< 700화 알고 있다(1) > ‘우리 희라 누나 진짜 오늘 간지 폭발하네.’ 개인적으로 점수를 매겨 보건대 각성 김현성의 첫 등장 신보다 더 임팩트가 있는 모습이라 할 만했다. 시간 내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을지 불안함에 떨었던 것도 잠시, 딱 제때 도착했다고 생각이 든다. 아군 피해는 전무했고 댐에 구멍이 나기 전에 틀어막았다. ‘날 가져요. 누나. 진짜.’ 흥분했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은 마치 짐승 같지 않은가. ‘방금 그 말 취소여.’ 어서 빨리 싸우고 싶다는 듯이 눈동자가 천천히 뒤바뀌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시동을 걸고 있는 듯한 모습. 빨리 뚝배기를 깨버리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당장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전쟁터는 넓다. 짧게 끝날 전쟁도 아니다. 대륙의 북부 전체가 전쟁터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고개를 들어 올리자 수천 개가 넘는 화면이 시야에 들어온다. 마음의 눈이 있다고는 한들 저 정도 정보량을 모두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거기에 플러스로 망원경까지 사용하고 있으니, 점점 더 여유가 없어진다. 모든 성벽이 수성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약간은 숨을 쉴 수 있었지만 전장 자체가 굳어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제대로 전투에 들어간 지역이 50%도 되지 않는다. 적 병력의 일부는 아직도 북부의 먼 거리에서 이동하거나 상황을 지켜보는 중. 지금 상황에서 무작정 들어간다고 득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녀석들 역시 인지하고 있다는 거다. “34번.” -네… 네. 정하얀의 마법을 컨트롤 하는 것도 일.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얻었다고 한들 정말로 무한한 것은 아니었다. 장시간 마력을 컨트롤해야 하는 만큼 정하얀은 마력의 소비를 최소화해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계속해서 그녀의 상태를 봐줘야 했다. 조금 더 조여야 하는 부분은 어딘지, 풀어줘야 하는 부분은 어딘지, 수만 개의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지 않을까. 몇 번 손가락에 들어가 있는 힘을 빼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걸 컨트롤하고 있는 정하얀의 능력이 사기인 거지. 허벅지를 툭툭 두드려 본다. 아직까지도 제대로 반응하지 않고 있는 악마들의 모습에 의구심이 점점 불어닥친다. 상정하고 있던 여러 가지 상황 중에 가장 최악의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이 점점 찝찝해지기 시작했다. 곧바로 빛의 군대가 더러운 악마를 쓸어버리는 모습을 기대하기는 했지만…. “만만치 않다는 거네.” ‘전부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가장 원하고 있었던 그림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곧바로 전면전.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그림은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어째서 케루빔 혼자 나타난 거지?’ 다른 사대악마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뻔한 이야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녀석들은 곧바로 대응했고, 마치 이쪽의 반응을 지켜보고 싶다는 듯이 케루빔을 던졌다. 말하자면 한 번 찔러본 것에 불과하다는 거다. 아마 여기서 케루빔을 끝장낼 생각으로 들이민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건가?’ 한 가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녀석들에게도 컨트롤 타워가 존재한다는 것. 전장을 넓게 보고 상황 판단을 내리는 녀석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면쓰레기는 없잖아.’ 1회 차와는 다르게 2회 차 외신 세력에는 머리가 없다. 혹시나 진청이 살아나 놈들에게 합류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 봤지만 가능성은 적다. 가면쓰레기는 확실하게 죽었다. 지금 녀석들을 컨트롤 하고 있는 것은 사대천사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게 개연성이 맞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 정보, 그건 녀석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차희라와 케루빔의 이 만남은 중요하다. 어느 정도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지 알아야 했으니까. ‘현성이는 아직 출격시키면 안 돼.’ 나머지 녀석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하얀이는 묶여 있는 상황이고.’ 전쟁이 중반으로 치닫기 전까지는 정하얀을 뺄 수 없다. ‘라파엘 얘는 진짜로 뒤졌나?’ 슬쩍 바라보니 숨은 쉬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쪽은….’ -빛의 성자를 위해 싸워라! -베니고어의 아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자! -더러운 악마 놈들에게 절대로 틈을 보이지 마라! 그들의 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빛의 성자뿐이라는 걸 명심하고 싸워라. 목숨을 아까워하지 마라. 죽음 끝에 빛의 성자가 우리와 함께할 것이니! -아아아아아악! 사제… 사제! -올라온 녀석은 둘러싸! 넘어가지 못하게 해! 마법사들은 속박 마법 상시 유지하는 거 잊지 마! 퍼부어! 퍼부어! -흐어어어엉… 아아아악! -나… 이렇게… 죽는 건가. -명예추기경님이 보고 계실 거다. 마루앙. 대륙을 위해 싸운 네 목숨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겠어. 한쪽에서는 이미 처절한 전투가 진행되는 도중. 악마들에게 쓰러지는 이들을 볼 때마다 괜스레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 든다. 아이스 커피를 들어 쭙쭙 빨아올리자 머릿속이 조금은 차가워지는 듯한 느낌. 슬픈 일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다행히 전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다. 물론 사망자와 부상자가 생기고는 있었지만 그건 적들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이라는 게 본래 그렇다. 뒤집을 수 있는 곳도 보이기는 하지만 녀석들이 패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내가 먼저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속적으로 피해자가 생기고 있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크게 봤을 때는 패를 꺼내는 것보다는 낫다. 대충 고개를 돌린 이후 곧바로 차희라를 쪽을 응시한 것은 당연지사. 이성을 잃기 전에 원하는 것을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희라 누나. 무리할 필요 없다는 거 알지? 어차피 미끼….” 콰아아아아아아앙!!! 하지만 이미 싸움은 시작되고 있는 도중, 귀를 울리는 커다란 굉음에 괜스레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핫! 콰드드드드드득! ‘아… 시바….’ 거대한 검과 도끼가 휘둘러지는 동시에 푸른빛이 번쩍인다. 성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가기 시작한 시점부터 주변의 다른 병사들은 거리를 벌리고 있다. 저 싸움에 휘말리면 곧바로 빛의 성자의 품으로 향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왠지 이럴 것 같더라니.’ 태산도 가를 것 같은 거대한 대검이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멈춘다. 케노보노가 한 손으로 대검을 붙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물론 차희라는 당황하지 않는다. 곧바로 대검을 손에서 놓아버린 이후, 그녀가 붙잡은 것은 녀석의 머리카락. 휘잉 소리와 함께 케노보노가 반대쪽 벽으로 처박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머리를 그대로 부여잡고 무기를 휘두르듯 휘둘러 버린 것이다. 왼손에 있던 도끼도 놓아버린 이후에는 곧바로 주먹을 내리꽂는다. 콰아아아아아앙!! 마치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계속해서 머리를 부여잡고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희라 누나의 모습은 정말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 이거… 진짜… 이러다 이기면 진짜 좋은데… 생포하면 꿀 각인가?’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하고 있지만 차희라는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 피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팔꿈치가 턱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콰드드드드드득! ‘힘내라. 시바.’ 마구잡이로 망치질하는 것처럼 주먹으로 얼굴을 내려치고 있다. 아마 일반인이었다면 첫 번째 주먹에 그대로 머리통이 터져 나갔으리라. 어떤 형식도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 개싸움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광경이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개싸움과는 거리가 멀다. 거대한 파편이 여기저기로 튀어 나가고 퍼엉 퍼엉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런 상태로 정신을 잃지 않고 상대방을 마주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도 대단해 보이기는 했지만, 녀석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붉은색 전신. 마치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활화산을 보는 것만 같았다. 무난한 승리, 아마 이 싸움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이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미지를 입었다는 기색이 없는 모습을 보고서는 그 기대감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언뜻 보면 조노보노의 새로운 친구가 마구잡이로 처맞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녀석은 여유가 있다. 당연히 차희라도 제대로 싸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주변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녀석을 다른 곳으로 밀어내거나 주변 병사들을 대피시키는 것이 먼저라는 걸 머릿속에 담고 있지 않을까. 스케일이 큰 만큼 커다란 무대가 확보된 이후에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될 것 같았다. 물론 거기까지 가게 할 생각은 없다. “누나! 누나!” -끼어들지 마. 내 말 알아들어? 전투에 끼어들지 말라고. 암요. 알아듣고 말고요. 당연히 알아들어야겠죠. “지금 싸우지 마. 정신 놓으면 안 돼. 누나.” -…….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거지? -내가 알 바 아니잖아. 파랭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강하군. -뭐? -그대는 강해.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콰지지지지직!! -뭐? 안 들리는데? -믿기지 않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말을 좀 제대로 해야지. -않을 정도…. 콰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뭐라고?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야. 드디어 차희라의 팔을 뿌리친 녀석이 공중에 선 채로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은 스타일이 구겨진 듯한 모습. 쥐여 뜯기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엉망이 된 머리 스타일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조금은 더럽혀진 것 같은 외관도 말이다. 이질적인 빛이 녀석의 머리를 감싸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풀어헤친 푸른색의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하나로 묶이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희라 누나는 흥이 식었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몸은 언제든지 다시 전투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 ‘겉모습에도 신경을 쓰나?’ 완전히 감정이 거세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그건 또 아니지 않은가. 본인이 의식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녀석들 역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게 인간의 기준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지만, 조노보노의 새 친구는 자신의 스타일이 구겨지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한번 푸른색의 빛이 하나로 모여들어 낫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고 차희라는 놓아버렸던 검과 도끼를 들어 올린다. ‘조금 더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기본적인 정보야 대충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녀석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 특히나 케루빔이라는 녀석에 대한 정보는 매우 한정적이다. 차희라의 눈이 계속해서 뒤바뀌는 게 보이고는 있었지만 일단은 정보, 무조건 정보다. “여기에 온 목적이 뭐지?” -여기에 왜 왔어. 퍼랭아. -듣지 않았나. 구원을 위해서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치워. -그대는 짐승이로구나. 붉은색 짐승, 내게 말을 건네면서도 싸우고 싶어 하고 있어. 누군가 네게 전하고 있구나. 지금은 싸우지 말라고 말이야. “무시해. 누나.” -……. -대륙은 썩어 있다. 무능한 빛과 어둠에 사이에서 암 덩어리 같은 존재에 의해 부서지고 있지. 착각이 아니다. 붉은 머리 짐승이여. 우리가 말하는 구원이란 대륙의 안전과 관리이다. 그것 외에 다른 뜻은 없다. 우리는 구원자다. 대륙을 구하기 위해 당도했을 뿐 다른 뜻은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것 같은데… 내 눈이 이상한가 봐? 무장한 악마들의 모습이 아주 잘 보이는데… 응?”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뜻은 없다. “어떻게 알 수 있었지?” -내가 말하지 않았나. 네놈들 안에 대륙을 좀 먹는 암 덩어리가 있다고 말이야. 케노보노는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천천히 이쪽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어쩌면 상정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 정말로 도래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새끼들은…. 이 새끼들은 1회 차를 기억하고 있다. < 701화 알고 있다(2) >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거지?’ 베니고어나 엘룬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 걸 어째서 녀석이 기억할 수 있을까. 물론 확실히 결정된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단순한 가정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점점 기억하고 있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간단한 가정을 던진 것만으로도 모든 개연성이 성립되고 있다. 처음부터 싸우기 위해서 찾아온 것 같은 모습도, 또 컨트롤 타워의 모습도 말이다. 녀석들은 김현성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2회 차의 인류가 자신들에게 저항할 것이라는 사실 역시 예상하고 있다. ‘완전히 기억하고 있는 건가?’ 이 부분은 확실하지 않다. 아마 외신의 품에 있었기 때문에 회귀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벗어난 것이 아닐까. 잃어버린 기억을 모종의 방법으로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당연하지만 인류에게는 안 좋은 소식. 회귀자라는 이점을 노린 것은 대륙뿐만이 아니다. 녀석들 역시 회귀자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차원을 떠돌아다녔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가지고 있는 이점이 이쪽보다 크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대륙의 저항을 가정하고 있었다면…. 인류에게는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그렇다. 녀석들은 전면전을 피하고 있었고, 일부 지역을 대치 상태로 만들었다. 놈들의 컨트롤 타워는 그게 더 유리하다고 결정을 내렸다. 아예 싸우는 것을 포기한 성벽들도 눈에 보인다. ‘진짜 목적이 뭐야?’ 아니, 목적은 이미 알고 있나. 본 것도 있고 들은 것도 있었으니까. 외신세력은 대륙을 관리하고자 했다. 인간의 개체 수를 줄이고 안정적으로 대륙을 자신의 발아래 두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 모두 입 발린 소리…. 어디까지나 녀석들이 표면적으로 취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놈들은 악마야.’ 달콤한 말들로 인류를 유혹한 이후, 빨아먹을 거 전부 다 빨아먹고 빈껍데기만 남은 대륙이 쓸모가 없어지자 스스로 대륙멸망 스위치를 스스로 눌러버린 놈들이다.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도 매번 말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위선으로 가득 찬 악마들이며 죽어야 마땅한 놈들이라고. -암 덩어리? -그렇다. 붉은 짐승아. 그자는 썩은 암 덩어리다. 차원 자체에 존재하는 게 구역질이 날 정도로 위선으로 뭉쳐 있는 쓰레기, 교화의 여지마저 보이지 않은 괴물이며, 자신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위선자, 배신자,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이지. -내 눈에는 네가 개소리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말이야. 남의 집에 갑자기 쳐들어온 침입자가 이쪽의 사정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은 아니지 않아? -그대들의 보호자가 잘못되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우리들은 응당 그러한 책임을 지고 있다. 잘못된 보호자를 밀어내고, 대륙과 그 아래 살아가는 생명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 말이다. -그건 네 입장이야. 누가 누구를 관리하고 누가 누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고? 개소리 집어치워. 애초에 그 책임은 누가 부여해 준 건데? -조금 더 커다란 관점에서 생각해 보라 붉은 짐승아. -뭐? -대륙은 죽어가고 있다. 인간들은 서로를 죽이고…. -무슨 개소리를 할지 뻔히 보이는데 개똥철학을 중얼거릴 거라면 내려와 새끼야. 지금 이러고 있는 시간도 아까우니까. ‘아니야. 누나. 조금만 더 들어보자고. 진정해.’ -스스로를 좀 먹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모든 걸 망쳐왔지. 역사가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고 부수며 종국에는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쓸데없는 욕망에 몸을 맡기고 더욱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본능을 거부할 수 있는 척하지만 종국에는 거부하지 못한다. 대륙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들에게 멸종된 종족과 생물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한없이 이기적이며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도 두려운 종족이다. -귓구멍에 들어오지도 않는 다큐멘터리는 집어치워. -우리는 인간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붉은 짐승아.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지. “누나 조금만 더 들어봐. 어차피 분위기 식었잖아.” -……. -말 그대로 우리는 인간들을 사랑한다. 인간이라는 종족을 동경해. 그들은 욕망에 충실하고 추악하며 본능을 거부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당장 자기 자신을 내려다보라, 붉은 짐승아. 네가 가지고 있는 강함. 네가 쟁취한 힘.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가능성이다.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중력, 그리고 너희들이 마법이라고 부르는 마력의 선물을 보라.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우리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빛을 조금 더 오랫동안 보고 싶을 뿐이다.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가 더욱더 번영하고 균형을 유지하고 살았으면 한다. 인간들은 그렇게 살아가야 해. -이미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겉보기에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장 몇백 년, 아니, 몇십 년 후를 바라봐도 그렇게 될 거라 단언할 수 있나? 아직 그대에게는 이른 이야기일 수도 있다만 그대들을 관리하는 이들 역시 안전하지 않은 이들이다. 그들 역시 불안전하며 감정에 흔들리는 이들이야. 어둠은 항상 그대들을 노리고 있고 빛은 그들로부터 그대들을 지켜줄 수 없다. 이토록 못난 보호자가 또 어디에 있을까. -……. -지금의 보호자는 그대들을 보호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일부는 그대들을 단순한 벌이로만 생각하고 있으며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개개인의 고통에 공감해 줄 수도 없지. -입에 침이나 바르고 개소리 지껄여. 누가 누구에게 싸움을 걸고 있는지 안 보여? -우리는 합리적이다. 절대다수를 위해 일부 소수의 희생은 언제나 일어나는 불가피한 이야기지. 우리를 비난하고 싶은 그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가. 언제나 인간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나. 그뿐만이 아니다.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기도 했고 현재를 위해 미래를 희생시키기도 했다. 일관성이 없는 것보다는 더욱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 -병력을 거두어라. 무의미한 희생자를 내고 싶지 않은 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 우리의 검을 우리를 보호하기 위함이지 그대들을 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악마의 탈을 쓴 것이 아니다. 그대들의 새로운 보호자이며 구원자이다. ‘이 새끼 이거 뭐야?’ 계속해서 대화를 듣고 있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성향은 선의의 혁명가. 대륙을 삼키러 온 녀석치고는 너무나도 정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대륙의 빛은 무능하고 어둠은 호시탐탐 이곳을 노리고 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엘룬 쓰레기처럼 자신의 신자들을 돈벌이로 생각하는 녀석들 역시 존재한다. 녀석의 말에 나 역시 공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커다란 관점에서 본다면 녀석의 사상에는 허점이 없다. 지금 당장은 인류가 하나가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이후에는 어떨까. 공통의 적이 사라지고 난 뒤에 인류는 또다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달려가지는 않을 거라 단언할 수 있다. ‘단순히 신성농장으로 사용하려고 한 게 아니었나?’ 정말로 어떤 대의를 가지고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목적은 개체 수를 조절해 인간들을 사육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참된 보호자로서의 자세를 갖추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가진 부정적인 이면에 감춰져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그 가능성을 키워줄 생각을 하고 있으시단다. 못난 보호자를 밀어내고 안정적인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고 싶단다. 이 얼마나 달콤한 울림인가. 어쩌면 굶주리는 이들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전쟁과 다툼도 사라질 테고 모두가 천국에 온 것처럼 본인이 하고 싶은 일에 열중할 수도 있겠지. 안에 잠들어 있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발견하며 새로운 방향으로 한 발자국 도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김현성과 일부 대륙이 녀석들에게 저항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만약 놈들의 말이 거짓 없는 사실이라면…. 이전에 한 생각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녀석들이 대륙을 신성농장으로 사용하려고 했다면 최대한 인간들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끊임없는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고 그로 인해 대륙이 붕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관점도 존재한다. ‘저 말이 전부 다 개소리일 경우지.’ 급진파의 악마들처럼 크게 한탕 치고 빠져나가려는 경우, 저 모든 발언이 거짓말일 경우, 진실은 인간 사육 농장이나 대륙의 멸망인 주제에 말만 번지르르하고 있을 경우다. 표정만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 겉과 속이 다른 놈들은 많다. ‘조금 건드려 볼까?’ 조금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겠지만 건드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어째서 저렇게 말이 많아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있는 차희라를 대등한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쪽에게는 호재로 작용했다고 판단해도 상관없으리라. 천천히 말을 내뱉자 차희라의 표정에 의문이 떠오른다. 어째서 이런 걸 알고 있는지, 어째서 지금 이걸 전하라고 하는 것인지 궁금증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내가 말한 대사를 입에 담는다. -너희들은 한 번 실패했잖아? -……. -너희들은 실패했어. 그렇지 않아? -…….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놨지만 결국에는 다른 목적이…. -실패한 것은 우리가 아니다. -뭐? -실패한 것은 우리가 아니야. 그… 그 더러운 암 덩어리 때문이었어. 그 개자식 때문이었단 말이다. ‘뭐야. 시바. 쟤 표정 왜 저래. 표정 관리해.’ -그 역겨운 놈을 믿은 것이 실수였다. 우리는 하지 않아도 되는 싸움을 했고, 마땅히 대륙에 살아가야 할 인간들을 우리의 손으로 죽였다. 그 개자식 때문이다. 우리가 실패한 것은 그 개자식 때문이야! ‘야. 너 왜 그래. 캐붕 일어났자너… 이미지 관리 좀 해.’ -그 거짓말을 일삼는 혓바닥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결코 우리의 실패가 아니야! 본래대로라면 모든 게 계획대로 돌아갔어야 했다. 모든 이들이 고통 없이 살아야 했고, 대륙은 번영해야 했다. 자연이 대륙을 채워야 했고 마력은 풍족해야 했다. 고민과 번뇌가 사라지고 대륙 위 모든 생명체는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렸어야 했다. ‘케노보노 시바 다혈질이었어?’ -즐거움 대신 자리 잡은 것은 고통과 비명으로 가득 찬 삶이었고 자연 대신 자리 잡은 것은 역병과 죽은 자였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죽였고 갈등은 커져 봉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야… 울지마. 왜 울어. 악어의 눈물 맞지? 맞다고 말해줘.’ -모든 걸 되돌리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걸 눈치챈 이후였지. 그 쓰레기가 마련한 무대에서 내 형제가 죽었고, 형제들이 아끼는 인간 역시 죽었다. 그 암 덩어리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다. 그 역겨운 쓰레기가… 그 쓰레기가 모든 걸 망쳤다는 말이다. 거짓된 천사와 거짓된 얼굴로, 거짓된 혓바닥과 거짓된 행동으로 대륙을 오물 사이로 던져 버렸다. 결코 우리의 실패가 아니다. 그런 마지막은…. -……. -그런 마지막은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었어. 결코… 내가 보고 싶은 풍경이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폐한 이곳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야. 그런 소리 하니까 너네가 정의의 편 같자너… 왜 그래.’ -이번에는 절대로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 내 눈이 감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엔딩은 맞이하게 하지 않겠다. 절대로 이 대륙을 그 암 덩어리의 손에 넘어가게 하지 않을 것이다. 아픈 일이라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출사표 던지고 있어. 시바.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 -대륙의 번영을 위해. ‘뭐야. 시바. 이 새끼 이거 진심인 거야?’ 믿기지는 않지만 연기도 이 정도라면 수준급. 만약에, 아주 만약에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대륙의 진실이 아닐 가능성도 존재한다. ‘정말인가?’ 대륙과 외신을 이간질해 서로 싸우게 했다고? ‘그럴 리가…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갈등만을 유발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역병과 죽은 자로 대륙을 가득 채웠다고? ‘이건….’ 김현성이 바라본 붉은 풍경을 만든 게… 녀석이었다고? 이미 쓰레기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구제할 방법이 없는 악독한 빌런이라는 사실도 이미 깨닫고 있었지만…. “넌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망가져 있었던 거냐. 진청.” 녀석의 악행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 702화 소울 메이트 (1) > “잘하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는데?” “무슨 말이에요? 언니?” “말 그대로야. 이렇게 치고받고 싸우지 않아도 일이 해결될 수도 있겠다고.” “네?” ‘이 언니는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일을 너무 크게 벌여서 수습하는 데 애를 먹기야 먹겠지만 적당히 잘 넘어가지 않을까 싶어. 오빠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고… 이미 악마라고 이빨을 털어놨으니 몰아내는 연기를 한 이후에는 합의서 쓰고 좋게좋게 마무리될 수도 있다는 거지. 연수야, 언니 커피 좀. 한 잔 마시고 바로 연락해 봐야겠다.” “지금 커피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방금 무슨 말씀을 하신 거예요? 좋게좋게 넘어간다니…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방금 저 파란색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싸우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야. 아깝잖아. 인력 손실이라는 거. 더군다나 여기 모인 사람들은 대륙을 위해 진심으로 싸우는 사람들이고 상위모험가로 분류할 수 있는 고급 인력들인데…. 그렇다고 정신이 썩은 사람들도 아니지. 새로운 대륙으로 커다란 발걸음을 옮기기에 적절한 인재들이라 이거야. 이런 사람들이 희생된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지 않아? 쟤들이 정말로 원하는 게 대륙의 번영이라면 우리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봐도 되는 거 아니야?” “저는… 정말로 이해가 안 되거든요. 어떻게 결론이 그렇게 날 수 있는 건지. 방금 같은 걸 본 게 맞아요?” “그럼. 왜 내가 이상한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 언니는….’ 조금이지만 등 뒤로 소름이 돋는다. ‘뭐야? 도대체. 정말로? 정말로 그렇게 한다고?’ 실소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당황스럽다. ‘이게 뭐야.’ 눈에는 흔들림이 없다. 웃자고, 농담 삼아 던진 말도 아니었고 교묘하게 돌려 말하는 것도 아니다. 틀림없이 저 눈은 진지하게 저 개소리에 수긍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저들의 보호하고 관리한다는 걸 용인하고 인간을 울타리 안에 가두고 키우는 것에 동의하는 표정이다. ‘진심이야?’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조금 쓰레기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정말로 저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연수야. 그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이렇게 생각해 봐. 뭐가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되는가. 뭐가 우리에게 더욱더 이득을 가져다주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올걸? 언니 그렇게 꼬인 사람은 아니야. 쟤들 말이 이상론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고.” ‘이상론이니 뭐니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윤리적으로 걸리는 부분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지.” “그래서 이게… 이득이 된다는 거예요?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건….” “왜?”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언니.” “연수야.” “네?” “검은백조에서 어땠어?” “무슨 뜻이에요?” “자유로운 것 같았어?” “어떤 대답을 원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다른 의도가 없는 질문이라면 자유로웠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물론 무력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는 단체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통제가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특히 그랬다고 했었나.’ 지혜 언니가 출범하기 전에는 그랬다고 들었던 적이 있다. 규율은 엄격했고 처벌 수위 역시 높았다. 실제로 길드에 피해를 끼친 길드원들이 실종됐다거나 사라졌다거나 하는 일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이루어졌었다.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한 일도 많이 일어났었고 길드 내 상하관계는 완벽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길드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박연주 님으로 길드 마스터가 바뀌고 난 이후, 정확히 말하면 이지혜가 그에 상응하는 권력을 손에 넣은 이후였다. 시스템은 변했다. 길드의 변화는 너무나도 빨라 이전 길드원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을 정도. 급진적인 변화에 우려를 표현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새로운 시스템은 길드에 완벽하게 자리 잡았다. 자유로워진 분위기처럼 일의 능률은 올라갔고 이제는 붉은용병과 파란을 따라갈 수 없게 될 거라고 입을 모아 떠드는 이들의 입을 닥치게 만들었다. 그래. 결론을 말하자면 자유로웠다. 검은백조에서의 삶은 마치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고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완벽한 환경을 마련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을 때 이지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때? 정말로 자유로웠을까?” “…….” “정말로 검은백조의 길드원들이 자유로웠을까? 그렇게 느낀 게 아닐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그냥. 한번 생각해 보자는 이야기야. 이런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이지. 울타리를 크게 만들면 양들은 본인들이 울타리 안에 있는지도 몰라. 아, 미안, 연수야. 네가 양이라는 소리는 아니야. 검은백조를 가지고 사회 실험을 해본 것도 아니고… 하지만 쟤들 말도 일리가 아예 없는 소리는 아니라 이거야. 물론 입장 차이야 존재하겠지.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 윤리적인 선이라는 것도 있을 테고… 그래서 필요한 게 합의라는 거잖아. 그렇지?” “…….” “울타리는 아주 커다랄 거야. 울타리를 친 놈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테고 인류는 저런 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를걸?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 하나만 기억하는 거야. 인류는 자유롭겠지. 번영을 누리며 자기 자신이 안전하고 자유롭다고 느끼겠지. 보호자들의 든든한 지원에 자원은 마를 날이 없을 거고….” “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요.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소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검은백조랑은 달라요. 단순한 무력 단체에서 언니의 시스템이 성공했다고 한들 대륙에서도 같은 걸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아무리 언니라고는 해도….”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지.” “네. 그… 그렇….” “하지만 이기영과 함께라면 가능해.” ‘미… 미친년.’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욕을 해버릴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언니 역시 울타리 안에….” “아니야. 연수야. 나는 더 위에 있을 거야. 울타리를 공사한 노동자 비둘기들보다 더 높은 곳에. 나는 끌려다니는 쪽이 아니야. 끌고 다니는 쪽이지.” ‘미친년이야. 미친년이라고. 미친…미친년이라고.’ 이런 여자가 뭐가 좋다고 지금까지 쫓아다녔을까. 순식간에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파란색의 천사가 단편적으로 말한 것만 듣고 어떻게 저기까지 생각이 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다. 항상 귀엽다고 느꼈던 얼굴이 일그러져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머리가 어지럽다. 확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미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한편으로는 경이롭다. 인류를 장기 말로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확실히 본인 이외의 인간들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 저기 위에 있는 천사들이나 눈앞에 있는 이 여자나 다를 게 없다. ‘자기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나? 다수의 인간보다 본인이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언니는 틀림없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한 인간은 아니지만. 우월해질 수 있는 인간이라고. 어째서 저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지구에서부터 그녀가 살아온 환경이 그녀를 저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단편적으로밖에 듣지 못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이해하기 힘들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까지 생겨나고 있지 않은가. 이 여자는…. 나를…. 하연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똑같이 장기 말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심으로 나를 아끼기는 했었나. 달콤한 말들에 진심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었을까? 애초에 같은 인간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결국에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언, 언, 언니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고?” “…….” “조금 불안했어?”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연수야.” “네.” “이거 하나만 기억해 줬으면 좋겠네.” “…….” “원래 우리 같은 사람일수록 자기 사람은 끔찍하게 아낀다는 거.” “…….” “대륙 1/3의 인간을 준다고 해도 우리 연수랑은 안 바꾸지. 아무리 대의가 중요하다고는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바꿀 수야 있겠어? 저 비둘기들이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고 한들, 연수 없으면 안 해. 더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서 만약 연수가 죽으면 언니는 포기할 수도 있어.” “뭐… 뭐를요?” “내가 가지고 있는 이상과 꿈, 그리고 야망.” “…….” “그렇게 만든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세상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복수해 줄게. 그걸 원하는 건 아니지?” “아… 아니에요.” “내가 별생각 없이 던진 생각은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끼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해. 물론 합의가 될지 안 될지는 언니도 알 수 없지만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아파하는 건 보기 싫거든. 전쟁터에서 연수가 다친다면 언니는 정말로 견디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그게 어떤 감정이야?’ 묻는 게 무섭다. 대등한, 같은 인간으로서 말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애완동물이나 장기 말 같은 느낌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애초에 저 말이 진실이기는 한 건가? 단순히 듣기 좋으라고 한 립 서비스는 아닐까. 원래부터 이 사람은 거짓말을 달고 살았으니까. 천천히 눈을 바라보자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가 뭔지, 정말로 이 사람이 나쁜 건지 착한 건지도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지혜의 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무척 기쁘게 웃고 있었다는 것.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언니 팔 아픈데. 무안하게 할래? 안 잡아 줄 거야?” “아니요. 아니에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 손을 잡은 걸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손을 뻗는다.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야.’ “어떻게….” 눈에 들어온 것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천사.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운 외형에 저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혀왔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본부 안에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지? 경비들은 뭐 하고 있었던 거지? 방어 시스템은?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었으니까. 생각보다는 행동이 더 빠르다. 곧바로 무기를 뽑아 녀석에게 쇄도하는 것은 순식간. 살짝 뒤를 바라보자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언니의 표정이 시야에 비친다.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눈에 들어온다. “협상결렬이네. 아니… 그것보다는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가 문제인 것 같은데.” ‘언니는 내가 살려.’ 갈색의 땋은 머리를 한 여자는 슬픈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뻗는다. 영창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당신은 위험한 인간입니다. 대륙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인간입니다.” “그렇게 평가해 주니 영광이네. 이름이?” “제 이름은 도미니온스. 부디 저를 용서하시길.” “언니! 도망쳐! 언니!” “얘는 여기 도망칠 데가 어디 있다고.” “내 뒤로 숨어!” “전부 소용없어. 연수야. 이미 늦은 게 빤히 보이는 데 뭐. 내가 아무리 전투에 문외한이라도 그 정도는 알아요. 도미니온스라고 했나? 그것보다 너 실수하는 거야. 아마 후회할걸? 지금의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야. 만약 네 목적이 정말로 대륙의 번영이라면 말이야.” “…….” “내가 말했지? 원래 우리 같은 놈들일수록 자기 사람이 뒈지는 꼴은 못 본다고….” “언… 언니?” “그 컨트롤프릭이 미쳐 날뛰는 꼴은 꼭 보고 싶었는데 그걸 못 보고 가게 생겼네. 저기 오빠. 보고 있지? 우리 사이에 이런 말 하기도 쑥스럽고 엄청 웃기기는 하지만 나는 정말로 동생을 사랑했어.” “…….” “반쯤은.” “…….” “아니, 반의반쯤이었던가.” “…….” “그럼 지옥에서 보자. 소울메이트.” 위이이이이이이이잉! 거대한 폭발이 공간을 꽉 메우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언니이!!”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703화 소울 메이트 (2) >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음…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지구에 있을 때.” “…….” “정말로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뭔 소리야, 누나. 갑자기 분위기 조성하면서 이빨 털어봐야 안 믿어.” “왜? 우리는 이렇게 진지한 이야기는 하면 안 돼요?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에요. 오빠가 믿든 안 믿든 상관 안 할래. 그냥 들어요.” “지금까지 지구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한 줄 알아? 할 때마다 말이 바뀌었는데 내가 어떻게….” “몰래카메라 하는 거 아니에요. 꼭 이런 이야기 나오면 피하려고 그러더라. 이것도 병이에요, 병. 오빠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이런 식으로 어필할 필요는 없잖아요? 서로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보자는데 그게 뭐 대단하고 엄청난 일이라고…. 한심하다, 진짜. 한심해. 이럴 때 보면 진짜 겁쟁이가 따로 없다니까. 피하지 마요. 나한테까지 정 안 붙이려고 할 필요는 없잖아. 이미 다 끝난 마당인데.” “…….” “아무튼 다시 이야기해 보자면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정확히 무슨 일들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겠네요. 어차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테고, 제대로 믿지도 않을 테니까. 반쯤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요. 원래 과거라는 게 이야기로 풀다 보면 과장되는 부분이 많잖아요?” “요점이 뭔데?” “요점만 이야기하자고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잖아. 오빠가 생각하기에 저는 어떤 사람 같아요?” “…….” “미친년으로 보이겠죠. 싸이코패스? 악당?” “…….”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으니까. 드라마에 흔하게 나오는 악녀 일 번이나 구제할 길이 없는 인간쓰레기로 보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애초에 범죄자 비슷한 년이었으니 그랬을 수도 있겠네. 범죄자 비슷한 년이 아니라 범죄자였구나. 그렇게 생각했겠네. 아, 정곡 찔렸다는 표정 짓지 마요. 괜히 아닌 척, 미안해하는 척하지도 말고요. 나도 오빠를 그렇게 보고 있거든. 그리고 솔직히 내가 오빠보다는 쓰레기가 아니지.” “…….” “뭐 어때요? 마지막이 온 김에 진솔해진 건데. 지구에서도 별반 다를 바 없었어요. 남들이 바라보는 이지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위로 올라가고 싶었거든요.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계속, 계속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이 말이에요. 제 기준으로도 나쁘지 않다는 위치까지 올라가 본 적도 있어요. 근데 나는 욕심이 끝이 없었나 봐. 위로 가면 더 위로 가고 싶고 이 풍경을 보면 또 다음 풍경을 보고 싶더라고.” “…….” “만족을 모르는 건지 원래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지, 나름대로 선을 지키기야 했지만 남들 기준으로는 더러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을 거예요. 뭐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어요. 나는 나 자신에게 긍지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더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길이, 눈앞에 길이 보였거든.” “…….” “열심히 줄을 잘 타고 있었고 가지고 있는 패도 많이 있었으니까. 자신감도 있었죠.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 “진짜 위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게 아니었나 봐. 나한테는 허락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나 봐. 새삼스레 깨달은 거 있죠. 아, 내가 여기까지 올라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롯이 이 개자식들이 내가 이곳에 있는 걸 허락했기 때문이었구나. 위에 있는 몇몇 놈들이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허락한 거구나. 물론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무대를 마련해 준 것은 위에 있는 놈들 이었구나. 애초에… 애초에 나한테는 허락된 자리가… 아니었던 거구나.” “…….” “주제넘었던 거죠. 주제넘었던 거예요. 내가 아무리 날고 기고 지랄을 한다고 해도 진짜 위에 있는 양반들의 눈에는 키 작은 계집애 한 명이 알랑거리는 거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이거죠. 그렇게 모든 걸 잃었어요. 순식간에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모든 걸 잃었다니까. 믿어져요? 모든 게 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손 안에 이미 들어온 것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눈 한 번 깜빡하는 순간 모든 걸 잃었다고.” “…….” “발버둥 치고 내가 가지고 있는 패들을 쥐고 흔들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진짜 위에 있는 놈들이 보고 있는 것처럼 키 작은 계집애 한 명이 발광하는 꼴이었던 거죠. 제기랄. 씨발. 인정하기는 싫지만 현실이 그랬어요. 열 받아. 개 씨발! 콜록. 콜록.” “…….” “그래서 내가 도박을 안 해. 오빠.” “…….” “내 주제를 깨달아 버렸거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게 달라. 누구는 노력하나 하지 않아도 공으로 얻는 걸, 어떤 놈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얻어버리거든. 그리고 그게 자신이 정말로 얻은 것인 양 떠든다 이거야. 환경이 준 걸, 본인이 얻은 것처럼 으스댄다고. 걔들 근처에서 그런 걸 바라보고 있으면 그게 얼마나 아니꼬운 줄 알아?” “…….” “그래서 오빠를 선택한 거야.” “…….” “오빠가 나를 선택한 게 아니라. 내가 오빠를 선택한 거라고. 오빠는 가지고 있었거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조건, 가지고 있었잖아. 으스대지 않고 그 특별한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지. 여기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물론 그 얼굴이 내 타입이었다는 게 가장 커다란 이유이기는 했지만 이건 너무 속물적인 이유인 것처럼 보이니 빼도록 할게요.” “보통 사람들은 앞전의 이유가 더 속물적이라고 생각해. 누나.” “그래요? 그건 몰랐네. 콜록. 콜록.” “…….” “아무튼 그래요. 이지혜는 그렇게 살았어요. 그래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처음에 여기 왔을 때 웃었다니까. 기분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니까.” “…….” “처음 대륙에 떨어졌을 때, 튜토리얼 던전에 들어왔을 때, 다른 사람들이 울고 있었을 때, 저는 구석에서 한참을 웃었네요.” “…….” “거기서는 손에 쥘 수 없는 것들을 여기서는 쥘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구에서 보지 못한 풍경을 여기서는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애초에 올라가 본 적이 없었으면 이런 거에 집착하지 않았으려나. 어때요, 오빠가 보기에는…. 잠깐이라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게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했을까? 내가 위에 올라가 보지 않았으면 이런 거에 집착하지 않았을까?” “아니. 누나는 원래부터 권력에 미친 쓰레기였어. 태생이 그래.” “말이 심하네. 콜록. 콜록. 콜록. 자기가… 콜록. 콜록. 더 쓰레기면서.” “…….” “…….” “오빠는 어때요. 뭐 할 이야기 없어요?” “나는 없어. 누나.” “굳이 캐묻는 건 조금 아닌 것 같고… 사연과 비밀이 많은 남자는 매력적이야.” “누나 남자 취향 에반거 알고 있지?” “남자 취향만 구릴 것 같아요? 콜록. 콜록.” “…….” “…….” “괜찮냐는 말을… 한마디도 안 해 주네. 이 쓰레기는.” “누가 봐도 괜찮지 않아 보이니까.” “그래요? 나… 이대로 죽나 봐.” “…….” “마무리는 조금 멋있게 하고 싶었는데 역시 사람이 뒈질 때가 되니 말이 많아지네요. 오빠는 어때요. 눈물이 나오기는 해요?” “아니.” “질리도록 쓰고 있는 그 가면 벗어 봐요. 지금 울고 있는 것 같은데. 목이 메이는 것 같은데?” “안 울어.” “그래도 마지막 소원인데… 한 번 쯤은 벗어주지 그래요?” “…….” “벗으라고… 새끼야.” “…….” “…….” “다행이네.” “뭐가.” “당연히 들어가 있을 거라고 확신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불안했거든, 내가 오빠한테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이기영의 사람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 있을까. 콜록. 콜록. 불안했지만 지금 보니 일말의 영향이라도 있었던 것 같아서. 아. 다시 가면 써도 돼. 콜록. 콜록. 섹시하기는 한데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역시 별로네.” “…….” “오빠가 아끼는 그 돼지 새끼. 그 돼지 새끼랑… 누구… 였더라. 아. 그… 그 일본 여자… 그 맹인… 카스가노 뭐시기… 만큼인 거네. 나도 걔들만큼은 지분을 가져간 거네. 아니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네. 나는 욕심이 많아서 그 이상이었으면 좋겠어. 아니, 돼지 새끼만큼은 아닌가? 진짜 질린다. 그 돼지 죽은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아니, 됐다. 돼지 이야기는 안 할래. 모처럼 이 이지혜의 턴인데… 자꾸 돼지 이야기하면 오빠 또 죽은 돼지 생각할 거잖아. 콜록. 콜록. 우리 이야기해요. 즐거웠죠? 우리.” “즐거웠어. 누나. 정말로.” “죽여주는 한 쌍이었잖아. 소울 메이트. 영혼의 단짝. 이렇게 화끈하게 개판을 칠 수 있었다는 것도 정말 재미있었… 콜록. 콜록.” “…….” “재미있었지. 우리가 이 정도까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알았겠어. 저 위에 있는 놈들도 몰랐을걸. 신성제국을 부수고 공화국을 부수고 깡그리 쓸어버렸잖아. 본인들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의 뒤통수도 크게 한 방 먹여줬지. 우리 둘이 이 정도까지 해낼 수 있을지 아마 아무도 몰랐을 거야. 물론 오빠 덕이 크기는 했지만 그래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고.” “아니야. 누나.” “…….” “나 때문이 아니야. 누나의 덕이 컸지. 누나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누나는 천재고 위에 서 있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믿어져?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누나가 위에 있는 개자식들한테 엿을 먹인 거라고. 누나는 내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야. 오히려 내가 누나의 덕을 본 거지.” “말 이라도… 콜록… 콜록… 기쁘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그렇게 말해주니… 행복해. 오빠.” “처음 여단에 왔을 때 나를 받으라고 한 것도 누나였고 수차례나 내 목숨을 구한 것도 누나였어. 우리 계획의 반 이상은 누나가 주도한 것도 알고 있잖아. 이미 가는 양반 듣기 좋으라고 떠드는 개소리가 아니야. 다시 한번 말하건대 누나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기쁘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너무… 기뻐. 콜록. 콜록.” “…….” “…….” “그런 말은… 살아 있을 때 많이 해줬으면… 더 좋았을 걸. 이 쓰레기 새끼.” “…….” “가면… 가면 쓰게 해줘. 가면 쓴 채로 이렇게… 갈래. 여단의 이지혜는 역시 이렇게 가야지.” “…….” “그래. 그렇게. 졸리다, 기영아. 누나 졸려. 이제 정말로 됐나… 콜록… 콜록… 끝인가 봐. 후회는 없… 없어. 정말로 없어. 내가… 내가 누군지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 “…….” “사… 사랑….” “…….” “콜록. 콜록. 콜록… 사… 랑해. 동생… 내 소울 메이트. 지옥에서… 지옥에서 보자.” “나도 사랑해. 누나. 내 영혼의 단짝.” “매번 하던… 키스. 콜록. 콜록.” 툭. “다음… 다음… 다음 계획은?” “복수. 그리고… 완전한 멸망.” “하… 하….” “…….” “하… 하하하… 하하.” “…….” “하하…콜록. 콜록. 하하하하하.” “…….”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 “역시… 나는….” “…….” “야망 있는 남자가 취향….” “…….” “취향… 이라니까.” “…….” “…….” “누나?” “…….” “누나?” “…….” 툭. “…….” “사랑해. 누나.” < 704화 소울 메이트(3) > “조금만 기다려.” “…….”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뭐?’ “거의 다 왔어.” ‘뭐라고?’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순식간에 꿈에서 깬 듯한 감각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 장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 지나가는 것들은 뭐가 뭔지도 제대로 인식하기가 힘들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박덕구의 마지막을 봤을 때처럼 눈물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는 것.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뭐야. 이게… 갑자기.’ 정황상 1회 차의 이야기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방금 봤던 것들에 대해 자세히 파고들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갑작스레 검은색 세계로 빨려 들어가기 전에 일어났던 상황이 떠올랐던 탓이다. 희라 누나와 케루빔의 대화를 듣고 있는 도중이었다. 이상한 비둘기 하나가 지혜 누나가 있는 곳에 모습을 드러냈고 망원경으로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타이밍이었다. ‘그럼 지옥에서 보자. 소울 메이트.’ 본격적으로 이상한 게 보인 시점은 이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온 직후였다. ‘제기랄.’ 사태를 파악한 이후에 허겁지겁 다시 그녀를 들여다본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아니, 머리가 어지러워 내가 어딜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보고 있는 게 1회 차의 검은색 세계인지, 아니면 현실인지도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은 현재 이지혜의 상태가 어떤지부터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1회 차의 일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기에는 내가 너무 정신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여신의 거울에 보이는 화면은 거대한 폭발음과 뿌연 먼지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망원경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시발. 시발. 시발.” 이지혜가 죽어? 죽은 건 아니지? 그렇지? 어떻게 들어간 거지? ‘도미니온스?’ 그런 능력이 있었다는 건 못 들었는데. 정하얀과 같은 순간 이동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에야 이지혜가 있는 곳에 들어간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순간 이동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상황실 주변에 걸쳐져 있는 방어시스템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정말로 벌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저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도 않다고 느껴진다. 방심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적어도 나와 이지혜가 있는 상황실은 절대로 적의 침략을 허용하지 않을 거라 자신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이곳 역시 도미니온스라는 비둘기의 목표물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가정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이 상황에 나 살자고 몸을 피할 수 있겠는가. “지혜 누나! 들려? 들려?” 여기서 들릴 리가 없지만 자신도 모르게 커다랗게 목소리를 내볼 정도. 머리가 하얀색으로 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점점 더 초조하다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만약 이지혜가 죽는다면… 아니, 이미 죽었다면 어떨지에 대해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입이 꾹 다물어졌다. ‘제기랄. 시발.’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지혜 누나. (0/1)] [이지혜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이지혜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개 시발… 개 시발!’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이지혜 들려? 들리면 대답해. (0/1)] [이지혜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이지혜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이지혜! 이지혜!”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대답하라고 이 미친년아! 빨리 대답하라고! (0/1)] [이지혜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이지혜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이지혜! 대답하라고 했잖아! 이 머저리 같은 년!”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쾅 하고 발로 차버렸지만 아직까지도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있다.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 ‘이지혜가 죽으면?’ 이전이랑 똑같이. ‘뭐가 이전이랑 똑같은데.’ 내 것인지 알 수 없는 절망감이 순식간에 온몸을 감싸 안는다. 머리는 어지럽고 몸은 무기력하다. 아까 흘린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고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사방에서 들어오는 비둘기들이 화면에 비치고 있다. 집중하고 다음 명령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나 자신의 심장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자기. 방금 뭐였어? 나 다음 명령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무슨… 신경 안 써도 되는 거지? 싸워? 이 새끼 죽여도 돼? 자꾸 개소리 뱉는 게 아니꼬운데. -부길드마스터. 다음에는…. -명예추기경님. 현재 적들이 계속해서 몰려들어 오고 있습니다. -방금 일어난 폭발에 대해서… 관리위원장님. 관리위원장님? “대답하라고!”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지혜 누나. 죽지 마. 지혜 누나. (0/1)] [이지혜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이지혜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지?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은 거지?’ 머리가 뜨거워지기보다는 점점 차가워진다. 다른 생각을 아예 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도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른 나에게 실소가 나올 지경. 조용히 허벅지를 두드리며 다음 계획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었지만 머리가 점점 더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이지혜. (0/1)] 거대한 무언가가 위에서부터 나를 덮쳐오는 것 같다. 호흡이 가빠지고 정신이 없다. 눈물은 마르지 않고 자꾸만 매몰되는 것만 같다. 눈 깜빡할 사이에 어두운 곳으로 내리 떨어지는 기분이라 이 짓거리를 멈춰야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시바. 이 정도면 만족했겠지. 뭐.’ 이 정도면 리액션이면 이지혜 역시 충분히 만족했으리라.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구란 거 아니까 그냥 일어나. 누나. 진짜. 재미없어. 제발 이런 짓 좀 하지 마. (0/1)] [이지혜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이지혜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 ‘지옥에서 보자 소울 메이트는 개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진짜.’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아니, 진짜. 그만 좀 해. 무슨 쌍팔년도도 아니고 이상한 연출 자제 좀 합시다. 진짜. (0/1)] [이지혜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이지혜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아무 반응이 없는 모습에 당황스러워서 헛웃음이 나온다. ‘이지혜가 여기서 죽어?’ 김현성의 가방 쇼핑을 끊는다는 소리보다 더 설득력 없는 소리다. 이토 소우타가 베니고어의 독실한 신자라는 것보다 더 설득력 없다.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실소가 나온다. 무려 1회 차의 가면쓰레기다. 세상을 완전히 나락으로 빠뜨렸던 빌런 중에 빌런 이였고, 항상 본인 빠져나갈 구멍은 기가 막히게 만들어 놓았던 쓰레기였다. 외신과 인간의 뒤통수를 때리다 못해 아주 너덜너덜하게 만들어버린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물론 1회 차 이지혜와 2회 차 이지혜의 성장 방향이나 목표가 달라 어느 정도는 나비효과를 받았다고 한들 그래도 가면쓰레기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가면쓰레기로 태어났고 겨우 이 정도로 죽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당연히…. ‘보험을 들어 놨겠지.’ 나도 그녀에게 숨기는 것이 있듯이 그녀도 나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 백 퍼센트 장담할 수 있다. 만약 이지혜가 보험을 들어 놓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옥상에서 몸을 던져도 상관이 없을 정도였다. 솔직히 걱정스럽지도 않다. ‘누나 그렇게 멍청한 사람 아니지 않아?’ 애초에 이 쇼에 내가 걸려들 거라고 생각한 것도 우스워. 하려면 조금 제대로 해야지 이게 뭐야. 처음에 시스템이 뚫린 것도 지가 방어막도 풀어버린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닌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빨리 예X전생 하세요. 진짜. 지옥에서 빨리 살아 돌아오라고 헛소리하지 말고 진짜. ‘이거 조혜진 때문 아니야?’ 그건 좀 너무 했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설득력 없다. 조혜진한테 뭐 하나 제대로 보여준다고 호언장담하던 목소리가 떠오르기는 했지만 방어시스템에 일부러 구멍을 내서 적을 안으로 들일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다. 자기 밑천을 보인다는 건 이지혜로서도 환영할 만한 상황이 아닐 테니까. 아마 도미니온스라는 녀석이 방어시스템을 뚫고 침입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지혜가 빠른 판단력으로 시나리오를 짰다는 게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와, 고새를 못 참고 시나리오를 써? 얘도 진짜 놀랍다. 진짜 너무 놀라워.’ “아니, 왜 근데 안 나와.” 애초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다른 액션이 없다. “아, 진짜 거짓말하지 말고 나오라고. 사람 초조하게 만들지 말고.” 아직도 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야! 진짜 시바! 하지 말라고! 진짜! 하지 마! 누나!” 새끼손톱 때 정도의 불안감이 살짝 마음을 뒤흔들었을 때였다. -어휴….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 -좀 속아주지. 오빠도 정말 쓰레기야. 이 정도까지 했는데 조금이라도 불안해하면 어디 덧나나? -언, 언니? -연수야. 몸으로 받아주겠다고 생각한 건 너무 기특하고 좋은데. 언니 너무 무거워. 조금 떨어질래? 아, 그리고 오빠. 혹시 의심할까 봐 하는 소린데 이거 주작한 거 아니에요. 저도 깜짝 놀랐다니까요. 이런 것까지 주작할 이유도 없으니까 괜한 의심하지 마요. 내가 오빠 같은 줄 아는 건 아니죠? 아, 그나저나 진짜 신기한 비둘기가 다 있네. 이게 뚫릴 수도 있는 상황을 가정하기는 했지만 진짜였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어떻게 들어왔는지 너무 궁금한데 그건 차근차근히 들어보면 될 것 같고…. -언니… 지금… 지금 뭐예요? -뭐긴, 언니가 연수를 지켜준 거지. -언니가 어떻게…. -원래 언니 같은 사람은 비밀이 많은 법이야. 그게 더 매력 있잖니. 잠깐 떨어질래? 아니, 너무 떨어지지는 말고 연수도 전투 준비해야지. -어? 어? 언니…. -사람이라는 게 참 재미있지. 계획이라는 게 꼬이게 마련이야. 세상사 자기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이지혜는 웃었다. -저기 아줌마. 왜 여기에 찾아온 줄은 모르겠는데. 당신 실수한 거야. -역시 그랬군. 의자에 거만하게 앉은 모양새는 어딘가의 높은 양반처럼 보인다. 도미니온스를 내려다보는 모습에 나도 입꼬리를 올리게 된다. -원래 이런 성격은 아니었는데 험한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있을 것 같더라고. 원래 나 같은 여자가 그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미끄러질 걸 생각하면 계속 계속 대비할 수밖에 없잖아. 힘이라는 거 가질 수도 없을 것 같았고 현장에서 뛰는 체질도 아니라 그다지 신경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보험을 들어두기를 잘했네. 오빠처럼 주사위를 던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언니…. 틀림없이 위에 선 자의 표정이었다. 대충 눈으로 보기에도 자기 자신에게 취한 것이 보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약간이지만 이지혜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끊임없이 위에 올라가고 싶어 하는 그녀의 욕망이 분출되는 순간, 나도 그녀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그녀는 저 순간을 즐기고 있다. 틀림없이 저런 순간을 위해 위에 서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신이라고 불려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의 존재를 본인의 밑에서 발이나 핥고 있는 쓰레기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눈빛만 보면 그런 것 같다. 넌 그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수 없다는 듯, 곧 너는 땅바닥을 기게 될 것이라는 듯, 네가 몇 분 뒤에도 그런 표정을 나에게 보낼 수 있겠냐는 듯한 얼굴로 위대한 존재에게 비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패가 좋긴 좋은가 봐.’ 그렇게. 1회 차의 가면 빌런은 입을 열었다. -나와도 돼. 로노베. 내 입으로 말하기에는 뭣 하지만, -나의 작고 귀여운 주인님의 뜻대로. 정말로 쓰레기 같은 얼굴이었다. -구두라도 핥아볼래? 그럼 용서해 줄지도. < 705화 소울 메이트(4) > “오이오이! 진짜냐구.” -꿇어. “지혜 누나! 내가 믿고 있었다구! 젠장!” -내 말이 안 들리는 모양이네. “도대체 로노베랑은 언제 계약한 거야?” 어떻게 계약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개연성은 충족된다고 생각했다. 로노베는 꿈속으로 이지혜를 만나러 갈 수 있었을 테니까. 아마 베니고어와 벨리알이 드잡이질을 하고 있는 도중이 아니었을까. 이전에는 27군단의 만인장이었지만 지금은 당당히 악마 72군주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서큐버스 로노베. 아무리 이지혜가 편법을 썼다고 한들 지금의 로노베와 계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 로노베가 군단장의 지위를 얻기 전에 계약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누나가 고민 많이 했겠는데.’ 물론 당시 로노베도 충분히 강력하다고 할 수 있는 존재였겠지만 아무래도 어떤 패널티를 안고 로노베와 계약했다는 사실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노베는 어떤 비전을 내세우며 이지혜를 설득했을 테고… 이지혜는 주사위를 던졌다. 결과적으로는 완벽하게 이득을 보는 계약을 한 셈이다. 누나가 뭘 보고 그녀와 계약을 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노베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으니까. 군단장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박아 넣은 것으로 모자라 루시퍼의 총애까지 받고 있지 않은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주식을 산 이후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열 배 이상으로 돌려받은 셈이다. ‘얼마나 좋아했겠어?’ 이지혜가 역겹고 구역질 나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이미 만인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걸 떠올려보면 더욱더 그렇다. 의문점은 어떻게 계약에 필요한 마력을 공급받고 있냐는 것. 이런 상상을 하기는 싫지만 아마 대륙 어느 한구석에 이지혜의 계약을 유지시켜 주는 흑마법 공장이라도 운영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별로 파고들고 싶지도 않다. 과정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 이지혜가 그녀와 계약했다는 사실이고 그게 천장을 뚫을 정도로 떡상했다는 사실 뿐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좁은 실내에서는 이미 전투가 진행되고 있다. 하연수가 사막을 처음 본 바다거북 같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지만 그녀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이해하고 있다. 이지혜의 옆에 나타난 서큐버스 로노베는 웃으며 팔을 휘둘렀고 이윽고 거대한 검은색의 마력이 도미니온스를 덮친다. -악마와 계약한 것도 놀랍지만, 정상적으로 계약한 것 또한 아니로군요. 당신 대신 고통받는 인간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머. 말이 심하네. 누가 보면 내가 강제로 흑마법사 공장이라도 돌리고 있는 건 아닌지 오해하겠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노동자들한테는 좋은 대우를 해주는 사장님이거든. 복지도 괜찮고, 편한 삶을 선물해 주고 있으니 따로 걱정하지 않아도… 우리 직원들 업무 환경은 항상 최상으로 유지시켜 주고 있으니까. -구역질 나는 인간. -당신 때문에 우리 직원들 전부 야근하게 생겼는데… 야근 수당도 나가게 생겼잖아. 저기 자기는 야근 수당 받으면서 일하는 거 맞아? 내 쪽으로 와보는 것도 생각해 봐. 당신 윗대가리보다는 더 잘해줄 자신 있거든. 여러 가지 의미로. -당신의 말에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역시 당신은 사라져야 하는 인간입니다. 악마를 이 대륙에 불러들인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내 눈에는 비둘기나 악마나 똑같아. 무기는 어떻게 쓰게 마련이야. 아, 그런 표정 짓지 마. 로노베 너를 무기로 표현한 게 아니라. 굳이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거야. 잠깐 동안 혹하기는 했지만…. 도미니온스, 너희들 사상이 말도 안 되는 거라는 건 인지하고 있는 거지? 모든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자격이 있다 이거야. ‘이 누나 태세전환 봐.’ -정의의 편에 선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이라 이거지. 하하하하하하! 인간의 존엄성! 네놈들은 그걸 배재하고 있는 거라고. 우리가 정의고 너희들이 악이야. 아니, 내가 정의야. 더 위에 선 자가 정의지. 너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여기 온 거잖아. -저를 당신처럼 역겨운 인간과 엮지…. -누구나 다 생각은 다른 법 아니겠어? -당신을 죽이고 고통받는 모든 인간들을 해방시키겠습니다. -우리 직원들 복지 괜찮다니까 그러네. 진짜 악마가 여기 있었어. 나 죽으면 우리 직원들 전부 실업자 되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싸울 수밖에 없나 봐. 초월자들의 싸움이다. 이제 막 1티어에 들어선 하연수는 감히 끼어들 수도 없는 싸움이었다. 어떻게든 이지혜를 지키는 것이 그녀의 임무다. 도미니온스는 로노베를 배제한 채로 이지혜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게 뜻대로 될 리 만무했다. 아무리 로노베가 특기가 전투가 아니고, 소환 상태로 내려와 패널티를 안고 있다고 한들, 그녀는 72군단장 중에 하나다. 하위 서열이었지만 등급만 놓고 본다면 신이나 다름이 없다. ‘직원들 능력이 부족해. 다운그레이드된 것 같기는 하지만….’ 도미니온스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하다. 어느 쪽이 우세한지는 대충 봐도 보인다. 로노베는 끊임없이 손톱을 휘두르거나 권능을 사용하며 도미니온스를 몰아붙이고 있었고, 그녀는 막아내는 데 여념이 없다. 잠깐잠깐 퓨즈가 걸린 것처럼 멈칫하는 것도 전투를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다. 그 쿨타임이 굉장히 짧기는 했지만 로노베가 그녀의 정신 속으로 침투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더러운 것들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지. 비둘기. -그 더러운 입 다물어라. 이 악마야. ‘심지어 얘네는 감정도 실린 것 같네.’ 싸우는 모습이 꽤나 살벌하다. 여러 가지로 묘사하기 힘들 만큼 살벌하게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계속 저 싸움을 구경하고 싶기는 했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쪽에도 들어오고 있는 것 같은데. 오빠가 잘할 수 있죠? 상황실 하나가 완전히 망가져 버리며 이쪽이 지게 된 부담이 늘어난 것이다. ‘이거… 조금 꼬였는데.’ 차희라는 참지 못했는지 다시 한번 케루빔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고, 수성전도 원활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도중이기는 했다. 문제가 있다면 도미니온스와 로노베가 싸우고 있는 지역으로 병력이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역겨운 영혼을 가진 인간과 악마가 튀어나왔다는 소식에 비둘기들이 단체로 몰려들고 있는 것만 같다. 원래부터 지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붉은 용병이 메인으로 자리한 거점이라는 것. 심지어 이지혜 사단도 몇 명 포진되어 있다. ‘전부 다 아는 얼굴들이군.’ 아마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때마침 붉은용병의 최영기가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영기 씨. 제 말 들려요?” -네, 들립니다. 이기영 님. “알고 계시겠지만 현재 그쪽 상황실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혜 누나한테 따로 지시를 받을 수 없으니 당분간 전장은 영기 씨가 통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을 때까지는 매뉴얼대로 진행합니다. 적 병력이 몰리고 있으니 따로 지원도 보내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버티면서 소모전으로.” -네. 이해했습니다. 이기영 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용병여왕님의 상태는 어떤지에 대해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 그거?’ -너라면 이해할 줄 알았다. 붉은 짐승아. -지랄. 잘하고 있다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고 있는 도중, 붉은색과 파란색이 뒤엉키며 전장 자체를 마비시키고 있는 모습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양산형 비둘기들도, 아군 진영의 인간들도 이미 자리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현재 케루빔이라는 천사와 전투 중입니다. 상태는 나쁜 것처럼 보이지는 않네요. 전장은 마비 상태가 됐습니다. 제가 잘 체크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요. 특이 사항 있으면 곧바로 연락하셔야 합니다. 제가 지금 눈이 조금 바빠서요.” -네, 너무 무리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건강이…. “네, 네.” 차희라 대 케루빔. 이지혜 대 도미니온스. ‘일단 두 마리는 묶어둔 건가?’ 이동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도미니온스를 완전히 묶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케루빔은 묶어놨다고 판단해도 될 것 같았다. 어떻게든 녀석과 싸우고 싶어 하는 차희라에게 걸렸으니 당장은 빠져나가기가 힘들다. 전체적으로 상황을 평가해 보자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아니, 이건 나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예상외의 전력이 사대천사 중 하나를 묶어놓고 있다는 건 환영할 만한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이지혜는 저 천사에게 묶이는 것보다 전장을 컨트롤 할 때 빛을 발한다. 사대천사를 막을 패들은 어떻게든 만들 수 있지만 이지혜의 컨트롤 능력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붉은용병의 최영기가 잠깐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한들, 그래 봤자 본인이 맡은 작은 구역들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하는 수준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이쪽과 함께할 수 있는 파트너를 잠깐이나마 잃어버렸다는 것. ‘이게 커.’ 이지혜의 부재는 크다. 이기영은 완벽하지 않다. 대가리 하나보다 대가리 두 개가 더 쓸모 있다는 건 기본적인 상식이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이지혜가 없다는 건 내게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 이해자였고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으니까. 전술적인 측면에서 의견을 나눠야 했고 여러 가지 커다란 선택에 대해 짧은 회의를 나눠야 했다. ‘지혜 누나 코멘트 없이 가 봐야 한다는 거네.’ 우리가 녀석을 묶어둔 것이 아니다. 녀석들이 우리를 묶어둔 것일 수도 있다. 갑작스레 그런 가정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새끼들한테 컨트롤 타워가 있다는 가정은 사실이고.” ‘이 새끼들이 1회차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 녀석들이 정말로 가면쓰레기들에게 뒤통수를 후드려 맞았다면 그 듀오가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일단 두 명을 떼어놓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결정을 내리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두 가면쓰레기를 따로 떨어뜨려 놓겠다는 수작인가.’ 가면쓰레기 진청의 업보 때문에 내가 고생하는 형국이 된 것 같기는 했지만…. ‘이거 상대 얼굴 한번 보고 싶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병력을 운용하고 있는 타워의 수준이 높다. 누가 이 병력을 운용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해지기까지 한다. 적어도 얼굴이라도 마주 보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망원경으로 적의 컨트롤 타워를 찾고는 있었지만 보이는 것이 없다. 이렇게 쉽게 위치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애초 상정하고 있는 것보다 더 진전이 없다. 게다가. ‘허투루 배운 것도 아니야….’ 전장을 운용하는 걸 보면 느껴지는 것이 있다. ‘어디에서 병력을 더 빼 오지?’ 붉은용병이 맡고 있는 전선은 지원이 필요하다. 추가 병력을 지원해야 한다는 걸 실감하고 있지만 어디에서 병력을 빼내야 할지는 온전히 내 선택이 달린 문제, 주변 전선에서 적 병력의 움직임이 보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의도는 뻔하다. 추가 병력을 붉은용병 쪽에 밀어 넣는 순간 약해진 틈으로 추가 병력을 밀어 넣겠다는 거겠지. 이를테면 수 싸움이다. 유치한 비율 싸움을 해보자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지혜 누나가 생각날 정도로 깔끔한 운영이었다. “재미있네. 애초에 너희들이 이런 걸 필요로 할 리가 없잖아.” 외신세력과 천사들이 수준 높은 병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애초부터 중력의 영향을 받게 될 거라는 걸 생각했다면 모를까 이 새끼들이 병법과 친한 종족들도 아니었으니까. 1회차 놈들의 컨트롤 타워는 가면쓰레기 듀오가 아니었던가.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워서 이런 전술을 운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사대천사 중 하나.’ 허벅지를 툭툭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거대한 책상에 펼쳐져 있는 전장의 모형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말을 움직이자 병력들이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온다. 이쪽이 실시간으로 말을 움직이고 있다는 게 제대로 전달이 되기는 했나 보다. 한번 떠보는 식으로 병력을 던져보자 곧바로 적들의 움직임이 변하는 게 눈에 보였다. ‘반응 빠르네. 그리고… 무시해?’ 아무 의미 없는 수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하….” 비둘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보인다. 정말로 목적이 나와 이지혜를 떨어뜨려 놓는 것이었다는 듯 본격적으로 적 병력 전체가 한 발자국을 내디디고 있다. 적들의 목표물은 아군이 주요 거점들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14개의 거점이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겠지만 사방에 깔아놨던 모든 함정을 배제한 채, 비둘기들은 우리의 약점을 향해 창을 들이밀고 있었다. “뭐야?” 몇 개의 말을 더 움직여봤지만… 아니, 움직이기 전에도 이미 막히고 있다. 적군의 컨트롤 타워는 마치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 자존심 상하지만 이쪽보다 수준이 높다. ‘완벽해.’ 내가 이 전장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녀석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는 그림. 거기에 플러스 알파까지 되어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어울리는 예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마치 거울을 보고 체스를 두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새끼… 누구야.” 저 멀리서부터 비둘기 하나가 다가오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녀석이 뭘 하려고 하는지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였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꽉 막힌 전장에 변수를 추가하기에는 이것보다 적절한 수가 없었으니까. ‘전술 김현성?’ “정말로 전술 김현성이야?” 적의 컨트롤 타워가 사대천사를 사용해 전술 김현성을 흉내 내고 있었다. “이걸 따라 한다고?” 거의 완벽하게 운용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 706화 소울 메이트(5) > 의도는 확실했다. ‘1인 전술.’ 내가 갑자기 멍청이가 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꽉 막힌 답답한 전장에 균열을 만들어야 하는 작업은 현재 비둘기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녀석들의 날개는 완전히 봉인되어 있었고, 거대한 성벽이 아군을 완전히 막고 있는 상황, 정공법으로 공성전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마치 조이기를 당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분명히 공격은 본인들이 하는 것 같은데…. ‘포위당하고 있는 것 같았지?’ 사실 그게 맞다. 애초 성벽의 형태를 북부를 감싸 안을 수 있도록 설계했으니까. 시공에 들어가기 전 이미 수천 번이 넘는 시뮬레이션을 거쳤고, 아군에게 유리하게 싸울 수 있도록 온갖 전문가들과 함께 회의를 진행했다. 북부의 전진기지와 성벽은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1차 성벽이 뚫린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 다른 전진기지가 버티고 있는 것은 물론, 정하얀의 마법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방향까지 철저하게 계산했다. 거기다 하늘 위를 날아다니던 녀석들이 순식간에 땅바닥으로 떨어지기까지 했으니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보통 이런 전장에 변수를 가져오는 것은 소위 네임드라고 불리는 영웅들, 물론 네임드라고 하더라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부분은 한정적이다. 녀석들이 뚫어낼 수 있는 네임드를 보유하고 있다면 우리 측 역시 카운터를 칠 수 있는 네임드를 보유하고 있는 게 당연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정말로 전장을 뒤흔들 수 있는 영웅을 찾기는 힘들겠지. 조건은 까다롭다. 전장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민첩함을 가져야 했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경험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압도적인 무력은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1인 전술로 써먹을 수 있다. 넓은 시야, 빠르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두뇌, 변수에 대처할 수 있는 침착함, 여기에 주인공같이 잘생긴 얼굴까지. 마지막은 별로 상관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조건에 부합하는 인재는 김현성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전장을 휘젓고 있는 한 마리의 비둘기를 목도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아아아악! -적 네임드 출연! 지원이 필요하다. 지원!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제한해! 높게 날아오르지 못하게 해! -아아아아아아악!! -제기랄! 어디야. 어디냐고! -뒤, 뒤다. 피해. 피하라고 제기랄! -그래 봤자. 단신이다. 곧 아군 네임드들이 도착할 거다. 마법으로 방어해. 최대한 버틴다. 탱커들을 앞세우고 사제들을 최우선으로 보호해. 놈은 후방을 노리고 있다. 전력을 깎아 먹게 하지 마. -왼쪽! -제길! -사제! 여기… 여기 사제! -이게… 이게 뭐야. 제기랄… 이게 뭐냐고! -이 괴물 새끼! 괴물! 커헉! -죽어라! 죽…. 빠르다. 내 눈으로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난전에 빛을 발하는 타입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애초 평범한 병사가 녀석의 모습을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놈이 움직이는 걸 캐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시야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아군이 밀집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아군 동료가 시야를 가리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놈을 제압할 수 있는 수단 역시 사라진다. 적의 컨트롤 타워는 우리 측 아군 병력을 방패로 삼을 정도로 똑똑하고 녀석이 갈 길을 차근차근 안내해 주고 있었다. 내가 가장 거슬려 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화살을 날릴 수도 없고 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다. 말 그대로 양 떼들 사이에 늑대 한 마리를 풀어놓은 격이다. 순식간에 전장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당연지사. 제대로 공성전에 임할 수 없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놈의 첫 번째 목적은 현장지휘관을 처리하는 것이었고 녀석은 훌륭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있었다.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시간에 벌써 15명이 넘는 야전 지휘관이 목숨을 잃었다. 녀석들은 모두 네임드라면 네임드라고 분류할 수 있는 영웅들. 물론 진짜 네임드와는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하위에 있는 녀석들이었지만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당할 정도로 멍청한 이들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 능력을 인정받아 저 자리까지 올라간 놈들이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쉽게 당한다고?’ 성벽 위의 양 떼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보인다. 지금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아군 병력이 뭉텅이로 썰려 나가고 있는 마당에 야전 지휘관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심지어 아래에서는 비둘기들이 기어 올라오고 있다. 이것보다 더 공포스러운 상황이 또 어디 있을까. ‘안 좋은데.’ 균열을 더 벌어지게 만들면 안 된다. 댐에 생긴 구멍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넓어질 것이다. 빠르게 녀석을 바라보자 여전히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움직이는 비둘기의 모습이 보였다. 악마의 상징처럼 자리 잡은 찰랑거리는 은발을 가지고 있는 남성형. 복잡한 얼굴로 검을 휘두르며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다. 김현성보다는 아니었지만 봐줄 만했고 이야기 속에 나오는 전형적인 용사 같은 얼굴이었다. 녀석은 빠르고 또 빨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녀석의 움직임이 무척 익숙해 보였다는 것이었다. ‘처음이 아닌데.’ 1인 전술로 사용된 것이 처음이 아니다. ‘도대체 언제?’ 외신&비둘기 세력은 차원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1회 차?’ 어쩌면 녀석은 1회 차 때 1인 전술을 경험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정일 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쓰로누스?” 1회 차 가면쓰레기는 녀석이 1인 전술을 사용하기에 적절한 천사라고 판단했다. 너무나도 위화감이 없다. 조금 과장이 섞인 발언이었지만 수백, 수천 번을 움직여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컨트롤 타워에서 내려오고 있는 지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본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다. 확신할 수 있다. 놈은…. “1회 차를 통해서 학습한 거야.” 쓰로누스도 쓰로누스지만 녀석을 부리고 있는 컨트롤 타워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도 생겨난다. 가면쓰레기는 없다. 녀석은 이미 죽었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토록 자연스럽게 쓰로누스를 사용할 수 있는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천사 중 한 명이 1회 차 가면쓰레기를 보고 배운 거라고 봐야 되나?’ 아니면. ‘가면쓰레기가 지옥에서 살아 돌아오기라도 했나?’ 뭐가 됐든 최우선 사항은 녀석을 막아야 한다는 것. 곧바로 전술 김현성이라도 등판시켜 놈을 제압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니면 조금 더 숨기는 게 좋을까? ‘아끼다 똥 돼.’ 일단은 등판시키는 것이 옳다. 망원경으로 김현성을 바라보자 성벽에 자리를 잡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불현듯 ‘엿이나 먹으라지’라고 외친 삐뚤어진 현성이가 생각나기는 했지만 컨디션 자체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이거 괜찮은 건가?’ 얘 이거 정신적으로 문제 생긴 거 아닌가. 제대로 임무 수행할 수 있는 건 맞지? 살짝 의욕이 떨어진 것 같기도 했지만 무난하다고 표현해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심경이 복잡한 것과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면 이대로 보내고 싶기는 했지만, 김현성이 의외로 멘탈이 약하다는 걸 떠올려 보면 조금 걱정되기도 한다. 외신을 상대해야 하는 우리 소중한 현성이가 혹시나 결전을 앞두고 다치면 어떻게 하나. 평소라면 하지 않을 걱정이었지만 그만큼 은발의 악마가 보여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김현성이 천천히 날개를 펼친 것은 바로 그때. 조용히 쓰로누스를 바라보던 녀석이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명히 다른 오더가 있기 전까지는 대기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전달했던 기억이 있다. 드디어 김현성과 내 마음이 통한 걸까 싶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새끼….’ 그냥 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여야겠다고 마음이라도 먹었나 보다. “현성 씨?” -가서 막겠습니다. “네. 좋네요. 그럼 지시 사항을 계속해서 전달해 드릴 테니.” -괜찮습니다. 기영 씨. ‘이 새끼 이럴 줄 알고 있기는 했는데.’ 왠지 불안하더라니. -저자는 이전에도 상대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제 손으로 직접 죽인 적도 있고요. ‘아, 그게 쟤였어? 근데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쟤한테 머리 하나 더 붙어 있어. 현성아.’ -기영 씨에게 부담을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네가 다치면 형이 더 부담스러워지는데.’ -뭘 걱정하고 계시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강해졌으니까요. 다른 전장을 보시면서 저까지 따로 봐주신다는 건… 네. 너무 기영 씨를 힘들게 하는 일입니다. “아니, 그건….” -제가 짐을 들어준다는 걸 믿고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짐을 들어드리기는커녕 부담을 얹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부디…. ‘아니야. 현성아. 너 발릴 것 같아. 왠지 불안하단 말이야.’ 쓰로누스 하나라면 모르겠지만 쟤 위에 있는 애가 진짜 신경 쓰인다고. -잠깐 연결을 끊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기영 씨. “잠, 잠깐!”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연결이 끊긴 것이 보인다. 물론 내게는 김현성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단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 새끼의 각오가 새삼스레 당황스럽다. ‘뭐야, 시바. 너 지금 형 깐 거야?’ 중2병이 걸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걸려도 단단히 걸린 것 같은 모습에는 실소가 나올 지경,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일단 지켜봐야 하는 건가?’ 김현성이 혼자 잘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 지켜보고 판단을 내려야 하나? ‘아니, 걱정할 필요가 있어?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인데? 1회 차 때도 쓰로누스 1킬 성공했다잖아.’ 우리 현성이 날개 달고 욜라 세졌잖아. ‘지켜보자.’ 일단은 지켜보자. 혼자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검은색의 날개가 펄럭인다. 갓 태어난 새처럼 아직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 나와는 반대로 김현성은 이미 날개를 다루는 것에 익숙하다. 검은색의 빛이 순식간에 하늘을 가로지르고 거대한 마력이 녀석의 주위를 감싸 안기 시작했다. 신이라도 단칼에 베어낼 수 있는 모습에는 소름이 돋는다. ‘저래야 우리 회귀자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점점 더 커지는 환호성 때문에 김현성의 모습을 제대로 감상할 시간이 없었다. 아군 병력이 김현성이 오고 있다는 걸 알고 환호를 보내고 있는 도중이니 쓰로누스 역시 김현성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예상했던 그대로. 일반 검보다 두 배는 더 길 것 같은 검을 든 쓰로누스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김현성은 얘가 1회 차를 기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이것도 전하는 게 좋겠지? 아니, 어쩌면 김현성 스스로도 알게 될 것이다. 예전에 싸운 적이 있었던 적이 오랜만에 만나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을 리 없을 테니까. 예상했던 대로 은발의 악마가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냉정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김현성의 모습에 순식간에 얼굴을 구기는 모습이 보인다.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감싸 쥐는 것이 보였다. 루시퍼와 계약을 맺은 흑화 김현성에게 분노를 보내는 것일까. 어쩌면 내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저 비둘기가 보기에도 1회 차의 김현성은 올곧은 사람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내 예상을 완전히 넘어서고 있었다. -너였구나. -……. -네가 원인이었어. 언제부터 악마와 계약을 한 거지? -……. -이전부터였나? 그는… 그 역시 네 꾐에 넘어간 것이냐.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겠군. 그 모습처럼 가장 확실한 증거도 없을 테니.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지. 다른 동지들은 모두 우리가 배신당했다고 말했지만 역시 내가 틀리지 않았던 거야. 그가… 그가 우리를 배신할 리가 없어. 나의 이해자, 내 소중한 친우가 나를 배신하고 죽일 리가 없었어. 역시 그랬던 거야. -무슨…. -대답해라! 김현성! 이 더러운 기만자야! 네가 그를 타락시킨 것이냐고 물었다! ‘이 새끼는 도대체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누가 네 이해자고 네 친우였는데?’ < 707화 소울 메이트(6) > 가장 먼저 시야에 비친 것은 김현성의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 눈에 보인다. 내가 김현성이었어도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타락? 친우? 이해자? 악마와의 계약?’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김현성은 1회 차에 악마와 계약한 적이 없었다. 루시퍼와 계약한 것은 이번 회차가 처음이었고 그마저도 라파엘 사태가 아니었더라면 계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녀석은 올곧은 영혼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1회 차에는 특히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해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자세한 사정을 알 방법은 없었지만 녀석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물론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굳이 귀 기울여 들어볼 필요가 없는 소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잔뜩 흥분한 채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놈에게 어떻게 귀를 기울일 수가 있을까. 애초에 적이기도 했고 정상적으로 보이지도 않았으니 미친놈이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한 가지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쓰로누스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김현성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외신세력이 1회 차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게 분명하리라. 김현성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많은 대화를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1회 차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녀석을 바라보니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다. -기억하고 있는 건가. 쓰로누스. 뭐 대화를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딱 이 정도겠지. ‘일단 카리스마 먹어주고요.’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이 더러운 기만자여. -해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너는 죽을 것이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 현성이 싸늘하네. 1회 차에는 그랬어?’ -나는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 죽지도 않고 이렇게 살아 있지. 더러운 기만자. 내 질문에 대답해라. 김현성. 그는 어디에 있지? -……. -그는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라파엘을 바라보는 표정과 유사하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정말로 오래된 적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실제로도 정적이었을 것이다. 1회 차에 있었던 전쟁은 무척이나 길었다. 매번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각 진영의 중심이었던 그들은 서로를 향해 검을 들이밀었을 거라는 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려진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김현성으로 결정됐지만 그 과정에는 무척이나 많은 일이 있었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지독한 인연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 -……. -모르는 척하지 마라! 역겨운 악마의 하수인아. 네 검은 날개가 말해주고 있다. 네놈이었어. 모든 원흉이 바로 네놈이었단 말이다. -못 본 사이에 머저리가 됐군. 김현성의 말대로 정말로 머저리처럼 행동하고 있다. -닥쳐. 세라핌. -뭐? -입 다물어라. 세라핌. -…….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세라핌. 네 눈에도 이 더러운 기만자의 모습이… 아니, 아니야. 네 생각이 틀려. 세라핌. 그는 우리를 믿어줬어. 우리도 그를 믿어줘야만 해. 그가 고통받고 있을지도 몰라. 끔찍한 꼴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직도 그가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저 기만자의 모습을 보고도 그런 생각을…. -……. ‘갑자기 웬 또라이 새끼가 나와서….’ 이제는 혼잣말을 하는 모습이 가관이다. 눈을 보니 제대로 알겠다. 이 새끼는 제정신이 아니다. 무슨 알콜 중독자 같은 눈을 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냐, 세라핌! 그와 함께하고 싶다고 말한 것은 너였다. 그를 그렇게나 따르던 네가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정황상 세라핌이라는 비둘기와 대화를 나누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1인 전술은 세라핌을 통해서 하는 건가?’ 점점 더 험악해지는 분위기 때문에 제대로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제정신이 아닌 것은 내가 아니라 너다, 세라핌. 너야말로 직시해야 할 것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어! 다시 한번만 그 입을 놀린다면…. ‘뭐야. 이 새끼 왜 이래. 무서워. 현성아 형 지켜 줄 거지?’ -네가 하지 않겠다면… 혼자서라도 되찾을 것이다. 혼자서라도! 미친 비둘기가 쇄도하며 김현성을 향해 검을 내뻗는 것은 순식간이다. 약 먹을 때가 된 녀석의 갑작스러운 발작에 김현성도 조금 긴장했는지 검을 꺼내 들었다. 은색과 검은색이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는 것이 눈에 보인다. -김현성!! -쓰로누스!! 소년 만화처럼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검을 부딪치는 장면은 사진으로 한 장 찍어놓고 싶기는 했지만 갑작스레 전환되는 장면에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굉음이 들려오고 빛이 퍼져 나간 직후에 정신이 뒤흔들린다. ‘또?’ 또야? 이지혜의 마지막 기억을 봤을 때처럼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이 온몸에 스며든다. 눈 깜빡할 사이에 시야가 전환된다. 찰나였지만 긴 시간처럼 느껴지는 감각이 사라진 이후, 시야에 비치는 것은 이미 한 차례 전쟁이 끝난 것만 같이 느껴지는 장소였다. 폐허가 되어 쓰러진 건물에 앉아 있었던 인형은 가면을 쓴 남자와 방금까지 보고 있었던 쓰로누스. 이건 1회 차의 기억이다. ‘아니 뭐 볼 게 있다고 또 보여주고 난리야.’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지만 중간에 끊을 수가 없는 것이 문제, 이미 뇌 속에서 상영을 시작한 파노라마는 계속해서 내 눈과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어째서… 나를 선택한 거지.” “선택이랄 게 있겠습니까. 그저….” “그런 걸 묻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않느냐. 내가 궁금한 것은 어째서 나를 쓰기로 마음 먹었는지에 대해서다. 나는 세라핌이나 케루빔처럼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운이 좋아 권좌에 올라왔지만 도미니온스쳐럼 똑똑하지도 않지. 빠른 날개가 있다고 한들, 그것뿐이야.” “…….” “심성은 유약하기 짝이 없지. 나는 아직도 인간을 죽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커다란 뜻을 품고 있다고 한들, 파괴와 폭력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 “반드시 이뤄야 할 일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어.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것은… 도저히.” “쓰로누스 님은 약하지 않습니다.” “아니… 나는….” “쓰로누스 님은 결코 약하지 않아요. 케루빔 님, 아니, 어쩌면 세라핌 님보다 더욱더 강해지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쓰로누스 님은 어째서 인간을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사랑하도록….” “어째서 인간을 그리 아끼시는 건지 묻고 싶습니다.” “…….” “…….” “생각…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네.” “별.” “네?” “인간은 저 밤하늘에 별과 같으니까.” 잠깐 동안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알콜 중독 비둘기의 표정은 진지했다. ‘도대체 이건 뭐야?’ 거짓 하나 없는 진심으로 저런 대사를 내뱉을 수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괜스레 시야를 돌리고 싶어졌을 때 다시 한번 입을 여는 놈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 “그래. 그런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인간은 밤하늘의 별 같아. 그들은 빛나고 있다. 내가 말주변이 없어 설명을 못 하겠지만 그들은 항상 빛나고 있어.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대로 열려 있다. 그 가능성이 바로 그들이 자리한 우주야. 그들은 그렇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도화지를 빛내고 있지. 하핫. 물론 그 빛이 꺼지기도 하고 너무 커다란 빛이 주변의 다른 별들의 빛을 바라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것 또한 아름답다.” “…….” “그 모든 것이 아름답다.” “네.” “나는 같은 크기로 빛나는 별들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의 개성 역시 아름다워. 어떤 별은 크게 빛나고 또 어떤 별들은 작게 빛난다. 각기 다른 빛을 비추며 밤하늘을 밝게 비추고 있다. 그래. 나는 그들의 개성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빛날 수 있는 그 능력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커다란 가능성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들 자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 “내 대답이 이상했나?” “아닙니다. 딱 쓰로누스 님에게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잠깐 웃음이 나왔습니다.” “나를 비웃은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쓰로누스 님을 비웃을 수 있겠습니까. 아까 어째서 자신을 선택했는지 물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 “그건….” “그건?” “쓰로누스 님이 인간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 “기분 나쁘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쓰로누스 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제게는 쓰로누스 님이 저 하늘에 빛나는 별 중에 하나로 보입니다. 인간은 유약합니다. 제가 인간이기 때문에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 “때문에 고민합니다. 문제에 대해 괴로워하고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이게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생각에 빠집니다. 덕분에 그들은 옳은 선택을 하기도 하고 그른 선택을 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 “그렇기 때문에 빛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기 때문에, 후회하고 괴로워하며, 매일 같이 고뇌에 빠지기 때문에, 누구는 이전의 일을 되돌리고 싶어서, 누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끊임없이 다음을 준비합니다. 그게 바로 그들이 빛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가.” “그런 면에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쓰로누스 님은 인간들처럼 고민하고 후회합니다. 걱정하고, 별것 아닌 것들 때문에 깊은 생각에 빠집니다. 이런 질문을 제게 던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쓰로누스 님을 볼 때마다 항상 생각했었습니다. 쓰로누스 님은 빛날 수 있다고, 더 강해질 수 있고,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다른 천사님들보다 더욱더 높게 떠 있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게 제가 쓰로누스 님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쓰로누스 님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본 모든 이들을 통틀어 제일 강하신 분입니다.” “과… 과찬이로군. 그대의 말은… 나를 부끄럽게.” “거짓 하나 없는 진심입니다. 쓰로누스 님.” “부끄럽게 만들어.” “…….” “인간, 그 가면은 벗지 않는 건가?” “추한 얼굴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에는 부끄러운 얼굴입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가면을 벗는 일은 없을 거라고요.” “하지만….” 천천히 녀석이 가면으로 손을 뻗는 것이 보인다. 가면쓰레기는 굳이 그 손을 피하지 않는다. 절대로 자신의 가면을 벗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예상했던 것처럼 중간에 주저하는 은발 비둘기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결국에는 완전히 뻗지 못한 손을 내려놓는 모습.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은 괜스레 앉아 있는 가면 남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에 응답하듯 가면쓰레기의 가면 사이로 쓰레기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밤하늘의 별. 쓰로누스 님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멋진 풍경이로군요.” ‘이 쓰레기 새끼… 이빨 터는 거 봐.’ “다음에도 함께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어디에선가 많이 본 것만 같은 레파토리였다. “그래, 그랬으면 좋겠군. 진심으로 말이다.” “…….” “밤하늘의 별… 그래. 다시 함께.”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 708화 소울 메이트(7) > 귀를 찢을 것 같은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바. 도대체 뭔데.’ 어째서 1회 차 가면쓰레기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내게 보여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계속해서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은 감각이 혼란스럽다. 똑바로 눈을 떠 김현성과 쓰로누스를 바라봤지만 마치 화면이 섞이는 것만 같다.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는 김현성과 그걸 막아내는 알콜 중독 비둘기. 사방이 전부 다 터져 나가고 있는 모습에 주변의 지형지물들이 형태를 잃어가고 있는 게 시야에 비쳐왔다. 문제가 있다면 구별할 수 없었다는 것. ‘이게 뭐야. 지금은 2회 차인 건가?’ 아니. ‘방금 전에 1회 차로 전환된 것 같은데? 다시 2회 차?’ 뭐가 1회 차고 뭐가 2회 차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그만큼 연속적인 장면들이 뇌에 전달되고 있다. 이건 같은 장면이라고 판단해도 되지 않을까. 저 둘은 1회 차에서도 같은 싸움을 했을 테니까. 1회 차와 2회 차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은 김현성 등 뒤에 달린 날개 말고는 없다. 그마저도 계속해서 겹쳐 보이는 마당에 뭐라 코멘트를 내리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이질적인 무력을 가졌는지는 똑똑히 보인다. ‘강해.’ 1회 차 김현성은 강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거지?’ 루시퍼의 힘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로도 비슷한 움직임을 선보이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더 빠르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무척이나 잘 만들어진 한 자루의 검. 1회 차의 김현성은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거추장스러운 날개나 어두운 힘없이도 녀석은 사대천사라고 불리는 이들 중에 하나와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그런 김현성과 검을 부딪치고 있는 알콜 중독 비둘기 역시 만만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쓰로누스가 사대천사 중에 가장 약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적어도 내 눈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느껴진다. 녀석은 강하다. 김현성과 비견될 정도로 경지에 올라가 있는 검술, 아니, 그 이상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되는 기다란 검을 다루는 솜씨는 경지에 올라 있다. 확실히 보통 천사와는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차희라를 상대하는 케루빔이나 이지혜를 상대하고 있는 도미니온스와는 다르다. 녀석이 사용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인간의 기술이었다. 누군가에게 배운 적도 없었으니 본인이 직접 체득했을 것이다. 경험으로, 눈대중으로 인간을 동경했던 녀석은 인간의 기술을 훔쳐 배워 경지에 올라섰다. 지금 보고 있는 1회 차의 광경은 아마 녀석이 성장한 이후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콰드드드득! 콰직!!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1회 차에서도 2회 차에서도 말이다. 이빨을 털면서 상대방을 도발해 정신을 뒤흔들 만도 하건만 이 새끼들은 그저 검을 부딪치고 있을 뿐이었다. 나였다면 실컷 털었을 텐데. 뭐 경지에 오른 검사들끼리는 검만 부딪쳐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그런 거라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녀석들은 계속해서 긴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쓰로누스 쪽. ‘현성이가 밀리나?’ 완전히 1회 차로 전환된 화면 속에서 점점 더 얼굴이 굳어가는 김현성의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쓰로누스가 새로운 검술을 선보인 이후였다. 물론 나는 저 새끼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 어떤 검술을 펼치는지도 모르고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이미지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마치 별들이 쏟아지는 것만 같다. 제대로 알아볼 수 없지만 느낌이 그랬다. 당연히 김현성은 막아내기 급급해하는 중, 결국에는 몸을 뒤로 빼 한 차례 숨을 고르려고 했지만 알콜 비둘기가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리 만무. 녀석들이 사용하는 전장이 넓어지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두 녀석이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지형이 변한다. 아마 전과 후를 보여준다면 대부분의 갤러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여줄 것이다.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나무들이 뭉텅이로 잘려 나가고, 튕겨 나가는 김현성은 폐건물을 몇 번이나 뚫고 나가 벽에 부딪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얼굴을 가격당한 쓰로누스는 폐허가 된 도시로 튕겨 나가고 그들의 무대는 근처의 숲으로 뒤바뀐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점점 더 피투성이가 되고 있다. 천사에게도 혈액이 흐르는지, 녀석의 얼굴 역시 붉은색으로 뒤덮여 있다. 김현성은 왼손이 불편해 보인다. 온몸은 이미 넝마가 되어 있다. 그들의 모습은 처절해 보이기까지 하다. 말 그대로 처절한 사투였다. 조금 이상했던 것은 쓰로누스의 몸이 계속해서 삐걱거리고 있었다는 것. 올바른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마치 버퍼링이 걸린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보인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하고 있어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녀석의 움직임이 변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녀석이 무리하고 있다는 것은 보인다. 충분히 유리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무리한 공격을 이어나간다. ‘뭐지?’ 김현성의 검이 녀석의 심장을 꿰뚫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거대한 싸움의 끝은 예고 없이 찾아왔고 녀석은 그 자리에서 바로 허물어져 버렸다.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의 승리였다. 검으로 놈의 심장을 꿰뚫은 김현성 역시 이미 한계를 맞은 상황, 계속해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김현성의 눈에 성취감은 없다. 남아 있는 것은 지독히도 힘들었고 길었던 이 싸움을 끝냈다는 안도의 감정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김현성 역시 옆으로 쓰러진다. 다시 일어나 발걸음을 옮기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옆으로 풀썩 쓰러져 버렸다. 가면을 쓴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녀석은 심장에 검이 박힌 채 죽어가는 쓰로누스의 앞에 서 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죽어가는 녀석의 옆에 서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 “이렇게 죽는… 건가.” “쓰로누스 님.” “이게 내 마지막이었구나.” “쓰로누스 님….” “이게… 내 마지막이었어. 끝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죽음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태어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쉽구나.” “…….” “하지만 아쉬워. 네가, 아니, 우리가 그렸던 세상을 함께 볼 수 없다는 게 아쉽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아쉽고 이렇게 사라진다는 게 아쉽고 무섭구나.” “…….” “네 잘못이 아니다. 내가 패배하고 죽어가는 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지시는 언제나처럼 곧았다. 내가 패배한 것은 네 지시를 수행하지 못한 내 탓이다.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네 기대를 충족시킬 수는 없었….” “푸… 푸흡.” “없었던….” “푸…푸흐하하하핫.” “…….” “푸흐하하하하하하하헤헤핫!” “뭐?” “비융신. 푸하하핫! 멍청한 새끼.” “지금….” “아직도 모르겠어? 이 멍청한 비둘기야.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 어떻게 하나 몰라. 이러니까 다른 비둘기한테 아둔하다는 소리나 듣지.” “너….” “정말로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감이 안 와? 비둘기 새끼야.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 사과할 필요도 없어요. 이게 내가 바라던 상황이었으니까. 오히려 감사할 따름입니다. 쓰로누스 님. 너는 훌륭히 임무를 완수했거든. 좋은 배역으로 좋은 마무리를 하게 된 거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내가 너를 죽인 거야. 이 아둔한 비둘기야. 김현성이 너를 죽인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죽인 거라고.” “…….” “나는 처음부터 네가 이기길 바란 적이 없어. 쓰로누스. 넌 여기서 죽어야 했으니까.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죽기 위해서 내 지시를 기다려왔던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돼? 김현성의 품 안으로 뛰어들라고 지시했던 건 네가 검에 찔려 뒈지길 바랐기 때문이라고. 푸하핫!”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콜록. 콜록.” “이렇게 잘 설명해 줬는데도 쳐 알아듣지 못하는 거 보면 너도 참 멍청한 놈이다. 쓰로누스. 내가 처음부터 너를 선택했을 리가 없잖아. 병신아. 냄새나는 비둘기한테, 퉤, 정말로 맡길 거라고 생각했어?” “너… 너….” “내가 선택한 건 여기 있는 이자야. 훌륭히 자신의 과업을 달성하고 지쳐 쓰러져 버린 영웅 말이야. 이겨내지 못한 자. 희생을 등에 업은 자. 깨달은 자. 실패한 영웅 김현성. 크으… 좋은 울림이야. 그렇지 않아? 실패한 영웅 김현성! 모든 짐을 짊어진 영웅 김현성. 세상을 바꾸는 건 너희 비둘기들이 아니라 이거야. 여기 있는 이 자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이곳을 구원할 거다.” “뭐….” “왜 내가 여기 와서 울고불고 드라마라도 한 편 찍어줄 줄 알았어? 멍청한 새끼야. 이 멍청한 놈아. 하하핫. 이 멍청한 새끼야. 아! 이건 말해줘야겠네. 고맙다. 쓰로누스. 김현성에게 죽어줘서 고마워. 너는 큰 경험치가 된 거야. 자신감을 심어주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어 줬지. 오늘의 기억은 우리 현성이에게 아주 큰 힘이 될 거야.” “누구냐….” “뭐? 푸하핫.” “너를 그렇게 만든… 자가… 누구냐.” “이 또라이 새끼는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너를… 너를 그렇게 타락시킨 자가… 누구….” “이 새끼 이거 물건이네. 멍청한지는 알았지만… 그보다 이제 슬슬 뒈질 때 되지 않았어? 역시 목숨이 질겨, 비둘기들은. 퉤.” “너를 그렇게 만든 자가 누구냐고… 물었… 하아… 하아… 기다리거라.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할 수… 있… 내… 잘못… 내가… 조금 더… 신… 신경을….”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했는데.” “이렇게… 될 거라고는…생각… 하아… 하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멍청한 비둘기였구나.” “구할….” “너희들도 울 수 있구나.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조금만… 더… 시간을….” “좀 닥쳐봐. 쓰로누스. 너 때문에 시나리오에 문제가 생겼잖아. 제기랄. 아. 제길. 제길… 웬 멍청한 새끼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아….” “제발….”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 “아, 이렇게 하면 되겠네. 맞아,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쓰로누스.” “…….” “내가 누군가한테 당해서 타락한 것 같네. 사실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타락한 것 같아. 누가 구해줬으면 싶었는데 결국에는 도와준 사람이 없었네. 모두가 나를 외면했거든.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부 죽고 나도 정신적으로 많이 무너지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미안하다. 쓰로누스. 칠흑 같은 어둠의 기운을 뿌리칠 수가 없었어. 결국… 결국 당해버렸지 뭐야.” “하아… 하아….” “내가 정말로 널 배신할 리가 없잖아. 쓰로누스. 우리는 친우고 서로의 이해자인데. 나는 아직도 함께 봤던 밤하늘을 기억해. 좋았잖아. 선선한 바람은 불어오고 별은 쏟아지고 있었지. 이야기를 나눈 것도 즐거웠고… 응. 뭐 그랬지. 솔직히 조금 지루하기는 했는데… 아니다. 나도 재미있었어. 쓰로누스.” “…….” “우리 소울 메이트 같은 거잖아. 그래서 말인데… 네가 꼭 나를 구해줬으면 좋겠네. 만약에 다시 만나면 말이야. 꼭 나를 구해줬으면 해.” “…….” “아, 중요한 걸 알려줘야겠구나.” “하아… 하아… 하아….” “내 이름.” “하아….” “내 이름은 이기영이야. 똑똑히 기억해야 돼. 내 이름은 이기영이야.” “하아… 하아….” “이. 기. 영.” “…….” “때가 됐나 보다. 그럼 잘 가라. 쓰로누스.” “…….” “…….” 저도 모르게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역겨운 쓰레기의 모습, 저 자리에 있는 건 틀림없이 내가 아닐 것이다. < 709화 소울 메이트(8) > ‘생각해 볼 게 많기는 해.’ 그 말 그대로였다. 어째서 갑작스레 1회 차를 보게 된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 첫 번째 문제였다. 그동안은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이 블러핑을 했다고 생각했었지만 이미 나는 그것에 관해 알고 있지 않은가. ‘김현성이 이기영을 찌르는 것.’ 전에도 한 차례 결론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게 승리할 수 있는 퍼즐이었다. 루시퍼와의 내기였고, 우리가 이 전쟁을 가질 수 있었던 조건이었다. 대충은 마무리가 지어졌다고 판단했지만 아직도 내가 외면하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이전에 세웠던 가설들을 모두 무위로 돌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금 더 깊게 파고들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다. 가면쓰레기의 영혼이 이기영의 영혼을 침투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대해 잠깐 고민해 봤지만…. ‘위화감은 없고….’ 위화감이 없으니 구태여 막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애초 막고 싶다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분명히 도움을 주는 부분도 있었으니까. 일단은 내가 봤던 것들부터 정리하는 것이 먼저. 지금까지 세워놨던 가설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가설이 생겨났으니 태세전환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 적이 아니었던 건가?’ 가장 충격적인 것은 가면쓰레기가 김현성을 적대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 어떤 것보다도 이 사실이 가장 흥미롭다. 김현성과 1회 차의 가면쓰레기는 정적이라고 생각했었다. 1회 차의 역사는 김현성과 가면쓰레기의 대립이 주요 주제였다. 둘은 어느 시점부터 서로를 증오할 정도로 적대시했고 여러 차례의 전쟁을 겪었다.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고 결과적으로 대륙이 완전히 멸망할 정도로 상황이 꼬여 버렸다. 김현성은 세상을 구해야 하는 용사였고 가면쓰레기는 그의 대적자였다. 흔한 이야기다. 용사와 마왕 같은 포지션이었으며 라이벌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적의로 꽉 찬 관계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가면쓰레기 진청은 도저히 구제할 방법이 없는 사이코패스였다고.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 도대체 뭐지? ‘내가 선택한 건 여기 있는 이 자야. 훌륭히 자신의 과업을 달성하고 지쳐 쓰러져 버린 영웅 말이야. 이겨내지 못한 자. 희생을 등에 업은 자. 깨달은 자. 실패한 영웅 김현성. 크으… 좋은 울림이야. 그렇지 않아? 실패한 영웅 김현성! 모든 짐을 짊어진 영웅 김현성. 세상을 바꾸는 건 너희 비둘기들이 아니라 이거야. 여기 있는 이자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이곳을 구원할 거다.’ 도대체 뭐야. 마치 본인이 김현성을 애지중지 키운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동안 김현성과 적대한 모든 행동이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 애초에 내가 가정했던 모든 경우의 수를 한꺼번에 부숴 버리는 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저 말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가면쓰레기의 생각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단순히 알콜 중독 비둘기를 기만하기 위한 대사일 수도 있고 아무 의미 없이 지껄인 대사일 수도 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가면쓰레기는…. “가면쓰레기는 김현성을 죽인 적이 없었어.” 그의 역사를 계속해서 살펴봤지만 녀석은 김현성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김현성에게 다른 해를 끼친 적이 없다. 심지어 세계가 멸망한 이후에도 김현성이 계속해서 살아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지금의 가설에 힘을 실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알타누스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지만 이쯤 되면 다른 가능성도 존재한다. 처음부터 가면쓰레기가 김현성을 남겨두려고 했을 경우다. “미친 거 아닌가. 시바.” 이것저것 생각나는 것이 많다. 처음부터 가면쓰레기가 김현성을 원망하지 않았었다면? 물론 그간의 일을 생각했다면 그가 김현성을 원망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김현성을 이해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복수에서 다른 노선으로 목적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을 계속 적대했던 것은…. ‘김현성이 강해지기를 바라서였다고?’ 머리를 뒤흔든 뒤 망원경으로 김현성을 바라보니 알콜 중독 경험치 비둘기와 얽혀 있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1회 차에 있었던 싸움보다 더 격렬한 싸움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도중. 솔직히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김현성. -……. 콰아아아아아아앙!! 이미 저 둘이 있는 지역은 다른 전장와 공간이 분리되어 버린 지 오래다. 주변에 거대한 보호막이 펼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저들의 싸움에서 비롯한 여파에 다른 이들이 휘말리지 않게 하려는 최소한의 장치였다. 물론 저런 게 의미가 있을 리 만무했다. 보호막은 순식간에 터져 나가고 심지어 성벽까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아이… 시바. 이거 무너지면 안 되는 데.’ 김현성이 검을 휘두른 직후였다. 검에 담긴 검은색의 마력이 순식간에 성벽을 휘감았고 콰앙 소리와 벽면 한쪽이 완전히 터져 나갔다. 이상해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힘을 조절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둘의 싸움은 1회 차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위에서, 바닥에서, 쉬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며 검을 부딪친다. 둘의 모습이 감정적으로 흥분하고 있다는 게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필사적으로 자신의 친우를 찾는 알콜 중독 비둘기와는 다르게 김현성은 흥분할 이유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흥분 안 하는 게 이상한 건가.’ 분위기에 취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의 모습에 취해 있을 수도 있지. 녀석을 겨우 상대했던 예전의 김현성과는 다르다. 현재의 김현성은 놈을 압도하고 있었다. 부족했던 마력은 늘어났고 없던 날개도 생겨났다. 육체적으로도 몇 단계나 더 성장했다. 모든 게 열세에 있었던 예전과는 확실히 차이점이 있다는 거다. 점점 더 눈이 붉어지는 듯한 모습에 응원을 보내기는 했지만… 솔직히 저 알콜 중독 비둘기가 만만치 않다. 마치 서로의 포지션이 1회 차와 뒤바뀐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알콜 중독 비둘기는 마치 1회 차의 김현성처럼 싸우고 있었다. 모든 부분이 열세에 있지만 김현성의 힘을 적절히 이용하며 운영하는 싸움을 가져가고 있었다. 분명히 김현성이 밀어붙이고 있는 형국이었지만 이상하게 김현성이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가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한참이나 몸을 부딪치던 녀석들이 가까운 거리를 두고 검을 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 -약해졌군. -아니, 나는 강해졌다. 쓰로누스. -너는 약해졌어. -네 목이 잘려 나갈 때도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을지 지켜봐 주지. ‘현성이 시바 어디서 그렇게 험한 말을 배웠어.’ -힘에 취해 이성을 잃은 건가. 그 힘은 너를 갈아먹을 것이다. 김현성. -나는 언제나 이성적이다. 그리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야.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뭘 해야 하는지, 항상 인지하고 있다. -추하군.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는 알고 있나? -추한 모습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아니야. 현성아 너 안 추해. 추하지는 않아. 간지 나는데 왜 그래. 누가 검은 날개를 보고 추하다고 그래?’ -추해 보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그게 더러운 악마에게 몸을 판 자의 말로다. 김현성. 네 모습을 내려다봐라. 그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네가 빛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너는 빛나지 않아. 별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아니, 이런 대화를 한다는 것도 우습다고 느껴질 정도야. 아주 조금이나마 네게 기대를 걸었지만 이제 네게 궁금한 것은 없다. 네 역할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이야기하는 것뿐이야. -……. -지시는 필요 없다. 세라핌. 이 자는 나를 이길 수 없어. 나 혼자 되찾겠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네 모습으로 그런 말을 지껄이는 게 설득력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멍청해지기까지 했군. 넌 지금 그 힘에 취해 있어. -……. 입술을 꽉 깨무는 김현성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얼굴이다. 그렇게 잠깐 멈췄던 싸움이 다시 한번 시작됐다. 질 리가 없다는 표정의 김현성, 그리고 천천히 검을 쥔 쓰로누스. 전투의 향방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딱 이 시점부터였다. ‘이 약물중독 비둘기 새끼.’ “왜 이렇게 센 거야. 뭐 한 거야 도대체.” 쓰로누스가 가지고 있는 힘은 케루빔과 도미니온스보다 약하다고 여겨졌지만, 녀석은 그 둘보다 강하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그게 아니라면 현재의 모습이 설명될 리가 없다. 싸움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부터 김현성은 초조해하고 있다. 녀석의 어쭙잖은 심리전에 말린 것이 아니다. 방금 전에 나눴던 대화 그대로였다. 싸움은 스펙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듯 김현성을 유린하고 있었다. 김현성이 도노반을 상대로 싸워 이겼을 때를 보는 것 같다. 힘만 센 멍청이의 포지션에 있는 게 김현성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제길. -아둔한 인간. -제길!! ‘분명히 더 유리했을 텐데….’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는 듯한 느낌. ‘미성숙해.’ 김현성은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오히려 불안정해.” 1회 차를 겪고 남들이 일들을 겪었지만 녀석은 여전히 미성숙하고 불안정하다. ‘그렇기 때문이었나.’ “그렇기 때문이었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든 게 이해가 된다. “이래서였다고.” 흩어져 있던 퍼즐들이 다시 하나로 모이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가설을 하나 세워보자. 1회 차 가면쓰레기의 목적이 진정한 세계의 구원에 있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 녀석은 1회 차가 실패할 것이라는 걸 이미 예전에 깨닫고 있었고 남모르게 2회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면?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 것을 보면 그렇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너무 많아 당황스러울 정도가 아닌가. 모든 것이 이해가 간다.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가면쓰레기는 대륙을 멸망시키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닐까. “이게 맞아.” 외신의 대적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김현성을 적임자로 선택했다면 어떨까. 가면쓰레기가 진심으로 김현성을 적대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물론이거니와 방금 본 생소한 장면에 대한 개연성이 채워진다. “어째서 김현성이었던 거지?” 김현성은 완벽한 영웅은 아니었지만 인류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으니까. 내가 생각하면서도 내가 다 소름이 돋는다. 가면쓰레기가 애초부터 악인이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진실에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녀석은 빌런이 아니다. 대륙을 위해… 스스로 악인이기를 자처했다. 모든 것을 떠안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로 준비했다. 만약 이 가설이 진실이라면 녀석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을까. 모든 이들이 자신을 욕하고 미워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본인이 인류의 적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도 선택할 수 없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길을 향해 한 발자국을 더 내딛는 행동은 얼마나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할까. 녀석은 가면쓰레기가 아니라 대륙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영웅이다. 이제는 가면쓰레기라고 부를 수도 없다. 계속해서 이전에 봤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고맙다. 알타누스.’ 스스로 괴로움을 등에 짊어진 자.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누나.’ 대륙을 구하기 위해 악인이기를 자처한 자. ‘여기 있는 이자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이곳을 구원할 거다.‘ 대의를 위해 스스로 얼굴을 가린 자. 가면의 영웅. “나였어….” 진청이 아니었다. 녀석이 그럴 리가 없다. 진청 같은 쓰레기가 짐을 짊어진 영웅일 리가 없지 않은가. “나였다고….” 내가 바로 1회 차 가면의 영웅이었다. “시발 내가… 내가 가면의 영웅이었다고….” 상상도 못 한 정체. 그 거대한 반전의 앞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가면의 영웅. 이기영?” 그 가면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슬픔을 숨기기 위해 존재했던 물건이었을 것이다. < 710화 시나리오(1) > 아주 약간의 민망함이 머릿속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 부끄러움이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무거운 진실이었고 슬픈 이야기였다. 조금 태세전환이 거칠지 않았나 싶기도 했지만 누가 감히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가면의 영웅, 가면의 구세주가 어떤 심정으로 1회 차를 보냈을지에 대해 떠올리자, 거대한 숙연함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그런 거였구나.’ ‘이렇게까지 대륙을 망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의문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고 생각했다. 괴로웠겠지만 2회 차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인간 몇몇의 죽음이 위에 있는 신들에게 무겁게 다가올 리가 없지 않은가. 위에 있는 녀석들 역시 이 대륙은 가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만들어야 했다는 거다. 인간들만 이기적이고 실리를 챙기는 것이 아니다. 위에 있는 녀석들 역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는다. 어디 그것뿐이랴. 정말로 그것이 합리적인 것인지에 대한 회의를 거치고 결제를 받기도 한다. 절대로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로 자생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대륙에 안기는 것. 1회 차의 나는 그게 바로 회귀의 조건이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보다시피 가면의 구원자는 훌륭히 임무를 완수했다. 절대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대륙에 남겼고 자신 역시 거대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이상하다 싶었어.’ 내 상식으로 그 정도의 사이코패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현성에게 녀석의 악행을 들었을 때 얼마나 경악했던가. 정말로 그 정도까지 했을까 하는 의문도 계속해서 들었지만 이제야 그 퍼즐이 풀린 기분이었다. ‘무슨 전염병을 일으키고… 나 참… 인간을 역병 폭탄으로 사용해? 와… 좋아서 그런 미친 짓을 하는 미친놈이 이 세상에 어디 있었겠어.’ 좋아서 한 일이 아니었다. 가면의 영웅, 1회 차의 이기영은 모든 걸 설계했다. 물론 모든 과정을 예상하지는 못했겠지만 커다란 그림은 내가 그려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는 생각도 든다. 이를테면…. “김현성의 가방.” 튜토리얼에서 김현성이 발견했다던 영웅 등급의 아이템,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 ‘이것도 이상하지.’ 정말로 튜토리얼 던전에서 발견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혹은 김현성이 회귀하기 직전에 챙겼던 물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수많은 아이템을 두고 굳이 연금술사 전용 아이템을 챙겨올 이유가 어디 있었을까. 노을 진 대륙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게 나와 김현성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어쩌면 김현성이 가방을 챙기도록 의도한 걸지도 모른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베일에 감춰져 있지만 당시 대륙의 상태를 생각해 보면 영 설득력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시스템은 완전히 망가졌었다. 생명체를 하나도 남지 않았고 아이템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현성이 신화급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함께 회귀를 선택할 물건으로 본인의 장비를 가지고 왔을 것이다. ‘2회 차로 가져올 수 있는 장비가 그것밖에 없었던 거야.’ 왜? 가면의 구세주가 남겨놓은 아이템이었으니까. 1회 차에 너무나도 커다란 죄를 저지른 1기영은 흑마법사를 선택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하지도 않은 수많은 죄악을 함께 한 직업이다. 다시 한번 그 직업을 선택하고 싶을 리가 없다. 마음의 눈이 있으니 무조건 김현성을 따라갈 거라고 예상했을 거고 녀석의 예상을 들어맞았다. 결과적으로 2기영은 연금술사를 선택했다. 모든 게 계산대로였을 거다. 그것 외에도 뿌려놓은 것이 너무 많아 등 뒤로 소름이 돋아날 정도. 가면의 영웅은 본인의 자아가 사라진 상태에서도 나를 응원하고 인도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보이는 1회 차의 기억들이 확실한 증거였다. 녀석은 1기영과 2기영이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녀석은 내게 다음을 넘겼고. 내가 이후의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결정이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라고 한들, 온전히 믿음을 준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어떤 생각으로 녀석이 내게 뒤를 맡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유지. 잘 받았다.” 나는 녀석의 유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륙을 구하고 싶다는 그의 진심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뭘 해야 할지도 알 것 같았고 어떤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지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회 차와 2회 차 모두 목적은 같다. ‘우리 현성이의 성장.’ 그게 쟁점이다. 어쩌면 김현성이 이기영을 찌르게 되는 스토리도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가장 소중한 친구를 죽이면 새로운 눈깔을 얻는 어딘가의 만화 같은 각성은 아니겠지만 김현성의 내면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 영웅의 내면의 변화는 성장을 불러오는 것이 상식 아닌가. 현재 김현성의 상태로는 절대로 외신을 물리칠 수 없다. 당장 쓰로누스 하나에 힘들어하고 있는데 그 이상에 닿을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올시다. 김현성은 새로운 힘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더 성장시켜야 돼. 더. 더 강해져야 돼.’ 어떻게? 1회 차에 이미 시나리오를 만들어 놨었다는 걸 알고 있다. 누구를 이용해야 할지 무척 뻔하지 않은가. “알콜 중독 비둘기.” 1회 차의 이기영은 녀석을 이용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녀석이 깔아놓은 또 하나의 안배가 바로 쓰로누스다. ‘저 비둘기는 나를 못 죽여.’ 녀석에게 이쪽의 이름을 알려준 것부터가 이용하라고 던져놓은 것이 맞다. 이를테면 갑작스레 공짜 말이 생긴 상황이다. 체스를 두고 있는 도중, 누군가가 쓰라고 퀸을 하나 더 던져준 것이나 진배없다. 혹시나 내가 눈치채지 못할까 친절하게 1회 차를 통해 알려주기까지 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 비둘기는…. 4성 김현성을 5성 김현성으로 각성시키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바뀌기 전의 시나리오가 어떤 거였을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이건 이용하는 것이 맞다. 열심히 맞고 있는 김현성을 바라보기가 굉장히 가슴이 아프다. ‘시바 우리 현성이 좀 그만 때려라 이 악마 새끼야.’ 대륙의 영웅의 귀한 몸에 상처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진짜.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제길…. -말하지 않았나. 너는 약해졌다. -그럴 리가 없어. -…….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약해졌을 리가 없어. 나는… 나는 더 강해졌다. -……. -나는 더 강해졌어! 지켜야 하는 것을 위해. 나는 더 강해지는 것을 선택했고 그렇게 이 힘을 얻었다 나는 강해져야 해. 더. 더 강해져야 해. 더. 더. 더. 그래야 지킬 수 있어. 그래야…. -무엇을. -네가 알 필요는 없다. 쓰로누스. 중요한 것은 내가 더 이상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뿐이야. 나는 항상 서 있어야 한다. 그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어야 해. 더 이상… 더 이상 짐이 될 수는 없어. 그래.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할 수 있다. ‘우리 현성이 멘탈 나갔다.’ 이쯤 되면 굳이 보지 않아도 결과를 알 수 있다. 더 냉정해야 할 사람이 냉정을 잃었다.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도대체 무엇이 녀석을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김현성이 쓰로누스라는 벽을 넘지 못하는 건 이미 기정사실처럼 여겨졌다. ‘나가야 되나?’ 새로운 자극을 줘야 하나. 조금 더 궁지에 몰리면 새로운 힘을 깨닫게 될까? 어쩌면 지금이 김현성이 나를 찌르는 타이밍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완전히 타이밍이 다르다. 내가 봤던 풍경과 유사한 점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지금은 현성이의 텐션을 한 번 더 끌어올려야 하는 시점이다. ‘지혜 누나도 조금 여유가 생긴 것 같고….’ 점차적으로 전장이 안정되는 것이 느껴진다. 상황실을 잠깐 비우는 게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망원경으로 전장을 내려다보고 퀘스트로 지시를 내릴 수 있으니 크게 의미는 없다. 소외된 구역의 몇몇 인간들이 혼란을 겪을 수도 있겠지만 녀석들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김현성이다. ‘이건 가야 돼.’ 김현성은 한 번 더 계단을 올라설 수 있다. 조금 더 강해질 수 있다. 마침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었으니 날아간다면 충분히 닿을 수 있다. 문을 박차고 나가니 거대한 폭음과 함성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명예추기경님. 여기는 위험합니다. 상황실 안으로….” “방어선은 어떻습니까.” “계속해서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버티는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만….” ‘시간이 길어진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 이거지? 이미 알고 있어.’ “잠깐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최대한 현 상태 그대로 전장을 유지합니다.”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커다란 날개를 편 나를 바라보는 야전지휘관 1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망원경으로 보이는 김현성은 여전히 밀리고 있는 모습, 발악을 하듯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쓰로누스는 너무나도 쉽게 김현성의 압박을 벗겨내고 있었다. ‘시간의 맞출 수 있나?’ 빛의 날개를 움직이자 어설프게 몸이 앞으로 나아간다. -제기랄… 제기랄!! -추하군. -제길! -……. -죽어! 죽으라고! -……. -절대로 질 수 없어. 절대로. 이렇게까지 무력한 김현성의 모습을 보는 건 가슴이 아프다. ‘이렇게까지 밀리나? 이게 말이 돼?’ 차라리 루시퍼의 힘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제대로 싸울 수 있지 않았을까. 쓰로누스가 이야기하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저 힘에 의지하고 있는 거야.’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다. 김현성 본인이 가지고 있는 힘보다 받은 힘에 더 의지하고 있는 모습, 어쩌다가 저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진작에 멘탈 클리닉을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 이겨야 한다고, 질 수 없다고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저건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현성이가 희라 누나 성격에 반만 닮았어도….’ 하지만 이건 김현성을 비난할 수도 없다. 기영 쌤 역시 잘못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저 강해지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일을 그렇게 진행시켰으니 이런 일이 한 번은 있을 만했다. 2회 차 김현성의 성장 과정을 생각해보면 녀석의 자신감이 사라질 만도 하다. 애초부터 의욕이 없어 보이기도 한 것은 물론 무엇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지도 잃어버린 것 같다. 노을로 합의를 보기는 했지만 김현성이 싸워야 할 이유를 심어주기에는 미적지근한 감이 있다. 김현성의 마음 한편에서는 함께 노을을 바라보는 것보다 이기영이 온전한 모습 그대로 있어 주는 걸 더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계속된 실패에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된 영웅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초라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의 정하얀처럼, 김현성은 눈에 눈물을 머금으며 자기 좋을 대로 검은색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겨우 저것뿐이다. 맞을 리도 없고 견제가 될 리가 없다. -이거라면… 이 힘이라면…. 자세를 잡는 것을 보니 노을빛의 검을 사용하려고 하는 모양, 점점 붉어지는 검신이 보이기는 했지만…. 영웅이 자랑하는 노을빛의 검은 녀석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어째서…. 쓰로누스 역시 검을 휘두른다. 밤하늘에 별 무리가 쏟아지는 듯한 검에 김현성의 가슴에서 피가 울컥울컥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 김현성은 쓰러져 있고 쓰로누스는 다시 검을 휘두른다. 아니, 휘두르려고 했다. 내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자를 보내주십시오.” 시간에 맞게 도착했다. 나는 과장되게 팔과 날개를 뻗으며 쓰러져 있는 김현성과 쓰로누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빛으로 형상화된 날개 덕분인지 내 몸이 빛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 “…….” “저를 죽이고 이자를 보내주십시오.” 알콜 중독 비둘기가 나를 죽일 리가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희생적인 대사였다. < 711화 시나리오(2) > ‘잠깐. 근데 이 새끼 내 얼굴 모르잖아.’ 등장은 화려했고 연출도 나쁘지 않았다. ‘이름표라도 붙이고 왔어야 했나?’ 빛의 깃털을 떨어뜨리며 천천히 둘 사이를 가로막은 모습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너무나도 성스럽다. 내가 내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어떻게 봐도 신성한 기운이 흘러넘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툭 치면 곧바로 쓰러져 버릴 것만 같은 여리여리한 육신이 새하얀 빛에 감싸여 있으니,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을 것이다. 표정은 최대한 피해자처럼. 일단은 무조건 불쌍해 보이는 게 정답이다. 아니, 너무 약하게만 보이면 안 되지. 대륙의 영웅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는 듯, 나는 절대로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다는 듯한 강렬한 눈빛도 함께 전해야 한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전형적인 희생자의 모습이었다. 앞서 말했듯, 문제는 쓰로누스가 내 얼굴을 모르고 있다는 것 하나였다. 기왕이면 김현성이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 ‘기영 씨!’ 라고 한마디만 해줘도 살짝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거 이 타이밍에 추하게 자기소개라도 해야 되나?’ 쓰러져 있는 김현성은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여기까지 찾아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 입을 뗄 정신이 없어 보일뿐더러 완벽하게 깨진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버버거리며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 다른 반응이 없다.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는 아주 약간의 시간이 더 걸리지 않을까. ‘시바, 곧바로 죽이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 안 찌를 거지? 우리 딱 봐도 동족처럼 생겼잖아. 종류가 조금 다르기는 한데 너도 날개 있고 나도 날개 있으니까 우리 동료잖아. 그렇지? 나 죽이는 거 아니지?’ 검을 들어 올리려는 리액션이 보이면 일단 무조건 자기소개부터 하자. 아주 잠깐이지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내 이름을 부르는 김현성의 목소리가 아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쓰로누스였다. “…….” “…….” “이… 기영?” ‘이 새끼 어떻게 알았지?’ “이… 이기영?” ‘기가 막히네. 진짜.’ “네가….” ‘…….’ “네가 이기영이구나. 네가… 네가 이기영이었어.”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알콜이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마치 알콜 중독자가 오랜만에 술을 바라봤을 때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고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다. “추한 모습이 아니지 않느냐.” 금단현상이라도 찾아온 것인지 몸도 떨리고 있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죽지 않아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고결한 모습이다.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의 얼굴이야.” 그렇게 평가해 주니 고맙기는 하다. 이기영이 조명발은 조금 받으니까. “타락한 자들 사이에서도 빛을 잃어버리지 않았어. 본질은… 본질은 바꿀 수 없었던 거야.” 조금 기뻐 보인다. “세라핌. 이 모습을 보고 있나? 그자야. 내 이야기가 맞았다. 이 인간의 모습을 봐. 이 자는 빛을 잃어버리지 않았어. 오히려 그 여리고 작은 빛을 가슴 속에서 계속해서 키워오고 있었다. 하… 하하…. 이렇게 기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어떻게 그 상황에서도 본인의 빛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울 수 있었을까.” 비록 베니고어가 내린 힘이겠지만 빛의 날개라는 건 녀석들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모양. 확실히 이건 내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다시 만나게 됐구나. 드디어. 네 말대로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네 이름을 잊지 않으려고 말이다.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되뇌고 있었던 말은 많다만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친우, 내 이해자. 너를 구하기 위해 나는 이 자리에 있다. 자, 내 손을 잡거라. 인간, 아니, 이기영. 네 뒤에 있는 악마는 네 적이다. 네가 목숨을 걸 정도로 가치 있는 자가 아니야. 그자를 죽이고 너를 해방시키겠다.” ‘아니, 시바. 너 내 말 못 들었어? 현성이 죽이지 말라고 이 새끼야.’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보자. 혹시나 이 새끼가 나를 피해 김현성을 찌를 수도 있으니 몸으로 막을 준비를 하자.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 이후에는 곧바로 김현성에게 몸을 가까이 붙이기 시작했다. 나를 찌르지 않고서는 김현성을 공격할 수 없을 거라는 걸 확실히 말해두자. 절대로 내 신념을 꺾을 수는 없다는 듯, 절대로 빛은 꺼지지 않는다고 외치자. ‘시바 멋있다. 진짜 내가 다 내 모습에 취하겠다. 진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 “너무 걱정하지 마라. 어렵겠지만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사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앞으로 함께 할 날이 더 많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세라핌도 케루빔도 도미니온스도 너를 기다리고 있고 결국에는 환영할 거다.” ‘이 새끼 너무 친한 척하는 데… 현성아 전부 듣고 있는 건 아니지?’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정신이 없는 것 같다. 아마 현재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지 않을까. 숨을 헐떡이면서도 내 소매를 꽉 붙잡고 있는 것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입술을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을 보니 내가 왔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뭘 말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해석해 보면 아마…. 도망쳐. ‘형 도망 안 친다. 현성아.’ 소중한 대륙의 영웅을 두고 꼴사납게 도망칠 리가 없지 않은가. “네가 지키려고 하는 자의 모습을 다시 한번 내려다….” “이미 보고 있습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의 모습이다. 그는 기만자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은 위험해.” “위험하지 않습니다.” “더러운 모습….” “더럽지 않아요. 절대로 더러운 모습이 아닙니다.” ‘현성아. 시바. 듣고 있지? 형 목소리 들리고 있지? 듣고 있는 거지?’ 혹시 모르니까 한 번 더 이야기해 주자. “더러운 모습이 아니에요.” 3번 이야기했다. 입 모양도 볼 수 있도록 친절하게 배려까지 해줬으니 듣지 못할 리가 없다. “어째서 당신이 저를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겉모습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 어딜 시바. 누가 김현성을 추하다고 욕할 수 있겠어?’ 수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했고 소중한 사람들을 수도 없이 잃었어야 했다. 원치 않은 회귀를 해야 했고 혼자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가면의 구세주만큼 녀석도, 김현성도 괴로웠을 것이다. 커다란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부담감, 운명에 거스를 수 없다는 압박감, 다시 한번 소중한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모여서 만든 결정체가 바로 둠현성이다. 실제로 김현성의 겉모습이 빛과 조금 멀어졌다고 한들 영웅 김현성은 변하지 않는다. “악마의 탈을 쓴 것은 당신들입니다. 저는 이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어요.” ‘현성아. 형이 말하는 거 들었지? 나중에 찌를 때 안 아프게 찔러줘야 된다. 살살 찔러줘야 되는 거야.’ 별것 아닌 발언이었지만 욜라 감동적인 발언이었다. 김현성의 입장에서 이 말이 얼마나 달달하게 들릴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건 진짜 장담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고, 본인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있었던 타이밍, 형제 같은 사람이 너는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만큼 안심되는 말이 어디 있을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위로를 받아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다. 김현성이 내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얼굴은 예상했던 그대로. ‘야… 시바 너 왜 울어.’ 아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참신한 반응이었다. ‘너 왜 울어.’ 그렇게나 위안이 됐을까. 제대로 말도 내뱉지 못하는 상태로 쓰러져 있는 와중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스스로 닦을 수도 없는 것을 보니 내부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은 모양. 루시퍼의 힘을 있는 대로 사용했으니 내부가 엉망일 가능성도 있다. 한 번 몸 상태를 체크해 보고 싶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다. 그 와중에 전방에 위치한 쓰로누스는 복잡한 표정이다. “네가… 네가 착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조금이라도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다면 아마 곧 공감할 수 있을 거다.” “…….” “너는 지금 그 기만자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모두를 속이는 악인이야. 네 말대로 그의 본 모습이 저게 아니라 한들, 그는 이미 빛을 등진 사람이다. 믿을 수 있는 이가 아니야. 어서… 비키….” ‘아니, 시바. 나 절대 안 비켜. 차라리 죽여. 죽일 수 있으면 시바 죽여봐. 아니, 그전에 현성이 일어날 거야.’ 붙잡고 있는 소매에 힘이 실리는 것이 느껴진다. 녀석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김현성의 몸은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일어나려고 하는 거야.’ 루시퍼의 힘을 벗겨내고 진정한 자신의 힘을 되찾을지도 모른다. 4성 김현성이 5성 김현성으로 진화할 수도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내면의 자신과 대화를 한 번 나눴을 테니 이제 몸을 일으킬 타이밍인 건가. 초심으로 돌아가 김현성 본연의 모습을 찾는 걸까? ‘더 강해질 수 있는 거지? 시바, 현성아. 빨리 일어나. 형 무릎 아파.’ 날개가 꿈틀거리고 있다. 고통을 딛고 일어나는 영웅의 모습에 기대감이 생긴 것은 당연지사. 조금 더 빨리 일어나라고 닦달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지금의 포지션을 유지하는 게 최우선이다. 김현성한테 용기나 줘야지. “할 수 있을 거예요.” ‘현성아.’ “언제나처럼 이겨내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형도 눈물 한 발 장전했다.’ “계속 함께 있어 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형 죽음 각오했잖아. 죽음 각오한 거 보이지?’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죄송해요.” ‘형 진짜 죽기 전에 일어나라. 일어나서 각성해야지.’ “현성 씨는 잘 해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남은 이들을 잘 부탁합니다.” 쓰로누스는 나를 죽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지만 일단 녀석이 나를 죽이는 걸 기정사실로 만들어 보자.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은 비둘기의 얼굴이 보이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에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올 리가 없지 않은가. 쓰로누스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인다. 김현성이 몸을 일으킬 거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용서하거라.” 김현성의 앞을 막고 있는 나를 제압하는 것에 대한 사과를 하는 것 같다. 잠깐 동안은 시간을 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녀석은 너무나도 쉽게 내 손을 잡아 들어 올린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젠틀한 움직임이었지만, 일단은 아픈 척 비명을 내질러 보자. “아아아아아악!” ‘현성아. 이제. 시바 형 죽는다. 지금 보고 있지? 이 새끼가 형 죽이려고 그래. 시바. 빨리 일어나.’ “흐으윽….” ‘비둘기가 사람 잡는다. 형 이제 간다. 진짜 죽이려는 것 같아. 방금 팔 부러질 뻔했어. 안 일어나고 뭐 해.’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까보다 더 큰 비명을 지르면서 김현성을 바라보자 충혈된 눈과 입술을 깨물고 있는 입이 보인다. 안 그래도 붉은 눈이 더 붉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닐 것이다. ‘이 새끼 일어나겠는데?’ “흐으윽… 제발….” ‘일어나, 시바. 각성해. 시바.’ “…놔.” ‘각성! 그리고 각성! 또 각성!’ “그… 그 손 놔!!” 몸을 일으킨 것은 우리 자랑스러운 회귀자. 곧바로 쓰로누스의 안면에 주먹을 내지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방금과는 확연히 다른 움직임과 마력. ‘각성한 거야….’ 5성을 찍은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이겨낸 거라고!’ 문제가 있다면…. ‘뭐야… 시바 머리에 뿔은 왜 돋아났어? 아니… 뭐야. 피부는 왜 그래. 아니… 아니, 팔은 또 왜 저래… 왜… 얼굴은… 왜 그래….’ 전혀 다른 쪽으로의 각성이라는 것. ‘으아아….’ 김현성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 712화 시나리오(3) > ‘너 왜 그래… 왜 그래.’ 김현성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무섭다. 대충 보기에도 인간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만 같다. 제정신은 유지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조금 찝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현재 김현성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녀석의 모습을 훑어보자 김현성의 탄탄한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여긴 별로 변하지 않은 건가?’ 장화에 뒤덮여 있어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다. 뒤에 달린 꼬리가 유일하게 이전과 다른 점이다. 처음 보는 형태의 꼬리는 무슨 짐승을 빗대어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척 위협적으로 생겼다는 것, 저건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팔은 대충 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변화했다. 칙칙한 검은색으로 감싸져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까? 마치 짐승의 팔 같은 모습이다. 무기를 쥘 수 있을지 의심이 될 정도다. 손톱과 손의 경계가 없어진 검은색의 손은 대충 보기에도 날카롭게 보인다. 전체적으로 덩치도 조금은 커다랗게 변한 것 같은 느낌, 미세하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원래부터 근육으로 꽉 차 있었던 전신에 조금 더 근육이 붙었고 키도 조금은 커진 게 확실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머리 위에 자리한 커다란 뿔, 마치 산양의 뿔처럼 안쪽으로 말린 형태가 눈에 띈다. ‘저건 솔직히 간지날 것 같긴 해.’ 왜 하필 산양 뿔인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의 이미지와도 들어맞는 부분이 있다. 뿐만이 아니다. 정리되지 않은 채로 삐죽삐죽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머리카락도 멋있어 보이기는 한다. 미친 까마귀의 취향인지는 모르겠지만 허리까지 길게 내려온 장발이 눈에 들어온다. 대충 봐도 단순한 머리카락으로 보이지 않는다. 소재가 달라졌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저 머리카락은 평범한 방법으로는 잘라낼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딱 저 모습까지는 괜찮다. 저기까지는 용인해 줄 수 있다. 문제는…. ‘우리 현성이 얼굴 어디 갔어.’ 김현성의 얼굴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완전히 검은색으로 덮여 있다. 날카로운 이빨도 보이고 그 안에 기다란 혀도 눈에 띈다. 추하게 혀를 내밀면서 침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만약 저 혀를 바깥으로 내밀 수 있다면 평범한 인간보다는 확실하게 긴 모습일 것이다. ‘현성이가 원래 혓바닥이 길었었나?’ 그렇게 길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누가 봐도 몬스터나 다름이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 무슨 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짐승이 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았지만 이성이 있는지도 판단할 수 없다. 말하는 방법을 까먹고 있지 않은가.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이 왠지 모르게 무섭다. 다른 건 다 변해도 상관없지만 얼굴을 봐야 이 새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시바, 얼굴 돌려내. 시바. 이게 뭐야. 시바, 괴물이잖아. 이런 게 어디 있어. 아니, 이성은 남아 있는 거지, 그렇지? 아직 우리 현성이 완전히 타락한 거 아니지?’ 불안한 눈빛으로 위를 올려다본다. 김현성의 주먹을 맞고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처박혔는지 쓰로누스 이 새끼는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다. 김현성이 천천히 내 팔을 잡고 들어 올린 것은 바로 그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뭐야. 완전히 맛탱이 간 거야? 진짜로? 진짜?’ 내가 누구인지 확인해 보는 것만 같지 않은가. 짐승처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이상하게 두려운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입을 벌려 이쪽을 콱 깨물어 버릴지 누가 알겠는가. 내가 김현성에게 너무 자극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닌지 걱정이 생겨나기도 했다. ‘너무 오버했었나? 눈물 흘리면서 제발 그만해 달라고 막 소리 지르고 아픈 척했던 게 문제였던 거야?’ 당장 죽을 것처럼 난리 부르스를 쳤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내 연기력이 너무 실감 난 나머지 김현성이 너무 몰입해 버린 것은 아닐까. 조금이라도 늦으면 쓰로누스의 날카로운 검이 내 목을 찌를 거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마지막에 공포에 질린 표정은 뺏어야 했는데… 어쩌면 악마의 모습이라도 괜찮다는 발언이 문제가 됐을 수도 있다. 괜찮다 괜찮다 하니까 정말 괜찮은 줄 안 것일 수도 있지. 근데 이런 모습이었으면 안 괜찮아 시전했지. 사실 원인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한 가지로 확정을 지을 수가 없다. 중요한 건 내 눈앞에 있는 김현성이 괴물이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시바 각성 실패. 시바….’ 내 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아프다는 듯 표정을 찡그리자 깜짝 놀라는 것 같은 느낌. 이윽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도 시야에 비쳤다. 아주 약간은 정신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나를 찢어 죽이거나 깨물어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진짜 변한 거 아니지? 이제 그 모습으로 시바 평생 살아야 하는 거 아니지?’ 그건 아닐 거야.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봤던 미래의 모습은 이게 아니었으니까. 만약 미래가 변하지 않았다면 김현성은 다시 한번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어쩌면 이 상태로 김현성에게 찔리는 게 진정한 각성 김현성의 모습을 되찾는 실마리일 수도 있다. 어디에선가 많이 본 것 같은 클리셰가 아니었던가. 이성을 잃은 히어로가 친우의 죽음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한 영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서사는 클래식이나 다름이 없다. 주변 상황이 아직 타이밍이 아니기는 했지만 이게 열쇠가 아닐까. 내가 마취 물약을 어디다 놔뒀더라. 시바. 가지고 오긴 가지고 왔나. 이거 저 손에 뚫리면 아픈 정도로 안 끝날 것 같은데… 분명히 엄청 아플 거다. 여기서 잘못 깝치다가 개죽음당하면 그것보다 더 우스운 꼴이 어디 있을까. 라파엘도 아직 안 일어났으니까 타이밍이 지금은 아닐 것이다. 결코 스컬 그레이 김현성에게 배때지가 뚫리기 싫어서 나오는 자기 합리화가 아니다. ‘쓰로누스 이 미친 비둘기 새끼는 도대체 왜 안 오는 거야? 이쯤 되면 막아줘야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김현성이 다시 한번 천천히 내 몸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김현성의 몸이 반대쪽으로 튕겨 나간 것, 김현성이 들고 있는 내 몸은 자연스럽게 바닥에 떨어진다. 흑색의 괴물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은색의 쓰로누스. ‘시바. 왔구나.’ 이 순간만은 누가 영웅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 커다란 이빨을 벌리며 다시 등장한 적에게 적의를 표출하는 각성 둠현성. 잔뜩 표정을 일그러진 채로 들고 있는 검을 휘두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검은색의 참격이 날아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시바.’ 사정거리에는 분명히 이쪽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나를 조준하고 쏜 것은 아니었지만 쓰로누스가 저 참격을 흘리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검은색 기운에 휩쓸렸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망했다. 시바. 망했다고.’ 왠지 모를 설움이 밀려들어 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너 이 새끼, 진짜 안 보이는 거야?’ 피 토할 때까지 내조하면서 키워줬더니 돌아오는 게 검은색 참격일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이빨을 벌리며 적의를 보내고 있는 대상이 내가 아닐까 무섭다. 이제는 쉴드를 쳐줄 선한 얼굴도 없지 않은가. 손절 버튼을 눌러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이었지만 그간 함께 살아온 정이 뭔지 태세전환 버튼을 누르기가 쉽지가 않다. 적절한 예는 아니었지만 긴 시간을 함께한 부부가 어째서 이혼 도장을 찍을 때 망설이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뭔지 그 와중에도 쓰로누스의 등이 점점 듬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괜찮은가?” “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저자는 이미 괴물이라고. 이제야 그 실체를 드러낸 것뿐이다.” ‘시바 어떻게 하지.’ “이미 완전히 검은 마력에 잠식됐군. 너의 눈앞에 있는 저것은 파괴와 살육을 일삼는 괴물이야.” ‘무슨 개소리야. 우리 현성이 괴물 아니야.’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할 거다.” ‘네가 시바 뭘 안다고 그렇게 이야기해. 우리 애가 얼마나 착하고 순한데. 이게 다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그런 거라고 시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현실을 직시하거라. 네 눈앞에 있는 저게 무엇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모르는 척하고 싶을 뿐이야. 사실은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저건 되돌릴 수 없어.” ‘시바. 안 되는데… 진짜 안 되는데.’ 하지만 눈앞에 있는 김현성은 아무 말도 없다. 김현성의 두 눈에 나를 지키겠다는 감정은 없다. 은색의 쓰로누스의 말처럼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욕구 말고는 다른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한번 천천히 녀석의 얼굴을 바라봤었던 때였다. “어?” 아까 보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던 것. ‘시바… 되찾을 수 있어.’ 턱 쪽에 검은색 형태 물질이 김현성의 얼굴을 덮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검은색 마력의 밑에 있는 피부는 틀림없이 정상이었다. 인위적으로 누군가가 씌어놓은 것만 같은 형태. 틀림없이 가면이다. ‘시바 되찾을 수 있다고!’ 완전히 먹힌 것이 아니다. 김현성은 지금 벗지 못하는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다. 저 가면 뒤에는 평소대로의 김현성의 얼굴이 자리해 있다. ‘벗기면 되는 거야.’ 간단하지 않은가. 저 가면이 김현성의 이성을 잃게 하고 있다면 저 가면을 벗게 만들면 그만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일단은 정신을 차리게 되지 않을까. 얼마나 급했으면 저런 가면을 썼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갑작스레 가슴이 미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하겠지. 쓰로누스는 김현성이 이성을 잃은 괴물이 되었다고 판단했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만약 정말로 김현성이 파괴와 살육을 일삼는 빌런이 되었다면 나는 이미 죽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무의식 속에는 아직 이기영이라는 빛이 남아 있다. 어두운 가면을 쓰기 직전 김현성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을 터. ‘쓰로누스를 죽여야 돼.’ 어째서? 그래야 이기영이 살 수 있으니까. 자신의 이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지켜내고 싶었던 것. 내가 녀석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 누가 녀석을 이해할 수 있을까. 커다란 입을 벌리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는 김현성의 모습은 마치 절규하는 것만 같았다. 지킬 거라고,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내가 아니게 되더라도 지켜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만 같다. ‘되돌릴 수 있어. 그렇지? 형 기억하지?’ 문제는 지금의 김현성을 누가 막아낼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지 않은가. “도와주세요.” “뭐?” “저… 저 사람을 도와주세요.” “말하지 않았나.” “아니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원래대로 되돌아올 수 있어요.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은 것이 제 눈에는 보입니다.” “…….”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당신이 어떻게 저를 알고 있는 것인지, 또 당신들이 어째서 이곳에 왔는지에 대한 것은 다시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믿음을 보이고 싶다면 저를 도와주세요. 아주 작게 남아 있는 빛이라도 지킬 수 있다는 의지를… 이미 타락해 버린 자라도 저버리지 않겠다는 걸… 보여….” “…….” “만약 도움을 주신다면….” “…….” “원하는 게 무엇이든 그 뜻에 따르겠습니다.” “…….” 긍정의 뜻인지 부정의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 쓰로누스가 김현성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지만. 무엇이든 뜻에 따르겠다는 건 새하얀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고맙다. 가면의 구세주.’ < 713화 시나리오(4) > 2라운드가 시작된 시점, 초조하게 전방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쓰로누스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상태의 김현성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전 둠현성의 상태일 때도 스펙으로는 분명히 밀리는 측면이 있었다. 기술적인 면으로 다른 부분을 극복한 싸움이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체급이 같을 때의 이야기다. 새롭게 진화한 스컬 그레이 현성과 쓰로누스는 체급이 다르다. 조금만 스쳐도 녀석에게는 치명타. 부담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숨도 못 쉴 만큼의 압박감을 견뎌내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정신적으로도 피곤해지는 게 당연하다는 거다. 각성과 동시에 맞은 일격 역시 녀석에게는 대미지로 남았을 것이다.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지만 내부에는 확실하게 대미지가 쌓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 소리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은색에게 몸을 부딪치는 검정.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만 같은 팔과 다리는 형식이 사라졌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빨라졌다.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지고 있었던 좀 전과는 다르게 쓰로누스의 얼굴에도 여유가 사라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부담이 되는 것은…. ‘내구력이 차원이 달라.’ 김현성의 몸에 검이 닿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상처가 생기기는커녕 검이 튕겨 나가고 있다. 입술을 꽉 깨문 은색의 영웅이 본인의 힘을 가득 담아 검을 휘두르지만 반탄력 때문에 오히려 손이 튕겨 나오고 있다. 쓰로누스가 아니면 손에 들고 있는 검을 놓쳐 버리고 말았으리라. 성벽이 무너지는 것뿐만이 아니다. 이미 주위는 완전히 폐허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김현성과 쓰로누스가 사용하는 전장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입을 크게 벌리며 손과 발을 휘두를 때, 먼 곳까지 그 여파가 미친다. 콰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주위가 쑥대밭이 되는 광경은 이제는 이상하지도 않다. ‘완전히 미쳤어.’ 본인도 본인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린 것이다. 쓰로누스가 검을 휘두른다. 김현성은 그 검을 머리 위에 있는 뿔로 막아낸다. 스컬 그레이 현성이 손을 휘두르려고 하는 것이 보인다. 문제는 이다음이다. 무수히 많은 선택지가 있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저 공격에 대한 선택지를 찾기가 힘들다. 어디로 피할 것인가. ‘위? 아래? 오른쪽, 왼쪽?’ 저 손톱이 휘둘러지면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 덕분에 사방이 사정거리다. 김현성의 등 뒤 말고는 피할 곳이 없다. 아니, 지금은 등 뒤도 안전하지 않다. 날카로운 꼬리를 탑재하지 않았던가. 흘려야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밀도가 높은 마력은 함부로 흘려보낼 수도 없다. 결국에는 녀석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중앙 (0/1)] [쓰로누스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쓰로누스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내가 뭘 말하는지 녀석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날개로 몸을 감싼 채로 공중에서 몸을 비트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휘릭 하는 효과음이 들려올 것만 같은 움직임으로 검을 내뻗는다. 피할 수도 흘릴 수도 없다면 뚫어낸다. 밀도가 가장 옅은 곳이라면 쓰로누스 역시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마력이 덜 집중된 공간으로 녀석이 몸을 움직이는 것은 순식간, 품 안으로 파고 들어가 검의 손잡이로 김현성의 가면을 후려치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너무 가까이 붙어 검을 휘두를 수 없게 되자 손잡이를 사용한 것이다. 곧바로 몸을 빼야 한다는 메시지는 날릴 필요는 없다. 초근접거리가 자신에게 더 위험하다는 건 쓰로누스 역시 인지하고 있다. ‘잘 이해하고 있네.’ 뭔가 통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확실히 라파엘 때와는 다른 것 같은 느낌. 요단강 익스프레스에 몸을 단단히 고정시킨 라파엘에게는 미안하기는 했지만 승차감이 다르다. ‘이거 좋네.’ 처음부터 끝까지 지시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이런 전투에서는 지시를 내릴 수도 없다. 메시지를 보내는 시간에도 전투의 향방이 계속해서 바뀔 수밖에 없으니까. 일단 둘의 움직임이 너무 빠르다는 것이 문제, 당연히 어느 정도는 녀석의 개인 성능과 판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힘만 믿고 밀어붙이는 라파엘과는 비교하는 것부터가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다. 심지어 라파엘은 전부 다 하나하나 지정해 줘야 하는 수동이었다. 이렇게 움직여라, 저렇게 움직여라. 이런 말들을 전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소요했으니 필연적으로 수비적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쓰로누스는 자동화되어 있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었고 내 생각을 이해하고 있다. 현성이와 누가 더 좋을지 굳이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 급도 같고 성능도 같다. 아마 여기에서부터 갈리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 아닐까. ‘사정거리?’ 쓰로누스가 김현성보다 더 길다. 녀석이 가지고 있는 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녀석의 검이 긴 사정거리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쓰로누스는 중거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 별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검, 날개를 조금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 종류가 많지도 않고 확실하지도 않지만 권능 비슷한 것 역시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중에서 몸을 움직이는 방식이 약간은 비상식적이다. 자신의 힘을 형상화 시켜 쏘아 보내는 것도 익숙해 보였고 끊임없는 견제가 습관화되어 있다. 묵직한 한 방을 가지고 있는 김현성과 대조적이라면 대조적이다. 어쩌다가 사람을 몰아보는 것에 이렇게 평가를 내리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즐겁다. 비싼 스포츠카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세컨드 카를 즐기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공룡이 우는 소리를 내는 것만 같은 배기음, 거칠게 움직이는 주제에 기술적으로도 완벽하게 정리된 김현성. 하이브리드 카처럼 조용하지만 운전자를 약간 더 배려해 주고 편하게 만들어주는 쓰로누스. 전자가 더 괜찮다고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후자도 결코 나쁘지는 않다. ‘라파엘은?’ “성검용사 코인은 개뿔 이제는 손절할 때도 됐지.” 다시 몰기 싫어지는 승차감이었다. 조금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는 쓰로누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마 공간을 찾고 있는 거겠지. 녀석의 눈으로는 어디로 파고들어야 할지 모를 테니까. 언제 파고들어야 할지도 모를 테니 메시지를 받는 순간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타이밍은 아직이다. 녀석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큰 기술.’ 스컬 그레이 현성이 큰 기술을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가면에 대미지를 욱여넣는다. 아웃 파이터가 싸우는 것처럼 끊임없이 녀석을 주변으로 원을 그리며 공간을 찾는다. 귀찮다는 듯이 한 번 더 괴성을 지르며 마력을 모으는 것이 보인다. 공간이 검은색의 마력으로 꽉 채워진다. 내가 할 일은 간단하다. 눈으로 보고. 전달하는 것. 김현성이 마력을 뿜어내는 그 시점, 쓰나미 같은 거대한 파도에서 작은 공간을 찾아 녀석에게 전해주는 것으로 끝이다. 찰나의 시간에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게 어렵기는 했지만 약점을 찾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다시 한번 날개로 자신의 몸을 감싼 채 이쪽이 지시한 방향으로 몸을 던지는 모습, 환희에 찬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뚫어낸 이후에 바로 대응. (0/1)] [쓰로누스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쓰로누스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어둠에 가려져 있지만 김현성 역시 몸을 움직이고 있다. 쓰로누스가 공간으로 파고들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수풀 속에 숨어 몸을 웅크린 검은색 늑대가 이빨을 들이밀었지만 쓰로누스 역시 대응할 준비를 이미 마쳤다. 검은색 마력을 뚫어낸 이후에 공중에서 방향을 바꾼다. 김현성을 보고 움직였다면 타이밍이 맞지 않았겠지만 이미 전해 들은 정보로 일정거리를 유지한 채 검을 내지른다. 품 안으로 파고든 이후에 손잡이로 가면을 내리친 방금 전의 타격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옹졸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작은 포인트, 대미지를 느끼는 건지, 확실하게 준 건지 의심이 되기는 했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이 상태가 해답이다. 조금 더 무리하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딱 이 정도의 선은 지켜야 했다. 현재의 김현성은 참을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기회를 본다면 가능성이 있다. 예상대로 짜증 난다는 듯이 주변을 휩쓰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 대륙이라도 멸망시킬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저게 단순한 화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직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는 야전지휘관들에게 곧바로 전 병력을 대피시키라고 메시지를 보내놓기를 잘했다. ‘구역 하나를 통째로 전장으로 사용할 줄 누가 알았겠어.’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다시 한번 브리핑하겠습니다. 신호가 있을 때만 지정해 준 위치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들고 계시는 검 정도의 거리보다 더 멀게 간격을 유지해 주시고 치고 빠지는 것에만 집중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검보다는 왼손을 사용하는 빈도가 높으니 주의해 주시고, 절대로 뒤를 잡지 않습니다. 꼬리 주의하세요. 꼬리 주의. 너무 멀어지지는 마세요. 다시 접근하기 힘들 것 같으니까. 간격을 제가 계속 체크할 테니 눈대중으로 확인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0/1)] [쓰로누스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쓰로누스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알겠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사용하실 수 있는 권능이나 스킬 같은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0/1)] -……. ‘뭐야. 너 나 의심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Q, W, E, R로 신호 드리겠습니다. 견제기는 Q, 특수기는 W, 이동기는 E, 권능은 R입니다. (0/1)] -이해했다. 쓰로누스를 향해 커다랗게 점프하는 김현성의 모습이 보인다. 당연하지만 김현성이 뛰어오른 만큼 녀석은 뒤로 물러난다. 날개로 몸을 감싼 채로 이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녀석 역시 공격을 정통으로 맞는 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금 시간을 끄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나쁘지는 않다. ‘패턴 분석할 시간도 준다는 거네.’ 김현성은 프로그램 덩어리가 아니니 패턴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몸에 익은 습관이라는 게 있다. 지금처럼 이성이 날아간 상태일수록 그 습관들은 조금 더 두드러진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몬스터와 같은 상태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검을 한 번 휘두른 이후에는 곧바로 손톱을 휘두르는 빈도수가 높고, 꼬리를 한 번 살랑거린 이후에는 하단 공격 빈도수가 높다. 팔은 크게 횡 옆으로 움직이는 것이 대다수고 견제기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하나 있기는 하지. ‘꼬리.’ 그게 녀석의 유일한 견제기라고 할 수 있으리라. 쓰로누스와 다르게 거리는 재는 종류의 견제기는 아니었지만 저것도 저것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어 보였다. 등 뒤를 완벽하게 지킬 수 있다는 건 최고였으니까. 발차기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주변을 두리번거린 이후에는 광역기, 꼭 누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조금 양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쌓여 있는 데이터를 정리한 이후에는 곧바로 전달한다. 끊임없이 정보를 전달하고 녀석은 계속해서 정보를 받아들인다.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 정도.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맹신하지 마세요. (0/1)] 정보를 너무 맹신하지 않는 것. 상황은 언제 어떻게든 변할 수 있다. 나 역시 쌓인 데이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뒤에 3% 정도는 항상 여지를 남겨 놓는 것이 좋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솔직히 이기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가면을 벗겨내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조금만 더.’ 계속해서 대미지가 들어가고 있다. 김현성이 쓰고 있는 가면에 벌써 여러 번의 대미지가 들어갔다. 갈라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스컬 그레이 현성이 크게 흥분하고 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다. 조금 문제가 되는 것은…. ‘내구력이 약하구나.’ 쓰로누스의 내구력이 문제였다. 무작정 비난할 수도 없다. 아무리 날개로 몸을 가렸다고 한들, 가장 낮은 밀도의 공간으로 파고들었다고 한들, 대미지가 없는 것이 아니다. 녀석은 김현성의 마력 한가운데로 몸을 던졌고 그 대미지는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금씩 조금씩 너덜너덜해지는 날개들이 그 증거가 아닐까. ‘이거 조금 위험한 건가.’ 놈의 날개가 계속해서 이걸 버텨낼 수 있을까. ‘앞으로 몇 번이나 남았지. 한 번은 승부를 내야 하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었을 때였다. “어?” 사방에서 튀어나온 백금색의 사슬이 김현성의 몸을 휘감기 시작한 것. “뭐야.” 어느새 공중은 백금색의 검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쓰로누스 역시 당황한 듯한 얼굴, 녀석의 짓이 아니다. -처형. 소나기가 내리듯 하늘에서 검들이 쏟아져 내린다. -처형. 다시 한번 검들이 쏟아져 내린다. -처형. 다시 한번 검들이 떨어진다. -처형. -……! 처음에는 뚫리지 않았지만 검들은 김현성의 몸에 상처를 만들고 있다. 녀석은 온몸에 사슬이 포박된 채로 괴성을 내지르고 있다. 분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것은 고통스럽다는 울음이었다. -처형. -……! ‘뭐야… 시바.’ -처형. -……! ‘그만해. 미친….’ -처형. “그만하라고 이 미친 잡종 비둘기 새끼야!” 하늘 위에 떠 있는 것은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천사. 쓰로누스는 녀석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만. 그만해라. 세라핌. -어째서? -……. -저자는 죽어야 해. 쓰로누스. -……. -내가 저자를 죽이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이야기해. 쓰로누스. 그건 네 뜻이야? 아니면 네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더러운 배신자의 뜻이야? -……. -난 지금 저 인간을 죽여야겠어. ‘시발.’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는 상황,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죽어?’ 실제로 고통스러워하는 김현성의 얼굴을 보자 입술이 절로 꽉 깨물어졌다. 갑작스레 등장한 불청객에 초조한 마음이 생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녀석은 우리들에게 적대적이다. 정말로 현재의 김현성을 죽이는 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등장 임팩트만 보면 그게 불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시발… 시발….” ‘외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나?’ 차희라는? 아직까지 전투 중. 이지혜 역시 마찬가지다. 정하얀은? 불가능하다. 아니,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북부 전역에 쏟아지고 있는 마법을 해주하면 그녀가 개입하는 것이 가능하다. ‘풀어야 하나?’ 고민할 수밖에 없는 시점, 정말로 세라핌이 현재의 김현성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마법을 해제하는 것이 맞다. 쓰로누스에게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지만 중간에서 차단당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잡고 싶은 심정, 나도 모르게 망원경으로 전체를 둘러 볼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괜스레 녀석이 눈에 띈다. 김현성과 더불어 대륙을 지키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던 영웅. 성검에게 선택을 받은 용사. 내 동생 라파엘. ‘시바. 깨어나세요. 용사여!’ 뭐라도 해야만 했다. 몸은 튀어 나가면서도 계속해서 메시지를 날린다. ‘깨어나세요! 용사여! 대륙의 희망이여!’ 다시 한번 세라핌이 손을 휘두르는 것이 보인다. ‘일어나. 라파엘.’ 하늘을 가득 채운 검이 다시 떨어지고 있다. ‘깨어나세요! 용사여!’ “일어나라고! 이 미친 새끼야!” -처형. “일어나!” 거대한 백금색의 빛이 시야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 * * “…….” “…….” “형?” < 714화 시나리오(5) > 라파엘이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았는지 확인이 되지 않았다. 아니, 확인할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리라. ‘죽은 거 아니야? 죽은 건 아니지?’ 가장 중요한 것은 김현성의 생사 여부. 거대한 백금색의 빛이 흩어지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아직까지 주변에 서려 있는 빛 때문에 제대로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걸레 조각의 모습을 한 인형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움직이고 있는지 멈춘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미동도 없는 모습은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개 시바….’ “살아 있을 거야.” 애초 쓰로누스가 그렇게 두드려도 대미지를 입지 않았던 김현성의 내구를 생각해 보면 살아 있는 것이 정상이다. 아무리 백금색 비둘기가 강하다고는 해도 현재 김현성의 내구를 뚫고 계속해서 대미지를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어쩌면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합리화를 해서라도 김현성이 아직 살아 있다고 믿고 싶다. ‘성검용사 시바 뭐 하고 있는 거야.’ ‘깨어나세요, 용사여’로는 부족한가. 강한 용사 라파엘, 강한 용사 라파엘이라는 찬송가라도 만들어서 24시간 내내 녀석을 자극했어야 했나.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뒤죽박죽 뒤흔들고 있는 와중에도 몸은 점점 흩어지는 빛을 향해 쏘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혹시나 이쪽에도 같은 종류의 공격이 들어오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른 위협적인 공격이 들어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쓰로누스가 세라핌을 말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직까지도 주변에 서려 있는 빛을 계속해서 손으로 헤쳐 나가는 도중,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 온몸에 백금색의 검이 박혀 있는 모습. “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백금색의 검이 박혀 있다. “어….” 팔다리 할 것 없이 고슴도치라도 된 것처럼 온몸에 검이 박혀 있었다. “어… 어… 어….” 생각하는 것보다 행동하는 것이 더 빠르다. 허겁지겁 달려들어 김현성의 몸에 박혀 있는 검들을 뽑아내는 것이 먼저였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모습에 저절로 입술이 꽉 다물어진다. 계속해서 치이이익 소리를 내며 신체가 타들어 가고 있다. 걸레짝이 된 몸체는 그 어떤 미동도 없다. “일어나…. 시발. 일어나라고.” 저 검을 하나하나 손으로 뽑아내는 것도 일, 연약한 신체가 원망스러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깊숙이 박혀 있는지 하나를 뽑는데도 꽤 많은 시간이 흐른다. “시발… 시발….” 눈앞이 조금 흐려지는 것 같은 느낌, 김현성이 죽는다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제대로 숨은 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숨을 쉴 리가 없잖아. 목에만 세 개의 검이 박혀 있다. 그래도 일단은 뽑는다.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으니까. ‘죽지 마.’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다. 아니, 이미 찢어져 있다. 손이 저릿저릿 하기는 했지만 이 행동을 멈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심지어 머리에도 박혀 있는 검, 머리카락과 뿔 때문에 깊숙하게 박혀 있는 것 같지 않았지만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미 죽을 정도의 상처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죽었어. 시발.’ 죽었다고. 시발. 회귀자는 이제 없어. “시발… 시발….” 그런데 왜 이 의미 없는 노동을 하고 있는 걸까. 손도 찢어지고 어깨도 빠질 것 같은데. 왜 계속 이 멍청한 시체에 꽂혀 있는 칼을 뽑고 있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제 시바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인데 이 새끼는 죽었고 이제는 다음을 준비해야 하잖아. 살아남으려면 그게 맞지. 그렇지 않아? 세뇌에서 풀려난 척하면 끝이야. 외신 쪽에 붙어서 애들 데리고 가면 돼. 아니면 노아의 방주를 들고튀어도 되고. 아니, 그건 아니지. 그전에 할 게 있지. 복수해야지. 주제도 모르는 개 잡것들이 내 걸 건드렸는데. 갈기갈기 찢어서 쓰레기통에 집어처넣어야지. 그다음에는 예전에 했던 대로 하면 돼. 전부 다 죽이고 다시 시작하는 거지. 나도 참 멍청하다. 멍청한 새끼, 처음부터 내가 회귀했으면 됐을 텐데 뭣 하러 김현성을 회귀시켰을까. 시나리오, 시나리오 개소리하더니만 이런 시나리오는 계획에 없었나? 아니면 3회 차까지 보고 있었던 건가. 그렇든 말든 그게 뭔 상관이겠어. 이제 끝났으니까 다음을 준비하자. 그래. 이 의미 없는 헛짓거리는 그만하고 다음을 준비하자고. “시발… 더럽게 안 뽑히네.” 다음을 준비하는 게 맞다.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다. “왜 이렇게 시발 안 뽑히고 지랄이야.”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검을 향해 손을 뻗게 된다. 검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검은색의 핏물이 자꾸만 얼굴과 몸에 튄다. 계속해서 울컥울컥 올라오고 있는 혈액은 녀석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려주고 있는 것 같다. 한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혈액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어처구니가 없어 자꾸만 헛웃음이 나온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는 게 당황스럽다. 죽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몸에 검이 박히는 와중에 이 새끼는 무슨 생각을 머릿속에 담았을까. 이런 가정 자체가 의미 없다. 아마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 김현성의 모습은 짐승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냥 아프다는 생각만 하지 않았을까. 괴롭고 고통스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을 거다. 만약 의식이 남아 있었다면 기뻐했을 수도 있겠지. 드디어 끝났다고. 이제야 끝이 났다고. 길고 길었던 김현성의 삶이, 고통스럽고 괴롭기만 했던 내 삶이 이제는 마무리 지어졌다고. 후회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엿이나 먹으라지.” 후회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없었을 리가 없잖아.” 후회가 없었을 리가 없다. 이 새끼는 분명히 후회한 채로 죽어갔을 것이다. 1회 차 마지막의 김현성과 현재의 김현성은 다르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죽고 없어진 1회 차와는 다르게 김현성에게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새로운 경험을 하기도 했다. 고통스럽기만 했단 1회 차와는 다르다. 취미도 생겼고 하고 싶은 일도 생겼다. 대륙에서의 삶을 어떻게 즐겨야 할지, 여유롭게 휴일을 보내는 방법이나 소소한 하루를 보내는 방법도 깨달았다. 여러 가지 사건으로 많이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녀석은 죽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손톱으로 땅바닥을 긁은 자국이 녀석이 살고 싶었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몸이 땅에 박힌 채로 발버둥 쳤던 흔적들이 김현성이 살 의지가 있었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최대한 몸을 가린 날개들이 죽기 싫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 말이 맞지? 그렇지?” “…….” “살고 싶었지? 시발. 그렇지?” “…….” “살고 싶었을 거야. 그래. 뒈지고 싶을 리가 없지. 이제는 끝내고 싶다. 더 편해지고 싶다. 이딴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 생각하고 있었으면 진작 뒈졌겠지.” “…….” “넌 살고 싶을 거야. 짐은 무거웠지만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니까. 생각보다 2회 차가 즐거웠지? 그러니까 일어나자.” “…….” “숨 좀 쉬어봐.” “…….” “숨 좀 쉬어보라고! 이 멍청한 새끼! 이 쓸모없는 새끼! 씨발 무능력한 새끼!” “…….” “이 더럽게 멍청한 새끼! 나도 참 병신이지! 씨발! 왜 너 같은 머저리 새끼를 믿었을까. 씨발! 왜 멍청하게 시발! 이 사단을 만들어놨을까. 왜 시발 내가 너를 선택했는지 이해가 안 돼. 뭣 하러 너를 회귀시켜서 다시 한번 이 개 짓거리를 또 하게… 시… 시이… 시이… 발….” “…….” “퉤. 쓰레기 새끼.” “…….” “쓰레기는 새끼는 심했다. 내가 사과할게. 숨 좀 쉬어봐. 진짜 죽었어? 아니, 목에 박혀 있는 검 때문에 그래? 내가 뽑아줄게. 더럽게 안 뽑혀서 그래. 아니면 머리에 박혀 있는 게 문제야? 베니고어. 시발 베니고어. 보고 있어? 이거 보고 있냐고. 시발. 너희들이 자초한 거야. 너희들이 자초한 거라고. 루시퍼 개 잡종 까마귀.” “…….” “너도 마찬가지야. 이 미친 까마귀야. 진짜 더러운 꼴 보게 해줄게. 땅바닥에 기어 다니는 미천한 필멸자라 개밥으로 보셨나 본데 진짜 또라이한테 물리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고. 우습지? 내가 지금 여기서 병신처럼 질질 짜면서 검이나 뽑고 있으니까 내 말이 우습게 들릴 거야. 근데 두고 봐. 두고 보라고. 장난감이라고 생각했던 놈한테 발등 찍히면 참 볼만할 거야. 너도 똑같이 눈물 나오게 해줄게.” “…….” 목에 박혀 있었던 마지막 검을 뽑아서 들어 올린다. 무슨 말을 한지도 모르겠다. 소매로 한 번 눈을 훔치고 난 이후에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음.’ 다음을 생각하자. 몇 분이나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쓰로누스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 “…….” 녀석의 눈에 들어가 있는 감정은 안쓰러움이다. 뭐 그럴 만도 하다. 내 눈으로 보기에도 내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김현성의 피로 온몸이 얼룩졌고 손아귀가 다 찢어져 피만 줄줄 흘리고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얼굴은 아마 더 엉망일 것이다. “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녀석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부분이 그리 많지 않으니 기억을 되찾았다고 말하기는 조금 그렇고, 그냥 지금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굳이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아도 녀석 쪽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 “그… 그자는 악마에게….” “…….” “…….” “아니, 미안하구나.” “…….” “본의가 아니었다. 최대한 말려보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내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도 우리의 입장이….” “…….”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은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구나. 쉴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고 싶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일단 따라가는 게 좋나. “아니, 쓰로누스. 나는 동의하지 않았어.” “세라핌.” 그래. 너구나. 백금색 비둘기. 너였어. “이자는 적이야. 쓰로누스. 네가 지금 눈이 멀어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할 뿐이야. 이 자는 우리의 대의에는 관심이 없어. 저 얼굴을 봐. 세뇌를 당해? 웃기지 마.” “그는 이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세라핌.” “그럼 확인해 보면 되겠네.” “…….” “당황할 필요 없어. 쓰로누스. 정말로 이 자가 깨끗하다면, 정말로 죄가 없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야. 그렇지 않아? 나도 이 자가 우리와 뜻을 함께했으면 좋겠어. 너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야. 어디 너뿐이겠어? 케루빔도 도미니온스도 우리와 같은 생각일걸?” “하지만.” “하지만? 여기서 하지만이라는 말이 필요해? 확인해 보는 것뿐이야. 내 검으로, 이 자의 죄의 무게가 어느 정도의 고통을 안겨다 줄지… 확인해 볼 뿐이라고. 저기 죽어 있는 쓰레기처럼 말이야. 얼마나 죄를 많이 저질렀으면 저런 꼴이 됐겠어? 이건 정당한 심판이고 정당한 처형이었어. 쓰로누스.” “…….” “전부 본인이 저지른 죄야.” “…….” “김현성 저자의 죄악이라고.” “…….” “이제는 눈앞에 있는 이자를 시험해 볼 차례야. 쓰로누스.” < 715화 시나리오(6) > “내가 용납할 수 없다. 세라핌.” “나는 네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야. 쓰로누스. 이건 해야만 하는 일이지. 너도 이해하고 있잖아. 아니면 무서운 건가? 그가 수많은 죄를 저질렀을까 봐 그게 두려운 거야?” “…….” “…….” “내 믿음은 확고하지만….” “너도 궁금하잖아. 쓰로누스. 이 배신자가 얼마나 많은 죄를 가지고 있을지, 진짜로 네가 믿는 사람이 맞을지. 궁금하지 않아?” “…….” “우리가 정말로 함께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야. 나도 가슴이 아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우리는 확인해야 해. 정말로 이자가 우리를 배신한 것이 아닌지. 정말로 악마들에게 세뇌당한 것이 맞는지. 본의가 무엇인지, 정말로 선한 이가 맞는지. 이걸 알아야 우리가 같이 움직일 수 있어. 이게 내 최소한의 양보야. 쓰로누스. 더 이상의 타협은 없어.” “…….”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은색 비둘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알아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전부 다 해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결론이 내려진 것 같았다. 슬쩍 옆을 바라보자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는 김현성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 여전히 몸통을 찌르고 있는 검들이 눈에 띈다. 목과 머리에 박혀 있는 것들을 정리하면 호흡 정도는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여전히 김현성은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위기에 순간에 눈을 번쩍 뜨며 이쪽을 도와줄 만도 했지만 녀석은 움직이지 않는다. 계속해서 박혀 있는 백금색의 검들도 눈에 띈다. 아마 저 검이 세라핌이 말하는 심판의 검이지 않을까. ‘알 것 같아.’ 녀석의 권능이 뭔지, 저 백금색 검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가설일 뿐이다. 하늘을 가득 메웠던 백금색의 검들로 미루어봤을 때 생각할 수 있는 가설이었다. ‘김현성이 죄를 지었어?’ 당연히 김현성은 죄를 지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게 녀석의 기준인지 아니면 보편적인 기준 안에 들어가 있는 죄인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은 분명히 살아오면서 죄를 저질렀다. 전쟁에 휩쓸려 살인을 하기도 했고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들을 외면하기도 했다. 차마 내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사건들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런 꼴을 당할 정도는 아니다. 모든 것들 고려해 보더라도 김현성에게 박힌 검의 개수가 너무나도 많다. 몸에 박힌 검뿐만이 아니다. 땅바닥에 박혀 있는 검들까지 계산해 보면 공간을 꽉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말도 안 돼.’ 만약 죄의 기준이 비둘기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죄가 아닐 수도 있는 것들이 녀석들의 기준으로는 죄로 판단될 수도 있으니까. 쓸데없이 자원을 소비하거나 대륙의 균형을 어지럽히는 모든 행위를 모조리 죄로 판단하고 계산하고 있다면 이런 광경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가설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들은 완벽하지 않다. 신이나 신에 근접한 존재들도 결코 완벽하지는 않다. 답안지를 채점하듯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죄의 유무를 판단해 심판을 내리는 권능이라는 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한 차원을 유지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녀석이 권능으로 신성을 사용해 죄의 심판이라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었다면 녀석은 베니고어를 비롯한 다른 신들의 머리 위에 있었을 것이다. ‘김현성의 죄악? 지랄하고 자빠졌네, 미친놈이.’ 쓰레기 같은 가설을 뒤로하고 가장 먼저 생각한 가정은 저 검이 본인의 죄책감에 의거한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것. 세라핌이 판단한 것이 아니라 김현성이 판단했을 때의 경우다. 이 경우에는 저 검의 개수와 김현성이 느낀 고통이 이해가 간다. 물론 딱 이거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었지만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졌다. 여기 무수히 박혀 있는 검들이 김현성의 죄책감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씁쓸해지기는 했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다. 김현성은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본인이 죽인 사람들의 얼굴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실수나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백번 양보해 김현성에게 뒈진 놈들이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해자가 없는 죄는? 아니, 애초에 그런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기는 해? 인격신 위에 있는 초월적인 신이 망치 땅땅 두드리면서 대법관 시스템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세라핌은 이 모든 것들을 판단할 능력이 없어. 여러 가지 복잡한 것들을 전부 제외하고 살인죄에만 책임을 묻는다고 해도 저 새끼는 그것에 대해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애초에 대륙을 위해 개체 수를 조절해야 된다고 말하는 놈이 살인죄에 대해 판단할 수 있어? 저 새끼는 신이 아니야. 자기 집도 없어서 차원이나 떠돌아다니는 거렁뱅이 새끼라고. ‘사기꾼 새끼.’ 이제야 알 것 같다. 놈은 교묘한 사기꾼이다. 아니, 사기꾼도 되지 못한 반푼이 새끼다. 자신의 능력이 정말로 죄의 유무를 판단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놈일지도 모른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 확신이 깃들어 있는 얼굴, 정말로 본인의 권능이 인간의 선악을 가릴 수 있다고 판단한 표정이었다. ‘그래 한번 해봐.’ 한번 해보라고. 내 가설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다. 만약 정말로 놈이 그런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초월적인 존재라면 더 이상 내가 손을 쓸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저런 어처구니없는 권능을 가지고 있는 놈과 어떻게 드잡이질을 할 수 있을까. ‘백금색 비둘기는 신이 아니야.’ 반푼이지. 희미하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김현성이 살아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심판.” ‘심판은 개뿔. 지랄하지 마. 나는 죄지은 거 없어.’ “심판.” ‘나는 죄 같은 거 저지른 적 없다. 미친 비둘기야. 나처럼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심판?” ‘조금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게 인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다고.’ “…….”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한 커다란 그림이었지. 내가 죽인 놈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고 굳이 판단해보자면 네가 말하는 인류의 개체 수 조절에 기여했을 거야. 그렇지? 우리 알 만한 사람들끼리 이러지 말자. 내 말이 맞지. 넌 그걸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아니, 설사 판단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시스템을 마련할 능력이 없지.’ 당황하고 있는 얼굴이 눈에 띈다.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얼굴이 구겨지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자신의 능력에 혹시나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작은 가능성이었지만 내 가설이 맞았다는 것은 기쁘다. 아, 그전에 몇 가지는 해야지. 나도 감당할 게 있잖아. 살면서 죄를 저질러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녀석의 권능에 조금은 호응해 줘야지. 그게 자연스러우니까. 그게 평범한 인간다운 거잖아. 이기영이 죄책감을 느낄 만한 것들이 뭐가 있을까. 굳이 떠올려보지 않았지만 있기는 있었던 것 같아. 굳이 개수로 환산해 보자면 다섯 가지 정도. 아니, 여섯 가지인가. 스스로 죄책감을 가졌단 사건들을 떠올려보자 하늘에서 백금색의 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워했던 세라핌도 그제야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 둘, 셋, 숫자는 딱 여섯 자루. 가면의 구세주치고는 조금 많지 않은가 싶기도 했지만 그나마 현실적인 개수였다. 내가 딱 허용할 수 있는 사건들이기도 했고… 쓰로누스는 조금 안심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여섯 자루….” “비현설적이야. 인간이… 어떻게 인간이 겨우… 겨우 여섯 자루….” “아니, 현실적이다. 세라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 하하.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받아들인 거였어. 이토록 깨끗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신뢰할 수 있었던 거다. 이런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이해해 줄 수 있었던 거야.” “…….” “이 정도면 세라핌 너도 만족했겠지. 이제 이리로 와 내 손을 잡거라.”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쓰로누스.” “뭐?” “처형.” “세라핌!!” 여섯 자루의 검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쓰로누스는 곧바로 이쪽으로 몸을 날려 검을 뻗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떨어지는 검을 쳐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는지 검 한 자루가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모습이 똑똑히 시야에 비쳤다. 당연하지만 피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깨에 끔찍한 고통이 번지기 시작한다. 불에 덴 것처럼 뜨겁고 아프다. 무겁고 쓰라리다.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온다. 살아오면서 이 정도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입술을 꽉 깨물어 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안에서부터 튀어나왔다. ‘이렇게 아프다고?’ 시발. ‘이렇게?’ 어떻게 비명도 안 지르고 참았던 거지? 한 자루, 겨우 한 자루가 어깨에 박혔을 뿐인데도 고통스럽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왈칵 튀어나오고 숨을 쉬기가 어렵다. 머릿속이 어지러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쓰러져 있는 시체는 어떻게 이걸 견딜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괜찮으냐. 괜, 괜찮은 것이냐.” “…….”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쓰로누스의 모습도 보였지만 놈의 얼굴이 제대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만큼 고통스럽다. 그 어떤 고통도 이것보다 아프지는 않을 거다. “이게 무슨 짓이냐. 세라핌.” “…….”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세라핌!” “해야 할 일을 한 거야. 쓰로누스.” “…….” “검을 거두고 흥분을 가라앉혀. 쓰로누스. 그 말 그대로야.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야. 겨우 한 자루가 박혔을 뿐이잖아. 원래 저자가 감당해야 할 죄는 여섯 자루였어. 네 얼굴을 봐서 이 정도로 참아 주는 거야.” “세라핌….” “이자가 정말로 우리와 함께할 생각이라면 죄를 지울 필요가 있어. 그 한 자루, 어깨에 꽂혀 있는 그 한 자루로 그자는 다시 태어나는 거야. 맞아. 쓰로누스. 네 예상이 맞아. 우리는 다시 이자를 받아들일 거야. 케루빔은 어떤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도미니온스는 긍정적인 것 같네.” “너… 너….” “제멋대로 하는 건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쓰로누스. 네가 원하는 대로 된 거야. 그자는 깨끗해. 그러니 우선 치료라도 해주는 것이 어때?” 그제야 허겁지겁 검을 뽑아 신성력을 전해주는 쓰로누스의 모습이 보였다. “미안하구나. 많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래. 맞아보니까 얼마나 아픈 줄 알겠더라고.’ “괜찮으냐?” ‘괜찮을 리가 있겠어? 미친 비둘기야? 괜찮을 것 같아?’ “이제 안심하거라. 더 이상 너를 핍박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치료가 끝났으면 슬슬 돌아가자. 쓰로누스. 내 손을 잡아. 인간.” 상처는 완벽하게 치료되어 있었다. 머뭇거리자 곧바로 이쪽의 손을 들고 잡아끄는 모습은 다소 강압적이지만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니, 한 가지는 있지. 될지 안 될지도 모르고 아직 확신할 수도 없지만 작은 가능성에라도 걸어 봐야지. 때마침 김현성을 치료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오고 있는 것 같으니까. 내가 할 일은 메시지를 보내는 것 정도밖에는 없을 것 같네.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회귀자여. (0/1)] [알타누스의 회귀자 김현성에게 전설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 - …… (0/1)]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입력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 - 미래 (0/1)] 미래. < 716화 알프스(1) > 인류는 패배했다. 물론 완전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시적으로 휴전 상태에 돌입했다는 게 어울리는 표현이리라. 그 말 그대로 일시적인 휴전이었다. 어째서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의 공세가 천천히 줄어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북쪽 너머에 있는 자들은 조용히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륙 보호 관리위원회에서는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우리들의 끈질긴 저항이 대륙을 지켜냈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했지만, 그 발표가 진실이 아니라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길드마스터는 행방불명, 길드마스터는 타락한 채로 숨을 거뒀다. 직접 그 모습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길드마스터의 마지막 모습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는 다른 길드 선배들의 반응을 통해 유추할 수 있었다. 길드의 분위기는 어두웠고 뭐라고 말하기 힘든 이상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몇몇의 길드원들에게도 이 사실은 비밀이었다.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자신과 조혜진 길드마스터 대리님. 김미영 팀장님, 창렬 선배님과 아영 선배님, 그리고 박리안 님이 전부였다. 어째서 모든 길드원들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지는 대충 예상이 간다. 자신이 이 비밀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 끼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아 있었지만 아마 일손이 부족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짧은 전투였지만 모두가 피로가 누적되어 있는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믿음직스럽지 못한 신입 길드원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어진 것이다. 특히나 심각한 것은 정하얀 님 쪽이었다. ‘그럴 만도 해.’ 북쪽 전체에 건 마법을 며칠이나 유지시켰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한 마력과 초인적인 마력회복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탈진 현상을 겪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자신 역시 마력 탈진 현상을 겪어본 적이 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상실감과 무기력함, 영혼을 스스로 찢는 것 같은 고통, 다시는 겪기 싫은 경험이었다. 계속해서 그런 현상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려온다. “끼잉….”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왕! 왕!” “빨리 가 봐야 될 것 같다고? 으응. 그렇지. 오늘은 할 일이 좀 많으니까. 정하얀 님 기다리시겠네.” 떨리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계속해서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정하얀 님의 상태를 체크하고 챙겨주는 것이 신입 길드원인 자신에게 주어진 퀘스트였다. 벌써 몇 번이나 다녀왔는데도 불구하고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장 처음 길드에 가입했을 때는 친절하게 맞아주신 분이기도 했지만…. ‘겁먹을 필요 없어.’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는 게 당연하실 테니까. 조금은 긴장한 마음으로 방문을 똑똑 두드리자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 오, 오빠?” “네… 네… 아, 아니요. 정하얀 님. 알프스예요.”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무섭다. 약간의 침묵이 들려온 이후에는 문 밑으로 손이 스윽 하고 튀어나왔다. 마치 미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분을 다 빼앗겨 버린 손이다. 마력 탈진 현상을 한계까지 겪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였다. “잠,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 “…….” “어, 어떻게 해? 아… 응. 알, 알겠어, 소라야. 응. 들, 들, 들어와. 조심히. 조심히 들어와. 소라 밟, 밟지 말고.” “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비치는 것은 나무가 된 채로 굳어 있는 한소라 선배님의 모습이었다.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지만 무척 참혹한 광경이다. 그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하얀 님의 모습은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다. 몸 전체를 가리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어떻게 확인할 방도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머리가 빠졌는지 하얀색으로 변한 머리카락이 바닥에 뭉텅이로 떨어져 있었고 체격도 전보다 더 왜소해진 것 같았다. 심지어 허리가 굽어 있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마, 마, 마력 회복 물약 가지고 왔어?” “아니요. 부길드마스터님이 마… 마력 회복 물약은 하루에 한 병만 마셔야 한다고 하셨어요. 너무 많이 섭취하시면 건강에 좋지 않으시다고요. 오늘은 아침에 한 병 드셨으니까요. 지금은… 방도 정리해 드리고 여러 가지로 챙겨드릴 것도 조금 있어서요.” “여, 여, 여기로 온데?” “정하얀 님은 많이 피곤하시다고… 제가 전해드렸어요. 계속 주무시고 계시는 도중이라고요.” “그… 그래? 다행이다.” “일단 흰, 흰둥이부터… 맡아주시겠어요?” “…….” 흰둥이가 은근슬쩍 정하얀 님의 옆 자리에 자리를 잡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도움이 될 거야.’ 체력 회복과 마력 회복은 물론이거니와 심리적인 부분에서도 안정감을 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졌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도움이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하얀 님은 반응하지 않는 것 같았다. ‘괜찮으시겠지?’ 녀석이 필사적으로 꼬리를 흔들자 그제야 천천히 손을 머리 위로 가져다 대는 모습이 보였다. “오, 오, 오빠는 뭐 하고 있는데?” “여전하세요. 많이 바쁘시고… 네. 회의하시느라 피곤해하시기도 하고… 네.” “그, 그렇지… 전, 전쟁은 다시 언제 한대?” “기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다고 하셨어요. 곧 다시 시작될 것 같다고 말씀하시기는 했는데… 아군 측에서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고도 하시고… 선제공격도 고려해 보고 있다고 하거든요. 일… 일단 정하얀 님은 다른 부분은 신경 쓰지 마시고 푹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으… 응. 소라도 내가 조금 쉬어야 한데.” “두 분 사이가 참 좋으시네요.” “그… 그렇지?” “네. 소라 선배님이 정하얀 님을 바라보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거든요. 지금도 그렇고요.” “그래?” “네.” “다, 다행이다. 헤헤.” “저도 고향에는 그런 친구들이 있어요.” “아아… 그, 그래?” “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지내고 있지만 예전에는 정말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붙어 다녔던 사이였거든요. 자매처럼 지낸 친구들이에요. 참 많이 싸우기도 하고 서로 감정이 상한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무척 오래된 친구들이죠. 정하얀 님과 한소라 님을 보고 있으면 저도 그 친구들이 생각나요. 아, 식사하셔야죠.” “먹, 먹, 먹기 싫은데….” “그래도 드셔야 해요. 한소라 선배님도 좀 드셔야 된다고 하시잖아요.” “아… 으… 으응. 그렇지. 뭐라도 좀 먹어야지.” “…….” “바, 바, 바깥은 조금 어때?” “안개소환사님이 깔아두신 안개 때문에 쉽사리 악마들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저도 아직 전해들은 바가 없어서요. 한번 여쭈어 보고 올까요? 아, 용병여왕님은 어제 일어나셨대요. 상처가 커서 많이 위독하실 줄 알았는데 금방 몸을 움직이실 수 있으실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박덕구 선배님도 이번 수성전에서는 많이 다치지 않으신 것 같고… 이전 그대로예요.” “다, 다, 다행이다.” “네. 피해를 입은 부분도 크지 않고… 무너진 곳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악마들이 선을 넘지 못했으니 첫 번째 전투는 승리했다고 판단하고 있거든요. 아마 악마들도 접근하기 힘들 거예요. 그러니까 안심하시고 컨디션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셔야죠.” “으, 응… 소, 소라도 내가 너무 피곤한 것 같다고….” “네. 저도 들었어요. 모두가 정하얀 님 건강을 걱정하고 있네요. 저도 정하얀 님이 건강하셨으면 좋겠거든요.” “고마….” “흰둥이도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네요.” “왕!” “으… 응. 고마워.” ‘상태가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 지난 며칠간의 노력이 빛나는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대화를 진행할 수도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지 않았던가. 계속해서 전쟁터로 향하려고 하는 것을 말리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지금 이렇게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수확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엉망이 된 방을 정리하고 식사를 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보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말을 걸자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대화의 주제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굳이 먼저 말하지 않아도 정하얀 님께서 말을 걸어주시고 계셨으니 말이다. “그, 그, 그래서… 같, 같이 살기로 했어. 오… 오빠도 괜찮다고 했고.” “대단하시네요.” “으… 응. 나, 나는 조금 오빠한테 미, 미안한데… 소, 소, 소라가 고집을… 부려서….”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되면 저도 꼭 초대해 주세요.” “응. 초대해… 줘야지. 같, 같은 길드원이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로 기쁘네요.” “왕!” 이윽고 시간이 지나자 꾸벅꾸벅 조는 정하얀 님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한낮이었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다. 회복을 위해 몸이 수면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주무시겠어요?” “으응….” “침대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 여… 여기서… 잘… 잘래.” “그럼 담요만 덮어드릴게요.” “으… 응.” “…….” 나무에 반쯤 기대 잠을 청하는 정하얀님의 몸을 담요로 덮은 이후에는 조심스레 바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던 흰둥이 역시 슬슬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살짝 머리를 쓰다듬어 준 이후에는…. ‘조혜진 님.’ “보고하러 가야지?” “왕.”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자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려왔다.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니 먼저 온 손님이 있었던 모양인 것 같았다. 당연하지만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도 아니다. 저건 내 영역이 아니었으니까. “…….” “…….” 평소와 변함이 없는 모습. 항상 똑같이 머리를 묶고 있는 그녀가 눈에 보였다. 이쪽이 긴장했다는 걸 눈치챘는지 작게 미소를 지어준 이후에는 곧바로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중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나를 배려해 주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어떻습니까?” “많이 회복하신 것 같아요. 아직 마력은 회복되신 것 같지 않았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안정되어 있으신 것 같아서… 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마력 회복 속도도 무척 빠르시니 아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회복하실 거로 보이고… 특히나 많이 안정되셨거든요.”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요. 그… 그나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자신을 낮추지 않으셔도 되요. 당신은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 네.” “오늘 스케줄은….” “네.” 흔들림이 없는 자세였다. ‘괜찮으신 건가.’ 한 자루의 창 같은 사람이었다. 부러지지 않고 신념이 확고한 사람, 멀리서 봐왔던 조혜진은 그런 사람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괜찮으신 건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놀랍다. 자신을 짓누르는 압박감과 감정을 일과 연결시키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어째서 대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파란 길드에서도 중요 요직에 앉아 있는지 이해가 가는 모습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쉽게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모습이기도 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정하얀 님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도움이 필요해.’ 어떤 도움을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으니 마음이 답답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네. 특이 사항이 있으면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네.” 집무실의 문이 닫힌 이후에도 괜스레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는 계속해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규에 가까운. 너무나도 서럽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 717화 알프스(2) > ‘들어가 봐야 하는 걸까?’ 주제넘은 짓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들어가서 괜찮다고, 잘해낼 수 있을 거라고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선뜻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기가 꺼려진다. ‘내가 뭐라고….’ 자신이 뭐라고 들어가 위로의 말을 건넨다는 말인가. 아니, 애초에 무슨 말부터 건네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해할 수 있다고?’ 어떻게 조혜진 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가장 소중한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을 동시에 잃었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고 있을 거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평정심을 유지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녀를 지탱해 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도움이라도 받았겠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이지혜 님? 조혜진 님과 자주 시간을 보내던 그분 역시 며칠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누군가는 그녀를 보듬어 줘야만 한다고 느껴진다. 자신이 무슨 심리치료사나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조혜진은 현재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녀에게 어깨를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했다. ‘나도 그랬잖아.’ 그녀가 느낄 고통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지만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시기가 있는 법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죽을 만큼 힘들었을 때 흰둥이가 다가와 주지 않았다면…. 살짝 아래를 내려다보니 꼬리를 흔들고 있는 흰둥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울음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래. 일단 가 보는 거야.’ 건방진 행동이다. 문을 똑똑 두드리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 잠깐.” 하지만 곧바로 문을 열어야 했다. 틀림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물을 닦고 마음을 가다듬겠지. 다시 한번 평소와 같은 얼굴과 말투로 자신을 맞이할 것이다. 들어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일단은 빠르게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혜진 님?” “…….” “조혜진 님.” 흐트러진 모습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망가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황한 것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허벅지에서 흐르고 있는 혈액 때문이었다. 짐승에게 물어뜯긴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는 듯한 상처.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상처 난 곳을 찌르고 또 찔렀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되지는 않으리라. 차마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참혹한 자상이 눈에 들어온다. 잠깐 동안 정신이 멍해지기는 했지만 저게 어떤 상처인지에 대해서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자해.’ 자해한 거야. 정황상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 울음기 섞인 얼굴에는 당혹감이 감돈다. 하지만 그 당혹감은 이내 분노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사방을 옥죄어 오는 살기는 그녀가 대륙의 상위에 위치한 모험가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었던 거대한 악의와 살기가 머리를 뒤흔든다. “이게….” “저… 저….”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묻고 싶다. 하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황급히 상처를 가리는 모습을 보고서도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포 때문에 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에는 눈물이 가득 채워지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 아래턱은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고 온몸이 땀으로 뒤덮인다. 저도 모르게 정신을 놔 버릴 것 같았던 그때였다. 왕!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 몸을 옥죄는 살기와 마력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떨리던 몸이 진정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조금 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무슨 용기가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평소라면 할 수 없었던 한마디를 더 내뱉게 된다. “조… 조혜진 님이야말로 뭐… 뭘 하시는 건가요?” “…….” “그… 그 상처는 뭔가요?”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겠어요….”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세요. 명령입니다.” “나… 나가지 않을 거예요.” “나가세요.” “나가지 않을 거예요.” “제기랄! 나가!” “나가지….”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뒤로 튕겨 나간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등과 가슴에 통증이 있는 것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제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 분명히 나가라고 말했습니다.” 한 손으로 자신을 깔아뭉갠 이후에 압박하고 있는 모습.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는 공감할 수 없었다. 슬픔과 분노, 자기혐오로 얼룩져 있는 얼굴이었다. “괜찮아요.” “지금….” “다 괜찮을 거예요.” “…….” “전부 다 괜찮아질 거예요.” 뭐가 어떻게 괜찮아질 것인지, 정말로 상황이 이전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필사적으로 내뱉고 있는 말이었지만 아주 조금은 위안이 될 거라고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정말로 힘들 때 누군가 괜찮다고 말해주는 건 분명히 도움이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계속해서 입을 열어보자. 괜찮아질 거라고. 그렇게 말을 걸어보자. “전… 전부 다… 잘 될 거예요. 저는… 저는 길드에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됐고 그… 실제로 조혜진 님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계시는지, 얼마나 괴로울지도 모르고… 또 이 말이 지금 상황과 어울리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괜찮아질 거예요. 틀림없이 이겨내실 수 있으실 거예요.” “괜찮지 않습니다.” “…….” “전혀… 전혀 괜찮지 않아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눈물을 닦는다. 살짝 몸을 일으킨 이후에 그녀를 꽉 안아주자 계속해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 제 탓이었습니다.” “…….” “아무것도… 아무것도 막지 못했… 히극… 못했… 끄윽… 아무것도… 나는….” “…….” “내… 내가….” “…….” “내가… 내가… 끄윽… 히끅… 이번에도… 멍청한… 둔하고… 병신 같은 년.” 목이 메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알… 알고 있었는데… 내가… 막을 수… 있… 있….” “…….” “내… 내가….” “조혜진 님 탓이 아니에요.” “머저리… 같은….” “그렇게 혼자 자책하시고… 감당하실 필요 없어요. 그 누구도 조혜진 님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네. 분명히… 분명히 그럴 거예요. 자책하시지 않으셔도 돼요.” 입을 열며 상처 부위에 천천히 포션을 문지르자 고통스러운 듯이 찡긋거리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치료가 되는 과정이지만 아마 쓰라릴 것이다. 그 감각이 조금이나마 그녀의 정신을 차리게 하는 데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살짝 위를 올려다보자 어정쩡하게 앉은 채로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자해한다는 사실을 들킨 것도 부끄러울 것이고 엉엉 운 것도 부끄러울 것이다. 흥분해서 이쪽을 밀치고 압박한 것도 부끄럽겠지. 새파랗게 어린 신입 길드원에게 이렇게 발가벗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부끄러울까. 감정에 휩쓸려서 이것저것 저지른 일들을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럴 때일수록 뻔뻔해져야 돼.’ “혼자… 혼자 할 수 있습니다.” 더욱더 뻔뻔해져야 한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 줘야지.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말해줘야지. “아니요. 제가 할 수 있어요. 붕대도 감아드릴게요. 흰둥이 때문에 익숙하거든요.” “왕!” “…….” “…….”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사과드리고 싶은 걸요. 제… 제가 조금 무례했죠?” “…….” “그래도 알려드리고 싶었거든요. 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 없고… 약하고… 또 길드에 적응도 잘 못해서 붕 떠 있지만… 그래도…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서…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힘이 되어드리고 싶어서….” “…….” “제… 제가 길드에 입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처음… 면담했을 때. 길드 마스터가 이런 말씀을 해준 적이 있었거든요.” “…….” “힘이 들면 말하라고 하셨어요. 누구라도 좋으니 말하라고요. 좋은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에게 이야기하고 자매나 남매 같은 사람이 있으면 말하고 기대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하면 짐이 줄어들 거라고, 몸도 가벼워지고 힘이 날 거라고, 버틸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거고… 무거운 짐을 드는 것도 즐거워질 거라고 이야기하셨어요. 물론 당연한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때 말씀하셨던 길드 마스터의 얼굴이… 너무 확신에 차 있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었어요.” “…….”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고 무거운 걸 같이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요. 비록… 비록 실수투성이에 멍청이이기는 하지만…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조혜진 님이 느끼고 계실 고통을 덜 수 있게… 그러니까… 네. 그렇게 해도 될까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건방진 소리 하지 말라며 핀잔이 오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아주 천천히,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긍정에 표현인 거겠지? 저거 긍정 맞는 거지? 저도 모르게 웃게 된다. 조금이나마 힘이 된 것 같은 안도감에 눈에서 괜스레 눈물이 차올랐다. 긴장이 풀린 건지 모르겠지만 몸에 힘에 다 빠지는 것 같다. 붕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아 민망해 재빨리 눈물을 닦았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네… 네?” “함께 가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습니다. 명령이 아니라 부탁으로요.” “물론이에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 “…….” “길드마스터가 계신 곳으로.” “…….”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잠깐 동안 침묵했을 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드마스터가 살아계실지도 모릅니다.” “…….” “살릴 수 있을지, 정말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길드마스터를 치료 중입니다. 당신도 잘 아는 사람이 말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기쁜 소식이기도 했다. 길드 마스터가 살아계시고 치료 중이라고 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라파엘.” “아.” “라파엘입니다.” 베니고어 가라사대, 대륙의 선택을 받은 용사가 성스러운 검을 그 손에 쥐고 거짓된 천사를 연기하는 악마들의 어둠에 대항할 것이라 하시니, 그는 노을빛의 검을 휘두르는 영웅의 왼편에 서, 인류를 어둠에서 구하는 것에 이바지할 것이라 하셨노라. “예언.” 읽어본 적이 있는 구절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 718화 알프스(3) > 성검의 선택을 받은 회색빛의 용사. ‘라파엘.’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자신 역시 성검의 선택을 받기 위해 열심히 뛰어오지 않았던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지만 막연한 질투심과 동경을 가지게 하는 이름이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성검을 처음 잡았을 때의 그 감각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거대한 악의와 어둠, 빛이니 어둠이니 그런 것을 잘 구분할 수 없을 때였지만 구더기가 피부를 뚫고 들어와 내장을 헤집는 것 같은 감각은…. ‘다시는 느끼기 싫은 감각이야.’ 그 말 그대로였다. 자신은 견뎌내지 못한 시련을 견뎌낸 용사에게 어떻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방에 들어오기 직전에 열렸던 창문, 먼저 와 있던 손님이 누구였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구태여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가 먼저 다녀간 것이 아닐까. 지금 향하고 있는 곳에 틀림없이 회색빛의 용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욱한 안개 때문에 제대로 길이 보이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것 같은 파티원들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이쪽 역시 긴장되기는 마찬가지, 현재 이곳이 위험지역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폐허가 된 지역이기도 했고 이미 심하게 오염된 지역이기도 했다. 정화가 되지 않은 타락한 땅처럼 진입하면 진입할수록 악취 때문에 눈을 찌푸리게 된다. 성검의 시련을 받았을 때 느낀 적이 있었던 감각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분노와 후회, 절망과 두려움, 온갖 부정적인 감정으로 얼룩진 어둠.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자리한 장소의 느낌이 그랬다. 최대한 소음을 줄여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괜스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길드마스터가… 살아 계시는 건가요?” “사실….” “네.” “몸의 기능은 완전히 정지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숨도 쉬지 않고 심장도 완전히 멈춰 있어서… 의학적으로는 완전히 사망한 상태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그럼….” “하지만 몸에 마력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아시다시피 죽은 사람의 몸에는….” “아! 마력이 흐를 수 없죠.” “저희가 처음 길드 마스터를 발견했을 당시에는 한 줌의 마력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약 세 시간 뒤에는… 마력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호흡이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요. 지금 이 땅이 오염된 것은….” “길드마스터 안에 있는 마력 때문이군요.”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그녀로서도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력이 흐르고 있다고 말을 해오기는 했지만 그 힘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확히 규모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거의 한 도시를 뒤덮고도 남을 범위가 썩어가고 있다. 환경이 변해버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길드마스터가 타락한 상태로 숨을 거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살아계신 게 맞는 걸까?’ 만약 살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이전의 길드 마스터일까? 이미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것은 아닐까. 아니, 정말로 길드 마스터가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해도 손을 뻗는 게 이로운 행동일까. 어째서 이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베니고어 교단을 비롯한 교단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잠자코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는…. ‘악마를 되살리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어.’ 물론 쓸데없는 걱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짐승의 형상을 한 것의 모습을 두 눈에 담은 순간, 앞 전에 했던 생각을 돌이켜 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형태였다. 어릴 때 묘사로 접해왔던 악마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거대한 뿔은 흉측하고 불길했고, 등 뒤에 있는 날개는 기묘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이전에 봐왔던 길드마스터의 모습은 두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겉모습보다도 더 눈에 띄는 것은 길드마스터의 몸에 새겨진 상처.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고 숨을 참게 될 정도의 악취, 이미 저 신체는 썩어가고 있었다. 그게 눈으로도 보인다. 움직일 수 있을지 의심이 될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모습이다. 온몸에 검이 박힌 자국들로 가득했고, 이상하게 뒤틀린 모습은 죽음의 과정이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살아날 수 있는 거야?’ 주변은 굳어 있는 혈액으로 가득하다. 손을 대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미 몸이 완전히 굳어 있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참상을 목도했기 때문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어째서. 어째서 조혜진 님께서 함께 가자고 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걸….’ 이런 걸 어떻게 볼 수 있겠어. 이런 참상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 모습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마주할 수 있을까. 살짝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보니 뭐라 형용하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는 조혜진 님이 시야에 비친다. 몸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 같다. 살짝 손을 잡으니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처음 봤을 때는 더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네. 많이 좋아졌어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무척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용사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는 성검, 그리고 금발의 머리. 베니고어 님께 선택을 받은 회색빛의 용사. 라파엘이었다. “오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조혜진 님. 아, 이쪽은… 그러니까. 알프스 님이시죠? 오랜만입니다.” “네. 오랜만이에요. 라파엘 님. 깨어나신 걸 알았다면 인사라도 드리러 갔을 텐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도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이곳으로 향했던 터라… 형이 저를 찾는 목소리를 들었거든요.” “형이요?” “네. 파란 부길드마스터님이라고 하면….” “아.” “갑작스럽게 메시지를 받았어요. 이 사람을 살려달라고, 너라면 살릴 수 있다고 말하는 메시지요.” “그건….” “어떻습니까? 라파엘 님. 그 뒤로는….” “그 뒤로는 다른 메시지를 받진 못했어요. 깨어난 직후에 단 한 번이었고요. 어떻게 움직이는 게 좋을지, 어떻게 해야 할지 다른 답은 받지 못했지만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건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물론 제가 지금 옳은 일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주어진 일이 이것밖에 없으니까요.” “길드마스터의 상태는….” “보시는 그대로예요. 회색빛이 보내는 신성력에 상처가 메워지고 있어요. 일반적인 신성력처럼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아 다행이지만….” “그거라도 된다면 다행입니다.” “네, 다행이죠….” 회색빛의 용사 외에도 다른 이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저 사람이 아마… 사냥개 이주혁. 신성력으로 주변에 세이프티 존을 만들어 놓은 이가…. ‘기적의 사제 마리엔.’ 그 외에도 익숙한 얼굴들이 몇몇 있다. 성검용사 파티라고 불렸던 이들이다. 모두가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길드에 자주 얼굴을 비쳤던 사람들이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붉은 용병의 최영기… 그리고…. ‘검은백조 길드 마스터?’ 조혜진 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인사를 드리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가 극도로 긴장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박연주 님과 성검용사 파티, 붉은용병의 최영기를 비롯한 강자들 모두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다. 눈앞에 있는 길드 마스터 때문이 아니다. 언제든지 적들이 쳐들어올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얼마나 걸었지?’ 정확히 여기가 어디지. 언제든지 적이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다. 안개로 뒤덮여 있지만 이곳에 성벽은 없다. 마법과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세이프티 존은 적들의 공격을 막아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지 않다.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이 이곳에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거구나.’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긴장감 때문인지 괜스레 손아귀가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도 괜스레 불길하게 느껴진다. “끼잉.” 흰둥이가 낑낑거리며 멀리 떨어진 곳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흰둥이의 시선을 따라가자…. “어….” 가면을 쓴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어?” 워낙 멀리 떨어진 곳이다. 정말로 내가 본 게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잘못 본 게 아닐까? 잠깐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그곳을 바라봤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뿌연 안개뿐이다. ‘잘못 본 건가?’ 그래도 한번 조사를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새하얀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 어째서 빤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끼잉….” 가까운 곳에 있는 모험가에게 막 입을 떼려고 하던 찰나였다. “전투 준비!” “…….” “전 부대원은 전투 준비한다!” “왕! 왕!” “흰둥아!” 어디에선가 폭음이 들려온 것. “마법사들은 준비한 마법 캐스팅해!” “위치가 발각됐다. 지원 요청. 적의 숫자는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음.” “매뉴얼대로 움직인다.” 공기가 뒤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여기저기서 마법사들이 주문을 영창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주변이 무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자신 역시 다급하게 허리에 달린 검을 뽑게 된다. 천사의 모습을 한 악마 하나가 안개를 뚫고 창을 뻗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피할 수 있어.’ 긴장감에 몸이 살짝 굳었지만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왕!” 하는 소리가 들리자 몸에 활력이 돋는 것이 느껴진다. 움직임은 더 빨라졌고 힘은 더 강해졌다. 검을 정확히 심장으로 뻗었지만 턱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붙잡힌다. “아!” 잠깐 당황했을 때 이쪽을 구해준 것은 안개를 뚫고 들어온 한 자루의 창. 정확히 천사의 목을 꿰뚫은 창날이 눈에 보였다. “안전한 곳으로.” “아… 아니요. 저도 싸울 수 있어요.” “…….” “싸울 수 있어요.” “…….” “그럼 곧바로 부대에 합류….” “네.” 다시 한번 안개 속으로 몸을 던지는 조혜진 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확히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지만 갈색의 머리를 길게 땋은 천사에게 창을 뻗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콰아아아아아앙!! “흰둥아! 가자!” “왕!” 어떤 식으로 전투를 풀어나가야 할지는 알고 있다. 수많은 훈련을 거쳤으니까. 매뉴얼도 머릿속에 있다. 이로운 효과를 파티원들에게 끊기지 않게 해주는 게 중요하다. 흰둥이가 주는 버프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넓은 곳으로 움직여야 한다. ‘안개 때문에 시야가 차단되어 있으니까.’ 피아 구분이 힘들고 정확한 위치도 찾기 어렵다. 아군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적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흰둥이라면 구별할 수 있어.’ 냄새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대규모라면 효과가 없겠지만 이런 중소규모에 게릴라 전투에서는 자신의 능력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흰둥이 역시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지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신없이 뛰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주변의 지형을 기억해야 한다. 나중에 전부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니까. 거침없이 달려나가던 흰둥이가 움직임을 멈춘 것은 바로 그때. “왕!” “여기는 어디야? 도, 도착했어?” “왕! 왕!” 눈앞에 보인 것은 가면을 쓴 남자였다. < 719화 알프스(4) > ‘제기랄….’ 언제나 전투는 갑작스럽다. ‘들어올 거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갑작스럽게 일이 터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퇴각 명령은 없는 건가?’ 같은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물론 이 장소를 사수하려고 하는 이유 정도는 알고 있다. “노을빛의 검사.” 악마에 의해 타락해 숨이 끊어진 영웅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말 그대로 숨이 끊어진 영웅의 시체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다시 한번 싸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헛웃음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전술적 가치가 없는 지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병력을 뒤로 물린다면 충분히 전선을 유지할 수 있다. 굳이 이 장소에서 적들과 부딪쳐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손해가 막심하지 않을까. 대륙의 기준으로 네임드라고 판단하고 있는 상위 모험가들 다수를 잃을 수는 없지 않은가. 노을빛의 검사는…. “살아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잖아.”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자욱한 안개를 뚫고 들어오는 썩은 냄새 때문에 제대로 숨도 쉬기 힘들 지경이다. 그 참혹한 광경을 보고 어떻게 영웅이 되살아날 거라는 희망을 품을 수가 있겠는가. 지휘부에게 항상 지지를 보내고 있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이 판단이 맞는 건지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지휘부에서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닐까. 이기영 대륙 보호 관리 위원장을 잃은 현재의 머리가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몸을 빼라는 목소리를 계속해서 기다렸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본격적인 전투를 위한 명령이 떨어진다. “제기랄 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도 않는데….” “싸우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싸운다.” “본대 쪽으로 이동하는 거요?” “아니. 우리 파티는 본대와 합류하지 않는다.” “뒈지기 딱 좋네. 칼 밥 먹고 사는 입장에서 언제든지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일어서지도 못하는 시체를 지키기 위해 죽는 건 사양이었다고. 대장.”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명령이 떨어지면 수행하는 것. 그게 우리 임무다. 다른 말은 필요 없어.” “지금의 지휘부를 믿을 수 있다고?” “…….”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하는 소리라고. 회색빛의 용사와 검은백조 길드 마스터, 그리고 파란 길드마스터 대리도 있지. 내로라하는 대륙의 네임드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이런 곳에서 개죽음당할 사람들이 아니야.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다.” “누구를.” “명예추기경.” “…….” “…….” “회색빛의 용사가 명예추기경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었다. 간부들은 알고 있는 이야기야.” “…….” “그게 정말이요?” “그래. 그러니 믿고 싸운다. 그분을 믿지 않으면 더 이상 대륙에 희망 따위는 없어.” “…….” “파티원들은 전투 준비. 진입한다.” 만약 정말로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 ‘이건 할 수밖에 없잖아.’ 명예추기경의 말이라면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말이 거짓일 가능성도 있다. 어째서 지휘부에서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인지 이해가 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륙의 성자, 베니고어의 아들, 빛의 수호자,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목소리를 믿는 것이다. 괜스레 투구를 매만지며 방패를 고쳐 잡았을 때였다. “전투준비!” 앞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것. “화살!” “쏘지 마! 쏘지 마! 아군이다. 아군이야!” “멈춰! 제기랄!” 안개를 뚫고 나온 인형은 작은 키의 여자였다. 본적이 있다.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알프스?” 파란길드에 가입한 신입 길드원. 성검 후보자로 이름을 알린 모험가였고 테이머라는 직업을 유행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본인이 테이머라는 것을 증명하듯 옆에 강아지와 함께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파란 길드라고는 해도 신입은 신입, 갑작스러운 전투에 겁을 집어먹고 전장에서 이탈했을 가능성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겁을 집어먹은 얼굴은 아니다. 얼굴에 공포심은 없다.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 “당신은….” “도와주세요.” “네?” “길드마스터가 있는 곳까지 가야 해요. 도와주세요.” “지금 무슨….” “자세히 말씀드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요. 하지만 지금 가야 해요.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대장?” “…….” “부탁드려요.” “대장?” “임무를 변경한다. 지금부터 파란길드의 신입을 포인트로 데려간다. 최대한 빠르게.” “그래도 되는 거… 젠장. 갑시다. 가는 게 좋을 것 같으니. 이유는.” “메시지를 받았어요.” “충분하군.” 누구에게 무엇을 받았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장을 비롯한 파티원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 역시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눈동자에 확신이 보였던 탓이다. “움직인다.” 안개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렵기도 하고 혼란스러운 전장이라 난관이 예상되기는 하지만…. “길은 제가 안내할게요.” 뛰어나가는 강아지를 보고서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파란 길드는 파란 길드라는 건가?’ 잠깐이나마 그녀를 애송이로 판단했다는 게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검을 들고 뛰쳐나가는 모습에 망설임은 없었다. 강아지를 따라간다는 게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눈앞에 있는 신입은 포인트까지 닿을 장소를 확실하게 안내하고 있었다. “전투는 많아야 두 번이에요.” “확인했다. 전투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30초 뒤에요. 앞쪽에서 접근하고 있어요.”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도대체 파란 길드에서는 신입 길드원을 어떻게 교육시키는 거지?’ 엄밀히 말해 노련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강해.’ 단순히 무력의 의미가 아니다. 정신적으로도 강하고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 제대로 알고 있다. 보통의 뉴비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누구나 그렇다. 자신 역시 그랬다. 뉴비들은 흥분하거나 긴장하거나 둘 중 하나다. 전투에 취해 제대로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고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여유 같은 건 없다. 혹은 너무 떨어 1인분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현재의 길드들이 경력 있는 신입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러한 이유가 아니었던가. 최소 10번 이상의 원정을 마쳐야 비로소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파티에 녹아들 수 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애송이는…. ‘정말 애송이가 맞는 건가?’ 침착하다.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뭔지 알고 있고, 본인의 한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이미 파티와 완전히 녹아들고 있다. 적들만 살피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파티를 둘러보고 있다. 현재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기회가 나면 곧바로 검을 뽑고 달려들어 가고 방해가 될 것 같으면 움직임을 보조한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왕!” 사제를 방불케 하는 버프. 더 민첩해지고 더 강해진다. “조심!” “고… 고맙다.” “아니에요. 다음은 피해 갈게요. 왼쪽으로 돌아갈게요.” “파란의 신입을 중심으로.” “확인했습니다. 대장.” 계속해서 방향을 바꾸고 있으니 파티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점점 목표와 근접하고 있다는 것. 난전이 된 전장에서 이런 식으로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방팔방에서 굉음과 폭음이 들려오는 와중에도 이상하리만큼 이 파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방패 들어욧!” “방패! 방패!” 거대한 빛이 떨어지면 곧바로 모여 방진을 구성하고. “전진! 전진! 얼마 안 남았어요! 전진! 움직여요!” “알겠다.” “앞에 셋 있어요! 전투….” “2번대가 마크한다. 1번대는 계속 전진해!” “확인!” “살아남아라! 새끼들아!” “뭔 난리인지는 모르겠는데. 잘 다녀와라! 새끼들아!” 파티를 분리해 나아가기도 한다. 상위 모험가에 이름표를 올린 이후로 숨이 찬다고 느낀 적은 많지 않았지만 체력적으로도 점점 한계에 다다른 시점. “으아아아아!” “전진! 전진! 움직여! 시발! 움직여! 멈추지 마! 멈추지 말고 움직여!” “대장! 지원 요청은 하고 있어?” “붉은 용병이 길을 열어줄 거다. 애송이?” “왕!” “확인됐어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곧바로 달려나가는 파란길드 신입의 두 손에는 희미한 빛이 서려 있다. 저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들이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붉은 용병 길드가 열어준 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쓰러진 영웅이다. “방패 들어! 버텨! 버틴다! 무조건 버텨!” “물러서지 마! 새끼들아! 버텨!” “아아아아아아아악!” “위치 사수해! 위치 사수해!” 계속해서 떨어지는 이질적인 빛을 방패로 받아내는 와중에도 시선은 후방에 고정된다. 안개가 점점 걷히며 현재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에 보인다. 노을빛의 영웅을 중심으로 완전히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이거 전부 다 뒈지는 건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새끼야! 버텨! 일어날 거다! 일어날 거야!” ‘일어나?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파란 길드의 신입이 노을빛의 검사에게 손을 가져다 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일… 일….” “…….” “일어나라!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버텨! 새끼들아! 뒤쪽 신경 쓰지 말고 버티라고!”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지니!” “뒤에서 지금….” “신경 쓰지 말고 버티라고! 저쪽에는 못 닿게 해! 마법사들은 방어 마법 계속 유지해! 새끼들아! 유지해!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유지해! 새끼들아!” ‘제기랄 진짜 다 죽는 건가?’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지니!” 파란 길드의 신입이 갑자기 무슨 주문을 외우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저게 일어나지 않으면 여기 있는 이들은 몰살이다. 전멸이다. 대륙의 희망은 없어질 거다. “일어나! 제기랄! 일어나! 노을빛의 검사!”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그리하면 내게… 흐윽… 네게 미래를 선물할지니!” “일어나아!!”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일어나거라! 알타누스으… 흐윽… 영웅이여!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일어나거라! 영웅이여! 그리하면… 그리하면 그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제기랄… 제길!”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일어나 네 미래를 스스로의 손으로 쟁취하라! 일어나라!!” 반응이 없다. 파란길드의 애송이가 계속해서 희미한 빛을 노을빛의 검사에게 전달하며 절규하듯 외치고 있었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이제 끝인가?’ 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였다. * * * “빙고.” < 719화 알프스(4) > ‘제기랄….’ 언제나 전투는 갑작스럽다. ‘들어올 거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갑작스럽게 일이 터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퇴각 명령은 없는 건가?’ 같은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물론 이 장소를 사수하려고 하는 이유 정도는 알고 있다. “노을빛의 검사.” 악마에 의해 타락해 숨이 끊어진 영웅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말 그대로 숨이 끊어진 영웅의 시체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다시 한번 싸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헛웃음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전술적 가치가 없는 지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병력을 뒤로 물린다면 충분히 전선을 유지할 수 있다. 굳이 이 장소에서 적들과 부딪쳐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손해가 막심하지 않을까. 대륙의 기준으로 네임드라고 판단하고 있는 상위 모험가들 다수를 잃을 수는 없지 않은가. 노을빛의 검사는…. “살아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잖아.”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자욱한 안개를 뚫고 들어오는 썩은 냄새 때문에 제대로 숨도 쉬기 힘들 지경이다. 그 참혹한 광경을 보고 어떻게 영웅이 되살아날 거라는 희망을 품을 수가 있겠는가. 지휘부에게 항상 지지를 보내고 있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이 판단이 맞는 건지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지휘부에서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닐까. 이기영 대륙 보호 관리 위원장을 잃은 현재의 머리가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몸을 빼라는 목소리를 계속해서 기다렸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본격적인 전투를 위한 명령이 떨어진다. “제기랄 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도 않는데….” “싸우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싸운다.” “본대 쪽으로 이동하는 거요?” “아니. 우리 파티는 본대와 합류하지 않는다.” “뒈지기 딱 좋네. 칼 밥 먹고 사는 입장에서 언제든지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일어서지도 못하는 시체를 지키기 위해 죽는 건 사양이었다고. 대장.”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명령이 떨어지면 수행하는 것. 그게 우리 임무다. 다른 말은 필요 없어.” “지금의 지휘부를 믿을 수 있다고?” “…….”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하는 소리라고. 회색빛의 용사와 검은백조 길드 마스터, 그리고 파란 길드마스터 대리도 있지. 내로라하는 대륙의 네임드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이런 곳에서 개죽음당할 사람들이 아니야.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다.” “누구를.” “명예추기경.” “…….” “…….” “회색빛의 용사가 명예추기경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었다. 간부들은 알고 있는 이야기야.” “…….” “그게 정말이요?” “그래. 그러니 믿고 싸운다. 그분을 믿지 않으면 더 이상 대륙에 희망 따위는 없어.” “…….” “파티원들은 전투 준비. 진입한다.” 만약 정말로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 ‘이건 할 수밖에 없잖아.’ 명예추기경의 말이라면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말이 거짓일 가능성도 있다. 어째서 지휘부에서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인지 이해가 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륙의 성자, 베니고어의 아들, 빛의 수호자,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목소리를 믿는 것이다. 괜스레 투구를 매만지며 방패를 고쳐 잡았을 때였다. “전투준비!” 앞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것. “화살!” “쏘지 마! 쏘지 마! 아군이다. 아군이야!” “멈춰! 제기랄!” 안개를 뚫고 나온 인형은 작은 키의 여자였다. 본적이 있다.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알프스?” 파란길드에 가입한 신입 길드원. 성검 후보자로 이름을 알린 모험가였고 테이머라는 직업을 유행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본인이 테이머라는 것을 증명하듯 옆에 강아지와 함께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파란 길드라고는 해도 신입은 신입, 갑작스러운 전투에 겁을 집어먹고 전장에서 이탈했을 가능성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겁을 집어먹은 얼굴은 아니다. 얼굴에 공포심은 없다.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 “당신은….” “도와주세요.” “네?” “길드마스터가 있는 곳까지 가야 해요. 도와주세요.” “지금 무슨….” “자세히 말씀드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요. 하지만 지금 가야 해요.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대장?” “…….” “부탁드려요.” “대장?” “임무를 변경한다. 지금부터 파란길드의 신입을 포인트로 데려간다. 최대한 빠르게.” “그래도 되는 거… 젠장. 갑시다. 가는 게 좋을 것 같으니. 이유는.” “메시지를 받았어요.” “충분하군.” 누구에게 무엇을 받았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장을 비롯한 파티원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 역시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눈동자에 확신이 보였던 탓이다. “움직인다.” 안개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렵기도 하고 혼란스러운 전장이라 난관이 예상되기는 하지만…. “길은 제가 안내할게요.” 뛰어나가는 강아지를 보고서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파란 길드는 파란 길드라는 건가?’ 잠깐이나마 그녀를 애송이로 판단했다는 게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검을 들고 뛰쳐나가는 모습에 망설임은 없었다. 강아지를 따라간다는 게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눈앞에 있는 신입은 포인트까지 닿을 장소를 확실하게 안내하고 있었다. “전투는 많아야 두 번이에요.” “확인했다. 전투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30초 뒤에요. 앞쪽에서 접근하고 있어요.”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도대체 파란 길드에서는 신입 길드원을 어떻게 교육시키는 거지?’ 엄밀히 말해 노련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강해.’ 단순히 무력의 의미가 아니다. 정신적으로도 강하고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 제대로 알고 있다. 보통의 뉴비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누구나 그렇다. 자신 역시 그랬다. 뉴비들은 흥분하거나 긴장하거나 둘 중 하나다. 전투에 취해 제대로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고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여유 같은 건 없다. 혹은 너무 떨어 1인분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현재의 길드들이 경력 있는 신입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러한 이유가 아니었던가. 최소 10번 이상의 원정을 마쳐야 비로소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파티에 녹아들 수 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애송이는…. ‘정말 애송이가 맞는 건가?’ 침착하다.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뭔지 알고 있고, 본인의 한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이미 파티와 완전히 녹아들고 있다. 적들만 살피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파티를 둘러보고 있다. 현재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기회가 나면 곧바로 검을 뽑고 달려들어 가고 방해가 될 것 같으면 움직임을 보조한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왕!” 사제를 방불케 하는 버프. 더 민첩해지고 더 강해진다. “조심!” “고… 고맙다.” “아니에요. 다음은 피해 갈게요. 왼쪽으로 돌아갈게요.” “파란의 신입을 중심으로.” “확인했습니다. 대장.” 계속해서 방향을 바꾸고 있으니 파티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점점 목표와 근접하고 있다는 것. 난전이 된 전장에서 이런 식으로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방팔방에서 굉음과 폭음이 들려오는 와중에도 이상하리만큼 이 파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방패 들어욧!” “방패! 방패!” 거대한 빛이 떨어지면 곧바로 모여 방진을 구성하고. “전진! 전진! 얼마 안 남았어요! 전진! 움직여요!” “알겠다.” “앞에 셋 있어요! 전투….” “2번대가 마크한다. 1번대는 계속 전진해!” “확인!” “살아남아라! 새끼들아!” “뭔 난리인지는 모르겠는데. 잘 다녀와라! 새끼들아!” 파티를 분리해 나아가기도 한다. 상위 모험가에 이름표를 올린 이후로 숨이 찬다고 느낀 적은 많지 않았지만 체력적으로도 점점 한계에 다다른 시점. “으아아아아!” “전진! 전진! 움직여! 시발! 움직여! 멈추지 마! 멈추지 말고 움직여!” “대장! 지원 요청은 하고 있어?” “붉은 용병이 길을 열어줄 거다. 애송이?” “왕!” “확인됐어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곧바로 달려나가는 파란길드 신입의 두 손에는 희미한 빛이 서려 있다. 저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들이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붉은 용병 길드가 열어준 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쓰러진 영웅이다. “방패 들어! 버텨! 버틴다! 무조건 버텨!” “물러서지 마! 새끼들아! 버텨!” “아아아아아아아악!” “위치 사수해! 위치 사수해!” 계속해서 떨어지는 이질적인 빛을 방패로 받아내는 와중에도 시선은 후방에 고정된다. 안개가 점점 걷히며 현재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에 보인다. 노을빛의 영웅을 중심으로 완전히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이거 전부 다 뒈지는 건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새끼야! 버텨! 일어날 거다! 일어날 거야!” ‘일어나?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파란 길드의 신입이 노을빛의 검사에게 손을 가져다 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일… 일….” “…….” “일어나라!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버텨! 새끼들아! 뒤쪽 신경 쓰지 말고 버티라고!”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지니!” “뒤에서 지금….” “신경 쓰지 말고 버티라고! 저쪽에는 못 닿게 해! 마법사들은 방어 마법 계속 유지해! 새끼들아! 유지해!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유지해! 새끼들아!” ‘제기랄 진짜 다 죽는 건가?’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지니!” 파란 길드의 신입이 갑자기 무슨 주문을 외우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저게 일어나지 않으면 여기 있는 이들은 몰살이다. 전멸이다. 대륙의 희망은 없어질 거다. “일어나! 제기랄! 일어나! 노을빛의 검사!”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그리하면 내게… 흐윽… 네게 미래를 선물할지니!” “일어나아!!”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일어나거라! 알타누스으… 흐윽… 영웅이여!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일어나거라! 영웅이여! 그리하면… 그리하면 그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제기랄… 제길!”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일어나 네 미래를 스스로의 손으로 쟁취하라! 일어나라!!” 반응이 없다. 파란길드의 애송이가 계속해서 희미한 빛을 노을빛의 검사에게 전달하며 절규하듯 외치고 있었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이제 끝인가?’ 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였다. * * * “빙고.” < 720화 믿고 있었다고(1) > “일어날 수 있을 거야.” ‘무조건 일어나야지.’ -버텨! 새끼들아! 위치 사수해! 상황은 최악이라고 할 만했다. 누가 보기에도 인류에게 희망은 없어 보이는 상황이었다.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완전히 포위된 형국에서 천천히 좁혀오는 천사들과 그들에게 저항하고 있는 인류는 눈물이 다 나올 정도로 숭고하지 않은가. 영웅의 귀환으로 이것보다 적절한 타이밍이 있을 리가 없다. 계기도 있었고 준비도 충분했다. 불안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바 불안요소는 무슨 불안요소야. 안 일어나면 끝이야.’ 퀘스트를 계속해서 보내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 알프스가 와주지 않았다면 김현성에게 퀘스트를 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놈은 분명히 목소리에 반응하고 있다. 계속해서 요동치는 마력이 그 증거였다. 분명히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확신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영차, 영차를 외치고 싶었지만 그런 농담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가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여기서 일어나지 않으면 끝이다. 내 입장에서는 마지막으로 던져본 주사위였다. ‘아냐. 그런 가정은 하지 말자. 분명히 일어날 테니까.’ 깨어날 것이다. 미래는 변하지 않았다. 카스가노 유노는 아직도 미래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같은 그림을 보고 있었고 그것은 즉 김현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 김현성은 다시 부활해 이기영의 배때기에 칼을 쑤셔 박을 거고 종국에는 엔딩에 함께 남을 거다. ‘가자. 현성아. 가자! 제발. 제발.’ 지금 일어나야 돼. 병력들이 점점 뒤섞이고 있다. 마법사들은 마력이 떨어져 가고 있고 사제들의 신성력이 남아 있지 않다. 병사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드는 것이 보인다. 더 이상 희망은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이곳이 자신들의 무덤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자들의 마지막 저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알프스가 메시지를 밀어 넣으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던 바로 그때였다. ‘저거.’ 어떤 기적 같은 임팩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늘에서 회색빛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녀석을 중심으로 뭔가 다른 효과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고요하다. 방금 전까지 시끄러웠던 전장이 무척 고요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대기가 가라앉고 김현성을 중심으로 한 안개가 옅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 아…. 가장 먼저 이상을 느낀 것은 김현성의 옆에 자리해 있었던 파란길드의 신입 길드원. -아…. 김현성의 몸이 꿈틀거리는 걸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멈칫 날개를 털어내고 손가락을 움직인다. 오랜 시간 동면해 있었던 짐승처럼 검은색 형태의 영웅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인다.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비상식적인 광경처럼 보인다. 절대로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던 모습이었다. 심지어 지금도 움직이고 있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보여지는 광경이 비상식적이다. ‘정말로 살아났어?’ 믿고 있었다고. 젠장. 고래고래 일어나라 소리를 질렀던 주위 역시 조용해지기는 마찬가지. 방패로 쏟아지는 공격을 막고 있는 이도,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 보내고 있었던 궁수도, 캐스팅을 외우고 있었던 마법사도, 하나둘 뒤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모두 상위에 자리를 잡은 모험가들이다. 뭔가 상황이 달라졌다는 걸 인지하지 못할 리가 없다.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무언가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고 있는 걸 바라보고 있다. 대열을 유지하고 있던 병사 하나가 눈을 비비며 입을 여는 것이 보인다. -진짜로… 진짜로 되살아났어. -정말로 되살아났다고… 하… 하핫. -길, 길드… 마스터? -노을빛의 검사다. 노을빛의 검사가 부활했어. 믿고 있었다고 젠장! ‘뭘 믿어. 이 새끼들아.’ 분명히 절망으로 물들어가던 얼굴을 하고 있던 놈이 그 명대사를 외치는 것을 보니 당황스럽다. 하지만 나 역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나야말로 김현성을 믿고 있었다. 이대로 뒈지지 않을 거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길드마스터…. 김현성은 주변을 둘러본다. 아주 작은 고갯짓으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이내 그가 시선을 멈춘 곳은 알프스 쪽. 아직 가면이 부서진 것은 아니다. 알프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환희를 느꼈던 것도 잠시뿐이지 않을까. 어마어마한 악의와 타락한 마력, 상위에 랭크된 모험가조차 꺼리는 기운을 가장 가까이서 받아냈으니 저절로 몸이 떨리는 것이 분명하리라. 하지만 그것 역시 곧 사라지기 시작한다. 김현성은 알프스에게 적의를 보내지 않고 있다. -……. 녀석은 몸을 일으켰다. 거의 동시에 다소 당황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당황하고 있는 것 같다. -우…. 그리고 이내,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아직 이성이 없는 건가?’ 아니, 완전히 이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현성은 주변의 인간들에게 적의를 보내지 않고 있다. 최소한 피아 구분은 할 수 있는 상태까지 간 것이 틀림없다. 뭐가 김현성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미… 미래. 어눌한 발음, 완전히 갈라진 목소리, 무슨 뜻인지 알고서 말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녀석은 똑똑히 그 단어를 중얼거렸다. ‘그래 현성아. 시바. 그거야. 미래. 미래라고.’ -미래. ‘미래로 가자. 미래로 가는 거야. 알프스야 뭐하니 한마디 거들어야지.’ -네… 네. 길드마스터. 나아갈 수 있어요. -미래… 미… 미래. -네. 흐윽… 네. 미래예요. 미래요. -미래…. 김현성이 커다란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내 입장에서도 입을 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도미니온스 귀환해. 병력을 뒤로 물린다.” 조혜진과 몸을 부딪치고 있는 도미니온스에게는 메시지를 보내놓자. 외신 측의 입장에서는 병력을 뒤로 물리는 게 최선이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아니나 다를까 김현성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육중한 날개를 펼쳐 순식간에 쏘아져 나간다. 손톱을 한 번 휘두르자 인류를 둘러싸고 있는 천사들의 몸이 찢겨 나간다. -……. 소리 없는 절규를 내보내며 계속해서 하얀색 날개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몸을 찢어발기고 있다. 영광스러운 순간이었고 숭고한 순간이어야 했다. 하지만 김현성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 조금 비참하게 보이기도 했다. 물론 죽을 위기에 처한 이들의 눈에는 김현성이 어딘가의 신으로 보일 것이다. 형태가 어떻든, 뿜어내는 기운이 어떻든 간에, 녀석은 영웅이었으니까. 주관적인 렌즈를 빼고 보면 녀석의 등장은 충분히 히어로다웠다. -저게…. -믿겨지지 않는군. 다 쓸어버려라. 그래. 하핫. -노을빛의 검사. -정말로 부활했어. 정말로… 부활한 거야. 하하하하핫! 살았어! 시발 살았다고! -아직… 아직 희망이 있는 건가. 베니고어 님께서는 아직 우리를 버리시지 않은 건가. -명예추기경님의 예언 그대로다. 신의 아들의 말대로야. 순수한 무력에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는 이들도, 이상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이들도, 당장은 김현성에게 환호를 보낸다. 죽음에서 돌아온 영웅을 축복하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다. 관계자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다. 갑작스럽게 싸울 상대를 잃은 조혜진은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길드마스터? 김현성이 되살아났다는 걸 느끼기라도 한 건지 허겁지겁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한참을 달리다 이내 격전을 벌이고 있는 김현성을 바라보고 다시 한번 몸을 움직인다. -길드마스터. 흐윽… 길드마스터. ‘그래, 혜진아. 네가 고생이 많다.’ 조혜진은 저 광경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 기쁠 것이다. 상태가 어찌 됐든 간에 김현성이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하나, 그 사실 하나가 지금의 상황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형. 해낸 것 같아요. 열심히 임무를 완수해 준 우리 조연 라파엘의 표정은 읽기 힘들었지만 부정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네가 컸지. 진짜.’ 김현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퍼즐이었다. 라파엘을 육체를 끊임없이 재생시켰던 회색빛이 김현성의 몸에도 유효하다. 아마 라파엘이 아니었다면 정신이 깨어난다고 하더라고 몸을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쟤한테는 나중에 상여금이라도 두둑이 챙겨줘야지. 박연주나, 최영기 같은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저 적들이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전투가 마무리되는 것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천사들은 병력을 뒤로 물리고 있었고 안개가 걷힌다. 천천히 걷히는 안개 사이로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만 같은 빛이 쏟아져 내려온다. 자연이 만든 빛은 가장 타락한 영웅의 모습을 비춘다. 전투를 끝내고 홀로 폐허가 된 공간에 올라 뭔지 모를 소리를 지껄이는 타락한 영웅의 모습을 비춘다. 그 모습은 슬퍼 보이기도 했지만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해 보여 나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볼만하네요.” “왔어?” “아까 전부터 와 있었어요. 귀환 명령 듣고 바로 움직였죠. 왜요? 내가 너무 빨리 왔나? 조금 더 감상하고 싶어요?” “아니야.” “근데… 이거 뭐라고 보고해야 되나?” “뭐 따로 보고할 내용이 있어? 이건 우리가 낸 사고가 아니라 세라핌이 낸 사고야. 타락한 영웅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건 그 새끼인데 우리가 뭐 책임질 일이 있어? 오히려 좋은 기회지. 물어뜯을 수 있는 거리를 마련한 거니까. 압박하는 건 우리 포지션이지 걔 포지션이 아니야.”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나저나 인간은 신기하다니까. 저렇게 환호를 보낼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혹시라도 김현성이 자기들을 공격하면 어떻게 될 줄 알고… 조금이나마 정신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저쪽의 병력도 반 이상은 사라졌을 거예요. 아니, 정신이 남아 있다고 하기에도 뭣 한가? 지금 저걸 움직이는 건 분노와 적의 같거든.” “뭐든 상관없어 움직이게 되면 그걸로 땡큐지 뭐. 되돌리는 거야 천천히 생각하면 돼. 오히려 커다란 성과라니까.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퍼즐이 어떻게 맞아떨어지는지.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어련하시겠어요? 그래서 그런지 진짜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네요.” “누구. 나?” “그럼 누구겠어요? 하긴 나라도 기분 좋겠네. 상장 폐지된 줄 알았던 게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으니 얼마나 기분 좋겠어? 정신 나간 얼굴 하고 있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 “어떻게. 그때는 진짜 대륙이고 나발이고 전부 다 끝내고 손절 하려고 했었던 거 맞아요? 오빠도 참 웃기 다니까.” “…….” “어때요? 내가 오길 잘했지? 만약에 안 왔으면 조금 달라졌을까?” “뭐… 그거야 나도 모르지. 뭐 일어나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그래? 다른 이야기 좀 해봐. 우리 혜진이는 조금 괜찮아 보여?” “글쎄요.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나도 모르게 꽉 안아주고 싶었다니까. 그냥 눈 한 번 감고 메시지라도 한번 날려 봐요. 아니면 내가 한번 해볼까?” “안 그래도 의심받을 만한 상황인데, 어떻게 그렇게 해.” “그건 그렇기는 한데… 에이… 이건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네요. 아무튼 돌아가죠. 너무 늦으면 또 의심받을 수도 있으니….” “…….” “…….” “그보다 누나….” “왜요?” “계속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뭔데요?” “그 몸은 어때?” 눈앞에 있는 도미니온스가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끝내주네요.” 정말로 쓰레기 같은 표정으로 말이다. < 721화 믿고 있었다고(2) > ‘누나도 참 누나야.’ 단언컨대 가장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이라 말 할 만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도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어느 정도 능력이 있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지혜는 내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었다. 적어도 튜토리얼에서 나와 파란길드로 향할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마음의 눈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나와는 다르게 이지혜는 정말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채로 2회 차를 시작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그때는 몰랐었지.’ 지루한 표현이지만 발톱을 숨기고 있었다는 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리라. 그 말 그대로, 이지혜는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걸 전부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원래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몇 가지 숨기는 게 있기는 했지만 누나 같은 경우에는 정도가 조금 더 심했다. 주사위를 함부로 던지지 않은 것만 봐도 쉽게 유추할 수 있지 않은가. 이유 역시 뻔하다. 지혜 누나가 자신의 능력을 전부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아마…. ‘본인이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으니까.’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리라. 지금이야 그녀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이 수도 없이 많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계속해서 부풀리고 덩치를 키우는 나와는 반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째서 그녀가 가면의 구세주와 함께 인류를 구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던 시점이었다. 아니, 태초부터 가면의 구세주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저 표정은 아주 많이 쓰레기 같았지만…. ‘저 정도는 해줬으니까 가면의 영웅이라고 할 만하지 않았겠어?’ 이지혜가 없었다면 손과 발이 잘린 느낌이었으리라. “뭐예요? 왜 사람을 그렇게 봐요? 이제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감이 잡혀요?” “원래 누나는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 이야기하고 그래? 우리 영혼의 단짝이잖아. 소울메이트고 혼이 이어진 파트너잖어. 원래 나한테는 누나밖에 없었다니까.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듣기 좋은 아부 해주는 건 고맙기는 한데 별로 와닿지가 않네요. 표정이 정말 쓰레기 같아 보이거든요. 뭐 빼먹을 거 없나 머리 굴리고 있는 얼굴이라고요. 뭐 그래도 나쁘지는 않네요.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고 있는 것 같고….” “그렇지.” “이래서 능력이 있어야 한다니까.” “그나저나 누나. 그거 괜찮은 거긴 해? 도미니온스는? 아직 남아 있는 거 아니야?” “아직 남아 있기는 하지만 거의 죽여 놨어요. 아, 진짜로 죽여 놨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최근에는 조금 얌전해지고 있다니까요. 슬슬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순종적으로 변하고 있으면서도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기는 한데… 그게 관심 좀 가져달라는 거 같기도 하고 뭐 아마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얘도 의외로 귀엽다니까.” “…….” “자세히 알고 싶어요?” “아니… 굳이….”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로노베를 이용해 꿈속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은 아니다. 중요한 건 이지혜와 로노베가 함께 도미니온스의 머리로 들어와 있다는 결과였으니까. 둘이 도미니온스를 압박하고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 것이 아닌가. 심지어 도미니온스가 순종적으로 변하고 있단다. 굳이 다른 코멘트가 필요할 리가 없다. ‘수완도 좋아요.’ 누나의 말처럼 누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끝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김현성이 깨어날 거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그 확신에 무게를 싣기 힘든 상황이 아니었던가. 로노베는 김현성이 아직 육체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메시지를 보내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나를 대신해 카스가노 유노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아군이 생겨났다는 것이 아닐까. 쓰로누스가 내게 지지를 보내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녀석 하나로는 약한 감이 있었으니까. 아니, 솔직히 이 무능한 새끼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차라리 없는 게 더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지혜 누나 덕분에 작업을 치는 것이 수월해졌다는 것은 굳이 언급한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방향에서 의심을 받고 있는 만큼 그녀의 지지에는 힘이 실린다. “그래서… 계속 계획대로 진행하는 거 맞죠?” “물론. 왜?” “아니, 빨리 내 몸으로 돌아가고 싶으니까 그렇죠. 연수한테 부탁하고 오기는 했는데 직접 하지 않으면 성에 안 차요. 관리할 게 얼마나 많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손톱이라도 바꾸고 올걸. 엄청 촌스러운 파란색으로 칠한 거 있죠? 제기랄 맞아요. 그 보노보노 색깔이요. 얘가 나를 엿 먹이려고 하는 게 분명하다니까. 짜증 나 정말.” “어차피 누나 자고 있잖아.” “인간 이지혜가 어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줄 알아요? 오빠같이 태생적으로 피부 탱탱하고 반들반들한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끊임없는 관리와 작은 관심이 지금의 이지혜를 만든 거라고요. 진짜 짜증 나네. 자기는 먹어도 살 안 찐다는 개소리 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거 알죠? 그렇게 바쁜 상황에서도 관리는 매일매일 했었는데… 엄청 신경 쓰인다고요. 진짜.” “…….” “이번 일만 끝나면 진짜 몇 달은….” “…….” “…….” “병력 수습 됐네. 돌아가자. 누나. 저쪽도 거의 수습 된 것 같고.” “그렇네요. 김현성은 일단….” “응. 저대로 놔둘 거야.”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말을 돌리자 이지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시야에 비쳤다. 본인 말을 끊은게 마음에 들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그녀 역시 슬슬 물러설 타이밍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다. 살짝 눈을 돌리자 돌리자 김현성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병력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투는 마무리 지어졌고 김현성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모인 병력들은 그런 김현성을 조심스레 응시하는 도중, 일단 적의는 보이고 있지 않으니 조금 멀리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그 와중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조혜진도 시야에 비친다. 라파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무슨 말을 주고받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재 김현성의 상태가 어떤지, 정말로 건강한 것이 맞는지, 그리고 되돌아올 수 있는지. 조금 초조해 보이기는 했지만 불안감보다는 기쁨이 더욱더 크다는 게 느껴진다. 일단 되살아났다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올 방법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는 게 분명하리라. 이제 인류는 새로운 숙제를 떠안았다. 살리는 것에 성공했으니 다음 퀘스트는 뻔하지 않은가. 노을빛의 검사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린다. 아마 최우선 사항으로 생각되지 않을까. 나는 녀석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현시점에서 배때기 엔딩까지 가는 길목에 있는 것들이 확실히 보이지 않는 만큼 최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둬야 했다. “조금 씁쓸하기는 해요?” “조금은. 걱정되기도 하고 그러네. 다들 잘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뭐 혜진이가 알아서 해주겠지. 매뉴얼은 놓고 왔으니까. 하는 거 보니까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무 부담 주는 것도 안 좋은 것 같지만… 사랑하는 내 님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진짜 좋아하는 것 같네요. 가망이 없는지도 모르고.” “가망이 왜 없어?”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나? 쟤네는 가망 없다니까. 이지후, 이기연이나 잊지 마요. 절대로 저 둘이 이어질 일 없어.” “누나야말로 잊지 마. 누가 이기는지 보자고.” “기대되네요.” “나도 마찬가지야.” 쓸데없는 농담 따먹기를 지속할 정도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기는 했지만 일단은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곧바로 날개를 펼치자 어색하게나마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이지혜, 아니, 도미니온스 역시 마찬가지다. 조금씩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니 슬슬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사대천사들에게 도미니온스가 이지혜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는 것이 첫 번째였으니 저렇게 감정을 잡을 만도 하다. 그나마 남아 있던 이지혜의 얼굴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을 느낄 법도 한데 이지혜는 긴장한 구석도 없다. 오히려 재미있어 하는 것 같은 모습에 웃음을 참기가 힘들다. “조금 있으면 도착할 겁니다. 이기영 님.” “네. 도미니온스 님.” 북쪽으로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자 거대한 신전이 시야에 비친다.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처음 보는 양식의 건축물이다.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익숙해지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보면 훌륭해 보이기는 했지만 별다른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어차피 부서질 신전인데 뭐.’ 어차피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건축물이다. 조금 더 앞으로 몸을 옮기자 익숙한 인형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쪽을 초조하게 바라보는 무능력 비둘기, 쓰로누스. 당연하지만 무사히 귀환해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 개새끼 진짜.’ 내가 밖으로 나가는 걸 반대하는 데 한 표를 던진 새끼. 아니나 다를까 허겁지겁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물론 놈이 내 안부를 묻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일어났으니까. 천천히 신전에 착륙한 도미니온스는 쓰로누스가 내게 다가오기 전에 앞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별일은 없….” “타락한 검이 되살아났습니다.” “뭐?” “타락한 검이 되살아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회의를 소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쓰로누스.” “도미니온스. 그게….” “두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쓰로누스. 타락한 검이 되살아났다고.” ‘지혜 누나. 메소드 연기. 시바.’ “세라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죠. 여기서 압박해야죠. 그 새끼 잘못이죠?’ “한번 알아보겠다.” ‘그 와중에 이 무능력한 새끼는 세라핌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네. 넌, 시바, 할 줄 아는 게 뭐야?’ “죄의 심판을 타락한 검에게 사용한 것이 확실합니까?” “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의 죽음을 직접 확인해 본 것이 맞습니까?” “그건….” “쓰로누스.” “…….” “당신이 확인했어야 하는 일입니다.” “…….” “세라핌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어떻게…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경황이 없다고는 한들, 타락한 검의 영혼이 육신을 떠난 것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다니요. 만약 오늘 정찰을 나가보지 않았다면 그가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 “내 실수다. 도미니온스.” “당신을 문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문제를 제공한 것은 세라핌입니다. 세라핌의 오만함이 문제를 일으킬 줄 알고 있었어요.” ‘다시 한번 그렇죠? 그 새끼 잘못이죠.’ “도미니온스 나는….” “당신의 변명이나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일은 일어났고 이제는 수습할 방법을 찾아야 해요.” ‘지혜 누나 잘한다. 시바. 장하다. 이지혜. 비둘기들을 박살 내버리렴.’ “인류와의 전쟁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을 거라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었는데….” “…….”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노선을 확실하게 정해야 해요. 이대로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나갈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방법을 찾을 것인지 말입니다. 급한 일입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쓰로누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 새끼가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미니온스가 살짝 몸을 움직이자 이쪽에 말을 걸어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그러니까… 무슨 일은 없었느….” “그럼 갑시다. 도미니온스 님.” “네. 이기영 님.” 눈도 마주치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맞다. “없었느냐….” 빛기영 가라사대 무능력한 새끼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하셨노라. < 722화 원탁 회의(1) > ‘뭐, 잘 만들어지기는 잘 만들어졌네.’ 거대한 건축물의 외관도 외관이었지만 안쪽 역시 상당히 신비롭다. 지구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양식으로 디자인된 천장은 높고 거대하다. 커다란 기둥에는 천사들이 조각되어 있고 벽면에는 그들의 신화를 그려놓은 것 같은 그림이 눈에 띈다. 계속해서 일렁이는 그림 같은 것들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본래 종교란 게 이렇다. 베니고어 교단이나 다른 교단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압도적인 광경을 연출하는 예술품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작은 피조물로 느끼게 한다.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게 만들고 신의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게 보통이다.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쏟아지는 햇빛과 웅장한 찬송가, 드높이 떠 있는 종교적 상징과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 모든 것들이 계산되어 있다는 걸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다. 이들은 문명화되어 있다. 인간과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지만 천사들 역시 문명을 가지고 있다. ‘너무 당연한가.’ 악마들 역시 문명을 가지고 있을 진데… 무려, 대륙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들이 이런 것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을까. 대충 예상하기도 했고, 이미 몇 번의 확인 작업을 거쳤지만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들은 이성적이다. 개똥철학이지만 본인들의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대의를 위해서 움직인다. 진심으로 본인들이 하는 일이 대륙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으며 그걸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 쓸데없는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놈들이 없다고 확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는. 그래. 겉으로는 말이다. 천천히 도미니온스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자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네는 이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날아야 이동할 수 있게 설계된 공간을 향해 날개를 뻗자 조금 어색하게 몸이 위로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거대한 문이 스스로 열리자 안에 있는 황금색의 원탁이 시야에 비쳤다. 사대천사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함께 자리한 모습, 그들보다 강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이들이라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으리라. 도미니온스는 천천리 자리에 몸을 앉힌다. 쓰로누스 역시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고 나 역시 도미니온스의 옆자리에 안착했다. “회의를 소집했다고 들었다. 도미니온스.” “그렇습니다.” ‘이 누나 진짜 왜 이렇게 연기를 잘해.’ 아마 모르고 본다면 안에 이지혜가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미니온스의 성격과 말투, 사소한 행동까지 모든 것을 복사한 것만 같다. 당장 다른 이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다른 말이 필요할 리가 없다. “그렇습니다.” “오랜만이군. 네가 직접 회의를 소집한 것은 말이야.” “그리 오랜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비교적 최근에도….” 별로 쓸데없는 말을 나누는 와중에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무능력 쓰레기 비둘기 쓰로누스가 아니다. ‘케루빔.’ 붕대로 몸을 칭칭 감은 채로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는 파란색 장발. 희라 누나한테 제대로 두들겨 맞은 모양새였다. 물론 차희라 역시 몸이 성치는 않은 상태라고 들었지만…. ‘대미지를 입은 건 둘 다 마찬가지네.’ 반반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붕대를 감고 있다는 건 신성력으로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을 정도로 처맞았다는 걸 의미할 테니 아마 내 생각이 맞을 것이다. 시선에 적의는 없지만 짜증은 있다. 아무래도 내가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게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은 모양. 아니나 다를까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저 인간은 왜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냐.” “그는 인간을 벗어난 초월자입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저희와 더 가까운… 가까운 쪽입니다. 그와 함께하기로 결정했다면 그를 배재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우리 편에 서기로 결정을 내렸고 우리의 뜻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럴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저자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를 이해한다고 한들, 나는 저자가 우리와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번 등을 돌린 이는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음을 기억해라.” “그는 이전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추측과 의심만 가지고 그를 핍박하는 것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입니다. 체통을 지켜주세요. 케루빔. 당신이 인간에게 당해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이해하지만.” “…….” “그는 이제 우리에 속해 있습니다.” “말은 잘하는군. 정말로 그가 우리에 속해 있다면 어째서 그를 통제하는 것이냐. 도미니온스.” “통제가 아니라 보호입니다. 케루빔.” “난 인정할 수 없다.” ‘보통 그런 놈들이 제일 먼저 인정하게 되더라. 퍼랭아.’ “너무 심한 발언은 자제해라. 케루빔.” ‘이제 와서 보호해 주는 척하지 마. 이 무능력한 비둘기 새끼야.’ “내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이다. 쓰로누스.” “사담은 그만. 분명히 말했습니다. 케루빔. 우리는 당신의 화를 들어주려 이곳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온 세라핌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 중요한 이야기가 뭔지 궁금한데… 모두를 불러 모을 일인가?” “…….” “…….” 백금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녀석은 특유의 오만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이후,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다. 아마 습관 같은 행동이겠지. 마치 내가 허벅지를 두드리는 것과 비슷해 보여 짜증이 일어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는 여유가 있어 보이는 모습, 하지만 그 표정이 바뀌기 전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정확히 도미니온스가 말을 이은 직후였다. “타락한 검이 되살아났습니다.” “뭐?”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나는 그런 농담 별로 안 좋아해. 도미니온스.” “농담이 아닙니다. 세라핌. 그가 일어나는 걸 제 눈으로 직접 확인했고, 이번에도 많은 동지를 잃었습니다.” “…….” “네. 이번에도 말입니다. 정말로 그에게 죄의 심판을 사용한 것이 맞습니까?” “…….” 꿀 먹은 벙어리네. 이해할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다는 얼굴, 초조해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녀석의 표정은 확실히 일그러져 있었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를 상황을 상정하고 있지 않을까. 김현성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부터, 어쩌면 본인에 능력에 대해 의심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확률은 적다. 녀석만 입을 다물게 된 것이 아니다. 미리 이야기를 들었던 무능력 쓰레기는 담담하게 도미니온스의 말에 경청하고 있었지만 케루빔을 비롯한 다른 원로천사들의 얼굴은 누가 보기에도 심각해 보였다. “허허… 어떻게 이런 일이….” “그 말이 정말입니까?” “네. 어떤 이유와 경위로 그가 몸을 일으키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타락한 검은 현재 살아 있습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가 아닙니다. 세라핌. 당신이 이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나는… 나는 틀림없이 그의 죄를 심판했어. 도미니온스. 그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심판에 검에 박혀 처형당했어. 살아 있을 리가 없어.” “하지만 살아 있습니다.” “그 말이 맞다면 다시 한번 그를 처형하면 그만이다. 심각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어.” “그건 당신 생각입니다. 세라핌.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신성을 사용해, 얼마나 많은 동지를 희생시킬 생각입니까? 타락한 검을 다시 한번 처형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수할 생각입니까.” ‘비둘기 새끼 아무 말도 못 하죠?’ “당신의 실수를 문책하고자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는 당신의 책임입니다. 세라핌.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는 당신의 실수였습니다.” “나는 실수 같은 건 하지 않아. 도미니온스. 분명히 우리가 놓친 게 있었을 거야. 그는 확실하게 숨을 멈췄어. 악마에게 영혼을 판 또 다른 인간이 그를 살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자가 다시 한번 악마에게 힘을 빌렸을 수도 있지.” “…….” “물론 미래에 일어날 일까지 상정하지 못한 건….” “할 말은 그것뿐입니까?” “…….” “…….” “내가 부주의했다. 사과하지.” “…….” “…….” “부디 내 사과가 성에 찼으면 좋겠지만… 내 입에서 잘못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 아니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도미니온스.” “상황이 달라졌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어떤?” “말 그대로입니다.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많은 동지를 첫 번째 전투에서 잃었고 인간들이 우리에게 생각보다 더 적대적입니다. 전투를 지속할 수는 있지만 많은 인간이 목숨을 잃을 겁니다. 물론 우리가 감당해야 할 희생 역시 늘어난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래서.” “너무 강압적으로 나가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다는 겁니다. 그들은 우리를 원망할 겁니다. 아니, 이미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감수하고 있는 일이야. 이곳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셔야 합니다. 끊임없는 성전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증오와 분노뿐 아무것도 얻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애초에 우리는 인간들의 개체 수를 조절하려고 하고 있다. 도미니온스.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원래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지 않았나. 우리는 그들에게 이해를 받고자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지금에 와서….” “그들의 이해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노선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있다 느꼈을 뿐입니다.” 아주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다시 한번 세라핌이 말을 이어왔다. “네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군.” “네. 그 말이 맞습니다.” 살짝 움찔하는 도미니온스가 눈에 보였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예상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눈치가 더 빠르다. 갑작스레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외부의 영향을 받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마 내게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뭐. 받아들여질지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입을 여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녀석이 빨리 말해보라는 듯 나를 재촉했으니까. “말해 봐라. 이기영.” “원하신다니…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인간을 사랑하시고 아끼시며 인간과 대륙을 위해 노력하시고 계신 분들의 노고를….” “본론만.” “물론 그래야지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말씀을 드리기 전에 간단한 질문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 “이 일이 그만큼 급한 일입니까?” “무슨 소리지?” “이 과업이 코앞에 들이닥친 것처럼 급한 일입니까?” “…….” “인간의 위험성이라면 저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인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장 10년, 아니, 20년 이후에 대륙의 균형이 깨어질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네. 굳이 절반이나 되는 인간들을 가슴 아픈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일을 진행해야 하느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들의 목숨은 유한합니다. 직접적으로 말씀드리면 굳이 우리가 손을 쓰지 않아도 그들에게는 끝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과 적대시하며 우리가 가진 것을 희생하며 싸우고 있는 겁니까.” “그건 대륙을 구하기 위해.” “그러니까 왜 전쟁이라는 방법으로 답을 찾고 있는 것이냐 묻고 있는 겁니다. 세라핌님.” “…….” “…….” “재미있기는 하지만 의미가 있는 행동인지 모르겠군. 인간. 그들에게 끝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의미에서 무한하다. 끊임없이 후대를 남기고 이전에 했던 실수들을 반복하지.” “그 말이 맞습니다. 케루빔 님.”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 말에 힌트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뭐?” “…….” “후대를 남기지 못하게 하면 됩니다.” “?” “그럼 개체 수는 알아서 조절돼요.” “…….” “…….” “신성이 조금 많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이건 어떻습니까.” “…….” “그들의 욕구를 잘라버립시다.” 순식간에 장내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시스템을 바꿔.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는 거예요.” 몇몇 원로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우리가 인류의 새로운 진화에 기여하는 겁니다.” < 723화 원탁 회의(2) > “…….” “…….”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모습이었다. 몇몇 이들은 확실하게 또라이를 바라보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이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니지, 생각해 보지 않았을 리가 없지.’ 정말로 인간의 개체 수를 조절하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이렇게 합리적인 방법을 고려해 보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어떻게 봐도 평화로운 방법이다. 물론 걸리는 부분이 있기야 하지만, 극단적으로 말해 인류의 절반을 날려 버리는 것보다는 우리에게 이롭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물론 후대의 인간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지만 뭐, 크게 중요한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1차적으로. ‘어차피 전부 개소리이기도 하고.’ 2차적으로는. ‘실행된다 하더라도….’ 일이 마무리된 이후에 수습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위쪽의 높으신 분들일 테니까. 이쪽이야 적당한 떡밥을 던지고 물기를 기다리면 그만이라는 거다. 물어도 그만 안 물어도 그만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물어주는 게 더 좋을 거라는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어느 정도 피드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아직까지 무거운 얼굴을 하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비친다. ‘뭐야. 너네 진짜로 생각 안 해본 거야?’ 진짜로? 악독한 빌런 새끼들이 이 쉬운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잠깐 동안 자괴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아마 도덕적인 이유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이 새끼들이 나보다 도덕적 양심이 뛰어나서 고려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인간과 애초에 사고방식이 다른 게 가장 큰 원인일 것이고, 녀석들의 사고방식의 틀 안에 갇혀 있는 것 또한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거다. 녀석들이 이미 인간에 대해 규정을 내렸다. 인간이 인간답게 행동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느끼지 않는다. 인간은 그런 동물이라 이미 결론을 내린 것이다. 끝이 있는 삶을 살아가고 후대를 남기고 자신의 지식을 전하며, 끊임없이 성장하면서도, 스스로를 파괴하는, 아름다운 반딧불이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규정 안에는 아마 인간들의 욕구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굳이 또 다른 이유를 찾아보자면…. ‘예산 문제겠지, 뭐.’ 상상도 할 수 없는 예산을 때려 박아야 했을 테니 말이다. 굳이 신성으로 환산하자면 이 거대한 신전을 서너 개 정도는 때려 박아야지 개입할 수 있지 않을까. 실행하자고 해서 간단하게 실행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아직까지도 아무런 피드백이 없는 상황에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 볼 수밖에 없었다. 세라핌은 생각할 것이 많은지 입을 열 것 같지도 않다. 쓰로누스 저 무능력 비둘기는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가장 먼저 발언권을 가지는 게 부담스러운 모양새. 원로들이야 사대천사들의 코멘트 이후에 노선을 정할 거고… 바람잡이를 해줄 도미니온스가 곧바로 입을 여는 건 위험하다. 아마 가장 먼저 입을 열 비둘기는…. “절대로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퍼랭이겠지. “수도 없이 많은 차원에서,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했다. 그들이 그렇게 설계되고 진화해온 이유가 있다. 욕구를 잘라 버린다는 것은 제대로 만들어진 건축물의 뼈대를 바꾼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 어떤 부작용을 떠안을지 모른다는 위험성이 존재한다, 이 말이다.” “갑작스럽게 바꾸자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내일 아침 세상이 변하도록 두고 보자는 것이 아니에요. 변화는 급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일어날 겁니다. 한꺼번에 모든 욕구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세대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변하게 만드는 겁니다. 후대의 후대, 후대의 후대를 걸쳐 점차적으로 일을 진행하면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변화하는 것도 모른 채로 서서히 변해갈 겁니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새로운 행동 양식을 찾게 될 겁니다. 그게 진화예요. 그게 신인류입니다.” “개소리로군.” ‘개소리긴 개소리지.’ “개소리가 아닙니다.” “어떤 부작용을 떠안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다. 멍청한 인간아.” “그 부작용도 우리가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의도와 다르게 변화한다면 다시 다른 길을 열어주면 됩니다.” “종국에 그들은 자손과 후대를 남기려는 욕구를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 “시기를 정하면 되겠군요.” “발정기를 만들자는 말이나 다름없어 보이는군. 인간은 짐승이 아니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극단적인 예를 드린 것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쉽지 않은 길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케루빔 님의 생각에도 당연히 동의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 “기존의 방법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고, 결정을 내리는 것 또한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는 하나 된 과업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결정을 내리고 함께 하기로 손을 모았습니다.” “네가 생각한 일은 근본을 바꾼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전자의 선택지가 더 쉬운 길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 “아주 간단한 일이 될 겁니다. 병력들을 몰고 가 그들을 죽이고 대륙을 통제하면 되지요. 여러분들이 인간을 초월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종국에는 그 과업을 이룰 것입니다. 수많은 피와 희생으로 쌓인 탑 위에서 축배를 들겠지요.” “매번 극단적인 예를 제시하는 화법은 여전하구나.” “항상 최악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실제로 최악의 상황이 들이닥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 “다시 한번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케루빔 님의 말 그대로 제가 제안하는 길은 어려운 길이 될 겁니다. 신경 써야 할 일도 많고 수도 없이 많은 부작용을 떠안을지도 모릅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예산을 상회하는 신성을 소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피와 희생으로 얼룩진 탑 위에서 축배를 들지는 않을 겁니다.” “…….”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갈 신인류처럼 우리 역시 변화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더욱더. 긍정적인 방향으로요.” 작게 손을 벌리는 액션 정도는 취해주자. 선거 운동에 나가는 정치인처럼 힘 있고 선한 목소리를 장내에 가라앉게 만들자. 개소리로 치부해도 상관없다. 아니, 이미 몇몇은 고려할 가치도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바람잡이가, 다른 말로 지지자들이 하나둘 생겨나면 개소리에도 힘이 실리는 법이다. 슬그머니 쓰로누스를 바라보자. ‘지지해 줄 거지?’ 너 나한테 잘못한 거 많잖아. 다시 친해지고 싶으면 지지해 줘야 돼. 그렇지? ‘마지막 기회야.’ 기립박수라도 쳐야지. 하지만 저 무능력한 새끼는 표정을 굳힐 뿐 다른 말을 하질 않는 것이 보인다. 오히려 이쪽의 눈치를 살살 보는 게 반대표라도 던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도미니온스 역시 슬그머니 대중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 아무런 호응이 없으니 뭔가 반응을 끌어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쓰로누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게 더 어울리는 표현이리라. “뭔가 다른 의견은 없습니까? 쓰로누스는….” “나는….” ‘그래. 너는 뭐. 이 새끼야. 빨리 말해.’ “나는 잘 모르겠다.” ‘뭐?’ “물론 희생과 피로 세워진 탑에서 축배를 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인간이 바뀌어 버린다면 그게 진정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인간인 것일까. 많은 것이 바뀔지도 모른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들은 변화할지도 모른다.” ‘이 개새끼.’ 어차피 이 새끼한테는 기대도 안 했다. “그럼 지금과 같은 노선을 유지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다른 방법을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의견에는 나 역시 동의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어. 다시 한번 더 비슷한 상황을 겪을 수는 없다.” ‘이거 별로 안 좋은데.’ 지지자가 없다면 개소리는 개소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 도미니온스 하나로는 힘이 실리기 부족하고 케루빔과 쓰로누스는 전혀 이쪽에 호응해 주지 않는 상황. 원로들은 자신들끼리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딱히 다른 의견을 제시해 오지는 않았다. 세라핌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쁘지 않군.” ‘뭐?’ “나쁘지 않아.” ‘…….’ “도미니온스의 말이 맞아. 설득력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야. 장기적으로 바라보면 이것이 더 합리적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세라핌.” “똑같아. 생각해 봐. 케루빔. 어차피 우리는 인간을 통제해야 해. 그들의 개체 수를 조절해 대륙의 균형을 유지하겠다는 건 우리의 오랜 숙원이 아니었나? 가정해 봐. 모든 게 끝난 이후의 미래를 한번 가정해 보자고 그들은 다시 늘어나기 시작할 거야. 그들의 욕구는 끝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잖아?” “인간이 발전하고 빛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라핌.” “하지만 그들은 그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주변의 모든 것들을 파괴하지. 그러한 문제 때문에 통제하자고 말했던 것이 아니었나?” “이런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세라핌! 정신이 나간 소리를 지껄이는군. 그들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 돼. 통제와 관리하는 것에 동의한 것이지 그들의 근본을 바꾸는 것을 동의한 것은 아니다!” “이미 통제와 관리를 하겠다는 것부터가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거야. 케루빔. 우리는 다시 한번 더 슬픈 선택을 해야 할 거야. 끊임없이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그들을 죽여야 할 거라고. 이 자의 말대로야. 우리가 신인류의 탄생에 기여하는 것. 그게 우리의 존재 이유일지도 몰라.” “미쳤군. 정신이 나갔구나, 세라핌. 그리고 도미니온스. 저 인간의 감언이설에 홀린 것이냐. 이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거라. 이 아둔한 것들아. 저자는 뱀의 혓바닥을 가지고 있고 악마보다 더 비열하고 교활한 머리를 가지고 있다. 정말로 저 쓰레기 같은 인간이 진실로 인간을 사랑해 말 같지도 않은 의견을 던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거친 언동은 자제해라. 케루빔.” “저 정신 나간 소리를 부정하면서도 저자를 두둔하는구나. 쓰로누스!” “나는 저 인간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간 게 아니야. 케루빔.” “그 입 닥쳐라. 세라핌! 네놈은 이 전에도 그랬었지.” “뭐?” “네 추악한 욕망을 내가 모를 줄….” “입 다물어.”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것이라면 오산이다.” “입 다물어. 케루빔!” ‘히야, 시바. 개판이네. 개판이야.’ “회의와 상관이 없는 소리는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다니.” “지나치게 흥분해 있습니다. 케루빔. 당신답지 않아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을까. 너야말로 너답지 않다. 도미니온스.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을 했던 네가….” ‘아주 개판이죠? 슬슬 원로 비둘기들도 참전하고 있는 게 보이네요.’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생각을 해보자는 것뿐입니다. 여러 가지 방향성에 대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걸 두고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인간의 근본을 바꿔 버린다니요. 그걸 정말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겁니까?” “그것 역시 인간입니다. 신인류라 하지 않습니까. 어려운 일입니다만 만약 가능하다면 정말로 위대한 업적을 세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대륙뿐만이 아니라 전 차원에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심각하게 생각할 사안이 아닙니다. 고려해 볼 가치도 없어요. 단순히….” “그렇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 아닙니까!” 여기저기서 언성을 높이는 이들이 눈에 보인다. 딱 봐도 진영이 갈라져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흐뭇해 참을 수가 없다. 솔직히 이렇게 쉽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단하네. 시바.’ 가족끼리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명대사를 괜스레 실감하게 된다. 원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이념이라 하더라. ‘비유우우우웅신들.’ 그 말 그대로, 첫 번째 퍼즐 조각을 판 위에 올려놓은 순간이었고, 병신 새끼들이 미끼를 문 순간이었다. < 724화 원탁 회의(3) > ‘조금 의외기는 해.’ 쓰로누스와 도미니온스 정도가 안고 가는 패라고 생각해 벌인 일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쓰로누스의 배신에 어안이 벙벙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를 구해준 것이 백금색 비둘기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 녀석의 지지가 없었다면 이번 계획은 흐지부지하게 끝나지 않았을까. 굳이 예를 들어보자면 이는 사업이나 다름이 없다. 예산은 한정적이고 답은 정해져 있다. 계획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이전에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라는 거다. 사업성이 있을지 없을지의 여부를 판단해 보면 회의적인 여론이 대두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녀석들이 이걸 사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점, 적어도 세라핌의 참전이 이 사업을 이념 전쟁으로 변화시켰다. 공산주의가 가장 완벽한 이론이라 믿고 국가의 존망을 배팅한 정치가들처럼 녀석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쪽에 주사위를 던졌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념이라고도 볼 수 없지.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막대한 예산을 들여야 한다는 것만 빼면.’ 부족한 부분은 보완할 수 있다. 긴 시간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정말로 신인류를 탄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긴 세월과 막대한 신성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것을 가정해도 흑자 전환이 언제 올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다. “미끼를 물기는 물었네요.” “근데 그건 뭐야? 누나 몸도 아닌데 얼굴에 뭘 그렇게 붙이고 있어?” “아, 습관 같은 거예요. 사실 얘네 피부가 워낙 좋다 보니 이런 거 할 필요가 없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하고 싶은 거 있죠? 이래야 쉬는 것 같다고요. 사실 머리 스타일도 바꿔보고, 여러 가지 해보고 싶기는 한데… 갑자기 바뀌는 건 조금 그렇죠?” “조금 그렇지… 이상하게 쳐다볼 것 같은데?” “아닐 걸요. 걔네들이 뭐 관심이나 있겠어요. 안 그래도 지금 자기들끼리 편 갈라서 싸우느라 정신없을 텐데… 제 머리 스타일이 바뀐 게 대수겠어요?” “다른 비둘기는 몰라도 케루빔은 눈치챌 수도 있을걸.” “아. 그 비둘기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의외로 섬세한 것 같던데. 그렇게 격렬하게 날뛰어주니 더 고맙더라고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그쪽에서 더 열을 내주니까 떡밥이 불타오르는 거 아니겠어요? 조용히 지나갔으면 이렇게까지 격렬해지지도 않았을 텐데… 어제 이야기 들었어요?” “뭐?” “원로들끼리 한판 붙었다잖아요. 슬쩍 봤는데 무슨 청문회 분위기보다 더 살벌했다니까요. 얘네들 생각보다 더 진지해요. ‘신인류 탄생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이 몇몇 비둘기들의 심금을 울린 거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세라핌 쪽이 호의적이다 보니 이런 흐름으로 가고 있는 거겠죠. 그 미친 비둘기가 아군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게.” “쓰로누스 쪽은….” “아직 제대로 만나지는 못했는데… 시간을 언제 내보기는 해야지. 솔직히 크게 기대는 안 해. 2 대 2면 균형이 딱 좋기도 하고, 더 치열해 져야 싸움 구경하는 맛이 나지.” “오빠 말이 맞아요. 요즘 여기 돌아가는 거 보면 진짜 꿀잼이라니까. 지구에서 뉴스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어요. 꼬투리 잡아서 질질 시간 끄는 것도 그렇고, 파벌 만들어서 서로 견제하는 것도 그렇고… 기왕이면 성취감 있는 일을 하는 게 좋기는 한데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분탕질만 하는 것도 재미있네요.” “지금부터 시작이지 뭐. 준비는 제대로 됐지?” “오빠는 준비 제대로 됐어요?” “물론.” “그럼 슬슬 준비하죠. 슬슬 우리 대주주님 들어올 시간인데. 아, 나는 진짜 왜 오빠를 지구에서 못 만났을까. 우리 진짜 제대로 한탕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누나.” 자리에서 일어나 착착 준비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나 역시 만들어 놓은 자료를 검토하기 시작, 도미니온스가 다과를 준비하는 사이 이쪽은 차를 준비한다. 와인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건 일이 성사된 이후에 까야지. 조명도 나쁘지 않고 분위기도 괜찮다. 슬쩍 지혜 누나의 얼굴을 보니 벌써부터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된 듯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키야. 시바, 진짜 타고난 사기꾼이야. 진짜.’ “오빠 표정 변한 것 좀 봐. 진짜 타고난 사기꾼이라니까. 태어나길 사기꾼으로 태어났어요.” “…….” “원로들은?” “이미 받아 놨어요. 아까 제가 한 말 못 들었어요? 그냥 다 준비됐다니까.” “응.” “이제 사담은 금지예요. 올 때 됐으니까. 오빠도 긴장해요.” “잘해보자고.” “실패하면 죽어야죠.” 탁자의 자리를 앉은 모습에 사기꾼의 얼굴은 없다. 완벽히 도미니온스로 변신을 마친 이후에 다시금 자료를 검토하는 모습이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린 것은 당연지사.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가 왔는지 알 수 있었지만 곧바로 몸을 일으켜 반기는 정도의 센스는 필요했다. 반갑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자 고개를 끄덕이는 세라핌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오셨습니까?” “그래. 도미니온스는 미리 와 있었나.” “조금 더 검토할 게 있어 일찍부터 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허투루 진행할 사안이 아니니까요.” “그 말이 맞아. 케루빔과 쓰로누스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처음부터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케루빔이 새로운 사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쓰로누스의 경우가 조금 의외이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겁이 많지 않습니까.” “네 말이 맞아. 도미니온스. 쓰로누스는 겁이 많지.” “아마 결과물로 나오는 것이 있다면 쓰로누스 역시 합류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케루빔을 설득하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가 가지고 있는 낡은 이론에 반박할 수는 있겠죠.” “…….” “굳이 그들을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에는 이해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일이 중요합니다.” “알고 있어.” 살짝 이쪽을 바라보는 게 시야에 비쳤다. “하지만 조금 의구심이 있는 부분이 있기도 해. 아 물론 내 입장은 너와 같아. 도미니온스. 신인류를 만들고 새로운 대륙을 만드는 것은 이전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기도 했어.” ‘아니. 세 과장님. 그거 제 기획서이고 제 실적인데 중간에 가로채기 있기 없기?’ 사실 별 상관은 없지만. “기획서도 인상적이었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위험성이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지. 그렇지 않나?” ‘이렇게 나오네.’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아예 병신은 아니야.’ 좋다고 해서 따라오는 모지리는 아니다. 충분히 기획서를 검토해 보고 내린 결론이겠지. 이지혜와 함께 머리를 굴려서 만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있던 위험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건 거짓으로 보고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고 사기를 칠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다. 이 사업을 안전한 투자로 포장하는 건 아무리 가면의 영웅 듀오라고 해도 무리일 수밖에 없다. ‘최대한 숨기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도 잘 캐치했네. “특히 현재의 상황을 떠올려 보면 더욱더 그래. 일의 실패가 어떤 결과로 다가올지에 대해서는 다들 생각해 봤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도미니온스. 너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라핌. 하지만 어떤 일이든 위험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한 번의 실패를 겪었습니다. 물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그 실패의 원인을 우리에게서 완전히 분리시킬 수는 없습니다.” “…….” “생각하셔야 합니다. 세라핌. 분노와 증오로 무엇이 남았습니까. 이 전쟁을 이어나간다고 한들, 그 끝에는 무엇이 남을 것 같습니까. 인간들은 당장 눈앞에 닥쳐올 일들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미래와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는 다릅니다. 그들은 저항할 겁니다. 순응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강경하가 나간다면 그들은 더욱더 강경하게 부딪칠 겁니다. 보이지도 않는 머나먼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쓰로누스와 케루빔은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틀렸습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 “이것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입니다.” “네. 도미니온스 님의 말이 맞습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기획안의 테스트는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세라핌님.” ‘생각보다 고민하고 있네.’ 예산을 너무 높게 잡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었지만 이 정도는 잡아줘야 투자다운 투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제대로 된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신성을 적어놨을 뿐이다. 원로 비둘기들을 더 뒤흔들 수 있는 제대로 된 자료가 필요했으니까. 선뜻 손을 뻗지 못하는 걸 보면…. ‘확실히 의심하고 있구나.’ 이기영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이기영은 죄의 심판을 받았으니까. 녀석의 의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 일의 성공 여부다. 아마 이런 심리가 작용하고 있지 않을까. ‘한 번 했던 종목이 더 자신 있다 이거지.’ 1회 차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것은 곧 경험이기도 했다. 한 번 뛰어들었던 시장에 재도전하는 것이 더 안정감이 있다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앞으로 이쪽이 걸어갈 길은 완전히 새로운 길이었으니까.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투자를 한다면 익숙한 분야에 투자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요식업계 종사자가 실패 후에 패션 사업에 뛰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겠지 뭐.’ 티를 내지 않고 있을 뿐이다. 녀석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슬그머니 도미니온스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시작하라는 듯한 신호를 보내는 눈, 곧바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세라핌 님이 가지고 계신 불안감은 이해합니다.” “나는 불안한 게 아니야. 다만.” “제가 보여드린 기획서가 부족하게 느껴진 것이겠죠.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세라핌 님 성에 차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제가 느끼기에도 여러 가지 위험성이 따르고 있었고, 작업을 조금 더 구체화시켜 보니 생각보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도 많았습니다. 여러 가지 오류가 많아요. 이 계획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이기영 님의 말이 맞습니다.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시간을 더 두는 게 정답일 겁니다. 그게 예산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겠죠.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안 그래도 긴 세월을 바라보고 하는 일입니다. 케루빔님의 진영에서 손을 쓰기 전에 저희 쪽에서도 결과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원로들이 합리적인 판단을 할 테니까요.” “그래서, 신성이 필요하다 이건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세라핌 님. 세라핌 님이 가지고 계신 불안함과 제 기획서의 미흡함, 모두 인정드린다고요. 위험한 곳에 투자하라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기반을 다지는 것은 저와 도미니온스 님으로 충분할 겁니다.” ‘그래, 맞아. 우리 너 빼고 할 거야.’ “뭐라?” “기분 나쁘게 듣지 않으셔야 합니다. 세라핌. 당신의 상황을 고려해 보고 결정한 일입니다.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예산이 더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기획서의 테스트 서버를 만드는 것뿐이지만 중간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일단 기반을 다진 이후에 괜찮다는 판단이 서시면 합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근데 우리 자회사 주식 상장하면 후발주자한테 돌아가는 건 적을 수도 있다는 거 이해할 수 있지?’ “도미니온스 님의 말이 맞습니다. 세라핌. 도미니온스 님께서 보유하고 계신 신성이 생각보다 많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굳이 부담 느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너 아니어도 예산 많거든, 이거 누가 봐도 대박 날 아이템인데 셋이서 나눠 먹기는 조금 그렇지. 애초에 시작도 나랑 도미니온스가 한 거고 너는 그냥 중간에 합류했으니까. 나중에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받아먹으라 이거야.’ 아마 이렇게 들리지 않을까. “네. 이기영 님의 말대로입니다. 사실 조금 더 빨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티키타카 느낌 괜찮다. 누나. 신인류의 아버지, 어머니 타이틀은 우리가 가지고 간다. 백금색 비둘기야. 너는 조력자 정도로 이름만 적어 줄게.’ 분명히 이렇게 들리고 있을 것이다. < 725화 실험(1) > 물론 간단히 걸려들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누군가를 작업 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본인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판단할수록 이런 종류의 덫에 걸릴 여지가 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은 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사기 사례를 매체나 이야기를 통해 접해도 본인들은 안전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장 세상을 둘러보라, 피해자들 어디에나 존재한다. 많은 피해자가 이성적이지 못하거나 멍청해서 거미줄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남의 등쳐먹고 살아가는 사기꾼들도 사기를 당하는 세상이다. 교육 수준이 높은 계층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사회 경험이 낭낭한 베테랑들 역시 쥐도 새도 모르게 뒤통수에 구멍이 뚫린다. 물론 우리 회귀자처럼 선천적으로 뒤통수가 먹음직스러운 이들도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런 경우가 더 흔하지 않은 경우다. 대부분은 조심스러워 한다. 본인이 가진 무언가를 내밀 때는 짐승들조차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세라핌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간의 작업을 통해 이 이론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본인이 가진 걸 내놓는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래서 필요한 게 바로…. ‘적정선이라는 거지.’ 적정선이 중요했다. 부담이 되지 않는 금액, 내놓아도 타격이 들지 않을 정도로 적은 금액. 물론 점차적으로 늘려나가는 게 맞겠지만 나와 누나가 책정한 가격은 세라핌에게 부담되는 금액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녀석이 언제든 여유롭게 굴릴 수 있는 유동 자금, 딱 그 정도였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결코 적은 양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자산을 악착같이 쌓아 올리신 세라핌에게는 투자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신성이었다. 버리는 셈 치고 던져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특히나 이쪽이 자신을 배제시키려고 하는 느낌을 받는다면 더욱더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인류 부모 열차에 제때 탑승하지 못해 중간에 팽 당하지 않을까 싶은 불안감. 아마 녀석의 입장에서는 이게 가장 크게 다가올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비둘기들과는 다르게 세라핌은 자기주도적인 성격이었으니까. 나와 지혜 누나 정도라고는 볼 수 없지만 녀석도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나와 닮은 느낌이지 뭐.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는 모습까지 비슷하다. 만약 내가 녀석의 입장이었다면…. ‘기획서를 한 번 더 읽어보겠지.’ 주사위를 던지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필요할 때 던지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이게 주사위를 던질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게 먼저다. 예상했던 대로 아무 말 없이 다시 한번 기획서를 꼼꼼히 훑어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하지만 기획서에서 문제를 찾을 순 없을 것이다. 애초에 위험성이 있다는 건 녀석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었던가. 그걸 제외하면 특별히 모난 부분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이 생긴다면…. ‘다시 한번 더 묻겠네.’ “테스트 서버는 정확히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 거지?” “보고 계신 그대로입니다. 작은 세상을 먼저 프로그래밍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거대한 맵 안에 말입니다.” 여기서는 가지고 있던 걸 한 번 꺼낼 필요가 있다. 도미니온스가 살짝 손가락을 튕기자 작은 맵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크기는 작지만 마치 대륙의 축소판과도 같다. 하늘 위에서 작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작은 집들과 자연환경들도 눈에 보인다. 실제로 만들었냐고? 당연히 실제로 만든 결과물이지. 의심이 많은 놈은 결과물로 직접 보여줘야 고개를 끄덕이는 법이다. 예상했던 것처럼 무척 놀란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일이 진행됐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프로그램들이 살아갈 환경을 마련한 지는 꽤 됐습니다. 대륙의 중요 도시와 필수 환경 정도만 축소해 디자인했으니 아마 오류가 크지는 않을 겁니다. 세세한 오류 정도는 있을 수 있겠지만 곧바로 수정할 수 있을 정도고요.” “흥미롭군. 인간의 축소판들이 이 작은 대륙에서 생활한다는 건가?”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흉내를 내는 프로그램이며 더미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개성은 어떻게 부여할 생각이지? 만들어진 더미가 실제 인간처럼 생활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기껏해야 흉내내기밖에 되지 않을 거야. 별 의미 없는 행동일 수도 있다고.” “쌓아놓은 데이터가 있습니다.” “어디서 온 것인지 이야기할 수 있나?” “지금 당장 말씀드리기에는 조금 곤란합니다.” “도미니온스는 알고 있….” “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가지고 있다. 거짓은 없다. 정말로 나는 데이터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 이 의미 없는 실험을 진행할 생각이다. 그래야 녀석이 주사위를 던질 테니까. “합류해야 알려줄 수 있다는 건가?” “크게 관심을 가지실 정도는 아닙니다. 사실 숨길 사안도 아니니 말씀드려도 상관없지만… 저는 대륙 대부분의 인간들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살아 있는 생명처럼 움직일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지만 적어도 비슷하게 행동할 겁니다.” “으음….” “500만 명입니다.” “뭐?” “500만 개의 프로그램이 각자 다른 행동을 할 겁니다. 같은 행동이나 복사 붙여넣기 따위도 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네. 각기 다른 500만 개의 개성과 성향이 있는 겁니다.” “아무리 더미라고 한들, 그 정도나….” “가능한지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예산에 적혀 있는 신성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실험이 가능한 겁니다. 세라핌. 만약 이기영 님이 아니었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는 실제로 세상을 창조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대륙의 복제판에 가깝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을 겁니다.” “…….” ‘이 정도나 했는데 안 넘어와?’ 모든 게 실재하고 있었고, 거짓말도 없다. 물론 중간에 계획을 뒤집지도 않을 것이다. 이 실험은 계속 진행될 거고 신인류 만들기도 예정대로 진행될 거다. 녀석이 만약 투자를 한다면 말이다.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는 녀석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나도 함께하지.” “…….” “…….”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세라핌.” “아니, 나도 함께 하고 싶어. 기존 예산의 두 배를 투자하겠어.” “세라핌 님. 정말입니까?” “그래.” ‘아이고 우리 세 사장님 배포도 크십니다. 진짜.’ “세라핌,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야. 도미니온스. 좋은 일은 함께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 지금 당장 전달해 주도록 하지.” ‘화끈하기도 하셔라. 감사히 받겠습니다요. 세 사장님.’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도….” “계약서까지 작성하도록 하는게 좋겠어.” 도미니온스가 굳이 끼어들 필요가 없다는 멘트를 조금씩 투척하자 조금 더 애가 탔는지 곧바로 일을 진행시키려고 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결과물은 언제 볼 수 있지?” “5일이면 충분할 겁니다.” “빠르군.” “그만큼 시간이 촉박하니까요. 당연하지만 쓰로누스 님과 케루빔 님에게는 비밀입니다. 아마 계속해서 저희를 견제하려고 하실 겁니다. 세라핌 님께서도 두 분을 견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원로들에게도 힘을 조금 실어주시고요.” “물론이야.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 결과물은 확실히 가까운 시일 내에 볼 수 있는 건가?” “네. 약속드리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만 나가도록 할게. 네 말대로 원로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을 설득해야 하니… 오랜만에 바빠지겠어.” “세라핌 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고맙다, 새끼야.’ “그래.” ‘진짜로 고맙다. 이 새끼야.’ 물론 아직까지는 부담되는 신성은 아니겠지만 본래 시작이 반이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바깥으로 향하는 녀석의 모습은 가관. 약간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 도미니온스, 아니, 이지혜가 입을 열어왔다. “예산의 두 배면… 생각보다 많이 땡겨 오지는 못했네요. 예산을 조금 더 잡을 걸 그랬나 봐요.” “아니야. 이 정도가 딱 좋은 것 같아. 누나. 만약 조금 더 높게 불렀으면 훨씬 더 경계했을걸. 그리고 목적은 다른 데 있을 수도 있고….” “아아. 데이터?” “응. 맞아.” “확실히 구미가 당길 만도 하죠. 만약 일이 실패해도… 원천기술만 건져도 이익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저도 똑같이 생각했을 거예요. 일이 잘 풀릴 확률도 높고, 정말로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더미들을 500만 개나 뽑아낼 수 있다면 다른 실험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어차피 본인은 사용할 수 없겠지만… 애초에 베니고어넷 운영자 시스템에 접근해서 데이터 뽑아낼 수 있는 건 오빠랑 우리 막아들 둘뿐이잖아요?” “뭐 그렇지?” “나도 권한 주면 안 되려나.” “주고 싶어도 못 줘. 박물관 관리자 타이틀이 있어야 되는 거라. 아무튼 재미있기는 재미있네. 그럼 곧바로 실험 시작해야지. 누나. 우리 투자자님이 결과물을 원하시는데 열심히 실험해 봐야 하지 않겠어?” “이미 실험해 봤잖아요.” “다른 실험 말이야.” 이지혜가 허공을 두드리자 축소된 맵 안에 손톱만 한 크기의 인간들이 빛과 함께 생겨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기본적으로 더미이기는 하지만 베니고어넷에 저장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라 꽤 리얼하다. 베니고어넷 사용자나 기존 대륙에 있는 이들의 복사판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마치 게임을 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스마트폰을 확대하는 듯한 모션으로 손가락을 펼치자 한 풍경이 확대된 채로 눈에 들어왔다. 파란 길드의 모습이었다. 때마침 식사시간인지 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모습,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재잘거리는 모양새가 꽤 즐거워 보인다. 박덕구, 안기모, 김예리, 박기리 삼 남매는 그중에서도 가장 신났는지 박수까지 치고 있었고 정하얀은 여전히 이쪽 옆에 딱 붙어 있다. 선희영과 엘레나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알프스는 자신의 강아지를 안아 들고 있다. 김창렬과 유아영, 한소라도 자리해 있는 모습, 빠져 있는 사람은 없다. 조혜진의 모습도 눈에 띈다. 딱 각진 자세로 앉아 불편한 자세로 식사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조혜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지 않은가. 물론 김현성도 있다. 녀석은 분위기를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바람 따라가는 듯이 잘 어울리고 있다. ‘이거 오류인가?’ 조금 더 어색한 모습을 보여줄 줄 알았는데 저건 또 의외다. 아무래도 김현성의 사교 수치가 상향조정이 되었나 보다. “파란길드로 돌아가고 싶어요?” “왜, 감상에 빠져 있는 것 같아?” “조금 그렇게 보이기는 해요. 나도 우리 길드 보고 있었거든. 이제는 집 같은 곳이잖아요. 그럴 만도 하죠. 이 삶에 완전히 정착했으니까.” “나도 비슷해, 누나. 애타게 그립지는 않은데 생각이 나기도 하고.” “그런데 이거 진짜 어렵네요. 신인류 한번 만들어 볼까 싶기도 했지만 실험으로도 어렵다니까요. 이거 결과물 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일단은 이 정도로도 충분해. 다음 모임까지는 더미를 만들었다는 것만 공개하고 조금 더 땡겨오지. 뭐. 천천히 조절하면 된다니까.” 이기영 더미가 그리폰을 타고 붉은 용병길드로 향하는 것이 보인다. 옆에서는 이지혜가 뭔가를 툭툭 두드리는 모습, 아마 성향이 어떻게 변할지 시험하고 있는 거겠지. 저번에도 똑같은 걸 했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다. 붉은용병 길드에 들어간 이기영 더미가 필사적으로 길드를 빠져나가려 문을 두들기는 모습, 하지만 차희라 더미에게 머리를 잡혀 끌려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신인류는 개뿔.’ 이건 어차피 떡락할 주식이었다. “참혹한 광경이네요. 진짜로 죽겠는데요? 아.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요. 세부조정한 게 효과가 있기는 있나 봐.” < 726화 실험(2) > ‘별로 효과가 있는 것 같지가 않은데.’ “데이터 쪼가리이지만 흥미롭기는 흥미로워요. 욕망을 거세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거죠. 이렇게 부작용이 일어나는 걸 보면… 세부 수치를 조정해도 결국에는 똑같네요. 이건 어쩔 수 없나 봐요.” “음….” “삼 개월 정도는 억누를 수 있지만 특정 인물들은 발정기, 아. 발정기라고 하면 안 되는구나. 인간이 짐승도 아닌데.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조금 더 고급스러울까요. 사랑의 날로 명명할까요?” “들어맞는 단어는 천천히 생각해 보지,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아무튼 이 주간이 오면 공격성을 띄는 인물들이 생긴다는 게 문제예요. 성향에 따라 갈리는 것도 흥미롭고요. 평소에 욕구가 잘려 나가다 보니 사랑의 날이 찾아와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효과를 덜 받거나 완전히 잃어버리는 사람들, 반대로 폭발하듯 터져서 공격성까지 드러내는 인물들, 전자는 오빠고 후자는 차희라 더미라고 보면 되겠네요.”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인물들이 있기도 하다. 이기영 더미가 자고 있는 방을 몇 번이나 들락거린 정하얀과 일당들만 봐도 이 일이 얼마나 큰 부작용을 야기시키는지에 대해 예상해 볼 수 있었다. “그런 것치고는 어느 정도 시스템이 돌아가기는 해요. 양쪽 다 공격성을 띄고 있거나 욕구를 완전히 잃어버린다면 문제겠지만, 어찌 됐건 비율이 맞아 떨어지기는 하니까요.” “꽤 진지하네. 누나는.” “언제 이런 걸 또 해보겠어요? 재미있잖아요. 실험 같은 거. 조금 게임 같기도 하지 않아요? 어차피 해야 되는 일이 기도 하고… 이런 실험을 해봤다는 것만으로도 플러스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걸요. 물론 발표할 수 없는 내용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런 건 못 보여줘요. 우리 일이 실패할 거라고 말해주는 거나 다름없는데.” “당연히 은폐시켜야지. 너무 좋은 것만 보여주면 안 되니까. 적당히 부작용 몇 가지 보여주면 돼. 약한 거 있잖아. 막 감금시키고 이런 거 말고… 그냥 고개를 끄덕일 만한 부작용 같은 거 우리 능력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다 싶은 거. 그런 거 위주로 선별해서 보여주자.” “성향이 갈라진다는 것도 발표하면 좋겠네요. 비둘기들도 흥미로워 할 것 같아요. 우리가 찾지 못한 답이 있을 수도 있고요. 사실 이걸 가지고 북 치고 장구 치고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지만… 아! 그리고 김현성 더미랑 조혜진 더미랑은 아직도 진전 없어요. 데이트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이쪽에서 도움을 줬는데도 불구하고요. 단순한 프로그램 덩어리인데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도 재미있네요.” “누나 그거 현실이 아니야. 뭐 그런 거에 큰 의미를 두고 그래. 안 그래도 김현성 더미는 오류가 생긴 거 같기는 하더라고. 사교성 수치가 조금 상향조정되기도 했고 약간은 다르다니까. 그리고 왜 그런 실험을 해.” “누가 이게 현실이 아닌 걸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장난 좀 쳐본 거죠. 그리고 이게 데이터 쪼가리이기는 한데 이게 생각보다 리얼하다니까요. 소름 돋는 거 하나 말해줘요?” “뭔데?” “이기영 더미는 이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요. 어쩌면 자신이 더미라는 것도 눈치챘을지도 몰라요.” “뭐?” 시바, 소름 끼쳐. 뭐야. “시발, 소름 끼치는데.” “저도 얼마나 소름 끼쳤는지 몰라요. 편지까지 남겼다니까요.” “뭔데?” 이지혜가 살짝 허공을 터치하자 더미가 작성한 편지가 눈에 들어온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으아. 시바, 소름 끼쳐.’ “저 새끼 데이터 삭제해. 누나.” -존경하는 초월자시여. 저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아, 누나. 진심 소름 끼쳐, 이 새끼. 뭐야.” “이미 저건 처분했어요. 그러니까 저게… 345번째였네요. 제가 보고서 보낸 거 아직 안 읽어 봤어요?” “아직….” “정확히 몇 회차였더라. 382번째 회 차였나. 그때도 한 번 눈치챈 것 같더라고요. 극단적으로 일을 진행시켰을 때의 데이터가 필요해서… 솔직히 제가 생각하기에도 오류가 조금 많기는 했어요. 세세하게 조정하지도 못하기도 했고… 환경 변화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여기 있는 더미들도 혼란스러웠을 거예요. 당연히 382번째 회차도 들켰죠. 이기영 더미가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서 그냥 무시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된 줄 알아요?” “어떻게 됐는데.” “얘가 반란을 일으킨 거 있죠. 시스템에 저항해야 한다고 사람들 선동하고 지랄병 났었어요. 진짜로 깜짝 놀랐다니까요. 하루아침에 신전이 불바다 되고 이래도 나오지 않을 거라고 강짜 부리면서 협박하는데 환장할 노릇이죠. 황당해서 지켜보다가 곧바로 리셋했어요.” “소름 끼치네. 진짜.” “저도 소름 끼쳤다니까요. 혹시 우리도 이런 상황은 아닐까. 하고 걱정도 된 거 있죠. 아무튼 그거 보고서는 읽고 곧바로 처분하세요. 어차피 프레젠테이션용으로 내놓을 수도 없는 데이터니까.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않겠어요?” “안 그래도 삭제하려고 했어. 다른 특이 사항은 없어? 아, 애들은 좀 어때.” “더미요?” “아니, 실제 애들.” “매뉴얼대로 진행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전쟁 준비도 잘 하고 있는 것 같고 조금 희망적인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예전보다는 나아요. 김현성은 아직 그대로 이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더라고요. 일단 비둘기 측에서 군대를 보내지 않으니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 거겠죠.” 정확히는 막고 있다고 말하는 게 올바른 표현이리라. 말 그대로 전쟁은 소강상태에 돌입했다. 아마 인류 측에서도 혼란스러워하지 않을까. 갑작스레 비둘기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틀어박혔으니 얘네들도 충분히 의아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병력을 끌고 가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 케루빔이야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세라핌이 그걸 막고 있으니 뜻대로 될 리 만무하지 않은가. 애초에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도 황당할 정도로 내부가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매번 토론과 토의가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종종 몸싸움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원로 비둘기들이 푸드덕 거리며 목소리를 높이는 장면은 꽤 현실감이 넘쳤을 정도. 파벌은 완벽히 갈라졌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비둘기들마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힘들겠지.” “정말로 위기라고 생각했으면 이런 식으로 파벌이 나누어지지도 않았을 거예요. 당장 발등에 불이 안 떨어졌으니 여유롭게 가도 상관없다고 느끼고 있는 거겠죠. 그만큼 인류가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나요?” “뭐 그렇겠지. 아마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누나.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우리가 더미들을 바라보고 있는 심정으로 인간들을 보고 있을 텐데… 누나도 이 더미들이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잖아.”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죠. 케루빔은 차희라한테 쥐어 터졌잖아요.” “그래서 과장해서 말한 거라고 했잖아. 기본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게 먹힌 거야. 인간보다 위에 있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이 개자식들이 신인류 어쩌고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 수 있었던 거라고.” “그건 동의해요.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거겠죠. 오빠 말대로라면 쓰로누스와 케루빔이 그나마 인간을 동등하게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게 되는 거네요. 참 아이러니하다. 그치?” “걔네도 사실 똑같은 놈들이지 뭐. 누가 더 나쁘냐고 묻는다면 신인류 계획에 손을 들어준 멍청이들이 적폐기는 하지. 그러니까 신나게 뽑아 먹어도 돼. 발표 자료 준비됐지?” “네. 마무리 작업으로 편집 좀 하면 될 것 같아요. 세라핌이 처음에 와서 보고 간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시간 참 빠르다니까.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이게 싫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고요.” “먼저 나가서 셋팅 좀 하고 있을게.” “네. 발표 잘해요.” 곧바로 밖으로 움직이자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할 무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재미있겠네.’ 사실 별로 보여줄 것도 없다. 말 그대로 이런 실험을 진행 중이고 차도가 있다는 것 정도만 발표하면 끝이었으니까. 이것만으로도 투자자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원로 비둘기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처음 봤을 때는 약간 괄시하는 듯한 얼굴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표정도 없다.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보내오는 모습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세라핌 역시 미리 자리해 있다. 케루빔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녀석 쪽 진영에 있는 비둘기들은 자리에 앉아 있다. ‘자존심이 상한 거겠지.’ 당연히 초대장은 보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몸을 끌고 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모양이다. 무언의 시위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쟤는 왜 왔어?’ 쓰로누스도 눈치를 보며 자리를 잡는다. 잠깐 동안 어수선한 장내에 이야기를 주고받는 목소리가 들린다. 심지어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충돌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리는 두 파벌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어떻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는가. 사실 의도하기도 했다. 그래야 더 임팩트가 있잖어. ‘시간 됐네.’ 순식간에 조명이 꺼진다. 장내가 다시 한번 소란스러워 지고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들어와 나를 비췄다. 굳이 약을 팔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제품이 확실하면 구태여 이빨을 털 필요도 없다. 이상한 서론으로 시간을 끄는 것보다는 곧바로 보여주는 게 확실하다. 박수를 한 번 치자 곧바로 눈앞에 축소된 대륙의 환경이 시야에 비친다. ‘타이밍 좋았어. 누나.’ 며칠 전 세라핌에게만 보여줬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단순히 환경만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더미들이 움직이며 생활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누구는 모험을 떠나고 있었고 누구는 일상을 즐기고 있다. 각자 다른 행동 방식으로 움직이며 각기 다른 모습으로 대륙에서의 삶을 보내고 있다. 마치 홀로그램처럼 나타난 신기술에 회장이 완전히 침묵에 휩싸여 버렸다. 신문물을 처음 접한 이들처럼 입을 벌리고 이걸 바라보고 있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케루빔 진영 쪽에서도 동요하는 분위기.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박수를 한 번 더 치자 전혀 다른 도시가 보인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숲, 그 안에 있는 마을과 던전, 거대한 산과 바다, 호수의 신전, 또 다른 거대한 도시와 그 안을 꽉 채운 더미들.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광활한 환경에서 500만 개의 인격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이들은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게….” 당연히 세 사장님은 흡족해하는 분위기다. 본인이 투자한 온전한 결과물이 세상에 나타나는 순간이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대륙의 축소판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과언이 아닌 시스템입니다. 단순히 명령대로 움직이는 인형들이 아닌,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더미들입니다. 오백만 가지 성향과 행동 패턴. 네. 여러분들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다. 무려 오백만 가지입니다. 말 그대로 저와 도미니온스, 그리고 세라핌 님은 작은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이게….” “미쳤군. 아니, 대단하다고 표현해야 하는 건가.” ‘대단한 거지. 새끼야.’ “말도 안 돼….” ‘말이 왜 안 돼? 데이터만 확보되면 가능해.’ “모든 것은 테스트를 위해서였습니다. 네. 신인류 계획의 첫걸음, 단순히 이론으로만 존재하던 신인류 계획을 좀 더 확실하게 구체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위험성을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앞으로의 계획을 미리 시험하기 위해 우리는 작은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맞습니다. 네. 이 계획에 반대하시는 분들의 말씀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 계획은 위험성을 띄고 있고 완전하지 않습니다. 어떤 역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이 작은 세상에서 움직이고 있는 이들을 보십시오.” 대륙이 황폐화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비명을 지르는 더미들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의 모습도 눈에 보인다. 찬란했던 빛에 휩싸여 있던 도시들은 어두워지고 문명과 멀어진다. 아무것도 없었던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대륙의 모습에 안타까운지 몇몇 비둘기들의 탄식 소리마저 들려온다. “이것이 여러분이 원하는 결과입니까.” “…….” “진정 이 결과물이 여러분이 원하는 결과물입니까.” “…….” “아무리 숭고한 일이라고 한들, 잘못된 방법으로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숭고한 뜻을 더욱더 숭고하게 만드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우리는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저와 의견이 같은지, 같지 않은지는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들의 고통과 대륙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다는 겁니다.” “…….” “결과에서 비롯된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과정에서 비롯된 고통에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숲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면 나무의 아픔에도 공감해야만 합니다. 자신이 가진 걸 걸고 그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지만 여러분 역시 그들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대륙을 넘어 전 차원에 우리들을 창조한 신인류가 살아가는 가능성이 우리의 눈앞에, 열려 있습니다.” “…….” “바른 이론, 그 이론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혁신 기술, 함께해 주시는 여러분이 계신다면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무능력한 신들과 불쌍한 인류를 잡고 뒤흔드는 악마들을 몰아낸 이후, 우리가 신세계의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인류의 새로운 창조자로 기억될 것입니다! 여러분!” “…….” “투자하십시오! 미래에! 희망에! 새로운 인류에! 우리가 그려나갈 행복한 미래에! 투자하십시오!” < 727화 의심과 확신 (1) > 그야말로 비둘기들의 무수한 악수 요청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대충 봐도 분위기가 가열된 것이 느껴진다. 휘파람 부는 소리나 괴성을 지르는 이들은 없지만,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소리가 뒤섞여 전해져 오는 게 들려왔다. 심지어 우리 쪽 진영의 비둘기들 같은 경우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고 있으니 분위기가 어떤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마치 시상식 같지 않은가. 기립박수. 그래. 기립박수다. 쓰로누스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함께 온 반대파벌 비둘기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 보인다. 실제로 이렇게 빠르게 일이 진행될 줄은 몰랐겠지. 아니, 이렇게 구체화시켜 작정하고 들어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말 그대로 이건 단순한 이론이었을 뿐이니까. 막대한 신성과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투자해야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반대파벌의 주요 비둘기들이 꼬투리를 잡을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가 이상론이라는 단어가 아니었던가. 현실성 없는 이야기고, 이루어질 수 없는 이야기라고, 단순히 망상이라고 주장한 녀석들은 모두 심기가 불편한 얼굴들을 하고 있다. 물론, 이건 더미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불과하다. 신성을 섞은 데이터 쪼가리고 별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가능성을 읽었다. 새로운 이론과 그 이론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기술을 직접 목도하고 있다. ‘혁신 기술이라는 건 좋아.’ 다른 건 둘째 치고 일단 있어 보이잖아. 단순한 개소리를 그럴듯한 개소리로 보이게 만들어 준다구. 눈으로 보이는 결과물이다. 아마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 비둘기라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저 기술이라면 가능하다. 수많은 오류에 대비할 수 있으니 비용을 최소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원가절감 개꿀이자너. 투자자 입장에서 이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 ‘시간 단축도 가능하겠지. 한번 닦아놓은 길을 다시 걸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메리트 있는 일인가.’ 속도도 나오면 말 다했지. 뭐. 이건 안전주다. 안전한 투자고 안전한 주식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창업자인가, 라는 요소도 굉장히 중요하겠지만 이미 이기영 코인은 믿고 매수하는 코인이 아니었던가. 사대천사 중 두 명이 이쪽의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만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온다. 신진 소기업이나 스타트업 기업이 갑작스레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시장에 등판했다 생각해 보자. 투자해달라고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봤자 단순 개소리로 들리겠지만 대기업 회장님께서 자리에 함께 있다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심지어 상석에 앉아 박수 세례에 동참하고 있단다. 젊은 기업인, 지금껏 없었던 새로운 인재, 대기업의 자본을 지원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투자자들이 군침을 흘릴 만도 하다. 비둘기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투자하겠습니다!” ‘무수한 악수의 요청이!’ “대단하군! 대단해! 하하하하!” ‘그래 형 원래 대단하잖아. 그걸 이제 알았어?’ “역시 다릅니다. 이기영 님은 달라요! 세라핌 님도 정말 대단하지 않으십니까. 신인류 계획이라니, 완전히 새로운 바람이 아닙니까. 실제로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반대파벌도 흔들리고 있는 게 느껴진다. “물론 아직 조심해야 할 시기라는 것에는 입장 변화가 없지만 최소한 이제는 허무맹랑하다는 말로 공격받을 일은 없겠습니다.” “방금 표정 보셨습니까? 많이 어두워진 것이 보입니다. 이럴 게 아니라 투자해야지요. 아암, 그래야지요.” “정말로 가능할 거라고 보는 것인가! 저건 단순한 프로그램이지 인류가 아니다.” “무려 500만 가지입니다. 최소한 여러 가지 변수에 대항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습니다.” “옳습니다. 옳고 말고요.” “하지만!” “예의를 지켜주십시오! 회의를 하러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반대의견을 말하고 싶은 거라면 후에 마련된 자리에서 하세요!” “말 다했습니까!” “그래요! 말 다했습니다!” ‘개판 좋죠.’ “아직 발표가 전부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추태입니까! 사과하세요!” “사과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지금 이 상황에!” “사과하세요!” “지금은 전시상태입니다! 그런 와중에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장난에 휘둘리다니!” “전시상태라니! 하핫! 전시상태라니요. 상대는 인간입니다. 어디 전시상태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그래 너 말 잘한다. 기분 나쁘기는 한데 그런 자세 좋다구. 너는 편하게 죽여줄게.’ “그 인간에게 병력을 잃었습니다! 예산에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란 말입니다!” “정 그렇게 불안하면 원로가 비자금으로 숨겨놓은 자금을 가지고 오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투자하지 않겠다면 나가세요! 나가세요!” ‘시바 진짜 개판 되는 거 한순간이네.’ “인류는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인류 역시 저 미친 계획에는 동의하지 않을 거라고!” ‘그래 맞지. 하지만 너네 계획에도 동의하지는 않을 거야.’ 이쯤이 정리하기가 괜찮은 타이밍이 아닐까. 다시 한번 박수를 짝짝 치려고 하는 타이밍이었다. “그만.”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 세라핌이 아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파란 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케루빔.’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두워진 표정이 눈에 띈다. 이쪽이 내놓은 혁신기술을 보고 깜짝 놀랐다기보다는 현재의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 것 같았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을 만도 했다. 이 개판을 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놈이 얼마나 있을까. ‘이건 아쉬운데.’ 물론 놈은 파벌을 만든 주요인물이기는 했지만 갈등의 골이 이 정도까지 깊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심란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본인이 안에 들어와 있을 때는 몰랐겠지만 한 발자국 뒤에서 지켜보니 조금 더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이다. 물론 내 추측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들어맞으리라 생각했다. 녀석은 그나마 정상적인 비둘기였으니까. “이 무슨 추태인가.” “…….” “…….” ‘아 이 새끼 눈치 깠나?’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 눈빛이다. ‘이거였구나.’ 녀석이 노린 게 이거였구나. ‘착각은 아니지?’ 새삼스레 깨달은 듯한 얼굴이었다. 맞든 아니든 상관없지만 최소한 이성을 찾은 것만 같다. 무척 흥분한 전과는 반대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게 보인다. 내가 너무 힌트를 준건가? 아무래도 이건 너무 티 났지? 어디서 들킨 걸까. 조금 적당히 할 걸 그랬나? 너무 갈등을 조장하는 데 집중한 건가? 뭐 사실 별로 상관은 없지만……. 최근에 녀석의 상태를 살피지 않았다는 게 조금 후회되기는 했지만 이미 대세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네가 어떻게 할 건데?’ 도미니온스는 내 편이고 세라핌 역시 내 편인데. 심지어 보여? 내 지지자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네가 어떻게 할 건데? 장담하건대 분열을 보장시키는 것이 저 이기영이라는 발언을 한다면 쥐 잡듯이 잡아 비둘기 사회에서 매장시켜 줄 자신이 있다. 그렇게 멍청한 정치적 발언을 할 리가 없지. 대충 봐도 머리를 쓰는 것 같은 타입이 아닌 것 같이 보여 괜스레 기대하게 된다. 사대천사의 머리는 도미니온스와 세라핌이다. 쓰로누스는 그냥 무능력한 새끼고 케루빔은 그저 겉절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저 새끼는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혹시 맛탱이가 나가 목을 치려고 할까 긴장하고 있었던 타이밍이었지만……. “질문을 하고 싶군.” 놈은 다른 선택지에 주사위를 던졌다. “네. 마침 질문을 받으려고 하던 차였습니다. 케루빔 님.” 내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지 않을까. “계획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묻고 싶다. 나는 이 계획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만약 정말로 가능성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 진행하게 될 것인지 묻고 싶군. 아마 인간들 역시 이 계획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 “…….” “케루빔 님의 말이 맞습니다. 인간들은 신인류 계획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동의 여부가 중요합니까? 애초에 첫 번째 계획 역시 그들의 동의를 구하고 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인간들은 대륙이 변화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시스템에 접근권한 따위도 없는 그들이 뭘 알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적대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번 꼬인 실타래를 풀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는 인간들에게 화친을 제안할 생각입니다. 사과의 의미를 포함해, 그들이 입은 피해를 보상해 줄 계획이라고 하면…….” “바로 전까지 서로 창과 칼을 맞대던 사이끼리 말인가?” “인간은 멍청이가 아닙니다. 케루빔.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을 지켜봐 왔습니다. 이해관계를 통해 그들은 적도 될 수 있고 친구도 될 수 있어요. 물론 우리를 적대시하는 이들이야 존재할 겁니다. 하지만 더 이상 전쟁을 이어나가기 힘들다고 판단한 이들 역시 존재할 겁니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조금씩 두드리면 되겠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습니다. 아주 많아요.” “…….” “…….” ‘이 새끼 어울리지 않게 생각하네.’ 녀석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이거 사정거리 맞지?’ 손을 뻗어 새하얀 목을 꺾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기는 했지만 이미 녀석은 무리수를 던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괜히 쫄 필요는 없다. 당당해지자 기영아. 시바. 꿋꿋해져야 하는 거야. 한참이나 이쪽을 바라보던 녀석이 천천히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악수를 하자는 제스처처럼 보이지 않은가. ‘이 새끼 왜 이렇게 무례해?’ 이미 분위기가 개판이 되었다지만 발표 중간에 뚜벅뚜벅 걸어 나와 무대 위로 올라오는 행동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약간 주인공 병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원하는 게 이런 거라면 들어 줘야지. 나는 살짝 손을 뻗어 녀석의 손을 맞잡았다. 다른 이야기는 없겠지만 일단은 이쪽에 손을 들어준다는 제스처라고 판단해도 되지 않을까. 사방에서는 박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무능력 쓰로누스는 대세의 흐름에 따라올 것이고 반대여론이야 점차 정리될 것이다. 물론 녀석이 원하는 게 그런 흐름일 리는 없지. ‘내부에서 파내려고 하는 거구나?’ 일차적으로는 내 정체를 밝혀내겠다는 생각일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이 계획을 더 파고들겠다는 생각이 아닐까. 외부에서 어슬렁 거리는 것보다는 확실히 내부에 들어와 뒤집는 게 나을 테니 말이다. 그래. 나처럼. 녀석은 나 같은 선택을 했다. 기회를 확실히 노리고 들어와 가장 중요한 순간에 검을 꽂을 것이다. 곧바로 손을 맞잡기는 아쉬우니 조금만 더 깐죽거려주자. “동의하시는 겁니까?” “…….” 오랜만에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놈을 바라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제 말에 동의하셨군요.” “…….” 히죽히죽거리면 표정이 어떻게 변하려나.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드디어 깨달으셨군요.” “…….” 하지만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얼굴이 눈에 띈다. 조용히 입꼬리를 올려도 놈은 동요하지 않는다. 녀석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겠지. “나는 인간을 사랑한다.” “그것 영광입니다.” “하지만 네놈을 보면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구나. 대륙의 기생충아.” 오랜만에 느껴보는 느낌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해 다시 한번 녀석을 살펴봤지만 특유의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틀림없다.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성스러운 빛은, 녀석을 악마로 규정하고 있었다. < 728화 의심과 확신(2) > ‘내가, 시바, 그럴 줄 알았지.’ 녀석의 몸에서 나는 어둠의 악취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 구역질을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야 모든 개연성이 충족되는 것이 느껴진다. ‘더러운 악마 새끼가 누구 보고 구역질이 난다 안 난다야?’ 어째서 녀석이 그토록 전쟁을 원하고 있는지, 어째서 신인류 계획에 반대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애초 녀석은 인간을 위한 적이 없다. 미래의 인류를 위해 현재 인류의 개체 수를 조절한다는 개소리 역시 단순한 멍멍이 소리에 불과하다. 저 악취 나는 쓰레기가 진심으로 인간을 사랑할 리가 없지 않은가. 모든 건 거짓에 불과했다. 전쟁을 통해 인간의 마이너스 감정을 먹고 대륙에 혼란을 야기시키기 위한 연기다.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가면을 쓰고 자신을 숨겨온 철두철미함을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어쩌면 가면의 영웅이 가장 견제하던 적 역시 케루빔이 아니었을까? 너무 강경하게 반대할 때부터 수상하기는 수상했어. 진짜 너무 수상했지.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는 것도 지금 생각하니까 이상하다고. 이 정도 개연성이면 충분하겠지? 너무나도 설정이 잘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라 입꼬리가 올라간다. 어쩌면 준비물은 이미 마련된 건지도 모르겠다. 이 새끼는 이미 악마 그 자체가 될 준비를 마쳤다. 물론 섣부르게 건드릴 수는 없었다. ‘녀석은 사대천사였고 많은 비둘기의 귀감이 되는 애들 중 하나니까.’ 일단은 놈을 고립시키는 것이 먼저다. 원래 모든 작업의 기초가 그렇다. 한 명을 정치질 하고 싶다면 그 무리에서 떨어뜨려 놓는 게 옳다. 슬그머니 회의실에 착석한 모습은 아주 가관, 그렇게 반대를 했던 주제에 이제는 신인류 계획에 앞장서겠다고 하는 것 같아 아니꼽다. 네 정체를 파헤쳐 주고 말겠다는 듯이 말하는 눈빛이 신경 쓰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출사표를 먼저 던졌다 이거지?’ 아마 경고의 의미도 들어가 있으리라.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전부 지켜봐 주마.’ 혹은 ‘허튼짓은 하지 못할 것이다.’ 같은 뜻이 아닐까. 행동반경이 조금 축소됐다는 불편함이 있기는 했지만 커다란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이쪽은 뭔가 걸릴 만한 짓을 한 적이 없으니까. 퀘스트를 보낸 적도 없고 망원경을 사용하는 것도 자제했다. 아마 놈이 이쪽과 함께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러한 이유가 바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멀리서, 외부에서는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으니 내부에서 찾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똑똑한 비둘기네.’ 선택한 방법 역시 의외였다. “진행 상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현재 계속해서 실험 중입니다.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기도 하고 있습니다. 결과가 나오는 대로 보고 드릴 테니 너무 재촉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케루빔.” “일을 화려하게 벌인 것치고는 진도가 느린 것이 아닌가. 도미니온스?” “결코 느린 것이 아닙니다. 신인류 계획을 발표한 지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는 계속해서 수집 중이며, 모든 오류가 잡히기 전까지는 아직까지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글쎄. 너희들이 자랑하는 그 기술을 이용한다고 가정하면 삼 일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무언가 발표할 수 없는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군. 더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지? 몇 번이나 다른 회차를 반복한 것이냐.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 “나 역시 투자자다. 도미니온스. 그것도 꽤 많은 신성을 투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응당 알아야 할 자격이 있다.” ‘누나도 성가셔하고 있네.’ 이런 타입은 또 처음이겠지. 지금까지의 악마 관계자, 파란의 악마 늙은이와 사이코패스 살인마, 악마 숭배자 이토 소우타와 악마 소환사 진청, 그 외에도 수많은 녀석과 싸워왔지만 이런 타입은 처음이라 또 새롭다. ‘나도 처음 봐.’ 본래는 자신을 숨기는 게 보통이다. 자신의 신념이나 주장을 꼭꼭 숨기고 발톱을 드러내지 않아야 정상이다. 웃으며 등 뒤에 칼을 숨겨 놓는 것이 이런 싸움의 정석적인 방법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녀석은 다르다. 애초부터 칼을 숨기지 않고 있다. 자신의 신념과 주장을 굳이 숨기지 않는 것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반대한다 육성으로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녀석은 행동으로 우리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바닥에 뿌리는 신성이라는 걸 알면서도 대규모의 신성을 투자한 것 역시 그러한 이유였다. ‘괜히 상장했나?’ 심지어 원로 비둘기들 몫까지 자신의 신성으로 사들이기 시작했고, 녀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기영 자회사 더미에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녀석의 말은 틀린 것이 없다. 투자설명회에서 내가 말한 것처럼 투자자는 일의 진행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달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저 새끼가 자기 신성을 땅바닥에 버릴지를 가정하지 못해 일어난 상황이었다. 물론 크게 불리하지도 않다. 경영권 방어 같은 걸 생각해야 할 타이밍도 아니었고 녀석도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을 테니까. 녀석이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다. ‘압박하는 것.’ 지금처럼 나와 누나를 압박하는 것이다. 마음대로 뒤흔들지 못하도록, 결과를 조작하지 못하도록, 다른 원로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도록 계속해서 견제하는 것. 우리 입장에서는 불편한 것이 당연하다. 속여야 할 눈이 늘었으니 말이다. “1차 발표는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장 실험을 하고 있다고 해서 곧바로 결과가 나고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데이터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고 오류가 났다면 그 오류를 분석할 시간도 필요합니다.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케루빔. 너무 공격적인 태도는 지양해 주십시오. 이 일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완벽한 상태에서 일을 진행시키고 싶습니다.” “너야말로 너무 과민반응하는 것이 아닌가. 도미니온스. 나는 그저 진행 상황을 알고 싶을 뿐이다.” “…….” “그럴듯한 무대 위에서 그럴듯한 쇼를 선보였지만, 결과적으로 보인 것은 이론에 대한 비전이 아니라 기술에 대한 비전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가치가 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조금 더 정확한 데이터를 원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그들을 대표하는 것뿐이다.”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정확한 날짜를 명시해 주면 좋겠군.” ‘작작 좀 해, 새끼야.’ 아마 지혜 누나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을까 싶었다. “인간들과….” “이미 접촉을 시도하는 중입니다. 케루빔 님.” “…….” “물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대다수지만…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상황이 달라지면 이해관계도 달라지게 마련이 아닙니까. 우리와 뜻을 함께하기로 한 이들이 있습니다.” “확실한가?” “일을 처리한 것은 이기영이 아니라 나야. 케루빔.” “세라핌.” “물론 아직은 소수지만 그들이 함께할 이들이 더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들었어.” “…….” “일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어 케루빔. 그렇게 의구심을 느끼지 않아도 괜찮아.” “정확히 어떤 이들인지 들어야겠다.” 하지만 녀석의 올곧음이 정말로 효과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을 준비가 되어 있다. 정직하게 바위를 내겠다고 으름장을 내놓는 놈과 가위바위보를 하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가. 지금 녀석이 하는 일이 그렇다. ‘물론 이해는 돼.’ 녀석이 보기에는 지금의 이기영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지금 당장은 이렇게 압박하고 조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첫 번째는 견제.’ 본인이 투자한 자금으로 신인류 계획을 휘두르는 행위 자체가 바로 견제다. 놈의 생각이 맞다. 이쪽을 구석으로 몰아넣는다면 자기 자신의 행동반경이 더 넓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거겠지. 단순히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니라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만약 놈이 이쪽 세력까지 포섭하려고 하는 거라면 조금 귀찮아질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파벌과 나는 한 팀이었지만 놈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서로가 멀어질 수도 있다. 함께 신인류 계획을 향해 달려가는 동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투자자고 나는 그들이 가진 것을 돌려줘야 하는 입장이다. 만약 놈의 견제가 어느 정도 효과를 봤다고 가정해 보자. 저 퍼랭이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너무나도 뻔하지 않은가. 신성을 투자한 원로들을 포섭한 이후에는 견제가 아니라 칼로 심장을 쑤시려고 달려들 것이다. ‘내 돈 내놔! 이 사기꾼 연놈들아!’ 비둘기 수백 마리가 푸드덕거리며 저리 말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꿈과 미래를 향해 달려나가던 회의실이 사기꾼에게 단체 사기를 맞은 피해자 모임으로 돌변해 우리의 목을 조를 것이다. 나와 누나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거다. ‘지금까지 신성이 얼마나 모였더라?’ 정확한 수치로 표현할 수 없지만 대륙의 법칙을 하나둘 정도는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양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신인류 계획에 사활을 걸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신성을 쏟아부은 비둘기부터, 여기저기서 끌어모아 넣어놓은 비둘기들까지 있다. 말 그대로 이 사업이 무너지면 원로 비둘기 중에 반은 거울 호수의 물 온도가 어떤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IMF 뺨치는 쇼크가 올 수도 있겠는데.’ 이걸 이렇게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경제대공황 수준의 혼란이 찾아오지 않을까. 케루빔이 간과한 것은 바로 그 점이라고 생각했다. 저 비둘기는 신인류 계획을 끌어내리고 싶어 하고 있지만 내게 투자한 비둘기 중 이 계획이 떡락하길 바라는 비둘기는 아무도 없다. 모두가 손을 잡고 기도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거다. ‘누가 악당이 될 것 같아?’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내가 악당이 될 것이다. ‘내가 악당이 될 것 같아?’ 하지만 일을 망치려고 하는 외부의 적이 있다면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은 내가 아니다. 우리는, 시바, 함께 가라앉고 함께 떠오르니까. 운명공동체라는 거다. “오늘 회의 거지 같았네요. 진짜. 사사건건 시비 거는 데 짜증 나 죽을 뻔했다니까요.” “뭐 곧 해결될 거야.” “그런데, 왜 그렇게 악랄하게 웃고 있어요? 오빠?” “누나. 누나는 만약 누나가 투자한 회사가 찌라시 때문에 휘청거리면 어떻게 할 것 같아?” “네? 갑자기요?” “찌라시를 퍼뜨린 놈을 원망할 것 같아?” “당연히 그 쥐새끼를 원망하겠죠. 보통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잖아요. 변수가 생기면 변수에 원인을 두고 원망할 사람이 생기면 곧바로 원망하게 되는 법이에요. 만약 변수가 생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떡락하면 내 안목을 의심하겠지만 그게 아니잖아요?” “역시 그렇지?” “근데 그게 왜요? 아… 아하… 와… 이야… 진짜 쓰레기네요. 그런데… 음… 그게 될까요? 얘네들은 인간이 아니라 비둘기들이라 조금은 더 이성적일지도 몰라요.” “아니야. 누나 얘네들도 인간들이랑 별반 다를 바 없어.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예전에 베니고어에게 들었던 말이 괜스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아마 알타누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도중이었을 거다. ‘너희들도 완벽하지는 않구나.’ ‘맞아. 완벽하지 않지. 그걸 잘 기억해. 나의 자랑스러운 이기영 명예추기경. 우리들도 완벽하지 않아. 불안전하지. 대륙 위에 있는 이들과 서 있는 위치가 다를 뿐, 우리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너는 그걸 잘 기억해야 돼. 우리도 완벽하지 않다는 걸.’ 정확히 이런 대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째서 베니고어가 계속해서 완벽하지 않다는 걸 강조했는지 이해가 간다. 이때를 위해 복선을 깔아둔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베니고어는 아마 이걸 전하고 싶었을 거다. 앞으로 너희들이 싸울 존재들도 너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들이라고, 완벽한 존재가 아니고 인간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나 역시 그녀의 생각에 동의한다. 이지혜가 나를 바라보며 웃음을 보인 순간 허겁지겁 뛰어들어오는 원로 비둘기 한 마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지… 지금, 지금 우리에게 손을 내민 인간들이… 가면을 쓴 천사들에게 습격당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내가 만든 천사들이, 아니, 케루빔이 보낸 역겨운 비둘기들이 전쟁에 지쳐 손을 내민 힘없는 인류의 뒤통수를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게… 그게 정말입니까!”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729화 의심과 확신(3) > ‘꿩 먹고 알 먹고.’ 여러모로 이득이 되는 장사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이쪽에 붙으려 한 배신자들을 처리했으니 인류 측에도 이익이고, 천사 측에 붙어 있는 악마 놈의 이중생활을 고발할 수도 있으니 이 또한 이익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원로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얘도 배팅했었지.’ 그것도 꽤 많이 투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애초 이 비둘기들은 안정적으로 신성을 공급받을 수 없는 입장이다. 베니고어나 엘룬 쓰레기 같은 이들을 대륙에 취업해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직장인에 비유한다면 이들은 따로 일터가 정해져 있지 않은 비둘기들로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비렁뱅이들은 지금까지 쌓아온 자산으로만 삶을 영위한다는 거다. 어딘가에 수급처가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안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다.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상황이 꼬일 대로 꼬일 상황인데. 누가,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지도 않다. 저 원로 비둘기의 표정에 깃들어 있는 것은 어떻게 이번 일을 해결해야 하는가다. 일을 망친 원인에 대해서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지 않은가. “이, 이 일을…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뭘 어떻게 해. 뻔하잖아.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이걸 어떻게 수습하겠어? 일단은 버텨야지. 안 그래?’ “무언가 다른 방도가 있는지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애초에…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다른 명령이 내려오기는 한 겁니까?” “지금은 정보가 부족한 상황입니다. 현, 현재 전선에서 계속해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인간들이 전선을 옮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아군 진영을 압박하고… 심지어 신전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응 빠르네.’ 이를테면 신호탄을 쏘아 올린 셈이다. 암묵적으로 휴전상태에 돌입했던 양측 진영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상태였다. 우리 조금 지친 것 같은데 너희들은 어때? 아, 너희들도 그래? 그럼 조금만 더 쉬자. 우리 굳이 말 안 해도 알잖아. 내부 정리할 것도 필요하고 너무 갑작스럽게 커다란 전투가 일어나는 바람에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다고. 서로 구역만 침범하지 말자 이거야. 이런 배경에서 먼저 뒤통수를 친 쪽이 화친을 주장했던 천사들 쪽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피해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고 해도 일단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인류 측에서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거다. 김현성이 있는 지역은 완전히 소강상태에 들어갔지만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영웅이 되살아난 것은 팩트였고 빛의 진영은 한 번 더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정하얀도 마력의 회복을 끝내지 않았을까. 우리 회색빛의 용사는 자신을 증명해야 할 테니 몸이 달아올라 있을 테고, 차희라는 이미 옛날 옛적에 일어나 싸울 준비를 끝내 놓았을 것이다. 우리 혜진이도 착실히 매뉴얼대로 움직이고 있다. 전선을 위로 올리고 압박하는 것. 물론 전진기지에 기반을 둔 만큼, 저들의 예상처럼 비둘기들의 심장부까지 다가오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땅따먹기를 하고 싶다는 의지는 내보였다는 것은 충격적으로 다가올 거다. ‘드래곤들은 합류하기로 한 건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가능성은 높다. 일부 병력이라고 한들, 알을 깨고 나왔다는 것 자체가 제공권에 대한 대비가 있다는 거니까. 정리하자면 비둘기 측에서 한 방 먹인 게 꼭 천사들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 아마 김현성이 움직인다면 조금 더 일이 재미있어질 것이다. 알프스가 수정된 매뉴얼을 전했다면 조만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타… 타락한 검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그렇지. 움직일 때 됐지.’ 이성이 붙어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이 역시 아군 측에게는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다. 사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비둘기 측에서도 커다란 문제로 다가오는 상황은 아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걸 해오면 된다. 쉬운 일이다. 가지고 있는 걸 포기하고 다시 한번 이전의 일을 되풀이 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 그게 아니지 않은가. “다시 돌아가야겠습니다. 지금 당장 대책회의를….” “안 그래도 이미 모여 있습니다. 이기영 님. 일단… 일단 모시겠습니다.” ‘그래, 그럼 더 편해지지.’ 발걸음을 옮기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성난 목소리 들이 들려온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다시 전쟁이라니요! 도대체 어째서!”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랍니까. 지금 말이나 됩니까! 어디서 허가가 떨어진 겁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걸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문제예요.” “일단 병력을 보냅시다. 인간이 이 신성한 신전에 발을 들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병력을 보내다니요!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병력을 보낸단 말입니까! 다시 싸우자는 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고 오해가 있었다는 걸 전해야지요!” “본래부터 인간은 우리를 적대하고 있었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싸워야 할 때입니다.” “신인류 계획이 코앞에 있는데 쓸데없는 전쟁놀이로 예산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 묶인 신성을 생각해 봅시다. 조금 더 이성적으로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다지 이성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데요?’ 대공황을 맞은 첫날 금융시장에 나와 있는 개미들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모두 손에 봉투 같은 걸 꽉 쥔 모습은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가 아닌가. 불안감으로 맛탱이가 간 것 같은 눈을 보여주는 이들의 모습도 보이는 걸 보면 보통 힘이 드는 상황이 아닌 모양이다. ‘아주 개판이야. 진짜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어요.’ 살짝 인기척을 드러내자 역시나 이쪽으로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지혜 누나도 걱정스러운 표정 연기로 사태의 심각함을 표현하는 중. 자신을 절제한 연기력이 눈에 띈다. 표정을 최대한 숨기려고 하지만 당혹스러움은 감출 수 없는 디테일함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그 탄성에 무언가 불안감을 느낀 것일까. 나를 바라보는 원로 비둘기들의 표정이 조금 더 어둡게 변하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모두들 진정하십시오.” “아. 이기영 님.” “이기영 님. 소식은 전해 들으셨습니까.” “이기영 님!” 일단은 숨을 한 번 고르자. “들으셨습니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잇는 게 중요했다. “네. 전해 들었습니다. 인간들이 신전을 향해 병력을 끌고 들어오고 있다는 것도, 또 타락한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말입니다.” “이… 이 일을.” “당황하실 필요 없습니다. 계획에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 병력을 보내 전선을 유지하고 다시 한번 자리를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걸로 그들이 진정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 전투를 벌이는 것은 저희 계획에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네, 말씀하시죠.” “지금이라도 예산을 축소시키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미 예산은 한계까지 축소시킨 상황입니다. 여러분들이 투자해 주신 신성은 계속해서 작은 대륙을 움직이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만 번의 시뮬레이션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대륙을 유지하고 있는 시스템에 접근하기 위해서 필요한 신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엄밀히 말해 축소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작업 중인 신성을 회수할 수는 있지만 지금 회수한다면 손해가 클 겁니다.” “어느… 정도로 손해가.” “이미 신성의 삼 분의 일가량이… 아니, 그 이상이 들어가 있는 상황입니다.” ‘뺄 수 있어?’ 딱히 말로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손해가 큰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망하는 거야.’ 떡락하는 거라고. “계획에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실험도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 일만 해결하면 됩니다. 네. 딱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되는 겁니다.” 솔직히 창업자가 저 문장을 입에 담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끝장났다는 걸 의미하지만 뭐 그런 게 중요하겠는가. 어차피 쟤네들은 믿고 싶은 걸 믿을 것이다. 이번만 버티고 버티면 언젠가는 떡상 할 거라는 믿음, 잠깐 위기가 오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버티는 자가 승리할 거라는 믿음. 그런 믿음이 저들을 움직일 것이다. “투자한 신성을 회수하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지금 당장 돌려드리겠습니다. 물론 계약서상에 명시된 것처럼 원금을 그대로 돌려드리지 못하겠지만….” “…….” “…….” “불안하실 겁니다. 네. 불안해하시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힘을 모아야 합니다. 모두가 똘똘 뭉친다면 그 어떤 위기인들 해결하지 못하겠습니까. 저희 쪽에서 미처 상정하지 못한 일이 터진 것뿐입니다. 네. 갑자기 말입니다.” “…….” “…….” “이번 실수는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손해가 있겠지만 그것만 감수한다면 충분히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는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대비해야 하는 일입니다. 어째서, 누가 병력이 움직였습니까?” “현재 파악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렇군요. 아마…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 “작전 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물론 이 자리에서 쉽게 말씀드릴 수 있는 사안은 아닙니다만 신인류 계획이 성사되는 걸 바라지 않는 세력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네. 확실할 겁니다. 이런 타이밍에 일을 저질렀다는 건 확실히….” “이상하다?” “네, 이상하지요. 마치 일을 망치려고 작정하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되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불쌍한 인간들이 우리에게 손을 내민 사실 자체가 본래 극비였습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일의 진행 상황은 알고 계시기는 했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는 것은 저와 도미니온스, 세라핌, 그리고 케루빔 님뿐이었지요.” “…….” “이렇게까지 일을 벌일 수 있는 건….” 라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내부에서 나간 병력은 없다.” 하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고개를 돌리자 애써 침착한 척하는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띈다. 그리고 녀석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파란색 머리도 말이다. ‘매번 주인공처럼 등장하시네.’ 당연하지만 표정이 좋지만은 않아 보였다. 일이 조금 꼬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내부에서 나간 병력이 없다는 걸 확인한 것을 보니 본인 나름대로 조사를 마친 것 같았다. 아마 지금쯤 본인이 거미줄에 발을 들여놨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 않을까. “신전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력이 아니라 외부에서 전선을 유지하던 병력이 일으킨 사고일 겁니다. 계획적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작전 세력이 존재한다고요. 병력을 운용했다는 증거는 이미 한참 전에 인멸했을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추측이군.” ‘생각보다 조심스럽네.’ 발언에 조심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이 거미줄이 본인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눈치챘다면 당연히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녀석은 지금 정보가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어째서 갑작스레 천사들이 인간들을 공격했는지, 내가 가진 다른 패가 무엇인지, 정확히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또 그를 위해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 경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단순한 추측이라고 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인류 계획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 케루빔 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 기억에는 분명 케루빔 님도 반대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 “설마요. 설마….” “…….” “그럴 리가 없을 겁니다. 그렇지요?” 녀석이 나를 보고 구역질 나는 인간이라 칭했으니 최대한 구역질 나는 표정을 선보이는 게 맞다. 비웃음을 섞은 미소를 보내고 눈을 작게 떠 녀석을 바라본다. 최대한 때리고 싶은 얼굴로 보여주는 것이 맞다. 나는 이럴 때가 통쾌하더라. “인간과의 전쟁을 원하고 계시는 겁니까?” “…….” “설마 했지만 정말로 있었나 봅니다. 죄 없는 인간들을 죽여 자신의 배 속을 채우고 싶어 하는 이들이, 이 신성한 신전 안에, 천사의 탈을 쓴 채로… 쥐새끼인 양 숨어 있었나 봅니다.” “…….” “비극이로군요. 참 비극입니다.” < 730화 의심과 확신 (4) > “비극이로군요. 참 비극입니다.” 장내가 조용해진 것이 느껴진다. 딱 꼬집어 케루빔을 지칭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뉘앙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이가 어디 있을까. 당장 녀석을 잡아 족치고 싶기는 했지만 나 역시 조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준비물이 전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섣부르게 들어갈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잠깐의 침묵이 장내에 감돈다. 모두가 케루빔과 나를 바라보고 있어 조금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원래 빛기영은 근본부터가 무대 체질이 아니었던가. 저런 시선이야 오히려 즐겁게 느껴진다. 의연한 척 살짝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비치는 것은 파란색 머리를 한 천사. 케루빔이 머리를 굴리는 게 보인다. 그만큼 모호하게 말하기는 했다. 언성을 높이자니 모양새가 이상해질 테고 부정하기에도 적절하지 않다. 결국 녀석이 선택한 것은 내 말에 수긍하는 것. 아마 그 정도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을 게 분명했다. “…….” “…….” “네 말에 동의한다. 아무래도 쥐새끼가 숨어 있는 것 같군.” 쥐새끼가 있다는 건 확정된 이야기네. “네. 그런가 봅니다.” 케루빔 역시 가장 적절한 선택지에 손을 얹었다. 조금은 시간을 두고 싶다는 표현이 아닐까? 이쪽이 섣부르게 들어가기를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녀석 역시 갑작스레 이쪽을 몰아붙이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아마 하고 싶은 말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빌드업이라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 기왕이면 흥분해 날뛰어 자폭해 줬으면 싶었지만 그 정도로 멍청이는 아닌 모양. 오히려 이쪽을 바라보는 눈은 한번 해보자고 말하는 듯했다. 이다음이야 뻔했다. ‘분위기를 한 번 환기시키겠지.’ “그리고, 그 질문은 나를 겨냥해서 한 말인 것이냐.” 이런 식으로. 아마 놈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한 번 정도는 변호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어떤 질문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인간과 전쟁을 원하고 있냐는 질문 말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일이 틀어지면 힘든 것은 여기 있는 원로들과 그대뿐만이 아니다. 나 역시 손해를 입는다는 것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변명하는 것은 아니다만 방금의 발언에 사과해 줬으면 좋겠군. 나는 이미 신인류 계획에 함께 하기로 손을 내밀었다. 기존의 계획을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지만 이미 과거의 이야기다. 여기 있는 모두가 같지 않은가. 생각이라는 건 바뀔 수 있는 법이다.” ‘일단은 모르는 척하겠다. 이거지?’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굳이 케루빔 님을 겨냥해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네, 저도 경황이 없었나 봅니다. 다시 한번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받아들이지.” “하지만 찍찍거리는 쥐새끼가 신전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정확히 무엇이 목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힘을 모아 그자를 색출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 이후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네가 말하지 않았나. 정확히 우리에게 손을 내민 인간들이 습격당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나와 도미니온스, 세라핌, 그리고 이기영 너뿐이다. 물론 외부에 이 말이 빠져나갔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너 역시 용의자 선상에 올려야 함이 옳다.” “동기가 없지 않습니까.” “동기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가령 네가 아직 인간의 탈을 벗지 못했다고 가정해 보자.”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제 등 뒤에 있는 날개가 바로 그 증거가 아닙니까.” “그럼 인간의 탈을 벗지 못한 것이 아니라 네 마음이 아직 그들에게 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떨까.” “저는 이미 죄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진정으로 대륙을 위하는 길인지는 그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신인류 계획 역시 그 때문에 고안해 낸 방법이 아닙니까. 저는 이미 그들과 섞일 수 없어요. 본질이 달라졌습니다.” “나 역시 네가 범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네게도 동기는 충분하다. 우리에게 손을 내민 인간들, 그 인간들을 네 입장으로 생각해 보자면 적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인류에게는 배신자로 여겨질 수 있는 인간들이다.” “저는 천사들을 이끌 능력이 없습니다. 케루빔 님. 커다란 결정에 허가를 내리거나 명령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만약 제가 그 쥐새끼가 맞다면 어떻게 그들을 포섭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잖아. 나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네가 제일 잘 아는 거 아닌가? “천사의 형태를 한 무언가일 확률도 존재하지 않을까.” “가정, 가정, 가정이라니. 지금 케루빔 님께서 정확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케루빔 님의 말씀은 제가 천사와 비슷한 형태를 한 무언가를 만들어, 인간 측의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 그들을 보냈다는 겁니까? 물론 증거는 없으시고요? 아, 가정이라고 하셨죠. 제가 깜빡했습니다. 단순한 가정을 구태여 입을 열어 꺼낸 이유도 궁금해집니다.” “또다시 그렇게 과대 해석해 표현할 필요는 없다. 네가 쥐새끼라고 말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너 역시 그 후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뿐이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 말을 꺼낸 것이지.” “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둬야지요. 하지만 그 말씀은.” “물론 나 역시 용의 선상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마. 조사가 필요하다면 성실히 임할 수 있다. 다만 그대 역시 마찬가지다. 세라핌, 그리고 도미니온스도 마찬가지겠지. 그 외에도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이가 있다면….” ‘정면 돌파.’ 녀석답다는 생각이 든다. 잘못한 것이 없으니 당당해도 되겠다는 태도로 보인다. 이쪽이 증거를 조작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상정하고 있는 게 분명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뭔가 준비된 게 있나?’ 지금부터 준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자신은 변호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살짝 주변을 둘러보자 비둘기들이 애매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기관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 옳다. 첫 용의자로 지목된 네 명은 관여할 수 없는 독립적인 기관 말이다. 기관이 만들어지는 대로 차례대로 조사를 받는다면 무언가 나오는 게 있지 않겠지.” ‘예상한 건가.’ “신인류 계획에 투자한 천사들 반과 그렇지 않은 천사들 반으로 구성하는 게 괜찮을 것 같군.” ‘너무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것 같은데… 너 이 새끼 뭐 준비라도 했어?’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이로울 것이다.” ‘아니… 이 새끼 예상했구나?’ 이 앙큼한 새끼. 정말로 준비한 거구나? 잠깐이었지만 뒤통수가 가려워진다. 확실하게 맞은 것은 아니었지만 놈이 내 뒤통수를 쓰다듬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나를 노려보고 있는 눈을 보자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머리 아픈 짓거리를 하지 않는 타입이라고 판단했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 정말로 케루빔이 내가 함정을 팔 것이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자 조금 싸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어떤 종류의 함정일지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최소한 자신을 엮을 거미줄이 준비될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잘 알고 있네.’ 오히려 이 퍼랭이가 쓰로누스보다 나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녀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제 발톱을 드러냈다고 보면 되는 거야? 역갱 준비한 거지? 역으로 털어먹겠다?’ 세라핌의 죄의 심판에 대해서는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는 거네. 내 뒤에 있는 날개도 마찬가지고. 나도 이제 녀석에 대해 알 수 있을 것 같다. 녀석은 자기 자신의 판단을 믿는다. 주변에서 뭐라고 한들, 놈은 놈이 옳다고 판단한 것만 믿는다.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케루빔. 저 역시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밝혀질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동의해 줘서 고맙다. 도미니온스.” 여기서 어떻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어? 지혜 누나 역시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동의하겠어. 케루빔.” “세라핌.” ‘부정하는 순간 역적으로 몰릴 분위긴데.’ “저 역시 동의하겠습니다. 케루빔 님.” 이건 호응할 수밖에 없다. 녀석이 정론이다. 물타기와 인민재판으로 호로록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던 이쪽보다는 확실히 이성적인 선택이다. ‘이게 불리하게 작용할까?’ 당연하지만 나 역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애초에 이기영이 쥐새끼라는 건 영 들어맞는 이야기도 아니다. ‘케루빔이 증거를 가지고 있나?’ 가능성은 적다. 녀석이 아무리 모든 상황을 안배해 놓았다고 한들, 이런 것까지 완벽하게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 곧바로 시행하도록 하지. 독립기관의 구성은 쓰로누스를 통해서.” “네.” “최대한 빨리 구성한다고 해도 삼 일은 걸릴 테니 그 이후부터는 순차적으로 빠르게 조사에 임했으면 좋겠군.” “옳으신 말씀입니다. 케루빔 님.”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결코 유익하지 못한 시간은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더미 월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을 때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하고 있었던 거 맞아요.” “그래?” “네. 거의 백 퍼센트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쪽에서 함정을 파놓는 걸 기다리고 있었네요.” “조사받는 건 조금 어땠어? 누나?” “뭐 어쩌고 말고 할 게 있나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죠. 구성원을 구성하는 것도 예정된 시간보다 빠르게 진행됐잖아요? 미리 준비하지 않았으면 이런 속도가 나올 리가 없죠.” “세라핌은 어때?” “케루빔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비둘기야 원래 그렇잖아요?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니 오빠가 죄를 씻었다고 생각하는 놈인데. 그나저나 준비한 건 있어요? 왜 이렇게 태연해요? 그동안 바쁘게 움직인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더미 월드나 만지작거리면서 빈둥대고 있는 것밖에 안 보였는데. 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준비 다 끝내 놓은 거예요? 이렇게 여유로워도 돼요?” “왜 재미있잖아. 더미 월드.” “저쪽에서 이 갈고 준비하고 있잖아요. 얘가 은근히 만만치 않다니까요. 케루빔한테 작업 치려고 한 거 아니었어요?” “…….” “작업 들어가려고 한 게 케루빔이 아니었어요?” “…….” “너무 태연하다 싶었는데… 정말로 케루빔이 아니었던 거예요?” “…….” “아니, 답답하게 진짜 말 좀 해요. 그래야 여기서도 호응을 해주거나 하지. 세라핌이에요? 쓰로누스? 케루빔 맞죠? 지금 여기서 시간만 죽이면….” “누나도 이런 건 절대 안 알려주잖아. 오히려 안심되네. 누나가 아직 못 깨닫고 있다는 건 저쪽에서도 절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되는 거잖아.” “무슨 수수께끼 게임해요? 이제 말할 때도 됐잖아요.” “작업 치려고 한 건 케루빔이 맞아.” “그런데요?” “한 놈 더 있거든. 사실 케루빔은 겉절이지. 진짜로 작업 치려고 한 건 따로 있다 이거야.” “…….” “…….” “누군데요?” “지금 아군 병력은 어때?”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아.”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입을 벌리는 도미니온스, 아니,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천천히 말을 건넨다. 궁금증이 해결된 얼굴은 속이 다 시원해 보인다. “이제 알겠네요. 오빠가 작업을 치려고 한 게 뭔지. 이제 알겠어요.” “뭔데?” “…….” “…….” “시간.” 역시 누나는 눈치가 빠르다니까. 나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답.” < 731화 방주 (1) > 문제는 시간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갈 때마다 소비되는 신성이 어느 정도일 것 같아?” 비둘기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아준 신성은 초 단위로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있다. 더미 대륙에 계속해서 투자되고 있는 비용과 기존 대륙의 시스템을 뚫기 위한 비용, 심지어 전쟁을 지속시키는 것에서도 신성을 필요로 한다. 모인 신성의 삼 분의 일이 사용되고 있다는 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신성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해서 소모되고 있었다. 실실 웃고 있는 이지혜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혹시나 내 생각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내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저 얼굴을 보니 그런 걱정은 서랍 안으로 집어넣어도 될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안심되네.’ “시간이 흐를 때마다 인류 측이 얻게 되는 이득도 상당하겠네요. 계속되는 전투마다 소소한 이득을 가져가고 있으니까요.” “케루빔이 여기에 묶여 있으니까.” “세라핌도 묶여 있지만 네임드 개체들이 묶여 있다는 사실보다 더 문제가 되는 건 보급과 비용이겠네요. 오빠 말이 맞아요. 이건 제대로 들어맞았어요. 케루빔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맞았다고 해도 무리가 없겠는데요. 기간은 어느 정도로 생각해요?” “글쎄. 길게 뻐기면 반 개월은 뻐기고 싶은데… 일주일 정도면 눈치채지 않을까. 조금 더 늦을 수도 있고… 지금은 바쁜 상황이니까. 이것저것 따질 여유가 없겠지. 아마 한 참 신날 타이밍일 거야. 본인이 상황을 뒤집었다고 판단하고 있을 테니까. 역으로 함정을 파놓은 게 제대로 들어 먹혔고 조금만 버티면 눈에 거슬리는 놈 하나를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뭐.” “그러니까요.” “누나도 알고 나도 알잖아. 눈앞에 다친 사냥감이 있는데 어떻게 이빨을 들이밀지 않을 수가 있겠어.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주면 얘 입장에서는 더 애가 타지 않을까 싶은데… 눈치가 없는 놈은 아니니까. 최대 기간으로 잡으면 두 달 정도는 더 해먹을 수 있겠네.” “어떻게 조금 더 해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요? 아니면.” “아니야, 누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너무 티 나게 움직이면 괜한 의심 사기 딱 좋다니까. 지금 이 상태가 가장 이상적인 상태야. 더미 월드는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고 신성도 던져주고 있고 아군 진영도 매뉴얼대로 움직여 주고 있고.” “그게 가장 크죠?” “물론.” 외부에서도 이쪽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고 있다면 이득은 극대화 된다. ‘크게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지만 않으면 돼.’ 비둘기들이 발작을 일으킬 정도의 이득만 챙기지 않으면 된다. 지금까지 아군 진영이 보여준 모습을 보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리한 것은 이쪽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매뉴얼 그대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스노우 볼을 굴리는 걸 도와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게 운영 아니겠어.’ 아주 작은 이득, 그 작은 이득을 계속해서 굴리는 게 중요하다. 혜진이도 아마 할 일이 많지 않을까. 내부 정비야 끝냈겠지만 전선을 앞으로 당긴 이상 신경 쓸 게 더 많아졌을 것이다. 병력을 앞으로 당긴 만큼 임시 전선을 구축해야 할 것이고, 움직이기 시작한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면서도 녀석을 본래대로 되돌릴 방법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래, 혜진아. 시바.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슬슬 나가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 그래야지.” “뭐 크게 준비된 건 없는 것 같기는 하던데… 그래도 너무 당해주지는 마요. 떡밥 던지려다가 순식간에 잡아먹히는 수가 있으니까. 실제로 위험하다니까요. 까딱하다가는 배신자로 몰려서 오도 가도 못해요.” ‘그럴 리가 있겠어?’ 자만이 아니라 확신이다. 조사에 성실히 임하려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세라핌은 케루빔을 의심하고 있고 케루빔은 이쪽이 던져 놓은 떡밥을 받아먹기 급급하다. 여러 가지 퍼즐을 차곡차곡 모아 판 안에 끼워 맞추기 정신이 없다는 거다. 독립 조사 기관이 만들어진 지도 얼마 안 됐으니까. ‘초기 조사 정도에서 삼 일 정도 벌 수 있고.’ 케루빔이랑 드잡이질 하다 보면 일주일은 훌쩍 지나지 않을까. 만약 그때 가서 놈이 깨달았다고 한다고 해도 쉽사리 나를 옭아맬 수는 없을 것이다. 독립기관을 만들자고 한 것은 녀석이었고 단순한 의심만으로 나를 압박할 수는 없다. 행정절차대로 질질 시간을 끌다 보면 눈덩이는 커지고 커져 신전을 뭉개 버릴 정도가 커지고 종국에 작고 달콤한 복수가 완성될 것이다. ‘형이 복수해 줄게.’ 뭔가 이상한 기척이 느껴진 것은 목적지를 앞둔 바로 그때였다. 순식간에 붉어진 배경이 시야에 비친다. “전투 준비 한다. 전투 준비 한다!” ‘무슨 전투 준비야?’ “인간들이다. 전투 준비한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비상사태라도 일어난 것처럼 신전 안이 붉은 경고등으로 가득 메워지는 중.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꽃밭이었던 것 같은데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뭐야. 시바. 이거 현실이야? 이거 현실이냐고. 뭐야?’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김현성 연방 손절 사건?’ “불가능해.” 신전의 결계를 뚫고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스템으로 보호받고 있다고 느껴지는 수준의 결계다. 외부에서 뚫어내면 뚫어낼지언정, 순식간에 신전 안으로 이동하는 것은…. ‘밖에 온 건가?’ 시바. 갑작스레 불안감이 등 뒤를 타고 온몸을 휘감는다. ‘진짜로 온 건가? 비둘기들이 호구로 보여? 그냥 적진으로 돌격이라고?’ 조혜진 제정신이야? ‘아니, 시바, 위에서 캐리하고 있으면 아래에서 조용히 기다리면 되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내가 매뉴얼에 그딴 거 적어놨었어?’ 독단적인 판단이다. 나는 이런 무리수를 던지는 것에 동의한 적이 없다. 애초 가만히 있어도 잘 굴러가는 판이었다. 그걸 설계하기 위해서 개고생이라는 개고생은 전부 다 하면서 기다렸는데. 이 판을 만들려고 내가 얼마나…. “이… 미친놈들.” 순식간에 내부로 들어올 수 없다면 이 새끼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다. “외부에서 뚫고 들어올 생각인 거야.” 수성전을 해도 불리한 싸움인데 공성전으로 병력을 소모시키면서 들어 온 단다.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허겁지겁 뛰어나가 밖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아주 익숙한 형태를 하고 있는 운송수단 이었다. ‘방주.’ “이… 이 미친 새끼들이.” ‘나이스 보트.’ “이 병신 새끼들….” 마지막에 봤던 것보다 더욱더 거대한 외관, 더 많은 인원을 태우기 위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튜닝을 마친 상태였다. 선체의 앞부분에 장착된 뾰족한 장치를 보니 저 용도가 무엇인지 예상이 된다. 텔레포트로 배를 신전의 앞부분으로 옮긴 이후에. ‘그냥 뚫고 올 생각인가?’ 내가 불안해했던 그대로, 인류의 희망은 신전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이, 이 미친 새끼들아!” 다급한 상황에 망원경까지 켠 상황, 혹시 이쪽을 바라보는 눈이 있을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위에 있는 저 배가 더 걱정이 된다. 선체를 뚫고 들어간 시야는 어느새 선체의 내부까지 비치기 시작했다. -더 힘차게! ‘박덕구 시바. 이 돼지 새끼.’ -더 힘차게 저으라니까! ‘이 돼지 새끼 진짜.’ -속도를 내야 한다니까! 마법사들이 마력으로 이루어진 노를 잡고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라면 장관일 것이다. -아, 거 답답하네! 노 좀 줘보쇼. 힘차게 저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매가리가 없어, 매가리가. 힘차게! 구호에 맞춰서, 여엉차! 여엉차! 여엉차! 모두 타이밍 좀 맞추쇼! 영! 할 때 밀고! 차! 할 때 당기라 이 말이요! 영차! 영차! -아저씨. 비둘기들이 접근 중. -마법 포대는 이미 준비됐습니다. -그쪽은 기모 형씨가 좀 봐주쇼. -포대 열어! 포대! 포대 열고! 신호에 맞춰서 발사합니다! 포탄 장전! 포탄 장전! ‘마법 포대는 시바 또 언제 이렇게 많이 달았어. 시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영차! 영차! -발사!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발사!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박기리 삼 남매. 너희 진짜 왜 그래. 혹시나 이 미친놈들이 자기들끼리 독단 행동을 한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됐지만 그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애초에 녀석들끼리 움직였다면 여기까지 닿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조금 더 선체 내부를 살펴보자 동승자들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조혜진, 시바.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결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조혜진. ‘하얀이는 건강해 보이네. 근데 그거 손에 들고 있는 나뭇가지는 소라야?’ 한소라의 신체의 일부를 손에 꽉 쥔 채로 중얼 거리고 있는 정하얀. ‘너는 또 거기에 왜 껴 있어. 시바.’ 조용히 성검을 매만지고 있는 라파엘. ‘희라 누나는 그냥 싸우고 싶어서 왔지?’ 들떴는지 흥분한 상태로 보이는 차희라. 하나하나 다 열거할 수도 없다.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이들까지 시야에 비친다. 선희영과 엘레나 역시 온 것을 보니 애초에 전위 후위는 가리지 않기로 한 모양인 것 같았다. 일단 파란 길드원들은 모두 모여 있다. 대륙의 강자로 분류할 수 있는 네임드들도 모조리 배에 타고 있는 것만 같다. ‘저 배 채로 격추당할 거라는 가정은 아무도 안 한 거야? 저 미친 계획에 태클은 아무도 안 걸었던 거냐고.’ 박기리 삼 남매의 선동에 조혜진이 말려든 건지, 아니면 일을 벌인 게 조혜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뭐가 됐든 무리수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거대한 폭격이 공중에서 시작되고 하늘에 떠 있는 배가 힘차게 신전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폭격을 맞고 선체에 충격이 왔는지 흔들리는 와중에도 저 방주는 부서지지 않는다. 시바, 그래. 저거 튼튼하기는 오지게 튼튼했어. 차원 여행까지 다녀온 경력이 있으니 몇 번은 버틸 수 있겠지만 저게 여기까지 닿으리라는 확신이 없다. 만약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저 배를 신전에 꼬라박는 주사위는 던지지 않았으리라. 1차 방어선을 돌파한 방주가 맞이한 것은 개떼처럼 몰려들고 있는 비둘기들, 어떻게든 배의 움직임을 멈추려 하고 있었지만 마법 화포가 불을 뿜고 있다. -발사! 발사! 발사아!! ‘안기모 저 새끼 꿈이 해적왕이라고 그러지 않았어?’ “시발, 꿈을 이뤄서 행복하시겠네요.” 콰아아아앙! 화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비둘기들이 방주에서 튕겨 나간다. 거대한 방어막이 어느새 선체를 감싼 이후에는 탄력을 받았는지 더 빠른 움직임으로 접근하는 방주가 보였다. -전진! 전진! 더 힘차게! 더 힘차게! 부딪친다! 꽉 잡으쇼! -다들 진입할 준비! 진입할 준비 합니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충격에 대비합니다! 곧바로 움직입니다! 매뉴얼대로 움직입니다! “너나 시바 매뉴얼대로 움직여.” -꽉 잡으쇼!!!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투명한 막에 부딪치는 방주가 보인다. 조금 뻘쭘하기야 하겠지만 그대로 돌아가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직 우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어코 방주가 결계를 비집고 들어온다. 이후에는 뻔하지 않은가. 귀를 울리는 굉음을 내며 방주가 기어코 신전에 처박혔고, 상륙작전에 성공한 돼지 새끼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배 안을 뛰쳐나왔다. 뭐라고 코멘트를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시… 이발… 이 나쁜 새끼들아….” < 732화 방주 (2) >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직! 퍼어어어엉!! -움직여! 움직여어!! -방패부터 먼저 내려. 방패부터! -승리를!! -움직여라!!! 전진! 전진! -승리를 위해! -준비! 준비! 방어 마법 준비!! 신전에 처박힌 방주 안에서 인간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평소에 들고 다니던 방패보다 더 커다란 방패를 손에 든 채로 근육 돼지들을 이끌고 나오는 박덕구의 모습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 기가 찬다. 바깥에서부터 쏟아지는 공격들을 막으며 병력이 빠져나올 수 있게 하는 걸 보면 훈련 자체는 잘 되어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저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니, 시바, 멋있기는 멋있네.’ 위에서 떨어지는 공격도 막아서기 위해 방패로 위쪽까지 완전히 가득 채웠다. 마치 전진하는 작은 성벽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마법사들의 보호 마법으로 병력을 한차례 감싼 것으로 모자라 신성력까지 전부 때려 박았다. 밀집된 탱커들이 움직임을 보조하기 위해 민첩 관련된 버프는 전부 사용한 것 같은 모습, 이동하는 속도가 꽤 빨라 내가 보기에도 당황스럽다. 당연하지만 평범한 사제의 버프를 받은 것이 아니다. ‘벽 안에 있나.’ 방패의 벽 안에 누가 있는지 확인 할 수밖에 없었다. ‘엘레나.’ 망원경으로 안을 바라보자 에메랄드색 머리를 가지고 있는 엘프가 자리하고 있는 게 보인다. 입술은 덜덜 떨지만 계속해서 신성력을 보내고 있는 모습, 보조 탱커 한 명의 팔뚝을 붙잡고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얼굴을 보니 겁에 질려 있는 것이 보인다. 당연하겠지, 뭐. 애초에 쟤는 저런 난전에 대한 전투 경험이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후방을 책임지는 사제 중에서도 극 후방에 자리해야 하는 사제였고, 전투 사제처럼 써먹기에는 신체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총알받이들과 함께 선봉으로 전장에 나선다는 경험 자체가 처음이 아닐까. 뚫을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던 방패의 벽이지만 계속되는 폭격에도 금이 가는 것이 보인다. 콰앙!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작은 성벽의 한쪽 면이 터지기 시작.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핏물이 엘레나의 얼굴로 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방패의 벽은 순식간에 보조탱커들로 메워졌지만 전투의 열기를 그대로 전해 받은 엘프 공주가 동요하는 것이 보인다. -제길! 제기랄! -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바로 채워 넣어! 다음으로! -부상자들은 뒤로! 신속하게 움직이쇼! 신속하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조혜진이 곧바로 그녀의 가까이에 자리했다는 것이었다. -엘레나. 괜찮으십니까? -네… 네. 괜찮아요. 길, 길드마스터 대리. 그저. -도착할 때까지 제가 붙어 있겠습니다. -아니에요. 굳이 그러실 필요는…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힘드신 상황이라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 -……. -감사합니다. 조혜진을 붙잡은 채로 발걸음을 옮기는 엘레나의 모습은 한결 편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을 떨쳐낸 것은 아니다. 아니, 두렵다는 것 이전에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소음, 땀과 혈액으로 꽉 차 있는 공기, 애써 고개를 돌려야 하는 낙오한 부상자들과 죽어가는 동료들, 전장을 넓게만 바라보던 그녀는 처음 보는 광경이다. 선봉이 바라보는 배경을 가장 후방에 위치해야 하는 사제가 바라보고 있다.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보인다. 뭔가를 깨달았다고 말하면 거창하겠지만 적어도 아까와 같은 얼굴은 아니다. 외부에서 본다면 방패의 벽 안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엘레나의 몸 전체가 환하게 빛나고 있다. 그만큼 한계에 가까운 신성력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결연한 표정의 조혜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 곧바로 발걸음을 옮긴다. 방패의 성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괜찮습니다. -저를 따라 오세요. 엘레나 님. -버텨라! 조금만 더 버텨! 거의 다 왔다. 버텨! -엘레나 님! 어서 따라오세요. 지쳐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엘레나에게 손을 내민 것은 파란 길드의 보조탱커 유아영. 벽 안에서 대열을 새로 정비하는 병력들이 보인다. 방패의 벽을 이끌고 온 사제와 마법사들을 다시 한번 최후방으로 보내고 방패의 성문이 열리면 가장 뛰쳐나올 전사들이 무기를 가다듬는다. 대열을 재정비하기까지 시간을 벌어줘야 할 근육 돼지들은 쏟아지는 공격을 막으며 최대한 버티는 중, 비명과 함성이 섞여 신전 안을 가득 메웠다. -버텨어!! 버텨!!!!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열어! 열어라! 지금! 지금 열어!! -준비됐어! 열어! -죽지 마쇼! 혜진 누님! 다치지도 마쇼! -열어!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방패가 열리며 숨을 참아왔던 병력들이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가장 처음 성문을 열고 나온 것은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조혜진, 두 손으로 창을 잡은 채로 자신을 맞이하는 비둘기의 목을 꿰뚫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왜 이렇게 빨라? 혜진이, 시바, 이 갈았네. 창 한 방에 1킬이여. 아주.’ 마치 김현성을 보는 것만 같다. 그것도 조금 더 날카로운 것 같은 느낌, 뒤를 따라오는 병력들보다 한참 앞에 서 있다. 저러다 포커싱돼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 정말로 창을 들고 있는 건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창을 지렛대 삼아 몸을 움직이고 꽂힌 것을 그대로 빼지도 않는다. 일정 거리를 둬야 하는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게 완전히 비둘기들에게 둘러싸인 형국이 아닌가. 창을 휘두를 공간도 없는 전장에서 신창이 선택한 방법은 몸을 사용하는 것. 창을 완전히 놓은 채로 주먹질을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개… 시바, 개 멋있어.’ 단순한 주먹질이 아니다. ‘뭐야? 저런 건 또 어디서 배웠어.’ 이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다. 차희라와 부딪친 적이 있었던 샤오린이 비슷한 걸 보여준 적이 있다. 종류는 다른 것 같지만 뭔가 형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무기 긴 애들은 전부 주먹질 같은 거 할 줄 아는 거야?’ 무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게 되는 환경에 처했을 때에 대한 대비가 아닐까. 샤오린의 것보다는 화려하지 않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수수한 쪽, 하지만 절도가 있고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다. 필요한 만큼 움직이고 있는 느낌, 낭비가 없다는 게 전해져 온다. 마치 창을 휘두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발바닥으로 상대방의 정강이를 부러뜨리고 어깨로 밀친 이후에 공간을 만든다. 주먹을 쥔 이후에 상대방의 명치에 가져다 대자 주먹에 맞은 비둘기 엑스트라가 튕겨 나간다. 창을 뻗어오는 비둘기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는다. 긴 다리를 쭉 뻗어 창을 감은 이후에 몸을 돌리자 오히려 창을 뻗은 비둘기가 땅바닥에 처박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발로 턱을 걷어 올려 차고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른다. 너무 정신이 없어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발차기를 잘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게 된다. “뭐야, 이거. 시발 왜 이렇게 멋있어.” 보통의 싸움에서는 저렇게 할 수 없는 법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으니 어떻게 기가 차지 않을까. 액션 영화에서 보여주는 장면들도 지금 저것보다는 덜 멋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날 가져요. 누나. 시바.’ 지금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정말로 날 가지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시바, 이제 어쩔 건데.’ 쟤네들이 보여준 인상적인 모습은 확실히 뇌리에 박혔다. ‘그래 너네 멋있고 아주 훌륭하세요. 진짜. 근데 이제부터 어쩔 거냐고.’ 상륙작전에 성공하셨네요. 진짜 덕구야, 대단하다. 너도 진짜. 어떻게 이걸 성공시켰어? 훈련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내가 봐도 군더더기가 없더라. 근데 그래서 이제부터 뭐 할 건데. 여기서 어떻게 나갈 건데. 괜스레 입술을 깨물게 된다. 만약 일회성 기습 공격이었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내 통제에서 벗어난 행동이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며 박수를 보내지 않았을까. 문제는 이게 올인이라는 것에 있다. 인류가 가진 걸 모두 걸고 냅다 적에 심장부에 꼬라박았다. 내로라하는 길드의 길드마스터는 전부 자리해 있다. 저게 인류 전력의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거다. 총알받이들이라도 조금 자리해 있다면 그나마 안심이 되겠지만 어디까지나 저 병력은 소규모라고 말해야 옳다. 말이 좋아 상륙작전에 성공한 거지 저 병력이 모두 고립된 거나 마찬가지라다. 그 어떤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고,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상태다. ‘혜진아. 시바. 생각해 놓은 수는 있는 거지?’ 저 자리에 김현성이라도 있었다면 그나마 안심이 됐을 것이다. ‘아니야. 그래도 안심 안 됐을 것 같아. 혜진아. 뒤는 생각하고 온 거 맞지? 다음 수가 있기는 있는 거지?’ 누구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고 싶다. ‘그냥 자살하려고 온 건 아닐 거 아니야. 시바.’ 뭔가 그럴듯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 아니, 없더라도 내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혼란.’ 세라핌, 케루빔, 쓰로누스는 아직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 도착하지 않았다. 적 네임드들이 전쟁터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저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 ‘제길. 시바. 시바.’ 이 사달이 났는데도 이 새끼들이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다. 어디서 뭣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움직이는 중이 아닐까. 나 역시 움직여야 했다. ‘어디로?’ 지혜 누나는 따로 움직여 주겠지? 설마 저 사단이 났는데 이지혜의 영혼을 빼앗은 도미니온스 연기를 조혜진한테 선보이지는 않겠지? 아니, 얘는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을 때였다. “여, 여기 있었구나.” ‘쓰로누스.’ “다친 곳은 없… 다친 곳이 없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아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지금 인간들이….” “…….” “인간들이 신전을 습격했다. 지금 당장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안전한 곳이 어딘데.’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나 역시 지금 당장 가 봐야 해. 인간들의 공세가 심상치 않아. 아마도 너를 되찾으려고 온 거겠지. 확실한 것이다.” ‘이 새끼는 갑자기 친한 척이야. 이 무능력한 새끼. 시바.’ “어서! 빨리!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표정이 긴박해 보이기는 한다. 급한 상황이기는 하겠지. “쓰로누스 님?” 사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인간들이 본인들의 성소로 침입한 상황이 아니었던가. 한쪽에서 아직도 긴박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만큼 곧바로 지원을 나가는 것이 옳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먼저 찾아왔다는 건 어떤 상황에서는 환영할 만하다고 느껴진다. ‘쓰로누스는 당장 합류하지 않는 건가.’ 녀석이 합류한다면 팽팽한 균형은 분명히 무너질 것이다. 이 새끼가 무능력하기는 해도 김현성을 압도할 만한 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니었던가. ‘이 새끼를 상대할 만한 놈이 누가 있지?’ 당장은 떠오르는 이가 없다. 구태여 말하자면 라파엘 정도가 되겠지만 김현성을 궁지로 몰아넣은 녀석을 성검용사 따위가 감당해 낼 수 있을 리 만무. 차희라야 케루빔과 싸우기를 원하고 있을 테고 정하얀은 특별한 롤을 부여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돼지 새끼야 어차피 맞는 게 역할이고…. “빨리,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안전한 장소. 여기가 안전한 장소야?’ 허겁지겁 뛰어온 곳을 보니 확실히 안전할 만하다고 느껴지기야 한다. 문제는.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일을 정리한 이후에 곧바로 돌아오마.” ‘뭐, 시바, 너 지금 나 두고 간다고?’ 이 새끼가 나를 두고 전장에 합류하려 한다는 것. “조금만 버티거라.” ‘뭐야. 시바. 진짜 나 버리고 갈라고?’ “…….” “그럼.” “…….” “…….” “가지 마세요.” 일단은 녀석의 소매를 꽉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바깥은 무법천지였으니까. ‘나 지켜줄 거잖아? 그렇잖아. 케루빔이 와서 해코지하면 어떻게 해?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인데 누구를 믿을 수 있겠어. 진짜 그 새끼가 나 죽이러 올지도 모른다니까.’ < 733화 이례적인 일 (1) > ‘넌 지금 가면 진짜 쓰레기인 거야. 나쁜 새끼인 거라고. 어떻게 시바 나를 혼자 두고 가.’ 최대한 겁먹은 표정을 보여주는 것이 맞다. 여기는 안전하지 않다는 듯, 믿을 수 있는 건 너뿐이라는 얼굴로 쓰로누스를 바라보는 것이 정답이다. 잠깐이었지만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멈췄다고 하는 게 올바른 표현일까. 온몸에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뭐야? 시바 고민하는 거 아니지? 그렇지?’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너도 최근에 분위기 이상한 거 알고 있잖아. 우호적인 비둘기들도 있는 반면에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새끼들도 많다고. 지금 바깥이 상식이 통할 것 같아? 케루빔이 왜 시바 지금까지 저 싸움터에 등판하지 않았겠어? 이 새끼 분명히 나 찾아다니고 있을걸. 안 그래도 뚝배기 한번 깨보려고 기 모으던 찰나였는데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겠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거슬리던 새끼를 쓱싹하는 건 솔직히 누구나 다 하는 생각이잖아. 무법지대라고, 시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니까? 굳이 케루빔이 아니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원로 비둘기 중에서도 나를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이 많다. 쓰로누스가 뛰쳐나간 순간 그 새끼들이 이쪽으로 들이닥치면 이기영의 소중한 목숨이 저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 버리는 상황이라는 거다. “두렵습니다. 이곳은 안전하지 않아요.” ‘네 옆이 제일 안전한데 시바. 무슨 안전 타령이야?’ “…….” “가지 말아주세요.” “이곳은 안전한 곳이다. 내가 이미 다른 이들에게도 이야기해 놓았어. 아마 그들이 널 지켜줄 것이다.” “그들이 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쓰로누스 님.” “그렇지 않….” “몇 번이나 목숨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사실 받은 적은 없다. 좀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 정도로 미친놈들은 없더라. “그럴 리가.” “말씀드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계획한 일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는 건 쓰로누스 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할 말 없지? 시바. 너도 내 편 안 들어줬잖아.’ “가지 마세요.” 다시 한번 소매를 꽉 붙잡아 보자. 잠깐 동안 혼란스러워하기는 했지만 이내 결심한 듯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모습. 한 번 고개를 돌린 이후에는 조심스레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그래. 시바, 잘 생각했어.’ 일단은 붙잡아 두는 것에 성공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바닥에 자리를 잡아 조금은 어색한 몸짓으로 옆쪽에 자리를 잡는 것이 눈에 보였다. 본인이 느끼기에도 어색한지 조금 쭈뼛거리기는 했지만 이내 날개를 접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 조금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참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시점에 본인이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지 불안해하고 있는 거겠지, 뭐. 그 말 그대로 나를 지켜주고 있는 이 늠름한 천사는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한번 해볼까?’ 변덕이다. ‘한번 해봐?’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짐을 놓을 수 없는 이 천사가 짐을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짐을 놓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가정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쁘지는 않아.’ 전투 능력이야 흠잡을 데가 없다. 그 김현성을 압도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심지어 둠둠현성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선보이기도 했고 성격도 써먹을 만하다. 1회 차 가면의 영웅이 어째서 녀석을 곁에 두었을까 떠올려보면 금방 답을 찾을 수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잖아.’ 이 천사가 내 편이 되어준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투 역시 훨씬 원활하게 진행하지 않을까. 문제는 이놈이 케루빔이나 세라핌에게 검을 겨눌 수 있느냐는 것. 다른 비둘기들을 적대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때마침 콰아아아아앙!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였지만 연약하고 힘없는 이기영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괜찮을 것이다. 겁먹지 않아도 돼.” “하지만.” “잠깐 내가 바깥을 확인….” “안 돼요. 가지 마세요.” ‘주변에 아무도 없어 새끼야. 누구 하나가 열심히 뛰어오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네가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신경 쓰면 안 되는 거지.’ “…….” “…….” 슬슬 분위기나 잡아봐야지. 침묵이 너무 길면 이상하자너. 온몸에 떨림이 잦아든다. 공포에 질린 빛기영이 점점 안정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쓰로누스도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이 정도 타이밍이 좋을 것이다. 딱 지금인 것 같다. “…….” “이따금….” “?” “이따금 생각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뭐?” “흐릿하지만 이따금 생각나는 것들이 있어요. 저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입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장면들이 떠올라요. 그곳에서 저는 저런 비명 소리와 폭발 소리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 “피 묻은 가면을 쓴 채로 웃고 있었어요. 인간들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살려달라고, 살고 싶다고,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하지만 그런 그들 역시 온몸이 터져 넝마가 되어 흩어졌어요.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틀림없이 저였습니다. 폐허의 중심에서 웃고 있었던 것은 저였어요. 어째서인지, 도대체 제가 왜 이런 걸 보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가운데 자리한 것은 틀림없이… 틀림없이 제 모습이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었던 비밀. 쓰로누스의 얼굴이 흔들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건….” “쓰로누스 님을 처음 봤을 때가 기억이 납니다.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었지만…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분명히 저를 알고 계시는 것 같….” “그건 네 모습이 아니다. 잊어도 되는… 잊어도 되는 기억이야.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이미… 그래… 이 전과는 다르니까.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다.” “역시 그건….” “…….” 뭔가 말을 하기 꺼리는 표정이다.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쓰로누스의 입장에서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 그거 너야. 사실 1회 차에서 네가, 응? 나쁜 놈들에게 세뇌당했었는데, 그때 진짜 대단했었지. 막 있잖아. 여기저기 다 부수고 다니고 사람들도 화끈하게 죽이고 그랬는데. 내가 봐도 진짜 악질이었다니까. 그것뿐인 줄 알아? 나도 죽였다고. 뭐 세뇌당해서 그런 거기는 한데 그때는 1회 차고 정신도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죄책감 같지 않아도 돼.’ 어떤 싸이코패스가 저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상처받은 빛기영의 마음은 누가 치료해 주나. 녀석이 말을 조심하는 것도 그런 연유일 거라고 생각했다. “죄의 심판이 무엇인지, 제가 가지고 있었던 죄가 뭐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부정하고는 있었지만 그건….” “네가 아니었다!” “…….” “네 모습이 아니었어….”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머릿속에 나타나는 이미지 중에는 쓰로누스 님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이 기억은 조금 더 편안한 기억이에요.” “그건….” “함께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그건….” “정확히 어디인지는 떠오르지 않지만….” ‘너도 기억하지? 그때 우리 좋았잖아. 완전 행복했었자너.’ “쓰로누스 님은 인간은 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빛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그래서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죠. 어째서 제게 자신을 선택했는지도 물으셨습니다. 그럼 제가 대답을….” 늠름한 천사가 홀린 듯이 입을 열어왔다. “내가 인간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네. 쓰로누스 님은 인간들처럼 고민하고 후회한다고. 걱정하고, 별것 아닌 것들 때문에 깊은 생각에 빠진다고…. 당신은 더 빛날 수 있다고, 더 강해질 수 있고,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다른 천사님들보다 더욱더 높게 떠 있을 수 있다고. 그게 제가 쓰로누스 님을 선택한 이유라고….” “그렇지… 그랬었지.” “언젠가 다시 이 풍경을 보러 오자고.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자고.” “분명히… 그랬었다.” 아깐 아니라고 했으면서 지금은 또 그랬었단다. 녀석의 태세전환 솜씨를 보니 살짝 기대되기도 했다. 은근슬쩍 얼굴을 흘겨보자 확실히 감상에 빠져 있는 것만 같다. 눈가가 살짝 축축해진 것은 기분 탓인지 모르겠다. “그때의 대화는 제 가슴속에, 영혼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 것이냐.” “물론 괴로운 기억도 함께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이상하고, 제가 생각하기에도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 “저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 “인간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어요. 그것은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분노의 표출이었으며 광기 그 자체였습니다. 쓰로누스 님의 말처럼 그들은 별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별, 스스로 빛나고 어둠을 환하게 빛내는 별 말입니다. 저는 그 별들을 짓밟고 부쉈어요. 이유가 뭐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죄를 저질렀다는 것 하나예요. 네.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문장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들과 함께하고 싶어 하는 이유 말입니다. 덜 빛나거나 모양이 모났거나 설사 빛나지 못하는 별이라고 한들 상관없어요. 그들은 살아가야 합니다.” “이기영.” “저는 그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별들이 사라지게 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무슨 뜻이냐.” “저는 이곳에 들어온 제 가족과 친구들을 살리고 싶어요. 그게 제 속죄이고 저에게 주어진 역할입니다.” “어째서 나에게….” ‘뻔하지.’ “저는 쓰로누스 님이 저와 함께해줬으면 합니다.” “…….” “다시 한번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습니다. 함께.” 빌드업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굳이 빌드업 하지 않아도 우리 쓰로누스가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빌드업 다 해주고 있었을 텐데 뭐가 필요할까. 아니, 정말로 기초공사를 쌓아놓은 것은 가면의 영웅이다. 나 역시 조금은 긴장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솔직히 쓰로누스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나 다름이 없다. ‘나를 실망시키지 마.’ 내가 생각해도 이례적인 일이다. ‘나를 실망시키면 안 돼.’ 용서라는 단어는 빛기영과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으니까. 다시 한번 소매를 꽉 붙잡고 시선을 마주치자 놈의 눈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녀석 쪽. ‘그래. 시바,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나는….” ‘그래요. 시바.’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사명과… 책임이… 그래. 사명과 책임이다. 하… 하지만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마음껏 떠드세요. 시바, 하나도 안 들려요. 다른 방법을 왜 네가 찾아? 시바. 내가 찾아야지. 짜증 나 죽겠네. 이 새끼.’ “다른 이들에게도 잘 말한다면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케루빔이라면 틀림없이 이해를….” “야. 쓰로누스.” “어….” “나를 봐. 이 머저리야.” 콰아아아아아아앙!! 폭음이 들려오며 한쪽 벽이 무너진 것은 바로 그때. 한 인형이 검을 들고 이쪽을 찌르려고 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당황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내가 시킨 일이었으니까. 당황한 것은 오히려 쓰로누스 쪽이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녀석은 미처 반응하지 못한 채로 내 앞을 막아섰다. 아마 쓰로누스를 노렸다면 유효타를 먹일 수 없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번쩍이는 회색빛 때문에 잠시 감았던 눈을 뜨자 시야에 비친 것은 쓰로누스의 얼굴.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가슴을 뚫고 나온 회색의 검이 보였다는 것. “형한테서 떨어져. 개자식.” ‘아이고, 내 동생 라파엘 왔구나.’ 무능력한 천사의 손에서 나를 구해준 라파엘의 당당한 모습을 보자 속이 다 시원해진다. 감사의 인사를 하기 전에 이 새끼한테도 한마디 해줘야지. 그렇지? “…….” “…….” “내가 왜 너를 선택하지 않았는지 알겠다. 왜 네가 버림받았는지 알겠어. 쓰로누스.” “괜… 괜찮으… 냐.” “병신 새끼.” < 734화 이례적인 일 (2) > ‘우리 얘가 기술이 없어서 그렇지 힘은 좋아요.’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필사적으로 역주행한 라파엘은 강했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묵직한 검으로 쓰로누스의 가슴을 관통한 녀석은 0.5 김현성 정도로 믿음직스럽다. 아니, 0.6 김현성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날개를 펼친 채로 계속해서 회색빛의 힘을 주입하는 모습. 모르긴 몰라도 저 회색빛은 비둘기들에게 꽤 치명적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상극인 건 너무 당연해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 아마 독처럼 천사의 탈을 쓴 악마의 내부를 갉아먹고 있을 것이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놈의 얼굴이 내 예상이 맞았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괜… 괜찮….” “죽어.” “쿨럭… 쿨럭.” 이윽고 라파엘의 검이 녀석의 가슴에서 뽑혀 나온 순간, 천천히 허물어지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쪽에 손을 뻗으며 허우적거리고 있었지만 악마의 손아귀를 허용할 수 있을 리 만무, 살짝 몸을 뒤로 빼는 것이 맞다. 옆으로 힘없이 쓰러지는 놈의 뒤로 보이는 것은 피를 뒤집어쓴 채로 활짝 웃고 있는 라파엘이었다. “형.” ‘아이고, 그래. 우리 회색빛의 용사 왔어? 아주 믿음직스러워. 그래. 그래야지.’ “형.” 우리 성검용사의 얼굴에는 해냈다는 성취감이 서려 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왔고 결국에는 그걸 보여줬으니 기분이 좋은 게 당연하지 않을까.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면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모양. 얼굴에는 빛과 함께 걸어가고자 하는 신념이 새겨져 있었다. 쓰러져 있는 쓰로누스와 우리 라파엘의 차이점이 바로 이거다. 왜 녀석이라고 의문점을 가지지 않겠는가. 녀석은 김현성을 악으로 규정했었고 결국 우리 회귀자에게 뚝배기가 터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의문점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라파엘의 마지막이 그리 좋았던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라파엘은 모든 의심을 이겨내고 이 자리에 있다. 본인이 버림받지 않는 방법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빛을 따르는 것. 빛이 인도한 길을 아무 의심 없이 걸어가는 것. 회색 비둘기와의 차이점이야 굳이 열거할 필요도 없다. ‘그래. 네 역할이 컸지. 진짜.’ 회귀자의 상처를 치료한 것도 라파엘이 아니었던가. ‘많이 듬직해졌네.’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 승리하는 법이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생명유지장치를 떼지 않은 걸 이렇게 자랑스러워 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그새 많이 자란 것 같지 않은가. 한때는 꼴도 보기 싫은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뭐라고 했어. 누나. 이거 떡상한다고 했지.’ 내가, 시바, 이거 무조건 되는 거라고 했잖아. 그때 안 팔길 잘했네, 진짜. 이런 게 판단력이라는 거지. 올라갈 주와 내려갈 주를 구분하는 짐승 같은 감각. 투자의 귀재 이기영. 본래부터 몸을 꽉 채우고 있었던 회색빛의 마력은 조금 더 늘어나 있는 것 같았고 스탯도 상승한 게 눈에 띈다. 경험적인 부분이야 어쩔 수 없지만 라파엘은 규격 외로 강하다. 물론…. ‘그게 쓰로누스를 이긴다는 말은 되지 않지만.’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는 꼴은 가관이다. 정신을 다른 곳에 빼앗겼던 건지, 아니면 애초에 막을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놈은 죽어가고 있었다. 물론 굳이 놈에게 시선을 고정시키지는 않았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라파엘이 먼저였으니까. 일단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보여주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정말로 내 눈앞에 있는 모습이 현실이냐는 듯,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게 꿈이 아니냐는 듯 의문을 품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눈에는 눈물을 가득 담고 있어야 했고 종국에는 또르르 흘리는 게 괜찮을 것 같다. ‘아, 근데 얘 아까 내가 하는 소리 들었으려나? 욕도 했었던 것 같은데.’ 사소한 문제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뭐 문제는 없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자기 듣고 싶은 것만 듣는데 뭐.’ 감동적인 재회에 병신 새끼 정도야 애교에 가깝다. “라파엘….” “네.” “라파엘… 라파엘 님?” “네.” “라파엘 님.” 이제야 목 놓아 불러보는 그 이름, 내 동생 라파엘. “네.” 다시 생각해 보니 눈물을 보이는 건 당당한 빛기영과 어울리지 않은 것 같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중간에 멈추는 것은 힘들지만 꾹 참아보자. 연약하지만 마음은 강한 뚝심 있는 포지션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고맙습니다. 라파엘 님. 제… 제 목소리를 들어주셨군요.” “흐릿하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듣고 있었어요. 깜깜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와중에도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서…. 네, 일어나라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어요.” ‘그건 내가 부른 거 아닌 것 같은데.’ “형을 구해달라는 목소리였어요. 아마 베니고어 님이 저를 인도해 주신 거겠죠. 이렇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오래 걸렸네요. 이렇게 앞에 서기까지.” ‘이야, 성장했구나. 라파엘.’ “정말로 오래 걸린 것 같아요. 제 미약한 힘이라도 보탤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 “아니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라파엘 님. 그리고… 절대로 작은 힘이 아닙니다. 선택받은 힘이고 대륙을 구원하기 위한 힘입니다. 이렇게 오랜만에 보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네. 정말로 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형. 몸은 괜찮으신가요? 어디 다치시거나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가요? 혹시 이 악마들이 형에게….” 이 새끼들 진짜 나쁜 놈들이야. 진짜 다 죽어야 되는 놈들이라구. “이 악마는 어떻게… 죽이는 게 좋을까요?” 이런 것도 좋아. 하나하나 판단을 이쪽에 맡기니까 얼마나 행복해. 당연히 죽여야지. 지금 살려두면 화근이 될지도 몰라. 리타이어 상태기는 한데 원래 얘네 명이 조금 질기잖아.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는 끄덕여주자. 무언의 긍정에 라파엘이 검을 크게 치켜드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바로 옆에서 거대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여기다! 이곳입니다!” “여기에 이기영이 있다!” ‘비둘기 새끼들….’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리 만무, 귀를 울리는 굉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몸이 이동되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반응하지 못했지만 우리 성스러운 성검용사는 적들의 공격에 반응했다. 몸이 붙들린 채로 빠르게 이동되는 감각, 하얀색 빛이 이쪽에 쏟아지는 것이 보였지만, 회색빛이 시야를 환하게 비춘 이후에 들어온 공간은 아까 전에 있었던 장소와는 다른 장소였다. “죄송해요.” “…….” ‘이 새끼들 반응 빠르네. 척하면 척이죠. 시바. 케루빔 새끼. 벌써 풀어놨구나? 아 근데 쓰로누스는 막타 쳤어야 됐던 거 아닌가.’ 라파엘이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쉬운 것이 사실. 만약 쓰로누스가 다시 일어나 인류에게 검을 겨눈다고 생각하면 위협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이건 안 좋은데.’ 놈들이 쓰러져 있는 쓰로누스를 발견할 것이고 이기영이 다시 인류에 붙었다고 확정 지을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쯤이면 이미 모든 걸 깨닫지 않았을까. 라파엘에게 안겨 이동되는 와중에도 생각을 멈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 움직이는 게 가장 효율적인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했기 때문이다. 라파엘이 여기까지 닿은 것을 보면 아마 전장의 범위가 넓어졌을 것이다. 굳이 망원경으로 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다. 상륙작전은 성공했고, 조혜진은 부대를 나눠 신전 전체를 전쟁터로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조혜진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무언가 노리고 있는 게 있을 테니 그걸 처리하려고 하는 거겠지. 물론 이쪽의 구출도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정말로 조혜진이 내 구출만을 목적으로 이곳에 쳐들어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정도 리스크를 감당하려고 하는 게 맞다면 분명히 뭔가 숨겨둔 수가 있다. 분명히.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형? 일단 본대와 합류를… 아니, 방주 쪽으로… 길은 막혀 있지만….” ‘여기서 곧바로 라파엘에게 안겨서 방주로 되돌아가는 게 맞나.’ 잘 선택해야 돼. 잘 선택해야 한다.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니까. ‘세라핌.’ 내가 태세 전환 버튼을 눌렀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아마 직접적으로 전해 듣지는 못했을 거다. 케루빔과 세라핌은 걷는 노선이 달랐고 현시점에도 서로 다른 것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만약 알고 있다고 해도 세라핌이 그걸 믿어주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고…. 이기영이 다시 태세 전환 버튼을 눌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본인이 믿고 있는 죄의 심판을 부정하게 되는 일이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순식간, 선택 역시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아니요. 라파엘 님은 먼저 돌아가세요.” “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계시면 곧바로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무리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은 주사위를 던져야 할 타이밍이다. 물론 이기는 게임이기 때문에 주사위를 던지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갚아야 할 게 있지.’ 세라핌한테는 갚아야 할 게 있었으니까. “하…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긴박한 일이에요.” “…….” “위험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꼭 해야 합니다. 믿어주세요. 틀림없이 아무 일 없을 겁니다.” “…….” “…….” 녀석은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무언가 뜻이 있을 거라고 판단하는 것 이전에, 현재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라파엘 역시 의식하고 있다. 비둘기 병력이 이쪽을 압박하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나를 안은 채로 전투를 치를 수 없을 테니, 차라리 나를 안전한 곳으로 보낸 이후에 추적자들을 처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본인이 미끼가 되는 걸 상정하고 있던 찰나에 나온 제안이라는 거다. 선택지는 적었고 판단은 빠르다. 휙휙 뒤바뀌는 배경 사이로 라파엘의 목소리가 들어와 내리꽂혔다. “적어도 안전한 곳에 세워 드릴게요.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대기하고 있을 테니 꼭 신호를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가능하다면 이쪽으로 향하는 악마들을….” “네. 막아 볼게요. 형. 딱 20분, 20분 후에 찾아갈게요.” “20분이 지나도 아무 신호가 없으면 곧바로 찾아와 주시면 됩니다. 꼭.” ‘꼭 찾아와야 돼. 알겠지? 나 버리면 안 된다.’ “네.” 대답을 하면서도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곧바로 몸을 날리는 것을 보면 추적자들을 빠르게 처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모양인 것 같았다. 시간이 부족한 것은 이쪽 역시 마찬가지. 말 그대로 이건 시간 싸움이다. 세라핌의 귀에 이기영 배신 썰이 귓구멍에 들어가기 전에 빠르게 작업을 쳐야 했다. ‘누나. 준비됐어? 지금 빠르게 해야 돼. 시간 없어.’ 영혼의 파트너가 필요한 일. ‘이지혜. 시바, 얘 어디 갔어. 도대체 어디서 뭐 하고 있어?’ 망원경으로 있을 만한 곳을 확인해 봤지만 도통 보이는 것이 없다. ‘아. 얘 진짜, 시바, 혹시 진짜로 영혼 빼앗긴 거 하고 있는 거 아니야?’ 계속해서 망원경으로 격전지의 주변을 살피자 시야에 비친 것은 조혜진과 도미니온스. -그녀를 어떻게 했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저 역시 말씀드렸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아… 시바. 누나 진짜. 하지 말라고 했잖아. 진짜.’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거 하고 싶냐고 진짜. -그녀의 영혼을 되찾고 싶으신 거라면 와 보십시오. 그게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도미니온스에게 영혼을 빼앗긴 이지혜 하지 말라고. 시바, 한시가 급하다고 진짜. -다시 한번 소개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도미니온스. 영혼약탈자 도미니온스입니다. “아… 진짜 영혼약탈자 같은 거 하지 말라고….” < 735화 가치 (1) > ‘꼭 지금이었어야 해? 꼭?’ 괜스레 입안이 쓰다. ‘자기 욕심 채우겠다고 진짜. 이건 아니지.’ 너무 당황스러운 광경에 헛웃음이 나온다. 자기도 할 수 있다고, 언젠가 한 번 제대로 된 걸 보여준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던 거로 기억하지만 그게 지금이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와…. 너무 황당하다.” 안 그래도 바빴던 타이밍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니라 조혜진이 그렇다. ‘얘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걸 가로막아?’ 정확히 뭘 목적으로 이곳으로 왔는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여기까지 온 것은 조혜진의 판단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의구심이 들기는 했지만 한 번 더 전장을 둘러보니 이해가 간다. 덕구나 하얀이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모르고 있다. 그 둘뿐만이 아니다. 거의 상당수가 모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리 전달받은 매뉴얼대로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었고 감정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어느 정도 확신이 선다. 뿐만이 아니다. 병력 전체가 퇴로를 확보하지 않을 것을 보면 이기영 구출 이외의 다른 목적이 더 있다. 오히려 사방으로 퍼지고 있는 모습, 중대를 나눠 신전 안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지 않은가. 나쁜 판단은 아니다. ‘그래, 나쁜 판단은 아니지.’ 신전 안에서는 비둘기들의 날개를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이곳은 적의 진영이었지만 오히려 전투의 이점은 우리 쪽이 가지고 있다. 압도적으로 숫자가 불리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런 식으로 시간을 지연시킨다면 지연시킬 수는 있다. 본래 덩치가 클수록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법이 아닌가. 말 그대로 이곳에 침투한 병력은 외줄을 타는 소규모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었다. 이렇게 병력을 나눈 이유도 있지 않을까. 조혜진이 뭔가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는 건 너무나도 확정적인 이야기였다. 그 목표를 위해 뛰어다니던 조혜진을 갑작스럽게 등장한 영혼 약탈자 도미니온스가 막아선 것이다. ‘영혼 약탈자 도미니온스?’ 한숨이 나올 정도의 스토리텔링, 영혼약탈자라는 설정은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르겠지만 네이밍 자체가 촌스럽게 느껴진다. 굳이 영혼약탈자라는 이름을 붙여야 했을까. 영혼 수집가 정도가 더 괜찮지 않았을까. 물론 클래식한 네이밍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현시점에서는 조금 무리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점점 표정이 구겨지는 이쪽과는 반대로 영혼 약탈자 도미니온스의 입가에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사실 조금 멋있기는 해. 나도 저런 설정 좀 집어넣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영혼약탈 기가 막히게 할 수 있는데.’ 취향이 비슷하다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저게 먹힐까 싶어 의구심 넘치는 표정으로 망원경을 바라봤지만 내 심정과는 별개로 저쪽에서는 이미 저쪽만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영혼약탈자 도미니온스에게 이지혜의 영혼을 되찾기 위한 조혜진의 처절한 사투는 이미 옛날 옛적에 시작되고 있었다. -도미니온스!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조혜진이 창을 내지르는 것은 찰나였다. 저렇게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찬 조혜진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이지혜가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까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예상외로 거리를 허용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빛의 장막으로 계속해서 조혜진을 압박하고 있는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센스 있다고 느껴진다. ‘저건 누나 아니네.’ 로노베, 아니면 도미니온스? 뭐가 됐든 상관은 없지만 이지혜가 뿜어내는 빛은 실제로도 날카로웠다는 것. 공중에 살짝 뜬 채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빛을 뿌리고 다니는 모습에 이지혜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 내가 벨리알의 도움을 받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몇 번이나 밀고 당기는 격전이 벌어진 이후에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조혜진과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영혼약탈자. 아직 규격 외로 접어들지 못한 조혜진은 일대일에서 그녀를 상대할 수 없다. 답답한 마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분노가 서려 있었다. 순수한 분노 말이다. ‘내 친구 진짜 불쌍해서 어떻게 해.’ 너무 가슴 아프네. -당신은…. -……. -당신은 올곧은 사람입니다. -절대로 용서 못 해. 절대로. -부러지지 않은 점 역시 마음에 듭니다. 당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절대로 너만은 용서할 수 없어. 절대로. -말 그대로, 당신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니 다시 정중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돌아가십시오. -뭐? -지금 당장 뒤를 돌아 왔던 곳으로 그대로 돌아가십시오. 돌아가신다면 지금의 무례를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실수라고 생각하고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관리하게 될 새로운 대륙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평화롭고 정의로우며 올바른 대륙의 주민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신 같은 이들입니다. 슬슬 양념을 치고 있는 모습은 가증스럽다. 당연히 이지혜는 조혜진이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자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조혜진의 표정이 다시 한번 분노로 얼룩진 것이 보인다. 뭔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이 입술을 꽉 깨무는 모습에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조혜진이 명대사를 투척할 거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천천히 입을 떼는 모습이 보였다. -……. -아주 작은 생명도 소중히 하는 사람이었다. ‘뭐, 누구 말하는 거야?’ -검이라고는 쥘 줄도 모르고 싸움이라면 피하는 사람이었어. 조금의 갈등도 불편해해 항상 양보하던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항상 강한 척하지만 속은 여린 사람이었다. ‘누군데. 그게. 내 이야기 하는 거지? 혜진아?’ -생채기 같은 상처로도 아파하던 사람이었다. 남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그 작은 몸으로 많은 것을 감당하던 사람이었어. ‘누구 이야기하는 거야.’ -이런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데. 아니, 누나 이미지 메이킹 왜 이렇게 되어 있어? 어떻게 한 거야? 얘 눈치 빠른데.’ -아니요. 당신은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 인간은 누구보다도 추악한 인간이었습니다. 살아갈 가치라고는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자는 대륙의 해악입니다. 당신 앞에서는 숨기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녀가 얼마나 추악하고 비열한 인간인지… 그녀는 쓸모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지혜 누나는 자아성찰이 잘 되어 있네. -그 입 다물어라. -……. -……. -…….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건 없어. -……. ‘와, 명대사. 시바.’ 와. 혜진아. 진짜. 와. 와. 이건 저장해야지.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혹시나 했지만 그긍더 급의 명대사가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건 없어.’ 전형적인 영웅전기에서나 나올 것 같았던 대사를 실제로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더 소름이 돋는 것은 조혜진의 얼굴이 무척 진지했다는 것. 말 그대로 자신이 내뱉은 말에 한 점의 의심도 없었던 것 같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저 대사를 눈앞에서 들은 당사자가 내가 아니라는 점 하나였다. -누구에게나 어두운 면이 있다. 인간은 선하기만 할 수 없어. 한때는 나도 너처럼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도미니온스. 너는 인간을 규정할 수 없어. 아니, 너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개인을 규정할 수 없다. 내 신념은 이미 수도 없이 부러졌고 나는 그렇게 올바른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오히려 그녀가 더 나보다 더 곧은 사람이었다. -……. -인간의 인 자도 이해하지 못하는 네게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모난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인간을 이해할 수 있어야 인간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조금 더 객관적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한 발자국 뒤에서 중립적으로 말입니다. 이게 그자의 영혼입니다. 이 탁하고 더러운 것이 바로 당신이 그렇게나 찾던 영혼이란 말입니다. 도미니온스의 손에 나타난 것은 영혼은 개뿔, 그냥 로노베가 만들어 준 건 같은 검은색 구슬이었다. 하지만 입술을 꽉 깨무는 조혜진은 저게 정말로 이지혜의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정말 더러운 영혼이지 않습니까? -그 사람을 모욕하지 마라. -……. -그 사람을 모욕하지 마.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 그녀의 삶과 생각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으아아아….’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다. ‘아. 나도 영혼약탈자 이기영 해야 되나.’ -누구나 살아갈 자격이 있어. 사람의 영혼이라는 것은 그런 시답지 않은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천천히 창을 뻗는 조혜진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흔들림 없는 얼굴로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은 반하고 싶을 정도로 멋있다. 뭔가 갑작스럽게 각성하는 듯한 흐름으로 가는 것 같진 않았지만 조혜진은 한 번 더 마음을 바로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잠깐 감았던 눈이 떠지는 것은 순식간, 영혼약탈자 도미니온스의 앞에 자리 잡은 것은 한 자루의 날카로운 창이었다. -내가 그걸 증명하겠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저기는 이제 또 신나게 치고받겠네.’ 계속 보고 싶기는 했지만 중요한 장면은 전부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저거 저렇게 놔둬도 괜찮기는 한 건가?’ 누나도 뭔가 생각이 있지 않겠어? 배신감 때문에 잠깐 정신이 나갔었지만 뭔가 이유가 있기는 있을 것이다. 조혜진이 이곳에 들어온 이유를 캐내 도움을 줄지도 모르고,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아무 의미 없이 자기 작품을 보여주고 싶은 거라면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지만 이지혜는 목적 없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는 사실 자체는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쉬운 소리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대미지를 입는 건 녀석들이 아니라 우리였으니까. 빠르게 이동하면서 계속해서 창을 내 뻗고 있는 조혜진, 그리고 그런 창을 회피하며 계속해서 장소를 옮기는 도미니온스. 안 그래도 복잡한 전장에 둘이 계속해서 뒤엉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 역시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망원경으로도 뒤져봤지만 보이는 것이 없다. ‘어디 있는 거야.’ 아직까지도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잠깐 동안 고민하기는 했지만 판단을 내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내가 녀석이었다면 어디로 향했을까. ‘신인류 계획.’ 틀림없이 그것부터 지키러 갔을 것이다. 많은 게 달려 있고, 녀석으로써도 많은 걸 투자한 계획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익숙하지 않은 날갯짓으로 날갯짓을 하려다 차라리 달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본격적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는 폭음이 들려온다. 이 주변까지는 아직 인간들이 들어오지 못한 것 같았지만 이미 전장의 열기로 가득 차 있다. ‘박덕구?’ 박기리 삼 남매가 운용하고 있는 병력도 근처에 있다. 아마 시간이 조금 더 오래 걸린다면 이곳으로 향하지 않을까. -움직이라니까! 빨리! 마치 내게 말하는 것만 같다. 녀석의 목소리에 힘입어 발걸음을 한 번 더 내디딘다. 그제야 내 집보다 더 친근한 장소가 시야에 비친다. 거대한 문을 열자,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세라핌의 모습이 보였다. 백금색 비둘기는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의자에 앉아서 말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게 느껴진다. 조용하고 조금은 가라앉은 것 같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구태여 티를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20분 후면 라파엘이 도착할 테니 천천히 빌드를 쌓으면 된다. “여기 계셨군요. 세라핌 님.” “…….”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약간의 의심이 서려 있었다. “그래.” < 736화 가치 (2) > ‘뭐야 너 지금 나 의심하는 거 아니지?’ 기분 탓일 수도 있다. 어쩌면 조금 묘한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벌써 이야기를 들은 건가?’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전해 듣지 않았더라도 뭔가를 깨달았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확률은 낮다고 생각했다. 세라핌은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기영은 이미 죄를 회개한 천사였고, 신인류 계획을 향해 나아가는 동료의 포지션에 서 있다. 나를 받아들이는 것을 제안한 것은 쓰로누스였지만 결정적으로 동의하고 자리를 열어준 것은 녀석이었다. ‘우리 동료잖아. 그렇지?’ 뭐가 됐든 간에 일단은 모르는 척하는 게 정답이다. 녀석이 뭔가를 의심하고 있든 아니든 간에 변명할 필요도 없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 맞다. 그게 자연스러운 행동이니 말이다. “이곳에 와주실 줄 알았습니다.” “…….” “세라핌 님이라면 분명히 와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다행이로군요. 정말로 다행입니다.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의심하고 있는 건 맞는 것 같네.’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심상치 않지만 일단은 계속해서 오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허겁지겁 더미월드를 확인하는 게 첫 번째, 혹시나 다른 이상이 없는지 이곳저곳을 살펴본 이후에는 크게 안심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맞다. 당연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을 리는 만무했다. 이 작은 세계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곧바로… 바로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잖아. 여기 위험하잖아. 만약에 누가 들어와 이 작은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면 어떻게 해? 우리가 함께 만든 세상 아니야? 신인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면 이 작은 세계를 먼저 지켜야지. 여기에 들어간 신성이 얼마야. 혼란을 틈타서 누가 이걸 노릴지도 몰라. 너도 알잖아. 최근 분위기 이상했던 거. 노리는 놈들이 없다고 해도, 전장이 되어버린 신전 안에 이걸 놓을 수 있겠어? 굳이 들고 움직이지는 않더라도 뭔가 조치를 해야 해. 살짝 세라핌의 얼굴을 바라보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넘어가 준 건가? 아니면 그냥 두고 보기로 한 건가.’ 쉽게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아마 후자이지 않을까. 어쩌면 죄의 심판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크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본 이후에는 이기영이 타락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겠지. 여전히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고 있는 모습, 녀석이 생각에 빠졌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습관이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보고 있다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에 조금은 긴장이 된다. 세라핌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바로 그때.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이 시야에 비쳤다. “너도 여기로 먼저 와야겠다고 생각한 거로군.” ‘시바. 다행이다.’ “네. 그렇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 작은 세계를 지키는 것이 대륙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아니,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세라핌 님. 누군가가 이곳을 노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분명히 노리고 있을 겁니다.” “…….” “습격이 있었습니다.” “나도 알고 있어.” “인간들이 아닙니다. 세라핌 님. 저를 습격한 것은 천사들이었습니다.” “뭐?” “가면을 쓴 천사들 말입니다.” “…….” “쓰로누스 님이 구해주신 덕분에 그 장소를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 “어쩌면 쓰로누스 님이 크게 다치셨을 수도….” 진짜 큰일 날 뻔했다니까. 쓰로누스한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나를 대신해서 검을 막아주는 걸 네가 봤어야 했는데. 아직도 그 참상을 떠올리자 괜스레 눈에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지금쯤 사경을 헤매고 있을 쓰로누스에 대한 걱정이 얼굴에 피어난다. “쓰로누스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것보다 조금 자세히 말해줬으면 하는데,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당연히 말해줘야지. “조사를 받기 위해 의회실로 향하던 도중이었습니다. 갑자기 커다란 굉음이 울리며 신전이 흔들렸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쓰로누스 님이 눈앞에 서 계셨습니다. 쓰로누스 님께서는 저를 안전한 장소에 데려다주신 이후에 전장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천사들 때문에… 그렇게 전투가 일어났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천사들이 아니라 천사라는 것만 빼면 거짓말은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노렸던 것은 쓰로누스 님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저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 ‘동요하지 않네.’ 조금은 당황하거나 의심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사건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현재의 상황을 침착하게 분석하려고 하고 있다. ‘생각할 게 많으려나.’ 케루빔에게 먼저 이야기를 들었다면 생각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이기영이 배신했고 쓰로누스가 다쳤다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가정한다면 어떨까.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해진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판단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아주 쉬운 퍼즐이다. 하지만 너무 쉽기 때문에 의심이 가는 퍼즐이기도 하다. 신인류 계획에 반대하는 천사들의 위에 누가 서 있을까. 만약에 이기영이 말한 것이 진실이라면 너무나도 뻔하지 않은가. 쓰로누스가 다쳤다는 거짓 메시지를 보낸 케루빔이야말로 모든 사건의 원흉일지도 모른다. 애초 사대 천사 중에 이 계획에 반대한 비둘기는 두 마리였고 쓰로누스가 리타이어 했다면 남은 건 하나이지 않은가. ‘너무 간단하지? 정말 너무 간단하잖아.’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케루빔이 신인류 계획 막바지에 찬성하고 신성을 투자한 것은 맞지만, 그 새끼는 계속해서 우리 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다구. 훼방을 놓으면 훼방을 놨지, 절대로 협조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어. 조사기관이 설립된 건 누구 때문이지? 우리 그것 때문에 일정 늦어진 건 알지? 계속해서 너를 견제한 건 누구였어? 다 그 새끼야. 수상하지 않아? 갑자기 내가 배신했다고 메시지를 보내는 게 말이 돼? 생각해 봐, 세라핌. 내가 왜 배신을 하겠어? 나는 이미 죄를 용서받아 이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고 있는데. 누구보다 대륙을 생각하는 게 바로 나야. 너 지금 그 새끼한테 속고 있는 거라고. ‘그 새끼가 거짓말한 거야. 쓰로누스를 찌른 건 그 새끼가 보낸 비둘기지. 내가 아니야.’ 내 말이 맞아. 세라핌. 그 악마 새끼 거짓말에 속지 마. ‘우리와 함께하려고 하는 인간들을 죽여 대륙을 자극한 것도 바로 그 새끼라고. 정말로 모르겠어? 그 새끼가 혼란을 자초한 거야. 애초에 이 사달이 나는 걸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고. 진짜 목적은 전쟁이 아니었던 거야. 혼란을 이용해 신인류 계획을 망치고 그 중심에 서 있는 이기영을 제거하는 것, 그게 놈의 목적이야.’ 너무나도 간단한 퍼즐이다. 아니, 간단한 퍼즐이라기보다는 스토리가 너무나도 물 흐르듯이 이어진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놈도 확신을 내릴 수가 없을 것이다. 마치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딱딱 놓인 퍼즐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운 감이 있으니까. ‘너무 갑작스러웠어. 조금 급했나?’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좋았으려나?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이 간단한 퍼즐을 조금 꼬아서 선보였을 것이다. 개연성을 충족시켜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라핌이 직접 찾아낼 수 있는 떡밥들도 여기저기 남겨놨겠지. 자연스럽고 극적으로 진실을 받아들이게 했을 수도 있다. ‘아… 시바, 내가 너무 급했던 건가.’ 선물 상자를 너무 빨리 내밀었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세라핌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장에라도 내 목을 꺾어버릴 것만 같다. 눈동자에는 적의가 깃들어 있었고 온갖 의혹과 의심들이 휘몰아치고 있는 것 같다. ‘아, 이거 나도 그냥 지혜 누나랑 같이 영혼약탈자나 할걸. 괜히 왔어, 시바. 이래서 사람은 평소랑 다른 짓을 하면 안 되는데.’ 뭔가 반전이 될 만한 요소가 필요했다. 이 상태로라면 녀석이 내 개소리에 수긍한다고 해도 마음을 쉽사리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그림은 만들어질 수가 없다. 갑작스럽게 초조해지자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움직인다. 옆구리에 딱 붙인 손으로 계속해서 허벅지를 두드리게 된다. ‘아, 시바… 지금이라도 그냥 갈까? 라파엘 불러야 돼?’ 세라핌의 모습이 갑작스레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녀석이 선보인 행동이 갑자기 눈에 들어온다. 일어서 있는 모습, 팔짱을 낀 채로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다. 그 순간에도 손가락은 가만히 두지 못하겠는지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팔을 두드리고 있다. 녀석의 움직이는 손가락을 본 순간 이쪽은 손가락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실 처음 느낀 것은 아니다. 녀석이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건 나도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새삼스레 녀석의 모습이 나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완전 내 모습이잖아.’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마치 나를 따라 하는 것만 같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녀석은, 1회차 가면의 영웅의 행동을 따라하고 있을 것이다. ‘뭐야.’ 저 행동뿐만이 아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나 걸음걸이도 굉장히 비슷하다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전술 김현성을 카피한 것도…. ‘세라핌이었어.’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정답에 근접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놈은 1기영을 카피하고 있다. 어째서? 케루빔이 말했던 추악한 욕망이라는 게 바로 이거야? 가정해 보자. 세라핌이, 저 백금색 비둘기가, 1회 차 가면의 영웅을 질투했고, 동시에 동경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니, 만약 정말로 1기영을 따라 하고 있는 것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위 감정들이 기반이 되어 있을 것이다. 가면의 영웅이 보여주는 모습, 대륙을 위하는 마음, 능력과 성격, 인간인 주제에 천사들을 이끌던 모습이나, 틀에 박히지 않은 사고방식 같은 것들에 매료된 것이 맞다면… 닮고 싶다고, 같아지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래. 이곳에 도착한 직후에 녀석이 내게 내뱉은 첫 마디가 바로 이거였다. ‘너도 여기로 먼저 와야겠다고 생각한 거로군.’ 정말이야? 어째서 신인류 계획을 동의했는지도 알 것 같다. 그때도 비슷한 말을 지껄였었지. ‘나도 비슷한 걸 생각했었다’였나? 녀석은 신인류 계획 같은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생각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자신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한 것뿐이다. 성과를 빼앗거나 본인의 업적으로 남기고 싶어서 신성을 투자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주사위를 던졌을 뿐이다. 왜. 닮고 싶었으니까.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들어맞는 부분이 많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녀석에게서 내 모습이 보인다.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는 것,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는 것,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는 행동, 심지어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는 행동까지. 저 부분이 제일 재미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띄어놓은 부분이 가장 재미있지 않은가. 만약 녀석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면 녀석은 가면을 쓰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병신 새끼. 병신 새끼.’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걸리는 점이 많다. 곧바로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놈이 정말로 내 카피캣이 맞다면 해야 할 일은 뻔하지 않은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면 그만이다. 굳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말을 내뱉을 필요도 없다. 그저. “세라핌 님.” “…….” “어쩌면 억측일지도 모릅니다. 흘려들으셔도 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걱정이 돼서…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뭐지?” “어쩌면 케루….” 까지만 말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역시…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 병신 새끼. 가정이 들어맞았다. 이 비둘기는 가면의 영웅처럼 생각하고 싶어 하고, 가면의 영웅처럼 행동하고 싶어 한다. < 737화 가치 (3) >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잘나 보였을까.’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질문이기는 했다. ‘하, 이거, 미친 카리스마 이거…. 종자가 다르다니까. 종자가 달라요. 가만히 있어도 애새끼들이 꼬여요. 그냥 평범하게 살려고 해도 꼭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더라니까. 시바… 이거 어떻게 하냐. 진짜. 미치겠다. 이기영 네가 최고다.’ 가면의 영웅의 모습을 보고 질투하거나 동경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결단은 항상 과감했고 행동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세라핌이 나를 존경하게 된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사대 천사 중에서도 녀석은 리더라면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앉아 있지 않은가. 아니, 리더는 아니었지만 중심에 있다는 건 반론의 여지가 없다. 녀석이 처한 배경을 떠올려보면 무언가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거다. ‘네가 가지고 있지 않은 걸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1회의 세라핌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어쩌면 다소 소극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보통 이런 이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들을 동경하니 말이다. 사교성도 없었을 거고 무언가 명령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거나 부담스러워 했을 수도 있다. 마음 약하고 쉽게 휘둘리는 성격이었겠지. 내 흉내를 내는 지금도 선택을 내게 맡기는 것을 보면 답이 나온다. 무리하게 허리를 펴고 있는 것을 보니 실제로 허리를 조금 구부리고 다녔겠네. 1회 차의 녀석의 모습이 점점 오버랩된다. 나를 따라 하는 행동을 제외하면 녀석에게 남는 것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어째서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지에 대한 개연성도 충족되는 것 같지 않은가. ‘자기세뇌 하고 있는 거야.’ 특성은 없지만 스스로를 세뇌하고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의 판단이나 능력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순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뭐, 이 새끼는 예전으로 돌아가는 걸 무서워하고 있다. ‘이거 시바, 가면의 영웅이 대단하기는 대단해. 너무 꽁으로 먹는 것 같아서 미안해질 정도야.’ 이것 역시 2회 차를 위한 가면 영웅의 안배일지도 모르겠다. 의도적인 건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내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입니다.” “단순히 가능성이라고 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점이 많아. 인간들을 자극한 것도 이번 사건을 일으키기 위한 거라고 생각해도 돼. 어쩌면 인간들과 내통하고 있을 가능성도 고려해 봐야 해.” ‘그렇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어. 기관의 설립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짜여진 각본이었던 거겠지.” ‘그래, 네 말이 맞아. 이건 처음부터 짜여진 각본이었어.’ “케루빔은 아직까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이게 뭘 의미하는 거겠어?” ‘애초에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거죠. 신전이나 동포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만 이루겠다는 더러운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너라면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습죠.’ 이걸 생각하고 있던 게 맞냐는 듯 살짝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보였다. 마치 동의해 달라고 물어보는 것 같지 않은가. 녀석은 확실하게 정답 버튼을 눌렀다. 케루빔이 이번 일의 흑막일 수밖에 없다는 개연성을 자기 자신 스스로 충족시키고 있다.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는 척하는 모습은 가관이다. 이 비둘기 새끼의 민낯을 들여다보니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을 리는 만무, 심각한 표정으로 세라핌을 바라보자 녀석 역시 내게 같은 표정을 보내기 시작했다. “쓰로누스와 이야기가 잘되지 않았던 건가. 그래서 쓰로누스를 먼저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한 거겠지?” “네. 쓰로누스 님은 신인류 계획에 반대하기는 했지만… 이런 미친 계획에는 찬성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고 있었겠죠.” “쓰로누스는 이전부터 그랬어. 멍청한 놈.” 멍청한 건 너야. “그래서 이곳으로 왔던 겁니다. 정말로 케루빔 님이 노리는 것이 신인류 계획이 맞다면 무얼 목표로 삼았는지는 너무 뻔하니까요.” “너 아니면 이 작은 대륙이겠지. 케루빔의 생각이야 뻔해. 조금 신경 쓰이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근거는 충족되고도 남아.” ‘그렇죠.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세라핌 님.” “?” “만약 케루빔 님이… 정말로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맞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 “…….” “저도 케루빔 님이 이렇게나 극단적으로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원인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인류 계획에 불안감을 느끼셨을 수도 있고,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이 두려우셨을 수도 있을 겁니다. 단순히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일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무언가… 다른 합의점을 찾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말을 내뱉자 조금 의아해하는 놈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그지 이상하지? 내가 내뱉을 대사는 아니잖아. 그렇지 않아?’ 너무 몰아붙이기만 하는 것도 좋지 않다. 원래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데 가장 필요한 기술이 밀고 당기기가 아니었던가. ‘가면의 영웅은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 거야. 맞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놈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녀석은 방금 깨달았을 것이다. 1기영과 2기영은 다르구나. 생각하는 방향은 비슷하지만 해결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표정이 보인다. ‘즐거워하고 있는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본인이 1기영을 완벽히 대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게 맞다면 저런 표정을 지을 만도 하다. 별개로 녀석이 다른 합의점을 찾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면의 영웅은 절대로 합의하지 않는다. “왜 내가 합의점을 찾아야 하지?” “네?” “케루빔이 무슨 생각을 하건, 어떤 심정으로 이 일을 저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녀석이 죄를 저질렀다는 거다. 합의점을 찾아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녀석이야. 나는 양보하지 않아.” ‘키야.’ “그리고 용서하지도 않지.” ‘이야. 이 새끼 그냥 복사 붙여넣기 수준이구나?’ 내가 다 부끄러울 정도의 대사를 그대로 입 밖으로 내는 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 가면의 영웅은 양보하지 않지. 좋은 자세야. 그리고 용서 같은 것도 안 했다고, 죄를 저질렀으면 처형하고 다 죽이고 그랬지. 절대로 피하지 않았다니까. 양보하는 건 다른 사람이 할 일이지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 마음에 안 드는 악당 새끼들은 그냥 묻어 버렸자너. 너도 그럴 거지? 그럴 수 있지? “그래. 나는 양보하지 않아.” “…….” 이 새끼 좀 멋있다는 눈으로 바라봐 줘도 괜찮을 것 같다. 얼마나 신이 날까. 본인이 1회차에 롤모델로 삼았던 대상이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데. 내가 롤모델을 만들 리는 없겠지만 아마 만들었다면 나 역시 춤이라도 추고 싶었을 것이다. 멍청한 새끼라고 욕을 박아주고 싶지만 저런 종류의 우월감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다. ‘기분 좋았어? 내가 이렇게 바라봐 주니까 기분 좋아?’ 소름이라도 돋았는지 날개에 달려 있는 깃털이 쭈삣쭈삣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녀석은 자기 날개가 저렇게 됐는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나도 둠기영 할 때 저렇게 취했었나? 아, 저런 모습이었으면 조금 쪽팔릴 것 같은데. 저것보다는 덜 취했겠지?’ 어찌 됐건 간에 저것보다 부끄러운 모습은 아니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대충은 준비가 된 것 같은 느낌, 녀석의 말대로 녀석은 양보하지 않는다. 케루빔에게 제대로 된 본때가 뭔지 보여주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 눈에 보인다. 딱 이 정도 타이밍이면 케루빔도 이곳으로 도착하지 않을까. “양보하지 않는다고 하시면….” “죗값을 치러야지.” “…….” 기왕 보여주는 김에 확실하게 보여주려고 마음먹은 느낌, 본인이 얼마나 대단한 비둘기인지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하고 있다. ‘세라핌 님 믿고 있겠습니다.’ 혹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됐지만 그런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던 모양. 커다란 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슬슬 올 때가 된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마침 딱 좋은 타이밍에 빌런이 무대 위로 발걸음을 옮기는 게 시야에 비친다. 파란색 머리를 단정히 묶은 천사. 들어온 이후에 곧바로 표정을 구기는 모습이 눈에 띈다. ‘케 배우 왔구나? 타이밍도 참 기가 막혀.’ 당연하지만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다. 조용히 주변을 한 번 살핀 이후에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 뭐, 뻔한 대사였다. 안 들어봐도 뻔하다. 갑자기 등장한 악역이 뭣 모르고 지껄이는 개소리일 것이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세라핌?” 들어오자마자 한마디 박아주시네요. “…….” “…….” 분위기 조금 이상한 거 눈치 깠죠? “내 전언을 듣지 못한 건가?” “…….” “그 쥐새끼 같은 놈이 우리를 다시 한번 배신했다. 쓰로누스가 죽어가고 있어. 모든 게 다 저 비열한 놈의 계획이었다. 애초에 신인류 계획이라는 건 없었다. 모든 건 신성을 탕진시키고 우리를 분열시키기 위한 개소리였다. 저 쓰레기를 다시 한번 받아들인 게 실수였어.” “…….” “그자는 해악이다. 사라져야 할 인간이고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무언가다.” ‘거, 말이 심하시네.’ “개자식.” ‘많이 화났었어요?’ “쓰로누스는 너를 믿었다.” ‘아, 그래? 나는 걔 안 믿었어.’ “끝까지 너를 걱정하고 너를 믿었단 말이다.” ‘아, 그러셨어요?’ “인간 같지도 않은 놈.” ‘저 천사예요. 이 양반아. 그리고 당신도 인간 아니잖아요. 마음껏 지껄여 보세요. 이 악마 새끼야. 내가 눈 하나 깜빡하나. 지금 내 앞에 있는 분 보이지? 네가 아무리 지껄여도 이분은 흔들리지 않으신다구.’ 혼자만의 분노 타임을 즐기셨던 우리 케루빔 님이 뭔가 이상한 걸 감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라핌을 한 번 바라보고 나를 바라본다. 나를 바라보고 다시 한번 세라핌을 바라보고 있다. 백금색 비둘기의 추악한 욕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케루빔이라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도는 깨닫지 않을까. “너….” 녀석의 기대에 부응하듯 세라핌이 오만하게 입을 열었다. “배신자는 네놈이다. 케루빔.” “뭐?” “우리가 네 계획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 “이… 이 멍청한 놈!” “멍청한 것은 너야. 케루빔.” “저 쥐새끼가 네게 뭐라고 지껄이더냐. 세라핌.” “그는 내게 아무 말도 한 적이 없어. 모든 것은 내 판단이야.” ‘아픈 곳 건드리면 안 되지. 그런 말 하면 얘가 상처받아요. 트라우마 건드리지 말라고.’ “네가 이상하다는 것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져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이야. 케루빔.” “기어코 내 앞을 막아서겠다는 거냐.” “네 더러운 계획을 저지하는 거라고 표현해 줬으면 좋겠어.” “더러운 것은 네 추악한 욕망이다.” “입 다물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너는 망가져 있다. 세라핌.” “나는 망가지지 않았어.”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군.”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분위기 좋죠. 잠깐의 침묵, 저 둘은 이후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알고 있다. 케루빔은 조용히 나를 바라본 이후에 세라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를 용서해라. 세라핌.” “너는 얼마만큼의 죄를 가지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아? 케루빔?” ‘와, 시바. 이거 팝콘각인데.’ 두 비둘기가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무나 뒈져라. 그래 기왕이면 이번에는 네가 뒤지는 게 좋겠다. 파랭아.’ 비웃음이 입가를 비집고 터져 나오는 상황이었다. < 738화 가치 (4) > 서로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오래 알고 있던 사이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아, 진짜 어디 팝콘 없나.’ 세라핌 대 케루빔, 케루빔 대 세라핌, 지금까지 이런 대결은 없었다.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원래 같은 편끼리 싸우는 게 그렇게 재미있더라. 서로 감정도 상하고, 뭐 그런 거 있자너. 흥미진진한 거. 원래 파워레인저 같은 것도 레드랑 블루랑 싸우면 재미있잖아. 꿈의 대결이잖아. 그런 거. 개인적인 호기심도 생겨난다. ‘비둘기 중에서는 누가 제일 강하려나.’ 단순히 무력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는 쓰로누스가 가장 강한 것 같았지만 여러 가지를 종합해 생각해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신체 능력은 케루빔이 가장 우위에 있었던 것 같은데. 희라 누나랑 치고받은 거 보면 단단하기는 할 거야.’ 뭐 전투를 신체 능력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이점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 반대로 세라핌이 가지고 있는 이점은 아무래도 권능 같은 특수기겠지. 같은 천사를 상대로 놈의 권능이 얼마나 통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내 기대에 부응하듯 세라핌은 벌써부터 케루빔을 몰아붙이기 시작, 들려오는 굉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힘내라. 세라핌. 작은 세계의 미래가 네 손 안에 달려 있어. 지면 안 돼. 미래를 우리 손으로 쟁취해야지.’ “케루빔!” “이 멍청한 놈!” 서로를 부르며 무기를 맞대는 모습은 그럴듯한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아직 치명타라고 부를 만한 대미지는 없었지만 둘의 몸이 점점 더러워지는 것이 보인다. 콰앙! 소리와 함께 케루빔이 벽으로 튕겨 나가고, 잠시 후에는 같은 소리를 내며 세라핌이 벽에 처박힌다. 공중에서 몇 번이나 몸을 부딪친 이후에는 계속해서 빛이 번쩍거린다. 파란색의 천사가 낫을 휘두르자 백금색의 천사는 거대한 장막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쉽게 끝나지는 않을 싸움이다. 녀석들은 서로가 어떤 걸 할 수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너는 벗어나야 한다, 세라핌. 네가 아직도 망령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냐.” “입 다물라고 이야기했어. 케루빔.” “네 진짜 모습이 어땠는지 떠올려 봐라. 지금의 모습이 진정 네 모습인가. 아무도 네게 달라지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세라핌.” “개소리를 지껄이는군.” “벗어나야 해. 네놈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벗어나야 한다. 그 빌어먹을 망령에서 벗어나야 한단 말이다.” “이게 내 모습이야, 케루빔. 벗어나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네놈이야. 네놈이야말로 그 편협한 생각에서 멀어져야 해. 우리는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갈 수 있어.” “편협한 생각이 아니다. 난 그저 우리를 지키고 싶을 뿐이다.” “네놈은 썩었어. 케루빔. 달라지지 않고 고여 있는 것은 썩을 수밖에 없어. 흐르지 못하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는 거야. 애초에 흐르고 싶다는 생각도 없겠지. 그게 편하니까. 그게 안전하다고 느끼니까. 너는 이런 일에 주사위를 던지지 않지만 나는 주사위를 던지는 편이야.” “…….” “달라지지 않는 걸 선택하는 게 편하니 움직이지 않는 거야. 아니, 최소한 조금의 변화는 있었구나. 이딴 미친 계획을 실행시킬 정도라니.” “인간을 이곳으로 부른 것은 내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을 터였다. 너는 속고 있는 것이다. 세라핌.” “그 누구도 나를 속일 수는 없어. 케루빔.” “정신이 나갔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 같지 않으냐.” “…….” “너는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있다. 세라핌.” “난 잃어버리지 않아. 찾은 거야.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거라고. 이게 내 모습이야.” “그건 네 모습이 아니다.” “아니, 지금의 내가 진짜 나야.” “넌 지금 그를 모방하고 있을 뿐이야.” ‘어우야. 너무 아픈 곳 건드린다.’ “미친 소리 집어치워.” “그건 네 모습이 아니다. 세라핌. 너는 그를 모방하고 있는 거다. 따라 하고 있는 거야. 그의 행동, 말투, 사상까지.” “상대할 가치도 없는 개소리로군.” “스스로의 모습을 생각해 봐라. 세라핌. 이전의 네가 어땠는지를 떠올려 봐라. 그게 정녕 네 모습이더냐. 네가 되고 싶은 이의 모습일지언정, 네 모습은 아닐 것이다.” “입 다물어.” “넌 저 인간이 되고 싶은 거야.” “그 입 닥쳐!!” 왜 자꾸 얘를 부끄럽게 만들고 그래. 당사자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동경의 시선을 보냈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 치부를 드러내면 어떻게 하냐고. 얼마나 당황스럽고 부끄럽겠어.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면 조금 그렇지. 표정 봐. 얘가 제정신이 아니잖아. 얼마나 치욕스러워. 실제로도 부끄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깃털이 쭈삣쭈삣 서 있을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얼굴이 벌게져 있다. ‘나라도 싫겠다. 야. 얼마나 쪽팔리겠어?’ 그 부끄러움과 치욕이 분노로 뒤바뀌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예상했던 그대로 이를 갈고 있는 모습이지 않은가. 세라핌은 다시 검을 치켜들었고 케루빔은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놈을 자극한다. “어째서 저 인간을 따라 하….” “닥쳐어어어!!!!” 콰아아아아아아앙!! 케루빔의 몸이 반대쪽으로 날아가는 것은 순식간, 필사적으로 케루빔의 입을 막으려고 하는 것 같아 내 가슴이 다 아파온다. ‘부끄럽기는 부끄러웠던 모양이네.’ 나름의 신념을 걸고 부딪쳤던 싸움이 감정싸움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아마 케루빔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저쪽에서 감정적으로 나오면 괜스레 이쪽에서도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 기본 심리가 아닌가. 사실 케루빔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쟤 입장에서는 조금 황당할 수도 있지. 친구의 잘못을 딱 꼬집어 말해준 게 잘못은 아니잖아. 오히려 퍼랭이 입장에는 맞는 말 한 거라니까. 기껏 생각해서 말해줬더니 저딴 식으로 나오면 케루빔도 기분이 안 좋지. 이번 건 세라핌이 너무 했네. 너무 했어. “닥쳐어! 닥쳐! 닥쳐! 닥쳐!!” “그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은 네놈이다! 세라핌! 언제까지 철없이…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해라.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라 이 말이다!” “닥쳐!!! 이 배신자 새끼!” ‘아, 이거 감정 격해지죠. 배신자 새끼 나왔죠.’ “이… 이 더러운 배신자 놈! 내가 네, 네 말을 들을 것 같아? 인간을 신전으로 끌어들인 네 말을 내가 들을 것 같아? 저 배신자가 한 말은 전부 다 거짓말이다. 이기영. 저놈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라.” ‘아 굳이 여기서 나한테 변명하는 게 더 추해 보이는데요. 세하다. 추라핌아.’ “너는 이기영이 아니다! 세라핌!” ‘아… 너는 이기영이 아니다 나왔죠. 아, 이거 치명타인데요. 맥일려고 작정을 한 건가요. 잘못을 꼬집어 줄 수는 있어도 방법이랑 타이밍이 잘못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케루빔 님.’ “닥쳐어어어!!!!”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 이거 이러다가 더미 월드 다 망가지겠다. 이 새끼들아.’ “저, 저, 저… 저 미친 배신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 이기영. 아니, 지금 당장 자리를 피해. 내가 길을 열어주마.” 녀석의 다급한 표정을 보니 정말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게 불안한 모양인 것 같았다. 마침 딱 좋은 타이밍이 아닌가. 슬슬 라파엘이 들어올까 걱정되기도 했고, 괜히 여기 있다가 전투에 휘말리면 큰일 나자너. 세라핌이 이길 것 같기는 한데 혹시 케루빔이 이기면 난처해지니까. “네… 네.” “두려워하지 말고 어서!” ‘아, 이제 와서 멋있는 척하네요.’ 녀석의 얼굴에 들어서 있는 것은 나를 지키고 싶어 하는 감정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자신의 치부가 더 드러날까 무서워하고 있다. 눈치 없는 케루빔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눈을 떠라 세라핌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는 중, 저 새끼도 참 눈치가 없어요. 어째서 1기영이 이토록 쉽게 이 새끼들을 주물렀는지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 비둘기들은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에 서투르다. 인간과의 차이점이라고 판단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케루빔도 그렇고, 쓰로누스도 그렇고, 세라핌도 그렇다. 너희 1, 2년 본 사이 아니잖아. 상처가 곪아 터질 때까지 세라핌에게 이 건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케루빔이나, 다른 천사들에게 뒤처진다고 느껴 자기 자신을 자책한 쓰로누스. 그리고 애초에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건지 의심이 되는 수준의 세라핌. 뭐, 도미니온스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원래부터 이랬던 건지, 아니면 갑자기 난입한 가면의 영웅 때문에 놈들이 정신병자가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실 이 새끼들 정신병이 생긴 원인이야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그냥 꿩 먹고 알 먹고 하면 그만이지 뭐. 허겁지겁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했다. 도망치라고 길을 열어줬으니 빨리 도망가야지. 작은 세계의 데이터를 손에 안고 달리자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날아가라!” ‘나도 날고 싶은데. 시바. 그게 안 돼요. 이렇게 긴박한 상황에서 힘주면 날개가 꼬인다고. 그럼 땅바닥으로 바로 처박히는 거라고.’ 하지만 눈에 불을 켜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케루빔을 보자 날긴 날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추하게 달리다 다리가 꼬여 넘어지는 것보다 날개가 꼬여 땅바닥에 처박히는 게 더 멋있겠지. 퍼덕퍼덕거리기 시작하자마자 놈이 낫을 휘두르는 것이 보인다. 단번에 목을 쳐낼 각오로 신성을 가득 밀어 넣은 것만 같다. ‘으악 시바.’ 세라핌이 그 낫을 막아주기는 했지만. ‘시발 괜히 날았자너. 시바. 날개 꼬일 줄 알았다고.’ 어느새 내 몸은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손에서 뭔가를 놓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목숨보다 중요할까. 곧바로 바닥을 손으로 짚은 이후에는 허겁지겁 발걸음을 옮겼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뒤쪽에서 굉음과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 앞을 가로막지 마라, 세라핌! 너는 지금….” “입 닥쳐! 케루빔!” 다시 한번 발바닥에 힘을 줘 달리자 곧바로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넓은 복도. 문을 빠져나가기 직전에 거대한 빛이 바로 옆을 지나갔다. ‘방금 뒈질 뻔한 거야?’ -죽어! 이 더러운 배신자! -눈을 떠라! 세라핌! 배신자는 내가 아니다! 밖으로 빠져나간 이후에 망원경으로 녀석들을 바라보니 아직까지도 신나게 치고받는 놈들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얼마나 달렸을까. 벽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내 동생이야? 내 동생 라파엘?’ “여기에요! 이쪽으로.”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라파엘의 목소리가 아니다. 비둘기가 아닐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 내 예상이 맞다는 듯. 기분 좋은 강아지 소리가 들려온다. “왕!” “주변에 적은 없어요. 계속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아요! 빨리, 빨리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요!” 망원경으로 이미 한 번 봤던 얼굴이었지만 저도 모르게 기대감이 샘솟는다. ‘내가 그리워하긴 했나 보네.’ 딱히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그간 떠올리지도 않았었지만 가슴이 뛴다. ‘이해가 안 되네.’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감정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정이 들기는 들었나 보다. 마침내 코너를 돌고 반가운 얼굴을 마주친 순간 나는 커다랗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어?” “야… 이… 이 미친 돼지 새끼야!” “형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 돼지 새끼! 시발! 이 돼지 새끼! 하핫! 돼지 새끼!” 당황한 얼굴을 한 돼지 새끼가 몸을 던진 나를 받아 드는 것이 느껴졌다. < 739화 가치 (5) > -이대로 괜찮겠어? ‘이대로가 괜찮을 거야.’ -그래, 잘 생각했어. 이대로가 괜찮은 거야.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렇지 않아? ‘…….’ -내게 맡기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일 거라고 생각해. 너도 그렇기 때문에 내 손을 잡은 거잖아? ‘맞아.’ -그럼 그걸로 됐어. ‘하지만.’ -하지만? 아직도 그런 게 필요해? 네가 패배한 것은 내 힘 때문이 아니라 네 무능 때문이야. 그 커다란 힘을 가지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네 무능이 지금의 상황을 자초한 거라고. 내 말이 틀려? ‘…….’ -네 말이 틀린 거냐고 묻잖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녀가 준 힘이 어느 정도로 강한 힘인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만약에 이 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올 수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싸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쓰로누스와 검을 부딪치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는 약해. 알고 있다. 강했다면 그녀가 준 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너라는 인간을 한 단어로 규정하면 실패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저 말도 부정할 수 없다. 말 그대로, 김현성의 삶은 실패한 삶에 가까웠다. 소중한 가족들을 잃고, 소중한 동료들을 잃은 1회 차에서만 실패한 것이 아니다. 2회 차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해지려고 하고 싶었지만 강해질 수 없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할 수 없었고, 일어서고 싶었지만 끝내 쓰러졌다. 이번에도 역시, 소중한 사람 하나 구하지 못했다. 심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끌어준 사람에게 손을 뻗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에게 해를 끼친 것은 자신이었다. 편해지고 싶어서였다. 함께 짐을 들어 주고 싶다는 말에 짐을 맡긴 이후에는 안심했다.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불안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떠넘긴 짐을 상대방이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해 스스로 물음표를 던지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애써 무시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무시했을 것이다. 기뻤으니까. 말 그대로 그런 종류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나를 이해해 주고, 내 과거를 이해해 주고, 내 현재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생기는 마음의 안정은 마약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힘들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당시의 자신은 분명히 그가 보내는 신호를 못 본 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부담을 안겨주지는 않았을까. 그를 초조하게 만들고 힘들게 하지 않았을까. 그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었잖아. 짐을 맡긴다면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도 이미 알고 있었잖아. 그가 기억을 잃은 것은 나 때문이야. 그가 죽어가고 있는 것도 나 때문이고, 위험에 빠진 것 역시 나 때문이야. 내가 끌어들인 거야. 내가… 내가 끌어들인 거라고. 잘못됐어. 처음부터 잘못된 거야. 손을 건네지 말았어야 했어. 함께 하자고 말하지 않았어야 했어. 튜토리얼에서 만났을 때부터 지나쳤어야 했던 거야.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때는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 것 같아? ‘…….’ -아, 맞다. 내가 괜한 걸 물어봤구나? 너는 다시 회귀할 용기도 없는 쓰레기지. 겁쟁이. 너는 네가 그때에 비해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 튜토리얼에서 겁을 먹고 도망쳤던 김현성, 그게 바로 네 추악한 본질이야. 너는 계속해서 도망칠 거야. 그게 편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 -그게 네가 덜 아픈 방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네가 지금 옳은 선택을 하고 있다는 걸 모욕하는 게 아니야. 넌 합리적인 선택을 했어. 그 합리적인 선택에는 아주 추악하고 저열한 감정이 숨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지? ‘…….’ -넌 계속 도망칠 거야. 끊임없이. 끊임없이 도망치겠지. 비열하고 더럽고 추하게. ‘…….’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아무리 저열한 인간이라고 해도 나 정도는 너를 바라봐 주고 있잖아? 난 네 그런 더러운 면이 마음에 들더라. 이중적인 모습 말이야. ‘…….’ -다시 한번 다녀와. 이번에는 정말로 일이 끝나 있을 테니까. ‘…….’ 순식간에 눈앞에 있는 시야가 변하기 시작한다. 잠깐 동안 온몸에 거부감이 치솟는다. 당연하다. 당연한 반응이다. 나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은 만들어진 풍경이었으니까. 무의식 세계에서 한 번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이곳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내 미소 짓게 된다. 모든 게 거짓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노을 진 풍경이 비추는 이들의 모습은, 이 가짜에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너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잖아? 너는 실패한 인간의 표본이야. 너는 필연적으로 일을 망치게 되어 있고 주변에 고통을 주게 되어 있어. 그렇게 설계된 인간이야. ‘…….’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내 말이 맞아. 그래. 그녀의 말이 맞아. “어디를 보고 있는 겁니까? 길드마스터.” 일어나면 모든 게 끝나 있겠지. 어차피 김현성은 실패한 인간이고 실패할 인간이잖아. 입을 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저절로 입을 떼게 된다. 작은 속삭임에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계속해서 가라앉게 된다. “여기서는….” “네?” “여기서는 길드마스터가 아니지 않습니까.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혜진 씨.” “아… 그렇죠. 이곳은 지구니까요. 생각해 보니까 조금 재미있군요. 이런 곳에서 길드마스터라니. 누가 이야기를 들었을까 봐 괜히 부끄럽습니다.” “기껏해야 온라인 게임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나저나… 누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겁니까?” “거, 형님은 조금 늦는답디다. 요즘 들어서 바쁘다고 바쁘다고 하더니 진짜로 바쁜 모양이요. 거, 이번에도 겨우 시간 낸다는 것 같은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 형님 진짜 대단한 거 아니요?” “원래도 부길드마스터는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거, 희영 누님, 설마 내가 그걸 모를까 봐. 원래도 대단했지만 진짜로 대단하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요. 지구로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변호사 한 번 해볼까 말하더니 덜컥 되어버리고, 거 로펌에 취직한 지 얼마 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엄청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 거 보면 확실히 난 사람은 난 사람이요.” 대단한 사람이지. “이러다가 나중에는 정치 같은 거라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말이요. 막 20년 뒤, 10년 뒤에는 어디 어디 국회의원 되고 더 나중에는 막 대통령까지 되는 거 아니요?” “정말로 그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무척 잘 어울릴 것 같군요.” “그렇게 바쁘니까 요즘 하얀이 누님이랑은 일이 잘 안 풀리고 있다는 것 같아 아쉽기는 하지만… 뭐 그래도 그 둘이 어디 보통 인연이요. 혹시나 몇 년 안에 결혼 소식이 들려와도 이상하지 않다니까. 그건 소라 후배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지금 둘이….” “네… 정하얀 님은… 잘, 잘 지내고 계세요. 네… 식사도 잘하시고요.”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러고 보니, 거 소라 후배도, 지금 형님 회사에서… 무슨 로펌 비서인가 뭔가 하고 있는 거 아니요?”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너무 바쁘시다는 것만 빼면요… 원래는 오늘도 바쁜 날이라 제가 함께 있어야 했는데… 먼저 퇴근해도 된다고 배려해 주셨어요.” “그 중국인 변호사랑….” “자세히 설명을 드릴 수는 없고… 맡고 계신 게 있거든요. 그 건 때문에 정말로 바쁘세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에 비쳤다. 대륙에서 함께 한 길드원들과 동료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슴 속에서는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충족감이 채워진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미소가 지어졌다. 지구로는 돌아갈 수 없지만 이런 풍경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게 끝난 이후엔 이렇게 모이는 일도 많겠지. “어디 형님만 대단한가. 혜진이 누님도 대단하지. 시험에도 합격했으니까 이제 검사되는 일만 남은 거 아니요.” “저는… 이제 시작입니다. 한참 뒤처졌죠.” “처음에 지구에 다시 왔을 때만 해도 어안이 벙벙했었는데 이렇게 각자 자리 잡은 모습을 보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뭐 새롭기도 하고 그런 느낌이요. 예리도 대학을 다니고 있고, 거, 안기모 씨도 배우로 승승장구하고 있으니까. 이제 영화 개봉도 앞둔 거 아니요. 자동차왕 안복동인가 뭔가… 희영이 누님도 봉사활동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정신없고… 엘레나 님은 뜬금없이 스트리머….” 이제는 밝은 얼굴을 하고 있는 김예리가 입을 열어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구독자 수 450만. 외국에서도 유명해.” “정말로 그렇게 유명해요? 김예리 님?” “응. 정말로 유명해.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 유명할걸? 헬닭볶음면 먹는 영상이 조회 수가 2,500만… 이것 봐.” “대단하네요. 정말로… 생소한 곳에 오셔서 잘 적응하실 수 있으실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저보다 더 잘 적응하셨는데요.” “아영 후배도 공방 취직해서 잘살고 있으니까. 뭐 걱정하고 그럴 게 있나. 우리 길드 마스터 형씨가 더 걱정이지. 현성이 형씨는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 거요?” “네. 덕구 씨. 솔직히 뭘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하고는 있습니다.” “사실 현성이 형씨도 빨리 자리 잡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네. 더디죠. 아무래도 지구 생활에 아직까지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이 이렇게 잘 되는 모습을 보니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네. 정말로 기쁩니다.” 나는 제대로 적응할 수 없겠지만, 만약 지구로 돌아간다면 모두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모두 빛나고 있을 것이다. “현성이 형씨도 잘 자리 잡을 거요. 안 그래도 형님도 형씨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고.” “그렇습니까?” “자세히는 못 들었는데 신경 쓰인다고 하기는 합디다. 아, 마침 저기 들어오는 것 같은데. 한번 직접 물어보쇼.”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자 실내로 들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천천히 웃으며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눈에 담겼다. “여기요! 형님! 누님!” “덕구야.” “부길드마스터. 오랜만이에요.” “네. 다들 오랜만입니다.” “누님도 잘 지낸 거요?” “오, 오, 오랜만에 뵙네요. 다들….” “네.” “현성 씨도 오랜만입니다.” “아, 네. 기영 씨.” “정말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죄송스럽군요.” “아니요. 바쁘시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요. 폐가 될까 봐 선뜻 연락에 답장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사실 오늘도…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괜찮습니다. 현성 씨. 지구에서의 삶도 물론 중요하기는 하지만, 대륙에서의 기억들보다 중요하지는 않으니까요. 허락하신다면 앞으로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생각해 보니 제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네요.” “그건.” “허락해 주신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 “아니요. 괜찮….” “이번 일만 끝나면 조금 여유가 생길 겁니다. 그러니 정말로 괜찮습니다. 아! 제가 너무 자리에 서 있게 만들었네요. 하얀아, 앉자.” “…….” “현성 씨는 어떻게…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평소와 같은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 눈에 보인다. “네… 저는….”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걱정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는….”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잘 지내고 있지….” “네?”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740화 가치 (6) >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얼굴이 살짝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기고 있는 모습이 괜스레 눈에 띈다. 누가 봐도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다. 괜찮다고, 평소와 같다고 말해야 했던 것은 아닌지 떠올려봤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중에 꺼낸 말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리라. 방금 입에 담았던 것처럼…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어째서.’ 어째서일까. ‘이렇게 행복한데.’ 이따금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많았다.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지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텅 빈 공간 속에 혼자 남겨져 있는 것 같은 기분, 호흡이 가빠지고 속이 점점 메스꺼워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져 깊은 수면 속으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감각. 그 감각은 이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린다. 나 자신을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였고,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었다. 검을 들지 않아도 되고,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었고, 그들이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미소 짓게 되는 장소였다. 꿈에도 그리고 있었던 이상향 속에서도 여전히 김현성은 괜찮지 않았다. “제, 제… 제가 괜한 이야기를….” “길드마스터, 괜찮으십니까?” “네. 혜진 씨.” “형씨. 괜찮은 거요? 표정이 좋지 않은데.” “네…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아? 안색이 창백….” “그래. 나는… 괜찮다. 예리야.”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도망치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말할 것이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내 선택에 긍정할지도 모른다. 이기영은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현재의 자신이 쓸모없다는 것 정도는 그 누구보다도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럴 거야.’ 무능한 자신보다는 그녀가 일을 처리하는 게 더 확실하다. 그녀의 말대로. 김현성은 실패한 인간이었으니까. 내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실패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잃기만 했으니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선다고 하더라도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이다. 실수한다면 또 잃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 그냥 해본 말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 “정말입니다.” “…….” “…….”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까요?” “네?” “잠깐 따로, 이야기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고… 아마 다른 분들도 이해해 줄 겁니다.” 살짝 주변을 둘러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요.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무의식중에… 오늘은 모임이 있는 날이고 또, 기영 씨도 바쁘실 테니.” “제가 그러고 싶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밖으로 나가시죠.” 먼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어느새 모임 장소를 벗어나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륙과는 다른 풍경이다. 네온사인에 슬슬 불이 들어오고 있었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도 들려온다. 발걸음을 옮기기가 왠지 모르게 부담스럽다. 이렇게 많은 사람 사이에 있는 것도 이상하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핸드폰을 만지며 걸어가는 사람, 친구나 연인과 함께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 술에 취한 이들도 눈에 보였고, 각자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인파들 사이로 섞이는 그의 모습도 눈에 보인다. 그다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항상 생각해왔지만 어디에서나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만 같다. 자신도 비슷한 느낌일까. 나는 지금 어떻게 보일까. 살짝 옆을 바라보자 유리에 비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속으로 상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이질적이다. 새삼스럽게 이곳과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장소마저 김현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잠깐 쓴웃음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대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기영 씨와 함께 걷는다면 조금은 섞이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어떻습니까?” “네?” “이곳 말입니다.” “이곳이라고 하시면….” “지구 말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걷고 있는 이 장소요.” “…….” “불편하신 겁니까?”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무척 편한 것 같습니다. 대륙에 비한다면 이곳은 위험한 장소도 아니고, 여러 가지로 신경 쓸 일이 적으니까요. 적어도 그곳에 있는 것 보다는 덜 무거운 것 같습니다.” “덜 무거운 것 같다고 하시면.” “저… 기영 씨. 아까의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까지나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니까요.” “무의식중에 나온 말씀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입니다.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신 것 같아서… 뭔가 다른 이유가 있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응하는 게 힘이 드시는 겁니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기는 했지만 따로 실감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 느껴지기도 한다. 적응했냐 적응하지 않았냐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당연히 전자에 손을 얹을 수밖에 없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지구에서 생활하라니 힘이 드는 게 당연하겠죠. 그야 우리는 그 대륙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왔으니까요. 현성 씨 같은 경우는 저보다 더 오래 지냈으니, 혼란이 생기실 만도 합니다.” “…….” “어울리지 않는다고, 자신이 어색하다고 느끼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말이 맞다. “하지만 현성 씨뿐만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들과 섞이고 사회에 섞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가지고 있는 짐의 크기는 모두 다를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걸 느끼고 있을 겁니다.” “네… 네.” “모두가 힘드니 참으라고, 버티라고 말씀드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바로 이거예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닫는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은 거였습니다. 저기 길을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나 모두 같은 사람들입니다. 핸드폰을 만지며 걸어가고 있는 사람도, 모두 현성 씨와 같은 사람들이에요.” “…….” “서로 대화도 나누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는 서로의 이해자가 될 수도 있을 거예요.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시면 그게 가능해질 겁니다. 부족하겠지만 그게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걸로도 부족하다면 더 가깝게 생각해 봅시다.” 싱긋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좁게는 대륙에서 함께 넘어온 우리 길드원들이 우리의 이해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여는 얼굴이 시야에 비쳐왔다. “그것보다 더 좁게는 제가 현성 씨의 이해자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걱정이나 근심은 떨쳐 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기영 씨도….” “세상에 그런 걸 무서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아마 다들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겁니다. 저 역시 예외는 아니고요.” “아….” “그래서 드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저도 같았거든요. 나를 이해해 주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거든요. 물론 현성 씨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네?” “많은 걸 함께하고 많은 걸 공유하지 않았습니까. 제 생각이….” “아, 아니요. 틀리지 않습니다. 전혀… 틀리지 않아요.” “다행이군요.” 속을 좀먹고 있었던 벌레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불안감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세차게 뛰던 가슴이 천천히 진정되는 것 같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별것 아닌 한마디였지만 그 어떤 말보다 더 위안이 되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저, 저야말로 다행입니다. 저야말로. 그렇게 생각해 주시고 계실 줄은….” 상황이 반전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물론 제가 현성 씨를 완전히 이해하고 현성 씨가 저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 “서로의 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까.” “아….” “현성 씨도 제가 가진 짐을 함께 들어주셨으니까요.” “어….” “현성 씨라면 저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 어….” “제가 주제넘게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도 현성 씨의 짐을 함께 든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부족했지만 말입니다.” 부족하지 않았다. 절대로, 단 한 번도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어… 아… 어….” “제가 지금 이곳에서 잘 지낼 수 있게 된 이유는 어디까지나 현성 씨가 제 버팀목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버팀목이 되어준 적이 없었다. 그는 내 짐을 함께 들어줬지만 나는 그의 짐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도망쳤다. 도망쳐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아니… 저… 저는….”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지기 시작한다. 호흡이 가빠지고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들다. 주변의 것들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목소리도 잘 들려오지 않는다. 지독한 자괴감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쓰레기 같은 인간.’ “저는….” ‘이기적인 인간.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는 인간.’ 눈앞에 있는 얼굴이 입을 크게 벌려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네가 내 짐을 함께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네 짐을 함께 들어준 것만큼 나를 지탱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눈에서 점점 눈물이 차오른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장소가 어디인지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고개를 황급히 돌리자 검을 들고 서 있는 내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김현성.” 황급히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를 안고 있는 22살의 김현성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도망치는 거야? 도망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절대로 도망치지도 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잖아. 형을 잃고 그렇게 다짐했잖아.” 뒤를 돌자 머리에 뿔이 달린 괴물이 말을 이었다. “그의 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야. 너는 도망치고 있는 거야. 아무것도 할 용기가 없어서 그저 도망치고 있는 거라고. 이 이기적인 자식.” ‘아니야. 나는….’ “그는 널 위해 모든 걸 희생했다. 네 짐을 들어주기 위해 자신을 내 던졌어. 그 결과가 이거야? 내 모습이지만 혐오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구나. 넌 그의 옆에 설 자격도 없어. 너 같은 쥐새끼는 지옥에서 평생 썩는 게 어울려.” ‘나는 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 그럴 의도는 없었어. 이게 합리적이기 때문이야. 나는 모든 걸 망칠 거야. 모든 걸 망칠 거라고.’ “너는 그를 위해서 무엇을 했어? 그가 네 뒷바라지를 하며 힘들어하는 동안 너는 그를 위해서 뭘 했냐고 이 이기적인 쓰레기 새끼.” ‘나는… 나는….’ “이제는 네가 희생할 차례야.” -김현성. 이제는 네가 희생할 차례라고. < 741화 가치 (7) > “인간 쓰레기.” ‘아니야.’ “이기적인 자식.” ‘아니… 아니야.’ “비열하고 저열한 거로도 모자라 추하기까지 한 괴물.” ‘나는….’ “나는….” “현성 씨.” “나… 나는….” “현성 씨?” 화아아아아아아악! “현성 씨!” “…….” “괜찮으신 겁니까?” “저… 지금….” “아까부터 안색이 창백해서… 제가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네. 제가… 지금….” “네?” “여기가… 여기… 하아… 하아… 여기가 지금….” “현성 씨. 괜찮으신 겁니까? 잠깐… 잠깐.” 느리게 흘러갔던 시간이 점차 본래대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입은 계속해서 거친 숨을 토해내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으로 닦아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럽다.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것은 없다. 1회 차의 김현성도 괴물처럼 변한 김현성도 모두 사라졌다. 심신이 안정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틀림없이 그가 어깨를 부여잡았을 때였다. “잠깐 쉴 수 있는 곳을 찾아야 될 것 같습니다. 어디 가까운 곳에서….” 당황하고 있는 모습,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아니, 병원으로 같이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급해 보이는 얼굴이다. 걱정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괜찮으신 겁니까? 정신이 드신 겁니까?” “네….” “현성 씨?” “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조금만 더 쉬면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천천히 바라봤지만 여전히 진정하지 못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얼굴은 지금의 상황에 분노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 건지 알 것 같다. 분명히 자신을 자책하고 있지 않을까. 그는 항상 그랬으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는 잘못한 것이 없다.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현성 씨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빨리 눈치채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 정도로 힘들어하실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기영이 느끼고 있을 고통에 비하면 자신의 작은 문제 따위는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 “제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이 사람은 더 이상 희생할 필요가 없다. “아… 아니요. 더 이상….” “네.” “더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이미… 이미 충분하니까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고 생각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네. 그리고… 애초에 그렇게 심각한 일도 아닙니다. 잠깐 어지럼증이 일어났을 뿐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이럴 게 아니라 잠깐 앉을 수 있는 장소를….” “아니에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이제 정말로 괜찮다. 뭘 해야 할지 깨달았으니까. “그러지 마시고.” “아니요. 이제는…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네게 주어진 일이 뭔지 깨달았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신다니… 다행이지만….” “저는 항상 걱정만 끼쳐 드리는 것 같습니다.” “네?” “항상 걱정하게만 만들어드린 것 같습니다. 저번에도 이런 일이… 이런 적이 있었던 게 떠오르네요. 만약 그때 찾아오시지 않으셨다면 영원히 그곳에서 헤매고 있었을 겁니다. 저는 기영 씨와는 다르게 아주 나약한 인간이니까요. 그곳에서 계속해서 안주했을 거예요. 정말로 감사했었습니다.” “네?” “새로운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주셔서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제 짐을 함께 들어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죄송합니다. 맡겨서는 안 되는 짐을 맡긴 것으로 모자라 외면하고 도망쳐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회피하기만 해서….” “누구나 도망칩니다. 그리고 저는 현성 씨를 비난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현성 씨 역시 제 짐을 들어주시지….” “아니요. 저는 든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항상 떠맡기기만 하고 정작 필요할 때는 도망치기에 바빴었습니다. 외면하고 피하고 숨는 것밖에는 한 게 없었어요. 어쩌면… 어쩌면 여기서도 누군가가 나를 꺼내주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와주시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 생각만 하고 있을 정도로… 저는 도망치기만 하는 인간이었습니다. 나약하고 옆에 설 자격이 없는 인간이에요.” “…….” “사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나가기가… 두려워요. 이런 선택지가 생길 때면 항상 불안합니다. 무서워서 참을 수가 없어요. 기영 씨나 다른 분들이 제 손을 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때처럼 다시 한번, 다시 한번 손을 잡아주신다면 조금 더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어리광이라는 걸 지금 깨달았습니다.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 “이번에는 저 혼자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현성 씨.” “…….” “현성 씨가 원하는 일이라면 모두 이루어질 겁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모두 잘 될 거예요.” 저런 말이 필요했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은 안심되는 위로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사람은 두려워하는 법이 없었다. 기억을 잃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항상 올곧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기 때문에 그때도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 올곧은 눈을 보고 있을 때면 나 역시 실패할 거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 선택이 옳은 선택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이 사람은 절대로 틀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 역시 짐을 떠넘긴 행동에 불과하다. 선택에 대한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죄송합니다.” “네?” “정말로 그동안 너무 죄송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책임을 질 차례다. 모든 걸 끌어안고 마침표를 찍을 차례였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현성 씨? 현성 씨?”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굳이 멈추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만약에 고개를 돌린다면 다시 한번 결심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을 잡는 게 느껴졌지만 곧바로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현성 씨!” 점점 더 빠르게 바뀌는 풍경이 시야에 비쳐왔다.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셔츠와 청바지는 어느새 무거운 갑주로 변해 있다. 화려한 길거리는 점점 어두워진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노을 진 풍경은 거대한 어둠에 뒤덮였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기분 나쁜 공기가 장내를 가득 메운다. 커다란 책상에 앉아 책을 쓰다듬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보인 것은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직후였다. “루시퍼.” -……. “루시퍼.” -여기에는 무슨 일이야? 뭔가 잘 풀리지 않는 게 있나.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도 있어? “나가고 싶어.” -뭐?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 -……. “밖으로 나가야겠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말하지 않았나? 네가 나서면 모든 게 엉망이 될 거라고. “아니,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어떤 근거로? “내가 마침표를 찍을 테니까. 더 이상 도망치는 일은 없어.” -재미있는 생각을 하는구나. 쓰레기 같은 인간. 너는 주인공이 아니야. 모든 걸 끌어안고 마침표를 찍겠다고 한들, 그게 제대로 될 거라는 보장은 없어. 회귀했다는 것 하나야. 네 특별함은 겨우 그 정도라고, 운이 좋아서 아니 나빠서 선택됐을 뿐이야. 내가 장담할 게 여기서 나간다면 너는 후회하게 될 거야. 이번에도 역시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절규하게 될걸. “…….” -얌전히 기다리는 게 더 이로울 텐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다시 한번 실패하게 될 거라고. “그럴 일은 없어.” -어떤 근거로. “내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네가 본래 그리던 엔딩에 너는 없을 거야. 네가 꿈꾸던 일상에 너는 없을 거라고 그래도 좋아? “상관없어.” -지금까지 무서워 숨어 있었던 주제에 지금은 타인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이제야 내 역할이 뭔지 깨달은 것뿐이야. 나는 나가고 싶다고 분명히 이야기했다. 루시퍼. 그게 계약이었어.” -글쎄 조금만 더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 -후회할 거야. “이미 충분히 후회했어.” -실패할 거라고. “네가 절대로 마침표를 찍지 않을 거라는 걸 지금에서야 알았어. 루시퍼.” -누구보다도 끝을 바라고 있는 건 나야. “아니. 네가 원하는 건 혼란뿐이야.” -이래도 나가고 싶어? 나라면 가능해. 네가 꿈꾸는 미래를 실현시켜 주는 것도 아주 쉬운 일이야. 눈앞에 다시 한번 꿈 같은 현실이 펼쳐진다. 어두운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고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다. 길드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다들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다. 그 자리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 역시 자리해 있었다. 꿈 같은 광경이다. 아주 아름다운 멋진 풍경이었다. 저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찬란한 광경이었다. -네 모습을 봐. 어린애처럼 웃고 있는 모습을 보라고. 네가 꿈꾸던 게 이거야. 네가 가장 큰 가치로 품고 있었던 건 이런 거라고. 아니면 다른 건 어때. 조금 비현실적이기는 하겠지만 더 과거로 가 보는 건 어떨까. 그래. 대륙에 떨어지기 전에 만나는 것도 재미있을 거야. 학창시절을 함께 보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나가고 싶어. 나를 보내줘 루시퍼. 계약을 이행해.” -……. “…….” -……. -멍청한 놈. 넌 멍청한 인간이야. 천천히 감았던 눈이 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까 꿈 같았던 풍경과는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둠과 악취로 물든 폐허였다. 천사들의 시체로 가득 메워져 있는 장소는 확실히 아까 봤던 풍경보다 내게 더 익숙하게 느껴진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보자 괴물처럼 변한 팔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뿔 때문인지 머리도 익숙하지 않다. 고여 있는 썩은 물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예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형편없었던 것 같았다. 이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그걸 인지할 수 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어와 꽂힌 것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고 있었을 때였다. [총 2,124개의 강제 퀘스트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확인하지 않은 강제 퀘스트를 열람합니다.]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회귀자여. (0/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 (0/1)] “하하….”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 제발 내가 바라노니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회귀자여. (0/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 (0/1)] “하하하… 하… 흐… 흐으윽….”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회귀자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해 줄 것이다. (0/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 (0/1)] “흐윽… 흐으으윽….”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회귀자여. 그리하면 네가 원하는 것을 선물하겠다. (0/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 (0/1)] “흐으으윽…. 흐윽….”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제발. 제발.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회귀자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꿈 같은 미래를 선물해 줄 것이다. (0/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 (0/1)] “흐으으으으윽….”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 제발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회귀자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해 줄 것이다. 반드시 네게 미래를 줄 것이다. 내 이름을 걸고 네가 원하는 모든 걸 선물해 줄 것이다. (0/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 (0/1)] “흐어어어… 흐윽….”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일어나. 김현성. 제발… 죽지 마. 부탁이야. (0/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 (0/1)] “흐윽… 흐으으으윽….” < 742화 끝으로 (1) > 깜짝 놀란 것 같은 박덕구의 얼굴이 시야에 비쳐왔다. 여전히 멍청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다. 기분 나쁜 땀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용인해 줄 수 있을 정도, 여기까지 정신없이 뛰어오며 전투를 치러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놀란 것은 녀석뿐만이 아니다. 상황실에 있어야 할 내가 신전 한가운데서 발견됐으니 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당황할 만했다. 몇몇은 대놓고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돼지를 보고서는 크게 안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거 돼지 새끼라고 불렀다고 소문나는 건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조금 격해졌던 것 같기도 했다. 이지혜 덕분에 이곳에서의 생활이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스트레스가 쌓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생각해도 감정을 크게 드러낸 것 같았지만 곧바로 점잖은 모습을 보이자 서로를 바라보는 이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다들 오랜만에 보네.’ 세트나 다름없이 느껴지는 안기모와 김예리 마지막으로 황정연까지 자리해 있는 모습. 다른 길드원들은 다른 부대에 편입된 것 같았다. 밸런스를 유지해야 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나머지 인원들은 모두 모르는 얼굴들이다. 심지어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 능력치를 보면 나쁘지는 않아 보였지만 어딘가 하자가 있는 이들이다. 지나치게 체력만 높다든가 지나치게 적은 마력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라든가. 내 기준으로는 써먹을 수 있는 이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 저 같은 부대원들만 뽑아왔네.’ 조금 정상적인 이들로 구성하면 어디가 덧나나 싶기도 했지만 스탯을 볼 수 없는 녀석에게 기대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형님? 형님? 맞는 거요?” ‘그럼 내가 이기영이지, 누구로 보여?’ “부길드마스터가 맞네요.” “들어와 있었으면 들어와 있었다고 미리 이야기를 해주지! 어쩐지 이상하기는 이상했다니까! 언제부터 있었던 거요? 아니, 그것보다 어째서 여기 있었던 거요?” “설명하자면 길어. 나중에 말해줄게. 일단은 이동하는 게 좋겠다. 마침 나도 할 말이 많으니까 이 주변만 빠르게 벗어나자고.” “아니, 일단 설명을….” “빨리 가자고.” “알, 알겠소.” “여기 계셨군요. 부길드마스터. 이거 오랜만입니다.” 해적왕의 꿈을 이룬 안기모는 이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다. 조혜진이 철저하게 숨겼다고 한들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을 테니… 눈치가 빠른 녀석이라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도는 깨달을 수 있었으리라. 뜬금없이 알프스를 따라가라는 룰을 부여받은 것부터 의심이 됐겠지. “오랜만.” 짧게 인사를 건네는 김예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듯 손을 들어 올렸지만 얼굴에는 반가움이 묻어나 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하는 게 눈에 보인다. ‘좀 솔직해져라. 진짜. 너 정 많은 거 알아. 그렇게 쿨한 척하면 오히려 더 안 쿨해 보여요.’ 마지막으로 안심했다는 듯 크게 한숨을 몰아쉬는 신입 길드원 알프스까지. 차마 이쪽에 말을 건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인사를 건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그녀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갔으니까. “고맙습니다.” “네… 네! 부길드마스터!” ‘기합 들어가 있는 모습 좋고요. 자고로 신입은 이래야지. 패기가 있어야 된다니까, 패기가. 근데 사실 그렇게 고맙지는 않아요. 얘들이 반갑기는 반갑고. 솔직히 기분은 좋은데 내 기분이 좋다고 일이 잘 풀리는 건 아니자너.’ 어쩌자고 여기까지 들어온 건지 묻고 싶기야 하다. ‘다른 건 하지 말라고 못을 박아뒀어야 했나?’ 가면을 쓰고 만났을 때 다른 말은 하지 말라고 언급이라도 해야 했나 보다. 아니, 저 강아지가 나를 기억했다는 게 조혜진이 이번 작전을 기획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다 내 잘못이지 뭐.’ 일단은 미소가 지어지니 그것으로 됐다.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일이 짜증 나기는 했지만 어차피 지금부터 알게 될 것이다. 살짝 주변을 둘러보자 박덕구가 뽑아온 반쪽짜리 들이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을 어떻게 한다.’ 조금 급조되기는 했지만 간단한 방진 정도는 짤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껴진다. ‘애들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든든한 돼지 새끼가 있으니 전투 몇 번 정도는 치를 수 있을 것이다. 막 그렇게 입을 떼 지시사항을 전달하려고 했던 찰나였다. “형님은 내 옆에 딱 붙어 있으쇼. 아니. 차라리 내가 들고 달리는 게 낫겠네.” “뭐?” “모두 움직이라니까!” ‘뭐야.’ “위치 잡고 갑시다. 거, 빨리빨리! 그러니까… 그게… 스물네 번째. 스물네 번째!” ‘뭐가 스물네 번째야?’ 궁금증은 빠르게 해소됐다. ‘이 돼지 새끼….’ 빠르게 진영을 재정비하는 부대원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기 때문이다. ‘아니, 시발 이게 뭐야?’ 훈련이 잘되어 있다는 건 애초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박덕구 패밀리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내가 상상하던 모습보다 더 이상적이다. ‘이게 이렇게 된다고?’ 기형적인 도형을 모아 끼워 맞춘 정사각형의 퍼즐 같은 느낌이다. 조금 투박하기는 하지만 뭐라고 트집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인 모양이 완성됐다. 맨 첫 줄이 아니라 중앙에 박덕구가 자리해 있는 모습, 아마 기본적인 진영은 다를 것이다. 조금 변형된 형태로 만들어진 이 모양은 후방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만 같다. ‘밸런스가 좋은데.’ 전위에 박덕구가 없다는 게 커다란 약점으로 자리할 것 같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더 단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거북이 같은 느낌, 목이 언제든지 등껍질 안으로 숨을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지는 방진에 다른 사람을 보는 눈으로 돼지 새끼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너 시바 누구야.’ “형님이 할 수 있으면 나는 더 잘할 수 있다고 말한 건 형님이었소.” ‘아무리 그래도 시바.’ “전진! 전진!” 부대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박덕구는 내 몸을 최대한 방패와 가깝게 붙이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말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은 느낌. 나름대로 편안한 승차감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거, 신전 밖으로 나갈 거요. 그런 작전이었으니까.” “무슨 작전인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는데… 혜진 누님이 찾을 수 있는 걸 찾으면 바깥으로 나오라고 했다는 것 외에는… 그때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는데 지금 보니 그게 형님이었던 것 같더라니까. 형님을 찾고 바깥으로 나가는 게 내 임무라는 거지.” “퇴로는 확보했고?” “그런 자세한 것까지는 잘 모른다니까. 이번 작전이 완전히 극비였다는 거 아니요. 극비. 아 잠깐 앞에서 전투가 있을 것 같으니까. 그것 끝나고 마저 이야기합시다.” 시야가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굳이 망원경으로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거, 움직이쇼! 가만히 있지 말고! 김양! 거기서 뭐 해! 움직여야지! 어이! 정씨 아저씨! 힐! 힐! 타이밍 놓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 거기 좋다니까! 거기! 예리야! 매혹의 춤! 매혹의 춤!” ‘매혹의 춤은 하지 말지. 좀. 그거 정식 기술로 쓰기로 한 거야? 진심으로?’ “지금 딱 느낌 좋다니까! 지금 그대로! 하면 이길 수 있을 거요! 버티고! 버텨줘야지! 거기서 버텨줘야지! 아니! 거기서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 안기모 씨! 좀 메워주쇼! 아아아! 답답해 가지고! 진짜!” ‘이 새끼 뭘 알고 하는 거 맞는 거지?’ “정연씨! 보호! 보호! 잘했다! 나이스! 나이스으!!!” 목소리 하나는 우렁차다. 응원도 기가 막히고. 우당탕탕거린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어찌 됐건 뚫어내긴 뚫어낸 모양, 어미 곰이 새끼들 잘 있나 확인하듯 얼굴을 들이미는 박덕구의 모습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말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이 멍청한 새끼. 극비… 시바. 극비. 밖으로 나간다며 퇴로 확보해 놨냐고.” 소리를 지르며 등짝 스매시를 날리고 싶었지만 녀석의 부대원들이 들을까 그러기도 힘들다. 조곤조곤 힘 있게 말하니 내가 점점 열이 올라오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그… 그러니까.” “당황하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해. 시바.” “거, 그…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는데. 퇴로는 만들어 놓지 않은 거로 알고 있는데… 솔, 솔직히 나는 잘 몰라서….” “아니, 어떻게 몰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는 건 혜진이 누님을 포함해서 몇몇이 전부요. 아마 그… 붉은용병의 용병여왕이나 검은백조에 박연주 누님. 김미영 팀장님이랑 공화국과 연합, 이 종족 쪽에서도 몇… 모르긴 몰라도 채 10명도 안 되는 것 같더라니까.” “뭐?” “거, 어디서부터 이야기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스파이가 있었다는 거 아니요. 밀정이라고 해야 되나.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의 편에 서고 싶어 하는 배신자 놈들이… 솔직히 어떻게 접선했는지도 모르겠다니까.” 조금 양심이 찔려오기는 했다. ‘아 그건 이쪽에서 한 거기는 해.’ “이야기가 잘되지 않았던 건지는 모르겠는데… 지휘부 입장에서도 일이 그렇게 진행되다 보니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거 아니요. 혜진이 누님이 말하길 부품들을 구해오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소.” “부품?” “진짜로 부품을 가지고 와서 무슨 물건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되나.” “나도 알아 그냥 표현이 그렇다는 거지.” “아, 바로 그거요. 다들 자기 할 일을 끝내면 알아서 결과물이 나온다는 거지. 그래서 내가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줄 수가 없다니까. 아 그래도 하나 말해줄 수 있는 건 있는데.” “뭔데?” “이거는 혜진이 누님이 나한테만 말해준 건데.” “응.” “절대로 도망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니까.” “…….” ‘대충 뭔지 알 것 같은데….’ 사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기껏해야 퇴로를 확보해 성벽으로 되돌아가는 걸 상상했었다. 하지만 조혜진이 저런 식으로 입을 열었을 정도라면 확실히 지휘부 쪽에서 생각해 놓은 게 있다. ‘어떻게 싸우려고 그래?’ 부품이라는 게 뭐지? 이기기 위해 필요한 재료가 뭐야? 텔레포트로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방주를 통해 이곳으로 오지 않았던가. ‘제어장치?’ 마력을 억누르는 제어장치를 손본다면 텔레포트로 도망치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병력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져 있다. 이미 배수의 진을 치고 있다는 거다. 박덕구의 말대로 후퇴한다는 선택지는 없다. ‘도망쳐야 하는데.’ 카스가노 유노가 봤던 엔딩 장면에서는 틀림없이 성벽이 자리해 있었다. 김현성 배때기 엔딩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본래 있었던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이 옳다. 무슨 방법이 됐든 여기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은 엔딩으로 향하는 방법이 아니다. ‘아. 이거 조금 꼬인 거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허벅지를 두드렸을 때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김현성의 목소리. ‘1회 차의 하얀 씨는 교국 전체를 옮겼었습니다.’ “어….” ‘대륙의 지도를 바꾼 거라고 말씀드리면 이해하기 편하시겠군요.’ 머리로 망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 내가 엔딩 장소로 향할 수 없다는 그곳을 이곳으로 불러오면 된다. “하… 하하, 시발…. 시발! 푸흐… 푸하하하하!” 드디어 알 것 같다. “키야… 기가 막히네.” 조혜진은 북부의 성벽 전체를 신전 앞으로 옮겨올 생각이다. < 743화 끝으로 (2) > ‘우리 혜진이 진짜 이 갈았네. 와, 왜 요걸 생각 못 했을까.’ 너무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에 아예 고려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하얀이 이걸 가능하게 하냐 역시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으니까. ‘불가능할 게 뭐가 있겠어?’ 정하얀은 이미 중력을 북부 전체에 떨어뜨린 이력이 있다. 방법은 다르다고 한들, 그녀가 상식을 벗어난 마법사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중력 떨구기 마법학과를 나온 마법사가 순간 이동 마법학과의 권위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한소라의 신체 일부를 손에 쥔 정하얀에게 그런 구분이 필요할 리가 없다. 전공에 관계없이 정하얀은 마법이라는 커다란 학문에 능통해 있었으니까. 이게 가능하냐고 묻는 것보다 불가능한 게 뭔지 물어보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연구할 수 있는 시간만 충분하다면 우리 대마법사는 언제든지 결과를 만들어준다. 마력을 회복하는 동안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었다. 정하얀 역시 이를 갈고 있었다는 거다. 조혜진과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이 둘이 합의점을 찾았다는 사실 또한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조혜진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니까. 이 미친 작전을 기획한 것은 정하얀이 아니다. ‘참 의외기는 해.’ 내가 아는 조혜진은 신중하고 안정 지향적이었다. 사실 성격 이전에 이런 종류의 작전에 조혜진은 절대로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체스를 둘 때도 그런 성향이 두드러진다. 조혜진이 모 아니면 도의 심정으로 주사위를 던질 때는 항상…. ‘최후의 최후의 최후였으니까.’ 그녀가 느끼기에는 현재의 상황이 최악처럼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본인의 입장에서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지. 김미영 팀장이나 전략기획실, 위원회본부의 중역들과 함께 계획을 구체화 시켰겠지만…. 행동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그만큼 이번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높게 쳤다. 이 말도 안 되는 작전에 최소한의 개연성을 부여해 주는 것은 아마…. “내가 이걸 알아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목적은 이기영의 구출만이 아니다. 이기영 역시 작전을 성공시킬 부품이다. 이 계획을 끌고 갈 만한 필수요소로 규정한 것이다. 단 하나라도 어긋나면 모든 게 무너질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도박에 다른 사람도 아니라 조혜진이 주사위를 던졌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뭐, 뭐 눈치챈 거요? 아니면 역시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거요?” “덕구야.” “?” “혜진이가 나한테 넘기라고 한 거 없어? 밀봉해 놓은 거라든지, 뭐 편지 같은 거라든지 그런 거 없냐고.” “아… 내 정신 좀 봐. 아!” ‘이 새끼 진짜. 시바, 내가 이거 눈치 못 깠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아니, 근데 이거 혜진이 누님이 절대로 열지 말라고 했었는데.” “나 주라고 한 거야.” “절대로 열지 말라고 했었는데.” “절대로 열지 말라고 한 걸 왜 줬겠어? 빨리.” “무슨 상황이 와도 열지 말라고 했단 말이요. 얼마나 신신당부를 했는지 그때 그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니까.” “아니, 시바. 잡소리 하지 말고 빨리 내놓으라고!” “알, 알겠….” 품 안에서 무언가 뒤적뒤적거리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녀석의 주머니 안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여신의 손거울. ‘시바, 생각대로 딱딱 되네.’ 조금 전까지 짜증 났던 감정이 그대로 사그라지는 느낌. 초조하고 불안한 감정이 많이 희석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지혜 누나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각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리라. 문제는 신전 안에 있는 신성이 여신의 손거울의 전파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다음으로 필요한 부품이 무엇인지 역시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새끼들 이거 제정신 아니네.’ 컨트롤 타워도 없이 일을 해결하려고 했어? 완전히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근접한 거리라면 연결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정 거리 이상의 장소에서는 여신의 손거울이 듣지 않고 있는 상황, 다른 부대가 가져올 부품은 컨트롤 타워를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달라지기는 했지.’ 이기영은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빛의 눈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에게나 메시지를 날릴 수 있는 빛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조혜진이 원하는 건 이런 종류의 컨트롤 타워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부대와 부대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장치다. 이걸 가능하게 하는 건 아마도…. ‘막 사원, 아니, 아들 와 있었어?’ 신전 안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부대 중 하나에 균열 박물관 5등급 관리자 막스가 포함되어 있다. “덕구야.” “왜 부르쇼? 아직 가려면 한참 남은 것 같은데….” “막스는 어느 쪽으로 갔어?” “…….” “막스는 어느 쪽으로 갔냐고.” “막스가 여기 와 있는지 형님이 어떻게 아는 거요?” “알 만하니까 알지. 새로운 더미를 만들어서 보낸 건가? 본체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누구랑 갔어? 희라 누나야? 아니면 검은백조? 그것도 아니면 공화국 쪽의 길드? 왕국연합?” “잘,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우정클랜, 아니, 우정길드였을 거요.” “뭐?” “우정길드라니까.” “그게… 시바 어디에 붙어 있는 길든데?” “형님도 알고 있는 거 아니었소?” “내가 그런 코딱지만 한 길드를 일일이 어떻게 기억해?” “기억나지 않는 거요?” “뭐가?” “거, 옛날에 형님이 여장하고 나서 균열 박물관 체험하러 갔을 때 형님이랑 같이 다니던 사람들 말이요.” ‘여장한 거 아니야. 시바. 진짜로 변했던 거라고.’ “…….” “다 린델 출신이요. 이철우, 국민지, 다른 사람들은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그때….” “…….” “정말 기억 안 나는 거요?” “아니. 기억나.” 하지만 표정이 구겨진다. ‘시바. 뭐야. 시바. 우정길드?’ 머릿속에서 답이 없었던 놈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성 때문이 아니다. ‘그놈들이 이 작전에 참가할 깜냥은 돼?’ 대륙에서 내로라하던 이들로만 꾸려진 길드 안에 녀석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더미라고는 하지만 남의 소중한 아들내미를 그런 놈들에게 맡겼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제정신인 거야? 시바, 제정신인 거냐고. 완전히 버러지들이었잖아. 답도 없는 놈들이었다고.’ 박덕구가 뭔가 잘못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상황, 급한 마음에 허겁지겁 망원경을 돌려봤지만 이미 기억에서 흐릿해진 놈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엄청난 성장을 이룩한 길드요. 원래는 클랜이었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는지 내가 다 깜짝 놀랄 정도로 올라왔다니까. 이번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량이 엄청나게 성장한 것 같은 느낌이었소. 혜진이 누님도 그래서 별말 없이 작전을 맡긴 거고. 뭐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 나는 모르지만… 아마도….” 일단 라파엘에게 메시지를 보내놓자 혹시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계속해서 이동하며 한참이나 신전을 돌아봤을까. 드디어 익숙한 인영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른 놈들은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놈들 사이에 껴 있는 막 아들은 확실하게 눈에 들어온다. 굳은 얼굴 표정. 작고 여린 몸으로 웬 정체 모를 놈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게 보였다. 마음의 눈으로 놈을 확인하니 그제야 놈이 누군지 알 것 같다. ‘이철우? 맞잖아. 시바.’ 스멀스멀 잃어버린 기억들이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 제발 아니었으면 했지만 나와 같이 균열 박물관을 다녀온 파티가 맞는 모양이다. 괜스레 욕을 내뱉으며 다시금 놈들을 천천히 확인했을 때였다. “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달라진 놈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한 것. ‘뭐야 이 새끼들… 아이템 왜 이렇게 좋아?’ 기본적인 스탯의 성장은 고개를 끄덕여줄 만한 수준이기는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녀석들로서는 이룩할 수 없었던 성장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눈에 들어온 것은 삐까뻔쩍한 놈들의 모습이었다. ‘뭐야. 시바, 왜 이렇게 좋은 건데. 저게 다 얼마짜리야?’ 클랜이 해체될 거라고 생각했던 내 판단과는 다르게 놈들은 오히려 더 똘똘 뭉쳐 있는 것 같다. 이철우와 국민지뿐만이 아니다. 당시에 함께 균열 박물관 나들이를 나갔던 이들 역시 온몸이 고급 아이템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새로 들어온 길드원들의 몸 곳곳에서도 빛이 나고 있다. 그중 한 놈은 아예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금색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모습이다. ‘뭐야… 이 새끼들 이거 로또라도 맞았어?’ 로또라도 맞은 게 아니라면 저런 겉모습이 설명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온몸을 고등급 아이템으로 도배해 놨으니까. 클랜에 여유 자금이 많아지니 다른 유명 모험가들을 영입했을 테고 압도적인 자금력을 바탕으로 클랜을 길드로 성장시킨 것이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길드의 창립 멤버보다 수준이 높아 보이는 길드원들이 눈에 보인다. 심지어 그중에서는 나와 김현성이 비밀리에 지원하고 있었던 1회 차의 영웅들도 포함되어 있다. 돈이 좋아 온 놈들도 있겠지만 1회 차의 영웅들은 돈으로만 움직이지 않는 녀석들이다. 우정길드의 대외적인 평판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천사들과 전투를 하는 모습 역시 상당하다. 금방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을 고쳐주겠다는 듯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놈들의 눈에는 절대로 질 수 없다는 투지가 서려 있다. ‘와, 시바 이게 이렇게 되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착하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보상을 받게 되어 있다고. ‘저 스노우볼이 이렇게 굴러 왔다고?’ 의미 없는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예전의 작은 파티에게 베풀었던 온정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힘들었던 파티에게 내밀었던 따뜻한 손길. 그때의 작은 손길을 기억하는 녀석들은 어느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커다란 중책을 맡고 있었다. 대륙에 없어서는 안 될 당당한 한 사람의 모험가로 자리해 있다. 감동적인 순간에 울컥하기는 했지만 이 자리에 와준 녀석들을 위해서라도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울지 마. 이기영. 여기까지 와준 영웅들에게 실례니까. -철우 오빠! -알고 있다. 민지야. 막스 님 괜찮으십니까? 이 주변은…. -조금 더 들어가야 합니다. 아직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가 없어요. 이 근방 어디에 있다는 건 확실한 것 같지만…. ‘우리 아들 근엄한 척하네.’ 곧바로 퀘스트를 생성해 위치를 보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어느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으니까. 예상대로 근심 어린 표정을 하고 있는 막 아들의 얼굴이 환해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아버지예요. ‘응. 아빠라고 불러야지.’ 서둘러 몸을 움직이던 영웅들이 첫 번째 제어실로 들이닥치는 것은 순식간, 막스가 신전 안에 통신 타워를 설치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 직후에는 곧바로 여신의 손거울에 접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다렸습니다. 부길드마스터. 김미영 팀장입니다. 다른 목소리도 말이다. -기영 씨? < 744화 끝으로 (3) > “…….”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요? 뭐 성공하기는 한 거요? 아니, 정말로 뭐가 있기는 있었던 거요?” “…….” ‘일어났구나. 이 새끼.’ -기영 씨. 들리십니까? ‘그래, 시바 들린다.’ -저, 저 김현성입니다. ‘자기소개 안 해도 알아요.’ -김현성입니다. ‘두 번 말 안 해도 알아요.’ 멍하니 전방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도 잠시.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너무 예상하지 못 한 일이라 다른 반응을 보내기가 힘들다. 괜스레 주먹을 꽉 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었다. 구태여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저절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망원경 안에 비치는 것은 폐허에 혼자 남아 있는 김현성. 겉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거대한 뿔을 머리 위에 달고 있는 상태였고, 온몸이 검은색의 무언가로 뒤덮여 있다. 검은색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여전했다. 차이점은 녀석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는 것 하나였지만…. ‘얼굴 하나로 이렇게 달라지네.’ 괴물 같았던 모습이 간지나게 흑화한 주인공의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내가, 시바, 뿔 잘 어울릴 줄 알았자너.’ 얼굴에 맞게 체형도 본래대로 돌아온 걸 보니 멋을 아시는 분이 저 형태를 디자인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붉어진 모습, 아니, 심지어 지금도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래. 다시 살아나니 얼마나 감격스럽겠어.’ 여신의 손거울을 손에 꽉 쥐고 필사적으로 입을 열고 있는 모양새는 살짝 한심하게 느껴진다. 허둥지둥대는 걸 보니 본인이 뭔가를 잘못 누른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제기랄. 이거… 왜 안 되는 거야? 하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아니야, 되고 있는 거 맞아.’ “네. 들립니다. 현성 씨.” “현성이 형씨 일어난 거요? 진짜로? 정신을 차린 거요? 크으… 거 모든 게 잘 되고 있구만.” 맞아. 근데 얘는 어떻게 정신을 차린 거야? 이렇게 혼자서 본래대로 되돌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김현성의 이성을 깨우는 깜짝 이벤트라도 구상해야 하나 싶을 만큼 둠둠현성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뭐 시간제한이라도 있었던 건가? 아니면… 뭐 각성 비스무리한 거라도 한 거야? 전형적인 주인공 성장 클리셰자너. 흑화한 이후에 제정신 차리고 내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거.’ 모르긴 몰라도 김현성도 한 계단 더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나로서도 환영할 만한 부분이다. 혹시 둠둠현성이 배때기를 찌르는 게 아닐까 걱정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이성을 잃은 놈이 살살 찔러줄 리가 있겠는가. 그나마 이성을 되찾은 상태라도 되야 나를 배려해 줄 것이라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물론 이미 배신당하고 분노하고 정신없는 마당에 배려고 뭐고 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기왕이면 이성이 있는 편이 더 좋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다.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이 채널이 지휘부와 연결된 채널이라는 것. 개인 손거울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연락이 닿지 않아 허겁지겁 이 채널로 들어온 것 같았다. 김현성의 손거울이야 그 정도 권한은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뭐 상관은 없기는 한데….’ 지휘부라고 해도 채널에 들어와 있는 건 김미영 팀장을 포함해 몇몇이 전부였으니까. -기영 씨? 기영 씨 맞습니까? ‘그럼 내가 이기영이 아니면 누가 이기영이여.’ “네.” -무사하셨군요. 정말로… 정말로 다행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현성 씨는….” -죄송… 흐으윽… 죄송합니다. ‘아니, 시바 울지마. 다른 애들 듣자너. 위엄 있는 모습 보여줘야지. 강한 모습. 시바. 정신적으로 성장한 모습. 시바.’ -제가…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번에도 일을 망쳐서… 도망치고 숨어서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어나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안심했습니다.” -힘들게 만들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힘이, 도움이 되지 못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짐을 덜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 저는 계속해서 숨어 있었습니다.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제 앞에 있는 것을 외면해 왔던 것 같습니다. 함께 짐을 들어드린다 말한 주제에 계속해서 문제를 회피하고만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한 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 얘들이 듣고 있잖아. 원래 지휘 채널에서는 사담 금지예요.’ “하… 하하….” 본인이 어떻게 힘든 상황을 이겨냈는지 말하고 싶은 저 심정은 이해하지만 멋쩍은 웃음을 보내는 것 외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는 제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아마도 저를 깨운 것은 기영 씨가 보내준 메시지였을 겁니다. ‘아 시바… 나가고 싶다. 채널 뜨고 싶다.’ 지금 나가면 1분 뒤에 이제 지휘는 누가 해줍니까? 묻는 목소리가 들려오겠지. 눈치가 있으면 5분 후에 들어와도 상관없을 것 같았는데 김미영 팀장을 비롯해 컨트롤 타워에 들어와 있는 이들은 나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조용히 이쪽 대화를 듣고 있는 것 같아 괜스레 신경 쓰인다. 김현성 이 새끼는 정신이라도 나갔는지 계속해서 지 할 말만 이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다른 종류의 빌런이다. -네. 죽지 말라고, 일어나 달라고 말씀해 주신 메시지 말입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네… 네. 당연히… 네… 아무튼 일어나 주셔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아니, 시바 그만 좀 해. 진짜. 1절만 하라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2절 3절까지 할 것 같은 느낌, 감격에 찬 녀석의 말을 잘라내기는 싫었지만 일단은 빠르게 말을 이어야 했다. “밀린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 눈앞에 닥친 일들도 있고 여긴 개인 채널이 아니니까요.” 끊어줄 때는 확실하게 끊어줘야지. -아… 네. 조금 풀이 죽은 목소리였지만 뭐 본인이 잘못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겠지. “이렇게 깨어나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아니요. 제가… 한 일은…. ‘아, 얘 또 말 길어지네.’ “조금 후에 봅시다.” -아… 네. “김미영 팀장님?” -네, 부길드마스터. 김미영 팀장입니다. 길드마스터, 무사히 생환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네… 팀장님 오랜만입니다. -두 분이서 조금 더 오래 대화하셨으면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아니요.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 채널은 사담을 하라고 만들어놓은 채널이 아니니까요.” ‘내가 한 말 들었지?’ -……. ‘이제 실수한 거 깨달았죠? 이제 막 깨어나서 정신 없었죠?’ 망원경으로도 후회하고 있는 것 같은 김현성이 비친다. -지금 가겠습니다. “굳이 오실 필요 없습니다. 현성 씨는 오지 말고 성벽에서 대기하세요. 어차피 근처에 계실테니.” -네? “전투에 참여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벽을 이쪽으로 불러올 거예요.” -아…. -알고 계셨군요. 부길드마스터. “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무엇보다 혜진 씨가 이렇게 과감한 결단을 내릴 거라고는….” -많이 힘들어하셨습니다. “…….” 얘도 알 수 있을 정도면 진짜 힘들어하긴 했나 보네. 그 힘든 상황에 영혼약탈자 도미니온스랑 드잡이질을 하고 있다는 걸 떠올리자 다시금 이지혜의 인성에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필요로 하시는 데이터는 지금 보내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네. “신전의 대략적인 지도부터 보내드리는 게 맞겠네요. 위치가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만 제어실, 혹은 제어실로 추측되는 장소는 따로 표시를 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신전에 계속해서 신성을 공급하는 장소를 차단하면….” -네. “저도 모든 장소를 가 본 것은 아닌 터라 몇몇 장소는 확인이 불확실한 가능성이 큽니다. 추가로 현재 병력들이 있는 위치도 전송해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김미영 팀장님께서 관리해 주세요. 성벽에서의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이 신전 지도를 다 외운 거요?” ‘박덕구 이 새끼는 내가 튜토리얼 던전에서 길 외운 것도 기억 못 하지.’ 튜토리얼 던전 때처럼 화살표로 위치를 표시할 수는 없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면 기억에 남는 게 있는 법이다. 물론 지도를 만들어 놓을 수는 없었지만 머릿속에는 대략적인 정보가 들어가 있다. -확인했습니다. 부길드마스터. “성벽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미 전투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혹시나 작전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보험도 들어 놓은 건가?’ 여러 가지로 준비가 참 많이 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신전 안에 들어가 있는 각 부대에게 신전의 지도를 전송했습니다. ‘응, 나도 보고 있어.’ 갑작스레 움직임이 달라진 이들의 모습이 망원경에 들어온다. 컨트롤 타워에게 계속해서 데이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공화국에 새로운 대장군들도 연합의 강자들도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다. 현장에 나와 있는 야전 지휘관들은 끊임없이 여신의 거울을 두드리는 걸 보니 갑작스럽게 얻은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는 데 정신이 없는 모양. 박덕구 역시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한다. 알프스가 이끌고 있는 이 부대는 굳이 이런 종류의 데이터가 필요 없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 실시간으로 병력이 움직이고 있는 것까지 표시해 주고 있으니까. 망원경을 조금 더 위로 올리자 신전의 곳곳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만에 눈과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집중하고 있다. 아마 바쁜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컨트롤 타워에서도 계속해서 내가 보내는 정보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장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고 이들은 야전 지휘관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데이터를 수치화해야 했으니까. 모든 게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망원경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컨트롤 타워의 모습이 어떨지 상상이 된다. 수백 개가 넘는 여신의 거울 앞에 사람들이 따닥따닥 붙어서 계속해서 허공을 두드리고 있지 않을까. “덕구야. 여신의 거울 몇 개 더 줘봐. 네 거라도 내놔.” “알, 알겠다니까.” 나라도 계속해서 힘을 보태는 것이 맞다. 마력으로 몇몇 개의 손거울을 띄운 이후에는 정신없이 손가락을 두드린다. 임무를 마친 우정길드는 다른 병력과 합류하기 위한 동선을 잡아준다. 미리 보낸 라파엘이 녀석들을 이끌고 이동하는 게 시야에 비친다. 1회 차의 영웅들 역시 마찬가지다. 녀석들은 벌써 두 번째 제어실에 들이닥쳤다. 적 병력에 포위되기는 했지만 주변에 녀석들을 도울 수 있는 병력이 있다. 규모가 작은 놈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은 아니다. 다소 능력치가 떨어지는 이들은 전투를 회피하면서 이동하며 신전에 눈들을 설치하고 있다. 어두웠던 맵이 점점 밝혀지고 여신의 손거울에도 점점 더 많은 데이터가 들어온다. 비둘기들이 당황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이런 종류의 전투에서 컨트롤 타워 유무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다. ‘아. 너네 대가리는 뭐 하고 있냐고? 아직까지 신나게 싸우고 있을걸.’ 아직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따가 확인해 봐야지. 아, 짜투리 시간에 확인해 봐야 할 것도 있지. 카스가노유노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내자 곧바로 손거울이 울렸다. [네. 미래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 마취 물약 좀 먹어둬야겠네. 눈물 콧물 한 번 뺄 준비도 해주고.’ 김현성이 이기영의 배때기를 찌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745화 끝으로 (3) > ‘저는 케루빔 님이 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굳이 변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나는 네 조언 따위는 필요 없다.’ ‘조언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걸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받아들이라고 강요를 드리는 것도 아니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셔도 됩니다. 원래 제 말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 ‘많이들 변하신 것 같더군요.’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 ‘아니요. 쓰로누스 님도, 도미니온스 님도, 세라핌 님도 변하셨습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모두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아마 긴 전쟁 때문일 겁니다. 외부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고… 가까운 곳에서 영향을 받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인간들의 생과 사를 직접 들여다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그럴 만도 합니다. 그들은 아름답지요.’ ‘…….’ ‘그들은 눈이 부십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 그리고 그들의 유한한 삶과 그들의 욕구는 모두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아마 다른 분들도 같은 걸 느끼셨을 겁니다. 보통 자신들과 다른 걸 동경하게 마련이니까요. 케루빔 님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닌 척해도 속으로는 그들의 불완전함을 동경하고 계실 거라고 말입니다.’ ‘들을 가치도 없는 소리로군.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라면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네 개소리에 일일이 대응해 줄 생각은 없다.’ ‘다들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과 닮고 싶다고. 최소한 케루빔 님은 아니더라도 아마 다른 분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 겁니다.’ ‘아니, 우리들은….’ ‘제 말이 틀릴까요?’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때는 그 인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당시에 잠깐 말을 멈춘 것은 아마 정곡을 찔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세라핌은 어느 순간부터 인간들의 행동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 인간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고 도미니온스는 그들의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서적을 읽거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이미 도미니온스의 하루 일과였다. 쓰로누스도 다르지 않았다. 녀석은 인간들의 무구와 인간들의 검, 그들의 물건이나 그들의 전투 방식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본래 가장 신체가 약했던 쓰로누스가 자신과 검을 부딪치게 됐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변화였다. 분명히 변화였다.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우리였지만 그렇게 급격한 변화를 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었다. 변화는 갑작스러웠고 또 급진적이기도 했으며 또 빛나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변하고 싶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이미 변했을지도 모른다. “유대.” 유대감. 인간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고 있는 이상한 끈. 그 끈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 때부터 이미 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가면을 쓴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지고 있었던 감정, 이를테면 전장에서 등을 맞댄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죽어갈 때 서로의 손을 부여잡거나 동료를 지키기 위해 대신 삶의 끝을 택하거나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하는 이를 위해 사지로 들어가는 그들의 무모함은 모두 유대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느껴졌다. 쓰로누스 역시 그에게 유대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끈에 대해서 깨달은 것은 우리 중 쓰로누스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그걸 가지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봤지만 쉽게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우리들은 함께 태어나고 함께 존재하게 됐을 뿐이다. 서로를 위해 생의 끝을 걸지도 않고 감정도 교류하지 않는다. 의견에 대한 찬반과 그것에 대한 대립이 있고 집단을 형성하기는 하지만 인간들과는 다르다고 느껴진다. 정확히 정의를 내릴 수는 없었지만 유대감이라는 감정으로 인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라핌, 쓰로누스, 도미니온스. 그리고 나. “…….” 세라핌, 쓰로누스, 도미니온스. 그리고 나. “우리는… 우리는 연결되어 있었을까. 연결된 적이 있었을까.” ‘글쎄요. 저도 뭐라고 답을 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케루빔 님께서는 변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입 다물어라.” ‘중심을 지켜야 하는 이도 필요합니다. 상위의 존재라면 응당 그래야지요. 아시다시피 인간들은 불완전합니다. 그들을 관리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비인간적이어야 합니다. 어째서 대륙이 이렇게 망가졌는지에 대해 떠올려 보세요. 케루빔 님.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대륙이 망가진 것은 인격신이 존재하고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현재 차원들에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바로 그겁니다.’ “…….” ‘인격신이 이 대륙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라 이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동정하고, 아끼고 심지어는 사랑하기까지 합니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 아닙니까? 관찰자로서 자리해야 할 신들이 인격을 가지고 있다니요. 하핫. 인격신들이 항상 필멸자들의 삶에 관여해왔어요.’ “…….”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한 이벤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항상 대륙은 그렇게 흘러왔어요. 자연재해, 전쟁, 악마의 침입이나 그런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 태어나기도 했으니까요. 그런 대륙의 위기를 막은 것은 언제나 인격신 이었습니다.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억제했지만 그들은 항상 간접적으로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용사에게 성검을 내린 것도, 자연재해를 잠재운 것도, 타고난 운명을 타고난 인간을 막기 위해 지혜를 내려준 것도 언제나 인격신이었습니다. 네. 그들 역시 불완전합니다. 무엇이 대륙에 이로울지 알고 있으면서도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려 대의를 그르칩니다.’ “…….” ‘더 이상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케루빔 님마저 변화를 추구한다고 하신다면 대륙은 이전과 달라질 게 없을 겁니다.’ “나는 네… 네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 추악한 악마야.” 시야가 점점 흐릿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면을 쓴 환상이 옆에서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게 보여 쓴웃음이 지어진다. 나는 다를 거라고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탓이다. 과거에 그가 말했던 충고 아닌 충고들은 이미 뇌리에 박혀 버렸을지도 모른다. 악마의 간교한 혓바닥은 마지막에 와서도 자신을 계속해서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케루빔 님은 달라졌습니다. 결국에는 달라지고 말았군요.’ “네… 네 말에 따르는 것 같아서였다. 그게 기분 나빠서였어.” ‘글쎄요. 이유야 크게 상관없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케루빔 님이 달라졌다는 것 하나입니다.’ 가면을 쓴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며 싱긋 웃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환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비틀거리며 일어나 낫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환상은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개소리.” ‘제가 이전에 말씀드린 것을 끝까지 기억하고 계셨다면 이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끈에 대한 이상한 집착이 케루빔 님의 발목을 잡은 거예요. 힘차게 낫을 휘둘러야 할 대상은 제가 아니라 세라핌 님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지 않으셨습니까.’ “분명히… 말했을 터다. 네 말대로 움직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라고.” ‘제가 만약 케루빔 님의 죽음을 원했다면 케루빔 님의 그 청개구리 같은 성향마저 고려해 말씀드렸을지도 모릅니다. 하핫.’ “그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다르다. 이 더러운 악마야. 나는… 나는 네 간교한 혓바닥에 넘어간 것이 아니야. 세라핌의 목을 베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내 의지였다. 그저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네가 아무리 날 농락하고 싶어 한다 한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째서였습니까.’ “나도 알 수 없다.” ‘저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까도 중얼거리시지 않았습니까. ‘세라핌, 도미니온스, 쓰로누스, 그리고 나’라고. 모르긴 몰라도 유대감인지 뭔지가 케루빔 님의 안에 자리 잡았나 봅니다. 함께 태어나 같은 숙명을 함께 하기로 한… 형제. 네, 형제자매들에 대한 미묘한 유대감이 케루빔 님의 발목을 잡은 겁니다.’ “…….”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예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 ‘유대감이라는 말에 사전적인 의미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공통된 느낌, 끈과 띠라는 뜻으로, 둘 이상을 서로 연결하거나 결합하게 하는 것. 아쉽게도 세라핌 님께서는 케루빔 님과 유대감을 느끼지 않으셨나 봅니다. 하핫.’ “…….” ‘저는요. 이 유대라는 게 쌍방향이 됐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이라는 건 소통하기 때문에 비로소 의미가 있는 거예요. 아무리 케루빔 님께서 유대, 유대 한다고 해도 다른 이들이 그렇게 느껴주지 않으면 허무한 일이 되어버린다, 이 말입니다. 이를 테면 벽에게 유대감을 느낀다고 하는 거나 다름이 없겠네요. 결국 개죽음 엔딩이네요. 개죽음 엔딩. 그러게 제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 ‘변화하지 말고 완전해져야 한다고. 결국 당신도 멍청한 놈일 뿐이네요. 표정이 조금 안 좋으신데. 후회하시는 겁니까.’ “아니… 나는…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속으로 한 번 되물었지만 답은 여전했다. 슬프지도 않았고 가슴이 아프지도 않았다. 조금은 무감각해진 느낌이었다. 딱 하나 후회되는 점이 있다면 저 악마의 혓바닥을 뽑지 못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표현 그대로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세라핌에게 최후를 맞이한 것도, 세라핌을 막지 않은 것도 후회되는 것은 없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이게 어떤 감정인지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고 계시는 겁니까.’ 그것은 아마 궁금증 때문일 것이다. 저 악마의 말에 저항해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는 사실 자체는 만족스러웠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유대감.” 그게 어떤 것인지 깨닫지 못했으니까. 그게 뭔지 알지 못했으니까. ‘아마 너 같은 놈들은 평생 깨닫지 못할 거야.’ 그럴지도. ‘참 웃겨. 마지막에 후회한다는 게 꿈의 실현이 아니라 개인적인 호기심이라니.’ 그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은 과업은 실현될 것이다. 우리는 도구로써 태어났으니까. ‘널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려줄 사람이 없다는 게 가슴 아프네.’ 우리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야.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다.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아. 끝이 왔다고 해도 담담히 받아들일 뿐이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겠지. 하지만 아쉽구나. 조금 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도 괜찮았을 텐데.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네가 한 말은 내게 주박이 되었구나. 네가 내가 변화하기를 바랐든 바라지 않았든 간에 말이다. 나는 너를 저주한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네 최후가 추할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거야. 여전히 네가 원하는 건 얻지 못하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하. 네가…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겠구나.” 잠들 뻔한 신체를 깨운 것은 거대한 폭발 소리였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게 된다. 이미 몸에는 힘이 다 빠져 있었지만 거짓말처럼 일어서게 된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가장 반가운 목소리이기도 했다. “뭐야? 퍼랭이. 너 뒈진 거 아니지?” “…….”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몸이 성치는 않네.” “미안하게 됐군.” “뭐. 지금이 남의 사정 봐줄 만큼 한가한 상황도 아니고. 나름대로 전시 상태이기는 하니까. 멋있게 회복해서 돌아오라고 말해줄 수가 없네.” “…….”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밸런스는 맞춰줄게. 이 정도면 되나? 아… 생각보다 아프네.” “여전히 어리석군.” “남이사. 그럼 준비됐어?” “그래.” “다른 말은 필요 없지?” “그래.” 시야에 비친 것은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낸 붉은 짐승이었다. “마지막이 그리 나쁘지는 않겠군.” 어쩌면 저 짐승도 나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 746화 끝으로 (5) > “제대로 준비해 놓으셨네요.” -부길드마스터가 돌아오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우리 김미영 팀장님은 어떻게 이렇게 기분 좋은 말만 해주실까.’ 사실 그 말이 맞기는 했다. 애초에 내가 없다면 성립할 수 없는 작전이었으니까. “하얀이는 조금 어떻습니까?” -이미 캐스팅을 외우는 도중이십니다. “타이밍이 딱 맞겠군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 이런 페이스라면 시간 안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탄탄하고 개념 찬 지휘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일이 딱딱 들어맞는 것 같은 기분은 느끼지 못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김미영 팀장의 확언에 여신의 손거울을 두드리며 상황을 살핀 것은 당연지사. 북부 지역을 커다랗게 감싼 신성이 옅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혹시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녀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일부는 완전히 걷혀 있는 것을 보면 실상 지금 상태로 주문을 외워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컨트롤 타워에서도 나와 비슷한 판단을 하고 있겠지만, 아마…. ‘확실히 하고 싶은 거겠지.’ 나도 불확실한 쪽에는 걸고 싶지 않다. “임무가 끝난 병력이 빠져나갈 퇴로를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지역으로 향할 추가병력은 지휘부 쪽에서 편성해 주세요.” -네. 부길드마스터. ‘짜투리들은 대부분 해결됐고요. 이제 덩어리들만 남은 건가요?’ 도미니온스와 조혜진이 드라마 찍고 있는 곳은 아마 누나가 알아서 해결해 줄 거고…. 시간이 촉박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비둘기들의 컨트롤 타워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는 게 느껴졌으니까. 몇몇 병력이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케루빔과 세라핌이 서로 드잡이질을 하고 있는 것처럼 장로 비둘기들 역시 서로를 적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누가 이곳에 인간들을 불러 왔는지에 대해 탁상공론이나 하고 있겠지, 뭐. 굳이 망원경으로 살펴볼 필요도 없다. -작전 성공했습니다. ‘좋아요.’ -우정 길드가 임무를 마치고 병력과 합류했습니다. 라파엘 님께서도 함께 움직이고 계십니다. ‘좋은 울림이죠?’ -가로쉬앤캐쉬 길드와 미주사랑 길드 역시 포인트 도달에 성공한 것 같습니다. 현재 적들과 전투 중이며 공화국의 병력들이 합류할 예정입니다. ‘네, 보고 있습니다.’ -67구역 임무 완수했습니다. “네. 확인했습니다.” -검은백조 길드는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고 있습니다. 따로 지시를. “아니요. 검은백조 길드는 최대한 빠르게 귀환합니다.” -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계속해서 신성이 옅어지고 있다. “다른 특이사항이 있다면 계속해서 보고해 주세요.” 네. 조금 의외의 보고가 날아들어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부길드마스터, 용병여왕 님께서 현재 케루빔과 전투를 시작하실 거라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따로 지원 병력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전언을 받았습니다만…. “네? 언제….” -방금입니다. ‘뭐야.’ 케루빔과 세라핌의 영혼을 건 한판 승부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블루가 이겼어?’ 적어도 몇 시간을 서로 싸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조금은 일이 꼬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시선을 돌린 것은 당연지사. 김미영 팀장이 보고한 그대로 케루빔과 시선을 마주치고 있는 차희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현재의 케루빔의 상태. 정확히 어떤 상황일지는 알 수 없지만 몸이 성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이미 죽어가고 있다. 곧바로 주변을 살펴봤지만 세라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곧바로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깨닫게 된다. ‘세라핌이 이겼구나. 희라 누나는 막타 치러 온 거고.’ 작은 문제가 있다면 차희라가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는 것. “아….” -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 누나 왜 또 멋있는 거 하고 그래. 진짜. 그냥 얌전히 막타 치면 되는데 뭘 그렇게 또….’ “…….” ‘그러다 지면 어떻게 하려고.’ 물론 희라 누나가 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까 말한 것처럼 이미 케루빔은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차희라가 그걸 눈치채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회복할 수 있는 몸이 아니다. 아니, 가능성은 있었지만 스스로 그 가능성을 갉아먹고 있다. 촛불이 꺼질 때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상태가 아닐까. 솔직히 희라 누나가 좀 멋있기는 했지만 굳이 이 타이밍에 라이벌과의 정정당당한 혈투를 준비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거, 시바, 진짜 대륙 생각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니까.’ 자기 재미있겠다고 스스로 핸디캡을 달고 싸우는 게 꼭 자기 스스로 하드모드를 고르는 게이머 같다. 대륙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내 입장에서 저런 선택은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핫! 재미있네. 퍼랭이. -……. 하지만 그녀가 싸우는 모습은 그 자체로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케루빔은 둘째 치고 차희라마저 같은 인간이 맞는지에 대한 의심이 생기게 했다. 눈은 점점 붉어지고 있고 본인 스스로가 이성을 놓으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슬슬 시동이 걸렸는지 점점 말이 사라지고 있는 중, 폭음과 괴성 외에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기술과 기술의 전투는 이미 지나가고 마음껏 치고받는 모습, 그 와중에 케루빔의 입꼬리도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내가 모르는 유대감을 서로에게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모르긴 몰라도 나와 진청이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자신이 인정한 상대에게 보내는 찬사와 경의,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에 대한 존경, 이런 싸움을 즐길 수 있다는 즐거움과 결국에는 마지막이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씁쓸한 마음까지. 종류는 조금 다를지 모르겠지만 둘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지지지직! 작은 문제가 있었다면…. ‘연구시설이 아깝기는 하다. 야. 근데.’ 주변이 완전히 개 박살 나고 있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1차전 때와 마찬가지다. 2차전 때 역시 완전히 지형이 바뀌고 있다. 이미 연구실은 그 형태를 잃어버렸다. 세라핌과 케루빔이 얼마나 얌전하게 싸웠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즐거운가 봐? -무슨 소리냐. 붉은 짐승아. -너 지금 웃고 있잖아. 퍼랭아. 어때 재미있어? -이해할 수가 없군. 아니, 녀석은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마 녀석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부길드마스터. “들키지 않게 근처에 지원 병력 넣어 두세요. 어차피 신경 쓸 겨를도 없을 것 같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미소 짓게 되는 얼굴이 눈에 띈다. 이미 그 긴 머리는 풀어 헤쳐져 있다. 단정하게 머리를 묶었던 이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현재의 녀석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결벽증도 뭣도 아닌 모양, 본인의 얼굴이나 몸에 붙어 있는 것들이 거슬리지도 않아 보인다. 거대한 낫과 도끼가 부딪친다. 무기가 튕겨 나가자 곧바로 머리로 차희라를 들이받는 놈의 모습이 보인다. -하하하핫! 차희라 역시 비슷하다. 놈의 긴 머리를 잡은 이후에는 곧바로 팔꿈치로 얼굴을 가격한다. 콰아아아앙! 폭발 소리가 들려왔지만 둘은 물러서지 않는다. 박진감이라는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다. 인간과 천사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짐승과 짐승이 싸우는 것 같다.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신화 속에 나오는 짐승들이 싸우는 것만 같다. 케루빔은 차희라를 붉은 짐승이라 불렀지만 내가 보기엔 오히려 놈이 파란 짐승에 가깝다. 마치 본인을 억누르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토해내는 것처럼 녀석은 마지막 생명을 불태우고 있었다. 냉정한 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도 않다. 놈 역시 희라 누나와 같지 않은가. 활활 타오르는 불꽃. 절대로 꺼질 것 같지 않은 불꽃. 어떻게 저런 불을 억누르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녀석은 본인들이 타고난 성격이 없다고 표현했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불길도 사그라든다. 놈이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놈은 한계를 넘어섰으니까. ‘희라 누나 지는 건 아니지?’ 서로 치고받고 있지만 뒤로 물러서는 것은 녀석 쪽이다. 일어나지 못하는 쪽은 녀석이다. 종국에 쓰러져 비틀거리며 한심하게 땅바닥에 누워 있게 된 쪽도, 녀석이었다. 붉은 짐승은 피가 섞인 가래를 퉤 하고 내뱉으며 누워 있는 파란 짐승에게 입을 열었다. 조롱에 찬 대사를 내뱉어야 하는 타이밍이었지만 붉은 짐승의 얼굴은 진지해 보였다. -아쉽네. 진청이랑 나랑은 다르네. -그래… 아쉽구나. 붉은 짐승아. -그래서. 속은 조금 시원해졌고?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기분이 어때? -나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본래 사라지는 것에, 삶을 끝내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우리였지만… 어째서 인간들이 그토록 끝에 집착하는지 알 것 같구나.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내 안에 있던 걸 털어놓은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고… 또 유대감… 그래. 유대감이라는 게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유대감?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네가 나와 같은 걸 가지고 있다고 느껴지더군.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너 같은 인간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도 우습다만 너와 부딪치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아니, 죽어가는 이가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뿐이니 마음에 크게 담아두지 않아도 좋다. -비슷하기야 비슷해. 정확히 네가 뭘 말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너와 내가 닮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겠네. 굳이 풀어서 해석하자면 유대감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네. 우리는 동류야. 퍼랭아. -동류…. -그래 동류. 나는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거든. 지금 네 꼴이 그걸 증명하고 있는 거 아니겠어? 숨기려고 하지만 숨길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야. 타고난 본성이라는 건. 후천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데. 뭐 결국 너희들도 가지고 있었다는 거지. -우리는 그렇게 설계되어 태어난 것이 아니다만…. -그딴 건 관심 없어. 너와 내가 동류고 그렇기 때문에 네가 유대감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느꼈다는 거지. 나도 마찬가지야.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나도 너와 비슷한 걸 느꼈던 것 같네. 조금 더 해보고 싶었는데 아쉽기는 아쉬워. -그래. 아쉽… 구나. -어때? 뒈질 때까지 같이 있어 줄까? 그 정도면 가능한데. -하… 하하. 그럴 필요는 없다. 그냥 이렇게 눈을 감고 싶구나.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다만… 네게… 그래. 동류에게 부탁이 있다. -뭐? -부탁을…. -넉살도 좋네. 보통 동류라고 해서 부탁하고 들어주거나 그렇지 않아. -염치… 없다만… 내 형제들을… 잘 부탁…. -……. -……. -그건… 내 능력 밖이야. 퍼랭아. -……. -……. -그럼… 어쩔 수 없겠군. 녀석은 조용히 천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파란 짐승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째서 저 말을 중얼거리는지는 나는 하등 이해할 수 없었지만 놈은 끝까지 입을 열고 있었다. -세라핌, 도미니온스, 쓰로누스, 그리고 나… 하… 하하…. -……. -세라핌… 도미니온스, 쓰로누스, 그리고 나…. -……. -세라핌, 도미니온스…쓰로… 누스… 그… 그리고 나…. 붉은 짐승은 등을 돌린다. -세라…. 도미… 누스… 나…. -동류 맞네. 새끼. -쓰로누…스… 그…리…고…. 그리고, 그 아름다웠던, 투쟁과 격전의 장소에서. 넝마가 된 채로 굴러다니는 내 가방이 시야에 비쳤다. ‘아, 마취 물약 놓고 온 것 같은데….’ < 747화 끝으로 (5) > ‘진짜로 놓고 온 것 같은데… 큰일 났네.’ 자신의 형제들을 부르며 생을 마감한 케루빔의 최후를 눈에 담아보려고 했지만 녀석의 근처에 덩그러니 놓인 가방이 시야에 들어온 직후에는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형태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긴 가방은 내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만 같다. 안쪽을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마 완전히 개 박살이 났을 것이다. 신성으로 둘러싸인 연구실마저 폐허가 된 마당에 내 가방이라고 무사하겠는가. 뒤를 돌아 걸어가고 있었던 차희라 역시 가방이 눈에 띄었는지 슬쩍 확인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저 누나도 가방 하나 구하고 싶어 했지.’ 나 대신 상태를 확인해 주는 것 같아 기쁘기는 하다. 아이템 판정이 유지되고 있다면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아… 이거 걸레짝 됐네. 하지만 이내 가망이 없다는 걸 확인했는지 휙 하고 던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구태여 희라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내 물어볼 필요도 없다. 김현성의 컬렉션 중 하나는 이미 가방으로써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녀의 말대로 저건 이미 걸레짝이나 마찬가지다. ‘저기에 시바… 연금키트도 들어 있었는데.’ 다시 만들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상황에 기가 찬다. ‘전설 등급 연금키트였다고… 용 숨결 물약이랑 빛 폭탄 물약도 다 저기 있자너.’ 아니, 솔직히 그건 아무래도 좋다. 애초에 전투 물약을 쓸 상황 자체가 오는 걸 반기지 않았으니까. 가장 중요한 건 마취 물약이었다. ‘아… 시바. 이거 어떻게 하지.’ 그냥 없이 들어갈까? 없이 들어가도 괜찮겠지? 그 정도 고통은 지금까지 잘 참아 왔잖아. 솔직히 이토 소우타 때도 마취 물약 없이 들어갔던 거잖아… 몸 함부로 굴리는 것 정도야 쉬웠다구…. 하지만 그때의 이기영과 지금의 이기영은 다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겠다고 독기에 가득 찼던 초창기 이기영의 심정이 어땠는지 솔직히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배 좀 부르고 인생 좀 낭낭해지면 바뀌는 게 사람이라고 했던가. 고통에서 벗어난 지 오래된 빛기영의 육체로 배때기를 찔리는 상황은 결코 반갑지 않았다. ‘아, 내가 방에 하나 넣어놓지 않았나?’ 순간적으로 머리가 번뜩였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요?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요?” “문제는 무슨… 그나저나 잠깐 어디 좀 들렀다 가야겠는데.” “가까운 거리요? 이제 곧 하얀이 누님이 소환할 것 같은데…. 아니, 그건 형님이 더 잘 알겠구나.” “어차피 여기서 별로 안 멀어. 빠르게 다녀오자.” “크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무슨 비밀병기라도 숨겨놓은 모양이요.” ‘비밀병기는 비밀병기지.’ 감정 잡아주게 하는 비밀병기. 눈물 뚝뚝 흘리고 상황 연출해야 되는데 아프면 집중 못 하잖아. 아마 지금 상태로 배에 구멍이 난다면 비명만 지르다 시간이 다 가지 않을까. 마지막 인사를 할 여유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와, 시바. 이렇게 생각하니까 케루빔이 대단하기는 대단해.’ 나 같으면 데굴데굴 굴렀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정확히 시간이 얼마나 남은 거요?” “한 시간 정도.” “충분하겠구만.” ‘있겠지? 놔뒀겠지?’ 비둘기들이 내 방을 한바탕 뒤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마취 물약은 무사할 것이다. 안쪽에 숨겨놨으니까. 뭐, 저들이 어떻게 찾을 수 있겠어. 괜스레 박덕구의 팔뚝을 툭툭 치자 황소처럼 방향을 바꾸는 녀석. 방까지 당도하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디요?” “조금만 더 가면 나와.”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간 직후에는 곧바로 안을 확인하기 시작, 예상대로 비둘기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흔적들이 눈에 띄었다. 이미 방이라고 볼 수도 없었지만 사실 이 방이야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 없다. 곧바로 바닥을 두드린 이후에 잠금장치를 해체하자 바닥이 갈라지며 작은 창고가 시야에 비쳐왔다. 함께 들어온 박덕구는 신기했는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었지만 이내 내 모습을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에 숨겨놨었던 거요?” “응. 비상용으로 몇 개 챙겨놨지.” 용 숨결 물약 세 개. 빛 폭탄 물약 하나. 그 외에도 내가 생존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을 깡그리 모아 저장해 놓은 창고였다. 창고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협소하기는 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기야 한다. ‘역시, 시바, 준비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예비 가방도 하나 넣어놨었구나.’ 작은 문제가 있었다면 마취 물약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 더 안쪽에 있을까 싶어 뒤적거려 봤지만 분명히 넣어놓은 적이 있던 것 같았던 녹색 물약이 눈에 띄지 않았다. ‘뭐야. 시바. 이거 왜 없어.’ 고급 치유 물약도 있고 마나 회복 물약도 있다. 파란 길드에서 나오는 고급 연금 물약 세트는 물론이거니와 정식으로 판매되지 않은 여러 가지 물약들과 생존키트, 촉매들이 눈에 띈다. ‘이게 어디로 갔어?’ 혹시 그것만 넣어두지 않은 것은 아닌가 떠올려 보기도 했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와… 시…이발….” “뭐요? 갑자기.”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진짜….” “뭐 잘못되기라도 한 거요?” ‘이지혜 이… 시바… 너… 진짜.’ 만약 누군가 이걸 가져갔다면 범인이 누구인지는 뻔하지 않은가. “와… 진짜… 이 누나… 진짜 어떻게 이래? 시바 진짜 이건 아니지. 상도덕이 있지. 이건 아니잖아….”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상처투성이의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도미니온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조혜진 역시 몸이 성하지 않다. 내가 보지 않은 사이에 엄청난 격전이 있었던 모양. 아니, 지금도 서로를 향해 창을 들이밀고 있다. -도, 도망가세요. 혜진 씨.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진도 많이 뺐네, 진짜. 약탈당한 영혼이 튀어나와서 도망치라고 하는 것까지 진행됐어? 그것도 스토리야? 둠기영 아류 아니야? 개연성은 충족시킨 거 맞으시죠? 아니, 약탈된 영혼이 갑자기 도미니온스 몸으로 들어가는 건 무슨 설정이야?’ -제가 이 몸을 억누르고 있는 동안 도망가세요. 어서요.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시바, 진짜. 가증스럽다. 진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가증스러울까. 딱 저 표현이 가장 잘어울린다. 대충 봐도 견적이 나온다. 저 누나도 아픈 거 잘 못 참는 거로 유명한 사람이다. 몸 곳곳에 구멍이 뚫린 채로 움직이는 것만 봐도 부자연스럽다. 도미니온스, 로노베와 고통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이지혜는 저 고통을 참지 못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몸에 떨림도 없고 솔직히 고통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다. 누가 봐도 마취 물약을 꿀꺽한 사람의 모습이라 할 만했다. 정말로 고통스럽다는 듯이 몸을 떠는 연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실상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저걸 본다면 가증스럽다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혜진 씨는 저를 위해 희생할 필요가 없어요. 네. 이자의 말대로 저는… 저는…. -세상에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믿어요. ‘혜진아. 속지 마라. 진짜… 니가 저 여우의 본 모습을 봐야 되는 데… 가증스럽다. 너무 가증스러워 치가 떨린다… 와….’ -지혜 씨가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뭘 말해줬는데.’ -간혹…. ‘뭘 말해줬어?’ -자기 자신이 느끼지 못하더라도 타인이 느낄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말입니다. ‘그 와중에 저 가증스러운 눈빛 봐 진짜.’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지혜 씨가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길드마스터, 그러니까 기영이도 마찬가지였어요. 일단 나를 언급해 주는 건 마음에 든다. 게다가 기영이란다. -부길드마스터는 자기 자신을 양보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표현합니다만 그렇지 않아요. 그 누구보다도 가슴 따뜻하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에요.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알고 진정한 양보가 뭔지 깨닫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 이거 들을 만하다.’ -지혜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비하하고 폄하하지만 지혜 씨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필요한 사람입니다.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마음이 예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그건 아니야. 진짜 마음 하나도 안 예뻐.’ 마음이 예뻤다면 내 마취 물약을 가지고 갔을 리가 없다. -그렇지… 않아요. -아니요. 제 말이 맞습니다. 확신할 수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지혜 씨가 그렇게 스스로를 폄하할 필요는 없어요. 꼭 스스로 평가한 대로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좋다고 말씀하신 것 역시 지혜 씨였어요. 벗어나실 수 있어요. 아니, 제가 벗어나게 해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창을 들고 달려드는 조혜진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이제 슬슬 클라이맥스로 넘어가는 모양인지 도미니온스도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눈물을 흩뿌리며 이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이지혜와 이번에는 구해내고 말겠다는 집념으로 가득 차 있는 조혜진의 모습을 보니 당황스러워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저 누나는 진짜 사람 감정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혜진은 흔들리고 있다. 부러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아슬아슬하게 견뎌내고 있다. 마취 물약을 섭취한 이지혜에게 흔들림은 없다. 그저 계속해서 도망치라고 말하거나 이제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하나도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저게 연기라고 생각하니 당황스러운 마음밖에 들지 않는다. ‘아니, 시바 그래서 내 마취 물약 어떻게 해. 진짜.’ 남은 한 병마저 이지혜가 꿀꺽했다면 이제는 정말로 다른 선택지가 없다. -하아… 하아…. -혜진… 씨… 저… 더 이상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쪽에서는 신파물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도대체 저게 무슨 상황인 건지 이해할 수도 없다. 대충 그런 분위기라는 건 알겠는데 전개를 따라가기가 힘들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조혜진과 이지혜가 자리 잡은 곳이 마지막 남은 제어실이었다는 것.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른 이지혜가 조혜진을 저곳으로 안내한 거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아… 시바, 이거 시작되겠구나.’ 미처 다른 대책을 생각하기도 전에 조혜진이 창을 뻗는다. 커다란 굉음이 들려오며 김미영 팀장이 보낸 메시지가 들어와 꽂혔다. -작전 성공했습니다. ‘아니. 잠깐만 아직 성공하면 안 될 것 같아.’ 황급히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정하얀은 캐스팅을 내뱉고 있는 중. -……!! 기어코 주문을 내뱉은 정하얀이 지팡이를 위로 크게 들어 올리자 비현실적인 광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북부 전체를 뒤덮은 마법진, 천천히 소환되기 시작한 거대한 성벽. 그리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영웅들과 대륙 지도자들. -가자! 빛과 함께 하는 영웅들이여! 대륙을 지키자! 교국의 혁명지도자 오스칼은 검을 들고 가장 먼저 성벽에서 뛰어내린다. ‘아냐. 아직 아니야.’ -베니고어 님을 위하여!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연세에 우렁차게 소리 지르는 바젤 교황과 신성기사단은 필사의 각오로 전투에 뛰어들고 있었다. ‘잠깐만….’ -은혜를 갚을 때가 왔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중립국의 프리스티나. ‘너네 왜 그래. 단체로 왜 그래. 시바. 은혜를 갚을 거면 지금 오지 말았어야지.’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다. 공화국의 지도자마저 대륙뽕에 취했는지 함성을 내지른다. -진정한 화합을 위해! ‘아직 화합하지 마. 시바.’ 이 종족 연합의 엘리오스. -우리들은 오랫동안 많은 것을 잊고 살아왔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싸우자. ‘아니, 그냥 잊어.’ 차라리 안 나타났으면 했는데 심지어 도마뱀들까지 등판했단다. 그리고. -……. 결의에 찬 표정으로 검을 든 김현성까지. 녀석이 자신의 검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눈에 보인다. ‘시바… 아직 아니야. 이 새끼들아. 아직 아니라구… 현성아. 형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아직….’ 김현성이 든 검이 평소보다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이기자. ‘아직 아니야….’ 신화로 전해져올 것만 같은 비현실적인 전쟁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시이발….” < 748화 끝으로 (6) > 거대한 용들이 하늘을 뒤덮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대륙에 드래곤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수십 마리의 천사들이 드래곤에게 달라붙는 것이 보인다. 공중에서 뒤엉키며 격전을 펼치고 있는 모습 자체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의로운 광경이다. 당연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래픽으로 버무리는 장면들보다 더욱더 화려하다. 점점 숫자가 많아지는 천사들을 드래곤들이 견제하기 힘들어지자 엘프들은 계속해서 활시위를 당겨 드래곤들을 보조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드래곤들에게 다가가던 천사 중의 일부가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여유가 생긴 용들은 거대한 이빨과 발톱으로 놈들의 몸을 짓이긴다. 밀집된 에너지를 담은 브레스가 쏘아지자 비둘기들은 곧바로 공중에서 산개하는 중, 물론 그 여파에 휩싸인 비둘기들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녹아버렸다. 전황이 유리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비둘기들의 공세를 견디다 못해 추락하는 용들 역시 시야에 비친다.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디아루기아는 아직까지 여유가 있는 모양, 그녀 역시 다른 드래곤들처럼 계속해서 브레스를 뿜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드워프를 비롯한 이종족들 역시 칼과 도끼를 든 채로 성벽에서 뛰어내린다. 총력을 기울인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광경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말 그대로 대륙의 사활을 건 전투나 다름이 없었다. -저 악마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줍시다. 하나가 된 대륙이 강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줘야 합니다! -공격! 공격!! -손을 멈추지 마라! 계속해서 시위를 당겨라! -절대로 물러서지 마라! 마지막 전투다. 북부 전체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보니 망원경으로도 시야를 잡기가 힘들다. 워낙 거대한 규모의 전투가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교국의 병사들과 신성기사단들은 신성력을 뿌리며 적과 맞서고 있었고 공화국의 병사들은 마법을 흩뿌린다. 거대한 폭음이 연쇄적으로 들려오고 기상천외한 빛깔이 여기저기서 터지는 모습은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대륙의 영웅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적과 마주하고 있는 장면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형님 우리도 빨리 나가야 될 것 같다니까.” ‘시바 나도 알아.’ 왠지 모르게 모든 상황이 내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조금 시간을 끌려고 해봤지만 이미 박기리 삼남매는 이곳을 탈출할 준비를 마친 상황, 내가 뭐라 말을 내뱉기도 전에 이미 달리기 시작하고 있다. ‘아…… 이거 시바 그냥 들어가야 될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을 찾고 싶다면 찾고 싶었지만 현재는 그 방법을 찾기가 힘든 상황이지 않은가. ‘시간이 없어.’ 그 말 그대로다. ‘준비하고 있어야 돼.’ 타이밍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서 본 그 장면이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드래곤이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점점 이미 퍼즐이 하나 맞춰졌다. 희라 누나가 창에 꽂힌 상태로 싸우고 있는 모습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마지막 전쟁이 터졌으니 희라 누나도 바로 달려가지 않을까. 조금 싸우다 보면 상처가 생길 테고 그 장면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라파엘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우정 길드와 함께 바깥의 전쟁터에 합류할 것이다. 제노지르아와 정하얀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마법을 구현시킨 정하얀이 마력을 회복하면 전장에 난입하는 건 시간문제다. -정하얀 님…… 아직은……. -아니요. 할, 할, 할 수 있어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정하얀 님. 조금 더 회복하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정하얀은 곧바로 전장으로 합류하고 싶은 모양,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마법 할배들의 만류에 입술만 깨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조금 더 쉬어야지…… 상식적으로 평범한 인간이 이런 마법을 구현했으면 백 퍼센트 죽었을걸. 애초에 구현하지도 못했겠지만…… 구현하다가 터졌겠네.’ 본인의 무리하고 있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저 휴식도 오래가진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쟤 마력 회복 빠르니까.’ 제노지르아도 아직 최종보스처럼 쫄병들 풀어놓고 근엄한 척 하고 있는 분위기고…… 정하얀이 마력을 회복하기까지 남은 시간이 세 시간? 아니, 다섯 시간 정도는 되려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아…… 시바 내 마취물약. 시바…… 아…….’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찾아온 것 같아 괜스레 입안이 쓰다.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합리화하게 된다. 이를 테면……. 아니, 근데 이렇게 짧은 시간에 얘를 어떻게 설득시켜. 이거 혹시 미래 바뀌고 있는 거 아니야? 이 정도로. 문제는 타이밍이 맞아야 된다는 것 하나가 아니지 않은가. 시간 안에 김현성에게 당도해도 녀석이 나를 찔러야 시나리오가 완성된다. ‘아 너무 갑작스러워서 멘트 정리도 안 해놨는데. 너무 이상하잖아. 갑자기 막 어? 내가 그 가면쓰레기요. 하면 이상하잖아. 걔가 믿겠어? 분명히 안 믿을 걸 결국에 막 도리도리하고 그러다가 못 찌를 것 같다고. 이거 시간 부족한 거 아니야? 시바? 누가 옆에서 좀 도와줘야 되는 건 아니냐고…… 빌드업 할 시간이 부족한데…….’ 물론 도와줄 놈이 있기야 하다. 1회 차의 일을 잘 기억하고 있는 비둘기가 있기는 있으니까. 하지만 놈이 김현성과 만나면……. ‘현성이 또 발릴 수도 있잖아.’ 우리 회귀자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세라핌은 존재만으로 김현성의 카운터나 다름이 없다. 뭐라고 입을 털기도 전에 다시 한번 벌집이 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거다. 물론 지금의 김현성은 조금 달라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안 돼.’ 만약에 김현성이 세라핌과 대치하는 상황이 만들어 졌다고 해도…… 그 비둘기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가 되어 구구절절 이야기를 풀어 줄지도 의문이고…… 의외로 말이 많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있기도 하지만……. 구태여 그런 도박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어와 꽂힌다. 다른 장면을 찾는 게 더 합리적일 수도 있다. 김현성은 최대한 세라핌에게 떨어뜨리고…… 배때지 엔딩 개연성이야 다른 방향으로 조금씩 찾으면 되는 거니까. 만약 다른 사람으로 찾아야 한다면……. ‘누가 있을까.’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정하얀?’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한소라 관련한 일로 기본 죄책감이 탑재되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정하얀은 뻔뻔하다. 만약 백금색의 검들이 튀어나온다고 해도 개수가 얼마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마력회복하는 시간이 조금 길겠네.’ 그녀가 등판할 때까지 시간을 맞출 수 있느냐도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다. 이래저래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 역시나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는 걸 떠올리게 된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자 아까의 전장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현재의 전황이 어떻게 뒤집어질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게릴라전으로 내부에만 상처를 입혔던 방금과는 다르게 인간들이 대놓고 올인하고 들어오는 상황이니 놈들도 함부로 괄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세라핌이 지시하지 않더라도, 지금쯤이면 컨트롤 타워가 만들어져도 이상한 상황은 아니다. 내 생각이 맞다는 듯 점점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비둘기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리안…… 님을 위하여. -지원요청! 지원 요청해! 신전과 성벽의 끝에서부터 조금 씩 전황이 뒤집힐 조짐이 보인다. ‘이거 시바 진짜 대륙 지키기 하려면 할 수밖에 없겠는데.’ 방법은 둘째 치더라도…… 일단은 이기영이 큰 맘 먹고 희생 하기는 해야 되는 상황처럼 비쳐졌다. 괜스레 시선을 돌리자 김현성이 전장에 합류해 천사들을 썰어버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전황 자체를 바꿔버리는 모습은 저절로 입을 벌리게 된다. ‘와…… 우리 현성이 확실히 세긴 세네.’ 자기 자신을 조금은 믿기로 결심했는지 확실히 검이 살아 있다. 루시퍼의 힘을 마구잡이로 뿌리던 이전과는 다르게 지금 휘두르고 있는 것은 김현성의 검이다. 혹시나 또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했지만 잠깐 동안 여유가 생긴 사이에 입을 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기영 씨 어디 계십니까? “지금 덕구랑 빠져나가는 도중입니다. 곧 컨트롤 타워에 도착할 것 같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굳이 이쪽으로 오실 필요도 없고요. 일단 그쪽 전장을…….”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네. 거의 다 왔습니다. 용병여왕님과도 만날 것 같고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전투에 임해주세요. 전황이 그리 좋지 만은 않습니다. 지금 계시는 곳에서 크게 벗어나지…….” -이곳은 괜찮을 겁니다. ‘아닌데. 거기 도움 많이 필요한데.’ 솔직히 말하면 김현성이 없어도 되는 전장처럼 보이기는 했다. 이미 김현성이 그쪽에 있는 중간 네임드 비둘기들을 처리했으니까. 김현성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는 게 더 효율적인지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 일반 비둘기들과 드잡이질을 하는 것보다 조금 무게감 있는 놈들을 잡고 다니는 게 더 유리하다. 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녀석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여는 모습이 보인다. -세라핌의 위치를……. ‘시바…….’ “글쎄요. 저도 아직 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확인이 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또 알려줬다가 현성 당하면 제자리걸음이자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하는 게 아니라…….” -……. “걱정하는 게 아니라 확률의 문제예요. 현성 씨는 세라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상성이 너무 안 좋아요. 지금 제가 그쪽으로 갈 부대를 편성했으니 다른 쪽에 집중해 주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성검 용사파티 준비됐을 것 같은데. 라파엘도 컨디션 좋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분명히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아니. 너 못 이겨.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겨. 내가 죄를 사해 준다고 그래? 그거 그냥 하는 말이야. 네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는 문제야. 물론 그게 너를 다시 살렸을 수도 있지만 그것도 잠깐이야.’ 김현성 같은 놈들의 새겨진 상처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심판의 검이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불가능해요.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일단 컨트롤 타워에 들어간 이후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후의 지시사항은 지휘부에서 지침이 내려올 테니 그때까지 전선을 유지하세요.” -분명 이길 수 있습니다. ‘아…… 네에. 네에. 그러시겠죠. 너 주인공 병 심하게 걸린 거야. 원래 주인공들이 그렇자너. 한 번 진 적한테 다시 재도전하면 이길 수 있을 줄 알자너. 근데 현실은 달라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내가 지금 배에 구멍 뚫리기가 무서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로 전투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녀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기영 씨가 도와주신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 내가 응원해 주면 이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질 리가 없습니다. 김현성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단박에 이해가 된다. 천천히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면서 확률을 한 번 계산해 보자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가능성은 있네.’ 한번 시도는 해볼 만하다. ‘중간에 안 될 것 같으면 성검용사 파티 투입시키면 되니까.’ 사실 그렇게 할 확률은 현저히 적다. 내가 판단해도 질 것 같지 않았으니까. 잠깐 동안 음성 메시지를 끊은 이후에는 곧바로 박덕구에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덕구야.” “대화는 다 끝난 거요?” “방패로 나 좀 받치고 있어. 거기에 좀 앉자.” “뭐…… 이 상태로 달리라는 거요?” “지휘부에 들어가기 전까지야. 어차피 지금 근처에 적들도 없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하라면 해. 그리고 네 부대원들이 가지고 있는 여신의 손거울 전부 가져오라고 하고 정연 씨한테 여신의 손거울 좀 고정해 달라고…….” “네. 부길드 마스터.” “아 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네.” “여신의 손거울 좀 마력으로 고정시켜 주시면 됩니다. 이동하면서 확인할 테니 최대한 위치에 변함없이 부탁드립니다.” “네.” 천천히 손거울들이 떠오르는 게 시야에 비쳐왔다. 아무런 화면도 떠 있지 않은 손거울에 천천히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망원경에 비친 김현성은 천천히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준비가 됐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입을 열었다. “거리가 좀 됩니다.” -예. “포인트 집어드리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요.” 광활한 전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 749화 끝으로 (8) > 눈에 보이는 것은 광활한 전장이었다. 북부 전체다. 북부 전체라고 할 수 있는 맵들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어디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모든 것들이 화면 안에 비치는 한 명의 영웅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어째서 명예추기경님께서 여신의 손거울을 꺼내 전장을 바라보고 계신지, 도대체 무엇을 위해 파란 길드마스터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지, 파란 길드원들은 어째서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물론 들어본 적은 있다. 박 씨 아저씨, 아니, 이제는 박덕구 대장님이 술만 취하면 하는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형님이랑 형씨랑 힘을 합치면 무적이라니까. 거,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다니까. 솔직히 나도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는데. 파바박 파바박 하고 우르르 쾅쾅 하고 콰득 콰직거리면 금방 해결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니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평소처럼 과장해서 말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귀담아듣지도 않았지만 저 광경을 보고 있자니 아주 예전에 베니고어 넷에서 읽었던 게시물이 스쳐 지나간다. 유동닉이 게시한 글이었기 때문에 어그로성 게시물이라고 생각했고, 그마저도 몇 분 만에 내려갔기 때문에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게시글이었다. ‘뭐라고 했었지?’ 공화국과의 전쟁 때 파란 길드마스터에 관한 이야기. 정확히 이야기하면 함께 그 전쟁을 겪었던 이들의 이야기였다. ‘명예추기경님이 파란 길드마스터 한 사람을 위해 전장을 사용한다고 했었나?’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리플이 달렸던 기억이 있다. 물론 대부분이 검증되지 않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허공에 치유 주문과 체력 회복 주문을 외웠더니 파란 길드마스터가 짠 나타났다든가. 엉뚱한 곳에 화살을 날렸더니 적 지휘관의 심장에 화살이 꽂혀 있다든가. 마치 기적을 간증한 것만 같은 게시글이었다. 물론 규모가 있는 길드들은 모두 컨트롤 타워를 가지고 있고 그들이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소규모 전투나 대규모 전투 가리지 않고 그들은 여러 전투에 공헌하고 있었고, 실제로 유명한 길드들은 유능한 지휘부를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너무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대륙에서 모험가로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그 게시물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게 정말로 가능하다고? 자신 역시 대륙 우상화 작업의 일환이 아니라며 코웃음을 치지 않았던가. “신기합니까?” “아! 안 씨 아저… 아니, 부대장님. 죄, 죄송합니다.” “질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하. 네. 뭐, 신기한 광경이기는 하죠. 제게도 익숙한 장면은 아니니까요. 부길드마스터의 저런 모습을 직접 보는 건 저도 처음입니다. 아마 덕구 씨도 그렇고 예리도 처음 보는 광경일 겁니다.” ‘알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두 분이서 무슨 일을 만들어낼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네?” “두고 보시면 압니다.” 심지어 믿음직스럽다는 눈빛이다. 자신만 비정상인이 된 것 같지 않은가. ‘저게 도대체 뭔데.’ 우스꽝스럽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도 아니다. 명예추기경님은 커다란 방패에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있고 박 씨 아저씨는 그 방패를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있다. 부대원 전체의 여신의 손거울이 서로 각각 다른 화면을 송출하고 있었고 마도학자 황정연 님께서 저 손거울을 공중에 띄우고 있다. 혹시 모를 적의 습격을 대비해 보호 마법과 방패로 둘러싸인 채로 이동하는 모습은 마치 중요한 화물이라도 옮기는 것 같다. 자신 역시 방패를 들고 있지 않았다면 저 광경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작은 상황실, 화면이 빠르게 흘러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게 뭔데?’ 자그마한 여신의 손거울 8개를 붙여서 만든 커다란 화면에 비치는 것은…. ‘??’ 단순히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이었다. 차를 운전할 때 보이는 풍경, 혹은 기차를 타고 갈 때 보이는 풍경과도 같았다. 조금 달랐던 점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주변이 뒤바뀌었다는 것, 너무나도 빠르게 휙휙 지나가는 화면 때문인지 저게 뭔지도 알아보기도 쉽지 않다. 저게 뭔지 눈치챌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롯이 그 옆에 보이는 화면 때문이었다. 미친 듯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한 사람이 시야에 비친다. ‘아마도.’ 파란 길드마스터가 바라보고 있는 시야. ‘정말로?’ 노을빛의 검사라고 불리는 김현성이 바라보고 있는 전장. “아….” 놀라움에 입을 벌렸던 것도 잠시, 시시각각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다. “5중대. 힐러들 준비하세요. 현성 씨는 그대로 직진하시면 됩니다. 네임드 개체 위치와 움직이는 예상 동선 전부 보내드렸습니다.” 노을빛의 검사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인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진다. 잠깐 눈을 깜빡인 사이에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되어 있다. 마치 텔레포트 마법이라도 사용하고 있는 것만 같다. 옆에 보이는 3인칭 화면에서 파란 길드마스터의 몸이 빛나는 것이 눈에 보인다. -확인. 파란 길드마스터가 바라보고 있는 시야에 비친 것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5중대의 사제. -말… 말도…. ‘말도 안 돼….’ 사제의 황당한 말이 여신의 거울에 들리기도 전에 노을빛의 검사는 몸을 움직인다. 게시글에서 봤던 상황이 뭔지 드디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게시물이 뭘 말하고 있었던 건지 드디어 알 수 있을 것 같다.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 채로 검을 휘두른다.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악마들이 쏘아낸 빛이 파란 길드마스터를 노리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위험한 거 아니야?’ 하지만 노을 빛의 검사는 동요하지 않는다. 어째서? 이미 몇 초 전에 무시해도 된다는 지령을 받았으니까. 명예추기경이 예상하고, 노을빛의 검사가 믿었던 것처럼 허공에 커다란 벽이 생성되기 시작. 악마가 쏘아낸 빛은 보호 마법에 막히고 노을빛의 검사는 다시 한번 전장을 빠져나간다. 이번에도 역시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마법사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당연히 저런 표정을 짓게 되겠지. 저 마법사가 받은 지령은 시간에 맞춰 허공에 보호 마법을 깔아달라는 것뿐이었으니까.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는 모습에 망설임은 없다. “24번 전진기지에 진입합니다.” -특이 사항은…. “전진해요.” -네, 알겠습니다. 확인. 사지로 몰아넣는 것만 같다. ‘이건 위험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술을 글로 배운 자신이 보기에도 24번 전진기지의 전황은 많이 기울어 보였으니까. 아니, 기운 정도가 아니라 천사들로 꽉 차 있는 것만 같다. 손거울로 보이는 화면의 시야가 흐려진 것은 바로 그때.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손거울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노을빛의 검사가 보고 있는 시점 역시 마찬가지다. 가까스로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있지만 당장 3미터 앞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저런 현상이 나타났는지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교국 8좌. 안개 소환사. 천관위.’ 명예추기경님이 지시를 보낸 것이 틀림없으리라. 24번 전진기지 전체를 안개로 뒤덮은 그의 마법에 입을 벌렸던 것도 잠시. 더욱더 황당한 상황에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게 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저 정도 규모의 마법에 캐스팅이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 보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적어도 10분.’ 아무리 빨라도 8분이 걸리는 캐스팅을 미리 외워두고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그 말인즉슨…. ‘알고 있었던 거야.’ 명예추기경은 알고 있었다. 8분 전에 노을빛의 검사가 24번 전진기지에 진입할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30번 전진기지에서 24번 전진기지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정확히 8분이고 그 시간에 오차는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미래를…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고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정말로 미래를 내다본다고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이다. ‘저게 가능하다고?’ 만약에 미래를 보고 있지 않으면 저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시시각각 변하는 전장의 모든 변수를 고려해 가장 가능성이 높은 판단을 내리고 지령을 내려? 저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을? 인간의 뇌로 그걸 계산하고 판단하는 게 가능해? 아니, 애초에 저렇게 움직이는 걸 눈으로 담을 수나 있는 거야? 정말로 미래를 보고 있는 거 아니야? 봐봐, 지금도…. “허공을…바라보고 있잖아….” “원래 부길드마스터는 종종 허공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무엇을 보고계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뭘 바라보고 있겠어요. 안 씨 아저씨. 미래를 보고 있겠죠. 저거 봐요.’ “원거리 저격수. 준비. 지금 찍어 보낸 좌표에 화살.” -네. 파란 부길드마스터. 오랜만이네요. “지금 당장.” -네. ‘저거 보라고요.’ 같은 교국 8좌에 원거리 저격수 위란, 안개소환사 천관위로 함께 다완의 명성을 드 높인 모험가는 허공을 향해 화살을 뿌린다. 한 번에 백여 개가 넘는 빛줄기가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쉬지 않고 안개 속으로 활시위를 당기는 원거리 저격수는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는다. 결과는 곧바로 노을빛의 검사가 바라보고 있는 1인칭 화면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의 바로 코앞에 있는 악마 하나의 머리가 화살에 내리꽂힌다. 옆에 있는 녀석도 마찬가지, 그 옆에 있는 악마 역시 마찬가지다. 안개에 가려 시야가 흐렸지만 화살로 인해 만들어진 빛줄기는 계속해서 비둘기들을 두드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저 화살은 노을빛의 검사를 노렸을 것이다. 조금만 더 포인트에 당도하는 속도가 빨랐다면 노을빛의 머리에 화살이 박혔을 것이다. 움직이는 것에 망설임은 없다. 아군과 적군이 만들어낸 화살 빗속에서도 노을빛의 검사는 끊임없이 안개를 뚫고 전진한다. “…….” -확인. “…….” -확인. “…….” -확인. 무섭지도 않은 건가. 정말로 하나도 두렵지 않은 걸까. 마침내 안개를 뚫고 온 노을 빛의 검사의 입에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살짝 옆을 바라보니 코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미친놈처럼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명예추기경님의 얼굴이 보인다. 오히려 즐거워 보이지 않은가. 이 광활한 전장에서 미친 짓을 하는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꾸만 웃음을 참고 있는 것만 같은 명예추기경의 입가가 신경 쓰인다. 커다랗게 웃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만약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박 씨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웃어버릴 것만 같다. “21번 전진기지. 진입.” -확인. ‘전장의 5분의 1을 내질러서 달려왔어.’ 어째서 북부 전체의 맵을 띄워놨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김양! 준비해야지! 이제 신전 나갈 거라니까!” “아… 네! 박 씨 아저씨.” “방패 들어! 방패!” “네… 넵!” “방패 들어! 전진! 전진! 오른쪽에 적 마법, 오른쪽에 적 유탄! 마법사들 캐스팅 외우라니까!!”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그냥 전진해. 돼지 새끼!” ‘방금 명예 추기경님 목소리였나?’ -무슨 일 있었습니까? 기영 씨? 잠깐 통신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임무 수행하세요.” -확인했습니다. “마법 날아온단 말이요! 마법!” “그냥 전진.” 허겁지겁 마법이 떨어지는 쪽과 명예추기경님이 계신 곳을 번갈아 봤지만 여전히 중얼거리기 여념이 없는 모습.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는 없어 보인다. “형님이 그냥 전진하라고 합디다! 그냥 전진! 그냥 전진!” ‘뭐야. 뭐야? 진짜로? 저거 직격탄인데?’ “그냥 전진해! 전진! 망설이지 말고 전진합니다!” ‘안 씨 아저씨 정말로 그냥 전진해도 되는 거 맞아요?’ “전진해. 빨리. 뒤처지지 말고. 빨리. 전. 진.” ‘김예리 님 정말로요?’ “전진!” 명령이 들려오면 따를 뿐이다. 눈을 질끈 감고 달려봤지만 폭음은 들려오지 않는다. 천천히 눈을 뜨자 커다란 뿔을 달고 거대한 날개를 펼친 채 이쪽에 떨어진 공격을 막아선 노을빛의 검사의 뒷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기영 씨? 괜찮으십니….” “다음.” “네. 확인했습니다. 그럼.” 이윽고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지는 뒷모습이 눈에 보였다. 김현성과 이기영은 잠깐 눈을 마주쳤지만 이내 명예추기경님은 손거울을 바라보고 노을빛의 검사는 전장을 바라본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인간이 아니야.’ 신에게 선택받은 무언가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 750화 끝으로 (9) > ‘아, 씨…. 머리 아파 뒤질 것 같네, 진짜.’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난이도가 높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와. 씨….’ 정말로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허겁지겁 김현성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상황, 옆에서 박덕구가 주접떠는 소리마저 거슬리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방금 그거 형씨였소?” ‘시바 보면 몰라? 김현성이었잖아.’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진짜 끝을 알 수 없다니까! 그러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나! 형씨랑 형님이랑 뭉치면 적수가 없다니까.” ‘아니. 알겠으니까 조금 조용히 좀 해.’ “크으….” “아, 좀! 입 좀!” “아… 알겠….”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돼지 새끼에게 시간을 빼앗긴 사이에도 전장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시바, 그래도 제대로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엘룬의 망원경을 얻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동안 지력 능력치의 상승도 있긴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 역시 자만이었던 모양이다. 라파엘을 몰아보며 김현성을 그리워한 게 우스워질 지경이지 않은가.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은 김현성이 아니라 나였다. 열심히 스펙 업 한 이 자동차는 이기영이라는 파일럿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물론 변명거리 정도야 있다. 커버해야 될 공간이 늘었으니까. 커다란 검은색 날개를 달고 있는 김현성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더 이상 제한적이지 않다. 김현성이 전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이 흙바닥뿐만이 아니라는 거다. 드넓은 하늘 전체가 김현성의 전장이나 다름없다. 말인즉슨 녀석의 앞뒤는 물론이거니와 위아래까지 커버해 줘야 한다는 것. 위에서 공격이 떨어질 수도 있고 아래에서부터 화살을 이 올라올 수도 있으니 시야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시바. 시바. 시바. 그래, 시바. 변명이지. 변명이야.’ 녀석의 100%를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이기영의 무능이다. 장담할 수 있다. 김현성은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더 효율적으로 적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내가 놈의 전부를 끌어내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기영 씨 괜찮으십니…?’ 괜찮으십니까? 괜찮으십니까아? 말을 걸 여유가 있었네. 한가롭게 남 걱정할 여유가 있었던 거지? 내가 어떤 상황인지 살필 여유가 있었던 거지? 놈이 멈칫거리는 시간은 불과 몇 초에 불과했지만 그 몇 초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 몇 초가 얼마나 중요한지 녀석이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뻔하지 않은가. 본인의 개인적인 능력으로 딜레이된 몇 초를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김현성이 더욱더 속도를 올리는 중, 뭔가 시무룩한 얼굴부터가 본인이 아직 여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심지어 불편한 표정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진짜 짜증 나네. 진짜로. 만족이 안 돼? 이걸로도 안 된다고?’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만 같다. ‘이것밖에 안 되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조금 더 페이스를 빠르게 가져가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다. 회귀자의 100%를 끌어올리지 못하면 이 전술을 사용하는 의미가 없다.ㅋ 우습지 않은가. 병력의 잠재력을 끌어올리지는 못할망정, 병력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는 컨트롤 타워라니, 이렇게 무능한 새끼가 또 어디 있을까. 가능성은 낮지만 내가 김현성이였다면 이기영 손절 계획을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 이제는 쓸모 없구나 기영 씨도…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물론 김현성이 이딴 말을 지껄이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괜스레 짜증이 치솟기 시작한다. ‘이래도 부족해? 이래도?’ 곧바로 여신의 거울을 두드린다. 이게 내 한계라는 걸 알고 있지만 눈을 멈추지 않는다. 어느새 다음 전진기지까지 당도한 김현성에게 계속해서 좌표를 전송하고 퀘스트를 내린다. 전장을 눈에 담은 것 역시 잊지 않는다. 어느새 내 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여신의 손거울, 그리고 조금 더 보기 편한 거울이 눈에 보인다. 살짝 눈을 돌리니 빠른 속도로 상황실을 셋팅하는 이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제야 내가 박덕구의 방패 위에서 내려와 의자에 앉았다는 걸 인지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래. 시바. 아까는 환경이 너무 별로였어? 그렇지? 시야도 너무 좁고 임시로 만들어진 상황실이었잖아. 기다려. 시바. 기다려. 이번엔 진짜 제대로 한다.’ 다시 한번 화면을 눈에 담는다. 마치 곤충의 눈같이 가득 차 있는 다각도의 시야가 한꺼번에 머릿속에 들어온다. 순식간에 들어온 어마어마한 정보량을 처리하기도 당연히 쉽지 않다. 머릿속에 있는 프로그램을 돌리는 와중에도 김현성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결국에는 모호한 퀘스트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김현성을 좌표로 보낸 이후에 주변 상황을 녀석에게 맞추는 것이다. 줄타기처럼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이렇게라도 해야지. -기영 씨? ‘보내고 있어요. 시바, 기다려요.’ 21번 전진기지에 누가 있었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게 누구였지? 박연주? 박연주 있나? 한쪽 손으로는 거울을 두드리며 망원경으로는 검은백조의 길드마스터를 찾는다. 아니나 다를까 비둘기들과 함께 격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박덕구 몰카를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검은색의 무구들을 계속해서 쏘아 보내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교국 8좌로서도 부족함이 없다. “박연주 님. 그쪽으로 현성이 갑니다. 합류하는 그 즉시 제가 찍어드린 포인트로 함께 움직이세요.” -어? 의문을 표시할 시간 따위는 없을 것이다. 곧바로 옆을 지나치는 김현성이 시야에 비쳤을 테니까. 린델의 삼대 길드에 길드마스터를 꽁으로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곧바로 호응하기 시작하는 박연주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서로 연계하며 검을 휘두르며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은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유기적이다. 흩어졌다 붙었다 하기도 하며 서로 등을 맞댄 채로 검을 휘두르기도 한다. 김현성이 앞으로 전진 하는 사이 박연주는 김현성을 따라 붙어 검은색의 검들을 쏘아 보낸다.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이 열리기 시작한다. ‘아, 시바. 체력 회복 깜빡했네.’ 지금 곧바로 회복 주문과 버프를 갈아주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친 상황, 어쩔 수 없기는 했다. 두 사람을 위해 마법사들의 증원을 요청했어야 했으니까. 김현성과 박연주가 잠깐 움직임을 멈춘 사이 거대한 마법이 떨어진다. 두 사람은 폭발의 범위에 휘말리지 않는다. 미리 캐스팅해 뒀던 바람 마법이 두 사람을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확인. -파란 길드마스터.. -오랜만입니다. 검은백조 길드… 확인… 마스터. -네. 이렇게 일어나 계신 모습을 보니…. -확인. 잠깐이지만 두 사람은 추진력을 얻는다. 공중에서 휘리릭 돌면서 박연주는 온갖 화려한 기교를 부리며 사방 팔방에 검을 쏘아 보내는 중, 김현성은 박연주가 열어준 공간으로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달리기 시작한다. -현성 씨 위에! 하늘에서 빛을 떨어뜨리고 있는 적 비둘기를 보고 박연주가 입을 열었지만 김현성은 동요하지 않는다. 근처 마법 병단이 보호 마법 주문을 완성했으니까. 심지어는….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쏘아진 브레스가 공중에 떠 있는 적을 한 차례 쓸어버린다. 박연주의 임무는 여기에서 끝. ‘쩔었지? 현성아? 쩔었지?’ -꼭 무사하세요. 파란 길드마스터. -확인. 곧바로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향하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사방팔방에서 날아 들어오는 화살들의 위치를 계산하고 좌표를 쏘아 보내자 공중에서 방향을 선회하는 김현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금 쩔었지? 진짜? 장난 아니었지?’ 제발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나름대로 공을 들인 한 수였으니까.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드래곤 브레스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 와중에도 김현성은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고 있다. 마치 언제 브레스가 쏟아질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김현성은 공중에서 다른 비둘기들보다 한 발자국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브레스틑 모두 김현성을 빗겨나간다. 아니, 날개 끝부분이 살짝 그을린 것 같기는 한데… 아주 약간의 오차가 있었나 보다. 뭐, 저 정도면 그래도 정상참작 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 괜찮겠지. 김현성도 눈치챈 것 같지가 않다. 계속해서 빠르게 움직이는 김현성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으니까. 그래. 시바 녀석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아직 부족해? 아직?’ 도대체 어디까지 해줘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을 지경, 전술 김현성이고 나발이고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어와 내리꽂힌다. ‘이건 어때?’ -확인. ‘이렇게 한번 움직여 볼래?’ -확인. 여전히 변화가 없다. 내 실수가 있을지언정 김현성의 실수는 일어나지 않는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 괜스레 나를 짜증 나게 만든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많이 봐야 돼.’ 더 많이 봐야 한다. ‘더 빠르게 생각해야 돼.’ 더 빠르게 생각해야 한다. 내 손가락질에 천천히 늘어나기 시작한 화면은 어느새 상황실 전체를 가득 메운다. 크고 작은 화면들은 계속해서 서로 다른 장면을 비춰주고 있다. ‘내가 조금 뒤 떨어졌나.’ 김현성은 퀘스트 이상의 임무를 수행해 주고 있다. 몇 초 정도 딜레이 된 명령 체계 동안 할 게 없는 녀석이 다른 곳까지 커버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도? 이래도?’ 눈에 핏줄이 터져 나올 것 같다. 머리가 핑하고 어지럽지만 높은 지력 능력치는 정신을 놓게 만들지 않는다. 계속해서 코피가 뚝 뚝 떨어졌지만 닦을 여유는 없다. 대충 팔뚝으로 닦자 얼굴이 피로 문질러진 것만 같다. ‘아직도? 아직이야? 이제 괜찮지? 그렇지?’ -조금 더 올리겠습니다. ‘이 개새끼.’ 더 이상은 능력 밖이다. ‘이 이상은 불가능해.’ 이미 머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의 한계를 넘어섰다. 하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퓨즈가 꺼지기 일보 직전이다. ‘더 이상 시발 뭘 어떻게 하라고 진짜.’ 한 구역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머리와 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뭣 하지만 이미 평범함의 범주를 넘어 선 위업이다. 나조차도 이런 게 가능할지에 대해 고민해 봤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래. 이 방식으로는 이게 한계다. ‘조금 더 느껴야 돼.’ 내가 직접 전장으로 들어갈 수 있게. 김현성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 놈의 눈이 전장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나도 김현성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함께 바라봐야 한다. ‘피부로 느껴야 된다고.’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종류의 정보가 필요하다. 이를 테면 감각. 절정에 이른 검사가 전장에서 느끼는 감각, 피부로 느껴지는 위협, 코 끝을 스치는 악취, 경험으로 쌓인 무의식적인 움직임, 바닥의 감촉, 공기의 흐름, 피부에 맞닿는 적들의 혈액. 김현성이 느끼고 있는 모든 걸 나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 더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하고 있다. ‘가능해?’ 불가능하면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아니, 아마 최대한 비슷하게 할 수 있을 거야. 일단은 김현성이 보고 있는 시야부터. 여신의 거울로 보이는 게 아니라 놈이 진짜로 보고 있는 것처럼. 망원경이 있으니까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망원경을 반으로 쪼갤 수 있나? 내가 잠깐 놈에게 망원경을 빌려주면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게 가능한가? 남아 있는 신성으로 그런 게 가능할까. 절박하기까지 한 느낌.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여전히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뒤떨어지는 기분이다. 계속해서 몇 발자국씩 멀어지는 듯한 기분은 괜스레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불가능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할 수 있어.’ 시스템을 이용하면 가능해. 아니, 이건 처음부터 내가 가지고 있어야 했던 거였어.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할 능력이었다고. 그러니까. 해야 돼. 내놔. 그러니까 내놓으라고. 본래부터 내 거였어.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짜증에 바닥을 내려쳤던 바로 그때였다. [신화 등급의 새로운 특성을 개화합니다.] “내가, 시발, 이럴 줄 알았다고. 시바.” [신화 등급 -회귀자 사용설명서] < 751화 끝으로 (10) > 그것은 환희에 가까웠다. 이 상황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이건 분명히 환희와 비슷한 감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전에도 한 번 느껴본 적이 있는 고양감이 전신에 퍼져나간다. 드넓게 펼쳐져 있는 전장이 오롯이 자신을 위해 펼쳐져 있다. 모든 퍼즐이 딱딱 들어맞을 때 인간이 느끼는 원초적인 쾌감이 등 뒤를 쓸고 지나간다. 사실 1회 차에도 2회 차에도 나는 전투에 특별한 의미를 담아본 적이 없었다. 아무 생각이 없다는 쪽이 더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말 그대로의 의미다. 어떻게 전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와 땀과 혈액으로 젖은 몸,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감각과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전투가 끝나고 나면 녹초가 되기 일쑤였고 전장으로 나서기 전에는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였다. 물론 간혹 다른 부류가 있기야 하다. 전쟁을, 전투를 진심으로 즐기는 이들이 있기야 하다. 이를 테면 용병여왕, 그녀는 1회 차에서도 2회 차에서도 전투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으니 그런 부류에 포함해도 되지 않을까. 피에 취해 전쟁터를 떠돌아다니는 그런 부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붉은용병의 길드 마스터인 차희라는 정말로 순수하게 싸움을 즐기는 종류의 인간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이런 종류의 쾌감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녀조차 그와 함께 하는 전장을 겪어본 적이 없으니까. 아마 그녀가 느낀 것은 자신과 다른 종류의 감정일 것이다.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하늘 위로 치솟는 순간 쏟아지는 브레스가 느껴졌지만 굳이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다. 저게 자신을 스쳐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귓가를 곧바로 스쳐 지나간 용의 숨결이 눈앞에 있는 천사들을 휩쓸어 버리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이 열리는 것이 보였지만 그쪽으로 몸을 비틀지는 않았다. 내가 향해야 할 곳은 저곳이 아니었으니까. 더욱더 커다란 공간이 눈에 비친 것은 바로 그때, 곧바로 날개를 치솟자 몸이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만 같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검을 휘두를 수 있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적들이 스스로 급소를 내어주는 것만 같다. 사방에서 뻗어 나오는 빛과 마법에서 오롯이 자신만 벗어나 있다. ‘이게….’ 새롭다. 내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잘 짜여진 전장에서 느끼는 이 기분은 매번 새롭다. ‘즐거워.’ 지독히도 증오했던 전쟁터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니,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전투 그 자체에서 비롯된 즐거움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부분이 있었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몸은 정상인 건가?’ 현재 그의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닐까?’ 언제나 자신의 건강은 뒷전인 사람이었으니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수척해진 상태로 피를 흘리던 모습이 떠올리자 다시 한번 입술을 꽉 깨물게 된다. ‘부담되는 거야.’ 생각해 보면 당연한 문제다. 컴퓨터조차 과부하가 걸릴 정도의 데이터양을 한 인간이 받아들이고 있다. 미래 예지에 가까울 정도로 전장을 컨트롤 한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 인간이 이런 걸 실현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위업이다. 물론 그가 특별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의 몸은 망가져 있었다. 어쩌면 한계에 다다랐을 수도 있다. ‘그만두게 해야 해.’ 최대한 빨리 그를 내버려 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몸은 계속해서 이 감각을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멈추게 해야….’ 하지만 그게 의미가 있을까. ‘끝낼 수 있을까?’ 그 없이 이 전장에 마침표 찍을 수 있을까. “불가능해. 절대로… 불가능해.” 이 감각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어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기영 씨 없이는 이 전장을 마무리 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디로 향해야 하는 거지? 어디부터 깎아내리면 되지? 어디서 싸우면 되는 거야? 북부 전체에 펼쳐진 전장은 드넓다. 경험이 많이 쌓였다고 한들, 천재들이 바라보는 전장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영 씨가 보고 있는 전장은 자신은 들여다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는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 오차는 없고 실수 따위도 하지 않는다. 아주 작은 것 하나도 용납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김현성이라는 자원을 잘 써먹을 수 있는지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 만약 그가 없다면…. 그래. 당장 눈앞에 있는 천사들과의 전투를 승리로 가져갈 수는 있겠지.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어.’ 자신은 그를 필요로 한다. ‘더… 더.’ 빠르게 날개를 펼치며 검을 휘두른다. ‘더… 더!’ 땅으로 내려온 직후에도 다리를 멈추지 않는다. “확인.” 왼쪽에서 날아 들어온 창은 팔을 들어 쳐낸다. ‘더… 더 할 수 있어. 더.’ “확인.” 시야가 빠르게 뒤바뀐다.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 덕분에 전장을 제대로 살피기가 힘들다. ‘아직 더 할 수 있어. 더.’ 몸의 속도를 눈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중요하지 않다. 내 눈을 대신해 줄 사람이 있으니까. “확인.” 잠깐 숨을 고른 사이에 곧바로 회복 마법이 몸에 떨어진다. 체력 회복 주문도 함께 외워 준 것 같았지만 체력이 떨어졌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거친 숨을 쉬고 있는 상황이었고 근육은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힘든 것 같지 않다. 이미 뇌가 아드레날린으로 꽉 찬 것 같은 느낌, 일종의 존 상태에 들어간 것처럼 기분 좋은 감각이 계속해서 몸에 힘을 불어 넣어주고 있었다. 얼굴에 쏟아지는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진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도 기분이 좋다. ‘더. 더 할 수 있어.’ 더 빨라질 수 있을 것 같다. 더 날카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지치지 않을 것 같고 온종일이라도 싸울 수 있을 것 같다. 자꾸만 목이 마른 것처럼 몸이 계속해서 이 전장을 원하고 있었다. ‘아직 더 움직일 수 있어.’ 하지만 그 이상의 퀘스트는 떨어지지 않는다.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데.’ 하지만 그 이상의 지령이 내려오지 않는다. 어째서. 내가 한계를 맞았으니까? 분명히 그럴 것이다. 기영 씨는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내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 이해하고 있다.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아마…. ‘신체가 버티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계신 건가?’ 정확히 몸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 자가진단을 내리기가 힘들다. 검을 휘두르고 발을 놀리는 감각에 취해 다른 생각을 하기가 쉽지가 않다. 전장은 길다. 빠르게 탈진하거나 금방 리타이어 하는 상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그의 판단이 맞다. 여기서는 페이스를 조절하는 게 정답이다. 하지만 아주 조금만 더 텐션을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무리를 시키는 것 같아 말을 꺼내는 것도 쉽지 않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지령 이외의 움직임을 선보이게 된다. 아마 조금은 여유가 있을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퀘스트가 도착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조심스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더 무리하기 전에 이 전쟁을 끝내는 게 정답인 것 같았으니까. “조금 더 올리겠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령이 오지 않는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계시고….’ 정말로 내 육체가 한계를 맞이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아직 더 할 수 있는데….’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여전히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갑작스레 몰려드는 자괴감에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바로 그때였다. “어….” 변화는 천천히 하지만 갑작스럽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변화를 보인 것은 전장을 바라보는 시야. “이게… 이게… 도대체….” 마치 곤충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 왼쪽 눈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져 눈을 매만졌지만 이내 고통은 순식간에 사라지기 시작한다. 눈에 비치는 것은 정면뿐만이 아니다. 옆, 그리고 뒤, 광활한 전장, 위에서 아래에서 다각도의 시야가 왼쪽 눈에 들어온다. 순식간에 들어오는 정보량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 자신도 모르게 이해하게 된다. 눈앞에 보이는 천사가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 전장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내가 현재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다. 날개가 삐쭉삐쭉 설 것 같은 감각이 등 뒤를 훑고 지나가고 그 감각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전혀 새로운 감각들이 쏟아진다. 강아지는 후각으로 수만 가지의 정보를 받아들인다고 했던가. 현재 자신도 비슷한 상황일 거라고 생각했다. 적들이 내뱉는 호흡, 아군의 상태, 차가운 바닥과 말라 비틀어진 혈액, 공기의 흐름, 피부의 감촉, 지금까지 느껴왔던 모든 감각이 새롭다. 그중에서도 가장 새로운 감각은…. “하하.” 그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하…하하하!” 확신할 수는 없지만 느껴지는 게 있는 법이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게 느껴진다. 아마 기영 씨도 똑같은 걸 느끼고 있겠지. 호흡과 컨디션, 마치 전장에 함께 선 파트너처럼 모든 걸 알고 계시겠지. 내 뒤에, 내 앞에, 내 옆에서 함께해 주고 있다. 옆 곧바로 귀에 꽂혀 있는 수신기를 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런 건 필요하지 않으니까. 드디어 인정받은 거구나. 드디어 옆에 설 수 있게 된 거야. 하는 성취감이 온몸을 휘감은 것도 잠시,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보다는 속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 -정말로 괜찮으신 것 맞습니까? 검을 휘두르며 한쪽 손으로는 머리를 부여잡는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감각은 익숙하지 않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왼쪽 눈이 계속해서 지끈거린다. ‘어째서….’ 어째서 이 천재가 자신을 배려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김현성… 김현성… 이 병신 새끼. 이 모자란 새끼…. 주제도 모르는….’ 어째서 그동안 이걸 하지 않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직은 불가능했던 모양이군요. 뭐 아쉽지만….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네.” -상태를 두고 보겠습니다. “저는… 저는 괜찮습니다.” -힘드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셔도 됩니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온종일… 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본격적으로 연결하겠습니다. ‘이게… 아직 연결된 상태가 아니라고?’ -지금부터는 구태여 좌표를 보내거나 설명드리지 않겠습니다. 느끼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네… 느껴집니다.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네.” -행동하시면 됩니다. “…….” -뭐해? 움직여. 눈을 부여잡았던 손을 천천히 떼자.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전혀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 752화 끝으로 (11) >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 “밀어붙여. 하늘로 떠오르지 못하게 해! 마법을 상시 유지해라!” “아아아아악!” “죽어!” “지원! 지원!” “방패 들어! 방패 들어!” ‘이거 위험한데.’ “전열을 무너뜨리지 마라. 밀어붙여!” ‘위험해.’ “이건 위험하다고. 젠장.”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게 보였다. 전투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하는 것은 시기상조였지만 모든 전장에는 본래 흐름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곳이 얼마나 되는 거지? 제대로 버티고는 있는 건가?’ 창을 내지르는 악마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고개를 숙여 창을 피한 이후에는 곧바로 도끼를 들어 녀석의 어깻죽지에 쑤셔 박았다. 충분히 고통스러울 만도 했지만 녀석은 비명도 지르지 않은 채로 다시 한번 창을 내질렀다. 옆에 있는 동료가 아니었다면 아마 목에 창이 박혔을 것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일단은 계속해서 도끼를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태에서 등을 돌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니까. 이미 후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오스칼님은 무사하신 건가?’ 계속해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무사하신 것 같기는 했지만, 희망찬 상황이라기보다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전열이 무너진 것으로 모자라 완전히 포위된 형국이라고 볼 수 있었으니까. 아마 이런 페이스대로라면 오스칼 님이 계신 본대 역시 위험하지 않을까. 불길한 상상을 하기는 싫지만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끝까지 버텨. 끝까지! 무너지지 마라! 절대로! 무너지지 마!”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한참 동안이나 악마들과 전투를 치렀을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맥크리 분대장.” “예.” “지금 이동해야겠네.” “어디로 향하는 겁니까?” “오스칼, 아니, 오스칼 님이 계신 곳으로.” “…….” “이미 전열이 완전히 무너졌어. 합류하는 게 최선이겠지… 조금만 뚫어내면 돼. 자네가 앞장 서주게.” “…….” “난 이곳에서 시간을 벌겠네.” “제가 남아 있는 게 더….” “아닐세. 아직 한참 젊은 사람들에게 이런 일을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한때 제국의 검이라고 불렸던 남자였다. 수많은 사선을 넘고 수많은 전장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었으며 황가를 수호하는 무력 그 자체였던 남자였다. 천천히 얼굴을 들여다보자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빅터하르트 님의 모습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빅터하르트 님.” “후회되는군.” “…….” “지난 시간이 후회가 돼.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겠구만. 그자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그자는 제국을… 아니, 대륙을 바꿔놨어. 어째서 베니고어 님께서 그자를 선택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네. 가서 새로운 지도자를 지켜주게나. 그리고….” “네? 그게….” “명예추기경에게 안부 전해주게.” “네?” “지금.” “네… 네.”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빅터하르트의 모습이 눈에 보인 직후, 작지만 틀림없이 공간이 열리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할 시간은 짧다. 일단은 곧바로 몸을 날리는 게 최선이다. “이동한다! 이동! 오스칼 님과 합류한다!” “이곳이 우리의 마지막 전장이다. 교국의 전사들아.” 뒤쪽에서는 거대한 목소리와 함성 소리가 들려온다. 어떻게든 길을 열려고 기를 쓰는 부대원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곳이 끝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방패를 들고 적들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수많은 전장을 돌아다닌 자신조차 이런 광경은 본 적이 없다. 세상에 숭고한 죽음이 어디 있을까. 언제나 죽음은 비참하고 두려운 존재다. 하지만… 하지만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다. 대의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이 죽음이 무가치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대륙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 가치를 위해 싸우고 빛을 위해 싸운다. 이들은 가슴 속에 빛을 품고 있을 것이다. 명예추기경님께서 내린 커다란 빛을 그 품에 안고 싸우고 있다. 본인들의 희생이 절대 헛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예추기경님처럼 대륙을 위해 싸운다. 어둠이 이 땅을 집어삼키게 하지 않기 위해 싸운다. 이런 거창한 뜻을 품고 전장에 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 역시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보이는 지도자. 교국을 혁명으로 이끈 자유의 상징. 교국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짧게 자른 혁명가는 검을 높게 들어 올리며 작은 불씨를 지켜나가고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교국의 병사들아. 우리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기억하라. 명예추기경님이 우리를 기억하실 것이다. 역사가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기억할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모두 눈에 담고 기억에 담을 것이다.” ‘오스칼.’ “나는 자랑스럽다. 교국의 영웅들아. 역사가! 우리의 후대들이! 우리의 마지막에 대해 노래 부를 것이라 생각하니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내가 이 영웅들과 함께 최후를 맞이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이곳에 있는 영웅들과 함께 기억될 거라고 생각하니 자랑스럽다. 영웅들 역시 응당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다.” ‘오스칼 님.’ “마지막까지 희망의 등불을 잃지 마라. 우리가 패한다고 해도 빛은 승리할 것이다. 베니고어의 아들딸들은 결국에는 승리를 쟁취해 낼 것이다.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하라 우리의 마지막은 분명 빛에게 보탬이 될 것이다. 베니고어 신성교국이 자유의 저항의 신념 아래 세워졌다는 걸 기억하라. 그것이 그대들의 힘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의 뿌리가 그대들에게 싸울 수 있는 힘을 전해줄 것이다. 교국인들의 긍지를 보여라. 우리가 베니고어 님의 아들딸이라는 것을 적들에게 보이자.” ‘검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시는 분이었는데.’ 전투의 보탬이 된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것 이상으로 저분이 함께 해주신다는 것은 커다란 힘이 된다. 교국의 가장 위에 선 위인이 함께 죽음을 맞이하겠다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하지만…. ‘함께 최후를 맞이하게 해서는 안 돼.’ 그런 역사가 쓰여져서는 안 된다. 오스칼 님은 오랫동안 교국의 지도자로서 기억되어야 한다. 병사들과 함께 최후를 맞이한 비극적인 지도자가 아닌, 교국을 바꾼 인물로서 남아야 한다. 아마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전선을 유지하려는 수많은 병사의 눈에는 진심으로 자신들을 생각해 준 지도자를 위해 싸우고 싶다는 신념이 서려 있었다. ‘살려야 해.’ 이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내야 하는 것이 맞다. ‘베니고어시여. 제 보잘것없는 목숨은 거둬가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선택한 교국의 상징만은 오랫동안 남게 해주시옵소서.’ “베니고어시여.” “지켜! 죽을 힘을 다해 막아!” “희망의 등불은 꺼지지 않는다. 우리가 쓰러질지언정 빛은 승리할 것이다. 빛과 명예추기경님께 힘이 되어야 한다!” “버텨! 버텨!” “신성기사단이여! 최후의 최후까지 응전해라. 베니고어 님께서 너희들을 빛의 품으로 인도할 것이니. 명예추기경이 우리를 베니고어 님의 곁으로 안내할 것이다.” “베니고어시여! 베이고어시여!” “신의 아들을 위해. 빛의 선택을 받은 자를 위해.” “오스칼 님을 지키자. 교국을 지켜!” 하지만 점점 전장은 기울어진다. 함께 했던 영웅들이 하나하나 쓰러질 때마다 목이 터지라 소리를 지르는 오스칼 님이 눈에 보인다. 그 눈빛의 희망은 꺼지지 않는다. 하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조금 전에 봤던 제국의 검의 표정이 오버랩된다. ‘후회?’ 무엇에 대한 후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작게 중얼거리는 것만 같다.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을 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오스칼 님의 표정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어….’ 아주 작은 희망이 그녀의 눈빛에 들어선다. 기쁨에 찬 얼굴이 들어선다. “지원군.” “아….” “지원군이다! 지원군이 오고 있다! 조금만 더 버텨라! 대륙의 영웅들아.” “하…하하하하!”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조금만 버텨!” “지원군이….” 공기의 흐름이 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법 준비해! 마법!” “이게… 도대체….”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 아무런 전조도 없었지만 갑작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보니 검은색의 점이 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이내 그 검은색 선은 자취를 감췄지만 방금 전까지 멀지 않은 곳에서 병력과 대치하고 있었던 악마의 목이 잘려 나가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악마뿐만이 아니다. 마치 누군가가 오른쪽으로 커다랗게 원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아군 병력을 둘러싼 악마들의 몸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다. 순식간에 공중으로 치솟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 공중에서 날개가 잘려나가 땅으로 떨어지는 악마들의 모습만 눈에 보인다. “기적?” 검은색의 빛이 선을 그리는 것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말 그대로 검은색 빛줄기가 하늘을 수놓고 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땅이 갈라지고 있다.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제대로 인지할 수 없을 지경. 멍하니 있는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은 환호성조차 지르지 않는다.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광경에 말문이 막혀 버린 것이다. 대신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허공에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들과 사제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번쩍이는 빛이 계속해서 퍼져 나간다. 검은색 빛이 또다시 커다란 선을 만든다. 허공에서 움직이는 악마들 수십 마리가 나가떨어진다. 검은색 빛은 왼쪽에도 자리해 있다.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공중에서 선을 그리던 그 빛이었다. “하… 하하….” 콰아아아아아앙!! 하는 커다란 소리가 들려온 직후에는 검은색의 원이 적 병력에 내려앉는다. 마치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유성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전장 전체를 휘젓고 다니는 검은색 선. 바닥에 처박히기 바쁜 악마들.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지?’ “노을빛의 검사다.” “뭐?” “노을빛의 검사가 왔다!” 마법사들 사이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노을빛의 검사라고? 저 검은색 선이?’ “저… 저게?” 다행히 의문을 해결하기 전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검은색 선이 공중에 멈춰 섰을 때…. “파란… 길드마스터.” 천천히 숨을 몰아쉬는 영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영웅이라기보다는 악마에 가까운 모습. 검은색 날개를 달고 커다란 뿔을 가지고 있는 악마. 기다란 장발에 피처럼 붉은 눈. 비현실적인 광경을 보여준 직후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경외감보다는 공포심이 먼저 들어선다. “악마….” 라고 중얼거렸지만. 신성하게 빛나는 황금색의 왼쪽 눈을 바라본 순간 저도 모르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건… 신이야….” < 753화 끝으로 (12) > 검은색 선이 지나갈 때마다 온몸이 잘리며 땅바닥을 나뒹구는 비둘기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다. 멀찍이서 바라보면 저런 광경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 저걸 지켜보고 있는 갤러리들 역시 김현성의 모습이 선으로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커다란 여신의 거울을 손가락으로 한 번 긋자 내 손을 따라가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하지만 저 거울에 새로운 기능이 걸린 것은 아니다. -확인했습니다. “네.” 김현성은 알고 있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어디로 움직이기를 원하는지 모든 걸 이해하고 있다. 사실 확인했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전하기도 전에 녀석은 이미 깨닫고 있었으니까. 어떤 경로로 녀석이 그걸 깨닫게 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녀석은 분명 내 생각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거, 시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도 읽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새로 얻은 특성의 이름은 이기영 사용설명서가 아니라 회귀자 사용설명서였으니까. 김현성이 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김현성을 사용하는 종류의 특성이라는 거다. 나는 녀석의 어떤 걸 느끼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김현성이 바라보는 시야. 녀석의 상태, 내가 원했던 것처럼 김현성이 느끼고 있는 모든 걸 함께 느끼고 있었다. ‘시바….’ 머리가 핑핑 돌아갈 정도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은 아마 그것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일반인이 갑작스레 초인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나는 그 힘을 휘두를 수 없지만 그 힘을 휘두르는 이가 느끼는 감각들을 느끼고 있다. 공기를 찢으며 이동하는 속도와 바위도 으깰 수 있을 것 같은 근력. 절정에 이른 검사의 검술과 녀석이 다룰 수 있는 힘, 그리고 전쟁터에서 쏟아지는 열기와 적의, 초인의 후각과 촉각, 고양된 기분과 감각, 모든 걸 느끼고 있다. 김현성이 느끼고 있는 것은 내가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내가 어떤 명령을 원하고 있는지 알게 되는 것뿐이다. 겁이 많고 자존감이 낮은 김현성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는 모양. 누군가 전장에 함께 해준다는 건 녀석에게는 커다란 의미로 다가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 누군가가 자신의 유일한 이해자인 빛기영이라면 특히나 그렇지 않을까. ‘아암, 그렇고말고.’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김현성은 선택을 두려워한다. 본래 녀석의 성향이 그랬던 건지, 아니면 만들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가면의 영웅이 회귀자에게 내린 시련은 녀석을 단단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지만 한편으로는 유약하게 만들기도 했다. 1회 차에 김현성을 생각해 보면 무척 뻔한 이야기지 않은가. 김현성은 모든 일을 망쳤다. 튜토리얼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녀석은 항상 최악의 선택지에만 발을 담갔다. 녀석이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놈의 동료들을 죽거나 반병신이 됐고 끝끝내 가면의 영웅이 내린 가면의 시련 앞에 무너졌다. 그 트라우마가 사라졌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녀석은 선택을 두려워한다. 아닌 척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 척을 해도 놈은 선택하는 것을 무서워한다. 가슴속, 아니, 영혼 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그 잔재는… 김현성이 본래의 힘을 내는 걸 억제하고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족쇄를 달고 있는 맹수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본인의 앞발과 뒷발에 커가란 쇳덩이가 달려 있는지도 모르는 맹수. -하…하하! 김현성은 내가 자신에게 힘을 내려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 보여주고 있는 무력은 모두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힘이다. 녀석은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해줄 수 있다. 김현성은…. ‘X나 세. 진짜.’ 개인적으로 측정한 전투력을 훨씬 상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직!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전장을 휩쓸고 있는 저 친구 좀 보세요, 여러분들. 시바, 만화에서나 나오는 모습 아니야? -확인했습니다! “집중하세요.” -네! 환희에 찬 얼굴이 눈에 보였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은색 파동이 놈들을 뒤덮는다. 온종일이라도 싸울 수 있을 것 같다는 회귀자의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다른 병력을 김현성을 위해 사용할 필요도 없다. 날아들어 오는 마법과 화살을 방어할 보호 마법을 지원해주거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다른 영웅들을 밀어주지 않아도 된다. 김현성 혼자 움직여도 결코 무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거대한 빛과 화살, 창들이 사방팔방에서 날아들어 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굳이 마법사에게 지원을 요청하지 않는다. 왜. 녀석이 보고 있으니까.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모든 각도에서 볼 수 있었으니까. 물론 판단하는 것은 김현성이 아니다. 상황실에 앉아 있는 내가 모든 것을 판단한다. 어디로 피하는 것이 좋을지 어떤 루트로 움직이는 것이 좋을지 판단을 내린다. 아무 근거 없이 내리는 판단이 아니라 내게 쏟아지는 모든 정보를 근거로 한 판단이다. ‘그렇게 이기적인 비롯된 판단도 아니지.’ 김현성의 상태, 녀석의 경험치, 녀석의 생각. 이기영의 개인적인 의견을 거기에 덧붙여 가장 합리적인 루트를 찾아준다. 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시간은 찰나다. 어떻게 이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나도 알 수 없다. ‘어째서 생각할 수 있나요’라고 묻는 것과 똑같은 질문이었으니까. 그렇게 만들어진 명령체계가 김현성에게 내리꽂히는 것 역시 찰나. 마치 뇌가 하나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김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인다. 녀석은 날아들어 오는 창을 하늘로 쳐낸다. 팔이 살짝 저릿하다. 날아 들어오는 빛무더기는 날개로 자신의 몸을 감싼 채로 돌파한다. 화살은 날개를 펼치는 풍압으로 날려 보낸다. 가장 합리적인 공간으로 날개를 뻗는다. 듀렌달을 휘두르기가 무섭게 몇십 마리의 비둘기가 휩쓸려 나간다. 검은색 선이 다시 한번 하늘을 가로지른다. ‘시바! 개 빨라! 시바!’ 하늘에 서 있는 검은색 선은 어느새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현성아 너무 빠르다. 시바.’ 눈앞에 빅터하르트 영감이 고군분투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여기서 마무리하기에는 아까운 인간이니 살려두는 것도 괜찮겠지. 루트를 수정하자 김현성이 다시금 몸을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저 멀리서 보였던 영감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영감을 향해 창을 내지르고 있었던 비둘기들 몇 마리의 머리가 김현성의 손에 의해 땅바닥에 처박혀 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이후다. -자… 자네는…. “오랜만입니다. 영감님.” -오랜만입니다. 영감님. “따라 하라고 말한 게 아닙니다. 현성 씨.” -아… 네. 금안 적안의 오드아이가 그렇게 간지났을까. 김현성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영감은 허탈한 듯 말을 이었다. -하… 하하…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군…. 신에게 선택받은 이가 하나가 아니었던 모양이야. -……. -……. -아니. 신에게 선택받은 이는 하나입니다. -? -저는… 신에게 선택받은 이에게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아이고 현성이 기특하기도 해라. 그래. 내가 널 선택한 거야.’ -아니… 그렇지 않네… 자네는…. 순식간에 영감이 멀어진다. 빠르게 달린 김현성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는 것이 느껴진다. 절정에 이른 검사의 팔이 검을 휘두르는 감각이 내 손 안에 그대로 느껴진다. ‘와, 이거 시바 나도 세질 가능성 있는 거 아니야?’ 머릿속에 김현성의 검술이 있는데. 동네 양아치들 정도는 검술로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 계속해서 적들을 뚫고 나간다. 흑색의 선이 한 차례 전장을 훑고 지난 곳에 남은 것은 한 차례나 늦게 땅바닥에 처박히는 비둘기들뿐이다. ‘가즈아! 가즈아!’ 콰아아아아아앙!! 콰지직! 퍼어어어어어어엉!! ‘검만 쓸 수 있는 줄 알았더니 몸도 잘 쓰네. 왜 지금까지 안 쓰고 있었어? 너무 얽매여 있었던 거 아니야? 아니면 까먹고 있었어?’ 검을 땅바닥에 꽂은 김현성이 비둘기들을 주먹과 발로 후려치는 것이 보인다. 퍼어어어엉! 비현실적인 소리와 함께 온몸이 으깨진 놈들이 김현성에게서 튕겨 나간다. ‘컨셉에는 조금 안 맞는 것 같기는 한데 한 번 뿔로 들이 받아보는 것도 간지날 것 같자너. 어차피 오늘 이후로는 뿔 쓸 일도 없을 텐데 한 번만 써보자.’ 머릿속으로 다소 어처구니없는 지령을 떠올리자 곧바로 김현성이 천사 한 명을 뿔로 들이받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 확실히 그다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지만 나쁘지는 않다. ‘아… 이거 진짜 너무 쉽자너.’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금의 상황이 여유가 있다. 전력 차는 압도적이고 악마들 사이에 김현성은 양 소굴 안에 들이닥친 늑대나 다름이 없다. 어깨 쪽에 통증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아아악!!” 고개를 돌린 곳에 자리한 것은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네임드 비둘기. ‘방금 말 취소. 시바 방심하면 안 되겠다.’ 화살을 쏘아 보내는 특기라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보이지 않는 화살을 감지하지 못했다. 김현성 역시 깜짝 놀란 것 같은 반응. 화살이 박힌 건 자기 어깨인데 뭐 저렇게 놀란 건지 모르겠다. 이 새끼는 아프지도 않아? 고통에 익숙한 거야? 시바 졸라 아팠는데…. -괜찮… 괜찮으십니까? “아… 네. 괜찮….” -죄… 죄송… 죄송합니다. 죄송…. “아니요.” ‘아… 진짜 이 새끼 또 겁먹었다.’ “통각 공유는 조금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정하세요. 지나치게 흥분한 것 같네요.” 순식간에 거대한 분노가 머릿속에 내리꽂힌다. 미처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화살을 날린 네임드 비둘기의 얼굴이 피떡이 되어 있다. 얼굴이 완전히 뭉개져 있는 것으로 모자라 사지가 난도질 되는 모습은 조금 역하기까지 하다. -개자식! 개자식! ‘알았어, 그만해. 둠현성 다혈질 시바….’ 어쩌면 감정도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 천천히 마음을 다잡자 안정됐는지 천천히 숨을 몰아쉬는 김현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거 진짜 되네.’ 머리에 몰려 있던 피가 점점 빠지는 것 같은 감각이다. 녀석도 본인이 지나친 모습을 보였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지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저도 잠깐 집중력을 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아니… 정말로 죄송합니다. “전투에 집중하세요.” -네.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어깨가 조금 아프기는 했지만 흑색의 선이 움직이는 것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다. 아까보다 입술을 더 꽉 깨문 녀석은 오히려 더욱더 빨라지고 있었다. 폭음과 굉음만 계속해서 들려온다. 이제는 ‘확인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녀석이 집중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김현성이 검을 휘두르려고 하는 것이 보인다. 노을빛의 검을 주문했지만 아쉽게도 둠현성 상태로는 나가지 않는 모양, 하지만 거대한 칠흑색의 기운이 적 진영을 덮친다. 모든 게… 모든 게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시바 진짜 졸라 멋있네. 진짜.’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그 누가 저 장면을 보고 전율을 느끼지 않을까. 저걸 보고 전율을 느끼지 않는다면 놈이 있다면…. ‘그 새끼야말로 악마관계자지.’ 이단심문관이라도 불러 심문하는 것이 옳다. 한쪽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와중에도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보인다. “괜찮았습니다. 곧바로 다음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겁니다.” -네.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환하게 웃고 있는 김현성의 모습은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고 또 그렇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뭔가 찜찜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주 깊숙한 곳에서 두려움과 결심이 느껴진다. 찰나였지만 녀석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었다. ‘뭐야? 뭐가 무서워? 아까 그것 때문에 그래?’ 네가 나를 속일 수 있어? 잠겨져 있는 걸 풀어내는 것 정도야 쉽다.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보려고 생각하자 확실히 놈이 품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 -다음은 어디로 가면 되는 겁니까? “…….” -어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습니다. 기영 씨. 이렇게…. “…….” -지금 움직이겠습니다. ‘하… 이 새끼 봐라.’ 커다란 문제는 아니었다. ‘이 개새끼 진짜.’ 내게 있어서 커다란 문제는 아니었다. 김현성은…. 김현성은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의 끝을 자신의 희생으로 마무리하기로.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 754화 끝으로 (13) > 다시 한번 녀석을 살펴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올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김현성 정신 성장은 개뿔.’ “…….” ‘이 새끼 이 정도면 무슨 정신병 있는 거 아니야? 진짜?’ “…….” ‘내가 병신이었지. 내가 병신이었어.’ 다시 한번 생각해 봐도 여전히 당황스럽다. 완전히 미쳐 버린 상태에서 이성을 되찾은 걸 칭찬했던 내가 병신처럼 느껴진다. 제정신을 차린 이후에 뭔가 내면적인 성장을 이뤄낸 거라고 생각했었던 이기영이 병신이었나 보다. ‘난 또 진짜 성장한 줄 알았자너. 내면적인 성장은 개뿔 그딴 거 없었자너. 아니, 성장하기는 성장한 것 같은데 루트를 잘못 탔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야. 진짜 회귀자 사용설명서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자너. 상황 제대로 꼬일 뻔했네. 진짜. 욜라 이상하긴 이상했다니까. 김현성이 갑자기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할 리가 없는데. 말 그대로, 애초에 녀석이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것부터가 조금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내 몸에 무리가 갈까 봐 온갖 고집은 다 부리며 통신까지 차단했던 그 김현성이 갑작스레 함께해 달라고 말했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 긴가. 짐을 나눠 들기는커녕 짐을 떠넘겼다고 죄책감에 시달렸던 녀석이었다. 김현성 속의 이기영이 무척 위태로운 것으로도 모자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약한 새라는 걸 떠올려보면 더욱더 그렇다. 잠깐 까먹고 있을 뻔했지만 아직까지도 기억상실 기믹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 무슨 약을 먹고 왔는지, 갑자기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정말로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를 짓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거겠지. 어쩌면 보상심리 같은 것도 있을지도 모르지. 모든 걸 매듭짓기 전에 한 번은 더 교감하고 싶다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왜 그런 거 있잖아. 버킷리스트 같은 거. 마지막인데 혼자 싸우면 쓸쓸하잖아. ‘제정신 차린 게 자기희생 엔딩이나 찍으려고 그러셨어요? 왜, 시바 계속 도망치다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 새끼가 희생한다고 지랄을 할까 몰라.’ “…….” ‘와, 진짜 머릿속을 열어보고 싶네.’ 이미 반쯤은 열어보고 있었지만 아주 세세한 생각을 전부 캐치하기에는 숙련도가 많이 부족한 모양, 하지만 굳이 보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게 있는 법이다. 녀석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심리상태에 있는지 훤히 보인다. 정확하다고 딱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녀석이 살아온 배경이나 감정을 느껴보면…. ‘뻔하지. 뭐.’ 잠깐 김현성한테 빙의해 보자면 이렇다. ‘지금까지 너무 도망만 쳐온 것 같습니다. 제게 주어진 역할이 뭔지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해 왔던 겁니다. 제가 회귀한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이제는 도망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겠습니다.’ 그렇지. 도망쳤지. 근데 그게 왜. 누가 너보고 도망치지 말라고 칼이라도 겨눴어? 사람이 도망 좀 치고 회피할 수도 있는 건데 너는 뭐가 그렇게 문제야? 어쩌면 세라핌에게 죄의 심판을 받았던 것도 떠올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는 수많은 죄를 저질렀고 이 죄들을 외면해 왔습니다. 계속해서 생각했었습니다. 어쩌구. 속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항상 생각해 왔었습니다. 저쩌구. 이제 이 죄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어쩌구. 드디어 죗값을 치르고 어쩌구. 모든 것을 떠안고 어쩌고.’ 마지막 순간에 주절거리며 명대사를 쏟아낼 빌드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저런 대사를 지껄일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내가 쓰레기라 그런 것이 아니라 김현성이 정신병이 있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 ‘누가 네 죄에 대해서 신경이나 쓴데? 1회 차? 그건, 시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그리고 이미 2회 차 시작한 마당에 뭐…. 이미 세탁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 아니야? 왜 이렇게 세상을 어렵게 살아가세요, 진짜. 이런 놈이니까 신한테 사랑받고 영웅이고, 주인공 포지션 잡는 건 이해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너는 정도가 너무 심하다. 진짜.’ 김현성이 1회 차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빛의 성자 이기영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필터링을 한 이야기를 쏟아냈다는 것 역시 뻔한 이야기다. 전쟁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이야기했지만 그 전쟁에서 자신의 모습이 어땠는지, 얼마나 많은 인간을 죽였는지, 놈의 기준으로 얼마나 비인도적인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도 묘사하지 않았다.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는 부분 역시 존재한다. 그러니까 1회 차, 평범하고 순수했던 1회차 이기영이 가면의 영웅으로 각성하기 전, 박덕구의 죽음에도 김현성이 어떤 식으로 기여했는지 역시 의문으로 남아 있다. ‘아니. 손을 거든 건 맞긴 해?’ 대충 거들었을 수도 있겠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지역에 통째로 마법을 떨어뜨린다는 건 기득권들의 허가 없이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니까. 최종적으로 결제를 내린 건 당시 제국의 여황이었을지는 몰라도 당시 기득권이었던 김현성의 의견도 들어가지 않았을 거라고는 장담 못 해. 그래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솔직히 김현성이 기여했든 기여하지 않았든 지금의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는 거야. 사람마다 입장 차이라는 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나는 가면의 영웅 본인이 아니었으니까. 녀석의 유지를 이어받기는 했지만 놈이 분노했다고 해서 나도 분노하라는 법은 없지. -기영 씨? “…….” -기영 씨? “네?”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아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루트는 계속해서 찍어드리고 있는 것 같은데. 뭐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잘하고 계십니다. 아주 자알 하고 계시네요.” -……. “전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아주 대다안 하십니다. 혼자서도 전부 마무리 지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네.” -죄… 죄송합니다. “네?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뭐가 죄송한데요? 뭐가 죄송한지 한번 들어나 봅시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니, 뭐가 죄송한지 알아야 사과를 받아주죠. 그냥 지금 상황 모면하려고 대충 던지는 말이나 다름없잖습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 눈앞에 있는 거나 신경 쓰세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그러니까, 아까 그 명령을 무시하고 움직여서… 순간적으로 너무 화가 나서… 죄송합니다. “그것 때문에 화난 거 아닙니다.” -제가 부주의한 탓에 상처를…. “아니, 상처를 입은 건 현성 씨지 제가 아닙니다. 통각 차단했으니까 안심하시고 마음껏 싸우세요. 말리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요?” -……. 순간적으로 기분이 시궁창으로 나가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내 기분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녀석의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뭔가 집중력 자체도 슬슬 떨어지고 있는지 전투에 집중도 못 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진짜….’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솟아 올라 잠깐 억지를 부리기는 했지만… 확실히 영향을 받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너무 심했나?’ 그래도 제 딴에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형제 같은 친구랑 마지막에 마지막에는 전장에서 함께하면서 뭐 밀린 이야기도 나누고 정서적 교감도 하고 멋진 대사 쳐주고 눈물 한번 쫙 빼준 이후에 산화하는 그림 그리고 있을 게 뻔하자너. 근데 마지막이 이렇게 됐으니 얼마나 기분이 더럽겠어. 물론 아직 마지막이 다가온 것은 아니었지만 김현성의 기분을 나락으로 처박기에는 충분한 모양이다. 정상적인 마지막 인사를 하지는 못할망정 전부 다 망치고 빛기영 기분 잡치게 한 것으로 모자라 어째서 기분이 상했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속이 터질 지경이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다시 한번 구덩이 속으로 점점 파고드는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하는 생각부터 꽤나 순도 깊은 자괴감 마저 나를 덮쳐온다. 열심히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며 적들을 쓸어나가고 있지만 흔들리는 동공과 괜스레 힘이 들어간 전신은 녀석이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 -그러니까…. “…….” ‘그래. 시바, 그만하자. 그래도 제 딴에 한번 해보려고 한 건데. 생각해 보면 내가 이렇게 흥분할 이유도 없지. 뭐.’ 어차피 김현성의 계획이 실제로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 엔딩에 나와야 할 장면은 이기영 배때기지 김현성의 자기희생이 아니었으니까.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자기희생 엔딩보다 더 끔찍한 엔딩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나은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김현성은 죽지 않을 거고 희생도 하지 않을 거다. 희생하는 것은 회귀자의 동료지 회귀자가 아니다. ‘내가 너 대신 희생하겠다.’ 내가 생각하고도 조금 가슴 저릿한 멋이 있다. ‘진짜 멋있기는 하네.’ 자기 자신한테 살짝 취할 정도로 울림이 나쁘지 않다. ‘아, 씨. 이렇게 생각하니까 마취 물약이 또 아쉽네.’ -그러니까… 제가… 죄송… 합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네. 받아들이겠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흥분하신 것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현성 씨가 혼자 판단을 내리면 이걸 하는 의미가 없잖습니까. 이 정도 고통은 괜찮으니 지시를 무시하지는 말아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절대로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알기 쉽죠.’ 녀석이 기분이 직접적으로 들어와 꽂히는 것 이전에 전장에서부터 그 영향력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감정에 솔직한 것 같다. 순식간에 적들을 쓸어버리는 검은색 선의 위용은 굳이 다시 한번 묘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괜히 이미 전쟁은 끝난 것 같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신과 같은 존재가 전장에 강림한 상황. 열세로 보이는 전장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이후에는 다음 전장으로, 그다음 전장을 해결한 이후에는 또다시 다른 전장으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북부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회귀자의 모습은 정말로 마지막 남은 불꽃을 태우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직 못 턴 지역이 얼마나 되지?’ 전장은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김현성이 다녀간 전장은 밀리고 있는 형국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형국으로 전환되어 있다. ‘그렇게 무능하지는 않지.’ 차려놓은 밥상을 떠먹지 못할 정도로 대륙은 무능하지 않다. 검은백조 길드의 박연주, 오스칼과 빅터하르트 영감, 천관위와 위란, 각 전진기지를 대표하는 영웅들 역시 승기를 잡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는지 남은 적들을 몰아내는 중, 마치 데자뷔처럼 어딘가에서 많이 봐왔던 장면이었다. 언제 나왔는지 전장에서 날뛰고 있는 차희라의 모습 역시 시야에 비치고 있다. 아직까지는 치열한 접전이 유지되고 있는지 몸에 하나둘 창이 박히고 있는 모습. 그녀는 신경 쓰고 있지 않은 것 같았고, 대미지 역시 그리 커다란 것 같지 않았지만, 저 장면 역시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 틀림없이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본 장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정말 온 것 같은데.’ -기영 씨. “네?” -그러니까…. “네.” -잠깐 괜찮으십니까? “네.” -그러니까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 현성이와 함께 하는 추억 여행 시작하나요.’ “네. 당연히 기억합니다. 이전에도 자주 드렸던 말씀이니까요.” ‘근데 우리 이 이야기 자주 했잖아.’ -네. 기영 씨가 제가 차가운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도 그랬었지만… 생각해 보면 처음에는 정을 붙이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근데 추억 여행 처음부터 가려고 하는 건 아니지? 튜토리얼 때부터 되짚기에는 시간이 없자너.’ -그리고… 파란 길드에 처음 들어갔을 때 말입니다만…. 그 와중에 김현성은 자신의 손으로 끔찍한 짓을 저질러야 한다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추억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 755화 끝으로 (14) > -그러니까…. 대충 봐도 빠르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슬그머니 감정을 잡는 김현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상황이기는 했지.’ 김현성은 평소에는 과묵한 편에 속하기는 하지만 한 번 물꼬가 트이면 말이 많아지는 스타일이었으니까. 사람 자체가 재미없는 편에 속하는 인간이다 보니 기실 대화를 받아주는 입장에서는 힘든 면이 있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빠르게 끊고 가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사이코패스 같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녀석 나름대로는 마지막 추억여행이기도 했고, 희생 엔딩 내기 전에 정리하고 싶은 것이 있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간에 김현성은 이 시간을 무척이나 기다려왔다는 듯 조심스레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파란 길드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드리지 못해 너무나도 죄송스러웠습니다. “네….” 그래, 그건 솔직히 네가 심했지. 아직도 녀석이 내게 길드의 모든 업무를 맡기던 상황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돌멩이를 수백 번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최대한 빠르게 길드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부담을 드린 것 같습니다. “…….” ‘이 새끼 구라 치네. 뭔 저도 모르게 부담을 드려. 아주 작정하고 갈아버리려고 했잖아.’ -당시 기영 씨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철없기 그지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이후에 기영 씨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혜진 씨를 데려오기는 했지만 그것마저도 기영 씨를…. ‘지가 잘못한 건 알고 있네. 진짜. 지금이야 내가 혜진이랑 절친 먹었으니까 괜찮은 거지만 그땐 너 죽이고 싶었어. 개 짜증 났었다고. 그때 선물까지 들고 갔었는데.’ 하지만 일단 훈훈한 분위기는 유지하도록 하자. “이제는 모두 지난 이야기니까요. 솔직히 원망스러웠냐고 물어보신다면 원망스러웠다고 말씀드리겠지만….” -죄송합니다. “죄송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지금 떠올려보면 전부 다 재미있게 웃을 수 있는 이야기니까요.” -하… 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던전행도 마찬가지였어요. 당시에는 따라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치고 괴롭기도 했지만… 전부 다 즐거운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맨 처음 공포의 정원에 갔을 때도 그랬죠. 정유라 씨였나요? 정말로 통쾌하기는 했습니다. 현성 씨가 특별한 면이 있다는 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걸 확신할 수 있었던 원정이었죠. 아마 현성 씨가 없었다면 그런 원정은 경험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주받은 신단도…. ‘아, 그것도 있었지.’ -조금 위험하기는 했습니다만 솔직히 기영 씨가 물약을 제조해 공략에 일조해 주실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본래 신단의 공략방법은 그게 아니었는데… 아직도 기영 씨가 게드릭의 흉내를 내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정말… 하… 하하… 결과적으로 율리에나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뭐야 너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어?’ -처음부터 제 물건이 아니었던 거겠죠. 지금에서야 말씀드리는 거지만 율리에나는 마검사 정진호가 사용하던 물건이었습니다. 대충은 예상했는데 역시 그랬던 모양이다. -여러모로 좋은 아이템으로 느껴져 2회 차 초반부터 사용할 생각이었는데…. ‘은근히 속 좁네.’ -그때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해 보면 기영 씨가 그 검을 얻은 게 천운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잠깐 검술 수련을 한 것도 기억하십니까? “네. 정말 힘들었었는데… 길드 일이 본격적으로 바빠지다 보니 흐지부지되기는 했지만 솔직히….” ‘너 그때 나한테 감정 있었지? 율리에나 뺏어간 것 때문에 꿍해 있었던 거지?’ -혹시나 오해하실까 드리는 말씀이지만 결코 기영 씨를 힘들게 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좋은 검을 얻으신 것 같아서… 기본기만이라도 배우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거짓말하지 마. 시바. 어차피 나는 희망 없을 거라는 거 알고 있었잖아.’ -저… 저는… 결과적으로 다음 원정에서는 더 좋은 검을 얻기도 했고…. “네. 박물관에서….” -네. 지금 이 시기까지 사용할 수 있는 검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정말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파티가 그렇게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몰랐고요. 고대신의 파편이라니… 대륙의 멸망이라니, 무척 놀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때요? 지금은 지금 박물관으로 돌아간다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지금의 상태라면 가능성이 클 겁니다. “현성 씨가 얼마나 많이 성장했는지 대충 알 것 같네요. 하하.” -전부가 제힘은 아니지만…. 씁쓸한 듯이 웃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굉장히 커다란 사건들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국을 교국으로 변화시키기도 했죠? “샤를리아를 황제로 만들 수 없었거든요. 저도 일이 이렇게 잘 풀릴지 몰랐으니 어떻게 보면 현성 씨 덕을 본 거나 다름없죠.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때는….” ‘너, 시바, 어디서 뭐 하고 있었지?’ -흑마법사 집단을 찾고 있었습니다. 1회 차와는 달라진 것이 너무 많아 제대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는 기영 씨와 항상 떨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라이오스에서 벨리알이 소환됐을 때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네. 정말 많이 걱정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뒤늦게 찾아갔지만… 기영 씨를 지켜드리지는 못했었죠. 진청 그자는 교묘하고 악마 같은 자였지만 제 무능이 만든 사고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구태여 그렇게 스스로 자책할 필요는 없죠, 뭐. 상황이 조금 꼬이기도 했고, 현성 씨도 현성 씨 나름대로 할 일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때 입었던 대미지는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조금 자랑스럽기까지 해요. 라이오스의 국민들이 저를 위해 기도했던 그 순간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얀이한테도 고맙고, 함께 싸워준 소라 씨와 덕구에게도 너무 고마웠죠. 아 물론 현성 씨에게도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아니요. 아마… 아마 기영 씨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만약 진청 그자가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이번 전쟁 역시…. 안 좋은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심각해지는 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실 그거 난 것 같아. 현성아.’ “현성 씨에게 처음 1회 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로 놀랐었습니다. 사실 진청 그자가 그 정도로 악한 인간이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아마 밤을 새워도 부족할 겁니다. 그 정도로 치가 떨리는 인간이었습니다. ‘조금 상처받는데. 다 널 위해서였어.’ “그러고 보니 현성 씨가 저를 의심한 것도 기억이 나네요.” -그건… 죄송합니다. ‘아니야. 굳이 죄송할 건 없어. 어차피 조금 있다가 또 의심하게 될 테니까. 이번에는 확신할 수 있을걸.’ -당연히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계속해서 되뇌고 또 되뇌어 봤지만 제게 무언가가 쓰였던 모양입니다. 조금이나마 변명해 보자면 아직 모두를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음을 바꾼 계기가….” -한 여성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걸로는 부족하기는 했지만…. ‘아, 그것도 난 것 같아. 근데 이건 그냥 묻어두자. 굳이 밝힐 이유도 없잖아.’ -그 여성분이 제게 말씀하시더군요. 자신 역시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이 있다고, 믿음을 주지 못해서였다고…. 당시 제가 처한 상황과는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그 조언이 커다란 힘을 준 것 같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분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드리기는 했지만… 언젠가 만나면 정말로 죄송했다고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현성 씨가 다른 나쁜 뜻이 있다는 게 아니었다는 걸 이해해 주실 겁니다.” -그런 거라면 좋겠지만… 하하. 네. 정말로 그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정말로 다행인 거겠죠. 하지만 아마 저를 미워하시고 계실 겁니다. 녀석은 살짝 쓴웃음을 흘린 이후에 곧바로 검을 치켜들었다. 계속해서 비둘기들을 썰어 넘기면서도 저렇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조금 놀랍기도 했지만 전투보다는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임무 수행하는 데는 딱히 문제가 없으니까.’ 딱히 지적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막상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내 기분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기분 좋은 쪽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녀석과는 다르게 나는 온전히 집중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이니까.’ 김현성과 이렇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정말로 얼마 만인 줄 모르겠다. -함께 호수에 간 것도 재미있었죠. “덕구가 그렇게 큰 배를 만들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이렇게 전쟁에 쓰일 거라고는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와인이라도 한잔하면서 여유롭게 이야기 나누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전쟁 중이라는 게 아쉽게 느껴진다. “거울 연어가 정말 맛있었는데. 솔직히….” 안주로 거울 연어 곁들이면 딱일 것 같은데. -네. 기영 씨는 입이 짧으셨으니까요. 그렇게 잘 드실 거라고는 저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말씀을 드렸었나요? 거울 연어 양식에 성공했다고…. “네?” -연구비가 조금 들어가기는 했지만…. ‘아니… 조금이 아닐 것 같은데? 그거 시바 차원을 돌아다니는 물고긴데 그걸 어떻게.’ “좋은 소식이네요. 그래도….” ‘시바 길드 자금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거 알지?’ -네. 저도 다시 한번, 다시 한번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나는 다시 가자고 이야기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아 이 새끼 또 지가 대사 쳐놓고 지가 꿀꿀해졌네.’ “같이 가면 됩니다. 그것 말고도 할 게 많아요. 모든 게 끝난 이후에 해야 할 게 참 많습니다.” ‘우리 노을도 보러 가기로 했자너. 아, 근데 또 괜히 말했나 봐.’ 왠지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네. 그렇죠. 모든 게 끝난 이후에… 네….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 하는 본인의 운명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다. ‘너 희생할 일 없어요. 그만 감정 잡으세요.’ -저… 기영 씨. “네?” 아까와는 말투부터가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슬슬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기다리고 기다렸던 어쩌고저쩌고 타임이 돌아온 모양이다.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저는… 저는… 구제 불능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래. 시바, 내가 이거 왜 안 나오나 했다. 근데 현성아. 그 정도는 아니야. 너무 자책하지 마.’ -아무도 믿지 못하고… 인간관계에도 서툴고… 항상 실패만 반복하는 인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1회 차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 보면 김현성이라는 인간이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겁이 많고 회피하고 매번 도망만 치는 그런 인간으로 살아왔던 겁니다. 바뀔 수 있다고 달라질 수 있다고 항상 다짐하고 실제로도 결심을 하기는 했지만 항상 제자리걸음이었죠. 제가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은 기영 씨 때문입니다. “글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기영 씨가 저를 믿어주셨기 때문에 저도 기영 씨를 믿을 수 있었던 겁니다. 누군가를 완전히 신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기영 씨는 제게 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뭔지, 그 의미를 알려 준 사람입니다. 고맙기는 한데… 걱정되기도 한다 야. ‘원래 믿음이 클수록 배신당할 때의 배신감도 큰 법인데… 이 새끼가 배때기에 안 찌르고 다른 데 찌르면 어떻게 해.’ 활화산 같은 분노를 감당하기 힘들어 목을 뎅겅 베어버리지는 않을까. 한 방만 쑤셔도 되는데 여러 번 찔러서 뱃속을 헤집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그만큼 현재의 김현성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는 무한한 신뢰와 믿음이 섞여 있었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놀랍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알아서 조절하시겠지?’ “말뿐이라도 감사합니다만 저는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말뿐만이 아닙니다. “하… 하하….” -기영 씨에게는 사람들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어요. 하얀 씨도 그렇고 차희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에너지를 타고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위 사람들을 밝게 비춰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맙기는 한데….’ -저 역시 제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고, 친구를 사귀고, 별것 아닌 일로 즐거워 할 수 있을 거라고는…. ‘그래 내가 봐도 너 엄청 달라진 것 같기는 했어. 거울 호수에서 아이템 낚시 성공했을 때도….’ “어?” -이제는 제가 보답하고 싶습니다. “…….” 즐거웠던 분위기도 잠시. 조용히 위쪽을 바라보는 김현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가 마침표를 찍겠습니다. 그곳에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김현성을 바라보는 세라핌이 자리해 있었다. < 756화 끝으로 (15) > ‘근데 쟤는 한쪽 눈이 왜 저래? 어디서 당하고 왔어? 케루빔이야?’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녀석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 ‘아니, 왜 저래?’ 한쪽 눈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케루빔에게 당했거니 생각하기도 했겠지만…… 그토록 형제자매들을 사랑했던 녀석이 세라핌의 눈을 후벼 팠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조금 의아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내 의문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녀석의 한쪽 손에 구겨져 있는 더미월드의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뭐야?’ “…….” 분노로 떨리고 있는 한쪽 동공이 시야에 들어온다. ‘진짜야?’ 더미월드를 집어둔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인다. ‘진짜 덤기영이 그랬어?’ 가장 최근에 리셋 했을 때가 덤기영이 바깥 세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던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지혜 누나가 코웃음을 치며 다음 회차 버튼을 누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번 회 차에는 그 방법을 찾아 자신들을 괴롭히던 악마 같은 녀석에게 한 방 먹인 모양. ‘와 시바 진짜. 무섭기는 무섭다. 내가 이 새끼 언제 한 번 사고 칠 줄 알았는데…… 와 그 쥐방울만 한 얘들이 어떻게 세라핌 눈을 후벼 파냐. 이전 회차는 어떻게 계속 기억하고 있는 거야? 무의식 속에서 남아 있는 건가? 그런 트리거가 있는 거야?’ 시스템상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김현성을 보라 누가 녀석이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될지에 대해 예상이나 했을까. 수천, 아니, 수만 번을 넘게 같은 회차를 반복했던 더미세계에서는 일생일대의 저항이요. 최후의 발악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을 통제하려고 한 초월적인 악마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그들이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기 때문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계속해서 똑같은 삶을 살아가며 실험용 생쥐처럼 취급당하는 삶에 부당함을 느끼며 들고 일어섰고 결국에는 자신들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했다. 세라핌에게 상처를 입힘으로써 자신들이 운명에 저항할 수 있다는 걸 초월자들에게 알린 것이다. 하지만……. ‘악마 같은 자식.’ 녀석들의 창조주는 작은 세계를 부숴 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산산조각 나 부서지고 있는 더미월드의 모습은 내가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참혹할 것이다. 만약 더미월드의 생존자가 있다면 세라핌을 세상을 종말 시킨 악마라 평가하지 않을까. ‘그 쪼그마한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었던 나로서는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시바. 너무 빡 친 표정이기는 하더라. 이거면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눈치 깠겠는데.’ 놈이 바보가 아니라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조금 더 철석같이 믿고 있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했는데. 뭐 이것도 나쁜 상황이라고는 볼 수 없으니까.’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코인이 휴짓조각이 된 와중에도 신인류 계획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본인이 속았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지 않았을까. 별것 아니라면 오류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한쪽 눈까지 박살 난 마당에 그런 판단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왜 하필 눈이 다쳤는지도 대충 궁예질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내가 떨어뜨리고 간 더미월드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얼굴을 가져다 대다가……. ‘회심의 일격 맞은 거자너. 와 진짜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 진짜.’ 그 고통과 함께 모든 게 블러핑이고 개구라 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는 세라핌의 얼굴은 뭐라고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놈이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놀랍다. ‘얼마나 억울하겠어. 진심전력으로 밀고 있던 주식이 순식간에 상장폐지 됐자너. 케루빔도 지 손으로 찌른 거잖아. 벌써부터 싸울 태세 만반이네. 현성아 할 수 있지? 할 수 있는 거지?’ -기필코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더러운 쓰레기. 구역질 나는 개자식. ‘나한테 한 소리지?’ -……. ‘나한테 한 소리 맞는 것 같은데. 시바 저 새끼가 한 말 들었지 현성아? 저 새끼가 형 죽인단다.’ -절대로. 절대로 평범한 모습으로 살려두지 않을 거야. 이 쓰레기 같은 개자식. 평생을 영겁의 고통에서 헤엄치다 죽게 해주마. 평범한 고통이 아닐 거야. 가장 참혹한 모습으로 네 영혼과 육체에 고통을 새기고 유린하겠어. 네가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의 것을…… 그 이상의 것을 느끼게 해주마. ‘들었지? 시바 현성아. 저 새끼가 나 유린한대.’ -네놈만은 기필코 고통스럽게 만들겠어. 기필코! 네놈만은! 네놈만은 용서할 수 없어! 네놈만은! ‘흥분하자너. 무섭자너. 제정신 아닌 것 같자너.’ -듣고 있다면 대답해라! 개자식! 이 구역질 나는 쓰레기 자식! 이기영! 이기영! ‘한마디 해줘야 겠자너.’ “현…… 현성씨.” -두려워 하실 필요 없습니다. 기영씨. ‘역시 우리 현성이 자너.’ -네놈은 존재 자체가 악이야! 존재 자체가 해악이고 해로운 존재야! 이 세상에 네놈 같은 쓰레기가 돌아다닌 다는 것 자체가 대륙의 불운이며 차원의 실수야. ‘조금 더 창의적인 욕 없어? -네놈이 본래 살고 있던 차원이 어째서 네놈을 뱉어 냈는지 알 것 같구나! 알 것 같아! 이 더러운 오염물 자식! 대륙으로 버려진 인간들은 피해자들이다! 네놈을 뱉어내다 실수로 같이 뱉어낸 인간들이겠지. 이 구역질 나는 인간! 네놈은 그 어떤 신에게도 선택받지 못할 것이다. 네놈은 모두에게 버림받아 마땅한 존재야. ‘이건 조금 창의적이다.’ -아니! 네놈은 인간이라고 부르기에도 아까운 존재다. 네놈은 악마보다 더 지독하며 기생충보다 더 남에게 기생하는 법을 잘 알고 있는 구더기야! 나는 절대로 네놈을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절대로! 절대로!! ‘진짜 맛탱이 간 것 같은데.’ 조금 지나치게 흥분하신 거 아닙니까. 거 체통을 좀 지키셔야죠. 아무리 그래도 천사 중의 천사신데. 입이 왜 이렇게 상스러워? -내가…… 내가 네놈에게 속을 줄 알았어? ‘이미 속은 것 같은데.’ -쥐새끼 같은 쓰레기 자식! 더러운 기생충! ‘그만 좀 해. 진짜 왜 그래? 구질구질하게. 저 새끼 한쪽 눈깔 돌아간 거 봐. 현성아 저거 내버려 둘 거 아니지? 그렇지? 소름 끼쳐…… 아으…….’ “아으…….”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형은 너만 믿고 있어. 현성아. 흥분한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비둘기의 모습은 꽤나 우습게 비쳐진다. 솔직히 녀석에게 갚을 빚이 있는 나로서는 이보다 통쾌할 상황은 쉽사리 나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내 목소리를 놈이 들을 수 있다면 실컷 비웃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 내 정신 좀 봐. 비웃어 줄 수 있지? [일반 등급의 강제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비융신! 비유유우웅신!(0/1)] [세라핌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세라핌은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이 개자식! 이 쓰레기 자식! [일반 등급의 강제퀘스트를 생성합니다.] [푸핫푸흐하하하하하핫!(0/1)] -기필코 죽이겠다! 영겁의 고통에서 헤엄치게 해주……. [일반 등급의 강제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야이! 비유우웅신아! 눈깔은 어디다 두고 왔어?(0/1)] -구더기 만도 못한 쓰레기가! [일반 등급의 강제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비유우웅신아! 눈깔은 어디다 두고 왔냐구? 그거 참 아파 보이는데 말입니다.(0/1)] -네 살가죽을 하나하나 벗겨주마. 네 혓바닥을 가장 먼저 뽑은 이후에……. [일반 등급의 강제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신인류계획! 아디오스! 신인류! 야 근데 그 소식 들었어? 케루빔 미국 간 것 같더라고 신인류 계획이랑 같이 미국 갔댄다.(0/1)] -이 개자시이이이이익!!! 결국에 흥분을 참지 못한 녀석이 하늘로 손을 뻗는다. ‘현성아 전투 준비 됐지? 전투 준비 된 거지?’ 머리는 전혀 긴장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몸은 긴장하고 있는 것 같다. 김현성도 그랬고 나 역시 그렇다. 아무래도 온몸에 검이 박혀 있었던 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인 것 같았지만 억지로 걱정을 삼키는 게 정답이다. “질 확률은 없어.” 놈은 강하지 않다. 나와 김현성이 함께라면 절대로 지지 않는다. -심판!! ‘너는 죄가 없어.’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별 의미가 없는 대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내가 도움을 준다고 하더라도 김현성은 자신의 원죄를 외면할 수가 없다. 순식간에 공중에 불어난 검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저절로 입술을 꽉 깨물게 된다. ‘형이 한 발도 안 맞게 해줄 수 있어. 믿지?’ -믿고 있겠습니다. ‘마음 통했네.’ 하늘을 가득 채울 정도로 숫자가 많은 백금색 검들이었지만 공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마치 비를 피하는 것 같은 미션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김현성은 그걸 실현할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갖췄다. 만약 김현성이 저 검에 한 발이라도 꽂힌다면……. ‘내가 개 쓰레기 새끼다. 시바.’ -천벌!!!!! 공중에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검이 무더기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최대한 많은 숫자의 검을 눈에 담는…… 아니,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검을 눈에 담는다. 잠깐 동안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집중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순간적으로 안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기는 하지만 그 생각마저 다른 곳으로 날려 보낼 정도로 집중하고 있는 것만 같다. 시간이 느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계속해서 흘러가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내게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어깨 쪽으로 떨어지는 건 몸을 비트는 걸로 피할 수 있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지. ‘등 뒤쪽으로 떨어지는 것도 보이네. 피할 수 있지? 내가 찍어준 공간 보이지? 거기서 비틀고 저건 쳐내야겠다. 아. 지금 보고 있는 것도 쳐내는 데 그걸로 위에 떨어지고 있는 것까지 튕겨내야 돼.’ 몸을 비튼 김현성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검은색 선이 되어 그림을 그렸던 이 전과는 다르게 땅바닥에 발을 굳힌 채로 계속해서 하늘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전부 다 쳐낼 수 있어. 네가 더 빨라.’ 하늘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검보다 네가 더 빨라. 자세를 유지한 채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이 느껴지는 이 공간에서도 김현성의 검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 타인이 보기에는 희뿌연 보호막이 김현성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심판!! 천벌!!! ‘할 수 있어. 전부 다 보이잖아. 어떤 것부터 쳐내야 하는지 알고 있잖아.’ 녀석은 바닥에서 발을 떼지 않는다. -천벌!!! 천벌!!! 천벌!!! 본인이 저지른 원죄들을 쳐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내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 같다. 실제로 별 의미는 없었지만 뭔가 상징적이잖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지지지직! 콰드드드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주변으로 처박히는 검들은 커다란 굉음을 내고 있지만 아쉽게도 김현성에게 닿는 검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X나 세진 것 같아. 현성아. 그지? 시바 무적이라고.’ 김현성 역시 자신이 만든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날개가 부르르 떨리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환희의 표현일 것이다. 내가 봐도 소름이 돋는 장면이었으니 오죽할까. 산더미처럼 꽂혀 있는 검의 무덤의 한가운데, 아무 상처 없이 서 있는 놈의 모습은 나를 기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반 등급의 강제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비유우우웅신. 그것밖에 안 돼? 벌써 끝났어?(0/1)] [세라핌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세라핌은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 757화 끝으로 (16) > ‘역시 이럴 때가 제일 재미있더라.’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드루와! 드루와! 새끼야! (0/1)] ‘아, 시바. 행복해.’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센 척하더니 속 빈 강정이었네. 별거 아니자나. (0/1)] ‘기분 째진다 진짜.’ 원래 이런 종류의 싸움에서는 먼저 흥분하는 새끼가 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김현성과 녀석의 싸움이 아니라 나와 놈의 싸움이 그렇다. 입이 찢어질 정도로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안 그래도 흥분해 있는 상태에 있는 놈의 속을 살살 긁다 보니 지금까지 머리를 아프게 해왔던 스트레스가 전부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심판은 개뿔. 네가 진짜 뭐라고 되는 줄 알았어? 그런 거 아니야. 눈앞에 있는 걸 봐 병신아. 인간은 저런 모습에 경외감을 느끼는 거야. 너는 날개 달린 버러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덜떨어진 신 흉내 내지 말고 지금부터는 그냥 납작 엎드리기나 하세요. 네? (0/1)] -이… 이 기생충 같은 놈! ‘흥분하면 뭘 어쩔 건데? 응? 네가 뭘 어쩔 거냐고. 우리 현성이 이길 수 있어? 시바? 이길 수 있냐고. 네가 시바 이길 수 있냐고오!’ 울 현성이 좀 봐라. 원래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라고 싸울 때 말 많은 놈들은 도움이 되는 경우가 없어요. 묵직하게 제자리 지키고 있는 놈이 진짜 세 보이기도 하고 실제로도 세잖아. 너랑은 종자 자체가 달라요. 근본이 다르다고. 근본이. 네가 뭐 대단한 놈이라도 되는 양 생각 하지 마. 무척이나 흥분한 얼굴로 다시 한번 손을 뻗는 녀석이 보였지만 한 번 막힌 공격이 유효타로 들어갈 리가 없었다. 패턴 파악이 끝났다기보다는 스펙의 우위로 찍어 눌렀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만약 다른 패가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녀석의 처형은 그저 떨어질 뿐인 공격이다. 무수히 많은 숫자의 검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한 목표물을 향해 떨어진다는 것밖에는 없다. 이전과 다르게 현재의 김현성은 그 검을 인지하고 피할 수도 있고 막아낼 수도 있다. 걱정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이지 않은가. ‘방심은 금물이기는 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다른 패턴을 추가할 것이다. 이른바 2 페이즈로 진입했다고 판단해도 되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백금색의 검을 뽑아 들기 시작. 접근전이 약할 거라는 선입견을 품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선입견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사실상 거리가 의미가 없기는 해.’ 어차피 놈은 하늘 위에 떠 있는 검들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저 검은 세라핌을 노리지 않는다. 심판과 처형이 김현성에게 들어갈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하겠다는 거겠지. 아까보다는 더 까다로워질 것 같기는 했지만 전처럼 긴장되지는 않는다. 나는 김현성이 뭘 할 수 있을지 알고 있고, 녀석이 지지 않을 거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조금 복잡할 거야. 그래도 한 가지만 기억하면 돼. 처형이 떨어지는 순간 거리를 좁히면 한 타이밍을 벌 수 있는 거. 내 생각 이해하고 있지?’ 단언컨대 무수히 떨어지는 검의 파도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세라핌을 방패로 삼으면 돼.’ 새로운 패턴이 생기면 새로운 공략법을 찾으면 그만이다. 이 공략법이 정답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내 확신은 김현성이야.’ 사랑스러운 회귀자라면 가능하다. -이이익! 잔뜩 흥분한 채로 검을 휘두르는 세라핌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김현성 역시 최대한 집중하는 것 같은 얼굴로 녀석과 검을 맞대고 있다. 세라핌의 신체 능력에 커다란 압박감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계속해서 놈이 쏘아내고 있는 검의 파도에는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김현성에게 직접적으로 상처를 입히겠다기보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처형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게 하겠다는 심산, 실제로…. ‘쉽지는 않네.’ 한 발을 허용하면 다음을 허용할 확률이 높다. 다음을 허용하면 그다음을 허용할 확률이 더 높아진다. 마치 도미노가 무너지듯 연쇄적으로 무너질 확률이 높다는 거다. 그래도. “실수하면 안 됩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기영 씨. 김현성은 침착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검을 휘두르는 세라핌의 검을 막은 이후에는 곧바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을 쳐낸다. 계속해서 발을 놀리며 공간을 찾아낸다. 순식간에 날개를 펼치며 김현성에게서 멀어지는 세라핌의 모습을 확인한 이후에는. ‘뭐해. 붙어야지. 검 날아오잖아.’ 곧바로 날개를 펼치고 세라핌에게 근접하는 김현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회귀자를 노리던 심판의 검들이 어느새 공중에 우뚝 멈춰 선 것이 보인다. 세라핌이 입술을 깨물고 곧바로 김현성을 밀어냈지만. ‘시간 벌었지?’ 김현성이 검으로 원을 그리며 쏘아지는 공격들을 모조리 쳐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화살도 쏘시네요. 이거 히든 패턴 맞지? 그렇지?’ 녀석이 쏘아 보낸 한 발의 화살이 김현성이 만든 검의 원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지만. ‘봤지?’ 김현성이 고개를 비틀어 머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화살을 피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시바 흉터 남겠자너.’ 뺨 한쪽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커다란 문제는 아니다. -괜찮으십니까? “통각 차단해서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보다 집중하세요. 집중력이 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네가 나한테 죄송할 필요는 없지. 다치는 건 내가 아니라 넌데. 그래도 긴장을 너무 풀지는 말자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지직!! -처형!!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움직이겠습니다. 퍼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처형!!!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무대는 땅바닥에서 하늘 위로. 공중에서 선이 되어 계속해서 부딪치는 둘의 모습, 검의 파도는 계속해서 김현성의 뒤를 쫓고 있지만 단 한 자루의 검도 허용하지 않는다. ‘집중.’ 힘내라 현성아. 시바, 너만 싸우고 있는 게 아니야. 나도 싸우고 있어.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어차피 넌 덜떨어진 새끼야. 내 그림자나 쫓고 있었던 멍청한 새끼잖아. 그렇지 않아? (0/1)] -닥쳐! 닥쳐어!!!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숨기려고 해도 눈에 보이는 게 있는 법이야. 나는 네 추악한 욕망이 뭔지 알아. 세라핌. 네가 누구를 닮고 싶어 했는지도 알고 있고, 실제로 누구를 흉내 냈는지도 알 수 있다니까? 푸하하하핫! 어때? 즐거웠어? 조금이나마 네가 이상으로 생각했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이었어? (0/1)] -닥쳐라! 이기영! 그 입 다물어!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비유우웅신아. 너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가면의 영웅이 될 수 없어요. 아무리 애써봐도 카피캣은 카피캣이야.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인간이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넌 인간이 아니기는 하지만 내가 볼 때는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본질은 변하지 않아. 너는 영원히 1회 차의 세라핌일 거다. 추하고 질투심 많으며 역겨운 비둘기. (0/1)] -닥쳐! 닥쳐어어어어어어어!!!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지나치게 흥분했죠? 울어? 너 우냐? 푸하흐하헤헤헷! 울어요? 울어? (0/1)] -닥치라고!!!!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가면의 영웅은 절대 흥분하지 않아요. 비둘기. 롤모델로 삼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조금 더 확실하게 배웠어야지. (0/1)] -이 더러운 배신자! 추악한 기생충! 차원이 뱉어낸 쓰레기가! 누, 누가 네놈을… 흉내 냈다는 거냐!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누구기는 누구겠어. 너지, 너. 세라핌. 그리고 누구보고 배신자라고 지껄이는지는 모르겠는데 애초에 가면의 영웅은 배신자였던 적도 없었어. 처음부터 인류를 위해 싸우는 영웅 중에 영웅이었다고. 시바. 어디서 배신자라는 말을 입에 담아? 진짜 배신자는 네 형제를 저버린 너야. (0/1)] -그 혓바닥을 뽑아주마. 기필코 네놈의 혓바닥을….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스스로의 모습이 그렇게 싫었어? 내 흉내를 내고 싶을 만큼 네 모습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우리 불쌍한 세라핌. 자존감도 낮은 우리 불쌍한 비둘기. 보지 않아도 네 1회차 때 모습이 어땠는지 알 것 같다.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거야. 응? (0/1)] -이기영… 이기영… 이기영!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흥분할 필요도 없어. 세라핌. 그게 원래 너희의 모습이잖아. 내 말이 틀려? 네가 스스로 흉내 내고 만들어낸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들, 전혀 이상 할 것도 없지 않아? (0/1)] -이기영!!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너희들은 원래 만들어진 놈들이잖아. (0/1)] 놈이 우뚝 움직임을 멈춘 것이 눈에 보인다. ‘팩트가 너무 세게 박혔어요?’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인간과는 다르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놈들이잖아. 그래서 인간들을 질투하고 부러워했던 거잖아. 그들을 관리하겠다고, 그들의 위에 서겠다고 말하고 다닌다는 것부터가 자기방어야. 인간들보다 너희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네놈들 스스로 만들어낸 방어기제였다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망가질 것 같으니까. 목적을 찾아가면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부러워 미칠 것 같으니까. 너희 비둘기들은 스스로를 과대 포장했던 거야. (0/1)]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모습도 눈에 비친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세라핌. 너는 원래 태생이 그래. 만들어지고. 푸핫! 또 만들어지고! 푸흐흐하헤헷! 또 만들어진 불쌍한 비둘기. 푸흐하하하핫! 하하하흐허헤헷! (0/1)] 심지어 궁지에 몰린 것 같은 얼굴도 눈에 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이다. ‘봤지? 현성아. 형도 시바, 열심히 싸우고 있어.’ -닥, 닥… 닥쳐… 닥치라고….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너는 나를 차원이 뱉어낸 쓰레기라 평가했지만 아무런 차원에도 선택받지 못한 진짜 폐기물들이 너희들이야. 비유우우웅신아. 이 세상, 아니, 대륙 전체, 아니, 차원 전체를 뒤져봐도 네놈들을 사랑하는 이들은 존재하지 않아. 너희들은 피조물로 치지 않거든. 그렇지 않아? 누가 조립된 놈들을 사랑하겠어? 누가…푸… 푸흡. 조립된 놈들을 상대로 진지하게 그런 걸 생각하겠냐고. 푸흣… 푸… 푸하하헤핫! (0/1)] 너무 딜을 세게 박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기는 하네. 왠지 내가 악당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시바. 세라핌이 주인공이었으면 조연 동료가 나와서 외쳤겠지. 아니야! 시바! 우리들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하면서 세라핌한테 용기도 주고 살아갈 이유도 줬겠지만 어쩌겠어. 저 새끼가 빌런인데. 그렇게 말해줄 수 있는 애들도 전부 미국 갔잖아. 아 근데 너무 심했나 보다. 쟤 저러다가 자살하는 거 아닌지 몰라.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너희들은 너희를 만든 이들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있어. 불쌍한 세라핌. 우리 가여운 세라핌. 너희들이 어째서 인간 흉내를 내는지 알려줄까? 솔직히 정답인지 확신은 못 하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 어쩌면 너희들의 창조주가 네놈들을 사랑해 줄 거라는 무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거. 코미디가 따로 없지? (0/1)] -……. 녀석이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과 심판과 처형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부터도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로 다가올 진데 팩트로 정신을 두들겨 맞으니 멘탈이 많이 망가진 모양.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는 동공은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건 안 좋은데….’ 다른 건 몰라도 아마 한 가지는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얄미운 놈에게 한 방 먹여주고 말겠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지 않을까. ‘그 정도도 생각 못 할 정도로 병신은 아니지? 그래도 가면의 영웅한테 배운 게 있기는 있을 거 아냐. 한 방 먹었으면. 한 방 먹여줘야지? 그렇지?’ 암만 저놈이 모지리라도 그 정도 머리는 돌아갈 것이다. 분노로 잃었던 이성이 되돌아오면 무엇이 합리적인 선택인지 인지하게 될 것이다. 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였을까. 천천히 숨을 고르는 세라핌의 모습이 보인다. 김현성을 바라보며 즐겁게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그래. 네 역할은 그거야.’ 무대는 얼추 마련됐고, 개연성 역시 충족됐다. 세라핌은 김현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비위도 좋구나. 불쌍한 인간. ‘옳지.’ -자신의 삶을, 영혼을, 모든 걸 망친 인간을 진심으로 따르고 있다니 정말로… 비위도 좋아. < 758화 끝으로 (17) > ‘이 머저리 같은 놈이 드디어 해냈구나. 드디어 해냈어.’ 드디어 내게 한 방 먹일 방법을 찾았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는 세라핌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그래. 너는 자격 있다. 진짜.’ 녀석은 저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을 자격이 있다. 첫 단추를 조금 잘못 끼우기는 했지만 지금에 와서라도 본인의 역할을 깨닫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곧바로 열심히 노력해주고 있는 세라핌을 독려하고 싶었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 리 만무,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포문을 열기는 했지만 이번 작업의 빌드업은 지금까지 해왔던 그 어떤 작업과 비교해도 어렵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힘든 작업이었으니까. 어째서냐고? 그야 뻔하자너. ‘믿을 리가 없지. 뭐.’ 김현성이 녀석이 되는 대로 지껄이는 말을 쉽게 믿어줄 리가 없다. ‘상식적으로 저게 귀에나 들어오겠어?’ 내가 스스로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믿어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몇 년 전에 김현성이었다면 티끌만 한 의심이 가슴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겠지만, 묘령의 여인이 해준 조언과 노을로 정화된 우리의 빛현성이의 따뜻한 가슴 속에 마구니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최소한 무의식 세계에 합의를 본 순간부터 이기영이 가면 쓰레기라는 공식은 녀석 안에서 절대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다. 충신들이 궁궐 앞에 모여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그자는 전하를 망치고 있는 간신이옵니다!’라고 상소문을 올리며 버티기에 들어선다고 한들 김현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러할진대, 그러할진대 평생의 숙적이라고 한 비둘기가 지껄인 개소리를 믿는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가. ‘개소리죠.’ 당연히 개소리로 들리겠죠. 최소한 ‘그게 무슨 소리지?’ 또는 ‘뭐라고?’ 따위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던 세라핌 역시 입술을 꽉 깨물기에 여념이 없다. 아예 반응조차 하지 않는 모습은 가관, 세라핌의 말을 듣기는 들은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와… 이거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냐. 라핌아,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아마 세라핌 역시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을까. ‘뭐 어쩌겠어. 일단은 밀어붙여야지. 마침 전투도 소강상태에 들어간 타이밍이잖아. 이런 타이밍 잘 안 온다고. 조금 더 해봐.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설마 모르고 있었던 거야? -개소리에 대답해 줄 시간 따위는 없다. -나는 네 인생을 망가뜨린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 너도 사실은 알고 있을지도 몰라. 단지 부정하고 있을 뿐이지. 불쌍한 김현성. 불쌍한 알타누스의 회귀자. 너도 사실은 알고 있잖아? ‘아니, 시바,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잘 좀 해볼 수 없어?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얘가 어떻게 받아들이겠어.’ -우리와 함께 한 가면을 쓴 남자가 누구일까? ‘아, 이 새끼 틀린 것 같은데. 졸라 못하자너. 말에 두서도 없잖아. 시바.’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줘도 알아들을까 말까 한 상황에서 저따위 말을 지껄이는 걸 보니 희망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우리가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이 아니야. 김현성. 그가 우리에게 손을 내민 거지. 그는 우리와 함께하고자 했어. 함께 손을 잡고 인류를 정화하고, 관리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고 말했지. 그는 자신이 우리에게 선택받은 인간이라고 이야기했어. 앞으로 우리가 관리하게 될 세상에 일원으로써 살아가겠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지. 지금의 인간들은 잘못됐다고. 썩어 문드러지고 오염됐다고. 그들에게는 통제가 필요하며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 ‘그래 그런 식으로 빌드업 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히 김현성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잠깐 체력을 회복하겠습니다. ‘그래. 체력 회복 많이 해놔.’ 진실을 듣고 있는 김현성보다 진실을 말하고 있는 세라핌 쪽이 더 절박해 보인다. 믿어달라고 외친다기보다는 뭔가 본인이 말하면서도 울컥울컥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새 말투도 조금 달라진 것 같다. 목소리 톤이나 어조 같은 것들이 뒤죽박죽이 바뀌고 있다. 본래의 모습이 얼핏 얼핏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내게 있어서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조금 더 강한 어조로. 시바, 확신의 찬 어조로 말을 해야지. 저게 뭐야. 시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우물쭈물거리기나 하고… 저러면 시바 현성이가 퍽이나 믿어주겠다. 시바.’ -……. -그래. 그 쓰레기 같은 가면을 쓴 남자의 말대로, 그는 새로운 대륙에서 살아가기 위해 적합한 인간처럼 보였… 보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헌신적이었고, 때로는 순수했으며 때로는 과감하기도 했지. 그는 결단을 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 그… 그 누구보다 우리를 더 잘 이해해 주고 있는 것처럼… 아니 그때는 틀림없이 우리를 이해해 주고 있었다. 우리를… 여기서부터는 너도 아는 이야기일 거야. 김현성. -……. -그는 인류를 파멸시켰다.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지. 인류에게서 대마법사를 빼앗고, 그들을 분열시켰다. 그는 개체 수를 줄인다는 과업에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임했던 거야. 너희들의 저항은 거셌지만 너희들 역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거야. 그렇게, 그렇게 매번 너의 앞을 가로막고 네게 절망을 선사한 이가 누구인 것 같아? -……. -나도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아. 김현성. 어째서 그가 우리에게 와서 인류를, 아니, 대륙을 부숴버린 건지, 그의 진짜 목적이 뭔지. 이제는 알 것 같아. ‘조금 횡설수설하고 있기는 한데 전달력은 괜찮아졌어. 가면의 영웅한테 말하는 법은 안 배웠어?’ -그자는 새로 시작하기를 원했던 거야.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거라고.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어. 그는 너를 선택한 거야. 김현성.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는 계획에 너를 끌어들였지. 대륙을 관리하는 신들이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대륙을 부숴버린 이후에 너를 자신의 장기 말로 사용하기로 결심한 거야. 시련을 내리고 짐을 떠안겼지. ‘점점 더 괜찮아지고 있네. 이거 응원하면 상태 더 좋아지기는 하는 거지?’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너…. (0/1)] 일단은 당황하는 척해줘야지. 그래야 자신감 팍팍 살아나잖아. 아니나 다를까 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 놈의 모습이 눈에 띈다. 메시지를 받은 이후에는 뭔가 여유를 찾은 것만 같다. 본인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게 커다란 타격이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한 번 더 메시지를 보내도 괜찮겠지.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그만…. (0/1)] ‘키야. 이거 좋다. 그만.’ -모든 건 자기 자신의 추악한 욕심을 위해서였을 거야. 김현성. 그자에게 너 같은 종류의 인간은 다루기 쉽게 느껴졌을 테니까. 나는 너보다 그자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생각해 봐. 누군가를 회귀시킨다는 게 쉬운 일인 것 같아? 정말로 이 대륙을 관리하고 있는 신들이 이 커다란 리스크를 떠안고 너를 회귀시켰을까? 어째서 마지막에 너만 남겨졌을까? 어째서 네가 움직이는 곳에 그가 있었고, 어째서 너는 그 커다란 절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했을까. 어째서 안 좋은 일은 항상 너에게만 일어났고, 어째서 네 주변의 모든 사람은 차례차례 죽어갔을까. 어째서 너는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했을까. 어째서 네 두 번째 시작에는 그가 함께하고 있었을까. 모든 게 이상하지 않아?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제발 그만…. (0/1)] -그자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야.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어. 그는 누구의 편도 아니고 누구의 아군도 아니야.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지독한 인간이야. ‘이 새끼 나쁘지 않네.’ 진짜로 잘해주고 있는 것 같아. 칭찬받아야 좀 살아나는 타입인가 봐. 화술이 좋다고 콕 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뭔가 목소리에서 진실 됨이 느껴진다. 심지어 일이 어떻게 된 건지에 대한 걸 순간적으로 캐치해 내는 능력도 좋은 것 같다. 가면의 영웅의 참된 의도와 정확히 김현성이 어떻게 회귀했는지에 대한 경위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녀석이 저 정도까지 해줬다는 건…. ‘진짜 힘 제대로 줬나 보네.’ 녀석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 거라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욕심을 위해 너를 선택한 거야. 모든 이들을 손으로 주무르고 자신이 원하는 데로 움직이게 만드는 악마. 가면을 쓴 남자. 그 남자의 정체가 누구인지 궁금해? -……. -네게 지금 말을 걸고 있는 그자잖아. 네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그자라고. 이제 알겠어? 이제야 이해가 돼? ‘아니. 시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세라핌이 나빴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조금 더 차근차근히 풀어나가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기야 했지만, 이 정도라도 해준 게 어딘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일단 자신이 말하고 싶은 건 전부 토해낸 것 같이 보이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핵심을 잘 꼬집어 이야기했다. 이기영이 가면을 쓴 남자였고, 그 목적이 너를 회귀시킨 것이라는 거까지 설명을 마쳤다. ‘뭔가 감정에 호소하는 것 같은 느낌도 마음에 들기는 했었는데.’ 결과물은 아웃이라는 게 문제였지. -거의 다 회복한 것 같습니다. 기영 씨. 다시 가도 되겠습니까? ‘이 새끼 한 귀로 듣고 그냥 한 귀로 흘린 것 같은데. 제대로 들은 건 맞는 거지? 확실히 듣기는 들었지?’ 듣기는 들었다만 재고해 볼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말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너무나도 굳건한 믿음에 나 역시 내가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래, 시바, 나라도 안 믿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미친 비둘기가 전투 중에, 그것도 지가 밀리니까 입 터는 느낌인데 저걸 누가 믿겠어?’ 하지만 김현성은 믿어야 한다. 무조건 믿게 될 것이다.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전투 외 부분에서 건드리는 건 조금 찝찝한데. 윤리적으로도 조금 그렇고… 막 내가 현성이를 함부로 쥐락펴락하고 조종하고 그러는 것 같아서….’ 그래도 대의를 위해 이번 한 번은 예외를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카스가노 유노가 보여줬던 풍경이 실제로도 아른거리는 타이밍. 김현성은 여기서 번쩍하는 뭔가를 얻어 가야만 했다. ‘움직일 수 있어.’ 회귀자 사용설명서는 김현성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종할 수 있다. 녀석이 찬반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움직이게 유도한다면 녀석은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네. 곧바로….” 일단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너무 갑작스럽게 커다란 게 들어서면 이상할 수도 있으니까 머릿속에 아주 작은 의심을 키우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때랑 똑같은 거야. 현성아. 딱 그 정도. 노을로 합의 보기 전에 했던 아주 작은 의심 있잖아. 내가 그걸 심어 줄게. 정황상 세라핌의 힘찬 연설을 듣고 마구니가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되겠네. 그렇지? -어? 하는 소리와 함께 김현성이 잠깐 머리를 부여잡는 것이 보인다. 무척 당황하고 있는 얼굴이 눈에 띈다. 무슨 이미지를 떠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가면의 영웅과 겹쳐 보이는 이미지일 것이다. 최대한 순진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야지. “왜 그러십니까? 현성 씨?” -네… 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지는 않잖아. 솔직히. 세라핌 너도 가만히 있을 거야? 한마디 더 해줘야지.’ -진실이 뭔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해. 김현성. 그자는 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야. -……. -내 말이 진실이라는 거 눈치채고 있잖아. -그 입 다물어라, 세라핌. ‘진전이 있었죠?’ 아예 상대 자체를 하지 않았던 전과는 다르게 세라핌의 말에 민감한 것 같다. 이쪽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은 지금 무서워하고 있다. 자신이 녀석의 궤변에 흔들리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말을 걸어오는 모습마저 눈에 띈다. -기영 씨… 혹시 제게 정신착란 마법이나 비슷한 종류의…. “그런 전황은 없습니다. 현성 씨.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기영 씨. 죄송합니다. ‘뭐에 대한 사과야?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거? 아니면 현재 상황에 집중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거? 전자면 굳이 사과할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나는 네가 날 의심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상태인데.’ 김현성은 살짝 떨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다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양옆으로 계속해서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녀석의 머릿속에 다시 한번 의심을 한 스푼 집어넣었다. ‘현성이 멘탈 괜찮은 거지?’ 하지만 지독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자기혐오에 둘러싸인 녀석을 느끼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결국에는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759화 끝으로 (18) > ‘아, 이 새끼 멘탈 안 괜찮나?’ 힘내라, 김현성. 시바. ‘진짜 안 괜찮은 것 같은데.’ 혼란스러운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뭐라 설명하기도 힘든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우리 회귀자를 덮치고 있는 게 느껴진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수만 마리의 구더기들이 온몸을 갉아먹는 듯한 감각이 느껴질 정도. 녀석은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있었고 현재의 상황을 무척 혼란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너무 과민반응을 하는 것 같아 내가 다 민망하기는 했지만…. “…….” ‘당연한 건가.’ 김현성의 여기까지 온 과정을 떠올려보니 딱히 이상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말 그대로, 2회차 김현성의 성장과정은 실상 빛기영과의 유대를 메인으로 삼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육체적인 성장도 성장이지만 메인은 역시 정신적인 성장이 아니었던가. 매섭게 불어오는 북풍처럼 차가웠던 김현성의 심장을 사르르 녹여 버린 빛 중의 빛, 그 누구보다 따뜻했던 ‘그 녀석’이기영. 그 녀석은 항상 사건에 중심에 있었고 김현성의 얼마 남지 않은 인간관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한때는 서로를 오해하기도 했고, 의심하기도 했고, 적으로도 만나기도 했지만 종국에는 가장 신뢰하던 관계로 발전해 김현성의 성장과 새로운 인격 형성에 기여했다. 이는 심료 치료의 일환이기도 했고 1회 차에서 마모된 김현성에게 진실된 관계가 무엇인지 친절히 알려주는 교육의 과정이기도 했다. ‘그래. 시바. 맞지. 그럴 만하지.’ 영혼의 교감까지 나누며 모든 의심을 날려버리지 않았던가.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쓰레기가 아닌가 생각해 봄 직하다. 이미 털어냈다고 생각한 의심이 다시 생겨났을 때의 녀석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은인 아니야?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 없는 거 아니냐구. 아니, 정신적인 생명의 은인이지. 솔직히 내가 현성이 멘탈 심폐소생술 했자너. 시바 2회 차를 막 시작했을 때 김현성 눈빛 생각해 봐. 사람 하나 살리고 치료까지 해주고 병원비까지 내준거지. 근데 의심하고 있는 거자너… 얼마나 자괴감이 들겠어?’ 동공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고 있지 못하는 것만 같다. 원래 멘탈이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인다. 검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고 억지로 입술을 꽉 깨문 것도 눈에 띄었다. 이렇게라도 멘탈을 부여 잡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중요한 시기니까. 그럴 만도 하다. ‘아, 이거 시바 이대로 진행하는 게 맞나? 솔직히 전쟁은….’ 유리한 상황이기는 한데…. “현성 씨?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 “현성 씨?”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미 중요 비둘기들은 전부 미국 갔고, 병력의 컨디션도 나쁘지 않은데… 김현성 이 새끼 이러다가 정신병 걸리면 어떻게 해? 물론 갑작스럽게 전황이 바뀔 가능성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걸 위해 김현성에게 정신병을 선물하는 게 맞는가 하는 생각도 들어와 꽂힌다.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할 정도로 녀석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게 끝이라면 이기영이 그런 설계를 할 리가 없지.’ 정말로 이게 끝이었다면 루시퍼와 내가 의미 없는 내기를 할 이유가 없다. 뻔하지 않은가.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지금 하고 있는 전쟁 이후에 뭔가가 더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물론 확실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 볼만 하지 않은가. 비둘기들이 끝장난 이후에 진 비둘기 보스가 나타날 수도 있고 비둘기 부모님이 나타날 수도 있다. 갑자기 대륙이 붕괴될 수도 있고, 내가 상정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이 루시퍼와 계약을 한 것으로 모자라 쓸데없이 배때기를 내어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장 확률이 높은 건… 놈들의 창조주?’ 바깥 세계의 신. 비둘기들처럼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 정말로 완전무결한 존재. 까놓고 말하면 루시퍼가 커버 쳐 주지 않으면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는 괴물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내가 걸어놓은 안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무시할 정도로 간이 크지는 않다. 잠깐 동안 내적 갈등을 겪기는 했지만 역시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기영은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나라고 왜 우리 회귀자의 정신 건강을 걱정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와서 물리기에는…. “너무 멀리 왔어.”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렇게 계속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와중에, 유일하게 즐거운 녀석이 하나. -이제야 기억이 난 건가? -……. -너는 부정하고 있을 뿐이야. 김현성. 받아들이는 게 네게도 이롭지 않을까? 그자는 네 구원자가 아니야. 네 영혼을 비틀고 쥐어짜 내는 악마 그 자체야. -……. -네 입으로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거야. 그 악마는 지금도 너를 손바닥 위에 올리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걸. ‘이건 좀 찔리기는 하네.’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어. 너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어. 네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 내 말이 틀려? ‘물 만난 물고기 수준이네.’ 본인의 웅변이 김현성에게 먹혀들고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모습이 우습기는 했지만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여기서는 나도 조금 도움을 줘야지. “현성 씨? 지금….” -기영 씨가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네… 기영 씨가 신경 쓰실 일은… 일단 체, 체력 회복은 마쳤으니 곧바로…. -시선을 돌린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잖아. 너 자신에게 직접 물어봐. 1회 차에서 네 인생을 쥐고 흔든 자가 누군지, 네가 그렇게 증오하던 녀석이 누군지, 네 동료들과 대륙의 인간들을 학살하고 네 영혼을 무너뜨린 자가 누군지. 네 삶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휘두르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끝까지 너를 기만하고 속인자가 누군지. 네 자신한테 물어보라고. 여기서 의심 한 스푼 더 넣어줘야겠네요. -닥… 닥쳐.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네 진짜 적이 누구인지 응시해! -닥… 닥쳐어!!! 김현성이 검을 쥐고 날아오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순식간에 공중에서 한차례 맞붙은 녀석들은 계속해서 공중에서 선을 그리며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별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세라핌은 지금 이 상황이 내게 엿을 먹일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김현성 역시 계속해서 마음이 흔들리는 상황이다. 내가 계속해서 집어주고 있는 포인트도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지 움직임 역시 엉망진창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세라핌을 압도하는 걸 보면 확실히 육체적으로는 완성이 된 모양, 심지어…. ‘시바, 세라핌 저러다 죽는 거 아닙니까?’ 물론 저 새끼는 죽어야 되는 비둘기가 맞지만 자기 역할은 확실하게 하고 가야지. 김현성의 마음속에 있는 의심이 확신으로 만들어야지. 조금 문제가 있기는 한데…. ‘아… 이거 생각보다 어렵네.’ 이 의심을 완벽히 뿌리 내리게 하기가 쉽지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흐윽… 그런 생각한 적 없어. “현성 씨?” -믿어주세요. 저는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정, 정말… 정말입니다… 끅….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래도 제… 제 머릿속에 누가 들어온 것 같아요. 뭔가. 뭔가가 이상합니다. 기영 씨. “확인이 되는 건 없습….” -내 머릿속에서 나가! 흐윽… 이 개자식! 이 더러운 자식! ‘네 머릿속에 있는 거 난 거 같아….’ -흐윽…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야! 세라핌은 한 번 외쳐줘야지. -눈을 떠라! 김현성! -닥쳐! 닥쳐어!!!! 아니에요. 아니야! 내 머릿속에서 나가! 제기랄! 나가 루시퍼어!!! ‘루시퍼 아니야. 나야.’ 무식하게 검을 휘두르고만 있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 모습이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비참해 보이는 상황이다. 솔직히 저걸 보고 있기도 쉽지가 않다. -저는 의심 따위는 한 적 없습니다. 저는… 정말로 의심 같은 걸 한 적이 없어요. ‘괜찮은 거 맞지?’ 회귀자 사용설명서에 저항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걸 저항하는 게 가능할 거라고는 진심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흐윽… 끅…. ‘거부 하지마. 현성아. 받아들여야 돼. 너도, 시바, 뭐라고 말 좀 제대로 해봐. 이 미친 비둘기야.’ -받아들여라! 김현성! ‘시바. 그렇게 뻔한 대사만 지껄이지 말고 좀.’ 녀석에게는 뭔가 기대하기가 힘들다. 계속해서 녀석과 부딪치던 김현성이 움직임을 멈춘 것은 내가 한 번 더 의심을 집어 넣었을 때였다. ‘저항하지마. 제기랄.’ 이대로 가면 정말로 김현성이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다급 해진 그때. 갑자기 자신의 왼쪽 뿔을 붙잡은 놈이 시야에 들어온다. -제길! 제길! ‘뭐 하는 거야. 너.’ “너 뭐 하는 거야… 야….” -제기랄… 제길! “너 이 미친 새끼야! 뭐하고 있는 거야?” -제기일!!! 김현성은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놈이 지금 뭘 하려고 하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힘이 들어간 팔이 눈에 잡힌다. 으직으직거리는 징그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웬만한 고통에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 김현성이 기괴한 비명을 내뱉고 있다. 통각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김현성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전해져 온다. 하지만 녀석은 이전의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 광경을 본 세라핌의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진다. 저도 모르게 김현성이 내뱉는 비명이 주는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다. “하지 마, 이 병신 새끼야! 하지 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광경. 결국에는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김현성의 왼쪽 머리에 있는 뿔이 그대로 뽑혀 나갔다. -허억… 허억… 허억…. 거대한 뿔이 뽑혀 나간 자리에서는 피가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다. 김현성의 반쪽 얼굴을 완전히 뒤덮은 혈액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방금의 광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지고 초조해진다. 땀으로 범벅이 된 김현성은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 내 머릿속에서 나가. 루시퍼. 나는 의심하지 않아… 나는…. “이 미친 새끼….” -나는… 저는 의심한 적 없어요. 믿어요. 이, 이전에는 그랬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믿어요. 믿어요. 믿어. 나는 믿어. 나는 믿어…. ‘시발… 이거 어떻게 하지? 진짜 그대로 가는 게 맞아? 그대로 가야 돼?’ -이제는 알아요. 이제는…. ‘어떻게 해? 어떻게 하지? 시발… 시발… 이걸 어떻게 해? 개 시바… 개 시발…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진짜 이렇게 될 줄은 예상 못했는데. 진짜….’ 여전히 녀석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의심에 저항하고 있다. 방금의 행동으로도 의심이 사라지지 않자. 결국에는 남은 오른쪽 뿔에도 손을 가져다 대고 있다. -내… 내 머릿속에서 당장 사라져. 루시퍼. ‘어떻게 해? 어떻게… 어떻게… 시바, 이거 어떻게 하냐고. 시바… 어떻게 해?’ -나가으… 으으윽…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녀석이 우뚝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 760화 끝으로 (19) > “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확실하게 뿔을 잡아당기지 못하는 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으아아아아아악… 아… 아아… 흐윽… 아아아악!” 심지어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아직까지 확실하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 비명 소리에는 반응하고 있다. 눈이 커다랗게 변하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아… 으… 아아….” ‘시바, 새끼야.’ 무척이나 리얼한 울음소리와 고통에 찬 비명이 그대로 전해지지는 않을까. 아직까지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마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 네 생각이 맞을 거야.’ 통각 공유를 차단할 수 있다는 게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김현성이 깨닫지 못할 리가 없다. 눈치가 없기로 유명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깨달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회귀자가 전투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까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 녀석’의 배려. 자신의 고통을 참아가면서까지 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그 녀석의 희생. 아니나 다를까 흠칫거리고 있는 모습이다. 절망으로 가득 차 있는 감정은 녀석이 입을 떼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기… 기영 씨? “…….” -기영 씨? 괜찮… 괜찮으십니까? 기영 씨? ‘제정신인 건가?’ 솔직히 모르겠다. 그냥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일지도 모르지. 일단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맞다.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다시 의연하게 말을 잇는 모습을 선보이는 게 무난한 행동이지 않을까. 여기서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게 정답인지 결정을 내리는 것에 시간이 걸린다. 일단 김현성이 반병신이 되는 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으니까. 그만큼 나도 절박했었고…. 김현성이 느끼고 있는 통증은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육체적인 고통도 육체적인 고통이지만…. ‘문제를 그렇게 해결하려고 그러면 안 되지.’ 그렇게 막 자해하고 뿔 뽑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거 뽑은 다음에도 해결 안 됐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그다음에는 날개도 뜯으려고 했어? 그다음에도 안 되면 뭐 어떻게 할라구. 그런 거는 도움이 안 된다니까. 그런 행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안 돼요. 시바 그냥 받아들이는 게 차라리 편하다고. 애초에 마음속에 싹트고 있는 의심을 네가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찍어 눌러야 돼.’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찍어 누르는 게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녀석에 괜한 짓을 할 수 없게 제대로 찍어 눌러야 한다. 방법이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해야 돼.’ 아니, 사실 어렵지도 않다. 악마들이 한 인간을 타락시킬 때와 마찬가지다. 인간의 가장 약하고 괴로워하는 부분을 끊임없이 파고들고 파고들고, 또 파고든 다음, 저항할 수 없는 상태까지 내몬 이후에 완전히 먹어버리는 거지 뭐. 물론 나는 김현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기야 하지만 여기서는 그들의 방법이 더 잘 통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현재 김현성이 가장 괴로워하는 부분이 뭐지? 뻔하지 뭐. 죄책감? 더 어두운 곳으로 끌어내리자. 조금만 더 아픈 척하고 괜찮은 척하면 되는 거야. “아…. 하아… 아….” -괜… 괜찮으십니까? 기영… 기영 씨? 지금…. “하… 으… 아….” -기영 씨… 통각이… 통각이… 아… 제가… 제가…. “아….” -…….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네? 네… 어… 네… 흐윽….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지금 그쪽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저도 느껴지는 게 없어서… 뭔가…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이 맞다면… 제가 직접 현성 씨의 상태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머리는… 머리는 괜찮으십니까? “통각을 차단해 놓은 지 오래됐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네. 하아… 하아… 현성 씨는… 현성 씨는 괜찮으신 겁니까? 일단은… 일단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정말로 정신 계열의 마법이… 하윽… 현성 씨는 지금….” -기영 씨? 기영 씨? “…….” ‘나는 리얼루 아무렇지도 않은데. 넌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저는… 네. 저는… 흐윽…. ‘얘가 얼마나 고통에 익숙하면 진짜 저래요? 뭐 저래?’ -저는…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흐윽… 네. 딱 생각하고 있었던 그대로 였다. 굳이 의식을 유도할 필요도 없이 녀석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놈이 자신의 머리에 붙어 있는 뿔을 떼어낸 것은 루시퍼에게 저항하기 위한 의미라고 판단해도 되겠지만 실상은 자해라고 봐도 무방한 행동이었다. 자기혐오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 거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본인을 상처 입히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게 해를 끼친 셈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김현성이 점점 가라앉는 것인 느껴진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었다면 지금은 그 해결책마저 막혀 있는 상황. 김현성은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현재의 상황을 어떤 방향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려다가도 멈칫거리고 있었고, 유일하게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 막혀 버리자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막말로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한 단계 성장을 이룩해 냈던 김현성은 없다. 스스로 루시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희생하는 영웅으로 발돋움했던 김현성은 이미 자리에 없다. 건드리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모래성만 자리해 있었다.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덜덜 떨리는 입과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눈에 띈다. 뭐라고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하고 있다. 김현성은 망가졌다. “저는… 저는… 현성 씨를 믿고 있습니다.” 그 한마디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화아아아아아악 ‘지금.’ 쉬운 작업이다. 무방비 상태에 있는 김현성을 조금 건드리는 것 정도는 정말로 쉬운 작업이다. ‘끊자.’ 김현성이 이기영에게 가지고 있는 유대를 끊어놓으면 돼. 우리 회귀자가 저항하고 있는 이유는 그 끈을 놓기 싫어서니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전부 흐릿하게 만드는 거야. 아니, 흐릿하게 만든다기보다는 김현성이 지금까지 느꼈던 감정과 유대를 죽이자. 이기영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버리자. 이런 게 가능할까? 불가능할 게 뭐가 있겠어. 완벽히 벽이 허물어진 상태 아니야?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불안요소는 처음부터 차단하는 게 맞지. 지금의 김현성의 모습을 보면 확신할 수 있잖아? 유대가 있으면 결국에는 찌르지 못하는 거야. 내가 가면의 영웅이라는 사실을 인정해도 2회 차의 정 때문에 건드리지 못할 변수도 차단해야 돼. 저 새끼 봐. 분명히 그렇게 행동할걸. 머뭇거리고 부정하다가 결국에는 칼 떨어뜨린다니까.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선택지는 이거 하나야. 계속해서 김현성의 머릿속을 헤집는다. 녀석이 이기영에게 유대감을 느꼈던 순간들을 계속해서 뽑아낸다. 처음 튜토리얼 때부터. -아… 안 돼. 돼.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그래 처음부터. 처음부터 말이다. 이미 녀석과 한 차례 추억 이야기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이렇게 보니 마치 모든 게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기분이다. ‘개인적으로는 소환사, 연금술사, 흑마법사에서 고르는 게 조금 더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흑마법사는 추천해 드리기 어렵겠군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적어도 이 상태창은 저희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요.’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직업 때문에 실랑이했던 것도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 솔직히 나도 재미있기는 했어. 그때는 연금술사가 개꿀 직업인 줄 알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낚인 것 같기도 해. 시바. 흑마법사도 괜찮을 것 같았고 지휘관도 좋았을 것 같은데,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에 낚였었네. 너 지금도 이걸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진심으로? ‘혹… 혹시 말이요… 혹시나 형님은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인 거 아니요?’ ‘그건 안 돼요. 오, 오빠!’ ‘그런 건 아니야. 나도 너희와 함께하고 싶다. 물론 현성 씨도 같이. 그렇지 않습니까?’ ‘예. 비록 이런 이상한 장소가 맺어준 인연이지만… 기영 씨와 덕구 씨, 그리고 하얀 씨와는 함께 가고 싶군요.’ 처음 길드에 들어갔을 때야? 형이 돈 많이 벌게 해준다고 했자너. 그때는 진짜 급하기만 해가지고 앞뒤 안 돌아보고 들이대기만 했었지. 가끔 덕구가 없어도 넷이 있을 때가 즐거웠다고 이야기를 하고는 했는데. 너도 마찬가지였어? 아니면 추억 보정이야? 너 이때는 시바 나 별로 안 좋아했잖아. 그지?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기영 씨.’ ‘네?’ ‘기영 씨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아니 설사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유라 씨가 굳이 기영 씨의 잘못을 지적을 권리는 없습니다. 엄연히 기영 씨는 파란의 파티원입니다. 만약에 실수했다고 생각했다면 제가 먼저 말씀을 드렸을 겁니다. 어째서 유라 씨가 먼저 우리 파티원의 행동을 문제 삼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쁘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저번에도 말한 적이 있었던 첫 던전. 내가 생각해도 너 거기서 좀 멋있기는 했어. ‘우리 파란의 길드마스터를 위해 준비한 선물은 바로 이 그리폰입니다.’ ‘아!’ 그렇게 좋았어? 그리폰에 환장해요. ‘혜진 씨를 길드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려고….’ ‘그 현성 씨… 제가 이전에 말씀드린 것은 머릿속에서 지워주셔도 됩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니까요. 혜진 씨가 일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면 부담 없이 임명하셔도 됩니다. 아!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오해하고 있는 건 없습니다. 현성 씨 입장에서는 충분히 생각하실 수 있는 이야기니까요.’ 진짜로 이때 이 새끼 똥줄 탔었자너.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추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순서가 뒤죽박죽이지만 하나같이 김현성이 이기영에게 유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이다. 심지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많다. 아주 사소한 거. 정말로 사소한 것들. 함께 식사를 하거나 술자리에서 주고받은 별것 아닌 이야기들. 반대로 무척 커다란 사건들도 많다. ‘죽여줘.’ 이건 지금 보니까 조금 부끄럽네. 아니야. 솔직히 멋있기는 멋있었어. 저것 봐. ‘돌려줘. 이 개자식.’ ‘말하지 않았나.’ ‘돌려줘….’ ‘앵무새 같군.’ ‘돌려줘… 돌려달라고!!! 이 씨발!! 개새끼야아!!!!!’ 저건 그만 보자. 이 앞이 죽여줬었는데. ‘인간이라는 건 참 이상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게 다 무너진 폐허인데… 조금은 예쁘게 보이기도 합니다. 신비롭게 보이기도 하고요. 붉은 노을이….’ 그래. 이거. ‘제기랄!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아냐고! 제길… 제길! 흉내내지 마. 흉내내지 말라고. 제기랄!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나에게 책임을 강요하지 마. 이렇게까지 나타나서 나한테 책임을 강요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한 적 없어. 다시 한번 하고 싶다고 부탁 한 적도 없다고! 그러니까 그만 내버려 둬. 제발 그만! 그만 내버려 둬! 더 이상 나한테 책임을 강요하지마! 이 개새끼들아! 나한테 씨발… 책임을 강요하지 말라고… 씨발….’ ‘…….’ ‘제발 생각하지 마… 제발… 제발 생각하지 마. 떠올리지 말라고… 이제 지긋지긋하잖아. 제발 떠올리지 마. 아무것도 떠올리지 마.’ ‘…….’ ‘제발 그만해… 제발… 제발 그 모습으로 나한테 책임을 강요하지 마요.’ 솔직히 이게 결정적이었던 것 같아. 그렇지? 지금 생각해도 괜히 찡 하다고. ‘아무도 네게 책임지라고 말한 적 없다.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어.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압박으로 느껴진다는 것도, 많은 걸 감당해야 한다는 걸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굳이 혼자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어. 짐은 같이 들면 돼.’ ‘…….’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내가 김현성 전부 다 키웠지. 생각보다 너무 많네. 가방 쇼핑? 아, 시바. 2주 동안 감금당한 거? 야간 산책, 시바? 장난쳐? 진짜? 둠현성 사건도 조금 컸지? 라파엘 진짜 싫어했었네. 근데 이번 일 끝나면 너네 같이 얼굴 맞대고 지내야 할지도 몰라. 점점 더 가면 갈수록 사소한 거 하나하나 전부… 너무 많은데. 상관없지 뭐. 어차피 찰나니까. ‘기영 씨?’ 응. ‘저는 믿고 있습니다.’ 어. 시바, 나도. ‘그야 물론. 짐을 함께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근데 이거 끝나고 도망쳤지. ‘죄송합니다.’ 넌 죄송한 것도 많아. 미안할 짓을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더 이상 짐을 들게 하지마!! 더 이상!! 기영 씨! 거기서 나와요! 거기서 나오라고요! 하지마… 흐으윽… 하지 말라고. 더 이상 뭘 어쩌려고…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고….’ 울지 마. 시바. 왤케 자주 울어? ‘저는 조금 못난 사람이었습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았어. ‘꼭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과의 의미도 있고 여러 가지로 기영 씨에게 필요한 물건일 테니까요.’ 80만 골드짜리 가방도 선물해 줬자너. 그게 어떻게 못난 사람이야? 그리고. ‘저는….’ ‘…….’ ‘저는… 저는 회귀자입니다.’ 그래. 장하다. 시발로마. 너는 회귀자야. 내가 선택한 알타누스의 회귀자. 화아아아아아아악! 찰나였지만 많은 걸 보고 온 것 같은 느낌이다. 멍하니 서 있는 김현성이 눈에 보인다. 이미 눈물을 멈춘 지는 오래.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다시 뿔을 잡아당기려고 하지도 않고 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초점이 정확하게 잡히지 않은 눈에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지독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하… 끝났네.” < 761화 끝으로 (20) > “…….” -……. ‘정말로 끝났어.’ 정확히 말해서 기억을 지운 것은 아니었다. 2회 차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부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사건이 없다면 성장 역시 없다. 거세시킨 것은 김현성이 내게 느꼈던 감정과 유대감이다. 설명하기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아마 김현성은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이전처럼 커다란 감정을 느끼고 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애써 기억할 필요가 없는 일들이라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이기영이라는 인물에 대해 김현성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모든 감정은 모두 순식간에 허물어져 버렸다. “…….” 뭐라고 코멘트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다. 추억은 김현성 혼자서 쌓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원래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죽은 사람들보다 남겨진 사람이 더 괴롭다는 거. 물론 경우가 다르기도 했고 내가 선택한 일이기는 했지만 상실감이 생긴다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받아들여야지 뭐. 어쩌겠어. 뭘 잃었나보다는 뭘 얻을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 아니야?’ 그 말이 맞아. 그게 맞는 말이지. 일이 끝난 다음에는 주워 담을 수도 있잖아. 이걸로 파고드는 게 내 스타일도 아닌데.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지 뭐. 간단한 거야. ‘시바 행복 회로 좀 돌려 보자. 우울하면 재수 없으니까. 다 잘 됐잖아.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고 변수도 차단하고 있어. 더 이상 반전의 여지가 없을 정도라고.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고 있으니 웃는 게 맞지. 그렇지 않아?’ 계속해서 입꼬리가 올라간다. 입가에서는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내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는 거야. 중요한 건 그거 하나라고.’ 문제는 없다. 전부 다 내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으니까. 기쁜 소식이니까. 누나한테 전해주는 게 맞겠네. 근데 얘 정신없을 텐데… 굳이 말 안 해줘도 상관없나. 어차피 혜진이랑 드라마 찍고 있을 텐데. 덕구는 어디서 뭐 하지? 아 싸우고 있겠구나. 하얀이도… 싸우고 있네. 벌써 마력도 전부 회복한 것 같고…. 슬쩍 상황실을 둘러 봤지만 뭐가 있을 리 만무했다. 자축하는 의미로 괜스레 허공을 향해 잔을 들어 올린다.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니 축배를 들기에 이르기는 하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아, 내 정신 좀 봐. 일단 회귀자 상태가 어떤지부터 봐야지. 분노로 일그러져 있는 얼굴이 다시 한번 눈에 보인다. ‘진짜 화났네.’ 뒤죽박죽 섞여 있었던 이전에 비하면 무척 단순한 감정이다. 이렇게 심플한 게 가장 좋게 느껴진다. 왠지 1회 차의 김현성이 저런 모습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와 꽂힌다. 김현성에게 있어 그 녀석은 2회 차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그걸 쳐내면 1회 차 김현성이 남는다고 해석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 그건 아닌가.’ 뭐라고 평가를 내리기도 어렵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놈이 더 이상 마음의 목소리에 저항하고 있지 않다는 것. 김현성은 받아들이고 있었고 확정 짓고 있었다. 의심이 아닌 확신이다. 이기영이 1회 차의 가면남이라는 확신은 이미 놈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하나가 바뀌면 여러 가지가 바뀌는 법이다. 녀석이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던 추억들이 전부 일그러진 형태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이 새끼 입장에서는 모든 게 거짓말이고 기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텐데 뭐.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하나하나 추억을 되짚어가며 병신 같았던 자신의 모습들을 되돌아보고 있잖아. 녀석이 느끼는 분노 중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도 있다. 이전처럼 자기혐오로 얼룩진 분노가 아닌,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원수에게 다시 한번 속았다는 분노였다. 대뜸 욕을 박거나 연결을 끊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모양. 내가 먼저 말을 걸기 전에 놈의 앞에 있던 세라핌이 입을 열어왔다. -무엇을 깨달았지? -……. -뭔가 깨달은 표정인 것 같은데.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 거지? -……. -하… 하하. 하하하하하. ‘너도 수고 많았어, 세라핌. 근데 너 웃는 거 좀 재수 없어.’ -푸하하하하하핫! 김현성은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곧바로 검을 날리는 것이 눈에 보인다. -어…. 세라핌의 뺨에서 혈액이 흘러내리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검을 휘둘러오는 모습. 아무런 말도 없이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다. ‘뭐지?’ 일단은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계속해서 포인트를 찍어 주고는 있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잠깐 동안 당황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째서 녀석이 방금과 같은 행동을 취했는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어차피 비둘기야 놈의 적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현성 씨?” -네. 기영 씨. ‘목소리 살짝 차가워졌자너. 시바. 감정이 안 담겨 있자너. 진짜 남 부르는 것 같자너. 목소리가 시바 예전 같지 않자너.’ “조금… 상태는… 괜찮아지셨습니까?” -아까보다는 한결 나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이 아직도…. “네?” -실례가 되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직접 와서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가겠다고 말하기는 한 것 같은데… 와 시바. 김현성 이 여우 같은 새끼… 마음 진짜 단단히 먹었구나.’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발언이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닫게 된다. ‘불러들이고 싶은 거구나? 진짜로 적으로 규정한 거야?’ 김현성의 입장에서 가면의 영웅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자식이었으니까. 아마 내가 내뺀다면 이후에 화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직접 불러들여서 확실하게 찢어 죽이고…. ‘어?’ 뭐야. 찢어 죽이면 안 되지. 너 왜 그런 생각해? ‘목을 날려 버리는 것도 조금 그렇지. 아니, 왜 계속 잔인한 것만 생각해? 온몸을 조각 조각낸다고? 팔다리를 잘라 버리고 땅바닥을 질질 기게 만든 다음에 발로 짓이겨 죽이겠다고?’ “아니요. 잠깐 확인해야 하는….” -부탁드립니다. 지금 기영 씨가 필요합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서 돼지우리에 처박아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너 이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 누가 그런 걸 생각해…. 아무리 그래도 시바 우리가 함께한 추억이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 그건 너무 나갔지. 그런 게 어딨어. 시바. 그렇게까지 하는 건 조금… 그렇지 않아? 잠깐 동안 침묵을 보내기가 무섭게 김현성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안 좋은 상상들이 사라진다. 녀석이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회귀자 사용설명서로 인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게 새어 나갈 수도 있다는 가정을 경계하고 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내가 알 수 있다는 설명을 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내가 자신의 생각을 알지도 모른다는 상황을 경계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변수를 모조리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네. 조심히…. ‘근데 그건 알아야지. 현성아. 애초에 김현성이라면 여기에 와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을 거야. 너무 어설프다고. 지금 그게 연기하는 건지 뭔지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내가 속아주는 거지.’ 괜히 품속에 마취 물약이 있는지 다시 한번 찾아본 이후에는 몸을 일으킨다. -기영 씨? “네.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왕이면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좋다. 김현성은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세라핌이 상처투성이가 되기까지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오히려 조절하고 있는 듯한 느낌,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일부러 밀리는 모습도 슬슬 보여주면서 뭐. 머리도 붙잡아 주고. 자꾸 자기 자신한테 문제가 생겼다는 걸 어필하고 있는 거지. 리얼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좋게 느껴지기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아직까지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 끝이 다 와 간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그림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직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다. 가까이 왔다는 것 하나는 인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떤 상황을 위해 장면을 완성시켜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직 아닌 건가?’ 아니, 일단 가고 난 이후에 생각하는 게 맞는 건가? 녀석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내 손을 잡아. 김현성. 내가 네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줄 수 있어. -……. 절대로 안 잡을걸. -우리는 굳이 싸울 필요가 없었던 거야. 그렇지 않아? -그 입 닥쳐. 세라핌. -애초에 너희들이 승리할 확률이 없다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뭘 위해서 싸우고 있는 거야? -나는 너와 말장난을 하고 싶어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나도 장난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서 하는 말이지. 너와 우리가 싸운 게 본의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끝없이 파멸로 치닫는 전쟁은 우리가 원하던 상황이 아니었어.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던 벌레 같은 기생충에게 휘둘린 거지. -난 애초에 너희들의 방식에 단 한 번도 찬성한 적이 없어. -맞아. 하지만 그게 필요한 일이라는 거 알고 있잖아. 대륙은 병들었어. 괜히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까. 2회 차를 겪으면서 너도 느낀 게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 네 입으로 말해봐. 인간이 이전과 달라졌던가? -……. -인간은 달라지지 않아. 네가 알고 있는 그자처럼 본질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거야. -……. -나는 네게 기회를 주고 있는 거야. 김현성. 너는 아직 되돌아올 수 있어. 불순물이 끼어들기는 했지만 충분히 정화할 수 있을 거야. 이미 너는 인간이라고 볼 수도 없잖아? -개소리.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네. 저 쓰레기는.’ 세라핌은 김현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녀석이 회귀자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싫어하는 쪽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애초에 비둘기들은 악마들이 가지고 있는 힘에 적대적이었고 김현성은 그 힘으로 완전히 감싸 있을 정도로 오염된 상태였으니까. 본인이 가진 심판의 검에 대한 자부심이 특히나 남다르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 개소리는 자기 자신까지 속이면서 입을 털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그렇게 나한테 엿을 먹이고 싶었어요?’ 세라핌의 행동은 단순히 나를 화나게 하고 싶어 하는 것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의 창조주가 너를 원해. ‘뭐?’ -우리의 창조주가 너를 원해. 김현성. ‘갑자기?’ 아니, 갑자기가 아니다. ‘이거… 계산된 거야? 이것도 보고 있었어?’ 당황스러웠지만…. ‘정말로 계산된 거냐고. 시발.’ 이걸 노리고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비둘기들의 창조주는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은 관리자를 원해 저 모지리들을 만들었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금의 김현성은…. “잘라낸 상태니까….” 거대한 빛이 하늘을 뒤덮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 빛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지만 찬란해 보이기도 해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틀리지 않았네. 하… 시바… 틀리지 않았어.’ 마지막 퍼즐은 저것을 위해 존재한다. 이기영의 희생은 저것을 위해 존재한다. 이질적이고 거대한 빛은 기묘한 형태의 모양의 팔을 만들어 김현성에게 천천히 뻗고 있었다. 바깥 세계의 창조주가 찾아오는 게 아니다. “우리가… 불러내야 했던 거였어….” 녀석을 찾아오게 만드는 것 역시 과제 중 하나였다. 해피엔딩이 될지 배드엔딩이 될지 알 수 없었지만. 김현성과 이기영의 유대를 끊는 것 역시, 엔딩으로 가기 위한 과정 중 하나였을 것이다. “틀리지 않았던 거야.” < 762화 끝으로 (21) > 이기영은 틀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인다. 이 모든 개고생이 헛짓거리가 아니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보상받는 느낌이 든다. 모든 퍼즐이 맞춰진 것은 아니었지만 모아놨던 퍼즐 조각이 스스로 그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게 첫 번째 조건이었어.’ 비둘기들의 창조주가 이곳에 직접 찾아오게 하는 것, 그게 첫 번째 조건이었다. 맞서 싸워야 할 적이 없다면 애초에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기억을 잃기 전의 이기영이 어째서 녀석에 대해 알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시퍼의 개입으로 해결해야 할 존재가 있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던 바 아니었던가. 직접적으로 그걸 눈으로 확인하니 조금 더 개연성이 들어선 듯한 느낌이었다. ‘믿어도 되는 거 맞지? 이기영 이 사기꾼 새끼야?’ 물론 어째서 이걸 내게 비밀로 했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알고 있다면 미래가 틀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기억하지 않는 것 역시 내기의 조건이었을 수도 있지.’ 굳이 끼워 맞춘다면 이렇게 끼워 맞출 수도 있지 않을까? 현시점에서 중요한 퍼즐이라고는 볼 수 없는 만큼 잠깐은 생각을 뒤로 돌리는 것이 옳다. 구태여 예를 들자면 딱 배경 정도라고 판단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중요한 것은 현재 놈들의 창조주가 나타났고 우리가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 하나였다.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 곧바로 시선을 돌리자 지독하리만큼 이질적인 빛이 시야에 비쳐왔다. 어째서 저걸 바깥 세계의 신이라고 표현하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놈이 내뿜는 빛은 이질적이었다. 전쟁 중이던 병력들 역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직감하고 있지 않을까. 아마 전쟁 중인 병력뿐만이 아닐 것이다. 북부를 지나 자리해 있는 대륙인들 역시 저 빛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하늘을 감싸 안은 빛은 전장 전체를 비추고 있는 것으로 모자라 점점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나 역시 저 빛을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감히 항거할 수 없게 느껴지는 자연현상처럼 인간을 압도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저게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아마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저것에는 저항할 수 없다고. 저것과는 싸울 수 없다고 말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저런 것과 싸울 수 있는 건가? 아니, 생명체라고 부를 수 있기는 해? 저건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있는 거야? 의사소통은? 저게 도대체 뭐야? 이상한 점이 많다.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뭔가 생명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과 다르기는 하지만 그 비둘기들마저 살아 숨 쉬고 생각하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저건 그런 느낌이 없다. 갑자기 들이닥친 폭풍이나 거대한 파도를 바라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진다.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것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딱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냥…. ‘시스템 덩어리.’ 그냥 시스템 덩어리로 보인다. 비둘기들의 창조주도 뭣도 아닌 그냥 시스템 덩어리다. 저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본능? 아니면 그렇게 움직이게 스스로를 프로그래밍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상상하던 신은 아니었지만…. ‘저게 초월적인 무언가라는 건 확실해.’ 꿈틀꿈틀거리는 기괴하고 거대한 팔을 김현성에게 뻗고 있는 모습이 괜스레 더 이질적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 -그분의 손을 마주 잡아. 그것으로 너는 너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거야. ‘세라핌 병신 새끼.’ 쟤는 너희를 만든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너희가 저기에서 스스로 태어났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해봤어? 암만 봐도 저건 그냥 시스템 덩어리야. 의지가 없으니 스스로 나타나지도 않는 거야.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거라고. 김현성에게 반응한 것 역시 놈이 스스로 판단하고 손을 내민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놈은 그냥 자신 안에 내장되어 있는 프로그래밍을 돌리고 있는 것뿐이다. 이지혜와 세라핌이 더미월드를 돌렸던 것처럼 녀석 안에 있는 시스템이 변수에 반응한 것이다. 저 시스템이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무엇을 위해 존재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저 시스템이 원하는 것은 사대천사가 원하는 것과 같은 것일 확률이 높겠지. 놈은 놈이 뿌리내릴 수 있는 둥지를 찾고 싶어 했고. 대륙의 균형을 갈구하는 것을 원했다. 놈의 안에 있는 프로그램은 그것을 위해 비둘기들을 탄생시켰고, 본인이 뿌리내릴 수 있는 차원을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렇게 김현성의 1회 차가 시작됐고, 가면의 영웅의 계획 앞에 놈은 실패했다. 비둘기들은 1회 차의 실패에 영향을 받았겠지만 시스템 덩어리는 그렇지 않다. 시스템이 실패하면 어떻게 하겠어? 수정하는 거야. 어디에 오류가 있었는지는 찾아낸 이후에 스스로 수정하지 않았을까. 어떤 변수가 있었는지 점검하고 다시 한번 프로그램을 돌려봤을 것이다. 현재의 상태가 딱 그런 상태다. 놈은 비둘기들로 실패를 겪었고 새로운 대안을 찾았다. ‘그 대안이….’ 지금의 김현성이라는 거지. 조금은 다른 의미로 완전해진 김현성일 것이다. 김현성은 아직 인간성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놈은 김현성이 인간성을 버릴 수 있을 거라고 평가했다. 대륙과 차원을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자신이 수행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을 완벽히 수행할 수 있는 신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김현성은 놈의 손을 잡지 않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시바, 잡을 리가 없자너.’ 김현성의 숙원은 놈에게 저항하는 것이지 놈의 손을 잡는 것이 아니다. 이기영을 적대한다고 해서 비둘기들의 편에 선다는 건…. ‘말도 안 되지.’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거지? ‘거봐, 우리 현성이 강직하자너. 어?’ -대답해. 세라핌. 내가 이 손을 잡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어?’ -푸흐… 푸흐하하하하하하하핫! -네가 웃으라고 이야기한 게 아니다. 세라핌. 내 질문에 대답해. ‘너 지금 뭐하는 거야?’ “현성 씨?”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놈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읽기가 힘들다. -글쎄. 그건 네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나도 정확히 네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어. 하지만 확실히 말하건대 네가 무엇을 원하든 간에 그건 이루어질 거다. 우리의 창조주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난 대륙에 있는 인간의 절반을 죽이는 미친 계획에…. -다른 방법을 찾으면 돼. 개체 수를 조절할 방법이 이것 하나밖에 있는 게 아니잖아? ‘신인류 계획, 시발로마. 그거 지적 재산권 침해야.’ -나도 어째서 우리의 창조주가 너를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들이 시바 무능하니까 현성이를 골랐지.’ -그분은 너에게 많은 권한을 내릴 거야. 권한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위임하는 거야. 본인의 프로그램을 대륙에 직접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내가 대륙을 바꿀 수 있나? -이미 한 번 말하지 않았나. 네가 원하면 가능할 거야. ‘너, 시바, 지금 뭐하는 거야? 이거 내가 잘못한 거였나? 이게 아니었어?’ 유대감을 상실한 김현성이 비둘기 쪽으로 붙는 계산은 아예 안 해본 건가? ‘이게 뭐야.’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괜스레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김현성이 얻는 게 뭐가 있다고, 시바….’ 아니지. 굳이 하지 않을 이유도 없잖아. 얻는 것도 없지만 피해 볼 것도 없는데. 애초에 김현성이 죽자고 외신들이랑 싸운 이유는 지 품 안에 있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아니었나? 정말로 김현성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면 자기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게 다른 방식으로 짐을 떠안는 거라는 걸 모를 리는 없겠지만…. 나였다면 분명히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할 것이다. -손을 잡아. 김현성. ‘아니. 시바, 잡지 마. 시바….’ 지금 정확히 김현성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겠다. 물론 회귀자 사용설명서의 기본 효과 때문인지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지만 도대체 뭘 원하길래 놈의 손을 잡는 걸 고민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일단 허겁지겁 몸을 일으킨 것은 당연지사. “현성 씨.” 뭐가 됐든 간에 시나리오는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김현성이 외신의 편에 선다는 시나리오는 존재하지 않는다. 곧바로 바깥으로 향하자 여러 가지가 뒤섞인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뭐라고 설명할 시간이 없다. 날개를 펼친 이후에는 곧바로 하늘을 날기 시작. 주변에서는 계속해서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일단은 신경 쓰지 않고 몸을 옮기는 것이 급선무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진짜로 잡을 거 아니지? 그렇지? 시바?’ -손을 잡아. 김현성. ‘말도 안 돼. 시바. 무슨 손을 잡아? 이건 아니야.’ 그 새끼는 그냥 시스템 덩어리야. 아무것도 아니라 그냥 괴물 새끼라고.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질 수 있어. 퍼어어어어어어어엉!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한쪽으로 튕겨 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직격탄을 맞은 것만 같다. 다행히 제때 방어 마법이 펼쳐졌기 때문에 다른 이상은 없지만 몸은 땅으로 떨어져 곧바로 땅바닥을 구른다. “명예추기경님?” “명예추기경님이다! 명예추기경님이….” “보호해!” ‘미안. 지금은 그럴 시간 없어.’ 다시 한번 날개를 펼치자 몸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겹겹이 보호 마법들이 채워진다. ‘형 지금 가. 시바. 그러니까 괜히 상황 꼬이게 하지 말고….’ 내가 생각해도 꽤 빠른 속도로 날고 있는 것 같다. 중간중간에 많은 도움을 받은 것 같았지만 정신이 없어 하나하나 확인할 수가 없다. 드래곤들이 브레스를 쏘아 길을 열어줬고 길드원들의 목소리도 들린 것 같다. 엘레나와 선희영의 목소리도 들린 것 같았는데…. 아마 지금까지 몸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김현성의 모습이 점점 육안에 잡히고 있다. 이질적인 빛은 아직도 김현성에게 손을 뻗고 있었고, 세라핌 역시 내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다. “현성 씨!” 하지만 김현성이 나를 바라보는 눈을 확인한 순간. “하….” “…….” ‘아. 낚였네.’ 내가 놈에게 낚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손을 잡을 생각은 없었던 거네. 시바. 아… 이걸 왜 낚였지?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자너. 김현성의 우직함을 간과했네. 아….’ 어차피 이곳으로 향해야 하기는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 김현성이 나를 낚았다고 생각하니 뒤통수가 얼얼하다 못해 쓰라리다. 뒷다리에서 커다란 고통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라고 비명을 내지르기가 무섭게. 머리카락을 붙잡은 손이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쓰레기 같은 자식.” 김현성이 비틀린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 성….” 뭐라고 막 입을 떼려는 찰나. 목을 조르는 우악스러운 손길이 나를 덮쳤다. “켁… 켁….” “더럽고 비열하고 추악한… 쓰레기.” “켁….” “어떻게 해줄까? 더러운 자식.” “케헥….” “내가 어떻게 죽여줬으면 좋겠어?” < 763화 끝으로 (22) > 가장 처음 이 미래를 봤을 때 걱정했던 것은 김현성이 이기영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혼자서 여러 가지 가정을 하기도 했다. 녀석이 나를 찌르지 못할 경우 반드시 찌르게 만들어야 했으니까. 정말로 이기영이 가면의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부터, 1회 차 가면 쓰레기 이기영을 연기하는 상황까지. 심지어 김현성을 자극할 만한 대사 리스트를 뽑기까지 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냥 자극할 만한 대사 정도가 아니라 1회 차의 김현성을 원초적, 근본적으로 깎아내리며, 녀석의 미국 간 동료들까지 모욕할 만한 대사들이었다. 그걸 꺼낼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지금은 다른 종류의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여겨진다. 단순히 배에 칼을 박는 것뿐만이 아니다. 김현성은 지금의 이기영을 최대한 괴롭게 죽이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팔다리를 자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온갖 모욕적인 방법을 계속해서 떠올리고 있다. 이 새끼가 너무 실험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이단심문관으로 일해도 되겠는데… 익숙하지가 않네.’ 무섭다. 김현성이 내 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가 쏟아내고 있는 적의 때문에 숨이 턱하고 막힌 것만 같다. 김현성이 손아귀에 힘을 주면 여린 목은 순식간에 부러질 것이다. 아니, 단순히 부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손으로 두부를 으깨버리는 것처럼 산산 조각나지 않을까. 김현성이 조심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하고 있다. 자신의 손아귀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종류일 것이다. 녀석이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김현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개 쓰레기 같은 자식.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알아?” “케… 켁….” “구역질 나는 놈.” 그 와중에 풀어낼 수 있는 모욕적인 언어의 한계치가 보이기는 했지만…. 으지직. “케… 케헥…. 으그으읍….”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게 만드는 고통이 팔에서 느껴진다. ‘시바… 시바 새끼야. 시바… 진짜.’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개새끼. 시발 새끼. 진짜로… 진짜로… 때렸어. 시발. 시발. 시발.’ 물론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갑작스레 내가 처한 상황이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 이 새끼가 저 진짜로 때렸어요. 시바.’ 다리는 이미 감각이 없고 이제는 팔이 너덜너덜해졌다. 어마어마한 고통 때문인지 정상적인 생각을 하기가 힘들 정도. 그나마 정신이 붙어 있는 이유는 높은 지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이 고통에 익숙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했던 김현성과 너무 달라 억울하기까지 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한계에 다 달았을 때 녀석이 움켜쥐었던 내 목을 놓아주는 것이 느껴진다. 자연스럽게 몸은 땅바닥을 나 뒹굴고 한쪽 손은 망가진 팔을 붙잡게 된다. 그만큼 고통스럽다. 마취물약을 가지고 있었다면 조금이나마 여유가 있겠지만 그런 여유 따위는 없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호흡도 비정상이다. 눈에서는 자꾸만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고 입을 열면 곧바로 신음을 내뱉을 것만 같은 상태였다. ‘시바. 정신 나간 새끼. 나쁜 새끼. 천벌 받을 새끼. 시바. 시바… 나쁜 새끼. 진짜 복수할 거야. 진짜로 복수할 거라고.’ “뭐라고 변명이라도 지껄여 봐. 이 역겨운 새끼야.” ‘네가 시바 어떻게 나한테 이래? 시발놈. 네가 진짜로 어떻게 나한테 이래. 개새끼야.’ “하아… 하윽… 아….” “고통스러워? 괴로워? 벌써부터 그런 표정 지으면 안 되지. 지금부터가 시작인데. 아주 즐거워질 거야.” ‘이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그렇지 않아?” ‘그래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이 나쁜 새끼야.’ 당연히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진짜 이러다가 이 나쁜 새끼가 사람 잡을 것 같자너. 트라우마 생길 것 같자너.’ 일단 이 미친 폭주 기관차를 어떻게든 멈추는 것이 급선무였다. 배때기까지는 기분 좋게 내어 주겠지만 온몸이 걸레짝이 된 채로 돼지우리에 던져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옆쪽에서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는 세라핌의 표정도 마음에 들지 않고…. 사실 누가 봐도 현재의 김현성은 이성을 잃은 상태로 보이지 않은가. 자신의 모든 걸 망친 빌런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것 말고 다른 걸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 새끼들 진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현… 현성 씨.”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 개자식.” “아… 아파요. 아… 아파.” “겨우 그 정도로?” ‘이 새끼 시바 피도 눈물도 없네. 진짜.’ “어째서….”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말할 틈을 안 주자너.’ 기왕 눈물 나오는 거 더 서럽게 울어보자. 이미 아파 뒤지겠는데 더 아픈 척 한번 해보자. 이럴 때는 일단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최선의 선택일 테니까. 이기영이 가면의 영웅인가 아닌가의 여부는 일단 건너뛰고 현재의 이기영은 1회 차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포지션을 취해보자. ‘난 아무것도 몰라. 진짜. 너 나한테 왜 그래.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나는 기억나는 것도 하나도 없고 네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가면 쓰레기는 진청이었자너. 내가 아니라 진청인데 도대체 왜 그래.’ 정도로. 아, 여기에 한 가지 더.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세뇌라도 당한 거야? 형은 네가 너무 걱정된다. 현성아. 내 몸은 어떻게 돼도 상관이 없는데 네가 걱정돼서 참을 수가 없어.’ 후자가 더 빛기영에 어울린다. 가슴 따뜻했던 그 녀석이라면 분명히 후자의 포지션을 취할 것이다. 자신의 몸이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회귀자의 상태에 대한 걱정으로 꽉 차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야 이 새끼가 지금 하는 행동에 죄책감이라도 느끼겠지. 사실 조금 주저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이야 이성을 잃은 상태기도 하고 의심이 머릿속에 꽉 찬 상태이기는 했지만…. ‘나는 김현성을 알아. 시바.’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온갖 전쟁을 겪고 거친 생활을 해 인격이 바뀌었다고 한들, 김현성은 본질적으로 여리다. 녀석이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빛기영에게 단죄의 철퇴를 날릴 수 있다고? 물론 날릴 수야 있겠지만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는 짓까지는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유대감은 끊어졌지만 그래도 추억은 남아 있는 상태자너. 물론 네가 거기에서 아무것도 느끼고 있지 못한다고 한들, 기억은 하고 있을 거 아니야. 의심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겠지만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로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솔직히 네가 그렇게까지 나쁜 새끼는 아니잖아. 전혀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죄를 저지른 건 1회차 이기영이지 2회차 이기영이 아니야. 아, 물론 내가 가면 쓰레기라는 말은 아니지만 굳이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1회 차와 2회 차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거야. “현성… 현성 씨. 괜찮으신….” “그 더러운 입으로 날 부르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아으윽! 아아아아아악!” ‘개새끼 또 찔렀어. 아니, 욕하면 안 되지. 이해해 줘야지. 현성이 지금 많이 힘들자너. 외신 비둘기한테 정신 마법 당한 거라고 생각해야지.’ 범인은 세라핌 저 개자식일 것이다. 녀석이 김현성을 뒤흔들었고 아무 죄 없는 나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조금만….” “뭐?”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 습니다. 조금만….” “내가 속을 것 같아?” ‘응.’ 속을 것 같아. 의심은 지울 수 없겠지만 최소한 내가 1회 차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설정을 때려 받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장담하건대 분명히 가능할 것이다. 이미 표정을 뒤바꾼 상태이기는 했지만 곧바로 김현성을 걱정하는 눈빛으로 갈아치운다. 고통을 최대한 참은 채로 오직 녀석의 상태만 걱정하는 성자 중의 성자의 모습을 보이자. 얼마나 집중했는지 몸에 새겨진 통증들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새어 나오는 신음과 비명을 억지로 삼켜내며 말을 잇는다. “정확히 무슨 말씀…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전부 잘 해결될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참으세요.” “…….” 잘 뻗어지지는 않았지만 억지로 손을 뻗는 행동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겠지. 지금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정말로 비참한 것처럼 보일 것 같은데. 여기로 오는 동안 땅바닥에 두 번 정도 처박혔고 지금 한쪽 다리도 이상하잖아. 팔도 거의 박살 난 것 같고… 전장도 한 번 굴렀으니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을 거야. 극적이잖아. 그렇지 않아? “나는 네 말 따위는 믿지 않아. 더러운 새끼.” “조금만… 조금만 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고 발악하는 거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눈치 빠르기는 하네.’ 일단 울어야지. 진짜 실감 나게 눈물 뚝뚝 떨어뜨려야지. 사과도 한 번 박아주자. “제가… 제가 죄송합니다.” “웃기지 마. 그 혓바닥을 당장 뽑아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 사실은 너도 알고 있잖아. 전부 다 기억하고 있지 않아? 이 모든 상황을 자초한 거 너였어. 네가, 네가 내 삶을, 내 영혼을 망친 거야. 내 모든 걸 앗아가고 나를 부정하고 네 손바닥 위에서 나를 춤추게 만든 거라고.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내가 동요할 것 같아? 모든 게 연기라는 걸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제는 알아.” ‘혓바닥이 길어지셨네요.’ “얼마나 나를 병신으로 생각했을까. 그동안 네가 내 옆에 서서 나를 손에 쥐고 흔들었을 때, 그걸 보고 얼마나 나를 비웃었을지가 상상이 되지 않아. 이제는 절대로 내게 속는 일 따위는 없을 거야. 더러운 새끼야.” ‘왜 자꾸 더럽다고 해? 나 깨끗한 사람이야.’ “말해…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이야기해.” “현성… 씨?” “말하라고. 1회 차의 가면을 쓴 남자가 너였다고 이야기해.” “그런 확인이 필요한가? 김현성?” “넌 그 입 닥쳐. 세라핌.” “…….” 병신 새끼 한마디 거들려다가 본전도 못 건졌죠? 찌질해 가지고 바로 입 다물죠? “…….”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 네가 저지른 모든 악행에 대해 고백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어차피 넌 죽을 거야. 난 알아. 네가 그 가면을 쓴 남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어.” ‘그건 확신하고 있겠지, 뭐.’ “나는 네가 뭘 선택하는지는 관심 없어. 어차피 너 같은 벌레 새끼는 이 세상에 없는 게 이로우니까. 네가 지금 걱정해야 하는 건 하나야. 평생을 가축처럼 살다가 비참하게 끝을 맞이할 것인지, 아니면 인간답게 죽을 것인지. 그러니 말해. 진실을 이야기해. 이 모든 게 네가 저지른 일이라고 말해.” ‘내가 말 못 할 것 같아?’ 김현성이 원하는 말은 백 번이라도 더 해줄 수 있다. 다만 그게 어떤 뉘앙스냐는 게 문제겠지. 최대한 감정을 잡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뭘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김현성을 이해하고 있다는 눈빛을 보낸다. 네가 그걸로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몇 번이라도 더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인다. 머릿속에 있는 복잡한 생각들이 그걸로 해결될 수 있다면 기꺼이 이기영의 배때기를 내어 주겠다는 얼굴을 선보이자. 아프겠지만 참아야겠지. 괴롭고 슬프지만 이제는 눈물을 흘리지 말자. 빛기영은 절대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으니까. 아니, 이건 기쁨의 눈물이다. 이미 타들어 가는 생명을 가장 아꼈던 친우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기쁨의 눈물이다. 잘 일으켜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킨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지만 고통을 삼키며 정면으로 회귀자를 마주 본다. 나를 경계하는 김현성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저항할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한 손으로 검을 꽉 쥔 채로 나를 바라보는 게 시야에 비쳤다. 지금까지 대륙을, 친우를, 형제를 위해 모든 걸 희생했던 빛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희생하기 위해,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입을 담았다. “네.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걸로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걸로 대륙을 지킬 수 있다면 이런 고통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한번 눈물 젖은 모습으로 그렇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현성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네가… 네가… 네가 내 모든 걸 망친 거야.” “…….” “네가!! 흑… 내 삶을, 내 영혼을 좀먹은 거라고! 나는 이유도 모른 채로 네게 수없이 휘둘렸어. 이유도 모른 채로 내가 원하지 않은 것들을 해야 했고 원하지 않은 죽음을 목도해야 했어. 모든 게 너 때문이야. 모든 게! 모든 게 너 때문이라고!” “…….” “쓰레기 자식. 더러운 새끼! 이 더러운 개자식!!” 어째서인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김현성이 보인다. 분노로 얼룩진 얼굴 역시 시야에 비쳤다. 김현성은 속에 있는 한을 풀어내듯,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검을 내지른다. 녀석의 검이 내 복부를 꿰뚫은 순간. 나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믿고 있겠습니다. 현성 씨.” 순간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 764화 끝으로 (23) > ‘이제 된 거지? 그렇지?’ 사실…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와 꽂히기는 했지만 뱃속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감각이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니다. 계속해서 이물감이 느껴지는 것은 물론 누가 용암이라도 부어버리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니 확실하게 배때기를 관통하고 있는 검이 시야에 비쳤다. 이미 입고 있는 옷은 붉은색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축축한 무언가가 하의까지 적시고 있는 게 느껴진다. ‘시바… 진짜로 찔렀자너.’ 울컥울컥하는 소리와 함께 자꾸만 피를 토하게 된다. “아… 어… 쿨럭….” “…….” 김현성의 손이 진동이 온 것처럼 떨리는 게 느껴진 것도 잠시, 듀렌달을 그대로 손에서 놔버린 녀석은 피로 범벅이 된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회귀자 사용설명서는 아직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 녀석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생각을 읽을까 조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완벽한 백지상태가 됐다는 말이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복수는 허무할 뿐이자너. 이 새끼 지금 상태 이상하자너.’ “아… 으….” ‘지금 타이밍이 맞는 건 맞지?’ 자꾸만 배에 꽂힌 듀렌달 쪽으로 손이 향하게 된다. 검의 손잡이를 꾸욱 움켜쥐면서 망원경을 바라보자 확실히 타이밍이 나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서 본 미래 그대로다. 차희라는 온몸에 창이 꽂힌 채로 적들과 맞서고 있었고 정하얀이나 골드 드래곤 역시 같은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카스가노를 통해 보지는 못했지만 내게 영향을 받았는지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는 디아루기아의 모습도 보인다. ‘아, 우리 디아루기아를 깜빡했네.’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면 거의 다 온 것 같기도 하다. 김현성이 나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마 곧 그렇게 내려다보지 않을까. 일단 내가 쓰러진 상태가 아니니까. 미래에서는 분명히 쓰러진 상태였었지? 억지로 비틀거려 철푸덕 누워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괜히 부자연스러운 액션을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 시간에 딱 맞추는 게 이상적이다. “너… 너는… 내 삶을… 앗아갔어.” “…….” “모두가… 모두 네 잘못인 거야. 모두가… 네 잘못이야. 나는 아무런 잘못 없어. 나는…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어.” 나를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피로 흠뻑 젖어 있는 본인의 손을 바라보며 김현성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런 혼잣말을 하는 와중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소름 끼치기는 하지만 아마 곧 녀석의 머릿속에서 정리가 끝나지 않을까. 조금 문제가 있다면 녀석이 나를 아직까지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배때기에 검 들어가면 짠 하고 나타나는 거 아니었어?’ 루시퍼 쪽에서 뭔가 피드백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아직 머릿속에서 본 미래가 완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슬슬 조짐이라도 보여줬으면 좋겠다. ‘아니, 진짜. 이거 이러다가 시바 개죽음당하는 거 아니야?’ 이거, 시바, 장면 완성되면 피드백이 오기는 오는 거지? 싸늘한 눈 등판하면 바로 피드백 오는 거지? 정말로 그냥 뒈지면 우리 디아루기아 불쌍해서 어떻게 해? 이렇게 죽기는 싫자너. 혼자 죽는 게 아니라 외롭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싫자너…. 그럴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슬그머니 불안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점점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고 정말로 서 있기가 힘들다. 놈이 나를 내려다보는 순간 쓰러지고 싶었지만 저 새끼는 아직도 자신의 손을 바라볼 뿐 다른 리액션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는 게 시야에 비치기는 했지만 주저하는 것만 같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망원경 각도를 살짝 틀어 놈의 얼굴을 바라보자…. ‘이 새끼 왜 울어.’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뚝 뚝 떨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너 우냐?’ “네가… 나를 망친 거야. 네가… 아무 죄 없는 나를… 네가… 네가… 지옥 같은 곳으로 끌어들였어.” “…….” “네가 내 모든 걸 빼앗아 갔어…. 모든 걸… 내 소중한 이들을 전부 죽이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 앗아간 거야… 이건 정당한 심판이야. 아주… 정당한… 이… 개… 개….” “…….” 그럼 고개를 들어야지. 그게 보통 아니야? 복수할 대상이 어떻게 죽어가는지 구경하는 게 원래 제일 꿀잼 아니었나? 비릿한 조소라도 보내든가. 빨리 싸늘한 눈빛 보내줘야지. 아무래도 지금 피드백이 없는 게 장면이 완성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렇단 말이야. 막 혐오한다는 눈 있잖아. 아니면 아예 감정이 없다는 듯한 눈으로 딱 내려다봐야 될 것 같은데. 나 이제 막 쓰러질 것 같은데 다리에 힘도 풀리고 있고… 지금 뒤로 넘어가니까, 꼭 그렇게 내려다봐야 해. 쓰레기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바라봐 줘야 되는 거. 알지? 천천히 몸이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내뻗고 있는 김현성이 보인다. 쓰러지는 내 몸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어째서 저 새끼가 저런 행동을 취했는지 알 수가 없다. “어… 아… 아….” 같은 이상한 소리만 중얼거리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제대로 잡아주지도 못했다. 손바닥을 적신 피 때문에 미끄러워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이걸 놓친다는 게 김현성의 신체 스펙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이다. 아마 몸에 힘이 전부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만큼 경황이 없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덕분에 드라마틱하게 뒤로 꼬꾸라질 수 있었지만…. 정신이 점점 멍해진다. 몸이 땅바닥에 붙어 있다는 것도 느껴지지 못할 정도로 멍하다. 그 와중에도 김현성 이 새끼의 얼굴에는 걱정이 묻어나오는 중. 뭔가 무조건반사적인 느낌이기도 했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숨을 쉬기가 힘들어진다. 꺼억, 끄윽 소리만 나올 뿐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루시퍼가 깜짝 파티를 열어줬으면 좋겠지만 아직도 조짐이 없다. 김현성 이 개새끼가 걱정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싸늘한 눈빛 대신 자리한 것은 흔들리고 있는 눈빛이었다. ‘이 개새끼야….’ 유대감 날아간 거 아니었어? 어떻게 이래? 지금 뭐가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거야. 너 왜 그래. 시발. 붙이지 마. 전부 다 찢어서 날려 버린 거 스스로 기워 붙이지 마. 이런 게 가능한 거야? 저항하지 마. 다시, 시발, 주워 담지 말라고. 다시 주워 담지 마. 믿고 있겠습니다 괜히 한 건가? 그 스노우볼이 이렇게 굴러온 거야? 물론 싸늘한 눈 엔딩이 스위치라는 보장은 없다. 루시퍼가 다른 준비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나타날 확률도 존재한다. 하지만 녀석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 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른 변수를 완전히 차단하고 싶은 내 입장에서는 현재의 김현성이 하려고 하는 짓은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아까 봤던 이미지가 떠오른다. 내 손으로 내가 쳐낸 녀석과의 유대감이다. ‘저는… 저는 회귀자입니다.’ 그래, 너는 내가 선택한 알타누스의 회귀자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 내가 그린 그림을 망치지 마.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 알아들어? ‘꼭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과의 의미도 있고 여러 가지로 기영 씨에게 필요한 물건일 테니까요.’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그냥 닥치고 네 역할에 집중해. ‘저는 조금 못난 사람이었습니다.’ 뭐가 제일 못난 건지 알아?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이 가장 못난 짓이야. 이미 조각조각 난 걸 다시 붙여서 뭘 어쩌려고 그래? 감당할 수 있어? 지금 네가 저지른 일은 감당할 수 있냐고.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더 이상 짐을 들게 하지 마!! 더 이상!! 기영 씨! 거기서 나와요! 거기서 나오라고요! 하지 마… 흐으윽… 하지 말라고. 더 이상 뭘 어쩌려고…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고….’ 너나 하지 마. 너나 하지 말고 거기서 나와. 더 이상 뭘 어쩌려고 그래? 여기서 뭘 어떻게 하려고. 그거 알아? 미래가 바뀐다고. 미래가 바뀌는 거야. 예정에 없는 일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을 하지 마. ‘기영 씨?’ 내 이름 부르지 마. ‘저는 믿고 있습니다.’ 개새끼야. 나는 이제 못 믿어. 시바. ‘그야 물론. 짐을 함께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이미 벗어버린 거 아니었어? 다시 들지 않아도 돼. 너 지금 후회할 짓 하고 있는 거야. 이미 산산조각 난 것들을 다시 붙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애초에 말을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지만 어처구니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 정말로 김현성은 회귀자 사용설명서에 저항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지배력이 약해진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컨트롤하려고 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까 봐왔던 것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미 한 번 본 것들이기는 했지만 내가 무심코 넘긴 것들도 전부 다 주워 담고 있다. 어마어마한 죄책감이 쏟아진다. 굳이 감당하지 않아도 될 감정들을 감당하려고 하는 모습은 코웃음이 다 나올 정도. 계속해서 이걸 붙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하… 하… 하지… 마.” “…….” “안… 안 돼… 콜록….” “흐… 윽… 흐윽….” “개… 새… 끼… 하지 말라고… 쿨럭….” 미래는 변하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스가노 유노를 바라보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이다. 예정에는 없었던 일에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표정이 시야에 비친다. 장면들이 넘어간다. 차희라는 몸에 박힌 창을 전부 빼낸 채로 웃고 있었고 정하얀은 한소라의 실체 일부를 휘두르며 주문을 쏟아낸다. 김현성이 나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봐야 할 타이밍은 이미 지나갔다. 적어도 1분 전에는 그 그림이 만들어졌어야 했다. 최대한 회귀자 사용설명서를 컨트롤하려고 해보지만 김현성의 정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굳건했다. 그동안 너무나도 쉽게 휘둘렸던 것과는 다르게 이 개새끼가 내 의도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아주 작은 감정을 움직이는 것부터 하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저항하고 있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작업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고 있을 뿐 다른 말도 하지 않는다. 어마어마한 통증이 느껴진다. 내 배때기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아니다. 김현성이 조각조각 난 것들을 다시 끼워 맞추며 느끼는 죄책감에서 느껴지는 통증이다. 녀석은 그 고통을 전부 하나하나 곱씹으면서도 계속해서 망가진 것들을 주워 담고 있었다. 어째서? 이해가 안 되는데. 본인이 반병신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 왜 주워 담고 있는 건데. 또 쓸데없는 책임감 때문이야? 그런 거야? 책임감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야? 네가 한 걸 네가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래? 그럴 필요 없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마치 시간이 다시 되돌아가는 것만 같다. 악마소환 사태나 거울호수, 함께 식사를 하거나 그리폰 축제에 간 일, 길드원들과 시간을 보내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눈 일, 훈련을 함께 하고 원정에 간 일, 내게 업무를 몰아준 사건이나 박덕구와 함께 직업 선택에 대해 열변을 토한 일. 그리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내가 제일 먼저 끊어버린 첫 만남까지. 녀석은 끝끝내. 내가 던져 버린 것들을 다시 주워 담았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아… 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어… 흐… 윽… 끄으윽…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우웨에에에엑. 우웨에에에에엑… 흐윽… 흐으윽… 우웨에에에엑.” “…….” 머리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서 허물어져 토악질을 하고 있는 김현성의 모습을 보게 될 때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영 씨… 기영 씨… 기영 씨?” “…….” “기영 씨? 아… 안 돼… 흐으윽… 제발… 제발… 제발… 안 돼….” < 765화 끝으로 (24) > “제발… 제발… 우웨에에엑… 하아… 하아… 기영 씨… 기영 씨?” “…….” “안 돼. 안 돼… 흐으으윽… 제발… 제발….” “…….” ‘나도 안 된다고 말하고 싶어.’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너무나도 뜨거워진 복부와는 반대로 몸이 점점 차가워지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살짝 고개를 돌려 김현성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얼굴을 옆으로 뉘기조차 쉽지가 않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김현성이 직접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지금 녀석의 상태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김현성이 망가진 모습을 많이 봐오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27군단 악마들에게 세뇌당했을 때도, 무의식 세계에서 주저하는 녀석을 봤을 때도, 라파엘과 결전을 벌일 때도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다. ‘그러니까 왜 그랬어? 시발로마. 우리 완전히 죽 쒔어. 개 망했다고.’ “아아아… 아흐으윽… 아아아아아아. 기영 씨. 기영 씨… 기영 씨….” 서둘러 배에 꽂혀 있는 듀렌달을 뽑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 것일까. 곧바로 배에 꽂혀 있는 듀렌달을 뽑는다. 계속해서 뱃속에서 왈칵왈칵 피가 튀어 오르는 게 느껴진다. 김현성은 어떻게든 흘러나오는 피를 막으려고 압박하고 있었지만 겨우 그런 거로 출혈이 멈출 리 만무하지 않은가. 가지고 있는 포션이 떠올랐는지 허겁지겁 뚜껑을 열고 상처 부위에 쏟아내지만 이런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바알… 흐으윽… 제바알!” “…….” “제발 살려주세요. 하느님.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 “이건 아니야. 이건…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라고.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제길… 제길… 흐윽… 흐으으윽…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악… 멈춰! 제기랄! 멈춰… 제발… 멈춰줘. 제발… 사제… 사제! 사제!! 아으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 제발!! 흐으윽… 제발!!” “나… 나….” “기영 씨? 기영 씨? 기영 씨! 제발 죽지 마세요. 제발… 제발….” ‘네가 찔렀자너.’ “아아아… 제발 살아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아직 살 수 있어요. 아직 괜찮을 거예요. 분명히 전부 다 괜찮아질 겁니다. 제 목소리가 들리세요?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어떻게 살아.’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지금 상처가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딱 봐도 판단이 되지 않을까. 급기야. “제발… 흐윽… 흐으으으윽….” 이 새끼가 쳐 돌았는지 자신의 마력을 내게 보내고 있는 중, 이 새끼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언데드로 만드실려고? 그게 가능했어?’ 루시퍼의 마력을 받았으니 불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고위 흑마법사가 아닌 일개 검사가 얼마나 퀄리티가 높은 언데드를 만들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아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고 싶다. 빈껍데기만 돌아다니면 이상하자너. 아니, 애초에 가능한 일도 아니지. 베니고어를 비롯한 상위 신들의 신성을 받아 완성된 빛기영의 신체가 저런 어둠의 마력에 반응할 리가 없잖아. 내가 이걸 받아들이고 싶다고 해도 몸에 쌓여 있는 신성이 저 마력을 거부할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신성이 마력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김현성은 더욱더 입술을 꽉 깨물며 어떻게든 마력을 집어넣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거부반응을 보이는 몸이 다시 한번 피를 뿜어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내가 거부한다는 액션을 취해보자. 잘 올라가지도 않는 팔을 천천히 들어 김현성의 손 위에 가져다 댄 이후에는 고개를 살짝 젓는다. 굳이 이럴 필요가 없다는 액션이다. 언데드로 살아가는 치욕을 감내하느니 차라리 빛과 함께하겠다는 성자의 의지가 엿보이는 장면이었다. ‘X나 멋있었어… 시바.’ 아니, 이런 거로 취할 때가 아니긴 한데…. 아,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다면 언데드로 태어나도 괜찮겠지만 그건 네가 아니라 소라가 해야지. 그렇지 않아? “…….” “아아… 흐으윽… 제발… 제발 살아줘요. 제발… 제발… 흐으윽… 제가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죄송해요. 제기랄… 제기랄… 흐으윽… 제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흐윽… 제발 눈을 감지 마세요. 상처가 그렇게 깊지 않습니다… 네… 회복할 수 있을 만한 상처예요. 금방 치료될 겁니다. 지금도 상처가 아물고 있어요. 네.” ‘구라쟁이.’ “포션이… 포션이 효과가 좋은 것 같습니다. 기영 씨가… 흐으윽… 만드신 포션이라 그런지….” ‘뻥 치지마. 그 정도는 아니야.’ “제발… 조금만 버티면 사제들이 올 겁니다. 네… 그럼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겁니다. 제가 바보 같았… 웨에에에엑… 흐으윽… 흐윽….” 눈물 콧물 침 전부 다 흘리고 있는 와중에도 이 새끼 얼굴이 잘생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놀랍기는 하지만 정말로 멘탈이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되는 대로 말을 쏟아내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강했고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다. 기본 응급처치 정도는 배웠을 텐데도 불구하고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심장은 뛰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심폐소생술은 왜 하는 거야. 본인이 망가뜨린 팔과 다리를 계속해서 주무르면서 얼굴을 가슴에 가져다 댄다. “으아아아아아아으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짐승이 울부짖는 것처럼 오열하고 있다.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슬슬 실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김현성의 눈물이 상처를 적시면 기적적으로 부활하는 클리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이미 눈물 한 바가지를 내 상처 부위에 떨어뜨린 것 같았지만 여전히 이기영은 죽어가고 있었다. “아으아아아아… 제발… 베니고어 님… 알타누스! 알타누스!! 알타누스 님… 제발… 한 번 만 더 기회를 주세요.” ‘이건 조금 찡하네.’ 너 회귀하는 거 싫어했잖아. 아니, 증오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지. 차라리 죽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회귀했다는 걸… 싫어했었는데.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알타누스. 제발… 베니고어 님… 베니고어시여. 제 목소리가 들리신다면 제발… 한 번 만 더 기회를 주세요. 이번에는… 이번에는 망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네…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제가 전부 떠안겠습니다. 걱정하시는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제발 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제발… 시키시는 무슨 짓이든 하겠습니다. 죽으라면 죽고 모든 말에 따르겠습니다. 평생을 베니고어 님만을 위한 종으로 살겠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제발… 제발 한 번 만 더… 한 번 만 더하게 해주세요.” “…….” “한 번만… 끄윽… 끄으윽… 한 번 만 더 하게… 해주세요. 제발… 기회를 주세요. 기회를… 흐으으윽… 기회를 달라고… 제길… 기회를 달라고!!” ‘둠둠현성 다혈질 시바.’ “개새끼들아! 제발! 내가 이렇게 빌잖아. 그러니까 한 번 만 더 기회를 달라고! 개새끼들아! 너희들이 멋대로 나를 회귀시켰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제길! 흐으윽… 끄윽… 그러니까 내 말 들려? 기회를 달라고 했잖아! 내 말 들리냐고! 시발새끼들아아!!!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으면… 개새끼들아… 살려내. 시발새끼들아!! 제발…딱…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제발….” ‘욕 잘하자너.’ “루시퍼! 루시퍼! 내 말 들려? 내 말 들리는 거야? 내 모든 걸 가져가도 좋으니 제발 살려내. 그게 불가능하다면 네가 나를 회귀 시켜줘.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는 거지? 너도 할 수 있잖아. 알타누스쳐럼 너도 할 수 있는 거잖아.” ‘피드백이 오고 있기는 해? 걔는 믿지 마. 애초에 너를 조종한 게 루시펀데 왜 걔한테 부탁하고 앉아 있어? 그만큼 절박해?’ “제발 나를 회귀시켜! 제발….” 아쉽게도 피드백은 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미쳐 버린 것처럼 계속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소리치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절박해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아니, 이 새끼 진짜. ‘정신 나갔네.’ 시바, 그러니까 왜 그랬어. 왜 그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했어? 네가 정말로 미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아무 죄 없는 빛의 배때기에 손을 댄 이상 기다리는 건 파멸뿐이었자너. 그걸 다시 주워 담았으면 안 됐어. 그랬으면 안 됐다고. “아으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 제발… 흐으으윽… 흐윽… 흐으으윽… 기영 씨… 기영 씨….” “…….”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해요. 정말로… 흐윽…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모두 다 제가 나빴어요. 처음부터…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을걸.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흐으윽…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아무래도 내가 이렇게 된 게 자신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동공에 힘이 풀리고 있다. 뭘 떠올리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천천히 듀렌달을 들어 올리는 놈의 모습만은 확실하게 시야에 비친다. “다 내 잘못이야. 전부… 너 같은 새끼가… 너 같은 새끼가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됐던 거야. 버러지 같은 김현성 개자식아. 흐으윽… 제기랄… 흐으윽….” ‘너 이 미친 새끼 왜 나쁜 짓 하려고 그래. 하지 마.’ “기영 씨? 기영 씨… 조금만 참아요. 분명히 모든 게 원래대로 되돌아갈 겁니다. 하… 하하…. 네. 저는 이 개새끼들을 알아요. 정말로 대륙이 이대로 끝나는 걸 원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에 저를 다시 한번 회귀시킬 게 분명할 거예요. 네.” ‘야.’ “다음번에는 이, 이럴 일이 없을 겁니다. 네.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떠안을 겁니다. 짐 같은 건 함께 들어 주시지 않으셔도 돼요. 저를 만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아니, 다음에는 기영 씨에게 말을 걸지 않겠습니다. 제가… 제가… 흐윽… 흐으윽…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김현성? 너 이 새끼 제정신인 거지? 그렇지?’ 검을 자신의 목으로 가져다 대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자살하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고 있다. ‘제정신이야?’ 김현성이 여기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베니고어나 엘룬 쓰레기가 놈을 다시 회귀시켜 준다는 보장 따위는 없다. 알타누스 때는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시간을 되돌린다는 건 그렇게 쉬운 작업이 아니다. 해주냐 해주지 않냐의 문제가 아니라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느냐 문제라는 거다. 게다가…. 너 시바 자신 있어? 나 없이, 시바, 여기까지 끌고 올 자신 있냐고. 만약 회귀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한번 놈이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김현성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애초에 회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정말로 회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선택한다기보다는…. ‘그냥 견딜 수 없는 거야.’ 단순히 합리화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냥 스스로 저지른 일이 견딜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 하하… 하… 3회 차는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할 거예요. 제가…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흐으으윽… 흐윽… 제가….” 목으로 천천히 검을 밀어 넣으려고 하는 것만 같다. 울부짖고 있는 얼굴은 이미 차갑게 굳어 있다. 다시 한번 시간이 천천히 느려지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로 이게 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최악의 엔딩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뭐야. 이런 게 어디 있어. 시발. 정말로 그것 때문에 망친 거야? 루시퍼 이 미친 까마귀야. 정말로 이게 끝이야? 나는 조건을 완성했어. 내기는 내가 이긴 거라고. 개 쓰잘데기없는 조건 하나 들어맞지 않았다고 이렇게 끝난다는 게 말이 돼? “다음에… 다음에… 또… 그래. 다시 한번…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다시 한번은 없어. 김현성 미친 새끼야. 다시 한번은 없다고. 야. 야! 듀렌달의 날이 김현성의 목에 닿았을 때였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아?’ 머릿속에서 내 목소리가 울려온 것. ‘생각해 보면 이상하잖아. 이기영. 응? 그렇지 않아?’ 뭐가. 뭐가 이상한데? ‘웃기잖아. 최후의 최후에 우리가 타인에게 선택을 맡겼다는 게. 루시퍼의 선택에 네 모든 걸 걸었다는 게 이상하지 않냐고.’ 그건…. ‘신뢰가 돈독했나 봐. 그 정도로 그 미친 까마귀가 신용하고 있었어?’ 내가 그 까마귀를? ‘우리는 뒤통수를 맞는 쪽이 아니잖아. 치는 쪽이지.’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게 맞는 미래라는 거야. 지금 네가 보고 있는 장면이야말로 정말로 우리가 원했던 거라고.’ 나는 개 같은 3회 차 따위는 안 만들어. ‘나도 다시 한번 하자고 말한 적 없어. 그냥. 이게 맞는 미래라고.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겠어?’ “…….” ‘알고 있잖아.’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장담하건대 분명히 헛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죽어가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죽을 때가 되니 이런 것도 보고 그러나 봐. ‘김현성은 완전해질 수 있어.’ 가면을 쓴 남자가 김현성의 어깨에 손을 두른 채,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 766화 끝으로 (25) > 다시 한번 눈을 뜨고 쳐다봐도 여전히 가면을 쓴 남자가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정말로 헛것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너무나도 현실감이 없는 장면이다. 김현성이 자신의 옆에 있는 가면을 쓴 남자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그렇다. 녀석이 정신을 놓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리 쟤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한들, 어깨에 손을 두른 녀석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이상해진 것은 아니다. 김현성은 물론이거니와 세라핌 역시 녀석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넌 이미 답을 알고 있어.’ 이 개 같은 새끼가 나랑 지금 퀴즈 놀이 하자는 거야 뭐야?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놈이 뭘 말하고 있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 심지어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놈이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잠깐 동안 혀를 차기는 했지만…. ‘이거… 힌트라고 봐도 되는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아니, 무조건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눈앞을 봐. 완전히 개판 오 분 전인데.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어? 가면의 영웅이 한 말이 꼭 틀린 말은 아니야. 이유 모를 개소리에 선동당하자는 게 아니라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는 거야. 최후의 최후에 타인에게 선택을 맡기는 건 확실히 우리답지 않지. 이기영이 뒤통수를 맞는 쪽이 아니라 때리는 쪽이 아니라는 것도 공감할 수 있어. 나는 루시퍼에게 선택을 맡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 이미 한 번 데였잖아. 정확히 계약 조건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서로 함정을 파놨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고. 김현성이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도, 그리고 녀석이 하늘을 가리킨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조금만 더 차분히 현재의 상황들을 떠올리자 퍼즐들이 들어맞는 기분이 들어.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믿을 수… 있어?’ 내가 저 새끼를 믿을 수 있느냐에 대한 것. 최후의 최후까지 타인에게 선택을 맡기는 게 우리답지 않지만 놈이 정말 우리가 맞느냐에 대한 이야기였다. 저 가면을 쓴 남자가 내 적이라면? 내가 스스로 기억을 지운 것이 아니라 놈이 내 기억을 지운 것이라면? 놈이 뭔가를 꾸미고 있고 내가 놈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고 있는 것이라면? 가면의 영웅이 아니라 빌어먹을 가면 쓰레기라면 어떨 것 같아? 아니.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잖아.’ 어차피 내가 뿌린 씨앗이다. 그리고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되든 간에 이 선택이 결코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게 어떤 엔딩으로 향하는 길일지는 알 수 없지만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으니 여기에 걸어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내몰린 셈이다.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자 여전히 위를 가득 메운 이질적인 빛이 시야에 비친다. 뻘쭘하고 머쓱하게 서 있는 세라핌은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녀석이 어떤 선택을 하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김현성에게 뻗친 손이 다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기 때문이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외부 시스템은 인격을 잃어버린 김현성을 원했지만 녀석은 끝끝내 유대감을 되찾았다. 심지어 되찾은 직후, 한바탕 눈물을 뽑아내고 있으니 오죽할까. 저 시스템은 김현성이 자신의 프로그램을 관리해 줄 관리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내게 있어서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사실 커다란 의미는 없다. 어차피 곧 선택을 내려야 했으니까. ‘김현성은 완전해질 수 있어.’ 그래, 나도 알아. 네가 뭘 말하는 건지 알 것 같아. 이거 딱 그런 상황이잖아. 그렇지 않아? 소중한 동료의 죽음으로 인해 각성하는 주인공 클리셰. 네가 원하던 그림이 이거였잖아. 저 위에 있는 프로그램을 불러낸 것도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어? 촛불은 꺼지기 전에 가장 불타오른다고 했던가. 현재의 내 상태가 가장 불타오르는 상태라는 걸 깨닫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가면의 영웅이 내게 힘을 준 것일지도 모르지. 생각은 길었지만 시간은 찰나. 서둘러 본인의 목을 그어버리려는 김현성의 모습에 천천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 만.” 멈출 거라고 생각했지만 우뚝 움직임을 멈춘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기영 씨?” “해….” “기영 씨? 흐으윽… 기영 씨. 기영 씨… 기영 씨?” “그만… 하세요. 그렇게… 하지… 마….” “괜찮…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 으신 겁니까?” 허겁지겁 달려와 나를 부여잡는 놈이 시야에 비친다. 여기서는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 옳다. 원래 괜찮다고 말한 새끼치고 괜찮은 새끼 없거든. “네. 저는… 저는… 괜찮습니다.” 활짝 웃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내 미소가 어떻게 비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무척 숭고한 모습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김현성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녀석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기영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걸, 이렇게 대화를 나눌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녀석이 모를 리가 없다. “흐윽… 흐으으윽….” “그러니… 울지 마세요.” 살짝 손도 잡아줘야 하자너. 그래야 이 새끼가 진정하자너. 바들바들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굳이 감정을 읽지 않아도 녀석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있다. 허겁지겁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것 역시 눈에 보인다. “제가… 제가 다른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네. 이번에는… 이번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방법이에요. 아까… 아까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다시 한번 회차를 시작할 겁니다. 이번에는 틀리지 않을 거예요.” “그럴… 필요 없….” “네?” “저는… 이대로….” 빛의 성자의 퇴장으로 나쁘지 않은 무대야. 반의반의 반 정도의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면 솔직히 이런 끝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본래 마무리라는 게 그렇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희생하던 조연이 모든 걸 떠안고 다시 한번 희생하는 그림. 누가 봐도 완벽한 그림 아니야? “그러니… 믿고… 있겠습니다.” 이런 대사 한 번씩 박아주면서. 그럼 아주 자지러지잖아. “그동안… 즐거웠….” 그럴 확률은 없겠지만 만약에 이게 정말로 끝이라면 진짜로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 같아. 그동안 정말로 즐거웠다고. “함께해서… 다행….” 함께해서 다행이었다고. “흐윽… 흐으으윽….” “덕분에….” 덕분에 꿀 좀 빨았다고. 아니, 이건 이야기하지 말자. 덕분에 좋은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죄송… 합….”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좋겠네. 그동안 심한 짓을 많이 하기는 했어. 솔직히 본의는 아니었는데 내가 너한테 많이 심했던 것 같아. 여러 가지로… 응. 그래. 여러 가지로. 근데 그건 이제 퉁 치자. 그치? 너도 동의하지?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약속한 거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새끼야. 시바. 놀러 가기로 한 것도. 모든 게 끝난 다음에 할 일을 쌓아 뒀는데 모두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네. “저는… 알고 있… 현성 씨는… 강….” 나는 알고 있어. 너는 결코 약하지 않아. 너는 강해. 외적인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정말로 강해. 그래서 내가 너를 선택한 걸 거야. 휘둘리기만 하는 병신이 아니라 정말로 강했기 때문에 내가 널 선택한 거야. 너는 그걸 증명했어. “다른 사람들을… 잘 부탁….” 특히 하얀이랑 덕구는 잘 챙겨줘야 하는 거 알지? 정말로 내가 이대로 죽는다면 걔네들한테 몹쓸 짓을 하는 게 될 거야. 길드원들도 잘 챙겨주고 내 아들딸들도 마찬가지야. 지혜 누나랑 희라 누나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카스가노한테도 가끔 들러줘. “미안해… 하지 마세요. 저는… 하아… 하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가 한 짓에 대해 너무 미안해 하지 마. 솔직히 어쩔 수 없었잖아. 이게 다 루시퍼랑 저 간악한 세라핌 때문이야. 나는 네가 나를 찌른 게 네 본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동안… 정말로… 고마….” 마무리로 한마디만 더 해주고. “…….” “흐윽… 흐으윽….” “…….” “하늘… 하늘이… 보고 싶… 어….” 지금이 몇 시야? 지금 너무 하늘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네. “노을….” 그래. 노을이 보고 싶어. 그게 존엄한 죽음일 것 같아. 이렇게 마무리하고 가면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조용히 미소 짓게 된다. 놈이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지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이제는 익숙한 얼굴이다. 이 새끼가 웃고 있는 것보다 울고 있는 모습을 더 많이 본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싶….” 한 번 더 보고 싶었는데…. 하늘을 뒤덮은 저 이질적인 빛 때문에 내가 바라는 풍경을 볼 수 없어서 너무 아쉬워. 나는 노을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싶어. 나 원래 직접적으로 이야기 안 하는 거 알잖아.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지?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거지? 김현성은 아까처럼 울부짖지 않는다. 입술을 꽉 깨문 채로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인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눈 형제의 마지막 부탁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김현성이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이후에 어떤 선택을 하든, 놈은 내 존엄한 마지막을 위해, 친우의 부탁을 위해 내가 원하는 풍경을 바라보게 해줄 것이다. “현성 씨… 믿고… 있….”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김현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째서 가면의 영웅이 김현성이 완전해질 수 있다고 말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루시퍼의 힘이나 베니고어의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김현성은 혼자 일어설 수 있다. “흐윽… 흐으윽….” 녀석은 혼자 일어설 수 있다. ‘일어나.’ 그래. 시발. 김현성은 혼자 일어설 수 있다. ‘일어나. 김현성.’ 내가 선택한 알타누스의 회귀자는 혼자 일어설 수 있다. ‘일어나 새끼야.’ “약속을….” “네. 약속을….” “노을….” “네.” 이윽고 완전히 몸을 일으킨 녀석이 내게 시선을 뗀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린 녀석은 듀렌달을 치켜 올린 채로 다시 한번 자세를 고쳐 잡았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녀석이 뭘 하려고 하는 건지 알 것 같아 웃음이 나온다. 김현성의 몸에 변화가 생긴 것은 바로 그때였다. 녀석이 인식하고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틀림없이 자신의 몸에 변화가 생긴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시바… X나 멋있어.’ 그 말 그대로 진짜 X나 멋있다고. 거대한 검은색의 날개에 빛이 스며든다. 베니고어가 내린 빛이 아닌 김현성 스스로가 가지고 있었던 붉은 색 빛이 놈의 날개를 변화시킨다. 검은색의 칙칙한 날개 대신 자리한 것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것 같이 느껴지는 찬란한 날개다. 머리 위에 있는 뿔 역시 마찬가지. 뿔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까보다 더욱더 거대한 뿔이 놈의 머리 위에 자리 잡는다. 이 또한 빛나고 있다. 붉은 노을빛이 놈의 모습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하… 하하… 하하하하….” 그 누구의 힘이 아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아니. ‘이거 우리 필살기자너.’ 소중한 형제가 내린 우정의 힘이자너.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노을빛의 검을 하늘 위로 뻗는 놈의 모습이 보였다. < 767화 끝으로 (26) > 노을빛에 둘러싸인 김현성에게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 김현성이 신성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루시퍼의 것도, 베니고어의 것도 아닌 온전히 자신의 빛을 뿜어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괜스레 대견하게 느껴진다. ‘처음부터 자격이 있었던 거였어.’ 말 그대로, 처음부터 자격이 있었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는 광경이지 않을까. 베니고어가 준 신성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애를 먹었던 나와는 반대로 김현성의 신체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계단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지는 위에 있는 적폐 연놈들의 선택이 아닌 김현성의 선택에 달려 있었던 거다. 어째서 모두가 김현성을 원하고 있었는지도 이해가 간다. 경력 있는 신입이자너. 흑이든 백이든 간에 곧바로 이런 자원을 영입할 수 있다는 건 놈들에게도 무척 달콤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시바 저걸 보라고.’ 노을빛의 날개. 노을빛의 뿔, 노을빛의 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커다란 소리를 내지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은 뭔가 주먹을 꽉 쥐게 만드는 힘이 있다.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들 거라는 기대감을 품게 된다. 저런 건 많은 사람이 봐야지. 영웅이 우리와 함께 해주고 있다는 걸 더욱더 많은 사람이 알아야지. 생각과 동시에 동시다발적으로 공중에서 여신의 거울들이 떠오른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영웅의 이야기를 노래할 수 있게, 싸움에 지친 전사들을 위로해 줄 수 있게, 앞장서 걸어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켜줄 수 있게. 모두가 저 모습을 바라봐야지. 일순간 전장이 조용한 상태가 된 것 같다. 갑작스럽게 공중에 떠 있는 커다란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며 모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김현성이 검을 휘두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지금까지 녀석에게 응답하지 않았던 노을빛의 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게 녀석을 비춰주고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보인다. 무언가 할 말을 잊은 채로 조용히 고개를 올리고 있는 모두가 눈에 보인다. 도미니온스를 한 손으로 부축하며 신전을 빠져나가고 있는 조혜진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어째서 쟤를 챙겨 나오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안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되찾은 김현성에게 보내는 미소같이 느껴진다. 그럴 만도 하다. 그동안 조혜진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얼마나 속이 후련한 모습일까. 악마의 모습으로 수많은 백금색의 검에 꽂혀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던 그때의 김현성과는 다른 모습이다. -길드마스터…. 길드마스터라고 딱딱하게 부르지만 않았으면 더 그림이 됐을 것 같기는 했지만 저게 울 조노보노의 한계잖어.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곱게 묶여 있던 자신의 파란색 머리끈을 풀어 손에 꽉 쥐는 것이 눈에 보였다. 조혜진의 긴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바람에 휘날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지만 본인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양. 얘가 도대체 왜 이러나 싶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머리끈을 꽉 부여잡으며 바라보고 있는 게 수상하다. ‘시바, 혹시 현성이가 선물해 준 거 아니지?’ -힘내세요. 길드마스터. 분위기상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게 아니라면 저걸 저렇게 꽉 쥐고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지혜 누나와 했던 내기가 생각나 미소를 흘리며 시선을 돌리자 이미 도미니온스의 몸에서 빠져나와 휴식을 즐기고 있는 이지혜가 눈에 보인다. 아, 누나 진짜. ‘아직 전쟁 끝난 거 아닌데….’ 본인이 할 수 있는 걸 전부 하고 쉬고 있으니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창문에 걸터앉아서 커피 한잔하는 건 아니잖아. -혹시 보고 있어도 너무 나무라지 마요, 오빠. 솔직히 나는 할 거 다 한 거 알고 있잖아. 여기서도 미끄러지는 거면 운이 없는 거지. 이미 내 영역을 벗어난 일인데 뭐 어쩌겠어요? 하늘에 맡겨야지. 심지어 하연수가 성심성의껏 이지혜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고 있는 모습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쁘네요. 언니. 정말 예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저런 거 보면 정말로 신이 있기는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 아니, 이미 신인가? 그녀가 들고 있던 커피잔을 손에서 놓친 것은 바로 그때. 하연수가 급하게 떨어진 커피잔으로 손을 뻗어 봤지만 결국에는 쨍그랑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쏟아진 커피잔을 볼 수 있었다.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클리셰를 보여주는 건 나쁘지 않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내가 불안해졌다. -……. -이기영…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아니, 무슨 일 일어난 것 같아. 이것도 잘 안 보이기 시작했거든. -……. -……. -연수야 나갈 준비 해. -네? 갑자기요? -지금 당장 나갈 준비 하라고. 제기랄. 이 누나 표정 좀 보라고… 한 번 비웃어 주고 싶은데 카스가노 유노를 보면 정말로 큰일 난 것 같아서 뭐라고 말을 못 하겠네. 아무 말 없이 주저앉아서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는 걸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행복한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건지, 볼 수 없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표정이 이기영의 끝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호성을 보내는 쪽이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노을빛의 검사다. 하핫. 노을빛의 검사라고!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노을빛의 검사가 우리와 함께 싸우고 있다. -부탁해요! 파란 길드마스터!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어! 하하하핫! 전투에 지친 전사들은 전쟁의 끝이 오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다. 교국, 그리고 내 고향 같은 린델의 시민들도 저걸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아직 끝이 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들은 종국에는 김현성이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끊임없이 기도를 드리고 환호성을 보내며 대륙을 지키는 영웅을 위한 노래를 부른다.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껴안고 있었고 본인들을 이끌어 주는 영웅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 조금만 더 힘을 내주기를, 조금 만 더, 조금 만 더, 조금 만 더…. 박덕구 이 새끼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멋있다. 그지. 아저씨. 우리 길드마스터 오빠. 진짜 멋있어. -크으…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냐니깐. 우리가 승리할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 거, 결국에는 우리 형씨가 파바바박! 하고 전부 해치워 버릴 거라고 내가 몇 번이고 말했는데. 그게 이렇게 된 거 아니요. -정말로 이걸로 끝날 수…. -거, 기모 형씨. 당연히 해낼 수 있을 거요. 내가 장담한다니깐. 형님과 형씨가 함께라면…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요. 웃음이 나오는 광경이다. 언제부터 쟤들이 저렇게 붙어 다니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풍경처럼 보인다. 1회 차 박덕구를 떠올려 보면 더욱더 그렇다. 저렇게 성장한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다. 슬그머니 다가온 황정연이 녀석의 손을 잡고 있다. 둘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박덕구는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분명히 할 수 있을 거라니까. -네. 분명히 할 수 있겠죠? 이를 보이며 웃고 있는 모습, 왠지 모르게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그래서 내가 저 돼지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쓸데없는 걱정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니까. 녀석도 1회 차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박덕구답게. 매번 떠들썩하고 재미있게. 황정연과는 아마 결혼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놈이 가정을 이룬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박덕구의 자식들이 파란 길드에서 뛰어다닐 거라고 생각하니 정말로 웃음이 다 나온다. 그러고 보니까 나도 결혼하기로 했었지. 그래. 우리 하얀이 저기 있네. ‘이대로 죽으면….’ 하얀이… 하얀이는…. 자리에 철퍼덕 주저 앉아 한소라의 신체 일부를 껴안고 있는 모습. 하늘을 올려다 보며 안심했다는 듯이 숨을 몰아쉬고 있는 얼굴이다. 치열한 격전이 끝으로 다가왔고 이제야 조금 여유가 생긴 것 같은 표정이었다. ‘…….’ 이후가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소라가 있으니 잘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왜 자꾸 내가 죽게 되는 걸 떠올리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이기영은 벽에 똥칠할 때까지 잘 살 텐데. 너무 연기에 심취한 모양이다. 그래도…. -오빠? 눈치 빠르네. -오… 오빠? 방금 눈 마주친 것 같은데. 쟤는 진짜 귀신 같아. 무섭자너. -오빠… 오… 오, 오빠. 허겁지겁 다시 한번 몸을 일으키다 앞으로 풀썩 꼬꾸라지는 것이 보인다. 주변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정하얀을 붙잡고 있다. 그래. 쟤는 못 오게 하는 게 좋겠어. 한 줌의 마력도 남아 있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네.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이 주변의 다른 이들의 모습과 대비된다. 웃으며 환호성을 보내는 이들 사이에 정하얀은 한소라를 손에 꽉 쥐며 울부짖고 있었다. 정하얀의 눈에는 내가 보이는 모양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는데… 너 혹시 이기영 사용설명서 같은 특성이라도 얻은 건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줘. 아, 만약에 정말로 내가 죽으면…. 희영 씨. 그래. 희영 씨 말도 잘 듣고. 그나마 길드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니까. 지금도 차분히 기도드리고 있는 것 봐. 첫 만남이 조금 안 좋기는 했지만 기회가 있었더라면…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었을 텐데…. 엘레나와 엘리오스도 보이네. 이종족들 사이에 선 두 남매는 조용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후회하지는 않느냐. -지금 보고 계시잖아요. 파란 길드가 제가 있어야 할 곳이에요. -그래. 그렇게 보인다. 하하. 그렇게 보여. 지금까지 많은 기적을 봐왔다고 생각했지만… 이 광경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광경이에요. 파란 길드에 온 걸 후회하지 않는다니 다행이네. 그 와중에 희라 누나는 노을현성이랑 싸울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제발 참아줘. 본능대로 움직이는 건 좋은데 너무 몸을 맡기면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지잖아. 그나마 붉은 용병이 있어서 다행이야. 저 길드가 그나마 누나를 가두는 철장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고. -고생하셨습니다. 여왕님. -전투는? -거의 마무리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흠…. -여왕님? -어때? 저거랑 나랑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아? 싸우지 마. 제발. -아니, 대답하지 마. 지금은 그냥 즐기지 뭐. 정말로 이게 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더 올라갈 수 있는 곳이 보이는 게 다행이기도 하고. 저걸 보니 왜 우리 자기가 쟤한테 그렇게 달라 붙었는지 알겠네. 강함을 숭상하는 길드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박수를 치며 존경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게 눈에 띈다. -힘내. 파란 길드마스터님. 다들 응원이나 보내자고. -힘내라! 힘내! -하하하하하핫! 드디어 끝났다. 시발. 끝이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직 끝난 건 아니야. 아직까지 싸움은 진행 중이니까. 김현성의 검에서 뻗어 나온 노을빛이 하늘에 부딪치자 모두가 환호성을 보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질적인 빛은 형태를 만들어낸다. 이대로 있으면 본인이 당할 것이라는 것은 직감한 시스템은 어마어마한 신성을 투자해 하늘을 꽉 채운 거인으로 변모한다. 김현성의 검에서 뻗어 나오고 있는 노을빛을 두 손으로 어떻게든 틀어 막으려고 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왠지 모르게 옆구리가 비어 있는 것만 같다. 전에 낚시했을 때 박덕구가 신의 옆구리를 찌른 롱기누스의 창을 외쳤던 장면을 잠깐 동안 떠올리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어버렸다. 김현성은 해낼 수 있을 테니까.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흐으윽… 으아아아아아아!!” 힘들지? 조금만 힘내. 널 응원하고 있는 새끼들이 이렇게나 많다. 야. 지금까지 마음의 눈으로 훑어 봤던 것들, 환호성을 지르고, 김현성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기도를 드리는 이들, 그래. 우리를 믿고 있는 길드원들. 아,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조금 필터가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하얀이는 살짝 빼고…. 우리 병아리들. 이제 병아리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아영이랑 창렬이… 그리고 신입 길드원 알프스까지. 열심히 응원하고 있자너. 그렇지? 너 좋다는 검은백조 길드 마스터도 있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기도하고 있잖아. 어쩌면 진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왠지 정말로 진짜로 마지막인 것 같아. 이게 정말로 내 마지막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될 것 같다고. 그러니까 확실하게 받아. 내가 본 것들. 너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널 응원하고 있는 새끼들이 이렇게나 많단다. 새끼야. 회귀자 사용설명서로 내가 본 것들을 김현성에게 흘려보낸다. 아마 김현성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잠깐 동안 본 것들을, 이 마지막 싸움을 대륙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녀석에게 힘을 보내고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입술을 꽉 깨물고 울음을 참고 있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힘내라. 시바. 우리 회귀자.’ 마침내 녀석의 등 뒤에서 한 쌍의 날개가 더 솟아난다. ‘그래. 힘내라. 알타누스의 회귀자.’ 노을빛의 검이 이질적인 빛을 가르는 게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를 배신하듯.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흐으으윽… 으아아아아아아아!!” 김현성의 빛은 이질적인 빛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쏟아지는, 쏟아지는 노을이 보인다. “하… 하… 하하….” 역할극에 심취했는지 웃음이 나온다. 정말로 웃기지 않은가. 이후의 일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이렇게 됐다는 게. 이기영의 마지막이 정말 이렇게 됐다는 게 우스워. 나는 김현성이 대륙 구하기와 이기영 구하기 중 후자를 선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희생하는 게 나라는 게 어이없지 않냐고. 진짜… 당황스러워 죽겠네. 나도 내가 왜 이랬는지 모르겠어. 설마 설마 하면서 지켜봤지만… 정말로… 정말로…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 너무 심취했었나 봐. “기영 씨?” “…….” 그래도. 뭐. 풍경은 괜찮네. “…….” “…….” “…….” “기영 씨?” “…….” 눈이 감겼다. < 768화 마지막 (1) > -이후에 누군가가 그날의 전투가 어땠는지 묻는다면 제 생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과 빛을 바라본 날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 -먼 시간이 흐른 이후에 누군가가 그날의 풍경이 어땠는지 묻노라면 모두가 하나같이 가장 숭고한 빛이 있었다고 노래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륙은 승리했습니다. 대륙을 위협하는 악마의 무리를 몰아내고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쟁취했습니다. 값진 승리였습니다. “…….”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이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늘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한 성자의 희생을….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요.” “…….” “정말로… 믿기지가 않아요.” -한 성자의 희생을 기리기 위함입니다. “…….” -네. 파란의 부길드마스터. 이기영 명예추기경님께서는 항상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많은 것을 희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가장 가까이에서… 저는… 그의 친구로서… 그가… 얼마나… 얼마나… 많은 것을 감당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온종일 이야기해도…. 네… 죄송합니다. 다시… 그러니까… 제 친구… 기영이에 대해서… 흐윽… 죄송합니다. 앞을 바라보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조혜진 님의 모습이 보였다. 손에 들린 추도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뭐라고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어떻게든 말을 떼려고 하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그녀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남들 앞에서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던 그녀가 이런 공식 석상에서 눈물을 흘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하고 있는 이들 몇몇도 시야에 비친다. ‘가혹해.’ 이 장소에 자리해 있다는 게 그녀에게 가혹한 일이다. 부길드마스터의 지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 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미 눈가가 붉어져 있다. 대륙의 승리를 기뻐할 겨를도 없이 날아온 절망적인 소식에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로 지옥 같은 장소에 발을 디딘 것이다. 계속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억지로 입을 떼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이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눈에 보인다. 어떻게든 쥐어 짜내는 목소리는 절규 섞인 울음소리에 금세 묻혀 버렸다. -흐윽… 흐으으윽… 흐윽… 죄송합… 흐으으윽…. -자리해 주신 여러분께 사과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네… 잠시 후에… 순서를 바꿔…. 이내 교단 관계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몇 사제들이 단상 위로 올라가 허물어진 조혜진 님을 챙기고 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마 추도식은 계속 진행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중요한 자리였으니 말이다. 이기영 명예추기경을 추도하는 것은 교단과 대륙 전체에 무척 중요한 일이다. 그는 대륙의 영웅이었고 대륙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성자였다. 이 힘든 자리에 조혜진 님이 자리한 것 역시 그러한 이유였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의 죽음을 감당해야 했으니까. 파란 길드에서 누군가는 그가 얼마나 숭고하고 자기희생적인 사람이었는지, 그의 삶이 어땠는지, 대륙에 전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녀의 말대로 대륙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이었고 그 어떤 전투보다 가혹하고 힘든 전투였다. 이질적인 빛이 사라지고 난 이후, 노을빛의 물든 세상은 지금까지 봐왔던 어떤 풍경보다 더 아름다웠다. 모두가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누구도 그 커다란 승리 뒤에 더욱더 큰 희생이 자리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 역시 그랬다. 새로운 하늘이 열린 순간 웃음을 터뜨렸고 인류의 승리를 노래했다.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눈을 감고 있었던 부길드마스터의 시신을 보지 못했다면 다른 이들과 함께 계속해서 축배를 들어 올렸을 것이다. 지금도 무척 선명한 기억이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던 노을빛 아래, 부길드마스터의 시신을 부여잡고 오열하고 있는 정하얀 님의 모습과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길드마스터의 모습. 무언가 할 말을 잃은 것 같은 길드원들과 부길드마스터의 죽음을 부정하던 박덕구 님.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던 그 날은 기쁨보다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던 날이었다. 아니,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허리를 숙이며 계속해서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정하얀 님이 눈에 보였다. 옆에 있는 한소라 님이 손을 꽉 잡아주지 않고 있었더라면 아마 이 곳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정하얀 님은 아직까지도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으니까. 간혹 한소라 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부길드마스터가 말을 걸었다고, 부길드마스터가 함께하고 있다고 하는 종류의 이야기였다. 악마의 봉인에서 풀려난 한소라 님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말에 긍정했지만… ‘그렇지 않을 거야.’ 정말로 정하얀 님이 부길드마스터의 죽음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길드에 있는 그 누구보다 위태로워 보였고 심지어 부길드마스터와 만나겠다며 생을 마감하는 것을 기도하기도 했었다. 솔직히… 정하얀 님이 자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비어 있는 곳이 많이 보인다. 엘레나 님도, 길드마스터 역시 자리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표현이 더욱더 어울릴 것이다. 그만큼 그의 죽음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삼 일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대륙 전역에 커다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슬픔을 위로했지만 파란도, 대륙도, 빛의 아들을 잃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백조의 이지혜 님은 부길드마스터의 소식을 들은 직후에 자취를 감췄다. 선희영 님, 카스가노 유노 님도 비슷한 시기에 모습을 감췄다. 이지혜 님이 선희영 님과 따로 접선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그들이 어디로 향했는지, 함께 사라진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붉은용병의 길드마스터인 차희라 님 역시 자리하지 않았다. 참석하겠다는 메시지를 따로 받기는 했지만…. “알프스 님?” “…….” “알프스 님?” “…….” “알프스 님.” “아… 네. 죄송해요. 김미영 팀장님.” “아닙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조혜진 님이 이제 돌아오실 것 같습니다. 잠깐 따로 휴식을 취하시고 이곳에서 대기하시다가 단상 위로 올라가실 텐데….” “아… 네. 김미영 팀장님은 지금 가시는 건가요?” “네. 저는… 아무래도 교단 측과 한 번 더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로… 힘드네요.” “네.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많으니까요. 추도식에서까지 이런 이야기를 나눠야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길드에서 문제를 처리하지는 않는 건가요?” “다른 분들에게 이런 것까지 신경 쓰고 싶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조용하게 처리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정하얀 님의 상태를 생각하면… 알리면 안 될 것 같고요.” “아… 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추도식은 아마 잠시 후에 다시 시작될 것 같습니다. 조혜진 님이 꼭 마무리를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주셔서… 마음이 조금 진정되실 때까지만… 부탁드립니다.” “네.” 김미영 팀장님이 조용히 자리를 일으키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부은 눈을 바라보니 씁쓸한 기분이 든다. 김미영 팀장님이라고 슬프지 않을까. 부길드마스터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아마 그 누구보다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그런 걸 상의하고 싶지 않을 텐데.’ 간단한 문제다. 부길드마스터의 시신의 소유권에 대한 문제였다. 교단 측에서는 상징적인 의미로 베니고어의 아들의 시신을 직접 모시고 싶어 했다. 사실 모시고 싶다는 표현이 이상하기도 했지만….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교단 측에서도 양보하기 힘든 문제였을 것이다. 부길드마스터가 공식적으로 파란 길드를 탈퇴한 이후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결과적으로 파란 길드는 부길드마스터의 시신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공식적으로 명예추기경의 직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단에서는 시신이 자신들의 소유라고 주장했고 아직 남아 있는 대륙보호관리위원회는 위원회에서는 자신들이 시신을 인수인계하겠다고 주장했다. 추도식 전까지는 파란 길드에서 부 길드 마스터를 보관하고 있었지만 추도식이 끝난 이후에는 각기 집단들이 소유권을 주장할 것이다. 어쩌면 무력 충돌까지 일어날지도 모른다. 상상하기도 싫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이미 자신을 포함한 몇몇은 무력 충돌이 일어났을 경우의 매뉴얼을 숙지하고 있다. 슬픔을 감당하기도 힘든 시기에도 머리 아픈 정치적인 문제를 직면한 것이다. 김미영 팀장님이라고 이런 일을 맡고 싶었을까. 본인 나름대로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하셨지만 주변의 상황은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전쟁의 뒷정리는 물론이거니와 부 길드 마스터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들에 대응해야 했고 파란 길드를 지켜야 했다.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부길드마스터가 얼마나 길드를 사랑하는지 알고 계셨으니까.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씁쓸해… 이런 게… 부길드마스터가 원하는 광경은 아니었을 텐데….’ 이런 걸 원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자리를 지나치자 유아영 님과 김창렬 님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인다. 김예리 님은 막 교단의 관계자에게 향하려는 김미영 팀장님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방금 건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지네들이 뭔데. 아저씨를. 달라고그래? 그 새끼들이 한 게. 뭐가. 있다고. 시발 새끼들이.” “김예리 님. 지금 이 자리에서는… 잠깐… 따로….” “나도. 같이 갈래.” 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정하얀 님이 살짝 고개를 드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잠깐 동안 한소라 님과 이야기를 나눈 이후에 다시 한번 고개를 아래로 내렸지만 갑작스레 이유를 알 수 없는 오한이 등 뒤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째서 손발이 떨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방금 뭔가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거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숨을 몰아쉬는 한소라 님이 눈에 보인다. 황정연 님과 안기모 님도 자리에서 잠깐 일어나 김미영 팀장님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다. 그 끝에 조용히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조혜진 님이 눈에 띈다. 천천히 다가가 옆자리에 몸을 앉아봤지만 뭐라고 위로를 건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겠지. 조용히 손을 꽉 잡아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 “…….” “꼴불견이었군요.” “…….” “정말로… 꼴불견이었습니다.” “모두 이해할 거예요.” “괜한 고집을 부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마지막까지 폐를… 끼친 것 같습니다. 부길드마스터는… 저를 비웃을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밖에 못하냐며 저를 비웃고 있겠네요.” “…….” “읽을 수 없었습니다.” “…….” “그의 희생을 기리고 딛고 일어서야 한다고, 그게 대륙의 성자가 원하는 모습일 거라고 도저히 이야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얼마만큼 대륙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에 대해서도,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 “눈앞에 있는 걸… 그대로 읽으면… 그대로 읽으면 끝일 텐데… 그걸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흐윽… 그것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어요. 마지막까지…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흐으윽… 없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다시 한번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괜스레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허벅지에서 번지고 있는 피가 보인다. 검은색 하의를 물들이고 있는 붉은색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저번과 마찬가지다. 잠깐 동안 입술을 꽉 깨물게 된다. 이걸 다시 한번 언급하는 게 맞나 싶기도 했지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조혜진 님. 혹시….” “…….” “혹시….”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걸… 끝마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감사합니다. 덕분에 조금은… 힘이 된 것 같습니다. 이만 자리로 돌아가세요. 저는 이걸 끝마쳐야 하니까요. 네.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단상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조용히 말을 잇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몇 번이고 멈추고 억지로 눈물을 삼키고 있었지만 끝끝내 말을 이어 나간다. -그의… 그의 희생은 의미 있는 희생이었습니다. 의미 있는 죽음 같은 것은 없다. -분명히 이겨낼 수 있다고… 네. 견딜 수 있다고, 별것 아니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했던 제 친구는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던 마지막 순간… 순간처럼… 웃으며 우리를 지켜볼 것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겨낸다거나 그 죽음을 딛고 일어선다는 선택지는 없다. 죽음은 항상 괴롭고 저주스러웠으며 많은 사람을 갉아먹는다. -슬픔을… 딛고 일어섭시다. 그가 우리와 함께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 -빛의 성자는, 베니고어의 아들은, 제 친구는 대륙을 비추는 빛이 되어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 769화 마지막 (2) >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평소와 같은 풍경이 시야에 비쳤다. “길드마스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곧바로 발걸음을 옮긴다. -빛의 성자는, 베니고어의 아들은, 제 친구는 대륙을 비추는 빛이 되어 우리와 함께할 것…. 여신의 거울을 통해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윽고 사라져 버렸다. 잠깐 동안 여러 가지 소리가 섞여 들려왔던 길드 하우스 안이 조용해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텅 빈 공간이 눈에 보인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적막함이 감도는 공간이 괜스레 더 어두워 보였다. 천천히 문 앞에 선 이후에는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은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용히 의자에 앉아 방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어버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한동안 방 안을 서성이다 몸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괜스레 책상에 있는 책들을 쓰다듬었다. 그가 읽던 책이었다. 그는 항상 이곳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거나 책을 읽고는 했다. 할 일이 없을 때는 연금 키트를 가져와 이해하지 못하는 실험들을 하기도 했고, 조용히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급할 때는 식사를 이곳에서 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거워 한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이나 방 안을 둘러봤지만 여전히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 네. 식사라면… 이제 막 먹으려던 참이었습니다. 마침 좋은 타이밍이었네요.’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기자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간단히 할 수 있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떠올리다 이내 식재료 보관 창고에 손을 집어넣었다. ‘좋네요.’ 간단한 생선 요리 정도가 괜찮을 것 같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와인도 괜찮겠네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접시 두 개를 테이블 위에 놓은 이후에는 요리된 것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에 했던 것은 훨씬 더 괜찮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와인을 조금 마신 이후에는 다시 한번 몸을 움직였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걷는 게 좋을 것 같다. 길드를 한번 둘러보는 것도 좋겠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훈련장이 시야에 비쳤다. 사실 그는 이곳으로는 잘 내려오지 않았다. 테라스에 나와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길드원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내려다보기는 했지만 이곳을 밟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체력훈련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탓인지 금방 녹초가 되어버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조용히 웃고는 했다.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너무 힘든 것 아니냐고 웃으며 이야기하고는 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목검을 한 번 들고 휘둘러 봤지만 금방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는 간혹 파티를 했던 것도 같다. 따로 연회장이 만들어진 길드 하우스였지만 훈련을 하고 난 이후에 모여 맥주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다 곧바로 자리를 만든 경우가 많았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자연스레 자리가 만들어진 것 같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훈련하던 모습을 내려다보던 그가 길드 직원들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건넸던 것이 분명할 것이다. 간이 테이블이 만들어지고 자리가 만들어지고, 준비가 끝나면 조용히 내려와 이야기를 건네고는 했다. ‘오늘도 고생 많았다, 덕구야. 현성 씨도…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즐겁게 떠들고 웃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러가 있었다. 너무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가 버려 조금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고 신기하게도 느껴지기도 했다. 다음 날의 스케줄에 지장을 줄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자리를 즐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몇몇은 다음 날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항상 같은 시간에 나와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는 했다. 잠깐 눈을 마주치면 손을 들어 올렸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를 건넸다. 가끔 하얀 씨와 함께 나와 있기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지만 크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많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손님들도 저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교국의 의원들, 캐슬락 의원이나 카트린 의원, 교단의 손님들도 많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규모가 큰 티파티를 열 때면 항상 테라스가 떠들썩했었다. 그럴 때면 아래에서 훈련을 하는 길드원들은 조용히 훈련에 임하거나 실내 훈련장으로 들어갔었다. 티파티에 방해가 될까 걱정이 됐던 탓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모두가 그랬던 것 같았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여러 사람과 그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 간혹 새소리가 들려오거나 가벼운 해프닝에 소란스러운 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을 편하게 했으니 말이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마 평화롭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인 것 같다. 오늘도 일상이 시작됐구나, 이런 게 일상이구나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물론 파티에 초대된 적도 있었다. 아니, 사실 거의 대부분 초대받았었지만 굳이 위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곤란하게 하지 않을까 따위를 고민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석하는 게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참석해야 했던 것 같다. ‘그러게 제가 뭐라고 말했어요. 현성 씨도 여러 사람과 친분을 다져 놓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 ‘몇 주 뒤면 마를린 영애의 생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마 이곳에서….’ “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는 다시 한번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멈추지 않고 발걸음을 옮긴다. 회의실에 잠깐 앉았다 일어선 이후에는 괜스레 책상 위로 올라가 몸을 뉘었다. 우스운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다시 한번 텅 빈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회의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원정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김미영 팀장님이 다시 한번 브리핑을….’ 김미영 팀장님이 앞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낼 때면 항상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모두가 저마다 말을 건넬 때도 즐거워 했었던 것 같다. 심각한 회의가 쓸데없는 농담 때문에 옆길로 샐 때도 기분 좋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불편하다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웃고 있었던 것 같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현성 씨?’ “아니요. 저는… 네… 괜찮습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만 끝내는 게 좋겠네요. 커피라도 한잔할까요?’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긴다.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걷자. 도서관. 창고. 그리폰 우리. 공방. 연회장. 천천히 거닐다 위를 올려다 바라보자 어느새 붉어지고 있는 하늘이 눈에 비친다.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길드 하우스의 옥상에 올라서자 린델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쟁이 일어났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린델의 풍경은 이전과 다를 바 없다. 저 멀리서도 보이는 붉은용병과 검은백조의 길드 하우스. 모험가들이 모여 만든 린델의 광장. 커다란 분수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경매장도 눈에 보인다. 그가 즐겨 찾던 레스토랑이나 카페도 이전 그대로다. 항상 떠들썩했던 광장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조용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자 점점 더 붉어지고 있는 하늘이 눈에 보인다. 날이 저물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네요.’ “네.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약속을 지키게 돼서 다행입니다.’ “약속.” ‘언젠가 다시 함께하자는….’ “네… 다시 함께….” 오늘따라 정말로 이 풍경이 아름다워 보인다. 조금씩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진다. 조용히 옆을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하지만 눈을 깜빡이자 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보고 옆을 바라보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검이 시야에 비쳤다. “다시 함께.”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린다. 위를 올려다본다. 붉은색 풍경에 휩싸인 하늘이 세상을 비추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 그가 비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목에 서늘한 감촉이 느껴진다. 팔에 힘을 주고 검을 그대로 긋는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제대로 힘이 들어가기 전에, 날이 목을 파고들기 전에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신화 등급의 특성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발동됩니다.] “…….” [신화 등급의 특성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발동됩니다.] “흐으윽… 흐으윽… 제발….” [신화 등급의 특성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발동됩니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제발….” [신화 등급의 특성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발동됩니다.] “이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제발… 제발….” 검 면에 비친 금색의 눈동자가 보인다. 이미 예전에 바뀌어버린 본래의 색은 돌아오지 않는다. “제발… 부탁입니다. 제발… 이제 풀어주세요. 제발… 이제 매듭을 짓게 해주세요. 기영 씨. 제발… 제발… 제가 속죄할 수 있게 해주세요….” [신화 등급의 특성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발동됩니다.] 누군가가 몸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다시 한번 검을 뻗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검이 손에서 떨어져 내린다. 금색의 눈동자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검 면에 비친다.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다. 연결되어 있는 감각도, 유대감도, 그가 살아 있다는 것도. 그 무엇 하나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 빌어먹을 주박은 여전히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제발… 제발… 흐으으윽… 흐윽….”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살아가세요.’ “제발… 제발… 흐으윽… 이제… 됐어요. 이제 지쳤다고요. 흐윽… 제발… 다시 한번….”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살아가세요.’ “제발….” ‘살아가세요.’ 하늘이 저문다. 붉은색의 빛나는 하늘에 검은색 장막이 덮인다. 손으로 얼굴을 한 번 훔친 이후에는 다시 한번 몸을 일으킨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검이 손에 잡힌다. 천천히 검을 허리춤으로 집어넣은 이후에는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은… 반드시 함께.” ‘살아가세요.’ “반드시.” ‘살아가세요.’ “함께….” 발걸음을 옮긴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 이후에.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살아가세요.] 목소리가 들렸다. < 770화 마지막 (3) > 분명히. [살아가세요.] 목소리가 들렸다. “…….” [더 이상 스스로를 괴롭게 하지 마세요. 고통스러운 짐을 떠안지 마세요. 이제는 짐을 완전히 내려놓으시고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세요. 당신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자격이 있습니다.] “…….” 분명히 들려왔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아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미워하지 마세요. 스스로를 자책하지 마세요. 그 누구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과 앞으로 이 대륙에서 살아갈 이들을 구한 업적은 오래도록 그들의 가슴과 영혼 속에 기억될 것입니다. 대륙이 사라지는 그 날까지, 모든 신의 피조물들이 당신을 축복할 것입니다.]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킨다. 어두운 방 안에 희미한 빛이 조금씩 차오르고 있다. 누군가 램프를 껐다가 켠 것처럼 작은 빛이 계속해서 깜빡이고 있었다. 혹시나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히 착각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아니라 영혼 속에서 울리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목소리. 몸 전체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알… 타누스?” [기나긴 전투였습니다. 당신에게는 특히 가혹한 투쟁의 나날이었을 겁니다.] “아니, 베니고어?” [많은 것을 잃어버리며 원하지 않는 전장에 섞여 들어가야 하는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을 감당하며 성장해야 했던 나날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을 훌륭히 견뎌내 많은 이들을 구해냈습니다. 당신의 투쟁과 희생 정신, 용기와 찬란한 노을빛에 찬사를 보냅니다. 당신의 이겨낸 그 모든 것들에 진심 가득한 존경을 표합니다.] “알타누스… 베니고어… 아니 누구라도 상관없어… 보고 있다면 나를 회귀시켜줘… 부탁이야. 베니고어.” 계속해서 희미한 빛이 어둠을 밝힌다. “제발… 부탁이야. 베니고어. 제발….” [대륙의 위협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고통을 겪을 이유도, 당신이 새로운 희생을 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지옥 같은 삶을 다시 한번 시작해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여기가 바로 지옥이야. 차라리 한 번 만 더 기회를 줘. 제발… 그게 불가능하다면 나를 죽여줘… 제발… 최대한 고통스럽게. 끔찍한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계속해서 희미한 빛이 어둠을 밝힌다. [당신의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힘든 시간이라는 것에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틀림없이 커다란 슬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웃기지 마….” [당신은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 계속해서 희미한 빛이 어둠을 밝힌다. [아니요. 당신은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알고 있잖아.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내가 금수만도 못한 짓을 저질렀다는 거 알고 있잖아.” [당신의 탓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웃기지 마. 웃기지….” [그 역시…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 입 닥쳐! 네가… 네가 뭘 알아.” [맹세컨대 그 역시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떨쳐내고 과거의 굴레와 죄악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앞으로 살아갈 삶과 당신이 앞으로 겪을 일상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웃기지 마! 제기랄! 개 같은 놈들! 개새끼들! 개새끼들아!! 너희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다른 놈들도 아니고 너희 개 같은 새끼들이! 너희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 감히 그 사람에 대해 떠들 수 있어? 너희 개새끼들이…흐윽….”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웠던 바로 그때였다. 다시 한번 희미한 빛이 어두운 방 안을 밝힌다. 천천히 옆을 바라본다. [진심으로 저는 당신이 앞으로 살아갈 행복한 삶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친구와 가족들이 함께 만들어갈 이야기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한쪽 눈에서 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당신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눈에서 빛이 깜빡인다. [고개를 들어 당신이 지킨 대륙을 둘러보세요. 많은 것이 달라진 앞으로의 대륙을 경험하세요. 원정이 아닌 여행을 떠나고 전우가 아닌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풍경을 눈에 담으세요. 새로운 일상을 즐기고 그 이야기들을 보여주세요.]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계속해서 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흐… 흐으윽… 흐으으으윽… 흐윽….” [많은 것들을 누리고 경험하세요. 당신의 이야기를 완성하세요.] 계속해서 깜빡이고 있었다. “흐윽… 흐으으으윽… 흐윽… 끄으윽….” [당신이 하지 못한 일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이 경험할 것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모두가 당신이 이룬 것들입니다. 당신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들입니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자격이 있습니다.] “흐으윽… 흐윽….” [나아가세요. 이전의 일들을 잊고 새로운 시작을….]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어요. 기영 씨.” […….]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새로운 대륙도, 여행도, 새로운 풍경도, 새로운 일상도 상상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흐윽…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요.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저는 그 모든 것들을 누릴 자격이 없어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문을 박차고 나아가세요.] 황급히 문을 박차고 나간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는 하지만 무작정 발걸음을 옮긴다. “혼자서였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겁니다. 저 혼자만이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기영 씨야말로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에요. 당신이야말로 저보다 더 많은 것을 희생한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이 대륙을 위하고 이 풍경을 지키고 싶어 한 사람이에요. 네.” 계속해서 빛이 번쩍인다. [더 이상 주저앉지 마세요. 제발 스스로를 상처 입히지 마세요.] “저야말로 기영 씨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기영 씨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지 보고 싶어요. 새로운 풍경, 새로운 삶, 덕구 씨와 함께 평소처럼 떠드는 것도, 길드원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도… 하… 하하… 그런 것도 상상해 보세요. 조금 먼 미래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후에 하얀 씨와 함께 맺어진다면… 두 분이 어떻게 될지, 두 분의 아이가 어떨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저는… 즐거워집니다. 앞으로 기영 씨가 써 내려갈 이야기들입니다. 당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이에요. 제가 아닌 당신이 누려야 할 삶입니다.” […….] “아니, 가능하다면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제가… 제가 자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조금만… 아주 조금만 욕심을 내본다면 이 모든 것들을 함께 누리고 싶어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씩 조금씩 풍경이 뒤바뀐다. 별로 수 놓인 밤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들이 계속해서 옆으로 지나간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조금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다 이내 날개를 펼치자 밝은 노을빛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하늘로 몸이 떠오르자 광활한 대륙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북부의 아래에 보이는 대륙의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작은 빛들이 눈에 보인다. 수없이 많은 숫자의 아주 작은 불들이 대륙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대륙에 별이라도 깔린 것 같지 않은가. 미치도록 아름다운 밤하늘의 풍경이었다. “보고 계십니까?” […….] 어제 봤던 풍경과 마찬가지다. 완전히 무너져 내린 북부의 성벽 아래의 풍경은 싸움이 난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거울 호수, 균열 박물관, 라이오스, 공화국, 그 외에도 아름다운 풍경들에 작은 빛들이 수 놓여 있었다. “기영 씨가 지킨 것들입니다.” 서둘러 하늘을 가로지른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향해 쏟아진다. [당신이 지킨 것들입니다.] “기영 씨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을 위한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몸은 어느덧 린델을 벗어난다. 빛이 계속해서 깜빡인다. 조용히 하늘에 내려앉자 수많은 시선이 쏟아져 내렸다. “노을빛….” “노을빛의 검사다.”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에 비친다. “길드마스터?” “여기는 어떻게….” “파란 길드 마스터.”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곳이다.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자 천천히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빠? 이 새끼들이… 지금… 이 개새끼들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예리도 눈에 비친다. “길드마스터. 여기는 어떻게….” 뭔가 초조해 하는 김미영 씨의 모습도 보였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두드리자 조용히 길을 비켜주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앞을 가로막는 성기사들이 눈에 보였다. 초조하게 보이는 얼굴들이 이곳에 오기 전 뭔가가 있었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지만…. “파란 길드마스터, 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미리 말씀을 해주셨더라면….” “…….” “현재 명예추기경님을 모시고 있는 중입니다. 아무리 노을빛의 영웅이라고 한들, 이런 식의 무례는 교단에서 용납할 수 없습니다.” “…….” “명예추기경님을 봐서라도….”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네? 그건….”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니 데리고 가겠습니다.” “…….”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 “…….”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는 바젤 교황의 모습도 보인다. “그렇게 하게. 노을빛의 검사.” “바젤 교황님. 하지만 명예추기경님은… 우리 교단에서….” “내가… 내가… 데려가도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이 멍청하고 아둔한 것아!!” “네? 그건… 그러니까….” “우리 명예추기경도… 그편이 더 행복할 게야.”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바젤 교황님.” “신경 쓰지 말게나. 노을빛의 검사. 명예추기경을 잘 부탁하네.” 조용히 아래를 바라보자 누워 있는 이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새하얀 색의 옷을 입고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은 너무나도 편안해 보인다. 정말로 이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것만 같다. 천천히 시신을 안아 든 이후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길드마스터….” “늦어서 죄송합니다. 혜진 씨.” “아니요. 정말로 잘 와주셨습니다. 흐윽… 네….” “다른 사람들은….” “하얀 씨와 소라 씨는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아마 가까운 곳에서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지금 연락해 주세요.” “네.” “길드원들을 전부 소집해 주세요. 덕구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조금이라도 기영 씨와 접점이 있었던 분이라면 전부 다 불러주세요.” “네.” “…….” “길드마스터.” “네.” “실례지만… 방금 전에 하셨던 이야기는….” “네.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분명히 기영 씨였습니다.” “…….” “기영 씨가 제게 말을 걸어줬습니다.” “…….”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어쩌면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기영 씨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분명히요.” * * * “진짜 이런 상황이랑 이런 분위기에서 이런 말 하기는 싫은데… 조금 감동적이기도 하고… 근데 이게 살살 녹기는 하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디아루기아?” “이 미친 쓰레기 새끼.” “…….” “구역질 나는 자식.” “대륙을 구한 영웅한테 말이 조금….” “개새끼. 저주받을 쓰레기 같은 놈.” < 771화 마지막 (4) >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개새끼.” “…….” “…….” 항상 그렇기는 했지만 디아루기아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혐오감이 뒤섞여 있었다. “…….” “…….” 조금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슬그머니 눈치를 살핀 이후에는 괜스레 아래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이곳에 묶여 버리게 된 디아루기아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했고… 현시점에서 중요한 건 이쪽이 아니라 아래쪽이었으니까. ‘진짜 죽여주자너… 그림 죽여주자너. 시바.’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성스러운 육신을 안은 채로 신전을 내려오는 저 모습을 보라. ‘없던 신앙심도 생기겠다. 진짜.’ 너무나도 숭고한 장면이라 뭐라 설명하기도 어렵다. 밝은 빛이 쏟아지고 길이 열린다. 마치 모세가 바다를 가르는 것처럼 김현성이 걸어가는 길에 인파들이 갈라지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이미 죽었다는 걸 말해주듯 성스러운 육신의 고개와 팔이 땅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지만 김현성이 다시 한번 이쪽을 제대로 안아 드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내가 저거 어울릴 줄 알았자너.’ 교단에서 나오는 수의 잘 어울릴 줄 알았자너. 진짜. 베니고어 교단에서도 교황들만 입을 수 있다는 수의를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바젤 교황님이 제대로 신경 좀 써준 모양. 사실 추기경급들이 입는 수의는 성스러운 느낌이 덜해 걱정하기도 했었는데 그런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던 것 같았다. 무려 대륙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영웅의 죽음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힘없는 자들을 위해 살아왔던 성자의 죽음이었다. 평범한 장례를 치러줄 리가 없지 않은가. 교단에서 얼마나 이 이기영의 추도식을 신경 썼는지 눈에 보인다. 이마에 그려져 있는 베니고어와 같은 문양은 사실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세히 보니 기존의 수의보다 더 화려한 것 같다. 베니고어가 입고 있는 옷과 뭔가 느낌이 비슷하기도 했고 디테일 적인 부분에서 유사한 면들이 시야에 비친다. 오직 베니고어의 아들만이 가능한 복장 양식. 누가 저 모습을 보고 빛기영의 빛에 의심을 품을 수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충족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김현성의 등장으로 인해 모든 그림이 완벽해진 것만 같다. 노을빛의 등장은 단언컨대 저 장면에 정점을 찍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얼마나 벌렸지. 이거 대체 얼마나 벌린 거냐구.’ 방금의 그림으로 벌린 신성이 지금까지 모아놓은 신성보다 많다. 확실히 죽는 게 좋기는 좋아. 일단 그렇잖아. 어울리는 예는 아니지만 예술가가 숨을 거둔 이후 작품이 떡상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이쪽의 경우에는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부족하지도 않다. 성자의 죽음으로 이루어낸 평화. 이미 우상화되기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베니고어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만 봐도 대륙의 빛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예상해 볼 수 있다. -베니고어의 아들…. -노을빛의 검사가 베니고어의 아들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김현성을 향하는 신성까지 들어오고 있는 중, 회귀자 사용설명서의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벌리는 족족 자동이체 되듯 신성이 이동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회귀자 사용설명서의 효과는 아닌 것 같은데.’ 다단계 같은 느낌일 수도 있고… 뭐 아무렴 어떠랴. 계속해서 신성이 쏟아지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는 겁니까?” “이런 상황이니까 웃는 거죠. 왜 저라고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밑에 있는 얘들도 걱정되는 건 물론이거니와 지금 우리가 여기 어째서 있는 건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정황상 하늘나라에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생각한 거랑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일단 벌어둬야죠. 보험이라는 건 그런 거잖습니까, 디아루기아.” “…….” “보시다시피 아무것도 없는 공간인데 신성이라도 있어야 먹고 살죠. 이번에는 뭐로 드시겠습니까?” “…….” “…….” “다시 돌아갈 수는 있는 겁니까?” “다시 돌아가야죠. 아마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다들 걱정이 되기도 한다. 우리 하얀이, 돼지 새끼, 사랑스러운 김현성의 멘탈도 멘탈이었지만 지혜 누나가 선희영, 카스가노와 함께 여단을 재창설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김현성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성공했으니 아마 이지혜라면 소식을 듣지 않았을까. 상황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 금방 합류해서 방법을 찾아 주겠지, 뭐. 다시 한번 생각해도 살려달라고 말하지 않기를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추잡하게 다시 살고 싶다고 부활시켜 달라고 떼쓰는 것보다는 이렇게 담담하게 아직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게 정답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끈끈한 교감. 어차피 이 새끼가 날 살릴 거라면 이런 방식이 더 좋지 않은가. “정말로… 정말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겁니까? 디아루리아를 다시 볼 수 있는 겁니까?” “우리 디아루리아한테는 제대로 상황을 설명했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나저나 드래곤들이 정말 신기하기는 하더라고요. 저야 특성 때문에 현성이한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고는 하더라도….” “저 역시 갑자기 쌓인 이상한 기운이 아니었다면… 상황을 전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제 신성한 용, 디아루기아니까요. 신의 아들과 함께 싸운 빛의 드래곤 디아루기아. 좋은 울림이네요.” “…….” “아무튼 가장 걱정하고 있던 게 일단락됐으니 안심입니다. 일단 저쪽에서도 방법을 찾아야 여기서도 뭔가 희망이 생기는 거니까요.” “아직도 여기가 어떤 곳인지….” “…….”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 “일반적인 공간은 아니니까요. 대충 예상해 보자면 뭔가… 누군가 준비해 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누군가 말입니까?” “네. 누군가가 준비해 놓은 공간이라고 말하는 게 편하겠네요. 본래대로라면 눈을 감은 이후에는 아예 사라지거나 베니고어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걸 상상했었는데 여기는… 누가 봐도 이질적이니까요.” “대체 누가….” “글쎄요.”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 아니면 1기영? 누가 됐든 간에 이 공간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럼… 저 빛들은 어째서….” 시선을 돌리자 은색의 빛과 푸른 빛, 갈색빛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쓰로누스, 케루빔, 도미니온스. “글쎄요. 근데 생각나는 건 있네요.” “뭡니까.” “아무래도 제가 신이 될 준비를 하고 있나 봅니다.” “정신 나간 새끼.” “뭐 정신 나간 소리니 그렇게 들으시고 싶으시면 그렇게 들으셔도 됩니다. 제가 기억을 잃기 전의 저에 대해 이야기한 거, 기억하십니까?” “…….” “그냥 이 공간을 준비한 게 저라면 어떨까 싶은 생각에 망상 한번 해본 거예요.” “…….” “제가 죽을 거라는 걸 제가 미리 알고 있을 거라고 가정해 봅시다. 아니, 실제로 알고 있었으니 가정이 아닙니다. 무언가 준비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을 테고… 어디론가 이동되거나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잠깐 체류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게… 이곳이라는 겁니까?.”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고 우리 현성이를 인도할 컨트롤 타워라고 가정해 보면… 네… 뭐. 대충 말이 끼워 맞춰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아닐 수도 있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아요.” “그게 저 빛들과 무슨 상관입니까? 저들은 지금의 사태를 만든 이들입니다.” “지금은 단순한 빛 덩어리죠. 그 이질적인 프로그램, 그 괴물새끼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 남은 것들이에요.” 가까이 달라붙으려고 하는 은색 빛을 손으로 쳐낸 이후에 다시금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어째서….” “글쎄요. 어쩌면 기억을 잃기 전의 이기영은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뭐라고.” “지긋지긋하다고 말입니다.” “…….” “기억을 잃기 전의 이기영은 지금의 이기영과 다르게 컨트롤 프릭 같은 성향이 있었을 겁니다.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견딜 수 없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당신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 “…….” “아무튼 그래서 지긋지긋 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겁니다. 누군가가 대륙을 관리하는 게 아니꼽게 비친 거겠죠. 자기도 모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게 짜증나지 않겠어요? 뭐. 제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기억을 잃기 전의 이기영이 그렇다는 거니 오해는 하지 마세요. 그래서…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직접 대륙을 관리하고 싶다고, 직접 하는 게 속이 편할 것 같다고 느꼈을지도 모르죠.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니 혼자 힘으로는 힘들다고 느껴… 얘네들을 준비했나 봅니다.” “하지만 그들은….” “메인 시스템이 달라졌으니 이들의 생각이나 행동에도 변화가 있을 겁니다. 물론 특유의 성향이나 만들어진 성격은 고치지 못할지는 몰라도 긍정적인 방법으로 교정할 수는 있겠죠. 아마 이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건 얘네들이 귀찮은 일을 떠맡아 준다는 거죠. 실제로 대륙을 관리하기 위해 태어난 이들이니 효율이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뭐가 어찌 됐든 간에 간부급의 자원을 만든다는 건 어마어마한 신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니까요. 알맹이를 건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성비가 내려온다는 거예요. 누군가가 파산해서 경매에 내놓은 물건을 욜라 싸게 가져온 거라니까요.”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메인 시스템이 옮겨진 건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디아루기아 님도 제 작은 실험에 참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미 한 놈한테 육체를 만들어 줬는데도 별문제가 안 생기잖아요.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 걸 대비해서… 계획한 일들도 많아요.” 디아루기아의 옆에서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고 있는 백금색의 녀석을 보고 말을 이었다. “이들이 인간처럼 되고 싶다고 느끼고 있는 거 알고 계셨습니까? 얘네들이 창조주에게 비상식적인 애정결핍을 느끼고 있는 건 알고 계셨어요?” “…….” “천사들은 인간을 부러워하고 동경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을 인간처럼 키울 생각입니다. 아주 어린 육체를 만들어 이들이 인간처럼 자랄 수 있게 배려할 거예요. 주어진 역할은 다르겠지만 아마 케루빔, 쓰로누스, 도미니온스는 인간처럼 자랄 겁니다. 과거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가겠죠? 저는 이들의 창조주가 하지 못했던 일들을 이들에게 베풀 생각입니다. 이전의 이질적인 괴물 창조주와는 다르게 저는 다시 태어난 우리 천사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줄 생각입니다.” 다시 한번 힐끗 녀석을 바라본 이후에는 다시 말을 잇는다. “지금 디아루기아 님께 맹세코 말하건대 저는 정말로 제 몸을 바쳐 제 손발이 되어줄 이 천사들을 사랑할 겁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사랑할 거예요. 이 천사들이 지칠 때까지 저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 거라니까요?” “악취미… 로군요. 당신은….” “한 놈만 빼고 말입니다.” “정말로… 악취미예요.” “푸… 흐… 푸흐하헤하하하핫! 딱 한 놈만 빼고! 딱 한 놈만 빼고… 모두에게 평등한 사랑을 내릴 겁니다. 딱 한 놈만 빼고요. 시바… 그 새끼는 안 살릴 거예요. 그 새끼는 태어나지도 못하고 뒈질 겁니다. 우리가 다 이곳을 빠져나가도 그 새끼는 영원히 여기를 못 빠져나갈 거라니까요. 푸흣… 푸… 푸흣….” “…….” “푸흡! 푸흐흐핫… 들었어? 세라핌? 나는 절대로 너를 다시 태어나게 하지 않을 거야. 이미 내게 육신을 내리기는 했지만 너를 다시 만들지도 너를 데려가지도 너를 사랑하지도 않을 거라고….” “죄송… 합니다.” “응? 뭐라고?” “죄송… 죄송… 합니다.” “응? 안 들리는데?” “제가… 잘못했습니다. 흐으윽… 제가… 제가 진심으로 잘못했습니다.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제발….” 무릎을 꿇은 채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세라핌이 시야에 비쳤다. 나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싫어. 새끼야.” < 772화 마지막 (5) > ‘통쾌하네.’ 절망으로 물든 녀석의 얼굴이 보인다. 이런 식으로 세라핌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었을지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비 맞은 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세라핌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동안 수많은 빌런과 얼굴을 맞댔지만 이렇게까지 절망적인 표정을 본 적은 없었다. 의연하고 명예로운 선택을 했던 진청, 마지막까지 분노와 광기를 보여줬던 이토 소우타, 그 밖에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몇몇 녀석들과 대비되는 모습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굴복하기 전과 분위기가 너무 달라진 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솔직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뭐 많은 이유야 있겠지만 내가 지금 녀석의 창조주라는 게 가장 커다랗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물론 녀석의 정신까지 내가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의 세라핌은 내가 자신을 만들었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놈이 원하는 것을 내가 줄 수 있다는 걸 녀석이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처럼 살아가는 삶. 그리고. 창조주 혹은 부모님의 사랑. 어째서 놈들이 이것들에 집착하는지도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놈들의 탄생 배경을 논하기 이전에 나와 율하 역시 비슷한 시기를 겪은 적이 있었으니까. 조금 의외였던 것은 형식적으로나마 자신의 치부를 부정했던 세라핌이 무척 빠른 태세전환을 보여줬다는 것. 녀석이 정말로 원하는 삶에 대한 비전을 슬쩍 보여준 것만으로 세라핌은 완벽하게 굴복해 버렸다. 내가 놈을 입양한 순간부터 반항의 여지는 없었겠지만 육체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굴복했다는 건 의미가 크다. 슬그머니 잔을 내밀자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채우는 모습은 가관, 그 와중에서 파란색 빛은 은근슬쩍 세라핌을 맴돌고 있었다. ‘아. 쟤는 또 왜 저래?’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케루빔.” “…….” “너도 참 배알도 좋아. 세라핌한테 뒤통수를 그렇게 맞고도 쟤를 두둔하고 싶어? 너도 남겨지고 싶은 건 아니지?” “…….” “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세기의 형제애에 눈시울이 붉어지네…. 네가 세라핌을 얼마나 두둔하고 아끼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네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네 다른 형제들도 가슴 아픈 꼴을 당하게 될 거야. 아주 아주 불행해질 거라니까?” “…….” “쓰로누스와 도미니온스에게도 함께 책임을 물을 거야. 네 잘못된 선택이 다른 두 사람의 행복과 미래에도 영향을 끼치는 거야. 그걸 잘 기억하고 행동해.” “…….” “용서한다는 선택지는 없어, 케루빔. 나는 그렇게 아량이 넓은 사람이 아니야. 저 새끼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지? 타협한다는 선택지는 없다고.” “…….” 계속해서 푸른빛이 번쩍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세라핌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이 느껴진다.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엎드린 세라핌이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아, 아, 아버지시여.” 아버지라고 불러 보라고 조언이라도 해줬나 보다. “부디…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 제 모든 것을 걸고 아버님께 평생을 감사하고, 봉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이 대륙에 평생을 헌신하고… 흐윽… 제 죄를 가슴 속에 품고” “나는 네 아버지가 아니야. 세라핌. 그리고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는데….” “…….” “뭐 하고 있어? 케루빔?” “…….” “쓰로누스와 도미니온스가 슬퍼하겠네. 누구 하나 때문에 새로운 기회를 박탈당하게 생겼어. 나한테도 참 손실이 크겠지?” 다시 한번 은색의 빛을 손으로 밀어낸 이후에 말을 잇는다. 당연하지만 케루빔이 이들을 버리지 못할 거라는 건 알고 있다. 계속해서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 쓰로누스와 도미니온스를 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세라핌 주변을 떠돌아다녔던 녀석이 이쪽에 합류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닭똥 같은 눈물을 계속해서 떨어뜨리고 있는 세라핌이 시야에 비쳐오기는 했지만 이쪽은 저런 모습이 더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디아루기아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뭔가 할 말은 많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참지 못했는지 천천히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솔직히 제가 이런 말을 꺼내는 것도 조금 그렇습니다만… 다른 목적 없이 본인 기분을 위해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 “저도 지금 많이 초조하고 당황스럽지만 필요 이상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악의적으로 괴롭히는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악의적으로 괴롭히고 있는 거 맞아요. 화풀이하는 게 맞기는 한데….” “…….” 솔직히 조금 정곡을 찔린 것 같은 느낌이라 할 말이 없다. 세라핌에 대한 분노 때문에 화풀이를 하고 있다기보다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현 상황에 대한 분노하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리리라. 디아루기아가 이쪽의 상태를 눈치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계속 함께 있다 보니 느껴지는 게 있는 모양, 은연중에 티를 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괜스레 세라핌을 한 번 바라보자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김현성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었던 빌런 주제에 이제 와 피해자인 척하는 모습은 가관. 한 번 발로 차버리고 싶기는 했지만 디아루기아의 말처럼 그다지 생산성이 있는 일은 아니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마음의 안정을 위해 내 미래의 피조물들을 사랑해 줘야지. 절대로 세라핌이 보라고 하는 행동도 아니고 화풀이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앞으로 함께 대륙을 관리할 내 아이들을 미리 사랑해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잠깐 동안 밀쳐냈던 은색의 빛에게 손짓하자 허겁지겁 날아 붙어오는 것이 보인다. “이리로 와 쓰로누스. 우리 쓰로누스. 내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나 봐. 사랑스러운 케루빔도 와야지?” “치졸한 인간….” ‘그렇게 대놓고 말하지 마.’ “도미니온스 거기서 뭐 해? 우리 도미니온스랑 케루빔 너무 예쁘네. 반짝이는 게 꼭 별 같이 예쁘다. 왜 이렇게 예뻐? 그래. 이리로 와.” “정말로 치졸한 인간….” “조금 더 가까이 와도 돼. 쓰로누스. 그래 여기로.” “지금 당신이 얼마나 치졸해 보이는지 알기는 하는 겁니까?” “옳지. 우리 케루빔. 아까는 내가 말이 너무 심했네. 너도 이리로 올래? 같이 놀아도 돼. 괜히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아무 눈치 볼 필요도 없다니까?” 최대한 달콤한 목소리로 말해야 하자너. “정말로….” 하하 호호 행복한 모습을 연출해 주는 것만으로도 세라핌은 부러워 죽는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빛에 볼을 부비거나 어루만지고 쓰다듬어 주는 행위 자체가 조금 자괴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뭐 어떤가. 모르긴 몰라도 세라핌에게는 이 모습이 공원에서 뛰노는 행복한 가족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본인도 여기 와서 행복한 한 때를 같이 누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절망스럽겠지 뭐. 파란색 빛은 여전히 세라핌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뻐 보이는 것이 눈에 띈다. ‘그래 우리 조금 안 좋기는 했었는데. 이제 새 출발 해야지. 솔직히 너도 좋잖아. 그지? 기생충이라고 그렇게 매도하고 욕할 때는 언제고 기분 좋다고 반짝이고 있자너. 기생충 손짓에 반짝반짝거리고 있자너.’ 눈치 없는 은색 빛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며 달라 붙어오고 있다. 갈색빛은 크게 반응은 없지만 그래도 맞춰주는 것 같이 느껴진다. 나는 이 빛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하나뿐인 갤러리를 위해서라도 놈들이 행복해했으면 좋겠다. 슬쩍 곁눈질로 놈을 바라보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계속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현실이 놈을 더욱더 슬프게 만드는 것만 같다. 디아루기아의 말처럼 별로 도움이 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뭔가 등 뒤를 스치고 지나가는 쾌감 같은 것이 있다. 사이다 한 모금을 들이키는 것처럼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하겠는가. 여전히 인간쓰레기를 바라보는 것 같은 디아루기아의 눈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치졸한 행동은 아니지.’ 절대로 치졸한 행동은 아니다. 그냥 단란한 한 때를 보내는 건데 뭐. “대륙을 구한 영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금은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세요.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하는 게 먼저가 돼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네. 뭐….” “그래서… 다음 계획은 어떤 겁니까?” “…….” “당신이 신이 된다고 칩시다. 그래서 이질적인 빛이 만든 이들을 관리자로 사용하려 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되돌아갈 수 있는 힌트가 있기는 있는 겁니까? 만약 당신이 스스로 기억을 지운 게 맞고,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도 안배를 해 놓은 게 맞다면… 되돌아갈 방법에 대해서도 분명히 생각해 놓지 않았겠습니까?” “믿어주시는 거예요?” “모든 정황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저도 믿기지는 않지만… 일리가 없는 가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솔직히 기억나는 게 없어요.” “…….” “저도 뭐라도 힌트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지금으로써는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특정 행동이나 특정 생각을 떠올리는 게 트리거가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해서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기는 했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네요.” “방법을 밑에서 찾아야 한다는 겁니까?” 디아루기아의 말에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어느덧 신전에 나와 파란 길드에 모여 있는 이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저한테 말을 걸어준 것은 분명히… 분명히 기영 씨였습니다. 지금도 저희를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맞, 맞아요. 저, 저도 틀림없이 오빠 목소리를 들, 들었어요. 길드원들이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하얀이에게도 메시지를 보내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 봤지만 성공하지 못했는데… 내가 모르는 오류가 있었는지 몇 개는 도착한 모양이다. -그럼 부길드마스터를 살릴 수 있다는 겁니까? -형, 형님을 살릴 수 있는 거요? 그게 정말인 거요? 아이고, 박덕구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수척해졌어.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기영 씨가 어딘가에서 분명히 도움을 바라고 있을 거라는 겁니다.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뭐가 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영 씨라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그래. 나라면 그렇게 말했겠지. “다른 인간들이 우리를 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까?” “솔직히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뭔가 방법이 있기야 있을 것 같지만… 아! 혹시 기억을 잃기 전의 이기영이 루시퍼와 내기를 했다는 것도 말했었나요?” “네.” “어쩌면 그것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네?” “의도적으로 기억을 되찾지 못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이 찾을 필요가 없거나 떠올리지 않는 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지금에 와서는 내기가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게 무슨….” “단순히 되살아나는 게 전부였다면 저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컨트롤 프릭 이기영이 정말로 대륙을 관리하고 싶어 하는 게 맞는다면 루시퍼의 눈을 가릴 필요성도 있지 않겠어요? 대륙을 관리한다는 건 독립한다는 걸 의미할 테니… 루시퍼나 다른 악마, 다른 신들의 눈에서도 완전히 벗어난다는 걸 원하고 있을 겁니다.” “그 말은… 베니고어나 기존 대륙의 신들도 배제해야 한다는 겁니까?” “배제라기보다는…. 음… 솔직히 저도 초조하기는 합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전부 다 가설이고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고,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너무 큰 그림을 그리지 말고 당장 눈앞에 있는 것부터….” “…….” 김현성 말처럼.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뭐가 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곧바로 행동합시다.” 신성을 떼어내자 천천히 공간이 열린다. 그 안에서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어? 어?” 그 반가운 얼굴도 믿기 어렵다는 듯 손가락질을 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중, 뭔가 수척해진 얼굴이다. 얘네들이 잠을 자는지는 모르겠지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은 상태, 손에 있는 서류 더미가 눈에 보인다. 방금 전까지 업무를 해결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리라. 한차례 커다란 사건이 끝난 이후에 바쁜 것은 아래에 있는 이들뿐만이 아니었을 테니까. “이, 이기영 후배?”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은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베니고어 여신님.” “여기가 어디… 여기가 어디야?” “지금 일하고 계시는 곳에서 얼마나 받으시면서 일하고 계십니까?”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 773화 마지막 (6) > “어? 어?”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베니고어 님.” “여기가… 어디야? 아니… 그것보다… 어? 어? 어… 진짜로 이기영 후배야? 진짜?” “네.” “어… 이, 이기영 후배… 끄윽… 끄으윽… 이기영 후배에….” ‘뭐야. 얘 왜 이래?’ “이기영 후배에… 끄윽….” ‘뭐야?’ 팔을 벌리며 다가오고 있는 베니고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쪽을 껴안으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 얘가 깜짝 놀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극적인 반응을 보여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런 반응이 좋냐 나쁘냐를 묻는다면 좋은 쪽이기는 했지만 이쪽이 정말로 그리웠기 때문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 있었구나. 이기영. 후배. 끄윽… 나, 나는 믿고 있었어. 모두가 이기영 후배의 존재가 사라졌다고, 대륙이, 아니, 차원이 이기영 후배를 견디지 못해 아예 밖으로 뱉어버렸을 거라고 엘룬이 말했지만 나는 이기영 후배가 이렇게 버젓이 존재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구. 끄윽….” 계속해서 울먹이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그 울먹이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꽈악 하고 나무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이쪽을 껴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눈물을 질질 흘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계속해서 끄윽 끄윽 소리가 들려온다. 얘도 은근 정이 많은 타입인 모양이다. “이기영 후배에… 끄윽….” ‘이제 그만 좀 해.’ 뭔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베니고어 님?” “이렇게 다시 보게 돼서 정말로 다행이야. 끄윽…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해. 많이 도움을 주지 못해서 너무너무 미안해.” ‘아니, 그렇게 미안할 건 없는데.’ 자꾸 이러니까 조금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이제야 떨어지나 싶었지만 살짝 몸을 떨어뜨린 이후에 세라핌을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다시 한번 내 얼굴을 확인하고, 주변을 떠돌아다니는 빛을 본 이후에는 손바닥으로 푸른색 빛과 은색 빛을 쳐내기 시작. “너희들! 너희들이 감히! 또?” 조막만 한 손바닥으로 빛들을 찰싹찰싹 쳐내고 있는 모습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파리나 모기들을 잡는 것 같다. “여기가 어디라고! 당장 떨어지지 못해? 이기영 후배한테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할 테니까! 이기영 후배! 내 뒤로 와! 내가 지, 지켜줄게!” ‘얘 진짜 왜 이래. 뭐 잘못 먹고 왔어?’ “너희가 이곳에 이기영 후배를 가두고 있었구나! 못, 못된 놈들! 이 추악한 피조물들! 이 더러운 괴물들아!” ‘대놓고 추악한 피조물들이라고 하면 얘들 상처 받자너… 더러운 괴물도 좀 너무했어….’ “너희들이 이기영 후배를 괴롭히게 내가 내버려 둘 것 같아!!” ‘아니, 진짜 얘 왜 이래….’ 한 손에는 화려한 디자인의 방패가. 나머지 한쪽 손에는 성스러운 창이 소환된다. ‘뭐야. 저건… 방패는 처음 보내.’ 베니고어의 방패. 신전에 있는 도서관에서도 저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들은 바가 없다. 애초에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솔직히 눈이 휘둥그레지는 광경이기는 했다. 솔직히 얘가 싸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멋있기는 하다. ‘아무리 봐도 전투형은 아닌데….’ 겉모습은 그럴듯하지만 뭔가 자세를 잡는 게 어색하게 느껴지기는 한다. 생각해 보면 벨리알과 싸웠던 것도 전부 연기였으니까. 조금 더 내버려 둘까 싶기도 했지만 한 대륙의 신을 자처할 만큼의 신성이 창끝에 모이는 걸 확인한 이후에는 급하게 그녀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힘 조절을 못 해서 이 공간을 날려 버리면 안 되니 말이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베니고어 님. 진정하시고 자리에 앉아주세요. 이제 이들은 적이 아니에요. 아. 한 놈만 빼고요. 아마 궁금하신 게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일단은….” “…….” 근황 정도는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곧바로 일 이야기부터 하면 조금 정 없어 보이자너.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끄윽… 그으윽….” “잘 지내고 계셨어요?” “이기영 후… 후배에….” 아, 시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갔자너. 괜스레 입꼬리를 올리며 등을 토닥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끄윽 끄윽 소리가 줄어들 때 즈음에 본격적으로 입을 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너무 힘들었어. 진짜! 진짜로 너무 힘들었다니까! 위에서는 자꾸 뭐라고 하지. 손에 신성은 없는데 처리해야 할 일들은 많지! 지원도 안 해 주면서 이래라저래라! 제대로 쉬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서… 끄윽… 이기영 후배는 어디로 갔냐고 계속 압박하는데 내가 진짜… 서러워서….” “힘들었겠네요….” “응. 다들 비상이야. 바깥 신이 벌려놓은 균열을 닫는 것도 문제고… 갑자기 예전에 신성을 빌려줬던 얘들마저 찾아오는 바람에… 정말로 다들 배려라는 게 없다구. 우리 쪽이 힘든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찾아와서 바로 갚으라고 하는 거 있지?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몇 백 년 만 기다리면 되는데. 그것도 기다리기 힘드나? 소송하겠다고 으름장도 내놓더라니까? 이런 상황에서 분쟁까지 일어나면 우리가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알면서!” “그러게 말이에요.” “그 와중에 엘룬은 다른 곳으로 이직 준비한다고 하는 거 있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 진짜. 이기영 후배가 너무 보고 싶더라고….” ‘생각보다 쉽게 풀리나.’ “뭐. 그것도 이제 옛날이야기지만… 이기영 후배가 왔으니까. 이제 만사 해결이지. 기, 기왕 이렇게 된 거 이것 좀 같이 봐줄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산이 딱 이 정도거든. 더 이상은 다른 지원도 없고… 솔직히 여기에서 더 축소해야 할지도 몰라. 따지고 보니까 여러 가지로 밀린 것도 많았어서… 이번에 벌린 거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 들어온 게 얼마 없어서… 노, 노을빛의 신에게 많이 들어갔을 거야.” ‘그거 나한테 들어왔어. 그나저나 우리 현성이는 벌써 노을빛의 신 됐자너.’ “아! 그, 그러고 보니까 이기영 후배도 많이 받았겠구나? 이, 이기영 후배. 이럴 게 아니라 잠깐… 목마르지 않아? 아니면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내가… 선배가 돼서 이런 말 하기는 조금 부끄럽지만 혹시 괜찮으면 투자 좀 할 수 있을까? 이기영 후배도 알다시피 지금 대륙 상황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고…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앞으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이잖아. 이기영 후배가 조금만 도움을 주면 두 배, 아니, 세 배로 되돌려 줄 수 있어!” 절대로 빌려주면 안 될 것 같다. “저도 베니고어 님의 얼굴을 보면 투자하고 싶지만 그다지 비전이 있는 것 같지는 않네요.” “그, 그런 말 하지 말구… 이기영 후배. 비전이 왜 없어! 이기영 후배가 있는데 비전이 없을 리가 없잖아.” “저도 베니고어 님을 믿고 있어요. 만약 베니고어 님께서 온전히 대륙을 관리하고 계신다면 당연히 베니고어 님께 투자해 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위쪽에서 떼 가는 게 많은 걸 알고 있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베니고어 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대로… 내야 할 세금도 많고… 결국에 대륙이 잘 된다고 한들, 소위 말하는 윗분들만 배부르게 하는 구조가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아서….” “…….” “그동안 베니고어 님이 이 대륙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오지 않아요?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손이 저릴 정도로 펜을 움직였지만 남는 게 없지 않습니까. 여전히 대륙은 가난하고, 베니고어 님도 가난합니다. 제대로 된 업데이트도 할 수 없잖아요. 예산이라고 날아오는 것도 쥐꼬리 정도고… 일하면 일할수록 벌리는 게 아니라 손해 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말이에요. 솔직히 투자한다고 해도 원금이나 제대로 회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확신이 없습니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떻게 봐도 비상식적인 구조로 보입니다.” 베니고어를 포섭하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기존에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더 쉬워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본래 독립이라는 건 누구나 한 번쯤은 하는 생각이 아니었던가.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더욱더 그렇다. 베니고어야 신입도 아니고 한 대륙을 책임질 정도였으니 여러 가지로 더러운 꼴도 많이 봤을 테고, 현재 이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구태여 이 시스템 안에서 놀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느끼고 있겠지. 얘도 바보가 아니니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슬슬 눈치채지 않을까. 슬쩍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보인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공간. 그리고 누가 봐도 관리직으로 쓸 것처럼 대기하고 있는 사대천사, 아니, 삼대천사들이 다시 한번 조용히 내 얼굴을 바라본다. 베니고어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익숙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불가능해. 이기영 후배. 나도 이기영 후배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저도 간단한 일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 “어려운 일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제가 베니고어 님을 원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대륙은 새로운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질적인 빛을 열고 새로운 노을을 연 우리 현성이를 보세요. 본래 새로운 신화라는 건 이렇게 탄생하는 법 아니겠어요?” 살짝 불안해하는 베니고어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어떤 걸 상상하는지 알 것 같다. 아마 베니고어 교단이 점차적으로 쇠퇴하는 걸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라고 던진 말이었으니 의도대로 된 것 같아 기쁘기는 했지만 쟤가 저런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기분이 미묘해지기도 한다. 뭐 당연한 현상이다. 지금 당장은 베니고어 교단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몇백 년이 지난 이후에도 베니고어 교단이 여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대륙에 새로운 신화가 자리를 잡으면 기존의 신화로 자리 잡고 있던 것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질지도 모른다. 심지어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시기를 조금 더 가속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하지만 굳이 그런 슬픈 방법은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운 대륙을 위해 만들고 싶지만 베니고어 님이 없는 대륙에서 일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 이기영 후배….” “베니고어 님 없이는 해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기영… 후배에….” ‘뭐야. 왜 그래. 베니고어.’ “나, 나 사실은… 사실은 이기영 후배가 쓰레기라고 생각했었어.” “…….” “교화의 여지가 없는 타락한 영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끄윽….” “…….”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그럼….” “그래도….” 자꾸만 시선을 회피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연봉이라든지, 수익 배분이라든지, 뭔가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야 될까 싶기도 했지만 아마 본능적으로 꺼림칙하다고 느끼는 상태로 들어간 것 같다. ‘이거 안 되나.’ 내가 베니고어였어도 쉽게 마음을 결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베니고어는 테두리 안을 벗어난 적이 없었고 벗어날 생각도 없었다. 나름대로 본인의 커리어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직장을 바꾸라기보다는 가치관을 바꿔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느껴진다. 물론 내가 아는 베니고어라면 떨어지는 신성에 혹하기야 하겠지만…. “60 대 40으로. 제가 60이고 베니고어 님이 40입니다.” 아니 솔직히 좀 많이 흔들리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앞으로 이후 백 년간 베니고어 님께서 받으실 신성은 약… 이 정도가 되겠네요.” 동공이 흔들리는 게 실시간으로 눈에 보이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추가 조건 사항은 제가 지금 보내드린 문서에 전부 적혀 있어요.” 문서를 읽고 있는 손이 덜덜덜 떨리는 게 보이기는 한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모습도 시야에 비친다. 하지만 이걸로도 부족할 것 같다. 나와 어울리는 행동은 아니지만 조금 더 진심을 담아서 말해보는 게 어떨까. “제가 자회사를 세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자회사를 세우는 거예요.” “…….” “진심으로 베니고어 님이 함께해 주셨으면 합니다.”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기 전에 일단 이빨을 털어놔야 하니 말이다. ‘긴 싸움이 될 것 같은데….’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으니 준비를 다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괜스레 디아루기아 쪽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일단 조금 쉬시면서….” “할… 할게!!” ‘어?’ “할 거야! 할래! 무조건 할 거야! 이기영 후배!” ‘?’ < 774화 마지막 (7) > ‘아니, 같이 해준다니까 고맙기는 한데….’ “무조건 할 거야. 계약서는 지금 쓰면 되는 거지? 그렇지?” ‘왜 이렇게 불안하지.’ “여기에 서명하면 되는 거지? 그런 거지? 이기영 후배?” ‘왜 이렇게 의욕적인 거야.’ 함께 해준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불안해지기는 또 처음이다. ‘얘 이거 무슨 빚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아니, 애초에 빚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규모가 걱정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베니고어의 채무는 회사에서 떠안아 줄 수 있고, 또 떠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이쪽에서 해결할 수 없을 정도의 채무는 독이 될 수밖에 없다. 창업한 이후에 빚더미에 파묻혀 파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앞으로 벌릴 신성이 많다고는 해도…. “잠깐….” “지금 여기에 사인하면 돼?” “혹시 재정 상태를 제가 잠깐 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야. 이기영 후배. 조, 조금 깨끗하지 않기는 한데… 그, 그래도 그렇게까지 엉망은 아니야.” 슬그머니 베니고어가 손을 뻗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작은 파일 같은 것이 베니고어의 손에서 생성되기 시작, 생겨난 파일을 받아 훑어 내리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쪽의 눈치를 보던 베니고어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중이다.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지?” 라는 말을 내뱉고 있지만 솔직히 안심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 네 말대로…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데.’ 충분히 대륙에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채무… 하지만 베니고어 개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채무이기도 했다. ‘얘 도대체 어떻게 먹고살았어?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닌 거야? 아니 신성을 빌린 건 빌린 건데 이율은 또 왜 이렇게 높아?’ 제대로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현장. ‘이 정도면 사기당한 수준 아니야?’ 사기당했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쓸데없는 곳에 신성을 탕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또 아니었던 모양, 애초에 사치를 부릴 신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도 열심히 할게. 이기영 신도. 빚, 빚 갚아달라는 소리도 안 할 거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응! 앞으로가 정말 기대되는걸?” ‘아니야. 네가 뭘 알아서 해.’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겠지만 베니고어한테 신성 빌려준 놈들 상판대기나 한번 구경해 봐야지. 뭐 이딴 사기꾼 같은 놈들이 다 있어? 있는 놈들이, 시바 더한다더니만. 악마보다 더한 새끼들이 여기 있었네. “사, 사실 이게 맞는 행동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기영 후배가 이렇게 나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을 줄은 생각 못 했어서… 이기영 후배가 나를 믿어줬던 만큼 나도 이기영 후배를 믿기로 결심한 거야.” 말하는 걸 보니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진심을 담은 말 한마디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닐까. ‘이거 좋네.’ 작지만 머리 아픈 부분이 하나 해결됐으니까. “그, 그런데 이기영 후배. 이거 안전하기는 한 거지? 다른 계획이 있기는 있는 거지? 이기영 후배도 알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위의 보호 밖에서 대륙은 운영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서… 물론 사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여러 가지 위협에 노출되기 쉬울 테니까.” “네. 저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떠올릴 수 있는 문제다. 독립한다고 해서 딱히 다른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막말로 베니고어가 말하는 윗분들이 대륙에 찾아와 행패를 부린다는 선택지는 없다. 서류상으로 정리해야 할 문제로 골머리 좀 썩히거나 여러 가지 소송이 들어올 일이야 많겠지만 악의적인 보복을 할 가능성은 없다는 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놈들은 빛의 편이라 본인들을 포장하고 있었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의외의 사건이 생겼을 경우였다. 시스템에 구멍이 생겼을 경우나 악마 놈들이 대놓고 들어와 깽판을 쳤을 경우 말이다. 물론 이놈들이 직접적인 개입을 최소화하는 방침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녀석들이 필요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루시퍼와 같은 격을 지닌 악마들을 견제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걸 최소화한다는 것만 해도 그들의 필요성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이번 외신 역시 마찬가지. 놈들이 내게 신성을 따로 투자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일이 풀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위에 계신 놈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놈들이 책정한 예산은 대륙의 차원 관리비로 사용되고 있었고, 외신들이 진입하는 시기를 최대한 낮추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보험이라는 거다. 놈들은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세를 받고 개입할 명분을 만든다. 완전히 독립한다는 건 놈들의 보호를 완전히 벗어난다는 일이고 그 말인즉슨 우리가 커다란 위험부담을 떠안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뭐, 사실 이 대륙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가정이지만…. 왜냐고? 우리 전술 김현성 보유국이자너. “준비된 거 맞지?” “현성이 있잖습니까.” “아!” “파바박 하고 하늘 갈라 버리는 거 못 봤어요?” “그, 그러네! 그러네!” “현성이가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위에 있는 놈들이 해결해 줄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안보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노을빛의 검사가 우리와 함께한다는 거 아닙니까. 푸… 푸흡!” “푸… 푸흡… 그렇네! 노을빛의 신이 해결해 주겠지? 악마 놈들이 나타나도 파바바박 하고 막 전부 다 없애 버릴 거야.” 얘는 왜 나를 따라 하고 그래? ‘우리 회귀자 하나는 정말로 잘 키웠어.’ “위에 있는 놈들은 필요 없겠는걸. 그렇지 이기영 후배?” 상관이 하루아침에 놈으로 변해버리는 기적. 여전히 태세전환은 이쪽 못지않다. “하여간 그놈들 원래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니까? 제대로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말만, 말만 하고 말이야. 조금 도와주면 어디가 덧나? 맨날 맨날 규정 어쩌구 절차 어쩌구, 이제 너희들 도움은 필요 없다 이거야! 우리 노을빛의 신이 함께하고 있잖아. 푸…히히힛.” “…….”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참 노을빛의 신이라는 네이밍이랑 컨셉도 완전 제대로인 것 같더라구. 전략적인 선택이었어.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볼 때마다 노을빛의 신에 대해 떠올릴 텐데… 풍경 자체도 예쁘고 뭔가 신비로운 느낌도 있구… 쏟아지는 신성도 어마어마할 것 같구… 또 이렇게 막 신화를 써 내려간 경우의 사례들을 찾아보면 기존에 자리 잡은 애들보다 충성도가 높아.” “어쩐지 많이 들어오는 것 같더라고요.” “…….” “…….” “그걸 이기영 후배가 어떻게 알아?” “현성이가 벌어들이는 신성이 제게 쏟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째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백 퍼센트 들어오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잘됐네요.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렇구나….” “이런 경우가 있기는 합니까?” “흔하지는 않은 경우지만….” “…….” “아마 노을빛의 신이 이기영 후배를 믿고 있어서일 거야.” “…….” “하위 신과 상위 신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편할걸? 노을빛의 신이 이기영 후배를 신앙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나 봐. 아니, 신앙의 대상은 아닌가? 조금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도 뭐라고 단어를 규정짓지 못하겠어. 요지는 노을빛의 신이 이기영 후배를 믿고 있다는 거지. 보통 이런 경우에는 이기영 후배가 노을빛의 신에게 일정량을 다시 떼어주는 방식으로 신성을 재정산하기는 하지만… 지금 노을빛의 신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니까. 노을빛의 신이 정식으로 임관하면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겠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굳이 김현성에게 신성을 떼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가 관리해 준다고 생각하면 되자너.’ 신성이 욕심이 난다기보다는 김현성과 대륙을 위한 일이다. 이 새끼가 낭비벽이 심하다는 걸 떠올려보면 더욱더 내 생각이 옳다는 판단이 선다. ‘자기 연봉도 제대로 관리 못 해서 길드 공금까지 횡령하는 새끼가 무슨 신성을 관리한다고… 오버자너. 암만 생각해도 오버자너.’ 녀석의 재무 상태만 봐도 답이 나온다. 그 많은 연봉을 어디에다가 태워 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통장은 마이너스가 된 지 오래다. 녀석은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있겠지만 김미영 팀장에게 따로 연락해 비자금을 받았다는 소식도 이미 몇 차례나 전해 받지 않았던가. 가장 최근에 들려온 소식란에는 눈치가 보였는지 몰래 대출까지 받았던 전적도 있다. 결국에는 길드 자금으로 메워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김현성에게 신성을 맡긴다는 건 돈을 땅바닥에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완전 개오버자너.’ 필요할 때 용돈 주는 식으로 조금씩 떼어주면서…. ‘생색도 내야지.’ 아껴 쓰라고 요즘 살기 팍팍하다고 경고도 조금 해주면서 이 정도도 많이 주는 거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반항하면 쥐꼬리만큼 쌓이는 신성인데 뭐 그렇게 원하는 게 많냐고 짜증내면서 윽박도 한번 질러줘야지. 찔렸던 배때기 한번 부여잡고 막 숨 몰아쉬면서 이야기하면 거기서 게임 끝이야. 어차피 얘는 지가 얼마나 버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조금 너무한 거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이게 맞지. 재무설계사가 괜히 있겠어? 자산관리는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좋아. 괜히 얘 기분 맞춰 준다고 신성 뿌리면 이 새끼가 분명히 하루아침에 말아먹을걸. ‘장담할 수 있자너. 진짜.’ 정 크게 쓸 일이 생기면 그때 모아뒀던 거 조금 풀면 되는 거고, 혹시 악마 새끼들 쳐들어오면 그때 또 떼어주면 되는 거고. 김현성한테 맡겼다가 정작 쓸 일 있을 때 못 쓰는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 내가 관리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 아닌가. 어차피 현성이는 당장 필요하지도 않으니까. 구태여 뭐 나눠줄 필요가 있나? 생각해 보면 김현성이 신성 쓸 데가 어디 있어? 자기가 대륙을 직접 유지 보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묻어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조금 귀찮아지기야 하겠지만 원활한 관리를 위해서라도 이건 내가 맡아야 할 것 같았다. 전부 다 노을빛의 신을 위한 일이다. “노을빛의 신에게는 제가 따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응. 너무 섭섭하게 하지는 마. 그래도 80%는 재정산해 주는 게 일반적인 관례니까. 아무리 못 줘도 최소 75% 정도는 정산해 줘야 돼. 노을빛의 신이 받아야 할 신성이 이기영 후배에게 갔다는 건 그만큼 노을빛의 신이 이기영 후배를 믿고 따르고 있다는 거니까. 그만큼 존경하고 믿고 있다는 걸 표현한 거라구. 그거에 대한 예의를 표현해야 하는 거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고 있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악습과 관례는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부수기 위해 존재한다. 들어오는 신성으로 미루어 볼 때 일 년에 3%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3%도 많다. 1.5% 정도가 좋을 것 같다. “네, 물론입니다. 베니고어 님. 그럼 일단 도장 찍으시죠. 아, 그리고 인력이 조금 부족할 것 같은데… 혹시….” “으응! 아마 내가 부탁하면 로렌은 와줄 거야. 엘룬은… 한번 설득을 해봐야 될 것 같구… 바리안은… 잘 모르겠네. 인력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될걸? 이미 대륙에 몇 명 있잖아.” “네?” “그… 정하얀이랑 그… 무섭게 싸우는 빨간 머리 언니.” ‘네가 언니일 텐데?’ “아직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그 둘, 아니, 한 명과 한 분이 보여준 업적은….” 신화 속의 장면이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기는 했다. 누가 봐도 경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으니 몇몇 이들이 그녀들에게 신앙심을 느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물론 노을빛의 신처럼 신격화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준비나 주작이 필요하기야 하겠지만 그 둘이 경계선에 발을 내디뎠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조금 특수한 경우지만 로노베와 계약한 그 아이도 가능성이 있더군….” “어?” “오랜만이구나. 역겨운 인간아. 아니 이제는 역겨운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그렇군. 동업자? 파트너? 뭐라고 불러야 할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어울리지 않는 안경을 쓴 남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를 완전히 뒤로 넘겨 깔끔하고 단정해 보이는 인상, 본래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누구인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에게 계약서를 보낸 것은 이쪽이기도 했고 저 목소리를 잊을 수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오랜만입니다. 친애하고 존경하는 벨리알 님.” “나는 이미 계약서에 사인을 한 채로 온 것이다. 사인하지 않았다면 이곳으로 오지도 못했겠지. 역겹고 더러운 빛아. 내게 그렇게 아부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내가 네게 아부를 해야 하는 입장이 아닌가.” “누가 위에 있는 관계라고 할 수 없으니 맞는 표현은 아니지요. 하핫.” “네 말도 옳다.” “…….” “…….” “루시퍼 님을 배신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분도 기뻐하실 것이다. 이 벨리알이 이렇게까지 성장했다는 것에 감격하시겠지.” “잘됐군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히죽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27군단이 그대와 뜻을 함께할 것이다.” < 775화 마지막 (8) > “이제는 27군단이 아니지 않습니까. 새롭게 태어난 대륙은 벨리알 님을 유일무이한 만 마의 지배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네가 보낸 계약서의 내용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부족한 비전을 믿고 제의를 수락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여러 가지로 고민하기는 했을 거야.’ 당연히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리라. 나름대로 궁지에 몰렸던 상황에 있었던 베니고어와는 다르게 벨리알은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대륙 이외에도 몇 개의 사업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벨리알이 의외의 결정을 했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사업체들을 완전히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솔직히 기대도 안 했자너.’ 베니고어처럼 초대한 것이 아니라 계약서를 따로 보낸 것 역시 그런 이유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계속해서 히죽거리는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지만 구태여 먼저 나서서 벨리알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계약서에 서명한 순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운명 공동체가 된 것이나 다름없기도 했고…. 사실 녀석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을 테니까. 여러 곳에 분산 투자를 하는 것 보다는 똘똘한 한 곳에 직접 투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 어쩌면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의 침공의 배후에 벨리알이 있었다고 발표한다는 딜이 마음에 들었을지도 몰라. 확실한 것은 벨리알의 태도가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 별것 아닌 행동이기는 하지만 인간형으로 이곳을 방문했다는 것부터가 나를 배려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뭐라 형용할 수 없게 느껴졌던 악마의 모습보다는 지금의 모습이 경계심을 풀게 하거나 호감을 주기 쉽다고 계산했을 것이다. 아마 그렇게 탄생한 것이 지금 저 모습이리라. ‘안경은 왜 쓴 거야?’ 동업자한테 똑똑해 보이고 싶었던 건 아니지? 그런 시답지 않은 이유일 것 같지는 않다. 아티팩트를 변형해서 가져온 거일 수도 있고…. 뭔가 필요한 이유가 있기야 하겠지만 이것 역시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나마 믿을 수 있는 동업자가 함께해 준다는 것 하나였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베니고어가 배신당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본래부터 악마들을 혐오하고 있었던 천사들, 아니, 빛덩이들은 대놓고 녀석을 둘러싸고 있다. 디아루기아의 반응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을 경계하고 있었고 은색의 빛은 최선을 다해 벨리알을 공격하고 있다. 저걸 공격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필사적으로 반짝거리며 몸통 박치기를 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어처구니없지만 도망치라고 외치고 있는 것만 같다. “아무래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 “이기영 후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쟤, 쟤는 또 왜 온 거야?”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고 있는 겁니까? 악마군단장을 끌어들이다니요.” 디아루기아 너까지 그러지 마. “날 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본래 있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면 되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서 자리에 앉으시죠. 벨리알 님. 베니고어 님도 진정하세요. 제가 다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오랜만이구나. 베니고어.” “악마와는 말을 섞지 않을 거야.” “지금 섞지 않았나.” “안 들려. 하나도 안 들리거든? 하나도 안 들려요.”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베니고어. 굳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너와 나는 계약으로 묶인 사이가 아닌가.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 한 가지 더 말하자면 네가 그렇게 부정한다고 해도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네가 더 잘 기억하리라고 생각하는데….” “그, 그건….” “벨리알 님의 말대로입니다. 베니고어 님. 계약의 연장선입니다.” “저번에… 했던 그거?” ‘그래, 우리 저번에 주작했던 거, 그거. 그때 신성이 얼마나 쌓였는지 기억하고 있지?’ 당연히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성과를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고 빛이 있어야 어둠이 있는 법입니다. 그 균형을 맞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같은 대륙을 놓고 일하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부서가 다르니 마주칠 일도 많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흑과 백을 나누고 서로 대립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공통된 이익을 위해 함께 일하는 공동체야말로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대륙의 미래입니다.” “벨리알은 악, 악마잖아.” “벨리알 님이 대륙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륙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우리를 찾게 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감당해야 할 두려움과 공포가 안타깝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어둠은 대륙을 밝게 비추는 햇볕이 될 것입니다. 이미 베니고어 님께서 겪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그 신성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려 보세요. 대륙은 눈 깜빡할 사이에 어마어마하게 발전할 거예요. 5년에 한 번 주기로 이벤트를 열어도 100년 동안 대륙을 관리할 만한 예산을 얻을 수 있다고 저희 측 재무팀에서도 판단하고 있습니다.” 슬그머니 디아루기아를 바라본다. “…….” 억지로 시선을 피하고는 있지만 계속해서 바라보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네. 정확히는 132년입니다. 겨, 겨, 겨, 겨우 5년으로 132년을 벌 수 있는 거로….” “수고했어요. 루팀장.” “…….” “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조금… 내가 그래도 체면이 있고….”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베니고어 님. 벨 이사님의 합류는 우리 자회사가 더 커다란 시장으로 나가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 “벨 이사님, 현재 가지고 있는 사업체가 몇 개쯤….” “글쎄… 하나하나 세어보지 않았지만…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 우리 한번 함께 눈을 감아봅시다. 그리고 한번 떠올려 봅시다.” “…….” “…….” “우리 대륙의 이야기가 아니라 벨리알 님이 가지고 계시는 타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그곳은 이미 황폐화되어 있는 대륙일 겁니다. 꿈과 희망도 없고, 모든 것을 악마들에게 유린당한… 이미 어둠으로 잠식당한 대륙일 겁니다. 인간들은 꿈을 꾸는 것을 포기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대륙이지요. 흔히 말하는 아포칼립스 세계관이라고 가정합시다.” “더, 더러운 악마들… 이 비열한….” ‘너 왜 이렇게 몰입했어….’ “신들조차 포기한 대륙입니다.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한 대륙이에요.” “아, 안 돼… 포기하면 안 된다구.” “아무런 희망도 없는 그 장소에 다시 한번 27군단이 나타납니다. 벨리알 님이 악마의 군세를 이끌고 티끌만큼 남아 있는 희망을 짓밟기 위해 강림합니다.” “나쁜 자식… 나쁜 자식! 이 역겨운 악마 놈들!” “벨리알 님은 인간들을 향해 외칠 겁니다.” “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베니고어 뿐이다. 그 찬란하고 빛나는 여신의 눈이 이곳까지 닿지 않는다는 걸 감사해야겠구나. 바스러지거라, 필멸자들이여.” 티키타가 좋네요. 합이 잘 맞아요. “미안해…. 내, 내 눈이 닿지 않아서 미안해….” 눈을 감고 완전히 몰입한 베니고어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주먹을 꽉 쥔 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분한 모양. 심지어 코끝이 찡해진 것 같다. “인간들은 기도하기 시작할 겁니다. 베니고어시여. 우리들을 구원해 주소서. 저 공포스러운 벨리알에게서 우리들을 지켜주시옵소서.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계십니까. 찬란하고 빛나는 여신이시여.” “나… 나 여기 있어! 여기 있다구!” “그리고.” 짝! “이미 폐허가 된 땅에 아름다운 빛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아아아앗!” “베니고어의 신화는 그 땅 위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오래토록 황폐화된 대륙에 신화로 남을 것입니다. 새로운 신화의 등장에 기존에 있던 신앙은 무뎌질 것이며 베니고어 님께서는 현재의 대륙뿐만이 아니라 벨리알 님의 손 안에 있는 대륙의 가장 위대한 빛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들의 희망이 되는 것이지요.” “…….” “…….” ‘얘 진짜 돈 좋아한다.’ 이렇게까지 솔직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천천히 뜬 눈이 흔들리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틀림없이 동공이 흔들리고 있다. 자존심 때문에 당장은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있지 않지만 한 번 더 자신을 압박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잘 구슬리면 넘어올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빛을 널리 퍼뜨리기 위한 일보 후퇴입니다.” 치고 나와야지 벨 이사. “알고 있겠지만 나 역시 온건파에 몸을 담고 있다. 인간들이 멸망하고 희망을 잃는 것은 진심으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야. 희망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잃을 것이 없는 인간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 지금의 신들이 우리를 부정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현재 차원들의 상태가 지금보다는 나았겠지. 빛과 어둠의 싸움에서 고통받는 것은 인간들뿐이다. 나는 이 오랜 싸움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 베니고어.” “새로운 한 발자국을 위해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베니고어 님.” “그들이 희망을 얻는 것을 원한다고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어둠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 어둠을 밝힐 빛이 바로 베니고어 님이십니다.” “빛과 어둠의 화합. 우리들이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결단을….” “결단을!” “…….” “…….” “어… 어쩔 수 없나.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겠네.”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한 채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모습은 가관, 베니고어의 탄생 비화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원래부터 위 출신인 건가? 아니면 대륙에서부터 위로 올라간 거야?’ 후자라면 인간이었을 때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교단에도 제대로 적혀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무언가 비화가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캐물을 정도로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본인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고…. 일단은 함께 일하기로 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대륙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거네. 그렇지? 이기영 후배?” 벨리알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은 그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일 것이다. 솔직히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지금 벨리알의 표정은 왜 베니고어가 악마군단장으로 자리 잡지 않았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으니까. 단언컨대 베니고어는 저 표정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애매한 웃음을 보내며 어쩔 수 없다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이걸 보니 사대천사들이 어째서 기존의 신들을 비판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다 벨리알과 눈이 마주치자 지금 본인이 어떤 모습인지 깨달은 모양. “탐욕의 악마보다 더 욕심이 많군.” “…….”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들렸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결정된 거지? 그런 거지? 앞으로가 기대되네. 으응….” “군단의 인사팀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건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곳이지만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야.” 혼잣말하지 마. 쟤 듣잖아. “그,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는 거지? 아! 이기영 후배는 이곳에 계속 있을 건 아니지? 일단 대륙을 어떻게 운영할지 회의라도 해보는 게 좋겠네.”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려고 하고 있다. “이기영 후배는 내려가고 싶을 테니까. 으응. 이해할 수 있어. 나는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겠지만… 쉽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신성을 열심히 모은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니, 가능한 건가? 불가능한가?” 애써 무시하기 어려운 주제. “그게 가능한 겁니까?” 내가 질문해 봤지만 멍청한 질문 이다. 루시퍼가 나를 되살릴 수 있다면 신성을 사용해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문제가 있다면…. “글쎄… 나도 아직 모르는 게 많아서… 하지만 아마 가능하지 않을까. 한….” “…….” “5만 년 정도만 신성을 모으면….” 뭐? 뭔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베니고어를 바라보자 농담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괜스레 아래로 고개를 내리자 아직도 회의를 진행 중인 이들이 시야에 비쳐왔다. -무조건 기영 씨를 되살릴 겁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던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개소리야. 내가 상관있어. 현성아. -그래야지. 형님은 분명히 기다리고 있을 거요.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을 거라니까! 나 그렇게 참을성이 많은 성격은 아니야. ‘뭔데 이거 시바….’ 솔직히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그게…. 5만 년 이후에 재회하는 엔딩이었다고? “…….”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 776화 마지막 (9) > ‘아무리 그래도 5만 년은 아니지.’ “그럼 회의는 이걸로 마무리하면 되는 거지? 그렇지? 우리 또, 또 언제 모일까? 일단 이 공간에 내 사무실을 만들어 놓는 게 좋겠네! 아! 그리고 로렌이랑 다른 얘들한테도 한번 연락을 넣어볼게.”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열심히 일해 보자구. 이기영 후배! 이제 시작이니까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방금 전에 끝마쳤던 회의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바, 5만 년은 아니자너.’ 5만 년 발언이 충격적이었는지 가까운 자리에 있던 디아루기아도 뭐 씹은 표정을 보내오고 있는 중. 당연하지만 디아루리아가 생을 마치는 것을 이곳에서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다소 창백해진 얼굴은 아무 생각 없이 웃음을 보내고 있는 베니고어의 얼굴과 무척 대비되는 표정이었다. 아마 나 역시 디아루기아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 정도는 아닐 거야.’ 베니고어가 계산한 것보다는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신성이 벌어들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걸 가정하더라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정확히 어느 정도의 기간이 필요한 건지는 쉽게 계산할 수 없었지만 한 번의 강림에도 어마어마한 신성을 소모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녀의 계산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나도 돌아가 보겠다.” “고생하셨습니다. 벨리알 님.” ‘정확히 어느 정도지? 얼마나 기간을 줄일 수 있지?’ 1만 년? 아니 최대한 줄인다면 몇천 년까지는 단축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몇백 년이 걸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걸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얘들을 이쪽으로 부르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신성을 얻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결정적으로 파란 길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정말로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계획을 빠르게 실행한다면 만 년 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다릴 수 없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디아루기아 님.”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생각 중이에요.” 루시퍼와 했던 내기의 보상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기영을 살리는 거?’ 아마 이게 맞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숨어 있는 공간을 만든 이유는 그녀에게 보상받지 않기 위해서겠지. 루시퍼에게 보상을 받아 대륙에 다시 진입한다면 필연적으로 그녀가 대륙에 개입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자력으로 부활하는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으리라. 삼대천사를 관리직으로 만들고, 완전히 대륙을 외부와 독립시키고 벨리알과 베니고어를 포섭해 스스로 신성을 버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건가?’ 예상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아니, 도대체 왜 기억을 지워야 했던 거야?’ 계획하고 있는 것을 루시퍼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 모든 일을 그녀가 모르게 진행해야 했으니까. ‘그럼 지금은? 어차피 지금은 루시퍼의 시선이 닿지 않고 있잖아. 만약에 정말로 내가 스스로 신성을 벌어 아래로 내려가는 게 맞다면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할 이유가 없어. 여기서 5만 년 동안 버티는 게 엔딩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까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어차피 루시퍼랑 마주칠 일이 없는데….’ 어쩌면 할 일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쉽게 생각해 보면 다시 한번 내가 루시퍼와 접촉해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루시퍼를 만나야 되는 건가.” “네?” “루시퍼를 만나야 돼….” 아직까지 기억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루시퍼를 속이기 위해서라면 해답이야 뻔하지 않은가. 그녀와 대화를 나눠봐야 한다.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보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지. 내가 기억을 잃는 게 어떻게 그녀를 속이는 것이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해답은 루시퍼에게 있다. 문제가 있다면 이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 내 가설이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물증들이 부족하다는 것. 아니,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 심증 말고는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위험한 도박이다. 확률이 높은 도박에 주사위를 던지지 않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지만 현재의 내 판단이 맞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루시퍼를… 말입니까?” “그게 첫 번째 단서가 될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연락을 취해봐야 하나?’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는데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된다고? 정보가 부족하다. 최소한 뭔가 힌트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놓친 게 뭐가 있지? 아니, 지금 곧바로 놓친 걸 확인해 본다고 해서 뭔가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내가 이 공간을 만든 이유는 준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대륙을 관리와 되돌아갈 준비를 위해 만들었을 것이다. 현시점에서 모든 준비가 끝났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제 막 벨리알과 베니고어를 포섭한 시점이었고 내 손으로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다. 루시퍼를 만나는 것은 나 스스로가 만족스러울 정도로 기반이 다져진 이후가 될 것이다. 5만 년을 기다리지는 않겠지만 아주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도움이 필요해.’ 누나. 이지혜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만약 소식을 들었다면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거 아닌가. 망원경으로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것이 없다. 계속해서 그녀를 찾아봤지만 얼마나 꼭꼭 숨었는지 단서조차 보이지 않는다. 선희영과 함께 떠났을 테니 그녀를 대상으로 찾아보는 게 더 빠를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보였었는데. 시발.’ “도대체 어디로 꺼진 거야?” 한낱 인간이 빛의 망원경을 피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로노베를 통해서 연락을 넣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지만 로노베의 자취도 찾을 수 없었다. 벨리알이라면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절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로노베는 27군단 소속이 아니다. 그녀가 루시퍼 쪽에 붙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대화 창구가 필요해.’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유지되고 있고 김현성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지만 그것뿐이다. 조금 더 직접적인 연락 창구가 필요하다. 베니고어를 통해서 신탁을 내리는 방향도 있지만 아무래도 위쪽의 눈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괜스레 아래를 내려다본다. 아직까지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파란 길드원들이 시야에 비친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던 엘레나도 파란 길드로 돌아온 모양,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아까보다 인원이 더 불어나 있다. 현성이와 박덕구, 조혜진. 안기모와 황정연, 김예리. 우리 하얀이, 한소라. 박리안. 알프스. 김창렬. 유아영. 김미영 팀장. 이지혜를 따라나선 선희영을 제외하면 모든 길드원이 모여 있었고 모두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보기 좋은 풍경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미 회의 내용이 꽤 진행됐는지 어느 정도 내용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다. -정리하자면 부길드마스터가 대륙을 관장하는 신이 되셨다는 거군요. -네. -그리고 우리가 부길드마스터를 다시 데려올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고요.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형님이 정말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래도 조금 힘이 나는 기분이요. 거, 분명히 지금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부길드마스터님이 정말로 돌아오는 걸 원하시고 계실까요? 당연하지. -원하고 계실 겁니다. 분명히요. 당연히 원하고 있다. 정하얀과 한소라가 귓속말을 주고받는 게 들려온다. -이건 소라한테만 이야기해 줄게. 만약에 오빠가 안 내려오면 내, 내가 위로 올라갈 거야. 소라도 같이 갈 거지? -아… 네. 정하얀 님. 물론 저도 같이 가야죠. 가능하다면…. -시, 시간은 조금 걸릴 것 같아. 소라까지 데려가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걸. 힘들지만 참을 수 있어. 물론 오, 오빠가 먼저 내려오면 갈 필요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소라도 같이 올라갈 준비를 하자, 알겠지? 위로 올라오라는 메시지를 보낸 적은 없지만 힌트를 얻은 것만 같다. 본인에게 신성이 쌓이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한소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조금은 창백해진 눈치였다. 저 위로 올라가자는 표현이 함께 죽자는 말로 들려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 네. 그래도 저희가 올라가는 것보다는 부길드마스터를 데려오는 게 더 쉽지 않을까요? -으… 응. 그게 좋지. 난 그냥 혹시나 해서 말한 거야. 소라도 마음의 준비를 하, 하, 하고 있으라구…. -……. 저 상황을 보니 다시 한번 웃음이 나온다. 아까까지만 해도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다. 엘레나와 조혜진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본래 사제였던 엘레나의 입장에서는 위로 올라간 신을 다시 불러오는 게 맞는지, 정말로 내가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원하고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만약에 이기영 님께서 내려오는 걸 원하지 않는다 하시면… 엘룬 님의 곁에 있고 싶으시다 하시면…. -……. 다시 한번 생각해 봤지만 역시 내려가고 싶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현성이한테 메시지 한 번 더 보내야지. 뭔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지만 쉽사리 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모양. 나도 제대로 감을 잡을 수 없으니 오죽할까. 얘네들이 방법을 찾는다는 건 기대하기 힘들 것 같았다. -뭐 쓸데없는 말 할 필요 없다니까. 형님은 분명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소. 그냥 우리는 방법이나 찾으면 되는 거요. -저도 덕구 씨 말에 동의합니다. -나도. 박기리 삼 남매. -신을 다시 아래로 불러온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지만요. 여러 가지 책을 기억하고 있지만 비슷한 내용이 떠올리지 않네요. 베니고어 교단에 있는 서적을 다시 한번 읽어보는 게 좋겠어요. 아마 황정연의 기억력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저도 뭔가 도울 수 있을 게 있는지 알아볼게요. 유아영이랑 김창렬은 사실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근데 너네 왜 그렇게 붙어 있어. 아래쪽 역시 단기간에 결론을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건 내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일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게 좋으려나. 막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일단은…. -네. -신전을 먼저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 -조각상을 만든다면 기영 씨와 소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요. 신전은 거, 우리한테 맡겨주쇼. 전진기지도 우리가 만든 거 아니요. -나랑 기모 아저씨랑 덕구 아저씨 셋이서 만든 적이 있으니까. 도움. 될 거야. 그래도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좋지 않겠어? -조, 조각상은 소, 소라가 만들면 되겠다. 얘는 전문가 맞아. 인정해. -허가를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예산은…. 김미영 팀장 행동력 빨라. -예산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길드의 자금을 총동원하셔도 됩니다. 자금이 부족하다면 제가 따로 방법을 찾겠습니다. -……. -연줄이 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에요. 거기가 혹시 가로쉬앤캐쉬나 미주사랑은 아니지? 역시 쟤는 안 돼. 시바. 평소와 같은 모습들에 잠깐 동안 다운됐던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다. ‘그래. 차근차근 하나씩 해야지, 시바. 괜히 먼저 나서서 초조해할 필요 없자너.’ 아래쪽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신전이 지어진답니다. 디아루기아 님.” < 777화 마지막 (10) > “이기영 후배… 그럼 당분간 다른 업데이트는 하지 않는 거야?” “네. 일단 균열을 막는 걸 최우선으로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불안정한 시스템부터 손을 본 이후에 추가하는 게 더 합리적이에요.” “그, 그래도 모험가들이 새로운 던전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대륙에 숨겨져 있는 던전들과 이스터에그들을 몇 개 가지고 왔는데 한 번 체크해 볼래? 일단 이것부터 봐.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전설 중에 하나거든…. 고대의 전사들이 잠든 대지, 매일 밤 고대의 전사들이 검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온다는 거로 시작되는 이야기야. 클리어 보상도 인간들한테 도움이 될 것 같고… 신성도 조금만 투자하면 바로 활성화될 것 같아. 완전 거저라니까?” “…….” “…….” “일없습니다.” “서사 페이지를 채우는 건 중요한 일이라구, 이기영 후배. 당장은 눈앞에 커다란 이득이 떨어지지 않을지는 몰라도… 이런 전설들이 살아 숨 쉬는 대륙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인간들의 신앙심에….” “던전 위치가 어딥니까?” “인…간들이 캐슬락이라고 부르는 지역이야.” “신성 교국이네요.” “으응….” “클리어하는 모험가는 베니고어 님의 신자일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아니, 꼭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건 모르는 거니까… 굳이 내 신자가 이름을 남기는 게 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렇잖아. 이기영 후배도 알고 있잖아. 안 그래도 컨텐츠가 바닥나서 할 게 없는데… 이런 시간이 너무 길게 지속되면 안 좋아. 대륙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 인간들도 점점 무기력해질 거구… 슬슬 새로운 페이를….” “그래도 안 됩니다.” “내가 괜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그냥 장난삼아서 이걸 가지고 온 줄 알아? 보상에서 전설 등급의 석재나 광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건데… 보석도 나올지도 모른다니까. 지금 전설 등급의 광석들이 모조리 소진돼서….” ‘뭐라고 할 말이 없네.’ 이게 전부 다 네 탓이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베니고어의 얼굴이 보였다. 솔직히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야. 안 그래도 인간들이 발전이다 수복이다 뭐다 해서 대륙의 자원들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전설 등급으로 책정된 것들은 주변에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다는 거 알고 있는 거지? 이렇게 마구잡이로 소비하면 대륙의 균형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일걸.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봐. 세계수가 사라진다고 생각해 보라니까.” “…….” “아! 이미 극단적인 예가 있구나? 이기영 후배 신전 짓는 데 요정의 호수 조약돌이 들어갔었네. 요정의 호수가 오염될 뻔한 걸 막느라 빠져나간 신성이 얼마였더라… 그러고 보니까 태양의 보석도 들어갔네. 일대 지역의 온도가 조금 내려갔었지 아마?” “…….” “오리하르콘이 씨가 말라서 드워프들이 힘들어 한데. 그 소식을 들은 거 맞는 거지? 이기영 후배? 무분별하게 광산 채굴하다가 지반도 많이 약해졌네. 주변 몬스터 생태계도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진짜 너무 한다니까… 진짜로 너무해.” “몇 개… 정도는 나쁘지 않겠네요. 기획서 가져오시면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에는 이겼다는 승자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럴 줄 알고 가져왔어. 이기영 후배.” 심지어 이미 계획이 되어 있었단다. 슬그머니 기획서를 받아 읽어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석재나 광석 같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면 지금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조금 더 넓게 보면 베니고어의 말도 틀린 게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있다면 이 기획서 안에 몇 가지 속임수가 들어가 있었다는 것. 뭉텅이로 함께 넘긴 제안서 중에는 그다지 필요 없을 것 같은 것들도 눈에 띄었다. 기왕 결재받는 김에 은근슬쩍 함께 결재받겠다는 거겠지. [등급 외 던전]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 두더지들의 성녀라는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지하신전의 밖을 한 번도 빠져나오지 못한 성녀. 삶의 평생을 지하신전에서 지내며 추대받은 성녀의 신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던전이었다. 위치는…. ‘베니고어 신전 지하.’ 던전 활성화에 들어가는 신성의 비용도 만만치 않다. 오히려 고대 전사들이 잠든 대지가 싸게 먹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보상도 정확하지 않고 기획서 자체도 빈약하다. 살짝 베니고어의 눈을 보다 필사적으로 이쪽의 눈을 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얘가 무슨 생각인지, 두더지 성녀는 뭔지, 무슨 목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수락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나도 잘못한 게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내 잘못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잘못이기는 하니까…. ‘김현성 시바.’ 아까 베니고어가 서술한 그대로, 이기영의 신전을 짓기 위해 여러 가지 자본들이 투입된 것이 문제였다. 자금 문제를 겪게 되는 것은 파란 길드와 김현성 개인일 거라고 판단했지만 그게 위까지 영향이 오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륙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빛의 성자의 신전 건설이 대륙 균형에 문제를 일으킬 줄은 누가 알았을까. 물론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문제가 생겼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요정의 호수에서 조약돌을 꺼내 왔을 때는 내가 다 황당해 입을 벌렸을 정도, 호수를 지키는 가디언은 애초에 활성화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김현아의 검 한 번에 부서져 버렸을 테니까. 그것뿐만이 아니다. 광석을 구하겠다고 광산의 끝까지 기어들어 가다 활성화되지 않은 대지의 정령을 깨워 놈을 부숴 버렸다. 온갖 자금을 끌어모으는 것으로도 모자라 직접 발로 뛰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이 새끼가 움직일 때마다 이곳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늘어났다는 것. 기왕이면 화려하게 짓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기야 했지만 이 정도까지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지니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 시바, 이해는 해.’ 정확히 어떻게 해야 신전을 완성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조각상에 내가 깃드는 게 가능한지 궁금했을 테니까. 대륙의 빛이 머물 장소였고 인간과 신의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대충 짓는다고 해서 시스템이 신전 판정을 내린다는 보장이 없었으니 김현성 입장에서도 애가 타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조각상에 내가 들어갈 수 있을지도 걱정됐을 테고….’ 아무 곳에나 냉큼 들어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를 테면 시스템에 영업 신청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유아영이 아이템을 만들 때 등급 판정을 받는 것처럼 신전 역시 등급 판정을 받는다. 어느 정도 등급을 받느냐에 따라 신전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고 잘못된 경우 등급판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김현성이 이런 복잡한 상황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아마 본능적으로 알고 있지 않을까. 잘못 만들면 소통이 불가능해지는 거야. 물론 그게 돈과 전설 등급의 자제들로 처바른다고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률이 올라갈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결재를 받고 희희낙락 뛰어가는 베니고어의 뒷모습이 눈에 보인다. 재무팀의 루 팀장은 그런 베니고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중, 나 역시 괜스레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슬슬 파란 길드원들이 움직이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완성되려나.’ 거의 6개월이 지난 시점, 파란 길드의 신전 건설 계획은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다시 한번 시선을 돌리자 지나치게 화려한 신전이 눈에 띈다. ‘이거, 시바 너무 사치스럽다고 까이는 거 아니야?’ 농담 하나 보태지 않고 베니고어의 신전보다 더 화려하다. 휘황찬란한 보석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누가 보기에도 값비싼 자제들로 만들어져 있다. 누가 보면 신전이 아니라 재력가가 사치를 위해 만든 공간이라 착각하지 않을까. 그나마 신전 같은 느낌을 주는 포인트는 천장 전체가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 있다는 것, 어떻게 설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빛이 들어오면 마치 신전 전체에 노을이 내려앉은 것만 같은 모습이다. 뭔가 마법적인 설계가 들어간 것 같기는 했지만 정확히 어떤 원리인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갔다는 것 정도만 확신할 수 있었다. ‘파란 길드 자금 상황 괜찮은 것 맞지?’ 어두운 김미영 팀장의 얼굴을 보니 전혀 괜찮지 않은 모양이다. 빛의 성자의 신전을 짓기 위해 교국과 타국의 지원 요청까지 했지만 그래도 자금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 같았다. 파란 길드에서 관리하고 있었던 부동산도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으니 그녀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편에서는 한소라가 조각상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쟤는 진짜 전직해도 되겠다.’ 아마 직업을 바꾸겠냐는 메시지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인의 미래를 위해 거절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직업을 바꿨어도 먹고사는 것에는 걱정이 없었을 것이다. “진짜 어떻게 저렇게 똑같이 만들었을까?” “많이 미화된 것처럼 보입니다.” “조금 미화되기야 했죠.” “아니요. 많이 미화됐습니다.” 등 뒤로 활짝 펼쳐진 날개. 양팔을 교차시킨 이후에 가슴에 살짝 얹어 놓은 포즈가 눈에 띈다. 살며시 뜬 눈에 박혀 있는 요정의 조약돌과 태양의 보석은 정말로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복장은 추모식 때 입은 복장을 입고 있다. 거장 조각가들이 깎은 것 같은 디테일이 인상적이다. 정말로 피부가 부드럽게 만져질 것 같고 입고 있는 옷은 당장에라도 바람에 날려 나풀거릴 것만 같다. 살짝 벌어져 있는 입에서도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올 것 같지 않은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한소라가 새삼스레 대단하게 느껴진다. ‘생명력을 담아서 조각 하고 있는 것 같자너….’ 정하얀이 그런 한소라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몇 개월이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인지 정하얀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인다. 그나마 한소라가 있었다면 여러 가지로 챙겨줬겠지만 아무리 그녀라 하더라도 저런 걸 만들면서까지 신경 써줄 수는 없었겠지. -거, 거, 거의 다 끝난 거야? 소라야? -네, 일단은… 하지만 끝났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실 어떻게 끝을 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끝이 있는지, 마무리 짓는다고 마무리 지어지는지 모르겠네요…. -조, 조금 쉬면서 할까? -아… 네… 쉬는 게 좋겠네요. 식사는 하고 오셨어요? -아, 아니. 아직. 입, 입맛이 없어서. -마침 제가 가져온 게 있는데 같이 드시면 되겠네요. -그… 그렇게 하자. 그, 그런데… 오, 오빠가 저기 들어올까? -아마 들어오시지 않을까요. 아직 완성은 안 됐지만 길드 마스터가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조각상 쪽이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분, 분명히 들어올 거야. 그렇지? -네. 조용히 있다가 갑작스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한 정하얀이 눈에 보인다. -끄으윽… 끄윽… 끄으으으윽… 들어올 거야. 그, 그… 렇지? 갑자기 보고 싶어진 모양이다. -끄윽… 끄으윽… 히끅… 히끅…. 허겁지겁 정하얀의 눈물을 한소라가 닦아주기 시작했지만 본래 위로를 받으면 더 울고 싶어지는 법이다. 계속해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가슴이 조금 아파졌다. -분명히 돌아오실 거예요. 그러니 울지 마세요. 정하얀 님. 만약에 안 나타나시면 같이… 네… 같이 올라가면 되니까요. 그렇죠? -으응… 끄으윽…. -장거리… 네. 장거리 연애를 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준비만 되면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볼 수 있고… 장거리 연애나 다름없네요. -히끅… 으으응…. ‘진짜 왜 저렇게 서럽게 울어….’ 어깨랑 턱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조금 희망차게 시작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간이 점점 길어지니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나도 힘든 상황이었으니 쟤는 오죽할까. 솔직히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도 대단하게 느껴진다. -울지 마세요. 정하얀 님. “그래. 하얀아, 울지 마.” -그래요. 울지 마세요… 부길드마스터도…. -? -? 정하얀과 한소라가 멍한 표정으로 조각상을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오, 오빠? [플레이어 한소라가 세기의 걸작을 완성시켰습니다.]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신화 등급의 조각상이 활성화됩니다.] < 778화 마지막(11) > ‘신화 등급?’ 이거 어떻게 한 거지? [신화 등급의 조각상의 효과로 신전의 결계가 펼쳐집니다.] [결계 안의 플레이어들의 체력과 마력이 자동적으로 회복됩니다. 결계 안 플레이어들의 저항력이 올라갑니다. 결계 안에 신성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결계 안의 대지가 정화됩니다. 기도를 드리는 신도들의 저주가 해주됩니다. 플레이어들은 결계 안에서 피로를 느끼지 않습니다.] [신도들에게 무한한 신앙심이 깃듭니다. 추가 신성을 1.5배로 획득합니다.] ‘추가 신성 1.5배?’ 계속해서 떠오르는 메시지에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었다. 굳이 하나하나 읽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들은 입이 다 벌어질 정도로 인상적이다. 특히나 추가 신성을 얻을 수 있다는 부분은 내가 뭘 잘못 읽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럽다. 찬란한 노을빛이 석상을 비추고 있는 것이 보인다. 후광 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모르게 더욱더 성스럽게 보이는 것만 같다. 한소라와 정하얀은 다시 한번 빤히 석상을 바라보고 있는 중. 눈물 콧물 다 흘리던 정하얀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피어나는 것을 보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지만 한소라의 표정도 눈에 띈다. 본인이 만들고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 자신의 결과물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아니지. 시바, 이럴 게 아니지.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일단 쟤부터 전직시켜야 되겠네. 너 흑마법사 왜 하구 있어? 재능을 찾았으면 새로운 길로 가야지. 안 그래?’ [플레이어 한소라에게 전직을 제안하시겠습니까?] [신화 등급의 직업을 검색합니다. 적절한 직업을 찾을 수 없습니다.] [고유 신화 등급의 직업이 생성됩니다.] ‘시바, 고유 신화! 고유 신화야! 고유 신화!’ [생명을 깎는 조각사-고유 신화 등급] [플레이어 한소라에게 고유 신화 등급의 직업 생명을 깎는 조각사를 제안합니다.] 생명을 깎는 조각사란다. 그 말이 틀린 게 아니다. 저 조각상을 보라. 마치 살아 움직일 것만 같지 않은가. ‘가자. 소라야. 이런 거 몇 개 더 만들자!’ [플레이어 한소라가 제안을 거절합니다.] ‘?’ 서둘러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것만 같다. 김현성이랑 정하얀한테 압박당한 것 때문에 그래? 사사건건 옆에서 끼어들고 고나리질 해서 그런 거야? 걔네 짜증 받아내는 게 그렇게 힘들었어? 저거 만들어질 때 보면 내가 보기에도 조금 너무하기는 했는데… 솔직히 트라우마 생길 만하기도 했는데…. 지금 이것저것 따질 처지는 아니자너. 신화 등급의 직업이자너! 추가 신성 1.5배자너. [플레이어 한소라에게 고유 신화 등급의 직업 생명을 깎는 조각사를 제안합니다.] [플레이어 한소라가 제안을 완고히 거절합니다.] 눈을 꽉 감고 있다. 이건 아니라는 듯이 기도하고 있다. 다시 한번 그런 고통을 겪기 싫다는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온다. [플레이어 한소라가 애원합니다. 전직하고 싶지 않다고 저항합니다.] ‘시바, 그냥 전직해.’ [플레이어 한소라가 죽어도 전직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더 이상 전직을 권유할 수 없습니다.] ‘한소라. 진짜.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우리 하얀이 챙겨야지.’ 한소라의 전직 때문에 더 중요한 게 있었다는 걸 까먹을 뻔했다. 신화 등급의 조각상이라고 한들 계속해서 연결할 수 있다고 보장된 게 아니니 빠르게 입을 여는 게 좋겠지.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까. 솔직히 말하고 싶은 것은 많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봐왔지만 직접 안부를 묻는 건 또 다르니까. 조금 호들갑을 떨고 싶기는 했지만 명색이 신인데 그렇게 말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조각상에서 나오는 말은 신탁이나 다름이 없으니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신전 안에 있던 이들이 조각상 앞으로 모이는 것이 눈에 보인다. 모두가 뭔가에 홀린 것처럼 조각상을 올려다보고 있다. “울지 마세요. 정하얀 님.” 존댓말을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오, 오빠… 오빠. 끄으윽… 오빠. 오빠아…. “항상 당신을 지켜봐왔습니다. 이 신전과 조각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당신을 지켜봐왔습니다.” ‘이런 말 해주면 좋아 죽자너.’ “외롭고 힘든 시간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이름에 맹세코 말하건대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언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슬퍼하지 마세요.” -……. 그래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얘 왜 저렇게 서럽게 울어.’ “울음 그쳐야지?” 이제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 도움이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말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모양. 솔직히 정하얀은 이 말이 가장 듣고 싶었을 것이다. 본인 나름대로도 올라올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또 만나지 못할 경우의 수에 대처할 경우의 수를 떠올리고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한 점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안심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대화하는 게 오랜만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다른 얘들은 어디 있지? 아직 소식 못들은 건가.’ 아니나 다를까 허겁지겁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 눈에 띈다. 김미영 팀장이 연락을 돌린 것이리라. -형님이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나다. 돼지 새끼야.’ -진짜로 형님 맞는 거요? 진짜로 형님인 거요? 박덕구의 저런 얼굴을 보는 건 정말로 오래간만인 것 같다.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쏟아져 나온다. -정말로 형님 맞느냐 이 말이요… 흐윽… 흐으으윽…. 커다란 손으로 눈을 비비는 게 어린애 같다. -내가… 내가 멍청해서… 내가 멍청해서 정말로 미안합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끝까지 형님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정말로 미안… 미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내가… 정말로…. 이제는 목이 메는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얘도 김현성만큼이나 멘탈이 나가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지금이야 억지로 밝은 모습을 보이고는 있었지만 결국 추도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오죽할까. 솔직히 내 시체를 옮기는 것은 저 돼지 새끼의 역할이 될 줄 알았다. 가장 앞자리에서 사진이라도 들어줄 줄 알았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박덕구가 내 죽음을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한동안 방안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못했던 녀석이었으니 이해는 할 수 있다. -형님이… 형님이 그렇게 된 건 다 내 잘못이요.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 자책하지 마세요.” -뭐라고 말하든 내 잘못이라니까… 내가… 미안합니다. 형님을 그렇게 놔둬서 미안합니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제대로 배웅해 주지 못해서 정말로… 흐윽… 미안합니다. 아무 능력도 없는 동생 하나 거두느라 고생만 했는데… 내가 아무것도 도움 주지 못해서 정말로 미안합니다. 흐윽… 끄으으으윽… 바보 같은 놈이라 정말로…. “당신은 대륙의 영웅입니다. 기억하세요. 제가 당신에게 전한 말을 항상 기억하세요.” 울음을 그치라 말한 건데 오히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모양이다. -흐어어어어엉… 흐으으윽… 흐어어어어어엉…. 아니, 왜 이렇게 소리 내서 울어. 그만해. 다른 사람들이 보자너. -흐어어어어어엉…. 나름 성기사였던 안기모는 짧게 기도를 올리며 예를 표하고 있었고 김예리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같이 있을 때는 싫어하는 티를 냈었지만 역시 그렇지도 않은 모양, 어떻게든 참으려고 하고 있는 게 보이기는 했지만 코끝이 빨개진 게 보인다. 뭐라고 한마디라도 더 내뱉으려고 했을 때였다. [잠시 후 조각상과의 연결이 해제됩니다.] 반갑지 않은 소식이 들려온 것. 어처구니없어 헛웃음이 다 나올 정도로 짧은 시간, 어째서 그 많은 신이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현세 개입에 들어가는 신성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애초에 쉽게 가능한 일도 아니다. 조각상 안에 숨어 있었던 베니고어의 선례가 있기는 하지만 나는 지금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입장도 아니지 않은가. ‘특정 조건을 채우면 조각상과 연결할 수 있는 건가? 내 경우에는 노을빛이 쏟아지면 디스카운트되는 거야? 다른 조건도 더 있고… 한 번 읽어봐야겠는데.’ 신화 등급의 조각상이기 때문에 그나마 비용이 적다고 느껴진다. ‘이거 시바 그냥 아무 조건 없이 강림하고 연결하고 이러면….’ 들어가는 추가 비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 새끼들이 왜 현세에 개입하는 걸 최소화했는지 알겠다. 그냥, 시바 지불할 능력이 없었던 거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신이 현세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놈들의 입장도 이해는 가지만 어쩌면 이 법이 신들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솔직히 이건 도박이나 다름이 없다. 강림해서 뭔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그나마 본전은 건질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죽 쓰고 파산 엔딩으로 갈 수도 있을 테니까. 대륙과 차원을 유지하고 관리하려면 개입을 최소화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잠시 후 조각상과의 동기화가 해제됩니다.] ‘김현성 이 새끼 왜 빨리 안 와?’ 또 빨빨거리고 돌아다니고 있었을 게 뻔하다. 아직 신전이 완성되지 않았으니 자재들을 구하고 있겠지. 김미영 팀장의 연락을 받았다면 아마 지금 달려오는 중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허겁지겁 뛰어오는 놈의 모습이 보인다. 꽤 먼 거리라는 게 문제기는 했지만 말이다. 달려오던 김현성이 날개를 펼치는 게 느껴진다. -지금 가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전해주세요. 팀장님. 여신의 손거울로 능숙하게 김미영 팀장과 통화하고 있다. -지금 가고 있습니다. 10분 안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네. 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네. 네. 아니, 하얀 씨는 잠깐 이곳으로 부를 수 있습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이 새끼도 울려고 그런다. -아직도 계시는 겁니까? 아직도 목소리가 들립니까? ‘아, 근데 시간 안 될 것 같은데… 무슨 드라마야 이거… 꼭 어거지로 이렇게 못 만나게 해요. 진짜.’ 현성이, 조혜진, 그리고 나머지 파란 길드원들과도 인사했으면 좋을 것 같지만 정말로 시간이 없다. 일단 강림한 이상 신탁은 내려야 하니까. 소통 창구가 있으면 그걸 활용할 생각을 해야지, 그렇지? “나의 영혼의 단짝이여. 내 목소리가 들리신다면 이곳으로.” -네? “나의 영혼의 단짝이여.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이곳으로.” 검은 백조의 이지혜를 찾습니다. 라고 해봤자 나오지 않을 테니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딱히 그녀를 지칭하지 않았지만 어디에선가 소식을 듣고 있다면 신전으로 와주겠지. 아니, 와야 한다. 지혜 누나의 도움 없이는 이 상황을 벗어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가 있었다면…. -네?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 -아무래도… 네. 아무래도… 기영 씨가 저를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미영 팀장님. 김미영 팀장에게 실시간으로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던 김현성이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 ‘아니야. 시바. 현성아.’ -아마 영혼의 단짝이라는 건…. ‘너 아니야. 이 새끼야.’ -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확률이 높을 겁니다. “잠깐….” [조각상과의 연결이 해제됩니다.] “아….” “…….” “너 아니라고… 이 새끼야… 지혜 누나 불러줘. 제발….” < 779화 마지막 (12) > -확실히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마도 제 영혼과 기영 씨의 영혼이 연결되어 있어서인 것 같습니다. 영혼의 단짝이라는 신탁이 뜻하는 바는…. -길드마스터의 한쪽 눈의 색깔이 변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군요. -네. 지금에서야 말씀드리는 거지만 특성의 영향일 겁니다. 어째서 이런 게 가능한지, 어째서 계속해서 이 특성이 유지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추측하자면 기영 씨와 제가 쌓아온 유대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도 기영 씨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렇군요…. -기영 씨가 다시 돌아오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이유 역시 같습니다. 어쩌면 기영 씨도 현세에서의 끈을 완전히 놓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만약 정말로 모든 끈을 끊어버리셨다면… 계속해서 이 눈이 유지될 리가 없으니까요. -길드마스터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조각상에서 부길드마스터의 기운이 사라진 건…. -어쩌면 특정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할지도 모릅니다. 신탁이 내려오거나 신이 강림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니까요. 정확히 기영 씨가 조각상에 강림한 시간대가 언제인지, 어떤 환경이었고 주변에는 뭐가 있었는지. 모두 체크해 주세요. 아마 제 생각이 맞다면 내일 다시 나타나실지도 모릅니다. 강림한 바로 다음 날 바로 다시 한번 강림했다는 선례는 없지만 기영 씨가 제게 전할 말이 있는 게 확실하다면 분명히 모습을 드러내 주실 겁니다. ‘너 아니라니까….’ 무척 진지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진짜로 아니라구….’ 정말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미영 팀장은 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김현성의 저 발언이 그럴듯하게 들려오는 모양,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그럴듯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다른 길드원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조혜진이 입을 여는 것이 보인다. -베니고어 넷을 비롯한 언론에 부 길드 마스터의 신탁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굳이 막으실 필요 없습니다. 기영 씨가 신탁을 내린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신전을 만든 것은 숨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네. 알겠습니다. 심지어 여신의 거울에서도 온종일 특집으로 편성해 방영 중이었다. 그 장소에 파란 길드원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내 목소리가 퍼져 나가는 걸 원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누가 영상을 촬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박기리 삼 남매와 정하얀, 한소라, 김미영 팀장을 비롯한 건설 인부들이 멍하니 조각상을 바라보고 신탁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계속해서 나오는 중. 영혼의 단짝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각 언론별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지만 김현성의 발언이 유출되었는지 노을빛의 검사를 가리킨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아니, 지금 보니 유출된 정도가 아니네. ‘시바, 저건 또 언제 한 거야?’ 김미영 팀장이 이미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 못을 박아버린 모양. 구체적으로 신탁의 뜻이 무엇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김현성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을 해 놓은 것 같았다. 심지어 바젤 교황도 그 누구보다 앞장서 지금의 기적을 홍보하고 있다. 베니고어의 아들이 대륙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다고, 아니, 애초에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베니고어가 인간을 가엾게 여겨 대륙의 내린 신이었다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이미 신전과 조각상이 활성화되었지만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새로운 빛에 올라섰다는 걸 모두가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사실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한평생을 청렴하고 순수하게만 살아왔던 성자, 대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빛 그 자체. 하늘 위의 새로운 별이 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게 들려올 지경이다. 베니고어 님이 인간의 죄를 물으실 때 그녀의 왼편에 서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거나, 위에서도 대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거나.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신성이 벌리고는 있었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 각지에서 인파들이 미친 듯이 몰려들고 있었다. -다시 한번 기적을 목도할 수 있으니 참 운도 좋아. 그렇지 않은가. 조지,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정말로 이기영 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실 거라고 생각하나? -글쎄…. -최근에 자네 감이 좋다는 건 알고 있으니 빨리 대답하게. 이제 삼류도박사 조지라는 말도 옛말 아닌가. -아마 신탁대로라면 모습을 드러내겠지. -너무 뻔한 대답이야. 조지. 재미없다고. ‘시바… 내려갈 신성 없다고. 제기랄. 진짜로 내려갈 신성 없단 말이야.’ 어딜 가도 저 이야기뿐이다. 정말로 어딜 가도 저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다. 동네 주점이나 광장과 시장에서도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이기영 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신탁이 사실이라면 그분께서 모습을 드러내실 겁니다. 오늘 잡혀 있는 일정은 전부 취소해 주세요. 그분을 모시는 데에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파란 길드와 이야기는 끝난 겁니까? -네, 오스칼 님. -국가적인 행사입니다. 시간이 촉박한 것은 알고 있지만 총력을 기울여 주세요. -네, 오스칼 님.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오늘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해야 한다는 위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로군요. 추진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쟤까지 저러고 있다. 이 와중에 이지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추도식만큼이나 엄청난 인파의 행렬이 린델로 향하고 있다. 시바 대륙에 그리폰이 이렇게 많은 줄도 몰랐다. 하늘에 떠 있는 그리폰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여러 고위관료나 재력가, 모험가들을 옮기고 있었고 마차들은 불이 나게 달리고 있다. 길이 막히는 건 또 처음 본다. 먼 거리에서부터 걸어서 오는 이들도 있었지만 곧 교국에서 자체적으로 이동수단을 마련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미 도착한 놈들도 눈에 보인다. 신전 밖은 이미 인파로 꽉 채워져 있고 이들이 편하게 쉴 수 있게 파란 길드 직원들이 불이 나게 뛰어다니는 것이 보인다. ‘시바. 왜 저 인파들 식사를 길드 자금으로 해결해? 아니, 안 그래도 돈 없는데 왜 그렇게 돈을 써? 진짜?’ 이미 파산 상태다. 김미영 팀장도 이제 될 대로 되라 상태로 들어간 것만 같다. ‘와, 진짜 시바, 다시 돌아가기 싫다. 저거 재정 어떻게 하지….’ -분명히 빛이 쏟아지는 순간이었어요. -노을빛이었던 것 같다니까. 석상의 뒤로 후광이 막 쏟아지고 막 조각상이 빛나고 그러는데 어찌나 성스러운 기분이 들던지…. 거, 형님이 좀 달라 보였을 정도였다니까. 목소리가 조금 차가워진 것 같기는 한 것 같은데… 그래도 뭔가 우리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소. -오, 오빠가 분명히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해 줬어요. 그, 그렇지 소라야? -아… 그렇죠. -그리고 그 조각상 안에만 서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막 힘든 것도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니까. 신전이 완성되자마자 결계가 쫙 펼쳐졌다는 거 아니요. 이게 무얼 의미하는 건지 다들 알고 있을 거요. 형님이 우리를 잊지 않았다는 거겠지. 계속해서 우리를 떠올리고 있었던 거요. 이렇게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조각상에 자신의 힘을 불어넣었던 거요. 심지어 조혜진도 조금 들뜬 것 같다. 첫날 보지 못해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띈다. -부길드마스터라면 분명히 그랬을 겁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회의실 문이 열리며 김창렬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드마스터. 교황청에서 예복을 전해 왔습니다. 불편하시다면 거절하겠습니다. 이제는 예복까지 등장했단다. 대충 무슨 옷인지 예상이 간다. 아마 사제복이겠지. 아직 이기영 교단이 자리를 잡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신을 모시는 데에는 적절한 복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테니 바젤 교황이 배려 아닌 배려를 해준 것이리라. 물론 어느 정도 정치적인 입장도 섞여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바젤 교황의 뜻은 아니겠지만 이기영 교단이 베니고어 교단의 하위에 있다는 걸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겠지. 교단에서 준비한 예복을 입으라는 건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파란 길드의 입장에서도 나쁜 것은 아니다. 성기사인 안기모가 있었지만 뭐 쥐뿔도 아는 게 없고, 사람들이 이만큼 몰렸을 테니 하나의 교단으로 완성됐다는 느낌을 풍기기 위해서는 통일성도 중요하다. 어버버 하면서 신을 모실 수는 없지 않은가. 분명히 베니고어 교단에서 파견된 사제들이 기본적인 예법이나 동선 같은 것을 알려줄 것이다. ‘이건 해야 되겠는데.’ 거절의 여지가 있다는 것부터가 강압성을 띄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지만 이 경우에는 어쩔 수가 없다. 김미영 팀장도 그걸 알고 있는지 조용히 김현성을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길드마스터. -……. -부길드마스터를 본 따 만든 사제복이라고 들었습니다. 불편하시다면 거절하셔도 상관없지만 아무래도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도 있으니까요. -어쩔 수 없군요. ‘아, 진짜 큰일 났다.’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뭔가 김현성은 내가 정말 저걸 입을 자격이 있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동하기는 하는 모양. 쟤도 완전 맹탕이 아닌 만큼 저런 게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에 슬그머니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것이 눈에 띈다. 본인 앞에 놓인 옷을 보고도 뭔가 주저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방에 준비된 옷을 천천히 갈아입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솔직히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다. 본래 사제복은 조금 펑퍼짐한 게 맛인데 꽉 끼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김현성도 어색한지 이리저리 본인의 모습을 둘러보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전해 받은 로자리오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망했다. 아… 큰일 났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고 있다. 결국에 베니고어 교단에서 사제들이 도착해 김현성과 리허설을 하고 있었고 파란 길드원들도 대부분이 사제복으로 갈아입었다. 모두가 조금 어색한 것만 같다. 기도를 올리는 자세가 어색해 안기모가 박덕구의 자세를 잡아주고 있었지만 사실 안기모도 뭔가 익숙하지 않아 보인다. 한 번 피 맛을 보면 멈추지 않는 아르기르모를 연기하던 녀석이었으니 저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정하얀은 나름대로 열심히 배우려고 하고 있다. 뭔가 대단히 관심이 많아 보인다. -이, 이거 어때요? -아, 제가 조금 잡아드릴까요? -네. 감, 감, 감사합니다. 엘레나에게 도움을 받는 모습, 모두가 엉성한 가운데 엘레나만이 중심을 잡아주고 있었다. 김예리는 이 과정들이 지루했는지 박리안과 알프스 옆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 유아영도 나름 열심히 연습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박덕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체적으로는 무척 진지한 분위기. 그 가운데에서 사제들에게 둘러싸여 이것저것 주의사항을 듣는 김현성의 얼굴이 가장 진지해 보인다. 조금 흥분한 거 같기도 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올지 안 나올지에 대한 두려움보다 나를 직접 대면한다는 종류의 두려움으로 보인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내 배때기를 찌른 것은 녀석이었으니 그것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 있으리라. 비난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는 것 같다. 지금 그걸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괜스레 얼굴이 구겨졌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함께 나가시죠. 노을빛의 검사님. -한 번 만 더 해보겠습니다. -네, 그럼 이제…. -한 번 만 더…. -네. -한 번 만….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결국에는 하늘이 조금 붉어졌을 때. 녀석이 조용히 신전 안을 거니는 것이 보였다. 싸울 때는 긴장하지 않았던 파란 길드원들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모인 인파들도 쥐 죽은 듯이 녀석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긴장이 안 되는 게 이상하다. 걸음걸이가 신경 쓰이는지 박덕구는 뒤뚱거리고 있었고 정하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 베니고어 교단의 사제가 김현성의 머리 위로 성수를 떨어뜨리고 김현성은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신을 영접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리라. 저렇게 엄숙한 모습은 또 처음 본다. 자신 있게 영혼의 단짝이 자기라고 말한 주제에 발걸음을 주저하는 김현성. 내가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에게 저주의 목소리를 퍼부으면 어쩌나 하는 종류의 두려움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 감내할 수 있다는 듯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다. 신을 위하는 노래가 퍼져 나오고 파란 길드의 사제들이 양옆으로 갈라진다. 김현성은 발걸음과 보폭에 신경 쓰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기도를 드리며 조용히 조각상을 올려다본다. 때마침 지는 노을이 신전을 환하게 비춘다. 붉은색의 빛이 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조각상에서 후광이 쏟아진다. 모두가 기다리는 것 같다. ‘아, 시바… 이거 진짜 어떻게 해. 지금 나가야 되는 거냐고….’ 잠깐 동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지만 동요하는 이들은 없다. 모두 내가 나타난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느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분명히 나타날 거라고 믿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 시바, 조혜진이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네? 조혜진 님?” “어쩌면… 길드마스터가 아니라… 저일지도 모릅니다.” ‘…….’ “아무래도 저인 것 같습니다. 이거 어떻게 해야….”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알프스에게 입을 열고 있었다. < 780화 마지막 (13) > ‘그래, 시바. 고맙기는 하다. 우리 단짝이었자너. 잊은 거 아니었자너.’ 조혜진의 저런 반응이야 고맙다. 얘가 나랑 시간을 보내는 걸 즐거워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이쪽을 생각해 주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베스트 프렌드라니까.’ 하지만 미소가 지어지지는 않는다. 조혜진의 반응이 즐거운 것과는 별개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얀이도 가만히 있는데 왜 그러는 거야, 진짜….’ 말 그대로 정하얀도 잠자코 있는 상황이었다. 영혼의 단짝이 자신이라고 주장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반대로 무척이나 온화한 모습을 유지해 주고 있다. 박덕구와 정하얀이 있는 자리에서 신탁을 내렸으니 본인들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겠지만, 평소의 정하얀이라면 한 번쯤 고집을 부릴 만하지 않았던가. 지금 정하얀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그녀가 얼마나 성숙해졌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하얀이를 본받으라고….’ 사실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신탁이 뜻하는 인물이 김현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는 완전히 관심을 꺼버렸다. 김현성이 내 영혼의 단짝이라는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한 것이리라. 정하얀보다 얘네가 더 난리를 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 어떻게 하지….” 계속해서 기다리지만 달라지는 것이 없자 조혜진은 괜스레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 중, 눈을 뜬 채로 조각상을 올려다보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에는 아직도 확신이 들어차 있었다. ‘시바….’ 조혜진이 조용히 조금씩 조금씩 위치를 옮기는 것이 눈에 보인다. 조금이라도 조각상에 가까워지면 뭔가 반응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대놓고 김현성의 옆으로 다가가 ‘길드마스터가 아니라 저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할 용기는 조혜진에게 없었다. 아니, 아마 그 누구라도 용기를 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척이나 엄숙한 종교적 행사에 돌발 행동을 한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가. 자신이 영혼의 단짝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김현성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싶다는 마음도 마음이거니와 애초에 조혜진은 남의 눈에 튀는 행동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다. 조각상에서 반응이 없자 신도들은 더 열렬한 기도를 보내오는 중. 찬송가는 더욱더 커졌고 강림을 기다리는 축제가 다시 한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천천히 해가 지는 시간대라 하늘이 색을 바꾸고 있었지만 완전히 해가 지기 전까지는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해가 저물 때까지는 무조건 내가 등장하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못 내려간다니까. 진짜로….” 분위기가 조금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몇 분이 더 지난 이후, 너무 반응이 없자 실망한 군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온다. 아쉬워하는 이들도 보였고, 교단에서 파견된 사제들은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아직까지 파란 길드원들이 열을 맞추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가운데 조혜진만 유독 앞으로 삐져나와 조각상 쪽으로 붙고 있다. 김현성 이 새끼는 여전히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듯한 얼굴이다.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기영 씨… 제 목소리가 들리신다면…. ‘그래 목소리가 들리기는 들리는데.’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대답하기 조금 그래.’ 다시 한번 로자리오를 꼭 쥐고 기도를 올린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 들어오는 기도는 저곳에 모인 인파들의 기도들을 모조리 튕겨내고 가장 앞 열에 설 정도로 열정적이다.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부디…. 약간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 사제단은 대놓고 대책회의를 하는 중. 일을 크게 벌인 만큼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는 거겠지. 조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제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쩌면 신탁이 뜻하는 영혼의 단짝이 노을빛의 검사가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교황님께 소식을 전하기는 하셨습니까? -네. 하지만 반드시 모습을 드러내실 거라는 말씀 밖에는… 믿음이 확고하신 것 같았습니다. 교황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다른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망한 신도들을 달랠 방법을 찾아야지요. 제 생각에도 신탁이 뜻하는 영혼의 단짝은 노을빛의 검사가…. -아마 노을빛의 검사가 맞을 겁니다. 그가 주장한 게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뭔가 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께서 연달아 강림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니…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무언가 공물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흔한 예는 아니지만 엘프들의 경우에는 엘룬 님께 공물을 바친다고 하더군요. -이기영 님께서는 욕심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공물이라니요. 현세에서도 물욕 하나 없으셨던 분께 공물이라니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말조심하세요! 베리놈 사제! 그분의 화를 사게 될 겁니다. 노하실 게 분명합니다! 베니고어의 아들에게 공물이라니! 공물이라니요! -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말실수를…. 사제단 쪽으로 다가간 조혜진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은…. -물론 부길드마스터께서 욕심이 많으셨다는 말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것을 챙기기보다는 남을 도우시는 걸 즐기시기는 했지만… 제 기억에 부길드마스터께서는 가방을 모으시는 소소한 취미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따로 장식장을 두실 정도로 매번 같은 가방을 수집하셨습니다. -허허… 그런 일이…. -길드마스터께서도 그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항상 선물을 해주셨던 게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우리가… 우리가 그분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허…허허…. -……. -뭔가를 담아두고 싶으셨던 것 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들의 대한 믿음과 사랑을 보관하고 싶으신 거겠지요. 정말로 소박한 취미라는 생각도 듭니다. 새삼스레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그분께서도 인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요. 홀로 대륙을 지키시고 모든 짐을 떠안으신 분이 아닙니까. 마음속과 머릿속에 있는 커다란 압박감을 떨쳐 낼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게… 그게 고작 가방 수집이라니…. 눈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베리놈 사제님. -……. -이기영 님께서 현세에서 보낸 시간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게 고작 가방 수집이었다니… 그 소박한 취미가 그분을 달래주던 유일한 탈출구였다고 생각하니… 어떻게 눈물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진짜 사제라는 놈들은 진짜 무섭다니까. 와….’ 어떻게 인간들의 믿음과 사랑을 보관하기 위해 가방을 수집한다는 생각까지 나온 건지 모르겠다. ‘말조심하고 행동 조심해야 돼. 시바.’ 영혼의 단짝 발언으로 이 사달이 난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실제로 눈물을 뚝뚝 떨구며 진심 어린 기도를 올리고 있는 사제들의 모습은 가관, 그 와중에 조혜진이 뭘 노리려고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길드마스터가 최근에 같은 종류의 가방을 입수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바, 그 와중에 또 샀다고? 아니, 김현성 정신 나갔어?’ -아! 그걸 전해드리면 되겠군요. -네. 그렇지 않아도 전해드리는 게 어떨지 여쭙고 싶었던 참이었습니다. -당연히 전해드려야지요. 당연히요. -제가 길드마스터께 직접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조혜진 님. “진짜 미치겠다, 시바.” 진짜 미치겠다, 이 새끼들. 시바. 조혜진 얘는 도저히 영혼의 단짝이 자신이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 모양이다. 결국에 선택한 방법은 공물을 전해주는 척하며 김현성의 옆에 서성거리는 것, 조금이라도 조각상 가까이에 닿으면 내가 반응할 거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미치고 팔짝 뛰겠다.’ 나쁜 작전은 아니었지만 가방을 공물로 받아먹는 신이 되고 싶지는 않다. 조혜진도 생각이라는 걸 하는지 하얀 천으로 공물을 가리기는 했지만 천천히 다가오는 조혜진의 모습을 본 김현성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부족한 게 뭐였는지 깨달은 듯한 얼굴, 어째서 저걸 깜빡했을까 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저런 이미지였다고?’ -기영 씨에게 드릴 것이 있습니다. ‘주지 마…. 시바, 주지 말라고.’ 애초에 튀어나갈 수도 없지만 내가 저걸 받고 튀어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파란 길드 이 새끼들이 단체로 나를 먹이려고 작전이라도 짜놓은 것 같다. 굉장히 성스러운 물건이라도 들고 오는 양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기는 조혜진, 신께 보내는 감사의 선물일 거라고 웅성거리는 갤러리들. 생각이 있는 신이라면 이 타이밍에 등장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문제가 있었다면…. 한소라의 몸이 덜덜덜 떨려오고 있었다는 것 하나. ‘아… 하얀아… 시바… 아….’ 영혼의 단짝이 김현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한 정하얀이었다. ‘아… 아니야. 아….’ 자신도 아니고, 박덕구도 아니고, 김현성도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한 영혼의 단짝이 누구일까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자신이 모르는 제삼자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제2차 박미진 사태에 대해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표정이 굳어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위험을 감지하는 한소라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지금 이대로 놔두면 틀림없이 크게 한 번 터질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그 와중에 조혜진은 김현성에게 공물을 넘겼고 둘 모두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다. 조혜진은 자신이 왔으니 이제 내가 나타날 거라는 믿음이었고 김현성은 공물로 내가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믿음이었다. 원숭이가 아기 사자 들어 올리듯 공물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는 김현성, 그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이빨을 뿌득거리기 시작한 정하얀. 드높이 울려 퍼지는 찬송가. 천천히 지는 해. 환호성을 지르는 신도들, 바람 잡기 시작한 사제단과 언제 일어났는지 박수를 보내고 있는 박기리 삼 남매. 쟤네들이 제일 나쁘다. 엘레나는 왜 울고 있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잖아. 왜 우는 거야 도대체, 시바. 모든 게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만 같다. 장담하건대 마지막 전투보다 지금 이 상황이 더욱더 참기 힘들다. 옆을 바라보자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는 베니고어의 얼굴이 보인다. ‘얘는 또 언제 왔어.’ 틀림없이 비웃음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시바….’ “쉽지 않다니까. 대륙을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이기영 후배.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참… 나도 실수할까 봐 말 잘 안 하잖아. 너무 실망하지 마… 원래 신입들은 대부분 그런다니까.” ‘…….’ “물, 물론 이기영 후배는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아직 신입이기는 신입인 모양이네. 아직 애송이야. 푸… 푸히힛. 내가 이것저것 가르쳐서 올바른 길로 이기영 후배를 인도해야겠어. 표정 좀 풀어 이기영 후배. 원래 실수하면서 배운다고 그랬잖아. 그렇지?”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괜스레 고개를 숙이니 아래의 상황은 더욱더 점입가경으로 흘러가는 중,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결국에는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이기영 님이시다…. -이기영 님께서 강림하셨다! -정말로 강림하셨다고!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베니고어의 아들이다! -신이시여 언제나 항상 저희를 굽어살피소서. -신이시여! 대륙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당신께… 평생을 당신만을 위해 기도하겠나이다. -절대로 당신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 -기영 씨? “…….” -기영 씨….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녀석. 뭐라고 입을 열어야 이 손해를 복구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 781화 마지막 (14) >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만 같다.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만큼이나 당황스럽다. 무대 공포증이 있다거나 신도들의 환호성이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다. 솔직히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이 모든 상황이 나를 당황스럽게 하고 있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본래 예정에 없던 일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를 여기까지 내몰아버린 파란 길드원들에게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 아무런 악의 없이 사람을 X 되게 만드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거면 진작 튀어나올걸.’ 정말로 가방 받고 강림한 졸렬한 신이 되고 싶지는 않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환호성을 보내는 이들도 섞여 있었지만 대륙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친 성자의 진실 된 모습이 군중의 눈물샘을 훔쳐 버린 모양, 계속해서 신성이 쌓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사소한 기도들 역시 계속해서 쏟아진다. ‘와, 시바. 여기서 균열랜드 대박이랑 모험가 대학 합격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놈들은 뭐야. 대륙의 성자가 나타났는데 기도할 게 그것밖에 없다고? 현실적이기는 하자너.’ 당연하지만 그 누구보다 격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파란 길드원들도 눈에 띈다. 조혜진은 가만히 서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뭔가 할 말이 많은 건지 자꾸만 입술을 움직이려고 하지만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 것만 같다. 엘레나는 갑작스러운 강림에 고개를 숙이고 조각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눈을 마주치는 행위 자체가 죄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유아영과 김창렬은 자신의 두 눈을 비비는 중,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김창렬의 눈이 저렇게 커다랗게 떠진 것은 또 처음 보는 것 같다. 다시 한번 기적을 맛본 정하얀과 박덕구의 반응은 저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던 오스칼은 두 손을 모으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고, 신입 길드원 알프스는 대륙 출신답게 다른 누구보다도 능숙하게 예를 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신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른다. ‘내가 보기에도 신성해 보이기는 하네. 신화 등급의 조각상이라 그런가 효과가 좋자너.’ “…….” ‘가방 받고 강림한 것만 아니라면 더 그럴듯할 것 같자너….’ 태양의 보석과 요정의 호수의 조각돌로 만든 두 눈은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고, 일단 노을 진 하늘이 석상을 비추는 효과 자체가 죽여준다. 신성한 빛에 둘러싸여 있는 것 자체로도 경외감을 느끼기 충분할 터인데 주변 환경까지 도와주니 그림이 나오는 것 같다. 사소한 문제는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저렇게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김현성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나누고 싶은 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담이다. 많은 신도가 바라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내가 녀석을 부른 이유가 소소한 이유라면 조금 김이 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 린델의 신도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잘 지내셨어요? 현성 씨?’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미치겠다. 시바.’ -기영 씨… 제가 보이십니까? “…….” -제가… 정말로… 그러니까… 제가…. 목이 메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 것이 느껴진다. 일단 포근한 미소를 보내고는 있지만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건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 녀석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딱히 이상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를 미국으로 보내 버린 장본인. 일단 인사부터 하는 게 맞겠지. “오랜만입니다. 노을빛의 검사.” 조용히 목소리가 흘러나간다. -기영 씨…. 사무적인 말투에 잠깐 실망한 듯한 얼굴이 보였지만 곧 자신이 실망할 자격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녀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 오랜만입니다. 이기영 님. “…….” -드리고 싶은 말씀이 무척 많았습니다. 이렇게 만난다면 나누고 싶은 말들이 너무나 많았는데 무슨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할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잘 지내시고 계시는지, 어떻게 지내고 계신 건지, 무척 궁금하지만 제가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 -하지만…. 녀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 말을 이어나갔다. 제 딴에는 꽤나 용기를 낸 발언이었을 것이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그게 가장 궁금했던 모양이다. 뭔가 대답하기 굉장히 애매한 질문이다. 잘 지냈냐를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이런 사담을 나누는 게 옳은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괜히 내가 우리 현성이를 노을빛의 검사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 막 입을 떼려는 찰나 녀석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강림했으니 뭔가 말해야 하는데 할 말이 많은지 자꾸만 내 턴을 빼앗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질 나쁜 방법으로. -죄송합니다. “…….” -흐윽… 흐으으윽… 죄송… 죄송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정말로 많았는데… 죄송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저를 지켜봐 주고 계신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꼭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제가 저지른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정신 나간 새끼.’ -조금이라도 제 마음속에 있는 짐을 덜기 위한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김현성인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병신 같은 놈이다. -제가 저지른 일을…. “그만.” -……. “그만하세요.” ‘이 새끼 뒤질려고 환장했나 봐.’ 지금 이 자리에서 이기영 배때기에 대해 고백하려는 모양이다. 눈치가 없는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눈치가 없다. ‘돌팔매질 당해서 숨지고 싶어서 그래?’ 아니나 다를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중, 노을빛의 검사가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분명히 의혹이 없었을 리가 없다. 라파엘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도 신경 쓰이고 모든 게 깔끔하게 마무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이기영의 죽음에는 의혹이 있다는 루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여러 가지 음모론이 생겨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내뱉는다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다. 어쩌면 파란 길드에서도 녀석을 몰아낼지도 모른다. ‘그 말은 하지 마.’ “그 누구도 죄를 고백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죄인이 아니라 대륙을 구한 용사이며 찬란한 노을빛을 지켜낸 많은 이들의 수호자입니다. 모든 일은 예정된 일이었으며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눈물 흘리지 마세요. 노을빛의 검사. 희생된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리지 마세요. 상처 입은 영웅들이여.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마세요. 그대들과 같은 자리에 서 있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베니고어 님의 오른편에 앉아 스스로의 손으로 지켜낸 대륙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신이시여…. -아아… 베니고어시여. 아아아아… 이기영 님…. “가족과 친구, 동료, 연인들을 지켜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저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사자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이런 말은 필요하겠지. 새하얀 선의의 거짓말이자너. 다들 천국 가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자너.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은 슬퍼하는 일이 아니라 나아가는 일입니다.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애틋함과 죄책감을 이제는 놓아주어야 합니다.” ‘진짜 놓아주면 안 되는 거 알지? 그지?’ -하지만…. “놓아주세요.” -놓을 수… 없습니다. 흐윽… 놓을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좋은 자세다. 시바. 그런 자세야.’ 절대로 놓지 마. 시바. 특히 죄책감은 놓으면 안 돼. 이건 내 무기니까. “놓아주세요. 그대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 그대들은 나아갈 수 있습니다.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이들입니다.” 대충 던진 말이었지만 조혜진에게도 영향이 온 모양이다. 얘도 죄책감에 매몰되어 있었으니 조금이나마 내 말이 위로가 되지 않을까.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자신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서럽게 울고 있다. 결국에는 알프스가 앞으로 튀어나와 그녀를 수습했을 정도였다. -기영 씨… 저는… 저는…. “안주하지 마세요. 뒤를 돌아보는 일은 옳은 일이나 나아가지 않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은 옳은 일이나 그 죄에 매몰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슬퍼하는 것은 옳은 일이나 슬픔에 빠져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눈 앞에 펼쳐진 미래를 밝히고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작은 빛들입니다.” ‘죄에 조금은 매몰되어도 돼. 슬픔에 빠져 주변을 조금은 돌아보지 않게 돼도 상관 없자너. 그냥 잊지 말라구. 알겠지?’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김현성의 표정만 봐도 지금 이 새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인다. 내 말에 수긍하지 않고 있다. 절대로 내 말을 따르지 않겠다는 저항 정신이 돋보인다. 아주 올바른 저항 정신이다. 박수라도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 저기서 그 저항 정신을 드러내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당장 난리를 치겠다는 선택지에는 발을 들이지 않은 것 같았다. “저는 언제나 그대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대들이 어떤 대륙을 만들어갈지, 어떤 삶을 살아갈지 하루하루를 기대하며….” -기영 씨도 함께 누려야 합니다. 흐으윽… 흐윽…. “…….” -함께 누려야 합니다. 누려야 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기영 씨입니다. 흐윽… 제가 누릴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 기영 씨가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거 놔! 이거 놓으세요! 이거 놓으라고 했잖아! 제기랄! ‘이 새끼 흥분 하자너. 흥분하니까 무섭자너… 우리 저번에 이 이야기 끝내지 않았어?’ 오래 참아왔지만 결국에는 참을 수 없었는지 소리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주변 사제들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일단 김현성을 붙잡고는 있지만 저런다고 저 사제들이 김현성을 진정시킬 수 있을 리 만무. 지금 자신이 어떤 불경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이미 주변에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녀석이 기대하고 있었던 장면은 이런 장면이 아니었을 것이다. 부활한다는 희망을 전해주거나 혹시 모를 여지를 주기 위해서 자신을 찾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조금 밝은 모습을 보여준 걸지도 모르지. 영혼의 단짝이라는 말이 기쁘기도 했겠지만 정말로 기뻤던 것은 작은 가능성을 움켜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놓고 모든 걸 잊고 나아가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꼭 돌아오게 만들 겁니다. 꼭 돌아오게 만들겠어요. 기영 씨의 자리를 남겨둘 겁니다. 흐윽… 흐으윽… 절대로 이렇게 끝나게 만들지는 않겠어요. 이런 마무리는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겁니다. 모든 걸 걸고서라도 되찾을 겁니다. 제가, 파란 길드가 그렇게 하겠어요. ‘좋은 자세자너.’ 근데 이런 자리에서 말하기는 적절하지 않은데…. -기영 씨를 되살릴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영 씨를 되살릴 거예요. 어떤 방법을 쓰든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제 모든 걸 바쳐서라도…. 김현성은 무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조금 부족할지는 몰라도 일단 할 건 해야지. “내가… 그대들의 슬픔과 죄를 사하노라.” 거대한 빛무리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다. 물론 정말로 죄를 용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이런 효과라도 있어야 뭔가 나오는 보람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것처럼 신도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빛무리를 받아들이는 중, 그 와중에 김현성은 노을빛의 날개를 꺼내 자신에게 빛무리가 닿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내 모습이 천천히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떨어지는 빛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리고. -……. -……. -누구 마음대로 슬픔과 죄를 사해요? 나아가라고? 정말로 웃기다니까. 오빠나 실컷 용서해요. 나는 전부 죽여 버릴 테니까. 처음으로 돌아갈 때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잘근잘근 씹어서, 개미 새끼 한 마리 남지 않을 때까지 죽이고 또 죽일 거야. 가면을 쓴 이들과 함께 린델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지혜가 시야에 비쳤다. -전부 다. < 782화 마지막 (15) > -전부 다 죽일 거라고. “…….” ‘뭐야. 이 누나 왜 이래….’ “…….” ‘이 누나 지금 장난하는 거지? 뭐 이렇게까지 해? 뭐야, 무서워. 그러지 마.’ 다시 한번 봐도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얘가 왜 갑자기 여기서 튀어나와?’ 제발 좀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저런 모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최종 빌런 같은 모습을 원한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함께 있는 이들이 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카스가노 유노와 선희영, 틀림없이 내가 알고 있는 그녀들이다. 물론 전과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선희영의 얼굴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이 들어서 있다. 마치 1회 차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카스가노는 평소 같은 표정이었지만 평소보다 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읽기 어렵다. 커다란 망토 같은 것으로 몸 전체를 두르고 모두가 같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습. 멀리서 보면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녀들 외에도 몇몇 인물들이 더 보이기는 한다. 이지혜의 옆을 지키고 있는 하연수. 쟤는 저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딜 가든지 간에 꼭 데리고 다니는 인선이었으니까. 약간 의외였던 것은 조금은 생소한 얼굴들이 보였다는 것. 아니, 생각해 보니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쟤네 어디서 봤더라.” 라고 자기 자신에게 물음표를 던진 것도 잠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1회 차 여단.’ 내 기억이 맞다면 뒤쪽에 병풍처럼 서 있는 저 쌍둥이들은 1회 차 여단 멤버가 맞을 것이다. 그 옆에 있는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다리 한쪽이 없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온전한 다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분명히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본 기억이 있다. 당시에 봤던 녀석 중,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녀석은 키가 크고 빼빼 말랐던 녀석, 가장 기분 나쁜 기운을 풍기고 있었던 녀석이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와 녀석만 있었다면 내가 1회 차 여단을 보고 있나 하는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지혜가 어떻게 저 3명과 연결고리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이상하지도 않지, 뭐.’ 소수의 인원으로 대륙을 벼랑 끝까지 내몬 놈들인 만큼 재능 하나는 기가 막히지 않았을까. 카스가노가 정보를 전해줬을 수도 있고. 음지에서 활동하던 녀석들이니 이지혜가 건져냈을 수도 있다. 1회 차와는 역사 자체가 바뀌었을 테니 놈들의 성향도 바뀌었을 것이고…. 아! 키가 크고 빼빼 말랐던 놈 같은 경우에는 교화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해 제거하지 않았을까. 아마 정진호 그놈과 비슷한 종류의 녀석이었을 것이다. 성악설을 믿게 만드는 전형적인 쓰레기 말이다. 그 밖에는…. ‘라파엘은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이지혜와 같이 행동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 아니면 그냥 이 자리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뭐가 어찌 됐든 중요한 것은 현재 이지혜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는 것. 흑화를 해도 제대로 했는지 표정이 완전히 굳어 있다. 나 역시 그녀가 저 정도로 인상을 구긴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이 누나 왜 이렇게 분위기 파악을 못 해. 솔직히 딱 보면 척 아니야? 감 오는 거 아니냐구.’ 상식적으로 내가 슬픔과 죄를 사할 사람은 아니자너. 아무 조건 없이 걍 뒈질 사람은 아니자너. 누나가 더 잘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정말로 내가 저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렇지? 정말로 희생할 거라고 생각해? 아니, 물론 희생한 게 맞기는 해…. 아마 카스가노도 옆에서 뭐 열심히 말했겠지. 이기영 님은 스스로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다느니, 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하셨다느니, 최대한 막으려고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느니, 뭐 그런 이야기 했을 거야. 그래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석상에서 지껄인 개소리들이 진심으로 지껄인 소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모든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로노베와 계약한 그녀가 위쪽에서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리가 없다. ‘누나 다 알면서 그러는 거잖아. 그냥 겁주는 거자너… 빡쳐서 그냥 화풀이하는 거자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내가 누나를 왜 불렀겠어….’ 제발, 그럴 가능성이 높다. 위쪽에서 문제가 있으니 아래쪽에서 도움을 주려는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나도 누나한테 제대로 된 계획을 알려주지 않고 일을 시행했으니 너도 한번 엿 먹어 보라는 느낌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것 아닐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괜찮으세요? 언니? -……. -어떻게 할까요? 하지만 만약 이지혜가 진심이라면. 정말로 대륙을 처음으로 다시 되돌릴 생각이라면…. “어떻게 하지?” -시작할까요? “뭘 시작해. 아무것도 시작하지 마.” 이걸 김현성이 감당할 수 있나?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이지혜를 김현성이 막아낼 수 있나. 머릿속으로 잠깐 고민을 해봤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무력, 여단의 무력과는 별개로 지금의 김현성이 지혜 누나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 조금 저급하게 이야기하면…. ‘개 발릴 거야.’ 내가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를 높게 평가하는 것과는 별개로 김현성은 지혜 누나를 감당할 수 없다. 사실 여단도 필요하지 않다. 여단은 그녀의 몸을 보호하고 그녀의 계획을 조금 더 빠르게 앞당길 수 있는 장치일 뿐이다. 약간의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이지혜는 여단 없이도 일을 진행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이지혜가 대륙에 개판을 친다면 어떨까. 아마 이런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 않을까. ‘일단 김현성이 나를 찔렀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겠네.’ 베니고어넷이나 여신의 거울은 막스로 인해 통제되고 있으니 그런 소문을 퍼뜨리기 쉽지 않겠지만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현성이 나를 찔렀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할 것이다. 파란 길드와 김현성의 사이를 틀어지게 만들 테고 김현성을 완전히 고립시킬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정하얀과 김현성을 싸움 붙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 김현성과 대륙을 분리시키는 게 첫 번째 과제. 솔직히 저걸 보면 그녀의 첫 계획이 어렵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제가 살리고 말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답해 주세요. 기영 씨. 대답해 주세요! -노을빛의 검사님. -길드마스터…. -제길… 제기랄… 흐윽… 대답해 주세요. 제발… 희망이 있다고… 가능할 거라고 대답해 주세요. 아직도 저러고 있자너…. 저 새끼는 지 인생 최대의 위기가 왔다는 걸 알고는 있는지 이미 꺼져버린 석상을 향해 소리치고 있는 중. 본래의 김현성으로도 쉴 새 없이 뒤통수를 처맞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진대 저렇게 멘탈 나간 현성이 뒤통수를 어루만져 주는 것 정도야 얼마나 쉬울까. 재정 문제를 포함해 여러 가지 문제를 떠안고 있는 파란 길드도 방패막이 되어주는 데 한계가 있고 결국에는 내부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베니고어 교단과 이기영 교단을 이간질할 수도 있겠지. 국가와 국가 사이의 갈등을 야기할 가능성도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아직 안정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이지혜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똥줄이 탈 수밖에 없었다. ‘너도 한번 아무것도 모르는 게 얼마나 엿 같은지 느껴보라는 의도라면 이미 성공했자너. 그러니까 그만해. 누나. 진짜 불안해.’ -언니? -……. -언니…. ‘누나 왜 울어. 울지 마.’ -병신 같은 새끼. ‘이 누나 연기 장난 아니자너. 진짜로 장난 아닌 것 같은데….’ -이 병신 같은 새끼. ‘알고 있는 거지? 다 알고 있잖아.’ -나도 몰랐었지 뭐예요. 오빠. “…….” -그래. 내가 이렇게 화가 날 줄은 정말 몰랐었다고. 이렇게 기분이 엿 같을 줄은 정말 몰랐어. 솔직히 그냥 잊어버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오빠도 나랑 똑같을 거야. 그렇지? 비슷한 상황이었으면 분명히 같았을걸? “…….” -감히 내 걸 건드렸는데. 내가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줄 알았어요? 정말로 내가 그렇구나 하고 수긍할 줄 알았던 건 아니지? 이렇게 전부 다 끝내고 가면 룰루랄라 행복한 삶을 즐길 줄 알았냐고. “아니, 그런 건 아닌데….” -……. “…….” -대가를 치러야 돼. 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어서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일을 벌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야. 네가 무슨 정신으로 이런 개 같은 엔딩을 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나랑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라고. 중요한 건 이거 하나야. 내 걸 건드린 새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거. “…….” -잘 들어. 내 사랑. “…….” -네게 바칠게. “…….” -이게 누구의 희생으로 얻어진 평화인지도 모르는 저 썩어빠진 새끼들의 비명을 바칠 거야. ‘쟤네 알고 있는 것 같아. 누나.’ -오빠를 찌른 저 새끼의 시체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폐허가 된 대륙 위에서 너와 춤을 출거야. “이 누나 진짜 몰라?” 천천히 등을 돌리는 이지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단 멤버들이 천천히 그녀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될 거야.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린 상태에서 다시 한번 만나게 되겠지? “아… 시바….” -재미있겠네. 그렇지 않아? “진짜….” 조용히 가면을 올려 쓴 그녀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사랑해. 동생. 내 소울 메이트.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가면 안의 얼굴이 비틀려 있다. -나중에 보자. 그렇게 그녀는 순식간에 어디론가 꺼져 버렸다. 망원경으로도 잡을 수 없는 것을 보니 로노베의 도움을 받은 모양이다. “시이바….” 저절로 한숨이 튀어나온다. 정말로 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혀 올 지경. 왜 내가 지혜 누나로 인해 개판이 날 대륙의 운명을 걱정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슬쩍 옆을 둘러보니 베니고어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직감한 모양이다. 계속해서 실실 웃고 있었던 전과는 다르게 상당히 표정이 굳어 있었다. “어, 어떻게 해? 이기영 신도?”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접촉을 해야 하기는 하는데….” “저 여자가 날뛰면 어떻게 하지? 이기영 신도가 좀 말려봐야 하는 거 아니야? 어? 할 수 있지? 할 수 있는 거지? 나… 나… 희생하기 싫어 이기영 후배. 나는 알타누스가 아니라구. 아직 못해본 것도 많고….” “…….” “이럴 게 아니라 엘룬한테 빨리 이, 이쪽으로 합류하라고 해야겠네. 지, 지금은 일손이 많이 부족한 상황이니까. 어려운 문제는 잠깐 날려버리고 으응… 나는 여기에 조금 더 집중할게….”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베니고어님.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준비는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무슨 준비?” “아마 뭐가 됐든 간에 일을 진행하기는 할 것 같습니다.” “뭐?” “저를 도와주려는 의도건, 대륙을 부술 의도이건 간에 일을 벌이기는 할 거예요.” “아….” “수습할 준비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내려갈 준비라고 해도 되겠네요.” 그 말 그대로. 솔직히 잘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떤 방향이 됐든 간에 그녀는 나를 되살릴 거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녀가 또 보자고 이야기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