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회귀자 사용설명서 001화 내 재능 수치는 일반 이하다(1)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이게 무슨….” 욕을 내뱉으려다 살짝 주변을 둘러봤다. 시야에 비치는 것은 어두컴컴한 건축물의 내부다. 희미한 빛 사이로 뭐가 뭔지 모를 문양들이 보였다. 지구에 있는 건물 내부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 생전 처음 본 듯한 그것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입이 벌어졌다. 피라미드의 안을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상황에 잠깐 동안 눈동자를 굴렸다.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여동생과 함께 밥을 먹고 있었던 장면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기억해 보자면 이렇다. 핸드폰으로 뭐가 뭔지 모를 카톡이 날아 왔다. -게임에 참가하시겠습니까?- 친구가 보낸 게임 초대 메시지라고 생각했고 아무 생각 없이 버튼을 눌러버렸다. 겨우 그걸로 끝. 기억나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괜스레 턱과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너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탓이다. 갑작스럽게 생전 처음 보는 곳에 와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눈에 띄는 것은 이곳의 분위기.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 덕분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다른 생각을 채 하기도 전에 주변에서 여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기가 어디죠?” “저한테 묻지 마세요. 저, 저도 잘 모르겠단 말이에요.” “거, 거기 다른 사람들도 있나요? 이곳은 도대체… 그리고 검이랑 무기들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그걸 알면 우리가 이러고 있겠어요? 다들 똑같은 상황인 것 같은데 뭐 기억나는 거 없나요?” “저기요! 거기 누구 있어요? 저기요!”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사람들.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 이것이 꿈인 줄 아는지 볼을 꼬집는 사람. 모두 제각각이다. ‘꿈은 아니야.’ 꿈도 아니고, 나 혼자 이곳에 떨어진 것도 아니다. 빌어먹을 위화감이 없다. 잠깐 침을 삼켰을 때 다시 한번 작은 동굴이 울렸다. [플레이어들은 이세계로 초대되셨습니다. 저희는 플레이어에게 초대장을 보냈고 플레이어는 그 초대에 응했습니다. 죽어가는 대륙을 살리기 위한 용사로 선택받은 것입니다.] “제기랄! 무슨 용사야!” “거지같은 장난치지 말고 빨리 나와 이 개 같은 놈들아!” “경,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경,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당신들 몰래카메라 하는 거야? 이건 고소감이야. 고소감이라고!” [그렇지만 모두가 대륙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륙으로 갈 자격이 있는 것은 튜토리얼을 통과한 소수의 인원입니다.] “무슨 개소리야!” [앞으로의 제 말에 집중해 주세요. 여러분들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갑작스레 정신이 번쩍들었다. 뭔가 묘한 분위기에서 생존이라는 단어가 귀에 꽂혀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대륙으로 갈 자격이 있는 것은 이번 튜토리얼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입니다.] “뭐… 그럼 죽이기라고 하겠다는 거야?” [그 역시 여러분에게 달린 일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의 생존. 그리고 앞으로의 생활에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지금 이 상황은 꿈이 아닙니다. 엄밀히 여러분이 처한 현실입니다. 부정하시는 건 추천드리지 않겠습니다. 저 역시 이 튜토리얼에 안내자로서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드려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장난치지 말라고! 제기랄!” “제, 제발 꺼내주세요. 제발요.” 여러 가지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빌어먹을 여자의 설명은 차분하게 진행됐다.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지금 있는 곳은 튜토리얼을 시작하기 전 여러분들이 대기할 수 있게 만들어진 스타트 포인트입니다. 대기실이라 생각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스타트 포인트에는 여러분들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물품이 들어 있습니다. 식수, 식량 그리고 앞으로 여러분이 사용할 무기들입니다. 무기의 등급은 일반, 희귀, 영웅, 전설로 이곳에 있는 무기들은 모두 일반 이하 등급의 무기들입니다.] 확실히 몇 가지가 눈에 띈다. 지구에서 보던 패트병이 아니라 가죽으로 만들어진 수통이었지만 한쪽 구석에 비치되어 있다. 뿐만이 아니다. 역시나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생소한 무기들이다. 활과 화살, 검과 방패, 창과 메이스까지. 중세 시대에서나 사용할 것 같은 여러 가지 무기들이 즐비해 있는 모습은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진짜야.’ 가짜가 아니다. 이가 빠진 검이나 오래된 무기가 대부분이었지만 날카로워 보인다. 괜스레 현실감이 닥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무기들로 여러분은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튜토리얼의 목표는 생존과 공략입니다. 이곳에는 여러분뿐만이 아니라 대륙의 주민, 몬스터라고 부르는 생명체도 함께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노릴 것이고 여러분은 그들에게 맞서야 할 것입니다.] 마치 판타지 소설 같은 설정이다. 재미있는 것은 조금씩 조금씩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 이곳을 울리는 저 목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간헐적으로 욕지기가 튀어나오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물론 여러분들의 힘으로 그들에게 맞서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안심해 주세요.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니까요.] “이게 도대체 뭐냐고….” [여러분은 선택 받은 플레이어입니다. 각기 다른 곳에서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이곳에 왔습니다. 이 장소는 그 개성을 극대화해 주며 여러분의 성장을 도와주지요. 상태창이라고 말씀해 보시면 제 이야기가 뭔지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일단은 상태창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뭔지 모를 상황에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타이밍 좋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상태창.” “상태창? 어? 이게 뭐야.” “꺄악!” 허공을 향해 비명을 지르는 여자나 깜짝 놀랐는지 이것저것 살펴보는 이들이 눈에 보였다. [상태창은 여러분들을 상태를 그대로 표현해 주는 지표입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만큼 노력하는지에 따라서 여러분들의 능력치는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다음은 직업입니다. 크게는 전사, 마법사, 사제, 궁수로 분류되며 이후 업적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전사는 야만전사로 야만전사는 광전사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수많은 성장 방향이 있고 이 성장 방향을 결정하는 것 또한 오로지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아….” [직업의 등급은 일반, 희귀, 영웅, 전설입니다. 다만 마법사나 사제 같은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신성력이나 마력에 대한 친화력이 필요합니다. 일부 직업은 선택할 수 없다는 점 또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할당된 임무나 숨겨진 퀘스트 혹은 보이지 않는 경험치를 쌓았을 때 여러분은 직업을 선택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직업.’ 들으면 들을수록 어딘가에서 들었던 이야기와 굉장히 유사하다. 온라인 게임과 비슷한 구성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리리라. 이곳에서도 사제나 마법사가 희귀하다면 희귀하다고 말할 수 있는 모양. 만약에 정말로 몬스터라는 것들이 있고 그 괴물들이 이쪽을 노린다고 한다면 대부분이 전사를 기피할 거라고 생각했다. 모두를 대신해 앞서 싸우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상태창.” [이름-이기영]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5] [성향-용의주도한 전략가] [직업-백수입니다.] [능력치] [근력-10] [민첩-11] [체력-11] [지력-19] [내구-12] [행운-21] [마력-00] [장비-없음] 갑작스럽게 눈앞에 떠 있는 화면은 익숙하지가 않다. 뭔가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에 조용하게 입을 벌렸을 때 다시 한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은 한 가지는 특성입니다. 여러분들이 일정 수준에 도달했을 때마다 특성이 열리게 됩니다. 특성은 각 플레이어들마다 다르며 직업과 마찬가지로 플레이어 각자의 개성에 따라 결정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 고유의 개성입니다. 등급은 직업과 마찬가지로 일반, 희귀, 영웅, 전설 4가지로 분류되어 있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좋은 성능을 가지게 됩니다.] “어….” [특성 역시 직업과 유사한 방향으로 열립니다. 직업과 마찬가지로 특성 또한 성장 방향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부디 선택에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실 마지막 말에는 집중할 수가 없었다. 상태창에서 하단에 빛나고 있는 글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특성-영웅 등급-열람하시겠습니까?] ‘어?’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는 영웅 등급이란 글자. 분명히 일반, 희귀, 영웅, 전설 등급으로 분류된다고 말했던 특성이다. 심지어 플레이어의 개성에 따라 이후에 발현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그 특성이다. ‘좋아.’ 어째서 시작부터 이런 게 들어가 있는지, 정말로 지금 처한 상황이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나쁘지 않다. [특성] [마음의 눈-영웅] [자신과 타인의 상태창과 숨겨진 재능 등급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무언가 하나를 얻고 시작한다는 것은 커다란 이점일 것이다. 분명히 여자는 목표가 생존이라고 이야기했다. ‘생존.’ 살아남아야 돼.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 지금 이 상황이 거짓말이든 진짜든 간에 일단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율하는….’ 집에 혼자 남아 있을 여동생을 떠올리자 괜스레 입술을 꽉 깨물게 된다. 주변의 반응은 모두 제각각이다. 특성을 얻었는지 다른 이들과 특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이도 있었고 검을 만지작거리거나 방패를 찾는 남자들도 시야에 비쳤다.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자신들 나름대로 살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주저앉아 울고 있는 여자. 계속해서 고함을 지르는 중년 남성. 심지어는 아직 학생으로 보이는 꼬마도 보인다. 나 역시 주저앉아 소리를 지르고 싶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주저앉아 있을 시간은 없다. ‘재능?’ 정확히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특성이라는 것을 얻은 것만 해도 커다란 성과. 남들과는 다른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다. 소년 만화 혹은 판타지 소설 같은 상황에 주인공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묘한 기대감도 있었지만 금방 고개를 흔들어 버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플레이어 이기영의 재능 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이기영] [근력-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총평-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는 재능 수치는 최하입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소용없겠군요.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3류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어 보입니다. 거의 모든 수치가 절망적입니다. 선천적으로 몸치인 것은 물론 마력 쪽으로도 발달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그나마 지력과 행운은 괜찮지만 글쎄요…. 플레이어의 미래가 심히 걱정될 정도입니다. 굳이 검을 휘두르거나 다른 걸 시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결과는 뻔하니까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기대와는 너무 다른 수치. 눈을 비비고 보고 또 봐도 결과는 같다. “어?” 살아남는 것이 최종 목표다. 어차피 주인공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현실과 만화는 다르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너무나도 절망적인 수치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제기랄.” 내 재능 수치는 일반 이하다. # 2 회귀자 사용설명서 002화 내 재능 수치는 일반 이하다(2) “제기랄….” [이상으로 모든 안내를 마치겠습니다. 곧 스타트 포인트가 개방됩니다. 몬스터의 공격에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길….” 정신이 없다. 나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전에 계속해서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탓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들이 내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오고 있다. 공포에 질린 이들은 점점 벽 쪽으로 붙기 시작했고 최소한 자신의 몸이라도 보호하려고 하는지 무장하는 이들도 시야에 비쳤다. 나 역시 마찬가지. 무기는 부족하지 않다. 곧바로 달려가 창을 집어든 것은 당연지사. 검도 남아 있었지만 짐승들과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보는 것은 사양이었기 때문이다. ‘어떡하지?’ ‘어쩌지?’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당연하지만 당황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라 해도 무방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밖에서 들리는 짐승들이 우는 소리와 밀폐된 공간이라는 특수성이 공포감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살려주세요!” “제, 제발 꺼내주세요. 제발….” “장난치지 말고 빨리 문 안 열어? 당신들 전부 고소할 거야! 고소할 거라고! 빨리 문 열어!” “엉엉…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경찰에!” “무기 들어! 밖에서 나오는 소리 안 들려? 무기 들라고!” “당신이나 들어요! 당신이! 남자들은 빨리 방패라도 들어요. 빨리요!” “뭣 하는 거야! 지금! 이상한 분위기 조장하지 말고 빨리 이 거지 같은 장난 안 끝내?” “장난은 뭐가 장난이야! 다들 눈앞에 떠 있는 상태창 못 봤어? 빨리 무기 들라고! 어이 거기 아재! 이게 장난으로 보이쇼?” 발악하듯 외치던 덩치 큰 남성이 나무 방패를 들어 올렸다. 싸우자고 외치는 사람은 많지만 놈은 조금 더 적극적이다. 내가 채 어떤 것을 발동시키기도 전에 남자의 전체적인 정보가 시야에 비쳤다. [플레이어 박덕구의 상태창과 재능 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박덕구]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3] [성향-단순무식한 열정가] [직업-백수입니다.] [능력치] [근력-21/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민첩-16/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체력-21/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지력-10/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내구-30/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행운-11/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마력-00/성장한계치 일반 이상] [총평-전체적으로 나쁘지 않게 밸런스가 잡혀 있습니다. 근력과 내구의 잠재 능력 수치가 높아 전사로 성장한다면 나쁘지 않게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나 내구와 체력의 잠재력은 엄청나군요. 마력과 민첩이 낮은 것이 흠이지만 다른 부분으로 보완할 수 있겠죠? 플레이어 이기영에 비교한다면 무척이나 훌륭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딴 것까진 안 알려줘도 된다고….’ 23살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외모다. 거대한 키와 덩치, 살이 찐 체형이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뚱뚱하다는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온몸이 근육질로 뒤덮인 느낌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일단 근력 포인트와 내구 포인트가 10인 나와는 다르게 근력은 20포인트, 내구는 30포인트다. 재능 수치만 최하위일 뿐만이 아니라 기본 스탯마저 최악이라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특성 마음의 눈으로 읽은 것과 마찬가지로 전사, 고기방패로는 쓸 만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대놓고 친한 척한다면 상대방의 경계를 살 수 있음이 분명. 일단은 창을 들고 녀석 근처에 서성거리는 것이 첫 번째다. 역시나 창을 들고 싸우겠다는 액션을 취하자 박덕구라는 녀석이 반가운 듯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형씨도 싸울 참이요?” “그렇습니다. 일단은 그래야 될 것 같습니다. 바깥에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대로 주저앉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말 한 번 시원하구만, 형씨. 비실비실해 보이는데 말이야.” “고맙습니다. 일단은 준비를 하도록 하죠.” 실례되는 말을 한 건지도 모르는지 녀석은 썩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이렇게 말 한 마디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나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대중들을 향해서였다. “지금 이 상황을 부정해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일단은 앞서 닥친 일부터 해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밖에서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이게 현실이든 몰래카메라든 아니면 꿈이든 뭔가를 해야 합니다. 모두들 무기를 드세요. 일단은 저항해야 합니다.” “이딴 장난질 그만하라고!” “장난이 아닙니다. 저도 이런 장난 하고 싶지도 않고, 차라리 장난이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모두들 일단 무기를 들어주세요. 만약에 장난이라면 그때 다시 대처해도 됩니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들이닥칠 적의 숫자도, 종류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그래 일단은 무기를 듭시다. 일, 일단은 저 밖에 있는 것들을 처리한 다음에 상황을 살펴보는 게 맞을 겁니다. 분, 분명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했으니 그, 그렇게 될 겁니다.” “옳, 옳습니다!” “일단은 싸웁시다!” 당연히 싸움에 익숙한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둘 검을 들기 시작한다. 단순히 분위기에 이끌린 자도 있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는 이도 있다. 분위기는 조금씩 좋아진다. ‘나쁘지 않아.’ 이런 흐름은 괜찮다. “여자들도 무기 들어요.” “네?” “앞에 나가서 싸우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일단은 무기라도 들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지켜줄 거라고 기대하면 안 됩니다. 이건 현실이에요.” “아. 네, 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었을 것이다. 결국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무기를 들기는 하지만 그것뿐이다. 여전히 뒤에 서성거리고 있는 몇몇 무리는 확실히 아니꼽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는 없는 노릇. 결국에는 침을 삼키며 다가올 적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길 수 있을까?’ 당연히 무리. 그렇지만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다. 사망자가 많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 베이스캠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튜토리얼. 분명히 튜토리얼이라고 말했으니까.’ 분위기도 좋고, 모두 싸울 의지가 있다. 눈동자에는 모두들 살아남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하다. ‘할 수 있어.’ [잠시 후 스타트 포인트가 개방됩니다. 5, 4, 3, 2, 1.] [스타트 포인트를 개방합니다. 여러분의 무운을 빕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뭔가 버텨내거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로지 내 착각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앞쪽이 아닌 뒤쪽에 있던 석문이 열리며 인간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괴물이 몸을 뒤로 빼려던 여자의 목을 물어뜯었다. 상대적으로 후방에 위치한 이곳까지 피가 튈 정도. 다른 이들의 눈이 공포에 질리기도 전에 사방에서 괴물들이 들이닥쳤다. “아아아아아악! 살려줘!” “도망쳐!” ‘제기랄!’ 순식간에 비명소리가 가득 울려 퍼지기 시작.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싸우자고 먼저 외쳐댔던 박덕구 자식도 정말로 저런 괴물이 찾아올 거라고는 몰랐는지 검과 방패를 든 채로 멍하니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 한 번 잡아본 적이 없는 일반인, 심지어 싸움에도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다. 이런 상황을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모두들 눈앞의 현실이 믿기 힘든 것이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전방을 바라보고 있는 박덕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뭐 해? 죽고 싶어!?” “형, 형씨!” 다리와 창을 든 손이 후들후들 떨린다. 그렇지만 입술을 깨물며 일단은 창을 내질렀다. 얻어 걸렸는지 괴물의 머리를 정확히 관통한 창. 박덕구는 악에 받쳐 방패로 괴물들을 밀어냈다. 진형이 붕괴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순간적으로 아군과 괴물들이 뒤섞이고 열린 공간으로 도망치는 인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도망쳐야 돼.’ 이곳에 있다가는 죽는다. ‘죽어.’ 틀림없이 전멸. ‘죽을 거야.’ 다른 생각을 할 시간 따위는 없다. “뛰어!” “어? 어? 어?” “망할 돼지야! 뛰라고! 내 말 안 들려?!” 일단은 점찍어둔 녀석을 향해 고성을 내질렀다.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곧바로 방패를 들고 내빼기 시작한 녀석. 나 역시 좁은 틈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내던졌다. ‘아!’ 발걸음을 옮기던 와중에 떠오른 것은 식량과 물. 비교적 가까운 거리다. 이곳에 다른 쉼터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는 만큼 저것들은 무조건 챙겨놔야 한다. “형, 형씨! 어디로!” “물 챙겨!” “알, 알겠!” 여러 목소리가 뒤섞이는 와중에도 비명소리만은 분명히 들려왔다. 좀비에서 붙잡혀 어깨를 물린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살, 살려….” “제길.” 순간적인 고민. 그러나 창을 맞잡은 두 손은 여자의 기대를 배신한다. 절망으로 가득 찬 여자의 눈동자를 쳐다보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가죽 가방을 두세 개 집어 들고 고개를 돌리자 개떼같이 달려든 괴물들이 여자를 덮치는 광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 덕분에 내가 살 수 있으니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맞으리라. ‘미안하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을 사과를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이후에 곧바로 발걸음을 옮긴다. “형씨!” 박덕구가 힘껏 외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이쪽으로 몸을 날리는 괴물. “씨….” 푸욱! “게엑!” 마침 어디에선가 날아온 검이 녀석의 머리에 틀어박혔다. 행운 수치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는 상황. 잠깐 동안 검을 날린 남자와 눈이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보를 확인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확실한 것은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 ‘뭐지?’ 겁에 질린 얼굴도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눈도 아니다. 절박해 보이기는 했지만 삶에 대한 집착은 아니었다. ‘착각인가.’ 무척이나 기억에 남는 얼굴. 순간적으로 녀석과 스쳐지나가니 방패를 든 채로 나를 기다리는 박덕구가 보였다. “물 챙겼어?!”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러나 녀석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가죽 주머니를 보니 확실히 챙길 건 챙긴 모양. 시킨 일은 잘하는 타입이다. “안, 안에 아직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닥치고 뒤지기 싫으면 뛰어! 돼지 새끼야! 뒤에 괴물들 안보여?” “아, 알겠소. 형, 형씨!” 녀석과 함께 넓직한 공간을 튀어 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도망치다 잡히는 사람도, 애초에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 모두 시야에 들어온다. 살짝 뒤를 돌아보니 쫒아오는 괴물들은 없다. 모두 안쪽에 있는 먹이한테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저항하고 있는지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그냥 귀를 막아버렸다. “살, 살려줘!” “맞서 싸워아아아악!” “게엑!” “꺄아아아아아악!” “살려주세요. 엉엉… 살려주세요. 엉….” “으아아아아아악!” 녀석 역시 눈을 질끈 감는 것을 보니 두고 온 사람들이 눈에 밟히는 것 같았다. “죄책감 가지지 마.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녀석 역시 그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길….” 그러나 박덕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욕지거기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 3 회귀자 사용설명서 003화 적응 “이,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 거요. 형씨.”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아까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이다.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자 박덕구가 조용히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스타트 포인트에서 사건이 터진 이후 계속해서 반말을 유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쪽에 따로 이야기가 없는 것을 보면 내가 반말을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다. “일단은 이곳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도 모르니까. 주변에 뭐가 있는지부터 살펴봐야지.” “밖, 밖으로 나갈 거요?” “당장은 아니야.” “그, 그럼 언젠가는 밖으로 나간다는 거요?” “당장은 아니라고 말했잖아.” 마치 미로와도 같은 내부에서 겨우 찾은 숨겨진 공간이다. 녀석과 내가 함께 위치하기에는 조금 비좁지만 나쁘진 않다. 일단은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 식량 그리고 무기.’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버틸 수는 있다. 문제는 언제까지 버텨야 하냐는 것. 또 이곳이 정말로 안전하냐는 것. 생각할 것이 무척이나 많다.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상태창이랑 괴물 새끼들 봤잖아. 홀로그램도 아니도 게임도 아니야. 엄연한 현실이라고… 나도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끄으응….” 지금 처한 상황은 엄연히 현실이다. 스타트 포인트에서의 일을 언급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 보기도 했고,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괴물 새끼들이 들이닥치는 것도 확인했다. 현실을 부정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틀, 틀림없이 이 튜토리얼의 목표가 생존이니 뭐니 말한 것 아니요? 그, 그 이상한 여자가 분,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이곳에 계속 숨어 있다 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뭐가 또 있소?” “지금 이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 거라고 예상할 수 없는 게 문제지. 식량이랑 물은 어떻게든 챙겼지만 일주일도 버티기 빠듯하다고…. 그리고 이곳이 마냥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고. 우리가 지금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이 아까 봤던 괴물들의 쉼터인지 누가 알겠어.” “정말이요?” “말이 그렇다는 소리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튜토리얼을 나간다고 해도… 이후에는 어떻게 버틸 건데?” “무, 무슨 소리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튜토리얼이 끝난 이후에 우리는 대륙이라는 곳으로 간다. 말인즉슨 지금 이 던전이 천국같이 느낄 정도의 상황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거야. 이곳을 벗어난 이후에 들어갈 장소가 이곳보다 더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단순히 버틴다고 능사가 아니라고….” 녀석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말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이후의 일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자의 말처럼 우리가 정말 대륙을 구하기 위해 선택받은 플레이어라면 지금 이게 끝이 아닐 것이다. 아까 봤던 괴물들을 수없이 마주쳐야 될지도 모르고 같은 인간끼리 싸워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앞으로는 더한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웅크려 봤자 결국 이곳을 떠나면 뒤지는 건 똑같다는 소리다.” “뭐, 다, 다른 생각이라도 있는 거요?” “싸워야 돼.” “그 괴물들이랑 말이오?” “게임해 봤어?” “게, 게임 안 해본 인간도 있소?” “상태창, 스탯, 칭호, 장비, 직업. 어디서 많이 봤다는 생각 안 들어? 지금 게임 속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해 봐. 뭘 해야 되겠어.” “모르겠….” “레벨업이다. 최소한 우리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된다는 거야. 몸을 움직이고 괴물을 죽이면 스탯이 오르고 그 여자 말처럼 직업도 구할 수 있어. 특성이라는 것도 당연히 열릴 거고 힘들겠지만 그런 상황이 온다면 우리가 더 이상 그 괴물들을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아….” “일단 도망치는 와중에도 검이랑 방패는 챙겼고 식수랑 식량도 가지고 있는 상태지. 남들보다 상황은 조금 더 나아.” “그, 그렇지만….” 역시나 녀석은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실 모든 인간이 똑같을 것이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 새끼들과 마주치고 싶어 하는 인간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 도태되면 잡아먹힌다.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도 생각해 본다.” “답이 있기는 한 거요?” “답이 없으면 만들어야지.” 답이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아니, 생각보다 답은 쉽다. “죽일 수 있어.”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을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이오….” 생각해 보면 이기지 못할 녀석들은 아니다. 첫 번째 전투에서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방에서 덮쳐온 괴물들 때문에 모두가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에 감촉은 남아 있다. 창을 찔러 넣었을 때의 소름 돋는 감촉. 제대로 힘을 주고 찔러 넣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 창은 너무나도 쉽게 놈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단지 공포에 질렸을 뿐이다. 그 상황에, 처음 보는 괴물에 당황하고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을 뿐이다. 내가 그랬고 옆에 있는 박덕구가 그랬고 그곳에 있는 모두가 그랬다. ‘이기지 못할 상대는 아니야.’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기지 못할 상대는 아니다. “단순하게 생각해야 돼. 최대한 단순하게.” “무슨 소리요.” “공포에 떨지 말고 있는 그대로 놈들을 봐야 된다는 소리다. 물론 쉽지 않겠지. 지금 당장도 몸이 떨려서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으니까. 너도 그리고 나도 말이다. 그러나 둘러싸이거나 갑작스럽게 뒤에서 덮쳐오는 공격만 아니라면 승산은 있어. 피부는 연약하고 운동 능력도 높지는 않아. 우리가 도망칠 때 뒤따라오던 녀석은 없었어. 중간에 전부 나가 떨어졌지. 스타트 포인트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던 건 어디까지나 수적으로 열세했기 때문에. 그리고 공포에 질려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게 원인이야.”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기 전까지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러나 내 추측이 아마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신체 능력에 비교해서 녀석들이 나은 것은 턱 힘이나 손톱이다. 신체 능력은 이쪽이 우위에 있을 지도 모른다. 맨몸으로 달려드는 녀석들과는 다르게 이쪽은 창이나 검 따위도 가지고 있다. 사실상 모든 부분에서 앞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길 수 있어.” 문제는 박덕구 녀석이 덩치 값을 못하고 있다는 것. 내 설명이 끝난 이후에도 불안한 듯 침을 삼켜 넘기고 있었다. ‘답답한 놈.’ 그때였다. “게엑.”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온 것.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마신 것은 당연한 일. 나뿐만이 아니라 옆에 있는 박덕구 녀석도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게엑!” 녀석들이 본래 무리생활을 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녀석이 무리에서 떨어진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소리는 들려온다. “진짜 여기가 놈들이 사는 곳은 아니오?” ‘슈바….’ 마음속으로는 욕이 절로 튀어 나왔다. ‘할 수 있나?’ 어차피 한 번은 마주쳐야 할 놈이다. 심장을 누군가가 몽둥이질 하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곳에서 피한다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몬스터 게걸스러운 아귀의 상태창을 확인합니다.] [이름-없음]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5] [성향-본능] [직업-백수입니다.] [능력치] [근력-11] [민첩-15] [체력-14] [내구-12] [행운-10] [마력-00] 좁은 틈새사이로 보이는 놈의 정보가 시야에 비친다. ‘된다.’ 몬스터를 상대로도 이 능력은 발동한다. 조금은 반가운 소식. ‘이길 수 있어.’ 극복해야 하는 것은 공포다. 앞전에는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확실히 징그럽다. 벌거벗고 있는 상체와 하체는 그렇다고 치고 녹색 눈과 툭 튀어나온 턱과 이빨이 눈에 너무 거슬린다. 저 턱과 이빨로 이름 모를 여자의 목을 물고 있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재생된다. ‘그렇지만.’ 형편없는 능력치다. 이쪽도 그렇게 능력치가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녀석의 능력치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낮다. 저 정도라면 가능하다. 괜스레 창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박덕구가 초조한 듯이 나를 바라봤지만 내뺄 생각은 없다.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된다. “나, 나가면 안 되는 거 아니오?” “…….” 굳이 대답하지는 않는다. 땀으로 등이 흠뻑 젖었기 때문이다. 손과 다리가 덜덜 떨렸다. ‘젠장….’ 실수하면 죽는다. 아마도 죽을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가 없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필연적으로는 이 자식들과 부딪쳐야 한다. “안 나가도 어차피 죽어.” 숨을 한 번 참고 곧바로 밖으로 튀어나갔다. “게엑!” ‘제길!’ 어느 정도 거리에 나서면 눈치챌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내 생각보다 빠르다. 움직임과 동시에 창을 휘둘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지사. 그렇지만 손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공포에 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으아아아악!” 결국에는 악에 바치듯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는 놈의 머리를 향해 창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 공격한다는 것을 예상했는지 녀석은 곧바로 몸을 숙인다. 창의 진로를 바꾸기가 쉽지가 않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힘을 주고 다시 창을 내리자 우연히 놈의 어깨에 창이 박혔다. “게에에엑!” 푸욱! 하는 소름끼치는 감각에 손을 놓을 뻔했지만 멍하니 있을 시간은 없다. “으아아아!” 그대로 창을 벽에 밀어 넣자 놈이 창에 꽂힌 채 벽에 처박혔다. 버둥거리는 녀석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지만 옆에 있는 돌을 들어 그대로 놈의 머리를 내려치기 시작. 발버둥치는 놈의 손톱에 상처가 나기는 했지만 고통은 없었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콰직! 손과 몸에 튀는 이상한 점액질과 혈액이 소름끼친다. 내려치는 손은 멈춰지지가 않는다. “제기랄!” 콰직! “죽어!” 콰직! “게에에엑….” 콰지직! “후우….” 결국에 녀석의 얼굴이 피떡이 된 이후에야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후우… 후우….” 심장이 빨리 뛰고 진정이 잘 안 되었다. 팔은 녀석의 타액인지 혈액인지 모를 액체로 범벅이다. 생명체를 죽이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턱을 덜덜 떨다 좁은 틈새로 날 보는 박덕구와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랐다는 눈. 정말로 내가 해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던 것이다. 나 역시 믿겨지지 않는다. [근력 스탯이 1 상승했습니다.]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 입꼬리를 위로 치켜 올렸을 때 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 이름이 뭐요.” “이기영.” “거, 기영이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소?” 대답하는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놈에게 나는 똑바로 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할 수 있으면 너도 할 수 있어. 아니, 넌 더 잘할 수 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소. 기영이 형님. 맡겨주쇼. 그럼 지금부터 뭘 하면 되는 거요?” 일단 나쁘지 않은 녀석을 얻은 것 같다. 할 일은 많다. 나는 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은 백수부터 탈출해 보자고.” 직업을 구한다. 그게 첫 번째다. # 4 회귀자 사용설명서 004화 회귀자(1) “일단은 백수부터 탈출해 보자고.” 직업을 구한다. 그게 첫 번째다. “직업은 어떻게 구하는 거요?” “나도 몰라.” 박덕구가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봤다. “나는 무슨 척척박사가 아니야. 그렇게 똑똑한 편도 아니고.” “형님 정도면 똑똑한 거 아니오? 최소한 공부만 한 샌님보다는 형님이 조금 더 믿음직해 보이는 것 같소. 형님도 샌님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반쯤은 맞다. 공부도 그렇게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말이다. “그럼 어떻게 전직을 하겠다는 거요.” “일단은 놈들을 사냥하러 다니는 것 말고는 답이 없지. 그 여자는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는지에 따라서 직업이 결정된다고 이야기했다.” “그, 그건 나도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일단은 뭐라도 해야 변화가 생긴다는 말이다. 그냥 서서 검을 휘두르든지 아니면 계속해서 싸워서 놈들을 잡든지. 저기서 계속 처박혀 있었다가는 아무것도 못 하다가 죽었을 거다.” 입을 열며 가죽 가방에 있는 물품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잠깐 동안 뭘 하냐는 듯한 눈으로 박덕구가 나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신고 있는 운동화 끈으로 가죽을 대충 엮어 놈의 몸에 붙이기 시작하니 무엇을 하는지 눈치챈 모양이다. 조금 감동한 듯한 놈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거 갑옷 같기는 한데… 형님은 필요 없소?” 어차피 앞에서 싸우는 건 녀석이니 굳이 내 것까지 만들 필요는 없다. 목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가리개 하나로 충분. 방금 전 괜히 앞에 나가서 지랄을 떤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굳이 그런 설명을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상대적으로 네가 더 덩치가 크니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무섭기는 하지만… 일단 천천히 하나씩 해보겠소.” 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확실하게 기대에 부응했다. 사실 박덕구의 기본적인 스탯을 봤을 때 어느 정도 강하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신체가 스탯의 영향을 어떻게 받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녀석의 스탯은 내 두 배에 육박한다. 특히 30의 내구 능력치는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커다란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근력과 방패, 검. 어설픈 가죽 갑옷까지 더해지니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검투사 같다. 기대가 되는 것이 당연했고 실제로도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줄 것 같은 것은 당연. 그러나 어느 정도 자신감을 찾은 녀석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다. “형님!” “알겠다.” 방패로 괴물 두 마리를 밀어 붙이는 녀석의 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까지는 무서운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지만 놈의 방패에 맞은 괴물의 사정은 그렇지 않다. 단순히 힘으로 밀어 붙이고 있을 뿐이었지만 벽과 방패의 사이에서 끼어 있는 녀석은 손톱을 뻗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박덕구가 한 마리를 묶어둔 사이에 창을 내지르자 기괴한 감촉과 함께 창이 녀석의 얼굴이 틀어박혔다. ‘정확해.’ “흐입!” 괴상한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박덕구 역시 한쪽 손에 있는 검을 휘두른다. 인상을 찡그리지만 검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빼지는 않는다. 방심하면 다친다는 것을 이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에에에엑….” 놈이 추욱 늘어지고 난 이후 나는 괴물의 얼굴에 다시 한번 창을 밀어 넣었다. “후우… 후우….” ‘힘들다.’ 간단해 보이지만 모든 게 간단하지 않다. 그나마 박덕구가 하는 일에 비교하면 낫지만 애초에 기본 체력에서 차이가 있다. 이놈들과 몇 분 동안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몸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다. “거, 물 좀 드슈.” “고맙다.” 살짝 한숨을 쉬자 박덕구가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체력이 너무 약한 거 아니요?” “운동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체력 포인트가 오르긴 올랐다. ‘고작 1.’ 그에 비한다면 박덕구는 조금 다르다. 본래 30이었던 내구 수치가 현재는 33. 나와 비교한다면 엄청난 성과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스탯이 오르는 것에도 재능 수치의 영향을 받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놈의 내구 스탯 재능 등급은 영웅 이상, 마음만 먹는다면 전설 등급 이상까지도 갈 수 있을 정도의 잠재 능력을 가졌으니 이토록 빠르게 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제길.’ 쓸데없는 질투심은 물론 없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저 박덕구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경우다. 순박해 보이는 얼굴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저쪽이 이쪽을 의지해야 내가 살아남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더 나가 보는 건 어떨 것 같소? 형님?” “조금 더 주변을 둘러보고… 그리고 말할 때 목소리 좀 줄여라.” “역시 조심해야 되는 거요?” “첫 번째 스타트 포인트에서 괴물들이 그렇게 몰려 있었던 이유가 뭐일 것 같아.” “그 안내자라는 여자가….” “그럴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은 달라. 괴물들은 둔하지만 소리에는 민감하다. 한곳에서 그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댔으니 사방팔방에서 괴물들이 몰려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아마 조용히 튜토리얼을 시작했다면 거기 있는 인원 중 절반은 살아남았을 거다.” “그, 그런 거요?” “그래. 싸울 때 흐입! 같은 기합 소리도 조금 줄여야 돼. 지금이야 무리에서 떨어진 한두 마리 상대하는 건 일도 아니지만 4, 5마리 정도씩 모이기 시작하면 죽는 건 우리야. 계속 이동하는 이유도 한 자리에 있으면 둘러싸일까 봐 그러는 거고.” 묘하게 존경한다는 눈빛을 하고 있다.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모두 눈치챌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순박한 놈이 이쪽을 나쁘지 않게 봐주고 있다는 건 이쪽에서는 웃어야 하는 부분. 나는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이쪽이 조금 여유가 있는 것도 본래 이 근처에 있는 괴물들이 전부 스타트 포인트로 몰려갔기 때문일 거다. 아마 그때 도망친 다른 놈들도 다 비슷한 상황이겠지.”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하나씩 푸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잠깐 밥이라도 먹자.” “뭐, 그렇게 하는 게 좋겠소.” 조용히 바닥에 앉아 개도 먹지 않을 푸석푸석한 음식을 꺼냈을 때였다. “…….” 어디에선가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 마음 같아서는 모른 척하고 싶지만 박덕구 녀석이 귀를 쫑긋 세우며 이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거 사람 목소리 아니오?” “설마.” “꺄아아아아악… 살려주세요.” 심지어 목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아….’ 이쪽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실수였어.’ 실수다. 길을 헤매지 않기 위해 벽면에 칼집을 새긴 것이 실수였다. 누군가가 찾아오는 것을 바라기는 했지만 저렇게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면서 다가올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형, 형님.” “일단은 검 들어.” 피하기에는 늦었다. “게엑!” 조금은 다행인 것은 뒤따라오는 괴물의 숫자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다는 점. 새로운 인원이 합류한다는 건 반가운 상황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반갑지 않은 상황이기도 하다. ‘식수와 식량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자원이 한정적인 것이 문제다. 이쪽은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함께 싸워줄 동료가 필요한 것이지 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조건은 싸울 의지가 있을 것, 식수와 식량을 가지고 있을 것, 소수일 것 정도. 그런 의미에서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낙제점. 함께 움직일 만한 동료는 아니다. “짜증나는데….”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소, 형님. 얼마 없는 것 같으니.” ‘속 편한 놈.’ 검과 방패를 들고 먼저 뛰어가는 녀석. 나 역시 곧바로 창을 들고 박덕구의 뒤를 쫒았다. 조금은 널찍한 공간으로 나가자 괴물을 세 마리나 끌고 달리는 여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쯤 찢어진 옷. 전체적으로 미인상이지만 겉모습은 이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민폐녀.’ 이쪽을 봤는지 허겁지겁 뛰어오는 모습은 가관이다. 무기도 없고 식량도 없다. 뒤쪽에 있는 괴물들의 능력치를 확인한 이후에는 곧바로 눈을 발동시켜 여자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플레이어 정하얀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정하얀]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1] [성향-순수한 옹호자] [직업-백수입니다.] [능력치] [근력-10/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민첩-11/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체력-12/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22/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14/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행운-23/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10/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총평-전설급 이상의 스탯 한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체 능력치는 전체적으로 낮지만 향후 마법사나 사제로서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본인이 마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플레이어 이기영은 이 여자와 비교한다면 개미 발톱의 때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요.] ‘뭐야.’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여자의 능력치가 잘 실감나지 않는다.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전설 등급 이상의 잠재 능력을 가진 인간은 처음 본다. 마력 스탯이 전무한 이쪽과는 다르게 이미 10이라는 수치를 보유하고 있다. “세 마리랑은 싸워본 적 없는데.” 분명 여자를 버리는 선택지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지만 스탯을 확인한 순간 모든 선택지가 바뀌었다. “싸운다.” “이길 수 있는 거요?” “좁은 곳으로 갈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소.” 둘러싸이는 것보다는 벽을 기대고 싸우는 것이 더 유리하다. 퇴로가 막힌다는 단점은 있지만 빠르게 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창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여자도 이쪽을 발견했는지 최대한 빠르게 달려오는 중.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손짓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봐서는 영 맹탕은 아닌 모양이다. “코너에서 대기.” “알, 알겠소.” 마침내 여자와 이쪽에 먼저 당도한 이후, 괴물들이 코너를 돌았을 때 박덕구가 방패를 크게 휘둘렀다. “지금!” “흐읍!” 잠깐 밀려난 듯했지만 다시 한번 박덕구를 향해 달려들려는 녀석 하나를 상대로 창을 내질렀다. “형님!” 다른 한 녀석이 창을 붙잡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지만 박덕구가 휘두른 검에 한 놈이 그대로 허물어 졌다. 문제는 덕분에 박덕구의 자세가 흐트러졌다는 것. 확실히 세 녀석은 만만치 않다. 방패를 잡고 웅크린 박덕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창을 휘두르는 것뿐이었다. 입술을 다시금 꽉 깨무는 순간, 갑작스레 놈의 뒤쪽에서 푹 하고 튀어나오는 검을 볼 수 있었다. “고, 고맙소.” “아닙니다.” 누군가 이쪽을 도와준 것이다. 괴물이 허물어 진 이후에 뒤쪽에서 모습을 보인 사람은 한 번 본 적이 있는 얼굴. 스타트 포인트에서 이쪽에게 도움을 준 남자였다. 조금은 절박해 보였던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 “뭐야….” [플레이어 김현성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김현성] [칭호-알타누스의 회귀자, 2회 차를 시작하는 검사, 이겨내지 못한 자, 희생을 등에 업은 자. 깨달은 자.] [나이-22] [성향-선의의 중재자] [직업-검사-일반 등급] [능력치] [근력-19/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민첩-28/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체력-23/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지력-18/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내구-22/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행운-23/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11/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이게 뭐야….’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태창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회귀라고? 시간 역행?’ 녀석은 이번이 첫 번째가 아니다. # 5 회귀자 사용설명서 005화 회귀자(2) 다시 한번 놈의 능력치를 천천히 읽어봤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플레이어 김현성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김현성] [칭호-알타누스의 회귀자, 이회차를 시작하는 검사, 이겨내지 못한 자, 희생을 등에 업은 자. 깨달은 자.] [나이-22] [성향-선의의 중재자] [직업-검사-일반 등급] [능력치] [근력-19/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민첩-28/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체력-23/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지력-18/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내구-22/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행운-23/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11/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특성-검술 전문가-영웅 등급] [총평-놀랍군요. 눈으로 보고 믿지 않으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근력과 민첩, 체력 스탯의 잠재력은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합니다. 그 밖에도 다른 스탯 또한 놀라운 잠재 능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법사로서도 무서울 정도의 성장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근접전사로서의 가능성이 더욱 큽니다. 이미 일반 등급의 직업을 얻었지만 더욱 크게 성장할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플레이어 이기영 님에 비교한다면… 아니, 비교하는 것 자체가 저분에게 죄송한 일입니다. 저분과 말을 섞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아시길 바랍니다.] ‘말도 안 돼….’ 눈을 씻고 봐도 회귀자라는 칭호는 변함이 없다. ‘시간 역행, 정말로 했다고?’ 믿겨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괴물의 존재가 드러난 지금 누군가 나를 대상으로 몰래카메라를 진행하고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2회 차를 시작하는 검사. 당황스러워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 능력 마음의 눈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내 눈앞에 있는 녀석은 이 상황을 이미 이전에 경험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고 보니 스타트 포인트 지점에서도 녀석은 겁에 질린 얼굴이 아니었다. ‘제기랄….’ 괜스레 욕이 튀어나왔다. 본래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런 곳에서까지 그런 불공평함을 느낄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높은 스탯, 높은 잠재 능력치, 직업과 영웅 등급의 특성. ‘특성 열람도 가능한가.’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곧바로 정보가 떠올랐다. [특성, 검술 전문가] [검을 사용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 가산점을 부여합니다. 검을 휘두르는 시간과 비례해 일정 비율로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좋다.’ 공격력을 산출하는 공식은 알 수 없지만 수련 시간으로 확실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특성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어떤 특성을 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녀석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검사로서의 기반을 다지기에 아주 유리하다. 뭔가 불공평한 것 같은 느낌에 입술을 깨물었지만 녀석이 정말 시간을 역행해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한다면 녀석의 저 잘난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형씨는….” “제 이름은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박덕구요.” “이쪽은….” “저쪽은 기영이 형님이요.” “싸운 게… 처음이 아니시군요.” “뭐, 보시는 것처럼 그렇소. 가죽 갑옷도 형님이 만들어 줬고, 이제는 사냥도 조금은 익숙해졌지. 그렇게 많이 싸운 것은 아니지만 말이오. 형님이 먼저 창으로 괴물 새끼들 머리통을 박살냈다오. 그걸 보고 조금 용기를 얻었지.” “그런 것치고는 조금… 익숙해 보이시더군요.” “뭐, 모든 게 다 형님 덕분이오. 그보다는 형씨가 더 익숙해 보이는데…. 방금 한 번에 찔러 넣지 않았소?” “운이 좋았습니다.” 이쪽으로 녀석의 시선이 틀어와 박혔다. 박덕구의 말에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쓸데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머릿속으로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치자 왠지 놈이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그보다는 묘한 느낌에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살기, 마력?’ 뭐가 뭔지 알 수 없으니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뭔가 이상한 감각이다. “뭘….” ‘혹시 내가 상태창을 읽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 무언가를 읽고 있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상태창에 나와 있는 녀석의 성향은 선이었다. 그러나 그저 무골호인이라는 법은 없다. 놈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과거로 돌아왔다. 가능성은 낮지만 이쪽이 적이라고 판단한 순간 검을 휘두를지도 모른다. 아니, 그전에 괜한 의심을 받는 것은 일단 사양이다. 때마침 박덕구가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 거 상태창 좀 그만 쳐다봐도 되지 않겠소? 직업이라도 받은 거요?” ‘나이스, 박덕구.’ “비슷해. 조금 있다 말해주마.”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듯한 느낌. 녀석과 곧바로 대화하기보다는 나는 일단 정하얀이라는 여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놀랐는지 숨을 거칠게 쉬던 그녀는 이윽고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마침 저희도 생존자를 찾고 있던 와중이었습니다.” “아….” “일어나시죠.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요. 더 이상 폐를 끼칠 수는….” 그녀는 이미 한계다. 조용히 그녀에게 손을 뻗으니 그녀가 못 이기는 척 내 손을 맞잡았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성의 시선 때문에 얼굴이 따갑다. 나는 녀석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세 마리는 처음이었는데 …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본 적이 있는 얼굴이군요.” “스타트 포인트에서도 도움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 그때….” “네. 그때는 도망치고 있었죠.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때의 상황을 떠올려 보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괜스레 내가 구해주지 못한 여자가 녀석들에게 뜯어 먹히는 장면이 떠올랐다. 고개를 한 번 흔든 이후에 아까의 말을 이었다. “현성 씨는 혼자 다니시는 겁니까? 힘드실 텐데….” “일단은 그렇지만… 지금은 생존자를 모으고 있습니다. 함께 움직이는 이들도 있지요.” “네?” “생존자를 모으고 있습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고 있는 차에 비명소리가 들려서…. 일단은 함께 가시도록 하죠. 적당한 곳에 캠프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박덕구가 나를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하겠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녀석도 자신의 말이 조금 실례라는 걸 깨달았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제가 실례했군요.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제야 덕구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금은 고민해 볼 문제. “인원은 몇이나 됩니까.” “약 30명 정도 될 겁니다.” “싸울 수 있는 인원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만약 덕구 씨와 기영 씨가 들어와 준다면 지금 보다는 조금 상황이 나아지겠군요. 마음 같아서는 제발 와주셨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걱정되는데….’ 예상했던 대로다. 상태창에 있는 성향이 얼마나 들어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선의의 중재자라는 녀석의 칭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호구 같은 놈.’ 좋은 말로 포장하자면 천사. 나쁜 말로 말하자면 호구다. 생존자 캠프에 있는 대부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라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아마 그곳에 있는 인원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매번 공포에 떨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인원이 많아진다고 유리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다섯 명이나 모이면 한 명은 꼭 머저리가 있게 마련이다. 하물며 이런 상황에서 삼십 명이나 모인다면 문제는 더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온다. 불침번이나 갑작스러운 상황이 생겼을 때 대처할 힘은 커지겠지만 지킬 것이 많아진다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진다. 그렇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 궁금한 것이 무척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회귀는 뭔지, 직업은 어떻게 구한 건지, 어떻게 남들과 다른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건지, 마력은 또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이 튜토리얼에 얽혀 있는 비밀은 뭔지. 김현성은 이곳의 공략법을 알고 있고 더 나아가서는 대륙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는 녀석이다. 죽이든 밥이든 일단은 따라가는 것이 맞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곧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아마 놈들이 몰려올 겁니다.” “네.” “아. 이분은….” “정하얀이라고 합니다. 그, 저….” “아. 반, 반갑습니다.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정하얀 씨.” 대충은 서로 인사를 나눴다. 나는 정하얀을 부축한 채로 천천히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나 박덕구를 바라볼 때와는 표정이 조금 다르다. 놈의 시선이 정하얀에게 꽤나 오래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깜짝 놀란 것 같은 얼굴. 묘한 성취감이 김현성의 얼굴에 감돈다. 제대로 비유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것 같은 표정.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것 같은 느낌이다. 정하얀 역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김현성의 시선을 인지했는지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야 저 정도까지 빤히 쳐다본다면 그 누구라도 경계할 것이다. ‘찾고 있었나.’라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찾고 있었던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네. 문제없어요.” “혹시라도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괜, 괜찮습니다. 정, 정말로 괜찮아요.”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둘을 잠깐 뒤로 하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가정해 보자.’ 조금 우습지만 한번 가정해 보자. 만약 내가 다시 한번 똑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이다. 녀석의 끝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행복했을 수도 있고 불행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의로 다시 시작한 것이 아니라면 녀석은 이전 생에 미련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겨내지 못한 자’ 녀석의 칭호 중에 하나다. 설사 본의가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 인간은 후회하는 동물이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머릿속으로는 스타트 지점에서 봤던 여자를 구하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만약 힘이 있었다면 그 여자를 데리고 박덕구와 함께 도망치는 선택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전부 알고 있고,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재들을 전부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떨까? 내 경우에는 후회하는 일들을 바꾸려고 노력할 것이다. 당연히 그뿐만이 아니다. 시작부터 이득을 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선점한다. 인재, 보물, 직업은 물론 앞으로 사용할 재화까지 말이다. 앞으로 마주치게 될 적이나 위협이 되는 이들 역시 사전에 제거한다. ‘우습지만….’ 그런 의미에서 놈이 나와 박덕구를 보고 별 다른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적어도 나와 박덕구가 미래에 김현성의 앞을 막거나, 혹은 세상을 뒤흔들 악인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뭔가 중요한 역할을 맡을 캐릭터는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원 중에 하나였음이 틀림없다. “하얀 씨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 네. 감사합니다. 호, 호칭은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러나 지금 나에게 얼굴을 붉히고 있는 이 여자는 다르다. 정하얀. 마법사, 혹은 사제로서 폭발적인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여자. 내 특성 마음의 눈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본다면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보물이구나.’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그러나 작은 정보를 종합해 결과를 추론해 보면 그럴듯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 민폐녀는 미래에 세계를 뒤흔든다. 뭘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무척이나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된다. 단순한 망상일 수도 있다. 어쩌면 김현성의 은인일 수도 있고 살리지 못해 후회했던 동료였을지도 모른다. 나나 박덕구처럼 별일 못 하고 뒤지는 캐릭터 중에 한 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비벼볼 만한 가치는 있다. ‘이 여자.’ 더 이상 민폐 덩어리가 아니다. 소중한 보물이 굴러들어왔다. 제 발로 말이다. # 6 회귀자 사용설명서 006화 회귀자(3) 사실 정하얀뿐만이 아니다. 김현성 이 녀석도 마찬가지. 이유야 어찌됐든 놈은 한 번 이 세계의 끝을 본 강자일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고 닥쳐올 미래를 바꾸고 이용하려고 하는 의지도 가지고 있다.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왔던 표현을 빌리자면 녀석은 일종의 선택받은 용사인 셈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부러운 놈.’ 녀석이 등에 짊어진 것이 부러운 게 아니다. 다만 놈이 앞으로 얻을 것이나 이용할 것들이 부럽다. 놈이 위로 올라가는 것은 이미 기정 사실. 이쪽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얻어 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가야되는 거요. 거, 확실히 이 길이 맞는 거요?” “네. 거의 다 왔습니다.” 박덕구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고 녀석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살피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을 보니 묘하게 새롭다. 놈 역시 괴물들을 주의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지금 당장은 스탯이 그리 높지 않다. 특성이나 직업을 얻었다는 것 그리고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남들보다 유리한 고지에 있기는 하지만 괴물들이 사방에서 덮쳐온다면 녀석 역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지켜내지 못했던 거겠지.’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스타트 포인트에서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생각보다 많이 살아 있는 것 같소. 대부분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조금 더 구해낼 수 있었을 겁니다. 저도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서 괴물들을 자세히 마주하지 못했죠.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뭐, 나도 그건 같소. 당장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는 게 전부였으니…. 아마 형님이 없었으면 진즉에 죽었을 거요. 30명이 모두 그때 있었던 사람들이오?” “아!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지점에서도 포인트가 있었던 것 같더군요. 저희가 있었던 곳에서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끄응… 이곳에 온 사람들이 우리뿐만이 아니군.” “네. 아마 수색 범위를 넓히면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수색대가 다른 사람들의 흔적도 조금씩 찾고 있으니까요.” 도대체 뭐가 좋은 소식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생존자들을 더 찾을 생각이요?” “여건이 된다면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눈은 진심을 말하고 있다. 성향에 붙어 있는 선이라는 글자는 그저 폼이 아닌 모양. 자세한 사정은 알 길이 없지만 모두를 구해내겠다느니 함께 살아남겠다느니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머리가 아파졌다. ‘이 새끼….’ 왠지 모르게 생존자 캠프가 어떤 식으로 굴러가고 있을지 눈에 보인다. “조금 표정이 안 좋으시네요. 역, 역시 불편하신가요?” 내 표정이 조금 안 좋아 보였는지 정하얀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었던 터라….” “불, 불편하시면 역시.” “괜찮습니다.” “아… 저… 그….” “네?” “조, 조금 늦었지만 구해주신 거… 감사드려요.” 감사의 인사에는 살짝 미소를 보냈다. 이 여자를 부축하는 건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문제되진 않는다. 아주 약간이라도 점수를 따놓을 수 있는 부분에서 따놔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하얀의 얼굴은 묘하게 붉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성간의 접촉하는 게 익숙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너무 가까이 몸을 붙이기보다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경계심을 허무는 것에 도움이 된다.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유지하자 그제야 나쁘지 않다는 듯 내게 의지해 오는 정하얀을 바라볼 수 있었다. 조금 더 길을 걸어가자 보이는 것은 꽤나 널따란 공간. ‘나쁘지 않네.’ 꽤나 괜찮은 공간이다. 들어올 수 있는 입구가 하나라는 것이 나쁘지 않다. 입구로 들어오는 괴물을 막을 수 있는 방책이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는 것 같았고 바깥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 “놀랍군. 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요?” ‘이미 알고 있었겠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생존자들과 적당한 곳을 찾던 와중에 발견한 장소죠.” “정말 운이 좋구만….” 아마 이전 생에 이 장소를 사용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사방이 뚫려 한꺼번에 괴물들이 들어올 수 있었던 스타트 포인트와는 다르다. 조금 조잡하지만 이런 장소에서 이 정도면 견고한 성이나 마찬가지다. 스타트 포인트와 무척이나 멀어진 이 지점을 우연히 발견했다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조금이지만 녀석이 정말로 시간을 되돌아 왔다는 확신이 서기 시작했다. “거 대단해 보이는군. 그렇지 않소? 형님?”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놈들이 백 마리가 넘게 달려들어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소.” “그렇지는 않을 거다.” “조, 조금 오바하긴 했소.” 인원만 충분하다면 어쩌면 막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퇴로가 없다는 것은 약점이기도 하다. 만약 저곳에 정말로 이쪽이 감당하기 힘든 숫자의 괴물들이 침입한다고 한다면 무조건 몰살이다. 운이 좋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전부 죽을 거다. 나는 김현성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방이 막혀 있군요. 입구로 많은 숫자의 괴물들이 들어온다면….” “그래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모이는 괴물들의 정리도 착실하게 해주고 있고요.” “정기적으로 사냥이라도 나가는 겁니까?” “네. 일단은 다른 단서를 찾을 때 까지는….” 그 사냥은 누가 하는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입구까지 천천히 걸어 나가자 우리를 마중 나오는 여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조금은 작은 키에 전체적으로 애교가 많은 인상이다. “현성 오빠 다녀오셨어요? 아 새로운 분들도 오셨군요.” 검과 방패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거대한 덩치에 박덕구를 보고 조금 움찔하기는 했지만 미소를 잃지 않으며 이쪽에 웃음 섞인 말을 건네는 것은 조금 놀라웠다. ‘살갑네.’ 친화력이 좋은 모양. “지혜 씨.” “조금 늦으시는 것 같아서 걱정했어요.” [플레이어 이지혜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 합니다.] [이름-이지혜]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9] [성향-이기적인 야망가] [직업-백수입니다.] [능력치] [근력-05/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09/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09/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18/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내구-08/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12/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마력-0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쓰레기.’ 나보다 더 절망적인 쓰레기의 등장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사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총평-축하합니다. 플레이어 이기영. 드디어 영혼의 단짝을 만나셨군요. 플레이어 이기영과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낮은 스탯은 물론, 잠재 능력도 형편없습니다. 검이나 지팡이를 드는 것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형편없는 재능에 감탄해 목숨을 끊는 용도로는 또 이야기가 다르겠지만요. 둘이 이어지는 것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태어날 2세가 너무나도 불쌍하니까요.] 목 밖으로 튀어 나오려는 욕을 애써 집어넣었다. 저 상태창에 떠오른 메시지가 나를 도발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태창을 서둘러 꺼버린 이후에 여자의 정보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형편없는 재능 수치, 형편없는 스탯보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성향이다. ‘이기적인 야망가.’ 어쩌면 나와 비슷한 타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안에 있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김현성을 마중 나온 이 행동도 다분히 남의 시선을 의식한 행동. 살아남기 위해 김현성에게 비비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헤헤. 혹시 성함을 들을 수 있을까요?” “박덕구요.” “이기영입니다.” “정, 정하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다들 반가워요. 그럼 일단은 쉴 곳을 안내해 드리도록 할게요. 괜찮죠? 현성 씨?” “물론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지혜 씨.” “네. 맡겨만 주세요. 현성 오빠.” 주먹을 꽉 쥐는 모습은 얼핏 귀여워 보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성향을 떠올려 보자 달갑지만은 않다. 나와 정하얀, 박덕구를 위아래로 스캔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어쩌다 합류한 것인지 계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박덕구의 경우에는 일단은 합격점. 다리를 쩔뚝거리는 정하얀과 그런 그녀를 부축하는 비실한 나는 낙제점인 모양이다. 대놓고 박덕구 쪽으로 달라붙으며 입을 조잘거리는 꼴이 우습다. “혹시 괴물들을 만나셨나요?” “만난 것뿐만이 아니요. 벌써 몇 놈을 잡았지.” “어머… 무섭지는 않으셨어요?” 살짝 놀라는 것 같은 표정은 작위적. “물, 물론 무섭기는 무서웠지만… 큼. 사실 형님이 아니었으면 큰일 났을 거요.” 박덕구가 쓸데없는 말을 내뱉는 순간 이지혜의 시선이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같은 동족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지금 그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나에 대한 자체 평가를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중이떠중이 정도에서 박덕구의 형님 정도로 내부 평가가 올라갔으리라. “아아. 기영 씨도 함께 싸우셨군요.” “함께 싸우다마다! 형님이 창을 한 번 내지를 때마다 괴물 새끼들 서넛이 우수수 나가떨어진다오.” ‘닥쳐, 이 돼지야….’ 박덕구의 입을 틀어막고 싶다. 녀석에게 조금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은 하지만 나에 대한 호감도가 지나치다. 적어도 뒤통수를 맞을 걱정은 없어 다행이기는 했지만 저런 행동들은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아, 그렇군요. 정말로 다행이네요. 쉼터가 조금 더 안전해지겠군요.” 조금은 기대하는 듯한 말투. 그러나 별로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안으로 들어오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생존자들의 눈빛을 읽었기 때문이다. 특성 마음의 눈을 발동시켜 인원들을 모두 체크하고는 있지만 특별한 이들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녀석들이 보내오는 시선이 어떤 것인지는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안도.’ 녀석들 모두 안도하고 있다. 창을 들고, 검과 방패를 들고 온 우리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다. “허….” 뭔가 대충 이럴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니 한숨이 나온다. 김현성이 만든 이곳은 무척이나 안전한 곳이다. 우리가 아닌 저들에게 말이다. # 7 회귀자 사용설명서 007화 직업(1) 나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다. 지금 내 앞에 서서 실실 웃고 있는 이지혜와 비슷한 종류 말이다. 창과 검을 들고 마치 역전의 용사처럼 이곳에 합류한 것이 반가운지 몇몇 녀석이 이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아닌데….’ 이대로 가다간 내가 고기방패가 되게 생겼다. “거창하게 안내라고 말했지만 사실 안내라고 할 곳도 없네요. 여자들이 생활하는 공간과 남자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것 빼고는 뭐가 없으니까요.” “뭐, 이정도면 감지덕지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괜히 감사하네요. 조금은 걱정했는데….”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소. 초대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친절하시네요. 헤헤. 덕구 오빠라고 불러도 되나요?” “뭐… 마음대로….” “듬직하네요.” 순진한 박덕구는 이미 이지혜에게 반쯤 낚였다. 자신보다 6살이나 많은 여자한테 오빠라고 불리는 게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기영 씨도 괜찮으신가요?” “호칭은 상관없으니 편하게 부르시면 됩니다.” 정하얀에게는 눈길을 잘 안 주는 모습도 눈에 띈다. “그럼 기영 오빠라고 부를게요. 헤헤. 아! 하얀 씨는 이쪽으로 오세요. 생활하는 데 따로 규칙은 없지만 이곳에 자세한 사정은 현성 씨가 설명해 주실 거예요. 하얀 씨에게는 제가 몇 가지 가르쳐 드리도록 할게요. 오늘은 푹 쉬세요.” “아… 네! 기, 기영 씨 그럼 잠시 후에 뵐게요. 여기까지 감사했습니다.” “네. 잠시 후에 뵙도록 하죠.” “네!” 정하얀은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 이후에 이지혜와 함께 여자들에 품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러 가지 규칙 같은 것들을 전달 받는 와중이겠지만 솔직히 말해 저들의 일에 관심은 없다. 관심이 가는 쪽은 이쪽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가다. “형님 여기는 조금 살 만해 보이는 것 같지 않소?” “그렇기는 한데….” “뭐 문제라도 있는 거요?” “큰 문제는 아니다. 단지.” “단지?” “아무것도 아니다.” “거참 싱겁구만….” 이 안전한 쉼터를 지킬 고기방패가 될 생각에 조금 인상을 찌푸렸지만 조금 생각을 바꿔보면 나쁜 거래는 아니다. ‘얻을 것만 얻으면 돼.’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하다. 김현성과 함께하는 안전한 사냥, 사냥을 통한 직업 획득, 정하얀을 이쪽으로 끌어오는 것. 아마 그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가 생기겠지만 당연히 이쪽이 알 바는 아니다. 역시나 다음날 아침부터 김현성이 나와 박덕구를 불러왔다. “푹 주무셨습니까.” “덕분에 푹 잘 수 있었소.” 박덕구가 김현성의 말에 짧게 호응했다. 덕구와 둘만 있었을 때는 제대로 잠도 못 잤다. 녀석과 내가 끊어서 쪽잠을 자던 것에 비교하자면 훌륭한 휴식시간이었다. 오늘 녀석이 무슨 이야기를 할 건지는 대충 알고 있다. 조금은 뜸을 들이던 녀석이 시야에 비쳤기 때문에 나는 먼저 선수를 쳐 입을 열었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많이 보이지 않더군요. 대부분이 여자가 아니면 부상자. 그것도 아니면 싸울 의지가 아예 없는 사람뿐입니다.” “네.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이곳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 겁니까?” 다소 단도진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로 궁금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김현성은 잠깐 뜸을 들인 이후로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리 사정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예상하고 있던 바다. 나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놈의 말을 이었다. “식료품과 식수가 없다는 것. 싸울 수 있는 인원이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고요. 앞으로는 점점 늘어나겠군요.” “…….” “현성 씨가 사전에 챙겼던 식료품이나 식수 같은 것들로 지금까지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지만 미리 긁어모은 자원은 생각보다 더 빨리 떨어졌고, 다시 대책을 찾을 때가 됐다. 이거 아닙니까? 이곳저곳에 퍼져 있는 스타트 포인트에 있는 자원을 가져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무리. 지금 당장은 이 앞에 있는 괴물들을 정리하기도 벅찬 상황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울 수 없는 짐들은 늘어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들은 짐이 아닙니다.” “이후에는 짐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짐입니다.” 김현성은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마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한다면 지금 상황으로 비추어 본다면 차라리 이곳을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로 보입니다.” “나갈 거요? 형님?” 박덕구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곳에서 버텨 봤자 득이 될 게 없다는 소리다.” “아아….” “현성 씨, 저와 이 친구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친구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창을 잡고 서 있는 게 고작이지요.” “…….” “그래도 함께 싸우고 힘이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친구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는 했지만 꽤나 힘이 들었을 것이다. 외적, 내적으로도 많이 피곤한 것은 물론 곧 한계에 임박했을 수도 있다. 나와 박덕구의 등장이 모르긴 몰라도 무척이나 반가웠을 것이다. “저는 자원 봉사자가 아닙니다.” “아….” “현성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대충 알 것 같습니다. 아마 모두 함께 생존해 생환하고 싶으신 거겠지요. 저 역시 현성 씨의 뜻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현성 씨와는 다릅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성격은 되지 못하고 모두 함께 간다는 생각은 별로 하고 있지 않지요. 조금 이기적이라고 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아니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겠지요.”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한다. 정의가 아니라며 칼을 뽑아 들까봐 무서웠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와 주니 꽤나 고마웠다. “그렇다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앞으로 발견될 자원의 일부에 대한 소유권.” 녀석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정도는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 “앞으로 있을 현성 씨의 계획에 저희도 한 발 담그고 싶군요.” 김현성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잠깐 굳어진 이후에는 묘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다. 조금은 놀랐다는 표정이다. 그렇지만 그 표정의 마지막에는 점차 희미한 미소가 서리기 시작했다. “알고 계셨군요.” “스타트 포인트에서 이상한 여자는 분명히 두 가지 선택지를 내려줬습니다. 공략 그리고 생존. 두 번째 선택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아니, 몇 사람이 많은 자원을 독점하고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정확히 언제까지 생존해야 하는지 얼마나 살아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기억이 없군요.” “…….” “목표를 두 번째로 잡아야 되는 상황이라면 생존자를 긁어모으는 건 결코 바람직한 선택이 아닙니다. 괴물한테 잡아먹히지 않아도 어차피 굶어 죽을 테니까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추론입니다.” 녀석이 회귀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추론을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녀석은 무척이나 작은 조각을 끼워 맞춰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내 내뇌망상에 조금 탄복한 모양. 오히려 이쪽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망상이 들어맞은 것이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이쪽이야말로….” 나는 김현성의 손을 붙잡았다. 눈 안에 기이한 신뢰가 보인다. 내가 강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현성의 머릿속에서 나는 쓸모 있는 인재로 비쳐졌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책사나 행정가 같은 종류의 인간으로 말이다. * * * “형님!” “알고 있다.” 김현성이 합류한 이후로는 사냥이 조금 더 심플해졌다. 뿐만이 아니다. 내 특성,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 상태창에 대한 믿음도 더 확고해졌다. “덕구야!” “제가 갑니다.” 확실히 녀석이 칼을 쓰는 방법은 무언가 익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숨기고 싶은지 간혹 의도적으로 실수를 하기는 하지만 나나 박덕구가 위험에 몰렸을 때 보여주는 반응은 검을 처음 접한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좋아.’ 박덕구가 몇 마리의 괴물들을 붙잡고 있는 사이에 나와 김현성이 눈에 보이는 괴물들을 해결한다. 소리에 민감한 놈들을 향해 방패를 검으로 두드리고 어그로가 끌린 사이에 빠르게 정리하는 방법이다.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는지 창이 떨려온다. 박덕구에게 달려드는 녀석을 향해 창을 찔러 넣으니 녀석이 창에 박히며 나가 떨어졌다. 그사이에 박덕구는 방패로 놈을 내려찍는다. “흐읍!” “몇 마리 더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잠깐 막고 있도록 하죠. 그사이에….” “알겠습니다. 덕구야, 식량 챙겨라.” “이미 챙기고 있소, 기영이 형님. 저 자식은 뭐 지구에 있을 때 검도라도 한 거요?” “나도 몰라. 아마 비슷한 운동을 하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이미 직업을 구한 영향일 수도 있고.” “거, 살벌하게 싸우는구만.” 높은 민첩 수치를 활용해 피하고 벤다.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은 것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김현성이 이미 저 만치 앞서 나가고 있다는 것은 박덕구 역시 알고 있는 부분, 김현성이 직접 자신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박덕구는 조금 초조해 보였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직업이 열리지 않는 상황에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흐읍!” 이쪽이 결국 남은 한 마리를 죽였을 때 박덕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이나 깜짝 놀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거, 이쪽 스타트 포인트는 생각보다 괴물 새끼들이 없는 것 같소.” “아마 이쪽 근처를 미리 정리하고 있었을 거다.” “김현성이 말이요?” “그렇겠지. 식량은 많네. 생존자는 없는 것 같지만… 아니, 생존자가 있으면 식량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거 진짜로 세 명이서 스타트 포인트에 있는 식량을 구해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소.” “네 도움이 컸다.” “사실 내가 한 게 뭐가 있겠소. 다 저 양반 작품이지.” “그렇지는 않다. 네가 없었다면 이곳까지 들어오는 것도 힘들었을 거야.” 단순히 위로해 주기 위한 말이 아니다. 박덕구 때문에 이쪽으로 올 수 있었다는 건 엄연히 사실이다. 김현성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하지만 사방에서 덮쳐오는 괴물 새끼들을 전부 몰아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직은 녀석도 성장하는 도중, 앞을 든든하게 막아주는 전위의 존재는 녀석의 부담감을 한층 내려줬을 것이 분명하다. 혹시라도 오른 스탯이 있나 상태창을 점검하던 때였다. “어? 형님.” 깜짝 놀라는 박덕구의 목소리, 동시에 이쪽의 시야에서도 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몇 가지 직업이 개방되었습니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직업을 선택해주세요.] ‘좋다.’ 생각보다 더욱 빠르다. 김현성과 함께 주변을 빠르게 정리하고자 했던 것이 느껴진 것이다. [개방된 직업을 열람합니다.] [전사-일반 등급] [궁수-일반 등급] [마법사-일반 등급] [지휘관-희귀 등급] 굉장히 끌리는 직업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 8 회귀자 사용설명서 008화 직업(2) ‘지휘관?’ 하얀색인 다른 글자와 다르게 파란색으로 떠 있는 글자. 희귀 등급이라는 것 때문인지 더 눈에 들어온다. 일단은 모든 직업에 대한 설명을 읽는 것이 첫 번째다. [전사-일반 등급] -앞에서 싸울 수 있는 전사는 파티에서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효율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검과 방패, 혹은 창이나 도끼 어떤 무기든지 쉽게 적응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는 야만전사나 기사, 성기사, 기병, 용병 같은 종류의 다른 근접 직업들로도 전직할 수 있습니다. 내구력과 체력, 근력이 각각 1씩 올라갑니다. [궁수-일반 등급]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궁수입니다. 활과 화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합니다. 이후에 도둑, 암살자 같은 근접 직업들로 전직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궁수의 상위 직업인 정령궁수, 마력궁수로 갈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민첩이 3 올라갑니다. [마법사-일반 등급]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원거리 직업입니다. 마법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합니다. 이후에 흑마법사, 연금술사, 소환사 같은 직업으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마력이 3 올라갑니다. 셋 다 나쁘지는 않다. 전사는 내가 올리긴 힘든 스탯을 3개나 올려주고 궁수는 활과 화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게 만들어 준다. 원거리에서 꿀이나 빨고 싶은 나에게는 무척이나 괜찮은 직업이다.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 나에게는 완전히 동떨어진 마력을 올려준다는 사실이 꽤나 뜻 깊게 다가왔다. 그러나 가장 궁금했던 것은 지휘관이라는 희귀 직업. [지휘관-일반 등급] -전투능력이 거의 없는 직업입니다. 전투에 일선에 서기보다는 한 발자국 뒤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오더를 내리는 직업입니다. 시야가 조금 더 넓어집니다. 이후에 어떤 직업으로 전직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지력이 +1 올라갑니다. 사실, 설명을 읽기 전까지는 지휘관으로 마음이 많이 옮겨진 상태였다. 그러나 모든 설명을 읽고 나니 정말로 머리가 아파온다. 지휘관의 능력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시야가 넓어진다는 건 도대체 뭐야.’ 그리고 겨우 올려주는 지력 수치가 겨우 +1이다. 다른 두 직업이 스탯을 +3이나 올려준다고 생각해 보면 무려 스탯을 2나 손해 보는 상황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후에….’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언급된 바가 없다는 것이 불안하다. 그러고 보니 김현성 자식이 가지고 있는 직업 또한 일반 직업, 검사. 놈이라면 희귀 직업, 혹은 그에 준하는 영웅 직업을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특성으로 검술 전문가를 가지고 있는 만큼 일단은 검사를 지양하는 모양. 지금 당장의 효율보다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길, 알고 있는 루트를 밟으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 조금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김현성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직업이라도 열리셨나 보군요.” “네.” 녀석처럼 무슨 직업이 괜찮을지 성장 방향을 알 수 있다면 선택하기 쉽겠지만 첫 선택이 앞으로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만큼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뭔가 티 안 나게 조언이라도 받으면 어떨까 생각하던 찰나 박덕구 녀석이 입을 열었다. “형님, 이거….” “왜?” “조금 고민이 되오. 일반 등급으로는 전사, 사제. 희귀 등급으로는 방패병이 떴는데 어떤 게 좋은 건지 알 수가 없소.” “사제?” “뭐 이후에는 성전사 같은 걸로 전직할 수 있다는 모양인데… 전사는 광전사 같은 걸로 전직할 수 있는 걸로 보이고… 일단은 희귀가 괜찮은 것 아니오?” 박덕구의 잠재 능력이 체력이나 혹은 내구 쪽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방패병은 절대로 나쁜 선택은 아니다. “방패병은….” “뭐, 방어에 집중된 직업이라고 적혀 있소. 방패를 들 때 뭔가 이점이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후에 직업에 대해서는 잘 나와 있지 않은 게 문제요. 아, 그리고 근력이 -2가 된다고 하는데… 내구랑 체력이 3씩 올라간다고 합디다.” “나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 대신 입을 연 것은 김현성이었다. 이쪽이 먼저 청하지 않아도 티 안 나게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내구 능력치도 높으신 것 같고… 근력이 내려간다면 페널티는 있지만 내구가 그만큼이나 올라간다는 건 확실히 놀랍군요. 근력이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스탯 포인트에 4는 여유가 생기는 셈이니까요.” ‘그런가.’ 만약 이게 온라인 게임이라고 한다면 앞에서 싸우는 전사, 탱커의 존재는 필수불가결이다. 녀석의 반응을 본다면 이곳의 시스템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 사제뿐만이 아니라 탱커도 귀하게 취급받는 것 같았다. “으음… 역시 그런가.” “혹시 특성 부분은 아직 열리지 않았는지요.” “특성은 아직 없소.” “저 같은 경우에는 일반 직업으로 검사를 그리고 특성으로는 공격력을 올려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력을 올려주는 전사를 선택하고 싶기는 했지만 민첩을 대폭 올려주는 검사를 선택하는 게 더 나은 선택지라고 여겼죠. 우연치 않게 특성이 열린 지금은 그때 했던 선택이 잘한 선택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은근슬쩍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녀석. 단순히 직업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스탯의 밸런스와 특성의 존재 여부 그리고 그 특성의 능력. 이 삼박자가 맞아 떨어졌을 때가 가장 효율이 좋게 나온다는 것을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김현성은 박덕구가 희귀 직업 방패병을 선택했으면 하는 분위기. “형님 생각은 어떻소?” “나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후에 네가 공격력을 올려주는 특성이 생길지 않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부족한 공격력은 현성 씨가 메울 수도 있고, 이후보다는 당장을 생각해 본다면 스탯을 4나 올려준다는 건 확실히 나쁘지 않을지도… 그래도 선택은 네 몫이다.” “으음….” “사제는….” “최악.” 사제는 최악이다. 이후에 성전사 같은 직업으로 전직할 수 있다고 한들, 사제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박덕구의 마력 재능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조금의 시간이 지난 이후, 잠깐이지만 박덕구의 몸이 잠깐 파란색으로 빛나는 느낌이 들었다. 전직에 성공한 것이다. “선택했어?” “역시 방패병이 가장 적절한 것 같소.” “그래?” “형님이야 뭐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형님도 더 잘 지켜줄 수 있을 것 같고, 공격력이야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고. 뭐, 이후에 마법사라는 게 생기면 뻥뻥 터뜨릴 수도 있는 거 아니요? 가장 앞에 선다는 건 조금 무섭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소.” “잘 선택했다.” 김현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기영 씨도 뭘 선택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잠깐 뜸을 들이려다 그냥 입을 열었다. “아직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일단은 일반 등급으로는 전사와 궁수 그리고 마법사. 희귀 등급으로는 지휘관이 선택지 목록에 떠 있는 것 같군요.” “지휘관….” 잠깐 멈칫 하는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함정 카드인가.’ 자연스럽게 지휘관이라는 카드가 함정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으음… 그렇군요.” “크. 형님. 지휘관! 지휘관 왠지 모르게 형님과 딱 어울리는 것 같소!” “그, 그래?” “말은 안했지만 형님이 완전히 지휘관 스타일 아니요? 멋지게 뒤에서 손 흔드는 걸 상상만 해도 크으…. 거, 형님이 지휘하면 반드시 승리할 거요.” 박덕구는 내가 지휘관이라는 소리에 지나치게 흥분한 것 같았지만 사실 내가 지휘관 스타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유인즉슨 ‘병법 따위 아무것도 모르니까.’ 병법서 같은 건 읽어본 적도 없다. 바둑이나 체스 같은 것을 잘 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머리가 남들보다 특출하게 뛰어난 것도 아니다. 누군가를 지휘한 경험이라고 해봤자 이제는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온라인 게임에서 공대장을 몇 번 해본 게 전부. 사실 내 캐릭터는 지휘관이라기보다는 사기꾼에 조금 더 가깝다. 차라리 도둑 같은 직업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명령만 내려주십쇼! 형님!” ‘이 자식은….’ 귀엽기는 귀엽다. 이미 녀석은 내가 지휘관이라는 직업을 선택할 거라고 여기는 모양. “시야가 넓어지는 것과 지력이 +1올라간다고 적혀 있군요. 다른 직업은 아마 다들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얻을 수 있는 게 조금 적군요. 보통 다른 직업들은 스탯을 3포인트 정도 올려준다고 봤었는데….” 조금은 말리는 것 같은 느낌. 희귀 등급의 지휘관은 아무래도 함정인 모양이다. “형님은 지휘관이요! 지휘관!” 일단 혼자 신이 난 저 자식은 뒤로 하고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보기로 했다. “당장 희귀 등급이라서 좋아 보이겠지만 이후에 얻을 수 있는 직업을 볼 수 없다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 군요. 이후에 나오는 직업이 전부 일반 등급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겁니다. 첫 직업 선택은 무척 중요한 만큼 일단은….” “거, 형님은 지휘관이라니까! 지휘관이요! 어서 나를 지휘해 주쇼!” “…….” “어쩌면 궁수도 나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영 씨. 활을 사용 할 수 있다는 건 의외로 메리트가… 원거리에서 지원해 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도둑 같은 직업도….” “거, 형님은 지휘관이라니까! 지휘관! 나를 따르라!” “일단은 스탯을 올리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형님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건 지휘관! 무조건 지휘관!” “궁수가….” “지휘관!” “궁수를….” “지휘관!” “궁수도….” “지휘관!” “궁수가 역시!” “지휘관!” “그렇다면 궁수를….” “지휘과안!!!” 양쪽에서 이러니 내가 더욱더 혼란스럽다. ‘씨….’ 이러다가 주변에 남은 녀석들이라도 달려올 것만 같은 기세. 지휘관에 대한 정보를 조금 알고 있는 것 같은 김현성, 궁수를 추천해 나를 키워주려고 생각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녀석은 내 잠재 능력이 최악이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한다. ‘나도 그냥 궁수 하고 싶다.’ 그렇다고 지휘관을 선택해도 또 문제. 마법사 역시 계속해서 눈에 밟힌다. 마력은 형편없지만 그나마 높은 내 지력수치를 써먹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떡하지.’ 중요한 것은 내 장점을 가장 살려야 한다는 것. 어차피 내 특성 마음의 눈은 내가 이미 희망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 결국에는 가장 효율이 잘 나올 것 같은 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결심을 하며 눈을 감자 빛이 번쩍이며 내 몸이 조금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후우….” 전직에 성공한 것이다. 김현성과 박덕구가 동시에 말을 걸어왔다. “지휘관이요? 궁수요?” # 9 회귀자 사용설명서 009화 순수한 것은 물들이기 쉽다 “마법사.” “으으음….” “지, 지휘관이….” 양쪽의 반응은 뭔가 비슷했다. 박덕구는 정말로 실망한 것 같은 표정, 김현성은 조금은 아쉽지만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분위기였다. 확실히 활을 사용할 수 있는 궁수가 더 끌리기는 하지만 궁수의 강함에 밑바탕이 되는 민첩 수치가 낮은 것이 흠. 이후에 민첩 수치가 늘어나리라는 전망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내 민첩 잠재 능력 수치는 최하다. 아니, 그 이전에 몸을 쓰는 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 궁수로 직업을 얻고 도둑으로 전직한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일로 고민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한 일. 사실 마법사도 비슷하다. 마력 재능이 높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장점을 살려야 돼.’ 그나마 높은 지력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후에 뻗어나갈 수 있는 직업을 생각해 본다면 낮은 마력으로도 효율을 낼 수 있는 직업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어째서 마법사를 선택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감입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휘관을 선택한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스탯 포인트는 겨우 +1이 끝. 내게는 생소한 영역으로 보였던 마력을 3이나 올려준다는 건 엄청난 메리트다. “그렇군요.” 뭔가 납득한 거 같다는 느낌. 대놓고 재능 수치가 낮아 희망이 없다는 소리를 할 수 없어 조금은 씁쓸했다. [기초 마법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합니다.] [직업의 효과로 인해 마력 스탯이 3 상승했습니다.] [플레이어 이기영의 상태창과 재능 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이기영]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5] [성향-용의주도한 전략가] [직업-마법사] [직업효과-기초 마법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1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11/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12/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19/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12/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21/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03/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장비-없음] [특성-마음의 눈] [총평-여전히 절망적입니다. 그렇지만 직업이라도 구했다는 것에 의의를 둬 박수를 보냅니다. 마법사는 굉장히 괜찮은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플레이어 이기영의 재능으로는 마력을 느끼기도 힘들었을 테니까요. 마력 스탯이 3이나 올라간 것은 무척이나 희망적입니다만 마법사로서의 성장은 기대하지 않으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니까요.] ‘이 자식….’ 왠지 눈에 들어오는 총평도 나쁘지는 않은 느낌이다. 여전히 악담을 퍼붓고는 있지만 그래도 마력을 얻었다는 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부분. 상태창에서도 확실히 변화가 있다. 기초 마법에 대해 습득한다는 것 또한 무슨 뜻인지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머릿속으로 전혀 새로운 지식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말 그대로 기초라서 그런지 복잡한 술식이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전혀 새로운 마력이란 개념, 마력을 움직이는 방법, 마력으로 마법을 발현하는 것 그리고 수인과 영창에 대한 개념까지 들어왔다. “나쁘지 않은 것 같네.”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식을 푸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고 마력으로 탑을 쌓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그 공사 현장에 도움을 주는 것이 영창이나 수인, 전혀 생소했던 개념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쌓여간다. ‘당장 쓸 만하겠어.’ 지휘관과는 다르게 이 힘은 적응한다면 곧바로 전력으로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천천히 눈을 감고 안에 있는 마력을 느껴보니 곧바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비록 손톱만 한 마력이지만 내 뜻에 따라 움직여주는 녀석들은 고맙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다. 그렇게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마력을 운용하고 있었을 때 김현성 녀석이 이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도록 하죠. 시간을 많이 지체했군요. 식량은….” “가방 두 개면 충분합니다.” “네.” 박덕구는 가방 두 개를 챙긴 이후에 나머지 가방을 김현성에게 건넸다. 잠깐 고개를 끄덕인 녀석은 이윽고 조금 고맙다는 눈으로 우리를 봤다. 아마 우리가 자신을 배려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 스타트 포인트에 있었던 가죽 가방의 개수는 12개 정도, 괴물들의 어그로를 끌어준 박덕구의 공헌도를 생각해 본다면 2개 정도면 싸게 먹히는 장사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뭐,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현성 씨가 없다면 저희도 이것들을 얻지 못했을 테고… 여러 가지 도움 주신 걸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죠.” “그래도….” “거, 가서 사람들이나 먹이슈.”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요? 계속 저렇게 둘 수는 없지 않소.” “아예 싸울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아마 방해만 될 겁니다. 쓸데없는 희생자가 나오면 안 되니… 일단 적응 훈련을 마친 이후에 순차적으로 괴물 사냥에 데려가는 게 좋은 방법으로 보입니다.” “그게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소.” 생각해 본다면 박덕구 녀석도 일종의 적응 훈련을 마친 셈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머릿속에 있는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아마도 효과가 없지는 않을 겁니다. 일단은 시험 차 한 분을 데리고 다니는 게 좋겠군요. 물론 두 분이 허락하신다면 말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상관없지만… 형님은 어떻소?” “저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인원은 이쪽에서 선별해도 되겠습니까?” “혹시 마음에 두신 분….” “만약 본인이 원한다고 한다면 정하얀 씨를 생각하고 있기는 한데.” “아.” 잘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성의 모습이 보였다. 정하얀은 이미 당첨이 예정되어 있는 복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특성, 마음의 눈으로 잠재 능력을 확인하기도 했고 김현성 역시 미래의 정하얀에 대해서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대놓고 기뻐하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쉼터로 향하는 길은 꽤나 안락했다. 다른 스타트 포인트까지 가기 위해 쉼터를 조금 오래 비워둬야 했기 때문에 미리 정리한 효과이리라. 역시나 쉼터로 다가서자 이지혜를 포함한 몇몇이 밖으로 뛰어 나와 김현성을 맞았다. “아 현성 씨! 덕구 오빠랑 기영이 오빠도 수고 많으셨어요. 짐은 저희가….” 자연스레 김현성이 가지고 온 짐을 받아드는 녀석들이 눈에 보인다. 다리를 다친 것처럼 보이는 남자가 이쪽으로도 슬그머니 손을 뻗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나는 녀석의 손을 뿌리친 이후 입을 열었다. “저희 짐은 저희가 들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이쪽의 물건은 이쪽이 관리한다는 선을 그어놓은 셈이다. 우습게도 조금은 아니꼽다는 표정이 시야에 비친다. 직역해 보자면 ‘니들이 뭔데?’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잠깐 입꼬리를 올렸지만 녀석은 그걸 보지 못한 모양. 그런 나와 상관없이 김현성은 조용히 이지혜에게 전달 사항을 전달하고 있었다. “다른 스타트 포인트에서 구해온 식량입니다. 지혜 씨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분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네! 맡겨주세요, 현성 씨. 혹시 그쪽에 다른 생존자들은….” “없는 것 같더군요.” “그, 그렇군요. 아쉽게 됐네요.” “아마 근처에 몇몇이 살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조만간 다시 한번 그쪽 부분을 수색하러 가야겠지요.” “아! 네….” 아마 식량의 양이 넉넉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현성이 가져온 가방은 겨우 10개. 30명의 인원이 앞으로 저걸 나누어 먹는다고 주린 배가 채워지지는 않으리라. 당장은 버틸 수 있겠지만 배고픈 것은 마찬가지다. 박덕구와 나는 가방 두 개를 들고 김현성을 둘러싸고 있는 새로운 아귀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와중에도 계속해서 묘한 시선들이 떨어진다. 걸어가는 와중에 박덕구가 조금 불안한 듯이 말을 건넸다. “형님 진짜로 안 나누어 먹을 거요?” “우리는 자원봉사자가 아니야.” “뭐, 그건 알고 있기는 한데… 조금 나쁜 놈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 좋지만은 않소. 아까 밖에 나왔던 사람들의 표정도 조금 마음에 걸리고….” “왜 그 사람들 표정을 네가 신경 쓰는 건데.” “그, 그냥 모양새가 조금 그렇지 않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식량을 구해온 우리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 저들이다, 덕구야. 자연스럽게 짐을 받아드는 것도 웃기는 거야. 우리가 지내는 이곳은 엄연히 김현성의 쉼터다. 저들이 아니라. 우리는 도움을 받은 만큼 도움을 줬고 그것도 모자라 우리가 얻기로 한 식량의 일부도 양보했다. 이 정도면 최소한의 도리는 한 거라고 생각한다. 김현성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별 말 없는 거고….” “으음….” “저들이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싶다고 한다면 저들도 검을 들면 돼. 뭐 아마도 그렇게 하지는 못할 테지만… 어쩌면 김현성도 우리를 보고 다른 이들이 자극을 받았으면 하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다.” “아아… 거, 우리가 식량을 많이 챙겨가는 것을 보면, 싸워야 대접받는다는 걸 깨달을 거란 작전인거요?” “그런 효과도 바라는 거겠지.” 녀석은 멍청하지 않다. 아마 그런 효과를 일부 바라고 있을 수도 있으리라. 우리가 지낼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사이에도 정하얀이 눈에 띄지 않는다. 사냥을 나가지 않는 이들이 이곳에서 할 일이 있을까 싶지만 일하지 않는 이는 없는 모양. 주변을 정리한다든지 혹은 무거운 돌을 옮겨 방책을 쌓는 이들 역시 눈에 띈다. 아마 정하얀 역시 그런 종류의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없는 동안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불 보듯 뻔한 일. ‘이지혜.’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들을 담당한다. 배급도, 김현성에게 무엇인가를 보고하는 것도 그녀의 일이다. 김현성을 가장 처음 반기는 것 역시. 대충 어떤 생각을 하는지 느낌이 왔기 때문에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덕구야.” “왜 부르쇼?” “정하얀 씨 기억하지?” “그 다리 쩔뚝거리면서 형님한테 안겼던 아가씨 말하는 거 아니요?” “맞다.” 나는 가방에 있는 것 몇몇을 꺼내 박덕구에게 내밀었다. “그 여자한테 이것 좀 전해주고 여러 가지로 신경 좀 써줬으면 좋겠다.” “형님이 웬일… 아….” 뭔가 표정이 심상치 않은 느낌. “이해했소. 뭐, 이런 거라면 맡겨주쇼!” 단번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캐치하는 녀석. 그렇게 오랜 시간을 붙어 있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함께하다 보니 내가 뭘 원하는지 눈치챈 것 같다. 그녀를 얻기 위해 작업을 치고 있는 것이라는 걸 이해한 것이다. 물론 연애적인 감정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지만 한 인간을 이쪽에 기대게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서는 말이다. 정하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성향은 순수한 옹호자. 김현성의 성향, 선의의 중재자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둘은 확연히 차이가 있다. 순수한 것과 선한 것은 분명히 다르다. “순수한 건 물들이기 쉬우니까.” “무슨 소리요?” “아무것도 아니다.” 아마 작은 실험에서 그녀가 방금의 말을 증명해 줄 것이다. # 10 회귀자 사용설명서 010화 정하얀(1) 보이지 않는 계급이 형성되고 있다. 말을 못 하는 짐승도 저희들끼리 계급을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미묘한 계급 차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할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무척이나 당연한 반응. “일단.” 일단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것은 이곳을 만든 김현성. 쉼터를 구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곳에 있는 이들은 김현성에게 신뢰를 보낸다. 나라고 하더라도 비슷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떨어진 것은 물론,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장소. 검을 들고 괴물에게 맞서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가산점, 게다가 녀석은 바보같이 착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이 녀석을 우러러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 다음이라고 할 수 있는 이가 바로 이지혜. 김현성의 옆에서 콩고물이라는 콩고물은 전부 주워 먹고 있는 여자. 자주 밖을 싸돌아다니는 김현성에 비해 이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물론 식량 배급이나 불침번, 혹은 여러 가지 인력이 필요한 일을 관리하고 담당한다. 이지혜 사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몇몇 녀석들 역시 꽤나 막강한 권력을 지녔다. 물론 김현성을 의식해 그 권력을 악용하거나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아마 김현성이 밖으로 나가 있을 때 무언가 일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는 뭐요? 형님?” “우리는 김현성의 바로 밑에 있다고 봐야지.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식량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 “으음….” “아마 저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달갑지 않을 거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물론 처음에는 달가웠겠지. 그러나 어제 일로 보는 눈이 별로 좋지 않아졌을 거야. 우리가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싶다는 의견을 반쯤 피력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조금 심하게 말하면 너희를 먹여 살리는 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야. 라고 못을 박아 놓은 거지.” “그렇지만 그놈들이 가져간 식량에는 우리 분량도 있었소. 고마워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요?” “물론 그런 이들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본래 인간이란 건 항상 새로운 권력자를 견제하게 마련이거든. 이런 줘도 안 가질 소규모 구성원들의 모임이라고 해도 말이야.” “그 말은 김현성이 우리를 견제하고 있다는 말이오?” “아니, 애초에 김현성은 이곳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거다.” “그럼 도대체 누가 우리를 경계하고 있다는….” “그야 이곳을 자기 거라고 생각하는 인간들.” 왕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김현성이 아니다. 그 밑에서 콩고물을 받아먹고 있는 이지혜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것 같소.” “김현성은 이 구성원들에 위에 서 있기는 하지만 이들을 통제하는 건 그 여자야. 애초에 김현성은 이곳을 관리할 수 있는 시간이 없기도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내니까. 힘이 필요한 곳에선 힘을 가지고 있는 놈이 왕이고 식량과 편안한 쉼터가 필요한 곳에서는 그걸 쥐고 있는 놈이 왕이지. 김현성은 힘을 가지고 있지만 식량과 편안함 쉼터를 가지고 있는 건 그 여자일걸.” “이지혜 말이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아.” “…….” “자기 사람들한테는 떡이라도 하나 더 쥐어주고 자신이 경계하는 이들은 살짝 밀어내면서 불이익을 주면 돼. 권력은 차별이 만든다. 아마 정하얀도 이지혜의 눈 밖에 난 사람 중에 한 명일 거고… 그래서 따로 떨어져 험한 일을 하고 있었던 거겠지.” “하얀 씨는 언제 그렇게 유심히 봤소?” “앞으로는 조금 더 자세히 지켜봐야지.” 박덕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하얀을 지켜보는 것은 이제 시작이다. 이지혜와 정하얀 둘의 성향인 이기적인 야망가와 순수한 옹호자를 읽고 충동적으로 내린 판단이었지만 어쩌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 * * “하얀 씨, 일 좀 똑바로 하셔야죠.” “네? 네….” “모두가 힘들게 일하고 있습니다. 하얀 씨만 힘든 게 아니에요. 이런 상황일수록 모두가 함께 힘을 합쳐야죠…. 자꾸 이런 식으로 하시면 식량 배급을 줄일 수밖에 없습니다.” “네….” “대답만 네네 하신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사정이 그렇게 좋아지지 않아요.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될지도 모르고 다른 지점에 식량을 구해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현성 씨가 밖으로 나간 사이에 괴물이 쳐들어오면 전부 몰살입니다. 벽을 쌓는 일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정, 정말로 죄송합니다.” “쯧.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쉬지 말고 열심히 하세요. 계속해서 생존자들이 발견되고 늘어나면 하얀 씨 자리도 없습니다. 나 원, 이번에 들어온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이기적인지….”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일이나 똑바로 하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은 남자가 밖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괜스레 고개가 숙여진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일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할당된 작업량을 채우지 못한 지 벌써 며칠 째였으니 저렇게 신경질 내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보 같아.’ ‘느리고 굼뜨다’라는 말은 항상 들어왔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이 무척이나 싫어졌다. ‘아파.’ 살짝 밑을 내려다보니 엉망이 된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손톱이 거의 다 빠져 덜렁거리고 있다. 고통스러웠지만 확실히 방금의 말에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모두 열심히 하고 있어.’ 모두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밖으로 나가 싸우고 있는 현성 씨, 기영 씨와 덕구 씨는 물론, 같이 벽을 쌓고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혼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있었던 이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천국이나 다름 없으리라. 만약 그때 기영 씨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분명히 괴물들에게 당했을 것이다. 거의 안기듯이 이쪽으로 함께 온 것을 생각하니 괜스레 얼굴이 붉어진다. 남자와 접촉하는 게 그리 익숙하지 않았던 자신에게는 처음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멍하니 그때를 떠올리다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씨가 이해해 주시죠.” “아. 석우 씨.” “아마 저 친구도 최근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을 겁니다.” “그, 그런가요?” “네. 현성 씨가 최근에 자주 밖으로 나가니까요. 벽을 쌓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지혜 씨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만큼 할 수 있는 방비는 전부 해놔야 되니까요. 예민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 저도 그, 그건 이해해요.” “오늘은 특히나 더 예민한 것 같군요. 제가 보기에는 하얀 씨도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인데…. 제가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일단 같이 식사하러 가시죠.” “아… 네.” “어제 현성 씨가 스타트 포인트에서 식량을 구해왔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런가요?” “네. 지혜 씨한테 들었으니 아마 틀림없을 겁니다.” “그거 참 다행이네요. 헤헤.” 유석우. 이곳에서 그나마 말을 터놓고 지내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 일을 총괄하고 있는 만큼 새로 들어온 자신에게 이것저것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애초에 사교성이 좋은지 자주 말을 걸어오고는 했다. “그나저나 일은 힘들지 않으십니까?” “물, 물론 힘들기는 하지만 더 힘든 일을 하시는 분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그래도 이런 일을 하는 게 쉽지는 않으실 테니… 조금은 요령을 피우셔도 됩니다.” “아니요. 안 그래도 작업량을 다 채우지도 못하는데… 요령까지 피울 수는 없어요. 다친 석우 씨도 함께 일하시는데….” “저는 관리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몸을 움직일 일이 많이 없어서. 하하. 사실 이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하하.”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배급대 앞까지 도착했다.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 한 줄로 줄을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덕구 씨와 기영 씨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미 식사를 마쳤거나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으리라. ‘사냥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지친 몸을 쉬고 싶을 것이다. “줄 서시고 이쪽으로 붙으세요. 차례대로 받아 가시면 됩니다.” “네.” “아. 네.” 두 손으로 먹을거리를 받은 뒤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으니 모두들 끼리끼리 모여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은근슬쩍 끼어들까 생각도 했지만 애초에 소심한 성격 때문인지 먼저 말을 걸거나 함께 있기가 쉽지는 않았다. “힘든 상황이라서 그럴 겁니다.” “네?” “다른 사람들 말입니다. 다들 힘든 상황이니까요. 남들을 챙길 여유가 없고 또 하얀 씨 같은 경우에는 비교적 이곳에 늦게 들어왔으니 조금은 경계하고 있겠죠.” “아… 역, 역시 그럴까요. 일, 일을 제대로 못 해서….” “아니요. 하얀 씨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아마 시간이 지나고 이 일에 익숙해진다면 모두들 하얀 씨를 받아드릴 겁니다. 지금 저처럼요.” “좋,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죠. 저는 하얀 씨와 더 가깝게 지내고 싶은 걸요.” “아! 저도 마찬가지예요. 여러 가지로 항상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에게는 굉장히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처음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먼저 말을 걸어주고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연결시켜 주려고 노력한 것은 물론, 여러 가지로 편의를 봐준 사람이다. ‘고마운 사람이야.’ 무심코 빵 한 조각을 입속에 밀어 넣었을 때였다. 옆에 있던 유석우가 자신의 손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아….” 조금 힘을 줘 손을 빼보려고 했지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이곳을 보고 있는 유석우의 얼굴이 보였다. “이, 이거 놓아 주세요.” “네?” “놔, 놔주세요. 갑, 갑자기 왜.” “그렇지만 방금….” “그,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이미 다른 사람은 없다. 항상 웃고 있었던 유석우의 눈빛이 조금 바뀐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입가에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쏟아졌다. “하얀 씨.” “네? 네?” “제가 하얀 씨한테 자선 사업이라도 하시는 줄 알았습니까?”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죠. 정말 눈치 더럽게 없네.” “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왜, 왜 이러시는지….” “제가 분명히 여러 가지로 편의를 봐 드리고 있는 거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 그런 건 잘 몰라요. 도… 도움을 주신 건 감사하지만….” “나 참… 진짜로 멍청한 거야? 아니면 멍청한 척을 하는 거야? 조금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 해줄까요?” “일, 일단 손 좀 놔주세요. 아, 아파요. 아파….” “앞으로 이곳에서 잘 지내고 싶으면 나한테 잘 보이라는 소리야. 이 멍청한 여자야.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돼?” 눈이 무섭다. 이런 일은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것. 필사적으로 손을 반대쪽으로 빼려고 했을 때 뒤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형씨. 그 손 부러지기 싫으면 놓는 게 좋을 거요.” # 11 회귀자 사용설명서 011화 정하얀(2) “거, 형씨. 그 손 부러지기 싫으면 놓는 게 좋을 거요.” “어?” 콰직! “아아아아아악!” “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얼굴을 가리는 순간, 그만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진짜였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박덕구와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고 있는 유석우였다. “덕, 덕구 씨?” “아으아아아아….” “뭐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이 다 있는지 모르겠네. 거, 안 부러졌으니까 엄살은 그만 부리쇼.” “아아아아악….” 커다란 손이 다시 한번 공중을 갈랐다. 정확히 유석우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손은 이윽고 퍼억 소리를 내며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 무슨 둔기에 맞은 것처럼 땅바닥에 처박히는 모습은 비현실적이었다. “으아아악! 어… 어으어….” “거 질질 짜지 마쇼. 세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누가 보면 신생아라도 태어난 줄 알겠네.” 커다란 발이 들려 유석우의 몸이 잠깐 공중으로 떠올랐다. 발로 밀어 찬 것이다. 한쪽 벽에 처박히는 모습을 보니 혹시나 큰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이, 이제 괜찮으니까 그만해 주세요. 다치겠어요. 덕, 덕구 씨.” “아….” 살짝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길은 왠지 무섭다. 그러나 말리지 않는다면 유석우가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 바닥에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쇼, 누님. 그냥 밀어서 찬 거요. 거, 이 형씨는 엄살 한 번….” 그것뿐만이 아니다. 소란을 듣고 찾아온 몇몇 사람이 유석우의 비명을 듣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그만하세요!” “…….”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건가요? 석우 씨, 괜찮으세요?” “괜, 괜찮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연히 이지혜. 몇몇 무리를 이끌고 함께 온 그녀는 다소 당황스럽다는 눈빛을 이쪽으로 보내오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인가요? 내부에서 폭력은 금지예요.” “저 남자가 하얀 씨를 희롱했소. 그래서 후려친 게 전부요.” “정말인가요?” “내가 눈으로 직접 봤소.” “아… 닙니다.” “뭐?” “물, 물론 하얀 씨 팔을 제가 잡은 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어, 어디까지나 실수로….” “아직까지 입이 살았구만.” “그, 그만하세요. 덕구 오빠. 말씀 드린 대로 이곳에서 폭력은 금지되어 있어요. 설사 석우 씨가 잘못했다고 해도 이렇게 앞뒤 사정 듣지 않은 채 폭력을 휘두르는 건 구성원 들 간에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어요. 이, 이런 식으로… 이건 아니에요. 일단은 잘잘못을 따져보는 게 먼저예요.” “…….” “석우 씨 정말로 하얀 씨의 손을 잡고 그녀를 성희롱한 건가요?” “아, 아, 아, 아닙니다. 절, 절대로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덕구 오빠가 봤다는 건….” “조, 조금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 물론 제가 하얀 씨에게 마음을 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얀 씨도 제 뜻에 동의한 걸로 제가 착각을 해서… 이, 이런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네… 그, 그렇습니다.” “정확히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다시 한번 말해주세요.” “저는 하얀 씨에게 조금 더 가깝게 지내고 싶다고 말했고 하, 하얀 씨도 긍정적인 말을 하시기에… 아무래도 제가 착각한 모양이군요.” “하얀 씨 확실하게 말해주세요. 방금 석우 씨가 한 말이 사실인가요?” 여러 가지 시선이 뒤섞여 날아들었다. 당연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주변에 사람들의 시선이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에 내 편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 긴장감 때문인지 팔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을 때, 어서 말해보라는 듯 이쪽을 응시하는 이지혜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 그건 사실이에요. 그, 그렇지만 그 이후에는 석, 석, 석우 씨가… 억, 억지로 팔을 잡아당기고 이, 이곳에서 잘 지내고 싶으면… 그,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셔서… 저, 저도 조금 놀라서….” “이야기를 똑바로 해주세요. 하얀 씨. 정확히 뭐라 하시는지 잘 안 들려요. 차근차근 말씀해 보세요.”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석우 씨가 가깝게 지내고 싶다고 말한 것도 사실이고 하얀 씨가 거기에 동의했다는 것도 사실이라는 건가요?” “네? 네… 그, 그렇지만 저는 그런 뜻인 줄은… 몰, 몰라서….”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물었어요.” “사, 사실이에요. 그, 그렇지만….” “저기요, 하얀 씨.” “네?”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한 것도, 그런 여지를 준 것도 하얀 씨가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 이후로는 줄곧 석우 씨랑 붙어 다녔던 것 같던데. 제 말이 틀린가요?” “그건 맞지만… 어디까지나… 석, 석우 씨가 먼저….” “평소 행실에 문제가 있었으니 이런 사고가 발생하는 거예요.” “아니… 저, 그게….” “누구라도 오해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렇게 잡아떼면 그만인가요? 덕구 오빠도 그래요. 전후사정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이렇게 사람을 때리다니….” 살짝 고개를 돌려 박덕구를 바라보자 조금은 당황스러워 하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혹여나 자신이 실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저놈 말이 사실이요? 누님?” “더, 더 가깝게 지내자고 한 건 맞지만… 그, 그렇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이 일을 어디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들 때문에 괜스레 얼굴이 붉어지고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울면 해결되는지 아세요?” “죄, 죄송합니다. 제… 제가….” “말로만 죄송하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안 그래도 요즘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덕구 오빠도… 물론 이런 상황에서 피해를 입는 것 같은 여성을 도와준 건 저로서도 고맙지만 확실한 전후사정을 듣기 전까지는 함부로 행동하시면 안 되죠. 이번만큼은 조금… 경솔하셨던 것 같네요.” “끄응….” “누가 피해자인지 누가 가해자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죄, 죄송합니다.” “저한테 사과해서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피해자인 석우 씨한테 똑바로 사과하세요.” “죄, 죄… 죄송….” “이게 무슨 일입니까?” * * * “이게 무슨 일입니까?” 질문을 던진 내가 대답할 수 있다. 아주 적절하고도 좋은 상황이다. 조만간 뭔가 액션이 있기는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이렇게 커다란 건수가 걸려들 거라고는 사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조금은 당황하는 듯한 표정의 박덕구와 울먹이다 못해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정하얀. 당연히 억울하리라. 대충 봐도 가해자와 피해자는 명확하다. 뭐, 사실 정말로 정하얀이 유석우라는 놈을 이용하려 했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정하얀이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 하나는 꽤나 중요하게 다가온다. 내 모습을 보고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지혜. “마침 잘 오셨어요, 기영 오빠. 지금!” “지금 정신 나갔습니까?” “네?” “지혜 씨 지금 정신 나갔어요?” “그, 그게 무슨….” “지금 여기가 어디 동네 놀이터인 줄 아시는 겁니까?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면 놈들이 듣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하시는 거예요? 바깥을 주기적으로 정리하고 있다고 해서, 놈들이 아예 이쪽으로 오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본인들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깨달은 얼굴이다. “아… 그게 그러니까 지금 상황이….” “저도 멀리서 봐서 대충은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어요, 지혜 씨. 지혜 씨 말대로 아직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집단이 한 사람을 몰아넣으면 저라도 겁먹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뭐요?” “그렇지만 분명히 잘못은 저 여자가….” “지혜 씨, 정말로 석우 씨가 잘못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마도 확신할 수 있다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입 밖으로 그것을 내뱉는 순간 책임지는 것은 유석우라 아니라 그녀가 되어버린다. 조금 우물쭈물거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불안해 보이는 얼굴, 당황하는 표정이다. “그리고 하얀 씨 반응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만… 무엇보다 하얀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억지다. 순전히 억지다. 지금 나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다. 내가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도 실소가 나올 정도로 당황스러운 발언이다. 단순히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녀를 감싸주는 것은 정하얀에게는 무척이나 고마운 발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니다. 도대체 내가 언제 그녀를 봤다고 그녀를 보증한단 말인가. 그녀의 성향인 순수한 옹호자 말고는 그녀를 보증할 수 있는 그 어떤 연결점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 할 말은 무척이나 많다. 애초에 성관련 범죄에서 피해자에게 죄를 묻는 것부터가 오류가 있다. 여성인 이지혜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녀가 억지스럽게 유석우의 편을 들어준 것은 외부자를 배척하고 기존에 있던 자신의 편을 더욱더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정하얀에게 엿을 먹이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하나하나 전부 따지고 나가며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여기서는 다소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아니, 효과가 없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권력자니까.’ 이곳에 권력자는 바로 나다. 내 말은 이곳에 있는 그 어떤 사람들의 말보다 무게감 있다. “하얀 씨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 그….” 눈물을 닦고 이쪽을 바라보는 정하얀과 다소 적대적인 눈빛으로 정하얀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무척이나 대조적이다. 아마 저들의 눈에는 이 상황이 불합리해 보일지도 모른다. 뜬금없이 나타나 상황을 정리하고 윽박지르는 것은 물론,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편파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움 받는 것은 내가 아닐 것이다. 나는 슬쩍 정하얀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권력자에게 총애 받는 여자. 누가 봐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특히 이지혜 같은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다들 모여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참…. 유석우 씨는 일단 치료부터 하는 게 좋겠군요. 다만 치료가 끝난 이후에는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가 다시 한번 제대로 묻겠습니다. 일단 석우 씨를 옮기도록 하세요.” “알, 알겠습니다.” “지혜 씨는 이곳을 정리하고 바로 일과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조금 있으면 현성 씨가 돌아올 시간입니다. 방금 때문에 괴물들이 몰려올 수도 있으니 덕구는 가볍게 주변 순찰을 부탁한다.” “알, 알겠소 형님.” “그리고… 하얀 씨는 잠깐 저 좀 보죠.” “네.” 수군거리는 몇몇 인간,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는 이지혜나 다소 불안해 보이는 유석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인다. 흐릿하게 말들이 들려오기는 하지만 대놓고 내 행동을 지적하는 이들은 없다. “뭐야… 저 여자.” “재수 없어.” 나보다는 더 좋은 먹이감이 있을 것이다. “같이 가시죠.” “아… 네.” 권력자가 아닌, 물어뜯기 편한 종류의 사람 말이다. # 12 회귀자 사용설명서 012화 이지혜 “일단 앉으시죠.” “저, 저는….” 우물쭈물하는 얼굴이 보였다. 아직 진정되지 않았는지 어깨를 부르르 떤다든가 눈물을 닦아내는 모습은 조금은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애초에 그녀는 평범한 21살이다. 살면서 몇 번 겪어보지도 않을 상황을 이런 장소에서 겪었으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저 여자의 심정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마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지조차 제대로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죄, 히끅….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히끅… 제가.” “하얀 씨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물론 제가 자세한 상황을 본 것은 아니지만… 일단 천천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저, 저는 정말로 그런 의도로 그런 게 아, 아니었어요. 그, 그냥….” “알고 있습니다. 편하신 대로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내가 살짝 웃으며 말을 건네자 그녀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대충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녀의 말을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 울먹이며 두서없이 쏟아낸 그녀의 한탄은 확실히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시스템 상으로는 그녀의 지력 수치가 낮지는 않았었는데 아마 단순한 사고력을 기준으로 지력을 책정하는 건 아닌 듯하다. “그, 그래서 갑자기 석우 씨가….” “네… 네… 그랬군요.” “손, 손을 잡아당기면서 소리를 질렀어요.” “아….” 그렇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공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는 그녀가 어째서 울고 있는지 어째서 억울해하는지 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난 네 편이야.’ 라고 말하진 않지만 아마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그래서 그렇게 됐는데… 갑, 갑자기 덕구 씨가 와서… 그 남자를 때리고 지혜 씨가 히끅.” “그랬군요.” “거, 거기서 기영 씨가 와서….” “네.” 문제는 이 한탄의 시간이 꽤나 길어진다는 것. 결국에는 몇 분이 더 지난 이후에야 그녀의 장황한 이야기가 마무리 됐다. “힘드셨겠군요.” “아, 아니에요. 이, 이제 조금 괜찮아졌어요.” 확실히 진정했다는 느낌이 든다. 간헐적으로 떨리던 어깨는 제자리를 찾았고 계속해서 울먹이던 표정은 조금이지만 웃음기 섞인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다.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것이다. “고마워요, 기영 씨.”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단지 정황을….”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까 전에 저를 믿는다고….” “아아….” “맨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도움만 받네요. 저, 저는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는 것 같은데….”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 어째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지 물, 물어봐도 될까요?”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쪽에 호감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경계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아마 후자일 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석우 역시 나와 비슷하게 접근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당한 대답. “그저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만 굳이 이유를 찾자면….” “네?” “집에 여동생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하얀 씨를 보면 집에 있는 동생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사실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율하의 성격은 눈앞에 있는 정하얀과는 전혀 딴판이고 나이 말고는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이 대답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아….” “아마 하얀 씨와 비슷한 나이일 겁니다.” “죄, 죄송해요. 제가 괜한 걸….” “하얀 씨는….” “위, 위로 언니 둘이 있지만… 언, 언니들과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 돼서….” 어두운 표정. 굳이 캐물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안, 안 계셔요.” “공통점이 있군요.” “기영 씨도?” “네.” 묘하게 기뻐하는 표정. “조, 조금 닮았네요.” “네. 그렇군요.” 공통점이 있다는 건 좋은 일.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모습을 보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갈지 아니면 여기서 물러서는 게 좋을지 계산해 봤지만 정답이 나오지는 않는 것이 문제. 머릿속으로 조금 생각을 정리한 이후에 나는 다시 아까의 말을 이었다.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네?” “조금 더 편하게 대해주셨으면 좋겠군요. 순전히 제 욕심입니다만….” “아? 아? 네! 어, 어떻게?” “일단은 말을 편하게 하는 것부터 시작하죠.” “네? 네… 그, 그렇다면 편하게….” “편하게 할게.” “네… 아니, 응. 알, 알겠어요. 오, 오, 오빠.” 아무래도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얼굴이다. 정하얀이 인간관계에 서툴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부분. 조용히 그녀를 마주보며 마음의 눈으로 그녀를 투시하니 전체적인 능력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플레이어 정하얀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정하얀]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1] [성향-순수한 옹호자] [직업-백수입니다.] [능력치] [근력-11/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민첩-11/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체력-14/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22/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14/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행운-23/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10/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총평-전설급 이상의 스탯 한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체 능력치는 전체적으로 낮지만 향후 마법사나 사제로서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현재 본인이 마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만약 같은 마법사가 된다고 하더라도 플레이어 이기영과는 차원이 다른 마법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니 구태여 스트레스 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전에 봤던 것보다 근력이 1, 체력이 2 올라갔다. 그 동안 성벽을 빡세게 쌓긴 쌓았던 모양이다. 신기한 것은 역시나 마력 수치가 10이라는 것. 마법사로 전직한 이후에 마력을 얻은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이곳에 소환될 때부터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직 느끼지 못했지만 혹시라도 이쪽이 도움을 준다면 뭔가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마력과 마법에 대해서 말을 꺼내볼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저, 저기 기영 오빠… 잠, 잠깐 괜찮을까요?” 정하얀의 목소리가 아니다.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지혜. 불안해 보이는 정하얀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사실 이지혜가 찾아올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부분이다. 다만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빠르다. ‘확실히….’ 이 여자는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간다. ‘이쪽으로 붙겠다?’ 어느 쪽이 더 위에 있는지는 이미 아까 있었던 사건으로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 방금은 유석우와 정하얀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나와 이지혜 둘 중에 누가 더 위에 있는지 가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아마 이지혜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정하거나 눈에 보이는 계급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내가 자신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성향, ‘이기적인 야망가’. 이 여자 같은 종류, 아니 나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새로운 권력자를 찾았을 때 나오는 패턴은 두 가지. 배척하거나. 혹은 달라붙거나. 생각보다 더 행동력이 빠르다고 생각했다. 이쪽으로서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만 조금은 더 생각해 볼 만한 여지가 있는 부분. 나는 이지혜가 아닌 정하얀을 바라보며 살짝 입을 열었다. “잠깐 비켜줄래? 지혜 씨와 이야기 좀 해야 될 것 같아서.” “아. 네. 알겠어요. 오, 오빠.” 마지막 말에 조금 힘을 준 것을 보니 뭔가 불안하기는 한 모양. 결국 조용히 정하얀이 몸을 일으킨 자리에 이지혜가 자리 잡았다.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방금 대화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무슨 일이시죠?” “저… 그…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그,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해요.” “아뇨. 사실 지혜 씨가 잘못한 건 없습니다.” “아니에요, 기영 오빠. 저도 갑자기 이런 상황을 맞은 건 처음이라 바깥 상황을 생각 안 하고 지나치게 흥분했던 것 같아요. 밖에 나가서 고생하시는 분들 생각하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는 게 좋았을 텐데….” “괜찮습니다. 만약 제가 지혜 씨였어도 당황했을 겁니다. 오히려 제가 조금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아 죄송하더군요.” “아니요. 오빠는 할 일을 하셨을 뿐이에요.” 무척 동안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여자한테 오빠라고 불리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저….” “말씀하세요.” “석우 씨 말인데요.” “당장은 석우 씨를 불러다 뭘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치료가 먼저라고 할 수 있으니… 저도 당장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계속 이런 일로 신경 쓰이게 하는 것 같아 죄송했거든요. 아무래도 제가 아까는 당황해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어서요. 맡겨주신다면 제 나름대로 어떤 조치를 취해보려고 하는데… 이번 일은 저한테 맡겨주시면 안 될까요?” 조금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유석우를 어떻게 처우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 본 적 없다. 이곳은 법도 없고 경찰도 없는 만큼 어떤 식으로 처벌해야 할지, 어떻게 벌을 내려야 할지 정해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얀 씨는….” “저도 잘 생각해 보니 하얀 씨한테 너무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맡겨주신다면….” “뜻대로 하시지요. 애초에 이곳을 관리하는 건 지혜 씨가 하시는 일 같았는데… 주제넘게 제가 끼어든 것 같아 죄송했습니다.” “아!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예. 저도 무슨 말을 하시는지 압니다. 다만 아까처럼 신경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요지는 나 역시 그녀의 권력을 일부 인정한다는 것.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 여자는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너를 굳이 막을 생각이 없다.’ 그 대신 신경에 거슬리는 짓은 하지 마라. 납작 엎드리라는 뜻이다. 말을 마치자 슬그머니 이쪽의 손을 잡아 오는 것이 보인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지혜는 미인이다. 애써 심장을 조용히 가라앉혔지만 살짝 몸을 밀착해 오는 것은 적응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어째서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지도 궁금하다. “바깥일도 충분히 힘드실 텐데… 이쪽 일까지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하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무슨 일이든지요.” 허벅지를 살짝 쓰다듬어 오는 모습 또한 가관. 이쯤 되면 이 여자가 뭘 원하는지 당연히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든 말입니까?” “네. 무슨 일이든.” 생각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모습에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는 어리석을 수는 있지만 멍청하지는 않다. 이쪽을 바보로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기이한 열망. ‘권력욕? 야망?’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나는 야망 있는 남자가 좋더라.” 내게 있어서 권력이나 야망이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다. 물론 이지혜에게는 원인이나 동기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건 결과니까. 문제는 이 여자와 가까워지는 것이 내게 이득이 되는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건 고작 이 멍청한 집단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 정도다. 여러 가지 쓰임새야 많겠지만 일단은 그게 전부다. 본인 역시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쪽에 비벼왔을 것이다. 애초에 집단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은 나는 별로 쓸모없겠지만 있어서 나쁠 건 없다. 아니, 어쩌면 다른 쪽으로는 조금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하얀과 관련해서라든가…. ‘어떻게 할까….’ 이쪽이 자신에게 혹하지 않다는 것 정도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도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로 생각 없는 멍청한 년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그건 아니겠지.’ 목적은 계약? 심플한 관계? 이지혜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꽤나 많다. 흔들릴 뻔한 권력의 재확인, 집단 내 2인자일지도 모르는 사람과 끈을 만들어 놓는다는 것. 나와 자신이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여론을 이용할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친해져서 나쁠 건 없다. 적이 아니면 아군이라는 사고방식은 멍청한 사고방식. “나는 뭘 얻을 수 있을까?” “글쎄요. 하얀 씨?”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에게 내 몸을 밀착시켰다. 묘한 흥분감과 기대감이 서린 이지혜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좋네.’ 느껴본 지 오래된 감각. 살짝 입술을 포갠다. 언뜻 보면 로맨틱하게 느껴질 수 있는 광경. 그러나 서로 생각하고 있는 바는 다를 것이다. ‘서로 이용해 보자고.’ 나는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조금 닮은 것 같네요.” “네. 그런 것 같아요.” # 13 회귀자 사용설명서 013화 당황(1) [플레이어 이지혜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이지혜]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9] [성향-이기적인 야망가] [직업-백수입니다.] [능력치] [근력-05/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09/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1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20/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내구-08/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15/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마력-0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총평-축하합니다, 플레이어 이기영. 결국 사고 치셨군요. 낮은 스탯 형편없는 잠재 능력을 가진 한 쌍의 완벽한 커플이 탄생했습니다. 피임에는 신경 쓰도록 하세요. 정말로 태어난다면 2세가 너무 불쌍하니까요.] “뭐가 커플이야.” 내 생각보다 이 여자는 조금 더 똑똑하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머리가 특출하게 좋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황을 읽는 판단력이나 결단력, 행동력 정도는 봐줄 만하다. 눈치도 빠르고 가려운 곳을 긁어줄 줄 안다. 알게 모르게 견제하고 있던 정하얀을 이쪽에 던져준다는 것을 보면 그녀가 원하는 게 뭔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김현성이 이 여자한테 어째서 집단을 맡겼는지 이해가 된다. 굳이 필요 없는 몸통박치기를 해온 것도 최소한의 끈을 붙잡고 싶어서일 것이다. 물론 본인의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지만 굳이 내가 알 필요는 없다. 한 번 침을 삼키고 다시 한번 이지혜의 스탯창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지혜의 능력치 상승률이 나쁘지 않다. 저번에 봤을 때와 비교하면 체력은 1, 지력은 2, 행운은 3이 올랐다. ‘어떤 식으로 올라가는 거지?’ 궁금한 것은 스탯이 어떻게 올라가느냐에 대한 것. 일단 지력 같은 경우에는 단순한 사고력이나 알고 있는 지식에 기반 하지 않는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높은 지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덜 떨어진 모습을 보인다. 반면 이지혜의 경우는 다르다. 정하얀보다 낮은 지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삭빠르다. 어쩌면 마법이나 어떤 특정 지식에 관한 이해력 따위가 지력의 기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행운 같은 경우에도 조금은 의아하다. 최근에 체크해 봤을 때만 해도 그녀의 행운 수치는 12. 하룻밤 사이에 행운이 올라갔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혹시나 행운 수치나 높은 나와 연관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는 했지만 아직은 추측에 불과. 스탯에 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할 필요가 있으리라. “일찍 일어났네요.” “생각할 게 조금 있어서.” 옆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이지혜가 보였다. 어제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는지 표정은 조금 좋아 보인다. “유석우는 알아서 처리하고 정하얀은 잘 지켜봐. 정하얀 관련해서 특이사항 생기면 바로 보고하고.” “입까지 맞춘 여자한테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멍청한 소리하지 말고….” “뭐, 알아서 잘해볼게요. 뭘 생각하는 건지 알 것 같기는 한데 그 여자한테 뭐가 있기는 있나봐?” ‘눈치 빠른 년.’ “누나가 알 필요는 없어.” “당신!” 누나라고 부르니 얼굴이 붉어진 게 눈에 보인다. 아마 나이에 대해서 조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입술을 조금 깨물고 있는 이지혜의 얼굴이 보였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커플이라든가 혹은 서로의 등을 지켜줄 수 있는 동료로 변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계약 관계. 갑과 을 따위의 계약 항목 같은 건 없지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일정 부분 이용하기로 무언으로 합의했고 계약의 과정을 거쳤다. 쉽게 허물어질 수도 있는 계약이라고 한들 서로가 서로를 믿는데 발톱의 때 정도만큼은 기여할 것이다. 문제는 이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하느냐에 대한 것. 서로 선을 지키고 상대를 존중한다면 문제는 없지만 뒷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쉰 이후에 입을 열었다. “근데 지혜 씨는 어째서 나를 골랐을까.” “말했잖아요, 기영 오빠. 난 야망 있는 남자가 취향이라고.”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다. 내가 그녀를 언제든지 내칠 수 있듯이 그녀 역시 나를 언제든지 내칠 수 있다. 일단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의 성장과 정하얀. 이지혜는 나와 있었던 일을 여기 저기 떠벌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그녀한테도 유리하니까. 다만 뭔가 일이 있다는 분위기를 풍길지는 모른다. 그게 정하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가 중요하다. 인간관계에 서툴다는 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도 서툴다는 것을 의미. 부모님은 없고 언니들과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됐다. 말인즉슨 정하얀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애정결핍 따위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녀는 내게 조금 더 집착해야 하고 의존해야 한다. 그것을 이지혜가 도와줄 것이다. * * * 생각보다 일은 더 빠르게 처리됐다. 유석우에 대한 건은 재판이나 뭔가가 나올 건더기도 없었다. 이지혜가 이쪽에 붙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유석우는 금방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시인했고 모두가 납득할 만한 처벌을 받았다. 물론 이 과정에는 이지혜의 입김이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어쩔 수 없었다.’라는 태도를 고수했다는 것이었다. 이쪽으로 은근히 화살표를 돌리는 것은 물론, 일부의 원인을 정하얀에게 돌리는 여론 작업을 시작했다. ‘이기영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정하얀을 아끼고 있다.’ 따위의 뉘앙스를 풍기기 시작한 것. 당연히 정하얀은 이곳에 구성원들에게 미운 털이 박힐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여론조작 과정에서 이지혜가 내 생각보다 조금 더 지독한 년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사람 괴롭히는 데는 도가 튼 여자.’ 이걸 만약 재능 수치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녀는 전설 등급 이상을 받았으리라. 절대로 본인이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주변 사람들에게 정하얀이 철저하게 격리되거나 괴롭힘 당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마련해 내는 데 성공했다. 모두가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하얀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만무. 결국 그녀가 발을 돌릴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이쪽은 정하얀의 한탄을 며칠 째 들어주고 있는 중이다. “그, 그러니까… 히끅….” “괜찮아?” “네. 네… 고마워요. 오, 오, 오빠. 제가 너무 제 이야기만… 바쁘실 텐데….” “아니, 전혀.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네. 조금 더 열심히 하면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인정해 줄 거야. 물론, 나는 이미 하얀이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솔직히 사람 좋은 척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괜찮을 거야. 앞으로는 사냥도 같이 나가기로 했으니까. 현성 씨한테도 이미 이야기해 놨고….” “정, 정말로 저 같은 게… 괜찮을까요?” “물론.”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니 살짝 웃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 동안의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부분. 타인과 접촉하는 걸 어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그녀가 이 정도 반응을 보여줄 정도라면 그 동안의 시간이 의미 없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밖으로 나가기 전에는 도장을 찍고 싶은 심정. 그러나 급하게 다가가면 안 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천천히.’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것 같은 관계를 원하는 게 아니다. 나와 정하얀은 조금 더 단단해져야 한다. “오, 오빠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만, 만약 저 혼자였다면….” “아니, 나도 하얀이가 옆에 있어서 얼마나 안심하고 있는지 몰라. 그보다 마력을 움직이는 건 좀 어때? 진전이 좀 있어?” “네. 일, 일단은요. 안에 있는 게 뭔지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팔로 보내면 조금 더 힘이 세진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마법은?” “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사실 그동안 정하얀에 대한 작업만 진행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직업, 방패병에 익숙해지기 위해 무척이나 고군분투하는 박덕구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내 직업인 마법사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김현성이 최근 혼자 자주 나가는 것 역시 우리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을 것이다. ‘이미지.’ 마법은 마력을 쌓는 이미지화의 결과다. 조금 더 쉽게 이미지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주문이라는 수단. 나 역시 첫 마법을 구현하는데 꽤나 애를 먹었다. 기본적인 지식은 머릿속에 있지만 정답을 내는데 난항을 겪었기 때문이다. 내부에 있는 일부 마력으로 탑을 쌓는다. 빈틈이 없는 견고한 탑이다.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내가 구현하고 싶은 마법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떠올리는 것은 손가락에서 피어오르는 불꽃. “목소리에, 응답하라, 화염.” 동시에 손가락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올라왔다. 그걸 보며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정하얀이 눈에 들어왔다. “와….”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저장하는 주문은 간결하면 편하겠지만 불가능할 경우에는 조금 장황해도 상관없는 것 같고… 요지는 뭘 떠올리느냐 같아.” 단점은 이미지하기 쉬운 주문이 대부분 쓸데없이 장황하다는 것. 중2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주문들을 생각하니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군요.” “나 같은 경우에는 스스로 마법을 발현한다기보다는 힘을 빌려온다는 개념으로 이미지하고 있어서… 아마 너도 네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아니, 지금 당장은 힘들게 느껴질지 몰라도 만약에 직업을 얻는다면 조금 더 쉬워질걸.” “역시… 그렇군요.” 어쩌면 직업을 얻기 전까지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꽤나 많은 마력을 지니고 있는 김현성 역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직업의 한계는 뛰어 넘을 수 없는 모양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정하얀에게 마법에 대한 지식을 쏟아 붙는 이유는 뻔할 뻔자. ‘호감도.’ 뭔가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만큼 친해지기 쉬운 방법은 없다. 이후에 배우게 될 것을 미리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손해는 없다. “어쩌면 직업을 얻기 전까지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걸지도 몰라. 그래도 마력을 쌓는 연습은 차근차근히 해보자.” “네. 맡, 맡겨주세요. 오, 오빠 열심히 할게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마력이 1 올라갑니다.] [지력이 1 올라갑니다.] ‘좋네.’ “아마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마력은 계속 늘 테니까. 개인적으로 정말 기대하고 있어.” “네, 넷.”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사, 사, 사실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그래?” “네. 그, 그러니까 최근에 마력이 또 올랐는데요….” 설명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정하얀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그동안 어떤 진전이 있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플레이어 정하얀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정하얀]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1] [성향-순수한 옹호자] [직업-마법사-일반 등급] [능력치] [근력-11/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민첩-11/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체력-14/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22/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14/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행운-23/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15/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장비-없음] [특성-마법사가 되는 방법-영웅 등급] ‘뭐? 마법사?’ 눈에 띄는 것은 마법사라는 직업명이다. “마력이 잘 움직이지 않아서요.” 환하게 웃고 있는 정하얀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왔다. ‘너 뭐야.’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 14 회귀자 사용설명서 014화 당황(2) “마력이 잘 움직이지 않아서요.” ‘뭐야.’ 다시 한번 표정을 살펴봤지만 아까와 같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웃고 있는 모습이 아까 전에 훌쩍거렸던 그녀와 잘 매칭이 되지 않았다. 상태창을 다시 한번 봤지만 달라진 것이 없는 게 당연하다. 절대로 잘못 본 게 아니다. [직업-마법사-일반 등급] 이미 정하얀은 직업을 얻었다. ‘언제부터?’ 정하얀의 상태창을 마지막으로 살핀 것은 비교적 가까운 삼 일 전이었다. 마법에 대해서 강의 아닌 강의를 시작한 날짜와 거의 비슷하다. 그녀가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내가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넌지시 던졌던 순간부터 직업을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성-마법사가 되는 방법-영웅 등급] [마법에 대한 기초와 기본 지식을 완벽하게 습득합니다. 마력 포인트가 영구적으로 2 올라갑니다. 성장 가능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이건 또 뭐야….’ 특성마저 해괴하기 짝이 없다. 직업을 이해하자마자 관련된 영웅 등급의 특성을 얻은 것이리라. 정황상 그렇다고 보는 것이 맞다. 마법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직업을 얻었고 새로운 특성까지 손에 넣은 경우가 있다는 건 처음 보는 경우. 만약 이런 일이 다른 이들에게도 가능했다면 김현성은 이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정하얀은 분명 특이 케이스다. 생각이 길어지자 정하얀이 조금 불안한 듯이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저… 오, 오빠?” “아,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이 들어서… 마력을 움직이는 방법 말이지?” “네, 네! 오빠 말대로 해봐도 너무 어렵게 느껴져서….” 어렵게 느껴질 리가 없다. “마력량이 조금 많아서 그런가… 이상하네.” 먼저 살짝 손을 뻗어오는 것이 보인다. 나는 살짝 올린 정하얀의 손을 잡고 내 안에 있는 미약한 마력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내부로 들어가 마력을 쌓으려고 했지만 정하얀의 마력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단순히 둔한 것이 아니다. ‘막고 있어.’ 내가 자신의 마력을 움직이는 것을 의도적으로 억제하고 있다. 인상을 찡그리자 그제야 정하얀의 마력이 내가 간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역, 역시 오빠는 대단해요.” ‘얘 진짜….’ “이미지해 보자.” “네?” “주문을 한번 이미지해 보는 거야. 손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으로… 아까 내가 한 것처럼 할 수 있겠지?” “아! 네, 네!” 조건에 걸맞은 마력은 완벽하게 쌓았다. 여기까지 온다면 작은 불꽃을 이미지하는 것 정도는 그녀에게는 손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력은 곧장 허물어져 버린다. 시간이 지나거나 실패한 것이 아니다. 정하얀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그것을 무너뜨렸다. “역, 역시 아직은 너무 어려운 걸요. 저, 저는 왜 이럴까요…. 이, 이렇게 열심히 가르쳐 주시는데….”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가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원래는 실패하는 게 당연한 거니까 아직 직업이 없어서 그런 거일 수도 있어. 만약 사냥에 나간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슬쩍 흘린 직업이라는 단어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한, 한 번 더 해보면 안 될까요?”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자. 일단은 나도 할 일이 있으니까.” “약, 약속이라도 아니면… 오, 오늘도 혜, 혜영 씨랑… 만, 만나시나요?” 박혜영은 이지혜가 이쪽에 붙인 여자였다. 그 날 일이 있었던 뒤로 이지혜가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보내온 것. 여러 가지 일로 쓸모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아직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박혜영을 통해서 집단의 상황이나 내부적인 이야기를 듣는 게 전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영 씨?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박혜영’ 좋은 타이밍인지 나쁜 타이밍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눈앞에 있는 정하얀의 표정 변화가 크지는 않다. “아! 선, 선약이 있으셨네요. 저, 저는 그것도 모르고….” “아니, 혜영 씨와 약속은 없었어. 무슨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네. 일단 자리 좀 비켜줄래?” “아… 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정하얀과 이쪽으로 들어오는 박혜영. 부른 기억은 없는데 어째서 이곳에 온 건지 궁금해진다. 박혜영을 빤히 바라보는 정하얀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 질투심을 이용하는 것은 어느 정도 원하는 바이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다. “하얀아, 내일 또 보자.” “아! 네!” 정하얀이 이쪽의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박혜영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에요.” “어떤?” “다음번에 사냥을 나가실 때는 이쪽에 있는 인원 몇몇을 차출해서 함께 나간다는 이야기요.” “네. 맞습니다.” “만약 괜찮으시다면 제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꽤나 직접적이다. 자연스럽게 박혜영을 마음의 눈으로 한번 스캔해 봤지만 눈에 띄는 능력치나 특이사항은 없었다. [플레이어 박혜영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박혜영]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7] [성향-계산적인 외교관] [직업-백수입니다.] [능력치] [근력-10/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민첩-11/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체력-20/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지력-10/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내구-1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09/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마력-00/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총평-눈에 띄는 능력치나 특이사항이 없다는 한심한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전체적인 밸런스가 무척이나 잘 잡혀 있습니다. 근접 직군, 혹은 궁수 같은 원거리 직군으로도 무난한 성장이 가능해 보입니다.] 성향은 계산적인 외교관. 자세히 읽어보지 않아도 어떤 성향일지 대충 예상이 간다. 나는 잠깐 동안 그녀를 바라본 이후에 말을 이었다. “글쎄요. 일단은 하얀 씨를 먼저 추천했습니다만….” “역시 남자는 어린 여자가 좋은 가 봐요? 제가 더 잘해줄 수도 있는데. 저런 꼬맹이는 재미없지 않아요?” “어떻게 생각하셔도 별로 상관없겠지만 굳이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어떻게 안 될까요? 그게 우리 사이에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 사이가 정확히 뭔지 알 수 없다. 아무래도 이지혜에게 이쪽을 여러모로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 아무래도 박혜영에게는 내가 여자에게 관심이 많은 호색한 정도로 보이는 모양이다. 확실히 능력치도 나름 준수하고 잠재 능력도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준수하게 성장한다면 이쪽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계산적이다’라는 성향 자체는 마음에 안 든다. 다만 가는 게 있다면 오는 게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어차피 싸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덕구 씨와 기영 씨가 이쪽에 들어온 덕분에 상황이 조금은 변했거든요. 현성 씨가 우리를 어떻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이제는 소수예요. 이곳은 여자도 남자처럼 강해질 수 있는 곳이고 여러 가지 시스템으로 기존의 신체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곳이니까요.” “네. 맞습니다.” “괴물을 무서워하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지만 자기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어요. 본인들끼리 나가보겠다고 뭉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고, 어차피 모두가 싸울 수 있는 상태가 된다면 기영 씨 입장에서도 자기 편이 하나 더 늘어나는 건 손해가 아닐 거예요. 만약 하얀 씨가 뭔가 특별한 힘을 얻어서 돌아온다고 한다면 이 현상은 가속화 될 거예요.” “꼭 제가 편을 가르고 있다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제가 정곡을 찔렀나요?” “아니요. 별로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혹시 지혜 씨도 당신이 여기 온 일을 알고 있습니까?” “아마 대충은? 지혜 씨 생각을 누가 알겠어요?” “굳이 저를 찾아온 이유는….”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정하얀 그 계집애만 편애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기도 하고 만약에 거절하신다고 하면 제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역시 말이 통하네요.” “현성 씨가 돌아오면 아마 작업을 시작할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잘 말해보도록 하죠. 그렇지만 현성 씨가 무리라고 판단한다면 기각될 가능성도 있으니 너무 기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이런 대답을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적이에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 * * “웃긴다. 정말.” “쉿. 듣겠다. 얘.” 주변에서 목소리들이 들려왔지만 별로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영 오빠가 있는 곳이 신경 쓰인다. “하얀 씨! 무슨 생각해요?” “아, 아! 아니. 아무것도….” “피곤하시면 쉬셔도 돼요. 몸 쓰느라 힘들었을 텐데… 풉. 여기서 일하시면 힘들지 않겠어요?” “네? 네?” “모르는 척하는 거 봐.” “하지 말라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쪽을 향한 적의는 느껴졌다. 별로 피곤하거나 힘이 들지는 않았다. 무척이나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두 언니들에 비해 자신은 바보 같았고 어딘가 굼뜨고 멍청했다. 항상 자신을 돌봐주던 첫째 언니와 무척이나 똑똑했던 둘째 언니, 아마 언니들이 어느 순간부터 연락을 끊은 것 역시 자신이 멍청했기 때문이리라. “어휴… 냄새 나.” “취향 한번 참 독특하네. 별로 예쁘지도 않은 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그러니까 여우라는 거 아니겠어.” “쉿. 그만하라니까. 듣겠다, 야. 달려가서 이르면 어떡하려고 그래?” “뭐, 해보라지. 이미 질렸을지도 모르지. 아니, 분명히 질렸을걸?” 앞서 들려온 소리에는 괜스레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기영 오빠.’ 자신이 이곳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아까 전에 손을 잡고 있던 게 생각나 괜스레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질렸다? 오빠는 그런 마음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 더 다른 이유다. ‘두근거렸지.’ 분명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여동생 같아서요.’ 전에 들었던 말을 생각하니 미묘한 쾌감이 전해진다. 무척이나 생소한 감각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다. 망치질 하는 것처럼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괜스레 다리를 베베 꼬게 된다. 자신조차도 감정을 제어하기가 힘들다. ‘내일이면 또 만날 수 있어.’ 내일이면 또 만날 수 있다. 다시 한번 단둘이 이야기할 수 있고 귀여움 받을 수 있다. 옛날에 가족과 함께 있었던 것처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일종의 마약이다. 직업을 얻은 것을 숨긴 것도, 특성을 얻은 것을 숨긴 것도 전부 기영 오빠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길었으면 했기 때문.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가슴이 무척이나 아팠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혹시 자신을 찾지 않을까 겁이 난다. 들리는 목소리들을 애써 무시하며 괜스레 오빠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어머. 혹시 기다리고 있었어?” 방금 전까지 오빠와 함께 있었던 박혜영, 바로 그녀였다. # 15 회귀자 사용설명서 015화 각성 “걱정됐나 봐?” “그… 그게….” “웃긴다, 얘. 아닌 척하는 것 좀 봐. 내가 기영 씨한테 간 게 거슬리는 거잖아.” “그,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혜영 씨. 오, 오빠가 뭘 하든 딱히… 저랑은 관, 관계없고….” “표정은 다른데….” “정, 정말이에요.” “정말이긴. 웃기지 마, 이 계집애야. 네 앙큼한 속을 누가 모를 것 같아? 생긴 건 맹하고 멍청하게 생겨가지고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간단 말이야. 여기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저런 대어를 건질 줄 누가 알았겠어? 혹시 그런 얼굴하고선 생각보다 기술이 좋은 건가…. 이해할 수가 없네. 아님 그 사람 취향이 이상한 건가. 왜 그런 사람 있잖아. 모자라 보이는 사람한테 관심가지는 사람. 풉.”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또 그 표정. 정말로 마음에 안 들어.” “죄,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 어차피 속으로는 전부 바보 취급하고 있으면서….” “그, 그건 아니에요. 저, 저는 단지….” “기영 씨가 정말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서 너를 아껴주는 걸로 보여?” “그, 그런 게….” “착각하지 마, 멍청한 계집애야. 너는 정말로 운이 좋은 거야. 어쩌다가 첫 번째로 눈에 띄었을 뿐이고 어쩌다 보니까 얽혔을 뿐이야.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저런 타입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거든. 애초에 이기영 같은 인간은 사람을 잘 안 믿어. 쉽게 질려하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면 가차 없이 버리지.” “오, 오빠는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그렇게 믿는 게 너한테 도움이 되니까. 그런데 어쩌려나. 아마 내 말이 맞을 걸…. 지금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달라질 거야. 내가 보기에는 너는 좀 질리는 타입 같거든. 풉. 그런 소리 안 들어봤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머리가 굉장히 뜨겁다. 입으로는 무어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다. 다만 몸이 계속해서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표정은 처음 보는 거 같은데 혹시 화났어? 정곡을 찔렀나 봐? 너, 항상 버림받는 쪽이었지?” “아, 아, 아, 아, 아니에요.” “아니긴. 얼굴에 다 적혀 있는데. 아니면 많이 뺏기게 되는 쪽인가? 어느 쪽이든 비참하기는 마찬가지네. 있잖아. 네가 언제나 첫 번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저기 네가 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 것 같아?” 천천히 박혜영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윽고 귀에 살짝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자신도 모르게 큰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기영 씨 말이야… 생각보다 괜찮더라.” “거, 거짓말 하지 마세요!” “어머, 들켰네.” 눈에서는 자꾸만 눈물이 차오른다. 어떻게, 무어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자꾸만 뭔가가 목을 막고 있는 것 같다. 저 여자의 말이 맞다. 부모님에게도 언니들에게도 버림받았다. 함께 지냈던 친구들과도, 좋아하는 사람과도 하나같이 전부 멀어졌다. 어쩌면 자신은 정말로 질리는 타입일지도 모른다. 항상 실수만 저지르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따돌림은 일상이었고 혼자 있는 시간이 더욱더 편하다. 그래도. ‘오빠는 아니야.’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 만나 봤던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가족 같다고 했다. 여동생 같다고 해줬고 아껴주고 싶다고 말했다. 항상 매일 신경 써주고 자신을 돌봐줬다. 덕구 씨도 그렇다고 이야기해 줬다. 오빠가 나를 아낀다고 매일 매일 이야기해 줬다. 실수해도 괜찮다고 더 잘할 수 있다고 항상 응원해 줬다. 바보 같은 질문에도 웃으면서 대답해 줬고 조용히 지켜봐 주었다. “그, 그럴 리가 없어요.” “그건 네 희망사항인 것 같은데? 솔직히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내가 경고 하나 할게, 동생. 원하는 게 있으면 버림받기 전에 빨리 빨아먹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전부 빼앗겨 버릴걸?” “그, 그, 그만 하세요. 오, 오빠한테 그런 식으로….” “싫어.” 히죽이는 입가의 미소를 보는 순 간, 어깨를 툭 하고 밀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몸이 뒤로 밀쳐진다. 땅에 엉덩방아를 찧고 뒤를 돌아봤지만 이미 저 멀리 향하고 있는 박혜영의 뒷모습만이 시야에 비친다.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꼴좋다.” “방금 뭐야?” “아무래도 우리 순진한 창녀는 곧 버림받는 모양이네.” “그만해. 듣겠다, 얘.” “뭘 그만해? 방금 이야기 못 들었어? 조만간 또 혼자가 될 텐데… 그러면 또 누구한테 붙으려나. 아! 이제는 붙을 사람도 없으려나. 차라리 석우 씨한테 붙는 게 좋았을 텐데… 지 주제를 알아야지. 저러니까 혼자지.” “이제 쓸쓸해서 어떡하나.”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오빠가 나를 버릴 리가 없다. 항상 같이 있어 준다고 말했던 오빠가 그렇게 자신을 버릴 리가 없다. 가족 같다고 말해줬던 오빠가 나를 버릴 리가 없다. ‘글쎄. 정말로 그럴까?’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그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 울려 퍼진다. “그럴 리 없어!” “뭐야? 방금?” “쟤 방금 소리 지른 거 맞아? 정말로 화났나본데….” “이제 슬슬 본성 나오는 거지, 뭐. 킥.” 그럴 리가 없다. 오빠가 나를 버릴 리가 없다. 오빠는 다른 사람들과 틀리다. 항상 따뜻했고 항상 다정했다. ‘언니도 널 버렸잖아.’ “아, 아니야.” ‘아니긴 부모님도 널 버렸고.’ “그런 게 아니야. 오빠는 달라. 오빠는 달라.” 틀림없이 다를 것이다.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굉장히 힘들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눈에서는 눈물이 차올랐지만 뺨을 타고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주위에서 자신을 비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런 소리는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다른 게 필요했다.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오빠가 있는 곳이다. ‘잠깐이면 되겠지? 모르는 게 있다고 하고 찾아가면 만나줄 거야.’ 분명히 만나줄 것이다. 조금이라도 얼굴을 봐야지 진정될 것 같은 느낌.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지혜의 목소리였다. “잠깐 모여주세요, 여러분.” “네.” “내일 현성 씨와 덕구 씨, 기영 씨가 밖으로 나갈 때 이곳에 있는 인원을 차출해서 나갈 계획이라고 하시네요. 자세한 이야기는 현성 씨한테 들으면 될 것 같고 오늘 지명 받은 사람은 나름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함께 나간다고 들은 적이 있다. 조금 더 같이 있을 수 생각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째서 저걸 잊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이제는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날 것이다. ‘다행이다.’ 고개를 돌리자 이지혜의 뒤에서 김현성과 박덕구, 기영 오빠가 함께 나오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오빠.’ 평소와는 조금 다른 진지한 얼굴이지만 뭔가 안정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지만 머리가 아프거나 어지럽지 않았다. 아까 느꼈던 답답한 기분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전부 해소되어 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기분에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이곳을 봤어.’ 틀림없이 이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은 웅성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자 김현성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단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여러분을 모이게 해 죄송합니다. 여러분도 대충 인지하고 계시겠지만 이곳에서 계속해서 생존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식량 배급은 나날이 줄고 있고 생존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지요. 스타트 포인트에서 가져온 식량과 식수가 있지만 그 양이 넉넉하지는 않습니다. 저희는 조금 더 활동 반경을 넓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 “싸울 수 있는 인원이 지금보다 더 늘어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이 그 괴물들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은 압니다. 싸움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도 있고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으신 분도 계시겠지요. 그렇지만 일단 움직여야 합니다. 안 좋은 말씀을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모두 당할 겁니다. 해서 저희는 순차적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것이 옳다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김현성 다음으로 입을 연 것은 기영이 오빠였다. “기영 씨.” “네. 뭘 무서워하고 있는지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싸워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여기는 저희가 있던 지구가 아닙니다. 상태창이나 시스템 특성이나 직업 같은 것들이 뭘 뜻하는 건지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불꽃.” 손바닥에서 불꽃이 화르륵 올라오는 모습. 주변 사람들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어떻게 된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태창에서 가리키는 제 직업은 마법사입니다. 아직은 다룰 수 있는 마법이 많지 않지만 저 역시 여러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놈들이 무서워 도망치고 녀석들과 마주치기 싫어 숨어 다니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운이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면, 얻을 수 있습니다. 집단이 강해지면 우리들 모두가 강해질 수 있고 종국에는 이곳을 탈출할 수도 있을 겁니다. 조금 더 주체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오오오오….” “일단은 시범적으로 두 사람을 함께 데리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하얀 씨.” “아….” “그리고 혜영 씨.” “네. 잘 부탁드려요.” “일단은 두 분을 데리고 갑니다. 안정적으로 두 분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다시 조를 나누고 다음 사람을 데리고 갈 겁니다. 질문 있습니까?” “무슨 기준으로 뽑힌 건지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능성. 그리고 여러분의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이기도 합니다.” “저희끼리 사냥을 나가는 건….” “여러분의 자유 의지를 막고 싶지는 않지만 추천하고 싶지는 않군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박혜영, 그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다른 사람도 함께 간다곤 들었지만 저 여자도 함께 가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언니, 축하해요.” “다치시면 안 돼요.” “현성 씨, 기영 씨, 덕구 씨도 함께 가니까 아마 괜찮을 거야.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이겨내야지.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면 좋은 거니까.”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축하받고 있다. 부럽지는 않다. 다만 기분이 괜스레 이상해진다. ‘빼앗지 마.’ 서둘러 다시 단상 위를 올려다보니 오빠 역시 박혜영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걸려 있다. 아까 들었던 목소리가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은 물론 호흡이 계속해서 가빠진다. ‘질리기 쉬운 타입이니까.’ 박혜영이 단상 위로 달려가 다른 이들에게 악수를 건넨다. ‘버림받을 거야.’ ‘빼앗겨 버릴걸?’ ‘언니들도 너를 버렸잖아.’ ‘부모님도 말이야.’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너는 결국….’ ‘그만….’ ‘버림….’ ‘싫어.’ 그렇게 오빠가 박혜영의 손을 맞잡는 순간. 안에서 뭔가 무너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16 회귀자 사용설명서 016화 인간이 다섯이나 모이면 꼭 하나는 쓰레기가 있게 마련이다(1) ‘나쁘지 않은데.’ 마법을 보여준 건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김현성이나 박덕구는 확실히 강하다. 그러나 그 강함이 시스템에서 오는 강함인지, 아니면 본래 강한 것인지 애매하게 비칠 때가 있다. 당장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광고하며 방패를 들어봤자 그다지 와닿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에 비교하면 마법은 조금 다르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덩어리가 튀어나왔다.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파괴하는 모습이고 눈으로 보고도 제대로 믿지 못할 광경이다. 웅크려 있던 이들을 굴속으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다. 조용히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자 김현성이 중얼거렸다. “성공적이군요.” “아마 조금 달라진 정도일 겁니다. 싸우기 싫어하는 사람은 여전히 두려워할 거고…. 어쩌면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다소 무리하는 이들도 생기겠지요.” “그래도 굶어 뒤지는 거보다는 나을 거요, 형님.” “응. 그럴지도.” 박혜영이 단상으로 올라오고 있는 게 시야에 비친다. 많은 이의 축하를 받고 있는 모습. “혜영 씨와 하얀 씨가 성공적으로 귀환한다면 아마 그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겁니다.” 그만큼 이번 원정은 김현성에게 중요하다. 도대체 이 던전의 공략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김현성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애초에 지금 당장의 능력치는 박덕구보다 조금 나은 수준. 마력이 높지만 몇십 마리의 놈들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혼자서 많은 일을 떠안고 있는 만큼, 최소한 쉼터 주위의 놈들을 처리하는 건 타인에게 맡기고 싶을 것이다. ‘쓸데없는 책임감.’ 그것만 아니었다면 놈은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갔을지도 모른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이쪽으로 올라온 박혜영은 김현성과 박덕구, 내 손을 차례대로 잡으며 인사를 했다.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친화력이 꽤나 좋은 건 인정한다. 대충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자 박혜영 역시 이쪽의 손등을 만지며 신호를 보내는 것이 보였다. 그녀보다는 정하얀이 더 중요한 것이 당연하다. 고개를 돌리자 조용히 이쪽을 응시하는 정하얀을 바라볼 수 있었다. ‘뭐.’ 지금까지 봐왔던 표정과는 조금 다른 표정이다. 가라앉은 표정으로 박혜영을 바라보는 정하얀의 눈을 들여다본 순간 잠깐이지만 등 뒤로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제길.’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은 것이다. ‘뭐야. 방금 뭐야.’ “형님 어디 아프쇼. 식은땀이….” “조금 몸이 안 좋아서….” “거, 내일이 당장 원정 날인데 오늘은 푹 쉬쇼. 매일 그렇게 공부하니까 그런 거 아니요.” “알겠다.” “쯧. 누가 샌님 아니랄까 봐… 요즘 먹는 게 부실한 거요? 딱, 딱히 형님이 걱정되는 건 아닌데… 뭐, 내 몫이라도 좀….” 박덕구가 중얼거리는 건 관심 없다. 서둘러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정하얀을 바라본다. 평소와 같은 눈. ‘착각인가?’라고 생각해 봤지만 틀림없이 잘못 본 게 아니다. 이쪽을 바라보며 바보처럼 웃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뭐야.’ 뭔가 잘못됐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불안한 느낌에 나는 침을 삼켜 넘겼다. * * *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덕구 씨는 가장 앞, 그 뒤로는 현성 씨와 혜영 씨가. 뒤로는 하얀 씨와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전투 방법은 간단합니다. 방패로 앞을 막고 제가 뒤를 막습니다. 현재 쉼터 주변에는 녀석들이 많이 몰려 있지 않은 만큼 이곳에서 조금 앞으로 나아간 이후에 사냥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은?” “없소.”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네, 네….” 벌써 몇 번째 같은 브리핑의 반복이다. 본래 나, 박덕구, 김현성이 나갈 때와는 그 내용이 다르다. 김현성이 이번 원정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리라. 새로운 인원 2명을 들인 게 전부가 아니다. 이번 사냥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성공하느냐에 따라서 쉼터 안에 있는 집단의 향방이 달라진다. 모두가 무사 생환한다면 쉼터 안에 있는 이들은 조금 더 자신감을 얻을 것이고 만약 무슨 일이라도 터진다면 일이 조금 복잡하게 흘러갈지도 모른다. 인원 배치 역시 의도가 숨어져 있다. ‘점수라도 따고 싶은 거겠지.’ 김현성의 목적도 내 목적과 상당히 비슷하다. 정하얀을 얻는 것. 물론 이성적으로 그녀를 노리는 것은 아니다. 녀석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미 확정되어 있는 미래에 강자와 친분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정하얀.’ 정리하자면 집단의 무사 귀환 그리고 전설급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와의 친분. 굳이 위치 선정 하나에 반발할 이유도 없고 초조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상황을 지켜봐야 돼.’ 그때 봤던 정하얀의 눈. 내 착각이라면 좋겠지만 정하얀에게서 조금 떨어져 그녀를 지켜봐야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얀 누님을 안쪽으로 집어넣는 게 더 낫지 않겠소? 형님이랑 같은 포지션에 있는 게 가장….” “아니, 이대로 간다. 이게 가장 좋은 포지션이야.” “뭐, 형님이 그렇게 말한다면 야….” “현성 씨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해. 애초에 전방에서만 놈들을 사냥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만큼 하얀이를 가장 뒤로 두고 현성 씨로 보험을 둔다. 둘러싸이는 경우만 아니라면 이게 가장 효율적일 거다.” “네. 그 말이 맞습니다.” 김현성이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점수 딴 느낌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살짝 표정이 구겨져 있는 정하얀을 바라보며 김현성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아… 네.” “그럼 저는 기영 씨와 함께 오붓하게 있으면 되는 건가요?” “혜영 씨는 기영 씨를 잘 보조해 주시면 됩니다. 무기는 창이 적당하겠군요.” “네. 알겠어요.” “그럼 이만 출발하도록 하죠. 길은 미리 알려드린 대로….” “어, 어디였더라….” “제가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이곳 지리 정도는 이미 머릿속에 넣어두었다. 박덕구가 고맙다는 눈길을 보내왔다. 애초에 주변에 관심이 없는지 아니면 나를 지나치게 의지하는지 모르겠지만 머리 쓰기가 귀찮은 모양이다. 커다란 나무 방패를 들고 일어선 녀석을 보니 굉장히 듬직해 보인다. 단순히 외관으로 본다면 김현성보다는 박덕구에게 더 점수를 많이 주고 싶을 정도. 장비는 내가 만들어준 엉성한 가죽갑옷이나 스타트 포인트에서 주워온 방패가 전부지만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럼 출발해 볼까.” “그렇게 하도록 하죠.” 다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박혜영이나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아무래도 조금 긴장한 모양새다. 스타트 포인트에서 만났던 괴물을 직접 만난다고 생각하면 두려운 것이 당연하다. 나는 바로 옆에 있는 박혜영에게 툭 던지듯 위로의 말을 내뱉었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티 났나요?” “스타트 포인트 때처럼 놈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지역이기도 하고 전방에서 덕구가 막고 있는 괴물들을 차분하게 창으로 찌르시면 끝입니다. 조금 무섭겠지만 아마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생각보다 상냥하시네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네가 패닉을 일으키면 뒈지는 건 나니까.’ 전투 중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혹시라도 내가 저 여자의 눈 먼 창에 찔릴지 누가 알겠는가. 살짝 뒤를 돌아보니 정하얀에게 말을 거는 김현성이 시야에 비친다. 역시나 이것저것 신경 써주는 모양인 것 같았지만 정하얀은 김현성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조용히 고개를 숙여 외면하거나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바람에 의사소통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정하얀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던 인고의 시간이 떠오른다. 살짝 눈을 마주치며 웃자 정하얀 역시 무척이나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적어도 그녀와의 관계에서는 내가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어머, 한 눈 파는 거예요? 파트너는 나 아니었나.” “잠깐 후방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동 중에 지나친 잡담은….” “네. 알고 있어요.” 그때였다. “놈입니다. 준비를.” “뭐, 알겠소.” 뒤쪽에서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앞에서 박덕구가 중얼거렸다. 여전히 긴장하는지 박덕구의 몸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인다. “덕구 씨가 놈을 막고 있는 사이 혜영 씨가 놈을 처리합니다. 기영 씨는 혹시 일어날 상황에 대비를.” 고개를 끄덕인다. 여유로워 보였던 박혜영의 얼굴에 조금의 공포심과 긴장감이 감돈다. 아무리 우리가 있다고 해도 마무리를 해야 하는 것은 박혜영, 그녀다. 무섭지 않은 것이 이상하리라. 왼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하나. “덕구야, 왼쪽에 바로 있을 거다.” “알고 있소, 형님.” 뛰어든 박덕구가 곧바로 코너를 돌아 방패로 놈을 밀어 붙였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이 막다른 벽과 방패 사이에 막힌다. 박혜영은 나를 따라 들어오기는 하지만 여전히 당황한 듯한 모습. “게에에에엑!” “제기랄… 여전히 짜증나는 면상이구만.” “뭐 해요?” 부들부들 떨고 있는 팔, 후들거리는 다리.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오줌을 지리지 않은 게 용할 지경. “어, 어떻게.” “찔러요.” “거, 빨리 해결하쇼. 버티기 힘겹소.” “아….” 지금껏 보여줬던 다소 여유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나마 눈은 살아 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조차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멍청해가지고… 센 척하더니.’ 나는 그녀의 팔을 뒤에서 살짝 붙잡았다. 떨리는 손으로 창을 붙잡고 있는 박혜영의 손을 꽉 잡으니 그녀의 떨림이 잦아든다. 그녀의 귀에 속삭인다.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윽박지르는 것보다는 조용히 전달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번에도 이렇게 하면 다 뒈지는 거야. 알아듣지?” “네.” “팔에 힘줘.” “…….” 팔에 꽉 들어간 힘. 박덕구가 막고 있는 놈의 몸통을 향해 창을 천천히 내지르니 박혜영의 팔이 그대로 딸려 들어온다. 내지르는 것은 나지만 그녀 역시 감촉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정체불명의 액체들이 울컥울컥 튀어나오기 시작. 소름이 끼쳤는지 창을 놓아버리려고 하는 박혜영의 팔을 다시 한번 꽉 붙잡았다. “아직 안 죽었어. 힘 빼지 마.” “게에에에엑!” 아직까지 발버둥을 치고 있는 녀석은 고통스러운지 아니면 화난 건지 자신을 막고 있는 박덕구를 할퀴려고 했다. 다시 한번 박혜영의 손을 위에서 잡은 채 창을 내지른다. 역시나 기분 나쁜 감촉이다. “고기라고 생각해.” “네. 네.” 푸욱! 콰직! 계속해서 창을 내지른다. 이미 놈은 미동이 없지만 이렇게라도 적응시키는 게 효과적이다. 조금 시간이 지난 이후에 박덕구는 살짝 방패를 떼고 괴물과 멀어졌다. 나 역시 박혜영의 손을 붙잡고 있는 팔을 살짝 내려놨다. 자연스럽게 괴물은 허물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해서 놈을 향해 창을 내지른 중이다. 공포심에서 벗어나기 위함인지는 모르겠지만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창을 부여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이해할 수 있지.’ 애초에 생명의 빼앗는 행위 자체가 낯설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상대가 괴물이라고 한들, 그게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소름끼치는 소리가 한참이나 들려온 이후에야 탈진한 듯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속으로는 별별 생각을 다 하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주저앉아 있는 박혜영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 17 회귀자 사용설명서 017화 인간이 다섯이나 모이면 꼭 하나는 쓰레기가 있게 마련이다(2) “거, 오늘따라 놈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 않소. 형님?” “그동안 현성 씨가 이곳 주변을 정리해 놨었으니까. 아니라면 다른 쪽으로 몰려갔을 수도 있겠지.” “다른 곳에 생존자들이 있다는 소리요?” “글쎄….” 박덕구 녀석이 궁금한 듯이 중얼거렸다. 단순한 추측일 뿐이지만 아예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다. 이곳이 이 정도로 한산한 것을 보면 다른 지역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고 그곳으로 놈들이 몰려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김현성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지만 당연히 박혜영과 정하얀을 데리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놈들의 규모나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김현성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네. 그렇게 하도록 하죠.” 대충은 예상하고 있던 바, 장소를 찾고 움직이고 쉴만한 캠프를 꾸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물론 텐트 따위는 없지만 적당히 밀폐된 공간은 그나마 안정감을 심어준다. “첫 번째로는 혜영 씨와 기영 씨가 그리고 저와 하얀 씨, 마지막도 제가 덕구 씨와 함께 서겠습니다.” “괜찮겠소?” “네. 충분합니다.” 굳이 사서 고생하겠다는데 막을 이유는 없다. ‘첫 번째는 나쁘지 않지.’ 체력 같은 능력치가 높은 저들과는 달리 거지같은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나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휴식이 필요하다. 김현성의 체력 능력치나 마력 능력치를 생각한다면 하룻밤 새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것이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형님, 고생하쇼.” “수, 수고하세요.”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다. 정하얀을 비롯한 나머지 인원들은 천천히 안쪽의 석실로 들어간 이후에 나는 천천히 박혜영을 볼 수 있었다. 뭔가 얼이 빠진 듯한 느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거 같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충격이 컸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괴물이 저질렀던 비명이나,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 창을 내질러야 한다는 현실이나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까지. 소름이 돋는 것이 당연하다. 이미 스타트 포인트에서 한 번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꼈을 수도 있고 어쩌면 혈액이나 놈의 내장이 튀어나오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다. 어차피 다음 불침번이 오기 전까지는 시간도 많이 남은 상황. 몇 마디 건네 위로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네?” “어차피 이곳으로 떨어진 이상 한 번은 겪어야 했을 일입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경험했다고 생각하시면 편하시겠네요.” “네.” 처음과 비교하면 기가 꽤나 죽어 있는 모습. “처음에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그럴 겁니다. 아마 적응하시면 편해지실 겁니다.” “기영 씨는 어떠셨나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무작정 돌로 놈을 내려찍었죠. 무섭기는 했습니다만…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손은 물론 온몸이 괴물들의 내장과 뇌수로 범벅이 되어버려 냄새 때문에도 고생했죠.”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반쯤은 도박이었을 것이다. 박덕구가 나를 두고 도망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놈을 움직이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드레날린이 머리끝까지 올라왔었던 상황이었다. “아…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제가 우습네요.” “뭐, 확실히 이쪽에 도움을 주니 어쩌니 같은 소리를 하시기는 했죠.”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조금 있다. “그건 거짓말은 아니에요. 불러주신 만큼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그럴 줄 알았다. 성향도 나쁘지 않았고 능력치도 준수 했다. 은혜를 베풀면 그만큼 이쪽에 돌아올 게 있다고 생각해서 무리하게 한 명을 더 집어넣었는데 뚜껑을 까보니 속빈 강정. 나와 박덕구, 김현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바깥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니 우리가 하는 일이 쉬워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굳이 박혜영에게 투자할 이유는 없다. 박덕구라는 든든한 녀석이 있기도 했고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정하얀이라는 마법사와 회귀자 김현성과도 끈을 만들었다. 구태여 박혜영을 도와주려고 했던 건 혹시나 보험을 던져본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자꾸만 이런 식으로 겁을 집어 먹는 건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까 뒤에서 잡아주셨을 때 조금 기뻤어요.” 그러고 보니 바보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던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정신이 없어 쌍욕도 내뱉었던 것으로 기억. 그렇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는 없었다. “정신이 없어서 조금 험한 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네. 물, 물론.” “그리고, 도와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다음은 혼자서 하셔야 할 겁니다.” “네….”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박혜영이 시야에 비친다. 뭐,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지경. 침묵이 꽤나 길어진다.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에 다시 한번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오빠….” “기영 씨, 혜영 씨. 교대할 시간입니다.” 김현성과 정하얀이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조금 일찍 나오셨네요. 조금 더 주무셔도 될 텐데.” “아닙니다. 마침 잠에서 깨버려서… 아침에 깨워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성 씨.” 김현성과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는 정하얀에게 다가가 살짝 머리를 쓰다듬으니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히는 것이 보인다. 평소의 정하얀이다. 박혜영을 바라보는 눈동자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을 보니 저번에 봤던 것은 어쩌면 이쪽의 착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고생해, 하얀아.” “네? 네… 네, 오빠!” 조금 목소리가 크다. 본인도 깜짝 놀랐는지 입을 막고 있는 모습은 조금 귀엽게 보였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는 곧바로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고 있는 박덕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세상 편하게 자네.’ 이런 환경에서 저렇게 잘 수 있다는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축복일 것이다. 박혜영은 미리 비치된 자리에 가서 살짝 몸을 눕혔고 나 역시 박덕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괜스레 생각이 많아진다. 이 사냥이 끝난 이후에 변화할 집단이나 김현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말로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은 있는지. 공략이라고 한다면 어떤 식으로 어떻게 진행되는 것 따위의 일 말이다. 이미 직업을 얻은 정하얀이나 김현성의 회귀 사실, 과거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튜토리얼의 끝난 이후에 이야기나 이지혜와는 앞으로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지…. 이대로 잠을 자지 못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애초에 조금 많이 걷기도 했고 정신적으로 조금 스트레스를 받은 만큼 금방 눈이 감겼다. ‘몇 시지.’ 조금 불편한 잠자리 때문인지 중간 중간 깼다. 박덕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김현성과 함께 불침번을 서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모양이다. 박혜영이 잠깐 몸을 뒤척이는 소리나 정하얀이 다시 안쪽으로 들어오는 소리 역시 들린다. “안녕히 주무쇼, 누님.” “덕, 덕구 씨도 고생하세요.” 뭔가 조금 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기는 하지만 다시 한번 스르륵 눈이 감겼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과 동시에 다시 한번 의식이 흐릿해졌다. 다시 한번 깨어났던 것은 입술에 뭔가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을 때. 그리고 무언가가 손을 잡는 감각이 느껴졌을 때였다.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몸이 잘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아니, 그것보다는 누군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들려오는 것은 정하얀의 목소리. 무척이나 작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절…… 안…….” 잠이 덜 깼는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지금 나를 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눈치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흐릿했던 정신이 또렷해진다. 수마가 한순간에 달아난 것은 당연지사. 왼쪽 눈을 살짝 떠 위를 바라보니 조용히 이쪽을 내려다보는 검은 그림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뭔지는 모를 상황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몸을 일으킬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 지금 정하얀이 작게 속삭이는 것이 내게 말을 거는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애써 눈을 감은 뒤에도 자꾸만 소리가 들려온다. 스르륵 몸을 움직이는 소리, 옷깃이 스치는 소리, 심지어는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하아… 하아….” ‘이게 뭐야.’ 지금까지 이렇게 당황스러웠던 적이 없다. 특이한 성벽이라도 있는 건지 아니면 이쪽이 너무 정하얀을 몰아붙인 부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이쪽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아….” 그것도 조금 과하게 느껴질 정도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 일단은 쾌재를 질러야 함이 옳다. 애초에 거의 최우선 사항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바로 정하얀과 친분을 쌓은 일이었던 만큼 나쁜 결과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쪽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포지션은 오빠와 동생. 결코 이런 상황을 원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에야 정하얀은 이쪽에 조금 떨어졌다. 잠이 오지 않는 건지 자꾸만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궁금함에 살짝 눈을 뜨자 이번에는 조용히 박혜영을 내려다보고 있는 정하얀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 한참이나 박혜영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 미동도 없이 한 자리에 서서 빤히 그녀를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몽유병이야, 뭐야.’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일이 꼬였다. 애초에 직업을 얻은 이후에 그 사실을 숨긴 것도 그렇고 박혜영이 함께 원정에 떠나기로 한 당시에 그녀를 바라보던 표정도 마음에 걸린다. 방금. 그리고 지금 같은 이상 행동에는 틀림없이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하얀이 이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 것은 그때. 순간적이지만 눈이 마주친다. 한 번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등 뒤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아났다. ‘개….’ 반사적으로 눈을 감아보지만 들켰는지 들키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다. 아니, 그보다는 어째서. ‘내가 겁먹고 있는 거지?’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움츠리게 된다. 마력의 영향? 아니면 만화에서나 나오는 살기?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번에도 보여준 적이 있는 정하얀의 저런 모습이 나를 옭아매는 것만 같다. 일단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니 내가 깨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갑작스레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진 장내는 뭔가가 이상하다. ‘제기랄….’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아까처럼 숨을 마시거나 내뱉는 호흡 소리도, 옷깃이 스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박혜영의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기는 하지만 정하얀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소리는 아니다. 잠을 청하려고 하고는 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누군가 조용히 몸을 눕힌 것이 느껴진다. “…….” “…….” 아마도 정하얀일 것이다. 마치 1초가 1분 같은 느낌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을 때, 불행인지 다행인지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날 시간입니다.” # 18 회귀자 사용설명서 018화 인간이 다섯이나 모이면 꼭 하나는 쓰레기가 있게 마련이다(3) 일어나라는 목소리가 이렇게 기분 좋게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가장 처음 일어난 것은 박혜영. 그 뒤로는 정하얀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도 들렸다. 언제쯤 일어나는 게 좋을까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진다. “형님.” ‘박덕구, 나이스.’ 마침 나쁘지 않은 타이밍. 잠을 설쳐서 그런지 갑작스레 피곤함이 몰려들었지만 일단 눈을 살짝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오늘은 조금 일찍 움직일 계획인가 보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간 이후에 사냥을 마치고 쉼터로 돌아가기로 했소.” “괜찮네.” 일부로 정하얀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않고 있다. 피하는 게 더 어색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살짝 정하얀을 바라보니 환하게 웃으며 이쪽을 보는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어제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 동일인물로 보이지도 않는다. ‘어느 게 진짜야.’ 저 표정이 진짜인지, 아니면 어젯밤 내가 본 표정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 일단은 조금 더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나 역시 그녀를 향해 작게 웃어준 이후에 곧바로 몸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피곤해.’ 밤잠을 설친 것처럼 정신이 멍하다. 밖으로 나가자 김현성이 이쪽을 바라보며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조금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오늘은 조금 안까지 들어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근방에 놈들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쉼터에 있는 이들이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아마 안쪽이 잘못될 일은 없을 것 같군요. 다만 놈들의 숫자가 조금 많다고 판단되면….” “네. 물론 바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나저나 어느 쪽으로….” “왼쪽 길은 지난밤에 제가 간단하게 체크를 했습니다만 이곳과 별로 상황이 다르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불침번을 2번 서는 것도 모자라 탐색까지 하고 오셨단다. “고생하셨군요.” 이렇게 열심히 움직여주는 일꾼들이 있으면 나 같은 사람이야 즐겁다. 어쩌면 오른쪽에 무언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 “혜영 씨와 하얀 씨는….” “저도 준비됐어요.” “포지션은 어제처럼 놈들을 발견하면 하얀 씨가 혜영 씨 대신 나서면 되실 겁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죠.” “네.” 조금은 피곤한 행군길이 될 것 같았다. 일단 가장 걱정되는 것은 정하얀의 존재다. 뭐가 뭔지 모를 상황이지만 최근에 정하얀이 보여주는 행동은 다분히 비상식적이다. 뭐라고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누가 봐도 이상해 보인다. 내가 생각하던 그녀의 모습과 조금 거리가 먼 것 같았다. 무엇이 원인인지 파악하는 것이 먼저. 아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질투심?’ 원인이 질투심이라고 하기에는 나와 정하얀이 지내온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 문제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항상 지내온 시간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한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나와 정하얀을 둘러싼 상황의 특수성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다. 이곳은 카페나 레스토랑이 아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싸구려 B급 영화에서 위기에 빠진 남녀가 짧은 시간동안 사랑을 느끼는 것 같은 감정. 어쩌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정체가 그것일지도 모른다.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정하얀의 과거. 과거를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할 것 같았다. 부모님은 계시지 않고 언니들과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 만약에 본인이 가족들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쪽에 조금 더 기대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그녀에게 친절하지 않았을 테니까. ‘단순한 추론.’ 그렇지만 모종의 이유로 나는 그녀에게 의지할 수 있는 끈이 되어버렸다. 항상 친절하고 믿어주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 감정이 좋아하는 감정을 넘어 집착으로 발전한 형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내가 노린 것 역시 그녀의 정신적 방파제 역할이었으니까. 마음에 빈틈이 있는 인간은 조금 더 끌어들이기 쉬운 법이다. ‘시험해 볼까.’ 고전적이지만 사용해 볼 만하다. 나란히 길을 걸어가는 와중에 박혜영의 어깨를 살짝 끌어당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심.” “아… 네.” 조금 긴장한 듯한 모습.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한 걸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뭔가 감사의 표현을 하려고 하는 것 같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반응이 아니다. 곁눈질로 정하얀의 눈을 바라본다. 박혜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정하얀이 보인 것은 당연지사. 김현성이나 박덕구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특성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 눈에는 확실히 보인다.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정하얀의 눈 속에 들어가 있었다. ‘이건 이용할 수 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적의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다. 평범한 질투라고 하기에는 정도가 조금 지나친 것 같기는 했지만 정하얀의 성정을 생각해 본다면 수습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 당근과 채찍을 적당히 던져 준다면 정하얀은 이쪽을 위해서라면 몸도 던질 수 있는 충실한 가족이 되어줄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걷자 어느새 꽤나 먼 거리를 이동한 느낌이 들었다. “근처에 온 것 같군요.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조심히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큼. 알겠소, 형씨.” 아마 여기서부터가 김현성이 미리 봐둔 영역인 모양이다. 확실히 이전과는 냄새가 달랐다. 놈들의 몸에서 나는 특유의 악취가 이곳저곳에 베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저 멀리서 느껴지는 희미한 마력이다. 어떤 종류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뭔가 이질적인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김현성이 원하는 건 이것 일지도 모른다. “뭔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요? 형님. 놈들이라도 보이는 거요?” “앞쪽에서 희미한 마력이 느껴진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마력이라는 게 없으니 답답하구만. 형씨는 느낄 수 있겠소?”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기영 씨는 마법사인 만큼 저희보다는 조금 더 이질적인 감각에 익숙할 겁니다. 일단은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요. 이곳을 공략하는 데 어떤 힌트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현성은 확실히 연기에는 재능이 없다. 아무래도 앞에 있는 희미한 마력의 정체가 던전 공략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다. “뭐, 어차피 가는 길이기도 하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내가 먼저 가보겠소.” “조심.” 조심할 필요도 없다. 애초에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다면 김현성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자 내가 느꼈던 마력의 정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계단.’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군요.” 말 그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이 던전이라는 곳이 어떤 식으로 굴러 들어가는지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성을 바라보니 이 작위적인 설정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 어처구니가 없지만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뻔한 설정이지만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난이도가 올라간다는 건가? 아마 공략에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으음, 그런 거요? 형님.”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스타트 포인트가 있는 이 지점에서는 굳이 공략 힌트라고 할 만한 걸 찾을 수 없었으니까. 넓은 이곳에 괴물만 던져준 이후에 던전을 공략하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지. 아마 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부터가 시작일 확률이 높아.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곳보다는 단서가 많겠지.” 내 말을 듣고 김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빙고.’ “지금 당장은 무리가 있으니까 일단은 이곳을 기억해 놓은 이후에 다음에 내려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오늘은 공략을 위해서 찾아온 건 아니니까. 어쩌면 지하에는 조금 더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고. 괴물의 종류도 조금 다를 수도 있을 테니.” “지금보다 더 짜증나는 놈들이 나오면 정말로 싫을 것 같소.” 이하 동문이다. 어쨌든 간에 김현성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지하의 입구를 알리는 것에 성공했다. 이 정도라 하더라고 녀석에게는 조금 큰 성과라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당장 급한 것은 정하얀과 박혜영의 성장, 싸울 수 있는 인원이 준비가 되어야 아래로도 내려갈 수 있다. “길은” “대충 머릿속에 있어.” “그럼 이제부터는 이곳을 중심으로 놈들을 찾으면 되는 거요?”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조금 떨어진 지점부터 시작하도록 하죠.” “알겠소, 형씨.” 어제처럼 눈에 불을 키고 놈들을 찾지 않아도 가까운 곳에서 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아마도 이곳을 중심으로 녀석들이 조금씩 분포되어 있는 모양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괴물 세 마리. 살짝 김현성을 바라보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덕구 씨가 두 녀석을 맡아주시면 기영 씨가 빠르게 그중 한 녀석을, 나머지 하나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녀석을 교재로 사용하겠습니다. 혜영 씨와 하얀 씨는 기영 씨와 비슷한 위치에 서 계시면 됩니다.” “네.” “알겠소.” 입술을 꽉 다문 이후에 박덕구와 이기영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일단은 박덕구에게 어그로가 끌리게 할 모양인지 박덕구를 먼저 보내는 모습. 나 역시 잔뜩 긴장한 정하얀과 박혜영을 사이에 두고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한 녀석을 방패로 밀어내고 한 녀석은 가죽을 둘둘 말은 팔로 쳐내는 박덕구의 뒷모습이 보였다. 김현성은 다소 여유 있어 보이는 모습으로 한 녀석을 향해 달려가 놈의 팔을 베어내는 데 성공했다. ‘엄청 빠르네.’ 민첩 수치가 높아 어느 정도 빠를 거라고 예상했지만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그사이에 나는 창끝에 조금의 마력을 담아 박덕구가 붙들고 있는 녀석에게 창을 내질렀다.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혈액이 튀지만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아직 안 죽었어.’ 다시 한번 창을 찔러 넣으려고 했을 때 옆에서 박혜영이 뭐라도 해보겠다는 듯 창을 내지른다. ‘나쁘지 않네.’ 일단은 본인이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김현성 쪽은 굳이 쳐다볼 필요도 없다. 아마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적당히 힘을 빼며 상대하려고 할 테니까. 남은 것은 교재로 사용할 놈. 박덕구가 놈을 잡아놓으려고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조금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박혜영이 창을 내뻗기 시작. ‘멍청한 짓.’ 누가 봐도 멍청한 짓이다. 예상대로 창이 빗겨나가면서 남은 괴물 하나가 박덕구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앗! 죄, 죄송합니….” “개….” 인간이 다섯 명이나 모이면 꼭 하나는 쓰레기가 있게 마련. “덕구야.”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이 명언은 언제나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꺄아아아아악!!” ‘망할 년!’ # 19 회귀자 사용설명서 019화 인간이 다섯이나 모이면 꼭 하나는 쓰레기가 있게 마련이다(4) “꺄아아아아악!!”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괴물 새끼가 게걸스럽게 입을 벌리며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창을 먼저 내지르지 않았으면 어그로가 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놈들의 지능은 결코 높다고 할 수 없고, 침착하게 상황을 지켜본다면 박덕구가 달려오는 괴물을 막아줄 수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박혜영 이 망할 년은 침착하게 상황을 지켜보는 대신 자신의 공포심을 있는 대로 해방하는 것을 선택해 버렸다. “제길!” 박혜영이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이 상황을 꼬아 버렸다. 놈들은 소리에 민감하다. 평범한 대화 정도야 멀리 있는 곳까지 닿지 않겠지만 이 정도로 큰 비명이라면 당연히 놈들도 이쪽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 아마 주변에 있는 놈들이 전부 달려올지도 모른다. 김현성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대하고 있던 괴물의 머리를 날려버린 이후에 박덕구가 붙잡은 녀석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다.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와 조금 동떨어진 것 같기는 했지만 김현성도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낀 만큼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부들부들거리는 괴물 놈의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겠습니다.” “제기랄….” “죄, 죄송….” “기영 씨는 혜영 씨와 하얀 씨를…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덕구 씨가 길을 뚫는 걸로 하겠습니다.” “거, 형씨는 어쩔 거요.” “저는 괴물들의 주의를 끌도록 하겠습니다. 표식을 남겨두시면 찾아가도록 하죠. 곧바로 쉼터로 향하는 것보다는 조금 우회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기영 씨.”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쪽으로 관심이 끌린 괴물들을 전부 쉼터로 끌고 간다면 놈들에게 뷔페를 선물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김현성은 나름대로 이 사태를 해결하려는 모양이지만 표정이 썩 좋지 만은 않았다. 회귀자라고 하더라도 아직 김현성은 성장 중인 루키다. 어느 정도는 감당할 수 있겠지만 녀석들이 일정 수 이상 몰린다면 이렇게 폐쇄적인 공간에서 놈들을 상대하기 무리가 있을 것이다. “형님 어느 쪽으로….” “조금 돌아서 갈 거다.” “알, 알겠소.” 이제야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게 된 모양인지 박혜영이 창백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진심으로 비명을 지르게 될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일어나.” “네. 네….” “이쪽에 딱 붙어서 달린다.” “알, 알겠습니다.” 정하얀은 말이 없다. 다만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아.” “아… 네! 오빠.” 별로 겁먹은 것 같지 않은 모습. 그러고 보니 장차 대마법사가 되실 정하얀의 존재가 떠오른다. 정하얀 역시 마법사인 만큼 만약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쳐올 경우에는 이쪽에 도움을 줄 수도 있으리라. ‘생존 가능성은 높아.’ 충분히 살아 돌아갈 수 있다. “그럼 무운을.” “거, 형씨나 조심하쇼.” “괜찮을 겁니다.” 곧바로 박덕구가 방패를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박혜영 역시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우리를 뒤 따라오기 시작.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솟았지만 여기서 실랑이를 벌일 시간 따위는 없다. 그 대신 외우기 시작한 것은 주문. 마력으로 탑을 쌓는다. 아주 적은 마력이지만 위기의 순간에 이쪽을 한 번 구해줄 수 있는 마법. “달리면서도 외울 수 있는 거요? 형님?” “말 시키지 마라. 머리 아프니까.” 그만큼 주문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발과 손을 놀리면서 머릿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애초에 해내기 힘든 일이다. ‘어려운데….’ “나, 바라노니….” 자꾸만 쌓으려고 하는 마력의 탑이 무너진다. 집중이 잘 안 되는 탓이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느낌. 뇌가 과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하나만.’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외운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다시 한번 천천히 탑을 쌓는다. 어차피 아직 괴물 새끼들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외울 시간은 충분히 있다. “주여, 나, 바라노니, 내 목소리에, 답해, 적들을 태울, 힘을 내려, 주시옵소서.” 영창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영 짜증나는 주문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내 머릿속에 각인된 주문이 손으로 발현된다. 불의 구체. 사람 머리만 한 불의 구체가 내 손 안에 들어온 것이다. “거, 죽이는구만! 그런 건 언제 배운 거요!” “말 시키지 마라, 덕구야. 집중하기 어려우니까.” 주문을 외우는 것도 일이고 유지하는 것도 일이다. 계속해서 흔들리는 마력의 탑을 무너지지 않게 보수하고 균형을 잡아줘야 한다. ‘엄청 복잡하네.’ 만화나 애니메이션, 소설 따위의 창작물에서는 이 마법이라는 게 굉장히 간단하게 툭툭 던질 수 있는 걸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해 보니 머리가 깨질 지경. 오죽하면 마법사가 되는 선행 조건에 마력보다 중요한 것이 지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음은 어디요?” “왼쪽.” 이런 상황에서 박덕구에게 길까지 알려줘야 하니 짜증이 치솟아 오른다. “게에에에에엑!”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괴물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멀리 떨어진 놈들이라 그런지 몇 마리인지 자세히 확인할 수가 없다. “몇 마리.” “두 마리쯤.” “혼자서.” “해보겠소, 형님.” “못 죽여도 상관없으니까 길만 뚫어.” “맡겨주쇼.” 콰직! 푸욱!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계속해서 달리는 박덕구의 등을 보니 꽤나 듬직하게 느껴진 것은 당연지사. 조금 탱크 같은 놈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다음은!” “오른쪽.” “게에에에에에에엑!” “몇 마리.”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 같….” 곧바로 팔을 뻗는다. “화염구.” 내 손에서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었던 불꽃의 구체가 멈칫 하더니 일직선으로 날아가기 시작. 반동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풍압 때문인지 내 손이 잠깐 하늘 로 향했다. 마법이 날아가는 과정에서도 머릿속으로는 주문 술식 연산을 멈추지 않는다. 기껏 외워 놓은 주문이 중간에 이상한 쪽으로 휘어들어가는 건 사양이었으니까. 퍼엉! 괴물 새끼 하나의 몸에 부딪친 구체는 조금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퍼졌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구체에 맞은 괴물 들이 불에 휩싸인 채로 주변으로 튕겨지는 것이 보인다. 폭발의 여파로 이쪽까지 바람이 불어왔다. 박덕구가 슬쩍 방패로 우리의 앞을 막은 것은 당연한 일. 벽에 부딪치거나 불길에 휩싸인 괴물들 대다수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고, 녀석이 다시 한번 놀랐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좁은 공간이기도 했고 놈들이 밀집되어 있어서 운 좋게 맞은 것뿐이지만 주변에 퍼진 마법의 여파에 놀란 것이리라. “워메… 형님.” “후우… 후우….” 순간적으로 마력이 빠져나간 영향으로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길은 뚫어냈다. “다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때. “아!” 박덕구 역시 무심코 뒤를 돌아보다 깜짝 놀랐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하얀, 박혜영.’ 둘이 무리에서 떨어진 것이다. “언제부터…. 둘 못 봤어?” “아, 아까까지만 해도 분, 분명히 따라오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너.” 잠깐 동안 짜증을 내려다 목에서 흘러나오려는 욕지거리를 다시 집어 삼켰다. 이건 내 잘못이다. 머릿속으로 주문을 외우느라 둘이 언제 이쪽과 떨어졌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박덕구도 몰랐단 사실은 조금 예상 외였지만 분명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쪽을 따라오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들이 길을 알고 있느냐에 대한 것. 정하얀이라면 어쩌면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박혜영, 그 트롤러가 머릿속에 길을 외워 두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따라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을 테니까. “어, 어떻게… 미, 미안하….” “네 잘못이 아니다, 덕구야.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어. 시발.” “이제는 어떻게 하면 되, 되는 거요?” 내가 나에게 묻고 싶은 질문. 무리에서 떨어진 게 박혜영 하나뿐이라면 당연히 버리고 간다. 그렇지만 그녀와 함께 있는 정하얀이 문제다. 그녀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복권이다. 이런 곳에서 어처구니없게 그녀를 잃었다가는 헛웃음도 나오지 않으리라. 도박은 싫어하는 편이다. 그러나 필요할 때는 움직여야 한다. “분명히 살아 있을 거다.” “그, 그러면.” “생각이 있으면 이쪽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만들어놨겠지. 일단 다시 되돌아간다.” “잘 생각 하셨소, 형님.” 아마 뒤쪽에서 따라오는 괴물들은 김현성이 처리해 주고 있을 확률이 높다. 중요한 것은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을 떨거지들. 주문을 다시 외우기는 힘들다. 마력 상태는 이미 바닥이지만 어떻게든 쥐어짜면 한 번 정도는 더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언제쯤 떨어진 건지는 기억나?” “아, 아까 두 놈을 만났을 때만 해도 같이 달려오고 있는 것 같았소. 분, 분명히 눈으로… 비명 소리도 안 들렸었는데….” 나 역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문을 외우고 있을 때만 해도 둘이서 함께 나를 따라오던 기억이 있다. 마법을 유지하는 동안 그녀들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일단 간다.” “알겠소.”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한 것 같은 기분이다. 박덕구가 둔하기는 해도 따라오던 둘이 한꺼번에 없어졌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병신은 아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애초에 박덕구의 민첩 수치는 높지 않다. 정하얀이면 몰라도 박혜영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괴물에게 발목이 잡힌 것도 아닌 상황. 어쩌면 던전 자체에 있는 함정에 걸려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확률이 낮다. 애초에 한 번 지나갔던 길. 만약 이곳에 함정이 있었다고 한다면 김현성이 언질을 줬을 것이다. 갑작스레 정하얀이 박혜영을 바라보던 눈빛이 떠오른다. ‘아니겠지.’ 아직 판단을 내리기에는 시기상조지만 정하얀 그녀가 이쪽과 떨어지길 원했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어떤 주문을 외웠는지는 이쪽이 알 수 없지만 내가 주문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옆쪽에서 다른 주문을 외웠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확률도 있다. 주문을 유지하고 앞쪽에 상황을 살피기에도 여유가 없었던 상황. 애초에 마력이 없는 박덕구야 정하얀이 무슨 짓을 하는지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김현성이야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 논외. 이런 생각을 하기는 싫지만 정하얀이 박혜영과 단둘이 있고 싶은 상황을 만들고 싶어 했다는 가정도 후보로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왜.’ 안 좋은 생각을 하기는 싫지만 자꾸만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박덕구와 함께 앞쪽으로 달려가던 그때, 던전의 입구를 발견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희미한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개….’ “덕구야, 더 빨리.”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요?” 단순한 가정이다. 그렇지만 희미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향은 내 가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 20 회귀자 사용설명서 020화 사고 “혜영 씨?” “네, 지혜 씨. 이야기 듣고 있어요.” “기영 씨한테 가보세요.” “네?” “아무래도 기영 씨 같은 분들에게 여러 가지로 편의를 봐드리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오늘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말이에요.” “무슨 뜻인지 저는 잘….” “그건 혜영 씨가 받아들이기 나름이에요.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시면 됩니다. 단순히 말 상대가 되어도 상관없고… 아! 몸종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 “마지막 말은 농담이에요. 그렇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수도…. 지금 이쪽 상황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거든요. 먹을 수 있는 자원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사냥을 나갈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되어 있다는 게 그렇죠. 주변 괴물들을 현성 씨가 주기적으로 정리해 준다고는 하나 언제 다시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게 현실이죠. 사냥을 나갔던 인원들이 죽어서 돌아오지 못할 확률도 생각해야 하고 앞으로 일어날 여러 가지 일에 대처해야 하지 않겠어요?” “…….” “능력 있는 남자와 접점을 만들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예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하나쯤 보험을 만들어 놓는 게 좋잖아요? 일이 잘 풀리면 혹시 모르죠. 당신도 정하얀 씨처럼 특별 취급을 받을 수도….” “무슨 뜻인지 알겠네요.” “아! 그리고 다음 사냥에는 하얀 씨를 데리고 나간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혜영 씨가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여러 가지로 말해주신 건 고맙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호의를 보여주시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글쎄요. 단순한 호의예요. 다만 일이 잘 풀리면 이쪽도 한번 신경 써 주셨으면 하고 말씀드린 거랍니다. 저는 도박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거든요.” * * * ‘나쁜 년.’ 이지혜 망할 년. 속으로는 계속해서 이지혜에게 욕을 내뱉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실수는 어차피 이쪽이 저지른 상황이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모든 것이 이쪽의 선택이었다. 이지혜의 말에 동의한 것도, 이기영을 따라 나선 것도 모두 모르모트 생쥐가 될 걸 예상하고 저지른 일들이었다. 처음에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고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 무리하게 창을 휘두른 게 큰 실수였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은 그것보다 더한 실수다. 계속해서 앞으로 들리고 있는 이기영과 박덕구가 보였다. 이기영은 끊임없이 입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었고 박덕구는 커다란 방패로 달려 들어오고 있는 괴물들을 밀어낸다. 아까의 공포 때문인지 다리가 후들 후들 떨려왔지만 주저앉을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죽을 거야.’ 다리를 멈추지 않으면 죽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옆을 살짝 바라보니 정하얀 역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병신….’ 어쩌다 운이 좋아 이기영의 눈에 띄었고 어쩌다 운이 좋아 이 자리에 합류하게 됐다. 저 여자처럼 운이 좋은 여자도 여기에 없을 것이다.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자신은 살아 돌아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 뻔할 뻔자. 자신이 정하얀을 위한 교보재가 되어준 것이라고 생각하자 입 안에서 쓴 맛이 느껴졌다. 애초에…. 어떻게 저렇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괴물 앞에서도 묵묵히 칼과 창을 내지르는 김현성, 이기영, 박덕구도 물론 대단하다. 자신 같은 경우에는 손의 감촉이나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심을 이기지 못했으니까. 조금 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우스워질 정도다. 그렇지만 정하얀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저 여자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나와 있는 게 처음이었고 괴물들을 직접 마주한 것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저 눈에 틀림없이 공포심 따위는 들어가 있지 않았다. 계속해서 혼잣말을 하는 모습에 혹시 미친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동요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어.’ 이 튜토리얼이라고 불리는 현실 속에서는 생존을 위해 힘을 키워야만 한다. 혼자 힘으로는 당연히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기영과 김현성을 이용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낙인이 찍힌다면 저들과 같은 힘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물론, 찬밥신세가 될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남은 방법은 하나. ‘어떻게든 비벼야 돼.’ 살아 돌아간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영과 끈을 만들어 놔야 한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달라붙어 있어야 했다. 물론, 옆에 있는 정하얀의 존재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리라. 누가 봐도 이 멍청한 여자보다는 이쪽이 조금 더 나으니까. 입술을 깨물고 계속해서 달리던 와중, 왼쪽으로 향하던 박덕구와 이기영.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언제부터?’ 분명히 그들의 뒷모습만 쫒으며 달리고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언제부터, 어째서,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건지 기억을 더듬어 봐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정하얀 역시 가로 막혀 있는 벽면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기영 씨랑 덕구 씨가 어디로 간 건지 알고 있어?” 조심스레 말을 걸어봤지만 묵묵부답. 애초에 물어본 게 실수였다. ‘머저리 같아가지고….’ 자신조차 그들을 순식간에 놓쳐 버렸다. 하물며 옆에 있는 맹한 년이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 이 여자 역시 자신만 따라오고 있었으리라. “게에에엑.” 조금 멀리서 들려온 괴물의 목소리. 순간적으로 몸이 덜덜 떨려온 것은 당연했다. 어디론가 향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쯤 기영 씨도 자신들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눈치챘을지 모른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버티거나 기다린다면 분명 우리들을 찾으러 올 것이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뭔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정하얀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음을 넘어 실소가 나올 지경. “빼앗으려고 하는, 내 적들에게, 지킬 수 있는, 힘을.” 누군가에게 기도라도 올리는 것 같았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런 여자에게 신경 쓰고 있는 이기영 녀석도 어떻게 생각한다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바람 칼날.” 쉬익- 하는 바람을 찢는 소리가 들려온다. “입 닥쳐, 이 머저리야. 괴물 목소리 안 들려?” 살짝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던 때였다. ‘어?’ 몸의 균형이 갑작스레 무너지기 시작한 것.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땅바닥으로 꼬꾸라진다. 동시에 왼쪽 다리에서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격통이 느껴졌다. 붉은 혈액에 몸이 떨어지며 철퍽 하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고 왼쪽 다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보인다. ‘무슨… 일이….’ 판단을 내리기 전에 입에서는 비명이 터졌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누, 누가! 누가 나 좀… 살, 살려주세요. 살, 살려줘!” “소, 소, 소용없을 거예요. 혜, 혜영 씨.” “내, 내 다리… 내 다리….” “마, 마력으로 음, 음성을 차단했거든요. 아마도 들리지 않을 거예요. 괴, 괴물들도 이곳에 올 염려도 없으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제발 도, 도와줘 제발….” “생, 생각보다 멍, 멍청하시네요. 혜영 씨는…. 오, 오빠한테 폐를 끼치고… 나들이도 엉, 엉망으로 만들었어요.” “입 닥쳐. 제기랄! 아파… 아프다고! 지금 내 다리 안 보여? 빨리 기영 씨를 데리고 오든 아니면….” 계속해서 화끈거리는 다리를 손으로 부여잡는다. 울컥울컥 피가 나오고 있는 바람에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겉옷을 벗어 황급하게 출혈 부위를 동여매기는 했지만 이게 제대로 된 응급처치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을 지경. 턱이 덜덜 떨렸다.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은 당연지사. 애초에 어째서 다리가 떨어져 나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은 이해하기도 싫다. 다만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파악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했다. 마치 불에 덴 것 같은 고통이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는 상황. 흘러나오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불명확하다. 살짝 위를 올려다봤을 때 눈에 비친 건 이쪽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 ‘어?’ 손에는 무언가 이질적인 힘으로 이루어진 것을 들고 있다. ‘바람의 칼날.’ 이라는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뇌리에 꽂힌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한쪽 손을 중심으로 녹색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을 분명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어째서? 왜? 어떻게 저 여자가?’라고 떠올리기도 전에 느껴진 것은 본능적인 공포. “아… 하, 하얀 씨….” “네. 혜영 씨.” “갑자기 왜, 왜 그러는 거야.” “저, 저도 이, 이러기는 싫었어요. 그, 그래도 어쩔 수 없었는걸요. 당신이 자꾸 우, 우리 오빠를 빼앗으려고 하니까. 어, 어쩔 수 없었던 거예요. 저도 좋아서 이, 이러는 게 아니라고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모르는 척하면 싫은데…. 혜영 씨가 먼, 먼저 우리 오빠한테 꼬, 꼬리쳤잖아요? 빼, 빼, 빼앗아 가려고 했잖아요? 빼앗아 간다고 말했잖아요?” ‘미… 쳤어.’ 제정신이 아니다. 어째서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당황스러웠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확실히 미쳤다. 조금이지만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모습은 무언가 광기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건… 그냥 한 소리였어.” “거짓말.” “정말이야….” “거짓말이에요. 제, 제가 얼마나 아팠는데요? 당, 당신이 오빠랑 이야기하고 오, 오빠랑 손을 잡고 오, 오빠한테 기댈 때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아마 당, 당신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거예요.” “나, 나도 이해할 수 있어. 으응… 이, 이해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나, 나 좀 도와줘. 다, 다시는 너, 너희 오빠 앞에는 얼씬도 안 할 테니까.” “미, 미안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역시 안, 안 되겠어요. 혜영 씨도 나처럼 아파야 해요. 오빠를 빼앗아가려고 한 건 정말로 용서할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이 살아 있으면 내, 내가 너무 불안하니까….”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뭔가 피슉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한쪽 팔이 잘려져 나간다. 엄청난 격통이 느껴졌다. 발버둥 쳐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단 생각만 들 뿐이었다. 기어서 나가겠다고 발버둥 치기는 했지만 공포심과 고통 때문에 그것 역시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살, 살려 줘. 제발… 제발 내가 다 잘못했어. 살려줘. 제발… 아으아아아.” “안, 안 된다고요. 그러면 마, 마음 약해지니까….” “제발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읍! 읍!” “마, 마법으로는 이런 것도 가능하데요. 시끄러우니까 입을 막아 놓는 게 좋겠어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뭔가 이질적인 힘이 목을 조르는 느낌. 눈에서 계속해서 눈물이 쏟아진다.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계속해서 발버둥 쳐보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읍… 읍! 읍!” “그, 그러니까 미, 미안해요.” 계속해서 꿈틀거렸던 그때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얀아?” “오, 오빠.”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 이기영이었다. # 21 회귀자 사용설명서 021화 다행이다 “하얀아?” “오, 오빠.” ‘이럴 줄 알았어….’ 눈으로 보이는 현장은 생각보다도 더욱 참혹했다. 조용히 웃고 있는 정하얀과 팔과 다리가 잘린 채로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박혜영. 꿈틀거리고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올 뻔했지만 억지로 다시 집어넣었다. 흔들리는 정하얀의 눈동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벽을 봤을 때 이상한 불안감이 감돌기는 했지만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다.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떤 식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 무척이나 애매하다. 일이 터지기 전에 말리는 것이 최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해 빠르게 정하얀을 찾아 나선 보람이 없다. ‘박덕구라도 있었다면.’ 녀석은 마력을 느끼지 못한다. 왼쪽 길을 둘러봐 달라고 말한 이후 혼자 이곳에 온 것이 통한의 실수다. “읍… 읍!” 그 와중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에 입이 막힌 채로 도움을 청하고는 박혜영의 모습은 기가 찰 지경이다. 정하얀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슬쩍 정하얀을 바라보니 혼이라도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녀 역시 사고가 정지된 것이다. 사실 나 역시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다.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도망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 옳은가.’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문제. 위험을 느낀 신체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돌리라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뇌는 그 기대를 배신했다. 이해득실을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하얀은 틀림없이 이쪽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그 감정은 이미 옛날 옛적에 뛰어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혜영을 죽이려고 한 이유 역시 어쩌면 나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틀림없이 관련이 있다. 어쩌면 평소에 박혜영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녀가 지금까지 보인 반응을 바탕으로 추론해 본다면 답은 하나다. 이곳에서 내가 정하얀을 기피하는 모습을 보이면. 어쩌면 그녀의 화살이 내게 향할 수도 있다. 내가 알고 있지도 않은 마법을 펑펑 써대는 미친 여자와 드잡이질을 하는 건 이쪽에서 사양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도 무척이나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지경. 결국에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혜, 혜영 씨는 어떻게… 된 거야?” “네?” 제발 내가 주는 기회를 배신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제발 정답을 말해줬으면 좋겠다. 더 이상 이쪽이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다. “팔이랑 다리가 어째서… 어떻게 된 거지?” 손으로 입을 막는 것도 잊지 않는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도 빼놓을 수 없다. 정하얀의 표정이 조금 밝아진 것은 바로 그때. 예상과는 다른 내 반응에 자신이 상상하는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일이 자신이 벌인 일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말할 수 있는 선택지는 아주 간단. 그녀라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도 자세히는 잘 모르겠어요. 오빠… 갑, 갑자기….” 떨리는 손과 발, 부들거리는 입술과 떨리는 목소리. 그녀는 공포에 질린 것이 아니다. 이 일을 자신이 벌였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하얀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간다. “눈을 떠 보니 그, 모두와 떨어져 있어서 어떻게 된, 된 건지는 자세히 모르겠어요. 제가 여기에 왔을 때는 혜영 씨가… 이, 이렇게.” ‘나쁘지 않아.’ 나쁜 변명은 아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정하얀의 손을 잡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지?” “오, 오빠.” 어딘가 다치는 것을 염려해야 하는 것은 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린다. 혹시라도 그녀가 외워놓은 주문이 없는지 자꾸만 체크하게 되는 것은 물론, 손에 쥔 창에도 힘이 들어간다. 그 와중에도 박혜영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정하얀을 바라보는 중이다. “읍! 읍! 읍! 읍읍! 읍!”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유추해 볼 수 있다. ‘도망쳐.’ 혹은. ‘살려주세요.’ 후자일 확률이 높지만 안타깝게도 이쪽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정하얀을 적대하거나 도외시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다. 그녀의 정신은 틀림없이 마모됐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망가졌다. 이쪽에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집착이 타인에 대한 분노, 살인으로 이어진 만큼, 내가 그녀를 부정했을 때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가 없다. 아마 그 분노가 여기까지 뻗쳐 나오리라. 다루기 힘든 폭탄이지만 이쪽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잘 써먹을 수 있는 인재와 성장 가능성이 적은 쓰레기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답은 뻔하다. 누가 봐도 정하얀 쪽으로 붙는 것이 합리적이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살릴 수 없어.’ 천천히 죽어가는 박혜영을 살릴 능력이 없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쓸 만한 패라고 하더라도 지금은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 그녀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이쪽 역시 필사적이다. “읍! 읍! 읍읍! 읍읍읍! 읍!” 살려달라고, 제발 버리지 말아달라고 이쪽을 간절히 보는 눈을 외면하기 어렵다. 나는 급하게 그녀에게 다가가 옷으로 상처 부위를 동여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정하얀의 표정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녀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박혜영은 죽는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을 거다.’ 이미 출혈이 너무 크다. 천천히 정신을 잃어가고 있고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다. “어쩌면 던전에 있는 함정이 발동됐을 가능성도 있어. 하얀이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마력으로 이루어진 벽을 통과하고 들어왔으니까.” 정하얀이 만들어낸 벽이다. “…….”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에서 마력이 느껴진 것을 생각해 보면 이 근처에 함정과 비슷한 장치가 있을 수도 있지. 그걸 고려하지 못했어.” 1층에 그딴 장치 따위는 없다. 확신할 수 있다. “아마 내가 주문을 외우던 과정에서 함정이 발동됐을 가능성이 클 거야. 지금 입을 막고 있는 마법 역시 우리가 알 수 없는 함정일 가능성이 크고… 다행히 주변에 다른 마력은 느껴지지 않지만….” 주문을 발동한 것은 정하얀이다. “네… 네….” “읍! 읍!” 정하얀을 위한 적당한 시나리오는 이미 완성됐다. 문제는 김현성에게도 이 개소리가 먹힐 것이냐에 대한 것. 이미 한 번 이곳을 와본 녀석은 1층에 함정 따위가 없다는 걸 이미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되도 않는 소리로 개소리를 지껄였다간 의심받는 것은 이쪽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박혜영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최 감이 오지 않는다. 녀석이 혜영 씨를 발견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에 대한 것. 함정에 당했다? 애초에 이곳에 함정은 없고 녀석은 그걸 알고 있다. 괴물에게 당했다? 절단면이 너무 깔끔하다. 누가 보더라도 지금 박혜영은 괴물에게 공격당한 것이 아니다. 몸 주변에서 희미하게 남아 있는 마력의 향이나 아직까지 입을 봉인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마법은 틀림없이 박혜영이 괴물이 아닌 이질적인 힘에 죽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김현성이라면 틀림없이, 틀림없이 눈치챌 수 있다. 계속해서 상처를 동여매고 있기는 하지만 이걸로 응급처치가 될 리가 만무. 기본적인 지혈법이나 응급처치도 배운 적이 없다. 뭐라도 하는 척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한계. ‘제기랄.’ 결국에는 꿈틀거리며 발버둥 치던 박혜영의 움직임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발견되면 안 돼.’ 김현성에게 그녀가 발견되면 안 된다. 최고의 방법은 괴물들이 그녀를 발견하는 것이지만 생각할 것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내키지 않아.’ 내키지가 않는다. 마지막 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으리라.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한 그녀가 눈에 비친다. 숨이 끊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주여. 뜨거운 화염을, 막아낼 수 있는 힘을.” 정하얀은 그런 내 모습을 뭔가 뒤숭숭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화염벽.” 없는 마력을 끄집어서 사용한 마법이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어지러워졌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마법을 유지하는데 마력을 집중했다. “오, 오빠.” “데려가기 힘들 거야. 이미 출혈이 너무 커. 함께 가려고 했다가는 우리까지 죽을 거야. 너마저 잃을 수는 없어…. 그러니 일단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돼. 시체를 수습해 줄 수는 없으니까. 최소한 이렇게라도 하는 게 맞아. 그래, 이렇게 하는 게 맞아.” 이미 숨이 끊어진 박혜영에게 달라붙기 시작한 불길은 그녀를 계속해서 좀먹었다. 넘실거리는 불꽃이 마치 파티라도 벌이는 듯한 모습이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게 된다. ‘최선의 선택이었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살짝 정하얀의 표정을 보니 뭔가 웃음을 참기 힘들어하는 느낌이었다. 입에서는 욕지기가 튀어 나왔지만 괴물이 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다. 나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다. 왠지 모르게 자괴감이 든다. 조금 더 불길을 지켜보고 싶지만 계속해서 이곳에 있는 건 자살행위다. 내가 만들어낸 불꽃 때문인지 정하얀이 만들어 놓은 마법벽이 허물어 졌다.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자 박덕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혜영 씨는 어디 갔소? 누님은 무사….” 굳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저으니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정하얀을 발견하고 나서는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박혜영이 죽었다라는 것을 암시하자 표정이 조금 굳어진 것이다. “주변에 다른 괴물들은?”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김현성 형씨가 녀석들을 끌고 반대쪽으로 향한 것 같은데… 재빠른 양반이니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겠지.” “다행이네.” 정말로 다행이다. 녀석이 그만큼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건 정말 다행이다. “그나저나 어, 어떻게 된 거요?” “설명하자면 길다. 나중에 설명해 줄게. 조금 말하기 힘든 이야기이기도 하고….” “알, 알겠소 형님.” 박덕구에게는 대충 설명해도 상관없으리라. 정하얀의 이야기는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달리기 시작하니 이쪽으로 달려드는 녀석들이 몇몇 보였다. “형님 괜찮은 거요?” “마력이 부족해.” “너무 무리하지 마쇼.” 박덕구가 녀석들을 밀어내며 달리자 어느 정도 그 지점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폐가 터질 것 같은 느낌. 박덕구나 정하얀도 별반 다르지 않다. 모두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솔직히 쓰러질 것 같은 심정이다. 그래도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일을 끝까지 마무리해야 한다. 조금은 어두운 표정으로 뒤쪽을 바라보자 정하얀이 이쪽을 향해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역, 역시… 슬, 슬프세요?” 불안해하고 있는 듯한 표정과 질이다. 물론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잘 알고 있다. “네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 목소리에 정하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 오, 오빠.” “정말로 무사해서 다행이다.” 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 22 회귀자 사용설명서 022화 설계 “김현성, 그 형씨는 무사한지 모르겠소.” “무사할 거야.” 놈들의 포위망을 어느 정도 뚫어내자 박덕구가 툭하니 말을 뱉었다. 조금은 걱정하는 듯한 눈치. 박혜영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리를 면전에서 들으니 기분이 좀 싱숭생숭한 것 같았다. 김현성이 혼자서 다른 괴물들은 전부 끌고 간 거나 마찬가지인 만큼 녀석 역시 박혜영처럼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수세에 몰렸다고 한들 김현성이 괴물들에게 잡아 뜯기는 장면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제대로 움직이면 눈으로 따라가기조차 힘들 정도니 괴물들 여럿 따돌리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아마 지금쯤 그 양반도 그쪽 지역을 빠져나와 나와 같은 것을 걱정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꽤나 공들여서 나간 사냥에서 한 명이 죽어서 돌아왔다. 아마 쉼터에 있는 이들이 조금 더 웅크리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원정은 무조건 성공적으로 끝마쳤어야 하는 원정이었다. 물론 김현성은 아직 박혜영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겠지만 사고가 터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플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은 아쉽게 됐소. 박혜영 그 여자랑 별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려고 한 것 같기는 한데….” “하마터면 전부 다 뒈질 뻔했으니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야.” “그,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은 살아 돌아왔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돼. 어쩔 수 없었다. 이쪽의 말을 듣지 않고 설치다가 어그로가 끌린 것도 그쪽 탓이었고 주변의 괴물 새끼들한테 전부 다 들으라는 듯 소리를 지른 것도 그쪽이었어. 냉정하게 말해서 그 여자 대신 너나 하얀이가 죽었다면 나는 그 여자를 용서하지 못했을 거다.” ‘용서하지 못한다’라는 정도로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직접 그 여자를 죽이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박덕구와 정하얀은 소중한 패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정하얀은 물론이고 박덕구도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감동받은 것 같은 표정의 정하얀과 조금은 쑥스러워하는 것 같은 느낌의 박덕구. “아….” “뭐, 그,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을 거요.” 사실 박혜영을 죽인 건 정하얀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김현성을 제외하면 지금 내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두 명이다. 내구와 체력이 높은 고기방패 박덕구와 마법사로서 측정하기 힘든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정하얀. 둘 다 나에게 어느 정도 의지하고 있다는 단점은 있지만 어떻게 본다면 장점이기도 하다. 그중 한 명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폭탄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녀의 성향상 이쪽의 힘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건 그렇고 쉼터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어떻게 설명할 거요?” “설명하고 자시고도 없어. 실수가 있었고 한 명이 죽었다. 그게 전부야. 이 정도에 겁먹는다면….” “겁먹는다면?” “아무리 이쪽이 도움을 주고 싶다고 해도 결국에는 죽을 거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튜토리얼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해야 돼. 본게임에 들어간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위험하다고 가정하는 게 맞아.” 가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튜토리얼이라는 것을 까먹을 때가 많다. 자칫 잘못하면 뒈진다는 긴장감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본게임에 들어간다면 김현성도 어떻게 하지 못할 인간들이 득실거릴 수도 있고 지금 상대하고 있는 괴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새끼들이 널려 있을지도 모른다. ‘안주하면 안 돼.’ 쉼터에 있는 놈들처럼 안주하면 죽는다. 그나마 생각이 있는 것 같은 이지혜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병신들. 어떻게 쓸 만한 녀석이 단 한 명도 없을 수 있는지 당황스러웠다. 어째서 김현성이 이런 놈들에게 집착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 지난 생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 녀석의 과거까지 파헤치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오늘은 이쪽에서 자고 간다.” “쉼터에는 들어가지 않는 거요?” “너무 멀어.”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끄응. 형님은 어떻게 길을 그렇게 잘 외우는지 모르겠소.” “이 정도는 보통이야. 애초에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남기기도 했고.” “그새 표식까지 남겼소?” ‘이 자식….’ 애초에 박덕구에게 머리 쓰는 건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 정도면 뇌까지 근육으로 차 있는 것이 틀림없다. 잠깐 동안 내가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봤는지 박덕구가 움찔거린 것을 보고 정하얀이 황급하게 말을 이었다. “여, 여기요.” 창으로 살짝 긁어낸 것 같은 상처. 벽에 아주 작게 만들어진 상처가 확실히 시야에 비친다. “누님도 알고 있었구만.” “주변을 조금 더 신경 쓰는 게 좋아. 만약에 아까처럼 너와 내가 떨어져야 되는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말끝을 항상 흐리는 녀석을 보니 조금은 당황스러워진다. 괜스레 민망했는지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잡는 꼴이 꽤나 가관이다. 이곳에서 녀석에게 잔소리를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나 역시 피곤해진 몸으로 살짝 주저앉았다. 정하얀은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라도 되는 것처럼 이쪽에 찰싹 달라붙어 온다. 그 모습을 본 박덕구의 표정이 뭔가 음흉해 보인다. “큼큼…. 형님, 그럼 나는 잠깐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소.” “그럴 필요가 있나.” 웬만하면 박덕구가 자리를 떠나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다. “혹시 주변에 이쪽이 발견하지 못한 괴물 새끼가 있는지 누가 알겠소.” 틀린 말은 아니다. “거, 형님은 마력인지 뭔지를 많이 사용하기도 했고… 누님이 조금 보살펴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 맡, 맡겨주세요, 덕구 씨.” “길 잃어버리지 마라.” “주변만 살짝 둘러보는 정도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자리를 떠나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정하얀과 단둘만 남았다는 사실이 걱정된다. 대뜸 이쪽에 마법을 날릴 정도로 미치진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까 전에 봤던 장면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았기 때문이다. 히죽거리는 정하얀과 팔다리가 잘린 채로 꿈틀거리던 박혜영. 무섭다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상태창.” 괜스레 상태창을 한 번 외쳐보자 자연스럽게 시야에 내 정보가 비쳤다. [플레이어 이기영의 상태창과 재능 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이기영]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 겠네요.] [나이-25] [성향-용의주도한 전략가] [직업-마법사] [직업효과-기초 마법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1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11/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14/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25/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12/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23/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05/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장비-없음] [특성-마음의 눈] [총평-개미 쥐꼬리만큼은 성장하셨군요. 체력과 마력, 지력을 중심으로 많은 성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머리 쓸 일이 많았나 봐요? 특히나 높은 성장치를 기록한 지력이 눈에 들어옵니다. 너무 자만하지 말도록 하세요. 아직까지 플레이어 이기영의 능력치는 몬스터들의 분비물보다 못한 수준이니까요.] 도대체 이 총평은 누구의 의견을 바탕으로 작성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능력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겠지만 저 총평만큼은 어떻게 조치를 취하고 싶을 정도. 그렇지만 능력치의 성장에 조금은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마력이 2가 올라간 것이 눈에 띈다. 확실히 머리 쓸 일이 많기는 했는지 지력이 다른 능력치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아직까지 지력 스탯의 정확한 존재 유무를 찾을 수 없는 만큼 뭐가 좋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기본적인 사고력은 이전보다 조금 나아졌을 것이다. ‘행운.’ 미지에 쌓여 있는 행운 수치 역시 마찬가지로 두 단계나 올라간 상황. 정하얀의 상태가 이렇게 된 것이 이쪽에 그리 나쁘게 작용하지는 않았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반가워졌다. ‘나쁘지 않아.’ 재능 최하위를 달려가고 있는 쓰레기치고는 꽤나 좋은 성장치. 이 정도라면 다른 일반인들에 비해서도 그렇게 밀린다고 할 수는 없다. “능력치… 오르셨나 봐요?” “응. 하얀이는 뭔가 달라진 게 있어?” “아, 아뇨. 아직은… 그래도 마력 수치가 조금 더 올라갔어요. 체력이나 근력 같은 것도….” “그거 다행이네.” [플레이어 정하얀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정하얀]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1] [성향-순수한 옹호자] [직업-마법사-일반 등급] [능력치] [근력-11/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민첩-11/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체력-15/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23/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14/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행운-23/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18/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장비-없음] [특성-마법사가 되는 방법-영웅 등급] [총평-조심하세요. 나이스 보트.] 혹시나 싶어 정하얀의 상태창을 열어봤지만 이전과 크게 달라진 건 찾을 수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은 마력이 3이나 올라갔다는 것. 순수한 옹호자인 성향도 아직은 그대로. 지금의 상태도 확실히 순수하다면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니 불만은 없지만 조금 더 이쪽이 알아보기 쉽게 표기해 줬으면 싶었다. ‘총평은 또 뭐야.’ 왠지 모르게 불길하게 들려오는 울림이다. “전, 전부 오, 오, 오빠 덕분이에요.” “아니. 사실 내가 크게 도와준 건 없어.” 그녀의 능력치의 성장을 도와주는 것에 내가 크게 기여한 점은 없다. 내가 조용히 웃자 정하얀 역시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조금 무섭게 보이는 웃음이기도 했지만 티를 낼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살짝 머리를 쓰다듬자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박혜영의 팔다리를 잘라내며 미친년처럼 웃고 있었던 모습은 이미 그 자리에 없다. 한 번 더 그녀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밖에 없는 상황. 현재 정하얀은 내가 제일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이다. 컨트롤 불가능한 폭탄을 컨트롤이 가능하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선택지는 두 가지.’ 첫 번째. 아주 천천히 밀어낸다. 그녀를 내 품에서 밀어낸다는 의미가 아니다. 애인 이상의 호감도에서 오빠와 여동생 같은 포지션으로 밀어낸다. 남녀 간의 애정이 아닌 남매의 애정으로 강도를 낮춘다. 질투심 때문에 나를 마법으로 절단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도 하고 합리적이기도 하다. 두 번째. 빠르게 이쪽으로 끌어 들인다. 두 번째 선택지가 바로 남녀 간의 애정이다. 이쪽을 신뢰하고 믿고 따르는 것은 물론, 이쪽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를 수 있을 정도의 사이로 발전시킨다. 기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지금 정하얀의 상태로 봤을 때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실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첫 번째 선택지.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아직 관계를 개선할 여지는 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다시금 머리를 쓰다듬자 자기 머리 위에 올린 내 손을 잡았다. 솔직히 조금 깜짝 놀랐다. “큼… 큼….” 순찰을 나갔던 박덕구가 돌아온 것이다. “거, 분위기 좋은 것 같구만.” “네? 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조금 지나치게 당황하는 정하얀. 박덕구는 아까처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정하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형님을 돌봐주라고 했던 것 같은데 누님도 조금 엉큼한 면이 있는 거 아니요?”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실실 웃고 있는 박덕구가 뭔가 부담스러웠는지 정하얀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구석진 곳으로 슬쩍 향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박덕구는 또 실실 웃으며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 않았다. “거, 내가 너무 일찍 온 거요?” “무슨 말이야.” “거, 누님이랑 잘되고 있었던 거 아니요?” 이 자식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생각해 보니 놈의 나이는 23살. 정하얀의 나이는 21살이다. 어째서 정하얀을 누님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을 지경. 누가 봐도 정하얀은 박덕구보다 어려 보인다. “정하얀이 너보다 어리다는 건 알고 있지?” “물론이요. 그렇다고는 해도 형님의 여자가 될 사람을 동생 취급하는 아우가 어디 있겠소.” “무슨….” ‘개소리야’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러고 보니 뭔가가 이상하긴 이상했다. 애초에 이쪽이 정하얀에게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애정관계가 아닌 유대관계다. 그녀의 주변 환경이 그녀를 이상한 방향으로 이끈 것은 사실이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맞춰지지 않은 퍼즐 조각이 있었다. 그 마지막 조각이 맞추어진 기분이다. 있었던 것이다. ‘제길….’ 사랑의 조력자가. “나중에 잘되면 잊지 마쇼. 사실 말은 안 했지만 형님이 누님을 잘 챙겨달라는 말을 한 뒤로 이쪽에서도 은근슬쩍 푸시해 주고 있었소.” “뭐… 뭘 어떻게….” “큼큼… 뭐 잘 어울린다든가 형님이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흘리기도 하고…. 누님한테 은근슬쩍 떠보기도 하고 그런 식이었는데 너무 많아서 잘 기억도 나지 않은데… 흐흐…. 너무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 “취향이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큼! 형님이 그렇다는데 동생인 내가 도와주는 게 맞지! 내가 볼 때는 고지가 눈앞에 있는 것 같소. 사실 내가 생긴 건 이렇게 생겼어도 강원도 연애 박사 박덕구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덕구는 입꼬리를 올리며 자기자랑을 쏟아냈다.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온다. 첫 번째 선택지니 두 번째 선택지니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박덕구 이 돼지 새끼가….’ 완벽에 가까운 외통수. 뇌가 근육으로 꽉 찬 돼지의 설계를 막을 수 있는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 23 회귀자 사용설명서 023화 계산적인 살인자(1) 애초에 내게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박덕구의 설계대로라면 정하얀은 첫 번째 선택지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쪽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정하얀은 혼자 두 번째 선택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확률이 높다. “크어어엉.” 옆쪽에서 코를 골고 있는 박덕구를 보자 괜스레 심사가 뒤틀렸다. 애초에 이곳에서 연애를 할 생각이 있을 리가 만무. 언제 죽어 나갈지 모르는 곳에서 그런 감정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이성적이지 않다. 관계를 가지는 것과는 아예 다른 이야기. 언제 내 신체를 절단할지 모르는 여자와 지금보다 더 가까워지는 것은 사양이었지만…. ‘해야 돼.’ 아이러니하게도 사지가 찢겨져 죽는 엔딩을 피하는 방법은 그녀와 더 가까워지는 것뿐이다. 가장 위험한 사람임과 동시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도박은 즐기지 않지만 필요하다면 주사위를 던질 준비는 되어 있다. 인정하기 싫은 현실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까지 코를 골고 있는 박덕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일어나.” “끄으으으응….” “일어나라, 덕구야.” “끄으으응… 뭐요. 벌써 아침이요?” “조금 일찍 출발할 거야.” “어이, 누님. 일어나쇼.” “…….” “조금 깊게 잠든 모양인데… 누님, 일어날 시간이요.” “…….” “끄응… 거 아무래도 우리 누님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된 것 같은데… 이거, 이거 왕자님의 입맞춤이 필요한 거 아니요?” ‘개자식.’ 이쪽의 속도 모르고 약 올리는 듯한 말투다. 입에 화염구를 먹여주고 싶을 지경. 마침 마력도 대부분 회복된 참이다. 별것 아닌 대사가 왜 이렇게 나를 사지로 몰아넣는 것처럼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정하얀을 깨워야 하는 만큼 나는 살짝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하얀아.” “…….” “하얀아, 일어나야지.” “으응….” 살짝 머리를 쓰다듬자 그제야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아직은 잠이 덜 깬 것 같은 느낌.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며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지만 왠지 저런 모습조차 조금은 무섭게 느껴졌다. “아… 앗. 네, 오빠.” “곧바로 쉼터로 갈 거야.” “알겠소.” “간단하게 먹고 출발할 수 있도록 하자.” “큼. 준비는 맡겨주쇼.” 정말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움직일 준비를 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누군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모두가 각자의 방법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을 보니 제법 맞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김현성, 그 형씨도 형씨지만 쉼터도 괜찮은지 모르겠소. 조금 시간을 오래 비운 것 같은데.” “아마도 괜찮을 거다. 그곳에 있는 놈들이 괜히 헛바람이 불어서 지들끼리 사냥을 나가거나 하지만 않으면….” “제대로 할 수 있다면 더 좋은 거 아니요? 싸울 수 있는 인원은 어차피 더 늘어나야 되니까….” 물론 제대로 사냥만 할 수 있다면 이쪽에서도 굳이 막을 이유는 없다. “지금까지 겁을 집어먹고 숨어 있던 놈들이 뭔가 심경의 변화가 생긴다고 해서 갑자기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 지들끼리 뭉쳐서 사냥을 해보겠다고 나갈 확률도 낮을뿐더러, 만약에 나갔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못하면 전부 뒈졌을 거다. 차라리 그게 낫지.” “뭔 소리요?” “박혜영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야 한다는 거야.” 쉼터 안에 있는 이들끼리 사냥을 나갈 확률은 낮다. 그러나 자체적으로 파티를 만들어 밖에 나가서 괴물들을 찾아 나섰다고 한다면 이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있기는 있다. 물론, 내 판단이 전부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패닉에 빠져서 소리를 지르고 주변에 괴물들을 전부 몰아온 이후에 쉼터로 복귀하는 게 최악의 시나리오지.” “…….” “…….” “아마 쉼터가 위험해진다고 판단하는 놈들도 없을 거다. 전부 다 자기 살기 바쁠 테니까. 공포에 질린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거든…. 결국 물량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한 괴물들을 막지 못한 채 입구가 뚫리고 거기서 쉼터는 끝.” “거,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게 들리오.” 정말로 끔찍하다. “현성 씨가 멀리 돌아가라고 지시했던 이유도 바로 그거일 거야. 혹시 이쪽을 아직까지 쫒아오고 있는 괴물 새끼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거, 형님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똑똑한 것 같소.” 나는 절대로 똑똑한 게 아니다. “그런 건 아니야.” 다만 항상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고 행동할 뿐이다.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괜스레 불안해진다. 앞서 말했던 상황이 정말로 일어났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사실 이쪽이야 쉼터에 있는 인간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지만 그곳에 두고 온 자원이나 재원이 없어지는 것은 사양이기 때문이다. 기껏 안정화 해놓은 장소. 던전 공략의 길이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 만큼 쉼터는 아직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장소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길을 걷자 묘하게 조용한 것 같은 장내. 이런 침묵은 조금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박덕구와 정하얀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 얼마 지나지 않아 쉼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꽉 막혀 있는 입구. 이쪽을 발견했는지 이지혜가 돌무더기를 치우며 밖으로 나오는 게 눈에 보였다. 얼마나 단단하게 쌓아뒀는지 한참이나 지나서야 나오는 모습.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던 이지혜는 평소대로의 미소를 보내오며 이쪽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기영 오빠, 덕구 오빠 오셨어요? 혜영 씨랑 현성 씨는….” “박혜영은 죽었고 현성 씨는 곧 돌아올 겁니다.” “아, 그렇군요.” 조금은 담담하게 꺼낸 말에 잠깐 동안 눈을 감은 이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의 말을 이었다. “어쩌다가….” “설명하자면 깁니다. 그보다 그동안 쉼터에 별 일은 없었습니까? “으음… 따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편하게 이야기를 하자는 뜻일 것이 분명. 이지혜의 표정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뭔가 일이 있기는 있는 것이다. 어째서 항상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알 수 없다. 살짝 뒤를 돌아 박덕구를 바라보자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애초에 녀석은 나중에 나에게 듣고 싶어할 테니 상관없겠지만 신경 쓰이는 것은 정하얀의 반응이다. 그러나 이지혜와 대화하는 것은 나로서도 필요한 일인 만큼 정하얀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 주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먼저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릴래? 금방 갈게.” “아! 네… 네. 오빠.” 혹시나 이지혜도 찢어 죽이는 것이 아닌가 걱정됐던 탓이다. 쉼터 안으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슬쩍슬쩍 뒤를 돌아보며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박혜영 때를 떠올리게 했다. 둘이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야 이지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박혜영은 어쩌다가 죽은 거예요?” “뒈질 만했어. 괴물 새끼들이 널려 있는 곳에서 소리를 질렀지. 김현성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고… 자세한 게 궁금해?” “아니요. 대충 무슨 일이 있었을지 예상이 가요.” 살짝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하얀이 떠나간 길을 바라보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이쪽 사정을 대충 눈치챈 것 같은 느낌. 단순한 추론일 뿐이겠지만 내 생각보다 이지혜의 눈치가 조금 더 빠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야기는 빨리 끝내야겠네요.” “무슨 일이 있었지?” “유석우를 포함한 몇몇이 밖으로 나갔어요.” ‘이럴 줄 알았어.’ “언제?” “어제 아침.” “너.” “저도 알고 있어요. 함부로 나가게 두면 안 된다는 거.” “그런데… 왜.” “사실은 기영 오빠가 현성 오빠와 함께 밖으로 나간 직후부터 사냥을 나가겠다는 의견을 지속적으로 이쪽에 말해왔어요. 기영 오빠가 보여준 마법을 보고 다른 마음을 먹은 건지 아니면 자기가 처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맞는 남자 몇몇과 함께 사냥을 나간다고 하더라고요? 병신들…. 처음에는 당연히 기영 씨들이 돌아온 이후에 가는 게 합리적일 거라고 설득했지만….” “…….” “저는 힘없는 여자잖아요?” 무슨 상황인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마법을 사람들 앞에서 보인 게 악영향을 끼친 모양이다. 애초에 유석우는 정하얀과 있었던 트러블 때문에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입지가 줄어든 만큼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번쯤 해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힘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물론, 자신도 우리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해왔을 것이다. 관리자라고 생각되는 이지혜를 제외하면 나와 김현성, 박덕구의 권력은 이곳에서 절대적이었으니까. 나는 잠깐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걸 막는 게 네 일 아니었어?” “그나마 최대한 막은 거예요. 기영 오빠가 돌아오는 게 조금 늦으니 사람들이 불안해하기도 하고… 또 구조대를 보내겠다고 말하는 걸 이쪽에서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구조대는 개뿔…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잡것들이…. 그래서 입구를 막아 놓은 거야?” “네. 같이 죽을 수는 없잖아요?” 입구가 아예 막아져 있는 것은 그런 연유이리라. 만약 유석우를 비롯한 자칭 구조대들이 괴물들에게 쫓기다 쉼터도 도움을 요청할 경우를 생각한 것이다. 입구를 막고 열어주지 않은 상황까지 생각한 것을 보니 이지혜 역시 나름대로 쉼터를 지킬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고만 치는 멍청한 새끼는 그냥 콱 죽어버렸으면 싶었는데… 엉뚱한 사람이 죽어서 돌아왔네요. 어떡하나… 사람들이 무서워할 텐데…. 싸울 수 있는 사람, 아직도 더 필요해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사실 이 던전을 공략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김현성이다. 전투가 가능하다고 보는 인원이 지금보다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내가 아니라 김현성. 아래층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무조건 인원을 확충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는 어때?” 마음의 눈에서도 쓰레기로 평가하고 있었던 이지혜지만 박혜영 같은 년보다는 그나마 낫다. 창을 멋대로 내지르는 일도 없을 테고 중간에 소리를 지르는 일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박덕구의 뒤에서 침착하게 자기 일을 해줄 확률이 높다. “저는 사양이에요.” “…….” “무섭기도 하고 괜한 일에 휘말려 죽는 건 사양이거든요. 기영 오빠가 보여준 힘은 확실히 신기하고… 또 탐이 나기는 하지만 괜한 욕심은 객사하는 지름길이에요.” “…….”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고 하면 되겠어요? 뱁새는 뱁새 나름대로 사는 방법이 있는 거랍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다. 왠지 모르게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 같아 입맛이 조금 썼지만 이지혜의 생각은 합리적이기도 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사는 것보다는… 능력 있는 남자 만나서 평탄하게 사는 게 제일 아니겠어요?” 어디에선가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그때였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니 앞 쪽에서 몇몇 인형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유석우?’ 앞에서 걸어오는 것은 틀림없이 유석우. 그러나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세 명의 인형은 그간 쉼터에서 본 적이 없는 인간들이었다. “제일 죽었으면 하는 놈만 살아 돌아왔나 보네요. 그것도 혹을 달고….” # 24 회귀자 사용설명서 024화 계산적인 살인자(2) “몇 명이서 나갔지?” “일곱 명이에요.” 앞장서서 이쪽에 걸어오고 있는 것은 분명히 유석우였다. 아직은 먼 거리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확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유석우의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3명은 적어도 이곳에서는 처음 보는 이들이다. 유석우를 포함한 일곱 명의 인원 중에 여섯 명이 돌아오지 않았고 세 명의 다른 인물들이 쉼터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사냥을 나간 유석우 파티에게 무슨 일이 생겼고 지금 걸어오고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그 과정에서. ‘유석우를 빼고 전부 다 뒈진 건가.’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을 것이다. 걸어오고 있는 이들이 입고 있는 장비만 봐도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다. 한 명은 작은 방패와 검을 들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창을, 또 나머지 한 명은 활을 들고 있다. 풍기는 분위기나 상처를 감아놓은 붕대를 봤을 때 이미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르고 온 이들이 확실해 보였다. ‘마음의 눈.’ [플레이어 정진호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정진호] [칭호-없음] [나이-29] [성향-계산적인 살인자] [직업-마검사-희귀 등급] [능력치] [근력-25/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민첩-23/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체력-24/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지력-20/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내구-23/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행운-15/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마력-08/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특성-없음] [총평-훌륭한 재능, 크게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뛰어난 것은 물론 어디 하나 모난 곳이 없습니다. 아마 본인이 충실하게 성장에 임한다면 상위 서열로 충분히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향이 참 마음에 드는군요. 기왕이면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플레이어 이기영에게는 너무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요.] ‘마검사?’ 대충 능력치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 완벽하게 밸런스가 잡혀 있는 스탯,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마력의 존재와 직업 이었다. ‘마력?’ 마법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김현성을 제외하고는 또 처음이다. 희귀 등급 마검사라는 것이 계속해서 눈에 밟힌다. 보유하고 있는 마력은 8로 심지어 나보다도 높다.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강자로 올라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정보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녀석의 성향이었다. 계산적인 살인자. 지금까지 많은 성향을 봐왔지만 저런 성향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옆에 있는 두 녀석도 별반 다르지 않다. 스탯 자체는 나보다 낫거나 박덕구보다 살짝 아래인 정도지만 전체적으로 나쁜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녀석들의 성향 역시 선의의 중재자나 순수한 옹호자처럼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네요. 대충 봐도 싸울 수 있는 사람들처럼 보이는데… 잘된 건지 몰라.” “들어가서 박덕구와 정하얀 좀 불러와.” “네?” “빨리.” 반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지 이지혜 역시 표정을 굳히고 쉼터 안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조금씩 뒷걸음질 치기는 마찬가지. “주여, 나, 바라노니, 내 목소리에, 답해, 적들을 태울, 힘을 내려, 주시옵소서.” 아직까지 딱히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애초에 느긋하게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순수한 옹호자라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정하얀처럼 저들도 성향과 실제 행동이 불일치할 가능성도 존재 하지만 일단은 준비는 마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기랄.’ 마력으로 탑을 쌓았고 주문도 이미 외웠다. 마침표만 찍으면 되는 상황에서 나는 입으로 튀어나오려는 주문을 꾹 눌러 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진호라고 합니다.” 저쪽에서 인사를 던져왔기 때문이다. 살짝 이쪽으로 한 발자국 걸어오는 것을 보고는 두 발자국 물러섰다. ‘범위.’ 20대를 넘나드는 민첩 수치가 얼마나 빠른지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 사실 이 정도 거리도 위험하다. 정진호의 옆에 있는 두 명은 내가 최대한 억누르고 있는 마력에 대해서 눈치채지 못하고 있겠지만 마력을 보유하고 있는 정진호는 지금 내가 주문을 눌러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놈의 인사에 나 역시 계속해서 거리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아! 석우 씨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네?” “이번에 마법사로 전직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손에서 불꽃을 일으키신다고… 꼭 한 번 보고 싶군요.” ‘유석우 거지같은 놈. 쓸모없는 자식.’ “네.” “정말로 신기하더군요. 이곳이 저희에게 새로운 힘을 내리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마법사는 또 처음이라… 아!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까딱 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경계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녀석들이 들고 있는 검과 창, 활이 나를 짜증나게 만든다. 슬쩍 곁눈질로 유석우를 바라보니 조금 긴장한 것 같은 표정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떤 부분에서 긴장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긍정적인 신호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굉장한 곳이군요. 생존자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설마 했습니다. 이런 장소라면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생존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요.” “저도 처음에 이곳을 봤을 때는 깜짝 놀랐습니다. 전부 현성 씨의 덕이죠. 그보다 어쩌다가….” “아. 사실 근처에서 석우 씨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이곳에 있는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인 걸 발견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발견하는 게 너무 늦어 나머지 사람들은 구하지 못했지만… 석우 씨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죠.” 다시 한번 유석우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짜….’ 데려와도 하필이면 이딴 새끼들을 데려왔는지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사람 자체에게서 느껴지는 불길함. 그런 불길함이 녀석에게 있다. 어쩌면 행운 스탯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내 몸에 있는 감각이 녀석에게는 가까이 가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니까. “그거 다행이군요. 안 그래도 석우 씨가 사냥을 나갔다는 소리에 조금 걱정되던 참이었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어쩔 수 없었지만….” “조금만 더 빨리 발견했더라면 모두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아쉽더군요.”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을 때 정하얀과 박덕구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요? 형님.” “새로 오신 분들이다.” 그제야 조금 긴장이 풀린다. 묵직한 방패를 들고 밖으로 나서는 녀석의 모습은 확실히 겉으로 보기에도 위협적이다. 물론, 스탯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다. 압도적인 내구 수치와 체력 수치는 아마 정진호로도 뚫어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지혜에게 언질을 받았는지 허접한 가죽갑옷을 입고 있는 채로 앞에 있는 세 명에게 적의를 보이는 모습은 꽤나 듬직하다. 정하얀 역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는 모습. 아직까지 커다란 마력은 느껴지지 않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 “환영 받을 줄 알았는데… 조금은 의외로군요.”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 티를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 터라…. 저도 모르게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면 경계하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무례했다면….” “아닙니다, 기영 씨. 저희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희도 식량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습격당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아.” “질이 나쁜 사람들끼리 무리를 지어 이 근방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더군요. 저희는 가까스로 도망치기는 했습니다만 다른 피해자가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도 간살 당한 여자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을 저지른 것이 너희는 아닌지 묻고 싶다. 내 특성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녀석이 정말로 사람을 죽이고 다녔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정진호는 틀림없이 어떤 식으로도 문제를 일으킬 여지가 있다. 정상인의 성향이 계산적인 살인자라는 건 다분히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으니까. “정말로 참혹해 보였습니다. 이미 괴물이 시체를 반쯤 뜯어먹어 제대로 시체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몸 여기저기에 괴물들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흔적들이 보이더군요. 틀림없이 칼로 낸 상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도망치려고 했는지 등에는 화살이 박혀 있던 흔적도 있었습니다. 저항하려고 한 흔적도 보였고…. 아마 그 질이 나쁜 녀석들 중에 궁수가 있었을 겁니다. 검에 긁힌 자상이 있었으니 아마도… 검을 들고 다니는 놈들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죠. 혹시 본 적은 없으십니까?” “네.” 녀석의 옆에 조용히 활을 들고 있는 녀석이 자연스럽게 시야에 비친다. 저런 말을 꺼내는 의도를 파악할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묘한 긴장감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 ‘해보자는 건가.’ 정말로 해보자는 건지 궁금해졌다. 내 표정을 봤는지 박덕구 역시 슬그머니 방패를 빼 들고 앞으로 나가는 중. 나와 정하얀의 앞을 봐주기 위해 몸을 움직인 것이다. 박덕구가 보이지 않는 건지 궁금할 지경. 아마도 녀석은…. ‘자신이 있나?’ 그럴 확률이 높다. 모든 게 내 뇌내망상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놈은 분명히 이쪽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진호의 팔의 위치가 자꾸만 허리춤으로 가려는 게 신경 쓰인다. 아마 박덕구 역시 놈의 팔을 신경 쓰고 있으리라. “어쩌면 기영 씨들이 가지 않는 부근에서 활동하는 이들일 수도 있겠군요.” “아마도 그렇겠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습니다.” 자신의 허리를 만지고 있었던 놈의 손이 검의 손잡이로 향하려고 했던 그때. 나는 곧바로 주문을 내뱉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내뱉을 뻔했다.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화염구를 소환했을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검의 손잡이로 향하던 놈의 손이 슬쩍 하의 쪽으로 향한다. 바지에 자신의 손을 슥슥 닦은 이후에 이쪽의 악수를 해오는 모습은 꽤나 가관.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의 등장에 놈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나는 외우고 있는 주문을 캔슬한 이후에 녀석의 손을 맞잡았다. “아무튼 간에 반갑습니다, 기영 씨.” “저도 반갑습니다. 진호 씨.” 살짝 고개를 돌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을 바라본다. 며칠 동안 꽤나 고생 좀 했을 텐데 표정에는 피곤한 기색이 별로 없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유석우가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무사하셨군요. 설명하자면 조금 깁니다. 여기는 석우 씨가 데리고 온….” “처음 뵙겠습니다. 정진호라고 합니다.” 뭔가 표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그때. 정진호를 바라보고 있는 김현성의 표정이 조금 딱딱하게 굳어 있다. 뭔가의 데자뷰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표정은 다르지만 김현성이 처음 정하얀을 만났을 때와 무척이나 유사하다. ‘알고 있나?’ 김현성은 미래의 정진호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딱딱하게 굳어 있는 표정을 넘어 분노를 보내고 있는 듯한 눈빛에는 조금의 확신을 담을 수 있었다. 나조차도 몸이 덜덜 떨려왔으니까. ‘김현성은… 왜 저러는 거야.’ 내가 알고 있는 김현성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 25 회귀자 사용설명서 025화 계산적인 살인자(3) ‘저놈 왜 저러는 거야.’ 내가 알고 있는 김현성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애초에 김현성은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나마 감정을 크게 들어냈던 것은 정하얀을 처음 발견했을 때, 그마저도 찰나에 불과했다. ‘뭐야.’ 혹시라도 이쪽이 박혜영에게 한 짓을 눈치챈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김현성이 보고 있는 건 나나 정하얀이 아니다. 틀림없이 정진호를 바라보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또 처음. 마력을 일으키거나 하고는 있지 않지만 녀석의 눈은 틀림없이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경계하고 있는 듯한 표정과 눈동자. 조금은 떨리는 것 같은 손과 발, 무엇보다 무척이나 가라앉은 표정. ‘알고 있는 거야.’ 김현성은 분명 정진호를 알고 있다. 물론 어떻게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 방법이 없다.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면 내가 알지 못하는 미래에 어떤 악연으로 얽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확률이 높다. 김현성에게 남의 상태창을 볼 수 있는 능력 따위는 없다. 나처럼 계산적인 살인자라는 정진호의 성향을 보고 녀석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다. 정진호라는 인물 그 자체에게 불쾌감을 느끼고 있고 적의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도 김현성은 조심스럽게 정진호를 살펴보는 중. 악수를 하기 위해 김현성에게 손을 뻗는 자세가 머쓱할 만도 하건만 정진호는 싱글벙글 웃으며 김현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의 성향을 모른 채 저 얼굴을 봤다면 단순히 사람 좋은 녀석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 얼이 빠진 김현성에 모습에 나는 녀석의 팔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현성 씨.” “아… 죄송합니다.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정진호와 김현성이 살짝 손을 마주잡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왠지 모르게 꽉 쥔 주먹이 계속해서 눈에 띄었다. ‘살인자… 살인자라….’ 정진호의 성향 계산적인 살인자. 김현성이 오기 전까지 있었던 미묘한 대치. 정진호를 본 김현성의 반응. 여러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정진호를 사이코패스 살인마라고 가정했을 때 나올 수 있는 추론이다. 어쩌면 정진호가 김현성이나 김현성의 주변 인물들을 죽였을 수도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첫 번째. 직접적으로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정진호에 대한 소문이나 이야기를 들어왔을 확률이 두 번째다. 첫 번째일 확률은 상대적으로 적다. 만약 자신을 죽이거나 주변 친구들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이 저렇게 자제력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 나는 놈을 호구가 아니라 성자라고 부를 것이다. 내 기준으로는 지금도 녀석은 성자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건 이것과는 상관없는 이야기. 어쩌면 나와 박덕구, 정하얀 그리고 안에 있는 이들의 눈을 의식하고 있을 확률도 있다. 만약 우리의 눈을 의식하고 있다면 놈은 마음속으로 정진호를 수십 번은 찢어 죽이고 있으리라. 나였어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정진호라고 합니다. 석우 씨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이 쉼터를 관리하고 계시다고….” “우연치 않게 생존자들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계속해서 구조 활동에 힘을 써주시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정말 대단하신 것 같으십니다. 강한 분이라는 이야기는 석우 씨에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말로… 제 생각보다 더 강하신 것 같군요. 혹시 스탯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유석우 저 쓸모없는 놈은 지껄이지 않은 이야기가 없다. “아무래도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아! 물론 불편하다면 말씀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이곳에서는 조금 멀리 떨어진 스타트 포인트에서 왔습니다. 그쪽은 생존자들을 찾아볼 수 없어 우연치 않게 돌아다니고 있다가 석우 씨를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아까 기영 씨에게도 말씀드린 이야기입니다만 이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생존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김현성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경계나 적의 따위도 없다. 평소대로의 얼굴이다. 이미 한 차례 이 지랄을 겪은 녀석이니 자기감정을 숨기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내 생각보다 김현성은 조금 더 침착하다. 이런 놈이 어째서 호구처럼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모르는 과거가 발목을 잡고 있을 것이다. 첫 번째가 상대적으로 확률이 적다는 생각은 취소. 김현성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추론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정진호에 대한 소문이나 이야기.’ 정진호의 잠재 능력은 지붕을 뚫을 수 있을 것처럼 높다.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랭커로 올라갈 수 있는 기반을 이미 이곳에서 마련해 놓은 거나 마찬가지. 마음의 눈도 녀석을 성장 확률이 크다고 판단하고 있다. 녀석의 성향을 고려해 생각해 본다면 놈은 미래에 알아주는 살인마거나 범죄자가 될 확률이 크다. 세상을 한차례 떠들썩하게 만들었을 거다. 미래에 한딱가리 했을 김현성이 마찬가지로 미래에 유명한 범죄자가 될 정진호를 듣거나 본 적이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추론이다. 물론 둘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가능성도 있지만 성향을 생각해 본다면 확률은 미약하다. 살인을 즐거워하는 김현성의 얼굴은 상상하기 어려웠으니까. “만약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도 이곳에서 함께 지내도 괜찮겠습니까?” “…….” “가지고 온 식량도 있습니다. 아마 모두가 며칠을 나누어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현성 씨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잠깐 동안의 고민. 그렇지만 이내 김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생존자 분들은 항상 환영합니다. 따로 안내를 도와드리죠.” “아. 감사합니다.” 의외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덕구야, 네가 지혜 씨와 함께 이분들에 대한 안내를….” “형님. 괜찮겠소? 방금 전에 우리….” “상관없다, 덕구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불러.” “끄응. 형님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다들 따라 오슈. 그렇게 지내기 편한 곳은 아니지만 어디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요.” 김현성의 선택은 의외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적이라면 더욱더 가까이 두어야 한다는 것을 김현성도 알고 있다. 나로서도 환영해 주고 싶은 부분. 단순히 미치광이 사이코라면 이곳에 들이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 김현성의 등장 이후 꼬리를 내린 모습을 보면 정진호 녀석도 생각이 많은 종류에 속한다. 오히려 조금 얌체 같다. 이전에 느꼈던 불길함이나 미묘한 분위기는 이미 놈에게 찾아볼 수 없다. 김현성에 등장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한 발 물러선 것이다. 애초에 나와 박덕구를 공격할 의도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김현성이 오기 전 내가 느꼈던 불안감은 진짜였다. ‘고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에게는 무척이나 고맙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고 베시시 미소가 절로 나온다. 놈이 계산적이라면 이쪽에서 어떻게든 이용할 수 있다. ‘이용할 수 있어. 이 상황은 틀림없이 이용할 수 있다.’ 조금 뜬금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다. 아니, 어쩌면 지구상에서 제일 운이 좋은 사람은 나일지도 모른다. 방금 전 죽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고맙다, 정진호 이 새끼야.’ 놈이 이쪽에 나타난 것은 어떻게 보면 나한테는 엄청난 행운이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김현성이 시야에 비친다. 놈의 표정이 조금 멍해 보였다. “같이 들어가시죠, 현성 씨.” “조금 천천히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시죠.” 생각이 많은 것 같은 얼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녀석과의 대화를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한다. 그 편이 더욱더 효과가 좋을 테니까.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아.” “왠지 모르게 알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 드린 겁니다.” 조금은 고민하는 얼굴이었지만 녀석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조금은… 알고 있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군요. 아마 저 사람은 저를 모르고 있을 겁니다. 아주 예전에 스치듯이 본 것이 전부라….” “아, 그런 인연도 다 있군요.” “인연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스치듯이 본 것이 전부니까요. 정진호 씨에게는….” “물론 이야기하지 않도록 하죠.” 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밀을 지키는 것이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엔 역시 형식적인 이야기. 내 말에 놈도 자신이 실례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황급히 말을 이었다. 가출해 있던 정신이 살짝 돌아온 것이다. “무사하실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돌아오셨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아뇨. 운이 좋았습니다. 조금 힘들었습니다만… 최대한 길을 우회해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영 씨도 다행이군요. 이쪽에 돌아오는 데 무슨 문제는 없으셨습니까?” “사실 그것과 관련해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네?” “혜영 씨가 죽었습니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먼저 맞는 것이 맞다. 오히려 정진호 문제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지금 상황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게 가장 합리적이다. 조금은 충격 받은 얼굴 그러나 누군가의 죽음에는 익숙한지 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이쪽을 의심하는 눈치는 없다. 아까 전에 무슨 문제가 없었냐고 물었던 것으로 알 수 있었지만 김현성은 박혜영의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군요. 어떻게….” “마법입니다.” “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이었습니다.” “마법 말입니까?” “네.” “아마 확실할 겁니다. 제가 아직 수준이 낮아 정확히 뭐라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마법이었습니다. 잔존 마력이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 “덕구와 함께 길을 달리던 도중, 하얀 씨와 혜영 씨가 저희와 떨어진 걸 눈치챘습니다. 저도 주문을 외우고 있었던 상황이라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외웠던 주문을 유지하는 게 한계라….” “그렇군요.” “뒤늦게 찾아가 보니 사지가 잘린 채로 죽어가는 혜영 씨가 있더군요. 주변에는 어떤 마법적인 처리가 느껴진 것 같기도 하고… 근처에 있는 하얀이는 어떻게든 발견할 수 있었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는 거 같았습니다.” “사지가 잘린 채로 말입니까?” “네. 사지가 잘려 있었습니다. 아마도 던전의 함정 따위가 아닐까 하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함정 따위는 없다. 그걸 알고 있는 녀석이 다시 한번 내 말을 곱씹었다. “함정….” “네. 사실 혜영 씨의 사체라도 같이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경황이 없어서… 괴물들에게 먹힐 바에야 태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박혜영의 시체를 태웠다. “아. 그렇군요. 힘드셨겠습니다.” 최대한 진솔하게 말하는 게 좋다. 어제와는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우리 착하디착하고 순해 빠진 정하얀보다는 조금 더 제대로 된 용의자가 등장해 줬으니까. 나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고맙다, 마검사 정진호.’ 범인은 정해져 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 그 새끼가 범인이다. # 26 회귀자 사용설명서 026화 아이템(1) 박혜영의 일을 고백한 이후에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당연하지만, ‘정진호가 의심스럽다’라든지 ‘저 녀석이 살인자다’라는 따위의 말은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았다. ‘녀석이 박혜영을 죽인 살인자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김현성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구태여 녀석을 낙듭시킬 필요도 없었고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함정인 것 같다는 태도로만 일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좋아.’ 지금 당장 정하얀이나 나를 의심하기보다는 의심하기 좋은 합리적인 상대가 있다. 미래에 가지게 될 악연 역시 김현성이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도움을 줄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성은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정진호들을 예의주시한다든가 혹은 조용히 우리를 바라본다든가 하는 것이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던 나는 그런 녀석을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더 도움이 될 테니까. 가끔 굉장히 차가운 표정을 보여줬을 때는. 김현성이 정진호를 어떻게 죽일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래의 적, 미치광이 살인마, 박혜영을 죽인 범죄자.’ 지금 김현성이 녀석을 제거하지 않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아무리 놈이 부처님 수준의 자비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래에 후환이 되는 것은 무조건 제거하고 싶으리라. 문제는 어떻게 제거하는가. 어떤 식으로 제거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빠르게 녀석을 처리하고 싶겠지만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당한 기회를 찾기 어려워 보이기도 했고 여러 가지 일이 맞물려 있었으니까. 예를 들면 던전의 공략 문제 말이다. “같이 내려가는 건 어떻습니까?” “같이… 말입니까?” “네, 현성 씨. 마침 하얀이도 마법사로 전직을 마친 참이고… 진호 씨들도 들어와 줬으니 인원은 충분할 겁니다. 석우 씨도 직업을 구한 것 같고… 조금 더 느긋하게 움직이고 싶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식량이 점점 떨어져 가는 만큼 선택해야 할 때가 다가온 것 같습니다. 애초에 우리의 목적은 공략이었으니까요.” “으음….” “언제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불안하더라도 시도는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내가 던진 질문 때문에 머리가 조금은 아파올 것이다. 분열되는 것이 확정된 파티와 함께 던전 공략을 한다는 것은 고민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사실 나는 대충 화두를 던져 준 것뿐, 선택하는 것은 오롯이 김현성의 몫이다. 녀석들과 함께 던전을 뚫어내고 그 이후의 일까지 책임질 자신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녀석이 판단해야 한다. 만약 김현성 본인이 자신 있다고 한다면 상황은 꽤나 아름다워진다. ‘던전 공략 그리고 박혜영을 죽인 가짜 살인자의 죽음.’ 막말로 마검사 정진호를 골수까지 빨아먹을 수 있게 된다. 어차피 죽을 놈이라면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좋다. “새로운 사람들과 다시 사냥을 나가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박혜영 씨 같은 일이 또 언제 벌어질지 알 수 없기도 하고… 이렇게 계속 기다리는 것보다는 일단 한번 나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식량도 식수도 이제는 부족합니다. 이곳에서 안주하면 결국에는 죽을 겁니다.” “…….” 김현성은 꽤나 신중하다.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조금은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모양. 어쩌면 우리와 함께 다니면서 정진호를 처리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화재를 돌리려고 했을 때 김현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괜찮을 것 같군요.” “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지하로 한번 내려가 보도록 하죠. 아마 준비해야 될 게 조금 있을 겁니다. 정진호 씨 일행과는 아직 한 번도 합을 맞춰 본 적이 없는 만큼 파티는 2개로 돌려 같이 가는 것이 좋겠군요.” “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살인마한테 등을 맡기기는 싫다. 김현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진호 씨에게는 제가 말을 꺼내겠습니다. 기영 씨는 하얀 씨와 덕구 씨에게….” “네.” “아니, 이럴 게 아니라 하얀 씨와 덕구 씨를 불러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 어쩌면 꽤나 기분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슬쩍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박덕구와 정하얀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조금씩 발을 놀리자 평소와 같은 주변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최근에 쉼터에서 볼 수 없었던 아주 훈훈한 광경이다. “감사합니다, 진호 씨.” “고마워요, 진호 형.” “아닙니다. 모두 돕고 살아야지요.” 패배자들과 함께 벽돌을 쌓고 있는 정진호들의 모습.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 작업. 그저 자신들의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한 테트리스였다. “뭔가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셔도 됩니다.” “밖에 나가 식량을 구해주시기까지 하는데 이 정도는 저희가 해야죠. 진호 형은 조금 쉬세요. 그게 더 좋을 거예요.” “아닙니다. 이 정도는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크게 힘이 드는 일도 아니고 함께 하고 모두 함께 쉬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웃기는 소리.’ 하하호호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계시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 ‘멍청한 놈들….’ 아무런 목적 없이 호의를 보내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김현성이 저들을 돕는 이유 역시 단순한 자기만족에서 우러나오는 동정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김현성은 상황이 조금 나은 편. 내가 보기에 정진호들이 원하는 것은 지금 함께 웃고 떠들고 있는 이들의 목이다. 덕분에 박덕구와 내가 독립적으로 움직이겠다는 것을 표현했을 때부터 쏟아지던 안 좋은 시선들이 이제는 조금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정진호들과 우리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왜 놀고 있느냐.’ 그렇게 물어보고 있는 것 같다. 정진호는 식량을 나누는 것은 물론 잡일도 함께 한다. 우리 몫을 아득바득 지키고 있는 나와는 다르다. 저들이 녀석들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상황. 나와 박덕구 그리고 정하얀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 같기는 했지만 구태여 녀석을 따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움직이고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은 저딴 서민 코스프레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가까이에 있지 않은 권위. 그게 저런 종류의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다. ‘애초에.’ 놈도 저것이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저게 뭐하는 짓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가 아직까지는 범죄를 저지르기 전이고 성향을 억누르며 최대한 착하게 살려고 하는 것에 내가 고춧가루를 뿌린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는 했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이것도 함께 드시죠.” “아! 석우 오빠, 고마워요.” 최근 놈들과 같이 다니며 직업을 구해 의기양양해진 유석우도 시야에 들어온다. 정진호 일행에게 걸어보기로 결심한 모양. 가끔 굉장히 불안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어찌됐든 놈은 원하는 것을 얻었다. ‘직업.’ 그리고 이 보잘 것 없는 쉼터 내에서의 위치. 멀찍이서 노동의 참 가치를 느끼고 있는 이들에게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 보기 싫은 훈훈한 장면이기도 했고 저런 아름다운 장면은 왠지 모르게 심사를 거슬리다. 조금 더 걸어가니 정하얀과 박덕구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아.” “아. 오, 오빠.” 인기척을 드러내자 간단한 마법을 시험하고 있던 정하얀이 정신없이 달려와 내 소매를 살짝 움켜쥐었다. 박덕구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중. ‘슈바….’ “오늘도 새로운 주문이야?” “네? 네….” “대단하네.” “아니에요. 전, 전부 오빠 덕분이에요.” 아직 사귄다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스킨십을 하지는 않지만 쉼터 안에 있는 이들은 나와 정하얀의 사이를 기성사실로 받아들인 듯하다. 그것을 알고 있는 건지 최근 정하얀이 은근슬쩍 손을 잡거나 가까이 다가오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나 며칠 전 갑자기 전직한 것 같다며 조심스레 입을 열어온 이후에는 더욱더 그랬다. 이쪽이 그다지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용기를 얻은 것 같은 느낌. 물론 모두가 자고 있다고 판단되는 시간에 보여주는 모습도 여전했다. ‘…….’ 간혹 깜짝깜짝 잠에서 깰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릴 때가 많다. 점점 더 대담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이야 어찌됐든 박덕구가 아니었다면 전보다 더 가까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현성, 그 형씨한테 간다고 하지 않았소? 조금 빨리 온 것 같은데… 이야기는 잘된 거요?” “막 다녀왔던 참이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볼 일이 있는 것 같은 것 같은데… 시간 되지?” “남아도는 게 시간이요, 형님.” “물론이에요. 혹, 혹시 무슨 일 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 아마도 조만간 지하로 내려갈 것 같아.” “드디어 내려가는 거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도중이지만 진호 씨들과 함께 움직이게 될 것 같다.” “으음… 별로 느낌이 좋지는 않은 형씨들인데….”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당장 공략이 중요하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현성 씨 마음도 이해는 간다. 슬슬 버티는 것도 한계니까.” “그나저나 이 던전은 공략이 가능하게 만들어진 곳은 맞는 거요?” “아마 맞을 거다.” 김현성은 확실히 이곳을 공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정진호 무리와는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거야. 물론 겉으로는….” “큼. 너무 걱정하지 마쇼.” “하얀이도 마찬가지야.” “네. 알, 알겠어요. 오빠…. 말, 말도 안 섞을 거예요.” 말 정도는 섞으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박덕구야 조금 낫지만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인 만큼 지속적이고 세심한 관리와 정신 교육이 필요하다. 만일 박혜영 때처럼 돌발 행동을 한다면 이번에는 나도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 “유석우는 너무 신경쓰지 말고.” “신, 신경 쓰지 않는 걸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박덕구를 선두로 천천히 길을 걸어 나가니 다시 한번 시선이 내려와 꽂힌다. 노동의 참 가치를 깨달아가는 인간들과 정진호가 묘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딱히 부담스러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면 된다. 아직 무슨 일이 터진 것도 아니고 김현성과 회의를 하러가는 것뿐이니까. “…….” 가볍게 놈의 눈빛을 무시한 이후에는 곧바로 김현성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 이윽고 자신의 가방 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기분이 꽤나 좋아진다. 상태창을 둘러볼 때마다 항상 신경 쓰였던 장비창. 언젠가는 아이템과 같이 여러 가지 능력치가 붙어 있는 장비들을 보거나 착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기회가 더욱더 빨리 왔다. 지하로 내려가기 전에 필요한 스펙업. 놈의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한 작업일 것이다. 던전 공략 때문이라고 보는 것보다는 정진호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인 것이 분명. 김현성은 우리 셋을 키우려고 하고 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 맛있는 거라도 숨겨 놨소? 표정이 꼭 쌈짓돈 꺼내주는 우리 할매 같은 표정이요. 형씨.” ‘이 돼지는….’ 표현을 해도 꼭 이런 식으로 해야 되는지 알 수 없을 지경. 김현성도 조금은 황당했는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이템입니다.” 설마가 확신이 되는 상황. 기분 좋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에 띄는 검이나 창, 방패 같은 아이템은 아니다. 놈이 가방에서 꺼낸 것은 팔찌 하나와 반지 두 개. 투박해 보이지만 신비한 마력이 느껴졌다. ‘고맙다, 현성아.’ 지하로 함께 내려가는 보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과하다. # 27 회귀자 사용설명서 027화 아이템(2) “아이템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아이템입니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하셨소?” “말씀은 아직 안 드렸습니다만 사실 그때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우연치 않게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상자?” “보물 상자라고 부르는 편이 적절하겠군요. 마치 옛날에나 사용할 것 같은 나무 상자였습니다.” “거, 여기는 정말 별게 다 있는 모양이요. 형님, 그렇지 않소?” 진위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던전이라고 불렀으니 아마도 저런 아이템이 들어 있는 보물 상자가 있을 만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김현성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아이템이 아닐지에 대한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기는 했지만 굳이 꼬투리를 잡을 이유는 없다. 지금 김현성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뭔지, 나는 무엇을 받을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신기하군요. 만약에 이런 상자들이 주변에 더 있었다면 찾아볼 수 있었을 텐데…. 아마 던전 전체에 퍼져 있는 상자의 숫자가 한정적인 모양입니다. 어쩌면 현성 씨가 찾은 상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겠군요. 어쩌면 지하에도 비슷한 게 있을 수도….” “예. 그 말이 맞을 겁니다, 기영 씨. 저도 이쪽 주변을 전부 둘러보기는 했지만 상자를 발견한 건 저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조금 더 멀리까지는 가보진 못했지만…. 아무튼 한번 보시죠.” “네.” 안 그래도 둘러볼 생각이다. 굳이 마음의 눈을 발동시킬 필요도 없었다. 손으로 녀석들을 들어 올리자 곧바로 정보들이 쏟아졌으니까. 아이템의 자세한 능력치도 나만 확인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따위의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아쉬움도 잠시였다. [무쇠 드워프의 강철 팔찌-일반 등급] [이제는 몰락한 무쇠 드워프 종족이 만들어낸 장신구입니다. 투박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굉장히 기술적인 세공이 들어간 팔찌입니다. 체력과 내구력, 힘이 각각 1 올라갑니다.] 팔찌의 주인은 이미 정해져 있다. 박덕구 역시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좋아 보이기는 한 모양. 올려주는 스탯은 총 3이다. 직업을 얻을 때 받을 수 있는 스탯과 일치한다. 이 정도가 일반 등급의 아이템. 아마 영웅, 그 이상 가는 전설 장비들은 내가 상상하기 어려운 기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오오….” 할머니가 꺼내는 쌈짓돈을 받을 때의 표정이다. 문제는 바로 이 다음. [마력 방패의 반지-희귀 등급]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아주 오래된 물건입니다. 하루에 두 번 반지에 저장되어 있는 마력으로 마력 방패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장신구입니다. 사용자가 직접 마력을 충전해야 합니다. (2/2)] [신성한 치유-희귀 등급]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하급 신성 마법, 치유가 내장되어 있는 반지입니다. 하루 한 번 사용이 가능합니다. (1/1)] 나머지 두 개의 반지는 희귀 등급의 반지. 확인하는 즉시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개 좋네.’ 김현성을 따라다니다 보면 뭔가 콩고물을 얻어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벌써부터 이런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무려 희귀 등급의 반지다. 기능 역시 이쪽이 당황할 정도로 마음에 든다. 박덕구의 것처럼 스탯을 올려주지는 않았지만 녀석의 것보다 훨씬 가치 있다. 예를 들어 마력 방패의 반지, 마력 방패를 외우기 위해서 잡아먹는 마력이 4 정도가 들어간다고 가정했을 때, 이 방패를 +8 스탯 정도의 효율을 얻는다. +3의 효율을 얻을 수 있는 일반 등급의 아이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좋아.’ 신성한 치유 역시 마찬가지. 같은 희귀 등급인 것을 보니 이 녀석 역시 적어도 +6 이상의 스탯 효율을 보여주리라. 하루에 두 번 몸을 지킬 수 있는 보험과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 보험.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 김현성이 선택한 것은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할 수 있는 보험이었다. ‘그렇지. 준비는 확실해야지.’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을 때 팔찌를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귀한 것 같은데… 정말 가져도 되는 거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큼…. 그, 그렇다면 팔찌는 내가 가지는 것이 맞겠지. 고맙게 쓰겠소, 형씨. 이쪽은 해준 것도 없는데 괜스레 미안하구만….” “아닙니다.” “은혜는 꼭 갚지.” “마음만으로도 고맙습니다.” 팔찌의 주인은 정해졌지만 문제는 나머지 두 개의 반지. 사실 뭘 가져도 나쁠 것 같지 않지만 여차하면 몸을 지킬 수 있는 방패가 조금 더 끌린다. 만약 정하얀이 신성한 치유를 착용한다고 해도 안에 내장되어 있는 신성 마법을 나에게 사용할 확률이 높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확실하겠지.’ 쓰레기 같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여러 가지 마법을 펑펑 써댈 수 있는 저쪽과는 다르게 나는 어떤 주문이든 2번 사용하면 탈진 상태까지 갈 수 있으니까. 머리를 조금 굴리고 있을 때 먼저 입을 연 것은 정하얀이었다. “저, 저는 이걸로 할게요.” 그녀가 선택한 것은 신성한 치유. 내 눈치를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쪽의 의도대로 움직여 줬다. “그럼 저는 남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입꼬리가 계속해서 올라간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 이상한 상황이다. 하루 두 번 목숨을 건질 수 있는 보험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다.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그 어떤 리스크도 감수하지 않은 채로 희귀 등급에 아이템을 손에 넣은 것이다. ‘이거지!’ “그렇지만 저희가 정말로 이런 걸 받아도 되는지….” “괜찮습니다. 저도 하나 가지고 있기도 하고… 특별한 능력치가 붙은 장신구 같은 경우에는 착용할 수 있는 숫자가 제한되어 있는 것 같더군요. 아니, 착용은 가능하지만 뭔가 제한이 걸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좋은 정보도 받아간다. “두 개의 반지를 착용해도 능력이 발동되는 반지는 하나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나중에 천천히 실험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살짝 웃으며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표현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현성 씨. 덕구 말대로 저희가 뭔가 해드린 것도 없는데….” “고, 고마워요… 현성 씨.” “아닙니다. 기영 씨 그리고 하얀 씨.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는 동료니까요.”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다. 아마도 이쪽에 빚을 얹어줬다고 생각하는 모양. 정말로 고마워하는 나와 박덕구 그리고 정하얀의 표정을 본 것 같았다. 우리가 자신에게 확실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걸 보고 조금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지막 대사에서 확신을 얻었다. ‘함께 갈 생각이다.’ 우리는 동료니까. 김현성은 나와 박덕구 정하얀과 함께 갈 생각이다. 애초에 정하얀 같은 경우는 김현성이 무조건 포섭하려던 인재였다. 미래가 확정되어 있는 마법사. 애지중지 키워 끈을 만들어 놓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박덕구의 경우에도 나쁘지 않다. 게임에서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든든한 탱커는 언제나 인기가 좋다. 지금까지 사냥에서 보여준 판단력과 안정감, 잠재 능력은 정하얀이나 정진호에 비해 밀린다고 할 수 있지만 현재 가지고 있는 스탯 능력치가 좋다. 박덕구의 성장 한계치는 김현성이나 정진호, 정하얀 같은 진짜 괴물들에게는 밀린다고 할 수 있지만 충분히 제 몫을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가 사실 조금 애매하다. 어떻게 보면 현 김현성 사단에 꼽사리로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덕구와 정하얀과 친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 박덕구에게는 믿을 수 있는 형님이란 포지션. 정하얀에게는 연인과 비슷할 정도로 친밀한 포지션이다. 박덕구와 정하얀을 끌고 가려면 나 역시 끌고 갈 수밖에 없다. 사냥에서 실수하지 않는다는 정도와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점은 점수를 받을 수야 있겠지만 나 정도 되는 이들은 대륙에 널려 있다. 아마 차근히 이쪽을 키워 앞으로 더욱더 커질 김현성 왕국에 행정요원으로 사용해 줄지도 모른다. 물론 이지혜처럼 뱁새처럼 살아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개인의 몸을 더 확실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가끔 가랑이가 찢어져야 할 필요도 있다. ‘따라가기 벅차겠지만.’ 아득바득 따라가서 야금야금 이득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동료지요.” 우리는 서로를 지켜주고 아껴주는 동료다. 조금 더 단단해진 느낌. 기분이 좋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멋진 울림입니다, 형님. 크으… 동료! 아. 그래서 지하로는 언제 내려가는 거요?” “아마 조만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진호 씨들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 그쪽도 내심 함께 사냥을 나가는 걸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음. 안 그래도 같이 사냥을 나가자고 물어왔던 적이 있기는 있었소. 형님이 나가지 말라고 말해서 거절하기는 했지만….” “잘하셨습니다.” 김현성이 다시 한번 나를 바라본다. 새로 들어온 집단에 대한 적당한 경계. 기본적인 것이지만 이런 포지션을 잡아주는 게 고맙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저희끼리 이야기입니다만… 그쪽은 썩 느낌이 조금 좋지는 않습니다.” “거, 우리 형님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똑똑한 양반들은 확실히 다르긴 다른 모양이요. 사실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오.” “함께 사냥을 하고 던전을 공략하더라도 어느 정도 경계는 해야겠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만큼 주의하는 게 맞아. 박혜영 같은 일이 또 벌어질 수도 있으니 이번에는 조금 더 조심하자는 소리다.” “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내 말에 정하얀뿐만 아니라 김현성 녀석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기영 씨 말이 맞습니다. 조금 더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네.” “적과 함께 싸운다는 생각으로 임해주셨으면 합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적 말이요?” “네.” 김현성은 무대 위로 오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금은 그렇게 마음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나름의 준비는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 이전에 당장 지하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1층보다는 수준이 높다고 가정하는 게 맞겠지.” “네. 그렇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진호 씨에게는 제가 지금 말씀을 드리도록 하죠. 시간만 된다면 최대한 빠르게 떠나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빨리 말이요?” “준비는 지하로 가는 중에도 할 수 있으니까요.” “아. 그렇구만.” 정진호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놈들의 목적이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일 경우에도 그렇고 자신들의 은밀한 취미 활동을 즐기기에도 그렇다. 목적이 무엇이든 함께 나가는 것이 유리하다. 녀석은 김현성과 자신의 수준 차이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 것이다. 본래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변수. 던전 공략 원정은 놈이 바라는 변수를 만들어줄 가능성이 높다. 김현성만 제거하면 자신의 세상이 펼쳐질지도 모르는 상황. 놈이 정말 살인마라면 이 쉼터는 놈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장소이니만큼 도박을 해올 가능성이 높다. 내가 놈의 입장이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현성과 우리들을 죽이고 싶을 것이다. 놈에게나 김현성에게나 좋은 기회. 자꾸만 기분 좋은 미소가 입에 걸린다. 어차피 뒈질 놈. 골수까지 빨아 먹는 게 옳은 선택이다. # 28 회귀자 사용설명서 028화 퀘스트(1) “버티기 빠듯하겠네요.” “생각보다 많이 남기지 않았어?” “돌아오지 못했을 경우도 생각해야 되잖아요?” “재수 없는 소리 마. 그런 경우는 없으니까.” “물론 나는 우리 현성 오빠와 기영 오빠를 믿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요. 그나저나 하얀 씨가 여기 계속 보고 있는 것 같은데 괜찮은 거 맞죠?” 살짝 뒤를 돌아보니 조금 담담한 표정의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박혜영 때처럼 격정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건 아니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하게 만드는 표정이다. 혹시라도 딴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안정권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신체적인 접촉을 동반한 대화였다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꽤나 거리를 두고 이야기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친밀해 보이지는 않는다. 살짝 가방을 넘기자 다시 한번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조금 큰 결심을 하셨네요.” “뭐가.” “도박은 싫어하는 타입인 줄 알았는데.” “싫어해.” “그럼?” “이기는 게임에 주사위를 던지지 않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모든 변수를 가정해도 이쪽의 승률은 압도적으로 높다. 던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 전체적인 파티원의 스펙, 회귀자의 존재. 질 가능성 따위는 없다. 물론 그것 이외에도 생각해 볼 것이 많기는 하지만 아득바득 콩고물을 빨아먹어야 하는 내게 있어서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다. 위기를 함께 헤쳐 나가는 동료의 유대. 그리고…. ‘던전 공략의 보상.’ 분명히 있다. 김현성이 발견했다고 말한 상자 역시 분명, 그런 종류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 목소리를 듣고 잠깐 동안 입을 다물었던 이지혜가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래서 당신이 좋더라.” “쓸데없는 소리.” “아무튼 다녀와요, 기영 오빠.” “알겠어, 누나.” 역시나 표정이 구겨진다. 겉모습으로는 동안임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대해서는 제법 스트레스를 느끼는 모양. 아무래도 그녀는 어린여자가 살아남기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니 정하얀이 재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와 황급히 소매 끝을 잡는 것이 보인다. 내게는 아무 말도 해오지 않았지만 불안했던 모양이다. 박덕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김현성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중. 정진호와 유석우를 포함한 두 똘마니는 조용히 나를 기다린다.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인원은 총 8명. 많다고 하면 많다고 할 수 있는 인원이다. 이쪽이 4명, 저쪽이 4명이다. 저쪽은 정진호를 중심으로 한 파티라고 한다면 이쪽은 김현성을 중심으로 한 파티. 함께 걸어가고는 있지만 미묘한 거리는 있다. 대화소리는 많이 들려오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나와 정진호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 그 외에는 끼리끼리 떠들거나 혹은 각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건 그렇고 정말로 많이 돌아다니신 모양이군요. 저희는 새로운 입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우연치 않게 발견하게 됐습니다. 스타트 포인트에서 들으셨겠지만 이곳을 빠져나가는 조건은 생존 그리고 공략입니다.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만큼 전자에 기대를 거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해서… 최대한 공략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었죠.” “아.” “어쩌면 생존의 기간은 타인이 던전 공략을 성공할 때까지일지도 모릅니다.” “그것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저희가 던전 공략을 해야 쉼터 안에 있는 분들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게 되는 겁니까?” “그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겠죠. 뭐, 방법이야 어떻게 됐든 이 던전을 공략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 아무튼 제안에 동의해 준 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아니요. 피차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건 마찬가지니까요. 사실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희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상황이 조금 불안했던 터라….” 싱긋 웃고 있는 놈의 모습은 정말로 사람 좋아 보인다. 왠지 모르게 경계심을 풀게 하는 종류의 미소였지만 놈의 성향을 알고 있는 내가 경계심을 풀 리가 없다. 오히려 이쪽이 저쪽의 경계심을 풀어줘야 되는 상황.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꽤나 많이 된다. 지구에서의 이야기, 던전에 대한 이야기나 스타트 포인트에서 들려왔던 여자의 이야기들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자 이번에는 제법 당황스러운 주제가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기영 씨는 하얀 씨와 자주 붙어 다니시는 것 같더군요. 혹시… 두 분이….” 지금까지는 누구도 물어보지 않아왔던 이야기다.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들의 시선을 살핀다. 박덕구나 김현성이나 귀를 기울이는 것 같은 눈치. 정하얀에게 한 번 추파를 던진 적이 있는 유석우는 대놓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하얀 같은 경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소매를 꽈악 잡아당기는 중이다. 내가 뭐라고 할지 무척이나 궁금한 모양이다. ‘이러지 마….’ 뇌가 근육으로 꽉 찬 돼지뿐만이 아니라 미치광인 살인마 새끼도 이 설계에 동참하려고 하고 있다. ‘좋은 오빠 동생 사이?’ 이건 기각. ‘발전하고 있는 관계?’ 이것도 아니다. 어떻게 생각해도 열애설에 휩싸인 연예인의 변명으로밖에 안 보인다. 어차피 정하얀과는 필연적으로 지금보다 더 가까워져야 하는 관계다. 조금 고민했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결론을 내리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따. 나는 소매를 움켜쥐고 있는 정하얀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은 딱히 뭐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아마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오오오….” 입이 찢어져 있는 박덕구의 얼굴. 김현성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같은 경우에는 내 존재가 정하얀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재미있었던 것은 정하얀의 반응. 무척이나 붉어진 얼굴로 땅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다. ‘슈바… 아파.’ 얼마나 강하게 잡아대는지 내 미약한 내구가 버티지 못할 정도. 여러 가지 선택지를 생각해 봤지만 역시나 이게 정답이다. 굳이 뭐라고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 이유는 내가 아직 정하얀에게 마음을 전하지 않은 데 있다. 지금 도장을 찍어도 별 상관이 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녀와 나는 조금 더 기억에 남는 방식으로 이어져야 한다. 지금처럼 떠밀리는 방식이 아니라 이쪽의 진심을 제대로 전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다시 한번 고개를 돌리자 히죽거리는 입꼬리가 볼까지 올라와 있는 정하얀의 얼굴이 보였다. 이쪽은 조금 소름이 끼쳤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유석우는 심사가 뒤틀리는지 괜스레 인상을 구기고 있다. 정하얀과의 관계에 가장 크게 공허한 인물이 두 명이 있다면 박덕구를 제외한 한 명은 저 녀석. 이쪽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에는 서툰 모양이다. 이번 원정의 쓰레기는 놈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며 나는 괜스레 정하얀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었다. 유석우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이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파티는 계속해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진호의 똘마니들 중 하나인 궁수는 직업의 효과 때문인지 길을 읽는 능력이나 괴물들의 기척을 발견하는 것에 능했지만 굳이 괴물들을 피해 다닐 이유는 없었다. 정진호는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곳에 있는 괴물을 상대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고 이미 익숙해진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유석우 역시 적응이 빨랐다는 것. 박혜영 같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제법 침착하게 검을 놀렸다. 다른 이들의 수준도 결코 나쁘지 않다. 모두가 정진호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할 일을 잘해내고 있는 모습에 이쯤 되면 이 파티가 꽤나 이상적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빠르고 안전해.’ 나와 김현성, 박덕구, 정하얀, 박혜영이 움직일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정진호와 김현성이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하고 박덕구가 길을 막는다. 나와 정하얀은 후방지원을 할 뿐이었지만 궁수의 화살이나 정진호의 똘마니들도 솜씨가 이쪽보다 훨씬 괜찮다. 왠지 모르게 조금 아쉬워지는 것이 사실. 특히나 정진호의 경우가 그랬다. 검 한 자루를 사용하는 김현성과는 반대로 왼쪽 팔에 들려 있는 작은 방패로 상대방을 견제한다. 저기에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조금 더 놀랄 것이다. 놈이 박덕구와 나, 정하얀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은 느낌. 놈은 분명히 강하다. 박덕구와 김현성, 정하얀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만약 정진호라는 패를 단기가 아닌 장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면 꽤나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강하시군요.” “모두가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조금 더 가야 하나요?” “거의 다 왔을 겁니다.” 살짝 김현성을 바라보자 녀석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이 느껴지는 계단.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가 봐야 알 수 있다. 사실은 김현성에게 조금 더 제대로 된 설명을 요구하고 싶기는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뭐가 있을까.’ 어째서 김현성은 이 던전에 들어가는데 지금의 전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에 대한 원초적인 의문. 궁금증과 불안감이 뒤섞였지만…. “그럼…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포기하는 짓은 멍청한 일이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길은 어둡다. 조금 긴 계단을 내려가자 것은 거대한 철문이 보였다. 전위에 위치한 박덕구가 천천히 철문을 열고 이윽고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어와 꽂혔다. 스타트 포인트에서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지하 던전에 도달하셨습니다.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희귀 등급 퀘스트-생존 (0/1)] “뭐야.” “오, 오빠….” “전투 준비합니다.” “전투 준비하겠습니다.” 굳이 김현성이 입을 열지 않아도 모두들 자신들의 무구를 꽉 붙잡고 있다. “끼에에에에에엑!” “끼에에에에에에에엑!”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개 같은 목소리들이 귓가로 내려 꽂혀 왔으니까. ‘제기랄! 제기랄!’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난이도가 있다. 어째서 김현성이 많은 인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이해가 간다. ‘디펜스.’ 들려오는 목소리는 확실히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병력이 아니다. “철, 철문이 막혔습니다.” 누군가 중얼 거린 목소리. “도망치지 않습니다.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겁니다.” “할 수 있을 거다.” “키에에에에엑!” 놈들이 이곳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괴물 새끼들의 목소리는 둘째치고 땅 바닥을 울리는 것이 굉장히 신경 쓰인다. 불안감에 곧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 정진호 쪽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조금 얼이 빠진 듯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정진호를 중심으로 대열을 정비한다. ‘막을 수 있어.’ 당황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막을 수 있다. 회귀자는 이 전력으로 공략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거, 제기랄 엄청나게 많구만.” 놈들에게 둘러싸인 적은 스타트 포인트에서 한 번, 박혜영이 병신 짓을 저질렀을 때 또 한 번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다. # 29 회귀자 사용설명서 029화 퀘스트(2) 사방에서 몰려들어오는 괴물들은 대충 보기에도 질려버릴 정도였다. 개체 하나하나가 강해보이지는 않지만 그 양이 워낙 많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위험하단 생각을 하게 될 정도다. 일전에 김현성이 이곳에 들어오기 위한 인원이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알 수 있었다. 김현성과 박덕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겨우 두 명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정진호 일행의 표정 역시 똥 밟았다는 표정.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적어도 정진호 녀석은 당황하지 않는다. ‘살아남을 수 있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 마법에 쓸 마력을 아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다. 끊임없이 입으로는 주문을 외워가면서도 나는 두 손으로 창을 꽉 쥐었다. “덕구야.” “알고 있소.” 전위로 나서는 것은 박덕구와 김현성, 정진호. 가장 가운데를 박덕구가 제대로 틀어막고 최대한 밀집 대형을 유지한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두 집단이 똘똘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당장 뒤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우리 뒤를 칠 정도로 놈들은 멍청하지 않다. 그건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 일단은 눈앞에 닥친 현실을 벗어나야 된다는 생각으로 모두가 검을 잡고 달려 들어오는 괴물들과 몸을 부딪쳤다. 쾅! “키에에에에에엑!” “징그러운 놈들!” 한꺼번에 두세 마리가 달려 들어오는 것은 기본, 박덕구는 최대한 방패를 쥐고 몸을 웅크리며 녀석들을 막아내는 중이다. 딱히 창이 맞지 않는 상황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사방이 표적이니까. 푸욱 하는 감촉이 느껴지지만 그런 감촉을 느낄 여유도 없다. 반복적으로 창을 내지르며 어떻게든 박덕구와 김현성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란다. “최대한 밀집합니다! 최대한!” “형님이랑 누님은 뒤에 딱 붙으쇼! 떨어지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알, 알겠어요.” “키에에에에엑!” 계속해서 달려드는 녀석들을 견디기 힘든지 점점 철문으로 몸이 밀리는 듯한 느낌. 박덕구는 그 거대한 몸으로 방패를 휘두르며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김현성과 정진호는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놈들을 차분히 검으로 찌르거나 밀어내는 중. ‘강해.’ 확실히 놈들은 강하다. 작은 방패로 막아내고 검을 찌르는 정진호도 물론 이지만 김현성 같은 경우에는 저쪽을 보면서도 나와 정하얀을 신경 쓰고 있다. 혹시나 놈들에게 칼을 맞지는 않을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걱정할 필요 아무것도 없다, 이 자식아.’ “으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 정진호의 똘마니들도 필사적이다. 이쪽을 노릴 여유 따위는 없는 것이 당연하다.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자신들의 목을 노리고 오는 괴물들을 막아내려 최대한 힘을 쓰고 있다. 괴물 새끼들의 혈액이 계속해서 창과 얼굴에 튄다. 내장 따위의 신체기관도 철퍽 철퍽 바닥에 떨어지자 바닥이 미끄러워진다. 역겨운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게 되지만 계속해서 돌아가는 정신없는 상황 때문인지 그것 역시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키에에에에에엑!” 괴물들이 내지르는 거슬리는 소리와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비명이 하나로 합쳐진다. “흐으읍!” 쾅! 방패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한 녀석이 나가 떨어지는 모습은 꽤나 장관. ‘이 돼지! 아주 좋아.’ 잠재 능력은 그렇게 높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현재의 박덕구는 진짜다. 김현성 정진호와의 강함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강함이었지만 30대 중 후반을 바라보는 내구 능력치는 기가차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 스치는 종류의 공격은 아예 몸으로 받아버린다. ‘과소평가했어.’ 내가 재능 수치로만 녀석을 판단해 과소평가했다. 오히려 김현성이나 정진호보다 더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지금의 박덕구다. 거대한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존재감. 근력 수치는 높다고 할 수 없고, 마력 역시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제자리에 서 있는 이 방패병은 단순한 고기 방패가 아니다. 어디를 막아야 할지, 어디를 때려야 할지 알고 있다. 수를 가늠 할 수 없는 놈들을 몸으로 막으면서도 불편하다는 기색이 없다. ‘이놈은 인간 맞는 건가?’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해버릴 정도였다. 당연하지만 박덕구 역시 겁에 질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녀석은 마음이 약하기도 했고 처음 나와 사냥을 다녔을 때에도 놈들을 피해 다니기 급급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조금 질렸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무섭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처음처럼 도망치지는 않는다. 자신감이 붙거나 대형이 무너지는 걸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근육으로 꽉 찬 저 뇌에 그런 사고방식 따위는 들어가 있지 않다. 단순한 예상에 불과하지만 박덕구 저 돼지 새끼는 나와 정하얀이 다치거나 죽는 걸 원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한테 떨어지지 마쇼! 형님! 떨어지지 마쇼!” “뒤에 계속 있다, 돼지야. 집중해.” “딱 달라붙어야 하는 거요! 딱!” “알았다.” 계속해서 이쪽의 안부를 물어보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돼지 새끼….’ 조금 걱정되는 것은 괴물들의 공격이 지나치게 박덕구 쪽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것. 아직까지 큰 상처는 없어보였지만 분명히 크고 작은 자상 정도는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싸움 말고도 이후에 벌어진 일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흐름은 좋지 않다. 정하얀의 주문이 튀어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람 폭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들이 바깥으로 크게 튀어 올랐다. 바닥에 부딪치거나 천장에 부딪친 녀석들은 바람이 보낸 압력 때문에 피떡이 되지만 그렇게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아껴야 하는데….’ 나와 정하얀은 최대한 마력을 아껴야 한다. 물론 정하얀이 나보다 마력양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마법을 무한정으로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정진호 무리보다 이쪽이 먼저 체력이 떨어지면 안 된다. 놈들을 최대한 막아내면서도 마력의 소비를 최소화해야 된다. 뭐라고 말을 전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던 와중에 전황을 살피던 나는 슬쩍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푸핫.’ 아마도 의도된 것이리라. 정하얀의 마법이 떨어진 범위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정확히 박덕구와 김현성이 막고 있는 괴물들 사이에 내리 꽂힌 마법. 다시 이야기하자면 정진호 집단이 막고 있는 왼쪽은 마법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소리가 된다. 간접적으로 왼쪽에 집중하고 있는 정진호를 비롯한 똘마니들에게 부담이 가중된다는 소리다. 악을 쓰고 괴물들을 막고 있는 녀석들을 보니 조금은 불쌍할 지경. 그에 비하면 이쪽은 조금 여유가 생겼다. 정하얀의 마법 덕분에 괴물의 숫자가 크게 줄기도 했고, 잠깐의 공백이기는 했지만 숨을 돌릴 여유를 얻었다. ‘정하얀 나이스.’ 가끔 모자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기는 하지만 정하얀은 내 생각보다 더 똑똑하다. 한결 여유로워진 박덕구와 김현성은 당연히 왼쪽으로 지원을 갈 생각 따위는 없다. “대열을 유지해야 됩니다!” 아마 대열을 유지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아직까지 왼쪽 지역에는 놈들의 물량공세가 계속되고 있으니까. “숨 좀 돌려라, 덕구야.” “안,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요. 누님 때문에 살았소.” 이쯤 되자 바빠지는 것은 정진호 쪽이다. 마법은 정진호 역시 사용할 수 있기는 하지만 놈은 자신이 마검사라는 걸 숨기고 싶어 하는 만큼 자신의 똘마니들을 위해서 마법을 사용하진 않을 것이다. 결국 놈들의 입에서 비명소리 비슷한 고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원 좀 부탁드립니다!” “이쪽도 지원 좀!” “방금 같은 마법 부탁드립니다!” 마법을 쏴주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슬쩍 나를 바라보는 정하얀. 그러나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저었다. 정진호가 있다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팔이 물리거나 영 좋지 않은 쪽을 공격당할지도 모르지만 이 정도라면 놈들도 버텨낼 수 있다. 유석우 역시 정하얀을 향해 소리를 질러댄다. “하얀 씨!” “잠, 잠깐만요. 마, 마력을 채우고 있는 중이라….” “제길… 아아아아아악!” 그 와중에 놈의 팔에 상처를 입히는 멋진 괴물의 모습은 탄성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검을 멈추지 않는다. 왜. 멈추면 죽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큰 소리로 소리 내어 웃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틸 수 있습니다!” 한 명씩 상처가 쌓이기 시작하는 왼쪽 진형. ‘이건 좋아. 아주 좋아.’ 정진호의 몸에도 상처가 쌓인다. 아무리 놈이 내 생각보다 강하다고 한들, 이 장소는 김현성조차 혼자 들어가기를 꺼려했던 장소다. 고작 정진호 따위가 모든 것을 혼자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커다랗게 다시 한번 소리를 내질렀다. “버틸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영 씨는 아직입니까?” “조금만 더….” “빨리!” “버틸 수 있습니다. 분명히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한결 여유로워진 창을 내지르며 긴박한 듯이 소리 지르자 이쪽도 정말로 긴박한 줄 아는 모양. 이미 저쪽의 상황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기도 힘든 상태다. “으아악! 제길!!” 한 녀석은 다리를 물렸다. 모르긴 몰라도 이후의 전투는 절뚝거리며 진행해야 할 것이다. “제기랄 빨리! 빨리!! 마법을!” “거, 거의 다 됐습니다!” 사실은 이미 한참 전에 캐스팅이 끝난 마법, 정말로 뚫리기 전에 한 번쯤은 쏴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놈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조금 꺼려진다. 내가 쓸 수 있는 마법의 획수 제한은 많아야 두 번. 뒷일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는 세 번이 한계다. 상황상 도움을 줘야 되기는 하지만, 동시에 놈들에게 부담을 안겨줘야 한다. 인간이 다섯 명이나 모이면 꼭 쓰레기가 한 명쯤은 있게 마련. 아마도 오늘의 쓰레기는 내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화염구!” 콰광! “키에에에에에엑!” 거대한 불덩어리가 왼쪽 진형에 떨어지기 시작. 거대한 굉음을 내며 왼쪽 진영에 잠시 동안 여유가 생긴다. 순식간에 놈들을 불덩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물론, 그 파편에 맞은 이들까지 여파가 미친다. 아무래도 화력은 화염계 마법이 조금 더 쓸 만한 모양. 꽤나 많은 마력을 쏟아 부은 만큼 저 정도의 효과도 생기지 않는다면 조금은 섭섭해질 것이다. 확실하게 떨어진 마법을 본 정진호 집단은 조금 다행이라는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도 여유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법의 여파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키에에에에엑!” 녀석들의 표정이 점점 구겨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마법이 떨어져서 여유가 생겼고, 잠깐 동안 쉴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다만.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밀집된 아귀들에게 불이 옮겨 붙고 있다는 것. 불덩이에 휩싸인 괴물들이 서로 뒤엉키며 화려한 불꽃놀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괴로워하는 것도 잠시. 처먹는 것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놈들은 결국 자신들이 향하던 곳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조금 더 흥분한 모습으로 말이다. “키에에에에에에엑!” 비명인지 즐거움인지 모를 괴물 새끼들이 불덩이가 된 채로 정진호 무리에게 달려드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 ‘불타는 아귀다, 이 살인자 놈들아!’ “제길!!” “죄, 죄송합니다! 이,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이곳에는 없는 종류의 괴물. 놈들은 전혀 새로운 종류의 몬스터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 30 회귀자 사용설명서 030화 퀘스트(3) “이런 제기랄!!” 뚫리면 죽는다. 뒤엉키거나 침입을 허용해도 죽는다. 지금 이 파티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이 진형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진호 무리들도 사냥을 나가지 않은 놈들은 아닌 만큼, 분명히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버티고 있다. “제기랄!” 한껏 뜨거워진 불타는 괴물 새끼들을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놈들의 모습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죄, 죄송합니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쓰레기 짓. 괴물의 수가 줄어들었으니 실질적인 부담은 줄어들겠지만 뜨거움 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부담감을 안고 싸우고 있는 놈들의 모습은 확실히 가슴이 아프다. 불타는 괴물 새끼들을 최대한 밀어내고는 있었지만 자신들에게 옮겨 붙을 하는 불꽃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문제다. 아마 체력적인 부담감도 상당할 것이다. 뜨거운 열이 계속해서 놈들의 체력을 앗아간다. 당장 이쪽도 뜨거워질 지경. 정진호 집단이 느끼고 있는 열이 어느 정도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 [몬스터 불타는 아귀의 상태창을 확인합니다.] [이름-없음]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5] [성향-불타는 본능] [직업-백수입니다.] [능력치] [근력-12] [민첩-15] [체력-05] [내구-15] [행운-10] [마력-01]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지만 놈들의 상태창에도 변화가 있다. 생명력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마력을 품고 있는 걸 보니 확실하게 내가 보낸 불꽃을 품고 있는 모양. “불 좀 끄라고, 개자식아!” 부처님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조금만 버텨주세요!” 지옥의 군대에 맞서 싸우는 성스러운 용사들을 보는 듯한 느낌. 꾸역꾸역 물려 들어오고 있는 녀석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놈들 역시 무엇인가를 희생해야만 했다. 자신들의 체력이 됐든, 아니면 정진호가 숨기고 있던 패가 됐든 말이다.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정진호가 선택한 것은 아마 전자. ‘끝까지 숨기고 있겠다.’ 끝까지 자신이 숨기고 있는 것이 뭔지 보여주지 않는 판단은 좋다. 이미 녀석의 정보를 알고 있는 나와 김현성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귀여운 놈!’ 소리 내서 웃고 싶을 정도의 멍청함이다. 나는 물론이고 김현성 역시 녀석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미래에 놈이 어떤 직업으로 승급했을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마검사의 상위 직업을 얻었을 것이 분명. 놈의 정보창이 말해주고 있는 마검사라는 직업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미래. 지금 놈이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패는 이미 이쪽이 모두 알고 있는 것들이다. 패를 까놓고 하는 포커나 다름없다. 이미 놈이 가지고 있는 카드가 투페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숨기려고 아득바득 이빨을 깨물고 있는 것을 보면 웃음이 나올 지경. 심지어 이쪽이 가지고 있는 것은 김현성이라는 다이아몬드 플래시다. 역시나 놈의 판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상황은 조금 더 안 좋은 쪽으로 치달아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제길! 기철아!” “버텨 주세요!” 왠지 모르게 정감 가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정진호의 똘마니중 하나 이기철. 녀석이 불타는 아귀에게 붙잡혀 버린 것. 괴물에게 팔이 잡혔는지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당연히 이쪽이 뭘 해줄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이기철이 불타는 아귀들의 품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좁은 공간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괴물들의 품으로 꾸역꾸역 삼켜지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으아아아아아악! 살려줘! 살려줘!” “기영 씨! 하얀 씨!” 아직 한 번 남은 소중한 마력을 정진호의 똘마니를 지켜주자고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조금만! 더!” ‘뚫리지는 않을 거야.’ 정진호가 있는 이상 뚫리지는 않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그만해! 그만해! 개새끼들아! 그만!” 내장을 파먹고 있는 건지, 팔다리를 뜯고 있는 건지 이쪽에서 확인할 길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척이나 놈의 목소리가 고통스럽게 들려왔다는 것. 산채로 먹히는 고통과 살이 불에 타고 있는 고통이 동시에 느껴질 테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 놈은 끝.’ 이 와중에도 사람을 한 명 죽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감돌기는 했지만 전투의 흥분이나 상황 때문인지 죄책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이나 원하고 있던 상황. 입꼬리가 계속해서 올라간다. “할 수 있습니다!” ‘유리해.’ 안 그래도 유리한 상황을 더 유리하게 만들었다. “으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제기랄! 제기랄! 기철아!” “형님, 이거 진짜 위험한 건 아니요?” “신경 쓰지 마라. 뚫리지 않을 거야.” 끝이 보인다. 계속해서 버티다 보면 분명히 끝이 보일 거다. 정진호와 다르게 김현성은 초조해하지 않는다.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흐으읍!” 단순한 작업의 반복. 막아내고 창을 찔러 넣는다. 마치 오래 달리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처럼. 창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은 물론, 호흡도 계속해서 거칠어진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았고 숨을 쉬기가 힘들다. 당장에라도 땅에 엎드려 헐떡거리고 싶지만 계속해서 달려드는 놈들은 쉴 시간도 주지 않았다. ‘괜찮은 건가.’ 박덕구의 상태는 나쁘지 않다.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 한쪽 진형에 구멍이 생긴 정진호도 마찬가지다. 유석우나 남아 있는 궁수는 힘들어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나 정도로 보이지는 않는다. 괴물 새끼들의 시체가 벽처럼 쌓이고 또 다른 괴물이 그 시체를 넘어 이쪽으로 넘어온다. 박덕구는 그걸 막아내고 나는 다시 녀석을 창으로 찌른다. ‘버틸 수 있는 건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불안감이 감도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제는 녀석들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파악이 잘 안 될 지경.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들려오는 울음소리들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내 커다란 목소리만 울린다. ‘버텨주세요’라든가. ‘조금입니다’라는 개소리 말이다. “흐으으으읍!” 마치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는 듯한 느낌으로 내지른 창. 박덕구도 커다란 기합을 내지르며 방패를 밀어냈다. “키에에에에에엑!” 마침내 김현성이 슬쩍 자신의 팔을 내려놨을 때, 이 지옥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끝났다.” “끝, 끝났다….” 나도 모르게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입을 연 것은 김현성이다. “곧바로 이동하겠습니다.” ‘개….’ “방금 전에 저희가 받았던 퀘스트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몸을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끄응… 형님. 걷기 힘들면 내가 안고 가리다.” “됐다. 덕구야. 나도 걸을 수 있어. 하얀이는….” “저, 저도 마찬가지예요. 오빠.” 이쪽은 이미 준비를 마쳤다. 문제는 바로 저쪽. 아마 괴물들에게 끌려가 죽어버린 기철이라는 놈의 시체는 제대로 찾을 수도 없으리라. 앞쪽의 시체를 뒤적거리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참담하게 죽은 동료의 시신을 봤는지 결국에는 고개를 떨구기는 했지만 이쪽에게 보내는 적의까지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정진우 역시 무표정. 유석우가 내게 보내는 표정 역시 적의다. “이 개 같은 놈!” 머리카락은 대부분 타 있었고 몸에도 상처투성이. 이미 뒈져버린 기철이라는 놈이 괴물에게 끌려간 이후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칼을 든 것은 확인했었다. 겉모습을 보니 꽤나 고생한 모양. “죄, 죄송합니다.” “단순히 죄송하다고 끝날 일인 것 같아? 이 새끼야!” “그, 그렇지만… 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직 화염계 마법 이외에 다른 마법은 익숙하지 않았고 제 마법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아마 더한 참사가 벌어졌을 겁니다. 하얀이가 마법을 쓰기에도 시간이 부족했고 놈들이 서로 달라붙어 불길을 옮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 그리고… 놈들의 숫자는 확실하게 줄였습니다.” 과는 있지만 공은 확실하다. 애초에 내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시점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 분명. 물론, 정하얀이나 내가 마력을 전부 사용해 이 상황을 해쳐 나가는 선택지도 있었겠지만 놈을 살리기 위해 마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득보다는 실이 많다. 정진호도 똑같은 판단을 했다. 물론 정진호의 입장에서는 기철이라는 놈이 이렇게 빨리 리타이어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그게 놈의 실수다. 조금 화력이 과했었고 불이 달라붙은 것 때문에 기철이란 놈이 죽은 것은 사실, 그러나 내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없다. 어디까지나 일부러 불을 뿌린 것은 맞지만…. ‘그렇지.’ 그건 놈이 굳이 알 필요가 없다. “그걸 말이라고….” “어쩔 수 없었습니다. 기철 씨의 죽음은 저도 안타깝습니다만… 지금은….” 방구 낀 놈이 성을 내고 있는 상황이다. 놈이 저렇게 황당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당장에라도 활이나 창을 겨누고 싶은 심정일 것이 분명하지만……. 인상을 찌푸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놈의 모습을 보니 조금 무섭기는 하다. 애써 박덕구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개입하지 말라는 내 행동에 박덕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이… 이….” 어딜 봐도 동네 양아치처럼 보이는 외모. 이런 놈들의 특징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분노 조절 장애.’ 자신보다 약한 자라고 생각되는 이들에게만 보이게 되는 분노 조절 장애.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래도 우리들은 살지 않았습니까.” 가까이에 있는 놈에게만 보일 정도로 입꼬리를 올리며 히죽거리는 미소를 보내자 참지 못했는지 놈이 주먹을 휘둘러왔다. 당연하지만 굳이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느 정도의 갈등은 필요 하니까. 퍼억 소리와 함께 내 몸이 옆으로 나가떨어진 것은 당연지사. 순식간에 정신이 멍해지는 것은 물론, 입안이 터졌는지 피가 고였다. 굳이 연기하지 않아도 너무나도 허약한 내 몸은 땅바닥에 철푸덕하고 쓰러져 내린다. “형님! 이 잡놈이!” 깜짝 놀란 박덕구의 목소리. “괜찮다, 덕구야. 실수한 건 나니까.” 박덕구를 말리는 피해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재준 씨, 거기까지 하시죠.” “그, 그렇지만….” “거기까지 하는 게 맞습니다.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더 이상의 갈등은 좋지 않습니다.” ‘그렇지. 갈등은 좋지 않지.’ 정진호의 입장에서도 지금 이 자리에서 부딪치게 되는 건 사양일 테니까. 퉤 하는 소리와 함께 입안에 있는 걸 뱉어내니 고여 있는 핏물과 함께 이빨 하나가 툭 하나 떨어졌다. ‘아으….’ “괜찮습니까? 기영 씨….” “아. 괜찮습니다, 현성 씨. 제 실책입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쩐지 지나치게 아픈 것 같았다. 김현성에게서 별 말은 없다. 그렇지만 저쪽을 묘하게 경계하는 느낌에 내가 실수한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심지어 나를 걱정해 주고 있는 듯한 눈빛은 정말로 따뜻해 보인다. 회귀자 김현성의 동료. 너무나도 따뜻한 울림. 이것만으로도 내가 가장 안전한 장소에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예상하지 못한 문제는 전혀 다른 쪽. ‘아….’ 정진호의 똘마니, 김재준을 무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는 정하얀의 존재였다. ‘큰일 났다.’ # 31 회귀자 사용설명서 031화 퀘스트(4) 누가 봐도 내가 잘못한 상황이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쓰레기 짓이었다. 장담컨대 솔로몬이 와서 판결을 내려도 나를 죄인이라고 말하리라. 김현성에게 평판이 깎일 각오를 하고 선택한 도박, 확실히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이기철이라는 놈은 아귀의 뱃속으로 사라졌고 정진호의 똘마니는 이쪽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분노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갈등도 만들었고 김현성의 반응도 나쁘지는 않다. 내가 일부로 한 일인지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만들어진 결과에는 충분히 만족한다. 손도 쓰지 않고 한 놈을 아귀 뱃속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피해자가 되는 모험까지 감행하다보니 이빨을 하나 잃기는 했지만 사랑하고 소중한 동료들의 따뜻한 관심을 얻는 아름답고 바람직한 결과를 얻어냈다. 그러나 정하얀이 또다시 저런 표정을 보내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다른 이성과 스킨십을 하는 것도 금기. ‘이것도 안 되는 건가?’ 누군가 내 몸에 손을 대는 것 역시 금기다. 손톱을 까득까득 깨물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잠시. 이쪽이 아직까지 바닥에 엎어져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황급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놈에 대한 적의까지 버린 것은 아니다. “오, 오빠!” 그러나 입 안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심지어 반지를 쓰다듬으며 마력을 보내려고 하는 모습은 가관. 정하얀이 가지고 있는 신성력 반지는 이런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왼쪽 손을 살짝 움켜쥐자 내 뜻을 알아차렸는지 주문을 외우지는 않았다. 눈에는 눈물이 한 가득 고여 있고 커다란 눈에서는 눈물이 쉴 틈 없이 떨어진다. “괜, 괜찮으세요? 어떡해…. 어떡해요.” “물론 괜찮아. 내가 잘못한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입안이 괜스레 쓰다. 이빨 하나가 날아가서 볼 한쪽이 얼얼했지만 아프다는 티를 낼 수는 없다. 괜한 엄살이라도 부렸다간 정하얀이 대뜸 저쪽에 마법을 날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참아줘… 제발 부탁이다.’ 이쪽에서 먼저 마법을 쏘는 것도 분명 나쁜 선택지는 아니지만 웬만하면 피해자의 포지션으로 일을 진행시키는 게 좋다. 김현성이 아직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면 김현성도 그걸 바라고 있을 것이다. “흐으으극….” 내 얼굴을 계속해서 어루만지는 모습은 마치 나라라도 잃은 듯하다. 목이 메는지 자꾸만 히끅거리고 있는 것은 물론, 공황장애라도 걸린 것 같은 모습을 보니 정하얀이 정말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 누가 보면 내가 죽기라도 한 줄 알았을 것이다. 단순히 이빨 하나가 날아갔다고 보여주는 반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격정적이다. “괜찮으세요? 괜찮으신 거죠? 히끅…. 괜, 괜찮.” “응 괜찮아. 별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마, 하얀아. 정말로 괜찮으니까. 정말로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아프기는 하지만 대단한 상처는 아니다. 이 정도 상처에 이런 반응을 보여준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고마운 일이지만 또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본다면 조금 무섭게 보이기도 했다. “이놈이! 감히 어딜!” 화를 내는 것은 박덕구 역시 마찬가지. 사실 잘못해서 한 대 맞았을 뿐이다. 그러나 정하얀이나 박덕구가 보여주는 반응은 놈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정진호 역시 당황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누구보다 당황스러워 하는 것은 나를 때린 장본인. 갑작스럽게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불길함을 감지한 것이다. 마무리 되려고 하는 상황에 정하얀의 반응이 새로운 화두를 던져줬다. 오차가 있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은 정치질이었다. 가해자가 순식간에 피해자로 둔갑하는 마법.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보다 더욱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푸흡.’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런 얼굴을 보여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미소가 지어진다. 결국 고개를 숙인 것은 정진호 쪽이었다. “죄송합니다, 기영 씨.” “아닙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나쁜 의도로 그러시지 않으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마법을 써주지 않으셨다면 더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겠죠. 오랫동안 함께했던 기철 씨가 죽었다는 거에 재준 씨가 조금 흥분한 것 같습니다.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재준 씨?” “그렇지만….” “재준 씨. 사과하셔야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만약 기영 씨가 아니었다면 저희 모두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정진호의 눈치를 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인상을 구기고 있던 재준이란 녀석도 결국에는 고개를 숙여왔다. “제, 제가 잠시 흥분한 것 같습니다. 죄송… 합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주먹. 말을 잇기가 힘든지 나를 제대로 쳐다보고 있지도 않다. 정황상 사과는 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사과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성향이기도 했고, 사과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화를 참아내고 있는 표정이다. “괜찮습니다, 재준 씨.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조금 경솔했었고… 어떤 말로도 위로 드릴 수 없겠지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물론 나도 진심은 아니다. “죄송… 합니다.” 억지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딱히 사과를 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기분은 좋다. ‘푸흐흣.’ 녀석이 분노 조절 장애자가 아니었다면 계속해서 고개를 숙여야 했던 것은 내가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녀석보다 걱정되는 것은 당연히 정하얀의 존재. ‘이거….’ 만약에 박혜영 때와 똑같은 일을 벌이는 것을 생각 중이라면 난감해지는 것은 이쪽이다. 이미 박혜영 사건의 범인은 정진호라고 못을 박아놓은 상황. 갑자기 정진호의 똘마니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진 이후, 다시금 녀석이 사지가 절단된 채로 발견된다면 김현성은 정하얀을 의심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함께 용의자 선상에 오를 것이다. 말리고 싶지만 표정을 보면 말려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얼마나 주먹을 꽉 쥐었는지 손톱으로 상처가 난 손바닥을 보니 정하얀이 녀석을 공격하는 건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쁘진 않아.’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나쁘지는 않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정하얀이 직접적으로 움직여 준다는 건 이쪽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니까. 김재준이 죽는다면 정진호는 손발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저건 왜….’ 그러나 떨어져 나간 내 이빨을 남몰래 집어 드는 정하얀의 모습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다. “일단은 움직이겠습니다, 기영 씨.” “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살짝 몸을 일으키자 마치 부축이라도 해주겠다는 듯이 이쪽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가져다 대지만 그 정도 상처는 아니다. 그래도 일단은 붙어 있는 것이 정답. 방아쇠를 당기는 타이밍은 이쪽이 정해 줘야 한다. 자신의 이상한 모습을 들키는 것을 싫어했으니 아마 내가 옆에 붙어 있다면 당장은 터지지 않으리라.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혹시라도 힘드시면….” “아니, 정말로 괜찮습니다. 현성 씨. 말씀대로 일단은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하죠.” “네.” 철문은 아직도 굳게 닫혀 있다. 퀘스트가 끝나기 전에는 열리지 않을 수도 있고 아니면 외부에서만 열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이 던전에 있는 퀘스트들을 완료해야 된다는 것. 공교롭게도 퀘스트의 이름 역시 생존이다. “어쩌면 그 여자가 말했던 생존 혹은 공략이라는 게 이곳에서의 퀘스트를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한 정진호의 말. 아무 말이라도 하고 싶을 것이다. 정하얀을 포함한 모두가 정진호와 똘마니들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거리감을 좁히려고 발악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어울려주지 않을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마침 나도 비슷한 걸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저도 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1층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이곳에서의 생존과 공략이 주가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생존이라는 게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 괴물들을 피하거나 이겨내는 게 조건이라면 동시에 공략 퀘스트 역시 해결되는 것이니까요. 만약에 이 가설이 맞다면 1층은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는 장소였겠군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곳에서 생존과 공략을 동시에 해결해야 된다는 소리다. 살짝 김현성을 바라보니 부정하지는 않는 것 같은 느낌. 선두에서 길을 찾느라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다른 소리가 없는 것을 보면 나와 녀석의 가설이 맞는 것 같았다. 1층에서 여자가 말했던 생존과 공략, 두 가지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생존은 이해가 가지만….” “어쩌면 이곳에는 보스 몬스터 같은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 “그게 일반적이니까요. 상태창이나 직업 같은 것을 보면 이곳은 온라인 게임과 제법 유사합니다. 만약 튜토리얼이 아니었다면 공략을 위한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단순하게 생존과 공략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던전이라고 한다면 조금 다른 괴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괴물을 죽이는 게 아마 공략이 되겠죠.”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기영 씨.” “단순한 추측입니다. 두 번째로는 길을 찾는다는 선택지가 있을 수도 있겠죠.”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 말씀이시군요.” “네.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저희 모두를 밖으로 나가게 해주는 장치가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몇 가지가 더 있겠지만 생각나지는 않는군요.” 아니면 말고, 그냥 누구나 할 수 있는 추론이고 머릿속에 있는 개소리를 던져본 것에 불과하다. 정진호도 심지어는 유석우도 같은 걸 생각하겠지만 직접 입 밖으로 내뱉는 것과 내뱉지 않는 건 차이가 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기영 씨는….” 유석우가 중얼거렸다. 말에 조금 가시가 있는 것 같은 느낌. 불덩이를 일부로 집어던진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았지만 당연히 웃어 넘겼다. 이쪽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망상에 불과합니다.” 단순한 망상이다. 계속해서 길을 걸어도 아까같이 괴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간헐적으로 눈에 띄기는 했지만 아까 같은 전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혹시나 다른 소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정리했고 아까 같은 사고도 벌어지지 않았다.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이동 속도는 굉장히 느려졌지만… 조금의 여유를 찾을 수는 있었다. 그 와중에 마력이 자동으로 차고 있는 것은 웃을 수 있는 부분. 김현성이 간혹 인상을 찌푸린다든가, 정하얀이 김재준을 빤히 바라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행히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특히나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뭐가 그리 억울하고 분했는지 입 안이 부운 나를 볼 때마다 가끔 혼자서 눈물을 쏟아댔고 고개를 흔들며 혼자 중얼거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보이자 조금 당황했던 건 박덕구 쪽. 여자에 익숙하다고 호언장담했던 것과는 달리 정하얀을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지 감을 못 잡는 것 같았다. 누가 봐도 상황이 이상하니까. 사실 눈물을 보이는 것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고 속삭였던 부분이다. 너무 목소리가 작아 가까이에 있는 나에게도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가끔씩 귀에 꽂히는 단어들로 미루어 추측해 봤을 때는…. ‘죽여야 돼’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굳이 알아들었다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게 나에게도 이로울 테니까. “제가 복수해 줄게요.” 들리지 않는 척하는 게 더 좋다. 이건 확신할 수 있다. # 32 회귀자 사용설명서 032화 퀘스트(5) “밖에는 뭐가 있을 것 같습니까?” “글쎄… 아무래도 이곳에서 먹는 음식보다는 훨씬 맛있는 게 있지 않겠소.” “흐으윽….” “아마 덕구 씨가 원하는 것도 있을 겁니다.” “흐그윽….” “….” “….” “괜찮다니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이들이 묘하게 조용해졌다. 이제는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나를 빤히 쳐다보다 눈물을 참지 못했는지 또 한 차례 눈물을 쏟아내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맨 처음처럼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씩 이렇게 뚝뚝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지는 걸 볼 때마다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물론 상황은 나쁘지 않다. 김재준과 정진호가 이쪽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티의 분위기를 조금 좋게 끌고 나가기 위해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정하얀이 이런 식으로 눈물을 쏟아내니 분위기가 조금 숙연해 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누가 보면 뒈진 게 이기철이 아니라 나인 줄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정하얀이 김재준 쪽을 째려보는 것도 일과가 되어버렸다. 김재준이 얼마나 불편해할지 감도 제대로 오지 않을 정도다. 이미 저들은 이쪽에 설설 기어야 할 입장이 됐다. 이기철이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하면서 유지되던 힘의 균형이 무너졌다. 정진호 파티는 사실상 이쪽을 사냥하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정말로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는 순간이 오지 않는 한 무난하게 공략을 끝내는 게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였어도 그랬을 거다.’ 내가 정진호의 입장이었어도 김현성 파티를 죽인다는 계획을 전면 취소했을 것이다. 그들이 조금의 갈등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진호 씨. 조금 민망하군요. 사실은 계속 사과 받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건 제가 아닌데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사과를 해오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제가… 흥분했었습니다.” “당연히 흥분할 만합니다. 저도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둘이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정진호가 사과를 해올 때마다 김재준 역시 미안하다는 의사를 표현하고는 했다. 문제는 조금씩 조금씩 정하얀이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 “미, 미안할 짓을 어째서….”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을 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저러다 진짜 속마음을 말하는 게 아닌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 정도 사리 분별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유석우의 반응이었다. “…….” 처음 내가 정하얀과 가까운 사이라는 걸 밝혔을 때부터 놈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역시나 정하얀과 내가 붙어 다니기 시작하자 불편하다는 기색을 드러내곤 했다. 특히나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고 있는 모습을 정하얀이 나를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답으로 인식한 것 같았다. ‘유석우….’ 애초에 녀석은 정하얀에게 성범죄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실제로도 미수에 그쳤으니 이곳에 있는 게 조금 황당한 인원 중 한명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놈이 전에 한 짓을 생각해 보면 범죄자 집단과 어울리는 것도 이해하지 못 할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정진호들은 녀석에게 무엇인가를 약속한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뒤늦게 직업을 얻고 그들과 같이 다니며 경험을 쌓은 것일 수도 있다. 이를 테면 정하얀이라든가. 성공적으로 일을 끝내면 사랑하는 내 님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렜겠지만 계획이 전면 취소되게 생겼으니 질투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도 이해는 간다. 아무튼 간에 이 파티는 최소한 겉으로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분쟁을 최소화하고 다툼이 없고 싸우지 않는 아름다운 파티 말이다. 이 모든 결과물은 정진호와 김재준이 이쪽에 설설 기며 형성된 분위기였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그다지 놈들처럼 하하 호호 지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김현성은 가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나로서는 그게 정진호를 어떻게 처분할지에 대한 고민이 아니길 바란다. 놈들은 박혜영을 죽인 살인자들이고 이곳에서 죽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김현성이 정진호를 처음 봤을 때 보여준 반응을 생각해 본다면 그럴 확률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정진호와 유석우 그리고 김재준은 아직까지 가면을 쓰고 있다. 이곳에서 이쪽이 먼저 선공을 날린다면 미친놈이 되는 것은 당연히 김현성. 최소한 나와 박덕구 정하얀에게는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것이 확실한 만큼 명분이나 기회를 노리는 중일 수도 있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놈들을 죽일 수 있는 기회, 혹은 명분, 김현성이 간혹 인상을 찌푸리는 것은 그런 걸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도와줘도 될까.’ 김현성은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럴듯한 상황이나 우리와 떨어져 녀석들과 남을 수 있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를 테면…. ‘먼저 공격 받는다든가.’ 하는 일 말이다. 아마 그게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갑자기 습격해 온 비겁한 범죄자 무리에 맞서 싸우는 정의의 용사들, 어감이 꽤나 좋다. 문제는 이기철을 잃은 정진호와 똘마니들이 이쪽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것에 있지만, 한 명은 분노 조절 장애자에 한 명은 질투에 미친 남자라는 걸 고려해 보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쉬운 작업일 수도 있다. ‘도발은 특기니까.’ 특히나 유석우 같은 경우에는 정진호의 똘마니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는 만큼 정진호도 예측 못 한 돌발 행동을 해올 가능성도 있다. 생각을 계획으로 옮기는 것은 순식간. 일단은 정하얀을 이용해 놈의 속을 살살 긁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보였다. 무슨 커다란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 단지. 스킨십.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오빠….” 정하얀이 작게 속삭였다. 조금 당황한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굳이 손의 위치를 옮기지는 않았다. 허리와 골반의 경계선에 손을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 떨리는 모양. 누가 보면 내가 정하얀을 지지대 삼아 길을 걷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손 위치의 애매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정하얀이나 유석우가 전부일 것이다. 허리도 아니고 골반도 아니고 둔부도 아니다. 뭐라고 딱히 설명하기 애매한 그 경계선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반응이 온다. ‘풉….’ 이쪽에 분노를 보내고 있는 게 느껴진다. “아, 하얀아. 미안….” “괜, 괜찮아요. 편하신 곳… 잡으시면 돼요….” “그래도.” “괜찮아요….” 마치 사랑하는 여자친구라도 빼앗긴 것 같은 표정은 내가 봐도 참담할 지경이다. 김현성과 정진호, 박덕구와 똘마니 김재준이 던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놈은 이쪽만 바라보고 있다. 슬쩍 손을 더 아래쪽으로 내리자 정하얀은 고개를 숙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너무 좋아하는데….’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와 반대로 유석우는 속이 뒤집어 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슬쩍 눈이 마주치는 것은 순식간. 당연하지만…. 입가에 미소를 띄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부럽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행동이나 표정은 가끔은 훌륭한 대화수단이 되어주기도 하니까. “고마워, 하얀아. 힘들지는 않아?” “아! 아니에요. 오빠가 도와주신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놈이 병신 같은 코스프레까지 하며 잡고 싶어 하고 만지고 싶어 했던 정하얀이다. 그런 정하얀의 이곳저곳을 떡 주무르듯이 만지는 것처럼 보일 테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애초에 놈이 정하얀에게 진지하든 진지하지 않았든 그런 여부는 별로 상관 없다. 놈의 찌질함을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진지했을 거라고도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달달하네.’ 본인이 뿌린 씨앗이다. 이것 외에도 보여줄 것은 많다. 당장 나를 걱정하는 정하얀의 눈빛이나 달콤한 목소리. 물론 나에게는 달콤하게만은 들지 않지만 마치 꿀을 바른 것 같은 목소리는 놈의 아픈 가슴을 더욱더 후벼 팔 거라고 생각했다. ‘손을 붙잡고.’ 몸을 밀착시킨다. 허리나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적당히 긴장감을 유지한다. ‘몸의 대화라는 건 좋지.’ 성적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대화 방법이다. 정하얀의 얼굴은 이미 붉어질 만큼 붉어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가에 매달려 있는 미소는 도무지 사라지질 않는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는 것 같아 그만 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 행동을 끊을 수가 없다. 결국에는 놈이 참지 못했는지 말을 걸어왔다. “하얀 씨,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제, 제가.” “…….” “풉.” 하고 웃음소리가 나도 모르게 뿜어져 나오는 상황. 완벽하게 유석우를 무시하고 있는 정하얀이 보였기 때문이다. 정하얀과는 다른 의미로 붉어진 유석우의 얼굴이 보인다. 뒤에서 일어난 작은 소란에 살짝 뒤를 돌아보는 김현성과 정진호 그리고 박덕구. 정하얀이 조금 숨소리를 거칠게 내뱉는 것을 본 박덕구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거, 누님 이제 힘들면 교대해도 되는데….” “그래, 하얀아. 사실 그렇게 많이 다친 것도 아니….” “아! 아니에요! 제, 제가 할 거예요. 제가… 같이….” “거, 우리 누님이 아무래도 형님이랑 붙어 있고 싶은 모양인 것 같은데… 힘들면 꼭 말해줘야 됩니다.” “네.” 꽤나 좋은 타이밍에 박덕구가 개입해 줬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하얀이 원하고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알린 것이나 다름없다. 정하얀의 허리에 손을 올리며 슬쩍 뒤를 바라보자 다시 한번 눈이 마주친다. 히죽. 거리는 미소를 보는 건. 놈에게는 참기 힘든 일일 것이다. “달콤하네.” “네?” “아무것도 아니야, 하얀아.” “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놈의 모습이 보인다. 애초에 자제력이 있는 놈이었다면 쉼터에서도 그딴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정진호 혼자였으면 오히려 더 까다로웠을 뻔 했다. 자신의 검을 꽉 잡는 것을 보니 당장에라도 나를 검으로 쑤셔 박고 싶어 보였지만 일단은 참고 있는 모습에는 칭찬을 보내고 싶다. 자극이 조금 부족했던 건지, 아니면 기회를 보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한 것은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며 정하얀의 허리를 붙잡았을 때였다. “키에에에에엑!” “전투 준비합니다.” 타이밍 좋게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 나는 힘없는 표정으로 창을 들어 올렸고 정하얀 역시 잠깐 떨어져 주문을 외우기 시작. 박덕구와 정진호, 김현성은 전방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푸흐흐흐흣….” 놈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린다. “부러울 거야. 그렇지?” “이….” “정말 부드럽더라. 우리 하얀이.” 입꼬리를 올리고 계속해서 히죽거리는 얼굴을 멈추지 않는다. “숫자는 다섯. 전투 준비 하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이 개새끼야!!!” 놈이 검을 들어 올리는 것은 순식간. 정확하게 배를 향해 들어오고 있는 칼날이 보여 도망가야 하는지 고민했지만…. ‘맞는 게 나아.’ 살 수 있다. 정하얀이 가지고 있는 치유 반지라면 이런 검상쯤은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소름끼치는 느낌이 전해져 오기 시작. “아아아아아아악!” 얼굴을 맞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지는 고통 때문에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지사. 정진호나 김재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그렇지만 뭔가 사건이 터졌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유석우가 나를 찔렀다. 정진호가 유석우를 미친놈 취급하며 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는 했지만…. 놈이 커다랗게 외친 소리에 내 걱정이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제… 제가! 해냈습니다! 진호 형님!! 재준 형님!! 이 개새끼를 해치웠습니다!” 사천왕 중 최약체를 잘라낸 것 치고는 너무나도 위풍당당한 목소리. 정진호가 가지고 있었던 패 중, 적어도 하나는 완벽한 지뢰였다. # 33 회귀자 사용설명서 033화 적(1) 정진호 녀석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대문을 박차고 가출한 정도의 수준일 것이다. “무, 무슨 개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석우 씨.” “제가 해냈습니다! 이 개, 개새끼를! 찔렀다고요! 형님!” “이 미친 자식이!” 잠깐 동안 시끄러워진 공간. 정진호는 곧바로 검을 빼들었다. 당연하지만 나는 그게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는 의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죽이려는 거야.’ 유석우를 죽이고 이 상황을 수습하려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단 죽여 입을 막고 사태를 나중에 정리하려는 것이 틀림없다. 지금 정진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밖에 없으니까. 이런 곳에서 우리 팀과 함께 드잡이를 하기 싫은 것은 분명하다. 만약에 검에 찔린 것이 김현성이나 박덕구라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아쉽게도 검에 찔린 것은 최약체 이기영이다. ‘죽이게 하면 안 돼.’ 반사적으로 김현성을 바라봤을 때 녀석 역시 빠르게 자리를 옮기는 것이 보였다. 상황파악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정진호의 똘마니 김재준은 정진호가 뛰쳐나간 걸 전투의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단검을 들고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 “이 거지같은 쓰레기가! 네가 죽였어! 기철이를 네가 죽였다고!” 물론 이기철은 내가 죽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옆에 있는 덕구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 이쪽에 달려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공략을 진행하는 동안 이 파티의 공식적인 인기인이 된 모양. 후방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할 내가 순식간에 메인 탱커가 되어버린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박덕구의 상황 판단 능력이 조금 느렸다는 것. 적어도 두 번째 공격은 막아줄 줄 알았지만 김재준이 단검을 치켜들고 이쪽으로 달려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제길.’ 정확히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듯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니 등 뒤로 단검이 내리 꽂혔다. ‘아파!’ “아아아아악!” 아프다. 박덕구가 정신을 차린 것은 두 번째 공격이 내리 꽂힌 직후. 커다란 방패로 놈의 몸을 밀치는 것은 물론,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내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뒤에 있는 유석우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금 어안이 벙벙한 모습. 심지어 나를 찌른 검을 잡고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다. 녀석 역시 누군가를 찌른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떨거지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연히 정진호와 김현성. “오해입니….” 라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둘의 검이 부딪쳤다. ‘됐다.’ 쾅!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정진호가 저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게 시야에 비친다. 전투는 이미 시작됐다. 시나리오는 완성됐고 둘을 무대 위에 올렸다. 남은 것은 이 사태를 수습하는 것뿐이다. 어서 빨리 치료해 달라고 하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 문제.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격통에 비명 말고는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치유 마법이 내리 꽂힐 거라고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들려온 것은 정하얀의 비명. “싫어어어어어!” ‘아파….’ “이놈들이!! 형님!” “싫어어어어! 싫어어어어어!!” 비명을 지를 시간에 제발 치료해 줬으면 좋겠다. 너무나도 급박하게 굴러가는 상황에 나 역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 앞에서는 괴물들이 달려들고 있었고 정진호와 김현성은 검을 부딪치고 있다. 박덕구는 앞을 막아야 하는지 유석우가 있는 뒤를 막아야 하는지 아직 갈피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일단 쓰러져 있는 나를 최대한 보호하려고 하고 있는 모습이다. “형님! 형님!!” “아직 안 뒈졌어….” “누님! 반지! 반지! 반지 빨리 외우쇼! 반지!” “아아아아아아아! 오빠! 오빠! 오빠!” “진정하고 반지! 반지!” “아!” 정하얀이 패닉할 거라는 것은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사태가 조금 더 심각해 보였다. 박덕구가 정하얀의 손을 꽉 붙든 이후에야 정하얀은 자신에게 뭐가 있는지 생각난 모양이다. “치… 치유! 치유!” 나에게 쏟아져 내리는 빛. 순식간에 몸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기분 좋은 빛이 확실하게 내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고통은 여전하다. 그러나 울컥 울컥하고 상처 부위에서 혈액이 나오는 감각은 없다. ‘죽을 뻔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아마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빠. 오빠. 오빠.” “형, 형님!” “괜찮… 아.” 조금은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한번 주변을 살펴본다. 말도 없이 검을 부딪치고 있는 김현성과 정진호. 누가 봐도 김현성이 몇 수는 위다. 당연히 놈의 변명 따위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결국에 우리의 메인 빌런은 유석우와 김재준을 버리고 등을 돌려 이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잠깐 동안 이쪽을 바라보던 김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급하게 말을 이었다. “덕구 씨! 하얀 씨와 기영 씨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정진호를….” “알, 알겠소!” 우리가 상황을 정리할 능력이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높은 민첩 수치를 가지고 있는 둘인 만큼, 이쪽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 김재준도 상황이 꼬였다는 것을 이해했는지 곧바로 몸을 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녀석 역시 유석우를 데리고 가지는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괴물을 막아야 하는 건 박덕구 쪽. “이 잡놈들이!” 다시 한번 유석우가 검을 휘둘러 오는 것이 보인다. 물론 이번에는 공격에 맞지 않았다. 박덕구가 방패로 놈을 후려 쳤으니까. 퍽! 유석우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 벽에 처박혔지만 동시에 괴물 새끼들이 이곳에 달려들었다. “마력 방패!” 김현성이 준비해준 두 번째 보험이 놈들의 길을 막는다. 동시에 주문을 외우는 것은 순식간. 김재준과 정진호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김현성이라면 둘 다 잡아 올 수 있다. 아니. “형, 형님 누님이 없어졌….” 김재준은 정하얀이 잡아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덕구야. 일단 눈앞에 있는 괴물 새끼들부터 처리하고 곧바로 따라갈 테니까.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다.” “그러면 다행이지만….”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나 역시 보지 못했다. 그새 주문을 외우고 김재준을 따라 나선 것이다. 민첩 수치가 높은 녀석을 따라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쪽도 모를 정도로 서두른 것을 보면 아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올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맞닥뜨린 탓인지 박덕구의 얼굴 역시 눈물범벅. 내가 쓰러져 피를 흘리는 모습이 꽤나 충격적으로 보였던 모양인 것 같아 녀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울지 마, 돼지 새끼야.” “누, 누가 울었다는 거요?” 멍 때리던 녀석 덕분에 몸에 단검이 한 번 더 박히기는 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 * ‘제기랄.’ 뭐가 어떻게 돌아간 건지 이해하기 힘든 상황. ‘유석우 멍청한 놈. 쓰레기 같은 놈.’ 놈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유석우만 멍청했던 게 아니다. 정진호가 검을 뽑은 걸 공격 신호로 받아들이고 냅다 단검을 꽂아버린 자신 역시 마찬가지. 조금 더 냉정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함께 움직였던 친우인 이기철. 이기영 그 때려죽일 개자식이 친구를 죽였다는 생각 때문에 냉정을 찾지 못했다. ‘계획은 취소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말로는 미안하다 말하면서도 미소를 보이거나 이빨을 보이는 녀석 때문이었다. 자제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참지 못했다. 그 표정, 그 표정이 문제였다. 비웃는 것 같은 그 표정. 대놓고 도발하는 그 표정. 속으로 얕잡아 보는 듯한 놈의 눈빛과 미소가 문제였다. 안 그래도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간 상황에서 배에 검을 맞은 녀석을 발견했다. 그 상황에서도 묘하게 즐거운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놈의 얼굴을 발견한 순간,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정진호 개자식 역시 문제. 애초에 녀석과 동료애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토록 헌신짝 버리듯이 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상관없어.’ 그렇지만 그건 이제는 상관없는 이야기. 어차피 녀석과는 필요에 의해서 만나던 사이, 놈이 자신을 이용한 만큼, 자신도 녀석을 이용하면 된다. 간단한 이야기다. ‘일단.’ 일단은 이곳에서 벗어난다. 정진호는 방금 그 상황에선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길에 눈이 밝은 만큼 정진호가 도망간 길을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 지금도 놈이 도망간 흔적이 확실히 눈에 비친다. 정진호를 따라나선 김현성을 함께 처리하고 이번에는 조금 더 확실하게 뒤를 친다. 이기영 그 개자식을 찢어 죽이지 않고서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활과 화살을 챙기며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려고 했던 바로 그때였다. ‘뭐야.’ 외워놓았던 길과 다르다. 틀림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길이 아니다. 궁수로 전직을 한 이후에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뭔가 던전 자체에 문제가 있는지 궁금했지만 틀림없이 그건 아니었다. 정진호와 김현성의 흔적 역시 한쪽 벽면을 마지막으로 끊겨 있는 상황이다. “뭐야….” 살짝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 한쪽 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을 느낀 것은 조금의 시간이 지난 이후. “아아아아아아악!!” ‘뭐야…. 이게 뭐야…. 뭐야!’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다. 갑자기 어디에선가 바람이 불어온 이후에 다리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 뭐가 자신을 공격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공포에 질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다시 한번 바람이 불어온 이후에는 손목이 잘린다. “뭐야! 뭐야아아아아악!”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마법의 존재. 다시 한번 필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을 때 어둠 속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내는 여자가 시야에 비쳤다. 처음 보는 것 같은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분명히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다. ‘정하얀?’ 무척이나 붉어진 얼굴. ‘눈이….’ 눈이 이상하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고, 입고 있던 옷도 엉망이다.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쓱쓱 닦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당신한테는 사… 사과하지 않아요.” “뭐….” “절대로 용서 못해. 이… 멍청이! 전, 전부 죽여야 해요. 오빠한테 해를 끼치는 인간들은 모두 죽여야 해.” “무슨 개소리… 아아아아아악!” “입, 입 다물어요! 그 입 다물란 말이야! 이… 이… 바보가! 얼마나 아팠을까. 우리 오빠… 히끅… 얼마나 아팠을까요. 처음에 맞았을 때도… 분명히 아팠을 거예요.”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빠르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정상이 아니다. ‘씨발… 씨발….’ 잘못 걸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순식간. 이기영 그 개자식에게 이상하게 집착하는 것 같긴 했어도 이 정도로 미친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주문을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몸이 먼저 불길함을 감지한 것은 당연지사. 어떻게든 기어서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빠져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치기에는 이곳이 너무 넓다. 힘없는 여자의 팔이 머리카락을 잡아 얼굴을 들어 올리는 것이 느껴진다. “시,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끝내야 되는 게 너무 아쉬워요. 우리 오빠가… 우리 오빠가 당한 걸 몇 십 배로 돌려줘야 되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까. 히끅….” “살려줘… 나는…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거짓말쟁이 말은 안 믿어요…. 공기 폭탄.” 오른손에 들려 있는 것은 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마법이다. 여러 괴물을 피 떡으로 만든 마법. 사람 머리통만 했던 그때와는 다르게 이번에 보이는 것은 아주 작은 크기. 뭘 하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때, 다시 한번 미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 벌려요.” “뭐… 뭔….” “아… 하시라고요. 당, 당신도 똑같이 느껴봐야 되잖아요. 우리 오빠가 얼마나 아팠는지 당신도 느껴봐야 해요.” 저도 모르게 입을 꽉 다물게 된다. 저딴 게 입 안으로 들어왔다가는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렇지만 턱을 억지로 벌리는 미친년은 결국에는 작은 폭탄을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입 안으로 원하지 않은 이물질이 들어오는 느낌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식은땀은 계속해서 흘러나왔고 괜스레 몸이 벌벌 떨려온다. 이후에 일어난 일을 상상하기도 전에 뇌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들린 것은 바로 그때. 쾅! “우워아에에에에엑!” 입 안에서 이빨들의 파편이 터지며 혓바닥과 목, 입천장과 볼을 터져 나온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통 때문에 뇌가 녹아버릴 것 같았다는 것. “아프죠? 당신도 아프잖아요.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미친년… 미친년… 미친년….’ “피 튀었잖아요, 멍청이.” “살여져… 웨에으으엑 살….” 심지어 자신의 겉모습을 단정히 하고 있는 모습은 뭔가 괴기스럽다. 산발이 된 머리를 차분히 정리하고 얼굴에 튄 피를 소매로 슥슥 닦는다. “빨리 끝내야 되니까… 이게 마지막이에요.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돼요.” 제발 이러지 말아 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머릿속으로 떠올린다. 공포심 때문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의식은 점점 흐려지는 중.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정신을 붙잡았을 때, 마지막일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죽어버렸다.” # 34 회귀자 사용설명서 034화 적(2) “울지 마, 돼지새끼야.” “누, 누가 울었다는 거요?” 멍 때리던 녀석 덕분에 몸에 단검이 한 번 더 박히기는 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죽을 뻔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생각해 보면 더욱더 황당하다. 정말로 어처구니없게 죽을 뻔했다. 내 시나리오대로라면 박덕구는 두 번째 공격이 닿기 전에 김재준을 막았어야 했고 정하얀은 소리를 지르기 전에 일단 치유의 반지에 마력을 집어넣었어야 했다. 실제로 피를 너무 흘려 정신이 희미해질 때까지 갔으니 운이 좋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 계산이 아주 작은 요소에도 망가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고, 함부로 주사위를 던지면 안 된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필요할 때는 던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주사위를 던지기 전에 더욱 철저히 준비해야 함을 실감한 것이다. 아쉽기는 했지만 어쩔 수는 없는 노릇. 당장 나조차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공황을 일으킨다. 순진한 박덕구나 마음 약한 정하얀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어쩌면 겨우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 이곳은 튜토리얼이고 게임에 비유하자면 우린 아직 초보자인 셈. 아마 정하얀과 박덕구의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형님, 저는….” “일단은 유석우를 붙들고 있으면 될 것 같다.” “끄응… 괜찮겠소?” 대충 고개를 끄덕인다. 무려 희귀 등급의 아이템 마력 방패의 반지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 마음의 눈으로 보이고 있는 놈들은 지금 이 마력 방패의 마력을 뚫을 수 있는 힘이 없다고 판단했다. 갑작스레 김현성에게 고마워졌다. 내가 생각보다 아이템 효과가 좋다. ‘마력 방패.’ “키에에에에에엑!” 반투명한 막을 계속해서 두드리는 괴물들이 보이긴 했지만 굳이 무섭다는 감정이 들지는 않는다. 주문을 외우고 마력의 탑을 쌓는다. “주여, 나, 바라노니, 내 목소리에, 답해, 적들을 태울, 힘을….” “…….” “화염구.” 머리가 살짝 어지럽다. 마력에는 조금 여유가 있는 상황이나 아마 피를 흘린 것 때문일 것이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대미지는 아직 남아 있는 느낌이었으니까. 주문을 외우자 커다란 불덩이가 눈앞에서 생겨났고 마력의 방패를 해체시키며 그대로 손을 뻗으니 굉음과 함께 놈들이 폭발에 휘말렸다. 쾅! 완벽하게 직격이었지만 혹시 살아남은 놈들이 있을까 싶어 내 앞을 막아주는 박덕구. 틀림없이 전멸이다. “후우….” “몸, 몸은 괜찮은 거요?” “괜찮다니까.” 조금 어지럽기는 하지만 문제는 없다. 오히려 무척 상쾌한 기분이다. 죽다 살아나기도 했고 상황이 꽤나 아름답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정진호는 김현성이 죽여줄 것이고 김재준은 정하얀에게 붙들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유석우를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것. 아예 생각해 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일단 제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도 당연지사. 박덕구도 바보가 아닌지 녀석을 꽁꽁 묶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허술한 가죽 끈이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놈의 근력으로는 저런 가죽 끈도 끊을 수 없다. “이거 놔! 이거 못 놔?” 뒤늦게 정신을 차렸는지 저항하고 있기는 했지만 반전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놈은 바닥에 깔린 채로 발버둥 치고 있었고 박덕구는 힘으로 녀석을 누르고 있다. “개자식!” “이기영 너, 이 쥐새끼! 당장 이거 못 풀어!?” “병신.” “형님들이 다시 와줄 거다. 김현성 그 개자식을 해치운 다음에 곧바로 여기로 와서 네놈들의 목에 칼을 쑤셔 넣을 거야. 네놈들은 틀림없이 살려달라고….” 마음대로 떠들고 있지만 기가차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놈의 뇌내망상 세계는 내 생각보다 깊다. “푸핫.” “웃어? 이게 웃겨? 그렇게 계속 웃을 수 있을 것 같아? 이기영! 그리고 옆에 있는 돼지도… 정하얀 그년도 용서 못 하지. 절대로. 나를 선택하지 않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다. 매일… 매일….” “뭐라고?” “이….” “잘 안 들리는데?” 최대한 얄미운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지사. 슬쩍 손을 귀로 가져다 대고 얼굴을 내밀며 입꼬리를 올리자 분노로 게거품을 무는 놈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이… 이 이기영, 이 쓰레기가!” 저렇게 흥분한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즐겁다. “꽤나 자신이 있나 봐.” “뭐….” “네가 사랑하는 형님들은 누가 봐도 널 버리고 도망친 것 같이 보이는데 말이야.” “뭐?” “정진호한테 혹시 언질 받지 않았어? 이기철이 죽는 시점부터 계획은 여기서 취소라고…. 아니,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는 게 낮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수도 있겠네.” “뭐?” 황당하다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는 듯한 반응이다. 내가 무척이나 바랐던 장면이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눈’이나 김현성의 반응이 없었다면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조금 느낌이 구린 집단과 함께 움직이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내 말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도 별로 관심이 없다. 놈의 표정을 보니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 것 같지만, 이제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다. 당연하지만 놈에게 이쪽의 사정을 설명해 줄 이유도 없다. “뭐… 뭔 소리.” “병신.”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온다. 이런 게 너무 재미있다. 이런 멍청한 놈들이 인형이나 장기말처럼 움직여주는 이 순간이 말이다. 정진호가 보험이라고 생각한 패가 이런 병신이라 정말로 다행이다. “무슨 소리일까….” “그게 뭔 소리야….” 굳이 설명을 해주지는 않는다. 대신 무척이나 즐거운 미소를 내보냈다.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놈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쪽이 먼저 던전 공략을 제안한 것부터… 처음 몬스터 웨이브를 막았을 때의 마법, 조금은 황당했던 이기철의 죽음. 심지어는 내가 자신을 도발했다는 것까지 모든 게 잘 만들어진 연극이라는 걸 깨닫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멍청한 놈도 이제는 어째서 내가 대놓고 정하얀을 만지작거렸는지 추측하고 있을 것이다. 굳이 놈을 비웃으며 정하얀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모든 게 자신을 노리고 들어온 보잘 것 없는 함정. 아마 그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사실 조차 믿기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스스로의 마음을 컨트롤하는데 서툴다지만 놈의 경우에는 조금 더 했으니까. 박덕구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굳이 다른 설명을 추가하지는 않았다. 미친 것처럼 날뛰기 시작한 놈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기 때문이다. “이… 이기영, 이 쓰레기가! 쓰레기 같은 놈!” 애초에 놈이 형님들을 기다린다는 것도 웃어넘길 수 있는 일. 정진호는 전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해서 유석우를 영입했고 변수를 만들기 위해 던전에 함께 내려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놈이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일을 저지른 것에 불과하다. 조금만 냉정히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 유석우 역시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이… 이!” “고맙다, 석우야. 너한테는 고마운 게 많아.” 실실 비웃는 웃음을 보내자 상황파악하지 못하고 이쪽으로 달려들려고 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미 손과 발이 묶여 있는 상황이라 딱히 무섭지는 않았지만 조금 보기 안 좋은 장면에는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죽여 버릴거야! 죽여 버릴거야!”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야.” 놈을 살릴지 말지,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나. “뭐?”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야. 물론 사람을 죽이는 게 조금 꺼림칙하긴 하지만… 이런 곳에 떨어진 것을 보니 한 번쯤은 경험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경험.” “그게….” “남한테 떠맡기는 걸 좋아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남의 손을 빌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원래 죄라는 건 같이 나누는 편이 더 좋은 법이거든.” “이… 이… 넌 미쳤어….” “너도 마찬가지였잖아. 상황이 조금만 더 꼬였어도 여기 누워 있는 건 나였을 거다. 어쩌면 하얀이나 덕구가 됐을 수도 있겠지.” 살짝 손에 쥔 창을 들어올렸다. “형, 형님.” 나는 물론이고 박덕구 역시 살인을 해본 적은 없다. 조금은 당황스러운 목소리. 말리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진짜로 할 거냐고 물어보는 것만 같다. 아마 녀석이 날 만류했다면 난 여기서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일을 실행하기가 쉽지가 않다. 당연하지만 창을 든 손이 후들후들 떨린다.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미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행하기에는 꽤나 어렵다. 성격이 조금 비틀린 정하얀이나 사람을 수도 없이 많이 죽여 온 김현성과 나는 다르다. 평범한 일반인이고 소시민이다. 솔직히 말해 아직 내키지 않는다. 그렇지만. ‘선택.’ 어차피 경험할 일이라면 지금 이곳에서 경험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 생각했다. “살, 살려줘.” “미안.” 창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보기 싫으면 눈 감아라, 덕구야.” 굳이 박덕구의 표정을 살피지는 않았다. 아마 박덕구는 눈을 감아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살… 살려!”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창이 놈의 목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순식간. 기분 나쁜 감촉이 그대로 전해진다. “켁… 켁….” 창을 붙잡고 발버둥 치는 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부정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당긴 방아쇠고, 내가 쏘아 보낸 총알이다. 팔과 다리가 계속해서 부들부들 떨린다. 사람이 죽는 걸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직접 손을 쓴 것은 처음이다. ‘박혜영 때와 똑같다고 보면 돼.’ 그들 역시 내가 죽인 것이 맞다. 아니, 사실상 내가 죽인 거다. 스타트 포인트에서 처음 본 그 여자 역시 따지고 보면 내가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도움을 외면했으니까. 이제 와서 당황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때처럼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면 된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필요한 일이라고 자위하며 말이다. 한 생명이 조용히 죽어가는 걸 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주여….” “켁… 살… 려….” “미안.” 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계속해서 바람 빠진 목소리가 튀어나왔고 울컥 울컥 뱉어내는 혈액은 보기 좋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녀석의 얼굴은 조금씩 편안해졌다. “살… 려… 엄… 마….” 결국에 이쪽을 바라본 녀석이 조용해짐과 동시에 장내에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가 하면… 너는 더 잘할 수 있다.” 박덕구와 처음 사냥을 해서 괴물을 잡았을 때와 같은 대사. 처음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조금은 엉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박덕구의 입장에서는 말을 돌리기 위한 나름의 화술이었을 것이다. “형님….” “…….” “기독교였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황당한 질문, 나는 피식 웃으며 놈의 말을 이었다. “신 같은 건 없어.” [새로운 직업이 개방되었습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직업을 선택해 주세요.] “봐봐. 있을 리가 없지.” 그런 것. 있을 리가 없다. # 35 회귀자 사용설명서 035화 새로운 직업이 개방되었습니다(1) 조금 뜬금없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경험치가 축적되고 있었을 테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첫 번째 직업을 얻은 이후로 김현성과 함께 다니면서 괴물들을 많이 처리하기도 했고 이곳에 들어온 이후에도 놈들을 쉬지 않고 때려잡았다. 어쩌면 오히려 조금 더딘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조금 재미있었던 사실은 유석우를 죽인 이후에 새로운 직업이 열렸다는 것. ‘인간을 죽여도.’ 경험치는 오른다. 아마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행동이 경험치화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기여도나 막타 같은 것을 수치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데이터를 얻기는 힘들겠지만 쉼터에 있는 인원도 스탯이 오르는 걸 본 적이 있다. 여러 가지 방향이나 마법에 대한 사고는 지력을 올려주고 마력을 사용하는 것은 마력을 올려준다. 체력이나 민첩 같은 모든 스탯이 마찬가지다. 아마 이 직업 역시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직업이 개방되었습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직업을 선택해 주세요.] [개방된 직업을 열람합니다.] [소환사-희귀 등급] [마창사-희귀 등급] [흑마법사-희귀 등급] [연금술사-희귀 등급] [화염마법사-희귀 등급] ‘선택지가 많아.’ 혹시나 사기꾼 같은 직업 같은 게 있으면 어떡하나 조금 걱정했었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 오히려 무척이나 다행이다. 모든 직업이 희귀 등급이라는 것에 일단 점수를 주고 싶은 심정. 자세히 훑어보지는 않았지만 일단 나쁜 직업 같은 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지휘관이 없는 게 가장 다행스러운 부분이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내 전직 정보를 알아낸 박덕구가 다시 한번 지휘관 앵무새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했기 때문이다. 말은 안 했지만 그 당시에도 의외로 호소력 있는 박덕구 녀석의 말 덕분에 세 번 정도는 고민했었다. 사실 아직까지 지휘관을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고민했을 정도다. 이제는 지휘관의 주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사실이 조금 고마웠다. 계속해서 상태창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일단은 빠르게 한 번 훑어볼 수밖에 없었다. 슬쩍 상태창을 바라보자 여러 가지 정보들이 쏟아졌다. [소환사-희귀 등급] [소환사는 앞서 나가 싸우는 직업이 아닙니다. 소환한 사역마나 정령, 혹은 환수 계약을 통해 싸우는 직업군입니다. 이후에는 테이머, 정령사, 환수소환사 같은 소환사 관련 직군들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체력이 1, 지력 1, 마력이 2 올라갑니다.] ‘나쁘지 않아.’ 소환사 같은 경우에는 정말로 마음에 든다. 나를 대신해 앞으로 나가 싸워주는 환수나 정령의 존재가 있다는 점이 그렇다. 보통 소설이나 게임 속에서 나오는 친화력이라는 재능이 나에게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소환사가 직업으로 나온 것을 보니 내 성향과도 잘 맞는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마창사-희귀 등급] [마법과 창을 동시에 사용하는 중거리 직군입니다. 전장의 중심을 잡아주는 마창사는 마법과 창을 동시에 활용해 대, 소규모 전투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직업입니다. 창과 마법에 대한 중급 지식을 습득합니다. 이후에 전직할 수 있는 직업군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민첩이 2, 마력이 2 올라갑니다.] [흑마법사-희귀 등급]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원거리 직업입니다. 흑마법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마법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새로운 차원의 마법입니다. 악마에게 힘을 빌려온다는 개념 때문에 일부 종교 집단에서는 흑마법에 강한 반발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 파괴력만큼은 다른 직업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기초 흑마법 지식을 습득합니다. 마력이 4 올라갑니다.] 마창사는 일단은 패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어질 것이다. 미약한 근력이나 민첩으로 창을 휘둘러봤자 효율일 리 없다. 그렇지만 흑마법사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마력 스탯 +4가 일단 탐이 나기도 하고 기존의 마법 상식을 뒤집는다는 것도 그렇다. “으음.” 그렇지만 종교 집단에게 반발을 느끼게 한다는 게 조금은 고민되는 부분. 만약 튜토리얼이 끝난 뒤 내가 갈 곳이 중세 시대를 기반으로 한 판타지 세계라면 아마 미친 종교집단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쫒을 것이다. 가장 안전해야 할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것은 역시나 사양이다. [연금술사-희귀 등급] [연금술사는 기본적으로 마법화학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하는 직군입니다. 이들은 마도와 마법 그리고 마력에 대해 항상 새로운 방향과 발전을 모색합니다. 호문클루스 연금지식과 연금술에 관한 기초 지식을 습득합니다. 이후에는 약물제조사, 연금마법사, 호문클루스 전문가 등의 직군으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지력이 2, 마력이 2 올라갑니다.] [화염 마법사-희귀 등급] [모든 종류의 속성 마법사 중에서도 화염 마법사의 파괴력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입니다. 강한 화력을 바탕으로 아군을 지원하는 원거리 직군입니다. 소비 마력이 많기는 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은 적도 아군도 깜짝 놀라게 할 것입니다. 이후에는 폭렬 마법사, 폭탄 마법 전문가 등으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마력이 5 올라갑니다.] 당연하지만 화염 마법 전문가는 무조건 패스. 물론 생각해 볼 여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마력을 5나 올려준다는 사실이 그러했고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이라는 말에도 눈길이 갔다. 잘 써봐야 한두 번, 단점은 확실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연금술사?’ 사실 연금술사도 그다지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애초에 마력에 비해 지력이 높은 나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는 직군이다. 전투 능력이 다른 직업군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 것 같기는 했지만 호문클루스, 연금 마법 그리고 뭔가 수상해 보이는 약물제조사 같은 직업은 내 부족한 마력을 메울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확실히 제외할 수 있는 건 마창사 하나. 나머지 직업은 모두 저마다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선택보다는 조금 쉬울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 같아질 정도. 첫 번째보다 지금이 더 중요하다. 이를 테면 전공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선택 한 번에 앞으로 나아갈 대륙에서의 위치가 정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왔다. 물론 급한 것은 아닌 만큼 조금 더 두고 봐야겠지만 수많은 전공 중 어느 쪽을 심도 있게 파고들 것인지에 고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형님?” “아. 미안하다, 덕구야. 하얀이 부터 찾으러 가야지.” “새로운 직업이라도 얻으셨소?” “응. 조금 갑작스럽네. 아무래도 같은 인간을 죽여도 경험치가 오르는 모양이다.” “끄응….” 슬쩍 말을 아끼는 박덕구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이지만 크게 충격 받은 것 같지는 않은 모습. 혹시나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뇌가 근육으로 꽉 찬 놈이라고 부르고는 있었지만 제 딴에는 고민이 많은 것이다. 물론이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 애써 시선을 돌리고는 있지만 오늘의 기억은 아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덕구 녀석도 일단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긴 한 모양. 묘한 침묵이 부담스러웠는지 놈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김현성 그 형씨랑 누님이 무사한지 모르겠소.” “당연히 무사할 거다. 김현성은 물론, 하얀이도 별일 없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거요? 그, 마력이라는 것 때문이요?” “비슷해. 거리가 멀어질수록 감지하기 힘들지만 아마 너도 마력이 생기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걸.” 물론 그들이 무사하다는 걸 마력에 의한 감지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스펙과 성향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한 명은 회귀자고 한 명은 천재 마법사이자 괴물이다. 어쩌면 이미 일을 끝내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역시나 조금 발걸음을 옮기자 곧바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나와 박덕구를 바라보자마자 큰 눈을 뜨고 달려오는 모습은 조금 귀여웠지만 소매에 묻어 있는 혈액을 보니 그렇게 반갑지는 않았다. “오빠… 오빠! 오빠! 오빠!” 달려와 꽉 안기는 모습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적극적. 그만큼 그녀가 나를 걱정한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기분이 좋아진다. “어디 다치진 않으셨어요? 아프지는 않으세요? 이제 괜찮으신 건가요? 흐윽… 유석우는… 그… 그 사람은 어떻게….” “죽었어.” “아아아아. 다행이네요.” 정하얀이 충격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받아들이는 게 너무나도 빠르다. 착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아쉬워하는 것 같은 표정. 이유를 묻기는커녕 오히려 가슴을 쓸어내리며 살짝 웃는 모습에 박덕구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정하얀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누님, 어디 갔다가… 지금 온 거요?” “아… 그… 저도 모르게….” 잠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모습. 아마 따로 변명을 생각해 오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쓰러진 당시에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으니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 한편 겉모습은 또 무척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나에게는 무척 잘 보이고 싶은 모양. 조금 당황하는 것 같은 얼굴에 이번에도 도움을 줘야겠다고 생각해 슬쩍 입을 열었다. “현성 씨를 도와주러 간 거였지?” “아니에요, 오빠. 그, 그런 것 아니에요. 별로 관심도 없는 걸요…. 그냥 저는….” “어?” “현성 씨가 걱정된 게 아니에요.” 생각보다 더 과하게 반응하고 있다. 혹시나 자신이 김현성에게 관심이 있다는 오해를 받기는 싫은 것 같았지만 당연히 그런 의도로 물어본 것은 아니다. “그냥… 너무 화가 나서….” “아….” “김재준 그 사람한테 너무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그랬어요.” 사실상 먼저 배에 검을 꼽은 건 유석우였지만 정하얀은 그 장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나를 주먹으로 치거나 등에 단검을 쑤셔 박은 놈의 모습이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그때의 기억이 생각났는지 다시 한번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져 내리기 3초 전이라는 것을 인지한 박덕구가 굉장히 난감한 표정을 하며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강원도 카사노바치고는 굉장히 어울리지 않은 모습.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연애 박사는 무슨….’ “아니. 아니. 아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소, 누님. 사실 나도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으니… 형님, 그러고 있지만 말고 어떻게 좀….” “히끅. 그게 너무… 너무 계속 생각나서….” “누님, 이제 다 괜찮아졌으니까 울, 울지 마쇼. 이제 다 끝났으니까… 모두 무사하고 형님 상처도 다 나았다니까?” “흐그윽….” “아이고… 형님! 누님 좀 어떻게… 이미 눈도 퉁퉁 부었는데… 이거 어떻게….” 은근슬쩍 이쪽을 바라보며 위로해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녀석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조금은 아팠던 머리가 정리되는 것 같은 느낌. 결국에는 녀석의 바람대로 살짝 정하얀을 안아주자 어깨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오빠….”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등을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죄송해요, 오빠. 히끅.” “큼.” 오히려 고맙다. 뭔가 일이 훈훈하게 마무리된 것 같은 느낌이다. 더러웠던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정하얀을 위로하며 슬쩍 박덕구를 바라봤을 때였다. 묘하게 함박웃음을 짓는 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 ‘저 돼지 새끼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지경. 물론 정하얀이 아까와는 다르게 진정되었다고는 하지만 너무나도 태연하게 이쪽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 당연하지만 나와 정하얀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에서 나오는 훈훈한 미소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저열하고 비열해 보이는 미소. ‘설계였나….’ 나에게 당한 유석우의 기분을 아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저….’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누님.” 강원도 연애 박사 박덕구. 그게 거짓이 아니라 진실일 가능성에 대해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었다. # 36 회귀자 사용설명서 036화 새로운 직업이 개방되었습니다(2) 실실 웃고 있는 박덕구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대충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아마 내 기분이 조금 싱숭생술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랑하는 정하얀으로 잠깐이나마 마음속에 있는 꿀꿀한 기분을 털어버리라는 의도였겠지만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다. 내 품에 안긴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정하얀 때문. “오빠….” 울먹이는 것은 일단 논외로 치더라도 뭔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듯한 느낌. 체취라도 맡고 있는 모양인지 가슴 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아마 김현성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 더라면 몇 시간이고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 계셨군요.” 생각보다는 조금 늦었다. 사실 정하얀보다는 김현성이 조금더 빨리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겉모습은 말끔하다. 그렇지만 옷이 조금 그을렸다든가볼 쪽에 남은 작은 자상으로 봤을때 정진호와의 전투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회귀한 김현성은 당연히 괴물이라고 부를 만한 스펙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진호 역시 만만치 않았던 셈. ‘괴물들.’ 그렇지만 아마 일방적이었을 것이 다. 정진호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스탯과 경험의 차이는 분명하다. 끽 해봐야 마법으로 변수를 만드는게 고작이었을 터. 조금 홀가분해 보이는 놈의 얼굴을 보니 정진호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 모양이다. “다른 이들은….” 조금은 민감한 질문. 정하얀이 엉뚱한 소리를 하기 전에 내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죽였습니다.” “아.” 당연하지만 이곳에서 김현성이 나를 살인자라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 다. 후환을 남기는 것보다는 오히려 더욱더 깔끔한 선택. 선의의 중재자라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지만 이런 이들을 살려두면 안 된다는 사실을 나보다 더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진호는….” 내가 살짝 운을 띄우자 녀석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침울한 기색을 보이는 박덕구 그리고 싱숭생숭한 나와 울먹이는 정하얀. 파티가 전체적으로 조금 기죽은 느낌이었다. 물론 정하얀 같은 경우는 조금 달랐지만 첫 살인에 대한 충격으로 침울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 결국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어왔다.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이 파티의 리더가 동료들의 멘탈을 챙겨주기 시작한 것이다. “알고 있….” “처음부터 이쪽을 노리고 온 것 같았습니다. 석우 씨를 어떻게 포섭했 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중간부터 석우 씨 역시 그들의 계획에 동참한 모양입니다. 아마 저희가 당했다면 쉼터에 있는 이들 역시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 “힘드시겠지만 옳은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음….” “옳은 일을 하신 겁니다. 어쩌면 앞으로 이런 일이 잦아질지도 모릅 니다. 저희가 있는 이곳은 튜토리얼일 뿐이고 밖은 더 가혹할지도 모릅 니다. 힘드셨겠지만 이런 결단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지금뿐 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습 니다만… 부디 이겨내 주시길 바랍 니다.” “감사합니다.” “뭐… 고맙소.” 나름대로 훌륭한 연설이었다. 사실 맞는 일이다. 절대로 틀린 일은 한 것은 아니다. 녀석들이 살아 있었다면 쉼터가 위험해지는 것은 물론, 밖으로 나간 이후에도 많은 피해자를 만들었을 것이다. 비록 유석우가 내 경험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고 한들, 김현성이 말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쓰레기를 치운 거야.’ 말 그대로 쓰레기를 치운 것에 불과.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기영 씨는 조금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아마 현성 씨가 선물해 준 반지가 없었다면… 죽었을 겁니다. 두 번이나 목숨을 구원 받은 게 되는 거군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상처는….” “괜찮습니다. 말끔히 나았습니다.” 한 차례 연설이 끝난 이후 김현성은 조금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일이 풀렸으니 인상을 구길 이유가 없다. 자세하게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 뿌듯해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계획대로 정진호 무리를 처리했고 그것도 모자라 우리들에게 빚까지 만들었다. 어차피 같이 움직이기로 한 동료로 생각하기는 했었겠지만 이번 사건이 우리가 조금 더 끈끈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도 마찬가지. 같이 고생하고, 같이 위기를 겪고, 같이 이겨냈다. 이 네 명은 밖에 나가서도 확실히 좋은 관계를 유지할 거라 확신할 수있다. 안정감 있고 승차감 좋은 김현성 버스에 타고 있는 걸 상상하는 것만 으로도 졸음이 몰려올 지경. 아니, 긴장이 풀린 느낌이다. 박덕구와 정하얀만으로도 이미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역시 우리 회귀자의 승차감은 확실히 남다르다. “조금 피곤해 보이시는데 오늘은 가까운 곳에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게 좋을 것 같소. 형님도 그렇고… 누님도 조금 피곤해 보이니까.” “예.”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마력의 여유가 조금 있을 것이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기는 김현성을 향해 입을 열었 다. 당연히 직업에 대한 상담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선택하는 건 내몫이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김현성을 떠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성 씨.” “예. 말씀 하시죠.” “새로운 직업이 열렸습니다.” “아.” 당연하지만 꽤나 반가워하는 표정 이었다. “빠르군요.” “예. 아무래도 마법을 써서 괴물들을 잡다 보니….” “혹시 어떤 직업이 열렸는지 들을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박덕구는 물론 정하얀도 관심이 가는지 나를 보고 있다. 하룻밤 쉴 수 있는 곳을 찾으며 이야기를 하기에 괜찮은 주제이기도 했고 조금 처진 파티의 분위기를 살릴 수도 있는 적당한 소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소환사, 마창사, 흑마법사, 연금술 사, 화염 마법사. 선택지가 많더군 요.” “확실히 많은 것 같습니다.” 근처에 적당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은 각 직업에 대한 단점과 이후에 선택할 수 있는 직업까지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화염 마법사는 마력이 많이 필요하다든지, 마창사 같은 경우에는 이후에 갈 수 없는 직업이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내가 정확한 스탯을 밝힌 적은 없지만 아마 김현성 정도라면 내가 어느 정도의 스펙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실례지만… 기영 씨는 마력이 조금….” “네. 다른 마법사들을 만나보지 못해서 자세하게는 알 수 없지만 가지고 있는 마력 자체는 낮은 것 같습 니다. 하얀이와 비교해도 그다지 높은 것 같지는 않더군요.” “음….” 자세한 상담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개인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필수. 부족한 것을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 보여줄 장점은 많이 남아 있으 니까. “아마 화염 마법사 같은 경우에는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같습니다. 기영 씨와 화염 마법의 궁합이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높은 마력을 요구한다면 이후에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으니 까요.” “아,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어떻게든 기를 쓰고 힌트를 주려는 모습은 꽤나 귀여워 보인다. 녀석의 진짜 나이가 몇 살인지는알 수 없었지만 당장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나보다 어렸기 때문이다. “마창사도….” 대놓고 말은 하지 못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너 창질 잘 못 하잖아.’ 그래도 1인분 역할은 충분히 해왔 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놈의 입장 에서는 어설프게 보였던 모양이다. 어차피 마창사는 선택할 생각도 없었지만 김현성의 저런 표정을 보니 괜스레 씁쓸해졌다. ‘그렇게 엉망이었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소환사, 연금술사, 흑마법사에서 고르는 게 조금 더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흑마 법사는 추천해 드리기 어렵겠군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적어도 이상태창은 저희들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요.” “음….” “소환수를 유지하는데도 마력이 필요합니다만 어느 정도의 마력이 필요할지에 대해서는 감이 오지 않는군요. 오히려 연금술사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높은 지력을 가지고 있는 기영 씨에게 적절할 겁니 다.” “사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연금술은 촉매로 마법을 발동하는 경우도 있을 것같아서….” “그뿐만이 아닐 겁니다. 포션이나 많은 종류의 물약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소환수가 필요하면 이후에 호문클루스라는 대체 수단도 있으니더 유리하겠죠. 소환된 생명체가 아닌 만든 생명체에게는 많은 마력이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요.” 조금 흥분한 것처럼 열을 올리고 있는 느낌. 나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했던 첫번째와는 다르게 이미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런 만큼 녀석의 추천도 믿을 만하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조금 기뻐 보이는 표정을 보니 점점 더 마음이 기울어진다. ‘희귀하구나.’ 연금술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희귀한 것이다. 직업이 잘 열리지 않았을 수도 있고 사람들이 잘 선택하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아무튼 간에 연금술사 라는 직업 자체는 굉장히 희귀하다. 마찬가지로 사제 역시 희귀하다고 가정해 본다면 포션 같은 경우에는 조금 더 가치가 올라갈 것이다. 애초에 사제가 가지고 있는 신성력 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질 좋은 물약은 꼭 필요한 물건. 소환사도 끌리기는 하지만 비슷한걸 2명이나 가지고 있는 걸 생각해 본다면 이후에도 다른 소환수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한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덕구가 고개를 저으며 이 상담에 참전한 것이다. “무슨 소리요? 형님이라면 당연히 흑마법사요.” ‘….’ “어둠의 힘을 뿌리며 괴물들을 섬멸하는 흑마법사를 떠올려 보니 당연히 형님과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데… 누가 봐도 형님은 흑마법사 아니요?” 논리도 없고 뭣도 없지만 굉장히 무게감 있게 들려오는 울림이다. 전에 지휘관 어쩌고 했던 것은 전부 잊은 모양. 이번에는 흑마법사에 꽂힌 것 같았다. “뭐, 세간의 시선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요? 혹시나 형님을 노리는 놈들이 오면 내가 전부 날려 버릴 테니 별로 상관없을 것 같고…. 형님의 인품과 흑마법사는 사실 별로 어울리지 않지만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는 형님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멋질 것 같은데….” “연금술사가 더 괜찮을 겁니다.” 이쯤 되니 김현성도 꽤나 긴박해진다. 박덕구에 외침에 묘한 울림이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아니! 형님은 무조건 흑마법사!” 이전에 지휘관 앵무새가 되었던 박덕구는 갑작스레 흑마법사 앵무새로 진화하기 시작. “연금술사가 확실히 더 좋습니다.” “무조건 흑마법사!” “연금술사가….” “흑마법사! 어둠의 힘을 뿌리는 형님의 모습을 보고 싶다니까.” “연금술사!” “흑마법사!” “연금!” “흑!” “연!” ‘괜히 물어봤다.’ 왠지 다시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전보다 더욱 열을 올리고 있는 둘을 보자니 당황스럽다. 아무래도 어둠의 힘이라는 게 묘하게 박덕구의 심장을 울리는 모양이 다. 슬쩍 정하얀에게 시선을 돌리자 의사를 물어보는 줄 알았는지 정하얀도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어느 쪽도 고, 고를 수 없어요. 연금술을 하는 지적인 오빠와 어둠의 힘을 사용하는 오, 오빠라니….” 당연히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체불명의 논쟁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 중이다. 결국에는 김현성이 슬쩍 가방을 뒤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주 우연히… 아주 우연히… 구한 물건입니다. 마침 연금술사 전용 아이템으로 보이는군요. 만약 연금 술사를 선택하신다면 이걸 선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건 또 어디서 나온 거야?’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저 가죽 가방은 마법의 가방이라도 되는 모양 이다. 이 정도로 다급하게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덕분에 흑마법사의 인식이 별로 좋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녀석이 꺼낸 아이템을 확인한 순간, 우리 파티의 흑마법사 앵무새를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 37 회귀자 사용설명서 037화 우리는 살아남았다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영웅 등급-연금술사 전용] [대 연금술사 라무스 터커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연금술사입니다. 공화국 군부에 소속되어 생체 연성과 물약 연성 분야의 1인자로 그 명성을 날렸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어느 날을 기점으로 숙청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비록 그는 죽었으나 그가 남긴 연금 지식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은 그가 남긴 연구물의 집대성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 높은 서책 중 하나이며 기본 연금 지식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다양한 연금 지식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기본 직업으로 알 수 없는 영웅 등급의 연금 지식을 습득합니다. 마력이 1, 지력이 1 올라갑니다.] ‘영웅 등급?’ 이런 아이템이 눈앞에 있으니 흑마법사 앵무새를 저버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실 올려주는 스탯은 그리 많다고 할 수 없다. 마력 1에 지력 1이 전부. 그렇지만 저 아이템의 가치가 영웅 등급이라는 걸 생각해 본다면 아마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지식을 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현성의 말대로 상태창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저 서책이 영웅 등급 판정을 받은 아이템이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그에 상응하는 지식을 담고 있을 것이다. “어떻습니까?” “…….” 조금 당황스러운 것은 저런 아이템이 갑작스럽게 나왔다는 점. 슬쩍 표정을 보니 본인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놈도 인간인 만큼 실수를 하는 게 당연하지만 본인조차 박덕구의 도발 아닌 도발에 완벽하게 걸려든 것에 당황한 모양이다. 물론 그 영혼의 외침에 묘한 울림이 있었다는 건 나도 인정하긴 하지만 오늘따라 김현성이 조금은 귀여워 보인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한 거요?” “그때 그 상자 안에 함께 들어 있던 책이었습니다.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좋은 타이밍인 것 같아서….” “그래도 형님은 흑마법사가 어울리는데….” “무려 영웅 등급의 아이템입니다. 제가 연금술사가 아니기 때문에 이 책을 열람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기대 이상일 겁니다. 전설 등급 바로 밑에 있는 아이템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편이 가장 좋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런 아이템을 썩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군요.” “그래도… 흑마법사를… 형님….” 이 상황에서도 박덕구는 흑마법사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긴 하다. 애초에 우리에게 줄 반지나 박덕구에게 선물한 팔찌도 이곳에서 발견할 수 없는 아이템일 확률이 높다. 어디서 갑작스럽게 보물 상자가 튀어나왔다는 건 조금은 억지스러운 이야기다. 백번 양보해서 우연치 않게 얻었다고 해도 저런 서책이 이곳에 있다는 건 확실히 설득력이 부족하다. ‘철판 깔기로 한 건가.’ 그렇지만 김현성의 얼굴을 보니 그냥 모른 척하기로 한 모양. 녀석이 인벤토리 째로 회귀한 건지 아니면 아직 우리에게 개방되지 않은 상점 같은걸 이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가죽 가방에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물건들이 즐비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인벤토리 째로 회귀한 경우라면 그나마 녀석의 실수가 이해가 가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박덕구의 영혼의 울림에 낚여 저 아이템을 구입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충 봐도 심상치 않은 물건. 더 이상 고민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흑마법사도 끌리기는 했지만 역시 연금술사가 좋을 것 같군요.” 그제야 김현성의 얼굴이 활짝 펴지기 시작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연금술사로 전직하셨습니다. 기초 연금 지식을 습득합니다.] [플레이어 이기영의 상태창과 재능 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이기영]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5] [성향-용의주도한 전략가] [직업-연금술사] [직업효과-기초 마법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11/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11/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15/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29/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12/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25/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08/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장비]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영웅 등급-연금술사 전용] [마력 방패의 반지-희귀 등급] [특성-마음의 눈] [총평-그마나 괜찮은 길을 선택하셨군요.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픕니다. 네. 정말로요. 당신에게는 과분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것도 보이네요. 부디 라무스 터커의 연금술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가 되기에는 영웅 등급의 아이템이 불쌍하니까요.] 몸이 잠깐 푸른색 빛으로 번쩍인 뒤에는 확실히 전직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기초 연금에 대한 지식이 쏟아졌다. ‘나쁘지 않아.’ 어렵기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자 김현성이 나를 바라보는 표정도 슬그머니 달라져 있는 것 같은 느낌. 녀석 안에서 나에 대한 내부 평가가 올라간 모양이다. 쓸 만한 행정가 정도에서 잘 키워야 하는 연금술사 정도로 바뀐 것이 틀림없다. ‘기분 좋은 이야기지.’ 그만큼 내가 소중해졌다는 뜻이 된다. “축하드립니다, 기영 씨.” “끄응… 아쉽기는 하지만 형님의 선택이 그렇다면….” “축하드려요, 오빠.” “고맙습니다. 덕구도 하얀이도 고마워. 선물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현성 씨. 계속 받기만 하는군요.” 특히나 박덕구에게 고맙다. “아닙니다. 기영 씨가 강해진다면 우리 파티 전체가 강해졌다고 할 수 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도와드릴 수 있어서 제가 더 기분이 좋습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김현성이 나를 키워주는 만큼 그만한 결과를 내놔야 놈이 투자를 계속할 것이다. 이를 테면 지금의 나는 주식이다. 김현성은 이기영이라는 주식에 돈을 넣었고 상한가가 뛰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 분명. 바닥으로 꼬꾸라진다고 해도 나를 버리지는 않겠지만 투자 금액이 줄어들 거라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 계속해서 투자받기 위해서는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걸 지속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꼭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하. 일단은 오늘은 이곳에서 쉬는 것으로 하죠. 이 정도 걸었는데도 마땅한 장소가 안 보이는 것을 보면 지하는 야영할 장소가 없는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덕구야.” “거, 대충 주변정리나 하고 오겠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노숙이었지만 그래도 대충 주변을 정리하는 것이 맞다. 별건 없지만 그럴듯한 잠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순식간. 긴 튜토리얼도 어느 정도 끝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에 살짝 고개가 끄덕여 본다. 아직 생존 퀘스트는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김현성이 그다지 초조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던전의 공략은 사실상 마무리 단계라고 보는 것이 맞다. 입구를 찾는 것이 됐든 던전의 주인을 처리하는 일이 됐든 이 파티는 무난하게 헤쳐 나갈 것이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녀석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정하얀과 이미 드르렁 코를 골고 있는 박덕구를 보니 웃음이 나온다. 내일을 위해 잠을 자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연금술.’ 새로 얻은 지식을 나름대로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이곳에서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능력은 아니다. 본격적으로 연금술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장비가 필요하다. 연금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촉매도 이곳에는 없다. 그렇지만 미리 미리 공부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기초 연금 지식을 정리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한 만큼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은 일단 펼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주무시지 않는 겁니까?” “잠이 오지 않는군요.” 생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레벨 업 시켜야 한다. 나 자신을 단련하는 것은 물론, 절대로 한 곳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열정이라고 말하는 게 어울릴 것이다. 물약 연성이나 호물클루스에 대한 기본 지식, 연금촉매와 마력과의 상관관계까지 무엇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김현성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당연히 시선을 의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봐줬으면 좋겠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투자자님.’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이득.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성보다 내가 더 만족스럽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고 생각할 즈음에는 이미 아침이 왔다.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파티원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여러 가지 잡담을 나누며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이 보였다. 침울한 분위기라기보다는 조금 여유로운 분위기. 가는 길 중간 중간 김현성은 농담을 던졌고 박덕구는 그 농담에 던전이 떠나갈 것처럼 웃어댔다. 조금은 여유를 찾은 것처럼 보이는 김현성의 모습. 아마 녀석의 그런 분위기를 다른 이들도 조금씩 느끼고 있으리라. ‘던전 보스는 없는 거구나.’ 아마도 없다. 충분히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비장한 전투를 앞둔 표정은 아니다. 조금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고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정확히 설명하면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시작이야.’ 끝난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처음에 길을 무척이나 헤맸던 게 거짓말처럼 김현성을 중심으로 한 이 파티는 조금씩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났다. 가끔 전투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긴장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참을 걷자 눈앞에 조금은 이곳과 다른 양식의 입구가 보였다. “거 괴물이라도 튀어나오는 거 아닌지 모르겠소.” “전투 준비한 이후에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형씨, 내가 앞장서도록 하지.” “부탁드립니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희귀 등급 퀘스트-공략 (0/1)] 문이 열리고 주변을 둘러보지만 괴물 따위는 없다. 시야에 비치는 것은 뭔가 신전처럼 보이는 장소. 중앙에는 이상한 마법진이 보였고 반대편에는 또 다른 문이 보인다. 박덕구가 후다닥 달려 나가 문을 밀어봤지만 역시나 문은 열리지 않는다. “문은 열리지는 않는 모양이오.” “아마도 뭔가 조건이 있을 거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공략이라는 소리가 되는 거겠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바로 그때. 조금 주저하는 나와 박덕구, 정하얀과는 다르게 김현성이 무척이나 익숙한 것을 보는 것처럼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중앙에 있는 마법진에 마력을 슬며시 보내니 가운데 있는 마법진이 빛을 일으켰다. 모두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뭔가 조금 우습다. “마력… 이었군요.” 공략에 필요한 대단한 퀴즈 같은 것은 없었던 것.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아예 동떨어진 매개체라고 할 수 있는 마력 자체가 퀴즈에 대한 답이다.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희귀 등급 퀘스트-공략 (1/1)] [희귀 등급 퀘스트-생존 (1/1)] “형님.” “알고 있다.” 주먹을 꽉 쥔 김현성의 표정은 무언가 해냈다는 듯한 표정.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놈의 얼굴은 정말로 기분 좋아 보인다. 언뜻 보면 우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어깨와는 다르게 얼굴에서는 뭔가 어마어마한 성취감이 감돌고 있었으니 내 생각이 맞을 것이다. “예쁘네요.” “그래.” 엿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 엔딩치고는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띈다.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들은 높은 천장 위로 올라가고 천장 위에 있는 빛들은 이 장소를 가득 메운다. 반대쪽에 있는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는 것을 보니 정말로 이 거지같은 장소를 벗어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빛과는 전혀 다른 햇빛이 쏟아져 내린다. ‘햇빛.’ 시야에 비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갑옷과 무기를 들고 있는 자들. 대표로 보이는 듯한 여자가 조용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튜토리얼에서의 생환을 축하드립니다. 이번 튜토리얼 던전의 담당자 이상희라고 합니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그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 38 회귀자 사용설명서 038화 새로운 환경(1) “튜토리얼에서의 생환을 축하드립니다. 이번 튜토리얼 던전의 담당자 이상희라고 합니다.” 꽤나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것은 물론 이쪽을 향해 살짝 미소 짓는 것을 보면 적어도 이상희를 비롯한 저 인간들이 우리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조금 호의적인 느낌이다. “튜토리얼 던전의 담당자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베니고아 제국의 자유 길드 파란의 부길드 마스터로서 이번 회 차의 튜토리얼 던전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당신들이 우리를 이곳으로 불렀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닙니다. 저희들 역시 당신들과 같은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튜토리얼 던전으로 소환되었고 같은 시험을 겪었지요. 저희는 그냥 여러분보다 조금 더 먼저 이곳에 왔을 뿐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어째서 소환 의식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지요.” “으음….” “저희의 임무는 이 튜토리얼 던전의 공략이 끝난 이후에 여러분들을 모시는 것과 아직 안에 있는 생존자들을 구출하는 데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살아가야 하는 여러분들을 적응시키고 교육하는 것은 물론, 기본적인 생활권을 보장하는 것에 그 의의를 두고 있지요.” “기본적인 생활권 말입니까?” “네. 기본적인 생활권 입니다.” “그렇군요. 공략이 끝난 이후에야 당신들도 이곳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게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튜토리얼 던전의 문이 개방되어 있는 시간은 공략 직후 3일 정도입니다. 정확히 3일이 지난 이후에는 다시 던전의 문이 닫히게 됩니다. 어째서 그런 건지는 아직 저희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나누시죠.” 조금은 어안이 벙벙하다. 사실 나온 이후로 이런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의아한 것은 저 여자의 태도였다. [플레이어 이상희의 상태창과 재능 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이상희] [칭호-철혈] [나이-33] [성향-이상적인 중재자] [직업-성스러운 기사] [직업효과-기초 검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기초 방패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검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검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기초 신성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신성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82/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민첩-52/성장 한계치 희귀 이상] [체력-90/성장 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30/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내구-91/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행운-33/성장 한계치 희귀 이하] [마력-77/성장 한계치 희귀 이상] [장비] [세인트 칼리버-영웅 등급] [철혈의 방패-영웅 등급-기사 전용] [힘의 띠-희귀 등급] [특성-철혈] [총평-능력치 자체가 굉장히 훌륭하군요. 이미 어느 정도 성장을 마쳐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입니다. 내구 능력치와 근력 능력치에서 조금 더 성장할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다른 능력치는 더 이상의 성장이 힘들지도 모르겠군요.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뭔가 조금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를 무시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플레이어 이기영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무시?’ 당연하지만 내가 그녀를 무시할 리가 없다. ‘괴물.’ 지금 우리가 전부 달려들더라도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마찬가지. 능력치를 놓고 판단해 본다면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를 이 자리에서 죽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호의적이야.’ 지나치게 호의적이다. 아니, 오히려 조금 자신을 낮추려고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화연 씨?” “네.” “안에 있는 생존자 수색을 시작하도록 해주세요. 저는 이분들과 함께 잠깐 동안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던전 안으로 진입하는 병사들을 보니 쉼터에 있는 이지혜를 비롯한 이들이 구출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사람뿐만이 아니라 외국인들도 보인다. 입고 있는 옷의 양식과 생김새를 보니 현대인과는 조금 거리가 멀어 보이는 느낌. 저들은 아마 이곳에 현지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며 길을 걷고 있던 와중에 앞서 걸었던 이상희가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대답한 것은 파티의 리더인 김현성. 직접 대화에 참가하기보다는 이들의 대화를 듣고 정보를 수집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한 나는 조용히 그들의 목소리를 귀담았다. “무척 빠르게 공략을 완료하신 것 같더군요.” “보통은 이렇지 않습니까?” “예. 보통 공략이 끝나는 시점은 약 육 개월 정도입니다. 삼 개월 안에 던전의 공략을 완료한 것은 확실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아마 다른 곳에 있는 던전보다 이곳에 있는 던전이 훨씬 더 빨리 공략되었을 겁니다.” “다른 곳에서도 던전이 있는 거요?” “예. 공화국이나 왕국 연합에서도 몇몇 개의 튜토리얼 던전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소속되어 있는 베니고어 신성제국에서는 총 3개의 튜토리얼 던전을 관리하고 있지요. 한국인뿐만이 아닙니다. 다양한 국적을 가지고 있는 인종이 보통 각자 정해진 위치에서 소환되고 튜토리얼을 치릅니다.” “그렇군요. 저희가 가장 빨리 던전을 공략한 것이 되는 겁니까.” “예. 설명하자면 그렇습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것은 보통 금기입니다만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돌파하실 수 있으셨는지 정말 궁금하군요. 그것도… 4명밖에 안 되는 소규모 인원이 말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이 많았습니다. 모두 말씀드리는 건 힘들겠지만… 그다지 큰 무리는 없었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덕구 씨와 기영 씨 그리고 하얀 씨가 제 역할을 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공략이었죠. 아, 그리고 지상 1층에 쉼터가 마련되어 있을 겁니다. 그곳에 있는 인원들도 구출을 부탁드립니다.” “네?” “형씨가 만든 쉼터요. 생존자들을 따로 모아놨지. 사냥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공략조를 따로 만들어 운영했소. 안전한 장소에 성벽 비스무리 한 것을 만들고 운영했으니 아마도 아직도 잘 살아 있을 거요. 식량도 충분했으니까. 음!” “아….” 조금은 얼이 빠진 것 같은 표정. ‘아아아.’ 이제야 뭐가 뭔가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가 된다. “그… 그렇군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듯한 이상희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김현성, 이 여우같은 놈.’ 아무래도 우리 파티의 에이스이자 주인공은 힘을 숨기는 답답한 짓거리는 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슬쩍 뒤를 돌아 튜토리얼 던전을 바라보자 하나둘 구출되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 쉼터 안에 있는 이들이 아닌, 혼자 숨어 있던 사람들인 것 같다. 당연하지만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고 이곳이 어디냐고 따지듯 묻는 사람도 보인다. 아마 저게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다. 심지어 무장을 하고 있는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보내는 태도 역시 이쪽과는 묘하게 다르다. 조금은 강압적이고 아래로 보는 태도. “여기가 어딥니까? 지, 지금… 도대체….” “엄마… 엄마… 어어어엉….” “곧바로 모일 수 있도록 합니다. 설명은 이후에 충분히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바깥으로 함께 갑니다. 어이! 거기! 조용히 안 해?!” “여기가! 어디야! 여기가 어디냐고!” “야! 저 새끼 당장 끌어내!” “이거 놔!” “어어어엉… 여긴 어디예요?” “설명은 한꺼번에 드릴 수 있도록 한다고 이야기 드렸습니다. 통제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일단은 통제에 따라주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안전합니다. 더 이상의 위험은 없습니다. 모두 통제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좋네.’ 우리를 대하는 태도와는 180도 다르다. 저게 일반적인 반응이다. 울고불고 살려달라며 패닉을 일으키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파티는 조금 다르다. 지나치게 침착한 김현성은 물론, 정하얀도 내 옆에 꼭 달라붙어 있을 뿐, 새로운 환경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궁금한 게 많다는 듯 계속해서 질문 세례를 날리는 박덕구 역시 마찬가지. 이상희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파티는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튜토리얼 던전을 최단 시간에 클리어했다. 심지어 고작 네 명이서. 그뿐만이 아니다. 눈에 띄게 침착한 것은 물론, 다른 생존자들을 따로 모아 쉼터까지 만들었다. 그녀가 조금 황당해하는 모습도 이해가 간다. ‘대우가 다른 거구나….’ 싸우지 않고 숨어 있고 도망치며 살아왔던 이들과 대우가 다를 만하다. 애초에 공략조로 참가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길드니 제국이니 공화국이니 하는 것을 보면 이 곳에는 틀림없이 이익집단이 있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몸값이 오를 대로 오른 신인 스포츠 선수인 셈. 이들은 우리를 스카웃하려고 하는 구단이다. 우리같이 싹수가 좋은 선수들이 별로 없다는 가정 하에 구단의 숫자가 많다고 한다면 예상할 수 있는 건 한 가지. ‘우리가 갑이야.’ 지금 당장은 우리가 갑이다. 김현성이 어째서 자신을 숨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있는지도 예상이 간다. 여우처럼 은근슬쩍 우리의 활약상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을 보면 녀석 역시 몸값을 올리고 싶은 모양. 어차피 팔릴 거라면 최대한 비싸게 팔리는 것을 기대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당장 김현성의 계획이 뭔지 이쪽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꽃길뿐이다.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좋구나. 회귀자 파티라는 거.’ “들어가시죠.” 이상희가 우리를 안내한 곳 역시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방. 튜토리얼 던전 근처에 있는 곳이라고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 “음료는… 아, 필요하다면 식사도 내어 드리겠습니다.” “먹을 게 있소?” “네. 지구에서 먹던 것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아마 던전 안에서 먹던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겁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푸른색 깃발과 방 안에 있는 소품들은 이번 던전을 관리하는 파란 길드의 위상을 최대한 보여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을 위해 꽤나 신경을 쓴 것 같은 느낌. 당장 영입제의를 하는 건지, 아니면 무슨 여러 가지 절차가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충 봐도 이쪽에 긍정적인 인상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여러분들의 이름을 듣지 못했군요. 만약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김현성, 검사입니다.” 직업명까지 말하는 것은 꽤나 의외. 그에 질세라 박덕구도 입을 열었다. “방패병 박덕구요.” “정, 정하얀이라고 합니다. 직업은 마법사예요….” 자연스럽게 시선이 내게로 꽂혀 날아온다. 직업을 숨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별로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몸값을 올리는 이 대열에 합류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영. 연금술사입니다.” 다른 셋과는 다르게 벌써 2차 전직을 마쳤다. 아마 내부 평가가 올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 보인 것은 뭔가 아쉽다는 얼굴의 이상희. ‘어?’ 틀림없이 잘못 본 것이 아니다. 분명히 잠깐이지만 무척 아쉽다는 반응이 스쳤다. “아. 대… 단하시군요. 벌써 2차 전직까지….” 대단한 것 치고는 조금 가슴 아프다는 목소리. 자연스럽게 김현성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연금술사 좋다며, 이 나쁜 놈아….’ # 39 회귀자 사용설명서 039화 새로운 환경(2) 녀석을 원망하는 것도 잠시. 뒤통수가 조금 얼얼하기는 하지만 김현성이 나를 속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나에게 연금술사란 직업을 추천해 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영웅 등급의 아이템을 선물해 줄 리가 없다. 녀석에게는 별것 아닌 투자였을 수도 있지만 눈앞에 있는 이상희도 영웅 등급의 아이템을 2개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몇 년을 이 바닥에서 굴러먹었는지는 알 순 없지만 벌써 여러 차례 전직을 한 것은 물론, 스탯 역시 성장 한계치에 다다른 그녀를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영웅 등급의 아이템은 분명히…. ‘가치가 있어.’ 단순한 물약 공장이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했지만… 녀석의 태도를 보자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믿어야 돼.’ 아마 지금 시점에서는 그리 고평가 받지 못하는 직업일 확률이 높다. 추후 어떤 방식으로든 연금술사가 귀해지는 시점이 올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성장 후반에 효율이 나오는 직업일 수도 있다. 일단은 우리 회귀자를 믿고 간다. 녀석도 생각 없는 바보는 아닐 테니 분명히 생각해 놓은 방향이 있을 것이다. ‘물약 공장만 아니면 돼.’ 그것만 아니면 된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식사가 나오고 조금은 애매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시작됐다. 분명히 화기애애하기는 하지만 서로가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은 분위기. 박덕구야 오랜만에 보는 음식에 아무 생각 없이 접시에 코를 박고 있었지만 김현성이나 이상희나 서로 생각이 많아 보였다. 교묘하게 본론을 돌리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던 가운데 정곡을 찌른 것은 청순한 뇌를 가진 박덕구였다. “어우 맛있다. 따뜻한 음식을 먹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소.” “맛있게 드셔주시니 다행입니다.” “우리 할매가 공짜로 밥 주는 사람은 믿지 말라고 했었는데… 아직 한국의 정이 살아 있나보오!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뭔가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이다. 그 기회를 놓칠세라 김현성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음….”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덕구 씨의 말 그대로입니다. 좋은 대우를 해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어째서 이렇게 잘해주시는지 궁금하군요. 물론 불편하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저희의 생환을 축하하는 자리로는 조금 과해 보이는 느낌이라서 말입니다. 단순한 호의였다면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모든 게 혼란스러우시겠지요. 여러분이 조금 침착한 모습을 보였던 터라 제가 여러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사전에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그런 의도로 이런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일단 이곳의 배경부터 설명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네. 감사드립니다.” “이곳은 지구와 조금 다르면서도 비슷한 구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왕국 연합과 공화국, 저희가 소속되어 있는 신성제국까지 크게는 세 개의 나라가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지요. 물론 이곳에 포함되지 않은 자유국이나 다른 왕국도 있습니다만… 가장 큰 규모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세 나라입니다.” “아.” “물론 이 나라를 만든 것은 저희가 아닙니다. 아마 이곳에 오시면서 보실 수 있으셨을 겁니다. 이곳에는 저희 말고도 이 땅에서 살아 온 현지인들이 있습니다. 저희 지구인들과 이곳을 살아가고 있던 주민들의 관계는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지요.” “아….” “저희 파란 길드는 엄밀히 말하자면 베니고어 제국의 소속이기도 하고 소속이 아니기도 합니다. 저희는 그들의 법으로부터 자유롭지만 그들의 땅에서 살아가고 그들의 협력과 지원을 받고 있지요. 파란뿐만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터를 잡은 집단은 모두 베니고어 신성제국과의 계약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대충은 이해가 간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 각 집단이 제국의 영향력을 벗어나 어느 정도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유의 대가로 내놓아야 할 것들이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전쟁이 났을 때 징집된다든가… 아니면 세금이라든가 하는 복잡한 것들 말이다. 당장 나라가 뒤집어지지 않은 것을 보면 앞서 말한 세 개의 나라들은 이런 길드들에게도 밀리지 않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게 된다. 무력이나 자원 같은 것들로 자치권을 행사하는 길드들을 묶고 있을 것이다. “그렇군요.” “튜토리얼 던전은 약 1년에 걸쳐서 한 번씩 열리게 됩니다. 신성제국에서는 저희 이방인들에게 튜토리얼 던전의 관리를 일임했죠.” “그게 파란 길드라는 소리요?” “아닙니다. 관리는 어디까지나 로테이션을 기준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여러 대형 길드와 중소 길드들이 모여 순번을 정하고 차례를 만들었죠. 이번 회 차를 맡았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저희 파란 길드는 이번 회 차의 관리는 물론 여러분들에 대한 첫 번째 교섭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공평하군요.” 그 공평함은 신성제국이 만들었을 것이다. 지구인들끼리 우리 공평하게 나눠먹자고 순번을 정하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상상이 가지 않으니까. 지구인들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경계해 제국 내에 있는 길드들의 균형을 맞추려고 한 것이 틀림없다. 아마 이것 말고도 장치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았지만 굳이 내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퍼런 길드? 그곳에 소속된다는 말이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첫 번째 교섭권이라도 말씀 드렸습니다. 굳이 지구의 상황으로 표현하자면 저희는 기업, 여러분들은 입사와 연봉 협상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이해하기 편하실 겁니다.” “이해했습니다.” 예상했던 그대로다. “이 넓은 방이나 음식은 저희가 여러분들께 드리는 뇌물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네. 그런 것이죠.” 뭔가 조금 씁쓸한 웃음이었다. 모든 게 내 추측대로 돌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이상희, 이 여자의 반응이었다. ‘지나치게 솔직해.’ 말 그대로다. 사실 이상희의 자리에 있는 게 나였다면 방금의 이야기에 거짓말을 절반 이상 버무렸을 것이다. 꽤나 긴 이 이야기는 굳이 거짓말을 버무릴 필요도 없다. 개인의 주관적 견해보다는 대륙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만 서술한 사실이었다. 성향을 보고 예상은 했지만 이 여자는 지나치게 올곧다. 아마 그런 솔직함과 올곧음이 이 여자를 저 자리까지 오르게 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파란 길드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도 분명 이런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절박하구나.’ 저들은 현재 절박하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파란 길드에 대한 질문이었다. “질문이 있습니다만.” “네.” “베니고어 제국에서의 파란 길드의 위치는 어느 정도입니까?” 뭔가 우물쭈물거리는 느낌. 그렇지만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파란 길드는 신성제국을 대표하는 길드 중 하나였습니다. 규모가 크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과거형이로군요.” “네…. 피치 못할 사정 있다고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대형 길드 못지않은 성장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여러분들에게 제시할 금액이나 조건들도 다른 길드들에게 밀리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의 뭘 보고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막말로 그녀가 거액을 주고 우리를 영입한 뒤에 우리가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내놓지 못한다면 똥을 금값을 주고 산 셈이 된다. 물론 던전을 최초로 통과했다는 것. 그것도 4명이서 믿을 수 없는 결과물을 만들었다는 점 등 여러 가지 가능성을 보면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꽤나 급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진짜로 절박하다.’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파란 길드가 처한 상황은 정말로 절박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도박을 할 이유가 없다. “지금 당장은 말씀드리기 조금 그렇군요. 그렇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김현성은 의외로 긍정적인 분위기.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 정도는 괜찮다는 느낌이었다. 아마 아직까지 제대로 된 행선지를 정해놓지는 않은 느낌이다. ‘이곳도 후보라는 건가?’ 확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때 정점에 있었지만 몰락 중인 길드, 그럴듯한 먹잇감이다. 아무튼 간에 우리 쪽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자 이상희는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현성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희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를 각자의 숙소로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쁜 땅바닥과는 다르게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침대가 있는 방은 환호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다. 이런 게 영업이다. 계약을 체결하는 순간 나 몰라라 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계약 전까지는 왕 같은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불편하신 게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저는 이만….”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나간 뒤에 슬쩍 이쪽으로 시선이 쏠린다. 뭔가 이 상황에 대한 코멘트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어차피 선택은 김현성이 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박덕구의 시선에 못이기는 척 슬쩍 입을 열었다. “조금 갑작스럽기는 합니다만… 이런 구조로 돌아가고 있을지는 상상하지 못했군요. 이런 귀빈 대접이 도통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나도 그렇소, 형님. 끄응…. 계약이니 제국이니 뭐니 머리 아픈 것 투성이요. 누님은 조금 이해했소?” “네… 대충은….” “간단하게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덕구 씨, 하얀 씨. 저희는 지금 대접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아마 파란뿐만이 아닐 겁니다. 첫 번째 교섭이 끝난 이후에는 아마 다른 곳에서도 여러 가지 제안이 들어올지도 모릅니다.” “머리 아픈 건 질색인데….” “쉽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이 제일 유리한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오히려 대형 길드보다 이곳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조건은 조금 안 좋을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저희를 필요로 하는 곳이니 대우는 어느 정도 보장될 겁니다.” “아. 지원을 해줄 수 있는 곳으로 가자는 말씀이십니까?” “네. 단순한 느낌입니다만 이상희 씨…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더군요. 파란 길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슨 이유로 몰락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길드 재건에 신경 쓰는 만큼 결코 섭섭하게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김현성의 말에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려 보니 정하얀과 박덕구는 이런 이야기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지 멍한 표정이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생각이 있는 것은 나와 김현성뿐인 것 같았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놈이 독립할 생각이 없어보였다는 것. 그리고 파란 길드에 대해서 꽤나 우호적이었다는 것이었다. ‘이상희?’ 뭔가 커다란 연관은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1회 차에서 김현성이 이곳에서 활동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다시 이쪽에서 활동하는 것 역시 나쁘지 않게 보일 것이다. “그곳으로 하는 거요?” “오빠?” “그건 조금 더 생각해 봐야 될 것 같다. 내일이 와야 알 수 있겠지. 아직 어느 것 하나 결정된 게 없으니까. 조금은 여유를 가지는 편이 나을 거야.” “네.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모두 생각해 봐야 합니다. 네. 여러 가능성 말입니다.” 말을 아끼는 것 같은 분위기.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던 나는 일단은 침대에 몸을 눕힐 수밖에 없었다. 어제 밤을 새운 탓에 졸음이 나를 덮쳐왔기 때문이다. 미리 이야기했던 대로 다음날 아침부터 주변은 꽤나 분주했다. 쉼터 안에 있던 이지혜나 다른 이들이 어찌됐든 내 알 바 아니지만 아마 그들도 무사히 구출되어 우리와는 다른 곳에서 묵고 있을 것이다. 당장 급한 것은. ‘교섭.’ 그리고 저들이 어떤 제안을 해오는가에 대해서…. 아마 어젯밤 밤을 꼴딱 새웠을 것이다. 우리 네 명을 영입하는 데 어느 정도의 금액과 어느 정도의 지원을 해줘야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했을 테니까. 파란 길드의 중역들에게는 오늘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날로 비춰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침을 먹고 몸을 씻은 이후 대충 기다리니 역시나 우리를 부르는 이들이 보였다. 혹시나 단체로 협상을 하지 않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봤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현성 씨.” “예.” 첫 번째 타자는 김현성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이 들어간 이후에는 박수 소리마저 들려온다. 두 번째인 정하얀과 박덕구 역시 마찬가지. 당연하지만 단순한 면접 말고도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하는 모양이다. ‘이런 분위기는 질색인데….’ 말 그래도 질색. 내 모든 걸 까발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바깥으로 나오는 박덕구와 정하얀이 부럽다. 내 능력치 자체는 김현성과 박덕구, 정하얀에 비해 형편없다. 아마 마법을 사용한다면 내가 함정 카드라는 것이 알려질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결코 나쁜 능력치는 아니다. 성장의 한계는 있지만 현 시점만 두고 본다면 나는 꽤나 능력 있는 연금술사다. 지력도 높고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마력까지 가지고 있다. 아마 비슷한 가격으로 책정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영 씨.” “네.” 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상희를 비롯한 인간들이다. 아마 길드의 중역이나 인사 담당자일 것이 분명. 조금 늙어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안경을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아… 기영 씨는 직업이 분명… 아. 연금술사라고 하셨죠.” “네. 두 번째 직업이 개방되었을 때 연금술사를 선택했습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 같은 분위기에 조금 당황했다. 이상희는 그나마 나았지만 다른 이들 같은 경우에는 한숨을 쉰다든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보인다. 분위기를 보니 안쪽에 있는 연무실 같은 것도 사용하지 않을 모양. 김현성, 박덕구, 정하얀과는 다르게 내게는 아무런 주문도 없다. 장기자랑 같은 건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다. 조금 차가운 분위기에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이상희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내 쪽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계약금으로 1,500골드 한화로는 1억 5천만 원입니다. 계약기간은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7년 연봉은 700골드… 어떻습니까? 물론 이후에 연봉 재협상을 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신 물품에 대해서는 최대한 지원을 해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옆에 있는 할배가 질세라 말을 열어오는 꼴은 가관. “다른 분들과 함께 들어왔을 때의 경우입니다.” 이쯤 되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다. ‘이 거지같은 놈들이….’ 이놈들이 나를 멍청이로 보고 있다는 걸 말이다. # 40 회귀자 사용설명서 040화 계약 사실 결코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한화로 1억 5천만 원. 이곳의 화폐 단위로는 1,500골드의 계약금 그리고 연봉 700골드까지. 연봉은 한화로 무려 7천만 원이다. 이곳에 들어온 신입이 어느 정도의 평가를 받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겠지만 솔직히 신경 써줬다는 느낌은 있다. 당장 듣기에는 액수가 꽤나 크게 느껴졌으니까. 그렇지만 이들은 나를 환영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내 잠재 능력이 일반 이하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이들의 상태창에 마음의 눈과 비슷한 특성은 없다. 연금술사라는 직업 그리고 상대적으로 미약한 마력 정도가 감점 원인이 됐으리라. 굳이 설명하자면 계륵 같은 느낌. 먹기에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버리자니 뭔가 아쉬운 것이 있는 것이다. ‘맞아.’ ‘이 파티 전체를 영입하기 위해서 나 하나에게 이 정도로 투자할 가치가 있을까?’라는 느낌이다. 머릿속으로 잠깐 상황을 정리하는 사이 이상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다 설명 드릴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복지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대표적으로는 상해보험이나 사망보험 등의 여러 기본 보험은 물론, 길드 내에 있는 무료 시설들을 이용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개인 코치 역시 붙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만약에 결혼하거나 아이가 생겼을 때에도 기본적인 지원금이 나가게 됩니다. 사실 결혼하시는 분들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아아 그렇군요. 따로 이유가 있습니까?” “아마도 알 수 없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튜토리얼 던전 자체보다는 상황이 좋을지도 모르지만 이곳에도 몬스터와 던전 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파란 길드는 주로 던전 탐험이나 몬스터 사냥을 통해 길드를 유지하는 편이라…. 물론 사냥을 나가는 만큼 성과제도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냥이 끝난 뒤에 나오는 몬스터의 부산물은 길드와 사냥을 나간 파티가 약 40%에서 60%의 비율로 나누게 됩니다. 정확한 수치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말이 되는군요. 계약금과 연봉에는 위험수당까지 포함되어 있는 겁니까?” “네. 아마 체감하시는 것보다 조금 큰 금액이실 겁니다.” 조금은 솔직하다. 사실 꽤나 전문적이라고 느껴졌다. 지구인들이 이곳에 자리 잡은 지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 있는 느낌. 특히나 보험의 존재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똑똑하네.’ “연금술사로서 필요한 촉매 역시 이쪽에서 최대한 지원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가격이 값비싼 물건들은 지원해 드리기 힘들 수도 있기는 하지만….” “이상희 님….” “솔직하게 말씀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흠….” “저희 파란 길드에서 맞춰 드릴 수 있는 건 이 정도입니다.” 그나마 이 이상희라는 여자의 태도는 나쁘지 않다. 이쪽을 존중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절박함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양옆에 앉은 나이든 할배들이 문제. 연신 한숨을 내쉰다든가 이쪽의 등급을 매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들은 틀림없이 고인물이고 썩은 물이다. 애초에 이쪽이 박덕구나 정하얀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공략을 함께한 동료들이라는 건 꽤나 무게감 있는 울림인 줄 알았는데 바깥은 또 그게 아닌 모양이다. ‘비일비재했겠지.’ 어쩌면 던전에서 함께 나온 이들이 조건이나 돈, 혹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찢어지는 상황을 많이 봐왔을지도 모른다. 사실 말이 좋아 생사를 함께한 동료들이다. 불과 3개월 전까지만 해도 생판 모르던 남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주변 환경에 의해 찢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구에서도 형제들이나 가족, 둘도 없는 친구들이 이해관계 때문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 그런 어른의 사정은 여기나 그곳이나 똑같을 것이다. 물론…. ‘우리 파티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야.’ 절대로 아니다. 돈독이 오를 대로 오른 박덕구는 상상이 안 가기도 하고 무엇보다 정하얀이 나를 내팽개칠 리가 없다. 이미 이쪽에 투자한 것들이 많은 김현성도 마찬가지. 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는 조금 더 끈끈하고 저들이 알지 못하는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 나에게 이런 태도를 보내는 것 자체가 우스울 정도. 그나마 네 명을 포섭하기 위해 이쪽에도 좋은 조건을 들이 밀었다는 건 칭찬할 만한 이야기가 되지만 정말로 절박했다면 조금 더 저 자세로 나왔어야 했다. 기분이 나쁘기는 하지만 나쁘지 않기도 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은 내게 무척이나 즐겁게 다가온다. ‘멍청이들.’ 조금 더 나를 홀대하고 무시해 줬으면 좋겠다. 그게 더 유리하니까. “사실 잘 모르겠지만 좋은 조건처럼 보이는군요. 많이 신경 써주셨다는 걸 알겠습니다.” “네. 섭섭하지 않으실 겁니다.” “혹시 파란 길드 내에는 비전투직군이 있습니까?” “네.” 슬쩍 운을 띄어보자 역시나 옆에 있던 할배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기영 씨.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연금술사는 비전투직군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연금술사에게 이 정도로 계약 조건을 걸 길드는 없을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그거 참 이상하군요. 분명히 연금 마법이라는 선택지가 있을 텐데….” “별로 효율이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촉매를 이용해 마법을 발동시킨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몬스터의 부산물들은 가격이 비쌉니다. 연금술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연성진도 그다지 효율적이지는 않지요.” “아.” “연금술사 본인이 마력에 여유가 있다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집니다만… 혹시 마력 스탯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8입니다.” “으음… 전직을 두 번 한 것치고는 그리 높은 것 같지 않군요. 혹시나 마력의 성장이 조금 더딘 것은 아닌지….” “네. 지력에 비해서 빠르게 오르는 것 같지 않더군요. 동료 마법사에 비해서 말입니다.” “아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아무래도 방금의 대화 때문에 내부 평가가 조금 더 내려간 모양이다. 그나마 김현성이나 정하얀 때문에 이쪽을 받아준다는 것 같은 말투. “다른 분들에게도 말씀을 잘해주신다면 조금 더 섭섭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리슬쩍 계약서를 이쪽에 보이는 모습은 가관. 나는 일단 계약서를 힐끗 본 뒤 천천히 말을 이었다. “글쎄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될 것 같군요.” “그게 무슨….” “아. 일단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조금 생각해 볼 여유를 주셨으면 합니다.” “아아아. 비교적 빨리 답을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도 시간이 남아돌지는 않은지라….” “네. 최대한 빠르게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께도 잘 이야기 해주셨으면 합니다.” “네. 물론입니다.” 슬쩍 몸을 일으켰을 때 이상희가 조금 급하게 말을 걸어왔다. “파란 길드의 카탈로그와 계약서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생각하시는 동안 읽어보시면… 아마 도움이 될 겁니다.” “나중에 읽어보겠습니다.” 굳이 읽어볼 필요도 가치도 없다. ‘어차피 며칠 내에 모든 내용이 뒤바뀌어 있을 테니까.’ 밖으로 나가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박덕구와 정하얀 그리고 김현성이 보였다. 잘하고 왔냐고 물어보는 듯한 눈빛에는 아무 말하지 않고 웃음으로 대답했다. “형님은 뭐 별다른 시험 같은 건치지 않았소?” “뭐. 그렇지.” “사실 대우가 꽤나 괜찮은 모양이요.” “그래?” “네. 그렇습니다, 기영 씨. 개인적으로 조금 알아봤습니다만 다른 대형 길드도 이 정도 조건을 제시해 주지는 않는 것 같더군요. 아마 이들의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성장 가능성이 확실하게 보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라면….” “네. 사람들도 좋으신 분들 같더라고요, 오빠.” “아마 저들의 입장에서도 나름대로 도박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영입을 성공적으로 마쳐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겠지요. 사람이 곧 자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니 말입니다.” 별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놈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조금 이른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어떻습니까? 대형 길드에 있는 것 보다는 이곳에서 확실한 지원을 얻는 게 조금 더 좋을 겁니다.” “형님만 좋다면 나는 찬성이오.” “저도….” 역시나 우리 충성스러운 덕구와 사랑스러운 하얀이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문제는 김현성이 파란 길드에 꽤나 우호적이라는 것. 게다가 조금 급해 보이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세력을 형성하는 것보다는 이쪽에 기반을 마련하는 걸 생각하는 느낌이었다. 나 같아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세력을 형성한다면 확실히 장점은 있다. 온전히 우리 뜻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물론, 선택지가 꽤나 넓어진다. 그렇지만 파란 길드에 들어가는 것 역시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이 길드가 쌓아온 인프라를 한꺼번에 꿀꺽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 김현성이나 정하얀 정도라면 길드의 주축 세력이 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고 순식간에 녀석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놈의 선택은 확실히 합리적이다. “물론 급할 이유는 없습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하지만… 저는 이 길드가 조금 마음에 드는군요.” 김현성이 뭔가 대답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 굳이 초조해하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뇨. 딱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 “몸값을 조금 더 불릴 수 있을 겁니다.” “네?” “저희의 몸값 말입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인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조금 더 확실하게 몸값을 올릴 방법이 있을 겁니다.” “아….” 혹시나 김현성이 파란 길드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딱히 그런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녀석도 어디까지나 세력이 필요할 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조금 깜짝 놀란 것을 보니 뭔가에 쫒기는 것 같이 보였던 녀석도 제정신으로 돌아온 모양. 자신이 어느 정도에 위치에 있는지를 이제 실감한 것 같았다. 녀석의 계획이 뭔지 모르겠지만 우리 파티는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튜토리얼 던전에서 빨리 나온 만큼, 놈이 생각하는 미래에 차질은 없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것 같군요.” “네. 계약은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현성 씨. 질질 끌수록 초조해지는 건 저쪽이 될 겁니다.” 김현성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확실히 알아들었다. “그럼… 거기에서 더 받을 수 있다는 거요? 사실 돈은 별로 그다지 상관이 없기는 한데….” “뭐. 그렇지.” “혹시 말이요…. 혹시나 형님은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인 거 아니요?” “그, 그건 안 돼요. 오빠!” “그런 건 아니야. 나도 너희와 함께하고 싶다. 물론 현성 씨도 같이. 그렇지 않습니까?” “예. 비록 이런 이상한 장소가 맺어준 인연이지만… 기영 씨와 덕구 씨 그리고 하얀 씨와는 함께 가고 싶군요.” 꽤나 훈훈한 모습이다. 김현성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히죽 웃음이 나왔다. ‘형이 돈 많이 벌게 해줄게, 현성아.’ # 41 회귀자 사용설명서 041화 몸값을 올리자(1) 파란 길드가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이른바 긁지 않은 복권에 대한 투자였다. 신입들에게 과할 정도로 느껴질 정도의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고작 4인 파티로 이루어진 공략조가 최단 시간 안에 튜토리얼 던전을 공략한 건 저들 입장에서도 놀랄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 조건을 제시한다는 것은 파란의 수뇌부가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다는 이야기가 된다. ‘멍청하지는 않아.’ 오히려 유능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슬쩍 옆을 바라보자 박덕구가 뭔가를 열심히 읽고 있는 것이 보여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탈로그 읽고 있어?” “뭐, 그렇소. 아무래도 우리가 지내야 될 곳일지도 모르니까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여기 길드 식당이 그렇게 끝내 준답니다.” “음?” “거, 지구에서 있었을 때 스타 쉐프 레이먼 박인가 뭔가 하는 양반이 식당을 책임지고 있다는데…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게….” “아아아아.” “숙소도 끝내주는 것 같고… 크으. 이런 곳에서 박덕구가 이리 출세하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소. 우리 할배가 이 모습을 봤어야 되는데….” 진담으로 던진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박덕구의 할아버지는 녀석이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 “길드가 아주 으리으리한 것 같은데… 도대체 다른 길드는 얼마나 크다는 거요?” “아마 별 차이는 없을 거야. 본인들 입으로 예전 같지 않다고 말했지만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가는 법이니까. 그동안 쌓아온 게 있다면 버틸 수 있다는 여력이 있다고 봐야지. 우리를 영입하려는 것 역시 예전과 같은 영광을 되찾고 싶어서 인지도 모르고….” “오. 뭔가 대접받으니까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소, 형님.” “앞으로는 더 대접받게 될 거야.” “정말이요?” “물론.”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긁지 않은 복권, 그 말이 맞다. 우리는 긁지 않은 복권이다. 그것도 꽤나 당첨 확률이 높은 상품이다. 지금 위치에서 받을 수 있는 금액이 이 정도, 당연하지만 당첨 사실이 확실해진다면 우리의 가격은 이전보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뛸 수 있을 것이다. “그것보다 누님 표정이 조금 좋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역시 누님은 형님이랑 떨어지기 싫은가 보오. 거, 누님 좀 잘 챙기쇼.” “네가 그런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이건 필요한 일이라니까. 어쩔 수 없어.” “그래도.” ‘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굳이 박덕구가 저런 식으로 설계를 하지 않아도 정하얀에 대한 중요성은 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김현성 파티라는 복권이 당첨이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였으니까. 전설 등급의 마력 능력치 재능을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마법사 정하얀 그리고 두말 하면 서러운 회귀자 김현성까지. 잠재 능력이라는 건 단순히 능력치의 한계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잠재 능력이 높은 플레이어는 스탯이 오르는 속도가 그만큼 빠르다. 내 지력이나 행운이 바로 그러한 케이스. 정하얀의 경우에는 무서울 정도로 마력 능력치가 성장하고 있었고 이미 2차 전직을 마치기도 했다. ‘원소 마법사.’ 김현성과 내 추천으로 선택한 2차 직업이다. 애초에 화염 마법사 하나만 열렸던 나와는 다르게 정하얀은 모든 원소에 친화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연금술사는 정하얀의 전직 목록에서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애초에 정하얀이 가지고 있는 특성 ‘마법사가 되는 방법’은 마법사로서의 성장을 장려하는 특성이다. 튜토리얼에서 잊고 있었던 퀘스트 완료에 대한 보상, 스탯 포인트 2와 정하얀의 재능을 생각해 본다면 이미 그녀가 성장한다는 것은 정해져 있는 수순이다. 필요한 것은 약간의 계기. 아주 약간의 계기였다. 던전에서 있었던 일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본인이 가장 열의가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여기에 플러스로 나와 정하얀 사이에 자리 잡을 수 있는 무언의 규칙을 만들었다. 마치 말 잘 듣는 학생에게 조금씩 상을 주는 것처럼 정하얀이 성과를 낼 때마다 이쪽에서 먹이를 던져주는 것이다. ‘…….’ 물론 효과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단순히 칭찬하는 것을 시작으로 조금씩 스킨십의 강도를 올리는 것. 처음에는 머리를 쓰다듬고 깍지 손을 잡아주는 게 고작이었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수위를 올려나가자 미친 듯이 성과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강해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칭찬을 받고 보상을 받는 것이 목적인 것 같다. 성과가 없을 때에는 다소 냉랭한 반응을 보여주는 것 역시 정하얀을 꽤나 절박하게 만들었다. 아마 박덕구가 말한 것은 이번에 생긴 일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시연회를 앞뒀을 때는 거의 얼굴을 보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밥만 먹어도 마력 능력치가 오르는 종류의 인간이다. 이런 인간이 눈에 불을 켜고 성과를 올리려고 하는데 능력치가 오르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우리 중, 개인 훈련 시간에 가장 시간을 쏟고 있는 것은 박덕구도 나도, 김현성도 아닌 정하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의 말을 이었다. “애초에 내가 같이 있으면 하얀이가 집중을 못 하니까. 그래서 잠깐 떨어져 있었던 것뿐이야.” “끄응… 그건 그렇지만….” “파란 길드의 중역들과 다른 대형 길드의 스카우터들도 모이는 곳에서 하는 시연회인데… 괜히 나 때문에 일을 망치면 안 되니까. 안 그래도 이번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함께 있기로 했어.” “거 밤마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와서….” “조금 떨어져 있는 법도 배워야 돼. 언제까지 내가 붙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 마침 이번이 좋은 계기가 된 거지. 고작 일주일뿐이었으니까.” “끄응… 애초에 이런 시연회를 왜 하는 건지….” “운동선수에겐 일상이야. 우리가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저들도 알아야 정확한 가격을 책정할 수 있을 테니까. 조금 안 됐지만… 나 때문에 이번 일을 망치는 건 하얀이에게도 안 좋을 거다.” “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누님이 형님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소.” 정말로 좋아하는 정도로 끝났으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단순히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다. 그것도 박덕구의 설계 덕분에….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건지 궁금할 지경. 나는 슬쩍 몸을 일으킨 이후에 녀석에게 입을 열었다. “그럼 가자.” “거, 같이 갑시다, 형님.” “빨리 와.” “끄응….”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여러 가지 풍경이 스치고 지나갔다. 튜토리얼 던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고급스럽고, 안전하고, 대우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창문 밖을 보니 쉼터에 있었던 이들이 모여 뭔가 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도 기본적인 교육이나 이곳에서 필요한 교육을 받고 있으리라. 이지혜가 잠깐 생각이 나긴 했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발걸음을 옮기니 눈에 들어온 것은 내부 연무장. 벌써부터 사람들이 꽤나 많다. 마음의 눈으로 주변을 한 번 훑어 본 것은 당연지사. 능력치의 높고 낮음 이전에 입고 있는 옷들이 꽤나 고급스럽다. 파란 길드의 중역뿐만이 아니다. 각자 다른 깃발을 내걸고 마치 어딘가에 대기업의 이사님처럼 연무장 주변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은 확실히 대형 길드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이들처럼 보였다. ‘스카우터?’ 그래, 아마 스카우터일 것이다. 저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시야에 비친 것은 잔뜩 긴장한 표정의 정하얀. 꽤나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파란 길드의 1차 교섭권이 마무리 지어진 채로 시연회가 결정된 것이 벌써 일주일 전. 중간에 상태를 한번 확인하기 위해 본 것을 제외하면 정하얀을 보는 것은 정확히 3일 만이다. 겨우 3일 못 본 게 뭐가 대수냐고 말하자면 할 말 없지만 적어도 정하얀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조금 마른 것 같지 않소?” “조금.” 말랐다는 느낌보다는 조금 피곤한 느낌이다. 밤마다 훌쩍거렸단 덕구의 말도 정말이었는지 눈시울이 묘하게 붉어져 있었다. 시연회가 있는 날 보러 온다고 미리 말해놨기 때문에 제법 자신을 가꾼 것처럼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주변을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니 날 찾고 있는 모양. 조금 불안해 보이는 모습에 수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으으음…. 기대했었는데….” “조금 상태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아마 긴장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던전에서 나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저 정도면 그나마 조금 양호한 편입니다.” “최단 시간이라서 조금 기대했었는데… 뭔가 정신적으로….”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하나는 제대로 봤다. ‘안 좋은데….’ 어딜 봐도 뭔가 불안한 것 같은 모습이다. 2층에 있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여전히 초조해 보인다. 결국 슬쩍 손을 들자 나를 발견한 정하얀이 활짝 미소를 보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망치면 안 돼.’ 그만큼 이번 이벤트는 그만큼 중요하다. -아아. 정하얀 님께서는 준비가 되셨다면 신호를…. 들려온 목소리에는 정하얀이 고개를 끄덕인다.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모습은 조금 불안전해 보이기도 하다. 제발 잘되게 해달라고 어딘가에 기도라도 드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이들이 다시 한번 혀를 차는 것을 보고는 어쩌면 내 계획이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 몰아붙인 건가….’라고 후회하는 순간 느껴진 것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마력의 유동. “어?” “어어…?” 어처구니없지만 정하얀의 주변에 있는 먼지들이 흩날리는 것이 눈에 보인다. 몸 안에 있는 마력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저런 효과를 줄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지경. 뭐라고 주문을 외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창이 꽤나 길다. 혀를 차던 대형 길드의 중역들은 모두들 입을 벌리고 정하얀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중간 중간 당황스럽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보고해! 빨리!” “어이! 여기 빨리 저 여자 프로필 좀 가져와!” 그야 놀라울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저들보다 내 입이 더욱더 크게 벌어져 있다. 어느 정도 성취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문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웅성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리기 시작. 저 멀리 보이는 파란 길드에 이상희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정하얀을 바라보고 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뭐야, 저게….’ 정하얀이 짧게 입을 연 그때였다. “원, 원소 폭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정하얀의 손에서 터져 나오는 울림. 귀를 막아야 할 지경이었다. 고막이 파열되는 느낌 때문에 급하게 마력으로 귀를 감쌌다. 연무장 중간에 위치한 커다란 표적으로 날아가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마법은 굉음을 내며 처박혔고 정하얀과 표적을 이어주는 길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된다. “이게 뭐야….”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 이후로 터져 나온 2차 폭음에 표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 환호성은 없었다. 다만. 장내를 뒤엎은 침묵은 오히려 환호성보다 더욱더 시끄럽게 들려왔다. “쟤… 뭐야….” 박덕구도 슬쩍 내게 입을 열어왔다. “형님.” “…….” “이거 실화요?” 내가 내뱉고 싶은 대사다. 저런 건 상으로 뭘 해줘야 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 42 회귀자 사용설명서 042화 몸값을 올리자(2)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하기 힘들 지경이다. 상상하는 것 이상의 출력이라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모양이다. 침묵이 가라앉은 주변이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프로필 가져왔어?” “파란 길드와의 교섭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다고 했지?” “무조건 영입이다. 길드 마스터는?” “계약금은 상관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길드 내 인사담당자들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더 자세한 데이터 없어? 파란 길드에게 받은 것도 없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씨발. 지금 이게 죄송하다는 문제로 끝나는 일이야? 개새끼들… 쓸모없는 새끼들….” 아무래도 멀리 있는 상대와 통신을 할 수 있는 시스템도 마련되어 있는 모양이다. 딱 내가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이다. 무게 잡고 있던 길드의 중역들이 흥분하여 앞다투어 데이터를 얻으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정하얀의 프로필을 바라보는 것은 기본, 벌써부터 영입 전쟁에 들어가려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파란 길드에게 접근하는 대형 길드들도 눈에 띈다. 1차 교섭권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파란 길드와의 교섭 역시 생각해 두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이상희와 파란 길드의 중역들은 허둥지둥대고 있다. 긁지 않은 복권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겠지만 이 정도인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게 분명.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돌리자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는 정하얀이 보였다. 본인도 성공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두 손을 꽉 쥔 채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조금은 귀엽게 보인다. 어느 정도로 성장한 건지 궁금해 마음의 눈으로 그녀의 상태창을 들여다 보니 곧바로 시야에 그녀의 상태창이 비쳤다. [플레이어 정하얀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정하얀]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1] [성향-순수한 옹호자] [직업-원소 마법사-희귀 등급] [직업효과-기초 마법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마법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11/성장 한계치 희귀 이하] [민첩-11/성장 한계치 희귀 이하] [체력-16/성장 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29/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14/성장 한계치 희귀 이하] [행운-25/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31/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장비-신성한 치유-희귀 등급] [특성-마법사가 되는 방법-영웅 등급] [총평-아주 훌륭합니다. 마력 포인트의 성장이 가장 눈에 띕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성장 속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능력치가 고르게 성장하지 않았다는 단점 아닌 단점이 보이는군요. 플레이어 이기영은 운이 좋은 편입니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세요. 살아남으려면 그게 정답이니까요. 질 좋은 보트 위에 올라타는 것만 조심하면 되겠군요.] ‘마력 31?’ 어처구니없는 숫자. 사실 높은지 높지 않은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마법사로 보이는 이들의 마력 수치는 꽤나 다양하다. 낮게는 60부터 높게는 80대까지. 저들이 이곳에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놀라는 것을 보면 정하얀의 성장 속도가 심상치 않아 보이기는 하는 모양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마력 31로 저 정도의 출력을 내는 게 가능한가?’ 영창이 조금 긴 것을 생각해 보면 정하얀이 마법을 커스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조금 기진맥진해 보이니 마력 소모가 꽤나 큰 모양.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들썩한 주변 분위기를 보자면 지금 정하얀이 보여준 것은 상식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시연이 마무리 되었…. 사회자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이곳으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정하얀. 연무장에서 빠져나온 정하얀에게 인파들이 몰려들지만 정하얀에게는 그런 것 따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명함 정도는 받아 놓지….’ 2층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는 모습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 지금부터 상을 받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지 무척이나 흥분해 있다. 애초에 일주일이나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수고했어, 하얀아.” “오… 오빠….” “그동안 힘들었지?” “아니에요. 힘들… 지 않았어요.” 심지어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런 공개된 장소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도 되는 것인지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파란 길드의 수뇌나 대형 길드의 중역들이나 모두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쁘지는 않아. 오히려 좋지.’ 친분이 있다는 걸 과시해도 나쁘지 않다. 살짝 팔을 벌리자 허겁지겁 달려와서 꽉 안긴다. 기대하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워진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상을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아 괜스레 민망해졌다. ‘아….’ 당연하지만 공개적으로 애정행각을 벌일 정도로 낯짝이 두껍지는 않다. “거, 형님! 화끈하게 뽀뽀 한번 해주쇼!” ‘그만해, 이 돼지야….’ 박덕구는 드라마를 보는 표정으로 흐뭇하게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중. “형님! 형님! 형님! 남자답게 화끈하게!” 심지어 응원을 보내고 있는 모습은 가관이다. 박덕구가 바람을 잡으니 정하얀은 뭔가 더욱더 기대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정하얀….’ 항상 말하지만 정하얀은 결코 멍청한 것이 아니다.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이 정도 했으니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해. 일주일 동안이나 참았으니까. 그래.’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아니… 그것보다 이 공개된 곳에서 도장을 찍으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거야’라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뭐라도 해야 되는 타이밍이다. 생각을 마친 뒤에 살짝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자 입술을 삐죽 내미는 것이 보였다. 조금 고민하기는 했지만 너무 빠른 것도 좋지 않은 것이 당연. 가볍게 이마에 입을 맞추자 심하게 부들거리는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우 이마에 입술이 닿은 것뿐이다. 그러나 효과는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아파….’ 등이 아파올 정도로 꽉 껴안고 있는 것은 물론,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다. 슬쩍 얼굴을 보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붉어져 있는 얼굴이 보였다. 입가가 풀어져 있는 모습은 뭔가 위험해 보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크게 상관없다고 여겼다. 당연하게도 나와 정하얀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진다. 누가 봐도 서로를 위하는 연인의 모습.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쯤 되자 사회자도 당황한 것 같다. 뭔가 잘못됐다는 표정을 짓는 파란 길드의 수뇌부도 눈에 띄었다. -그… 정하얀 님의 시연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귀빈들께서는 자리를 뜨지 마시고 모든 일정이 마무리된 이후에 절차에 맞게 행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다음은 제1튜토리얼 던전의 공략조로 참가한 김현성 님의 시연이 있을 예정입니다. 시연 내용은 대련으로…. “하얀아, 이제 현성 씨 하는 거 봐야지.” “아… 네? 네… 오빠.” 단 한시라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나를 붙잡은 채로 고개를 돌린다. 사실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이 정도가 정하얀에게 주는 보상으로 적절하리라. 계속 가슴 쪽에 얼굴을 묻으려고 하는 것 같아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연무장 중앙에 김현성이 검을 가지고 나오자 관심이 슬쩍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 괜히 소외감 느끼는데…. 나도 여자친구를 만들든가 해야지….” “대련에나 집중해, 덕구야. 아마 꽤나 볼만할 테니까.” “형님이 그런 말 안 해도 눈 떼지 않고 있소. 김현성 그 형씨야… 뭐….” -준비가 되셨으면 신호를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슬쩍 김현성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사 계열은 대련으로 마법사 계열은 마법으로 시연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상대가 조금 녹록치 않아 보이기는 한다. 일단 능력치 자체가 김현성보다 높다. 대련이라고 하지만 아마도 지도 대련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물론 김현성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검을 쥔 놈을 바라보는 상대의 표정이 굳어진다. 정하얀을 보며 평범한 파티가 아니라는 사실은 예상했겠지만 내가 알 수 없는 뭔가를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두 명이 시야에서 잠깐 동안 사라진 것은 순식간. 눈으로 제대로 따라 잡을 수조차 없는 공방이 펼쳐졌다. 정하얀에 이어서 두 번째. 아무래도 오늘 이곳을 찾은 귀빈들께서는 꽤나 놀랄 일이 많은 모양이다. 대련이 지속될수록 눈이 커지는 이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정하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우리 파티가 실세가 정하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진짜는 따로 있다. ‘푸핫!’ 점점 더 입이 벌리는 귀빈들을 보자 자연스럽게 속으로 웃음이 튀어 나왔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단순히 비비는 것만이 아니다. ‘잘한다!’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강할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다. 압도하는 수준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렇지만 녀석과 검을 맞부딪치고 있는 상대의 표정을 본다면 답이 나온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당황한 듯 마력을 끌어내는 것도 눈에 보인다. 사실 검술 따위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도 이것 하나는 알 수 있다. ‘강해.’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도 대련 상대의 검이 하늘로 날아간다. 너무 많은 걸 보여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즈음에 김현성 역시 검을 놓친다. 포기하지 않고 주먹을 휘둘러 오지만 상대가 검을 놓친 팔로 김현성을 밀어낸 순간 굉음이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반대쪽으로 튕겨져 나가는 김현성. “아.”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처박히는 모습은 어딘가 잘못됐다고 느낄 만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먼지를 털어내는 녀석을 보니 내구 능력치도 나쁘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던 것 같았다. “졌습니다.” ‘깔끔해. 이 여우같은 놈!’ 자신의 장점을 모두 보여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전부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 능력치의 여부와 상관없이 간혹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도 칭찬해 주고 싶은 부분이다. 아무래도 이제 막 들어온 녀석이 베테랑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겨냈다면 아마 이곳에 계신 귀빈들께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짧다면 짧고 길면 길다고 말할 수 있는 이 대련이 김현성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천천히 박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당연하지만 대형 길드의 중역들은 조금 더 긴박해진 것처럼 보인다. 임팩트 면에서는 정하얀이 한 수 위라고 말하고 싶지만 김현성이 보여준 모습은 확실히 이질적이다. 내 눈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무기를 들고 있는 근접 직군들 같은 경우에는 김현성이 보여준 모습에 정말로 당황한 것 같았다. “허….” “천재….” 따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김현성 님의 시연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귀빈들께서는… 절, 절차에 맞게…. 사회자의 목소리는 우리 귀빈들에게는 닿지 않는다. 김현성의 대련이 끝나자마자 김현성에게 다가가고 있는 이들이 눈에 보인다. 물론. 스타가 된 것은 김현성만이 아니었다. “잠깐 이야기 괜찮으시겠습니까?” “…….” “이기영 님? 그리고 정하얀 님. 폐가 되지 않는다면 시간을… 붉은용병길드의 차희라라고 합니다.” 재능 있는 천재 마법사의 기둥서방인 내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이거지….’ 히죽거리는 미소를 숨길 수 없는 상황. 악수를 건네는 것은 특이하게도 붉은 머리를 하고 있는 여자였다. 노출도가 곧 방어력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대담한 복장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돌아갔다. ‘아….’ # 43 회귀자 사용설명서 043화 미친년(1) 히죽거리는 미소를 숨길 수가 없는 상황이다. 악수를 건네는 것은 특이하게도 붉은 머리를 하고 있는 여자. 노출도가 곧 방어력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대담한 복장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돌아갔다. ‘아….’ 실수라고 느낀 것은 순식간. 나와 차희라라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는 정하얀의 존재 때문이다. 평소에 이런 부분에 대해서 조심하며 행동했지만 너무 불가항력이라 이쪽이 어떻게 대처할 수가 없었다. ‘그야….’ 가슴과 배를 거의 훤히 내보이는 복장, 자신감이 있을 만한 외모와 몸매, 염색을 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마법적인 효과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붉은색 머리와 붉은색 입술은 묘하게 야한 느낌을 풍긴다. 그녀가 매력적인 외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고개를 흔들고 마음의 눈으로 그녀를 들여다보니 곧바로 여러 가지 정보들이 눈에 비쳤다. [플레이어 차희라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차희라] [칭호-피에 미친 광녀, 붉은 용병, 신성제국의 붉은 광녀] [나이-28] [성향-예측 불가능한 혁신가] [직업-용병여왕-전설 등급] [직업효과-기초 검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무기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무기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쌍수 무기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마력 운용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97/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민첩-82/성장 한계치 영웅 이하] [체력-85/성장 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67/성장 한계치 희귀 이상] [내구-90/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행운-56/성장 한계치 희귀 이상] [마력-82/성장 한계치 영웅 이하] [장비-없음] [특성-피에 미친 광녀-영웅 등급] [지력 스탯을 일시적으로 깎아 공격력을 상향시킵니다.] [총평-가까이 하기에는 조금 위험해 보이는 사람이군요. 찢겨 죽지 않게 조심하세요.] 직업은 영웅 등급의 용병여왕. 칭호는 피에 미친 광녀. 당연하지만 뭔가 좋은 느낌은 아니다. 예측 불가능한 혁신가라는 성향이 가장 그렇다. ‘뭔 능력치가….’ 97의 근력 능력치와 90의 내구 능력치가 인상적이다. 이상희보다 강하다. 다만 그녀와 얼핏 비슷한 수준으로 보이는 것을 보니 상위 기준을 그녀들로 보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90대를 넘는 능력치와 영웅 등급의 직업과 아이템, 여러 가지 조건들이 더 있겠지만 아마 이 정도가 최소한의 조건이리라. 악수를 하기 위해 조용히 손을 뻗은 채로 싱긋 웃는 모습은 솔직히 말해서 매력적이다. 그러나 티를 낼 수는 없다. 정하얀의 심기가 불편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대놓고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아직 자신이 이 여자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조금 더 철이 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팔을 꽉 잡은 손은 저 여자의 손을 맞잡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대형 길드의 귀빈이다. ‘이것 좀 놔… 하얀아….’ 이런 자리에서 무안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손을 꽉 잡고 있는 정하얀의 손 때문에 위치를 옮기기가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한 번만 이해해 달라는 심정으로 정하얀의 손을 잠깐 뿌리친 이후에 차희라의 손을 꽉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이번 회 차의 스타들을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 정말로 영광이네요.” “반… 갑습니다. 정하얀… 이라고 합니다.” “방금의 시연은 정말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감… 사합니다.” 뭔가 호흡이 거칠어진다. 맞잡은 손을 살짝 떨어뜨리자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내 팔을 꽉 붙잡았다. “두 분이 정말로 사이가 좋으시네요. 혹시 밖에서부터?” “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처음 본 건 튜토리얼 던전이었고 그 이후에 조금씩 가까워져서 좋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정말로 부럽네요.” 시선을 처리하기가 정말로 힘들다. ‘부끄럽지 않은 건가?’ 당연하지만 그녀의 자신감의 원천은 자신의 외관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가슴을 반절 이상 드러내고 다니는 것은 그녀의 취향이겠지만 저런 행동을 하는 내면에는 아마 용병여왕 차희라라는 플레이어로서의 자신감일 것이다. 그녀는 그만큼 강하다. 지금까지 내가 본 이들 중에서도 가장. 단순한 능력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녀 주위로 그 누구도 접근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 자기소개를 한 번 더 드려야 될 것 같네요. 붉은용병 길드의 단장. 직업은 용병여왕 차희라라고 합니다.” ‘역시.’ “직접 오셨군요.” “네. 인재에는 조금 관심이 많아서요. 특히나 이번에는 재능 있는 분들이 많이 들어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터라… 마침 여유도 있었고요.” “아. 그렇군요. 좋게 봐주시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뇨. 당연한 걸요.” “그렇지만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아직까지 교섭권은 파란 길드가….” “어머… 교섭이라뇨.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인데. 물론 영입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기야 하겠지만 저희 붉은용병 길드는 파란 길드의 교섭권을 존중하고 있답니다.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도와드리기 위한 조언자라고 생각해 주시면 편하실 거예요.” “아아아아.” 말하자면 눈 가리고 아웅 하겠다는 소리다. 아직 협상 테이블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들이 어디까지 맞춰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우리뿐만이 아니다. 박덕구도 어딘가에서 다가온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김현성은 대놓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파란 길드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상황. 힘 없는 길드가 어떤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만약 저들이 귀빈들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동정심이 들지는 않는다. 무소속인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이곳에서 끈을 만들어 놓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니까. “아마도 모르시는 게 많으실 거예요. 보통 1차 교섭권을 가지고 있는 길드들은 타 길드에 대한 정보를 통제하려는 성향이 강한 터라… 제가 운영하고 있는 붉은용병에 대해서는….” “네. 듣지 못했습니다.” “어머, 어쩔 수 없이 조금 설명 드려야겠네요. 저희 붉은용병은 근접 직군들이 모여 만든 길드입니다. 이름에서 보이는 것처럼 용병 성향을 가지고 있어 여러 의뢰는 물론, 던전이나 몬스터 사냥, 심지어는 소규모 전투나 전쟁에 대한 의뢰까지 받고 움직이는 길드라고 이해하시면 편할 겁니다.” “아, 근접직군….” “네. 정확히 말하면 근접직군으로 이루어진 용병 길드였었죠.”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자세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어렵지만 길드 내부에서 마법사 및 사제를 양성하고 보조 직업군에도 투자를 해야 된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어서 말이죠. 조금 딴 이야기겠지만 마침 많은 예산이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랍니다. 다른 길드에 비해서 조금 늦은 만큼 더욱 투자를 해야 된다고 어찌나 간부들이 재촉하는지…. 사실 제가 여기까지 온 배경도 저희 투자자들 때문이고….” “아아아아. 그렇군요.” 뭘 말하려는 건지 알 것 같다. “얼마나 투자를 하실 생각인지 궁금하네요.” “한화로 말씀드리는 게 편하시겠죠?” “네. 아직은 그편이….” 차희라는 싱긋 웃으며 내게 말을 이었다. “20억.” ‘어….’ “네?” “한 사람당 20억.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추가 예산도 마련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물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투자할 예정이고요. 적어도 연간 5억 정도는 쏟아야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오지 않겠어요?” 대충 해석하자면 계약금 20억 이상에 연봉 5억이다. 이곳을 기준으로 하면 계약금 2만골드에 연봉 5천 골드인 셈. 추가 예산을 마련해 준다는 것을 보니 지금 말해준 것보다 더욱 맞춰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20억?’ 처음에 파란 길드에게 제시 받았던 금액과 비교하면 그 갭이 너무 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가격이 뛸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대충 계산해도 20배가 뛰었다. 연봉 같은 경우에는 5배. 이쯤 되면 파란 길드 개잡놈들이 우리를 호구로 본 것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째서 함께 공략을 헤치고 나온 이들이 찢어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금액이 이 정도라면 흔들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무려 20억이다. 일반인은 평생을 일해도 모을 수 없는 액수. 당장 나조차도 이쪽으로 가는 게 어떤지에 대해 계산하고 있다. “다만… 근접직군 여러분들한테는 투자하기 조금 힘이 들지도 모르겠네요. 저희 쪽에서도 조금 무리하고 있다는 입장이라….” “아.” “저희 길드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정말로 많거든요. 물론 김현성 같은 사람이 탐이 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한곳에 집중하고 싶어서요.” 이건 좋지 않다. “그렇군요.” “기영 씨와 하얀 씨도 저희 길드의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서 조금 관심을 가지실 것 같은데… 생각이 어떠신지 여쭙고 싶네요.” 김현성과 박덕구를 버리고 자신 쪽으로 붙으라는 이야기가 된다. 아마 근접직군으로 다져진 길드인 만큼 검사나 탱커들은 이미 포화상태일 터. 박덕구와 김현성에게는 투자하지 않겠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일단 본인이 가장 완벽한 방패이자 검이다. 내가 그녀의 입장에 있었어도 정하얀 쪽에 조금 더 무게를 뒀으리라. “프로젝트 자체는 정말 흥미롭습니다만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을지가 조금 걱정됩니다. 아무래도 튜토리얼 던전을 같이 공략한 친구들과 정이 들었던 터라… 한곳에 집중하기에는….” “흐음… 의외네요.” 조금 흥미롭다는 표정이다. 왠지 모르게 고양이 앞에 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다른 곳에도 투자할 여력이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저희 길드도 요즘 힘들어서 말이죠. 떠나간 사람은 붙잡지 않는 주의이기는 하지만 저엉말로 아쉽네요. 옆에 있는 정하얀 씨도 마찬가지지만… 이기영 당신, 당신도 조금 아쉽단 말야….” “뭘….” “이건 선물.” 이쪽으로 가까이 온 차희라가 품 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이 느껴진다. 제대로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어떤 아이템처럼 보였다. ‘뇌물?’ 아마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정말로 선물의 의미로 던져준 것 같은 느낌.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려고 한다. 대형 길드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여자가 준 선물이니 아마도 꽤나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일 것이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이야기해도 돼요.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으니까요. 같은 제국 소속이니 함께 던전에 들어가거나 전선에 설 일도 많지 않겠어요? 그리고… 음… 하얀 씨?” “…….” “하얀 씨는 살기 좀 죽이는 방법도 배워야겠어.” “아…….” 차희라가 이쪽으로 다가온 것은 순식간. 내가 깜짝 놀라기도 전에 입술에 촉촉한 감촉이 느껴진다. ‘이런 미친….’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는 정신을 못 차릴 지경. 다급하게 손으로 차희라를 밀쳐봤지만 연약한 내 몸으로 근력 97의 차희라를 밀칠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입 안으로 뭔가 들어오는 느낌에 당황스러워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발버둥 치며 정하얀을 봤지만 마력의 유동이나 살기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라라도 잃은 것 같은 표정.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고가 정지된 것이다. “이것도 선물. 그럼 다음에 봐요.” ‘제기랄.’ 갑작스러운 소란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박덕구도 깜짝 놀란 표정이다. 왜 녀석도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짓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일은 곧바로 수습해야만 했다. ‘망했어.’ # 44 회귀자 사용설명서 044화 미친년(2) -이기영 님께서는 준비가 되면 신호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살짝 손을 들어 올리자 곧바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2층에서는 김현성과 박덕구, 정하얀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중. 이곳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니 조금은 긴장되기는 했지만 솔직히 색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된다는 부담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애초에 길드의 중역들도 내게 크게 기대하고 있진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비됐습니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것은 정하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묘하게 조용한 모습은 괜스레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옆에서 더 화를 내주는 박덕구의 존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는 어제 있었던 일을 없던 일로 하고 싶다고 말하는 듯했다. ‘불안해….’ 어째서 그 미친 여자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감이 온다. 나를 이성으로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마 자신에게 살기를 풀풀 뿜어대고 있었던 정하얀을 놀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물론 경고의 의미도 있기는 했었겠지만 대형 길드의 수장에게 살기를 보낸 것에 대한 벌을 내 입술로 퉁 친 거라면 나름대로 싸게 먹힌 셈이다. 방식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솔직히 그 미친 여자에게는 감사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당장 검을 뽑아 목을 날리지 않은 걸 고마워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조금 복잡해지는 머리를 환기시키고 천천히 바닥에 연성진을 그리기 시작. 다소 복잡한 과정이었지만 이미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마법진이다. ‘비효율적이야.’ 마력이 적게 들다 뿐이지 확실히 비효율적이다. 그렇지만 연성진이 완성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꽤나 익숙한 모습으로 보이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몇몇이 보였다. “주여, 나, 바라노니, 내 목소리에, 답하라.” 마력의 탑을 쌓는 것은 연성진 쪽. 영창을 외우자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불기둥.” 주문과 함께 연성진 쪽에서 솟아 오른 불기둥이 표적을 태운다. 내 마력으로 낼 수 있는 화력은 아니다. 꽤나 화려한 이펙트, 연성진의 도움을 받으니 확실히 가지고 있는 마력 이상의 효율을 낼 수 있다. “후우….” 앞전에 있었던 박덕구, 어제 있었던 김현성과 정하얀 정도의 환호성은 들리지 않는다. 다만. 짝짝짝.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보내고 있다. 나쁘지 않은 시연이었지만 당연히 박수를 받을 정도는 아니다. 저들이 원하는 건 하나. 아마 우리 파티의 비선실세로 보이는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함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기영 님의 시연이 마무리되었습니다. 귀빈들께서는 모두 절차에 맞게 움직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제와 마찬가지. 절차 따위는 개나 주라는 듯한 느낌으로 이쪽에 몰려들고 있는 귀빈들과 스카우터들이 보인다. “사성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이연희라고 합니다. 잠깐 이야기를… 아니, 일단 명함부터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클랜의 클랜 마스터 정종철이라고 합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고영수입니다. 저희 클랜은 이번에 생겨난 신생 클랜으로 조건은 다소 부족하겠지만 성장 가능성은 그 어떤 클랜이나 길드보다….” “마도 길드의 대표 박혜수예요. 잠깐 이야기 좀 나누고 싶은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일이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잠재 고객.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클랜이든 아니면 몰락한 길드든 간에 모두가 전부 중요하다. 명함을 받고 형식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만약에 파란 길드와의 계약하지 않으실 거라면….” “네. 이후에라도 모두 함께 꼭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길드도.” “예. 언제 한번 시간이 되시면 식사라도 함께하도록 하시죠.” “앞으로 어느 길드로 가시던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합니다.” “네. 먼저 연락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기는 하지만 그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한두 마디 나눈 게 뭐가 대수냐고 물어본다면 굳이 할 말은 없지만 인간관계라는 건 이런 게 중요하다. “재미있는 방식의 시연이었어요.” ‘재미는 개뿔….’ “연금술사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하하하.” ‘거짓말.’ “모두 감사드립니다. 다른 파티원에 비해서 보여준 것이 없어 조금 민망하군요.” 그래도. 이런 게 사회생활이라는 거다. 인파를 뚫고 나오자 이쪽을 바라보는 이상희와 파란의 중역들을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일그러진 얼굴이다. 처음 협상부터 꼬였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김현성도 이쪽의 말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 당연하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얼굴을 볼 기회가 많았다.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고, 대륙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듣는 시간들도 가졌다. 우리 파티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봤다면 당연히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김현성 파티 내에서 이기영의 위치가 생각보다 높다는 것.’ “잠깐 이야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협상 조건에 대해서 다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물론입니다, 이상희 님. 환영하고말고요.” “안쪽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예.”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은 심정이다. 정하얀, 박덕구, 김현성은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다. 저번에 협상을 나눴던 방으로 들어가자 솔직히 저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소 건방졌던 할배들 역시 이쪽의 눈치를 보는 느낌. ‘좋네.’ 이런 게 권력인가 싶기도 하다. “일단은 첫 번째 협상의 조건을 급하게 조정하는 데에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일반 신입들에게는 계약 조건이 후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시연회에서 보여주신 모습들을 보니, 저희가 이기영 님을 비롯한 분들을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아. 괜찮습니다. 당연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검증되지 않는 이들에게 투자하는 건 한 집단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지양하는 게 당연하니까요.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아. 이해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 “알게 모르게 여러 곳에서 제안을 받으셨을 겁니다.”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저들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네. 그렇습니다.” “다른 길드에게 어떤 제안을 받으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희 파란 길드는….” 뭐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지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뻔할 것이다. 대줄 수 있는 금액은 부족할 수도 있지만 성장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 파란 길드만의 차별점이나 지원해 줄 수 있는 특별한 조건, 어떻게 우리를 성장시킬 건지에 대한 계획과 어떤 식으로 지원해 줄지에 대한 것. 안 들어도 뻔하다. “타 길드에 비해 금액은 부족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파란 길드는 여전히 신성제국에 있는 네임드 길드 중에 하나입니다. 만약에 파란 길드 소속이 되신다면 파티에게 따로 예산을 책정해 드릴 수 있도록… 아, 그것만이 아닙니다. 파란 길드의 간부직도….” “구체적으로는….” “아직 구체적으로는 대답해 드리기는 힘들겠지만 최선을 다해….” “그렇군요. 조금 더 자세한 계약 내용을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조금 기뻐 보이는 표정이다. “계약금 만 골드 그리고 연봉 삼천 골드가 저희가 맞춰드릴 수 있는 조건입니다. 계약 기간은 10년으로… 연봉 협상은 매 년마다 새롭게 갱신할 수 있도록 하는….” “한화로는 10억이로군요.” “네.” 붉은용병에 비해서는 반절이 떨어졌다. 물론, 붉은용병 길드 같은 경우에는 김현성과 박덕구를 포함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연금술사가 돈이 많이 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계약 기간이 3년이나 늘어났다는 것. 아무래도 우리가 성장한 상태를 보고 싶은 모양이다. 처음 부른 금액이 저 정도라면 어쩌면 조금 더 올릴 여력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차희라 같은 경우에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었으니까. 원래 계약이라는 건 아쉬운 놈이 비비게 되어 있는 법이다. 나는 살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계약금 15,000골드. 한화로는 15억. 이게 저희가 바라는 계약 조건입니다.” “아….” “추가로 최소 영웅 등급의 연금도구 지원과 사냥했을 때 나오는 부산물의 조정, 정하얀에게는 영웅 등급의 마법서와 박덕구, 김현성에게도 마찬가지로 영웅 등급의 기본 장비를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그게….” “투자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저희 파티는 더욱 성장할 겁니다. 굳이 연봉에 집착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저희의 성장이 가속화될수록 파란 길드 역시 성장하게 되겠지요. 어쩌면 여러 길드에서 투자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저희의 사정상….” “골드가 필요하시면 1차 교섭권을 타 길드에게 판매하시면 됩니다. 파란 길드는 지금 골드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이다. “길드 마스터.”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길드 마스터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당연히 눈치챌 수 있다. 튜토리얼 던전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지각 변동 덕분에 중소 길드는 물론, 대형 길드의 마스터들도 출두 하셨다. 당장 차희라만 봐도 이쪽에 집적 제의를 하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란의 길드 마스터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현재 길드 내부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된다. “알고… 계셨군요. 혹시 누군가에게….” “단순한 추론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할 수 있는 생각이지요.” 뭔가 척척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파란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 길드 마스터를 포함한 길드의 주요 전력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 간부급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우리의 등장은 무척이나 반가울 것이다. 조금 실수했다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은 바로 그때. “건방진….” 이상희가 아니다. 옆에 있는 늙은이 한 놈이 지나치게 흥분한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 “우리는 네놈에게 투자하는 것이 아니다, 연금술사.” “설호 씨. 지금! 무슨 짓을!” “저희 파란 길드가 저런 놈한테 농락당할 정도로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상희 님.” ‘저….’ “아직까지 이곳에 들어온 지 1년도 안 된 애송이 아닙니까. 아무리 굽히고 들어갑니다만 저런 놈에게까지 굽힌다니요!” “마력을 거두세요!” ‘제기랄….’ 살기나 마력이라는 게 어떤 건지 이해가 간다. 방 안을 가득 점령한 늙은이의 마력 때문인지 몸이 떨리기 시작, 숨을 쉬는 것마저 쉽지 않다. ‘죽는다’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마력을 거두라고 말했습니다! 이설호!” “이 쓰레기 같은 놈이… 네놈 같은 놈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주제에 날뛰는 놈들 말이다. 이곳에는 아주 다양한 사람이 들어오지. 그동안 내가 이 대륙에서 살아오면서 너 같이 쥐새끼 같은 놈을 못 봤을 것 같아?” “으….” “너희 같은 놈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이 대륙에는 항상 위협이 넘치고 흐르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 누구도 모른단 말이다. 지구와는 다르다. 멍청한 애송이 놈이… 감히 하늘 높은지 모르고 날뛰어? 감히 파란에게… 감히!” ‘죽어.’ 정말로 죽는다. 숨을 쉬기가 힘들어질 지경이다. 도대체 이게 뭔 상황인지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거지같은… 늙은이가….’ 당장에라도 방문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뭐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 놓여 있을 때 여러 가지 선택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해봐, 이 미친 늙은이야.” “뭐?” “해보라고 이 미친 늙은이야.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라고.” “네놈이 감히!” “이설호! 제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 된 장내의 한가운데, 나는 한 글자씩 또박 또박 내뱉었다. “미친 늙은이가….” “네놈!” “내가 죽으면 우리 희라 누나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늙은이가 입을 다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 45 회귀자 사용설명서 045화 미친년(3) “내가 죽으면 우리 희라 누나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늙은이가 입을 다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짓말이다. 아마 차희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실소를 터뜨렸으리라. 차희라와 나는 어제 만난 게 처음이었고 별다른 이야기도 나누어 보지 않았으니까. 어처구니없는 개소리지만 이 개소리는 틀림없이 먹힌다. 아마 늙은이의 기억 속에 남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있어야지. 무조건 있어야지.’ 본의든 타의든 간에 나와 차희라는 접점을 만들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보니 생각나는 게 있는 모양. 고개 숙인 영감이 보기에는 자극적인 장면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슨… 개소리를….” “개소리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그 눈이 옹이구멍은 아닐 거야. 그렇지?” “…….” 꽤나 얌전해졌다. 대충 질러본 것치고는 꽤나 효과가 좋다. 그만큼 붉은용병 길드의 차희라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가 무거운 모양. 애초에 차희라가 파란 길드와 별로 접점이 없다는 걸 전제로 찔러본 것에 불과했지만 내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다. 근력 97의 괴물을 건드리고 싶은 사람은 없는 것이 당연하다. 단순히 능력치의 문제도 아니다. 신성제국에서 가장 큰 대형 길드 중에 하나, 지금까지 봐왔던 인간 중 가장 높은 능력치와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가 바로 그녀다. 성향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걸 가정한다면 내 말이 정말인지 거짓인지 판별하기 이전에 그녀의 이름이 등장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섣부르게 넘겨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파란 길드의 상태는 바람에 꺼지기만을 기다리는 촛불과 다름없어 보였으니까. ‘본래.’ 겁먹은 개가 가장 크게 짖는 법. 그건 저 할배와 나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차희라와는….”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잖아. 지구에서부터 인연이 있었든, 우리가 서로 사랑하든 사이든 간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중요한 건 교섭권을 가지고 있는 파란 길드가 이곳에 막 들어온 신입을 무력으로 겁박했다는 점이고 이게 외부로 알려지면 안 된다는 거지. 영광스러운 파란 길드도 희라 누나 이름이 나오면 움찔할 수밖에 없나보네.” “…….”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변에 적이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나마 가지고 있는 교섭권도 타 길드로 넘겨주고 싶은 건 아닐 테고, 도대체 당신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네. 나는 이곳에 싸우러 들어온 게 아니라 협상을 위해서 들어온 거야. 아무리 과거의 영광에 취했다고는 해도 상급자의 말을 무시하면서까지 이런 태도를 취하는 건 누가 봐도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아니면, 이제 그 문제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상황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건가?” “네놈….” 나도 모르게 자꾸만 버릇처럼 히죽이게 된다. 정확하게 차희라의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이곳을 점령하던 마력의 옅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아무 의미 없는 말싸움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흥분한 쪽이 지는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후우…. 만약에 파란 길드가 가족같이 자유롭고 엿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라면 대성공, 아니… 대성공이라고 말해주고 싶군요.” “…….” “한 집단을 망치는 건 당신 같은 사람입니다.” “뭐?” “고여 있는 물 말입니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는 법입니다. 이설호 씨. 당신이 저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를 내리든 간에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가치가 있는 쪽이 김현성과 정하얀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고요. 저를 탐탁지 않아 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그렇지만 적당히 하셨어야죠. 아무리 이 대륙이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곳이라고 한들, 당신의 행동은 충분히 무례한 행동입니다. 저는 아직 당신의 하급자가 아닙니다.” “이놈이 그래도!” 흥분한 늙은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쾅! 하는 소리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흥분한 것 같은 이설호 역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뻔할 뻔자. 하급자의 개짓거리를 보다 못한 이상희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친 것이다. “이설호.” “이, 이상희 님….” “지금 본인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는 겁니까?” “그것이….” “근신입니다.” “네?” “근신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 길드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물론 기영 씨에게 사과를 드린 이후입니다.” 이렇게 될 거라고 대충은 예상했다. 과거의 영광에 취한 꼰대의 돌발행동에 길드의 중심에 있는 그녀가 취해야 할 수 있는 행동은 단 하나다. “저는… 길드를 위해서….” “사과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 말씀드리지 않을 겁니다. 이설호 씨.” 아마 고개를 숙여올 것이다. 보통 저런 족속들은 강자에 약한 법이니까. 예상대로 표정을 구기는 늙은이의 모습이 보인다. 새삼 복잡한 표정, 배신당했다는 표정이기도 했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설호가 이 상황을 이해하고 말고는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예상했던 대로, 천천히 이쪽을 바라보는 이설호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고개를 숙여오는 것도 보인다. “무례한 언사에… 사… 과드립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저 역시 다소 흥분했었습니다. 사과드리도록 하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과를 한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다급하게 밖으로 나가는 꼴이 꽤나 가관이다. 조금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 어딘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 싱긋 웃으며 이상희를 바라보자 그녀 역시 허리를 숙여오는 것이 보였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길드원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제 부주의였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 ‘된 사람.’ 이상희 그녀는 된 사람이다. 단순히 보여주는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민망할 정도로 고개를 숙여오고 있다. 당연하지만 파란 길드와 척을 질 이유는 없다. 더 이상 압박한다고 해도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리라. “아뇨. 오히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어떻게 저희를 비난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부디….” “계약에 관련된 문제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제가 무례했었습니다.” “아….” “파란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프라이드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이야기를 꺼낸 것 같습니다. 협상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길드의 상처를 들쑤시는 발언은 해서는 안 됐습니다. 이설호 씨의 행동은 어떻게 생각해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저 역시 잘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아… 혹시 차희라 님과는….” “운 좋게 작은 인연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제가 누나와 잘 알고 지내는 것도 아마 파란에게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 말은 혹시… 계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는지요.” “물론입니다. 계약 조건 역시 15,000골드가 아닌 10,000골드로 합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네.” “파란 길드의 주요 간부직을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 “제가 어째서 이런 제안을 드리는 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아까와 같은 개 같은 상황이 한 번 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저런 늙은이들이 한 명만 있으리라는 보장 역시 없다. 어쩌면 조직적으로 단합하고 이쪽을 엿 먹이려고 할지도 모른다. 보통 기득권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법이니까. 납작 엎드릴 생각은 없다. 정치 싸움이라면 오히려 환영해 주고 싶을 정도다. 그 기반을 위해 필요한 권력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말뿐인 지위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아마도 받아들인다. 내 가치가 아까보다 더 올라갔다고 판단하고 있을 테니까. 일단 이쪽이 그 용병여왕 차희라와 접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우리 파티를 영입하면 파란은 붉은용병에게 비벼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말이다. 혹시나 내가 붉은용병의 간자일 확률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붉은용병이 굳이 파란을 건드릴 이유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손을 잡는 것은 굳이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이득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고인 물….’ 길드를 갉아 먹는 고여 있는 물들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도 우리가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녀로서는 통제 불능의 꼰대들이 꽤나 골칫거리일 터. 방금 전의 돌발행동을 생각해 본다면 이 길드는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무력과는 조금 다른 문제. 주요 간부직을 내놓으라고 제안한 것은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녀와 길드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내가 해결해 줄게.’ 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그녀가 원하는 결과물과 내가 원하는 결과물의 차이야 존재하겠지만 썩은 물을 정화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네.” “계약금 같은 경우에는 저희가 최대한 맞춰 드릴 수는 있습니다. 주요 간부직 역시 아예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마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큰 직급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보여 조심스럽습니다. 제 말이 맞는지….” 구태여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웅 등급의 아이템 같은 경우에는 당장은 힘들 수도 있다는 걸 미리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을 마련해 주신다면 가능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 ‘생각보다 귀하구나.’ 영웅 등급의 아이템이 내 생각보다 값어치가 조금 더 나가는 모양이다. 김현성의 마법 가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온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위 등급의 아이템을 조금 우습게 봤었다. “아이템은 곧바로 지급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당장 쓸 수 있는 장비가 아니라면….” “아! 그렇다면 내부 회의를 거친 이후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쉽지 않은 결정인 만큼 천천히 생각해 주셔도 됩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쪽을 받아들이냐에 대한 회의는 아닐 것이다. 이미 그건 어느 정도 확정된 이야기. 어떤 아이템을 지급하느냐에 대한 것과 어느 정도의 지위를 보장해 줘야 하는지가 쟁점이 될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회의 내용을 들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있는 시간도 여유도 없다. “그럼 저는 이만.” “네. 감사합니다, 기영 씨. 그리고 다시 한번 아까의 무례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오늘 친 말도 안 되는 구라를 진실로 탈바꿈시켜야 되기 때문이다. ‘차희라….’ 영감탱이에 말 그대로. 내가 너무 물렁하게 생각했었다. 이 대륙에서는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잘나가던 김현성이 갑자기 뒈질 수도 있고, 정신 나간 늙은이가 나를 노리는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파티만 믿고 가기에는 위협이 많아 보이는 것이 현실. ‘뒷배는 있어야 돼.’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줄 수 있는 빽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 46 회귀자 사용설명서 046화 호랑이가 있는 곳에서도 여우가 왕이 되는 경우가 있다(1) 혼자였다면 붉은용병으로 갔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파란으로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 파란은 이미 몰락의 전철을 밟고 있는 길드였고 썩은 물과 고인 물이 뒤섞이며 땅바닥을 뚫고 똥물로 처박히고 있는 집단이었다. 현재만 놓고 생각한다면 파란을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길드 마스터는 어디서 뒈진 것 같은 느낌. 우리와 계속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은 부길드 마스터인 이상희였고 과거의 영광에 취한 늙은이들이 길드를 잠식하고 있었다. 타 길드에게도 무시당하기 일쑤. 정상인이라고는 이상희밖에 보이지 않는 길드를 선택하는 건 침몰하는 배에 탑승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붉은용병이라는 배에 탑승해 침몰해 가는 놈들을 바라보며 하하 웃어 주는 게 당장은 통쾌할지도 모른다. 나는 애초에 내 능력을 과신하지 않는다. 우리가 파란 길드로 들어간다고 해서 뭔가 변화가 찾아올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여우는 의외로 조심스러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은 파란을 원한다. 처음부터 쭉 그랬다. 물론 다른 선택지를 아예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회귀자는 이곳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도출할 수 있는 답은 하나. 먼 미래가 됐든 가까운 미래가 됐든, 붉은용병으로 가는 것보다 파란으로 가는 것이 이득이라는 소리가 된다. 이미 당첨될 확률이 확실한 복권이 눈앞에 있는데 가는 길이 불편하다고 해서 다른 복권을 사러갈 이유는 없다. 회귀자는 조금 더 확실한 쪽에 걸었다. 고작 미친 늙은이 몇 명이 불편하다고 해서 굴러들어오는 복을 차는 짓이야말로 멍청한 짓이다. 물론 문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내 안전.’ 내 안전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회귀자가 그리는 그림을 망치지 않는 선에서 내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차희라를 찾는 이유. 언젠가는 내 안전을 위해 김현성이 그리는 그림을 망쳐야 할 시기가 올지도 모르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감당할 수 있어.’ 노망난 늙은이나 다 죽어 가는 길드는 감당할 수 있다. 도박은 싫어하는 편이지만 나는 지금 던져야 되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붉은용병 말입니까?” “잠깐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왜….” “용병여왕과 나눌 말이 있습니다.” “차희라… 말씀이시군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김현성의 표정은 뭔가 애매모호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박덕구나 정하얀 쪽은 난리가 난 상황. 그때 있었던 사건 때문에 한차례 홍역을 치렀는데도 그 미친 여자를 찾아간다고 하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대놓고 불안해하는 정하얀과 괜스레 그런 정하얀의 눈치를 보고 있는 박덕구. 특히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다 못해 공황이라도 온 것 같은 표정이었다. “오빠….” “거, 형님…. 그… 여자한테 가려는 건 아니겠….” “아니다. 파티에 도움이 되는 일일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 불여시한테….” “오, 오빠….” 정하얀의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들릴 것이다. 애초에 나와 차희라 사이에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하려던 참이었다. 갑작스레 내가 붉은용병으로 향한다는 소리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거다. 솔직히 무슨 사고를 치지 않을까 불안하기는 했지만 내 나름대로의 안전장치를 마련한다면 당장은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딱히 숨길 이유는 없다. “뒤를 봐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더 자세한 건 일이 잘 풀린 이후에 말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렇군요.” 김현성의 반응은 나쁘지 않다. 이쪽이 그녀와 끈을 만들어 놓는 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놈의 입장에서는 환영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정하얀은 겁을 먹은 표정이다. 자신이 버려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당연히 그럴 일은 없다. 뭔가 이쪽을 향해 뭔가 말하고 싶다는 듯 입을 뻐끔거리고 있지만 목이 메는지 아니면 나와 김현성의 대화에 끼어드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하는지 우리의 대화를 가로막지는 않았다.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박덕구 역시 마찬가지. 정하얀의 손을 슬쩍 잡아줄 수밖에 없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하고 곧바로 다녀오겠습니다.” “네.” 평소였으면 얼굴을 붉혀야 할 정하얀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확실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다. 갑작스레 흐뭇해진 박덕구의 미소를 뒤로 한 채 정하얀과 함께 복도를 걷기 시작하자 그제야 개미만 한 목소리가 들린다. “가… 가지 마세요.” “별일 없을 거야.” “그래도….” “이야기만 짧게 나누려는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저도 같이… 가… 가요.” “혼자 다녀오는 게 더 좋을 거야.” “가지… 가지 마세요. 가면… 가면….” 목소리가 점점 더 가라앉는다. 조금은 예상했던 상황이었지만 뭔가 알 수 없는 오한마저 느껴지는 상황에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우리 파티에게, 무엇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정하얀은 지금 당장 나를 지켜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살짝 그녀를 벽에 밀어 붙였다. 창백해지고 조금은 뒤틀린 얼굴에 깜짝 놀랐다는 감정이 들어선다. “오… 오빠.” 말은 하지 않는다. 대신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올린다. 얼굴이 터질 것 같이 붉어진 정하얀은 갑작스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신을 못 차린다. 방금같이 가라앉은 목소리 대신 묘하게 긴장한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오빠….”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대기 시작하자 내 얼굴을 전부 담아두려는 듯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이 보인다.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기 시작. 분위기고 무드도 없는 그저 입을 맞출 뿐이었지만 정하얀에게는 충분히 먹히는 모양이다. 이쪽의 머리를 두 팔로 감은 이후에는 혀와 혀가 얽히기 시작했다. 이것까지는 계획은 없었지만 상관없다. 마치 전에 있었던 더러운 것을 소독이라고 하겠다는 것처럼 이쪽을 애타게 찾는 느낌으로 달라붙는다. 머리카락을 꽉 쥔 손 때문에 아프지만 묘하게 흥분되는 분위기 때문인지 그 아픔마저 기분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 분명히 처음에 먼저 입맞춤을 시도한 것은 이쪽이었지만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정하얀은 오히려 이곳에서 더 한 짓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 그동안 숨겨왔던 욕망을 폭발이라도 시키려는 것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는 덕분에 그녀를 떨어뜨리기도 쉽지가 않다. 숨이 한계까지 다다른 이후에야 타액이 길게 늘어지며 잠깐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정하얀은 다시 한번 내 목을 감아오며 입을 열었다. “오빠. 오빠. 오빠. 오빠.” 다시 한번 입을 맞춰온다. 피할 이유는 없다. 지금은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이 중요하니까.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혀에 따끔한 느낌이 든다. 정하얀이 이쪽의 혀를 살짝 깨문 것이다. 인상이 살짝 찌푸려지기는 했지만 문제는 없다. 정하얀 본인도 깜짝 놀란 것 같이 나를 바라봤을 때 그제야 정하얀을 천천히 떼어 놓을 수 있었다. “좋아해.” 귀에 달콤한 말을 속삭인다. 환희로 몸이 부들부들 떠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래. 환희. 표정에 보이고 있는 감정은 틀림없이 환희였다. “저도… 사랑… 사랑해요.” “나는 우리 하얀이를 지켜주고 싶어.” 반은 진심이다. “저도… 저도….” “다치지 않기를 원해.” “저도!” “그래서 필요한 일이야. 그 여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야. 내가 강하지 않으니까.” “내가… 강하지 않으니까….” “그래. 우리가 강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괜찮을 거야.”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정하얀이 보인다. 대충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다. 물론 굳이 해석하려고 애를 쓰지는 않았다. 대신 잡고 있던 손을 넣고 다시 한번 살짝 입술에 입을 맞춘다. 별것 아닌 일이다. 정하얀은 내가 어쩔 수 없이 팔려가는 입장에 처한 줄 아는 모양이다만 정말로 대화를 나누러 가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흐름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좋아.’ 예측 불가능한 여자는 믿을 수 없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나를 가장 잘 지켜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다. 알 수 없는 책임감이 깃든 얼굴. 그녀는 오늘 이후로 조금 더 자신의 성장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힘이 없어 나를 보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에게는 이 상황이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신파. 별것 아닌 일이 엄청나게 큰일인 것처럼 포장되고 있는 것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저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히끅….” “사랑해.” “아… 아아….” 살면서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어 본 적도 없지만 다리가 풀려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다시 한번 부들부들 떠는 정하얀을 보니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모양. 한 번 더 이마에 입을 맞춘 이후에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계획이 일부 망가졌다. 정하얀과의 관계를 조금 급하게 진행시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자체적인 평가는 나쁘지 않다. 좋은 분위기에서 로맨틱하게 맺어지는 방법도 있지만 이런 종류의 위기가 우리 사이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 테니까. ‘미친 늙은이.’ 가진 바 힘이 미천해 피해를 입은 것은 정하얀뿐만이 아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예상하지 못한 불순물을 배제할 힘이 부족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 그렇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숙소를 나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용병 길드가 머물고 있는 곳이 시야에 비쳤다. 깜짝 놀랐다는 눈으로 나를 본 한 길드원이 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차희라 님을 뵈러 왔습니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조금은 떠들썩해진 것 같은 느낌. 이윽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길드원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의 말을 이었다. “안 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가장 끝 방입니다.” “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은 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발걸음이 괜스레 무겁다. 차희라는 이기영이라는 인간에게 별로 관심이 없을 테니까. 붉은용병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야 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문을 한 번 두드리니 안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침대에 누워 하품을 하고 있는 여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붉은색 머리에 속이 비칠 것 같은 옷을 입고 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시선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고민했지만 허둥대지 않은 채 앞에 있는 권력자를 마주했다. “생각이라도 바뀌었나 보네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이렇게 혼자 찾아왔는지에 대해 설명해 줘야겠는데….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었거든. 솔직히 조금 불쾌할 지경이야. 나는 간보는 남자는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멋진 애인을 두고 누나를 잊지 못해서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아직 차희라라는 사람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탕해 보이는 성격으로 봤을 때 주눅이 들거나 겁먹었다는 태도는 패스. 제안을 하러 온 입장인 만큼 나는 그녀에게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숨을 들이마신 뒤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문장을 내뱉었다. “스폰서가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장내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조금은 깜짝 놀랐다는 표정의 차희라는 이내 굉장히 흥미 있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조금은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흐음… 너… 잘해?” ‘뭔 소리야….’ # 47 회귀자 사용설명서 047화 호랑이가 있는 곳에서도 여우가 왕이 되는 경우가 있다(2) ‘뭔 소리야….’ 얼굴은 정말로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궁금해하고 있는 표정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입맛을 다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해 오는 사람은 없었는데… 자신 있나 봐? 솔직히 말해서 네 외관은 내 취향이기는 한데… 나는 조금 뱀상을 좋아하거든. 눈이 조금 찢어진 게 마음에 드네. 딱 꼬집어 말하면 잘생긴 건 아닌데 매력 있어 보이기는 해.” “그게….” “구매 욕구가 아예 생기지 않는 건 아니야. 그래도 믿고 써볼 만한 제품인지 한번 시험해 봐야 될 것 같은데… 어때?” 다리를 꼰 채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린다. 그제야 저 여자가 내 제안을 무슨 뜻으로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질 지경. ‘뭐….’ 스폰이라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았지만 이런 이야기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여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고 있나?’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으로 말한 걸까….” “그건….” “이기영. 내가 너한테 투자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네가 우리 길드에 왔을 때의 이야기야. 물론, 네 사랑스러운 애인과 함께 왔을 경우에. 너 혼자 온다고 해도 솔직히 받아들일 용의는 있어. 썩 재능이 좋은 것 같지는 않지만… 나는 연금술에 대해서 그리 부정적이지는 않거든. 좋은 관계를 만들어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 “아.” “그렇지만 네가 타 길드로 이적한 뒤에도 이쪽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건 내 역할이 아니야. 네가 소속된 길드가 할 일이지. 아무것도 아닌 타인에게 투자를 해? 차라리 너와 한 달에 몇 번 함께 놀아주는 걸 대가로 돈을 쥐어주는 게 더 수지가 맞는 장사라 이거야. 그게 이쪽에는 더 이득이라는 소리라고…. 이해할 수 있겠어?” ‘제길.’ 팩트가 너무 강하게 치고 올라온다. 말하자면 이기영 개인의 성장 기대치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잠자리에 투자를 하는 게 더 수지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비호를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연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지금 나를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물론 좋아한다는 감정보다는 단순히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느낌이었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저 여자의 말 잘 듣는 강아지가 되는 게 이득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따져보는 내가 싫어진다.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어.’ 스스로의 가치를 그렇게 떨어뜨릴 수는 없다. 한 번 품에 들어온 장난감은 언젠가 질리게 마련이다. 나는 겨우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다. “당연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차희라 님. 개인의 스폰서가 되어 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회 차에 튜토리얼을 첫 번째로 공략한 저희 파티의 스폰서가 되어 주시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김현성이나 정하얀은 틀림없이 성장할 겁니다. 대륙에서 손에 꼽힐 만큼 강자로 성장할지도 모르죠.” “그래서?” “네?” “그래서 어쩌라고. 그들이 성장하든 말든 나랑은 별로 상관없어. 이미 내가 손에 꼽힐 만한 강자 중에 하나야. 우리 길드의 길드원 역시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고. 마법사가 탐이 나기는 하지만 골드만 뿌리면 마법사는 언제든지 고용할 수 있어. 마도 길드나 마탑의 마법사들을 당장 고용할 수 있는 자금력을 가진 게 붉은용병이야. 정하얀이 성장한다고 쳐도 최소 3년은 걸릴 텐데… 그때까지 내가 너를 스폰해 줄 이유가 있나?” “…….” “내가 필요한 건 붉은용병 소속의 마법사들야. 남이 가지고 있는 건 필요 없다고. 계속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할 거면 그냥 얌전히 옆으로 와서 애교나 부려 봐. 가격은 섭섭하지 않게 쳐줄 테니까. 선물도 종종 챙겨 줄게.” ‘개….’ 화대를 준다는 말은 정말로 당황스럽게 들려올 지경이다. 무슨 말을 해도 이쪽의 말을 장난으로 받아 던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품에 살짝 쥔 아티팩트를 천천히 꺼내든다. 뭔 짓을 하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잠깐이지만 눈에 이채가 생겨났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내 품속에 넣어 준 아이템이었으니까. [마력 팬던트-희귀 등급] [마력을 3 올려주는 팬던트입니다. 마법의 효과를 증폭시켜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서 발견됐는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딴 게 필요한 게 아니야.” 침대 옆에 툭 하고 떨어진 팬던트를 보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보내오는 것은 순식간이다.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 확실히 무리수를 던지기는 했지만 최소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다. “골드도 아니고.” “…….” “내가 필요한 건 네 명성과 힘이야. 용병여왕 차희라라는 브랜드가 필요한 거지. 나도 이런 것들은 관심 없어.” “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고 있어? 신입에게 손을 대지 않는 건 모두가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네게 좋지 않을 거야. 좋은 조건이 계속해서 날아 들어오니까 네 위치가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당연히 알고 있어. 네 한마디면 이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도 알고 있고, 당장 어디 가다가 아무도 모르게 뒈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 “그래서 네가… 아니, 당신이 필요한 겁니다.” 천천히 말을 내뱉고 그녀를 바라봤을 때였다. 방안을 가득 채운 살기와 마력. 늙은이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압박감이 순식간에 치고 들어왔다. “재미있네. 알고 행동하고 있어서 더 짜증 날 것 같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알겠어. 잠깐이지만 내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롭고…. 솔직히 말하면 정말 취향이야. 내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남자는 얼마 없거든…. 이런 대우를 받아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그것도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입한테….” “…….” “그래도 정도가 조금 지나쳤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거지? 있잖아. 본래 연금술이라는 건 등가교환이라고 하잖아. 나를 네 고기방패로 써먹을 거라면 그에 준하는 상품은 준비되어 있는 거겠지?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너는 네가 한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거야.” 말을 하는 것도 버겁다. 그렇지만 실패라고는 할 수 없다. 일단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지는 만들었다. “말해.” “첫 번째는… 앞으로 제가 만들 포션에 대한 지분입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품에 있는 영웅 등급의 서책을 꺼내들어 땅바닥에 집어 던졌다. 잠깐 동안 흥미롭다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네가 그 정도로 대단해질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영웅 등급의 서책을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전부라면 조금 고달파질걸?” “일 퍼센트…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겨우?” “돈 방석에 앉으실 겁니다.” 믿도 끝도 없는 허세와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묘하게 신뢰가 가는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왜? 나는 목숨을 걸고 있으니까. “두 번째는… 저희 파티와의 우호 관계입니다.” “아까 말했잖아. 내 것이 아닌 거에는 관심이 없다고.” “우리는 당신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겁니다.” “사기꾼 새끼.” “농담이 아닙니다. 우리는 강해질 거고 이 제국을 대표하는 길드가 될 겁니다. 붉은용병의 혈맹으로써 항상 당신의 곁에 있을 겁니다. 별것 아닌 투자로 당신은 이후의 저희와 좋은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어떤 길드나 세력보다 먼저.” “지금 네가 하는 말이 혓바닥이 긴 놈들이 하는 개소리라는 건 알고 있는 거지? 투자비용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도 네가 만든 포션이 잘 만들어진다는 보장이나 너희 파티가 성장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세 번째.” “…….” “필요로 하시는 마법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개소리.” “이번 튜토리얼에서 끝나고 나온 이들 중 최소 3년, 아니, 2년 안에 제대로 된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인원을 선발해 차트를 만들고 그 명단을 차희라 님에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용병 길드의 프로젝트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고 한다면 내 제안은 그녀의 구미를 당기고 있을 것이다. “흥미롭긴 하지만… 가능한 일이야?” “자신하고 있는 첫 번째 이유는 제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섭권을 가지고 있는 파란의 간부가 된다는 점이고.” “흐음….” “두 번째 이유는….” “…….” “비밀입니다.” “너.” “연금술이라는 건 본래 등가교환이라고 하셨지요.” 내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찾을 수 있다는 건 비밀. 그녀의 비호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모든 걸 까발리는 건 역시나 이쪽이 손해다. 조용히 있는 차희라. 내가 가지고 있는 비밀과 자신의 비호가 등가교환이 되지 않는다는 발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제발 만화에서 나오는 호탕한 캐릭터처럼 하하 웃어주며 이 자리가 원만하게 마무리됐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그러지는 않을 모양.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해득실을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제기랄.’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는 비밀에 대해 추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파티가 성장한다는 확신. 그리고 성장할 수 있는 마법사들을 찾아줄 수 있다는 것. 완벽하게는 아니겠지만 어쩌면 어느 정도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너무 많이 풀었나.’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그때였다. “네가 만들 포션의 대한 지분은 1퍼센트가 아닌 3퍼센트로. 마법사에 명단은 물론 근접직군에 대한 명단도 함께 받도록 하겠어. 그리고 방식은 내가 정한다.” “무슨….” “내 비호가 필요한 거 아니었어? 그 누구도 너를 건드리는 일은 없을 거야. 대신 그 방식은 내가 정한다는 거야.” “어떻게….” “그건 오늘내로 알게 될 거야.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당연히 거절할 이유는 없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이만 나가보라는 듯이 손을 휙휙 젓는 차희라의 모습이 보였다.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쪽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됐다.’ 슬쩍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오자 차희라의 방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모두 근접직군으로 보이는 이들이다. 마음의 눈으로 한 번 그들을 살펴보자 붉은용병의 간부들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도 방금 있었던 대화에 대한 회의를 하려는 것. 이쪽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부터 이기영 개인을 보호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문제는 어떻게 보호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기분 좋게 붉은용병의 숙소를 나서는 순간 갑자기 떠오른 상태창에 메시지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칭호를 얻으셨습니다.] “뭐?” [칭호-용병여왕의 정부] “제기랄.” 이 대륙에 넘어와 첫 번째로 얻은 칭호였다. # 48 회귀자 사용설명서 048화 권력(1) 파란 길드와의 협상은 물 흐르듯이 진행됐다. 개인 계좌를 개설하는 동시에 계약금은 곧바로 들어왔고 영웅 등급의 아이템은 아직이지만 분에 넘치는 직위를 받을 수 있었다. 확실히 약속했던 그대로였다. 사실 마지막까지 파란으로 가는 것에 대해 고민 아닌 고민을 하기는 했지만 알면 알수록 나쁘지 않은 점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용병 길드 같은 경우에는 길드 마스터에게 권위가 집중되어 있지만 파란 같은 경우에는 조직체계가 생각보다 세분화되어 있었다. 길드 마스터 그리고 부길드 마스터, 그 아래에 있는 여섯 개의 팀과 몇 가지의 행정직급이 존재했던 것. 쉽게 설명하자면 파란 길드는 6개의 파티로 이루어져 있다는 소리가 된다. 파티는 다섯 명에서 많게는 열다섯명까지 구성되어 있었다. 다른 길드의 체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김현성이 어째서 파란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움직이는 게 편하니까.’ 녀석의 바람처럼 우리가 들어가는 즉시 파란에서는 새로운 파티가 신설됐다. 일곱 번째 파티의 파티장은 김현성. 아직 정식으로 출원됐다고 하기는 힘들기는 했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파란이 본래 우리에게 해주기로 한 것들이었다. 남아 있는 것은 아직 지급되지 않은 영웅 등급의 아이템과 내가 가지게 될 직위. 아마 나를 어디로 배정해야 할지 무척이나 고민했을 것이다. 이설호 같은 고인 물에게 꿀리지 않을 직위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위한 직위가 마련되기는 했다. ‘비전투직군 특수행정관.’ 누가 봐도 애매하고 급조했다는 느낌이 드는 직위다. 본래 파티에 소속되어 있는 이가 행정직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나 역시 김현성 파티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기 위한 이상희의 배려였다. ‘좋지.’ 아무튼 간에 나 때문에 파란 길드는 한 가지의 행정직을 더 떠안게 됐다. 내게 할당된 직무가 무엇인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행정업무 전반에 걸쳐 도움을 주라는 이야기겠지만 지금 당장은 일을 맡기기 힘들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급하게 직위를 나누어 준 것은 분명 뭔가 바라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야…. “기영 씨, 밖에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현성 씨.” 나는 용병여왕의 정부였으니까. ‘슈바….’ 마음대로 할 거라고 했을 때부터 뭔가 불길했지만 이런 식으로 대놓고 치고 들어올지는 몰랐다. 건방졌던 나에게 작은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매일 매일 손편지와 함께 어마어마한 선물을 해주는 것을 보면 이왕 투자하기로 한 거 확실하게 해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물론 원하는 건 확실히 이루어졌다. 용병여왕의 정부를 건드릴 미친놈은 적어도 베니고어 신성제국에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이건 아니야.” 이런 방식은 내가 의도했던 방식과는 조금 달랐다. 물론, 조금 심란한 나와는 다르게 파란 길드는 때 아닌 호황을 맞았다. 현재 신성제국에서 가장 유력한 길드인 붉은용병과 급진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 물론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나인만큼 길드에서의 내 위치가 올라가기는 한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 좋은 시선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붉은용병 길드의 용병여왕 차희라가 튜토리얼에서 막 나온 신입에게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신입은 파란 길드의 간부이며 용병여왕의 끝없는 구애를 받고 있다.’ 라는 소문 때문이다. 그밖에도 개 같은 소리들이 나오기는 했다. 숨겨진 애인을 따로 두고 있는데도 그런 짓을 하는 놈이라든가, 잠자리를 잡는 기술이 뛰어나다든가, 지구에서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라든가 하는 개소리들 말이다. 물론. 이 모든 소문은 붉은용병 길드에서 자체적으로 퍼뜨린 소문이었다. 튜토리얼 던전의 앞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이미 소문이 쫙 퍼진 상황이었으니 아마 신성제국의 앞마당까지 소문이 닿았으리라. ‘제길….’ 멍하니 산처럼 쌓여 있는 것들을 보고 함께 서 있는 김현성이 슬쩍 말을 걸어왔다. 녀석의 입장에서도 당황스럽고 황당할 것이다. 녀석이 생각하는 차희라의 모습은 이런 모습과는 거리가 있을 테니까. “그녀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말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별건 아닙니다. 다만 저희를 스폰해 달라고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어째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질 나쁜 장난일 겁니다.” “흐음… 그럴지도요. 그렇지만 선물들을 보니 확실히 기영 씨가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는 한 모양입니다.” 김현성의 말에 슬쩍 건물 앞에 쌓여져 있는 물품들을 보자, 이런 종류의 오해가 어째서 신뢰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고대 공화국의 약물제조 연금술 키트-영웅 등급] [고대 공화국에서 전승으로 내려오는 연금술 키트입니다. 지하 실험실에서 발견된 이 기본 장비들은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서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특수한 약품 처리가 되어 있는 것 같지만 마력을 품고 있는 이 물건은 단순한 장비라고 표현하기에는 그 질과 성능이 뛰어납니다. 물약제조 성공률이 올라갑니다. 사용자의 행운 수치를 일시적으로 올려줍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미노타우르스의 힘줄-희귀 등급] [벤시의 마력정수-희귀 등급] [트롤의 혈액-희귀 등급] [신원을 알 수 없는 몬스터 혈액-희귀 등급] [신성제국의 성수-희귀 등급] 연금술에 사용되는 온갖 촉매들이 상자 째 쌓여 있다. 상자 가장 위에 있는 편지에는 보라는 듯이 애정을 가득 담은 손 편지가 놓여 있다. -항상 고맙습니다. 별것 아니지만 부디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내 님에게 사랑을 담아서. 차희라. ‘이… 제기랄….’ 당연하지만 싫은 것은 아니다. 공짜로 선물이나 비싼 물품들을 뿌려주는 게 싫을 리가 없다. 사실, 타인의 시선도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문제는 정하얀이다. 당연히 정하얀뿐이었다. 처음 이 선물이 도착하고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의 그녀의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용병여왕이 준 선물들을 향해 마법을 퍼붓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지만 오히려 눈 한가득 눈물을 뿌리며 선물들을 보지 않으려는 것을 보면 자신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에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 같았다. 지금으로서는 내게 이런 것들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차희라와는 아무 관계가 아니며 내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너뿐이라며 계속해서 설득 아닌 설득을 하기는 했지만 정하얀은 혼자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마법 수련에 미친 듯이 몰두하는 것은 마치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 나와 함께 있는 잠깐의 시간을 제외하면 잠도 거의 자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스킨십을 하는 시간 역시 마찬가지. 아마 이런 시간까지 없었다면 정하얀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의 감정을 재확인하는 시간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더러운 것으로부터 나를 소독하는 시간이기도 했으니까. “하얀이는….” “하얀 씨는 뒤쪽 호숫가에 있을 겁니다. 최근에는 수속성 마법에 대해 수련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아마 그쪽에 가시면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덕구 씨는….” “덕구요?” “덕구 씨도 호숫가에서 배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시작한 것 같습니다만….” “배를요?” “네. 하얀 씨가 아무래도 호숫가를 바라보고 있는 게 혹시 뱃놀이라도 하고 싶은 건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일단 수련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놔두기는 했습니다.” 왠지 모르겠지만 괜스레 등골이 서늘해졌다. ‘박덕구….’ 또 무슨 설계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별로 좋을 것 같지 않다. 괜스레 침을 삼켰을 때 다시 한번 김현성이 말을 걸었다. “그보다 일은 잘 되고 있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아직은 회의를 따라가기 힘들지만… 조금은 파란에 대해 알 것 같습니다. 이제야 다른 장소에서도 튜토리얼 던전이 열리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조만간 이적시장이 열릴 것 같지만 아쉽게도 길드 자체에서 공략조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없던 터라… 많아야 한두 명일 겁니다. 생존자 중에서도 더 가능성이 있는 이들이 있을 테니 그쪽에 조금 더 투자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음… 저희 때문이군요.” 완벽히 정답이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그렇지만 가능하다면 저희 파티에 들어올 인원은 계약금을 사용하는 것은 어떨지 생각 중입니다만….” “나쁜 생각은 아닐 겁니다. 길드 차원에서도 조금 기뻐할 것 같고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쪽은 좀 어떻습니까?” “길드 주체로 다른 파티와 협연해 던전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쪽을 빠르게 성장시키는 게 길드 입장에서는 좋은 방법일 테니까요. 물론 이번 일이 마무리된 이후겠지만 준비는 미리미리 해두는 게 좋을 겁니다.” “혹시 어느 쪽으로….” “그건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던전을 찾아보는 것도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길드에서는 기본적인 사냥을 나가는 것부터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요.” “아, 그렇군요.” “그럼 저는 회의가 있어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기영 씨는?” “아. 저는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네. 그럼 잠시 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나름대로 영양가 있는 대화였다. 슬쩍 김현성을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놈의 모습이 보였다. 김현성이 앞으로 우리가 행동해야 할 방침에 대해 생각하고 움직이는 쪽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외적인 부분에서 김현성을 보조한다. 모든 튜토리얼이 끝나고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했거나 선택하지 못한 이들 그리고 교육이 끝난 이들을 추려 우리 파티로 데려오는 일이다. 혹시 과거의 인연이 있는지 알아봐야 했기 때문에 김현성도 다른 이들을 살펴봐야 하겠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나에게 일을 맡겨보려는 느낌이다. 녀석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잘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상상 이상의 성과를 내주었으니 자신의 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조금 재미있다. ‘조금 더 신뢰받아야 해.’ 여러모로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좋다. 김현성은 틀림없이 쓸 만한 머리를 얻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발걸음을 옮기며 향하는 곳은 현재 교육 받는 인원들이 몰려 있는 훈련소 쪽. 튜토리얼 던전의 생존자들을 관리하는 장소였다. 김현성과 대화를 나눴던 대로 슬슬 기본적인 교육이 끝난 참이다. 영입에 대한 준비도 할 겸, 차희라에게 보낼 명단도 작성할 겸, 다른 이들보다 조금 일찍 나서는 것이 유리한 것은 당연지사. 물론 이들보다는 타 튜토리얼 던전의 인원이 더욱 중하지만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생존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체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파란 길드의 간부님들이 찾아오실 예정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짧지만 길었던 교육을 마치고 각 길드로 오퍼를 받거나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 통제에 맞게 행동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훈련소의 연무장에서는 오늘 있을 교육이 한참이다. 슬쩍 발걸음을 옮기자 이쪽으로 인사를 해오는 것이 느껴진다. 물론 연무장에 도열해 있는 인원들에게서 나온 인사가 아니었다. “고생하십니다.” “아! 아닙니다, 팀장님.” “아직 정식으로 임관하지도 않았습니다, 교관님.” “하하. 그래도 곧 파란의 기둥이 되실 분이 아닙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보다는 무슨 일로…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아. 미리 한 번 둘러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과분한 직책을 내려주신 만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요.” “과연….” 잠깐의 대화. 그렇지만 이 대화는 분명히 땡볕에 서 있는 이들에게 닿았다. 나를 모르는 이들은 그저 높은 사람이 왔다고 생각하는지 바짝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쉼터에서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권력이란 거 좋구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역시 줄이란 건 서기 나름이라니까.’ 함께 떨어지고 함께 이곳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녀석들과 내 입장은 180도 이상 달라져 있었다. 무척이나 극단적으로 말이다. # 49 회귀자 사용설명서 049화 권력(2) 한쪽은 길드의 간부가 되어 있고 다른 한쪽은 길드와 클랜이 자신을 찾아주기만을 바라는 쪽이 되어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솔직히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저들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살짝 주변을 둘러보니 이지혜를 비롯한 쉼터의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상태가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그동안 꽤나 힘든 훈련을 받은 것을 고려해 보면 건강 상태가 괜찮아 보인다. 그야 시장으로 팔려갈 상품들이니 파란 길드 입장에서도 관리를 꽤나 열심히 했을 것이다. 우습게도 영양 상태는 오히려 나나 정하얀보다 나아보일 정도였다. 처음에 적응하지 못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현실을 받아들인 것 같은 모습도 눈에 띈다. 믿기지는 않지만 정말로 이 세계로 넘어왔다는 걸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어….” 쉼터에 있던 이들을 제외하고도 살아남은 이들이 꽤나 많았는지 내가 모르는 얼굴도 많다. 마음의 눈으로 저들을 한 번 훑어보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력 재능 희귀 이상, 영웅 이하, 영웅 이상. 역시나 쉽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희귀 이상은 조금 보이기는 했지만 차희라가 원하는 이들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체크하는 것이 당연. 같은 등급을 판정받았다고 하더라도 이상은 이쪽, 이하는 저쪽으로 주는 게 좋은 일인 만큼 머릿속으로 인원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감회가 조금 새로울 것 같습니다.” “네.” 교육생들의 표정뿐만이 아니라 이 교관의 태도 역시 꽤나 나를 기분 좋게 만든다. 최대한 잘 보이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파란 길드에서 운영하고 있는 7개의 파티 중 그 어느 곳에도 해당되지 않은 어중이떠중이들. 이쪽에 잘 보인다면 이번에 신설되는 새로운 파티에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파란에서 정식으로 밀어주는 파티로 들어간다는 건 단순히 연봉이 뛴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여러 가지 혜택은 물론, 길드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교관 같은 경우에는 일반 길드원으로 들어온 이후 길드 내 파티에 비벼봤지만 어느 곳에서도 선택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아마 자잘한 임무나 의뢰로 길드의 잔심부름을 하다 이쪽 길로 빠진 것이 틀림없다. 사실 파란에서 투자하는 것은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이들뿐이다. 자신들이 투자받지 못해 올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재능이 뛰어나다면 어느 파티에서든 데려갔을 것이 분명. 교관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니 확실히 한계가 느껴지는 성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스탯 능력치도… 전체적으로 낮아.’ “하하하하하하.” “제가 여기에 온 지 오래되지 않아서 그런데… 이곳에서의 교육은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궁금하군요.” “네. 성심성의껏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가장 기초적인 교육만 받는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음.” “1차적으로는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 직업을 얻게 하는 것이 목표이기는 하지만 사실 직업을 얻어서 밖으로 나가는 이들은 아주 일부입니다. 사냥을 겸비하지 않은 교육으로만 직업을 얻는 이들은 아주 일부라, 보통 재능 있는 이들 중에 그런 경우가 많이 나타나고는 하더군요.” 정하얀의 경우다. “그렇군요.” “아예 전투 경험이 없이 살아남았던 인원들은 적성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여러 가지 교육을 한꺼번에 받게 됩니다. 마법사나 사제 같은 경우에는 마력을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여부부터 검사를 하기 때문에 보통 근접직군 쪽으로 많이 빠지지요. 아무튼 간에 훈련생들은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기본적인 전투법이나 화폐의 단위,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는 이들은 비전투직군 쪽으로 들어가 직업교육을 따로 받게 됩니다.” “직업교육이라고 하면….” “예를 들면 청소나 요리, 잡무 등을 담당하는 걸 말합니다. 제국민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대장간에 취업하는 이들도 있고 지구에서의 특기를 살려 미용실 같은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플레이어도 있지요.” “아….” “실제로 길드의 투자를 받고 사업을 시작하는 이들은 반응이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붉은용병 길드의 차희라 님 역시 따로 길드에 헤어디자이너를 두고 있으니까요.” “아아아. 네. 알고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처음 들어본 말이다. 외모를 가꾸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내 생각보다 더 신경 쓰는 모양. 그녀도 여자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왠지 모르게 차희라가 관리를 받고 있는 장면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비전투직군으로 빠지는 이들의 경우에는….” “보통 본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편이지만 훈련소 차원에서 권장하는 편은 아닙니다. 사실 아무런 기반도 없이 대륙으로 내몰린 경우에는 결과가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이죠. 소정의 골드를 지원해 주기는 하지만 자리 잡기에는 턱도 없는 금액이다 보니…. 대부분은 길드나 클랜에게 컨택 받기를 원하는 편입니다. 위험에 내몰리는 건 어딜 가나 똑같지만…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원하니까요.” “으음… 그렇군요.” “네. 대부분이 중형 길드나 대형 길드로 가는 걸 원하기는 하지만… 이미 자리가 잡혀 있는 길드에서는 사실 신입에게 투자하고 싶지 않아 합니다. 신인이지만 신인답지 않은… 음… 이를 테면 이기영 님들과 같은 이들을 원하는 사실이죠.”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신입답지 않은 신입 혹은 경력 있는 신입.’ “중소 클랜은 조금 어떻습니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중소 클랜은 상황이 더 좋지 않습니다. 아마 대형 길드나 중형 길드의 컨택을 받지 못한 이들은 대부분 중소 클랜으로 들어가겠지만… 중소 클랜에 들어간 신입들의 생환률은 그다지 높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재미있군요. 따로 이유가 있습니까?” “대형 길드에 비해 여유가 없다 보니 무리하게 원정을 떠나는 것이 일단 첫 번째 이유입니다. 길드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지구에서 블랙 기업이 있는 것처럼 이곳에서도 그런 종류의 클랜이 꽤나 많습니다. 대형 길드의 외주를 무리하게 받다 생겨나는 사고도 일상다반사고… 성과를 내기 위해 길드원들을 착취하거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클랜 마스터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서… 열정 페이는 물론 기본적인 보험도 없이 죽어나가는 이들이 태반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군요.” 사실 더 들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 대륙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눈에 보인다. 배경만 달라졌을 뿐이다. 뭐라고 딱 말하기는 힘들지만 현대 사회의 완벽한 축소판처럼 보이는 느낌이다. 대형 길드는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고 그렇지 않은 중소 클랜은 클랜원들을 무리하게 혹사시킨다. 아마 연봉 자체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먼저 자리 잡은 기득권들은 이후에 들어올 신입들에게 지옥 같은 환경을 선물하는 데 성공했다.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생산직이나 서비스직으로 가는 사람들의 비율이 그리 적지 않다는 것.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비전투인원에 대한 체크도 한 번쯤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재능을 깨닫지 못한 채 한가하게 빵이나 팔고 있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밖에는 대륙의 전반적인 상식에 대해서도 교육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길드나 길드와의 관계, 신성제국과 공화국 그리고 왕국 연합의 관계와 역사 같은 것들 말입니다.” “저희도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부분이군요.” “팀장님 같은 경우에는 길드 차원에서 교육이 들어갈 겁니다. 훈련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남은 인원 중에 다른 길드나 클랜으로 들어가는 경우에도 각 길드에서 교육이 따로 들어가게 되겠지요. 사실 그 때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길드 내에서도 따로 연수기간을 두고 신입들을 입맛에 맞게 성장시키니 말입니다.” “아아아아아.” “파란 같은 경우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입니다만 타 길드 같은 경우에는 조금 까다롭습니다.” “그렇군요.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도움을 드릴 수 있어 무척 기쁩니다.” 슬쩍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조금 건방져 보이는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녀석의 입가가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오늘 해주신 이야기는 추후에 보답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러실 필요는….” “아뇨.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런 뒷사정 같은 경우에는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서민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법이다. 대놓고 기뻐하는 표정의 교관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다시 한번 주변을 살피니 이쪽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지혜가 눈에 잡혔다. ‘데려올까.’ 물론 파티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소리는 아니다. 당분간은 눈뜰 새도 없이 바쁠 것이 분명. 차희라에게 줄 명단도 만들어야 하고 김현성 파티에 필요한 인원도 구해야 한다. 파란 길드에게 교육을 받을 시간도 필요하고 전반적인 행정업무에도 발을 들여야 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던전 탐사, 물약 제조.’ 김현성이 계획하고 있는 던전 공략이나 신성대륙에 내놓을 상품도 필요하다. 일을 벌여놓은 만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 최소한 옆에서 업무를 도와줄 팀원이 무조건 필요하다. 나름대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그녀라면 기본적인 일을 맡겨도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흠….” “필요하신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훈련소 입구로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 ‘이상희.’ 그리고 김현성. 꼴 보기 싫은 늙은이 이설호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근신을 당한 만큼 길드 내에서 늙은 몸을 푹 쉬고 있으리라. 몇몇 행정팀장도 눈에 띄어 살짝 인사를 건네니 이쪽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계급상으로는 완전히 같다고 할 수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리라. 물론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교관과 대기하고 있는 길드원들은 허겁지겁 인사를 하는 중이다. 길드원들 하나하나에게 마주 인사를 하던 이상희가 나에게 다가와 입을 여는 모습이 보였다. “먼저 와 계셨군요.” “예, 이상희 님.” “현성 씨한테도 말씀드린 부분입니다만 혹시나 필요한 인원이 있다면 영입하는 것을 허가하도록 하겠습니다. 길드 차원에서도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알아본 이후에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용히 웃고 있는 이상희가 보였다. ‘열심히 해줄게.’ 비정상적인 인간들한테 둘러싸여 기를 빨리는 것과는 다르게 이상희와 함께 있으면 꽤나 안심이 된다. 이제 서른세 살이 된 여자한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만 뭔가 우리 내 어머니 같은 느낌. 그만큼 그녀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열심히 해주셔서 무척이나 감사합니다.” “아뇨.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살짝 인사를 마친 뒤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으니 꽤나 긴장한 표정의 교육생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혹여나 자신들 역시 오퍼를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자신들의 눈앞에 현 파란 길드의 실권자들이 있으니까. 뭔가 대단한 허례허식 같은 것은 없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 따위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수료식치고는 지나치게 단출한 모습. 파란의 부길드 마스터는 조용히 단상에 선 뒤에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이곳으로 끌려와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여러분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잘 견뎌주셨습니다.” “…….” “마음 같아서는 여러분들이 대륙에 자리를 잡으실 때까지 조금 더 오랜 시간 교육하고 싶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죄송스러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곧 이곳을 벗어나 베니고어 신성제국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후로… 여러분 중 일부는 길드나 클랜으로부터 컨택을 받으실지도 모릅니다. 또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모여 클랜을 창설하는 분들도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것도 아니라면 비전투직군으로서 신성제국에 녹아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각자가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말씀은 하나입니다.” 묘하게 장내가 조용해졌다. “살아남으십시오.”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저희 파란은 자유 도시 린델의 서쪽 지역에 길드 하우스를 두고 있습니다. 언제나 여러분들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잠깐 고개를 숙인 이후에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당황스러울 정도다. ‘한 명도….’ 파란 길드에서는 저곳에 있는 인원들 중 단 한 명도 영입할 생각이 없다. 아마 다른 길드도 비슷한 상황일터. 이번 생존자들은 길드의 자금과 인력을 들여 성장시킬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너무 잔인한데….’ 이곳 역시 어딘가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곳이었다. # 50 회귀자 사용설명서 050화 자유 도시 린델(1) 딱히 저들을 구해줘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전투인원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자금이나 시간 등을 생각해보면 소수 정예를 지양하고 있는 파란에서 저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파란이 우리 파티를 영입하지 않았더라면 저들에게도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파란은 김현성 파티를 들여오는 데 무척이나 큰 값을 치렀다. 이제야 다른 튜토리얼 던전이 열리고 있는 만큼 저들은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낮다. 굳이 이들에게 투자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무능하지는 않다니까….’ “그럼.” 곧바로 고개를 숙인 이후에 등을 돌리는 수뇌부들을 보자 남아 있는 인원들은 조금 어안이 벙벙한 표정. “현, 현성 씨!” 결국에는 누군가가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 “저… 저희는…. 저희도 함께… 데려가… 주세요.” 조금은 황당한 발언. 누군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쉼터에 함께 있었던 이들 중에 하나.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김현성이 던져주는 식량을 덥석 받아먹던 이들 중 하나였고 정하얀을 욕하던 이들 중 하나였다. 사냥을 나가자는 소리에 조용히 고개를 돌리는 것은 물론, 이제는 뒈져 버린 정진호가 처음 쉼터로 왔을 때 가장 가까이 달라붙어 있었던 녀석이었다. 낯짝이 두꺼워도 이렇게 두꺼울 수도 없다. 튜토리얼에서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쉼터를 마련해 준 것으로도 모자라 아까운 식량을 가져다 바치기까지 했다. 모든 교육이 마무리된 이후에도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관들도 당황한 표정이다. 어떤 의미로는 정말로 대단하다. 철저한 약자의 입장에서 저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는 존경할 만하다. 나였어도 저 자리에서 저런 발언을 할 수는 없으리라. 나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나를 향한 말도 아니었고 선택권은 오롯이 김현성에게 있었으니까. ‘그 정도로 호구는 아니겠지.’ 아무리 녀석이 호구라고 해도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아니, 조금 걱정이 되기는 된다. 애초에 튜토리얼 던전에서 생존자들을 모아놓은 이후에 그들을 위한 쉼터를 마련한 것도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발상은 아니었으니까. “끝까지… 책임져 주셔야죠….” ‘무슨 개소리야?’ 아마 본인도 본인이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절박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지만 때로는 멍청하게 만든다. 이상희는 조용히 김현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튜토리얼 던전에서 맺은 인연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저, 저희도 함께….” 덕분에 용기를 얻은 미친놈들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한 상황은 실소가 나올 정도다. 그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았던 패배자들이 지옥에서 자신을 구해달라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보니 정말로 당황스러워졌다. “이대로 버리지는 않으실 거죠?” “현성 씨!” “현성 씨, 함께 데려가….” 김현성은 천천히 그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입술을 깨무는 녀석을 보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아닌 모양이다. 무척 당연한 반응. 저런 상황이라면 스님이라고 해도 화가 났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현성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네?” “여러분들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흡.” 순간적이지만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내 생각보다 조금 더 통쾌했기 때문이다. “저와 함께 다니시는 것보다는 새로운 환경에서의 각자의 삶을 살아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습니다.” “그… 그런 게….” “아마 도시는 안전할 겁니다.” “그런 무책임한 소리가 어디 있…있어요.” 뭐가 무책임하다는 건지 알 수 없다. 나서는 게 조금 건방져 보일 수도 있지만 한발 앞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희가 당신을 책임져야 할 의무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 “도시 안은 안전할 겁니다. 비록 편한 생활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목숨을 위협받을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나 현성 씨가 당신을 돌봐줘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저희는 타인입니다.” “…….” 이렇게까지 친절히 설명해 주는데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의 얼굴. 왜 당신들은 저곳에 있고 자신은 이곳에 있는 것인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바보들.’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법이다. 아마 저 녀석은 평생이 가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쪽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것 같은 기세로 달라붙어 왔기 때문에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품에 있는 금화 주머니를 내밀었다. “마지막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선물입니다. 아마 조금은 도움이 될 겁니다.” 허겁지겁 내가 건네준 주머니를 받아드는 녀석의 표정은 가관. 뭔가 배신당한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조금 묵직한 주머니 안에 든 것이 소중한 건 아는지 품에 집어넣는다. 정말로 얼마 되지 않는 액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놈에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진다. “감, 감사합니다.” “살아남게 되길 빌겠습니다. 연이 닿으면 다시….” “네….” 희생 없이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모양. 도시 안에 들어가서도 놈이 금화나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거머리를 떼어놓는 심정으로 몇 푼 던져준 것에 불과하니까. 어째서 내가 대놓고 주머니를 던진 건지 깨달은 것 같은 이지혜도 마치 바보를 보는 표정이다. 이지혜가 이쪽에 굳이 달라붙지 않다는 게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걸 보면 뭔가 생각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이지혜….’ 어쩌면 다른 길드의 컨택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만큼 혓바닥을 놀리면서 자기 덩치를 키웠을 수도 있다. ‘아까운데….’ 내가 가지자니 부담스럽고 버리자니 조금은 아깝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녀의 태도. 자신은 별로 아쉬울 것 없다고 자신하는 저 태도가 왠지 모르게 구미를 당기게 만든다. ‘나는 굳이 당신과 함께하지 않아도 돼.’ 그런 느낌이다. 이미 마음의 눈으로 그녀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음을 안다. 그렇지만 웬만한 어중이떠중이보다는 그녀가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지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뵙도록 하죠.” “네… 네.” 놈에게 해준 말은 아니지만 내 말이 기쁘게 들리는 모양.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이지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파란에 지원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만나게 되리라. 곧바로 뒤를 도니 이상희와 김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영 씨는 정말 따뜻하시네요. 물론 길드에서 나가는 기초생활지원금도 나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정도는 별거 아닙니다. 그래도 튜토리얼 던전에서는 동거동락하던 사이니까요. 그럼 지금부터 바로 린델로 향하는 겁니까?” “예. 정리는 이미 대충 끝내놨습니다. 사실 조금 더 여유를 두고 싶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준비할 게 많으니까요.” “아. 교육생들은….” “저희와 함께 곧바로 자유 도시로 향하게 될 겁니다. 일단 가도록 하죠.” “네.” 교관들을 비롯한 파란 길드의 평길드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튜토리얼 던전 앞에서의 생활은 이걸로 끝이라는 느낌. 정이 들지는 않았지만 전혀 새로운 도시에서의 생활은 당연히 기대가 되리라. 차희라가 준 선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내 짐이 무척이나 많았기 때문에 길드원 몇몇이 달라붙어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오빠.” “형님!” 물론 박덕구와 정하얀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은 마찬가지. 조금 수척해 보이는 정하얀은 이쪽의 옆으로 다가왔고 박덕구 역시 괜스레 아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빨리 출발할지는 몰랐는데 뭐,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오. 아쉽게 됐는데….” “뭐가….” “이거 말이요!” 밧줄에 묶여 있는 작은 나룻배 한 척.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호수에서 만들고 있던 걸 굳이 여기까지 가져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의외로 손재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나 질이 좋아 보이는 것은 덤. ‘왜 이렇게 잘 만들었어.’ “…….” “조금 더 있었으면 근처에 있는 쉼터에서 뱃놀이라도 할까 했는데… 만든 게 아까워서 일단은 가져가기로 했소.” “짐이 많을 텐데….” “여기에 실으면 되니까 별문제는 없는데… 체력 단련도 될 것 같고. 형님이 걷다가 힘들면 누님이랑 같이 타면 제가 끌어줄 수도 있는 거 아니요?”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야.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타고 싶지 않다. “거, 자유 도시 근처에는 호수도 없다고 들었는데… 끄응.” “나중에 꼭 함께 타요… 오, 오빠.” “그렇게 하자.” 정하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니 기분 좋다는 듯이 웃는 게 눈에 띄었다. 생각보다 상태가 좋아 보여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박덕구와 함께 나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다. 은근히 녀석이 정하얀의 멘탈을 잡아주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이제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네, 현성 씨.” 작지도 크지도 않은 파란 길드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꽤나 오래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 나기는 했지만 즐겁기도 하다. 오랜만에 김현성과 박덕구, 정하얀과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요…. 새로운 마법을 오늘 써봤는데요….” “응. 응.” “내가 직접 봤는데 정말로 대단한 것 같았는데… 거, 누님이 주문을 외우니 호수가 갑자기 갈라지는 거 아니겠소? 옛날에 동네 아지매가 했던 이야기 중에 마새인가 앵무새인가 하는 양반이 바다를 갈랐다고 하는데 정말로 그걸 실제로 보는 것 같더오.” “아마 모세일 겁니다.” “아아아! 모새, 그 양반이었던 것 같소. 형씨는 참 똑똑하구만. 아무튼 그래서 말이오.” 꽤나 말이 많아진 박덕구와 기분 좋은 듯한 표정의 김현성. 정하얀은 내 손을 꽉 잡은 채로 걷고 있다. 정말로 잠을 자지 못했는지 꾸벅 꾸벅 졸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손을 꽉 쥐고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가는 길 중간 중간, 파란 길드의 중역들이 여러 가지를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고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휴식시간을 충분히 즐겼다. 한참이나 걷다 보니 눈에 띄는 것은 높게 솟은 시계탑. 슬쩍 옆을 바라보니 김현성의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에게도 시작이지만 녀석에게도 시작이다. 뭔가 복잡한 표정이 감돌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여러모로 생각하는 것이 많을 것이 당연하다. 과거에 있었던 일, 앞으로 벌어질 일, 파란과 우리 파티에 대한 일까지. 차분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정하얀은 마치 신혼집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앞으로 두 사람이 살아갈 터전이라고 생각하는지 한껏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저기가….” 신성제국 내 지구인들이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는 장소. “린델….” 자유 도시 린델이다. “세상아, 박덕구가 왔다!” “푸핫!” # 51 회귀자 사용설명서 051화 자유 도시 린델(2) “우와아아아아아아.” “와….” 박덕구와 정하얀이 커다란 탄성을 내질렀다. 파란의 수뇌부들은 그런 우리들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짓는 중. 도시에 처음 온 우리들이 보여주는 반응을 보니 예전 생각이라도 나는 모양이다. 서쪽 성문이 열리자마자 조금은 웅장해 보이는 도시가 시야에 들어왔다. 기본적은 건축 양식은 서양의 것을 참고하고 있는 걸로 보였고 여기저기 곳곳에서 지구인이 살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검은 머리를 하고 있는 이들이 눈에 띈다. “자유 도시 린델은 한국인이 자리 잡고 있는 곳입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다른 나라 사람들도 함께 소환되고 있다고 들었었죠.” “네. 신성제국이 보유하고 있는 튜토리얼 던전의 경우에는 한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대만인이 소환되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신성제국 안에 있는 도시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고 있지요. 린델에서도 일본인이나 대만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같은 지구인인 만큼 서로 교류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하필이면 일본인이다. 딱히 나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은 찜찜했다. “공화국은….” “중국인과 러시아인이 소환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기에 세트로 묶이는 것보다는 좋을 것 같은 느낌.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자 여러 가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상점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이들도 보였고 사냥을 나가는 파티도 눈에 보인다. “사제 구합니다.” “같이 사냥 나가실 사제 구합니다.” “아이템 팔아요! 희귀 등급 아이템입니다!” 마치 게임 속에서 봤던 광장을 현실로 재현해 놓는 듯한 모습이다. 꽤나 활기가 있다. 아마 박덕구와 정하얀이 눈을 크게 뜬 이유도 저런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높게 솟아 오른 건물은 아니지만 고풍스럽다는 특징이 있다. 중간 중간 화려한 모습을 한 상점들도 눈에 띄고 테라스에 앉아 식사를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당장 나조차도 어딘가에 해외로 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이곳저곳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이들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물론, 좋은 장면만 눈에 띄는 것은 아니다. “흠… 빈민촌도 있군요.” “네.” 길드가 위치해 있는 서쪽과는 다르게 저 멀리 보이는 것은 버려진 듯한 건물. 여기서도 언뜻언뜻 보이기 때문에 저쪽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볼 순 없지만 뻔할 것이다. 내 생각보다 이곳의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져 있다. “도시 내에서 자체적으로 복지정책들을 실시하고는 있지만 그 효과가 미비한지라….” “그렇군요.” ‘모두들 쉬쉬하고 있겠지.’ 지금의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렇게 입구를 떠나 광장을 지날 즈음 커다란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이 커진 박덕구를 바라보던 이상희가 조용히 웃으면 입을 열었다. “파란 길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오오오오오!” 내 생각보다 더 큰 규모였다. 우뚝 솟아 오른 건물이 보인다. 몰락하고 있는 길드로는 보이지 않는 외관. 아니, 오히려 몰락해가고 있기 때문에 겉모습에 조금 더 신경을 쓰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우리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운지 이상희는 한 번 더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1층은 로비와 쉼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보통 타 길드나 집단의 의뢰를 받는 곳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몸을 쉴 수 있는 장소도 함께 마련되어 있지요. 간단한 회식이라면 1층에 마련되어 있는 주점에서 하셔도 됩니다. 다른 파티나 길드원 분들이 자주 모이시니 제 바람으로는 자주 이용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오오…. 형님, 여기는 술도 마실 수 있는 모양이오.” “네. 외부 주점보다 훨씬 나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지하에는 길드 식당이 있으니 언제든지 이용하시면 됩니다. 물론 무료로요.” “좋, 좋네요….” “칠 번대 여러분들은 2층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2층?” “네. 함께 올라가도록 하시죠.” 마치 새로 산 집이라도 구경하는 느낌. 1층 메인 로비에 조용히 서 있는 접수원이 건네는 인사에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2층으로 올라가니 꽤나 넓은 공간이 우리를 반겼다. “빈 방은 많으니 마음에 드는 방을 고르시면 됩니다.” “네.” 1층의 넓이를 보고 예상은 했지만 우리가 사용할 2층 역시 무척이나 크다. 복도 자체도 넓었고 방의 개수도 꽤나 많았다. 아직 우리 파티의 숫자가 적다 보니 공간이 조금 더 넓어 보인다. 방 내부도 꽤나 괜찮아 보인다. 혼자 사용하기에는 조금 커다란 침대. 의자와 책상, 기본적인 책장 같은 것밖에 없어 조금은 휑해 보이기는 했지만 앞으로 우리가 생활할 방이라고 생각하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오빠….” 정하얀이 슬쩍 옷깃을 잡어 당기며 몸을 기대온다.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방을 같이 쓸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애써 모르는 척하는 것도 일. “거, 방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우리는 세 개만 써도 될 것 같소. 부길마 양반.” “…….” “나랑 형씨가 따로 하나씩 쓰고 누님이랑 형님이 함께 쓰면 딱인 것 같은데….” ‘이 돼지가….’ “아… 그렇게 하셔도 상관은 없지만 그….” “큼… 그것보다는 바로 옆방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네.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묘한 신경전. 둘의 표정에 잠깐의 아쉬움이 싹트기는 했지만 아마 진심으로 던진 말은 아닐 것이다. 결국 정하얀은 내 옆방을 차지했고 김현성과 박덕구가 그 맞은편에 있는 방을 사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정하얀이 바로 옆방에서 지내는 게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본인은 기분이 좋은지 계속해서 싱글벙글 웃고 있다. 모두가 자고 있을 때 슬쩍 옆으로 와서 누웠던 예전보다야 낫겠지만 혹시나 벽에 구멍이라도 뚫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무실이나 훈련장은 건물 뒤에 있습니다. 개인 연무실은 없지만 칠 번대 분들께서 사용하실 만한 합동 훈련장이 마련되어 있지요. 혹시라도 개인적으로 연무실을 사용하시고 싶으시면 로비에서 신청을 하시고 사용하시면 됩니다.” “아… 그렇군요.” “그리고 기영 씨는….” “네.” “따로 마련되어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네?” “잠깐 함께 가시죠.” “네. 알겠습니다.” 조금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의 이상희를 따라갔다. 박덕구와 정하얀, 김현성도 궁금한지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2층 복도 끝에 위치한 방에 들어서자 펼쳐진 광경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린델에 도착한 이후에 첫 번째로 말이다. “앞으로는 이곳에서 작업하시면 될 겁니다.” “워….” “와….” 한쪽에 쌓여 있는 서책들. 그것보다 눈에 띄는 것은 방 안을 가득 채운 연금술 장비다. 비커나 플라스크 같이 현대에서 사용하던 물품들이 있는 것은 물론,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연금술 도구들이 즐비해 있다. 한쪽에는 촉매나 재료로 부르는 것들이 종류별로 놓여 있었고 연금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는 연금 항아리 역시 눈에 띈다. 차희라가 선물해 준 물품의 대부분이 정리되어 있다. 고대 공화국의 약물 제조 연금술 키트도 한 쪽에 제대로 비치되어 있는 모습. 말하자면 이곳은…. “사용하실 연금술 공방입니다.” “아.” “사실 조금 더 규모를 키우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비전투직군들을 위해서 이런 장소를 마련한 것 자체가 처음인지라….” “아니요…. 충분합니다.” “실험에 다른 불순물들이 포함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어서 살균 마법이 포함되어 있는 아티팩트를 방 전체에 설치했습니다. 방 끝에 있는데다가 환기시키기 편하시도록 다른 아티팩트도 설치해 놨으니 쾌적하게 이용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혹시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겨날 수도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방어 마법 역시 설치되어 있고요.” “감사합니다.” 솔직히 감회가 새롭다. 지구에서도 나만의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다. “과학자들이 쓰는 실험실 같은 느낌이요. 크으….” “멋있어요, 오빠.” 사실 이곳에 있는 모든 물품보다 차희라가 선물해 준 것들이 더 가치 있다. 그러나 최소한 홀대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애초에 이 대륙에 떨어진 연금술사 중에 이 정도로 좋게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고 싶을 정도. 영웅 등급의 서책과 영웅 등급의 연금 키트, 길드에서 지원해 주는 그럴듯한 공방과 대형 길드의 주인이 지원해 주는 수많은 재료와 촉매까지. 이 정도 조건에서 결과물을 내지 못한다면 병신이라고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으리라. 하고 싶은 걸 전부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다. 애초에 연금술이라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골드를 심하게 잡아먹는다는 것도 그렇고 마법에 비해 결과물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도 그렇다. 기술 이전에 들어가는 투자비용이 문제라는 것. 그렇지만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정도 조건이라면 만들고 싶은 건 뭐든지 만들 수 있다. “형님! 이제 밥이라도 먹으러 가는 게….” “아니. 먼저 먹어라, 덕구야.” “엉?” “몇 가지 실험해 봐야 될 게 있어서. 하얀이랑 먼저 먹어.” 조금은 아쉬운 듯한 박덕구의 표정. 이상희는 뭔가 열심히 공부하려는 자식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날 보는 중이다. 그야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자식이 열의를 보이는 상황이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집도 사주고 공부방도 마련해 줬다. 자식된 입장에서는 열심히 해주는 것이 도리. 사실 하루 정도는 쉬어도 별로 상관없겠지만 지금 당장 시험해 보고 싶은 것들이 많다. 연금술사라는 직업을 얻은 직후에 머릿속에 담겨져 있는 것들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끄응….” “사실 오늘 간단하게 회식이라도 할까 했지만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군요. 다른 파티들도 전부 밖으로 나가 있으니 오히려 잘된 것 같네요. 만약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1층 로비에 말씀하시면 됩니다. 저도 그럼 올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설명드리지 못한 길드 내에 있는 여러 시설은 차후에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싱글벙글 웃는 모습이 의외로 귀여워 보인다. “끄응. 나도 훈련이나 좀 해야겠소. 짐 정리도 좀 하고… 누님은 뭐 할 거요?” “저… 저도… 따로 공부할 게 있어서….” “형씨는?” “저는 도시를 둘러봐야 될 것 같습니다.” “응?” “아무래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신전이나 빈민촌도 한 번 둘러보려고 합니다.” ‘이 새끼….’ 혹시나 빈민촌에 가서 저번과 같은 봉사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든다. 녀석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행동이다. 그렇지만 저번에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마냥 생각이 없는 놈은 아니니 일단은 믿어볼 셈. “그리고….” “네?” “아까 광장에서 보니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더군요.” “거, 대부분이 파티원을 구하는 사람들인 것 같던데….” “아.” “네. 혹시 저희와 함께할 이들이 있는지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그제야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깨달을 수 있었다. ‘있구나.’ 빈민촌 혹은 신전.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이 도시 내에 우리 회귀자가 점 찍어둔 다섯 번째 멤버가 있다. # 52 회귀자 사용설명서 052화 가난하다고 해서 착한 것은 아니다(1) [새로운 조합법을 발견했습니다.] [기본 체력 물약 제조에 성공합니다.] [지력이 1 올라갑니다.] [중독초와 트롤의 혈액을 조합합니다. 새로운 촉매 조합에 성공하셨습니다.] [지력이 1 올라갑니다.] [중독초와 마력의 정수를 조합합니다. 새로운 촉매 조합에 성공하셨습니다.] [중독초와 오크의 어금니를 조합합니다. 새로운 촉매 조합에 실패하셨습니다.] 연금술이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물론 기술이 아예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연성 마법진을 사용하는 타이밍, 각 촉매에 재료 별로 달라지는 마법진의 종류, 마법진에 들어가는 마력의 양, 촉매나 재료들의 상성까지.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임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건 실험에 가깝다.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어마어마한 실험. 그렇기 때문에 연금술은 신중해야 한다. 소재 자체가 비싼 만큼 실험 한 번에 날아가는 골드를 생각하면 물약 제조나 촉매 조합에 이론을 파고든 이후에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야 했다. 그 가설을 토대로 가상 실험을 진행하고 그 가상 실험을 바탕으로 실전에 임한다. 그게 다른 연금술사들이 기본적으로 연금술에 임하는 방법이다. 물론.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왜. “돈이 많으니까.” 가상 실험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계속해서 촉매 조합이나 물약 조합에 몰두. 이론이나 가설 따위는 일단 집어 치우고 실험에 의한 결과에만 집중한다. 이를 테면 실험으로 인한 결론을 먼저 도출한 이후에 어째서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희귀 등급의 촉매 하나에 벌벌 떨며 한 달을 준비하는 다른 연금술사들과는 당연히 효율이 다를 수밖에 없다. [실패하셨습니다.] [실패하셨습니다.] [실패하셨습니다.] ‘안 되나?’ 이유를 찾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방법을 조금 바꾸면 된다. [성공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절정에 이른 돈지랄. 모르긴 몰라도 최근 일주일간 천 골드 정도는 빠져나갔으리라. 그렇지만 얻은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눈에 띄는 실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중에서 기본적으로 판매하는 물약 레시피는 이미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지력 능력치와 마력 능력치를 올릴 수 있었다. 말하자면 골드로 능력치를 산 셈이다. 다시 한번 연금 키트에 골드를 쏟아 부으려고 하고 있을 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아. 들어 와. 아티팩트로 소독하는 거 잊지 말고….” “알겠소.” 슬쩍 방문이 열리자 보이는 것은 당연히 박덕구. 그 옆에는 정하얀도 있었다. 손에 한 움큼 짐을 들고 있는 걸보니 왜 찾아왔는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왜 굳이 네가 오는 거야. 짐 정리는 다른 평길드원 분들이 도와주시기로 했는데. 로비 안내원한테도 그렇게 말해놨으니까 다음부터는 직접 옮겨주지 않아도 돼.” “끄응.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형님 얼굴 보는 게 쉽지 않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요. 어떻게 한 집에서 사는데 얼굴 보기가 이리 힘든지 모르겠소. 짐은 이쪽에 내려놓으면 되는 거요?” “대충 놔둬도 돼. 고맙다, 덕구야.” “흐흐. 뭐, 이 정도는 껌 아니요.” “오, 오빠. 식사는 하셨어요?” “아.” 슬쩍 시간을 보니 벌써 시간이 꽤나 지난 상황. 집중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흐른 지 제대로 몰랐다. “제… 제가 뭘 조금 만들어 왔는데요….” “아. 그러면 같이 먹자.” “그래야지!” 지나치게 기뻐하는 박덕구와 정하얀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슬쩍 안을 확인해 보니 주문한 물품이 제대로 도착했다. “그런데 그 물건들은 전부 어디에 쓰려고 주문한 거요?” “전부 연금술에 들어가는 촉매야.” “크으. 이게 형님이 만든 물약이구만… 다 죽어가는 사람도 이걸로 살릴 수 있는 거요?” “그건 아니다. 기본적인 상처만 치료해 주는 정도지. 아, 하얀아. 그쪽에 있는 건 건들면 안 되는 거야. 혹시라도 마실 생각 마.” “네… 네!” “내가 이런 건 잘 몰라서 그런데 형님이 뭔가 대단한 걸 하려고 하는지는 알겠소. 근데 어떤 걸 만들려고 하는 거요?” “글쎄… 일단은….” “네.” “돈이 되는 거.” 조금 멍한 표정의 박덕구와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정도. 그렇지만 대충 말한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돈은 내게 가장 중요하다. 쓰는 돈이 있는 만큼 수입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투자한 만큼 돈이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김현성 파티의 물주가 되는 셈. 물론 차희라에게 계속해서 투자받을 만한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 이미 대충 명단은 넘겨줬지만 계속해서 쓸모가 있다는 걸 어필해야 되는 것도 당연하다. 물론 내가 뭘 만들고 있는지에 대한 것은 비밀. 굳이 박덕구와 정하얀이 알 필요는 없다. “그나저나 현성 씨는 요즘 뭐 해?” “그러고 보니 현성 씨도 오래 못 본 것 같아요.” “뭐, 거의 형님이랑 비슷한 것 같더오. 연무장에서 같이 훈련을 하기는 하는데 훈련이 끝나면 항상 거 빈민촌으로 달려가는 거 아니겠소? 그것도 먹을 거 바리바리 싸들고 말이요.” “응?” “거, 원래 착한 양반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천사도 그런 천사가 없다니까. 무슨 봉사 활동이라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일주일째 저러고 있으니… 큼. 뭐,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럽디다.” “그래? 매일?” “아마 그럴 거요. 아! 새로운 던전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는 것 같은데… 아무튼 도시를 싸돌아다니는 게 무슨 사람을 찾는 것 같기도 하고 정보를 얻으러 가는 것 같기도 하고…. 한 가지 확실한 건 김현성 그 형씨가 정말로 착하다는 거요.” ‘봉사 활동?’ 물론 어울리기는 하다. 녀석이 알고 있는 새로운 인재를 데려오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내 생각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리는 것 같다. 계속해서 빈민촌을 들락날락거리는 것을 보면 그곳에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지는 않다. 만약 금방 영입할 수 있었다면 아직까지 그곳에서 봉사 활동을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거 얼마나 거기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인상도 찌푸리고 하는 게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요.” ‘뭐지?’ 어쩌면 뭔가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으리라. ‘한번 가볼까.’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만들고 있는 물건도 마무리 단계고 앞으로 친해져야 할 동료가 어떤 재능과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했으니까. 정하얀이 만든 음식을 대충 목구멍으로 넘기자 기뻐하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한번 가봐야겠는데….” “엉? 정말이요?” “조금 궁금하기는 하네. 빈민촌이 어느 정도인지도 궁금하고….” “저, 저도 같이 가요, 오빠.” “그럴까?” “네… 네!” 박덕구도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나와 정하얀 사이에 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오히려 빨리 자리를 비켜줘야 된다고 생각하는지 황급히 식사를 마무리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지금 갈까? 하얀아?” “네… 네!” 생각한 것은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것은 좋다. 정하얀과 함께 길드를 나서는 것은 금방이었다. 처음에는 신기했던 풍도 계속 보다 보니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지금까지는 광장 밖에 다닌 적이 없지만 꽤 걸어야 할 것 같았다. 기왕이면 시간을 단축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마차를 잡고 올라서자 내 손을 꽉 마주잡은 정하얀이 무척이나 기쁜 표정을 보였다. 마치 시티 투어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 지나쳐가는 풍경이 꽤나 재미있다. 마차가 천천히 이동할수록 분위기 자체가 달라진다. 밝고 깨끗한 분위기에서 어둡고 더러운 분위기로. 마차를 운행하는 마부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는 표정이다. 습기가 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공기 자체가 불쾌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서쪽 지역과 다른 것은 사람들의 행색과 표정이었다. “그런데 이곳까지는 어째서 가시는 겁니까.” “별일은 아닙니다. 사실 도시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곳은 어떤지 궁금해서.” “아. 좋은 조건으로 길드에 오퍼를 받으신 모양이군요.” “하하.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전형적인 패배자를 보는 것 같다. 고개를 숙인 채로 걷는 것은 물론 혹시나 이쪽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지 불안해하는 표정이었다. 사냥을 나갈 자신도 없고, 길드나 클랜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무서워하는 이들. 무슨 연유로 이곳에 들어와 뿌리내리기 시작했는지 한 명 한 명의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긍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서쪽 광장이랑은 조금 분위기가 다르네요, 오빠.” “응. 그래 보이지?” 혹시나 위험하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했던 내가 바보 같다. 마차를 끌고 빈민촌을 돌아다니는 나와 정하얀은 그야말로 이곳의 상류층 커플이다. 힘도 돈도 없는 저들은 이쪽에 해를 끼칠 패기도 근성도 없다. 기껏해야 자신들끼리 드잡이를 하는 게 고작이리라. 마차에서 내린 이후에도 상황은 같다. 구걸을 하려고 말을 거는 것조차 무서운지 멀찍이 떨어져서 나와 정하얀을 경계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뭉쳐 있는 곳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 추레한 행색을 한 사람들 사이로 말끔한 행색을 한 여자 한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플레이어 선희영의 상태창과 재능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선희영] [칭호-버림받은 이들의 성녀] [나이-32] [성향-이상적인 봉사자] [직업-태양의 사제-영웅 등급] [직업효과-기초 신성력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신성력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3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28/성장한계치 일반 이상] [체력-30/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45/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32/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행운-45/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신성-69/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장비] [없음] [특성-성녀의 기도] [총평-사제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썩은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 이기영과의 차이도 무척이나 명백하군요. 혹시라도 다가갈 생각은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플레이어 이기영에게 오염되기에 저분은 너무나도 깨끗하니까요.] ‘허….’ 이제는 익숙해진 총평은 가볍게 넘긴 후에 여자를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었다. ‘슈바….’ 내 눈이 옹이구멍이 아니라면 저 여자가 분명할 것이다. 전설 등급의 신성 능력치…. 이곳에 들어온 지 조금 돼 보이기는 했지만 잠재 능력은 왠지 모르게 정하얀을 생각나게 했다. 김현성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저 여자 주변에 다른 이들이 모여 있다. 부랑자들이 아닌 똑같이 말끔한 행색을 하고 있는 이들이다. 같은 소속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입고 있는 옷이나 깃발들이 달랐으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선희영이라는 여자를 중심으로 모여 있다는 것. 모두가 함께 저 여자를 향해 알랑방귀를 끼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어째서인지는 뻔할 뻔자. ‘영입 전쟁?’ 아마 확실할 것이다. 이번에 김현성이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인재는 김현성만 알고 있는 인재가 아닌 모양이다. 모두가 원하는 인재. 이미 미래가 보장된 인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소속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인재. 어째서 김현성이 이곳을 자주 찾아왔는지, 어째서 봉사 활동과는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수많은 클랜의 인사들이 모여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모두 착한 척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저 여자의 눈에 들기 위해 함께 봉사를 하는 모습은 꽤나 가관이었다. ‘버림받은 이들의 성녀?’ 내 눈에는 일하기 싫은 개돼지들의 호구들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올 정도 였다. 한 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게 있었다면, 내 의견에 무한 긍정하려는 정하얀의 존재였다. “개돼지 같네.” “네. 오빠. 개… 개돼지들처럼 보이네요!” 잠깐 끊겨버린 대화에 초조했는지 필사적으로 긍정하는 외침. 기어가는 듯한 내 목소리와는 다르게 정하얀의 조금은 큰 목소리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이런 개….’ # 53 회귀자 사용설명서 053화 가난하다고 해서 착한 것은 아니다(2) 지금 나와 정하얀이 저들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을지 대충 예상이 간다. 애초에 외관 자체가 이곳과 무척이나 동떨어져 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한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정하얀은 말끔하다 못해 화장까지 한 것 같은 모습. 심지어 굉장히 예쁘장한 옷을 입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저들처럼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그저 빈민촌이 궁금해 마실 나온 철없는 젊은 커플처럼 비치고 있을 것이다. 사실상 폭동이 일어나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물론 빈민들이 우리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극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자유 도시 린델에서 말끔한 복장을 하고 다닌다는 것은 무력이 강하거나,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골드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자신들에게 화가 닿을 수도 있을 상황을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적의가 깃든 눈빛을 보내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물론 저들이 어떤 눈빛을 보내는 지는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 다만 김현성이 점찍어 둔 것으로 추정되는 저 선희영이라는 여자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건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정하얀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는지 괜스레 내 눈치를 보고 있다. 결국에는 선희영이 빈민들을 헤치고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교회 누나 같은 인상이다. 긴 머리에 커다란 눈에 고생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외모다. 괜스레 시선을 피하며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선희영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들에게 사과하세요.” “…….” “저들에게 한 폭언을 취소하고 저들에게 사과하세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당신들에게 폭언을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저 여자에게 알랑방귀를 뀌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각 클랜의 스카우터들도 목소리를 높인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사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당장 그 폭언을 취소해 주셨으면 합니다.” “혹시 파란 길드에서 오셨습니까?” 붉은용병이나 다른 대형 길드는 보이지 않는다. 중소형 클랜의 다른 이들은 생각보다 정중한 느낌이다. 가슴에 달려 있는 파란의 휘장이 저들을 얌전하게 만드는 모양인 것 같았다. 저 여자가 저런 말을 하는 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지만 타 클랜과 길드 놈들이 저런 말을 외치는 건 어이가 없다. ‘이기적인 야심가.’ ‘계산적인 분석가.’ 어딜 봐도 봉사 활동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놈들이 눈에 보인다. 성향이 안 좋은 쪽으로 치우쳐져 있을수록 목소리를 높인다. 누가 봐도 정의의 편은 저들이고 우리는 개념 없는 커플이다. 착한 놈과 나쁜 놈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실수?’ 아니. 결코 실수라고는 할 수 없다. 언제부터 저 영입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는지, 김현성이 저 여자를 작업 치는 것에 얼마나 많은 진전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경쟁자가 저렇게 많은데 제대로 된 영입 제의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런 상황이 하루 이틀인 것도 아닐 것이다. 왠지 모르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저 여자에게 있어서 최우선 사항은 빈민들을 구제하는 것. 그 일에 매달려 있으니 클랜이나 길드에 들어가 원정을 떠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 여자에게 맞는 전혀 새로운 방식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조금 풀이 죽은 것 같은 정하얀의 어깨를 살짝 이쪽으로 끌어들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취소하지 않겠습니다.” “네… 네?” “취소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이 주는 것을 받아먹고 있는 이들을 개돼지 같다고 말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당신… 파란 길드로군요.” “제 소속과 제 말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파란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죠. 파란에 뜻과는 무관한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해도 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 겁니다. 당신은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단순히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저들을 비난할 자격은 없습니다.” 잠깐 동안 입을 다물자 기세등등해졌는지 입을 여는 선희영이 보였다. “모두가 좋아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어쩔 수 없이 몰렸지요. 이 대륙은 조금만 실수해도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당신처럼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좋은 길드의 컨택을 받고 대충 대충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요.” 특별한 재능이 나왔을 때는 나도 모르게 실소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렇지만 대충 대충 살아가고 있다는 말에는 조금 인상이 찌푸려졌다. “웃기네요.” “네?” “제가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저기 있는 이들 보다는 10배는 더 치열하게 살았을 겁니다. 아마 이곳에 계신 분들 모두 마찬가지겠지요. 저기 보이는 클랜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목숨을 걸고 사냥을 나가는 것은 물론, 궂은 일, 힘든 일 가리지 않고 살아감으로써 저 위치를 얻었을 겁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일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지요.” “아….”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기며 파란에 들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위해 무엇도 걸어본 적이 없는 인간일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어째서.” “…….” “어째서 저들이 저렇게 되었는지 대충 알 것 같군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저들을 저렇게 만든 건 당신입니다.”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표정이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없다. “저들을 길들인 것은 당신입니다. 먹이를 주고 있을 곳을 마련해 주고 입을 옷을 건네준 당신이 저들을 길들인 겁니다. 당신들이 저들을 패배자로 만든 겁니다.” “뭘 안다고 그런 말… 말을 하시는 건가요.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고 하셨지요. 현재 도시의 정확한 상태에 대해서 모… 모르고 계신 상태로 이런 말을 하시면… 빈민들이 생겨난 건 저 때문이 아니라… 당, 당신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세하게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저런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아아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이들 말이군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오직 자기 이득만 챙기는 당신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린델을 썩게 만드는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저 긍정할 수는 없다. “저는 제 이득을 챙기기 위해 남에게 부당함을 준 적은 없습니다. 일부 인간이 그렇게 느낄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방금의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당신이 도와줘야 하는 대상은 이곳에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원정을 떠나는 모험가, 힘든 장소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지요.” 궤변이다. 당연히 궤변이고 개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당연하지만 봉사 활동 자체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이런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렇지만 이 여자의 방법은 잘못되었다. 성향. ‘이상적인 봉사자?’ 어쩌면 봉사를 위한 봉사를 하는 타입일 수도 있으리라.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알 것 같군요.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면 된다는 뻔한 말을 하… 하시려는 거군요.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습니다. 이분들을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당신의… 말은 설득력이 없어요.” “행동하려고 찾아왔습니다.” “뭐….”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전원, 제가 고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 제가 고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위험한 일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고된 일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시급도 기본 시급 이상을 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 “지금 상태에서 벗어나 재기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숙소는 제공해 드릴 수 없겠지만 중식 정도는 제공해 드리지요.” “당신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요?” “계속해서 남에게 빌붙는 이들로 이곳에 남을 건지 아니면 당당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것인지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스스로 일어날 때가 됐습니다. 여러분.” 나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조용하다. 그렇지만 용기를 낸 누군가를 시작으로 질문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말 그대로 위험하지 않은 간단한 일입니다. 절대로 위험은 없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단순 노동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시급은….” “1골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추가 근무가 발생된다면 따로 수당까지 쳐드릴 수 있도록 하지요. 하루 근무 시간은 기본적으로 8시간으로 책정하는 게 좋겠군요.” 금방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믿지 못하겠다면 이곳에 있는 이분을 저희 회사의 고문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안심할 수 있게 말입니다.” “저는 한다고 말한 적이!”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지켜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여러분들에게는 기회입니다. 몸이 불편하신 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선희영을 회사의 고문으로 모신다는 말이 꽤나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천천히 손을 들기 시작한다. “하겠습니다.” “저… 저도 하겠습니다.” “저도….” “맡, 맡겨만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너도 나도 손을 들기 시작한 상황에 무척이나 기분이 좋다.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선희영이나 다른 클랜 녀석들의 시선도 말이다. “일은 내일부터 곧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한 일이니 내일 아침 9시까지 몸만 오시면 됩니다.” “네.” 이쯤 되면 선희영도 방금의 말이 민망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나를 완전히 믿는 표정은 아니었다. 사실 믿을지 믿지 않을지에 대한 여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선희영을 조금 경계하는 것 같은 정하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리자 조용히 이쪽으로 다가온 그녀가 아주 천천히 내게 입을 열었다. “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 할지 모르겠지만… 일, 일단은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네요.” “네?” “감사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 “별로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요.” “무슨 소리를….” “아까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네?” “저들을 길들인 건 당신입니다.” 정말로 저 사람들이 선희영에게 길들여졌는지 아닌지에 대한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그렇게 생각하게 될 테니까. # 54 회귀자 사용설명서 054화 가난하다고 해서 착한 것은 아니다(3)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죠?” “별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솔직히 제가 옳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돈이 많기는 한 것 같네요. 단순히 그런 이유로 저 사람들을 전부 고용해서 부릴 정도라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돈은 무슨….’ 솔직히 여기 있는 이들을 한꺼번에 고용하는 것은 당연히 문제가 있다. 당장 내 연금술에 들어갈 촉매도 부족한 상황이니까. 나 역시 골드가 남아도는 상황은 아니지만 저들이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척이나 싸게 임상 실험을 할 수 있는 찬스였고 선희영이라는 여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부숴버릴 수 있는 기회였다. 여러모로 이득을 보는 장사라는 소리다. 어째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생각을 부숴야 하는지는 간단하다. 그게 저 여자를 영입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들어온 지는 3년차.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2년 전. 클랜이나 길드가 아닌 신전 소속으로 시작했고 신전을 나온 이후부터는 계속해서 봉사 활동에 전념. 대형 길드나 중소형 클랜의 오퍼를 2년 동안 거절해 오고 있는 중.’ 그녀의 화려한 이력이다. 나처럼 엘리트 코스를 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신전 소속으로 들어간 행보가 눈에 띈다. 클랜이나 길드의 컨택을 거절한 이유도 무척이나 간단하다. 왜? 우리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께서는 빈민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막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무려 2년 동안이나 길드나 클랜의 컨택을 거절해 온 셈이다. 아마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제의가 오갔을 것이다. 물론 그 조건에는 빈민에 대한 본격적인 구제 역시 포함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제의를 거절했다면 이유는 뻔할 뻔자. 자신이 직접 행동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런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알 필요도 없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저 여자의 우선순위를 저들로부터 옮기는 거니까. 말하자면 저 여자를 빈민들과 떨어뜨리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슬쩍 전방을 보니 꽤나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시야에 비쳤다. 꽤나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몇몇 있기는 하다. 어쩌면 내 계획이 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굳이 걱정하지는 않았다. “빈민촌에는 아직 일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에게는 가보시지 않는 겁니까?”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지켜봐야 하니까요.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갈 겁니다.” “굳이 무슨 짓이라고 할 게 있겠습니까. 바위를 옮기는 단순 노동입니다. 날씨가 조금 덥고 태양빛이 뜨겁겠지만 저들에게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치 있는 땀방울일 겁니다. 노동의 참 가치를 느끼고 있는 이들을 보니 저도 함께 바위라도 옮기고 싶은 심정이네요.”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리는네요.” “착각이실 겁니다.” 당연하지만 이쪽을 좋게 봐주지 않고 있다. 내가 그녀였어도 나를 좋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한 사람이니까. 그러나 나쁜 상황은 아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접근했던 다른 이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건 적어도 인상을 남긴다는 점에서는 효과적이다. “제가 저들을 길들였다는 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저들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하기 싫은 것뿐이죠.” “당신 눈에는 지금 일하고 있는 저들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요.” “잘 보입니다. 무척이나 잘 보여요.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뭘….” “자유 도시 린델 내에 이런 일자리는 널리고 널렸습니다.” ‘조금 위험한 일이기는 하지만.’ “물론 저와 함께 일하는 게 조금 조건이 좋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비슷한 일은 많습니다. 동쪽 지역은 재개발에 들어갔고 붉은용병 길드에서도 이번에 마탑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잡역부를 구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튜토리얼 근처에서도 현재 대규모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건 아십니까? 아마 저들도 대충은 알고 있을 겁니다.” “…….” “어제 그 자리에서 제가 저들의 근로 의욕을 조금 고취시키기는 했습니다. 자신들이 개돼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겠죠.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님이 지켜봐 주시고 있다는 것에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죠. 분명히 그럴 겁니다.” “그런….” “저들은 선동당한 겁니다. 아마 자신들이 선동당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제가 저들을 부정적인 방향이 아니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었기 때문이죠. 뭐,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것도 얼마가지 않을 겁니다.” “뭘….” “인간의 본성이란 건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의욕적일 겁니다. 제 눈에도 그게 보입니다. 저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보여요. 그렇지만 길어야 한 달이 지나지 않을 겁니다. 땡볕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보다는 빈민촌에서 뒹굴면서 시간을 보내던 때가 그리워질 겁니다. 당신이 주는 안식처가 그리워질 때가 올 겁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고통을 겪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잘 알겠지만 당신의 말은 맞는 게 없어요. 사람은 충분히 바뀔 수 있어요.” “그럼 우리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님께서 저들을 바꿨다는 추론은 어떻습니까. 평범한 사람들을 받아먹기만 하는 짐승들로 만든 겁니다.” “당신!” ‘너무 심했나.’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선희영이 시야에 비쳤다. 따귀라도 한 대 올리고 싶은지 입술을 꽉 깨물고 싶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심지어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를 너무 심하게 몰아붙인 건 아닌지 생각해 봤지만 이 정도 자극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 말이 틀리다고 믿으면서도 마음속에 싹트고 있는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혹시 저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런 작은 의구심만 생겨도 남을 봉사하며 가치를 찾는 여자는 망가질 것이다. 우리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님은 무척 유약해 보였으니까. “당신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겁니다. 저 사람들이 당신의 생각대로 움직인다는 건 오만이고 독선이에요. 세상은 절대로 당신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아요.” “글쎄요.” “설,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제가 보기에는 저들이 당신보다 훨씬 가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있습니까?” “굳이 이유를 찾지 않아도 너무나도 뻔하게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혹시 언더독 효과라고 들어보였습니까?” “…….” “힘의 차이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분하는 기본적인 오류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님.” “…….” “가난하다고 해서 착한 것은 아닙니다.” “…….” “아마 당신의 앞에서는 그저 순박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요. 분명히 당신 앞에서는 이 사회의 시스템에 희생된 사람들을 연기할 겁니다. 그렇지만 저들도 어딘가에서는 가해자입니다. 빈민촌은 천사들이 사는 천국이 아닙니다. 저희가 살고 있는 곳과 같은 사회입니다. 그래요. 사회요. 온갖 더러운 일과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사회 말입니다.” “사회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썩었습니다. 인간이 있는 곳은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작은 실험을 추천하고 싶군요.” “무슨….” “당신이 직접 빈민이 되어보는 겁니다. 저들을 구해주는 성녀의 입장이 아니라 저들과 같은 위치에 있는 빈민으로 생활해 보는 겁니다. 그러면 느끼는 것이 있겠지요. 일주일? 아니, 단 하루면 충분할 겁니다.” “그럴 수는….”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없으면 굶주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계시겠지요. 그렇지만 하루 정도는 괜찮습니다. 당신을 따라서 봉사를 하고 있는 멋진 친구들이 있지 않습니까.” ‘네가 없으면 나타나지도 않을 테지만.’ 당연하지만 그 친구들 입장에서도 성녀가 없다면 굳이 빈민촌을 찾을 이유가 없다. 나는 한 번 더 입꼬리를 올리며 슬쩍 입을 열었다. “아니면 혹시 자신이 없으신 겁니까?” “그렇지… 않아요.” “준비는 이쪽에서 해드리도록 하죠. 빈민 체험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당신 정말… 역겨운 사람이군요.” “자신이 있다면 응하시면 됩니다.” “자신이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들은 동물원의 동물들이 아니에요. 당신은!” “응하실 겁니까. 응하시지 않으실 겁니까. 만약 우리 성녀님께서 응하신다고 한다면 저 역시 성녀님의 뜻에 감복해 봉사 활동을 하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어려운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응하시는 게 맞죠.” “후회할 거예요.” “글쎄요. 후회하는 건 제가 아니라 당신이 될 겁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등을 돌리며 멀어지는 모습은 꽤나 가관. ‘너무 순진한데….’ 지구가 아니라 이곳에 온 이후에도 저런 순진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건 어떻게 보면 축복이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려고 할 테지만 모르긴 몰라도 고생깨나 할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자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의미 없는 바위 옮기기에 열과 성을 쏟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어이! 거기!” “이건 못 옮길 것 같은데….” “다 같이 모여 들면 될 겁니다.” “네.” “어이 김씨! 빨리 빨리 와봐!” “이것만 끝마치고 갈게요!” ‘훈훈하네.’ 선희영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하얀이 이쪽으로 후다닥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조금은 불안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살짝 안아주자 기분이 풀리는 모양. 한쪽 손에 들고 있는 공책을 보니 맡긴 일은 열심히 한 것 같았다. “오빠.” “제대로 잘하고 있지?” “네.” “한번 들어볼까?” “네! 그… 그러니까.” “응.” “13번 실험체는 조금 무기력한 모습인 것 같아요. 25번은 화가 나 있는 것 같고… 7번이랑 8번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까 조금 안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던데.” “56번이랑 75번이었어요. 일하는 도중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는데… 그, 그쪽까지는 제대로… 죄송해요.” “아니, 문제가 있다는 걸로도 충분해. 38번은 좀 어때?” “아. 38번은 조금 설렁설렁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라… 안 보이는 곳에서 조금씩 쉬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요. 그, 그리고… 그만 두겠다는 소리를 하기도 했고요. 93번이랑 95번은 38번의 말에 동조하기도 했어요.” “아아아. 그렇구나. 괜찮은 결과네.” “네.” “고생했어, 하얀아. 이건 고맙다는 선물.” “오… 오빠.”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인데… 겉모습을 바꾸는 마법이 가능할까?” “그건 잘….” “마력으로 살짝 모습을 바꾸는 정도면 될 거야. 환상 마법 같은 개념처럼. 어려울까?” “아! 그 정도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그런데 왜….” 그야.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님한테 사람 사는 곳이 얼마나 더러운지 보여줘야 될 것 같아서.” 정하얀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네. 그러네요.” # 55 회귀자 사용설명서 055화 가난하다고 해서 착한 것은 아니다(4) 괜스레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손과 발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화가 난 것은 아니다. 단순히 이해하기 힘들었을 뿐이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당연하다. 사람을 돕는 것은 무척이나 당연한 일. 그래,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 빈민촌에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 모두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뿐이다. 길드나 클랜의 컨택을 받지 못한 자들도 있고 사냥을 나가다 어딘가 불구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찾아온 이들도 있다. 병든 가족 때문에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일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말하자면 이 사회가 저들을 거리로 이끈 것이다. 린델은, 신성제국은, 아니, 이 대륙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 약자를 배려할 줄 모르는 사회. 그리고 이기적인 사회. 복지혜택이 있다고는 하지만 빈민들은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움직이고 있는 이 대륙에서 누군가는 나서야 했다. “위험하실 겁니다.” “아니요.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뭐,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그건 사제님의 자유입니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오히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으신 건지 묻고 싶군요.” “당신이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신이 저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제 대답도 같습니다. 오히려 저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은 사제님입니다. 저들은 그저 불쌍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것은 일어서려고 하는 이들이지 자의로 누워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더는 그 궤변을 듣고 싶지 않네요.” “네네. 궤변으로 들리시겠지요.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럼 말씀하신 대로 이만 떠나보겠습니다. 약속해 주신 것은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부디 안녕히 다녀오시길.” 굳이 대답할 가치도 없다. 아니, 애초에 이런 모습으로 빈민촌에 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도 없다. 사실 이런 장난 같지도 않은 제안에 응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홀로 빈민촌에 들어가는 이유는 하나이리라. ‘나는 틀리지 않았어.’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으니까. 저 남자가 잘못되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으니까. 단순히 멀리서 지켜보는 것과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생활한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모두가 바보같이 순진한 사람들뿐이다. 별것 아닌 도움에도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인사를 하던 노부부도 있었고 보답이라며 꽃을 꺾어 주던 꼬마아이도 있었다. 그 남자가 보지 못했던 많은 것을 근 2년 동안 지켜봐 왔다. 함께 소통하고 대화하며 오랜 시간을 지내왔다. ‘보지 않았으니까 저런 소리를 할 수 있었던 거야.’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이리라.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자 어느덧 분위기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매일 같이 왔던 곳이지만 조금은 낯선 기분. 식사를 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함께 봉사하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오늘은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이곳은 언제나 같다. 코를 찌르는 악취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이제는 적응된 지 오래다. 처음과 비하면 적응이 된 덕분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다닐 수 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자 여전히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이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잡담을 나누고 있는 이들도 보이고 다른 지역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아이들을 챙겨주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고 함께 팔짱을 끼고 걷고 있는 연인들도 눈에 비친다. 그 남자의 말이 맞다. 이곳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다. 무척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 편의시설도 없고 변변치 않은 식당도 없고, 제대로 된 집도 없지만.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좋아.’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서자 역시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광장.’ 제대로 된 광장이라고는 볼 수 없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고 자신이 이곳을 찾기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공간이라 광장이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말하자면 이곳은 빈민들이 쉼터라고 부르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한쪽에 조용히 자리를 잡자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분명히 그 남자가 데려간 남자 중에 한 명. 어째서 일터에 있어야 할 그가 지금 이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무언가 사정이 있었으리라. 그렇게 조용히 주변을 살피고 있었던 그때, 귓가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김씨! 오늘은 일 안 나갔어?” “무슨 일.” “그 눈 째진 놈이 고용한다고 해서….” “아아아. 때려 쳤어.” “뭐?” “거 드럽게 힘들더라고. 무슨 바위를 옮기라고 하는데 솔직히 나랑 맞는 일은 아니야.” “뭐? 이제는 진짜 새로 시작한다고 어쩌고 하지 않았어?”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 근데 거기서 쌔빠지게 일하나 여기서 그년이 주는 밥 처먹으면서 지내나 별로 차이도 없는 것 같더라고.” “누가 들으면 욕해, 이 사람아.” “들으라지. 분위기 보니까 오늘은 오지도 않을 것 같은데… 괜히 일 한다고 개지랄을 떤 것 같단 말이야. 이제 여기 안 오면 어떡하지?” “아마 오겠지. 오늘 하루는 아플 수도 있고.” “사제가 아픈 게 말이 돼?” “그날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사제라고 해도 자연의 섭리는 거스를 수 없는 거 아니겠어?” “그것 참 말 되네.” ‘어?’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혹시나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다시금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오고 갔다. ‘아….’ “거, 엿 같네…. 배고파 죽겠는데… 몸은 나른하고….” “잠깐 저거 못 보던 얼굴인데….” “아….” 정확히 자신을 지칭한 것 같지는 않지만 괜스레 움츠려 드는 것은 당연지사. 대충 손으로 얼굴을 가린 이후에 광장을 빠져나갔다. 어째서 도망쳤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저곳에 계속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사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저들의 대화를 더 이상 듣기 싫어서였지만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당신이 저들을 길들인 겁니다.’ 그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손바닥이 뒤집히듯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광경들이 눈에 보인다. “싸게 해줄게.”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네.” “그야 그 남자 따라간 걸 알고 있는데… 당연히 알고 있지.” “푸핫.”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연인은 이제 연인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창부와 창부를 찾는 중년이다. “겨우 이거야?” “죄… 죄송합니다.” “애새끼들이 빠져가지고….” “아악!” 아이들과 함께 있던 남자 역시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길거리에 있는 부랑자들은 싸구려 럼주로 목을 축이고 있었고,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거나 남자가 여자들을 희롱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길거리에 토악질을 한 이후에 그대로 내버려 두는가 하면 누워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이를 못 본 척 지나치는 이들도 시야에 비쳤다. “어이!” 지금까지 들을 수 없었던 욕설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울 지경. ‘당연한 거야.’ 어느 곳이나 똑같다. 굳이 흔들릴 이유는 없다. 어떤 곳에서도 질 나쁜 사람은 존재한다. 일부로 전체를 판단한다는 건 최대한 지양하는 것이 맞다. 그렇지만 불현듯 찾아온 생각에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그 남자의 말이 맞다면?’ 정말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면? ‘내가 본 것이 일부고 그가 본 것이 전체였다면?’ 지금까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자신이었다면.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얽힌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입장에 있었을 때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들도 어딘가에서는 가해자일 겁니다.’ 그의 말이 맞다. 약자라고 생각했던 이들도 어딘가에서는 가해자. 어느 곳에서는 가해자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화가 미치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저들보다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피해자가 되지 않았던 것은 좋은 옷을 입고 강자들의 집단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과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어째서 그 남자가 위험할 거라고 말했는지 깨닫는 것은 그 순간. ‘나가야 해.’ 지금은 자신 역시 이 사회의 구성원이다. 마른 침을 한 번 삼켜 넘기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찔리기 싫으면 움직이지 마.”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가래가 들끓는 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날붙이의 존재였다. “네… 네?” “씨불년….” “…….” “걸려들어도 이런 월척이 걸려들었네. 그렇게 후드로 꽁꽁 싸매고 있으면 여잔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무… 무슨 짓을….” “알면서 물어보는 거야? 아니면 몰라서 묻는 거야?” “이… 러지 마세요.” “이런 밤에 혼자 돌아다니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는 거지?” “살… 살려….” “죽이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도 돼. 죽이면 쓰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충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날붙이를 등에 대고 있는 손길이 느껴졌으니까. 주문을 외워야 한다고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하면서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었고 처음 겪는 상황에 다리가 떨렸다.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철퍽 주저 않았을 때 뒤에서 머리를 후려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꺄아아아아악!” 자연스럽게 몸이 옆으로 넘어간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머리카락을 붙잡는 억센 손길이 느껴졌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알을 굴렸지만 시야에 들어온 남자들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도… 도와….” 알고 있는 얼굴들도 보인다. 배식시간에 모습을 보였던 사람들도 눈에 보인다. 함께 웃고 떠들던 이들이다. 분명히 이런저런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고, 모두가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다. 잘못된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누구 하나 도움의 손길을 뻗어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시선을 피하거나 손가락질하면서 웃거나. 보여주는 반응은 모두 같았다. “이러지 마세요. 살… 살려주세아아아악!” 복부를 후려치는 주먹. 억센 손길이 그대로 뺨에 휘둘러져 온다. 입안이 터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공포 때문인지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이다. 주문을 외우려고 신성력을 일으키자 커다란 주먹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아아아악!” “…….”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누군가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여기 있는 놈들이 다 나 같은 놈들인데 뭘 도와달라고 말하고 그래. 너… 신입이지?” “아… 아니에요.” “그걸 알면서도 여기 들어오셨어? 그것도 혼자. 푸흣. 나 잡아먹어 줍쇼. 하는 거야, 뭐야.” 빈민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 남자가 말했던 지역이 광장의 서쪽 지역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 어째서 이곳이 들어오면 안 되는 지역이라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봉사가 있는 날이면 항상 걸어 다니던 곳이었으니까.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커다란 얼굴이 바로 앞으로 드리운다. “좋은 가격에 팔 수 있을 것 같은데….” 화상으로 문드러져 있는 한쪽 얼굴. 여기저기가 썩어 문드러진 것처럼 보였다. 입과 몸 전체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헛구역질을 하게 될 정도였다. “우욱.” “아가씨, 내가 역겨워?” “아… 아니.” 다시 한번 고개가 돌아간다. 왼쪽 뺨에 통증이 느껴지기도 전에 목을 조르는 억센 손길이 느껴지기 시작. 숨을 쉬기가 힘든 와중에도 몸 전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통증이 느껴진다. “내가 역겨워?!” “아아아아악!” “내가! 내가 역겨워?!” “살… 살려. 누가… 도와꺄아아악!” ‘죽을 거야….’ “앞으로 더 역겨운 꼴을 당하게 될 텐데 비위가 이렇게 약하면 안 되지. 응? 지금보다 더 한 곳으로 팔려가게 될 텐데 말이야. 물론 그전에 우리랑 즐거운 시간도 보내고 응? 그렇게 될 거야.” ‘도와줘.’ “제발 도와….” “아가씨. 뭘 자꾸 도와달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누가 아가씨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도움이 필요하면 근처 클랜 자경단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해야지. 여기에서 아가씨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들 지 살기 바쁜 연놈들이라고….” “제발….” “병신 같은 년. 푸흐흐흐.” ‘도와줘….’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기대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은 누군가를 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위험할 겁니다.’ “안… 안 돼.” ‘그들도 어딘가에서는 가해자일 겁니다.’ “도와줘요. 누군가… 제발….” ‘도움이 필요한 것은 일어서려고 하는 사람이지 누워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잘못했어요. 제발… 도와줘.” ‘저들을 개돼지로 만든 게 바로 당신이야.’ “구해줘요. 잘못했어요! 제발! 아아아악! 그만! 그만!”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제님.” “아….” “가난한 자들이 전부 착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가장 보기 싫었던 얼굴이었다. # 56 회귀자 사용설명서 056화 가난하다고 해서 착한 것은 아니다(5)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제님.” “아….” “가난한 자들이 전부 착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개를 숙이자 꽤나 험한 꼴을 본 것 같은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철없는 여자의 모험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공포에 질려 있는 얼굴. 물론 나를 확인하자마자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보는 듯한 표정을 보내오고 있지만 딱히 동정심이 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것은 온도차. 오늘 아침에 보여줬던 모습과 180도 달라져 있는 것을 보자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인간은 재밌네.’ 그녀가 보호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빈민들이 가해자가 되어 있고 그녀가 경멸하던 나는 그녀의 구원자가 되어 있는 상황이다. 웃음이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제일 재미있는 상황이다. 많이 맞았는지 얼굴은 부어올라 있었고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다. 걸친 옷은 반 이상이 찢겨져 있다. 여기저기에 멍이 들어 있었고 어딘가에 긁혔는지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은 처음 봤던 단정한 모습과는 딴판이다. 아마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큰일이라도 당했을 것이다. “아아….” 눈에 한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 선희영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있는 남자와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랑자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넌 또 뭐야.”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쓰레기.” “나참…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누구냐고, 이 새끼야.” “움직이지 마라.” 당연히 여기 있는 이들을 전부 싸잡아 죽일 자신은 없다. 난 연약한 마법사였고 저들은 다수였으니까. 내 뒤에서 주문을 외우고 있는 정하얀을 믿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은 오히려 저들. 자신들의 욕망을 풀기에 정신이 없었던 쓰레기들이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 앞에선 약한 종류의 인간. 아니나 다를까 조심스러워 보이는 표정이 보인다. 나나 정하얀의 행색은 저들과 다를 바 없지만 지나치게 당당한 모습에 위축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어… 어디서 오셨습니까.” “네가 알 필요는 없다.” “그게….” 살짝 뒤를 돌아보자 정하얀이 외우고 있었던 주문을 내뱉었다. 목소리가 채 터져나오기도 전에 사방을 잠식한 정체불명의 마력이 저들을 포박하기 시작.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동그란 눈을 뜨고 벌벌 떨고 있던 선희영도 이쪽으로 허겁지겁 달려오기 시작했다.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게 나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위험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떨어지셔도 됩니다. 사제님은 안전하니까요.” 이쪽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는 모습. “어떻습니까? 이곳저곳을 둘러본 감상은.”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빨리, 빨… 빨리 빨리 나가요. 빨리…. 이곳에서….” 아무래도 제대로 사고하는 게 불가능해진 모양이다. 지나친 공포 때문에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못 하는 듯싶다. 어떤 식으로 튜토리얼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자는 확실히 이런 상황에 대한 내성이 없다. 조금은 진중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내 입장에서는 똥 밟은 듯한 상황이다. 이 건 별로 좋지 않다. 단순히 그녀를 구출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이거 놔.” “네?” “이거 놓으라고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야. 다시 저기로 던져 버리기 전에.” “그, 그러지 말아주세요. 제발… 제발….” “어떤 것 같아?” “뭐가….” “네가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이들을 가까이서 보니까 어떤 것 같아?” “당, 당신 말이 맞아요. 당신이 맞았어요. 전부 다 맞아요.” 제대로 생각하고 있지 않고 있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것은 절박함뿐이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단순히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필사적인 외침이다. “하얀아, 마법 풀어.” “네. 오빠.” “하지 마세요! 하지 말아주세요!” 당연하지만 저들에게 걸려 있는 포박 마법을 푸는 것이 아니다. 선희영에게 걸려 있는 환각 마법. 그녀의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함이다. 정하얀이 천천히 마력을 거두자 선희영의 얼굴이 훤하게 드러났다. “저쪽 똑바로 쳐다봐.” “네?” 우리 소중한 사제를 핍박하던 쓰레기들의 얼굴도 파랗게 질리기 시작. 자신들이 건드린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고 있는 것이다. 후회하는 표정보다는 일이 꼬였다는 표정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것 정도는 깨닫고 있을 것이다. 이 쓰레기들은 뭇 클랜의 사랑을 받고 있는 중요한 인재를 건드린 셈이 되는 거니까.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는 놈들을 보니 웃음이 나올 정도. “사…….” “살고 싶어?”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보였기 때문에 곧바로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 여자… 죽일 수 있겠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조금 더 부연설명이 필요한 것 같아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아니, 굳이 죽이지는 않아도 돼. 너희가 하고 싶었던 장난이나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이 여자한테 풀어보는 거야. 동경의 대상이었잖아.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님은… 그렇지 않아?” 뭔가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금수 같은 놈들이 시야에 비쳤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개인적으로 이 여자한테는 조금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좋은 구경거리가 될 것 같기도 하고, 굳이 이유를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알 필요는 없어. 중요한 건 하느냐 하지 않느냐. 이건 내가 너희에게 주는 기회야.” “…….” “거절하면 죽는다.” “하…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조금 멍한 표정의 선희영이 눈에 띄었다. “형, 형님… 어떻게.”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이 새끼들아. 어차피 달라질 건 없으니까.”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겁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물론. 아까 하려던 걸 마저 해도 상관없다.” “정말입니까?”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그래도….” “닥쳐, 이 새끼야. 어차피 이년도 다른 놈들이랑 똑같아.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는 개뿔. 아까 질질 짜는 거 못 봤어? 하기 싫으면 넌 빠져. 고자 새끼야.” “빠, 빠진다는 건 아니지만….” “애초에 마음에 안 들었다 이거야. 지가 뭔데 남을 돕네 마네 하면서 지랄병을 떨었는지…. 덕분에 굶지는 않아서 고맙기는 한데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푸흐흐. 원래 사람일이라는 게 어떻게 응? 어떻게 될 줄 모르는 거 아니겠어?” “맞는 말입니다.” 화상 자국의 남자가 분위기를 탔는지 꽤나 이쪽에 유리한 소리를 해준다. 생김새만 봐도 개자식이라는 건 대충 예상할 수 있었지만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개자식의 등장에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선희영은 더 이상 공포에 질려 있지 않다. 오히려 체념한 듯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나보다 훨씬 당황스러울 것이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봉사해 왔던 대상에게 부정당하고 있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정하얀이 나를 잃어버린 기분과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으리라. 결국. “흐으윽….” 하는 소리와 함께 처량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푸흐흐흐흣.” 양심이 찔리지도 않는지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금수들의 모습은 꽤나 가관이다. 솔직히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다가가자 선희영을 둘러싸려고 하던 이들이 천천히 물러서는 것은 당연지사. 천천히 선희영에게 시선을 돌리자 뭔가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흐윽…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이제야 대화가 통하겠네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흐윽….” “조금 더 현실을 바라봐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도움을 드린 것뿐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이곳은?” “당신이 옳았어요. 흐윽… 당신이 옳았다고요. 제가 틀렸어요. 제가….”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뭐….” “당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선희영 님. 당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숭고합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다는 건 평범한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지요.” “…….” “저는 당신을 존중합니다. 제가 당신이었다면 매일같이 일어나 이런 자들을 위해 봉사할 수 없었을 겁니다. 무언가를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닙니다. 길드나 클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물욕에 집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켜냈습니다. 고생하며 가장 앞장서서 이들을 향해 몸을 움직였습니다. 암요.” 멍한 표정이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다른 이들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습니다. 실례지만 당신이 지내는 곳을 지켜본 적도 있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절대로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지요. 당신은 모든 것을 양보했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요. 다른 사람들도 움직였지요. 타 클랜과 길드가 빈민들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했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숭고합니다.” “바… 바보 같은 소리예요.” “당신이 저들을 개돼지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전에 했던 소리는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당신에 대한 질투였습니다. 숭고하고 아름다우며 진실한 그 모습은 제가 가지고 못한 것들이니까요. 꼬여 있는 건 저였습니다.” “…….” 질질 짜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위로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한 눈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녀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 정도는 인지할 수 있었다. “당신은 절대로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네…. 흐윽….” “당신은 숭고해요.” “네….” “존경할 만한 사람입니다.” “네….” “잘못된 것은….” “네….” “저들이지요.” “네.” “은혜도 모르는 금수 같은 개돼지들이야말로 잘못되었습니다.” “…….” “자신들이 받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당신을 배신한 자들이야말로 잘못되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린델을, 신성제국을, 사회를 썩게 만드는 겁니다. 숭고한 이들이 계속해서 사회에 이바지해도 이런 자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나아지지 않는 겁니다. 그래요. 이런 자들 때문입니다. 빈민촌이 나아지지 않는 것도, 쓸데없는 오해를 받는 것도, 당신의 숭고함의 빛이 바란 것도 모두 저들 때문입니다.” “네…. 흐윽….” “일어서려고 하는 자들이 아닌, 일어설 생각도 하지 않는 이들이 이곳을 썩게 만드는 겁니다.” “네. 네. 네.” “자, 그럼.” “…….” “진정한 의미의 봉사를 시작합시다, 사제님.” 내 개소리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일어나 내가 건네는 단검을 받아드는 선희영이 눈에 들어왔다. “함께 아름다운 린델을 만들어 가도록 합시다.” # 57 회귀자 사용설명서 057화 이상적인 봉사자 “함께 아름다운 린델을 만들어 가도록 합시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얼굴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입을 꽉 깨물고 있는 것은 물론, 굉장히 진중한 표정이다. 솔직히 나도 선희영이 이 정도로 의욕적인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몇 가지 장치를 해두기는 했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예상하고 있었던 장면은 겁을 집어먹고 머뭇거리는 것이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 ‘약발이 잘 받는 건가.’ 물론 덜덜 떨리는 손과 발을 보면 무의식 어딘가에서는 지금 이 상황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정신은 그녀에게 정상적인 사고를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좋네.’ 엉망이 된 얼굴에 깃든 표정의 정체는 사명감. 내 생각이 정확한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선희영의 얼굴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은 틀림없이 사명감이다. 천천히 단검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어떤 종교적 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짧게 기도를 드린다거나 손을 위로 들어 올리는 동작 역시 마찬가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는 그녀는 저들을 원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허….’ “사제님… 저희가…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저희가 잠, 잠깐 미쳤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가 정말로 미쳤었습니다.” “살려주세요, 사제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마법사님… 분, 분명히 살려준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살려준다고….” 그 와중에도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가관이다. 이미 정하얀의 마법으로 인해 사지가 포박된 채로 단검이 드리워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눈앞에 둔 채로 선희영은 뒤를 돌아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정, 정말로… 정말로… 하나요?” 브레이크를 걸어 달라는 것 같이 들려오는 목소리. 당연하지만 걸어줄 생각은 없다. “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까지 해오셨던 일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엄연히 남을 돕는 일입니다. 쓰레기가 있으면 치우는 것이 맞지요.” “네….” 선희영은 우리와 함께 움직여야 하는 인재니까. 환하게 웃음을 보내자 곧바로 그녀가 위로 치켜든 단검을 아래로 내려찍기 시작했다. 비명이 들려온다. 어색하게 단검을 찍어 내리는 그녀의 모습은 괴기스럽다기보다는 숭고하다. “아으아아아악!” “사제니임…! 살려….” “도와….” “아아아아악!” 끔찍하다면 끔찍하다고 할 수 있는 모습. 연신 피가 튀가 튀고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도와달라는 목소리에 응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이곳이 마력으로 밀폐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굳이 그런 작업을 거치지 않아도 저들을 도와주러 이곳에 찾아오는 이들은 없으리라. 녀석들이 말한 그대로, 이곳에서 도움을 청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일이다. 빈민촌에 있는 사람은 모두 자기 살기 바쁜 이들이다. 남을 도와준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봉사했을 그녀를 떠올리자 웃음이 나올 지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들을 욕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자신이 할 일을 끝마치려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봐도 어색하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끔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내 도움을 받지 않고 말이다. “사제님! 사제님! 제발….” “이 개 같은 년아! 니가 사람이야?” “죄송합니다. 제발… 제발!” “아으아아아아악!” 어쩌면 그녀는 처음부터 비정상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 기준에서 생각해 보자면 저렇게 이타적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에는 끅끅거리는 목소리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조용히 숨을 헐떡거리는 선희영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떻습니까?” 조금은 홍조가 깃든 얼굴. 부어오른 눈덩이와 찢어진 이마에 서 피를 흘리고 있었던 그녀는 내 말에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보람차네요.” 조금은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그녀의 모습은 조금 아름다워 보였다. 염려됐던 것은 정신 상태였지만 그렇게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여러 가지 조건의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 내가 주입한 새로운 가치관은 그녀의 내부에 아주 잘 자리 잡았기 때문이리라. ‘성공적이야.’ “그럼 갈까요?” “어디….” 뻔한 영입 제의 역시 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손을 뻗으니 내 손을 맞잡은 손이 느껴졌다. 정하얀이 조금 불편해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문제없으리라. “새로운 의미의 봉사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조금은 조용하게 활동할 필요가 있지요. 제가 당신과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네. 함께요. 당신의 가치관을 실현시키는 것에 문제가 많을 겁니다. 일반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니까요.” “네.” “제가 당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제가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기영 님.” “일단은 치료를….” “괜찮아요. 제가 직접 할 수 있으니까요.” 선희영은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되는 모습은 기가 찰 지경. 정하얀이 가지고 있는 반지 때문에 나도 한 번 체험해 본 적은 있지만 내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유능해.’ 이곳에서 사제는 무척이나 귀하다. 사제 적성에 맞는 사람을 구하기 힘든 것은 물론, 제대로 된 사제는 보기도 힘들다. 전설 등급의 신성 재능을 가지고 있는 여자와 함께 움직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은 것은 당연지사. 최소한 눈 먼 화살에 맞고 뒤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남은 것은 이 여자와 함께 클랜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정하얀은 이쪽에 몸을 기대오고 있었다. 내가 선희영에게 보여주는 친절한 모습이 걱정되는 모양. 선희영은 조금 멀찍이서 떨어져 조용히 입을 열어오고 있었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일상적인 대화였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본다면 일상적인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정하얀도 조금씩 선희영의 말에 응해오는 것을 보면 이 둘은 서로에게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조금 익숙한 인형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던 것은 바로 그때. “현성 씨?” “혹시나 했는데 기영 씨였군요. 이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입니다. 실험실에 계실 줄 알았는데… 하얀 씨와 함께 나들이라도 나오셨습니까?” “아. 사실은….” 살짝 선희영을 보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희영이라고 합니다. 잠깐 봉사 활동 차 이곳에….” “아. 처음 뵙겠습니다.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서로 처음 보는 모습에 조금 당황스럽다. 김현성의 뒤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꼬마 하나가 시야에 비쳤다. 아직 어린아이 티를 벗지 못한 모습의 꼬마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제대로 구분하기도 힘든 것처럼 느껴졌다. 눈에는 알 수 없는 독기가 들어 있었고 떼 국물이 묻어 있는 얼굴은 꼬마가 빈민촌 출신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 빠르게 마음의 눈을 발동시키자 보이는 모습은 가관. [플레이어 김예리의 상태창과 잠재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김예리]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14] [성향-상처받은 도둑] [직업-궁수] [직업효과-기초 궁술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10/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민첩-31/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체력-12/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15/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내구-14/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행운-15/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10/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총평-전설급 이상의 스탯 한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민첩과 마력이 전설급의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스탯의 잠재 능력 역시 플레이어 이기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게 조심해서 움직여주세요. 상처받았지만 아직은 순수한 아이입니다. 눈치가 빠른 꼬마지만 미워하지는 말아주세요.] ‘허….’ 김현성을 제외하고 모든 능력치가 영웅, 전설을 가리키고 있는 이는 처음 본다. 녀석이 노리고 있던 것이 선희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애초에 빈민촌으로 향한 이유는 이 꼬마를 데려오기 위함이리라. 살짝 아래를 내려다보자 김현성의 뒤로 후다닥 숨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겁을 집어먹은 것 같기도 했고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선희영이 꼬마를 보는 눈이 그리 탐탁지 않아 보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다행히 별 다른 트러블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 이 아이는….” “빈민촌에서 우연히 만난 아이입니다. 재능이 있어 보여 이것저것 가르쳐 볼 생각으로 데려왔습니다. 생각이 깊고 벌써 직업도 얻은 것 같더군요. 사냥을 나가기에는 조금 어린나이지만… 아! 아직은 낯을 많이 가리는 것 같으니 친해지시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실 겁니다.” “아… 그렇군요.” “기영 씨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빈민촌을 둘러보던 차에 우연히 사제님과 연이 닿게 되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음이 조금 맞아서 말입니다.” “아아아.” 선희영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김현성은 정말로 그녀를 처음 보는 모양이다. 조용히 그녀를 가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모르나.’ 내가 만약 김현성이었다면 저 꼬마를 영입하면서도 그녀를 어떻게든 영입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녀의 신성 재능 한계치는 전설 이상. 이유야 어찌됐든 미래를 뒤흔들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 중에 하나였으니까. 사실상 말이 되지 않는다. 빈민촌의 규모가 조금 크기는 하지만 어쩌면 몇 번 마주쳤을 수도 있다. 선희영은 항상 사람들을 몰고 다녔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이 굳이 그녀를 영입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녀에게 별 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럴 수가 있나?’ 그녀는 미래가 보장된 사제.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에는 더욱더 성장할 인재다.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녀가 가까운 미래에 예기치 못할 사고를 당했다면 김현성이 그녀에게 집중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간다. 1회 차의 김현성은 지금 이 시기에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을 테니까.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빈민촌이나 주변에 들려오는 소문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린델은 넓고 같은 시간에도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사냥을 나가거나 어딘가에 틀어박혀 훈련에 열중했다면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님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선희영 그녀가 지금의 삶을 계속해서 유지하며 살아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다. 낭중지추라는 말을 떠올리면 생각하고 있는 추론이 조금 더 설득력이 있다. 그냥 뇌내망상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선희영이 과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었을 거라는 생각이 괜스레 머릿속에 들어와 꽂혔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당연히 알 수 없다. 클랜이나 길드의 오퍼를 받아들인 이후 탐사 도중에 죽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전쟁이 일어나 휩쓸렸을 수도 있다. 병에 걸렸을 수도 있고, 클랜과 길드의 이해관계에 얽혀 피해를 받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빈민들에게 죽었을 수도 있고.’ 김현성이 회귀하기 전에 일어난 일은 내가 전부 알 수 없다. 단순히 예상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선희영 그녀가 전 회 차에 조금 씁쓸한 인생을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희영 씨.”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현성 씨. 당분간 신세를 질 것 같네요.” 그녀는 이상적인 봉사자였으니까. # 58 회귀자 사용설명서 058화 회귀자 버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현성이 데리고 온 꼬마 김예리 그리고 내가 데려온 선희영은 김현성 파티에 들어오게 됐다. 파티의 멤버를 정하는 것은 오롯이 칠 번대의 파티장 김현성의 권한이었지만 행정팀의 몇몇은 조금 아니꼽다는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사전에 행정팀과 충분한 협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시킨 셈. 물론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배경에는 김현성이 고작 1년차라는 현실이 가장 컸을 것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이쪽이 만들어낸 결과에는 무척이나 놀랍다는 반응이었지만 역시나 미친 늙은이들은 그걸 굳이 표현하지는 않았다. 여러 클랜과 길드에서 군침을 흘리던 선희영의 영입, 저들이 입을 닥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것도 무척 싼값에.’ 어느 클랜이나 길드로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던 그녀가 파란으로 간다는 소식에 파란의 주가가 올라간 것은 당연지사. 안 그래도 주목받고 있던 김현성 파티는 자유 도시 린델의 주목의 대상이 됐다. 이곳에 도착한 소환자들의 역사를 알 수 없지만 린델 내에서 신입 파티가 이 정도로 주목받았던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형님! 식사할 시간이요.” “알겠다.” 방에서 여전히 실험에 몰두하고 있었을 때 박덕구가 슬그머니 문을 두드리며 이쪽으로 들어왔다. 최근 파티가 하루에 세 번 꼭 함께 식사를 했다. 새로 들어온 이들, 그러니까 선희영과 김예리와 가까워지기 위함이기도 했고 파티의 전반적인 상황과 앞으로의 일정을 회의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똘똘 뭉쳐 있는 네 명에 비해 새로 들어온 두 명은 조금 거리감이 있다. 의외로 정하얀과 선희영이 죽이 잘 맞는 느낌이지만 아직 친해졌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낯을 가리는 김예리 같은 경우와는 아직 대화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눈치 빠른 꼬맹이.’ 무슨 마법을 쓴 건지 아니면 권력자의 냄새를 잘 맡는 건지 김현성에게만 딱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가관이다. 친해지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차도가 없는 것은 꽤나 답답했다.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며 널려 있는 것들을 정리하는 와중에 박덕구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형님은 뭘 그렇게 매번 실험을 하고 있는 거요?” “여러 가지야. 한꺼번에 하고 있는 게 많아서 뭐라고 말해주기가 애매하네.” “그중에 하나만 좀 이야기해 줄 수 없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요. 매일 방에 처박혀서 실험하고 있는데 하나 정도는 알려줄 때도 되지 않았소?” “글쎄….” “거, 그러지 말고 하나만 이야기해 주쇼.” “가장 최근까지 하고 있던 건 감정을 건드리는 물약이었는데….” “그런 게 가능한 거요?” “어디까지나 이론만.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는 건드리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예를 들면?” “성욕이나 수면욕, 식욕 같은 것들 말이다. 사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감정을 건드리는 건 아니야. 단순히 나른하게 만든다든가 몸이 피곤한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든가 하는 것이 전부고….” “에이… 그럼 그건 감정을 건드리는 게 아닌 거 아니요?” “그래서 인간이 재미있는 거야. 인간이라는 동물은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게 자기 감정이라고 믿기도 하거든. 예를 들면 근육이 이완되고 몸이 편안해지는 물약을 만들었다고 가정하자. 그곳에 마법적인 무언가를 첨가했다고 했을 때, 인간은 정말로 몸이 나른하다고 느낀다는 거야. 뇌가 몸의 신호를 멋대로 해석해 버리니까.” “아아아아….”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야. 몸에 열을 가한다든가 심장이 조금 빨리 뛰게 한다든가. 조금만 툭툭 건드려줘도 쉽게 흥분하기도 하고 쉽게 짜증 내지.” “거 왠지 무섭게 들리는데….” “지력이 낮은 경우에는 조금 더 잘 먹힐 거야. 아니면.” “아니면?” “정신이 조금 불안전한 대상이라던가.” “끙….” 뭔가 조금 겁먹은 듯한 표정이 시야에 들어온다. 물약 하나로 사람의 감정을 좌지우지한다는 소리가 무척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최근에 제법 재미를 보기는 했지만 사실 사용하기에 적절하지는 않다. 극적인 상황이 따라와 줘야 하고 여러 가지 재료들이 필요하다. 아직까지는 완전하게 써먹을 수 없는 상황. 사실 정말로 만들고 싶었던 물약을 개발하기 위한 시제품에 불과하지만 전혀 쓸모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농담이다.” “엉?” “농담이라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아아아아, 형님!” “어디까지나 상상만 해보는 거야. 원래 모든 실험의 출발은 상상에서부터 시작하니까. 예컨대 아이디어가 중요하다는 소리지.” “오! 그럼 엉뚱한 아이디어도 실현이 가능한 거요?” “상황만 맞아 떨어진다면.” “사랑의 묘약 같은 거 말이요?” “그건 앞전에 말했던 물약에 연장선이잖아.” “그럼 마시면 스탯이 오르는 물약은 어떻소? 아니면 투명해지는 물약이라든가. 아니면.” “…….” “괴물이 되는 물약. 그런 것도 가능한 거요?” 알고 말하는 건지 모르고 말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박덕구가 한 번씩 언급한 물약은 내가 연구 중에 있는 것들이다. 조금 놀랐다는 표정으로 놈을 바라보자 싱글벙글 웃으며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모습이 가관. 그중에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도 있었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녀석을 다시 볼 정도였다. ‘이 새끼는 바보야, 천재야.’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할 아이디어를 쏟아낼 것 같은 느낌이다. 이론이고 나발이고 단순히 재미있을 것 같은 말을 꺼내는 것에 불과했지만 가끔 허를 찔러오는 것 같은 발언에 녀석의 말을 머릿속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길드 하우스의 지하에 내려가자 역시나 모여 있는 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빠, 오셨어요?” “기영 님.” “앉으시죠.” 정하얀은 기분 좋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선희영 역시 단정한 모습으로 조용히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김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반겼고 가장 나이가 어린 김예리는 아직도 이쪽을 경계하는 듯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 살짝 자리에 앉으니 곧바로 정하얀이 이쪽으로 식사를 가져왔다. 선희영 같은 경우에는 슬쩍 물을 따라 이쪽에 놓아주는 모습. 재미있게도 선희영의 성향은 변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이상적인 봉사자라는 성향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당황스러울 정도다. 아마 내 조언대로 그 행위 자체를 봉사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더 이상 이상적인 봉사자라는 성향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대신 직업에 변화가 생겼다. [암흑사제-영웅 등급] 기존에 있었던 태양의 사제라는 직업이 암흑사제로 변경된 것. 아마 그때 있었던 일의 영향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차례 지켜본 결과 능력이나 스펙 자체에 변화가 생기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신성 마법을 외울 수 있었고 김현성 역시 그녀의 능력에 꽤나 놀란 표정이었으니까. 물론, 수련에 열중하는 정하얀 같은 경우에도 눈에 띄게 성장했다. 마력이 40대로 들어섰고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 같은 경우에는 애초에 다른 설명이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오히려 성장 속도가 조금 느렸던 것은 박덕구.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는 내구 수치와는 다르게 근력이나 체력의 성장 속도가 조금 더뎠다. 특히 민첩 스탯 같은 경우에는 성장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 문제. 본인이 가장 답답해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사실 녀석의 심정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스탯이 오르는 게 시원치 않았던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다들 적당히 자리를 잡자 김현성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식사 시작하도록 합시다.” “거, 맛있게 드쇼.” “식사 맛있게 하세요.” 파티의 리더는 김현성이다. 존중을 보여야 하는 것이 당연,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 뒤에 조용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시작됐고 조금씩 잡담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녀석이 이쪽을 향해 슬그머니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당연히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네?” “오늘 아침에 부길드 마스터로부터 제의를 받았습니다.” “무슨 제의 말이요?” “던전 공략입니다. 저희 파티뿐만이 아니라, 근처에 있는 대형 길드의 파티들도 함께 들어가게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듣고 싶군요.” 조금은 뜬금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언젠가 사냥이나 던전을 갈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다. 우리 파티는 아직 이곳에 막 들어온 신입이었고 빠른 성장이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파티는 현재 여섯 명으로 꼬맹이 김예리까지 함께 간다면 그럭저럭 하나의 파티의 모습을 만들 수 있었으니 타이밍상 나쁘지는 않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다른 길드의 파티와 함께 들어가게 된다는 것. 만약에 던전에 간다고 한다면 회귀자만이 알고 있는 던전으로 가서 회귀자밖에 모르는 단물을 뽑아먹는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레 다른 불청객들도 함께 들어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배경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내 질문에 김현성을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입니다. 저도 아주 자세히 전해 듣지는 못했지만 중견 파티 하나가 튜토리얼 던전 근처 지역에서 새로운 던전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근데 그게….” “문제는 파티의 구성원들입니다. 길드에서 만들어진 파티가 아닌 여러 길드와 클랜에서 모인 친목 파티가 모임을 하는 도중에 발견한 던전이었기 때문에 어떤 길드의 소유로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조금 애매해졌죠.” ‘아….’ 대충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간다. “그들이 직접 공략에 참여하지는 않은 겁니까?” “네. 일반 등급, 높아봐야 희귀 등급의 던전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와서 굳이 던전을 공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마 길드 내에서 따로 보상이 갔을 겁니다. 공략이 완료된 던전의 지분도 일부 나누어 주기로 했고요.” “직접 공략하기보다는….” “각 길드와 클랜이 밀어주고 있는 성장 파티에 투자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겠죠.”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각 길드의 구성원들이 모인 친목 파티가 우연히 희귀 등급의 던전을 발견했다는 소리가 된다. 문제는 이 친목 모임의 구성원들이 들어가기에는 던전의 등급이 다소 낮게 느껴졌던 것. 굳이 자신들이 들어가 드잡이를 하기보다는 현재 경험이 필요한 파티에게 양보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이가 좋은가 보네.’ 소유권 분쟁이 없이 사이좋게 나누어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조금 신기했다. 사실 던전을 발견한 녀석들의 입장에서는 각 길드에서 보상도 받고 던전의 지분 중 일부도 받을 수 있으니 호재라고 할 만한 상황이긴 하다. 희귀 등급의 던전에 목을 매지 않는 것을 보니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골드나 아이템 따위에 집착했다면 애초에 던전을 양도하지도 않았으리라. “저희 파란 길드에서 한 파티가, 붉은용병 길드에서 한 파티 그리고 마도 길드에서 한 파티, 마지막으로는 검은백조 길드에서 한 파티가 나올 예정입니다. 희귀 등급의 던전이지만 던전의 규모가 조금 크기 때문에 모든 파티가 함께 움직이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아마 던전을 공략한 이후에는 각 파티의 기여도에 따라 아이템을 분배할 것 같기는 하지만….” “기여도에 따라서 말입니까?” “네. 그렇지만 이번 던전행의 목적은 아이템이나 재화가 아닙니다. 경험이죠.” 김현성의 계획이 어떤 것인지 대충 눈에 보인다. 이런저런 설명이 길기는 했지만 목적은 한 가지. ‘파티의 성장.’ 당연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 회귀자가 그게 옳은 방향이라고 판단을 내렸을 테니까. ‘고맙다, 현성아.’ 회귀자 버스에 단체로 탑승할 시간이다. # 59 회귀자 사용설명서 059화 던전 공략은 정치다(1) 조금은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이었기 때문에 꽤나 분주해졌다. 우리네 어머니 이상희가 직접 우리 파티의 교육을 맡았고 남는 시간에도 김현성에게 하루 종일 붙잡혀 있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사실 우리 파티는 기본적인 사냥으로 합을 맞춰본 기억도 없다. 튜토리얼에서의 경험도 경험이라곤 할 수 있겠지만 튜토리얼 던전의 경우에는 등급으로 분류되지도 않는 던전. 말하자면 우리 파티는 초보자의 전형적인 성장 과정을 스킵한 셈이다. 보통의 파티는 몬스터의 숲 초입으로 들어가 작은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물론 전체적인 스펙이 높은 김현성 파티에게는 하찮은 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런 성장 과정은 중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알게 모르게 쌓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던전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각 파티가 함께 움직일 때 동선이 꼬이지 않게 하는 진형을 연습해 보거나 몬스터의 종류와 특성을 외우는 것이 고작. 사실상 던전공략에 필요한 준비는 타 길드의 파티가 떠안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말하자면 특혜를 받고 있는 셈. 다른 길드의 파티들이 우리 파티를 배려해 주고 있는 것이다. ‘좋게 작용할지는 모르겠지만….’ 각 만들어진 신입 파티가 희귀 등급의 던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운이 좋은 상황. 타 파티와 함께 움직이는 것은 불편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그만큼의 안전이 확보된다는 소리다. 저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볼 수 있고 던전 공략이 어떻게 진행하는지에 대해서도 지켜볼 수 있다. 물론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파티의 수준도 그리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선배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는 자체만으로 도움이 된다. 정리해 보자면 여러모로 운이 좋다는 거다. “그런데… 정말로 데려갈 생각입니까?” “네.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나이가 어리다는 건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장점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렇군요.” 그 와중에도 김현성이 김예리를 함께 데려가려고 한 것은 꽤나 의외였다. 물론 안전하기야 할 것이다. 김현성이 공을 쏟아 붙고 있는 인재인 만큼 혹시 모르게 튀는 위협을 배재하려 할 테니까. 아무튼 간에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고 파티는 점점 더 완성되고 있었다. 특히나 김현성이 회의를 위해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잦아지면서 파란 길드의 칠 번대, 김현성 파티의 첫 원정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원정 당일. 평소와는 다른 분주한 아침이 시작되었다. “덕구야, 챙길 건 다 챙겼어?” “물론이요. 거, 몇몇 길드원 분들이 짐을 미리 챙겨줬는데….” “희영 씨 혹시 빠진 게 있는지 체크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몸이 안 좋은 이들이 있으면….” “네, 기영 님.” “하얀아, 식량, 식수, 포션 모두 이상 없는지 확인해 줘.” “네, 오빠.” 사실 내가 제일 바쁘기는 하다. 본래 시키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상사에게 예쁨 받는다. 물론, 던전 공략의 기획 자체에 끼어들거나 김현성이 불편할 만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기본적인 것이 중요하다. 필요한 물품을 확인하는 일, 원정에 대한 준비를 미리 끝내 놓는 일 등. 말하자면 던전 공략과는 상관없이 잡일이다. 굳이 이런 것까지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형이 전부 준비해 놓을게, 현성아. 너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예상대로 만족스럽게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차피 스탯이나 공격력으로는 비빌 수 없으니 이런 쪽으로 잘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 ‘이 새끼… 약하기는 한데 진짜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라는 인상을 심어 주는 게 중요한 것이다. “혹시나 빠뜨린 장비는 없는지 확인해 봐. 하얀아, 일 끝났으면 길드 창고에서 렌탈하기로 한 장비도 가져오고….” “네, 오빠.” “예리가 쓸 화살 챙기는 거 잊지 말고.” “네!” 바쁘지만 더욱더 바쁘게 보이는 게 중요하다. 첫 원정이니 만큼 내 포지션을 미리 못을 밖아 두는 것이다. 파티의 아버지가 김현성이라면 파티의 어머니는 이기영. 나름대로 괜찮은 울림이다. 실제 하는 일에 비해 얻어가는 것은 꽤나 많을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목록을 확인하거나 전체적인 준비를 완료해 놓는 것이 고작이니까. 무척이나 흐뭇해하고 있는 김현성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직접 확인을….” “아니요. 괜찮습니다, 기영 씨. 별 다른 문제없겠지요. 밖에서 타 파티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슬슬 출발하도록 하죠.” “네.” 회귀자의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즐거운 일이다. 이쪽을 완벽하게 믿는다는 눈빛. 굳이 마지막 체크를 직접 하지 않은 것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출발하도록 합시다.” “네.” 천천히 바깥으로 나가는 와중에도 왠지 모르게 시선이 집중된다. 물론, 생각 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아마 대부분 우리 파티를 주목하고 있으리라. “선희영이다. 이번에….” “저게 그럼 파란에서 이번에 영입했다는 파티가 맞아?” “뭐, 꽤나 비싼 값을 주고 데려왔다는데… 까봐야 알겠지.” “부럽다. 하… 우리랑은 출발선이 다르네. 쟤들은….”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뭐, 아직 보여준 것도 없다며?” “그래서 지금 사냥 나가는 거 아니야?” “길드에서 지원해 준 던전에 들어가겠지.” 질투하는 이들부터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는 이들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비들을 보면 질투하는 것이 당연하다. 길드 창고에서 렌탈한 장비들이었지만 일반 등급의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 이곳의 현실이니까. 실제로 부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걸치고 있는 장비는 대부분 누더기다. 당연히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박덕구만 봐도 알 수 있다. 튜토리얼에서 쓰던 부러질 것 같은 나무 방패 대신에 제법 질이 좋아 보이는 철제 방패를 들고 있다. 신발 끈으로 이었던 가죽 갑옷 대신 사슬 갑옷을 입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박덕구의 힘 스탯이 조금만 더 높았더라도 판금 갑옷을 입을 수 있었으리라. 조잡한 칼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뭉툭한 둔기가 들려져 있다. 영웅 등급의 아이템은 없지만 이 정도만 해도 초보자 티를 벗은 것 같은 모습이라는 거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니 시야에 비치는 것은 각 길드의 휘장을 달고 있는 구성원들,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파티장끼리는 사전에 몇 번 만남을 가진 만큼 익숙하게 악수를 하고 있다. 나머지 파티원들 역시 마찬가지. 가슴에 붉은 휘장을 달고 있는 것은 당연히 붉은용병이다. 괜스레 이쪽에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 그래.’ “처음 뵙겠습니다. 붉은용병의 최영기라고 합니다. 마스터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 “아 반갑습니다.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대외적으로 붉은용병의 길드 마스터 차희라가 이쪽에 목을 매고 있는 상황이나 잘 보이고 싶은 것이 당연하리라. 전체적으로 붉은색으로 무장을 맞춘 것을 보니 아이덴티티가 꽤나 확실하다. 정하얀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이들은 마도 길드에서 온 파티가 분명. 마법진처럼 보이는 휘장을 달고 있었고 궁금한 것들이 많은지 정하얀에게 벌써부터 입을 열어오고 있었다. 김현성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이들이 검은백조 길드. 역시나 길드 휘장을 달고 있었고 여자 다섯, 남자 하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들었던 대로….’ 대부분이 여자로 구성되어 있는 모양.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있지만 확실히 하나의 파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근접직군의 라인이 탄탄해 보이는 빨갱이들, 후방 라인이 능력치가 좋은 공부벌레들,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좋아 보이는 검둥이들, 스탯은 모두 40대에서 50대 정도. 각 길드에서 밀어주고 있는 파티다운 모습이었다. 인원이 많다 보니 일일이 인사를 하는 것도 문제. 당연하지만 인기가 제일 많은 것은 사제인 선희영이었다. “결국 활동하기로 하셨군요.” “네. 조금 사정이 있어서… 파란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무척 든든합니다. 하하.” “아니요. 사실 저도 던전행이 익숙하지 않은지라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 같아요. 잘 부탁드립니다.” “예. 물론이죠. 그럼 이만 떠나도록 하죠.” 분위기상 이 공격대를 이끄는 것은 붉은용병의 최영기다. 규모가 제일 큰 길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최영기의 스탯이 가장 좋다. 전설 등급의 능력치는 보유한 건 아니지만 영웅 등급의 잠재능력을 가졌다. 탱커인지 내구와 체력이 50대에 들어간 것이 눈에 보인다. 심지어 민첩 스탯도 결코 낮지 않다. 굳이 설명하자면 박덕구의 상위호환 같은 느낌, 박덕구가 이상적으로 성장한다면 아마 저런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 “소문이 자자한 파티를 직접 보게 되니 이거 참 영광입니다, 현성 씨.” “아닙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아무래도 이번이 첫 원정이기도 하고… 뭘 하는 것보다는 잘 보고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들어왔으니까요.” “하하하. 사실 저도 전에 있었던 시연회에서 현성 씨를 지켜봤었습니다. 거… 정말로 천재라는 게 있구나 싶었던 모습이었습니다. 겸손도 과하면 독이 됩니다.” “그렇게 봐주시니 정말로 감사하군요.” “그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정하얀 씨도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붉은용병의 최영기는 꽤나 유쾌한 성격이었다. 마도는 전체적으로 조용한 분위기다. 검둥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우리를 경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아예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김예리의 존재 때문이었다. 검둥이들의 리더가 조용히 걸어가는 도중 할 말은 해야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원정에 어린 아이를 데려온다는 말씀은 없었잖아요, 현성 씨.” “방해는 되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어린 아이이기 이전에 재능 있는 궁수니까요. 혹시라도 폐가 되지 않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잘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후우….” 충분히 뭐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대놓고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니 인성이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상대에게 대놓고 무안을 주는 만큼. 사실 이미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능력치를 살펴보기는 했지만 한 번 더 봐야 할 것 같아 천천히 마음의 눈을 발동시켰다. [플레이어 정유라의 상태창과 잠재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정유라]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9] [성향-계산적인 전략가] [직업-암살도적-희귀 등급] [직업효과-기초 궁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기초 단검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기초 함정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기초 암살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41/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민첩-55/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체력-43/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40/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내구-20/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행운-23/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마력-43/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총평-암살자로서 쓸 만한 스탯과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향과 직업, 능력치가 무척이나 합이 잘 맞는 것이 눈에 띕니다. 무난하게 성장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겠네요. 혹시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나 직업을 얻는다고 가정한다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인재입니다. 인성이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네요. 물론, 플레이어 이기영에 비한다면 새 발의 피로 보이지만요.] ‘괜찮네.’ 너무 괴물 같은 스탯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별 다른 감흥이 없기는 했지만 총평의 말 그대로 성장 가능성은 나쁘지 않다. 성향도 암살자라는 직업과 잘 어울리는 듯한 느낌. 이 정도가 희귀 등급의 던전을 공략할 수 있는 능력치라고 판단하면 될 것 같았다. 함정 해체나 후방 교란 등이 역할인 모양. 대충 어떤 성격일지 눈에 보인다. “우리가 보모도 아니고 후우….” 지나치며 작게 중얼 거린 목소리를 들어보자면 더욱더 그랬다. # 60 회귀자 사용설명서 060화 던전 공략은 정치다(2) 물론 이해가 가기는 한다. 타 길드의 입장에서는 우리 파티를 위해 꽤나 많은 걸 양보해 준 셈이니까. 사실 우리 파티는 이곳에서 스펙이 가장 떨어진다. 경험이 가장 부족한 것도 우리 파티다. 던전행뿐만이 아니라 사냥 자체도 처음이었고 그 사실을 저들도 잘 알고 있다. 꽤나 많은 걸 양보한 상황에서 갑작스레 김예리 같은 꼬마가 눈에 띄었다면 나였어도 한소리 했을 것이 분명하다. “자자. 그런 말 하지 말고 즐겁게 갑시다. 즐겁게.” “던전 탐사를 어떻게 즐겁게 할 수가 있어요. 최영기 씨. 이건 장난이 아니라고요. 아무리 많은 인원이 들어간다고는 하지만… 걱정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게….” “전체적인 스펙이 높다고는 해도…. 후우…. 저희는 어디 관광을 온 게 아니에요. 언제든지 위험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고요.” “저희가 더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붉은용병의 최영기가 이쪽의 눈치를 보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마도 차희라에게 뭔가 언질을 받은 모양이다. 이후에 빈 말이라도 한번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물론, 붉은용병을 믿지 못한다는 건 아니지만….” “큼큼… 분위기가 조금 불편해 진 것 같군요. 뭐, 분위기라도 환기 시킬 겸 간단한 브리핑이라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네.” “들어갈 던전은 전해 들으셨다시피 희귀 등급의 던전입니다. 던전의 이름은 공포의 정원으로 식물형 몬스터들이 주를 이룰 거라는 길드의 분석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다. 정말로 분위기를 환기시킬 목적으로 이야기를 꺼낸 듯. 길을 걷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파티의 분위기를 좋게 만들려는 걸 보니 최영기라는 녀석의 성격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형님, 저 형씨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소?” “응.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박덕구 역시 이런 소리를 해올 정도였다. 나 역시 동의하는 부분. 단순히 착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제법 리더의 자질이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탱커가 있다는 것은 꽤나 믿음직스러울 것이다. 침착하고 사람들을 잘 다를 줄 알고 실력도 괜찮다. 분위기를 잘 읽고 갈등을 최소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면 최영기는 확실히 베테랑이다. 박덕구가 목표로 할 만한 탱커였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던전에 다다랐다. 수많은 가시덤불들이 모여 있는 곳을 헤쳐 지나가는 것은 조금 짜증나기는 했지만 조금 더 시간을 들여 걸으니 던전의 입구를 내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조그만 해?’ 묘한 마력이 느껴지는 입구. 한두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작은 입구다. 오히려 튜토리얼 던전이 조금 더 웅장해 보일 정도였다. 이런 입구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동안 찾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최영기는 잠깐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천천히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입 순서는 저희가 첫 번째, 검은백조, 마도, 파란 순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전투가 시작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최대한 곧바로 전투 준비를 한 이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한두 명씩 허리를 숙이면서 던전 안으로 진입했고 나 역시 정하얀의 팔을 잡고 던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뭔가 공기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에 몸을 잠깐 떤 이후에는 곧바로 익숙한 메시지가 들려왔다. [희귀 등급 던전 공포의 정원에 입장하셨습니다. 인원[24/30]을 확인했습니다.] 그 이후에 들려온 것은 다급한 목소리였다. “공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공간! 공간 확보 해주세요!” 진입하자마자 시작되는 거친 환영 인사에 조금 어안이 벙벙하다. 희귀 등급 특유의 마력의 때문인지 괜스레 숨이 턱 막혀왔다. 붉은용병의 근접 직군들은 최대한 들이닥치는 몬스터를 막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시야에 비치는 것은 무척이나 괴기스럽게 생긴 식물들이다. 식물의 형태를 한 거인이라는 편이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덩치는 인간의 2배 정도 되는 것 같았고 올려다봐야 될 정도로 육중한 몸을 가지고 있다. 줄기와 뿌리로 만들어진 것 같은 몸은 녀석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멍하니 놈을 구경하고 있는 박덕구를 두드리자 정신을 차렸는지 곧바로 앞으로 튀어나가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덕구야.” “아, 알겠소.” 겁을 집어 먹은 것 같지는 않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리라. 커다란 방패를 들고 앞으로 뛰어나가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타 파티의 탱커들 역시 앞으로 나서며 이쪽을 공격해 오는 덩치들을 밀어내는 중이다. 어떻게든 검사나 창병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계속해서 밀어내겠습니다. 천천히 공격 시작해 주세요.” “어엇!” 용기 있게 튀어나갔던 박덕구가 갑작스레 중심을 잃었던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놈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균형을 잃은 것이다. “사제님.” “네.” 선희영은 초행 같지 않은 모습으로 박덕구를 향해 주문을 외우고 김현성 역시 녀석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 박덕구가 없는 틈을 타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괴물이 이쪽으로 쇄도해 오는 것을 보니 솔직히 몸이 움츠러들었다. ‘시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진형이 무너졌다. 반지에 내재되어 있는 주문을 외울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던전의 초입에서 쓰기에는 아깝다. 김현성이 튀어 나가는 것을 보니 괜찮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괜스레 불안해진다. 다가오던 괴물이 순식간에 벽면으로 처박힌 것은 바로 그때. 어느새 다가온 최영기가 녀석을 옆쪽으로 밀어낸 것이다. 콰앙! “여기 지원!” “알겠습니다.” “후우….” 순식간에 정리되기 시작한 장내. 수준 차이가 어느 정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지막에 온 우리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입구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물론 김현성은 그 와중에도 착실하게 대미지를 주었지만 나와 정하얀이 주문을 외우기도 전에 놈들이 천천히 쓰러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우리보다 몇 년은 이곳에 먼저 도착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우리 파티와 차이가 크다. 단순히 기본적인 스펙의 문제가 아니다. 경험의 차이고 팀워크의 차이다. ‘안일했어.’ 어느 정도 주변이 정리되자 최영기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박덕구가 상황파악이 안 되는지 벙쪄 있다. “너무 급하게 움직이신 것 같습니다.” “거… 그… 고맙소.” “경험이 부족하면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체에 조금 힘을 싣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알, 알겠소.” 툭툭 박덕구의 어깨를 두드린 붉은용병의 최영기를 보니 괜스레 감사한 마음이 샘솟기 시작. 이쪽을 신경 써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 함께 주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많이 다친 것 같지는 않지만 이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박덕구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씁쓸해 보였다. “죄… 죄송… 합니다. 형님. 그리고… 모두들….” “미안해할 것 없습니다. 덕구 씨. 이것도 전부 경험이니까요.” “그래도….” “현성 씨 말이 맞다. 덕구야. 침울해할 필요 없어. 보고 배운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면 될 거다. 다음번에 잘하면 되니까.” “후우… 알겠소.” “체중이 있는 만큼 공격이 조금 더 묵직하게 느껴질 겁니다. 자세를 조금 숙이고 바닥에 달라붙는 느낌으로 자세를 잡는 게 좋을 겁니다.” “아.” “조금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잘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덕구 씨.”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한 녀석이 왠지 모르게 침울해 있으니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한다. 사실 박덕구의 재능은 저기 있는 다른 탱커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다른 이들에 비해 성장이 빠르기는 했지만 경험적으로나 스탯으로나 전체적으로 딸리는 것이 현실이다. 그나마 묻어 갈 수 있는 후방 지원조와는 다르게 실수하면 티가 나는 근접 직군인 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느끼고 있으리라. 녀석을 위로해 주는 것이 일단 첫 번째. 순박한 녀석인 만큼 이런저런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을 것이 당연하다. 멘탈을 케어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때 앞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최영기 님.” “네?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유라 씨?” “그 파란 길드에서 오신 분들 말인데요. 저쪽 탱커 분은 차라리 후방에 배치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 “보니까 피지컬 자체가 조금 딸리시는 것 같은데… 저런 분이 전방에 있으면 조금 위험하잖아요. 아직 초입이라서 그렇지 후반에 가면 갈수록 저분도 위험할 것 같아요.” 말을 꺼낸 것은 검은백조의 정유라. ‘하….’ 뭔가 이쪽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박덕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건….” “이제 막 들어오신 분답지 않다는 건 알겠지만 전방에 서기에는 조금 부족한 것 같네요. 경험도, 스펙도.” “아마 금방 적응할 겁니다. 내구 능력치가 괜찮아 보이시던데… 만약의 상황이 오면 제가 이번처럼….”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만약에 영기 씨가 빠지면 진형 자체가 위험해 진다고요. 내구 스탯이 좋은 붉은용병길드와는 다르게 저희 파티는 탱커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내구가 낮아요. 자리를 비우시는 동안 무슨 사고가 생길지 알 수 없고요. 애초에 메인 탱커가… 자리를 비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지만… 그걸 저한테 말하셔도….” “그래서 건의 드린다는 거예요. 마도 길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최영기가 괜히 말을 아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차희라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도 아닐 것이다. 엄연히 이 원정대는 네 개의 파티가 함께 모여 만들어진 원정대다. 한 길드에서 온 파티라면 최영기가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겠지만 박덕구의 배치 같은 경우에는 엄연히 우리 파티의 고유 권한이다. 만약 저런 의견을 내는 게 합당하다고는 해도 정유라는 우리 파티의 리더인 김현성에게 제안을 했어야 했다. 그것도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말하는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건의를 하는 게 옳다. 저런 식의 행동은 분란만 만들 뿐이니까. ‘저년이….’ 던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조금 느끼기는 했지만 저 여자가 원하는 바가 뭔지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계산적인 전략가?’ 어쩐지 성향부터 친근한 냄새가 풍겨온다고 했다. 정말로 던전 공략의 안전을 위하기보다는 우리를 깎아내리고 자신의 위치를 조금 더 공고히 하려는 느낌이다. 저 여자는 이런 집단 내에서 발언권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인지하고 있다. 목적은 아마도 던전행이 끝난 이후에 있을 아이템 분배에서의 기여도. 애초에 우리 파티 같은 경우에는 이번 던전이 끝나고 분배할 아이템에는 관심도 없었다. 단순히 경험해 본다는 것을 목적으로 합류한 거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러는 것을 보면 무임승차 하는 우리가 무척이나 아니꼬운 모양. 물론 집단 내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지만 그 방법이 꽤나 저열하고 비열하다. 흔히 정치라고 부르는 선동. 이곳에서도 저런 헛짓거리를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네가 정치를 해?’ 괜스레 입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저런 식의 정치와 선동은 이쪽도 특기였으니까. # 61 회귀자 사용설명서 061화 던전 공략은 정치다(3) 이런 종류의 정치에서는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예컨대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의 선택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다. 정치라는 것이 결국에는 여론 싸움인 만큼 다른 이들의 반응을 보는 것은 필수.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자면 사실 지금이 적당한 타이밍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미 확고한 지위와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정유라와는 다르게 나는 가진 게 없는 파티원에 불과했으니까. 붉은용병이 나를 호의적인 시선으로 봐준다고 한들, 겨우 녀석들로는 커다란 목소리를 내기가 어렵다. 일단은 이 원정대에게 내 존재를 각인시키는 게 먼저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게 첫 번째 작업이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일단은 사과를 보냈다. 자연스레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불편하실 거라는 건 압니다. 불안하실 거라는 것도 알고요. 처음 들어온 저희와 함께 원정을 떠나신다는 것이 불편하신 것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건….” “어떤 부분을 염려하시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진영에 구멍이 뚫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최대한 진심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 진심 어린 사과는 대중의 마음을 흔드는 좋은 방법이니까. 역시나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이쪽은 최대한 존중을 보였다. 정유라 역시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도 한 차례 양보해야 되는 자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미안합니다.” 심지어는 박덕구 역시 고개를 숙여오기 시작. 사실 사과해야 할 대상은 그녀가 아니다. 애초에 방금 일어난 일 때문에 그녀가 피해를 입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차피 뒈져도 우리가 죽고, 살아도 우리가 사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고개를 숙인 타이밍에 조금 무리해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겠지만 분위기도 읽지 못하는 바보는 아니리라. “던전 공략은 장난이 아니에요. 사실 기회를 한 번 더 달라는 것부터가 마음에 드는 말은 아니지만… 한 번 정도는 더 지켜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슬쩍 고개를 숙이는 것이 당연하다. 왠지 모르게 감동받은 듯한 박덕구가 이쪽을 향해 입을 열어오기 시작했다. “형님. 거… 정말로 뭐라 할 말이 없소.” “아니다, 덕구야.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야. 겁먹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면 할 수 있을 거다.” “형, 형님.” 등을 툭툭 두드려 두드리자 괜스레 훌쩍이는 녀석이 보였다. 만약에 이번 일로 뭔가 사고가 생겼다면 정유라의 말이 조금 더 설득력을 얻었을 수도 있다. 사상자가 생겼다면 빼도 박도 못하고 이쪽의 실책으로 되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단순한 사과의 말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이 원정대는 아주 손쉽게 이 위기를 해쳐나갔다. 별 다른 부상자도 없었고 오히려 조금 여유 있는 모습으로 몬스터들을 정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 파티가 정말로 위험할 뻔하고 어떻든 간에 방금 일어난 일은 그저 해프닝이었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조금 침울해 보이는 박덕구에게 다가가 위로를 건네는 전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행복해질 지경이다. ‘초보자 시절이 없었던 사람은 없거든.’ 모두가 고달팠던 시절이 있다. 저들도 한때는 초보자였다. 실수 한 번 해보지 않은 이들은 없다. 특히나 탱커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럴 것이다. 파티의 앞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과 가장 전위에서 적을 막아야 한다는 스트레스. 자신의 실수로 동료가 죽을 수 있다는 것 역시 부담으로 다가올 것이다. 저곳은 그 모든 걸 짊어지고 싸우는 자리다.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공격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흘린다는 생각으로 하는 게 더 좋을 거야, 후배.” “고, 고맙소.” “언제 어디서라도 응? 하체에 힘을 꽉 쥐면서 버티는 게 중요한 거야 알겠지?” “알겠소. 선, 선배….” “방금 그런 상황을 우리끼리는 벌러덩이라고 부르기는 하는데… 중형이나 대형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는 모두 그런 상황을 겪기도 하거든. 푹찍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푹찍….” “그래. 이 친구는 처음에 중형 몬스터와 마주쳤을 때는 겁먹어서 움직이지도 못했다니까.” “어이, 내가 그거 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사실 그렇게 벌러덩 넘어가 버렸다는 것도 용기가 있었다는 증거야, 형제. 겁먹지 않고 제대로 마주했다는 증거니까. 침울해하면 좋지 않아. 만약에 넘어 갔다고 해도 다시 중심을 잡고 끈덕지게 달라붙으면 돼. 네 파티원도 나약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뒤에 있는 동료들을 믿고 끝까지 버티는 게 중요해.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뭘 해도 할 수 있어.” “고맙소. 형씨….” “그러니까 힘내라고.” “다음에도 넘어가면 안 된다.” “그럼 앞으로도 평생 놀림 받을 거라고! 푸흐흣! 벌러덩이라고. 경험담이니까 새겨들어.” 자기들끼리 선배니 후배니 형제니 말하는 걸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전위들의 커뮤니티가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끈끈한 모양이다. 꽤나 귀족 직업으로 분류되는 것은 물론, 그 수가 그리 많지 않다 보니 자신들끼리 여러 가지 정보를 주고받고 있는 것 같았다. 덩치들에게 둘러싸인 박덕구를 보니 괜스레 흐뭇해진다. 서로 등을 두드려 주거나 근육을 과시하는 땀내 나는 우정에 굳이 합류하고 싶지는 않지만 멀리서 바라보기에는 나쁘지 않은 장면이다. ‘멍청한 년.’ 나였으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을 것이다. 세상은 약자의 편이니까. 조금은 기분이 풀린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웃고 있는 박덕구는 꽤나 귀엽다. “형님!” “덕구야. 이것 좀 저분들에게 가져다주고 와라.” “엉?” “체력 포션이야. 시중에 파는 것 보다는 좋을 거다. 아마 여러 가지 가르쳐 주신 것 같은데 보답해 드려야지.” “아. 그래야지! 고맙소, 형님!” 다시금 덩치 무리로 후다닥 달려가는 박덕구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런 게 사회 생활이라는 거다. 굳이 가치를 매기자면 5골드도 하지 않을 체력 포션으로 여러 가지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박덕구는 저들의 커뮤니티에서 조금 더 진득하게 붙어 있어야 했다. 그게 우리한테도 이득이니까. 김현성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박덕구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 형님이 주신 건데 말이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기영 씨!” “딱 봐도 이거 상당한 포션인데… 시중에 이런 게 나온 적이 있었나?” “아니. 등급 판정을 받은 물약도 없는 마당에 무슨…. 파란에서 괜히 연금술사를 영입한 건 아닌 것 같네.” 물론 그 와중에 내 주가를 올리는 것은 덤이다. 아무튼 간에 파티는 조금씩 던전 내부로 진입하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덩치들은 박덕구에게 이것저것 조금씩 가르쳐 주기 시작했고 다음 몬스터가 나온 이후에도 별 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함께 전위에서 싸우는 덩치 큰 형제들이 알게 모르게 박덕구를 배려해준 것. 쓰러지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거나 등을 두드려 준 것이 전부였지만 녀석은 점차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물론 전혀 실수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잔 실수들이 눈에 띄었고 그것이 정유라의 먹잇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처음처럼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후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쉬거나. “조금 불안정한 것 같네요.” 그러나 별로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다. 공허 속의 메아리라고 하는 게 가장 어울리리라. “인원이 많아서 그런지 조금 복잡한 것 같네요. 조금 더 빨리 정리할 수 있었는데….” “하하하. 그래도 안전하게 잘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냥 아쉬워서 하는 소리예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뭔가 턱턱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저희가 완벽한 파티가 아니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만약에 같은 길드에서 나온 원정대였다면 손발이 조금 맞았겠지만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마 차차 나아질 겁니다.” “네. 당연히 그래야죠. 나아지지 않으면 안 되죠. 평소 같지 않네요.” “하하…. 그럼 잠깐 쉬었다 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뭐, 대충 이런 상황이라는 거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최영기를 향해서였다. 뭐 별 다른 대화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한 번쯤은 이야기를 나눠봐야 된다고 생각했고 잠깐 캠프를 차린 지금이 적당한 타이밍이라고 여겼으니까. “최영기 씨.” “아! 기영 씨!” 역시나 반갑다는 얼굴이다. 당연한 반응. 용병여왕의 정부를 상대하는 거니까. “고생하십니다.” “아니, 아니, 아닙니다. 이리 앉으시죠.” “차희라 님은 잘 지내십니까?” “하하하. 안 그래도 그것 관련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정하얀은 여전히 마도 길드에게 붙잡혀 있는 상태다. 저쪽은 굳이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저희 마스터께서 얼마나 기영 씨를 챙겨달라고 말씀하시던지 이거 참. 하하.”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챙겨드리지 못해서 죄송한 게 많습니다.” “아뇨. 이해합니다. 이미 여러모로 배려 받고 있는 상태였는데… 다른 쪽으로도 그러면 조금 눈치가 보여서 말입니다.” “아. 그….”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슬쩍 정유라 쪽을 바라보던 녀석은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방금 전은 죄송했습니다. 제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아뇨. 아뇨. 잘못은 저희 파티가 한 게 맞지요. 사실 이해해 주시고 있는 다른 분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이 큽니다. 막아주셨을 때는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처음에는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정말로 잘 적응해 주시고 있습니다. 역시 모두의 기대를 받는 신입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기영 씨 때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습니다. 그나마 저희 마스터가 신경을 많이 써주셔서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죠.” “하하하.” “저희 마스터와 지구에 있었을 때부터 연인이셨다고 들었습니다.” ‘…….’ 내가 모르는 새로운 설정이 등장해 조금 당황했지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특히나 마스터께서 힘이 드셨을 때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마스터께서는 이기영 님을 은인이라고 말하시더군요.” 이것도 새로운 설정이다. “네… 네. 분명히 그런 기억이 있기는 있습니다만….” “마스터의 은인이라면 사실 제게도 은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용병여왕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생각보다 좋은 종류의 설정이다. ‘고맙다, 차희라.’ 이런 참신한 설정을 생각해 낸 차희라에게는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왠지 모르게 이쪽을 바라보는 정하얀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아마 제대로 들을 순 없을 거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도움이라고 할 것도 없었고….” “하하하하. 그게 도움이 아니면 뭐가 도움이겠습니까. 사실상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주신 것이나 마찬가진데 말이죠.” ‘뭔 개소리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해놨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 그렇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나와 차희라의 과거가 아니다. 이 최영기라는 파티의 리더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사람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내 생각보다 조금 더 좋아 보이는 것 같다. 어떻게든 이쪽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붉은용병에서 온 파티는 내 텃밭이나 다름없는 모양, 꽤나 심각한 갈등이 생겼을 때도 이쪽을 지지해줄 수 있는 확실한 기반이었다.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정유라를 바라보니 괜스레 입고리가 올라갔다. 그녀에게 소리칠 수 있다면 한마디 해주고 싶은 타이밍이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 ‘민생을 돌보는 거라고.’ # 62 회귀자 사용설명서 062화 던전 공략은 정치다(4) 민생을 돌보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구에서 높으신 분들이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스윽 한 번 시장을 둘러보며 친근감을 느끼게 해주면 그걸로 끝. 물론 나 같은 경우와는 상황이 다르다. 나는 저들의 위에 있다곤 할 수 없는 입장. 그렇다고는 해도 아예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다. 잠깐 쉬는 시간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캠프를 차릴 때마다 열심히 챙겨준다. 원정 중에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안 그래도 마도 길드 같은 경우에는 정하얀에게 이상할 만큼의 호감을 느끼고 있었고 붉은용병의 파티원들 역시 내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다. 살짝살짝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물론 정하얀과는 별개로 마도 길드의 파티원들을 관리하는 것도 필수다. 이쪽 편에 서게 될 좋은 여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하하. 거의 신성 마법과 효율이 비슷할 정도의 포션인 것 같습니다, 기영 씨.” “과찬입니다. 사제님들이 들으실까 부끄럽군요.” “사실 마법의 화력도 그렇게 밀리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더군요. 어떻게….” “마도 길드에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괜히 기분이 좋네요.” “아뇨. 아뇨.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닙니다. 사실 평범한 마법사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주문을 외우는 게 조금 더 오래 걸리거나 연성 마법진을 사용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기는 있습니다만 괜찮은 촉매만 있다면 효율이 좋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효율이라고 함은….” “적은 마력으로도 괜찮은 화력을 가진 주문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아아아아.”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문을 외우기 위해 들어가는 촉매의 비용이 제법 나가니까요.” “혹시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약 30골드입니다. 주로 마력의 정수를 이용하니까요.” “아! 마력의 정수.” “네. 하급 마법을 사용하는 데 들어가는 정수의 비용이 30골드입니다.” 조금 놀라워하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그보다는 조금 질렸다는 표정. 말하자면 주문을 외울 때마다 30골드가 빠져나간다는 셈이 되는 거니 아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물론, 일반 등급의 마력의 정수 같은 경우에는 창고에 쌓여 있다. 차희라가 이쪽에 선물해 준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확실히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군요. 그럼 혹시나 희귀 등급 이상의 마력의 정수는 한 번 사용하면 사라지는 겁니까?” “예.” “그건 조금 아쉽군요.” “만약에 무한정으로 마력을 뽑아낼 수 있는 정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현자의 돌이라고 부를 만하겠죠.” “현자의 돌. 아아아… 현자의 돌이라….” 이런 주제들이 마법사들이 환장하는 대화라는 거다. “만들 수는 있는 겁니까?” “제가 공부하고 있는 책에서도 잠깐 잠깐 언급된 정도입니다. 아직 연구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죠. 제대로 공부하기에는 아직 제가 부족하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꼭 만들어낼 겁니다.” ‘현자의 돌은 개뿔.’ “저… 혹시 연구가 시작된다고 한다면….” “네. 물론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것도 인연이니까요.” 보통 마법사가 되는 인간은 이런 종류의 인간이다. 연금술이라는 분야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면 나와의 대화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걸로 마도 길드의 마지막 녀석과도 제법 가까워졌다. 아무튼 간에 이 원정대의 던전 공략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우리 파티도 타 파티에 훌륭하게 녹아들고 있었다. 김현성이 내 생각을 알고 있는 건지 모르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얻어 가는 것들은 확실히 있다. 박덕구의 경우에는 탱커들의 커뮤니티로 들어가 여러 가지 노하우를 빼내고 있었고, 김예리 역시 꽤나 훌륭히 적응에 성공했다. 물론 아직까지 1인분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양 갈래 머리를 한 꼬마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애초에 스펙 자체가 뛰어난 선희영 같은 경우에는 적응하는 데 별 무리가 없어보였고 나 역시 그리 나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정하얀과 함께 마법을 쏘다 보니 별로 티가 나지 않는 게 원인이리라. 우리 여우 김현성 같은 경우에는 지나치게 나서지 않는 듯한 느낌. 힘을 숨기는 타입은 아닌 만큼 몸을 사리기보다는 움직일 기회가 없다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그만큼 원정대의 공략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그럼 잠깐 볼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네. 아무래도 오늘은 이곳에서 묵을 것 같더군요.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아까의 대화를 다시 한번 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현자의 돌이라는 게 뭔지… 자세히….” “네. 물론입니다.” 볼 일은 보기 위해 살짝 원정대가 있는 곳으로 벗어나 세이프 포인트에 도달했을 때였다. ‘그럼 그렇지.’ 정유라가 슬그머니 이쪽으로 다가온 것. 슬슬 행동할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빠르다. “경험을 하러 온 줄 알았더니 친목질이라도 하러 들어왔나 보네요?” 심지어 꽤나 직접적으로 물어와 조금 당황할 정도였다. ‘그렇게 거슬렸었나?’ 어쩌면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쉬는 시간마다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고 여론을 휘어잡는 작업을 하는 것에 여념이 없었으니까. 자신과 내가 동류라고 생각했다면 정치적으로 위협을 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공략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나는 모두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으니까. “하하하.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유라 씨.” “그야 해도 해도 너무 하는 것처럼 보여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기영 씨.”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팀워크를 위해 친분을 다지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전에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으니까요.” “그 정도가 너무 과하니까 하는 소리예요.” “무슨 말씀이신지?” “적당한 긴장감마저 해치고 있다는 소리를 하는 겁니다. 너무 편한 모습을 보이는 건 좋지 않아요.” “던전을 공략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선은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아주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 실수했던 저희 쪽의 전사 역시 무척 잘 적응해 주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분위기 좋게 공략에 임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요.” 정론이다. “저기요. 기영 씨.” “네? 유라 씨?” “아직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나 본데… 던전이란 건 언제 어디서 무슨 위협이 있을지 모르는 장소예요. 아무리 쉬는 시간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기영 씨가 분위기를 흐리고 있다는 거 정말로 모르시겠어요?” “네.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파티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처음보다는 분위기가 좋아졌으니까요. 유라 씨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인상을 찌푸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어느 정도 긴장해야 하는 건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원정 중에는 진지한 모습으로 임하고 있다는 생각했었는데…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정확히 요지를 모르겠습니다.” 실실 웃으니 붉어진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말은 정론이다. 그렇지만 표정을 살살 약 올리는 것처럼 지으니 금방 금방 반응이 오는 게 꽤나 재밌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도발에 특화되어 있는 얼굴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파티 내에 있을 영향력 같은 걸 걱정하고 있지는 않을 테고…. 던전 공략의 보상으로 나올 아이템이 욕심나는 것도 저얼대 아니실 텐데…. 왜 이렇게 저희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희귀 등급의 아이템이면 당연히 탐이 나서 비벼보고 싶기야 하겠지만… 설마 검은백조 길드에서 밀어주고 계시는 정유라 님께서 그런 욕심을 낼 리가 없겠죠.” 아마 심장이 쿡쿡 쑤셔올 것이다. “어쩌면 영웅 등급의 아이템이 나올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고작 좋은 장비 하나 먹자고 이러는 건 조금은 치사하지 않습니까. 저라면 차라리 양보하고 말았을 겁니다. 뭔 정치질을 그렇게 심하게 하시는지… 아, 혹시 제가 착각했다면 정말로 죄송합니다.” 얼굴이 무척이나 붉어져 있다. 물론 나 역시 영웅 등급의 장비가 등장한다면 눈이 돌아가기야 하겠지만 속물이 아닌 척하는 것은 굉장히 쉽다. “혹시 정곡을 찔렀….” “야.” “네?” “내가 우스워?” “아뇨. 절대로 우습지 않습니다. 절대로 우스울 리가 없지요. 검은백조의 정유라 님이신데 말입니다. 그런데….” “…….” “왜 반말을 하고 그러십니까. 응?” 기가 차다는 얼굴이다.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에 당황한 모양이다.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고 보는 사람도 없다. “저는 엄연히 파란 길드에 정식 파티에 등록되어 있는 길드원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안 되죠. 정유라 씨.” “허… 차희라의 기둥서방이라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여기에서도 용병여왕이 너를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방금의 말은 저를 어떻게 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정유라 씨. 발언을 조심해 주셔야죠. 그리고 제가 믿고 있는 건 희라 누나가 아닙니다.” “뭐?” 살짝 숨을 들이킨다. 내 입에서 다음에 나올 말이 뭔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당연히 이곳에서 쓸데없이 드잡이를 할 마음은 없다. 괜한 다툼으로 이미지를 깎아 먹는 것은 최대한 지양해야 되는 일이었으니까. 대신 조금은 큰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뭐?” 조금은 멀리 떨어져 있는 원정대가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이다. “너… 지금 무슨 개짓거리를….”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 더 크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사과의 말을 전하자 무척이나 당황스러워하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그야 저런 표정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다. 뜬금없는 타이밍에 나온 목소리였으니까. 그렇지만 어째서 내가 진심어린 마음의 사과를 보낸 건지는 대충 감이 온 모양. 표정이 구겨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역시나 헐레벌떡 뛰어오는 최영기와 그의 친구들이 보인다. 심지어는 방금 전 대화를 나눴던 마도 길드 사람들 역시 눈에 띄기 시작한다. 물론 정하얀과 선희영을 비롯한 우리 파티원과 검은백조의 파티원도 보인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유라 씨.” “너….” “기영 씨? 이게 무슨 일 입니까?” “아… 아니요. 별일 아닙니다.” “네… 네. 별일 아니에요. 최영기 님.” ‘별일 아니긴….’ “저는 유라 씨에게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기영 씨,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고맙게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붉은용병의 최영기는 이 일을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한다. 정하얀은 무슨 일인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지만 일단은 피해자가 된 내 모습에 조금 분노하는 모습을 보내고 있었다. ‘선희영은 왜 저래?’ 선희영 역시 마찬가지. 피해자를 연기하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특히나 힘의 차이가 명백한 이런 상황에서는 말이다. “무슨 일입니까? 기영 씨.” “그게….” “…….” “별것 아닙니다. 그저 조금 긴장하고 주의하라는 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네?” “아무래도 쉬는 시간 동안 여러분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잠깐 긴장을 놓고 있었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제가 분위기를 흐리고 있다고 하셔서….” “네?” “저 나름대로는 분위기를 좋게 하자는 의도였는데… 아무래도 탐탁지 않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거짓 하나 들어 있지 않은 진실이다. 무척이나 황당해하는 정유라의 모습은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게 보인다. 순도 백 퍼센트의 진실이 밝혀지자 모두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붉은용병의 최영기와 마도, 심지어는 김현성까지 조금은 무거운 눈빛을 그녀에게 보내고 있었다. “죄….”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보내려고 했던 바로 그때.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기영 씨.” 말을 막은 것은 사랑스러운 내 동생 김현성이었다. ‘얘, 화났나?’ # 63 회귀자 사용설명서 063화 던전 공략은 정치다(5) 확실히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이었다.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기영 씨.” “네?” “기영 씨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아니 설사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유라 씨가 굳이 기영 씨의 잘못을 지적할 권리는 없습니다.” ‘잘한다.’ “엄연히 기영 씨는 파란의 파티원입니다. 만약에 실수했다고 생각했다면 제가 먼저 말씀을 드렸을 겁니다. 어째서 유라 씨가 먼저 우리 파티원의 행동을 문제 삼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쁘군요.” 사실 이것까지는 계산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단순히 여론을 조작해야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한번 떠올려 보니 김현성이 기분이 나쁜 것도 당연하다. 엄연히 정유라가 한 행동은 월권다. 내 소속은 파란. 나를 관리하는 일 역시 김현성의 일이라는 것. 아무 상관없는 정유라가 이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본인의 입장에서는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혹은 선배의 입장에서 던질 수도 있는 소리였지만 이 대륙에서 진득하게 오래 붙어 있었던 김현성의 상식 내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말하자면 타 파티원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은 금기라는 게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는 룰. 정유라는 그 룰을 어긴 셈이 된다. ‘우리 파티를 호구로 봤다는 거지.’ 김현성의 발언을 간단하게 직역하자면 이렇다. ‘도대체 네가 뭔데 우리 애들을 건드리느냐.’ 박덕구 때처럼 공략을 이끌고 있는 최영기에게 하는 소리도 아니고 굳이 나를 이곳으로 불러내 한 소리를 하는 건 확실히 문제가 있다. 따뜻한 김현성의 품이라는 건 예상보다 조금 더 행복한 공간이다. ‘아주 좋아.’ 상황은 아주 좋게 돌아가고 있다. 사실 화를 내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 시누이를 연기하기 위해 감정을 잡기는 쉽지 않았지만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이 배역은 내게 딱 들어맞는다. “현성 씨, 유라 씨는 선배의 입장에서… 한 말씀 해주신 것… 같습니다. 딱히 그럴 의도는 없으셨던 것 같은데….” “아닙니다, 기영 씨.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식으로는 아닙니다.” “저도 잘못한 것이 분명….” “확실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영 씨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솟아 오르려는 입꼬리를 막을 수가 없다. 당황하고 있는 정유라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 비호감 지지율은 천장을 꿰뚫을 지경. 별것 아닌 선동으로도 이미 당선이 확정된 정유라를 보니 정말로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푸핫.’ 그 와중에도 나에게는 격려의 말들이 쏟아져 내리는 중. 위로를 받는 것도 일이다. “아직 기영 씨가 이곳에 오신 지 잘 모르셔서… 현성 씨 말이 맞습니다. 만약에 기영 씨에게 직접 할 말이 있었다면 적어도 파티장에게 양해를 구하는 게 맞습니다. 저런 식으로 뒤에서 따로 불러내 잘못을 지적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이건 아니지요. 아무리 잘못했다고 한들 이런 식으로는 아닙니다.” “파란의 파티가 경험이 부족해 배우고 있는 입장이라곤 하지만 파란 역시 던전행을 함께 진행하고 있는 파티 중 하나입니다. 못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제 역할을 충분히 잘해주고 있는 상황에서… 검은백조의 행동은 정말로 이해하기 힘드네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예의에 대해서 말을 하는 마도 길드. “기영 씨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공략을 진행될 때는 실제로 열심히 임해주시기도 했고….” “아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사실 어디 이런 분위기로 공략을 진행하는 게 쉬운 일인가. 다른 파티 들어가면 싸우고 헐뜯는 게 일상다반산데….” “의사소통은 중요합니다. 솔직히 검은백조가 뭐한 게 있다고 저러는 건지 원….” “쯧….” 감정에 충실한 붉은용병까지 함께해 주고 있다. 물론. “너무한 것 같습니다. 쯧.” “유라 씨, 이렇게까지 하는 건 조금 심하지 않습니까. 엄연히 같이 원정을 나온 파티입니다.” “어휴….” 정유라 그녀에게도 직접적인 비난에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사전에 치밀한 설계가 없었다면 이런 그림은 만들어내지 못했을 거다. ‘이래서 이미지가 중요한 거지.’ 이래서 평소 쌓아왔던 이미지가 중요하다. “오빠…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응. 괜찮아, 하얀아. 별일 아니야.” “정확히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괜찮습니다, 희영 씨. 아까 전에 말씀 드렸던 게 전부입니다.” 사실 따귀라도 한 대 맞았으면 정말로 좋을 뻔했다. 그렇지만 정유라도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은 모양.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면 정하얀이 정유라 암살 작전을 계획할지도 모르는 만큼 이 정도가 딱 적정선 이기는 하다. 아무튼 간에 흘러가는 상황은 이쪽에 무척이나 유리하다. 정유라는 계속해서 표정을 구기고 있었고 나에게는 계속해서 위로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었다. 사과할 필요 없었다거나 오히려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 졌다는 것이 주된 평가. 딱히 모난 짓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원정대에 활기를 불어 넣었으니 당연한 반응이리라. 솔직히 여기서 정유라가 어떤 선택을 할지가 제일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 ‘잘못을 인정하고 납작 엎드리기.’ 그나마 이게 제일 나은 선택이기는 하지만, 그럴 경우 결과가 그리 좋지 않을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미 무너져가는 위치라고는 하지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그녀의 입지가 더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조금 밉보이는 걸 감수해서라도 자신이 파티에 기여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하는 것이 맞다. 그게 가장 옳은 선택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딱 중간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녀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인 것 같았다. “일단은 죄송합니다.” 사과하되 너무 저자세로 나오지 않겠다는 것. ‘멍청한 년.’ “기영 씨는 엄연히 제 파티원이고 제 관할 아래 있습니다.” “미리 말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현성 씨. 그리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상처 받았을 기영 씨에게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단순히….” “제가 조금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긴장감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만약에 정상적인 파티로 이루어진 원정대라고 한다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겠지만….” ‘등신.’ “조금이지만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선배로서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방법이 잘못됐다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정유라 씨가 기강을 바로 잡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첫 번째에 저희의 실수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후에는 그렇게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잔 실수가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내 생각보다 꽤나 괜찮게 대처하고 있는 모습.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내가 잘못하기는 했다. 그런데 너희들 실수했잖아? 솔직히 우리 등에 업혀가는 입장인데 이 정도는 이해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너희들 경험 없잖아. 배우려고 온 거잖아. 그럼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래도 방법이 잘못되기는 한 것 같네. 미안하긴 미안하다.’ 궤변이기도 하지만 정론이기는 하다. 만약 여론을 등에 업은 것이 그녀였다면 내가 당선됐을 수도 있을 만큼 훌륭한 대처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백조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많은 탱커분들이 파란의 탱커분을 배려해 주고 있는 거잖아요. 만약에 그게 아니었으면 조금 더 원활하게 진행됐을 거예요. 저희의 부담도 조금 줄어들었을 거고요.” “파란의 궁수분도 사실 일인분을 하고 있다고는 판단하기 힘들고….” “연금술사분도 사실 전투 직군은 아니어서….” 사과를 하면서도 우리 파티 자체를 물고 늘어지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반대되는 의견도 튀어나온다. “그렇지만 방해가 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하얀 씨의 마법 때문에 도움을 받은 적도 많고 무엇보다 선희영 씨가….”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습니다. 벌써부터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지만 이렇게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좋지 않다. 말하자면 의미 없는 심판대에 올라가 버린 셈. 긍정적인 분위기든 부정적인 분위기든 일단 심판대에 올라갔다는 건 확실히 불리하다. 이쪽을 심판대에서 빠르게 내리고 검은백조를 올리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조금 굳어져 있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 것. ‘역시.’ 김현성의 부처의 환생이라고 해도 화가 날 것이다. 대충 보기에도 김현성은 정치질에 익숙해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우리 파티가 정치질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저희 파티에게 할 말이 있으시면 저를 통해서 직접 해주시면 됩니다.” “네. 정말로 죄송합니다, 현성 씨. 그리고 마음고생 하셨을 파란 파티분들께도 무척이나 죄송합니다. 특히 기영 씨에게는 정말로 죄송해요.” “아닙니다. 조금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요.” “저도 깜짝 놀랐네요. 상처 받으실 줄은 몰랐는데… 나중에 따로 이야기라도 나누도록 해요.” “뭐, 그렇진 않습니다. 조금 당황했을 뿐이죠.” 우리를 심판대로 올리기는 했지만 저년이 잃은 것도 많다. 여론을 잃는 순간 정치생명은 끝이라는 걸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어쩌면 이 여론을 뒤집을 만한 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가지고 있는 것은 뻔하다. 이 원정대에 더욱더 열심히 기여하는 것. 말하자면 원정대의 안전을 위해 억지로 악역을 자처했다는 느낌이었지만 가짜 악역을 진짜 악역으로 만드는 것 정도는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다. ‘어떻게 할까….’ 선택지는 무척이나 많다. 여유로운 척하지만 체크 메이트를 한 번 피한 것에 불과하다. 이미 저년은 국민비호감으로 낙인 찍혔다. 이 여론을 이용하기만 해도 그녀를 고립시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김현성은 그렇게 단순한 방법으로 해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잠깐 모여주시겠습니까.” “네.” 파티원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는 것을 눈치챘는지 다른 이들이 살짝 자리를 비켜줬고 김현성은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일단은 죄송합니다.” “아뇨. 현성 씨가 죄송할 건 없습니다. 오히려….” “아닙니다. 배우자는 입장으로 이 던전행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타 파티에게 무시 받고 계실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딱히 무시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여러 가지를 배우셨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네.” “지금부터는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본래 김현성은 책임감이 있는 녀석이다. 열이 받기는 했던 모양.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녀석을 보니 무언가 따로 생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위치를 조금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조금 더 전위에 서겠습니다. 덕구 씨는 하던 대로 계속 해주시면 됩니다. 마법을 쓸 타이밍도 이쪽에서 따로 지시하도록 하겠습니다. 희영 씨는 덕구 씨에게 조금 더 집중해 주세요. 이쪽은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리는 평소와 하던 대로….” “네.” “하얀 씨는 화력을 조금 더 늘리셔도 됩니다. 희영 씨가 계속 덕구 씨를 봐주시면 되니까요.” 본래 녀석은 절대로 호구라고 할 수는 없다. ‘아아아아.’ 그제야 김현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일선에 나서지 않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를 위해서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조금 더 사냥에 익숙해지라는 의미였을 수도 있고 혹시 모를 자만심을 줄이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우리 파티는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실제로도 계속되는 편한 생활로 인해 예전 같은 절박함이 사라지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고맙게 올라타겠습니다.’ 정유라에게 엿을 먹이고 싶은 건 나뿐만이 아니게 됐다. 검을 꽉 쥐고 있는 회귀자를 바라보며, 조금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64 회귀자 사용설명서 064화 승차감(1) “정말 너무한 것 같습니다.” “네?” “정유라 말입니다.” “아아아아.” “쯧. 성과에만 너무 집착하는 성격이랄까… 휘하에 있는 이들도 고생이 많을 겁니다.” “그렇군요.”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마 기영 씨를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저희 마도에서도 모두 정유라가 심했다는 말이 많이 나오더군요.” “다행이네요. 혹시나 폐를 끼치지 않았는지 걱정했는데….” “아뇨. 아뇨. 어딜 가나 분란을 만드는 이가 있는 법이죠. 함께 던전에 들어가면 인간성을 확인해 볼 수 있다는 격언을 이제야 실감했지 뭡니까. 최소한의 예의는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당분간 검은백조와 협연하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 정유라 저 여자와는 말입니다.” “우리 붉은용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이해가 아예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기영 씨가 사람이 좋아서 그런 겁니다. 다른 파티의 일까지 관여하는 건 월권입니다. 마지막까지 본인이 잘했다고 큰소리치는 꼴이라니…. 진심어린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에. 만약에 거슬렸다고는 하더라도 대화로 해결하거나 원정대장에게 말하는 것이 맞죠. 길드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자기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꽤나 많습니다. 실례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만약에 파란의 위세가 예전 같았다면 입도 뻥긋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하하.” “그건 그렇고 정확히 뭐라고 말한 겁니까?” “이거 참…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걱정하지 않으시고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히 말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굳이 숨길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게… 친목질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네? 정말입니까? 친목질이라고 말했습니까?” “네. 던전 공략을 하러 왔는지 친목질을 하러 왔는지 모르겠다며… 말씀하시더군요. 그저 마도 길드 여러분과 친해지고 싶은 것뿐이었는데… 제가 긴장을 놓치고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 “아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허, 친목질이라니 허….” “또 이건 말씀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 용병여왕이 너를 여기서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냐고… 말하시더군요.” “미친년.” 격한 반응을 보일 줄은 알았지만 붉은용병의 이름 모를 검사가 불편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듣, 듣겠습니다.” “들으라지. 그거 완전 정신 나간 년 아닙니까? 어디 지 주제도 모르고 용병여왕님을 걸고 넘어져? 지가 뭔데! 우리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거 아니야. 응?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영 씨. 저 거지 같은 여자가 혹시나 이번 일로 해코지라도 한다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감히 어딜…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정말 그렇게 위협받으셨단 말입니까? 지금 당장 나가서 정식으로 항의하는 게 옳습니다. 어디 할 짓이 없어 범죄자들이나 하는 짓을….” “아뇨. 아뇨. 정말로 괜찮습니다.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쯧. 편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도적 직군이나 암살자 직군 중에 저런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더군요. 도적은 신성 마법 받지 말고 뒤에서 붕대나 감으라는 소리가 괜히 나온 소리겠습니까. 다 저런 여자 때문에 나온 소립니다.” “하하….” 적당히 말리는 듯한 행동이 중요하다. 취해야 할 포지션은 어디까지나 시누이의 포지션, 전위에 나서지 않아도 이미 어느 정도 분위기는 만들어져 있었다. 정유라는 우리 모두의 주적이라는 분위기 말이다. 방금의 대화뿐만이 아니다. 한차례 소동이 지나간 이 후에는 모두 내게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를 꺼냈고 마치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정유라에겐 한마디 내뱉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를 심판대로 올린 것치고는 지나치게 큰 대가를 치룬 것이다. ‘물론.’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유라도 괜스레 이곳저곳 기웃거리고는 있었지만 소득이 없는 게 당연하다. 애초에 지나친 친목질이 좋지 않다는 발언을 한 것은 그녀라는 사실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모두 뒤에서 내가 열심히 이빨을 털어준 덕분. 이미 여론을 관리하려고 해도 관리할 수가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 잘하는 게 중요한 거야.’ 누가 봐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웃음이 나오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녀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싸늘한 시선이 들어와 꽂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특히나 용병여왕을 언급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붉은용병 길드 내에서의 평가는 완전히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오죽하면 원정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최영기가 파티원들에게 조금만 참아달라고 이야기했을까. 실제로 몇몇은 같이 던전 공략에 임할 수 없다며 성화를 냈으니 중재자의 입장에 서 있는 최영기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자, 그럼 다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정리하자면 이곳에서 정유라의 입지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비벼볼 수 있는 것은 앞으로의 공략에서 최대한 활약하는 것이겠지만 김현성이 풍겨오는 분위기를 보면 그것도 원활할 것 같지는 않다. 우리의 실수를 비집고 들어가 ‘그럴 줄 알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터. 극단적으로 말하면 사고가 나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 그럼 저는 다시 가보겠습니다.” “네.” 파티의 분위기 자체가 조금 달라졌다. 더 이상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기본. 김현성의 묘한 분위기 때문인지 모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히 녀석은 리더의 자질이 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분위기를 바꾸는 힘이 있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덕구 씨. 최대한 후방에만 집중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 알겠소.” “예리야, 다른 곳은 상관없으니까. 검으로 상처가 난 곳을 집중적으로… 알겠지? 기왕이면 마력을 싣는 게 좋을 거야.” “네…….” “하얀 씨와 기영 씨는 잘하고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희영 씨는 저를 봐주지 않으셔도….” “네. 기억하고 있어요. 현성 씨.” “좋습니다.” 다른 파티원들 역시 묘한 열의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차라리 빨리 괴물이 그 모습을 드러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세이프 포인트를 벗어난 것은 금방이었다. 언제 어디서 녀석들이 들어올지 모르는 만큼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궁수들이 눈에 띄었다. 정원이라는 이름이 붙기는 했지만 마치 거대한 정글 같은 느낌의 주변 환경이다. 어떤 것이 식물이고 어느 것이 몬스터인지 구분하는 것도 힘든 만큼 더욱더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당연하리라. 나 역시 함께 상황을 살피고 있었을 때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문을.” “네.” 어째서 지금 주문을 외워야 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하면 광명이 열릴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정하얀도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내 속도에 맞추기 시작한다. “주여.” “빼앗기지 않는 힘을.” “지킬 수 있는 힘을.” “불꽃을.” “바람을.” 이런 식으로 목소리가 교차되는 것이 정하얀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내가 주문을 외우는 속도에 맞춰 마력을 꾸역꾸역 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화음을 쌓는 것 같은 느낌은 나도 꽤나 즐겁다. 촉매에 마력을 불어넣고 마력의 탑을 계속해서 쌓아간다. “전투 준비합니다.” 최영기가 전투를 알렸다. 어째서 주문을 외워놓으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는 중형 몬스터. 심지어 첫 번째로 봤던 녀석보다 덩치가 더 크다. 전위들이 앞에 있기는 하지만 조금 움츠려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구어어어억! 우리 회귀자를 믿는다. 김현성이 앞으로 달려 나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당신 뭐하는 건가요?” 잘 됐다는 듯이 김현성의 꼬투리를 잡는 정유라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 괴물은 틀림없이 박덕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김현성의 조언대로 선희영의 신성 마법이 박덕구 쪽에 쏟아졌다. 괴물의 거대한 주먹이 박덕구에게 떨어지기도 전에 괴물의 한 쪽 팔이 갈라지기 시작. 누가 저 팔에 상처를 냈는지는 뻔하다. ‘허.’ 숨을 돌리기도 전에 김현성이 말 했던 것처럼 김예리의 화살이 팔 쪽에 쏟아졌다. 순식간에 팔 하나를 잃은 괴물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준비를 하던 박덕구도 그 광경에 조금 당황한 모습이었지만 뭔가에 홀린 듯이 위치를 오른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전위의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내 눈에는 마치 김현성이 박덕구가 움직여야 할 곳을 정해준 것처럼 보인다. 나머지 한쪽 팔로 박덕구를 찍어 누르려는 녀석이 방패를 부수려던 차, 그 팔마저 검에 찢겨져 나간다. 두 팔이 없어지고 훤한 몸통을 드러내고 있는 괴물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마법을.” “화염.” “폭풍!” 김현성의 입을 여는 타이밍과 거의 동시에 정하얀과 함께 주문을 외웠다. 내가 외운 화염 주문의 공격력을 키우기 위한 콜라보였지만 사실상 정하얀의 공격력 자체에 많이 의지하고 있는 주문. 식물거인의 발밑에서 올라온 화염의 폭풍은 녀석을 금방 집어삼켰고 녀석은 곧 거대한 비명을 내지르며 허물어졌다. 박덕구가 범위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 같지만 선희영이 박덕구를 마크하고 있으니 아마 괜찮을 것이다. “다음.” ‘하….’ 결코 김현성의 스펙이 높은 것은 아니다. 실제로 김현성의 능력치는 저들과 크게 차이가 없었으니까. 이건 스펙 이전의 문제. 경험, 센스. 뭐라고 정확히 정의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김현성이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것 하나는 제대로 느껴진다. 양 갈래 머리 꼬마 김예리가 화살을 날려야 할 타이밍을 계속해서 말해주고 있었고, 박덕구가 움직이는 길을 인도하고 있는 느낌이다. 나나 정하얀 역시 마찬가지. 어떻게 공격을 해야 하는 건지 어떤 타이밍에 주문을 외워야 하는 건지 이끌어 주고 있다. 말로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야.’ 라고 정확히 집어주는 것만 같다. 빠르게 다시 주문을 외우는 순간에 딱 맞춰서 빈틈을 드러내는 몬스터에게 다시 한번 마법을 퍼붓는다. 다른 파티가 굳이 박덕구를 도와주기도 전에 박덕구 스스로가 홀린 듯이 움직이고 있다.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사냥이 쉽다고 느끼기는 처음. 나와 정하얀이 하는 일이라고는 주문을 외우고 쏘고 주문을 외우고 쏘는 것밖에 없다. 물론 놈들의 공격 패턴이 무척이나 단순하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겠지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주문 하나에 몬스터 하나가 쓰러지는 진풍경을 바라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른 파티 역시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몬스터에게 집중하고 있지만 갑자기 달라진 우리 파티에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정유라 같은 경우에는 조금 경악한 표정.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회귀자 버스가 편할 거라고는 생각은 했지만….’ 본격적인 라이딩은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 너무나도 편한 시트 때문인지 바지를 갈아입고 싶어질 정도다. “다음.” ‘승차감 지리는데?’ 마치 나도 함께 괴물 대열에 합류한 것만 같은 기분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런 게 버스구나.’ 사실 버스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고급 세단도 이렇게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 65 회귀자 사용설명서 065화 승차감(2) 이미 다른 사람들의 입은 벌어질 대로 벌어져 있는 상황. 그야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 김현성이 현재 보여주는 모습은 이곳에 들어온 지 1년도 안 된 사람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단순히 스탯이 높다는 의미가 아니다. 김현성은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탯의 약 2배가 넘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근접직군이 아닌 내가 뭐라고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겠지만, 다시 말하면 자세하게 알지 못하는 내가 봐도 특별하다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붉은용병의 최영기를 비롯한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할 뻔자. ‘괴물.’ 혹은. ‘천재.’ 얼굴에 전부 드러나 있다. 물론 고평가를 받는 것은 김현성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정하얀이 보여주고 있는 마법의 화력도 상상 이상. 사실 나 같은 경우에는 반 이상을 정하얀에게 의지하고 있었지만 화력의 제한을 두지 않아도 되는 마법은 착실히 놈들에게 틀어박히며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박덕구를 케어하는 선희영의 존재와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김예리도 마찬가지다. 이제야 완벽한 한 팀이 된 것 같은 모습.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사냥을 하는 이 일련의 과정이 재미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퍼즐이 딱딱 맞춰졌을 때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사냥을 통해 느낀다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다. 애초에 느낄 수 있다는 게 당황스럽다.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나서서 파티를 이끌어 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다르긴 다르네.’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완벽한 파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문을 계속해서 외우는 동안 슬그머니 정유라를 바라보자 무척이나 당황한 듯한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그러시겠죠.’ 애초에 그녀의 알 수 없는 자신감의 근원은 사냥에서 기여한다. 여론이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원정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악역의 포지션에 섰다는 것이 계획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던 간에 대외적으로 이미지가 나빠졌다는 건 바꿀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악역을 자처했기 때문에 던전의 공략이 가능했다는 언론 플레이는 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 모든 계획이 망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웃음이 나올 것 같다. “다음.” 뭔가에 홀린 듯이 주문을 외우고 마법을 던진다. 거대한 녀석들이 하나하나 쓰러져 갈 때마다 왠지 모르게 찌릿찌릿한 뭔가가 올라온다. 정유라의 표정이 구겨질수록 이쪽의 입꼬리는 올라간다. 결국에는 눈앞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이 바닥에 쓰러졌을 때, 장내에는 묘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대부분 방금 전에 있었던 전투가 정말 실화인 건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김현성을 보고 있다. 길어진 침묵이 부담스러웠는지 최영기가 먼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천재가 정말로 있기는 있는 모양이로군요.” “과찬이십니다. 여러분을 보고 흉내를 내본 것이 전부입니다.” “아닙니다. 저는 물론 이곳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흉내 낼 수 없을 겁니다. 단순하게 스펙이 좋다기보다는 뭐랄까. 경험이 무척 많은 전사 같은 느낌이라고 하는 게 어울리겠군요. 솔직히 조금 자괴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현성 씨에게도 파티원 분들에게도 말입니다.” “그런….” “파티원 분들도 전체적으로 많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솔직히 파란이 비싼 가격을 들여 여러분들을 영입했을 때는 조금 무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들었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니 올바른 판단이었다는 게 피부로 느껴집니다. 파란이 예전의 위세를 되찾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군요.” “부끄럽습니다.” “하하하. 혹시나 나중에 잘되시면 잊으시면 안 됩니다.” 최영기 같은 인재는 절대로 잊지 않는다. ‘나중에 잘해줄게.’ 당연하지만 우리 파티를 다시 보고 있는 것은 최영기뿐만이 아니다. 뭔가 얼떨떨한 느낌이기는 했지만 좋은 모습을 보여준 박덕구나 김예리에게도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오죽하면 몬스터의 사체를 수습하는 일이 늦어지고 있는 상황. 연구에 쓸 만한 것들이 나올까 싶어 사체를 뒤적거려 봤지만 아직까지 나온 것은 없었다. 이렇게 모두가 훈훈해진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것은 정유라 밖에는 없다. ‘어떻게 나오려나.’ 가장 궁금한 것은 역시나 그녀의 노선. 이번에도 선택지는 두 가지다. 앞으로의 좋은 관계를 위해 납작 엎드리거나 아니면 이전의 태도를 고수하든가. 물론 첫 번째 선택지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이전의 자신이 했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철회해야 될 정도로 낯짝이 두꺼워야 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존심을 아무렇게도 않게 던질 수 있을 정도로 졸렬해야 했다. 쉬워 보이기는 하지만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물론 나 같은 경우에야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 던질 수 있는 것들이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의외로 던지기 힘든 것들이다. 특히 지금의 정유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다. 정말로 위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가치로 여기고 있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자존심을 던질 줄 안다. 국민을 위해 고개를 숙이는 정치인이나 기업가들이 그렇다. 뒤에서는 개돼지라고 욕을 하는지 설치류라고 하는지 내 알 바 아니지만 적어도 눈앞에서는 사과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지만 애매한 위치에 서 있는 자들은 그 쉬운 걸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자기 자존심이 가장 중요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을 수치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지만 이런 차이야말로 나 같은 형태의 인간을 일류와 이류로 판단하는 척도다. ‘넌 어느 쪽일까. 유라야.’ 복잡해 보이는 표정. ‘넌 일류일까 이류일까.’ 구겨져 있는 얼굴. 슬쩍 입을 여는 그녀를 보며 나는 그녀가 아직 이류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너는 정치하면 안 되겠다.’ 애초에 견적조차 나오지 않는 싸움. 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길게 보고 있었던 내가 괜스레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놀랍기는 했지만 갑자기 튀어나오셔서 조금 깜짝 놀랐어요.” “무슨 말씀을.” “만약에 포지션을 바꾸실 생각이었다면 이쪽에 말씀이라도 해주셔야 되는 게 맞지 않나요? 물론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당황할 저희의 입장도 생각해 주셨으면 해요.” “정유라 씨, 지금….” “제 말이 틀렸나요? 현성 씨 때문에 저희 쪽 진영이 흐트러졌잖아요. 다른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야 조금 깜짝 놀라기는 했습니다만 저희가 대처하지 못할 정도의 돌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검사 하나가 앞으로 나선다고 해서 무너질 진영도 아니었고요. 오히려 파란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여 준 덕분에 더욱더 쉽게 승리를 가져갈 수 있었던 겁니다. 그 정도도 모르시진 않을 텐데요.” “물론 공이 아예 없었다고 말씀드리는 건 아니에요. 제 말은 단지 조금 당황스러웠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은 거라고요. 그리고 애초에 이렇게 움직일 수 있었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해야 하지 않았나요?” 훌륭히 지랄을 해주는 모습은 너무나도 훈훈하게 느껴질 정도다. “아직 저희 파티원들이 던전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움직였습니다. 특히 덕구 씨나 예리가 조금 힘들어해서 말입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친 것 같아 움직여 봤는데… 미리 말씀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사과를 받으려고 말씀드린 게 아니예요, 현성 씨.” 그 알량한 지위와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일장연설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선이 좋게 갈 리가 없다. 내가 사전 조작을 하지 않았더라도 이쯤 되면 자기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그녀의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김현성이 돌발 행동을 한 것도 사실이고 그것 때문에 정유라가 놀랐다는 것도 사실로 포장할 수 있을 테니까. 만약에 정유라와 김현성의 상황이 서로 뒤바뀌어 있다고 가정하고 정유라가 혼신의 연기력을 활용해 본인이 피해를 받았다는 것을 어필해 본다면 비벼볼 수 없는 상황도 아니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정유라는 모두의 질타를 받고 있던 국민비호감이었다. 좋은 시선이 가는 게 이상한 일이다. “말씀이 조금 심하신 것 같습니다, 유라 씨.” “지가 뭔데 자꾸만 저러는 건지 몰라.” “잘했다고 칭찬해 주지는 못할 망정 기를 죽이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아무리 파란의 파티가 질투가 난다고 해도 저건 아니지.” “쯧. 아니, 방금 같은 상황을 보고 뭐라고 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정신 차려야 할 건 현성 씨가 아니라 유라 씨 같습니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몇 번이라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정말로 참다 참다 한마디 던진 겁니다. 왜 이렇게 꼬투리 못 잡아서 안달인 줄 몰라.” “저는 어디까지나 원정대를 위해서 말씀드린 거예요.” “원정대를 위하긴 무슨… 퍽이나 위하고 있겠다.” “당신은 가만히 있는 게 원정대를 위하는 겁니다.” 특히나 거친 말을 쏟아내려는 붉은용병 같은 경우에는 그 행동이 조금 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을 보니 확실히 정유라의 정치 생명이 끝났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얼굴이 새빨개져 있는 모습. 검은백조의 다른 이들이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지만 수습될 리가 없는 상황. 심지어는 계속해서 중재를 해왔던 원정대장 최영기의 표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사실 나도 대놓고 정유라를 비난하고 싶었지만 그런 포지션을 취할 수 없었다는 게 천추의 한이다. 그래도 뭔가 불을 지피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다. 어떻게 말을 꺼내는 것이 좋을까 필사의 고민을 해봤지만 사실 이야기를 꺼내는 게 쉽지는 않았다. 나는 어디까지나 피해자의 입장에 서야 했으니까. 일단은 김현성의 허락을 얻어내는 게 필수. 슬쩍 김현성을 바라보자 이쪽을 바라보는 두 눈이 보였다. 직접적으로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내가 말하고 싶다고 하는 걸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대놓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형이 한마디 해도 되지? 형 말 잘하니까, 현성아.’ 눈빛을 보내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는 얼굴이 보였다. 허락이 떨어졌으니 입을 여는 것은 순식간이다. “조심스럽게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목소리가 나옴과 동시에 여러 사람의 시선이 쏟아져 내렸다. “네. 물론입니다.” 사람을 놀린다는 건 꽤나 재밌다. 그동안 여론이라는 벽에 숨어서 그녀를 지켜보는 일도 상당히 재미있었지만 확실히 대놓고 놀리면서 도발하는 쪽이 조금 더 취향에 맞는다. “사실 무척이나 죄송스럽습니다. 열심히 한다고는 했지만 조금은 폐를 끼친 것 같아서….” “아, 아닙니다.” “특히나 검은백조 분들에게는 정말로 죄송합니다. 정유라 씨께 특히나요.” 묘한 표정을 보내니 금방 반응이 온다. “사실 저희 현성 씨를 비롯한 많은 파티원들과 이야기를 나눠 봤습니다. 애초에 경험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희가 이 던전 공략에 합류했다는 사실은 대충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파란 길드에서 희귀 등급의 던전을 갈 수 있는 파티가 저희밖에 없었던 이유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저희 파티의 스펙으로는 여러분들께 폐를 끼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영 씨.” “아뇨. 이 부분은 정말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공략 외적으로도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 부족했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정유라 씨가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고요. 조금 더 열심히 해보자 파티원들끼리 마음을 다 잡았지만 방금 사냥이 끝난 뒤의 상황을 지켜보니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 알 것 같습니다.” 괜스레 불안해하는 정유라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기라도 할 줄 아는 모양이다. 물론 그런 선택지도 나쁘지 않기는 하지만 정답은 그게 아니다. 한 번 숨을 내쉰 뒤 천천히 말을 잇자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이들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저희가 분란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네?” “저희 파티가 아무래도 이 원정대의 분란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아….” “탐탁지 않으시리라 생각은 했었지만 사실 이 정도로 불편해하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들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이런 던전 공략에 있어서 원정대의 분위기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선배님들의 수기에도 그런 내용이 적혀 있었고요. 무척이나 아쉽기는 하지만… 더 이상 폐를 끼치며 실례되는 행동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런 게….” 여기저기서 당황스러운 목소리들이 튀어 나왔다. 사실 마지막 발언도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파티장이 해주는 것이 옳은 것 같은 느낌. 곰곰이 고민하던 김현성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희 파란 파티는 이곳에서 돌아가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호흡 좋고….’ 내 생각을 이해해 주고 있다는 게 꽤나 기특했다. 물론 김현성의 말이 끝난 뒤에 분위기가 조금 더 급변한 것은 당연지사. “아니, 파란에서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쪽에….”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가 분란을 일으켰는데….” 내 방패막이 되었던 여론이 이제는 창이 되어 검은백조를 찌르기 시작한 것이다. 최영기 역시 고민이 많은 것 같다. 그렇지만 붉은용병에서 온 녀석이 할 수 있는 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욱 열심히 해주셨습니다.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고요. 분란을 일으키는 쪽은 오히려 다른 쪽입니다.” ‘운율 좋고, 가락 좋고.’ “정유라 씨.” “…….” “이런 말씀을 드려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동안 고생한 건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원활한 공략 진행을 위해 양해해 주셔야 할 부분이 생긴 것 같습니다.” “지금 무슨….” “던전에서 나온 부산물의 일부의 소유권을 인정할 수 있도록 배려해 드리겠습니다.” “정말로….” “원정대에서 나가 주시는 걸 건의하고 싶습니다.”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던 장면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 66 회귀자 사용설명서 066화 가장 중요한 것(1) “원정대에서 나가 주시는 걸 건의하고 싶습니다.”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던 장면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명장면이다. 정유라를 비롯한 다른 검은백조의 파티원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안이 벙벙하다. 저런 얼굴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만큼 정유라에게는 이 상황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처럼 느껴질 테니까. 이런 배경이 오기까지 내가 얼마나 뒤에서 뒷공작을 치밀하게 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본래 여론이라는 게 이렇다. 조용하게 보이다가도 심지에 불을 붙이면 걷잡을 수 없이 팽창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너무나도 명백한 상황에서도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농담하시는 거죠?” “…….”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하는 꼬라지가 가관이다. 당연하지만 농담일리가 없다. 최영기의 진지한 표정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는지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정유라가 보였다. “이건 말도 안 돼요.” “아뇨. 이건 이 원정대를 이끌고 있는 입장에서 내린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허….” “정유라 씨의 의도가 어떤지는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기여해 주신 점 역시 알고 있고요. 이 원정대를 위해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일하셨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더 이상 함께 가기는 힘들 것 같군요.” “그걸 알고 있으신 분이 방금 같은 말을 하셨단 말이에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이런 상태의 분위기로 원정을 진행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라 씨가 파란의 파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라 씨가 보여주는 모습은 다분히 비상식적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원정대를 위해서 말씀드린 거예요. 당연히 파란의 파티에게는 그 어떤 감정도 품고 있지 않고요. 오히려 문제가 되는 건!” 내 이름을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슬쩍 눈웃음을 보내자 이빨을 까득 까득 갈고 있는 정유라. 얼마나 화가 났는지 대충 봐도 알 수 있다. ‘풉.’ 속으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저주의 말을 쏟고 있을 것이다. 표정이 말해준다. 조금 더 속을 긁고 싶어진 것은 당연지사. 괜스레 최영기에게 한마디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 괜찮습니다. 최영기 씨.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뇨, 기영 씨. 이편이 더 좋을 겁니다. 분란을 일으키는 파티원은 언젠가는 커다란 사고를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아니,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날 겁니다.” “지금 제가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딱히 어째서인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생각나는 게 있을 테니까요.” “그런 게….” “유라 씨의 행동은 이미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유라 씨도 이곳에서 오랫동안 지내신 분인 만큼 아마 제 결정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설사 유라 씨가 느끼기에 자신의 행동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셨더라도 다수가 유라 씨를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다른 파티원들을 위해서라도 결단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이해?” 아직까지도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깨닫고 있지 못하는 모양. 그저 억울하기만 하다는 표정이다. ‘이런 애랑….’ 정치질을 했다는 사실이 황당하게만 느껴질 지경. 지금에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이 여자는 무능하다. 사냥 실력이나 스펙에는 관계없이 리더로서도 적합하지 않다. 묘하게 바뀌는 표정을 바라보면 더욱더 그렇다. 나와 최영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 조금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다. 아마 어떤 연결점을 찾으려 뇌내망상을 하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어째서 최영기와 내가 자신을 향해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마도 순식간 일 것이다. 우리는 용병여왕이라는 접전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최영기 씨.”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기 힘듭니다만.” “공명정대하고 뭐, 신의를 지킬 줄 안다는 소리가 들려서 그나마 믿었던 사람이었는데…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나 봐?” ‘뻔하지 뭐.’ “용병여왕님한테 무슨 언질이라도 받으셨어요? 자기 기둥서방 좀 잘 부탁한다고? 처음부터 우리 길드를 내칠 생각이었죠? 정말로 어이가 없어가지고… 앞에서는 깨끗한 척 정의로운 척 지랄을 해대더니 결국에는 이거였어? 왜? 이기영 이 새끼한테 잘 보이면 용병여왕이 잘해준다고 했나보지?” “유라 씨, 말씀이 조금 심하신 것 아닙니까. 희라 누나는… 이번 일과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뇌내망상 제대로고요.’ “닥쳐, 이 새끼야.” “흥분하지 마시고… 천천히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제는 막나가고 있는 꼴이 가관이다. 이미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의 심정으로 청와대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이면에는 살살 속을 긁는 내 말투와 표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고 있었겠지만 내 생각보다 조금 더 제대로 걸려들었다. “좋겠네. 누구는 용병여왕한테 몇 번 대주고 아이템도 공짜로 받고 꿀 같은 경험도 해볼 수 있고 말이야. 던전 공략이 장난 같지? 그럴 거면 파란에는 왜 들어갔나 몰라. 붉은용병에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야?” “유라 씨.”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이미지를 깎아 먹고 있는 꼴이다. 오랜만에 언급된 용병여왕 때문인지 정하얀의 심기도 불편해 보인다. 슬슬 입을 막을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건만 이 여자의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에 모두가 당황한 느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당황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최영기의 모습은 마치 최대한 분노를 삭이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언니, 그, 그만하세요.” “언니, 그만하세요!” “이거 놔, 미친년들아. 붉은용병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길드에서 이 일을 알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누가 봐도 파란과 용병이 우리 길드를 억압하고 있잖아! 이건 부당하다고! 정식으로 항의를!” 쾅! 계속해서 부당함을 토로하고 있던 정유라가 입을 닫는 것이 눈에 보였다. 눈앞에 있는 최영기 때문일 것이다. 주먹으로 옆에 있던 벽을 후려친 것.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얼굴이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말해준다. 그러고 보니. ‘용병여왕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고 말했었나….’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그럴 것이다. 우리 정의로운 영기 씨가 존경해 마지않는 희라 누나를 언급하며 미친 소리를 해댄 것이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기둥서방이 어떻고 대준다느니 어쩐다느니 개소리를 해댔다. 아마 정유라는 흥분한 나머지 자신이 뭔 소리를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런 분위기에서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닌 모양. 화를 참고 있는 최영기와 붉은용병들을 보니 그녀뿐만이 아니라 나 역시 조신해지기 시작했다. ‘조신해졌는데.’ 말 그대로 미친 벌꿀 오소리처럼 날뛰던 여자가 현모양처로 돌변하는 건 순식간. 나도 모르게 부들부들 다리가 떨려온다. 스탯을 보고 대충 예상하기는 했지만 최영기가 저도 모르게 보내는 살기에는 숨이 턱 막혀올 지경이다. 이런 내 상황을 알고 있었는지 김현성이 손을 뻗자 순식간에 아까와 같은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 감사합니다.” 최영기의 모습은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수장을 욕했다고 해서 나올 반응을 훨씬 넘어섰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차희라가 더 인망이 두텁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리라. 솔직히 검을 휘두르지 않은 것만 해도 칭찬해 주고 싶은 상황이기는 하다. ‘얘 좀 탐나는데….’ 만약 박덕구가 없었다면 최영기를 이쪽에 불러오는 방향을 생각해 봤을 것이다. 이만큼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데도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똥오줌을 가릴 수 있다는 증거였으니 말이다. 정유라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살의에 당황해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능력치를 생각해 보면 이 기운에 저항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분명하다. ‘아주 좋아요.’ 마치 폭탄이 터질 것 같은 상황. 그 가운데 최영기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말은 전부 끝내셨습니까.” “그게….” “지금 당장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지나치게 흥분했었네요. 방금의 일은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당장 나가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듣기 싫습니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일정 지분은 따로 챙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쾅! 하는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온다. “나가 달라 했습니다.” ‘좋고요.’ 창백하게 질린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슬쩍슬쩍 히죽거리는 미소를 보내는 것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통쾌하다. 등 뒤로 뭔가 짜릿한 느낌이 스치고 지나갈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지금 당장 던전을 떠나 주셨으면 합니다, 유라 씨. 저희 마도 길드에서도 더 이상 함께 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파티장들이 눈앞에서 형식적으로 건네는 말은 그나마 예의를 지키고 있었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온갖 욕설이 섞인 외침이 들려오는 것은 마치 중세의 마녀 사냥을 현대판으로 보는 느낌이다. 돌멩이만 던지지 않았을 뿐이지 저 여자는 완벽하게 화형대 위에 올라가 있다. 다른 점은 저 여자가 정말로 마녀의 포지션에 있다는 것. 지금에 와서 자신은 마녀가 아니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내고 싶겠지만 군중은 돌을 던지는 것이 멈추지 않는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입가를 깨물고 있는 입에서는 피가 튀어 나오고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중이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나오는 눈물을 참으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참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키야.’ 강 건너 불구경 하는 것은 언제 봐도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그게 내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더욱이. 결국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 정유라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이쪽을 지나치는 것이 보였다. 그렇지만 나를 째려보는 눈빛은 그녀가 내게 상상하기 힘든 원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짧은 순간에 입꼬리를 올리자 심지어 어깨를 치고 지가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나 세게 치고 지나갔는지 내 몸이 살짝 뒤쪽으로 밀려날 정도였다. ‘아이고….’ 물론 무섭지도 않고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본래 한 번 물었던 건 끝장을 내야 안심이 되는 성격인 만큼 나 역시 이후를 생각해 두었다. 혹시나 이쪽에 원한을 품은 미친년이 단검을 들고 등을 찌를 수도 있으니 조금 더 확실히 하는 게 맞다. 말 한 마디 잘못 내뱉은 걸로 인생이 끝장나는 경우를 그동안 꽤나 많이 봐왔다.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이곳도 아마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추측하는 만큼 이번에도 내 생각대로 흘러가는 게 당연하리라. 더 이상 그녀와 하는 건 정치 싸움이라고 보기에도 힘들다. 일방적인 괴롭힘이고 어떻게 보면 값비싼 수업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이번 챕터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중 나머지 남은 하나. “그럼 출발하도록 합시다.” “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아뇨. 저희야말로….” 바로. 언론에 관한 이야기였다. ‘끝난 줄 알았을 거다. 이년아.’ 나는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독한 사람이다. # 67 회귀자 사용설명서 067화 가장 중요한 것(2) [희귀 등급 던전, 공포의 정원의 공략을 완료하셨습니다. 인원[18/30]을 확인했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무척이나 기분 좋은 목소리다. 모두의 얼굴에 조금이지만 성취감이 깃들어져 있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최영기를 향해 슬쩍 입을 열었다. 물론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단순한 첫 공략에 대한 감상이었다. “보통 희귀 등급의 던전은 대부분 이런 식입니까?” “네. 조금 단조로운 편입니다. 몬스터와 보스 몬스터를 잡으면 공략이 완료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영웅 등급의 던전이나 전설 등급의 던전은 듣기에 여러 가지 조건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부끄럽지만 사실 저도 아직 가본 적이 없습니다.” “아아아.” “실제로 전설 등급의 던전은 신성제국에서도 딱 한 번 발견됐다고 하더군요.” “아. 그렇군요. 영웅 등급은 조금 많은 겁니까?” “사실 영웅 등급의 던전도 그다지 흔하지는 않습니다. 저희가 공략한 이 공포의 정원 역시 희귀 등급 중에서도 하급으로 보이는 것 같았는데, 다른 던전 같은 경우에는 구성이 조금 다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간에 중간에 조금 불편한 상황을 겪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오히려 더 죄송합니다.” 슬쩍 고개를 숙여오는 최영기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굴을 보니 대충 하는 말이 아닌 모양. 뜻하지 않은 사고에 대해서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괜스레 가슴 한쪽이 콕콕 찔려오기는 했지만 당연히 티를 낼 수는 없다. 그저 슬쩍 웃으며 부정할 뿐이다. “사실 덕분에 좋은 경험도 하고 던전이라는 게 어떤 곳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이템도 좋은 아이템으로 받았고….” “아뇨. 받을 만큼은 해주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붉은용병뿐만이 아니라 마도 길드 역시 같은 생각을 하시는 것 같더군요. 오히려 더 챙겨주지 못해 죄송할 지경입니다.” “하하하.” 슬쩍 옆을 바라보니 김현성 역시 마도 길드의 인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지금 나와 최영기가 나누는 대화와 비슷한 형식의 대화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감사했다든가, 나중에 식사 한번 하자는 약속 같은 것들 말이다. 정유라가 나간 뒤에 파티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아마 조만간 모두가 함께 모이는 자리가 생길 것 같기도 했다. 본래도 나쁘지 않은 구성이었지만 모두가 눈엣가시라고 생각했던 정유라가 사라지며 원정대가 탄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이전보다 더 화목해진 것은 당연지사. 사냥하는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정유라라는 국민비호감이 사라지며 원정대가 국민대통합을 이룬 것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사실 상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전체적으로 내구 능력치가 낮은 검은백조 때문에 붉은용병의 부담이 가중되어 있었던 것.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사라지자 붉은용병 길드의 전위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고, 각 길드 내에 있는 사제들 역시 본연의 임무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유라가 원정 내내 크게 짖었던 이유가 드러난 셈이다. 자신들의 파티가 던전 공략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만약 정상적인 형태로 던전 공략이 완료되었어도 그녀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얼마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손익으로 계산해 보자면 그녀가 중간에 빠진 것이 그녀에게는 득이 된 셈이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보상으로 나온 아이템을 가져가게 되었으니 무척이나 행복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정말 괜찮겠습니까?” “네?” “검은백조 길드에게 분배되는 아이템들 말입니다.” “아아아. 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성 씨도 정산 비율을 그대로 하는 게 좋다고 말했으니까요.” “그렇다고는 해도 큰 활약을 해주신 파란에게 조금 더 몰아드리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데….” “덕구가 받은 방패만으로 충분합니다. 사실 지금도 너무 많이 가져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무척 부담스럽습니다.” 살짝 고개를 돌리니 탱커직군의 선배들에게 둘러싸인 박덕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꽤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희귀 등급 중에서도 상급으로 분류되는 방패를 얻은 게 무척 좋은 모양이다. 사실상 우리 파티가 이번 원정에서 얻은 것들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무구였다. [뿌리 방패-희귀 등급] [정원의 주인 아라키가 식물의 뿌리로 만든 단단한 방패입니다. 본래는 정원을 지키는 경비에게 장비시킬 방패였지만 정원 내에 있는 모든 인간이 저주를 받으며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방어력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 외부의 충격을 완화시켜 줍니다. 내구도를 자체적으로 수복할 수 있습니다.] [체력 +3] [내구 +2] [마력 +1] ‘좋아 보이네.’ 특히나 내구도를 자체적으로 수리할 수 있다는 부분이 마음에 든다. 가성비가 좋은 초보자 장비 같은 느낌이다. 능력치도 상당한 수준이니 박덕구의 성장에 탄력이 붙을 것이다. 본래는 저 방패 역시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할 아이템이었으나 모든 전위가 박덕구에게 양보해도 된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아마 저들만의 신고식인 것 같지만 초행에 저런 종류의 아이템을 얻은 건 박덕구에게는 천운인 셈. 들어오자마자 불쌍한 모습을 보인 게 정말로 설계가 아닌가 다시금 떠올려 볼 정도였다. 그 외에도 여러 아이템이 있었다. 애초에 공포의 정원은 한 인간이 만든 실험실이었고 신의 저주를 받아 모두가 괴물로 변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마력의 정수나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도 많았고 내가 봐도 값이 꽤나 나가는 것들 투성이었다. 던전 공략이 돈벌이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사실 붉은용병과 마도 길드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준 우리들을 위해 많은 것을 양보하려 했지만 정말 필요한 것들 빼고는 다른 분들이 나누어 갖는 것이 맞다는 김현성의 발언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아이템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이후를 위해 친분을 다지는 것이 좋을 테니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조금은 아쉽게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던전 공략 중간에 내쫓겨 나간 검은백조 길드, 정유라에게 돌아가게 될 몫이었다. 이 대화 주제는 꽤나 오랫동안 원정대의 화두에 오르기는 했지만 검은백조 길드의 체면을 생각해 이전의 비율로 분배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 입장에서도 조금 과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합당한 활약을 한 파란에서 더 가져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만… 혹시라도 이후에 압력을 생각하고 계신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어떻게든….” “아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하하. 사실 분란을 일으킨 것은 정유라 씨라고 많이들 말씀해 주시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저희 파티에게 아예 잘못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덕구가 넘어진 것도 그렇고 그 후에도 잔 실수가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건….” “화를 내시는 게 당연한 거겠죠. 아마 던전 중간에 나가야 했던 상실감이 클 겁니다. 얼마 안 되는 보상으로라도 위로가 된다면 더 좋은 일이 아닙니까.” “하하하. 괜히 부끄러워지는군요. 아이템 몇 개에 손익을 계산하고 있는 제가 바보처럼 느껴집니다. 아마 이 자유 도시 린델 내에서 기영 씨처럼 따뜻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예전에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라고 불린 선희영 님이 왜 파란에 들어가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군요.” 사실 그 누구보다 계산하고 있는 건 나였지만 굳이 이쪽을 띄어 주는 것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애초에 이쪽이 검은백조에게 많은 부분의 지분을 넘기자고 한 것도 그 손익계산에 비롯된 행동이니만큼 양심이 찔리기는 찔린다. 어차피 검은백조 길드에게 들어갈 지분은 전부 이쪽에 떨어지게 되어 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 물론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 각자의 길드로 돌아가면 되는 겁니까?” “예. 아직 정산이 끝나지 않은 자재는 일주일 내에 정산이 되서 지급될 겁니다. 물론, 공략이 완료된 던전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아아아.” “물론 아무 의미 없는 문서입니다만… 하하. 없는 것보다는 나으실 겁니다. 그럼 이만 저희도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랜 원정이었던 만큼 조금 쉬고 싶군요.” “네. 살펴 들어가시죠. 추후에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제가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 한잔하시기로 한 일 까먹으시면 안 됩니다.” “물론이죠. 하하. 기다리겠습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훈훈하다. 아무래도 정유라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약간은 든다. 진정한 대통합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괜한 감동이 밀려올 정도였다.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던 파티원들이 결국에는 자유 도시 린델을 앞에 두고 찢어지는 것을 보니 서로 다른 집단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지만 이건 아주 사소한 이야기다. 이 원정대는 서로의 신뢰를 확인했고 이 인연은 아마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만큼이나 우리 파티 역시 모두 기분이 좋아 보인다. 우리에게 여러 경험을 줄 수 있었던 김현성, 새로운 방패를 얻은 박덕구와 묘하게 기뻐하고 있는 김예리도 눈에 들어온다. 물론 그동안 봉사를 하지 못했던 선희영이나 단둘이 있을 시간이 부족해 힘들어 하던 정하얀 역시 마찬가지. 꽤나 쓰잘 데기 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파란의 길드 하우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는 이곳이 집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즐겁기도 했다. 길드의 접수원에게 보고를 마치고, 던전에 관한 수기를 기록하는 것은 필히 해야 하는 일. 당연하지만 부길드 마스터인 이상희도 만나야 했고, 비율이나 정산에 대한 정확한 이야기도 나눠야 했다. 우리가 파란 길드의 소속인 만큼 우리가 얻은 것들을 파란 길드와 협의 하에 분배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불만은 없다. 애초에 파란이 없었다면 물지도 못했을 일거리인 만큼 오히려 이런 자리를 소개해 준 것이 고맙다. 중소형 길드는 애초에 이런 기회조차 없이 맨땅에 헤딩하는 상황이었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간에 공략 후에도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상황. 그렇지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따로 있었다. “하얀아.” “네, 오빠.”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네? 네!” “현성 씨, 저희는 잠깐 먼저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덕구야, 식사는 먼저 해라. 희영 씨도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 박덕구가 뭔가 음흉한 표정을 보내기는 했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곧바로 정하얀을 방으로 데리고 갔다. 홍시같이 붉어진 얼굴을 보니 내가 뭔가 오해할 만한 행동을 했다는 걸 느끼기는 했지만 던전 안에서 참아야 했던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하려고 이러는 건 아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정하얀을 본다. “오, 오빠” “하얀아.” “네? 네?” “가벼운 부탁 좀 해도 될까?” “물론, 물론이에요. 물론! 어떤 거든 다 하셔도 돼요. 전부… 전부요!” ‘얘 왜 이래….’ “전부 괜찮아요.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 전부 준비되어 있어요. 말, 말 그대로 전부요!” 왠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를 격하게 기대하고 있는 표정을 보니 괜스레 미안해진다. 그렇지만 일단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린델 내에 있는 언론사에 대해서 좀 알아봐 줄 수 있겠어?” “아….” 역시나 실망했다는 얼굴. 하지만 살짝 얼굴을 가져다대니 몸이 경직되듯 굳는다. 슬쩍 정하얀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는 것으로 감사의 표현을 대신하자,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가 시야에 비쳤다. “네….”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 성과를 내면 상을 받을 수 있다. 우리 사이에 암묵적으로 약속되어 있는 사실을 기억한 것이다. # 68 회귀자 사용설명서 068화 언론(1) 자유 도시 린델 내에 있는 언론사들은 언론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그것이 정하얀과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펜을 들고 싶은 자는 많다.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자들이라면 모두가 원하고 있는 이상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회체계가 잡혀 있는 린델에서 언론사가 자신들 마음대로 기사를 쓸 수 없다는 이유는 아마 뻔할 것이다. ‘무서우니까.’ 이 대륙은 기본적으로 무력이 지배하는 세계다. 사람 몇 죽는 일은 흔하고 대형 길드에 반하는 이들이 어떤 식으로도 그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 기사 하나를 쓰는 것도 굉장히 조심스러울 것이다. 흔히 말하는 권력자들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살인 사건을 작성하는 기사를 쓸 때도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기사를 읽은 미친 살인마가 언론 클랜을 습격할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사실 린델 내에서 팔리는 신문을 처음 봤을 때부터 이해할 수 있었다. 기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여러 가지 일에 대한 공지가 대부분이었고 심지어는 대형 길드의 수장이 아침밥으로 무엇을 먹었는지에 대한 기사가 나가기도 했다. 당연히 어느 정도 자괴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게 언론인이라는 거니까. 직업의식을 가지고 일을 하는 이가 얼마나 되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참된 언론인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사람이다. 돈이 급하고. 이기적이고. 주사위를 던질 수 있는 자. 흔히 기레기라고 말하는 종류의 언론인이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올 수 있는 자들이 필요했다. 사실 지금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 자체는 나쁘지 않다. 아주 예전에 들었던 린델의 모습과는 다르게 지금은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혀가고 있다.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사냥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다르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었고 실제로 식당이나 극장 같은 것들에 투자하는 길드도 많아지는 추세다. 대형 길드나 중형 길드의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대중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운이 좋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만약에 이곳이 초창기였을 때 내가 떨어졌었다면 이런 방향은 생각도 못 했을 거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무척이나 관심을 가진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의 심심함을 달래주는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것. 안에 모여 있는 이들의 숫자를 생각해 보니 내 생각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많이 모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저들에게는 이게 밥줄이니까. “오빠, 대부분 와주신 것 같아요.” “아, 그래?” “네네. 몇 분 빼고는… 어떻게 할까요?” “내버려 둬. 어차피 이번 일이 잘되면 따라오게 돼 있으니까. 그보다 정말로 고마워, 하얀아.” “아, 아니요.” “이번 일이 끝나면 꼭 보답해 줄게.” “네!” 단기간 내에 이 정도로 해낼 수 있었던 것도 어디까지나 정하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춰준 뒤에 방 안으로 들어가니 모여 있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내가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조금은 조용해진 것을 보니 조금 우스웠다. 저들이 내 눈치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티를 낼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일단은 살짝 웃으며 첫 인사를 건넸다. “모두 반갑습니다.” “아… 반갑습니다.” “린델 일보의 김성경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반갑습니다. 파란 길드의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자신들을 불러 모은 이유보다는 얼마를 줄 것인지가 더 궁금한 모양. 린델 내에서 이들이 돈을 벌어 살아가고 있는 방법은 이것뿐일 테니 무리는 아니리라. 이런저런 인사를 나누었다. 제법 번듯한 식사가 나오자 얼굴이 밝아지는 이들이 보였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도 좋기는 하지만 이런 시간도 확실히 필요하다. “당연하지만 여러분을 모은 이유는 작은 기사를 써주셨으면 해서입니다.” “대충은 예상했지만 역시 그렇군요. 하하하. 당연히 써드려야지요. 안 그래도 최근 최고 주가를 달리고 있는 파란의 파티가 아닙니까. 오히려 홍보를 해드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홍보는 개뿔.’ 사실 기사를 낸다고 하더라도 홍보효과는 미비하다. 어차피 저들이 내는 기사는 영향력이라고는 쥐뿔도 없었다. “겨우 네 명이서 튜토리얼 던전을 최단 시간으로 돌파하고 공포의 정원의 공략까지 성공적으로 마치셨다 들었습니다. 좋은 기사거리가 될 겁니다.” 물론 좋은 소스도 아니다. 어떤 파티가 어떤 던전을 공략했다는 건 굳이 기사로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니까. 사실 길드가 자체적으로 홍보를 하는 게 더 효과적일 거다. “하하하하하하. 어떤 식으로 써드리면 되는지 방향을 결정해 주시면 최대한 맞춰서 써드리겠습니다.” 저런 말을 하는 놈들이 지금 린델의 언론을 이끌고 있는 놈들의 현 주소.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저런 말이야말로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대사였으니까. “사실 써주셨으면 하는 기사는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내용과 조금 다릅니다.” “네?” “검은백조에 정유라라는 여자에 대한 기사를 써주셨으면 합니다. 정확한 내용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사의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내용을 첨가하거나 살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저 던전 내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담담히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이들의 표정은 점점 구겨지고 있었다. 저게 보통의 반응이다.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보인다. ‘저는 자살 희망자가 아닙니다.’ 또는. ‘아직 더 살고 싶습니다.’ 정도라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그냥 있는 내용을 그대로 써주셔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살을 붙이는 것도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자극적으로 써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대중들은 자극적인 내용의 기사를 좋아하니 말입니다. 물론 골드는 섭섭하지 않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 “…….” 장내가 조용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다. “그,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네?” “그런 기사를 써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떤 의도로 기사를 작성해 달라고 하시는지 대충은 이해가 갑니다만… 아무래도 내용이 조금….” “검은백조를 대상으로 기사를 써주시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검은백조보다는 정유라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주시는 걸….”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꼴이 가관이다. 자꾸만 대답을 회피하거나 이 자리에 있는 걸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아마 내가 파란의 이기영이 아니었다면 몇몇은 개소리하지 말라며 성화를 부린 뒤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여러분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압니다.” “네?” “아마도 안전이겠지요. 혹시 모를 보복이 두려울 거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괜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이건 제 뜻이라고 하기보다는….” “아.” “차희라 님의 뜻이지요.” 물론 거짓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실 거라는 건 이해하고 있습니다. 검은백조뿐만이 아니라 정유라 개인의 보복도 무서우실 겁니다. 용병여왕님이 지켜주신다고 한들,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압니다.” “…….” “만약 기사를 작성하게 된다면 실명으로 작성하게 될 겁니다.” “아….” “아마 몇몇 분은 기사가 나갔을 때의 파장을 예상하고 계실 겁니다. 방법이야 어떻게 됐든 대형 길드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는 것은 꽤나 파장이 클 겁니다. 사람들은 어째서 이런 사건이 터졌는지에 대해서 궁금해하겠죠. 판매율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갈 거고 그만큼 여러분은 많은 금화를 만질 수 있을 겁니다.” “금화가 문제가….” “기사를 읽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여러분들은 안전해질 겁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들어간 기사나 칼럼이 팔리면 팔릴수록 여러분들은 영향력을 얻게 될 겁니다.”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야 당연하다. 지구에서도 언론에 종사하고 있었던 이들이 있을 테니까. “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고 해서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대형 길드 역시 세간의 시선은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킬 것이 많은 만큼 함부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이미 린델 내에서는 어느 정도 사회 체계가 잡혀 있습니다. 단순히 사냥이나 던전만으로 운영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 그렇지만 내킨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조금 불안합니다. 아니, 솔직히 이 장소에 있다는 것도 굉장히 불편합니다.” “붉은용병이 여러분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무서울 게 없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차희라 님께서도 심사숙고해서 결정해 주신 사안입니다.” “그렇지만 실명으로 기사를….” “그 부분이 중요한 겁니다. 혹시나 여러분들이 잘못된다면 검은백조 길드의 입장에서 비난을 피하기가 힘들 겁니다. 그렇지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조금 불안해하고 있는 기자들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 당연할 것이다. 별것 아닌 바람에도 벌벌 떨어야 하는 게 저들의 입장이었으니까.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는 뻔하다. 아무리 붉은용병이 뒤를 봐주고 있다고 한들 대형 길드의 반하는 기사를 썼다는 건 아무래도 무서울 테니 말이다. 살짝 한숨을 쉰 뒤 곧바로 말을 이었다. “어째서 그동안 린델 내에 있는 언론사들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을까요?” “그야… 보복….” “네. 물론 보복이 두려우셨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수준 이하의 기사를 쓰셨던 것이겠죠. 물론,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활동해 온 것을 비난하거나 모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대륙은 철저히 힘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는 장소고 함부로 기사를 내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네.” “그렇지만 그건 정답이 아닙니다.” “네?” “힘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는 대륙 때문에 여러 언론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해요.” “…….” “여러분들이 노선을 정하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아마 지구에서도 기자 활동을 하신 분들은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언론이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굳이 정치로 예를 들자면 여당에 설 것인가 야당에 설 것인가 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게 이런 배경에서 언론이 활동하는 데 커다란 힘을 실어주게 되지요.” “파란과 붉은용병의 노선을 타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겁니까?” “네. 물론입니다. 저희가 필요로 하는 기사를 써주시면 됩니다. 언론은 어차피 완벽히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반만 자유로워지시면 됩니다. 딱 반 말입니다. 파란과 붉은용병의 적을 비판하고 저희를 옹호해 주시면 됩니다. 대중들을 움직여 주시면 되는 겁니다. 다른 쪽으로 가신다고 해도 불이익은 없을 겁니다. 검은백조를 선택하시거나 아니면 타 세력으로 갈 수 있는 노선이 마련되어 있다면 그쪽으로 가셔도 됩니다. 물론, 간혹 목숨의 위협을 받으실 수도 있으실 겁니다. 외부의 압력은 일상이 될 겁니다. 그렇지만 그건 린델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던전에 들어가는 이들도, 전선에 서는 이들도, 모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위협을 받으신 만큼, 더욱더 큰 것을 얻어 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게….” “금화.” “…….” “그리고.” “…….” “권력입니다.” 물론 저들이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줄 수는 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 사이로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69 회귀자 사용설명서 069화 언론(2) 쓰레기 같은 놈에게 농락되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흥분했었다. 상황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면 그 말이 맞다. 그 당시 나는 틀림없이 과하게 흥분하고 있는 상태였다.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고 원정대의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못했다. 놈이 여론을 조성하는 동안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으리라.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성질을 살살 긁는 놈의 말투는 속을 뒤집어 놓았고 가끔 혀로 입술을 훔치는 표정은 심장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목덜미에 박아 넣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였으니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꽉 쥔 주먹에서 피가 흘러나올 정도, 단언컨대 지금까지 이 대륙을 살아오면서 그런 유형의 인간은 본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가증스러운 새끼.’ 느껴지는 마력의 양이나 직업을 살펴보면 이기영은 틀림없이 이 대륙이 약자로 규정하고 있는 종류의 인간이다. 빈민촌에 굴러다니며 구걸을 해야 하는 종류의 인간이었고, 하루 벌고 하루 먹고 살아가야 되는 인간이었다. 파티를 구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려야 하는 놈이다.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할 쓰레기 같은 놈이 배경을 믿고 날뛰는 모습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낯짝이 두꺼워도 이렇게 두꺼울 수가 없다. 입으로는 계속해서 사과의 말을 뱉어오기는 했지만 표정이 말해주는 것은 전혀 다르다. 아마 자신뿐만이 아니라 함께 원정을 떠났던 파티원들도 놈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멸시하고 무시하고 화를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다시금 그 표정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다시 한번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제기랄….” 가만히 누워 열을 식히고 있는 상황.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유라 언니?” “상황은 좀 어때?” “똑, 똑같아요. 아직까지 별 다른 소식이 없어서….” “하….” “정식으로 항의하는 건 아직 시기상조라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까지 정황을 파악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그, 그렇지만….” “언제부터 우리 길드가 남의 눈치를 보게 된 건데? 분명히 붉은용병과 파란 사이에 뭔가 커넥션이 있었어. 전부 다 뒤집어 놔도 모자란 판에 뭐? 길드가 하는 일이 도대체 뭐야? 대형 길드는 무슨… 어차피 붉은용병 딱갈이 노릇이나 할 텐데.” “아직은 경거망동하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하셨어요. 정확한 정황을 파악한 다음에 움직이는 게 맞다고 생각하셔서… 그, 아무래도 차희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고요.” “차희라가 뭐라고.” “길드의 중역들이 붉은용병과 만나서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더 이상 정황을 파악할 필요가 뭐가 있다는 건데? 우리가 보고서에 작성한 그대로 아니야?” “물, 물론 그렇지만….” “그리고 애초에 사건의 원흉인 놈들과 함께 정황을 찾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고. 누가 봐도 검은백조가 붉은용병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린델 내에서의 이미지가 병신이 되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긴 한 거야? 다른 대형 길드가 우리를 뭐라고 생각할 것 같아? 정확히 말하면 차희라 그 창녀한테 숙이고 들어가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호랑이를 등에 업은 여우 하나한테 이리저리 휘둘리는 거라고! 씨발. 이기영 그 개새끼 말이야.” “어쩌겠어요. 그 남자는 차희라의 정부라고 소문이 이미 자자한데…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지구에 있었을 때부터 아는 사이라고 들었던 것 같아요. 듣기로는 그만큼 애틋한 사이라고…. 그 차희라가 먼저 목을 맬 정도면 다했죠. 아무래도 붉은용병과 저희 길드가 공생관계이기도 하고… 이, 이것저것 어쩔 수 없는 분위기인 것 같아요. 저도 언니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뭐?” “일단은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분명히 갚아줄 기회가 올 거예요.” “그렇지. 그래야지.” “네.” “단순히 받은 걸 돌려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을 거야. 울고불고 살려달라며 빌 때까지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거야. 천년만년 차희라가 자신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그 믿음이 언제까지 갈지 보자고….” “맞, 맞아요.” “원정 중에는 사고가 많이 일어나니까. 그렇지?” “네. 그, 그렇지만 지금은….” “나도 알고 있어. 다만… 참기 어려울 뿐이야.” “언, 언니 생각대로 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그래도 이번에 도착한 아이템을 보니까. 저희를 아예 무시한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던전 안에서 있었던 트러블을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다는 표현이라도 봐도 될 것 같아요.” “그래?” “네. 희귀 등급의 무구들도 많이 보이고 자재도 생각보다 많이 넣어줬어요. 분배된 아이템 목록을 보니 파란보다 조금 더 많이 받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그래야지. 푸핫! 아무리 붉은용병이라고 해도 이쪽의 눈치를 아예 안 볼 수는 없겠지.” “최소한의 성의는 보인 것 같은 느낌이더라고요. 이, 이러지 말고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서 식사라도 할까요? 기분 전환이 조금 필요할 것 같은데….” “그래.” “괜찮은 식당이 하나 생겼다는 소리를 들어서요. 그럼 가요, 언니.” 못이기는 척 발걸음을 옮긴다. 사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시점이었다. 방 안에 처박혀 있어봤자 생각나는 것은 놈의 능글능글한 얼굴밖에 없었고 당장 화를 내봤자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기회는 분명히 찾아온다. 아무리 파란이 붉은용병과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고 있다고는 해도, 대형 길드로 분류되는 검은백조를 내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쪽에 무게를 두는 게 더 올바른 판단이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만약 눈앞에 있는 박은혜의 말이 맞다면 붉은용병에서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준 셈이 되니 자신이 생각이 마냥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길드 하우스를 빠져나가는 것은 순식간. 평소와는 다르게 뭔가 주변이 요란스럽지만 여느 때와 같은 자유 도시의 풍경이다. 광장 쪽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휴… 진짜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이 있나.” “뭐 안 봐도 뻔하지 않겠어? 눈 감고 봐도 어떤 상황인지 그려지는데….” “쯧.”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뭔가 호의적이지 않다. 가끔씩 전해져 오는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들 신문을 손에 쥐고 있다는 것. 익숙하지는 않은 풍경이다. 린델 내에서 언론사가 가지고 있는 힘은 그리 크지 않았으니까. 기껏해야 새로운 몬스터나 신성제국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전부였고 실제로 린델 내의 모험가들은 다른 매체들을 접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삼삼오오 모여 신문을 읽는 풍경은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궁금증이 든 것은 당연지사. 왠지 모르게 불길하기는 했지만 상점에서 팔고 있는 일간지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언, 언니….” “이게….” [파란을 일으키다.] [파란에서 커다란 거액을 주고 영입한 김현성 파티의 첫 번째 던전행이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고작 4명의 인원으로 튜토리얼 던전을 가장 빠르게 돌파한 파티를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김현성 파티라고 불리는 이 파티는 다른 대형 길드들와의 친분을 과시하듯, 마도 길드와 붉은용병 길드 그리고 검은백조 길드와 함께 몇 주 전 린델을 떠났다. 지나친 키워주기가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와 비판이 있었던 가운데, 마도 길드의 던전 공략일지가 공개되며 커다란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던전 내에 있었던 검은백조 길드 소속으로 알려진 정모 씨의 지나친 갑질이 세간에 함께 공개된 것. 함께 출발했던 원정대가 따로따로 린델에 도착했을 때부터 원정대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뒷이야기가 있었지만 그 소문이 진실로 밝혀지며 다른 길드의 인원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고 있다. 출발하기 전부터 파티 내에 갈등을 일으키던 정모 씨(29)가 파란의 파티의 이모 씨를 위협했다는 것이 그 소문의 진상. 실제로 검은백조 길드의 정모 씨가 지나치게 파란을 압박하고 있다는 증언이 여기저기서 밝혀지며 모든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정확히 어떤 종류의 위협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사건의 당사자인 이모 씨는 가해자를 의식하는 듯이 말을 아끼고 있었지만 혹시나 육체적인 압력이 있는지에 대한 소문이 확산되고 있다. 아마도 던전 내에 있을 아이템 분배에 대한 기여도 문제가 원인이지 않을까 하고 전문가들이 추측하고 있으나 아직 그 어떤 것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파란과 검은백조, 양 길드가 이에 대해 말을 아끼는 가운데 이 사건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에 대해 귀추가 주목된다. 길드 간의 협력을 통해 던전을 공략하는 것인 이제는 이 자유 도시 린델에서는 무척이나 익숙한 이야기다. 물론 아이템 분배나 기여도에 관한 문제 역시 마찬가지로 보인다. 대부분의 사건 사고들이 이런 욕심 때문에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대형 길드가 중형 길드나 소형 클랜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지만 자유 도시 린델이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있는 이 시점에서 대형 길드들이 먼저 건전한 던전 공략 문화를 선도해야 하지 않을까.-린델 일보 김성경 기자] ‘이게 뭐야.’ 이것뿐만이 아니다. [정모 씨(29), 용병여왕이 너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냐고 발언해 파문.] [희귀 등급 던전에 함께 들어간 정모 씨의 발언이 속속들이 공개되며 린델내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정모 씨가 용병여왕의 연인으로 알려진 파란의 연금술사 이모 씨에게 했던 발언들이 문제가 된 것. 이모 씨가 포함된 파티가 던전 공략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자 기여도를 의식한 정모 씨가 이모 씨를 따로 불러 위협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가 무섭게 그녀가 했던 발언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용병여왕의 기둥서방이라고 이모 씨를 모욕한 것은 물론, 용병여왕이 너를 지켜줄 수 있냐고 발언한 것으로 밝혀졌다. 대형 길드가 중소형 길드를 알게 모르게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특히나 이런 정모 씨의 발언들은 이모 씨를 겨냥한 것뿐만이 아니라 붉은용병 길드의 용병여왕을 의식한 소리가 아니냐는 듯한 목소리가 커지며 붉은용병과 검은백조의 향후 방향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중동일보] 여러 가지 자극 적인 제목들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검은백조와 붉은용병의 관계에 대해 -부제: 파란의 현재 위치는?] [대형 길드의 던전 내 패악질 이대로 괜찮은가 -던전 칼럼니스트 김성경] [수면 아래에 묻혀 있던 대형 길드 갑질 논란, 정유라 사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린델 정치부 기자 강유미] [정모 씨(29)의 과거 논란 재점화] [용병여왕에게 대준다는 발언으로 파문, 노린 것은 파란인가 붉은용병인가. 검은백조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바뀐 것 같은 느낌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손이 덜덜 떨린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당연히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 능글능글한 얼굴. 여기저기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아아아. 예전에 한 번 같이 들어가 본 적 있었는데… 아마 전부 다 사실일걸? 그나마 파란이니까 이렇게 기사로 나오는 거지. 아마 우리 같은 놈들이었으면 어디서 시체로 발견됐을 거야.” “망할 년. 이런 놈들 때문에 린델에 발전이 없는 거라고.” “조용히 해. 혹시라도….” “아니 내 말이 틀렸어?” “아무리 그래도….” “어이 저기… 쟤가 정유라 맞아?” “쉿. 들린다.” ‘이… 이, 새끼가.’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 끝내지 않은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이 개자식….’ # 70 회귀자 사용설명서 070화 언론(3) “좋은 기사네.” 어느 정도는 달라지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솔직히 이 정도로 해줄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특히나 린델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대형 길드의 이권 문제에 대해 꼬집을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부분. 단순히 정유라를 공격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회에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는 분위기를 싸잡아 비판한 것이다. “던전 내 대형 길드의 패악질, 이대로 괜찮은가.” ‘아주 좋아.’ 이런 종류의 타이틀은 꽤나 심금을 울린다. 아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기사를 읽고 접하는 대중은 아마 나와 같은 경험을 한두 번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단순히 던전 내에서 일어난 상황 뿐만이 아니다. 사냥터에서, 무기 상점에서, 단순히 길을 걸어가다 갑질을 당한 경험이 한두 번은 있다. 어느 정도 사회적 위치에 있는 나는 린델 내에서 그런 취급을 당해본 적은 없지만 중소 길드의 모험가들은 틀림없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고통 받고 있었을 것이다. 린델 내에서 대형 길드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사회의 상류층.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지구에서의 대기업 이사의 자리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본인이 직접 행동할 수 있는 무력도 가지고 있으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패악질이 도시 내에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단순히 상상하는 것 이상의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붉은용병이나 파란 같은 경우에는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에 속하기는 하지만 검은백조 같은 경우에는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대중들은 피해자인 나를 자신들에게 투영하여 내가 당한 일에 공감하고 함께 분노해 준다. 눈치 빠른 대형 길드들은 우리는 검은백조와 다르다는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시대에 편승하기 위한 중견 길드와 소형 클랜들 역시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내보이는 상황. 종류는 다르지만 마치 사회운동의 한 종류처럼 보일 정도였다. 대중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곧 권력이며 힘. 아무리 본인의 무력이 강하다고 한들, 그걸 받쳐 주는 구성원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중산층이 사회의 톱니바퀴를 힘들게 움직여주고 있는 덕분에 나와 같은 상류층의 생활이 유지될 수 있는 거다. 내가 제조한 포션을 구입해 주고, 던전에 대한 정보를 물어와 준다. 붉은용병 길드가 운영하고 있는 무기 상점을 이용하는 것도, 마도 길드에서 마법학 강의를 돈을 내고 들어주는 것도, 검은백조에서 판매하고 있는 싸구려 정보들을 사주는 것도, 다른 대형 길드에서 판매하는 소비 아이템과 재료 아이템을 처분해 주는 것 역시 민중이다. 민중이 없으면 상류층은 유지될 수 없다. 아무리 자신이 잘났다고 한들, 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밑에 있는 자들이 우리 같은 자들을 받쳐주고 올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잊고 있었을 것이다. 이곳은 지구가 아니고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장소였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다른 대형 길드에서도 언론에 굳이 손을 뻗치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아니, 어쩌면 언론 자체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언론이라는 장치는….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도구니까.’ 자신들의 기득권을 조금 더 확실하기 위해 버려둔 것이겠지만 선점하는 자가 나온다면 이야기는 당연히 달라진다. 아마 모두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여론이 등을 돌린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효과는 굉장했다. 검은백조 길드가 운영하고 있는 모든 사업체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것은 물론, 중견 길드와 중소길드, 이름 있는 탐험가나 모험가들이 검은백조와 던전을 공략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일부는.’ 붉은용병의 차희라에게 알랑방귀를 끼기 위해. ‘일부는.’ 단순히 시대에 편승하기 위해. ‘또 일부는.’ 억압받았던, 소외되었던 이들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저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함께 일어났다. 아마 먼 미래 역사가가 오늘을 평가한다면 꽤나 할 말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던진 작은 돌멩이가 문화 혁명 수준으로 번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식사를 대충 마친 뒤에 살짝 밖으로 나가니 역시나 기자들이 들이닥치는 것이 보였다. 당연하지만 모습을 보인 기자들은 나와 함께 했던 이들이 아니다. 뒤늦게 돈 냄새를 맡고 달려든 이들. 아니나 다를까 이쪽에 조심스레 질문을 퍼붓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잠깐 말씀 좀 묻겠습니다. 정유라 씨에 대해서는….” “죄송합니다. 아직 공식적인 입장 발표는….” “불편하시겠지만 혹시 정유라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추후에 공식적으로 기자 회견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정유라 씨의 발언이 붉은용병과 파란의 협연에 대한 발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고 계신지….” “아직 제가 대답해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거, 너무 달라붙지 마쇼!” “괜찮다, 덕구야.” 언론인에게는 친절해야 한다. 언론과 권력자는 영원한 친구니까.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검은백조 길드 보이콧에서는 어떤 입장을 취하고 계시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질문을 던진 녀석은 꽤나 익숙한 얼굴. ‘김성경이라고 했나.’ 아마 그럴 것이다. 이 정도 질문에는 대답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이번 일이 진실인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얼마나 많은 분이 상실감을 느낄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게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지금껏 많은 분이 느꼈던 부당함이라는 고름이 터진 것이겠지요.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혹시나 많은 분이 화를 당하지 않을지 걱정됩니다. 이상입니다.” 뭐, 이 정도로 말하는 게 가장 좋은 방향일 것이다. “방금 그 말은 던전 내에 있었던 위협 행위가 사실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보이콧을 지지하는 말씀이십니까?” “한편으로는 지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닙니다. 그저 이번 일로 인해 2차 피해가 생기지는 않을지가 걱정될 뿐입니다.” 애매모호한 화술이 이럴 땐 꽤나 편하다. 나는 검은백조와 척을 지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검은백조와는 원활한 소통 창구를 만들고 싶을 정도다. 원하는 건 정유라밖에 없다. “차희라 님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죠.” “추후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태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는 모험가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입장상 무척 난감합니다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사회에 부당함에 저항하는 여러분의 행동은 절대로 잘못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고 있는 것보다 여러분 개개인은 훨씬 영향력 있는 사람들입니다.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말고 행동하십시오. 여러분 모두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내 말을 받아 적는 기자들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도 내일이면 기사로 나갈 타이틀이 눈에 보인다. [상실감 느끼고 있는 모험가들의 심정, 십분 이해해.] 라든가. [보이콧 지지하기는 하지만 2차 피해 우려] 이런 종류의 기사들 말이다. 아마 내 생각보다 더 자극적으로 뽑아줄 수도 있다. 이쪽으로는 저들이 전문가니까. 꽤나 기분이 좋아졌다. 슬쩍 기자들을 지나치는 와중에도 여러 가지 질문이 쏟아져 내렸지만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게 당연하다. 피해자의 모습을 연기하는 나로서는 최대한 이야기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대중의 해석은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하니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바로 옆에서 박덕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소, 형님.” “그러게 말이다.” “뭐, 앞으로는 행동도 좀 조심해야 될 것 같고… 뭐, 그럽디다.” “그냥 평소대로 행동해도 상관없을 거야.” “그러고 보니 오늘 붉은용병에서 입장 발표한다고 하지 않았소?” “응. 그렇지.” 아마도 유감을 표할 것이다. 굳이 검은백조 전체에 대한 비난여론을 확신시키려고 하지 않겠지만 정유라 개인에 대한 비판과 용병여왕 차희라를 언급하며 했던 발언에 대해서 몇 마디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미 세간에 정유라가 차희라를 모욕했다는 사실이 전해졌고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붉은용병은 뭔가 액션을 취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마 일주일 이내에….’ 검은백조도 입장 발표에 들어간다. 사실 이미 늦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 내부적으로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예상할 수 없었던 상황에 검은백조가 당황하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야 죽이고 싸우는 것밖에 할 줄 몰랐던 인간들이 갑작스럽게 대중 앞에 서 발표를 한다니 막막할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내부에서는 난리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응하는 것이 무척이나 느리게 느껴질 정도니까. 만약 내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당장 대응팀을 꾸려 이쪽과 어떻게든 접촉하려고 했을 것이다. 단순히 접촉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액션이 된다. 만약 검은백조에 유능한 두뇌가 있었다면 사태가 이렇게 번질 때까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선희영이 다가와 입을 열었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기영 씨?” “네.” “검은백조 길드에서 찾아왔어요.” ‘그렇지.’ 지금 이 시점까지 행동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영 생각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누가 왔죠?”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사과를 위해 찾아온 것으로 보였어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네.”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선희영. 살짝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에 곧바로 길드의 응접실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에 비쳤다. 사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정유라.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검은백조의 중역들도 눈에 띈다. 근신이 풀린 이설호를 비롯한 파란 길드의 고인 물과도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니 나뿐만 아니라 파란 길드와의 접촉도 고려하고 있는 모양. ‘미친 늙은이.’ 이때다 싶어 숟가락을 올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전부 깔아놓은 판에 탑승하려고 하는 모습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이거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하하하하. 아닙니다. 일단은….” 짜증이 치솟는다. 그때 한쪽에 앉아 있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이지혜?’ 튜토리얼 던전에서 김현성이 만든 쉼터를 관리하고 있던 여자. 이쪽과 어느 정도 전략적인 제휴관계를 맺고 있었던 여자였다.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니 어딘가에서 잘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검은백조에 들어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조용히 우리 쪽의 고인 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은 꽤나 익숙하다. ‘하.’ [플레이어 이지혜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이지혜]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9] [성향-이기적인 야망가] [직업-지휘관] [능력치] [근력-09/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11/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15/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29/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내구-1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15/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마력-05/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총평-축하합니다. 플레이어 이기영. 영혼의 단짝을 다시 한번 만나셨군요. 이쯤 되면 운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네요. 이미 한 번 이어진 적이 있는 것 같지만 다시 한번 이어지는 것은 추천하지 않겠습니다. 말씀드렸지만 앞으로 태어날 2세가 너무나도 불쌍하니까요. 항상 행동을 조심하도록 하세요.] 여전히 눈웃음을 살살 보내며 우리쪽 늙은이들에게 잘 보이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와중에 이쪽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지사. 슬쩍 이쪽을 바라보던 이지혜가 반갑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빠! 오랜만이에요.” ‘오빠는 무슨….’ # 71 회귀자 사용설명서 071화 언론(4) 분위기를 보니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똑똑하네.’ 시대에 흐름에 탑승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검은백조에서도 이런 흐름에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고 내부적으로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인재를 찾았을 것이다. 그게 이지혜라는 건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아예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정치에 능하기도 했고 그나마 내가 본 사람 중에서는 머리 회전이 빨랐으니까. 자기 주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정유라보다 백 배는 낫다. 지금 이렇게 이쪽에 반갑게 인사를 보내는 것도 계산된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보여주고 싶다 이거지?’ 함께 온 검은백조 길드의 일원들에게 나와의 친분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일 터. 모른 척해도 별로 상관없지만 아마 저쪽의 행동에 맞춰주면 이쪽에 떨어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지혜는 거래가 뭔지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여자다. “정말로 지혜 맞아?” “네. 여기서 또 뵙네요. 헤헤.”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네. 물론이죠. 앞으로는 보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또 보게 돼서 다행이네요.” “반갑다. 정말.” 고개를 끄덕이며 눈웃음을 치는 것을 보니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 모양이다. 검은백조에서 온 중년 여성은 꽤나 기분이 좋아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쪽의 고인 물들도 무척이나 즐거워 보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하하. 이런 인연이 다 있습니다.” “네. 그러네요.” ‘왜 웃는 거야. 이 미친 늙은이는.’ 애초에 저 늙은이들이 이 자리에 있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묘하게 저자세를 보이고 있는 태도도 그렇다. 심지어는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느낌.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검은백조가 아무리 린델을 대표하는 대형 길드라고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파란이 굳이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다. 현재 파란은 붉은용병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입장이었고 흘러가는 상황 자체가 이쪽에 유리하고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정유라에게 빅 엿을 먹이는 것만이 아니다. 외교적으로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 개인보다 파란 전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대충 봐도 사이가 좋아 보인다. “늦게 인사드리러와 정말로 죄송합니다. 저희 쪽에서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직접 와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충분? 지랄하네. 미친 늙은이가.’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는 꼴은 꽤나 가관. 사건의 당사자들은 조용히 있는데 자신들끼리 사과를 주고받고 있다. 이쪽이 조용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인사를 건네 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솔직히 무례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슬쩍 중년여자를 바라보자 뭔가 눈치가 보였는지 이쪽에 인사를 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검은백조 길드의 최은희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미친 늙은이는 나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곧바로 내 인사를 막고 다시 한번 여자를 향해 입을 여는 것이 보인다. “이거 이럴 게 아니라 간단하게 차라도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최은희 님.” “예, 설호 씨. 그렇게 할까요?” 이쪽을 힐끔 쳐다본 늙은이는 최은희이라는 여자와 다시금 대화를 나누기 시작. 이 늙은이가 내 설계를 전부 망가뜨리고 있는 것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뒤집어?’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쓰레기가 더 짜증나게 다가오는 어이없는 상황. 언젠가 짜증나는 짓거리를 해올 거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개판을 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뭐라고 한마디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었던 찰나였다. “차는 두 분이서 마시고 오시는 게 좋겠네요. 일단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있으니까요.” 이지혜가 조용히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아.” 조금은 황당하다는 이설호의 얼굴과 이지혜를 바라보는 최은희의 표정이 꽤나 비슷하다. 그렇지만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최은희을 보니 내 생각보다 이지혜가 이번 일에서 맡은 권한이 크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거지?’ 검은백조의 중역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높으신 위치에 있는 분들에게 무척이나 신뢰받는 모양이다. 이쪽에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다. “그럼 그렇게 할까요? 설호 씨?” “네?” “저희끼리도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이번 일에 대해서는 아이들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일단은 가져온 선물부터 보여드리도록 할게요.” “허허허. 이것 참 고맙습니다, 최은희 님.” ‘미친놈.’ 최은희이라는 여자가 우리 쪽에 있는 김설호보다는 조금 더 나아 보인다. 그나마 사태 파악은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살짝 이쪽을 돌아본 최은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이지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아가, 잘 부탁한다.” “네, 언니.” 어딜 봐도 언니로 보이지 않는 외관이지만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 이윽고 김설호와 최은희를 비롯한 고인 물들이 응접실을 나가는 것이 보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나와 이지혜와 정유라. 싱글벙글 웃고 있는 이지혜와는 다르게 정유라는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다. 그동안 마음고생을 한 게 눈에 보일 정도. 아마 여러모로 스트레스가 심할 것이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기도 했고 일이 이만큼 커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사방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물론 붉은용병과의 관계도 틀어졌다. 많은 모험가들이 검은백조를 보이콧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일반 파티에도 들어가기 힘든 상황일 것이다. 지금 그녀의 위치는 국민비호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길드 내에서 입지가 내려간 것도 당연하다. 아마 검은백조에서 아직까지 쫓겨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러게 왜 나댔는지 몰라.’ 실실 웃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 어차피 우리밖에 없는 자리이기도 했고 이지혜도 딱딱한 분위기보다는 이런 분위기가 더 마음에 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지혜가 소파 뒤에 몸을 눕히며 말을 이었다. “짜증 나지 않아요?” “뭐?” “저기 늙은이 말이에요. 대충 봐도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 같던데…. 나 같으면 머리통을 뜯어 버리고 싶었을 거예요.” “뭐, 틀린 말은 아닌데… 이쪽도 나름의 사정이 있으니까. 그보다 네가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검은백조 길드에서 원래 오퍼를 받고 있는 상황이기는 했는데 사실 출세길에서는 멀어지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세상이 이렇게 변할지 알았겠어요? 우리 길드 측에서도 사태를 수습할 사람이 필요했고 제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나름대로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이런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제격이라고 판단하신 것 같더라고요. 우리 길드의 윗분들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이게 전부 오빠 덕분이죠. 역시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된다니까.” “그거 참 고맙네.” “빈말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실제로 이기영과 친하다는 덕을 톡톡히 보기도 했고, 이 모든 상황을 설계한 게 오빠라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질문의 요지를 읽을 수 없다. 그렇지만 대놓고 내가 했다고 말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다만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글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옆에 있던 정유라는 무척이나 황당한 표정이다. 자신은 아예 무시하고 진행되는 대화에 어처구니없는 눈치다. 나 역시 조금은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 이지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한때 검은백조에서 밀어주던 정유라를 아예 대화에서 배제할 줄은 몰랐다. 오히려 정유라가 이지혜의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 ‘허.’ 확실히 수완이 좋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 이상이다. 나와 커넥션이 있다는 것을 길드 내에 알렸다고는 해도 그 상황을 이용한 건 그녀였으니 말이다. “어차피 그렇게 나올 거라고 이야기 했어요. 사실 제 입장에서도 뭐가 진실인지는 별로 상관없고…. 지금 중요한 건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지에 대한 거니까요. 흐음…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가기 전에… 오랜만에 어때요?” 슬쩍 입고 있는 치마를 들추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당연하지만. “관심 없어.” 응할 리가 없다. “어머, 매정해라. 잠깐 예전 추억을 되새기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조건이나 제시해요, 누나. 피차 무슨 생각하는지 뻔히 보이는데 빙빙 말 돌리지 말고.” “정말로 매정하네요. 옆에 있는 이 여자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오빠.” “그 때문이 아니야.” “이유는 대충 알 것 같기는 한데… 뭐,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일단은 사과부터 받으셔야겠네요. 아! 이제는 유라 씨 차례예요.” 살짝 정유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이지혜가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말해서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그림이다. 이지혜를 이쪽으로 데려오지 못했다는 게 조금은 후회될 정도였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녀는 유능하다. 이지혜의 부름에 정유라는 슬쩍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사과하고 싶을 리가 없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나와 이지혜의 태도를 보고 있자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힘들게 한 글자 한 글자 떼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패배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다.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기는 했지만 이런 방향도 나쁘지는 않다. “…죄송합니다.” “어머, 유라 씨. 조금 더 정중하게 사과하셔야죠. 우리 오빠 섭섭하시겠다.” “죄… 죄… 송합니다.” “…….” 그렇지만 여전히 성의 없어 보이는 모습. 이지혜가 정유라의 머리채를 쥔 것은 바로 그때였다. ‘허.’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정유라의 고개가 돌아간 것.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알 수 없다. 정유라가 그녀의 눈치를 보는 것을 보고 대충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 추락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유라 씨, 제 말이 말 같지 않아요?” 성에 차지 않는지 한 번 더 손을 휘두르자 정유라의 고개가 그대로 돌아간다. “똑바로 해주세요.” 솔직히 웃음이 나오는 상황이다. 지금 이지혜가 보여주는 태도로 정유라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정유라가 얼마나 몰락했는지 보다 이지혜가 보여주는 모습이 조금 더 흥미롭다. 지금 저런 행동에도 많은 계산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상대에게 자신의 권위를 확인시켜주는 행동이기도 했고, 이쪽에 조금 알랑방귀를 끼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전투 능력이 전무한 몸으로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 정유라가 이지혜를 죽이는 것은 개미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이는 것보다 쉽다. 그녀가 자신을 헤치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에서 나타난 행동으로 보였으니 파란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위치보다 이지혜가 검은백조에서 챙긴 위치가 더욱 커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리라. “엎드려서 똑바로 사과해 주세요.” “…….”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정유라의 고개가 돌아간다. 당연하지만 동정심 같은 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은 통쾌하게 느껴진다. 변태는 아니지만 나를 짜증 나게 했던 상대가 저렇게 고통 받는 모습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다. 정유라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최대한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캬. 우리 지혜 잘하네.’ 정유라의 머리를 끌어 잡은 뒤에 억지로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는 모습은 가관.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똑바로 사과하라고 말했어요. 유라 씨.” 이쪽을 선택해도 저쪽을 선택해도 굴욕을 당하는 것은 마찬가지. 결국 정유라가 천천히 엎드리기 시작했다. “옳지. 이제야 말을 알아들으시네요.” “죄….” 절이라도 올리는 것처럼 땅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린 것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흐으윽… 정말로 죄송합니다. 함부로… 대해서… 죄송합니다.”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나를 단번에 죽일 수 있는 여자가 이렇게 비참하게 엎드리고 있으니 정말 묘한 쾌감을 느꼈다. 살짝 허리를 떨자 곧바로 이지혜가 입을 열어왔다. “뭐 원하시는 거라도 있어요. 나랑은 싫으면 이 여자랑은 어때요?” “아니, 별로 관심 없다니까.” “그러고 보니 뭔가 원하시는 게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 “그러고 보니 신발이 조금 더러워 진 것 같기도 하고….” 이지혜가 살짝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아깝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72 회귀자 사용설명서 072화 야망 있는 남자(1) “그러고 보니 신발이 조금 더러워 진 것 같기도 하고….” 말을 내뱉으니 정유라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렇지만 천천히 이쪽으로 기어오는 걸 보니 자신을 내려놓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지만 살의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흐음….’ 사실 나보다는 이지혜의 눈치를 보는 느낌이다. 정유라가 이런 위치로 떨어진 이유보다는 이지혜가 어떻게 저런 위치에 서게 되었는지가 더 궁금하다. 내가 먼저 입을 열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가지로 궁금하신 것 같네요.” “물론. 솔직히 네가 이 여자를 이런 식으로 다룰 줄 몰랐거든. 그래도 한때는 검은백조에서 밀어주던 인재이기도 했고, 가지고 있는 무력도 상당한 수준인데…. 지혜는 리스크를 짊어지는 걸 싫어하는 타입이었잖아. 뒷감당을 할 준비는 된 거 맞지?” “리스크는 없어요. 전혀 없으니까 오빠도 안심하셔도 돼요.” 무슨 소리냐고 입을 떼려다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정유라의 상태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플레이어 정유라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정유라] [칭호-국민비호감, 사상 최악의 여자] [나이-29] [성향-계산적인 전략가] [직업-암살도적-희귀 등급] [직업효과-기초 궁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기초 단검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기초 함정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기초 암살 지식 습득] [습득한 지식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능력치] [근력-41→05/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민첩-55→10/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체력-43→11/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40→30/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내구-20→05/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행운-23→10/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마력-43→09/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총평-외부의 충격을 받아 몸이 망가진 상태입니다. 마력 회로가 대부분 파괴된 것은 물론, 근섬유의 손상으로 능력치가 하락하였습니다. 일상적인 생활은 할 수 있지만 모험가로서의 생명은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엘릭서라고 부르는 전설의 영약이나 성녀급 사제의 신성 치유 마법이 있다면 치유될 수 있겠지만… 글쎄요. 아무튼 간에 정말로 불쌍하네요. 플레이어 이기영처럼 원래 가지고 있는 게 없는 사람과는 달리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느끼는 상실감은 엄청나거든요.] ‘허….’ 새롭게 들어선 칭호보다도 눈에 들어온 것은 형편없는 몸 상태. 칭호는 어차피 생겨날 거라고 대충은 예상했었지만 전체적으로 스탯이 내려가 있다. 정확히 일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이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의문에 대한 답을 던져준 것이다. “몸이 여기저기 망가졌거든요.” “…….”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정상적인 생활도 겨우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네요. 저야 제대로 알 수 없지만 만약 언론이 주목하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을 거예요. 솔직히 이 여자 목숨도 제가 살린 거나 다름없고요. 이해하시겠지만 얘는 살아 있어야 하거든요. 여전히 사태 파악을 못 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그만큼 우리 길드의 높으신 분들이 화가 많이 나셨다니까요.” “이해는 되네.” “기껏 키워주려고 했더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개판치는 게 일상이기도 했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번이 처음도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제대로 걸린 거죠, 뭐. 저야 잘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길드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나 봐요. 사실 이번 기회에 그런 사람들을 골라내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고… 이 여자는 본보기로 제대로 걸렸죠.” “흐음….” “조금 더 정치적인 이유도 있기는 하지만 내부적인 일이라 아무리 오빠라고는 해도 가르쳐 드릴 수는 없네요.” “권력 싸움이라도 있었나 봐?” 아마 확실할 것이다. 예상대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내부가 어수선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내 뇌내망상에 불과하긴 하지만 검은백조 길드는 정유라 같은 종류의 인간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것이 분명. 언젠가 한번 길드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고 물갈이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세력이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정유라는 좋은 타이밍에 걸려든 적당한 이유가 되는 셈이 된다. “그만큼 내부적으로 썩어가고 있었으니 도려낼 건 도려내야겠다고 생각하신 거겠죠. 현 길드 마스터 언니 생각이 그래요.” “현?” “이렇게 입이 싼 여자는 아닌데 오빠 앞이라고 여러 가지 정보를 내놓게 되네요. 뭐, 어차피 알게 될 테니까 상관은 없지만. 아직 공식적인 발표가 없었을 뿐이에요. 이번 일이 잘 마무리 되면 길드 마스터가 교체되며 내․외부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거예요. 권력승계는 평화적으로 잘 진행됐으니 이상한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그걸로 설명이 되는 건가? 아니, 그보다 평화롭게 승계됐다는 소리는 이 여자 꼴을 보면 그렇게 신뢰감 있게 느껴지는 말이 아닌데….” “정말로 내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세상은 진실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잖아요? 대중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지. 오빠가 이번에 꾸민 일도 비슷한 부분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영 모르겠는데….” “걱정이 많으시네요. 녹음기나 녹음 마법 같은 게 있는 세상도 아닌데…. 뭐, 아무튼 간에 반 정도는 오빠 생각이 맞을 거예요. 저 같은 경우에는 리스크를 짊어지는 타입은 아니지만 어느 한쪽에는 서야 됐거든요. 우리 길드 마스터 언니는 여러 종류의 인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말이죠.” “그래서?” “일이 터진 뒤에 보고서 몇 백 장 작성해서 가지고 갔을 뿐이에요. 현 사태에 대해 분석해서 원인과 길드가 부패하고 있는 이유, 검은백조가 앞으로 움직여야 할 방향, 붉은용병과의 파란의 관계나, 앞으로의 파란의 성장 가능성 그리고… 으음… 이기영이라는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에 대해서? 정신없이 써서 잘 기억은 안 나네요.” “…….” “아무튼 제 행동이 위에 계신 분들한테는 조금 신선하게 느껴졌나 봐요. 여기저기에서 중구난방으로 되지도 않을 개소리 같은 탁상공론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갑자기 평길드원이 집무실로 찾아오면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쓸 만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 쪽에 미친 늙은이들은 이게 뭔 개짓거리냐고 반응할 테지만 내가 검은백조의 중역에 있는 입장이었다면 틀림없이 이지혜를 기용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길드의 내부적 위기를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로 잡은 셈이 된다. “사실 보고서도 완벽하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기영 오빠만큼 똑똑하지 않기도 하고, 시간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싶어 하는 상황에서 행동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이쁨 받을 수 있다는 거 아니겠어요? 뭐, 사실 리스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한 번쯤은 짊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뭔가 심경에 변화라도 생겼나 봐?” “그럼요. 뭐, 자세한 이유는 오빠가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은 원하시는 조건부터 말씀해 주시겠어요? 최대한 맞춰줄 수 있는 만큼 맞춰 드릴 수 있어요. 공식적으로 전달하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어느 정도까지냐면… 아! 저 여자를 달라고 해도 드릴 수 있을 거예요.” “꽤나 성의를 보이네.” “그럼요.” 슬쩍 바닥을 바라보니 아직도 바닥을 기고 있는 정유라가 시야에 들어왔다. 무척이나 성심성의껏 이쪽에 봉사하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무척이나 필사적이다. 어째서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회복하고 싶은 거겠지.’ 그 말이 맞다. 성녀급의 고위 사제나 엘릭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정말로 고위 사제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은 몇 명 없기는 했고 이들을 데리고 오는 과정에도 큰 값을 치러야 한다. 엘릭서 역시 마찬가지. 들어가는 재료도 재료이거니와 엘릭서를 만들어낼 연금술사도 없다. 말하자면 던전 공략 과정에서 드랍 되는 확률에 의지해야 된다는 소리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개인의 힘으로는 절대로 회복할 수 없다는 것. 길드 차원에 지원을 받아야 되니 잘 보이고 싶은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살짝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자 이쪽을 바라보는 표정이 눈에 보인다. 분노, 원망, 걱정, 후회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표정. 깨끗하게 닦인 신발과는 대조적이다. “사실 이렇게 일이 잘 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 솔직히 이제는 관심이 있다고 하기에도 조금 힘들었다. “세상이라는 게 조금… 그렇지?” “네….” “사람 일이라는 게 정말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게 당신을 보니까 실감이 나네.” “…….” “납득하기는 힘들겠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거라고 생각해. 하나를 보면 열이 보인다고 네가 해왔던 행동이 되돌아 온 거니까.” “네….” “나한테도 해당되는 이야기로 들린다는 표정이네.” “아, 아닙니다….” “아마 네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걸. 밑바닥에 있어 본 적 없는 철부지가 뭘 알겠어. 풉.” “…….” “네 경우에는 이번에는 운이 안 좋았을 뿐이야. 그래, 똥 밟았다고 생각해. 그편이 맞겠네. 열심히 한다면 혹시 재기할 수도 있을 테니까 힘차게 살아가도록 하고. 그리고 으음… 이건 열심히 닦아준 값.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노동에 대한 대가는 받아야지. 그게 아름다운 사회니까.” 살짝 주머니를 뒤적거리자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골드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꺼내 천천히 바닥에 떨어뜨리니 깨물고 있는 입술에서 피가 튀어나오는 것이 보인다. 눈물이 가득 고였다. 화가 나지 않을 리가 없다. 아직까지 나는 그녀에게 버러지로 보일 테니까. “표정관리 해야지?” “그래요. 유라 씨. 오빠가 주신 선물인데 웃어야죠.” “감, 감사합니다.” 천천히 바닥에 떨어진 골드를 줍는 모습은 당연히 내가 보고 싶었던 그림이다. 한 사람이 이렇게 쉽게 몰락했다는 사실이 조금은 재미있었다. 저런 모습은 교훈이 된다. 저런 식으로 살면 안 된다는 교훈보다는 치밀하지 않으면 언젠가 저런 꼴이 될 수 있다는 게 조금 더 와닿는다. 사실 정상인이 생각할 수 있는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옳지 못한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다. 스스로의 가치를 올려야 하고, 적은 쳐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번 일은 마무리가 꽤나 마음에 든다. 아직 완벽하게 끝났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유라와 나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 “즐거웠어. 이만 나가봐도 돼.” 아마 그녀는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대형 길드에서 다시 한번 그녀에게 투자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준다는 건 꽤나 마음에 드는 부분. 희망이 큰 만큼 절망도 크다. 평생 언젠가 회복할 수 있다고, 언젠가는 되돌려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삶의 끈을 이어나갈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고통 끝에 낙이 있다고 생각하기야 하겠지만 아마 그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끝난다고 하더라도 꽤나 긴 것이 당연. 그래도 그녀는 십년 후나 이십 년 후를 상상하며 자위할 것이다. ‘그게 인간이란 거니까.’ 정확히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여론이 조금 조용해진 뒤에는 죽을 수도 있고 어쩌면 평범한 생활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언젠가 그녀를 빈민촌이나 창녀촌에서 마주쳤을 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있다. ‘사람 잘못 건드렸다고.’ 그녀가 천천히 응접실을 나가자 곧바로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만족하셨나요? 오빠?” “절반 정도는… 자. 그럼 뭘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네.” “물론이죠. 아마 만족하실 거예요.” # 73 회귀자 사용설명서 073화 야망 있는 남자(2) “아! 일단 저희의 요구사항부터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 “일단 공식 입장을 발표해 주시면 돼요.” “예를 들면?” “검은백조의 정유라로부터 진심어린 사과를 받았고 서로 오해를 풀었다는 이야기요. 육체적으로 위협을 받은 적은 없다는 말도… 같이 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네요. 그밖에는 오빠가 알아서 생각해 주시면 될 텐데… 뭐, 지금 이 사태를 진정시켜주는 발언이라면 어떤 말이라도 상관없어요.” “흐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쉽진 않을 거야.” “추가로 검은백조의 달라진 모습에 대해서도 언급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나를 홍보 수단으로 쓰겠다, 이거야?” “그야 당연하죠. 일부에서는 저항의 상징 이기영이니 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는데… 아마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칭호까지 생길걸요. 아무래도 오빠가 추구하는 이미지가 있을 테니 추가 사항에 대해서 언급하는 건 필수 사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제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쯤은 언급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여러분들이 한 대형 길드를 변화시켰습니다. 여러분이 승리했습니다. 저 혼자만의 승리가 아닙니다! 뭐, 이 정도가 좋겠네요.” “승리는 무슨….” 꽤나 앙큼한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검은백조의 권력 체계가 바뀐 것은 어디까지나 여러 가지 정치적 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도화선이 된 것이 지금의 사태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검은백조가 가지고 있는 내부적인 문제가 아니었다면 아마 바뀌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대중의 승리에 초점을 맞춰 발표해 달라는 이야기에 웃음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할 것이다. “진실이 뭔지는 상관없잖아요? 대중이 승리했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게 중요한 거라는 건 알고 있으실 텐데….” “그래서 웃음이 나오는 거야.” “뭐, 저희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이쪽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여러 가지 발언으로 기름만 붓지 않으시면 된다고요. 여러분을 이해한다든가 패악질이라든가 이런 말을 조심해 주시는 걸 바라는 거예요.” “이해했어. 고려해 보도록 하지.” “옛정을 생각해서라도요. 네?” 살살 눈웃음을 치는 게 시야에 들어오지만 굳이 신경 쓰지는 않았다. “또 있나?” “물론이죠. 오빠의 권한에서는 조금 벗어날 수도 있는 이야기이긴 한데… 붉은용병과 검은백조 그리고 파란의 삼권 동맹을 추진하는 중이에요. 이것도 공식적으로 발표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오빠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예요.” “길드 내에서 영향력을 넓힐 수 있다는 소리지?” “네. 물론 이건 당장 발표해 달라고는 말하지 않을게요. 아무래도 시국이 어수선하니까. 다만 친근한 분위기에 대해서 언급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달라진 검은백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정도가 괜찮아 보이네요.” “원하는 게 조금 많아 보이는데… 보상은 제대로 준비되어 있는 거지?” “네. 일단 공포의 정원에서 얻은 아이템과 자재, 재화는 모두 오빠 개인에게 들어갈 거예요. 공략이 완료된 던전의 지분이나 토지문서도 마찬가지로.” “여론을 생각하면 그렇게 반가운 소리는 아닌데.” “공식적으로는 기부에 들어갈 겁니다.” “아아아아. 이해가 되네.” “오빠가 저희 길드에서 무엇을 받았다는 건 절대 알려지지 않을 거예요.” 사실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눈앞에 있는 이지혜라면 충분히 이쪽의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마 이쪽이 어떤 식으로라도 커다란 이득을 받았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진다면 언론을 이용해 개인의 이득을 꾀 했다는 비난 여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에 알려진다고 해도 충분히 수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 말은 맞아.’ 이미 여러 언론이 내 편에 서 있다. 만약에 그런 일이 터졌다고는 해도 수습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이미 린델 내에 대부분의 언론은 파란과 붉은용병에 편에 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검은백조가 이쪽에 러브콜을 하고 있는 것도 무척이나 당연하다. 만약 이지혜를 비롯한 검은백조의 인사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말이다. “또 길드 차원에서 김현성 파티에 대한 지원이 있을 거예요.” “너무 후한 거 아닌가?” “그만큼 오빠한테 잘 보이고 싶은 거 아니겠어요?” “이런 식의 주목은 반갑지만은 않은데….” 말은 안하고 있지만 사실 검은백조 내에서 내 이미지를 꽤나 부풀려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내 가치가 올라가야 나와 연줄을 가지고 있는 이지혜의 위치도 함께 올라간다. 말하자면 상생관계인 셈.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쁘지는 않다.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내가 받을 수 있는 것들이 무척 많았다는 소리였으니까. “또 원하시는 것들이 있으시면 최대한 이쪽에서 맞춰드릴 수….” “그건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해. 뭘 얼마나 줄지에 대해서는 길드가 생각하는 방향이 있을 테니 뭘 해주든지 이제는 상관없어.” “조금 부담되네요. 시험하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렇지는 않아.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면 어째서 이 정도로까지 해주는 건지 이해가 안 되네. 물론 검은백조의 행동이 당위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조금 과해. 챙길 건 나뿐만이 아니잖아? 붉은용병까지 함께 케어해야 되는 상황에서 수지가 맞는 장사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거야.” “제 입으로 이런 말 드리기는 부끄럽지만 제 입김이 아예 들어가지 않은 건 아니에요.” “그래서 더 궁금한 거야. 옛정에 얽매여 있다고 하기에는 누나는 너무 이성적이야.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지혜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당황한 것 같지도 않다. 그녀는 무척이나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만 내가 예상하고 있었던 대답과는 거리가 꽤나 멀었다. “저번에 말하지 않았어요?” “뭐.” “난 야망 있는 남자가 취향이라고.” “농담하지 말….” 그녀의 눈을 바라본 순간 입 안에 있던 말을 끝까지 내뱉을 수 없었다. 이쪽을 똑바로 보는 표정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실실 웃으며 눈웃음을 치고 있는 표정이 아니다. “제가 농담하는 것 같아요?” “…….”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게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왠지 모르게 그래야 할 것 같았으니까. “미 전 대통령 클린턴 부부의 일화 들어본 적 있어요? 픽션이지만 조금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없어.” 그녀는 잠깐 숨을 내쉰 뒤 말을 잇기 시작했다. 조금은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시절 당시 주유소에 주유를 하러 간 적이 있었어요. 그 주유소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낯선 남자와 뜨거운 포옹을 했다지 뭐예요.” “재미있는 이야기네.” “알고 보니, 그 주유소에 있었던 남자는 힐러리의 전 남자친구였고… 돌아가는 길에 그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던 중에 빌 클린턴이 조금 짓궂게 말했다고 해요. 만약 아직까지 저 사람과 사귀고 있었다면 당신은 주유소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을 거야… 라고 말이에요.” “…….” “그 말에 대한 힐러리의 대답이 뭐였을 것 같아요?” “…….” “아니. 당신이 아닌 저 사람이 미합중국 대통령이 되어 있겠지.” 재미있는 이야기다. 확실히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의 일화를 나와 이지혜에게 대입해 보자면 그녀는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줄 수 있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공감이 아예 안 되는 일화는 아니에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저 이야기에 전제 조건 하나를 더 붙이고 싶거든요.” “그건.” “남자가 얼마만큼 야망을 가지고 있는가.” ‘허….’ “남자란 여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행동할 수 있는 야망이 없는 남자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거든요.”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이해하고 있는 거지?” “그럼요. 무려 용병여왕의 정부이신데… 그뿐이겠어요? 정하얀이라는 폭탄도 옆에서 애지중지 키우고 있잖아요. 그렇지만 여자의 매력이라는 건 가지고 있는 외모나 힘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랍니다.” “하….” “지금 당장 만나달라고 구질구질하게 달라붙고 있는 건 아니에요, 오빠. 그런 여자가 인기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거든. 피에 미친 용병이나 눈깔이 맛탱이 간 이상한 마법사와 물고 빨고 뒹굴든 나는 하나도 상관없어. 그게 전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과정이라면 오히려 환영하고 싶어질 정도고. 결정적으로 최후의 선택받는 건 나 같은 여자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 “오빠 같은 종류의 남자를 왕으로 만들 수 있는 여자.” ‘허….’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기적인 야심가라는 성향을 봤을 때부터 그리고 튜토리얼에서부터 그녀를 이해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쪽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묘한 자신감 때문이다. 이지혜의 능력치는 확실히 형편없다. 재능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이지혜는 자신의 재능 한계치를 모르고 있는 상태겠지만 아마도 조금씩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직업을 지휘관으로 고른 것 역시 그녀가 자신의 한계를 눈치채고 있다는 증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닮은 이 여자는 자신감이 있다. 능력치나 이곳에서 통용되는 무력을 제외하고 자신이 고른 남자를 왕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자신감. ‘뭐…….’ 언제부터 이 여자가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녀의 성향을 생각했다면 아마 처음부터였을 가능성이 높으리라. 이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러 생각을 하던 도중에도 살짝 몸을 일으키고 있는 이지혜가 시야에 비쳤다.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모습 역시 눈에 보인다. “어째서 나야?” “글쎄. 굳이 이유를 만들어 보자면….” “…….” “그때 오빠가 다시 보자고 말해줘서?” 살짝 입을 맞춰오는 걸 굳이 피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용할 가치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 길드 차원에서 만들어준 것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말씀드린 것도 잘 생각해 주세요, 오빠.” “생각해 볼게요, 누나.” ‘전부 다 좋은 이야기였으니까.’ 살짝 구겨진 인상. 그렇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니 오늘 있었던 대화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렇게 몸을 일으킨 그녀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였다. ‘아.’ 응접실에 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친 것. 잠깐 깜짝 놀란 나와는 다르게 이지혜는 놀라는 기색 없이 정하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하얀 씨.” “네…. 오랜… 만… 이네요. 지혜 씨.” ‘시발.’ “기영 오빠랑 사귀기로 하셨다면서요? 현성 씨나 덕구 씨도 잘 지내죠?” “네….” “어머 축하드려요. 예쁜 사랑하는 걸 보니까 제가 다 기분이 좋네요. 앞으로도 종종 보게 될 것 같은데… 잘 부탁드려요.” “네….” “그럼 이만.”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하얀의 상태가 묘하게 다르다. 물론,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장소는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지 않는 마법 처리가 되어 있는 방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묘한 분위기를 느낀 것 때문인지 이전에 박혜영을 바라보던 눈빛으로 이지혜를 보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의 정하얀은 눈이 맛이 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기랄.’ 심지어 이쪽을 추궁하는 듯한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는 상황. 이지혜는 슬슬 입꼬리를 올리며 나에게 미소를 보낸다.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다. 그렇지만. 어째서 나는 이렇게 정신이 나간 여자들만 꼬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74 회귀자 사용설명서 074화 과거 회상 과거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직 일어나지 않는 미래에 어째서 전쟁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때 당시에 나는 대륙의 중심과는 거리가 있었으니 당연할 것이다. 물론 예상가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튜토리얼의 이권 문제도 얽혀 있었고 사상과 이념문제 역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에 중요한 것은 원인보다는 결과. 처음에 작은 전투로 시작했었던 분쟁은 어느덧 커다란 불씨가 되어 대륙 전체를 집어 삼켰다. 몇몇 집단은 서로를 이유 없이 증오했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이후에는 서로 가지고 있던 이념과 사상을 외치지도 않을 정도가 됐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보다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배설하는 것에 주력한 것이다. 악의는 악의를 만들고 분노는 분노를, 복수는 복수를 낳았다. 언젠가 끝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지구인과 원주민의 전쟁. 원주민과 원주민의 전쟁. 지구인과 지구인의 전쟁. 증오하는 대상을 바꾸고 확대시켜가며 전쟁에 몰입했고 서로가 서로를 노예처럼 부리고 학살했다. 차마 눈 뜨고도 보지 못할 정도의 참혹한 광경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고 모두가 이런 일을 모른 척하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서로에 대한 불신이 점점 커진 것은 물론 이 후에 있을 싸움에서도 연합은 뭉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대마법사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며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일본의 무녀는 간살당했고. 용병여왕은 생사가 불분명해졌다. 가족이라고 부르던 이들과 모든 클랜원이 목숨을 잃었고. 영웅이라고 불리던 많은 이들이 죽거나 망가졌다. 선택받은 용사의 성검 역시 그 빛을 잃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연합은 와해됐고 결국에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이 무의미한 전쟁의 1막이 마무리됐다. 멀리 던져진 부메랑이 다시금 이쪽으로 돌아온 셈이다. 모두 인류의 잘못이었다. “전투와 전쟁은 다릅니다.” “무슨….” “솔직히 당신이 강하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이길 수 없어요. 물론 저뿐만이 아니라 제 밑에 있는 자들도 당신을 이길 수 없을 겁니다. 그건 몇 번을 생각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요. 절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너는… 인간이군….” “예. 인간입니다. 가면 때문에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모두에게 칭송 받는 천재 검사는 역시 다른 모양입니다. 마력으로 보호받고 있다고 들었었는데 영 질이 좋지 못하네요.” “그냥 느낌일 뿐이다. 대충 봐도 너는 그들과는 달라 보이니까.” “칭찬인지 모욕인지 구분하기 힘들군요.” “어째서 그들의 편에 선 거지?” “승률이 높은 쪽에 걸었을 뿐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이유이지요.” “많은 인간이 죽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이미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인간이 죽었다고 한들, 과거처럼 많이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윗분들은 인간의 개체수를 유지하고 싶어 하십니다. 아주 평화롭고 규격화된 장소에서 말입니다. 그게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인류를 배신….” “뻔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배신한 건 저뿐만이 아닙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건가.” “글쎄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닙니다. 민간인을 죽여야 할 때는 조금 가슴이 아팠고 저를 사랑해 주는 귀여운 마법사를 배신해야 했을 때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연히 만난 운명적인 상대와의 사랑이라니, 그 순진한 아가씨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더군요. 푸핫. 설마하니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조금 더 써먹고 싶었는데. 죄책감을 이기지 못했나 봅니다.” “너….” “백성을 사랑하는 제국의 여왕이 그들 스스로를 죽이는 것을 지켜봤을 때에도 가슴은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필요한 일이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걸 지켜봐야만 했던 용사를 봤을 때도 가슴이 찢어지더군요. 그분은 자신이 당신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풉. 그러게 이런저런 오해가 생기지 않게 잘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너… 누구야. 누군데!”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어요. 아니, 그보다는 조금 이상하네. 네가 이렇게 격정적으로 반응할지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것과 연관 없는 사람이 죽는 건 역시 다른가 봐.” “…….” “너도 그렇게 착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잖아, 김현성.” “너….” “쓰레기 같은 위선자 새끼.” “누구냐고 물었….” “그건 알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어차피 말한다고 해도 넌 기억도 못 할 거다. 지금 그보다 중요한 건 네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냐는 거지.” “죽여.” “숭고한 척하지 마, 쓰레기. 너한테 선택권은 없으니까. 물론 조금 힘들 거라는 건 알고 있어. 그럼 이렇게 하자, 김현성. 나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네가 최소한의 양심에 비빌 수 있는 구멍 정도는 만들어 줄게. 옆에서 헐떡거리고 있는 개자식을 죽여. 그렇지 않으면 네 사랑하는 연인이 죽는다. 아, 연인이라고는 볼 수 없나?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네. 둘이 하긴 했지?” “이 개자식….” “다시 말하지만 선택권은 없다. 네가 거부한다면 이년은 인간 같지도 않은 변태 새끼들한테 넘겨서 하루 종일 보람찬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빨리 선택하는 게 좋을 텐데…. 물론 약속은 지킨다. 나는 누구와는 다르게 굉장히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거든….” “…….” “푸핫!” “…….” “거 봐요, 누나. 내가 할 거라고 했잖아요. 아아아아. 물론이죠. 약속은 지킬 거예요. 녀석도 살려줄 거고 저 여자도 풀어줄 겁니다. 지금 여기에서 죽이기엔 조금 아까우니까. 물론이죠. 여기서 죽으면 안 되니까요. 윗분들에게도 잘 말해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 금방 돌아가도록 할게요. 걱정하지 마요, 내 단짝.” “…….” “…….” “수고했어, 김현성. 뭐라고 인사를 해야 될지 잘 모르겠는데… 음. 이게 좋겠네. 다음에 또 보자.” 콰직! “아.” 순식간에 눈이 번쩍 떠졌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등. 축축한 느낌에 기분이 더러워진 것도 잠시, 고개를 올리자 평소와 같은 천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돌아왔어. 돌아온 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에게 되묻는 질문이었다. 틀림없이 돌아온 것이 맞다. 이곳은 이전에 있었던 장소가 아니라 틀림없이 파란의 길드 하우스다. 방 한 쪽에 걸려 있는 검 한 자루. 마찬가지로 침대 위에 놓여 있는 검. 인테리어가 거의 없다시피 한 단출한 방 안은 틀림없이 자신의 방이었다. 항상 몸에 배어 있던 피 냄새는 없다. 비명과 괴성, 살려달라는 목소리 대신 들려오는 것은 아침을 여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다. 어둡고 불길한 마력 대신 환한 빛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에 있었던 일을 꿈으로 꾼 것은 꽤나 오랜만이다. 특히나 이렇게 현실감을 느끼는 것은 더욱더 오랜만이었다. 죽어가는 동료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었던 기분 나쁜 감촉이 아직도 손에서 느껴질 지경이다. 그때 나눴던 대화도 그리고 그곳의 분위기도 무척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기분이 더러워진 것은 당연지사. 자신도 모르게 온 몸에 힘이 들어갈 정도였다. 숨소리가 점점 더 가빠지는 것은 물론, 머리가 어지럽다. 괜스레 헛구역질이 올라오려고 했고,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한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자 결국에는 욕지기를 참지 못하고 바닥에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을 쏟아냈다. “하아… 하아….”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꽉 잡은 것은 당연지사. ‘지금은 달라.’ 당연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튜토리얼에서의 사고도 없었고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지금은 달라.’ 이전의 실수들을 최대한 바로 잡았다. 최소한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실수를 전부 다 바로 잡았다. 마음에 걸리는 건 단 하나도 없다. “달라. 예전과는 달라. 분명히 달라….” 정하얀도 처음부터 발견할 수 있었고 김예리 역시 함께 시작했다. 튜토리얼 던전에서 정진호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커다란 성과. 물론 아직 찾아야 할 사람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무척이나 많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기반은 다져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무척이나 좋은 출발선에 서게 됐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다. 이전과 비교한다면 상상할 수도 없이 달라져 있었으니 말이다. 단순히 상황이 좋아졌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세상이 뒤바뀌어 버렸다. 누가 그 중심에 있었는지는 뻔할 뻔자. 1회 차 때는 본 적이 없는 유형의 인재. ‘이기영.’ 그들은 1회 차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유형의 인재였다. 훈련에 잘 따라오고 있는 박덕구도 그랬고 대외적인 부분은 물론 파티의 모든 부분을 담당하는 이기영은 더욱더 그랬다. 마법사나 연금술사로서의 역할은 아직까지 기대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이기영의 진가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능한 사람.’ 단순히 유능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옆에서 보고 있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느낄 지경. 좋은 조건으로 파란에 올 수 있게 손을 썼고 용병여왕과의 친분을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이전에 없었던 인재 선희영을 길드에 영입하는 것에 성공했다. 자신보다 파티에 기여한 것이 많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전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검은백조와 붉은용병의 연합, 1회 차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림이었을 것이다. ‘미래가 달라졌다.’ 그것도 무척이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쉴 틈 없이 계속되는 전쟁은 무척이나 많은 인재를 죽이거나 바꿔 놨다. 애초에 많은 비전투직군이 자신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권력자들의 다툼에 휘말렸다. 초반부터 이런 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놔야 된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 상황이 좋다.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 작은 날갯짓이 태풍을 만든다. 그 장면을 실제로 보고 있으니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다.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만난 작은 인연이 현재 린델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이다. 물론, 앞으로 흘러갈 미래를 너무 뒤바꾸는 것도 좋지는 않지만 최소한 지금 이 시점에서는 나쁜 흐름은 아니었다. ‘비축해야 해.’ 지금은 최대한 힘을 길러야 하는 시기다. 여러 생각을 하고 있던 때, 밖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형씨.” “네. 덕구 씨.” “아침 먹을 시간이요. 형님이랑 누님 그리고 꼬맹이랑 사제 아가씨도 기다리고 있소.” “네. 금방 나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늦잠을 자서….” “매일 일찍 일어나던 양반이 늦게 일어나는 거 보면 잠이라도 설친 거 아니요?” “비슷합니다.” “야한 꿈이라도 꾼 거 아니요?” “…….” “거, 농담이요. 모두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내려오쇼.” “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달라질 수 있다. 마음 한구석에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치솟기는 했지만 틀림없이 바꿀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하기 위해 시작한 2회 차였고 후회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모두에 대한 속죄. ‘달라질 수 있어.’ 미래를 바꾼다. 그게 바로 이곳으로 돌아온 이유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현성 씨.” “그럼 앞으로의 파티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모두들 식사하면서 편한 분위기에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네.” “스펙업, 능력치 상승과 전직에 대해서입니다.” “새로운 직업 말이요?” “네. 그렇습니다.” # 75 회귀자 사용설명서 075화 세 번째 직업(1) 나쁜 타이밍은 아니다. 이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듯한 느낌이었고,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조금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싶을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외부적으로 방해되는 요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붉은용병, 검은백조의 일은 마무리 단계에 있었고 이지혜의 일은 확실하게 맞아 떨어졌다. ‘여러분이 승리했습니다. 여러분의 승리입니다. 린델은 평소처럼 평화롭고 이전보다 더욱더 안전할 겁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 정유라의 사과를 받았다는 언플과 함께하긴 했지만 겨우 이 정도의 발언으로도 대중들을 진정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변한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계속된 언론의 선동에 대중들은 자신들의 승리에 환호했고 스스로 만족했다. 한 개인이 대형 길드의 압력에 맞서 싸워 이겨낸 것에 함께 기뻐했다. 이쪽에게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내 발표가 끝난 이후 며칠 뒤 검은백조는 지휘체계 개편과 초보 모험가들에 대한 기부를 홍보했다. 갑론을박이 있기는 했지만 나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검은백조의 모든 간부가 나와 고개 숙여 사과한 것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형 길드의 간부들이 이런 사과를 한 적이 없으니 대중의 입장에서도 무척이나 신선했으리라.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면 그 날 이지혜가 떠난 이후의 정하얀의 반응. 당장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종종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전보다 달라붙어오는 게 더 심해졌고 나와 함께 하는 것으로 자신의 불안감을 잊으려는 상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설명하자면 조금 더 자기 주도적으로 변했다고 하는 게 어울리리라. ‘좋지 않아.’ 당연하지만 정하얀의 이런 변화는 그다지 달갑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물론 아직은. ‘어디가요, 오빠?’ 라고 묻는다든지. ‘언제 돌아오실 건가요.’ 라고 물어오는 것이 전부였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종류의 집착은 내 쪽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지혜와 어느 정도의 커넥션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묘한 분위기 같은 걸 느낀 게 틀림없다. 물론 이지혜는 얼굴의 철판을 깔고 모른 척하기는 했다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 유지되고 있는 묘한 긴장감 같은 걸 캐치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시스템이 공인으로 인정한 영혼의 단짝이니 정하얀이 뭔가 낌새를 차린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가짜 연인 컨셉을 유지하고 있는 용병여왕 차희라보다는 이지혜를 조금 더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녀를 컨트롤해야 한다. 항상 그걸 머릿속에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평생 끌려 다닐 수도 있다. 아무튼 간에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성장하기에는 최고의 적기다. 파란 내에 미친 늙은이들을 제외하면 우리를 억압하는 외부적인 요인은 없다. 사이좋은 삼권 동맹 추진, 조금 더 좋아진 던전 문화와 사냥 문화, 우리 곁에 있는 언론을 통해 여기저기에서 지원들이 쏟아지는 최고의 상황. 어느 정도는 날아오를 준비를 마친 것처럼 보였다. 그게 현 김현성 파티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이다. “여러분도 대충 이해하시고 있겠지만 전직을 하는 데 필요한 선행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사냥으로 경험치를 쌓는 것 그리고 직업 고유의 특정 행동을 반복하는 것. 능력치를 오르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력을 사용하면 마력이 오르고 근력을 사용하면 근력이 오를 거라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물론입니다.” “지난 번 던전행 이후로 여러 사정 때문에 잠깐 휴식기를 가지기는 했지만 지금보다 좀 더 빠르게 성장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최소 지금의 선희영 씨 정도로 성장하면 이상적일 것 같군요. 아니 최소한 저번에 함께 던전 공략을 진행했던 다른 분들 정도의 스펙은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소한 초보자 타이틀은 때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렇군요.” “최소 세 번 혹은 네 번의 전직, 60대의 주요 능력치. 그게 제가 여러분들께 요구하는 전부입니다.” 어려운 문제이기도 했고 쉬운 문제이기도 했다. 김현성의 저 발언은 아마 나와 박덕구 그리고 꼬맹이 김예리. 그중에서도 꼬맹이와 나를 저격한 발언으로 들렸다. 물론 녀석은 우리의 능력치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마력이 40대 후반으로 다다르고 있었고, 김현성 자신은 이미 능력치가 50대를 넘어섰다. 본래부터 우리보다 늦게 들어온 선희영 같은 경우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느리기는 했지만 박덕구도 차근차근 성장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 아직 어린 김예리와 내가 김현성 파티의 유일한 골칫거리로 느껴지고 있으리라. ‘흠.’ 김예리는 차라리 낫다. 전설 이상의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성장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김현성 파티의 골칫거리는 바로 나. 물론 성장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니다. 연금술사라는 내 직업은 빈약한 마력을 커버할 수 있는 직업이기도 했고 어느 정도 나와 맞는 느낌이니까. 그렇지만 확실히 전투직군으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아직까지 완전히 성장한 모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흑마법사를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 때도 있었다. 어차피 성장의 한계야 있었겠지만 지금보다는 강했을 테니까. 물론. ‘이곳이 신성제국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끄응….” “한 달 이내입니다. 여러분이 전원 한 달 이내에 세 번째 전직과 능력치를 맞출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말은 쉽지만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되지는 않을 거요. 직업은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능력치 같은 경우에는 훈련을 해도 오르는 속도가 더뎌지고 있기도 하고… 사냥을 하면 달라지는 점이야 있겠지만….” “아마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일단 사냥을 나가는 것부터 시작하겠지요. 적어도 목표로 했던 것들을 완성할 때까지는 도시를 나가 돌아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음.” “원정에 나가는 인원은 다섯. 기영 씨를 제외하고 모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형님이….” 솔직히 조금은 가슴이 철렁할 수밖에 없는 상황. 승차감 좋은 김현성 버스에서 내리라는 소리처럼 들렸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솔직히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 그건 안 돼요.” 짧은 시간이지만 오만가지 생각이 뇌리에 꽂힌다. 혹시 이제부터 비전투직군으로 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메인 파티에서 밀어내려고 하는 게 아닐까? 따위의 잡생각이다. 박덕구와 정하얀은 나보다도 깜짝 놀란 표정. 심지어 선희영도 별로 기분이 좋아보이지가 않았다. 어쩌면 파티 내에서 확대된 내 영향력을 줄이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표정은 무척이나 담담하다. 애초에 김현성의 성격상 그 정도의 일로 나를 밀어낼 결심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놈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는 소중한 파티원이었으니까. 심장은 쿵쾅거리지만 별다른 동요 없이 입을 열었다.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김현성의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너무 의지하고 있습니다.” “아.” “덕구 씨나 하얀 씨는 너무 좋은 환경에서 성장해 왔습니다. 사냥에 익숙하지 않은 희영 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편하거나 사냥이 쉽다는 종류의 환경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의 노고를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만 여러분은 기영 씨의 존재로 인해 생기는 심리적 안정감이라는 환경에 너무나도 편하게 안주해 있습니다.” “심리적 안정감 말이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는 간다. 아니, 이해만 간다. “조금 과대 해석하자면 기영 씨의 존재가 여러분의 성장을 막고 있는 겁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부끄럽지만 제 존재 역시 악영향을 끼치고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들과 함께 원정을 나가기야 하겠지만 크게 개입하지 않을 겁니다. 오롯이 저와 기영 씨를 제외한 네 분이서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터무니없는 과대평가.’ 골칫거리가 나였던 것은 일단은 완벽한 정답이다. 물론 그 의미와 해석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내가 성장을 못 하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성장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문제란다. 김현성이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정하얀이나 박덕구가 나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내 존재가 성장을 막고 있을 정도의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까놓고 이야기하면 김현성이 뭔가 착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기영 씨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군요.”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하얀이나 덕구는….” “기영 씨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기영 씨는 파티에 기여하는 부분이 큽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눈에는 보입니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기영 씨가 없는 이번 원정은 철저한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클 겁니다.” “그, 그렇지 않아요. 아니 만약에 그렇다고는 해도 어떻게 오빠랑… 한, 한 달이나….” “우리는 어린애가 아니요, 형씨. 물론 기영이 형님이 대단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적어도 이 파티를 이끌어가는 입장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번복은 없습니다. 이번 원정에 기영 씨는 참가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를 제외한 네 분이 사냥과 공략을 진행하게 될 겁니다.” 모두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일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진 않아.’ 나로서도 조금 의아하기는 하지만 김현성이 그렇게 판단하고 성장 방향을 결정했다면 그게 맞을 것이다. 특히 박덕구는 몰라도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내가 없는 상황에서도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 이쪽을 따르는 것은 좋지만 너무 과한 것보다는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한 달 동안 떨어져야 한다는 현실이 믿기 힘든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나 역시 김현성의 결정에 반기를 들 생각은 없다. “후우….” “뭐, 저도 현성 씨 말에 동의합니다. 그게 성장 방향에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문제는 저들이 아닌 나. 김현성 버스에서 내린 이후라면 미아가 되기 일보 직전의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파티원이 강해지는 것은 좋다. 그렇지만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다면 앞으로 함께하는 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건 안 돼.’ 굳이 나를 따로 뺀 것을 보면, 회귀자가 남겨둔 안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잠재 능력이 낮은 것처럼 보이는 나를 위한 선물이 있을 거다. 능력치의 상승과 전직. 무척이나 달콤하게 들려오는 울림. 어떤 것을 준비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꽤나 달콤한 꿀단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그동안 저는….” 그렇지만 그건 내 착각에 불과했던 모양. 이쪽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 김현성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신뢰감이 가득 차 있었다. “기영 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치 상승과 전직을 중점으로 생각하고 한 달 동안 움직여 주시면 됩니다.” “아… 네.” “출발은 최대한 빠르게 하는 걸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기영 씨는 도와주지 말아 주십시오. 출발 준비부터 해야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쪽은 신경 쓰지 마시고 곧바로 기영 씨 본인의 성장에 집중해 주세요.” “네….”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자식은 나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뭔가 심경의 변화가 생긴 듯한데 이런 상황이 찾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제가 없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믿고 있겠습니다, 기영 씨.” ‘믿지 마, 이 새끼야.’ 라는 말이 혀끝에 맴돌고 있었다. # 76 회귀자 사용설명서 076화 세 번째 직업(2) 회귀자의 신뢰를 받는다는 건 물론 행복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신뢰는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를 어느 정도로 평가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나는 아직도 김현성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시기에 있는 어린아이다. 특히나 이런 성장 방향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렇다. 물론, 전직과 능력치를 올리는 게 뭐가 대수냐고 물으면 마땅히 대답할거리가 없지만 이 정도의 과대평가는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조금은 불신해라, 이 새끼야.’ 그동안 혼자서도 잘한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는 했지만 이번 사태는 마음에 안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원정은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클 겁니다.’ 기존의 파티원들이 내가 주는 심리적 안정감에서 안전하게 사냥해 왔다는 말을 조금은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저도 가지 않을 거예요. 가기 싫어요. 절대로 안가요.” “…….” 문제는 정하얀이었다. 원정 날짜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여러 가지 변명을 들며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게 황당하게 느껴지는 부분. 말이 나왔던 첫날에는 김현성이 목표라고 말한 능력치와 전직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원정을 준비하는 며칠 안 되는 시간 동안 전직을 하거나 능력치를 달성한다면 원정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정하얀이 목표치에 다다른다고 한들 원정을 떠나는 것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었지만 그걸 빌미로 어떻게 비벼볼 생각이었을 거다. ‘당연하지만.’ 전설급의 재능도 단기간 내에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 했다. 물론, 짧은 시간에 폭발적으로 상승한 능력치 자체로도 경악할 만했지만 목표치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결국 정하얀은 무척이나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는데 그 상태가 마치 시한부 환자가 죽음을 인정하기까지의 단계와 굉장히 흡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으로 이루어지는 다섯 단계였다. 첫 번째 단계가 찾아오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달 동안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정말로 그렇게 될 리가 없다든가 농담이 분명하다든가. 그렇게 떨어지는 것 자체를 상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열심히 짐을 챙기는 박덕구나 선희영을 마치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멀리서 바라봤고, 그때의 회의가 없기라도 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원정일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 그 후에 찾아온 단계가 바로 분노였다. ‘…….’ 갑작스레 원정 스케줄을 만들어 버린 김현성을 미워하게 된 것이다. 다행이라고 하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살기나 살의는 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생사를 함께한 동료라는 의식은 있는 모양이다. 방 안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는 시간이 많아졌고 실제로 굉장히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 최약체라고 할 수 있는 김예리에게 분노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원정을 떠난 나름의 이유를 찾는 것이다. 활을 쏘는 궁수 꼬맹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숙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직접적으로 김예리에게 신경질을 내거나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정하얀은 순수했으니까.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어딘가를 향해 바보라든가 멍청이라든가 귀여운 욕을 쏟아내곤 했다. 박덕구 오피셜에 따르면 박덕구에게 다가가 김예리의 대한 뒷담화를 한 적이 있단다. 정하얀의 인성을 생각해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 다음 단계에 들어갔을 때는 말이 무척이나 많아졌다. ‘타협?’ 마치 나로 빙의라도 한 것처럼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로 열심히 할 수 있어요. 원정에 가지 않고 여기 있는 걸로도 능력치를 더 많이 올릴 수 있고, 더 열심히 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요. 흐으윽.’ 라든가. ‘그러면 일주일만 함께 가는 게 어떨까요? 그게 더 효과가 좋을 거예요.’ 라든가. ‘오빠도 함께 출발하되 현성 씨처럼 지켜보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같은 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목표와 수치가 제법 구체적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이곳에 남는 게 더 효과적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정도. 사냥을 떠났을 때와 이곳에 남아 있을 때의 능력치의 변화에 대한 통계적인 분석을 내놓았을 때는 솔직히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물론 김현성에게도 여러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박덕구와 선희영에게도 마찬가지다. 정식으로 항의해야 된다고 이상한 선동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런 종류의 선동은 박덕구가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단순한 추측에 불과했지만 아마 박덕구도 타협 단계에 들어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나에게 찾아온 적도 있었으니까. 정하얀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본 것이다. 사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다음 단계인 우울이었다. ‘우울….’ 눈에 띄게 살이 빠지기 시작했고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아졌다. 본인의 몸 상태를 본인이 인지했는지 아프다고 말하며 갈 수 없겠다고 종종 말해오기도 했고 마치 중증의 우울증 환자가 된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멍하니 하늘을 보는 일이 많아졌고. ‘정말 싫어요. 정말로….’ 혼자 중얼거리는 주기도 짧아졌다. 정하얀뿐만이 아니라 나도 함께 힘들었던 시기다. 그녀를 어르고 달래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물론 보상에 대해서 언급한다든가, 그동안 밀린 보상을 한 번에 해주는 방식으로 그녀를 진정시키기는 했지만 한 달 이상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 모든 행복한 시간을 날려버릴 정도로 충격적이었던 것 같았다. 물론 정하얀도 내가 위로해 주는 상황을 즐기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우울한 감정이 더 커진 것 같다. 함께 있는 시간이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멀어지는 시간이 무섭다는 걸 실감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스킨십을 하는 동안에도 눈물을 쏟아내는 것으로 네 번째 단계가 마무리됐다. 가장 큰 문제는 마지막 단계인 수용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앞선 네 단계를 전부 눈으로 지켜봐왔기 때문에 마지막은 결국 수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정하얀은 이별에 초탈한 상태가 되지는 않았다. 억지수용이라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끝까지 현실을 부정했고 심지어는 가기 전 날까지 믿고 싶지 않아 했다. 울고불고 했지만 효과가 있을 리가 만무. 그렇지만 파티의 결정이기도 했고 내가 내린 결정이기도 했다. 정하얀의 입장에서는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억지수용의 단계로 한 달 동안의 헤어짐을 준비한 것. 만약에 1년 이상 혹은 평생 보지 않는다고 했을 때의 그 파장이 어떻게 올지 상상하기 무척 힘들었다. 나를 만나며 이상한 성향을 가지게 된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헤어짐에 익숙하지 않다. 아마 언니들을 포함한 가족에게 버림받은 이후 오랜 기간 혼자 생활했던 것이 저런 성격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정하얀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 원정 날짜는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솔직히 원정 준비가 잘 되었을 리가 없다. 정하얀은 자기 멘탈을 지키는 것도 힘들어 보였고 이해는 되지 않지만 박덕구 역시 상태가 조금 이상했으니까. 선희영 같은 경우에는 그저 담담하게 이후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거 같았지만 봉사를 한동안 가지 못했던 걸로 스트레스가 조금 쌓여 있는 상태였다. 솔직히 김예리는 뭘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를 제외한 파티원의 원정 준비를 바라보는 일은 솔직히 무척 힘들었다. 당연하지만 버림받을까 봐 불안해진 상태가 아니었다. ‘이렇게 개판이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물론 뭔가 이상한 박덕구와 정하얀 그리고 원정이 익숙하지 않은 선희영. 꼬맹이까지 끼어 있었기 때문에 준비가 미흡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김현성 역시 이런 과정에서 손을 놓아버리자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정말로 저 상태로 출발할 겁니까?” “네.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는 게 맞습니다. 저희 파티원들은 명령 받는 것에 무척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아마 기영 씨도 느끼고 계실 겁니다.” “네….” “원정 중에 깨닫는 게 있을 겁니다.” “…….” “그동안 심리적으로 편한 상태에서 원정을 임했다는 건 지금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물론 사냥 중에는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겠지만… 덕구 씨나 희영 씨는 틀림없이 그 성장치가 높습니다. 하얀 씨는 두말할 것도 없지만 솔직히 모두가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저와 기영 씨가 함께 다니면 사고는 없을 테지만 만약에 둘 다 없다고 가정 했을 때에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김현성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사냥 같은 요인만이 아니다. 김현성 파티의 지휘체계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파티의 리더인 김현성이 있고 차선책으로는 내가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파티에는 그 뒤가 없다. 선희영이든 정하얀이든 박덕구든 간에 누구 하나가 나서서 원정에 대한 방향을 찾는다면 준비하는 과정이 수월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누구하나 제대로 된 질문이나 답을 찾는 사람이 없다. 이렇게 하면 되겠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조금 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원정은 훈련을 하는 것과 동시에 집단 내에서 우리의 차선책을 찾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잘될까?’ 솔직히 조금은 회의적으로 느껴지긴 한다. 지금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 달이나 되는 원정을 준비한다고 하기에는 소비 물품이 턱없이 부족했고 개인이 필요한 장비나 도구도 제대로 챙기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어린아이들끼리 여행을 준비하는 것 같은 느낌. 김예리가 챙긴 것이라고는 화살과 활이 전부. 정하얀은 멀리 나가는 의미를 아예 모르는지 나와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물건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게….’ 까놓고 말해서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우리 파티에게 투자를 했던 많은 길드나 집단이 지금 이 꼴을 본다면 당장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발버둥 치리라.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인 건 준비하고….” “정말 기본적인 것은 어느 정도 챙겨놨습니다. 그나마 덕구 씨나 희영 씨가 준비한 것들이 있으니까요. 저도 불안한 건 똑같습니다만 이렇게 하는 게 맞습니다. 자신들이 피부로 느끼는 것과 느끼지 않는 건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김현성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나와 녀석을 기다리고 있는 파티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름대로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기는 했지만 실속 없는 물건이 전부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원정 준비를 완벽히 마친 줄 알고 있는 박덕구를 바라보니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 답답한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명씩 이쪽에 말을 걸어온다. “너무 걱정하지 마쇼, 형님. 뭐, 한 달이나 걸리지도 않을 거요!” 한 달 이상이 걸릴 가능성도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제가 없는 동안 잘 부탁드려요, 기영 씨. 아무래도 봉사 활동을 가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밖으로 나간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봉사 활동을 받아야 될 처지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빠… 오빠아….” 눈에 눈물을 머금고 이쪽에 푹 안겨오는 정하얀을 봐도 가슴이 찡해지지 않을 지경. “그, 그동안 몸 조심히 계셔야 해요. 그, 그리고….” “응. 걱정하지 마, 하얀아.” 너희가 더 걱정되니까. 혹시라도 자신이 없는 타이밍에 이쪽이 다른 사람을 만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지만 일단은 이별의 아픔이 더 큰 모양. 출발하자는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와 살짝 정하얀을 밀어내기는 했지만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힘으로 어떻게든 붙들고 있는 모습. 결국에는 툭하고 떨어지기는 했지만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얼굴을 보는 게 쉽지가 않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거, 걱정하지 마쇼.” ‘고행길.’ 이번 원정은 김현성과 함께하는 버스여행이 아니다. 장담컨대 그 어떤 수도승이 걸었던 길보다 더욱 고통에 찬 고행길이 될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같이 안 간 게 다행일 수도 있어.’ 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 77 회귀자 사용설명서 077화 세 번째 직업(3) 항상 북적거리던 길드 하우스의 2층이 묘하게 조용하니 왠지 모르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정이 들었나 보네.’ 파티원들이 떠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감정을 느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없으니 외롭다 정도의 수준을 벗어났다고는 볼 수 없다. 단순히 환경이 갑작스레 바뀌었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리라. 오히려 조금은 즐거운 느낌도 있다. 그동안 묘하게 불편한 점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했으니까. 항상 이쪽의 동태를 살피는 정하얀이나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박덕구, 함께 봉사활동을 나가자고 하는 선희영 때문에 개인 시간이 무척 부족했다. 차라리 김예리가 이쪽에 말을 걸어오지 않는 게 고마울 지경. 만약 그 꼬마까지 난리를 피웠더라면 사생활 같은 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분간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해야 되기는 했지만 뭔가 휴가를 얻은 듯한 기분도 든다. ‘절박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김현성이 목표로 했던 세 번째 직업이나 능력치의 상승을 꾀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저쪽만큼이나 절박하게 움직여야 한다. 도대체 내 뭘 믿고 성장을 따라올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의 생각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 역시 그렇게 나쁜 상황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으니까. 영웅 등급의 연금 장비들과 수많은 촉매와 자재, 이미 성장하는 게 확정된 상황이나 다름없다. 능력치 같은 경우에는 문제가 없긴 하지만 그 능력치가 지력이라는 게 문제다. 애초에 다른 능력치는 올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선택지가 없는 상황. 그렇기 때문에 세 번째 전직은 무척 중요했다. 전투 능력으로 비비는 건 어차피 생각도 안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순 연구직으로는 파티를 따라다니는 것은 무리가 있다. 천천히 올라가며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구체화시키지 않았던 문제에 대한 해답들이었다. 연금술사라는 개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최소한의 전투 능력을 갖출 수 있는 방안이다. ‘일단은 호문클루스….’ 사실상 연금술사를 선택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마력의 소비 없이 소환수와 비슷한 존재를 다룰 수 있다는 건 이쪽에 무척이나 유리했으니까. 실제로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에서는 호문클루스를 굉장히 심층적으로 다룬다. [호문클루스라는 것은 여성의 태를 빌리지 않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를 의미한다. 학파마다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조금씩 그 의견이 다르기는 하지만 최소한 필자는 호문클루스를 만들어진 생명체라고 정의하겠다. 물론, 키메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키메라와는 다르게 우리 연금술사가 다루는 호문클루스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개념이다.] 호문클루스란 만들어진 인공생명체를 의미한다.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모른다. 심지어 터커의 책에도 이론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다. 키메라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유전자를 조작하는 개념인 키메라와 만들어진 생명체인 호문클루스는 엄연히 그 성질이 다르다. 어쩌면 터커에게도 호문클루스는 미지의 영역이었을 수도 있으리라. 아니, 만약 실제로 생명체를 탄생시켰다고 한들, 자신이 새로운 생명을 만들었다고 떠들고 다녔을 리가 없다. 그건 일종의 신의 영역이라고 봐도 무방하니까. ‘두 번째는 물약.’ 이 세계에서 포션이라고 불리는 물약이다. 기껏 물약으로 전투 능력을 갖출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당연히 고개를 젓겠지만 이건 단순한 내 상상력에 기반한 이론의 일종이었다. ‘마법을 포션에 담을 수 있는가?’ 이 대륙의 마법의 원리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마력의 탑을 쌓고, 이미지하기 위해 주문을 외운다. 완성된 주문은 팔이나 특정신체에 머무르고 사용자의 주문 시동어와 함께 발동한다. 머무르는 주문을 신체가 아니라 포션이나 특정 물건에 담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런 실험이다. 물론 일부 아이템에는 마법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아이템은 사람이 만든 아이템이 아닌 어디까지나 본래 완성되어 있는 완공품이었다. 실제로 어떤 마법학파는 아이템에 마법을 인챈트하지만 그 효과가 미비하기도 했고, 효율이 좋지 안다고 알려져 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에 연구가 중단된 것이다. 만약에 연금 마법을 사용하는 연금술사가 연성진을 활용해 1회용 마법은 담을 수 있다면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상업적으로도 무척 뛰어난 성과를 얻을 것이 분명하다. ‘세 번째는 키메라.’ 유전자나 세포 따위를 조작해서 소환수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사실상 가장 간단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기는 하다. 이 세계에서도 몬스터라는 생명체는 흥미의 대상이었으니까. 단순히 키메라를 제조하는 것은 쉽다. 몇몇 몬스터는 굉장히 유사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유전자를 섞어 실험에 들어간다고 해도 틀림없이 몬스터는 살아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것을 컨트롤 하는 것은 연금술사의 영역이 아니라 흑마법사의 영역이다. 내가 가진 마력으로는 만들어진 키메라를 컨트롤할 수 없다. 물론 아직 성체가 되지 않은 녀석을 잡아 배양한 이 후에 키우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 방법이 제대로 먹힐지가 문제다. 내가 키운 키메라에게 잡아먹히고 싶지는 않다. ‘그밖에도….’ 생각해 놓은 방향은 많다. 이건 내게 있어서 생존이 직결된 문제였으니까. 위험성은 높지만 내 신체를 직접 손볼 생각을 해본 적도 있고, 실제로 현자의 돌을 연성하는 방안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효율이 좋게 나오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아직까지 내가 다루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 부분도 있다. 미루고 있지만 성장 방향을 어느 정도 결정하고 움직여야 할 시기다. 회귀자 일행을 따라가려면 발바닥에 땀이 날 때까지 뛰는 것도 중요하지만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단기간에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험과 실패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면 되고 연구가 막히면 조언을 구하는 것은 상식이다. 마법과 연금술은 갈래는 다르나 어찌됐든 뿌리는 같다. 다른 종류의 직업 모두 마찬가지. 각자의 해석이 존재하는 만큼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리라. ‘마도 길드가 낫겠지?’ 확실히 나쁘지 않은 선택지. 현자의 돌의 연구에 끼어 달라며 아우성을 쳤던 그들이라면 이기영 연구실의 충실한 일꾼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여러 생각을 하며 식당에 들어갔던 바로 그때였다. “오늘은 혼자 드시나요?” “아.”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고개를 돌리니 시야에 비치는 것은 조금 나이가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아! 인사를 드리는 건 처음인가요. 파란 5번 대의 파티장을 맡고 있는 황정연이라고 해요.” “아. 반갑습니다. 저는….” “알고 있어요. 7번 대 파티의 연금술사 이기영. 맞죠?” “네.” “공포의 정원은 잘 다녀오셨나요?”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 그렇지만 그녀가 어째서 이런 질문을 했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발견자.’ 눈앞에 있는 이 황정연이라는 여자가 던전을 발견한 뒤 우리에게 양보한 사람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들었던 대로 눈치가 빠르시네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물론 칭찬이죠. 사실 조금 죄송하기도 하네요. 정말로 좋은 경험을 하고 나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솔직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어요. 검은백조에 있었던 친구가 죄송하다고 전해 달라는 걸 지금에서야 말씀드리네요.” “아! 아닙니다. 이미 사과를 받기도 했고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 됐으니까요. 오히려 제 부족함을 깨닫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분이 또 좋네요. 모두의 기대를 받는 7번 대 파티와 이야기를 나눈 건 처음이네요. 기뻐라.” 조금 텐션이 낮은 얼굴과 목소리다. 엄청나게 느긋하게 보이는 얼굴이라고 하는 게 가장 어울리리라. 얼굴은 조금 젊어 보이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옛날 생각이 나게 만드는 분위기. 현대에 살고 있었던 여성에게 어울리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뭔가 양갓집 규수 같은 느낌의 인상이었다. “사실 원정에서 돌아온 지는 조금 오래 됐었는데 7번 대 여러분들이 워낙 똘똘 뭉쳐 있어서 말 걸기가 쉽지 않았지 뭐예요.” “아. 그렇군요.” “다 같이 모여서 회식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타 파티 여러분은 원정에서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으시고… 길드가 바쁘긴 바빠졌으니까요. 모두가 여유가 없으셨던 거겠죠.” “아아아. 듣기는 했습니다. 영웅 등급의 던전에 들어가셨다고….” “네. 그보다는 뭔가 고민이 있으신 듯한 표정인데….” “흠….” 누가 봐도 마법사 같은 외형을 하고 있다. 아마 같은 유형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고충이라고 생각했던 모양. 굳이 조용히 있는 후배에게 말을 거는 성격과 던전의 소유권을 양보한 것을 보면 오지랖이 꽤나 넓은 것 같기는 했다. 물론 그 오지랖이 이쪽에 무척 도움이 되는 이야기인 것은 당연지사. 굳이 마음의 눈으로 능력치를 확인하지 않아도 그녀가 능력 있는 마법사라는 것은 눈치챌 수 있다. 굳이 숨기지 않은 마력은 그녀의 수치를 대충이나마 짐작하게 했고, 눈에 깃든 총명함도 눈에 띈다. 여유로운 성격도 아마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력 특유의 영향이리라. ‘쓸 만하겠는데….’ 굳이 마도 길드에 지원을 요청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 느낌. 그녀에게 여러 가지 물어봐도 상관은 없으리라. “네.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최근에 조금 방향을 잘 잡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네네. 이해해요. 그럴 때가 다 있죠.” “선택지가 꽤나 많은데 사실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지도 감이 오지 않아서….” “그것도 이해해요. 누구나 겪는 일이니까요. 특히나 기영 씨 같은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겠네요.” “네?” “용병여왕과 하얀 씨 사이에서 고민하는 거 맞으시죠? 한쪽은 지구에서부터 사귀고 있었던 연인이고 한쪽은 이곳에서 생사를 함께한 쪽이라니…. 선택하는 게 어려운 게 당연하잖아요?” “예?” “사실 일부일처나 일처다부가 당연시 되던 현대의 윤리관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때는 두 명 모두 선택하는 게 정답일 수도 있답니다.” “…….”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무척이나 황당하다는 내 표정을 보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있던 황정연이 황급히 입을 닫았다. “아. 그 이야기가 아니었군요.” “네.” “죄, 죄송해요.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시고 있는 것 같아서 당연히 그럴 줄….” “…….” 조금 민망하다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것 같았지만 뭔가 잘 안 되는 느낌. 어디에선가 뭔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닮았는데….’ 인상도 다르고 생김새도 전혀 다르다. 아니, 인종 자체가 다른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상상하고 있는 얼굴은 산적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돼지였고 눈앞에 있는 여자는 현모양처 같은 이미지였으니까. 그렇지만 왠지 이 여자에게서 박덕구와 비슷한 향기가 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닮았어.’ 뭔가 연관되면 피곤해질 것 같은 그 느낌도 같다.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앞에서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정신 좀 봐. 죄송해요. 드라마를 본 지가 너무 오래 되서… 저도 모르게.” “아… 네.” “너무 사이좋은 두 분이니까요. 사실 하얀 씨와 기영 씨를 볼 때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때가 많아서… 특히나 하얀 씨가 기영 씨를 정말로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그래서 그런 마법까지 걸고 다니시나 봐요.” “네?” “위치 추적 마법이요. 제가 이렇게 함께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정보 정도는 들어가고 있을 텐데….” “음?”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직접 신체 부위도 넘겨주셨잖아요? 로맨틱해라.” “…….” “…….” “혹시… 모르고 계셨나요?” “…….” “못 들은 척해주시는 건… 안 되겠죠?” 무척이나 황당한 소식이었다. # 78 회귀자 사용설명서 078화 세 번째 직업(4) 무척이나 황당한 소식이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머릿속으로 나에게 마법을 건 사람의 얼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성격으로 보나 지금까지의 행적으로 보나 범인은 뻔하다. ‘정하얀.’ 틀림없이 정하얀이다. 여러 길드나 클랜도 떠오르기는 했지만 겨우 나 같은 놈을 위해 그런 수고를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용의자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나에게 집착하고 있는 세 명의 여인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조금 애매한 포지션인 차희라 같은 경우에는 일단 아웃이다. 차희라가 다른 마법사를 고용해 이쪽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다는 건 왠지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기도 했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가 굳이 내게 이런 일을 할 이유가 없다. 또 다른 용의자라고 할 수 있는 이지혜 역시 마찬가지. 심지어 이지혜는 이쪽에 마법을 걸 시간도 능력도 없다. 아니 그전에 만약 누군가가 내게 마법을 걸었다면 틀림없이 눈치챘을 거다. 쉽게 생각하면 내가 모르게 마법을 걸 수 있는 사람이 범인이라는 이야기. 내가 휴식을 취하고 있거나 자고 있었을 때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와 마법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그게 가능한 것은 정하얀뿐이다. 자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주문을 외우는 정하얀을 떠올리니 괜스레 소름이 돋을 지경. ‘이게 뭐야….’ 길드 하우스에 들어오기 전에는 사실 정하얀이 밤마다 이쪽으로 와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가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니 길드 하우스에 들어온 이후로는 중간에 잠을 깬 적도 없다. ‘언제부터였지?’ 생각해 보니 정말로 그렇다. 사실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넘겨도 별로 상관없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정하얀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니 기분이 묘했다. 길드 하우스에 들어온 이후로 자는 도중 한 번도 깨지 않은 게 정말로 우연인가 생각한다면 답이 나온다. ‘우연일 리가 없지.’ 내 방에 들어와 수면 마법을 걸고 이 짓거리 저 짓거리 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너무 황당해서 헛기침이 나올 지경. 물론 추측일 뿐이지만 만약에 전부 사실이라면 이곳에 들어온 이후부터 정하얀에게 간접적으로 성교육을 시켜준 셈이 된다. ‘허….’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춘 뒤에 살짝 고개를 드니 큰 실수를 했다는 듯이 흙빛이 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저 여자라고 해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굳이 현대에 비유하자면 의부증을 앓고 있는 부인이 남편에게 감시를 붙였다는 것을 전한 꼴이니까. 나와 정하얀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로 풋풋해 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괜스레 이쪽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얼굴이다. 혼란스러운 정신을 부여잡고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네? 네?” 정확한 경위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 나도 조심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정확히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이렇게 뜸을 드리니 괜스레 조금 더 불안해진다. 혹시나 내가 모르는 기능이 숨겨져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된 탓이다. 물론 이 대륙에서 도청 같은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정하얀이라면 전혀 새로운 마법을 개발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씀드리기는 조, 조금…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알고 싶어서 말입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기도 했고…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려드리긴 해야겠네요. 정, 정말로 깜짝 놀랐네요.” “네. 하얀이가 질투가 조금 심한 편인데… 아마 그런 것 때문에 마법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 어머. 하긴 용병여왕이랑 그런 소문이 났으니까요. 충분히 이, 이해할 만하긴 한 것 같네요.” “…….” “어쩐지 너무 꼭꼭 숨겨 놓은 것 같더라니….” “네?” “아마 평범한 사람은 눈치채지도 못했을 거예요. 특히나 검사 같은 종류의 인간은 기영 씨한테 마법이 걸려 있는지도 모르고 있을걸요. 마법사도 마찬가지예요. 저처럼 마력에 민감한 체질이 아니거나 그… 보통 마법사 같은 경우에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체계적이고 복잡하게 마법을 걸어 놨어요. 마력 수치 80이상이 되지 않으면 아마 그냥 넘어갔을 거예요. 마력도 굉장히 희미하고 무엇보다 기영 씨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마력 파장에 녹아들도록 설계했으니까요.” “아….” “솔직히 제가 봐도 흥미롭네요. 이런 방식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천재라는 소문이 거짓말은 아니었군요. 저랑은 분야가 조금 달라서 흉내 내기도 쉽지 않겠어요. 기영 씨가 눈치채지 못하신 것도… 무리가 아닐 것 같네요. 연금술사라고 하셨으니.” “네….” “그래도 어떤 마법이 걸렸는지에 대해서는 말씀 드릴 수 있겠네요. 주문 자체는 기본 주문을 차용했으니까요.” “네네.” “일단 첫 번째로 걸려 있는 마법은 말씀드렸다시피 위치 추적 마법이에요. 이름 그대로 상대방에 간단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설계된 마법이죠. 이 정도는 사실 별거 아니긴 한데 두 번째로 걸려 있는 마법은 제가 봐도 조금 재미있네요.” “뭔가요?” “던전 내에서 세이프티 존을 만드는 것과 유사한 종류의 마법이에요. 일정 반경에 생명체가 들어왔을 때 신호가 울리는 마법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거예요. 아마 반경은 50센티 정도… 쉽게 이야기해서 타인이 일정 구역 이상 기영 씨에게 접근하면 신호가 가는 마법이라고 설명 드리는 게 맞겠네요. 물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네.” “보통 이런 종류의 마법을 걸기 위해서는 대상자의 신체 일부나 혈액 따위의 촉매가 필요한데… 정말로 전해주신 적이 없으신 건가요?” “촉매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촉매 없이 이런 종류의 마법을 사용한다는 건 불가능해요. 이 마법은 기영 씨가 가지고 있는 마력의 파장과 유사한 형태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발견하기 힘든 거니까요. 특히나 위치 추적 마법 같은 경우에는 촉매의 존재가 필수예요. 없다면… 발동 자체가 불가능해서….” “기억이 나기는 합니다만….” “역시….” “혹시 머리카락 같은 종류도 괜찮은 겁니까? 예를 들면 손톱이라든가.” “아뇨. 머리카락 한 올 가지고는 불가능할 거예요. 한 뭉텅이 정도가 필요하겠네요.” 당연히 머리카락 한 뭉텅이를 전해준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생각나는 것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전에 던전에서 정하얀이 내 이빨을 주워 가는 걸 본 적이 있다. 그걸 떠올리니 괜스레 황당하다. 그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런 식의 결과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생각해 보니 이지혜와 함께 있을 때도 왠지 마법이 걸려 있었던 것 같은 느낌. 나와 그녀 사이에 묘한 기류를 눈치챈 것이 아니라 정하얀이 설정해 놓은 범위 내에 이지혜가 들어왔다는 걸 안 것이다. ‘그래서였어.’ 정하얀이 이지혜를 죽일 듯이 노려본 것은 그녀가 범위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머. 질투가 좀 심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어… 어떡하나 몰라.” 걱정하는 것치고는 조금 흥미로워 하는 것 같은 표정. 적절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막장 드라마를 보고 있는 우리네 어머니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큼… 혹시 이쪽이 하는 이야기를 듣거나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종류의 마법은 걸려 있지 않은 겁니까?” “네. 걸려 있는 마법은 딱 두 가지 뿐이에요. 정말로 교묘하네요. 제가 봐도 놀라울 정도로… 이제 막 이곳에 온 신입이 이런 마법을 완성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물론 마력 자체에 들어가는 마력의 소모량이 적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지만… 학계에 논문을 쓸 정도는 되겠는데요?” 그 논문의 제목은 남자친구 스토킹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끄응….” “해제하려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아뇨. 지금 당장은 괜찮습니다.” “어머. 구속 받고 싶은 스타일이신가 보다.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로맨틱하네요.” ‘로맨틱은 개뿔.’ 말 그대로다. 무척이나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너무 황당해서 도리어 담담해졌다. 이쪽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사실. 내 성격이 이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하얀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것으로 이 정도의 교환이라면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물론 소름이 끼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거부감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모른 척할 수 있다. 어찌됐든 이런 종류의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도 호재다. 혹시나 방에는 다른 장치가 있지는 않은지 궁금해졌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함께 방으로 올라가 주시겠습니까?” “네?” 괜스레 경계하는 표정을 보내오는 것 같아 이쪽이 더 황당해졌다. “물, 물론 제, 제안은 감사드리지만 조… 조금 뜬금없고 좀 당황스럽네요. 당신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이미 주변에 여자도 많으시고… 물론 이런 상황에 합류하는 건 조금 뭔가 로망이랄까 그런 게 있기는 하지만 제 취향은 조금 덩치가 크고 포근한 사람이라….”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 “혹시나 제 방에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아아아… 그, 그렇겠죠.” 낯선 여자에게서 박덕구의 냄새가 난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면 같이 올라가시죠! 안 그래도 엄청난 비용을 들였다는 공방이 궁금하기도 했었거든요. 오늘은 운이 좋네요.” “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런 종류의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으리라. 살짝 자리에서 일어나자 뭔가 굉장히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쪽을 따라오는 황정연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쪽은 나름대로 진지한 것에 비해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드라마 촬영장이라도 구경하는 표정이다. 2층으로 올라갈수록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무거워지긴 했지만 한 번 하는 것 확실하게 정리하는 것이 낫다. “여기가 7번 대 분들이 사용하시는 숙소군요. 들었던 것처럼 무척 좋네요.” “사실 다른 분들의 숙소를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설명하기가 조금 그렇군요.” 한참이나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여자가 선 곳은 박덕구의 방 앞. 뭐라도 발견한 건가 싶어 슬쩍 얼굴을 바라보니 왠지 모르게 미소를 보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겠지….’ 내가 상상하는 최악의 그림이 나오지 않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간에 목적은 박덕구의 방이 아니라 내 방이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방문을 여니 평소의 모습이 들어왔다. 책상에는 각종 서적이 널려 있고, 여러 장비가 쌓여 있는 방. 청소를 하지 않은 티가 나는 게 괜스레 민망하지만 지금 와서 정리한다고 한들 더욱더 이상하게 비칠 것이다. “정말 깔끔한 방이네요.” “네….” “어머나. 저보다 책을 더 많이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 “반쯤은 읽다 포기한 것들입니다.” “그래도 공부한다는 건 좋은 거죠. 아, 내 정신 좀 봐. 비슷한 마법이 걸려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잠시만요.” 눈에 마력을 담은 뒤에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 같은 느낌. 이 정도로 작정하고 찾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무래도 정하얀의 마법적 재능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황정연의 표정이 무척이나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흥미로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깜짝 놀란 표정도 종종 눈에 띄어 내 불안감이 증폭됐을 정도다. 결국에는 방 안을 둘러보던 그녀가 이쪽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있기는 있네요.” “네?” “벽 그리고 침대에서 보여요.” ‘…….’ # 79 회귀자 사용설명서 079화 세 번째 직업(5) “벽 그리고 침대에서 보여요.” “…….” “일단은 벽부터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혹시 바로 옆방을 사용하시는 분이 하얀 씨…… 맞죠?” “네. 그렇습니다만.” “하얀 씨가 조금 음흉한 면이 있네요.” 대충 뭔지 예상이 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튜토리얼 때부터 정하얀이 환상 마법으로 벽을 만드는 걸 봐왔다. 그렇지만 내가 벽 하나가 통째로 바뀌어 있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너무 당황스럽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벽을 손으로 매만져 봤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마법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벽이었다. ‘전부 바뀌지는 않은 건가?’ 분명히 일반 벽이다.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황정연을 바라보니 그녀가 즐겁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벽이 통째로 바뀐 건 아니에요. 대신 작은 구멍이 있어요.” “네?” “여기 한 번 손가락을 넣어보시면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이쪽에 걸어둔 안전거리를 유지하려는 듯 천천히 손가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자리한 곳에 슬쩍 손가락을 넣어보니 쑥 하고 벽면으로 손가락이 뚫고 들어가는 모습은 심히 당황스러울 정도다. 지금까지 이 구멍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다는 게 황당했다. 손으로 직접 만지고 나서야 마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모를 수가….” “아주 미약한 마력이니까요. 그리고 이 방 자체가 이미 마력에 둘러싸여 있으니 눈치채기 힘드신 것도 무리가 아니죠. 기영 씨는 마력에 그렇게 민감한 체질도 아니실 것 같고… 무엇보다 이 구멍은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네요.” “아, 그렇습니까?” “네. 한 달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째서 하얀 씨가 기영 씨 방을 훔쳐보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예상은 가는데요. 후후후.” “아… 네.” 불행 중에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리라. 물론 이 방에서 뭔가 엄한 짓을 한 기억은 없지만 그래도 정하얀이 내 모든 모습을 봤을 거라고 생각하니 찝찝한 기분이 든다. 심지어 샤워를 마친 뒤에 알몸으로 나온 적도 있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린 적도 있다. 조금 찝찝하기는 했지만 이것 역시 이해해 준다고 한다면 이해해 줄 수 있는 부분이다. ‘원인은 나니까.’ 이 정도로 발전할지는 생각도 못했지만 어찌됐든 정하얀을 이쪽으로 끌어드린 것은 나. 이쪽에서 감내해야 될 부분이다. 어쩌면 겨우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혼자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곧바로 목소리가 들어와 꽂혔다. “사실 정말로 놀라운 건 이 침대예요.” “침대 말입니까?” “이건 마법학의 새로운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물건이에요.” “아….” 남 일이라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씁쓸해졌다. 그렇지만 정말로 놀랍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니 이 침대에는 내가 상상하기 힘든 뭔가가 숨겨져 있는 모양. 슬쩍 그녀를 바라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여는 황정연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피로 회복 마법이네요.” “그렇군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기영 씨의 상태를 체크하는 것은 물론, 여러 종류의 마법이 걸려 있어요. 하나하나 전부 다 설명을 드릴 수 없을 정도로 많네요. 활력을 돋우는 마법부터 두뇌 회전과 혈액 순환을 빠르게 해주는 마법까지. 방범 대책 마법과 더불어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에 기영 씨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보호 마법까지 내장되어 있어요. 만약에 이 길드 하우스에 대형 마법이 떨어진다고 해도 아마 기영 씨는 무사하실 거예요. 걸려 있는 마법이 마법이다 보니 이 침대에서 주무셨다면 쥐 죽은 듯이 잠드셨을 것 같네요. 일어나신 후에 피곤하신 적이 없으셨을 것 같은데… 맞나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조금 개운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야 이런 침대에서 주무셨다면 피로가 싹 가시는 게 당연하겠네요. 로맨틱해라….” 조금이지만 괜스레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생각하기 힘든 종류의 마법이 걸려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종류일 줄은 몰랐다. 조금 당황스러웠던 건 정하얀이 걸었던 마법의 종류가 인챈트라는 것. “그럼 침대 자체에 마법이 걸려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네. 불가능하죠. 만약에 가능하다고 해도 효율이 좋을 리가 없고요. 주문을 인간이 아닌 물건 같은 대상에 우겨 넣는다는 건 이미 여러 학파에서도 포기한 부분이니까요.” “네. 아이템 효과가 들어 있는 아이템은 고작해야 이 대륙에서 나온 완공품이 대부분일 텐데요. 저도 여러 가지에 개인적으로 조사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혁명적이라는 말씀을 드린 거예요. 기영 씨에게 걸려 있는 위치 추적 마법의 은폐기술이 논문급이라고 표현하자면 이 침대에 걸려 있는 마법은 마법 학계를 뒤흔드는 것은 물론, 새로운 학파를 만들 수도 있을 정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요. 일대 종사가 할 수 있는 일을 이곳에 들어온 지 겨우 1년도 안 된 신입이 해버린 거라고요. 같이 마법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자괴감이 느껴질 지경이네요.” “…….” “물론 제한 조건이 없는 건 아니지만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정하얀이라고는 해도 인챈트 기술을 완벽하게 실용화시켰을 리가 없다. 이미 이곳에 있던 모든 마법사가 도전하고 손을 놓아버린 연구다. “이 마법은 기영 씨에게만 발동되는 마법입니다.” “이해했습니다.” “네. 아마 이번 마법도 촉매를 활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기영 씨의 신체 일부를 촉매로 활용해 마법을 압축하고 압축하고 또 압축해서 기영 씨 개인에게만 효과가 발동되는 마법을 꾸렸어요. 아마 모든 대상에게 마법이 발동되게 한다면 이 정도의 마법을 담을 수는 없었겠죠? 효율도 무척 떨어질 거고요. 어디까지나 기영 씨만을 위한 침대라는 뜻이 되겠네요.” “그렇군요.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기영 씨가 가지고 있는 유전적인 정보 그리고 촉매가 가지고 있는 유전적인 정보가 일치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마법이라고 설명하는 게 이해하기 편하시겠네요.”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두 번째는 충전해줘야 한다는 거예요.” “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주문을 외운 당사자가 마력을 넣어야 돼요. 지금까지도 마법이 유지되는 것을 보니 침대에서 함께 있을 일이 많으셨나 봐요. 후후후.” “…….” “또 하나.” “말씀해 주세요.” “정확히 말하면 이 마법은 침대에 걸려 있는 마법이 아닙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촉매를 활용한 마법이니까요. 흐음. 혹시 매트 좀 뒤집어 주시겠어요? 아니면 어딘가에 분명 공간이 있을 텐데….” “네. 물론입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침대에 마력을 유지하고 있는 장치가 있다는 소리가 된다. 확실히 침대를 뒤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얀색으로 된 뭔가가 매트리스 안쪽에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이빨?’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였네요. 혹시 기영 씨 이빨이 맞나요?” “네.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저 촉매에 저장되어 있는 기영 씨의 정보가 기영 씨에게 마법을 유지시켜주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이해할 수 있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이건… 비슷하니까요.” “아. 이런 쪽으로는 전문가시죠?”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닙니다.” ‘이 방식은 틀림없이 연금술과도 비슷하다.’ 단순한 마법이라고 볼 수 없다. 아무리 나 개인에게 유지되는 아티팩트라고 한들, 단순히 마력 파장만 맞춘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정보와 촉매로 쓰인 저 이빨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일치하기 때문에 발동할 수 있는 마법. 이런 종류의 방법을 발견하기 위해 얼마나 힘을 쏟았는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허….’ 조금만 더 생각해 보니 지금 이 방식은 내가 성장하려는 방향과 완벽하게 일치. 촉매에 여러 가지 마법을 섞는다는 발상도 그렇고 유전자 정보를 활용한다는 것도 그렇다. 호문클루스 연구나 키메라 연구, 심지어 마법 물약 연구까지.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대차게 활용할 수 있는 최고의 교재다. ‘대박인데….’ 물론 방식은 다를 것이다. 정하얀은 어디까지나 마법적으로 접근한 경우고 나 같은 경우에는 연금술로 접근해야 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촉매의 활용이나 유전자 조양 배합은 이쪽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더 많다. 말하자면 방식은 같되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 모든 게 정하얀이 내린 안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건 된다.’ 확실히 된다.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실험과 노력의 결과물이 눈앞에 있다. 온전히 연구에 집중한다고 한들,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완벽에 가까운 교과서다. 흥분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리라. “역시나 기쁘신가 봐요. 어머 어머.” “아… 네. 솔직히 기분이 좋기는… 합니다.” “아직 좋아하시긴 일러요. 이 침대의 놀라운 기능이 또 한 가지 숨겨져 있거든요.” “또 있습니까?” “네. 리버스라고 불리는 마법이에요.” “아.” “이 수많은 버프를 뒤집는 디버프가 내장되어 있어요. 대상은 물론….” “…….” “기영 씨를 제외한 인간이고요. 아마 침대에 가까이 가거나 누웠을 때 발동될 거예요. 물론 타인의 경우에는 촉매와 정보 값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효과가 그리 대단하지는 않지만 하급 저주도 일단은 저주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저도 앉았으면 큰일 날 뻔했지 뭐예요. 만약에 이 침대에 걸려 있는 마법을 약 10년간 연구한다고 가정한 뒤에 발전시킨다면… 어쩌면 기영 씨 이외의 여자가 침대에 눕는 순간 상급 저주에 걸려 즉사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저한테 침대를 들어달라고 하셨군요.” “네. 그러니까 다른 여자를 이 침대로 끌어들이면 안 된다는 하얀 씨의 귀여운 메시지 아니겠어요? 로맨틱해라.” 하나도 로맨틱하지 않다. 아니 조금은 무섭다. “다른 건 없는 겁니까?” “네. 제 눈으로 찾을 수 있는 건 이 정도. 기영 씨가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신다고 한다면 결과물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제가 말씀드린 것 이외에 마법적 지식은 거의 없다고 확신할 수 있어요. 이래 보여도 조금 능력 있는 마법사니까.” “감사합니다.” 뭔가 엉뚱하고 이상한 시간이기는 했지만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정하얀이 이쪽에 여러 가지 안배를 해두었다는 것보다 사실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게 기쁜 부분. 물론 이 일에 대해서는 조속히 조치를 취해야 하기는 했지만 당장은 성장하는 것이 더욱더 급했다. 내 방이 진리가 숨겨져 있는 던전이나 유적지로 보일 정도. 내 몸에 걸려 있는 마법은 물론, 침대 역시 최고의 연구물품이다. 이런 최고의 상황에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게 조금은 행복했다. 적절하지 않은 예일 수도 있지만 정하얀이 내게 준 선물은 물을 마시려는 나에게 물이 담긴 컵을 준 것과 다름이 없다. 조금 복잡하고 비좁은 모양의 물컵이기 때문에 마시기 쉽지 않겠지만 그 문제만 해결하면 마실 일만 남은 거다. 기분 좋게 싱글 벙글 웃으며 침대를 바라보니 한쪽 구석에 박혀 있는 이빨이 괜스레 사랑스러워 보였다. ‘이빨?’ 잠깐이지만 머릿속에서 의문이 생겨난 것은 바로 그때. “저, 혹시 말입니다.” “네.” “지금 제 위치가 하얀이에게 전송되고 있다는 건 그녀가 제 신체 부위 중에 어딘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맞습니까?” “네.” ‘뭐야….’ 틀림없이 저 빠진 이빨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저게 아니라면 지금 정하얀이 뭘 가지고 있는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머리카락은 그대로, 혈액을 뽑힌 기억도 없다. 아니, 그전에 정하얀이 내 몸에 상처를 낼 리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어딘가에서 살점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이빨이 또 떨어진 것도 아니다. ‘뭘 가지고 있는 거지?’ 보통 몬스터의 경우에는 촉매로 사용되는 부위가 무척이나 다양하다. 이빨이나 머리카락 뭉치는 물론, 마력을 담고 있는 혈액이나 눈알 같은 것도 가능. 심장은 가장 효과가 좋은 편이었고 심지어는 뼈나 장기도 도움이 된다. 특정 몬스터의 경우에는 타액 그리고 수컷에 한해서는 몸에서 생성되는 액체 역시 효과가 있는 편이기는 하지만 도대체 정하얀이 뭘 가져갔는지 추측하기 힘들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몇 가지를 떠올리기는 했지만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는 않다. 상상하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으니까. ‘설마… 아니겠지?’ 내 신체에서 나오는 것들 중에 무엇을 촉매로 가지고 있을지가 궁금해졌지만 당연하게도 이쪽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뭐가 됐든 불안하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으리라. ‘그건 아닐 거야….’ # 80 회귀자 사용설명서 080화 세 번째 직업(6) 사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정하얀의 범죄 행위도 아니고 뭘 가져갔는지도 아니다. 물론 이대로 내버려 두고 상태가 더 심각해질 것을 고려해 본다면 어느 정도 브레이크를 걸어줘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직 성장 중인 그녀가 보여준 결과물이 이 정도. 만약 김현성의 그림대로 정하얀이 대륙을 떨칠 정도의 대마법사가 된다면 아마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 엿보기 구멍은 벽 전체로 확대될 것이고 이 침대는 타인에게 강력한 저주를 발휘하게 되는 아티팩트가 될지도 모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직 실용화되지 않고 있는 도청 마법이나 영상 녹화 마법 같은 것을 개발할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떠오르기는 한다. ‘정신계열?’ 내 정신을 조금씩 조종하는 마인드 컨트롤이라든지, 어쩌면 저런 촉매를 이용해 나에게만 해당되는 강력한 매혹 주문을 만들 수도 있다. 심지어 투명인간이 돼서 나에게 항상 붙어 있는 것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물론 어느 방향으로든 나에게 해를 끼치기 싫어하기도 했고 아직까지는 순수한 옹호자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는 정하얀이 그런 짓을 저지를 확률은 적었지만 박혜영의 사지를 절단 내는 장면을 떠올리니 설득력이 생긴다. 잘못하면…. ‘엿 될 수도 있어.’ 함부로 몸을 굴리는 순간 그 시점에서는 이미 아웃. 정하얀이 주변에 있을 때만이 아니라 없을 때도 조심해야 한다. 황정연이 능력 있는 마법사라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 장치가 작동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보험을 마련해야 하기는 하겠지만 일단은 조신하게 지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 지금은 한 가지 일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였으니까. “대단하네요.” “네?” “2층 전체를 공방으로 활용하실 줄은 생각하지 못했어요.” “아아아아.” 내가 봐도 조금 멋져 보이는 공간이다. 같은 마법사인 황정연에게도 이 공간은 마치 꿈의 공간처럼 느껴질 것이다. 길드원이 나간 틈을 타 내 방과 연금공방을 연결하니 작업 공간이 무척이나 넓어진 것. 층 하나를 실험실로 사용하는 이쪽의 배포에 놀라기보단 눈에 들어온 것들은 최고를 자랑하는 장비일 것이다. ‘검은백조한테도 많이 뜯어냈으니까.’ 숙련된 모험가인 그녀가 봐도 박수를 보낼 만한 도구가 즐비해 있으니 저런 얼굴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 공방과 방을 연결한 게 전부입니다. 아무래도 왔다 갔다 하기 조금 불편해서… 연구해야 할 최고의 교재가 이미 이곳에 있는데 시간을 들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아뇨. 주변에 깔린 물건들이 전부 대단해 보여서요.” “다 선물 받은 것들이라… 그건 그렇고 2번 대는 할 일이 없는 겁니까?” “지금은 휴식기예요. 혹시 제가 방해되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것저것 도와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뭐, 할 일이 없기도 하고… 아무래도 저도 마법사인 만큼 호기심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하얀 씨의 마법이나 기영 씨의 연구 결과로 논문을 쓴다거나 추가적인 이득을 얻는다든가 할 생각은 없어요.” “네. 알고 있습니다.” 슬쩍 마음의 눈으로 그녀를 들여다보니 여러 가지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한 번 봤지만 정확히 기억해 두고 싶다. [플레이어 황정연의 상태창과 재능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황정연] [칭호-일일드라마 애청자] [나이-34] [성향-호들갑떠는 낙천주의자] [직업-마도학자-영웅 등급] [직업효과-기초 마법 지식 습득] [직업효과-기초 마도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마법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마도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30/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민첩-40/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체력-32/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지력-90/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32/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행운-54/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마력-80/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특성-민감한 몸-희귀 등급] [특성-초기억력-희귀 등급] [총평-마력의 성장이 거의 멈춰 있습니다. 상위 마법사로 가는 길은 거의 닫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높은 지력 능력치로 자신의 단점을 감추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특성과 직업과의 궁합이 좋아 상위 레벨에 오를 수 있게 된 케이스라고 보는 게 맞겠군요. 만약 마력 재능이 영웅 이하가 아니라 영웅 이상이었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 겁니다. 플레이어 이기영과 비슷한 타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동지라고 생각하진 말아주세요. 조금 아쉬운 걸로 끝나는 저분의 비해 플레이어 이기영은 마력에 대한 재능이 전무하니까요.] ‘나쁜 새끼.’ 총평은 확실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의 능력치나 성장 정도는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물론 나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조금 그렇기는 했지만 그녀는 마력보다는 지력에 의지하는 마법사다. 마력 능력치 성장이 더디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머리를 굴렸을 것이 당연하다. 정하얀이 걸어준 마법뿐만 아니라 그녀의 존재 자체도 나에게는 큰 교재였다. ‘특성도 괜찮아.’ 민감한 몸이라는 특성이 눈에 들어왔지만 성적인 의미가 아니다. 마력이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특성. 사실 그것보다 눈에 들어온 것은 초기억력이라는 특성이었다. [특성-초기억력-희귀 등급] [완벽에 가까운 초기억력을 부여합니다.] 아직까지 희귀 등급이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겠지만 만약 등급이 진화한다고 가정한다면 저 능력은 내 마음에 눈보다 효율 좋은 능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테면 완전 기억 능력이라든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시 한번 슬쩍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읽어봐도 되나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리해 놓으신 서책이요.”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자문을 구하고 싶었으니까요.” “아뇨, 아뇨. 사실 자문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말씀드린다고 해봤자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고 사실 이쪽은 기영 씨가 전문가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워낙 생소한 지식이다 보니… 저한테도 어렵게 느껴지네요.” “고위 마법사의 지력으로도 말입니까?” “네.” “흠….” “아. 그러고 보니 기영 씨는 지력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시고 계시겠군요. 스탯을 연구할 시간이 없으실 테니까요.” “네. 사실 그렇기는 합니다.” “흐음… 기영 씨는 혹시 지력 능력치에 대해서 의문을 느낀 적은 없나요?” 당연히 있다. “물론 있습니다. 근력이나 체력, 마력같이 측정할 수 있는 수치와는 다르게 행운 능력치나 지력 능력치는 측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니까요. 사실 저도 지력 스탯이 오르기는 하지만 정확히 뭐가 변화하고 있는지는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연금 지식에 대한 이해력이 올라가고 있다는 건 확신할 수 있습니다만….” “벌써 많이 알고 계시네요.” “솔직히 그것 외에 다른 부분에서 뭔가가 달라졌다고 체감하기는 힘들기는 합니다.” “저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기영 씨 생각이 맞을 거예요. 지력이 올라간다고 해서 천재가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사고력에 커다란 변화가 없다는 거죠. 없는 지식이 갑자기 생겨나는 건 아니니까요.” “존재하는 이유가 불분명한 스탯이군요. 80대나 70대에 이른 지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까?” “네. 조금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지력이 90대에 다다른 사람이 구구단을 외우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건 너무 극단적이군요.” “네. 정말로 극단적인 이야기죠. 그렇지만 그만큼 지력이라는 스탯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능과 크게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마력이나 연금술에 대한 이해력의 상승이 전부라는 겁니까?” 만약에 정말로 그렇다고 한다면 계륵 같은 능력치라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아예 쓸모가 없진 않겠지만 다른 능력치와 비교하면 한숨이 나올 정도의 효율이라는 거다.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에요.” “흐음.” “인간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능 전체에 관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느 한쪽에 도움을 주는 건 확실해요. 특히 80을 넘어가는 순간 조금 더 확실하게 느껴지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지력이 90을 넘어가는 이들은 대부분 한쪽으로 뇌가 발달되는 편이예요. 제 주변의 마법사나 린델 내에 지력 90 이상이 되는 능력자들은 대부분 비상하다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계산력에 치우쳐져 있는 사람도 있었고 사고력 자체가 말도 안 되게 발달한 사람도 있었죠.” “하.” “창의력, 혹은 병법에 대한 이해력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암기력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어요.” “그렇군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좋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지력 능력치가 90이 된 순간 제가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물론 다른 부분에서는 크게 변화가 없었지만요. 우리끼리의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아마 뇌가 발달되어 있는 부분의 효율을 극대화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보고 있어요.” “그거… 정말로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네. 그렇죠?” “제가 가지고 있는 특성 중, 초기억력이라는 특성은 능력치가 지력이 90을 넘은 이후에 얻은 특성이에요. 다른 분들도 다들 비슷한 상황이시고요. 제가 보기에는 기영 씨도 뭔가를 얻으실 수도 있겠네요. 연애에 뛰어나시니 연애 쪽으로 발달하시려나… 후후후.”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아예 희망이 없는 편에 서 있는 나에게는 무척이나 반가운 소리였다. 지력 능력치에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뇌가 한쪽으로 발달하는 종류의 기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 정말로 그녀의 말이 맞다면 90이란 지력이 가능한 나 역시 뭔가 한쪽으로 발달된 뇌를 갖게 된다는 말이 된다. ‘뭘까.’ 개인에 따른 특성 차이는 있겠지만 어렸을 적부터 기억력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황정연이 얻은 특성은 초기억력.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가 무슨 소리를 들어왔는지 떠올려보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잔머리 하나는 기가 막힌 놈이라니까.’ ‘허, 꼬마가 영악하기도 하지.’ 정도가 전부. 잔머리 같은 쪽으로도 발전 방향이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에 90을 넘은 뒤에 얻는 것이 이런 쪽이라면 조금은 씁쓸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미래를 생각하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것이 맞으리라. 아니, 어쩌면 그게 나을 수도 있다. 황정연이 농담으로 던진 말처럼 연애 쪽으로 발달된 능력을 얻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최악의 상황이다. ‘그딴 걸 어디다가 써먹겠어.’ “특성이란 건 지력 90의 능력자 모두가 받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본인이 가지고 있는 특성 외에 하나 더 얻는 것이나 다름없죠. 굳이 시스템 상으로 표현이 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만요.” “여러 가지 말씀 감사드립니다.” “아뇨. 아뇨. 어차피 알게 되실 사실인데요. 먼저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테고요. 다만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생소한 지식에 대한 이해력은 부족할 수도 있다는 걸 말씀드린 거랍니다. 후후. 그보다 확실히 진전이 있는 게 느껴지는데요?” “아직은 걸음마 수준입니다. 이 마법 자체를 이해하는 게 목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매달리고 있으니까요.” “시작이 반인 법이죠. 혹시나 제가 도와드릴 게 있으면 꼭 말씀해 주세요.”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거절할 명분도,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답례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혹시 저도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도움을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닌데….”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렇다면….” “네.” 꽤나 덥석 문다. ‘당연하겠지.’ 같은 길드라고는 하지만 단순한 호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그녀는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고 도와줬다. 우연히 만난 것처럼 가장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어느 정도 목적이 있었다는 이야기. 이쪽이 감당할 수 없는 부탁을 할 것 같은 느낌에 괜스레 테이블을 두드렸을 때 황정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네. 말씀하셔도 됩니다.” “혹시 일이 끝난 이후에 박덕구라는 분 좀 소개시켜 주실 수 있을까요?” 감당할 수 없는 부탁처럼 들린 것은 분명 착각이 아니리라. ‘정말로 연애 박사였나.’ # 81 회귀자 사용설명서 081화 세 번째 직업(7) “…….” “그냥 한 번만 자리를 만들어 주셨으면 좋, 좋겠어요. 사실 정말 이런 걸 바란 건 아닌데. 굳이 말씀해 보라고 하셔서….” 정말로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 건 분명 착각이 아니리라. 솔직한 심정으로는 두 사람의 연애사에 별로 관여하기 싫기는 했지만 말 한마디 하는 것으로 이 정도의 조수를 얻는다는 것은 무척 아름다운 이야기. 그렇지만 이유를 듣고 싶은 것이 당연. 박덕구가 걱정되는 것이 아닌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언제부터….” “딱, 딱히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저… 박덕구 님의 모습이 기억 속에서 떠나질 않아서요….”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은 아닐까.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무심한 듯 저를 쳐다보는 눈이… 이상하게… 뇌리에 박혀서….” ‘옴므파탈이야 뭐야.’ 녀석이 가지고 있는 뜻밖의 성질에는 조금 당황스러울 지경. 아니, 이 여자는 애초에 덩치가 크고 푸근한 사람이 취향이라고 했으니 박덕구에게 꽂히는 것도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빛 한방에 무너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황정연은 미인인 편에 속한다. 뭔가 묘하게 차분한 분위기 같은 모습은 얌전한 현모양처 같은 느낌을 가지게 만든다. 한쪽으로 묶어 어깨로 넘긴 머리도 그렇고 엷은 미소가 어울리는 외모도 그렇다. 소중한 덕구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종 자체가 다르다고 느껴질 정도다. 90의 지력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여자를 함락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0초 남짓. 정하얀을 이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며칠을 허비했던 나와는 사뭇 다른 결과물이었다.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승낙하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다. “자리를 만들어 드리는 것 정도라면.” “아… 추가로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든지… 아니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든지… 잘 맞을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바람이라도 조금 잡아주시면….” “…….” “열심히 도와드릴게요. 하시는 연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네. 그 옵션도 넣기로 하지요. 대신 여러 가지로 할 일이 많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몇 마디 하는 것 정도로 무척이나 유능한 조수를 얻었다. 둘이 연인이 되는지 아닌지에 대한 여부는 별로 이쪽과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어쩌면 확률이 조금 높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저 여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좋은 평가를 쏟아 낸다면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덕구 녀석에게 점수를 먹고 들어가는 셈. 그렇게 생각하니 이 기묘한 거래가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어찌됐든 이쪽에 나쁜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어 더욱더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 시작해 보죠, 박사님.” “그렇게 합시다, 조수” 그렇게 나는 뜻밖의 조력자와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뒤로 시간이 아주 조금 흘렀다. “조금 알아낸 건 있어요?” “아직이요. 그렇지만 보이는 게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이쪽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하얀의 연구 결과물을 재정립하는데 있다. 무언가 새로운 이론을 만들거나 혁명적인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치의 상승 그리고 전직. 능력치 상승 같은 경우에는 연구 초반에는 쉽게 올라가기는 했지만 후반에 다다를수록 그 속도가 무척이나 더뎌졌다. 이전처럼 촉매를 쏟아 붙는 방식의 능력치 상승의 효율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 건가요?” “딱히 특정 지식을 콕 집어서 파고들었다기보다는 예전에 황정연 씨가 봤던 것 정도가 전부입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주력하고 있는 것은 연금술로도 촉매에 들어 있는 마법을 압축하고 유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유전 정보값을 활용하는 방안이 있는가. 이 정도니까요.” “아아아아.” “주문의 구성이나 설계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네요. 이쪽에 그렇게 쓸모 있는 정보는 아니지만요. 어째서 정연 씨가 하얀이를 천재라고 했는지도 이해가 갑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을 때에는 말 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째서 정하얀이 천재라고 불리는 건지, 나에게 걸려 있는 마법이 어째서 논문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건지, 촉매에 저장되어 있는 마법이 어째서 일대 학파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가능성이 있는 건지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특해.’ 마력을 배열하는 방식, 마력의 탑을 쌓는 순서와 그 방식이 무척이나 세련됐다. 기억력을 발달시키고 있는 황정연의 지력과는 달리 정하얀의 지력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마법을 다루는 쪽으로 발달되어 있고 지금도 발달되고 있을 것이다. 단순히 완성된 마법을 자세히 보는 것만으로도 그걸 느낄 수 있다. ‘천재.’ 어째서 김현성이 정하얀에게 집착했는지 그 이유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연구는 계속됐다. 막히는 게 있으면 잠을 자지 않는 날이 잦아졌고 밥을 거르는 일도 많아졌다. 물론 이쪽의 실험을 돕는 황정연 역시 마찬가지. 사실상 그녀가 하는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어려워하는 마법적인 방식에 대해 해설해 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 존재 이유가 충분했다. [지력이 1 올라갑니다.] [지력이 1 올라갑니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그래도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알람이 기분 좋게 들려온다. 지력 수치가 막 50대를 돌파했을 시점에는 지력이 올라가는 메커니즘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새로운 지식의 습득이나 이해. 두 번째는 심도 깊은 사고였다.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실험하며 이론을 재정립하고 책을 읽는다. 그 모든 과정이 지력을 올리는 것에 도움이 된다. 박덕구가 근력을 올리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것처럼, 나 역시 뇌를 살찌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양식을 집어넣은 것이다. “오랜만에 방 청소 좀 할게요, 기영 씨.”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근처는 치우지 말아주세요. 아직 정리하지 않은 자료들이 있어서요.” “물론이죠. 그보다 잠 좀 주무시는 게 어때요?” “아뇨. 흐름이 끊기니까요.” 당연하지만 방도 무척이나 더러워졌다. 내가 정리한 자료들과 이론서가 계속해서 쌓이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움직일 공간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침대를 중심으로 모든 자료들이 나열해 있는 것은 제법 재미있는 장면이기는 했지만 공부하는 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지겨워.’ 확실히 지겹다.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는 있지만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은 느낌은 스트레스가 쌓일 정도. 그렇지만 이를 악물고 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김현성과 함께 사냥을 나가고 있는 파티원들은 발전하고 있을 테니까. 도태되면 버려진다. 김현성이 나를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파티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면 같이 다닐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단순한 포션 공장으로 전락하기 싫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억지로라도 침대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기요, 기영 씨. 마법을 어떻게 연성진으로 풀어나가시는 거예요?” “아. 사람마다 주문을 외우는 방식이 다릅니다만 최소한 저는 탑을 만드는 방식으로 주문을 외우곤 합니다. 하얀이 같은 경우에는 정밀하게 돌아가는 시계를 만드는 것 같은 방식으로 설계하는 것 같은데… 부품들을 전부 빼내서 한 곳에 비치하는 느낌이라고 하면….” “무슨 말씀인지 알겠네요.” “제 마법을 푸는 것보다 사실 더 복잡합니다. 다른 건 몰라고 유전 정보값을 일치시키는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주문을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힘에 부치는데… 연성진으로 변환해야 한다는 것도 스트레스 받으시겠네요.” “네. 그렇지만 단순한 작업이니만큼… 시간만 쓰면 되는 거니까요.” 이제 원을 그린 정도기는 했지만 확실히 차도가 있기는 있다.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조급해 지는 것이 사실. 그렇게 한 달이 어영부영 지나갔지만 다행히 김현성 파티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고통 받고 있겠지.’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가져간 소모품도 쓸모없거나 부족했을 테고 떠날 때 분위기 자체가 엉망이었다. 정하얀은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울 것이고 김현성의 명령이 없는 김예리는 엉뚱한 화살을 날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박덕구는 예전에 겁쟁이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선희영은 그나마 정상적으로 움직이겠지만 주도적으로 파티를 이끌어나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만큼 전체적으로 파티가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만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아주 조금이었다. 이 즈음에 정하얀의 마법에 대해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고 지력 능력치가 60에 가까워졌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만족할 수밖에 없는 성과였다. “성과가 있기는 있네요.” “네. 실제로도 지력 능력치는 올랐으니까요. 사실상 목표로 했던 수치에는 거의 도달했습니다.” “아. 축하드려요. 오늘은 조금 쉬시는 게 어때요?” “아뇨. 최소한 마무리는 하고 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만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만큼 쉴 수 있을 리가 없는 게 당연하다.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생활하게 됐을 때는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할 수 있었다. 마법 안에 숨겨진 진리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내가 목표로 했던 전직에 대한 질문이었다. 정하얀은 어떻게 경험치를 쌓지 않고 다음 단계를 밟을 수 있었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이해한 거야.’ 정하얀은 사냥을 한 번도 거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직업을 얻었다. 어떻게 얻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정하얀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녀가 마법이라는 것에 대해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이 학문을 이해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작은 진리에 도달한 셈. 나 역시 같다. ‘이해해야 돼.’ 분석하고 서술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것 이외에도 지금 내가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것을 전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길이 맞고 이 방향이 맞다. 이후에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던 걸로 기억. ‘어째서?’ 보다는 ‘왜?’에 조금 더 집착하기 시작했다. 보이는 결과보다는 보이지 않는 진리에 손을 뻗었다. 상상하고 실험에 옮기고 실패한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실험은 어렵지 않았다. 무척이나 유능한 조수가 곁에 있었으니까. “살이 조금 빠졌네요.” “그래도 나쁘지는 않은 기분입니다.” 한 꺼풀 벗었다느니 진리에 도달했다느니 그런 거창한 것은 없다. 집착하고 있는 것은 그저 왜. 거창한 정답을 원한 것도 아니다. 아주 작은 조각 하나면 족했다. 유전 형질의 변화, 정보값, 마력이라는 것은 개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마력으로 변질된 개체는 완전한가 불완전한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실타래 같이 꼬인 DNA, 어떤 몬스터에게는 어떤 바이러스가 치명적인지, 어째서 이 유전자는 이 바이러스를 받아들이지 못하는지에 대한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연성진, 마력, 유전, 정보, 작은 조각들 중에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이해되는 것은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발전하고 있다는 것. “이번에는 어떤?” “공포의 정원에서 가져온 촉매들로 부탁드립니다.” 뭔가 대단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나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고 머리가 똑똑한 편도 아니었으니까. 사실 나는 과학자도 아니고 유전자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그렇지만 이때 즈음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즐겁다고 느껴졌다. “즐거우신가 봐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력이 1 올라갑니다.] “재미있으시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아뇨. 솔직히 말하면 지겹습니다.” [지력이 1 올라갑니다.] “거짓말.” [지력이 1 올라갑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작은 조각을 손으로 움켜쥐었을 때. 나는, 아주 조금 더 발전할 수 있었다. [새로운 직업을 발견합니다.] 나름대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을 가지고 말이다. “푸핫.” # 82 회귀자 사용설명서 082화 세 번째 직업(8) 천천히 눈이 떠졌다. 무척 시끌벅적했기 때문이다. 어제 직업을 선택한 뒤에 여러 가지를 시험해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잠들었던 것이 마지막 기억. 아주 오랜만에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얼마나 흐른 거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거의 잠을 자지 않았던 것이 문제. 아직 뒷정리를 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내 방이 아닌 연금술 공방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피곤해.’ 일어난 이 후에도 이렇게 피곤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뒷정리를 하고 자는 게 나을 뻔했다. 정하얀이 선물해 준 침대는 피로를 푸는 데 특효약이었으니까.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니 시야에 비치는 것은 소파 한쪽에 그대로 뻗어 있는 황정연. ‘피곤했겠지.’ 이쪽의 일정을 무리하게 따라오기 위해서 노력한 그녀도 일을 끝마친 이후에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 조금 조심성이 없는 상태로 누워 있기는 했지만 이상한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만큼 나에 대한 경계심이 허물어졌다는 증거이니 오히려 즐거워할 일이리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잠을 깨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이고… 우리 형님도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요. 2층 전체가 아주 난리네, 난리야. 거, 누님! 뛰어가면 넘어집니다. 희연 누님도 뭐라고 좀 해보쇼.” “…….” “일단은 짐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희연 씨, 하얀 씨는….” “네. 네.” 무슨 소리인지는 뻔할 뻔자. 밖으로 원정을 나갔던 파티원들이 돌아온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 것도 잠시. 소파에 그대로 뻗어 있는 황정연을 보자 정신이 멍해지기 시작했다. ‘망했다.’ 2층 계단을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척이나 빠른 속도, 누구의 발소리인지는 뻔하다. ‘정하얀.’ 신체적 접촉이 아예 없었다고는 해도 한 방에 여자가 함께 있다는 것이 달가울 리가 없다. 박덕구와의 운명적인 재회가 예정되어 있는 황정연에게도 반가운 상황은 아닐 것이다. “오빠… 오빠….” 연금공방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문들 두드리는 정하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위치 추적 마법을 걸어놨으니 내가 이쪽에 있다는 정보 정도는 알고 있을 터.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인지 마치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덜컹! “오빠… 거기 계시나요? 계신가요?” 덜컹! “계시죠? 오빠?” 덜컹! “거, 자고 있기라도 한 거 아니요? 아마 계속 연구 중이셨던 것 같은데…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시끄럽게 하지 않는 게 좋겠소, 누님. 아직 이른 아침이기도 하고….” ‘나이스, 박덕구.’ “아니면 형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혹시 쓰러진 건 아니요?” ‘이 돼지 새끼가.’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괜스레 놀림이라도 받은 것 느낌이었다. 갑자기 들려오는 커다란 소리에 황정연이 잠에서 깬 것은 아주 당연한 수순이리라. 슬그머니 눈을 비빈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는 건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토끼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니 조금 더 당황스러워진다. “형님! 거, 주무시고 계신 거요?” 자고 있다면 대답을 할 수 없다는 아주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한 질문이었다. 자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거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요?” ‘무슨 개소리야.’ 눈짓으로 창문을 바라보자 황정연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아… 덕구야. 깜빡 잠이 들어서 지금 일어났다.” “오빠….” “역시 자고 있었구만.” “약속했던 것보다 조금 늦게 왔네. 문은 지금 열어줄게. 기다려.” 황정연이 황급히 2층 창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보인다. 아니, 애초에 함께 연구 중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괜한 오해는 피하는 것이 좋다. 남녀가 이 시간까지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정하얀의 정서에 위배되는 일일 것이다. “꺅!” 2층에서 뛰어 내리던 황정연이 짧은 비명소리를 내질렀고 문이 한 번 더 덜컹거렸다. 덜컹, 덜컹, 덜컹.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정하얀이 문을 필사적으로 흔들고 있는 중이리라. 혹시라도 방 안에 다른 흔적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본 뒤에 살짝 문을 열자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시야에 비쳤다. 일단은 박덕구. 순박한 미소를 짓고 있는 놈의 얼굴은 언제 봐도 무척이나 반갑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녀석. 몸 여기저기에 남은 상처를 보니 그동안의 원정이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당연하지만 정하얀 역시 반갑기는 마찬가지였다. 짧은 비명소리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듯 공방 안을 두리번거렸지만 이내 시선이 내 쪽으로 고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한가득 고이는 것은 순식간. 찰나의 순간에 한가득 고여 있는 눈물이 닭똥 떨어지듯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다. 저렇게 울 정도로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나 역시도 비슷한 감정이기는 하다. 오랜만에 보는 정하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끄으어으으윽…. 오빠아….” 뒤이어 터져 나온 것은 이상한 울음소리. 조금은 귀엽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끄어으그어윽…. 오빠아….” “힘들었어?” “끄으으윽….” 고개를 세차게 양 옆으로 돌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바닥으로 어떻게든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 하기는 하지만 닦아질 리가 없다. 그 모습에 살짝 팔을 벌리니 정하얀이 순식간에 이쪽으로 뛰어들어 푸욱 안겨왔다. 이쪽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고 있는 것이다. “보고 싶었어요.”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하얀아.” 반 정도는 진심이다. 머리를 두드리며 앞을 바라보니 눈인사를 건네는 선희영과 이쪽을 바라보는 김현성도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떨어뜨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정하얀을 달고 손을 흔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분위기를 보니 완벽하지는 않지만 모두가 나름대로 해답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원정은 성공적이야.’ 거의 확실할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기영 씨.” “네. 현성 씨. 원정은 조금 괜찮으셨습니까?”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성과를 얻었습니다. 예리는 세 번째 전직이 아니라 두 번째 전직을 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희영 씨도, 덕구 씨도, 하얀 씨도 모두 전직을 마쳤습니다. 스탯도 모두 눈에 띄게 올라간 것 같더군요.” “다행입니다.”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현성은 보모의 입장으로 따라간 것에 불과했으니까. 한 달 동안 무척이나 퀭해진 김현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으니 내 생각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영 씨는 조금 어떻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탯도 확실히 맞췄고 새로운 직업도 얻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역시 형님도 전직을 했소?” “응. 그래. 자세한 건 내려가서 설명해 주마.” “아아아.” “사실 제가 어떤 직업을 얻었는지 저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직접 보여드리는 게 이해가 빠를 겁니다.” “연금술사의 상위 직업입니까?” “네. 상태창에서 말하기로는 새롭게 발견된 직업이라고 하더군요.” “기존에 있던 직업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건… 조금 놀랍군요.” “덕분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만약 여러 가지 직업이 동시에 떴다면 현성 씨가 올 때까지 결정을 미루려고 했지만… 선택지가 없더군요. 그렇지만 후회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조금 더 궁금해집니다.” 정하얀은 아직까지 이쪽에 달라붙어 있어 표정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박덕구 녀석도 무척이나 궁금한 표정이었다. “크으. 그 영광스러운 순간에 내가 함께 있었어야 하는 건데… 이번에는 형님이 직업을 고르는 데 도움을 드리지 못해 조금 아쉽게 됐소.” “너도 좋아할 거다.” “그게 정말이요?” 김현성은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서 알 수 없지만 박덕구는 확실히 좋아할 만한 직업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화려하고 신기해 보일 테니까. “혼자만의 힘으로 직업을 얻으시다니 정말로 대단하시네요.” “아닙니다. 그보다 희영 씨는 이번이….” “네. 저는 이번이 네 번째 전직이에요.” “그렇군요.”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파티의 분위기다. 이전에는 확실히 조금 애매한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전체적으로 사이가 좋아 보인다. 새로운 멤버들이 기존 멤버에게 잘 섞여 들었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박덕구나 꼬맹이 김예리가 조금 선희영의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째서인지에 대한 정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흐음.’ 아무래도 나와 김현성 이후의 차선책이 그녀였던 모양. 그나마 가장 스펙이 높은 그녀에게 조금씩 의지하기 시작한 것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으리라. ‘나쁘진 않아.’ 나태하고 사회에 쓸모없는 인간들을 때려죽이는 것을 새로운 봉사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녀는 틀림없이 유능하고 사리분별을 할 줄 안다. 정하얀과는 다르지만 조금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사실. 아마 이런 장점들이 그녀를 차선책으로 만드는 것에 기여했으리라. 사실 박덕구가 조금 더 주도적으로 움직여주지는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건가.’ 묘하게 기가 죽은 것 같은 느낌도 있었다. 아무튼 간에 오랜만에 다시 뭉친 파티의 분위기는 꽤나 화기애애하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연무장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이쪽에 직업에 대해 물어왔고 조금 대충 대충 입을 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시연회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 사실 무소속일 당시에 다른 길드의 유력 인사들에게 보여준 시연회는 시연회라고 할 수도 없다. 내 장점이나 특성을 살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개념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나도 내 나름대로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 당연. 회귀자와 파티에게 내가 더욱더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아야 한다. “제대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화력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기는 하지만 효율적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어서….” “네. 물론입니다.” “하얀아, 잠깐만 떨어져 있을까?” “아… 네. 오빠.” 제법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준비해 둔 촉매에 마력을 쏟자 곧바로 반응이 오기 시작한다. 내 기준에서도 커다란 마력은 아니다. 아무래도 마력이 낮으니 이 정도 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맞으리라. 준비물은 두 가지. 여러 가지 마법을 품은 연성진이 그려져 있는 촉매와 주문을 받을 촉매다. 같은 정보값을 가지고 있는 자재들, 서로 상호작용을 보여 줄 수 있는 자재들이 필요하다. 사실 압축하고 또 압축한 연성진을 견뎌낼 수 있는 질에 대한 부분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정보값이다. 예를 들면. ‘정하얀이 마법을 걸어둔 이빨과 마법을 받는 대상인 나처럼.’ 조금 집중력이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마법을 완성하기에는 무리가 없다.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성장촉진.’ 간단하면 간단하다고 말할 수 있는 주문이었다. 주문에 맞춰 날아가던 몬스터의 작은 세포가 갑작스레 팽창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 작은 세포가 갑작스레 살덩이로 변모하는 것은 조금 그로테스크한 장면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무게감은 있다. 콰지지지직, 쿠직, 까드드드득. 이해할 수 없는 소리들도 들려온다. 뼈가 뒤틀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세포들이 터져나가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에게는 익숙한 소리이기는 했지만 김예리는 시끄러운지 자신의 귀를 막았다. 혹시 저대로 터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던 거대한 살덩이는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곳에서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괴물의 손. 콰드드드드드득! 굉음이 들려오기도 전에 모두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 형, 형님….” “이거… 어떻게 할 수 있었던 겁니까.” 심지어 김현성조차 말이다. 등 뒤로 알 수 없는 쾌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직업의 특성입니다.” # 83 회귀자 사용설명서 083화 세 번째 직업(9) 굉음이 들려오기도 전에 모두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 형, 형님….” “이거… 어떻게 할 수 있었던 겁니까.” 심지어 김현성조차 말이다. “직업의 특성입니다.” “아….”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는 얼굴들이다. 조금은 불안했던 감정도 잠시였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 드리자면 유전 정보값이 같은 촉매를 활용한 생체 실험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게 맞겠군요.” “거, 무, 무슨 소리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조금만 더 쉽게 풀어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여러 가지 마법을 압축해 놓은 리모컨과 반응을 해주는 텔레비전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지금 제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리모컨이고 저기서 팽창하고 있는 거대한 괴물의 팔이 티비인 셈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실 서로 반응할 수 있는 촉매만 있으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준비하는 과정이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요.”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다시 한번 놀랍다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저런 표정을 짓는 게 당연할 것이다. 나 역시 처음 결과물을 만들어냈을 때는 놀라는 수준을 넘어 당황스러울 정도였으니까. 다시 한번 살짝 정보를 바라보자 괜스레 자랑스러워졌다. 내가 만들 결과물이라고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이기영] [칭호-용병여왕의 정부] [나이-25] [성향-용의주도한 전략가] [직업-생체 연금 소환사-고유 영웅 등급]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직업입니다. 무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륙에서도 이런 종류의 연금 방식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연금술사가 당신의 결과물을 본다면 여러 미사여구로 찬사를 보낼 것입니다. 당신의 놀라운 업적의 영향으로 직업의 등급을 고유 영웅 등급으로 상향조정합니다. 지력이 4 오릅니다. 마력이 3 오릅니다. 만들어낸 생체연금의 결과물을 소환수로 판정합니다. 소환수에 대한 미약한 통제권을 부여합니다.] [직업효과-기초 마법 지식 습득] [직업효과-기초 연금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연금 지식 습득] [직업효과-특수 소환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2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21/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25/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64/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2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45/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15/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장비]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영웅 등급-연금술사 전용] [마력 방패의 반지-희귀 등급] [특성-마음의 눈] [총평-어떻게든 최악의 상황을 면하려는 노력은 눈에 띕니다만 너무 발버둥 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최악의 상황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요. 그것과는 별개로 당신의 노력에는 찬사를 보냅니다. 한계가 찾아올 때까지 있는 힘껏 발악해 보도록 하세요.] 그동안 능력치가 전체적으로 많이 올라갔고 직업 효과로 특수 소환 지식을 얻었다. 사실 얻었다는 표현도 이상하다. 내가 정립한 이론으로 내가 만든 지식이었으니 말이다. 눈에 띄는 것은 고유 영웅이라는 직업 등급. 모두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기 때문에 살짝 웃으면 입을 열었다. “직업의 이름은 생체 연금 소환사이며 직업의 등급은 고유 영웅 등급입니다.” “아.” “고유 영웅 등급 말이요?” “응.” 왠지 모르게 조금 기가 죽은 것 같은 박덕구의 얼굴. 정보를 확인한 뒤에는 어째서 녀석이 저런 표정을 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희귀?’ 박덕구를 제외한 전원이 영웅 등급의 직업을 얻은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꼬맹이인 김예리 역시 겨우 두 번째 전직 만에 영웅 등급, 보통 네 번째나 다섯 번째에 영웅 등급의 직업을 얻는다는 게 일반적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이 빠르다는 이야기가 된다. 뭔가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박덕구의 멘탈을 케어해주는 것은 이후라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일단은 팀원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게 더 중요하니까. “고유 영웅 등급이라니… 대단하시네요, 기영 씨.” “희귀나 영웅, 전설 이외에 다른 종류의 등급이 또 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아마도 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이가 기영 씨뿐이라는 말일 겁니다. 도시 내에도 고유 등급 판정을 받은 모험가들이 조금 있습니다. 그들 역시 기영 씨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뭔가를 발견했을 때 고유 등급의 직업을 받았습니다만… 후발주자들이 똑같은 행동이나 결과물을 만들어도 같은 직업을 부여받지는 않는다고 하더군요.” “아.” “쉽게 말하면 양산이 불가능한 직업군이라는 말이 됩니다.” ‘좋은데?’ 특별하다는 것은 장점이 된다. 몸값을 미친 듯이 올릴 수 있다는 장점 말이다. 살짝 김현성을 바라보니 조금은 흥분한 듯 이야기를 쏟아내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도시를 돌아다니며 마음의 눈을 켜 사람들의 정보를 확인해 봤지만 아직까지 고유 영웅 등급 판정을 받은 직업을 본적이 없었다.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김현성은 지금 미래의 대한 정보를 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느 한쪽으로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단점은 틀림없이 존재하지만 장점도 충분할 것 같군요. 제 생각에는 물약이나 호문클루스 쪽으로 성장 방향을 결정하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사실 호문클루스 쪽으로 더 공부하면 어떨까 생각해 봤지만 아직은 지력이 낮아서 그런지 이해가 잘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키메라 쪽의 분야는 파고들만 하다고 생각했었지만 만들어진 키메라에 대한 통제권이 문제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정신지배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이나 마력이 없어서 말입니다.” “아….” “만약에 키메라 전체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일부를 통제하면 어떨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니 답이 금방 나오더군요. 아, 일단 저건 치우고 이야기 하겠습니다.” 다시 주문을 외우자 팽창한 괴물의 팔이 다시 축소되기 시작했다. 모든 마법의 효과를 되돌리는 정하얀의 리버스 주문의 개정판이었다. “일단 방금 보신 것은 소환수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생명체라고도 할 수도 없었던 것은 물론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만… 전직 이후에는 감사하게도 소환수로 판정하더군요.” “그렇군요.” 대단해 보이긴 하지만 사실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로 재료의 질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것. 여러 가지 마법이 들어간 연성진을 우겨넣을 수 있을 정도로 품질이 좋아야 했다. 소모품으로 쓰기 힘든 것을 소모품으로 사용해야 된다는 이야기. 최소 희귀 등급 이상의 촉매들을 사용해야 한다. 두 번째는 유지 시간이 길지 못하다는 것. 계속해서 주인의 곁에 있어주는 여럿 소환수와 달리 내가 소환한 생체연금의 결과물은 그 유지 시간이 무척이나 짧다. 몸 전체를 연성하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다.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일부만 소환하는 것이 한계다. 마법이지만 공격 자체는 물리계열로 판정한다는 것도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후에 다른 몬스터의 촉매를 발견하면 다른 수가 생길 수가 있겠지만 일단 내가 파악하기로는 이 정도가 전부다. 내 판단보다 중요한 것은 김현성의 생각이다. 새롭게 얻은 직업과 능력이 앞으로의 여정에 도움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가 제일 중요하다. 총평을 내려달라는 듯이 살짝 김현성을 바라보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잘해내실 수 있으실 거라고 생각했지만 제가 상상한 것 이상의 결과물이군요.” “감사합니다.” “아직 조금 더 알아봐야겠습니다만….” 일단은 만족스럽다는 이야기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김현성뿐만이 아니다. 처음 능력을 시연할 때도 같았지만 파티원들은 전체적으로 무척 놀랐다는 표정이다. 여기저기에서 축하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와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형님은 뭔가 해낼 줄 알았소. 크으… 완전 멋있습니다, 형님.” “고맙다, 덕구야.” “축하….” 심지어는 김예리 역시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목소리를 제대로 듣는 것은 처음. 슬쩍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팔을 올려봤지만 김현성 뒤로 후다닥 숨는 바람에 내 팔이 허공을 갈랐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바로 그때였다. ‘…….’ 정하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뭔가 불안해하는 표정. 내가 김예리를 향해 손을 뻗었기 때문이 아니다. ‘들켰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내가 보여준 연금술의 매커니즘 방식이 자신이 걸었던 마법의 방식과 굉장히 유사하기 때문인지, 얼굴 한쪽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자신의 마법을 발견한 것은 아닌가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사실 정하얀의 행동은 어느 정도 브레이크를 걸어줘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었기에 일단은 말을 아꼈다. “하얀아.” “아… 네. 오빠.” 손을 꽉 잡아주니 뭔가 진정하는 것 같은 느낌. 뭔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 보였기 때문에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 느끼게 만들어야 돼.’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행동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게 가장 베스트. 아직까지 성향이 변하지 않았으니 쿡쿡 찔리게만 만들어줘도 이런 행동을 자제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아침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군요. 기영 씨 역시 저희가 뭘 얻었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하니까요.” ‘굳이 안 알려줘도 되지만….’ 자신들의 입으로 설명하는 게 조금 더 편하다. “원정이 만족스러웠나 보군요.”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다시 되돌아가야 되지 않을까 할 정도로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만….” “…….”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군요.” 김현성이 말을 꺼내가 슬쩍 주변이 조용해졌다. 얼마나 개판을 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용한 분위기를 보니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희귀 등급의 던전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처음 던전에 진입한 이 후에 출발하기 전까지 3일이 걸렸습니다.” “네?” “하얀 씨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아.” 고개를 푹 숙이는 정하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말로 어떻게든 포장하기는 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을지 대충 예상이 간다. 이곳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을 테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던 것은 기본 옵션. 아마 던전 내에서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늦었구나.’ 김현성이 이야기하는 삼 일이란 아마 정하얀의 멘탈을 다듬어 주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덕구 씨 역시 적응하는 데 무척 오래 걸렸습니다. 이전에 보여줬던 모습 외에도 다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죠. 예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경험이 적다고는 하지만 이상한 돌발 행동을 해서 파티를 혼란스럽게 했죠. 아마 희영 씨가 없었다면 더욱더 힘들었을 겁니다.” “…….” “…….” ‘들으라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호흡도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제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전멸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전방에게 화살을 쏘는 후위, 겁을 집어먹은 전위 때문에 후위가 위험해진 적도 많았죠.” “끄응….” “언제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저들에게 들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나에게 그동안의 고충을 이야기하는 걸 보여주고 싶은 것 같다. ‘…….’ 마치 자식의 나쁜 행동을 배우자에게 이야기하는 우리네 아버지나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아니나 다를까 박덕구나 정하얀의 고개가 더욱더 푹 숙여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가면 갈수록 자리를 잡아가더군요. 결과물도 나쁘지 않았고요.” “네.” “저희 역시 모두가 60의 능력치를 이뤘고, 영웅 등급의 직업을 얻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아….” “조금 더 자세한 건 안에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두?’ 김현성의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눈으로 확인한 덕구 녀석의 직업 등급은 틀림없이 희귀 등급이었기 때문이다. ‘이 돼지가….’ # 84 회귀자 사용설명서 084화 세 번째 직업(10) 어째서 박덕구가 거짓말을 했는지는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원정 중에 하나둘씩 새로운 직업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김현성이나 선희영에게 상담 아닌 상담을 했을 것이고 모두가 영웅 등급의 직업을 얻었다고 말했을 가능성이 크다. 원정 중에 얼마나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분명. 특히나 천재로 분류할 수 있는 김예리의 존재는 박덕구에게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잠재 능력 전설 이상.’ 그건 단순히 능력치에서만 국한되지 않는다. 혹시라도 마음의 눈의 등급이 상승하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김예리가 가지고 있는 포텐이 엄청나다는 것 정도는 깨달을 수 있다. 공포의 정원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아마 이번 던전에서도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것이 당연. 아마 박덕구는 바로 옆에서 천재들을 봐왔으리라. 천재라는 것은 원래 인종이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수십 년 동안 노력한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리는 종류의 인간들. 긴 세월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천재라고 불리는 종류의 인간들을 많이 봐왔다. ‘지구에서뿐만이 아니라….’ 여기에서도 마찬가지.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당장 주변에 깔려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고위 마법을 쏟아내고 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마법을 구사하는 정하얀. 아직까지 도드라진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신성 능력치 전설 이상의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특유의 침착함으로 파티의 중심을 잡아주는 선희영. 김현성이 빈민촌에서 직접 가서 데리고 온 김예리와 천재라는 수식어마저도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는 회귀자까지. ‘…….’ 사실 말도 안 되는 라인업이라고 볼 수 있다. 파티원 한 명, 한 명의 구성원의 수준이 감히 천재라고 말할 수 있는 잠재 능력을 갖춘 파티가 바로 김현성 파티다. 물론 박덕구도 충분히 상위로 올라갈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라고 분류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원정 중에 느끼는 것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괴물.’ 실제로 황정연도 정하얀을 보고 자괴감을 느낀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녀석의 이런 선택은 꽤나 의외였다. 박덕구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뭔가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허겁지겁 거짓말을 했다고 예상하는 게 맞겠지만 거짓말보다는 놈의 멘탈이 조금 더 걱정됐다. 내가 고유 영웅 등급의 직업을 얻고 난 이후에 조금 측은해 보였던 것은 그런 연유이었으리라. 파티에서 자신만 뒤처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얻은 직업은 대마법사예요.” “그래?” “네. 마력도 많이 올려주고 모든 종류의 속성에 대한 친화력을 올려줘요. 원소 마법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마법도 전부 다요. 헤헤. 마법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고 고급 마법 지식도 들어왔어요. 아직은 그렇게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잘됐네.” “아, 또 마력 능력치는 69가 됐어요! 오빠.” “대단하네, 우리 하얀이. 생각보다 많이 올랐는데.” “지력도 62예요.” “대단하네.” “현성 씨가 그러는데 능력치가 70까지는 잘 오른다고 하더라고요. 희영 언니가 사냥을 많이 나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능력치가 높았던 것처럼요.” ‘그건 아마 너희들 같은 사람들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 거다.’ 실제로 나와 박덕구의 주요 능력치는 60대 초반에 안착해 있다.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오랫동안 고생한 자신에게 보상을 달라는 의미인 것 같아 조금 민망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일이다. 그녀가 강해질수록 나는 더 안전해진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물론 그 반대의 상황이 올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성장 방향이 나쁘지 않다. 습관처럼 정하얀을 바라보니 직업에 대한 정보가 쏟아졌다. [대마법사-영웅 등급] [마력의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자들이 부여받는 직업입니다. 마력이 5 상승하고 모든 종류의 마력에 대한 친화력이 올라갑니다. 이후에 전직할 수 있는 직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좋아.’ 어떤 방향의 성장을 노리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뭔가 담백한 이름의 직업이기는 하지만 정하얀과 확실히 잘 어울린다. 혈액 마도사 혹은 살육 마도사, 광기의 대마도사 따위의 이름으로 전직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리라. 이를 테면 정하얀은 정석 루트를 타고 있는 셈. 물론 그건 정하얀뿐만이 아니었다. 김현성 녀석도 마찬가지. 이후의 성장 방향은 내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김현성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검사를 지양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고위 검술 수련자-영웅 등급] [검술의 극의를 깨닫기 위해 수련하는 이들을 위한 직업입니다. 근력이 3, 민첩이 2, 마력이 1 상승합니다.] 다른 설명은 더 읽어볼 필요도 없다. 영웅 등급의 직업을 거쳐 가는 직업으로 선택한 것만 봐도 답이 나오는 상황. 김현성에게는 저 등급의 직업도 그저 지나쳐야 할 통과문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 세계에서 직업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다. 만약 그저 그런 모험가였다면 절대로 녀석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음식을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집어 넘기는 도중. 이번에는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리는 추적자라는 직업을 얻었습니다.” “추적자 말입니까?” “예.” “궁수계열의 한 종류로 활뿐만이 아니라 단검이나 검 같은 중소형의 무기들도 다룰 수 있어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리 같은 경우에는 능력치가 두루 좋은 편이니까요. 민첩과 마력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선택지가 넓어질 겁니다.” ‘영웅 이하의 능력치가 하나도 없으니까.’ “길을 헤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저희 파티의 고질적인 문제였으니까요. 아, 그밖에도 희영 씨는 대법관이라는 직업으로 전직했고… 신성력이 눈에 띄게 올랐습니다. 덕구 씨도 마찬가지로 탱킹 능력에 관련된 전위 직업을 얻었다고 하더군요.” 김현성의 말에 슬쩍 선희영을 보자 곧바로 직업명이 시야에 비쳤다. [암흑사제 대법관-영웅 등급] 아무래도 김현성에게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은 모양.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곧바로 선희영도 고개를 끄덕여왔다. 이전 직업이었던 암흑사제의 진화판 같은 직업이니 조금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일반 신성 주문 말고도 공격 주문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한 게 없는 것 같았다. 이렇든 저렇든 파티는 무척이나 무난히 성장하고 있는 편. 조금 민망한 표정의 박덕구를 제외하면 사실 문제는 없다. 아니, 사실 박덕구 역시 문제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주변 이들이 성장이 특출할 뿐, 박덕구의 성장치도 충분히 놀랄 만한 성과다. 녀석 역시 어느 곳을 가더라도 환영받을 수 있을 정도의 스펙과 잠재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 번은 이야기를 해봐야겠는데….’ 팀원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이 건에 대해 언급할 마음은 없는 것이 당연. 내가 능력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팀원들에게 알리기는 싫기도 했고 이런 곳에서 박덕구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건 안 될 일이다. ‘천재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처럼 멍청한 짓은 없어.’ 조금 잔인한 말일 수도 있지만 녀석도 이 사실을 깨달았으면 싶었다. 적당히 합의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조금은 무거운 분위기에서 대화가 계속되기는 했지만 조금씩 대화의 주제는 가벼워 졌다. 던전행에서의 웃지 못할 실수들이라든가, 그동안 방에만 처박혀 있었던 나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정하얀이 매일 훌쩍거렸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김현성이 위기에 빠진 파티를 구해줬다는 이야기에는 예상했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감정표현을 잘 안 하는 김예리도 슬그머니 미소 지었고, 그렇게 조금씩 목소리가 올라가고 있었던 그때였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길드의 문이 열린 것. 주인공은 미친 늙은이 이설호와 파란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 이상희. 무척이나 무거운 표정으로 길드를 들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지금 당장 회의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길드에 남아 있는 모든 간부들을 소집해 주세요.” “전부 말입니까?” “네. 예외는 없습니다. 일단은 전부 소집해 주세요. 회의는 제 개인 집무실에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파티가 얼마나 되죠?” “2번 대가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7번 대도 귀환했습니다. 이상희 님, 이설호 님.” “그렇다면 현성 씨와 기영 씨도 올려 보내도록 해주세요.” “꼭 그들까지….” “아니요. 전부 소집해 주세요. 길드의 일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도대체 뭐야?’ 대충 봐도 심각한 분위기라는 것이 느껴진다. 항상 우리네 어머니 같은 표정으로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줬던 이상희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해져 있었고 미친 늙은이의 얼굴에도 근심이 서려 있다. 정확히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지만 길드의 중역들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태의 심각성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 “먼저 올라가 계시지요. 제가 함께 올라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설호 씨.” “예.” 파티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일반 길드원들은 허겁지겁 길드의 위로 올라가는 중. 아마 황정연을 부르러 가는 도중이리라. 파란의 2번 대는 사층에서 거주 하고 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닙니까?” “기영 씨, 올라가시죠.” “아… 네.” “예.” 나름대로 즐거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개판이 됐다. 이설호가 슬쩍 이쪽을 향해 눈짓하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일단 무슨 일인지 듣는 것이 먼저다. “다른 분들은 저와 기영 씨가 돌아오실 때까지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시면 됩니다. 아니, 혹시 모르니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알, 알겠소.” ‘뭐지?’ 사실 머릿속으로는 별별 생각이 다 들기는 한다. 갑작스레 짐을 챙기는 이들을 바라보면 더욱더 그렇다. 일반 길드원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말없이 무장을 챙기는 길드원도 많아졌다. 여러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자세한 상황은 저들 역시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김현성 님, 이기영 님. 부길드 마스터께서 지금 회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저, 저도 자세히는….” 뒤늦게 이쪽에 소식을 전하는 길드의 접수원도 급히 고개를 숙인 뒤 길드 밖으로 뛰어 나간다. 황급히 이상희의 집무실로 올라가자 무장한 경비가 문을 열어주는 게 보였고 나와 김현성은 조금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부 모였나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눈앞에 자리한 것은 이상희. 그리고 황정연과 미친 늙은이와 그 똘마니 세 명이 전부다. 그동안 얼굴만 봐왔던 행정 간부 2명도 자리해 있는 모습이었지만…. ‘이게 전부? 실화야?’ 한때 자유 도시 린델을 대표하는 길드의 간부들이 다 모였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숫자였다. “기영 씨, 현성 씨. 자리에 앉아주세요. 조금은 안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제법 진지한 표정의 간부들을 눈앞에 두니 괜스레 위축되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침착한 김현성은 대충은 예상했다는 표정 같아 보였다. ‘알고 있는 건가.’ 계산을 마친 것은 순식간, 우리가 어째서 파란으로 왔는지에 대해 떠올리니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알고 있어.’ 김현성은 어째서 이런 상황이 펼쳐졌는지 알고 있다. 많은 대형 길드의 오퍼를 거절한 이후에 김현성이 굳이 파란을 선택한 이유. 부 길드 마스터인 이상희가 그 이유에 대해 입을 열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 85 회귀자 사용설명서 085화 미친 늙은이(1) 분위기 자체가 무척이나 무거웠다. 갓난아기라도 지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으리라. 조금 머뭇거리던 이상희가 입을 연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다. “현재 파란의 2번 대와 7번 대를 제외한 모든 파티가 영웅 등급의 던전에 고립되어 있습니다. 생사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며 구조 신호를 확인한 것은 오늘 아침입니다. 이후에 따로 신호를 보내오지 않은 것을 유추해 보면 던전에 진입한 파티에 문제가 생긴 걸로 보입니다.” ‘이건가?’ “던전에 진입한 정확한 시기는 8월 14일, 마지막 연락은 오늘 아침 6시 40분 경이었습니다. 설호 씨?” “네. 맞습니다. 정확합니다.” 8월 14일 이라면 우리가 파란으로 들어오기도 전이다.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느낌이 온다. ‘원정 실패.’ 길드나 클랜이 무너지는 아주 전형적인 상황 중에 하나다. 자유 도시 린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도시 내에 떠돌아다니는 전형적인 격언들은 대충 들어왔다. ‘한 번의 원정실패는 소형 클랜을 휘청거리게 만들고 두 번의 원정실패는 대형 길드를 휘청거리게 만든다.’ 그만큼 던전 공략이나 사냥을 나가는 게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격언이다. 저런 말이 나오는 게 당연할 것이다. 린델에서는 강자가 곧 집단의 재산이다. 원정 중에 실수로 저들이 죽거나 움직이기 힘든 상태가 된다면 그것은 곧바로 집단의 전력이 대폭 하락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클랜이나 길드는 원정 준비에 무척이나 많은 투자를 하는 편. 조금 질이 나쁜 길드의 경우에는 시험용 파티를 먼저 들여보낸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만약 발견된 던전이 영웅 등급 이상의 던전이라면 조금 더 조심스러워야 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몬스터가 나오고 이 후에 보스 몬스터가 나오는 희귀 등급의 던전과는 달리 영웅 등급의 던전은 각 던전마다 그 메커니즘이 다르기 때문. 나 역시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여러 길드에서 만든 모험일지만 봐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일이다. ‘파란은 원정 실패로 무너진다.’ 김현성은 이 상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구조대를 보내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수순일 터. 버리기에는 던전 안에 들어가 있는 인적 자원이 무척이나 고급스럽다. 아니, 인적 자원 이전에 이상희에게는 던전 안에 고립되어 있는 이들이 하나하나 가족처럼 느껴질 것이다. 파란은 그 역사가 꽤나 오래됐으니까. 그녀의 성격이라면 무리하게 들어가고도 남는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대한 것.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선택지에 대해 떠올리고 있는 도중에도 회의실에서는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간단한 브리핑이 끝난 뒤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탁상공론이지만….’ “다른 길드에 지원을 요청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붉은용병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현재 용병여왕의 부재로 인해 대답이 늦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답을 듣는 데 얼마나 걸릴지…. 만약에 한시가 다급한 상황이라면 원정대가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아무런 대책 없이 이렇게 들어가자는 말씀이십니까?” “꼭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신호가 끊긴 것이 오늘 아침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대다수의 인원들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길드의 재산입니다.” “당연히 구조대를 보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전력이 턱없이 부족해요. 공략이 아니라 구조가 목적이라곤 하나 사실 저희만으로는….” “만약에 구조대를 구성한다고 한다면 은퇴하신 분들도 함께….” “이미 모험을 떠날 몸이 아니지 않습니까. 허허. 솔직히 저는 행정일을 하는 데도 조금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숫자가 부족하지 않습니까.” “부족하다니요? 7번 대도 있지 않습니까.” “…….” “7번 대는….” “7번 대 파티도 우리 길드의 주요 전력이지 않습니까?” ‘미친 영감탱이들이….’ 말을 아끼고 있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고립된 파티를 구해내기 위해 구조대를 보내느냐 마느냐. 던전에 대한 정보는 길드 측에서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이미 한 번 실패한 데이터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던전행은 틀림없이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무려 파란의 다섯 파티를 잡아먹은 던전을 황정연과 이상희, 우리가 함께 간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생존자를 확인하는 게 고작일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것, 구조대를 파견해야 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길드에서 구조대를 만들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리 이설호를 비롯한 이들은 위험한 곳에 자신의 몸을 던지기 싫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려고 그 비싼 돈을 주고 영입 한 것이 아닙니까. 그들도 틀림없이 도움이 될 겁니다.” “아직 제대로 성장도 되지 않은 파티예요. 이설호 님.” “황정연 님, 저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주 작은 손이라도 필요한 시점이 아닙니까. 최소한 데려가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길드의 위기입니다. 함께 헤쳐 나가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설호 님도 함께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늙고 노쇠해 움직이기 힘든 몸입니다. 그동안 길드를 위해 헌신하시는 분인데… 길드를 지켜야 하는 사람도 필요한 만큼 이설호 님께서는 길드를 지켜야 하지요.” “아암 그렇고 말고요!” “아마 저희가 간다고 해도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크흠….” “흠흠.” ‘지랄하고 자빠졌네, 미친 새끼들이….’ 돌아가는 분위기를 바라보니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말을 맞춰 놓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호흡이 예술이다. 미친 늙은이가 계속해서 우리를 사지로 들이밀려고 하는 것을 보니 이번 기회에 꿀을 빨려고 제대로 마음먹은 모양. 애초에 이상희나 황정연 그리고 우리가 함께 던전에 들어간다고 가정한다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것은 이설호 저 늙은이다. ‘늙고 노쇠하기는 개뿔.’ 첫 만남 당시에 이쪽을 향해 살기를 풀풀 날리던 게 엊그제 같다. 스탯 역시 나쁘지 않은 것이 눈에 보인다. 늙은 것은 맞지만 절대로 움직이기 힘든 몸은 아니다. 집구석에서나 밖에서는 여포처럼 군림하는 기운찬 늙은이가 대중교통을 안에서는 노쇠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굳이 저 난리를 치는 이유는 뻔할 뻔자. 위험한 곳에 몸을 던지기 싫은 것이다. ‘한탕 하고 싶다 이거지?’ 구조대를 보내느냐 마느냐라는 논쟁에 우리 파티가 참가하는가 참가하지 않는가에 대한 프레임이 덧씌워졌다. “아직 7번 대 여러분들이 들어가기에는 적절한 곳이 아니에요.” “허허허. 뭔가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아직 린델에 들어온 지 1년도 안 된 이들입니다.” “그렇지만 파란의 일원이기도 하지요. 저들도 엄연히 길드원입니다. 안 그래도 많은 특혜를 받고 온 이들입니다. 이번에도 특혜를 줄 수는 없습니다.” “특혜가 아니라 당연한 상식이에요. 도시 내에 있는 그 어떤 길드도 1년도 지나지 않을 파티를 영웅 등급의 던전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아, 하나 있기는 하네요. 시험용 파티를 집어 던지는 길드들이 대부분 그런 식이죠.” “시험용 파티라니요. 말씀이 조금 지나치십니다. 어디까지나.” “그만.” 여기저기 오고가던 탁상공론을 가로막은 것은 이상희였다. “7번 대는 길드 하우스에서 대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설호 씨, 정연 씨의 말이 맞습니다. 현성 씨를 비롯한 다른 분들이 아무리 성장이 빠르다고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이거지.’ “이곳에서 함께 길드를 지켜주도록 하세요.” “그렇지만….” “그렇지만은 없습니다. 이건 제가 내린 결정입니다. 나머지 인원은 지금부터 원정 준비를 서둘러 주세요. 목표는 공략이 아니라 구조입니다. 다른 분들은 지금부터 곧바로 타 길드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겠습니다.” 김현성이 노린 게 이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상적이라면 이상적인 방법이다. 구조대를 파견한 이들이 죽거나 커다란 상처를 얻고 되돌아 왔다고 가정한다면 김현성 파티는 단숨에 파란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말하자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중형 길드 하나를 꿀꺽 할 수 있다는 이야기. 물론 여러 가지 처리해야 될 문제들이 있기야 하겠지만 복잡한 과정을 스킵한다고 가정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많다. ‘사실 꼭 그런 것만도 아니지만….’ 반대로 생각하자면 이상희나 황정연 같은 이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도 문제가 되는 부분. 이후에 김현성 왕국에서 일해줄 훌륭한 일꾼 두 명을 이렇게 잃는다고 생각하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친 늙은이야 어디서 뒈져 버려도 상관하지 않겠지만 그녀들은 이쪽에 충분히 호의적이다. 시간이 조금 걸리기야 걸리겠지만 안전하게 권력을 승계 받는 선택지도 나쁘지는 않은 옵션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김현성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 녀석의 생각을 알 수 없다는 게 무척이나 답답했다. 물론 아예 예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라면 조용히 떨어지는 꿀을 받아먹는 선택지도 분명 염두에 두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김현성이라면 아마…. “저희도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저런 소리를 내뱉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 “저희도 함께 가도록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이건.” 회귀자를 지지해줘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김현성을 응원해 줄 수밖에 없으리라. 조금 고민하기는 했지만 결정을 내리는 것은 순식간. 사실 황정연이나 이상희를 사지로 내몰았다면 아무리 나라고는 해도 찜찜했을 것이다. 그녀들에게는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현성 씨 말이 맞습니다. 저희도 함께 가는 게 옳습니다.” ‘불안하지만….’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던전의 공략 방법을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이 던전행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수도 있다. 녀석은 착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무골호인은 아니다.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 마신 뒤에 입을 열었다. “최근 파티원 전체가 눈에 띄는 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전원 세 번째 직업으로 영웅 등급의 직업을 얻었고, 주요 능력치는 60대 초반, 하얀이 같은 경우에는 70대에 이르렀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허….” “말도 안 돼….” “당연히 이 정도로도 부족하다는 건 압니다. 영웅 등급의 던전에 들어가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그 누구보다 저희가 그걸 가장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희 역시 파란의 구성원입니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으로 맺어진 인연이지만 저는 그 인연이 결코 가볍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저희의 작은 손이라도 빌려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중간에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무리하지 않고 통제에 따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작은 손이라도 보태는 것을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자 곧바로 반응이 터져 나왔다. 멍청하게 보일 수 있는 행동이기도 했지만 나쁘지는 않다. “꼭 함께 가고 싶습니다.” “허허. 무척 감동적입니다.” 나를 향해 눈웃음 짓고 있는 미친 늙은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상희 님, 기영 씨와 현성 씨가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데려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미 세 번째 전직까지 마쳤다면 틀림없이 도움이 될 겁니다. 허허.” 저 늙은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치우는 것이 맞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 86 회귀자 사용설명서 086화 미친 늙은이(2) “그게 좋아 보입니다.” “이렇게 길드를 생각하는 마음이 강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 “아암. 그래야지.” ‘미친놈들.’ 나는 저 늙은이들이 과거에 파란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모른다. 이상희가 저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최소한 과거에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길드 마스터와 깊은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모두 과거의 이야기다. ‘미친 늙은이.’ 이를 갈 지경. 우리 파티의 뜻과 저 늙은이들의 뜻이 일치하는 게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벌써 세 번째 전직을 했다면 확실히 도움이 되겠군요.” “정말로 대단합니다. 돈을 들인 보람이 있어요.” “전부 길드의 지원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 황정연 역시 기가 차다는 듯이 이설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게 보여준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낙천주의자라는 성향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찌푸려져 있는 얼굴. 저런 표정을 보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설호의 지금 태도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의 행동과 굉장히 유사했으니까. “이제 막 들어온 이들도 원정에 끼워 달라는데 지금까지 길드를 지켜오셨다고 말하시는 분들은 조용하군요. 다른 사람을 떠밀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나설 생각은 하지 않는 건가요?” 이설호뿐만이 아니다. 몇몇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조금은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들도 찔리는 것이 있는지 흑색이 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큼….” “아무래도 일선에 서기에는 힘든 몸이라.” “방금은 아주 작은 힘이라도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길드를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이 모두 다르지 않습니까. 애초에 비전투직인 저희도 그렇지만… 이설호 님 역시 은퇴하신 지 한참이나 되었습니다. 여기 다른 간부님들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지금 와서 전선에 서기에는 좀… 방해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글쎄요. 제 눈에는 책임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이네요.”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제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가기 싫다고.” “허… 보자보자 하니까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지금 누가 정말 심한지는 당신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것이 눈에 보인다. 만일 나였다고 하더라도 황정연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쪽이 뭘 할 수 있을 리가 만무. 저들은 틀림없이 비전투직군으로 분류되어 있다. 애초에 함께 데려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부끄럽습니다. 당신들 정말로 부끄러운 사람들이에요.” 조금 과한 생각. 내 뇌내망상이지만 이설호를 비롯한 똘마니들은 이쪽이 죽어서 돌아오는 것을 바라고 있을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시나리오는 완벽하다고도 볼 수 있다. 모든 전투직군이 영웅 등급의 던전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 뒤 그동안 키워왔던 영향력을 바탕으로 길드를 잠식, 이설호를 중심으로 새로운 체제를 유지한다. 마침 세상이 변하는 참이니 놈에게도 좋은 기회일 것이다. 가능성은 낮지만 어쩌면 파란을 통째로 팔아넘길 수도 있다. ‘돈이 될 거야.’ 전투직군이 없다고는 하지만 파란이 보유하고 있는 재산이나 길드 하우스, 지금까지 쌓아올린 인프라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 애초에 김현성이 노리고 있는 것 역시 같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나쁘지는 않은 추론이다.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이설호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저들의 행동이었다. ‘뒤가 있나?’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보통 저런 종류의 늙은이들은 뒷배 없이는 도박을 하지 않는 편이니까. 도박은 젊은이들에게 강요하고 자신들은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아마 저들이 지금 위치에 앉아 있는 이유 역시 수많은 이들의 희생위에 쌓아 올린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저들이 고인 물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조금 분위기가 과열되고 있었을 때 이상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어왔다. “그만하세요. 아마 다른 분들도 많이 답답하실 겁니다. 정연 씨도 평소답지 않게 너무 흥분하신 것 같네요.” “마스터, 그렇지만….” “행정 간부들을 던전에 데려 갈 수는 없습니다. 이설호 님 역시 마찬가집니다. 이미 은퇴하신 몸이기도 하고 최근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고려해 본다면 함께 가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물론 정연 씨가 어떤 마음인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같은 심정이니까요. 솔직히 지금 여러분이 보여주는 행동이 달갑진 않습니다.” “아….” “그게….” “크흠.” “어쩔 수 없지 않…. 큼.” “예전에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솔직히 현성 씨나 기영 씨에게 굉장히 부끄러운 심정입니다. 제가 그렸던 파란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의 행동은 합리적입니다. 비전투직군과 함께 던전을 떠날 수 없는 것은 맞습니다. 여러분들의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설호 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정말로 실망스럽습니다. 아니, 사실은 무능력한 제 자신에게 가장 실망스럽습니다.” 제대로 입을 닥치고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최소한 자기들도 함께 가겠다는 액션을 취하기만 해도 섭섭함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도리어 김현성과 나를 떠미는 행동을 보였으니 이상희가 얼마나 실망이 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상희는 천천히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뭐라고 입을 털어야 이쪽을 데려가 줄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던 찰나,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성 씨 그리고 기영 씨.” “네.” “예.” “아까의 말씀을 번복해 정말로 죄송합니다. 염치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이번 원정에 합류해 주시겠습니까?”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 심지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상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마음이 바뀔 만하지.’ 아마 한 달 전이었다면 이상희도 우리를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였네.’ 어찌됐든 60 이상의 능력치와 세 번째 전직이 영웅 등급의 던전에서 비빌 수는 있는 모양. 아마 그래서 그녀 역시 마음을 바꿨을 것이다. 사실 파란 길드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은 최악이라고 볼 수 있다. 주요 전력이 없는 상태에서 던전에 들어가야 되는 상황이고 심지어 던전 안에 있는 이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다. 우리라는 지푸라기를 잡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간다. 김현성 파티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다분히 비상식적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길드의 어머니 포지션에 있는 이상희의 진심 어린 부탁을 들었던 김현성의 대답은 뻔할 뻔자. “물론입니다.” 너무나도 뻔한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감사합니다.”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곧바로 구조대를 구성해 원정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네.” “구성원은 저와 2번 대 파티와 칠 번대 파티가 함께 갑니다. 30분 이 후에 곧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원정 준비는 최대한 서둘러 주세요.” “네.” “길드에 남아계시는 여러분들은 붉은용병을 비롯한 다른 길드와 접선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연락이 닿는 즉시 던전으로 지원을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네.” “설호 씨.” “네. 이상희 님.” “부디 저를 실망시키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믿겠습니다.”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이상희 님. 타 길드와 연락이 되는 즉시, 함께 향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바깥을 박차고 나가는 이상희의 모습이 보였다. 이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던 황정연도 황급히 집무실을 빠져나갔고, 행정팀 녀석들도 제법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나와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 1층으로 내려온 이후에 파티원들을 향해 곧바로 입을 열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선희영의 지휘 아래 빠르게 정리가 되고 있는 것을 보니, 이번 원정에 대한 준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원정 준비 말고도 해야 할 일이 있는 내게는 딱 알맞은 타이밍이다. ‘믿기는 개뿔.’ 이상희는 좋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상적인 지도자라고는 볼 수 없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바보 같은 지도자다. 믿음이라는 건 물론 훌륭한 사람을 다룰 때는 좋은 수단이다. 예를 들면 덕구나 하얀이처럼. 이상희가 이설호와 똘마니들을 바라보는 심정도 아마 같을 것이다. 그렇지만 미친 늙은이 같은 종류의 사람들을 다루는 데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이상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정체가 뭔지는 알 수 없다. 지금까지 함께 했던 이들에 대한 믿음, 길드가 위태로워져도 끝까지 함께 할 거라는 믿음. 뭐,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렇지만. 저런 종류의 믿음은 굉장히 쉽게 배신당한다. 내가 보기에 저 위에 있는 늙은이들은 빈민촌에 있는 선희영의 봉사 대상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곳에 있는 이들 보다 여기 있는 이들이 운이 조금 좋았다는 정도. 그리고 타인을 밟고 올라왔다는 것 정도. 물론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정말 그것 외에는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믿음이란 건….’ 서로가 서로에게 받을 수 있는 것들이 있을 때 유지되는 감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늙은이들은 이상희에게 받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믿음이 유지될 리가 없다. “30분 뒤에 출발….” “네?” “아무것도 아니야, 하얀아.” “네. 오빠 또 챙길 거 없나요?” “아, 하얀아. 그것보다는 잠깐 예리 좀 불러다 줄래?” “네?” “잠깐 심부름시킬 게 있는데… 시간이 얼마 없어서.” “네.” 정하얀이 허겁지겁 뛰어간 뒤에 조금 미심쩍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김예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빠르네.’ “잠깐 심부름 좀 해줄 수 있을까?”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현성 씨에게도 좋은 일이 될 거야.” “응.” “검은백조에 있는 이지혜라는 사람한테 편지 좀 전해줄 수 있겠어?” “이지혜?” “응, 이지혜. 기왕이면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게… 물론 중간에 읽는 것도 금지.” “응….” “내가 보냈다고 하면 환영해 줄 거야. 빠르게 다녀와야 한다.” “응.”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괜스레 생각이 많아지기는 한다. 내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인지 판단하기는 사실 어렵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는 정답일 거라고 생각한다. ‘왜?’ 믿음이 사라진 관계는 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청소하기 딱 좋은 날씨네.” 썩은 피를 뽑아낼 필요가 있다. # 87 회귀자 사용설명서 087화 우린 영원히 함께예요(1) 김예리가 가져온 이지혜의 편지를 읽고 있을 때 이상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슬쩍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당연지사. 대충 편지를 주머니에 우겨 넣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마 우리가 던전에서 나올 때 즈음이면 계획이 진행되어 있을 것이다. 일단은 던전행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 총인원 14명. 김현성 파티에서 6명 그리고 황정연이 관리하는 파티에서 7명, 원정대를 이끄는 이상희까지. 부족한 인원이었지만 구성 자체는 굉장히 괜찮았다. 일단 이상희 그녀가 능력치 90을 가지고 있는 성기사라는 게 중요했다. 리더로서의 자질은 부족하지만 전투요원으로서는 너무도 뛰어난 인재. 그녀는 내가 지금껏 봐온 그 어떤 전위들 중에서도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탱커였다. 민첩은 낮았지만 마력이 77이었고 자가 치유가 가능하다는 장점은 린델 내에 있는 그 어떤 탱커도 따라올 수 없으리라. ‘황정연 쪽도 마찬가지야.’ 2번 대 역시 전체적으로 능력치가 준수하다. 70에서 80선을 유지하고 있고 잠재 능력도 나쁘지 않다. 아마 저 정도의 스펙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영웅 등급의 들어가기 적당한 스탯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리라. “시간이 없는 관계로 브리핑은 이동하면서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희의 목적은 공략이 아닙니다.” “네.” “목적은 어디까지나 생존자의 확인과 구출. 생존자가 없다고 판단하면 곧바로 몸을 빼겠습니다. 생존자의 구출 역시 중요하지만 여러분들의 안전이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중요합니다. 그걸 항상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네.” “들어가는 던전의 등급은 영웅 등급, 던전의 이름은 저주받은 신단입니다.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종류는 망령과 언데드이며 그 외에 자세한 정보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안전하게 생존자를 수색할 예정입니다.” “얼마나 걸리나요?” “린델의 서쪽 지역에 언데드 사냥터에서 발견된 던전입니다. 목적지 까지는 약 8시간 정도가 소요될 예정입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겠군요.” 확실히 급하게 던전행을 준비한 느낌이다. 우리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알려진 정보가 저것밖에 없다는 것은 무척이나 의외. 어째서 그 많은 파티가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이 터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던전의 위치와 나타나는 몬스터의 종류밖에 확인되지 않았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 던전의 등급이 희귀 등급이었다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나?’ ‘이 정도 전력이 들어가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라는 마음가짐으로 무리하게 들어간 것이 실패의 원인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궁금한 마음에 살짝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내 말에 황정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정보가 조금 부족하군요.” “당시에 조금 급하게 들어갔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이유가 있었던 겁니까?” “네…. 원정 준비를 할 시간이 부족했었거든요. 길드의 거의 모든 전력이 투입된 던전행이라 영웅 등급의 던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각했었던 게 실수였어요. 파란의 길드 마스터가 저주에 걸렸다는 건 알고 있으시죠?” 당연히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 “아니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아. 대외적으로는 비밀인 이야기였으니까요. 아마 주변에서는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극비라고 하기라도 그렇지만요. 이상희 님도 적당한 타이밍을 봐서 말씀드리려고 했을 거예요.” “흠….” “기영 씨가 파티에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일이예요. 길드 마스터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저주에 걸렸고 그 저주를 해주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저주받은 신단에 진입했죠. 사실 당시에는 무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원정을 떠나는 길드 분들은 영웅 등급의 던전이나 대형 몬스터 사냥에 특화된 베테랑들이니까요.” ‘나라도….’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을 수도 있다. 황정연 정도로 구성된 파티가 다섯 이라고 생각한다면 전설 등급의 던전도 트라이가 가능하다. 영웅 등급에서 발목이 잡힐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다. “저주받은 신단에 저주를 해주할 수 있는 힌트가 있다는 겁니까?” “사실 그것마저도 확실하지 않았죠. 길드 마스터가 당한 저주가 저주받은 신단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얻은 저주였고 당연히 원인이 된 던전에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요. 던전의 입구를 열기 위해 손을 뻗으셨다가….” “그렇군요.” 간단하게 압축하자면 파란의 길드 마스터라는 양반이 던전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저주에 걸렸고 나머지 인원들은 길드 마스터의 저주를 해제하기 위해 던전에 진입했다는 이야기. 마치 던전이 인간들을 끌어 들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던전이었어.’ 뭔가 조금 불안감이 밀려들어오기는 한다. 왠지 모르게 공포 영화에서 나오는 패턴과 굉장히 흡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경우에 동료를 구하겠다고 따라 들어간 놈들은 대부분 안 좋은 꼴을 당한다. 이번에는 그런 꼴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별로 놀라지는 않으시네요. 기영 씨는.” “아뇨. 사실 파란의 길드 마스터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습니다.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캐물을 사안도 아니라고 생각했고요. 당장은 성장하기 바빴으니 말입니다.” “아아아. 네. 아마 이상희 님도 굳이 다른 일에 신경 쓰게 하기 싫어하셨을 거예요.” “네. 그렇겠죠.” “오빠….” “아, 하얀아.” 아무래도 황정연과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낸 모양. 정하얀이 이쪽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 대충 인사를 한 뒤에 살짝 발걸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새 안 좋았던 기분이 풀어졌는지 생긋 웃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무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된 행군이었기 때문에 손을 잡고 걷는다든지 하는 것들은 자제하고 있었지만 정하얀도 어느 정도 나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처럼 은근슬쩍 소매를 잡아당긴다거나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마차가 들어오지 못할 정도고 험한 길. 사실 체력이 약한 이쪽은 조금 힘들다고 느꼈지만 파티는 무척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시가 급했으니까.’ 체력 능력치가 낮은 이들을 배려하지 못한 것도 이해는 간다. 일단은 가지고 온 체력 물약을 들이키며 행군에 참가할 수밖에 없는 상태. 아무래도 상대해야 할 적들이 언데드다 보니 사제들은 최대한 신성력을 아끼는 게 좋다고 생각한 모양인 것 같았다. 결국에는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언데드들이 있다는 구역에 도착, 우리 파티는 처음 들어와 보는 지역이다. 애초에 언데드라는 몬스터를 마주한 것도 처음이다. 신기한지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끄응….” 사제들은 대놓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암흑사제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선희영 같은 경우에는 저들처럼 힘들어 하지 않는 것 같기는 했지만 확실히 영향을 받는 모양이다. 김예리는 생각보다 겁이 많은지 김현성 옆에 달라붙어 있었고, 원래 겁이 많은 박덕구는 음산한 분위기에 위축되어 있었다. 우리 파티원 중에 그나마 멀쩡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정하얀과 김현성이다. 애초에 이 장소를 알고 있는 김현성은 논외라고 하더라도 싱글벙글 웃고 있는 정하얀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진입하면 진입할수록 날이 어두워지는 느낌. 단순히 밤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곳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 자체가 어둑어둑하다. ‘기분 나빠.’ 발밑이 질퍽거리고 습기가 차 있는 찝찝한 분위기.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언데드의 소리는 괜스레 긴장감을 증폭시킨다. 정확히 말하면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다. 특히 목적지에 당도하면 당도할수록 그런 감정들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저주?’ 자세하게 알 순 없다. 아마 장소 그 자체가 불쾌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리라. “거, 정말로 짜증나는 곳 아니요?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나도 느끼고 있다. 덕구야. 아마 목적지에 당도하면 조금 더 심해질 거야.” “끄응.” “언데드 같은 놈들이랑은 상종하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지.”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자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 도착한 곳은 신전 안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막연히 찝찝한 감정이 든 것은 당연지사. 작은 방에 있는 책장을 뒤로 뒤로 넘기니 던전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방 안에 알려지지 않은 입구가 하나 더 있었던 것. 정확히 뭐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거꾸로 매달린 짐승의 팬던트라든지 기분 나쁜 장식이 눈에 띄었다. 신단이라기보다는 마치…. ‘악마 숭배라도 했던 장소.’ 지하로 향하는 입구를 바라보니 이곳을 발견한 파란의 길드 마스터가 저주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사실 대놓고 저주가 걸릴 것 같은 분위기다. 얼마나 조심성 없게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파란의 길드마스터는 자신의 능력을 무척이나 과신했던 모양. ‘숨만 쉬어도 저주 걸릴 것 같은데…….’ 용기 있게 손을 뻗은 것도 어떻게 본다면 재능이다. 나 같이 몸을 사리는 놈들은 뭔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이런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을 때, 이상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부터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7번 대가 먼저 그리고 2번 대는 그 뒤를 따라옵니다. 사제들은 정화주문을 외워주세요.” “네.” 선희영과 2번대 파티의 남자가 주문을 외우는 것이 보였다. 곧바로 이쪽에 빛이 쏟아져 내리자 차분하게 가라앉은 뇌가 다시금 붕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효과가 있어.’ 아마 이 장소 자체가 기본적으로 마이너스한 감정을 분출하고 있는 모양. 다른 이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이상희는 등을 돌린 뒤 발걸음을 옮겼다. “가시죠, 기영 씨.” “형님.” “네.” 물론 우리 역시 진입한 것은 당연지사. 곧바로 들어본 적 있는 정보가 쏟아져 내렸다. [영웅 등급 던전 저주받은 신단에 입장하셨습니다. 인원[??/??]을 확인했습니다.] 곧바로 전투가 시작될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은 모양. 완전히 풍경이 변한 것처럼 보였던 공포의 정원과는 다르게 지금 우리가 위치한 던전 저주받은 신단은 바깥과의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신전 지하에 있는 거대한 신단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한껏 긴장한 것 치고는 썰렁한 내부. 아니나 다를까 분주해진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가장 바쁜 것은 역시나 궁수. 주위를 둘러보자마자 곧바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근처에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자세하게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이 주변에는 있는 다른 흔적은 시간이 많이 지난 것들로 보입니다.” 궁수의 말대로다. 최소한 이 근처는 안전. 일단은 공략이 완료된 지역이라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머리가 조금 지끈거리기는 했지만 아까처럼 기분 나쁜 감각이 몸을 감싸고 있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조금 빨리… 이동한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렇습니까?” “네. 속도를 올리면서 이동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 말대로 하겠습니다. 사제분들은 언제라도 주문을 외울 수 있도록 대비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파티가 진입하는 속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빠르다. 물론 경계를 소홀이 하는 건 아니다. 언데드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지만 이미 많은 파티를 집어 삼킨 던전인 만큼 모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무난하게 공략한 것 같은데.’ 궁수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진입하면 진입할수록 무척이나 깨끗한 내부가 시야에 들어온다. 전투의 흔적 역시 크게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니, 이전에 들어왔던 이들이 얼마나 무난하게 이번 구간을 돌파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다음.” “네.” “다음 방으로 진입하겠습니다.” “네.” “그 다음 방으로….” “네.”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주가 내리리라. ‘무슨 소리….’ # 88 회귀자 사용설명서 088화 우린 영원히 함께예요(2) -저주가 내리리라. ‘무슨 개소리…….’ 나에게만 들린 목소리가 아니다. 모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이 신단 전체에 울리고 있는 목소리가 분명했다. “방금.” “사제들은 다시 한번 정화 주문을…….” “네.” 커다란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지만 저런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확실히 긴장될 만하다. 솔직히 당장 이곳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이상희나 2번 대의 파티는 아직까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파티는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다. -저주가 내리리라……. “마력은 느껴지나요?” “아뇨.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력 반응은…… 없습니다. 신성력 역시.” -침입자들에게 저주를 내려 주리라……. “아마도 던전 자체에 심어져 있는 기능으로 보입니다.” “어떤 종류의 저주인지는…….”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단순히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고작이라.” “일단은 뒤로…… 당장 뒤로 빼고 신성 방어 주문을.” 라고 이상희가 입을 열었던 그때였다.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머리가 어지럽고 순식간에 구토감이 올라왔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변화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물론 이것마저도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정확히 지금 이 현상을 뭐라고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아마 나 말고도 다들 이런 현상을 겪고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풍경이 바뀐 뒤에 어디에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조금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어요? -어째서…… 저를 버렸나요. ‘이런.’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이름 모를 여자였다. 얼굴은 기억이 난다. 튜토리얼 당시에 아귀들에게 뜯어 먹히고 있었던 여자였으니까. 살기 위해서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고는 하지만 저 여자를 잊을 수 없었다. 저 여자 대신 선택한 것이 식수와 식량이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줄곧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상황이야.” 내장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이쪽에 다가오고 있는 모습은 가관. 아쉬들에게 뜯겨 먹히고 있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인상이 찡그려지기는 했지만 무섭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이건 가짜야.’ 틀림없이 가짜다. -아팠어요. 무척이나요. 구해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분명히 그럴 거라고 믿었는데. 당신은 등을 돌렸어요. “지랄.” -넌 쓰레기 같은 인간이야. “박혜영.” 심지어는 정하얀에게 죽은 박혜영의 목소리도 귓가에 들어와 꽂힌다. 팔과 다리가 절단된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눈에는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어째서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느냐에 대한 원망이다. 물론, 그녀는 이름 모를 여자와 조금 경우가 다르다. 그녀를 살리는 선택지도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만.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당신은 항상 그런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방어합니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무척이나 재미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당신은 저와 같은 종류의 인간입니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미친 살인마 새끼가. 난 너랑 엄연히 달라.” ‘정진호.’ 김현성의 칼이 목에 박힌 채로 다가오는 모습은 조금 그로테스크 하다.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같은 종류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럽지요. 석우 씨가 죽은 이유도 필요에 의해서였습니까? 선희영이 죽여 버린 빈민, 유석우와 정진호의 똘마니 둘. 나와 관련된 이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종류의 저주인 건가.’ 다른 이들도 이런 걸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모습은 내가 가장 보기 싫어하는 종류의 장면이었을 것이다. 일말의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남아 있는 모양, 솔직히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네가 죽였어. “닥쳐.” -합리화. 당신은 비겁한 사람이야. “합리화하는 게 뭐가 나빠. 인간은 원래 그렇게 설계되어 있어. 어떻게든 상황을 합리화하게 되어 있다고 머저리들아.” -그리고 넌 죄책감을 느끼고 있지.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감정이지만 후회하지는 않아.” -쓰레기. “할 말은 그것밖에 없나. 아무리 나를 비난한다고 한들, 현실은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거고 너희들은 뒈져서 이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거야. 그건 절대 변하지 않아. 다시 한번 기회가 와도 나는 똑같이 행동한다.” -언젠가 너도 이 자리에 함께 서게 될 거야. “지랄. 그건 네 희망사항이겠지.” 시야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 순식간에 욕지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웨에에엑.” 나도 모르게 안에 있는 것들을 쏟아낸 것은 당연지사. 한 번 뒈졌던 놈들의 시체를 다시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대충 떠들어 댔던 아까와는 다르게 흥건한 식은땀 때문에 온 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다리는 덜덜 떨리기 시작, 가짜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입이 말라왔다. ‘가짜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정말로 가짜일까? ‘입 닥쳐.’ 심지어는 현실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해서 내 귓가로 속삭이는 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네가 우릴 죽였어. ‘제기랄.’ -네가 우릴 죽인거야. 네가! ‘제길.’ 생각보다 데미지가 있다. 불쾌감이 치솟아 올라온 것은 너무나도 당연. 거칠게 숨을 헐떡이자 내 어깨를 두드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흠칫 놀라 순식간에 어깨에 있는 손을 뿌리치자 편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꺼져!” “괜찮으십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김현성.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그곳이 아니다. “아…… 네. 괜찮습니다.” 김현성이 이쪽에 조금씩 마력을 보내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아마 모두들 나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을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으아아아아아…….”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몸을 부여잡고 있는 김예리, 손을 휘두르며 자꾸만 뭔가를 뿌리치려고 하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입을 오물오물거리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은 눈치. “그만…… 그만. 엄마…… 엄마! 도와줘요. 구해주세요. 엄마…… 제발…….” 아마 빈민가에서 있었던 기억 중에 하나이리라. 대충 봐도 끔찍한 경험을 하고 왔다는 것이 느껴진다. 박덕구 같은 경우에는 몸을 웅크리고 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로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떤걸 보고 있을지 상상이 가기 시작했다. 선희영도 그때의 기억을 보고 있는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 비명은 지르지 않고 있지만 입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쪽은 정하얀. “싫어어어어어! 싫어어어. 제발. 제발요. 오빠. 오빠.” ‘…….’ “제발요. 잘못했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발요. 제발…….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잘할게요. 제발 버리지 말아주세요. 제발…….” ‘시발.’ 솔직히 상황이 심각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손톱에는 피가 묻어 있다. 손으로 자신의 살점을 뜯어버린 것이다.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진 것을 보니 자신의 머리도 쥐어뜯은 모양. 숨을 쉬기 힘들어 하는 것은 물론 너무 울어서 쉬어버렸는지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안 돼…….” ‘…….’ “그 여자랑 그러지 마요. 그러지 마요, 오빠. 잘못했어요. 싫어…… 싫어! 싫어!” 대충 무엇을 보고 있는지 예상이 간다. 그밖에도 다른 사람들 모두 고개를 저으며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중간 중간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대로 쓰러져 토악질을 해대거나 혼란스러워 하는 이들이 대부분. 이상희 같은 경우에는 자꾸만 어딘가를 향해 사과를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정말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금 이 안에 들어와 있는 길드원들에게 사과를 하고 있는 느낌. 줄곧 생존자들을 걱정하고 있던 그녀였으니 당연한 반응이리라.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황정연도 깨어났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시야에 비친다. 김현성을 제외하면 깨어난 이들은 대부분 지력이 높은 이들이다. 개인차가 있지만 가지고 있는 지력이 영향을 미치는 모양. 정하얀의 경우에는 아마 특이 케이스일 것이다. ‘정신이 불안정하니까.’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밀어낼 수 없는 것이다. “현성 씨는 혹시 언제…….” “저도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도 이해가 잘되지는 않지만…….” 족히 수십 분은 있었던 것 같은 느낌. 내게 일어난 일이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물론 사태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해결하는 것이 먼저. 머릿속에서 맴도는 의문을 지워버린 이후에 김현성을 향해 급하게 입을 열었다. “깨울 수 있는 방법은?” “조용히 마력을 넣어주시는 게 가장 좋을 겁니다. 신성력이 조금 더 효과가 있기는 할 테지만……. 기영 씨는 일단 하얀 씨를 부탁드립니다.” “아. 네.” 김현성은 일단 선희영을 깨워야겠다고 생각하는 모양. 황정연 역시 마찬가지인지 조금은 초췌한 얼굴로 자신의 파티의 사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마음을 가다듬자 어느덧 이쪽을 옭아매고 있는 이상한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 나 역시 정하얀 쪽으로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겼다. “죽여야 해…….” ‘뭔 소리야.’ “죽, 죽여야 해. 전부…… 전부 죽여야 해. 그래야 오빠랑 하나가 될 수 있어. 그래. 그래요. 그게 맞아. 전부 죽이는 거야.” 조용히 중얼거려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무섭게 들려오기는 한다. 조용히 다가가 손을 잡고 마력을 밀어 넣으니 정하얀의 혈색이 조금 씩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항상 같이 있을 거야.” 조용히 귓가에 속삭여 주는 것은 당연. 정하얀이라면 금방 벗어날 수 있으리라. 정하얀의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분명히 눈을 뜨고 있기는 했지만 마치 의식을 회복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거칠었던 호흡은 차차 안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덜덜 떨리던 팔과 다리도 어느 순간 멈칫하고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정신이 들어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오빠?” “괜찮지?” “오…… 오빠.” “응.” 놓치기 싫다는 듯이 내 목을 꽉 끌어안아 온다. 숨이 턱 막혔지만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 “오빠……. 오빠. 오빠.” “그래 여기 있다.”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에 이어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방금 자신이 본 것이 환상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악몽을 꾼 자식을 돌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쁘지는 않다. -넌 그녀도 버릴 거야.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무시하는 것이 당연. 저주의 효과일 것이다. -저주의 효과 같은 게 아니야. 네 마음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인 것이지. 아마 지금 이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깨어난 이후에도 조금씩 혼잣말을 하고 있는 이들이 보인다. -결국 네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을 거야. 네가 전부 버릴 테니까. 네 옆에 있는 이들도 언젠가는 우리와 함께 너를 바라보게 될 거야. 틀림없이. “오빠 맞죠?” “그래.” “진짜 오빠야…….” “그래, 맞아.” 자꾸만 확인하려는 듯이 말을 걸고 있는 정하얀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녀에게도 지금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그게 무슨 목소리인지 이쪽이 알 수 없다는 게 조금 불안한 부분. 엉망이 되어 있는 정하얀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켜 넘겼다. ‘불안한데…….’ 폭탄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정하얀의 상태는 불안정해 보였다. # 89 회귀자 사용설명서 089화 우린 영원히 함께예요(3) 사실 정하얀뿐만이 아니다. 나는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었지만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는 이들이 대충 봐도 눈에 보인다. 예를 들면 김예리가 그렇다. 김현성에게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항상 담담한 표정을 보내왔던 꼬마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아직 어리다 보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이해가 간다. 뭘 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정황상 그녀가 본 것은 끔찍한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정하얀 역시 마찬가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하얀이 본 그림은 나에게 버림받는 상황일 터. 이 저주가 사람의 약한 부분을 파고든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튼 간에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있는 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 대부분이 저주의 영향에서 벗어난 상황. 그렇지만 누구하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나를 꽉 껴안고 있는 정하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내자 이윽고 정돈된 장내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상희였다. “피, 피해 상황 보고해 주세요.” “전무합니다. 저주의 종류는 정신계의 일종으로 보이며 그 외에 다른 효과는 없는 걸로 생각됩니다. 환청과 환각을 보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분이 있나요?” “외상을 입은 사람은 없습니다.” 육체적인 대미지는 없다. 그렇지만 대미지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정신적으로는 많이 피폐해지고 있는 상황을 겪었을 테니까. 어째서 파란의 파티가 이곳에서 전멸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이 던전이 저주받은 신단이라는 그 이름처럼 이런 저주가 중첩되거나 심각해진다고 가정한다면…. ‘심각해질 거야.’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상희가 머리를 매만지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혹시 환청이 들리는 분이 있습니까?” 모두들 대답이 없다. 아마 조금씩 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리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아마 다른 분도 마찬가지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신성 정화 주문으로도 해주되지 않는 것 같군요. 아마도 던전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저주일 것 같습니다. 일정 구역에 진입할 때나 일정 시간이 지날 때마다 저주가 한 번씩 내리는 던전일 가능성이 큽니다.” ‘괜찮은 추론이야.’ 그녀 역시 나와 생각이 같다. 슬쩍 김현성을 바라보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인다. 완벽한 정답은 아닐지언정 어느 정도 답을 찾은 것이다. “혹은 지금과 같은 증상이 조금씩 심해질 수도 있겠군요. 만약에 언데드들이 함께 있는 상황에서 이런 종류의 저주가 쏟아진다면….” 큰 피해를 입을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 그렇지만 정말로 위험한 것은 지금 내리고 있는 저주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언데드나 망령 따위는 어떻게 생각해도 에피타이저. 던전의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 저주받은 신단의 공략법은 저주의 해주에 있다. -결국 넌 혼자 남게 될 거야. ‘입 닫아.’ 단언컨대 이 저주를 해주하지 못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상희나 2번 대 경우에는 지금 들리는 목소리에 저항할 수 있겠지만 김현성을 제외한 우리 7번 대는 상황이 다르다. 내 입으로 말하기에는 뭣 하지만 확실히 김현성 파티의 성장은 빠르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당장 나조차도 수많은 자원과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으로 인해 파티의 성장을 따라가고 있는 상황. 본래 전설 이상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두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스펙이 높다고 해서 파티가 강한 것은 아니다. 우리 파티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들이 많다. 이를 테면 육체의 성장을 정신의 성장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노린 건가.’ 내가 생각한 것을 고려한 김현성이 일부로 우리를 이 던전 안으로 데려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 놈은 최소한 남의 목숨을 저울질 하지는 않는다. 만약 일반적인 던전이었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심각해.’ 말 그대로다. 우리 파티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원정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 첫 번째는 귀환하는 것이다. 던전 자체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아무리 생존자 구출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위험요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원정대장이 조금 신중한 성격이었다면 틀림없이 첫 번째 선택지를 골랐을 것이다. 두 번째는 계속해서 진입하는 것. 사실상 추천하고 싶지는 않지만 생존자의 상태를 모르는 지금, 한시가 급한 것을 고려하면 이런 선택지도 나쁘지는 않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일단은 이곳에 캠프를 차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근접직군 여러분들은 조를 짜서 주변 수색과 함께 공략에 힌트가 될 만할 정보를 찾아주세요. 나머지 인원은 이곳에 캠프를 만들겠습니다. 식사를 준비해 주세요. 지금은 휴식을 취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일단은 2번 대 여러분을 중심으로….” “저도 함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몸은 괜찮으신 건가요?” “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주의 크게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목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군요.” “아.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현성 씨.” 내가 생각해도 지금은 이게 가장 베스트다. 저주를 받았다는 것 이전에 원정대가 전체적으로 지쳐 있다. 반나절이 넘게 행군했고 신단에 들어온 뒤로도 약 6시간 정도가 지났다. 아마 이런 상태로 무리하게 수색 작업에 진행하면 어느 순간 한계를 맞이할 것이다. 특히나 사제나 마법사 직군들은 이미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가까운 만큼 몸을 쉬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이곳에서 수면을 취한 뒤에 내일 아침 곧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정확히 3일을 머물고 차도가 없다고 판단되면 던전에서 벗어나겠습니다. 그리고.” “예.” “만약에 지금 걸려 있는 저주가 해주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따로 방도를 찾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까?”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보통 저주라는 건 반 영구적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예. 일단은 몸을 회복하는 데 전념해 주세요. 대응책은 수색대가 돌아온 이후에 찾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상희가 말을 마치자 김현성과 김예리를 포함한 민첩 수치가 높은 몇몇이 차출되어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움직임이 느린 전위들은 캠프를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상황. 굳이 자신도 나가겠다고 하는 것을 보니 김현성 나름대로 이 신단을 제어할 수 있는 묘안이 있는 모양. ‘어쩌면 다른 힌트를 주워올지도 모르고.’ 바깥사람이 밖으로 나간다면 안사람으로서 해야 할 임무는 뻔하다. 우리 자식들의 멘탈을 제어해 주는 게 할당된 임무일 터. 굳이 나에게 다른 이들을 부탁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믿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금방 안정을 찾은 성희영과는 반대로 아직까지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덕구 녀석이 첫 번째 카운셀링 상대. 정하얀은 이쪽에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자연치유가 된다. 나뿐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을 보니 확실히 사람과의 대화가 해결책이라는 걸 깨닫고 있는 것 같았다. “덕구야.” “아, 형님.” 눈에 띄게 초췌한 얼굴, 내 옆에 붙어 있는 정하얀에게도 인사를 건네는 놈의 모습이 비쳤다. “조금 괜찮아?” “물, 물론이요.”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다.” “거,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형님. 누님이나 잘 챙겨주쇼. 나는 끄떡없으니까.” ‘이 돼지가….’ “뭘 봤는데.” “별거 아니요.” 말을 아끼는 느낌. 자신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짐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조용히 녀석을 응시하자 조금은 불안해하는 얼굴이 눈에 보인다. “나는 내가 죽인 이들이나 내 앞에서 죽은 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유석우 그리고 구해주지 못했던 여자나 박혜영의 시체도 봤어. 물론 정진호와 그 똘마니들의 얼굴도 보였고. 나보고 곧 죽을 거라고 말하더구나. 지금도 욕하고 있어. 자신들의 죽음을 합리화하지 말라고 외치기도 했다.” “…….” “너는?” 무척 고민하고 있는 얼굴이다. 말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건지 우물쭈물거리고 있다. 어쩌면 자신의 약점이나 트라우마에 관련된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 조심스러운 게 당연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쪽이 먼저 입을 연 것이 큰 도움이 된 모양. 결국에는 슬쩍 입을 열어오는 얼굴이 보였다. “저, 저는… 형, 형님이랑 다른 파티원들이 죽는 걸 봤소. 거대한 괴물이랑 싸우고 있는 도중이었는데…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그,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잠깐 움찔한 사이에 형님이 다치고 누님도 다쳐서,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그게, 그러니까… 끄으으윽….”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것 같다. 입을 열면서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고 목이 메는지 말을 더듬는다. 사실 덕구 녀석이 마음이 약하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 했다. ‘유석우를 죽였을 때도….’ 박덕구는 그 장면을 굳이 쳐다보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형님이랑 누님들이 나를 비난하는 걸 봤소. 너 때문에 죽었다고… 다 나 때문이라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벌벌 떨고만 있었는데… 또다시 같은 상황이 찾아왔는데도 움직이지 못했소. 계속 움직이지 못해서….”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도 마찬가지였… 한 번도 구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목소리는 지금도 들려?”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이 보였다. “뭐라고.” “겁쟁이, 너 때문이라고 계속 그렇게 말합디다.” “누가?” “형님이랑 누님 목소리요. 현성 형씨 목소리도 들리고 희형 누님 목소리랑 꼬맹이 목소리도 조금씩 들리는 것 같소. 형님도 마찬가지요?” “물론이다. 나도 똑같이 들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래도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 “역시 형님은….” “역시 형님은… 같은 소리 마. 네가 본 건 단순한 환각이나 환청이야.” 이건 박덕구에게 하는 소리지만 옆에 있는 선희영이나 정하얀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굳이 흔들릴 이유도 없고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어차피 개소리니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지금 네가 실제로 보는 것에 집중해라.” “아….” “내가 하면 너는 더 잘할 수 있다, 덕구야.” “아, 알겠소.” “계속 생각해. 내가 하면 너는 더 잘할 수 있는 거야.” 당연하지만 이걸로 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놈은 내 목소리에 잘 흔들리는 편이니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으리라. 조금은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 얼굴이 보이는 것을 보니 확실할 것이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선희영과도 짧은 이야기를 나눴고 이상희와 황정연, 김현성과 함께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 시간을 가졌다. 물론, 그 외에 시간에는 모조리 정하얀에게 투자한 것이 당연지사.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정신을 붙잡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하얀의 경우에도 박덕구처럼 이야기해 보는 게 어떨까 생각해 봤지만 이쪽에 제대로 호응해 주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사실 자신이 봤던 최악의 상황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싫은 것이리라. ‘…….’ 뭘 봤냐고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입술이 터질 정도로 깨무는 모습을 보고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리하게 괜찮은 척을 했던 박덕구와는 사정이 달랐다. 모두가 예민해져 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버틸 수 있는 상황. 기껏해야 환청이 들리는 것 정도가 전부였고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사람은 일단은 없었다. 신성력으로 저주를 해주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현 상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이다. ‘잠깐 휴식을 취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 불침번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잠깐 눈을 붙였고 그건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잠을 제대로 자기 힘든 상황이기는 했지만 오랜 여정에 지쳤기 때문에 금방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물론, 계속해서 눈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 어느 순간부터 정하얀이 커다랗게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히 함께인 거야. 으응… 아니야. 오빠가 그럴 리가 없어. 네 말은 바보 같아. 오빠가 네 말은 무시하라고 했어. 그러니까 넌 없는 거야.”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이쪽의 귀에 속삭이고 있는 소리가 들려온다. “네 말은 안 들어. 바보 멍청아. 오빠가 죽으면 안 된다니까. 나는 오빠랑 영원히 함께 살 거야.” ‘제기랄….’ “우리는 영원히 함께예요. 함께 살 수 있어요. 여기서 쭉 함께 지내요. 오빠. 히히히.” 소름이 끼칠 정도의 목소리였다. # 90 회귀자 사용설명서 090화 우린 영원히 함께예요(4) “우리는 영원히 함께예요. 함께 살 수 있어요. 여기서 쭉 함께 지내요, 오빠. 히히히.” 소름이 끼칠 정도의 목소리였다. 계속해서 귓가로 속삭이는 것을 보니 이쪽이 잠에서 깰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애초에 지금은….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한 상태가 아닌가?’ 애초에 정하얀의 정신은 그다지 건강하지가 않다. 선희영 역시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녀 같은 경우에는 이미 확고한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쪽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정하얀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조금 더 정확히 하자면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가 제어하지 못하는 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정하얀에게 들리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네 말은 안 들을 거라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말 걸지 마. 어차피 안 들을 거야.” 어쩌면 자기 자신 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정황상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다. 죽여서 소유하는 것이 옳다고 말해오고 있는 것이다. “오빠는 죽으면 안 된다니까. 다리만? 도망칠 거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 오빠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니까. 절대로 안 도망쳐…. 그리고 그렇게 하면 오빠가 아프잖아. 그건 싫은데….” 순간적으로 이쪽의 다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별것 아닌 손길임에도 불구하고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심정, 뿌리치고 싶지만 뿌리칠 수도 없는 게 문제였다. 지금 나는 자고 있는 상태여야 했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안 된다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팔도 안 되지 그럼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이 없어지는 거니까, 바보야. 꽉 껴안아 주지도 못할 거라고…. 넌 멍청이야.” “…….” ‘제기랄.’ 상태가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저러고 있는 건지 이해는 간다. 당장 내 귓가로도 정하얀의 목소리 이외에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빌어먹을 정진호와 박혜영의 목소리 때문에 짜증이 치솟을 지경. 본래 불안정한 정신에 저주까지 겹치니 어느 한 쪽이 마모된 것이 틀림없다. 다른 사람들 보다 저주가 정신을 침식하는 속도가 빠른 것이다. 본인은 계속해서 영향이 없다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정하얀은 목소리에 흔들리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 완전히 미친 건 아니야.’ 최소한 남들에게는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증거. 누군가 뒤척일 때마다 조용히 입을 닫고 있다. 아직 제 정신을 유지하고 있기는 한 것이다. 입을 꾹 담고 최대한 눈을 뜨지 않으려고 했던 그때였다. “깨어 있는 것 같다고?” “…….” “아니야. 지금까지도 한 번도 깬 적 없었어. 오빠는 한 번 자면 쉽게 일어나지 않으니까. 마법도….” “…….” “…….” “아. 여기는 집이 아니었지. 깜빡했다.” ‘개….’ 눈을 감고 있지만 정하얀의 얼굴이 이쪽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거친 호흡이 그대로 이쪽으로 전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로 잠을 자고 있는 건지 확인이라고 하려고 하는 모양새였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이쪽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계속해서 내 옆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모양. 정하얀의 숨소리도 느껴지지 않았고 이쪽을 만지는 손길도 없다. 이미 자신의 자리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직후 살짝 눈을 떠볼까 고민하던 바로 그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말이 맞지? 아직 자고 있잖아. 히히히.” 다시 한번 몸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는 정말로 멀어진 것이다. 최대한 잠을 자려고 해봤지만 졸음이 쏟아질 리가 만무, 그나마 앞전에 숙면을 취했기 때문에 그렇게 피곤하다는 느낌은 없기는 했지만 던전 공략보다 더 큰 숙제를 받은 것 같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까놓고 말해서 내게 있어서는 더 이상 던전이 문제가 아니다. ‘정리해 보자.’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하다. 사실 정하얀의 이상 행동은 하루 이틀 일이라고는 볼 수 없다 애초에 내 방과 나에게 마법을 걸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건 나에게 위해를 끼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호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으리라. 연적으로부터의 보호이기도 했고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침대에 걸려 있었던 수많은 마법 역시 이쪽을 최대한 배려해준 나름의 착한 짓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정하얀은 내 쪽에는 최대한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의 상황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지금은….’ 이쪽에 해를 끼치는 걸로 범위를 확대시키려고 하고 있다. 방금을 생각해 보면 거의 확실할 것이다. 계획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평생 둘이서만 이 던전에서 영원히 함께 지내는 것.’ 기가 차서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이곳에서 식수나 먹을 것들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우습다. 식수는 마법으로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겠지만 이곳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물론 아직까지 정하얀이 움직인다는 확신은 없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에는 최대한 대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정하얀이 정말로 마음을 먹었다고 가정했을 때, 그녀의 선택지는 두 가지. 하나는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죽이고 숨는 것. 나머지 하나는 나만 데리고 간 이후에 사라지는 것. 두 번째 선택지를 더 염두에 두고 있기는 한 것 같기는 했지만 지금보다 더 사태가 심각해진다면 첫 번째를 선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물론.’ 정하얀이 이 원정대를 전부 죽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가능할 수도 있어.’ 정하얀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똑똑하고 용의주도하다. 이전에 박혜영을 처리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는 파란의 다섯 파티를 집어 삼켜 버린 던전이고 모두들 환청과 환각을 듣고 있는 상태, 아무리 김현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회귀자가 그리고 있는 그림에 정하얀이라는 변수는 들어가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정하얀의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고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가 있는 던전은 영웅 등급의 던전, 저주받은 신단이 아니라 전설 등급의 던전 미친 마법사와 저주받은 신단으로 네이밍이 바뀔 지도 모른다. ‘미친 마법사와 저주받은 신단….’ 다시 한번 생각해도 그럴 듯하다. 정하얀의 입장에서 이 던전을 공략하러 들어온 이들은 사랑의 보금자리를 파괴하려는 이들로 보일 테니 말이다. 배드 엔딩 중에서도 최고의 배드 엔딩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 당연하지만 이런 곳에서 평생을 썩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곳이 안전하고 안락한 곳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자유가 억압되는 것은 취향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되지….’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지만 일단은 정하얀의 멘탈을 최대한 잡아두는 것이 첫 번째. 던전 공략 말고도 해결해야 되는 숙제를 한 가지 더 떠안게 되어버렸다. 계속해서 앞으로의 행동 방향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을 때 어느 순간 날이 밝았는지 주변이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들려온 목소리는 역시나 정하얀의 목소리였다. “오빠 일어날 시간이에요.” “아… 응.” 고개를 끄덕이며 정하얀을 바라보자 그녀의 상태창이 시야에 비친다. [플레이어 정하얀의 상태창과 잠재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 - 정하얀] [칭호 - 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 - 21] [성향 - ??] [직업 - 대마법사 - 영웅 등급] [능력치] [근력 - 17/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민첩 - 15/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체력 - 29/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 - 61/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 - 22/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행운 - 52/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 - 70/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장비 - 신성한 보호] [특성 - 마법사가 되는 방법 - 영웅 등급] [총평 - 무척 빠른 성장 속도가 눈에 띕니다. 플레이어 정하야은 마력과 마법에 대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지력이 낮아 상위 단계로 발 돋음 하기 힘들어 보입니다만 얼마 걸리지 않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플레이어 이기영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죄송할 지경입니다. 재미있는 것이 보입니다. 성향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는군요. 저주받은 신단을 새로운 형태의 던전으로 탈바꿈시키고 싶지 않으시다면 노력해야겠네요. 그동안 정이 들었었는데 부디 살아남으시길 빌겠습니다.] ‘이럴 것 같더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 성향의 변화가 완전하지 않다는 점. 저 물음표가 뭘 뜻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총평의 말 그대로라면 정하얀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계속해서 순수한 옹호자라는 성향을 이어갈지, 아니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뀔지 말이다. 뒤바뀔 성향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긍정적인 영향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정하얀을 바라보자 눈에 보이는 것은 평소와 같은 얼굴,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것 같아 내가 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헤헤헤.” 그렇지만 곧바로 연기에 돌입한 것은 당연지사. 웃으며 얼굴을 쓰다듬으니 무척이나 기뻐하는 것 같은 모습이 보인다. “아직도 목소리가 들려? 하얀아?” “네. 조금씩은 들려요. 그래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환청이니까요.” “정확히 뭐라고 말하고 있는데?” “잘 모르겠어요. 이제는 잘 들리지도 않아서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거짓말. “그래. 다행이네. 일단은 출발할 준비부터 해야지 다른 사람들은?” “30분 뒤에 출발한다고 들었어요. 다들 짐 정리하는 것 같은데….” 손을 꼬옥 잡아오는 모습. 나 역시 살짝 웃으며 정하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말이다. 이게 웬 떡이냐는 듯 정하얀이 내 목을 감싸 앉았지만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연인이 아침 인사를 나누는 것 같은 느낌. 잠깐이었지만 얼굴을 붉히고 있는 정하얀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 나쁘지 않은 반응이다. 내 쪽에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은 느낌에 시도해 보기는 했지만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 몸을 조금 더 밀착시키는 것은 물론 계속해서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은 당연지사. 지금 정하얀에게 필요한 건 더 큰 애정이라고 생각했다. 혼잣말을 하고 있지도 않고 눈이 이상해 보이지도 않는다. 최소한 나와 함께 있을 때면 상태가 심각해 보이지는 않는다. “떠날 준비는?” “제가 다 해놨어요. 헤헤.” “아. 고마워. 그럼 나갈까?” “네.” “아. 오빠 잠깐… 할 말이 있는데요.” “응?” “저번에…. 저번에 말이에요.” “응. 저번에?” “저희가 그러니까… 첫… 첫, 첫키스했을 때 있잖아요?” 기억 난다. 차희라에게 가기 전에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입을 맞췄던 적이 있다. “그때.” “…….” “사, 사랑한다고 말해주셨잖아요? 저밖에 없다고 말씀해 주셨잖아요?” “응. 그랬지.” “지금도… 똑같으시죠? 저 사랑하는 거 맞죠?” ‘이거….’ 뭐라고 답하는 것이 정답인 건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니 현재 내가 어떤 선택지에 당도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정답. 그렇지만 정말로 이게 정답인 건지 구분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말 한마디로 그녀의 성향이 바뀌거나 하지 않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계산을 하고 있었을 때, 다시 한번 대답을 강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하는 거 맞죠?” 급해 보이는 눈.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물론,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거야.” “아… 다행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척이나 기뻐하는 얼굴, 그렇지만 내가 선택한 것이 정답인지에 대한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아직까지 성향에 변화가 없었으니까. “저도 사랑해요, 오빠.” “나도….” 정하얀의 상태창에 변화가 생긴 것은 바로 그때였다. # 91 회귀자 사용설명서 091화 우린 영원히 함께예요(5) 정하얀의 상태창에 변화가 생긴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성향 - 타락한 옹호자] ‘이렇게 갑자기 타락하지 마….’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튀어나왔다. ‘정답이 아니었어.’ 사랑한다는 말이 정답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렇지만 다른 선택지를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순간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 다 정답이 아니라고 한다면 차라리 예상 가능하게 행동하는 편이 조금 더 낫다. 그나마 지금 같은 경우에는 행동방향을 예측할 수 있었으니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웃으니 마찬가지로 이쪽으로 웃음을 보낸다. ‘대책을 마련해야 돼.’ 앞서 말했던 것처럼 던전의 공략 이외에도 정하얀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야 한다. 여러 가지 선택지가 떠오르기는 했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떠올리는 것은 순식간. 정하얀을 아예 떨어뜨리거나 배제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잠깐 회의 좀 하고 올게, 하얀아. 덕구랑 희영 씨랑 같이 준비하고 있어.” “네! 오빠.” 그나마 떨어질 수 있는 시간은 간부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내가 가장 마지막에 나온 것이 맞는지 벌써부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황정연과 김현성, 이상희가 시야에 들어왔다. “작은 조각상 말인가요?” “네. 조각상입니다.” “일정 구역마다 설치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고 잠깐 동안이지만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저주를 해주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잠깐 동안 억제 시켜준 것에 불과합니다만….” “그렇군요. 그렇다면 일정 구역마다 세이프티 존이 있다고 봐도 되는 건가요?” “아직 다른 구역에도 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는 조각상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피폐해진 정신을 부여잡는 것에는 도움이 될 겁니다. 저주에 걸린 이후로는 신성력도 커다란 효과를 발휘하기 힘든 상황이니 최대한 활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사실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던 참인데….” “여기서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니 마찬가지로 인사를 해오는 이들이 눈에 보인다. 흘러나오는 이야기의 분위기로 봐서는 김현성이 뭔가를 찾아낸 모양. 대충 정리해 보자면 저주의 침식을 막아주는 세이프티 존을 찾아낸 것 같았다. ‘나쁘지 않네.’ 세이프티 존의 같은 경우에는 어차피 던전 공략을 하던 도중에 밝혀질 일이기는 했지만, 조금 이른 이 시점에 발견했다는 것은 확실히 박수를 보낼 만한 일이다. “7번대 분들은 조금 어떠신가요?” 슬쩍 내 쪽을 바라보는 김현성이 보였다. 지금까지 밖에서 고생하다 돌아왔으니 우리 파티원들의 상태를 모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조금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같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희영 씨 같은 경우에는 별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지 않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목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군요.” “자세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가지고 있는 지력 스탯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더군요.” “아.” “2번대는 어떻습니까?” “네. 저희 파티도 후위보다는 지력 스탯이 상대적으로 낮은 전위 분들이 더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았어요. 침식 속도도 조금 빠른 것 같고요. 당장은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이 상태가 길게는 삼 일, 혹은 일주일이 더 지속된다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그래도 다행입니다. 일단은 일정 구역마다 안전하게 몸을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각 파티의 사제 분들에게 후위보다는 전위에 신성력을 몰아 줄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겁니다. 혹시 그 외에도 다른 정보들이 모이면 곧바로 말씀해 주세요.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정리를 마친 이후에 곧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포지션은 어제처럼, 현성 씨를 선두로 수색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이상희는 입을 열었고 우리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희의 용무는 대충 끝난 것 같았지만 사실 상 내 용무는 지금부터 시작. “현성 씨, 저는 잠깐 정연 씨와 이야기 좀 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김현성 녀석도 조금 의아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눈앞에 있는 황정연도 조금은 놀란 표정. 이쪽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무슨 이야기를 할지 기대되는 모양이다. 이윽고 김현성이 발걸음을 옮겼고 황정연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정연 씨는 좀 어떻습니까?” “저도 괜찮아요. 지력 스탯이 높은 게 확실히 영향이 있기는 있었던 것 같네요. 기영 씨를 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지만요.” “겉으로 보기에만 아무렇지도 않게 보일 뿐입니다.” “아뇨. 저주가 내렸을 때에도 일찍 깨어나셨잖아요. 개인마다 보이는 게 다르다고는 하지만 조금 자존심 상한다니까요. 후후.” “혹시 뭐 따로 알아내신 건 있으십니까.” “아… 네. 아직은 딱히 이야기 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기다리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 데이터를 모으고는 있어요.”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목소리가 들려오는 시기라든가…. 정확히 말하면 10분 46초 주기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어요. 1시간이 지날 때마다 38초 정도 짧아지고 있고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에는 침식 속도가 느려요. 물론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일단 제 몸 상태는 이래요.” “아. 확실히 기억력이 좋다는 건 도움이 되는군요.” “네. 물론 그 개자식들의 목소리가 더욱더 생생히 들려오는 건 반갑지 않지만요.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예요? 혹시 저번에 약속을 지키려고 하시는 건가요?” “아뇨. 지금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덕구도 많이 힘들어하고 있고… 아무래도 던전 안이니까요.” “후후후. 그런 것 치고는 하얀 씨랑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로맨틱해라.” “사실 별로 로맨틱한 상황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저주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죠.” “함께 오래 지냈기 때문에 미묘하게 달라진 차이도 알 수 있다는 건가요?” “그렇다고 해두죠.” “흐음…. 굳이 이상희 님이나 현성 씨에게 알리지 않은 건….” “혼자 해결해야 되는 일입니다.” “그래도 알리는 게 좋을 거예요. 특히나 아주 작은 변수로도 달라질 수 있는 게 던전 공략이니까요. 하얀 씨의 상태가 좋지 않다면 차라리 두 분이서 먼저 던전을 나가는 선택지도 있으니까요.” “아뇨, 어차피 던전 안에서 나가도 이 저주가 해주될 거라는 보장도 없고….” 나가면 더욱더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차라리 모두와 함께 있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다. “그리고 최소한 정연 씨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대비 할 수 있는 보험이 하나 생긴 셈이니까요.” “믿어주시는 건 좋지만 자신 있다고 말씀드리기는 힘드네요. 말은 안하고 있지만 저도 상당히 스트레스 받고 있는 상황이라, 그래서 뭘 해드리면 되는 거예요?” 굳이 질질 끌 이유는 없다. 나는 곧바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환상 마법이나, 환각 마법, 혹은 정신계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으십니까?” “흐음….” “…….” “정신계 마법은 불가능해요.” ‘아….’ “환각이나 환상 마법 정도는 가능해요. 정신계도 사실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복잡해요. 기영 씨도 알고 계시잖아요?” “네. 어려운 일이라는 건 대충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뭘 생각하시는 지는 대충 알 것 같은데…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아녜요. 환상이나 환각 마법도 지력이 높은 사람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고 심지어 지력이 낮은 이들도 마력이 높다면 저항하기 일쑤니까요. 정신계 마법은 더욱더 그렇죠. 아무리 받아들이는 사람이 마법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정신에 침입해 오는 걸 밀어내려고 하는 성향이 있어요.” 어려울 거라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시작부터 불가능 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은 맥이 빠질 정도. 그렇지만 불가능으로 가능으로 만드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게 황정연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본래는 불가능한 게 맞아요. 틀림없이 불가능하지만….” “저주가 걸려 있는 대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힘들 거예요.” “그렇다면 약물의 도움이 있다면 어떻습니까? 혹은 촉매라든가….” “기영 씨가 마법을 사용하는 방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것 외에도 연구하고 있던 물약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감정을 건드린다는 목적으로 실험하고 있던 물약이었죠. 물론 커다란 성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만… 나쁘지는 않습니다. 물론 정말로 감정을 건드리는 건 아닙니다만 최소한 비슷한 효과를 내게 할 수는 있을 겁니다.” “…….” “가능하시겠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물약 치료와 환상 마법으로 인한 치료를 병행하는 게 되는 거네요. 동시에 들어가는 것도 효과가 좋을 수 있을 것 같고요.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장벽을 물약으로 제거하고… 안 그래도 저주로 정신력이 약해졌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니까….”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는 황정연의 모습이 보였다. 머릿속으로 이론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흥미로워 보인다는 얼굴이었다. “만약에 이게 성공적으로 된다고 한다면 던전의 공략이 쉬워질 수도 있겠네요. 물론 여러 가지 실험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아무리 빨라도 최소 한 달은….” “자질구레한 것들은 모두 건너뛰고 곧바로 실험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쓸 만한 실험체가 있으니까요.” “네?” “제가 직접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몸에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일단 제가 만든 물약에 대해서는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 “가능하시겠습니까?” “확답은 드릴 수는 없어요. 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하네요. 이론에 대한 이야기는 가는 길에, 잠깐 쉴 때마다 임상실험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정신에 이상이 생긴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아예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맞다. 어차피 어느 정도 도박을 해야 되는 상황. 정하얀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황정연과 붙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하얀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계획의 일부야.’ 큰 그림을 생각한다면 이것 역시 나쁘지는 않은 선택지처럼 보였다. “현성 씨한테 잠깐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네?” “당분간 2번대와 함께 움직인다고 말입니다.” “네. 그러는 것이 좋겠네요. 아니, 저희 파티원을 보내는 게 좋겠어요.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던전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좋겠어요. 몬스터가 언제 나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전까지 만이라도 여유 있게 실험에 임할 수 있을 거예요.” “네.” “촉매들은 챙겨오셨나요?” “물론입니다. 연금키트들도 챙겨왔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삼 일. 삼 일 안에 해결하도록 하죠.” “기왕이면 더 빨리 부탁드립니다.” “끄응…. 주문이 어렵기는 하지만 준비물은 갖춰져 있는 상황이네요. 만약에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마도학자라는 직업명이 울 거예요. 그럼 이번이 두 번째 실험이 되는 거네요?” “이번에는 정연 씨가 박사님입니다.” “그래요. 조수. 잘 부탁해요.” # 92 회귀자 사용설명서 092화 우린 영원히 함께예요(6) “반응이 어때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방법도 틀렸나…. 몸에는 이상이 없으신 것 맞죠?” “네.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습니다. 사실 이전에 임상실험으로 썼던 데이터들도 신체에는 이상이 없었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실험은 또 언제 하셨데….” 선희영을 이쪽으로 꾀어오기 위해 인부들을 고용하는 과정에서 사용했다. 그때 당시에는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을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너무나도 제한 조건이 많아 연구를 중단했던 종류의 실험이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마치 모든 게 준비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상황처럼 느껴질 정도, 데이터를 머릿속에 가지고 다녔던 것이 유효했던 것이다. “농도를 조금 진하게 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너무 많이 투입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이후에 마법을 사용할 거라고 생각하면 딱 적절한 양이 있을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신체에 영향이 올 수도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아니, 어디까지나 저주에 저항한다는 목적으로 사용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저주의 효과를 뛰어넘을 만한….” “이독제독인가요?” “비슷한 효과로 접근하는 방향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시 빙 돌아가게 생겼네요.”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는 건 아닙니다. 솔직히 거의 대부분 준비가 됐다고 보긴 하지만….” “아직 확신할 수 없다는 게 문제죠?” “네.” “공식을 다시 짜야 되잖아요. 오늘도 힘들겠네요.” 확실히 계속해서 의견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뜬구름을 잡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 불과 하루 전이다. 고작 하루 만에 이렇게 진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와 그녀가 생각보다 잘 맞았던 것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으리라. 애초에 이전에 새로운 직업을 얻기 전부터도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이었지만 황정연과 나는 서로 가려운 부분을 긁어줄 수 있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였다. 물론 그 상호보완적인 관계라는 것이 성격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일의 능률에 대한 이야기. 암산이나 계산은 내가 어려워한다면 어려워한다고 말할 수 있는 분야다. 그런 분야에서 황정연은 거의 스페셜 리스트나 다름없다.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은 것은 당연지사. 아마 자유로운 사고방식이 부족한 그녀에게도 내가 많이 도움이 됐으리라. 일 더하기 일이 이가 아닌 십이 된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그나저나 하얀 씨는 괜찮아요? 많이 불안해하고 있는 것 같던데….” “그래도 저녁에 가끔씩 얼굴을 비춰주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딱 이 정도 거리감이 좋을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까지는 다른 이상행동을 보이지는 않고 있으니까요.” “네. 기영 씨가 말한 대로…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어째서 그렇게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하셨는지 알겠네요. 요즘 이쪽을 심하게 노려보는 것 같아서 오금이 다 저린다니까요.” “죄송합니다. 말씀드렸던 대로….” “알아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응해야 한다는 거…. 남자도 한 번 못 사귀어본 처녀가 어째서 갑자기 캣파이트의 주인공이 돼서 원망을 받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손도 한 번 안 잡아봤는데 불륜녀로 낙인찍힌 기분이에요. 억울해 죽겠다니까. 물론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을 느껴보는 건 나쁘지 않은 것 같지만….” “큼….” “왜 하필 그 포지션이 불륜녀냐고요. 심지어 덕구 씨도 조금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인데… 이번 일만 끝나면 정말로 두 세배로 돌려받을 거예요.” “네. 이번 일이 끝나면 전력으로 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 잊지 말아요.” 그녀의 말 그대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정하얀의 불안 증세는 조금 더 심해졌다. 내가 갑작스레 2번대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물론 자세한 원인이 황정연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데 있다는 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리라. 정하얀이 보내고 있는 것은 질투였다. 안 그래도 정신이 마모된 상황에서 나와 떨어져 있는 상황을 생기자 저주의 침식이 급속도로 빨라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사실 뭐가 저주의 침식이고 뭐가 정하얀의 생각인지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머릿속으로는 자신만의 계획을 세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하얀의 계획이 먼저 완성되느냐, 아니면 나와 황정연이 하고 있는 연구가 먼저 성과를 내느냐의 싸움이었다. 온전히 연구에 집중 할 수 있었다면 지금보다 성과가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정하얀의 몇 가닥 남지 않은 멘탈을 잡아주는 시간이 있어야 하는 만큼 하루에 얼마는 그녀에게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안정제와 함께 물약의 일부를 먹이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마저도 무척이나 중요했다. 정하얀의 정신에 결정타를 날리고 있지는 못하고 있지만 지속적으로 약하게나마 흔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너무 갑작스러우면 상황이 좋지 않아질 수도 있으니까.’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사실 새로운 연구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정하얀뿐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 원정대의 목적이 탐사가 아닌 구조인 만큼 여러 가지 상황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물론 던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겠다는 나와 황정연은 소규모 탐사에서 대부분 열외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동하면서 실험을 해야 한다는 건 커다란 단점으로 다가왔다. 2번대의 파티장이라고 할 수 있는 황정연이 거의 모든 수색에 열외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구조대는 무척이나 쭉쭉 뻗어 나가고 있었다. 아직 몬스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김현성을 필두로 작은 성과나 힌트를 발견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리라. 연구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공략의 진척 상황을 아주 자세하게 전해 듣지는 못했지만 원정대가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물론.’ 모든 게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만도 아니었다. 정하얀 이외에도 저주에 침식되고 있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고 간혹 혼잣말을 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김현성으로 인해 저주의 침식이 최대한 늦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이 던전에 머물렀던 부작용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조금 심각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다름 아닌 이상희였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이 던전에 먼저 들어온 파티원들의 모습이었다.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뻔할 뻔자. 그만큼 그녀는 급해졌고 초조해했다. ‘아직도 생존자는커녕 힌트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아마 모두들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앞전에 파티원들은 대부분이 죽었을 거라는 것을.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도 원정대는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었고 우리의 정신을 좀 먹은 저주는 점점 이쪽을 파고들고 있었다. “아직 완벽하다고는 볼 수 없네요. 아쉬워요, 기영 씨.” “그래도 전혀 효과가 없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목소리는 계속 들려오기는 하지만 머리가 지끈거리는 감각은 사라졌으니까요.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성과라고 부를 수 있기야 하겠지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완벽하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아쉬워하는 것보다는 상용화하는 게 중요하죠.” “그러게요. 그보다 하얀 씨한테 이쪽 좀 노려보지 말라고 부탁 좀 해 주시겠어요?”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겪어보니까 좋지만은 않네요…. 역시 드라마는 현실과는 달라요.” “…….” “한 발자국 멀어져서 떨어져서 구경하는 게 가장 재미있는 법이라니까요.” “그런데 정연 씨는 좀 괜찮으신 겁니까?” “아… 사실 정신적으로 힘들기는 해요. 그렇지만 뭔가에 빠져서 연구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인지 기분은 한결 났네요. 요즘에는 환각도 보이는데 기영 씨는 안 그러세요?” “보이기는 합니다만… 심각할 정도는 아닙니다.” “정말로 효과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네요. 다들 힘들어 하고 있는데….”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구조대는 계속해서 안쪽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언데드들은 눈에 띄지 않았고 생존자들 역시 보이지 않았다.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마치 똑같은 미로 속을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 김현성을 별로 초조해하지 않았지만 이상희는 눈에 띄게 상태가 안 좋아졌다. “이상희 님 세이프티 존입니다.” “오, 오늘은 묵고 가지 않고 지나치도록 하겠습니다.” “네?” “벌,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겨우 몇 분차이로 생존자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다음 포인트에서 쉬도록 하겠습니다.” ‘또 저러네.’ “그렇지만 벌써 2번째….” “다음 방에는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래요. 분명히 있을… 겁니다.” “마스터도 조금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 괜찮습니다. 다들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생존자를 발견하고 나면… 네. 생존자가 발견된다면….” 생존자 따위는 없을 수도 있다. 아니 솔직히 대부분이 죽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린델에 들어오기 전부터 파란의 파티가 이곳에서 버텼을 거라고 생각해 보면 언데드들에게 죽든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든 서로 죽고 죽이든 간에 일이 벌어져도 단단히 벌어졌으리라.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조금만… 속도를 올리겠습니다. 조금 더 빨리….” “아….” 현재의 상황을 지켜보면 당연히 알 수 있다. 환각과 환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원정대의 리더. 짜증이 섞인 표정과 불만이 가득한 몇몇의 길드원. 자기 정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하고 있는 인원. 박덕구가 그나마 묵묵히 버텨주고 있는 것은 용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그 선희영조차 지금은 지쳐 있다는 표정이었다. 터지기 직전에 놓여 있는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이 상태에서 몇 개월을 보내라고?’ 불가능한 일이다. 파티원들에게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 모든 상황이 사실 정하얀에게는 최고의 상황일터, 만약 그녀가 정말로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킨다고 한다면 지금이 적기라고 할 수 있으리라. “모, 모두들 조금만 힘내주세요.” “그렇지만 이제 한계….” “안에서 길드원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후위들이 많이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이상희 님.” “…….” “이상희 님.” 뭔가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였다. -저주가…. ‘제길.’ 모두가 동시에 허공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처음에 들려왔던 목소리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박혜영이나 정진호의 목소리가 아니다. ‘2차?’ 안 그래도 정신의 마모가 가속화 되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두 번째를 맞으면 구조가 아니라 이쪽의 생존 역시 불투명해진다. 몇몇은 괜찮을 지도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대부분이 정신을 잃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성 방어 마법을 외워주세요.” “그렇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최대한 대응합니다. 마법사들도 최대한 막을 수 있는 주문을….” 마법사와 사제들이 신성력과 마력을 일으켰지만 이건 마법으로 막아낼 수 있는 종류의 공격이 아니다.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 나도 모르게 정하얀 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이쪽을 바라보며 활짝 웃는 모습이 보인 것은 당연지사. 말을 해오고 있지는 않지만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사.랑.해.요?’ 눈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곧바로 황정연의 이름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개…씨…. 정연 씨, 바로 주문 외워요!” 정말로 할 생각이다. 어쩌면 조금 이르다고 할 수도 있는 타이밍, 아무리 이런 상황이 왔다고는 한들 움직이는 게 조금 빠르다고 생각했다. ‘황정연 때문인가?’ 아마 확실하리라. “네? 네? 그렇지만 방어 주문을….” “빨리!” “알, 알겠어요! 정,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요? 이거 아직….” “빨리 외워요!” “내용도?!” “그냥 빨리 외워!” 순식간에 소란스러워 지는 장내에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들이 튀어나왔다. 가장 앞에 있는 전위들이 벌써부터 저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준비해 두고 있던 물약을 순식간에 입 안으로 털어낸 이후에 곧바로 정하얀 쪽으로 달리기 시작. “역시! 오빠도 똑같은 마음이었어!” 환한 표정으로 나를 반기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곧바로 입을 맞추며 안에 있는 것을 밀어 넣었다. “사랑읍!” ‘제기랄.’ 그 와중에도 마력을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 꽉 잡은 손으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마력의 유동이 느껴졌다. 무슨 마법을 사용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방어 마법은 아니었을 것이다. 황정연이 정하얀보다 더 마법을 빨리 완성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던 그때. 정하얀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지기 시작했다. ‘걸렸나?’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어쩌면 저주의 영향으로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만약에 정하얀이 저주에 걸린 것이 아니라 황정연의 마법에 걸린 것이라면 틀림없이 보고 있을 것이다. ‘미친 마법사와 저주받은 신단.’ 본인이 원했던 결말을 말이다. “아아아아아아아!!!” 순식간에 허공을 바라보며 눈물을 쏟고 있는 모습에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이 내가 준비한 시나리오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 93 회귀자 사용설명서 093화 우린 영원히 함께예요(7) 영원히 함께! 영원히 함께 지낼 수 있다. -그래. 영원히 함께 지내는 거야. 우리 둘만의 보금자리. -그래.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그 누구도 침입하지 못할 보금자리야. 우리가 원했던 결말이지. 오빠의 생각도 같을까? -물론. 오빠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했잖아? 맞아.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어. -바깥은 위험해. 그건 맞아. 오빠를 빼앗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 네 말은 전부 바보 같았지만…. -저 여자를 봐. 어떻게든 오빠를 꼬시려는 것 같잖아. 오빠가 곤란해하는 게 보인다구. 오빠를 죽이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고? 튜토리얼 던전 때 있었던 일을 떠올려 봐. 오빠는 약해. 오빠는 약해. -우리 보호가 필요해. 그래. -이건 보호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거야. 바깥은 위험하니까. 외우고 있었던 주문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어쩔 수 없는 거야.’ -전부 죽여. 일단은 저 여자. 오빠를 빼앗으려고 하는 저 여자부터. 고위 마법사인데 괜찮을까? -아마 생각하지 못할 거야. 저주의 영향에 노출되어 있을 때를 노리면 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괜찮아. 내가 너를 보호해 줄 테니까.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고? 네가 나를? -그럼 나는 너고 너는 나니까. 한 번에 머리를 꿰뚫어. 작은 주문이면 될 거야. 마력을 낭비하지 않는 게 중요해. 아! 성공했다. -좋아. 다음은 누구로 할까. 저기 멍청한 여자가 좋겠다. 내구 능력치가 좋으니까 조금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보는 게 좋겠네. 뭐가 좋을까. 부패주문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 흑마법은 특기가 아니니까. 다른 걸로 해볼까? 머리를 터뜨리는 게 좋겠다. 안에서부터. -좋은 생각이야. 마침 이쪽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정말로 좋아. 옳지 그렇게. 이렇게…. -해냈다! 헤헤. -나머지는 신경 쓰지마. 어차피 전부 죽을 테니까. 그 다음은… 선희영? 오빠랑 매일 같이 나갔었지? -응. 그랬었지. 그래도…. -약해지면 안 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저기 있는 꼬맹이도 한꺼번에 해치우자. 역시 그건 내키지 않는걸. -안 된다니까. 약해지면 안 돼. 모두가 다 오빠를 보호하기 위해서니까.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주자. 으응. -덕구 씨랑 현성 씨는…. 죽이는 건 조금 그래.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잠을 재우는 게 좋을 것 같아. -불안하지 않아? 김현성은 강하잖아. 나중에 혹시라도 다시 이곳으로 찾아오면 어떡하지? 오빠를 돌려달라고 말할 수도 있어. 그건 안 돼. -역시 죽이자. 그건 안 된다니까 자꾸 바보처럼 굴 거야? -바보는 너야.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근데 지금에 와서 포기할거야? 둘만 죽이면 끝이라니까. 싫어. 그건 안 할 거야. 특히 덕구 오빠는 나를 많이 도와줬으니까. -후회할 텐데. 잠을 재우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밖으로 보내주는 거지. 계속해서 찾아오면 어쩔 수 없지만 역시 둘은 죽이고 싶지는 않아. -너. 그보다는 오빠를 데려가는 게 먼저야.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하게 안쪽으로 데려가서 꼭꼭 숨겨 놔야지. 우리 오빠 잠든 모습 좀 봐.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지? -으응. 근데 혹시나 오빠가 도망가면 어떡하지? 그러진 않을 거야. 오빠는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니까. -혹시 모르니까 안전장치를 만드는 게 좋겠네. 으응. 그 정도는 괜찮겠지. 헤헤. 잠든 오빠 너무 귀엽다. -응. 정말 귀엽네. 그보다 빨리 가야 돼. 앞으로 할 일이 많아. 그래.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며야 되고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을 거야. 오빠는 공부하는 걸 좋아하니까 오빠만을 위한 공방을 만들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욕실도 만들어야지. 가, 같이 샤워도 할 수 있게 크게 만들면 좋겠다. 침대도 크게, 화장실도 만들어야 되고 최선을 다해야 해. -보금자리에 침입할 사람을 죽여 버릴 시스템도 필요해. 언제 또 여기로 오빠를 노리는 사람들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골렘도 만들고, 키메라도 만들자. 언데드도 더 늘려야 돼. 던전이 텅텅 비었으니까. 힘들겠지만 오빠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어. 이곳은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될 거야.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오빠와 나만의 성이 될 거야. * * * 오빠는? -이제 일어났어. 오늘도 식사를 안 한 것 같은데…. 너무 걱정되는데 괜찮은 걸까? 상태가 계속 안 좋아 보여.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닐까. 벌써 몇 개월째…. 아니… 혹시 오빠는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 건 아닐까? -그럴 수도 있어. 며칠 전에도 말한 적이 있었어. 바깥을 구경하고 싶다고…. -속지 마. 절대로 속으면 안 돼. 오빠가 기운이 없는 건 너무 싫어. 요즘에는 잘 웃어주지도 않는 걸. -언젠가는 이해하기 될 거야. 이 모든 것이 오빠를 위해서라는 걸 이해하게 될 거야. 밖은 위험해. 오늘만 해도 우리의 보금자리로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왔잖아? 만약에 오빠가 밖으로 나가면 감당할 수 없게 될 거야. 또 뺏기고 싶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빠가 슬픈 표정을 짓는 건 싫어. -그러면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을 걸어주면 되잖아. 오빠도 기분이 좋아질 거야. 기분이 좋아지면 우리한테도 친절해질 거고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야. 항상 웃게 만들어줘야지. 그래도 괜찮은 걸까? -전부 오빠를 위한 일이야. 전부 오빠를 위한 일이야. 맞아. 지금 당장 시험해 봐야겠다. -좋아. 아! 웃어줬어. 네 말이 맞았어. -그렇지? 다른 마법도 써볼까? 매혹 마법 같은 건 어때? 그렇지만 그건 오빠의 진심이 아니잖아. -그래도 가끔은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지금까지 열심히 해왔으니까 자신에게 주는 상으로는 딱 알맞을 거야. 그렇지? 나에게 주는 상? -응. 우리에게 주는 상. 오늘 하루만 이 상태로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생각해 봐. 오빠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매일 매일 이곳으로 들어오는 놈들을 전부 잡아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가끔씩 주변도 정리하러 나가잖아? 던전도 완전히 리모델링하느라 힘들었다고 키메라들도 매일 매일 만들어줘야 되고 요 며칠은 오빠 걱정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까. 그렇지? 그래도…. -딱 하루만 하자. 그래도 될까? -물론, 고민하지 말고 바로 하자. “그, 그렇다면 딱 하루 만이야. 딱 하루만….” -잘했어. 아아아아아아아아. -좋아. 행복해. 너무 행복해. 너무 너무 행복해. “행복해. 너무 행복해.” -내 말이 맞잖아. 하길 잘했지? 응. 네 말이 맞았어. * * * 어떡하지? 오, 오빠가 도망쳤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어째서? 어째서? 이제 내가 미워진 걸까? 매일 행복하게 해줬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 -바깥세상의 독을 마시고 있어서일 수도 있어. 그렇지만 여긴 던전 안이야. 바깥 공기가 들어올 리가 없잖아. -매일 매일 침입자들이 들어오잖아? 그들이 내뿜고 있는 더러운 공기가 오빠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거야. 전부 죽여야 해.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도망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모두 침입자 탓이야! 왜 가만히 있는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 거야? 어째서 계속 이곳으로 들어와서 나와 오빠만의 시간을 방해하는지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전부 나가서 죽이는 게 좋지 않을까? 린델, 린델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거야. -좋은 생각이야. 그렇지만 오빠 외에 인간은 벌레 같아서 죽여도, 죽여도 계속해서 이곳으로 들어오게 될걸. 그, 그러면 어떡하지? -이미 오빠의 정신은 바깥의 공기에 마모되었을지도 몰라. 치료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 오빠가 던전을 혼자 빠져나갈 수는 없겠지만… 그대로 일단 임시방편으로 뭔가를 해야 되지 않을까? 뭘? -다리를 자르자.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는 오빠가 아픈 건 싫어.” -아프지 않게 자르면 되잖아. 아프지 않게? -응. 아프지 않게 자르면 돼.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을 걸고, 천천히 떼어내면 오빠도 분명 아프지 않을 거야. 물론 걸어 다니는 게 조금 힘들어지기는 하겠지만 괜찮잖아? 우리가 항상 오빠 옆에 달라붙어 있을 테니까. 우리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거야. 아니… 그건…. -만약에 오빠가 이곳을 빠져나가서 다른 여자랑 함께 도망치면 어쩌려고? 붉은용병 애들도 왔었잖아? 차희라 그 멍청한 여자가 다시 올지도 몰라. 그러네. -참을 수 있겠어? 정말로 그런 상황이 오면 너무 힘들어질 것 같지 않아? 지금이라도 자르는 게 맞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 응. -내 말을 들어서 후회한 적 있어? 없지만…. -이번에도 나만 믿어. 정말 잘 될 거라니까? * * * 오빠가 죽, 죽으려고 했어. 혀를 깨물었다고! 너무 싫어. 너무 무서워. 오빠가 죽으면 어떡하지? -죽지 않았잖아? 아직까진 괜찮아. 그래도 죽으려고 했다고! 이유를 모르겠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사랑한다고 매일 말해주고 있잖아. 매일! 매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고 이제는 바깥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아! 이제 막 편안한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됐단 말이야! -바깥 공기가 이미 뇌를 침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오빠가 죽는 건 싫어. 나를 남겨두고 가는 건 싫어. 갑자기 죽으려고 하는 것도 너무 싫어. 너무 싫다고 전부 다! -죽지 않게 만들면 돼. 언데드로 만드는 건 안 되니까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자. 분명히 오빠를 구해낼 방법이 있을 거야. 영원한 삶을 함께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육체가 재생되게 하는 촉매를 구하고 그걸 오빠의 몸을 시술하자. 조금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오빠도 이해해 줄 거야. 물론 쉽지는 않겠지. 그래도 지금까지도 잘해왔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분명히 할 수 있어. 그… 그래. 그렇게 해야겠어.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그렇게 해야겠어.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오빠. 아파도 조금만 참아요. 오빠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아으… 아… 아.” “사랑한다고요? 물론이죠. 저도 오빠를 너무 사랑해요.” “아아… 아… 를… 해.” “절대로 죽으면 안 돼요. 절대로….” “아아….”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흰머리가 난 오빠도 정말로 멋진걸요. 아아아… 좋아요. 오빠. 오빠!” “…해….” “사랑해요. 저도 사랑해요.” “…….” “머리가 많이 길어졌네요. 연구요? 아… 물론 오늘도 해야죠. 조금 아프시겠지만 참으실 수 있을 거예요. 오빠가 아프면 저도 아파요. 그러니까 우리 같이 힘내요.” “…….” “오빠 조금만 참으세요. 아직 버티실 수 있을 거예요. 희망의 끈을 놓으시면 안 돼요. 흐그으으으윽… 사랑해요. 사랑해요.” “……해” “아아아아… 안 돼! 안 돼!” “나는….” “네, 오빠. 저 여기 있어요.” “너를….” “사랑해요. 저도 사랑해요. 그러니까 제발 가지 말아요. 제발….” “원망한다.” “아….” “나를 이 꼴로 만든 너를 원망하고 저주할 거야. 평생… 아니 죽어서도 너를 저주할 거다. 너는 나에게 사랑을 준 게 아니야. 날 괴롭게 하고 결국 이 꼴로 만들었어. 내 몸을 봐. 네가 만든 결과물이야.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봐. 모두 네가 망쳐 버렸어.” “아아아아아아.” “네가 전부 저버린 거야.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도, 내 진심도 네가 전부 망쳐 버린 거야. 우리는 더 행복해질 수 있었어. 행복하게 함께 살 수 있었어. 죽어서도… 죽어서도 널 잊지 않을 거야. 널 저주하고 저주하고 또 저주할 거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제는 널 사랑하지 않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싫어! 싫어! 어떻게 해? 이… 이젠 어떻게 하지? 오빠? 오빠!” -살릴 수 있어. 아직 살릴 수 있다고. “웃,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 다… 다 너 때문이야! 전부 다! 네가 이렇게 만들었어! 오빠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죽어! 죽어버려! 죽어!”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야. 바보야. 아직도 모르겠어? “…….” -잘 봐. 난 너야. 우리는 하나라고 이야기했잖아? 이 모든 걸 네가 해낸 거야. 멍청아.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바…. “…….” -보…. 콰드드드드드득!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94 회귀자 사용설명서 094화 우린 영원히 함께예요(8) 갑작스러운 저주로 한차례 실랑이를 겪은 이후에 서둘러 정하얀을 바라봤다.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심각해 보이는 얼굴.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성공한 게 맞아.’ 다소 충격적일 수도 있는 이야기겠지만 그래도 나름 기승전결이 잘 버무려진 스토리다. 그녀가 감내하기에는 조금 힘들 수도 있겠지만. ‘이게 정답이야.’ 틀림없이 정답일 것이다. 물론, 평소의 정하얀이라면 이런 돌발행동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던전에 들어온 이후에 계속해서 혼란스러워했던 것 역시 모두가 저주의 영향. 충격요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나마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다. 물론 다른 이들도 별 다를 바 없지만 누가 봐도 정하얀의 상황이 가장 심각하다는 것은 알 수 있으리라. 일단은 정하얀의 손을 꽉 잡아주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싫어! 싫어!” ‘무슨 힘이….’ 이쪽의 손을 뿌리친 이후에 곧바로 자해를 시도하려고 하는 모습. 스스로 목을 조르는 탓에 최대한 그녀의 손을 잡아 당겼다. 켁켁거리기는 하지만 어떻게는 숨구멍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 손을 더 꽉 잡은 뒤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니 천천히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아아아아….” “…….” “흐으으윽.” 혼란스러워하던 표정에서 깜짝 놀란 표정으로, 제대로 내 얼굴을 확인한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아아아아… 오빠아…. 오빠아….” 내 얼굴을 매만지는 것은 물론 온몸을 확인하려 한다. 저런 반응이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마지막에 봤던 내 모습은 무척이나 처참했을 테니까. “되돌아 왔어.” “무슨….” “되돌아 왔어요. 되돌아 왔어. 흐으으으윽… 되돌아 온 거야…. 되돌아 온 거야.” “무슨 소리야, 하얀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흐으으윽… 미안해요. 미안해요. 바보 멍청이라서 미안해요.” ‘좋아.’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나는 잘…. 저주는 괜찮아? 혹시 뭘 본 거야?” “아니에요. 저주 같은 게 아니에요. 다 제 잘못이었어요. 전부다. 미안해요, 오빠. 마음대로 해서 정말로 죄송해요. 흐으으윽… 미워하지 말아줘요.” ‘미워할 리가 없지.’ 애초에 이쪽이 먼저 정하얀을 미워한 적은 없다. 물론 이번에는 정도가 조금 과했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은 어디까지나 저주의 영향이다. 오히려 마모된 정신의 틈으로 환상을 우겨 넣을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할 지경. 이런 기회가 빨리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언젠가 한 번 정하얀은 사고를 치게 되어 있다. 물론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지만 정하얀의 성향상 폭탄이 터지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이야기. 그걸 지금부터 미리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일말의 책임감은 느끼고 있기도 하고….’ 내가 뭔가 특이한 취향이나 구속당하는 걸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하얀에게 죄책감과 동정심 그리고 약간의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거야. 그녀와 가까워지면 죄책감에서 멀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녀를 버리지 않음으로써 자신에게 양심이란 게 남아 있다는 걸 자위하고 싶어서 말이야. ‘그럴 수도 있지.’ 나 역시 저주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묵직한 목소리가 개소리처럼 들려온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너를 미워할 이유는 없어. 나는 네가 가장 소중하니까.” 반의 반 정도는 진심이다. “어흐어으으으엉… 저도 오빠가 가장 소중해요. 가장 좋아해요.” 다시 한번 눈물과 콧물이 묻은 얼굴을 내 가슴에 푹 묻는 것이 보였다. “되돌아 왔어. 돌아온 거야. 감사합니다, 신님. 너무 고마워요, 신님. 너무 감사합니다.” “자꾸만….” “아무것도 아니에요. 흐그윽… 오빠. 오빠.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신 거죠? 다리는….” “멀쩡해.” “흐으으으윽… 다행이다 팔도 괜찮아. 흉터도 없어. 흰머리도 없어. 아프지도 않아. 혀도 멀쩡해. 흐으으윽.” 물론,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있기는 있었다. 만들어 놓은 환상이 실감날 거라고는 생각하기는 했었지만…. ‘회귀했다고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만약에 이렇게 생각할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스토리를 우겨 넣는 편이 좋을 뻔했다. 예를 들면 차희라나 이지혜가 언젠가 내 목숨을 구하는 장면이라든가. 물론 각본상 들어가기 힘들기야 하겠지만 만약에 그런 장면을 넣었다면 정하얀이 그들에게 가지는 적대감이 무척 줄어들었을 것이다. ‘아쉽네.’ 아마 이후에 따로 설명해 주는 것이 좋으리라. “오빠… 흐으으으으윽….” “이제 좀 진정됐어?” “네… 조금은… 조금은요.” “그럼 잠깐만 기다려 줄래? 다른 사람들도 챙겨야 할 것 같아서.” “내. 물론이에요. 오빠.” 살짝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곧바로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보였다.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회귀 전에 있었던 일이라도 떠올렸는지 어깨를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은 애처로운 강아지 같아 조금 귀엽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무튼 간에 정하얀의 모습을 보니 제정신을 되찾은 것은 물론 저주의 영향에서 조금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의 실험으로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은 예상할 수 없었다. 아마 정하얀에게 맞춤으로 제작된 카운슬링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어.’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가장 상황이 심각했던 정하얀을 끌어올렸으니 다른 이들은 더 쉬울 것이다. 약물 치료와 마법적 효과를 적절히 사용하면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여유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 당연. 슬쩍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니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장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첫 번째와 같다.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이들은 천천히 깨어나고 있었고 여기저기 주위를 둘러보는 이들이나 혼잣말을 하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정신이 든 것처럼 보이는 황정연을 슬쩍 바라보자 어떻게 됐냐는 듯이 이쪽에 질문을 보내오고 있다. ‘결과는 대성공.’ 그 자리에서 곧바로 연금 키트를 꺼내 연성진을 그리자 황정연이 머리를 붙잡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 마치 길거리 약장수가 싸구려 물약이라도 팔려고 하는 모양새였으니까. “기영 씨, 지금 무슨….” “한 분씩 이쪽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네?” “다른 분들은 일단 대기해 주시고 한 분씩 이쪽으로 와주세요.” “일단 윽…. 설명을….” “이상희 님부터 이쪽으로 와주세요.” “마스터, 이쪽에 앉으세요.” “자… 보자. 우리 부길드 마스터님. 정확히 어떤 증상을 겪고 계십니까?” “네?” “아. 아무래도 프라이버시가 관련된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적어서 제출하시는 게 더 좋겠네요. 정연 씨.” “네. 준비해 놓을 게요.” “지금….” “저주를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이상희 님. 일단은 마음을 편하게 해주시고 정확히 어떤 증상과 어떤 목소리가 들려주시는지 적어주셔야 합니다. 만약에 환각이 보이기 시작했다면 그것의 내용을 정확히 말씀해 주시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환청이 많이 들린다면 반복적으로 들리는 문구에 대해서도 기술해 주셔야 되고요.” “아….” “2번 대 여러분도 통제에 맞게 제대로 줄을 서서 이쪽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필기구 모두 지참하시고 편하게 대기해 주세요.” “…….” 모두가 의아해하는 것 같았지만 일단은 통제에 따르려고 하는 모습은 조금은 우습다. 뭔가 하나둘 나사가 빠진 것 같은 모습. 아마 황 간호사의 역할이 컸을 것 같기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재미있는 모습이었다. “아아. 그러시군요.” “지금까지 죽였던 이들의 얼굴이 보입니다. 너도 곧 죽을 거라고 계속해서 귓가로 속삭이고 있습니다.” “물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으니까요. 일단 물약을 처방받으시고 정신 치료는 잠시 후에 진행할 예정입니다. 누락된 항목이 보이긴 하지만……. 으음. 아, 혹시 어떤 식으로 죽였는지에 대해서도 서술해 주시면 무척이나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건….” “말하기 힘든 부분은 글로 적어주셔도 됩니다. 자세히 기술하시는 게 더 효과적입니다.” “제가 보증할게요. 효과가 있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황정연 님.” 역시나 황 간호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아, 다음 분은… 가현 씨. 지구에 홀로 남아 있는 남동생이….” “네….” “무척 힘드셨겠습니다.” “흐으윽.” “저도 지구에 여동생이 있습니다. 당연히 걱정되기는 하지만… 일단은 힘을 내는 게 중요합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시고 있는 것 같은데 완벽한 치료는 어려워도 마음의 짐은 덜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할까요? 기영 씨?” “가방에 있는 14번 물약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정연 씨. 정신 처방도 곧바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가현 씨는 곧바로 치료에 들어가도 될 겁니다. 마법을 준비해 주세요.” “네.” 성향이 온순한 이상주의자니까. 아마 약발이 꽤나 잘 받을 것이다. 가지고 있는 성향과 보이고 있는 환각과 환청의 종류, 이런 경우에는 더 치료하기가 쉽다. ‘남동생과의 아름다운 재회 이후, 누나는 힘내서 살아달라고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 살아서 꼭 만나자라는 대사는 꽤나 잘 먹힐 것이다. 몇 가지 감동적인 연출이 있어야 하고… 취미가 독서니까 판타지 요소도 조금 섞어도 될 것 같았다. ‘동생의 목소리와 저주의 목소리가 서로 대립하는 부분도 넣어주면 효과적일 것 같네.’ 당연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위는 의료 행위라고 볼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카운슬링을 빙자한 사기에 불과하다. 완전히 치료가 되는 것도 아니고 환각과 환청이 들리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마모된 정신에 약간의 항생제를 넣어주는 것이 전부. 그렇지만 효과가 있다. 인간의 정신은 약하기도 하고 강하기도 하다. 이런 종류의 저주에 무척이나 맥없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희망이 보인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목소리에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 여자의 경우에는 남동생이, 나와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남자의 경우에는 자존감이,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내 존재 자체가 힘이 된다. ‘좋아. 좋아.’ 모든 일이 잘 풀리는 느낌이다. 당연하지만 김현성에게는 사전에 그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치료 행위에 이쪽을 향해 놀랐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당연. 심지어 황정연의 정신 치료를 받은 이후에 한결 나아졌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뜨는 이들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공략하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눈빛. 회귀자의 입장에서는 아마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분명 자신이 생각한 공략 루트가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 저주를 해주할 방법을 알고 있고 실제로 그걸 실행에 옮기려고 하고 있는 도중이었을 터. 하지만 방법은 달라도 목적지만 같다면 상관없다. 녀석도 그걸 이해하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되돌아 왔어…. 너무 감사합니다, 신님. 다시 되돌아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로… 흐으윽….” 그렇지만 정하얀이 중얼거리는 소리에는 괜스레 심각한 표정을 보내고 있는 느낌. ‘걔 회귀한 거 아니야, 현성아.’ 아무래도 모든 치료가 끝난 이후에 따로 설명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 95 회귀자 사용설명서 095화 우린 영원히 함께예요(9) “조금 어떻습니까, 가현 씨?” “조금 나아진 것 같아요. 환청은 여전히 들리지만 이전처럼 머리가 아프다든가 정신적으로 힘들지는 않네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전부 정연 씨 덕분입니다.’ 같은 개소리는 하지 않았다. 내 가치를 최대한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투 부분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힘든 처지인 만큼 그것 외에 외적인 부분에서는 충분히 유능한 척을 해야 한다. “어떤 마법을 부리신 건가요?” “하하하. 사실 완전한 마법과는 조금 거리가 멉니다. 그거 아십니까? 뇌는 연합 뉴런으로 이루어져 자극 처리와 가공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학적으로도 뇌를 중추신경계로 분류하고 있지요.” “네? 그게….”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박가현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른다. 뇌에 대해서는 개뿔 알지도 못하고 심리학 전문가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본래부터 나를 과대평가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전문지식을 조금 언급하니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중추신경계는 타 기관과는 차별화된 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데노신 삼인산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산소를 공급해야 하는데…….” 대한민국에서 이딴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당연하지만 적어도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냥 되는 대로 아무런 말이나 쏟아내고 있는 중이니까. ‘뇌 과학 연구소에서 일하다 온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알아듣는다고 해도 마법과 연금지식을 접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개척한 분야.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은 것처럼 얻은 성과였지만 이빨을 털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아. 제가 조금 어렵게 설명했군요.” “아… 아니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런 종류의 저주는 마법이나 저희가 알지 못한 방법으로 들어와도 결국에는 뇌에 관여한다는 겁니다. 마법이나 연금학이니 흑마법이니 신성력이니 해도 결과적으로는 뇌를 건드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아.” “저희가 환각과 환청을 듣는 것 역시 뇌가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저로서는 그 착각을 바로잡아 줄 수 있게 고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항생제를 투여해 줄 수는 있었죠.” “어떤….” “저희가 보고 듣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인식입니다. 인간의 몸은 정말로 신기하거든요. 물론 단순히 약물만으로 치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마법이라는 학문은 생각보다 더 복잡하니까요. 연금학 쪽으로 풀어서 설명해 드리자면….” “아아아… 그, 그렇군요. 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이들이 보이지만 당연히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나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지들이 어떻게 알겠어?’ 뇌과학계의 권위자가 와도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황정연이나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귀찮은 질문을 해올 것 같기는 했지만 대충 뭉뚱그려 설명해 주면 자신들끼리 지지고 볶고 정확한 해답을 내놓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좋아.’ 평판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다. 사실 처음에 내가 길드로 찾아왔을 때만 생각해도 이런 상황이 생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처음에 연금술사를 그만한 가격에 데리고 왔다고 들었을 때는 간부들이 미쳤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보니까 정말 천, 천재가 들어왔네요. 하… 혹시 지구에서는 뭘 하시다가….” ‘천재는 개뿔.’ 사기꾼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딱히 대단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혹시 연구소 같은 곳에서는….” “뭐,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자세하게 알려드리기는 조금 어렵지만.”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기영 씨가 있어서 정말로 든든합니다. 천재, 천재하는 건 미디어에서만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런 사람이 정말로 옆에 있으니 신기하군요.” “하하하. 그렇게 추켜세우시면 민망합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잡지식이 많을 뿐입니다.” “제가 지금가지 봐왔던 사람 중에 가장 똑똑한 것 같으신데요?” 심지어 박가현이라는 이 여자는 이쪽에 알게 모르게 호감을 보내는 느낌이었다. 같이 지구에 동생들을 놔두고 이곳으로 왔다는 공통관심사가 있기도 했고 뇌가 섹시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당연히 그녀의 마음에는 응해줄 수 없다. 정하얀의 얼굴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꽉 쥔 주먹과 입술을 깨물고 있는 이빨이 보였다. ‘아직 완벽하게 고쳐진 건 아니니까.’ 아마도 정하얀이 내가 집착하는 것은 어떤 치료를 병행하더라도 평생 고칠 수 없을 것이다. “과찬입니다. 정연 씨 앞에서 부끄럽군요.” “아니에요. 저는 단순히 기억력이 좋을 뿐이니까요.” 뭐, 대충 정리해 보자면 저들은 지금 나를 몇 만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천재 연금술사로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것. “예전에 만났었던 다른 연금술사들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저보다 더 머리가 좋은 연금술사는 아마 린델 내에 널렸을 겁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은 지원을 받지 않았을 뿐이고 저는 출발이 조금 좋았다는 것뿐이겠죠.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게 파란 덕분입니다.” “겸손하시기까지.” 겸손이 아니라 진실이다. 물론, 몇몇 멍청한 놈이 있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한두 명은 특출한 이들이 있을 것이리라. 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이런 이야기를 해도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은 이미지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상황. ‘하늘이 내린 천재 연금술사 이기영.’ 이미지가 확고하게 자리 잡는 느낌이었다. 인간은 보통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을 잘하는 사람을 질투한다. 반대로 이해할 수 없는 업적을 달성한 이에게는 경외의 시선을 보낸다. 저들에게 있어서 내가 해낸 일은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느껴졌을 터. 던전행이 끝난다면 파란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 것이다. 본래 파란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이상희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상희는 권력에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다. 책임감은 있지만 중압감이나 부담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상황을 달가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특히나 저주에 걸려 있었던 상황에서 자신이 보여준 비상식적인 모습에 굉장한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길드원을 전부 죽일 뻔했어.’ 라든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아.’ 라고 자책하는 모습이 보였다. 잠깐 쉬고 있는 동안에도 김현성과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고 혼자 괴로워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간은 보통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경외심을 보낸다. 지금까지는 나에게 그런 모습을 보내고 있었지만 앞으로의 던전행에서는 누구에게 경외심을 보낼지는 뻔할 뻔자. 잠자코 있었던 우리의 회귀자가 어떻게 움직일지 조금은 궁금해졌다.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그때였다. “그 동안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아….” “아무리 저주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냉정함을 유지했어야 하는 제가 여러분들을 위험해 처하게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고 변명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좋네.’ 입을 연 것은 이상희였다. 확실히 마음에 드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사과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개를 숙인 게 되는 거니까. “현 시간부터 파티의 노선을 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생존자에 대한 구출보다는 공략이 중요하다고 판단, 공략을 마친 이후에 시신과 혹시 모를 생존자를 구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무척이나 합리적인 판단이다. 죽은 자를 살리자고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순서가 뒤바뀐 것뿐이지만 이상희의 저 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렇지만….” “물론 생존자들의 대한 수색도 멈추지는 않도록 하겠습니다. 대형을 변경하고 지금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선두에는 현성 씨가 서도록 하겠습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현성이 이상희를 구워삶은 모양이다. 아니, 녀석도 지금 이 시점이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저주의 영향을 받고 있는 파티원은 없다. 저주를 해주하기 위해 혼자서 고군분투했을 녀석을 떠올리자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기는 했지만 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걱정거리가 하나 날아간 셈. 이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음을 보내고 있는 게 시야에 비쳤다. 천천히 일어서며 검을 갈무리하는 모습이 확실히 인상적이다. 뭔가 분위기 자체를 압도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위압?’ 살기 따위가 아니다. 터벅터벅 걷고 있던 자세를 올곧이 잡자 너도 나도 몸을 일으키기 시작. 이곳에 있는 원정대원들이 뭔가에 홀렸다고 느낄 정도였다. ‘저게 맞아.’ 저런 걸 이상적인 지도자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상희도 당장 김현성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보내고 있다. 김현성은 사실 조금 독단적이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이 던전에 온 것 역시 파티원들의 의견을 배제한 김현성 혼자의 판단이라고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녀석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철시키고 목표를 위해 똑바로 나아간다. ‘여기가 옳은 길이야. 함께 가자.’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르고 싶은 매력이 있다. 군주학에 대해서는 개뿔 알지도 못하지만 녀석은 내가 봤을 때 이상적인 군주라고 볼 수 있다. 다스리는 자로서는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이끄는 자로서는 내가 본 그 누구보다도 이상적이다. “출발합니다.” 말을 내뱉은 이후에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순식간. 모두들 자리를 일으키고 곧바로 녀석의 뒤를 따른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던 김현성을 속도를 올리고 마찬가지로 다른 파티원들도 속도를 올린다. 중간에 갈라져 있는 길이나 방에 대한 수색은 무시. 커다란 길로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는 녀석의 뒷모습은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간다. 몬스터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은 속도.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함정이나 언데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길을 찾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것 같은 느낌. ‘없는 건가?’ 이곳에 다른 몬스터들이 없을 가능성에 대해서 떠올리는 것은 순식간.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주받은 신단이라는 그 네이밍처럼 저주 자체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종류의 던전일 수도 있다. 만약 그 가설이 맞다면 지금 김현성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뻔할 뻔자. 이 던전의 주인이자 우리에게 저주를 내린 술사일 것이다.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풍경이 조금씩 바뀐다. 갈래가 줄어들고 작은 방도 이젠 보이지 않는다. 빠르게 걸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커다란 규모의 신단의 끝에 다다르기에는 아직인 모양. 물론 몇 차례 저주가 쏟아지기는 했지만 크게 동요하는 이들은 없었다. 약발이 생각보다 잘 받았다는 증거이리라. “언데드는… 없군요.” “분명히 보고를 받았었는데….” “아마 언데드를 봤던 것 역시 저주일 확률이 클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확정지을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게 가정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경계를 늦추지 말아주십시오.” “네.” 중간 중간 시체도 발견할 수 있었다. 파란의 전 길드원들이다. 저들이 어째서 죽었는지는 자세히 확인하지 않았지만 대충은 예상이 갔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든가 아니면 서로 죽고 죽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상희는 조금 혼란스러워했지만 원정을 계속해서 진행하는 데는 무리는 없었다.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이후에는 무척이나 투박하게 장식된 자그마한 문을 볼 수 있었다. 천천히 문을 열자 시야에 비치는 것은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 곧바로 상태창에 새로운 정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영웅 등급의 던전 저주받은 신단의 주인, 저주를 내리는 성녀 율리에나와 조우하셨습니다. 퀘스트가 활성화됩니다.]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영웅 등급 퀘스트-율리에나 처치(0/1)] 끝에 다다른 것이다. # 96 회귀자 사용설명서 096화 율리에나(1) 기분 나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스레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온다. 사실 희귀 등급의 던전, 공포의 정원의 던전 보스는 제대로 된 던전 보스라고 하기에는 힘들었다. 정원의 주인은 덩치가 큰 것이 고작이었고 그나마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회복력도 파티원의 공격력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는 다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사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성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외관이었지만 풍겨져 오는 분위기는 딴판. 본능적으로 압도당하는 느낌. 저 여자는 포식자고 나는 피식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괜스레 김현성의 따뜻한 등 뒤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현성아… 괜찮은 거 맞지?’ -아아아… 게드릭… 나의 게드릭! 드디어 나를 만나러 와주었구나…. ‘무슨 개소리야.’ -드디어 나를 찾아주었어. 사랑스러운 나의 게드릭! 목이 이상할 정도로 꺾여서 돌아간 이후에 이쪽을 향해 손을 뻗는다. 잠깐 동안 게드릭인 척을 해볼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런 곳에서 먼저 나서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조용히 후위에 섞여 전위들의 품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가장 베스트다. ‘눈이 안 보이는 건가?’ 김현성이 한 발자국을 더 내디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아아아아. ‘…….’ -너희는 그가 아니구나. 그가 아니야. 미간을 잔뜩 찡그린 이후에 감긴 눈을 치켜뜬다. 눈동자가 정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눈꺼풀 안에 있는 것은 새까만 어둠이었다. 뽑혔는지 아니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생리적인 거부감 때문인지 등 뒤로 소름이 돋아났다. ‘개….’ -그가 아니야. 그가! 밟고 있는 바닥이 울리고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던전의 내부가 흔들린다. 마력이라고 할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은 물론 계속해서 울리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울컥 하고 목구멍으로 피가 튀어나오려고 했을 때 원정대 전체를 감싸는 막이 보였다. 선희영이 신성 마법으로 기운을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아니야! “전투 준비합니다. 마법사들은 주문을, 사제님들을 계속해서 신성력을 유지해 주세요. 어그로를 끌 수 없는 몬스터라고 판단, 최대한 수비적으로 운영하겠습니다. 장기전이 될 겁니다.” “네.” 생각보다 침착한 이상희는 커다란 방패를 들고 후위를 가렸다. 든든한 느낌이다. 곧바로 주문을 외우자 여기저기서 마력이 일어나기 시작. 캐스팅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은 전위의 몫이다. 물론 우리 쪽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김현성을 필두로 몇몇이 율리에나를 향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힘내라, 김현성.’ 마법도 신성력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기운들이 사방으로 터져 나온다. 누구의 것인지는 아마도 뻔할 것이다. ‘율리에나.’ “방어 마법 준비해 주세요.” -더러운 놈들이… 더러운 놈들이 감히! 이곳을 침범하다니… 이곳을! 콰드드드드득! 검은색 구체가 바닥을 긁으며 이쪽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가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다. 어느새 길을 막는 이상희가 방패를 들어 묵직한 공격을 막아내는 장면이 보였다. 공격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쉽지 않은 느낌. 표정이 일그러진 이상희에게로 신성 마법이 들어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쉽지 않은데….’ 본래의 몬스터를 사냥하는 방법과는 조금 다르다. 정원 군주 같은 경우에는 가장 앞쪽에 있었던 전위들에게 어그로가 쏠렸다고 한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율리에나의 경우에는 딱히 특정 목표를 설정하고 있지가 않다. 그야말로 미친년처럼 날뛰는 상황.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낮은 후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전위가 이쪽에 달라 붙어 있을 수밖에 없으니 저 여자를 상대하는 게 쉽지 않았다. 마법을 캐스팅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장기전인 만큼 혹시라도 사제단이 피해가 가면 안 되었기에 그 상황을 대비해 탱커들은 조금 더 긴장해야 했다. 민첩이 높은 궁수들은 다른 도움을 받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정하얀과 황정연의 입을 여니 곧바로 튀어나오는 것은 거대한 마력을 담은 마법. 순식간에 미친 여자를 감싸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윽고 검은색 구체가 또다시 그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나 역시 외우고 있었던 주문을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은 바로 그때. “……!” 허공에서 생겨난 거대한 팔이 검은색 구체에 감싸져 있는 율리에나를 통째로 뭉개버릴 기세로 떨어졌다. 콰드드드득! 파티원들의 표정이 조금은 깜짝 놀랐다는 감정이 생겨난 것도 잠시. 흙먼지가 가라앉고 율리에나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감히… 감히! 내 마법은 엄연히 물리계로 분류되어 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대미지가 들어간 것 같은 느낌. 그렇지만 그 소식이 그렇게 반갑지 만은 않았다. ‘망했다.’ 우연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검은색의 구체가 내가 있는 지역을 향해서 떨어지는 듯한 느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김현성 역시 혹시나 이쪽이 피해를 입을까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검으로 공격을 막아내는 상황. 차라리 이쪽이 없었다면 조금 더 편하게 사냥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영웅 등급의 던전은 원래 이런 건가?’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빡세다. 여기저기에서 굉음이 들리고 땅이 파이고 던전 전체가 흔들린다. ‘덕구로는 무리야.’ 아마 그것이 김현성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이리라. 이상희는 틀림없이 1인분을 해주고 있지만 마력이 낮아 저항력이 딸리는 박덕구는 이쪽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열심히 해주고는 있지만 작은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고작이리라. 그나마 버틸 만한 건, 아직까지 저주를 쏟아붓지 않다는 것. 애초에 신성력이나 마력으로도 해주할 수 없는 규격 외의 기술이라 제한 조건이나 쿨타임이 있으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자주 쓸 수 있는 기술은 아닌 것 같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환각마저 보게 된다면 조금 더 위험해질 수 있으리라. 어떻게든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조금이라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을 멀리하고 싶다. 결국에는 슬쩍 입을 여는 게 조금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아아아. 나의 율리에나!” 우습게도 움찔 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게, 게드릭? 한참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도중 터져나온 내 목소리에 잠깐 동안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뭐하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원정대원들의 시선이 날아들었지만 굳이 대답할 의무는 없다. 곧 모두가 알게 될 테니까. “율리에나! 나의 율리에나!” -게드릭! 아아, 와주었구나. 게드릭! 네가 와주었어. “율리에나! 기나긴 영겁의 시간동안 당신을 찾아다녔소. 이 신단을!” -게드릭, 드디어 네가 드디어…. “율리에나!” -아, 아니야. 너는 게드릭이 아니야. ‘제길.’ “수많은 세월이 흘렀소, 율리에나. 이 신단에 묶여 있는 그대와는 반대로 나는 여러 번의 변화를 겪었지. 헤아릴 수조차 없는 시간이요. 내 말투와 내 존재, 내 모든 것이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소.” -아니야. 너는 게드릭이 아니야. “율리에나! 나의 사랑 율리에나!” -너는 게드릭이 아니야! “율리에나, 나는 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그 날을 기억하고 있소. 율리에나 그대와의 추억을 항상 이 몸 안에 간직하고 있소.” -아…. “그 소중했던 기억을 말이오….” -게드… 릭? 그날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눈동자에서 검은색 눈물이 흘러나왔다. 보기만 해도 괴기스럽다. 그로테스크한 느낌에 잠깐 동안 인상을 찌푸렸지만 구태여 목소리로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 일단은 저 여자에게 작업을 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여기서 설명을 더 요구한다면 밑천이 바닥나는 것은 당연지사. -그날이라면…. 한 번 더 물어올 것 같아 괜스레 불안해졌다. “우리가 서로… 아아아아악! 율리에나!” -게드릭! “이들이 나를 억압하고 있소, 율리에나! 아아아아악!” 뭐 하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이상희와 박덕구, 선희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고 정하얀은 질투를 보내고 있었다. ‘다들 눈치가….’ 없어. 지금쯤 열심히 시킨 일을 하고 있을 이지혜가 그리워질 지경. 그나마 머리가 잘 돌아가는 황정연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눈짓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황정연의 얼굴이 보였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율리에나! 어리석은 율리에나야! 네, 네, 네가 사랑하는 게드릭은 우리 손에 있다!” ‘미친 발연기.’ 일일 드라마에 미쳐 있다는 것을 보고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던 내가 다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혹시나 율리에나가 황정연의 연기를 보고 마음을 바꿔 먹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의 수준. 본인도 민망했는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지만 다행히 율리에나는 황정연의 연기에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율리에나! 나를 구하지 마시오. 율리에나! 지금 당장 도망치시… 크흑 이들은….” -게드릭! “크흑… 도망치시오! 율리에나!” -네놈들이 감히! 감히! 게드릭을! 게드릭인지 개드립인지 내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효과가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평생 동안을 기다리던 게드릭이 죽게 생긴 상황이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 ‘미친 듯이 폭주하는 게 문제지만….’ 후위를 향해 기운을 날리는 미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게드릭이 붙잡혀 있는 곳이었으니까. 조금 멍한 표정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김현성은 곧바로 율리에나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 곧바로 검을 휘둘러 오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김현성은 아직 영웅 등급의 던전에서 활개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사실상 녀석도 아직까지 성장 단계라고 말하는 편이 맞으리라. 그렇지만 계속해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려는 율리에나와 그녀를 막으려는 김현성의 싸움은 내가 보기에도 놀라워 보였다. 사방에서 뻗어 나오는 검은 기운을 검 한 자루에 의지한 채로 막아내고 있는 김현성. 공격 범위가 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김현성에게 수많은 공격을 뿌려대고 있는 율리에나. 콰드득 콰직!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은 물론,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허….’ 김현성이 검을 뻗지만 검은색 기운에 틀어 막힌다. 마치 촉수처럼 보이는 율리에나의 검은색 기운이 김현성을 후려치지만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낸다. 대충 보기에도 화려한 공방에 우리 파티원뿐만이 아니라 남은 파란의 파티원들 역시 커다랗게 입을 벌릴 정도. 애초에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지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어 보였다. -이 버러지 같은 놈이… 당장 비키지 못해? “…….” -게드릭! 게드릭! # 97 회귀자 사용설명서 097화 율리에나(2) 싸움의 스케일이 커지는 게 눈에 보인다. 본래 영웅 등급 던전의 주인인 율리에나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김현성이 현재 보여주고 있는 무위는 입이 벌어질 수준. 우리가 자리한 이 방이 조금씩 그 형태가 바뀌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당장 비키지 못해? 쾅! 콰드드드득! 얼핏 보면 호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그렇지만 사실상 이 전투는 김현성이 가져갈 수밖에 없는 전투다. -저주가! “아아아아아악!” -게드릭! 진심으로 싸울 수 있는 김현성과는 다르게 율리에나는 게드릭이라는 약점을 노출시킨 채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게드릭이라는 녀석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위험한 곳에 자신의 목숨을 던질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라는 정보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소중한 사람이 인질로 잡혀 있으니 본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내가 비명을 지르거나 율리에나의 이름을 외칠 때마다 동요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사실 지금보다 싸움을 쉽게 끝낼 수도 있다. 소중한 게드릭을 억압하는 이 괴한들이 협박을 하는 순간부터 율리에나가 힘을 못 쓰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 그렇지만 싸움의 여파를 바라보는 이들은 그런 생각을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꼭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김현성은 파란의 남은 인원들을 향해 무력을 선보이고 싶어 하는 타이밍이었으니 말이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김현성은 어디까지나 진심이다. 율리에나는 그만큼 강하다. 그녀를 둘러싼 검은색 촉수들은 사방으로 뻗어나가 어떻게든 김현성을 옭아매려고 한다. 마치 곡예를 보이는 것처럼 한 끝 차이로 촉수를 피하거나 잘라내는 모습은 이미 사전에 합을 맞춰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길 정도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촉수가 뭉텅이로 잘려나가고 김현성이 몸을 피한 자리에는 어김없이 공격들이 쏟아진다. 물론 율리에나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은 당연지사. 상위의 싸움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마 저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차희라 정도가 고작이리라. 그나마 이곳에서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이상희도 뭔가에 홀린 듯 김현성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무척이나 필사적인 율리에나의 모습을 보고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는 했지만…. ‘너무 위험해.’ 만약에 들키면 그곳에서 아웃. 나뿐만이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이들도 전부 피해를 입을 것이다. 도박을 하는 건 싫어하는 편. 지금은 굳이 주사위를 던져야 하는 타이밍이 아니다. -조금만 기다려, 게드릭. 조금만! 돌아가는 상황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지만 한 가지 찜찜했던 것은 어느새 악역의 포지션에 자리 잡은 것이 우리처럼 보였다는 것. 눈이 없는 율리에나가 얼마나 절박한지 느껴졌다. 내가 찜찜하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녀의 모습은 필사적이다. 악한에게 붙잡혀 있는 게드릭을 어떻게든 구출하기 위한 성녀의 발버둥. 물론 저 여자를 동정하진 않는다. 광기에 집어 삼켜진 것처럼 보이는 율리에나는 수많은 희생자를 낸 던전의 주인이었고 실제로 우리 파티도 죽을 위기를 겪었으니 말이다. 아마 이 던전의 존재가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뿐, 우리가 모르는 사상자를 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던전에 먼저 침입한 불청객도 우리라는 걸 생각해 보면 변명의 여지는 없지만… 김현성과 호각으로 맞붙을 수 있는 괴물과 드잡이를 하고 싶지는 않다. -이 귀찮은 파리가! “…….” -어둠에 집어 삼켜지리라. 하늘을 수놓은 어두운 색의 역십자가. 그것이 김현성을 향해 떨어지지만 김현성은 제자리에서 검을 휘둘렀다. 쾅! 콰직! 콰드드득! ‘강해.’ 자신의 몸보다 더 큰 검은색 십자가들을 전부 잘라내고 있는 모습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정도. 나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에 집어 삼켜지리라! 콰직! 콰앙! ‘허….’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은 김현성의 얼굴이었다. 입가에 걸려 있는 미소는 누가 봐도 지금 이 상황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콰직! 어쩌면 자신의 힘을 시험하고 있는 과정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스펙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지 몸에 상처가 쌓이지만 김현성은 현재의 자신의 상태에 만족스러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평균 80에 도달하지 않은 능력치로도 저 정도라니….’ -당장 비키지 못해!? 오라! 저주를 내리는 검이여! 얼굴이 일그러진 저주받은 성녀의 위로 하늘에서 검이 떨어진다. 김현성의 검이 아니다. ‘저게 무슨 성녀야.’ 아니 애초에…. ‘이게 무슨 싸움이야.’ 지금 저들이 보여주고 있는 싸움은 규격 외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그것 말고는 이 싸움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 2페이즈에 돌입한 것처럼 보이는 율리에나가 검을 들고 김현성과 다시금 맞부딪치고 있는 모습. 정면승부로는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김현성은 율리에나의 검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여파가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져 온다. 박덕구나 이상희는 방패를 들고 최대한 이쪽을 막아서고 있었고 김현성을 보조해 주는 마법이 아닌 우리를 보호해 주는 마법이 계속해서 덧 씌어졌다. ‘이길 수 있나?’ 그 와중에도 걱정되는 것은 승패 여부. 김현성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점점 늘어나는 김현성의 상처에 조금 걱정이 들었다. 이쪽에서 계속해서 신성력을 넣어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모양이라면 어쩌면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믿어야 되나?’ 저게 김현성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뭔가 하나나 둘 정도는 숨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을 과신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둠에 짓밟히리라! 율리에나가 들고 있는 검을 들어 올리고 김현성 역시 마력을 검에 집중시킨다. ‘아마도 마지막.’ 싸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전력을 담은 검이 부딪치려고 할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율리에나!”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녀. 김현성은 막대한 기운이 담긴 율리에나의 검을 흘려낸다. 허공을 가르는 저주를 내리는 검. 사태를 파악하려고 자세히 그녀를 지켜봤을 때는 이미 김현성의 검이 그녀의 복부에 꽂힌 이후였다. -게드… 릭 ‘너무 쓰레기 같은데….’ 지금까지도 쓰레기 짓을 많이 해왔다고 생각하지만 던전의 보스 몬스터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은 또 처음. 쓰러진 이후에 이쪽을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게드릭……. 천천히 흩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뒤로 멍하게 김현성을 바라보는 원정대원들이 시야에 비쳤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했을 때는 사방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퍼져나갔다. 잠깐 움찔 하기는 했지만 머리가 맑아진다. 이후에는 던전 공략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영웅 등급 퀘스트-율리에나 처치(1/1)] [보상으로 랜덤 스탯 포인트 4를 부여합니다.] ‘끝났어.’ 조용히 숨을 헐떡거리며 반쯤 쓰러져 있는 녀석에게 모두가 달려간 것은 당연지사. 그 와중에도 굉장히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현성 씨 괜찮으십니까?” “어… 어떻게 그렇게….” “현성 씨!” “아, 저는 괜찮습니다.” 처음에는 물론 김현성의 몸 상태를 확인하는 말이 대부분이었지만 계속해서 그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허….” “말도… 안 돼….” “난이도가 있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조금 당황스럽군요.” “아마 승급을 앞두고 있는 던전 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본래 등급에서 강등당했을 가능성도 있고요.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뭐라고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군요.” “무슨 일이 됐든 길드에게는 복이 되겠네요.”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도 잠시, 바닥에 꽂혀 있는 검을 보자 저들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주를 내리는 검-전설 등급] ‘허….’ 희미하지만 계속해서 주황색 빛이 번뜩이고 있다. ‘대박….’ 어째서 김현성이 이 던전에 오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다. ‘이걸 위해서였나?’ 전설 등급의 아이템. 아직까지 대륙 전체에서도 매우 적게 풀린 무구다. 확인되는 전설 등급의 아이템은 총 6개, 아마 실질적인 사용자가 몇 명 더 있겠지만 그래봤자 10개가 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는 전설 등급의 던전에서도 드랍되지 않을 확률이 크다는 무구가 난데없이 이곳에 떨어진 것이다. 이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사실을 김현성이 알고 있었다면 무리하게라도 나선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애초에 이 대륙에서 전설이라는 단어는 그 정도의 무게감을 가진다. 전설 등급의 던전, 전설 등급의 직업, 전설 등급의 아이템, 전설 등급의 퀘스트, 전설 등급의 레이드 몬스터. 대륙에 사는 누구나 머릿속으로 이것 중 하나라도 가지거나 발견하길 바란다. 갑작스레 이곳이 소란스러워진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하지만. 주인은 정해져 있다. 아마 모두가 속으로 이 아이템을 가져가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바람 정도는 잡아주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율리에나를 일 대 일로 쓰러뜨리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아마 기영 씨가 없었다면 당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녀석 역시 스리슬쩍 자신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이 검이 탐나기는 하는 모양. 탐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좋은 연금 키트를 원하듯 녀석 역시 좋은 검을 원할 것이다. 누가 주인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도 없다. 어디까지나 율리에나를 잡은 것은 김현성, 물론 다른 사람들의 외적인 도움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녀와 대치한 것은 우리의 사랑스러운 회귀자다. 이상희 역시 자신이 지금 어떤 발언을 해야 하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 일단은 영웅 등급의 던전 저주받은 신단의 공략 완료를 선언하겠습니다. 이 주변을 정리하고 다른 아이템이나 타 길드의 시신이 없는지 탐색해 주세요. 3인 1조로 주변을 둘러보시고 특이사항을 발견하면 곧바로 보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산은 길드에 돌아간 이후에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가현 씨는 지금 곧장 길드로 돌아가 원정대의 상황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 “아직 말씀드리기는 이릅니다만 저주를 내리는 검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대충 이해하고 계실 겁니다. 혹시라도… 이 저주를 내리는 검을….” 이상희가 말을 잇는 순간이었다. 우웅……. “어?” 우웅! ‘뭐야.’ 가만히 바닥에 꽂혀 있던 검이 저 혼자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른 것. 모두가 경계를 보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난생 처음 보는 상황에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을 때, 저주를 내리는 검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조금 이상했던 것은 적의가 느껴지지는 않았다는 것. “주인 의식?” 누군가 중얼거린 목소리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파악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희미한 빛을 내며 다가온 검이 계속해서 떨리는 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이게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지경. ‘이러지 마.’ 우웅! ‘나 검사 아니야, 이 새끼야.’ 굉장히 당황한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이게 아닌데… 슈바… 이거 아니야. 현성아, 믿어줘. 이러려고 한 게 아니야.’ # 98 회귀자 사용설명서 098화 율리에나(3) 엉망이 된 김현성의 몰골이 보인다. 신성 마법으로 이미 한차례 치료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에 상처가 남아 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싸움을 벌였으니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게 당연할 것이다. 율리에나의 촉수에 당했는지 몸 곳곳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입고 있는 장비는 거의 반 이상이 날아가 있다. 심지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검은색 십자가에 당한 팔은 아직도 치료중이다. 단순히 겉모습으로만 판단해 보자면 조금은 처량해 보인다. 그와 반대로 내 모습은…. ‘깨끗해.’ 상처 하나 없이 무척이나 깨끗한 모습이다. 아니, 상처는커녕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나에게 다가오는 검을 바라보는 김현성의 얼굴은 마치 애인이라도 떠나보내는 것 같다. 눈치가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보통 전설 등급의 아이템은 스스로 주인을 정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어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런 상황인 것 같네요.” “네.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정연 씨.” ‘이러지 마.’ 내 입장에서는 너무 당황해서 어이가 가출을 한 상황. 김현성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녀석이 무리한 게 이 전설 등급의 아이템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올 지경. 모두가 아이템을 얻기 위한 영광스러운 상처다. 본의는 아니지만 김현성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을 박살 냈다. ‘제길… 어차피 쓸 일도 없는데….’ “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슬쩍 시선을 피하니 공중에 떠오른 검이 내 시선을 따라온다. 우웅…. 계속해서 울리고 있는 것은 덤. “혹시 주인 의식을 거부할 수도 있는 겁니까?”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아직 전설 등급의 아이템에 대한 정보가 풀리지 않아서 말입니다. 상황을 보면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현성 씨가 한 번 잡아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일단은 저는 검사도 아니고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아이템이니까요. 저보다는 현성 씨가 쓰는 게 좋을 겁니다.” “네. 현성 씨, 그렇게 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네.” 모두의 시선이 녀석에게 쏠린 것은 당연지사. 김현성도 굉장히 긴장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손을 뻗기 시작했다. 아마 녀석은 전설 등급의 아이템에 대한 정보를 많이 접했을지도 모른다. 이 저주를 내리는 검에 대해서도 당연히 잘 알고 있을 터. 어쩌면 전 회 차에 김현성이 사용하던 검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가지고 싶었던 검이었을 수도 있다. 얼굴에 떠오른 것은 긴장하는 표정. 녀석이 이 검을 얻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 역시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슬쩍 검 자루를 쥐는 순간 저주를 내리는 검의 주위에서 어두운 기운들이 쏟아지기 시작.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주변에 있던 원정대원들이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콰지지지지직! 그 모습을 본 김현성 역시 한숨을 쉬고 검을 놓아버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숨을 쉬고 아쉽다는 표정으로 슬쩍 시선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괜스레 심장이 쿡쿡 찔려왔다. ‘아… 씨….’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미 주인은 정해진 것 같군요.” “아… 저는 딱히….” “아마 자아가 무척 강한 검일 겁니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던전을 공략한 1등 공신이 기영 씨라고 할 수 있으니 받을 자격도 충분합니다. 저 역시 마지막 싸움에서 기영 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요. 솔직히 이야기하면 잠깐의 틈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저도 어떻게 됐을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뇨. 사용할 수 없는 걸 가진다고 해도….” “기영 씨가 싫다고 해서 거부할 수 없는 일일 겁니다. 특히나 이 검은 말입니다. 잠깐 잡아본 이후에 곧바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마음을 먹은 것 같더군요. 설사 다른 사람이 억지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목검과 다를 바 없을 겁니다. 그나마 기능을 살릴 수 있는 기영 씨가 사용하시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연금술사가 검을….” 다들 대놓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내가 이 검을 사용한다는 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약한 근력과 미약한 체력. 몇 번만 휘둘러도 헉헉거릴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제발 이러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만 저주를 내리는 검은 내 의견을 완전히 묵살해 버렸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검에서 나온 검은색 기운이 나를 옭아매기 시작한 것이다. “어… 어!” 내 팔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들어 올려 진다. “누가 좀….” 슬쩍 다른 사람들을 쳐다봤지만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내 손이 정확히 검의 손잡이에 당도하자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설 등급의 아이템, 저주를 내리는 검 율리에나의 주인으로 인정받으셨습니다. 전설 무기의 사용자가 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시바… 인정은 무슨. 받기는 뭘 받아. 내가 인정을 안 했는데.’ [저주를 내리는 검 율리에나-전설 등급] [저주를 내리는 성녀 율리에나가 사용하던 애검이었습니다. 수만 년 전에 저주의 신 에이에스가 율리에나를 위해 내린 이 검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지 않습니다. 상처를 입은 대상에게 즉시 정신적인 대미지를 입히는 최상급 저주를 내립니다. 마력을 사용해 에이에스의 기운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오랫동안 기운에 노출된 대상 역시 저주에 걸리게 합니다. 마력을 대량으로 사용하여 광역 저주를 내릴 수 있게 됩니다. 소환과 역소환이 가능합니다. 율리에나가 목숨을 잃기 전 필사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봉인시켰습니다. 게드릭을 위하는 율리에나의 자아가 잠들어 있습니다. 검이 스스로 움직여 위협으로부터 주인을 보호합니다. 성장치가 낮아 아이템의 기능이 몇 가지가 봉인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마력이 15 올라갑니다. -게드릭… 사랑하는 나의 게드릭] ‘시… 바… 인정한다.’ 속으로 쌍욕을 내뱉었던 것도 잠시, 슬쩍 검을 바라보자 뭔가 잘된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스펙에 당황스러워 입이 벌어질 정도. 지금까지 내가 봐 왔던 그 어떤 아이템과도 비교할 수 없는 능력치였다. 이곳에서 저주가 얼마나 커다란 힘을 발휘하는지는 이미 알게 되었다. 파란이라는 나름 실력 있는 클랜을 집어 삼킬 뻔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저주를 거는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전설 아이템으로 불릴 만하다. 물론 내 마력으로는 율리에나가 했던 것처럼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활용 가능성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마력을 15나 올려주는 검의 능력치는 또 어떠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력 고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 외에도 주목할 만한 점은 스스로 나를 보호해 준다는 것. 율리에나의 자아가 봉인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 추가된 기능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가장 필요한 기능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율리에나.’ 그 미친 여자가 다시 깨어났을 때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 얼굴도 모르는 게드릭이라는 놈을 연기해야 될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주인 의식이 끝났군요.” 조금은 허탈해 보이는 원정대의 목소리는 덤. “이거… 정,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렇게 될 줄은….” “아닙니다. 기영 씨가 하신 일들을 생각해 보면 받을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물론 연금술사로서 검을 사용한다는 게 조금 그렇기는 합니다만… 앞으로는 훈련도 함께할 수 있겠군요?” “네?”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이라도 검을 쓰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기본기정도는 잡아드리겠습니다.” ‘말에 뭔가 가시가 있는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꽤나 불안해졌다. ‘삐졌나?’ 김현성이 삐진다는 건 사실 상상이 안 된다. 그렇지만 입꼬리 한쪽이 티 나게 내려가 있다. 김현성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아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살짝 주변을 바라보니 파티원들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뭔가 뿌듯해 하는 박덕구와 선희영, 정하얀의 표정은 조금은 미묘하다. 그래도 나쁜 느낌은 아니다. 타 파티의 경우에는 질투하는 듯했지만 나에게 모두 한 번씩 신세를 진 사람들이라 그런지 그래도 박수를 보내주는 분위기. 율리에나에 대해 설명해 주길 바라는 눈빛이라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 검의 품질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안에 있는 내부적인 기능이 상당히 좋습니다. 그… 저주를 내리는 기능도 있고 심지어는 검이 저를 보호해 준다고 하더군요.” “네?” 조금은 놀란 것 같은 김현성. 1회 차에는 없었던 기능이었기 때문이리라. 1회 차에서도 게드릭인 척 연기한 미친놈이 있었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겠지만 단언컨대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 다른 분들은 읽을 수 없으신 모양이군요. 율리에나의 자아가 봉인되어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어떤 위협이 닥치면 검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제 마력을 사용하는 것 같아 조금 찜찜하기는 하지만… 아마도 그… 제가 게드릭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게드릭이 돼야 해.’ 최소한 자기 검에 목이 꿰뚫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게드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내가 게드릭이 아니라는 걸 들킨다면 문제가 꽤나 커질 것이다. 일단 당장은 싸움의 여파로 율리에나가 잠들어 있다는 희소식. 얻은 것은 많았지만 분명히 머리가 아파오는 부분도 있었다.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김현성이 생각보다 허탈해하지 않았다는 것. 심지어 자동으로 움직여 준다는 소리에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있었다. ‘쓸모 있을 거라고 판단한 건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일단은 본인이 사용하는 게 베스트라고 생각했겠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인 모양. 한쪽 입꼬리가 추욱 내려간 것 빼고는 괜찮아 보인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 저주를 내리는 대검 율리에나는 김현성이 알고 있을 수많은 전설 등급의 아이템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뭐 하지만 김현성의 성향과 이 검은 그다지 궁합이 좋다고는 볼 수 없다. 굳이 다른 주인을 찾는다면…. ‘정진호?’ 이전에 튜토리얼 던전에서 만났던 그 미치광이 살인마와 조금 더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일단은 축하드립니다, 기영 씨.” “아… 네… 감사합니다.” “조금 일이 꼬였지만 현성 씨가 납득하신다면….” “네. 납득하고 있습니다. 이상희 님.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문제 같습니다.” “이미 저희의 인정이 필요한 상태가 아니지만 일단 전설 등급의 아이템. 저주를 내리는 검의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곳에서의 일도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 같으니 제가 말해드린 일을 마친 이후에 곧바로 린델로 향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갑시다.” “네.” 던전 공략으로 얻은 것들이 무척 많다. 물론 파란은 원정 실패로 인해 전력이 대폭 하락했다. 잔인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결코 나쁜 상황은 아니다. 이상희의 입지는 줄어들었고 김현성과 나의 내부 평가는 상대적으로 많이 올라갔다. 앞으로 이상희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부길드 마스터라는 자리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파란을 김현성과 내 입맛에 맞게 바꿀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번원정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말 할 수 있으리라. ‘하얀이의 상태도 많이 나아졌고….’ 모두가 이번 원정으로 계단 하나를 오른 것 같은 기분. 물론 아직까지 해결해야 될 문제는 남아 있다. 성장을 멈춘 박덕구와 이지혜에게 맡겨놓은 일. 아직 완벽하게 뒷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느낌은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내 손에 들어온 무기 덕분인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녀석을 꺼내 놓는 것은 문제되리라. 살며시 마력을 보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소환.’ [저주를 내리는 검이 역소환을 거부합니다.] “…….” ‘역소환.’ [저주를 내리는 검이 역소환을 거부합니다.] ‘돌아가.’ [저주를 내리는 검이 역소환을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시바! 돌아가!’ [저주를 내리는 검이 역소환을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저주를 내리는 검이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저주를 내리는 검이 사랑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저주를 내리는 검이 함께하자고 이야기 합니다. 저주를 내리는 검이 화를 냅니다.] “돌아가라고! 제발!” 분명히 만족스러운 원정이었다. # 99 회귀자 사용설명서 099화 율리에나(4) “기영 씨, 거기에는 무슨 내용이 적혀 있나요?” “아, 희영 씨. 게드릭과 율리에나의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끄응… 이 검 때문에라도 알아야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아. 안쪽에 있는 방 안에서 발견하신 책을 말씀하기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읽다 보니까 생각보다 볼만하더군요. 전설 같은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 음… 아무튼 흥미롭습니다.” “재미있겠네요. 혹시 어떤 내용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무척이나 궁금해하는 선희영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린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에도 이쪽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니 정말로 궁금하기는 한 모양. 사실 봉사 활동을 함께 나가는 것 이외에는 그동안 커다란 접전이 없었던 터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옆에서 내 팔을 꼭 잡고 있는 정하얀 역시 선희영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잠시, 내가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바라는 눈치다. 지속된 행군이 지루했던 것이 틀림없으리라. ‘긴 이야기는 아니니까.’ 목적지에 도착하는 길에 즐길 수 있는 이야기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정확히 만 년 전입니다.” “만 년이요?” “네. 우리가 자리해 있는 신성제국 베니고어가 생겨나기도 전의 이야기 입니다. 처참한 전투가 계속되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저주의 신을 숭상하는 신도와 축복의 신을 따르는 신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 전쟁이었다고 합니다.” “아아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네. 지금의 신성제국이 있는 것은 그때의 종교전쟁이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네. 그 당시에 율리에나는 저주의 신을 모시는 성녀였고 게드릭은 축복의 신을 모시는 성자였다고 하더군요. 둘은 직접적으로 부딪치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대한 이야기를 항상 들으며 전선에 섰다고 합니다. 실제로 둘이 전선에서 부딪친 것도 전쟁이 시작되고 15년이 흐른 뒤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무튼 간에 거의 모든 병력이 부딪친 큰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베르만 절벽 전투.” “알고 계십니까?” “신전에 몸을 담고 있는 자라면 대부분 배우죠. 물론, 율리에나나 게드릭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만약 기영 씨가 가지고 있는 책이 거짓이 아니라면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게 되는 거네요.” “신성제국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운이 좋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군요. 하하. 아무튼 수많은 신도들이 목숨을 잃었고 게드릭과 율리에나 역시 최후의 최후까지 싸우다 절벽에 떨어지는 것으로 그날의 전투는 마무리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사실 이때의 기록은 책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율리에나와 게드릭이 정확히 1년 뒤에 각자의 신전으로 돌아와 있다고만 되어 있죠. 물론 율리에나의 일기에는 아주 정확하게 적혀 있기는 합니다만 말하기 민망한 내용이 많아 정확히 설명해 드리기가 부끄럽군요.”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게드릭과 율리에나는 떨어진 절벽의 동굴에서 1년 가까이 함께 생존하고 결국에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동굴 안에서 있었던 내용을 대충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보였다. 물론 엄한 내용은 빼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지 연애 박사 박덕구도 슬그머니 이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그때부터 율리에나와 게드릭이 만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마침 전쟁 역시 소강 상태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죠. 베르만 절벽 전투에서 양측의 피해가 무척이나 컸으니까요. 당연히 두 신은 처음에는 이 둘을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이미 서로를 열렬히 사랑한 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어째서 이런 꼴이 된 건지 이해가 되네요.” “네. 당연하게도 둘은 서로의 신에게 분노를 사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게드릭은 축복신의 신전 안에 작은 신단을 만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저희가 다녀왔던 던전, 저주받은 신단입니다. 둘은 이곳에서 사랑을 키웠고 결과적으로는 분노를 사게 되어 이 신단에 묶여버렸죠.” “아….” 저주의 신은 율리에나에게 이 저주받은 신단의 작은 방을 빠져나갈 수 없는 저주를 내렸고, 축복의 신은 게드릭에게 율리에나를 영원히 그릴 수 있는 축복을 내렸다. 이 저주받은 신단을 계속해서 떠돌아다니며 율리에나를 찾아 헤매야 하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물론 축복의 신은 게드릭이 율리에나를 찾아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불쌍해요.” 정하얀의 말에 선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주를 받는 게 당연할 거예요. 신전 지하에 다른 신을 모시는 신단을 세운다는 건…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발상이네요. 아마 저주받은 신단 밖에 있는 언데드도 축복의 신이 내린 저주의 영향이겠죠.” “게드릭의 일기에는 축복의 신이 영생을 살아가는 축복을 내렸다고 했었지만 이들의 입장에서는 사실 저주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율리에나는 찾아오지 못할 게드릭을 영원히 기다리게 됐고, 게드릭은 찾을 수 없는 율리에나를 영원히 찾아 헤매게 됐다는 이야기로 말입니다.” 무거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정하얀에게는 무척이나 감동적인 이야기였는지 벌써부터 훌쩍 거리는 것이 보였다. “스, 슬퍼요.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렸다고 하니….” 살짝 머리를 쓰다듬어 준 건은 당연지사. 이때가 기회라는 듯 내 품에 푹 안기는 정하얀이 보였다. “그럼 그때 왼쪽 방에서 발견된 언데드가 게드릭이라는 소리요? 형님?” “응. 맞다.” 혹시 모를 생존자를 수색하는 과정에 발견한 것이 게드릭과 언데드 무리. 율리에나가 쓰러진 영향인지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던 이들이었지만 우리가 발견한 언데드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녀석의 품에서 흥미로운 아이템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드릭의 청혼 반지-영웅 등급] [율리에나의 저주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슬쩍 내 손에 들려 있는 아이템을 바라보니 이 던전의 본래 공략 방법이 어떤 것이었는지 대충 알 것 같은 느낌. 더불어 김현성이 왜 그렇게 밤만 되면 싸돌아 다녔는지, 또 이곳에서 전 파티가 봤다는 언데드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아마도 일반적으로 저주받은 신단을 공략하는 방법은 이곳을 떠돌아다니는 게드릭을 발견하는 것이 먼저였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랜덤으로 리스폰되는 게드릭이라는 몬스터를 먼저 잡아낸 이후에야 비로소 저주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영웅 등급 이상의 판정을 받아도 될 정도로 까다로운 공략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 신단은 넓다. 아무리 싸돌아 다녀도 게드릭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공략 방법이 거의 없는 것과 같다. 말 그대로 율리에나의 저주에 노출되어 서서히 죽어가는 수밖에 없다. 우리 파티 같은 경우에는 게드릭을 발견한 것보다 먼저 저주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것. 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면 김현성이 게드릭을 찾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은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사랑이라는 건 확실히 무섭네요.” “네.” 그 누구보다도 공감할 수 있다. 내 품에 안겨 있는 정하얀만 봐도 답이 나온다. 아무튼 간에 일단은 게드릭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모을 수밖에 없는 상황. 지금 당장은 율리에나의 자아가 검 안에서 잠들어 있지만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만큼 대비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둬야 한다. “그런데 여기 들어온 지도 좀 된 것 같은데 그 지원군이니 뭐니 데려온다고 하던 양반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것 같소.” “누구?” “그, 이설호 그 할배 말이요.” “아아아. 아마도 아직 붉은용병이 돌아오지 않은 탓도 있고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쳤겠지. 사실 우리가 던전 공략을 생각보다 빨리 끝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라도 데려와야 되는 거 아니요? 형님이나 김현성 형씨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만약에 아니었으면 아마 우리도 그 곳에서 죽었을 수도 있었소.” “뭔가 사정이 있었을 거다.” ‘사정은 개뿔….’ 아마 우리가 이곳에서 죽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게 녀석들에게 조금 더 유리할 테니까. 시기상 조금 애매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상희는 이설호를 비롯한 구태세력에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형님은 너무 착해서 탈이오.” 고개를 끄덕이는 박덕구와 정하얀. 그렇지만 선희영의 표정은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이설호를 비롯한 늙은이들은 빈민에 있는 부랑자들과 별 다른 차이가 없다. 쓸모없고, 스스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앉아 있는 그 자리에 눌러앉아 어떻게든 아득바득 이득을 꾀하려고 한다. 저번에도 한 번 말한 적이 있지만 부랑자들과의 차이는 조금 더 운이 좋았다는 것밖에 없다. 사회의 암 덩어리, 이설호는 그녀에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리라. ‘지혜는 잘하고 있을까.’ 이지혜에게 시켰던 일도 갑작스레 떠오르기 시작. 그녀라면 내가 시킨 일을 거의 완벽하게 마무리 지어놨겠지만 우리가 나오는 타이밍이 생각보다 빨라 일을 끝내지 못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멀리서 누가 뛰어왔다. ‘박가현?’ 시야에 비치는 인형은 틀림없이 이상희가 우리보다 한발 앞서 길드로 보냈던 박가현이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한 건 당연지사. 어떤 소식을 들고 왔을지 기대가 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하다.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온 것치고는 무척이나 초조하고 정신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이윽고 이상희 앞에 당도한 그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하아… 하아…. 부 길드 마스터.” “소식은 전했나요? 어째서 혼자….” “일단은 시키신 대로 전부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 전, 전해야만 하는 소식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먼저….” “진정하시고 말씀해 주세요.” 뭔가 눈치를 보는 느낌. 이곳에서 말해도 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 결심한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귓가로 그녀의 목소리가 꽂혀 들어왔다. “그… 길드 마스터가 돌아가셨습니다.” “네?” “길드 마스터가…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무슨… 분명히 저주가 풀리셨을 텐데….” “돌아가신 건 정확히 3일 전이라고 들었습니다. 주무시는 동안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고…. 이, 일단은 이상희 님께 알리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서….” “…….”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이상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물을 쏟고 있는 박가현 역시 마찬가지. 나는 파란의 길드 마스터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인성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 대충 봐도 분위기가 내려앉은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사실 우리 파티에게 나쁜 상황은 아니다. 길드 마스터가 없다면 우리가 실권을 쥐는 게 더욱더 쉬워질 테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갑자기?’ 확실히 이상한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 단순한 자연사라고 하기에는 늙은이들에게 무척이나 유리한 타이밍이다. 물론 이 정도로 저주에 장시간 노출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왠지 모르게…. ‘이설호인가?’ 단순한 추측일 뿐이지만 영 설득력이 없는 가설은 아니리라. “일단은 서둘러 길드로… 모두 힘드시겠지만 행군 속도를 조금 올리도록 하… 겠습니다.” “네.” 당연히 바라던 바. 그렇게 원정대는 조금은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의외의 소식 때문인지 이상희는 입을 꾹 다문 채 원정대를 이끌었고 다른 파티원들 역시 이상희를 위로하며 묵묵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 눈에 들어온 자유 도시 린델. 물론 린델에 당도하기 전 마중 나온 늙은이들과 이지혜가 같이 있었다. 검은백조의 몇몇도 함께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액션 정도는 취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무사생환을 축하드립니다. 이상희 님. 마침 출발하려던 차였는데….” “그것보다 설호 씨, 마스터는 어떻게 됐습니까? 정말로 돌아가신 게 맞습니까?” “네. 편안하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시, 시신은 어디에 있죠?” “일단은 길드의 지하에 모셨습니다. 안 그래도 장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도중이었습니다. 3일 전에 갑자기….” “아….” 저들의 이야기는 이미 관심 밖이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이설호와 이상희의 뒤로 이지혜를 바라보고 손가락으로 툭툭 머리를 두드리자 마찬가지로 미소를 띄우며 다리를 툭툭 건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그렇지.’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 10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0화 구태세력(1) 길드 하우스에 막 도착한 원정대가 서둘러 짐을 풀고 지하로 내려갔다. 길드 마스터의 시신을 확인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 것이다. 잠깐 고민했지만 나 역시 내려가는 것이 맞다. 바로 이지혜와 대화를 나누고 싶기는 했지만 길드의 내부적인 상황을 살핀 이후라도 늦지 않으리라. 살짝 이지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이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모양. 나도 대충 이지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예상이 된다. ‘천생연분?’ 아마도 시스템이 말한 영혼의 단짝이라는 말은 이걸 뜻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화가 잘 통하기도 하고….’ 생각하는 패턴이 굉장히 비슷했으니까. 실제로 그녀를 파란으로 불러들이지 못한 건 내가 한 실수 중 최악의 실수였다. 조금 더 곁에 두고 써먹었어야 했다. ‘쩝.’ 물론 지금의 포지션도 나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 아무튼 간에 길드의 외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지혜와는 여기에서 잠깐 작별. 슬쩍 인사를 해오는 이지혜를 지나친 뒤 길드 하우스의 지하로 내려가니 무척이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공간이 보였다. 하얀 꽃이 가득 차 있는 공간에 한 남자가 관 안에 누워 있다. 조금은 나이가 들어보였고 얼굴에 있는 수많은 상처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짐작하게 했다. 턱을 뒤덮은 수염과 머리 곳곳을 뒤덮고 있는 흰머리. ‘40대?’ 어쩌면 50대로 볼 수도 있으리라. 마력의 영향으로 노화가 느렸기 때문에 정확한 나이는 가늠할 수 없지만 대충 보기에도 연배가 많아 보인다. 무척이나 편안하게 눈을 감은 모습, 아니나 다를까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흐으으윽….” “마스터….” “흐으윽… 아저씨, 아저씨. 끝까지 살아주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아저씨… 흐으으윽….” 나는 공감할 수 없는 슬픔이다.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 나는 씁쓸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주변을 가득 메운 눈물은 다른 이들이 얼마나 슬퍼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저씨?’ 그중에서도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이상희였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들어온 이후에는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보통 인연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미 죽어 있는 시신을 끌어 앉고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은 가족이 죽었을 때의 반응과도 비슷해 보였다. ‘혹은 연인이라든가.’ 나이 차를 생각해 보면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것 같은 반응이다. 혼자 있게 해주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2번 대의 몇몇이 조용히 위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보였다. 우리 7번 대 역시 마찬가지다. 김현성 같은 경우에는 이상희를 위로해 주고 싶은지 여전히 옆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눈물 바다가 된 상황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박덕구나 조용히 고새를 숙이고 있는 김예리도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편안한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선희영이 시신을 향해 신성력을 밀어 넣고 고인에 대한 예의를 갖춘 뒤 위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 내 팔을 꼭 붙잡고 있는 정하얀과 함께 위층으로 몸을 옮겼다. “하얀아.” “네? 오빠?” “혹시 이상한 거… 느끼지 못했지?”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예요?” “마력의 흐름이라든가… 아니면 시신에서 보이는 흔적 같은 것들. 나는 마력에 민감하지 않으니까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거야.” “아… 네. 이상한 건 발견하지 못했어요. 뭘 알아내려면 조금 더 자세히 봐야 될 것 같은데… 아무래도 멀리서 잠깐 본 게 전부라서….” “으음….” 죄책감이 느껴지는 얼굴.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자 그제야 기분이 좋아진 듯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괜스레 생각이 복잡해졌다. 정하얀은 마력에 민감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마력 능력치와는 관계없이 잠재 능력이 전설 이상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패시브 같은 능력이다. 그런 정하얀이 아주 작은 마력의 유동이나 대상에게 남아 있는 잔존 마력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은 적어도 길드 마스터의 죽음이 마법으로 인한 타살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끄응….’ 위층으로 올라가자 모여 있는 2번 대원들이 시야에 비쳤다. 길드 주점에 각자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 황정연을 중심으로 몰려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살짝 운을 띄우자 이쪽을 반기는 이들이 보였다. 던전에서의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 기영 씨.” “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아니요. 저희도 그렇지만 아마 이상희 님에 비한다면….” “두 분이 무척 사이가 좋으셨던 모양이군요.” “네. 무척이나 상심이 크실 겁니다. 튜토리얼 때부터 함께하셨다고 했으니….” “튜토리얼 때부터 말씀이십니까?” “네. 그러고 보니 7번 대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군요. 파란 길드는 이상희 님과 길드 마스터인 주승준 님이 만드신 길드입니다. 튜토리얼부터 함께한 두 분이 린델에 들어오신 이후에 처음 자리를 잡으셨죠. 그때 당시에 이상희 님이 성인이 아니라고 하셨으니 무척 오래된 일일 겁니다. 햇수로 따지면 15년 정도.” 지금 이상희의 나이가 33살인 걸 생각해 보면 당시 이상희의 나이가 18살이라는 소리가 된다. 이계인들이 이곳에 처음 들어온 게 20년 전 정도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거의 초기 멤버라고 봐도 되리라. “오래됐군요.” “네. 저희도 파란에 들어온 지는 오래 되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이상희 님께서는 마스터를 아버지처럼 따르셨습니다. 실제로 마스터께서 저주에 걸리셨을 때는 직접 던전으로 들어가시려 했으니까요.” “아….” “항상 함께 움직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처음 길드를 만드셨을 때도… 처음 던전이나 사냥을 나가셨을 때도 말입니다. 절대로 이상희 님을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아마 마스터가 없으셨다면 지금의 이상희 님은 없을 겁니다.” 살짝 고개를 돌려 황정연을 바라보니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저도 조금은 씁쓸하네요. 이상희 님 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파란에 꽤나 오래 있었거든요. 주승준 님은….” “네.” “훌륭한 사람이었어요. 남들을 위해 희생할 줄 아시고 무엇보다 저희를 많이 아끼셨죠. 굳이 길드의 규모를 늘리지 않으신 것도 너무 규모가 커지면 길드원 한 분, 한 분에게 신경 쓰기 어렵다는 이유였고…. 실제로 모든 길드원이 승준 님을 좋아했으니까요. 5번 대 같은 경우에는 아저씨만 보고 이곳으로 이적할 정도였다니까요. 물론… 지금은 없지만.” “…….” “그래도 사람과 헤어지는 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영 적응되지가 않네요.” 주승준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이 사람의 인성이 무척이나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강하셨죠.” ‘유능해.’ 무척이나 유능한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파란의 상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던 상황. 이상희는 강하지만 이상적인 리더가 아니다. 인품이 좋다고는 하지만 겨우 그것만 가지고는 하나의 집단을 이끌어갈 수 없다. 파란은 주승준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중앙 집권 체제의 길드였다. 머리가 없으니 몸이 흔들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이설호 같은 구태세력이 날뛰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설호도 처음부터 함께한 사람입니까?” “네.” ‘역시.’ “설호 씨 역시 튜토리얼부터 함께하셨다고 들었어요. 전투요원으로서 많이 활약하셨고 파란이 자리 잡으시는 데 많이 기여하셨죠. 물론, 마스터와는 사사건건 부딪쳤지만 그래도 두 분 사이는 좋으셨다고 알고 있어요. 이상희 님과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아… 그렇군요. 무척 신뢰하셨겠습니다.” “네. 보시는 것처럼… 아마 설호 씨도 가슴 아플 거예요.” “글쎄요. 정말 아플지는….”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탁자를 툭툭 두드리자 조금은 긴장한 표정의 황정연이 시야에 비쳤다. “저. 여러분들은 잠깐 위로 올라가 주시겠어요? 저는 기영 씨랑 좀 더 이야기….” “물론입니다, 황정연 님. 편하게 나누시죠.” 아무래도 묻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모양이다. 슬쩍 정하얀을 바라보자 자신도 올라가야 하냐는 듯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살짝 고개를 저으니 곧바로 얼굴이 환해지는 게 보였다. “방금 무슨 이야기하신 건가요? 기영 씨.” “아뇨. 그냥… 타살에 대한 가능성을 접어두고 계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타살이요?” “네. 물론 단순한 망상입니다.” “…….” “정연 씨도 저랑 비슷한 생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아뇨. 사실은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가능성을 배제한 건 아니지만… 주승준 님의 시신을 보고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건가요?” “네.” “저도 그렇습니다. 대충 보기에는 외상도 없고 그 어떤 마력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맞지, 하얀아?” “네, 오빠.” “그렇지만 이 대륙에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꼭 마법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가능성 정도는 열어두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살인 동기라고 할 만한 것은 없지만 길드 마스터와 저희가 함께 없어지면 이득을 볼 만한 사람이 몇 명 있지 않습니까. 아, 이것도 동기라고 할 수 있군요.” “네. 확실히 맞는 말이에요.” “뭐가 됐든 시신을 조사하면 분명히 나오는 게 있을 겁니다. 정연 씨가 이상희 님을 설득하시는 게….” “네. 당연히 말씀을 드리기는 하겠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겁니다. 혹시나 저희가 발견할 수 없었던 잔존마력이 전부 날아갈지도 모르니까요. 만약에 저희가 조금만 더 늦었다면 시신을 확인할 시간도 없었을 겁니다. 아마 살인자들이 장례를 서둘렀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게 돼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네.” “혹시 다른 것을 발견할지도 모르니 부검에는 저와 선희영 씨도 함께 들어가는 게 좋겠군요. 연금술이나 신성력이 사용됐을지도 모르고… 아무튼 모든 가능성을 열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후우… 조금 심정이 복잡하네요.” “네?” “같은 길드원이었던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는 게 말이에요. 이상희 님도… 마찬가지시겠죠?” 아마 황정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이설호 그 늙은이와 튜토리얼 때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자위한 시점에서부터 상황은 마무리. 의심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찾아오는 것이다. 우습게도 가장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타인에 가까운 나. 가끔은 안에서 보는 것보다 밖에서 보는 게 훨씬 잘 보이는 법이다. 계속해서 테이블을 두드리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십니까?” 매우 불쾌한 목소리였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보기 싫은 상판대기가 시야에 비쳤다. “글쎄요.” 이설호와 그를 따르는 똘마니들이었다. # 101 회귀자 사용설명서 101화 구태세력(2) “무슨 이야기를 나누십니까?” 슬쩍 고개를 돌리니 보기 싫은 상판대기가 시야에 비쳤다. 이설호와 그를 따르는 똘마니들이었다. “이상희 님은 아직도….” “네. 지하에서 마스터와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상심이 무척이나 크신 것 같더군요.” “가족 같은 분이 돌아가셨으니 그럴 만할 겁니다. 마스터는 이상희 님께 특별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물론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네. 사실 처음에 저도 잠을 설쳤습니다. 다른 분들이 모두 자리에 없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도 너무나도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보다 황정연 님, 무사 생환하신 것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다른 파티원에 대해서는… 참 유감입니다.” 꽤나 호의가 가득한 목소리. 물론 나에게 보내는 호의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2번 대의 파티장인 황정연에게 보내는 것이다. 원정을 떠나기 전에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부라리던 것이 거짓말 같다. 황정연도 갑작스러운 할배의 태세전환에 놀랐는지 눈이 조금 동그랗게 변하고 있다. ‘푸핫.’ 당연히 웃음이 나오는 상황. 저 늙은이의 개수작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가 돌아올 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로 이설호가 파란의 길드 마스터를 죽였는지 않았는지에 대한 여부와는 상관없다. 그는 일단 길드 마스터가 죽은 사실에 쾌재를 불렀으리라. 밖으로 나가 있었던 떨거지들만 돌아오지 않는다면 파란은 저 늙은이들의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로 지원군을 보내는 시기를 늦췄고 어물쩡거리며 시간을 끌어댔다.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레 원정대가 돌아온 것이다. ‘황당하겠지.’ 내가 저들이라도 꼬리를 흔들었음이 틀림없다. 그나마 나에게 비비지 않으려는 것은 마지막 자존심이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존심을 챙기는 일이 웃기는 일. 다시 한번 황정연에게 이야기를 말을 거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정말 다행입니다.” “아.” “사실 지원군 편성이 많이 늦어 걱정하고 있었던 차였습니다. 갑작스레 길드 마스터도 돌아가시고… 이상희 님까지 잃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 여건이 되지 않더군요. 불안했지만… 이렇게 직접 뵈니 새삼 반갑습니다. 정말로… 정말 살아오게 돼서 다행입니다.” 심지어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은 가관이었다. 진심이 아니었다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도 부럽지 않을 정도의 연기력이다. 방금 내가 한 이야기 때문에 생각이 많아진 황정연도 굳이 반갑지만은 않다는 표정이다. 조금은 입을 여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보였다. ‘반응을 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게 아니신지… 혹시나 무슨 다른 이유가 없었는지는 궁금합니다, 설호 씨.” “무슨 뜻으로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 수 없군요.” “아뇨. 그냥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직 희라 누나가 도착하지 않은 붉은용병이야 그렇다고 쳐도 검은백조에서는 여력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광장에만 나가도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수십인데… 부대를 편성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단기간에 해내기에는 불가능하지만… 짧은 시간은 아니었으니까요.” “그, 그건….” “아아아. 뭐, 이미 지나간 이야기니까 여기까지만 하고 넘어간다고 쳐도… 흠…. 그것보다 길드 마스터께서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말한 그대로입니다. 3일 전에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편하게 가신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지요.” “조용히 돌아가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혹시 길드 내에서는 타살에 대한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으신 겁니까?” “무슨 말을….” “이것도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분명히 방금 전에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은 돌아가셨을 당시에 길드 마스터의 방에 아무도 없었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그… 렇습니다만.” “반응을 보니 타살에 대한 가능성은 아예 생각도 않으신 모양이군요.” 자꾸만 비릿한 미소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는 것이 당연. 누가 봐도 내가 지금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그만큼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네가 죽였지?’ 미친 늙은이의 얼굴이 붉어진 것은 당연지사. 애초에 이설호의 성격은 다혈질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으면 꼰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무슨 소리를!” “아니, 또 왜 이렇게 흥분하고 그러십니까? 우리 존경하는 이설호 님.”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우리가 길드 마스터를 죽이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어디서 그런 되도 않는 생각을!” “이렇게 흥분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설호 님. 저는 길드원분들이 마스터를 살해했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외부의 침입자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물어본 것뿐이었는데… 이거 지나치게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도무지 이렇게 흥분하시는 이유를 알 수가 없군요. 풉.” “네… 네놈이… 그래도….” “아니면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것은 아닌지?” “감히 내게 그런 소리를 지껄여? 지금까지 파란을 지켜온 내게!” “우리 이설호 씨가 몇 년이나 길드를 지켜왔든 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근데….” “…….” “보자보자 하니까 왜 이렇게 자꾸 반말을 하십니까? 이제는 같은 간부인데 말입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말 아닙니까?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사과를 해야 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뭘 믿고 계시기에 그렇게 큰소리를 치십니까아… 네에에에?” “네가….” “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설호 씨. 길드 마스터가 죽으면 그걸로 끝입니까? 운명하셨습니다. 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무능한 것도 정도가 있지…. 기껏 사지로 들어가려고 한 걸 열외해 줬더니 집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게 무슨 간부라고… 지랄 똥을 싸고 자빠졌는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네 거참….” “…….” “외부의 침입은 없었는지, 아니면 내부에 길드 마스터의 침실로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있었는지 파악하고 분류하는 게 먼저 아닙니까? 우리 설호 씨 열심히는 하는 것 같은데… 능력이 없으면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을 해야지 아득 바득 붙어 있다고 사랑하는 길드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뭐? 지원군 편성이 늦어서 어쩔 수 없었다? 사회에서는 그런 걸 보고 무능하다고 합니다. 그런 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아 예! 그랬습니까. 그것 참 아쉽습니다. 하고 받아줄 것 같았습니까? 이봐요. 알 만한 양반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 “있잖습니까. 여기는 학교가 아니에요. 못 했다면 못 했다고 죄송합니다 하고 끝나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파란을 지켜주신 기둥 여러분, 제가 만약에 윗대가리였으면 당신들은 전부 모가지였어요. 모가지.” “네놈… 네놈이 감히!” 이설호의 손에서 마력이 응집되는 것은 순식간. 아마 정말로 나를 후려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사리분별 못 하는 늙은이는 아니니까. 그렇지만 일단은 자신의 화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맞으면.’ 꽤나 아플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연약한 연금술사였으니까. 정하얀의 깜짝 놀란 얼굴이 보였다. 순식간에 주문을 외우는 것이 보였지만 녀석의 주먹이 더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상황. 그렇지만 굳이 피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내게 마조히스트 감성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 건 맞아도 별로 의미가 없는 공격, 몸을 사리지 않는 이유는 굳이 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왜? “사랑스러운 율리에나? 흥분하지 않아도 돼.” 우우우웅…. 늙은이의 목을 겨누고 있는 새로운 빽의 존재 때문이다. ‘뒷배가 있다는 건 좋네. 아주 좋아.’ “이… 이건….” “아. 이번 던전행에서 우연하게 인연이 닿게 된 아이템입니다. 여러 기능이 있는 것 같더군요. 예를 들면 분노 조절 장애를 분노 조절 잘해로 바꿔주는 기능이라든가. 일단 손 좀 치워주시겠습니까, 이설호 님? 우리 율리에나가 조금 성격이 드셉니다.”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빼내는 이설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그와 동시에 나의 사랑스러운 율리에나 역시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 입술을 꽉 깨문 정하얀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 것은 덤이다. ‘칼한테 질투하지 마….’ 어째서 검을 질투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일을 율리에나가 해냈기 때문이리라. 결정적인 순간, 위협에서 나를 구출한 게 자신이 아니라는 자괴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럼 저도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설호 씨.” “…….” “최소한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한 경위에 대해서라도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하세요. 마스터가 숨을 거두실 때 보안 상황은 어땠는지 길드에 출입한 사람들은 있는지 일반 길드원들은 어땠는지 말입니다. 아, 추가로 구조대 편성이 어떻게 늦어졌는지에 대한 경위서도 보내주셔야 합니다. 하는 꼴을 보니 조사를 해도 다시 하긴 해야겠지만… 최소한 뒤처리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덜 무능해 보일 테니까요. 그게 다른 평길드원들이 보기에도 덜 부끄러운 장면이 아니겠습니까. 하얀아, 가자.” “네… 네!” 그리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다. 아니, 사실은 꽤나 통쾌할 정도. 허겁지겁 나를 따라오는 정하얀의 뒤로 보이는 늙은이들의 얼굴을 보니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척이나 분해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만 있는 장소였다면 아마 그나마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소란에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온 평길드원이 많았다는 것이 문제. 체면을 중요시하는 저런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충격적인 일인 게 당연할 터, 기다렸다는 듯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봤어?” “저… 무기… 뭐지?” 대부분이 감탄하거나 영감을 지탄하는 목소리들이다. 모든 게 잘 짜인 각본이다. ‘어떻게 나오려나.’ 이쪽을 견제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내가 뭔가 냄새를 맡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찔리는 게 있다면 조금 더 급히 움직일 것이고 아니라면 차분히 웅크릴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간에 저들이 정리될 거라는 건 이미 확정된 이야기. 이쪽은 조용한 호수에 돌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을 때 정하얀이 살짝 질문을 던져왔다. “오빠.” “응?” “그, 그런데 말이에요.” “응.” “그… 저 사람들이 길드 마스터를 죽인 게 맞다면 그… 알려주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뭘?” “아까 전에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하셨잖아요.” “아아아. 아니야.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단서가 있는 쪽에서 움직이는 게 더 편하거든.” 뭔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 그 천재 마법사가 어째서 이런 쪽으로는 이해력이 떨어지는지 알 수 없어 조금은 신기했다. 어쩌면 이해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로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을 수도 있으리라. 뭐가 됐든 상관없다. 이쪽도 마침 심심하던 차였으니까. “아마 조금씩 개인차가 있을 거야. 나는 이쪽 방법이 더 편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아….” “인간이란 건 뭘 완벽하게 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야. 이설호가 얼마나 열심히 그때의 상황을 기술하든 간에….” “네. 네.” “분명히 잘못된 정보가 나올 거야. 무려 3일 전에 일어난 일인데 자기가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어? 만약에 주승준이 정말로 자연사한 거라 해도 상관없어. 털어보면 분명히 일치하지 않는 내용이 나올 테니까. 그걸 비집고 들어가서 꼬투리를 잡는 게 더 편하지. 반대로 우리 길드 마스터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고 생각해도 마찬가지야. 어차피 그날 있었던 보고서는 모두 거짓일 테니까.” “아… 이해했어요. 그… 그러면 제대로 된 증거를….” “사실 중요한 건 증거가 아니야.” “네?” “우리가 저쪽을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있는가? 가 더 중요해.” “…….” “심증만 있으면 물증 같은 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거든. 다수가 진짜라고 믿으면 그게 진짜가 되는 거야.” 순수하다면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정하얀에게 너무 많은 소리를 한 게 아닌가, 살짝 후회한 것도 잠시. 뭔가 깨달을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정하얀을 보고서는 방금의 대화가 실수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용의주도한 정하얀이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진화하는 건 아니겠지.’ 분명 그러진 않을 것이다. # 102 회귀자 사용설명서 102화 구태세력(3) “다수가 진짜라고 믿으면… 그게 진짜가 되는 거야.” ‘중얼거리지 마….’ 걷는 와중에도 암기하듯 중얼거리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무슨 일을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아마도 큰일은 벌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던전에서의 일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다. 기껏해야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인이라는 사실을 몰래 알리는 것이 고작이리라.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지만 오랜만에 함께하는 데이트 같은 상황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정하얀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밖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할 때만 해도 분명 저런 표정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 아무 말 없이 내 소매를 잡고 최대한 발걸음을 늦추려고 하는 것을 보면 역시나 이런 면에서는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 소매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눈에 보일 정도. 광장을 지나 주변에 있는 많은 잡화점들을 역시 지나치고 나니 커다란 규모의 길드 하우스가 한 눈에 들어왔다. ‘검은백조.’ 자유 도시 린델을 대표하는 대형 길드 중의 하나, 검은백조 길드였다. “아….” 역시나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모습,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짝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할 일이 있어서 온 거야.” “네….” “데이트는 나중에도 시간이 있으니까. 지금은 바쁜 상황이라는 거 이해하고 있지?” “네, 오빠.” 그래도 자신 몰래 이곳에 오지 않은 것은 기분이 좋은 모양. 물론 이지혜와 대화할 때는 정하얀을 데리고 갈 수는 없지만 같은 건물 안에 있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심리적으로 위안을 느낄 것이다. ‘방문한 적은 처음인가.’ 검은백조와는 많은 접전을 가지고 있는 나였지만 실제로 내부를 구경하는 것은 처음이다. 살짝 발걸음을 옮기자 눈앞에 있는 문이 스르륵 열리는 것이 보였다. ‘마법?’ 아마도 확실할 것이다. 파란보다 상태가 좋은 건 규모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주위를 둘러보기가 무섭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드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기영 님 그리고… 정하얀 님.” “아… 네.” “제가 직접 안쪽으로 모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검은백조에 오신 것은 처음이신지요.” “그렇습니다.” “응접실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곧바로 분주해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목소리로 이쪽을 안내해 주고 있는 안내인은 무척이나 차분했지만 표정 곳곳에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쪽이 지나갈 때마다 사방에서 인사를 해오는 것은 물론, 어딘가 불편한 점이 있지 않을까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은 확실히 파란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귀빈 대우. ‘허.’ 어째서 나와 정하얀에게 이렇게 극진한 대접을 하는지 대충은 알 수 있었지만,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혹시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 오는 길에 하고 왔습니다.” “그럼 차를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언가 불편하시다면….” “바로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그보다 지혜 씨는 안에 있습니까?” “네. 이미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하얀 님은 따로 안내를 해드려도 되겠는지요.” “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하얀 님께서는 이쪽으로….” “아… 네. 가, 감사합니다.” 당장 정하얀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잠깐 동안 나에게 애원의 표정을 보내는 것도 잠시, 바로 옆방으로 간다는 걸 확인하고서는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안내인 한 명이 고개를 숙이며 방문을 여니 시야에 비치는 것은 단정한 옷을 입고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이지혜. 이쪽을 확인하자마자 슬그머니 입을 열어오는 게 보였다. “그래도 같이 들어오지는 않았네요. 나 참, 하얀 씨까지 데리고 올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모를 수가 있담?”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보다 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나 봐?” “네. 이미 몇 차례 보고도 받았고 파란에서의 일이 마무리되면 이쪽에 올 거라고 말해 뒀으니까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검은백조로 올 생각은 없는 거죠?” “뭐, 미안하지만 그래.” “이럴 줄 알았다니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곧바로 말을 잇는 것이 보였다. “오빠랑 정하얀 그 여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길드가 난리가 났었거든요. 현재 파란의 상황은 망해가기 일보 직전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고… 어디로 이적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저랑 친분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생각해 보면 검은백조로 이적할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으니 지레 설레발 친 거죠, 뭐. 안내인들 바짝 긴장한 표정 봤죠?” “사실 이 정도로 대우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대우받을 만해요. 한 명은 최고의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천재고, 나머지 한 명은 정치와 연금술에 능한 것은 물론, 전설 등급의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인재니까요.” ‘개판이네.’ 파란이 개판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가 율리에나를 얻었다는 것을 이미 이지혜가 알고 있었다는 것은 파란에 있는 놈 중 한 명이 검은백조에 정보를 흘렸다는 소리일 터, 아무리 지금 파란이 망해가기 일보직전의 길드라고는 하지만 보안 상황이 이토록 형편없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제기랄.’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오빠.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니까. 솔직히 오빠라면 이적도 고려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아득바득 파란에 남아 있겠다는 소리는 역시나 현성 씨 때문인 거네요.” “반은 맞아.” “저기요, 오빠.” “왜.” “이거 조금은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데요.” “응.” “내가 김현성도 라이벌에 포함시켜야 할까?” “…….” “혹시나 정말로 제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미리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아무리 오빠가 취향이라고 한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성정체성을 뒤집을 자신은 없으니까요.” “…….” “농담.” “그거 다행이네. 솔직히 지금 자리를 박차고 나갈 뻔했거든.” “그냥 분위기가 너무 딱딱한 것 같아서 농담 한번 해봤어요. 이적하러 온 게 아니면 찾아온 이유는 뻔하겠네요?” “맞아.” “아마 만족하실 거예요. 그럼 일단 자료부터 받으시고… 그건 길드로 가서 천천히 검토해 보시면 되겠네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뒤가 구리지 않은 건 아니더라고요. 주제도 모르고 너무 나대는 건 아닌지 생각하기는 했는데 커넥션이 있는 곳이 확실히 있어요.” “어디?” “일본.” “기대하지도 못했던 게 걸려들었네.” “정확히 말하면 자유 도시 실리아에 있는 대형 길드 야마토예요.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구조대가 린델을 떠난 이후에 1차 접촉, 그 뒤로도 몇 번 이나 접촉했던 것 같았는데 저희가 확인한 건 3차례 정도. 물론 전부 확인할 수는 없었어요. 내용도 정확히는 알지 못하고… 그래도 찾아 놓은 게 있으니 보고서를 보시고 판단하시면 될 것 같네요. 어떻게 써먹을 지는 우리 오빠 재량이니까.”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설호 같은 종류의 인간들은 보통 뒷배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으니까. 이미 자신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모두 마련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을 벌인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구조대가 편성되기 전에 아득바득 가지 않으려고 애쓰던 모습도 이해가 된다. “그림이 뻔하기는 하네. 스스로 활동할 수 없을 지경까지 망가진 파란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린델까지 영향력을 확대시킨다는 건가. 아니면 경제적 원조라고 봐도 되겠네. 늙은이는 그 대가로 꽤나 달콤한 것들을 많이 받아 처먹었을 테고….” “아마 오빠가 생각하시는 게 맞을 거예요. 실리아랑은 교류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이곳에 뿌리를 내리는 게 더 편할 테니까요.” 물론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애초에 자유 도시 실리아와 자유 도시 린델은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였으니까. 두 도시 모두 신성제국 베니고어에서 관리하고 있는 도시, 당연하지만 전력 하락을 고려한 베니고어에서는 린델과 실리아와의 전투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면 종종 부딪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서로를 물어뜯는 앙숙은 아니라는 거다. 실제로 실리아와의 교역은 무척이나 활발해지고 있는 상황. 이런 배경을 생각해 보면 침략이나 침탈 같은 거창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 정보는 써먹을 수 있다. 단순한 협력관계나 원조, 혹은 보호라고는 해도 입을 털기에 따라서는 조금 더 심각한 상황으로 포장할 수 있다. “기껏해야 린델 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니까요. 생각보다 스케일이 더 큰 거죠. 욕심만 많아가지고 지금에서야 말하는 건데 이쪽을 보는 시선이 얼마나 소름끼쳤는지 알아요?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았다고요. 오빠, 오빠 해주니까 얼마나 좋아하던지….” “고생했겠네.” “단순히 고생이라는 말로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니까. 앞에서는 온갖 아양을 떨어야 되고 뒤에 가서는 뭔 짓을 하는지 알아봐야 하고… 오빠 부탁 아니었으면 더러워서 안 했을 거예요. 정말로요.” 확실히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해줬는지 알 수 있었다. 당장 들고 있는 보고서의 두께만 봐도 눈치챌 수 있다. 대충 넘겨보기만 해도 빼곡하게 적혀 있는 정보들은 이설호를 제외한 다른 늙은이들의 일상에 대한 부분까지 서술하고 있었다. 파란에 이지혜 같은 인물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지금 같은 상황으로는 치닫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지만 고마운 것이 당연하다. 슬그머니 눈을 맞춘 뒤에 천천히 입을 여니 평소답지 않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마워, 누나.” “…….” 황급하게 말을 돌리는 것은 물론 이지혜답지 않았다. “뭐, 별거 아니에요. 그리고 지원군 편성 부분에서도 확실히 문제가 있기는 있었어요. 검은백조에 원조 요청이 들어온 것도 원정대가 길을 떠나고 이틀이 지나서야 정식으로 이루어졌죠. 계속해서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것도 그쪽이었어요. 뭐,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해요.” “으으음….” “광장에도 많이 돌아다니기는 했어요. 실속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고개를 젓겠지만 일단 액션은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보였죠. 만약에 정말로 지원군 편성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늦어진 거였다면 그 인간들이 무능의 끝을 달리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네요.” “관련 내용도 전부 적혀 있는 거지?” “물론이죠.” “길드 마스터 쪽은 조금 어떤 것 같아?” “아아. 역시 오빠도 타살 쪽으로 생각하시고 계시는구나.”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으니까.” “글쎄요.” “흐음… 뭘 따로 발견하지 못한 거야?” “제가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어요. 저는 엄연히 외부인인데. 노력해 보지 않은 건 아닌데… 깨끗해요.” “음….” “정말로 깨끗. 그때 당시에 파란에 들어간 인원들이나 이설호의 행적을 봐도 트집 잡을 게 없다니까요. 어쩌면 정말로 자연사일 확률도 생각해 봐야 될 정도로 말이에요. 어차피 파란의 길드 마스터야 오늘 내일 하던 사람이라고 들었으니까 자연사해도 이상하지 않기도 하고… 타이밍이 조금 귀신같기는 하지만, 가능성은 열어둬야 해요.” “끄응.” 실제로 자연사했을 가능성을 떠올리자 조금 머리가 아파왔다. 어차피 뭐가 됐든 이쪽이 일을 꾸며야 하는 것은 변함없다. 그래도 이설호가 실제로 길드 마스터를 죽였다고 가정하는 게 조금 더 편한 것은 당연지사. 물론 지금까지 얻은 정보로도 충분히 이설호를 조질 수 있지만 더욱더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한방이 길드 마스터였고….’ 아쉽지만 증거야 만들면 그만, 슬쩍 이지혜를 바라보자 조용히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마치 칭찬해 달라는 것만 같은 표정을 본 순간, 이지혜가 무슨 안배를 해놨는지 깨닫는 것은 순식간.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어왔다. “이게 뭘까요?” 손 안에 든 것은 아주 작은 물약. “아주 어렵게 구한 물약이에요. 독은 아니랍니다. 오히려 신경안정제라고 볼 수 있겠네요. 조금은 복합적이라 제가 전부 알지는 못했지만 어떤 종류의 환자에게는 꽤나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확인해 봐도 되지?” “아. 이쪽은 전문분야였죠.” 이지혜에게 물약을 건네받은 이후에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하니 그녀의 말 그대로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푸핫.” “이설호의 그 아저씨가 매일 입고 다니는 옷에 조금 발라뒀어요. 구하고 있었던 증거로는 어때요? 시간이 없어서 준비한 건 이것뿐인데….” “아냐. 충분해, 누나” “그것 참 다행이네요, 오빠.” 어떻게 이렇게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이쪽의 생각을 전부 꿰뚫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조금이지만 소름이 끼칠 지경. ‘개 유능해.’ 어째서 자꾸만 상태창이 이지혜와 나를 영혼의 단짝이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103 회귀자 사용설명서 103화 구태세력(4) 단순히 손발이 잘 맞는다는 수준이 아닌 것 느낌.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이지혜가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고유 능력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슬쩍 상태창을 뒤져봤지만 그렇지는 않은 모양, 그냥 생각하는 패턴이 비슷한 것 때문이리라. 이런 종류의 사람은 아군이라면 무척 도움이 되지만 적이 된다면 까다로워진다. 조금 더 이쪽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 살짝 표정을 바꾸니 곧바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그냥 고마워서 그렇지. 솔직히 이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는데… 내 생각보다 더 잘해준 것 같아서.” “처음 맡긴 일인데 열심히 하는 게 당연한 거죠. 이쪽도 그쪽 덕을 톡톡히 봤으니까. 뭐 당연한 거예요. 징그럽게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세요.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으니까.” “…….” “정 보답하고 싶으면 라면이라도 먹고 가시든가.” 그건 불가능하다. “미안. 이쪽도 나름대로 할 일이 있어서. 대신 다른 쪽으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해.” “그것 외에는 딱히 없어요. 일이나 제대로 해결해요.” “물론.” “저번에 한 말 기억하죠, 오빠?” “응.”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 우리 하얀 씨가 불안해하시겠다.” “알겠어. 다시 한번 고마워.” 살짝 방문을 열자 저번과 마찬가지로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정하얀이 보였다. 그 옆에는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하는 검은백조의 안내원들이 보이는 상황. 아무리 옆방에 있었다고는 해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적어도 이 방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칭찬해 주고 싶은 심정. 이전보다는 조금 자제력이 높아진 것이 눈에 보였다. 뭔가 성장한 아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머리를 쓰다듬자 기분이 좋은지 싱긋 웃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머, 하얀 씨.” “아… 네… 지, 지혜 씨.”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지셨다. 던전에서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아? 아? 네….” “기영이 오빠도 좋으시겠네요. 이렇게 예쁜 애인을 둬서.” “아… 그… 고마워요, 지혜 씨.” 이지혜가 이쪽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먼지를 털어내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행동에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진다. 왠지 모르게 자신과 나의 친분을 과시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적당히 선을 지키고 있는 게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두 분 모두 식사라도 하시고 가는 게 어떠세요? 우리 길드 마스터도 한 번 뵙고 싶어 하시던데.” “지금은 조금 상황이 그래서, 나중에라도 시간을 꼭 낼게.”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약속하신 거예요? 하얀 씨랑 오빠 둘 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정하얀과 나에게 입을 열고 있는 이지혜를 보고는 다시 한번 이 여자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정하얀뿐만이 아니라 그 누가 와도 저 여자를 상대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 것도 잠시, 곧바로 이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에는 제가 길드로 한 번 놀러갈게요, 오빠. 하얀 씨도 같이 식사라도 해요.” “네? 네.” “응. 언제 시간을 정하는 게 좋겠네. 그럼 다음에 보자, 지혜야.” 어느 정도 고쳐졌다고 생각했는데도 질투심은 어쩔 수 없는 모양. 손을 흔드는 이지혜에게 눈인사를 대충 하고 방을 빠져나가니 안내원들이 우리를 밖으로 인도했다. 나오는 그 순간까지 이쪽에 계속해서 인사를 해오는 것을 보니 정말로 검은백조에서 우리를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알 것 같은 느낌. ‘그럴 만하지.’ 이지혜의 말대로 언제 어떻게 이적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단언컨대 김현성이 자신의 길드를 꾸릴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 역시 무조건 검은백조로 향했으리라. 그만큼 지금의 파란에는 메리트가 없다. 분명히 나올 때만 해도 해가 떠 있었는데 벌써 어둑해진 밤이다. 조금은 운치가 있다. 내 손을 꽉 잡고 있는 정하얀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해가 지고 있는 린델은 조금 예뻤으니까. 아마도 좋은 분위기라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나 역시 비슷한 기분을 느끼기는 마찬가지. 분명히 평소 같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정하얀이 아름다워 보인다. ‘분위기라는 게 있으니까.’ 그렇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정하얀과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이었다. 우우우웅- ‘뭐야.’ 갑작스레 율리에나가 천천히 울리기 시작한 것.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기도 전에 정하얀이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입을 우물거리고 있지만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아니다. 당연하지만 정하얀이 뭘 하고 있는지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정하얀을 중심으로 미세한 마력이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주문?” 도심 한가운데서 주문을 외울 일은 없다. 혹시라도 분위기에 취해 저주받은 신단 때처럼 엄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닌가에 대해 떠올렸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은 순식간. ‘개….’ 귀를 울리는 굉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앙! “바람의 보호!” 동시에 정하얀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정하얀의 보호막 안에 있어서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폭발의 충격은 고스란히 전해져 와 내부가 흔들렸다. 울컥 튀어나오려는 피를 가까스로 다시 집어넣는다. “제기랄.” “오빠! 이, 이쪽으로! 바람 발걸음!” 폭음을 뒤덮은 뒤로 연기를 헤치고 지나간 것은 당연지사.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폭발의 영향을 받은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아아아아악!” “으아악!” “살려… 살려줘!” 몇몇이 폭발에 휘말렸지만 저들을 신경 쓸 여유는 없다. 내 팔을 잡고 달리기 시작한 정하얀의 표정에 깃든 절박함이 지금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휘말렸는지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뭔가 일이 터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상황. 누군가 우리를 노리고 있다. ‘어째서?’ 갑작스러운 폭탄 테러는 분명히 나와 정하얀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정신이 없기는 하지만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물론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런 짓을 저지른 놈들이 누구인지는 이미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도시 안에서? 제정신인가.’ 내 목숨을 노릴 만한 인간은 린델 내에 한 명밖에 없다. 미친 늙은이 이설호. ‘안일했어.’ 설마 도시 안에서 이런 개짓거리를 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나마 경우는 있는 늙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수라면 실수다. 이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뇌는 없는 모양이다. ‘정말로 제정신인가?’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본인이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 나와 정하얀을 노리고 있는 이들은 이설호가 따로 밑에서 부리는 자들 일 터, 혹은 야마토 길드의 일원일 수도 있다. 어찌 됐건 이쪽이 위협당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 내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정하얀이 내 손을 꼭 잡은 채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하얀아, 이쪽 길이….” “저, 저쪽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어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한두 명이 아니군.’ 상대는 조직적으로 이쪽을 노리고 있다. 첫 폭발 이후에 폭발음이 들려오지는 않았지만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마력은 느껴진다. “바람의 보호!” 화살 한 발이 정하얀의 마법에 가로 막힌다. 일직선으로 달리던 정하얀은 다시 한번 방향을 꺾기 시작, 저 앞에도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마치 우리를 어디론가 몰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에 괜스레 초조해져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날아 들어오는 원거리 공격은 어떻게든 막고 있지만 한계가 온다. 정하얀이 아무리 캐스팅을 빨리 한다고 해도 사방에서 덮쳐오는 공격을 전부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고는 있지만 평범한 보호 마법 말고는 외울 수 있는 주문이 없는 것이 현실, 일단 적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버티면 돼.” “네?” “파란이든 이지혜든 간에 분명히 이쪽으로 올 거다. 도시 안에서 일어난 일이고 폭발음도 들렸으니까 분명히 이쪽으로 올 거야.” “아! 네… 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겠네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율리에나.” 품 안에 있던 검이 공중으로 튀어나간 것은 바로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저 멀리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아악!” 율리에나가 우리의 뒤를 노리던 궁수를 꿰뚫어버린 것. 이쪽을 향해 날아오던 마법은 다시 한번 정하얀이 막아낸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잠깐 동안 정체되어 있던 폭음이 다시금 들려온다. 율리에나가 몇 명을 붙잡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도 상황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도대체 몇 명을 동원했는지, 어디에서 공격이 날아오는 건지, 우리를 노리는 이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되지 않는다. 지금 이곳으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는 이들은 틀림없이 훈련받은 암살자들일 터.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제기랄.’ 쾅! 정신없이 뛰고 있을 때 옆에 있는 벽을 뚫고 나온 기다란 창. “율리에나!” 콰득! 하늘에서 떨어진 검이 나를 향해 날아오던 창을 내려찍는 것이 보였다. 구경할 시간이 있을 리 만무. ‘멈추면 죽어.’ 멈추면 죽는다. “이런 미친놈들….” “제, 제가 지켜드릴게요, 오빠.” “무리하지 마.” 이딴 어처구니없는 일로 목숨을 잃거나 정하얀을 잃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오히려 내가 다치는 한이 있더라도 정하얀을 살려가는 게 맞다. 최악인 것은 숨이 차오르고 있다는 것. 낮은 체력 스탯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워 지는 순간이었다. “오빠!” 멈추려고 하고 있는 발을 계속해서 움직였을 때 들려온 것은 정하얀의 목소리,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자 이쪽으로 다가오는 검이 보였다. “율리에….” 율리에나가 이쪽으로 다가오기도 전에 정하얀이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괜스레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은 기분, 앙증맞은 손이 나를 밀치자 자연스럽게 몸이 기울어진다. 땅바닥에 넘어졌을 때 시야에 비친 것은 가슴에 검이 박힌 채로 나를 감싸는 정하얀.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장면에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길, 제길. 율리에나! 율리에나!” “내 이름….” “율리에나! 제기랄! 율리에나!” “내 이름 불러줘요. 오빠….” “하얀아. 하얀아, 정하얀!” “잠깐만 이대로… 있….” 다시 한번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정하얀의 배로 검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를 꽉 껴안은 채 어떻게든 웅크리며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보호! 보호!” 반지에 내장되어 있는 보호 마법이 발동되지만 형편없이 부서지는 상황. 그 와중에도 정하얀은 몸을 움찔거리며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제기랄… 제기랄! 떨어져!” “싫어….” “저리 안 비켜? 이 멍청한 년아!” “미움… 받았다.” ‘죽어.’ 정하얀이 죽는다고 생각하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 어떻게든 떼어내려고 했지만 껌딱지처럼 이쪽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더욱더 초조해졌다. “바람의 보호….” “바람의 보호고 나발이고 비키라고! 씨발!” ‘죽어.’ 정말로 죽는다. “당장 꺼지라고!” ‘죽어.’ 정하얀이 죽는다. 입술을 꽉 깨물어 계속해서 정하얀을 밀어내지만 그러기에는 역부족, 계속해서 내 몸으로 정하얀의 피가 떨어진다. “제기랄! 제기랄! 비키라고! 이 멍청한 년아!” 거대한 굉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콰아아아아아앙!! 그 뒤로 들려온 것은 익숙하다면 익숙하다고 할 수 있는 목소리. “어이가 없네. 진짜로 어이가 없어. 나를 호구로 보고 있는 새끼들이 린델 내에 많았나 봐?” “…….” “용병여왕의 정부한테 검을 들이밀어?” 우리 앞을 막아선 것은 붉은 머리를 하고 있는 여자였다. # 104 회귀자 사용설명서 104화 구태세력(5) “어이가 없네. 진짜로 어이가 없어. 나를 호구로 보고 있는 새끼들이 린델 내에 많았나 봐?” 우리 앞을 막아선 것은 붉은 머리를 하고 있는 여자였다. ‘차희라.’ “차….” “감히 나를 개무시했다. 이 말이지? 감히.” 습격자들을 막으러 온 것치고는 무척이나 단출한 차림. 마치 시장으로 마실이라도 나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심지어는 무기도 손에 쥐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위협적이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리라. 당장 내가 봐도 몸이 덜덜 떨려올 정도의 기세. 핏발이 선 눈은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당연하지만 내가 습격당했다는 것 자체에 분노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위에 대해 대항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분노한 느낌. 정체모를 인형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그녀를 향해 검을 내지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위험!” 이라는 말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차희라가 허공을 향해 발을 올려 차는 것이 보인다. 콰지지지직! 퍼어어어어엉! ‘저게 뭐야….’ 사람을 발로 차서 낼 수 있는 효과음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눈앞에 펼쳐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는 입을 크게 벌릴 수밖에 없었다. 검을 들고 내려오던 놈의 몸이 완전히 몸이 터져 버린 것. 몸통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발길질 한 번에….’ 나를 구해주고 있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괴물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되고 있으니 안도의 마음이 든 것이 당연하리라. 언젠가 들어놨던 보험에 이런 식으로 목숨을 구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차희라에게 시선이 머물렀던 것도 잠시, 다시 한번 정하얀을 올려다보니 아직까지 몸을 웅크린 채로 나를 보호하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하얀이는… 숨은 쉬고 있나.’ 정하얀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순식간. ‘살아 있어.’ 아주 느리게 뛰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맥박이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지사. 거의 의식이 없다시피 한 정하얀을 밀어내려고 힘을 줘봤지만 여전히 떨어질 생각이 없다. 그야말로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있다. 낑낑대며 정하얀을 들어 올려 눕히자 보이지 않았던 상처들이 시야에 비친다. 단순히 검에 맞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등에 꽂혀 있는 화살이나 마법에 당한 흔적,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제길….’ 고통스럽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를 막아줬다는 사실에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하리라. “멍청한 년이….” ‘어떻게 하지?’ 지금 당장 사제를 찾으러 신전으로 향할 수는 없다. ‘그사이에 죽을 거야.’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응급처치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정하얀의 손에 끼워져 있는 치유의 반지. 황급히 반지를 빼내려고 손을 뻗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는지 작은 손을 꼬옥 쥐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의식은 가지고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신호다. 정하얀의 손을 다시 제대로 펴 이쪽의 손으로 옮기는 것은 순식간. 곧바로 반지에 마력을 밀어 넣은 이후에 주문을 외우자 하얀 빛이 정하얀을 감싸는 것이 보인다. “치유.” “…….” 그래봤자 하급 치유지만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은….’ 품에 있는 포션. 양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질이 좋은 물건이다. 입으로 포션의 마개를 따 정하얀의 상처 부위에 뿌린 이후 곧바로 포션을 입 안에 머금었다. 정하얀의 턱을 붙잡고 그대로 포션을 밀어 넣자 움찔거리는 손이 시야에 들어온다. ‘효과가 있어.’ 아직은 고비다. 어처구니없게도 정하얀의 혀가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았어.’ 틀림없이 살았다. 왜 혀를 움직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순식간에 긴장이 턱하고 풀리는 것이 당연지사. 입을 떼내자 숨소리가 한결 나아진 모습이 보인다. 괜스레 시야가 흐려진다. 동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어린애처럼 질질 짜지는 않았지만 뚝뚝 떨어지는 눈물, 죽을 뻔했다는 생각에 손과 발이 덜덜 떨려온 것은 물론 괜스레 호흡도 가빠진다. 대충 눈물을 닦아내며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자 아까의 상황이 더욱 자세하게 눈에 들어왔다. 암살자들과 드잡이를 하고 있는 차희라. 사실 드잡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였다. 조금 맛이 간 것 같은 그녀의 움직임에 팔다리가 찢겨지거나 터져 나가는 이들이 대다수였으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무리가 아니리라. 물론, 그중에서도 실력이 있는 이들이 있는지 차희라와 몸을 부딪치고 있었지만 그들이 수세에 물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어디까지나 우위는 이쪽에 있다. 아마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이후에는 린델에 있는 다른 길드 쪽에서도 지원이 올 것이 틀림없다. 조금은 안심하고 있었을 때, 순간적으로 흙먼지를 헤치며 이쪽에 검을 들고 오는 암살자가 다시 한번 눈에 들어왔다. 살짝 움찔했지만 굳이 피하지는 않는다. 녀석이 이곳으로 검을 뽑기도 전에 목이 베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며 녀석의 목과 몸이 분리되고 반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내리 꽂힌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현성 씨, 그것보다는 하얀이를….” “희영 씨도 함께 오셨습니다.” “아….” 김현성의 말대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방패를 들고 있는 박덕구의 뒤에 숨어 이쪽으로 다가오는 선희영이 보였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주변에 점점 몰려들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붉은용병과 검은백조. 짧은 시간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 누님….” 이쪽으로 오자마자 박덕구는 정하얀의 얼굴을 매만지며 눈물을 쏟기 시작, 선희영 역시 계속해서 신성력을 밀어 넣는 것이 보였다. 단순히 고위 신성력을 때려 박는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진료를 하는 것처럼 보여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하얀 씨의 상태는 조금 어떻습니까?” “조금만 늦었어도 죽었을 거예요. 기영 씨가 응급처치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그나마 다행이로군요.” “…….” “누굽니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얀이와 검은백조에 들렸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고 이쪽을 노리는 것으로 추정되는 암살자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차희라 님이 도움을 주신 게 전부입니다.” “그렇군요.” 김현성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차가운 눈에 나도 모르게 등 뒤가 서늘해진다. 지금까지 보여준 반응 중에 가장 격정적이었다. 어쩌면 김현성이 1회 차에 비슷한 경험을 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가능성이 들긴 들었지만 일단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니들은 다 뒤졌다, 이 새끼들아.’ 나와 정하얀을 습격했던 이들에게 승산 따위는 없다는 것. 암살의 성공 여부를 떠나 자신들의 목숨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게 되리라. 당연하지만 전황은 계속해서 바뀌고 있다. 아니, 사실 전황이라고 볼 수도 없다. 정확한 숫자를 파악할 수 없는 다수의 암살자들이 이쪽을 노린 것에 불과했으니까. 차희라는 그야말로 암살자들을 두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있었고,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는 붉은용병이 주변을 포위하며 망을 좁혀오는 상황. 저들이 등을 돌리며 도망치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예, 마스터.” 차희라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김현성 역시 가장 가까운 곳으로 튀어나가기 시작, 서둘러 도망치는 암살자를 쫒는 것이다. 사태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최소한 이 근처에는 더 이상 남은 암살자가 없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차희라 역시 천천히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였다. 물론 도착한 길드의 간부들을 모두 대동하고 말이다. 대충 보기에도 심기가 불편한 것 같은 표정, 눈치를 보고 있는 붉은용병의 간부들도 시야에 들어왔다. “끄응… 몇 명은 살려뒀어야 됐는데….” “어차피 전부 죽었을 겁니다. 모두 독약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팔다리가 잘려나가거나 상처가 큰 이들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아아아… 다행이라고 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습관은 고쳐야 되는데 말야. 상대가 누군지는 파악했어?” “현재 파악 중에 있습니다. 검은백조에서도 협력 요청을….” “아. 그 분야는 그쪽이 특기니까 몇 명 빼고 전부다 넘겨버려. 아마 우리가 하루 종일 조지는 것보다는 성과가 나올 거야.” “네.” “뒷정리하는 거 있지 말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린델 내에 있는 잡것들이 빠져나갔다는 소리가 들려오면 너희도 전부 뒈질 테니까 알아서 해.” “네.” “아니 그전에….” “죄송합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는 알고 있지?” “죄송합니다.” “우리 그이가 습격당하고 있는 장면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줄이야, 상상도 못 했네.” “…….” “그것도 린델 내에서… 요즘 길드가 많이 편한가 봐? 응? 아니면 쟤들처럼 너희도 나를 바보로 보는 건가? 원정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됐다고 기합이 빠진 건 아니지?” “그, 그건….” “시키는 것만 하는 머저리들은 필요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을 거야.” “네….” “나는 두 번 말 안 해. 다시 한번 이런 장면이 내 눈에 띄면… 그 날이 너희 전부 다 뒈질테니 알아서 해.” “가슴 속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좋아.” 대화 내용이 들려올 때마다 왠지 모르게 민망해진다. 차희라에게 꾸지람을 받고 있는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며 이상한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고 새로운 다짐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주변에 있는 다른 녀석들 역시 정체모를 꾸지람에 고개를 숙이기 바쁜 상황. 괜스레 조금 부담스러웠다. 몸에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차희라의 모습은 영웅보다는 악마 같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색 덩어리들이 몸 전체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들을 툭툭 털어내는 모습이다. 이쪽이 먼저 입을 열어오기도 전에 차희라가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자기, 몸은 괜찮지?” 존대를 해야 할지 반말을 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지만 역시 반말이 조금 더 편하다. “고마워, 희라 누나.” 마치 귀여운 인형이라도 보는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은 이후 이쪽을 꽉 껴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가관. 순식간에 피 냄새가 코끝으로 흘러들어왔다. “아니, 아니, 우리 자기가 다쳤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지. 생각보다 원한 살 곳이 많았나 봐? 아니지 이럴 게 아니지. 저쪽에 들어가서 이야기라도 좀 나눠봤으면 좋겠는데….” “아….” “형진아!” “예, 마스터.” “여기 무너진 건물을 중심으로 반경 50미터 밖으로 떨어져서 길드원들 대기시켜. 그리고… 저기 보이는 우리 자기 세컨드는 일단 길드로 데려가서 치료해 주고, 흉터는 최대한 남지 않게. 여자 몸은 소중하니까.” 그걸 아는 양반이 그 누구보다 몸을 험하게 굴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슬쩍 정하얀을 바라보자 새근새근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계속해서 선희영이 신경을 써주고 있다. 사실은 함께 가서 상태를 지켜보고 싶기는 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선 차희라와 함께 있는 것이 맞다. “희영 씨.”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일단은 안정권에 들어가 있는 상태니까요. 의식을 회복하기까진 조금 걸리겠지만 신체의 회복은 맡겨주셔도 돼요.” “그렇다고 하는데… 일단은 들어가지, 자기. 보는 눈도 많은데 세컨드한테 신경을 너무 많이 쓰면 본처로서 조금 자존심 상하니까. 물론 다쳤다는 걸 참작해도… 자기도 내가 질투심이 많은 건 알고 있잖아.” “아… 응. 미안, 누나.” 발걸음을 옮긴 곳은 무너져 내리는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차희라가 입을 열었다. “이제 빨리 우리 자기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는데….” “설명하자면 조금 깁니다.” “말 편하게 해도 돼.”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희라 누나.” “아무튼 간에 고생했어. 나도 설마 도시 안에서 이런 미친 짓을 벌이는 놈이 있을지는 생각 못 했거든. 그것도 내가 있는데 말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도 자존심에 조금 상처를 입은 상태야. 무슨 말인지 알지?” “물론.” “이번에 새로 얻었다는 전설 아이템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과하고… 애초에 주인 의식을 마친 아이템은 주인을 죽인다고 해도 사용할 수 없을 거라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정확히 어디 사는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싶은데….”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순식간. 아마도 이설호의 존재에 대해서 입을 연다면 어느 순간 쥐도 새로 모르게 늙은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 쉬워.’ 짜증 나는 늙은이에게는 너무 쉬운 죽음이며 결말이다. 화가 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다. 나 역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을 정도, 이럴 때 일수록 머리를 조금 더 차갑게 해야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가 않았다. 이설호를 차희라에게 넘기고 싶지 않다. 그게 솔직한 본심이다. 그렇지만. ‘거짓말은 안 돼.’ 그건 하책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 길드의 이설호.” “아아아. 이설호… 그래. 이설호란 말이지.” “이쪽이 조금 신경을 거슬리게 했거든. 우리 길드 마스터가 죽었다는 소식은 알고 있지, 누나?” “도시로 되돌아오자마자 처음 들었던 소식이 그거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영감이 우리 길드 마스터를 죽였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거든. 그것 외에도 얽힌 게 무척이나 많은데 그것까지는 전부 설명하기 힘들어. 추가로 부탁하는 거지만 이설호한테는 손을 대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 조금 표정이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자기.” “응.” “자기 입장이 갑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조용히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조금 화가 나 있는 상태라는 것도 알고 있을 테고… 지금 당장 그 새끼를 이쪽으로 데리고 오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정도라 이 말이야.” “…….” “솔직히 이야기할게. 난 네가 마음에 들어. 여건만 되면 하루 종일 서로를 탐구하는 시간을 가져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그래도 있잖아. 아무리 자기라고 해도 내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 되지.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대충 알겠어. 당한 걸 갚아주고 싶은 것도 물론 이해되고. 만약에 너한테 그 영감을 넘기면 내 상처 입은 마음은 어디 가서 풀어야 될까. 응?” 이런 소리를 해올 거라는 것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던 부분. 다시 한번 똑바로 차희라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야마토 길드.” 히죽이는 차희라의 얼굴이 보였다. “넌 정말 너무 마음에 드는 쓰레기야.” # 105 회귀자 사용설명서 105화 선동과 날조(1) “넌 정말 너무 마음에 드는 쓰레기야.” “…….” 계속해서 히죽거리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설호와 야마토가 커넥션이 있었나 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네.” “아직 이거다 할 정도로 확실한 건 없어, 누나. 그래도 영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는 거지. 설사 그 늙은 영감이 나를 죽이고 싶어 한들, 린델 내에 있는 길드나 집단이 누나를 무시할 수 있겠어?” “우리 귀여운 자기, 아부 떠는 거야?” 아부 떠는 게 맞다. “반 정도는….” “솔직해서 좋네. 조금 더 해봐.” “린델 내에서 누나의 눈치를 안 보는 사람은 없어. 외부의 미친놈들이 방아쇠를 당겼다고 생각하는 게 맞지. 혹여나 걸린다고 해도 이후의 일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집단일 거라는 게 합리적인 판단,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은 쪽을 골랐을 뿐이야.” “이해가 되네. 야마토… 생각해 보니 그 재수 없는 년이 길드 마스터로 있는 곳이었지.” “만난 적이 있어?” “대형 길드의 마스터들은 정기적으로 한 번씩 모이게 되어 있어. 신성제국의 주최로 말이지. 꽤나 자주 마주쳤거든… 뭐, 아무튼 우리 자기가 그렇게 말해주면 조금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신성제국 내 길드들 간의 싸움은 금지되어 있는 건 알고 있지? 방법은 알아서 생각하겠다고 믿을게.” “…….” “이만 가봐. 자기도 바쁘니까. 우리 길드원들이 데려다 줄 거야.” “응, 희라 누나.” “저번에 보내준 명단은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어. 아. 그리고 정하얀은….” “조금만 붉은용병에 맡길게.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만.”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자기.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기는 한데… 표정을 보니 그건 안 될 것 같네.” “응.” “그럼 나중에 또 봐. 다음에는 조금 더 로맨틱한 장소에서 만났으면 좋겠네.” “그렇게 하자, 누나.” 손을 흔드는 차희라의 모습에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밖으로 나가자 곧바로 이쪽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붉은용병.’ 아까 차희라에게 혼난 것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먼저 이쪽으로 달려들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무척이나 긴장하는 표정과 떨리는 얼굴, 잘 보이는 것은 물론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감정이 느껴져 조금은 재미있었다. 이런 강자들이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 이기영 님.” “네.” “길드까지 모셔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거절할 이유는 없다. 사실 이미 이 주변은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는 상태로 보였지만 혹시 나 남아 있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가능성은 낮지만.’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 좋다. 박덕구와 정하얀 그리고 선희영은 붉은용병에 잠깐 이동해 있는 상태. 김현성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어쩌면 녀석은 습격자의 배후를 캐내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바쁘니까.’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이 늙은이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비참하게 해치우는 방법일까. 혹은 어떻게 죽이는 것이 좋을까에 대한 이야기. 계획을 일부 수정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최대한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싶은 만큼 그때의 상황에 맞춰 임기응변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보였다. ‘동요하지 말고.’ 흥분했다는 걸 보여주는 순간 싸움은 진거나 다름없다. 힘들 때 웃는 게 일류라는 명언은 개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입꼬리를 올리는 게 더 잘 어울린다. “여기까지면 충분합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곧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혹여나 길드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아.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아무래도 저희 길드니까요.” 슬쩍 운을 띄어 봤지만 별 다른 효과는 없는 느낌. 심지어 주머니에서 뭔가를 뒤적뒤적 꺼내며 공손히 건네는 모습 역시 시야에 비쳤다. “그리고 이것을….” “네?” “필요하실 때 언제든지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한 물건입니다.” 슬쩍 눈앞에 남자를 바라보자 무언가 엄청난 열망이 깃든 눈동자가 느껴진다. 아무래도 용병여왕에게 받은 꾸지람에 다른 마음이라도 굳게 먹은 모양. 어쩌면 나를 위한 전담팀이 구성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대해 떠올리자 조금 더 황당해지기 시작했다. ‘안전한 건 좋지만….’ 이쪽이 행동하는 데 제약이 많아지면 오히려 귀찮아진다. 이 건은 이후에 차희라에게 말을 해두는 것이 좋으리라. 살짝 고개를 숙인 이후에 곧바로 길드로 진입하니 무척이나 어수선한 내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미 상황이 끝났기 때문에 다들 방금 길드로 돌아온 듯한 눈치. 이미 린델 내에 있는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마무리됐다는 반증이었다. ‘내가 차희라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말이지….’ 확실히 대처가 빠르다. 아마도 곧 린델의 모든 길드 마스터들이 모이는 회의 같은 게 열릴지도 모른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나 하나를 노린 테러였지만 실행된 장소가 문제였으니까. 물론 누가 그랬는지에 대한 증거를 찾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목소리는 커지게 되리라. 이미 언론사에서는 이번 습격에 대해서 대서특필을 할 것이 분명, 지금 당장 여러 정보를 주지 못한 게 후회되지만 굳이 언론을 이용할 필요도 없다. 길드의 내부에 들어온 뒤에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몇몇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우리 파티원이라고는 김예리밖에 없는 상황.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는 내게 더 친근감을 느끼는 모양인지 반가운 얼굴이 감돌고 있었다. 이상희 같은 경우에도 눈이 퉁퉁 부어 있는 얼굴로 화들짝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황정연도 마찬가지였다. “기영 씨! 어디 다치신 곳은?” “몸은 괜찮습니다, 이상희 님.” “정, 정말로 다행입니다. 아… 그, 하얀 씨가 다쳤다는 이야기는….” “일단 고비는 넘겼습니다. 물론 후유증이 조금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더군요. 너무나도 정신이 없었던 터라 일단 붉은용병에게 맡겼습니다. 덕구와 희영 씨도 하얀이의 상태를 보기 위해 함께 붉은용병으로 향했습니다. 현성 씨 같은 경우에는 이제 곧 돌아오겠군요.” “아….” “아무래도 이곳보다는 그곳이 조금 더 안전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뼈가 있는 말. 굳이 이상희를 저격한 발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표정이 침울해진다. 물론 그런 이상희보다 더욱더 내 시선을 잡아 끈 것은 이설호와 그 똘마니들. 이설호야 무척이나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확실히 똘마니들은 표정 관리하는 것이 서툰지 왠지 모르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 놈이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왔다. 어쩌면 지금쯤 자신들의 멍청했던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잡아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놈들도 분명히 있겠지만 일단 이쪽이 습격당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공격의 우선권은 나한테 있다. ‘멍청한 새끼들.’ 무능의 끝을 달리는 인간들. 백번 양보해서 이설호를 비롯한 똘마니들이 아무런 죄가 없다고 해도 이런 놈들과 함께할 수는 없다. 어떤 방식으로도 이들은 길드를 좀 먹는 자들이다. 살짝 입을 다물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어오는 이설호가 다시 한번 시야에 비쳤다. “허허허. 이것 참 정말로 불행 중 다행입니다. 정신없는 테러 속에서도 목숨을 구한 게 어디입니까.” ‘미친 늙은이.’ 확실히 사람 속을 박박 긁는 재주는 있다. “혹시라도 폭발의 여파가 몸에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검사라도 한 번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기영 씨.” “괜찮습니다.” “참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그런 폭발에 휘말리다니요. 정체를 알 수 없는 폭도들에게 둘러싸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어찌나 가슴이 철렁하던지… 정말로 걱정했습니다. 안 그래도 많은 인원을 잃은 상황에서 파란의 새로운 인재를 잃는다는 건… 정말로 가슴 아픈 일이지요.” 진심 어린 걱정을 보내는 사람치고는 말투가 그리 진정성 있어 보이진 않다. “최근에 악재가 겹친 것 같아 이 늙은이도 불안하기만 합니다.” “…….” 그 와중에도 어물쩡 이 상황을 수습하려는 꼬라지가 가관이다. 어디서부터 운을 띄울까 고민하는 것도 잠시, 보는 것만으로도 욕지기가 올라오는 늙은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자 입술을 꽉 깨무는 놈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단순한 폭도들이 아닙니다.” “…….” “아마 이후에 다들 듣게 되실 겁니다. 린델 내에서 일어난 일은 묻지마 테러가 아니었습니다. 습격 역시 폭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잘 훈련된 암살자들이었죠. 틀림없이 저와 하얀이를 함께 노리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아마 기영 씨가 가지고 있는 전설 등급의 아이템 때문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이상희 님.” ‘푸핫.’ 물론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리 주인 의식을 치룬 아이템이라고 해도 전설 등급의 아이템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 어쩌면 주인 의식을 치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대해서도 떠올려 본다면 욕심에 눈이 먼 미친놈들이 이런 짓을 벌였다고 해도 고개가 끄덕여지기는 한다. 그렇지만. “아,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아….” “제가 전설 등급의 아이템을 얻었다는 건 어디까지나 파란의 길드원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물론 주인 의식을 치렀다는 것도 알려진 일이기도 하고요. 누가 정보를 흘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주인이 있는 아이템을 노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용병여왕이라는 적을 만들면서까지 말입니다.” “정보가….” 길드 내에서만 공유해야 하는 정보가 빠져나갔다는 것에 대해 충격 받았다는 표정이 보인다. ‘순진한 아가씨야.’ 파란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이미 예전에 깨끗했던 그곳과는 거리가 멀다. “제가 습격당한 이유는 아마 제 호기심 때문일 겁니다.” “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굉장히 조심스럽지만 사실 저는 길드 마스터에 대한 죽음에 의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 “물론 저희 길드 마스터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전에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 가는 것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이설호의 표정이 보였다. ‘네가 아니구나.’ 어쩌면 정말 이설호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습격당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설호의 자존심, 혹은 길드를 일본에 팔아넘기려는 결론에 도달하려고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설호는 우리 모두가 저주받은 신단을 클리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어차피 길드 마스터는 죽는 것이 확정된 상황. 생각해 보니 굳이 이설호가 길드 마스터를 살해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이해가 가긴 한다. 물론 일 처리를 조금 빠르게 하고 싶다거나, 개인적인 이유가 있어 살인를 저질렀을 수도 있겠지만…. ‘자연사일 가능성이 커지네….’ 저 표정이 연기가 아니라면 말이다. 사실 진실이 뭐든 간에 이쪽과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 오히려 상황이 조금 재미있어졌다. 내 입장에서도 누명을 씌우는 쪽이 조금 달콤하게 느껴지니까. “타살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길드 마스터가 숨을 거두던 그 순간에는 방에 아무도 없었고 저희가 원정을 나갔을 당시, 남아 있던 길드원은 타살에 대한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요.” “무슨 소리를….” 개소리다. “사실 외부에서의 적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저희가 원정을 떠난 뒤에 일어난 일에 대한 내부 정보가 없어.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었죠.” “…….” “결과는 보시는 대로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저는 몇 가지 단서를 얻을 수 있었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와중에 습격을 받았습니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누군가로부터 말입니다.” 정말로 개소리라고 하는 편이 어울린다. 사실은 조금 더 치밀하게 접근하는 게 맞다. 만들어 놓은 증거와 물증과 심증은 많았지만 퍼즐을 맞출 시간은 확실히 부족했다. 길드 마스터의 시신을 부검하는 시간도 있어야 했고 조금 더 치밀하게 이설호를 구석으로 몰아넣었어야 했다. 그렇지만 상황이 크게 변했다. 왜? 내가 습격당했으니까.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흩어져 완성할 수 없었던 퍼즐을 맞추는 데 도움이 되는 틀을 얻을 수 있다. 살짝 코를 막는 것은 당연지사. 천천히 입을 여니 똥이라도 씹어 먹은 것 같은 이설호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아무래도 말입니다, 이상희 님. 파란에 역겨운 배신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길드 마스터를 살해한 범인이 말입니다.”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건 진실이 아니다. ‘선동과 날조지.’ # 106 회귀자 사용설명서 106화 선동과 날조(2) “아무래도 말입니다, 이상희 님. 파란에 역겨운 배신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길드 마스터를 살해한 범인이 말입니다.” 말을 마친 이후에 주변을 둘러보자 묘하게 침묵에 휩싸인 장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이상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고, 애초에 이쪽과 이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황정연은 고개를 끄덕이는 중. 이 일과 상관이 없는 이들은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고 이설호와 늙은이들의 표정은 구겨져 있다. 길드 마스터를 살해한 범인이 자신들이 아니라고 한들, 역겨운 배신자라는 소리는 귀를 뚫고 뇌리에 울려 퍼지고 있을 것이다. ‘이건 사실이니까.’ 당연하지만 이런 종류의 작업은 선동과 날조로만 이뤄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메인으로 깔고 가는 것은 당연히 진실. 날조는 그 위의 조미료 역할을 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굳이 예를 들자면 조미료의 맛이 조금 세다는 것뿐이지만 진실과 섞인 거짓말을 놀라울 정도의 설득력을 얻는다. 나는 똑똑하지 않다. 말을 그렇게 잘하는 것도 아니다. 마음의 눈으로 상대방의 성향을 읽을 수 있다는 것으로 대략적인 성격을 파악하고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 이야기를 만든다. 아마 상대방의 성향을 알지 못했다면 제대로 된 시나리오가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상당 부분을 능력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 진짜 제대로 된 천재였다면 나같이 머리를 많이 굴리지 않았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설레발을 치는 늙은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괜한 분란을 조장하려고 하는 건… 조, 조금 시기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기영 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지금은 이런 이야기보다는 일어날 일을 수습하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이상희 님, 일단은 자리로 돌아가서….” “아뇨. 끝까지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들어보겠습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이상희는 우리 편이다. 그녀도 바보는 아니다. 저들의 태도에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원군이 빠르게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부터 원정에 빠지고 싶어 했던 점까지. 몇 번쯤은 의심하고 있었으리라. 당연히 그녀의 의심을 막아주는 방패막이 되어 줬던 것은 저들과 쌓아올린 정이다. 아주 예전부터 함께 했다는 정이 뿌리내린 의심을 키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과 비료를 신나게 먹이면 돼.’ 내가 해야 할 일은 이상희에게 물을 주는 일밖에 없다. “일부 기득권들은 행동 패턴은 단순 합니다. 본인들이 가진 것들을 빼앗긴다고 생각되면 게거품을 물고 물불을 가리지 않죠. 그리고 파란에도 그런 종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누구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계속해서 시선을 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말로는 하고 있지 않았지만 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아마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설호야.’ 본래 대놓고 적의를 보내고 있는 쪽보다 살살 긁으며 이죽거리는 쪽이 더 미운 법. 다른 건 몰라도 도발하는 것 하나는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다. 이쪽의 얼굴을 바라보는 이설호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상상이 조금 과하십니다. 허허.” “우리 설호 씨는 아마 예전과 달라진 현실이 무척이나 가슴 아프게 다가왔을 겁니다. 영광스러운 파란의 과거를 함께 했던 초창기 멤버이자 길드에 많은 공을 세운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니 지금의 파란이 성에 차지 않을 수밖에요.” “…….” “자신의 미래와 길드를 위해서라도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를 테면 타 길드의 도움을 받는 일이라든지… 어떠면 누군가한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막 들어온 신입이 린델 내의 대형 길드와의 동맹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으니 초조한 것도 이해가 갑니다.” “무슨.” “끌어들이려는 상대가 타 도시에 있는 대형 길드라는 건 이미 한물 간 무능한 영감이나 할 수 있는 발상이기는 하지만 노력은 높게 쳐주도록 하겠습니다. 6점 드리도록 하죠.” 계속해서 이죽거리며 살짝 마력을 움직이자 이지혜에게 받은 보고서가 한 장씩 길드 안을 휘젓기 시작했다. 빔 프로젝터라도 두고 이후에 프레젠테이션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천천히 공중을 떠다니는 종이에 적혀 있는 내용을 읽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자유 도시 실비아의 일본인들과 결탁하고 있다는 정보는 이미 확정된 사안이다. 언제 몇 시 몇 분에 어떻게 만났다는 사실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단순히 세 차례의 만남이었지만 이 자료는 틀림없이 진실이다. “이런 자료를 어떻…….” “평소에도 의심이 조금 많은 성격이라 이것저것 대비하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날조된 정보입니다, 이상희 님.” “날조된 정보인지 아닌지는 어차피 밝혀지게 될 겁니다. 저를 습격한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7번 대 파티장이신 현성 씨와 검은백조 길드가 최선을 다해 노력해 주고 계시니까요.” “애초에 당신을 습격한 사람과 우리는 관련이 없습니다! 기영 씨, 화가 나신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상황이지만 이런 날조된 자료를 가지고 괜한 사람을 모함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뭘 믿고 자꾸 날조된 자료라고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자신 있어?” “무슨 소리를….” “이 자료가 진실이 아니라는 자신 있냐고. 진실은 어차피 까면 전부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 멍청하고 무능한 인간들아. 백번 양보해서 너희가 일본 길드를 만난 게 아니라고 해도 비어 있는 스케줄들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들이 야마토 길드와 실제로 만남을 가졌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아마 그 누구보다 저들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계속해서 부정해 주는 편이 좋다. 그게 이쪽에 더 유리하니까. 아무리 만났다는 사실을 은폐했다고 한들, 하나부터 열까지 털기 시작하면 증거는 나오게 되어 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신나는 것은 이쪽. 사실은 조금 더 부정해줬으면 싶었다. 이설호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들을 만난 것은 사실입니다, 이상희 님.” ‘…….’ “그렇지만 맹세컨대 길드 마스터의 죽음과 이번 습격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지랄.’ 선동과 날조만 나만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 저들 역시 진실에 섞어 교모하게 거짓을 보태고 있다. 길드 마스터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 없다는 것은 진실. 습격에 대해 하는 게 없다는 것은 날조다. 일부는 끌어안고 일부에 대해서는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마 길드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같은 뻔한 소리를 해오리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목소리가 곧바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길드에 보탬이 되고 싶었던 것 뿐입니다.” “…….” “파란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혹시라도 이상희 님께서 돌아오시지 못할 상황을 생각해야만 했었습니다. 길드 마스터께서 지켜온 파란을 보존키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했습니다. 모두다 파란을 위해서였습니다.” “그 사실을 제가 사전에 몰랐어야 할 이유가 있었나요?” “그저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입니다. 길드 마스터와 제가 함께 꾸린 길드입니다. 파란에 대한 애정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습니다. 길드 마스터를 죽였다니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상희 님.” “닥… 닥치세요.” “이상희 님.” “그 입 다물라고… 이설호.” 시도는 좋았지만 효과는 미비했다. 지금 물과 비료를 뿌려주고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 이설호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 의심의 싹을 가로막는 벽은 없다. 이설호의 차선책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봤자 차선책에 불과, 저들이 타 길드와 내통을 한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말 하나는 청산유수네, 미친 영감들이… 파란을 위하기는 개뿔. 집단의 최고 권위자가 모르게 타 집단과 결탁하는 것을 내통이라고 부르는 거야, 이 무능한 인간들아. 설마 하니 내통하고 있다는 걸 이렇게 당당하게 밝힐 줄이야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내통이라니! 어디서 그런 망발을! 그저 대책을 세우고 있었을 뿐이다! 린델 내에서 구조대를 구성하기가 쉽지가 않아 어쩔 수 없이 외부의 세력에 도움을 청했던 것을 내통이라고 하다니! 분란을 조장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본 논리의 개소리를 펼쳐주시고 있는데. 이봐요. 할저씨들. 본래 나라나 집단을 망하게 하는 놈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꼭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이더라고…. 다들 왜 이렇게 창의성이 없나 몰라. 분란을 조장하는 건 너희 미친 영감탱이 들이지. 우리가 아니야.” “전부 다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이상희 님. 암. 그렇고말고요.” “말씀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애초에 지금까지 숨기고 있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애초에 저들은 구조대를 구성해 저희 쪽으로 보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완벽하게 일을 진행시키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상희 님.” “그게 사실이라면 하늘을 꿰뚫을 무능함이로군요. 일주일이 넘도록 구조대 하나도 제대로 편성하지 못한 게 무슨 자랑이라고 떠드는지… 푸핫. 그리고 애초에 사실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이설호 님. 의도적으로 편성 시기를 늦춘 사실은 검은백조가 광장에 있는 이들을 통해 조사를 마친 상태입니다.” “무슨 개소리를!” “개소리는 네가 지껄이고 있지! 미친 영감탱이야! 애초에 저주받은 신단에 기를 쓰고 가지 않으려고 한 것도 수색대가 전멸하기를 바라고 있어서 한 행동 아니야? 이상희 님, 이 역겨운 배신자는 저희가 전멸한 이후에 파란을 자기 손에 넣고 굴리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파란에 남아 있는 길드 마스터 역시 표적이었을 겁니다.” “어이없는 소리 지껄이지 마라! 네가 뭘 안다는 거냐! 길드 마스터와 내가 얼마나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친 동생 같은 사람이었고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 내 손으로 주승준을 해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본래 살인 사건이라는 게 전부 욕심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잖아?” “이건 모함입니다! 신께 맹세코 저는 길드 마스터를 해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 그러시겠죠. 해한 적이 없으시겠죠, 우리 이설호 님. 그럼 이건 뭘까?” 꺼내든 것은 이지혜에게 받아온 물약이다. 다시 한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무슨….” “연기력 하나는 정말로 발군이네. 우리 이설호 님… 이게 뭔지는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잖아. 응?” 계속해서 이죽거리며 물약이 든 병을 찰랑찰랑 흔들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애초에 나를 죽이려고 한 것도 전부 이것 때문이었잖아. 이 영감탱이야.”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이상희 님! 이건 모함입니다! 저는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저 퇴물의 말이 모함입니다, 이상희 님. 이 물약은 이설호가 길드 마스터를 살해할 당시에 사용했던 물약입니다. 신경안정제의 한 종류로써 인체에 도움을 주는 종류의 약이기는 하지만 일부 사람에게는 꽤나 치명적으로 작용합니다. 죽음에 가까워진 이들을 천천히 죽이는 물약이지요.” “저런 것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습니다! 이놈이 감히! 어디서 나를 모함하려고 드는 것이냐!” “일반인은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물약들은 간혹 흔적을 남기고는 합니다. 마개를 열었을 때 공기 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입자들이 모직에 달라붙게 됩니다. 이설호가 입고 있는 옷에 성분을 검출하면 금방 답이 나올 겁니다. 아니, 굳이 성분을 검출할 필요도 없습니다.” 천천히 주문을 외우자 손에 들려 있는 물약이 천천히 빛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이설호의 옷 역시 곳곳에 빛에 휩싸이기 시작. 살짝 황정연을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볼 수 있었다. 지금 내가 건 마법에 어떤 조작도 없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우리 이설호 님이 입고 있는 옷에 이 물약과 똑같은 성분이 검출되고 있는지는 모르겠군요.” “모, 모함입니다! 이상희 님! 이건 모함입니다! 저는 절대로 길드 마스터의 죽음과 관련이 없습니다! 제가 어째서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꽤나 당황하고 있는 모습은 무척이나 가관이다. 이설호뿐만이 아니다. 옆쪽에 있는 늙은이들도 계속해서 이상희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는 않지만 저런 범죄자들의 변명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모함은 무슨… 이 역겹고 무능한 인간들. 아주 악질적입니다, 이상희 님. 주승준 님은 아마 무척이나 고통스럽게 죽어갔을 겁니다. 계속해서 의식의 끈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 말이죠.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까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히 그런 개소리를! 아직도! 상희야! 이 삼촌의 말을 믿어다오. 저 더러운 연금술사가 하는 말은 전부가 거짓부렁이다.” 이제는 정에 호소하고 있다. 그 모습은 꽤나 가관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너와 승준이를 항상 친 가족처럼 여기며 살아왔다. 가족이 없는 이곳에서 너희들은 내 가족이었어. 나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다.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저 연금술사가 하는 말은 전부 거짓말이다. 정연아! 너도 뭐라고 좀… 여러분, 이건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거짓말 같은 소리 하네.” 이설호를 사용하는 방법은 무척이나 간단. 만약 누군가 내게 이설호를 사용하는 설명서를 적어달라고 이야기 하면 나는 이렇게 기술할 것이다. 무능하고, 욕심이 많으며, 다혈질이다. 계속해서 입꼬리를 올리자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점점 붉어진다. “어차피 진실은 전부 드러나게 되어 있어.” “이놈….” “길드의 경비들은 당장 저 미친 늙은이를….” “이노옴!! 네가 감히! 네놈이 문제였다! 네놈이 문제였어! 네놈이 이 길드의 암 덩어리인 게야!” “누구보고 암 덩어리라도 하는지 모르겠는데 누가 봐도 이 길드에서 무능한 인간은 당신이야. 아니, 애초에 무능해서 다행이지. 흔적을 남겨서 정말로 다행이야.” “네가 감히! 감히 이런 모함을 해? 파란을 평생 동안 지켜온 나에게 이런 죄를 뒤집어 씌워?! 이거 놓지 못해? 다들 저 미친 인간의 말을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 손 놔라! 감히 누구를!” 경비병들의 손을 뿌리치고 있는 모습은 가관. 계속해서 히죽거리자 화를 참지 못했는지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 더러운 놈! 네놈이 문제였다! 네가 문제였어!” 물론 이번에도 굳이 이설호를 피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율리에나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니다.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상희를 믿고 있는 것이다. 내 기대에 부응하듯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 이상희가 커다랗게 입을 열었다. “이 금수만도 못한 자식!”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설호의 팔이 잘려나가며 벽 쪽으로 튕겨 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브라보!’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명장면이었다. # 107 회귀자 사용설명서 107화 나는 너를 기억할 것이다(1) “커허어어어어억!” “이 금수만도 못한 자식.” “꺄아아악!” 떨어져 나간 팔을 붙잡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이설호가 눈에 들어왔다. 길드의 안내인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다. 허공에 흩뿌려지는 피는 마치 거짓말 같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팔을 붙잡고 뒹굴고 있는 이설호의 모습은 꽤나 가관. 그 와중에 이상희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누가 봐도 흥분한 모습. 이상희의 캐릭터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가족 혹은 연인을 죽인 살인자가 바로 눈앞에 있다. 부처라도 눈이 뒤집힐 것이다. 화가 나는 이유도 그것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녀로서도 이설호는 믿고 싶은 사람이었고 실제로도 과할 정도의 믿음을 줬었으니까. 눈에 밟히는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동안 참아왔다는 것으로 그녀가 이설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가 설명이 된다. “하아… 하아… 하아….” “아아아아악! 나는… 죽이지 않았다. 내가 아니란 말이다! 상희야… 삼촌의 말을 믿어다오. 내가 그런 죄를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는 건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느냐… 하아… 후우….” “웃기지마. 나는 당신을 믿었어. 그… 그 신뢰에 대한 결과가… 이거야?” “모함이다. 모함이란 말이다….” 모함을 외치는 앵무새가 되어버린 이설호가 질질 짜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당연하지만 동정심 따위는 들지 않는다. 오히려 무척이나 행복한 기분이 든다. 모든 걸 전부 잃은 비참한 늙은이를 보고 이런 마음이 드는 게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아마 아까의 정하얀의 모습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이건 모함이다. 모함이야! 나는 죽이지 않았어! 정연아! 너도 무어라고 말 좀 해보거라! 내가 승준이를 죽일 리가 없지 않느냐….” “그 입 다무세요. 이설호, 당신이란 인간은 정말로….” “그게 아니다… 그게 아니야. 정연아, 나는 절대로 마스터를 죽이지 않았다.” “쓰레기 같은 인간. 길드 마스터가 당신에게 해준 것들이 얼만데…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나요.” “내가 죽인 게 아니야! 흐윽….” 그 와중에도 주변에 있는 다른 늙은이들이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몇몇은 이미 태세전환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지만 쓸데없는 발버둥. “저희는 정말로 몰랐습니다.” “관, 관련이 없는 일입니다.” ‘관련이 없기는 개뿔.’ “모두 잡아들이세요. 예외는 없습니다. 전부 감옥에 가두도록 하세요.” “이, 이거 놔! 모두 이설호가 시켜서 한 일입니다! 이상희 님! 일본의 길드를 끌어들인 것도 모두 이설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모르는 일입니다!” “길드 마스터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말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제발… 모두 저 노망난 늙은이가 꾸민 일입니다!” “제 말 안 들립니까?! 저들 전부 잡아넣도록 하세요.” 길드의 경비들이 창을 들이밀고 저항하는 늙은이들을 모두 포박하기 시작. 여기저기에서 곡소리가 울려 퍼지고 모함을 외치는 앵무새들이 중창단을 만든다. “모함입니다! 이건 모함!” “거짓말입니다! 이상희 님! 제발 믿어… 아악!” 심지어는 이설호를 비난하는 자들도 들고 일어나기 시작.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저 할배들 역시 이설호가 주승준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물론 무척이나 확고한 증거가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저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즐거워졌다.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이상희 님! 이설호가 마스터를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제발….” 이상희의 표정이 착잡해진 것은 당연지사. 순식간에 파란이라는 길드가 풍비박살이 났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이 옳다. 아무리 맑은 물들을 투입한다고 한들, 이미 썩은 물들이 자리 잡은 상황에서는 정화되기 어렵다. 한꺼번에 치워버리는 게 가장 옳은 선택이리라. 당분간은 조금 혼란스러울 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이 옳다. 나도 모르게 히죽이려는 표정을 관리하기가 어려워졌을 때 옆쪽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뻔할 뻔자, 이설호였다. “저… 더러운 연금술사 놈이! 세 치 혀로 파란을 농락하려 들어!” “파란을 농락한 건 당신이 아닙니까, 역겨운 배신자.” “나는 죽이지 않았다! 모두 네놈의 모함이 아니더냐.” “끝까지 변명하는 모습이 참으로 우습군요. 차라리 죄를 인정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게 지금까지 신뢰를 줬던 구성원들의 대한 예의가 아닙니까.” “죽이지 않았….” “모든 범죄자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의 입으로 자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확고한 증거가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발을 빼니 정말로 당황스럽군요. 반성이라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참작의 여지가 있었을 텐데요.” “상희야, 한 번만 믿어다오. 딱 한 번만 더.” “이상희 님, 이미 많은 믿음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모함이다. 저 더러운 연금술사는 파란에 암 같은 존재다. 저놈을 죽여야 해. 저놈을 가두는 것이 맞아! 저 쓰레기 같은 놈은 언젠가 파란을 좀 먹는 괴물이 될 거다.” “거 참, 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봐요, 이설호 씨. 당신이 파란을 위해서 한 게 도대체 뭐기에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길드의 주인은 당신이 아닙니다. 지휘부도 모르게 타 길드와 내통을 하고, 신입 길드원을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고용하는 것은 물론 길드 마스터를 살해하기까지 한 당신은 파란에 대해 언급할 자격도 없습니다.” “이놈이!” “분란을 조장하는 것은 당신들 같은 고인 물입니다. 본래 보통의 사람들은 집단에 위기가 찾아오면 함께 해결하려고 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게 맞습니다. 그렇지만 당신 같은 종류의 인간들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아니 못할 겁니다. 그 누구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소중하니까요.” 예전에 금 모으기 운동을 했을 때도 상류층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놓지 않았다는 통계가 실제로 있다. 이설호는 딱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계속해서 이상희를 바라보며 정에 호소하고 있기는 하지만 무척이나 충격 받은 이상희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 멘탈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녀라면 충분히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현성이가 잘 케어해 주겠지.’ 최근에 항상 붙어 다니고 있는 것을 보면 곧 도착할 김현성이 이상희의 정신을 잡아줄 것이다. 이상희는 굳이 이설호를 바라보지 않았다. 아마 계속해서 바라본다면 분노를 다스리기 힘들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간에 파란을 좀먹고 있었던 구태세력은 줄줄이 엮인 소시지처럼 포박된 상태로 지하로 끌려가기 시작. 계속해서 울려오는 곡소리가 무척이나 우스웠다. 거의 모든 게 정리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당연하지만 우리 길드의 구태세력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완전히 움직일 수 없게 된 썩은 물들을 정리하니 길드가 한결 깨끗해진 느낌이다. 지하로 발걸음을 옮기자 앵무새들의 비명소리들이 들려왔다. 경비원들이 아무 힘없는 고인 물을 무력으로 다루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속이 시원한 장면. 물론 질질 눈물을 흘리고 있는 구태세력들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는 명장면이었다.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리자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기영 님. 이설호 님에 대한, 아니 저들의 처리는 어떻게….” 아무래도 이곳 지하 감옥에 간수인 모양. 여자라는 게 조금 의외이기는 했지만 능력치나 성향을 보니 감옥을 관리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부길드 마스터님께서 결단을 내리실 때까지는 일단은 저 상태로 대기시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식수와 식량은 죽지 않을 정도로만 공급하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깐만 밖으로 나가주셨으면 좋겠군요. 범죄자들에게 따로 물어볼 게 있어서 말입니다.” “따로 심문하실 게 남아 있으십니까?” “네. 물론입니다. 아!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입구에 대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예.” “지하 감옥이 꽤나 넓군요. 관리를 잘하신 게 눈에 보입니다.” “별말씀을요. 감사합니다.” “이곳에 있는 의자 하나는 잠깐 빌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물론입니다, 이기영 님.” 황급히 이쪽에게 인사를 하고 멀찍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니 눈치도 꽤나 빠른 것이 보였다. 의자를 질질 끌고 천천히 감옥의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각자의 감옥에 처박혀 있는 늙은이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쇠창살의 안쪽에서 이쪽에 구원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꼴을 가관. 여러 가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를 욕하는 목소리도 들렸고 혹은 아첨을 하고 있는 자도 있다.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저들에게 용무는 없다. 용무가 있는 쪽은 이설호. 의자를 놓은 이후 자리에 앉으니 팔을 잃은 채로 허망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설호가 한 눈에 들어왔다. 나를 바라본 녀석의 표정에 동요의 감정이 생긴 것은 당연지사. 곧바로 쌍욕이 귓가에 내리 꽂혔다. “이… 이 개자식! 이 개자식!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 더러운 쓰레기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니 고맙네, 미친 영감탱이.” 천천히 마력으로 주변을 차단하기 시작. 미약한 양이지만 나와 이설호를 위한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에는 충분한 마력이다. “무슨 말을….”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건 내가 할 소리야.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독하거든. 그리고 적에게는 자비가 없고… 푸핫. 넌 나를 정말로 화나게 만들었어. 정말로….” “뭐….” “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거다. 설호야, 너는 이 길드에 아무것도 남길 수 없게 될 거야.”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 “네가 내통했던 일본의 길드가 너희를 파란의 지하 감옥에서 꺼내줄 거다.” “뭐?” “길드 마스터를 살해한 살인범, 부길드 마스터 이상희의 기대를 배신한 파란의 범죄자 이설호는 공식적으로는 지하 감옥을 탈출한 게 되겠지. 물론 비공식적으로는 붉은용병의 지하 고문실로 가게 될 거다.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제님 한 분이 너를 직접 맡아주실 거야. 기대해도 좋아, 영감. 인간의 몸이 얼마나 신기한지 직접 느껴보는 시간이 될 테니까. 신을 위해 봉사하는 사제가 얼마나 독한지에 대해서 느끼게 되겠지.” “이… 이 개자식! 개자식!” “너를 비롯한 이곳에 있는 늙은이들은 전부 끔찍한 모습으로 살해된 채 어딘가에 버려지게 될 거다. 물론 이 건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일본 길드가 너희를 처리한 것으로 포장되겠지? 푸하핫. 언론은 파란의 배신자 이설호를 대서특필하며 여기저기에 떠들어댈 거고 린델 내에 있는 모든 인간이 술자리에서 네놈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인간인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거다. 상처 입은 파란은 너의 이름을 잊기 위해 노력할거고 불과 반년이 지나기도 전에 네 이름은 천천히 잊혀질 거야. 모두에게서.” “…….” “네 죽음도, 네가 지금까지 파란에 공헌한 것들도, 네가 지금까지 이룬 것들도 모두 하나씩, 하나씩… 마치 처음부터 이설호라는 인간이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야. 넌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는 거야.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로 죽게 되겠지.” “너… 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영감. 나는 너를 기억할 거니까. 내가 잘 알고 있는 사제님께서 너를 친절히 돌봐주실 때 나는 그 옆에서 조용히 너를 바라볼 거다. 네가 지르는 비명소리, 고통으로 일그러진 네 표정, 살려달라고 외치는 목소리까지 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 속에 담을 거야. 그 모든 과정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너를 바라보고 있을 거다.” “이노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네가!” “난 고통으로 일그러진 네 표정을 나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 소중한 내 사람을 위해 바칠 거다. 네 목소리는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을 한 늙은이의 말로가 어떤 건지 상기시켜 주는 교훈이 되어 내 머릿속에 항상 울려 퍼지겠지. 넌 내 성장을 위한 양분이 되고 나는 그 양분을 소화시키기 위해 네 모습을 끝까지 지켜볼 거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말이야….” “…….” 입을 다물고 있는 이설호가 시야에 비쳤다. 조용히 의자에 앉아 허리를 굽히고 이설호를 바라보자 녀석 역시 이후에 일어난 일을 상상했는지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이보게… 기영이….” “…….” “우리 거래를 하는 게 어떻겠나.” “…….” “이건 아니지 않나…. 아무리 우리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너무 불명예스러운 죽음이 아닌가. 이건 조금 아니야.” “…….” “이렇게 죽을 수는 없네. 이렇게는… 흐으윽… 흐어어엉….”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는 것은 이런 종류의 인간들에게는 무척이나 가슴 아픈 일이다.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지 질질 짜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쩌면 앞으로 일어날 고통스러운 시간이 무서워서 일수도 있으리라. 나는 굳이 녀석을 향해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이후에 일어날 일을 예행연습이라도 하듯 입을 다물고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주 조용히 말이다. # 108 회귀자 사용설명서 108화 나는 너를 기억할 것이다(2) “잘 뒤졌지. 이런 천벌 받은 놈들….” “죽어 마땅한 놈들 아니었나.” “이곳에서 살아오면서 쓰레기 같은 놈들을 많이 봐오기는 했지만 이런 쓰레기는 또 처음이라니까. 도시 한복판에서 테러를 일으킨 것도 신입 길드원을 죽이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죄 없이 휘말린 사람들도 불쌍하지만 이 길드원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건 알고 있나? 이 습격당한 길드원이 그, 용병여왕의 정부라는 소리가 있던데… 붉은용병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한테 들었는데 길드 분위기가 말이 아니라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거 아닌가. 아! 저기 오는구만… 어이, 김씨! 오늘 올라온 신문 읽었어?” “거, 파란에 있는 친일파 자식이 뒈졌다는 소식이라면 당연히 읽었지. 덕분에 어젯밤에는 팔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었다니까.” “자네 가게는 괜찮나?” “물론, 보험금 말고도 파란에서 따로 보상금까지 챙겨줘서 복구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네…. 사실 파란에서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나 같은 사람이야 뭐 고맙게 넙죽넙죽 잘 받아먹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미안했다는 거 아닌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대충 던져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보상금이 두둑하기도 하고 새로운 가게 차리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푸하하핫.” “이 친구 얼굴에 웃음꽃 핀 거 보게. 한턱 쏴야 되는 거 아닌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귓가에 꽂혀왔다. 뭐, 내용이야 이설호를 욕하는 내용이나 파란을 걱정하는 내용들이 대부분. 사실 도시의 수복 비용이 가장 큰 문제였다. 언론이 확대됨에 따라 이미지를 챙기는 수많은 길드와 클랜의 기부가 없었더라면 파란이 혼자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 분명. 검은백조와 붉은용병에게는 다시 한번 빚을 졌다. 광장을 돌아다니며 아직까지 온전한 건물을 바라보니 여기저기에서 자극적인 신문 타이틀이 시야에 비쳤다. [파란의 배신자 이설호, 실리아 근처 라마델 산맥에서 숨진 채 발견.] [어째서 그는 그런 선택을 했는가-김성경의 썰전] [이설호가 내통하고 있었던 일본의 길드. 자유 도시 실리아와 린델의 관계의 향후 관계에 끼칠 영향에 대해] 모든 게 예상했던 대로였다. 검은백조의 국민비호감 사건 이후로 조금은 심심했던 린델을 한바탕 뒤집어 놓은 사건이었으니 린델 내의 모든 언론사가 이 사건에 군침을 흘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린델 전체가 떠들썩해졌고 주점이나 광장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의견을 쏟아내는 이들이 무척이나 많아졌다. 현재 린델에서 이뤄지는 대화의 9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느낌. 대형 길드에 속해 있는 길드원이나 간부나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일반 모험가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길을 걸어가며 살짝 눈을 돌리자 손에 쥔 신문이 들어왔다. [커다란 시련에 놓인 파란의 향후 행보는?] [도시 내 테러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탈출했던 범죄자들을 추적한 지 수일 째, 붉은용병의 수색대가 라마델 산맥 근처에서 수십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의 정체는 범죄자 이설호와 그를 따랐었던 파란의 간부들로 추정. 정확한 감식 결과 파란에서는 그들이 이설호를 비롯한 간부들이라는 판단을 내려, 오는 15일 공식적인 수색 작업이 종료됐다. 시신은 무척이나 심하게 훼손되어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던 걸로 보아 전문 고문 기술자에게 모진 고문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붉은용병의 관계자는 이들을 죽인 범인으로 일본 길드를 지목. 이유로는 증거의 인멸 혹은 일이 틀어진 것에 대한 단순한 화풀이라는 입장의 소견을 내놓았다. 파란의 부길드 마스터 이상희가 아직까지 공식석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가운데, 린델 내 귀추가 파란에 주목되고 있다. 한때는 자유 도시 린델을 대표하는 길드 중의 하나였던 파란은 길드 마스터 주승준과 많은 파티를 잃어 재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아직까지는 붉은용병과 검은백조와의 동맹관계가 원활하게 유지되어 있기는 하지만 많은 중견 길드에서도 파란의 파티에게 많은 러브콜을 하고 있는 상황. 파란의 간부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해서도 린델의 많은 스카우터들이 주목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대로 파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는 가운데 용병여왕 차희라(28)는 붉은용병은 어디까지나 파란의 우방이며 어떤 선택을 하든 최선을 다해 도울 거라 발언했고 검은백조의 대변인 이지혜 역시 파란은 다시 일어설 거라며 여러 가지 떠돌아다니고 있는 소문을 일축시켰다. 수많은 상처를 입은 파란이 앞으로는 어떤 행보를 보일지에 대해서는 본 기자 역시 정확히 판단을 할 수 없지만 그동안 파란이 보여줬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이번의 위기 역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나쁘지 않네.’ 잘 정리된 기사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파란의 긍정적인 입장을 취해주고 있다는 것, 물론 언론사의 입장에서는 이럴 수밖에 없겠지만 스물스물 침몰하는 배에서 내리려고 하는 다른 언론사들의 비해 이 린델일보는 꽤나 믿음직스럽다. ‘김성경이라는 놈도 그렇고….’ 항상 이쪽에 우호적인 기사를 써주는 것을 보니 한번 탄 노선을 바꾸고 싶지는 않은 모양. 단순히 감이 좋은 건지 아니면 의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에 조금이라도 챙겨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혼자 고개를 끄덕였을 때 들려오는 것은 어젯밤 하루 종일 들었던 목소리, 선희영이었다. “뭘 읽고 계신가요.” “기사입니다. 아무래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걷다 보니 잠이 쏟아져서 말입니다. 희영 씨는 별로 피곤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오히려 조금 상쾌해요. 오랜만에 신께 봉사하는 시간을 가졌으니까요. 이곳에서 지내시는 시민 여러분들의 반응만 봐도 저희가 함께 한 일이 얼마나 뿌듯한 시간이었는지 알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사실 수고는 희영 씨가 전부 해주셨는데요.” “많은 준비를 해주셨잖아요. 함께 있어 주시기도 했고… 사실 혼자였다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못 했을 거예요.” ‘그건 아니지.’ 사실 내가 함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별로 상관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최근 조금 잠잠해지기는 했지만 확실히 우리 사제님께서는 봉사하는 시간이 가장 보람차게 느껴진 모양. 특히나 이설호에 대한 건수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만족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처음부터 그 할아버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것 같기는 했지만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분노를 보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 쌓인 게 더 많았던 것이다. ‘나태한 생각, 나태한 정신, 당신은 사회의 악입니다. 빈민촌의 부랑자만큼이나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당신들이 이 사회를 좀먹고 있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계속해서 생기는 겁니다. 회개하세요. 물론 제가 원하는 것은 말뿐인 회개가 아닙니다.’ ‘아아아아아악!’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눈을 끝까지 돌리지 않았던 것을 스스로 칭찬하고 싶었을 정도. 헛구역질이 나올 뻔하기는 했지만 올라오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집어넣은 이후에 선희영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네?” “함께 아름다운 린델을 만들어 가자는 말씀을 해주셨잖아요.” “네. 그랬었죠.” “물론 당시에는 불안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이렇게 결과가 나오니 조금은 기쁘네요. 오랜만에 함께하기도 했고… 아무튼 기분이 좋은 날이에요.” 누가 봐도 사제처럼 행동하는 선희영의 모습. 뭔가 점점 더 가까이 붙는 것 같은 느낌. 계획적이라기보다는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졌기 때문에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리라. ‘너까지 이러지 마.’ 선희영과는 함께 일하는 동료의 포지션이 가장 잘 어울린다. 안 그래도 주변에 있는 여자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물론 선희영의 마음도 이해가 가긴 한다. 나는 그녀의 유일한 아군이었고 새로운 곳에 눈을 뜨게 해준 최초이자 최고의 동료였으니까. 물론 아직까지는 연애 감정이라고 할 정도의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선희영까지 깊게 연관이 된다면 일상이 더욱더 피곤해질 것이다. 정하얀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걸 보여준다고 한들, 어차피 이곳은 일처다부나 일부다처가 당연시 되는 세계. 지금 당장 주위를 둘러봐도 남자 하나에 여자 여럿, 여자 하나에 남자 여럿이 함께 다니는 게 눈에 보인다. 지구처럼 손가락질 당할 일은 아니라는 거다. 애인이나 부인이 있다고 해도 지레 포기하는 상황을 찾는 게 오히려 드물다. 만약 선희영이 이쪽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을 먹는다면 정하얀이나 차희라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사전에 차단해야 해.’ 적당한 선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아, 잠깐 식사라도 하시고 들어가는 게 어떠세요?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는데 아침이라도….” “아, 그렇게 하도록 하죠.” 물론 이 적당한 선을 유지한다는 건 조금은 힘들다. 식사를 같이하는 것 정도는 상관없으리라.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적당히 자리를 잡은 이후에 주문을 하니 곧바로 선희영이 입을 열어왔다. “어제는 조금 어떠셨어요? 기영 씨?” “보람찬 시간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봉사였으니까요.” “네. 그렇죠. 봉사였죠. 후훗. 정말 보람찬 시간이었어요. 역시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네요.” “네. 그렇죠.” “매일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었지만 기영 씨에게는 정말로 감사한 마음밖에는 없네요. 표현 방식은 조금 거칠기는 했지만 제가 잘못되어 있었다는 걸 깨닫게 해주셨으니까요.” “하하….” 이런 흐름은 별로 좋지 않다. 황급하게 말을 돌리는 게 올바른 판단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하얀이의 상태는 조금 어떻습니까?” “아직 회복하고 있는 단계예요. 일단 몸은 전부 회복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붉은용병 내에 계시는 사제님들께서도 힘써주시고 계시니까요. 지금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 건, 어디까지나 몸의 피로 때문이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군요. 그것 참 다행입니다.” “아. 혹시 기영 씨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네?” “계속해서 파란에 남아 있으실 건지를 여쭌 거예요. 요즘 통 길드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아.” 선희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 확실히 최근에는 파란에 그다지 신경 쓰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안 했다고 하는 편이 어울리리라. 파란은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무척 흔들리고 있는 상태. 사실 파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지금 같은 타이밍이 가장 알 맞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가 파란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이유는 김현성 때문이다. ‘권력은 한곳에 집중되는 게 편하니까.’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상차림을 차려준 이후에 맛있게 먹으라고 숟가락까지 올려준 상태. 이상희는 거의 리타이어나 다름없고 황정연은 애초에 권력구도 따위에 관심도 없다. 새로운 권력의 중추로 김현성이 우뚝 서는 것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물론 김현성이 들어온 시기를 생각했을 때 길드 마스터가 아닌 섭정으로 잠깐 동안 길드를 운영하는 것이 전부겠지만 녀석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생각해 보면 아마 여러 사람이 믿음과 호응을 보내고 있으리라. 지금 당장은 내가 파란에 손을 뻗는다고 해도 역효과가 날 수도 있는 상황. 어차피 김현성이 권력을 얻는다면 1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나에게 무척이나 많은 콩고물이 떨어질 것이다. ‘굳이 앞서서 챙겨달라고 추한 모습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오히려 한발 물러난 상태에서 상대의 애를 태우는 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김현성 왕국에 꼭 필요한 인재니까. “최근에 조금 바빠서 말입니다. 현성 씨가 이상희 님과 항상 함께 있기도 하고 길드가 위기라고는 하지만 저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 “오히려 썩은 물을 모두 걷어낸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된 집단을 만들 수 있는 기회니까요.” “아아! 그, 그렇군요. 아… 역시 기영 씨네요. 저는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었는데….” “하하하….” “그럼 쉬는 건 조금 미뤄야겠네요. 사, 사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부끄럽지만 기영 씨와 함께 봉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건 아닌가 하는 기대도 잠깐 했었거든요. 아! 오, 오해는 마세요. 연애 감정이 아니라… 같은 취미를… 매일 함께… 그 뭐랄까….” “아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왠지 모르게 붉어진 얼굴. ‘아….’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건지 눈에 보인다. 아마 둘이 함께 봉사의 집이라도 만들어 그곳에서 생활하며 봉사를 위한 삶을 살아가는 걸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달갑지 않은데….’ 만약 그런 집이 완성된다면 사랑의 집이 아니라 공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집일 것이다. 선희영은 삐뚤어진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 삐뚤어진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를 감금해 영원히 함께한다는 정하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고방식. 어디까지나 신을 위해 일하는 사제인 만큼 그런 독특한 발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정상인 건 아니지만….’ “물론 희영 씨가 생각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만 일단 다른 중요한 문제도 있으니 말입니다. 아마 현성 씨가 어수선한 내부를 잘 정리해 주실 겁니다. 저도 조금은 힘들게 뛰어오기도 했고 어제는 큰 건수를 해결했으니까요.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이라고 하는 편이 잘 어울릴 것 같군요.” “간단하게 말하면 휴식을 취하신다는 거네요. 후훗. 덕분에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좋네요. 아! 물, 물론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에요.” “네. 이해하고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사랑과 정, 봉사 정신이 넘치는 선희영 하우스에서 함께 지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일단은 김현성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 어떤 건지가 가장 커다란 문제. 정치에는 조금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김현성은 김현성이다. 계속해서 이상희와 함께 붙어다니며 그녀를 케어하고 위로해 주는 모습도 매일 보여주고 있는 걸 보면 녀석 역시 나름대로의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은근히 음흉하단 말이야.’ 나였어도 이상희의 호감을 사는 것을 첫 번째 과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큰 걸 해줬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렇게까지 그림을 그려줬는데도 점을 찍지 못한다면 회귀자 자격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들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 ‘우리 현성이는 뭘 하고 있을까.’ 예전 이지혜의 농담이 농담처럼 생각나 움찔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 사랑스러운 김현성의 머릿속은 조금 궁금했다. # 109 회귀자 사용설명서 109화 과거 회상(1) “혜진 씨, 갑작스럽게….” “마스터, 정하얀 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사인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추측하기에는 자, 자살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분명히 뭔가 잘못 알….” “…….” “정말로 죽었군요.” “네. 오늘 아침 방에서 목을 매달고 계신 채 죽어 있는 걸 마도 길드의 길드원들이 확인했습니다.” “혹, 혹시 타살은 아닙니까? 암살자들이 들어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닙니다. 틀림없이 자살입니다. 유서도 발견되었고 그… 이것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하얀 님의 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편지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독하진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소식이 들려온 이후 타 길드에서는 혹시나 그들과 내통하고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습니다.” “내통이라고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단순한 추측일 뿐입니다.” “그건 아닐 겁니다. 린델의 천재 마법사가 지금까지 보여준 업적을 생각해 보면 그럴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들과 결탁할 수 있었다면 이미 한참 전부터 그들 편에 서 있었을 겁니다.” “마스터의 말이 맞습니다, 혜진 씨. 린델의 천재 마법사가 없었다면 애초에 전선 자체가 유지되어 있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라마델 산맥 전투와 북부 프로스트 월 전투, 심지어는 베니고어 방어전을 승리로 이끈 것도 모두 정하얀 님이 있었던 덕분입니다. 내통은 아마 잘못된 정보일 겁니다. 어쩌면 저희를 분열시키려는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지….” “…….” “혜진 씨, 유서는… 유서에는 뭐라고 적혀 있었습니까.”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물론 마도 길드에서 공개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전문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만… 몸에 가혹행위를 당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암살당한 것이 아닌 게 확실합니까?” “네. 몸에 남아 있는 상처는 훨씬 이전부터 나 있는 상처라고 들었습니다. 치료를 받지 않아 곪아 터지기 직전의 상처도 있었던 걸로 봤을 때는 혹시 자해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습니다. 포션이나 신성력으로 치료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상처를 남겨놓은 것은 물론 심지어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부분까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자해….” “네. 정말로 자해를 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겁니다, 마스터. 평소에도 정하얀 님께서는 생명을 뺏는 일에 무척이나 힘들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뒤에는 항상 악몽을 꾸셨고 실제로도 전투에 참가하는 것을 무척이나 꺼려하셨으니까요. 개미 한 마리도 죽이기 싫어하시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전장에 서게 되셨으니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린델의 대마법사, 정하얀의 성품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전장에 서는 것 자체가….’ 무리였던 것이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전적으로 제 잘못이 맞군요. 그녀를 전쟁터로 부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마스터의 탓이 아니에요. 정하얀 님을 설득하신 건 마스터뿐만이 아닙니다. 신성제국과 공화국, 왕국 연합에 있는 모든 이들이 정하얀 님이 움직여 주시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결단을 내리신 것 역시 정하얀 님입니다. 마스터의 설득으로 움직여주신 게 아닙니다. 정하얀 님께서도 신성제국과 린델에 있는 자유민에게 항상 빚을 지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도망쳐 숨으려고 하셨다면 아무도 찾지 못했을 겁니다. 정하얀 님 역시 그 나름의 이유로 이 전쟁터에 합류하신 겁니다.” “…….” “아직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이유 역시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마스터, 죄책감을 느꼈다는 것은 아마 사실이겠지만 저는 그분께서 그 때문에 목숨을 끊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고통스러워하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만큼 자신이 지켜낸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으니까요. 제가 처음에 만났던 정하얀 씨 역시 분명히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본 적이 있는 장면이다. 사람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그녀가 전투가 끝난 뒤에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이 목숨을 구한 병사들과 악수를 나누는 장면은 틀림없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함께 나눴던 대화도. ‘보람 있네요.’ ‘힘든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아니에요, 현성 씨. 무, 물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모두가 싸우고 있으니까요. 그… 그리고 기분이 나쁜 것만도 아니니까요. 다들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기분이 좋네요. 헤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할 뿐입니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조혜진의 말대로 정하얀은 그것이 자신이 감내해야 할 고통임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이제 와 죄책감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직 이유를 파악하고 있는 중입니다. 마법으로 암호화되어 있는 편지에 단서가 있을 것이라 추측, 대륙의 모든 마법사가 계속해서 암호화된 물건을 해석하려 애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조혜진을 바라보던 바로 그때였다. 콰앙! 어디에선가 들려온 폭음, 적이 온 것은 아닌가 의심하던 것도 잠시.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에는 들고 있는 검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 “김아영 님! 이러시면….” “닥치고 문 열어. 김현성 여기에 있는 거 아니까 문 열라고!” “일단은 진정하시고… 지, 지금은 회의 중이십니다.” “좋은 말하기 전에 문 여는 게 좋을 거야. 인내심이 바닥을 기려고 하고 있거든.” 다시 한번 들려온 요란한 소리가 지난 이후에 시야에 비친 것은 무척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영 씨.” “김현성, 이 개자식!”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 거대한 검이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리자 다시 한번 요란한 소리와 함께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주변에 물건이 사방으로 날아갔고 압력을 버티지 못한 창문이 깨져나간다. “이 개자식! 네가 언니를 죽였어.” “…….” “네가 언니를 전쟁에 끌어 들인 거야. 이 쓰레기 같은 새끼! 너 때문에 언니가 죽은 거라고!” “…….” “아영 님…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지금은 전시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곳으로 들어와서 저희 길드 마스터에게 검을 겨누다니요! 이 일은 정식으로 길드에 항의하겠습니다.” “그 입 다물어, 조혜진.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 이상 입을 놀리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항의? 할 거면 해봐. 어차피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항의가 무슨 의미가 있는데? 마음대로 해보라고… 어차피 전부 뒈지게 생겼는데 뭐? 그딴 건 엿이나 먹으라 해!” “그렇지만….” “내가 분명히 이야기했지, 김현성? 언니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거라고… 네 그 알량한 욕심 때문에 언니가 죽은 거야.” “정하얀 님이 전선에 서지 않으셨더라면 수많은 민간인이 죽었을 겁니다. 김아영 님.” “입 다물라는 내 말 안 들려? 난 김현성에게 묻고 있는 거야.”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습니다. 물론 저희 마스터께서 정하얀 님을 설득하시기는 했지만 실제로도 정하얀 님이 계셨기 때문에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그 수많은 전투 때문에 언니가 죽었어. 언니가 죽었다고! 처음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어.” “아직 정확히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이유에 대해서 나온 것이 없습니다. 전투의 충격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 역시 아직 확정된 사안은 아닙니다. 유서나 밀봉된 편지를 정확히 확인해야 합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왔어. 이 더러운 위선자들아. 그 사람 말을 새겨들었어야 했어.” “그 사람이 누구….” “네가 알 필요는 없잖아!” “죄송합니다.” “뚫린 입이라고 죄송하다는 소리가 나오나 보네 응? 김현성 이 개자식… 영웅? 웃기지 말라고 그래.” “그렇지만 조금만 더 차분히 생각을….” “입 닥쳐. 우리 길드는 이 엿 같은 동맹에서 나간다. 애초에 서로 싸우던 놈들이 하나가 된다는 소리도 어처구니없는 소리였어. 공화국과 왕국연합의 개자식들이랑 손을 잡는 것부터가 무리였다고. 내가 네 말을 듣는다는 것부터가 웃기지도 않을 코미디였고. 수십만 명을 살린 영웅 김현성은 개뿔.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언니가 죽었는데… 언니가 죽었다고! 몇 명이 언니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든 간에 나랑은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야. 알아들어?” “…….” “앞으로는 볼 일 없을 거야.”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김아영 님.” “조혜진.” “정하얀 님께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 아닐 겁니다.” “개소리 하지 마.” “만약에 그렇다고 한들, 김아영 님께서 이러시는 것은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분명 많이 괴로워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자신이 구하신 이들을 두고 기뻐하셨던 정하얀 님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 “아직 정확한 유서의 내용이 나오지도 않은 상황입니다. 실제로도 암살에 대한 가능성도 전부 파악하지 않고 있고요. 어쩌면 밀봉된 편지나 유서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모든 조사가 끝난 이후에 정하얀 님의 죽음이 저희와 관련된 것이 밝혀진다면.” “…….” “제 죽음으로 이번 일에 대해 사죄하겠습니다.” “난 네 목숨 따위 관심 없어.” 김아영이 뭘 원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상황. 천천히 그녀를 마주보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일이 끝난 이후에 죽음으로 사죄하겠습니다.” “마스터는!” “이게 맞습니다, 혜진 씨. 분명히 저에게도 책임이 있을 겁니다. 어차피 이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제 나름대로 마침표를 찍으려고 했으니까요.” 살아 있을 자격이라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미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사실 지금에 와서 사죄한다고 설치는 것도 웃기는 일. 그렇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할 일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눈앞에 있는 김아영의 표정이 복잡해 보인 것은 당연지사. 아마 그녀 역시 생각이 많을 것이다. 계속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쾅!!! 어디에선가 들려온 굉음. 그밖에도 울려 퍼지는 거대한 소리에 실제로 그들이 이곳을 침범했다는 사실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뭐?” “적습이다!” “마스터!” “적습입니다! 조혜진 님, 현재 성벽의 뒤로… 아아아아악!”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것은 익숙하지만 이질적인 마력이다. 정확히 김아영을 향해 쏟아지는 정체불명의 기운에 몸을 움직인 것은 당연지사. 검을 가로로 들어 막아내자 갈라진 마력이 양 옆의 벽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성벽으로 향하겠습니다.” “나, 나는 아직!” “일단은 힘을 모아야 합니다. 모든 일이 끝난 이후 제 처우는 아영 씨에게 맡기겠습니다. 지금은 부디 힘을 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기랄.” “혜진 씨, 차희라 님은 아직 도시 내에 있습니까?” “네. 12시 방향으로부터 계속해서 증원 신호가 오고 있습니다. 아마 붉은용병 역시 그쪽으로 향했….”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린델을 집어삼킨 새하얀 빛. 어딘가에서 터져 나온 그 빛이 주변을 가득 메움과 동시에 감겨져 있던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 11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0화 과거 회상(2) “꿈이구나….”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꿈이다. 살짝 몸을 일으켜 창문을 바라보니 그때의 굉음과 빛이 생생하게 눈에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를 흔들어보지만 마찬가지. 괜스레 침을 삼켜 넘기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성 씨, 회의 시간입니다. 이상희 님께서 파란에 남아 있는 파티원과 간부들을 모두 소집하셨습니다.” “아… 네. 금방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30분 안으로….” “네. 30분 안으로 가겠습니다.” 괜스레 생각이 많아졌다. 1회 차에 있었던 일에 대해 꿈을 꿀 때는 항상 비슷한 아침을 맞는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게 되고 이곳이 어디인지에 대해 상기하게 된다. 연스럽게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하니 거울에 비친 퀭한 얼굴이 보였다. ‘최근 잠을 자지 못했으니까.’ 내 외부적으로 바쁜 일이 무척이나 많다. 본래 린델 테러사건은 1회 차에는 없었던 이야기. 심지어 아직 해가 전부 지지도 않은 시간에 그런 일을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안일했어.’ 이설호의 성정을 조금 더 염두에 뒀어야 했다. 이기영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의뢰를 해올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부분. 덕분에 파란에서 입지를 다지는 데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정하얀이 중상을 입었다는 것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뼈아픈 실책이었다. ‘그녀가 없으면 안 돼.’ 그녀는 향후에 린델을, 아니, 신성제국 베니고어를 대표하는 마법사가 된다. 이후의 전쟁에서도 정하얀이 보여준 모습은 상상 이상. 실제로 그녀가 죽지 않았더라면 전쟁은 인류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만큼 모두의 존경을 받는 린델의 대마법사가 보여준 모습은 그 어떤 영웅의 모습보다도 압도적, 장담컨대 그녀는 이번 회 차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최근까지 보여주고 있었던 성장 속도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재능.’ 선천적으로 마법에 대한 타고난 사람. 그녀가 보여주는 성과들이 눈에 띄면 띌수록 린델의 천재 마법사가 만들어낸 업적에 대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1회 차의 정하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원정이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마도 길드의 연구원으로 입단했고, 오랜 시간 세간에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사실 그녀의 성품을 생각해 보면 대충 어떤 인생을 살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예상이 가는 것이 당연. 내가 알지 못하는 과거의 사건의 영향으로 사람들과의 소통을 거부 하고 마탑에 틀어박힌 것이다. 아마 그녀의 일상은 무척이나 단조로웠으리라. 하루 종일 마법 공부에 매진하고 잠이 드는 시간의 연속. 외부로는 일절 나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김아영 외에는 타인과의 대화를 거부하다시피 했으니까. 아마 예상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회성이 부족해.’ 그녀는 사회성이 부족하다. 그게 정하얀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 많은 모험을 감수하면서 그녀를 동료로 들인 이유였다. 성장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인물이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각자가 고통을 겪으며 성장을 이뤄냈다. 어떤 이는 동료의 죽음으로, 어떤 이는 연인의 배신으로, 어떤 이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연을 얻어 각자의 역할을 다 할 수 있게 된다. 정하얀 역시 마찬가지. 그녀가 강했던 이유는 어쩌면 마탑에 틀어박혀 소통을 거부한 채 마법에 열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정하얀을 마도길드로 보내는 게 맞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녀의 마지막을 생각해 보면 성장보다는 멘탈을 보호해 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에서는 가장 잘했다고 여겨지는 선택 중에 하나. 정하얀은 성장하고 있다. 외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말이다. ‘심지어는….’ 연애도 하고 있다. 1회 차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 조금 과하게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흠은 분명히 있지만 그래도 정하얀과 이기영은 계속해서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정답이다. 이기영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미래는 피해갈 수 있다. 방금 꿈에서 봤던 최악의 엔딩은 지나칠 수 있다. 만약 이쪽이 케어해 줄 수 없는 부분으로 접근해 오더라도 이기영이 사전에 차단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그는 이제껏 봐왔던 종류의 인재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인재이면서도 무척이나 유능하다. 생각하는 바가 맞을 것이다. 여러모로 생각해 봤을 때 이기영과 정하얀에게는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맞다. 자신이 없을 때도 이런 종류의 습격에 대비해 줄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다.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던 사람은 자신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던 부관 조혜진.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적군을 헤집어 적에게마저 그녀를 신창이라 불렀다. ‘아마 지금쯤 린델에 들어와 있을 지도….’ 고민을 했던 것도 잠시, 서둘러 얼굴을 씻고 밖으로 나가자 발걸음을 옮기자 익숙한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드의 안내인은 고개를 숙여왔지만 무척이나 휑한 길드의 내부는 파란의 몰락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이미 지금은 길드의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하기에도 힘든 상황. 다른 길드와의 동맹은 유지되고 있지만 길드가 의뢰소는 닫혀 있었고 이미 대부분의 평길드원이 빠져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는 2번 대 파티의 몇몇도 타 길드로의 이적이 정해져 있는 상황. 이대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난다면 실제로 린델에서 파란의 이름은 사라질 수도 있으리라. 최근에는 이기영 역시 붉은용병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역시 길드를 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는 했지만 그건 아니라고 확실할 수 있다. 그가 바라고 있는 게 뭔지 대충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주길 바라고 있는 거겠지….’ 내가 파란의 실권을 잡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유능해.’ 내가 알고 있는 이기영이라면 아마도 이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부로 파란을 내버려 두고 있는 이유는 파티의 리더인 자신에게 더욱더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 분명.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이해하고 있다. 마치 이쪽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느낌. 흘러갈 상황을 미리 파악한 이후 모든 안배를 준비해 놓은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발걸음을 뗀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현성 님.” “네.” “봐주셔야 할 서류가 있습니다.” “아… 네.” “오늘까지 봐주셔야 할 사안들이 있습니다만… 그… 이기영 님께서도 자리에 계시지 않아서….” “기영 씨에게는 회의가 있다는 사실을 전했습니까?” “네. 지금 이쪽으로 오시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어제는 붉은용병 쪽에서 정하얀 님을 간호하셨다고….” “아. 그건 저도 들었습니다. 결재가 필요한 서류는 일단은 제 방에 놔주세요. 회의가 끝난 이후에 직접 확인해 마스터께 따로 말씀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길드원 확충에 관한 공고도 오늘 올려도 되겠습니까?” “이건 직접 말씀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회의실로 향하는 도중에도 이쪽에 여러 가지를 물어오는 모습. 이기영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 뭔지 답이 나온다. 실제로 이기영이 병간호를 핑계로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많은 이들이 나를 의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천천히 자리를 옮기자 회의실이 눈앞에 들어 온 것은 당연지사. 문을 열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상희와 황정연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눈에 띄게 초췌한 모습의 이상희와 그런 이상희를 바라보고 있는 2번 대의 황정연. 예전에는 꽉 찼던 회의실에 있는 사람은 단 세 명, 처참한 모습이었다. “아… 오셨군요.” “네.” “기영 씨는….” “지금 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다행이군요.” “오랜만에 회의를 하는 것 같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사실 조금 더 빨리 이런 자리를 만들었어야 했었는데…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경황이 없었습니다.” 힘이 없는 눈. 그렇지만 극복해 낼 거라고 생각했다. 1회 차에서도 그녀는 아픔을 딛고 일어났으니까. “기영 씨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일단은 계속해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굉장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파란에 남아 있는 여러분들을 생각했더라면 조금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에도 길드의 버팀목이 되어주신 두 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 사실 쉬는 동안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파란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여러분과 파티원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길드를 해체시키고 여러분들을 타 길드로 보내 드리는 것이 여러분을 위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게 맞는 방법일 겁니다.” “…….” “그렇지만 차마 아저씨… 아니, 마스터가 세운 이곳을 제 손으로 해체할 순 없었습니다. 두 분께 너무나도 죄송한 말씀이지만 부디, 이 길드에 남아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네… 마스터와….” “이제는 마스터가 아닙니다. 정연 씨. 저는 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맞습니다.” “네?” “저주받은 신단에서도 여러분들을 위험하게 만든 것은 물론, 마스터가 일어나 계실 때도 심지어 병상에 누워계실 때에도 단순히 직함만 달고 있었습니다. 이설호가 일본과 내통하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들을 의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정 때문에 그들을 쳐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위에 있는 사람으로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 역시 기영 씨가 말했던 무능한 사람이란 범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약 제가 다시 파란의 실권을 잡는다고 한들 이전과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겁니다. 제가 물러나는 것이 맞습니다. 힘드시겠지만….” “저, 저는….” 뜻밖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조금은 예상할 수 있었던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제대로 말은 끝내지 않았지만 이미 황정연은 거절의 의사를 밝히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이상희의 표정 역시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기영이었다면 이런 타이밍에 입을 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확고하게 입을 여는 게 좋을 수도 있으리라. “정연 씨께서 별로 내키지 않으신다면….” “네.” “임시로나마 제가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더 신뢰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아….” “물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일처리를 혼자 하는 것은 저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만… 두 분께서 제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 않게 도움을 주신다면 이전의 모습을 되찾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아….” “아직 파란에 남아 있는 인재가 많으니까요.” 동시에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기영입니다.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111 회귀자 사용설명서 111화 어서 일해라!(1) “이기영 님, 여기 계셨군요.” “아. 분명히….” “평길드원 박중기입니다.” “아아아아… 중기 씨, 네. 기억이 납니다. 무슨 일입니까?” “길드 마스터께서 간부님들을 소집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일단 먼저 돌아가서 제가 가고 있다고 전해드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평길드원 치고는 민첩 수치가 높은지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저러니 전령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 내가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 한번 훑어보기가 무섭게 녀석의 정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민첩 능력치 영웅 이하….’ “나쁘지는 않네.”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희영 씨.” “혹시 지금 들어가 보셔야 되는 건가요? 회의가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조금 천천히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아아… 다행이네요. 그럼 커피도 한 잔 마시는 게 어떠세요?” “그럼 가까운 카페에 들리도록 하죠.” 뭔가 일반적인 데이트 코스를 밟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굳이 헐레벌떡 뛰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충 무슨 일인지 예상이 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잠수를 타고 있었던 이상희가 드디어 마음을 굳힌 것. 아마 간부들을 모이라고 한 이유도 앞으로 파란의 미래나 공석이 된 길드 마스터의 자리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싶어서일 거다. 계속해서 한계를 느끼고 있었을 테니 아마 어느 쪽이든 결단을 내리는 것이 맞다. 이상희는 지도자로서 무능하다. 그 사실을 본인이 가장 잘 깨닫고 있을 것이다. 아마 내가 길드에 자리를 비운 동안 그 사실을 더욱더 실감하고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모든 행정팀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 자체가 일반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다. 대놓고 이야기하자면 이미 무너진 길드가 박살이 나 지하로 가라앉고 있었던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멘탈이 반쯤 나간 이상희가 어떻게 수습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김현성이야 어느 정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일어날 일에 대비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아마 녀석의 계획에는 보이지 않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회귀 전에도 칼밥만 먹고 살았을 테니 익숙하지 않은 게 당연. 그렇지만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다. ‘어차피 결과는 이후에 내가 만들면 되니까.’ 파란이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김현성이 뭔가를 한다는 상황 그 자체가 중요했다. 무력과 지력을 모두 갖추고 있는 유능한 지도자, 우리들의 김현성. 내가 잠깐 길드를 비운 사이 내부의 인원들이 모두 김현성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리라. ‘일을 던져 놓은 건 미안하긴 하지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별말 안 하는 거고.’ 적당히 자리를 옮겨 손 안에 있는 것을 살짝 들이켜며 선희영과 대화를 나누자 시간이 조금 흐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선희영과의 대화는 조금 재미있다. 내가 알고 있는 여자들 중 말이 가장 잘 통하는 상대를 꼽아 보아보라면 1위는 당연히 이지혜겠지만 선희영 역시 나와 잘 맞는 부분이 어느 정도 있다. 차희라처럼 뇌를 거치지 않고 말하는 스타일보다는 훨씬 낫다는 거다. “슬슬 일어나야겠군요.” “아. 조금은 아쉽네요. 정말 오랜만에 여유를 가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희영 씨. 뭐, 앞으로 종종 쉬러 나오죠.” “가끔 어울려 주시는 건가요?” “네. 물론입니다.” 전형적인 서비스 멘트를 날린 이후에야 천천히 길을 걷기 시작. 사실 선희영과 함께 있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김현성이 잘해내고 있을까에 대한 걱정밖에 없다. 적당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안일에는 관심도 없었던 바깥사람에게 장을 보러오라는 심부름을 시킨 것 같은 느낌. 티가 안 나게 도와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잠깐해 보긴 했지만 김현성이라면 아마 잘해냈을 거라 믿는다. ‘잘했겠지.’ 김현성은 바보가 아니다. 자신이 챙겨 먹을 수 있는 건 제대로 챙겨먹었으리라. “그럼 회의 잘 마치고 저녁에 봐요.” “네. 그렇게 하죠.” 조금은 느릿하게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길드에 도착한 것은 순식간. 아마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조금 빨라진 것 같았다. 녀석이 일을 잘 처리했을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선희영과 대충 인사를 마치고 난 이후에는 곧바로 길드 회의실로 향한 것은 당연지사. 대충 문을 두드린 이후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세 명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기영입니다.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조금은 찹찹한 표정의 이상희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황정연, 그리고 이쪽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보내고 있는 김현성. 일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것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좋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중간에 약간 사고가 있어서….” “아뇨. 괜찮습니다. 모임이 조금 갑작스러웠으니까요.” “혹시 무슨 일로….” 대답을 한 것은 김현성이었다. “이후의 파란이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상희 님께서 일선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셔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 ‘좋네.’ “부족하지만 당분간은 제가 길드를 맡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상희 님께서 고문으로서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시는 입장에 서게 되실 겁니다.”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여진다. ‘나쁘지 않아.’ 이상희를 고문으로 둔 것도 탁월한 선택이다. 이상희는 지도자로서 아쉬울 뿐, 그것이 그녀가 무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너무 과하게 유능해 보이는 것이 문제. 아마 이상희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능함이 지도자로서의 무능함을 감추고 있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권력 이동에 혼란스러워할 평길드원이나 주변의 시선도 충분히 신경 쓴 것 같았다. 어차피 이상희는 성향상 많이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 이런 인재를 썩힌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훌훌 털고 일어나서 빨리 일해야지. 우리 상희도.’ 내 생각보다 김현성이 넙죽 잘 주워 먹은 것 같은 느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어려운 선택을 하셨군요. 이상희 님께서도….” “아닙니다, 기영 씨. 그동안 맞지 않고 있던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오히려 훌훌 털어버린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그럼 이만 나가 볼까요?” “네?” “다른 길드원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니까요. 중기 씨, 길드원들은….” “미리 말씀하신 대로 모두 한곳에 있습니다.” “그럼 바로 향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말을 해놓은 걸로 봐서는 준비를 해도 단단히 한 것 같은 느낌. 정말로 자신이 자리 잡고 있던 감투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간 것은 당연지사. 계속해서 이상희와 대화를 나누는 김현성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지금의 발표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살짝 강당의 안을 바라보자 꽤나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조금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박덕구와 김예리 그리고 선희영 역시 가장 앞줄에 앉아 있다. 오늘의 나는 단상에 올라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차피 길드원들에게 인수인계가 되었다는 것만 말하는 것이 주목적 일 테니까. “형님.” “잘 지냈어?” “거, 요즘 너무 바쁘신 거 아니요?” “여러 가지 일이 있었으니까. 이제 조금 같이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 질 거다. 길드를 복구 하는 시간이 흐르고 나면 좀 더 여유로워지겠지.” “빨리 그날이 오면 좋겠는데… 그것보다 거, 누님은 조금 괜찮소?” “응. 어제는 잠꼬대까지 하던데, 뭐.” “다행이구만.” “희영 씨도 곧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그것보다는 오늘 들려온 뉴스에 집중해.” “안 그래도 전부 다 모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는데… 뭐 재미있는 뉴스라도 있는 거요?” “직접 보면 알아.” 재미있는 정도가 아니다. 그동안 이곳에서 고생했던 보상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시간이 될 테니까. 이윽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이후에 단상 위에 이상희와 김현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대충 인수인계를 하고 던지듯 자리를 물려줘도 별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은 이상희가 제대로 마무리를 하고 싶다는 반증이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자 오랜만에 듣는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오늘 여러분들을 이렇게 불러 모은 것은 앞으로 파란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지금 저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조금 더 효과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함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동안 무거운 짐으로 느껴졌던 직책을 내려놓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조금 담담하게 보였다. 그렇지만 이곳에 앉아 있는 관중들도 담담해질 수는 없는 이야기. 파란의 초창기 멤버였던 그녀가 파란을 떠난다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불안해하는 듯한 목소리들이나 탄식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란의 새로운 길드 마스터는 7번 대의 파티장이었던 김현성 씨가 어울린다고 판단, 저를 비롯한 파란의 지도부들 역시 전원 동의한 사항입니다. 혼란스러운 시기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이렇게 여러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 역시 전 지도부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부디 이 위기를 함께 해쳐나가 주셨으면 합니다.” 작은 박수소리가 울려 퍼진다. 좋은 연설이었다. 짧고 강렬했다. 굳이 온갖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은 것은 김현성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이상희가 슬그머니 자리를 비키자 살짝 몸을 일으켜 곧바로 단상으로 향하는 녀석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단상 위에 올라간 김현성은 그다지 긴장하거나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이나 익숙한 듯한 모습. ‘아마….’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자리에 오른 적이 분명히 있었으리라. “과분한 자리에 앉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러분이 우려를 표하시는 것처럼 이상희 님께서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내려오신 것은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런 생각을 많이 해오셨고 저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아직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파란의 창단 멤버셨던 이상희 님께서는 길드의 고문으로서 계속해서 길드에 남아 있으실 겁니다.” ‘좋아. 우리 현성이 아주 좋아.’ “파란은 커다란 아픔을 겪었습니다. 아마 지금 이 자리에 계신 평길드원 여러분이나 길드에 소속된 직원 여러분들께서도 오랜 시간 파란과 함께하셨을 겁니다. 그만큼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에 동요하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꽤나 장하다. “새롭게 시작한다고 생각합시다.” 아니 무척 장하다. “아무것도 없었던 허허벌판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합시다. 파란은 변화할 겁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될 거라고 말씀드립니다. 갑작스럽지만 인사와 향후 발전에 대한 계획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설마 이것까지 준비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슬쩍 시선을 돌려 이상희를 보니 본래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 둘이 언제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조금 이르다면 이르다고 할 수 있는 타이밍인 것은 확실했다. 사람들은 변화에 익숙하지 않다. 어쩌면 반발이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저들의 반발이 크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초창기에는 조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김현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 천천히 열리는 녀석의 입을 바라보니 괜스레 가슴이 콩닥거렸다. 솔직히 기대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김현성이 내게 한자리 단단히 챙겨주는 것은 당연히 기대해 볼 만한 사실. 지금까지 내가 파티와 파란의 기여한 걸 생각하면 아마 꿀이 단지 째로 떨어지는 자리로 나를 안내해 줄 것이다.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본 것도 잠시 이윽고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일단 부길드 마스터에 이기영 씨를 임명합니다.” ‘사랑한다! 현성아!’ 눈이 번쩍 띄어졌다. 기다렸던 것이 바로 이거다. 아니, 솔직히 이 정도까지 해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김현성 왕국의 2인자.’ 나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김현성은 나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당연하리라.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도 나를 기분 좋게 한다. “길드의 총무 역시 임시로 이기영 씨를 임명합니다.” 길드의 자금줄을 잡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많은 실권을 주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부길마뿐만이 아니라 총무까지. 조금 바빠지기야 하겠지만 이정도 업무는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인원 충원을 위해 임시로 인사위원회를 꾸린 이후에 그곳의 위원장으로서 이기영 씨가 수고해 주실 예정입니다.” 이것도 좋다. 내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뽑을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이점이 있다. “던전 공략 전략팀을 새롭게 신설해 임시로 이기영 씨가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 “길드 미래 전략 본부와 피해 대책 위원회를 설립, 이기영 씨께서 초대 위원장으로 당분간 수고해 주실 예정입니다.” ‘잠깐.’ “전반적인 행정 업무를 아우를 수 있는 행정수석의 자리에 임시로 이기영 씨를 임명합니다. 상황이 안정화될 때까지 계속해서 수고해 주실 예정입니다.” ‘그만.’ “연금 전략 기획실을 만들어 그곳을 관리하는 실장직에 이기영 씨를 임명합니다.” ‘그만해.’ “홍보 전략팀을 신설, 이기영 씨가 임시로 길드의 홍보를 담당해 주실 예정입니다.” ‘제발 그만하라고, 이 새끼야!’ 김현성의 입에서 계속해서 내 이름이 튀어나오고 있다는 것이 문제. 물론 내 이름 말고도 황정연이나 선희영의 이름 역시 중간 중간 튀어나오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 별 이상한 직책에 계속해서 내 이름이 언급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하던 이들도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 이쯤 되면 김현성이 내게 역을 먹이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임시 위원장으로 이기영 씨를 임명합니다.” ‘알겠으니까 그만하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 녀석이 최초로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 112 회귀자 사용설명서 112화 어서 일해라!(2) 세종과 황희 정승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황희가 열 차례 넘게 사직하기를 청했지만 세종이 결국 윤허하지 않아 죽기 직전까지 일을 해야 했다는 이야기다. 건강의 문제로 사직을 요청하면 자택 근무를 시켰고, 노쇠해 움직일 수 없다 사직을 청하면 가마를 보내 직접 궁으로 불러들였다. 심지어 서류 업무는 누워서라도 처리하라고 관료들을 황희의 집으로 보내기까지 했으니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일을 했던 셈이다. ‘시바….’ 나 역시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 상황. 김현성이 나를 제대로 갈아 벌이려 작정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김현성 왕국이 커지게 됨으로써 김현성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면 그 이름 옆에 내 이름도 함께 언급될 것이 분명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만 하다 과로사한 멍청한 놈으로 말이다. 물론 받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러 비리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황희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힘.’ 당연하지만 길드 내에서 이기영이라는 인간의 위치가 이전과 완벽하게 뒤바뀌었다. 물론 이전에도 결코 낮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누구 봐도 지금의 나는 파란의 실질적인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 힘을 휘두를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현재의 파란은 거의 모든 일에 내 손을 거치면서 돌아간다. 물론 지금까지 맡고 있는 직책 중, 임시라는 단어를 붙이고 있는 직책이 많다는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이후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일단은 내가 파란의 행정 시스템을 전부다 꿰고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전반적인 모든 제반사항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 김현성이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길드 마스터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다 보니 다른 길드원들이 설설 기는 것도 당연지사. 안 그래도 무게감 있는 내 직함이 날개를 단 격이었다. 두 번째는 금화다. 파란은 블랙 기업이 아니라 일한 만큼 보상해주는 따뜻한 길드라는 것을 홍보하기라도 하듯, 나는 길드 내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사람이 됐다. 심지어는 길드 마스터인 김현성 보다도 많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받았던 연봉이 1만 골드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내가 받는 연봉은 약 12배가 뛰었다. 한화로 약 12억을 받는 셈이니 이전과 비교하면 성공도 이런 성공이 없다. 물론 이 정도의 연봉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이 현실. 문제는 내가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갈 수 없을 정도로 파란이 망가진 데 있다. 연봉은 올랐는데 길드의 사정상 월급을 받을 수 없는 상황. 심지어 월급을 길드 직원들이 아니라 내가 직접 벌어야 하는 초유의 사태. 파란은 현재 위기 아닌 위기를 겪고 있었다. 재정난과 인력난으로 말이다. ‘일단 이것부터야.’ 뭐가 됐든 일단은 이 둘부터 해결하는 것이 옳다. 눈앞에 있는 보고서를 정신없이 읽어나가고 있었을 때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기영 님, 피해 대책 위원회에서 올린 보고서입니다. 이건.” “책상에 놔두세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처리하고 곧바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괜찮으시면 정연 씨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그… 황정연 님께서는 지금 따로 할 일이 있으시다고….” “네? 분명히 쉬고 오겠다고….”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도망쳤어.’ 잠깐 쉬고 오겠다는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 하기야 만 하루 동안 이곳에 있었으니 무척이나 오래 버틴 셈. 그나마 그녀가 그간 쌓여 있는 서류를 전부 분류했기 때문에 일이 편해지긴 했다. 컴퓨터가 없는 세계. 그녀 같은 재원은 필요한 상황에만 딱딱 꺼내 쓰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말도 없이 도망칠 줄은 상상도 못했던 부분. 아마 본인의 일도 밀린 일이 많았을 테니 이해는 하지만 괜스레 내 신세가 조금은 더 처량해졌다. “길드의 홍보는….” “말씀드렸던 대로 기사에 파란의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싣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저주받은 신단의 공략 일지를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정은 3일 뒤로 부탁드립니다. 아니, 다시 하겠습니다. 무료 분을 공개한 이후에 일부는 판매하는 게 좋겠군요.” “공략 일지를 판매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판매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럼 이건은 사업부로….” “아뇨. 그냥 놔두도록 하세요. 사업부는 따로 할 일이 있으니까요.” “네?” 어차피 사업부도 내 관할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나를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길드직원의 표정이 눈에 띄었다. “조금 수정 작업을 거쳐야겠지만 충분히 팔리고 남을 겁니다. 저주받은 신단의 이야기는 자극적이니까요.”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원정을 떠나기 전 이설호의 관한 이야기도 집어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금 다듬어야겠지만 말입니다. 혹시 길드 내에서 글을 써봤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면 전부 모아서 수정 작업에 돌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도록 하죠.” “좋은 생각입니다만… 출판과 대량생산까지 생각하게 되면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릅니다. 부길드 마스터.” “모든 일정을 재조정하겠습니다. 아, 또 공략 일지와 함께 기사에는 저주받은 신단에서 구했던 아이템 목록도 올리는 게 좋겠군요. 율리에나의 대한 정보 역시 푸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지고 계신 전설 아이템도 말입니까.” “네. 당연하지만 아이템의 기능에 대한 것은 풀지 않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전설 아이템 보유자라는 말에 초점을 맞춰 홍보를 진행해 주도록 해주세요. 그게 빠르면서 효과적일 겁니다.” “공략 일지에 대해 더 궁금해하겠군요.” “네.” 전설 아이템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먼저 관심을 끈 이후에 공략 일지를 공개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모르긴 몰라도 아마 어마어마하게 팔려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대중은 궁금한 것이 많다. 어디서 아이템을 얻었는지 어떻게 전설 등급의 주인으로 인정받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할지도 모른다. 갑자기 든 생각치고는 조금 괜찮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설 등급의 아이템에 대해 들을 기회는 없었을 테니까. 심지어는…. “환상물약의 출하 시기는 조금 앞당기도록 하겠습니다. 시기는 제가 조금 더 앞당기도록 하지요. 공략 일지 판매와 동시에 함께 푸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일정을 조정하겠습니다.” 다른 쪽으로도 홍보효과를 많이 노릴 수 있다. 신단 공략의 일등공신이었던 물약은 아마 불티나게 팔리게 되리라. 계획 자체는 나쁘지 않다. 뭔가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부족한 느낌. “음…….”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향성을 잘못 잡은 느낌도 있다. 길드의 상품을 홍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길드 자체를 홍보해야 한다. 이런 식이라면 아무리 일이 잘 끝나도 돈만 버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 지어질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길드의 가치는 올라간다. 그렇지만 그게…. ‘파란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뜻이 되는 건 아니지….’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하다. “아. 혹시 마차의 광고판 같은 경우에는 시세가 어떻게 됩니까?” “조금 싸게 하면 하루에 200골드 정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으로 가는 마차의 경우에는 가격이….” “나쁘지는 않군요. 가성비도 괜찮고 무엇보다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듭니다.” “네. 혹시 광고판에는 어떤….” “조금 더 생각해 봐야 될 문제 같습니다. 그것보다 영웅 등급의 아이템 목록은 전부 정리했습니까?” “거의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경매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가져오라고 전해주세요. 쓸모없는 아이템은 전부 매각하겠습니다.” “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일은 나쁘지 않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과 연관이 되어 있으니 유동적으로 일정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괜찮게 느껴지는 부분. 아마 일반적인 회사였다면 일정을 조율하는 데도 수많은 회의를 거쳐야 했을 것이다. 이것저것 전부 따져가며 한계에 부딪치는 일도 있었으리라. 혼자 모든 걸 조정하니 귀찮은 관료주의에 발목 잡힐 만한 일은 없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 일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내 능력에 한계가 있는 것이 문제다. 본래 여러 명이서 하던 일을 혼자 처리하려고 하니 머리가 아픈 것이 당연하다. 내가 소설 속에 나오는 행정능력자처럼 이것저것 착착 할 수 있었으면 조금 더 일이 쉬워졌을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제국법도 전부 숙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일반적인 일은 처리하는 데 무리가 없지만 조금 민감한 세금 문제나 제국법에 관련되어 있는 문제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하면서 처리했어야 했으니까. ‘쓸모 있는 인재가 없는 것도 한 몫하고….’ 사실 이게 가장 크다. 파란은 결코 그 규모가 작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7개의 파티를 위해 돌아가고 있는 연예 기획사 같은 느낌이기는 했지만 그들을 보조해 주는 평길드원이나 길드직원의 숫자도 상당하다. 이들 중에 그렇게 특출한 인재가 없다는 소리는 뻔할 뻔자. 애초에 그 늙은이들이 조금이라도 뛰어난 이들의 목을 사전에 날려버렸다는 이야기. 물론 실제로 죽이지는 않았겠지만 압박해 길드에 나가는 것을 종용하든 아니면 올라오기 전에 쳐내건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죽어서도 쓸모없는 놈들.’ 얼마나 자기의 자리에 집착하고 있었는지 답이 나온다. 실질적으로 업무를 뛰어야 하는 인원이 없으니 내가 독박을 쓰는 건 무척이나 당연한 흐름. ‘값싼 인력.’ 값싸고 유능한 인력. 필요한 것은 값싸고 유능한 인력이다.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 길드의 이미지고 이런 길드의 이미지를 결정짓는 것이 바로 홍보, 마케팅. 현재의 파란의 상황을 보자면 값싼 이들이 지원을 하는 것은 맞지만 유능한 이들이 지원할 정도는 아니다. 어떤 식으로 파란의 이미지를 좋게 사기 치는 게 좋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 대충 입을 여니 밖에서 박덕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나요.” “들어와도 된다, 덕구야.” “끄응… 거, 너무 바빠진 거 아니요?” “응. 바쁘지 정말로 바쁘다.” “우리 길드 마스터가 형님한테 전해주라고 한 게 있어서 왔수.” “뭔데?” “거 피로회복제라는 모양인데….” “아….” ‘김현성 나쁜 새끼.’ 이쯤 되면 전생에 내가 녀석과 원수라도 졌었던 모양이다. 이야기 속의 황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형님의 건강을 걱정하는지… 어디서 구해왔는지는 모르겠는데 거 효과가 대단하다 합디다. 한 방이면 3일 정도는 밤을 새도 끄떡없다고….” 박덕구가 입을 열면 입을 열수록 괜스레 더욱더 무서워진다. ‘이러지 마, 이 새끼야….’ 계속 이대로 가다가는 사단이 나도 뭔 사단이 날 것은 당연지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녀석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단순한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될 수도 있으니까….’ 슬그머니 입을 여니 초롱초롱한 녀석의 눈빛이 나를 반겼다. “덕구야,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뭐요?” “우리 길드의 이미지가 어때?” “거… 망한 길드 아니요? 이제 막 다시 일어서고 있고… 뭐, 앞으로는 잘되겠지만 나쁘지는 않아 보이는 것 같은데… 큼.” 완벽한 정답이다. “그럼 우리 길드의 장점이 뭘까?” “갑자기 그런 걸 물어도….” “진지하게 물어본 게 아니니까 대충 대답해도 돼. 뭐라고 말해야 유능한 인재가 우리 길드로 들어올까?”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거, 우리 길드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젊음과 열정 그리고 패기 아니요? 그리고 형님이 있다는 것이지! 크으….” “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답을 얻은 느낌. 이 간단한 걸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는지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박덕구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자 자신이 도움이 됐다는 걸 깨달았는지 녀석 역시 있는 힘껏 웃음을 보내기 시작. 옆에 앉아 있는 박중기를 향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중기 씨.” “네. 부길드 마스터.” “지금 당장 린델 운송 조합에 연락을 넣고 사방으로 전단을 뿌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역시나 인원을 확충하실….” “아뇨. 일단은….” “…….” “인턴을 모집해야 될 것 같습니다.” 나만 갈릴 수는 없다. # 113 회귀자 사용설명서 113화 어서 일해라!(3) “인턴 말입니까?” “네. 인턴 말입니다.” 그동안 옆에서 이것저것 일처리를 도와주던 박중기가 조금은 미심쩍다는 표정을 보내왔다. 사실 저런 얼굴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길드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인턴이라니… 사람들이 지원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 여론과 언론이 힘을 합치면 어차피 지원자는 들어오게 되어 있다. 우리 길드가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만 잘 잡는다면 말이다. ‘젊은 기업, 젊은 길드!’ 레퍼런스로 잡아야 하는 것은 지구에 있는 벤처기업.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모두가 웃을 수 있는 환경이다. 물론, 현실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겉으로라도 그렇게 보이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유능한 인재들이 일하고 싶은 길드, 상대적으로 적은 임금으로 회사에 충성을 다할 비전투직군 신입들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인턴이고.’ “일단은 인테리어를 조금 바꾸는 게 좋겠군요.” “네?” “사무실이 조금 딱딱한 것 같습니다. 린델의 젊은 인재들이 바라는 건 이런 길드가 아닐 겁니다. 책상은 전부 치우고 염색 마법을 활용해서 푸른색 위주로 인테리어를 바꾸는 게 좋겠군요.” “그게… 갑자기 인테리어를 바꾸라는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파란에 필요한 것은 혁신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제대로 된 생각이 나올 리가 없지요. 일단은 일하기 좋은 장소를 마련하는 게 첫 번째가 될 겁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남이 일하고 싶은 장소 말입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혁신이란 단어보다 듣기 좋은 말은 없다. 아마 내가 무슨 사기를 치려고 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사무실과 사무실을 가로막고 있는 벽도 허물어 버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이설호를 비롯한 늙은이들이 사용하던 집무실 벽은 일단 전부 허물어 버리세요. 탁 트여 보이는 게 더 괜찮을 겁니다. 직원들이 몸을 눕힐 수 있는 커다란 소파도 하나 놓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 잠깐 오침할 수 있는 수면캡슐 같은 것도 추가하겠습니다. 따로 구입하기보다는 기존에 있던 걸 활용하는 방향으로 준비해 주세요. 예산은 최소화합니다. 중요한 것은 분위기입니다. 분위기. 자유롭고 능동적이고 젊은이들의 꿈을 바칠 수 있는 그런 길드가 되는 게 중요합니다. 아니, 최소한 그런 길드처럼 보여야 합니다.” “아… 네….” “쉬는 시간에 직원들이 이용할 수 있는 휴게실에는 당구대든 카드게임이든 상관없으니까 아무거나 집어놓도록 하세요. 아, 체스 같은 보드게임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가격도 별로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추가로 길드 식당은 뷔페식으로 바꾸도록 합시다.” “식당의 예산은….” 잘 먹는 노예가 더 힘차게 일할 수 있는 법이다. 다른 건 몰라도 평길드원이나 길드 직원들이 이용하는 식당 같은 경우에는 어느 정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간부 식당이랑 갭이 너무 크니까.’ “이전에 자리 잡고 있었던 늙은이들의 쓸모없는 사치품을 정리하면 나올 겁니다.” “그래도 조금 부족할 겁니다. 어느 정도 수준을 바라고 있으신지….” 조금은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 그렇지만 답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앞으로 파란에 품위유지비 같은 것은 없습니다. 파티원과 간부들 복지로 매달 빠져나갔던 품위 유지 비용을 빼도록 해주세요. 남는 예산의 일부를 투입하면 될 겁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노예들을 부리는 게 더 낫다. ‘품위 유지는 개뿔.’ 간부와 파티원들이 받고 있는 연봉만으로도 품위유지 같은 건 하고도 남는다. 애초에 따로 이 돈을 처먹었다는 게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장담컨대 길드의 구태세력들이 없었다면 파란은 더욱 큰 길드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 물론 길드 마스터와 부길드 마스터 그리고 외교 간부의 비용은 그대로 유지합니다. 다만 받는 금액을 30% 삭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나는 받아먹고 싶은 것이 솔직한 탐관오리의 심정. 애초에 밖으로 나갈 일이 많으니 따로 써야 될 일이 있을 것이다.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다. 왠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점심시간은 딱히 두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본인이 먹고 싶을 때, 시간도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자유롭게 먹고 싶은 걸 먹습니다. 이건 지금 길드 직원 여러분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내일 아침에 따로 공지해 주세요.” “네.” “간부만 사용했던 편의시설도 모두 개방할 겁니다.” “네? 모든 길드원이 사용하기에는 조금 규모가 작은 것은 아닌지….” “예약제로 운영하겠습니다. 물론 파티원이나 간부에게 우선예약의 권한이 있는 걸로 하는 게 좋겠군요. 사용하라고 만들어 놓은 시설입니다. 썩히는 게 아깝지요. 어차피 원정을 나가 있는 동안에는 사용하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거 아닙니까.” ‘효율적으로.’ “아, 알겠습니다.” “평길드원이나 길드직원들을 대상으로 마법이나 검술, 혹은 제국법을 공부할 수 있는 클래스를 운영하겠습니다. 마법 클래스는 정연 씨… 검술 클래스는… 이상희 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아니, 이상희 님께는 제가 직접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예산은 얼마나 들어갈 것 같습니까?” 질문을 하면서도 천천히 계산하기 시작. 그렇게 많이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이 필요한 일은 박덕구가 해주면 되고 그동안 늙은이들과 간부들이 받아 갔던 품위 유지비를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예산이 남을 수도 있다. ‘어차피 인턴을 부릴 거면 이게 맞아.’ 고용하려고 하는 인턴들이 무료로 일해 줄 1년의 고용 기간에 쓸 임금보다 직원 복지에 쓰이는 비용이 훨씬 덜 들어간다. 별것도 아닌 걸로 생색내는 것을 대가로 마음대로 노예들을 부릴 수 있는 최고의 환경. 애초에 이해득실을 따지며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아니, 계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생각해 보니 괜찮을 것 같군요. 오늘 잔업은 숙소에서 각자 하는 걸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퇴근하시고 제가 검토해야 될 서류는 방으로 직접 가져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중기 씨가 가져오시면 됩니다.” “네? 지금 말씀이십니까?” “네. 공사는 지금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길드 마스터의 결재는….” 필요없다. “마스터의 결재는 필요 없습니다. 이후에 제가 직접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애초에 자질구레한 것들은 굳이 결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은 김현성이다. 결재를 위한 보고서를 만드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녀석 역시 길드 마스터로서 해야 할 업무들이 있으니 지금은 그쪽에 더 집중하는 것이 맞다. “그럼 시작하도록 합시다.” “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박덕구의 등을 한차례 두드리자 녀석 역시 고개를 끄덕여왔다. 내가 원한대로 공사는 무척이나 빠르게 진행됐다. 단순한 노동을 위한 인력은 많다. 린델 노동 조합에서 기술자들을 싼값에 고용하고 광장에서 재능을 썩히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불러 모았다. 푼돈을 받고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나 그려주고 있었던 이들에게도 꿈을 펼칠 기회였을 것이다. 허한 공간은 무료로 자신을 홍보하기를 원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하나씩 채워지기 시작했고 그것도 모자라 판매하지 않는 작품까지 기부하겠다는 이들이 넘쳐났다. 예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40골드, 50골드에 자신의 그림이나 조각상을 판매하던 이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넘쳐났다. ‘예술가들이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니까.’ 박덕구는 신나게 늙은이들의 집무실의 벽을 부셔가며 이런저런 일을 해왔는데, 수용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녀석의 의견을 다수 받아들였다. 머리 쓰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관심 없었던 박덕구도 관심을 가질 환경이니 계획이 꽤나 잘 돌아가고 있는 도중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기영 님, 남는 공간은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저희 길드의 육아 복지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지원금은 나오고 있습니다만….” “아, 그렇다면 일할 때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어린이 집을 내부에 만들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구에서 보육 교사로 일했던 분이 있으면 저한테 보고하도록 해주세요. 지금 길드에 가정을 꾸린 가구가 몇 가구가 있죠?” “세 가구입니다.” “거의 없군요.” “아무래도 조금 결혼을 꺼리는 편이라….” 부모가 길드에 충성을 맹세하면 그 자식 역시 길드에 충성을 다할 확률이 높다. 짧게 일할 노예가 아니라 평생을 바쳐 일할 노예를 육성해야 한다. 육아 복지와 출산 휴가 제도를 확대하는 것이 옳은 판단, 임신했다는 이유로 길드에서 내쳐지는 늙은 기업 이미지 따위, 버리는 것이 옳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길드의 모습이 바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기는 했지만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기존에 있었던 인원들에게도 무척 좋은 이야기였으니까. 물론 우리 길드가 바뀌었다는 걸 홍보하는 것도 빠질 수 없는 부분. 린델일보에게 연락하는 것은 물론 운송 조합에 내걸 광고판을 만드는 것도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타이틀은…. [꿈의 직장, 꿈의 길드 파란] 또는. [완전히 달라졌다. 파란의 길드직원이 이야기하는 파란이 꿈의 직장인 이유 23가지] 정도가 있을 수 있으리라. 직원들의 복지와 수직적이지 않고 수평적인 분위기, 모두가 함께 웃을 수 있는 근무환경과 개인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복지까지. 모르긴 몰라도 조금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에 만들어진 길드의 모습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수준. 물론 미비한 부분도 눈에 띄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부족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도 나름 인간적일 것이다. 너무 완벽해 보인다면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좋지 않다. “입소문이 가장 중요합니다. 길드원들을 계속해서 교육해 주세요. 언론보다 중요한 게 여론입니다. 퇴근한 이후에는 길드원들을 주점을 보내서 회식비를 지원하세요. 길드 사정상 회식비로 지출할 수 있는 한도는 정해놓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이십니까?” “네. 실컷 웃고 떠들고 오세요. 물론 다음날 업무에 지장을 주는 것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혁신. 중요한 건 혁신입니다. 길드직원과 평길드원 분들에게도 계속해서 이미지를 심어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젊은 길드와 혁신입니다. 그게 우리 길드가 외부에 내걸 이미지입니다. 회식 이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자기개발을 멈추지 마세요. 중기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첩 스탯이 좋으신 것 같은데… 재능을 썩히는 건 아까우니까요.” “아…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길드휘장은 왜 하고 다니지 않는 겁니까?” “네? 아… 그건 간부님과 파티원분만 착용할 수 있다고….” “하… 이 미친 늙은이들이….”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앞으로는 평길드원과 직원분도 전원 휘장을 착용합니다. 밖으로 나갈 때는 특히 전원이 착용하도록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길드의 얼굴입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외부에서 사고를 일으킨다면 목이 날아갈 각오를 해야 할 겁니다. 단순히 예를 들어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로 목을 날릴 거예요. 그걸 잘 알아두도록 하세요. 추레한 모습도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통일된 복장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깔끔하고 말끔한 모습으로 다니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감,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계획은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실제로 여론 조사도 나쁘지 않은 상태. 현재 길드의 남아 있는 인원들을 조금 챙겨주고 분위기를 바꿔준 정도로 자신들끼리 앞다투며 길드를 홍보해 주고 있는 상황이다. 외부의 여론도 아주 좋다. 실제로 아직 지원기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심심치 않게 문의가 들어오고 있었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이후에는 입단 설명회와 길드 내부를 공개하는 언론 플레이를 해야 되는 상황에 놓였다. 그 와중에 일의 능률이 올라간 것은 조금 의외라고 할 수 있는 성과. 밖에만 나가도 심심치 않게 파란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올 정도였으니 인재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당연지사. 당연하지만 부정적인 시선이 아닌 긍정적인 시선이었다. 이전에 있었던 사건들은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고 파란이 과연 일어설 수 있을까에 대한 시선은 ‘파란에 가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됐다. 애초에 우리와 하나였던 붉은용병과 검은백조 역시 다시금 손을 내밀기 시작하니 거대 자본을 등진 젊은 길드라는 이미지가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 사고를 쳤던 늙은이들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다. 일단 직원들이 활약을 해주고 있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 아마 이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아니었다면 이처럼 단기간 내에 린델에 소문이 자리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가 보낸 회식도 일의 연장선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는 이미 대형 길드의 소속되어 있는 안내인들도 이쪽에 관심을 가질 정도니 파란의 길드원 교육이 얼마나 철저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최악이라고 느껴졌던 기존 길드원들도 나름대로 마음에 들기 시작한 상황. ‘요즘에는 보고서도 제때 올라오고….’ 기존에 보였던 거지같은 실수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물론 아직까지 유능한 노예들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이 보였지만 최소한 본인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만족할 수 있는 부분이리라.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면서도 계속해서 외부에 여론을 신경 써야 되는 상태. 버틸 만큼 버텼지만 더 이상 길드의 빈자리를 소수의 인원이 감당하기 힘든 상황까지 치달았을 때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모집공고를 돌렸다. 조금은 불안한 심정으로 말이다. [파란 인턴십 모집 공고] [파란과 새로운 가족이 되실 분을 찾습니다. 정식 길드원 전환 가능] 떨리는 마음으로 외부의 반응을 살펴본 이후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폭발적. “파란 공채 떴다.” “내가 모집한다고 했잖아.” “전투직군도 뽑는 거 맞아?” “아….” 린델이 시끄러워질 정도였다. # 114 회귀자 사용설명서 114화 어서 일해라!(4) 린델이 시끄러워질 정도였다. 혁신, 혁신 하고 외친 보람이 있다. 아마 이들에게도 현재의 파란의 시스템이 익숙할 것이다. 수많은 복지와 직원들의 편의를 생각한 꿈같은 회사. 지구에 있는 인간들 역시 머릿속으로는 그런 꿈같은 회사를 그린다. 물론 당연한 것들이 어떤 곳에서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지만 말이다. 경영학을 공부하고 창업을 하는 이 땅의 수많은 전문경영인 역시 어떤 기업에 인재들이 몰려오는지 알고 있다. 그렇지만 단순히 알고 있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천지차이.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기업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방법을 실행하지 않는다. 개인의 욕심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노예들을 혹사시켜도 그 다음 노예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현실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회사의 내부적인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자본이 부족할 수도 있고 위태로운 회사의 상황 때문에 복지 자체가 힘들 수도 있다. 똑똑한 양반이 널려 있는 지구에서도 이 정도로 직원들에게 신경 써주는 기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나 위험이라는 특수성을 떠안고 있는 린델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다. 붉은용병이나 검은백조 같은 대형 길드 같은 경우에는 사정이 좋긴 하지만 나머지 중소 클랜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것이 현실. 애초에 내가 한 행동도 혁신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인턴을 부린다는 것 자체가 그다지 좋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정당한 보상이 있기 때문에 이들이 더 필사적으로 일할 수 있다. ‘정직원만 된다면.’ 그런 생각이 노예들의 가열로에 석탄을 집어넣게 한다. 굳이 설명하자면 애초에 혁신이란 단어도 프레임 씌우기와 말장난에 불과하다. 한번 심어진 이미지는 고착화되어 자리 잡고 앞으로 파란에게 변화가 생길 때마다 우리의 추종자들이 혁신을 외치는 앵무새로 변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건 이미지야.’ 언론과 여론을 통한 프레임 씌우기가 집단의 모든 걸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으로 툭툭 책상을 치고 있을 때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합격자가 꽤 됩니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군요.” “네. 1차 시험으로 이미 한 차례 걸렀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습니다. 생각보다 능력 있는 지원자가 많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역시 부길드 마스터는 따로….” “아뇨. 전부 직접 보겠습니다.” 상태창을 볼 수 있으니 이렇게 하는 편이 옳다. “조금 무리하는 게 아니신지 걱정됩니다.” “아닙니다. 길드의 일꾼이 되실 분들인데 직접 얼굴을 보는 게 맞습니다.” “역시….” “어차피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을 테니까요.” 인재를 솎아내는 방법은 간단. 아쉽지만 어중이떠중이들을 걸러내는 것은 시험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다. 제국법에 관련된 시험이나 세금관리에 대한 문제들을 출제, 연금 기획실에 지원한 이들은 연금술에 대한 시험을 내는 것이 가장 좋다고 판단을 내렸고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단순히 소문만 듣고 몰려온 이들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아쉬운 것은 순간의 실수 때문에 탈락하고만 인재이지만 현재는 이런 이들까지 품을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일단 곧바로 전력으로 써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 “면접 지원자들은 전부 모였습니까?” “네.” “한 명씩 들여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면접은 저 혼자 진행합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리에 슬쩍 몸을 앉히기가 무섭게 긴장한 표정의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똥이라도 마려운 표정. 아마 내가 직접 면접을 볼 줄은 몰랐던 모양인 것 같았다. 도시 내의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과의 면접이라니 저런 얼굴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살짝 웃으며 저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순식간. 능력치는 전체적으로 낮고 성향은…. ‘나태한 이기주의자.’ 이런 사람들을 골라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희영에게 걸리면 뼈도 추리지 못할 이런 놈들 말이다. 앞에 놓인 서류를 보니 이력은 그다지 나쁘게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놈들이 길드의 종양이 되는 거다. 파란에 다시 한번 미친 늙은이들을 부활시킬 이유가 없는 것이 당연. 아마 1년 뒤 정직원이 돼서 복지효과를 누리고 싶은 이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아. 김철수 씨?” “네. 안녕하십니까.” “아. 자기소개 하실 필요 없습니다. 기존의 면접과는 조금 다를 테니까요. 위기 대책 대응팀에 지원해 주셨는데….” “네. 그렇습니다. 들어보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수호의 나무 클랜에서 잠깐 동안 팀장을 역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들어본 적 있습니다. 인상적이군요.” 수호의 나무는 개뿔. 들어본 적도 없다. 아마 어처구니없게 사라져 버린 그저 그런 길드 중에 하나이리라. 두 눈으로는 열의를 불태워 오고 있기는 하지만 성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슬쩍 녀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자 조금은 당황스러워하는 놈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간단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네.” “린델 전역을 덮친 재난 발생시 피난 대책을 설계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지금 말씀이십니까?” “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린델의 인구를 전원 대피시켜야 합니다. 당신이라면 이 인원들을 어떻게 대피시키겠습니까.” “아… 저… 일단은 마법을 사용하는 게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고 판단해서….” 뭐라고 횡설수설 말하고는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대답과는 거리가 멀다. ‘멍청한 놈.’ 어떤 종류의 위험으로부터 대피시켜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꼴은 가관. 성향 때문에 이미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눈앞에 있는 지원자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린델의 3번 성문은….” “네. 잘 알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면접이었습니다. 이만 나가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합격 여부는 이후 통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인상적이더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아! 감, 감사합니다.” 정말로 적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저 친구는 1년만 써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정답을 말했다고 생각했는지 입꼬리가 올라간 녀석이 나간 이후에는 바로 다음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제법 말끔해 보이는 여자. 그렇지만 몸 곳곳에서 고생한 흔적들이 느껴졌다. ‘나이도 있어 보이고….’ 슬그머니 상태창을 열어보자 그녀의 정보가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이름 김미영, 39살, 성향은 노력하는 변호인.’ 지력이 생각보다 괜찮고 심지어는 마력 능력치도 삼십이다. 이력은 꽤나 특이해 보인다. 중견 길드에서 일하는 도중 30살에 퇴직, 결혼한 이후에는 광장에 작은 잡화점을 열었고… 이후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 대충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보이는 것 같은 느낌.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김미영 씨.” “아… 네.” “제국 법무팀에 지원해 주셨군요.” “네.” “이력이 조금 특이한데 있는 그대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결혼도 하셨는데… 휴식기간이 조금 긴 것 같습니다. 5년을 쉬셨군요.” “아… 네.” 표정이 금방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부담스러울 것이다. 슬쩍 이쪽에서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남편 분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군요. 유감입니다. 혹시 자녀분를 두셨습니까?” “두 명입니다. 그렇지만 업무에는 지장이 생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전에 있던 길드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셨나 보군요.” “…….”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머릿속으로 그려진다. 아마 길드에서 일하던 도중 남편을 만나고 결혼에 골인하고 거의 동시에 임신한 것이 분명. 여러 가지 압박을 받은 이후 길드에 나온 다음에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그 사업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남편이 사냥을 나가게 됐을 것이다. 병에 걸려서 죽었는지 아니면 몬스터와 싸우다 큰 상처를 입어 죽었는지는 내 알 바 없지만 아무튼 간에 죽은 남편 때문에 생계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 육아 때문에 다른 길드나 클랜에 취업할 수 없었고 그렇게 휴식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길드에서 기피하는 대상이 된 것. 그동안 어떻게 아이를 키워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절대로 쉬운 일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심한 경우 팔아야 하지 말 것을 팔았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어딘가에 일용직에 몸을 담으며 상상하기 힘든 시간을 보냈으리라. “휴식기간 동안에는 여러 가지 일에 도전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활동을 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건 거짓말. “그렇군요.” 그렇지만 내가 저런 거짓말에 신경 쓸 이유는 없다. 이 여자는 내가 마음속으로 그리고 그려왔던 최고의 인재상이었으니까. ‘아주 좋아.’ 아이가 있다는 게 흠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다시 말하면 애들 쪽만 어떻게 해주면 길드를 위해 충성을 다할 노예로 변모한다는 소리가 된다. 똘똘한 그녀의 자식도 우리 길드의 일꾼이 되어줄 터. 휴식기간이 길다는 흠이야 일하다 보면 적응할 문제고 무엇보다 성향이 마음에 든다. ‘노력이라는 건 좋은 거니까.’ 어머니는 강하다.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다. “본인이 현역으로 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물론입니다. 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공부했고 제국법 1급 자격증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물론, 갱신해야 되긴 하지만… 필요한 업무를 처리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겁니다.” “현재 저희 길드의 상황이 어떤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네.” “어째서 파란의 제국 법무팀으로 지원해 주셨는지 들어보고 싶군요.” 짧은 침묵 뒤에 천천히 입을 열고 있는 그녀가 시야에 비쳤다. “제국법에 능통하신 이들을 필요로 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국법상으로도 다른 자유 도시와의 분쟁은 허용되지 않은 상태에서 최근 파란 길드가 겪었던 사건을 생각해 보면 일본 쪽에 정식으로 항의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파란 길드가 증거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말입니다.” “그렇군요. 만약 증거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법에 위배되지 않은 방향으로 압박을 넣을 방법을 생각하실 수도 있으실 겁니다. 현대의 법에도 허점이 있는 만큼 제국법에도 분명히 허점은 존재합니다.” “방법은 있습니까?” 고개를 살짝 끄덕이지만 대답은 하지 않는다. 아마 더 듣고 싶으면 자신을 고용해 달라는 완곡한 표현일 터. 조금 마음에 든다. “그렇군요. 음… 흥미롭습니다. 아니, 좋아요. 무척 좋습니다.” “…….” “함께 일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네?” “당신을 고용한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1년간은 무급으로 일하셔야 될 겁니다. 물론 급여를 아예 안 드린다는 건 아닙니다. 미영 씨 같은 경우에는 조금 특별한 경우라고 하는 게 맞겠군요. 기본적인 생활비 같은 경우에는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이후에는 연봉 협상을 다시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 그리고 미영 씨만 괜찮으시다면 법무팀의 팀장직을 맡기고 싶습니다만… 물론 인턴 기간 동안 성과가 있어야 가능할 겁니다.” “네?” “아이들은 길드 내 시설에 맡기고 출근하시면 됩니다. 현재 사시는 곳이 어딥니까?” “그게… 저 외곽 쪽에….” 아무래도 빈민촌에서 살고 있는 모양. 문제될 것은 없다. 갈 곳이 없다는 건 더욱더 좋다. “길드 하우스에서 거주하시는 게 좋겠군요. 아이들과 함께 거주하실 방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아….” 앉아 있는 테이블에 밑을 뒤적여 곧바로 근로계약서를 던지자 얼떨떨한 눈으로 계약서를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아마 나보다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분야에 정통한 건 내가 아니라 그녀였으니까. “읽어보시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네… 네.” 무척이나 천천히 계약서를 살펴보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 환희로 바뀌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 바빠질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자녀분들을 며칠 동안은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길드에서 필요한 건 전부 준비해 드립니다. 교육부터 향후 진로까지 말입니다. 성과를 내주시면 제국의 수도로 유학을 보내드릴 의향도 있습니다. 물론 자녀분들도 파란에 입단한다는 전제하에 드리는 지원입니다.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을 겁니다. 김미영 씨.” “네… 아… 네!” “혹시 모험가로서의 교육을 원하신다면 길드에서는 간단한 검술 클래스와 마법 클래스도 지원하고 있으니 자녀분뿐만이 아니라 미영 씨도 함께 참여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사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빈민촌에서 사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지내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다. 아니, 그녀의 자녀들을 생각해 보면 무조건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이 맞다. 언제 정체모를 봉사자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빈민촌에서 사는 것보다는 안락한 파란의 품이 더 좋을 것이다. 밍숭맹숭한 표정으로 그녀가 근로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것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것이 당연.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저 그럼 출근은….” “지금부터.” “네?” “길드 로비에서 박덕구라는 사람을 찾은 이후에 자녀분들과 함께 길드 하우스로 오시면 됩니다. 짐을 정리하고 사무실로 올라간 이후에는 지금 들고 계신 근로계약서를 다시 작성해 주면 됩니다. 제가 법 쪽에 조금 무지합니다. 예전에 있던 걸 참고해서 만들어봤는데 아무래도 이상해 보여서 말입니다.” “아….” “퇴근 전까지 일을 끝낸 뒤에 제출하도록 해주세요, 미영 씨.” 혹시 자신이 실수한 것은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미영의 얼굴이 보였지만 그녀에게 선택지는 없다. 희미하게 기뻐 보이는 얼굴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으리라. “네!” 본디 일꾼을 부릴 때는 본인이 노예라는 자각을 하지 못하게 부리는 게 가장 이상적. 비장한 표정마저 감도는 김미영의 얼굴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같이 갈리자.’ “납득할 만한 성과가 있으면 1년을 채우지 않고도 정규직으로 전환해 드립니다. 납득할 만한 성과여야 합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 115 회귀자 사용설명서 115화 어서 일해라!(5) 면접은 무척이나 원활하게 진행됐고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내 생각보다 우리 김미영 팀장 같은 인재가 많았다는 것은 조금 의외였던 부분. 당연하지만 그들을 기피할 이유가 없었다. 절박한 노예들이 일을 더 잘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애초에 떨어뜨리기 위해 괴상한 질문을 던진 이들 중 몇몇은 무척 억울하다는 반응. 나조차도 정답이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파란의 길드원 전원이 물에 빠졌다. 당신이라면 누구를 구하겠는가와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라.’ ‘린델에 있는 모든 길드의 청소를 의뢰받은 당신, 얼마를 청구해야 적절한 금액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동료들과 함께 던전 탐험을 나섰다. 무조건 한 명이 탐험 중에 죽을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당신은 이 던전 공략에 임하겠는가, 임하지 않겠는가.’ ‘당신의 5살 난 자녀에게 연금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한다면 뭐라고 설명하겠는가.’ 같은 종류의 질문이었다. 다분히 혁신적인 이미지를 노린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어차피 떨어뜨릴 놈들에게만 한 질문이니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실제로 이 대답에 나름 괜찮은 해답을 보여 마음을 바꾸게 한 지원자도 있었다. 물론 지구에 있는 유명한 기업들의 면접 질문을 참고한 것뿐이었지만 효과는 나름 괜찮았다. ‘역시 파란!’ 이라는 반응이 터져 나온 것이다. 망해가는 주제에 지들이 뭔데 혁신 기업 흉내를 내느냐는 비판적인 여론도 있기는 했지만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꿈의 직장의 이미지는 그런 논란을 잠재우는 데 일조했다. 아마 면접 이후에 시작되고 있는 후처리가 꽤나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최종 탈락자들 같은 경우에는 따로 면담을 진행하도록 해주세요.” “어떤?” “어째서 본인이 떨어졌는지에 대해 궁금해할 겁니다. 이력서 대충 보시고 대충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아. 귀하의 지원에 감사드리며 어쩌구 하는 서신도 하나 넣어서 보내주세요. 아마 큰 힘이 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탈락자들까지 케어하는 아름다운 길드. 탈락한 이유조차 모른 채 집으로 쓸쓸히 돌아가야 했던 타 길드와는 다분히 다른 행보였다. 물론 나의 영원한 친구 언론인들을 이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째서 파란은 다른가?] 라는 타이틀로 인터뷰 형식의 기사를 내보냈고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혁신 추종자와 혁신 앵무새들이 슬그머니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비전투직군 면접 이후에 있을 전투직군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이미지 관리에 불과했다. 이쯤 되니 사건이 터진 이후에 파란을 매정하게 버렸던 잠재적 배신자 여러분들도 다시금 연락을 해오기 시작. 물론 그들의 재입단은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다. ‘철새는 필요 없지.’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놈들과 함께 일할 바에야 사랑스러운 일꾼들 몇몇을 뽑는 게 더 좋다. 새롭게 합류한 노예들은 파란이 썩 마음에 드는 모양. 물론 바쁘기는 했지만 이들은 길드의 편의시설에 즐거워했고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 성과를 내면 보상을 받는다. 이 간단한 논리는 김미영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분화구에 기름을 집어넣은 격. 적응을 거친 이후 기존에 자리해 있던 직원들을 위협할 정도로 몰두하니 묘한 경쟁심이 형성돼 시너지 효과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원활해지고 있는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뒈질 것 같다.’ 내가 바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루 일과는 간단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는 정하얀의 병문안을 핑계로 슬쩍 그녀의 병실에서 눈을 붙인다. 이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몸을 가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정하얀의 바로 옆자리에 누워 잠을 잔 적이 있을 정도로 궁지에 몰린 상황. 정하얀이 만약에 깨어 있었다면 오히려 좋아했을 거라는 생각으로 자위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어난 이후에는 왠지 모를 자괴감까지 느낄 수 있었다. 잠깐의 휴식시간을 보낸 이후에는 공방으로 들어가 곧 상품으로 출원할 환상물약에 대해 연구하는 시간을 가진다. 새로 뽑은 연금술 기획팀이 무척이나 수고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보니 내 부담은 줄어든다고 하기에는 힘든 부분. 아직 2차 전직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연구원들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그 이후에는 회의를 진행, 길드에 대소사를 정리하고 디테일한 업무지시를 내린다. 황정연에게는 특히 일을 조금 더 주고 김현성을 원망하는 시간을 가진다. 다음에는 조금 유동적으로 홍보 전략, 미래 기획, 제국 법무의 일을 번갈아 하는 것은 물론 전투직군의 인사 기획까지 마무리한다. 아직까지 인턴들이 할 수 없는 일을 내 선에서 최대한 마무리하는 것이다. 물론 원망스러운 김현성의 결재가 필요한 것들을 정리하는 시간도 빼 놓을 수는 없다. “김현성… 나쁜 새끼….” 나도 모르게 다른 생각을 하며 중얼거리자 옆쪽에서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영 씨. 최근 잘해주시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부길드 마스터.” “자녀분들은 좀 어떻습니까?” “덕, 덕분에 무척이나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뭐,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나야말로 더 고맙지.’ 아이를 맡아주는 것 정도로 이런 인력을 부릴 수 있다는 건 무척이나 아름다운 사실이다. 내가 뽑은 인원들 중에서도 김미영은 사실상 에이스. 면접 당시에는 그냥 한 번 던져본 것뿐이었지만 1년 뒤에는 김미영이 정말 김미영 팀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뇨. 오히려 저희 길드로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네. 일단은 여기….” “아.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이만 퇴근하도록 하세요.” “그렇지만 수정 사항은….” “저도 지금 마스터에게 결재를 받으러 가야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 감사합니다.” 툭툭 어깨를 두드리자 묘하게 붉어진 얼굴이 보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부길드 마스터.” 김미영이 나간 이후에는 슬쩍 서류들을 정리해 몸을 일으킨 것은 당연지사. 내 선에서 처리하기 무리라고 판단하는 일들은 아무래도 이 길드의 최고 권위자의 허락이 필요하다. 사실 이런 결재도 필요 없지만 만약 결과가 좋지 않을 때 나 대신 덤터기를 쓸 최고 권위자가 필요하다는 거다. 다시 말하면 위험성이 높은 일들은 결재를 받는 게 옳다는 것.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천천히 집무실로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어?” 시야에 비친 것은 붉은용병 길드의 일원, 혹시나 저번 같은 암살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고려한 차희라가 나에게 붙여놓은 이들. 어째서 저들이 이곳에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기가 무섭게 눈앞에 있는 용병 하나가 입을 열어왔다. “오랜만입니다.” “네. 오랜만이군요.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마스터가 와계십니다.” “희라 누나가요?” “네. 현재 파란의 길드 마스터인 김현성 님과 대화를 나누시는 중입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기 시작. 내가 오는 걸 감지라도 했는지 무척 빠른 반응속도였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조금은 오랜만에 본다고 말할 수 있는 차희라. 싱긍벙글 웃고 있는 표정이 왠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자기 왔네?” “누나?” “마침 잘됐네. 안 그래도 자기랑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기영 씨도 들어오시죠.” “아. 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는 것이 당연지사. 보통 차희라가 김현성에게 단독으로 말을 거는 경우는 내가 알기로는 없었다. 파란과의 협상은 대부분 나를 중심으로 진행된 것이 사실. 물론 김현성이 길드 마스터가 됐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둘이 만남을 가지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김현성의 표정을 보니 정말로 불안해졌다. ‘무슨 일이라도 터진 건가.’ 지금까지 우리 원망스러운 회귀자의 표정을 많이 살펴봤지만 저런 표정은 또 처음. 나라 잃은 표정이라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이리라. 이상한 것은 차희라의 표정은 나쁘지 않아보였다는 것, 아니, 오히려 무척 기뻐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 연유를 알 수가 없으니 내 쪽에서 불안한 것은 당연. 조금 눈치를 보고 있었을 때 김현성이 내 질문에 대답해왔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모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도중이었습니다.” “중요한 모임입니까?” “네. 혹시 들으신 적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설명해 드리는 것이 좋겠군요. 사실 저희가 아직 알 필요는 없습니다만 신성제국 베니고어에서는 매년 각 자유 도시에 소속된 대형 길드의 마스터를 초청해 파티를 즐기는 행사를 열고 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사교회인 셈이죠.” “네.” 분명히 들은 적이 있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차희라에게 들었던 것으로 기억. 당연하지만 우리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이야기다. 초대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붉은용병이나 검은백조 같은 대형 길드였고 우리 파란 같은 경우에는 이제 막 새로 시작하는 길드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차희라의 표정을 보니 왠지 모르게 무슨 말을 해올지 예상이 간다. 기다렸다는 듯이 차희라 역시 입을 열어왔다. “당연하지만 이번에도 우리 붉은용병과 검은백조 쪽은 신성제국의 초청을 받았어.” “아….” “용병여왕님께서 이번 모임에 이기영 씨를 데려가고 싶다고 파란 길드에 정식으로 요청하셨습니다.” “요청이라기보다는 간곡한 부탁이라는 게 맞겠지.” “아!!” ‘붐바야!’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깨닫는 것은 순식간. 어째서 김현성이 나라 잃은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시바! 희라 누나, 사랑해!’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업무의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 차희라에게 없던 애정도 생겨날 지경이다. 그녀의 탐스러운 붉은색 머리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어 참기 힘든 것은 물론 자꾸만 올라가려고 하는 입꼬리를 숨길 수가 없었다. “그렇군… 요.” 표정 관리를 하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잘 안 된다. 신성제국의 수도로 들어가 차희라와 함께 파티를 즐기고 여유로운 유랑 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건 상상 만해도 오줌을 지릴 것 같은 이야기. 안 그래도 휴식이 너무나도 그리웠던 참이다. ‘희라 누나….’ “사실 지금 저희 길드에서 전체적인 업무를 총괄해 주고 있는 기영 씨가 빠진다면… 상황이 무척 힘들어질 수도 있겠지만 수도로 들어가 다른 이들이나 유력한 인사들을 만나고 오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계속해서 입을 열고 있는 김현성의 표정이 무척 처참해 보였다. 내가 내 능력을 과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지금 길드가 돌아가고 있는 이유가 내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기영이라는 인간을 업무와 등가교환하고 있는 셈. 이런 상황에서 내가 빠진다면 일이 어떻게 될지는 뻔할 뻔자. 아마 그 막대한 업무와 길드 마스터에게 쏟아질 것이다. ‘정의는 승리한다.’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나를 보내기 싫은 것이 당연할 터, 그렇지만 이번 기회에 사교계에 발을 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나쁜 교환은 아니다. 그게 녀석의 표정이 복잡 미묘해지고 있는 이유이리라. “용병여왕님께서는 기영 씨가 거부한다면 굳이 데려갈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감사히 다녀오겠습니다.” “네… 그게 맞겠죠.” 항상 붉은용병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 파란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이런 간단한 부탁은 들어주는 게 당연. 김현성에게 일을 떠맡기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그럼 결정된 건가요? 현성 씨?” “네. 오히려 저희 쪽에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차희라 님.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많이 씁쓸해 보이시네요.” “아무래도 기영 씨가 길드에서 하는 역할이 무척이나 많다 보니…. 하하. 기영 씨가 자리를 비우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오는군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나 대신 네가 갈리는 거지.’ 어떤 식으로든 정의는 승리하게 되어 있다. 그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고생 좀 하시게. 바깥양반.’ 내조는 끝났다. 그동안 고생한 안사람도 잠깐이나마 인생을 즐길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 * * “거, 누님은 괜찮은 거요? 희영 누님?” “네. 어째서 일어나지 않으시는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요.” “…….” “그거 건강하다니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이렇게 안 일어나니 조금 걱정이 되는데… 근데 숨이 고른 것을 보면 확실히 건강하긴 건강한 모양이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말로 건강하니까요.” “…….” “그건 그렇고 그 이야기 들었소? 이번에 형님이 제국 수도인가 어디인가 하는 곳으로 간다는 것 같던데.” “아. 덕분에 길드에 비상이 걸렸죠. 자리를 좀 오래 비울 것 같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아마 그런 것 같더오. 그 용병여왕이랑 함께 간다는 것 같은데. 그 불여우 같은 여자가 혹시 형님을 건드리지는 않을….” “아… 안 돼!!” “어?” “하얀 씨?” “자,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 116 회귀자 사용설명서 116화 수도로(1) “정하얀 님이 깨어나셨습니다.” 차희라가 길드를 나간 이후에야 들려온 소식이었다. 오랫동안 잠을 자고 있었던 정하얀이 드디어 몸을 일으킨 것. 타이밍이 조금 묘하기는 했지만 기쁘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때 당시 정하얀이 나를 막아줬던 기억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조금 웃기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정하얀이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고생했지.’ 내가 정하얀에게 빠졌다거나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이 든 것은 사실. 물론 연애감정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금수도 은혜를 안다. 이쪽의 목숨을 구해준 만큼 자연스럽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 잠깐 보러가는 게 좋겠군요.” “네.” “길드 마스터에게 인수인계는 제가 오늘 안으로 해놓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중기 씨, 미영 씨는 일을 전부 마무리 지은 이후에 제가 지시한 일들을 검토해 주도록 하세요.” “네.” 김현성과 함께 고생해 줄 박중기와 김미영의 어깨를 두드린 이후에 조금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자 곧바로 정하얀의 병실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안이 조용한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내가 첫 번째인 것 같았다. “하얀아.” “아. 오…… 빠.” 사실 매일 봐왔지만 실제로 깨어 있는 모습을 본 것은 오랜만. 평소대로의 모습이었다. 이전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살짝 기가 죽은 것 같아 보였다는 것. 뭔가 겁을 집어먹은 것 같은 느낌에 어째서 그녀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그녀가 정신을 잃기 전 내가 했던 폭언 때문이었을 것이다. 너무 정신이 없어 비키라고 소리를 지르며 쌍욕을 했던 것으로 기억.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다. 미움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하얀 역시 그때 당시 정신이 없는 상태였겠지만 아마 내가 말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 조금은 무서웠으리라. 왠지 모르게 조금은 어색한 상황에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하기에도 조금 민망했다. ‘어색해.’ 정하얀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으리라. 그렇지만 굳이 말을 꺼낼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순식간. 살짝 팔을 벌리니 마치 고양이가 쥐를 향해 점프하는 것처럼 나에게 튕겨져 안기는 정하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흐으으윽… 오빠. 제성해여… 흐그윽.” “아니야. 나야말로 고맙고 미안해.” “오빠아으으응.”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가슴에 얼굴을 묻은 이후 얼굴을 부비는 것은 가관. 조금은 섬뜩하게 느껴졌던 평소의 행동도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귀엽다. 심지어 평소보다 더 건강한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에 있었던 내 걱정은 기우였던 모양. 떨어질 생각이 없는 모습이 괜스레 부담스러웠다. “많이 아팠지?” 상처가 많았던 등을 쓰다듬자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혹시나 상처가 남았는지 걱정되는 것이 당연. 살짝 정하얀을 뒤로 돌려 윗옷을 들어 올리니 꺅 하는 기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처도 안 남았고.’ 뭐라도 할 줄 알았는지 붉어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고 있는 표정. 심지어는 몸을 슬그머니 이쪽에 가져대는 것 같아 조금 민망했다. 당연하지만 엄한 의미의 등짝을 보자는 의도는 아니다. 다시금 그녀의 상의를 내린 이후니 지나치게 실망한 듯한 정하얀의 얼굴이 나를 반겼다. “이제는 멀쩡하네. 다행이다.” “아… 거,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오빠.”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돼, 하얀아.” “네….” “나는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네!” 천천히 뺨을 쓰다듬자 경련이라도 일어난 듯 몸을 부들부들 떨어오는 모습은 겁먹은 동물 같다. 평소와 별로 다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정하얀이 이렇게 경기를 일으키는 것은 아마 평소와 조금 다른 내 눈빛 때문일 것이다. 진심으로 걱정스럽고 진심으로 고맙다. 조금은 기계적으로 스킨십을 했던 예전과 지금의 모습이 무척 달라졌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정하얀이 느끼고 있을 터. 아니, 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느끼고 있다. 정체모를 애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하얀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갑작스레 정하얀이 작은 비명을 내질렀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음?”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배를 감싸 안은 것. 갑자기 이게 뭔 상황인지 어안이 벙벙한 것은 당연지사. 뭔가 고통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네. 괜, 괜찮아요.” 걱정하는 듯한 말투를 보내자 표정이 슬그머니 변하기 시작한다. 다시금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보인 것이다. ‘얘 봐라….’ “정말로 괜찮아?” “네. 오빠 괜찮아요. 배가 조금 아파서… 그 칼, 칼에 찔린 상처가… 자꾸 욱씬거려서….” “희영 씨를 불러오는 게 좋지 않을까?” “그,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 정도는… 그냥 아주 조금 고통이 느껴질 뿐이라서….” 꾸미고 있는 짓이 무척 앙큼하다. 걱정되는 것이 기분 좋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저주받은 신단 회귀 사건 이후에는 조금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었는데 뭔가 이상한 병이 또 도질 것 같은 느낌이다. 이대로 내버려뒀다간 자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정하얀의 이상 행동은 초기에 잡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무척 짜증나는 것은…. ‘마음 약해지네.’ 저 어처구니없는 엄살에 자꾸만 반응하는 내 양심이었다. ‘진짜 아픈 건 아니겠지.’ 그만큼 정하얀이 내 위에서 피를 쏟으며 나를 꽉 안아줬던 기억은 생생하다. 그 뜨거운 피도 그리고 지켜주겠다는 목소리도 말이다. 일부러 찡그린 저 표정에 설마 정말로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게 느껴질 정도. 이번 한 번은 속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나 대신 칼에 찔린 정하얀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까의 포지션을 유지하자 다시 한번 몸을 부르르 떠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친다. “아… 아파요.” ‘…….’ “역시 희영 씨를 불러오는 게 좋겠다.” “아,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 정도는… 조금 쓰다듬어 주시면 그, 금방 나을 것 같아요. 오빠가 쓰다듬어 주면….” 이쯤 되면 내 대신 칼에 맞은 게 설계는 아니었는지 의심이 될 지경. 본인이 직접 입고 있는 옷을 살짝 들어 올리며 배를 내보이는 행동은 강아지가 따로 없다. 심지어 맨살을 쓰다듬어 달라는 주문이다.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내 반응을 살피는 게 눈에 보인다. ‘상이라고 생각해야 되나.’ 아마 그게 맞을 것이다. 굳이 망설일 이유는 없다. 살짝 배 위에 손을 얹으니 곧바로 풀어지는 표정. 자기 딴에는 표정관리를 하겠다고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미 헤벌쭉한 얼굴로 변해 있다. 자꾸만 아프다고 칭얼거리고 있었지만 이미 보여주고 있는 표정은 아픈 사람이 아니다.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이제 좀 괜찮아?” “조, 조금 더 아래가… 아픈 것 같아요.” “여기?” “조금 더 아래요.” “여기 즈음?” “조, 조금 더 아래예요.” ‘시바… 어디까지 내려가는 건데….’ “조금만 더 아래… 조, 조금만 더….” ‘그만 내려가….’ “거기서 조금만 더 아래예요.” ‘그만.’ 뭔가 조금 발전했다. 지금까지는 무식한 방법으로 내 쪽을 향해 돌진만 해왔다고 한다면 지금의 정하얀은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것 같은 진화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 아니, 틀림없이 변화하고 있다. 애초에 내 동정심에 호소해 이런 일을 꾸민다는 건 예전의 정하얀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 혹시나 나를 보고 이것저것을 배우고 있는 건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필사적으로 머리를 흔들며 쓸데없는 생각을 치워버렸다. ‘그래봤자.’ 아직 어린애 수준이다. 애초에 정하얀은 이런 쪽에는 영 재능이 없다. 당장 지금만 봐도 자신을 자제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땅굴을 파는 장인 마냥 계속해서 다운을 외치고 있는 것을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처음에 시작을 잘했다고 해도 조금 더 교묘해야 이쪽을 옭아맬 수 있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확실한 상을 주는 건 어떨까 생각했던 바로 그때였다. “어디 아프신 곳이 있으신가요?” 들려온 것은 선희영의 목소리였다. “안 그래도 형님 찾으러 갔었는데 이미 만나고 있었구만.” “하얀 씨, 일어나셔서 다행입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뭔가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박덕구부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김예리까지. 심지어는 그런 그녀의 눈을 살며시 가리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 역시 시야에 비쳤다. 뭔가 민망해하는 것 같은 김현성의 얼굴 뒤로 우리 파티 유일의 미성년자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도 알 거 다 알아… 아이 만들기….” ‘네가 뭘 알아. 꼬맹이가 아이 만들기는 개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순식간. 조용히 팔을 꺼낸 이후에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내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하얀이가 배가 아프다고 해서 말입니다. 그, 잠깐 상태를 살펴보고 있는 도중이었습니다.” “네… 아, 혹시 저희가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흐흐… 역시 조금 있다 다시 오는 게 더 좋은 거 아니요?” ‘박덕구, 이 새끼.’ “아니다, 덕구야. 정말로 상, 상태를 확인해 보고 있는 것뿐이었으니까.” 어째서 정하얀이 말을 더듬는지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 약간의 해프닝은 있었지만 무척 오랜만에 7번 대 파티의 모두가 모인 상황. 다들 조금씩 웃는 것을 보니 말은 안 했지만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볼을 부풀리고 있었던 정하얀조차 조금은 기쁜 것 같은 반응. 물론 지금도 길드는 무척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박덕구나 김예리는 그렇다고 쳐도 선희영이나 김현성은 함부로 움직일 수 있는 타이밍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은 것은 잠깐이나마 함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렇게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은 역시나 즐겁다. 물론 전부 모인 7번대 중에서 가장 신나는 반응을 보인 것은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박덕구. 귀가 다 아플 정도였다. “거, 정말로 깜짝 놀랐다니까! 형님이 수도로 간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갑자기 누님이 기적적으로 눈을 번쩍 뜨고 순식간에 몸을 일으키는데 거, 옛날에 우리 할매가 교회에서 봤던 앉은뱅이가 몸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다는 거 아니요. 이게 사랑의 힘이지. 아암!” “정신만 깨어나면 되는 상태였으니까요. 어쩌면 희미하게 의식이 남아 있었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틀림없이 몸의 치료는 완벽했거든요.” “아… 그렇군요.” “왠지 일어날 것 같았다는 거 아니요. 거, 형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살짝 움찔움찔 하는 게 있었는데 역시 그렇게 따악! 일어나니까 정말로 놀랐….” ‘그만해.’ 박덕구의 이야기로 추론해 봤을 때 정하얀이 사실이 깨어 있었던 건 아닌지에 대한 의심이 들긴 들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무척 안정된 정하얀의 반응이 더 신경 쓰인다. 박덕구의 말대로라면 이미 내가 수도로 떠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 울고불고 달라붙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무척이나 침착한 저 표정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을 때 내 의문을 해결해 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이 하도 힘들어 하기에….” ‘이 새끼….’ “내가 현성 형씨한테 달려가서 누님도 함께 가는 게 어떻겠냐 건의했다는 거 아니요. 이건 칭찬받아 마땅한 일 아니요?” ‘이 돼지가….’ “용병여왕님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기영 씨. 조금 생각을 해 봤지만 역시 함께 다녀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얀 씨는 아직 업무를 보기에는 무리이기도 하고….” ‘볼 수가 없는 거겠지.’ “기영 씨와 함께 있는 게 심적으로 도움이 될 겁니다.” 내가 떠난 이후의 정하얀을 감당하기 싫은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김현성 너마저….’ 다분히 나를 저격한 것만 같은 설계였다. 아니, 틀림없이 저격하고 있었다. # 117 회귀자 사용설명서 117화 수도로(2) 김현성의 표정은 무척이나 필사적이었다. 제발 정하얀을 데리고 가달라는 표정, 어차피 정하얀이 이곳에 있어봤자 업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지력은 높지만 정하얀의 업무 능력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나마 나와 함께 있다면 능률이 올라갈 수는 있겠지만 내가 없는 곳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길드를 시끄럽게 만들게 분명하다. 이미 한 번 내가 없는 원정을 나가본 김현성은 내가 없는 정하얀을 통제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느껴본 바가 있다. 하루 종일 울고 지치고 잠들고를 반복하는 것은 물론 히스테리가 담긴 돌발 행동까지. 행정 능력이 후달려 일을 처리하기 바쁜 김현성이 정하얀까지 케어해 줄 수 있을 리가 만무. 박덕구가 입을 열었을 땐 반갑기 까지 했을 것이다. ‘이… 나쁜 놈.’ 문제는 이쪽도 정하얀을 책임지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 ‘사교계야.’ 차희라의 정부로서 참가하는 사교 파티에 정하얀을 끼고 가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신성제국의 귀족이나 귀부인들을 상대로 열심히 입을 털어야 하는 상황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물론, 차희라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행동에도 제한이 생긴다. 그나마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휴가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 조금의 반항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함께하는 것 자체는 좋을 것 같지만 보시다시피 하얀이가 조금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오랜 여행을 견딜 수 있을지가 걱정됩니다.” “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복통을 호소했었습니다.” “지금은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정하얀!’ 평생 엄살을 부리며 칭얼대는 기회를 날리면서까지 당장의 쾌락을 좇겠다는 심보. 방금 전에 아픈 척했던 것이 거짓말 같다. ‘머리를 굴려야 해.’ “아냐, 하얀아. 그래도 안정기가 필요하니까….” “거, 누님은 형님 옆에 있을 때가 가장 안정되는 거 아니요.” “마, 맞아요. 덕구 오빠.” 시간이 너무 짧다. 이미 떠나기 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최대한 정하얀과 같이 가지 않는 쪽으로 설계하고 싶었지만… 무논리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거, 원래 사랑이라는 게 가장 달콤한 회복약이요. 만병통치약이다! 이 말이요!” ‘그게 무슨 논리야.’ “아니예요. 덕구 씨. 사실 기영 씨 말이 맞아요. 몸은 완전히 회복했지만 그래도 안정기라는 게 필요할 거예요. 몸이랑 마력은 이상이 있는 걸로 보이진 않지만….” “그래서 필요한 게 마음의 안정이라는 거 아닙니까. 희영 누님.” 정하얀이 일어난 순간부터, 아니, 심지어 차희라와의 수도행이 결정된 이후부터 이 치밀한 설계가 계획되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 발언을 무시하는 박덕구의 탱킹력과 치고 들어오는 김현성의 공격력에는 속수무책. 가끔씩 터져 나오는 정하얀의 마법 같은 발언은 이상할 정도로 신뢰를 받고 있다. 이쯤 되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미 확정된 사안을 되돌릴 수는 없는 분위기. “…….” 이미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조금은 참담한 심정으로 말을 꺼내는 것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어쩔 수 없군요. 함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큼….”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이스! 누님!” “헤헤….” 패자는 고개를 숙이고 승자는 축배를 든다. 한숨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기왕 이렇게 된 것 정하얀을 잘 교육시키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 ‘특히 차희라에 대해서 교육시켜야겠지.’ “떠들다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기영 씨와 하얀 씨 슬슬 출발할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네. 아 그전에 잠깐 인수인계를….” “아. 그렇군요. 짐은 전부 챙겨 놓으셨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곧바로 가지고 내려오면 됩니다.” 마음 같아서는 인수인계도 하지 않고 도망치고 싶지만 어차피 내가 없는 동안 일이 잘 되어 있지 않으면 수습하는 것도 내 역할이다. 이미 대부분은 황정연에게 말해놔서 괜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김현성이 직접 듣는 것과 직접 듣지 않은 것은 차이가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 작성해 둔 서류를 보이며 설명을 시작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 지력이 낮지는 않으니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현성이는 멍청하지 않으니까. 뭐, 사실 그렇게 크게 할 일이 많지도 않다. “그렇게 크게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새로운 인원도 뽑았고 업무 분담 역시 확실히 재정립되어 있는 상태니까요. 아마 분류된 서류를 정리하고 이해하는 일이 전부일 겁니다. 그리고 최종 책임자로서의 결정이나 확인해야 할 일을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네.” “연금 기획실은 정연 씨에게, 제국 법무팀은 새로 들어온 김미영 팀장에게 보고를 받으면 됩니다. 사업부에게 맡긴 일은 가이드라인을 전부 짜 두었으니 생산 라인과 유통 라인을 전부 확인해 주시고… 체크해 놓은 것을 직접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위기 대책 위원회의 제반 사항을 전부 점검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는 동안에도 김현성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 아마 내가 해놓은 일이 무척 많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유능하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사실 유능도 뭣도 아니고 그냥 길드직원과 나를 갈아내며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일을 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우리 회귀자에게 유능함을 어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새로운 인력들을 뽑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의 결과를 만들 수 없었던 것이 현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까닭은 우리의 충실한 노예들이 힘써줬기 때문이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김현성이 나를 유능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부분. 굳이 내 공을 노예들의 공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김미영 팀장은 직접 챙겨주면 되는 거니까.’ “대충….” “네. 이해했습니다.” 이쯤 되니 김현성의 얼굴에도 슬그머니 죄책감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정하얀을 이쪽에 떠넘기는 걸 미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알면 됐다. 이미 용서했다, 현성아.’ “그… 감사합니다.” “대부분의 플랜이나 가이드라인은 정연 씨가 알고 계실 겁니다.” 기억력 좋은 인간 컴퓨터와 함께 업무를 보시면 됩니다. 라고 마무리 하고 싶지만 괜스레 황정연에게 미안해져 애써 목소리를 삼켜 넘겼다. 여러 가지 설명을 함께 동반하며 설명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나 흘렀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이것저것 꼬집어 주고 싶었지만 더 이상 차희라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현성 씨.” “네. 돌아오실 때 즈음이면 조금 여유로워지겠군요. 물론 업무 쪽의 이야기입니다.” “본의 아니게 일을 떠넘긴 듯한 느낌이 들어 죄송하군요.”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파란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저도 할 일이 조금 많았지만… 덕구 씨나 예리의 훈련도 그렇고… 원정이나 의뢰를 함께 해야 할 새로운 파티원들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으니까요.” “하하하하하.” “감사합니다.” “아뇨.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너무나도 훈훈한 작별 인사에 혹시나 이쪽에 사망 플래그가 꽂힌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는 했지만 아마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파란은 여느 때와 같이 이전의 피해를 복구하고 길드를 정상으로 돌리는 데 주력할 것이고 박덕구는 그저 그런 성장을, 잠재 능력이 뛰어난 김예리는 폭발적인 성장을 할 것이다. 린델은 계속해서 활기찰 거고 인재들은 파란으로 몰려드는 것이 당연. 어쩌면 김현성이 알고 있는 미래의 인재가 길드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조금은 그윽하게 바라보는 김현성을 보니 녀석 역시 이쪽에 꽤나 정이든 모양. 나 자신이 정이 많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윽하게 보지 마. 형도 네 마음 이해한다. 새꺄.’ 슬쩍 손을 내밀자 김현성 역시 내 손을 맞잡아 왔다. 간단한 악수, 너무 간단하지 않나 싶어 포옹이라도 해야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슬쩍 가까이 다가갔지만 왠지 모르게 어색한 듯한 느낌. 내 모습을 보고 살짝 입꼬리를 올린 김현성이 먼저 이쪽의 등을 두드렸다. ‘잘생긴 새끼, 몸 한번 탄탄하네.’ 김현성과 조금은 민망한 인사를 거친 이후에는 박덕구가 슬그머니 다가온다. “형니임….” 안아 달라는 듯 활짝 팔을 벌리는 놈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친 이후에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녀석과도 포옹할 생각은 없다. 안기면 아플 것 같으니까. “항상 기억해라, 덕구야. 내가 하면 너는 더 잘할 수 있다.” “매일 가슴에 새길 거요.” “그리고 정연 씨랑 밥 한번 같이 먹어주고. 너랑 자리 한번 만들어 달라고 매일 성화더라.” “엇!?” “희영 씨도 잘 지내셔야 합니다. 얼마 걸리지는 않겠지만….” “네. 기영 씨도 열심히 일하고 오세요.” “제가 없는 동안 봉사 활동은 금지입니다. 돌아온 다음에는 계속해서 아름다운 린델을 만들어 가도록 합시다.” “네….” “꼬맹이 너도.” “응. 아저씨도 잘하고 와….” 가방을 들고 있는 정하얀을 바라보자 혹시나 자신을 버리고 가는 것은 아닌지 후다닥 이쪽의 옆에 붙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길드 하우스의 문을 여니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붉은 머리의 차희라. 그런 그녀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녀의 뒤에 있는 짐승이다. “어?” 새의 머리, 짐승의 몸에 커다란 날개를 달고 있는 동물은 신화 속에서나 들어봤던 괴물. “그리폰?” “린델 내에서도 두 마리밖에 없는 동물이야. 너무 먼 거리를 이동할 때는 이 녀석만 한 게 없거든. 신성제국에서도 양산하고 싶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개체고… 그만큼 귀하지.” “아….” “3명이서 갈 줄은 생각 못했는데… 우리 붕붕이가 좋아할지 모르겠네. 본래는 2명이 타는 게 적당하거든.” “붉은용병에 다른 인원들은 가지 않는 겁니까?” “나머지 인원은 뒤따라 올 거야. 육로로. 일단 먼저 가 있는 게 편하지 않겠어? 기왕 수도에 갔는데 즐길 건 즐겨야지. 빨리 올라타. 내가 첫 번째, 우리 자기가 두 번째, 저기 있는 세컨드가 마지막 자리에… 혹시나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꽉 잡는 게 좋겠네.”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 슬그머니 올라갔지만 왠지 모르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무서운 것이 당연. 일단 이 괴물의 등 위에 올라가 있는 것 자체가 뭔가 떨린다. 자연스럽게 차희라의 허리를 꽉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 뭔가 좋은 냄새가 나는 것은 물론, 뭔가 부드러운 것이 닿는 것 같은 느낌은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에 취할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이이이익….” ‘아파.’ “이이이이익!” 정하얀은 그게 또 분한지 내 허리를 붙잡으며 차희라에게서 나를 떨어뜨리려고 하고 있다. 내가 차희라에게서 떨어지면 우리가 함께 땅바닥으로 떨어진다는 생각은 못하는 모양이다. ‘떨어지면 둘 다 죽는다, 하얀아. 제발 그만 잡아당겨.’ 벌써부터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 천천히 그리폰이 공중으로 떠오를수록 이쪽에 손을 흔들고 있는 길드원들이 작아지는 게 보였다. 미처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황정연과 이상희 역시 창문을 통해 슬그머니 인사를 해온다. 여러 가지로 이쪽을 도와줬던 박중기나 김미영 팀장도 마찬가지. “작별 인사를 하는 게 조금 오래 걸리던데. 우리 자기,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봐? 그런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누나. 나도 사람이야, 사람.” “은근히 귀여운 면도 있었네. 조금 더 꽉 잡아도 돼. 세컨드도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그 말 그대로 최대한 딱 달라붙는 것이 좋다. 조금 긴장하며 손을 흔들고 있었을 때 아니나 다를까 아래쪽에서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형님! 누님! 거, 길드로 돌아올 때는 세 명이서 돌아와야 합니다!” ‘두 달도 안 걸릴 거다, 덕구야.’ 2년 후에 온다고 하더라도 세 명이서 돌아올 일은 없으리라. 녀석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정하얀이 돌발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다짐하지 마라, 하얀아.’ 저런 이상한 소리라도 확실히 배웅 받는다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박덕구가 린델에 처음 도착했을 때 했던 소리가 괜스레 떠오른다. ‘세상아, 박덕구가 왔다.’ 자세하지는 않지만 아마 이런 종류의 외침이었던 걸로 기억. 하늘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째서 박덕구가 그런 말을 외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작아 보이네.’ 끝없이 펼쳐진 대륙이 손바닥 안에 들어올 것처럼 작아보였다. # 118 회귀자 사용설명서 118화 무녀(1) “하늘을 나는 감상은 어때.” “기분 좋아, 누나.”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나쁘지 않다. 광활한 대륙을 한 번에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특권처럼 느껴질 지경. 다른 대중교통 수단과는 다르게 승차감이 좋지 않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멀리서 보이는 광경은 마치 해외여행이라도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웅장한 자연환경, 거대한 폭포, 거대한 나무, 거대한 숲과 커다란 절벽. 지구에 있는 관광명소를 전부 둘러본 기억은 없지만 장담컨대 내가 지금 위에서 보고 있는 것들은 지구에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으리라. “웅장하네.” “몬스터가 있는 곳이니까. 지구처럼 무작정 개발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잖아? 몬스터가 없었으면 아래에 있는 나무들도 진즉에 벌목되고 개간됐을 거야. 귀중한 자원이니까.” 차희라의 말이 맞다. 관광 산업조차 없는 이곳의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정말로 몬스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녀석들이 자연의 수호자들 인 셈. 어떤 작가가 인간을 지구의 암 세포에 비유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아주 약간은 공감할 수 있는 발언이라고 생각해 보면 이곳에 살고 있는 몬스터들은 암 세포들을 박멸하는 백신인 셈. 모르긴 몰라도 몬스터가 없었다면 내가 보고 있는 자연환경도 싸그리 쓸려나갔으리라. ‘관광 사업은 할 만하려나….’ 그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오빠….” 정하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계속되는 차희라와의 대화에 소외감을 느꼈는지 나를 꽉 안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정하얀의 손을 살살 쓰다듬어 준 것은 당연지사. 이렇게 참아주는 것만으로도 대견했기 때문이다. “…….” 아마 보통 때였다면 일을 벌여도 제대로 벌였으리라. 단순히 저주받은 신단 정하얀 회귀사건의 공이라기보다는 정하얀 본인이 양해해 주는 느낌. 어째서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예상이 가는 게 없는 것은 아니다. ‘차희라가 내 목숨을 구해줬기 때문인가.’ 아마 그럴 확률이 높다. 대륙은 위험하다. 도시 안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은 물론, 외부로 나간다면 그 위험이 조금 더 가시화된다. 정하얀 역시 대충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때의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그녀였으니까. 알 수 없는 여러 요소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선택했던 것이 던전 안에서 영원히 함께 사는 것. 회귀 사건 이후에 나를 감금하는 루트가 사라졌다면 정하얀은 현재 선택을 해야 되는 시기에 놓여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불안하지만 오빠를 지켜줄 수 있는 여자.’ 라는 걸로 차희라를 판단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조용히 있을 이유가 없다. ‘이용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일 수도 있어.’ 정하얀이 점점 성장하고 있다는 건 기쁜 일.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일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흐른다. 반나절을 넘게 날아온 이후에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자유 도시 린델과는 전혀 다른 풍경. “와아아아아아아….” 나를 꽉 붙잡고 있는 정하얀이 탄성을 내질렀다. “워….” “처음 보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당연. 거대하고 고딕한 건축물, 노을빛에 반사되고 있는 거대한 신전, 조금 멀리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 웅장함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응. 멋지네.” 우리 말고도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있는지 공중에서 날고 있는 그리폰이 몇 마리 보인다. 아마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자유 도시의 길드 마스터들이 집결하고 있을 것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신성제국 베니고어의 주민들이 보였다. 내가 상상하는 중세 시대의 양식 보다는 조금 세련된 것 같은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럽다거나 비위생적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이곳의 문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뒤떨어지지 않았어. 오히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편이지. 주민들과 귀족들 너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의 문화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고 그 자부심에 걸맞은 무력이나 지성도 갖추고 있는 편이야. 실제로 신성제국에는 나 정도 되는 강자들도 눈에 띈다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 같….” “너무 멍청하게 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자기. 제국민들을 아래로 보는 플레이어는 명이 그리 길지 않거든.” “충고 고마워, 누나.” 차희라의 말이 맞다. 대충 마음의 눈으로 병사들의 스탯을 확인해 봐도 결코 린델 내에 있는 이들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개개인을 비교해 봤을 때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력이 더 우수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인구의 차이가 있으니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무력을 갖추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상상을 뛰어 넘는다. 특히…. ‘차희라 정도 되는 전력도 보유하고 있다면….’ 이들을 무시하며 신성제국을 침범하는 미친 집단은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그런 놈들이 없는 것을 보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날뛰는 원숭이들은 전부 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저기 레스토랑은 꽤나 먹을 만해. 저기는 정말로 맛있고 우리 세컨드도 같이 가는 게 좋겠네. 저어기 보이는 곳이 대장간은 생각보다 질 좋은 물건이 많아. 가끔 영웅 등급 판정을 받은 무구들이 나오기도 하고, 가격도 린델에 비하면 저렴하다니까. 아, 수도에 뿌리내린 플레이어들도 있어. 허가 받기가 조금 까다롭지만 일단 자리를 잡으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똑같네.” “뭐, 그렇지.” 생각보다 차희라가 수다스럽다. 오랜만에 나들이에는 즐거워 보이는 게 느껴진다. 당연하지만 나와 함께이기 때문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워낙 기분이 자기 좋을 대로 확확 바뀌는 성격이니 오랜만에 수도를 둘러볼 수 있다는 게 신나는 것이리라. “그리고 저곳이 우리가 당분간 지낼 왕성, 물론 저기서 하루 종일 보내지는 않을 거야. 저 안은 조금 따분하거든.” 자신의 수도 관광 계획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와중에도 그리폰은 계속해서 성 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상황. 차희라가 해주는 말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마음의 눈으로 사람들을 훑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착륙장으로 보이는 곳에 그리폰이 내려앉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제국민 병사들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중갑을 입고 있는 할아범. 차희라를 향해 방긋 웃는 모습을 보니 사이가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다. “오랜만이다, 희라야.” “할아버지도 오랜만이네. 생각보다 정정한가 봐. 아직도 현역?” “물론. 그것보다 소문이 자자하던데… 어디 보자 이쪽이 용병여왕의 정부로 소문난 남자인가.”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눈을 발동시키는 것은 당연지사. 전체적인 할아범에 스펙이 곧바로 시야에 비쳤다. ‘빅터하르트, 74살, 능력치는….’ 차희라 이상. 아마 차희라가 말하는 강자는 이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리라. 괴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무력.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후려치기만 해도 머리통이 날아갈 것이다. 보기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 이쪽을 위 아래로 살피는 얼굴이 눈에 보였다. “음 잘 부탁하네. 그 뒤에는….” “우리 자기. 두 번째 애인.” 입술을 까득 깨물며 정하얀 역시 입을 열어왔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기는 했지만 일단은 제대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소개하는 모습. “정하얀입니다.” ‘잘한다. 우리 하얀이.’ “젊은이가 생각보다 능력이 좋구만….” “그러니까 내가 여기까지 데려왔지. 괜히 붙들고 다니겠어? 뭐, 우리 자기야 나중에 차차 설명해 주면 될 것 같고… 할아버지, 오랜만에 대련 어때?” “됐다. 또 왕궁을 시끄럽게 만들 생각은 없으니. 나중에라도 시간이 나면 상대해 주마. 쯧. 너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구나.” “그동안 몸을 제대로 움직일 일이 없었을 뿐이야. 근데 이번에도 우리가 첫 번째로 온 건가?” “아니, 아쉽지만 두 번째. 자유 도시 실리아에서 온 이들이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는 도중이었다.” “누구.” “카스가노 유노.” “무녀?” “그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매일 늦게 오던 여자가 별일이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앞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빅터 할배는 이쪽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는 않은 모양. 사실 이쪽이 조금 더 편하다. 단지 용병여왕의 정부라는 이유로 주목받는다는 것은 움직이기 귀찮을 수도 있으니까. 차희라와 빅터 할배가 대화를 나누자 정하얀은 무척이나 신난다는 듯이 이쪽에 달라붙어왔다. 뭔가 말이라도 걸어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차희라와 빅터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당연지사. 권력자들의 별것 아닌 대화는 나 같은 사람들한테는 아주 좋은 정보가 된다. ‘카스가노 유노?’ 아마도 일본에서 대형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인물. 차희라가 그다지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걸로 봐서는 최소한 야마토 길드는 아니다. 계속해서 머릿속에 새로운 정보를 저장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서부터 조금 수수한 복장을 하고 있는 여자가 모습을 드려낸 것. ‘일본인?’ 아니 수수하다기보다는 단정한 느낌. 그녀의 중심으로 몇몇의 인원들이 그녀를 보좌하듯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앞에 있는 여자는 조용히 두 눈을 감으며 걸어오고 있다. 마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길게 땋은 머리는 땅바닥까지 닿을 것처럼 보였고 차분해 보이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인상적이었다. [플레이어 카스가노 유노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특성 본질과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는 눈이 특성 마음에 눈에 저항합니다.] ‘제기랄….’ 순간적으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이런 경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 오만 생각이 전부 드는 것이 당연지사. 상대방에게 내가 자신을 훔쳐보려고 했다는 정보가 가지는 않았을지 걱정하기가 무섭게 곧바로 상태창이 변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 카스가노 유노가 자신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스스로 개방합니다.] ‘이건 또 뭐….’ [플레이어 카스가노 유노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카스가노 유노] [칭호-조용한 무녀] [나이-20] [성향-타락한 구도자] [직업-무녀-전설 등급] [직업효과-기초 마법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마법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마법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주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점성술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13/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2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17/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89/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15/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00/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마력-96/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장비-없음] [특성-본질과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는 눈-전설 등급] [총평-전설 등급의 무녀입니다. 근력이나 민첩, 체력과 내구 모두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행운과 지력, 마력의 잠재 능력이 높아 후위로서는 무척 좋은 스탯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 이하의 스탯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혹시 비슷하다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플레이어 이기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사람이니까요. 전설 등급의 특성, 본질과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는 눈과 직업의 효율도 좋다고 할 수 있지만 뭔가에 오염된 탓인지 상태가 좋아보이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다지 가까이하는 것을 추천드리지 않겠습니다.] ‘뭐야…….’ 전설 등급의 특성, 전설 등급의 직업 그리고 전설 등급의 잠재 능력치. 누가 봐도 강자로 분류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다. 특히나 행운 잠재 능력이 이렇게 높은 사람을 본 것은 처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바닥을 찍고 있는 스탯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물론 그것보다 더 신경 쓰였던 것은… ‘뭐야….’ 눈을 감은 채로 이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 ‘…뭔데?’ 심지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119 회귀자 사용설명서 119화 무녀(2) ‘뭐야. 왜 울어.’ 눈은 보이지 않는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 그녀는 장님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괜스레 주변의 눈치를 보게 된 것은 당연지사.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니 내가 다 당황스러워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필사적으로 눈을 돌려봤지만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에 괜스레 불안해진다. ‘뭐야….’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조금은 멈칫 하는 모습. 손수건으로 조용히 눈물을 닦는 것을 보니 본인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자각도 하지 못했던 모양. 도무지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표정을 읽기가 힘들어.’ 눈을 감고 있으니 정말로 표정을 읽기가 힘들다. 타락한 구도자라는 성향은 도대체 어떤 성향인지 파악하기 힘들고 본질과 미래와 과거를 꿰뚫어 보는 눈은 도대체 어떤 미친 특성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저 눈깔이 내가 가지고 있다는 눈깔을 뛰어 넘는다는 것뿐. 말하자면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난 셈. ‘시바….’ 예상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짜증 나는 경우는 없다. 차희라가 조금 껄끄러운 이유 역시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예상이 가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적어도 정하얀은 자신의 감정에는 솔직하니 논외. 눈앞에 보이는 무녀의 행동 패턴은 내가 계산할 수 있는 한계를 이미 넘어섰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경계심을 보인 것은 당연지사. 한 발자국 슬그머니 물러서자 곧바로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랑스러운 차희라가 시야에 비쳤다. ‘이제는 희라 누나뿐이야.’ “너. 뭐야?” “오랜만입니다. 차희라 님.” “오랜만인 건 오랜만인 거고… 갑자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찾아오셨데? 그렇게 눈물까지 흩뿌리면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인사를 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누구한테? 우리가 평소에 인사를 나눌 정도로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잖아. 아니, 나보다는 우리 자기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아 보였는데… 내 착각은 아니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정말로 인사를 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차희라 님.” “우리가 지금 실리아에 있는 개자식들 때문에 조금 민감한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지?” “…….” “네가 연관이 되어 있을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거기 있는 잡것들이 별로 좋게 보이지는 않아. 또다시 뭔 개수작을 부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이런 상황에서 나한테 인사를 하러 왔다… 이 멍청한 여자야. 여기가 왕성이 아니었으면 넌 뒈졌어.” “저는 무슨 일이 때문에 그러시는지… 정확히….” “모르면 닥치고 내 눈앞에서 사라져. 네가 정말 모르고 있는지 모르는 척하고 있는지는 알 바 아니지만 우리 자기가 조금 불안해하는 것 같거든.” 믿음직스럽긴 하지만 조금 날이 선 것 같은 느낌. 이름을 들었을 때의 반응만 해도 사이가 나쁘진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린델테러사건 때문에 조금 민감해진 모양이다. 물론 저 무녀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차희라의 반응이 이해가 간다. 차희라와 빅터 할배가 이야기를 나눈 것을 생각해 보면, 무녀는 이 모임에 그다지 열정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았으니까. 갑작스럽게 일찍 온 것도 모자라 인사를 명분으로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해보는 게 당연하다. 폭언 아닌 폭언을 퍼붓자 함께 온 무녀의 똘마니들 역시 한 마디씩 내 뱉기 시작. 물론 똘마니들이 일어선 것은 차희라에게 그다지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차희라 님.” “유노 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입 다물라고 했어. 쓰레기들.” 심지어는 슬그머니 마력까지 운용하고 있는 상황. 잠깐 동안 침묵하고 있었던 유노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아닙니다. 여러분. 그만하셔도 됩니다. 제가 조금 갑작스러웠던 것 같군요.” “…….” “차희라 님. 그리고 다른 분들도… 자리를 불편하게 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혹여나 실리아에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있다면… 그들을 대신해 제가 사과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천천히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인 이후에 말을 내뱉는 모습은 무척이나 침착. 빅터 할배가 빤히 차희라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심 어린 사과에 반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국에 몸을 담고 있는 입장이라면 두 권력자의 싸움이 달가울 리가 없다. 남은 것은 차희라의 선택뿐이었다. “받아들이지.” ‘나쁘진 않았어. 희라 누나.’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길….” 용병여왕은 고개를 끄덕였고 무녀는 조용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쪽의 귀로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은 바로 그때. -부디 시간이 나실 때 제 방으로 와주셨으면 합니다. 서관 2층에 위치해 있습니다. ‘어….’ 분명히 나에게만 들려왔다. -부디 꼭 와주셨으면 합니다. ‘이게 뭔 거지같은 상황이야.’ 어이가 출타할 지경. 어째서 하나부터 끝까지 이해가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어째서 그녀가 나를 찾는 건지, 정말로 나를 보고 눈물을 흘린 것이 맞는지. 왜 자신의 방으로 나를 초대하는 건지 모든 게 장막 속에 가려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룻밤 불장난을 저지르자는 것도 아니고….’ 호텔에 있는 바에서 이런 제안을 받았다면 그나마 즐거웠을 것이다. 정보가 조금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마침 차희라가 이쪽을 바라보며 칭얼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소름이 끼친단 말이야.” “아는 사람이야? 누나?” “대화한 것도 이번이 두 번째.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정말로 신기하네… 이렇게 길게 말한 적도 처음이야.” “…….” “약 5년 전에 이곳에 들어와 실리아에서 길드를 세웠고… 지금은 무척이나 승승장구하고 있는 신흥 길드 요조라의 주인이야. 사실 행보도 명확하지는 않아. 일각에서는 미래나 과거를 본다는 소리도 나오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걸 볼 수 있다는 헛소리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행보를 생각해 보면 거짓말처럼 보이지도 않고… 사실 나도 아는 게 별로 없어.” “…….”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자기. 우리 부하나 검은백조는 확실하게 숙지하고 있을 테니까. 도착하면 물어보지, 뭐.” “응.” “아, 한 가지 확실한 정보는 있어.” “뭐?” “저 여자 맹인이야.” “그 정도는 나도 알 수 있어.” 역시나 이런 쪽으로 차희라에게 기대는 것은 무리다. ‘보고서라도 받아올 걸 그랬나.’ 애초에 조금 더 제대로 된 준비를 하고 왔어야 했다. “저 여자 조금 이상해요, 오빠.” “그래?” “네. 조금 이상해요. 뭔가… 이상해요….” 사실 정하얀이 사람을 잘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저 여자는 하얀이에게는 꽤나 밉보인 모양. 내 쪽에 더욱더 달라붙어 오는 것을 보고는 조금 민망해졌다. “할아버지, 우리는 이만 들어가도 되지?” “물론. 식사는 어디서….” “오늘은 여기 식당에서 간단히 때울 거야. 아니, 사람들 시켜서 대충 방으로 보내줘. 두 시간 후에… 아무래도 장거리 비행을 했더니 조금 피곤하거든.” “대련 어쩌고 하지 않았나?” “기분 잡쳤어.” “뭐, 좋을 대로 하도록 해. 그리고 항상 말하지만 괜한 분란을 만드는 건….” “알아. 싸우면 안 된다는 거. 그래도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는 거 알잖아. 린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지?” “알고 있지만 희라야, 항의할 것이 있으면 기관을 통해 정식으로 항의하는 게 옳아. 너는 너무 다혈질….” “알고 있어.” “쯧. 위로 올라가도록 해.” “내일 또 봐.” 마치 자기 집인 것 같은 움직임, 넓은 왕성을 싸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니 이 신성제국에서 차희라가 받는 대우가 어떤지에 대해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 밥도 조금 먹을 만해. 조금 느끼하기는 하지만 가끔 먹기에는 질리지가 않거든. 일단 방으로 가자.” 초행인 나와 정하얀은 전적으로 차희라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새끼 강아지가 어미를 쫒아가는 것처럼 쫄레쫄레 따라가는 모양새는 내가 생각해도 조금 우습다. 아무래도 자기 방 역시 마련되어 있는 모양. 계단을 계속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차희라의 방 앞이다. 문을 여니 단순히 넓다고 설명할 수 없는 커다란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방 안에 방이 있는 구조. 4개나 5개는 되는 것처럼 보인다. 비싼 호텔을 가본 적은 없지만 아마 그 어떤 호텔이더라도 이곳과 비교하기는 힘드리라. “어차피 방 많으니까 대충 자리 잡으면 될 거야. 화장실도 두 개나 있고.” “좋네요.” “제국한테 받은 방이라서… 조금 쓸 만하지? 사실 가끔 들러서 묵기에는 괜찮아. 이런 걸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사치부리는 기분이 들어서 좋거든. 밥 올 때까지 대충 있든지. 두 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나는 잠깐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 올 거야.” “알겠어.” “심심하면 적당히 주변이나 돌아다녀. 어차피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위험하지도 않을 거고.” “응.” 시원시원하게 말하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아마 차희라 역시 이렇게 빨리 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업무 관련으로 급한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 챙길 것을 챙긴 이후에 방문을 닫고 나가는 모습이 조금 바빠 보인다. 차희라가 나가자 기분이 좋은지 정하얀은 침대 위로 뛰어들어 푹신함을 느끼는 중. 몇 가지 충고할 것에 대해 떠올렸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아직까지는 잘해주고 있기도 하고….’ 지금은 정하얀에게 신경 써줄 여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유야 뻔할 뻔자. 그 무녀가 신경 쓰였던 탓이다. ‘부디 시간이 나실 때 제 방으로 와주셨으면 합니다. 서관 2층에 위치해 있습니다.’ 간곡히 부탁하는 어조로 말했던 목소리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울리고 있는 상황. 혹시나 함정은 아닐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신성제국의 성에서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를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쪽이 마음의 눈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를 찾아가야 하는 것은 필연적인 이야기. 어떻게 됐든 한 번쯤은 대화를 해보는 게 옳다고 할 수 있으리라. 마음의 눈이라는 특성은 사실상 내 밥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가지 능력치가 딸리는 내가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무기, 그런 무기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솔직히 내키지 않는다. ‘마침 차희라도 나간 상황이고….’ 기회가 있다면 지금이 가장 적절한 타이밍. 만약 내가 상상하는 최악의 상황이 온다고 한다면 그녀를 어떻게든 제거해야 한다. “하얀아.” “네?” “잠깐 나갔다 와야 될 것 같아.” “아… 네.” “여기서 조금 기다리고 있을 수 있지?” “…….” “금방 올 거야.” 내키지 않는 표정이지만 정하얀은 내 자유를 억압하지는 않는다. 버려진 강아지의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두고 방문을 나서는 것은 순식간. 성에서 일하고 있는 시종이나 하인들의 눈에 띄게끔 이들에게 질문을 하거나 인상을 남기는 것도 당연. 혹시 모를 사고가 났을 때 이쪽의 움직임을 설명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함정이라면….’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럴 확률은 적다고 생각했다. 내 몸에 이상이 생긴다면 정하얀에게 곧바로 신호가 간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만큼 버틸 시간은 충분. 가방에 가득 가져온 물약을 매만지고 잠잠한 율리에나도 괜스레 한 번 쓰다듬는다. 그러고 보면 그녀가 접근했을 때는……. ‘율리에나도 반응하지 않았어.’ 그녀를 적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정황상 그녀가 나를 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정설. 이설호와의 일이 모두 마무리된 지금 굳이 나를 죽일 생각은 없다. 이쪽에 해를 끼친다면 문제가 더욱더 커진다. 이윽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요조라 길드의 인원들이 보이기 시작.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쪽을 향해 인사를 해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대체 뭐야….’ “이쪽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 “무기는….” 율리에나를 바라본 한 남자가 자신이 잠깐 맡겠다는 의사를 표현했지만 넘길 수 있을 리 만무. 타이밍 좋게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관없습니다. 들여보내도록 해주세요.” “네, 무녀님.” 고개를 끄덕이고 살짝 문을 연 순간 눈앞에 보인 것은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있는 장님. 혹시 모를 위험이 있는지 궁금해 율리에나를 만져봤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나의….” “…….” “주인님이시여.” ‘무슨 개소리야.’ 천천히 겉옷을 벗은 채로 이쪽에 절을 올리는 꼴은 가관.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과 환희에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보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황당한 상황에 잠깐 동안 사고가 정지된 것만 같다. “아아아아… 나의 주인님.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나이다.” ‘미, 미친년….’ “이 못된 종에게 벌을, 벌을 내려주시옵소서… 나의 주인이시여.” ‘개 시바….’ 슬쩍 옆을 바라보자 그동안 보지도 못했던 해괴한 도구들이 눈에 띈다. “부디 벌을 내려주시옵소서… 나의 주인 나, 나의 주인님.” “미친!” 갑작스러운 상황에 문을 다시 열어봤지만 철컥거릴 뿐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미천한 돼지에게 벌을 내려….” “저리 꺼져!” 비명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120 회귀자 사용설명서 120화 검은색 세계(1) 비명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방금도 뭐가 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 ‘정신 나간 여자.’ 눈앞에 있는 무녀는 정신이 나간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계속해서 문을 당겨봤지만 굳게 닫혀 있는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상상하는 종류의 함정은 아니었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당황스러운 상황. 그 와중에도 눈앞에 무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주인님! 주인님! 오랫동안 이날만을 기다려왔나이다.” “시, 시바!” “나의 빛, 나의 사랑, 나의 모든 것.” “가까이 오지 마.” 엉금엉금 기어오는 꼴을 보니 등 뒤로 소름이 돋을 지경.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정하얀을 불러야 되나?’ 그녀와 신체접촉을 한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하얀에게 정보가 날아간다. 아마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이곳으로 향해 줄 수 있으리라. 아니, 어쩌면 지금도 이쪽으로 향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지만.’ 그게 옳은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는 부분. 눈앞에 있는 무녀의 돌발 행동 때문에 이쪽에 첫 번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가 어째서 나를 이곳으로 불렀는지, 그녀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는지 어느새 문을 바로 등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자리는 아까 전 머리를 조아리던 바로 그곳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위치해 있다. 문은 잠겨 있지만 이쪽을 해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뭔가 하려고 했으면….’ 진즉에 했을 것이다. 지금 이 와중에도 몸을 파들파들 떠는 것이 불안해 보이기는 했지만 일단은 대화를 하는 것이 옳다. 잠깐 주인님 흉내를 내는 건 어떨지에 떠올려봤지만 그다지 좋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이라면 그 정도는 파악할 수 있으리라. 슬쩍 주변을 돌아 의자에 앉자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나를 바라보는 무녀의 얼굴이 보였다. 뭔가 이상한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예의 그 해괴한 도구들이 보이고 있는 상황. 별로 용도를 알고 싶지 않은 종류의 물건들이다. ‘애초에 이딴 게 왜 여기에….’ “아아아아….” ‘그딴 소리 내지 마.’ “주인님.” ‘기대도 하지 마.’ 앉은 위치가 그리 좋지는 않다. 의자에 채찍은 왜 걸려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정상적으로 대화를 하는 게 첫 번째. 문제는 어떤 식으로 대화를 시작해야 되는지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에 있다. 내가 대화를 이끌어 가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그녀에게 맞춰줘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압도적인 갑의 위치에 있어야 할 사람이 스스로를 을이라고 해달라 외치고 있다. 그것도 조금 처참한 모습을 자처하면서까지 말이다. 생각이 조금 길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순식간. 일단은 뭐가 됐든 입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눈앞에 있는 무녀가 먼저 입을 열어왔다. “부디 말씀을 낮춰주시옵소서.” 이게 낫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나?” “하나뿐인 저의 주인님이십니다.” “질문의 요지는 그게 아니야. 내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고 있냐는 말이지.” “저의 주인님이라는 사실밖에는 아는 것이 없사옵니다.”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야….’ “처음 본 순간 바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찾아 헤매던 분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셨던 심안 역시….” “알고 있군.” “죄, 죄송합니다. 혹여나 불쾌하신지요.” ‘그만해.’ “솔직히 조금 당황스럽다. 주인이니 뭐니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당신을 처음 보는 것 같거든…. 이곳에 온 것도 확인할 것이 있었을 뿐이고 어째서 나한테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네 말이 맞아. 조금 불쾌한 심정이라고 하는 게 맞겠네.” “송구스럽습니다. 제, 제가 미처 주인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 그렇아… 네… 죄송합니다. 이, 이런 실수를. 주, 죽여주시옵소서.” “…….” “이를 어째… 제, 제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앞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부디 요, 용서를!” ‘연기는 아니야.’ 감긴 눈에서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눈물이 나오고 있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하는 느낌. 눈앞에 있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에 조금은 더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 그녀가 미래나 과거를 볼 수 있다는 것. 특성의 설명에도 이미 그런 설명이 적혀 있다. [특성-본질과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는 눈-전설 등급] [대가를 바쳐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고 애매하게만 설명되었지만 일단 미래나 과거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애초에 특성 이름이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는 눈이니까. ‘어쩌면….’ “미래의 나를 본 적이 있나?” 미래의 내가 그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쳤고 계속해서 미래를 훔쳐보던 그녀가 그 영향에 잠식되었다는 가정을 할 수도 있다. 저 무녀가 보여주고 있는 행동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것은….” “아니면 과거에 나를 만난 적이 있나? “둘 다 아니옵니다. 주인이시여. 정확히 말하면….” “말하면?” “정확히 말하면 미래도 과거도 아니옵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저의 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사옵니다. 이상한 말로 여기실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는 것은 과거이면서도 미래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 몸에 새겨진 기억입니다.” “몸에 새겨진 기억?” “아니, 영혼의 새겨진 기억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이곳에 들어온 6년 전부터….” “4년이라고 하지 않았나?”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만 제가 이곳에 들어온 지는 6년 전입니다. 워, 원하신다면 4년 전으로….” “아니,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일단은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군.” “제, 제가 처음에 이곳에 오자마자 목격한 것은 주인님과 함께하는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무척이나 행복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그 당시에 제가 받아들이기는 힘든 기억이었지만….” “그게 미래를 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연유는 있나?” “보통 미래의 경우에는 하얀색으로 보입니다. 과거의 경우에는 회색 그리고 과거도 미래도 아닌 것들의 경우에는 검정색으로 보이옵니다. 그, 그리고 저는 이것을 검은색 세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군.” 설득력은 있다. 상태창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만약 그녀가 본 것이 미래나 과거가 아니라면 어떤 걸 봤는지는 뻔할 뻔자. ‘1회 차?’ 어쩌면 저 여자가 만들어낸 정신병일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김현성이 겪었던 1회 차뿐이다. 평행세계인지 나발인지일 가능성도 있고 아까 말했던 것처럼 망상일 가능성도 다분하지만…. ‘가능성은 있어.’ 이 여자는 나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내 특성이 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다. 본인은 이것이 1회 차라는 것에 대한 자각은 없는 것 같았지만 만약 이 여자가 볼 수 있는 검은색 세계가 1회 차가 맞다면 이 여자 역시 회귀자에 가깝다. 문제는 다름 아닌 나에 대한 것. ‘살아남았었나?’ 나 역시 1회 차에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생존가능성이 낮다는 쪽으로 생각했었다. 내가 1회 차를 겪었던 당시 김현성 역시 회귀자가 아니었을 테니 나는 김현성을 따라가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박덕구와 계속해서 함께 행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튜토리얼 던전에서 김현성에게 목숨을 구해진 것만 해도 두 번. 만약에 김현성이 없었다면 이기영이라는 인간은 대륙으로 향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저런 여자의 주인 행세를 했던 것을 보면 모르긴 몰라도 조금 능력자였던 모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기분이 조금 묘했다. 물론 이 모든 게 저 여자가 본 게 1회 차라는 것이 확실하다는 가정으로 하는 생각이다. 아직 확인도장을 찍어볼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보를 얻어 나쁠 것은 없으리라. “또 다른 것을 본 적이 있나? 아니, 나에 대해서는 무엇을 본 거지?” “사실 그다지 많은 것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송구스럽지만 제 특성은 제가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나 과거는 가끔 원하는 것이 보이기는 하지만 검은색 세계의 경우에는….” ‘페널티가 있는 건가.’ “검은색 세계의 경우에 보이는 것은 단편적이거나 인상적인 장면뿐입니다. 물론 가, 가장 많이 본 것은 주인님과 함께하는 장면이었습니다만… 아니, 사실 대부분이 주인님과 함께 지낸 기억뿐입니다.” “정확히 어떤 기억을 말하는 거지?” “말,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그… 그것은….” 슬그머니 내 뒤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는 표정이 보였다. 그제야 이 무녀의 반응이 이해가 가기 시작. ‘이기영, 이 새끼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상태창으로 본 그녀의 나이는 겨우 20살. 내가 그녀와 언제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아니, 말하지 않아도 된다.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럼 질문을 바꾸어 보지. 검은색 세계에서 우리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거지? 이것도 볼 수 없었나?” “아, 아닙니다. 주인님과 관련된 것이라면 어느 정도 볼 수 있었습니다. 단편적이어서 자세한 설명을 드리기에는 조금 힘들지만 검은색 세계에서는 제가 주인님을 직접 찾아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뭐?” “검은색 세계에서의 저 역시 주인님과 함께 하는 미래를 가끔씩 보고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행복해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혼란을 느꼈던 것이겠죠. 심지어는 주인님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고 괴로워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곳에 막 들어왔던 저 역시 그랬으니 이해는 합니다만 검은색 세계의 저는 정말로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주제넘게도 주인님을 동정하기도 했습니다. 멍청하게도 주인님과 함께하는 미래를 거부하고 싶어 하면서도 주인님을 가엽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군.” “당시 많이 다치신 주인님을 모셔와 저는 주인님을 치료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그렇게 주인님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생명의 은인이군.” “부,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무튼 간에 주인님이 몸을 거의 회복하신 이후에 본 장면은….” “…….” “…….” “장면은?” “주인님이 제 목을 조르고 있던 장면이었습니다.” “뭐?” “주인님이 제 목을 조르고 있던 장면입니다. 이후는 자세히 보지 못했습니다만 주인님이 하신 말씀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해진다. “뭐라고 이야기했지?” “싸구려 동정 집어 치워. 거지같은 년아. 네놈들은 전부 다 똑같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저와 주인님은 맺어지게 되었지요. 그 다음 장면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습니다. 그렇게 검은색 세계에서의 저와 주인님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지요. 후후….” ‘그게 뭐야.’ 어떻게 거기서 맺어질 수가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들은 이야기가 너무 황당해 조금 혼란스러울 지경. 근본 없이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하나하나 집어나가자 대충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무녀는 미래와 과거와 본질을 볼 수 있다. 미래와 과거만 볼 수 있었던 1회 차의 무녀와는 다르게 2회 차의 무녀는 1회 차까지 엿볼 수 있다. 두 번째. 미래나 과거는 함부로 들춰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랜덤으로 열리고 랜덤으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무녀가 볼 수 있는 1회 차는 제한적이다. 정황상 자신의 영혼에 새겨진 기억만 열람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네 번째. 이유는 모르겠지만 2회 차의 무녀는 나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 아마도 1회 차를 너무 많이 들여다 본 부작용일 것이다. 다섯 번째. 일단 1회 차에서의 무녀는 1회 차 이기영의 생명의 은인이다. 여섯 번째. 1회 차의 무녀는 1회 차의 미래를, 즉 나와 함께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혼란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부정하고 거부했다. 일곱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1회 차의 무녀는 나를 동정했기 때문에 이기영이라는 인간을 구하기로 결심한다. 어떻게 찾아냈는지, 어디에서 찾아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회 차의 무녀는 죽어가는 나를 구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마지막. 몸을 완전히 회복한 1회 차의 이기영이 1회 차의 무녀의 목을 조른다. 시간이 지난 이후 1회 차의 무녀는 자신의 미래를 변화시키지 못한 채로 지금과 같은 결과를 맞이한다. 미래를 바꾸려고 했지만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이해관계를 전부 빼고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뒤통수를 거하게 때린 셈. 어떻게 생각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 새끼 완전히 쓰레기 아냐?’ 1회 차의 이기영은 완벽한 인간 쓰레기였다. 그것도 구제 불능의 쓰레기. ‘이… 나쁜 새끼….’ # 121 회귀자 사용설명서 121화 검은색 세계(2) ‘이… 나쁜 새끼….’ 속으로 욕을 해보기는 했지만 사실 상황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조금 찔리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판단한 것이 전부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지금 나는 차희라와 김현성 급의 강력한 아군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도 이쪽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완벽한 아군. 이쯤 되면 직업을 선택할 때 소환술사를 고르지 않은 것이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새로운 소환수야.’ 눈앞에 있는 이 무녀는 자유 도시 실리아의 대형 길드의 주인인 것은 물론 과거와 미래를 내다보고 기존에 있는 마법과는 다른 개념의 힘도 보유하고 있는 규격 외의 존재다. 정확한 무력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스탯이나 잠재 능력만 고려해 봤을 때, 활용 가치는 정하얀 이상.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는 게 당연했다. ‘어쩔 수 없는 쓰레기인가 보다.’ 물론 완벽하게 이쪽의 품에 끌어들이기 전에 몇 가지 확인 작업을 거쳐야 하는 것이 당연. 게다가 궁금한 게 남아 있다. 초조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무녀를 향해 곧바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질문을 몇 가지 더 하지. 검은색 세계에서의 나는 어떻게 죽었지?” 가장 궁금한 질문이었다.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볼 수 없었다는 뜻인가?” “네.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제가 주인님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가. 너는 어떻게 죽었나?” “주인님을 위해서 죽었습니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알 수 있는 것은 검은색 세계에서의 저는 마지막에 대해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는 것뿐입니다.” “으음…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인연을 맺게 된 건지도 궁금하군.” “송구하지만 무슨 의미이신지….” “말 그대로의 이야기다. 네가 알 고 있는 것처럼 나는 타인의 정보를 훔쳐볼 수 있다. 네가 네 정보를 스스로 개방해 준 덕분에 네 정보 역시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네.” “마력 능력치 96에 전설 등급의 직업, 전설 등급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 아니, 주술사라고 해야 옳은가?” “네. 맞습니다.” “네가 말하는 검은색 세계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어 잘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의 나도 강하다고 하기에는 힘들었겠지.” “아닙니다. 주인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늠름하시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단순히 육체의 스펙을 말하는 거다. 내 말이 맞나?” “네… 그렇습니다.” “의문점은 어째서 네가 나에게 저항하지 않았는가다. 내가 네 목을 조르는 걸 봤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중간에 나와야 할 설명이 빠져 있어. 검은색 세계에서의 우리가 지금보다 더 늦게 만났을 거라고 가정한다면 더욱더 그렇지.” “네. 정확한 일자는 보지 못했지만 검은색 세계에서의 주인님과 저는 지금으로부터 2년 후에서 3년 후에 만나게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네가 22살 때 만났다는 이야기군.” “그렇습니다.” “뭐, 언제 만났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요지는 네가 나보다 강자의 입장에 있었다는 거야.” “제, 제가 어찌 감히.” “내 말이 맞아. 까놓고 이야기해서 네가 나를 죽일 의도가 있었다면 나는 벌써 죽었을 거다. 지금 이곳에서도 그리고 검은색 세계에서도 마찬가지겠지. 어째서 검은색 세계의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을까?” 의문점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1회 차의 무녀는 나에게 학대 받고 있었던 것이 분명. 백번 양보해서 합의 하에 일을 치렀다고 보기에는 무녀의 정신 상태가 그리 좋지만은 않다. 약물이나 다른 방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에 대해 떠올려 봤지만 이 정도의 강자에게는 그마저도 잘 듣지 않으리라. 까놓고 이야기하면 무녀가 나를 밀어낼 수 있는 기회는 꽤나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렇게 된 연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무녀 역시 내 질문에 공감하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오기 시작. 조금 핵심적인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그건?” “검은색 세계의 제가 주인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발언에 잠깐 의자의 손잡이를 두드린 것은 당연지사. 계속해서 말을 잇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 “감정을 직접적으로 느끼지는 못해 정확한 말씀을 드리기는 힘듭니다만 틀림없이 검은색 세계의 저는 주인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간병을 하는 동안 정이라도 들었다는 건가?”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아마 운명적인 어떤 이끌림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주인님을 걱정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주인님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주인님과 함께하는 시간도 당연 길어졌지요. 검은색 세계를 보는 내내 그곳의 저의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아 저 역시 가슴이 뭉클했었습니다.” ‘옴므파탈이야 뭐야.’ 사실 내 자신이 잘생겼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눈이 조금 찢어졌다는 것 외에는 모난 곳이 없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남이라는 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외모. 잘생겼다는 수식어는 우리 사랑스러운 김현성에게나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강인하고 커다란 눈, 오똑한 콧날과 아주 예쁜 입술, 심지어 몸도 좋으니 놈은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격도 나쁘지 않고….’ 사랑을 느끼기에는 조금 더 적합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 조금 옆길로 새기는 했지만 정리하자면 어째서 이런 여자들이 굳이 나에게 달라붙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그녀를 궁지로 몰아붙이면서 이쪽에 호감을 가지게 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도대체 어째서 이쪽에 집착하고 있는지 영문을 모를 지경. 심지어 1회 차에서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이런 유용한 여자를 손에 넣었단다. 물론 아직 확정된 사안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이쯤 되면 특성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 아마 그 특성에는 매혹이라든지 유혹이라든지 그런 식으로 적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주인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떻지?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었나?” “아마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주인님이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을 겁니다. 네. 분명히.” 1회 차 이기영의 심정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녀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공감하는 것처럼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금 머리를 조아리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 그렇다면….” “네 말은 확실히 앞뒤가 맞아. 직접 자신의 정보를 밝힌 것도 그렇고 자신의 상태창을 내게 보여준 것도 아주 인상적이야. 실제로 네가 미래와 과거 그리고 검은색 세계까지 볼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지. 내 눈에는 네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보이니까.” “아.” “그래도 아직 부족해.” “네?” “나는 의심이 무척 많아. 굳이 검은색 세계의 일을 가지고 와 자신과 동일시하는 네 심리도 궁금하고, 네가 본 그대로 나에게 이야기를 하는지도 궁금해. 검은색 세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동일인물이 아니야. 마찬가지로 검은색 세계의 너와 지금의 너도 동일인물이 아니고. 물론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으마.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지. 이해할 수 있나?” “물, 물론입니다.” 부들부들 떨고 있다. 조금 불안한 것 같은 표정, 혹시라도 내가 자신을 내치면 어떡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네가 이야기해 준 것이 전부 진실이라는 보장도 없지. 혹여나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도 한다. 주인님이라는 것도 뭔지 잘 모르겠고… 솔직히 말하면 불쾌한 심정이다. 다짜고짜 이런 이야기를 한들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어?” “아아아….” “내가 어떻게 해야 너를 믿을 수 있을까?” “그… 그건.” “네가 나에게 검은색 세계에 대해서 말해준 걸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 겨우 그것만으로는 내가 네 주인이 되어줄 수 있을 리가 없지. 어떻게 해야 네가 원하는 관계가 구축될 수 있을까?” 쓰레기 같은 딜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맞다. “워, 원하신다면 그, 그 어떤 것이라도 드릴 수 있사옵니다.” “내가 받고 싶은 건 그런 것이 아냐. 어차피 이 관계가 성립된다면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내 것인데… 아니면 말뿐인 관계를 원하고 있는 건가?” “아, 아닙니다. 제… 제 모든 것이 주인님의 것입니다. 그, 그렇습니다.” “내가 너를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아니, 어떻게 해야 내가 안심하고 너를 들일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물론입니다. 무, 물론 있습니다. 주인님은 의심이 많으셨으니까요. 네. 생각해 낸 방법이 있습니다.” 조금 흥분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설명해 줬으면 좋겠군.” “주술입니다.” “주술?” “네. 주인님께서 저를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주술입니다. 제 신체의 소유권을 주인님에게 양도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것도 가능한가.’ 들어본 적이 없는 방법이다. 비슷한 종류의 마법에 대해서 생각해 봤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다. 아마 그녀가 가지고 있는 고유 주술인 모양. 그녀가 이 날을 위해 준비한 주술이라고 생각해 보면 대충 말이 맞아 떨어진다. “제 자신에게 스스로 주박을 거는 종류의 주술입니다. 제 신체와 주인님과 정신을 직접적으로 연결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군. 그렇지만….” 그 반대도 가능한 것은 아닌지 조금은 불안해지기는 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일단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필사적이듯이 나 역시 카스가노 유노라는 매물을 얻고 싶다. 굳이 머리 아프게 이런 짓을 하지 않고 빠르게 그녀를 취하고 싶은 심정. 도박은 싫어하는 편이지만 주사위를 한 번 던지는 것치고는 얻는 게 너무도 크다. “한번 보지.” “알겠습니다. 그럼 빠르게 의식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눈을 감은 채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한 표정은 확인할 수 없지만 마치 세상을 다가진 것만 같은 느낌. 누가 보면 복권이라도 당첨된 줄 알았을 것이다. 품 안에서 작은 단검을 꺼낼 때는 조금 움찔 하기는 했지만 서둘러 그것으로 자신의 팔에 상처를 낼 때는 그녀가 혈액을 매개체로 주술을 완성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연금술과 비슷한 건가.’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거의 다 됐습니다. 거의!” “천천히 해도 상관없다.” 허겁지겁 바닥에 주술진을 그리는 모습은 가관. 분명히 천천히 해도 상관없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뭔가에 쫓기는 것 같아 보였다. 나 역시 마법과 연금술을 전문적으로 하는 만큼 그녀가 어떤 것을 하려고 하는지 봤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문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주술이 내 생각보다 더 어렵다는 것에 있다. 그녀 정도의 고위 마법사가 혈액을 매개체로 땀을 뻘뻘 흘려야 겨우 완성할 수 있는 주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주문의 효과만큼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불안한 마음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그녀를 기다리자 이윽고 주술진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여전히 무릎을 꿇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혈액으로 그려진 주술진에서 희미한 빛이 퍼져 나왔다. 율리에나에게서 반응은 없다. 최소한 나에게 해가 되는 주술은 아니다. 희미한 붉은 빛이 그녀를 감싸 안은 이후에 무녀는 무척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송, 송구스럽지만 주인님의 혈액을….” 입을 벌리며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살짝 상처를 내 그녀의 입 안에 떨어뜨린다. “내 앞에 계신 분께 나의 모든 것을 바치기를 원하노라. 이 주박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깰 수 없는 피의 맹약이 될 것이며 그 누구도 우리에게 간섭할 수 없으리라.” 순식간에 터져 나온 빛. 왠지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 위에 손을 올렸을 때 단편적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시야에 비쳤다. 말 그대로 내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장면. 그녀가 봤던 검은색 세계였을 것이다. ‘싸구려 동정 집어 치워. 거지같은 년아. 네놈들은 전부 다 똑같아.’ ‘아아아… 불쌍한 사람.’ ‘네가 나를 동정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눈물을 흘리며 내 몸을 꽉 껴안는 그녀의 모습이 잠깐 동안 들어온다. 화아아아아아악! 다시 눈을 뜨니 그녀가 그린 주술진이 그녀의 몸으로 흡수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성공했습니다, 주인님.” 지나치게 기뻐하는 듯한 얼굴, 괜스레 양심이 쿡쿡 찔려왔다. ‘너무 쓰레기 같은데….’ 지금 이 모습을 1회 차의 이기영이 보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이쪽을 향해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이 새끼 완전 쓰레기 아니야?’ 괜스레 자괴감이 엄습해왔다. # 122 회귀자 사용설명서 122화 검은색 세계(3) 괜스레 자괴감이 엄습해 왔다. 그렇지만 일은 제대로 끝마치는 것이 옳다. “몇 가지 시험을 해볼 생각인데….” “물론…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묘하게 기대하고 있는 표정을 뒤로 하고 천천히 입을 여니 이상하게 기뻐하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악감정은 없다.” “네. 저를 아껴주셔서 벌을 주신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벌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뭐,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는 네 마음이겠지… 일단 너는 지금부터 숨을 쉬지 못할 거다.” “…….”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모습에 혹시나 이 무녀가 사기를 친 것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볼 정도. 그렇지만 다시 한번 들려온 목소리에 내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마력을 담아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 조금 부끄러워진 것이 당연. 다시 한번 입을 여니 곧바로 숨을 한껏 들이마시는 그녀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너는 숨을 쉬지 못할 거다.” 다량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은 순식간. 이렇게 많은 마력이 빠져나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육체 제어권을 완전히 가져온다는 것치고는 싸게 먹히는 장사다. 저도 모르게 일그러지는 표정. 목을 붙잡고 켁켁거리고 있는 모습은 틀림없이 연기가 아니다. 자꾸만 이쪽을 향해 손을 뻗으며 뒹굴고 있는 모습은 그녀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주… 인… 켁….”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공기가 몸속으로 들어가지 않는지 발버둥 치고 있는 듯한 모습. 눈에서는 자연스럽게 눈물이 흘러나오고 공기를 갈구하듯 혓바닥이 점점 더 앞으로 튀어나온다. 막 숨이 끊어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떠올렸을 때는 곧바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여기서 죽는 것은 사양이니까. “지금부터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시험은 이것으로 끝. 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던 나름대로 합리적인 계약은 성공적으로 완료된 것이 맞다. 지금까지 부족한 공기를 한꺼번에 마신 이후에는 토해내듯 말을 내뱉었다. “감, 감사합니다. 주인님.” 뭐에 대한 감사함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그녀가 그녀 자신에게 스스로 걸어놓은 주박은 완성됐다. 그것도 무척이나 완벽하게…. 이쪽이 페널티로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굳이 하나 설명하자면 그녀를 책임져야 되는 상황에 놓인 것 정도. ‘괜찮겠지.’ 아마 방금의 장면을 주술을 걸기 전에 봤었다면 굳이 이런 귀찮은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 내 눈에 그 장면이 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술의 효과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신체와 내 정신이 연결되는 과정에서 잠깐 동안 오류가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나를 꽉 안아줬던 무녀의 얼굴, 적어도 그녀가 내 목숨을 구해줬다는 것은 틀림없이 진실이다. 살짝 땅에 엎드려 있는 그녀를 일으키자 영문 모를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저 기뻐하고 있는 표정. 아까도 같은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양심이 쿡쿡 찔려온다. ‘앞으로 잘해줄게.’ 1회 차의 이기영을 뛰어 넘을 수 있을 정도로 나쁜 짓을 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 순진한 사람 하나를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 같은 느낌. 검은색 세계의 그녀의 표정을 본 이후에는 괜스레 더 미안해졌다. ‘시바….’ 그러나 합리적인 선택이었고 결과도 나쁘지 않다. 결정적으로는 그녀가 가장 기뻐하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윈윈. ‘물론 합리화지만….’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아군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다면 양심의 가책은 저 멀리 하늘로 날려 버리는 게 옳다. “뭐라고 말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네?” “일단은 고맙다.” “그, 그게 무슨… 당치도 않습니다.” 무녀의 길다란 머리카락을 슬쩍 넘기자 눈에 띄게 붉어하는 얼굴이 보이는 상황. 살짝 웃으니 다리가 풀린 건지 자꾸만 주저앉으려고 해 황당했지만 일단은 스스로 이쪽으로 온 보상 정도는 해주는 것이 맞으리라. “아, 저기 주인님….” 조용히 얼굴을 가까이 대자 눈을 꽉 감아오는 모습.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자 그대로 허물어진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뢰에 보답해 준 네 행동이 비할 바는 아니다. 그리고 검은색 세계에서 네가 나에게 베풀어준 온정에 비하면 미약하다.” “아….” “잠깐이었지만 나도 네가 봤던 것을 본 것 같다.” “네?” “그때. 네가 나에게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맞나?” “네. 맞습니다. 어, 어째서….” “나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네 말처럼 운명적인 이끌림일지도 모르겠군.” 지나치게 기뻐하고 있는 얼굴.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가 맞다. 갑작스레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때. ‘정하얀?’ 이쪽이 무녀에게 신체적 접촉을 했을 때의 정보가 정하얀에게 넘어간 모양. 잘 참는다고 생각했는데 또 그새를 참지 못하고 이쪽으로 올라온 것이다. ‘끄응….’ 아직 이 여자와는 조금 더 할 말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정하얀을 계속해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나에 대해서 타인에게 이야기한 적은 있나?” “물론 없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오늘 만남은 여기까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당연하지만 나와 네 관계는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네. 알겠사옵니다.”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전 회 차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모양. 나 역시 대충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 곧바로 문을 여니 아까와는 다르게 쉽게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정하얀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고민했지만 눈에 들어온 사람은 처음 보는 남자. 조금은 커다란 키에 허리춤에는 긴 검을 가지고 있다. ‘일본도?’ 중세를 기반으로 한 대륙에서 일본도라니 기가 차는 것이 당연. 주문제작을 한 것은 아닌지에 떠올려 봤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남자에게 시선이 끌렸기 때문이다. ‘뭐야?’ 마음의 눈으로 정보를 확인하자 순식간에 여러 가지 정보가 쏟아졌다. [플레이어 이토 소우타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이토 소우타] [칭호-실리아의 바람] [나이-28] [성향-용의주도한 전략가] [직업-무사-전설 등급] [직업효과-기초 검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검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검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마력 운용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81/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민첩-99/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체력-61/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지력-89/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내구-66/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행운-34/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마력-75/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장비-바람의 검-영웅 등급] [특성-바람의 검-전설 등급] [총평-전설 등급의 클래스 무사입니다. 전체적으로 높은 능력치, 그중에서도 특히나 높은 민첩 능력치가 눈에 띕니다. 내구가 조금 낮은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민첩 위주의 검사인 그에게는 꼭 필요한 스탯은 아닙니다. 체력이 조금 떨어져 보이는 것은 가슴 아프군요. 전설 등급의 직업과 전설 등급의 특성을 얻은 것도 눈에 띕니다. 우리 플레이어 이기영과 같다는 건 성향밖에 없군요. 조금 더 분발하시기 바랍니다.] ‘뭔 만나는 놈들마다 전부 괴물이야.’ 민첩 위주의 검사.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다. 애초에 이 정도 스탯을 가지고 있는 이가 평범한 사람일 리가 만무, 차희라와 동급 혹은 그 이상. 한 길드의 길드 마스터로서도 부족함이 없는 능력치라고 생각했다.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성향이 나와 같은 용의주도한 전략가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힘을 얻은 것에 대해서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슬쩍 남자를 지나치려고 했을 때였다. “…….” “이기영 씨?” 내 어깨를 살짝 붙잡은 남자의 손이 느껴진 것. “이토 씨, 무슨 일입니까?” 사랑스러운 무녀가 기분 나쁜 자식을 경계한 것은 당연지사. 그렇지만 이 자식은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며 싱글 싱글 웃고 있었다. ‘기분 나쁜데….’ “처음 뵙겠습니다. 야마토 길드의 길드 마스터, 이토 소우타라고 합니다.” ‘…….’ 순간적으로 말문이 턱하고 막혀온 것은 당연지사. 순간적이지만 린델 테러 사건이 떠오른 탓이다. 폭음과 함께 화살과 칼날이 나를 덮치려고 들어온 기억은 트라우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짜증 나는 기억이다. 그렇지만 침을 삼키며 악수를 내밀고 있는 손을 맞잡았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 ‘짜증 나게….’ 이곳은 안전하다. 분쟁이 완전히 금지된 이곳에서 녀석이 나를 해칠 수 있을 리가 없다. 뒤에는 믿음직한 무녀도 있고 내 허리춤에 있는 율리에나 역시 순간적인 기습을 한 번 정도는 막아줄 수 있을 것이다. ‘민첩 수치를 생각해 보면 그럴 확률은 적지만….’ 일단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 어차피 야마토 길드에 대해 정식으로 항의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만큼 최대한 정보를 뽑아내는 것이 옳다. “저를 어디서 본 적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본 적은 없습니다만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린델 테러 사건의 중심이셨으니 말입니다.” ‘이 새끼….’ 살짝 미소 짓는 모습은 가관. 시치미 땔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평온한 모습이었다. ‘용의주도한 전략가?’ 아마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자유 도시의 중심에서 갑작스레 테러라뇨. 도시는 다르지만 지구에서 이곳으로 함께 넘어온 만큼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아…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네.” “린델 쪽에서 테러의 용의자로 저희 길드를 지목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말입니다.” ‘어쩌라는 거야.’ 지금 이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기에는 너무 불편한 주제. 적어도 희라 누나가 있는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옳다. “이 이야기는 이후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게 좋겠군요. 지금은 타이밍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살짝 고개를 돌렸을 때 다시 한번 어깨를 잡는 손이 느껴진다. 당연하지만 나서준 것은 카스가노 유노. 조용하지만 묵직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 손님한테 무슨….” “아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무례한 행동은 삼가주시겠습니까.” 어디에선가 살기가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 ‘제기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순식간에 희뿌연 막이 주위에 생겨나는 것이 보였다. 옆을 바라보니 카스가노 유노가 빠르게 주문을 외운 상황.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야마토의 개자식이 시야에 비친다. 여기서 미친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린델 내에서도 테러를 일으킨 놈들이니 만큼 어쩌면 이곳에서 나를 확실하게 제거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에 대해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카스가노 유노, 무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마법사인 만큼 대인전에서는 무리가 있다. 눈앞에 있는 무사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녀의 방어막을 뚫어내고 내 목을 치는 데 얼마 걸리지도 않을 터. ‘현성아….’ 왠지 모르게 김현성의 따뜻한 품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자연스럽게 율리에나가 품에서 뛰쳐나오는 순간 눈에 보이는 것은 여전히 웃고 있는 이토 소우타의 표정. “아….” 뭔가 잘못됐다. “율리에나, 안 돼!” 소리를 질렀을 때는 이미 율리에나가 녀석의 옆에 있는 검사의 목을 꿰뚫어 버린 이후. ‘용의주도한 전략가?’ 완벽한 외통수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제기랄.’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를 낸 남자가 바닥에 허물어진 이후에 이토 소우타가 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아니 아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기영 씨. 갑작스레 검을 날리시다니요. 그것도 성스럽고 위대한 베니고어 신성제국의 왕성에서 말입니다. 푸흡… 아끼는 부하가 한 명 죽어버리지 않았습니까? 푸흐흣….” “…….” “이 건은 정식으로 항의해도 되는 겁니까?” “…….” “아니면… 우리 야마토 길드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여도 되는 겁니까?” 단순히 성향만 비슷한 것이 아니다. 행동 패턴 역시 굉장히 비슷하다. 사람을 약 올리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녀석을 눈에 담는 순간, 그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 123 회귀자 사용설명서 123화 뒤통수 사람을 약 올리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녀석을 눈에 담는 순간 그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짜증 나는데….’ 동족혐오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짜증이 치솟는 것은 순식간. 이렇게 1차원적인 함정에 걸려들게 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율리에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 나에게 위험이 생기면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율리에나의 기능을 이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녀석의 똘마니가 한 명 죽기는 했지만 지금부터 일어날 일에 비하면 남는 장사일 터, 아니, 애초에 똘마니가 맞는지 아닌지조차 불명확하다. 이 일이 본래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건지 나와 만난 순간 이 일을 꾸민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사실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 끝이라고 할 수는 없는 부분. 어이없게 당하기는 했지만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고였다는 것은 내 옆에 있는 카스가노 유노가 증언해 줄 수 있다. 조사관들에게 율리에나의 기능을 설명하는 것 역시 도움이 될 것이다. ‘율리에나의 대한 정보를 풀 수밖에 없나.’ 내 입장에서는 조금 짜증 나는 일이기는 하지만 녀석의 뒤통수를 때릴 수 있다면 나쁜 거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닐 게 분명. 만약 놈이 신성제국의 윗대가리들과의 커넥션을 미리 만들어 놨다고 가정한다면 이후에 있을 논쟁에서 분쟁이 생길 여지가 있다. 재판이 열린다면 이쪽이 불리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 어떻게 변명해도 이쪽이 저쪽의 똘마니를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녀석이 정말로 나와 성향이 비슷하다면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놨을 것이 자명한 일. 만약 시나리오를 전부 짜놓지 않았더라도 지금부터 큰 그림을 위한 설계에 들어갈 것이다. ‘나였어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녀석의 계산 외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사랑스러운 무녀 카스가노 유노가 이쪽의 편을 들 거라는 것 하나뿐이겠지만 그것마저 대처할 가능성이 크다. 머릿속으로 일어난 상황을 정리해 보고 있는 사이, 바로 앞 쪽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아끼는 부하가 죽었습니다. 신성제국의 왕성에서 말입니다.” “웃기는 소리 집어 치우세요, 이토 씨. 먼저 살기를 내뿜어 제 손님을 위협한 것은 당신의 부하입니다. 이 사건은 정당방위로 처리될 겁니다.” “이건 좀 의외로군요, 무녀님. 저희 사이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건 당신 혼자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당신의 부하가 제 손님을 위협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정확히 어떻게 위협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아니, 설사 위협했다고 하더라도 단순한 위협만으로 다짜고짜 검을 날리시다니요. 누가 봐도 피해자는 저희 쪽에서 나왔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겠습니다만 최소한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판단하셔야 될 겁니다. 그게 무녀님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입니다. 물론 당신의 휘하에 있는 요조라에게도 도움이 되는 행동이지요.” “당신….” 카스가노 유노는 믿을 수 있는 아군이다. 놈이 저렇게 꾀어내려고 한들 꾀어 낼 수가 없는 이쪽의 우방, 그녀와 그녀의 길드 요조라는 최소한 이쪽을 전력으로 변호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살짝 율리에나를 바라보니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지 이쪽을 맴돌고 있는 모습. 기가 죽은 것 같아 보이는 검을 다시 허리춤에 가져간 이후에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일단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단순히 사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기영 씨.” “제가 가지고 있는 무구, 저주를 내리는 검 율리에나는 주인을 위협하는 행동에 반응하여 움직이는 에고 소드입니다.” “아아아아. 그렇군요. 그런 무구도 있었군요.” “알고 계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군요.” “물론 린델의 한 모험가가 전설 등급의 무구를 얻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그게 이 무기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틀림없이 알고 있었다. 소문으로 들었는지 아니면 본인이 직접 확인한 건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지만 일단 저 얄미운 자식이 린델 테러사건의 주범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아니라면 나에게 작업을 칠 이유는 없을 테니까.’ “네. 어째서 그쪽의 길드원이 저를 위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희 길드원은 당신을 위협한 적이 없습니다.” “아뇨. 틀림없이 위협했습니다. 만약 이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 가도 저는 당신의 길드원이 제 손님을 위협했다고 증언하겠습니다. 당연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희 길드원들 역시 같은 증언을 할 것입니다.” ‘주인님 힘난다! 유노야!’ “무녀님이 그렇게 증언하고 말고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조금 이상하군요. 지금은 틀림없이 자신의 검을 제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만약 당신의 증언대로 이쪽이 먼저 위협을 했다고 하더라도 제 충성스러운 부하가 죽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어째서 제 부하 녀석이 살기를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동료를 죽인 살인범과 기영 님이 조금 닮아보여서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나 봅니다.” “…….” “겨우 그것 가지고 목에 검이 박히게 되다니… 이렇게 불쌍한 경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무기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것도 죄라는 겁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찢어지는군요.” ‘이 새끼….’ 계속해서 피해자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보면 마음을 먹어도 어지간히 먹은 모양. 어떻게 해서든 간에 이쪽에게 가해자 프레임을 씌우고 싶은 거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확 받아버려?’ 자해 정도라면 이쪽도 가능하다. 지금 뒤져 있는 놈의 칼로 이쪽의 배를 한 번 쑤시면 확실한 정당방위가 성립. 문제는 눈앞에 있는 녀석이 쉽게 길을 열어주지 않을 거라는 것에 있다. 민첩 능력치 99의 움직임은 내가 스스로 내 배에 단검을 꽂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선택지는 제한적, 모함을 외치는 앵무새가 되기는 싫지만 찔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애초에 제 갈 길을 가려고 했던 저를 붙잡아 세운 것은 소우타 님이 아니십니까. 갑작스레 사고가 일어났습니다만 혹시 뭔가 다른 뜻이 있어 길드원 중에 한 명을 희생시킨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되는군요.” “그럴 리가요. 상상력이 풍부하십니다.” “상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말씀 드린 것뿐입니다.” “쓸데없는 음모론은 제국의 조사관에게 설명해 주시면 됩니다. 일단은 왕성 안에서 사람이 죽었으니 절차는 밟아야겠지요. 아, 마침 저기 오는군요.” 담담한 척했지만 속이 뒤틀린 것은 당연지사. 무장한 왕성 내 경비들이 이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용의자 취급을 받는 것도 놈이 준비한 덫에 걸려들었다는 것도 짜증난다. “무슨 일입니까?” 경비의 목소리에 대답한 것은 무녀. 두 번째로는 녀석이 대답했고 그 다음으로는 내가 말을 이었다. “야마토 길드의 길드원이 이기영 씨를 위협했고 그에 대한 정당방위로 목에 검이 꽂혀 죽은 것이 전부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위협한 것은 아닙니다. 서로 잠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다짜고짜 이쪽으로 검을 날리더군요.” “제 검은 위협에 발동하는 무구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이템 정보는 확인시켜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야마토 길드의 길드원에게 위협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 사실은 요조라 길드의 카스가노 유노 님과 그녀의 길드원들이 증언할 것입니다.” 당연하지만 양측의 주장이 다르다. 서로 귓속말을 한 이후에 어디론가 뛰어가는 것을 보니 상급자라도 불러올 모양.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더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녀석 한 명이 황급하게 다가온다. 심지어 녀석의 권한도 아닌지 녀석 역시 서둘러 뛰어가기 시작. 사건이 점점 커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 이토 소우타가 바라는 상황일 터, 복잡하게 돌아가고는 있지만 지금부터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에 대해서 생각하자 머리가 아파왔다. ‘아마 조사를 시작하겠지.’ 물론 용의자는 나다. 이유야 어찌됐건 무슨 사건이 터졌던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던 간에 신성제국 베니고어의 왕성 내에서 사람이 죽었다. 우리들이 자유민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우리들도 제국법에 영향을 받는다. 제국에서 길드와 길드간의 지나친 분쟁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살인을 저지른 나는 일단 용의자 취급을 받을 것이다. 소우타의 말대로 그게 바로 절차라는 거다. 예상대로 슬그머니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화려한 복장의 남자 한 명이 시야에 비쳤다. ‘제국민.’ “제국 내에 소속된 신성 기사단의 칼리튼이라고 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잠깐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역시.’ 짜증 나지는 하기만 아직은 괜찮다. 셋의 증언이 다른 지금, 이토 소우타 역시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당장에는 피해자의 신분으로 조사를 받을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의 무녀님의 증언이 있다면 살인자라는 여론은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 있는 칼리튼이라는 남자의 태도로 미루어 봤을 때 아직 이쪽을 완벽히 용의자로 확정지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존중하고 있지.’ 물론 감금되다시피 한 이후 조사를 받는다는 건 변함이 없지만 충분히 뒤집을 수 있다. “네. 알겠습니다.” 대충 대답을 한 뒤에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을 때였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고 있는 카스가노 유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평소와 조금 다르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움직이지 마라.” “음?” “내 손님을 데리고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네놈들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 땅바닥을 기어 다니게 될 것이다. 분명히 저자들이 내 손님을 위협했다고 말하였다.” 땅이 부르르 떨려온다. 아까 전에 눈으로 확인했던 정체불명의 주문진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 감은 눈을 치켜뜨자 마치 블랙홀 같은 눈동자가 시야에 비쳤다. 누가 봐도 거대한 마력을 품고 있는 그것은 내가 느끼기에도 이 주변 일대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정도. 침을 꿀꺽 삼켜 넘길 수밖에 없었다. “무녀….” 심지어 재수 없는 녀석 역시 침을 삼키며 자신의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기 시작. 지금 이 상황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내 손님을 붙잡고 있는 더러운 손을 치워라.” “…….” “내가 치우라고 말하였다.” ‘이건 안 좋은데….’ 나를 변호해 주는 것은 괜찮지만 소란을 피우는 것은 더 좋지 않다. 신성기사단의 칼리튼이라는 녀석 역시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 최대한 얼굴을 찡그린 채로 이쪽을 바라보며 검을 뽑고 있다. “이, 일단은 절차에 맞게 행동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왕성 내에서의 이런 종류의 마법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당신이라고는 해도….” “나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내가 정리하는 것이 맞다. “괜찮을 겁니다, 유노 님. 일단은 간단한 절차의 조사를 받고 오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 마력이 가라앉기 시작하자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던 주변도 멈춘다. “그렇지만… 기영 님….” “별것 아닐 겁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만 증언해 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 있다. ‘세상이 진실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소우타의 표정은 그걸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쪽을 범인으로 몰아가려는 것 같은 느낌. 일단은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조사는 감금되어 받습니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절차상 조사를 하는 것뿐입니다. 당연하지만 최대한 편의를 봐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움직임에 제한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은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네. 물론입니다.” “야마토 길드 쪽과 저곳에 있었던 이들 모두 조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저와는 조금 입장이 다르겠죠?” “죄송합니다만 그렇습니다. 일단은 살인 사건인 만큼….” “그렇군요. 대리인을 통해 증언하는 것도 가능합니까?” “네. 물론 가능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시죠.” * * * “엣취.” “감기라도 걸렸니?” “아뇨, 언니. 죄송해요. 갑자기 재채기가 나와서요.” “요즘 조금 무리한 것 같더라니…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네가 먼저야. 뭐, 오랜만에 쉬라고 함께 데려온 거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쉬도록 해. 그보다 수도는 어떤 것 같아?” “살기 좋은 것 같네요. 처음 온 것 치고는 나쁘지도 않고 사람들의 눈에 생기가 보여요. 신성제국의 문명 수준이 이 정도로 높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생각보다 체계적이라 깜짝 놀란 거 있죠?”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보다 언니, 오늘따라 화장 진짜. 잘 먹으셨다.” “얘도 참….” “아니 그것보다는 피부가 좋아진 건가? 언니, 요즘 남자 만나요?”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겠니? 바빠 죽겠는데… 아니, 나보다는 네가 연애 중인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어? 뭐 이미 다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소개시켜 주면 참 좋을 텐데….” “조금 더 사이가 진전되면 말씀 드릴게요. 오빠가 조금 사정이 있어서요.” “하긴. 아, 이제 도착이네.” “…….” “…….” “검은백조의 여러분들 신성제국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박연주 님은 오랜만이군요.” “네. 오랜만입니다.” “허허. 오늘은 처음 보는 얼굴도 보이는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을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지혜야?” “네, 언니.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번 튜토리얼 때 검은백조 길드에 입단하게 된 이지혜라고 합니다. 명예롭고 위대한 신성제국의 제국민 여러분들을 이렇게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 124 회귀자 사용설명서 124화 영혼의 단짝(1) ‘생각보다 안락하네.’ 야마토 길드의 길드원 살해범이 받는 대우치고는 꽤나 안락했다. 누워 있는 곳은 딱딱한 바닥이 아닌 안락한 침대였고 나오는 음식의 퀄리티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범죄자들이나 먹는 음식을 먹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사실. 이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차희라나 카스가노 유노의 입김이 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내가 그저 그런 촌뜨기였다면 재판은 나발이고 목이 달아났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용병여왕의 정부, 무녀의 손님이라는 위치는 유죄도 무죄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이 있다. ‘권력이라는 게 이래서 좋아.’ 그렇지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는 볼 수 없다. 물론 내가 서 있는 위치만으로 내 목이 달아날 확률은 희박하다. 용병여왕과 무녀에게 동시에 반감을 사는 것은 제국의 전력이 삭감되는 걸 원하는 녀석들에게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다. 야마토 길드의 일반 길드원이 뒈진 것보다는 나를 보호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이토 소우타 그 개자식이 무슨 일을 꾸미냐에 대한 것. 아마 녀석이 얼마나 이빨을 터는지에 따라 내가 받는 벌의 강도나 벌금의 강도가 결정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최소한 뒈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하나. ‘외교적으로 불리해지는 상황.’ 이 문제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확실히 분쟁의 여지가 있다. 대충 식사를 마치고 눈앞을 바라보자 묘하게 기분 나빠 보이는 차희라의 얼굴이 보였다. “솔직히 기분은 좋네.” “응?” “뒈진 게 자기가 아니라 그 자식이잖아?” “안 좋은 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 “물론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아니야. 계획하고 있던 게 망가진 건 기분 나쁘고 네가 말도 없이 무녀의 방에 올라갔다가 그런 꼴을 당한 건 조금 더 기분 나쁘거든. 알고 있겠지만 내가 은근히 체면을 중요시하잖아. 기분이 좋다는 건 자의든 타의든 네가 저쪽 길드원을 한 명 죽였다는 것 때문이야. 그것도 꽤나 화끈하게….” “그거 고맙네….” “무녀와는 무슨 관계야?” “…….” “야마토 길드의 편에 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여자가 끝까지 우리 자기를 무죄라고 주장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 뭐야. 혹여나 내가 모르게 줄을 대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만약에 그렇다면 조금 슬퍼질 가능성도 있어.”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자유지만 무녀를 만난 건 엊그제가 처음이야.” “나한테까지 거짓말 치면 뒷일이 상큼하게 끝나진 않을 거라는 거 알고 있지?” “내가 누나한테 거짓말을 왜 하겠어? 처음 카스가노 유노랑 만났을 때 그 여자가 날 보고 울었던 것 기억나?” “물론.” “그 여자 미래를 볼 수 있어.” “무슨 개….” “물론 자신이 원하는 걸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다고 해도 무척 짧은 시간을 들여다보는 게 전부지만 그녀는 틀림없이 미래를 보는 게 가능해.” “농담하는 거 아니지?” “내가 직접 확인했어. 사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16살짜리 여자가 4년 만에 대형 길드를 만들 수가 있겠어? 어째서 그 여자가 나에게 집착하는지도 대충은 알아. 그 여자는 미래에 나와 이어지거든.” “지랄.” “그게 그 여자가 날 보고 질질 짜던 이유고 지금도 열심히 나를 변호하고 있는 이유야.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희라 누나 자유.” 조금은 짜증 난다는 얼굴. 괜스레 테이블을 한 번 두드린 차희라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어왔다. “하…… 이 새끼, 이거 완전 페로몬 덩어리네.” “난 누나밖에 없는 거 알잖아.” “너무 기어오르면 안 좋아, 자기.” 테이블을 툭툭 치고 있는 손 위로 조금은 일그러진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이런 종류의 장난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모양. 누가 봐도 화가 났다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 방법은 있는 거지? 내가 계속해서 개판을 치고 있기는 하지만 여론이 그다지 좋지는 않아. 신성제국의 왕성에서 다툼이 일어나 누가 죽은 건 처음 있는 일이거든. 우리 자기가 단두대에 목이 날아가는 장면은 나오지 않을 테지만 붉은용병과 파란 그리고 린델의 입지가 좁아질 수도 있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이건 조금 민감한 문제고….” “생각하고 있는 건 많아. 계획에 변동은 있겠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을 거야.” “제대로 행동하는 게 좋아. 내가 네 뒤를 봐주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네가 나한테 도움이 되기 때문이야. 네가 나한테 매력적인 남자로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이유라는 걸 항상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게 좋을 거야.” “알고 있어. 고마워, 누나.” “……저녁 즈음에 또 올게. 스트레스 받지 말고 쉬면서 여러 가지 생각해 봐, 자기.” “누나도.” ‘기분 좋아 보이네.’ 어디서 기분이 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희미한 미소가 확실하게 보였다. 차희라 역시 정하얀과 마찬가지로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난다. 상태창에서 보이는 광년이라는 칭호처럼 그 감정이 뒤바뀌는 게 들쭉날쭉한 것이 문제일 뿐이다. 하루에 세 번 이곳으로 찾아오는 여자들을 전부 상대해 주려니 피곤한 것이 당연. 사실 조사를 받는 것보다 정하얀이나 무녀를 상대해 주는 일이 더 힘들다. “흐으으으윽… 오빠아… 어어어어엉….”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오자마자 대놓고 눈물을 흩뿌리고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행동하기 일쑤. 이곳에서 계속해서 함께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그녀에게는 감금을 당하고 있는 내가 무척이나 가슴 아픈 모양이다. 심지어 커다란 벌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내 볼을 어루만지며 통곡하는 모습은 가관. 누가 보면 내가 이미 사형수가 된지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사정을 대충 알아들은 뒤에는 여느 때처럼 이토 소우타를 향해 분노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사건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지 카스가노 유노에 대한 분노는 덤이다. 2차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특별 교육에 들어간 것은 당연지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 차희라에게 관리를 부탁할 정도였다. ‘오늘은 오지 않는 건가.’ 나도 모르게 정하얀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카스가노 유노의 경우에도 그다지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이쪽을 위해 계속해서 대외 활동을 해야 하는 그녀의 경우에는 자주 찾아오기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몇 번은 꼭 시간을 내 나에게 보고 아닌 보고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둘에게는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기다리는 것은 카스가노도 정하얀도 아니다. 오매불망 기다리는 것은 나를 변호해 줄 수 있는 변호사. 물론 나 스스로를 내가 변호해도 그다지 상관은 없지만 기왕 변호를 해 줄 사람을 찾는다면 대형 길드의 주축 중에 한 명이 대리인을 해주는 것이 좋으리라. 그것도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여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방문이 벌컥 열리기 시작. 정하얀이나 유노가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눈앞에 보이는 여자는 내가 기다리고 있는 여자였다. ‘이지혜.’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바라보며 그녀가 중얼거리는 게 시야에 비쳤다. “꼴이 이게 뭐람… 패배자가 따로 없네요.” “면목 없네.” “아주 완벽하게 걸려드셨네요.” “…….” “자존심이 많이 상하셨나 봐요? 이렇게 화나 보이는 모습은 또 처음이인 거 보니까.” “그래 보여?” “딱 보면 척이죠.” 눈치가 빠른 건지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해야 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여러모로 화가 나는 것이 당연. 상대방의 뒤통수를 치는 게 유일한 장점이었던 내가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하리라.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는 괴물한테 어처구니없는 계략으로 뒤통수를 맞았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는다. 정하얀이나 차희라도 눈치채지 못했던 내 상태를 보자마자 꼬집어 오니 솔직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영혼의 단짝.’ 그녀를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이지혜는 나와 너무 잘 맞는다. “이미 행동하고 계실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너를 기다리고 있었지.” “붉은용병의 정부, 무녀의 손님이라는 타이틀로는 아직 부족했나 봐요?” 그녀의 말이 맞다. 검은백조의 간부, 그것도 길드 마스터에게 신임을 받고 있는 고위 간부가 내 대리인이 되어준다는 건 그 의미가 크다. 권력자들의 인간관계라는 것은 그렇다는 거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직 판사나 검사였던 변호사들의 첫 재판을 우대해주는 관례라는 게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체면은 중요하니까.’ “그런 것도 딱히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그것보다는 누나가 필요했거든.” “으음… 듣기 나쁜 소리는 아니네요, 오빠.” “그렇게 들리니 다행이네. 사실… 지혜 말이 맞아. 화가 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도 맞고… 뒤통수가 얼얼하다니까.” “같이 울어드리기라도 할까요?” “아니. 계획하고 있는 조금 큰 건수가 있는데 네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거든. 단순히 맞은 걸 돌려주는 정도로 끝내지 않을 거야. 물론 너한테도 떨어지는 게 있을 거고.” “떨어지는 게 없어도 도와드릴 생각이었네요. 나 은근히 로맨티스트니까. 개인적으로 그리고 있던 그림에 오물을 던진 놈한테는 나도 화가 나기는 마찬가지고… 그럼 일단… 당연한 권리부터 찾아야겠죠?” “잘 부탁해, 대리인님.” “걱정 마세요, 의뢰인님.” 이지혜가 슬쩍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닌 문 앞에 서 있는 경비를 향해서였다. 뭘 할지에 대해서는 대충 예상이 간다. 내가 그녀에게 원하는 건 이런 역할이었으니까. “저기요?” “네.” “이기영 님이 가지고 계신 무구는 어디에 있는 거죠?” “아. 그 무구에 경우에는 일단… 조사를 위해 저희 쪽에서 보관을….” “그거 당장 가져와 주세요.” “네?” “그 무구를 당장 가져와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그게… 일단은 살해 현장에서 쓰인 무기이니 만큼 일단 저희 쪽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다짜고짜 가져오라고 말씀하셔도….” “아직도 조사가 끝나지 않은 건가요? 아이템의 기능은 분명히 말로도 설명드렸고 실제로고 확인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벌써 수차례 실험까지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걸로는 부족한가요?”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있어서….” “저 역시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서 가져와 달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먼저 제 의뢰인 쪽을 위협한 것은 야마토 길드의 길드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텐데요. 이는 그 자리에 있던 카스가노 유노가 직접 증언하고 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반 감금에 무기까지 빼앗는다니요.” “사람이 죽었습니다. 일단은 절차상….” “저주를 내리는 검 율리에나는 저희 의뢰인이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입니다. 몸을 보호할 수단을 잃어버린 제 의뢰인에게 혹시 사고라도 생긴다면 그 뒷감당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용병여왕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당신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말입니다.” “…….” “그 무구의 가치가 얼마인지 알고 있는 겁니까? 대륙에 몇 개 풀리지도 않은 전설 등급의 아이템입니다. 혹시나 기능에 문제가 생긴다면 당신들이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겁니까? 제가 확인하기로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무구들은 주인과 오랜 시간 떨어지면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알고 있습니다. 만약, 아주 만약에 율리에나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제 의뢰인을 대신해 제가 당신들을 고소하겠습니다.” “저희는 신성제국의 절차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뿐입니다. 고소하겠다고 하셔도….” “신성제국을 고소한다는 게 아닙니다. 관리를 소홀이 하지 못한 당신들을 고소한다는 거예요. 신성제국에는 죄가 없습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그렇지만 당신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내가 고소하는 것은 제국이 아니라 지금 우리 의뢰인을 억압하고 있는 당신들 개인이야.” “아….” “내 의뢰인이 가지고 있는 무기의 가치는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 그런 무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면 당신들한테 죄가 없을 것 같아? 내가 당신들을 고소하면 이곳에 있는 경비들은 전원 순식간에 빚더미에 올라서게 되는 것은 물론, 대형 길드들을 상대로 길고 긴 법정 싸움을 벌여야 할 거야. 당신들이 믿고 있는 신성제국에서 누구의 편을 들어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뻔할 거고… 자신 있어?” “…….” “만약에 일이 터졌을 때 신성제국에서 당신들을 보호해 준다는 걸 믿고 있어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라면 입 다물고 내 남자친구 물건 가져와. 상급자한테도 내가 한 말 그대로 전하고 상급자도 권한이 없다고 하면 더 윗선에서 물어서 어떻게든 해결해. 해결이 안 되면 너희끼리 방법을 마련해서 당장 여기로 율리에나를 가져오고… 안 그러면 관련된 인간들 한꺼번에 묶어서 전부 다 고소해 버릴 테니까.” “그, 그게… 저희 권한이….” “내 말 못 들었어? 상급자 아니면 책임자 불러 오라고! 여기 책임자가 누구야?! 누군데 일을 이딴 식으로 처리해?!” 마치 비싼 물건을 환불하러 갈 때 센 언니를 대동하고 가는 것 같은 기분. ‘지혜 언니, 너무 멋있어.’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걸크러시다. 그렇게 밖에 이 상황을 표현할 말이 없었다. # 125 회귀자 사용설명서 125화 영혼의 단짝(2) 그 이외에 이 상황을 표현할 말이 없었다.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난 이지혜의 표정은 뭔가 후련한 듯한 느낌. 헐레벌떡 상급자를 찾으러 뛰어가는 경비들이 시야에 비쳤다. 아니나 다를까 내 쪽으로 다가온 이지혜가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서로 생각하고 있는 걸 말해 볼까요? 방금 걸로 대충 눈치챘을 것 같은데… 정답이 조금 쉽나요?” “응.” “하나둘 하면 동시에 말하기로 해요.” “…….” “하나, 둘.” “일단은 안전.” “일단은 안전.” “통했네요. 여론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죠?” “물론.” “율리에나를 돌려받는 게 첫 번째예요. 오빠는 피해자잖아요? 사실 돌려받는 게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차선책으로는 신성제국에 있는 유력한 권력자에게 도움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빅터하르트.” “알고 있는 사람이예요?” “희라 누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신성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무인이고… 이 사람 정도만 되도 우리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거야. 아니, 오히려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 당연하지만 나와 이지혜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안전이 아니다. 정말로 원하는 것은…. ‘여론을 뒤집는 것.’ 그게 첫 번째 목표다. 아주 작은 것으로도 변화는 온다. 갑작스러운 살인 사건으로 왕성 내에 여론이 집중되고 있는 상태. 내가 경비들에게 감금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다지 기분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렇지만….’ 보호받고 있다는 인식이 깔린다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경비들이 이쪽을 감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 최고의 무인이라고 할 수 있는 빅터하르트가 이쪽을 보호한다는 것. 달라붙는 대상이 달라지는 것뿐이지만 겨우 이것만으로도 여론은 손바닥을 뒤집듯 바뀌게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쪽은 오빠 쪽이니까요.” “아주 위험한 상태니까. 어쩔 수 없지. 용병여왕이나 무녀의 보호를 받는 것도 효과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신성제국 쪽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게 보여주는 쪽으로는 효과가 클 거야. 언제 야마토의 암살자가 올지 모르니까 그걸 빌미로 찔러보는 게 낫겠네.” “린델 쪽도 건드릴 생각이죠?” “정답.” “언론을 이용하면 반일감정을 키우는 건 일도 아니지만 이건 이거대로 걱정되기는 하네요.” “린델 테러 사건의 주범이었던 야마토 길드가 죄 없는 파란의 길드원 이기영을 핍박하고 위협했다.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할 사건이 일어났고 죄를 뒤집어 쓴 피해자가 오히려 재판을 받게 될 위기에 몰렸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아니면 조금 더 자극적으로 단두대에 올라갈 위기에 처해 있는 죄 없는 한국인. 이런 건 어때?” “나쁘지 않겠네요. 근데 이거 파장이 생각보다 엄청날 거예요. 그건 알고 있죠?” “물론. 애초에 노린 게 그건데, 뭐. 나를 처벌하는 건 곧 린델을 처벌하는 게 될 거야.” “분란을 싫어하는 신성제국의 입장에서는 오빠를 건드리기가 지금보다 더 꺼림칙해질 거고요. 자기 목숨 하나는 제대로 챙기시네요. 그 점이 조금 마음에 들지만….” “취향 한번 이상하네.” “말했잖아요. 야망 있는 남자가 취향이라고 기왕이면 오빠 같은 더러운 권력자가 좋다니까.” “피차일반이야.” “이쪽은 건드리기 조금 꺼림칙하긴 한데… 뭐, 오빠가 죽는 것보다는 전쟁이 일어나는 게 낫겠죠.” “전쟁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게 아니야.”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는 한데… 뭐 생각해 보니 제가 알 바는 아니네요. 사실 오빠 혼자 준비했어도 별로 상관없을 것 같았는데 굳이 대리인으로 저를 내세워서까지 일을 벌이려는 걸 보면 따로 생각이 있기는 있나 봐요?” “물론. 미안하지만 조금 수고해 줬으면 좋겠어.” “안 그래도 그럴 예정이었어요, 오빠. 사실 피해자가 직접 나서는 것 보다는… 대형 길드의 대리인이 나서는 게 더 효과적이니까요. 푹 쉬고 계세요.” “안 도와줘도 괜찮겠지?” “물론이죠. 이런 일은 혼자가 더 편하거든요.” 당연하지만 이지혜가 유능하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내 손을 타지 않는 일이다 보니 조금은 불안한 것이 현실. 특히나 우리 희라 누나의 오랜 친구인 빅터하르트를 끌어들이는 건 조금은 도와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틀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이지혜가 가진 컴플레인 능력의 위대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내 의뢰인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야? 아니 이미 생긴 것 같은데….” ‘옳지.’ “아. 켄드릭 님이시라고요? 당신이 이곳의 책임자입니까?”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반 감금 상태에 대한 정신적 피해는 어떻게 보상해 줄 겁니까? 켄드릭님?” ‘최고다, 이지혜.’ “야마토 길드에 대한 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까?” ‘지혜 누나! 파이팅!’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신성제국의 앞잡이들을 털고 다니는 이지혜의 모습은 이전 삼국시대의 여포를 보는 듯한 착각을 하게 할 정도. 예상은 했지만 밑바닥에서부터 털어나갈지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사실 켄드릭과 경비들에게는 미안한 것이 사실. 이들이 얼마나 나를 신경 써주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에게는 죄가 없지만 이지혜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피해자는 우리다.’ 라는 것을 강력하게 어필하고 있는 것. 야마토 길드의 이토 소우타가 모종의 이유로 파란의 이기영을 암살하려고 하고 있다는 헛소문을 왕성 내에 뿌림과 동시에 시작된 이 언론 플레이는 무척이나 효과적이었다. 아니, 단순히 효과적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 검은백조의 유력 간부가 나를 변호해주고 용병여왕이 나를 보호해 주며 무녀가 계속해서 이쪽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준다는 상황 자체가 저들에게는 달갑지 않을 것이다. 키워드로 잡고 있는 것은 안전, 위협, 목숨. ‘확실히 능력이 좋긴 좋아.’ 내가 간지러운 부분을 어떻게 이렇게 긁어줄 수 있는지 놀라울 지경. 덕분에 나는 내가 개인적으로 벌이고 있는 일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아마 이지혜가 아니었다면 야마토 길드를 상대하는 데 조금 더 힘을 들였어야 했으리라. “의뢰인이 무척이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을 고려해 저희 쪽에서도 최대한 편의를….” “편의를 봐준다는 게 겨우 이 정도 입니까? 저희 검은백조 길드의 사제가 내놓은 소견서를 확인해 보시면 의뢰인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지 나와 있습니다. 이후에 트라우마를 생각했을 때 당신들이 얼마나 제 의뢰인을 압박하고 핍박했는지….” “그렇지만….” “말씀드린 율리에나는 어째서 이렇게 늦는 겁니까? 혹시나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지금 방안을 찾고 있는 도중입니다. 상층부에서도 여러 가지 회의를 하고 있는 도중이라서… 조금만 더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실 생각이십니까?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혹시나 율리에나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요?” “무구는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그건 저희가 확인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켄드릭 님.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율리에나는 제 의뢰인 개인의 사유 재산이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이미 한 번 위협을 받은 상황에 두 번째 위협이 없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사건 정황상 야마토 길드에서 제 의뢰인의 목숨을 위협하려고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어떻게든 해결해 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저희가 24시간 경비를 서고 있습니다.” “이토 소우타가 의뢰인의 목숨을 해치러 온다고 가정했을 때 당신들에게 그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례되는 말이지만 신성제국의 몇몇이 그들과 결탁하고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 봤을 때 조금 더 확실한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 이 말입니다. 빅터하르트 님께 요청드린 보호 조치도 아직이다. 율리에나를 돌려받은 것도 안 된다고 하시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그것은….” “이대로 흉수들이 찾아오면 목을 빼놓고 죽으라는 겁니까? 정식으로 보호를 요청한 지 벌써 18시간이 지났습니다. 저희 의뢰인은 지금도 무척이나 불안해하는 상태입니다.” “그게, 그러니까….” “빅터하르트 님에 대한 요청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용병여왕님께서도 심히 걱정하시고 계십니다. 자꾸만 자리를 비워야 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데 왕성 안에서 살해 위협을 받고 있는 피해자의 대한 신변보호가 이렇게 미비하다니요. 마음 같아선 의뢰인을 지금 당장 린델로 데려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희 쪽에서도 최대한 요청을 해 드리고 있습니다. 아, 알고 계시겠지만 빅터하르트 님께서도 무척이나 바쁜 상황이신지라….” “혹여 말로만 요청을 드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 이지혜도 열심히 해주고 있지만 아마 차희라 역시 오랜 친구인 할아버지에게 은근슬쩍 청탁을 넣고 있는 것이 당연.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늦어지는 것 같아 초조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거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예상했던 대로 첫 번째 조각이 완성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허,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켄드릭 님!” 무척이나 행복해 하는 경비의 표정. 식은땀만 흘리고 있는 켄드릭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그 동안 이지혜와 대리인단에게 시달린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리라. “빅터하르트 님께서 직접 이기영 님을 보호 조치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율리에나 역시 오늘 중으로 다시 반출될 예정입니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켄드릭 님.” “다행이로군요, 이지혜 님. 허가가 떨어진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빅터하르트 님께서 정식으로 이기영 님을 보호할 것입니다. 들으셨던 대로 저주를 내리는 검에 대한 조사 역시 끝났기 때문에 일단은 돌려드리겠습니다만… 일부 구역은 반입이 불가 한 점에 대해서는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특히 빅터하르트 님과 떨어져 계실 시에는 율리에나를….” “야마토 길드의 길드원들을 이쪽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이 먼저입니다, 켄드릭 님. 그들은 틀림없이 제 의뢰인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억압받아야 하는 건 이기영 님이 아닌 그들입니다.” “네. 최대한 힘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율리에나를 돌려받은 것보다 더 한 성과를 얻어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 이후 방 안으로 들어온 이지혜가 살짝 입꼬리를 올린 것이 보였다. “수고했어.” “율리에나까지 돌려받을 수 있을지는 몰랐는데 성과가 나쁘지는 않네요. 앞으로는 빅터하르트 님이 오빠를 보호할 거예요.”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소리네.” 애초에 우리가 이곳에 온 이후로 가장 신경을 쓰던 일 중에 하나가 마무리 됐다. “움직임이 조금 제한될 수 있다는 건 걱정되기는 하지만 나쁜 거래는 아니야. 어차피 우리 지혜 누나가 움직이고 있는 상태고 내 쪽에 빅터하르트가 달라붙어 있다는 건 오히려 이쪽이 계획하고 있는 일에 도움이 되거든.” “아직도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나만 알고 있는 게 좋아. 그게 더 효과가 좋거든. 일이 진행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섭섭해라…. 뭐, 아무튼 들으셨던 대로 제한구역 역시 조금씩 풀리기 시작할 거예요. 빅터하르트 님과 함께 나간다면 사교회나 예배를 드리는 것도 가능할 테고.” “혹시 빅터 할배는 야마토와 접전이 없나?” “알아본 게 조금 있는데… 말씀드려요?” “물론.” “신성제국이 황제파와 교황파로 분리되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그 할아버지는 골수부터가 황제 쪽이에요. 교황쪽에 달라붙어 있는 야마토와는 앙숙이면 앙숙이었지 좋은 관계는 아닐 거예요.” “뭐, 흥미로운 이야기네. 린델 쪽은 어떻게 됐지?” “나쁘지 않아요. 반일감정 일으키는 건 누워서 떡먹기죠, 뭐. 막말로 오빠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전쟁이라도 일어날 기세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마 그 할아버지가 오빠 쪽에 붙은 이유로 린델의 배경이 어느 정도 깔려 있을 거예요.” “린델 쪽의 여론도 계속해서 파악해 줘.” “시키지 않아도 척척 진행되고 있으니까 급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것보다 슬슬 밖으로 나가보셔야 되는 거 아닌가요? 저쪽도 열심히 작업치고 있던데… 교황청 쪽으로는 제가 작업을 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먼저 자리 잡은 쪽이 저쪽이라 그런지 한계가 보이거든요.” “황제 쪽은 이쪽에서 하나둘 접선해볼게. 대리인단 구성은 아직이지?” “제국 쪽 인물들의 포섭이 아직이에요. 이건 오빠한테 맡길게요. 어차피 그 사람이랑 같이 다니면 알아서 사람들이 달라붙을 테니까. 어렵진 않을 거고… 기왕이면 빅터하르트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겠네요.” “이미 희라 누나와 친한 것 같아 보이던데…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흐음… 그럼 내일은 파티에 나오시는 건가요?” “아마 그렇게 되겠지.” “살인범이 호위무사까지 대동하면서 파티에 참석하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나는 어디까지나 피해자인데… 자랑스러워해도 돼. 누나가 이룩한 결과물 이니까.” 희미하게 미소 짓는 이지혜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 126 회귀자 사용설명서 126화 영혼의 단짝(3) 당연하지만 이지혜와 내가 내놓은 해결책은 여론을 천천히 뒤집기 시작했다. 암살자를 핑계로 빅터하르트를 불러들이는 것은 실제로 왕성 내 여론을 잠잠하게 만든 것은 물론 이토 소우타를 견제하는 효과까지 가지게 했다. 율리에나의 기능과 특성을 설명하는 건과 카스가노 유노의 증언이 맞물려져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무척 많은 상황. 혹시 의도적으로 내가 검을 날린 것은 아닌지에 대한 가능성에 대한 문제는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마저도 이토 소우타가 교황청 쪽에 청탁을 넣고 있지 않다면 금방 사라질 혐의였다. 아직까지 나에게 용의자 딱지가 붙어 있는 이유는 신성제국 내 왕성에서 처음 일어난 살인 사건이라는 사건의 특수성과 일본의 대형 길드의 체면을 세워 주려는 교황청의 발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거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현재의 린델의 상태에 있다. 본래 린델은 실리아와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린델 테러 사건의 주범이라고 생각되는 야마토 길드의 함정에 빠져 죄 없는 시민의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는 소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물론 목이 달아난다는 건 거짓말. 지금도 의자에 편하게 앉아서 음료를 마시고 있기는 하지만 린델의 시민들이 그렇게 믿어준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당연하지만 저것으로 끝이 아니다. 야마토 길드의 린델 침략 시나리오를 미리 배포해 린델 시민들에게 적대감을 키워놓는 것이 진짜 목표. 특히나 이지혜의 언론 플레이는 내 것보다 조금 더 과격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린델과 실리아의 전쟁이 터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붉은용병이나 검은백조가 의도적으로 일부 과격파들의 행동을 억제하지 않는 다는 것. 언론을 대충 살펴봐도 금방 답이 나온다. [일성 길드, 실리아 근처 라마델 산맥으로 폭격 마법 훈련 실시.] [금일 오전 9시 린델의 일성 길드에서 라마델 산맥으로 폭격 마법 훈련을 실시했다. 실리아를 가로질러 라마델 산맥을 타격한 초장거리 원거리 마법은 그간 일성 길드에서는 선보이지 않은… 중략… 이에 일성 길드의 최고 존엄 이설주(21)는 일본놈들의 오만방자한 행태가 극에 달해 자꾸만 우리 길드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자유 도시 실리아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강경발언 역시 서슴지 않은 것은 물론, 3일 뒤에는 실리아의 영해를 삼면 포위해 초장거리 폭격 마법 훈련을… 중략… 진행할 예정이다. -린델일보 종군기자 김성경] 그 일부 과격파 중에서도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일성 길드의 행보는 당황스러울 정도. 나도 모르게 이지혜를 빤히 바라보며 사건의 진상에 대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들 이거 괜찮은 거 맞지?” “네. 돈 달라는 거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어제부로 입금 끝냈고요. 전부 다 이쪽이랑 이야기가 되어 있는 행동이기는 하지만… 하는 짓거리를 보니 저도 조금 불안하기는 하네요. 이 정도로 해줄 줄은 몰랐거든요.” “너무 심한 도발은 별로 좋지 않은데….” “그쪽 길드 애들이 확실히 이상하기는 하지만 검은백조에서 확실히 브레이크를 걸어주고 있으니까 안심하셔도 되요.” “개인적으로 알아?” “음… 알면 안다고 하기는 하지만… 같이 술자리 한 번 가져본 게 다예요. 정신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친하게 지내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쓸 데가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전쟁, 전쟁 노래를 부르는 미친놈들이라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역시나 인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니까요.” “별별 놈들이 다 있네.” “네. 약하게 나가는 것보다 오히려 저런 게 효과가 있으니까요. 덕분에 린델 내에서도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니까… 반응이 오기야 오겠죠.” 말하자면 지금의 린델은 터지기 직전의 폭탄인 셈이다. 실제로 실리아에서 온 상인들은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빠르게 린델을 벗어나고 있었고 죄 없는 대만의 대형 길드 역시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대피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전쟁은 안 나요. 신성제국이 분쟁을 막고 있는데 어떻게 전쟁이 일어나겠어요? 안 그래도 공화국이나 왕국연합과의 관계도 틀어지고 있는데 두 도시의 정면충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이번 기회에 폭격 마법 훈련이나 실컷 하라고 하세요. 쟤네가 저러면 저럴수록 오빠는 안전해지니까.” “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율리에나의 정보도 최대한 뿌려. 특히 실리아 쪽으로… 신성력으로도 정화되지 않는 광역 저주, 율리에나를 매개체로 사용해서 도시 하나 전체에 저주를 내릴 수 있는 광역 마법의 연구가 진행 중이고 실제로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나쁘지 않네요.” “외부 종군기자들도 실리아로 보내서 언론 플레이 진행하고… 아, 그 일성 길드에서도 정신 공격 전략 병기 개발 같은 것도 진행하고 있다고 발표하라고 서신 넣어봐. 이런 식으로 입 좀 잘 터는 애들 같은데. 아무래도 정상인들이 발표하는 것보다는 미친놈들이 직접 움직이는 게 더 효율적일 테니까.” “네네. 알겠어요. 일본 쪽 언론은 건드리고 있는 거죠?” “일단은 불안감 조성 정도는 하고 있어. 우리 무녀님께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도중이니까. 일본 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니, 일본에는 최대한 신경 쓰지 마.” “참 능력도 좋아. 카스가노 유노랑은 어떻게 연줄을 만들었어요?” “알고 싶어?” “아뇨. 괜찮아요. 쓸모만 있다면야 어디 사는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난 누나 그런 면이 좋더라.” “이 타이밍에 고백?” “글쎄.” 천천히 이쪽으로 얼굴을 가져다 대는 이지혜의 모습이 보였다. 나 역시 살짝 몸을 일으키기는 마찬가지. 바깥에서 쿵쿵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빠!” “시간 됐나 보네요.” “그러네. 슬슬 이쪽도 준비해야겠네.” “준비는 이쪽에서 도와드릴 거예요. 용병여왕님께도 이미 말씀드렸으니까 일단은 기다려 주세요.” 오늘 저녁에 있을 사교모임에 참석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일단은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정하얀을 들여야 했기 때문에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의 정하얀. 지금까지 후드를 뒤집어 쓴 마법사의 모습을 많이 봐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교모임에 참석할 정하얀의 모습은 꽤나 아름다워 보였다. 하얀색 드레스에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고 있는 모습.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깔끔해 보인다. 본래 굉장히 좋은 몸매를 가지고 있었던 만큼 라인이 그대로 사는 드레스는 마치 그녀를 위해 준비된 드레스인 것 같아 보였고 귀엽고 맹해보이던 얼굴에 들어선 화장은 조금은 섹시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전체적으로 오버하지 않고 자신의 색다른 매력을 이끌어 냈다는 느낌이 강했다. “예쁘네. 우리 하얀이.” “정, 정말요?” “물론.” “헤헤헤헤….” 웃으면서도 힐끔힐끔 방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이지혜를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적대감이라기보다는 고마워하고 있는 듯한 얼굴. 반 감금 상태에 있는 나를 풀어줘 함께 있게 만들어준 장본인이었으니 정하얀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어머, 우리 하얀 씨 너무 아름다우시다.” “정, 정말요? 고마워요, 지혜 씨.” “오늘따라 조금 성숙해진 느낌이네요. 이렇게 일찍 끝내신 거 보니까 빨리 오빠한테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그렇죠?” “네.” “예쁜 커플이네요. 아. 지금 막 기영 오빠의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밖에서 기다리시겠어요? 아니면 여기 앉아서….” “여기 앉아 있을게요!” “네. 편한 대로 하세요.” 정하얀이 한쪽에 자리 잡자 본격적인 단장이 시작됐다. 사실 그냥 이대로 가고 싶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자리에 어울리고 격식에 맞는 복장을 하고 가는 것은 필수라고 할 수 있는 부분. 물론 이지혜가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은 조금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다들 들어와요.” “네.” 여성 길드원이 많기로 소문난 검은백조의 아티스트들이 등장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별로 잘생긴 외모는 아니지만 본판은 그리 나쁘지 않으니까요. 다들 최선을 다해주세요. 우리 오빠가 그런 곳 가서 무시당하는 일은 없어야 되잖아요?” “네. 이지혜 님.” 별로 잘생긴 외모가 아닌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순식간에 이쪽으로 달라붙어 오는 이들을 보니 잠깐 한숨이 나온 것은 당연지사.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지혜가 전부 알아서 해줄 테니까. “앞머리 조금 남기는 게 좋겠네요. 화장팀은 기왕이면 선해 보이는 인상으로 부탁드려요. 조금 우수에 젖은 것 같은 느낌으로 약간 병약한 느낌으로 가는 것도 좋겠네요. 의상팀은 최대한 강한 색상은 피해주시고… 포인트를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네.” “네.” “붉은색은 아니에요. 제 말 들은 거 맞아요? 피해자처럼 보여야 한다니까. 귀부인들이 동정심을 가질 만한 느낌으로… 최대한 어려 보이게… 정장 말고 제국양식의 복장으로 할 거예요.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게 좋으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겉모습이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 역시 정치의 일환이니까. 그렇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든 이지혜의 요구에 맞게 움직이고 있는 검은백조 직원들의 모습은 가관. 지구에서 이름난 메이크업 아티스트들과 코디네이터, 심지어는 뷰티 크리에이터였던 이들도 보인다. 거울로 내 모습을 확인하고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뭐가 달라지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을 지경. 그렇지만 정하얀의 눈에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얼굴이 조금씩 조금씩 멍해진다. ‘쟤는 원래 저러니까.’ “하얀아.” “…….” “하얀아?” “…….” “하얀아?!” “네… 네!” 심지어 이쪽의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보니 나쁘지 않은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시킨 일은 전부 다 끝내 놨지?” “네?” “파란에 보내기로 한 물건이랑 무녀한테 전해야 하는 서신.” “네. 전부 해놨어요. 오빠 말대로 마법으로 꽁꽁 묶어서 보냈어요.” “잘했어. 역시 하얀이가 최고네?” “히… 히히. 그런데 오빠. 그럼 이제부터는 계속 여기에 계시지 않으셔도 되는 건가요?” “응. 행동하는 데 제약이 없지는 않겠지만 사교모임에 갈 수 있을 정도면 이쪽 편의를 많이 봐주고 있는 거니까. 전부 지혜 씨 덕분이지 뭐.” “아….” “아마 시간이 지나면 곧 누명도 벗길 수 있을 거야.” “그, 그거 다행이네요.” 정하얀과 대충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조금 흘렀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이지혜와 검은백조의 길드 여러분들은 피땀을 흘리며 내 모습을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중,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눈에도 뭐가 달라졌는지 보인다. ‘허….’ 왠지 모르게 미남이 된 것 같은 느낌. 타고난 본판을 이길 수야 없겠지만 이정도면…. ‘우리 현성이한테도 비벼볼 만한데….’ 옷빨, 머리빨, 화장빨이라는 게 뭔지 대충 이해가 간다. 거의 대부분이 마무리 됐다고 했을 때 몸을 일으키니 다시 한번 전신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기본적으로는 양복의 형식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거추장스러운 장식이 많은 제국귀족의 옷은 확실히 움직이기 편하지 않다. “한번 돌아봐요, 기영 오빠. 제대로 잘됐는지 볼 테니까.” “네, 지혜 씨.” “장식들이 조금 삐뚤어졌네.” 이지혜가 슬그머니 입을 열며 잘못된 점을 꼬집었지만 검은백조의 길드의 길드 직원의 표정은 여전히 좋다. ‘여우네.’ 이쪽으로 슬그머니 다가온 이지혜가 마지막으로 내 옷매무새를 점검해 주는 모습은 마치 출근하는 아버지의 넥타이를 매어주는 어머니의 모습. 정하얀에게 과시하는 건지 아니면 본인이 직접 하고 싶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하얀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짜증이 들어서고 있었다. ‘차라리 대놓고 기싸움을 했다면….’ 이쪽이 조금 더 편해질 것 같은 느낌. 살살 정하얀의 속을 긁으며 영역을 침범하려고 하고 있는 이지혜의 모습은 확실히 고단수다. “우리 오빠 너무 멋지시네요. 그렇죠? 하얀 씨?” “네? 네….” 중요한 일을 앞두고도 이런 도발을 하는 것은 멈출 수 없는 모양. “나, 나머지는 제가….” “지금까지 앉아계셨으니까 계속 앉아 계세요. 이런 건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좋잖아요?” 심지어 내 목을 슬그머니 팔로 감싸며 상의의 뒤를 정리하고 있는 액션은 대놓고 정하얀을 겨냥한 것 같은 행동이었다. ‘그만해. 지혜 누나….’ “옳지. 다됐다.” “고마워요, 지혜 씨.” “뭘요.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인데요 뭐. 우리 하얀 씨가 아직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저라도 열심히 오빠를 내조해야 되지 않겠어요? 여자친구가 너무 어려서 고생이네요. 호호.” 대놓고 도발하는 듯한 발언, 이지혜의 얼굴을 본 순간 확실히 우리가 영혼의 단짝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게 내조야, 애송아.’ 라는 표정으로 정하얀에게 빅 엿을 먹이는 이지혜의 얼굴은 평소의 내 표정과 굉장히 흡사했다. “이제 그만 나갈까요? 저도 슬슬 준비해야 되니까요. 하얀 씨, 오늘 하루 우리 오빠 잘 부탁드려요.” “네…….” # 127 회귀자 사용설명서 127화 양보하지 않는다 “그럼 모임에서 봐요. 기영 오빠, 하얀 씨.” 내 준비가 대충 끝나자 분위기가 좋지 않은 이곳을 나가버리는 이지혜가 갑작스레 원망스러워졌다. 정하얀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살기를 내뿜거나 죽여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얼굴에 짙게 드리운 패배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장식이 삐, 삐뚤어졌어요. 오빠….” ‘안 삐뚤어졌어.’ “아… 괜찮은 것 같은데.” “아니요. 삐뚤어졌어요. 제, 제가 고쳐드릴게요.” “아… 응… 고마워, 하얀아.” 이지혜와 자신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는 것이 당연. 곱게 꾸민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헐레벌떡 뛰어온 자신과는 다르게 이지혜는 이쪽을 완벽하게 케어해 준 이후에 밖으로 나갔으니 분명 느끼는 게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어린애가 아니고 여성의 역할이 꼭 저런 내조에 국한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김현성이 단상에 설 일이 생긴다면 이지혜의 자리에 내가 서서 이것저것 신경 써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화장을 해줄 수는 없지만 옷의 코디나 전체적인 이미지를 잡아주는 것은 우리 같은 내조인에게는 꼭 해야 할 일이다. 내 대리인단, 그중에서도 대표 대리인을 하고 있는 만큼 이지혜가 보여준 행동은 다분히 정상적인 행동이었다. 문제는 그 모든 모습을 받아들이는 입장에 있는 정하얀. ‘이게 내조라는 거다’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지혜의 모습과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대사는 마음속에 훅 치고 들어왔음이 분명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이니까….’ 내 목숨을 구했다는 업적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것이 분명. 벌써부터 굉장히 초조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먼, 먼지가 있네요?” “아. 고마워, 하얀아.” “머리에 뭐가 묻어 있어요. 오, 오빠….”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는지 갑작스레 이곳저곳을 챙기는 모습은 가관. 눈이 글썽글썽한 걸 보니 미안함의 눈물을 쏟기 일보 직전의 느낌이라 굉장히 부담스러워졌다.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챙겨주는 게 이지혜가 아니라 자신이었어야 하는 자책, 내 입장에서는 정하얀이 나에게 달라붙어 이것저것 해주는 것보다 이지혜가 처리해 주는 게 더 좋기야 하지만 이런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침부터 바, 바빠서요. 저도 준비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남으면 챙겨 드리려고 했거든요. 오, 오빠가 시키신 일 때문에… 깜, 깜빡….” ‘괜찮으니까. 변명하지 마, 하얀아….’ “아냐. 괜찮아. 하얀이가 오늘 얼마나 신경 썼는지 보이니까. 이렇게 예쁜 모습을 보니까 나도 기분이 좋네.” 이지혜가 동시에 처리하고 있는 일들을 만약 정하얀이 알고 있다면 틀림없이 자괴감에 휩싸이리라. 아주 간단한 심부름만을 한 정하얀과는 다르게 이지혜는 린델의 여론조작과 언론조작, 왕성내의 인맥관리 뿐만이 아니라 이쪽을 변호하는 일까지 해내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정하얀에게 원하는 것은 이지혜의 역할이 아니다. 모두 각자가 할 수 있는 분야가 정해져 있고 각자의 역할이 있다. “하얀이는 잘해주고 있어. 너무 여러 가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지금처럼만 잘 참아주고 지금까지 성장했던 것처럼 무럭무럭 성장해 주면 된다. 규격 외의 대마법사의 무대는 이곳이 아니다. “오, 오빠….” ‘여긴 나와 내 단짝의 무대지.’ 슬쩍 밖으로 나가니 최근에 인사를 나눴던 빅터하르트와 그의 기사단원 몇몇이 보였다. 살해범을 지켜줄 오늘의 호위무사들이다. “안녕하십니까, 빅터하르트 님.” “조금 늦었군, 젊은이.”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쉬고 있는 늙은이를 불러낼 정도로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젊은이가 생각보다 겁이 많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희라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더군. 그럼 천천히 가겠나?” “네. 물론입니다.” “쯧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말일세….” “예.” “실리아 쪽의 인원을 죽인 건….” “당연히 아닙니다, 빅터하르트 님. 어디까지나 저는 살해 위협을 받은 피해자에 불과합니다. 율리에나는 저를 지키기 위해 정당한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군.” “빅터하르트 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토 소우타가 교황청과 결탁하고 있어 저희 쪽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용의자로 몰린 것뿐입니다.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는 행동이었을 겁니다. 저희 파란에서 야마토 길드가 린텔 테러 사건의 주범이라고 발표한 보복이겠지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저를 암살하거나 저를 살인자로 몰아가려는 수작입니다.” “그런가.” “예. 애초에 율리에나를 막을 수 없었다는 게 조금 더 의아하지 않습니까. 빅터하르트 님께서는 어떻습니까?” “뭘 묻는 건지 모르겠군.” “만약 제가 가지고 있는 검이 이 주변에 있는 누군가를 해친다고 가정했을 때 빅터하르트 님께서는 검을 막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이토 소우타 역시 율리에나를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의 초대 받은 자유민은 아마 대부분이 율리에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그자를 고의로 살해한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네는 용의자가 되어 있군.” “세상이 꼭 진실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요. 이건 이미 단순한 살해사건이 아닙니다. 조금 더 정치적으로 얽혀 있는 일이 되어버렸지요. 황제파와 교황파로 나뉜 신성제국 내의 정치 싸움. 린델과 실리아로 번진 이권 싸움 말입니다.” “그래서 린델 쪽에 이상한 소문을 퍼뜨렸나 보군.” “…….” 무장인지 알고 있었는데 나름대로 머리도 굴릴 줄 알았던 모양. 심기가 불편하다는 표정에는 살짝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 일찍이 젊은이 같은 친구들을 많이 봐왔지. 뱀의 혀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 말이야.” “…….” ‘당신 같은 눈치 빠른 영감들이 이래서 싫다니까.’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답게 눈치가 보통 빠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이를 뒤로 먹지는 않은 모양.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곧바로 할아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그런 이들은 일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켜왔네. 그리고 그 본인 역시 항상 끝이 좋지는 않지. 주변 사람은 물론 결국에는 자신조차 망가뜨리는 게야.”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쯧. 모르는 척하지 말게나.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들려오는 게 있으니까. 지금 린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리아에 때한 지속적인 도발은 모두 자네가 꾸민 일이 아닌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영감의 눈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더 이상 시치미 뗀다고 해도 별로 성과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당연지사. 결국에는 슬쩍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반 정도는 맞습니다.” “…….” “빅터하르트 님이 좋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제가 린델에 손을 쓰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 모임에 참석하는 대신 법정에 서게 됐을 겁니다. 이토 소우타를 비롯한 교황파의 덫에 걸려 모르긴 몰라도 조금은 커다란 피해를 감수해야 했겠죠.” “목숨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네.” “당연히 그랬겠죠. 저는 용병여왕이 아끼지 마다않는 정부고 요조라 길드 무녀의 손님이니까요.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만약 제가 아무런 뒷배로 가지고 있지 않은 일반인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목이 날라 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건.” “아마도 어려울 겁니다. 양보는 영감님 같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단어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가 그들에게 져줬다고 가정합시다. 영감님, 인간이란 말입니다. 무척이나 단순해서 호의가 계속되면 그것이 권리인 줄 압니다. 한 번을 양보하면 그 다음을 양보해야 되고 그 다음을 양보하면 또 그 다음을 양보해야 합니다.” “…….” “수많은 자유민 중에도 이곳에 온 제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여기에서 영감님과 대화할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별다른 재능도 특기도 없는 멍청이가 어떻게 이곳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용병여왕이 아끼는 사람이라서가 아닙니다. 무녀의 손님이라서가 아니에요.” “…….” “제가 그 어느 것 하나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쯧….” “양보하지 않아서 이렇게 신성제국 최고의 무인의 보호를 받고 있는 거고 양보하지 않아서 용병여왕의 뒤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겁니다. 양보하지 않아서 법정이 아닌 파티장에 있을 수 있는 거고 양보하지 않아서 살아 있는 겁니다. 특별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양보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이들은 저 같은 놈들을 이해하지 못해요.” “생각하는 게 독특하군.”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신성제국의 황제가 어째서 교황의 눈치를 보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아마 수세기 동안이나 양보해 왔을 겁니다. 양보하고, 양보하고 또 양보해서 이 지경이 된 겁니다. 분쟁을 피하는 인간이나 집단은 목소리를 낼 수가 없어요. 영감님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제국을 사랑하는 마음도 당연히 이해가 가요. 그렇지만 그건 영감님이 강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세상에는 저 같은 놈들이 아주 많습니다. 남이 양보하고 남이 땅바닥에 떨어진 것을 게걸스럽게 먹는 이들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영감님이 저들을 키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궤변이로군. 자네 말은 전부 궤변이야.”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일정 부분 공감하시는 게 있을 겁니다. 만약 검을 휘둘렀더라면 양보하지 않고 내 것을 탐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싸움이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났겠지. 내 손에는 수많은 피가 묻었을 것이고 난 그것 때문에 후회와 자책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아갔겠군.” “대신 영감님이 사랑해 마지않는 황제와 영감님의 후대들은 행복한 인생을 살아갔을 겁니다. 물론 조화가 중요하다는 건 이해합니다. 당장 교황파를 쳐내라는 이야기를 말씀 드린 것도 아닙니다. 이미 그들은 이 신성제국의 일부니까요. 그래도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양보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 “저는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양보하지 않고 있을 뿐이에요.” “만약에….” “네.” “만약에 그대가 말하던 저들도 양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글쎄요. 저도 전쟁을 피하고 싶은 건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저는 절대로 피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비키는 건 상대방이 해야 될 일이예요. 저는 카드를 던졌고 그걸 받을지 피할지는 저들 손에 들려 있습니다.” “만약 저들이 피하지 않는다면….” “저는 이미 던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생각보다 무서운 젊은이로군… 또 뛰어나기도 하고… 희라 고년이 어째서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알겠어.”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영감님.” “쯧. 희라 고년을 좋아하기는 하나?” ‘눈치 없는 늙은이.’ 계속해서 길을 걷고 있는 와중에 들려온 할아범의 목소리에 내 옆에 있는 정하얀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 어떻게 말을 해도 답이 없겠지만 이럴 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단어가 있다. “반 정도는.” “그건 또 다행이로구만.” “많이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물론. 웃기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희라는 내게 딸 같은 아이일세.” 마지막 말에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파티장의 입구에 도착했는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차희라의 모습이 보였으니까. 붉은색 드레스에 붉은색 머리 새빨간 목소리와 새빨간 입술을 하고 있는 생소한 모습의 그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영감이랑 자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했어?” “별것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둘이 그렇게 나란히 들어오니까 기분이 좋네. 세컨드도 음… 조금 예뻐 보이고. 어디 가서 꿀리지는 않겠는데? 어때 자기? 오랜만에 입어보는 것 같은데 나 좀 괜찮나?” 괜찮고 자시고가 아니다. 노출도가 높은 드레스가 가리지 못한 곳에 자리한 것은 수많은 상처. 그녀가 지금까지 얼마만큼 투쟁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상처들이다. 영감님과의 대화에서 지나치게 감상에 젖었던 모양. 그녀 역시 종류는 다르지만 나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투쟁. 그녀도 지금의 위치에 있기까지 물불 가리지 않고 오직 직진했을 것이다. 차희라는 불이다. 활활 타오르고 꺼지지 않는 불.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과 자신의 몸의 상처를 보여주기를 꺼리지 않는 태도. 절대로 자신은 피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실제로도 그녀는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목소리 차희라의 얼굴이 붉어졌고 내 손을 꽉 잡은 정하얀의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붉은용병 길드의 길드 마스터 용병여왕 차희라 님과 제국기사단의 기사단장 빅터하르트 님. 파란 길드의 이기영 님, 마찬가지로 파란길드의 정하얀 님이 입장하십니다.”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128 회귀자 사용설명서 128화 함정 카드 발동(1) 별다른 감흥은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정해져 있었고 지금에 와서 사교계에 데뷔한다는 것 자체에 별 다른 무게를 두지는 않았다. ‘할 일만 잘하면 돼.’ 새로운 인물이라는 건 어딜 가나 관심을 받게 마련, 특히 용병여왕의 정부이자 이번 모임에 뜨거운 감자의 주인공. 유리한 위치다. 애초에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혐의를 벗고 있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꼴. 빅터하르트의 보호를 받고 있는 내게 개짓거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간 큰 놈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문이 열리자 고급스러운 내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한쪽에 비치된 테이블들과 가벼운 디저트나 와인을 들고 다니는 하인들도 보였고 검은 머리를 한 동양인들도 눈에 띄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것은 형형색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제국의 귀부인들. 옷은 대충 보기에도 그 원단이 고급스러워 보였고 그들이 하고 있는 액세서리는 가격을 측정하기 힘들 정도였다. ‘제국 귀족.’ 신성제국의 신관의 옷을 입고 있는 이들도 눈에 띈다. 아마 저들이 교황청 쪽에 속해 있는 이들. 조금 황당했던 것은 저들 역시 무척 비싸 보이는 옷과 장식을 하고 있었다는 것. 아무래도 이쪽의 종교는 청렴함을 모토로 하지 않는 모양이다.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기도 전에 슬쩍 나에게 손을 뻗는 차희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약간의 죄책감이 그녀의 표정에 감돈다. “잡아, 자기.” 신성제국의 경우에도 남자가 여자를 에스코트 하는 게 일반적, 그렇지만 차희라는 그런 건 엿이라도 먹으라는 것처럼 내 손을 잡고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 흘러들어오는 마력에 팔이 아프기는 했지만 애써 입을 꾹 다물고 발걸음을 옮긴다. ‘더럽게 아프네. 시바….’ 걸음걸이는 커다랗게. 주변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눈으로 주변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용병여왕 그 자체. 나름대로 병약해 보이는 남자가 강한 여성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장하는 게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는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지만…. ‘효과가 있어.’ 이건 내 이미지에 도움이 된다. “저분이….” “용병여왕님께서 푹 빠지셨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이런 적은 처음이죠? 아마?” “생각했던 거랑은 조금 다르게 생기셨네요. 조금 더 거친 이미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능력 있는 연금술사라는 모양이에요. 학자 타입이신가 봐요.” “누구를 해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얼굴이네요. 조금 귀엽게 생기기도 하신 것 같고….” “아. 저도 느꼈어요. 보호해 주고 싶은 그런 느낌?” “맞아요. 그런 생각이 들죠.” “용병여왕님의 취향도 훌륭하시네요. 언뜻 보기엔 평범해 보이기는 하지만 묘한 색기가 보이는 게….” “네. 네. 저도 느꼈어요.” 가지고 있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로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전부 다 들려온다. ‘저 아줌마들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귀부인 쪽에 인기가 많은 것 같은 느낌. 보호 본능을 일으킨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기는 했지만 지금 내 모습이 그렇게 비치기는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나를 아니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자들도 있기는 있다. 가슴 아프기는 하지만 용병여왕의 뒤나 쫄레쫄레 따라다니는 멍청이로 기억되는 편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내 가치는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고 지금 당장은 그저 피해자로 기억되는 것이 더 편하니까. ‘저런 놈이?’ ‘농담이겠지.’ ‘살인은 무슨.’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구만.’ 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첫 번째. 차희라가 이걸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행동 덕분에 일단 대중들에게 그런 이미지를 넣어주는 것이 반쯤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이 사교회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시선이 떨어질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 상황. 어떻게든 말을 붙여오기 위해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람들이 시야에 비친다. 누구와 먼저 대화를 나누는 지도 이곳에서는 조금 중요한 문제. 기왕이면 권력자가 좋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자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정하얀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우리 세컨드 표정이 말이 아니네.” “…….” “내일은 네가 함께 입장해도 돼.” “아… 네.” “나는 공평한 걸 좋아하거든.” 이 와중에도 슬그머니 정하얀을 배려해 주는 모습은 무척이나 고맙다. 그렇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여기에 주인공들이 전부 모여 있으신 것 같은 느낌이네요.” “오랜만에 보는군. 카트린 공작부인.” “빅터하르트 님도 간만이시네요. 용병여왕님은 잘 지내셨나요?” “네. 저는 잘 지냈습니다.” ‘나쁘지 않네.’ 이쪽에 말을 걸어온 것은 남색의 머리를 하고 있는 여자. 대충 보기에도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눈에 보인다. ‘카트린 공작부인.’ 사교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여자. 공작부인이라는 위치도 그렇지만 특유의 친화력 때문인지 이곳저곳에 인맥을 많이 만들어 놓고 있다는 걸로 알고 있다. 나이가 많아 병상에 누워 있는 자신의 남편 대신 일선에 나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성제국에서도 많은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는 사람. 말하자면 친목을 다지기에 최적화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소리다. “이분이 떠들썩한 소문의 주인공이신가요?”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카트린이라고 합니다. 제가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시네요.” “무슨 의미이신지….” “저는 조금 더 무서운 모습을 상상했거든요. 이렇게 훤칠하실 줄은 몰랐네요.” “감사합니다. 카트린 공작부인께서도 듣던 대로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어머. 저를 알고 계신가 봐요?” “네. 물론입니다. 평소에 누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니까요.” 이정도 립 서비스는 해주는 것이 당연. 예상했던 대로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리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용병여왕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남자친구 분을 잠깐 빌려가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공작부인. 안 그래도 심심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무척 다행이로군요.” “후훗. 감사합니다.” 정하얀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감돌았지만 일단 차희라의 오케이 사인은 받았다. 그녀 역시 따로 할 일이 있는 것이 당연. 아마 검은백조의 마스터와 함께 현재 린델의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정하얀 역시 궁정 마법사들과 함께 안면을 터놓아야 할 테니 내 쪽은 이쪽을 상대하는 것이 당연. 카트린 공작부인에게 왼쪽 팔을 내밀자 의외라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보였다. 사실 아까 희라 누나가 잡은 오른팔을 보호하기 위한 것뿐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내가 에스코트 하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 당연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다른 귀부인들도 천천히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가십의 중심에 있으니 이런 대우를 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사방에서 눈길과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최대한 주제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기초 공사를 해놓는 게 중요하니까.’ 다짜고짜 사건의 이야기부터 들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어머… 용병여왕 님께서는 그럼….” “네. 희라 누나와는 저희 세계에 있었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습니다. 그때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아아. 그러셨구나.” “율리에나라는 검은 어디서 얻으신 건가요?” “파티원을 구하기 위해 던전 공략에 나섰다가 얻었습니다. 본래는 저희 길드 마스터인 김현성 님의 소유가 될 예정이었지만 율리에나에게는 선택받았지요.” “굉장하시네요. 자유 도시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아서 파란이 겪었던 일에 대해서도 들었어요. 저주받은 신단의 공략 도중에 발견하신 보물이 아닌가요?” “잘 알고 계시는군요.” “네. 이기영 님께서 만든 물약으로 저주의 효과를 반감시켜 공략에 성공했다고 들었는데 제 말이 맞나요? 연금술사가 공략에서 직접적인 도움을 준 첫 번째 사례이기 때문에 린델에서도 무척이나 화제였다고 들었거든요.” “부끄럽습니다.” “어머 정말로 그렇군요?” “재미있네요.” 이미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들도 있다. 당연하지만 저들이 미리 조사를 해온 것이 아니다. 틀림없이 이지혜가 이곳저곳에 이빨을 털고 다닌 것이 분명. 모르긴 몰라도 이쪽에 대해 좋은 소리만 주입시켜놨을 것이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간의 우정을 돈독히 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자유 도시 실리아에서 오신 야마토 길드의 이토 소우타 님 입장하십니다.” 이쪽에게 빅 엿을 먹인 녀석이 입구에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한 것. 당연하지만 여기저기서 시선들이 날아와 꽂힌다. 제법 날렵하게 생긴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평소에도 이미지 관리를 잘해왔을 것이 분명. 교황파 뿐만이 아니라 귀부인이나 다른 귀족들의 시선에서도 왠지 모를 호감이 머물러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능력은 있구만….’ 이만한 사람들에게 호감 어린 시선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능력이다. 벌써부터 이곳저곳에서 놈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 언뜻 보면 내 쪽에 과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맥과 능력 그리고 힘. 움직임에는 기품이 넘치고 선량한 인상은 누가 봐도 뒤로 거지같은 짓을 저지를 이미지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언제부터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이곳의 인간들을 관리했다고 생각한다면 아마 놈에 대한 신뢰도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기껏 해야 빅터하르트와만 친분을 유지한 차희라와는 상황이 다르다. 검은백조의 박연주도 길드 마스터가 된지 얼마 안 됐고 카스가노 유노 역시 그럴 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인기인이라는 거네.’ 유치하고 1차원적인 표현이지만 틀림없이 이토 소우타는 이곳의 인기인. 조금 뜻밖이었다는 것은 이쪽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는 것.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것은 당연지사. 조금은 겁먹은 듯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자 녀석이 활짝 웃는 모습이 들어왔다. “오랜만이로군요.” 이쪽에 말을 거는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다. 단순한 과시? 아니면 화해? 생각보다 이쪽을 건드린 게 파장이 커지자 지레 겁을 먹고 먼저 왔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네… 오랜만입니다.” 귀부인들은 슬그머니 길을 비켜주기 시작했고 빅터하르트는 조금 녀석을 경계하기 시작. 내 호위라는 입장에 있는 이상 이런 행동은 무척이나 당연할 터. 녀석의 얼굴에 살짝 묻어나온 것은 흥미였다. ‘하….’ 재미있어 하는 표정. ‘그렇다, 이거지.’ 놈은 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아마 이번 일 역시 쉽게 끝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는 다르다. 나는 법정이 아니라 사교장에 서 있고 현재의 린델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 신성제국에서도 나를 함부로 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다. 어쩌면 처음 겪어보고 있는 상황에 신기하고 재미있어 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놈같이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는 나 같은 놈이 그저 흥미 거리로 비칠지도 모른다. “조금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기영 님.” ‘개새….’ 이건 납작 엎드리는 게 아니다. 내가 던진 카드와 주사위에 겁을 먹고 피하는 행동이 아니다. 녀석은 나를 확실히 내려다보고 있다. 승자가 패배자에게 아량을 베푸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본인이 예상하지 못한 수에 감탄을 보내면서 박수를 치고 이쪽으로 들어올 공간을 마련해 준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열심히 했네. 제법이야. 그래서 이제 어쩌게? 어차피 이것밖에 선택지가 없는 거 알잖아? 내 손을 잡아. 그게 최선이야.’ 놈의 목소리는 내게 이렇게 들려온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거짓말. 뒤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제 와서 오해라니 개소리도 작작해.” “차희라 님, 저희 실리아는 어디까지나 린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두 집단이 너무 과열되어 있습니다.” “글쎄?” “신성제국에서는 분쟁을 바라지 않습니다. 사건의 경위가 어떻든 간에 서로가 가지고 있는 앙금을 풀어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길드원 한 명을 잃은 것은 가슴 아픕니다만… 신성제국의 테두리 안에서 한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저희들끼리 부딪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 아닙니까.” 요약하자면 본인이 희생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평화를 위해 양보해 주겠는 느낌. “그걸 말해야 될 대상은 내가 아니라 우리 자기야, 이토 소우타.” “네. 물론 이기영 님께 드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부디 이 이상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저희의 행동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손을 뻗어오는 모습은 가관. 신성제국의 권력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녀석의 손을 잡는 것밖에는 선택지가 없어 보인다. 못이기는 척 살짝 손을 내밀자 내 손을 꽉 쥐며 웃고 있는 놈의 표정이 보였다. 녀석이 한 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면…. “합리적인 선택에 감사… 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 한쪽 팔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함정 카드 발동이다, 이 새끼야!’ “아아아아아아악!” # 129 회귀자 사용설명서 129화 함정 카드 발동(2) 당연하지만 미적지근하게 끝낼 생각은 없다. 단순히 팔이 부러졌다든가 어깨가 탈골됐다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내가 놈에게 준비한 선물은 조금 더 묵직하다. 차희라가 미리 넣어놓은 마력에 슬쩍 내 마력을 흘리자 상상했던 것 이상의 결과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플 거라는 경고를 듣기는 했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 “아아아아아악!!” 오른팔에서 피분수가 튀어나온 것은 순식간. 차희라가 다급한 표정으로 이쪽의 팔을 잘라내는 것이 보였다. 물론 그녀가 나를 공격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내 팔을 잘라낸 것은 오히려 응급처치에 가깝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그녀가 미리 심어 놓았던 마력이 폭주하듯 내 몸을 타고 올라왔으니 당연한 반응. 지금 팔이 잘리지 않았다면 그녀의 마력은 순식간에 내 뇌 속으로 파고들었으리라. 엄청난 격통이 몰려들기는 했지만 어처구니없다는 이토 소우타의 표정을 보니 고통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주 진통제네, 진통제야.’ “이런 개!” ‘연기 좋고.’ 정말로 다급한 표정의 차희라의 연기는 이 갑작스러운 사건에 조금 더 생동감을 더한다. 애초에 위험할 수도 있다고 반대한 쪽은 희라 누나 쪽이니 급한 게 당연할 것이다. ‘푸히하하하핫.’ 큰 소리로 웃고 싶은 심정. 그렇지만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고통에 찬 비명이다. “아으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팔이 떨어져 나갔다. 고통스러운 것이 당연하다. 아니, 지금까지 참아왔던 비명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리라. 그녀가 이쪽을 에스코트할 때부터 비집어 나오는 고통을 삼키고 있었으니 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지금은 참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조금 더 큰 비명이 터져 나올 정도. 마치 신생아가 된 심정이었다. 졸지에 피를 뒤집어쓰게 된 귀부인 집단은 단체로 비명을 내지르며 내 주변에서 멀어지는 중. 깜짝 놀란 정하얀이 서둘러 내 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사제를 찾는 커다란 목소리는 울려 퍼지고 주먹을 꽉 쥔 차희라가 소우타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 그 풍압만으로도 주변에 있는 것들이 사방으로 날아가 버린다. “꺄아아아아악!” “꺄악!” “이런!!” 애초에 진짜 피해자인 척하려면 본인이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게 효과적이다. 조금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이게 합리적인 선택. 차희라의 주먹이 뻗어나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이토 소우타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인다. 짧은 순간이지만 나 역시 땅바닥에서 뒹굴며 최대한 입꼬리를 올렸다. ‘멍청한 새끼!’ 콰지지지직! 큰 소리와 함께 차희라의 주먹이 놈의 안면에 틀어 박혔고 공중에서 몇 바퀴를 회전한 채 놈의 몸이 한쪽 벽에 틀어박혔다. 콰아아아아아앙! “이 개 같은 놈….” “쿨럭….” 연기가 걷힌 뒤에 눈에 보이는 것은 벽에 처박힌 채 피를 내뱉고 있는 이토 소우타와 녀석에게 다가가고 있는 차희라. 아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놈의 내구 수치는 그리 높지 않았으니까.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감돌지만 다시 한번 이쪽으로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소리를 내지르며 파티장 내에 어그로를 끌고 있었으니 시선이 모이는 게 당연하다. 순식간에 사제들이 이쪽으로 모여들고 내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오, 오빠는 괜찮은 건가요? 오빠… 흐으으으으윽… 오빠아….” “끄으으윽….” “오빠아….” “아으아아악!” 이 모든 상황을 알 리가 없는 정하얀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내 팔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중. 내가 생각해도 그림이 꽤나 괜찮다. 어느새 달려온 이지혜도 드레스를 찢어 내 팔을 지혈하고 있다. ‘명장면이네. 키야… 진짜 명장면이야.’ 마치 전쟁 영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사제를 향해 뻔한 질문을 날리는 이지혜.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 분명. 분노를 표현하는 그녀의 연기력 하나는 발군이다. “아니, 일단 치료를 해주세요. 떨어진 팔을 붙여야겠어요.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멍하니 있을 때에요? 당장 사제를 불러오세요!” “빨리 사제를… 사제를!” “조금만 늦었더라고 팔 하나가 떨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증상을 말씀해 주세요.” “외, 외부에서 의도적으로 마력을 집어넣어 폭주시켰습니다. 다행히 차희라 님께서 서둘러 팔을 잘라내 몸까지 침식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많이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일, 일단은 팔을 봉합하는 게 먼저일 것 같군요. 더 늦기 전에 떨어진 팔에 있는 잔존 마력을 걷어내야 합니다. 누, 누군가가….” “제, 제가 할게요. 제가.” “부탁드려요, 하얀 씨.” 고맙게도 이쪽으로 달려와 준 사제의 소견은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중. 여기저기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떠들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미 들을 만한 사람은 전부 들었을 것이다. 오른팔부터 시작된 갑작스러운 마력의 폭주가 이 사태의 원인. 의도적으로 마력을 집어넣어 나에게 고통을 준 장본인이 누군지는 아마 뻔할 뻔자. 모두가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는 바로 그 이름. 우리들의 아이돌. ‘이토 소우타.’ 이 새끼가 범인이다. 빼도 박도 못하고 이 새끼가 무조건 범인이다. 강자로 분류되는 이들은 보통 고급 마력 운용 지식이라는 직업효과를 가지고 있다. 내 팔에 의도적으로 마력을 집어넣어 폭발시킬 수 있는 것은 이런 종류의 지식을 얻은 이들에게만 가능한 행동이다. 그게 가능한 것은 이 자리에 많아야 5명, 당장 생각나는 사람은 차희라와 빅터하르트 그리고 이토 소우타가 전부다. 애초에 빅터하르트는 이쪽에 마력을 집어넣을 여력이 없었으니 용의자는 둘, 사랑하는 희라 누나가 내게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으니 범인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아마 녀석 역시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슬쩍 고개를 들자 정하얀이 열심히 떨어진 팔을 붙잡고 잔존 마력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 보였고 그 뒤로는 계속해서 피를 토하고 있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쿨럭… 우웨에엑….”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녀석이었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터. 조금은 아쉽게 됐다. 피를 토하고 있는 놈의 모습이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녀석이 차희라에게 반격을 가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시나리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쾌하기는 마찬가지. 녀석의 주변에 있는 야마토 길드원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든 차희라를 견제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될 리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막타를 넣고 싶은 심정이지만…. ‘정황상 그건 힘들 거야.’ 차희라의 앞을 막아서는 빅터하르트와 들이닥친 경비들을 보니 아무래도 여기까지가 끝인 모양. 조용히 차희라를 응시하는 표정의 빅터 영감의 표정이 구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만. 더 이상은 허용하지 않겠다.” “비켜, 할아범. 내 용무는 할아범한테 있는 게 아니라 그 뒤쪽에 있는 개자식에게 있으니까.” “이곳은 연무장이 아니다, 희라야.” “지금 누가 먼저 개수작을 부렸는지는 할아버지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그런데도 막아서고 있는 건 그 자식이 아니라 나인 것처럼 보이는데… 주변 경비들도 마찬가지고… 아직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가? 다른 증거가 필요해? 저 새끼는 현행범이야. 내 눈앞에서 우리 자기를 죽이려 한 죽어도 싼 놈.” ‘좋다.’ 순전히 억지. 모든 게 억지다. 사실은 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이토 소우타가 아무리 미친놈이라고는 해도 모든 중역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나에게 마력을 밀어 넣어 머리를 터뜨릴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다. 침착하게 생각해 보면 범인이 이토 소우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내 경우에도 마찬가지. 당연하지만 나 역시 신성제국의 왕성에서 놈의 길드원들을 살해할 정도로 정신을 놓고 다니지는 않는다. ‘그럴 만한 배짱도 없고….’ 어처구니없게 당한 걸 그래도 돌려 준 셈. 증거만 있으면 이유 따위는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 저 멍청한 놈이 그렇게 했듯이 진실은 이쪽에서 만들어내는 거다.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아무리 그가 이기영을 위협했다고 한들, 이런 자리에서 일을 벌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절차에 맞게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먼저다.” “글쎄.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지. 우리 자기 머릿속에 꽤나 고급 정보가 들어 있거든.” “…….” “물증이 없어서 확실하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조금 파급력이 있는 정보라서… 나는 이토 소우타라는 놈이 어째서 이런 무리수를 던졌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 자기 입을 막고 싶었을 거야. 우리 자기 입이 열리면 본인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거지.’ 내 생각보다 차희라가 혼신의 연기를 해주고 있다. 조금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흥분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제대로 잘해주고 있다. ‘장하다, 차희라!’ “무슨….” “이런 자리에서 이런 일을 벌일 정도로 입을 막고 싶었다는 거야. 그럴 만한 동기가 있어. 내가 보증할게.” ‘물론 거짓말.’ “애초에 우리 자기를 위협하고 율리에나를 이용해 범죄자로 몰아붙인 것 역시 그 이유 때문이고….” ‘이것도 거짓말.’ “린델 테러 사건 역시 연관이 있다고 하면 설명이 돼?” ‘당연하지만 요것도 거짓말.’ “만약 그렇다고는 해도 죄를 벌하는 건 네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잊지 않느냐. 네가 사랑하는 이가 다쳐 흥분한 것은 이해가 가지만 부디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생각해다오. 그렇지 않다면… 나도 검을 들 수밖에 없다.” 빅터하르트는 꽤나 초조한 표정이다. 차희라의 놀라운 연기력에 혹시나 차희라의 말이 진실일 가능성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곳에 오기 전 나와 나눴던 대화가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을 것이다. ‘딸 같은 아이다.’ 그의 말을 고려하면 차희라에게 엄청난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 같지만 괜히 아들자식, 딸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다. 조용히 검을 올리고 있는 빅터하르트는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있는 것이 보여 슬그머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대치해 봤자 떨어지는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희라 누나, 나는… 괜찮아….” “자기.” 화들짝 놀라 뛰어오는 차희라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심장이 쿵덕쿵덕 거릴 지경. 지금 이 순간만큼은 김현성보다 차희라가 더욱더 소중하다. 왠지 모르게 우리 회귀자에게 미안해졌지만 아무튼 그렇다. “괜찮아? 자기? 팔은?” “괜찮아… 소란 피우면 안 돼. 누나….” “응… 알겠어.”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다시금 싸구려 연극 톤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느낌. 경비들과 빅터하르트가 순식간에 이토 소우타를 에워싸는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아진다. “일단은 연행해야겠소. 이런 곳에서 그런 짓을 저지른 이유가 뭔지.” “저는 이기영 씨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일단은 절차대로 조사를 받게 될 거요.” ‘좋은 단어지. 절차라는 건….’ “네. 일단은 조사를 받겠습니다만 절대로 저는 이기영 씨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죽이려는 의도로 접근 한 것도 아니라 위협한 적도 없다는 걸 이 자리에 있는 다른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중에 따로 발언하실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겁니다. 일단은 함께 가시죠.” “네.” 슬쩍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이 보였다. 잠깐이었지만 얼굴이 미친 듯이 일그러진 것을 보니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 원래 저렇게 고고하고 부족한 것 없는 이들일수록 꿈틀거리는 애벌레한테 당한 것을 수치로 여긴다. 아마 지금쯤 속이 뒤집어져 있을 것이다. 나조차도 놈에게 뒤통수를 맞고 난 이후에는 화가 나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녀석의 경우에는 어떨지 확인할 수 없지만 모르긴 몰라도 지금 당장 나를 찢어 죽이고 싶을 거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이미 나는 조각조각 나 시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되리라.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라고 느낄 거라는 건 굳이 머리를 쓰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다. 나를 죽이고 싶다면 장소를 잘못 골랐다. 애초에 이런 정치 싸움으로 끌고 가지 말았어야 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불쌍한 놈아.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기대해도 돼.’ 여전히 나를 응시하는 녀석을 향해 무언가 메시지라도 전해주고 싶은 심정. 천천히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짜릿한 쾌감이 등 뒤를 훑고 지나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엿이나 먹어라.’ # 130 회귀자 사용설명서 130화 함정 카드 발동(3) ‘엿이나 먹어라.’ 입에서는 웃음이 나온다. 이제 그만 웃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피식 피식 나오는 웃음은 참을 수 없을 지경.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위로와 걱정을 받고 있는 와중이었기 때문에 참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자꾸만 쿡쿡 거리게 된다. “발, 발작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사제님들은 계속 주문을 외워주시고 마법사 분들은 혹시 몸에 폭주하는 마력이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네.”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깨달은 이지혜가 발작을 일으키고 있다는 거짓말을 해준 덕분에 슬그머니 붙고 있는 팔을 잡으며 한 번 더 뒹굴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카스가노 유노도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사실 계속해서 이쪽에 있을 이유는 없다. 이미 몸은 회복되고 있었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보다는 안락한 내 방에서 쉬는 게 훨씬 더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곳에서 생쇼를 하는 이유는 뻔하다. ‘우리가 피해자다. 이 새끼들아!’ 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가장 찰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정하얀. “으허어어어어엉 오빠아아아! 끄어어어엉….” “괜찮아….” “허어어어엉….” 눈물과 콧물을 전부 쏟아내고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서러워 보인다. 정하얀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백퍼센트 리얼. 사랑해 마지않는 오빠가 더러운 흉수의 손을 잡는 순간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죽을 뻔했으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 누가 보면 내가 이미 숨어 끊어진지 오해할 만한 상황. 너무나도 서럽게 울고 있는 탓에 몇몇 마음이 약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귀부인들도 슬그머니 자신의 촉촉한 눈가를 닦아내고 있다. 카스가노 유노에게는 미리 언질은 해놨지만 그녀에게도 조금 익숙하지 않은 장면인지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내 역할은 조금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만 보이면 끝. 물론 바닥에서 너무 진상 부리는 것도 좋지는 않다. 이지혜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분위기를 정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 차희라가 나를 들쳐 업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건 이거대로 또 그림이 된다. 내 몸과 옷에서 묻어 있는 혈액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 모습.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피범벅이 됐지만 신성제국의 귀부인들과 귀족들이 보기에는 한없이 아름다운 모습이다. 지금 이 순간만은 그 어느 문학 작품보다 이 상황이 더 재미있을 것이다. 여자치고는 꽤나 넓은 등에 업히니 정말로 보호받고 있는 듯한 느낌. 여기저기를 만져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탄탄한 몸이라는 게 느껴진다. 박덕구처럼 쓸데없이 벌크업된 것이 아니라 근육이 완벽하게 압축되어 있다. 이런 몸으로 휘두른 무지막지한 주먹을 전력으로 맞았을 이토 소우타를 생각하니 괜스레 다시금 웃음이 나왔다. ‘죽지 않은 게 대단한 거야.’ 아마 맞는 그 순간 전력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를 토하는 것을 보면 녀석 역시 치명상을 입은 셈. 까놓고 말하면 내가 입은 대미지보다 이토 소우타가 받은 대미지가 곱절로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은 황급히 파티장을 빠져나간다. 정하얀도 계속해서 눈물을 닦으며 이쪽을 따라오고 있었고 이지혜는 장내를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여전히 입을 털고 있는 편. 내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계속해서 남아 작업을 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조금 섭섭하기는 했지만 그게 이지혜답다. ‘나한테 유리한 행동이기도 하고….’ 아무튼 간에 이기영호는 전력으로 순항 중. 안락한 병실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고 있다. 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이쪽을 침대 위에 눕힌 차희라의 표정은 아직도 조금은 심각해 보인다. 사제들이 들이닥치고 다시 한번 치료가 시작되고 있는 와중에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을 지경. 정하얀 역시 한발 물러나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차희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태는?” “많이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차희라 님. 이대로 안정을 취하시면 다른 부작용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고했어. 이만 나가 봐.” “네.” “세컨드, 너도 나가.” “싫….” “하얀아, 오빠 방에 가면 두 번째 서랍장에 편지 하나가 있을 거야. 지금 가서 무녀한테 전해 주면 돼.” “오, 오빠… 흐으으으으윽….” “몸은 괜찮으니까 오빠 말 들어야지?” “으… 응.” “옷도 갈아입고 씻고 오면 돼.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것만 전해준 다음에 계속 같이 있자. 착하지? 카스가노 유노한테도 이제는 괜찮다고 전해주고.” “네. 네….” 차희라가 어째서 정하얀까지 나가라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잠깐 동안 정하얀이 이 방을 떠나줬으면 좋겠다. 마침 그녀가 꼭 해야 할 심부름은 딱 좋은 변명거리인 셈. 아직도 눈에 한가득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에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저렇게 걱정하고 있는 표정 앞에서 대놓고 웃음을 터뜨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이미 사제들은 황급하게 방을 빠져 나갔고 정하얀도 못 이기는 척 천천히 병실을 빠져나간 상황. 그동안 꾹 참아왔던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푸히하하흐흐하하하하핫.” “…….” “푸하흐허허허헛. 쿨럭!” “…….” 너무 심하게 빵 터져 기침이 나올 정도.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차희라의 모습이 보였다. “십년 묵은 체증이 싹 하고 내려간 기분인데. 누나, 이토 소우타 표정 봤어? 쿨럭. 푸흐흐흣.” “…….” “내 생각보다 훨씬 완벽했어. 진짜로… 사실 거기서 놈이 누나 주먹을 피하는 게 더 베스트였는데… 그건 좀 아쉽게 됐네. 거기서 때려 죽여 버렸으면 조금 더 일이 편해졌을 거야.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살아 있어서 다행이네. 아직 준비한 선물이 많이 남아 있는데 벌써 뒈지면 안 돼지. 누나도 조절한 거지? 아니면 그 새끼가 반응이 빨랐던 건가. 푸흡. 뭐 어찌됐든 괜찮았어. 쿨럭.” 계속해서 웃고 있는 와중에 차희라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 저래.’ 당연히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차희라의 얼굴에는 미세한 분노마저 느껴졌으니까. 한참 동안이나 잠잠히 있던 차희라가 조용히 입을 열어왔다. “자기.” “응?” “이게 웃겨?” ‘얘는 또 왜 저러는 거야.’ “이게 웃기냐고, 이 새끼야. 이토 소우타고 나발이고 네가 방금 뒈질 뻔했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거지?” “안 죽….” “안 죽었으니까 됐다는 개소리는 집어 치워. 조금만 늦었어도 넌 정말 뒈질 뻔한 거야. 어쩌면 평생 불구로 살아갈 수도 있었다고. 내가 팔을 잘라내지 않았으면….” “그래서 희라 누나를 믿는다고 이야기했잖아.”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네 태도에 대해서야.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 미친놈을 봐왔지만 너처럼 미친놈은 처음이다, 이 새끼야. 자기 목숨을 배팅하는 놈들도 가끔은 봤지만 너처럼 웃는 놈은 처음이야. 그렇게 뒈지고 싶어?” “아니….” “뒈지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직접 때려 죽여줄 테니까.” “누나 왜이래?” 뭔가 평소답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완벽한 몰카에 같이 웃음을 터뜨릴 줄 알았던 차희라가 이런 모습을 보이니 당황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 그렇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서는 어째서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허….’ 용병여왕이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얘 설마….’ 혹시라도 차희라가 이쪽에 진짜로 빠진 건 아닌지 생각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쪽에 목을 매는 그림은 아무리 상상해도 그려지지 않는다. 조금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최소한 이쪽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니,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청신호라고 할 수 있으리라. “걱정했어?” “입 닥….” 살짝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자 조용히 입을 다문 그녀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누나.” “너….” “누나가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웃을 수 있었던 거야. 누나가 실수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 나는 목숨을 배팅한 게 아니야.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너….” “고마워, 희라야.” 잘 움직이지도 않는 한쪽 팔로도 그녀의 얼굴을 잡고 살짝 끌어당기자 어처구니없게도 그녀의 몸이 이쪽으로 딸려오기 시작했다. 조용히 입술을 가져다대니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그녀의 몸이 느껴졌다. ‘긴장했네.’ 나도 믿기지 않지만 차희라는 지금 틀림없이 긴장하고 있다. 물론 그것도 잠깐, 자연스럽게 나를 갈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 생각이 반 정도는 맞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다친 팔을 꽉 잡은 모습은 가관. 어쩌면 덮쳐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 “미, 미안.” “아니야, 희라 누나.” 이런 반응은 또 색다르다. 본인도 본인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걸 알았는지 조금 민망해하는 느낌.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아무튼 생각대로 잘 됐다고 하니 다행이네.” “응. 이 정도면 충분해. 상황을 확실히 뒤집었거든.” “다른 생각은 있는 거 맞지? 일단 지르라는 대로 지르기는 했는데 자기가 알고 있다는 비밀이 뭔지 사람들이 전부 궁금해할 거야. 어째서 이토 소우타가 자기를 죽이려고 했는지에 대해서 알고 싶어할 거고.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별 다른 일 없이 풀려날 수도 있어.” “그건 알고 있어. 신성제국에서는 분쟁을 싫어하니까.” “대형 길드의 마스터를 처형한다는 것도 확실히 애매한 문제고… 교황청측이 야마토 길드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아마 일주일 정도 뒤에는 자기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모임장에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겠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누나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내가 따로 작업하고 있는 게 있거든.” “뭐?” “방금 전에 하얀이한테 심부름을 시킨 것도 관련된 일이라고 보면 돼.” 무척이나 궁금하다는 표정.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미 알게 될 일이다. 조금 먼저 말해준다고 해서 계획이 틀어지지는 않는다. 그녀에게는 조금 쌩뚱 맞은 소식일 것이다. “일본에 물약을 풀었거든.” “뭐?” “파란에서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일본으로 물약을 유통시키고 있어. 물론 대외적으로는 무녀와 파란은 이 물약과 관계가 없다는 입장을 취할 거고… 일본의 신생 클랜이 이 물약을 개발하고 유통하고 있다는 게 사람들이 알게 될 진실이 될 거야.” “너… 이새끼….” “물론 신생 클랜을 앞세워 이 물약을 유통시킨 진짜 흑막은 이토 소우타라는 소문도 퍼지게 되겠지. 그놈의 절차 때문에 놈의 움직임이 제한된 지금이 언론 플레이를 하기에 딱 좋은 시기라는 거지. 당연하지만 이쪽에서 직접적으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지는 않을 거야. 들어놓은 보험이 조금 많거든. 진실은 아주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게 될 거고… 그게 결국 놈의 목을 조르게 될 거야.” “이토 소우타가 교황만이 아니라 귀족들에게도 이미지가 좋다는 건 알고 있는 거지, 자기?” “그래서 더 좋다니까, 누나. 사람들은 악인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 오히려 이미지가 좋은 경우가 조금 더 작업하기 편해. 모르긴 몰라도 이토 소우타가 다시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낼 때 즈음이면 놈에 대한 여론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을걸. 재기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이미지를 조져놓을 수 있어.” “…….” “원래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어 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남 뒷담화 까는 거.” 조금은 당황스러워하는 차희라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 131 회귀자 사용설명서 131화 마녀 사냥(1) 할 일 없는 귀족들이나 귀부인들은 본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개인적으로는 거의 모든 인간이 좋아할 만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착한 가면을 쓰고 있었던 이토 소우타가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죄 없는 일반인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소식은 이 사교계를 뒤흔들 만한 이야기로 충분했다. 놈이 그저 그런 놈이었다면 이 정도로 파장이 있었을지는 의문. 서글서글하고 이미지 좋고, 사교계의 아이돌로 군림하던 놈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파장이 클 것이다. 차희라와의 대화가 끝난 이후 하루 종일 정하얀을 달래주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는 게 조금 아깝기는 했지만 들려오는 이야기에 기분이 좋은 것은 매한가지. 벌써부터 열심히 이지혜가 작업을 치고 있다는 소식은 나를 무척 기분 좋게 할 정도였다. 물론 나 역시 틈틈이 이빨을 털어놓기는 했지만 이런 종류의 뒷담화는 그 여자가 전문이니까. ‘오늘은 나도 같이 입 좀 털어 봐야지.’ 아무튼 간에 오늘 이쪽을 찾아온 것은 꽤나 오랜만에 보는 카스가노 유노. 조용히 무릎을 꿇고 내게 조아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주인님.” “물론, 생각보다 후유증도 없고 움직이는 데도 별 무리가 없거든.” “그… 많이 고통스러우셨는지.” “아프긴 했지만 별거 아니다. 사전에 진통제를 먼저 먹어두기도 했고… 사실 마력으로 내부를 뒤집는 듯한 느낌 때문에 별로 효과가 없기는 했지만… 그보다 유통 건은 어떻게 되고 있지?” “주인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전부 처리했습니다. 이미 시중에 상품으로 나왔고 판매율도 좋은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오늘 기준으로 정확히 순이익 2만 골드를 넘어섰습니다. 그전에 암시장에 내놓았던 것은 제외한 수치입니다.” “괜찮은데? 기간이 짧다는 걸 생각하면 나쁘지 않아.” “네. 단순히 개인의 만족을 위해서 구매하고 있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고… 아마 조금씩 더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사옵니다.” “나쁘지 않네.” 팔리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가격으로 책정한 것은 물론 잠깐 동안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준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런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에서 팔려나간다는 그다지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다. 저주 받은 신단에서 개발했던 정신치료 물약의 개량형. 문제는 이 물약이 가지고 있는 약간의 중독성에 있다. 약사와 함께 상의하면 큰 문제는 없지만 애초에 내가 약사인 상황에서 그 물약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이가 있을 리가 없다. “들키지는 않았겠지?” “네. 물론입니다, 주인님. 암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물건은 제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업장을 통해 세탁하고 있고 물약을 판매하고 있는 신생 길드 역시 절차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야마토 길드원들 중에서도 물약을 이용하고 있는 이들이….” “그건 또 재미있는 소식이네. 야마토 길드에서 들려온 다른 소식은 없나?” “정확히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만 이토 소우타가 조사를 받게 된 이후에 길드의 분위기가 조금 바뀐 것 같습니다. 저희 길드와는 교역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고 계속해서 다른 길드와 접선을 하고 있는 상태이옵니다.” “대처는?” “저희 길드 역시 계속해서 타 길드와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인님. 현재 일본 내에서도 이토 소우타의 여론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좋네.” 간만에 들려오는 훈훈한 소식. 이곳뿐만이 아니라 저곳에서도 놈의 여론이 좋지 않다는 건 무척 행복한 소식이다. 아마 같은 대형 길드인 요조라에서 직접적으로 녀석을 비난하고 있으니 나오는 반응일 터, 물론 일부 우익들 때문인지 요조라 역시 여론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차피 일이 모두 끝나면 모두 해결될 이야기다. “혹시라도 특이사항 있으면 계속해서 보고할 수 있도록.” “네. 주인님. 계속해서 예의주시하고 있겠습니다.” “아. 혹시 보이는 것은 없나?” “예. 아직까지는….” “좋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한 능력이군.” “송구합니다. 벌, 벌을 내려주시옵소서.” 다시 한번 납작 엎드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녀가 원하는 벌을 내리기에는 그다지 타이밍이 좋지 않은 것 같은 느낌. 밖에서부터 차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자기? 카트린 공작부인이랑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 곧 나갈 거야, 누나.” 조금은 불편한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가장 변화한 것은 차희라와의 관계. 조금 이상한 모습을 보여줬던 저번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하고는 있기는 했지만 요즘은 부쩍 이쪽으로 말을 걸어오는 빈도가 잦아졌다. 특히나 카스가노 유노와 함께 있을 때는 티가 날 정도로 나를 찾았는데 아마 미래의 유노가 나와 맺어진다는 소리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이리라. ‘티를 못 내고 있을 뿐이지.’ 그녀는 자존심 강한 용병여왕이니까. 나 역시 차희라가 어째서 예전과는 조금 다른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개인적인 계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본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물론 그녀 안에 내 존재가 커졌다는 추론 역시 내 설레발일 가능성도 있지만 정황상 이전보다 조금 더 크게 자리 잡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일이지.’ “이만 나가봐야겠군.” “네. 뜻대로 하시옵소서.” “네게는 항상 고맙다.” 용병여왕도 용병여왕이지만 카스가노 유노 쪽을 관리해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천천히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것만으로도 정하얀처럼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 확실히 카스가노 유노는 다루기 편하다. 난이도로 따지면 최하. 이미 나에게 자신의 몸까지 맡겼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다. “즐거워 보이십니다, 주인님.” “아. 너와 함께 있는 게 따분했던 것은 아니다. 카트린 공작부인과 함께 이토 소우타를 욕하는 게 즐거울 뿐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아, 신성제국에 인물들과도 계속해서 친분을 유지하고… 아무튼 다음에 또 보자구나.” 살짝 방문을 여니 차희라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잠깐 동안 무녀를 바라보는 모습은 조금 묘하게 느껴질 정도. 카스가노 유노는 고개를 숙일 뿐 별로 반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차희라의 시선은 느낀 모양인지 조용히 그녀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아.” “자기는 일 봐. 여자끼리 잠깐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괜찮지? 무녀?” “네. 물론입니다. 저 역시 차희라 님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밀린 일이 있기는 하지만 잠깐이라면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거 잘됐네. 그럼 조금 있다 봐. 자기.” “…….” 무슨 이야기를 할지 조금은 무섭기는 했지만 뭔가 연관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이 당연. 당장 약속이 있기도 했고 지금은 둘이 나누는 대화보다 내 즐거움을 나누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 잠깐 동안 빠져 있는 빅터하르트 영감을 대신해 나온 제국의 기사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니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는 귀부인들이 시야에 비쳤다. “아, 이기영 님.” “반갑습니다. 카트린 공작부인 그리고 엘리제 백작부인, 아! 오늘은 마를린 영애도 함께 오셨군요. 다른 분들도 모두 오랜만입니다.” “오늘 기영 님과 티타임을 가진다는 소리에 다들 참가하고 싶다고 하지 뭐예요? 몸은 조금 괜찮으세요?” “사실 아직까지는 조금 움직이기 불편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야 있겠습니까. 지난번 일로 많이 놀라셨을 텐데… 이렇게 오늘 또 불러 주셔서 무척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희 역시 그때 당시에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밖에는 없는 걸요.” “누구라도 무서워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오히려 따로 찾아주신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렇게 모임에 초대해 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합니다.” “아니요. 기영 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저희도 무척 즐겁거든요.” 즐겁지 않을 리가 없다. 화술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적재적소에 감탄하거나 박수를 쳐주는 것만으로도 할 일 없는 귀부인들은 신나 죽는다. 대화의 주제도 주제지만 현재 이 왕성에서 내가 제일 핫한 인물이다 보니 이들에게는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우월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소문도 빠를 거고….’ 집단 커뮤니케이션의 거미줄. 그 중심에 있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으니 왕성 내에 퍼지는 건 순식간. 사건 사고를 안주 삼아 차를 마시는 시간은 나 역시도 즐겁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수다를 떨고 있는 누님들을 보니 미소가 지어질 지경.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는 하지만 어차피 모든 대화의 결론은 녀석으로 귀결된다. “참… 그렇게 안 봤는데 조금 무서운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네네. 그렇죠. 설마 사교모임에서 그런 짓을 저지를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아직도 그날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니까요.” “엘리제 백작 부인께서도 역시 그러시군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교황청 측과는 사이가 좋은 것 같아서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 속은 알 방법이 없네요.” “사실 제가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아! 마를린 영애 뭔가 들은 게 있으신가요?” “네. 조금은 민감한 이야기라… 교황청 쪽에 있는 친구한테 들은 이야기랍니다. 여러분이라 믿고 말씀 드리는 이야기지만 꼭 비밀을 지켜주셨으면 좋겠어요.” “네. 물론이죠.” 장담컨대 지금 내 앞에 있는 마를린 영애가 하는 이야기는 이 모임이 끝난 지 3시간도 지나지 않아 모든 왕성에 퍼지게 될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비밀이 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이토 소우타, 그분이 교황청 쪽에 있는 아리엘 대수녀님과 그….” “네에?!” “쉬잇. 목소리 낮춰주세요. 엘리제 백작 부인.” “부적절한 관계에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더라고요. 물론 정확히 확인되진 않은 이야기지만 한 밤중에 교황청에 들락날락 거리던 걸 생각해 보면 뭔가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 “사실 아리엘 대수녀님도 소문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시죠. 그렇게 웃는 얼굴을 하고 뒤로는 그런 짓을 하고 있었던 거네요. 어쩐지 이 모임 때 유난히 왕성에 들락날락거리고 계신다고 생각했어요.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었는데 설마 이토 소우타 그 사람과 관련되어 있을 줄이야….” “교황청도 예전 같지 않으니까요. 아, 물론 신에게 봉사하는 그 분들의 마음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 안 좋은 행동을 하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사실 이것도 실리아에 있는 친구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이토 소우타 그 사람은 자유 도시에서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네?” “아녀자들을 희롱한다든가 약자를 괴롭힌다든가 기사답지 못한 행동을 많이 보였다지 뭐예요. 대형 길드의 수장인 만큼 모두들 모른 척하고 있지만 요즘 영향력이 약해졌는지 최근에서야 그런 비판들이 나오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 “뒷세계의 주인이라는 말도 있고 암시장을 운영하고 이종족 노예들을….” “어머… 무서워라.” 굳이 내가 입을 털지 않아도 녀석은 전력으로 쓰레기가 되어가는 중이다. 교황청과 구린 관계에 있다는 것은 물론, 삼류 파락호도 하지 않을 이상한 같은 소문들이 확산되고 만들어진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소문들은 대부분 진실이 되어 왕성을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 분명. 나 역시 무척이나 즐겁게 대화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아. 저도 그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들어본 적 없다.’ “암시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이건 내가 퍼뜨린 소문이다.’ “어머… 정말인가요?” “네. 다양한 물건들을 구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저희 자유민의 입장에서는 사실 야마토 길드의 성장 속도가 비정상적이라고 평가하는 호사가들이 조금 많습니다. 물론 그 길드가 이룩한 업적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던전 공략이나 다른 성과들에 비해 길드가 너무 커졌으니까요.” “어머, 어머….” “정확히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힘들지만 안 좋은 방법으로 덩치를 키우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 물론 출처는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오늘 이후로 출처까지 정확해질 것이다. “그렇군요. 혹시 알고 계시다는 게… 관련된 일인가요?” “네. 그렇지만 아직 말씀드릴 시기가 아닙니다. 저로서도 조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괜한 분란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이기영 님을 그렇게 다치게 한 걸 보면 그냥 흘러나오는 소문은 아닌 것 같아요. 뭔가 뒤로 켕기는 게 있겠죠?” “참… 그 동안 그 사람이랑 같이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눈 게….”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니까요. 안 그런가요? 마를린 영애?” “네. 카트린 공작부인 말씀이 맞아요. 아버지께도 단단히 말씀드려야겠네요.” “저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남편한테 꼭 말해야겠네요.” 이래서 내가 여기 오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이토 소우타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처구니없어 실소를 흘릴 정도의 상황. 시간이 조금 지나자 직접적인 비난이나 나쁜 말들도 튀어 나오고 있다. “더러운 쓰레기.” “그런 사람들 때문에 다른 자유민들도 욕을 집어먹는 거 아니겠어요? 물론 기영 씨를 말하는 건 아니지만….” “아닙니다. 저도 충분히 여러분들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이해하다마다. 이렇게 재미있는 걸 어떻게 끊을 수 있단 말인가. ‘개 재밌어!’ 내일은 또 어떤 소문을 퍼뜨릴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진다. 따뜻한 햇살과 맛 좋은 차. 무엇보다 재미있는 뒷담화.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이건 마약이나 다름없다. # 132 회귀자 사용설명서 132화 마녀 사냥(2) 이건 마약이나 다름없다. 당연하지만 이 약에 취한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토 소우타의 평판은 땅바닥을 뚫고 그 반대편을 빠져나올 기세로 돌진하고 있을 정도. 이 대륙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 지구와 같다고 가정한다면 아마 지금쯤 놈의 평판은 지구의 내핵에 닿았으리라. ‘쓰레기.’ 두말할 필요도 없는 쓰레기. 불과 4일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놈은 암흑가의 숨겨져 있는 제왕이며 노예 거래와 장기밀매도 서슴지 않는 인간말종으로 변모해 있었다. 수많은 아녀자를 희롱하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피를 묻혀온 냉혈한. 자신의 치부를 덮기 위해 나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아름다운 소식은 이 근거 없는 소문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물론.’ 너무나도 허황된 소문에 이 따끈따끈한 가십거리를 믿지 않는 이들도 소수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 왕성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소문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어차피 사람들은 관심 없다. ‘지루했던 일상에 재미있는 소식이니까.’ 대부분이 그저 이 재미있는 떡밥이 가라앉기를 바라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 떡밥이 거짓이길 바라지 않고 있다. 계속해서 이 대화를 주제로 마녀사냥을 진행시키고 싶어 한다. “이게 제대로 된 마녀사냥이지. 푸히하하핫.” 공작이나 백작, 권력의 유력자들 보다 그들과 함께 있는 귀부인들은 조진 것도 아주 아름다운 선택이었다. 집으로 돌아가 하루 종일 이토 소우타의 대한 이야기를 나를 대신해 전해줄 테니 말이다. 임금을 지불해주지 않아도 되는 일꾼들을 풀어놓은 셈. 여기저기서 견제 아닌 견제를 받고 있는 나보다는 그들이 가장 신뢰하고 믿고 있는 가족들이 전해주는 게 낫다.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여론에 저쪽에서도 사람을 풀었는지 최대한 대응하고 있기는 했지만 당연히 모두를 잠재우기에는 무리가 있다. 변명하고는 있지만 이미 대중들의 시선은 싸늘하게 돌아버린 뒤, 현대였다면 기자회견이라도 열어 자신의 무죄를 입증했겠지만 절차대로 조사를 받고 있는 놈은 아직도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는 상태니 아마 속이 타들어 갈 것이다. 그와 반대로 나는 물 만난 물고기 마냥 빨빨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안 좋은 소문으로부터 이토 소우타를 쳐내려고 하는 교황청 측의 인사들이 중요한 고객들이었다. “아아아. 글랑 부교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허. 이제 하루가 지났을 뿐이 아닙니까.” “하하하. 항상 뵙고 싶습니다. 글랑 부교구장님을 만나 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제게는 아주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니까요.” “이기영 님께서 이 보잘 것 없는 사제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십니다. 아, 오늘은 소개시켜 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제시카 주교님이라고 혹시 들어보셨는지….” “물론입니다. 이거, 오늘은 베니고어 여신님과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겠군요.” “일단은 제시카 주교님과 가까워지셔야 될 겁니다. 많이 기대하고 계시니까요.” “이거 영 부담스럽군요.” “허허허허.” 오늘은 글랑 부교구장과 만나고 내일은 제시카 주교를 만난다. 제시카 주교와 친분을 어느 정도 쌓고 난 이후에는 곧바로 다른 사람들을 물색한다. “아, 기영 씨 오셨군요!” “제시카 주교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빨리 달려왔지 뭡니까.” “둘이 있을 때는 제시카라고 불러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아. 그렇기로 했지?” “네. 오늘은 같이 대주교님을 뵈러 가요. 안두린 대주교님께 기영 씨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더니 꼭 한 번 뵙고 싶어 하시지 뭐예요.” “조금 부담스러운데. 우리 제시카 얼굴을 봐서라도 용기내야겠네.” “기영 씨도 참.” 마찬가지로 제시카 주교와 진한 친분을 쌓은 이후에는 계단을 하나 더 오른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두린 대주교님.” “이거 요즘 소문이 무성하신 분을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귀하신 분을 직접 뵙게 되어 제가 더 영광스럽습니다. 제시카 주교님께 익히 들었지만 제가 상상했던 것 이상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우리 이기영 신도님께서는 말씀을 참 재미있게 하시는군요. 그러고 보니 곧 식사시간인데 함께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바젤 추기경님과 함께 식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제시카 주교도 시간이 나면 함께 가기로 하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안두린 대주교님.” 계단을 하나 더 오른 이후에는 더 높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쉴 틈 없이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이제는 이름을 외우기 힘들어질 지경. 그렇지만 열심히 조사 받고 있는 녀석에 비하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갑작스럽지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바젤 추기경님.” “아니 무슨 또 선물을 준비하셨습니까, 이기영 신도님. 이런 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거 참….” “넣어 두셔도 됩니다. 약소한 성의니까요. 좋은 술이니 적적하실 때 도움이 될 겁니다. 아, 그리고 이건 제가 교황청에 직접 드리는 기부금입니다.” “뭐 이런 걸 다….” “신에게 바치는 금액으로는 모자랄 수도 있겠지만 일단 약소하게 5만 골드 정도 넣었습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지속적으로 헌금할 수 있도록 힘내겠습니다.” “신을 사랑하는 이기영 신도님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 것 같습니다.” “하하하. 사실 준비한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바젤 추기경님께도 따로 헌금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그게 무슨….” “신을 위해 써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험….” 내가 준 것을 넙죽 받아먹고 있는 바젤 추기경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이미 교황청은 썩을 대로 썩었다. 보통 종교라는 게 고착화되면 부패가 되게 마련. 주변에서 보면 인상을 찌푸리겠지만 나 같은 놈들이 설치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환경이다. “이거 이럴 게 아니라, 총대주교님도 함께 뵙는 게 어떻습니까? 이기영 신도님.” “네 물론입니다. 당연히 뵈어야지요.” “아, 그전에 소개시켜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이단심문관장 헬레나입니다.” “헬레나?” “네. 바젤 추기경님.” “귀한 손님이시다. 자기소개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 “반갑습니다, 이기영 신도님. 이단심문관장 헬레나라고 합니다.” “아, 소문으로 익히 들었습니다. 더러운 이단놈들의 목을 베어버리시는 영광스러운 일을 하고 계시고 있다고…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 “모두가 부담스러워하는 일을 도맡아 하시느라 참 수고가 많으십니다.” 물론 직접적인 무력 집단이나 밑을 돌아보는 것도 까먹지 않았다. 사실 인맥 관리라는 것이 힘들기는 하다. 신경 써야 할 게 은근히 많기 때문이다. 먼저 연락을 하고 먼저 인사들 드리고 중요한 날 약소한 선물을 챙겨주는 게 뭐가 대수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잘 못하는 이유가 있다. 가깝다고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연락하고 인사하는 것 자체를 고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거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시간이 더 소중하고 자기만의 공간과 영역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남들과 대화하는 것보다는 자기개발에 힘쓰며 쓸데없는 사람과 연락을 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들의 삶은 존중하지만 이런 이들은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손해를 보는 편. ‘세상이 썩었거든.’ 얼굴을 익히고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 자체가 도움이 된다.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고 한 번도 안 본 사람보다는 얼굴을 익혀놓은 사람에게 정이 가는 법이니까. 일부는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취업경쟁에 밀리고 일부는 회식에 몇 번 참가하지 않았다고 직장 동료들과의 거리감을 체감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회라는 시스템 자체가 나 같은 놈들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지난 모임과 만남도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쪽에게 무척이나 도움이 많이 되는 편. 짧지는 않은 시간이었지만 내 스케줄은 이미 꽉 차서 터질 정도가 되어버렸다. 당연하지만 바쁜 것은 나만이 아니다. 차희라도 차희라 나름대로 고위 공직자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그녀의 성격에 내키지는 않았겠지만 하루에 짧게라도 얼굴을 비추는 건 개인주의자인 그녀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카스가노 유노는 사실상 가장 정신없이 일해주고 있는 편. 물약의 모든 유통과 관리를 맞고 있으니 바쁜 것이 당연. 특히나 자유 도시 실리아 내부의 여론 조작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하얀은 조금 여유로운 것처럼 보였지만 나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는 상황. 다행히 지난 번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모양인지 본인이 먼저 마법 수련에 열중해 방 안에 틀어 박혀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와 같이 혹독한 스케줄을 강요받고 있는 것은 당연 이지혜였다. 오늘의 일정이 끝난 뒤 되돌아가는 그녀의 모습 또한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어젯밤에 뭐 했어요?” “제시가 주교랑 헬레나 이단심문관장이랑 같이 있었어.” “능력도 좋네요.” “그냥 기도회에 함께 했을 뿐이야.” “밤새도록?” “응.” “그 말을 누가 믿겠어요? 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알아서 하라니까.” “믿든 안 믿든 네 자유야.” “쓸모 있는 사람들은 맞죠? 오빠?” “잠깐 쓰기에는 괜찮아.” “그럼 됐어요. 뭐 물어온 건 있고?” “개인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일은 나쁘지 않게 되는 것 같고… 굳이 이토 소우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헌금이라는 소리에 그렇게 입이 찢어지더라. 지혜는 좀 어때?” “오늘 물어온 따끈따끈한 소식이 있죠. 들으시면 조금 놀라실 것 같은데….” “뭔데?” “재판 일정 잡혔어요.” “확실히… 놀랄 만한 소식이네.” 애초에 재판까지 가기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의외라고 할 수 있는 부분. 나와 이지혜가 열심히 입을 털어오고 있기는 했지만 녀석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재판에 서는 것은 지금 보다 조금 더 이후다. ‘나한테도 혐의가 붙어 있기는 하니까.’ 전에 말했던 대로 나와 이토 소우타의 관계는 터지기 일보 직전의 린델과 실리아의 관계다. 만약 녀석이 부당한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면 실리아에서 난리가 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신성제국의 입장에서는 여기저기에서 눈치가 보이더라도 원만하게 해결하는 게 낫다는 거다. 어쩌면 벌금형을 위한 형식적인 재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지.’ 일단 법정에 서는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용의자의 탈을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나와 이지혜가 놈의 영향력을 조금씩 축소시켜 놨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본인이 불리한 싸움터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 이미 놈의 정치생명은 끝장나기 일보 직전이고 대외적인 시선에 민감한 교황청측도 놈의 뒤를 계속해서 봐주기 힘든 상황이었으니까. “법관들의 매수는?” “반반이에요. 저를 만난 사람도 있고 그쪽에 붙은 사람들도 보이는 것 같기는 한데… 조금 특이한 건 있잖아요?” “응.” “이토 소우타 본인이 직접 재판을 열어달라고 말했다고 하지 뭐예요?” “아아아아….”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자기 선에서 적당히 마무리를 짓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나름대로 열심히 움직인 걸 보면 이쪽이 켕길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해요.” “아아아.” “오빠 역시 깨끗한 것만은 아니니까. 물론 그놈이 쥐고 있는 정보가 영향력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재판대로 끌고 가려고 하는 걸 보면 날조된 건 아닐 가능성이 커요. 아니면 누가 봐도 이상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퀄리티가 좋다던가.” “그래?” “반응이 영 미적지근한 것 같은데… 혹시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생각해 두신 거예요?” “푸… 흐흣. 뭐, 비슷해. 내가 보험을 조금 많이 들어놨다고 이야기한 거 기억나?” “네.” “경우에 따라서 대비할 수 있는 선택지를 몇십 가지 정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거든. 물론 그중에는 이토 소우타가 직접 재판을 신청해 이쪽을 공격할 경우도 들어 있었고….” “흐음….” “장담컨대 최악의 선택지를 골랐다고 단언할 수 있어. 그놈이 내 생각대로 움직인 게 맞다면… 푸흐흡. 진짜 뒤통수를 맞는다는 게 어떤 건지 확실히 알게 될 거야. 기대해도 돼, 누나.” # 133 회귀자 사용설명서 133화 마녀 사냥(3) 이토 소우타의 재판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문장은 단순했지만 의미하는 바는 컸다. 미쳐 날뛰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린델 시민들은 이게 바로 정의라며 술잔을 부딪쳤고 실리아에 있는 인원들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물론 재판을 열어달라고 한 것은 이토 소우타였지만 저 멀리 린델과 실리아의 있는 인원들이 그 소식을 알고 있을 리가 만무. 우리 쪽에서도 굳이 녀석이 재판을 원했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없었고 이토 소우타 역시 그 소식을 실리아에 전하지 않았다. 저번에는 내가 피해자가 되었으니 이번에는 자신이 피해자가 되겠다는 심산. 그렇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놈이 재판을 받는다는 사실 그것 하나뿐이다. 일본 내 여론을 조작하겠다는 고약한 심보는 이미 카스가노 유노가 어느정도 막아주고 있었으니까. ‘가해자.’ 사실 대부분의 민중에게 이런 속사정이야 알 바가 아니다. 오로지 녀석이 가해자의 입장으로 법정에 선다는 것, 선량한 이기영이 살인미수혐의로 붙잡혀 재판을 진행한다는 것. ‘이걸로도 충분해.’ 지금 당장은 이걸로도 충분하다. 아마 재판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재판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피해자 이기영에게 해를 끼친 가해자인 이토 소우타의 처벌 수위에 대한 문제지만, 이 재판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이들은 이 자리가 정치 싸움의 장이 될 거라는 것을 대충은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게 이지혜가 불안해하고 있는 이유였다. “조금 갑작스러워서 준비가 잘 됐는지 모르겠네요, 오빠.” “충분해, 지혜 누나. 법관들과 이야기도 잘 되어 있고 교황청측과도 나쁘지 않잖아?” “초조해서 그래요. 오빠가 뭘 숨기고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지만 나도 신경 쓰이는 게 있으니까. 준비해 놓은 보험이 있다고는 해도 그게 맞아 떨어질 지는 확신할 수 없고… 아마 재판은 그저 명목에 불과할 수도 있어요. 이곳의 재판은 현대랑은 조금 다르니까요. 자신을 변호하면서 무슨 말을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걱정되는 게 당연하잖아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우리 이토 소우타 상은 똑똑하니까.”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지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 모습은 처음.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다. 이지혜가 가닥을 잡고 있다는 건 녀석 역시 어느 정도 가닥을 잡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니까. “믿을게요.” “응. 믿어도 돼, 누나.” 불안하기는 했지만 피어오르는 불안을 떨쳐내기로 마음먹은 모양. 딱 좋다. 이지혜가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았거나 못했다는 건 그만큼 일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걸로 이쪽을 털어올지 나름대로 궁금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계산이 되어 있다는 거다. 굳이 혼자서 이중 삼중으로 함정을 판 이유는 최대한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이쪽에 궁금한 것이 많은 표정에는 슬그머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마침 재판을 기다리기도 지루했고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시 궁금해?”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신경 쓰지 말라고 해서 신경 쓰지 않고 있을 뿐이에요. 본래 함정이란 건 그렇게 파야 되는 거니까. 제가 빨빨거리면서 움직이는 게 방해된다는 거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여럿이 움직이면 눈에 더 띌 테니까.” “정확히 말하면 그건 아니야. 아마 일반적인 상황이었으면 우리 지혜의 도움을 받는 게 더 좋았겠지. 조금 더 완벽한 함정을 만들 수 있었을 테니까. 내가 굳이 누나한테 비밀로 하고 일을 진행시킨 이유는 이토 소우타에게 내가 조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게 바로 보험이고. 누나 생각은 어때?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 같아? 아니… 이 질문부터 먼저 할게. 단순한 심증으로는 어디까지 닿을 수 있었어? 내 본래 계획이 뭐였을 것 같아?” 잠깐 고민하던 이지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일단은….” “응.” “이토 소우타의 정치생명을 완전히 끝내는 것부터… 교황파와 황제파 둘 모두에게 놈을 격리시킨 이후에 천천히 끝내려고 했겠죠. 수단은….” “수단은?” “아마 오빠가 현재 일본에 풀고 있는 마약. 그 외에도 몇 개 보이는 게 있지만 나머지는 그저 시선을 끌기 위한 가짜라고 생각했어요. 노예매매나 장기밀매 암시장 운영 같은 헛소문은 대부분 날조된 정보니까.” “알고 있었네?” “물론 물증은 하나도 없어요. 그냥 흐름상 그리고 심증으로… 그렇게 되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죠. 당연히 혼자만 알고 있었던 거예요. 따로 뒤를 캐지도 않았고, 설사 뒤를 캤다고 해도 움직임이 제한적인 제가 알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거예요. 마약이라는 명확한 증거로 지금까지 이토 소우타가 했던 범법행위를 한 대로 묶어 완전히 끝장내자는 게 계획 아니었나요?” “조금 더 쉽게 말해줘, 누나.” “이토 소우타가 운영하고 있는 야마토 길드가 실리아에 마약을 풀고 있다는 날조된 정보로 놈을 끝장내는 게 본래의 계획.” “그래, 그게 첫 번째야. 그럼 내가 왜 이 건을 누나나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을까.” “조심해야 되니까. 여러 가지 이유야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정답은 이거네요.” “그것도 정답이긴 해, 누나. 그렇지만 아까 말했듯이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일에 내가 최대한 조심스러워 한다는 모습을 보였어야 한다는 거야. 가장 신뢰하고 믿고 있는 나의 대리인에게도 알리지 않을 정도의 묵직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거지.” “그거….” “물론 실제로도 내가 날조한 정보들은 묵직한 한 방이야. 이기영 살인미수 사건도 그냥 거쳐 가는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고…. 만약 도시 내에 새로운 물약이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면 놈은 마약유통 죄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겠지. 도시 내에 불법적인 물약을 유통했다는 죄를 뒤집어쓰는 거야. 이게 첫 번째 루트였어.” “이해했어요.” “여기에서 경우의 수가 하나 더, 이번에는 놈이 그 물약의 존재를 알아 차렸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고.” “네.” “내가 지금 유통하고 있는 물약이 수상하다고 생각한 것도 모자라 함정이라는 것을 깨닫고 뒤를 조사해 봤을 경우야. 개인적으로는 이 편이 조금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무려 본인이 먼저 재판을 열어달라고 말했으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마 찾기 어려울 거야. 이건 나와 카스가노 유노만 알고 있는 정보거든…. 놈이 유능하다면 도달하거나 정보를 날조할 수 있겠지만 아마 조사하는 내내 진땀을 뺐을걸. 아까 말했듯이 이건 지혜 누나조차 관여하지 않았던 작업이었으니까. 뒤를 캐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거야. 증거가 나오지 않으니 수상하다고 생각했겠지. 예를 들면….” 잠깐 뜸을 들이자 이지혜가 급하게 입을 여는 게 보였다. “예를 들면 준비하고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는 거?” “응.” “대충 무슨 뜻인지 알겠네요. 근데 만약에 이토 소우타가 두 번째로 예상하고 있었다면요? 오빠가 자신을 물약 건으로 보내버리려고 하는 것도 이미 알고 있고…. 오빠의 다음 수까지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내 다음 수가 뭐일 것 같은데?” “제가 오빠라면 카스가노 유노한테 죄를 뒤집어 씌었을 거예요. 카스가노 유노랑 이토 소우타를 쌍으로 묶어 보내 버리는 게 가장 합리적이고 할 만한 생각이겠죠. 이토 소우타가 법정에서 현재 실리아에 물약을 유통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이기영와 카스가노 유노라고 발언한다면 빠져나갈 구멍은 카스가노 유노밖에 없잖아요?” “푸핫.” “거짓증언을 해서 둘 다 보내버리는 게 맞죠. 그렇지만 카스가노 유노는 여기서 버리기 아까워요, 오빠. 만약 제 생각이 맞다면 차라리 지금 이라도 계획을 수정하는 게 나아요. 화난 건 이해하지만 미친놈한테 그 무녀를 소비하는 건… 수지에 맞는 장사는 아니에요.” “내가 그 정도로 쓰레기로 보여?” “그저 제가 오빠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게 제일 합리적인 선택이니까요.” “네 말이 맞아. 확실히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나는 카스가노 유노를 버릴 생각이 없어. 정말로 이토 소우타가 물약의 뒤를 캐는데 성공해서 이후에 있을 재판에 내가 물약을 유통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고 왔다고 치자. 그래서 내가 위기에 빠졌다고 쳐.” “네.” “애초에 전제부터 잘못됐어, 누나.” “무슨 뜻이죠?” “이거 마약 아니야.” “뭐라고요?” “이거 마약 아니라고…. 정확히 말하면 내가 마약이라고 말하면 마약이 되고, 마약이 아니라고 증언하면 마약이 아니게 되는 물건이야.” “아….” “이토 소우타가 이 물약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면 이 물약은 마약이 될 거야. 녀석은 순식간에 마약사범이 돼서 목이 잘려나가거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겠지. 반대로 이토 소우타가 물약을 유통한 증거를 들이 밀어 나를 마약사범으로 몰면 이 물약은 마약이 아니게 될 거야.”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죠?” “왜 그런 게 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이 물약의 성분을 검출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이 대륙에서 연금술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 누나. 이 물약은 내가 만든 오리지널이고 내 머릿속을 열어 보지 않는 한 레시피도 알 수가 없거든.” “아….” “누나한테만 살짝 말해줄게….” “네.” “이 물약에 베이스가 되는 촉매가 뭔지 알아?” “…….” “성수야.” “뭐라고요?” “성수라고. 신성제국 베니고어 왕국에서 정식으로 취급하고 있는 성수. 이토 소우타가 이 물약을 마약이라고 말하는 순간, 거기서 게임은 끝이야. 성수로 만든 물약을 마약이라고 말하는데 이게 신성모독이 아니고 뭐겠어? 푸하흐하하하핫. 이 물약의 존재에 대해서 알았다고 해서 뭐 어쩔 건데? 지가 뭘 할 수가 있겠어. 이 물약이 성수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죽어도 알지 못할 텐데.” “…….” “푸하하하하핫.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마약사범이 돼서 죽는 게 마음 편할 거라는 거야. 괜히 상황을 뒤집어 보겠다고 나한테 마약을 유통했다 어쨌다 하는 순간 이단심문관들이 출동할 거라고! 푸허하핫. 쿨럭 쿨럭. 그래, 그 새끼 똑똑한 거 나도 인정해, 지혜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토 소우타가 똑똑하든 멍청하든 내가 만든 물약이 일본에 들어간 순간부터 게임은 끝난 거야. 그놈은 연금술사가 아니거든.” “아….” “어차피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는 이야기야. 푸하하하히하핫! 그래서 내가 녀석이 최악을 선택했다고 말한 거였어, 누나. 내가 유통한 물약으로 나를 공격하려고 마음먹은 게 맞다면 번지수를 잘못 잡았다, 이거야. 이단으로 가족부터 길드원까지 싸그리 뒈지는 거라고…. 여긴 신성제국이니까.”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이지혜가 시야에 비쳤다. 아마 지금 그녀 나름대로 머릿속으로 정보를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많지만 일단 대표적으로는 두 가지. 첫 번째로 이토 소우타가 이 물약에 대해 모르고 있을 경우. 준비한 것은 야마토 길드가 마약을 유통하고 있다는 날조된 증거. 이름하야 마약유통범 엔딩이다. 두 번째로 이토 소우타가 이 물약에 대해 알고 있고 나를 마약 유통범으로 몰아갈 증거를 가져왔을 경우, 준비한 것은 이 물약의 레시피. 담담하게 이 위대한 물약을 배포한 것은 나라고 이야기하면 된다. 이름하야 신성모독범 엔딩. 어느 쪽을 선택하든 녀석에게 펼쳐진 것은 지옥. 웃음을 참기가 힘들 정도였다. “푸하흐허하하하핫!” 최근에 빵 터질 일이 꽤나 많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그런 나를 바라본 이지혜의 얼굴이 묘하게 붉어졌다. “오빠.” “응?” “오빠 정말로 섹시하네요.” “네 취향이 이상한 거야.” “끝내주는 쓰레기이기도 하고요. 정말로 매력적이란 말이야.” “…….” 두 번째 발언에는 왠지 모르게 말문이 막힌다. 슬쩍 시계를 보니 꽤나 시간이 많이 지난 상황, 법정으로 향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자 이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무리하러 가자, 지혜야” “정말로 기대되네요, 기영 오빠.” # 134 회귀자 사용설명서 134화 진실 속에 섞인 거짓들(1) 법정에 서는 만큼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단정히 해야 한다. 마음가짐 같은 거야 내 알 바가 아니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사교회에 가는 것보다 더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나를 케어해 준 것은 이지혜였지만 지난 번 사건으로 교훈을 얻은 정하얀 역시 괜스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검은 백조의 길드 직원들을 전력으로 방해하는 중.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난 이후에야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는데 사실 이번 작업에서 정하얀의 지분은 1%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대리인단의 대표인 이지혜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자 정숙한 분위기의 법정이 시야에 비쳤다. 이쪽의 대리인단은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상태. 한쪽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 제시카 주교와 헬레나 이단심문관장을 비롯한 소중한 인맥들이 보여 살짝 인사를 하자 그들의 입가에서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나왔다. ‘중요하지…. 종교지도자들은.’ 항상 웃음 짓고 있는 바젤 추기경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 굳어 있는 표정. 내 소중한 보험 중에 하나이니만큼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리라. ‘종교 재판은 추기경급 이상의 사제만 열 수 있으니까.’ 그 반대쪽에 있는 것은 배심원단. 본래는 무작위로 선출하는 것이 맞지만 카트린 공작 부인과 마를린 영애가 앉아 있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 만도 않다. 배심제가 아니기 때문에 저들에게 큰 권한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힘이 되는 관중이 있는 것이 어딘가. 눈을 마주치자 살짝 웃고 있는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원형으로 이쪽을 둘러싸고 있는 의자에는 이번 재판을 빛내줄 수많은 관중이 자리해 있다. 마치 이전에 검투사들이 검을 부딪치던 콜로세움을 보는 듯한 느낌. 전투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나쁘지 않은 비유다. “이것도 싸움이니까.”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혜 씨.” “싱겁네요.” 별것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흔들자 다시금 서류에 머리를 박고 있는 이지혜가 보였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여러 가지로 대응책이나 다른 요소들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조금은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자 비어 있는 자리에도 하나둘씩 사람들이 채워지기 시작. 이미 어느 정도 이야기가 되어 있는 법관들, 증인석에 자리한 차희라나 카스가노 유노 그리고…. “피고를 입장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스러운 우리 이토 소우타다. 한쪽 문이 열리며 등장한 녀석의 모습은 꽤나 당당. 본인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어필이라도 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주변에 시선을 주고 있었지만 두 손에 자리 잡은 수갑은 놈이 가해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관중석에 심어놓은 소중한 동료들이 천천히 입을 열고 있는 상황. “저거, 저거, 쓰레기 같은 놈.” “여기가 어디라고 얼굴을 쳐들고 와?”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열됐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토 소우타 측에 있는 이들 역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니 한두 마디씩 내뱉던 다른 사람들도 고함을 외치며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소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법관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모두 정숙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신성한 법정에서 소란을 피우시는 분들은 이유를 막론하고 퇴실조치 하겠습니다.” “…….” “본 재판은 피고 이토 소우타, 야마토 길드의 길드 마스터인 이토 소우타의 요청으로 열린 재판임을 여러분께 알려드리며 본 재판이 시작함에 앞서 베니고어 여신께 기도를 드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기도는 바젤 추기경님이 직접 진행해 주시도록 하겠습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어디가나 복잡하거나 짜증나는 절차는 있다. 곧바로 재판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는 했지만 말할 수 있을 리가 만무. 모두가 기도를 드리며 눈을 감는 와중에 슬쩍 곁눈질로 녀석을 바라보자 놈 역시 이쪽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화났네.’ 대충 봐도 우리 이토 소우타 상이 화났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야 마지막에 조사를 받으러 가는 도중 이쪽이 날린 빅엿을 기억하고 있는 게 당연. 핏발이 선 눈으로 이쪽을 계속해서 노려보고 있는 표정은 마치 악귀. 만약 이곳이 법정이 아니었다면 나를 찢어 죽일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개 무섭네.’ 당연히 무섭다. 그렇지만 녀석이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굳이 쫄 이유도 없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빅터하르트와 제국기사단이 내가 있는 곳을 지키고 있고 손이 완전히 묶인 녀석이 이쪽을 해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시 한번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것은 당연. 최대한 입꼬리를 올린 채로 살살 혓바닥을 낼름거리니 이토 소우타가 깨물고 있는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어쩔 건데?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이 자식아.’ “푸….” 비집고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힘들 지경. 기도를 드리는 시간에는 정숙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경기를 일으키려고 하는 듯한 표정은 언제 봐도 즐겁다. 지금까지 내가 받아본 악의 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악의. 그 와중에 살기를 날리고 있지 않은 건 칭찬해 줄만 하지만 그래봤자 나의 소중한 중지는 멈추지 않는다. “공정한 재판이 되기 위해 축복을 내려주시옵소서….” “수고해 주신 바젤 추기경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 재판은 60분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며…….” 대법관이 말해주고 있는 절차에 대해서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알고 있는 사실이다. 몇 회에 걸쳐 진행되기는 하겠지만 내 생각대로 흘러간다면 녀석을 족칠 수 있는데 필요한 시간은 오늘 하루로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그럼 먼저 원고측의 증언… 이기영 님의 대리인단 대표 이지혜 씨의 발언으로 본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원고?” “네. 존경스러운 대법관님. 발언을 시작하기에 앞서 저희 측이 정리한 자료를 봐주셨으면 합니다.” “가져와 주세요.” “사건은 18일 사교회 때 처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제 의뢰인 이기영 님은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살해 협박과 알 수 없는 위협을 받아왔습니다. 파란 길드의 이설호와 야마토 길드의 모종의 거래가 그 이유였습니다.” “계속해 주세요.” “제 의뢰인 이기영 씨가 직접적인 해를 입은 것은 지난 10월 1일, 여러분들도 모두 린델 테러 사건에 대해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이 테러사건은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묻지마 테러가 아닌 정확히 제 의뢰인을 노린 암살 사건이었고 이 사고로 인해 죄 없는 수십 명의 린델 자유민들이 휘말렸습니다. 파란 길드와 붉은 용병길드, 검은 백조 길드는 이설호를 조사하는 과정 중에 그가 야마토 길드의 이토 소우타와 접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 증언까지 확보했으나 며칠 뒤인 10월 7일에 변사체가 된 채로 라마델 산맥 근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말 잘한다. 우리 지혜’ “라마델 산맥 근처에서 발견된 이설호의 사체는 수많은 고문을 받아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있었으나 상처에서 야마토 길드가 주로 사용하던 카타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제출한 자료와 원형 보관된 이설호의 사체를 이후 증거물로 제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하지만 모든 게 날조된 정보다. 애초에 이설호를 살해한 것은 저쪽이 아닌 이쪽. 이설호의 시체를 가지고 있는 이쪽에서 약간의 수를 쓰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그 외에도 린델 테러 사건의 흉수들은 대부분 붙잡히기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들의 몸에서 검출된 독약 성분은 일본의 암살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테러 사건의 암살자들에게서 발견된 독약이 야마토 길드의 것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증거로 채택하기에 부적합 합니다.” “일단은 증거로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관련 자료를 가져와 주세요.” “네. 존경하는 대법관님.” 저건 날조된 정보가 아니다. 물론 암살자들이 야마토 길드에서 보낸 이들이라는 증거는 없지만 만들기에 따라서는 없는 것도 증거가 된다. “흉수들의 정확한 신원조회는 되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자유 도시 실리아에서 온 일본인이라고 판명. 그들이 들고 있었던 무기의 양식이나 마법의 매커니즘 역시 상당 부분 실리아의 자유 도시에서 온 이들이라는 증거도 함께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나 반대쪽에서는 이토 소우타의 대리인이 열심히 입을 털어온다. “이의 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의 매커니즘이나 무기의 양식이 자유 도시 실리아에서 온 것이라고 한들 그들이 정말 실리아에서 온 인원들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야마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타 세력이 꾸민….” “일단은 증거로 채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조용히 해주세요. 아직 원고 측의 진술이 모두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 빠져 있는 증거를 열심히 채택하고 있는 우리의 대법관님. 이쯤 되면 뭐가 어떻게 잘못된 건지 느낌이 오고 있으리라. ‘푸흐흐하흐흣.’ 이미 이지혜는 신성제국의 대법관과 수차례 만남을 가졌다는 거다. 물론 정확히 이쪽의 편을 들어주겠다는 확답은 들을 수 없었지만 받아 처먹은 게 많으니 어느 정도 눈을 감아줄 용의가 있는 것이 분명. 베니고어 여신에게 드렸던 기도 내용에 있었던 공정한 재판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의 있습니다! 그 증거는….” “충분히 채택할 만한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관련 자료를 가져와 주세요.” “네. 존경하는 대법관님.” 이것도. “이의 있습니다! 물증이 아니라 단순한 심증에 가깝습니다. 날조된 자료일 가능성을 재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어허! 아직 원고 측에 진술이 전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단은 관련 자료들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리인은 자료를 가져와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존경해 마지않는 대법관님.” 요것도. “이의 있습니다!” “채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법관님.” 그리고 이것도. 모든 게 증거 투성이다. 녀석에게 이곳은 재판대가 아닌 심판대나 마찬가지. 정숙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대법관이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박수를 보내고 있었고 이토 소우타 측에서 입을 열 때마다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빈틈 따위는 없다. 아무리 저쪽에서 날조된 정보라고 한들, 이미 증거로 채택되어 있는 것들이고 이중 삼중으로 파놓은 함정은 모든 것이 야마토 길드의 소행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율리에나 사건 역시 비슷한 맥락입니다, 대법관님. 야마토 길드의 이토 소우타는 제 의뢰인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이설호와 린델 테러사건에서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제 의뢰인을 살인범으로 몰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전설 등급의 아이템 율리에나의 아이템 정보를 보시면 나와 있는 것처럼 율리에나는 제 의뢰인에게 위협을 끼치는 경우에만 움직입니다.” “그렇군요.” “야마토 길드의 카즈마 히로유키는 이토 소우타의 명을 받아 제 의뢰인에게 살기를 내뿜으며 직접적인 위협행동을 한 바, 지난 시간동안 조사했던 율리에나의 행동 패턴에 대한 분석 자료와 추가로 무녀 카스가노 유노의 증언을 증거로 제출하겠습니다.” “확인하겠습니다. 요조라 길드의 카스가노 유노는 증인석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네…. 일단 제가 처음에 본 것은…….” 이렇게 순조로울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카스가노의 유노의 증언 역시 무척이나 신빙성 있는 것이 사실. 배심원단이나 종교인들이나 카스가노 유노의 생생한 증언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녀의 증언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이지혜는 입을 열기 시작. “원고는 이만 마지막 발언을 하도록 하세요.” “네, 존경하는 대법관님. 모두들 아시다시피 지난 사교 모임 때 있었던 살인미수 사건을 기억하실 겁니다. 다행히도 차희라 님 덕분에 미수에 그친 사건이지만 모든 귀족과 종교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나누는 천인공노할 죄를 저지른 것은 구태여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때까지 말씀 드렸던 모든 증거와 정황상 이토 소우타가 제 의뢰인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가 그 날 의도적으로 제 의뢰인의 팔에 마력을 집어넣은 것은 모두가 눈으로 확인한 진실입니다.” “네.” “굳이 따로 증거를 제출하지 않겠습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이 증인이니까요. 이상입니다.” 마무리까지 확실했다. 중간 중간에 이토 소우타의 의뢰인 역시 발언 아닌 발언을 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모양. 어떤 식으로 반박할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끝나지는 않겠지?’ 이토 소우타라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녀석은 유능하고 똑똑하니 분명 이렇게 무너지지 않는다. ‘기대한 걸 보여줘.’ 날조된 증거든 뭐든 간에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 내 예상대로 슬그머니 이토 소우타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이 아닙니다. 대변인 이지혜 님의 말씀은 사실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거지.’ “린델 테러사건이나 율리에나 사건 그리고 암살 미수 사건 역시 제가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본 쪽에서 저지른 일이기는 하지만 저는 이 중 그 어떤 일과도 관계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발언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피고.” “말도 안 되는 발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그리고 존경해 마지않는 대법관님. 조금 갑작스럽지만 혹시 현재 일본에서 유통되고 있는… 환상물약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예상했던 대로…. 미끼를 물었다. 아주 제대로 물어주셨다. ‘유능해서 다행이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세한 변화를 눈치채 줘서 다행이다. 도달할 수 없는 결과에 도달해 줘서 다행이다. 날조된 증거로 나와 환상물약에 관계에 대해 파고들고 그걸 또 집어줘서 다행이다. ‘푸흐하허흐흐하하핫.’ 이미 속에서는 웃음이 튀어나오고 있는 상황. 그렇지만 나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고맙다, 똑똑한 새끼야!’ # 135 회귀자 사용설명서 135화 진실 속에 섞인 거짓들(2) ‘알아 줬어!’ 머리에 든 게 없는 병신이었다면 뭐가 자기의 목을 옥죄고 있을 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겠지만, 조심성 많은 녀석이라면 틀림없이 눈치채 줄 거라고 생각했다. 말하는 타이밍도 나쁘지 않다. 아직 이쪽이 물약으로 녀석을 옥죄기도 전, 녀석의 입장에서는 먼저 선수를 친 입장이니 무척 좋은 타이밍처럼 느껴질 것이다. 회심의 한 방을 날리는 것 같은 오만한 표정을 보니 정말로 웃음을 참기 어려울 지경. 그렇지만 계속해서 심각한 척 연기하는 걸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자기최면을 외우는 것이 좋다. ‘나는 지금 위기에 빠졌다.’ 잔뜩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것도 쉽지 않다. ‘연기 수업이라도 받을까.’ 린델을 뒤지면 연기학원을 했던 사람이나 연기자 한 명쯤은 나올 지도 모른다.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며 최대한 웃음을 참고 있었을 때도 이토 소우타는 계속해서 회심의 한 방을 준비하는 중.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것을 느낀 것인지 관중들을 둘러보는 것이 보였다. 여유가 넘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죄인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녀석의 대리인단 중 한 명이 자그마한 물약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메이드 인 이기영, 내가 생산한 제품이다. “이 물약이 현재 일본에서 유통되고 있는 환상물약입니다.” “재판과 관계가 없는 발언은 삼가주시길 바랍니다!” 이지혜에게도 미리 말해 놓기를 잘했다. 당황한 듯 책상을 쾅! 치며 일어서는 모습은 누가 봐도 켕기는 게 있는 것 같은 사람의 얼굴과 행동이다. “이의 있습니다! 대법관님, 지금 저 사람은 본 재판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대법관님. 제가 지금부터 드릴 이야기는 틀림없이 이번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핵심적인 사안이며 빠뜨려서는 안 될 주제입니다. 존경하는 대법관님, 부디 발언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토 소우타의 발언에 대법관은 고개를 살짝 저었지만 녀석이 심어놓은 법관 하나가 있는 모양. 슬쩍 대법관을 향해 귓속말을 하자 못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발언을 허락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아. 좋아.’ “말씀드렸다시피 이 물약은 현재 일본에서 유통되고 있는 환상물약입니다.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훨씬 전부터 암시장에는 암암리에 거래가 되고 있었습니다. 가격은 한 명에 20골드 정도, 비싸다면 비싸다고 할 수 있고 싸다면 싸다고 할 수 있는 가격입니다.” “그래서 뭐가 문제란 말입니까, 피고.” “문제는 이 물약의 효과에 있습니다. 존경하는 대법관님, 이 환상물약이라고 이름 지어진 그대로 인간에게 자기가 보고 싶은 환상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환각제인 셈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치명적인 중독성도 띠고 있지요.” “이의 있습니다, 대법관님.” “조금만 더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옆에서 딴지를 거는 타이밍이 장난이 아니다. 분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이지혜의 연기는 마치 극단에서 생활을 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 잠깐 동안 이지혜의 표정을 살피던 이토 소우타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네. 여러분들의 생각이 맞습니다. 이 물약은 중독성을 띠고 있습니다. 마치… 마약처럼 말입니다.” ‘빙고.’ 잘한다. 잘한다. 내 새끼! 응원이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문제는 이 물약을 우리와 어떻게 엮느냐에 대한 것.만약에 어거지로 엮을 생각이라면 번지수를 잘못 잡은 것 같지만 녀석의 표정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조금 더 있는 모양. 일단은 조금 더 지켜봐도 될 것 같았다. “저희 야마토 길드에서는 이 물약이 암시장에서 팔리고 있을 때부터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물약의 출처에 대해서 알아내려고 굉장한 노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마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물약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은 물론, 자유 도시를 병들게 하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으니까요.” “…….” “처음 흔적을 발견한 것은 린델 테러 사건이 있었던 10월 1일이었습니다. 원고 측에서는 저희를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하고, 또 오해하고 있지만 저희 길드의 조사 결과 이기영 씨를 공격한 것은 자유 도시 실리아의 소형 길드 카케였습니다.” ‘이빨 한 번 잘 치네.’ “관련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피고?” “네. 그렇습니다, 대법관님.” 조심스럽게 녀석이 준비한 문서를 읽고 있는 대법관을 보니 아주 잘 짜인 날조인 모양. 아마 단기간 내에 소형 길드 카케에 대한 정보를 만들어내기 힘들었을 테니 이미 있는 길드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소형 길드 카케는 불법적인 물건이나 약품과 같은 허락되지 않은 물건들을 유통하며 수익을 챙기는 범죄 길드입니다. 도시 내에 암암리에 퍼져 있기 때문에 자유 도시 실리아에서도 골칫거리라고 생각하는 집단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추측이었습니다. 저희 길드가 가지고 있는 정보력으로도 어째서 카케 길드가 파란의 이기영 씨를 습격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만 아주 작은 힌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피고.” “린델 테러 사건이 단순한 테러사건이 아닌 마약 조직들 간의 영역 다툼이었다는 증거였습니다.” ‘캬아….’ “피고 그 말은?” “예. 제가 말씀드린 환상물약을 일본에 유통시키고 있는 사람, 마약조직 간의 세력 다툼을 린텔 테러 사건으로 둔갑시킨 장본인. 그리고 신생 길드 요소가노소라의 주인이 바로 원고석에 앉아 있는 이기영 씨입니다.” ‘완벽해.’ 정말로 완벽한 회심의 한 방이었다. 신생길드 요소가노소라의 주인인 것은 내가 맞다. 환상물약을 일본에 유통시키고 있는 것 또한 내가 맞다. 사실과 다른 것은 린델 테러 사건이 마약조직 간의 세력 다툼이라는 것. 진실 속에 교묘하게 날조를 섞은 것이 꼭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 문제는 저것들이 증거로 채택되느냐는 것이겠지만 일단은 내놓은 증거 자체는 퀄리티가 꽤 있어 보인다. “지금도 원고석에 앉아 인상을 구기고 있는 이기영 씨는 미리 친분을 가지고 있었던 요조라 길드의 카스가노 유노와 결탁하여 신생 길드를 만들었습니다. 그 길드의 이름이 바로 요소가노소라입니다. 굳이 카스가노 유노를 끌어들인 이유는 암시장에서만 판매되는 물약을 정식으로 유통시키기 위해서였겠지요. 그리고 그들의 계획은 훌륭하게 적중했습니다.” ‘정답.’ “환상물약이라고 이름 지어진 마약을 의학 물약으로 속여 유통절차를 밟고 합법적으로 유통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마약은 아니지만, 정답.’ “며칠도 채 지나지 않아 저들은 몇 만 골드의 순이익을 남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몇 만 골드뿐만이 아니다. 벌써부터 어마어마한 돈이 계속해서 이쪽으로 굴러들어오고 있다. 아무튼 간에 꽤나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이 정도로 진실에 근접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도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는 상태에서 날조된 증거를 만들면서까지 말이다. 확실히 놈이 유능하긴 유능한 모양. 살짝 표정을 구기자 놈이 더욱더 신나서 입을 여는 모습이 보였다. “지난날에 있었던 율리에나 사건 역시 신성기사단과 저희 길드에서 따로 조사를 한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사 결과 또 재미있는 사실이 나오더군요. 저주를 내리는 검 율리에나에게 목이 꿰뚫린 카즈마 히로유키는 실제로 이기영 씨를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정말로 주인의 위협을 감지한 율리에나가 카즈마 히로유키를 공격한 것도 틀림없이 사실입니다.” “피고. 그렇다면 율리에나 사건에 대한 죄에 대해서는 인정한다고 말씀하기는 겁니까?” “네. 길드원들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제 잘못이 맞습니다. 야마토 길드의 정길드원이었던 카즈마 히로유키가 가지고 있는 신분이 두 개였지만 일단은 저희 쪽의 길드원이 맞으니 제가 벌을 받는 게 마땅하겠지요.” “그 말은….” “네. 죽은 카즈마 히로유키는 카케길드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린델에서의 암살이 미수로 끝나자 왕성 내에서까지 암살을 시도하려고 한 것입니다. 아마 카케 길드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마약조직의 분쟁이 거진 그런 것처럼 환상물약이 시중에 들어온다면 자신들이 판매하고 있는 약이 팔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요소가노소라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이기영 씨를 제거하고 싶었을 겁니다.” 시나리오 한 번 대박. 이 정도면 극작가라고 불려도 될 정도로 손색이 없을 정도의 스토리 라인이다. 두 차례의 암살 사건을 마약 카르텔의 싸움으로 이끌고 가는 것. 누가 봐도 무척이나 재미있어질 만한 상황이었다. “이기영 씨가 환상물약을 제작하고 유통하고 있다는 증거는 가지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존경해 마지않는 대법관님. 환상물약은 사실 파란 길드가 저주받은 신단을 공략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해준 정신 치료 물약의 변형입니다. 파란 길드에서 판매하고 있는 저주받은 신단 공략일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부분이 환상물약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계속 말씀해 보세요, 피고.” “파란의 공략일지를 보면 저주받은 신단이라는 던전은 일정 시간이 지날 때마다 점점 환청과 환각을 보게 되는 던전이라 기술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환각과 환청을 억제할 수 있는 수단, 이기영 씨는 그 수단이 새로운 환각을 보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이론으로 탄생된 것이 바로 정신 치료 물약입니다.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환상물약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점은 중독성을 띄고 있느냐 띄고 있지 않느냐는 것뿐입니다.” “이의 있습니다. 대법관님! 피고는 가장 중요한 사건인 암살 미수 사건을 교묘히 배제한 이후에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리고 있습니다. 지금 재판의 주요 명제는 환상물약 같은 것이 아니라 사교 모임 암살 미수 사건입니다.” “아닙니다, 대법관님. 틀림없이 이 모든 일은 연관성을 띄고 있습니다. 사교 모임에 있었던 암살 미수사건은 베니고어 여신께 맹세컨대 제가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어째서 이기영 씨의 몸에 그런 이상이 생겼는지, 정확한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었지만 이 건 역시 카케 길드와 연관성을 띄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환상물약과 이기영 씨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언제 어디서 목숨을 노려져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저희 야마토 길드와 저를 모함한 것 역시, 제가 환상물약의 뒤를 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암살 미수 사건 역시 본인의 자작극일 확률도 고려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다. “본 재판이 환상물약에 대한 재판이 아니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대법관님. 그렇지만 이 모든 일에 이 물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추가로 이 물약에 대한 위험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원고석에 앉아 있는 이기영 씨에게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 들어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토 소우타는 완벽했다. 본인도 무척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당연하지만 주변에 있는 관중들도 동요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녀석이 입을 털면서 계속해서 제시한 증거들은 누가 봐도 내가 나쁜 새끼라는 걸 가리키고 있었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완전한 날조라고도 볼 수 없다. 반 이상이 진실이다. 어떻게 이쪽의 뒤를 이렇게 잘 캘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작은 증거를 파고 파고 또 파고들어 결론에 도달한 녀석에게는 칭찬의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슬슬 말을 내뱉어야 하는 타이밍. 이토 소우타를 살짝 바라보니 한껏 입가를 비틀고 있는 놈의 얼굴이 보였다. 똥을 씹어 먹은 듯한 내 표정을 보고 자신이 이겼다고 확신한 것 같은 느낌. 당연하지만 나는 계속 인상을 구기고 있지 않았다. 찡그린 미간은 활짝 펴졌고 축 쳐진 입가는 한껏 올린다. ‘푸흡.’ 녀석을 바라보며 미소를 보내고 고맙다는 표현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내 표정이 점점 변해가면 갈수록 당황하고 있는 녀석의 모습은 가관. 담담하게 입을 여는 순간 이토 소우타의 인상이 한 것 구겨졌다. “제가 유통한 것이 맞습니다, 존경하는 대법관님.” # 136 회귀자 사용설명서 136화 세 번째 카드(1) “제가 유통한 것이 맞습니다, 존경하는 대법관님.”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애써 집어 삼켰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 경기를 바라보고 있는 갤러리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는 중. 바젤 추기경은 담담한 모습이었지만 그 외에 다른 이들은 갑작스럽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선한 미소를 보내오고 있던 이웃사람이 어느날 마약사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대부분이 저런 표정을 보낼 것이다. 내 입으로 말하기엔 조금 그렇지만 제국 내에서 내 이미지는 하늘을 뚫을 수 있을 만큼 좋았으니까. 내게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이토 소우타는 다급하게 입을 열기 시작. 그렇지만 현재 대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녀석의 발언이 아니라 내 입에서 흘러나올 진실이다. “자신의 죄를 저리 담담하게 고백하다니 뻔뻔하기 그지없군요. 대법관님 더 이상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까? 현재 원고와 피고는 명확하게 뒤바뀌어 있는 상황입니다. 어서 저자를 구속하고 절차대로….” “구속과 절차라뇨? 제가 유통한 것은 맞습니다만 저는 제 입으로 저의 죄를 인정한 적은 없습니다. 아직도 피고는 당신입니다.” “자유도시에 마약을 유통한 것이 죄가 아니면 무엇이 죄라는 말입니까. 죄 없는 사람을 가해자로 몰아붙이려고 한 것도 죄라고 한다면 죄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그러니까 저는 지금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이 말입니다, 이토 소우타 씨.” “보여 지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이기영 씨. 지금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마약을 유통했다고 증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는 겁니다. 소우타 씨.” “시치미를 뗄 생각이라면….” “환상물약은 마약이 아닙니다. 마약이 아니에요.” 계속해서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한다. 당황한 듯한 놈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쪽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하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한 허세가 아닌가에 대한 가능성 역시 생각해 보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조심성 많은 녀석이니 만큼 이쪽에 뭐가 있다는 것을 가정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존경하는 대법관님, 제가 유통한 환상 물약은 마약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지금 이 곳에 계신 제국시민 여러분들께 제가 유통하고 있는 환상물약에 대해 해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확실히… 이건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대법관님!” “발언을 허락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좋다. “이토 소우타의 증언은 대부분이 사실입니다. 저주 받은 신단에서 저는 정신치료물약을 만들었고 실제로 그 물약에서 힌트를 얻어 환상물약을 만든 것 또한 사실입니다. 카스가노 유노와 요소가노소라라는 신생길드를 만들고 그 길드를 통해 물약을 유통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암시장에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은 제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마 그것 역시 사실일 가능성이 크겠지요.” “계속 증언해 주도록 해주세요.” “당연하지만 사실보다는 사실이 아닌 증언이 더욱더 많습니다. 린델 테러 사건이 마약조직 간의 싸움이었다는 말은 거짓이고 죽은 카즈마 히로유키가 카게 길드의 일원이었다는 것 역시 거짓입니다. 물론 암살 미수 사건이 제 자작극이었다는 것 역시 거짓입니다.” “대법관님!” “피고는 잠깐 조용히 하도록 하세요. 피고가 이전에 발언했던 것처럼 지금부터 원고가 증언할 사항들은 이번 재판에서 아주 중요한 사안입니다.” 그동안 이쪽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온 대법관 역시 우리가 재판에서 이기기를 바라고 있는 모양. 말없이 나를 응원해 주는 모습을 보니 조금 더 힘이 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거짓말은 환상물약이 마약이라는 발언입니다. 전혀 말도 되지 않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입니다.” “근거가 있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환상물약은 치료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약입니다.” “치료말입니까?” “네. 치료입니다. 저주 받은 신단에서 사용했던 정신치료물약처럼 환상 물약 역시 치료목적으로 만든 이후에 치료 목적으로 유통한 물약입니다. 피고는 카케 길드와 저의 영역 다툼으로 그간의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사실은 전혀 다릅니다. 이토 소우타가 몸을 담고 있는 야마토 길드야말로 카케 길드와 함께 손을 잡고 있지요.” 야마토 길드와 카케 길드가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은 내 뇌에서 나온 오리지날 설정이다. 물론 당장 제출한 증거는 없지만 이런 식으로 이빨을 터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 “모두들 어디에선가 들으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내가 한 이야기니까.’ “이토 소우타의 야마토 길드가 노예매매와 장기밀매, 불법적인 약품을 취급하는 것은 물론 암시장까지 운영하고 있다는 소문 말입니다.” “이의있습니다. 대법관님! 저 소문은 아무 근거도 없는 소문이며 제출할 증거들의 내용 역시 무척이나 빈약합니다.” “가장 큰 증거는 잠시 후에 알게 되실 겁니다. 시작은 이렇습니다. 대법관님, 요조라 길드의 카스가노 유노가 저를 찾아 온 것부터가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아주 예전부터 일본에서 불법적으로 유통되고 있었던 마약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네. 환상물약이 아니라 진짜 마약이라고 부르는 물건 말입니다. 이미 자유도시 실리아는 불법 마약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고 많은 사람이 그 마약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녀로부터 직접 전해 듣게 되었지요.” “……….” “그녀가 제게 의뢰한 것은 치료제였습니다.” “아….” “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대로 환상물약은 이제는 실리아에서 모습을 찾기 힘들어진 불법 마약의 치료제입니다. 저희 파란과 요조라는 마약중독자들을 치료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 불법 마약이 어디서부터 유통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원고?” “제가 지속적으로 암살 위협을 당한 것이 말입니다. 그들은 제가 진실에 다가가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린델 테러 사건 이외에도 계속해서 저를 노리는 위협들이 많아졌지요. 사실 일본의 마약시장을 주무르고 있는 집단에 대해서 저희는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지만 계속되는 암살 시도 덕분에 많은 걸 알게 됐습니다. 재판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를 암살하려고 한 것은 야마토 길드였습니다. 아 어쩌면 카케 길드였을지도 모르겠군요. 야마토 길드의 명을 받은 카케 길드의 길드원 말입니다.” “모두가 거짓이고 궤변입니다, 대법관님. 환상물약이 기존 마약의 치료제라는 발언은 사실무근입니다. 애초에 중독성을 띄고 있는 환상물약이 어떻게 마약에 치료제가 될 수 있는지가 궁금하군요.” “어째서 치료제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토 소우타 씨. 이미 환상물약은 저주 받은 신단으로 그 효과를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중독성이라뇨. 말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환상물약이 약간의 중독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마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와인 같은 기호 식품들도 마약이라 부르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건….” “애초에 치료제로 나온 상품입니다. 어디에 있는 누가 의도적으로 유통을 막지 않았다면 벌써부터 유통되고 있는 물건이었겠지요. 재판관님, 이토 소우타가 저에게 지속적으로 위협을 한 이유는 환상물약이라는 치료제가 유통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재판장님, 저희 길드에 있는 연금술사들은 환상물약에서 중독성과 환각을 유도하는 위드 성분을 발견했습니다.” 이건 확실히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 물론 확실한 증거를 잡기 위해 성분검출을 할 줄은 알았지만 거기에 포함된 촉매 하나를 정확히 때려 맞추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름대로 유능하다고 할 수 있는 연금술사들을 데려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확실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대륙에서 나보다 유능한 연금술사는 없다. “성분검출도 이미 끝내 놓으셨군요. 조금 더 의문점이 생길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대법관님. 성분검출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환상물약을 마약이라고 부른다니요.” “위드 성분이 들어간 물약을 마약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이기영 씨.” “이토 소우타 씨. 제대로 성분을 검출한 것이 맞습니까? 환상물약에 대해 제대로 파악한 것이 맞다면 지금 같은 말씀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니, 나와서는 안 됩니다.” “무슨….” “환상 물약은 성수로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이토 소우타 씨.” “…….” “…….” “…….” 녀석뿐만이 아니다. 마치 쥐라도 집어먹은 것처럼 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너무 재미있어서 웃음이 나오는 상황. 이 재판이 조금 묘해졌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이토 소우타의 표정은 이미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다. 급하게 고개를 돌려 바젤 추기경을 비롯한 종교인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푸흡.’ 그 꼴은 한 도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본래 치료제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이토 소우타 씨. 위드 성분이 들어간 것은 어디까지나 치료의 목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베니고어 여신님이 내린 성수가 몸에 조금이라도 해로운 성분은 전부 정화해 주시니 말입니다. 연금술사 입장에서는 조금 편했지 뭡니까.” “…….” “사실 따로 치료제를 만들 필요도 없었습니다. 여신님의 성수만으로도 정화작업이야 끝내고도 남지만 자유도시 실리아를 좀먹고 있는 괴물은 불법 마약뿐만이 아니었으니까요. 환상물약이 보여주는 것은 여신님이 저희를 위해 내려주신 선물입니다, 이토 소우타 씨.” “……..” “감히 여신님의 선물을 마약이라고 부르다니요. 이게 신성모독이 아니면 무엇이 신성모독이란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아직까지 몇몇은 입을 꾹 닫고 있는 상황. 그렇지만 조용했던 장내가 광기에 휩싸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와 무척이나 친밀하고 진한 관계를 유지했던 이단심문관장 헬레나의 입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튀어 나왔기 때문이다. “신성모독이다!” 그녀가 입을 여니 주변에 있던 다른 이단심문관들도 광기에 전염된 것은 순식간. 여기저기서 곧바로 커다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신성모독이다! 신성모독입니다!” “이단이다! 이단이야!” “신성모독입니다!” 이단은 좀 너무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확실히 저런 편이 나에게는 도움이 된다. ‘푸흡.’ 일이 너무 재미있어져 웃음이 나올 지경. 당황하여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진 이토 소우타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환, 환상물약이 성수로 만들어졌다는 걸 모른 무지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절대로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존경하는 대법관님. 아니, 바젤 추기경님 제가 얼마나 베니고어 여신께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변명하는 것이 낫다.’ “존경하는 사제님들 부디 제 무지함을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절대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종교인은 바젤 추기경이 맞다. 추기경급만이 종교재판을 열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녀석이 바젤 추기경에게 계속해서 비비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아쉽게도 바젤 추기경은 이쪽의 편이 된 지 오래다. 뭐, 그것과는 별개로 사실 녀석의 변명은 합리적이다. 환상물약이 마약이 아니라고 다시 발언하는 것은 놈이 지금까지 했던 증언을 자신이 부정하는 꼴. 다시 말하면 차라리 자신의 증언을 부정하는 게 더 살아날 확률이 높다는 것에 있다. ‘가능성도 있고.’ 몰랐다고 한다면 변명의 여지는 분명히 있다. ‘문제는.’ 내가 준비한 게 끝이 아니라는 것. 반전은 바젤 추기경이 이미 복용을 마쳤다는 것에 있다. 뭘? 내가 준비한 소중한 포도주를. ‘그것도 특상품으로. 푸흐하흐흐하흐핫.’ 환상물약은 기본적으로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게 해준다. 당연하지만 저주 받은 신단 때처럼 약사의 특권으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줄 수도 있다. 어쩌면 몇몇 종교인 은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의 성수를 마신 이후에 본 것을 신의 계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신앙심이 돈독한 우리 바젤 추기경님 역시 그건 마찬가지. ‘바젤 추기경님이 내가 선물한 포도주를 마신 이후에 뭘 봤을 것 같아? 머저리야.’ 아마 녀석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바젤 추기경에게 어떤 장면을 보여줬을 것 같아? 응? 이 악마 숭배자 새끼야.’ “현 시간 부로 이 사건은 제국 법정의 권한을 벗어났다고 판단, 신성제국의 교황청 제2추기경의 권한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종교재판을 여는 것을 제임스 대법관에게 정식으로 요청하는 바이다.” “그런….” 나와 바젤 추기경만이 알고 있는 작은 비밀. ‘악마 숭배자 이토 소우타!’ 내가 녀석을 향해 던진 진심어린 선물이었다. # 137 회귀자 사용설명서 137화 세 번째 카드(2) “현 시간 부로 이 사건은 제국 법정의 권한을 벗어났다고 판단, 신성제국의 교황청 제2추기경의 권한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종교재판을 여는 것을 제임스 대법관에게 정식으로 요청하는 바이다.” 굳은 얼굴을 한 바젤 추기경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토 소우타의 입장에서는 조금 당황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었던 부분. 녀석이 신성모독자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녀석의 말대로 이 건은 놈의 무지함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멍청한 놈.’ 성수가 들어간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무지함. 환상물약을 마약이라고 부른 것은 모두 녀석이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실수였다는 걸 고려해 보면 적어도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종교재판을 열려고 하는 바젤 추기경에게 있다. 당연하지만 내가 추기경급의 사제들과 모임을 가진 이유는 그저 우정을 돈독히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순히 친분을 만들기 위해 개고생을 하며 빨빨 돌아다닐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이런 종류의 친분도 결코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만 추기경급의 사제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있어서 아주 좋은 기회였다. ‘널 엿 먹일 수 있는 기회.’ 성수로 만든 포도주 선물하고 환각을 보여주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물론 바젤 추기경에게 준 와인은 이쪽이 만들어낸 특상품. 싸구려 환상물약과는 같은 매커니즘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사치품이었다. [신성한 포도주 - 영웅 등급] [신의 선물이라고 불리는 성수로 만들어낸 포도주입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재료가 섞인 이 포도주는 첫 잔에 한정하여 신성력 스탯이 영구적으로 2 증가하는 효과와 소모된 신성력을 회복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은 특별한 것을 보여주곤 합니다.] ‘다른 말이 필요가 없지.’ 한 병을 만들어내는 필요한 골드만 약 8천 골드 정도. 물론 만드는 게 그리 복잡하지는 않지만 만들려고 하는 과정은 조금 힘들었다. 환상물약이야 파란에 있는 연금술 공장이 있기 때문에 이쪽의 손을 떠났다고 볼 수 있었지만 신성한 포도주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아마 이토 소우타가 조사를 받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틀림없이 불가능했다. 신성한 포도주를 만든 이후에 내가 한 일은 무척이나 간단하다. 그저 바젤 추기경과 식사를 하며 포도주를 함께 마시는 것으로 끝. 바젤 추기경이 포도주를 마신 이후에 본 장면에는 더욱더 공을 들였다. ‘푸흐하흐하흐핫.’ 그건 앞으로 20년이나 지난 이후에 벌어질 이야기. 지옥에서 소환된 악마와 계약한 이토 소우타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바젤 추기경에게 보여줄 시나리오는 한 남자의 처절한 일대기였다. 베니고어 여신과 신성제국을 지키기 위한 한 남자의 분투기. 물론 그 남자가 상대하게 될 메인 빌런은 쓰레기 같은 악마 숭배자 이토 소우타다. 이미 이곳 대륙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악마와 계약한 녀석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교황청의 내부로 들어간다. 지금 이 시점에서 5년이 지난 이후에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교황청을 잠식한 것은 물론 신성제국의 교황까지 자신의 손으로 주무를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우리의 히어로 바젤 추기경은 그런 이토 소우타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교단의 희망이자 대항마였다. ‘아주 좋지.’ 무척이나 오랫동안 지속된 바젤 추기경과 이토 소우타의 외로운 싸움. 여느 아포칼립스 물이 그렇듯 바젤 추기경은 결국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잃고 그 자신 역시 무척이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들에게 둘러싸인 교황청을 바라보며 울부짖고 그 가운데에서 여신도들을 찢어 죽이는 이토 소우타를 바라보며 그렇게 심장에 검이 박힌다. 환상을 본 이후에 바젤 추기경의 표정은 잊을 수가 없을 정도. 본인이 본 것이 신의 계시가 맞는 것인지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음날의 확고한 표정으로 그가 여신의 뜻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앙심이 뛰어나시니까.’ 미래를 먼저 보고 온 조금 다른 종류의 회귀자이자 계시자, 우리 바젤 추기경에게 이토 소우타란 지금 당장 제거해야 할 정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거다. ‘우리 현성이가 정진호를 처음 봤을 때처럼.’ 이미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이게 내가 준비한 마지막 보험. 몇 가지가 더 있기는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게 가장 확실하게 놈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다. “제임스 대법관님?” “알겠습니다. 바젤 추기경님의 요청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현 시간 부로 이 사건은 제국 법정의 권한을 벗어났다고 판단, 신성제국의 제국 법정 대법관의 권한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본 재판을 폐회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나치게 당황한 듯한 이토 소우타의 얼굴. 무척이나 일그러진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존경하는 바젤 추기경님, 어떤 심정이신지는 이해하지만 저, 저는 지금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환상물약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한들, 저는 결코 베니고어 여신님을 모욕할 의도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벌을 받아야 할 것은 원고석에 있는 이기영입니다!” “어째서 제가 벌을 받아야 합니까, 이토 소우타 씨?” “위드 성분과 여신님의 성수를 섞는 불경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녀석이 위기에 빠졌다는 반증. 되는 말이라고 전부 지껄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것이 어째서 불경한 짓입니까. 이토 소우타 씨, 저는 엄연히 정화과정을 거친 것에 불과합니다. 여신님의 위대한 힘은 그 어떤 것이든 깨끗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신의 그 불경한 마음도 정화해 주실 수 있으시겠지요.” “그,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바젤 추기경님! 파란 길드의 이기영은 여신님의 선물을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챙겨 자신의 배를 불렸습니다.” “환상물약의 수익금의 일부는 교황청에 헌금으로 나가고 있으니 부당한 이득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또 다른 일부는 진짜 마약 중독자들의 재활치료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여신님의 선물로 만들어낸 물건입니다. 사사로운 것에 사용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 같지 않습니다, 범죄자 이토 소우타.” “누구 보고 범죄자라고 말하는 것….” “그야 물론 현행범인 당신입니다. 환상물약이 마약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당신이 한 증언이 모두 거짓말이 아닙니까. 본인의 입으로 본인의 죄를 고백했으니 종교재판으로 넘어가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유죄를 선고 받았을 것입니다. 아, 혹시 지금의 발언을 후회하고 있으시다면 제가 다시 한번 꼭 묻고 싶군요. 환상물약은 마약입니까? 마약이 아닙니까?” “……….” “우리 자랑스러운 야마토 길드의 이토 소우타 씨. 제 질문에 대답해 주셔야지요. 환상물약은 마약입니까? 아니면 마약이 아닙니까?” “질문에 대답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 말씀은?” “여신님의 선물이 마약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질문을 해오는 것 자체가 불경한 짓입니다. 대법관님, 바젤 추기경님. 이건 함정이고 모함입니다. 뭔가가… 다시 한번 정식으로 재판을 열어주실 것을 청원합니다. 아니, 휴정을 요청하겠습니다. 대법관님!” 애타게 대법관을 외쳐봤지만 대법관이 긍정적일 리가 만무. 이미 권한은 바젤 추기경에게 넘어갔다. “현 법정의 권한은 저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피고, 휴정 요청과 항소는 종교재판이 끝난 이후에 진행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바젤 추기경님, 이건 모함입니다. 애초에 저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파란 길드의 이기영의 더러운 수작입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확실한 증거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어째서 저런 종류의 인간들은 이쯤 되면 모함을 외치는 모함 앵무새로 변신하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긴박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억울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당연히 대중들의 반응은 싸늘. 이미 한 차례 거짓말을 한 것이 탄로 났다. 이제 와서 함정에 빠졌다고 증언한들 들어줄 리가 없다. 오히려 지금 저 행동은 바젤 추기경을 더 화나게 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우리 베니고어 여신님이 보여준 미래에서도 이토 소우타의 특기는 저 간교한 혓바닥이었으니까. “닥쳐라!” “바젤 추기경님?” “닥쳐라, 이 더러운 이단아!” “저, 저는 이단이 아닙니다. 바젤 추기경님, 헬레나 이단심문관장님. 오해가 있기야 했지만 절대로 베니고어 여신님을 배신하는 행동은 한 적이 없습니다.” “웃기지 마라, 더러운 이단. 네, 네놈의 검은 속내를 누가 모를 줄 아느냐?!” “저는 억울합니다.” “처음부터 교황청에 들락날락거릴 때부터 어느 정도 이상하다고 느끼고는 있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입 닥치라고 했다. 더러운 이단아! 네놈이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들과 결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느냐?” “네?” “이곳에 온 이후부터 네놈이 악마들과 함께 신성제국을 좀먹으려고 하는 사실은 내 일찍이 여신님에게 계시를 받아 알고 있었다.” “그게….” “더러운 악마 숭배자 놈.” “그게 무슨….”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신성제국을 좀먹어 교황청의 있는 모든 것을 타락시키고 죽이려고 했던 그 모든 것을 여신님에게 전해 들었다, 이 말이다!” “뭔,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악마와 결탁했다니, 사실무근입니다. 화가 나신 건 이해합니다만….” “아무리 변명을 해도 네가 베니고어 여신님의 성수로 만든 물약을 일본 내에 유통시키지 않기 위해 이기영 신도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절대로 저희가 암살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기영을 암살하려고 한 것은 카게 길드입니다.” “조직 간의 분쟁을 말하는 것이냐?”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카케 길드는 아마도 여신님의 성수로 만든 치료제를 일본 내에 유통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기영 씨에 대한 암살 시도를….” “아까와는 말이 다르군.” “제가 무지했던 탓입니다.” “네놈은 항상 그랬다. 여봐라. 이단심문관장은 뭘 하고 있느냐. 헬레나! 헬레나!” “곧바로 준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당장 저 악마 숭배자 놈을 포박하여 저놈을 심문하고 심판하라! 종교재판도 필요 없다. 저 이단에게는 재판이라는 수단조차 아깝다. 아니 저놈뿐만이 아니다. 지금 신성제국 내에 있는 더러운 악마집단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자유 도시 실리아에 있는 더러운 이단들도 잡아들여라.” “네.” “이단심문관들과 신성기사단을 당장 실리아에 보내도록 하겠다. 더러운 악마숭배자 놈들의 싹을 잘라버릴 것이야!” 아무래도 바젤 추기경님께서 예전 기억에 덕분인지 조금은 흥분하신 모양. 당연히 나도 바젤 추기경의 마음을 이해한다. 미래에 신성제국을 멸망시킬 장본인이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눈깔이 돌아가 처리하고 싶은 심정도 당연하다. ‘재판도 하지 않을지는 예상 못 했지만….’ 어차피 재판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간에 놈이 고통을 받고 죽을 거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조금 더 놀아보고 싶었다. 후반에 가서는 놈 역시 무너져 내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것으로 뭘 준비했는지 알고 싶기는 하다. 그래 봤자 이쪽이 준비한 패에 무너지게 되었겠지만 조금은 여흥이 됐을 수도 있으리라. 장내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토 소우타의 표정이 보인다. ‘눈치챘구나?’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자신이 어째서 이런 지경에 몰렸는지, 어째서 바젤 추기경이 저렇게 흥분하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 뭔가 입을 떼려고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입이 떼질 리가 없다. 원래 종교라는 건 논리라는 게 통하지 않는다. ‘저놈도 그걸 알고 있을 거고.’ “당장 저놈을 화형대에 올려라! 저 악마 숭배자 놈을!” “이단을 죽여라!” “신성 모독자를 지금 당장 처형해라!” 결국 궁지에 몰린 녀석에게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다는 거다. 마녀 사냥이나 다름없는 이단심문관의 심문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이 부당한 상황에 저항하거나 도망칠 것인가. 첫 번째 선택지는 그나마 조금의 생존 가능성은 있다. 고문을 받아 조금 고통스럽게 뒈지겠지만 티끌만한 희망이라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번째 선택지는 이야기가 다르다. 저항하는 순간 악마 숭배자와 이단 꼬리표를 달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녀석이 교황청에 저항했다는 그 사실이 바로 놈이 악마 숭배자라는 증거가 된다. ‘넌 어떻게 할래?’ 어떤 것을 선택할지 무척이나 궁금해졌지만 가슴 아프게도 녀석의 선택지는 후자밖에 없어보였다. 왜. 신성기사단과 이단심문관들이 놈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빙고.’ # 138 회귀자 사용설명서 138화 세 번째 카드(3) “이단을 잡아라!” “악마 숭배자를 지금 당장 처형해라!” 당연하지만 순순히 오라를 받을 리가 없다. 아니, 애초에 저항하지 않는다고 한들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해내기는 힘들어 보였으니 녀석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그만큼 법정 안에 있는 우리 사제님들은 광기에 휩싸여 있다. ‘푸핫.’ 간단히 말해 녀석에게는 저항하는 것밖에는 선택지가 없다는 거다. “순순히 심문을 받아라, 악마 숭배자 놈!” “제기랄!” 놈의 주변에 있는 두 명이 나가떨어지는 것은 순식간. 손을 묵고 있는 구속구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끊어진다. 애초에 제대로 포박되어 있지도 않았던 것. 제국 기사단 중에 몇몇을 포섭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저… 악마 숭배자 놈을 당장 잡아 죽여라!” “잡아! 이단이다! 당장 저 이단을 이곳으로 데려와라! 헬레나! 저 녀석의 목을 가져와라! 목을!” “네.”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 아니, 단순히 소란스러워졌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다. 문제는 저들이 이토 소우타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몰려들어 법정 안을 빼곡히 채우는 저들의 모습은 다분히 비상식적으로 보였다. 녀석의 입장에서도 결단을 내려야했다. ‘싸우든지 아니면 피하든지.’ 비폭력을 외쳤던 간디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검을 빼들었을 상황에, 결국에는 신성기사단 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토 소우타가 자신을 향해 날아든 검을 쳐내려고 하는 과정에서 기사 한 명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아아아아아악!” “저 더러운 이단 놈이!” 그 모습을 본 이지혜가 슬그머니 이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빠, 여기 있다가는 조금 위험할 것 같은데요?” “아냐. 별로 위험하지 않으니까 가만히 상황을 구경하기만 하면 돼. 일이 조금 재미있게 변할 것 같거든.” “아아아… 그렇겠네요.” 이미 몇몇은 이 자리를 피하고 있다. 대법관이나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은 제국 기사단의 따뜻한 품 안에서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하고 있다.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바젤 추기경 쪽. 신성제국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녀석을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당장 저놈을 이곳으로 데려와라! 이단심문관 헬레나! 신성한 종교재판의 자리에서 저런 되먹지 않는 행동을 하다니. 이단이 틀림없다. 악마 숭배자가 틀림없어!” “네!” “아니다! 내가 직접 가겠다. 내가 직접 녀석을 때려죽이겠다! 내 철퇴를 가져와라! 지금 당장!” “바젤 추기경님께서 움직이실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빨리 잡아오란 말이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것 같은 양반이 저리 날뛰는 꼴은 우습다기보다는 무섭다. 역시나 여신의 계시를 받은 선택받은 전사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결국에는 이단심문관장 헬레나까지 슬그머니 몸을 움직이자 전황이 조금은 더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강자야.’ 빅터하르트 혹은 차희라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지만 무력 집단의 수장을 맡을 정도로는 강하다는 이야기. 굳이 예를 들자면 이상희나 황정연 정도의 수준. 철퇴를 들고 달려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누가 봐도 성전에 참전하는 성전사의 모습이었다. 대주교 제시카가 온갖 신성력을 뿌리며 보호막과 버프들을 밀어놓고 탄력을 받은 신성기사단은 다시 한번 이토 소우타에게 들이 닥친다. “으아아아악!” ‘장관이네, 장관이야.’ 신성기사단과 이단심문관에게 저항할 수도, 저항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 일단은 자신을 향해 계속해서 달려드는 이들을 막아내고는 있지만 저런 페이스가 어디까지 유지될지는 미지수.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민첩 99의 능력치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그래봤자 얼마 버티지 못할 테지만.’ 수십 명의 기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을 본 이토 소우타가 몸을 뒤쪽으로 피한다. 당연하지만 그 뒤쪽에 있는 것 역시 녀석을 잡으러 온 기사. 기사를 팔로 밀어낸 이후에는 옆에서 날아드는 검을 쳐낸다. 저런 상황에서 모든 공격을 피한다는 것은 확실히 대단하기는 하지만, 헬레나가 전선에 뛰어드니 확실히 놈의 인상이 구겨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내가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다. 괜스레 웃음이 터져 나온다. 긴박한 녀석의 목소리가 내 웃음을 소환하는 촉매로 느껴질 지경. “바젤 추기경님! 이 모든 게 계획되어 있는 일이었습니다!” “닥쳐라! 더러운 이단아!” “모든 게 오해입니다. 일단은 이들을… 물려주십시오!” “그 더러운 입을 다물어라!” “헬레나 님, 제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악마 숭배자 놈!” “제시카 주교님, 뭐라고 말씀 좀….” “무엇들 하느냐! 저 악마 숭배자 놈이 계속 간교한 혓바닥을 놀리는 것을 두고만 보고 있을 생각인가! 어서 저자의 입을 막아라!” 녀석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단심문관 헬레나와 대주교 제시카는 이미 이쪽 라인을 타고 있다. 굳이 신성한 포도주를 사용할 필요도 없이 그녀들은 나와 함께 이토 소우타에 대해 열렬히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졌으니까. 아마 바젤 추기경의 진노가 결정적이었을 터. 이 숨 막히는 승부는 누가 봐도 재미있지만 슬슬 새로운 바람이 필요하다. 살짝 정하얀을 바라보자 주문을 외우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마력 사슬.” 푸른색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쇠사슬이 놈의 주변을 휘감는다. 손짓으로 마법을 파훼하는 모습은 다분히 비상식적. 정하얀이 살짝 실망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보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만들고 정하얀을 절박하게 만든다. “바람 칼날! 마력 사슬! 공기 팡!” 설마 설마 했던 트리플 캐스팅. 다른 이들도 휘말릴 것을 고려해 출력을 많이 줄인 상태였지만 이토 소우타 레이드의 메인 딜러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 이쪽도 뭔가 거들어야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내 마법은 이곳에서는 사용할 수 없으니 율리에나를 이용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율리에나!” 내 손짓에 따라 쏘아져 나가는 율리에나는 웬만한 기사의 움직임보다 빠르다. 율리에나는 율리에나 나름대로 이토 소우타에게 쏘아져 나가며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중. 이단심문관과 신성기사단이라는 탱커집단들이 제대로 앞을 봐주고 있으니 우리 같은 메인 딜러들은 무척이나 편해진다. 게다가 이토 소우타는 탱커들을 마음대로 공격할 수도 없는 입장에 있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 놈이 나를 공격할지 공격하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열심히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걸 보니 이쪽이 안전하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로 보였다. 녀석은 분쟁이 더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설득하다보면 이 광기가 가라앉을 거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아… 이거 만만치 않은데?” “그러게요.” “이렇게 셀 줄은 정말로 상상도 못 했는데….” “용병 여왕님이랑 무녀님을 출동시키는 건 어때요?” “아니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일단은 혹시 모를 상황에 귀빈들을 보호해야 하니까. 희라 누나도 지금 충분히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고… 아마 무슨 일이 생기면 참전해 줄 거야.” “아. 피했다! 집중 좀 해요.” “율리에나의 속도로도 잡기가 쉽지가 않아. 진짜 빠르네. 대형 길드의 마스터라는 사람들은 다 저런 건가.” “하얀 씨랑 연계를 해보는 것도 좋겠네요. 아니면 조금 다른 쪽으로 공략 방법을 찾아보든가요. 율리에나에게 상처를 입으면 저주에 걸린다면서요? 처음부터 큰 거를 노리기보다는 얕은 상처를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직접 저주를 내리는 기능과 검은색 촉수 같은 걸 움직일 수 있다고도 하지 않았어요?” “아, 그건 현재 사용할 수 없는 기능이야. 아마 율리에나의 자아가 깨어나면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정신 공격이라는 방법도 있으니까. 일단 말이라도 걸어 봐요. 조금 주도적으로 이단심문관이나 신성기사단을 지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전략팀장 이지혜의 훌륭한 제안. 본래 레이드라는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행해야 되는 법이다.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열리기 시작했다. “저 더러운 이단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더러운 이단이 악마의 힘을 받아 무척 강하니 저희들 역시 힘을 합쳐야 될 것 같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이쪽을 노려보는 놈의 얼굴이 보인다. 그렇지만 뭘 할 수 있을 리가 만무. 조금 더 신나게 떠들자 확실히 체계적인 진형이 잡힌다. 방금은 모두가 조금 흥분한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기본적인 레이드의 형태가 잡히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좋습니다! 저 악마를 당장 처단합시다! 여러분!” “이단을 처치하라!” “절대로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문을 막고 끈질기게 달라 붙다 보면 곧 녀석에게 붙어 있는 더러운 악마의 힘도 조금씩 빠져나갈 것입니다.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여러분! 베니고어 여신님을 위하여!” “베니고어 여신님을 위하여!”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정하얀의 마법이 녀석의 팔에 적중한 것은 바로 그때. 단순한 속박 마법일 뿐이었지만 그 틈을 타 율리에나가 녀석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길!” ‘좋아.’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게 될 정도. 아마 사방이 뻥 뚫린 야외였다면 녀석의 민첩 수치가 커다란 힘을 줬겠지만 현재로서는 녀석에게 상황이 좋지 않다. 앞과 뒤, 옆이 꽉 막힌 밀폐된 공간.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 심지어 공격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녀석 역시 변하기 시작한다. 어차피 자신에게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떠들고 있는 내 입을 찢고 싶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녀석 역시 전력으로 저항하고 있다는 것. 그 와중에도 조금 눈에 띄는 것은 녀석의 상태였다. ‘정상이 아니구나?’ 차희라에게 뒈질 뻔한 데미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 몸 상태로 대주교 제시카의 버프를 받은 이단심문관 헬레나를 상대해야 한다. 적재적소에 이루어지는 정하얀의 견제도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저 이단을 처단해야 합니다! 여러분!” “……….” “신성제국의 암입니다! 아니 자유 도시의 암입니다! 저린 이들은 그 싹을! 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 “모두들 힘을 냅시다!” “닥, 닥쳐라….” “고지가 눈앞입니다!” “닥쳐라! 제발, 제발 닥쳐!” “닥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네가 되어야 한다. 이 더러운 악마숭배자! 베니고어 여신께서 너를 벌할 것이다!” “이… 이 개자식! 개자식!” “신의 심판이다! 더러운 이단아! 베니고어 여신님 힘을 내려주시옵소서!” 확실히 다가오지도 못하고 있다.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다. 눈에 띄게 초조해하는 것은 물론, 의도적으로 무시하던 내 말에도 욕설로 화답하고 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단순히 화가 난 상태가 아니다. 율리에나가 가지고 있는 저주가 바로 그 연유. 조금 더 자극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여신님의 힘을 받아라!” “제기랄, 제기랄!” “여러분 더러운 악마의 힘이 점점 물러가고 있습니다. 힘드시겠지만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이… 이 약해빠진 버러지가!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 “악마가 그 본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입 다물어라!”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더러운 악마의 하수인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몸에 잔챙이 같은 상처가 쌓이면 쌓일수록 흥분하는 모습은 가관. 나와 율리에나의 궁합이 꽤나 잘 맞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본인의 화를 참지 못한 모양인지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아.’ 사방으로 폭발적인 마력이 뻗어나가기 시작. 더 이상 방어하면서 바젤 추기경을 설득하는 게 무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녀석 역시 나름대로 나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니, 어쩌면 저주로 인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진실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단순히 나에 대한 복수심 때문일수도 있고 신성기사단들을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엄청 세네.’ 녀석이 내 생각보다 더욱 강했다는 것.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본래부터 놈의 모습을 보기 힘들었지만 기사단들과 이단 심문관들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녀석의 손에 검이라도 쥐어져 있었다면 사방으로 팔다리가 날아다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꽉 채운 신성력은 기존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병력의 역할은 녀석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용도 그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신성기사단과 이단심문관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신성제국이 최정예로 치고 있는 무력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헬레나와 제시카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몇몇 이들의 스탯 수준도 상당. 지금까지 이토 소우타가 버티고 있는 상황 자체가 이해가 되는 상황은 아니다. ‘그것도 정상적이지 않은 몸 상태로? 장비도 없는데? 이거 실화야?’ 어째서 신성제국이 이 정도 강자들에 대한 예우를 확실히 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저번 차희라 때도 느꼈지만 규격 외의 존재들을 규격 외라고 부르는 이유가 확실히 있다. “붙잡아! 아아아악!” “움직이게 두지 마! 최대한 에워싸라!” “헬레나 님!” “공간을 만들어주지 마!” “여러분, 조금만 더 힘을 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열심히 입을 털고 있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길이 열린다. 잠깐 방심한 사이에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놈의 얼굴. ‘오!’ 놀라기는 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녀석이 나를 치기에는 아직 험난한 산들이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내 쪽으로 다가오기도 전에 빠르게 다가온 차희라가 놈의 옆구리를 걷어차는 것이 보였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비명을 내지르며 반대쪽 벽에 처박히는 것이 당연한 수순. 1차 관문을 뚫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아쉽게도 2차 관문을 통과하지는 못했다. “아아아악!” “당장 저놈을 포박해라!” “쿨럭. 이거 놔라! 이거 놔! 죽여 버릴 테다! 우웨에에엑…. 죽여! 너만은 내가 죽여 버릴 거다. 반드시! 반드시! 이기영. 이기영! 당장 이거 놔! 쿨럭!” “팔다리를 묶어라!!” “이거 놔라. 우웨에에엑! 가까이 다가오는 놈들은 전부 죽여 버리겠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저주의 영향을 받은 이토 소우타의 모습은 정말로 악마의 힘에 취한 것 같은 모양새. 희라 누나에게 한 대 맞아 입에서 피를 울컥 울컥 뱉어내고 있는 모습은 악마의 친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고상한 척했던 녀석에게 어울리는 마무리. “후우…. 속 한 번 시원하네.” 차희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139 회귀자 사용설명서 139화 판결(1) 마치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은 상쾌한 기분. 벌써부터 이단 심문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녀석을 보니 그간 해왔던 고생이 보답 받은 것 같아 괜스레 즐거워졌다. 당연하지만 나보다 더 기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여신의 계시를 받은 전사, 바젤 추기경. 얼굴에는 묘한 기쁨의 흔적이 묻어 있다. 자신이 봤던 암울한 미래를 뒤바꿀 수 있었으니 부여받은 임무를 달성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잘했다! 잘했어!”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니지. 아직 좋아하기는 이르지! 지금 당장 자유 도시 실리아로 신성기사단과 이단 심문관들을 파견하겠다. 제시카 대주교는 정식으로 신성기사단의 파견을 진두지휘하라.” “네, 추기경님.” “성전이다. 성전이야.” 앞서 말했던 사실이기도 했지만 바젤 추기경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이토 소우타의 죽음이 아니다. 자유 도시에 뿌리내린 악마 놈들을 색출해 그 뿌리까지 뽑아내는 것. 이런 빅 이벤트에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 당연지사. 슬그머니 카스가노 유노 쪽을 바라보자 내 마음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젤 추기경님, 혹시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 요조라 길드도 함께 해도 되겠습니까?” “아!” “악마의 끄나풀들이 언제 자유 도시 실리아를 탈출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한시가 급한 만큼 틀림없이 도움이 될 겁니다.” “오… 고맙습니다. 카스가노 유노 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여신님께서는 절대 이번 일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내가 길드 마스터였다면 파란도 이단 심판 행렬에 참가시켰겠지만 우리 현성이와 덕구는 해야 할 일이 많다. 김현성은 몰라도 마음 약한 덕구는 이런 일을 힘들어 할지도 모른다. “저희 검은백조도 힘을 보태드리도록 하지요.” “붉은용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자유 도시인 만큼 요조라 길드의 허가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괜찮다면 병력을 보내고 싶습니다.” “물론입니다. 여러분.” ‘캬아.’ 물론 검은백조와 붉은용병 역시 이 빅 이벤트에 참가하는 것이 옳다. 무려 대형 길드 하나가 통째로 지도에서 없어질 타이밍. 저들이 지금까지 모은 재화나 아이템 골드 등을 생각해 보면 파이를 나누고 나눠도 먹을 것이 있으리라. 1등 공신인 내게 어느 정도 지분이 떨어질 것은 굳이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부분. 일단 카스가노 유노가 먹는 것은 대부분이 이쪽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다. 이지혜도 이쪽에 챙겨줄 것이 있을 것이고 붉은용병 역시 이쪽에 많은 것을 챙겨줄 것이다. 안 그래도 파란에서 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업이 자본 문제로 보류되어 있는 상황. 환상물약에서 나온 골드와 야마토 길드에서 나온 것들을 대충 합치면 사업을 몇 번 말아먹어도 골드가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러분이 있어 신성 제국의 미래가 밝습니다.” “당연히 해야 될 일입니다. 바젤 추기경님. 신성 제국에 뿌리내린 암덩이를 뽑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작은 손을 보탤 수 있어서 무척 다행입니다.” “허허허.” “요조라 길드에 서신을 보내 놓도록 하겠습니다.” “이거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여유를 부려도 될 상황은 아니지만 여러분들 덕분에 조금 침착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후우….” 나 역시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는 게 좋다. 괴성과 비명을 지르며 이단심문관들의 포박에 저항하고 있는 이토 소우타는 이미 아웃 오브 안중이다. 녀석과는 한 번쯤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순서상 이게 먼저다. ‘공적은 챙겨야 하니까.’ 잠깐의 통쾌함보다는 뭘 받을 수 있을지 계산하는 게 더 옳은 행동.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기니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지사. 특히나 바젤 추기경은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았다. “아. 이기영 신도!”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내신 것 같습니다, 추기경님.” “큼… 큼….” “며칠 전부터 표정이 굉장히 좋지 않으신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좋은 표정을 하고 계신 것을 보니 이제야 조금 안심이 됩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일단은 가장 큰 짐은 덜었습니다. 이기영 신도님 덕분입니다. 허허허.” “하하. 제가 한 것이라고는 여신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 것밖에는 없습니다. 이 모든 게 베니고어 여신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저희 파란 길드도 이 성전에 참가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아직까지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죄송하다니요? 이기영 신도님이야말로 이번 일에 가장 큰 공신이십니다. 이기영 신도님이 아니었다면 저 악마들을 색출해 낼 수 있었겠습니까? 허허.” 내가 한 게 많기야 많다. 악마에게 오염될 뻔한 도시를 환상물약으로 치료한 것은 물론 이토 소우타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에 일조했다. 신성한 포도주로 바젤 추기경에게 여신의 계시를 선물했고 이 재판에서도 확실한 증거들을 내밀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이거 정말 부끄럽습니다.” “아닙니다. 마땅히 칭찬받아야 할 업적을 이룩하셨습니다. 게다가 파란 길드의 세력이 축소된 것은 야마토 길드 때문이 아닙니까? 일단 내정을 다스리는 것이 먼저지요. 이기영 신도님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한 말뿐인 칭찬이 아니다. 목구멍에서 ‘보상 줘’라는 말이 맴돌기는 했지만 일단은 생글 생글 미소를 보내자 곧바로 추기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황청에서 보상이 있을 겁니다.” “아.” “아니, 교황청뿐만이 아닙니다. 신성 제국을 위해서 커다란 일을 하셨으니 왕성에서도 보상을 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모두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 혹시나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보상을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닙니다, 바젤 추기경님.” “허허허. 이기영 신도님의 마음이야 제가 모르고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하신 일에 대한 합당한 보상은 받으시는 게 옳습니다. 그래야 제 마음이 조금 편해질 것 같습니다.” “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기영 신도님.” “아닙니다. 하하하. 바젤 추기경님이 더 고생하셨지요.” ‘좋아.’ 상황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추기경급의 사제가 저렇게 호언장담을 할 정도라면 내가 뭘 받을 수 있을지 어느 정도 각이 나온다. 정확히는 예상하기 힘들지만 아마…. ‘장관급 대우?’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물론 선물 상자는 까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대형 길드의 길드 마스터 급의 대우를 받는다. 아직까지는 저들이 받는 특혜에 대해서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일단은 그리폰 지급과 왕성 내의 나만의 방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 물론 부가적으로 다른 옵션들이 딸려 들어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달콤한데.’ 이건 목숨을 걸 가치가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상황에 기분 좋게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슬쩍 옆을 보니 이토 소우타가 이단심문관 헬레나를 비롯한 다른 이단 심문관들에게 포박당하는 중이었다. 주변은 무척이나 산만하다. 갑작스러운 싸움으로 일어난 장내를 정리하는 이들이 시야에 들어왔고 왕성 내에 남아 있는 야마토 길드원들을 체포하기 위해 분주하게 신성기사단이 뛰어 다닌다. 딱히 할 일이 없기는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함께 분주한 척을 하는 게 괜찮다. “이거 놔라! 나는 죄가 없단 말이다! 이거 놔! 쿨럭. 쿨럭.” “이 더러운 악마 숭배자 놈. 더 이상 혓바닥을 놀린다면 입을 뭉개버리겠다.” “제기랄… 제기랄!”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이토 소우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중. 누가 봐도 비참한 모습이다. 한때 모두의 사랑을 받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길드 마스터 같지는 않은 모습.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것은 물론 아직까지 입에서 피를 토해내고 있다. 차희라의 발차기 한 방에 내장이 완벽하게 파괴된 것이다. 아직까지 삶의 끈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혹시라도 녀석이 그렇게 죽어버릴까 걱정한 사제들이 신성력을 밀어 넣고 있기 때문. 완전히 말렸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표정만 봐도 녀석이 얼마나 당황하고 억울해하고 있는지 눈에 보인다. 뭐가 문제였을까? 어디서부터가 실수였을까? 라는 의문을 떠올리고 있겠지만 아마 본인은 답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녀석은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입장에 있었을 테니까. 기본적으로 놈과 나의 성향은 같다. ‘용의주도한 전략가.’ 마음의 눈은 성향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해주지는 않지만 그동안 많은 타입의 인간들을 봐온 만큼 어떤 성향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대충은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성향의 네이밍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들 말이다. 애초에 인간을 한 가지 성향으로 파악한다는 것부터가 위험한 일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눈으로 보이는 성향에 가장 가깝다고 예상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자면 일단은 이기적인 야망가라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이지혜. 그녀 같은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권력욕이 강하다. 탐욕스러우며 목적을 위해서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상태창으로 보이는 그녀의 성향처럼 마냥 이기적이지도 않다. 그녀가 자신을 완벽하게 숨기고 있다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기적인 야망가라는 성향 자체가 이지혜를 대변해 주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나랑 이토 소우타도 마찬가지지.’ 우리 둘이 가지고 있는 성향은 용의주도한 전략가. 뒤에서 일을 꾸미는 것을 즐기고 한 가지 일에 들어가기 전 항상 여러 가지 변수를 상정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먼저 떠올리는 편, 녀석 역시 그럴지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아마 나와 비슷할 것이다. 물론, 녀석과 나의 차이점은 존재한다. 플레이어 이토 소우타는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나 역시 도박은 싫어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놈과 나의 차이점은 주사위를 던지는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가에 있다. 나였다면 율리에나 사건 때 길드원 대신 내가 상처 입었을 것이다. 나였다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직접 몸을 움직여 나를 죽여 버렸을 것이다. 평판이나 주변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조금 적극적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본인의 이미지를 챙기기 위해 나머지 하나를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 놈의 첫 번째 실수였다. 뒷수습이야 이후에 하면 그만. 그렇지만 녀석은 여러 가지 선택지 중 도박이라고 생각했던 선택지들을 과감히 무시했다. 이토 소우타에게는 자신의 안위와 평판이 가장 중요하니까. 녀석과 나의 차이점이 어디서 나올지는 뻔할 뻔자. ‘난 절박하거든.’ 이미 가진 것이 많은 녀석에 비해 나는 선택지가 없다. 나에게 충성을 맹세해 주는 이들은 없고 녀석처럼 강하지도 않다. 매번 위험을 감수했던 나와는 다르게 녀석은 단 한 번도 이번 싸움에서 위험을 감수한 적이 없다. ‘그게 너와 내 차이야.’ 그게 녀석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비명을 내지르고, 내가 녀석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이유다. 별다른 감정은 없다. 바젤 추기경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니 완전히 몸에 포박되어 있는 채로 꿈틀 거리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겠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 쿨럭. 쿨럭.” 들리지도 않는 개소리는 가볍게 무시. 조용히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이거 아무래도 뇌 속까지 악마에게 오염된 것 같습니다. 바젤 추기경님.” “네. 이미 뼛속까지 오염되어 있을 것이 분명할 겁니다.” “이자의 처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마 곧바로 처형이 진행될 겁니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네. 지금 당장입니다. 물론 적당한 방법을 생각해야 하겠지만… 아마 이 악마 놈에게 어울리는 형벌이 있겠지요.” 마침 나에게도 생각나는 형벌이 있다. 어울리는지 어울리지 않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박하다면 신박할 수도 있는 방법. 조용히 입을 열자 표정이 밝아지는 추기경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성수에 넣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호오….” “여신님의 성수를 마약이라 모독하고 폄하한 녀석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 140 회귀자 사용설명서 140화 판결(2) “여신님의 성수를 마약이라 모독하고 폄하한 녀석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오….” “온몸이 악마에게 오염되었으니 정화의 의식이 될 겁니다.” “아주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함부로 처형을 했다간 녀석의 몸 안에 있는 악마의 기운이 왕성을 오염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게 맞지요. 그렇게 하는 게 맞습니다! 역시 이기영 신도님입니다.” 대충 던져본 것치고는 무척 반응이 좋다. 중세 시대 마녀들이 당한 형벌 중 하나였던 돌을 묶어 바다에 빠뜨리는 것을 생각해 보면 비슷한 형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 저들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기야 하겠지만 일단 바젤 추기경은 기뻐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흐음. 괜찮은데.’ 이토 소우타의 경우에는 이설호와는 다르다. 이미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고 하지만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만큼 기회가 있을 때 처리하는 것이 옳다. 굳이 처형 날짜를 기다리거나 두고 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 바젤 추기경 같은 경우에는 나보다 더 급할 것이다. ‘보고 느낀 게 있으니까.’ 미래에 일어날 일을 생각해 보면 한 시라도 기다리기 싫은 것이 당연하다. “무, 무슨….” 당연하지만 이토 소우타는 무척이나 당황스럽다는 반응. 아까까지만 해도 이쪽을 바라보며 저주를 퍼붓던 모습이 거짓말 같다. 슬슬 현실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멍청이.’ 저주에 노출되었다고는 하지만 납작 엎드려도 모자랄 상황에 미쳐 날뛰는 것을 보면 자존심이라는 것은 어떨 때는 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커다란 목소리로 입을 여는 바젤 추기경을 본 녀석의 얼굴이 다시 한번 창백해졌다. “지금 당장 청동 조각상을 가져와라! 청동 조각상이다!” “네!” “안이 비어 있는 청동 조각상을 가져 와라! 성수로 가득 채운 청동 조각상이다!” “명을 받듭니다.” 추진력 하나는 굉장히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년에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신의 계시를 받을 사람으로 바젤 추기경을 선택하는 것이 옳았다는 생각을 해볼 정도. 나름대로 품위와 기품을 지키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내면에 불같은 성정이 있다. 물론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 바젤 추기경의 성정은 이쪽에 무척 긍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이단 심문관들은 바로 저 악마 숭배자를 바로 세워라.” “네.” “재판은 빠르게 진행하도록 하겠다. 아니 재판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악마 숭배자에게 죄의 여부를 묻는 것부터가 가당키나 한가. 단순한 처형식이 될 것이다.” “제길… 제길!” “지금에 와서 지은 죄를 후회한다 해도 이미 늦었다, 악마 숭배자. 신성기사단은 어지러운 장내를 정리하는 게 좋겠군.” “네. 알겠습니다.” “동상이 들어오기 위한 공간을 만들어 놓는 게 좋겠어. 그래. 이쪽이다. 이쪽이야!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은 모두 이 처형식의 참관인이 될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것은 물론 신을 배신한 악인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여신의 눈과 입이 되어 이 처형식을 증언할 것이다.” 보면 볼수록 은근슬쩍 이 양반이 마음에 든다. 바젤 추기경을 선택한 것은 단순히 우연이었지만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종류의 인간은 언젠가 다시 쓸 일이 있는 법. 만약 바젤 추기경이 승진이라도 하는 날에는 그와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는 나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다. ‘잘해줘야겠어.’ 신성한 포도주를 몇 병 정도 더 챙겨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전 법정이었던 현 처형장의 문이 열리기 시작.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커다란 동상이다. 커다란 날개를 가지고 있는 남자의 동상. 어떤 이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나 역시 어느 정도 신학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 했으니까. ‘라르켈.’ 베니고어 여신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천사다. 저런 동상 안에서 숨을 거둘 수 있는 게 나름대로 괜찮은 최후인지 최후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대충 보기에도 무척이나 아름답게 만들어진 동상은 성인 남성 두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기에도 충분해 보였다. 무슨 용도로 사용했던 동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등 뒤에 문이 있는 것을 보면 고문 도구로써도 사용했었던 모양. 어쩌면 단순히 물품들을 저장하기 위한 용도일지도 모른다. 물론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나와 별로 관계가 없는 이야기. 동상의 안쪽에 성수를 들이 붓고 있는 사제들의 모습이 조금 더 중요하다. 마치 미리 연습이라도 해본 것처럼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안쪽에 성수를 들이 붓는 모습이 묘하게 성스러워 보인다. 물론 이토 소우타에게도 그렇게 비치지는 않을 것이다. “미친… 이런 미친놈들! 미개한 놈들이! 쿨럭….” “…….” “마를린 영애! 카트린 공작부인! 쿨럭! 이 미친 짓을 두고만 보고 계실 겁니까? 제임스 대법관! 신성한 법정에서 쿨럭. 처형식이라니! 제정신입니까? 카스가노 유노! 정녕 지금 조국을 배신하는 것인가!” “무슨 조국 배신이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여기는 지구가 아니에요. 이토 소우타 씨. 우리는 지금 자유 도시 린델과 실리아의 소속되어 있는 제국민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요. 모두에게 공평한 이 사회는 죄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평등합니다.” “이기영 너… 쿨럭….” “그러게 왜 그러셨습니까. 어째서 악마와 결탁하신 겁니까.” “아니다. 나는 그런 게 아니야. 모두다 네놈이 꾸민 일이 아니냐….”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이토 소우타 씨. 본래 있잖습니까. 한순간에 잘못된 선택이 이런 결과를 만드는 겁니다. 여신님을 적으로 돌리지 않으셨어야죠.” 정확히 말하면 나를 적으로 돌렸으면 안 된다는 말. 아마 놈은 내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베니고어 여신님께서는 적을 용서하는 경우가 없으십니다. 오직 자신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신도들에게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너… 너!” “절대로 자신을 적대하는 이들을 용서하지 않으시죠.” “쿨럭… 너….” “회개하기에는 너무 멀리 오셨습니다, 이토 소우타 님. 좋은 곳으로 가실 거라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죄를 저질러왔으니 천국으로 가시기에는 무리가 있겠지요. 다음 생에는 부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카스가노 유노의 방 문 앞에서 당한 걸 되갚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녀석이 내 뒤통수를 때렸을 때는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다. “풉.” 녀석이 웃어줬던 것처럼 똑같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꽁꽁 묶여 있는 모습이 가슴 아프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인과응보, 악인으로서 딱 어울리는 최후라고 볼 수 있으리라. 바젤 추기경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엄숙하게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죄인이 간교한 혓바닥을 놀리지 못하도록 입을 막아라.” “네.” “이 미개한 놈들! 이거 놓지 못해? 이거 놓으란 말이다!” 저항하고는 있지만 꽁꽁 묶인 녀석이 뭔가를 할 수 있을 리가 만무. 결국에는 입에 재갈을 문 채로 주변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우리를 저주하고 있을 것이다. “읍! 읍!” 당연하지만 계시자 바젤 추기경은 저런 눈빛에 동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노를 보내며 조용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판결! 죄인 린델 테러 사건의 가해자 야마토 길드의 길드 마스터 이토 소우타는 자유 도시 린델 시민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줬을 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욕심으로 인해 수십 명의 사상자를 만들었다. 뿐만이 아니다. 제국 왕성에서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르며 신성 제국의 손님을 위협하고 암살하려는 죄를 저질렀다. 분쟁을 최소화하라는 제국 협정을 깬 제국의 죄인이다.” “…….” “그러나.” “…….” “죄인 이토 소우타의 처형을 판결하는 것은 앞선 이유가 아니다. 그는 악마와 내통해 신성 제국을 좀먹을 계획을 세웠으며 자유 도시 실리아에 불법적인 약물을 거래하고 노예매매나 장기밀매 같은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렀다. 신성한 법정에서 베니고어 여신님의 성수를 마약이라 모독했고 거짓된 증언으로 여신님과의 맹세를 배신했다.” “…….” “이단심문관의 심문에 불복한 것을 악마 숭배의 증거로 채택하여 천인공노할 죄인 이토 소우타를….” “…….” “사형에 처한다.” 바젤 추기경이 입을 다물자 주변에 있는 이들이 박수를 보내기 시작. 당연히 올바른 판결이다. 사지가 꽁꽁 묶인 채로 동상 위로 배달되는 이토 소우타는 최대한 발버둥치고 있었지만 애초에 다 죽어가는 마당에 달리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떻게든 저 동상 안으로 들어가기 싫은지 몸을 비틀고 있지만 녀석의 몸은 결국 어둡고 비좁은 문 속으로 구겨져 들어간다. “읍! 읍!” 풍덩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려오고 동상이 닫힌다. 몇 번 벽을 치는지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녀석은 저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후회하고 있을까 아니면 억울해 하고 있을까. 괜스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놈은 나를 죽이려고 했고 나는 그걸 되갚아 줬다. 그게 전부니까. 쿵- 최후를 직접 지켜볼 수는 없었지만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결과물. 쿵- 딱 좋다. 쿵- ‘물론 악인치고는 미적지근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는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다. 안쪽에서부터 울리는 쿵쿵거리는 소리가 사라진 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난 이후. 화려한 인생을 삶과는 다른 초라한 최후였다. 나는 주변인들과 대충 인사를 한 이후에 발걸음을 옮겼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의는 승리했습니다. 여신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따위의 형식적인 이야기. 몇몇은 기도를 드렸고 몇몇은 녀석의 악행에 대해 떠들어댔다. 이지혜와 차희라는 그들 나름대로 할 일이 있는 모양. 오늘만 날이 아니니 다른 이들과는 천천히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을 것이다. 살짝 정하얀의 손을 잡고 혼란스러운 저곳을 빠져나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걸어온 사람은 조금 의외라고 할 수 있었지만 소식 자체는 기분 좋은 소식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왕성에서는 그리폰을 내릴 것이라는군.” “그렇습니까? 듣기 좋은 소식이로군요.” “그렇다네, 젊은이. 뿐만이 아니라네. 바젤 추기경이 말한 대로 여러 가지 보상이 예정되어 있다는군. 대표적으로는 수만 골드의 금화와 아이템이 지급되겠지. 왕성에서는 자네만을 위한 방이 생길 것이고 온갖 사치품을 사용할 수 있을 게야. 어쩌면 작위로 수여될지도 모르고… 교황청에서 그대에서 직위를 내리는 것은 거의 확정된 사안이겠지.” “아주 좋습니다.” “기분이 좋은가? 아니 만족스러운가?” “물론입니다. 빅터하르트 님께서도 나쁜 소식은 아닐 겁니다. 영감님이 걱정하셨던 실리아와 린델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선에서 모든 일이 정리됐으니까요.” “전쟁이 문제가 아니야. 죄 없는 사람들이 죽….” “빅터하르트 님. 야마토 길드의 길드원은 죄 없는 이들이 아닙니다. 이토 소우타는 엄연히 범죄를 일으킨 범죄자이며 신성모독을 일으킨 것은 물론 악마 숭배 혐의도 있는 악질적인 인간입니다. 야마토 길드에 있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죠.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던 이들입니다. 말조심하셔야 됩니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만약 양보한 것이 저였다면 저는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자네 말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네. 내가 모르는 사정이 분명히 있겠지. 그렇지만 방식이 너무 지나쳐.” “아니, 빅터하르트 님은 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적이라는 생각이 들면 자비를 베풀지 말아야 합니다. 자비는 강자가 약자에게 가질 수 있는 감정이지 약자가 강자에게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자네를 약자로 보겠는가. 자네는 이미 약자가 아니야.” “제가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아마 빅터하르트 님은 평생 저를 이해할 수 없으실 겁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질세. 나는… 젊은이를 좋아할 수 없을 것 같군.” “그렇지만 사이좋게는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싱긋 웃으며 입을 열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빅터하르트가 보였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다. “어떻습니까? 함께 술이라도 한 잔 하시는 게. 굉장히 좋은 포도주를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일 없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슬쩍 자리를 뜨는 빅터하르트의 뒷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혹시나 이쪽을 적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는 했지만 눈에 적의는 없다. 황제파 측에서도 나는 나름 버릴 수 없는 인물일 테니 빅터하르트의 입장에서도 나와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영감의 눈은 왠지 모르게 이쪽을 짜증나게 만들긴 하지만…. “하얀아.” “네?” “같이 포도주나 마실까?” “좋, 좋아요!” 그런 사소한 것 따윈 상관없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까. 살짝 뒤를 바라보자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는 동상이 시야에 비쳤다. ‘고맙다, 새끼야.’ # 141 회귀자 사용설명서 141화 집으로(1)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은 아니었다. 실리아에 있는 대형 길드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졌으니 아마 밖에서는 난리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최근에 린델 일보에서도 그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편인 만큼 어느 주점을 가도 이토 소우타와 야마토 길드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왕성에 있는 야마토 길드원들은 이토 소우타가 죽었던 그날 모두 함께 처형당했다. 요조라와 검은백조, 붉은용병이 합류한 교황청의 군대가 녀석들을 그대로 밀어버렸고 실리아의 인원들은 그 어처구니없었던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물론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니다.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 이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었지만 어찌됐든 그것은 소수에 불과. 전투 능력이 있거나 이토 소우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이들은 대부분 그 목숨을 잃었다. 한 번 줄을 잘못 선 것치고는 꽤나 처참한 결과물. ‘쯧….’ 현장에 없었던 나는 야마토 길드의 최후를 보고서로만 접해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됐든 이쪽에 이득이라는 이야기다. 린델 테러 사건으로 인해 구겨진 차희라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고, 교황청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요조라 길드와 동맹을 정식으로 체결한 것 역시 커다란 성과. 검은백조, 붉은용병, 요조라 그리고 우리 파란까지 포함한 이 자유 도시 연맹은 신성 제국 내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처음이라고 했던가.’ 본래 자유 도시끼리 거래와 대화를 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밀접한 동맹을 맺은 것은 사례는 처음. 서로서로 양보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가능한 행보였다. 물론 그 동안 나오지 않았던 사례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 그럼 오빠가 사제님이 되는 건가요?” “아마 그렇게 되겠지.” 자유민 중에 교황청의 직위를 받은 또 다른 첫 번째 사례. 그게 바로 이기영이라는 거다. ‘아름답지.’ 바젤 추기경의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더 확실한 직위. 대주교급과 거의 동급이라고 할 수 있는 명예주교라는 직함은 사실 이쪽에게는 과분할 정도였다. 왕성의 직위와 비교한다면 대충 백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 그 어느 신전을 가도 나는 대우 받는다. 이곳에 존재하는 몇몇 신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베니고어 여신의 명예주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울림이라고 생각했다. 잠깐 동안 다른 생각을 한 뒤에 앞을 바라보자 뭐가 그리 불안한지 창백해진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대충 어떤 걸 걱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더 문제가 커지기 전에 해명하는 것이 옳으리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말 그대로 명예직일 뿐이고… 책임은 없고 권리만 있는 자리거든. 굳이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고 교황청에 들락날락거리지 않아도 되니까.” “아….” “물론 결혼이랑 연애도 가능하고.” “아!!!” 역시나 이쪽이 문제였던 것 같았다. 정하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라고 할 수 있으리라. 자유 도시에 있는 사제들과는 다르게 베니고어 여신을 섬기는 사제들에게 결혼은 금기지만 자유민 신분의 명예주교인 나에게도 통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신성한 포도주를 주기적으로 유통해야 되는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제한이 있는 건 아니니까. 공짜로 납품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쪽은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좋지.” “그, 그렇네요.” “신전과 가까워진다는 건 좋은 거야. 특히 신성 제국에서는….” “그럼 정확히 어떤 게 좋은 건가요?” “여러 가지가 있지. 일단 대표적으로는 대우받는다는 것.” “아.” “교황청의 대주교라는 건 직함으로만 따지만 네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직위가 높아. 교황, 추기경, 총대주교, 대주교라는 걸 생각하면 대충 이해가 되지? 물론 중간 중간에 이단심문관장이나 신성 기사단장 같은 직위가 있기는 하지만 교황청에서 무력집단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2순위에 불과하니까.” “그렇군요.” “응. 내가 얻은 명예주교라는 직위는 직위 상으로는 대주교의 위치와 동일하다고 생각해면 돼.” “엄청 높네요. 헤헤.” 특혜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이단심문관들과 신성 기사단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기본적으로 나에게 문제가 생기면 내가 이들을 자유롭게 부릴 수 있게 되어 있다. 물론 던전에 데려간다거나 개인적인 전쟁에 사용하는 것은 불가. 그것만 해도 어딘가. 혹시 모를 위험에 처했을 때 교황청의 무력 집단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내겐 무척이나 유리한 내용이다. ‘만약 추기경급으로 올라가게 된다면….’ 교황청에서 보유하고 있는 세 명의 템플러가 내 위험에 반응한다. 아직 내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지만 교황청이 자랑하는 괴물들인 만큼 적어도 차희라나 빅터하르트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 것이다. ‘어쩌면 조금 모자를 수도 있고.’ 어디까지나 자유민인 만큼 추기경급의 사제로 올라가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다. 당장 내가 대주교와 비슷한 직위를 얻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한 오 년 정도 열심히 비비다 보면 자리가 날 수도 있고 자리가 나면 좁은 문을 비집고 들어갈 수도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겉만 번지르르한 왕국의 귀족 작위보다는 몇 백 배는 이득. 진짜 귀족은 황제 쪽이 아니라 교황 측이라는 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황제파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될 일. 본진이랑 멀티 모두 신경 쓸 줄 알아야 되는 사람이 게임에서 이기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걔네들 한테도 많이 얻어먹었으니까.’ 일단 빅터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왕성에서는 내게 그리폰을 지급했다. 차희라 것과는 조금 다른 새하얀 그리폰. 명예주교라는 내 위치를 신경 써준 것 같은 느낌이기는 했다. 이곳에서도 종교는 순백의 상징이니까. 슬쩍 옆을 바라보니 성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크기의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차희라의 것보다는 작기는 하지만 날아다니기에는 무리가 없다. 괜스레 뿌듯해지는 느낌. 값비싼 외제차를 소유한 것만 같은 만족감이다. 사실 이 세계에서 그리폰의 가치가 높은 것을 생각해 보면 공장에서 양산되는 물건과 비교조차 할 수 없으리라. ‘크으….’ 여기 올 때 그리폰을 받아서 갈 것이라고는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두 마리나.’ 나머지 한 마리는 선물 받은 것 이라기보다는 빼앗아 온 것. 이토 소우타의 소유로 되어 있었던 그리폰이었다. ‘업어 오느라 노력했지.’ 공중으로 붕 떠버린 녀석의 재산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탐이 났던 물건이다. 대놓고 소유권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은근슬쩍 탐이 난다는 소문을 뿌리고 차희라에게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자 자연스럽게 이쪽의 소유로 넘어오게 됐다. 어째서 녀석을 업어왔는지에 대한 이유는 뻔할 뻔자. ‘우리 현성이 챙겨줘야지.’ 혼자서 고생한 우리 회귀자에게 주는 선물로는 딱 알맞다. 검은색의 우람한 녀석은 확실히 수컷이라는 느낌. 내 그리폰이 암컷이니 어쩌면 둘이 짝을 지어줘 사이좋은 가정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5년 후에는… 그리폰의 양산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전해져왔지만 시도는 하기 나름. 괜스레 행복해졌다. “아, 오빠. 바젤 추기경님 오셨어요.” “아… 응.” 이제 막 출발하려고 하던 찰나,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니 확실히 이쪽이 마음에 들긴 든 모양. 어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 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심지어 다른 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카트린 공작부인과 마를린 영애, 엘리제 백작 부인, 제시카 대주교, 헬레나 이단심문관장. 그밖에도 몇몇 이의 모습이 보였다. 이쪽에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당연히 바젤 추기경. 아쉽다는 표정이 눈에 띈다. “아직 출발하지 않으셨군요. 이기영 명예주교.” “하하하. 아직 용병여왕님이 오시지 않으셔서 말입니다.” “아….” “사실은 바젤 추기경님이 배웅해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허허허. 이기영 명예주교님은 언제나 넉살이 좋은 것 같습니다. 허허.”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나와 배웅해 주시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떠나시는데 당연히 배웅해 드려야지요. 이 늙은이가 너무 붙잡아 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아니요. 저도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조만간 또 찾아뵙겠습니다. 바젤 추기경님.” 이쪽의 손을 꽉 잡고 있는 바젤 추기경의 모습은 확실히 재미있다. 눈에 들어 있는 것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신뢰. 이 양반이 교황이 된다면 어쩌면 내가 추기경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나 역시 손을 꽉 잡게 된다. 물론 아쉬워하는 것은 바젤 추기경뿐만이 아니다. “이기영 님.” “아, 카트린 공작부인.” “조금 안 좋은 타이밍에 오신 것 같아 제가 다 죄송하네요. 사교 모임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신 것 같아서….” “아닙니다. 사실 전에는 조금 바쁘기는 했지만 요 며칠간은 정말로 재미있었습니다. 소개시켜주신 분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정말 즐거웠고요. 평생 만나볼 사람을 전부 다 만나본 것 같지 뭡니까. 모든 게 카트린 공작부인 덕분입니다.” 심지어 마를린 영애는 이상할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쟤는 또 왜 저래?’ 괜스레 그저께 봤던 카스가노 유노가 생각났다. 먼저 실리아로 떠나기 전에 오열했던 모습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들르겠다는 약속을 해서 겨우 진정시키기는 했지만 무척이나 고역이었다. 그녀의 입장도 이해가 가기는 간다. 계속해서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게 가슴 아픈 것이 당연. 그렇지만 카스가노 유노는 실리아에서 해줄 일이 있는 만큼 린델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흐으으윽… 흐으윽….” “마를린 영애가 많이 아쉬운 모양이네요. 호호.” “이, 이기영 님! 꼭, 꼭 다시 와주셔야 돼요. 끄윽….” “네. 마를린 영애. 당연히 찾아뵙겠습니다. 틈이 나는 대로 올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리제 백작부인도 꼭 다시 만나기로 하죠.” “네.” “제시카 대주교님과 헬레나 이단심문관장님도 꼭 다시 뵙도록 합시다.” “네. 이기영 명예주교님. 저희가 직접 린델로 찾아뵙도록 할게요.” “이거 영광이로군요.” 그밖에도 많은 사람이 와 있어 한 사람 한 사람 인사를 해주기가 힘들 지경. 주로 직위가 높은 사람을 중심으로 조지기는 했지만 그밖에도 중요한 사람이 무척 많다. 좋은 유통망을 가지고 있는 귀족도 있고 잠재 능력이 높아 장래가 촉망되는 기사도 있다. 버릴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 인적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건 확실히 어렵다. 순식간에 인기인이 된 듯한 기분이기는 했지만…. ‘조금 지치긴 하네.’ 그렇지만 티를 낼 수는 없다. “혹시 그리폰을 타는 게 처음이시면 교황청에서 따로 기사를 붙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바젤 추기경님. 이미 몇 번 하늘을 날아봤는데 괜찮은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여신님의 도움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이라면 그럴 만하지요.” “과찬입니다, 바젤 추기경님.” 슬슬 지루하다고 생각했을 때 즈음에 차희라가 빅터하르트와 함께 그리폰 이륙장에 도착했다. 저기도 여기저기 인사를 나누기는 마찬가지. 나를 슬쩍 바라본 이후에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슬슬 출발하지, 자기?” “응. 누나. 다들 배웅에 감사드립니다.” “교황청에는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 이기영 명예주교.” “하하하. 마지막까지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리폰의 등에 살짝 올라타자 아니나 다를까 정하얀이 내 뒤에 자리를 잡았다. 차희라는 본인의 그리폰에 몸을 실었고 이토 소우타의 그리폰 위에는 붉은용병 길드의 간부 한 명이 올라탔다. 린델까지 대리운전을 해줄 모양. 살짝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는 그리폰이 천천히 날갯짓을 하기 시작. ‘집으로 돌아간다.’ 나를 둘러싼 배경들이 뒤바뀌니 집이라고 생각한 장소도 바뀐다. 아쉽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은 변화. 괜스레 집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어졌다. 아니, 그것보다는 다양한 선물에 반응할 우리 회귀자의 반응이 궁금했다. ‘현성아! 형 간다!’ # 142 회귀자 사용설명서 142화 집으로(2) 집이라는 건 좋다. 사태가 해결된 이후에 왕성에서 지내는 것도 즐겁기는 했지만 내 방과 내 집이 더 편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 물론 닥쳐올 업무 스트레스가 두렵기는 했지만 아마 지금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미영 팀장과 나름대로 유능하다고 할 수 있는 행정팀의 박중기, 박덕구를 연모하는 우리 황정연이 나 대신 열심히 갈렸을 거라고 생각하니 괜스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모두가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지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 김현성과 박덕구, 선희영과 김예리 꼬맹이까지. 일단은 우리 파티원이 가장 생각나기는 한다. 항상 생각했었는데 은근히 정이든 모양. 오랜만에 단체로 나들이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던전이나 들어가 볼까.’ 단체로 실리아 여행을 하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물론 시간을 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잠깐의 여유를 갖는 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나는 하얀색 그리폰의 이름을 화이트폴이라고 이름 지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얀색이니 화이트 폴, 딱 적당한 이름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폰 위에 올라타는 것은 여전히 불편하기는 했지만 이쪽을 배려하는 것처럼 보이는 녀석의 모습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작은 산 하나를 넘으니 시야에 비친 것은 자유 도시 린델. 작게 보였던 린델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보인다. ‘도착했네.’ 린델로 돌아온 것이다. 물론 도착한 장소는 붉은용병 길드의 착륙장. 아직 파란 길드에는 그리폰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정하얀은 아쉬운 듯이 내 등에 떨어져 그리폰에서 내렸고 나는 화이트 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쿠룩.” 확실히 귀여운 놈이다. “잠깐 맡겨도 괜찮지, 누나?” “물론.” “다른 그리폰도 잠깐 맡아줘. 아직 우리 길드에는 이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어려운 일은 아니야, 자기. 그것보다 하룻밤 쉬었다 가는 건 어때?” “아냐 됐어. 길드부터 먼저 들려야지.” “그래? 그거 아쉽네.” “내일이나 모레에 한번 들릴게. 여유가 있으면… 해야 될 이야기도 조금 있으니까.” 살짝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별다른 생각은 없는 모양. 말은 저렇게 하지만 차희라도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길드를 오래 비운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나와 정하얀은 붉은용병 길드를 나섰다. 짧다고 하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긴 시간이지만 역시 린델은 평소와 같다. 광장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도 여전했고 파티원을 구하는 사람들 역시 여전하다. 사냥을 나가려 분주한 이들도 보였고 테라스에 모여 수다를 떠는 사람들도 보였다. ‘좋네.’ 묘하게 익숙한 인형이 시야에 비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새끼….’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녀석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익숙한 것은 당연지사. 심지어 그 옆에 있는 여자의 뒷모습도 익숙하다.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 모습은 분명히 우리 길드의 마법사.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해맑게 웃고 있는 옆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행복한 모양이다. “아!” 옆에 있는 정하얀도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는지 깜짝 놀랐다는 목소리로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리라. 저 둘이 벌써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옆에서 바라보기에 굉장히 친근해 보였다. 입꼬리를 올리며 녀석의 이름을 불러 보는 것이 당연.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는 놈의 얼굴이 보였다. “덕구야!” “어?” 뒤를 돌아본 녀석의 얼굴이 점점 밝아지는 것이 보인다. 무슨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반응. 관 뚜껑을 발로 차고 나온 사람을 봐도 저런 표정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평상시와 같은 얼굴이 활짝 펴지는 것은 순식간. 그 이후에는 전체적으로 얼굴이 일그러진다. 기분이 나쁘다거나 분노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울음을 참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도 꽤나 필사적으로. “형, 형님!” 기세는 마치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 이쪽을 향해 무식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마치 황소나 코뿔소가 돌격해 오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나 반가운지 인정사정없이 끌어안을 기세에 살짝 몸을 피하는 게 좋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 역시도 놈이 반갑다. 결국에는 내 쪽에서 먼저 좋지 않은 선택을 해버렸다. “형니임!” 살짝 팔을 벌리자 조금 더 감동한 것 같은 느낌. 녀석이 이쪽을 꽉 껴안자 갑작스레 숨이 턱 막혀왔다. ‘시바… 괜히 껴안았나.’ 허리가 부러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 그렇지만 나 역시 덕구 녀석의 등을 두드렸다. 사나이들의 뜨거운 포옹을 주변인은 무척이나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지만 박덕구는 별로 의식하지 않는 모양. 심지어는 나를 붙잡고 빙글빙글 돌고 있다. ‘이 새끼는….’ 결국에는 한참이나 광장을 빙글 빙글 돈 이후에야 녀석은 나에게 입을 열었다. “형님! 아니, 왔으면 왔다고 말이라도 좀 해주지….” “푸하하핫. 아마 다른 사람은 다 알고 있었을 거다. 그리폰 날아오는 거 못 봤어?” “아! 그럼 그 하얀색 그리폰에 타고 있던 게 형님이었소?” “응.” “우리 형님 출세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던 것 같은데… 크으…. 그것보다 뭐 힘든 일 있었소? 아주 얼굴이 반쪽이 된 것 같소.” “그런 거 아니다. 오히려 최근에는 조금 더 편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형님이 무슨 그 뭐시다냐…. 그 누명을 썼다고 신문에서 그러던데 가슴이 얼마나 철렁했는지 아쇼? 이제 그건 다 해결된 거요?” “물론. 애초에 밝혀질 이야기였어. 별거 아니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편지 받아서 알고 있었던 것 아니었어?” “아니, 물론 대충 알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거기 상황을 모르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있나. 갈 수만 있었다면 가고 싶었는데 그때마다 편지가 오니까… 아, 그냥 무사하겠구나 싶었지. 신경 쓰여서 밤에는 잠도 못 잤다니까.” “푸하하핫.” “거, 웃을 일이 아니요. 형님. 진짜로. 말은 안 해서 그렇지 현성 씨도 달려가려고 했다니까. 아, 그러고 보니 누님을 깜빡했구만. 잘 지냈소?” 이건 조금 기쁜 소식이다. “네. 덕구 오빠. 저, 저희는 잘 지냈어요.” “아니지. 이럴게 아니라 빨리 길드로 돌아가야지. 형님이 돌아왔다는 걸 알면 모두 다 기뻐할 거요.” “그보다 너는 정연 씨랑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살짝 황정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자 박덕구 녀석이 우물쭈물거리기 시작했다. 강원도 연애 박사치고는 묘하게 부끄러워하고 있는 듯한 느낌. 황정연도 고개를 숙인 채로 얼굴을 붉히는 걸 보니 내가 없는 동안 둘 사이에 뭔가 진전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 그보다 빨리 길드로 돌아가요. 기영 씨. 오랜만에 보니까 저도 좋네요.” “큼. 빨리 갑시다.” 왠지 모르게 말을 돌리려고 하는 모습은 조금 귀여워 보였다. 덕분에 길드로 돌아가는 길이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정하얀과 황정연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물론 이쪽은 박덕구와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은 길드에 관련된 이야기. “희영 씨랑 예리는 잘 지냈어?” “희영 누님은 매일 똑같은 것 같고… 예리 고 꼬맹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소.” “응?” “원래 그 나이 때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지 않소. 사실 나는 매일 봐서 잘 모르겠는데 길드에 다른 사람들은 엄청 많이 컸다 합디다. 아, 그리고 엄청 빠르게 강해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아마 보면 깜짝 놀랄 거요.” “아아아….” “별로 궁금하지 않은가보오 형님은.” “아냐. 예리의 성장이 빠를 거라는 건 대충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너는 어떤데, 덕구야?” 말을 하면서 대충 마음의 눈으로 박덕구를 살펴보니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능력치가 시야에 비쳤다. 그동안 괴물들을 많이 봐서 인상적이지는 않지만 착실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 같은 느낌의 능력치. [플레이어 박덕구의 상태창과 재능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박덕구] [칭호 - 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 - 23] [성향 - 단순무식한 열정가] [직업 - 강철방패병 - 희귀 등급] [능력치] [근력 - 67/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민첩 - 34/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체력 - 70/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지력 - 27/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내구 - 71/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행운 - 23/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마력 - 22/성장한계치 일반 이상] [총평 - 근력과 내구와 체력이 높아 괜찮은 성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70 스탯을 넘어선 내구 능력치와 체력 능력치가 눈에 띕니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마력이 아쉽기는 하지만 열심히 노력한다면 상위 플레이어로 올라갈 수 있을 겁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도 여전히 마력이 너무 아쉽네요.] ‘내구 능력치가 70….’ 나쁘지 않은 수치다. 아니 훌륭하다. 애초에 60의 능력치에 다다르면 성장이 쉽지 않다는 걸 감안해 본다면 주요 스탯 70은 절대로 낮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했구나.’ 녀석 나름대로도 필사적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주변에 있는 다른 천재들을 따라가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물론 그래도 따라가기에는 무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타고난 재능의 한계치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왠지 이 돼지는 해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뭐… 그렇게 대단하지는… 그냥 다른 사람 하는 만큼만 열심히 했지.” “그래?” “매일 하던 훈련이요. 능력치가 오르긴 올랐고 여기저기 많이 배우려고 그때 봤던 선배들도 찾아가고 해 봤지만 뭐 그렇게 성장한 것 같지는 않소.” “어느 정도인데?” “내구랑 체력은 70이 넘었고 근력은 아직 67이요. 마력 능력치는 죽어라 안 오르고….” “잘하고 있다.” “응?” “잘하고 있으니까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는 거야.” “아….” “굳이 다른 사람이랑 비교할 필요 없다, 덕구야. 너는 너대로 열심히 하면 반드시 보답 받는 날이 올 거다. 고민하는 건 좋지만 너무 깊게는 파고들지 말고. 정 힘들면 따로 찾아와. 우리랑 같이 시작한 다른 자유민의 능력치나, 비전투직군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보면 네 성장이 얼마나 빠른지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형, 형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라는 명언도 있으니까.” 내가 말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양심이 찔리긴 찔린다. 노력이 인간의 기대를 너무나도 쉽게 배신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단순한 녀석은 뭔가 감명 받은 것 같은 느낌. 또다시 감동의 도가니에서 녀석이 헤엄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내가 지시한 일은 전부다 처리되어 있어?” “아아아. 아마 그럴 거요. 사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형님이 뽑은 김미영이라는 사람이 본인의 업무 외에도 다른 업무까지 컨트롤한다는 거 아니겠소.” “그거 다행이네.” “뭐, 물론 형님이 직접 확인해야겠지만… 우리 형씨도 문제가 없는 것 같아 보였으니까.” “다른 특이사항은?” “아! 이걸 이야기 안 한 것 같은데…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는 거 아니요?” “새로운 사람?” “우리 형씨가 직접 데리고 온 사람 같던데 파란에 입단한 지 좀 지난 것 같소. 착하고 친절한 양반인데 강하기까지하고…. 아! 형님이 없는 동안 행정 총괄 책임자로 길드를 정리해 주기도 했고… 우리 형씨랑 얼마나 궁합이 잘 맞는지 매일 붙어 다닌다니까.” “…….” 왠지 모르게 조금 불안해졌다. “또?”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는 잘 모르겠는데… 설명하자면 막 문무를 겸비한다는 느낌이요. 똑똑하기도 하고 싸움도 잘하니까.” 내 빈자리를 누군가가 채웠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새로운 사람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김현성과 친하다는 말에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시바… 현성아.’ 불안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온갖 인재를 알고 있는 김현성이 파란으로 인재들을 끌어 들일 거라는 것은 이미 예상했지만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빠르다. 그중에는 1회 차에 잘 알고 지내던 사람도 있을 것이 분명. 나는 알지 못하는 유대를 쌓아온 사람들이 등장할 수도 있다. 김현성의 최측근인 나로서는 조금 불안한 이야기라는 거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저 멀리서부터 김현성이 보였다. 옆에는 한 명을 대동한 채로 말이다. 창을 들고 있는 인형과 무척이나 활발한 대화를 하고 있는 중, 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웃고 있는 김현성이 시야에 비쳤다. “아… 저기 형씨가 마중 나온 모양이요. 형님.” 박덕구가 열심히 옆에서 입을 열었지만 귀에 잘 들어올 리가 없다. 어째서인지는 뻔할 뻔자. 누가 봐도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 김현성 때문이었다. ‘형한테는 그렇게 웃어준 적 없었잖아. 이 새끼야….’ # 143 회귀자 사용설명서 143화 집으로(3) 엄청나게 섭섭하게 느껴진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회사에서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랑하는 아내가 딴 놈과 노닥거리는 걸 보는 것 같은 기분. 심지어는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있었던 채라면 나름 상황이 맞을 수도 있으리라. ‘형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무려 그리폰을 뽑아줬다. 물론 김현성이라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스스로 얻을 수 있었겠지만 그걸 내가 조금 앞당겨 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당연하지만 가져온 것은 이것뿐 만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리폰이 메인 메뉴이기는 하지만 그밖에도 준비한 선물이 많다. 현재 붉은용병의 길드원이 가져오는 물품은 작은 방 하나 정도는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아이템을 비롯한 온갖 재화. 모두 내 개인 소유로 할 수 있었던 것들이지만 우리 회귀자를 위해 고개를 끄덕이며 내놓기로 결심한 것들이다. 나에게 보여주지 않은 환한 미소를 보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리폰을 주고 싶은 마음이 순식간에 달아난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 새끼….’ 이쪽을 바라보는 김현성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반가운지 미소를 보이고는 있지만 이미 진실된 미소를 봐버린 뒤. 그래도 일단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리라. “기영 씨.” “아. 현성 씨.” 박덕구처럼 헐레벌떡 뛰어오지는 않았지만 조금 빠른 발걸음을 옮긴 뒤에 이쪽을 꽉 안아주는 녀석을 보니 그래도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은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 있는 인형은 괜스레 신경 쓰였다. “그리폰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오셨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미리 나와 있길 잘했군요.” “이럴 필요까지는 없으셨는데.” “아니요. 당연히 해야 될 일입니다. 기영 씨도 고생 많이 하셨을 테니까요. 여러 가지 일에 휘말렸다는 사실은 이미 전해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정말 잘 이겨내셨습니다.” “하하.” “야마토 길드의 이토 소우타는 어떻게 됐습니까?” “들으신 대로 처형당했습니다. 여러 가지 혐의가 씌어져 있는 상태여서 빠져나올 수 있는 구멍이 없었을 겁니다. 사실 저로서도 사형은 면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바젤 추기경님의 뜻이 워낙 완강하더군요.” “그렇군요.” “제가 정확히 모르는 사정이 있는 모양입니다. 단순히 여신님을 모독한 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기야 있는 것 같았지만 정확히는….” 별로 씁쓸해하는 반응은 아니다. 오히려 이토 소우타가 죽어서 다행이라는 것 같은 느낌. 김현성의 반응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토 소우타가 미래에 그다지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놈이니까.’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자기 잘난 맛에 행동하는 녀석이었고 린델을 선제공격하기도 했었다. 물론 내가 바젤 추기경에게 보여준 것처럼 악마 숭배자가 되어 신성 제국을 뒤집을 음모를 꾸미지는 않았겠지만 미래의 녀석은 적어도 김현성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을 것이다. ‘잘 죽였네.’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격. 은근슬쩍 김현성에게 이토 소우타에 대해 물어보니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이토 소우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예. 아무래도 이야기를 하다 보면 타 도시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니까요.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공공연연하게 퍼져 있던 소문이었으니 벌을 받은 걸로 봐도 되는 거겠죠. 기영 씨가 죄책감을 느끼실 일은 아닙니다.” ‘형은 그런 거 안 느낀다, 현성아.’ 뭐 신성 제국의 뒤통수를 치거나 린델과 실리아와의 전쟁의 시발점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놈의 죽음으로 인해 회귀자가 그리고 있는 미래가 조금 더 아름다워졌다는 것. 1회 차에 어떤 개짓거리를 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한 사안은 아니다. “현성 씨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야 늘 똑같았습니다. 일단은 길드를 안정시켜야 했으니까요. 사실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을 때는 기영 씨가 맡기신 일이 대부분 끝난 상태여서…… 만약 기영 씨가 신성 제국으로 오지 않아도 된다는 편지를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분명히 신성 제국으로 향했을 겁니다.” “하하하. 걱정하실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조금 순조로웠으니까. 혹시 들으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교황청으로부터 직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네?” “물론 자유민의 신분을 보장해 주는 종류의 직위입니다. 바젤 추기경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셔서 말입니다. 명예주교라는 과분한 직책을 맡게 됐습니다.” “아. 그렇군요.” “아마 자세하게는 들어보신 적이 없으실 겁니다. 교황청 외부에 있는 사람에게 직위를 주는 것이 무척 오랜만이라고 들었으니까요. 정확히는 254년도 더 된 일이라 합니다. 직급 자체는 대주교님들과 동급이고 여러 가지 혜택도 있어서… 저희 길드에게도 도움이 될 겁니다.” “아!” 아무래도 1회 차에서는 명예주교라는 신분을 얻은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아니면 김현성이 그쪽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만 직급이 대주교와 동급이라는 말이 나오자 현성이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당연한 반응이다. 이단심문관과 신성 기사단을 부리는 혜택 이외에도 신전에 관련된 혜택이 무척 많았으니까. ‘형이야, 이 자식아. 형 능력자라고.’ “이런 것까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상상 이상이로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게 끝일 것 같지?’ 슬슬 선물 보따리를 풀어볼까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김현성이 급하게 말을 걸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뭔가 자랑이라도 하려는 것만 같은 모양새.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감이 온다. 아마 옆에 있는 사람을 소개하려고 하는 듯한 느낌. 녀석 나름대로는 성과라고 할 수도 있으니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가지만 괜스레 씁쓸해졌다. “사실 저희도 조금 달라진 게 있습니다. 덕구 씨에게 이미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기영 씨가 없는 동안 새로운 분을 영입했습니다.” “아… 이분이시군요.” “네. 이번에 파란에 함께하게 된 조혜진 양이라고 합니다.” 김현성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은 긴 창을 들고 있는 여자. 조금 큰 키에 묶어서 뒤로 넘긴 머리는 왠지 모르게 옛날 무사를 떠올리게 했다. 뭔가 군인이나 기사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면 어울릴 것 같은 느낌. 이목구비가 뚜렷하지만 왠지 모르게 딱딱해 보이는 성격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그럴 것 같고….’ “조혜진입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이기영 부길드 마스터님.” “아아아. 조혜진 씨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네. 듣던 그대로이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마음의 눈으로 녀석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곧바로 녀석의 정보가 내게 쏟아져 내렸다. [이름 - 조혜진] [칭호 - 캐슬락의 고집불통] [나이 - 25] [성향 - 고지식한 원칙주의자] [직업 - 창술전문가 - 영웅 등급] [직업효과 - 기초 창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 - 중급 창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 - 고급 창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 - 고급 마력 운용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 - 75/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민첩 - 82/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체력 - 87/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지력 - 51/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내구 - 71/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행운 - 50/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마력 - 60/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특성 - 노력하는 자 - 전설 등급] [총평 - 눈에 띄는 것은 없지만 성장한계치 이전에 그녀는 무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향과 특성의 영향으로 본인이 가지고 있는 한계치보다 더욱더 성장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플레이어 이기영이 지금까지 봐왔던 천재들과는 다른 유형의 천재입니다.] ‘눈에 띄는 게 없기는 개뿔….’ 린델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이 정도의 능력치와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본 것은 처음. 차희라 같은 이들을 제외한다면 이정도로 가능성 있는 이는 본 적도 없다. 물론 전설 이상의 능력치는 없었지만 밸런스가 엄청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총평이 평가한 그대로. 그냥 대충 봐도 강하리라는 건 이미 알 수 있었다. 모든 능력치가 영웅 이상이거나 영웅 이하, 심지어 저 능력치로 행정에도 능하다고 하니 어떻게 본다면 반칙인 셈. “린델에서는 처음… 뵙는 것 같군요. 물론 제가 이 넓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아. 네. 기영 씨 말이 맞습니다. 조혜진 씨는 린델이 아니라 캐슬락에서 활동하시던 분입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전에 있는 길드를 탈퇴하게 됐고 린델로 와서 파란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캐슬락 말입니까?” “네. 캐슬락입니다.” 캐슬락은 자유민이 자리 잡은 자유 도시가 아니다. 신성 제국의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영토. 주변에 쓸 만한 사냥터나 던전이 많아 몇몇 자유민이 정착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조금 더 남쪽에 있고 몬스터 숲과 가깝다는 걸 생각해 보면 확실히 자리 잡기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 ‘물론.’ 단점도 분명히 존재하기는 한다. 일단 자유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세금을 조금 더 많이 납부해야 한다는 것도 그랬고 여러 가지 제한되는 사항이 실제로도 많았다. 자유민은 제국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린델 안에서의 이야기. 귀족이 다스리는 도시에 정착한다고 가정했을 때 자유민으로서 포기해야 하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마를린 영애가 캐슬락 출신이었나.’ 내 기억이 맞을 것이다. 뭐, 사실 저 여자가 캐슬락에서 왔는지 도시락에서 왔는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김현성이 조혜진을 1회 차에서 이미 알고 지낸 것처럼 보인다는 것과 실제로도 상당히 신뢰한다는 것. 칭호는 캐슬락의 고집불통, 성향은 고지식한 원칙주의자. 어딜 봐도 나랑 잘 맞을 것 같지가 않다. 대놓고 융통성이 없을 것 같은 느낌. 원칙은 개나 주라는 심정으로 활동하는 나와 궁합이 좋을 리가 없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눈치 없는 인간은 그녀에 대한 칭찬을 쏟아내기에 여념이 없는 중. 왠지 모르게 초조해진다. ‘얘는 진짜 안 맞을 것 같은데….’ 단순한 예상이 아니라 확신이다. 물론 단순히 성향을 보고 추측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런 유형의 인간은 나와 잘 맞지 않는다고 내기를 할 수도 있다. “사실 기영 씨가 맡기신 일의 일부분도 혜진 씨가 도움을 주셨습니다.” “아… 네. 그렇군요. 양이 조금 많았을 텐데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뇨.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정리해 주신 서류대로 처리했을 뿐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로 유능하고 착한 사람입니다. 아마 기영 씨도 함께 대화를 나눠보시면 제 말을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렇군요.” “또 상당한 무력도 가지고 있고요. 길드의 요직에 곧바로 임명하고 싶었지만 기영 씨의 동의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해 일단은 보류 중입니다.” “아….” 그나마 이건 고맙다. 사실 이쪽에서는 거부할 사항도 아니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적어도 김현성이 나를 존중했다는 뜻이 되는 거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아닙니다. 아직은 제안이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그나마 저쪽에서 거절하는 그림은 조금 아름답다. “이럴 게 아니라 빨리 길드 하우스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예리와 희영 씨도 일이 끝나면 곧바로 올 테니까요.” “네.” “네. 마스터.” 누가 봐도 지금의 김현성은 기존에 있던 친구에게 새 친구를 소개시켜줘야겠다는 생각에 들뜬 모습. 자기 나름대로는 우리 둘의 시너지를 바라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대충 앞으로의 일을 예상할 수 있었다. 진짜 충신이 등장하면서 왠지 모르게 내가 간신의 포지션으로 물러날 것만 같은 느낌. 회귀자 옆에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남고 싶은 나에게는 위기라면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현성아, 형은 널 믿는다.’ # 144 회귀자 사용설명서 144화 집으로(4) 길드 하우스로 돌아가는 도중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대부분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무엇을 했는지 밀린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기는 했지만 즐겁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 정하얀은 처음에 조혜진을 경계하는 듯 살펴보기는 했지만 이쪽과 접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금방 관심을 꺼버렸다. 그저.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구나.’ 정도의 생각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조금은 정하얀다운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박덕구 같은 경우에는 다르다. 나를 볼 때까지는 아닌 것 같기는 했지만 조혜진에게 무척이나 긍정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녀석과 가까워지기라도 한 모양인지 무척이나 친근하게 달라붙고 있는 모습은 가관. 물론 대화 내용은 나쁘지 않았다. “거, 혜진 씨.” “응?” “우리 형님 어떻소?” “듣던 대로 현명하신 분 같습니다. 사실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일을 이렇게 잘 정리한 사람이 누구인지 항상 궁금했었는데… 상상했던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기영 씨가 없었다면 아마 길드가 자리 잡기까지 시간이 더 오래 걸렸을 겁니다.” “네. 마스터. 확실히…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양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제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는군요. 혼자만의 힘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입니다. 파란에는 유능한 사람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대충 이런 형식의 대화. 오랜만에 무척 즐거워 보이는 김현성과 재잘재잘 떠드는 박덕구를 보니 확실히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긴 든다.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하나 더 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가슴이 조금 아프긴 하지만 김현성이 기분 좋아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조혜진은 지금도 성장 중이다. 아직까지도 포텐이 터진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단순한 잠재능력으로 봤을 때는 미래에는 더욱더 강해질 여지가 많다. 특성 ‘노력하는 자’라는 것을 보면 이후에는 어쩌면 길드 마스터급의 강자로 성장할지도 모르는 일. 1회 차에 잘 알고 지냈다는 것을 가정해 본다면 녀석이 조혜진에게 호감을 갖는 이유도 당연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취해야 할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밀어내야 하는가, 받아 들여야 하는가. 합리적인 것은 당연히 후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길드에 도움이 된다. 앞으로 김현성 왕국이 점점 더 커질 거라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유능한 인간은 반드시 쓸 때가 있다. 문무 겸비, 그중에서도 무력과 잠재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이쪽의 영향력이 적어지는 것에 대한 것. 그전까지 김현성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이런 라이벌이 등장하는 것이 별로 달갑지만은 않다. ‘김현성이 여자에 미치는 건 왠지 상상하기 어렵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조혜진 같은 1회 차의 동료들이 계속해서 들어온다면 우리 현성이가 기존의 파티를 소홀히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는 한다. 상대적으로 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나와 덕구 같은 경우에는 공중에 붕 떠버릴 수도 있으니까. 물론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보면 권력의 양분화는 필요하다. 너무 내 쪽으로만 권력이 쏠리는 것은 지양해야 될 일. 그렇지만 시기가 조금 빠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생기는 것은 김현성 왕국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후에도 늦지 않는다. 지금은 빠른 성장이 필요한 시기, 원칙이니 뭐니 따지고 들어갈 여유가 없다. 물론 조혜진이 내게 태클을 걸 것이라는 것도 모두 내 뇌 내 망상이다. 항상 최악을 생각하는 성격상 이것저것 경우의 수를 둔 것뿐이었지만 여태껏 본 적 없는 김현성의 웃음은 괜스레 신경 쓰였다. ‘일단은 하던 대로 하자.’ 걱정을 미리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 일단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가 우리 쪽에 들어왔고 그걸 기뻐하는 게 옳다.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자 천천히 파란의 길드 하우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 정도 환영을 받을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벌써부터 무척이나 분주한 모습. 밖에 나와 있는 이들도 눈에 보이고 길드 직원들은 뭔가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뭐지?’ 그게 파티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순식간.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선희영과 김예리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이상희까지 이쪽으로 달려와 차례대로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잘 다녀왔어….” “예리도 오랜만이다.” 별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조용히 내 쪽을 바라보며 인사하는 꼬맹이. “기영 씨! 드디어 오셨군요.” “네. 희영 씨. 오랜만입니다.” 조금은 밝게 인사를 건네고 있는 선희영. “수고하셨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감사합니다. 이상희 님.” 길드의 고문으로서 인사를 건네는 이상희까지 말이다. 그밖에도 김미영 팀장도 이쪽에 반듯하게 인사를 건네 왔고 행정팀의 박중기도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어왔다. 대체적인 반응을 보니 바쁜 시기를 무사히 넘겨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모양. 나에게 인사를 한 뒤에는 모두 정하얀에게 한 마디씩 건네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분위기가 시끌벅적해졌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길드 마당에는 음식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누가 준비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하리라. 아마 그리폰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지시했음이 틀림없을 터. ‘현성아….’ 이 자식은 밀고 당기기가 뭔지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 물론 모든 섭섭함이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환영파티를 하는 데 기분 나쁜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정말로 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 표정이 뭘 말하고 있는지 아는 모양인지 김현성이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기영 씨.” “환영합니다, 부 길드 마스터.”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짧은 파티가 시작됐다. 모든 길드 직원이 즐길 수 있는 파티였던 것은 당연지사. 물론 준비도 뒤처리도 저들이 하게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즐거워 보였다. 적당히 술에 취한 이들도 많이 생겼고 모두가 떠들썩하게 즐기는 축제. 생각해 보면 파란으로 온 뒤에 처음 즐기는 여유였다. 정하얀은 여전히 이쪽에 찰싹 달라붙어서 주스를 홀짝 거리고 있었고 박덕구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음식들을 입에 쑤셔 넣고 있다. 당연하지만 녀석의 옆에는 황정연이 자리하는 중. 둘이 조금 친해진 모양인지 마치 연인 같은 모습으로 주변을 휩쓸고 다니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취한 사람들이 하나둘 등장하는 것은 당연지사. 길드 직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끄으윽….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사실은 조금 부길드 마스터님을 원망할 정도였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미영 씨. 아! 이제는 김미영 팀장님이라고 불러야 되겠군요.” “네?” “사실 미루고 미뤄왔을 뿐입니다. 김미영 팀장님이 얼마나 고생하셨는지는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연봉 협상은 내일 마저 할 수 있도록 하지요.” “아!!” “조금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일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아이들에게 가는 지원도 조금 늘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 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생했던 행정팀을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물론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김미영 팀장은 곧바로 고속승진. 옆에서 부러운 듯 바라보는 박중기를 보니 녀석도 어느 정도 챙겨주기는 해야 될 것 같았다. “당연한 일입니다. 아. 그것보다는 조혜진 씨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네. 조금 딱딱하시기는 했지만… 좋으신 분이에요.” ‘평판이 좋네.’ 아무래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는 모양.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옆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이거 한 번 먹어보쇼! 형님!” “하얀 씨도 한 번 드셔보세요.” 선희영과 박덕구가 이쪽으로 다가온 것. 자그마한 접시에 음식을 들고 온 것을 보니 아마도 맛있다고 가져온 것이리라. “정말로 맛있어요, 기영 씨. 근처 식당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더….” “아, 그렇습니까?” “하얀 씨도 한 번 드셔보세요.” “네. 감, 감사합니다.” “정말로 맛이 끝내 준다니까. 깜짝 놀랐소. 정말로!” 녀석에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간단한 스튜였다. 지금까지 나왔던 화려한 음식과는 조금 다른 모습. 파란에서 식당을 책임지고 있는 셰프가 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뭔가 투박하다. 무심한 듯 두툼하게 썰린 소고기가 맛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원정 중에 간단히 먹을 음식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자신할 수 있다.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 “빨리 먹어보쇼! 아 빨리!” “알겠다.” 박덕구의 성화에 이기지 못해 녀석을 한 숟가락 가져가는 순간 뭔가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색다른 맛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들고 일어섰다. “맛있지 않소?” ‘맛있어.’ 박덕구의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내 표정이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눈이 동그랗게 떠져 있을 테니까. “누가 만든 거야?” “우리 길드 마스터 형씨랑 이상희 님이 만들었소. 간이 주방으로 가더니 쓱싹쓱싹 하고 만들었는데 이게 웬걸! 입에서 살살 녹는 거 아니겠소? 업진살 살살 녹는다!” “어?” “살살 녹는다. 살살 녹아!” “진짜 맛있네. 진짜로.” “누님은 좀 어떻소?” “맛, 맛있어요…. 덕, 덕구 오빠. 이게… 진짜로 맛있네요.” 정하얀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패배감이 깃들여 있다. “누님도 요리 좀 하는 거 아니요?” “네? 네? 아… 그… 네! 조금 배운 게 있기는 있는데….” 누가 봐도 자신 없어 보이는 표정과 행동. 마지못해 간이 주방으로 향하기는 하지만 표정은 마치 동상 안으로 들어가는 이토 소우타의 얼굴과 흡사해 보인다. 단두대에 올라가는 사형수의 느낌. 정하얀이 오늘 만든 요리는 굳이 손을 대지 않는 게 좋아 보였다. 모두들 삼삼오오 짝을 이루며 각자의 방식으로 파티를 즐기고 있는 모습. 눈에 띄는 것은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조혜진이었다. 조용히 우물우물 음식을 씹고 있는 모습. 어느 정도 이야기는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겼다. 단순한 성향 말고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궁금했으니까. 마침 정하얀도 무한도전을 하고 있는 도중이니 딱 알맞은 타이밍이리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김미영 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발걸음을 옮기자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조혜진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은 조금 어떻습니까?” “좋은 곳인 것 같습니다. 들려오는 소문으로 대충 예상하기는 했지만 제 생각보다 더욱더 말입니다.” “아.” “특히 부 길드 마스터가 들어온 지금은 분위기가 조금 더 좋아 보이더군요.” “매번 이렇지는 않습니다. 저도 이런 시간을 가진 건 처음이라….” “이 길드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길드 마스터와 부길드 마스터를 신뢰하고 있는지 눈에 보입니다.” “아….” “저 역시 튜토리얼을 함께 한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륙에 들어온 이후에 여러 가지 이해관계나 사소한 사건들 때문에 갈라지는 것을 보면 파란 여러분들은 확실히 보기 좋습니다.” 별로 흐트러진 모습 없이 음식을 먹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입에서 나오고 있는 소리는 꽤나 감상적이다. 취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확실히 그리 나쁘지 만은 않은 모습. 그녀가 맨 처음 함께 했던 파티가 어떤 식으로 끝났는지, 그녀가 어째서 캐슬락을 나와 이곳까지 오게 됐는지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원래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특히 현성 씨가 기영 씨를 정말로 신뢰하는 것 같더군요. 기영 씨를 마중 나가러 가는 와중에도 계속 기영 씨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아.” “평소에 잘 웃지 않으신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은 의외였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조혜진이 하는 말이 더 의외. 모든 게 오해라는 것을 깨달은 건 순식간이다. 아직도 이상희와 같이 요리를 하고 있는 김현성을 바라보니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형은 널 믿었어! 이 자식아!’ 회귀자를 향한 나의 충심이 제대로 보답 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다. 김현성은 나를 신뢰하고 있다. 1회 차의 인연만큼이나. # 145 회귀자 사용설명서 145화 집으로(5)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폰을 주고 싶은 생각이 날아가 버리기 일보직전이었지만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벌써부터 선물을 공개하고 싶다. 김현성 자식이 표현하는 게 서툴다는 것을 대충 알고 있었지만 환한 웃음까지 꿍쳐두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주 좋아.’ 솔직히 조금 섭섭할 뻔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 회귀자를 향해 충심으로 버텨온 지난 1년. 빠진 독에 물 붓는 건 아닌지 걱정했었지만 제대로 열매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정이 들어가는 마당에 놈이 그렇지 않는다는 것은 어딜 봐도 이상한 일. 그 동안 내 행적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물론 튜토리얼에서 처음 봤던 놈의 무표정한 얼굴을 봤을 때는 우여곡절 끝에 회귀한 이 자식이 인간성을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야 했었지만 우정의 힘이 얼어붙은 놈의 마음을 살살 녹이고 있었던 것.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표정이 제법 다양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의 녀석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을 사무적으로 대했었다. 아직까지도 서로 말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 최근에 와서는 제법 웃어주거나 농담을 하기도 하면서 변하고 있었지만 애매한 거리감이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아 불안하던 차였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관계는 진전하고 있었다. ‘너무 비인간적이면 안 좋아.’ 동료의 위기와 멸망을 앞둔 세계, 이후에 우리 현성이가 이 두 가지 중 하나의 선택권에 도달했을 때 내가 원하는 것은 무조건 전자다. ‘나를 먼저 구해줘야지.’ 무조건 나를 먼저 구해야 한다. 당연하지만…. ‘먼저 가!’ 라든가. ‘나 대신 세계를 구해!’ 라든가. ‘꼭 행복하게 살아. 내 몫까지 힘차게 살아줘!’ 라든가. ‘죽기 참 좋은 날씨네. 현성 씨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여기는 제게 맡겨 주세요.’ 따위의 대사를 외친 이후에 장렬하게 퇴장할 생각은 하나도 없다. 기껏 충성을 바친 이후에 녀석이 덜컥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내뱉으며 나대신 세계를 선택하면 그게 바로 죽 쒀서 개 준 꼴. 녀석이 이쪽에 정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어딜 봐도 청신호였다. 너무나 아름다운 소식에 순간적으로 표정관리를 하지 못한 모양. 재미있다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기뻐 보이십니다.” “현성 씨는 평소에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편이라 저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몰랐습니다.” “좋군요. 동료라는 건.” “동료라기보다는 친구나 동생 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현성 씨도 같은 생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파란에서 함께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아.” “사실 그렇게 긴 시간을 함께 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파티원들끼리 쌓아올린 유대라는 게 있으니까요.” “유대….” 얼마나 공들여서 쌓았는지 알면 놀랄 것이다. 죽을 정도만 아니라면 김현성과 정하얀, 박덕구를 위해 칼이라도 대신 맞아줄 수 있다. ‘실제로도 그렇게 해왔고.’ “캐슬락에서 문제가 생겨 이쪽으로 오셨다고 들었는데 혹시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 그건….”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들어오게 됐는지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 슬쩍 운을 띄우니 곧바로 벽을 치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무래도 말하기 싫은 모양. 자꾸만 말을 더듬는 것 같았다. 어차피 그녀가 말하기 싫어도 이쪽은 따로 정보통이 있어서 상관은 없지만…. ‘마를린 영애한테 편지 한 통 써야겠네.’ 뭔가 구린내가 나는 것은 사실. 알리기 싫어하는 것만 봐도 대충 답이 나온다. 뭔가 실수를 했거나 숨겨야 할 사정을 가지고 있다. 애초에 이런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자유민이 구태여 다 죽어가는 파란을 선택한 것도 이상한 일. 물론 김현성이 그녀를 포섭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기야 했겠지만… 뭔가 캥기는 것이 있기는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현성이는 그걸 알면서 받아줬을 테고….’ 녀석 역시 은근히 감언이설에 능하니 어느 정도 패널티를 떠안고 그녀를 받아줬을 것이다. 그녀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을 테니까. 따로 알아보기로 결정을 내린 것은 순식간. 더 이상 쪼을 필요는 없다. 인맥이 많은 건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거다. “말씀하시기 싫으시다면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굳이 심문하는 것도 아니니 긴장하실 필요도 없고요. 조혜진 씨에 대한 프로필은 잠깐 방위로 올라가 읽었습니다. 저희 길드에 오시는 게 과분할 정도로 많은 활약을 해주셨더군요.” “과찬입니다.” “환영인사를 저만 드리지 못한 것 같더군요. 혜진 씨, 파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부길드 마스터.” “네.” 그녀와의 짧은 대화는 이걸로 끝, 지금 당장은 권력의 양분화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 일 년이나 이 년 정도 후라면 모르겠지만… 이쪽이 확실히 위라는 걸 계속해서 인지시키면 되니까. 인사를 한 뒤에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슬그머니 정하얀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손에는 독창적인 요리들을 담은 접시가 자리하고 있다. 박덕구는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고 선희영도 슬그머니 자리를 옮긴다. 저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고 느낀 것은 당연. 애써 시선을 돌리자 정하얀이 한 발자국 다가온다. “오, 오빠. 한 번 드셔보시겠어요?” “아….” 도박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물론 필요할 땐 던져야 된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이건 굳이 주사위를 던질 필요가 없는 작업.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다고 생각해 슬그머니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보다는 잠깐 붉은 용병에 다녀올까?” “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 선물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네….” 사람이 제법 감성적으로 변하는 저녁 10시. 우리 회귀자에게 그리폰을 선물해 줄 시간으로는 제법 적절하다. 문제는 자신이 해준 음식을 먹어주지 않은 게 내심 섭섭한 것 같은 정하얀의 표정. 함께 다녀온 정하얀에게는 따로 챙겨줄 것이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런 것 한 입 정도는 먹어주는 게 수지에 맞으리라. 생각 없이 수저를 들어 입 안에 집어넣는 것은 순식간, 맛을 느끼기도 전에 사정없이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입안에 이상한 맛이 감돌았다. ‘시바.’ 방금 목구멍으로 넘어간 흐물흐물한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일단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최대한 이 상황을 벗어나야만 했다. “맛있네.” “아!!!” “그럼 다녀올까?” “네!!” 모두들 몰래 밖을 나서는 게 왠지 두근거리는지 정하얀이 달라붙어 왔지만 용무는 야외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붉은 용병에 맡겨놓은 선물을 되찾기 위함. 그러고 보니 저녁에 린델에 나온 것은 제법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의 린델 역시 제법 활기차다. 치안이 안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빈민촌 쪽은 위험하기는 하지만 광장이나 길드들이 밀집되어 있는 장소는 낮보다 안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벽까지 불을 밝히는 야명주가 있고 야시장을 운영하는 상인들도 있다. 집집마다 불이 켜져 있기도 하고 당연하지만 그건 붉은 용병 길드도 예외는 아니다. 짧은 시간 동안 왔다 갔다 하는데 용병 여왕을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잠깐 동안 잠깐 마구간에 들려 그리폰과 창고에 맡겨놓은 물건들을 가지고 나오니 괜스레 시선이 집중됐다. “쿠룩.” 하얀색 그리폰과 검정색 그리폰이다. 그리폰을 무려 두 마리나 끌고 다니는 모습에 모두가 신기한 듯 이쪽을 바라본다. 굳이 예를 들면 시골에 외제차를 끌고 나타난 셈. 당장 수도에서도 그리폰들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린델에 4개체 밖에 없는 그리폰이다 보니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당연하다. ‘이게 형이 줄 선물이다, 현성아.’ 김현성이라고 저들과 다를 리가 없다. 물론 1회 차 때는 수도 없이 타고 다녔을 테지만 차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는 별로 없다. 실용적이고 전투에도 활용이 가능한 게 요 녀석들이니까. 회귀자한테 줄 검은색 녀석은 제법 날카롭게 생기기도 했고 카리스마도 있어 보인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중요시하는 이토 소우타가 타고 다녔던 놈인 만큼 관리가 무척 잘 되어 있다. 괜스레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사람들이 몰려든다. 지구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시선을 이런 곳에서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파란 길드 하우스에 도착할 때까지 시선이 떨어지지를 않을 정도에 이제는 점점 부담스러워졌지만 정하얀은 마치 이게 내 남자친구라는 듯한 표정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부끄러운데.’ 그저 마냥 좋은 모양이다. 그렇게 파란의 길드 하우스로 도착한 것은 순식간. 잠깐 산책을 나간 줄 알았던 두 사람이 갑자기 그리폰을 데리고 오자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의 사람들이 시선이 비쳤다. “형님. 어디 갔다가… 엉? 그거….” “사실은 시간을 내서 따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지금이 딱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마침 파티 중이기도 하고 선물을 드리기에 적절할 것 같습니다.” “오!” 선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길드 직원들은 별다른 관심이 없기는 했지만 당연히 저들을 위한 선물도 있다. “직원분들은 미처 선물을 준비해 드리지 못해 일단 수도에서 파는 간단한 것들로 준비했습니다.” “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간단한 선물이 아니다. 꽤나 고급 브랜드로 취급되는 귀중품. 남자들에게는 만년필 세트와 시계, 여자들에게는 화장품 세트와 가방. 가격이 제법 나가기는 했지만 이번에 벌어온 돈에 비하면 푼돈이나 마찬가지. 물론 자필 편지 정도야 전부 적어 두었다. 모두의 이름을 적어 놓는 것도 기본. 이게 사회생활이라는 거다. 부하 직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사기진작이 된다. 옆에서 정하얀이 하나하나 나누어 주는 모습을 보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차별하는 건 아닙니다만 간부 여러분들께는 따로 선물을 준비했으니 직원분들은 괜히 아쉬워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쉬워 할 리가 없다. 애초에 비전투직군인 저들에게는 저런 선물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할 테니까. “덕구는 저번 원정에서 방패를 구했으니까 검으로….” “어? 고, 고맙소. 어어어어!” 아이템의 기능을 확인한 박덕구의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무거운 무게에 당황한 것이 아니다. 능력치를 보고 놀란 것이 틀림없으리라.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 영웅 등급 중에서도 상등품으로 취급되는 물건이다. [거인의 단검으로 만든 대검 - 영웅 등급] [이제는 잊힌 종족인 거인족이 사용하던 작은 단검의 조각으로 만든 대검입니다. 명장 카할라스의 작품으로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이 무거운 대검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위협적인 파괴력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소유하는 것만으로 근력 능력치가 6 상승합니다. 다른 부가기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상희 님과 정연 씨는 각각 영웅 등급의 목걸이를 준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기영 씨.” [베니고어 여신의 축복이 깃든 목걸이 - 영웅 등급] [베니고어 여신의 축복이 깃든 목걸이입니다. 중급 저주 해제와 중급 해독, 상급 치유 마법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 됩니다.] “우리 꼬맹이는 단검으로….” “고마워….” [대마법사 아이작의 투척용 단검 - 영웅 등급] [소환과 역소환이 가능한 단검입니다. 어떤 경로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부 전문가는 이 단검이 다른 차원을 넘어온 것은 아닐까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수많은 세월의 흔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뒷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민첩 능력치가 3 상승합니다.] “희영 씨는 반지로 준비했습니다.” “고마워요, 기영 씨.” [카를레나 여왕의 결혼반지 - 영웅 등급] [망국의 여왕 카를레나가 평생을 간직하고 있었던 결혼반지였습니다. 매우 수수한 이 반지는 카를레나 여왕의 성품을 그 누구보다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카를레나 여왕의 진실한 기도의 효과로 신성력을 품게 되었습니다. 모든 신성 주문의 효과가 소폭 상승합니다.] 모두가 특등품이다. 일부는 신전에서 선물로 받은 것들이고 일부는 야마토 길드가 망하면서 이쪽에 넘어온 물건. 사실 이것 말고도 이토 소우타가 가지고 있는 바람의 검이라든가, 간부들이 사용하던 몇몇 물건이 있기야 있지만 이후에 추후 분배를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모두에게 선물을 주고 남은 것은 김현성.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녀석에게 아이템을 받아먹던 것이 나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조금 황당한 그림이기는 하지만 우리 회귀자에게는 자격이 있다. “우리 파란의 길드 마스터를 위해 준비한 선물은 바로 이 그리폰입니다.” “아!”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검은색 날개를 활짝 핀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김현성의 표정을 살펴본 것은 당연지사. ‘입 찢어지네.’ 좋아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내 예상보다 더 좋아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정말로 활짝 웃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녀석의 기준에서 입이 찢어진다는 표현. 그렇지만 입가에 그려진 미소는 한동안 얼굴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형 마음이다, 자식아.’ 내가 다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 146 회귀자 사용설명서 146화 내부 고발자(1) 김현성은 무언가를 받는다는 것에 익숙하지가 않다. 1회 차에서는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의 잠재능력이 높은 것을 생각해 보면 받기보다는 주는 쪽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으리라. 그런 녀석이 예상치 못한 서프라이즈를 받았으니 좋아하는 것이 당연. 본인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커다란 웃음이나 함박미소를 짓고 있지는 않지만 삐질삐질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기뻐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 ‘좋아하네.’ 관리가 잘되어 있는 흑색의 그리폰. 저런 표정을 하지 않았으면 내가 더 섭섭했으리라. 그 희소성 때문에 감히 값으로 측정할 수도 없는 물건. 이 대륙에서 하늘을 날 수 있는 이동수단의 위치는 전설 아이템에 비견된다. 그것 때문인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놀랐다는 표정을 보내오고 있었다. “와….” 이 그리폰이 길드 소유의 물건이 아닌 내 소유의 물건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덜컥 선물한다고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뭐, 나한테는 무척 쉬운 일이지만 타인들에게는 확실히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이 선물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으로 얻는 것도 꽤나 많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그만큼 길드 마스터와 부길드 마스터가 끈끈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되는 거고.’ 이를 테면 권력의 재확인. ‘우리 현성이한테는 내가 그만큼 충성하고 있다는 게 되는 거니까.’ 충신 이기영의 이미지를 더욱더 확고하게 심어줄 수도 있다. 역시나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고개를 젓는 김현성이 시야에 비쳤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기영 씨. 마음은 감사하지만…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부담스러워 해야지. 이게 얼마짜린데….’ “부담 같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성 씨. 그 동안 받은 것이 많으니 보답하는 차원에서 준비한 것뿐입니다. 아! 저도 우연치 않게 받은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물론 저런 반응도 예상하기는 했었다. 단순한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묵직하니까. 그렇지만 얼굴 표정은 누가 봐도 받고 싶다는 표정. 거절은 인사치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 이미 김현성은 못 이기는 척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마치 삼촌들의 용돈을 애써 거절하는 학생의 심정. 어차피 줄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보여줄 수 있는 거절이다. “율리에나 건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부담스러워 하시면 제가 더 부담스럽습니다. 저도 제 그리폰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받으셔도 됩니다.” “아….” ‘빨리 받아, 자식아. 어차피 받을 거면서.’ 이미 받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는 것은 누가 봐도 느낄 수 있는 부분. 결국에는 녀석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렇게 말씀하시면 감, 감사히 받겠습니다.” ‘말 더듬지 말고….’ “정말로 부담 같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 그동안 저한테 선물해 줬던 것들을 돌려받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앞으로도 차차 갚아나가라, 현성아.’ “아뇨. 제가 받은 게 더 큽니다.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그런 자세야. 그거라고!’ 슬그머니 흑색 그리폰을 넘기자 김현성이 녀석을 쓰다듬는 것이 보였다. 선물을 받은 당사자가 기뻐하면 준 사람 역시 기분이 좋아진다. 김현성뿐만이 아니다. 박덕구와 선희영, 꼬맹이와 황정연, 이상희까지 모두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다. 조금 스케일이 크다고 할 수 있는 선물 증정식은 여기서 끝, 파티 역시 금방 끝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보다 길드원들이 쌓였던 것이 많은 모양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 하루는 밤새도록 놀아야지. 아암! 현성 형씨. 그래도 되겠소?” “그럼 내일 업무는 오후부터 시작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아….” “농담입니다. 하루 정도는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기쁜 날이니 조금 취해도 될 겁니다. 혜진 씨도 이리로 와서 함께 어울리도록 하죠.” “예, 마스터.” 사실은 오랜 비행으로 조금은 피곤한 상태지만 뭐, 하루 정도는 기분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아! 오빠. 이것도 한 번 먹어보세요.” “응.” “기영 씨, 다음 봉사 일정 말인데요.” “네. 한 번 시간을 내서 나가도록 하죠.”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먼저 말씀해 주시면 안 되나요?” “이야기하자면 조금 깁니다.” 밤은 길고 시간은 많다. 밤새도록 천천히 술을 들이켜고 다시 한번 밀렸던 이야기를 나눈다. 김현성은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고 박덕구는 여전히 신나는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상황. 조혜진은 적응하지 못한 듯싶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무척 무리에 잘 어우러졌다. 정하얀과 선희영은 이쪽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고 아직 미성년자인 김예리는 들어가서 자라는 김현성을 원망스럽게 바라본 뒤에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내가 지금 당장 걱정하고 있는 것들은 적어도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날이 밝아오고 있다고 느낀 이후에야 대충 축제가 마무리됐고 나 역시 기쁜 마음에 조금은 정신이 없는 상태로 눈을 감았다. “…….” 툭. 툭. 툭. 창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잠을 깬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 ‘조금 더 잤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해봤지만 왠지 모르게 무거운 느낌에 고개를 아래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 정하얀이 이쪽에 몸을 반쯤 걸치고 있었던 것. ‘…….’ 어제 분명히 방으로 데려다 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 것 같은 상황. 어째서 정하얀이 이쪽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취한 척 내 방으로 들어온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뭐, 어찌되든 상관없지만 몸이 저려온다. 언제부터 이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이렇게 있었으니 팔이 저리는 것은 당연하리라. 원정을 나갈 때도 자주 마주치던 상황이라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색색거리며 자는 척하는 정하얀을 보니 조금 더 이 자세를 유지해야 될 것 같았다. 툭. 툭. 그 와중에도 창문 밖에서는 계속해서 소리가 들려오는 중,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작은 새 한 마리가 계속해서 창문을 쪼아대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편지 왔구나.’ 어제 마를린 영애에게 보낸 편지가 벌써 도착한 것이다. ‘좋아.’ 답장이 빠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빠르다. 궁금한 것이 많은 나로서는 환영할 만한 상황이다. 궁금증은 당연히 조혜진에 대한 것. 캐슬락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에 대한 것은 이쪽의 구미를 당긴다. 벌써부터 약점을 쥐고 흔들 생각은 없지만 그녀가 숨기고 있는 것이 뭔지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하얀이 깨지 않게 슬그머니 창문을 열자 작은 새가 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 한 쪽 발에 묶여 있는 전서를 손으로 쥔 이후에 대충 답장을 휘갈겨 다시 묶어 내보냈다. 조만간 찾아뵙겠다는 내용의 답장이니 아마 저쪽에서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조심스레 편지를 펼치자 마를린 영애가 보낸 편지가 시야에 비쳤다.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갑작스레 편지를 주셔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단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남몰래 이기영 님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내주신 이 편지는 마치 황량한 겨울바람에 버려진 제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시는 것처럼 와닿았습니다. 제 마음을 읽어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은 제 착각인지요?] ‘뭐 이렇게 사족이 길어?’ 조금은 묵직하고 길게 써내려간 편지에 수많은 정보들이 적혀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 살펴보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저런 종류의 글이었다. 몇 번이나 적었다 썼다는 반복한 흔적이 보이는 것을 보니 나름대로 공을 들이긴 들인 모양이다. [귀족영애로서 이런 말을 드린다는 게 부끄럽기는 하지만 왕성에서 이기영 님과 함께 했던 꿈같은 시간들이 아직도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저 하늘을 날아가는 새처럼 저 역시 하늘을 훨훨 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요? 부디 제 마음만은 이 편지와 함께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도대체 얘는….’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 둘이 함께 만난 적도 별로 없었고 서로 주고받은 이상한 느낌 따위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카트린 공작부인과 함께 보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만난 횟수를 생각해 보면 바젤추기경 다음으로 많이 만나기야 했지만 소녀의 연심에 불을 지를 만한 사건 따위는 없었다는 거다. 최대한 매너 있게 행동하고 챙겨주려고 노력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은 느낌. 어떻게 생각해도 조금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적혀 있는 글귀들은 가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 한 장을 넘기니 그제야 내가 원하는 내용이 보이기 시작했다. ‘좋아.’ [시간이 부족해 많이 조사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이기영 님이 원하는 정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급하게 자유민들을 불러 모아 조사를 진행했고 예전 조혜진 씨가 속해 있었다던 길드직원을 불러 그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듣다보니 작은바위 길드가 저희 캐슬락 영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요.] ‘오.’ 읽던 중 반가운 소리, 이러면 조금 더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조혜진 씨가 속해 있었던 작은바위 길드는 저희 영지의 감찰대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얽혀 있는 조사이기는 했지만 주로 몬스터 부산물의 밀반입과 탈세혐의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혜진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일이 재미있어지는 것 같아 계속해서 편지를 읽어 나가자 역시나 내가 예상했던 내용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사를 시작한 이유는 양심 있는 작은바위 소속의 자유민 한 분이 감찰대에 먼저 제보를 해주신 덕분이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저는 가문의 행사에 참가하기에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들어서만 알고 있었지만 그 때 도움을 주신 분이 바로 조혜진 씨로 알고 있습니다. 작은바위 소속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양심을 위해 저희 영지로 직접 제보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내부 고발자?’ 조혜진이 어째서 린델로, 그중에서도 파란으로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로서는 조금 머리 아파지는 문제다. 그녀의 행동 자체를 비난하거나 욕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옳은 행동을 했고 칭찬받아 마땅한 행동을 했다. 용기 있는 행동이었고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전 길드원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 분명히 이야기가 나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부 자유민은 신성제국의 법을 꼭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신이 제국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이유. 그런 이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자유도시 린델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빠를 것이다. 이런 자유민들의 특성상 세금 문제에 대해서 인색해지는 경우가 많다. 사실 어느 정도는 다들 탈세를 하는 게 일반적이고 제국법을 무시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조혜진이 속했었던 작은바위 역시 마찬가지였을 터. 아마 저것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몬스터 부산물의 밀반입과 탈세를 저지른 길드라면 다른 쪽에도 손을 댔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테면 이종족 노예 거래라든가….’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조혜진이 길드의 부패를 캐슬락의 영주에게 고발한 내부 고발자라는 것이다. 이후의 일이 어떻게 됐을지는 뻔할 뻔자. 아마 길드원들 사이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혔을 것이고 욕이란 욕은 전부 얻어먹었을 것이다. 쓸데없이 일을 키웠다는 둥, 지만 깨끗한지 안다는 둥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물론 순식간에 집단에서 고립됐을 것이다. ‘그게 우리 사회니까.’ 현대 사회에서 내부 고발자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떠올려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길드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타 길드나 집단에 들어가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집단에 피해를 끼치는 사람이 길드에 있으면 안 되니까. 심지어 그녀를 향해 박수를 보내고 엄지를 치켜 올린 사람들도 그녀와 직접적인 연관이 되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다. ‘파티도 맺기 싫었을 수도 있었겠네.’ 백 퍼센트 장담할 수 있다. 파티사냥의 성과를 축소보고해서 이득을 챙기는 것 역시 오랜 관행이니까. 다시 한번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역시 내 생각대로 스토리가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작은바위 길드는 증거불충분으로 인해 처벌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만, 전 길드 직원에게 물어본 결과 조혜진 씨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해당 길드를 떠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캐슬락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 타 도시로 떠났다는 게 마지막입니다. 린델로 가셨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기영 님께서 혜진 씨를 알고 계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죠.] “맞네.” 양심에 따라 행동한 결과는 자기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말아먹은 것. 모든 집단의 입장에서 그녀는 폭탄 아닌 폭탄인 셈이다. 언제 길드의 치부를 드러낼지 모르는 위험 인물. 물론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존중하지만… 내 입장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하…. 이거 큰일 났는데….’ 생각나는 게 은근히 많은 나로서는 조금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 147 회귀자 사용설명서 147화 내부 고발자(2) 물론 모든 일은 어디까지나 합법적이다. 제국법 전문가인 김미영 팀장을 신뢰하는 이유도 그녀가 법을 교묘하게 잘 이용하는 것에 있다. 제국법의 촘촘한 그물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은근히 많기 때문이다. 조사가 들어왔을 때는 문제의 여지가 없지만 조혜진의 시선에서는 조금 위험한 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녀가 원칙주의자라면 어쩌면 내가 없는 동안 길드 안에 있는 병폐들을 눈치챘을 지도 모른다. ‘그것만 문제가 아니지….’ 선희영의 봉사도 문제가 될 수가 있다. 빈민촌의 쓰레기를 치우는 작업은 몇몇 사람의 입장에서는 범죄자들을 잡아 죽여 사회에 기여하는 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정확히 이야기하면 범죄다. 언론을 내 쪽에서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도 현대인의 가치관에서는 납득이 할 수 없는 이야기. 어쩌면 ‘언론은 투명해야 된다.’라고 생각하며 그걸 실행시킬지도 모른다. 내 입장에서는 그녀는 지뢰 중의 지뢰. 그녀가 가지고 있는 권한이 커지고 그녀의 영향력이 늘어날수록 이쪽은 움직임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현성아….’ 왜 하필 이 타이밍이었어야 했는지, 괜스레 우리 회귀자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똥오줌 가릴 때가 아니다. 파란에 필요한 것은 첫 번째도 성장, 두 번째도 성장. 이기적인 소리지만 개인의 양심에 발목 잡히고 싶지는 않다. 한 번 망해봤으니 자제할 거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몇 번 모른 척할 수야 있겠지만 확실히 이 여자는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확인해 보는 것이 먼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자 정하얀이 내 몸과 함께 딸려 올라왔다. 슬그머니 그녀를 침대의 옆쪽에 눕힌 뒤에 적당히 씻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순식간. 자는 척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정말로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찾아갈 사람은 김미영 팀장. 쉬는 날 찾아가는 게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일은 미리미리 처리하는 것이 옳다. 대부분이 뻗어 있는지 무척 조용한 실내. 김미영 팀장의 숙소를 찾아가 문을 두드리니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꼬맹이가 보였다. “아!” “방에 엄마 있니?” “엄, 엄마! 아저씨 왔어!” “엄마아!!” 아직 아저씨라고 불릴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직격탄을 맞으니 생각보다 가슴이 아프다. 어린아이가 보기에는 전부 아저씨로 보이겠지만 그래도 씁쓸한 것이 사실. 아무튼 아이들의 외침이 김미영에게 닿은 모양인지 안에서부터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휴일에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상사만큼 불편한 것은 없다. 그녀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도 마찬가지.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이정도 불편함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받는 만큼 고생해야지.’ 팀장으로 승진한 신고식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황급히 문을 여는 김미영이 시야에 비쳤다. “부, 부길드 마스터. 여기는 어떻게?” “쉬는 날에 죄송하지만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말입니다. 계약서를 새로 작성해야 하기도 하고요. 뭐 겸사겸사 찾아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말씀을 해주셨으면….” “아뇨. 굳이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은 개인적인 용무라….” “네?” “업무 관련입니다. 아무튼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네. 누추하지만….” 길드 직원들이 사용하는 방에 들어온 것은 처음. ‘생각보다 괜찮은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 대우가 좋다. 물론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좋은 방을 지급받은 것뿐이겠지만 기본 가구나 식기 같은 것들이 무척이나 좋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니 왠지 기가 죽은 것 같은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 괜스레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슬쩍 의자에 몸을 맡겼다. “혹시 식사는 하셨나요?” “아뇨. 아직입니다. 일어나자마자 온 거라.” “괜찮으시다면….” “괜찮습니다. 이미 식사를 하신 것 같은데 폐를 끼칠 수는 없죠. 아이들은….” “아! 네. 잠깐 방에 들어가 있을래?” “네!” 후다닥 발걸음을 옮기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말을 잘 듣는 아이들이군요.” “어렸을 때부터 철이 빨리 든 아이들이라… 편하기는 하지만 조금 가슴 아플 때가 많죠. 아, 어떤 용무로 오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그저 확인할 게 몇 가지 있을 뿐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계약 부분도 다시 진행하려고 하고요. 연봉은 700골드입니다.” “네?” 조금 많다고 느껴질 정도의 액수. 파티원이 아닌 직원이 연봉을 700골드를 받는다는 것은 그녀 입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화로는 칠천만 원, 지구에서도 받기 쉽지는 않은 액수다. “700골드입니다. 이후 하시는 것에 따라서 연봉 인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너, 너무 과….” “과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일하게 될 테니까.’ “김미영 팀장님이 연봉 이상의 일을 해주시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계약서를 보시면 복지조건도 변경이 있으니 확인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감, 감사합니다.” “천천히 읽어보시고 사인해 주시면 됩니다. 오늘이 아니어도 좋으니까요.” “네.” “아! 그리고 오늘 이곳에 찾아온 또 다른 이유 말입니다만….” “네.” “조혜진 씨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 어제 말씀 드린 대로 일을 잘하시고 또….”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없었던 당시 어떤 일을 하고 무슨 일을 처리했는지, 결제를 했다면 어떤 서류를 결제하고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혹시 일을 처리하는 와중에 트러블이나 다른 것은 없었는지 기억나는 걸 전부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아주 사소한 거라도 괜찮습니다. 그녀의 성격이나 행동, 이상하게 보였던 행동이나 평소 행실, 말 그대로 전부 다요.” “아….” “당연하지만 제가 그녀에 대해서 물었다는 사실은 비밀입니다.” “네. 네….” 동그랗게 눈을 뜬 얼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내오고 있었다. “혹시 조혜진 님에게 뭔가 문제가 있나요?” “딱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깨끗한 게 문제라면 문제니까요. 아, 먼저 배경에 대해서 설명해야 될 것 같네요. 이건 미영 씨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네.” “조혜진 씨가 캐슬락에서 린델로 옮기게 된 것은 내부고발 때문입니다. 길드의 비리를 폭로하고 길드에서 강제로 탈퇴 당했죠. 소문이 퍼졌는지 캐슬락에서는 다른 길드나 클랜에 입단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린델로 오게 된 겁니다. 아마 영입을 진행한 현성 씨는 알고 계실 겁니다. 저는 다른 루트로 정보를 입수했고요.” “네….” “물론 옳은 일이기는 하지만 걱정이 아예 되지 않는 건 아니어서 말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 드린 건 그런 의미에서 여쭌 겁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네… 네.” 당연히 무슨 뜻인지 알아먹을 것이다. 내 질문의 결론은 하나. ‘혹시 뭔가 캥길 만한 짓을 한 적이 있느냐? 만약 있다면 조혜진이 그걸 알고 있느냐?’ 였으니까. “어떤 부분을 걱정하시는지 알겠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다행이로군요.” “안심하셔도 되실 만한 이야기입니다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일단 문제가 될 것 같은 부분은 사전에 제가 처리하고 있었던 터라…. 포션 공장이라든가 세금이나 자유도시 실리아에 관련된 몇몇 일은 일단 제가 처리해 길드 마스터께 보고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조혜진 님은 주로 위기대책대응반이나 던전공략전략팀 같은 조금 더 직접적인 분야의 업무를 처리해 주셨습니다. 저도 거기까지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뇨. 그쪽은 괜찮습니다.” “길드 자체는 어디까지나 투명하고 깔끔하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법을 어기지도 않았고 모든 게 합법적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다행이로군요. 그럼 도의적인 부분에서는 어떻습니까? 아! 솔직하게 그냥 느낀 걸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슬쩍 김미영 팀장을 바라보자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물약 시장 같은 경우에는 소형 클랜이나 개인 연금사업자들이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독과점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습니다. 이번에 린델 연금술 지원 사업을 시작하면 아마 도의적으로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실제로 파란 길드의 이미지는 좋은 편이니까요. 다른 부분은 문제가 없습니다.” 슬그머니 김미영 팀장을 바라보자 민망했는지 그녀가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내가 뽑았지만 확실히 유능하다. 나 같은 헛똑똑이와는 다르다. 선동과 날조와 사기만 칠 줄 아는 이쪽에 비해 저쪽은 정말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유능한 부하가 많다는 것은 좋다. 저런 사람들을 부리는 나도 유능해 보이는 효과가 있으니까. “좋군요.” “감사합니다.” ‘넌 조금 더 받아도 되겠다.’ 계약서에 적혀 있는 연봉란에 밑줄을 그어버리고 다시 한번 금액을 적어 넣었다. 기존의 연봉보다 300골드가 더 올라간 1,000골드. 눈이 휘둥그레진 게 보였지만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을 이었다. “능력에 맞는 연봉을 드리는 겁니다. 문제가 있을 것 같은 부분은 미리 빼와서 처리했다는 게 정말로 마음에 드네요.” “그…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뇨. 아뇨. 은혜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굴러다니는 보석을 주운 게 은혜라니 말도 안 되죠. 아, 또 다른 특이사항은 없습니까? 예를 들면 길드 마스터가 혜진 씨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을 줬다든가 하는 이야기 말입니다.” “객관적으로 말씀 드린다면….” “네.” “과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능력이나 성품을 생각해 봤을 때는 좋은 요직에 앉히는 게 이해가 가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권한이 큰 것 같아서….” “엄밀히 따지면 그건 김미영 팀장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저, 저는 그저 부길드 마스터의 대리인으로서 업무를 처리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음.” “혜진 님은 다릅니다. 길드 마스터께서는 조혜진 님을 영입한 이후에 곧바로 업무에 투입하시는 것은 물론 여러 가지 권한을 넘겨주셨습니다. 그냥 흘려가는 이야기였지만 조혜진 님을 길드의 비서실장으로 역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고요. 파란 길드의 모토는 이해하지만 다른 파티원분들을 웃도는 권한을 주신 것 같다는 평이 많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는 있습니다.” “그렇군요.” “조혜진 님의 성품과 능력과는 별개로….” “아. 무슨 말씀을 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당연하지만 눈앞에 있는 김미영 팀장은 조혜진을 질투하는 것이 아니다. 김미영은 질투 같은 걸 할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대상 자체가 레벨이 다르다. 아무리 그녀가 능력이 좋다고 한들, 조혜진은 손꼽히는 무력을 가지고 있는 강자다. 이른바 출세가 보장되어 있는 능력자라는 거다. 김미영은 조혜진의 성품과는 별개로 단순히 한 사람에게 단기간에 많은 권력을 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리라. “부 길드 마스터님의 입지도….” 그 와중에도 내 입지까지 생각해 주는 것은 조금 의외지만 말이다. “제 걱정을 해주시다니 감사하군요.” “당,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길드 마스터께서는 이기영 님과 협의 하에 조혜진 님의 요직을 결정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이미 마음을 굳히신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음.” ‘길드 비서실장….’ 직책만 놓고 따지고 보자면 부길드 마스터와 비슷할 정도의 권력을 지닌 위치다. 물론 감투야 내가 더 크겠지만 길드 마스터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저 직책 역시 권한의 크기는 만만치 않다. 김현성은 권력의 양분화를 이루어내 양당체제를 만들려고 하진 않을 터. 나와 그녀의 시너지 효과를 그리며 마음속으로 웃음 짓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두 명의 인재가 섞이면 파란이 얼마나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겠지만, 그녀와 나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이다. 물론 상태창과 성향을 읽어볼 수 없는 김현성이 우리 둘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만…. ‘얘는 너무 심해….’ 우리 현성이가 왜 1회 차에 실패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나 같은 놈들한테 뒤통수를 여러 번 맞았으리라. ‘확실해.’ # 148 회귀자 사용설명서 148화 내부 고발자(3) 정확히 1회 차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잠재능력이 높은 것을 생각해 보면 김현성이 무력이 높았을 거라는 건 이미 확정된 사실이다. 조혜진이 현성이의 부관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1회 차의 김현성이 이끌던 길드는 앞뒤가 꽉꽉 막힌 걸로도 모자라 고지식의 끝판왕이었음이 분명할 것이다. 만약 나나 이지혜였다면 그런 집단을 흔드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을 것이 당연. 우리 회귀자가 실패한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뒷공작에 면역이 없는 인간들을 터는 일이야 간단하니까. 나 말고도 이런 인간들이 많으니 커가는 데 우여곡절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은 정진호한테 한 방 맞았을 것이고 높은 확률로 이토 소우타한테도 괴롭힘 당했을 것이 틀림없다. ‘형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니, 현성아.’ 아니, 어쩌면 이설호한테도 꽤나 험한 꼴을 당했을 수도 있으리라. 이설호에 의해 이토 소우타가 린델 내에 자리 잡았다고 가정하면 녀석 역시 큰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을 테니까. 슬쩍 옆을 바라보자 나를 바라보고 있는 김미영 팀장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혹시 따로 지시를….” “아뇨. 괜찮습니다. 아직까지는 두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요. 아, 그래도 보험은 들어놔야 하니 제국의 감사원이 들이 닥쳤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장부나 자료들은 만들어 놓는 게 좋겠군요.” “아! 네, 알겠습니다.” “김미영 팀장님이 있어서 아주 든든합니다.” “감, 감사합니다.” “휴일에 갑작스럽게 시간을 뺏어 죄송합니다. 그럼 나가볼 테니 푹 쉬도록 하시지요.” “아닙니다. 도움이 됐다면… 네.” 김미영에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조혜진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일단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녀를 컨트롤해야 되는 것은 내게 있어서는 숙제나 다름없다. 파란이 조혜진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미 확정된 일. 김현성은 그녀를 신뢰하고 있고 1회 차의 인연을 생각해 보면 그 신뢰가 깨지지 않을 확률이 높다. 또 조혜진이 가지고 있는 성장 가능성과 무력을 생각해 본다면 그녀를 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어떻게?’ 품어야 하느냐에 대한 것. ‘한번 작업 쳐볼까.’ 완벽하게 이쪽에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정하얀 같은 반 의존 상태가 되게 만드는 것. 그렇지만 그녀를 이쪽으로 당겨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자의식 과잉이다. 정하얀이나 선희영이 이쪽의 설계로 치명적인 부작용을 떠안게 된 만큼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싶지는 않다. ‘성공 확률도 낮을 거고….’ 그녀의 성향을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김미영 팀장에게 대충 인사를 한 이후에 밖으로 나가고 난 이후에는 왠지 모르게 길을 잃은 듯한 느낌. ‘아무런 생각하지 않고 쉴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해 봤지만 갑작스럽게 생긴 일과 이놈의 성격 때문에 마음 편히 쉴 수가 없다. 물론 목적지를 정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지금 이 시점에 가야할 곳은 한 군데밖에 없었으니까. ‘현성아.’ 파란의 최고 권위자인 김현성에게 앞으로의 계획과 조혜진의 처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맞다.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김현성. 그 미래를 바탕으로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도 김현성이다. ‘이게 무슨 휴일이야.’ 일어난 이후부터 무척 바쁜 상황. “길드 마스터는 계십니까?” “아마 지금 집무실에 있으실 겁니다.” “아, 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녀석 역시 이것저것 처리하고 계획할 일이 많았는지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다는 훈훈한 소식이 들려왔다. 일 이야기를 하기에는 딱 좋은 타이밍이기는 하다.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적당히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연 이후에 시야에 비친 것은 책상에 반쯤 걸터앉은 김현성. 마찬가지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아….” 선객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마침 잘됐군요. 안 그래도 기영 씨를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네.” “혹시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뇨. 아직입니다.” “그럼 함께 식사라도 하는 게….” “네, 물론입니다.” ‘생각보다 신경 쓰이는데….’ 어째서 정하얀이 내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조혜진이 김현성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무척 신경 쓰인다.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짜증이 날 지경. 정하얀의 경우에는 혹시 내가 다른 여성과 무슨 짓을 한 건 아닌지 신경 쓰였던 것이리라. 가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과거의 나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앞으론 더 조심할게, 하얀아.’ 마음속으로 정하얀에게 사과를 보내니 김현성이 이쪽에 입을 열어왔다. “뭔가 용무라도 있으셨습니까?” “네. 별건 아닙니다만….”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일단 이쪽을 바라보는 눈에도 두 눈 가득 애정이 들어가 있기는 하다. 물론 당연한 반응이다. 그리폰을 선물로 준 것 이전에 김현성은 나를 신뢰하니까. “별것 아닙니다. 그저 앞으로의 계획이나 일정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어서….” “아.” “혜진 씨 덕분에 길드의 안정화도 어느 정도 마무리 되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아무래도 원정을 나가도 괜찮을 것 같더군요. 슬슬 본업으로 돌아갈 시간이라…. 현성 씨도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것은 아닌지가 궁금했습니다.” “네. 사실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확실히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기영 씨 같은 경우에는 여러 일을 역임하고 있으니까요. 미리 스케줄을 뺄 시간이 필요하겠죠.” “네. 현성 씨 말이 맞습니다.” 당연하지만 김현성은 원정에서도 날 버릴 생각도 없다. 지난 던전에서 내 가치를 입증하기도 했고 어떤 원정이든 내가 있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공격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하얀의 멘탈 관리라든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라든가, 전체적으로 파티를 케어한다든가. 생각보다 내가 해주는 일이 많다고 느꼈을 것이다. 연금소환술사로서의 성장도 지켜보고 싶을 테니 지금 이 타이밍에 뒷방 늙은이가 되지는 않을 거라 확실할 수 있었다. 내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원정에서 빠지는 상황, 아득바득 달라붙어 챙길 건 챙겨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확실하게 정해진 건 없습니다만 기영 씨 말이 맞습니다. 여러 가지 사업으로 자금을 확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영 씨 덕분에 여유가 생겼으니 지금쯤 나가 보는 게 괜찮겠죠. 안 그래도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많았는데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네. 네.” “일단 다음 목적지는 캐슬락이 될 것 같습니다.” “…캐슬락 말입니까?” “네.” ‘마를린 영애가 좋아하겠네.’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캐슬락에서 몬스터들의 이상 징후가 포착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마 근처에 있는 던전의 영향을 받거나 영웅급 네임드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흐음….” “확률은 적지만 몬스터 웨이브의 징후일 가능성도 있고요. 캐슬락 근처에는 사냥터도 많은 만큼 그쪽 주변으로 원정을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기영 씨 생각은 어떤지 들어보고 싶군요.” “아. 제 생각도 현성 씨와 마찬가지입니다. 확실히 좋을 것 같군요. 린델 근처가 아니라 캐슬락이라는 게 조금 의외이긴 합니다만… 혜진 씨가 캐슬락 출신이라고 하셨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좋아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 부길드 마스터. 주변 지리 같은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말씀을 드리지는 않았지만 안 그래도 기본 물약의 판매를 조금 확장시킬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원정이 먼저이기는 하지만 타 길드들과 공급 계약을 맺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더군요. 캐슬락에서도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길드들이 많지 않습니까?” “네…. 부길드 마스터. 린델에 비해 규모가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시장 자체는 좋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길드와 클랜이 원정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니까요. 린델에 비해 사제도 부족할 겁니다.” ‘그렇다 이거지.’ 슬쩍 옆을 보니 표정이 좋지 않은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대답을 하면서도 캥기는 것이 있는지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아무래도 그녀 또한 캐슬락으로 간다는 사실은 전해 듣지 못한 모양이다. 껄끄러운 인연을 마주치기 싫은 것이 당연하기는 했지만 김현성은 그녀를 꼭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원정이 그만큼 힘들 거라는 건가.’ 답은 우리 현성이가 말해준 것에 있다. 단순한 던전 공략일 수도 있고 영웅급 네임드 몬스터의 레이드 일수도 있다. ‘몬스터 웨이브일 확률도 있고….’ 지금 이 시점에서 벌어질 미래의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 캐슬락으로 향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는 부분. 캐슬락으로 향하다 보면 대충 가닥을 잡을 수 있겠지만… 어찌됐든 이쪽이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 파티의 질을 올리기 위해 가는 거니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조혜진에 대해서 더 파고들 여지가 있다는 것. ‘이게 최고야.’ 작은바위의 수뇌부들과도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으리라. 어디까지나 사업차 방문했다는 느낌으로. 갑작스레 말이 없어진 조혜진을 김현성은 조금 안타깝다는 눈으로 바라보기는 했지만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어보였다. “원정 준비는 언제 하면 되겠습니까? 현성 씨.” “음….” 고민하고 있는 회귀자를 향해서는 먼저 입을 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되니까. “내일 곧바로 출발하는 건 어떻습니까? 물자들 같은 경우에는 이후에 조달받을 수 있지만 물약의 유통에 대해 개인적으로 알아봐야 할 게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게 되는군요. 사실 한두 달 안으로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그렇게 해도 나쁠 건 없어 보입니다. 지낼 곳이 문제긴 하지만.” “숙소는 따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캐슬락 영주의 따님과 조금 친밀한 사이라… 아마 영주성을 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마를린 영애라면 양팔을 벌려 환영할 것이다. 식당에 도착해서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대화 주제는 대부분 캐슬락 원정에 대한 이야기. 조혜진은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김현성은 그런 조혜진을 배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 이미 확정된 상황이네.’ 계속해서 캐슬락에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으니 어차피 한 번쯤은 들어가야 되겠지만 그 시기가 지나치게 빠른 것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린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 볼 때 아직도 조혜진은 캐슬락의 뜨거운 감자일 확률이 높다. 그 외에 대화는 조금 평범했다. 일상적이었고 나쁘지 않아 것 같았다. 김현성은 조금 의식적으로 조혜진을 칭찬하는 것 같았고 나에게 그녀의 좋은 점을 어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때쯤에는 어째서 녀석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해왔는지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조혜진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먼저 입을 열어온 것이다. “어떻습니까? 기영 씨?” “네?” “혜진 씨 말입니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능력도 있고 성품도 괜찮습니다. 어째서 현성 씨가 그녀를 영입했는지 잘 알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가지고 있는 무력과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을 생각하면 그녀는 어디에서나 탐낼 만한 인재입니다.” “다행이로군요. 혹시나 불편해하지 않으실까 걱정했는데.”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대놓고 말하겠냐, 눈치 없는 자식아.’ “시기가 조금 빠른 느낌은 있지만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혜진 씨를 요직으로 임명하고 싶습니다만… 기영 씨 생각이 궁금하군요.” 오늘 나를 부르려고 한 이유가 바로 이거일 것이다. 뭔가 기대하고 있는 듯한 눈빛. 이쪽의 의사를 존중해준 건 기쁘지만 조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 “저는….” 말하기 전에 한 번 정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 149 회귀자 사용설명서 149화 너는 내가 왜 섭섭한지 몰라?(1) “저는….” 말하기 전에 한 번 정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대답을 하고 싶은 지는 뻔할 뻔 자. 나로서는 당연히 그녀가 필요 이상의 권력을 얻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쳐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렇지만 이쪽이 너무 티 나게 그녀를 밀어내고 싶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은 심정.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시도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김현성에게 괜히 권력욕심이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일단은 이쪽에 의견을 물어왔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니까.’ “그전에 정확히 어떤 요직에 앉히려고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길드 비서실장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물어보는 것은 당연지사. 애초에 어떤 요직에 앉힐 건지에 대해 말해오지 않았다. 김현성 자식도 조금 캥기는 것이 있는 것이다. “사실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는 도중입니다만….” “네.” “괜찮다면 길드 비서실장의 자리에 앉히는 것은 어떤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네?” “길드 비서실장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 사실 여러 가지 생각은 해봤습니다만 아마 기영 씨도 무척 편해질 겁니다. 지금까지 맡으신 일이 많았으니까요. 혜진 씨가 여러 방면으로 도와줄 수 있을 겁니다.” “으음….” “아마 일을 어떻게 처리하셨는지에 대해 확인해 보신다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네….” “상상하기 어려운 부분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렇군요.” 솔직히 반대. 무조건 반대다. 어떻게 반대를 해야 할지 이야기를 꺼내던 찰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뭔가 초조해하고 있는 듯한 표정의 김현성. ‘아.’ 어째서 녀석이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별로 탐탁지 않다는 듯한 내 표정. 두 번째는 나와 긴밀한 상의 없이 그녀를 높은 자리에 앉히려고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 물론 지금 이렇게 물어오고는 있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혼자 저런 생각을 하고 바로 제안을 했다는 게 내심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귀여운 새끼….’ 무척 좋아하고 동감하며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던 서프라이즈가 탐탁지 않은 내 표정에 막혀버린 셈.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선물의 주인공인 내가 그다지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당황한 것이다. 아니 기뻐하기는커녕 불편해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속이 꽤나 초조해 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실수했다고 생각한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 김현성은 독불장군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1회 차에 녀석이 어떻게 실패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수도 없이 많이 맞아온 뒤통수 덕분인지 파티원의 멘탈과 상태에 대해 굉장히 많이 신경 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히나 나에 관해서는 더욱더. 내가 신성제국에 갔을 당시 나라 잃은 표정을 보였던 녀석의 얼굴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김현성은 독재자가 아니다. 파란의 길드 마스터는 어디까지나 김현성이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있는 녀석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언제나 인지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상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뭐, 아무튼 간에 녀석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의 명단에 정점에 있는 것은 나다. ‘그렇지.’ 다시 한번 김현성의 표정을 살핀 뒤에 입을 열었다. “글쎄요….” “아.” “확실히 혜진 씨가 유능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조금 시기가 이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더 지켜보는 게 맞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아! 일단 현성 씨 생각은 이해합니다. 업무에 눌려 있는 저를 생각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고… 그…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정이기는 합니다.” “네….” “그렇지만 그 갑작스럽게 그녀가 길드 비서실장에 자리에 앉는다면 다른 길드원들에게 위화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은 아닌지…. 길드 직원 입장에서는 아마 회사에 지금까지 전혀 관련도 없는 CEO가 나타나 갑작스레 실권을 쥐는 것처럼 비춰질 겁니다.” “저도 물론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기영 씨가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는 충분히 잘 어우러졌다고 생각해서….” “저만 보지 못했군요….” “아.” 직접적으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기분 파악 상해부렀스 스킬을 시전하는 것이 당연. 무척이나 섭섭하다는 얼굴로 김현성을 바라보자 조금 움찔거리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 섭섭하다, 현성아.’ 물론 연기다. 아까보다 조금 더 당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 별것 아닐 거라고 생각한 질문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어디까지나 김현성이 나를 배려해 주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상황에 조금은 입꼬리가 올라가기는 했지만 굳이 표현하지는 않았다. 살짝 한숨을 쉰다든지, 괜스레 말을 줄인다든지 조금 기분이 상한 척 해도 효과는 충분하다. 조혜진의 임명을 놓고 대화를 나누는 이 자리가 점점 더 미묘해 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뇨. 저는 현성 씨를 믿습니다. 지금까지 옳지 않은 선택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조금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아마 제가 모르는 무슨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저한테 물어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어디까지나 클랜의 길드 마스터는 현성 씨니 조금은 마음대로 하셔도 괜찮습니다.” “조금 오해하신 게 있으신 것 같습니다.” “아뇨. 아뇨. 오해가 아닙니다.” “그, 어디까지나 기영 씨가 힘들어 보이셔서 개인적으로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임명할 생각도 없고 일단 혜진 씨가 많이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보니….” “그렇군요.” “네.” 저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은 했다. 본래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하는 말의 대부분은 ‘너를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이전의 태도를 풀어주지는 않았다. 화를 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짜증을 내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계속해서 묘하게 섭섭한 태도를 보내자 무척이나 답답해하는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너무 당기기만 해도 안 좋다는 말은 연애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통용된다. ‘내가 왜 이러는지도 모를 거다.’ 굳이 예를 들어 표현하자면 ‘오빠는 내가 왜 섭섭한지 몰라?’라는 필살기 아닌 필살기를 시전한 것. 물론 효과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 우리 회귀자가 마음 고생하는 게 조금 가슴 아프기야 했지만 열심히 밀고 당기면서 조혜진의 등판 시기를 최대한 늦춰야 했다. “그 현성 씨… 제가 이전에 말씀 드린 것은 머릿속에서 지워주셔도 됩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니까요. 혜진 씨가 일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면 부담 없이 임명하셔도 됩니다.” ‘부담 팍팍!’ “아!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오해하고 있는 건 없습니다. 현성 씨 입장에서는 충분히 생각하실 수 있는 이야기니까요.” ‘오해하고 있다! 현성아! 나는 너를 오해하고 있어!’ “별로 섭섭한 것도 없습니다.” ‘형 섭섭하다! 진짜 너무 섭섭하다.’ 슬슬 돌려 까며 열심히 입을 터는 중. 말은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마 김현성 입장에서는 임명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녀석이 아무리 바보라고는 해도 이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으니까. 아마 머릿속으로는 무척이나 고민하고 있으리라. ‘시간은 대충 늦췄다고 봐도 되겠네.’ 어차피 조혜진이 높은 요직에 한자리 단단히 차지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다. 나 역시 그녀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권한을 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기는 하다. 능력 있는 사람을 썩히는 건 아까우니까. 내부고발자라는 그녀의 이미지도 도움이 된다. 그녀가 파란에서 정상적으로 자리 잡는다면 조혜진이라는 사람은 대중들에게 홍보 효과가 될지도 모른다. 힘세고 똑똑하고 이미지 좋은 사람을 단순히 파티원으로 쓴다는 건 무식한 일. 어디까지나 문제는 그녀가 등판하는 시기다. 사실 지금 상황은 그녀와 내가 줄다리기를 하는 파워 게임이라고 볼 수도 없다. 단순히 지레짐작한 내가 혼자 쉐도우 복싱하는 상황에 불과하다. 뚜렷한 수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만약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이 해결된다면 나는 그녀를 그 누구보다 열심히 부릴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도 개처럼. “흠. 저는 이만 일어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성 씨.” “네?” “식사도 어느 정도 끝났고. 슬슬 캐슬락으로 갈 준비를 해놔야 되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일단 기본적인 물품은 제가 지시해 놓겠지만 혹여나 추가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시해서 서류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그….” 슬슬 나가야 되는 타이밍, 슬쩍 방문을 열자 길드 직원들이 시야에 비쳤다. “저. 기영 씨!” 김현성이 커다란 목소리로 이쪽을 부르며 내 팔을 잡은 것은 그때. 왠지는 모르겠지만 순식간에 이쪽으로 시선이 집중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심지어 얼굴을 붉히고 있는 길드 직원들도 눈에 띄는 중. 대부분의 여자직원들은 작은 비명을 내지른다. ‘뭐야.’ “저… 아직 할 말이.” 뭔가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것이 당연하리라. ‘내가 맞다고 했잖아’라는 작은 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왔고 ‘어머, 어머.’ 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심지어는 ‘여자친구 분들은 연막이라고…’라고 말하는 소리도 들린다. 저들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깨닫는 것은 순식간. ‘이게 아닌데… 시바….’ “그… 제가 잘 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기영 씨.” ‘알았으니까. 팔 좀 놔.’ “다른 뜻이 있었던 게 아니라 정말로 기영 씨가 부담을 느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이상하게 들리잖아.’ 꺄악! 하는 까마귀 우는 소리에 서둘러 문을 닫은 것은 당연. 김현성이 다시 한번 입을 열어오는 것이 보였다. “기영 씨 말대로 시기는 조금 늦추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당황스러우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길드로 돌아오자마자 이런 이야기를 드린 게 제가 생각해도 타이밍이 조금 이상했던 것 같군요.” “아니 그게….” “기영 씨도 혜진 씨를 알아갈 시간이 필요하겠죠. 다른 길드원들이 위화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물론 기영 씨도 위화감을 느낄 수 있고요. 조금 당황하시는 게 당연하고 섭섭해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 같은 느낌. 이상한 오해가 생긴 것 같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다. 정하얀만 인간관계에 서툰 것이 아니다. 나보다 많은 생을 살아온 회귀자 역시 인간관계에는 꽤나 서툴다. 굳이 비유하자면 녀석은 기차 같은 느낌. 유연하지 못하고 성격자체가 단순하다. ‘선의의 중재자.’ 사실 1회 차에서 오만가지 사건을 다 겪었을 녀석이 제대로 된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 처음 튜토리얼에서 만났던 표정과 지금의 표정이 다르다는 것을 보면 김현성은 확실히 이전에 잊어버렸던 것을 되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쁘지 않네.’ 정이 많은 회귀자라는 건 좋다. 내가 녀석이었다면 이런 애매한 상황에 이렇게 직구로 사과하진 않았을 것이다. ‘정말 나쁘지 않아.’ 나는 녀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뇨. 정말로 괜찮습니다, 현성 씨.” 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형이 용서해 준다, 쨔샤.’ # 150 회귀자 사용설명서 150화 너는 내가 왜 섭섭한지 몰라?(2) “그래서 어떻게 된 거요? 형님? 이야기는 잘된 거요?” “보면 알잖아? 아주 좋아.” “아….” “왜?” 조금은 진지했던 김현성과의 대화가 끝난 이후 하루가 지난 상황. 짐을 챙기던 박덕구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요. 조금 의외라서 그렇지. 아! 우리 형씨는 조금 어떻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제의 김현성은 조금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다. 1회 차의 망령에 사로 잡혔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 김현성에게 조혜진이 어떤 의미인지는 나야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자신이 실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내가 없는 동안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는 건 이해하지만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상태로 그녀를 요직에 앉히려고 한 것 자체가 무리수. 나를 위해 준비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이 있기는 했지만 김현성이 1회 차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은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녀석은…. ‘조금 강아지 같았지.’ 정말로 강아지 같았다. 아마 내 입에서 긍정적인 목소리가 나오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라고 하며 우쭈쭈 해주고 싶지만 내 입장에서는 아직까지 그녀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것이 움직이기 편하다. 최소한 김미영 팀장이 일을 끝마칠 때까지는 이런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내 쪽에서 조혜진을 거절한 대외적인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녀가 아직 우리 쪽에 완전히 녹아들지 않았다는 것. 실제로도 그녀의 능력과는 별개로 조혜진과 김현성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냐는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는 걸 보면 설득력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지금은 그것보다 더 이상한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김현성과 나에 관련된 오해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내 개인적인 이유를 제외 하더라도 지금 조혜진을 요직에 앉힌다는 것은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는 거다. ‘애초에 너무 대놓고 편파적으로 차별하는 건 안 좋아.’ 결론을 말하자면 파란에서 그런 위치에 있어야 하는 건 나 하나로도 충분하다는 것. 다시 한번 박덕구를 바라보며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뭐, 아쉬워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수긍하는 것처럼 보였어.” “그러면 또 다행이지만….”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아니 뭐 별건 아니요. 사실 형님이랑 형씨랑 의견이 틀어진 게 조금 신기해서 그렇지. 큼.” “마찰이 있었던 건 아니야.” “에이! 내가 들은 게 있는데.” “뭘 들었는데?” “거 뭐, 길드 여직원들이 하는 이야기는 일단 둘째 치고 뭐, 형님이랑 형씨랑 싸웠다는 소문이요. 식당에서 조금 마찰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는데 그거 진짜인거요?” “아….” “아니, 아니! 거, 싸우기는 한 거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일도 아니야. 뭐 싸운 거라고 볼 수도 없고 서로 오해가 있었을 뿐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런 중요한 일에 대한 결정을 혼자 계획한 채로 마지막에 말했다는 게 섭섭하기는 했지만….” “그래서….” “결과적으로 사과도 받았고 모든 게 정상이라는 거다. 만약 내가 그녀를 계속해서 반대한다면 마찰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어찌됐든 조혜진 씨는 유능하고 파란에서는 그녀 같은 인재상을 필요로 하니까.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지는 말고….” “아암. 입 무거운 거 하면 박덕구 아니요.” “준비한 건 전부 챙겼어?” “거의 다 챙겼소.” “한번 체크해 봐도 되지?” “잠, 잠깐만 조금만 더.” “오랜만에 긴 원정인데 실수가 있으면 안 되지.”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원정준비로 바쁜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박덕구 같은 경우에는 괜스레 이쪽을 기웃기웃거리며 빠르게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황정연은 그런 박덕구를 보조하는 쪽. 정하얀과 선희영 그리고 우리 꼬맹이 김예리도 자신들의 짐을 정리하는데 한참이다. 갑작스럽게 캐슬락으로 떠난다는 소식에 대부분의 인원들이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경험이 있어서 인지 빼놓는 물품들 없이 차곡차곡 마차 안에 실어 나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사실 파티원보다 바쁜 것은 길드 직원이다. 여기저기에서 꽤나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보급 물품은 확실히 챙겼어?” “네, 박중기 팀장님! 지금 마지막 꺼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후에 보낼 물품도 미리 정리해 놓은 거 맞지?” “네. 그러니까… 연금 키트랑 소모성 촉매들, 예비 장비들은 일단 창고에 넣어놨습니다.” “그리폰 사료도 넣어놔.” “네.” “기본 보호 마법으로 물품들 상하지 않게 관리 잘해주고. 내가 한번 확인해 볼 테니까 팀원들은 대기하고 있으라고 전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이럴 때 쓰라고 원정 지원 팀을 만들고 월급을 주고 있는 것이다. 굳이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챙기지 않아도 알아서 딱딱 원정 준비를 해주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훈훈하게 느껴진다. “저, 근데 팀장님. 긴 원정이 될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보급품의 양이 지나치게 많은 것 같습니다. 캐슬락에서 구입할 목록도 많은데… 편성된 보급품들이 예산 이상이라….” “길드 마스터께서 직접 요청한 사안이니 적혀 있는 대로만 처리해. 괜한 의문 가지지 말고 궁금해하는 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야. 우리가 할 일은 오차 없이 보금품을 전달하는 거지.”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조금 재미있는 사실은 캐슬락 원정에 들어가는 보급 물품들이 평소 원정에 비해 과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박중기 원정 지원 팀장이 아마 가장 잘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 길드 마스터가 직접 지시한 사항이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생각해도 이번 원정에 들어가는 물품들은 조금 이상한 면이 많다. 물론 현재 캐슬락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캐슬락에 자리 잡고 있는 이들이 지금 자신의 도시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은 분명히 캐슬락에서 뭔가 일어난다고 이야기 했다. ‘새로운 던전 출연? 몬스터 웨이브? 네임드 몬스터?’ 보급물품을 살펴보면 뭐가 가장 확률이 높은지 금방 답이 나온다. ‘너무 티 나잖아, 현성아.’ 물론 린델에서 멀어지는 만큼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지만 순수한 궁수도 아닌 김예리가 사용할 화살을 수천 발 준비하는 건 누가 봐도 당황스럽게 느껴진다. 화살뿐만이 아니다. 포션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는 기본 체력 포션도 김현성이 말해놓은 물량을 쏟아내기 위해 가열 차게 생산되고 있는 상태. 이쯤 되면 캐슬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쉽게 감이 잡힌다. 누가 봐도 대규모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진다. 물론 김현성이 말한 대로 모든 징후에 대비하기 위함이겠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녀석이 과하게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최소한 이번 원정의 목적이 단순한 던전 공략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몬스터 웨이브 아니면 레이드겠네.’ 개인적으로는 몬스터 웨이브에 조금 더 힘을 많이 실어주는 편. 불안하기는 했지만 기대가 되기도 했다. 김현성 스스로가 위험한 곳에 찾아서 기어 들어간다는 건 그만큼 보상이 크다는 거니까. “경험치가 어마어마하겠지?”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희영 씨, 짐은 다 챙기셨는지요?” “네. 개인 짐은 전부 다 챙겼어요.” “다른 이들은?” “네. 전부 챙겼고 예리와 하얀 씨의 짐도 직접 확인했습니다. 혜진 씨도 준비를 끝마치신 것 같고요. 문제는 없습니다.” “다행이로군요. 그럼 저희 길드 마스터께 출발 준비가 됐다고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일단 이쪽은 마무리. 그 다음은 저 쪽이다. “박중기 팀장님?” “부길드 마스터.” “목록대로 오차 없게 처리하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아. 네. 갑작스럽게 준비하다 보니 빠진 물건이 조금 있지만 물량이 전부다 갖춰지면 이후 캐슬락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확인하는 것입니다만 정말 이 보급 물품을 전부 보내드리면 되는 겁니까?” “네, 박중기 팀장님. 하나의 오차 없이 보내주시면 됩니다. 아니 여유가 된다면 추가 보급을 보내주시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 이후에 증원할 물품이 많아지면 전서구를 이용해 다시 한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이곳도 준비가 끝났다. 마침 타이밍 좋게 김현성이 모습을 드러낸 상황. 굳이 원정 준비가 끝났다고 뛰어가서 보고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미 마차는 출발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으니까. “바로 출발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현성 씨.” “네. 매번 수고하시는군요. 굳이 나와서 확인하실 필요는 없으신데….” “아무래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조금 불안해서 말입니다.” “기영 씨가 있어서 든든합니다.” ‘그래야지, 자식아.’ “어렵지 않은 일입니까요. 원정인원은 저를 포함해서 황정연, 박덕구, 정하얀, 선희영, 김예리, 조혜진 그리고 길드 직원 5명을 포함한 총원 13명입니다. 물량을 맞춰야 하는 일부 물품을 제외하고는 전부 마차에 실어놨습니다. 이후 물량이 맞춰지는 즉시 다른 마차들이 출발할 예정입니다.” “네.” “길드는 이상희 고문님과 김미영 팀장님 외 기존 타 팀장들이 맡아주실 계획입니다.” “네. 확인했습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죠.” “예.” 천천히 마차 안으로 길드원들이 들어가고 난 이후에 나 역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폰으로 이동한다면 금방이지만 마차로 이동하면 시간이 조금 걸린다. 보급품과 함께 움직여야 하기도 하고 캐슬락까지는 길이 조금 거치니까. 이미 안정화가 되어 있는 장소였기 때문에 몬스터가 습격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여행길은 소풍이나 다름없다. 느긋하고 편안하게 몸을 쉬다 보면 목적지까지는 금방 도착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 원정은 오랜만인 느낌이라 두근두근거린다니까.” “놀러가는 건 아니니까 긴장하는 게 좋을 거야. 쉬는 건 캐슬락에 도착할 때까지니까.” “큼, 기영이 형님 너무 빡빡한 거 아니요?” “하하하하.” 박덕구의 말에 김현성이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비가 오면 땅이 굳는다. 마찰 아닌 마찰을 겪은 나와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보다는 조금 관계가 단단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어제의 초조한 표정이 갑자기 떠오르자 웃음이 나올 지경. 본래 김현성의 인성이 나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어제의 사건으로 인해 김현성에게 좀 더 확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야 하는 것은 많다. 조혜진에 대해 알아봐야 하고 캐슬락에 메이드인 이기영 포션을 유통시켜야 한다. 마를린 영애와 만나야 되는 것은 물론, 어쩌면 신전도 들려야 할지도 모른다. 몬스터 웨이브인지 네임드 몬스터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도시자체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도 해결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도 조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한 가지. ‘현성아, 네 뒤통수는 형이 지켜줄게.’ 회귀자 뒤통수는 내가 지킨다. 그때였다. [영웅 등급 특성 마음의 눈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갑자기 뭐야?’ # 151 회귀자 사용설명서 151화 마를린 영애(1) 할 일 없이 푹 쉬는 여행길이 됐어야 했다. ‘후우….’ 사실 몸이 편한 거야 당연하다. 문제는 계속해서 고민을 하게 만드는 상황이었다. 어째서 갑작스럽게 마음의 눈의 등급이 진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상이 가는 게 있기는 하다. 어디까지나 가설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김현성 때문일 거라는 게 합리적인 판단. ‘상태창.’ [플레이어 이기영의 상태창과 재능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이기영] [칭호 - 용병 여왕의 정부, 베니고어 신성제국의 명예주교] [나이 - 25] [성향 - 용의주도한 전략가] [직업 - 생체연금소환사 - 고유 영웅 등급] [직업 효과 - 기초 마법 지식 습득] [직업 효과 - 기초 연금 지식 습득] [직업 효과 - 중급 연금 지식 습득] [직업 효과 - 특수 소환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 - 21/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 - 22/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 - 3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 - 72/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 - 22/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 - 60/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 - 33/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장비] [저주를 내리는 검 율리에나 - 전설 등급 - 주인의식]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 - 영웅 등급 - 연금술사 전용] [마력방패의 반지 - 희귀 등급] [특성 - 마음의 눈 - 전설 등급] [총평 - 이제 조금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셨군요. 나름대로 높다고 할 수 있는 지력 능력치와 높은 행운 능력치가 인상적입니다. 나머지 능력치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쓰레기지만 마력 스탯이 30을 넘었다는 것은 그래도 칭찬할 만합니다. 물론 그중에서도 고유 영웅 등급의 직업과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 가장 눈에 띄지만요. 한계는 있겠지만 열심히 발버둥 쳐보도록 하세요. 아주 작게나마 응원을 보내드리도록 하죠.] ‘조금 우호적인데.’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총평이 조금 우호적으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죽으라고 말했던 처음과는 다르게 뭔가 이쪽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는 듯한 느낌. 물론 이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나야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마음의 눈’ 등급이 상승한 것은 김현성에게 충성을 맹세한 효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타이밍이 그랬으니까.’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김현성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저 그런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을 역행한다는 게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김현성의 상태창에 보이는 칭호 중에 하나인 ‘알타누스의 회귀자’. 어쩌면 김현성이 시간을 역행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초자연적인 존재? 초월적인 존재? 어쩌면 신일 수도 있다. 이 시스템을 만들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녀석임은 물론 일반 사람이 사용할 수 없는 힘을 이쪽에 뿌려주는 녀석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는 되어야 시간을 되돌렸다는 게 현실성이 있다. ‘문제는….’ 녀석이 어째서 김현성의 시간을 되돌렸는가. 정답은 간단. 원하는 것이 있어서 되돌린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 원하는 게 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말하자면 우리 회귀자는 초월적인 존재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선택받은 사람인 셈. 어쩌면 이번 등급 상승은 그 존재의 선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열심히 해왔다는 위로와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느낌의 선물 말이다. [특성] [마음의 눈 - 전설 등급] [자신과 타인의 상태창과 숨겨진 재능 등급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전설 등급의 특성이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대다수의 기능이 잠겨 있습니다.] [추가 - 자신과 타인의 숨겨진 고유기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유기벽이란 플레이어가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종류의 능력치이며 오직 플레이어 이기영만이 가지고 있는 전설 등급의 마음의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대다수의 기능이 묶여 있다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준다면 하나하나 제한을 풀어준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모든 것이 내 가설이고 뇌 내 망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암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요! 감사합니다! 신이시여!’라고 생각해도 별 상관은 없다는 거다. 중요한 것은 내가 새로운 능력을 얻었다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하다. 사실 고유기벽과 특성이 뭐가 다른 것인지, 겨우 이걸 보는 게 뭐가 중요한지에 대해 고민해 보기는 했지만 내 생각보다 더 쓸 만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특성이 시스템이 내린 힘이라면 고유기벽이란 시스템에 의지하지 않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힘이고 성향 외의 성격이다. 대부분의 특성은 긍정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지만 고유기벽은 그렇지 않다. 무척 부정적일 수도 있다는 거다. [플레이어 이기영의 고유기벽을 확인합니다.] [거짓말쟁이의 유혹] [상대방을 유혹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듭니다. 위험한 이성에게 사랑받을 확률이 증가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처럼. 물론 이런 것도 있다. [플레이어 정하얀의 고유기벽을 확인합니다.] [핏물이 넘쳐흐르는 사랑]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모든 걸 바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나 양심까지도. 대상이 연관되어 있는 특정 상황에서의 각성 확률이 올라갑니다. 부작용을 조심해 주세요.] 결론적으로 나는 주변 사람들을 이전보다 조금 더 다룰 수 있게 됐다는 거다. 이 고유기벽이라는 게 개인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없지만 정하얀과 나만 봐도 대충 답이 나온다. 의외로 맞아 떨어진다. 정하얀이 내가 관련되어 있는 일이라면 상상이상의 힘을 내는 것도, 묘하게 이쪽에게 이상한 인연들이 꼬이는 것도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무튼 간에 다른 사람들이 여행을 즐기는 와중에도 이쪽은 얻은 것들을 열심히 굴릴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능력치에 대해 연구하고 현 상황에 대해서 분석 아닌 분석을 하느라 정신적으로 조금 지쳐 있는 상태. 본래 몸 비우고 마음 비우고 쉬려고 했던 걸 생각해 보면 상상이상으로 피곤해 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도 좋아.’ 마음의 눈에 있는 제한이 전부 풀린다면 어쩌면 한 대상에 관해 거의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리라. 어쩌면 마음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고 거의 모든 정보를 손에 쥐게 될지도 모른다. ‘베니고어 여신님! 알타누스 님! 저는 우리 회귀자에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요! 더 주셔도 됩니다! 더 베풀어 주세요!’ 괜스레 속으로 다시 한번 외쳐봤지만 그다지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신님의 목소리 대신 들려온 것은 정하얀의 목소리. 내 얼굴을 바라보는 정하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빠, 조금 피곤해 보여요.” “아. 잠을 못자서 그런가…. 조금 피곤하네. 캐슬락은 얼마나 남았지?”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들었어요. 아니… 거의 다 왔어요.” “그거 다행이네.” “저, 저기 오빠.” “응?” “저… 그… 캐슬락이 마를린 영애가 있는 곳 맞죠?” “아… 응.” “어디서 들었는데… 그… 남자들은 백인을 좋아한다고….” ‘박덕구 이 새끼….’ 왠지 모르게 저런 말을 흘린 건 박덕구일 것 같은 느낌. 며칠간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캥기는 게 있는 모양이다. 어째서 정하얀이 마를린 영애를 의식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상황이 하나 있기는 하다. ‘편지… 읽었나?’ 그러고 보니 편지를 읽은 이후에 잠든 정하얀을 그대로 놔두고 방을 나섰다. 만약 정하얀이 마를린 영애의 편지를 읽었다면 쓸데없는 오해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것. 심지어 상담 차 박덕구를 찾아갔고 박덕구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일이 많은 상황에서 정하얀까지 날뛰는 건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니다. ‘이 돼지가 오랜만에….’ 아직도 방에 있는 보트를 사용하고 싶은 모양. 처음부터 안심시켜 주는 게 중요하다. 김현성이 조혜진을 보고 느낀 게 있는 만큼 슬쩍 정하얀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마를린 영애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안심해도 돼.” “아!” 저주받은 신단 회귀사건 이후에 정하얀이 사고를 치는 횟수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하얀은 정하얀이다. 지속적인 멘탈 관리가 필요하다. 굳이 고유기벽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형님! 밖으로 나와보쇼. 누님도!” “응?” “캐슬락에 다 온 것 같소. 크으….” “그래.” 정하얀의 손을 꽉 잡은 채로 밖으로 나가니 시야에 비친 것은 바위로 쌓아올려진 커다란 성벽. “와….” “거, 가관 아니요?” “장관이겠지.” 그야말로 장관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광경이다. 딱딱하고 견고한 성벽. 무척이나 높아 보이는 성벽은 그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성벽 때문에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조금 답답하기는 했지만 저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을 뺏긴 것 같은 느낌이다. 린델이 은근슬쩍 현대화가 되어 있고 신성제국의 수도가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했다면 눈앞에 보이는 성벽과 성은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었던 판타지 세계의 영지 그 자체.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게 될 정도였다. “멋지네.” “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아, 현성 씨.” “저도 들은 이야기지만 과거의 캐슬락은 신성제국 베니고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합니다.” “음.” “끊임없이 몬스터들을 막아내기 위해 고안된 높은 성벽이 공화국의 침략을 막아주는 벽이 된 셈이죠. 물론 지금은 몬스터들이 성벽을 들이닥치는 일이 없다고는 하지만 캐슬락의 제국민들은 저 벽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럴 만하군요. 위치도 위치니까요. 국경과 가장 가깝기도 하고… 커다란 숲을 옆에 두고 있으니… 아! 그렇다면 최근에야 숲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지기 시작한 겁니까?” “네. 자세한 사항은 확인해봐야겠지만 캐슬락에 체류하고 있는 용병이나 자유민들의 생환율이 지속적으로 내려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가끔 숲 밖으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도 보이고요.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별로 좋은 징후는 아니죠.”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기는….’ 이미 준비를 다 하고 가는 주제에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조금은 우습다. ‘귀여운 놈.’ 슬그머니 정하얀의 머리를 쓰다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마차는 캐슬락을 향해 가는 중,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성벽이 조금 더 높아진다. 익숙한 인형이 보였던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아….’ 수많은 기사를 대동한 채 오랜만에 보는 마를린 영애가 이쪽을 마중 나온 것. 이쪽이 간다는 것은 아직 정하지 않은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저렇게 나와 있는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그다지 정하얀을 기분 나쁘게 하고 싶지는 않은 심정. 김현성도 슬쩍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저들이 우리를 마중 나온 게 나 때문이냐고 묻는 듯한 느낌. 우리 회귀자에게 유능함도 보여주고 싶고 정하얀의 멘탈도 다듬어주고 싶은 상황. 한 가지를 선택하면 한 가지를 포기해야 되는 극한 상황이지만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이기영 님!” 눈물을 흩뿌리며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마를린 영애가 보였으니까. ‘시바… 하얀아, 이번엔 진짜 아니다.’ 슬쩍 김현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하얀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이다. “간다고 말한 적은 없었는데… 아마 멀리서 저희가 오는 것을 봤던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큼. 일단은 인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네.” 마차에서 살짝 내린 뒤에 손을 흔든 것은 당연지사. “아! 마를린 영애!” 적당히 악수를 건네려던 찰나, 속도를 줄이지 않고 무식하게 이쪽으로 달려오는 여자가 시야에 비쳤다. “이기영 님!” 오랜만에 만난 장거리 커플처럼 나를 꽉 안아 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한 것은 당연지사. 기사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이 철없는 아가씨를 밀쳐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둬야 하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 정하얀은 여느 때처럼 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조혜진과 김현성은 놀랐다는 표정. 들어본 적이 오래된 것 같은 꼬맹이 김예리의 목소리가 괜스레 크게 들려왔다. “바람둥이.” # 152 회귀자 사용설명서 152화 마를린 영애(2) 괜스레 심장이 쿡쿡 찔려왔다. 그렇지만 김예리의 한마디보다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이다. 몇 년간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 장거리 커플처럼 대하려는 이 마를린 영애가 문제다. 아직까지 포옹을 하고 있는 그녀를 슬쩍 떼어내며 살짝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마를린 영애.”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기영 님.” “미리 마중 나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 사실 언젠가 한 번 들린다는 말씀이 적혀 있는 편지를 받은 후에 이기영 님께서 오시는 날만을 기다렸답니다.” “네?” 편지를 보낸 시점부터 이곳에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15일 정도. 계속해서 이쪽을 기다렸다는 게 조금 당황스러웠다. ‘애도 좀 이상한데….’ [제국민 마를린 베라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집착하는 소녀] [관심 있는 것에 광적으로 몰두하며 집착합니다.] ‘시바….’ 앞으로는 조금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를린 베라의 성향은 순수한 귀족영애. 당시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었지만 자세하게 속을 들여다보니 또 조금 다르다. 정확히 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정상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캐슬락 영주의 따님이라는 것밖에는 장점이 없으니 적당한 선에서 밀어내는 게 옳다. ‘머리 아파질 수도 있어.’ 제2의 정하얀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높은 성 위에서 항상 린델에서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꼭 들려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네….” “린델에서 나오는 소식지도 직접 전달 받아 읽어보고 있답니다.” “아… 네….” ‘…….’ “오늘 아침에 저 멀리서 오는 마차를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같이 오신 분들께 인사가 늦었군요. 안녕하십니까, 캐슬락에 오신 손님 여러분들. 마를린 캐슬락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마를린이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반갑습니다, 마를린 영애.” “이쪽은 제가 몸을 담고 있는 파란의 길드 마스터 김현성 씨라고 합니다. 나머지 분들과도 모두 인사 나누시죠. 마를린 영애. 하얀 씨는 뵌 적이 있으시죠?” “네. 정하얀 님도 반갑네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파란 길드 마스터님.” “저도 마를린 영애에 대해서는 자주 전해 들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많이 들어보기는 개뿔… 인사 치례라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라.’ 왕성에 김현성에 대한 이야기를 수차례 뿌린 건 진실이지만 김현성에게 마를린 영애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밖에 없다. 괜히 자주 전해 들었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하얀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으니까. ‘뭔가 변명을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던 찰나 옆에서부터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는 목소리였다. “후우… 후우…. 이기영 명예주교님!” “유다 대주교님! 캐슬락 신전에 계셨군요.” 마찬가지로 교황청에서 만난 작은 인연. 뭐, 같이 차를 마신 게 전부지만 우리 교황청 식구들은 조금 많이 끈끈하다. “미리 연락을 해주셨으면 마중 나갔을 텐데요. 허허허.” “하하하. 바쁘신 분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거 유다 대주교님이 오실 줄 알았으면 선물이라도 가져왔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캐슬락에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허허. 제가 말씀 드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선물은… 큼. 마음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떻게. 바젤 추기경님을 잘 계십니까?” “허허. 그분은 여전하십니다. 베니고어 여신님을 모시는 것에 여념이 없으신지라….” “그렇군요. 현성 씨. 잠깐 이쪽으로… 말씀 드렸었지요? 이쪽은 제가 몸을 담고 있는 파란의 길드 마스터 김현성 님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저희 길드의 사제님인 선희영 님이시고요. 빈민의 성녀라고 불릴 만큼 봉사에 힘써주시고 계신 사제님입니다. 린델에서 신의 뜻을 설파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사제 중 한 분이시지요.” “오오오. 이분이 그 김현성 님이시로군요. 그리고 이쪽이 선희영 사제님이시고….” “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김현성 님.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우며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이기영 명예주교가 입이 닳도록 칭찬한 이유가 있었군요. 눈이 무척 깊습니다.” “과찬입니다, 유다 대주교님. 파란의 길드 마스터인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빅토리아 주교! 이쪽으로 와서 선희영 사제님과 인사 나누시지요!” “네. 유다 대주교님!” “자유민 중에서도 이런 사제님이 있다는 건 복 받은 일입니다.” “하하하하하하.” 순식간에 서로 인사를 나누고 시끌벅적해지는 분위기 때문에 대충 마를린을 떨쳐낼 수 있었다. 정하얀과도 안면이 있는 이들이 그녀에게 인사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정하얀은 저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크게 관심이 없는 모양. 오히려 이쪽에 꼭 달라 붙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누구보다 가장 바쁜 것은 김현성. 갑작스럽게 자신을 향해오는 인사세례에 조금 당황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인맥은 인맥을 만들고 그 인맥은 또 새로운 인맥을 만든다. 왕성과 교황청에 김현성에 대한 이야기를 뿌리며 긍정적인 분위기를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작업은 끝이라는 거다. ‘이게 형이야.’ 별것 아니지만 능력이라면 능력. 기존 멤버들이야 그다지 혼란스러워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길드의 새로운 멤버인 조혜진은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만하지.’ 파란은 잠재능력이 높다. 대외적으로 붉은용병, 검은백조, 카스가노 유노의 요조라 길드와 동맹관계고 포션 시장도 꽉 잡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파란의 위치는 잘 봐줘야 중형 길드. 물론 금전은 짭짤하게 만지기는 하지만 무력이 우선인 이곳에서는 가치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접을 받고 있으니 신기한 게 당연할 것이다. 막말로 차희라와 카스가노 유노가 손을 잡고 캐슬락을 방문해도 대주교가 저들을 마중 나오지는 않는다. 도시 안에 있는 주요 인물은 전부다 나온 것 같은 상황이니 저렇게 황당한 표정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혜진아, 알아서 잘 처신해줘.’ “밖에서 이럴게 아니라 일단 안쪽으로 모시는 게 좋겠네요.” “허허허. 그렇게 하시지요. 마를린 영애.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오신다는 소리에 반가워 늙은이가 시간을 뺏었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환영해 주셔서 기쁠 따름입니다. 대주교님.” “여전히 우리 이기영 명예주교님의 입은 꿀을 바른 듯합니다. 허허. 그럼 마를린 영애 말대로 빨리 들어가시지요. 일단은 영주성에서 머무르면서 쉬시고 신전에도 꼭 들려 주셔야 합니다.” “네. 물론입니다. 유다 대주교.” “신도들이 기뻐하겠군요. 허허.” 기사들이 길을 만들고 그 안으로 천천히 마차가 진입하기 시작.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캐슬락의 내부가 시야에 비쳤다. 제국민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긴 하지만 확실히 자유민들이 터를 많이 잡은 곳인 만큼 검은색 머리를 한 동양인들이 시야에 비친다. “이렇게 갑자기 캐슬락을 찾아 주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이기영 님.” “저도 이렇게 빨리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영애. 그렇지 않아? 하얀아?” “네. 오빠!” “아…….” 조금씩 자신을 챙기는 모습을 보이자 그제야 기분이 좋은지 싱글거리는 정하얀. 반대로 마를린은 조금 풀이 죽는다. 김현성 같은 경우에는 유다 대주교에게 붙잡혀서 대화하는 중. 캐슬락이 신기한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파티원들도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우리 파티원들보다 더 신기해하는 것은 캐슬락에 자리 잡은 플레이어. 아까의 조혜진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푸흐흣.”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할 뻔자. 지금 들어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기에 캐슬락의 기사들을 대동한 채 신전의 대주교와 함께 들어오는지 궁금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저들에게도 진풍경처럼 느껴질 터. 귀빈이라도 방문한 줄 알고 있는지 어떻게든 이쪽을 확인하려고 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쯧.’ 자신들과 같은 자유민이라는 걸 확인했는지 모두가 놀란 얼굴들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영주성으로 향하면 향할 수록 한 사람에게 시선이 몰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혜진.’ 저들의 입장에서는 캐슬락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녀가 갑작스레 금의환향한 셈이다. 조혜진은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캐슬락의 자유민들을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나 별로 좋지 않게 캐슬락을 나왔던 게 맞다. 혹시나 자신을 아는 얼굴이 나오지는 않을까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옳은 일을 한 그녀가 어째서 죄인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표정이 재미있다. “마를린 영애.” “네, 이기영 님.” “조혜진 씨 기억하시지요? 그 저번에 제가 말씀드린….” “아아아! 그렇군요. 아버님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혜진 님.” “네….” “몇 년 전에는 제가 아카데미에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뵙지 못 했네요. 캐슬락에서 활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인상적인 활약을 하셨다고….” “그… 인상적이지는 않습니다. 그저 다른 자유민이 하는 것처럼….” “조혜진 님이나 이기영 님 같은 자유민 덕분에 저희 신성 제국이 더 발전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제국민을 대표해서 감사의 인사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랍니다.” 캐슬락 영지에 금지옥엽인 마를린이 조혜진에게 딱 달라붙어 대화를 나누자 다시 한번 시선이 집중되는 것 같은 느낌. 일이 점점 더 재미있어 진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사람이 몇몇 있다. 혀를 차거나 인상을 구기는 족속. 가슴에 달려 있는 길드 휘장은 저들이 어떤 길드인지 말해주고 있다. ‘작은바위.’ 아마 확실하리라. 캐슬락에 자리 잡은 길드 중에서는 그나마 대형 길드라고 할 수 있는 길드. 그리고. ‘우리 조혜진 양이 고발한 사람들’ 지나가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시선이 마주친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내가 저들을 의식해 한 번씩 보고 있는 것뿐이지만 저들도 그걸 알고 있는지 영주성으로 향하는 우리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되나.’ 대화를 한 번쯤 나누어 보고 싶은 것은 사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고 정확히 어떤 사건이 터졌고 또 저들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가 무척 궁금해졌다. “마를린 영애.” “네? 이기영 님.” “조금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캐슬락은 이곳에 체류한 자유민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마 조금은 우호적일 거라고 생각해요. 영주성에 초청해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저희 캐슬락 입장에서도 이곳에 체류한 자유민들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요. 몬스터의 개체 수를 줄여주시는 것도 그렇고 저희 기사들이 할 일을 분담해 주고 계시니 고마울 따름이랍니다.” “그렇군요.” “자유 도시 린델만큼은 아니지만 저희 캐슬락에서도 여러 가지로 자유민들의 편의를 봐주고 있고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고 있어요. 영주민뿐만이 아니라 자유민 분들의 복지로 신경 쓰고 있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아아아아아.” “혹시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영애. 갑작스럽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있습니다.” “네?” “사실 캐슬락으로 온 이유는 이곳에 있는 몇몇 길드와 계약을 맺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저희 길드에서 유통하고 있는 포션을 캐슬락에도 판매할 수 있다면 서로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혹시나 괜찮으시면 다리를 놔주셨으면 합니다.” “네! 물론이죠! 이기영 님의 부탁인데….” ‘계약 건은 이걸로 됐고….’ 남은 건 천천히 저들을 만나기만 하면 된다는 거다.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을 때 앞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를린 영애.” 처음 들어본 남자 놈의 목소리. 조금 키가 커 보이는 녀석. ‘뭐야 이놈은 갑자기….’ 녀석이 누구인지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조혜진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 153 회귀자 사용설명서 153화 마를린 영애(3) ‘뭐야, 이놈은. 갑자기….’ 조혜진이 몸담고 있었던 작은바위의 길드 마스터. 순간적으로 마음의 눈을 발동시키니 녀석의 능력치와 특성이 눈에 들어왔다.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은 것 같은 느낌. 기억해 둘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이런 말을 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동안 대단한 사람들을 많이 봐왔던 나에게 녀석은 그저 그런 놈으로 비춰졌다는 거다. 성향은…. ‘열정적인 야망가.’ 고유기벽은…. ‘양면이 다른 나뭇잎.’ 왠지 모르게 졸렬하게 들려오는 기벽. 별다른 보너스 효과도 없는 종류의 능력이다. 대충 녀석이 어떤 인간인지가 머릿속에서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하….’ 조혜진과 얽힌 이야기도 어느 정도 감이 올 것 같았다. 지금 이런 식으로 이쪽에 말을 걸어오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대놓고 말하자면 어떻게든 얽히고 싶어 하는 듯한 느낌. 정확히 원하는 바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쪽에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하든지, 아니면 이쪽을 견제하든지 그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행렬 속에서 갑작스레 마를린을 불러 세우는 게 이쪽에게 실례라는 걸 알지는 못하는 모양. 어쩌면 계획된 일일수도 있다. 영역표시라든가 텃세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니까. 겨우 저런 것 가지고 뭐라고 할 정도의 꼰대는 아니지만 기분이 나쁘기는 하다. “아, 송정욱 님.” 마를린이 입을 열었지만 별로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정하얀의 어깨를 감싸며 녀석을 지나치는 게 전부. 당연히 마를린은 녀석을 무시한 채로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이쪽과 대화를 나누는 게 더 중요할 테니까. “누구였습니까?” “아. 그 작은바위 길드의 마스터 송정욱 님이라고….” 살짝 뒤를 돌아보니 영 좋지 않은 곳을 맞은 것처럼 표정이 일그러진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면전에서 개무시를 당했으니 저런 표정을 보이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물론 이쪽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다.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것도 아니었고 마를린 영애가 이쪽으로 혼자 뛰어온 것에 불과하다. 나는 그냥 정하얀과 사이좋게 갈 길을 가고 있었으니 그걸로 끝. 지금 일어난 민망한 상황은 내 잘못이 아니다. “아아아. 작은바위 말이군요.” “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캐슬락에서 규모가 제법 크다고 들었습니다. 모험 실적 역시 괜찮고요. 희귀 등급의 던전이 세 개, 영웅 등급의 던전을 하나 정도 공략했었다고 했었나요?” “아… 저, 저는 자세히는….” “괜찮습니다, 마를린 영애. 이거 귀인을 지나칠 뻔했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로드릭 경? 송정욱 님 좀 이리 불러 주시겠어요?” “네, 영애.” 딱 봐도 능력치가 나쁘지 않은 기사가 후다닥 뛰어갔다. 잠깐 동안 무안을 느꼈던 송정욱이라는 놈의 안색이 점점 심각해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자존심이 상하기는 상한 모양. 그야 뉘 집 개도 아니고 ‘여기 갔다 저기 갔다’라고 말하는 데 기분이 좋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지 않을 수도 없다. 어디까지나 녀석을 이쪽으로 부른 건 마를린 영애였으니까. 결국에는 입술을 조금 깨문 채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송정욱 님. 정신이 없었던 터라.” “아니요. 괜찮습니다, 영애.” “다름이 아니라 이쪽은 린델에서 오신 파란의 부길드 마스터 이기영 님이라고 합니다. 꼭 한 번 송정욱 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셔서….” “그렇군요.” 내 쪽을 슬그머니 살펴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네가 그럼 그렇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은 가관. 이쪽이 자신을 부른 것이 뭔가 특별한 뜻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슬쩍 손을 내밀며 입을 여는 송정욱이 시야에 비쳤다. “반갑네. 작은바위의 길드 마스터 송정욱이라고 하네.” ‘하….’ “그래. 파란의 길드 마스터는 어디계시나.” ‘이 새끼가….’ “언제 한 번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려고 했었는데 마침 잘됐군.”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그리고… 혜진이는 오랜만이구나. 파란에 들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아. 오랜만입니다, 송정욱 님.” ‘무시해?’ 어의가 상실하다 못해 대역죄를 받아 사약을 마시고 날아가 버릴 지경. 이해는 간다. 나는 길드 마스터가 아닌 부길드 마스터의 입장이었고 송정욱 저 양반은 캐슬락을 대표하는 길드를 운영하고 있었으니까. 굳이 직급으로 분류하자면 놈이 나보다 위에 있다는 거다. 나이도 그렇고 이곳에 들어온 년차도 있으니까. 평소대로 아주 자연스럽게 하대가 나왔을 것이다. ‘내가 명예 주교가 된 걸 아직도 모르는 인간도 있나?’ 캐슬락에 있는 자유민들에게는 아직 소식이 들어가지 않은 모양. 언제 한 번 신문에 광고라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업차 온 것이 맞지만 당연히 굽히고 들어갈 생각은 없다. 영업사원이 꼭 을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물론 적당히 기분을 맞춰줄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녀석은 차희라 급의 강자도, 조혜진 정도의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굳이 내가 먼저 손바닥을 비벼야 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거다. 비벼야 한다면 도리어 저쪽에 해당되는 일이다. 이곳에서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것도 바보 같은 일. 딱히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이건 무슨 상황인지에 대해 물어보듯 마를린 영애를 바라보니 그녀가 화들짝 놀라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예, 예의를 지켜 주시지요.” “영애?” “이기영 님은 캐슬락 영지의 손님이십니다. 무례하군요.” “마, 마를린… 영애.”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실망입니다, 송정욱 님.” “그게….”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이기영 님.” “큼. 뭐, 괜찮습니다. 사과할 사람은 영애가 아니기도 하고…. 그, 아까 제가 한 말은 잊어주시겠습니까?” “네?” “포션 관련해서 드린 말씀 말입니다. 본래는 조금 천천히 즐기다 가려고 했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용무만 마친 이후에 빠르게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 마를린 영애의 표정이 구겨졌고 정하얀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슬그머니 정하얀을 이쪽으로 더 끌어당기자 과시하듯 이쪽에 달라붙어 오는 정하얀. ‘이런 표정은 조금 안 어울리네.’ 지나치게 기뻐하는 것 이전에 뭔가 콧대가 올라간 것 같은 표정. 자신이 가장 사랑받고 있다는 걸 모두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치명적인 표정을 지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내 눈에는 그저 귀엽게만 보인다. 영애의 표정이 창백해진 것은 당연지사. 정하얀 때문이 아니다. 아마도 내가 방금 말한 대사의 속뜻을 읽었을 것이다. ‘영업이고 포션 계약이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대충 볼일만 본 다음에 돌아갈래. 캐슬락 여행하는 걸 얼마나 기대했었는데… 기대 이하야. 무례한 사람들 때문에 기분 다운됐어.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안 왔을 거야.’ 아마 온갖 부정적인 대사들이 머릿속에 박히고 있을 것이다. “이기영 님, 그게….” “자. 이만 돌아가도록 합시다, 영애.”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뻔할 뻔자.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송정욱이라는 녀석을 향해 입을 여는 영애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정식으로 사과해 주세요.” “네?” “방금 이기영 님께 보인 무례를 정식으로 사과해 주세요, 송정욱 님.” “그… 무례라뇨.” ‘이렇게까지 과민반응할 일은 아니긴 하지.’ “제가 뭘 말하고 계시는 건지는 송정욱 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아까 전에 이기영 님께 보인 무례를 정식으로 사과해 주세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얼굴을 뵙지 않을 겁니다.”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 그렇지만 유다 대주교가 없는 게 다행이다. 김현성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저 멀리 나아가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놈은 신전의 신도들에게 둘러싸였으리라. “괜찮습니다, 마를린 영애.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뇨. 이기영 님은 저희 캐슬락의 손님이십니다.” ‘손님 자격으로 오지는 않았지만….’ “이기영 님에게 무례를 보인 것은 곧 저희 가문에게 무례를 보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꼭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애.” 감동받았다는 표정 정도는 보내주는 게 당연할 것이다. 어찌됐건 마를린 영애가 나를 위해 무리해 주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작은바위 정도의 길드와 척을 지는 것은 사실 캐슬락에서도 반가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저렇게 계속해서 압박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철없는 마를린 영애의 생떼인 셈. 물론 굳이 갑을 관계를 정리하자면 영애 쪽이 갑이기는 하지만…. ‘자존심 상할 거라 이 말이지.’ 송정욱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일 것이다. “송정욱 님. 정말!” “마를린 영애, 괜찮습니다.” 욕하는 시어머니와 말리는 시누이. 내가 봐도 그림이 무척 얄밉다. 상황 자체도 무척이나 나쁜 상황. 길거리 한복판에서 자유민들과 제국민들이 모두를 바라보고 있다. 자유민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송정욱이 나한테 고개를 숙여야 되는 상황이라는 거다. ‘잘됐네.’ 이참에 이쪽과 저쪽의 갑을 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 문제는 녀석이 나에게 고개를 숙이는가. ‘자존심이 강해 보이니까.’ 어물쩍 넘어가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였어도 녀석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옛날 길드원인 우리 조혜진 양도 지켜보고 있고 현 길드원 몇몇도 보인다. 제국민들 물론, 무소속의 자유민들도 갑작스러운 사건에 집중하고 있다. 놀리는 건 여기까지라고 생각했을 때 눈에 보인 것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송정욱의 모습. ‘히야….’ 내 입장에서는 얻을 게 없어 보였던 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숙인 녀석을 보니 어째서 녀석이 내게 고개를 숙였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를린 영애 때문이구나….’ 그녀한테 조금 더 잘 보이고 싶다는 것 빼고는 다른 답이 나오지 않는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지요, 이기영 부길드 마스터.” “아아. 괜찮습니다, 송정욱 님.”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하하하. 이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 “마를린 영애, 이제 괜찮습니다. 실수 때문에 일어난 오해니까요. 용서해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 대로변에서 파란의 부 길드 마스터인 내가 캐슬락의 작은바위 길드의 길드 마스터를 용서해 주는 그림은 아름답다. 저 길드뿐만이 아니다. 아마 지금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대부분의 길드와 클랜, 개인들이 이 상황을 보고 느끼는 게 있을 것이다. ‘저 새끼는 건드리면 안 되는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물론 저것 말고도 얻은 것은 있다. “안 그래도 작은바위 길드에 한 번 찾아가려고 했었습니다, 송정욱 님. 조만간 영주성에 들려서 저를 찾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제가 찾아가도록 하죠.” “…….” “하하하하. 이거 오늘도 즐거운 인연을 만들었군요. 뭐, 더 하실 말씀이 없으니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마를린 영애는 뭐 할 말이 있는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이기영 님. 그, 중요한 일은 아닐 것 같아서…. 송정욱 님,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얀아? 혜진 씨도 빨리 가시죠.” “네, 오빠.” “네, 부길드 마스터.” “그리고… 음. 혜진 씨?” “네.” “캐슬락에 있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고개 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리고 다른 길드의 길드 마스터에게 굳이 깍듯이 대할 필요도 없고요. 혜진 씨는 이제 파란 소속이고 파란의 얼굴입니다. 타 길드나 클랜에 고개 숙인다는 건 곧 파란이 고개를 숙인다는 거라는 걸 항상 머릿속에 떠올려 주세요.” “아…….”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그거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조혜진을 어떻게 이쪽에 끌어드릴지에 대한 것. 마를린 영애를 부르려고 하지만 끝내 붙잡지 못하는 송모씨를 보자 좋은 아이디어들이 여러 가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 154 회귀자 사용설명서 154화 작은바위(1) 파란은 캐슬락에 훌륭하게 적응했다. 마를린 영애는 우리를 위해 성대한 파티를 열었고 온갖 산해진미와 좋은 술을 마시며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오랜 여행의 피로가 풀린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것 역시 일의 연장선임은 변함없었지만 마치 휴양 온 기분으로 캐슬락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특혜 아닌 특혜를 누렸다. 물론 김현성의 경우에는 예외였다. 이쪽이야 본래부터 아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김현성 같은 경우에는 다른 유력 귀족들에게 인사를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피곤해 보였지.’ 내가 온다는 소식에 다른 도시에 있는 주교와 귀족들도 캐슬락으로 향한 것이 문제. 5일이 넘게 지속된 연회 기간 동안 모든 이의 얼굴을 익히고 대화를 나눠야 했던 김현성은 정말로 힘들어 보였다. 체질인 나와는 다르게 칼 밥 먹고 살던 녀석에게는 어울리는 그림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캐슬락 백작 때문에 조금 더 힘들었으리라. 마를린 캐슬락의 아버지로서 김현성이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주인공. 문관보다는 무장이라는 느낌이 강한 이 귀족이 김현성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다. 실제 능력치도 웬만한 자유민 정도는 쌈 싸먹을 수준. 덕분에 마를린 캐슬락이 계속해서 이쪽에 달라붙어 있는 상황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큼. 딸아이가 실례가 많은 것 같습니다, 명예 주교님.” “괜찮습니다, 캐슬락 백작님. 총명하신 따님과 대화를 나누는 건 저 역시도 즐겁습니다. 최근에 마를린 영애 때문에 웃을 수 있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큼… 사실 딸아이가 본래 한 가지에 빠지면 정신을 못 차리는 성격이라……. 최근에 지켜보니 정말로 이기영 님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더군요.” “하하….” “저희끼리라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혼담을 진행시켜 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여간 당황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아, 이건 마를린에게는 비밀입니다. 명예 주교님. 은근슬쩍 떠보기만 해주라고 부탁받았던 터라….” “네. 그… 렇군요.” 이런 위험한 상황이 생긴다는 거니까. “저도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부끄럽지만… 끄응. 딸아이 고집에는 당할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자꾸 이런 소리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뇨.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백작님.” 이번이 벌써 두 번째 방어전이다. 슬하에 자식이라곤 마를린 하나밖에 두지 않은 이 캐슬락 백작은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어 하는 딸 바보. 말하자면 마를린 영애의 모든 것을 받아주고 싶어 하는 아버지라는 거다. 처음에는 나를 보고 도둑놈 바라보듯이 바라보기는 했지만 자신 나름대로 계산이 선 모양인지 계속해서 이런 압박 아닌 압박을 넣고 있었다. 사실 나 정도면 어디 가서 빠지는 사람은 아니다. 유력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고 교황청의 명예 주교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다. 물론 황제파와 교황파가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내가 그들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어줄 수 있다 가정했을 때 내 가치는 천정부지로 올라간다. ‘얻을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하겠지.’ 귀족은 원래 조금은 계산적이다. 그나마 이 캐슬락 백작 같은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덜한 편. 사실 여러 계산 이전에 그냥 마를린이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 나와 마를린을 이어주는 게 캐슬락에 나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용병여왕님과 인연을 맺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작게나마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항상 붙어 다니는 마법사님과도?”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흐음… 딸아이도….” “아마 알고 있을 겁니다.” 조금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 이쪽에서 먼저 운을 띄울 수밖에 없었다. “저… 아직 마를린 영애가 성인식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서 혼란스러워 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국민에게 자유민들이란 조금 신기하고 특별하게 다가오기도 하니까요. 당연히 저로서도 아름다우신 따님을 배필로 맞이하고 싶지만 혹시나 한 순간의 실수로 마를린 영애의 앞날을 망쳐 버리지는 않을지 큰 걱정이 됩니다. 자유민에게는 자유민의 인생이 있고 마를린 영애의 앞도 창창하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마를린 영애는 장차 캐슬락을 물려받아 운영해야 하는 만큼 너무 급하게 일을 진행시키기보다는 그저 차분히 영애를 지켜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큼.” “마를린 영애에게는 제가 잘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일단은 부탁드립니다. 제 생각보다 조금 더 좋은 분이신 것 같군요. 명예 주교님은.” ‘시바… 점수 땄나?’ “아닙니다, 백작님.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하하!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오늘 식사는 함께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마침 좋은 술이 들어왔는데… 딸아이도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내일은 어떻습니까?” “내일도 괜찮을 것 같군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백작님.” “네. 즐거웠습니다.” 슬쩍 방문을 닫고 나오니 진이 빠진다. 캐슬락 백작과 함께하는 둘만의 진지한 오찬은 대부분이 이런 이야기. 조금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보면 평소에 얼마나 마를린이 자신의 아버지를 달달 볶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로서도 마를린과 연결되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다. 만약에 캐슬락에 붙어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면 말이다. 애초에 자유민들을 일반 평민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지만 귀족과 결혼한다는 것은 귀족이 될 수 있다는 거니까. 그렇지만 조금만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굳이 필요한 일도 아니다. 나는 이미 귀족 이상의 위치에 있는 교황청의 명예 주교이며 그 지위는 백작에 필적한다. 괜히 캐슬락 백작이 나와 함께 대담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는 거다. 캐슬락 백작이 죽은 이후에 마를린에게 캐슬락의 통치권이 넘어간다면 아주 조금이나마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마를린은 짐. 가문과 가문의 결합, 집단과 집단의 협치라고 생각하는 제국민의 결혼관습은 이쪽에게는 머리 아프게 다가올 뿐이다. ‘어느 정도만 관리해 주는 게 맞아.’ 정하얀, 차희라, 이지혜를 생각하면 이게 맞다. 방을 빠져나오자 곧바로 마를린 영애가 다가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 처음부터 모든 걸 설계해 둔 주제에 저런 표정을 보내는 게 꽤나 우습다. “이기영 님! 아버님과의 오찬은 마음에 어떠셨는지요.” “캐슬락 백작님이 편하게 대해주셔서 마음 놓고 식사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영애.” “다, 다행이네요. 혹시 다른 이야기를 듣지는 않으셨는지….” “말씀드리기 조금 부끄럽습니다만 캐슬락 백작님께서는 저와 마를린 영애를 이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네. 하하….” “아… 버님도 참…. 이기영 님이 이해해 주세요. 아버님이 이기영 님이 무척 마음에 드신 모양이라….” ‘네가 마음에 든 거겠지.’ “캐슬락 백작님께서 영애를 무척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네. 그렇죠. 그, 그보다 대, 대답은… 어떻게 하셨는지….” “일단은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유민으로서의 제 삶도 있고 결혼은 아직 제게도, 마를린 영애에게도 이르니까요.” “그 말씀은?” “일단은 차차 서로를 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영애.” “아!! 네… 네!” “그리고 오늘 식사는 내일로 미루기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할 일이 있어서…. 그럼, 저는 이만.” “네, 이기영 님.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을….” “네. 알겠습니다.” 여기는 일단 이정도로 끝. 그 동안 즐길 만큼 즐겼으니 이제 일을 하러가는 게 맞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아까의 마를린과는 또 다른 표정의 정하얀이 보였다. 이 여자와 대화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여자를 만나니 정말로 바람둥이가 된 것 같은 느낌. 괜스레 김예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애써 무시해 버렸다. “오빠!” “가자, 하얀아. 많이 기다렸지?” “아, 아니에요!” “점심은 먹었어?” “네. 현성 씨랑 덕구 오빠랑 그리고 예리랑 희영 씨랑 혜진 씨랑 정현 씨랑 같이요.” “다행이네. 현성 씨는….” “이 앞을 둘러보고 온다고 하셨어요. 뭔가 조사하러 나가신다고 했는데….” “음. 알겠어. 그럼 가자.” “네!” “서류는 챙겼지?” “네!” “기분 좋아 보이네.” “오… 오랜만에 오빠랑 둘만 나가는 거니까요. 헤헤….” “생각해 보니 정말로 그렇구나.” 오랜만에 외출이라 조금 들뜬 얼굴이 보였다. 굳이 정하얀을 데려가는 이유는 호위의 개념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호위야 비밀리에 나를 보호해 주는 캐슬락의 기사들도 있고 신성기사단과 이단심문관들도 있다. 함께 나들이를 나선 건 그 동안 잘 참아왔던 것을 보상해 주는 의미가 강하다. 정하얀의 기준으로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을 몇 가지 사건들과 상황들을 훌륭히 참아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라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조금씩 조금씩 챙겨줄게, 하얀아.’ 마치 강아지를 길들이는 것처럼 참으면 보상 받는다는 개념을 확실히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했다. 괜스레 캐슬락에서 폭주하기라도 하면 큰일. 이지혜는 정하얀이 흥분하지 않는 내에서 선을 잘 지켰고 차희라나 카스가노 유노 같은 경우에는 애초에 정하얀보다 월등히 강하다. 그러나 마를린 영애 같은 경우에는 아무런 힘도 없는 일반인. 괜스레 기분에 취해 날뛰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리라. ‘회귀 사건으로 한 번 멘탈을 잡아 놔서 다행이야.’ 만약 그때 한 번 바로잡지 않았다면 사건이 터져도 백 번은 더 터졌으리라. “그럼 지금부터 어디 가는 건가요?” “일단은 데이트 좀 한 다음에 작은 바위에 갈 거야.” “데이트….” “그동안 하얀이가 열심히 해줬으니까.”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이 장하게 느껴진 모양. 생각보다 조금 더 귀여웠다. “그, 그럼 가요.” “그래.” “캐슬락 근처에 구경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은 것 같더라.” “정말요?” “그럼.” 짧은 시간이지만 제법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즐기는 게 맞다. “오빠! 저거 봐요! 나무가 거북이 모양이에요.” “아. 응.” 멋진 경치를 구경하고. “너무 귀엽다.” “이건 얼마나 합니까?” 지나가다 보인 예쁜 액세서리를 선물해 주기도 하고. “연극도 보러갈까?” “네… 네!” 지구와 별다를 바 없는 코스를 밟는다. “저기 보트도 탈 수 있어요!” “…….” “저거 타러가요, 오빠.” “저건… 나중에 타자.” “그치만 지금 타고 싶은데….”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또 기회가 있을 거야.” 지구보다야 문화가 낙후되기는 했지만 이곳에서도 즐길 거리가 충분하니까. “헤헤헤.” 행복하고 웃고 있는 정하얀을 보니 왜 진즉 이렇게 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물론 그간 바쁘기는 했지만 앞으로는 조금 시간을 내서라도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풀어주면 되지.’ “너무 좋다. 헤헤….” “다행이네.” 손도 잡고 가끔 포옹도 하고 노을 지는 저녁에는 살짝 입도 맞춰준다. ‘얘가 이렇게 예뻤나.’ 사실 예전부터 내가 정하얀에게 은근슬쩍 빠지고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진지하게 마주하니, 조금 더 끌어 당겨지고 있는 듯한 느낌. 최근에는 정상인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해 주고 있다는 게 더 마음에 든다. “항상 고마워, 하얀아.” “저, 저도요.” 미친 소리 같겠지만 만약 결혼을 할 거라면 이런 여자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럼 작은바위로 가볼까.” “네!” # 155 회귀자 사용설명서 155화 작은바위(2) 짧은 데이트가 끝났다. 덕분에 정하얀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캐슬락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대충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를 테면 시장 조사. 물가가 어느 정도 되는지, 물건의 시세가 높은지 낮은지 자연스럽게 확인할 수 있었다는 거다. 전체적인 평을 굳이 설명하라고 한다면 아주 만족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캐슬락의 상태는 훨씬 괜찮았다.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고….’ 린델 주변에 있는 사냥터들은 이미 대부분이 포화 상태. 물론 일자리가 많기는 하지만 그만큼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도 많다. 그에 비한다면 캐슬락은 아직도 일자리가 넘치는 상황이니 어떻게 생각해 보면 새로 떠오르는 도시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자원은 풍족하고 자유민도 이미 어느 정도 터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보니 전략적 요충지뿐만이 아니라 경제적 요충지라고 하기에도 충분했다. ‘생각보다 더 쓸 만한데….’ 몇몇 토지를 매입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볼 정도. 상인과 모험가는 모두 활발하게 움직이고 생활필수품에 대한 수요도 충분하다.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위험 징후?’ 큰일이 터질 도시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 김현성의 말대로라면 앞으로 한 달 이내에 이 도시에 무슨 일이 터진다. 우리 회귀자는 몇 가지 자료를 근거로 캐슬락에 위험이 닥칠 것이라는 것을 내게 이야기 했고 그게 우리가 캐슬락으로 원정을 떠나온 이유였다. 그렇지만 캐슬락의 분위기는 평화 그 자체. 사람들은 김현성이 말했던 징후에 대해서는 쥐뿔도 신경 쓰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징후 자체가 김현성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누가 봐도 현재의 캐슬락은 여유롭다. 아마 1회 차에서도 비슷했을 것이 분명. 지금 같은 분위기로 대비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사고에 펑 하고 터져 버렸음이 틀림없으리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을 거고….’ 마를린이나 작은바위도 예외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운이 좋은 거지.” “네? 뭐라고 하셨어요? 오빠?” “조금 둘러보고 나니까 이쪽에서 유통되고 있는 포션 수준을 알 만할 것 같아서.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한 거야.” “아! 오빠가 만든 포션을 사람들이 쓸 수 있어서 운이 좋다고 하신 거군요!” “응. 이전에도 말했지만 캐슬락에는 사제가 부족하거든. 이곳에 있는 포션의 품질은 형편없어. 내가 만든 포션에 비한다면 더욱. 솔직히 말해서 어린애 장난이라고 하기에도 약간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거든.” “그렇군요.” “물론 연금술사의 전체적인 수준이 올라간 게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수요가 많으니 저런 저 품질의 물건들도 팔린다는 거네. 캐슬락은 좋구나….” “그렇군요!” “작은바위 길드에서도 포션을 만들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는데.” “그렇군요!!” 계속해서 긍정의 외침을 날려주고 있는 정하얀에게는 살짝 웃어주며 발걸음을 옮기자 작은바위 길드가 시야에 들어왔다. ‘꽤나 화려하네.’ 길드 하우스 자체는 파란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꽤나 넓은 부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건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누가 봐도 괜찮은 자제가 들어간 듯한 느낌. 전체적으로는 과시한다는 인상이 강했다. ‘붉은용병도 이 정도는 아닌데….’ 녀석이 내가 생각한 그대로의 인간이라는 거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을 중요시하고 자신의 야망에 충실한 녀석이다.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자 이쪽으로 쏟아지는 시선들. 굳이 어색해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당당한 쪽이 좋으니까. 이쪽으로 향하는 길드 직원의 인사에 대충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이쪽으로 온 안내원과 이야기를 나눈 뒤에 응접실로 향하니 오랜만에 보는 우리 정욱 씨가 시야에 비쳤다. 물론 옆쪽에 있는 몇몇 길드원도 보인다. 능력치는 나쁘지 않은 수준, 무력시위라도 한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세가 흉흉하다. 대로변에서 별로 좋지 않은 사건을 함께한 뒤로는 처음. 역시나 그다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당연하지.’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했다. 야망이 있는 만큼 체면 역시 중요히 하고 있을 것이 분명. 녀석 같은 성격이라면 마음속에 꿍쳐두고 있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쩔 건데.’ 갑을 관계가 명확한 상황에서 굳이 을 흉내를 낼 필요는 없다. 그건 지구에서도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거 오랜만이군요.” “네. 파란 부길드 마스터. 오랜만입니다.” “하하하. 이거 첫 만남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이렇게 보니 반갑군요.” “네. 아주 반갑군요. 이기영 씨.” “하하하. 표정 좀 푸시죠. 작은바위 마스터. 누가 보면 원수라도 만난 것 같습니다.” “…….” “이거, 이거 마음 상하겠습니다. 정욱 씨. 계속 그렇게 바라보시면 아무리 저라고 해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 “중요한 회의니까요. 하하.” “중요한 회의를 앞둔 사람치고는 꽤나 여유롭군요, 파란 부길드 마스터. 낮부터 한가롭게 데이트라니… 준비하고 있었던 이쪽이 바보가 된 기분입니다. 아무리 요즘 린델에서 위명을 떨치고 계시다고는 하나….” “네. 네. 네….” “저희 캐슬락은 린델의 하청업체나 부하가 아닙니다. 예의를 지키는 것이 맞지 않지 않습니까, 이기영 씨.” “조금 날이 서 있는 것 같군요, 정욱 씨. 하하하.” “저는 지금 장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파란 부길드 마스터.”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무슨 오해를….” “중요한 회의라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작은바위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에게는 별로 중요한 회의가 아니죠. 그렇고말고요. 하하. 이런 회의에 들어오기 전에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데이트를 하고 들어오는 것도 실례가 된다는 겁니까? 푸흐흣.” “당신….” “그리고… 이거 뭐 미행이라도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저야말로 우리 정욱 씨에게는 조금 실망할 것 같습니다. 이거 엄연히 프라이버시 침해가 아닙니까.” 황당하다 못해 일그러져 있는 얼굴이 보였다. 아직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이토 소우타가 그립네.’ 야망이 많은 녀석이 이렇게 권력 냄새를 맡지 못해서야… 문제가 있고 생각하는 게 맞다. 이미 이쪽에서 여러 가지 힌트를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저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단단히 미움 받은 모양. 이정도 길드를 키운 녀석치고는 생각하는 범위가 무척 좁다. ‘어….’ 미움 받을 짓을 하기는 했지만 어쩌면 나를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테면…. ‘마를린 영애?’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권력욕이 높은 남자가 철없는 귀족영애를 출세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니까. 녀석과는 제법 재미있게 얽혀 있는 것이 많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조혜진에 이어서는 마를린인가.’ 이쪽이 계속해서 히죽히죽 웃고 있으니 저쪽에서는 확실히 기가 차는지 곧바로 입을 열고 잇는 것이 보였다. “이만 돌아가 주시죠. 마를린 영애의 주선으로 한 번쯤은 만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역시나 예의를 모르는 사람과는 일하고 싶지 않군요.” “아, 이대로 돌려보내시는 겁니까? 작은바위 길드 마스터?” “정중하게 말씀 드렸습니다. 파란 부길드 마스터. 저희 작은바위는 파란과 그 어떤 거래도 트지 않겠습니다. 아니 작은바위뿐만이 아닙니다. 캐슬락에 있는 모든 길드와 클랜이 파란과 일하는 걸 원하지 않을 겁니다.” “이거 후회하실 텐데 말입니다.” “두 번은 정중하게 말씀 드리지 않을 겁니다. 억지로 쫓겨나기 싫으시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지요.” “저야말로 두 번은 정중하게 말씀 드리지 않을 겁니다. 작은바위 길드 마스터. 조금 흥분하시기 전에 일단은 제 이야기를 조금 들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 “허락한 걸로 알고 그럼. 푸흡. 천천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기요. 송정욱 씨. 혹시 지구에서 말입니다. 이런 경우를 보거나 들은 적 있으십니까? 젊은이나 예술가들이 말입니다. 특정 지역에 모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지금 무슨….” “일단은 들어주시죠. 푸흐핫!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우연하게 모인 젊은이들과 예술가들은 천천히 지역과 거리를 발전시키게 됩니다. 저마다의 방식은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뭐, 벽화도 그리고 유니크하면서도 독특한 컨셉의 가게들을 열기도 하고 자신들만의 축제나 문화를 만들어 가면서 점차 변화시키죠.” “…….” “언론은 금방 그 지역에 집중합니다. 예술가들이 일군 지역! 좋은 레스토랑이 많은 동네라면서 떠들어 대고… 푸흐흣. 자칭 셀럽이라는 SNS 스타나 연예인들은 예술가들과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곳을 제 집 드나들 듯 돌아다니고 점점 더 유명세를 얻습니다. 아마 이런 상황을 많이 보셨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그 일과 저희가 처한 상황이 무슨 상관이라는 겁니까.” “이런 곳은 말입니다. 처음에는 꽤나 그럴 듯하게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마지막에는 결국 가슴 아픈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겁니다.” “…….” “빵 하고 들어와 버리거든요.” “뭐….” “거대 자본이나 대기업 말입니다.” “그….” “아무것도 하지 않고 꿀을 빨게 된 건물주들은 곧바로 임대료와 월세를 올리고 지금의 영광을 만들어낸 젊은 예술가들을 쫒아냅니다. 쫓겨난 젊은 예술가들은 피눈물을 흘리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죠. 그들은 철저한 을의 입장에 있으니까요. 뭐 설명은 길었지만 결국에 그런 이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다는 겁니다. 무척이나 허무하게 말이죠.” 일그러진 얼굴이 보인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대형 프렌차이즈 기업들과 돈 맛 좀 보고 싶은 자영업자들이 달려들고 결국 젊은 예술가들의 거리는 대형 자본을 가지고 있는 현 기득권이 차지하게 되죠. 여기서 문제! 지금 이 상황에서 젊은 예술가는 누구고… 거대 자본을 가지고 있는 대기업은 누구일까요?” 파들파들 떨리는 입이 보인다. “당신들의 삶의 터전을 뒤흔들 수 있는 자본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동공이 흔들리고 있다. “시장 경제를 뒤흔들 수 있는 제품을 가지고 있는 게 누구일까요?” 손끝이 움찔거린다. “붉은용병과 검은백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교황청의 추기경에게 임명된 명예주교이면서 캐슬락의 영애와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건 과연 누구일까요?” 당연히 반응은 곧바로 나온다. 납작 엎드리든지 아니면 발끈하든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저들은 후자를 선택한 모양. 그나마 길드 마스터인 작은 바위의 송정욱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뒤에 있는 녀석들은 시뻘건 얼굴로 큰 소리를 내뱉으려 입을 열고 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이… 왜 안 돼.”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진 것 같은 느낌. 마치 위협이라도 받은 듯이 벌벌 떨고 있는 얼굴. 공포에 질린 듯한 표정. 당연하지만 내가 한 말에 벌벌 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들의 시선이 누구를 쫓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저들의 시선이 머무른 곳은 내 뒤쪽에 조용히 서 있는 정하얀. ‘어우… 시바. 소름 끼쳐.’ 내가 봐도 무서운 표정으로 저들을 노려보고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역시 결혼 생각은 취소하는 게 좋겠다.’ # 156 회귀자 사용설명서 156화 작은바위(3) “말이… 왜 안 돼.” 직접적으로 마력을 내뿜어 위협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확히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얼굴. 마력을 억누르고 있는 영향인지 머리카락이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한 번도 깜빡이지 않은 채로 전방을 응시하고 있는 표정이 마치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의 눈의 효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동자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어우야….’ 전체적으로 위험한 느낌. 살기나 마력을 방출하지 않고 저런 표정으로만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재능이다. 마치 어두운 그림자가 나를 제외한 모든 이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말… 돼.” ‘결혼 생각은 취소다.’ 틀림없이 제 명에 못 살고 죽으리라. 사실 정하얀이 강해졌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차희라나 카스가노 유노 같은 규격 외로 강한 이들을 옆에서 계속해서 보다 보니 능력 부족에 대해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큰일을 터뜨리지 않은 것은 정하얀 본인이 바빠서였을지도 모른다. 나와 함께 있는 시간 외에 그녀는 미친 듯이 마법에 몰두했으니까. 조금 더 강해져야 돼. 조금 더 힘내야 돼. 어제보다 오늘 더 성장하고 오늘 보다 내일 더 성장한다. 본래 천재란 이런 족속들이다. [플레이어 정하얀의 상태창과 잠재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 - 정하얀] [칭호 - 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 - 21] [성향 - 사랑에 빠진 옹호자] [직업 - 대마법사 - 영웅 등급] [능력치] [근력 - 18/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민첩 - 17/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체력 - 30/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 - 71/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 - 25/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행운 - 63/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 - 81/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장비] [빛을 잃어버린 생명수의 지팡이 - 영웅 등급] [마력을 담은 그림자의 로브 - 영웅 등급] [신성한 보호 - 희귀 등급] [특성 - 마법사가 되는 방법 - 영웅 등급] [총평 - 마력 능력치가 80을 넘었습니다. 아이템 효과까지 고려한 능력치이지만 1년도 되지 않은 플레이어가 보여준다고 하기에는 다분히 비상식적입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다른 능력치는 형편없기 때문에 밸런스 있는 성장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모습은 다분히 비상식적입니다. 성장 속도가 빠른 것은 좋지만 몸에 무리가 올 수도 있으니 균형 있는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군요. 물론 그녀의 정신 건강을 챙기는 것이 먼저입니다. 노력하세요. 플레이어 이기영.] 현재 정하얀의 마력 능력치는 황정연보다 높다. 총평의 말대로 고작 1년도 지나지 않은 플레이어가 이렇게까지 성장했다는 건 믿기 힘든 일. 물론 한 가지에 몰두한 덕분에 타 능력치의 상승률은 형편없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정하얀은 이미 이 대륙에서 상위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니 본래 마법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의 가치는 보여 지는 것 이상이다. 생각을 마친 뒤 다시 한번 슬그머니 정하얀을 바라보니 여전히 아까와 같은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어우….’ 나름대로 그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있는 우리 작은바위의 마스터는 그 영향을 떨쳐내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 뒤에 있는 쩌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 녀석이 마력을 일으키자 그제야 뒤에 있는 녀석들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하얀아, 표정 풀어야지.” “네….” “이거 죄송합니다. 제 여자친구가 오늘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을 터라. 큼. 뭐, 계속 말씀 드리자면 저에게는 당신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을 실현시키는 힘이 있다는 겁니다.” “…….” “믿지 못하시는 것 같아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를린 영애에게 부탁하는 방법도 있고, 조금 거칠겠지만 종교적인 이유를 물고 늘어지는 방법도 있습니다. 초저가 포션과 상품을 무더기로 캐슬락에 뿌려 시장 경제를 완전히 파괴시키는 것도 가능하고, 린델의 우수한 자유민을 캐슬락으로 옮기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 붉은용병이 캐슬락에 분점이라도 낸다면 좋을 것 같지 않습니까? 희라 누나에게 한 번 사업을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 “저와 카스가노 유노가 운영하고 있는 일본의 요소가노소라 길드를 이쪽으로 불러오면 어떻게 될까요. 초기 투자비용이야 조금 들겠지만 거대한 포션 공장을 캐슬락에 차려버리는 겁니다. 작은바위도 포션사업에 발을 들이고 있지요? 지금 얼마에 판매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여러분이 파는 가격의 1/2도 충분히 감내할 수 있습니다.” “…….” “여러분들의 수입원인 몬스터 부산물도 조금 고생해서 캐슬락에 팔아버리면 어떨 것 같습니까? 더 싸게 말입니다. 아니면 여러분들이 밟고 있는 이 토지를 매입하는 방법도 있겠군요. 하하하. 여러분은 자유민이기 때문에 캐슬락에 땅을 임대해서 쓰고 있는 입장이지만 명예주교라는 직함을 걸치고 있는 저는 토지의 매입이 가능합니다.” “…….” “물론 더러우시면 다른 도시로 이주하시면 됩니다. 여러분은 타 도시에서 다시 한번 젊은 예술가의 정신으로 지역을 발전시켜 주도록 하세요. 무르익을 쯤 다시 한번 찾아가 여러분이 열심히 키운 달콤한 과실들을 따먹을 테니까요. 신성 제국 베니고어 어디라도 상관없습니다.” “미… 미친….” “당신들이 다시 린델로 돌아가도… 계속해서 캐슬락에 남아 있어도… 완전히 타 도시로 이주해도 저는 계속 당신들을 주시하고 있을 겁니다. 저를 피하고 싶으면 공화국이나 왕국 연합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산속에 틀어박혀서 범죄나 저지르며 삶을 연명해야 하겠죠.” “…….” “내 말이 거짓말 같으면 한번 시험해 봐.” 조용한 정적이 가라앉았다. 방금 정하얀 때보다 장내가 좀 더 조용해진 것 같은 느낌. 내 말이 단순 농담처럼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 증거로 지금 송정욱의 안색은 꽤나 창백해져 있다. 물론 나로서도 저런 귀찮은 일을 전부 다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몬스터의 부산물들을 굳이 린델에서 판매하는 것도 그렇고, 이곳에 포션 공장을 세운다는 것도 틀림없이 이쪽의 손해다. 똑똑한 녀석 한두 명은 ‘그게 가능하겠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실현 가능성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 만약 눈앞에 있는 자식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미친놈이라면? 정말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득을 전부 버리고서라도 순수한 악의로 이쪽을 괴롭힐 수 있는 녀석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이미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다. 결정타를 날려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슬그머니 입을 여니 곧바로 반응이 오는 게 재미있었다. “금력과 권력이라는 건 말입니다. 무력이 우선시되는 이 세상에서도 여전히 나 같은 놈들을 갑으로 있을 수 있게 만드는 장치야. 상태창에서 보이는 능력치나 개인의 강함으로 인해 자리 잡은 사람들이라 제법 자존심이 높으신 건 알겠는데…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알량한 무력으로 나한테 부딪치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거야.” “…….” “사회의 틀을 깨부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으면 조용히 납작 엎드리는 게 너희의 역할이라는 거지. 그걸 하지 않은 사람을 내가 여태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이곳에 온 지 1년도 되지 않은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있을 것 같아? 응? 내 말 이해할 수 있지? 선택지는 두 가지. 젊은 예술가가 될래? 아니면 거대 자본에서 떨어지는 꿀을 빨아먹는 기생충이 될래?”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답은 뻔할 것이다. “뭘, 뭘 하면 됩니까. 파란 부길드 마스터.” 갑작스레 정중해진 송정욱이 시야에 비쳤다. “정답을 골랐네. 귀찮은 일을 피하게 되어 정말로 다행입니다. 작은바위 마스터. 하하하. 이제야 좀 제대로 된 회의를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아주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납작 엎드렸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별로 상관 없다. 어차피 내게 중요한 건 녀석들을 얻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하하하. 딱딱한 집무실이 아니라 조금 편한 자리는 없습니까? 아, 거기 뒤에 있는 친구. 좋은 날인데 술이라도 내와 봐. 이 정도는 괜찮지요? 작은바위 마스터.” “네… 물론입니다. 영철아… 말씀하신 대로… 마실 것을 가져와 드리는 게 좋겠다.” “네. 마스터.” “하하하. 혼자만 마시면 좋지 않지 않습니까. 작은바위 마스터도 함께 드시죠. 하얀이도 조금 편하게 있어도 돼. 뭐 마실래?” “네… 네! 오빠. 저는 우유로 충분해요.” “들으셨지요. 영철 씨. 간단히 과자라도 조금 가져와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계약서는 미리 가져왔습니다.” “예.” “여기 한번 천천히 읽어보시면 됩니다. 뭐 큰 걸 원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포션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질 좋은 포션을 혼자만 사용하는 게 너무 아까워서 말입니다. 마침 캐슬락에 사제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들고 이렇게 달려왔다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모두 다 캐슬락을 위한 일입니다.” “그…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파란 부길드 마스터.” “캐슬락에 있는 대형 길드들에게 정기적으로 포션을 공급해 주는 게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무척이나 싸게 말입니다. 아아아. 일단은 상품부터 보셔야겠지요?” “네.” 별로 기대하는 표정은 아니지만 상품 자체는 확실하다. 메이드 바이 이기영의 포션이 싸구려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브랜드 가치는 올라가는 편이 좋다. “한번 보시죠.” [붉은 체력 회복 포션 - 희귀 등급] [상처를 치료해 주는 회복 효과가 훌륭한 포션입니다. 중상급 치유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독이나 출혈을 막아줍니다. 복용을 마친 이후에는 대상의 내구도가 일정시간 동안 소폭 증가합니다. 제작자 - 이기영] 가방에서 뒤적거리며 포션을 꺼내 놓으니 눈이 커지는 녀석들이 시야에 비친다. 물론 이런 물건을 판매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이쪽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송정욱의 얼굴도 보였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아까의 대화는 갑을 관계를 정립하는 동시에 비싼 만큼 값을 받아내기 위한 설계였다는 거다. “가격은 저렴하게 40골드입니다.” “아….” “한 병에 40골드.” “너, 너무 비싼 것이 아닌지….” “하하하. 비싸다니요. 작은바위 마스터. 지금 아이템의 효과를 읽고 계시지 않습니까. 딱 적당한 가격입니다. 여러분께서 매입할 능력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사냥의 효율도 올라갈 테니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저… 저희 길드에서는 이 포션을 40골드에 매입할 능력이 없습니다. 대량으로 판매하시려고 한다면 더욱더… 어떻게 생각해 봐도 20골드가 마지노선입니다. 계약서에 적혀 있는 물량을 생각해 보면 연간 빠져나가는 가격이 무려 몇 만….” “40골드입니다.” “30골드는… 안, 안되겠습니까.” “하하하. 이거 섭섭해지려고 합니다. 작은바위 마스터. 이런 물건을 30골드에 받아가겠다는 건 너무 날강도 같은 심보 아닙니까. 40골드입니다.” “그런….” “40골드입니다.” “알, 알겠습니다.” “계약서에 사인해 주시면 됩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작은바위 마스터. 이쪽에서도 따로 챙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제 손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아주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하하.” “네….” “자자자. 이 자리에서 사인해 주시고! 물약은 바로 받아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나만 만족하는 아름다운 상황. 이런 게 진짜 거래라는 거다. # 157 회귀자 사용설명서 157화 위선자(1) “하하하하. 이거 참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대화가 더 잘 통하시는 분 같군요.” “저도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파란 부길드 마스터.” “앞으로도 사업차 만나는 일이 많아질 겁니다. 물론 이번보다는 조금 더 작은바위에게 유리한 일일 수도 있겠군요. 서로에게 이득이 가는 일 말입니다.” “네.” “이야… 그리고 오늘 들었던 이야기는 참 재미있었습니다. 특히나 혜진 씨에 관련된 이야기라던가.” “네. 사실 파란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습니다. 오늘 말씀드린 대로지만 들으신 것처럼 그다지 질이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일부는 그녀가 정의의 사도라도 된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쯧.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었을 겁니다. 실제로도 저희 길드는 무혐의를 받았고요.” “아! 그렇군요.” “사실 저랑 개인적으로 사사건건 부딪칠 일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고분고분 한 듯싶었지만 간부직에 오르자마자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해 오기 시작해서 말입니다. 연봉을 올려달라는 건지 아니면 다른 뭔가를 해달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속적으로 이런 일이 생기는 바람에 무척 힘들었습니다.” “혹시 무슨 혐의를 받으셨는지….” “그건….” “말씀하시기 힘드시면 개인적으로 찾아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송정욱 씨.” “하… 하하. 당연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뭐 무혐의니까요. 몬스터 거래였습니다.” “아.” “그 외에도 세금 문제라든가… 길드 직원에 대한 처우 문제가 있기야 있었지만 사실 가장 중점적인 것은 몬스터 불법 거래 혐의였죠.” “그렇군요.” “별것 아닌 문제를 크게 만들기도 하고 사람이 영 융통성이 없어서 말입니다. 던전에서나 다른 곳에서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타 길드와 여러 가지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고요.” “아. 조금 그래 보이기는 했습니다. 확실히 고집스러워 보인다는 느낌이 강했죠.”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아! 하얀 씨도 한 잔 드시죠.” “아, 아뇨… 저는 괜찮아요. 송정욱 님.” “하얀 씨께서는 술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 모양입니다.” ‘이놈, 생각보다 더 잘 엎드리는 데?’ 나름대로 건방진 짓을 했던 이전이 거짓말 같을 정도였다. 적당히 이쪽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은 물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은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을 정도. 가려운 곳을 살살 긁어주는 아부 실력은 확실히 이쪽의 우월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뭐,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녀석의 고유 기벽을 생각해 보면 아마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모르긴 몰라도 속으로는 이쪽의 뒤통수를 칠 생각이나 나를 적당히 이용하자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래서 더 재미있는 거지만.’ 특히나 이쪽에 조혜진에 대해서 안 좋은 말을 뿌리는 것은 가관. 반쯤은 걸러 들어야겠지만 그래도 그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아마 다른 이들에게 이따위 여론 플레이를 펼쳤을 것이다. ‘그 사람 별로더라.’라거나 ‘조금 이상한 사람 같다.’ 따위의 말로 조혜진을 고립시켰을 거라고 생각했다. 권력자의 말은 신뢰를 얻는다. 조혜진 같은 여자를 고립시키는 데는 채 몇 달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슬그머니 말이 없어지자 다시금 급하게 이쪽을 찾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시간도 시간인데 오늘은 아예 이쪽에서 푹 주무시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기영 님.”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호의는 감사하지만 이만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를린 영애가 걱정할 겁니다. 하핫.” “…….” 역시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순식간이기는 하지만 조금 찌푸린 얼굴. 반응이 너무 예상대로다. “그럼 저희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많이 마시기도 했고… 못 다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아 그리고… 부탁한 일은 맡겨도 되겠습니까?” “네. 말씀하신 대로 캐슬락 내에 있는 다른 길드에게는 모두 연락해 계약을 진행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거 감사합니다. 제 생각보다 조금 더 유능하군요…. 작은바위 마스터는….” “감사합니다. 큼… 그보다 시간도 늦었는데 호위라도 붙여 드리….” “아. 호위라면 괜찮습니다. 하하하. 걱정하시는 것은 이해하지만 저는 안전합니다.” “네?” “미리 말씀은 안 드렸었군요. 지난번에 린델 테러 사건 말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때 이후로 안전에 조금 민감해져서 말입니다. 저도 민감하긴 하지만 저희 희라 누나도 많이 신경을 써주는 지라… 붉은용병의 그림자 분들이 호위를 서주고 계십니다.” “네?” “물론 캐슬락에 온 이후로는 영주성의 기사 분들과 교황청의 이단심문관 분들도 힘써주고 있지요. 제가 뭐 중요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곳저곳에서 많은 분께 사랑 받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하하. 농담으로 하는 소리지만 만약 작은바위 마스터께서 저에게 해를 끼치기라도 했다면 입장이 아주 곤란해졌을 겁니다.” “그, 그렇군요.”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 다른 생각을 하긴 했던 모양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말입니다. 그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하얀아, 가자.” “네, 오빠!” 곧바로 밖으로 나가자 조금 어둑해진 캐슬락이 시야에 비쳤다. 낮에도 본 풍경이지만 이렇게 봐도 나쁘지는 않다. 조금은 덜 다듬어 진 듯한 중세 도시는 확실히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내가 느끼는 것보다 술을 조금 많이 먹은 모양. 아니 작은바위에서 준비해 준 게 생각보다 도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슬그머니 정하얀의 팔을 잡고 이동하자 괜스레 이쪽을 부축해 주려는 정하얀이 보였다. “조, 조금 기대셔도 되요.” “그럼 부탁할게. 일어서니까 갑자기 취기가 올라오네.” “역시 걷기 힘드세요?” “그렇지는 않아. 내 몸 정도는 간수할 수 있어. 그보다 오늘 수고 많았어. 하얀아.” “아니에요. 제가 하는 일은 이런 것밖에 없으니까. 헤헤헤. 그보다 조금 의외네요.” “뭐가?” “혜진 씨 말이에요.” “아아아아.” 그러고 보니 정하얀은 조혜진에 대해서 듣는 것이 처음이다. 대충 사정을 알고 있는 이쪽과는 다르게 그녀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으니 나름대로 재미있었으리라. “그런 사람인지는 몰랐는데….” “아아. 나쁜 건 아니지. 그리고 정확히 이야기하면 작은바위의 입장에서의 이야기를 들어본 것뿐이니까. 조혜진 씨의 말도 한 번쯤은 들어봐야 되지 않겠어?” “네! 그렇죠. 들어봐야 되겠죠!” “그렇지만 그 사실 하나만으로는 우리한테 조금 껄끄럽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기는 하고. 이런 생각은 하기 싫지만 아무래도 내부 고발자라는 건 조금 꺼림칙하게 들리니까.” “네! 역시 조금 그래요. 껄끄럽긴 껄끄럽죠. 오빠.” “그래도 자기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그렇죠! 그, 그래도 자기 양심은 꼭 챙겨야죠!” 뭘 해도 이쪽에 긍정하고 있는 앵무새가 된 정하얀을 바라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실제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아마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을 것이다. 타인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건 그다지 정하얀답지 않다. 지금 당장은 내 의견에 필사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송정욱한테 들은 조혜진의 이야기는 간단. 내 생각보다 더 별것 아닌 일이었다. 만약 송정욱이 말하는 동안 조미료를 뿌리지 않았더라면 이야기가 더 밋밋해 졌으리라. ‘물론 전부 다 이야기해 줬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아무튼 그중에서도 흥미로웠던 것은 작은바위에 입단한 이들 중 대다수가 조혜진과 튜토리얼 던전을 마친 동기라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친인과 지인들로 구성된 길드나 다음이 없었을 것이다. 이를 테면 지금의 파란처럼 말이다. 굳이 우리 길드를 예로 들자면 정하얀이 갑작스레 이쪽의 비리를 모두 폭로해 버린 셈. 동료들이 배신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가기야 간다. ‘몬스터 불법 거래.’ 무혐의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아마 조혜진의 말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틀림없겠지.’ 작은바위는 숨기는 게 많다. 물론 증거는 없지만 성향과 기벽을 보면 누가 악당이고 누가 정의의 편인지는 금방 답이 나온다. 작은바위는 이쪽이 모르는 경로로 몬스터를 불법적으로 거래하고 있다. 영주성의 몇몇도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작은바위뿐만이 아니라 다른 길드와 클랜도 한 발 걸쳐 있을지도 모른다. ‘꾼이네 꾼이야.’ 가능하다면 조혜진 측의 진술도 들어보고 싶은 심정.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광장을 지나치고 있다. “많이 취하셨어요?” “조금 어지럽기는 해도 괜찮아.” “많이 피곤하신 것 같은데.” “아냐. 하얀아.” “역시 쉬었다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괜찮다니까. 바로 앞인데 뭐.” “저, 저도 조금 힘들어서.” 슬쩍 정하얀의 시선을 따라가니 눈에 보이는 것은 고급 여관이다. 별 뜻 없이 말을 주고받았지만 정하얀이 말한 것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은 것은 순식간. 눈에는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필사의 각오가 들어가 있었다. ‘나… 참.’ “조, 조금만 쉬었다 가요.” 본인 나름대로는 설계인 모양. 은근슬쩍 먼 길로 돌아갈 때는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 모양이겠거니 생각했었지만 아무래도 진짜 목적은 이거인 것 같았다. 은근슬쩍 이쪽을 잡아당기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 “피곤하신 것 같아요. 아니 피곤하신 게 분명해요.” 심지어 억지로 이쪽을 피곤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던 것은 이쪽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동한다는 것. 낮에 즐거웠던 만큼 조금 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한 번쯤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흠….” “…….” 뭔가 결정을 내리려고 하던 그때였다. “여기 계셨군요.” “아….”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 반갑지 않은 손님에 정하얀은 볼을 부풀렸고 이쪽은 머쓱한 표정으로 저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와 정하얀이 서 있는 위치가 왠지 애매한 위치였으니까. “혜진 씨. 이곳에는 무슨 일로.” “기영 씨와 하얀 씨를 데리러 왔습니다.” “네?” “정확히 말씀드리면 호위 차 찾아왔다고 하는 게 맞겠군요. 어둑한 밤이니까요. 캐슬락은 린델보다 위험합니다. 좁은 골목에서는 질이 좋지 않은 제국민도 있으니까요. 물론 하얀 씨를 생각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는 힘들겠지만 아무래도 후위인 만큼 제가 이렇게 하는 게 안심이 될 것 같습니다.” “영주성의 기사도 있을 텐데.” “아. 들으셨을지는 모르겠지만 길드 마스터는 이런 경우, 저에게 이기영 님의 호위를 맡기셨습니다. 아무래도 린델 테러 사건이 신경 쓰여 하시는 터라.” “아아아아아….” 역시나 우리 회귀자는 나를 아낀다는 사실을 한 번 더 깨달을 수 있었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제가 직접 나와 보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그럼 함께 가시죠.” “네. 이렇게 마중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흠… 한데 생각해 보니 혜진 씨와는 길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 것 같군요.” “아….” “어떻습니까.” “네?” “어디서 잠깐 시간 좀 보내는 게.” 마침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조혜진과는 한 번쯤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는 것이 당연. 마침 작은바위와 이야기를 하고 나온 지금이 타이밍이라면 타이밍이다. 정하얀은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지만 잠깐 근처 주점에서 함께 술을 마시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아마 그녀 역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여주는 반응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딴판. 이쪽을 노려보는 것은 물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 무례하군요.” “네?”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이렇게 까지 무례한 사람이었습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무슨 개소리야.’ # 158 회귀자 사용설명서 158화 위선자(2) 뭔가 이쪽이 실수했는지에 대해 곰곰이 떠올려 봤지만 감이 오는 게 없다. 조금 취기가 올라와서 생각하는 게 반 박자 느린 것 같은 느낌. ‘무례했나.’ 술 한잔하자는 말에 저렇게까지 반응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지사. 어째서 작은바위의 송정욱이 그녀를 보고 융통성이 없다는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죄송합니다만 제 발언에 뭐가 문제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걸 말,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하얀 씨도 옆에 계신데….” “하얀이가 함께 있는 게 문제가 됩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얘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허….’ 홍시같이 붉어진 얼굴을 보니 대충 감이 잡혔다. 내 말이 아닌 나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문제. 야심한 밤에 고급 여관 앞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자는 말을 두고 오해했음이 분명하다. ‘당신의 그 무고한 상상력이….’ 이를 테면 직장 후배에게 성추행을 하는 사람으로 비춰진 셈. 정하얀도 하지 않을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쪽이 계속해서 황당하다는 입장을 취하자 조혜진은 더욱더 당황스러워졌는지 얼굴을 붉혔지만 정하얀의 발언에 잠깐 동안 뭔가 오해가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 건가요?” “나도 잘….” “아….” “…….” 민망했는지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게… 그….” “무슨 문제라도….”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잠깐 착각을 한 것 같군요.” “무슨 착각을?”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라도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신 건 아닌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거 평소에 혜진 씨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는지 잘 알 것 같습니다.” “그게….” “조금 실망이로군요.” “죄, 죄송합니다.” ‘이게 웬 떡이냐.’ 이렇게 살살 놀릴 수 있다는 상황자체가 굉장히 좋다. 조혜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함께 술이라도 마시자는 제안을 거절할 것 같은 느낌. 당장은 안전한 영주성으로 데려가는 것을 우선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이라면 이쪽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으리라. “뭐, 농담입니다. 제가 오해할 만한 말을 하기도 했고요. 제 이성 관계가 그렇게 깨끗한 편은 아니니… 저를 그런 취급 하시는 것도 당연할 겁니다.” “그… 렇지 않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익숙하니까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로 미안하긴 미안하신 겁니까?” “네.” “그럼… 아까 제안했던 대로 잠깐 시간 좀 죽이다가 들어가는 게 어떻습니까?”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 곧 고개를 끄덕일 거라고 생각했고 역시나 이쪽의 예상대로 조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이라면….” “좋군요. 그럼 들어가도록 하지요.” “부길드 마스터. 그, 그쪽은….” “네? 혹시 이 여관에는 펍이 없는 겁니까?” “아. 아뇨. 아마 있을 겁니다.” 아까는 단순히 놀려먹으려고 말했을 뿐이지만 확실히 저쪽에게 나는 별로 신뢰가 가는 인물은 아니었나보다. 물론 일부다처나 일처다부가 당연시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쪽의 이성 관계는 난잡하다면 난잡하다고 말할 수 있는 편. 내가 자신을 홀릴 작전이라도 세워놓은 것은 아닌지 생각한 모양이다. ‘세워놓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애초에 저쪽은 이쪽에 별 다른 호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관의 안내인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예약은….” “아. 숙박하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라운지 바나 펍에서 잠깐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슬그머니 정하얀을 바라보자 그녀가 허겁지겁 주머니에 있는 금화를 꺼내 안내인에게 쥐어주는 것이 보였다. ‘왜 이렇게 많이 줘?’ 하나만 줘도 눈에 띄게 기뻐할 것이 분명,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쥐어주니 적어도 다섯 개 이상은 여관의 안내인의 손에 들어간 것 같았다. 이게 무슨 횡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기왕이면 조용한 곳으로.” “네. 곧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확실히 돈이라는 게 편리하긴 편하다. 조금 위층으로 올라가자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괜찮은 자리가 눈에 띄었다. “저 자리로 하죠.” “네.” “주문은?” “괜찮은 거 아무거나 가져오셔도 됩니다. 가격에 상관없이.” “네.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네.” 슬그머니 자리에 앉아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는 조혜진. 뭔가 익숙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장소에 온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 조금 고급스럽기야 하지만 한때 작은바위의 간부였던 조혜진이 들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송정욱이 내 생각보다 더 짠돌이거나 아니면 조혜진 그녀가 평소에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이 분명하리라.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조금 더 점수를 주고 싶다. 그녀가 저임금을 받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으니까. “이런 곳은 처음이십니까?” “아? 네….” “캐슬락에서 조금 오랫동안 지내셨다고 들었는데 의외로군요. 작은바위에서 간부에 계셨을 정도니 좋은 곳에 많이 가보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있는 동안 많이 검소한 생활을 하신 모양입니다.” “검소하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확실히 쓸데없는 곳에 금화를 쓴 기억은 없으니까요.” “하하하. 쓸데없는 곳이 아닙니다.” “네?” “금화는 쌓아둔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소비해 줘야 그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금화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사회에 금화를 뿌려야 비로소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죠.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아….” “방금 저희에게 팁을 받은 안내인도 소비를 할 테고 저희가 오늘 이곳에서 소비한 골드들은 또 어딘가에서 지출될 겁니다. 지금 아래 내려다보이는 평범한 자유민이나 가난한 제국민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가게에 들어가서 다른 누군가가 또 지출을 한다는 겁니다. 알고 계신 내용일 테지만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합리적으로 금화를 굴려야 경제가 더 활발히 돌아가게 됩니다.” “무슨 뜻인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네?” “제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말투가 마치 저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려서….”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각하는 건 필요한 일입니다.” “부길드 마스터가 저들보다 더 위에 있다는 걸 말입니까?” “네. 개인적으로는 그런 자각이 있어야 조금 더 쉽게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있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계속해서 생각하셔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행동이 불러올 파장도.” “무슨 이야기를 하시고 싶으신 건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조금 취기가 올라와서 쓸데없는 소리를 했나 봅니다. 본래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것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보면 연장선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큼. 혹시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작은바위의 마스터와 계약을 끝내고 왔습니다.” “그거… 다행이로군요.” 예상했던 대로 별로 표정이 좋지는 않다. 자신의 일을 내가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 당연하지만 별로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혹시 들으셨습니까?” “내부 고발 말씀이십니까?” “예.” “네. 들었습니다. 어째서 작은바위를 떠나셔야 했는지 어째서 캐슬락에 나와 린델로 오셨는지 말입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저쪽에서 먼저 이야기해 주시더군요. 조금 원망 받고 있으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튜토리얼 때부터 함께한 동료들을 배신한 꼴이 됐으니 말입니다.” “…….” “알 만한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애초에 왜 숨기려고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었습니다.” “역시 저를 비난하시는 겁니까?” “현성 씨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혜진 씨를 데려오실 때 말입니다.” “상관없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조금 표정이 풀린 것이 눈에 보였다. ‘아아아.’ 눈치채는 게 느렸지만 이 여자에게 김현성은 단순한 상사가 아닌 모양이다. ‘꽂아놨구나.’ 본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은 확실하게 이 여자에게 플래그를 꽂았다. “오히려 잘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기 신념을 관철시키는 것은 중요하다고… 그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정론이로군요. 현성 씨다운 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 당신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몬스터 불법 거래와 세금 문제 때문에 그들을 고발하신 게 아닙니까?” “이종족 노예 거래 문제도 얽혀 있었습니다.” “아, 그건 듣지 못한 소식이군요.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까놓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비난하지는 않지만 멍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네?” “당신은 멍청해요.” “그게 무슨….” “이 사회는 내부 고발자에게 별로 호의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아무리 당신이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켰다고 한들 보이는 결과를 보면 당신은 정말로 멍청한 사람입니다.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군요. 틀림없이 아까는 비난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황당해하는 표정. 저런 눈빛을 보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을 겁니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항상 인식하고 계셔야 한다고요. 내부 고발로 일어날 결과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제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합니까? 그들은 범죄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에 대해서가 아닙니다. 당신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될 많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작은바위 말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에 어쩔 수 없이 구조조정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무혐의라고는 하지만 세금 문제가 얽혀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요.” “…….” “길드 직원이 참 많이 줄었나 봅니다. 많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어버렸죠. 듣자하니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무리하게 사냥을 나가 대부분이 좋지 못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더군요.” “그게….” “여성 직원들은 길거리에 내몰렸고 가장들은 실업자가 되어 자식들을 먹여 살리러 사냥터로 향했다고 합니다. 이제 막 취업한 젊은이도 모가지가 날아가 빈민촌에서 구걸하며 살아가고 있죠.” “그게… 정말입니까?” “아뇨. 방금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부, 부길드 마스터? 지금 저랑 장난….” “그렇지만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죠. 실제로 제가 말한 것처럼 되지는 않았겠지만 몇몇은 정말로 그런 인생을 살아야 할 처지에 놓였을 수도 있습니다. 찾아보지 않았다 뿐이지 마음먹고 찾는다면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이 진짜로 고발하고자 했던 소중한 옛 동료들은 아직도 잘 먹고 잘사는 데 엄한 사람들만 피해를 입은 셈이죠.” “아….” “멍청하다고 한 것은 방금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양심에 맡긴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조혜진 씨. 끝장을 내려면 조금 더 확실하게 목을 졸랐어야죠. 결과적으로는 욕먹을 짓을 했다는 겁니다.” “…….” “당신은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했어요. 캐슬락의 발전에도 신념을 관철시키는 것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는 겁니다. 증거를 제대로 찾지도 못했고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싸질러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개인적인 양심의 가책을 해소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계획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저는 당신을 멍청이라고 불렀을 겁니다.” “…….” “작은 바위의 길드 직원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일에 가담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길드 마스터에게 협력하게 된 이들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당신은 그들의 인생을 전부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쯤 되면 오히려 실패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될 타이밍이로군요. 수백 명의 실업자가 거리로 내몰리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 “제가 지금 말씀 드렸던 문제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 159 회귀자 사용설명서 159화 위선자(3) “없… 습니다.” 있을 리가 없다. 만약에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면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여러 가지 사안을 놓고 고민하면서 선택한 행동이 아니다. “모든 일은 생각한 이후에 행동해야 된다는 겁니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들은 맞아 죽어요. 막말로 제가 기침만 해도 목이 달아날 인간들이 수두룩합니다.” “…….” “자기가 서 있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하는 말이 어느 정도의 파장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해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요. 아. 한잔 받으시죠.” “아뇨… 저는 마시지 않겠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저 혼자만 취한 것 같아 민망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정식으로 영주성에 호위를 요청할 테니 그냥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조금만….” “어울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아무튼 간에 그렇다는 겁니다. 만약에 제가 혜진 씨였다면 조금 더 화끈하게 저질렀을 겁니다. 아마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면 저처럼 생각해 본 적도 있었을 거예요.” “무슨 말씀을….” “단순히 내부 고발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안쪽에서부터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하고 송정욱을 비롯한 당신의 동료들의 목을 날려 버리면 됩니다. 길드는 정상적으로 돌아갈 테고 길드 직원에게도 피해가 없을 테니 문제는 없었겠죠.” “…….”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당신이 이 방안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넌 멍청하지 않으니까.’ “아마 그렇게까지 하지 않은 것은 당신의 옛 동료들과 갈등을 만들기 싫어서였겠죠. 그들의 목을 치기는 싫고 자신의 양심은 지키고 싶은 상황.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 내부 고발이라는 거. 어떻습니까? 제 망상이? 여러 가지로 설득을 해봤지만 통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최후의 수단을 실행하신 것 아닙니까.” 묘한 침묵이 장내에 가라앉았다. 지금까지도 조용했었지만 조금 더 조용해진 것 같은 느낌. 정하얀은 아무 생각 없이 조혜진을 바라보며 야금야금 음식을 넘기고 있었지만 당사자인 그녀는 그저 말없이 술을 홀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침묵은 긍정이다. 다시 한번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결과적으로는 당신이 그들에게 버림받았고요.” “그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뇨. 제 말이 맞습니다. 작은바위의 송정욱이라는 사람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어떻게 했을지 감이 옵니다. 아, 당신과 튜토리얼을 함께한 친구 분들도 말입니다.” “어떤….” “그들은 욕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종류의 인간들이죠. 양심이나 도덕 같은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더 많은 재화, 더 많은 돈, 더 많은 권력.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이죠.” “단정 지을 정도는 아닙니다.” “당신과는 많이 다르죠. 아마 그들은 당신을 쳐내기 위해 뒷공작을 벌였을 겁니다. 캐슬락에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첫 번째. 타 길드와 클랜에게 당신을 받아주지 말라고 청탁을 넣는 것이 두 번째. 자신들의 행사를 방해한 게 별로 유쾌하게 비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이야기가 많이 들려오더군요. 조혜진은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 지금의 권력을 잡은 사람이라든가, 타 길드원과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든가 하는 이야기 말입니다. 정말 우습죠. 학생 때 하던 짓들을 지금에 와서도 하고 있으니까요. 왕따 놀이라도 하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애나 어른이나 유치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단순한 헛소문입니다. 저는 신경 쓰지도 않는 소문들이요.” “잘 포장된 소문은 진실이 되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그 소문 때문에 당신의 입지와 명성은 엉망이 됐고요. 어떻습니까. 호의를 배신으로 돌려받은 기분은.” “별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각오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고 계십니까. 마찰이 싫어 피한 결과.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이 상황에 대해서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걸 보고 위선이라고 합니다.” “위선이 아닙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있는 것들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흥분했는지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 조금 갑작스러운 상황이지만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이쪽에서 정곡을 찌른 모양인 것 같았다. 나보다 당황한 것은 정하얀.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였지만 슬그머니 손을 잡자 털썩 자리에 앉는 것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습니다, 이기영 부길드 마스터님. 위선자는 당신이니까요.” “아.”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세간에 들려오는 당신에 대한 이야기와 당신의 진짜 모습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예리하시군요.”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그래서요?” “그래서라는 말이!” “우리 혜진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요. 확실히 저는 깨끗하기만 한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벌린 사업이나 실제로 하는 일들은 교묘하게 법의 테두리에 걸쳐 있으니까요. 그래서 뭐 어쩌란 말입니까.” “그게 진짜 위선이라는 겁니다. 이기영 부길드 마스터.” “저는 한 달에 한 번 교황청에 수 만 골드를 기부하고 있습니다.” “…….” “그 기부금은 신성 제국의 각지로 쏟아져 어려운 제국민 신도들과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 자유민을 돕는 기금이 되지요.” “겨우!” “겨우가 아닙니다. 또 저는 린델 내에 있는 빈민촌의 무료 급식소도 운영하고 있지요. 길드 내에 있는 김미영 팀장님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빈민촌에서 하루하루를 구걸하며 살아가던 빈민이었습니다. 아이 둘을 키우며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이었죠. 그녀를 구제해 준 게 누구 일 것 같습니까.” “그건….” “그녀뿐만이 아닙니다. 파란은 인재를 가리지 않습니다. 장애인이나 미혼모, 전투에서 큰 상처를 입어 후유증을 앓고 있는 전사. 입단에 차별을 두지 말라고 하는 것 역시 제 지시였습니다. 물론 파란에 이득이 되는 행위이기는 하지만 이것 자체가 커다란 사회활동인 셈이죠.” “당신이, 당신이 대형 길드와 협연해 언론을 조종하고 있다는 건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제 생각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시는 군요.” “자연스럽게 알게 됐을 뿐입니다. 길드에서 일하다 보면 보기 싫은 것도 보이게 되는 법이니까요.” “혹시 신성 제국의 법에 개인이 언론을 컨트롤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습니까?” “신성 제국에서는 이기영 씨가 만든 언론이라는 개념 자체를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언론은 소식지에 불과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이기영 씨가 벌이고 있는 일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법 날카롭다. 확실히 날카롭다. “부길드 마스터님, 이건 기본적인 상식의 문제입니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글쎄요.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 혜진 씨께서는 현 신성 제국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겁니까.” “무슨 소리를….”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 귀족주의나 왕권체제에 대해서는 어째서 눈을 감고 있는 겁니까? 이것도 생각해 보면 혜진 씨의 말처럼 지구의 상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건 그들의 삶….” “정말로 도의를 지키고 싶으신 거라면 일단은 이곳에 프랑스 혁명이라도 일으켜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를린 영애도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같은 소리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캐슬락에 있는 빈민에 대해서는 쥐뿔도 신경 쓰지 않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요. 지금 당장 민중을 이끌고 단두대를 만드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궤… 변입니다.” “저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궤변이지요.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 궤변을 외치는 건 당연하다는 겁니다. 애초의 법의 경계가 무척이나 모호하지요. 지구에 있는 상식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이 대륙의 상식을 따를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든 자유민이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입니다.” “그것도 궤변입니다.” “개인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기에는 맞물리는 가치관이 무척 많다는 겁니다. 당장 사형 제도만 생각해 봐도 그래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화형시키는 것은 비윤리적이지 않습니까? 이토 소우타라는 일본인은 악마 숭배 혐의로 성수를 넣은 석상 안에 들어가 익사 당했습니다. 이건 비윤리적이지 않습니까?” “…….” “사형 제도 자체가 비윤리적이지요.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일이 무척 당연하게 일어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누가 더 위선적인 걸까요?” “궤변… 입니다.” “법에 테두리 안에 걸쳐 있는 채로 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나. 아니면 동료들과의 마찰이 무서워 내부 고발이라는 형태로 도망친 혜진 씨. 누가 더 위선자입니까?” “…….” “저는 지금 말싸움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혜진 씨.” “그런 걸로는 보이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누가 봐도 부길드 마스터님이 제게 시비 걸고 있는 걸로 비춰집니다.” “술자리에서 흔히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이고 논쟁입니다. 그저 의견 교환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병 주고 약 주는 것이 아닙니다만 사실 저는 혜진 씨가 썩 나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개인의 신념을 지킨다는 건 멋진 일이니까요.” “놀리시는 거라면….” “아뇨. 놀리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저보다는 현성 씨에게 가까운 인간입니다만 저는 그런 방식을 고수하는 인간을 동경합니다. 올곧은 사람들 말입니다.” “잘도 그런 소리를 하시는군요.” “올곧은 이들이 부러지지 않게 도와주는 게 제 역할이라는 겁니다.” “이기영 부길드 마스터….” “저는 도움이 되는 인간입니다. 아, 다시 한번 주제를 돌려서 송정욱 씨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만약 그들이 아직까지 몬스터 불법 거래와 이종족 노예 거래를 해오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저에게 그들의 목을 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법 진지한 얼굴이 보였다. “제가 당신의 복수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 진지한 얼굴. 원래 항상 표정이 굳어 있는 조혜진이었지만 지금은 정말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할 뻔자. 나는 이미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다. 지금에 와서 복수를 부르짖는 것은 조혜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부길드 마스터는… 부 길드 마스터의 일을 하시면 됩니다.”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영주성에 있는 기사들에게 따로 호위를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벌떡 일어나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아무래도 기분이 많이 상한 모양. 딱히 기분을 나쁘게 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가지로 가슴에 꽂히는 게 많을 거라 생각했다. ‘위선자.’ 그녀한테 조금 잘 어울리는 단어다. 본인도 아마 그걸 자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표정이 구겨져 있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에서 이리라. ‘정의는 구현하고 싶고 동료들이 잘못되는 것은 원하지 않고.’ 저런 호구 같은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조혜진이 발걸음을 옮기자 정하얀이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제멋대로인 사람이네요. 호위해 주겠다고 하면서 먼저 가버리고….” “응?” “혜진 씨요!” “아아아. 너무 미워하지 마. 전부 다 착해서 그런 거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저렇게 해도 나중에는 아주 절친한 친구가 될 예정이거든.” “네?” “본래 친구는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니까.” [플레이어 조혜진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우정 속에서 피는 꽃] 본래 친구는 싸우면서 친해지는 게 맞다. ‘친구야!’ # 160 회귀자 사용설명서 160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1) 조혜진과 대화를 나눈 날로부터 시간이 좀 더 흘렀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쪽도 나름대로 주변을 잡아 뒤지기는 했지만 나보다 더욱 열심히 움직여준 것은 작은바위의 송정욱. 계약은 놀라울 정도로 쉽고 빠르게 진행됐다. 녀석은 마치 이쪽에 충성이라도 맹세한 것처럼 타 길드와 클랜에 내가 만든 포션을 홍보하기 시작했고 내가 먼저 계약서를 내밀기 전에 직인이 찍힌 계약서를 이쪽으로 가져왔다. 영주성에 들려 마를린 영애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과 친분을 만들려는 속셈 같기는 했지만 남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녀석의 자유. 오히려 콩고물이라도 먹으라는 기분으로 하위 귀족을 소개시켜 준 적도 있으니 놈의 입장에서는 수지맞았다고 느낄 것이다. 충신으로 변모한 듯한 모습은 확실히 당황스럽기는 했다. 물론 송정욱이 지속적으로 영주성에 찾아오는 이유는 겨우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마를린 영애.’ 마치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던 것. 녀석이 영애를 이용하려는 사실은 이미 옛날 옛적에 눈치챈 사안이었지만 대놓고 영애를 노리는 모습이 보이니 내 입장에서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해봐라.’ 확실히 송정욱이 마를린 영애와 이어진다면 녀석의 입장에서는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귀족이 될 수 있고 토지를 매입할 수 있게 되고 세금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마를린 영애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녀석은 이전에 내가 말했던 거대 자본 측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다. 딱히 이쪽에 반기를 드는 것은 아니니 뭐라고 할 필요는 없었지만 의도가 좋지 않다는 것은 대충 알 수 있는 부분. 송정욱은 나와 가까워지는 걸 원하면서도 작은바위가 파란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이쪽에 충성을 맹세하는 척, 안으로는 어떻게든 상황을 뒤집기 위해 아등바등 움직이는 꼴은 양면이 다른 나뭇잎이라고 할 만했다. ‘졸렬한 놈.’ 이쪽도 끝까지 저쪽을 케어해 줄 생각은 없다. 적당한 선을 유지하면서 꼬리를 자를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전에 뜯어먹을 수 있는 건 전부 뜯어 먹어야 되지만 말이다. 당연하지만 바쁜 것은 송정욱뿐만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밖으로 나가는 김현성 파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 같은 경우에는 업무 차 왔기 때문에 격일에 한 번씩 나가고 있었지만 김현성은 박덕구와 김예리 키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마 몬스터 웨이브의 징후를 가져와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 역시 녀석이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이리라. “그럼 오늘도 다녀오겠습니다. 기영 씨.” “네. 현성 씨. 덕구도 몸 조심히 잘 다녀와라.” “아, 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어차피 밖에만 살짝 돌아다니다 오는 거고 조사 차 다녀오는 거니 괜찮소.” “그렇다면 걱정 없고. 희영 씨도 몸 조심히….” “네. 걱정하지 마세요.” “하얀이도.” “네… 히끅.” “울지 말고 뚝.” 굳이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이 건은 김현성이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 믿고 맡길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것.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건 상당히 즐거운 일이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바탕으로 김현성은 차근차근 정보를 모을 테고 그 정보를 캐슬락 내에 정식으로 공지할 것이다. 전시체제에 들어간 캐슬락은 이전 회 차와는 다르게 몬스터 웨이브나 네임드 몬스터의 습격을 막아내고 우리 회귀자는 캐슬락을 구한 영웅으로 일어서게 될지도 모른다. 계획대로 될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걸 실현시키는 것이 나 같은 놈이 해야 할 일. 나 역시 여러모로 바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처리해 줄 수 있었다. “저 잠깐, 기영 씨.” “네. 현성 씨.” “그… 혹시 혜진 씨랑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네?” “최근에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아. 일적인 부분에서 잠시 마찰이 있었을 뿐입니다.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현성 씨가 뭘 걱정하고 계시는지 알 것 같지만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아. 네… 그… 저는 두 분이서 친하게….” “네. 혜진 씨와 친해지고 싶은 건,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마침 이번에는 혜진 씨도 원정에 나가지 않는다고 하니 제 쪽에서 조심스레 다가갈 예정입니다. 하핫.” “하하. 그거 다행이로군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한시름 놨습니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네. 오늘도 조심히….” “예.” ‘걱정되나 보네.’ 물론 나도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저번 사건 이후로 조혜진이 이쪽에 조금 냉랭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대화 창구가 아예 끊긴 것은 아니었다. 본래 사소한 말다툼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말없는 냉전. 아직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청신호라고 할 수 있으리라. 잘 다녀오라는 뜻으로 파티원들에게 손을 흔들자 마찬가지로 이쪽에 인사를 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캐슬락에서 도착한 이후에 시간이 흐르고 있는 시점. 내가 해결해야 될 일들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잡히는 것 같았다. ‘첫 번째는 앞으로 도시에 닥칠 위기를 막아내는 것.’ 사실 이번 원정에 가장 큰 목적이다.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목표이기도 하고 우리 파티가 캐슬락에 온 이유이기도 하다. 부가적으로는 위험을 알리고 캐슬락에서 우리 길드의 입지를 다져놓는다. 지금 당장은 김현성이 힘써주고 있는 부분이니 내 쪽에서 움직일 일은 없지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대비는 철저히 마쳐놔야 한다. ‘두 번째는 작은바위의 송정욱.’ 계속 품고 갈 것인지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쳐낼 것인지도 고민해야 할 부분. 사실 이 부분은 조혜진이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먼저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현 상황을 유지하며 써먹을 수 있는 패들을 준비 하는 게 옳다. 그리고… ‘세 번째는 조혜진 양과의 관계 개선.’ 그녀와 내 사이에 우정이라는 끈을 만들어 놓는 것. 첫 번째와는 다르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파티가 아닌 나 개인이 움직여야 할 일이다. 앞으로도 조혜진과 함께 움직일 것을 생각하면 최소한 그녀를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키워드는 신뢰할 수 있는 친우이다. 물론 이미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는 그녀와 가까워지는 것은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미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고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다른 파티원들이 자리를 비운 지금은 기회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 조금이라도 말을 붙이며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옳다. 굳이 친구가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빚을 만들어 놓는다거나 나를 다시 보게 만드는 계기가 중요하다. 송정욱이 나를 위해 일하고 있는 동안, 나 역시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 앞을 바라보니 나가는 파티원들을 배웅하고 있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현성 씨가 걱정하고 계신 것 같더군요.” “…….” “혹시나 저와 혜진 씨가 서로 으르렁거리지는 않았을까에 대해서 말입니다.” “공적인 일을 제외한 대화는 그다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이것 역시 공적인 대화란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있는 일입니다. 혜진 씨. 길드원 간의 친목 도모는 아주 중요하니까요.” “또 이상한 이야기를 하시겠다는 거라면….” “아뇨.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서로 약간의 오해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오해는 사전에 푸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조금 반응이 차갑기는 했지만 최근에는 쭉 이래왔다. 아마 본인 역시 생각이 많을 것이다. 이전에 내가 한 말은 아마 그녀의 심장 속에 꽤나 깊숙하게 틀어 박혔을 테니까. “복수에 대해서 말씀 드린 건 혜진 씨를 위함이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일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원한에는 관계없이 만약 그들이 아직까지 불법적인 일에 손을 걸치고 있다면 제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손을 써둬야 하니까요.” “…….” “만약 바쁘지 않으시다면 함께 가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습니다. 아 물론 혜진 씨가 거절한다고 하신다면 저 혼자라도 찾아갈 예정입니다. 제법 위험한 곳이지만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운이 나빠서 납치라도 당한다면 팔이나 다리 하나 정도는 잘리겠죠. 현성 씨가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혜진 씨. 이것도 전부 일입니다. 다른 파티원들이 모두 밖에 나가 열심히 일 해주고 계시고 있는데 저희도 할 일은 해야 되지 않습니까. 큼. 함께 가주실 겁니까?” “선택지를 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 것 같네요.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현성이 이쪽의 호위를 맡긴 것은 어떻게 보면 행운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녀와 함께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는 거니까. “아. 지금 입고 계신 복장으로는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 옷을 갈아입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이쪽이 미리 준비해 놨으니 다른 걱정은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목적지를 물어도 괜찮을까요?” “아마 천천히 알게 될 겁니다. 미리 말씀 드리면 재미없으니까요. 한 시간 이후에 바로 출발이니 빨리 준비해 주시죠.” “이미 결정해 두신 거군요. 정말로 제멋대로네요.” “제가 추진력이 좋아서 말입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여전히 표정은 별로 좋지 않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순순히 이쪽의 제안을 따라주기는 할 모양. 인상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과의 데이트니 뭐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준비하는 동안 나 역시 채비를 시작한다. 미리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고 적당히 머리를 손질하는 것으로 마무리. 왕성에서 파티할 때의 복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사람다워진 모습을 보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로비에서 그녀가 나오길 기다리니 한 쪽에서 슬그머니 익숙한 얼굴이 보이기 시작. 제법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니 내가 준비한 옷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이거 정말로 입어야 하는 겁니까?” “이미 갈아입고 나오신 것 아닙니까. 굳이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혜진 씨.” “그, 그렇지만… 노출이 너무….” “아름다워 보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푸른색 드레스가 잘 받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내 예상이 맞았다. 영주성의 안내인에게 적당히 꾸며 달라고 말한 것이 유효한 것 같은 느낌. 화장은 하든 안 하든 별 상관 없지만 곱게 묶은 머리카락이 드레스와 굉장히 잘 어울렸다. 다리 한 쪽과 등이 훤히 보이도록 파인 드레스에는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섹시한 느낌이다. ‘색기와는 거리가 먼 여자라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매력적이기는 하다. “파티라도 가시는 겁니까? 파트너가 필요한 거라면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단순한 파티가 아니니 믿고 가주시면 됩니다. 밖에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으니 어서 가시죠.” “네.” “아 그전에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만.” “네.” “작은바위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혹시 그들이 불법적으로 몬스터 거래나 이종간 노예 거래를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까?” “네. 마차 안에 갇혀 있는 이들을 봤습니다.” “실제로 어떻게 거래가 이루어지지에 대해서는 본 적이 없다는 거군요. 아마 세금 문제나 몬스터 거래도 장부를 들춰보면서 알게 된 것 아닙니까?” “그걸 어떻게….”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판정을 받은 데는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아까 목적지를 물으셨지요?” “네.” “저희는 지금부터 그 현장을 견학하러 갈 겁니다.” “무슨….” “실제로 불법적인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려 한다. 이 말입니다.” 말문이 막혔는지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굳이 이해시킬 필요는 없다. 그녀가 가서 느끼게 될 테니까. 나는 품 안에 있는 가면 두 개 중 하나를 착용하며 입을 열었다. “가면 받으세요.” # 161 회귀자 사용설명서 161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2) 마차 안에서 가면을 쓴 채 조용히 앉아 있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당연.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조금은 초조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로 그런 장소가 있는 겁니까.”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는 겁니다.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어야 파는 사람도 생기는 법이죠.” “제가 캐슬락에 있었던 삼 년간 그런 장소가 있다는 건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몇몇 도시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블랙마켓이 아닙니다. 조금 더 고급스럽고 VIP만을 위한 장소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지요. 그저 그런 블랙마켓은 린델 내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마약 거래가 가장 활발히 일어나는 곳은 보통 국경입니다. 지구에서도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에 근접한 도시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노출되어 있어요. 제가 생각해도 캐슬락의 지리적 요건은 나쁘지 않습니다. 공화국과 근접해 있으니까요.” “공화국과는….” “냉전 상태이기는 합니다만… 그 와중에도 팔릴 수 있는 물건은 신나게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건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동물이니까요.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전쟁 상태로 돌입해 있는 와중에도 마켓은 운영될 겁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있냐고요? 구매력이 있으니까요. 이 세상에 돈으로 불가능한 건 없습니다.” 사실 돈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루트를 발견하기 위해서 개고생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분명히 캐슬락 도시 내에 시장이나 경매장이 있다고 확신하고는 있었지만 내가 모르는 수년 동안 형성된 루트를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송정욱의 도움을 받으면 간단하긴 하지만 녀석에게는 나와 조혜진이 지하 경매장에 출입한다는 사실을 숨기기 싶었다. 이곳저곳 열심히 알아보던 가운데 이쪽에 도움을 준 것은 카스가노 유노. 편지 한 통에 모든 게 해결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덕분에 일이 끝난 이후 실리아에 들린다는 약속을 했지만 정확히 언제 실현될지 모르는 약속이다. “캐슬락 백작이나 마를린 영애도 아마 모르고 있을 겁니다. 현성 씨도 마찬가지고요.” “길드 마스터도….” 1회 차의 녀석도 알고 있지 못했으리라. 시기상으로 생각해 본다면 지금 이 시기 즈음에 김현성은 린델 내에서 무력을 높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타이밍이었으니까. 일이 끝난 이후에는 접했을 수도 있겠지만 불법 경매장 같은 것은 조혜진 같은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조금 먼 이야기다. “현성 씨에게는 제법 확고한 목표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말입니다. 이런 세세한 것은 놓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좋게 말하면 나무가 아닌 숲을 바라보고 있는 거겠죠.” “숲 말입니까?” “네. 이를 테면 전쟁이나 몬스터 웨이브 같은 대륙에 직접적인 영향일 끼칠 수 있는 사건들 말입니다. 캐슬락의 지하 경매장보다는 캐슬락의 안위 자체에 신경 쓰고 계신 거겠죠. 지금 열심히 숲을 뒤지고 있는 것 역시 그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숲을 보는 사람이 있으면 나무를 보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겁니다.” “…….” “그 역할은 저나 혜진 씨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고요.” “그렇지만….” “물론 보고는 드릴 겁니다만 저는 우리 길드 마스터에게 굳이 썩은 나무를 보여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 사람이니까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있겠네요. 그럼 굳이 저에게 같이 가자고 한 이유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혜진 씨가 마음에 듭니다. 현성 씨가 혜진 씨를 길드의 간부로 들이려는 이유도 공감할 수 있고요. 서로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있어야 앞으로가 편해지지 않겠습니까. 아. 도착한 것 같군요. 내리시죠. 지하 경매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을 아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아! 이곳에서의 제 이름은 카스가노 하루카입니다. 저는 혜진 씨를 유카라고 부를 거고요.” “아. 네.” 마차에서 내리자 제법 조용한 연회장이 시야에 비쳤다. 왠지 모르게 조금 긴장한 표정의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갑작스러운 일탈에 사춘기 소녀처럼 두근거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가면을 썼지만 혹시 들키지는 않을지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다른 사람들은….” “입구는 이곳뿐만이 아닙니다, 유카.” “네?” “조금 더 이쪽으로 붙어.” “아… 네.” ‘현성아, 미안.’ 슬그머니 허리를 붙잡자 잔뜩 긴장한 몸이 느껴졌다. 물론 다른 의미는 없다. 어디까지나 오늘의 컨셉은 사이좋고 돈 많은 일본인 커플이니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쪽으로 다가오는 안내인이 보였다. 대충 봐도 강하다는 게 느껴지지만 적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돈을 펑펑 써줄 손님이니 적의를 보이는 게 이상할 것이다. “초대장을.” 대충 입을 열며 준비한 것을 꺼내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마차에 올라타시면 됩니다, 고객님.” “오늘은 조금 어떤가.” “아마 만족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거 좋군.” 다시 한번 암막 천으로 가려진 마차에 올라타고 마차는 천천히 출발한다. “안전한 게 맞습니까? 부길드 마스터.” “하루카라니까. 유카.” “안전한 게 맞습니까? 하루카?” “물론. 생각보다 가슴이 콩알만 하네. 우리 유카는.” “하루카 님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안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요.” “안전한 게 맞으니까 안심해도 돼, 유카. 이건 신뢰의 문제거든. 장담컨대 이곳에 경비들이 하루카보다 내 안전에 대해 걱정하고 있을걸. 소중한 고객을 잃으면 안 되니까.” “출발하기 전에는 위험하다고….” “거짓말이었어.” “당신이라는 사람은….” “너무 벌벌 떨지 말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즐기는 거 어때? 마차 안에서 와인 마셔본 적 있어?” “…….” 조용히 입술을 깨물고 있는 조혜진이 보였지만 긴장을 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암막 천에 휩싸인 채 알 수 없는 장소로 향하다 보니 긴장하는 것이 당연.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보안을 철저히 해야 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만 뭐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야 하니까. 마차에서 내린 이후에는 다시 한번 마차를 갈아탄다. 마차가 조금 기울어져 아래로 내려간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는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다는 느낌. 잔에 담긴 와인을 마지막으로 홀짝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습니다.” “나가지.” “네. 하루카 님.” “혹시나 해서 말하는 데 시골에서 갓 상경한 사람처럼 괜히 두리번거리지 마.” “알고 있습니다.” 마차의 문을 열자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주황색 조명이 환하게 안을 비추고 있었고 온갖 사치품이 늘어져 있는 광경은 마치 베니고어 신성 제국의 수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조혜진 역시 신기해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전에 내 경고를 떠올린 모양인지 괜스레 기웃거리지 않는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동자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붙잡자 다시 한번 몸을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제법 훌륭하게 적응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정하얀과 스킨십을 할 때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들어가지.” “네.”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누가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 형형색색의 가면을 착용하고 있다. 이쪽이 포션 사업으로 제법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사업 초창기 단계. 희라 누나에게 받은 용돈과 카스가노 유노라는 통장이 없었다면 이쪽은 저쪽에 제대로 비빌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을 그 사람이 관리하고 있다는 건가요?” “말도 안 되지. 송 씨는 그냥 이곳에 있는 수많은 상인 중 하나일 뿐이야. 그 머저리가 정말로 이런 곳을 전부 관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유카?” “아뇨.” “아마 볼 만한 것이 꽤나 많을 거야. 기왕 견학 온 거 제대로 즐기자고.” “하루카 씨가 말하던 분위기는 아니네요. 마치 가면무도회라도 온 것 같아요.” “어떤 장소든 이면이 있는 법이니까. 아무튼 조금만 들어가 보면 볼 수 있을 거야. 굳이 말하면 이곳은 로비니까. 방 안쪽으로 들어 가보면 보이는 게 있겠지.” 살짝 손을 들어 올리니 칵테일이 든 잔을 옮기고 있는 안내인이 다가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한 잔 받아. 유카.” “…….” “싫으면 혼자 먹지 뭐.” 조혜진의 말 그대로다. 이곳은 블랙마켓보다는 사교회장에 가깝다. 단순히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료와 디저트들을 들고 다니며 귀부인이나 귀족들에게 건네는 웨이터들이나.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웃음 섞인 대화를 하고 있는 이들은 정말로 어딘가 정신 한구석이 망가진 사람들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마음의 눈으로 봤을 때는 조금 다르지만. 대충 봐도 성향이나 고유기벽이 정상이 아니다. ‘남자고 여자고….’ 이상성욕자나 단순히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야망가, 이토 소우타나 나와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보인다. ‘심지어는….’ 정진호랑 똑같은 살인자도 보이고… 저들이 어째서 이곳을 방문했는지는 뻔할 뻔자.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살인도 할 수 있는 모양. 감히 숫자를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공간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성향을 보면 뻔하니까. ‘뭐부터 보여주는 게 좋을까.’ 약한 것부터 차근차근 보여주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처음부터 너무 센 걸 보면 지나치게 당황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송정욱이 관리하는 시장을 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던 바로 그 때 옆쪽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네?” “잠깐 시간 좀 괜찮을까요? 옆에 부인 분만 괜찮으시다면 잠깐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데….” “부, 부인이라니….” “아. 여자 친구 분이신가 보네요. 뭐 어찌되든 상관없지만….”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대충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지 보인다. ‘강하네.’ 조금 특이하게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 아마 공화국민에서 넘어온 중국인이 아니면 신성 제국에 체류하고 있는 대만인일 것이다. 시간만 된다면 조금 상대해 주고 싶을 정도로 훌륭해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괜한 잡담을 할 때가 아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요. 저는 셋이서도 괜찮은데.” “일이 바빠서.” 조금 신경 쓰였던 것은 가면 뒤로 비치는 눈동자. 정확히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정도. [플레이어 샤오린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목 조르는 로맨티스트] ‘시바.’ “그러지 말고요.” “아뇨. 괜찮습니다.” 잠깐이지만 내 고유 기벽을 떠올린 것은 바로 그때. [플레이어 이기영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거짓말쟁이의 유혹] [상대방을 유혹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듭니다. 위험한 이성에게 사랑 받을 확률이 증가합니다.] ‘위험한 이성에게 사랑 받을 확률이 증가합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이곳저곳에서 시선이 쏟아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말을 걸어온 것은 눈앞에 있는 미친 여자 한 명뿐이지만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로 여기를 빤히 바라보는 여성이 많다. ‘지금… 위험한 건가….’ 정신이상자 같은 여자나 시스템이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여자는 전부 다 이곳에 모여 있는 것 같은 느낌. ‘이런 개….’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옆에 있는 조혜진의 손을 꽉 잡을 수밖에 없었다. # 162 회귀자 사용설명서 162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3)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옆에 있는 조혜진의 손을 꽉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말고요. 이래 보여도 나 꽤 매력적인데. 가면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으려나. 이런 점은 불편하네. 벗을 수도 없고….”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함께하도록 하죠.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잠깐이라도 어때요? 그것도 불편하면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네요. 아무한테나 이러는 거 아닌데… 정말이라니까?” “죄송합니다.” 눈앞에 있는 정신 나간 여자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라는 듯 조혜진을 살짝 바라보자 내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앞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이니 대충 내가 불편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해두시죠. 확실하게 거절하시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 이러는 것은 무례입니다.” “아아아….” “빨리 가자, 유카.” “네. 하루카 님.” “뭐야. 애인이 아니라 부하였어?” “제가 이분과 무슨 사이든 당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이제 그만 비켜주시겠습니까. 더 이상 저희를 곤란하게 하신다면 경비를 부르겠습니다.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 제 눈앞에서 그만 사라져 주셨으면 좋겠군요. 지금 계속 앞을 막고 계시는 것도 상당히 불쾌합니다.” “생각보다 소유욕이 강하네. 부하 씨는….” “소유욕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예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 “…….” 두 여자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 떨리기야 했지만 눈앞에 있는 정신 나간 여자가 뭘할 수 있을 리가 만무. 이곳에서 소란을 일으킨다면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조혜진은 나를 자신 쪽으로 한 번 더 끌어 당겼고 자연스럽게 내 몸은 그녀와 조금 더 밀착되기 시작했다. 이상한 의미는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나 보호해 주기 위한 행동인 것 같기는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이 영역 표시라도 하는 것처럼 비치는 모양. 고유 기벽이 시체애호가인 여자는 이쪽을 바라보다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고 마찬가지로 고유 기벽이 고통을 주는 주인님인 여자도 관심을 떼버렸다. ‘뭔 정신 나간 여자가 이렇게 많아.’ 정신 나간 놈들도 많기는 하지만 애초에 그쪽은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논외. 조금 더 시선이 집중되는 걸 느낀 모양인지 결국 샤오린은 천천히 이쪽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남자 몇몇이 그녀에게 달려가는 것을 보니 함께 온 수행원인 모양이다. “종이랑 펜.” “네.” “이쪽이 편지를 받을 수 있는 주소예요. 꼭 연락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여유가 된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서로 정체를 밝히기 싫은 건 피차일반인 것 같은데… 여기 있는 걸 보니까 당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거든요. 아마도 도움이 될 거예요. 여러 가지로….” “꼭 연락을 드린다는 약속은 하기 힘들지만 언젠가는 찾아뵙도록 하죠.” ‘절대로 안 한다, 이년아.’ “꼭이요. 약속하신 거예요? 그럼 전 이만….” ‘빨리 사라져. 제발 사라져라. 대륙에서 사라져….’ 아쉬운 듯 계속해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괜스레 소름이 끼치는 것은 당연지사. 최대한 시선을 피하자 어느 순간 이쪽의 시야를 완벽히 벗어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기가 많으시군요.” “이런 곳에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인기야. 조금 더 밀착해서 걸어줬으면 좋겠는데.” “…….” “나도 별로 유카랑 사이좋은 척은 하기 싫지만 최소한 영역표시라도 하는 것처럼 해줄 수는 없어? 여기저기에서 시선들이 꽂히는 게 괜히 불편하거든.” “페로몬이라도 뿌리고 다니는 겁니까?” “비슷한 것 같아. 영향을 받는 게 저런 사람들이라는 건 조금 가슴 아프지만…. 뭐 아무튼 간에 조금 더 사이좋게 걸어보자고….” “너무 달라붙으니 조금 불쾌한 기분입니다.”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상당히 가슴 아프네.” “…….” 그렇지만 효과는 있다. 사랑을 속삭이는 것 같은 연인의 모습으로 걸어가니 확실히 다른 이들의 사정권을 벗어난 것 같은 느낌. 애초에 이곳에서 타인에게 말을 건다는 행동 자체가 상식적인 행동은 아니다. 방금 봤던 샤오린이라는 여자가 조금 지나치게 적극적이었던 게 분명. 보안과 고객의 안전에 철저해야 하는 장소인 만큼 어떤 사건이 터질 걱정은 조금 줄여도 될 것 같았다. ‘우리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이곳에 있는 여자들과는 앞으로도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다. 물론 다들 한 가닥씩 능력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더 이상 감당해야 할 여자가 늘어나는 건 이쪽에서 사양이라는 거다. 아무튼 간에 목적이 목적인만큼 다시 한번 천천히 주변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조혜진 역시 적응이 된 모양인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 시작. 지금 당장은 이 장소에 불쾌해하기보다는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괜스레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람들이 꽉 찼던 복도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면 모두 개인 용무를 보기에 정신이 없는 모양. 슬슬 들어가 봐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적당한 곳에 들어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방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들에게 눈짓하자 그들이 커다란 문을 여는 것이 보였다. 이후에 시야에 비치는 것은 전형적인 노예 경매장. 꽤나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은 그들이 이 상황에 익숙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종족을 보는 건 처음인가.’ 조혜진을 이끌고 자리에 착석하자 안내인 한 명이 이쪽에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적당히 가져와 주셔도 됩니다.” “네.” 아마 어떤 걸 마실 거냐고 물어보러 온 것이 분명하리라. 몸을 반 정도는 눕힐 수 있을 만큼 고급스럽고 푹신한 의자에 앉자 절로 잠이 쏟아질 지경. 아직까지 시작하지 않았는지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채우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여기는?” “글쎄 확인하고 들어온 건 아니라서… 아마 노예 경매장 같은데. 뭐, 보면 알겠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괜한 소란은 피우지 말자.”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알고 있으면 다행이고. 혹시 이종족에 대해서 아는 건 있어?” “아뇨.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을 뿐입니다. 본 것도 저번 한 번이 전부였고요.” “그래? 조금 아쉽네. 이쪽도 그쪽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는데.” “그것보다 저기 멀리 앉아 있는 여자. 아까 그 여자 아닌가요?” 조혜진이 눈짓하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확실히 그 여자가 맞다. ‘시… 바….’ “따라온 건 아닐 거야. 괜히 시선 보내지 마. 이쪽이 여기 왔다는 걸 알리기는 싫으니까.” 분명히 우리가 들어오기 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애써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 위에 사람이 들어서는 것이 보인다. 밝은 조명이 쏟아지고 마치 영화관처럼 어두운 이쪽에도 빛이 쏟아졌다.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도 저희 경매장을 찾아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상품에 품질에 대해서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항상 진심을 전하는 저희 클럽에 마음이 담겨져 있으니까요.”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싸구려 멘트. 고급스러운 분위기라 조금 기대했는데 이런 부분은 역시 어쩔 수 없는 모양인 것 같았다. “제가 너무 오래 시간을 뺏는 것도 좋지 않겠죠. 모두 바쁘신 분들이니까요. 갑작스럽지만 곧바로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54살의 엘프 루메니아입니다.” 한쪽에서 긴 귀를 가지고 있는 여자 한 명이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 이러기는 싫지만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봐왔던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겉모습에 혹한 것도 잠시. 누가 봐도 겁에 질린 것 같은 얼굴로 무대를 올려다보는 엘프를 보니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손과 발에는 구속구를 차고 있었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은 동정심을 유발하기에 충분.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의 눈에는 금방 탐욕이 깃든다. 입을 뻐끔뻐끔거리고는 있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마법이라도 걸어놓은 것 같았다. “아주 어렵게 구해온 개체입니다. 흔하지 않은 에메랄드 색 머리를 가지고 있고 보시는 것처럼 몸매도 아주 훌륭합니다. 영양 상태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아주 관리가 잘된 깨끗한 상품이지요.” 함께 나온 사람 두 명이 천천히 루메니아라는 엘프의 몸을 붙잡고 구속하자 비명을 지르며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뒷모습을 보게 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리는지 부들부들 떨고 있다. 눈에서는 눈물이 닭똥 흐르듯이 터져 나오고 다리가 풀렸는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전투 능력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교육은 일부로 시키지 않았습니다. 가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계신 고객님께 필요한 물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엘프치고는 상당히 어린 나이이기도 하고요.” “목소리가 듣고 싶군.” “아. 고객님이 원하신다면 당연히 들려 드려야지요. 다른 고객님들께서는 양해 부탁드립니다. 지금부터 잠깐 동안만 걸려 있는 마법을 풀도록 하겠습니다.” 무대 한 쪽에 있는 마법사가 천천히 주문을 외웠고 곧바로 비명과 비슷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누군가… 제발 도와주세요.” 목소리 자체는 맑고 청량했지만 내용이 맑지 않다. 울부짖는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보지만 반응이 있을 리가 만무. 애초에 신성 제국의 일부 귀족은 이종족을 인격체로 보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이곳에 들어온 자유민이야 인성이 어떤지 뻔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좋은 목소리로군.” “하하하. 당연히 그렇게 느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충 이런 상황이라는 거다. 슬그머니 옆을 바라보자 부들부들 떨고 있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마치 똥이라도 씹어 먹은 것처럼 구겨진 얼굴과 꽉 쥔 주먹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조금 화가 날 거라는 것은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분노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부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혜진의 인성이 조금 더 훌륭한 모양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괜한 소란 일으키면….”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건 인권 유린의 현장이다.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분명. 환호를 보내거나 손가락을 들어 구매 의사를 표현하는 잡놈들을 우리의 정의로운 조혜진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들은 타인의 고통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타인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며 즐긴다. “문제가 뭐일 것 같아? 뭐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무슨 소리가 듣고 싶으신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유카.” 후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정도로 규모가 크고 이렇게 광기로 점철된 공간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확인한 것은 단순한 장부였으니까. 실제로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피부로 느끼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 정도는 보통이야. 솔직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깔끔해서 놀라울 정도지. 뭐, 특별한 노예를 취급하는 곳도 있겠지만 시간도 없으니까. 거기는 넘기는 게 좋겠네.” “…….” “노예 거래의 실상은 눈으로 확인했고. 그럼 불법으로 잡아온 몬스터들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그건….” “일어서자.” 입술을 꽉 다물고 있는 조혜진의 얼굴이 보였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이렇게 반응할 거라고 생각했다. “장소를 옮기도록 하죠, 하루카 님.” “알겠어. 유카.” # 163 회귀자 사용설명서 163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4) “굳이 죄책감 느낄 필요는 없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글세…. 네가 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만약에 내가 제대로 일을 처리했더라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렇지는… 않습니다.” ‘않기는….’ 이미 뭔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것 같다. 만약에 일을 미적지근하게 끝내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단순히 윗선에 조사를 해달라고 부탁한 게 전부였으니까. 물론 그녀가 작은바위의 일을 제대로 처리했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장담컨대 이 장소에 단 1%도 영향을 끼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네가 일을 제대로 처리했다 해도 그다지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 “송 씨는 이곳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고… 보시다시피 이 장소는 전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움직이고 있으니까. 내가 말했잖아. 캐슬락의 영주도 이런 장소가 있을지 예상하지 못할 거라고.” “어떻게 자신의 영지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를 수가 있죠?” “서울시장이 서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을 것 같아? 아마 캐슬락의 영주성 내에서도 이곳에 합류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걸. 알면서도 쉬쉬하는 사람도 있거든.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가 캐슬락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어쩌면 공화국과 가까운 접경지대일지도 모르지. 아주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는.” “어째서….” “여러 가지 이해관계로 얽혀 있겠지만 유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알아놔야 하는 것도 간단해. 도려내야 할 부분이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현실도 엄연히 사회의 일부. 그리고 자리에 있는 사람들 역시 사회의 구성원들이라는 거지.” “사회의 일부 말입니까.” “범죄가 일어나지 않은 세상이라는 건 없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천천히 이해하게 될 거야.”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작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여전히 인상이 찌푸려져 있다. 말투 자체도 조금 차갑고 화를 참고 있는 듯했다. 물론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 환경과 손을 쓸 수가 없는 자기 자신. 이제야 슬슬 현실을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마주해왔던 세상과는 180도 다른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친절하게 이야기를 해줘도 될 것 같아, 은근 슬쩍 그녀에게 몸을 붙이며 입을 열었다. “정말로 없는 게 없는 것 같지 않아?” “돈만 있으면 전부 다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죠.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정도야 뻔할 테니까요.” “그 말은 맞아. 돈만 있으면 전부다 구할 수 있지. 노예는 물론이고 마약이나 이성. 심지어는 경험도 살 수 있겠지.” “경험 말입니까?” “그래. 경험.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유카는 사람 죽여본 적 있어?” 아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꽤나 오래 썩었다면 경험이 없을 리가 없다. 아마 첫 경험은 튜토리얼 던전일 것이다. 식량이 한정적인 그곳에서는 지켜야 하기 위해 창을 들어야 할 때가 많으니까. 우리 파티 역시 박덕구를 제외한 모두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정하얀도 마찬가지고, 김현성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튜토리얼 던전에서 몇 명을 골로 보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하지 않은 이들. 빤히 조혜진을 바라보자 그녀 역시 조용히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어왔다. “있습니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나 보네.” “좋은 기억이라고 한다면… 이상하겠죠.” “네 말이 맞아. 좋은 기억은 아니지. 그렇지만 그걸 좋은 기억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종종 나타나거든…. 우리 같은 자유민들이야 다들 어느 정도 경험을 하기는 하지만 평범한 귀족들은 그런 경험을 하기가 어렵잖아? 특히나 제국민 사이에서의 살인은 엄연히 불법이니까. 귀족은 평민을 처벌할 수는 있어도 죄 없이 죽일 수는 없어. 가끔 태어나는 미친 인간들이 자기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들리는 게 어디일 것 같아? 나는 이곳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데.” “그럴 리가….” 미심쩍어 하는 조혜진을 바라보니 웃음이 나올 정도. 방금 전 광경을 보고도 아직까지 인간의 양심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웃으면서 손을 들어 올리자 곧바로 이쪽으로 향하는 안내인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조혜진이 무슨 짓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보면 알게 돼.’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물어보면 무엇이든 대답해 주는 네비게이터가 상시 대기하고 있으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길 좀 묻겠습니다.” “편하게 말씀 하시지요.” “이 검을 시험해 보고 싶은데… 적당한 장소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고객님. 몬스터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면….” “지금은 따로 할 일이 있어서 길만 가르쳐 주시면 알아서 찾아가겠습니다. 아, 그것보다 먼저 커다란 몬스터를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으면 안내해 주시죠.” “직접 안내해 드릴까요?” “아뇨. 설명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이쪽 길을 쭉 따라가셔서 오른쪽으로 계속 향하시면 3번 출구가 나올 겁니다. 그쪽으로 쭈욱 걸어가시면 원형 경기장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입장료는 별도로….” “네. 알겠습니다. 이만 볼일 보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녀석이 사라지자 믿기 힘들다는 표정의 조혜진이 시야에 보였다. “봤지?” “…….” “구할 수 없는 게 없다니까. 여기서는 경험도 돈을 주고 살 수 있어. 불법적인 경험도 마찬가지지.” “…….” “혹시 평소에 하고 싶은 일이나 해줬으면 하는 일, 머릿속에서만 그리고 있는 일이 있었어? 돈은 이쪽에서 내줄 테니 한번 찾아보는 건 어때?” “당신.” “농담이야.”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아마 이곳에서 전부 실현시켜 줄 것이다. 그녀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자 방금 전 안내인이 말했던 대로 원형경기장이 시야에 비쳤다. 내 생각보다 더 규모가 크다. 마치 예전의 콜로세움을 지하에 옮겨놓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입장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도 보였고 저마다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이쪽 역시 준비해 온 골드를 내밀자 안내원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VIP로.” “추가 요금이 발생합니다.” “상관없습니다.” “네.” “아직 경기는 시작하기 전입니까?” “잠깐 쉬는 시간입니다. 다음 경기는 5분 후에 시작할 예정입니다.” “네.” 안내인이 지나간 이후에는 곧바로 조혜진이 입을 열어오기 시작. 꽤나 많은 관객 앞에 무슨 일이 펼쳐질지 궁금한 모양인 것 같았다. “하루카 님. 무슨 경기를….” “글세…. 나도 여기 온 게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나. 대형 몬스터가 나오는 경기라면 무슨 경기일지 뻔할 것 같은데.” “이곳에서 사냥하는 모습이라고 보여준다는 겁니까?” “그렇게 미적지근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여기에 모인 사람이 고작 모험가가 몬스터 때려잡는 거 보고 싶어서 모인 사람들 같아?” “그럼….” “보면 알 거야.” 말을 마치자 곧바로 함성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들 체면이 있기 때문인지 대놓고 소리를 지르지는 않지만 조용히 박수를 보내는 사람부터 응원을 보내는 사람까지 형태가 꽤나 다양하다. 그중에도 눈에 띄는 것은 아까 봤던 여자.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애써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니겠지.’ 커다란 함성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아래로 내리니 경기장의 안쪽에서 육중한 몬스터가 한 마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크네.’ 뭐라고 형태를 표현할 수가 없는 모습. 머리는 도마뱀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다리가 여섯 개가 달려 있는 외관이었다. 입가에서는 질질 침을 흘리고 있었고 연신 괴성을 질러대는 모습에는 귀가 시끄러울 정도. 조용히 있던 관객 역시 그 모습을 보며 환호성을 보내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그 반대쪽에서도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아마 저 괴물을 상대할 인간들일 것이다. 숫자는 30여 명. 기본적인 장비도 보급되지 않은 채로 괴물을 마주하게 될 일반인들이었다. 키가 작은 이도 섞여 있는 것을 보면 상품 가치가 없는 이종족도 섞여 있는 모양. 다양한 관객의 취향을 반영한 모양인지 미형의 엘프도 눈에 띄었다. 상태창으로 그들을 한 번씩 훑어 본 것은 당연지사. 당연하지만 능력치 자체가 형편없다. 중간 중간에 그나마 싸움을 한 흔적이 있는 이들이 눈에 띄기야 했지만 당연히 저런 괴물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 저 정도의 괴물은 아주 잘 훈련된 자유민들이 파티를 이뤄 잡을 수 있을 정도라 생각했다. 제대로 된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은 이들이 저런 괴물을 상대로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몬스터를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이 끊어진 이후 괴물이 30명의 인간들을 향해 쇄도한 것은 순식간. 시작하기 전부터 전투 의지를 상실한 인간 측은 이미 뿔뿔이 흩어져 경기장을 헤집으며 도망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목소리가 쏟아진다. “버텨!” “조금 더 버티라고!” ‘내기까지 하고 있는 건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인간들을 으깨버리고 있는 몬스터의 모습은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 연신 피가 튀어나오지만 저들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 장소에 없다. “키에에에에엑!” “살, 살려줘!” “살려줘! 아아아아악!” 본인들이 나왔던 문을 두드리는 사람부터 함께 나온 이를 밀치고 도망가는 사람들까지. 나름의 처절한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저들의 다큐멘터리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관객이 저 광경을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엔터테이먼트로 보고 있을 테니까. 개인적으로 저 장면이 다큐멘터리로 보이는 걸로 보니 나도 아직 썩지는 않은 모양. 벌써 반 이상의 인간들이 죽어나간 것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찜찜해졌다. ‘쯧.’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으니 아마 조혜진은 더하면 더했을 것이다. 방금 전 노예 시장에서 본 모습에서도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었으니까. 살짝 고개를 돌리니 눈에 보이는 모습은 가관. ‘너무 강했나.’ 가면 안에서 보이고 있는 조혜진의 두 눈에 담긴 것은 분노. 입술을 까득 깨물고 있는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심지어 꽉 쥔 주먹에서도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거 안 되겠는데.’ “돌발 행동은….” “알고 있습니다.” “하면 안 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말은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움직이면 안 된다’를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당장에라도 저 경기장으로 뛰쳐나갈 것 같은 느낌에 불안해진 것은 당연지사. 손을 꽉 잡으니 그 떨림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비명이 들려오는 중. 이제 경기장 안에 남아 있는 인간은 겨우 다섯 명이 전부다. “살,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누군가… 누군가 도와주세요!” “죽기 싫어… 흐어엉….” “죽고 싶지 않아. 여기서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제발….” 목이 터져라 외치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광기를 보내고 있는 관객들의 함성에 묻히고 만다. 그렇지만 조혜진의 귓가에는 똑똑히 들리고 있는 모양. ‘개… 시바….’ 이곳에서 그녀가 뛰쳐나가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자 애가 탈 지경.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쪽이 처리해 주기 곤란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조혜진의 모습이 보여 다시 한번 그녀의 손을 꽉 잡았지만 캐슬락의 고집불통이라는 원칙주의자의 눈에는 이미 내 주변 환경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자극이 너무 심했나.’ “미친 짓 하지 마.” “알고 있습니다.” “뛰어들면 나도 죽어.” “…….” “살리고 싶어?”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게 옳다. “머리를 잘 굴려봐.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입에서 정답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 나는 계속해서 그녀를 바라봤고…. 조금 늦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도출해 낸 결론을 입으로 내뱉었다. “제가….” “…….” “사도록 하겠습니다.” “정답이야.” # 164 회귀자 사용설명서 164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5) “정답이야.” 생각보다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 이곳을 대충 돌아다니다 보면 당연히 느끼는 바가 있겠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수긍하는 것이 빠르다. 손을 들어 올리자 경기장 안으로 다른 용병들이 들이닥치는 것은 순식간. 방패를 든 몇몇 인간이 아직 살아남은 생존자들에게 다가가는 동시에 괴물을 향해 마법들이 쏟아져 내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경기장 안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구겨지기는 했지만 전황이 변한 것에 흥미로워 하는 이들도 있다. 화살과 마법이 몬스터의 몸에 차근차근 박힌다. 물론 그 와중에도 부상자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부분. 이쪽이 살 물건들을 일단 구해내야 했기 때문에 무리해야 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결국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들을 찢어 죽였던 녀석은 완전히 행동을 멈춰버렸다. 기절시키는 정도로 마무리 지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흥분한 녀석을 막기 위해서는 죽이는 것밖에는 방도가 없었던 모양이다. 투입된 용병단의 수준이 조금만 더 높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저것도 물어줘야겠네.’ 뿐만이 아니라 부상자들의 치료비용까지 대줘야 할 것 같은 느낌. 쓸데없는 부분에서 아쉬워하는 나와는 다르게 조혜진 같은 경우에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눈에 보인다.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쉽게 일이 끝마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관중석에서는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는 중. “죽여!” “뭣 하는 거야! 죽이라고!” “이딴 거 보려고 여기에 돈 내고 들어온 줄 알아?!” “죽여라! 죽여라!” ‘돈 좀 깨지겠네.’ 그렇지만 나쁘지 않은 마무리였다. “간단하지?” “…….” “본래 그렇다는 거야. 우리가 지금 있는 장소가 이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된 게 아니야. 유카. 내가 구매력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쉽게 풀린 거지. 이곳뿐만이 아니라 바깥 역시 똑같아. 우리를 둘러싼 대부분의 문제는 이 반짝이는 물건으로 해결 가능하다는 거지.” “그런….” “아마 유카는 값을 치를 수가 없을 테니 대금은 내 쪽에서 빌려 줄게. 생각보다 더 비쌀 것 같거든.” “…….” “친구가 된 선물이라는 걸로.” 조혜진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당연하지만 안내인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 아마 방금 일어난 일의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페이는 어떤 식으로 지불하시겠습니까.” “정확한 금액이 얼마나 됩니까?” “살아남은 노예의 가격은 4인으로 각각 50골드. 한 명은 이종족 엘프로 500골드까지….” “문제없군요.” “죽은 몬스터의 비용은 1만 골드입니다.” “좋습니다.” 죽은 노예보다 몬스터의 값어치가 훨씬 많이 나간다. 나로서는 예상하고 있었던 이야기였지만 조혜진의 입장에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지 전표를 가지고 온 안내인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그밖에도 구출을 위해 투입한 용병들의 비용이 600골드. 아, 부상자에 대한 치료도 포함되어 있는 가격입니다.” “알겠습니다.” “경기장 내에 있는 관객들의 입장료 총액이 4만 골드. 그 외 여러 가지 피해 보상 금액이 2만 골드, 기본 비용이 5만 골드가 발생합니다. 합계 121,250골드 되겠습니다, 고객님.” ‘생각보다 비싸네.’ 지불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나로서도 살 떨리는 가격이기는 하지만 비용 처리 정도는 자유 도시 실리아에 카스가노 유노가 전부 해줄 테니 별문제 없다. ‘미안해, 유노야.’ 대형 길드의 입장에서도 이 정도의 돈이 한꺼번에 빠져나간다는 건 기분이 좋지 않은 일. 통장에 빨대를 제대로 꽂은 셈이었으니 언젠가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편지라도 한 통 써주는 것이 맞으리라. “전표로 처리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고객님.” “갑작스럽게 이런 일을 일으켜 이거 죄송하군요.” “아닙니다.” “제가 이종족 애호가라 그런지 아무래도 엘프가 죽는 걸 보는 건 가슴이 아프더군요. 엘프는 죽기 위해 태어난 이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먹이 쪽에 엘프가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듣지 못했는데… 본래 업체 측에서는 쇼에 대한 사전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겁니까?” “아, 죄송합니다.” “팜플렛을 하나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군요. 쯧.” “저, 사과의 말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남는 엘프 노예 몇 마리를 함께 제공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살짝 조혜진을 바라보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엘프들을 공짜로 주겠다는데 거절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흠. 알겠습니다. 기왕이면 전투능력을 조금이라도 보유한 이들이었으면 좋겠군요. 아, 너무 교육을 받은 엘프는 원하지 않습니다. 아까 사과하신 게 진심이라면 제대로 성의를 보여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쪽도 이곳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으니까요.”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업체는 항상 고객님의 만족을 위해서만 행동합니다. 혹시 언제쯤 돌아가시는지….” “적당히 둘러보다 나가겠습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 “저희 업체의 미숙한 운영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뭐, 이해는 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저희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혹시 오늘 중앙 경매장에도 좋은 엘프들이 많이 나올 예정인데… 관심이 있으시다면….” 지금 이 타이밍에서 영업이라니 이 곳도 참 대단한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이외에 나오는 특별한 물건은 없습니까?” “몬스터의 알과 질 좋은 영웅 등급의 아이템을 비롯해 다양한 물건이 경매될 예정입니다. 이제는 구할 수 없는 각종 예술품도….” “예술품은 별로 관심이 없지만… 흠 몬스터의 알이 나온다고 하셨습니까?” “네. 아주 어렵게 구한 특별한 물건이라 하더군요.” “흥미가 생기기는 하지만… 아쉽지만 중앙 경매장에는 다음에 들리도록 하지요.” 무슨 알이기에 중앙 경매장에서 매물이 풀릴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맞다. 이곳에서 더 시간을 보내다가는 먹이들이 나오는 족족 사줘야 될 것 같은 느낌. 뭐, 조혜진도 빨리 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녀의 입장에서는 이런 공간에 단 1초도 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원형 경기장 밖으로 나가는 순간까지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확실히 충격을 받긴 받은 모양. 순진한 사람에게는 자극이 너무 강했다. “50골드로군요.” “뭐가?” “방금 죽어간 사람들의 가치가 고작 50골드로군요. 고작… 고작… 50골드….” “뭐 그렇다는 거지. 나는 생각보다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유카는 그게 아닌가 봐.” “그 빌어먹을 몬스터의 가격이 1만 골드였습니다.”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저런 종류의 몬스터는 생포하기어렵다고 들었는데… 물론 관리하기는 더 어렵겠지. 먹이 쪽으로 배정된 인간보다 가치가 높은 건, 저들의 입장에서는 무척 당연한 거야. 당장 그 몬스터의 사체만 분해해도 촉매로 쓸 수 있는 가격이 몇 백 골드는 넘을걸.” “그렇지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 유카가 납득하냐 하지 않느냐는 관심 없어. 중요한 건 몬스터가 더 비싸다는 사실 하나지.” “당신은….” “나는 내 생각을 이야기한 게 아니라 있는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한 거야. 값을 책정한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고. 멋대로 감상에 젖는 건 자유지만 이제 현실을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데…. 아니면 내 생각보다 조금 더 순진한 건가. 유카도 직접 눈으로 확인했잖아. 네가 불의라고 불렀던 것과 타협한 것이 아니었나?” “저도… 이해하고 있지만… 분명히 이해하고 있지만….” “납득이 되지 않는 건가?” “그렇다고… 해두지요.” 입을 닫고 있는 것을 보니 꽤나 깊은 생각에 빠진 모양. 굳이 말을 걸 필요는 없어보였다. 그녀가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가 이쪽에는 중요했으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나가기도 민망한 것이 당연지사.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 천천히 둘러봤지만 다른 모습들은 그녀에게 별다른 자극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물론 치가 떨린다는 듯한 반응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 원형 경기장에서 봤던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에는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밖으로 나가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마차 한 대가 시야에 비쳤다. 여러 명의 엘프가 오들오들 떨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딱히 관심을 둘 리가 없다. ‘다섯 명.’ 낭낭하게 챙겨준다고 말한 것치고는 숫자가 적기는 하지만 상태가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구속구에 완전히 구속된 채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적의보다는 공포감이 서려 있다. “괜찮군요.” “고객님의 만족을 위한 성의입니다.” “확실히 만족스럽군요. 다음에 한 번 더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편안한 여행 되십시오.” “아. 저 엘프들은 마차에 실어 주시면 됩니다.” “네.” 조혜진과 함께 마차에 올라탄 이후에는 귀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 엘프들도 마차 내부로 진입하기 시작. 마차의 문이 닫히자 조혜진이 조심스레 엘프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꺄악!”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는 것이 보인 것은 당연지사. 저들의 입장에서 조혜진은 자신을 구해준 용감한 기사가 아니라 미친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섯 명이서 똘똘 뭉쳐 부들부들 떨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조혜진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들이 아닌 나를 향해서였다.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글쎄… 사실상 한 명은 네 소유라고 할 수 있으니까… 고민을 좀 해보기는 해야겠네. 영주성에 들이기도 그렇고 적당한 곳에서 풀어주는 것도 조금 그렇고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겠지. 아마 파란으로 보내는 게 가장 합리적일 거다.” “풀어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지금 당장 풀어준다고 하더라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붙잡힐 테고 다시 한번 아까 같은 꼴이 될걸.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엘프들이 그들의 숲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 “…….” “일단은 이쪽도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지금 당장은 불가능해. 엘프 왕국에 갈 일이 있을 때 데려다 줄 거야. 이쪽이 직접.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한 번 들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건… 다행이로군요.”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은 사람이지 않아?”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침묵은 긍정이라고 생각할게.” “저를 어째서 이곳으로 데려온 겁니까.” “이유야 네가 찾게 마련이지.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건 결과였어.” “결과… 말입니까?” “그래. 결과. 당신이 내린 판단의 결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결과. 당신이 이전에 캐슬락에 서 벌였던 일과 오늘 한 일의 차이. 어떤 것이 옳은 해결 방법인가에 대해서는 스스로 생각해 봐. 아니, 생각해 보셔도 됩니다, 혜진 씨.” “그건….” “이들을 구한 건 저이기도 하지만 당신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올바른 선택이 이들을 구한 거예요.”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보이는 결과는 다르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시면 존중해 드리도록 하지요.” 입을 꾹 닫고 있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인정하기 싫은 느낌이기는 하지만 그녀가 인정하고 하지 않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마음속에 이쪽이 가지고 있는 사상을 박아 넣었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했다. 본래 유대감이라는 것은 단기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가진 가치와 사상을 오랜 시간에 걸쳐 교환하며 쌓아가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어야 비로소 유대감이라는 게 형성된다. 개인적으로 내가 그녀의 멍청한 사상에 영향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최소한 그녀를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거다. 뭔가 극적인 효과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는 나를 이해한다. 지금 당장은 이걸로도 충분하다.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지만… 오늘 일은… 감사합니다. 부길드 마스터.” ‘역시 내 생각이 맞네.’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없다. # 165 회귀자 사용설명서 165화 몬스터 웨이브(1) “일단은 자유도시 린델로 향하시게 될 겁니다. 저희 길드에서 지내시다 보면 이후에 꼭 고향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 정말인가요? 혹시라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초에 제가 여러분들을 해하거나 더럽힐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 “큰 피해를 입으면서까지 몬스터에게서 당신들을 구해내진 않았을 거고요. 린델에 가시면 곧바로 새 신분증을 받으시고 일단은 파란의 손님으로 행동하시게 될 겁니다. 도시 밖으로 가지 않으시는 한도 내에서 외출은 자유롭게 할 수 있으시고 여러분께 피해를 끼치는 인간도 없을 겁니다. 물론 밖으로 나가기 무서우시면 길드 하우스 내에서만 활동하셔도 상관없고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저보다는 저기 있는 조혜진 씨에게 하시는 게… 당신들을 구하고 싶어 한 건 그녀였으니까요.” “아! 정말로 감사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저희를 돌봐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꼭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흐으으윽….” 똘똘 뭉쳐서 울고 있는 엘프들이 시야에 비쳤다. 조혜진은 그런 그녀들을 함께 위로해 주고 있는 중. 조금은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12만 골드짜리 엘프들을 무료로 고향에 돌려보내야 한다는 현실이 가슴 아프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은 저게 맞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쓸 데도 없다. 능력치가 나쁘지 않기는 하지만 모험가로 키우기에는 잠재 능력이 조금 애매하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냥 촌부나 다를 바 없는 수준.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사냥꾼에게 운 없게 붙잡힌 케이스이리라. 사실 하루 빨리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쪽이 엘프 노예를 5명이나 얻어왔다는 소식이 카스가노 유노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쪽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그녀에게는 거의 경기를 불러일으킬 만한 상황. 갑작스레 캐슬락으로 오겠다고 난리를 치는 편지를 보내올 정도였으니 하루 빨리 내보내야 한다. 조용히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이쪽을 바라보는 꼴은 가관. 혹시나 자신들이 다른 곳으로 팔려 들어가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것이겠지만 아마 제대로 도착하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말씀 드리지만 도착하기 전까지는 마차 안에서 나오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길드 휘장이 박혀 있는 마차 안은 위험하지 않지만 밖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은인이시여.” “뭐, 은인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합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여러분들밖에 구할 수 없어서 죄송할 따름이지요. 모든 인간을 대표해 사과드리겠습니다.” “혹, 혹시라도!” “네. 다른 엘프가 보이면 제가 할 수 있는 내에서 도와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시지요.” 마차 안에 엘프들을 태우자 이쪽을 향해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조혜진 역시 조용히 인사를 보내오는 중. 아주 조금은 속이 후련해 보였다. “후련하십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동안 정이라도 드신 겁니까?” “네.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금은 정이 든 것 같군요.”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전부 하신 겁니다. 구해준 것도 모자라 고급 여관에 숨겨주기까지 하고 파란에서도 그녀들을 책임지기로 했으니 오히려 그 이상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죠.” “호의에는 감사합니다. 부길드 마스터.” “그들을 위한 호의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이야기하면 호의를 베푼 건 혜진 씨였고요. 뭐, 엘프들을 구해주다 보면 나중에 돌아오는 게 있겠죠.” “…….” 조금 질렸다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굳이 노린 행동은 아니었지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종족에 대한 애착이 강한 엘프들에게 빚을 만들어 놓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선행은 돌려받을 날이 있으리라. “그럼 식사라도 하러 가시죠.” “네. 부길드 마스터.” 물론 엘프만 잘 대해준 것이 아니다. 조혜진과는 수차례나 대화를 나눴고 어느 정도 가까워지는 것에 성공했다. 선희영이나 정하얀처럼 극단적으로 변화하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이쪽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그녀를 이해해야 되는 상황에 놓이기는 했다.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은 어떤지 하고 생각은 해봤지만 조혜진은 이쪽에 선을 그어 놓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시스템이 말하는 위험한 여자나 정신 나간 여자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 나에게 일정 이상의 호감을 느끼게 하기는 조금 힘들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혜진과 가까워지는 것. 아직 갈 길이 멀기야 하겠지만 일단 급한 불은 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렇게 계속 함께 다니고 있음에도 그녀가 별 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그 증거. ‘친구로 충분하지.’ 나 역시 이런 여자는 친구 정도의 포지션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조금 답답한 건 사실이니까.’ 겉모습은 어떨지 몰라도 안쪽은 이쪽의 이상향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생각은 많이 해보셨습니까?” “어떤….” “제가 뭘 말하고 있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새로운 피해자가 나오기 전에 빨리 빨리 정리해야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네?” “아. 물론 그들을 처벌하는 것을 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법대로 처리하는 게 맞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왔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제대로 일이 처리될지는 모르겠다. 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알린다고 하더라도 이전과 똑같은 상황이 오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아마 혜진 씨 생각이 맞을 겁니다. 제대로 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채로 무턱대고 움직이면 분명히 그때와 같을 겁니다.”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의 고민을 물을 수 있을 정도는 됐다는 거. 작지만 커다란 변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계속해서 걸어가는 와중에도 조혜진은 자아를 찾아 헤매는 청년 마냥 이쪽에 입을 열어오기 시작. 내 입장에서는 정말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삶의 방식은 다양하다는 걸 그녀에게 알려줄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튜토리얼을 함께한 소중한 동료들에 대한 동정심은 버린 겁니까?” “지금은 그들을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건 당연한 반응이다. 그 꼴을 보고 온 지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런 일까지 손을 뻗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제가 상상하던 그들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서 조금 혼란스럽더군요. 아니, 정말로 제가 알던 이들이 그 일에 연류되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원래 환경은 인간을 바꿉니다. 지구에 있는 제 친인들이나 혜진 씨의 친인들도 저희가 살인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뭐, 정당방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손을 더럽힌 건 사실이니까요. 그들은 위로 올라가기 위해 가지고 있는 것 하나를 버린 것뿐입니다. 정녕 자신들이 잡아온 엘프나 몬스터들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다고 한들, 지은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죠.” “부길드 마스터의 말이 맞습니다. 옳은 일은 아니고 벌을 받아야 하는 일이 맞습니다. 저는 그 방식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아마 부길드 마스터는… 본인이 직접 해결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으신 것 같지만….” “네. 일은 개인적으로 직접 해결합니다.” “저 역시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개인이 개인을 벌하는 게 맞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게 되더군요. 아울러 저에게 그들을 벌할 자격이 있는지도 말입니다. 정말 저에게 그들을 벌할 자격이 있는 겁니까?” “없을 건 또 뭐가 있겠습니까. 작은바위를 비롯한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휘둘렀고 그의 상응하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은 아직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격언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다. 그게 전부입니다. 생각이 많은 것은 좋지만 매몰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혜진 씨는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기분 같아서는 그 역겨운 곳에 있는 놈들을 전부 죽여 버리고 싶을 것이다. 이런 대화들은 짜증나기는 하지만 충분히 도움이 된다. 악으로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계속해서 교환하는 과정이니까. 그녀는 돈으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내 가치관의 일부를 알게 모르게 받아 들였고 그 이후에도 조금씩, 조금씩 영향을 받고 있다. 물론 나 역시 그녀의 말에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마찬가지. 조혜진과 나의 관계는 이지혜와 나의 관계와는 조금 다르다. 검은백조와 이지혜와 나를 시스템에서 영혼의 단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행동방식이나 가치관이 거의 같다는 것에 있다. 당연히 그로 인해 튀어나오는 시너지 효과라는 것이 있다. 능률이 2배 이상이 올라가는 것은 거의 확실. 조혜진은 이지혜와는 완전 딴판이다. 오히려 일의 능률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사람이지만 그녀는 나를 계속해서 고민하게 한다. 의견과 가치관이 서로 다를 때 나올 수 있는 시너지라는 건 확실하게 존재한다. ‘이런 게 조화라는 거지.’ 물론 이쪽에 조금 더 유리하다. 나는 조혜진이 내 앞을 막아서는 벽이 되는 걸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그녀는 브레이크이며 블랙박스다. 사고를 사전에 차단하기도 하고 사고가 난 이후에도 이쪽의 뒤를 봐 줄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다.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인간. 그녀는 내 편이 아니라 내 반대편에 서게 될 거다. 김현성 왕국이 팽창해 거대해진 이후에도 그녀는 내 친우로서 이쪽의 반대편에서 이쪽이 원할 때마다 작동하는 브레이크가 될 거다. 진짜로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내 반대편에 설 사람 역시 이쪽에서 결정해야 한다. ‘앞으로 잘 부탁해, 혜진아.’ 그녀와 난 오래 갈 거다. “저도 부길드 마스터와 같은… 생각일 겁니다.” “사회가 해결해 주지 않으니 개인이 움직이는 겁니다. 그게 바로 혁명의 첫 번째 발걸음이고요.”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그들을 밀어버리는 정도로 끝내지는 않을 거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범죄라는 건 어차피 사라지지 않습니다.” “무슨….” “완벽한 사회를 만드는 건 불가능 하다 이 말입니다. 제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곳에는 언제나 죄가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작은바위와 그 장소가 사라져도 결국에는 제2의 작은바위와 원형경기장이 생겨날 겁니다. 그들을 갈아치우면 제3의 작은 바위와 원형경기장이 생겨나겠죠.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겁니다.” “말씀을….” “저는 사회의 병폐들을 컨트롤할 겁니다.” “위험한 생각이군요….” “가만히 보고 있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기존에 있던 걸 밀어버린 이후 그 위에 다시 한번 탑을 쌓아올릴 겁니다. 린델에서도 마찬가지고 캐슬락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어떻게….” “글쎄요? 어떻게일까요?” “그곳 전체를 구매하실 생각인 겁니까?” 구매할 거라는 소리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조금이지만 피식 하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아뇨. 한꺼번에 밀어버릴 생각입니다. 잡초하나 남김없이 전부 다 밀어버릴 거예요.” 물론 내 이득을 위해서. 말을 마친 이후에 슬그머니 조혜진을 바라보자 뭔가 복잡한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내 말과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녀는 날 막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인류애로 이쪽을 막기에는 그녀가 본 광경이 무척이나 충격적이었으니까. 오히려 내 쪽에서 행동해 주길 바랄지도 모른다. 문제는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쪽이 어떻게 그곳을 밀어버릴 수 있는가. 조혜진도 의문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상황이 받쳐 준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몬스터 웨이브도 곧 일어날 거고….’ 공교롭게도 이쪽은 그곳의 위치도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다. 물론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나와 조혜진은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 위치를 처음부터 끝까지 추적하고 있었던 누군가의 뇌 속에는 틀림없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하얀아, 체크하고 있는 거 맞지?’ 대마법사의 스토킹을 받고 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된다. # 166 회귀자 사용설명서 166화 몬스터 웨이브(2) ‘그렇지 하얀아?’ 이쪽에 위치 추적기가 달라붙어 있다는 것을 들킬 가능성에 대해 걱정한 것은 사실. 그렇지만 발각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상위 마법사로 분류할 수 있는 마도학자 황정연이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던 마법이다. 촉매를 이용해 위치추적을 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대륙에 등장하지 않은 마법적 발상이기도 했고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되는 정하얀의 술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교묘해졌다. 어딘가에 대마법사라도 상시 붙어 있지 않는 한 이 몸에 붙어 있는 마법에 대해 눈치채기 힘든 것이 사실. 중간에 마법 동결 지역을 거치기는 했지만 위치 추적기는 그 기능을 멈추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 오매불망 정하얀을 기다리고 있는 이유였다. 물론 김현성이 가져오는 정보도 기대되는 것이 사실. 퍼즐 조각은 어느 정도 맞춰줬다. 거의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실행을 못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지막 조각을 끼워 넣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 퍼즐 조각을 각각 하나씩 가져오고 있는 이들이 아직까지 원정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현재로서는 이쪽이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언제 오는 거니 얘들아.’ 도시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커다란 빅 이벤트라는 건 나 같은 놈들이 움직이기 편한 천재일우의 기회. 그 이벤트를 기다리는 것은 성격이 급한 나로서는 조금 힘들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지금 당장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를린 영애나 조혜진과 시간을 보내고 이쪽과 계약을 맺은 길드나 클랜을 관리해 주는 것이 전부. 물론 기존에 있던 주요 인물을 지속적으로 관리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작은 바위의 송정욱. 녀석 같은 경우에는 여전히 마를린에게 애정 공세를 펼치고 있었지만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니 조금 초조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는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당연지사. 지금 당장은 이쪽에 엎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마를린 영애를 생각해 보면 녀석이 내 뒤통수를 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은 충성을 맹세한다고 외칠 수도 있지만 놈의 기벽을 생각한다면 언제 등을 돌려도 이상하지 않다. ‘나 같아도 치고 싶어질 걸….’ 귀족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쪽이 계속해서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물론 내가 없었더라도 마를린이 녀석을 선택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사실 마를린 이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송정욱의 이용 가치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 나에게 아직까지도 용건이 많은 놈과는 다르게 이미 나는 녀석에게 볼일이 없다. 쪽쪽 빨아먹어 단물만 남은 녀석을 굳이 녀석을 이쪽에서 품을 필요는 없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혜진이 일도 있고.’ 이제는 녀석을 향해 쓰는 시간도 아까워지고 있다는 거다. 뭐, 그 외에도 남는 시간에는 파란의 전략기획 팀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캐슬락의 방어 체제와 공성전에 대한 토론을 했고 조혜진과도 이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전술 같은 걸 제대로 모르는 나와 달리 확실히 이쪽에 해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레이드 몬스터의 등장 여부를 고려하며 캐슬락의 병력 상황을 계산해 편성해 보기도 했고 보급 물자와 물량을 계속해서 체크하고 있는 단순한 일상의 나날. 김현성이 파티원들과 함께 캐슬락에 돌아온 것은 이 즈음이었다. “이기영 님! 김현성 님이 방금 돌아오셨어요.” “예. 굳이 전해주러 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마를린 영애.” “아, 아니에요. 당연한 일인 걸요.” “그럼 저는 잠깐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영애.” “네.” 남들에게는 그저 평소대로 사냥을 마치고 온 것뿐이지만 나에게는 의미하는 바는 컸다. 몇몇 정황을 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녀석이 돌아왔다는 건 곧 캐슬락을 둘러싸고 있는 정세가 바뀐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좋아. 좋아.’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자 김현성과 함께 돌아오는 파티원들이 시야에 비쳤다. 이쪽을 향해 뛰어오는 정하얀부터 손을 흔드는 박덕구까지. 김예리나 선희영 그리고 황정연은 확실히 지친 표정. 모두 무척이나 하드한 일정을 강행했다는 걸 대충 깨달을 수 있었다. “오빠!” “아, 하얀아. 그동안 잘 지냈지?” “네. 잘, 잘 지냈어요!” “별일은 없었고?” “뭐, 별일이라고 해야 될지 안 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저번에 우리 형씨가 했던 말이 사실인 것 같소.” “말?” “거, 몬스터 웨이브인지 뭔지 있잖소.” ‘물어왔구나.’ 당연히 이런 소식을 가져올 거라고 생각했다. “덕구 말이 사실입니까?” “네. 기영 씨. 자세한 설명은 조금 있다 드리는 게 좋겠군요.” “정말 사실이었군요.” ‘사실이어야지.’ “네. 그동안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에 조금 힘든 면이 있었지만 이번 원정으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힐 것 같습니다. 일단은 캐슬락 백작님을 만나보고 오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돌아오자마자 죄송하지만 먼저 집무실에 가 있겠습니다. 혹시.” “네. 저도 조금 있다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아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전체 회의와 브리핑이 시작될 것이다. 남는 시간동안 정하얀과 이야기를 해보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하얀이는 잠깐 나 좀 보자.” “아… 네!” “오시자마자 죄송하지만 희영 씨와 정연 씨는 보급품의 점검과 린델에 따로 요청할 물품의 발주를 부탁드립니다. 혜진 씨가 정확히 알고 계실 겁니다.” “네. 현성 씨.” 슬쩍 자리를 떠나자 이쪽을 쫄레 쫄레 따라오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이쪽이 불러준 것 자체가 기분이 좋은 모양. 활짝 웃으며 손을 잡아오는 모습을 보니 이쪽도 괜스레 입꼬리 올라갔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 정하얀은 지금 당장 이쪽이 자신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상태다. 혹시라도 숨기려고 하면 별로 좋지 않으니 최대한 좋은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좋으리라. 이쪽의 방문을 열고 손짓하자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기 위해 달려오는 꼬맹이 마냥 함박웃음을 띄기 시작. 뭘 기대하는 건지 제대로 얼굴이 슬쩍 붉어져 있었다. “들어와.” “네, 오빠.” 정하얀이 들어온 이후에는 찰칵 소리가 들려왔다. ‘문은 왜 잠그는 거야.’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대충 의자에 몸을 눕히며 옆쪽을 탁탁 두드리자 조용히 이쪽에 앉아오는 모습은 가관. 나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왜, 왜 부르셨어요?” “궁금한 게 있어서.” “아. 궁, 궁금한 거요?” “응. 별 건 아니고… 혹시 있잖아.” “네!”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없지?” “네!” 이쪽을 바라보며 너무 당당하게 거짓말을 하는 걸 보니 무척 당황스럽다. 아무래도 조금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꼭 필요한 일이라서 그래. 하얀아. 원정을 떠난 날 내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지?” “네?” “파티원들끼리 원정을 떠난 날, 내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잖아. 그렇지 않아?” “무슨 말씀을 하,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제가 어떻게….” “탓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하얀아. 알고 있잖아.” “글, 글쎄요. 저는 잘….” 눈을 빤히 바라보니 이쪽을 계속해서 쳐다보기가 부담스러운지 조용히 시선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 거짓말에는 재능이 없는 모양이다. “다 알고 있으니까. 편하게 말해도 돼. 추궁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필요한 일이라서 물어보는 거니까.” “잘, 잘 모르겠어요. 정, 정말로….” ‘티 나….’ 거짓말하고 있는 게 티가 난다. 어떻게든 숨기고 싶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뭔가 이대로 간다면 끝이 없을 것 같은 느낌. 조금 더 압박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하얀아.” “네? 네?”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 “아….” “다른 건 다 괜찮아도 거짓말하는 사람은 정말로 싫어.” “그… 그게….” 애초에 상대도 안 됐던 줄다리기는 여기서 끝.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은 보니 괜스레 측은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마치 엄마에게 커다란 거짓말을 들킨 꼬마처럼 눈에는 한가득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히끅.” 심지어는 딸꾹질도 하기 시작. “히끅.” 조금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반응이 조금 더 거칠다. “히끅.” “내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었지?” “…….” “옛날부터 위치 추적 마법이 하얀이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 “…….” “하나. 둘.” “네….” 살짝 위협하는 모습을 보이자 결국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면 가슴이 조금 아프기는 하지만 확실히 반응이 조금 재미있다. 조금 더 놀리고 싶기는 했지만 일단은 정황을 묻는 게 가장 중요. 적당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화내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처음에는 조금 싫었지만 전부 다 하얀이가 나를 생각해서 그랬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 “네… 네!” “혹시 위험해질까 봐 그런 마법을 걸어놨던 거지?” “네… 조, 조금은….” “혹시 습격당하지는 않을까 걱정 되서 그랬던 거잖아.” “네. 그, 그래요.” “방법은 조금 잘못됐지만 하얀이가 나를 생각해서 그랬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해해 줄 수 있어.” “아….” ‘사실 도움이 되기도 하고….’ 비루한 스펙으로 인해 언제든지 외부의 위협을 노출되어 있는 내게 위치추적기란 가장 확실한 보험이다. ‘납치당하는 상황에 대비할 수도 있고… 이런 용도로도 사용 가능하니까.’ 개인 프라이버시에 문제가 생기기는 하지만 안전상으로는 확실히 괜찮다는 거다.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괜찮아. 물론 하얀이가 한 행동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잘한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네… 오빠.” “탓하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울음 그치고.” “네!” “좋아. 그럼 지도를 같이 볼까?” “네. 오빠!” 확실히 안심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커다란 압박과 꾸중을 받을 거라는 본인의 생각과는 반대로 너무나도 무난하게 흘러가는 상황이 기분이 좋은 모양. 똑똑한 만큼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도움이 됐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조금 기뻐하는 모습까지 보이는 걸 보고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잠깐 고민하긴 했지만 잘못했다는 걸 꼬집어 주기도 했으니 결과는 나쁘지 않으리라. ‘앞으로는 거짓말도 안 할 거고….’ 물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한번 손가락으로 가리켜 볼까?” “정, 정확한 위치는 몰라요. 제가 캐슬락의 지리를 잘은 몰라서.” “괜찮아.” “그러니까. 이쪽에서 분명히 왼쪽으로 500미터 정도….”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간 길을 전부 꾀 차고 있다는 건 소름이 끼칠 만한 부분이기는 하다. 물론 열정적으로 길을 찾는 정하얀에게는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채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스토킹 루트와 방법을 설명하는 모습은 정하얀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얘는 진짜….’ “여기에서는 잠깐 마력 동결 지역이었어요. 그래도 제가 오빠한테 걸어놓은 마법은 그런 걸로 막을 수 없거든요. 옛날보다 더 업그레이드해서… 헤헤.” “아… 응….” “여기는 막혀 있는 공간일 텐데 이상하네요. 분명히 이쪽으로 가셨는데… 그리고… 여기서 잠깐 멈춘 이후에 지하로 내려가신 것 같았는데.” “막혀 있는 길은 걱정하지 말고 그냥 계속해서 가리키기만 하면 돼.” “아. 알겠어요.” “여기서 이렇게….” “응.” “이렇게….” “응.” “여기네요!” 곱게 뻗은 손가락이 특정 위치를 가리키는 순간, 이쪽도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도시 내에 있었네?’ # 167 회귀자 사용설명서 167화 몬스터 웨이브(3) ‘도시 내에 있었네?’ 혹시라도 밖에 있을 가능성에 떠올려 봤지만 아무래도 안쪽에 있는 모양. 도시 내에 있었다면 이쪽이 활동하기 조금 더 편해진다. ‘서쪽 지역.’ 캐슬락의 상류층들이 몰려 살고 있는 것만 제외한다면 특이사항은 없다. 지하에 넓은 부지가 있다는 건 아무래도 상상하기 힘들기는 했지만 정하얀이 자신감 있게 손으로 콕 찝은 것을 보니 오차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확실하지?” “네. 확실해요!” “음. 알겠어. 고마워, 하얀아.” “헤헤헤.” ‘괜찮을 것 같은데….’ 위치는 나쁘지 않다.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쓸려나가도 별로 상관없다. ‘영주성과도 멀리 떨어져 있고….’ 신전과도 완전히 반대편인 걸 생각해 보면 지도에서 사라져도 별로 상관 있는 위치는 아니라는 거다. ‘나쁘지 않아.’ 머릿속으로 계속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도 정하얀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 일단은 큰 용건 하나를 끝났으니 이쪽도 회의에 들어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수고했다, 하얀아.” “아… 네!” “그럼 조금 있다 보자.” “네… 네.” 개인적으로 퍼즐을 맞추는 것을 좋아한다. 조각 하나가 더 맞춰지니 기분이 업 되는 것은 당연지사. 내가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이미 캐슬락을 둘러싼 정세는 시시각각 뒤바뀌고 있다. 정하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곧바로 밖으로 나온 이후에 들려온 소식은 캐슬락 백작이 영지 내에 있는 모든 길드와 클랜 마스터를 소환했다는 소식. 신나게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마 신성 제국에서 터진다면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리라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 징집과는 조금 다른 형태지만 영주성에서 발을 붙이고 있고 신성 제국 내에서 살고 있는 만큼 제국을 위해서 싸우는 것은 자유민들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아주 좋은 상황이야.’ 도시가 위험에 빠졌다는 정황을 가져온 게 파란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에도 끝난 이후에도 이쪽은 제법 좋은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거다.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기자 캐슬락 백작과 김현성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가 봐도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솔직히 기쁘다. “정말입니까?” “확실할 겁니다. 이미 숲에서 여러 가지 정황이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몇 십 년 동안 이런 일이 없었는데….” 둘의 대화에 슬그머니 끼어들자 곧바로 이쪽으로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본래 위협은 경고장을 보내고 들이닥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들이 닥치게 되죠. 준비해서 나쁠 건 없을 겁니다.” 내 역할은 김현성을 의견을 뒷받침 해주고 신뢰를 주는 것. 갑작스럽게 일이 터진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신성 제국 명예주교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소리는 또 다르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김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현하는 게 보였다. 내 이빨에 한 번 더 힘입은 김현성이 말을 이어가기 시작.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 내 뱉는 것이 무척 장해 보였다.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만 계속해서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번 사냥을 나가면서 그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기존에 몬스터 웨이브를 받은 도시에서 일어나는 징후들과 놀라울 만큼 유사합니다.” ‘웨이브구나.’ “묘하게 조용한 것도, 대부분의 몬스터들의 생태에 이상이 생긴 것도 말입니다.” “확실히 그런 것 같군요.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부터가 의심스럽습니다만… 일단은 회의를 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대책이라면 어느 정도 정리해 놓은 자료가 있습니다.” “아. 이기영 명예주교님.” “물론 캐슬락 내에서도 상황이 터졌을 때의 매뉴얼이 있겠지만 저희 쪽에서 개인적으로 준비한 게 있습니다. 사실 저희 파란이 캐슬락으로 온 이후도 몬스터의 숲에서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받았기 때문이니까요.” “네? 저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당연히 듣지 못했을 거다. 애초에 그딴 소식은 있지도 않았으니까. “자유민들끼리 은근히 퍼져 있는 소문이라… 접하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갑니다, 캐슬락 백작님. 같은 자유민으로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뭣 하지만… 이런 상황을 반기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신성 제국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만 주장하고 의무와 권리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자가 무척 많습니다. 아니, 거의 대다수일 겁니다. 몇몇 자유민은 징집되는 이 상황 자체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죠. 어째서 우리가 캐슬락을 위해 싸워야 하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 “그런 이들 대부분이 갑작스레 웨이브가 시작되면 꽁무니를 빼고 도망칠 자들입니다.” 방금 말한 건 거짓말이 아니다. 장담컨대 몬스터들이 몰려오면 도망칠 놈들이 몇몇 있다. 캐슬락 백작도 바보는 아니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계엄령을 선포하고 출입문을 봉쇄해야 합니다. 소집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부대를 편성하고 전시체제에서 대기를 하는 게 옳습니다.” ‘경매장 개자식들이 빠져나가면 안 되니까.’ 그곳에 있는 놈들과 물건은 절대로 밖으로 나가게 둬서는 안 된다. ‘그게 다 돈인데….’ 더불어 이번 기회에 도망치려고 하는 개자식들 역시 이쪽에서 제대로 막고 있어야 한다. “영주민에게 불안감을 조성하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는 하지만… 일리는 있군요.” “어느 정도의 불안감은 있어야 되는 게 맞습니다. 아니,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회의실에 안으로 하나 둘 기어들어오는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모두 한 번쯤은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자유민들. 작은바위 송정욱의 소개로 만나고 그 이후로도 개인적인 만남을 한 번씩 만나본 이들이다. 캐슬락 백작은 저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을 곱씹어 보면 저들이 좋게 보일 리가 없다. “자리에 앉으셔도 됩니다.” “네, 백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캐슬락 백작님.” “큼.” 하나둘씩 인사를 주고받고 있기는 하지만 이곳은 사교회가 아니다. 조금 무거운 것 같은 분위기에 길드 마스터나 클랜 마스터들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 중. 송정욱은 무슨 일이냐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드니 멍청한 놈처럼 씨익 웃기 시작. 혹시 뭔가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꼴이 제법 우스워 보였다. 신성 제국의 명예주교로서 이쪽이 캐슬락 백작과 친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 나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자신은 무슨 일이 터져도 일단은 안심이라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귀엽네.’ 눈치가 빠른 건지 느린 건지 알 수 없는 상황. 사건이 터졌다는 걸 알고 있지만 자신의 처우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 역시 김현성과 함께 가까운 자리에 착석하자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캐슬락 백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짧게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지만 일단은 이쪽의 뜻은 어느 정도 전달한 상황. 어떤 선택을 하든지 캐슬락 백작의 자유지만 나는 눈앞에 보이는 마를린 영애의 아버지가 어느 정도 내 뜻을 존중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죠?’ 만약에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다는 사건만 전한 뒤에 오늘의 회의를 끝낸다면 원정이나 여행이니 뭐니 캐슬락을 도망치는 녀석들이 분명히 생길 것이다. 영지민을 보호해야 하는 백작의 입장에서도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 여러모로 내 의견을 수용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거다. “지금부터 캐슬락은 전시체제에 들어가도록 하겠네.” ‘나이스.’ “앞으로 한 달 안에 몬스터 웨이브가 들어올 거라고 판단. 타 도시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출구를 봉쇄한 이후에 캐슬락 내에 있는 자유민 병력을 영주성의 병력과 통합해 운영하도록 하겠네.” “갑자기 무슨….” 모두가 멍한 표정.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몇몇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 “몬스터 웨이브 말입니까?” “그건… 어디서 나온 정보….” 개소리에 대답한 것은 역시나 김현성. “저희 파란에서 조사한 정보입니다.” “확, 확실한 겁니까?” “네. 이후에 브리핑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지만 확실한 정보입니다.” 우리 회귀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에서 곡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튀어나온다. 갑작스레 몬스터 웨이브를 상대로 공성전을 하게 생겼으니 불안한 것이 당연. 심지어 영주성에 편입되어 싸워야 한다는 소리는 저들에게 한층 더 불안감을 선사해 주는 것 같았다. ‘쯧.’ 뭔가 불만이 터져 나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강경한 캐슬락 백작의 태도에 이곳에 있는 길드 마스터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상황. 작은바위의 송정욱이 살며시 입을 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캐슬락 백작님.” “무슨 일인가? 작은바위 길드 마스터.” “전시체제를 유지하신다는 말씀과 계엄령을 선포하신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만… 저희가 영주성에 편입되어서 싸운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나?” “아마 제대로 된 효율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제국법상 전쟁과 비슷한 위험 상황이 터지면 길드와 클랜은 각각의 독립부대로 활동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영주성에서 운용된다는 건….” “아니지. 정확히 이야기하면 제국 법상으로는 최고 사령관의 재량에 따라 병력의 편성을 바꿀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네. 제국법에 문제될 건 없지.” “그렇지만….” 여기저기에서 다른 목소리도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최고 사령관의 재량이라고 한다면 더욱더 방금의 선택을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 역시 캐슬락에서 자리 잡고 있는 자유민으로서 닥쳐오는 위협에 합류해야 한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영주성의 기사들과 함께 싸우는 건 무리가 있을 것 같다. 이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저 자유민들에게는 자유민들의 방식이 있다는 걸 말씀드린 겁니다. 조금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해주십시오.” “자유민들의 방식이라니 대체… 뭘 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자유민들의 방식이라는 게 도대체 뭔가? 제국민을 앞세우고 자신들만 살아남는 게 자유민의 방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백작님. 적어도 자유민들을 지휘하는 것은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서 작은바위 마스터가 직접 병력을 운용하겠다. 이 말이로군.”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가. 작은바위 마스터. 나는 바보가 아니야. 그대들이 어째서 캐슬락에 체류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고 어째서 독립된 부대를 원하는지도 알고 있네. 이곳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 싫어한다는 것도 알아.”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만 상황이….” 둘 다 양보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사실 둘 모두에게도 그다지 도움이 되는 그림은 아니다. 자유민과 제국민은 어디까지나 공생관계에 있다. 백작 입장에서는 일단은 밀어 붙이는 그림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뒷일을 생각해 보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지.’ 마음에 들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아야 했다. 캐슬락 백작의 입에서 의외의 소리가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기영 명예주교에게 맡기도록 하겠네.” ‘요거지!’ 물론 캐슬락에 사는 자유민들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나는 손님에 불과했으니까. 역시나 몇몇 길드 마스터가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이기영 님이라면 본래 캐슬락 출신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최대한 보일 수 있는 양보야.” “그것도 좋을 것 같군요.” 조금 의외였던 것은 송정욱이 그대로 긍정해 버렸다는 것. 슬그머니 송정욱을 바라보니 이쪽을 보고 살짝 웃어오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이 새끼는….’ 어떻게든 살 곳을 찾아 열심히 구덩이를 파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구덩이가 자신의 무덤이 될 장소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 ‘아무리 비벼 봐야 넌 최전방이야 정욱아….’ 이미 그건 결정이 된 사항이었다. # 168 회귀자 사용설명서 168화 몬스터 웨이브(4) ‘아무리 비벼봐야… 넌 최전방이야 정욱아….’ 녀석의 생각이 이해가 가기는 간다. 당연히 영주성으로 편입된 채로 명령을 받으면서 싸우는 것과 자유민들의 부대를 운용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녀석은 자신의 길드를 온전히 유지하고 싶어 한다. 아니, 조금 더 명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건 이미 생존의 문제나 다름없다. 굳이 백작의 말에 긍정한 것 역시 이런 배경이 깔려 있을 것이다. 자신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면 작은바위에 적절한 자리를 넘겨줄 거라고 생각한 모양. 아마도…. ‘후방 배치를 원하고 있겠지.’ 어차피 캐슬락 백작은 마음을 먹었다. 캐슬락 영지 전체를 전시체제로 돌리고 계엄령을 선포해 자유민이 도시를 도망치는 것을 봉쇄했다. 이미 백작이 양보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지휘체계의 꼭대기에 선다고 발언해 봤자 괜한 위화감을 심어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렇지만 명예주교의 위치에 서 있는 나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자유민으로서도 그럴듯한 지위를 가지고 있고 교황청에서 받은 명예주교라는 직위로 이런 감투를 쓰기에 충분하다. 이러나저러나 작은바위에서 나쁠 건 없다. 작은바위의 방패가 될 사람으로 날 선택한 건 훌륭한 선택이지만 내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하책 중에 하책이라 생각했다. 아직도 이쪽이 자신을 아끼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인지 필사적으로 동조하는 꼴은 꽤나 가관. 자연스럽게 다른 길드 몇몇도 그대로 녀석의 주장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길드와 클랜이 독립된 채로 운영한다고는 하나… 어차피 지휘체계는 필요합니다. 백작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비록 이기영 님께서 캐슬락 출신이 아니기는 하나 같은 신성 제국민이 아닙니까.” “흐음….”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희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여기저기에서 입을 열어오는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아무래도 그게 조금 더….” “차라리 이기영 명예주교님께서 지휘해 주시는 게….” 몇몇 길드가 동조하자 혜택을 받고 싶은 기존 길드와 클랜 역시 지나치게 동조하기 시작. 뭔가 꿀이 떨어지는 상황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아니지 않나?’라고 생각했던 여론이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는 것은 순식간. 이때다 싶어 살랑살랑 꼬리를 치는 모습이 가관이다. 마치 잘해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당연하리라. ‘백작도 괜찮은 생각을 했네.’ 자유민을 강압적으로 다루는 것은 당장이야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이후를 생각하면 현명한 방법이라고는 볼 수 없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은 애초에 당연한 수순. 자신과 자유민들을 연결시켜 줄 연결점으로 날 선택한 것은 나에게도 괜찮고 영주에게도 괜찮은 생각이었다. ‘합리적이지.’ 캐슬락 내에 있는 자유민들 중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 마를린 영애 때문인지, 아니면 캐슬락에 진심을 다하려는 모습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백작이 나를 신뢰하는 것 같았다. ‘왕성 내에 퍼져 있는 소문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명예주고 이기영은 그 평가가 꽤나 좋으니까. 김현성 역시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우리 회귀자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모양. 동분서주 뛰어다녀야 할 녀석의 입장에서도 안정적으로 병력을 컨트롤해 줄 사람이 있다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것이다. ‘물론 나한테도 좋은 이야기고….’ “저는… 조금 부담스럽군요.” “아닙니다. 이기영 님. 제가 전력으로 서포트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송정욱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큼.” 어차피 대규모 병력지휘라는 걸 한 번 해보고 싶었던 참. 물론 이론상으로는 공부를 하기야 했지만 실전은 이론과는 또 다르니까.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바보나 다름이 없긴 하지만 겸손이란 건 한국인의 미덕. 부족하다는 걸 전제로 깔고 슬쩍 감투를 쓴다고 입을 열자 곧바로 내 쪽으로 시선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좋네.’ “정 그렇다면… 캐슬락 영주성과 함께 부대편성과 운영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캐슬락 영주님.” “잘 부탁드립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 이제야 조금 분위기가 안정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벌써부터 시선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니 이쪽에 할 말이 무척 많은 모양. 부대 편성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런 시선을 보내는 게 당연하다. ‘누가 제1성벽으로 가고 싶겠어.’ 이미 그 자리에 들어갈 주인공이 정해져 있기는 했지만 마지막까지 고민을 해봐야 하는 자리. 브리핑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이 보인다. 어떻게 하면 제1성벽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 말이다. 물론 몬스터 웨이브가 정말로 일어날까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는 이들도 많지만 눈앞에 있는 김현성은 그런 이들의 의문을 꽤나 훌륭하게 해결해 주고 있었다. “최근에 사냥을 다녀오신 분들은 대부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현재 캐슬락 앞에 있는 숲에서 서식하는 몬스터들의 생태에 문제가 있다는 것 말입니다.” “확실히… 느낀 적이 있기는 있습니다. 늪에서 살고 있는 바실리스크가 갑자기 숲 쪽에 모습을 드러낸다든가 하는 일이 잦아졌죠. 숲 바깥쪽에서도 고등 몬스터들이 출연하기도 하고요. 저희 클랜에서도 일단은 신입 길드원들의 사냥을 자제시키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수십 년 전 캐슬락에 들이 닥쳤던 몬스터 웨이브의 징후를 살펴보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인은?” “아마도 개체수의 포화, 혹은 기존 몬스터를 위협할 만한 새로운 몬스터가 서식지를 옮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죠.” “그렇지만 겨우 그걸로 몬스터 웨이브의 징후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겁니까? 전시체제나 계엄령은 조금 더 일이 확실해진 이후에도….” “그때면 이미 늦습니다. 알고 대비하는 것과 모르고 대비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도 그래프를 보시면….” “끄응… 그렇군요.” 대충 이런 종류의 대화들을 주고받고 있다는 거다. 굳이 내가 끼어들 타이밍은 아니긴 하다. 우리 측에서 제시한 자료의 정보가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지기는 하겠지만 일단 모든 증거가 확실하게 뭔가가 일어날 거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었으니까. 의구심을 품은 몇몇은 갑작스러운 전시체제에 불만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인정하기 싫을 뿐이다. 사실 이쪽도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 김현성이 가져온 정황들을 보면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아니, 굳이 증거를 찾을 필요도 없다. 김현성의 역사에서 몬스터 웨이브는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그렇지만 이유가 조금 명확하지는 않은 느낌. 어째서 웨이브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김현성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별로 상관없나.’ 어차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뻔할 뻔자. 들어오는 몬스터를 잡는다. 그게 전부다. 나 말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브리핑이 끝난 이후에도 여기저기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이쪽도 슬그머니 발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 당연하다. 제대로 뭘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중구난방으로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그럼 지휘관으로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각각의 길드와 클랜의 부대편성과 주요 병과에 대해서 제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확히 기술 하셔야 합리적인 배치가 가능하니 숨기고 있는 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네?” “각 길드에서 보유하고 있는 보급물자는 통합. 저희 파란에서 가져온 물건들 역시 통합해서 운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린델 내에서도 지원이 올 겁니다. 린델에서 도착한 물자 역시 통합 운용할 생각이니 따라주셨으면 좋겠군요. 물자 관리는 캐슬락의 상인 길드, 캐슬락 상인 조합에 맡길 생각입니다. 일이 끝난 이후에 남은 보급품들은 합리적인 방법으로 분배할 예정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각 길드나 집단이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 있는데….” “저희 파란에서 무료로 지급할 보급품의 목록입니다. 몇몇 중소형 길드가 낼 수 있는 전체 양보다 많을 겁니다. 길드 각각의 상황을 모두 고려해 주면 좋겠지만 저는 여러분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서 감투를 쓴 게 아닙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참작해 드리겠지만 따르지 않으실 생각이라면 차라리 캐슬락 영지의 휘하로 들어가서 함께 싸우는 게 좋으실 겁니다.”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말 안 듣는 멍청이들을 컨트롤하는 것의 첫 번째는 일단 밥줄을 쥐어 잡는 것. 보급품만큼은 내 쪽에서 사수하는 게 옳다. 작은 바위의 송정욱 녀석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입을 여는 중. “저 역시 이기영 명예주교님의 말에 백번 동감합니다.” 조금은 갑작스럽게 충성스러워진 느낌이지만 나쁘지는 않다. “길드 하우스에 남기는 것은 최소한의 병력, 모든 길드는 당분간 성벽 안쪽에 있는 막사를 이용하고 성벽 위에서 상시 대기하는 걸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전체 훈련은 당장 내일부터 시작할 겁니다. 붉은용병에서 오신 분들이 직접 훈련을 맡아주실 예정입니다.” “아. 붉은용병 분들도 오시는 겁니까?” 조금은 희망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린델과 지속적으로 교신을 주고받는 상황입니다. 아마 타이밍이 맞는다면 차희라 님도 함께 싸워 주실 수 있을 겁니다.” “오오오오.” 눈에 띄게 좋아하는 얼굴. 녀석들의 불안감을 날려버리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하다. 붉은용병이 있어서 다행이다.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을 거다.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차희라의 후광 때문인지 나를 조금 더 우러러 보는 것 같은 느낌. 물론 내가 개인적으로 준비된 지휘관이라는 사실 역시 저들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는 이유였다. 김현성이 캐슬락으로 가자고 했을 때부터 정리된 계획을 한마디씩 내뱉는 것에 불과하지만 불안한 상황에서의 지휘관의 자신감은 저런 우민들에게 확신을 준다. ‘잘만 따라오면 꿀 빨게 해줄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하하. 이기영 님이 캐슬락에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 와중에도 송정욱은 이쪽을 향해 계속해서 알랑방귀를 끼고 있는 중. 어지간히 후방 배치를 받고 싶은 모양인 것 같았다. “캐슬락 상인 조합은 오늘 안으로 모든 보급품을 받은 후 분류를 시작하도록 합니다. 다른 길드 여러분들 역시 무장하고 성벽 막사로 거주지를 옮기겠습니다.” “오늘 안으로 말입니까?” “네. 오늘 안입니다.” “이거 바쁘게 움직여야겠군요.” “혹시 모를 상황이 터진다면 보고는 제게 직접 해주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저, 어떤 막사로 가면 되는 겁니까?” “다녀오시면 모든 준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정리할 시간은 필요할 테니 이 정도의 여유를 주는 것이 옳다. 이미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것처럼 일 처리에 대해 이야기하자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들 역시 천천히 변하기 시작. 어쩌면 정말로 내가 지휘권을 잡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내가 원하는 거고.’ 신성 제국의 명예주교로서 타 도시 사제들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용병여왕의 정부이니 붉은용병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어쩌면 실리아에 있는 요조라 길드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 배경만으로도 이기영이라는 인간은 제법 유능한 지휘관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캐슬락 백작님과 협의 하에 부대편성을 마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해산하도록 하죠. 신변 정리는 최대한 빨리 끝내주셔야 합니다. 캐슬락 백작님의 말대로 지금은 전시체제니까요. 저 역시 괜한 분란을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만큼 통제에만 잘 따라주신다면 여러분들에게도 떨어지는 게 있을 겁니다.” “아….” “당장 앞만 생각하지 말고 웨이브가 끝난 이후에 일도 한 번쯤 생각해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쪽이 먼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자 동시에 몸을 일으키는 훌륭한 제군들이 시야에 비쳤다. 밖으로 자리를 옮기자 이쪽으로 다가오는 녀석들의 모습은 가관.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것은 나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든 1등 공신 송정욱이었다. “이기영 님, 몇 시까지 들어오면 되겠습니까?” “사실 오후까지 다들 집결했으면 좋겠지만….” “조금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그렇다면 조금이지만 편의를 봐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이거 감사합니다.” “아뇨. 너무 융통성이 없으면 안 되니까요.” “역시 이기영 님이십니다. 처음에 캐슬락에 오셨을 때부터 캐슬락에 빛이 되실 분이라는 걸 느꼈지 뭡니까. 하하하하.” 꼬리를 흔드는 것은 녀석뿐만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이 이쪽에 한마디씩 던진다거나 입을 열어오고 있다. 이 녀석들을 떨쳐내는 것도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 내 몸에 달려 있는 위치추적기에 대해 정하얀과 대화를 하는 시간이 조금 더 늦어졌다. ‘병력 편성도 해야 되는데….’ 이건 대단한 문제는 아니다. 이런 부분에서 나보다 능력 있는 똑똑한 조혜진 양께서 해주면 되는 일이니까. “혜진 씨?” “네. 부길드 마스터.” “저는 잠깐 따로 볼일을 좀 보고 오겠습니다. 저도 정리할 게 있어서… 병력 편성은 혜진 씨가 알아서 해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네?” “제1성벽에는 작은바위와 송정욱, 나머지는 대충 가닥만 잡아주세요.” “아….”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정욱 입장에서는 뒤통수가 얼얼할 거라고 생각했다. # 169 회귀자 사용설명서 169화 믿음에는 배신으로(1) “저, 마스터.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뭘?” “이번에 파란의 이기영을 총지휘관으로 맡기신….” “아. 신경 쓸 필요 없어.” “네? 하지만… 계획하고 있으신 건….” “일단은 눈앞에 보이는 일부터 처리해야지. 어차피 이기영 그 인간은 린델 출신이고 캐슬락에서의 영향력이 넓어진다고 하더라도 움직일 수 있는 데 한계가 있을 거야. 아니, 오히려 이쪽은 좋지. 아직도 떨어지는 꿀이 많거든.” “아….” “기브 앤 테이크가 뭔지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인간이라 이거야. 파란의 이기영은…. 흐흐흣.”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좋지 않았던 첫 인상과는 다르게 이기영이라는 인간은 보면 볼수록 놀라움을 주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운이 좋은 애송이 정도로 인지하고 있었던 게 당연지사. 용병여왕의 정부라는 것을 이용해서 지금의 지위를 손에 넣은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녀석이 보여주는 수완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지금의 권력을 얻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한 것은 그가 권력을 대하고 이용하는 태도였다. ‘이해하고 있지.’ 권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한 느낌. 실제로 그는 캐슬락에 온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거의 모든 중소 클랜의 클랜 마스터들과의 친분을 손에 넣었다. ‘물론 나를 통해서지만….’ 첫 번째로 이쪽을 찾아온 것부터가 이미 이기영이 어떤 인간인지를 보여주는지에 대한 지표. 조금 웃기는 소리였지만 어떤 의미로는 존경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효율을 중요시하고 상대가 어떻든 간에 일단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충성에 대한 보상을 주고 자신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 인간인지에 대해 느끼게 만든다. 그에 대한 결과가 어떤 건지는 뻔할 뻔자. 캐슬락의 정세는 많이 뒤바뀌었다. 경제나 정치 같은 커다란 부분부터 별 것 아닌 아주 작은 부분까지. 이기영을 빼놓고는 이미 캐슬락을 논할 수가 없을 지경까지 와버렸다는 거다. ‘그것도 전부 능력이지.’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눈앞에 있는 부관 박가을이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길드 마스터 생각은 이해하지만 이상하게 조금 걱정이 돼서….” “걱정할 필요 없다.” “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멍청하지도 않고… 듣기로는 그쪽도 조혜진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 같은데… 뜻하는 바가 뭐겠어?” “아.” “그놈 역시 우리랑 비슷한 인간이라는 거야. 파란에서 벌이고 있는 사업도 대부분 법에 한 발자국 정도 걸쳐져 있는 종류고…. 애초에 이쪽과 맺은 계약도 그다지 합법적인 방법은 아니었잖아? 강매 아닌 강매였지.” “분명히… 그랬죠.” “대충 들려오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양심 따윈 ‘개나 줘’라고 할 수 있는 행동도 많이 보여준 것 같던데…. 조혜진보다는 이쪽에 가까운 인간이야. 사실 조금 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도 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해볼 정도니 말 다했지 뭐.” “마스터… 설마 저희 사업에 대해서 이야기하실 생각입니까?” “아니.” “후우….” “아직은 시기상조지.” “그, 그렇다면… 결국에는 말씀하실 생각이라는 겁니까?” “생각해 보면 볼수록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아마 그 양반이 들어오면 볼 만할 거야. 린델의 이기영이 지하에 나타나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상상이 돼? 우리도 조금 더 커질 수 있을 거고… 원형경기장을 꽉 잡을 수도 있어. 작은바위를 무시했던 놈들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다. 이거야.” “확실히 마스터의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만… 그 조금은 불안합니다. 너무 가깝게 엮이는 것은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아아아. 나도 조금 조심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큼. 일단은 지금처럼만 가자. 혹시 알아? 이기영이 이쪽에 마를린을 넙죽 넘길 수도 있고… 일단은 충성하는 척하면 떨어질 콩고물은 얼마든지 있어. 내가 확실하게 관리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가을아.” “…….” “성벽에서 생활한다고 했을 때는 조금 걱정했는데 말이야. 확실히 인맥이라는 게 좋긴 좋아.” 확실히 그랬다. 병영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직한 방 안은 이쪽이 앉아 있는 방보다 쾌적하게 느껴질 정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사치를 부릴 수는 없지만 전시체제로 바뀐 이후에도 괜찮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일이었다. 이기영이 이쪽을 배려해 준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있는 방을 봐도… 그놈이 얼마나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어? 사실 그럴 수밖에 없지. 흐흐흐. 그놈도 나를 필요로 하니까.” “네.” “그건 그렇고 박가을. 왜 그렇게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불만이라도 있어?” “아뇨.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것 같아서….” “불안해할 필요 없다니까.” “그 사람은 뭔가….” “응?” “조금 불길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그저 감일 뿐이지만…. 엮여서 별로 좋을 게 없는 인간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쯧. 너는 너무 조심스러운 게 탈이야.” “죄송합니다, 마스터.” “죄송할 건 아니지. 그 점이 마음에 들기도 하니까. 물론 갑자기 나타난 미친놈을 믿는다는 게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저번에 이기영 그놈이랑 술 한잔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있거든.” “네?” “도박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렇지만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는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아.” “키야….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새끼는 뭘 해도 될 놈이라고 생각이 들더라고. 나보다 어린놈이기는 하지만 배울 점도 있고. 응? 존경할 만한 점도 있다는 거야. 지금 내 상황이 그래. 나도 도박은 싫어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내 감이 지금은 주사위를 던져야 될 때라고 말하고 있거든.” “그렇군요….” “걱정하는 것도 물론 이해는 하지만 너무 움츠리고만 있으면 안 좋아. 나와 그 양반이 차이점이 뭘 것 같아? 그 자식이 이룩한 것들을 봐. 이기영이 이곳에 온 지 1년밖에 안 됐다는 걸 믿을 수 있겠어? 물론 용병여왕과 친근한 사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분명히 차이점이 있어.” “어떤?” “선택의 순간이 올 때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지 않았다는 거고 이기영 그놈은 주사위를 던져왔던 거지. 그게 지금 내가 캐슬락에서 우물쭈물거리고 있는 이유고 이기영 그놈이 린델을 주무르고 있는 이유야. 내 말 알아들어?” “네. 물론입니다. 마스터.” “아무것도 걸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거 아니겠어. 아, 이것도 그놈이 한 말인데. 아무래도 나한테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할까. 큼. 이 이야기는 이제 여기서 그만. 슬슬 회의시간이니까 나가봐야지. 혹시나 해서 묻겠는데… 물건들은 제대로 보관해 놓은 거 맞지?” “네. 마스터. 전부 다 길드 창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알은?” “제대로 관리하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일이 끝나도 한 번 비벼보지. 바깥쪽도 계속 신경 쓰고 있어. 이럴 때일수록 더 열심히 해야 되니까. 애들 관리도 확실하게 하고.” “네.” 조금 길었던 대화를 마친 이후에 바깥으로 나오니 거대한 성벽이 시야에 비쳤다. 성벽의 위에서 바깥을 순찰하는 병사들은 물론 합동 훈련을 하는 길드원은 물론 붉은용병의 휘장을 달고 있는 이들도 눈에 보인다. 물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들과 섞여 있는 붉은색 머리를 한 여자. ‘차희라?’ 이기영이 붉은 용병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사실 정말로 이곳을 찾을 거라고는 생각도하지 못했다. 첫 번째 회의가 끝난 이후에 곧바로 그리폰을 타고 날아왔던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 터질듯이 탄탄한 몸과 강한 인상은 이전에 술자리에서나 들었던 용병여왕의 모습 그 자체였다. 올려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가슴이 두근두근거릴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지구에서부터 아는 사이라고 했던가.’ 솔직히 말해 누군가가 부럽지 않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부럽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용병여왕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외관의 아름다움 역시 두말하면 잔소리. 붉은 입술과 강한 눈빛 그리고 타오를 것처럼 빨간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있는 모습은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여신 같이 느껴졌다. 잠깐 동안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이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허리를 곧바로 숙인 것은 당연. 최대한 정중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맞다. 잠깐 허리를 다시 일으켰을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회의를 위해 먼저 들어가는 모양. 용병여왕보다 늦게 회의실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가출한 정신을 붙잡고 헐레벌떡 회의실로 뛰어가니 이미 모두 모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 늦었나.’ 실수라고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조금은 긴장감이 풀어져 있던 것이 사실. 전시체제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커다란 실수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조금 늦으셨군요.” “아… 네. 죄송합니다.” “뭐, 괜찮습니다. 작은바위 마스터. 부대 편성도 완료가 되지 않은 상태니까요. 그래도 오늘부터는 조금 긴장감을 가지고 움직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거지.’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앞에서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를 하는 이기영을 바라보니 확실히 기분은 좋다. ‘권력자의 친구로 있다는 건 좋다니까.’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는 게 좋겠군요.” “네.” “아. 작은바위 마스터도 빨리 앉으시죠. 부대 편성을 하고 있는 도중이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규모가 조금 작은 길드나 클랜은 통합 운영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최대한 자치권을 드리려고 노력하기는 했지만 구조상 어쩔 수 없이 편성된 부분에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신경 쓰면서 말해? 자기? 총지휘관이 까라면 까는 거지. 안 그래? 명령불복종은 군법으로 다스리면 되는 거야. 전부 다 목을 날려 버리면 되는 거라고. 다들 내 말이 틀린가?” “네. 맞습니다. 차희라 님.” “아… 아암 그렇고말고요. 용병여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봐. 모두 그렇다고 말하잖아? 전시상황에서 지휘관의 명령은 곧 법이야. 이건 린델도 마찬가지고 캐슬락도 마찬가지니까 굳이 출신을 따질 필요조차도 없는 거고 혹시나 해서 이야기하는데… 나는 우리 자기처럼 물렁하지 않아. 명령불복종은 곧 죽는다는 거야.” “네… 네!” “알겠습니다.” “누나.” “알겠어. 알겠어. 조용히 할게. 그러니까 그렇게 보지 마. 자기.”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거의 모든 클랜과 길드 마스터들이 최대한 용병여왕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알게 모르게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아마 저게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린델의 최고 권력자이자 신성 제국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강자와 함께하는 자리는 캐슬락에 있는 자유민들에게 익숙한 상황이 아니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아까 전 손을 흔들어 주던 모습을 기억해 보니 작은바위의 송정욱이라는 인간은 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모양. 모르긴 몰라도 눈앞에 있는 용병여왕의 정부가 미리 말을 잘해놨기 때문이리라. ‘난 안전하겠네. 고맙다, 이기영. 흐흐흐.’ 적당한 곳에 후방 배치되어 달콤한 꿀을 계속해서 받아먹는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절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지사. 이기영을 지휘관으로 추대한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자신이니 어쩌면 더 달콤한 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 일단 편성을 발표하는 게 좋겠군요. 일단은 제1성벽부터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제1성벽 같은 경우에는 위험에 많이 노출되어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만큼 믿을 수 있는 분이 맡아주시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아마 작은바위와 비슷한 규모를 가지고 있는 길드들 중 하나가 들어가게 될 것이다. 라이벌의 규모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이쪽에서도 무척이나 커다란 이득.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당연하리라. “제1성벽은 작은바위가 맡아주시겠습니다.” “예?” ‘뭐….’ 순식간에 고개가 돌아간 것은 당연지사. 눈에 들어온 것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환한 미소를 보내고 있는 이기영이었다. ‘저… 저 개새끼가!’ # 170 회귀자 사용설명서 170화 믿음에는 배신으로(2) “제1성벽은 작은바위가 맡아주시겠습니다.” 당황하는 얼굴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지나치게 일그러진 것은 물론 얼굴이 푸들푸들 떨려온다. 볼 살이 저렇게 떨릴 수도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 재미있다면 재미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놈에게도 재미있는 상황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일터.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는 욕지거리를 억누르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뻔할 뻔 자. ‘분노 조절 장애 치료사 차희라.’ 그 어떤 분노 조절 장애도 치료해 주는 사랑스러운 차희라가 내 옆에 있다는 게 가장 커다란 이유였다. ‘전시상황에서 지휘관의 명령은 곧 법이야. 이건 린델도 마찬가지고 캐슬락도 마찬가지니까 굳이 출신을 따질 필요조차도 없는 거고, 혹시나 해서 이야기하는데… 나는 우리 자기처럼 물렁하지 않아. 명령불복종은 곧 죽는다는 거야.’ 계산한 건지 계산하지 않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전에 밑밥을 깔아준 덕분에 움직이기가 한결 편해졌다. 별 것 아닌 1년 차인 내가 눈앞에 보이는 선배들을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이유. 눈앞에 거치적거리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거다. 남들의 눈에는 이쪽이 차희라의 권력과 무력에 빌붙은 여우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남들의 시선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저들이 나를 지휘관으로 추대했다는 거고 내 옆에 차희라가 있다는 사실뿐이다. 분노 조절 장애뿐만이 아니라 많은 종류의 갈등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차희라의 존재는 만병통치약이나 마찬가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송정욱의 얼굴을 보니 다시 한번 차희라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배신당했다는 표정이네.’ 어차피 저쪽과는 갈라지게 되어 있다. 기벽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애초에 굳이 끌고 가야 할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녀석과 계속 친분을 유지하느니 조혜진의 마음의 평안을 위한 제물로 바치는 게 더 낫다는 거다. ‘미안하다, 정욱아.’ “제2성벽은 거인 길드와 박하사탕 클랜이… 제3성벽은 영주성에서 맡아주시기로 했습니다. 이어서 제4성벽과 제5성벽은 캐슬락 북부 지역에 있는 클랜 연합이. 이전에 말씀 드렸던 대로 캐슬락 상인 조합은 보급을 맡아주시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파란과 붉은용병을 중심으로 중앙지휘부를 마련한 이후 보고 체계를 획일화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용병여왕님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딱딱해진 것 같군요. 이거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긴장해야 하는 건 맞지만 사실 저는 조금 더 유연한 회의 분위기를 추구합니다.” “하하하.” “하하하하.” 웃으라고 던진 소리도 아니다. 굳이 농담을 하려고 한 의도도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웃어야 되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활짝 피고 있는 이들이 눈에 보였다. ‘푸핫.’ 모두가 이쪽의 눈치를 보기에 여념이 없다. 실수하면 곧바로 제1성벽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리라. 갑작스레 송정욱을 버린 이쪽에 조금 당황한 듯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기는 있지만 이미 그들에게 중요한 건 송정욱이 아니다. 나는 방금 녀석의 알량한 권력의 끝을 고했고 녀석은 그걸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득달같이 이쪽에게 눈빛을 보내오고 있는 길드 마스터들을 보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갈 정도. 내가 생각한 것처럼 끈끈한 관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 뭔가 혹시 건의사항이라든가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셔도 됩니다.” “하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편성에 불만이 있으시면 심사숙고 후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 명예주교님.” “네.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 일단 편성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서쪽 지역의 성벽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되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물론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아.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날카롭네.’ 미리 준비해 온 대사를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쪽의 옆에 앉아 있던 차희라. 지루하다는 듯이 한쪽 손으로 머리카락을 베베 꼬면서 입을 여는 모습은 확실히 그녀답다. “일단은 숲을 마주보고 있는 제1성벽에 조금 더 힘을 실어야 된다고 생각한 거지, 자기? 작은바위 길드가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것 역시 그런 이유고… 서쪽 성벽 같은 경우에는 만약에라도 1열이 뚫린다면 그 이후에 영주성과 이쪽이 지원해 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네. 알겠습니다. 그… 쓸데없는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게 뭐가 있겠어. 다 몰라서 묻는 건데….” “용병여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질문 같은 것은 부담 없이 해주셔도 됩니다.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한 만큼 여러분의 많은 의견이 도움이 될 겁니다.” “부족한 건 아니야. 단기간 내에 이정도로 할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하고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빈틈 같은 건 없는 것 같은데… 어차피 파란이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할 수도 없었어.” “…….” “아마 제대로 수성전이 이뤄지지도 않았을걸. 장담할 수 있다니까. 아무런 대비 없이 몬스터들을 뒤늦게 발견한 이후에 부랴부랴 준비했지만 역부족, 결국에는 캐슬락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그마저도 못해서 전멸했을 거야.” “그, 그건….” 사실 나도 차희라의 생각에 동감하긴 한다. 그렇지만 그걸 저렇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누나.” “알겠어. 알겠다고.” 이쪽을 위해서 힘써주는 건 좋지만 너무 힘을 써주는 것이 문제. 조금 분위기가 애매했기 때문에 이쯤에서 회의를 마무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뭐 크게 한 것은 없지만 일단은 편성이 완료 됐으니 모두 자리를 잡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세부사항은 각 조별로 추후 전달해 드리면 되겠고… 근무 같은 경우에는 각 길드 마스터들께서 재량껏 해주시면 됩니다. 오후에 있을 훈련은 전체가 참가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다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천천히 밖으로 나가는 이들이 보였다. 문을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이쪽에게 잘 보이려 하는 모습들은 가관. ‘위기의식이 없네.’ 사실상 긴장을 놓고 있는 이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물론 현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몇몇 이들은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낸다는 것보다는 그 이후에 있을 이권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은 느낌. 어딜 가나 기득권이 하는 짓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이런 전쟁에서 뒤에서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들은 상대적으로 위험에 덜 노출되어 있는 것이 사실. 어쩌면 저들의 행동은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행동일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인사를 주고받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바로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 이쪽에 말을 걸어온 것은 작은바위의 송정욱이었다. “저. 이기영 님.” “아. 송정욱 님.” “저….” “편한 대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작은바위 마스터.” “혹, 혹시….” “네.” “제가 뭘 잘못한 것이 있다면….”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네?” “하하하. 작은바위 마스터가 잘못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쪽에서는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상대적으로 위험할지도 모르는 성벽을 맡아주셨으니까요.” ‘정확히는 내가 시킨 거지만.’ “아마 작은바위 길드는 영주성의 기사들이나 다른 제국민에게도 큰 귀감이 될 겁니다. 지원은 최대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드릴 예정이니 다른 부분은 신경 쓰지 마시고 캐슬락을 지키는 데만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집중하기 힘들겠지.’ 기가 차는지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굳이 따로 말을 걸 필요는 없을 것 같은 느낌. “혹시 문제라도 있으신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기영 님.”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작은바위 마스터의 임무와 책임이 아주 막중합니다. 부디 최선을 다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네….”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그래도 싸지.’ “아. 그리고 앞으로는 따로 궁금한 점이나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제 부관을 통해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부관이라 하면….” “부관!” “네. 부길드 마스터.” “조혜진 양입니다.”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조혜진과 입술을 곽 깨물고 있는 송정욱의 모습. 아마 자신이 팽 당한 이유가 조혜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굳이 이간질을 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 느낌. 차희라를 바라보며 슬그머니 몸을 옮기는 와중에도 주먹을 꽉 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예 틀린 이야기는 아니니까.’ 녀석이 팽 당하는 이유는 반쯤은 조혜진 탓이 맞다. 이쪽이 원망 당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저쪽이 당하는 게 나으니 굳이 오해를 풀어줄 이유도 없다. 지금에 와서 녀석이 뭘 뒤집으려고 노력한다고는 해도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상황. 녀석에게 선택권은 없다. “앞으로 부대의 대소사는 혜진 씨가 관리해 주실 겁니다. 뭐, 너무 사소한 부분까지도 제가 관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두 분이 구면이신 것 같은데… 조용히 이야기 나누시면 됩니다.” “네. 부길드 마스터.” “하하하. 혜진 씨만 믿고 있겠습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니 뒤에서 둘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별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서로 원망하고 싸우고 있겠지 뭐.’ 굳이 듣지 않아도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뻔하다. 저들의 대화보다 중요한 것은 이 빅 이벤트로 이쪽이 얻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작전대로 계획을 실행시키는 것.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이간질이야? 자기?” “그런 거 아니야, 누나. 그보다 와줘서 고맙네.” “아니. 오히려 이쪽에서 불러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은데… 안 그래도 이런 이벤트를 기다리고 있었거든.” “그렇게 말해주니까 좋네.” “정말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다면 좋겠지만 안 그럴 확률도 있으니까. 자기 얼굴 보러 왔다고 치면 돼. 오랜만에 길드에 긴장감도 심어줄 겸 왔으니까. 나쁘지 않다는 거지.” “무슨 뜻이야?”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지 않을 확률도 있다는 거야. 자기.” “그럴 리가.” “글쎄. 김현성, 걔가 가져온 정황들을 보면 거의 확실하기는 한 것 같은데… 증거가 조금 부족하다고 해야 되나?” “응?” “뭐, 자기는 아직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보통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는 징조는 숲의 포화나 던전의 불안정화야. 숲에 먹을 것이나 지낼 곳이 부족한 몬스터들이 바깥으로 튀어 나온다는 거지. 그렇지만 아무리 자료를 뒤져봐도 숲이 포화됐다는 정황은 없어.” “그래?” “근처에 다른 몬스터들을 자극할 만한 던전도 발견되지 않았고… 징후들은 있지만 원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알아듣겠어?”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네.” 당연히 나도 의문을 품고 있었던 부분이다. 몬스터 웨이브를 실제로 겪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차희라와는 달리 이쪽은 경험이 없어 제대로 꼬집을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기는 있었다. 물론 나만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은 느낌. 몬스터 웨이브에 대한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있는 것으로 모자라 뭔가 바빠 보이는 김현성 역시 그 이유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1회 차에서 캐슬락과 커다란 연관이 없었던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 역시 어째서 웨이브가 시작되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그렇지만 이건 이미 확정된 일이야.’ 이유야 어찌됐든 웨이브는 일어난다. 차희라의 말처럼 미적지근하게 끝나지는 않는다는 거다. 지금부터 일어날 사실에 대해서 입을 열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던 그때였다. “키에에에에엑.” ‘뭐야?’ 희미하게 들려온 것은 몬스터의 울음소리. 도시 바깥쪽이 아닌 안쪽에서부터 들려온 목소리였다. “방금 뭔 소리야?” # 171 회귀자 사용설명서 171화 믿음에는 배신으로(3) 희미하게 들려온 것은 몬스터의 울음소리. 도시 바깥쪽이 아닌 안쪽에서부터 들려온 목소리였다. “방금 뭔 소리야?”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을 정도. 차희라의 질문에 대충 고개를 젓는 와중에도 어디에선가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길고 가는 것 같은 하이톤의 울음소리. 인간이 흉내 내고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소리다. “키에에에에에엑!” ‘지하에 있는 몬스터들이 뛰쳐나온 건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조금 애처롭게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 이유야 어찌됐든 들려오는 소리에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옳으리라. 다시 한번 차희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자기. 잠깐만 조용히 해줄 수 있어?” “응?” “일단 조금만 조용히.” 눈을 감고 뭔가를 감지하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 이쪽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어째서 그녀가 방금 같은 소리를 했는지는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기가 무섭게 바닥이 천천히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세하지만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바닥이 울리고 있다. 타닥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돌멩이가 위로 튀어 오르는 것도 보인다.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순식간. ‘뭐… 야?’ “준비해?” “뭘.” “오고 있는 것 같아.” “뭐?” “농담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아무래도 내가 틀렸나 봐. 지금 오고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준비하도록 해. 아직은 조금 먼 거리에 있는 것 같지만… 아마 곧 들이 닥칠 거야.” “뭐 이렇게 갑자기….”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 시기상으로 생각해 보면 조금 더 늦게 일어난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 동안 김현성은 바빠 보이기는 했지만 곧바로 닥쳐올 적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으니까. ‘1회 차보다 먼저 일어난 건가. 김현성은 오늘 몬스터들이 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건가? 지금 이 타이밍에?’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김현성 역시 저 먼발치에서 이쪽을 향해 뛰어오기 시작. 얼굴에는 당황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모르고 있었어.’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녀석의 얼굴을 본 순간, 1회 차보다 일이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얼굴이 믿기 힘들다는 기색으로 역력했으니까. 아마 뭔가가 틀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리라. “기영 씨.” “네. 현성 씨.” “빠르게 전투 준비를… 아무래도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어째서 틀어진 거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김현성도 마찬가지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미래를 비틀었다는 생각을 적지 않게 해오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별로 의심이 가는 것은 없다. 기껏해야 부대 편성을 조금 더 빠르게 한 것이 전부. 그렇지만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자 이 갑작스러운 폭탄의 도화선이 무엇인지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굳이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다. 정황상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방금 그 울음소리.’ 어떻게 해서 도시 밖으로 울리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지금 이 사태의 주인공은 방금 그 울음소리가 맞다.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조금 더 큰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지금 당장 전투 준비 태세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현성 씨는?” “영주성에는 제가 직접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기영 씨는 계속 중앙지휘부에서 계속 상황을 보며 예비 보존 병력을 운영해 주시면 됩니다. 파란은 모두 한꺼번에 움직이겠습니다.” “아… 네. 그럼 전원 화살을 장전하고 마법을 캐스팅해 놓은 채로 대기시키겠습니다.” “네. 그리고 방금 전에 들렸던 소리는….” “현재 파악 중에 있습니다. 뭔가 이상한 점이 생기면 곧바로 보고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기영 씨?” “예?” “믿고 있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것은 당연지사. 회귀자의 신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김현성의 말이 단순한 인사치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이번 이벤트는 녀석 역시 제법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벤트. 눈에 보이는 경험치를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황 상 이쪽이 지휘를 맡기는 했지만 경험이 없는 나를 믿어주는 것은 김현성으로도 힘들었을 터. 별다른 말없이 조용히 나를 지지해주는 녀석에게 감사의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리라. 잠깐 동안 멍하게 있기는 했지만 이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 당연지사. 곧바로 뛰어가며 이곳저곳에 상황이 터졌다는 것을 알리기 시작하자 이쪽의 목소리를 주변으로 정리해 주는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빠르게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커다란 종소리가 들려오고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전투 준비하라! 전투 준비!!” 다시 한번 조용히 입을 연다. “전 병력은 위치를 사수하고 마법 병단은 캐스팅을 한 이후에 대기.” “몬스터다. 전 병력은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 위치를 사수하고 마법사병단은 캐스팅하고 대기한다!!” 대신 소리를 질러주는 전령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편하다. 캐슬락도 영 개판은 아닌 모양인지 순식간에 전투 체제로 들어간 것 같은 모습. 눈앞에 몬스터들이 보이지 않으니 영문도 모른 채 마법을 캐스팅하거나 화살을 장전하고 있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울리는 종소리 때문인지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물론 이쪽 같은 경우에는 아직도 다른 생각을 하기에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방금의 울음소리가 키워드다. 마치 새끼 강아지가 엄마를 찾는 것 같이 들린 비명소리. 순간적이지만 경매장에서 매물로 나올 거라는 몬스터의 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니겠지?’ 잠깐 흘려 지나간 이야기라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았지만 만약 그 알이 팔려가지 않거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길드가 보관하고 있다면 알이 부화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다. ‘조금 더 주의 깊게 확인했어야 했어.’ 애초에 몬스터의 알이 중앙 경매장에 나왔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물론 아닐 확률이 높기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퍼즐이 딱딱 들어맞는 듯한 느낌. 예정보다 더 빠르게 웨이브가 시작되려고 하는 것을 보면 일단 원인이 울음소리라고 가정하는 것이 맞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은 그 알에 대해서 알아봐야 한다는 거다. “누나.” “왜?” “방금 도시 내에서 들려온 소리.” “확인하면 되는 건가?” “응. 누나가 직접 갈 필요는 없어. 아니, 누나는 이곳을 지켜주는 게 좋겠네. 용병여왕의 이름이 사기를 증가시키는 데 도움이 되니까.” “물론.” “서쪽 지역은?” “웨이브가 시작되면 곧바로 작전에 들어갈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자기. 이쪽은 문제없으니 이번 일에 대한 보상으로는 뭘 주는 게 좋을지 잘 생각해 놓는 게 좋을 거야. 이미 돈이라면 썩어 넘치니까. 얼렁뚱땅 금화로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 “끄응….” “이번에도 돈으로 해결할 생각이었어?” “반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 알고 있었어. 그것보다 영광스러운 첫 출진인데… 말이야. 짧게 연설 같은 거 해보는 게 어때?” “…….” 마음 같아서는 확실하게 출사표를 던지고 싶지만 인간적으로 너무나 갑작스럽다. 지휘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인간과 인간의 전쟁은 아니지만 대규모 전투로 분류할 수 있는 만큼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 역시 중요한 부분. 그렇지만 입을 열기에는 좋은 타이밍이라고 볼 수는 없다. 편성이 끝난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고 우왕좌왕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모두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눈에 보인다. 혹여나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도망치지 않을까 걱정했던 작은바위 역시 제1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중. 보급품을 전달하는 상인 조합은 화살이나 포션 같은 소모품을 각 위치로 옮기고 있었고 제국민 중에서도 마음이 약한 일부는 신께 기도를 드리거나 손과 발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마…. ‘실감하고 있겠지.’ 땅을 울리고 있는 진동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게 느껴졌으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다. 천천히 떨리기 시작한 대지는 진도가 올라간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 저 멀리서부터 몬스터들의 괴성이 들려온다. ‘흐미….’ 쫄지 않았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당연히 겁먹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만큼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곳의 공기는 비현실적이다. 막연하게 괜찮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마음도 어느덧 점점 더 불안감으로 차오른다. ‘시발… 무서운데….’ 물론 겁을 먹고 움츠려 들기에는 이쪽이 가지고 있는 패가 꽤나 많다.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과 고기방패 박덕구. 나만 바라봐 주는 귀여운 정하얀과 수준 높은 사제 선희영. 꼬맹이 김예리와 황정연은 이쪽 라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거리가 멀지만 아무튼 내가 위험할 때 목숨을 구해줄 수 있는 동료다. 지금 당장 가장 듬직한 것은 이쪽에 자리하고 있는 차희라. 후방에서 안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내가 안전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들 말고도 내 앞에서 나를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는 병사들이 수 천, 수 만이다. “불안해할 필요는 없지.” “응?” “음성 마법. 부탁드리겠습니다.” “한마디 하려고?” “당연하지, 희라 누나.” 괴성이 커지고 몬스터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가운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 별 것 아닌 이야기였다. 내가 작게 내뱉은 목소리는 증폭 마법을 거쳐 성벽과 영주성 전체를 감쌌고 잠깐이지만 몬스터들의 울음소리 역시 먹어버렸다. 아마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들에게 들리는 것은 녀석들의 괴성이 아닌 내 목소리일 것이다. “우리의 고향은 이곳이 아닙니다.” “…….” “엄밀히 따지자면 저희는 이곳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유도 모른 채 이곳으로 끌려와, 일부는 살아남기 위해 또 일부는 일거리를 찾기 위해 캐슬락을 찾은 사람이 대부분일 겁니다.” “…….” “안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으신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이곳의 환경은 저희에게 친절하지만은 않으니까요. 친구를 잃어버리신 분들도 있으실 테고 연인을 잃어버리신 분도 계실 겁니다.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 술로 밤을 지새우시는 분들도 있는가 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지 걱정하고 고민하시는 분도 있으셨을 겁니다.” “자기?” “그러나 여러분. 잠깐 동안 뒤를 돌아 여러분들의 뒤에 있는 결과물을 보십시오. 지금의 캐슬락을 만든 사람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군사시설로써의 기능을 하지 않고 있었던 과거의 캐슬락을 바꾼 것은 지금의 자유민과 제국민입니다. 모두가 위험하다고 생각해 기피하고 이주하기 바빴던 캐슬락은 이제는 많은 관광객과 자유민이 찾는 명소이자 사냥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잃어버린 친구와 연인과 가족들이 함께 만든 결과물입니다.” “…….” “모두 여러분이 이룩하고 쌓아올린 것입니다. 저희가 밟고 있는 이 높은 성벽,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화살, 여러분들이 자리하고 있는 모든 것. 이 모든 것을 쌓아올린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여러분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장소입니다. 이곳은 우리에게 쉼터이며 집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집입니다.” “말 한번 잘하네, 우리 자기.” “여러분들께 묻겠습니다. 캐슬락은 정말로 우리들의 고향이 아닙니까? 정말로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캐슬락은 안전합니다. 여러분들이 지킬 마음으로 무기를 들어 올린다면 우리가 스스로 일군 우리의 고향은 안전할 겁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신성 제국과의 계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검을 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향을 우리 스스로가 지키기 위해 검을 들어 올린 겁니다. 삶의 터전을 함께 지켜 나갑시다! 여러분!” 갑작스러웠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인간이란 동물은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때 이런 별 것 아닌 연설에 쉽게 감명을 받는다. ‘난 캐슬락 출신도 아니지만….’ 지금 그 사실을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는 이들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일부는 뭔 개소리냐고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겠지만 일부는 마음이 흔들려 공포를 잊기 위해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고… 고향을 지키자!” 바로 저렇게. “고향을 지키자! 우리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자!” 좋다. 아주 좋아. “고향을 지키자!!!” 작게 터져 나왔던 악에 바치는 듯한 소리는 어느새 전염병처럼 이 성벽 저 성벽 위를 돌아다니기 시작. 제1성벽에 작은바위까지 고향을 지키자는 개소리를 외치는 모습은 조금 우스웠다. ‘너희나 많이 지켜라, 이 새끼들아.’ “쿠워어어어어어어!” 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숲을 뚫고 나오는 몬스터들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잠깐 동안 움찔 하는 병사들이 눈에 보이기는 했지만 어디에선가 날아 들어오는 고향 드립에 자신도 모르게 고향을 지키자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오늘 캐슬락은 안전할 겁니다! 여러분!” “캐슬락을 지키자!” “전군!” “쿠워어어어어어어!” “발사!” 마법과 화살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 172 회귀자 사용설명서 172화 믿음에는 배신으로(4) 이 광활한 광경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늘을 꽉 채운 거대한 불꽃 덩어리들과 화살은 예전 전쟁 영화나 만화에서나 봤던 장면. 그것보다 더 비현실적인 것은 계속해서 성벽을 향해 달려오는 몬스터들의 존재다. “쿠워어어어어어어!” ‘뭐가 저렇게 많아.’ 내가 사냥을 많이 나간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처음 보는 종류도 눈에 띈다. 인간보다 약 5배는 더 큰 중형몬스터부터 그런 몬스터의 발에 밝히고 있는 소형 몬스터까지. 목적과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성벽을 넘겠다는 목적 하나만 가지고 있는 괴물들은 확실히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녀석들이 성벽을 앞에 두고 있었을 때 고향 앵무새가 된 우리의 병사들이 쏘아 올린 마법과 화살이 내리 꽂히기 시작. 순간적이지만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콰지지직! 콰드드드드득! 폭음이 들리며 땅에 파편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소형 몬스터들은 순식간에 화마에 휩싸인다. 중형 몬스터의 온 몸에 화살이 박혀 쓰러지는 것은 물론, 한 발 한 발에 마력이 담겨져 있는 화살들은 소형 몬스터의 머리를 착실하게 날려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몰려들고 있는 몬스터들의 숫자는 상상 이상. 꾸역꾸역 숲 쪽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걸보니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어디 있다가 튀어나온 거야.’ 가장 깊은 숲에 있었던 몬스터들도 튀어나온 것이 분명. 숲이 워낙 커다란 만큼 그곳에 있는 모든 몬스터가 모였으니 그 숫자가 엄청날 만도 하리라. “발사!” 다시 한번 입을 여니 2차 포격이 성벽 위에서 땅으로 꽂힌다. 다시 한번 아까와 같은 일의 반복. 달려오던 몬스터들이 쓰러지고 그 쓰러진 몬스터의 발이 걸린 몬스터들도 보인다. 살짝 손을 들어 올리니 대지 속성을 잘 다루는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고 땅에서부터 흙과 바위로 만들어진 창이 튀어 나오기 시작. 달려오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멍청한 몬스터들은 창에 그대로 꿰뚫리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좋아.’ 상황은 좋다. 별로 티가 나지 않는 것이 문제지만 일단 지금의 공격만으로 앞에 나오는 찌끄레기는 정리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티도 안 나네.’ 일단 이쪽이 할 수 있는 건 화살과 마법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경험치라도 주워 먹을까 하는 생각에 나 역시도 주문을 외워볼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포기. 회귀자가 준비한 이 커다란 이벤트를 효율적으로 챙기기 위해서는 일반 등급의 몬스터나 희귀 등급의 몬스터들은 쩌리들에게 남겨주는 것이 좋다. ‘마력을 아껴야 돼.’ 이후에 등장할 질 좋은 경험치 공급원을 위해서 말이다. “무난한데?” “그래?” “응. 자기. 이 정도면 무난하게 시작하는 거야. 대지 마법으로 한 번 제동을 건 게 인상적이네. 캐슬락에는 비행형 몬스터가 많지 않으니까 계속해서 입구를 틀어막고 방어하다보면 저쪽에서 먼저 나가떨어질 거야.” “그거 기분 좋은 소식이네.” “혹시나 해서 하는 이야기인데 자기는 마력을 아끼는 게 좋을 거야. 이런 기회는 흔치 않거든.” “알고 있어.” 이곳에서도 있는 놈들이 없는 놈들보다 더 챙겨가는 현실이 보이기는 보인다. 아득바득 죽기 싫어서 명령에 따라 희귀 등급과 일반 등급의 몬스터에게 화력을 퍼붓는 이들과는 다르게 지휘관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은 나중을 위해 마력과 체력을 아끼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제1성벽에 먼저 들이 닥친다.” “응. 그러네.” 수성전이 계속되는 와중에 1차 웨이브에 들어온 몬스터들이 성벽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기세만으로는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수백 년 동안이나 캐슬락을 지켜온 거대한 성벽이 무너질 리가 없다. 여전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몬스터들은 서로의 시체를 계단 삼아가며 꾸역꾸역 성벽 위를 기어오르는 중. “막아!” “쿼어어어어어!” “화살 퍼부어! 제기랄! 화살!” “마법으로 떨쳐!” 제1성벽에서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작은바위 길드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키야… 필사적이네.’ 필사적인 게 당연하리라. 뚫리면 죽으니까. 뒤에 있는 캐슬락이 아니라 가장 눈앞에 있던 자신들이 먼저 죽는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죽어버리라고 내버려 두고 싶은 심정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만무. 아직 웨이브 초반이니 저들은 계속해서 버텨주는 것이 옳다. 저 멀리서 길드원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송정욱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튀어나올 정도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숭고한 놈들.’ 저런 게 희생이 아니라면 무엇이 희생이겠는가. 고향을 지키고 있지만 자기 자신들은 지키지 못하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기계처럼 쉴 틈 없이 화살을 쏘고 있는 궁수와 벌써 탈진의 위기를 겪고 있는 마법사들. 긴장을 놓치지 않는 사제들과 스물스물 기어 올라오기 시작한 몬스터들을 밑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전사. 그 가운데 있는 것이 작은 바위의 송정욱이다. “절대로 올라오게 하지 마!”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을 터. 그렇지만 지천에 깔린 붉은용병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마 나였어도 모든 걸 버리고 홀로 도망치기는 어려웠을 터. 본인이 지금까지 일궈왔던 길드원들과 캐슬락 내의 입지들을 생각해 보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전에 고향 드립을 치기는 했지만 놈에게는 이곳이 진짜 고향보다 소중한 장소라고 생각해도 된다는 거다. ‘히야….’ 순식간에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다르다. 이쪽이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바위의 전력은 강하다.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에 지휘관으로 흐뭇한 것이 당연. “제1성벽을 지원.” “알겠습니다. 제1성벽을 지원하겠습니다. 예비분대는 곧바로 제1성벽으로 향한다!” 장기전이 될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적절한 체력 분배와 예비 병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있다. 이쪽의 손에 몇백, 몇천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전쟁터에서는 인간의 목숨을 숫자로 생각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다. 괜한 인류애에 휘둘렸다가는 오히려 골치 아파지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거다. 다른 성벽 쪽에 피해가 생기기야 하겠지만 지금은 1성벽 쪽에 여유를 조금 주는 것이 효율적. 예비 병력에 포함되어 있는 마법사들이 급하게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흐음….” “왜 그래, 희라 누나?” “그냥… 자기는 유능한 지휘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 “…….”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차희라가 내 생각을 대충은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희망을 주는 걸 좋아하나 봐?” 차희라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내 시선은 작은바위의 송정욱에게 향해 있다. 갑작스러운 예비 병력에 멀리서나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녀석의 지친 얼굴에 일순간 희망이 들어선 것은 순식간. 제1성벽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비칠지도 있으리라. “지원군이 왔다! 조금만 더 힘내라! 애들아!” “네! 길드 마스터!” 뭘 상상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버림받지 않았다는 듯 몸을 사리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 1성벽 쪽으로 지원을 집중시키기 시작하자 끊임없이 기어 올라오던 몬스터들의 움직임에도 제동이 걸렸다. “그런 걸 좋아하는 건 아니야. 희라 누나. 그냥 최대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활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응.”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제1성벽은 뚫리게 되어 있어. 캐슬락의 수성전 기록을 보면 수백 년 동안 계속됐던 수성전에서 1성벽이 뚫리지 않은 적은 없거든. 물론 성벽이 완전히 뚫린 적도 없지는 않지만 수많은 전투에서도 1성벽은 항상 뚫려왔다는 거야.” “열심히 공부했네.” “그냥 기록을 읽어보는 걸로도 간단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야. 캐슬락의 성벽 건축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 성벽을 만들었는지는 나는 알 수 없지만 모르긴 몰라도 조금은 정신이 나간 사람일걸.” “왜?” “수성전 자체에 희생을 강요하도록 만들어졌어. 성벽을 만든 놈은 애초에 제1성벽에 있는 인간들이 살아남지 못한다는 전제하에 이 성벽을 디자인했고… 음… 나머지 거점들이 1성벽 쪽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도 그런 연유고. 이를 테면 지금까지 무너진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캐슬락이 있었던 배경에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 있었다는 거지.” “이번 희생양이 작은바위라고 말하고 있는 셈?” “물론. 아마 쟤네들은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거야. 쓸 데까지 전부 쓰고 마력을 전부 뽑아낸 이후에 깔끔하게 내동댕이치면 돼. 마력이 남아 있는 채로 죽는 건 쟤들도 억울하고 이쪽한테도 손해일 테니까.” “너무 쓰레기 같은데….” “누나가 유능한 지휘관이 될 것 같다고 말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맞긴 한데… 그래도 넌 정말 빌어먹을 쓰레기야.” “어차피 죽어야 했을 범죄자들이야. 이렇게 죽을 기회를 줬으니 이쪽에게 감사해야 맞지. 이른바 명예로운 죽음 아니겠어?” 명예로운 죽음이 맞다. 녀석에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지만 증거를 밝혀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만약에 운이 좋아 저곳에서 살아남는다고는 해도 어차피 송정욱은 죽는다는 거다. 모진고문을 받을 확률도 있으니 저대로 괴물들에게 둘러싸여 죽는 것이 가장 이상적. 잠깐이나마 모두의 귀감이 될 테니 죽어서도 이쪽을 도와줄 것이 분명하다. “응전하라!” “올라오게 하지 마! 절대로! 전사들은 뭘 하고 있는!” ‘생각보다 잘 버텨주고 있는데.’ 제1성벽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만 해도 기적. 물론 아직 희귀 등급의 몬스터들 밖에는 없지만 지금 버티는 것만으로도 1성벽의 역할은 충분히 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더 고등급의 몬스터를 한 번 막아준다면 작은바위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 이상을 해준 셈이니 조금 더 지원을 해줘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화살이 집중적으로 1성벽 아래 있는 몬스터들에게 떨어지자 비명을 내지르며 다시 한번 여유가 생긴다. 송정욱의 얼굴에는 다시 한번 희망이 들어서고 이쪽에게 완전한 신뢰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멍청한 놈.’ 작은바위를 활약시키기 위해 1성벽에 배치시킨 줄 아는 모양. 저 뒤쪽에서부터 희귀 등급 이상의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때. 파티를 이루어야만 잡는 것이 가능한 영웅 등급의 몬스터들이 하나 둘 성벽으로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지금부터 시작.’ 본격적인 전투는 지금부터다. 한 번에 먼 거리를 이동해 점프해오는 사족보행의 괴물이 성벽 위를 기어 올라오는 게 보인다. 매뉴얼대로 집중적으로 녀석에게 마법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예비 병력까지 급하게 투입해 체력을 떨어뜨리는 것이 1차 목표. 그 와중에 정하얀의 마법이나 황정연의 마법도 떨어지는 것을 보니 녀석을 떨어내기 위해서는 이쪽이 가지고 있는 패들도 조금씩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새로운 녀석들의 등장으로 인해 제1성벽으로의 지원이 끊기자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작은바위는 꾸역꾸역 몰려들어오는 몬스터들과 백병전을 벌이고 있다. ‘저건 지원해 봐야 의미가 없네.’ 슬슬 버릴 때가 왔다는 생각이 절로 꽂힌다. 남아 있는 병력을 천천히 빼는 한편, 계속해서 원거리로만 1성벽을 지원한다. 이미 일부 지역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는 중. “아아아아아악!” “살려줘! 살려…!” 작은바위의 송정욱 역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쪽을 바라보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게 보이기는 하지만 고개를 돌린 녀석의 눈에 비친 것은 이미 빠져나가기 시작한 예비병력일 터. “이기영 이 개자식! 후… 후퇴! 병력을 뒤로….” 뺄 수 있을 리가 없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몬스터를 상대로 등을 돌리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으니까. 몬스터들의 괴성 때문에 놈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온다. “이기영! 개자식! 이기영!! 이기여어어엉!!!” ‘잘 가라.’ “이기여어어어엉!” 결국 제1성벽에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들어서서 녀석들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수인을 외우며 입을 열었다. “작은바위의 희생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눈에 잔뜩 눈물을 머금은 채였다. # 173 회귀자 사용설명서 173화 믿음에는 배신으로(5) 눈에 잔뜩 눈물을 머금은 채였다. “작은바위의 희생을 헛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음성 증폭 마법으로 인해 커다랗게 퍼져나간 내 목소리에 병력들은 동요하기보다는 마음을 다잡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들 역시 작은바위처럼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보이기는 했지만 작은바위의 마지막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마 흐릿하게 들렸던 녀석의 마지막 절규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마법의 도움을 받아 전황을 파악하고 있는 이쪽과는 다르게 일반 병사들은 당장 눈앞에 있는 몬스터 들을 처리하기에도 바빴으니까. ‘이기영 개자식’이라고 외치며 검을 들어 올려 저항하던 놈의 모습은 몬스터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모습으로 보였을 거라는 거다. 멀찍이서 바라본 송정욱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았던 아름다운 최후. 최전선에서 마지막까지 캐슬락을 위해 싸우다가 사라진 작은바위와 송정욱. 그야말로 이 수성전이 낳은 최고의 영웅이었다. ‘너나 영웅 많이 해라, 정욱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사실 작은바위의 제1성벽 행은 녀석들의 지원이라는 설정도 우겨 넣으면 괜찮아 질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저딴 영웅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차라리 구질구질하게 살아남는 게 낫지.’ 캐슬락을 대표하는 길드 중에 하나인 작은바위의 모습에 많은 병력이 감명을 받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지사. 하나 둘 이쪽의 목소리에 동조하는 이들도 나타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작은바위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마라!” “더러운 괴물 새끼들! 네놈들이!” “고향을 지키자!” 녀석의 최후로 수성병력은 다시 한번 활기를 얻는다. 마치 버프라도 받은 것처럼 눈에 불을 켜고 시위를 당기는 궁수부터 몸을 사리지 않는 전사들과 끊임없이 신성력을 내뿜는 사제들까지. 모범을 보여야 하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쪽 역시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제1성벽을 꽉 채운 더러운 몬스터들에게 캐슬락의 단결된 힘이 얼마나 커다란지 본때를 보여줘야 될 타이밍이다. “캐슬락을 지킵시다!” ‘푸히하히히헷.’ 내 마력을 느낀 모양인지 정하얀 역시 멀찍이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 나 혼자라면 녀석들에게 큰 대미지를 주기는 힘들겠지만 정하얀의 마력을 품은 채라면 상상하는 것 이상의 대미지를 줄 수 있다. ‘경험치 먹어야지.’ 주문이 완성된 순간 입 밖으로 주문을 외웠고 기다렸다는 듯이 제1성벽의 하늘 위에서 커다란 손이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순식간에 재구성된 촉매의 거대한 손이 계속해서 팽창하는 것은 물론, 정하얀에게서 공급된 마력이 끊임없이 손에 힘을 불어넣는 중.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1성벽에 있는 몬스터들이 짓이겨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작은바위도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작은 희생 역시 필요한 법. 이윽고 거대한 손이 팽창하며 터져나가 폭발을 일으켰다. 내 작품은 아니지만 저 마법을 건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할 뻔자. ‘하얀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콰드드드드득! “쿠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나이스!’ 경험치 바가 오르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방금 전의 마법으로 몬스터 수백 마리가 휩쓸려간 느낌. 성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며 그 밑에 깔려버린 몬스터의 숫자도 제법 된다. [몇 가지 직업이 개방되었습니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직업을 선택해주세요.] ‘벌써?’ 상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성장이 어렵다는 걸 생각해 보면 무척 커다란 성과. 꽤나 많은 몬스터를 죽인 것 같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새로운 직업을 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것이 당연하리라. 내 표정을 본 모양인지 차희라가 조용히 입을 열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새로운 직업?” “응. 이렇게 빨리 오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이번이 몇 번째였지, 자기?” “네 번째.” “방금 것도 괜찮은 것 같기는 했지만 상당히 빠른데… 아마 이토 소우타 때 있었던 경험치도 함께 정산 받았을 거야. 기본적으로 전투가 가장 커다란 경험치를 주기는 하지만 보통 모든 행동에 대해 경험치를 부여하니까. 직업 선택은 웨이브가 끝난 이후에 조금 더 신중하게 해도 돼. 경험치는 어차피 축적되니까.” “팁 고마워.” “전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뭐. 그보다 표정 관리 해야지.” “물론. 몬스터들이 밀집해 있는 제1성벽에 화력을 집중합니다! 송정욱 길드 마스터의 마지막 전언입니다!” 당연히 저런 말은 한 적도 없다. “캐슬락을 지켜달라는 송정욱 길드 마스터의 뜻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부운!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습니다. 그게 송정욱 길드 마스터가 제1성벽에서 최후의 최후까지 싸우다 희생된 이유입니다. 캐슬락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영웅을 위해 모두 함께 싸웁시다! 전군 발사!” 혹시라도 1성벽 쪽에 생존자가 있을지 모른다. 희생이라는 숭고한 이름으로 포장된 마법과 화살들이 순식간에 몬스터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내 계산보다는 많이 버텨준 것은 물론 많은 몬스터들의 어그로를 끌어준 셈. 여러 가지 계산을 하기가 무섭게 많은 마법이 내리 꽂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지지지지직! 귀를 울리는 굉음은 덤. 화력에 집중해야 하는 만큼 화염계 마법을 뿌린 보람이 있다. 불에 완전히 새까맣게 타버린 녀석들은 오히려 양반. 폭발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터져나가는 소형 몬스터들의 모습은 어떻게 본다면 장관이다. ‘히야….’ “키에에에에에엑!” “쿠워어어어어어어어어!” 서로 발버둥 치며 성벽 위에서 떨어져 나간 녀석들은 올라오려는 몬스터들을 깔아뭉개고 순간적이지만 끊임없이 몰려들어오던 몬스터들의 바다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다. 물론 그 공간을 메우는 녀석들이 여전히 달려오고는 있었지만 눈대중으로 보기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이 모든 게 송정욱 덕분이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녀석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것은 당연지사. 자꾸만 입가에 미소가 터져 나온다. “생각보다 쉽게 끝날 수도 있겠는데….” 차희라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성벽에 의지한 아군은 완벽하게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있다. 물론 영웅 등급의 몬스터들이 계속해서 꾸역꾸역 올라오고 있는 것은 사실. 성벽 위로 올라온 녀석들도 일부 보이기는 했지만 그런 녀석들 경우에는 각 길드의 간부나 클랜의 마스터들이 확실하게 마크해 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현성과 우리 파란의 파티 같은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하는 집단 중에 하나였다. 이 성벽 저 성벽을 날아다니며 착실하게 몬스터들을 정리하고 있는 김현성의 모습은 마치 전신. 어떻게 검 한 자루로 커다란 몬스터의 목을 잘라내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눈에 불을 키고 돌아다니고 있는 우리 회귀자는 혼자서 많은 부분을 감당해 내고 있다. ‘김예리도….’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꼬맹이 역시 마찬가지. 적재적소에 떨어지는 정하얀의 마법이나 그런 정하얀을 보조하는 황정연, 신성력을 사방에 뿌리고 다니는 선희영. 우리 파티에 일반인은 박덕구밖에 없다. 심지어 녀석 역시 충분히 1인분을 해주고 있으니 잘 훈련되고 능력 있는 하나의 파티가 전황에 끼치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실감할 수 있었다. ‘많이 성장했어.’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 파티는 확실히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붉은용병의 휘장을 달고 있는 한 명이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차희라 님.” “응? 아. 처리했어?” “예. 말씀하신 대로 지하 경매장에 남아 있던 모든 상품을 확보했습니다. 추가로 아까 전에 들렸던 몬스터의 울음소리 역시 확인했습니다.” “보고.” “작은바위의 길드창고에서 몬스터의 알에서 태어난 새끼를 확인했습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던 형태로….” “뭐?” “지금까지 봤던 적이 없는 형태의 몬스터였습니다. 일단은 저희 쪽에서 작은바위 길드 하우스를 점거한 이후 신병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한번 직접 오셔서 확인을 해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허….’ “어쩌면 몬스터 웨이브의 원인일 수도 있겠군요.” 붉은용병의 단원에게 말을 건네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생각이 맞았어.’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단순히 추측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확신이 되자 조금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 만약에 정말로 몬스터의 알 때문에 웨이브가 시작됐다고 가정한다면 이쪽은 녀석의 부모를 상대해야 될지도 모른다. 차희라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인지 조용히 벽 쪽을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디에서 발견된 알인지는 확인했어?” “작은바위의 창고 관리인을 심문했지만 깊은 숲에서 발견했다는 것 외에는 단서가 없었습니다.” “허… 정신 나간 놈들이네. 몬스터의 알을 함부로 들여오는 건 불법이 아니라 금기야. 애초에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는 놈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멍청한 놈들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쯤 되니까 그 망할 놈들이 너무 편하게 죽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네….” “그럼 몬스터 웨이브는….” “그 새끼 때문에 일어났을 확률이 높아. 이제야 좀 설명이 되네. 자기네 길드 마스터가 찾은 정황들이 이제야 이해가 가. 몬스터 웨이브의 시작도 분명히 그 하울링이었고….” “위험한 상환인거야?” 내가 입으로 내뱉고도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위험한 게 당연하다. “아냐.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 아마도… 일단은 자기는 도시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네. 나는 메인 디시가 오기 전에 에피타이저들을 조금 정리하고 있어야 할 것 같거든.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처리해야 될 놈이 하나 더 늘은 것뿐이니까.” 굳이 차희라가 지금부터 움직이겠다는 소리는 이쪽에게 조금 당황스럽게 들려올 지경. 물론 타이밍 상 나쁜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다녀온다.” “아… 응.” 별 것 아니라는 듯 손을 한 번 흔들고 성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모습은 가관. 혹시나 위험하지 않은지 슬쩍 붉은용병의 단원을 바라보자 녀석이 곧바로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혼자 싸우시는 게 편할 겁니다.” “그렇군요.” “마스터께서는 집중하시면 자주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시는 터라… 이성을 잃는다고 말하는 편이 좋겠군요.”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차희라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특성 - 피에 미친 광녀 - 영웅 등급] [지력 스탯을 일시적으로 깎아 공격력을 상향시킵니다.] 지력 스탯이 떨어지는 건지 지능 자체가 떨어지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사실상 지금의 차희라를 있게 만든 특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본래 그녀의 근력이 97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공격력이 상향된 상태에서의 그녀의 모습은 전신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하다. 콰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앙! 슬쩍 성벽의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이쪽의 예상대로 몬스터들을 찢어 죽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까지는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지 피에 젖지 않은 채 놈들을 저승길로 보내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짐승처럼 변하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가 몬스터고 누가 인간인지를 잊게 만드는 움직임. 영웅 등급의 몬스터의 위로 올라가 그대로 턱을 손으로 찢어버리고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모습은 정말로 인간의 탈을 짐승이다. ‘강해….’ 이토 소우타 정도 되는 녀석들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차희라의 경우에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 솔직히 말하면…. 조금 질릴 정도였다. 내장을 흠뻑 뒤집어 쓴 채로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확실히 제정신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어우 무서워….’ 이성을 잃은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던 차희라의 시선이 성벽 위로 옮겨진 것은 바로 그때. “어?” 착각이 아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한쪽 손에 몬스터의 머리통을 들고 있는 채 정확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미 이성이 날아가 버린 것 같은 눈, 히죽히죽 웃고 있는 표정. 묘하게 흥분한 것 같은 얼굴. ‘설마….’ [플레이어 차희라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본능에 충실한 암사자.] ‘설마….’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 사실. 갑작스레 나를 보고 달려오는 차희라를 보며 뭔가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개… 씨!! 튀어!”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차희라는 분명히 나를 쫒고 있었다. # 174 회귀자 사용설명서 174화 본능에 충실한 암사자(1) “개… 씨!! 튀어!”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차희라는 분명히 나를 쫒고 있었다. 핏발이 선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그녀의 얼굴은 소름이 돋을 지경.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크르륵거리는 짐승소리를 내며 얼굴을 히죽거리고 있었다. ‘제기랄….’ 최소한 자기 앞가림은 할 줄 알았던 차희라가 폭탄이 된 셈. 터지기 직전에 막았던 정하얀과는 다르게 차희라 같은 경우에는 완전히 예상 외였다. 보통 어떤 일을 할 때 예상 가능한 범주 내에 있는 일들이 있다. 아니, 대부분의 일이 그렇다. 이번 원정만 해도 마찬가지. 깨닫는 게 조금 늦기는 했지만 웨이브의 원인을 유추할 수 있었고 제1성벽이 무너지는 것도 이미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번 수성전에는 변수에 대한 대비를 많이 준비했고 실제로 네임드급 몬스터가 나왔을 때의 대한 매뉴얼도 존재한다. 당장 이쪽이 시뮬레이션한 변수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는다. 그렇지만 아군에게 쫓기는 미친 상황이 올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단 한 번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본 적이 없다. ‘이딴 건 계산에 들어가 있지 않았어.’ 옆쪽에 있는 몬스터의 머리를 날려버린 이후에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은 가관. 성벽을 달려서 올라올 수 있다는 게 어처구니없게 느껴질 정도. 어째서 적이 아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왠지 모르게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고유 기벽인 본능의 충실한 암사자를 생각해 보면 답이 금방 나온다. 지금의 차희라는 지능과 지력을 낮춘 상태. 아마 자신 역시 이런 상황은 염두에 두지 못했던 모양이다. 보통 때의 차희라 같은 경우에는 특성을 발동시키면 피에 미친 광녀마냥 전장을 헤집고 다녔을 터. 그녀 안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폭발시키는 것에 주력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폭력성 대신 다른 것이 폭발한 것 같은 느낌. 만약 이전에 이런 적이 있었다면 나에게 한 번이라도 경고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도 처음인 거야.’ 분명히 그럴 것이다. [플레이어 차희라의 상태창과 잠재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 - 차희라] [칭호 - 피에 미친 광녀, 붉은 용병, 신성제국의 붉은 광녀] [나이 - 28] [성향 - 예측 불가능한 혁신가] [직업 - 용병여왕 - 전설 등급] [직업효과 - 기초 검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 - 중급 무기 지식 습득] [직업효과 - 고급 무기 지식 습득] [직업효과 - 고급 쌍수무기 지식 습득] [직업효과 - 고급 마력운용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 - 117/성장한계치 신화 이상] [민첩 - 90/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체력 - 90/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 - 00/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내구 - 90/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행운 - 56/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마력 - 82/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장비 - 없음] [특성 - 피에 미친 광녀 - 영웅 등급] [지력 스탯을 일시적으로 깎아 공격력을 상향시킵니다.] [총평 - 지력 스탯을 일시적으로 깎아놓은 상태입니다. 근력 스탯이 20 상승해 117으로써 일시적이지만 전설 등급의 능력치를 뛰어 넘고 있습니다. 이성을 잃은 상태이니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특히나 플레이어 이기영의 종잇장 같은 내구력은 플레이어 차희라의 손짓 한 번에 날아갈 수도 있으니 조심해 주세요. 이번 만남이 끝이 아니길 빕니다. 부디 살아남아 주시길….] ‘도움도 안 되는 총평! 넌 내가 꼭 찢어 죽인다.’ 내가 예상한 대로 이미 본능에 완전히 집어 삼켜진 상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높은 근력 능력치와 성장 한계치가 신화 이상이라고 적혀 있다는 것. ‘저게 가능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해볼 정도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차희라가 재채기만 해도 날아갈 것만 같은 느낌.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붉은용병의 단원의 눈에는 알 수 없는 당혹스러움이 감돌고 있었다. “어, 어째서?” “일단 뛰어!” 내 몸을 지켜줄 방패막이 한 명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슬쩍 상태창을 훑어보니 곧바로 녀석의 능력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쁘지 않아.’ 한 번이나 두 번 정도는 차희라를 막아줄 수 있을 것 같은 능력치. 데리고 다니기에는 썩 나쁘지 않다. “이런 적 있었습니까?” “아, 아닙니다. 이러신 적은 처음….” 말을 내뱉고 있는 와중에도 차희라는 계속해서 성벽을 올라오고 있는 중. 그녀가 성벽을 올라오기까지 최대한 먼 거리를 달려보기는 했지만 내 민첩 능력치와 체력 능력치로는 뛰어 봤자 벼룩이다. “막아!” “알, 알겠습니다!” 내 말에 홀린 듯이 방패를 내밀고 차희라를 저지하려고 하긴 하지만 차희라가 뻗은 발을 막지 못한 채 성벽의 안쪽으로 튕겨나가 버렸다. 콰직! “아아아아아악!” 뼈가 으스러진 것이 분명. 어느 정도의 이성이 남아 있었는지 자신의 부하를 죽이는 실수는 하지 않았지만 일반인이었다면 아마 날아가기도 전에 온 몸이 터져 죽어버렸으리라. “율리에나! 아니! 화이트 폴! 화이트 폴!”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은 함께 온 그리폰 화이트 폴.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애타게 부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용맹할 거라고 생각했던 녀석은 내 목소리에 묵묵부답. 목소리가 닿지 않는 건지 아니면 본인까지 위험할 거라 생각해 몸을 사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후자라면 녀석은 완벽히 내 그리폰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차희라에게 붙잡혀도 별 문제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는 했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온 몸이 으스러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일단은 뛰는 것이 상책.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허리에 걸려 있는 율리에나가 그녀 쪽으로 급하게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잠깐이나마 시간을 끌어줄 거야.’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수성전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도 이런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상황. 한쪽 성벽은 이성을 잃은 차희라 덕분에 제대로 된 수성전을 치루지 못하고 있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수성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일단 그녀를 도시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옳다. ‘일단은 성벽 아래로.’ 차희라나 내가 없다고 해도 수성전은 무난하게 진행될 것이다. 물론 작은바위가 붙잡고 있던 새끼의 어미가 나타난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이미 캐슬락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병력은 이 전투의 승기가 이쪽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아 있는 지휘부가 바보가 아니라면 틀림없이 당장은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라. 허겁지겁 뛰어가는 와중에도 내 뒤쪽에서는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중. 아마 거치적거리는 모든 걸 팔로 치면서 뛰어오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살짝 밀친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대미지로 느껴지겠지만 지금은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니다. “크르르륵….” ‘몬스터야 뭐야.’ 점점 더 숨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는 듯한 느낌. 잡히면 어떤 꼴을 당할지 머릿속으로는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내 몸이 안전할 거라고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다. 이쪽의 몸이 들어 올려진 것은 바로 그때. 나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를 뻔했을 때 몸이 하늘로 솟구치는 느낌에 조금 다른 상황이 나를 맞이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눈을 뜬 이후에 보이는 것은 차희라가 아닌 나를 품에 안고 있는 조혜진. “후우!” “이게… 도대체 무슨 일….” “설명하자면 깁니다. 일단은 도시 안쪽으로 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네.” “조심하셔야 합니다, 혜진 씨.” “네.” “수성전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무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일단은 부길드 마스터가 차희라 님한테 쫓기고 있는 것 같아서….” “괜찮군요. 혹시 이 상황에 대해서 지휘부는 알고 있습니까?” “지하수로 안쪽에서 침투해 오는 몬스터를 막기 위해 부길드 마스터와 차희라 님이 일부 병력을 이끌고 이동한다고 전했습니다.” “누가?” “일, 일단은 제가 그렇게 말을… 아! 수성전의 총지휘는 일단 거인 길드 마스터에게 맡겼습니다.” 조금은 융통성이 늘었다. 병력에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함이였겠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했다는 건 조금 칭찬해 주고 싶은 부분. 거인 길드 마스터가 지휘권을 잡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서쪽 성벽의 병력 편성에 의문을 가지고 있을 정도고 감이 좋은 놈이니 매뉴얼대로 수성전을 이끌어 갈 것이다. “근데… 갑자기 차희라 님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굉장히 민망했다. 애당초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오는 것이 보였다. 사실 지금은 우리를 쫒아오고 있는 차희라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보이는 것 같은 느낌. 능력치 자체가 워낙에 차이가 나다보니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니고 있지만 나를 놓친 게 분한지 도시 안쪽에 있는 건물을 부수며 달려오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한쪽 손에 나를 들고 있는 채로 계속해서 뛰는 조혜진은 튕겨져 나오는 건물의 파편을 전부 피해내며 조금 더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는 중. 무척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덕분인지 배경이 순식간에 휙휙 뒤바뀐다. “크르르르륵….”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들리는 소름끼치는 소리에 당황스럽다 못해 헛웃음이 나온다. 지금 상황 자체가 너무 어이가 없었기 때문.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 정도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이쯤 되면 고인이 되어버린 송정욱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내게 저주를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지금 이 상황이 현실성이 없다는 거다. 아마 계속해서 저 상태로 있지는 않을 것이 분명. 특성인 만큼 아마 페널티와 함께 시간제한도 두고 있으리라. 다시 한번 더 마음의 눈으로 차희라를 바라보자 그녀의 특성 정보가 날아 들어와 꽂혔다. 그전까지는 이런 기능은 없었던 걸로 기억. 내 마음의 눈이 진화하면서 딸려온 기능 같아 보였다. [플레이어 차희라의 특성, 피에 미친 광녀의 세부정보를 확인합니다.] [지력 스탯을 일시적으로 깎아 공격력을 상향시킵니다. 제한 시간 1시간 - 남은 시간 49분] ‘제한 시간 1시간.’ 아직도 11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체감 상으로는 30분은 지난 것 같은 느낌. 그래도 제한시간이 있다는 건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차희라의 체력이 다할 때까지라는 조건이 적혀 있었다면 조금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1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어.” “네?” 조혜진이 이쪽에 반문하는 사이에 저 멀리서부터 튀어오는 차희라가 눈에 보였다. “조심!” 이라는 외침에 급하게 조혜진이 뒤를 돌기는 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은 느낌. 입술을 꽉 깨물며 나를 바깥쪽으로 던지고 창을 꺼내든 모습이 보였다. 아마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능력치의 차이가 심하니까. 그렇지만 내 예상이 빗나간 모양. 꽝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조혜진은 바깥쪽으로 튕겨나가지 않았다. 한 번 파공성이 들려온 이후 눈에 보인 것은 차희라를 막고 있는 김현성이었다. ‘현성아!’ 우리 현성이가 나와 조혜진을 위기에서 구해준 것. 물론 능력치의 차이가 심하다. 부들부들 손을 떨고 있는 김현성의 모습은 확실히 익숙한 모습이 아니다. 그렇지만 녀석에게 신성력이 쏟아진 것을 본 이후에는 이곳에 도착한 것이 김현성 혼자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선희영이 김현성에게 손을 뻗고 있었고 정하얀은 조용히 차희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김예리와 황정연까지 함께 온 모습에 조금은 어안이 벙벙한 상황. “갑자기 이게 뭔 날벼락이요? 형님?” 박덕구 역시 방패를 들고 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나도 잘 모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폭주한 것 같은데….” “아마 맞을 겁니다. 용병여왕의 특성에 대해서는 대충 들은 적이 있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지력을 깎아 공격력을 향상시키는 종류의 특성으로 예상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조금 지났으니 조금만 버티면 될 겁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차희라 님을 막는 게 먼저일 것 같군요.” “성벽은?” “수성전 자체는 지금까지는 무난합니다. 잠깐 동안 자리를 비우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대답한 것은 사랑스러운 회귀자다. “아… 네.” “죽이지 않고 제압합니다.” “가능한 거요?” 의문에 찬 박덕구의 물음에 정하얀은 고개를 젓는다. 이번 기회에 숨통을 끊으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에 불을 키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은 조금이지만 소름이 돋아날 정도. 당연하지만 차희라가 지금 여기서 죽는다면 상황이 더 복잡해진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전력으로 놓고 봤을 때 우리 파티 쪽이 극단적으로 불리하다. 목이 달아날 걱정을 해야 하는 건 저쪽이 아니라 이쪽이다. 그나마 힘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본래 고위 마법사라고 할 수 있는 황정연의 존재와 상상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회귀자 때문. 조혜진 역시 균형을 유지해 줄 수 있는 인재 중의 인재다. 만약 이 세 명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고기 방패 박덕구가 약 3초 컷. 김예리가 약 15초 컷. 전위가 순식간에 뭉개진 후열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싹 다 밀려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이게 뭔 상황인지 모르겠소.” 당황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몬스터 웨이브를 막으러 와서 차희라를 막게 될 줄은 이곳에 있는 이들 전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나 중요한 이벤트였는데….’ # 175 회귀자 사용설명서 175화 본능에 충실한 암사자(2) “최소 전설급의 네임드 몬스터를 상대한다는 생각으로 싸움에 임하겠습니다. 희영 씨는 근접 직군들에게 버프를. 덕구 씨와 혜진 씨는 후열을 무너지지 않게 주력합니다. 저와 예리가 최대한 앞을 막아설 테니 하얀 씨와 기영 씨 그리고 정연 씨는 그녀를 막을 수 있는 마법을 캐스팅해 주시면 될 것 같군요.” “네. 알겠어요.” “거, 알겠소.” 선희영과 박덕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본래대로라면 후위에도 버프를 넣는 게 정석이겠지만 아마 근접직군이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전위에 버프를 집중하려는 느낌. 나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김현성이 이 상황에 제법 익숙해 보였다는 것.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도 차희라가 폭주할 만한 일이 몇 번 일어나는 모양이다. ‘물론 이런 상황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김현성은 이런 상황을 한 번 정도는 겪어 봤다는 거다. “크르르르륵….” 이쪽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차희라의 모습은 조금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아까 전 잠깐 몬스터의 피를 뒤집어 쓴 덕분에 붉은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붉게 물들었기 때문. 산발이 된 머리로 이쪽을 바라보는 차희라를 보니 몸이 떨려왔다. ‘어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아군과 적군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것. 붉은용병의 단원을 죽이지 않은 것을 보면 이쪽에게도 위험한 공격을 날리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차희라가 살짝 던진 돌에 이쪽은 머리가 날아갈 수도 있지만 아무튼 간에 치명적인 공격을 해오지 않는다는 것만 해도 충분한 메리트라는 거다. “옵니다.” “크륵!!” 앗 하는 사이에 커다란 건물의 파편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 ‘죽일 생각 없는 거 맞지?’ 순식간에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우리 파티원들을 집어삼켰지만 황정연이 주문을 외우자 파편이 공중에서 우뚝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염동력을 사용하는 마법인 모양인 것 같았지만 탄성을 내지르는 파티원은 없다. 건물에 잠깐 가려진 덕분에 차희라의 위치를 잡을 수 없었으니까. 순식간에 옆쪽으로 나타난 그녀가 아무렇게나 팔을 뻗는 것이 보였다. 차희라를 막은 것은 의외의 박덕구. “형님한테는 손 하나… 끄억!” 방패로 공격을 막자마자 반대쪽으로 튕겨져 나가는 박덕구의 모습은 비현실적. 일직선으로 날아간 녀석이 굉음을 내며 건물에 처박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죽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아마 팔정도는 으스러져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1초 컷?’ 의기양양하게 방패를 내밀기는 했지만 공격을 한 번 막아내는 것이 한계. 그렇지만 그 틈에 그녀에게 돌진하는 조혜진과 김현성 그리고 김예리를 볼 수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김현성을 귀찮다는 듯이 팔로 쳐내지만 사랑스러운 회귀자는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한다. 그 사이로 뻗어나가는 것은 조혜진의 창. 공기를 뚫어버리는 것 같은 파공성이 먼저 들려왔다. ‘보여.’ 신기한 것은 전혀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녀석들의 공격이 눈에 들어왔다는 것. 아마 이것 역시 마음의 눈이 전설 등급으로 진화한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차희라가 자신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창을 손으로 쳐내자 조혜진의 균형이 흐트러진다. 주먹을 날리려고 준비하고 있는 차희라의 뒤에서 나타난 것은 단검을 들고 있는 김예리. 멍하니 입을 벌리고 보게 만드는 합격술이다. 1회 차에서도 셋이 호흡을 많이 맞춰봤다는 걸 가정해 보면 김현성이 저들에게 잘 맞춰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잇!” 입을 꽉 다문 채 단검을 내지르지만 차희라가 발을 굴리자 근처에 있던 세 명이 마력의 충격에 휩쓸려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잠깐 동안의 틈,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은 정하얀의 마법. “이익! 사라져!!” ‘죽이는 거 아니야!’ 자신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온 모양인 것 같았지만 차희라가 정하얀의 마법에 피해를 입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차희라를 향해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나간 것은 시연회 때 정하얀이 한 번 보여준 적이 있는 마법 원소폭탄.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마력이 뒤섞인 것이 땅바닥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리며 차희라를 집어 삼키려고 하고 있다. “크앙!” 그렇지만 귀찮다는 듯이 마법을 손으로 쳐내는 모습은 가관. 정하얀이 마력을 퍼부어 만들어낸 원소폭탄은 반대쪽 건물에 쳐 박히며 커다란 굉음을 만들어냈다. 콰과아아아아아아앙! 콰드드드득! ‘이런 개….’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건물들을 보니 캐슬락이 안전할 거라고 외쳤던 내가 떠올랐지만 찬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다. 일단은 지금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먼저. 김현성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인지 곧바로 검을 들고 차희라에게 쏘아져 나갔고 조혜진과 김예리 역시 그런 김현성을 보조하기 위해 빠르게 달려오는 중. 다시 한번 검과 창 그리고 단검이 그녀에게 쏘아졌지만 전부 무용지물. 심지어 단검을 뻗고 있는 김예리를 발로 차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위험한 거 아닌가?’ 김예리의 내구력은 높은 편이 아니다. 급하게 주문을 외우려고 했을 때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박덕구가 다시 한번 차희라의 공격을 막았다. “나이스, 박덕구!”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자연스럽게 반대쪽 건물로 다시 처박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돌아오자마자 급하게 퇴장하기는 했지만 김예리가 리타이어 되는 건 막았다. 근성과 맷집 하나는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은 느낌. 아니 이대로 버텨주기만 해도 이득을 보는 것은 이쪽이다. ‘문제는….’ 차희라가 언제까지 이쪽의 사정을 봐줄지 알 수 없다는 것. 지금도 상당히 짜증이 올라온 것이 보인다. 그나마 남아 있는 이성이 이쪽을 죽이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이 한 시간 동안이나 지속된다고 한다면 그녀가 힘 조절을 하지 못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신화급의 능력치를 정면으로 받았다간 반대쪽 건물로 튕겨져 나가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피떡으로 변해 사방으로 터져나갈 것이다. ‘이거 안 좋은데….’ 나와 황정연, 정하얀이 계속해서 마법을 쏟아내고는 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는 상황. 김현성도 계속해서 인상일 찌푸리는 것을 보니 조금은 불안한 모양이다. 아직 이쪽도 차희라도 체력에 여유가 있다. 몬스터를 잡아서 경험치를 올려야 할 소중한 체력과 마력을 이런 곳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게 짜증나기는 했지만 이것도 경험치라면 경험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대로 가면 안 돼.’ 사실 경험치가 문제가 아니다. 만약 김현성과 차희라가 자리를 비운 타이밍에 녀석의 어미라도 나타난다면 도시 안에서 캐슬락의 제국민들과 사이좋게 전멸할 수도 있는 상황.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성벽 밖에서 거대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 낮은 울음소리. 그렇지만 온몸이 찌릿 찌릿 울릴 정도. ‘망했다.’ 도시 안에서는 보이지는 않지만 들려오는 울음소리만으로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비행형은 아닌지 순식간에 이곳으로 넘어오지는 않았지만 성벽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것을 보고 일이 터져도 제대로 터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만 저놈의 목소리는 이쪽에게만 들리는 게 아니다. 김현성 역시 표정을 구겼고 황정연도 깜짝 놀란 표정. 목소리에 깃든 존재감은 영웅 등급의 몬스터와는 차원이 다르다.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성벽에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 차희라도 차희라지만 일단은 성벽이 먼저다. ‘막아야 돼.’ “일단 성벽 쪽으로! 현성 씨! 일단 성벽 쪽으로 향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하, 하지만….” “아니, 서쪽 지역으로!” “네?”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저를 서쪽 지역으로 데려다 주신 이후에 곧바로 성벽에 있는 몬스터를 정리하러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위, 위험해요. 오빠.” “파티원들은 지금 즉시 성벽으로 향합니다. 혜진 씨가 지휘를 맡고 성벽으로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막는 것에 주력합니다. 기영 씨를 서쪽 지역으로 데려다 준 이후에 곧바로 성벽으로 향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말은 듣지 않겠습니다. 최우선 사항입니다.” “괜찮을 거야, 하얀아.” 정하얀이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김현성은 내게 무슨 생각이 있는 줄 아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명령은 이미 떨어졌다. 순식간에 이쪽으로 다가온 김현성은 내 손을 붙잡고 곧바로 서쪽을 향해 달려가는 중. 빠른 민첩 능력치만큼 순식간에 배경이 휙휙 뒤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안락하고 따스한 회귀자의 품 안에 안겨 달리는 기분이 뭔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방금 전 조혜진이 나를 붙잡고 달릴 때와는 속도 자체가 다르다. 사랑하는 애인을 불한당에게 뺏긴 것처럼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차희라가 보이긴 보였지만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빠르게 달려가는 김현성을 잡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무슨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녀석 역시 숨이 차는지 헐떡거리며 이쪽에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마 궁금할 것이다. 난데없이 갑작스레 서쪽 지역으로 향하자는 게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지금 캐슬락 내에는 싸울 수 있는 세력이 하나 더 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지원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며칠 전에 우연히 만난 사람이….” “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얼굴. 그야 미친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나 역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쪽이 지하 경매장을 다녀온 이후 곧바로 도시를 떠났다면 내 생각이 틀렸을 가능성도 있지만 경매장을 다녀온 이후에 곧바로 캐슬락에 계엄령이 내려 떨어졌다. ‘있을 거야.’ 경계가 삼엄해진 것은 물론 붉은용병이 개미새끼 하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캐슬락을 꽁꽁 에워싸고 있었다. 이쪽이 알지 못하는 지하 출입구가 따로 있다면 또 알 수 없지만 지하 경매장을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 외부로 나가는 출구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만약 이쪽에 조금이라도 미련이 있었다면 금방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만무. 혹여나 다시 만나지는 않을까 지하 경매장을 기웃거렸을 가능성도 있다는 소리다. ‘있어.’ 아마 기회를 봐 탈출할 시기를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 주머니를 뒤적거리자 이전에 받았던 쪽지가 보이기 시작. 다시는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쪽에서 먼저 찾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디까지 가면 되는 겁니까?” 아마도 이 근처.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이후에 부르기 싫은 그 이름을 다시 한번 불러볼 수밖에 없었다. “샤오… 린!!” “뭐….” “샤오린! 나와!!” 당황스러워 하는 회귀자의 얼굴. 기묘하게 비틀린 눈에는 어째서 네가 그 이름을 알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것 같았지만 입술을 꽉 깨물 뿐 다른 건 묻지 않는 것이 보였다. ‘시바…. 아는 사이였구나.’ 그것도 악연으로 얽혀 있는 것 같은 느낌. 정진호 같은 반응은 아니었지만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샤오린의 기벽을 생각해 보면 그다지 정의에 편에 서지는 않았던 것 같았지만…. ‘공화국 출신일 수도 있으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다. 나중에 적당한 변명거리를 생각해 대충 말해주면 수긍할 수도 있으리라. “샤오린!! 나와!!” “정말로 있는 겁니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아마도… 아니 분명히 있을 겁니다.” 오늘만 해도 극적인 상황에 도우미가 나타난 것만 여러 번. 목소리를 듣고 있다면 제발 나와 달라고 절이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차희라가 제정신이 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34분. 아직까지 미친 듯이 이곳을 쫓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김현성에게 안겨 34분 동안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 지금까지는 어떻게 피해내고 있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 아슬아슬하다. 그만큼 뒤쪽에서 게걸스럽게 달려들고 있는 광년은 왠지 모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어디에선가 폭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생각 못 했는데…. 그리고 이런 상황에… 그러니까 뭐라고 불러야 되는 거지? 가면남? 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시야에 비치는 것은 건물 위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저번 그 여자. 이전에 만났던 모습 그대로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미인이라고 하더니 정말 미인이 맞았던 모양.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것은 당연지사. ‘이거지!’ 정신이 나간 짐승은 똑같이 미친년으로 상대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명언이 계속해서 귓가에 흘러들어오기 시작. ‘힘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다시 만나서 영광입니다. 아름다운 샤오린 님.” 너무나도 반가운 인사에 조금 황당해하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 176 회귀자 사용설명서 176화 본능에 충실한 암사자(3) “다시 만나서 영광입니다. 아름다운 샤오린 님.” 너무나도 반가운 인사에 조금 황당해하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그래요? 글쎄…. 나는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어째서 내 이름을 알고 계신 걸까?” “당연히 그때 봤던 샤오린 님의 아름다운 자태가 머릿속에서 떠나지가 않아서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거짓말.” “거짓말이 아닙니다, 샤오린 님.” “하….” “도와줄 생각이 있어서 나오신 거 아니십니까?” “이쪽은 한 번 차인 상태라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은데…. 정확히 말하면 나를 찬 남자가 어떻게 죽는지 구경하러 나왔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앙큼한 년!’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대충 예상했다. 그렇지만 아마도…. ‘분명히 도와줄 거야.’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면 저렇게 모습을 드러낼 이유가 없다. 계속해서 튕기고 있는 건 아마 이쪽과 무언의 거래를 하기 위함이 분명하리라. 공화국 소속일지도 모르는 여자가 이쪽의 외침에 대답해 신성제국의 요충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름대로 페널티라면 페널티라고 할 수 있는 부분. 물론 그 모습을 본 것은 나와 김현성 그리고 이성을 잃은 차희라가 전부지만 아마 나름대로 얻어갈 것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단순히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나왔다는 건 자의식 과잉이지만 지하 경매장에서 만났던 그녀의 반응을 생각해 보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이쪽과 협상을 원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은 부정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게 뭔 협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은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반응.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분노를 쏘아내는 것으로 모자라 나를 바라보고 있는 표정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적의를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 마침 그녀가 이쪽을 가면남이라고 칭했기 때문에 순간적이지만 그럴듯한 변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가면무도회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파티원들이 사냥을 나섰을 때 혜진 씨와 한 번 마주쳤던 사람입니다.” 알리바이는 조혜진이 만들어 줄 것이다. “혜진 씨와 함께 말입니까?” “예. 이전에 저분에게는 조금 곤란한 제안을 받아서… 거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도시에 머무르고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다행히 체류하고 있었군요. 혹시 누군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아니요…. 저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김현성을 납득시키기 위한 짧은 대화를 하고 있었을 때 다시 한번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불러놓고 이렇게 무시할 셈? 그냥 가도 상관없는 건가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랜만에 만났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십니까? 샤오린 님. 저번에는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당시에 옆에 있는 파트너가 제 안전에 조금 민감했던 터라….” 순식간에 편집증이 되어버린 조혜진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그녀에게 잘 보이는 게 최우선 사항이다. 이렇게 말을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차희라는 계속 이쪽을 쫒아오고 있었으니까. “내 기억에는 분명히 불편해하던 쪽은 그쪽이었던 것 같은데요?” “하하하하. 제가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을 마다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함께 온 부하와 샤오린 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린 가면이 죄인 아니겠습니까? 아름다우실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우십니다. 저도 모르게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 같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야 지금 당신이 절박한 상황이니까요.” “본래 절박한 상황이야말로 서로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배경입니다. 보통 영화 속 주인공들이 전부 그런 식이니까요. 일단 구경만 하지 마시고 조금 도와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아서….” “도와주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신성제국의 맛탱이 간 용병여왕을 막으라는 건 조금 비싼 주문인데…. 이쪽도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고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지 않겠어요?” “최선을 다해서 싸워달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30분 정도만 함께해 주시면 정말로 감사할 것 같은데…. 원하시는 게 있다면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 물론 캐슬락을 안전하게 빠져나가는 것 역시 포함해서 말입니다.” “흐음…. 30분이 절대로 쉬운 게 아닌데?” “금화는 어떻습니까?” “글쎄….” “물질적인 것을 원하신다면….” “저도 돈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라서….” “정식으로 식사라도 한 번 대접해 드리도록 하지요. 그뿐만 아니라 이쪽에서 맞춰드릴 수 있는 건 전부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흐음….” “부탁드립니다. 아름답고 고귀한 샤오린 님.” “그럼… 일단은 급해 보이니 계약은 이걸로 성립이라는 걸로 할까요?” “죽이지 않고 제압한다는 조건입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내가 죽이려고 한들 죽을 사람은 아니니까. 저 미친 고릴라는… 이 기회에 고릴라한테 빚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제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네요.”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차희라와는 면식이 있는 모양인 것 같았다. 만약에 그녀 역시 어딘가에서 한 자리 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신성제국을 대표하는 플레이어인 차희라와 한 번쯤 만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 좋은 건가.’ 어찌되든 상관없지만 이쪽에게는 그녀가 차희라를 막아준다는 사실 하나만이 중요하다. 그다지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나쁘지 않아.’ 샤오린이 조용히 손을 뻗으니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남자 한 명이 그녀에게 조용히 상자 안에 있는 무구를 건네기 시작.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아든 그녀가 자신의 무기를 길게 늘어뜨렸다. ‘채찍?’ 차희라는 그녀를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오직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그녀를 향해 거대한 마력이 틀어박힌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공기가 찢어버리는 파공성이 들려온 이후에 차희라의 몸이 왼쪽으로 쳐 박힌 것. 콰아아아아앙!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와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정도였다. ‘저렇게 강했나?’ 이전에는 능력치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지사. [플레이어 샤오린의 상태창과 잠재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 - 샤오린] [칭호 - 사디스트] [나이 - 22] [성향 - 호기심 많은 탐구자] [고유기벽 - 목 조르는 로맨티스트] [직업 - 채찍기술자 - 영웅등급] [직업효과 - 기초검술지식 습득] [직업효과 - 중급채찍지식 습득] [직업효과 - 고급무투지식 습득] [직업효과 - 고급채찍지식 습득] [직업효과 - 고급마력운용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 - 87/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민첩 - 89/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체력 - 71/성장 한계치 희귀 이상] [지력 - 81/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 - 64/성장 한계치 희귀 이상] [행운 - 81/성장 한계치 영웅 이하] [마력 - 89/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특성 - 활기찬 채찍질 - 영웅 등급] [채찍으로 입힌 대미지의 비례에 체력을 회복합니다.] [총평 - 낮은 체력 능력치와 내구능력치가 아쉽지만 기본에 충실한 스탯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나 부족한 체력 능력치를 특성으로 지속적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성향은 좋으나 기벽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위험한 호기심에 눈을 뜰 수 있는 플레이어라고 하는 편이 맞겠군요. 가까이 해서 좋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확실히 강자라고 분류할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기는 하지만 차희라에게 비빌 정도는 아니다. 근력 능력치에서 이미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는 상황. 종합적인 능력치를 판단해 봤을 때는 그다지 강하게 보이지는 않는다는 거다.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은 그녀가 들고 있는 채찍. [장비 - 여신을 벌한 채찍 울드 - 전설 등급] [오래된 고신전에서 발견된 무구입니다. 누가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바가 없지만 여신을 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채찍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파묻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이템의 소유자는 랜덤으로 스탯 10포인트가 영구적으로 내려갑니다. 채찍 본연이 머금은 마력이 증가합니다.] ‘역시.’ 뭔가 믿고 있는 구석이 하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전설 아이템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쪽 역시 대부분의 기능이 봉인되어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의식도 깨우지 못하고 있는 내 율리에나와는 천지차이. 전설 등급의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면 단신으로 차희라를 막으려고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스탯 포인트가 10개나 내려간 상태에서….’ 아마 저 아이템은 스탯이 내려간 값어치만큼의 효율을 보여줄 것이다. 실제로 그녀가 데리고 왔던 부하들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혹시나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집단이겠지만 아직까지 거리가 가깝지 않기 때문에 차희라를 상대할 수 있다는 거다. 계속해서 무너진 건물의 틈으로 파공성이 들리는 것은 가관. “크르르르르륵!” 자신의 몸에 직접적인 위협이 다가온 이후에는 차희라도 더 이상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곧바로 건물에서 튀어나와 채찍을 든 정신 나간 여자를 향해 쏘아지는 것은 순식간. 김현성도 더 이상 나를 들고 뺑뺑이를 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곧바로 성벽을 향해 달려가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함께 움직일 생각은 없다. “먼저 성벽으로 향해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쪽은 따로 들려야 할 곳이 있어서….” “네?” “생각하고 있는 보험이 있습니다. 아! 그보다 혹시 모르니 붉은용병의 단원들을 이쪽으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까지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계속해서 이런 상황이 왔을 때 둘 중 하나를 말려야 되니까요.” “네. 무슨 말인지 알겠군요. 그럼 저는 지금부터 성벽으로 향하겠습니다.” “네, 현성 씨.” “그리고….” “네?” “오늘 일에 대해서는 조금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아까처럼 표정이 별로 좋지는 않다. ‘그야 의심스럽겠지.’ 공화국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여자를 알고 있는 것으로 모자라 그녀가 있는 위치를 직접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까지 했다. 물론 정확한 주소는 모르고 있었고 이쪽은 샤오린이 뭐하는 여잔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만 보면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는 내 말에 응답한 셈이다. 솔직히 말하면 경매장에서 잠깐 마주친 인연은 완전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서쪽 지역은 어차피 아슬아슬하게 뚫리는 것이 계획. 그 이후에 몬스터들을 침입시키고 한꺼번에 밀어버리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거인 길드 마스터가 지휘권을 받았으니 서쪽 지역의 병력이 보강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현재는 이 지역이 무너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물론 밖에서 울고 있는 저 미친 괴물이 날뛴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그럼 조금 있다 보겠습니다.” “네. 현성 씨.” 사랑스러운 회귀자 역시 걱정이 되긴 되는지 곧바로 몸을 날린 것이 시선에 들어왔다. 밖에서는 수성전과 레이드가 한참 일 터. 별다른 문제는 없겠지만 만약을 위해 한 곳 더 들릴 곳이 있다. ‘물론 밖으로 나가기가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혹시 샤오린이 차희라에게 개짓거리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어차피 붉은용병이 오기 전까지는 이곳에 숨어 그녀를 지켜봐야 한다. 그 정신 나간 여자의 말대로 차희라가 죽거나 다치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만…. ‘만약의 상황이라는 게 있으니까.’ 일단은 지켜보는 것이 옳다. “미친년!!” “크르르르르륵!!!!” 밖에서는 정신 나간 괴수 대격돌이 펼쳐지고 있는 상황. 안전한 후방에서 손가락질만 하면 끝날 줄 알았던 수성전을 생각해 보면 개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괜스레 서러워졌다. # 177 회귀자 사용설명서 177화 본능에 충실한 암사자(4) 안전한 후방에서 손가락질만 하면 끝날 줄 알았던 수성전을 생각해 보면 개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괜스레 서러워졌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상황이 정리가 된 것 같은 느낌. 사실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이제야 겨우 상황이 원위치로 변했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여전히 불안요소는 많다. 미리 무너지기로 예약되어 있었던 서쪽 성벽과 최소 전설급으로 분류될 레이드 몬스터의 존재가 바로 그렇다. 물론 처음 하울링이 들리고 난 이후에 시간이 조금 지났다는 걸 떠올려 보면 기존 병력이 충분히 잘 버텨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김현성이 합류한 성벽 쪽은 다시 한번 활력을 얻을 것이고 어쩌면 무난하게 수성전이 마무리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항상 최악을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 전황이라는 건 언제 어떤 식으로 뒤바뀔지 모른다. 차희라가 그랬고 새끼 몬스터의 하울링이 그랬다. ‘보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성공적으로 이 위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머리를 굴려야 한다는 것. 할 수 있는 게 한정적인 나는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는 패들을 떠올려야 한다. 괜스레 침을 삼키며 전방을 바라보자 앞에서는 여전히 괴수 대격돌이 진행되는 도중. 샤오린도 충분이 강하기는 하지만 어째서 그녀가 차희라를 죽일 자신이 없다고 했는지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전설 등급의 아이템 울드는 확실히 위력적이다. 채찍질 한 번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작은 건물들은 휩쓸려 나갈 정도. 그렇지만 차희라는 처음 기습 이후에 다음번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크르르륵!!” 쾅! 쾅! 하는 요란한 소리보다 한 발자국 빠르게 움직여 계속해서 공격을 피해내는 움직임은 90의 민첩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성이 날아가고 본능만 남은 상태에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보여줄 수밖에 없는 움직임. 내 눈으로 보건데 저건 그냥…. ‘감각이야.’ 감각이며 본능이다. 이미 수련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정하얀처럼 그녀 역시 천재의 한 종류인 셈. 물론 저 정도까지 올라간 플레이어 중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를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기는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중에서도 차희라는 확실하게 비상식적이다. 샤오린이 어떻게든 이전의 거리를 유리하며 그녀를 묶어놓으려고 하고 있지만 우리 속에서 풀려난 맹수가 조련사를 따를 리가 만무, 눈으로 보기에도 위협적인 상황이 몇 번이나 지나갔는지 모른다. ‘잘 버티는데?’ 특성이 유지되는 시간이 거의 다 끝나갈 때 즈음에 차희라가 그녀를 찢어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결과긴 하지만 지금 저렇게 죽어버리면 굳이 그녀를 이쪽으로 부른 이유가 없다. ‘조금만 더 버텨! 이년아!’ 내 생각과는 다르게 자꾸 거리를 허용하는 듯한 느낌. 마력의 존재 때문에 무기의 단점을 조금은 상쇄시킬 수 있지만 그래도 채찍이라는 무기의 특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근접전 같은 경우에는 불리한 것이 당연. 특히나 상대가 근접전의 스폐셜리스트라는 차희라라면 더욱더 그렇다. 도망치려는 조련사를 끝까지 물어뜯으려 바로 앞까지 달려드는 짐승이 결국에는 채찍을 든 멍청한 여자의 품까지 파고들었을 때, 샤오린 그녀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무구를 놓아 버리는 것이 보였다. 뭔가 기묘한 자세를 잡은 이후에는 차희라의 팔을 쳐내고 오히려 팔꿈치로 그녀의 명치를 가격. ‘권법?’ 누가 보기에도 엄청난 힘이 실린 모양인지 반대쪽으로 튕겨져 나가는 게 차희라의 모습은 다분히 비현실적. ‘슈바…. 뭔 권법이야….’ 보통 저런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근접전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 저런 모습을 보여주니 황당한 반응이 나오는 게 무리가 아니리라. ‘쟤 왜 저렇게 세?’ 아무리 성장 중이라고 하지만 천하의 김현성 역시 저 차희라에게는 애를 먹었다. 전설 등급의 무구를 이용한 중장거리전부터 초 근접전까지 완벽하게 몸에 익히고 있는 샤오린은 누가 봐도 강자라고 분류할 수 있는 종류의 인간. 능력치는 조금 밀리는 것 같기는 했지만 고인이 되어버린 이토 소우타보다도 저쪽에 조금 더 점수를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 차희라를 밀어 붙이고 있는 거였으니까. 그렇지만 차희라를 밀어붙이고 있다는 판단은 내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한 모양, 대미지를 먹인 것 치고는 별로 표정이 좋지 않은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샤오린의 시선을 따라가니 보이는 것은 싸구려 무기 두 개를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붉은 짐승. 운 좋게도 처박힌 곳이 무기 상점인 모양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차희라가 무기를 사용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분명히 처음이다. 직업의 효과로 고급 쌍수 무기 지식을 습득한 그녀가 어째서 자신의 무구를 들고 다니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전투의 양상이 조금 달라질 것 같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니 어떻게 봐도 무기를 든 쪽이 들지 않은 쪽보다는 강할 것이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도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괜스레 샤오린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러다가 저거 죽는 거 아니야?” 자연스레 나온 혼잣말. 뒤 쪽에서 내 말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험할 겁니다. 확실히 그녀는 강합니다만….” “깜짝이야!” “아… 이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뒤쪽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김현성에게 주문한 붉은용병. 뒤를 돌아보니 이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현재 성벽 쪽에 병력의 여유가 많지는 않아 단원 여섯 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저희가 함께해야 할 일이 있다고 와서 찾아왔는데…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대충 알 것 같군요.” “네. 저 채찍을 든 여자가 지금 희라 누나를 막고 있습니다만 혹시라도 다른 사고가 나지 않도록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아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만… 일단 마스터를 지키는 것은 저희 일이기도 하니 감사한 마음으로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보다 저 여자 쪽은?” “그녀 말고 그녀의 부하들도 있는 걸로 확인됩니다. 숫자는 약 다섯 명. 공화국 쪽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일단은 저희 쪽에 협력하기로 했으니 그들의 안전 역시 신경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특히나 폭주가 끝나기 전까지 죽지 않도록….”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보통 저 상태에 접어든 마스터는 말리기가 쉽지 않으니…. 이성이 되돌아오기 전까지는 오히려 저 여자를 지원해야겠군요. 조금은 다행인 것 같습니다. 도시로 오지 않았거나 저 여자가 없었다면 다른 사고가 터졌을 겁니다. 최근에는 저러신 적이 없었는데….” ‘원인이 나라고는 말 못 하지.’ “예전에는 저렇게 폭주한 적이 있었습니까?” “대륙에 떨어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수차례 있으셨고 붉은용병을 창단하고 자리 잡으신 이후로는 딱 한 번입니다. 물론 그때는 지금 같은 느낌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때는?” “적 아군 가릴 것 없이 공격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은 적어도 아군은 구별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으니 다행이로군요.” 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쪽도 앞뒤 가리지 않고 캐슬락을 빠져나갔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 차희라도 차희라지만 궁금한 것은 성벽의 소식. 단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자 곧바로 말을 받아오는 녀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아. 현재 수성전 상황은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전설급의 네임드 몬스터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공격에는 조금 소극적이더군요.” “아하….” “아직까지는 영웅 등급의 몬스터나 하위 종들을 보내올 뿐 성벽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해오지 않고 있습니다. 녀석이 본격적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저희 역시 커다란 피해를 감수해야겠지만 이전의 전투에서 아군 마법사들이 마력을 많이 아껴놓은 덕분에 수성전에는 여유가 있습니다. 제1성벽 쪽에서 한꺼번에 몬스터들을 해치운 게 확실히 효과가 있었던 터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예상할 수 있었던 상황, 네임드 몬스터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건 예상 외였지만 그것 말고는 전부가 계산 안에 있다. 아니, 사실 어째서 녀석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대충 답이 나온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아주 손쉬운 문제.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리라.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겠는데….’ 지금까지는 힘들었지만 지금부터는 제법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이쪽이 준비한 보험은 완전히 들어맞았다. “서쪽 성벽은 조금 어떻습니까?” “서쪽 성벽 역시 별 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사망자가 다수 나오기는 했지만 예비 병력을 빠르게 투입해 빈자리를 메울 수 있었고… 물론 다른 쪽 성벽에 비하면 전력이 밀리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혹시 서쪽 성벽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뇨. 말씀을 들어보니 괜찮을 것 같군요.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동쪽 지역으로 대피하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혹시 음성 증폭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분이 계십니까?” “아… 네.” 마법사 스쿼드가 약한 붉은용병임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마법사 한 명을 끼워 놓은 것을 보면 이쪽에 내가 있다는 걸 듣고 신경을 조금 써준 모양, 우리 회귀자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좋네.’ “마법사 한 분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제가 방금 말씀 드렸던 임무를 수행해 주시면 됩니다. 혹시 폭주상태가 끝난 이후에 희라 누나는….” “다른 부작용은 없습니다. 곧바로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오신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건 다행이로군요. 그럼 신호는 이쪽에서 보내겠습니다.” “무슨 신호를?” “희라 누나한테 들으시면 될 겁니다. 저는 지금부터 작은바위 길드 하우스로 갈 겁니다. 안전할 것 같으니 호위는 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명 더 데려가시지요.” 아무래도 이쪽의 안전에 꽤나 신경을 써주는 것 같았다. 차희라의 명령 때문이라지만 고마워지는 것이 사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니 곧바로 전사 한 명과 마법사 한 명이 이쪽으로 달라붙었다. ‘남은 시간 15분.’ 나를 위해 열심히 싸워주시고 계시는 샤오린 님 덕분에 싸움 구경도 하고 편하게 몸을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게 기분 좋기는 좋다. 이렇게 호위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고… 붉은 용병의 마법사 한 명이 바깥으로 나가기 전 간단한 환상 마법을 걸어주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차희라에게 발각될까 걱정된 모양인 것 같지만, 이미 차희라는 이쪽에 관심이 멀어져 있다. 조용히 바깥으로 나오자 여기저기에서 폭음과 굉음이 들려온 것은 당연지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쪽의 상황은 무척이나 여유롭다. 기분도 무척 좋아진다. 어째서인지는 뻔할 뻔자. ‘퍼즐 조각이 전부 모인 것 같았으니까.’ 조금 빠르게 달리기 시작하자 배경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 샤오린과 열심히 치고 박고 있는 차희라는 잠깐이지만 이쪽의 존재를 잊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물론 내가 사라졌다는 걸 깨닫고 조금 화가 난 모양인지 아까보다 더욱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지만 내가 신경 쓸 타이밍은 아니다. ‘남은 시간 10분.’ “혹시 안고 달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예. 물론입니다.” 체력적 부담을 짊어지게 될 전사한테는 미안하지만 이편이 조금 더 빠르다. 서쪽 지역에서 작은바위의 길드 하우스에는 거리가 있으니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이다. ‘남은 시간 2분.’ 김현성이였으면 벌써 도착했을 시간. 민첩이 아닌 내구와 힘에 투자한 전사니 이정도의 속도로 뛰어주는 것도 용하다. 배경이 조금 뒤바뀐 이후에는 작은바위 길드 하우스를 점거하고 있는 사랑스러운 붉은용병이 눈에 보이기 시작. 희라 누나 쪽은 정신을 차렸는지 서쪽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음이 줄어들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이후에는 왠지 이유를 알 것 같은 차희라의 절규 소리가 들려온 것 같은 착각이 들기는 했지만 저건 안 들리는 척하는 것이 나으리라. 작은 바위의 길드 하우스에 가까워지자 단원 한 명이 이쪽을 마중 나왔고 나는 녀석을 향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계셨군요?” “아, 이기영 님.” “별일 없으십니까?” “예. 그것보다 이곳까지는 무슨 일로….” “갓 태어난 몬스터의 새끼, 이곳에 있지요?” 약간 쓰레기 같기는 했지만 최고로 효율적인 방법. 붉은용병의 단원들이 우물쭈물거리며 새끼를 꺼내오는 것이 보인다. 조금은 용처럼 생긴 것 같은 모습. 차이점이 있다면 날개가 돋아나 있지 않은 것 정도였다. 정확히 말하면 앞다리 쪽에 뭔가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누가 봐도 날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 아니다. 뭐, 사실 겉모습 따위는 상관없다. 이쪽이 입마개를 풀자 녀석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도시를 가득 메운 것은 당연지사. “키에에에에에에에엑….” 콰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서쪽 성벽을 박살낸 어미가 정확히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는 것이 눈에 보였다. “노려보면 어쩔 건데 이 자식아! 푸흐하하핫!” # 178 회귀자 사용설명서 178화 인질극의 결과(1) “노려보면 어쩔 건데 이 자식아! 푸흐하하핫!” 이쪽의 예상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기세등등하게 등장한 것치고는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당혹스러움이 감돌고 있었다. 자신의 새끼를 인질로 잡고 있는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조용히 나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은 가관. 새끼를 인질로 잡고 있는 내 모습이 조금 쓰레기 같기는 했지만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그워어어어어어….” 슬쩍 움직이려고 하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율리에나를 천천히 이동시켜 태어 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불쌍한 새끼 쪽으로 검을 옮기니 속박 마법이라도 맞은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된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녀석뿐만이 아니다. 녀석이 이쪽으로 보낸 다른 몬스터들 역시 마법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억제하고 있는 건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말이 조금 더 통하는 상대다. 덕분에 녀석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은 당연지사. 크기가 이쪽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커다란 느낌. 멀리서 바라봤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모습이 정확히 들어왔다. 머리에 거대한 두 뿔을 가지고 있는 외관. 당연하지만 저 뿔이 단순한 장식용은 아닐 것이다. 방금 전 서쪽 성벽을 순식간에 박살 낸 것은 저 뿔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리라. ‘비싸게 팔리겠는데.’ 값비싸 보이는 것은 녀석의 뿔뿐만이 아니다. 검정색으로 뒤덮인 피부는 누가 봐도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멀리서 봐도 광택이 느껴지는 가죽은 희귀 등급 이하의 주문은 튕겨낼 것처럼 보인다. 모르긴 몰라도 저 가죽으로 방어구를 만들면 웬만한 몬스터의 공격은 씹어 먹을 수 있으리라. 드래곤의 한 종류인지 확실히 용의 형태였고 기다란 꼬리 역시 인상적이다. ‘저건 무기로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고….’ 물론 이곳에서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용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다. 마법을 펑펑 써대며 인류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종류의 몬스터는 아닌 모양. 그렇지만 대충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마력이 느껴지기는 한다. 전설 등급의 몬스터들이 다 저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눈에 어느 정도 감정이 깃들어져 있는 것 같았고 지성체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는 걸로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모성애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니 곧바로 녀석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 내려왔다. [흑암룡 디아루기아 - 전설 등급] [락레블 산맥의 깊은 곳에서 서식하고 있는 전설 등급의 몬스터입니다. 드래곤 타입의 몬스터로서 어느 정도의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거대한 뿔과 기다란 꼬리를 이용해 중형급 이상의 몬스터를 사냥하며 살아갑니다.] [전설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 흑암룡 디아루기아의 상태창을 확인합니다.] [이름 - 디아루기아] [칭호 - 락레블 산맥의 지배자] [나이 - 4,036] [성향 - 온순한 어머니] [분류 - 드래곤] [능력치] [근력 - 105/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민첩 - 101/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체력 - 123/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지력 - 100/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내구 - 132/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행운 - 101/성장한계치 전설 이하] [마력 - 125/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총평 - 아이를 빼앗겨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입니다. 맹렬한 분노를 보내고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능력치가….’ 능력치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높다. 몬스터와 인간의 스탯 계산법이 다르다는 것을 가정하면 이쪽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능력치. 근력 포인트가 폭주 이후의 차희라보다 낮기는 하지만 애초에 둘은 체급이 다르다. 저런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근력이라면 적어도 몇 배의 효율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내구 능력치 132 그리고 마력 능력치가 125. 아직까지 전설급의 몬스터를 레이드한 적은 없지만 한 도시가 가지고 있는 전력으로 가능한 건지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가능하겠지….’ 아마 가능할 것이다. 물론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캐슬락 쪽이 조금… 아니, 많이 불리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이쪽은 저쪽의 소중한 아이를 인질로 붙잡고 있으니까. 잠자코 있던 전설 등급의 몬스터의 목소리와 녀석이 주는 압박감에 잠깐 동안이나마 캐슬락이 침묵에 휩싸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없다. 지성체라는 건 오히려 이쪽에 도움이 된다. 애초에 녀석이 왜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는지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커다란 꼬리로 건물도 밀어버릴 수도 있고 브레스로 성벽 쪽에 구멍도 뚫을 수 있는 능력 좋은 양반이 어째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는지는 뻔할 뻔자. ‘위치가 확인이 안 됐으니까.’ 누가 보기에도 내 옆에서 구슬픈 울음소리를 흘리고 있는 녀석의 새끼의 신체는 유약하다. 혹시라도 사랑하는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것이 분명. 성벽을 뚫어내려고 브레스를 내뿜으려다가 자식이 휩쓸리는 상황까지 생각한 것이다. 저 정도로 똑똑한 녀석과 굳이 정면으로 부딪쳐 줄 이유는 없다. 흥분하며 서쪽 성벽을 뚫어낸 어미가 갑작스럽게 이쪽을 바라보고 침묵을 유지하자 잠깐 혼란에 빠진 병력 역시 당황스러워하는 것은 마찬가지. 지금까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규격 외의 몬스터가 어째서 그 행동을 멈추고 있는 건지, 혹시나 다른 일이 생기지는 않을지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를 아예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병력을 지휘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이쪽의 임무. 곧바로 입을 열자 곧바로 반응을 보이는 인간들의 모습이 재미있다. “캐슬락을 지킵시다! 여러분!” 음성 증폭 마법으로 뻗어져 나간 내 목소리는 분명히 성벽까지 닿는다. 어리둥절하고 있던 일부 병력이 함성을 내지르는 것은 순식간. “고작 몬스터에 불과합니다. 캐슬락을 침략하려고 한 더러운 몬스터에게 우리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어야 합니다! 방어조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실드 주문을 외우고 그 외 전 병력은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를 공략합니다. 오른팔에 마법과 화살을 집중! 근접 직군은 원거리 직군들을 보호하며 아직 성벽 바깥에 있는 몬스터를 처리합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승리가 눈앞에 있습니다! 여러분! 전군 발사!” 성벽에서 화려한 색깔의 마법들이 날아가 녀석에게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 능력치가 높기는 하지만 이 정도의 인원이 한꺼번에 쏘아 보낸 마법은 녀석의 가죽도 뚫을 수 있는 모양이다. 잠깐 동안 휘청거리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이쪽은 웃음이 다 나올 정도. 이미 레이드라고 부를 수도 없다. 저건 샌드백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으리라. 방어 본능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꼬리를 휘두르려는 모습이 보였지만 율리에라가 사랑스러운 새끼의 주변을 둥둥 떠다니는 것이 어떤 걸 의미한다는 것 정도는 아는 모양인지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키에에에에에엑….” 다시 한번 새끼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이 조그만 녀석이 자신의 어미를 구별하고 있는지는 이쪽이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목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오는 것은 사실이다. 만약 자식이고 나발이고 미친 듯이 돌진하는 멍청한 몬스터였다면 조금 애를 먹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새끼의 구슬픈 목소리 한 방 한 방을 묵직한 정신 공격으로 느끼고 있는 바보 같은 몬스터에게는 참교육이 답. 끊임없이 떨어지는 마법과 화살이 계속해서 축적되고 있는 것을 보면 상황이 정말 재미있다.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여러분! 적은 지금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승리가 코앞에 있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상태!’ “오늘의 승리는 캐슬락에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 여러분! 희생으로 일구어낸 승리입니다! 조금만 더 박차를 가합시다!” ‘이게 바로 만물의 영장의 힘이다! 이 미개한 몬스터야!’ “고향을 지킵시다!” 저게 다 얼마인지 생각해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조금 양심이 찔리기야 한다.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는 마법과 공격에 조금씩 불쌍한 모습으로 변모하는 우리 디아루기아 양의 모습은 처참 그 자체. 움직이려고 움찔거릴 때마다 이쪽이 계속해서 사랑스러운 새끼를 위협하니 저항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자신이 죽으면 그 다음은 이 새끼의 차례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 물론 인지하고 있다고 해도 당장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래 모성애라는 게 그런 거니까. 지금 당장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식이 상처 입는 것을 보고 싶은 부모는 없다. ‘어우… 조금 불쌍하기는 한데….’ 콩알만 한 동정심이 계속해서 양심을 콕콕 찌르기는 했지만 하지만 멈출 생각이 없는 것은 당연. 애초에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저 몬스터를 잡는데 커다란 애로 사항이 꽃 필 것이다. 쉽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정정당당하게 치고받을 이유가 없다. 캐슬락 인구의 절반이 죽을지도 모르고 우리가 밀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난데없이 알을 도둑맞은 것은 물론, 갑작스럽게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된 온순한 어머니에게는 제법 미안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이쪽도 딱히 선택지가 없다는 거다. ‘어쩔 수 없는 거야.’ 본격적으로 녀석을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하는지 근접 직군들 역시 달라붙어 칼침을 박아놓고 있는 모습은 가관. 전설 등급의 몬스터로는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로 무기력하다. 녀석이 이쪽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보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 눈을 깜빡 하기도 전에 마력과는 다른 이상한 기운이 이쪽으로 향해 흘러들어오고 있는 듯한 느낌. ‘이게 뭐야….’ 몸에 이상은 없다. 그렇지만 갑작스럽게 기운이 빠지는 듯한 탈력감은 어처구니없을 정도. 혹시나 녀석이 무슨 개수작을 벌인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것이 당연하다. 본보기로 지금 구슬프게 울고 있는 녀석의 다리라도 잘라야 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생각했을 때 상태창이 떠오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칭호가 생성되었습니다.] [용의 배우자] ‘뭔… 개소리야.’ [한날한시에 함께 죽고 함께 살아가는 용의 배우자로 선택받은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칭호입니다. 디아루기아의 배우자로 선택 받으셨습니다. 현 시간부터 디아루기아의 배우자로서 삶과 죽음을 함께 하게 됩니다. 마력이 5올라갑니다.] ‘미… 친….’ 갑작스럽게 이쪽에 찾아온 탈력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뻔할 뻔자. ‘제기랄.’ 마력 스탯이 5가 오른 것은 기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지금 당장 뒈지게 생겼다는 걸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다. 재빨리 디아루기아 쪽을 바라보니 승리에 취한 플레이어들이 캐슬락의 숭고한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고 기를 모으는 도중. 저 공격에 이쪽도 함께 죽어버리게 생겼다. “공, 공격 중지! 공격 중지!! 공격 중지!!” 일단은 저 최후의 일격을 막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상황. 물론 저 몬스터의 내구력을 생각하면 끈질기게 살아남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쪽의 목숨이 걸린 일인 만큼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이쪽의 명령을 알아들은 모양인지 당장 떨어지는 마법은 멈췄지만 디아루기아는 휘청거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당장에라도 죽을 것처럼 비틀대고 있었다. 기절이라도 했는지 미동도 없는 모습은 가관. 이제는 건물에 가려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경험치 욕심에 어떤 미친놈이 막타라도 넣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안, 안 돼….’ “몬스터가 있는 쪽으로!” “네?” “지금 당장 몬스터가 있는 쪽으로 향하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도대체 몇 번을 왔다갔다거리는 거야.’ 새끼를 품은 채 붉은용병의 단원의 품에 몸을 맡기니 풍경이 뒤바뀌었다. 이제는 무척이나 익숙한 일이라서 편하게 느껴질 정도. 그렇지만 공성전의 전황은 다시 한번 바뀐다. 디아루기아가 정신을 잃은 영향인지 잠자코 샌드백이 되어주고 있던 몬스터들이 날뛰기 시작한 것. “네임드 몬스터는 생포합니다! 성벽 바깥쪽에 있는 몬스터를 정리하는 것에 주력합니다!!” ‘제발 죽이지 마라….’ “다시 한번 말합니다! 네임드 몬스터는 생포합니다! 성벽 바깥쪽에 있는 몬스터를 정리하는 데 주력합니다!!! 실드 마법으로 무너진 성벽을 틀어막은 이후에 다시 한번 수성 체제에 돌입합니다! 네임드 몬스터는 생포합니다!” ‘왜 안 보이는 거야?’ 서쪽 지역에 거의 다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디아루기아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상황. 답답한 마음에 붉은용병의 품에서 내려 달려갔지만 보이는 것은 없다. 아니, 눈에 띄는 것은 머리에 커다란 뿔을 달고 있는 인간. 몇몇 병력에게 제압당한 채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커다란 뿔을 달고 있는 여자가 아까의 디아루기아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 “아… 아가!” 누가 봐도 이쪽이 악당이고 저쪽이 피해자인 것 같은 느낌. “무사했구나… 아가… 무사했구나… 무사했어….” 울컥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고는 급하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손… 손 떼! 이 자식들아!” # 179 회귀자 사용설명서 179화 인질극의 결과(2) 울컥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고는 급하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손… 손 떼! 이 자식들아!” 격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까딱하면 죽을 것 같은 위태위태한 얼굴이 보였으니까.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은 이쪽의 목소리에 당황했는지 나를 바라보는 중. 이게 무슨 상황인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다른 설명을 할 시간은 없다. “지금 당장 전선으로 복귀합니다. 제가 직접 구류하겠습니다.” “네… 네!” 그렇지만 일반 병사들이 뭘 할 수 있을 리가 만무. 곧바로 사라지는 녀석들이 시야에 비쳤다. 이쪽이 가지고 있는 포션으로 회복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표정으로 아이를 울부짖는 녀석을 치료하기 위한 수단은 당장은 하나밖에 없다. 한쪽 품에 새끼를 꽉 안은 채 다가가니 자꾸만 손을 뻗어온다. 이쪽을 공격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상태창의 설명을 보면 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완전히 당했어.’ 인간형으로의 변신이 가능하다는 것 이전에 이쪽과 자신의 목숨을 하나로 묶어버렸다는 점은 완전히 외통수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 눈앞에 있는 디아루기아가 머리를 잘 썼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아마 자신이 죽는다면 자신의 새끼도 죽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 새끼를 인질로 잡고 있는 동시에 음성 증폭 마법으로 전 병력에 명령을 전달하는 나를 배우자로 선택해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려고 한 것이다. 이쪽이 인류의 평화를 위해 희생할 만한 성격이 아니라고 꿰뚫어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도박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나는 숭고한 희생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자신을 살리는 게 곧 새끼를 살리는 법이고 이쪽의 목숨을 쥐는 게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새끼가 휘말리거나 목숨을 위협당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직접적으로 내게 해를 끼칠 수는 없으니 나를 자신의 배우자로 선택해 목숨을 공유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보가 너무 부족했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내가 놓친 것은 용이라고 분류되는 종족의 생태였으니까. 일단 이쪽이 알게 된 것은 네 가지. 물론 이게 드래곤으로 분류되는 모든 종족의 공통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눈앞에 있는 디아루기아에게는 해당되는 이야기다. 1. 용은 암컷 혼자 아이를 가질 수 있다. 애초에 암컷과 수컷이 무의미한 동물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 개체수가 적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아마 이쪽의 생각이 확실할 것이다. 2. 용은 인간형으로 변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확실히 마법은 아니다. 종족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으리라. 3. 맹약인지 마법인지 아니면 종족이 가지고 있는 고유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용은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저항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자동문 수준의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 내가 지금 와서 이런 걸 따져봐야 무의미하다. 4. 자신이 배우자로 선택한 개체와 생사를 공유한다. 어떤 방법인지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생명을 공유한다는 것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다. ‘내 몸이 가장 큰 증거니까.’ 이해는 할 수 없지만 단순한 미물은 아니라는 거다. 이들 역시 자신들의 문화와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지적 생명체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 인간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화한 종류의 생명체 말이다. ‘어떻게 보면 상위 개체라고 불러야 되는 건가.’ 연구할 것도 많고 생각도 많아졌지만 일단은 눈앞에 있는 디아루기아를 살리는 것이 먼저. 헐레벌떡 품 안에 있는 포션을 상처가 난 부위에 들이 붓자 아주 천천히 몸이 회복되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물론 효과는 크지 않다. 본체의 크기가 어마어마한 만큼 인간 폼으로의 회복 역시 페널티를 받는 모양. 평범한 인간을 치료하는 데 드는 포션이 한 병이라면 이 용에게는 최소 몇 백 병이 들어가게 되리라. 계속해서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소량의 포션이 도움이 되는 모양인지 눈에 점차 생기가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녀가 내 품에 안겨 있는 소중한 새끼에게 시선을 돌린 것은 순식간. “아… 아가!” “키에에에에엑….” 그 감동적인 모습에 재회라도 시켜주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그녀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에 대해 확답을 내릴 수 없는 만큼 일단은 거리를 슬그머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곧 그녀의 입에서 서글픈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돌… 돌려주세요. 제… 아이를… 제 아이를 돌려주세요.” ‘시바….’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 아이를 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울지 마….’ “제발….” 눈물이 흐르다 넘쳐 폭포수처럼 떨어지고 있는 상황. 누가 봐도 내가 너무 쓰레기처럼 보였다. 차희라처럼 달려 들 것을 예상했지만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모양인지 납작 엎드려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빌미로 협박을 해오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내 예상과는 180도 다른 모습. 그녀로서도 이쪽을 배우자로 선택하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본래 성격인 건가.’ 아마도 내 생각이 맞으리라. 그녀의 성향에 적혀 있는 것은 온순한 어머니였으니까. 4,000살 이상을 먹는 와중에도 캐슬락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한 번도 없는 것을 보면 정말로 아이 때문에 눈이 돌아가 이쪽에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송정욱, 이 악당 새끼.’ 이쪽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는 송정욱 탓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타이밍 좋게 옆에 있는 붉은용병의 단원 한 명이 입을 열어왔다. “이 사람은….” “방금 그 몬스터일 겁니다. 아마 인간형으로도 변할 수 있는 모양인 것 같군요.” “이런 건 들어보지 못했는데….” “저 역시도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이런 게 가능하다는 건 본 적도 없고요. 아마 캐슬락을 침공한 이유도 이 아이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 그렇군요.” “수성전이 진행되는 도중입니다. 일단은 저 몬스터, 아니, 여자를 구류하겠습니다. 수성전 상황은….” “대부분이 정리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거 다행이로군요.” 단원과 말을 섞고 있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애처롭게 손을 뻗어오며 이쪽에 말을 걸어오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무시하기가 힘들다. 몬스터의 외관일 때도 양심 한구석이 콕콕 찔려왔으니 인간의 모습으로 저런 모습을 보이니 흔들리는 것이 당연하다. 머릿속으로 자꾸 가슴 아픈 시나리오가 떠오르기 시작. 디아루기아의 시점에서 생각해 보니 황당하기가 그지없다. 갑자기 알을 도둑맞은 것으로 모자라 태어난 새끼로 인질극을 벌였고 인간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다. “돌, 돌려주세요.” “…….” “아가… 엄마란다. 엄마….” “…….” “다 괜찮을 거야. 안심해도 돼. 아가… 안심해도 된단다.” “…….” “아가….” “키에에에에엑….” 솔직히 아이를 돌려주는 선택지는 피하고 싶지만 눈앞에서 저런 모습을 보이면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이미 온 몸이 망신창이가 된 상태. 혹시나 새끼를 품에 안은 뒤에는 본체로 현현해 우리의 뒤통수를 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가능성은 없어.’ 눈앞에 보이는 디아루기아는 이미 대부분의 전투 능력을 상실한 상태다. 포션을 쏟아 부은 것도 일단은 응급처치에 불과. 자신이 죽으면 그 다음이 아이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만큼 당장 아이를 품에 안는다고 해서 별 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후를 생각했을 때도 일단은 한 번 안아보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앞으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니까. 딱히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천천히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그녀의 품으로 옮기니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 자신의 아이를 꽉 안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가… 아가!” “키엑!” 그 모습을 본 단원이 한마디 건넨 것은 당연지사.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른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이미 거의 모든 전투 능력을 상실한 상태이기도 하고 새끼를 안고 있는다 해서 뭔가 달라지진 않겠죠. 오히려 정신적으로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군요.” 이미 정서적으로 많이 안정되어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아이를 꽉 안고 난 이후에는 다시 한번 아이를 빼앗길까 이쪽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었지만 확실히 다른 행동을 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생각보다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것이다. 대화를 몇 마디 건네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천천히 입을 열자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확실히 이질적이다. 머리에 달려 있는 커다란 두 개의 뿔도 그렇고 눈도 인간의 것이 아니다. “제 말을 이해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저기요?” 대답이 들려온 것은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로군요. 자기 소개부터 하는 게 좋겠군요. 저는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디아루기아….” “뭐, 서로 오해가 조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설명을 드리고는 싶지만 지금 당장은 힘들 것 같군요. 일단은 저희의 통제에 따라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훔친 것은 저희가 아닙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큼… 엄연히 저희를 공격한 것은 당신이 먼저라는 겁니다.” “…….” “통제에 따라주시지 않는다면 다소 거친 방법을 사용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과정에서 아이는 안전할 거라는 걸 전제로 말씀 드리는 겁니다. 아이에게는 그 어떤 해도 끼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약속 드리겠습니다.” “인, 인간의 약속은 믿을 수 없습….” “믿을지 믿지 않을지에 대한 선택권은 당신에게 없습니다. 제 말을 따라야 되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아….” 계속해서 이쪽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게 당연하다. 나였어도 그녀처럼 주변의 모든 상황을 의심했을 테니까. 다시 한번 마음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순식간. 조금 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파악해야 대화하기가 더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설 등급의 몬스터 디아루기아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어?’ 오랜만에 보는 정상적인 기벽. 존재 자체가 위험했기 때문에 혹시라도 정하얀이나 차희라 같은 종류의 녀석은 아닌지에 대한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이쪽의 생각보다 정상적인 기벽에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좋은데?’ 방금 전까지는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기벽을 보는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꽂혀온 것이 당연. 성향이 온순한 어머니에 고유 기벽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이 대륙에서 살면서 지금까지 이런 정상적인 성격과 성향을 본 게 얼마만인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거 엄청 좋은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는 거다. 눈앞의 있는 드래곤의 능력치와 그 능력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갑작스레 든든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목숨을 공유한다는 점도 생각해 보면 이쪽에게 무척이나 유리한 이야기. 수명이 늘어나는지 늘어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디아루기아는 자식 때문에라도 살아야 되는 입장에 처해 있다. 이쪽이 죽기라도 한다면 소중한 자식이 위험에 맨몸으로 내던져지는 상황일 테니 어쩌면 나보다 내 목숨에 대해서 신경 써야 하는 것은 그녀일지도 모른다. 몬스터 웨이브를 만들 수 있는 능력과 거대한 마력, 높은 지능과 강철 같은 뿔과 꼬리, 서쪽 성벽을 한꺼번에 뚫어낸 돌파력까지. 당했다는 표현이 이상하다. 오히려 기연이라도 얻은 것 같은 느낌에 입꼬리가 올라간 것은 당연지사. ‘용의 배우자!’ 이제는 자력으로 올리기 힘든 마력 포인트도 5나 얻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지.’ 연금술사로서 살아 있는 드래곤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누가 얻을 수 있겠는가. 제대로 된 협조만 받아낸다면 이쪽은 무료로 저쪽의 비늘이든 뿔이든 무작정 얻어낼 수 있다. 죽은 시체보다 얻기 힘들다는 게 살아 있는 실험체다. 물론 그녀와 내가 생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거친 짓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그러진 얼굴이 미소로 뒤덮이는 것은 순식간. 갑작스러운 이쪽의 태세전환에 디아루기아는 조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그녀의 몸을 일으키며 슬그머니 어깨를 부여잡자 조금 흠칫 거리기는 했지만 몸이 그대로 딸려 들어 올려지는 것이 느껴진다. “약속은 지킵니다.” “네….” “이쪽 역시 많은 인간이 죽었습니다.” “…….” “물론 상황은 이해합니다만 피차 어쩔 수 없다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는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일단은 신병을 구속하겠습니다. 물론 저희 입장에서는 눈 가리고 아웅이겠지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저희 쪽에서도 많은 배려를 했다는 것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이는….” “자녀분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하하.” “…….” “이제는 제 아이이기도 하니까요. 푸흐헤헷.” 작게 귓가에 속삭인 마지막 한마디. 정신없는 와중에 자신을 뭔 짓을 했는지 이제야 깨달은 모양인지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이거 둘만의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자식에 대한 사랑은 진짜. 외통수를 맞은 것은 내가 아니라 디아루기아다. ‘아빠가 잘해줄게!’ # 180 회귀자 사용설명서 180화 수성전의 끝(1) ‘아빠가 잘해 줄게!’ 원치 않은 자식이기는 했지만 이제는 뭐 상관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노후를 책임져 줄 든든한 보험이 나타났으니 소리라도 지르는 것이 맞다. 앞을 보니 아직까지 입을 벌린 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디아루기아가 시야에 비쳤다. 오만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어와 있는 얼굴은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표정. 그렇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뭐 원치 않은 상황이기는 했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거… 참….” “아으….” “아! 일단은 들어가 계시죠. 일을 마무리하고 곧바로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푸흡. 잠시 후에 봅시다. 우리 아가도 엄마 말 잘 듣고 있어야 한다.” “누… 누가! 아, 아가라는….”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아무튼 관련된 이야기는 일이 끝난 이후에 합시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괜한 소란을 일으키시면 안 됩니다. 저도 거친 방법을 이용하기는 싫으니까요. 제 자식이 다치길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푸흐헤핫.” “…….” 멍한 표정을 뒤로하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지사. 수성전이 슬슬 마무리되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굳이 내가 함께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쪽은 이번 수성전에 책임을 지고 있는 총지휘관이다. 승리를 축하하는 현장에 함께 있어야 되는 것이 맞다. 그다지 많은 것을 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생색은 내야했기 때문이다. 디아루기아와 함께 하고 싶기는 했지만 그녀와 아기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은 붉은용병으로도 충분. 허드렛일을 해준 단원들에게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니 녀석들 역시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흐음….’ 천천히 성벽 위로 발걸음을 옮기자 몬스터들의 시체가 밑에 깔려 있는 것이 보였다. 피 냄새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성벽 위로 올라오는 녀석들도 눈에 띄었고 상황을 파악하긴 했는지 성벽 반대쪽으로 도망치는 녀석들도 보인다. 더 이상 웨이브는 오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아니, 그녀의 신병을 이쪽에서 꽉 잡고 있는 이상 더 이상의 웨이브는 없다. 성벽 위에 있는 인간들은 대부분이 탈진상태였지만 눈에 띄게 줄어든 몬스터를 보고서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밀리지 마!”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마라!” 콰아아아아아앙!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열심히 몬스터들을 막아내고 있는 모습이 멋지기는 하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을 보니 우리 파티 역시 성벽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몬스터를 막아내고 있는 듯한 느낌. 정하얀은 여전히 입술을 꽉 깨문 채로 마법을 뿌리고 있었고 김현성 역시 검을 휘둘러 올라오려고 하는 녀석들의 목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많은 경험치를 먹지 못한 이쪽으로서도 급해진 것은 당연지사. 별것 아닌 마법이지만 계속해서 수인을 맺으며 아래쪽에 있는 녀석들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끊임없이 이빨을 터는 것은 덤이다. “탱커들은 무너진 서쪽 성벽 쪽으로 남은 몬스터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길을 막겠습니다!” 나도 뭔가 했다는 티를 내야 했으니까. 마무리가 중요하다는 거다. 콰직! 콰득! “크어어어어어어어!” 피슉. “아아아아악!” “막아!” 이쪽이 소환한 거대한 손이 떨어져 내리고 몬스터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체력적으로는 여유가 없지만 마력은 조금 여유가 있다. 총지휘관이 숨을 헐떡거리며 마법을 캐스팅하는 것은 모두에게도 귀감이 되는 것이 당연. 그동안 구르고 구른 덕분에 겉모습도 나쁘지 않다. 흙먼지로 뒤덮인 온 몸, 도망치는 와중에 생긴 상처, 물론 긁힌 상처이기는 하지만 열심히 수성전을 임한 사람들과 겉모습에 별 차이는 없다. 총지휘관이 직접 전장에 나가 솔선수범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물론 진실은 저 멀리에 있기는 하지만 누가 진실에 관심이 있겠는가. 상대적으로 깨끗해 보이는 지휘부와는 다르게 내 모습은 무척이나 더럽다. 슬그머니 성벽의 앞 쪽으로 자리를 잡으며 율리에나를 손에 쥔 채로 칼질을 하는 모습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율리에나를 얻었을 당시 김현성에게 배우기는 했지만 여전히 칼을 쥐는 방법은 어색하다. 정확히 말하면 율리에나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내 몸이 따라 움직인다고 보는 게 맞으리라. 올라오는 소형 몬스터 한 녀석의 목을 깔끔하게 날려 버린 이후에 다시 한번 음성 증폭 마법을 날려 크게 소리쳤다. “마지막까지 방심하면 안 됩니다! 마력이 떨어진 마법사들은 검과 창을 들어올리고! 신성력이 떨어진 사제들도 성벽의 밑으로 돌이라도 집어 던집시다. 우리의 고향입니다!” 물론 내 고향은 아니다. “승리가 눈앞에 있습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정말로 승리가 눈앞에 있다. 옆쪽에 일반 병사들 역시 창을 잡고 열심히 아래로 찌르는 모습. 일단 병사에 섞여 있는 분투하는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조금 멋져 보일 것 같은 느낌이다. ‘좋아.’ “힘을 내자! 전우들아!” “총지휘관님.” 물론 녀석들을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어깨를 두드려 주기도 하고 응원을 보내주기도 한다. “작은바위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마라!” 이제는 잊혀 가는 송정욱 녀석을 한 번 언급해 주는 것도 당연. 소형 몬스터 한 마리가 바로 옆에 있는 병사에게 달려든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잠깐 고민하기는 했지만 물려도 별로 아플 것 같지 않은 것 같은 녀석. 병사 녀석을 밀치니 자연스럽게 녀석이 공격한 것은 이쪽이 된다. 팔을 들어 올리니 날카로운 이빨이 팔로 들어오는 상처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은 있다. ‘더럽게 아프네!’ 이번 수성전에서 처음 얻은 상처. 잡고 있던 율리에나를 손에서 놓아버리는 순간 검이 날아가 내 팔을 물고 있는 녀석을 꿰뚫어 버렸다. 목숨을 구해진 녀석이 당황하는 게 눈에 보인다. “이기영 님! 상처를 치료……!” “별것 아닌 상처입니다. 신성력은 거두시지요.” “포… 포션은….” 그건 내 품에도 있지만 그걸 곧바로 사용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괜찮습니다. 신성력이나 남은 보급물자는 중상자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 정도 상처는 견딜 수 있습니다.” “이… 이기영 님….” “살아서 소중한 가족들을 다시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내 내구 능력치가 조금만 높았어도 피가 흘러내리는 연출은 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것으로 일단 겉모습은 완성. 한쪽 팔을 부여잡은 채로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누가 봐도 처절해 보일 것이다. ‘좋아.’ 더럽게 아프기는 하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직까지도 팔이 움직이기는 하지만 추욱 늘어뜨린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욱더 효과적인 것은 당연. 굳이 나를 봐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나마 안전해 보이는 지역에서 가장 처절하고 열심히 싸운다. 사랑스러운 회귀자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종횡무진하고 있는 모습. 중간 중간 치료해 주겠다고 말하는 사제의 말에는 고개를 젓는다. “이 정도 상처는 괜찮습니다.” “총지휘관님….” 오히려 품안에 있는 포션을 꺼내 다른 사람들을 먼저 치료하기도 한다. 별것 아니지만 이런 미담들이 모여 나중에 힘이 되어준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우 꽤 많네.’ 그렇지만 그 많던 몬스터들도 정리가 되고 있기는 하는 모양. 어느 순간부터는 몬스터들의 괴성보다는 인간들의 함성이 조금 더 커진다. 승리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내가 합류할 때부터 어느 정도 승패가 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만했다. 눈앞에 있는 적들을 정신없이 처리하고 있었던 사람들과는 다르게 전체적인 전황은 인간 쪽이 몬스터를 밀고 있었다는 걸 이미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긴장을 늦추지 마라!” 화살이 떨어진 궁수들도 검을 꺼내서 몬스터들을 찌르고 있었고 전사들도 이제는 완전히 날이 나가서 둔기가 되어버린 도끼로 올라온 중형 몬스터를 두드리고 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대부분의 병사들이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정리가 끝난 제3성벽에 있는 병사들은 무기를 떨어뜨리고 환호성을 내질렀고 제4성벽과 제2성벽에 있는 인원들도 무기를 떨어뜨리고 얼싸 안고 있는 상황. 나도 승리를 자축하고 싶기는 했지만 아직 정리가 덜 끝난 지역에 돌아가서 조금이라도 처절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옳다. 아마 곧 정리가 끝날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자리에 같이 있어야 했으니까. 조금 무리한 모양인지 숨이 차기는 했지만 그게 다 뭔 상관이란 말인가. 나와는 다르게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우리 파티원들 역시 열심히 달려오는 도중. 율리에나를 먼저 날리자 검이 날아가 병사와 싸우고 있었던 몬스터의 목을 꿰뚫는다. ‘히야!’ 병사가 시선을 돌린 곳에 위치한 것은 한쪽 팔을 늘어뜨리며 자신을 위기에서 구한 내 모습일 터. 굳이 숨을 몰아쉬지 않아도 내 숨이 저절로 거칠어진다. 정말로 피곤한 모양인지 나도 모르게 숨을 헐떡이게 되지만 이것도 연출이며 미담이다. ‘미담 적립!’ 이후에 평가를 위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거다. “감,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현성 역시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을 터. 하나둘 몬스터가 쓰러지고 거의 모든 성벽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뚫려 버린 서쪽 성벽에 있었던 몬스터도 대부분 거의 마무리 된 상황. ‘이겼다.’ 이제는 정말로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기울었다. 아니 기울었다는 말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서 있는 몬스터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아주 좋아.’ 물론 나 같은 경우에는 이후가 더 문제. 해결해야 할 일이 꽤나 많다. 희라 누나의 일도 해결해야 되고 한 번 이쪽을 도와준 샤오린과의 일도 마무리 지어야 한다. 김현성에게 설명할 것도 많고 무엇보다 디아루기아와 사랑스러운 자식을 꺼내 와야 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캐슬락에 있는 타 길드들이 그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떤 걸 챙겨줘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야 된다는 거다. ‘직업도… 정해야지.’ 전후처리도 문제. 저 많은 몬스터들의 사체를 정산해야 되고 피해 상황과 어떤 이권을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를 해야 한다는 거다. 본래 나 같은 놈들은 전쟁 중보다는 전이나 후가 더 바쁘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살았다! 살았다고!” “시발! 해냈어!!”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와중에도 함성소리는 점점 더 커져가는 도중. 사람들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동료를 잃어 눈물을 흘리는 놈들도 있었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녀석도 있다. 물론 대부분은 후자. 이럴 때 마지막으로 한마디 거드는 것 역시 내 역할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종전을 선언해야 했으니까. “우리는!” 이라고 입을 열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당연지사. 조금 머리가 어지럽다고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팽글팽글 머리가 도는 것 같은 느낌. 입을 열려고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슈바….’ 혹시라도 누군가 디아루기아를 죽인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나기는 했지만 그런 문제는 아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그렇게 많이 흘리지도 않았다. 이전에 디아루기아가 상처투성이였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때다. 이미 이쪽으로 일부의 대미지가 전달이 됐던 모양. 그 와중에 피를 흘리고 개처럼 뛰어다니는 것으로 모자라 마력까지 펑펑 썼으니 어쩌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 그래도 종전 선언은 하고 쓰러져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눈앞이 점점 흐릿해지고 깜깜해진다. 자꾸만 비틀비틀거리게 된다는 거다. 애써 정신을 부여잡아봤지만 무리다. ‘아니… 그림이 좋은 건가.’ 이미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탈진으로 쓰러지는 그림도… 나쁘지… 않을지도. “오빠아아아아아!” “형님!!!” “기영 씨!” 이쪽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르는 파티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제법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좋은 그림이다.’ 기왕이면 일어났을 때 전후처리에 대한 문제는 해결됐으면 좋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망자와 중상자를 낸 캐슬락 수성전. 탈진으로 기절해 모두의 귀감이 된 총지휘관에 몸에 생긴 상처는 고작 소형 몬스터에게 물린 상처 하나였다. # 181 회귀자 사용설명서 181화 수성전의 끝(2)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밝은 천장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 정신이 멍하기는 했지만 시간은 별로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막 자고 일어난 것 같은 기분에 몸이 조금 상쾌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당연지사. 오른팔에 나 있었던 상처도 치료되어 있었고 샤워라도 한 것처럼 온 몸이 보송보송한 느낌이었다. ‘누가 씻겨준 모양이네.’ 아마 마법으로 몸을 씻어냈을 것이다. 조금 눈앞이 조금 어지럽기는 했지만 문제는 없다. 시간이 조금씩 지날수록 괜찮아 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커다란 방 안에 혼자 남겨진 것을 보니 아마도 병실인 모양. 물론 병실치고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만큼 내가 대우받고 있다는 반증이니 기분 좋게 주변을 살펴볼 수 있었다. 문이 천천히 열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당연히 정하얀일 거라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의외의 마를린 영애. 곧바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기영 님!” 눈물을 흩뿌리며 이쪽으로 달려와 나를 한 번 안는 모습은 가관. 이후에는 깜짝 놀라서 떨어지기는 했지만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본인도 깜짝 놀랐는지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아마도 귀족 영애가 해야 할 행동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리라. 눈에 띄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에는 호감이 들어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이쪽은 마를린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귀엽기야 하지만….’ 별 다른 이득도 없고 얘까지 신경 쓰기에는 여러 가지로 머리가 아프다. “아, 마를린 영애.” 그렇지만 영업용 미소까지는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 당연.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기절하신 이후로 정확히 삼 일이 흘렀습니다. 혹시나 깨어나시지 않으시는 건 아니신지 걱정이 돼서….” “삼 일 말입니까?” “예, 이기영 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잠깐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오히려 기분이 좋다. ‘뒷정리는 거의 다 끝났겠네….’ 아니, 몬스터 사체의 정리만 해도 하루아침에 끝날 일이 아니니 아마 지금도 작업이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쪽 파티원들이 어째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에 대해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쪽의 몸에 이상이 없는 걸 보면 디아루기아도 무사히 잘 지내고 있는 모양.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것 말고도 궁금한 것이 많다. “그렇군요….”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이기영 님.” “마를린 영애?” “이렇게 몸이 망가질 때까지 캐슬락을 위해서 힘써주실 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릅니다. 히끄윽….” “하하하. 괜찮습니다. 고생은 다른 분들이 하셨지요. 제가 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기영 님이 하신 일이 없으시다니요! 캐슬락 자유민들을 지휘해 주신 것으로 모자라 지하수로에서 넘어오는 몬스터들을 막아주시고… 몸을 아끼지 않고 직접 전장에서 힘써주신 것을 캐슬락 내에 있는 모든 제국민이 지켜봤습니다! 끄윽….” “그건… 큼. 캐슬락을 위해 희생한 작은바위 길드와 송정욱 님이야 말로 진정한 영웅이시지요. 저는 그냥….” “물, 물론 그런 분들도 계시지만… 그보다 몸은… 몸은 조금 괜찮으십니까?” “네. 달리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몬스터에 깔리고 처참하게 죽어갔던 송정욱은 어찌되든 상관없는 모양이다. 일단은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를린 영애의 말처럼 지하수로에서 넘어오는 몬스터 같은 것은 없었다. 차희라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조혜진이 만들어낸 거짓말이었지만 거짓말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붉은용병이 그쪽에 몬스터 시체라도 몇 마리 던져놓은 것이리라. 차희라가 폭주해서 수성전 계획이 박살 났다는 건 녀석들로서도 외부로 알리면 안 되는 이야기였을 테니까. 직접 전장에 나서 힘써줬다는 부분도 마찬가지. 몸을 아끼지 않은 적은 없지만 그렇게 보였다고 하니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좋은데?’ 영애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제국민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뻔할 뻔자. 파란과 내가 얻어갈 이권에 적신호가 켜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입꼬리를 올리며 마를린 영애에게 입을 열자 곧바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은 혹시 어디에….” “어떤?” “저희 파티원과 차희라 님 말입니다. 그리고 혹시 디아루기아는? 뒷정리는 혹시 전부다 끝났습니까? 그 외에 다른 것들의 처리는 어떻게 됐는지….” “아! 정말 죄송합니다. 이기영 님. 쓰러져 계신 동안 일이 어떻게 됐는지 설명 드리는 게 먼저였는데….” “괜찮습니다, 마를린 영애. 죄송해할 일도 아니고요. 그저 제대로 수성전이 마무리됐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 그렇게 캐슬락을 신경 써주실 줄은 몰랐었는데….” “하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또다시 말을….” “아뇨. 정말로 괜찮습니다.” 조금은 흥분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마 내가 캐슬락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게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것으로 동일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 단순히 내 추측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만약에 내 생각이 맞다면 이런 오해는 사전에 차단하는 게 맞으리라. 조금은 불편하다는 듯이 어색한 미소를 짓자 초조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그녀가 시야에 비쳤다. “이기영 님이 기절하고 난 이후라고 한다면… 아! 일단 몬스터들의 사체 처리를 곧바로 시작했고 그건 지금도 하고 있는 도중입니다.” “그렇군요.” “혹시 살아남은 몬스터도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일단 자유민 분들이 먼저 정리를 해주시는 터라…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파란의 파티원 분들도….” “열심히겠군요.” “네. 붉은용병 길드와 함께 최전방에서 작업원들이 다치지 않게 보호해주고 계십니다.” “차희라 님도 혹시 함께하시고 계십니까?” “차희라 님은 급하게 린델로 돌아가셨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바쁘신 듯 보여서 미처 감사의 인사를 할 틈도 없었습니다. 캐슬락을 위해주신 영웅이신데… 제대로 대접도 해드리지 못한 것 같아 가슴이 아프기만 합니다.” ‘도망친 건가.’ “바쁜 일 말입니까?” “네. 급하게 처리해야 될 사안이 있으시다고… 아. 그리고 이건 차희라 님께서 전해주시라고 했던 편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영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네. 물론 바로 읽으셔도 됩니다. 이기영 님.” 편지에 걸려 있는 암호 마법을 해체한 이후 슬그머니 아래를 내려다보자 보고 싶은 모양인지 마를린 영애가 이쪽으로 얼굴을 내미는 것이 보였다. 당연하지만 보여줄 생각은 없다. 뭔가 사과의 말이라도 적혀 있을 것 같았지만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결과. [잊지도 말고 무시하지도 마세요. 린델에 사시는 파란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 이기영 님. 약속은 꼭 지키리라고 믿습니다. 좋은 타이밍에 좋은 초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신성제국의 명예주교 이기영 님께 공화국의 오호대장군 사좌 샤오린 드림] ‘샤오린?’ 아마 차희라와의 드잡이질이 끝나고 나서 그녀에게 편지를 전해준 모양이다. 마음 같아서는 무시하고 싶기는 하지만 이렇게 자기 신분까지 밝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호대장군….’ 뭐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공화국은 자유민에게 공직을 뿌리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꽤나 걸출해 보이는 직함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녀의 위치가 조금 높다는 것. 그리고 그녀와 비슷한 강자들이 최소 다섯은 더 있다는 것. 이후에 신성제국과 공화국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 줄은 알 수 없지만 조금 좋은 정보를 얻었다. ‘이건 이용할 수 있을 것 같고….’ 내 쪽에서도 위험을 감수해야 되기는 했지만 그녀 같은 경우에는 이후에 요긴하게 따로 쓸 데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공화국과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한 번은 부딪치게 되어 있으니까. ‘요즘 하는 걸 보면 그다지 긍정적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지금 당장은 공화국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다. 당장 내 앞가림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니까. 신성제국의 일 만으로도 이미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 당장 걱정이 되는 건 차희라. 얼굴 한 번 비치지 않고 순식간에 캐슬락을 빠져나간 것을 보면 제대로 얼굴을 마주치기 힘들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그야 쪽팔리긴 쪽팔리겠지….’ 20년 정도가 지난 이후에도 갑자기 생각이 난다면 이불을 걷어 차 버릴 정도의 흑역사. 왠지 모르게 예상이 가는 이유로 전선을 이탈한 이후에 개판을 쳐놨으니 부끄러운 것이 당연하리라.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등장하겠지만 의외로 소녀 같은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차희라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네?” “그… 논공행상은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기영 님과 김현성 님 그리고 파란의 길드원분들에게는 저희 캐슬락 영주성에서 직접 보상을 드릴 것 같습니다.” ‘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입꼬리가 올라가기는 한다. 나도 모르게 조금 더 친절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지금까지 조금 차가운 모습을 보였던 게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에는 호의가 깃들자 마를린 영애도 급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쪽이 뭘 원하는지 제대로 깨달은 것이다. “그렇지만 캐슬락은 이기영 님과 파란 길드 때문에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아버님께서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시고 있는 게 보여서….” “하하하….” “만약에 부족하시다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꼭….” “아닙니다. 마를린 영애의 마음만으로도 정말 충분합니다. 정말로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기도 하고요. 신성제국의 일원으로서 힘을 보탠 것에 불과합니다.” “아니요. 꼭 보답하게 해주세요.” “마를린 영애의 마음이 그런 것이라면… 어쩔 수 없군요.” “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지요. 당연한 일에 보상을 해주신 거니까요.” 마를린도 조금 호구 기질이 있는 것 같은 느낌. 이쪽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괜찮은 걸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자 붉어진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마를린 영애가 보인 것은 당연. 고마움에 표시로 뭔가 할 생각은 없다. 깨어난 김에 밀린 숙제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었으니까. “혹시 잡아온 몬스터는….” “네?” “머리에 뿔이 달려 있는 여성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아… 그 여자라면….” “무슨 일이라도?” “아마 캐슬락 지하 감옥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 쪽에서도 처우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터라… 그리고….” “네.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 몬스터가 이기영 님과 생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얼토당토하지 않는 소리를 해서….” ‘거기까지 말했나….’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배우자라고 말하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일단은 자신과 새끼의 목숨은 부지했어야 했었으니까. 얌전히 이쪽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아마 몸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것이 분명. 새끼와 함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 이전에 확인은 해봐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쪽으로 가봐야 될 것 같군요.” “네?” “디아루기아의 말은 사실입니다. 사실 저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었던 터라…. 지금으로선 그녀와 제가 목숨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밖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아!” “알려주신 건 감사합니다, 영애. 캐슬락 영주님과 함께 식사라도 하도록 하지요.” “네. 이기영 님! 물론입니다.” 곧바로 몸을 옮기는 것이 당연하다. ‘내 자식 잘 있나 볼까.’ 지금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녀의 일이었으니까. # 182 회귀자 사용설명서 182화 똘똘이(1) 대충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창문 아래로 비친 도시였다. 완전히 폐허가 된 시내가 비친다. 물론 본래 부수어 버리려고 했던 서쪽 지역이기는 했지만 복구 작업에 한참인 것을 보니 전투가 끝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하는….’ 지하에까지 생각이 미친 것은 당연지사. 본래 계획은 무너뜨리고 새롭게 만드는 것. 일이 조금 애매하게 마무리됐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정리는 지금부터 하기에도 충분하기는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꼭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 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복구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계획을 진행시키면 된다. 조금 늦었을 뿐이다. ‘머리 아프네.’ 여러모로 머리가 아파오는 문제들이 많았다. 디아루기아가 붙잡혀 있다는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창문으로 비치는 풍경들은 모두 제각각. 마를린 영애의 말처럼 몬스터의 사체 정리를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고 성벽 안쪽이나 건물에 달라붙어 있는 혈액을 지우는 이들도 눈에 띈다. 다들 얼굴에 조금씩 웃음꽃이 피었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달라진 건 없다. 모험가들 같은 경우에는 다들 한 단계씩 성장한 것 같은 느낌. 나름대로 열심히 경험치를 먹었을 테니 하위의 플레이어들 같은 경우에는 전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리라. ‘나도 마찬가지고….’ 우리 파티원들 역시 마찬가지. 이미 성장치가 높은 황정연이나 조혜진, 선희영은 눈에 띄는 변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정하얀과 김예리, 박덕구와 김현성은 새로운 직업을 얻는 것은 물론 스탯에서도 이득을 봤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야기 한번 해봐야겠는데….” 이번 원정의 목적이 레벨업인 만큼 모두들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결과물을 얻었을 것이다. 박덕구 역시 영웅 등급의 직업을 얻었을 지도 모른다. 파티원들이 강해지는 건 즐거운 일인 만큼 이쪽의 입가에도 슬그머니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경비 한 명이 인사를 건네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마 지하 감옥을 지키는 간수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기영 님? 일어나셨군요.” “아… 네. 그러니까 바란 님이시군요.” “그, 그렇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것에 깜작 놀란 모양. 나 정도로 높은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외우고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란 것 같았지만 당연히 이름을 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순히 마음의 눈으로 정보를 읽어본 것이 전부. 그렇지만 그걸 알릴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이것도 미담의 한 종류였으니까. “이곳에는 어쩐 일로 오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지하 감옥 안에 용무가 있어서 향하고 있는 도중이었습니다.” “혹시?” “네.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마침 길이 복잡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 도중이었는데 이거 운이 좋군요. 괜찮으시다면 안내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 “따로 하시고 계시는 일이 있으시다면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안내해 드려야지요. 저만 믿고 따라와 주시면 됩니다.” “하하하.” “그나저나 일어나시자마자 곧바로 이쪽으로 향하시다니 정말로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편하게 쉬셔도 괜찮으실 텐데….” “기절해 있는 동안 시간이 조금 흘렀으니까요. 밖을 보니 너나 가릴 것 없이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저렇게 있을 수 있는 것도 전부 이기영과 파란 길드 분들 덕분입니다.” “과찬입니다. 그보다 그 몬스터에 대한 관리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사실 저도 자세한 것은 잘 모릅니다. 이곳을 지키는 게 일이기는 하지만 마법사 분들이 오셔서 계속해서 뭔가를 확인하는 것 말고 어떻게 된 건지는…. 처음에는 구속구를 채우고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시켜 놨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결박을 해체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저에게 허락된 공간은 아니지만 아마 직접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들어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이, 길 열어드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길을 지키고 있는 몇몇 경비들이 이쪽에 고개를 숙여온 것은 당연지사. 마법으로 문을 잠가놓은 모양인지 주문을 외우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기 시작했다. 조금 환경이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생각보다는 깔끔한 모습. 여기저기에서 복잡한 마력술식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자극하지 않는다면 터지는 종류의 마법은 아니었다. 머리 위에 뿔을 달고 있는 익숙한 인형이 시야에 비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우리 자식도 있네.’ 새끼를 꼬옥 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혹시나 따로 억류하지는 않았는지 걱정하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한 결과 이렇게 하는 게 가장 좋다는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손과 발에는 수많은 마법진이 새겨진 마력 구속구를 차고 있는 걸 보니 나름의 대책은 강구했던 모양. 심지어는 목에도 뭔가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저런 걸로 컨트롤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니 일단은 저 상태로도 괜찮을 것이다. “키엑!” “아이고! 그래 아빠 왔다!” 나를 보고 짧게 울어버리는 작은 용은 제법 귀여운 모습.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은근슬쩍 나를 반가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디아루기아의 배우자로 선택받은 영향이 녀석에게도 전해지고 있는 모양. 꼬리를 살랑 살랑 흔들고 있는 걸 보니 내 생각이 맞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소중한 자식과는 다르게 우리 여편네는 자식을 꽉 쥔 채로 나를 경계하고 있다. 발버둥치는 아기 용을 꽉 잡고 있는 모습은 가관. 누가 봐도 저 꼬마는 이쪽으로 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손뼉을 딱딱 치며 아기용의 시선을 끌자 디아루기아가 몸을 조금 더 움츠리며 입을 열었다.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그녀의 시선에 안도라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는 것. 혹시나 내가 죽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던 모양이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만약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곤란한 것은 그녀일 테니까. “누가 아버지라는 건, 건가요?” “이거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섭섭합니다. 푸흐헷. 이제는 한 가족이 될 사이인데 이거 너무 딱딱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이고! 우리 아가! 아빠 보고 싶었어? 우쭈쭈!” “키엑!” “우리 똘똘이도 제가 보고 싶다고 난리를 치지 않습니까.” “똘똘이가 아닙니다….” “상의도 없이 이름을 막 지으신 겁니까? 이거 조금 섭섭하군요.” “애초에… 당신은….” “하하하. 갑자기 생긴 가족이기는 하지만 모두 당신이 선택한 일 아닙니까. 저도 조금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갑자기 아버지가 되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더군요. 아이고! 우리 똘똘이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키엑! 키엑! 키엑!”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키에에엑!” “디아루리아가 당신에게 호감을 품는 것은 제, 제가 배우자로 당신을 선택한 것 때문이지 당신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디아루리아라는 이름입니까. 상의라도 하고 지으시지…. 뭐 그래도 괜찮습니다. 저는 배우자의 의견을 수용하고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니까요. 그건 그렇고 정말로 다행입니다. 용의 배우자가 되는 것에 이런 부가기능도 심어져 있는 모양이군요. 혹시라도 자식에게 미움 받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었는데 말입니다.” “으득….” “우리 디아루리아, 아빠 품에 한 번 안겨야지!” “키엑에에엑!” 흥분해서 난리를 치는 우리 똘똘이를 여전히 안고 있는 모습. 지나치게 흥분한 녀석이 어미의 품을 빠져나오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꼬리를 흔들며 순식간에 이쪽에 뛰어 들어와 얼굴을 핥는 꼴을 보니 제법 귀엽게 느껴지기도 한다. 헥헥대며 이쪽을 향해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은 물론 자꾸만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은 꽤나 재미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디아루기아의 표정도 정말로 재미있다. 뭔가 믿었던 것에 배신이라도 받은 것 같은 표정. “아… 아가!” “어이구! 우리 똘똘이!” “아가 엄마한테 와야지!” “오이구! 오이구! 우리 똘똘이 잘한다! 잘한다!” “키에에에엑!” “아가! 엄마한테 오라는 소리 안 들리니?!” “우리 똘똘이 아빠가 비행기 태워줄게!” “키엑! 키엑! 헥헥! 헥!” “아… 아가….” “아이고! 아이고! 신났쪄? 우리 똘똘이?” “똘, 똘똘이가 아닙니다! 디… 디아루리아….” “똘똘아!” “키엑! 키엑! 헥헥헥!” ‘이 자식 지나치게 좋아하는데.’ 혹시라도 뭔가 위험한 기벽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기는 했지만 눈으로 확인해 보니 아직 기벽과 성향조차 생성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애초에 녀석의 성별도 아직 모르기도 하고 용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쪽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만무. 일단 오랜만에 아빠를 만난 반가움이라고 하는 게 맞으리라. 아이를 보는 것보다는 왠지 모르게 강아지를 보는 것 같은 느낌. 이런 종류의 녀석들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이 좁은 곳에서 엄마와 단둘이 심심했을 테니 비행기 놀이 같은 것에 환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거다. 잔뜩 흥분한 채로 콧김을 씩씩 뿜으며 꼬리를 흔드는 똘똘이는 누가 봐도 당장은 엄마보다는 나와 함께 있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아… 아가….” 그렇지만 디아루기아의 축 쳐진 모습은 외면할 수가 없는 모양. 슬그머니 이쪽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천천히 나를 자신의 어미 쪽으로 옮기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우리 똘똘이는 엄마와 아빠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거 우리 똘똘이가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아이고 귀여운 우리 똘똘이….” “똘똘이가 아니라 디, 디아루리아입니다.” “하하. 애칭입니다. 애칭. 이렇게 귀엽게 생겼는데 똘똘이면 어떻고 디아루리아면 어떻습니까? 그렇지 똘똘아?” “키엑! 헥헥! 키에에에에엑!” ‘이 자식 귀여운데.’ 처음에는 조금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보면 볼수록 귀여운 맛이 있다. 커다란 눈도 그렇고 프로펠라처럼 흔들리는 꼬리도 귀엽다. 처음과는 다르게 이쪽과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꽉 안겨 있는 모습은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 왠지 모르게 마음속이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계속해서 똘똘이와 다정한 모습을 보이자 디아루기아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 입을 열어온 것은 당연.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가장이 와이프와 자식을 보러온 것도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 그때는 어쩔 수 없었을 뿐입니다. 저는 당신 같은 인간을 우리 디아루리아의 아버지나 제 배우자로 인정할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당신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저는 이미 이 아이의 아버지이며 당신의 배우자입니다. 그건 당신이 선택한 일이 아닙니까. 상황을 보니 그 맹약과 비슷한 것 같은 건 취소할 수도 없어 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 똘똘이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인정할 생각이 없다니요. 똘똘이도 아빠가 아빠인 게 좋지?” “키엑! 헥헥!” “아… 아가….” “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만 혹시 맹약을 취소하는 게 가능한 겁니까? 아직 제가 용에 대해서 잘 몰라서 묻는 질문입니다.” “…….” “취소할 수 없군요.” “…….” “이거 어쩔 수 없군요. 저도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지만 이렇게 귀여운 똘똘이를 보고 모른 척할 수는 없으니까요.” “굳이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제 실, 실수였고 제 아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뿐입니다. 애초에 당신은 디아루리아를 데리고 저를 협박!” “이 여편네가 애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아… 디, 디아루리아 그런 게 아니란다.” “쯧. 똘똘이를 납치한 것은 저희가 아니라고 제가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인간의 법에도 몬스터의 알이나 아이를 납치하는 것은 금기입니다. 범죄자들은 몇몇 빼고는 이미 합당한 벌을 받은 상태이고요. 그때 저는 우리 똘똘이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뿐이지 뭘 하려는 생각은 결코 없었습니다.” “거짓말….” “정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우리 똘똘이를 좋아하는 걸 눈으로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인간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몸을 회복한 뒤에 다시 숲으로 들어갈 겁니다. 디아루리아와 함께 말입니다. 저는 더 이상 인간과 관여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으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빠져 나갈 겁니다….” “아아. 그렇군요. 이거 참 유감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 “제가 삼 일 동안 기절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 “소형 몬스터에게 물린 상처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얼마나 아팠는지 과다 출혈과 마력을 많이 쓴 부작용으로 그만 죽을 뻔했지 뭡니까. 인간의 몸은 아주 아주 유약하지 않습니까. 별것 아닌 상처에도 픽픽 쓰러져 죽기도 하고….” “아….” “만약에 당신이 아가와 함께 숲으로 향한 뒤에 갑자기 제가 픽 쓰러져 죽기라도 한다면 우리 똘똘이에게 아주 유감일 것 같군요. 엄마 아빠도 없이 혼자 커야 할 텐데…. 이거 정말로 유감이겠습니다. 푸흐헤하헤핫.” 디아루기아의 흔들리는 동공이 시야에 들어왔다. # 183 회귀자 사용설명서 183화 똘똘이(2) “만약에 당신이 아가와 함께 숲으로 향한 뒤에 갑자기 제가 픽 쓰러져 죽기라도 한다면 우리 똘똘이에게 아주 유감일 것 같군요. 엄마 아빠도 없이 혼자 커야 할 텐데… 이거 정말로 유감이겠습니다. 푸흐헤하헤핫.” 디아루기아의 흔들리는 동공이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당황하는 듯했지만 이내 천천히 눈에는 살의가 감돌기 시작.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보인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온순하고 호구에 가깝지만 자식을 지키기 위한 어머니가 무슨 돌발행동을 할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니까. “혹시라도 이쪽을 어떻게 해서 목숨만 유지한 채로 가둬놓는다는 선택지는 고르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아빠 없이 클 똘똘이가 불쌍하기도 하고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않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요.” “그런 생각은….” “당신이 권력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저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제법 중요하게 분류되는 사람입니다. 아껴주시는 사람도 많고… 주변 여성분들에게 과분할 정도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생각대로 하시기까지는 조금 힘드실 겁니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했으면서 무슨….’ 조금 더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슬그머니 똘똘이를 살짝 이쪽에 끌어들이니 화들짝 놀라는 디아루기아가 시야에 비쳤다. 물론 굳이 제지하지는 않는 듯한 모습. 생각 없이 꼬리를 흔들고 헥헥거리는 그녀의 자식이 보였기 때문이리라. 바닥에 작은 원을 그리자 이게 뭐냐는 듯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이곳이 당신이 지금 자리하고 있는 캐슬락이라는 도시입니다.” “…….” “그리고 이 중간 크기의 원이 플레이어들이 살아가고 있는 자유 도시 린델이라는 곳이고… 이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원이 인간들의 나라. 베니고어 신성 제국입니다.” “그게 지금 이야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요?” “단순히 가지고 있는 땅의 크기만 다른 게 아니라는 겁니다. 땅의 크기만큼 인구도 많고 당연히 싸울 수 있는 병력의 양이나 질에도 차이가 있죠.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당신은 캐슬락을 건드렸고 한 도시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패배해 이곳에 있습니다.” “전력으로 싸웠다면 달라졌을 겁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끈질깁니다. 그리고 비열하기도 하지요. 아! 제 이야기는 아니니 노려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이 이 거대한 나라의 인원을 전부 죽일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럴 것 같지는 않군요. 다시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거대한 땅에서도 제법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당신도 그걸 이해하고 있었으니 저를 배우자로 선택한 것이겠죠.” “인간은….” “만약에 당신이 저를 납치해 어디엔가 가둬놓는다고 가정합시다. 아마 몇몇 인간은 저를 구하기 위해 당신을 찾아갈 겁니다. 물론 디아루기아의 맹렬한 공격에 대부분의 인간들은 산화하겠지만 인간은 끈질길 겁니다. 가치를 알고 있거든요.” “무슨 가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당신의 몸에 대한 가치입니다.” 화들짝 놀라는 것이 눈에 보인다. 왠지 모르게 붉어져 있는 얼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 것이 보였지만 아쉽게도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까놓고 말하면 제가 납치당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디아루기아라는 전설 등급의 몬스터 개체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일 겁니다. 당신의 우뚝 솟은 뿔과 아름답고 견고한 비늘 그리고 잘빠진 꼬리, 심지어 당신의 심장이나 보석 같은 눈.” “그, 그런 식으로 칭찬해도….”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하핫. 제가 앞서 설명 드렸던 모든 것이 인간에게 꽤나 요긴하게 쓰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음… 막대한 재화를 손에 넣을 수 있기도 하고요. 재화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까?” “잘은 알지 못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알겠습니다.” “당신의 몸은 돈이 됩니다. 가죽은 갑옷으로 만들 수 있고 뿔은 무기로 만들 수 있지요. 당신의 신체를 구성하는 모든 기관은 좋은 실험 재료로 쓰이고 천문학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이 당신을 찾아가지 않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디아루기아라는 개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 “인간은 탐욕스럽습니다. 전설 등급의 몬스터 디아루기아가 어느날 갑자기 짠 하고 모습을 드러냈으니 당신이 이곳을 빠져나간다고 해도 결국에 인간들은 당신을 찾아갈 겁니다. 이미 이 커다란 원 안에 들어가 있는 인간들은 대부분 당신에 대한 소식을 접했을 거고 방패막이 없어진다면 개떼같이 당신에게 달려들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 “아마 긴 싸움이 되겠죠. 귀여운 똘똘이를 인질로 삼아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추악하고 더러운 인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그건 당신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계속 말씀드리지만 디아루리아입니다.” “아무튼 간에 결과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뭘 선택하든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겁니다. 이미 당신은 인간사회에 아주 깊숙한 곳에서 발을 들였습니다. 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라는 거죠.” “불합리합니다.” “네?” “불합리합니다. 애초에 가만히 있던 저희를 먼저 핍박한 것이 인간들입니다. 저희는 그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요. 제 알을 먼저 훔쳐 달아난 것도 인간들이고 저와 제 아이를 떨어뜨려 놓은 것도 인간이었습니다. 저라고 싸우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얼굴이 조금은 일그러져 있었다. 조용히 분노를 보내오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으리라. “그저 아이와 조용히 살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인간들과 전쟁을 치루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건 이미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당신도 먹고 살기 위해 다른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지 않습니까.” 천천히 똘똘이를 쓰다듬자 녀석이 다시 한번 헥헥거리며 이쪽으로 달라붙어 왔다. 나와 똘똘이의 그런 모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디아루기아는 이쪽의 손에서 똘똘이를 가져가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단순히 탐욕으로 만들어진 이기심과는 엄연히 다른 행위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별반 다르지는 않습니다. 너무 깊게 파고들게 되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 이 이야기는 이제 여기서 그만하도록 하죠. 충분히 배경 설명이 된 것 같으니까요. 여기서 잠깐 주제를 바꿔서 이야기해 봅시다. 똘똘아, 이리와.” “키엑.” “지금 당신이 살아 있는 이유가 누구 덕분일까요?” “그건….” “아마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전설 등급의 몬스터 디아루기아는 캐슬락을 침공했고 수많은 사상자와 부상자를 만들어내고 천문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피해를 끼쳤습니다. 물론 몬스터의 사체 같은 부수적인 이득은 챙길 수 있지만 엄연히 말하면 인류에게 당신은 적이라는 겁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저희를 먼저 핍박한 것은 인간들입니다.” “인간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당신은 지성체가 아니라 몬스터일 뿐이니까요. 엄연히 말하면 제가 당신의 편의를 봐주고 있다는 겁니다. 목숨을 공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똘똘이와 당신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지하 감옥에서 나름대로 편하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어디까지나 당신이 저와 연관되어 있다는 이유 하나뿐이에요.” “…….” “극단적으로 말해서 당신이 저를 배우자로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물론 사랑스러운 디아루리아까지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당신도 그걸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저와 당신의 생명을 연결해 버린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이야기하면 당신을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건 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으득….” “목숨만 붙여 놓으면 아무 문제가 없지요? 꼬리나 뿔을 잘라 가거나 가죽을 벗겨낸다고 해서 당신이 죽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막말로 계속해서 똘똘이를 이쪽이 붙잡고 있는다고 가정하면 당신이 뭘 할 수 있었을까요? 결과적으로 생각해 보면 저는 당신을 아주 신사적으로 대우해 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똘똘아?” “키엑! 헥헥헥!” “그 어떤 고통을 주지 않고 자식과 함께 생활하도록 배려해 주고 있다는 겁니다. 하하핫하핫.” 아마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 내 말은 틀린 것이 없으니까. 그녀는 아직 완전히 자신의 몸을 회복하지 못했고 그녀의 아이를 지켜야만 하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다. “저는 용의 생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유추할 수 있는 게 있지요. 어째서 용이 배우자를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 “애초에 왜 전설 등급의 몬스터 디아루기아는 자신의 알을 도둑맞았을까요?” “그건….” “아마 영양이 필요했을 겁니다. 용도 엄연히 에너지를 소비하는 개체고 24시간 아이에게 붙어 있는다는 건 힘든 일이었을 테니까요. 육아에 대한 준비도 해야 했을 테고 겨울을 날 준비를 해야 했을 지도 모릅니다. 둥지를 만들고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해야 됐을지도 모르겠군요.” “맞습니다.” “육아라는 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당신 혼자 살아가기에 숲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이상 조금 문제가 달라졌을 테니까요. 혼자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용족이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라는 추측은 어떻습니까?” “맞… 습니다.” “그거 다행이로군요. 필요할 것 같지 않은 배우자가 어째서 등장하는지도 알겠고요. 주변에 있는 적들로부터 아이를 지켜야 할 테니 아이를 함께 키우고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까?” “맞습니다.” “정답을 맞춘다는 것은 기분이 좋군요. 자, 그럼 이번에는 당신이 정답을 말할 차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미 당신은 인간과 이미 관계를 맺은 상태입니다. 관여하기 싫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관련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당신이 살아갈 환경이 깊은 숲속에서 인간의 도시로 옮겨졌을 때. 이상적인 배우자가 누구일 것 같습니까?” “…….” “우리 똘똘이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고 최소한의 자유를 보장해 주며 원하는 교육과 질 좋고 양 많은 먹이를 공급해 줄 수 있는 게 누구일 것 같습니까? 단단하고 안전한 둥지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가장이 어디에 있을까요? 당신이 찾아 헤매던 이상적인 배우자가 누구일까요?”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것을 보니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다. 나와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는 똘똘이는 이쪽의 손을 핥기 바빴지만 내 말은 틀린 것이 없다. 그녀가 숲에서 살기로 결심했다면 당연히 나 같은 배우자는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짐승의 기준으로 봤을 때 나는 유약하고 이기심 많고 힘없는 인간이었으니까. 다른 용족이 더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녀에게 어울리는 배우자는 같은 용이나 그보다 더한 상위 개체일지도 모른다. 용의 둥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힘세고 막강한 전설 등급의 몬스터 말이다. 그렇지만 상황이 아주 많이 달라졌다. 모든 게 내 말처럼 되지는 않겠지만 이미 그녀는 인간과 관계를 맺었고 함께 살아가야 되는 상황에 놓였다. 결과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녀는 꽤 이상적인 배우자를 자신의 손으로 고른 셈이다. “당신… 입니다.” “맞습니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자 흠칫 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녀를 일으키려고 했을 뿐 다른 의도는 없다. 어째서 내가 자신을 일으키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는지 조용히 이쪽의 손에 끌려오는 듯하다. “일단은 지하 감옥에서 나갑시다. 똘똘이도 안에만 있으면 답답할 테니까요.” “네?” “그동안 고생하셨으니 몸도 풀고 맛좋은 음식도 먹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바깥에서 어떻게 설명할지에 대해서는 천천히 생각하는 게 좋겠지만 배우자라고 알리는 것은 당신도 불편할 테니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것을 생각해 보는 게 좋겠군요. 사실 저도 원치 않았던 상태에서 가정을 이뤘기 때문에 이 정도는 배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만나고 있는 여성체도 있었고… 뭐 여러 가지로 복잡하니까요. 좋은 남편은 되지 못하겠지만 좋은 아버지는 될 수 있을 것 같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당신도 그편이 더 좋지요?” “아니….” “해야 될 일이 많습니다. 일단 당신의 소유를 저로 한다는 문서를 받아야 하기도 하고… 당신이 끼친 피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다뤄야 합니다. 인간 세상은 조금 복잡해요. 옳지. 똘똘아, 밖으로 나가자.” “키엑! 키엑! 헥헥!” “우리 귀여운 똘똘이도 마찬가지로 처리해야 될 문제들이 많고요.” 갑작스럽게 태세 전환된 이쪽이 조금은 당황스러운지 일이 진행되는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자신과 똘똘이가 안전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는 모양.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다. 얄미워 보였던 내가 나름대로 배우자가 보여줘야 할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일 테니까. 그녀가 이쪽을 향해 입을 연 것은 지하 감옥을 빠져나가기 전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인간은 탐욕스럽습니다.” “네네. 그렇지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딱히 거짓말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눈으로 보면 보이는 게 있으니까요.” “네. 저도 탐욕스러운 인간입니다.” “원하는 게 뭡니까.” “하하하. 별것 아닙니다. 제 안전과 자신의 안전에 대해서 조금 신경 써주시고… 제 실험에 함께 해주시면 됩니다. 기껏해야 바늘로 찔리는 것 정도가 전부고 생명에도 지장이 없을 겁니다. 가만히 누워 있는 걸로 끝입니다.” “실험?” “아. 제가 말씀을 안 드렸군요. 저는 연금술사입니다.” “연금술사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함께 천천히 알아가도록 합시다.” “정말 겨우 그거면 되는 겁니까?” “네?” “겨우 그거면 둥지와 먹이 그리고 우리 디아루리아의 안전을 제공해 주시는 겁니까?” “통제만 잘 따라와 주신다면 더한 것도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고… 저도 귀여운 똘똘이에게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으니까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건 물론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도록 이 한 몸 불살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겨우가 아닙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 “당신 몸은 돈이 된다고요. 가만히 누워계시면 모든 게 다 해결됩니다. 하하핫.” 내가 내뱉고도 왠지 쓰레기 같은 발언.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디아루기아가 시야에 비쳤다. # 184 회귀자 사용설명서 184화 제국 8좌(1) 많은 것이 변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변하고 있는 도중이라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최우선 사항은 일단 디아루기아의 소유권을 이쪽으로 확실히 돌리는 것.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본래 캐슬락 쪽에서 나에게 보상을 내려주기로 하기도 했었고 이번 원정에 가장 큰 활약을 한 것은 파란 길드라는 생각이 도처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쉬워하는 길드나 클랜은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몬스터의 사체를 조금 더 떼어주는 것으로 입을 막았다. 함께 고향을 지켜낸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굳이 녀석들에게 소중한 디아루기아의 비늘과 가죽을 공급할 필요는 없는 것이 현실. 조금 이기적인 생각이기는 했지만 디아루기아는 엄연히 이쪽이 얻은 성과였다. 공유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다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문제는 디아루기아가 캐슬락에 입힌 피해였다. 유족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해줘야 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한 것이 당연지사. 나 개인적으로도 충분한 보상을 해주는 것은 물론 캐슬락에서도 그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표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물론 마무리할 수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일을 끝냈다는 거다. 혹시나 몬스터 웨이브의 주범이 디아루기아가 아니냐에 대한 의심은 있었지만 교황청에서 조사 나온 이단 심문관들이 그 의구심을 정면으로 배제한 것은 당연지사. ‘권력이 이래서 좋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명예주교라는 제대로 이용했다. 캐슬락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유다 대주교를 시작으로 평소에 연락을 하고 지냈던 교황청의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 제시카 주교와 이단 심문관 헬레나, 교황청의 안두린 대주교는 물론 나를 사랑해 마지않는 바젤 추기경에게도 끊임없이 청원을 넣은 결과물이었다. 캐슬락 지하의 비밀 경매장은 계속해서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작은바위가 똘똘이를 납치했다는 사실 역시 숨길 수밖에 없었고 똘똘이 역시 몬스터 웨이브의 영향을 받은 개체였다는 걸로 마무리. 디아루기아 말고도 다른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이단 심문관과 신성기사단은 몬스터 웨이브의 원인이 캐슬락 깊은 숲 안에 있는 정체불명의 던전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당연히 이단으로 낙인찍히기 싫은 대부분의 인간들은 교황청의 발표에 토를 달지 않았다. 나름대로 깔끔하다면 깔끔한 결말. 물론 이 모든 일에 대전제는 디아루기아와 나의 공식적인 관계가 깔려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용의 선택을 받은 자.’ 공식적으로 디아루기아는 정체불명의 던전에 지배 받아 도시로 흘러들어 온 가련한 용이었고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기영이라는 인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작위적이고 말도 되지 않는 설정을 꾸역꾸역 밀어 붙인 것. 삼류 소설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설정이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의 새끼를 지켜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용의 배우자를 선택했다는 시나리오보다는 떨 쓰레기 같고 설득력 있다. 애초에 신에게 선택 받은 용사도 있는 마당에 용의 선택을 받았다는 설정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이야기다. 전설급의 네임드 몬스터가 신성제국의 품 안에 굴러들어오게 생겼으니 황제파 역시 이쪽을 적극지지해준 것은 당연지사. 자주 국방에 신경 써주시는 제국 기사단은 용의 위험성에 대해서 신경 쓰면서도 한편으로는 디아루기아라는 개체가 제국을 수호하는 용이 되는 것을 은근슬쩍 바라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용은 귀하니까.” “무슨 말씀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네?” “그… 감사합니다.” “뭐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러 가지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이 잘 풀린 건 당신 덕분이기도 하니까요.” “네?” “용은 귀중합니다. 베니고어 신성제국의 역사보다 당신 개인의 역사가 더 오래됐으니 인간들 입장에서는 당신의 존재가 대단하다고 느껴지기도 하겠죠. 무려 4,000년 동안이나 살아온 존재니까요. 용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서적들도 거의 유실상태. 제가 당신을 붙잡고 싶은 것처럼 신성제국도 온전한 용을 보유하고 싶었을 겁니다.” “아….” “물론 기본적으로 제가 가지고 있는 힘이 도움이 되기야 했지만 이번 결과물은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서로 얽혀서 만들어낸 훌륭한 결과물이니 너무 감사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똘똘아?” “키엑! 헥헥!” “아이고 우리 똘똘이 이리 와.” “헥! 헥! 헥!” “아빠랑 비행기 놀이 할까?” “헥헥! 키엑!” “오이구! 우리 똘똘이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키엑! 키엑! 키엑!” 물론 달라진 것은 이런 큰 배경만이 아니었다. ‘이 자식… 이거 너무 귀여운데.’ 적당히 상대하려고 했던 똘똘이 녀석이 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귀여웠던 것. 박수 소리에 맞춰 소파에서 혼자 방방 뛰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귀엽게 느껴질 것이다. 커다란 눈망울이 꿈뻑꿈뻑거리고 살랑살랑 흔들리는 엉덩이와 꼬리. 조금 짜증나게 느껴졌던 녀석의 울음소리도 이제는 귀엽게 들려온다. 계속해서 이쪽에 달라붙어 얼굴을 핥는 행동은 간혹 귀찮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똘똘이는 은근슬쩍 이쪽의 마음에 파고들었다. 물론 외형이 외형이다 보니 진짜 자식이라기보다는 애완동물을 기르고 있는 느낌이었지만 어째서 지구에 있는 사람들이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동물에 집착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정도. “오이구! 이리 와, 똘똘아!” “헥헥!” “똘똘이 간식 먹을까?” “키엑! 키엑! 키엑! 헥헥! 키엑!” 간식과 산책이라는 말에 미친 듯이 반응하며 꼬리를 흔들고 있는 모습은 나도 모르게 꽉 껴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간, 간식은 아까도 먹었지 않습니까!” “원래 애들은 먹으면서 크는 겁니다. 그렇지, 똘똘아?” “키엑!” “간식은 하루에 두 번입니다. 그렇게 정해져 있어요.” “똘똘이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간식정도야 어떻습니까. 오히려 영양을 축적할 수 있어서 좋은 거 아닙니까?” “영양 섭취는 이미 충분하다 못해 과할 정도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탕은 좋은 음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음식이고… 어차피 몇 년이 지난 이후에는 실컷 먹을 수 있으니 지금은 적정량을 유지하는 게 좋습니다.” “엄마가 너무 딱딱해서 별로지?” “키엑!” “디아루리아… 엄, 엄마는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란다….” “내일부터는 두 개씩만 먹이도록 하지요. 오늘은 하나만 더 먹자, 똘똘아?” “키엑! 헥!” 품 안에서 크기가 조금 큰 동그란 사탕을 꺼내자 벌써부터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가관. 눈앞에서 사탕이 왔다갔다 거리자 끊임없이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몸은 가만히 있었지만 꼬리는 사정없이 바닥을 치는 중. 입안에 살짝 사탕을 넣어주자 사정없이 방안을 뛰어다니는 모습은 역시 귀엽다. “키엑! 헥헥! 헥!” “어이구 우리 똘똘이 신났쪄?” “헥헥헥! 헥! 키엑!”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다시 한번 손뼉을 치니 소파 위에서 방방 뛰는 것은 당연지사. 저 모습을 보기 위해서 간식을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가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기뻐하자 간식 세 개는 안 된다고 주장하던 디아루기아 역시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아직은 나를 경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기는 했지만 최소한 이쪽이 똘똘이를 무척 좋아한다는 건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좋은 아버지 흉내를 열심히 내려고 할 필요도 없이 나는 그녀가 이상으로 그리던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이놈이 너무 귀엽잖아.’ 나 스스로도 조금 과할 정도의 사랑을 주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정도니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뻔할 뻔자. 최근에는 조용히 웃으며 나와 똘똘이를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똘똘이가 섰다!” “어머. 디아루리아.”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녀석이 두 발로 굳건히 서 있는 모습. 이 녀석은 하루에 한 번씩 새로운 걸 보여준다. ‘무럭무럭 자라서 아빠 노후도 부탁한다, 똘똘아!’ 라는 생각이 아예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간에 똘똘이가 귀엽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거다. 파란의 다른 파티원들 역시 녀석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고 있으니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리라. 물론 모든 파티원이 녀석을 귀여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디아루기아와 디아루리아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파티원이 누구인지는 뻔할 뻔자. “오… 오빠.”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저 정하얀이었다. “아. 하얀아 왔어? 오늘도 수고 많았어.” “아, 아니요. 별거 아니었어요. 작업하시는 분들을 지켜보는 것뿐이었고… 이제는 몬스터 사체 정리도 거의 다 끝났으니까요. 그보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응. 물론. 이제는 건강해. 마력 탈진 때문에 기절한 것뿐이었고 특별히 상처가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아마 조금 있다가 전부다 모일 것 같아요. 현성 씨가 오랜만에 파티원끼리 함께 식사하자고 해서….” “응.” “오늘은 시간되시는 건가요?” “물론.” “다, 다행이다….” 디아루기아와 똘똘이에게 나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게 그 원인이었다. 깨어난 나를 본 이후에 울고불고 할 틈도 없이 디아루기아를 이쪽으로 데려오기 위한 작업을 시작해야 됐던 것은 당연지사. 지금이야 조금 여유가 생겨 간혹 시간을 같이 보내기는 했지만 당장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로 바빴었다. 일이 일인 만큼 그 와중에도 똘똘이와 디아루기아와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정하얀 입장에서는 뭔가 나를 빼앗긴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디아루기아는 몬스터이기는 하지만 저래 보여도 인간 형태로 있는 모습은 꽤나 미형이었고 조심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내가 똘똘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제법 봤을 테니 말이다. 말은 안 했지만…. ‘사이좋은 가족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결정적이었던 것은 나와 디아루기아가 생명을 공유한다고 발표한 것에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상실감을 느낀 모양인지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내가 찾아 갔을 때에도 한 번은 방문을 열어주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뭔가 마법을 연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과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뿐이다. 만약 정하얀이 마법을 연구했다면 그 마법은 아마도 나와 자신의 생명을 연결하는 마법이었을 테니까.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얘라면 완성했을 수도 있어.’ 어쩌면 더한 걸 완성했을 수도 있다. 본래부터 마법에 대한 재능이 천재적이기도 했고 이번 웨이브를 통해 엄청난 성장을 했으니 말이다. 정하얀 역시 똘똘이만큼이나 관리가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쪽에서 조금 더 신경 써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막말로 용의 배우자가 되었다고 발표라도 했다면 정하얀을 컨트롤하기가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똘똘이와 디아루기아를 못 본 것처럼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만 봐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한 사이에 정하얀이 슬쩍 팔짱을 끼며 몸을 밀착 시켜왔다. “지금 같이 가요!” 왠지 모르게 디아루기아와 똘똘이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 같은 느낌. 대놓고 외도를 할 정도로 강심장은 아니다 보니 이런 부분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디아루기아.” “…….” “디아루리아도 얌전히 있어야 한다.” “키엑! 헥헥!” “빨, 빨리 가요. 오빠! 모두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불안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정하얀과 마찬가지로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 똘똘이. 아쉽지만 여기서는 녀석의 마음을 외면하는 것이 베스트리라. “키엑! 키엑!” “빨리 가요, 오빠!” 문을 닫고 나가니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 숨을 몰아쉬는 모습. 본능적으로 뭔가 눈치챈 듯한 느낌에 괜스레 불안해진다. 적당히 관심을 돌려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 당연. 입을 여니 곧바로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오늘 현성 씨가 모여야 된다고 한 이유가 따로 있어?” “네.” “응?” “아, 아직 오빠는… 듣지 못하셨나보네요.” “응. 뭐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었나?”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 신성제국에서 이번에 제국 8좌를 뽑는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어?” “파란 길드에서 두 명이나 나올지도 모른다고 말이 많아요.” ‘이건 또 뭔 소리야.’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에 조금은 당황스러워 질 수밖에 없었다. # 185 회귀자 사용설명서 185화 제국 8좌(2) 대충 이해가 가기는 간다. ‘제국 8좌?’ 어떤 의도로 신성제국이 이런 자리를 만들려고 하는지 말이다. 신성제국은 플레이어들에게 감투를 씌워주지 않는다. 내가 교황청의 명예주교로 발탁된 것은 그만큼 이례적인 일이었고 제국의 커다란 파란을 몰고왔다. 간단하게 말하면 나 이외에는 플레이어 들은 제국의 공직과는 무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거다. 대형길드의 길드 마스터들의 대한 대우나 강자들의 대한 대우는 기본적으로 원수급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지만 제국의 정치에 개입하지는 말라고 선을 그어놓은 것이다. 제국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 플레이어들이 제국의 일에 너무 깊게 관여하는 것은 황제파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닐 테니까. ‘지금 와서….’ 어쩌면 자신들의 목숨을 던지면서 까지 캐슬락을 지키려고 했던 플레이어들 때문에 생각을 고쳐먹었을 확률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외적인 이유가 될 수는 있어도 고작 몬스터 웨이브 하나 막았다는 걸로는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 ‘공화국을 의식했나?’ 나쁘지 않은 추측이다. 공화국과 신성제국은 예전부터 묘한 라이벌관계에 있었으니까. 신성제국이 높은 건축물을 올리면 공화국 역시 높은 건축물을 올린다. 공화국이 새로운 마법이나 던전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면 제국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종류의 연구를 대외적으로 발표한다. 국제적인 관계에서 항상 이런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거다. 공화국의 오호대장군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는 샤오린을 생각해보면 신성제국도 뭔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확률이 높다. 공화국 대장군들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아직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몇몇의 세작을 공화국 내에 집어넣었을 테니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공화국은 다섯이니 이쪽은 여덟명으로! 그 외에도 황제파와 교황청 사이의 묘한 줄다리기와 이권싸움,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정치적인 요소가 얽혀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것만도 해도 플레이어이면서도 명예주교인 나를 황제파가 견제하려고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파란에서 2명이 들어갈 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제국민은 제국8좌에 포함시키지 않은 건가.’ 내 예상들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는 김현성과 대화를 해봐야 알 수 있으리라. 몇 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지금은 김현성을 만나기 껄끄럽기는 했지만 모두가 함께 모이는 자리이니 그다지 상관없을 것이다. “헤헤헤헤….” “왜?” “오랜만에 같이 있으니까 좋아서요.” “그렇네.” 복잡한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하얀은 싱글방글 웃고 있었다. ‘정하얀은 아니겠지.’ 아닐 확률이 높다. 아니 사실상 우리 파란에서 8좌에 해당되는 인물을 찾기가 어렵다. 엄연히 우리 파티는 성장 중인 루키라는 인식이 있었고 정하얀이나 김예리, 선희영, 조혜진. 모두가 강자라고 하기에는 힘들었으니까. ‘아마 우리 회귀자겠지.’ 한 명만 꼽는다면 무조건 김현성이다. 물론 아직까지 크게 보여준 게 없기는 하지만 몬스터 웨이브에서 차희라의 빈자리를 혼자 메운 것을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납득이 가기는 하니까.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기 바빴던 나는 김현성의 활약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미담만 퍼뜨리고 다닌 나와는 다르게 김현성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제국민과 자유민들에게 각인시켰다. ‘희라 누나가 참가를 안 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되나.’ 차희라가 있었다면 상대적으로 활약이 묻힐 수도 있었겠지만 김현성을 확실히 캐슬락 성벽 수성전의 중심에 있었다는 거다. 내 복잡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하얀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음을 보내며 이쪽의 옆에 꼭 달라붙어 나에게 기대듯 발걸음을 옮기는 중,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정하얀과 함께 걷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평소의 정하얀은 제법 귀여웠으니까. 이윽고 식당의 문을 여니 파티원들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박덕구와 딱 달라 붙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황정연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 옆에 앉아있는 것은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선희영과 조혜진. ‘은근히 닮았네.’ 그리고 꼬맹이 김예리를 챙겨주고 있는 김현성이 눈에 띄었다. 이쪽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역시나 김현성.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리는 표정은 나쁘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일이 끝나자마자 이 것 저 것 물어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내 생각과는 반대로 천천히 이쪽을 두고 보면서 적당한 타이밍을 노리는 모양이다. ‘녀석 답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김현성의 마음속에 찝찝한 감정이 남아있는 건 이쪽의 손해인 만큼 둘이 될 수 있는 상황을 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김현성이 손을 드는 것을 확인했는지 박덕구가 뒤를 돌아본 것은 당연지사. 곧바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형님!” “그래.” “크으… 거 용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오. 왜 이렇게 얼굴보기가 힘드오?” “호들갑 떨지 마.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니니까.” “아뇨. 충분히 대단한 일이지요. 평소 신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는 이기영신도이기 때문에 이런….” “정말로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선희영 님.” 나의 품성을 칭찬하는 선희영의 목소리를 듣고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조혜진의 표정이 괜스레 신경 쓰인다. 그렇지만 곧 이쪽의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 그다지 연관되고 싶지는 않은 모양.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우리를 향해 입을 연 것은 황정연이었다. “두 분은 오늘도 딱 달라붙어있으시네요. 로맨틱해라.” “아… 감, 감사합니다.” “여기 앉으세요. 하얀 씨. 기영 씨.” “네. 정연 씨.” 파티원들은 보는 건 오랜만이지만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다. 김예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그게 인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 역시 꼬맹이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대충 자리를 잡고 한 번 둘러본 파티원들은 전체적으로 크게 성장해 있는 모습. ‘당연한 건가.’ 나도 직업을 정하지 않았지만 일단은 전직을 앞두고 있는 상태다. 김예리와 김현성, 정하얀은 이미 전직을 마친 모습. 시간이 나면 조금 자세히 들여 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모든 파티원들이 전직을 했을 거라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선희영과 황정연, 조혜진은 능력치만 올랐을 뿐 아직까지 새로운 직업을 얻지는 못한 것 같았다. ‘애네들은… 이미 성장치가 높았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박덕구다. ‘자꾸 아쉽네. 얘는….’ 나처럼 전직을 미루고 있는지 아니면 직업을 얻지 못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희귀등급의 직업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내구 능력치와 체력 능력치가 오르긴 올랐지만 성장치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물론 다른 일반인들에 비하면 능력치가 좋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기는 했지만 규격외 괴물들이 드글드글 거리고 있는 김현성 파티에서 박덕구가 일반인이다. ‘언제 한 번 충격요법이라도 써야 될 것 같은데….’ 박덕구는 노력하고 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게 나다. 그렇지만 통 진전을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면 뭔가 막혀있는 벽이 꽉 녀석을 막고있는 모양. 지금 당장 녀석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기는 했지만 일단은 녀석보다 더 급한 일이 있는 만큼 시선을 돌려 김현성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녀석에게 쏠린 것은 당연지사. 길드의 리더가 첫말을 떼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기대에 부응하듯 녀석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당연지사. 확실히 사람을 잡아 끌어당기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이렇게 다들 모인 것은 조금 오랜만인 것 같군요. 전투가 있을 때보다 후에 일 처리를 하는 게 더 바쁜 것 같습니다. 하하하….” “…….” 농담이라고 던진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분위기는 웃을 분위기가 아니다. 김현성은 확실히 이런 쪽으로는 재능이 없다. 녀석 역시 그걸 느끼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큼. 아, 아무튼 모두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저를 믿고 따라와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따라오고 말고가 뭐가 있겠습니까. 길드 마스터의 명이었고….” “아니요. 혜진씨.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들에게는 이번이 첫 대규모 전투였을 겁니다. 특히나 하얀 씨나 덕구씨… 그리고 예리와 기영 씨까지 말입니다. 이제 들어 온지 1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잠자코 전선에 선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아… 그랬었군요. 그러고 보니 네 분은 대규모 전투가 처음이었군요.” “네.” ‘그렇네.’ 보통의 상식이라면 그렇다. 아마 부들부들 떨면서 도망이라도 치는 게 좋은 것은 아닌가 고민하는 게 정상적인 반응일터. 박덕구가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는 것이 보였다. ‘무서웠구나.’ 회귀자와 희라누나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나 역시 무서웠으니 박덕구도 두려웠을 것이다. 김예리는 여전히 무표정이었기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정하얀은 지금 김현성이 뭔 말을 하는지 이해조차 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얘는 안 무서워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현성 씨가 저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성벽 위에 설 수 있었던 것 뿐입니다. 실제로도 현성 씨가 여러번 목숨을 구해주시기도 했고요.” “기영이 형님 말이 맞소. 사실 우리 형씨 아니었으면 벌써 몇 번은 죽었겠지. 안 무서웠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지만 뭐… 나름대로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감사를 전해야 하는 건 이쪽이 맞지.” “네. 맞, 오빠 말이 맞아요.” “응. 기영이 아저씨 말이 맞아.” 파티원들이 고개를 젓자 나름 감동한 듯한 표정. 감성 하나는 풍부하다.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됨됨이가 되기는 됐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부끄럽다는 듯이 괜스레 헛기침을 하는 꼴은 가관. 우리 회귀자가 이렇게 귀여울 리 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방금 보여준 모습은 조금 재미있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여러분. 아! 그리고 오늘 이렇게 다른 분들을 호출한 이유는 이번에 제국에서 발표할 제국 8좌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기 위해섭니다. 기영 씨는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쪽으로 오기 전에 하얀이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너무 의외라….” “네. 확실히 저도 조금 갑작스럽기는 하더군요. 그런 움직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타이밍이 조금 이른 감이 있어서….” “형씨는 혹시 관련해서 들은 게 있는 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기영 씨도 마찬가지로 사전에 이런 이야기는 공지 받지 못한 걸로 보이고요. 제가 전해 듣지 못했다는 건 부자연스러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기영 씨가 이 일을 미리 듣지 못했다는 건….” 교황파가 아니라 황제파에서 주최한 거라고 생각 하는 게 맞다. 물론 교황파에서도 움직임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아무튼 간에 이 일의 주체는 황제파라는 거다. “일단 제국 8좌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드려야겠군요.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면 제국 8좌는 제국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는 8명의 인물을 뽑아 직위와 권한을 주는 시스템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자세한 건 조금 더 알아봐야 될 것 같지만 사실상 귀족의 작위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겠죠.” “그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니요? 아니 그것보다 우리 길드에 제국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는 인물 중 2명이 있다는 거요?” “무력의 수치도 수치겠지만 아마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가 얽혀 있을 겁니다.” “그야 형씨가 강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박덕구의 말은 일부 동감이 가기는 간다. 김현성이 강한 건 맞지만 제국에서 가장 강한 8명에 들어갈 거라는 건 아직 무리가 있다. 설명을 위해 내가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나 대신 입을 연 것은 조혜진. 곧바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마 제국민들은 제외했을 겁니다. 제국민까지 포함해야 된다면 8명이라는 숫자는 너무 적으니까요. 왕성의 빅터하르트님. 그리고 교황청이 보유하고 있는 3명의 템플러들은 차희라님보다 조금 더 강하거나 비슷하다고 들었습니다. 이 분들만 다 합쳐도 4명이니….” “그… 빨갱이 아줌마 보다 말이요? 빅터하르트 영감님은 들어본 적이 있기는 한데… 템, 템플러는 또 뭐요?” “교황청이 보유하고 있는 가장 강한 3명의 기사를 칭하는 말 입니다. 추기경급이상의 사제의 신변에 위험이 생겼을 때만 움직이는 무력집단으로 개개인의 무력은 전술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제인 희영씨가 잘 알고 계시겠군요.” “네. 조혜진님이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추기경급의 사제님들은 교황청에서 큰 축을 담당하시고 계시니까요. 아마 이기영님도 추기경급으로 올라가신다면….” 만약에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꽤나 행복한 일이 일어나리라. 아직은 먼 이야기인 만큼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고 조혜진이 다시 한 번 말을 이었다. “제국민들을 빼고 생각해보면 얼추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붉은용병의 차희라님. 그리고 검은백조의 박연주님. 요조라 길드의 카스가노 유노님. 죽은 이토 소우타를 대신할 강자가 실리아에서 한 분 나올 거고… 마찬가지로 대만인들이 사는 자유도시 다완에서도 거대길드의 두 분이 선택받으시겠죠.” “아….” “물론 제국 내에 있는 플레이어들 중에 강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많기는 하지만 은거하는 이들이나 세력을 일구지 않은 이들은 어느 정도 배제했을 확률이 큽니다. 어쩌면 제국 8좌의 자리를 거절한 몇몇 이들 때문에 저희 파란에게 기회가 왔을 수도 있고요.” “거절할 이유가 있소?” “권한과 직위가 있는 만큼 책임도 딸려 들어올 겁니다. 그런 족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이들은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을 거고요. 마침 제국 8좌를 발표하려고 했던 타이밍에 캐슬락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으니 이쪽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에 주목했을 겁니다. 아마 대상은….” 말을 해도 되냐는 듯 뜸을 들이고 있는 듯한 느낌. 여기서 부터는 김현성이 말을 이어받아도 상관없으리라. “네. 저와 기영 씨 둘이 함께 8좌의 일원으로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형님 말이요?!” 나를 빤히 바라보는 박덕구의 얼굴이 보였다. # 186 회귀자 사용설명서 186화 제국 8좌(3) “네. 저와 기영 씨 둘이 함께 8좌의 일원으로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형님 말이요?!” 이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눈에 보인다. 박덕구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내가 강하느냐 강하지 않느냐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형님이? 형님이 제국 8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기본적으로 이쪽의 신체능력은 보잘 것 없었으니까. 막말로 녀석이 주먹을 휘두르면 이쪽은 곧바로 치명상이다. 물론 율리에나가 있기는 하지만 미각성상태의 율리에나는 그다지 효율이 높지 않은 것이 현실. 전술적으로 쓸데가 많은 연금마법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정하얀의 마법과 비교하면 전등에 반딧불을 비비는 격이라는 거다. 쉽게 말하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무력은 그야말로 구더기 이하. 물론 박덕구는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어떻게 내가 제국 8좌에 추천을 받을 수 있는지 의문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형님도….” “기영 씨 같은 경우에는 아마….” “네. 디아루기아의 존재가 결정적이었을 겁니다.” 뭐 그렇다는 거다. “제국의 입장에서 용의 선택을 받은 인간을 배제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인간과 교류를 원하는 최초의 용을 묶어두고 싶은 것도 이유가 될 수도 있고… 1차원 적으로 생각해 봐도 디아루기아가 가지고 있는 힘은 제국 8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을 겁니다. 그런 용을 소유하고 있는 게 기영 씨라는 걸 생각해 보면 오히려 선택을 받지 않는 게 이상하죠.” “아….” “조금 더 쉽게 말씀드린다면 테이밍 할 수 없는 몬스터를 소환한 테이머나 규격 외의 소환수를 소환한 소환사와 다를 바 없게 비춰질 겁니다. 부 길드 마스터의 존재는요. 그리고….” “엉?”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연금술사로써도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가 있으니까요. 영웅등급 이상의 포션을 만들 수 있는 건 현재로써도 거의 유일하기도 하고… 물론 직업 자체가 전투 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다지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을 테지만요.” “그, 그렇구만….” “나는 테이머나 소환수처럼 자신의 의지대로 디아루기아를 부릴 수 있는 건 아니야.” “그… 그래도 그게 어디요 형님! 거, 엄청 대단한 거 아니요?” 대단하다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조혜진의 말대로 디아루기아의 존재 자체가 규격 외로 비춰질 수도 있었으니까. 지금은 상당히 몸이 상한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막말로 브레스라도 한 번 날린다고 가정하면 웬만한 고유마법을 뺨때릴 화력이 나올 것이 분명. 물론 그녀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지만 남들의 시선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요한 것은 내가 그녀에게 선택을 받았고 그녀의 힘을 빌려올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박덕구는 깜짝 놀라며 이 것 저 것 떠들어댔지만 의외로 조금은 씁쓸한 표정. ‘하… 이새끼….’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뻔할 뻔자. 아마 자신만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륙에 진입한 것 함께였는데 어느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격차가 벌려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 질투라기보다는 자신의 대한 자괴감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주변에 괴물들이 많을 뿐 자신 역시 성장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위로차 무슨 말이라도 던져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당연지사. 적당히 말을 건네니 곧바로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히 정치적으로 얽혀 감투를 쓰게 될 뿐이야. 영주성 쪽에서 교황청을 의식하고 억지로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교황청에서 억지로 나를 밀어 넣었을 수도 있겠지 어찌됐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거다. 덕구야.” “그래도 선택받았다는 건 대단한 거 아니요. 형님은 원래 신성제국의 명예주교이기도 하고… 대륙에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제일 똑똑한 사람인데….” “나는 똑똑한 게 아니라 남들보다 조금 더 조심해서 움직이는 것 뿐이야.” “그게 그거 아니요. 게다가 이번 수성전을 훌륭히 지휘하기도 했으니 아마 그런 점도 대단하게 비춰졌을 거요. 길드 마스터 형씨도 그렇고… 아무튼 축하해줄 일이 많아져서 기쁘구만… 이야 다들 날아오르는구만!” “사실 받아들일지 받아들이지 않을지는 아직 결정 나지 않았지만….” “네. 이건 어디까지나 길드 마스터님과 부 길드 마스터님의 생각에 달려있는 문제니까요.” 조혜진의 마지막 말에는 나 역시 김현성 녀석을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는 부분. 정하얀은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그저 몸을 기대며 눈을 꿈뻑이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파티원들의 표정은 진지하다. 앞으로 어떤 행보를 걸을지가 결정된 문제였으니까. ‘아마도….’ 받아들일 것이다. 나쁠 건 없어 보이니까. “저 같은 경우에는 일단 받아들이는 게 옳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책임이 따라 들어오기는 하지만 개인으로서도 그리고 길드로서도 거절하는 게 수지에 맞으니까요. 앞으로 파란이 성장하는데 더 큰 힘이 될 겁니다. 기영 씨 같은 경우에는 기영 씨가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기왕이면 받아들이는 걸 추천하고 싶군요.” 이게 맞다. “저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제국을 대표하는 얼굴이 된다는 건 아무래도 활동하는데 유리할 테니까요.”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하하….” “해서… 기영 씨와 저는 잠깐 영주성 쪽에 다녀와야 될 것 같습니다.” “네?!” 지금까지 아무 반응도 없던 정하얀이 격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물론 이어서 들려온 말에는 다시 잠잠해 졌지만 갑자기 커다란 소리를 지른 정하얀 때문에 김현성도 깜짝 놀란 모양이다. “아. 하얀 씨도 함께 가게 될 테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네….” “혜진씨는 이곳에 남아서 뒤처리를 해주시고 정연 씨는 나머지를 데리고 길드로 복귀한 이후 이상희 길드 고문의 지휘 아래 준비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슬슬 이군요.” “무슨 준비를….” “다음 기수가 올 겁니다.” “아!” 완전히 기억 속에서 잊고 있었던 사실. 보통 1년에 한 번씩 열린다고 했으니 시기를 생각해 보면 지금쯤 열리는 것이 맞다. 아마 튜토리얼은 이미 진행 중일 것이 분명, 시험을 얼마나 빠르게 통과할지에 따라 며칠에서 몇 개월 정도가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 한 번 빠르네.’ “이번 튜토리얼 던전의 관리는 붉은용병이 맡기는 하겠지만… 아무리 저희 차례가 아니라 하더라도 신입의 영입은 꼭 필요한 일이니까요.” “혹시 길드원들을 얼마나 늘리실 건지….” “딱히 몇 명을 영입해야 된다고 결정이 난 건 없습니다만… 마음이 맞고 파란에 잘 녹아들 수 있는 인재라면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네.” “차희라님과의 협의 하에 영입 우선권을 가져오는 방향도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 전투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바빠질 겁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훈련과 사냥을 게을리 하시면 안 됩니다. 큼… 그럼 지루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요. 식사라도 하면서 편안하게 밀린 이야기라도 나눠 보도록 합시다.” 김현성의 말이 끝나자마자 분위기가 조금 시끌벅적 해졌다. 간만에 편안한 분위기에서 모두가 모이게 된 것이니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이곳에서 가장 시간을 오래 보낸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건 재미있다. 방에서 나를 기다릴 똘똘이가 조금 눈에 밟히기는 했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 지 제대로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시종일관 뭔가 표정이 좋지 않은 박덕구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그나마 녀석은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었다. “오빠 한 잔 더 드세요.” “아니. 나는 이 정도로 충분해.” “좋, 좋은 날이잖아요.” “그럼 한 잔만 더 마실까.” “네!” 그 와중에도 정하얀은 무슨 생각이 있는지 나에게 계속 술을 먹이려고 하고 있는 중. 적당히 취하는 건 좋지만 왠지 모르게 더는 마시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거절 한 것은 당연지사. 물론 끈질기고 필사적인 정하얀을 뿌리치기는 조금 어려웠다. 덕구 녀석은 뭔 생각인지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술을 마실 기분은 아닌 모양. 이쪽이 권하는데도 불구하고 적당히 웃으면서 거절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라도 해 주는 게 좋을까 싶어 타이밍을 보고 있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에는 심지어 술자리를 슬그머니 벗어나 버렸다. 녀석 뿐 만이 아니다. 미성년자인 김예리나 애초에 술을 즐기지 않는 사제 선희영은 자리를 뜬지 오래다. 이미 밤이 깊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그럼 저도 일어나겠습니다. 기영 씨.” “네.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현성 씨.” “네.” 조금은 자연스럽게 마무리 된 자리. 정하얀은 여전히 내 옆을 지키고 있었고 이제는 이쪽도 방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도 슬슬 일어나자. 하얀아.” “아! 네! 많이 취하셨어요?” “아니야. 아직 멀쩡해.” “아….” ‘왜 아쉬워하는 건데….’ “시간도 늦었으니까 이만 들어가서 자야지.” “네….” “아니면 잠깐 밤 산책이라도 하러 나갈까?” “정, 정말요?” “물론.” 최근에 그녀에게 좀 소홀했기 때문에 이 정도 이벤트는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스가 쌓일 만큼 쌓였을 테니 이런 식으로라도 풀어주는 게 중요하다. 참다 참다 터지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 이제는 조금 쌀쌀한 것 같은 날씨였지만 아직까지는 걸을 만 하다. 하늘 위에는 달이 떠 있었고 로맨틱하다면 로맨틱하다고 할 수 있는 분위기. 맞잡은 정하얀의 손이 달달달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래봤자 영주성안의 정원을 돌아다니는 것 뿐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조용한 밤의 영주성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방금 들었어?” “네.” 궁금증이 든 것이 당연. 자꾸만 어둡고 침침한 곳으로 나를 이끌려고 하는 정하얀의 손을 쥐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시야에 비친 것은 박덕구와 김예리였다. ‘뭐야 쟤네는….’ 잠깐 동안 의아한 표정으로 녀석들을 바라보기는 했지만 뭘 하고 있는 지에 대해 눈치 채는 것이 당연.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는 모습만 봐도 답이 나온다. 이쪽이 눈을 깜빡이기가 무섭게 박덕구에게 단검을 겨누고 달려 나간 김예리가 녀석의 목을 노리기 시작. 황급히 방패를 들어 올렸지만 우리 꼬맹이의 공격의 반응하는 것이 전부다. “후압!” 여전히 독창적인 녀석의 짧은 기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박덕구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간다. 녀석을 놀리듯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피해내는 꼬맹이의 움직임은 장관. ‘고양이야 뭐야.’ 공중에서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이 남들보다 더 긴 것 같은 느낌이다. 허공에 반쯤 떠있는 꼬맹이를 방패로 휘둘러 쳐내려고 하지만 공중에서 몸을 비튼 채로 공격을 피해낸다. 그것도 모자라 방패위에 살짝 내려앉은 모습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 당황스러워 하는 건 나 뿐 만이 아니다. 박덕구 역시 크게 당황한 것 같은 모습. 아마 내가 느끼는 황당함 보다 녀석이 느끼는 황당함이 더 클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까. 입을 벌리는 녀석에게 날아들어 온 것은 김예리의 발길질. 머리를 그대로 발로 차 버리자 박덕구 녀석이 곧바로 옆 쪽 바닥에 쳐 박혔다. 곧바로 단검을 들고 녀석의 목에 겨누는 걸로 짧은 승부는 끝. 조용한 김예리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약해.” “아직 안 끝났다니깐.” “벌써 끝났어… 자야 될 시간에 안자면… 혼나. 그리고 이미 시간 많이 지났어.” “끄응… 한 번만 더 하자.” “싫어. 재미없는걸.” “마지막으로!” “덕구 아저씨. 진짜로 했으면 아저씨. 벌써 몇 번은 죽었어. 그러니까 오늘은 이걸로 끝. 내일 다시. 수련은 좋으니까. 재미없지만.” 말에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 저 꼬맹이는 감정표현과 의사소통이 서투르니까. 그렇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에 꽂히는 모양인지 박덕구의 표정이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내일 큼… 내일 연습을 봐주마.” “틀려. 내가 아저씨. 연습을 봐주는 거야.” “그게 그거지 뭐. 그럼 먼저 들어 가봐라. 예리야.” “응. 아저씨도 푹 쉬어.” “그리고…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 “얼굴. 오빠 얼굴 아니야. 아저씨 얼굴이야.” “…….” 마지막까지 팩트폭력을 멈추지 않는 모습을 보면 어쩌면 노리고 말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는 든다. 김예리가 조용히 자리를 뜨는 모습을 박덕구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모습. 나도 저 꼬맹이와는 저렇게 길게 이야기 해 본적이 없다. 아마 박덕구와 김예리는 이미 수차례 이런 만남을 가져왔던 것 같았다. ‘쯧….’ 김예리가 간 이후에도 박덕구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벽에 기대 철푸덕 자리에 주저앉았다. 계속해서 이쪽을 끌어당기기 바빴던 정하얀도 제법 박덕구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다. 온 몸은 이미 망신창이. 땀으로 범벅이 된 것은 물론 흙먼지 속에서 얼마나 뒹굴었는지 전체적으로 몸이 더러워진 느낌이다. 술자리에서 빨리 벗어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 짓을 했다고 가정해 보면 벌써 몇 시간째 김예리에게 얻어맞았다는 게 되니 아마 저런 모습이 당연할 것이다. 커다란 덩치를 가진 놈이 얼굴을 무릎 사이로 파묻는 장면은 솔직히 볼 만한 장면은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눈에 보였으니 말이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줘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저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녀석이 다시 한 번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후욱….” 힘이 드는지 부들 부들 떨리는 몸. “후욱….” 그렇지만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는 게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의미 없는 짓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저렇게 몇 번 검을 휘두른다고 벌어질 격차도 아닐뿐더러 저런 훈련 방법은 그다지 효율적으로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단순하게 허공에 검을 휘두른다고 강해질 수 있으면 이 대륙에 있는 거의 모든 이들이 강자가 됐을 것이다. 박덕구의 눈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 노력의 벽이 아닌 재능의 벽이다. 당장 그걸 메운다고 해도 금방 격차가 벌어질 거고… 어떻게 다시 따라잡는다고 해도 결국에는 다시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내가 할 말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박덕구 같은 인간은 김현성이나 김예리를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 하다. 시스템이 말해준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에 위로 올라가는 것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고 트로피를 차지하는 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간들이다. 까놓고 말해 박덕구가 위에 있는 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렇지만 멍청한 짓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녀석이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귓가로 내려 꽂혔으니까.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 187 회귀자 사용설명서 187화 미련한 놈(1) “돌아가자 하얀아.” “네….” 녀석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최소한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쪽이 말을 건네 봤자 별로 머릿속에는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박덕구와 평소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정하얀도 조금은 씁쓸해 보이는 것 같은 표정, 다른 파티원들도 물론 소중하기는 하지만 정하얀에게는 김현성과 박덕구가 그나마 가장 중요한 인간으로 분류되어있을 테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다. 튜토리얼 때부터 함께한 것은 물론 외톨이였던 자신을 케어해준 인간들이 바로 녀석들 이었으니까. 특히나 박덕구는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성추행범을 두들겨 패줬으니 아마 나를 제외한다면 덕구에게 가장 정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큐피트이기도 했고….’ 혹시라도 녀석이 우리를 발견하지는 않을까 살금 살금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녀석은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듯한 모습.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로 내려와 꽂히는 게 조금은 거슬렸다. ‘나는 더 잘 할 수 있다.’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녀석에게 해준 말을 계속해서 되새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처음에는 단순히 겁먹은 녀석을 움직이게 하기 위한 말 이었지만 지금은 그 말이 녀석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내 입장에서도 조금은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난 녀석을 믿는다. 그렇지만 상태창이 보여주는 현실은 잔인하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다는 건 개소리야.’ 물론 몇몇에게는 너무나도 커다란 결과를 선물해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노력만으로 뒤집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존재한다. 특히나 녀석이 목표로 하는 게 천재일 경우에는 노력은 너무나도 쉽게 인간의 기대를 배신한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검을 휘두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보였다. 애써 시선을 돌렸지만 녀석의 모습은 계속해서 머릿속에 남아있다. 당연히 나는 녀석의 노력이 배신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녀석의 성장치가 정말로 한계에 부딪쳐 김현성 파티를 따라올 수가 없다고 판단했을 때는 나는 어느 쪽의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되기는 한다. ‘죽을 거야.’ 녀석을 버린다 버리지 않는다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후위에 서있고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가지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전위의 실수란 파티의 전멸, 아니 파티의 전멸이 문제가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걸 상대로 싸웠을 때 박덕구는 틀림없이 죽는다. 차희라의 경우가 그랬다. 만약에 차희라가 적과 아군을 완전히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미쳐있는 상태였다면 박덕구는 첫 일격을 받아내지도 못한 채로 사망. 그 자리에서 곧바로 몸이 터져 죽었을 거다. 앞으로 김현성 파티가 가는 길이 제법 험난할 거라는 걸 생각해 보면 박덕구는 오히려 머무른 채로 있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머리 아프네. 시바… 전직도 해야 되는데….’ 안 그래도 네 번 째로 선택할 직업 문제 때문에 여러 가지로 신경 쓸 게 많은 타이밍. 생각할 게 더 많아진 느낌이었다. ***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마스터 뒷정리는 모두 끝내 놓겠습니다.” “천천히 해주셔도 됩니다. 혜진씨.” “린델의 일도 마무리 해 놓을 테니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오세요. 현성 씨. 기영 씨도 하얀 씨랑 오붓하게 잘 다녀오시고요.” “린델에서 뵙겠습니다. 정연 씨.” “잘 다녀오세요. 기영 씨.” “금방 돌아올 겁니다. 빈민촌을 잘 부탁드립니다. 희영씨.” “네.” 수도로 떠나기 전에 파티원들과 짧게 작별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지만 한 쪽에서는 굉장히 따가운 시선이 날아 들어온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캐슬락의 블랙마켓의 건설의 부탁을 받은 조혜진도 아니었고 김현성과 떨어지게 돼서 심기가 불편한 김예리도 아니었다. 똘똘이를 꽉 껴안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디아루기아가 그 시선의 주인공이다. 평소대로 무표정이기는 했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은 느낌과 누가 봐도 불만이 있다는 눈빛을 보내온 걸 보니 아직도 이쪽이 수도로 향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짧게 다녀온다고 말은 해 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박덕구를 본 날 밤에도 방으로 돌아온 뒤 조금은 언성을 높였던 것으로 기억. 가정을 소홀히 하고 밖으로 싸돌아다닌다는 게 그녀가 화가 난 이유였다. ‘이게 뭐야….’ 뭔가 슬슬 낌새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벌써부터 이쪽을 옭아매려고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다. 그녀 품에 안겨 있는 똘똘이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계속해서 키엑 키엑 거리는 똘똘이도 이쪽과 조금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걸 실감하고 있는지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말이라도 한 번 붙여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마침 정하얀도 다른 파티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으니 그녀와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디아루기아.” “…….” “하… 하하… 다녀오겠습니다. 디아루기아.” “…….”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 나한테 그런 걸 보고하는지 모르겠군요. 어차피 본인이 하고 싶은 건 전부 해야 직성이 풀리지 않습니까?” “저도 마음 같아서는 똘똘이와 함께 하고 싶지만 상황이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상황입니까?” “저번에도 분명히 설명을 드렸었는데… 이것도 전부 안전한 둥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니 알아주셨으면….” “뭐 당신의 생각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말 나온 김에 조금만 더 말해 봅시다. 안전한 둥지. 안전한 둥지. 안전한 둥지. 그래 좋지요. 그렇지만 디아루리아에게 가장 안전한 둥지란 당신과 함께 있는 둥지입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지금 이 시기가 디아루리아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디아루리아도 이렇게 불안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키엑! 키엑! 키엑! 키에에에엑!” ‘똘똘이 이자식… 오버하지마 이자식아.’ “인간의 생각이란 너무나도 뻔합니다. 어차피 인간들의 수도로 가서도 그 날 밤처럼 좋지 않은 음료를 마시고 정신을 잃으시겠죠. 그게 얼마나 우리 디아루리아의 교육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건강도요. 다른 여성체와 당신이 손을 잡던 입을 맞추던 저는 상관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디아루리아에게는 충실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시바… 무서운데….’ “어차피 인간들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좋은 계약자는 무슨… 손에 물 한방을 묻히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인간이 자신의 둥지는 쉽게 내팽개치는군요. 애초에 당신은 자각이 없습니다.” “인간들의 사회는 복잡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고 그만큼 술자리라는 것도 빠질 수는 없는 겁니다.” “항상 그런 식으로만 이야기 하시죠. 복잡하다. 인간들의 사회는 위험하다. 그 복잡하고 위험한 사회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 디아루리아를 홀로 남겨두는 이유에 대해서부터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그것도… 전부 일입니다.” “당신의 일은 술이라는 걸 먹고 정신을 잃는 게 아니라 다이루리아를 지키고 사랑해주는 겁니다.” “…….” “…….” “아이고 우리 똘똘이 일루와!” 뭐라고 딱히 대답해 줄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으니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는 것이 당연하다. 저 상태의 그녀에게는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으로썬 떠나기 전 똘똘이를 한 번 귀여워 해주는 게 최선이라는 거다. “키엑! 헥헥!” “오이구! 우리 똘똘이 잘한다! 오이구 그래! 이틀만 기다려 금방 갔다가 금방 다녀올게?” “키에에에에에엑!” “똘똘이 쓰읍! 소리 지르지 말고!” “키에에에엑…..” “금방 올 거니까 참고 조금만 기다릴 수 있지?” “헥… 헥헥!” “말 잘 들으며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헥! 헥!” “우리 똘똘이 많이 성숙해졌네.” “키엑!”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키엑! 키엑! 키엑!” 다시 한 번 방방 뛰기 시작하는 녀석을 바라보니 용의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든 모양. 그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똘똘이가 저렇게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니 얼굴이 풀리는 게 당연할 것이다. 여전히 기분이 나쁜 것 같기는 했지만 얼어붙은 그녀의 마음을 녹이는데는 똘똘이 만한 게 없다. 묘한 시선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 때. 정하얀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 훈훈하다는 느낌의 표정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제야 나와 디아루기아가 보여준 그림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당연지사. 디아루기아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지만 정하얀을 의식하고 있는 이쪽은 이걸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여성진들의 대부분은 그저 똘똘이를 귀여워하는 것 같은 느낌. 특히나 똘똘이가 방방 뛰는 것을 처음 본 김예리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물론 그 눈을 본 디아루기아는 황급히 똘똘이를 들어 올렸지만 말이다. “귀…귀여워.” “최대한 빨리 오셔야 합니다.” “네. 아. 그리고 린델에 도착한 이후에는 곧바로 둥지에 건설이 진행 될 테니 김미영팀장이라는 인간을 찾아서 필요한 걸 말씀해주시면 될 겁니다.” “둥지 말입니까?” “네. 사실 용의 둥지가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는 저는 알 수가 없어서… 일단은 당신과 협의 하에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라고 말해 놨습니다.” “아….” “맞춤형이니 지르고 싶으신 데로 지르시면 됩니다.” 디아루기아의 표정에는 아직도 불만이 가득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둥지를 본격적으로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기분이 조금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일단은 선물과 똘똘이의 애교로 커다란 산 하나는 넘었다. 물론 그 커다란 산 때문에 또 다른 산이 하나 생기기는 했지만 정하얀과는 어차피 수도로 함께 가게 되니 풀어줄 기회가 제법 많을 것이다. 정하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기뻐 보이는 듯한 표정.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와 나를 꽉 껴안는 모습이 보였지만 지금은 그녀보다 조금 더 신경 쓰이는 쪽은 박덕구 쪽이다. 슬그머니 옆을 바라보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커다란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거, 형님 잘 다녀오쇼!” “응. 내가 없는 동안 디아루기아와 디아루리아를 부탁한다.” “아….” “생명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지?” “뭐 대충은 알 것 같소.” “덕구야.” “엉?” “나는 너를 믿는다. 그리고 내가 하면….” “알고 있소. 나는 더 잘 할 수 있다. 그거 말하는 거 아니요? 거 참 귀에 딱지 앉을 것 같다니까. 형님이 걱정할 일 없을 테니 기분 좋게 다녀오쇼.” “너도 정연 씨랑 사이좋게 지내고.” “큼. 정연이 누님이랑은 거 그런 사이 아니라니깐 형님이나 거 하얀이 누님한테 좀 잘해주는 게 좋을 거요.” “힘내세요! 덕구오빠.” “흐흐흐 나야 뭐 맨날 힘이 넘치는 박덕구 아니요.” 박덕구의 말에는 슬그머니 웃으며 정하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게 조금은 수준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을 때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넘길만한 신호들이 조금 씩 조금 씩 눈에 띄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모르긴 몰라도 어제도 하루 종일 검을 휘두른 것이 분명하다. 자신은 눈치 채지 못 하겠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녀석의 근처로만 가도 땀 냄새가 난다. 그나마 옷을 깔끔한 걸로 갈아입었지만 샤워할 시간은 없었던 모양이다. 당연하지만 별로 불쾌하지는 않다. 오히려 “기영 씨 슬슬….” “아… 네. 현성 씨.” 각자의 그리폰에 올라 탄 것은 당연지사. 정하얀 역시 등 뒤로 껌딱지처럼 달라붙었고 나 역시 아직도 인사를 해오고 있는 사람들과 발광을 하고 있는 똘똘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김현성과 함께 하늘 위로 올라갔을 때 그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는 박덕구의 꽉 쥔 주먹이 떨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내가 시야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등을 돌려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미련한 새끼.’ 녀석은 내가 본 인간들 중에 가장 미련하다. # 188 회귀자 사용설명서 188화 미련한 놈(2) 처음 봤을 때는 제법 대단하게 느껴졌던 수도도 역시나 두 번째로 보면 별 감흥이 없다. 여전히 수도는 반짝 거리고 있었고 그리폰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사실 제대로 저것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왠지 모르게 계속해서 혼자 뛰어가던 미련한 녀석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새끼는 괜히 사람 심란하게 만들어서….’ 그렇지만 잠깐이나마 녀석의 생각을 접어 주머니 속에 넣어버릴 수 있었다. 물론 계속해서 이쪽을 짜증나게 만들기는 했지만 이곳에 도착한 이상 일이 먼저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영주성을 떠나 왕성에 도착한 다음에 무엇을 가장 처음에 했는지에 대한 것은 뻔할 뻔자. 그동안 소홀했던 인맥에 대한 관리였다. 두 번째지만 제법 익숙해진 그리폰 착륙장에서 내리자 곧바로 이쪽을 부르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인지는 뻔 할 것이다. 왕성에서 나를 제일 좋아하는 인물이 누구인지는 이미 정해져있으니까. “바젤 추기경님!” “이기영 명예주교! 이거 안 본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되셨습니다. 그래. 캐슬락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하하하. 전부 베니고어 여신님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제이나 주교! 그리고 헬레나 이단 심문관도 오랜만이군요.” “이기영 명예주교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아. 인사하시지요. 이쪽은 이번에 함께 제국 8좌로 추천을 받은 파란의 길드마스터 김현성님입니다.” “아아아아.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김현성 신도님.” “네. 저도 이야기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바젤 추기경님.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굳이 내가 찾을 필요도 없이 그리폰 착륙장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바젤 추기경과 제이나 주교, 헬레나 이단심문관들이 나와 김현성을 맞이했고 곧바로 잠깐의 티타임을 가졌다. 차희라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 애초에 제국 8좌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는 나중에 따로 일정이 잡혀 있으니 오지 않아도 별로 상관없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것은 조금은 차희라 답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도 민망한가.’ 그렇게 생각하니 이미 왕성에 도착했다가 빠르게 서임을 받고 도망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우리 말고도 몇몇은 다녀왔다 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으니까. 붉은용병은 현재 신입들을 맞을 준비에 제법 바쁘기도 하고 왕성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시간따위는 없을 것이다. 교황청의 일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나를 제국 8좌로 밀어 준 게 바젤 추기경이라는 사실이었는데 혹시라도 교황청이 내가 제국 8좌로 들어가기 싫어하지는 않을까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던 것이 의외였다. 내가 왕성 쪽 보다는 교황청과 조금 더 가까우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모양. 만약 바젤 추기경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나를 억지로 8좌로 밀어 넣는 것도 이해는 간다. 교황청의 명예주교가 제국에서 가장 강한 8명으로 뽑혔다는 건 나름대로 홍보거리가 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제이나 주교와 헬레나 이단심문관과는 함께 세 명만의 짧고 흥미로운 기도회를 가졌고 그 외에도 오랜만에 보는 귀족들과도 계속해서 만남을 가졌다. 빅터하르트 영감과는 인사를 주고받은 것이 전부지만 카트린 공작부인 마를린 공작부인 그리고 미리 왕성으로 와 있었던 마를린 영애와도 쓸데없는 수다를 떨었다. 마지막 작별 인사 때 나오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미리 자리를 깔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하지 못했던 부분. 대화는 주로 마를린 영애가 캐슬락 공성전에 대한 내 무용담을 다른 귀족부인들에게 설명해 주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 중에서는 당연히 파란의 파티의 이야기도 끼어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잊혀졌던 미련한 녀석에 대해서도 다시금 떠올려 버려 짜증이 났던 순간이었다. 당연하지만 디아루기아의 대한 세간의 관심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에 대해서도 깨달을 수 있었던 부분. ‘안 데려오길 잘했지.’ 용에 대한 홍보는 공식 발표 때 해도 그다지 상관이 없다. 지금은 디아루기아가 제법 바쁜 시기이기도 하고 만약 이곳에 똘똘이를 데려온다면 괜히 이상한 사건에 휘말릴 확률도 있었으니까. 무척이나 바빴던 나와 마찬가지로 김현성 역시 바쁜 시간을 보낸 것은 당연지사. 이번이 왕성이 처음이었던 만큼 녀석은 나와 정하얀과 함께 인맥을 다지는 데 시간을 보냈고 귀부인들과 교황청을 대상으로 시간을 보낸 나와는 다르게 주고 왕성의 권력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무용을 겨뤘다. 용의 선택을 받고 교황청이 밀어주고 있는 나와는 반대로 아직까지는 김현성에 대한 의문이 도처에 깔려있는 상태. 빅터하르트 같은 왕성의 인물들과 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게 녀석의 평가를 올리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 모양이다. 왕성에 오면 당연히 바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바쁜 상태. 이런 일에는 나보다 더 피곤함을 느끼던 김현성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수도에 온지 이제 겨우 이틀이 조금이 지난 상황. 계속해서 에너지 충전을 하고 있는 정하얀과는 다르게 녀석은 극도의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지만….’ 여러 가지 신경 쓸 게 많았으니 말이다. 앞으로의 파란이라든가. 내 전직에 대해서라든가. 김현성과의 일이라든가. 생각할게 너무 많은 것도 일이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제일 신경 쓰였던 것은 굳이 말 하지 않아도 되리라. 나와는 생각하는 게 조금 다르기야 하겠지만 같은 상황에 처 한 것은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 이제 곧 튜토리얼 던전이 열리는 타이밍이니 김현성이 알고 있는 인재들이 대거 등장할지도 모르는 만큼 생각이 많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래에 활약할 인물들을 선별해야 했고 대외적으로 달라지게 될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도 신경 쓸 게 많으리라.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올지는 나는 알 수 없지만 녀석은 알고 있었으니까. 서로가 합의해야 될 상황도 많고 이해관계도 일치하는 상황. 지친 몸을 이끌고 야밤에도 녀석과 머리를 맞대야 하는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있었다. 물론 나눠야만 하는 진지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서로가 조금씩 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기는 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데는 지장이 없다. 녀석과 나는 여전히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며 믿는 친구이자 동료였으니까. “후우… 하루가 길군요.” “아마 내일은 조금 더 바빠질 겁니다. 서임식 준비도 해야 하고… 아마 저희가 제일 마지막인 거 같더군요. 큼 아무튼 간에 현성 씨가 만나야 될 사람이 조금 더 있습니다.” “…….” “안두린 대주교도 한 번 보셔야 하고… 유력영지 영애들과의 만남도….” “아….” 대놓고 이러지 말아달라는 표정이었다. 안두린 대주교를 만나는 쪽은 상관없지만 유력영지의 영애들과의 만남은 대놓고 불편한 모양.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의 표정이었다. “큼. 현성 씨가 불편하시다면 영애들과의 만남은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니요. 마침 시간이 남아서 말입니다.” “감,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받는 것도 꽤나 오랜만이다. 옆에서 꾸벅 꾸벅 졸고 있는 정하얀을 한 번 바라본 뒤에 김현성은 다시 한 번 말을 이었다. “벌써 1년이 다 되가는 군요.” “네.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벌써 1년이 지났으니까요. 사실 현성 씨 한테 벌써 다음 기수들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들었을 때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릅니다.” “하하하. 기영 씨도 놓치는 게 있군요.” “저도 평범한 사람이니까요. 당장 일어난 일 만 처리하는 것도 솔직히 버겁습니다.” “아뇨. 저는… 기영 씨가 그다지 평범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애초에 현성 씨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튜토리얼 던전도 빠져나오지 못했겠죠. 그리고 그건 현성 씨도 마찬가지니까요.” “조금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거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영 씨가 큰 힘이 되주고 있습니다.” 대놓고 이런 소리를 들으니 대놓고 뿌듯하다. 당연하지만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다. 그 전에 있었던 식사초대 때문에 적당히 술을 마시기도 했으니까. 뭔가 서로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게 조금 답답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평화롭게 보이기는 한다는 거다. “저기….” 힘들게 녀석이 입을 열었던 그 때였다. “저도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해주세요….” 정하얀의 잠꼬대가 들려온 것. 피식 하고 녀석이 웃음을 터뜨린 것은 당연지사. 다시 한 번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하던 말과는 조금 차이가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제법 진지한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생각했던 게 있습니다.” “네?” “현재의 파란에 대해서입니다.” “아. 그렇겠군요. 혹시 길드원 확충에 관련된 문제가….” “네. 맞습니다.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일이겠지만 파란의 시스템과 지금의 파티를 조금 개편해야 될 필요성을 느끼고 있어서 말입니다.” “음….” “아무래도 새로운 파티원들이 들어오면 파란의 파티를 하나로 굴린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비효율적으로 느껴져서… 아직은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을 뿐이기는 하지만 두 번째 파티를 신설해 덕구씨와 정연 씨에게 파티를 맡기는 게 좋지 않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아아아….” 조금은 입을 꽉 다물 수밖에 없었다. 딱히 뭐라고 할 말도 없다. 김현성도 나와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드러난 셈이니까. 김현성은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박덕구가 더 이상 자신의 파티를 따라오는 게 힘든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 올 놈 들 중에 괜찮은 탱커가 있나.’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미래에 활약하게 될 괜찮은 전위가 있으면 녀석을 파티원으로 받아들이는 게 더 효율적일 테니까. 조금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김현성이 박덕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자식! 너무 약하니까 이제 버리고 가자!’ 라고 활기차게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녀석의 한계를 이해한 결정이기도 했고 클랜의 간부격으로 키우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새로 만들어질 파티의 파티장이 돼서 조금 경험을 쌓고 경과를 지켜봐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클랜 내의 박덕구의 위신과 위치는 올라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녀석은 김현성 파티에서 멀어지게 되는 셈. 사실 당장 이상희가 전선에서 복귀만 해도 그녀가 김현성 파티의 주축이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김현성이 박덕구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녀석의 안전을 생각하고 있다면 더욱더.’ 성장에 탄력을 받은 김현성 파티는 계속해서 새로운 곳에 발을 디딜 것이고 박덕구는 계속해서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객관적인 녀석의 스펙을 생각해 보면 공격을 한 두 번 버티는 게 전부일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죽어버릴 수도 있다. ‘후위인 나와는 다르니까.’ 그렇다고 박덕구를 김현성 파티로 끌어 당겨가 후위에 배치시키는 것은 오히려 녀석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것이 당연. 아마 김현성은 이 모든 것을 고려한 것이 분명. 굳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마도 덕구와 가장 친근한 나에게 먼저 어떻냐고 의향을 물어보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박덕구의 성장이나 안전 그리고 앞으로의 클랜에서의 간부로 키우려는 사실 등등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확실히 김현성의 제안이 더 좋을 지도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녀석을 두고 가는 건 조금 잔인하게 느껴졌다. ‘시바….’ 녀석의 한계를 알고 있는 건 상태창을 볼 수 있는 나 뿐 만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박덕구를 바라보고 함께 싸워왔던 김현성이 녀석의 한계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실감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지는 알겠습니다. 현성 씨.” “네.” “제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아마… 덕구에 대해서 말씀 하시는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습니까?” “네. 기영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궁금하군요. 아무래도… 이번 일 같은 경우에는 기영 씨의 판단이 제 판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먼저 말씀 드린 겁니다. 기영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실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는 조금 더 위험해 질 수도 있는 걸 생각해 보면….” “글쎄요….” 머리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짜증나는데… 시바….’ 내 심정을 물어보는 건 물론 기분 좋지만 김현성이 왠지 잔인한 결정을 내게 선택하라고 말하는 것 같아 괜스레 미워졌다. 그렇지만 답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에는 적당한 대답을 입으로 내 뱉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 189 회귀자 사용설명서 189화 미련한 놈 (3) “저는….” “…….” “조금 더 지켜봐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거짓말이었다. 별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녀석은 노력하고 있고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지만 김현성을 따라올 수 있을 거라고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는 게 냉정한 현실이라는 거다. 아니, 김현성은 고사하고 조혜진도 따라잡을 수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생각해도 쳐내는 것이 당연. ‘정이라도 들은 건가.’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슬슬 나 스스로가 나를 합리화하는 게 느껴졌으니까. 어찌됐든 박덕구는 이쪽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고 나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따르고 있다. 언젠가는 쳐내야 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새로운 탱커가 들어와 내가 가지고 있는 파티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도 싫고 새로 들어올 녀석을 이쪽의 입맛에 맞게 길들이는 데 시간을 쓰는 것도 싫다. 박덕구는 최소한 이쪽을 위해서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상황이 온다면 겁 많은 녀석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미지수지만 최소한 등을 돌려 도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노력하고 있으니까.’ 녀석을 아주 조금만 더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군요.” 내 말에 김현성은 짧게 한숨을 쉬는 듯한 느낌. 이쪽은 다시 한번 급하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위가 무너지면 파티 전체가 위험해진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메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아이템이라든지…. 뭐 방법은 많을 겁니다. 무엇보다 덕구 본인이 가장 노력하고 있으니 아주 작은 성과일지라도 얻는 게 있을 겁니다.” ‘그 성과가 엄청 작을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나도 별로 기대는 안 돼.’ “다른 파티원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매일 훈련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최근에 예리와 함께 대련하는 모습을 본 적도 있습니다. 물론 제 눈으로는 둘을 제대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선전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떡이 될 때까지 두들겨 맞았지.’ “본인이 의지가 있습니다.” ‘별로 필요도 없는 쓸모없는 의지.’ “조금씩 조금씩이지만 성장하고 있을 겁니다.” ‘너무 조금씩이라서 문제.’ “아마 다음 원정에서는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요.” ‘솔직히 단언할 수는 없다. 현성아… 슈바….’ 거짓말에 익숙하기는 하지만 이번 거짓말은 조금 어설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별 논리도 없이 의지 드립이나 치며 녀석을 실드 쳐주기에 바빴으니까. 나와 어울리는 행동은 확실히 아니다. 그렇지만 김현성이 이쪽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보내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잘 알겠습니다.” 무척이나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 뭐라고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역시나 자신이 생각했던 게 맞았다고 기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뭔가 마음의 짐을 덜은 것 같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리라. ‘이 자식… 설마….’ 나를 시험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사랑스러운 회귀자는 최근까지 이쪽을 조금은 경계하면서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니까. 은근히 여우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이 문제로 나를 시험한 게 맞다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여우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부분에 의구심을 느껴 이런 작은 이벤트를 벌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간에 김현성의 얼굴이 좋아진 것을 보니 뭔가 성공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혹시나 이것도 박덕구의 설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살짝 들기는 했지만…. ‘설계는 아니겠지.’ 그건 아닐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아무튼 간에 내 말을 들은 김현성은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좋은 미소를 보내오는 중.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한 내가 어색한 미소로 화답하기도 전에 다시 한번 김현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영 씨가 어떤 생각을 하시고 있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사실 아까 전에는 기영 씨의 판단을 믿는다고 말씀 드렸지만 파티원뿐만이 아니라 덕구 씨 본인이 위험해질 날이 분명히 올 겁니다.” “네… 그것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두고 보겠습니다만 성장 정도나 훈련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시에는 제가 제안한 대로… 두 번째 파티를 신설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물론 시기는 기영 씨가 결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굳이 제가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시는 게 있을 테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요.” ‘기회를 몇 번 더 준다는 건가.’ 김현성도 박덕구를 더 지켜본다는 거다.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이쪽은 원하는 걸 얻었다. 물론 앞으로 있을 몇 번의 던전행이나 사냥에서 녀석이 낙제점을 받는다면 쫓겨나듯이 두 번째 파티로 가게 되겠지만, 그나마 곧바로 사형선고가 떨어지지 않다는 건 충분히 축하할 만한 일. 여기서 내가 취해야 할 입장은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강화시켜야지.’ 박덕구를 강화기에 넣고 돌린다. 물론 아직까지는 뾰족한 수를 찾기 힘든 게 당연. 그렇지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앞서 말했던 대로 아이템을 구해다 줄 수도 있고 연금술을 사용해서 녀석의 신체를 조금 강화시키는 방법도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내가 그걸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있지만 말이다. 그것 외에도 전설 등급의 직업을 얻는 걸로도 잠깐이나마 비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강해지는 첫 번째 조건은 뭐가 됐든 전설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걸 얻는 거니까. 그게 첫 번째 발걸음이다. 정말로 재능이 없는 나 역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나보다 더 뛰어난 박덕구는 해낼 것이다. 물론 내가 녀석의 일을 이렇게 신경 쓴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게 김현성이 내게 내리는 시험의 연장선이라고 예상해 본다면 전력으로 부딪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신경 써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덕구야.’ 절대로 놈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 이러는 건 아니다. 나도 할 일 많은 사람이고 신경 쓸 게 많다. 단순히 계속해서 미련한 놈의 뒷모습을 떠올리느니 차라리 단기간에 빡 하고 시간을 쓰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한 것뿐이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현성 씨.” “네.” “혹시 아까 하시려던 말씀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음에 술이나 한잔하면서 이야기 나누도록 하지요.” “아… 네.” “기영 씨, 믿고 있겠습니다.” ‘여우같은 놈… 시험한 거 맞구만.’ “하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아직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정하얀을 살짝 들어 올린 이후에 김현성의 방에서 나간 것은 당연. 정하얀이 제법 무겁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반인보다는 근력이 뛰어난 만큼 무리 없이 그녀를 방으로 안고 갈 수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함께 돌아다니다 보니 이미 잠에 빠져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모양. 조금 더 움직이기 편해졌다. 지금부터 내가 어딘가로 향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 정하얀이 싫어할 거라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으니까. 방문을 다시 닫은 이후에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었는데 마침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귀찮고 바빴기 때문에 미루고 미뤘던 상황에서 좋은 핑계가 생긴 셈이니까. 박덕구를 위해서 손을 써줘야겠다고 이미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솔직히 녀석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줘야 할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 녀석의 성장을 방해하는 벽이 뭔지 잘 알지도 못하겠고 진단을 내릴 수조차 없다. 나는 개인 카운슬러가 아니고 그저 상태창과 성향을 읽을 줄 아는 것뿐이다. 녀석의 마력 성장치는 터무니없이 낮지만 체력과 내구력의 잠재 능력은 영웅 이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하는 속도가 느린 것이 문제. 물론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가슴 아프지만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전투 센스는 김현성 주변에 있는 괴물들에 비하면 기대 이하. ‘솔직히 말하면….’ 김예리가 박덕구보다 능력치가 낮다고 해도 박덕구는 김예리를 이길 수 없을 거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센스 자체가 다르다. 마력과 지력 능력치가 전설 이상인 다른 이들이 정하얀만큼 마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과 일맥상통. 안 그래도 스탯 자체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경험도 부족하고 센스도 부족하다. 직업도 아직 희귀 등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특성조차 열리지 않았다. ‘총체적 난국인데….’ 물론 아직 특성이 열리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조금의 희망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센스가 어디 가는 게 아니다. 그 와중에 체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미래의 박덕구. 지금보다 조금 더 성장했을 녀석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녀석을 어떤 식으로 성장시킬지에 대해서 조금 가닥을 잡을 수 있으리라. 김현성은 나와 박덕구를 알지 못했지만 미래의 나를 알고 있는 무녀는 어쩌면 녀석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방에 다다르기도 전에 요조라 길드의 길드원들이 이쪽에 인사를 건네기 시작. 적당히 손을 흔들어 주니 저절로 방문이 열렸고 저번에 봤던 모습과 똑같이 부복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카스가노 유노.’ 여전히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떠지지 않는 눈을 감고 있는 모습. 우연히 연을 맺게 된 무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렸사옵니다, 주인님.”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찾아주신 것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주인님께서 바쁘게 생활하고 계신다는 건 그 누구보다도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보다. 어서 방으로 들어오시지요.” “내가 오늘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나?” “그, 그건 아니옵니다.” “그럼….” “찾아오실 때까지 기다렸사옵니다. 분명히 찾아주실 거라고 생각해서….” 딱히 할 말이 없다. “힘들었겠군.”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인님을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좋아져서… 오히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얘는… 이래서 안 돼.’ “큼.” “뭔가 용무가 있어서 찾아와 주신 것이겠지요.” 당연히 그럴 것 같다는 카스가노 유노의 표정에는 조금의 섭섭함이 담겨져 있었다. 조금이지만 양심이 찔렸다. 그렇지만 너를 보러 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실제로 나는 용건이 있어서 찾아왔고 조금은 시간이 빠듯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조용히 자리에 앉아 슬그머니 옆을 두드리자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예상대로 기뻐 보이는 표정이다. 물론 정하얀같이 대놓고 입꼬리를 올리지는 않았지만 뭔가 계속해서 풀어져가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하기는 하지만 삐질 삐질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뭐. 겸사 겸사 왔다고 하는 게 맞겠지.” “제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뻐 몸이 날아갈 것 같사옵니다. 주인님, 원하시는 걸 말씀해 주시옵소서.” 이렇게까지 말하면 당장 본론으로 들어간다 해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안 그래도 관련해서 궁금한 게 조금 많아진 상태였다. “검은색 세계에 대해서다.” “예.” “너는 나를 분명히 폐허에서 발견했다고 했었지.” “예. 제가 먼저 죽어가는 주인님을 찾아갔사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2년 후에 일어날 일인가?” “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아마 2년 후나 3년 후 정도로 사료되옵니다.” 일단은 여기서 궁금한 게 하나. “그 폐허에서 발견한 건 나 하나였나? 혹시 다른 이들은… 예를 들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카스가노 유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주인님께서는 덩치가 커다란 분에 대해 물어봐 주시는 거군요.” “알고 있나?” 카스가노 유노의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려 나를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보여야 할 곳에 자리한 곳은 검은색 어둠. 공포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에 등 뒤로 소름이 돋아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쳐다보지 마.’ # 1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90화 미련한 놈 (4) 카스가노 유노의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눈동자가 보여야 할 곳에 자리한 곳은 검은색 어둠. 공포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에 등 뒤로 소름이 돋아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쳐다보지 마.’ 눈을 뜰 거라면 이쪽을 쳐다보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렇지만 카스가노 유노에게는 이쪽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모양. 나와 전혀 다른 걸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그녀가 지금 검은색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야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갑작스레 입술을 꽉 다문 채 떨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이전과 너무 달랐다. 카스가노 유노가 볼 수 있는 것이 제한적이고 무작위적이라는 걸 생각했을 때. 만약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맞다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 ‘나쁘지 않네.’ 일단 그녀가 박덕구를 알고 있다는 시점에서 어느 정도 이쪽의 예상이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카스가노 유노와 만나기 전의 1회 차의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내 성향을 생각해 보면 1회 차에서도 아마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을 확률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소환됐을 당시에 박덕구에게 내가 달라붙어 있었다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2회 차에서도 한 번 일어난 일이기도 했고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 중에서는 그나마 박덕구가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지금은 별 볼일 없지만 녀석의 초기 스탯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현성이도 회귀자가 아니었을 테니 접촉하지 않았을 확률이 더 컸겠고….’ 그때 당시에도 잠재능력이 높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김현성과는 지금처럼 딱 달라붙어 있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다. 비빌 구석이 없었다면 내 입장에서는 그나마 동아줄인 박덕구를 꽉 잡고 있었다는 게 해볼 만한 추측. 여러 가지 사고를 겪었겠지만 카스가노 유노를 만나기 전까지는 박덕구와 함께 행동했다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만났었는지, 중간에 떨어진 것은 아닌지, 내가 녀석의 통수를 치지는 않았는지 등. 여러 가지 걱정되는 변수가 있기야 하지만…. ‘최소한 박덕구가 날 먼저 버리지는 않았을 거야.’ 이것 하나만은 부정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카스가노 유노가 덜컥 내 손을 잡아왔던 것은 바로 그 때. ‘깜짝야.’ 나도 모르게 그녀의 검은색 눈을 바라봤을 때, 뭔가가 비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응?’ [외부의 개입으로 인해 제한적인 정보를 열람합니다. 전설 등급의 특성, 마음의 눈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어어어?’ [플레이어 카스가노 유노의 특성, 본질과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는 눈이 저항하지 않습니다.] “뭐….” 이쪽이 뭔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시야로 쏟아진 것은 카스가노 유노가 항상 내게 말했던 검은색 세계의 모습. 어째서 카스가노 유노가 이곳을 검은색 세계라고 부르는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정확히 이 상황을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을 내가 훔쳐보고 있다는 게 옳은 표현이리라. 어째서 이런 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기억은 이전에도 한 번 훔쳐본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내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장면이었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고 있는 풍경에 그녀는 없다. 시야에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는 것은 박덕구와 나. 카스가노 유노가 이전에 말했던 대로 마치 편집되지 않은 영상이나 그림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보이는 것 같았다. 아무튼 간에 내 눈에 보이는 박덕구와 내 모습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 무척 고급스러운 외투와 비싼 장비로 떡칠을 해놓은 지금과는 다르게 초라하기 그지없다. 빈민촌에서 막 올라온 3류 모험자 같은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누가 봐도 비참해 보이는 외관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 심지어 내 몸은 정상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거… 미안하오….’ ‘뭐가.’ ‘오늘 사냥 말이요. 내가 조금 더 잘했어야 했는데….’ ‘신경 쓸 필요 없다, 덕구야. 어차피 피차 처음이었고 그래도 보수는 받았으니까.’ ‘좋은 파티였는데… 이제부터 안 불러줄 것 같아서….’ ‘너는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다니까.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래도….’ ‘걔네들이 생각하는 것쯤이야 이쪽 손바닥 위에 있어. 아, 오늘은 먼저 들어가 봐.’ ‘또 뭐 약속이라도 있는 거요?’ ‘금마 클랜 부단장.’ ‘또 그 여자랑 저녁 먹는 거요?’ ‘너무 섭섭해하지 마라. 이것도 다 우리한테 도움되는 일이니까.’ ‘그 여자… 별로 소문이 좋지 않던데….’ ‘네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야. 너는 훈련이나 열심히 해. 알고 있지? 내가 하면….’ ‘…….’ ‘내가 하면 너는 더 잘할 수 있는 거야.’ ‘…….’ 풍경이 한 번 더 뒤바뀐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린델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최소한 내가 알기로는 저렇게 생긴 사냥터는 린델 내에 없다. 겉모습 또한 제법 모험자 티가 난다. 어느 정도 싸구려 복장을 벗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박덕구는 전사 그리고 이쪽은 마법사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검은색 세계의 나도 지휘관 앵무새에게 낚이지 않은 모양. 다음 전직으로 뭘 선택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연금술사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김현성한테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을 받지 못했을 테니 내가 연금술사를 선택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형님!’ ‘돼지 새끼야! 집중 안 해? 별거 아닌 걸로 뒤 돌아보면 뒤진다고 했지?’ ‘그렇지만 형님… 마력이.’ ‘내 걱정하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해.’ ‘알, 알겠소.’ 움직임도 나쁘지만은 않다. 굳이 표현하자면 나는 창을 든 마법사였고 녀석은 어리숙한 전위였다. 주변 파티원들과의 관계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듯한 느낌. 클랜이라도 창설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야무지게 창질을 하며 주문을 외우는 내 모습은 제법 창이 손에 익은 것 같았지만, 박덕구 같은 경우에는 단단해 보이는 외견과는 반대로 잔 실수가 무척이나 많은 느낌. 처음 공포의 정원에 들어갔을 때처럼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으리라. 결국에는 전위에서 놓친 몬스터 한 마리가 후위의 사제를 덮쳤고 내가 사제의 앞을 막아서는 게 시야에 비친다. 소형 몬스터에게 제법 아프게 당했지만 창을 휘두르는 것으로 전투는 마무리. 화가 난 사제를 내가 달래고 있고 박덕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미안하오….’ ‘지금 미안하다는 소리가 나와요? 내구 능력치 믿고 따라와 줬더니 진짜….’ ‘그… 그게….’ ‘저기요. 말 좀 똑바로 하세요. 우물쭈물거리지 말고. 짜증 나네 진짜. 기영 씨 봐서 참는다는 거 알고 있어요? 지금이 벌써 몇 번째인 줄 알아요? 저럴 거면 왜 탱커로 전직 했나 몰라. 캐슬락 쪽에서 사람 구하는 것 같던데… 거기 가서 막일이나 뛰세요. 실리아 애들 때문에 물 안 좋아지고 나서 요즘은 개나 소나 사냥다닌다더니…. 내가 어이가 없어서 진짜….’ ‘아… 이거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가희 씨. 평소에는 이렇지 않은데 오늘은 조금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아서.’ ‘기영 씨 봐서 참는 거예요. 기영씨 봐서….’ ‘아마 시간이 조금 지나면 적응할 겁니다. 일단 지금은 아무 문제가 없으니 진행을… 제가 나중에 밥이라도 한번 사겠습니다.’ ‘점심이요? 저녁이요?’ ‘물론 저녁입니다.’ ‘그럼… 조금만 더 참아 보도록 할게요. 아. 그리고 혹시 길드 제의는 생각 좀 해보셨어요?’ ‘아직은 따로 할 일이 있어서… 하하…. 일이 끝나면 곧바로 확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릴게요.’ 다시 한번 배경이 변했다. 이번에는 사냥을 끝내고 돌아오는 도중인 것 같았다. ‘형님….’ ‘그러니까 내가 뒤 돌아보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말하지 않았냐. 이 돼지야.’ ‘그… 그게… 미안하오….’ ‘미안해할 필요 없다. 어차피 사냥이 진짜 목적도 아니었고… 결과적으로는 제법 쏠쏠하게 챙기게 됐으니까.’ ‘어디 가는 거요?’ ‘네가 알 필요 없어.’ ‘혹시 정진….’ ‘입 닫아.’ ‘미… 미안하오.’ ‘너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따라오면 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아직은 한 발 걸치고 있는 것뿐이고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니까. 이게 다 날아오르기 위한 과정이라는 거야.’ ‘그래도… 적당한 길드에 들어가는 게 더….’ ‘넌 그냥 닥치고 하나만 기억하면 돼. 내가 하면….’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바로 그거야. 그리고… 네가 한 말은 조금은 더 생각해 보마. 덕구야.’ ‘거… 고맙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것들이 보인다. 별로 쓸모 있는 장면은 아니지만 녀석과 술을 마시는 거라든지,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라든지, 발로 녀석을 차는 모습이라든지. 여러 장면이 사진 같이 휙휙 지나가기 시작했다. 꽤나 중요한 장면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어 안타까울 정도였다. ‘잊지 마라, 덕구야.’ ‘알고 있소.’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는 와중에 재미있었던 것은 지금보다 더 지난 시점의 미래에도 녀석의 성장치는 그다지 높지 않아보였다는 것. 설마설마 했지만 이 자식은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도 크게 성장하진 않았다. ‘잊지 마라.’ ‘알고 있소. 형님이 하면….’ ‘그럼 됐어.’ 녀석이 미래에 어떻게 성장하는지가 궁금했지만 시야에 비치는 것은 쓰잘 떼기 없는 기억들이다. ‘힘드냐?’ ‘형, 형님은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 수 있는 거요.’ ‘죽여야 사니까 냉정해질 수 있는 거야.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 여기는 원래 죽이고 죽이는 장소니까. 잊지 마. 내가 하면….’ ‘형님이 하면…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바로 그거야.’ 다시 한번 풍경이 뒤바뀌고 난 다음에 보인 것은 녀석이 날 들쳐 업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장면이었다.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고 있는 나는 피를 흘리고 있었고 녀석 역시 괜찮은 갑옷을 입고 있다. 조금 많이 스킵이 된 것 같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은 자리에 앉기는 한 모양. 린델은 아닌 것 같았지만 제법 성공한 것 같기는 했다. 피를 흘리지만 않았다면 조금 더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형님 내 목소리 들리쇼?’ ‘그래….’ ‘거 죽으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뒈질 생각 없으니까.’ ‘미안하오, 형님. 미안합니다.’ ‘뭐가 미안해.’ ‘내가 한 말 때문에….’ ‘됐다. 별로 네 말을 따른 건 아니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계산에 착오가 있었던 것뿐이야. 그 위선자새끼들을 조금이라도 믿은 내가 잘못한 거지. 덩치만 큰 돼지는 별 잘못 없다.’ ‘그래도 나 때문에… 나 때문에… 형, 형님 생각대로… 했어야 했는데….’ ‘그래, 돼지새끼야. 너 때문인 거 같으니까 빨리 튀기나 해. 이렇게 후회하는 거 보니까 다음번에는 조금 더 잘할 수 있겠네. 응?’ 여러 가지 마법이 떨어지고 창과 화살이 날아다닌다. 나를 들고 정신없이 뛰고 있는 박덕구의 모습은 정말로 필사적으로 보였다.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황상 박덕구가 나에게 어떤 제안을 했고 나는 그걸 받아들인 것 같았으니까. 결과적으로 일은 꼬인 것 같았지만… 모르긴 몰라도 녀석이 내 브레이크가 되어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간에 이 추격전은 꽤나 오랜 시간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박덕구는 계속해서 몸으로 화살을 막으며 포위망을 벗어나려고 했고 한 손에 들린 검으로 자신의 길을 막는 녀석들의 머리를 부셔버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계는 온다. 추격자들은 막을 수 있어도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마법과 화살 다발을 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버리고 가라는 말은 못 하겠다. 돼지야.’ ‘형님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소.’ ‘그래도 이만 두고 가는 게 좋을 거다. 몸뚱이는 무식하게 튼튼하니까. 너는 살 수 있겠지. 뭐… 조금 무섭기야 하지만 별로 후회되는 인생은 아니었는데… 네가 복수만 해주면 신날 것 같은데….’ ‘거 동정심 유발해서 버리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 아니요?’ ‘이 새끼는….’ ‘아무리 뭐라 해도 안 버리고 가니까 개소리 하지 마쇼. 형님은 내가 살리니까.’ ‘이빨 치지 말고 내려 놔.’ ‘허풍이 아니라 진짜라니까. 형님은 내가 살릴 거요. 거, 기억은 나는 거요?’ ‘뭐가.’ ‘형님이 내 목숨을 얼마나 많이 구해줬는지. 기억하냔 말이오.’ ‘나는 별로 네 목숨을 구하려고 움직인 적은 없다. 네가 싹수 있어 보였고 그래서 너를 케어해 준 게 다야….’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소. 형님이 뭐라 말하든 간에 형님이 나를 구한 건 마찬가지니까.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육체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요. 못난 동생 때문에 몇 번이나 칼을 대신 맞아줘서 고마웠소.’ ‘네가 죽으면 안 되니까… 그럼 투자한 게 얼만데… 돌려받아야지.’ ‘던전에 갔을 때도 변호해 줘서 고마웠고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마웠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나는 형님한테 구해지기만 한 것 같다니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정말로 그런 기억밖에는 없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신세진 것 밖에 없다… 이 말이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 차례라는 거요.’ ‘같이 뒈질 거다….’ ‘내가 분명히 형님은 살릴 거라고 이야기 했소. 잊지 마쇼. 형님.’ ‘뭐.’ ‘형님이 할 수 있으면… 나는 더 잘할 수 있소.’ ‘…….’ ‘형님이 할 수 있는 건 나는 더… 잘할 수 있소.’ ‘…….’ ‘형님이… 할 수 있으면… 나는 더….’ ‘…….’ ‘더… 잘할 수 있소….’ ‘…….’ ‘형님이… 할 수 있으면….’ ‘…….’ ‘할 수… 있… 소….’ ‘…….’ ‘있… 소….’ ‘…….’ ‘…….’ 그리고. 나를 찾아온 카스가노 유노의 얼굴이 보였다. # 191 회귀자 사용설명서 191화 미련한 놈 (5) 익숙하지 않은 풍경 속에서 조용히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카스가노 유노의 모습 역시 시야에 비친다. 방금 전에 내가 있었던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 폭음과 비명 따위가 들려오던 것과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는다. 고급스럽다고 하기에는 힘들었지만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방 안에 있는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인 모양. 그러고 보니 잠깐이지만 이 방의 구조를 봤던 것 같기도 하다.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1회 차를 봤을 때 역시 나는 이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카스가노 유노가 나를 발견한 이후에 이쪽에서 지내게 한 모양이다. 내가 기절한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검은색 세계의 나는 정상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넘기더라도 신체의 반 이상이 부셔져 있는 걸로 봐서는 덕구 녀석이 막아주는 것도 이게 한계. 물론 그 공격 속에서 내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카스가노 유노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분명히 나는 그 속에서 천천히 죽어갔을 거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아마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신체의 모든 기능이 정지하고 의식만 남아 있는 상태. 조용히 문이 열렸고 그 가운데 카스가노 유노가 다가와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불쌍하신 분.’ ‘…….’ ‘참으로 불쌍하신 분.’ 카스가노 유노의 모습은 지금보다 조금 더 성숙해 보였다. 2년이 지난 시점인 만큼 머리카락도 조금 더 길었고 분위기 자체도 조금 차분해진 느낌이다. ‘궁금한 것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은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지만 일단은 회복하는 데 전념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러고 보니 소개가 아직이었군요. 제 이름은 카스가노 유노라고 합니다. 아마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 커다란 명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 ‘네. 아마 알고 계시겠지요. 어째서 당신을 이곳에 데려왔는지에 대해서는 차차 말씀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몸이 회복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장담할 수 없지만 의지만 있다면 정상적인 활동을 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제가 조금 말이 많아졌군요.’ ‘…….’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또.’ 검은색 세계의 나는 카스가노 유노가 나가는 것도 보지 못했다. 시선이 천장 속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마 그녀의 얼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초조해 보이는 얼굴, 불안한 표정,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무엇을 실감하고 있는지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녀석이 죽었다. 아마 검은색 세계의 내가 크게 동요하는 이유는 그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움직이지 못하고 소리도 내지 못하는 상태로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꼴불견. 누가 봐도 비참한 얼굴이다. 저쪽 세계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감성적이었던 모양. 솔직히 지금 이걸 보고 있는 내 감정도 조금이지만 흔들리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 제삼자의 입장에서 이걸 지켜보고 있었지만 엄연히 말하면 삼자가 아니었으니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고 분풀이 할 수 없는 상태로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검은색 세계의 나를, 나는 그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고 카스가노 유노는 한 번 더 나를 찾았다. 엄밀히 말하면 한 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병간호를 녀석이 도맡아 하고 있었으니까. 어째서 그녀가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카스가노 유노가 나에 대해서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검은색 세계의 그녀는 미래에 자신과 내가 함께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검은색 세계의 나는 그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무녀가 미래와 과거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그녀가 어째서 나에게 이렇게 헌신적인지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검은색 세계의 나를 동정하고 검은색 세계의 나를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풍경이 뒤바뀐다. 배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차이점은 내가 말을 할 수 있고 몸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 ‘일어나셨는지요.’ ‘…….’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이제… 내가 먹을 수 있어.’ ‘아직 몸을 움직이기 힘드실 겁니다.’ ‘필요 없….’ ‘아직은 힘드실 거라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리 주시지요. 제가 떠먹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꽤나 헌신적인 카스가노 유노와는 다르게 이쪽은 그녀를 믿지 않고 있는 듯한 느낌. 저런 반응이 당연하다. 내가 저 상태였더라도 카스가노 유노를 믿지 않았을 테니까. 그녀가 인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눈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다. ‘왜 나를 구했지. 아니, 질문을 바꾸겠다. 본질과 미래와 과거를 꿰뚫어 보는 눈이라는 건 뭐지? 너는 미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가? 아니면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건가?’ ‘제가 알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입니다. 모든 미래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과거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죠.’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구했나.’ ‘그건….’ ‘너는 미래의 나를 알고 있구나.’ 카스가노 유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긍정이었다. 아마 검은색 세계의 나는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녀가 나를 구했는지 그리고 이 호의의 정체는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해서 의문을 품고 있을 거다. 그 와중에도 풍경은 뒤바뀌고 시간은 흐른다. 여전히 카스가노 유노는 나를 극진히 간호하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호의에 의문을 느끼면서도 마음을 열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스가노 유노는 나에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녀의 어린 시절 이야기. 그녀의 주변 환경과 생활에 대한 이야기. 그녀 개인의 대한 이야기. 주제는 끊임없이 뒤바뀌었고 가끔은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즈음에 나는 카스가노 유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검은색 세계의 나는 아직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가 본 카스가노 유노의 모습은 틀림없이 사랑을 하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매일 나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매일 나를 위해 무엇을 해야 되는지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힘든 업무를 마치고 온 이후에는 곧바로 방으로 들어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가끔은 방문을 닫고 나간 이후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작은 칭찬 하나에 기뻐하고 작은 짜증에 슬퍼한다. 편지를 써보기도 하고 나를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도 많아졌다. ‘어째서 나한테 호의를 보내는 거지.’ ‘…….’ 라고 가끔 말할 때는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검은색 세계의 나는 괴로워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간이 조금 흘렀고 과거의 아픔은 몸의 상처와 함께 조금씩 아물기 시작한다. 당연하지만 검은색 세계의 이기영은 그걸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혼자 술을 마시는 시간이 많아졌고 짜증을 내거나 분을 삭이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마 떠올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기억의 양분이 나를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카스가노 유노는 미래를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계속해서 자신이 볼 수 없는 걸 엿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 그녀가 미래에 집착하는지는 뻔할 뻔자. 아마 그때부터 카스가노 유노는 나와 함께하는 전혀 다른 미래를 그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보기 위해 계속해서 스탯을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멍청하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지켜보고 있는 나는 삼자의 입장이었으니까. 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검은색 세계의 나는 완전히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고 카스가노 유노의 입장은 조금 더 잦아졌다. 별것 아닌 대화로 꽃을 피우고 이야기를 나눈다. 아마 이때 즈음에 나는 제법 생각하는 게 많아졌을 것이다. 저놈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재미있게도 검은색 세계의 이기영은 카스가노 유노를 이용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호의를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줄다리는 꽤나 위태위태해 보여서 내가 바라보기에도 조금 불안전해 보일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검은색 세계의 나는 카스가노 유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이기영 님, 차 드실 시간입니다.’ ‘아. 고마워.’ ‘오늘은 한 번 몸을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하기에는….’ ‘괜찮아. 움직이는 데 무리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애를 돌보는 취미라도 있는 건가.’ ‘그, 그건 아니옵니다. 그저….’ 이런 쓸데없는 장난을 치는 시간도 많아졌다. 내가 봐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결과이리라. 그녀는 내게 헌신적이었고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나는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태였으니까. 어떻게 보면 풋풋한 사랑을 키워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결과가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 쪽은 카스가노 유노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유노 앞에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녀석이 뭘 괴로워하는지 알고 있다. 이기영은 잊는 걸 무서워하고 있었다. 상처가 아물고 망가진 정신의 상처가 아물고 있다는 것에 대해 많은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다. 단꿈에 취한 카스가노 유노의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적어도 내 눈에 녀석은 폭탄처럼 보였다. 터지기 직전의 폭탄 말이다. 풍경이 뒤바뀌고 시야가 변한다. 그녀와 나는 조금 가까워진 것 같지만 검은색 세계의 나는 본능적으로 그걸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카스가노 유노에게는 봄이 찾아왔다. 겨울이 그치고 봄이 찾아왔다. 녹색이 더 우거지고 여름이 찾아온다. 다시 한번 계절이 바뀌고 낙엽이 떨어진다. ‘나는 나갈 거다.’ ‘뭘… 뭘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조… 조금 더 있으셔도 됩니다.’ 낙엽이 떨어진다. ‘아,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내 몸이 정상이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조금 더 몸을 챙기셔야 됩니다.’ ‘…….’ ‘가지… 가지 말아주세요. 이기영 님.’ 낙엽이 떨어진다. ‘너에게는 감사한다. 네가 어째서 나한테 호의를 보이고 있는지는 처음 이후에는 묻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아.’ ‘…….’ ‘나는 네게 감사하지만 그것뿐이야. 나는 많은 사람을 죽여서 내 실수를 바로잡을 거다. 더 비정해지고 잔인해질 거야. 아마 네가 봤던 미래가 그런 미래일 거라고 생각이 든다. 아니면 내 마지막일 수도 있겠지.’ ‘그것이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본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이기영 님. 제가, 제가 본 것은 당신과… 당신과 함께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낙엽이 떨어진다. ‘당신과 제가 함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걸… 제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이 집에서 당신과 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저희는 행, 행복해 보였습니다. 아이를 둘이나 가지고 있었고 아직 이름을 듣지는 못했지만 틀림없이 착한 아이들이었습니다.’ ‘…….’ ‘당신은 저를 아껴주고 사랑해 줬습니다.’ ‘거짓말이군.’ ‘정… 정, 정말입니다. 당신과 저는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네. 둘 모두 행복해 보였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틀림없이 당신도 행복해 보였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당신을 찾은 것은 계속해서 제가 봤던 미래가 눈에 밟혔기 때문입니다.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내 눈에는 그게 보여….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허송세월을 보낸다는 선택지는 없어.’ ‘당신은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저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여 줬습니다. 모, 모든 걸 잊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운… 운명! 그렇습니다. 운, 운명입니다. 이건… 운명 인 것입니다. 당신과 제가 모든 고통과 억압과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것은… 운명, 운명인 것입니다.’ 낙엽이 떨어진다. ‘뭘 잊어?’ ‘아픔, 아픔을… 아픔을 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본 미래에 괴로워하는 이기영 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술로 아픔을 잊으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괴로워하시는 일이 없으시고 항상 웃으셨습니다. 정말로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 그분에 대해서도….’ ‘뭐?’ ‘아….’ ‘내가 잊었을 것 같아?’ ‘이, 이기영 님… 그게… 아니오라….’ ‘내가 잊었을 것 같냐고 묻잖아.’ ‘이기영 님… 그, 그게….’ ‘여기서 허송세월 보내면서 하하호호 웃어주니까 내가 정말로 까먹을 것 같았어? 거지같은 위선자 놈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잊어버릴 것 같았냐고…. 내가 녀석에 대해 물어보지 않으니까. 정말로 내가 까먹고 살아가고 있는 줄 알았어? 나 대신 뒈진 멍청한 돼지 새끼를 정말로 내가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줄 안 거야? 네가 본 게 정말로 그딴 미래라고? 네가 본 게 그게 맞다고?!’ ‘그게….’ ‘웃기지 마. 나는 안 잊어. 카스가노 유노. 넌 독이야. 나는 네가 약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어. 넌 내게 있어서 독이었던 거야. 운명? 그래. 난 네가 뭔 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겠어. 내가 여기 온 건 운명이 맞아.’ ‘아….’ ‘네가 여기로 나를 데려온 게 바로 운명이야. 나를 좀먹는 독을 해독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거야.’ ‘이기영 님… 흐으으윽….’ 낙엽이 떨어졌다. ‘싸구려 동정 집어 치워. 거지같은 년아. 네놈들은 전부 똑같아.’ ‘아아아아…. 불쌍하신 분.’ ‘네가 날 동정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낙엽이 떨어졌다. ‘켁… 켁….’ ‘고맙다. 너 때문에 내가 뭘 해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났어. 너는 지표가 될 거다.’ ‘켁….’ ‘내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지표가 될 거야. 이게 네가 원하는 결론이겠지. 응? 그렇지 않아? 네가 원하는 행복한 삶이랑은 조금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는 내 옆에 있는 거야.’ ‘켁… 켁….’ 낙엽이 떨어졌다. ‘나는 너를 내 옆에 두고 계속해서 떠올릴 거다. 너는 내가 녀석을 잊지 못하게 하는 매개체가 되겠지. 너한테도 좋은 일이잖아. 응? 내 생각이 맞는 거지?’ ‘울지… 마세요. 내… 사랑.’ ‘…….’ ‘울지 마세요. 내 사랑….’ 낙엽이 떨어졌다. 미련한 놈은 그 낙엽을 밟았고. 겨울이…. 다시 한번 긴 겨울이 찾아왔다. # 192 회귀자 사용설명서 192화 아무 일도 없었어 어디론가 튕겨져 나가는 느낌이 드는 순간 몸을 벌떡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현실로 되돌아 왔다. 굳이 주변을 쳐다보지 않아도 그걸 실감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검은색 풍경이 아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느껴진 것은 엄청난 격통. 비명도 지르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었다. 입 밖으로 비명을 내뱉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뇌에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듯한 느낌에 괜스레 입을 뻐끔 거리며 얼굴을 쥐어 잡을 수밖에 없었다. ‘개… 슈바….’ 아마도 카스가노 유노가 보고 있던 검은색 세계를 내 눈으로 직접 본 부작용인 모양. 눈이 부서질 것 같은 느낌에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며 계속해서 눈이 있는 쪽을 붙잡았다. 나로서도 이런 게 가능할지 몰랐으니 이 정도의 부작용은 당연할 것이다. 조금 가슴 아픈 부분이 있다면 내가 본의로 들여다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파서 흘러내리는 눈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눈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몸은 1회 차 따위는 기억하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어쨌거나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게 뭔… 개 같은 상황이야.’ 물론 인상이 깊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사실 나는 내가 검은색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은 없었다. 궁금한 것은 내가 언제 어디에서 죽는지 그리고 도대체 뭘 하면서 싸돌아다녔는지가 전부. 중요한 건 검은색 세계의 내가 아니라 현재의 내가 어디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가였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리라. 박덕구를 강화하러 왔다가 꽤나 여러 가지를 본 느낌에 괜스레 침을 목구멍으로 집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카스가노 유노의 일까지 알아버린 상황. 아니, 사실 그 이후의 이야기도 봤던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만 틀림없이 나는 검은색 세계의 겨울을 잠깐 들여다봤다. 그런 기분이 든다.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생각이 나는 것이 없으니 그날 일어났던 일의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논외. 다시 한번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볼 수밖에 없었다. 카스가노 유노의 이야기는 그녀에게 들어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용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파국. 박덕구는 나를 지키다 죽었고 나는 카스가노 유노를 배신했다. ‘깡도 좋은 쓰레기 놈.’ 거기서 카스가노 유노가 나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더라면 이쪽은 틀림없이 죽었을 거다. 검은색 세계의 쓰레기도 카스가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겠지만 그래도 녀석이 도박을 선택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던 카스가노 유노의 얼굴이 괜스레 머리에 떠오른다. ‘얘는 어떻게 죽는 거지?’ 카스가노 유노는 틀림없이 자신이 죽는다고 이야기 했다. 그것도 나보다 먼저. 내가 녀석이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검은색 쓰레기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스스로 유노를 죽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옆에서 두고 본다고 했었으니까.’ 아마 그럴 확률이 높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실제로 카스가노 유노와는 꽤나 오랜시간을 함께 한 것 같았고 쓰임새가 상당히 많은 만큼 나였어도 그녀를 죽이는 멍청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다.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카스가노 유노가 죽는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찌릿거리는 고통에 다시 한번 안면을 부여잡은 것이 당연. 유노뿐만이 아니다. 녀석의 등도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돈다. ‘멍청한 놈.’ 카스가노 유노가 나를 혼자 발견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박덕구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했지만 그렇게 장렬한 최후를 맞이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눈시울이 조금 붉어지기는 했지만 괜스레 감성적이 되는 것 같아 고개를 흔들었다. 2회 차의 박덕구는 살아 있다. 성장에 대한 힌트도 조금 발견한 것 같기도 하고… 이 지끈거리는 고통만 아니라면 모든 게 완벽하다고 말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지… 그건 아니지….” 한 가지 의문점이 더 남아 있다. ‘외부의 개입으로 인해 제한적인 정보를 열람합니다. 전설 등급의 특성, 마음의 눈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외부의 개입은 또 뭐란 말인가. 지금까지 특성을 사용하면서 이딴 문구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심지어 이쪽이 마음의 눈을 발동시킨 적도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방금 장면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녀석이 있었다는 거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전설 등급의 특성인 마음의 눈과 본질과 미래와 과거를 꿰뚫어 보는 눈의 행사에 개입한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 이건 이미 인간의 영역이라고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내게 이 장면을 보여줬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왜?’ 그만큼 카스가노와 박덕구가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리고 싶어서? 나쁘지 않은 가설이다. 검은색 세계의 쓰레기는 두 사람 때문에 꽤나 망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이건…. “장려한다고 봐도 되는 건가?” 박덕구가 죽는 걸 원치 않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게 된다. “그 미련한 놈이 내 브레이크가 되어주고 있어서?” 이것도 정답일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쪽에 개입한 어떤 존재의 목적은 1회 차처럼 상황을 막장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한다는 것에 있다. 이거 하나만큼은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상황.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왔다. 무척이나 엄청난 장면을 목격했다. 슬쩍 고개를 옆쪽으로 돌렸을 때였다. “으…응….” “아….” 시야에 비친 것은 이쪽의 옆에 누워 있는 카스가노 유노. “어….” 당황스러웠던 것은 그녀가 알몸이었다는 것이었다. ‘뭐야….’ 살짝 창문 쪽을 바라보니 이미 해가 떠 있는 상황. 조금 오랜 시간을 검은색 세계에 쏟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밤을 지새울 줄은 전혀 몰랐다. 물론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더욱더 예상하지 못했다. ‘제기랄’ 아니겠지. 슬쩍 이불을 들어 올렸지만 그녀와 내가 사랑을 나눴던 증거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카스가노 유노는 행복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겉모습은 조금 안쓰러워 보일 정도. 마지막에 봤던 장면으로 빙의라고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그녀와 내가 서로를 탐구 했다는 것 하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깊게 생각하는 것은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아 머리를 전력으로 흔들자 조용히 깨어난 카스가노가 눈에 보인다. “아… 주인님.” “일어났구나.” “네… 네.” 묘하게 얼굴이 붉어져 있는 모습. 그렇지만 행복해 보인다. 검은색 세계에서 봤던 얼굴과 묘하게 대조되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그녀가 행복하다면 나쁜 상황은 아니다. 실리아에 살고 있는 그녀에게는 압도적으로 소홀하기도 했고 어제 봤던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은근히 귀여워 보이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2회 차의 카스가노 유노도 나 때문에 인생이 꼬인 만큼 이쪽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검은색 세계의 유노와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된 지금의 그녀가 완성된 것은, 사실 이쪽의 지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쪽에 달라붙던 걸 생각하면 상당히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머리를 잠깐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의문이 남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가장 궁금한 것부터.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거다만….” “예. 말씀하시옵소서.” “네가 나에게 검은색 세계를 보여준 것이 맞나?” “아, 아니옵니다. 주인님. 저 역시 주인님이 제 안에 들어와 검은색 세계를 보실 줄은 상상 못 했나이다. 제가 미처 저항할 틈도 없이 주인님께서 제 안에 들어왔나이다.” 뭔가 말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저도 이해할 수 없는 억제력이 갑자기 물밀 듯이 몰려 들어왔습니다.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주인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은색 세계에 그토록 오랫동안 체류한 것은 저 역시 처음이었습니다.” “그래?” “예. 부끄럽지만 보통은 단편적으로 한 장면, 한 장면을 찢어서 볼 수 있는 게 고작입니다. 물론 제 능력이 조금 더 성장한다면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었겠지만… 이제까지… 아! 혹시 주인님께서는 아는 것이 있으신지요.” “아니. 나도 이런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마음의 눈을 발동시킨 건 내가 아니라는 거야. 내가 그 눈으로 너를 들여다보기도 전에 이미 특성이 발동되어 있는 상태였어. 그것 외에는 달라진 건 없었지만… 아무튼 간에 조금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네가 본다는 세계가 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커다란 성과야.” “얻은 것은 있었나이까.” “적지는 않다. 고맙다.” “아….” “그리고 검은색 세계에서의 일도 고맙구나.” “주, 주인님.”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었지.” “예.” “이건 별건 아니다만… 검은색 세계에서 네가 본 미래는 정말로 나와 함께 있는 미래가 맞았나?” “확인할 수 없사옵니다. 그렇지만 아마 검은색 세계의 아둔한 카스가노는 주인님을 붙잡기 위해 거짓을 말했을 거라고 생각하옵니다.” “그런가.” “네. 틀림없사옵니다. 주인님의 역린을 건드릴지는 몰랐던 것이겠지요. 아, 어쩌면 일부로였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음?” “주인님과 함께 하고 싶어서였을 겁니다. 검은색 세계의 저는….” “무슨 말인지 알겠군.” 정리해 보자면 그녀가 이기영을 붙잡기 위해 날렸던 거짓말이 스위치를 켜버린 셈이다. 카스가노 유노의 말대로 검은색 세계의 나와 헤어지기 싫어 일부로 스위치를 눌렀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자가 정황상 맞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간에 제법 나쁘지 않은 상황.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이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떠올렸을 때 뭔가 한 가지 잊은 것 같은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갸우뚱 거렸을 때 들려온 것은 거대한 폭음. ‘슈바….’ 뭘 잊었는지에 대해서 깨닫는 것은 순식간 내 생각이 맞았다는 듯 바깥에서도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빠! 오빠!” ‘미친!’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은 방에 재워놓고 왔던 정하얀의 존재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거… 놔!!” 콰직! 콰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바로 옆에서 들려온 소리는 정하얀이 마법까지 사용해 가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 준다. 내가 위험할 것 같아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아니면 내가 누군가와 접촉했다는 걸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어찌됐든 이 상황을 보이는 것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건 지나가던 개도 알 것이다. “유노.” “네. 주인님.” 이 사태를 어떻게 정리하자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옆에 있는 벽면이 무너져 내리며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어처구니없는 양의 마력을 온몸에 두르며 손을 뻗고 있는 정하얀의 눈에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광기가 담겨져 있었다. 한바탕 눈물을 흩뿌렸는지 부어 있고 붉어있는 눈은 가관.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카스가노 유노를 노려보는 것 같기는 했지만 찔리는 게 있는 나는 그녀의 표정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개슈바….’ 도가의 사상에 커다란 관심은 없지만 지금 나에게 카스가노 유노가 달라붙어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업보일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 적이 불과 몇 분 전이다. 박덕구 역시 마찬가지. 정하얀에게 이런 식으로 시달리는 걸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도 무슨 잘못을 한 건 아닐지 하는 생각이들 정도였다.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 괜스레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보게 된다는 거다. “이이이익!” 주먹을 꽉 쥐고있는 손에는 피가 흘러나왔고 마찬가지로 꽉 깨문 입가에서도 피가 흘러나온다. 덜덜 떨려오는 정하얀의 얼굴은 제대로 마주치기에도 조금은 무섭게 느껴질 정도.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내 입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어.” “아….” 말도 안 되는 개소리,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한 치의 거짓 없는 투명한 목소리였다. # 193 회귀자 사용설명서 193화 용의 둥지, 실험, 전직, 강화(1) 김현성의 뒤에서 계속해서 훌쩍이고 있는 정하얀을 보니 괜스레 양심이 찔렸다. 그리폰을 타고 린델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울고 있는 게 보일 정도니 가슴 한편에 죄책감이 드리우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살짝 뒤를 돌아보니 깜짝 놀란 얼굴. 그렇지만 여전히 무거운 표정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하얀아.’ 제대로 화가 났다는 걸 계속해서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실제로 화가 날 상황이기는 했다. 카스가노 유노의 방에 갑자기 들이닥쳤을 뿐만 아니라 요조라 길드의 길드원들에게도 해를 끼쳤으니까. 심지어 왕성 안에서 마법을 사용했다. 화력이 높은 마력은 아니었지만 성을 부술 정도의 위력은 가지고 있었으니 모두가 깨어나 들었을 것이다. 주변 귀족 입장에서는 이토 소우타 사건 이후에 터진 꽤 굵직한 사건이었고 당연히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한쪽에서는 요조라와 파란 사이의 혈맹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떠들어댔고 최대한 뜬소문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무리. 왕성 안에서 일어난 사고였으니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조라 길드와 파란이 동맹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덮을 수 있을 정도의 사고. 카스가노 유노가 요조라를 완전히 장악하지 않았더라면 파란과 요조라의 사이가 틀어졌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커다란 사건이었다는 거다. ‘슈바….’ 물론 나 개인에게도 커다란 사건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어떻게든 정하얀을 납득시켜야 했지만 납득시킬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미 논리적으로는 납득시킬 수 없을 정도로 증거가 너무나도 명확했으니까. 결국 내가 취한 선택지는 역으로 성을 내는 것. 일단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곧바로 잡아뗀 것은 물론, 곧바로 무슨 무례한 짓이냐고 호통을 친 것으로 사건은 간단하게 마무리됐다.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겠지만 이쪽은 정하얀이 찾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황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부족했다. 둘이 한 이불을 덮고 하룻밤을 같이 보내기는 했지만 절대로 정하얀이 생각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명 아닌 해명. 알몸과 비슷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주술을 해주하기 위한 의식이었다고 변명.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논리가 맞지 않는 발언이었다. 눈 하나 깜빡 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던 그때의 내게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완전히 쓰레기였어.’ 잠깐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틀림없이 검은색 세계의 이기영을 능가하는 쓰레기였다. 변명 이후에 보인 모습은 더욱 가관. 정하얀의 뇌가 의문을 느낄 틈도 없이 몰아붙인 것이다. ‘실망했다.’ 부터 시작한 것은 물론. ‘예의가 없다.’ 또는. ‘반성해야 한다.’ 라는 것을 빌미로 요조라 길드원들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고 카스가노 유노에게도 곧바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다. 눈치가 빠른 카스가노 유노 역시 이쪽의 장단에 맞춰버리니 정하얀이 순식간에 역적이 되어버린 셈. 그때부터 쭈욱 차가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결과가 바로 이거다. ‘미안해… 하얀아.’ 연인과의 관계에서는 더 좋아하는 쪽이 항상 약자라고 했던가. 그 말이 옳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민망한 반, 죄책감 반, 정하얀의 돌발행동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곧바로 방 안에 틀어박혀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고 당연하지만 정하얀과도 만나지 않았다. 물론 카스가노 유노와도 일체 연락하지 않았다. 서임식이 끝난 뒤에는 아무 말 없이 그리폰 위에 올라 타버렸다. 당연히 내 뒤쪽에 붙을 줄 알았던 정하얀이 김현성의 뒤에서 그리폰을 타고 있는 이유였다. 이 정도로까지 매정하게 정하얀을 밀어붙인 것은 이후에 이런 사고를 일으키지 않기 위함. 김현성은 사이좋은 우리가 그저 사랑싸움을 한 것 같이 여기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많은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거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 처음에는 이걸로 진정이 될까 싶었지만 정하얀의 뇌는 결국 나를 의심하는 것보다는 나에게 미움 받지 싶지 않다는 쪽으로 노선을 틀었다. 내가 방에 틀어박혀 있는 사이에 내 방문 앞을 서성였고 카스가노 유노에게 이를 갈면서도 그녀에게 혼자 찾아가 사과했다. ‘주객전도.’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인간 쓰레기였다. 정하얀의 눈에는 단 하루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화이트 폴에 살짝 탄 상태로 다시 한번 돌아보니 역시나 계속해서 한 손으로 슥슥 얼굴을 닦고 있는 모습. 지금까지는 그나마 잘 버텼지만 여기서부터는 나도 한계다. “조금 쉬었다 가시죠.” 바람 소리 때문에 소리가 뭉개지기는 했지만 오감이 뛰어난 김현성은 알아들었다는 듯 그리폰의 기수를 틀었다. 나 역시 화이트 폴을 데리고 근처의 절벽에 내린 것은 당연지사. 자리에 내리자마자 어색한 침묵이 펼쳐졌다. 사실상 나보다 더 어색해하는 것은 김현성이다. ‘이 자식.’ 이런 면에서는 상당히 둔감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정하얀과 내 눈치를 필사적으로 살피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이 묘한 침묵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느껴질 것이다. 파티원 간에 일어난 실수였다면 어떻게든 중재하려고 하겠지만 나와 정하연의 개인적인 문제가 얽혀 있는 만큼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을 못 잡는 것 같았다. ‘어차피 기대도 안 하고 있었지만….’ 은근슬쩍 이쪽을 못 본 척하고 있는 꼴은 가관이다. “잠깐 식사라도 하고 이동하도록 하죠.” “네…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요. 기영 씨.” 슬그머니 나와 정하연과 거리를 벌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튼 간에 대충 자리를 만든 이후에는 왕성에서 챙겨온 음식을 꺼내들기 시작. 정하얀은 열심히 준비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정하얀의 흘리는 눈물의 무게만큼 내 죄책감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입맛이 없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래도 우물우물 도시락을 먹고 있는 모습이다. 가끔 끄윽끄윽거리며 눈물을 일발장전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내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을 보며 애써 터져 나오는 오열을 참고 있는 모습. 정하얀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고 김현성은 정하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가운데 기묘한 식사가 펼쳐지고 있다. “날, 날씨 좋군요.” “아… 네.” 별로 좋은 날씨는 아니다. 자신이 말하고도 민망했는지 다시금 묵언수행을 하고 있는 김현성. 꾸역꾸역 억지로 음식을 밀어 넣고 있는 정하얀. 내가 만든 분위기인 만큼 수습하는 것도 이쪽의 몫. 결국에는 정하얀에게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애초에 화해의 손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잘못은 나 혼자 다 하고 나 혼자 화가 난 척했던 것뿐이었으니까. 내 몫에 있는 고기를 무심하게 정하얀의 반합통 위에 올리자 깜짝 놀랐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의 얼굴이 보인다. 그 와중에도 닭똥 같은 눈물이 뚜욱 뚜욱 떨어지고 있는 상황. 그렇지만 내가 자신을 챙겨주는 게 무척이나 기분 좋은 모양이다. “끄윽… 끄윽… 히끅….” “많이 먹어.” “네엣…. 끄윽….” “천천히.” “네엣. 끄으윽… 제… 제성합니다.” “울지 말고.” “제성합니다…. 끄윽….” “체하겠다.” 상당히 불편하다. ‘이건 아닌데….’ 최근에 조금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느낌은 있었는데 왠지 이번 일로 그 정점을 찍은 듯한 기분에 괜스레 나도 침묵을 지키게 된다. 정하얀과 나는 사실 공식적으로 연인이란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내 마음에 조금은 거짓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도 했고 은근슬쩍 둘만의 스킨십을 가지고 있을 때도 있다. 간혹 데이트도 나가기도 하고 가끔은 밀어를 속삭인다. 내 마음이 어떻든 간에 일단은 연인의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는 거다. 정하얀 역시 그 사실을 대충은 깨닫고 있는 상태.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밤을 지새우고 있다는 정황이 의심이 간다면 두발 벗고 나서는 것은 정상적인 여자 친구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지구가 아니라 대륙이라는 배경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의 특수성과 정하얀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사실 때문에 이런 상황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고 나 자신을 합리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어.’ 이토 소우타와 잊힌 미친 늙은이를 골로 보낼 때도 하지 않았던 합리화다. 정하얀과 내 관계는 연인관계이면서도 팽팽한 줄다리기를 필요로 한다. 저주 받은 신단 사건을 생각해 보면 더욱더 감이 온다. 일부한테는 쓰레기처럼 들리는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둘의 관계에서는 내 쪽이 절대적인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이게 맞아.’ 아직도 끄윽대며 눈물 젖은 고기를 먹고 있는 겉모습은 내 마음을 약하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긴장을 놓으면 안 된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마친 이후에는 다시 한번 그리폰으로 탑승. 김현성의 뒤로 가야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다시 내 쪽으로 붙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 슬그머니 손을 내미니 기분 좋게 웃으며 내 등에 착 달라붙는 정하얀이 보였다. “헤… 헤헤.” 그새 또 기분이 좋아진 모양. 사실 나도 이게 편하다. “꽉 잡아, 하얀아.” “네!” 아까보다는 조금 더 기운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이 어느 정도는 용서했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어차피 연구도 했어야 했으니까.’ 정하얀과 계속해서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걸 참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기 이전에 린델에 돌아가자마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쯤에서 서로 타협하는 게 맞다는 거다. ‘박덕구 개조 계획.’ 그리고. ‘전직.’ 잘하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다. 연구가 조금 힘이 들기야 하겠지만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건 이미 확정되어 있는 이야기다. ‘왜?’ 린델에는 지식의 보고가 있으니까. 시간이 없어 자세히 연구해 보지는 못했지만 디아루기아는 살아 있는 표본이다. 용에 대해서 모든 걸 알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표본. 물론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디아루기아를 이해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것은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별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촉매 자체가 전설 등급 이상. 박덕구를 캡틴 린델로 진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혈청.’ 가장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박덕구 강화 계획이 벌써부터 머릿속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눈에 보이는 것은 자유 도시 린델. 쌓인 피로를 풀고 싶었지만 여러모로 바빠질 만큼 곧바로 연구를 시작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 왠지 모르게 익숙하지 않은 건물 하나가 시야에 비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건물이라고 볼 수 없다. “어?” 마치 동굴처럼 보이는 건축물. 문제는 그 건축물을 구성하는 물질에 있다. ‘미스릴?’ 건물 자체를 미스릴로 뒤덮은 듯한 느낌. 심지어는 처음 들어본 금속들이 계속해서 눈에 띄기 시작. 전부다 평범한 금속들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영웅 등급 이상의 자재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축물은 디아루기아의 몸을 전부 우겨놓고도 남을 만한 정도의 크기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린델을 떠나기 전 디아루기아에게 건넸던 한마디. 둥지를 만들 계획이니 지르고 싶으신 대로 지르시면 됩니다. ‘미친! 미친!’ 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이 미친!’ 하고 싶으신 건 다 하셔도 됩니다. “이 미친 여편네가!!!” 경제관념이 없는 것에게 통장관리를 맡기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사례. 서둘러 돌아가 내 금고를 확인해야만 했다. # 194 회귀자 사용설명서 194화 용의 둥지, 실험, 전직, 강화(2) “제기랄.” 린델에 도착했지만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우연히 엇갈린 것인지 파티원들은 사냥을 나가 있었고 나는 나대로 긴박했기 때문이다. 곧바로 김미영 팀장에게 찾아간 것은 당연지사. 내 눈으로 본 게 실화인지 확인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거의 완성된 저 둥지는 도대체 뭔지 어처구니가 없어 턱이다 빠질 지경이었다. “제기랄!” 린델을 떠난 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건물이 거의 완성단계에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곳은 지구와 배경이 다르니까. 고급 인력을 미친 듯이 투입한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는 거다. 물론 마법사들이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장인들을 고용하자면 그만큼 돈이 들어가는 게 현실. 마치 예술품과 비슷할 정도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바라보면, 있는 장인 없는 장인을 전부 끌어다 모아쓴 것 같았다. 아마 한두 명이 투입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벌써부터 중축이 완료되어 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슈바!!!’ 둥지를 만들기 위해 영웅 등급 이상의 마법사들은 물론 대장장이, 심지어 생산직 전반에 걸쳐 있는 명인들을 모두 고용한 셈. 인건비 자체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토지의 매입부터 시작해 개간까지 생각해 보면 여기서 또 추가금액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저 둥지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다. 애초에 저 정도의 미스릴 광석이 린델에 있었는지조차 의문스러운 부분. 타 도시와 영주에서 저 미스릴 광석을 수입했다고 생각해 보면 운송비도 만만치 않게 들어갔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리폰을 이용했을 테니까. 자제만으로도 이미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고 있는 상황. 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 물론 어마어마하기는 했지만 내 전 재산을 때려 박아도 저 둥지를 짓는데 들어간 돈에는 미치지 못한다. 대충 둘러봐도 견적이 나온다는 거다. 내부 역시 꾸몄을 거라고 생각해 보면 아마 저 곱절로 생각하는 게 옳다. ‘미친 여편네. 미친 여편네!’ 박덕구와 검은색 세계의 카스가노 유노에 대해서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똥줄이 타는 상태. 황급하게 행정실의 문을 여니 화들짝 놀란 김미영 팀장의 얼굴이 보였다. “부길드 마스터.” 당연하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 모양. 김미영 팀장은 결코 멍청하지 않다. 둥지를 짓는 데 있는 돈 없는 돈을 박아 넣는 걸 허락해 줄 리가 없다. 말하자면 그녀 역시도 저 상황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는 것. 곧바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김미영 팀장, 저 둥지는….” “일, 일단 죄송합니다. 부길드 마스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군요.” “네. 그러니까….” 이야기는 조금 간결했다. 일단 나와 김현성이 린델에 빠져나간 직후에 디아루기아가 곧바로 둥지의 건설을 의뢰했다는 것. 둥지를 만들 거라고 이미 김미영 팀장에게 말을 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당연히 작업은 빠르게 진행됐다. “저도 처음에는 부길드 마스터의 말을 듣고 예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추가 예산이 생겨난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문제는 디아루기아가 직접 공사 현장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났다.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이 계속해서 추가 주문을 하며 자신의 의도대로 둥지를 완성시킬 것을 주장했다는 것. 물론 그게 생각대로 될 리가 없다. 편성할 수 있는 예산에는 한계가 있고 이미 내 개인의 재산은 물론 파란의 재산까지도 사용하고 있는 상태였을 테니까. 이쯤에서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김미영 팀장과 몇몇 파티원이 디아루기아를 말려보려고 했지만… 말릴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은 급한 대로 자금줄을 끊었지만….” “…….” “그… 디아루기아 님 본인이 돈을 구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각 길드를 찾아가 자신의 이름을 대고 직접 돈을 빌려오셨습니다.” “막을 수 없었겠군요.” “네. 엄밀히 말하면 길드에서는 디아루기아 님에게 그 어떤 권리도 강제로 행사할 수 없으니까요. 물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신 분도 아니니 저희로서는 디아루기아 님에게 채권을 발행하지 말라고 타 길드에게 압박을 넣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훌륭한 판단이다. 그녀가 돈을 빌리는 걸 막을 수가 없다면 길드에서 돈을 빌려주지 않게 하면 된다. “물론 이 계획도 원활하게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린델 내에 있는 길드들이 디아루기아 님에게 채권을 발행하지 않자 저희 측에서 뭔가 손을 썼다는 걸 금방 깨달으셔서… 린델 전역에 자신의 가죽과 비늘을 인간들에게 판매하신다고 발표하셨습니다.” “혹시 판매가 된 겁니까?!” 그녀의 몸에서 나온 것을 내 허락 없이 파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몸에 대한 힌트를 다른 길드의 연구자에게 보여주느니 차라리 돈을 쓰는 게 낫다. 어째서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지에 대해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걸 막기 위해서 타 길드에서 돈을 빌리는 걸 허락할 수밖에 없었던 거군요.” “예. 그렇습니다.” “액수가 어느 정도 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미영 팀장이 이쪽으로 슬그머니 문서들을 내밀었다. 확인하면 할수록 뒷목을 잡고 쓰러지고 싶을 지경. 김미영 팀장을 비롯한 행정팀을 질책하기보다는 칭찬해야 한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꾸역꾸역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자금을 운용한 게 눈에 보인다. 그러고 보니 며칠은 잠을 자지 못했는지 다크 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상태. 다른 이들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아마 이 며칠간은 저들에게도 지옥이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수고했습니다, 김미영 팀장님.” “아닙니다. 부길드 마스터. 오히려 죄송할 뿐입니다.” 길드의 행정팀을 탓할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면 이건 내 잘못이었으니까. 연구하기도 전에 뭔가 진이 빠진 것 같은 기분. 괜스레 말이 없어졌다. 순식간에 빚더미에 들어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수익이야 있기는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해서 포션이 팔려나가고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들어오는 돈 만큼 나가는 돈도 많다. 캐슬락의 지하에 블랙마켓도 아직은 건설 중에 있었고 여러 가지 사업이 아직 준비하고 있는 단계다. 조금 씁쓸하기는 했지만 디아루기아가 있다면 어떻게 복구가 가능한 부분. 당연하지만 디아루기아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둥지가 어떤 상태인지부터 알아야 했으니까. 곧바로 화이트 폴을 타고 날아가자 정하얀이 이쪽에 눈길을 보내온다. 함께 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함께 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건 엄연히 가정사였으니까. “하얀아.” “네. 오빠….” “내일 바로 연구 들어갈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아마 연구실에서 며칠은 같이 밤을 새야 될 거야.” “네… 네!” 일단은 이걸로 정하얀을 떼어놓을 수는 있다. 빠르게 둥지로 날아가자 확실히 육중하고 거대한 용의 둥지가 한 눈에 보였다. ‘멋지기는 하네…. 마력석도 쏟아 부었나.’ 도시 안에 용의 둥지가 있다. 뭔가 상징적으로도 괜찮기도 하고 겉으로 보기에 사람을 위압하는 크기가 있다. 마력석뿐만이 아니라 아티팩트도 여럿 때려 박은 느낌. 조용히 안으로 들어서자 무척 화려한 실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늘 위에 박혀 있는 야명주들은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고 도통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도 눈에 보이기는 한다. 내가 용이 아니니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저마다 쓰임새가 있으리라.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누구인지는 뻔할 뻔자.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여전히 머리에 커다란 뿔을 달고 옷을 입고 있는 그녀가 시야에 비쳤다. “빨리 돌아왔군요.” “똘똘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잠을 자는 중입니다. 그보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빠르게 만들었군요….” 당연히 화내고 질책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그렇지만 입가에 연신 미소를 쏟고 있는 디아루기아를 바라보니 그녀가 정말로 이 둥지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 가장 행복해 보이는 표정. 그야 나라도 저런 표정을 지을 것이다. 누가 보기에도 이 장소는 아름다워 보였으니까. 심지어는 조경도 해두었다. 동굴 안에 연못과 나무도 있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아니, 저 정도면 연못과 나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호수와 숲이라고 하는 게 옳다. “인간의 마법이라는 건 참으로 놀라운 것 같습니다.” ‘슈… 바….’ “둥지 내에 이런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후후후.” ‘기분 엄청 좋아 보이네….’ 나와는 전혀 딴 판이다. “사실 당신과 함께 살아야 하는 만큼 이것저것 상의를 거치고 싶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바쁘신 것 같아서… 똘똘이에게도 커다란 둥지가 필요하니까요.” “별, 별로 바쁘지는 않았는데 상의라도 한번 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저번에는 조금 날카로웠던 것 같습니다. 인간들의 세계에서 당신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이 조금 나더군요. 저 혼자 해결할 수 없었던 일도 당신의 이름을 대면 해결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조금이지만 이 둥지를 만들면서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죠.” “그렇군요….” “어째서 당신이 안전한 둥지를 제공해 줄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 물론 너무 밖으로 나가시는 건 조금 자중해 주셨으면 좋겠지만… 똘똘이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간에 일하고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솔직히 입가가 파들파들 떨리기는 한다. 지금까지 내가 벌어왔던 걸 까먹은 사람이 눈앞에 있다. 속이 쓰리지 않은 것이 이상하리라. 그렇지만 일단은 참을 수 있는 부분. 수도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쌀쌀맞았던 그녀가 갑작스레 친절해졌기 때문이다. ‘얘는 보물이야.’ 디아루기아는 보물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가치가 어떤지에 대해서도 조금씩이지만 깨달아가고 있다. 전 재산을 털리고 빚을 지기는 했지만 이런 둥지로 호감을 살 수 있다면 나쁘지는 않은 거래라는 거다. 어차피 연구가 조금만 진행되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 돈은 부수적으로 딸려 들어오는 것뿐이다.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게 될 거고 나 개인의 전직과 박덕구의 강화도 책임져 줄 열쇠. ‘똘똘이의 삶의 질도 올라가겠지.’ 이런 방향으로 친해지는 것도 결코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스레 미소가 지어지기는 한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커다란 둥지가 만들어졌는데 당연히 알아야 할 게 많지요. 인간들의 용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 않습니까.” 확실히 아무것도 모른다. 아마 이 곳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용의 생태에 대해 대충은 파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대충 걸어 다니다 보니 확실히 신기한 부분이 많기는 많다. “식량 창고입니다.” “이렇게 클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은 디아루리아가 조금씩 먹고 있습니다만… 3년에서 5년 정도 사이에 계속해서 영양 섭취를 하게 됩니다. 영양을 전부 마력으로 돌리기 위함입니다.” “아아아….” “인간들의 마법 중에는 음식물을 상하지 않게 하는 종류의 마법도 있더군요. 덕분에 커다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저 숲과 호수는….” “네. 디아루리아는 저곳에서 사냥을 배울 겁니다.” “그렇군요.” 생각보다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지는 않았다. 물론 모든 우리 똘똘이가 사용하는 모든 물품이 최고급이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생각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 질만 하다. ‘가슴은 쓰렸지만.’ “그리고 이곳은 당신이 지낼 방입니다.” “이런 것도….” “당신은 디아루리아의 아버지입니다. 당연히 여기서의 수면도 생각해 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는 인간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아직 무지해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내에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많이 머무를 수는 없겠지만….’ 일단은 감사의 인사라도 하는 것이 맞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정말로 보여드리고 싶은 건 이곳입니다.” “네?” 마치 던전 같은 구조의 방을 지나자 내 눈에 보인 것은 커다란 규모의 연금실험실이다. 심지어 디아루기아의 본체가 누워도 무리가 없을 만한 규모의 실험실이었다. ‘뭐….’ “꼭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내키지는 않지만 당신은 제 몸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애초에 그 조건으로 제가 이곳에 있는 거기도 하고요. 잘은 모르겠지만 인간의 기준으로는 고급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둥지를 주신 제 선물이라고 알아주시면 됩니다.” “선물….” 규모가 꽤 커다랗다. 골드가 무척이나 많이 들어간 것 같은 느낌. 여기에도 돈이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속이 쓰리기는 하지만 어차피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아마 디아루기아가 공사 책임자에게 공방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한 게 틀림없으리라. 아는 게 없으니 바가지는 조금 긁혔겠지만 솔직히 마음씨는 가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때였다. 순간적이지만 머릿속으로 한 가지 의문이 들어와 꽂힌 것. ‘예산이 맞나?’ 서류와 머릿속으로 대충 계산한 예산은 딱 이 동굴까지. 이 정도 규모의 공방을 차릴 정도는 아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건 정말로 선물이니까요.” “골드는….” “아. 친절한 인간들이 빌려주시더군요.” 다행히 자신의 신체 일부를 팔아넘긴 것은 아니다. “린델에 있는 길드 분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아 이 둥지를 완성할 수 있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골드라는 것이 조금 모자랐습니다. 겸사겸사 돈을 빌려주신다는 친절한 인간이 있어 그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요.”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든다. “조금 조건이 까다롭기는 했지만 다행히 제가 그 조건을 충족하고 있어서….” “조건이라는 게 혹시 뭡니까?” “특이하게도 여성체에게만 대출이라는 걸 해주시는 인간들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플레이어 전문여성대출이라는 글을 우연히 보게 되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선물인 만큼 당신이 속해 있는 길드의 인간들에게 신세를 지는 건 아닌 것 같아 제가 직접 계약이라는 걸 처음 진행해 봤습니다. 저는 플레이어라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당신 때문에 신용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더군요.” “네?” “그렇게 기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으로 똘똘이에게 잘해달라는 제 성의니까요. 후훗.” “그게 아니라 아까 전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 신세지는 건 아닌 것 같다는 말 전에 말입니다.” “플레이어 전문여성대출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혹시 처음 들어보셨습니까?” “야… 이 미, 미….” “역시 당신도 알고 계셨군요. 미… 미…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이… 아! 미주사랑이라는 길드에서 빌려주셨습니다.” “야 이 미친 여편네야!” 이 꼴을 볼 때부터 속으로 삼킨 목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 195 회귀자 사용설명서 195화 용의 둥지, 실험, 전직, 강화 (3) “야, 이 미! 미친 여편네야!” 조금만 생각해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겠지만 이 대륙은 그다지 여성들에게 친절하지 않다. 차희라나 정하얀, 조혜진같이 일부 재능을 가지고 있거나 이지혜처럼 독한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지만 튜토리얼 던전에서 무임승차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 사회의 약자다. 몬스터와 마주해서 싸워야 되는 상황은 남자들도 부담을 느낀다. 신체적 약자에 있는 여자가 부담을 느낀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라는 거다. 마법사 적성이나 사제 적성이 없는 이들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싸우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 적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재능이 없는 이들은 별 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는 것이 현실. 용기를 낸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일부 정신 나간 미친놈들 때문에 파티 사냥에 들어갔다가 험한 꼴을 당하기 십상이었고, 노숙이나 함께 오랜 시간을 가져야 하는 공략이나 사냥의 특수성에 노출된 여성 플레이어들은 자연스럽게 사냥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길드에 들어가 있지 않은 여성 플레이어들은 고정 파티가 아니면 잘 들어가지 않는다. 몇 박 며칠을 함께해야 되는 상황에서 처음 본 남자를 믿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만들어진 게 대부분의 길드원들이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검은백조라는 걸 생각해 보면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 문제가 조금 더 심각했었다는 거다. 결국 플레이어로서 살아가기를 포기한 여성들이 발길을 돌린 것은 사무직으로서 길드에 취직하거나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 그렇지만 길드나 클랜, 심지어는 자영업자들도 이들에게 제대로 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최저임금제도는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지만 말 그래도 암묵적.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플레이어 전문여성대출.’ 미주사랑이나 가로쉬 앤 캐쉬 같은 합법적인 대부업체였다. 린델에도 은행이 있다. 조금 원시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신성제국에서도 제국은행을 운영하고 있고 대출 상품과 보험 상품도 분명히 존재한다. 당연하지만 아무 기반이 없는 이들이 이런 시설에 돈을 빌릴 수 있을 리가 만무. 제1금융권, 제2금융권에 승인이 나지 않자 제3금융권으로 몰려드는 이들이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제길.’ 대출을 대출로 막고 그 대출을 대출로 막는다. 결국에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궁지에 몰리는 흔한 클리셰. 물론 나 같은 경우도 있다. 모험가 남편을 둔 부인들이 자신들의 소비벽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 인간도 아닌 용에게 이런 뒤통수를 맞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갑작스레 소리를 지르는 내 모습을 본 디아루기아의 표정은 멍하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냐는 듯이 인상을 쓰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뭐, 뭐라고 했습니까? 무례합니다. 어디까지나 당신을 위해서! 이건 선물이란 말입니다!” “나를 위하긴 개뿔!” “정… 말로 무례한 사람이었군요! 이런 사람이 디아루리아의 아버지라니! 인간은 감사의 마음을 담은 선물이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까?” “지금 진짜 무례한 게 누군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당장 계약서나 가져 와!” “네?” “빨리 계약서나 가져오라고 이 여편네야!” 황당해하는 내 모습을 본 이후에는 디아루기아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모양.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한 뭉텅이의 서류를 들고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차라리 가로쉬 앤 캐쉬에서 돈을 빌렸다면 조금 더 나을 뻔했다. 거기는 규모가 조금 작은 클랜이었고 클랜 마스터 갈오식의 무력도 그다지 강하다고 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미주사랑에 김미주는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대형 길드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규모이기는 했지만 최소한 자기 몸은 지킬 수 있을 만한 무력과 인맥을 가지고 있다. 물론 덩치 자체로 비교해 보자면 붉은용병과 검은백조, 요조라 길드와 함께 있는 파란과 비교가 안 되겠지만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돈을 빌린 것은 물론 이미 전부 사용해 버리기까지 했다. 이것 때문에 또 협상 테이블에 앉아 시간을 버릴 걸 생각하면 짜증이 샘솟는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거기까지 신경을 쓸 시간이 없다. 애초에 돈을 먼저 빌려달라고 한 쪽도 이쪽. 사용하고 배 째라는 것은 다른 길드나 클랜들이 보기에도 좋은 그림은 아니라는 거다. “여, 여기 있습니다.” 갑자기 짜증이 샘솟는다. “필요 없어!” 서류 뭉치를 들자마자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계약서를 집어 던진 것은 당연지사.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분위기상 엄청난 실수를 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지 잔뜩 주눅 든 얼굴이 보였다. 나를 한 번에 밟아 죽일 수 있는 용의 얼굴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화가 풀리는 건 아니다. 대충 봐도 어마어마한 액수. 미주사랑 쪽에서 이쪽에 먼저 접선한 것도 아니라 디아루기아가 먼저 미주사랑을 찾아간 상황이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지하투기장 때 안 그래도 돈 많이 썼는데….’ 요조라 길드의 도움을 받기는 힘들다. 아무래도 검은백조나 붉은용병에게 돈을 빌려 메우는 게 가장 좋은 선택지인 것 같았다. 계속해서 이자가 불어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으니까. ‘밥상이라도 있었으면 뒤집어버리고 싶다.’ 정말로 강렬한 충동을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일단은 입술을 꽉 깨물고 신사적으로 대해줘야 한다. 사이가 틀어져 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 “제가… 함부로… 인간들과 접촉하지 말라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디아루기아.” “아직 뭐가 뭔지….” “골드는 함부로 빌리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지성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인간 사회를 기준으로 하면 사회성이 어린아이 수준이나 마찬가지에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배우는 건 차근차근히 합시다. 아니 애초에!” “키에에엑!” “…….” “키에에에에에엑!” “오이구! 우리 똘똘이 일어났쪄?” “헥헥! 헥!” 막 성질을 내려고 했을 때 어머니를 구원하러 등장해 준 똘똘이. 이쪽의 커다란 목소리가 녀석을 깨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디아루기아로서는 적절한 타이밍에 녀석이 등장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녀석 앞에서는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을 연출해야 하는 만큼 이쪽이 신경질을 낼 수도 없었으니까. 사실 정신없이 내가 있는 쪽으로 뛰어오는 똘똘이의 모습이 귀여워 잠깐이지만 화가 풀린다. 자식 보고 산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볼 정도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오이구! 그래 아빠 왔다. 보고 싶었어?” “키에에에에에엑! 키에에에엑! 헥! 헥!”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들고 있는 똘똘이의 상태는 광란 마법이라도 걸어 놓은 것 같았다. 정신없이 얼굴을 핥는 것을 보니 정말로 내가 그리웠던 모양. 그야 조금 오랜 시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리라. “그래, 그래, 아빠 일하고 왔다!” “키에에에엑!” 아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저 신나서 방방 뛰면서 어떻게든 안기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녀석을 품에 꼭 안은 채로 디아루기아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바라보자 괜스레 내 시선을 피하는 디아루기아가 보인다. “제가… 갚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무슨 수로? 참고로 당신 신체의 일부를 판매한다는 선택지는 없습니다. 당신 몸은 온전히 제 소유예요. 그게 거래였습니다.” “키에에엑! 헥헥!” “그, 그럼 사냥이라도 나가서 몬스터들을 잡아오면 됩니다.” “몬스터 한두 마리 잡아서 충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닙니다. 그리고 잡아와봤자 어차피 이자를 막는 용도로밖에 사용할 수 없을 거고요. 골드 쪽은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후우. 교육이 필요한 건 똘똘이뿐만이 아니군요. 당신도 교육을 좀 받아야 될 것 같습니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되니까요.” “…….” “일단 곧바로 당신의 몸에 대해서 확인할 게 있으니 준비해 주세요.” 조금 여유롭게 할 생각이었지만 최대한 빨리 들어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실험실도 이미 완성되어 있는 상황. 고마운 마음도 조금은 들었지만 순간적으로 짜증이 올라와 표현도 하지 못했다. 나한테 말은 안 했지만 디아루기아도 조금은 섭섭한 표정이었다. 결국에는 슬그머니 감사의 인사를 날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물은 일단 고맙습니다.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제야 얼굴이 조금 풀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똘똘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는 곧바로 그녀에 대해서 알아봐야 되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 이쪽의 일에는 조금 소홀했다. ‘사실 며칠 정도 쉬려고 했지만….’ 비어버린 통장이 나를 채찍질한다. ‘어차피 돈은 생기게 되어 있어.’ 지금부터 벌어드릴 돈에 비하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돈은 어차피 푼돈. 누구보다 그걸 잘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속이 쓰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똘똘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디아루기아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고민해보는 것이 당연. 디아루기아는 여전히 죄인의 표정으로 몇 발자국 떨어져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단은 본신의 모습으로 변해주시면 됩니다. 아직 저도 감이 안 잡혀서 말입니다.” “네.”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 보였다. 입고 있던 옷이 찢어졌지만 그녀의 몸을 대놓고 감상할 시간은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그녀가 용족화하고 있는 게 보였으니까. 팔에는 점점 특유의 비늘이 돋아나고 있었고 인간의 피부가 용의 피부로 탈피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신기해 보인다.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괴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마치 걷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워어어어어어….” 순식간에 덩치를 키워나간 커다란 용의 위용은 여전히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면 조금은 무섭다. 괜스레 서류뭉치를 집어 던진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 그녀의 시선에 내가 어떻게 비칠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이에서 본 디아루기아의 모습은 정말로 압도적.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는 것이 보인다. “와….” 두 개의 커다란 뿔, 나 같은 건 한 입에 씹어 삼킬 수 있을 것 같은 이빨. 무엇보다 하위종으로서 상위종에게 느끼는 경외감이 느껴진다. 광택이 도는 가죽과 비늘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내 앞에 있는 게 용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한 겁니까. “아?” -배우자에게만 마음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용의 신체기관은 인간의 언어를 내뱉는 게 불가능한 터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군요.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단지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그때는 단순히 무섭게만 보였을 뿐이었는데 이렇게 차분하게 당신을 살펴보니 정말로 놀랍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니가 네 돈은 날려버렸지만….’ “일단은 간단하게 혈액부터 분석해 볼 겁니다. 그 뒤로 수치를 재고 여러 가지로 알아볼 거고요. 혹시 아프시면 말씀하셔야 됩니다.” 특수 제작된 주사기로 그녀의 팔 안에 꼽아 천천히 혈액을 뽑아내자. 곧바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지럽습니다. 히… 히힛. 히히힛. 내 생각보다는 웃음소리가 경박하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히… 히히하힛! “저 깔려 죽는 거 보기 싫으면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이제 다 끝났습니다. 조금 조심 좀 해주세요. 제 몸은 정말로 연약하단 말입니다.”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 연구가 하루아침에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조금 서두른 것도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할지에 대해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바로 마음의 눈을 켜고 그녀의 혈액을 연금 키트에 옮기기 시작. 그녀의 혈액은 조금씩 분리되서 각각의 플라스크에 옮겨졌고 곧바로 이쪽이 상정하고 있던 촉매들과 반응을 일으켰다. 그다지 결과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다. 준비해 놓은 설비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해 확인하는 게 먼저다. 세포를 추출하고 유전자 검색을 하는 것도 당연한 부분. 내가 가지고 있는 장비와 마력으로는 연산하는 시간이 조금 걸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장비로 먼저 돌려놓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서부터 파고들어야 돼?’ [전설 등급의 촉매 -----를 최초로 발견합니다.] [지력 1이 올라갑니다.] [전설 등급의 촉매 -----를 최초로 발견합니다.] [지력 1이 올라갑니다.] [전설 등급의 촉매 -----를 최초로 발견합니다.] [지력 1이 올라갑니다.] [촉매의 이름을 직접 입력해 주세요.] [새로운 칭호를 얻었습니다.] [최초 발견자] [대륙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물질을 발견한 플레이어를 위한 칭호입니다. 지력이 1올라갑니다.] [용을 실험한 연금술사] [대륙 최초로 살아있는 용에 대해서 탐구한 플레이어를 위한 칭호입니다. 지력이 1 올라갑니다.] [연금술과 진리에 대한 당신의 끝없는 탐구심과 모험심에 경외를 표합니다.] [전설 등급의 새로운 직업을 발견합니다.] [드래곤 알케미스트-고유 전설 등급] “사랑해 임자!!” 그녀가 내 전 재산을 까먹었다는 사실은 이미 잊었다. # 196 회귀자 사용설명서 196화 용의 둥지, 실험, 전직, 강화 (4) 성과가 있을 거라는 건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야 디아루기아는 용족으로 분류되는 전설 등급의 몬스터였고 그녀의 몸은 아직 미지에 둘러 쌓여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이 정도로까지 내게 커다란 선물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드래곤 알케미스트 - 고유 전설 등급] ‘고유 전설!’ 무려 고유 전설 등급이다. 영웅 등급의 직업을 얻을 때도 기쁘기는 했지만 보라색으로 몸이 반짝이던 예전과는 이펙트 자체가 다르다. “와….” 온몸에서 황금색 빛이 터져 나오는 효과는 말로만 듣던 전설 등급으로의 전직을 알리는 이펙트.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기분이다. 계속해서 몸 안에서 터져 나온 황금빛은 꺼질 생각을 하지 않고 한껏 올라간 입가에 미소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전설 등급!’ 결국에는 눈이 조금 아프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에야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 그렇지만 여운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푸흣… 푸흐흐흐흐흐.” 칠칠맞지만 계속 웃음이 나온다. 기쁘지 않은 것이 이상하리라. 이 대륙에서 뭐라도 하나 전설이라는 걸 가지고 있다 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미각성 상태로도 충분히 제 효율을 발휘하는 율리에나. 전설 등급의 특성 마음의 눈. 그리고 이번에는 전설 등급의 직업까지. 지금까지 나를 개무시했던 총평에게 이제는 누가 장님인지에 대해 물어보고 싶을 정도. 보통 다섯 번째나 여섯 번째에 전설 등급의 직업이 열린다는 게 대륙의 상식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재능이 없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내 성장 속도는 빠르다. ‘물론 능력치는 형편없지만….’ 일반 전설이 아니다. 무려 고유 전설 등급이다. 이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이제는 대륙에서 내가 유일하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성과는 가치가 있다. [드래곤 알케미스트 - 고유 전설 등급]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직업입니다. 무구한 세월을 자랑하는 대륙의 역사에도 살아 있는 용을 촉매로 한 연금술은 시도해 보지도 실행되지도 못했습니다. 그 업적을 높이 평가해 드래곤 알케미스트를 고유 전설 등급으로 판정합니다. 모든 연금술사가 당신의 위대한 업적에 놀라움을 표시합니다. 드래곤 알케미스트는 용을 촉매로 연금술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의 연금술사입니다. 어떤 것을 가능하게 할지는 당신의 연구와 연금기술에 달려 있습니다. 지력이 +6 올라갑니다. 마력이 +7 올라갑니다. 용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갑니다. 전 직업 생체연금소환사의 직업 효과는 그대로 유지됩니다. 고유 전설 등급 드래곤 알케미스트의 직업 효과로 만들어낸 일부의 결과물을 소환수로 판정합니다.] ‘이야!!!’ [플레이어 이기영의 상태창과 재능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이기영] [칭호 - 용병여왕의 정부, 베니고어 신성 제국의 명예 주교, 용의 배우자, 최초 발견자, 용을 실험한 연금술사] [나이 - 25] [성향 - 용의주도한 전략가] [직업 - 드래곤 알케미스트 - 고유 전설 등급] [직업 효과 - 기초마법지식 습득] [직업 효과 - 기초연금지식 습득] [직업 효과 - 중급연금지식 습득] [직업 효과 - 특수소환지식 습득] [직업 효과 - 고급연금지식 습득] [직업 효과 - 용전문연금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 - 21/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 - 22/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 - 3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 - 87/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 - 22/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 - 65/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 - 45/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장비] [저주를 내리는 검 율리에나 - 전설 등급 - 주인 의식]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 - 영웅 등급 - 연금술사 전용] [마력 방패의 반지 - 희귀 등급] [특성 - 마음의 눈 - 전설 등급] [총평 - 더 이상 자력으로 성장하지 않는 마력 능력치를 꾸역꾸역 올리기 위해 열심히 하는 모습이 측은하기도 합니다. 45의 마력 능력치를 가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일단은 박수라도 드리고 싶군요. 여전히 다른 능력치는 형편없지만 곧 90을 돌파할 지력 능력치와 고유 전설 등급의 직업을 얻은 것은 칭찬해드리고 싶은 부분이네요. 앞으로는 조금 기대해 보겠습니다만… 너무 자만하지 말도록 하세요. 지력과 마력과 행운을 제외한 능력치들은 단 1도 올라가지 않았으니까요.] ‘나 어차피 연금술사다, 이놈아. 그게 뭔 상관이야.’ 사실 상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근력과 민첩, 내구야 그렇다고 쳐도 체력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니까. 렇지만 후회될 정도는 아니다. 내가 45 스탯의 마력을 가지게 될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게… 45스탯의 마력이다!’ 다른 마법사들에 비하면 여전히 절망적인 수치지만 내 안에 들어 있는 어마어마한 마력에는 웃음이 나왔다. 물론 내 기준에서나 어마어마한 마력. 살짝 손에 마력을 밀어 넣고 품 안에 제법 단단해 보이는 촉매를 잡고 힘을 주자…. ‘제길.’ 부셔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그 촉매를 내려놓고 다른 촉매를 집어 들자 또각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부셔져 나갔다. ‘헐크!’ 마치 헐크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30대의 마력 능력치로 할 수 없는 일들이 40대에서는 가능해진다. 마력 운용을 통한 일시적인 신체의 강화. 기분이 좋은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최근 잘 오르지 않는 지력 능력치도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다. 지력 스탯이 90이 되면 특성 하나가 더 열린다는 것은 이미 황정연을 통해 들었던 적이 있다. 연구하는 동안 지력 스탯 3을 올리는 건 아마 일도 아니리라. 물론 89에서 90으로 넘어갈 때 뭔가 제한이 걸려 있을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당장은 성장하는 데 문제가 없다. 어차피 나는 이제 겨우 4차 전직을 이뤄냈을 뿐이고 아직 5차가 남아 있으니까. 이제 들어온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인간의 성장 속도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나와 함께 들어온 녀석들은 고작해야 3차 직업이나 2차 직업에서 빌빌 거리는 것이 태반. 김현성 파티를 꽉 잡아야 한다는 내 선택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나는 그 덕을 톡톡히 봤고 덕분에 매우 기분 좋아지는 상황을 함께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정신없이 얻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중에 말을 걸어온 것은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디아루기아다. -뭔가 얻은 게 있는 겁니까? “덕분에 아주 좋은 걸 얻었다니까. 사랑해, 여보. 아이구! 아이구!” 디아루기아의 신분은 미친 여편네에서 사랑스러운 임자로 승급. 그림으로 그린 듯한 태세전환. 이 기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 그녀의 커다란 얼굴로 달려가 가죽에 찰싹 달라붙어 정신없이 뽀뽀세례를 퍼부었다. -징그럽습니다. 이러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아니 우리 사이에 뽀뽀 정도는 할 수 있지!” -아무튼 간에 이러지 말라고 말 했습니다. 이런 애정 표현은 불편하고 불쾌합니다. 이럴 시간이 있다면 빨리 실험을 끝내고 우리 디아루리아에게 조금 더 신경써 주도록 하세요. 역시 인간들이란…. “우리 이쁜이! 어째서 이 매력을 그동안 몰라봤을까. 반들반들한 광택하며 쭉 뻗은 뿔하며! 안 예쁜 곳이 없네.” -왠지 모르겠지만 칭찬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불쾌합니다. “흐흐흐!” -징그럽게 달라붙지 말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달라붙지 마세요. 움직일 겁니다. “아이고 사랑스러워라… 움직이면 나는 깔려 죽습니다, 임자.” -이, 이런 인간이…. 솔직히 조금 흥분한 상태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흥분한 상태라고 하는 게 맞다. 고유 영웅 등급 생체연금소환사를 얻었을 때도 기쁘기는 했지만 그때와 지금은 와닿는 느낌 자체가 다르다. 어차피 이곳에서는 나를 보는 사람도 없으니 혼자 기분 내는 것 정도야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디아루기아도 처음에는 질색하는 표정이기는 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포기한 건지 조용히 한숨을 쉬는 것이 보인다. 그녀의 한숨에 밀려드는 바람에 살짝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기쁜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것이 당연. 디아루기아가 다시 한번 말을 걸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래서… 뭘 얻으신 겁니까. “큼큼….” -빨리 말씀해 주시죠. 감추려고 하시는 거라도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조금 흥분을 가라앉힌 것뿐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당신의 몸이 가치가 나간다는 걸 알았거든요.” -결국 욕심 때문이었군요.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 “…….” -빨리 말씀이나 해주시죠. “물론입니다. 이 대륙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당신과는 다르게 직업을 부여받습니다. 인간 형태의 당신도 직업을 부여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인간들은 그래요. 아! 이 이야기는 너무 복잡하니 일단은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요. 저번에 제 직업이 연금술사라는 건 이미 말씀드렸을 겁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연금술사는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이 부여받는 직군입니다. 마법사에서 파생된 직군이기는 하지만 그들과 추구하는 게 다르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당신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군요. “일부 인정합니다. 아무튼 간에 조금 거창하게 말씀드린다면 당신의 몸에서 나온 유전자와 혈액 같은 것들은 대륙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재료입니다. 물론 곧바로 촉매로 활용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 정제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그래도 최초로 발견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다시 말해 이 세 가지 물질은 원래는 이 세상에 없었던 물건이라는 겁니다.” -그건 제 혈액이 아닙니까? 이 세상에 없었던 물질이 아니라 기존부터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정제 과정을 거치고 촉매화에 성공했으니 온전히 당신의 혈액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엄연히 말하면 원활한 활동을 돕는 몇 가지 촉매와 함께 이루어진 합성촉매입니다. 주재료가 당신의 것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요. 단순히 화학 반응을 보려고 일으킨 실험이 대박을 터뜨린 겁니다. 물론 사전에 계산을 조금 해놓기는 했지만… 이렇게 잘될 줄이야 솔직히 저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수백 개의 플라스크 중에 살아남은 것은 딱 세 가지다. 얼핏 보면 그다지 커다란 성과를 내지 못한 것 같기는 하지만 첫 실험부터 잭팟을 터뜨렸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거다.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전설 등급의 촉매들은 보기만 해도 짜릿해질 정도. 커다란 눈으로 그것들을 조용히 바라보는 디아루기아의 표정에 언뜻 흥미가 스쳐지나갔다. -이름이 뭡니까? “미정입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건 처음으로 발견된 촉매라고요. 마침 딱 세 가지이니 이름도 당신과 저 그리고 우리 똘똘이가 하나씩 정해도 될 것 같군요.” -아…. 뭔가 조금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커다란 눈이 한 번 크게 꿈뻑였다. “정확한 계산 없이 질러놓은 것들이라 아직까지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 어째서 이런 결과물이 나왔는지 정의하고 증명하는 시간이 남기야 했지만 정리하는 과정은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도움이 된 거군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얻은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에요. 아까 말씀드렸지요. 인간들은 특정 행동을 통해 직업을 부여받는다는 것 말입니다.” -네. “이 세 가지 촉매의 발견 그리고 당신의 몸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전에 직업을 부여받았습니다. 최상위 등급의 직업이고 용족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직업이라고 하는 게 맞겠군요. 당신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 말입니다.” -특별한 힘을 부여받았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그렇게 생각해도 될 겁니다. 물론 아직은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합니다만….” -아… “연구가 완료된다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를 테면 당신의 숨결을 이 조그만 플라스크에 담아 넣는다든가.” -브레스? “같은 화력을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불가능합니다. 저 작은 유리병에 제 브레스를 담아 놓을 수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불가능하고 말고는 연구에 들어가 봐야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아마도 불가능할 겁니다. “가능할 겁니다. 이런 것도 가능해졌으니까요. 제가 세 번째로 얻은 직업이 생체연금소환사라는 직업입니다. 이 직업의 효과와 지금 얻은 드래곤 알케미스트라는 직업의 효과를 생각해 보면….” 디아루기아의 세포로 만든 촉매를 손에 쥔 순간 촉매가 마력으로 변한 뒤 주변에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본래 스위치와 리모컨이 있어야 했던 예전과는 반대로 용의 촉매는 그런 복잡한 과정이 완전히 삭제됐다. 촉매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게 가능하다. 고유 전설 등급의 직업 보정 효과라고 할 수 있으리라. 파직!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 묘한 기운이 튀었다. 디아루기아가 그런 날 멍하니 바라보는 것은 당연. 내가 뭘 할지 꽤나 궁금한 모양이다. 나도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궁금하다. 손에 맺혀 있는 기운을 이용해 수인을 맺고 땅바닥을 짚는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용의 손이 땅바닥에서부터 생성되기 시작. 마력은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파직!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용의 팔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 “엄청 좋네…. 이거….” -말도 안 돼… 당, 당신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디아루기아. 당연하지만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은 디아루기아뿐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도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황당하다. -신이라도 되는 겁니까? 지금 당신이 한 건! 상식적으로! “아 엄연히 저건 생명체가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파괴력도 기대하기는 힘들어요. 그리고 저는 진짜 용을 만들어 낼 수도 없고요. 이건 실험으로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에 대해서 따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형태의 호문클루스를 만들어 내는 것도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니까요. 그게 가능하다면 당신의 말대로 저는 인간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 있을 겁니다. 당신같이 복잡하고 고귀한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는 없어요. 물론 하위종은….” -하위종은 가능하다는 겁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렇군요. “아직은.” 커다란 용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루기아의 클론을 만들 수 있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 외의 드레이크 종에 대한 클론 양산은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브레스 물약 같은 가능할 것 같은 아이디어도 계속해서 떠오르기 시작. 물론 이 연구의 최종 목적, 박덕구의 강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할 게 많다. ‘어쩌면 정말로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어.’ 정말로 파란 길드의 마크가 새겨진 방패를 집어 던지는 캡틴 린델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 197 회귀자 사용설명서 197화 용의 둥지, 실험, 전직, 강화 (5) 오랜만의 열의가 붙은 만큼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됐다. 일단은 디아루기아의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해 마음의 눈으로 그녀를 계속해서 스캔했고 혹시 무언가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도 하루 종일 고민했다. 예전에는 누워만 있어야 된다고 말했지만 디아루기아가 움직여 주는 것을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운동 능력이나 가지고 있는 마력을 얼마만큼 운영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함께 진행됐기 때문이다. 브레스가 어느 정도의 화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마력 능력치에 기반한 마력 운용 능력이나 그녀의 증언으로 어느 정도의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었다. ‘도시 하나?’ 작은 도시 하나 정도는 날려 버릴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증언. 실제로 마력 능력치가 125,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필적하는 이들만이 할 수 있다는 고급 마력 운용 지식을 가지고 있는 걸로 판단되니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마음의 눈에는 그녀가 고급 마력 운용 지식을 습득한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비슷한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속속들이 드러났다. 애초에 그녀가 고급 운영 마력 지식을 습득하지 않았더라면 여러 가지 종류의 브레스를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브레스의 종류도 두 가지, 나는 두 가지 종류의 브레스를 이렇게 분류했다. 1. 도시를 날릴 수 있을 정도의 화력을 지닌 방사형. 2. 마법 저항력이 높은 이들이나 단순 화력만으로 상대하기 힘든 강자들을 위한 집중형. 이를 테면 방사형은 개인보다는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브레스다. 범위가 크지만 차희라 같은 종류나 내구나 마법 저항력이 높은 인간들에게 그만큼 피해가 적다. 이런 이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집중형 브레스라는 것. 그만큼 마력을 고밀도로 농축해 쏘는 집중형은 범위는 좁지만 모든 부분에서 월등했다. 정확한 수치를 산출해 내기는 어려웠지만 5차에서 6차 전직을 마친 대마법사의 실드를 관통해 뚫을 수 있을 정도. 물론 날아가는 속도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집중형 같은 경우에는 민첩이 높은 이들도 제대로 피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집중한 것은 브레스뿐만이 아니었다. 민첩 능력치나 근력 능력치를 상정해 어느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데이터도 곧바로 뽑아냈고 그밖에도 모든 데이터를 뽑아내 뇌에 저장했다. 소소한 오차 범위가 있기는 했지만 더 정밀한 데이터 측정은 이후에. 지금은 달려야 한다고 생각한 타이밍이었기 때문이다. ‘한쪽으로만 집중적으로 파고들기에는….’ 그녀가 너무나도 크고 방대하다. 지식의 보고이며 지식의 산맥이다. 스펙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꽤 걸린다는 건 이례적인 이야기. 솔직히 나 혼자 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비행이 아예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과는 다르게 마력을 사용하여 날 수 있다는 것도 조금 놀랐던 부분. 마력 소모가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애용하지 않는 모양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날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용은 용이야.’ 내가 가지고 있는 디아루기아의 평가를 조금 더 상향시킬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만 단순 스펙 계산에만 열과 성을 쏟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데이터를 분류하고 뽑아내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일. 앞으로의 연구를 조금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한 정보의 분류에 불과했다. 본래는 데이터가 쌓이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게 원칙이기는 하지만 디아루기아는 죽어 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다. 그녀에게서 뽑아낸 혈액이나 세포들은 거의 무한하다. 고작 피 몇 리터 정도야 몇 시간도 안 되서 스스로 수복한다는 이야기다. 돈 걱정, 재료 걱정하면서 진도를 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쪽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만 제외하고…. ‘일단은 지른다.’ 조금 위험한 실험도 상관없다. 그것 역시 지른다. 여기로 가도 저기로 가도 길은 하나였고 돈 걱정에 수많은 장비를 놀리기엔 내가 가지고 있는 설비가 어마어마했으니까. 넓은 공간 안에 있는 많은 연금키트들이 멈추는 일은 없다. 여러 가지 재료들이 계속해서 정제 과정을 거치고 있었고 마법진의 불 또한 꺼지는 날이 없었다. 물론 이 마법진에 마력을 공급하고 있는 것은 정하얀이다. 디아루기아에 대한 모든 일은 극비. 연구실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정하얀이 전부. 사실 박덕구의 그녀, 마도학자 황정연도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내가 무조건 신뢰할 수 있는 이는 정하얀밖에 없다는 판단이 선 탓에 그녀는 굳이 부르지 않았다. 디아루기아는 지고의 보물이다. 친분이 있고… 같은 길드라고는 해도 그녀의 데이터를 함부로 넘겨주기 싫다는 게 내 작은 욕심이라면 욕심이다. 마이 프레셔스라는 말이 계속해서 입가에 맴돌고 있을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가 없으리라. 실험 첫째 날에 우연히 터진 것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딱히 얻은 게 없는 상황이었지만 굳이 초조해하지는 않았다. 분명히 차도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대하게 쌓여가는 데이터와 계속해서 돌아가는 키트들은 어떻게 생각하면 자동화 실험실과 비슷한 수준. 디아루기아는 뭐가 뭔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말똥말똥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가만히 누워 있는 게 휴식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간혹 잠에 빠지기도 했다. 외부에서의 검사가 진척이 없자 그녀의 내부에 관심이 생긴 것은 당연지사. 사랑스러운 디아루기아를 해부할 생각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그녀를 스캔하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방향의 실험을 한꺼번에 시도했다. 물론 그중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실험은 그녀의 내부로 직접 진입하는 것. 미친 소리 같겠지만 정하얀과 나는 실제로 그녀의 입을 통해 안을 구경하고 나왔다. 그녀의 도움으로 식도와 위장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관까지 제법 알 찬 탐험을 할 수 있었다는 거다.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모두 다 위대한 연금술의 발전을 위한 일입니다. 당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요.” -저도 제 몸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바로 빠져 나올 테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부, 부끄럽단 말입니다. “…….” -……. 의외로 디아루기아가 최초로 거부감을 느낀 실험이기도 했다. 디아루기아는 이 실험을 마치 발가벗겨진 기분이라고 표현했는데 애초에 옷을 입지 않은 그녀가 이런 발언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조금 웃었다. 다행스럽게도 나와 정하얀이 위 산성액에 녹아버리는 가슴 아픈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용은 섭취한 것을 소화하지 않고 마력으로 분해하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나와 정하얀도 마력으로 분해될 뻔했다는 이야기. 디아루기아의 기관이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분해를 시작해 버릴 뻔했기 때문에 정하얀의 보호 마법의 도움을 톡톡히 받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신체 탐험은 거기서 그렇게 마무리. 특수한 장비를 자체 제작했고 다시 한번 들어간 이후에야 비교적 안전하고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신체 탐험을 하는 도중 알아낸 재미있는 사실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기관의 구조가 인간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엄연히 상위 개체라고 할 수 있는 종족이었으니까. 일단은 소화를 마력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부분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덩치에 배 이상을 먹는 똘똘이를 보고 신기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저런 기관을 가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여느 판타지 소설의 흔한 클리셰처럼 소화된 마력은 심장으로 보내지고 심장에서는 혈액과 함께 마력을 온 몸으로 공급한다. ‘이거였구나.’ 그녀의 혈액이 마력을 담고 있는 촉매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괜히 드래곤 하트, 드래곤 하트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외 기관 역시 모두가 독특하다는 것. 어떻게 보면 그녀의 몸은 하나의 거대한 발전소다. 먹은 것을 마력으로 분해하고 그 마력을 몸 전체에 돌린다. 정제되지 않은 오염된 마력 역시 외부로 배출 하지 않고 정수과정을 거쳐 다시 한번 활용한다. 그녀가 행동하는 데 들어가는 모든 에너지의 비밀은 모두 마력에 있다. 나는 그 모든 모습을 보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지만 정하얀은 디아루기아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체계 자체가 신기한지 그녀 나름대로 자료를 분석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뭔가 배우는 것이 있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디아루기아의 안에서 황금빛에 휩싸였다. 전설 등급의 특성을 개화한 것이다. [대마법사의 심장 - 전설 등급]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무슨 특성이야? 아니 어떻게….” “마력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기관을 더 만들었어요.” “뭐?” “저도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한 번 해봤는데….” “…….” “바로 된 것 같아요. 오빠. 헤헤헤….” “그렇구나…. 잘했어, 하얀아.” “헤헤헤헤….” 굳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부분이기도 했다. 내 눈도 계속해서 그녀를 보고 있었으니까. 천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이가 없어서 당황스러울 정도. 디아루기아처럼 모든 것을 마력으로 분해하지는 못했지만 정하얀은 틀림없이 신체 내에서 마력을 끊임없이 재순환시키며 재활용하고 있었다. 신체 내에 마력을 급속 충전할 수 있는 충전기 하나를 마련한 것은 물론 마법을 사용한 이후에 남은 마력의 찌꺼기들도 계속해서 정제하고 쌓기 시작한 것이다. 당장 마력 능력치가 오르지는 않았지만 마력을 계속해서 순환하며 충전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한 셈. 이제야 조금 따라 잡은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혼자 상상하던 내 입장에서는 어째서 천재가 천재라고 불리는지 깨닫게 된 좋은 기회였다. 물론 정하얀의 이러한 각성은 나에게도 제법 커다란 자극이 됐다.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억울한 부분이 있었던 탓이다. 전설 등급의 직업 드래곤 알케미스트뿐만이 아니라. 나도 뭔가를 하나 더 얻어가야만 했다. 박덕구를 강화시키기 위한 혈청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남는 시간에는 그녀가 어떻게 브레스를 쏠 수 있는지에 대한 원리에 접근했다. 드래곤 하트에 저장한 마력을 목 안에 있는 특수한 기관으로 넘겨 한 순간에 방출하는 게 바로 브레스다. 중요한 내부 기관의 표본을 체취하기에는 디아루기아에게도 위험부담이 따르는 것이 사실. 혹시라도 이쪽이 잘못 건드렸다가 브레스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손해가 막심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이 기관의 작은 모형을 만드는 것. 마음의 눈으로 그녀의 기관을 완벽하게 스캔한 이후에 어떤 원리로 기관이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파악한다. 수십 수백 번의 실험이 무용지물로 변했지만 계속해서 힌트를 얻어갔고 결국에는 브레스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준 주요기관과 완벽하게 같은 모양의 작은 병을 만들어냈다. 기형적인 모양의 유리병은 이미 마법적인 처리를 거쳤고 증폭과 확산과 제어를 위한 작은 마법진을 수차례 각인했다. 물약의 제일 끝에 자리한 것은 디아루기아의 혈액으로 이루어진 마력의 촉매. 내 마력을 흘려보내면 저장되어 있는 디아루기아의 혈액이 작은 유리병으로 떨어져 내린다. 위이이이이잉!! 혈액은 기형적인 모양의 유리병의 입구를 타고 들어가 모터 마냥 맹렬히 회전하며 마법진을 활성화한다. 이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약 2초. 결국에 이 작은 유리병은 마력의 파동을 만들어내며 사방으로 혈액에 담긴 마력을 방출한다. 그게 바로 용족이 브레스를 사용하는 원리다. 마력을 견디지 못한 유리병은 순식간에 깨져 버린다. 그녀처럼 방사형, 집중형이 아니라 단순히 효과가 폭발뿐이지만… 이쪽이 원하는 화력을 만들어내기에는 충분하다는 거다. [전설 등급의 물약 -----를 최초로 발견합니다.] [지력 1이 올라갑니다.] [물약의 이름을 직접 입력해 주세요.] [물약의 이름을 입력합니다.] [용 숨결 물약 - 전설 등급] 콰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폭발은 예술이다!!!” 용 숨결 물약 MK1. 대륙 최초로 전투형 물약이 등장한 순간이었다. # 198 회귀자 사용설명서 198화 용의 둥지, 실험, 전직, 강화 (6) [용 숨결 물약 - 전설 등급] [드래곤 알케미스트 이기영이 제작한 전설 등급의 물약입니다. 마력을 주입하면 2초 후에 디아루기아의 마력을 사방으로 방출하며 충격파와 함께 폭발을 만들어냅니다.] 내 손에 들려 있는 특이하게 생긴 이 유리병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멋지게 보였다. 기형적인 외관도 뭔가 특이해 보인다는 거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이 좋은 것은 당연지사. 항상 모자란 내 화력을 보충할 수 있는 도구였고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물약이 발동되기 전까지 2초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커다란 페널티다. 이런 페널티가 있기 때문에 대인전에 쓰기에는 모자란 감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장 마법 외에도 선택지가 하나 더 늘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이득이니까. 나 개인의 스펙만으로는 아직 제국 8좌에 도달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이 물약을 계속해서 개량해 나가다 보면 화력만큼은 대마법사에 굴하지 않을 정도가 될지도 모른다. 영롱한 녀석을 괜스레 품에 안아 호호 닦아냈을 때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 폼으로 되돌아 온 디아루기아 였다. “대단하군요. 정말로… 정말로 만들어낼 수 있을 줄은….” 처음 봤을 때도 충분히 놀라움을 표시했던 그녀였지만 가까이서 한 번 더 녀석을 바라보니 더욱 신기한 모양.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놀랐다는 건 내가 제대로 해냈다는 말과 일맥상통했으니까. ‘이게 연금술의 힘이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과학과 마법과 연금술의 산물이라고요. 물론 아직 개량할 점이 많고… 어떻게 보면 원시적인 시험품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점점 발전할 겁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위력은 그렇게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정도면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큼. 아무튼 간에 원리는 간단합니다. 디아루기아 당신의 기관을 그대로 본 따서 만들었을 뿐이니까요. 이 유리병으로 보이는 것에는 당신의 세포가 조금 섞여 있어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기관의 열화판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겁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크기를 엄청나게 축소했다는 것과 이 기관을 따라 흐르는 게 마력이 아닌 정제된 혈액이라는 것뿐입니다.” “…….” “사실 저도 어떤 원리로 이 기관이 마력 파동을 방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중요한 건 당신의 안에 있는 기관이 마력을 방출할 수 있다는 것이고 제가 그 기관을 카피할 수 있었다는 거니까요.” “그게 가능한 겁니까?” “일반인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눈이 조금 좋아서…. 뭐, 계속해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당신의 혈액에는 마력이 흘러요. 당신이 당신의 기관에 마력을 전달하는 것처럼 저는 이 유리 모형에 당신의 혈액을 일정 용량 떨어뜨립니다. 각인된 마법진의 인도로 따라가 혈액은 에너지를 만들고 이 기관을 작동시킵니다. 활성화되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2초….” “네.” “그리고….” 위이이이이이잉!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쪽이 힘차게 던진 물약이 날아가 깨지며 커다란 마력의 파동을 만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마력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은색으로 터져 나가는 모습은 내가 봐도 제법 그럴싸하게 보인다. 평범한 폭발이었으면 그다지 멋있다고 느끼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 유리병 하나의 가격을 생각해 보면 깨지는 게 조금 아깝기는 했지만 어차피 시험품이니 터져나가도 별 상관은 없다. “다시 봐도 신기하군요.” “저도 신기합니다. 아무튼 당분간은 실험에 참가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필요한 데이터도 모였고 나머지는 전부 이쪽에 달려 있으니까요.” “본래 만들기로 한 건 완성이 된 겁니까?”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사실 거의 완성이라고 해도 무방하기는 하지만… 지금의 능력으로는 이 이상 가는 걸 만들 자신이 없더군요.” 박덕구를 캡틴 린델로 만들어줄 혈청은 거의 마무리 단계이긴 하다. 한꺼번에 두 가지를 만들어내는 게 조금 힘들기야 했지만 지금 똘똘이와 함께 놀고 있는 정하얀의 도움이 컸다. 단순히 연금술의 영역이 아니라 마법까지 확대되어 불러와야 성공 확률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게 바로 그 이유. 사람의 신체를 뜯어 고친다는 건 용 숨결 물약을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렵다. 완성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사실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는 게 맞는지에 대해 고민해 볼 정도였다. 그렇지만 능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다. 지금 이 시점에 나에게는 물약을 이 정도로만 개량시키는 것이 한계. [강화의 혈청 - 전설 등급] [드래곤 알케미스트 이기영이 만든 전설 등급의 물약입니다. 디아루기아의 혈청을 촉매로 만든 이 물약은 사용자의 신체 능력을 강제적으로 영구 상향시킵니다. 체력 70이상 내구 70이상의 플레이어에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공 확률이 높지는 않습니다. 실패할 경우 사용자가 사망하니 이용에 유의해 주세요.] 뭔가 불길해 보이는 녹색의 액체. 데우지도 않았는데 지 혼자 부글부글 끓고 있는 모습이 꽤나 요란하다. 어째서 체력 70 이상의 능력치를 요구하는 지는 뻔할 뻔자. 당연히 위험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애초에 혈청을 만들었다고 한들 이걸 그대로 주입하는 게 안전할 리가 없다. 인간의 몸은 용의 피에 거부할 거고 그 거부반응을 이겨내기 위한 최소한의 능력치가 바로 체력 70과 내구 70이란 능력치. 물론 시술자의 의지와 여러 가지 마법의 도움으로 성공 확률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성공률은 아무리 높게 잡아줘도 62% 미만이다. 김현성이나 차희라 같은 이들에게는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냐 물어볼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들 정도의 수준에 들어선 이들에게는 애초에 이런 물약 자체가 무의미. 헐크와 토르에게 캡틴 린델의 혈청을 주입할 정도로 나는 멍청하지 않다. 말하자면 이건 박덕구 맞춤용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거다. 애초에 녀석을 위해 설계했고 녀석의 몸에 맞게 개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 확률이 이 정도라는 건 강화 시술이라는 것 자체가 위험 부담을 가지고 있는 시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위험할 것 같군요.” “역시 그렇습니까?” “네. 저희의 피는 다른 몬스터들에게도 거부반응을 일으키니까요. 애초에 타 종족의 혈액으로 이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발상입니다.” “끄응….” “아마 실패한다면 온몸이 터져 죽을지도….” 박덕구가 온몸이 터져 죽는 선택지는 별로 바라보고 싶지 않다. 바쁜 실험 와중에 박덕구의 신체 데이터를 수집하러갔을 때만 해도 여전히 녀석은 검을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건 어떻게 보면 키메라를 만드는 거나 다름없다. 모든 키메라가 어느 정도의 부작용을 떠안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다지 추천해 주고 싶지도 않을 정도다. 그렇지만…. ‘왠지 될 것 같은데….’ 왠지 모를 자신감이 있다. 내 능력을 과신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 실험은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게 솔직한 판단. ‘박덕구가 죽는 걸 원하지 않고 있어.’ 단순한 망상이지만 왠지 모르게 그렇게 느껴졌다. 내 마음의 눈에도 개입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 실험 역시 개입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성공 확률은 계속 높일 수 있어.’ 박덕구의 정신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혼자 생각을 해봤자 어차피 판단은 덕구가 하는 일이지만, 이대로 가다간 김현성 파티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하니 일단 이곳으로 불러 본격적으로 경우의 수를 판단해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자.’ 서프라이즈로 공개하고 싶었지만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는 성공 확률을 올리기가 힘들다. 녀석 역시 슬슬 참여하는 게 맞다. “하얀아.” “네? 오빠!” “덕구 좀 여기로 데려와 줄래?” “아… 네!” 내 말을 듣고 있던 정하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뛰쳐나갔고 디아루기아는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정말로 하는 겁니까?” “일단은 개량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되니까요. 개인에게 맞춘 물약인 만큼 녀석이 있으면 조금 더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식으로….” “녀석의 피가 어떤 거부반응을 일으키는지에 대해 확인해 보고 이 강화의 혈청의 효과를 상쇄시킬 수 있는 물약을 다시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물약을 먼저 주입한 이후에 혈청을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성공 확률은 높일 수 있을 겁니다. 정밀 검사도 진행해 봐야 하고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알 것 같군요.” “네네. 임상실험을 할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번에는 조금 조심스럽게 접근해 볼 생각입니다.” “으으음…. 제가 도울 일이 있습니까?” “어쩌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마력을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거부반응이 줄어들 겁니다.” 의외로 연금술에 흥미를 느끼는 디아루기아와 계속해서 이야기를 계속해서 나눴다. ‘이번에 들어올 신입들이랑 같이 훈련이나 받게 해볼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나마 해보기는 했다. 박덕구도 박덕구지만 디아루기아의 사회화도 이쪽이 풀어나가야 할 과제였으니까. 결론적으로 이 실험실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더 이런 아찔한 경험을 하기는 싫다. 이지혜가 나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대부업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제대로 느껴볼 뻔 했으니까. 조금 더 그녀와 시간을 보내니 정하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박덕구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오는지 제법 떠들썩하다. 괜스레 강화의 혈청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나름대로 선물이라고 준비했기 때문이다. ‘서프라이즈는 아니게 됐지만 일단 이거라도 보여줘야지.’ 재능이 없는 놈의 심정은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이해하고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의 녀석이 이걸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자연스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시야에 비친 것은 박덕구와 정하얀, 이쪽이 먼저 인사를 건네기 전에 박덕구가 먼저 손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는 만큼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 들어가 있다. “형님!” “덕구야.” “거, 잘 지낸 거요? 실험도 좋지만 파란에도 얼굴 좀 비춰주쇼. 아니 지금 길드에 행정팀 양반들이 아주 난리라니까. 튜토리얼 던전 관련해서 준비할 게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요.” “최근에 좀 바빠서 만들 게 있었거든.” “거, 하얀이 누님한테 이야기 다 들었소. 굉장한 걸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기분 좋다는 듯 웃고 있는 녀석의 얼굴. 여전히 땀에 젖어 있는 것을 보면 방금 전까지도 훈련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말하는 걸 듣고 혹시나 정하얀이 혈청에 대해 말한 것은 아닌지 걱정되긴 했지만 녀석이 말한 게 용 숨결 물약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 용 숨결 물약인지 뭔지 그거 보여주려고 부른 거 아니요? 크으… 형님이 나한테 제일 먼저 보여줄지 알았다니까! 하얀이 누님이 벌써 길드에 소문 쫙 퍼뜨렸다는 거 아니요?” “하핫. 사실 그것도 그건데 새로운 걸 만들었거든.” “거, 정말이요?” “그래.” 괜스레 가슴이 떨려온 것은 당연지사. 순박한 얼굴로 이쪽을 향해 뛰어오는 녀석은 내 선물 따위는 생각도 못 하는 것 같았다. 슬그머니 타이밍에 맞춰 강화의 혈청을 내미니 깜짝 놀란 얼굴로 이게 뭔지에 대해 대답을 요구하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한 번 읽어봐.” “어? 이거요?” 황급히 상태창으로 물약을 확인하는 녀석의 얼굴에는 흥미가 가득하다.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 반쯤은 성공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다시 한번 녀석의 말을 이었다. “손 볼 부분이 조금 있기야 하지만 네 맞춤으로 만들어진 거라 별 문제는 없을 거다. 일단은 앞으로 이쪽에서 함께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 “아….” “지금 당장 투입하기에는 문제가 조금 있기도 하고… 경우의 수를 따져봐야 되니까. 아, 그리고 페널티는 신경 쓰지 마라. 높게 잡으면 80% 이상이니까. 여기로 부른 것도 다….” “거 이거 때문에 부른 거요?” “응. 최근에 네가 조금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 “왜?”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반응.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에 대해서 떠올렸을 때 박덕구가 슬그머니 내게 손을 밀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안 먹을 거요, 형님.” “뭐?” “나는 안 먹을 거라고 말했소.” ‘이 돼지가….’ 처음으로 눈앞에 있는 돼지가 나를 노려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 199 회귀자 사용설명서 199화 용의 둥지, 실험, 전직, 강화 (7) 내가 예상했던 반응과는 너무 다르다. 신나서 헐레벌떡 달려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해하지 못할 오기가 느껴진다. 괜스레 섭섭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강화의 혈청을 만들기 위해서 들인 시간을 생각해 보면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차피 연구야 하긴 했었겠지만 이건 박덕구 전용으로 만든 물건이었으니까. ‘이… 돼지….’ 어째서 이걸 거절하는지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예상이 가는 이유는 있다. 내 기준에서는 조금 보잘 것 없이 느껴지는 이유. 자기의 힘으로 강해지고 싶다느니, 이런 물약의 힘을 빌리고 싶지 않다느니 하는 보잘 것 없는 이유일 것이다. ‘이 새끼….’ ‘절박함이 없는 건가’라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인지하고 있다면 절대로 저런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녀석이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도 배경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고 생각하는 편협한 사고방식에 어이가 없어질 정도. 만약에 박덕구가 파란이 아닌 어디 중소 길드에서 구르고 굴렀더라면 당장에라도 이 혈청을 받아들였으리라. 당장 이 물약이 시중에 풀린다면 한계를 느끼고 있는 이들에게 불티나게 팔려나갈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내 입으로 말하기에는 뭣 하지만 이건 녀석 같은 이들에게는 영약이나 다름없다. 왠지 모를 배신감에 이쪽의 눈에서도 불꽃이 튄다. 화가 난 것은 아니다. 단순히 조금 기분이 언짢아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뭐?” “마음은 고맙지만 안 먹을 거요. 정말로 이것 때문에 부른 거요?” “그거 때문에 부른 게 맞아.” “나를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지 않아도 된다는 거요. 나는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거 없이도 충분히 잘할 수 있소.” 녀석 역시 굉장히 불편하다는 표정이다. 애초에 녀석과 함께 다닌 이래 저놈이 나를 저런 눈으로 쳐다본 것 자체가 처음이다. 뭔가 건드려서는 안 될 역린을 건드렸단 느낌이었지만 어쩌면 열등감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고 계속해서 달려 나가고 있는데 이런 물약을 제안 받았으니 동정 받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이걸 종용할 수밖에 없다. “쓸데없는 고집이야.” “고집이 아니요.” “너만을 위한 게 아니라 파티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걸 잘 생각해라.”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아도 되오. 더 강한 전위가 필요하다는 거 아니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그럼 다른 사람을 쓰면 되는 거 아니요. 아무튼 난 이건 안 받을 거요.” “너!” “안 받는다고 말했잖아!” 순간적으로 몸을 돌리려는 녀석을 한 손으로 붙잡은 순간 녀석이 화를 내며 내 팔을 쳐냈다. 능력치가 꽤 오르긴 올랐지만 내 유약한 몸이 튕겨져 나가는 것은 당연지사. 깜짝 놀랐다는 박덕구의 표정이 순간 스쳐지나간다. 실수했다는 녀석의 표정과는 다르게 내 몸은 여전히 근처에 있는 책상으로 나가떨어지는 중. ‘개….’ 불행인지 다행인지 왼손에 쥔 강화의 혈청은 품에 꼭 안아 지켜낼 수 있었지만 내가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는 건 변함이 없다. 등 뒤로 작은 충격이 느껴졌고 혈청의 안위를 확인한 나는 곧바로 녀석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이! 돼지 새끼!” 나도 모르게 화가 나 소리를 지르려고 했을 때 느껴진 것은 거대한 마력의 유동. ‘아.’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고개를 돌리자 박덕구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전설 등급의 특성이 열린 것이 성공적이었는지 느껴지는 마력은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 그 커다란 마력에는 나도 모르게 침을 넘어갈 정도였다. 단순히 마력만으로 녀석을 압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슨 주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박덕구가 밟고 있는 땅바닥이 우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파이고 있다. 녀석은 부들부들 떨며 버티려고 하고 있지만 바로 위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압력에는 저항할 수 없는 모양.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린 모습으로 땅에 처박혀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으으으윽….” 계속해서 일어나려고 하고는 있지만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다. 내구가 높아 공격을 버틸 수 있다는 의미와 마력의 압력을 견뎌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 근력과 마력 수치가 낮은 녀석으로서는 저 정체 모를 마법에 저항하는 건 불가능하다. 정하얀이 내 안전에 민감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박덕구에게까지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과해요.” “후으으으윽!” “사과해요!” 콰지지지지지지직! “으득!” 다시 한번 힘을 주자 박덕구가 더 깊게 땅을 파고들기 시작. 저러다가 애 잡겠다는 생각이 든 나는 급하게 정하얀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워낙 튼튼하기는 하지만 저런 압력을 정면으로 받은 뒤에 대미지가 남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 “정하얀, 그만.” “아….” “다치지도 않았고 일부로 그런 것도 아니니까.” “죄, 죄송합니다.” “사과는 나중에 덕구한테 해.” “…….” 정하얀이 손을 내리자 곧바로 마력의 압력이 사라진 것이 느껴졌다. 이 주변을 잠식하던 마력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숨을 쉬기가 한결 편해진다. 45의 마력으로도 정하얀의 마력은 견디기가 힘든 모양. 박덕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땅에 박혀 있는 녀석이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손을 뻗어주는 것은 당연지사. 혹시라도 다친 곳은 아닌지 마음의 눈으로 확인해 봤지만 큰 대미지는 없다. 정하얀의 마력에 저항하기 위해 마력을 지나치게 끌어올려 내부가 조금 망가진 것 같긴 했지만 충분히 자력으로 회복할 수 있을 정도의 상처. 녀석이 전력으로 정하얀에게 저항하려고 한 흔적이 몸 곳곳에 보인다. 조용히 손을 뻗으며 녀석이 내 손을 잡기를 기다렸지만 돼지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얼굴에 드리운 것은 지독한 패배감. 정하얀의 마법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이다. ‘아….’ 일이 조금 더 꼬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덕구가 정말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김예리를 통해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던 김현성 파티와 자신과의 괴리를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본 계기가 된 것이다. ‘당장 나만 해도….’ 괴물들의 파티를 따라가기가 힘이 들 지경. 비전투직군으로서 어떻게든 비비고는 있지만 당장 내가 보기에도 주변에 있는 이들이 괴물이라는 게 느껴진다. 아마 직접 전위에 서 있는 녀석은 나보다 더욱 절실히 느낄 것이리라. 결국 녀석은 내 손을 잡지 않았다. 마법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는 패배감을 얼굴에 실고 혼자서 몸을 일으킨 뒤에는 아무 말 없이 둥지의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아까는 미안했소, 형님.” “아니다. 조금 흥분해 있었던 것 같았으니까. 나도 미안하다, 덕구야. 내가 조금 급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천천히 해보자.” “아니요. 형님은 잘못 없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녀석을 잡을 수가 없다. ‘짜증 나….’ 자꾸만 짜증이 치솟는다. 대놓고 ‘너 재능 없으니까 닥치고 쳐 마시기나 해. 어차피 너는 한계가 있고 이대로 있다간 다른 사람과의 차이는 더 벌어지기만 할 거야.’라고 일침이라도 놔주고 싶은 심정. 그렇지만 녀석의 마음을 생각하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녀석이 느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윽박 지르는 것보다는 어린아이 다루듯이 살살 말해주는 게 효과가 더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하얀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았는지 조용히 내 눈치를 보고 있었고, 먼발치에서 나를 바라보는 디아루기아는 지금 이게 뭔 상황인지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왜 갑자기 일이 꼬인 건지 제대로 알고 싶다. 그리고 있던 그림은 분명히 이게 아니었다. ‘개 답답하네, 슈바….’ ‘나를 통해서 얻은 힘은 자기 힘이 아니다’라는 물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봤지만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내가 녀석을 걱정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에는 다시 한번 천천히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잠깐 길드에 다녀올게.” “네… 오빠.” 녀석을 보고 오든 김현성과 이야기를 하고 오든 간에 뭔가 다시 해결책을 만들어야 했다. ‘진짜 이번 한 번이 마지막이다.’ 내가 녀석을 케어해 주는 것은 이게 마지막이다. 어떻게든 한 번만 녀석을 끌어준 이후에는 다시 떨어졌을 때는 잡아주지 않을 거라고 굳게 다짐하며 서둘러 파란으로 돌아갔다. 굳이 화이트 폴을 타고 가지는 않았다. 박덕구가 어떤 상태인지 한 번 보고 싶었으니까. 그리폰을 타고 내가 나타났다고 광고하면서 등장하면 상태가 좋지 않은 녀석은 방 안에 틀어박힐 거라고 생각했다. 둥지에서 크게 떨어지지는 않은 만큼 파란의 길드 하우스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지하에 있는 주점에서 술이라도 퍼마실 것 같은 얼굴이었으니, 혹시 그러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 이곳에 있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저번에 김예리와 함께 있었던 곳으로 향했다. 정하얀과 함께 박덕구를 훔쳐보던 곳에서 자리를 잡자 역시나 김예리와 함께 있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심지어 김예리는 이쪽을 발견했는지 티가 안 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모습. 이쪽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박덕구는 나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았지만 김예리는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걸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 굳이 박덕구에게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쪽의 사정을 대충 이해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슬그머니 나에게 시선을 뗀 김예리는 박덕구에게 입을 열기 시작. 곧바로 그 말에 대답하는 녀석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표정. 안 좋아. 아저씨. 억지로 훈련해 봤자. 별로 효율. 안 좋아. 쉴 때는 쉬어야 돼.” “아니, 오늘은 훈련이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 “대련.” “대련이라면 매일 하던 거. 훈련 맞아.” “아니. 그거 말고.” “뭔데.” “실전처럼 해달라는 뜻이다.” “봐주지 말라는 뜻? 아저씨 다쳐.” “괜찮으니까.” 박덕구의 얼굴은 초조해 보인다. 아무래도 아까 정하얀에게 손가락 까닥 하지 못한 게 정말로 충격적이었던 모양. 지금 자기가 어디쯤 와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싶은 것 같았다. 김예리는 박덕구에게 대답하는 대신 슬그머니 내가 있는 쪽으로 눈알을 돌렸다. 진짜로 해도 되냐고 물어보는 것 같은 표정. 왜 이런 일에 내 의사를 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지금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도 녀석에게는 필요한 일일 테니까. 박덕구는 자세를 잡았고 김예리는 곧바로 녀석을 향해 쇄도했다. ‘김현성?’ 꼬마가 누구를 모델로 근접전을 연습했는지 깨닫는 것은 순식간. 김현성보다 조금 더 가볍고 스타일리시하긴 하지만 언뜻 언뜻 움직임에서 녀석의 그림자가 비친다. 알게 모르게 영향을 많이 받은 모양. 박덕구는 깜짝 놀랐다는 듯이 검을 바로 잡았지만 김예리는 이미 근처까지 와 있다. 순식간에 주변에 피가 뿌려진다. 차희라와 싸울 때 대충은 느꼈었지만 저 꼬마의 전투 능력은 거의 조혜진에 필적한다. 싸움이라도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밀리는 녀석을 보니 정말로 가슴이 아파온다. 선천적인 내구 능력치로 버티고는 있지만 녀석으로서는 김예리를 잡을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 박덕구가 약한 것이 아니다. ‘괴물 꼬맹이.’ 덕구가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반 박자 더 빠르게 움직인다. 멀리 떨어진 이후에는 던진 투척용 단검은 녀석의 몸에 박히고 단검으로는 온몸을 헤집는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는 모습을 보니 기가 찰 지경. 어째서 그녀가 박덕구를 상대로 봐준다고 표현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만할래.” “어?” “이제 그만. 더 이상 하면. 위험하니까. 사제 불러올게.” “조금만 더… 후우… 후우….” “싫어. 왜 나랑. 싸우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 “아저씨 역할은 나랑 싸우는 거. 아니야. 인정?” “…….” “아저씨는 어차피 조혜진 아줌마나 현성이 오빠처럼 못 해. 받아들이는 게 좋아.” 꼬맹이는 조용히 박덕구를 바라보다 곧바로 몸을 돌려버렸다. 아마 사제를 부르러 가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박덕구는 땅바닥에 철푸덕 앉아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저번처럼 금방이라도 일어나 검을 휘두를 것 같아 녀석을 살펴봤지만 다시 일어나 검을 휘두르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끄윽끄윽거리는 정체모를 울음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졌다. # 200 회귀자 사용설명서 200화 이기영의 몰래카메라 (1) 절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녀석은 그 누구보다도 절박할 거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훈련에 매달리는 모습만 봐도 녀석이 얼마나 구석에 몰렸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마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 믿음에 보답하고 싶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일 수도 있고 자신의 힘으로 옆에 서고 싶다는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녀석이 이러고 있는 이유보다 녀석을 조금이라도 성장시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멍청한 놈이니까.’ 녀석은 자가진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에 있다. 본인의 문제가 뭔지 본인도 모르고 있으니 답답한 것이 당연. 애초에 김예리나 김현성, 조혜진 같은 천재들을 자신과 동일선상에 놓으려고 한 것부터가 무리수. 김예리의 말이 맞다. 녀석에게는 녀석만의 역할이 있고 박덕구가 이 혈청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김현성 파티의 천재들을 따라갈 수 없다. 나 역시 녀석과 비슷한 경우다. 처음부터 천재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이후 노선을 변경한 것. 내가 마법에 큰 뜻이 있고 근성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가정해도 정하얀 같은 이들을 따라잡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거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는 천 년을 수련해도 정하얀에게 닿지 못할 거라는 걸 내 스스로 확신할 수 있다. 물론 박덕구는 게으른 나보다는 저들에게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이 방법이라는 건가요?” “그래.” “나쁜 방법은 아닌 것 같긴 한데… 이거 잘못하면 사람 하나 완전히 망가뜨리는 게 될 수도 있다고요? 저도 튜토리얼 때부터 그 사람 많이 보기는 봤었지만 정신력이 그렇게 강해보이지는 않던데요? 오히려 의존적이고… 솔직히 말하면….” “응?” “솔직히 말하면 기영이 오빠가 없었으면 이 사람은 튜토리얼에서 죽었을 거예요.” 박덕구가 들으면 슬퍼할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있는 이지혜가 시야에 비쳤다. 검은백조에서의 일이 조금 힘들기는 한지 한눈에 봐도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항상 당당한 표정과 여유 있는 모습은 여전했다. “지혜 누나가 할 소리는 아니잖아.” “어머. 글쎄요. 저는 기영 오빠랑 현성 씨가 없었어도 아득바득 살아남았을 것 같은데. 뭐, 이미 지난 일이니까 예전 일은 그만 들추자고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리고 왜 자꾸 누나라고 부르는 거예요, 오빠?” [플레이어 이지혜의 상태창과 잠재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 - 이지혜] [칭호 - 검은백조의 머리.] [나이 - 29] [성향 - 이기적인 야망가] [직업 - 지휘관] [능력치] [근력 - 16/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 - 15/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 - 27/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 - 67/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내구 - 14/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 - 44/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마력 - 13/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총평 - 오랜만에 다시 보는 영혼의 단짝이네요. 항상 말씀드리지만 너무 깊은 사이가 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태어날 2세가 너무나도 불쌍하다는 건 알고 계신 거죠?] ‘그야 네가 누나니까.’ 이쪽이 나이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다. 아직까지는 혼자만 알고 싶은 비밀인 것 같았기 때문에 총평의 2세 드립을 속으로 곱씹으며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나이 들어 보이는 외모도 아닌데… 아무튼 신기하기는 신기하네요.” “뭐가?” “이렇게까지 신경 쓸 줄은 몰랐거든요. 조금 더 냉정한 타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예전부터 함께한 사이라 쉽게 쳐내기는 조금 어려웠던 건가?” “비슷한 이유이기는 해.” “그게 의외라는 거예요. 현성 씨 현성 씨 현성 씨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덩치 큰 아저씨에게 있는 거 없는 거 다 퍼주시는 것 같고…. 왕성에서 카스가노 유노랑 같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지 않았으면 기영이 오빠가 호모가 아닌지 의심이라도 한 번 해봤을 거라니까.” “뭐?” “농담이에요.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혹시라도 남자가 더 좋은 게 맞다면 저한테 귀띔이라도 해주셔야 되요. 도전 의식을 불러들이는 건 좋지만 만약 그게 정말이라고 하면 너무 슬퍼지잖아요?” “그런 거 아니야.” “저도 알아요. 그만큼 오빠가 덕구 씨를 생각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한번 던져 봤어요. 버리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계속해서 품에 안고 가려는 생각이 눈에 보이니까. 타 길드에서나 파티에서도 말이 많은 거 알죠?” “아니. 최근에 연구 때문에 제법 바빴거든. 뭐 안 좋은 소문이라도 돌고 있는 거야?” “비슷해요. 대륙 8좌의 김현성과 이기영이 있는 파란의 파티에서 쓸 만한 전위를 구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요.” “헛소문이야.” “입이 가벼운 사람들한테는 그게 헛소문처럼 들리지 않을 수도 있죠. 외부에서만 봐도 보이는 게 있는 법이예요. 덕구 씨가 더 이상 그 파티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 어떻게 봐도 사실인 부분이고 파란의 전위를 맡기기에는 여러 가지 불안한 점이 있는 것도 맞잖아요? 능력 있는 전위를 구한다는 소문에 이적시장이 묘하게 움직이고 있다고요. 프리랜서 탱커들도 혹시나 연락이 오지 않을까 설레고 있는 모양이고….” “…….” “물론 오빠 마음도 이해는 하지만 성공하기 위해서는 쳐내는 타이밍도 잘 생각해 봐야 된다고요. 뭐,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이런 것까지 제가 판단할 위치에 있는 건 아니죠. 그냥 우리 지아비 걱정되는 마음에 주절거려 봤다고 생각해 주세요.” “아냐. 네 말도 일부 맞는 부분이 있기는 해.” “정말요?” “실제로 현성 씨가 나한테 2파티를 신설하자고 운을 띄어 본 적은 있으니까. 덕구를 버린다기보다는 지금 보다 더 위험한 곳으로 발을 들였을 때 녀석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있기는 했지. 실제로 다른 탱커를 영입하거나 새로 키워보려는 생각도 있는 것 같고….” “안 됐네요… 덕구 씨. 키워본다고 한다면 이번 튜토리얼 던전에서 구해볼 참인가….” “아마 그렇겠지. 은퇴하기는 했지만 이상희가 아직도 파란의 고문으로 있으니 사실 그렇게 급한 상황도 아니야. 다만 준비하기는 준비해야 된다는 거지. 내가 박덕구를 돌봐주는 건 딱 여기까지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네.” “솔직히 강화의 혈청을 만드는 데 시간과 재화를 쏟아붓기도 했고 이런 짓까지 하면서 녀석을 케어해 주기에는 너무 바빠졌거든. 위치도 위치고 길드에 있는 일 말고도 할 일이 너무 많아. 이번 신입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붉은용병이나 검은백조뿐만이 아니거든.” “하긴… 파란은 이제 조금 자리를 잡았으니 괜찮은 신입을 많이 데려가고 싶겠네요. 이해는 가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뭔가 성과가 없거나 녀석이 달라지는 게 없으면….” “길드에서 내보내기라도 하게요?” “설마. 2파티를 맡기거나 훈련교관으로 빼거나 행정직으로 빼는 게 적당하겠지.” “역시 정이 많다니까.” “칭찬으로 들을게, 누나.” 재미있다는 듯이 싱글벙글 이지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로 재미있다는 표정. 날 관찰하는 모습은 조금 찝찝했지만 일단은 도움을 준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니 목적은 완료된 거나 다름없다. “바쁠 텐데 신경 써줘서 고마워. 누나.” “주식을 몇 개 사놨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요. 나중에 돌아오는 게 있겠죠. 뭐.” “조만간 검은백조에서도 콩고물이 떨어질 일이 있을 거야.” “연주 언니가 좋아하겠다. 아. 그리고 현성 씨한테 언제 시간 좀 내달라고 해주세요.” “응?” “우리 길드 마스터가 계속 보자고 하는데도 반응이 없지 뭐예요?” “박연주 님이?” “네. 뭐 들은 거 없어요?” “아예 없는데….” “아무래도 우리 언니가 현성 씨한테 꽂힌 것 같은 거 있죠? 저보고 자리 좀 만들어 달라고 난리예요. 이것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 사람 고자 아니죠?” “아닐…걸….” 조혜진과 뭔가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줄 알았던 내 입장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이야기였다. 설마하니 검은백조의 길드 마스터와 묘한 열애설에 휩싸일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당연하지만 이건 파란에 도움이 된다. 내가 모르는 것을 보면 김현성이 별 관심이 없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건 희소식이야.’ 이런 소식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정말 최근에는 틀어박혀서 연구만 한 모양이네요. 뭐 공식적인 움직임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것도 덕구 씨 관련 소식처럼 은근슬쩍 돌고 있는 이야기 였는데….” “어떤 이야기?” “파란 길드가 지금의 위치에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가 길드 마스터와 부길드 마스터의 여성편력 때문이라는 소문이요.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김현성은 몰라도 이기영한테는 완전히 들어맞는 소문이죠. 참 신기하단 말이야. 그렇게 잘생긴 얼굴도 아닌데 무슨 매력을 보고 여자들이 자석처럼 달라붙는지….” 거기에는 아주 슬픈 사연이 있지만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지혜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정말로 내가 연구하는 데 시간을 많이 쓰긴 많이 쓴 모양. 혹시나 다른 소문이 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 밖에 내가 들어보지 못한 소문은 있어?” “글쎄요. 뭐 붉은용병이 이번 튜토리얼 던전에서 나올 신입들에게 사활을 걸고 있다든가. 왜 용병여왕님 아직까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잖아요? 저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세간에는 그렇게 보이고 있는 모양이에요.” ‘정답이야.’ “그리고 또 뭐가 있었더라? 조만간 대륙 8좌를 공식석상에서 발표할 거라는 소문도 돌고 있고요. 아마 이 소문은 신성 제국 쪽에서 퍼뜨린 거라고 생각해요. 단순한 헛소문이라기보다는 오피셜로 봐야죠.” “좋네. 안 그래도 공식발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는데… 타이밍도 맞아. 아마….” “튜토리얼 던전이 열린 이후가 되겠죠? 아! 또 파란의 이기영이 마를린 영애와 약혼해 캐슬락을 집어 삼킬지도 모른다는….” “그건 헛소문이야.” “그럴 줄 알았어요. 정보 출처가 마를린 쪽이었거든요.” “별걸 다 알고 있네.” “검은백조의 정보력이야 제국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아, 그리고 오빠 있잖아요?” “응?” “오빠네 길드의 김예리.” “왜?” “최근에 우리 길드 애랑 친하게 지내는 건 알죠?” “난 걔에 대해서는 잘 몰라. 김예리를 케어해 주는 건 현성 씨 쪽이라서….” “검은백조에 그만 들락날락거리라고 하는 게 좋을 거예요.” “뭐 사고라도 치고 있는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니라… 사실 예리가 친하게 지내고 있는 친구가 제 직속인데… 그렇게 질이 좋은 아이는 아니거든요. 물론 나쁜 짓을 하는 건 않지만 여러모로 너무 요즘 애들 같아서…. 예리가 검은백조에 피해를 끼친다기보다는 저희 애가 그쪽한테 악영향을 끼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돼서요. 저희 쪽에서도 통제하기 꽤 애를 썩고 있어서….” “뭐, 사이코패스라도 돼?” “아뇨. 인성은 착해요. 재능도 있고 능력도 있고 실제로 앞으로 검은백조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만한 인재로 평가되고 있으니까요.” “그 정도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오히려 좋구만, 뭐. 파란의 미래와 검은백조의 미래가 사이좋게 지낸다는 건 정치적으로도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고… 친구를 사귄다고 생각해 보면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확률이 높으니까. 우리 길드의 꼬맹이는 항상 외톨이였거든. 오히려 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안심될 지경인데 뭐. 현성 씨도 좋아할 거야.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정석에 가까운 대사를 내뱉자 이지혜가 커다란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는 것이 보였다. “시라야? 채시라?” 물론 커다란 목소리에 대한 대답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언니가 내가 필요해서 부르는 부분? 린정? 어 린정. 대륙 8좌로 내정된 이기영 오빠와의 만남에서 나를 불렀다는 건 드디어 지혜 언니가 나를 인정해 줬다는 부분! 오지고요. 지리고요. 고요 고요 고요한 밤에 나를 부르는 각이고요! 혹시나 셋이서 함께 놀아보자는 말은 아닐지 걱정이 되는 각이지만 의외로 설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요. 아앙!” “아니야. 들어올 필요 없어.” “…….” 문 밖에서 커다랗게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김예리의 검은백조 길드 출입을 필사적으로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필사적으로 막을게.” “네…. 아무튼 던전은 곧 들어가시는 거죠? 오빠가 주문한 건 전부 준비해 놓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시나리오대로 착착 잘 진행시켜 놓을 게요.” “고마워, 누나.” “뭘요. 우리사이에…. 아무튼 간에 잘해보세요. 그 덩치 큰 아저씨 그래도 사람은 좋았는데 이번 기회에 좋은 결과를 얻었으면 좋겠네요.” “진심이야?” “당연하죠. 본래 권력자한테는 그런 충신이 한두 명쯤 있는 게 당연하잖아요? 굳이 배웅은 안 할게요. 내 사랑.” “응. 다음에 또 봐. 내 단짝.” 이미 주사위는 던져 졌다. 제1차 박덕구 각성 및 강화 계획. 캡틴 린델 계획은 이후로, 일단은 녀석과 함께 던전에 진입하는 게 첫 번째다. 물론 그전에…. ‘현성이한테 경고 한번 해줘야겠어.’ 파란의 미래를 저런 식으로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된다. # 201 회귀자 사용설명서 201화 이기영의 몰래카메라 (2) “정말로 괜찮은 거요?” “물론. 이제는 언제 또 이렇게 모일 수 있을지 모르니까.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하면 이런 식으로 붙어 다닐 수 있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 거야. 당장 신입들만 들어와도 정신없어 질 거고… 현성 씨도 그걸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던전행을 허락해 준 것 같다.” “그렇지만….” “조용히 머리라도 식히자는 의미도 있고… 간만에 나들이 간다는 생각으로 한번 돌아보자. 그 동안 여유부릴 시간이 없었으니까. 사람한테는 휴식도 필요한 법이거든.” “형님….” 왠지 모르게 이쪽에 고마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박덕구의 표정이 보였다. 아마 이 던전행이 기획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걸 거의 확신하고 있었던 모양. 녀석의 입장에서 저런 표정을 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이런 시기에 갑작스럽게 던전행이라니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웠으니까. 이쪽과 약간의 마찰이 있었던 게 불과 며칠 전이다. 이토록 갑작스럽게 내가 던전 탐험을 기획하게 된 이유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실제로 정하얀은 아직도 박덕구와 불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고 이 원정에 대한 이야기가 있기 전까지 나도 녀석에게 별 말을 건네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잠깐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화해의 원정이라는 거다. ‘그렇지.’ 아마 그 누구라도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게 당연하다. 자신이 생각한 방향과 전혀 다른 쪽으로 이 모든 일을 계획했을 거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거다. 제1차 박덕구 각성 및 강화 계획. 감독 이기영, 각본 이기영, 도움 이지혜. 김예리에게 무참하게 깨진 뒤에 질질 짜고 있는 녀석을 위해 준비한 진짜 선물이었다. 아니, 선물이라고 하기에도 조금은 잔인할 수도 있겠지만 녀석이 원하는 걸 얻게 해주기 위한 나름대로의 조치라고 할 수 있으리라. 여러모로 부족한 게 많기는 하지만 현재 박덕구가 가지고 있는 문제 중 가장 커다랗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4차 전직.’ 파란의 파티원 들 중에서 아직까지 4차 전직을 하지 못한 채 희귀 등급의 직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녀석 혼자다. 몬스터 웨이브에서 이미 차고 넘치는 경험치를 얻었으리라고 판단되는 녀석이 어째서 전직을 못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뭔가 심리적인 방벽이 녀석을 막고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녀석은 정신적으로 약간의 문제를 겪고 있는 상황이었고 뚜렷한 해결책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내가 궁금한 것은 하나였다. ‘위기가 닥칠 때.’ 박덕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별 것 아닌 추론이지만 한번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였다. 녀석은 위기를 겪어본 적이 없다. 김현성 파티는 천재들로만 이루어진 규격 외의 파티였고 박덕구가 제 역할을 하지 않아도 김현성이라는 규격 외의 존재에 의해 항상 모든 일이 해결되곤 했다. 김현성뿐만이 아니다. 정하얀의 보호 마법은 박덕구보다 먼저 후위를 막아줬고 파티원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천재들이 녀석을 위기에서 구출해 냈다. 율리에나와 결전을 치렀던 저주 받은 신단에서도 영웅 등급 이상의 몬스터였던 율리에나를 단독으로 처리 한 것은 김현성이었고 몬스터 웨이브에서도 녀석은 특출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묻어갔을 뿐이라는 거다. ‘경험치는 전부 채운 것이 맞지만….’ 시스템이 판단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녀석에게 어떤 직업을 부여할지 이 시스템이 판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디까지나 가설이다. 그렇지만 실험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웃어넘기기에는 여러 가지로 캥기는 게 많았으니까. 굳이 이번에 직업이나 특성을 개화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만약 이번 원정에서 녀석이 부족함을 느낀다면 혈청을 받아들이게 하는 게 조금 더 쉬워질 거고 이번 일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메인 파티가 아닌 다른 쪽에 자리를 만들어 주면 된다. 그렇지만…. ‘그럴 확률은 없어.’ 만에 하나라도 녀석이 자신을 포기하는 경우는 없다. 이 모든 게 그걸 전제로 만들어진 계획이다. 대충 생각을 정리한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한번 녀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정신을 놓고 있으면 안 돼. 아무리 희귀 등급의 던전이라고는 해도 사고가 터질 가능성은 항상 염두에 둬야 되니까.” “응. 기영이 아저씨 말이 맞아.” “그건 알고 있소. 이번에는 현성이 형씨도 없으니까. 더욱더 긴장을 늦추면 안 되지.” “물론 너무 힘을 주라는 소리는 아니다. 일부로 난이도가 낮은 던전으로 구입했으니까. 긴장할 때는 긴장 하되 너무 급하게만 움직이지 않으면 돼.” “끄응… 굳이 던전을 사올 필요는 없었는데….” “다른 길드들은 지금 튜토리얼 던전이 열린 이후의 일을 준비하느라 바빠. 싸게 구해왔으니까 부담 느끼지 않아도 돼.” “그렇다면 다행이요.” 간만에 보는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였다. 아니, 원래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잘 티를 안 내려고 하는 만큼 실실 잘 웃고 다니기는 하지만 조금은 여유로운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과장해서 말하면 뭔가 초탈한 것 같은 느낌. 나름대로 소심하다고 할 수 있는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저번 같은 모습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쁘지는 않아.’ 녀석의 상태는 나쁘지 않다. 당장은 나와 정하얀과의 관계를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이 강한 것 같은 느낌. 특히나 정하얀의 눈치를 많이 보고 있는 걸로 봐서는 이쪽이 말해준 행동강령을 속으로 곱씹고 있는 정하얀의 표정이 계속해서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쯧. 미련한 놈.’ 저번 일에 대한 미안함을 사과해야 되는 건 오히려 정하얀이다. 어째서 녀석이 사과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솔직히 귀엽게 느껴진다. 괜스레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자 이번에 원정을 함께 할 파티원들 다섯 명이 시야에 비쳤다. 나, 박덕구, 정하얀, 김예리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과 여러모로 활약을 해주시게 될 사제분이 한 명. 본래는 선희영을 빼오고 싶었지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그럴 수 없었다. 박덕구와 제법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황정연 역시 파란 행정 측에 큰 축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리. 사실 황정연은 이 계획에 중심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형편없는 연기력을 생각해 보면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율리에나 때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황정연은 드라마를 좋아하긴 했지만 연기에는 절망적일 정도로 재능이 없다. 물론 나를 제외한 나머지도 마찬가지. 벌써부터 어색한 손짓과 몸짓으로 박덕구를 불안하게 하는 정하얀과 말이 없어 속내를 알 수 없는 김예리도 연기와는 거리가 멀다. ‘발연기.’ 그래서 영입한 것이 붉은용병에서 차출해온 사제 안기모였다. 어떻게든 김예리와 정하얀의 만들어 놓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줄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침 타이밍 좋게 덕구 녀석이 입을 열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사제님이랑 인사를 안 했던 것 같은데… 괜찮으면 소개 좀 해주쇼, 형님.” “덕구는 처음인가?” “뭐, 그렇소.” “만나서 반갑습니다. 덕구 씨. 안기모라고 합니다.” “아아아. 기모 형씨였구만.” “하하. 네. 붉은용병 길드 소속으로 어쩌다 보니 연이 닿게 되어 이번 원정에 함께하게 됐습니다.” “희영 씨가 많이 바빠서 인맥의 힘을 조금 빌렸지.” “아아아아…. 그렇게 된 거였구만.” 안기모의 합류도 조금 달가운 모양이다. 덕구 녀석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의외로 좋아하기도 했고 겉으로 보기에 안기모는 호감형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모 씨.” “아닙니다. 기영 씨. 파란은 붉은용병의 우방이기도 하고 마침 저도 굉장히 지루했던 참이라서요. 요즘 린델을 들썩거리게 만든 파티와 함께 하게 되어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클리어한 던전이라고 해봤자 영웅 등급의 던전 하나와 희귀 등급의 던전 하나가 전부고요.” “몇 개의 던전을 클리어 했는지가 뭐 중요하겠습니까.” “하하하하….” ‘이 자식 자연스러운데….’ 그럴 만했다. 듣기로는 연극을 전공했었고 유명해지지는 못했지만 대학로에서 구를 만큼 굴렀다는 이야기를 미리 전해 들었으니까. 원래는 평범한 사제가 아니라 전투성직자 종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몸 어디를 봐도 근접 직군을 병행했었다는 흔적이 없다. 본인이 힘을 빼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겉모습은 일반 사제의 모습. 이미 저 겉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이곳에 합류할 자격이 있다. 파티원들은 제법 떠들썩한 이야기를 나누며 던전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마차를 타고 빠르게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걸으면서 함께 이야기하는 게 더 좋을 거라 판단해 피크닉스러운 분위기도 연출. 정하얀이 연기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박덕구를 묘하게 피하고 있어서 덕구 녀석이 불편해한다는 것만 빼면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좋아.’ 애매하게 합류할 바에야 차라리 저런 포지션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김예리는 조용히 있다가 몇 마디를 던지는 것이 전부였는데 다행히 친구의 영향을 그리 많이 받지는 않을 것 같았다. 친화력이 좋은 덕구 녀석이 안기모와 가까워지는 것은 순식간. 길을 걷다가 앉아서 쉬는 시간이 많아졌고 하룻밤 자려고 지은 캠프에도 꽤 많은 공을 들였다. 술은 많이 마시지 못했지만 식사를 하며 목을 축이는 느낌으로 분위기를 즐겼다. 지금까지는 거의 모든 게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 신경 쓸 게 많은 나 역시 간만에 여유를 즐길 기회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좋은 경치와 좋은 분위기. 좋은 음식을 이렇게 즐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받은 거나 다름없다. 재미있었던 것은 의외로 김예리가 요리를 잘했다는 것. “신부 수업.” 어째서 이렇게 잘하느냐는 말에 짧게 대답한 그녀의 대답에는 조심스레 김현성 쓰레기 설을 곱씹어 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간에 파티는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서 점점 던전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도시가 멀어져 쉽사리 돌아갈 수 없게 됐을 때 즈음에 안기모에게 슬그머니 눈치를 보냈다. 화기애애한 휴식시간은 여기에서 끝. 이쯤에서 운을 띄우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신호를 받아들였는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군요.” “네. 기모 씨. 내일 오전 즈음에는 던전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희귀 등급의 던전이라고 말씀하셨죠?” “네.” “파티 구성을 보면 커다란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 같군요. 여기 계신 분들 정도라면 틀림없이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겁니다.” “거 당연한 거요. 형님이랑 하얀이 누님도 있고….” “대신 이 부근에 들어가시면 조금 긴장하셔야 될 겁니다.” “아아아…. 그 건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네. 이기영 님은 알고 계셨군요.” 나와 안기모의 대화에 궁금하다는 표정을 보내오고 있는 박덕구의 얼굴이 보였다. 당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 녀석의 얼굴을 본 안기모가 그대로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아 덕구 씨는 모르고 있나 보군요.” “무슨 소리요?” “사실 몇 년 전에 이 부근에서 클랜 하나가 완전히 몰살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형 길드에 가입되어 있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는 사건이죠.” 거짓말이다. “이 근처에서 말이요?” “예. 당시에 린델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를 하지 않았습니다만… 아마 알고 있는 이들은 전부 알고 있을 겁니다.” “뭘 말이요?” “살인여단.” 괜스레 장내가 차분해졌다. 조금은 달라진 분위기에 덕구 녀석이 침을 삼켜 넘기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항상 미소 짓고 있던 안기모도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도 조금 긴장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자식.’ 연기를 잘한다는 소리에 데려오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꽤나 수준급으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 저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는 나도 왠지 분위기 때문에 긴장되기 시작한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두 손을 꽉 쥐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살인여단이라는 녀석들을 두려워하는 것 같은 표정. 호흡이 살짝 거칠어진 것은 물론 표정 연기도 완벽에 가깝다. 혼을 실은 연기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 자식… 영입하고 싶은데?’ 저도 모르게 연기 혼을 터뜨린 녀석이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신성 제국으로 넘어온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이 만든 머더러 클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는 고인이 되 버린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가 미래에 만들 클랜. ‘오늘도 신세진다, 진호야!’ 녀석에게 고마운 마음이 샘솟을 수밖에 없었다. # 202 회귀자 사용설명서 202화 이기영의 몰래카메라 (3) 싸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 어떻게 보면 녀석은 2회 차 최대의 피해자였다. 원래대로 미래가 흘러갔더라면 정진호는 지금쯤 머더러 클랜 살인여단을 창설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율리에나의 진짜 주인이 됐을 수도 있고….’ 물론 정진호가 율리에나를 사용했을 거라는 건 둘의 궁합이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고려한 뇌내망상이지만 녀석이 살인여단을 창설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째서 내가 그 사실을 아는지에 대한 대답은 뻔할 뻔자. ‘봤으니까.’ 실제로 본 것은 아니다. 1회 차의 이기영과 박덕구의 대화에서 내가 당시 여단에 한 발 걸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던 것뿐이다. 박덕구의 만류 때문에 여단에는 가입하지 않았던 것 같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정진호와 친분을 만들어 놨었다는 거다. 녀석이 만들 머더러 클랜 살인여단은 앞으로 1년이나 2년 뒤에 만들어질 비공식 클랜. 자세한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알고 있다. 여단은 정진호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클랜이고, 녀석이 없는 2회 차 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가상의 머더러 클랜의 이름으로 살인여단의 이름을 빌려온 것뿐이지만 왠지 모르게 어감이 착착 감기는 듯한 느낌은 분명히 있었다. ‘녀석이 없어도 멤버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니 창설될 확률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아마 창설된다고 하더라도 이번 회 차에서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안기모 녀석은 얼굴을 굳힌 채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 표정에서 느껴지는 긴장감 때문인지 박덕구 역시 귀를 기울인 채로 녀석을 응시하고 있었다. “머더러 클랜?” “그렇습니다.” “린델 근처에서도 그런 놈들이 설치고 있다는 말이요?” “네. 도시 차원에서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고 있기는 하지만 머더러 클랜 자체의 수법이 워낙 은밀하고 폐쇄적인 터라… 저희 길드에서도 아직까지 꼬리를 잡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때 이후로 시간이 조금 지나기는 했지만 백번 조심해도 모자람은 없으니까요.” “거, 혹시 최근에 모습을 드러내기라도 한 거요?” “만약에 그렇다면 여기까지 던전행을 나오지는 않았겠죠. 하하하.” “그건 다행이구만….” ‘밀고 당기는 게 수준급인데.’ 조금 고전적이지만 공포 영화의 흔한 클리셰다. 시나리오에는 없었지만 본인의 애드립이 가미된 모양. 긴장감을 한 것 끌어올린 이후 이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수습하려는 모양새가 재미있다. 보통 저러다가 주인공 일행이 봉변을 당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첫 운을 무척이나 잘 띄운 셈이 된다. 일단 떡밥을 뿌려야 물고기가 잡히는 거니까.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정하얀과 김예리가 ‘아아. 그렇군요?’라든가 ‘무, 무섭네요.’ 같은 말도 안 되는 연기를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쪽도 급하게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덕구야. 이미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자는 의도로 말씀하신 거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기모 씨?” “네. 하핫. 뭐 그렇습니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죠. 물론 마음에 걸리는 게 없는 건 아닙니다만….” 파티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박덕구가 황급하게 말을 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뭐요?” ‘미끼를 제대로 물어버렸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제대로 물어버렸다. 안기모 역시 박덕구가 미끼를 물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지 이쪽에 신호를 보내기 시작. 저런 눈빛을 보내지 않아도 나 역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아. 별 건 아닙니다. 정말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덕구 씨.”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요, 기모 형씨.” “최근에 실종 사건이 일어나는 빈도가 조금 늘어나서 말입니다.” “실종 사건 말이요?” “네. 물론 주목할 만한 수치는 아닙니다. 본래 숲에서의 실종 사건은 매년 있었던 인사치례 같은 일이니까요.” “그런 거요?” “예. 저번 분기에 들어온 신입들이 슬슬 자신감이 붙을 시기니까요. 덕구 씨와 기영 씨의 동기 분들 말입니다. 보통 처음 들어온 1년에 능력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니….” “아.” “무리한 원정은 도시에서도 지양하고 있기는 하지만 보통 말을 듣지는 않습니다. 대륙에 들어온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제국 8좌에 선택된 두 분들 덕분인지 저번 분기의 신입들은 유난히 자신감이 넘쳐서 말입니다. 하하하. 물론 기영 씨를 탓하는 건 아닙니다. 일어난 사고들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선택이니까요.” “이유가 그것뿐인 게 확실한 거요?” “정말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물론 단순히 신입들이 기운이 넘친다고 보기에는 빈도가 조금 잦긴 했습니다만 이미 그 건에 대해서는 붉은용병에서 수색을 끝마쳤으니까요. 이미 몇 차례나 수색을 돌아봤지만 머더러 클랜이 머물렀던 흔적 따위는 없었습니다.” “붉은용병이라면 믿을 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미심쩍어 보이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생각 없이 사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미간을 구기고 있는 걸 보니 자신 나름대로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정보를 정리하고 있는 모양이다. 김현성이 없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생각보다 감이 좋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미끼를 제법 거칠게 물었다. 이쪽의 안전을 책임질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물론 김예리라는 전위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암살자 라인이다. 전투에 들어갔을 때 그녀가 후위를 신경 쓴다는 것 자체가 일이 꼬였다는 걸 의미한다는 거다. 단순히 놀러 온 것 치고는 표정이 너무 심각해 웃음이 다 나올 정도였다. “그럼 슬슬 일어나자.” “형님.” “응?” “아, 아무것도 아니요.” 되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 자리가 화해의 자리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 말을 직접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자꾸만 불길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런 모습은 좋네.’ 개인적으로는 무척 마음에 드는 모습. 항상 걱정하고 최악을 떠올리는 건 정말 마음에 든다. 물론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마이너스 점수를 주기는 했지만 일단은 합격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계속해서 길을 걷는 와중에도 홀로 심각해지고 있는 녀석 덕분에 파티원 전체가 그 영향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 개인적으로 경계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던전에 거의 다 왔을 즈음에는 다시 한번 이것저것 이쪽을 향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 이 던전의 출처에 대해서였다. “형님. 이 던전은 어디서….” “글쎄. 본래 출처는 확인 안 해서 이 길드, 저 길드 건너서 매입한 거야.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었던 건 검은백조였고.” “그렇구만.” “왜. 뭔가 문제라도 생길 것 같아서?” “아니, 그런 건 아니요. 뭐 혹시 검은백조 길드는 그… 여단인가 뭐시긴가 연관이 있는 거요?” “조금씩 연관이 되어 있겠지, 뭐. 당시 녀석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도 검은백조는 여전히 린델을 대표하는 거대 길드 중에 하나였으니까. 혹시 아직도 여단에 대해서 신경 쓰는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니요. 뭔가 조금 불길해서….” “인상 좀 풀어도 된다. 나도 충분히 조심하고 매입한 거니까. 벌써 몇 년 지난 일이고 여단에서 굳이 이 시기에 린델을 노릴 이유는 없어. 물론 이유가 있어서 행동할 놈들은 아니지만….” “형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거, 나는 뭐 조금 그렇지만 형님은 이제 도시 내에서 중요한 사람 아니요.” “응?” “제국을 대표하는 8명 중에 한 명이라는 건 상징적인 의미도 있으니까. 그냥 왠지 모르게 사고가 터질까 봐 걱정이 된다 이 말이요. 끄응. 생각 안하려고 해도 이상하게 자꾸만 신경 쓰인다니까.” 녀석의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말을 잘하지 못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뭘 불안해하고 있는지도 이해가 간다. 아마 제국 8좌라는 내 위치와 일이 벌어진 타이밍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확실히 시기상 안전하다고 하기에는 어렵다. 신입들을 맞을 준비로 대형 길드와 중견 길드들의 경계가 소홀해지는 타이밍이었으니까. 만약 어떤 집단이 불특정 다수를 노리거나 나를 노린다고 가정한다면 일을 터뜨리기에 꽤나 좋은 환경이 마련되었다는 거다. 파란의 이기영이 던전을 매입한다는 소문이 린델 내에 은은히 돌았고 도시 내에 들어가 있던 여단의 끄나풀이 그 정보를 습득. 신성 제국의 명예주교이며 제국 8좌의 죽음을 여단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물론 박덕구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망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우리가 던진 조각 하나는 여단에 대한 정보뿐이었고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퍼즐을 맞춰 나가기에는 다른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녀석이 이쪽에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완성된 퍼즐을 머릿속으로 대충이나마 그리고 있으니 계속해서 다른 조각을 찾으려고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녀석이 찾고 있는 조각이 내가 그린 그림과 맞는지 맞지 않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지만 솔직히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이 자식, 성장했구나.’ 아무 생각 없이 쫄레쫄레 이쪽을 따라다녔던 예전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박덕구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성장하고 있다. 별 것 아닌 계기였지만 그걸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튼 간에 녀석이 느끼고 있는 불안감은 계속해서 증폭되기 시작. 중간 중간에 공포 영화의 예고편 같은 느낌으로 계속해서 떡밥을 뿌리는 안기모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으리라. 정하얀과 김예리가 굳이 입을 열지 않은 게 확실히 도움이 됐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박덕구의 의심이 많아졌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불안해하는 박덕구를 달랬고 정하얀과 김예리도 괜찮을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기모는 여단에 대해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공포 영화의 주인공 무리처럼 범의 아가리 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완벽한 그림이 그려졌다. 보통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사고가 언제 처음 일어나는지는 뻔할 뻔자. ‘안전할 거다.’라는 의식이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자리 잡혔을 때 시작된다. 확실히 박덕구 역시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계속해서 뒤로 곱씹고 있었을 타이밍이 최고의 타이밍이라는 거다.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위치상으로도 시기상으로도 지금 타이밍이 딱이다. 기습으로 시작해도 좋고 길을 잃은 척 다가오는 모험가의 행색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 이 부분은 이지혜가 온전히 기획한 부분이기 때문에 나로서도 궁금함이 앞선다. 던전에 거의 당도해 마지막 정비를 하며 이제 막 진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시야에 비치는 것은 차가운 인상을 하고 있는 여자 한 명. ‘저건가?’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이상한 광경이다. 누가 봐도 그녀의 모습은 길을 막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거… 누구… 요? 혹시 여기 혼자 온 거요?” 박덕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을 때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불안해하는 박덕구 녀석과는 반대로 이쪽은 조금 김이 빠진다. ‘한 명이 뭐야?’ 확실하게 준비해 놓을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호언장담을 하던 이지혜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검은백조의 정예라도 보낸 건 아닌지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보내온 것은 딸랑 한 명. 혹시 몰라 주변에 마력을 보내봤지만 이지혜가 준비한 건 저 여자 하나가 맞다. 물론 연기이기 때문에 누가 오든 별로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긴박함이 조금 부족한 느낌은 있다. ‘쯧.’ 폭발적인 살기가 갑작스럽게 장내를 뒤덮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손과 발이 덜덜 떨려오고 나도 모르게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게 된다. 이전에 차희라에게도 한 번 맞아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감각. ‘어….’ 폭발적인 마력이 장내를 휘감는 순간 이지혜가 누구를 보내줬는지 깨닫게 된 것은 당연지사. 차희라와 동수로 평가받고 있는 린델 내의 또 다른 강자. 제국 8좌의 일원. 김현성에게 목을 매고 있다는 검은백조의 길드 마스터. ‘박연주?’ 내가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박덕구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망쳐어!!!!!!” # 203 회귀자 사용설명서 203화 영웅은 만들어진다. (1) 확실히 이지혜에게는 기왕 할 거 제대로 해달라는 주문을 한 적이 있었다. ‘정말로 위기 상황처럼 느껴지게끔 하는 게 좋겠는데… 어색하면 안 하느니만 못 해.’ ‘일단 오빠네 파티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정도면 된다는 거 아니에요? 평 길드원으로는 택도 없겠네요.’ ‘그렇게 되나?’ ‘끄응…. 지금 간부들은 바쁜 타이밍인데…. 간부 한 명 껴봐야 별로 달라지는 것도 없을 것 같고… 이 건은 제가 알아서 해볼게요. 어쩔 수 없죠, 뭐.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거래만 괜찮게 되면 아마 만족하실 만한 결과를 얻으실 수 있으실 거예요?’ ‘뾰족한 수가 있어?’ ‘일단은 비밀. 선물 상자는 그 장소에 가서 풀어보세요.’ 분명히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이지혜의 일처리 능력은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으니까. 뭔가 대단한 이벤트를 준비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자신이 속해 있는 길드의 마스터를 움직일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어떤 걸 조건으로 내밀었는지도 대충 이해가 간다. 아마 김현성과의 만남을 조건으로 이번 이벤트에 참가하기로 결정을 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물론 이지혜의 일처리가 완벽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해내도 너무 제대로 해냈다. “도망쳐어!!!!” 박덕구의 격정적인 반응만 봐도 답이 나온다. 쏟아진 마력과 살기를 정면으로 받은 뒤에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물론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전부 강자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이다. 정하얀 역시 그렇고 김예리 역시 그렇다. 심지어 제일 스펙이 떨어지는 박덕구 역시 함께 들어온 1년 차 동기들과 비교해 봤을 때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게 저 정도의 강자를 이길 수 있다는 지표가 되지는 않는다. ‘레벨이 달라.’ 라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거다. “갑, 갑자기 이게 뭔….” “형님! 빨리 도망치쇼! 빨리!” 위험을 느낀 것이 자신뿐인 줄 알았는지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가관. 그만큼 녀석이 이쪽의 안전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거겠지만 이게 연기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녀석이 저렇게 난리를 치는 것도 이유가 간다. 차희라와 맞부딪쳤을 때와는 이야기가 다르다. 김현성, 조혜진이 있었기 때문에 균형이 유지된 것이기도 했고 차희라가 이쪽의 사정을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백번 생각해도 박덕구 혼자서는 후위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녀석 역시 그걸 실감하고 있기 때문에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거겠지만 이쪽도 그때보다는 성장했다. 일단 저항하는 모습은 보이는 게 맞다. 반사적으로 정하얀도 주문을 외웠고 김예리도 단검을 고쳐 잡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시바… 혹시 저거 진짜 여단 아니야?’ 라고 생각할 정도의 살기. 마음의 눈으로 그녀를 들여다보고서 박연주가 맞다는 것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무서워.’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것으로도 모자라 이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는 그녀의 모습은 무섭다. “앗…!!”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정하얀의 주문이 먼저 튀어나왔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 가닥의 마력이 박연주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 유도형인지 중간 중간에 꺾이기도 하며 그녀를 추적하지만 들고 있는 한 개의 단검으로 그 모든 공격을 막아내며 이쪽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탐색용으로 한번 던져본 마법인 만큼 그녀에게는 별 다른 영향을 끼치긴 힘든 모양. 당연히 나 역시 용숨결 물약에 마력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저항해야 된다는 생각보다는 그녀가 쏘아내는 살기를 떨쳐내기 위한 행동이라고 하는 게 맞으리라. 위이이이이이잉!!!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정하얀의 마법 가닥을 쳐낸 이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커다란 폭발일 터. 물론 다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쪽이 전력을 다해도 저쪽은 여유가 있다. 용숨결 물약의 화력을 처음 봤는지 깜짝 놀란 박덕구가 이쪽을 바라봤지만 대답할 여유는 없다. “집중해! 돼지 새끼야!” “알, 알겠소. 형님!” 현재 박덕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녀는 거리를 좁히려고 하고 있고 우리는 거리를 벌리려는 상황이었으니까. 정하얀은 그녀를 떨쳐내기 위한 주문을 외우고 나 역시 혹시 모를 변수에 대응한다. ‘자존심 상하니까.’ 나와 정하얀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는 시험대이기도 하다. “바람 발걸음!” 정하얀의 주문에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 그래봤자 저 여자의 민첩 수치에 비하면 미비하지만 체력적으로는 도움이 된다. 폭발이 걷힌 이후에는 역시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모습으로 연기를 뚫고 지나온 얼굴. 표정을 보니 얼굴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화나게 했나? 슈바….’ 냅다 전설 등급의 물약을 던졌으니 저런 얼굴을 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아까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 다시 한번 마력을 집어넣는다. 터지기 전까지 2초. 그렇지만 박연주가 이쪽으로 달려오기까지는 2초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위이이이이이잉! 그래도 일단 마력을 집어넣었으니 던지는 것이 맞다. 폭발 반경에는 우리 쪽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굳이 신경 쓰지는 않았다. 코앞에 던진 이후에 곧바로 땅바닥을 손으로 집자 파직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용의 꼬리가 파티원을 감싸 안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폭발의 반경에 노출된 것은 박연주 혼자. 이번에도 박덕구는 나를 깜짝 놀랐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 이게….” “최근에 조금 성취가 있었어.” “그렇구만….” 용의 꼬리가 사라진 순간 정하얀의 마법이 터져 나온다. ‘이거 이기는 거 아니야?’ 꿈같은 상상을 잠깐 해봤지만 정하얀의 범위형 마법을 뚫고 접근하는 모습은 가관. 이번에는 조금 더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나와 정하얀을 응시하고 있는 표정이 보인다. ‘으아….’ 조금 더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어?’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그녀가 우리 그룹에 섞인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특성인가?’ 마음의 눈으로는 이름만 확인한 것이 전부. 박연주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힐 수 있는 특성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급하게 촉매를 만지작거리자 다시금 파직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서 불꽃이 튀었지만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곧바로 나를 향해 단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으니까. 박덕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튀어나온 것은 단검을 들고 있는 김예리. 콰앙! “파란에는 인재가 많다더니… 정말이었네?” 작은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녀의 공격을 따라와 막았다는 것만으로도 김예리를 칭찬하는 게 옳다. 순식간에 무리 가운데에 나타난 그녀에게 반응한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으니까. 그렇지만 그게 그녀를 막을 수 있다는 소리는 건 아니다. 한 번의 공격은 막아냈지만 그 이후의 공격은 막아내지 못하는 것이 당연. 박연주는 단검을 회수한 이후에는 곧바로 발을 내질렀고 발에 맞은 김예리가 피를 울컥 토하며 반대쪽으로 날아가 커다란 나무에 처박혔다. ‘리타이어.’ “예리야!” “네 걱정부터 하는 게 좋을 거야, 이기영.” “으아아아아아아!” 김예리가 나무에 부딪친 이후에 깜짝 놀란 박덕구가 방패를 들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안기모 씨는 예리를!” “네… 네!” 급하게 김예리에게 달려가는 안기모의 등 뒤로는 수십 개의 단검과 검이 꽂힌다. ‘저것도 특성인가?’ “커헉!” 즉사하는 게 당연한 상처지만 비명을 내지르는 안기모를 보니 직접적인 대미지가 있는 공격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 특수하게 처리된 검일 확률이 높다. “끄어어어어억….”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질 기어가며 혼신의 연기를 펼치고 있는 안기모의 모습은 가관. 봐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저런 연기를 펼치는 것을 보니 난놈이긴 난놈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김예리를 치료하기 위해 엉금엉금 기어가는 모습은 전우를 잃은 이의 모습 그 자체다. 혼신의 연기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지만 이 무대의 주인공은 안기모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박덕구. 이 모든 무대는 녀석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맞다. 입술을 꽉 깨물고 박연주와 맞서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지만 상대가 될 리가 없다. 오히려 휘둘리고 있는 듯한 느낌. 민첩 수치에서 차이가 나니 어쩔 수가 없다. 박덕구를 완전히 무시한 채로 정하얀에게 달려드는 박연주를 녀석이 막을 수 있을 리가 만무. 결국에는 정하얀 역시 가슴에 검정색의 검이 박힌 채로 일단은 리타이어. 나는 깜짝 놀란 모습으로 정하얀에게 다가가 가슴 쪽에 포션을 뿌려댔다. ‘진짜 꽂힌 거 아니지?’ 살짝 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보니 확실히 아무 이상 없는 모양. 검의 소재가 조금 궁금해지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 빠… 사랑….” “살 수 있어, 하얀아.” “사랑해요….” “하얀아!!” 주문한 적이 없는 비련의 여주인공 연기를 끝으로 정하얀의 숨이 점점 가라앉기 시작. 그 모습을 본 박덕구가 방패를 휘두르며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예상은 했지만 꽤나 처절한 모습이다. 얼굴에는 자신의 무기력에 대한 원망이 담겨져 있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다 너를 위해서다, 덕구야.’ 분명히…. ‘할 수 있다.’ 박연주는 정하얀에게 검은색 검을 꽂은 뒤로는 나를 노리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내가 정하얀을 붙잡고 오열하는 포지션에 있었으니까. 아마 박덕구를 무기력하게 만든 이후에 나를 처리하는 게 옳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조금 더 극적이기도 하다는 걸 그녀 역시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계속해서 방패를 휘두르며 검을 놀리고 있었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박덕구의 검은 그녀에게 닿지 않는다. “제기랄!! 제기랄!!!” 김예리에게도 닿지 못했던 검이 박연주에게 닿을 리가 없다. 오히려 농락 당하고 있는 모습. 철저하게 괴롭힘 당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점점 더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외관을 보니 내가 다 안쓰러울 지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검을 놓지 않는다. 어째서인지는 뻔할 뻔자. 녀석이 지금 나를 지키려고 한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망치쇼! 형님! 빨리 멀리 떨어지쇼!” 같은 소리를 계속해서 입 밖으로 내뱉고 있었으니까. “형님!” ‘엄청 미안한데….’ 이 모든 게 연기라는 게 밝혀진다면 박덕구가 나를 때려 죽여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화끈하게 일을 벌였다. 계획할 때부터 조금 미안한 짓을 할 거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지만 눈물 콧물을 흘리며 도망치라고 말하는 놈의 모습을 보니 괜스레 더 찡해진다. 녀석이 얼마나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던 탓이다. 우리야 이 모든 게 가짜라는 걸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별 생각이 없었지만 녀석에게는 이 모든 게 현실이다. 자신이 이 여자를 막고 있을 테니 빨리 도망치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자신의 목숨보다 내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과 같다.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열정과 투지가 모든 일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나자 박덕구는 숨을 헐떡이며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박연주를 노려보기 시작. 이미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박연주가 슬쩍 손을 들어 올리자 검정색 검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마치 처형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 “도망치쇼… 형님…. 누님이랑 같이… 빨리….” 똑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녀석의 위로 검정색 검이 떨어지는 순간, 나는 몸을 옮겨 박덕구의 앞을 막아섰다. 박연주의 신호에 맞춰 몸을 움직인 것에 불과하지만 꽤나 극적이다. 내 몸에 검은색 검들이 꽂혔지만 고통은 없다. 몸을 움직이기 불편하기는 하지만 고통이 없다는 건 무척이나 신기한 부분. 당연하지만 등 뒤로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박덕구가 보는 장면은 내가 양팔을 벌려 자신을 보호한 장면일 터. 누가 봐도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명장면이다. “형님?” “아….” “형님?” “돼지 새끼야, 도망… 쳐….” 미리 입에 머금고 있던 붉은색 포션을 왈칵 내뱉으며 박덕구를 바라보자 녀석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형… 형니임… 형니임….” 어린애처럼 나를 부르며 울부짖는 모습은 가슴이 찡해 괜스레 감동스러울 지경.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하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형니임… 끄으으으윽… 형님!!” “아….” “형님! 형님!!” “항상 기억해라… 덕구야.” “가지 마쇼…. 가지 마쇼…. 기억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버티쇼… 조금만 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조금 더 비정해진다. 아마 박덕구도 대충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 살릴 수 있다.’ 정하얀도 미세하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김예리도 마찬가지다. 물론 나 역시 아직 숨이 붙어 있다. ‘좋아.’ 할 줄 아는 게 없는 돼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 이미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다. 저런 몸으로 녀석은 질질 짜서 최후를 맞는 것보다 일어서서 싸우고 지키는 것을 선택했다. ‘좋아! 슈바! 그거야!’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검과 방패를 다시 한번 붙잡고 내 앞을 막아서는 녀석의 모습이 괜스레 듬직해 보이기 시작.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모습 역시 내 귀로 들어와 내리 꽂혔다.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녀석을 계속해서 지탱해 주던 대사였다. 모든 준비물이 모였고 상황 역시 충분히 극적이다. 본디 영웅이라는 놈들은 이런 상황에서 한두 개쯤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게 마련. 당연하지만 나는 녀석을 믿는다. 검과 방패를 다시 들어 올린 것만으로도 녀석은 충분히 자격이 있다.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아직까지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박연주가 다시 한번 손을 휘두른 순간, 수십 개의 검이 다시 한번 내 몸 위로 떨어진다. 박덕구는 방패를 들어 올렸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외침과 함께 녀석의 몸이 황금색으로 물드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전직….” [플레이어 박덕구의 고유기벽을 확인합니다.] [쓰러지지 않는 영웅] ‘그렇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204 회귀자 사용설명서 204화 영웅은 만들어진다 (2) 경험치는 이미 옛날 옛적에 채워졌다. 박덕구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황금색의 빛은 너무나도 눈이 부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정도. 드래곤 알케미스트로 전직했을 때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뿌듯함이 배가 됐다. ‘해냈어!! 슈바!!!’ 이 모든 기획과 무대가 의미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한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이번 일의 마무리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다. 사실 카스가노 유노와 함께 검은색 세계를 보지 못했다면 이번 기획은 애초에 떠올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시 수많은 마법과 화살의 폭풍 속에서 박덕구가 나를 감싸 안았을 때, 검은색 세계의 이기영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 물론 녀석이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만 봐도 내구 능력치와 체력 능력치는 훌륭한 수준이다. 그렇지만 그게 박덕구가 이쪽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이 되지는 않는다. 녀석이 아무리 튼튼하다고 한들 육체는 부셔지게 마련, 도시를 쓸어버렸던 수많은 마법의 틈에서 녀석이 나를 살릴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기적과는 거리가 멀다. 아마 그 당시에도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내 가설이 맞다면 애초에 녀석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다. 박연주의 검을 방패로 받아내는 와중에도 빛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 눈을 아프게 했던 빛이 사그라진 후에야 박덕구의 상태창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좋아!’ [플레이어 박덕구의 상태창과 재능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박덕구] [칭호 - 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 - 23] [성향 - 단순무식한 열정가] [직업 - 신념의 방패 - 전설 등급] [직업효과 - 기초 검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 - 기초 방패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 - 중급 방패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 - 고급 방패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 - 고급 마력 운용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 - 70/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민첩 - 35/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체력 - 81/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지력 - 29/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내구 - 90/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행운 - 29/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마력 - 28/성장한계치 일반 이상] [총평 - 내구 스탯이 90에 도달했습니다. 마력 능력치와 민첩 능력치는 여전히 별다른 성장이 없었지만 높은 체력 수치와 내구 수치가 전설 등급의 직업 ‘신념의 방패’와 궁합이 좋아 상위로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내구와 체력의 성장 한계치가 눈에 밟히기는 하지만, 이하가 아닌 이상 판정을 받은 만큼 본인의 노력 여부에 따라 조금 더 올라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물론 죽을 만큼 고생하겠지만요.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말아주세요.] ‘대박…. 내구 스탯 구십?’ 어처구니가 없어 헛기침이 나올 정도였다. 총평의 말대로 중요 스탯이 90을 돌파했다는 건 상위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상대적으로 다른 능력치들은 형편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전설 등급의 직업과 내구 스탯 90을 찍었다는 건 분명히 의미가 있다. 게다가…. ‘고급 마력 운용 지식?’ 눈앞에 있는 박연주, 차희라, 고인이 되어버린 이토 소우타, 빅터하르트 영감이나 김현성 같은 이들만 가지고 있는 고급 마력 운용 지식을 습득한 것 또한 놀라울 정도로 당황스럽다. 덕구의 마력 능력치는 겨우 28. 마력 운용 지식을 습득하는 데 마력의 크기나 양은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지금 당장은 사용하기 어려운 지식이겠지만 녀석이 계단 하나를 오르는 데 많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그 어떤 것보다 제일 황당했던 것은 내구 능력치의 폭발적인 증가다. 가장 최근에 확인했을 때만 해도 80을 넘지 못했던 내구 능력치가 어째서 90이 되었는지는 뻔할 뻔자. 아마 전직 보너스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념의 방패 - 전설 등급] [고대부터 신념의 방패라는 것은 직업의 이름이 아니라 위대한 전사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칭호였습니다. 타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전사들만이 신념의 방패라는 칭호를 얻었고 그들은 전사의 무덤에 안치되어 수세기의 세월 동안 고대 전사들의 존경을 받아 왔습니다. 이 위대한 영웅들이 내린 의지가 계승되어 신념의 방패의 칭호를 플레이어 박덕구의 직업으로 판정합니다. 내구 스탯이 15 올라갑니다. 내구 능력치를 제외한 모든 스탯이 1 하락합니다. 영웅들의 축복을 받습니다. 고급 방패술을 습득합니다. 고급 마력 운용 지식을 습득합니다. 신념의 방패의 특수 직업효과로 전설 등급의 특성, 숭고한 희생을 개화합니다.] [플레이어 박덕구의 특성을 확인합니다.] [숭고한 희생 - 전설 등급] [일정시간 동안 선택한 대상에게 끼치는 외부의 충격과 피해를 대신 받아냅니다.] ‘사기!!’ 개화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너무 해버린 상황. 15나 올라가 버린 내구 능력치 그리고 외부의 충격과 피해를 대신 받아낸다는 특성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녀석의 발목을 붙잡았던 낮은 민첩 수치가 ‘숭고한 희생’으로 해결된 것과 다름이 없다. 손이 닿지 않는 곳의 피해를 직접 받아내면 되는 거니까. 이게 녀석이 원한 성장 방향과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지금 전 대륙에서 가장 훌륭한 고기방패로써의 전직을 마쳤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 투병한 방패가 생겨나기 시작. 아마 이게 박덕구의 특성 숭고한 희생이리라. ‘맞으면 안 되겠는데.’ 위엄 넘치는 녀석의 모습을 응원하면서도 걱정되는 게 있기는 하다. 검정색 검이 대미지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박덕구가 알기라도 한다면 일이 매우 심각해진다.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기 때문에 이게 몰카라는 것은 무조건 숨겨야 한다는 거다. 단순히 특성만 생긴 것이 아닌지 박연주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어서 나에게는 상처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검정색 검이 내게 박히는 순간 이 몰래 카메라는 끝난다. ‘그건 안 돼.’ 아무리 녀석을 위한 일이었다지만 박덕구가 느낄 배신감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도 하지 못하는 부분. 시선을 마주친 박연주에게 계속해서 이제 그만 사라지라고 고개를 까닥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 고갯짓에 박연주도 고개를 슬그머니 돌린다. 그러나 이제 그만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과는 다르게 불행하게도 그녀가 고개를 돌린 곳에 자리한 것은 정신을 잃고 있는 김예리. ‘슈바….’ 내 고갯짓을 김예리를 공격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그녀의 검정색 검들이 김예리를 향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박덕구의 몸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걸 보고서도 이제 다 끝난 거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모양. 김현성과의 만남을 조건으로 걸었기 때문인지 열정이 남다르다. ‘이런 미친!’ “안 돼!!!” 순식간에 김예리에게 쏘아져 나가는 검정색 검들. 박덕구 역시 깜짝 놀라며 손을 뻗어봤지만 닿지 않는다. 결국에는 특성을 다시 한번 발동시키는 게 맞다고 생각했는지 누워 있는 김예리를 투명한 방패가 가로막는 것이 보였다. ‘제기랄!’ 저 검이 방패에 닿는 순간, 이 모든 게 연기라는 게 들통 날지도 모른다. 재빨리 연금술을 펼치려고 했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김예리 대신 검을 받아내고 있는 안기모. ‘아직도 안 죽었었구나! 저 새끼!’ “나이스 안기모….” 설정상 약간의 숨이 붙어 있었던 모양. 나도 모르게 중얼거릴 정도였다. “어으으으윽….” “기… 기모 형씨!” “아직 어린 아이를… 죽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굳이 이런 설정에 저런 대사를 집어넣지 않아도 충분히 감동적이고 극적이다. 열정이 넘치는 것은 박연주뿐만이 아니다. 안기모 저 자식도 이번 연기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다. ‘이제 그만.’ 너무 과한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 박덕구에게 감동과 처절함을 선물해 주고 싶은 두 배우의 열정은 이해하지만 슬슬 위험 수치를 넘어가고 있는 모습에는 침을 삼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정말로 끝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박덕구가 안기모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에 박연주에게는 사정없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기 시작. 드디어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박덕구는 눈에 띄게 강해졌다. 지금까지의 노력을 보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동안 밀린 능력치를 모두 받은 것은 물론 전설 등급의 특성과 직업 역시 얻었다. 그렇지만 박연주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걸로 봐서는 어떻게 비벼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녀석의 역할은 저런 대인전이 아니라 후위를 보호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박연주는 진심이 아니었으니까.’ 어설프게 박연주가 당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이런 결말을 맞이하는 게 좋다는 거다. 그녀도 괜찮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지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기 시작. 물론 그녀가 몸을 뒤로 빼는 데에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게 당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검은백조.’ 우리를 구조하기 위한 구조대가 찾아온 것이다. ‘놓치지 않습니다.’ ‘레인저들은 곧바로 추적을 시작 합니다.’ ‘나머지는 부상자들을 신속히 옮겨주세요.’ 따위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고 검은백조가 자랑하는 정예 레인저들이 자신들의 길드 마스터를 따라 사라졌다. 사제들이 순식간에 달라붙는 것이 시야에 비치는 것은 물론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검은백조 길드원들이 보인다. 가슴에 검이 꽂힌 채 기절한 척하고 있는 정하얀이나 김예리 대신 검을 받아낸 안기모. 정말로 기절해 있는 것 같은 김예리에게도 두세 명의 사제들이 붙기 시작. 갑작스러운 지원군의 등장에 박덕구는 잠깐 멍하니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녀석이 제정신을 차리기 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당황하고 있는 녀석에게 검은백조의 정예길드원이 입을 여는 것이 보였으니까. “파란의 박덕구 씨? 사고 경위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습니다.” “뭐… 뭐?”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어, 어떻게? 아니 이게 뭐요?” “구조 신호를 보고 왔습니다.” “아… 아… 구조 신호…. 형님은? 형님이랑 누님은 무사한 거요? 예리는?” “일단은 저희 측의 사제들이 치료 작업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잠, 잠깐 얼굴 좀….” “한시가 위급한 상황입니다.” “같, 같이 움직일 거요. 같이! 이것 좀 놔 보쇼!” 내 몸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차로 옮겨진다. 제법 넓은 마차인지 김예리와 안기모, 김예리도 차례차례 마차로 들어오기 시작. 마치 구급차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마차를 보니 검은백조가 내 생각보다 괜찮은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슬그머니 왼쪽 눈을 뜨니 덕구 녀석이 우리가 마차 안으로 차례차례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물론.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말이다. “끄어어어어엉… 형니임….” 참아왔던 울음이 터진 모양인지 나를 비롯한 연기자들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걸 보고 허공에 손을 뻗고 있다. “끄어어어어어엉…. 꺼으어어억… 누님 죽으면 안 됩니다. 죽으면… 아니, 나도 같이 갈 거요! 나도 같이!” 이제야 모든 일이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나는 모양. 지원군의 등장에 여단의 흉수는 도망쳤고 죽어가는 동료들이 다시 한번 눈에 보이는 것이다. “이거 놓으라니까! 형님! 형님! 말 좀 해보쇼. 말 좀! 끄어어엉….” “이러시면 안 됩니다, 박덕구 씨. 환자들은 지금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최대한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끄으으으윽어어엉… 우리 형님 좀 살려주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쇼. 제발. 끄으으윽… 예리야! 안기모 씨!” “마차에 가까이 다가오지 마세요! 안정을 취해야 된단 말입니다!” “끄어어엉으으윽… 제발 살려주셔야 합니다. 선생님, 제발….” “네. 믿어주세요.” 울음소리가 얼마나 서럽게 들리는지 괜스레 나도 눈시울이 붉어질 지경. 이미 밖에서는 박덕구를 진정시키기 위한 의료 전문가들과 사제들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 “끄으으으윽….” 계속해서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너무 거슬린다. “흉수가 다시 마차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덕구 씨는 마차의 안전에 신경 써주세요.” 결국에는 저 말이 나온 뒤에야 잠잠해지는 걸 보니 마지막까지 책임감 하나는 강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밖에서는 계속해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마차의 문이 닫히자 누워 있던 네 명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얼굴에 들어와 앉은 것이 느껴졌다.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표정이지.’ 평소 자주 느끼는 감정을 저들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감회가 새롭다. 안기모의 얼굴에는 뭔가 완벽하게 해냈다는 뿌듯함이 공존하고 있었지만 그뿐이다. 저 꼴을 보고 민망하지 않을 리가 없다. 녀석 역시 일말의 양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도 가장 심각한 것은 김예리. ‘깨어 있었구나.’ 무척 충격 받은 듯한 김예리의 얼굴에는 지독한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네 명의 죄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을 때, 김예리의 작은 목소리가 마차 안에 울려 퍼졌다. “다음부터는. 안 할래. 너무… 쓰레기 같아.” “수고했다…. 그래도… 성공이야.” 너무나도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수고했다는 말을 내뱉는 것도 제법 힘들다. “이기영 아저씨.” “응.” “우리 잘한 거 맞지?” 살짝 고개를 끄덕였지만 긍정적인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아직도 밖에서 꺼억꺼억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기 때문이다. 순진한 김예리는 아직도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한 모양. 그녀를 위해 천천히 입을 열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김예리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원래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야.” “으응… 알겠어….” 아직도 얼굴에는 수심이 드리우고 있었다. # 205 회귀자 사용설명서 205화 G.T.O (1) 거의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나는 검은백조 길드에서 약 일주일 정도의 응급처치를 받은 이후 파란으로 옮겨졌고, 파란의 병실에서 나머지 시간을 보냈다. 당연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후에 붉은용병 소속이었던 안기모는 자신의 길드로 향했는데 그 과정에서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탐나는 데….’ 열정적인 연기를 보여준 녀석이 탐이 났기 때문이다. 서브 힐러면서 서브 탱커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타이밍에 나타난 인재. 전투 성직자로서의 상태창도 나쁘지 않았고, 사실 무엇보다 성향이 이쪽과 조금 비슷한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내가 욕심을 내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능력이 좋은 것을 넘어서 이 정도로 열정적인 배우를 다시 찾기는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녀석 역시 이쪽과 다시 한번 일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는 것.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붉은용병에서 나온다면 이후 갈 곳이 없으니 받아주겠냐는 의미로 던져온 질문.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당연하리라. 안 그래도 차희라에게 한번 찾아가려고 했었으니까. 다음에 붉은용병의 길드 하우스로 향할 때 안기모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본 지도 오래됐지.’ 사실 차희라를 아예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공식적으로 나와 정하얀, 김예리는 머더러 클랜의 습격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 세간의 시선을 위해서라도 차희라가 이쪽의 병문안을 오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었다. 몇 마디를 나눈 이후에 민망해졌는지 빠르게 발걸음을 돌리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어 나쁘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검은백조는 신성제국의 제국 8좌 중 한 명이 머더러 클랜의 습격을 받았다는 공식 발표를 진행했고 도시 내에 있는 린델에서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이 건은 차희라와 김현성 역시 공식적으로 찬성한 부분. 김현성은 물론 파란의 주요 인물들은 이 소란이 전부 박덕구 한 명을 위해 진행된 몰래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커다란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아마 이지혜의 작품이리라. 검은백조와 붉은용병 그리고 파란. 이 삼자동맹은 곧바로 도시의 경계를 강화시켰고 안보를 핑계로 도시 안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지혜와 김현성을 믿고 있으니 자세한 보고서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최근 조금 안주해 있는 도시에 경각심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사건이라 생각한 모양인지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검은백조의 마스터인 박연주는 이걸 빌미로 김현성과 만나는 걸 조금 더 기대하고 있는 듯했지만 이지혜를 통해 들은 말로는 그다지 진전이 없었다고 하니 내가 자리를 만드는 것은 이미 확정된 사안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머리 아파지겠는데….’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뒤를 봐주는 것은 항상 내가 해왔던 일이지만 녀석의 연애에도 한 발 걸친다고 생각하니 생각이 조금 복잡해졌다. 큰 그림을 그려본다면 녀석이 박연주와 이어지는 것은 양 길드 모두에 이득이 된다. 도와주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된다면 한번 손을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당연하지만 검은백조의 움직임은 박연주 개인의 욕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일단 가장 먼저 이쪽에 나왔던 이야기 중 하나가 용숨결 물약을 판매해 줄 수 있냐는 것. 노골적인 금액과 노골적인 제안이 오고갔지만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단순히 마력을 집어넣는 것만으로도 정신 나간 화력을 보여줄 수 있는 물약이니 이들이 판매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도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용숨결 물약을 시중에 판매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생산 과정이 까다로워 만들 수 있는 물량이 한정되어 있어 대량생산이 불가능하다. 공장에서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핸드메이드로만 만들 수 있는 물건이라는 거다. 물론 한두 개 정도야 판매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이쪽의 밥줄을 넘긴다는 게 그다지 기분 좋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아무튼 간에 전체적으로 정리해 보자면 생각 없이 던진 돌이 쓸데없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셈이다. “끄으으으윽… 어어엉….” 물론 눈앞에 있는 돼지는 아직도 그 파문의 영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아픈 데 없다니까. 그만 울어라, 덕구야. 한 달이나 지난 일 이잖아.” “그렇지만….” “쯧. 다음부터 조금 조심하면 되는 거니까. 네 잘못이 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잘못한 게 맞다.” “형님 잘못이 아니요.” “조금 더 치밀하게 움직였어야 했어. 준비하기 전에 조금만 더 꼼꼼하게 살펴봤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거다. 안기모 씨의 말대로 자신감이 넘쳤다고 하는 게 맞겠네.” “무… 슨 말이요?” “왜? 막 1년이 지난 플레이어들은 자신감이 넘쳐서 무리한 원정을 떠나기도 한다는 이야기. 그게 나한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는 거지. 사실 무슨 일이 생긴다는 상황을 별로 상상하지는 않았거든. 만약에 일어난다고 해도 해결할 만한 자신감이 있었고. 막말로 머더러 클랜이 우리를 습격해도 당연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이번 일은 커다란 교훈을 준 셈이야. 우리는 끝부분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이제 출발점에 서 있다는 거지.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게 더 많다고 본다. 내 일뿐만이 아니라 네 일도 그렇고.” “아….” “그래서 어때? 전보다 강해진 기분은? 시험은 조금 해봤어?” “뭐, 이것저것 시험해 본 건 아니요. 이상희 고문님이랑 형씨랑 대련 몇 번 해본게 다인데… 두 사람은 아주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나는 뭐가 달라진 건지 잘 모르겠소. 확실히 몸은 단단해 졌지만… 아! 내구 능력치는 이제 90이요!” “그래?” “여전히 검을 맞히기는 어렵고 고급 마력 운용 지식이니 고급 방패술이니 뭐니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건 많지만 아직 이 지식을 전부 흡수하지는 못했으니….”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덕구야.” “아….” “넌 지금 충분히 잘해내고 있고 실제로도 강해. 솔직히 말하면 내가 기대한 것 이상이야. 네 머릿속에 있는 건 어디 도망가지 않을 거다. 지금처럼 착실히 한다면 지금보다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거야. 그리고….” “형님….” “이건 미안하다.” 슬쩍 강화의 혈청을 침대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니 그걸 빤히 바라보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널 믿지 못해서 그랬던 게 아니었어.” “아….” 지나치게 감동한 것 같은 표정이 눈에 보인다. 조금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려고 했었는데 표정을 보니 몇 마디 더 내뱉었다가는 녀석의 사정없는 포옹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결국에는 짧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말해왔던 것처럼 나는 너를 믿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는 더 잘할 수 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 생각은 변함이 없고… 아무튼 간에 축하한다. 덕구야.” “형니임….” “알았으니까 울지 마. 이제 지겹다.” “꺼으으으윽… 예리야.” 다시 한번 눈에 눈물이 슬금슬금 차오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상태가 한 달은 더 지속될 것 같았다. 녀석을 밀치자 이번에는 옆에 있는 김예리의 팔을 부여잡으려고 했지만 김예리가 받아줄 리가 없다. 오히려 김예리는 필사적으로 녀석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중. 아직도 죄책감이 아물지 않은 것이다. ‘덕구 아저씨 눈. 못 쳐다보겠어.’ 라고 실제로 말한 적이 있을 정도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하얀이 누니임… 꺼어으어억….” “이, 이제는 정말로 괜찮아요. 건강해요. 이렇게 걸어 다닐 수도 있을 정도예요!” 다른 사람의 일에 죄책감 같은 걸 잘 느끼지 않는 정하얀도 민망해하기는 마찬가지. 평소에는 괜찮았지만 녀석이 눈을 글썽거리며 어디 아프지 않냐고 물어볼 때면 모두가 같은 반응을 보이기는 했다. 솔직히 나도 제대로 녀석을 마주하기가 민망하다. 아마 안기모 정도가 녀석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형님은….” 사실은 나 역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상태다. 녀석이 계속 쫄레쫄레 따라다니다 보니 침대에 누워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아무리 변명해 봤자 믿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함께 자리해 있는 선희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도 문제없어. 실제로 여기서 업무도 같이 병행하고 있으니까. 희영 씨도 이제는 문제가 없다고 하기도 했고… 그렇지 않습니까?” “네. 외상은 완벽하게 다 나았습니다. 다른 부작용도 없고요. 다른 분들보다 회복이 더딘 건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으신 것 같습니다.” “봤지?” “아마 일주일 이후에는 평소처럼 행동할 수 있으실 겁니다.” “그…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러니까 기영 씨가 몸을 편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나이스, 선희영.’ 이쪽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 내가 혼자 있고 싶다고 한 걸 완벽하게 이해한 것이다.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에 박덕구는 괜스레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김예리와 정하얀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정하얀은 그다지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녀 역시 덕구 녀석과 쌓인 이야기가 있을 테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결국에 방에 남은 것은 나와 선희영이 전부. 생각해 보니 둘이 이렇게 함께만 있는 것은 조금은 오랜만이다. 별로 어색한 것은 없지만 묘하게 얼굴이 붉어져 있는 얼굴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얘는 사리 분별은 할 줄 아니까.’ 솔직히 파란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고맙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조금은 거슬렸기 때문에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무적인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튜토리얼 던전은 조금 어떻습니까?” “아… 원래는 이 정도 시기쯤에 열리는 게 보통이기는 한데… 이번에는 조금 늦는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네. 아마 잠시 후면 열릴 겁니다. 저도 이곳에서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지만 보통 이 정도 시기쯤에 열리고는 하니까요.” “아아아아…. 그러고 보니 희영 씨는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지내셨죠.” “네. 사실 그때 당시에는 뭔가 생산적인 일은 하지는 않았지만요. 그 시절의 저를 생각해 보면 그냥 죽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네?” “이런 말이 조금 우습게 들리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최근에야 조금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있어요. 참된 의미의 봉사에 대해서도 그렇고 파란에서 하는 일도 그렇고요. 제가 예전에 하던 일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일이었는지에 대해서도 항상 생각하게 되고요. 전부 기영 씨 덕분입니다.” “하하하. 제가 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전부 희영 씨가 잘해주신 덕분입니다.” “아니요. 저는 정말로 기영 씨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에도 어째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에 대해서도 알 것 같고요.” “네?” “덕구 씨를 빌미로… 도시밖에 있는 살인자들을 확실하게 처단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는 거….” ‘뭔 소리야.’ 그런 계획을 세운 적은 없다.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미친 사제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모양. 확실히 저런 방향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도시 내에서 머더러 클랜을 더 이상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도중이니까. “저 이런 생각은 주제 넘는다는 걸 이해하고 있고 또 죄송합니다만… 저… 기영 씨!….” ‘무슨 생각인데….’ 괜스레 불안해진다. 갑작스럽게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것 선희영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묘하게 두 뺨이 붉어져 있었고 한쪽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 조금 호흡이 거친 것 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흥분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애타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고 긴장하고 초조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 왠지 모르게 그녀가 신호를 보내오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바보라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깨달을 수 있다. ‘뭐야 갑자기. 이런 타이밍에….’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는 게 당장에라고 고백할 것 같은 분위기. 이 미친 사제가 나에게 은근슬쩍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움직임을 보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항상 몇 발자국 뒤에서 이쪽을 지켜보는 포지션이었으니까. 저번에도 한 번 움직임이 있었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조금 더 저돌적이다. ‘예쁘긴 예쁘네.’ 확실히 예쁘긴 예쁘다. 괜히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라고 불린 것이 아니다. 물론 그녀의 행동과 품성도 당연히 영향을 끼치고 있겠지만 린델에서 성녀라고 불리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녀의 외모에 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딱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에 항상 입고 있는 단정한 사제복. 차분해 보이는 분위기는 ‘성인 여성이라는 건 이런 느낌이다’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 이쪽도 남자인지라 두근거리는 것은 당연지사. 저런 진지한 얼굴로 나를 마주보니 괜스레 가슴이 선덕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오빠!” 벌컥 하고 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 노크도 없이 이쪽의 병실에 문을 연 것은 정하얀이었다. “어?” 신체적 접촉은 없었다. 타이밍 좋게 튀어나오기는 했지만 저번에 호되게 혼난 이후에도 이런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부분. 아마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하얀의 얼굴이 조금 흥분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화를 내기보다는 일단은 차분히 말을 기다렸고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튜토리얼 던전이 열렸어요! 붉은용병에서 오빠를 선생님으로 모시고 싶대요!” “재미있네.” # 206 회귀자 사용설명서 206화 G.T.O (2) “환자를 여기까지 오게 했네… 미안해서 어쩌지, 자기?” “놀리지 마. 다 알고 있으면서…. 그나저나 여기 다시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괜히 감회가 새롭네. 불러줘서 고마워, 누나.” “역시 그렇지? 보통 여기로 돌아오는 사람들 반응이 거의 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차희라가 시야에 비쳤다. 얼굴은 여전했다. 평소 같이 넉살 좋은 표정을 하고 있었고 왠지 모르게 위험하게 느껴지는 눈동자와 붉은색 입술도 여전했다.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제대로 다듬지 않은 머리카락. 어깨를 넘어 가슴까지 내려와 있는 걸 보니 확실히 오랜만에 만나기는 한 모양인 것 같았다. 저번에 잠깐 본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게 처음. 어째서 그동안 그녀가 나를 피했는지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그 일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차희라의 모습은 꽤나 의외였다. ‘없었던 일로 하려는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의 성격상 맨입으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 당연. 이유야 어쨌든 간에 차희라가 캐슬락에서 저지른 일은 꽤 큰 실수다. 이쪽에 피해를 끼쳤으니 뭔가 콩고물이 떨어지는 것은 이미 확정된 수순이라는 거다. 어쩌면 이번에 이곳으로 나를 부른 것 역시 그 콩고물과 연관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번 튜토리얼 던전을 맡게 된 길드는 엄연히 붉은용병이다. 파란과 붉은용병이 동맹 관계에 있다고 한들, 이런 식으로 나에게 먼저 공개를 하는 것 역시 특혜 아닌 특혜다. ‘어쩌면 우선교섭권도 몇 장 줄 수도 있겠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곳에 온 이상 어느 정도의 혜택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큼. 그럼 이야기를 조금 들어보고 싶은데 괜찮지?” “어. 뭐, 그렇게 해 어차피 바로 시작할 생각이었으니까. 저녁은 먹었어?” “아직.” “그럼 식사라도 하면서 대충 귓구멍에 박아놔. 그리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니까.” “응.” “여기! 먹을 것 좀 가져다주겠어? 간단한 거면 되니까. 아! 저번에 먹었던 거 있지? 그걸로 가져다 줘.” “네. 길드 마스터.” 확실히 붉은용병은 다르다. 저번 파란이 튜토리얼 던전을 맡았을 때와는 규모가 다른 것이 느껴진다. 예전의 이상희처럼 길드 마스터가 직접 공략조를 맞이하러 가지 않는 다는 것도 꽤나 신기했던 부분. 이전에 그녀가 나와 정하얀을 찾아왔던 게 얼마나 이례적인 일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확실히 그때는 최단 시간이라고 했었으니까….’ 다르다는 의미는 굳이 이런 의미로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가 예전 이상희가 사용했던 장소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지경. 창밖으로 보이는 훈련소 또한 이미 완벽하게 단장을 마치고 신입들이 입소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니 문이 열리고 차희라가 주문했던 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 미식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다지 시선이 쏠리지는 않았지만 대충 보기에도 퀄리티가 제법 훌륭해 보였다. ‘이것도 다르네.’ “이것 좀 먹어봐, 자기. 저번에 먹어봤는데 맛있어.” “그래?” “응. 와인도 한잔할래?” “아냐. 그건 괜찮아. 일단 대외적으로는 환자니까.” “그건 좀 아쉽네. 그나저나 어때? 여기?” “솔직한 감상?” “응.” “정말 놀랐어.”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어째서 사람들이 붉은용병, 붉은용병 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야.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파란도 제법 대단해 보였는데 확실히 레벨이 다르기는 다르네. 어느 것 하나 고급품이 아닌 게 없고 길드원의 상태도 그렇고… 기합이 제대로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 누가 보면 훈련하는 게 신입이 아니라 붉은용병의 단원들인 줄 알걸. 이거 과시하는 거 맞지?” “맞아. 신입도 신입이지만 1년에 한 번 있는 이 이벤트는 우리 길드가 어느 정도인지 타 세력에게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하니까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지. 이적시장도 곧 열릴 테고 타 길드 스카우터들도 기죽일 수 있고… 좋잖아?” “악취미네.” “원래 정점에 선 사람은 한 번쯤 자기 세력을 과시해야 할 필요가 있어, 자기. 그렇지 않으면 자꾸 쓸데없는 도전자들이 생겨나거든.” “누나한테 도전하는 미친놈은 린델에 없을 거야.” “당연히 린델 애들을 의식하고 벌인 일은 아니야. 일본 애들 있는 실리아는 그렇다고 쳐도 대만 애들 있는 다완은 또 모르지. 보면 알겠지만 붉은용병에서도 제법 무리했어. 기왕 보여줄 거 제대로 보여주자는 식으로 단원들 휘장이랑 장비도 싹 다 새 걸로 교체했고 훈련소 장비도 최신식으로, 몇 달 전부터 중축 공사도 진행했으니 말 다했지, 뭐.” “그게 나를 부른 거랑 이유가 있는 거야?” “흐음….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 파란과의 동맹이 굳건하다는 걸 보여줄 수 있다는 건 좋은 거니까. 그래도 자기를 부른 이유는 따로 있어.” “음….” “예상은 가지?” “내가 생각하는 이유랑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혹시 생산직들 때문에 그래?” “맞아.” “틀릴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사실 자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생산직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거든. 솔직히 이야기하면 거의 무관심했다고 하는 게 맞겠네.” “응. 뭐 그렇지.” “연금술사야 기껏해야 사제들이 없는 파티에서나 기용할 정도지. 사실 연금술사를 기용한다는 것도 말도 안 되고…. 포션만 사면 되는데 굳이 비전투직군인 연금술사를 파티원으로 들일 이유가 없잖아? 마법사도 없고 사제도 없는 파티에서나 울며 겨자 먹기로 들이는 게 연금술사야.” “팩트폭력이 심하네.” “자기 이야기 하는 건 아니야. 대장장이들도 마찬가지지, 뭐. 이미 신성제국에 유능한 대장장이들은 많아. 굳이 모험을 하면서까지 소재와 무기를 초보에게 맡기는 얼간이는 없고…. 그밖에도 시스템이 규정하고 있는 많은 비전투직군들과 생산직의 최후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해. 길드에는 들어갈 수도 없었고 빈민촌에서 쪽잠자다 칼 맞고 뒤지기 십상이었어.”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바로 맞췄어. 자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지. 길드의 지원과 자본을 등에 업은 생산직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가에 대한 사례가 지금까지는 없었거든. 물론 타 길드에서도 생산직에 대한 투자가 없었던 건 아니야. 자기가 오기 전에도 각 길드마다 몇 차례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꽝이었다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도시에서도 생산직에 대한 지원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나봐.” “그건 조금 의외네.” “사실 자기 말고도 어디 조그만 동네에서 별빛 조각사인가 햇빛 조각사인가 하는 놈도 나타났었거든…. 그쪽은 그다지 효율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걔도 길드의 지원을 받은 생산직 중에 하나야. 본전을 뽑지는 못했지만 가능성은 봤다는 거지. 자기가 여기 있는 건 내 개인적인 욕심이기도 하지만 린델의 길드와 클랜 마스터들의 청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해.” “으음… 그렇게 된 거였구나?” “무시해도 별 상관은 없을 것 같았지만 도시 생산직의 질을 올리는 건 나 역시 찬성이거든. 제국에서도 묘하게 원하는 눈치니 말 다했지, 뭐.”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 거였어.’ 말인즉슨 나로 인해 생산직에 대한 기대치가 올라갔다는 거다. 실제로 내가 만든 포션 중에서도 상급품은 사제의 치유와 비슷한 효율을 낼 정도로 효과가 좋다. 소모품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고가의 포션이 많이 사용되지는 않지만 사냥을 나가는 파티라면 비상용으로 몇 개씩 들고 다닐 정도. 당연히 린델 내에서도 잠깐이지만 생산직 붐이 일어났었고 아직도 몇몇 길드와 클랜에서는 생산직에 대한 투자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길드와 클랜들이 붉은용병에게 어떤 청원을 했는지는 뻔할 뻔자. 이번 훈련소의 교육에 생산직 과정을 넣어주면 어떻겠냐고 입을 열어온 것이 틀림없으리라. 몇몇 길드의 청원이야 단순히 개소리를 하고 무시할 수도 있을 테지만 린델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붉은용병이 수많은 백성의 탄원을 그저 모른 척하기에는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점이 많았을 터. 특히나 제국도 묘하게 그걸 바라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런 선택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거다. ‘성군 납시었네….’ 이를 테면 이번을 기회로 권위와 자비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것이 차희라의 생각. 이상적인 왕이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리라. “붉은용병에 계속 청원하면 누나가 나를 불러올 거라는 걸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네. 머리 좋은걸 걔네들도….” “아마 파란에도 엄청나게 갔을 거야. 자기가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을 때 즈음? 여기저기에서 괴롭히기도 하고 로비도 많이 받았을 걸. 우리 소중한 연금술사를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나름대로 배려해 준 거겠지.” “괜히 고맙네.” “애틋하네. 혹시 해서 물어보는 건데 둘이 사귀는 건 아니지?” “뭔 소리야?” “아냐. 그냥 도시 내에 묘한 소문이 돌아서… 이상한 책도 돌고….” “헛소문이야.” “그럼 다행이고 아무튼 간에 이렇게 됐다는 거야. 물론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 뻥뻥 쳐놓기는 했지만 자기가 싫다면 그다지 강제할 생각도 없고.” “아니 굳이 싫은 건 아니야.” “이유가 있어?” “생산직의 질을 높이는 건 솔직히 찬성이야.” “그건 의외네.” “물론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안 하는 게 이득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아직 제대로 된 시장이 형성되지도 않았거든. 이름난 판매자도 나 하나뿐이고 내 포션은 제법 고가로 분류되니까. 굳이 예를 들자면 쓰는 놈만 쓴다는 거지.” “아아아….” “어차피 가난한 파티나 클랜에서는 내 포션을 살 여력도 없어. 사제도 없이 사냥을 나가서 뒈지는 놈들은 어차피 내가 만든 상품을 이용할 수 없다는 거야. 그래서 만든 게 저가형 모델이기는 한데… 브랜드 이미지 문제도 있고 어차피 공장을 돌릴 거면 상등품을 돌리는 게 이득이라.” “음… 이해되네. 밑바닥에서 깔아주는 친구들이 있어야 시장이 더 활성화된다는 거지?” “맞아. 원래 포션이라는 게 소모품처럼 인식이 돼서 이미지가 좋지는 않지만 한 번도 안 마셔본 놈은 있어도 한 번만 마셔본 놈은 없거든. 밑바닥 친구들이 사냥에서 돌아온 이후에 성과를 챙기고 점점 성장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계속 저가형 모델을 사용할 것 같아?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인데?” “어차피 종착지는 메이드 바이 이기영이라, 이거야?” “맞아. 명품 좋아하는 건 여기나 지구나 똑같기도 하고… 구매자들은 신뢰할 수 있는 기업을 원하니까. 잘난 척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연금술사로서 독보적이야. 단언컨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경쟁자가 나타날 확률은 제로야. 뭐, 이런 이유도 있고 도시 차원의 복지 문제도 있고 내 이미지 문제도 있고 여러모로 나쁘지는 않아. 궁금한 건 나한테 지금 당장 뭔가 떨어지는 게 있느냐는 거지. 맨입으로 청원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물론 떨어지는 건 있어. 일단 자기 개인에게 돌아갈 보상금. 길드와 클랜에서 교육비를 명목으로 골드를 지급할 거야.” “나이스!” “좋아하네?” “최근에 돈이 급한 일이 있었거든. 붉은용병에서는 뭐 없어?”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야? 자기?” “큼….” 섭섭하다는 듯 테이블을 두드리는 차희라가 눈에 보이기는 했지만 맨입으로 강의 뛰는 건 사절이다. “물론 붉은용병에서도 사례금이 있을 거야. 개인적으로 챙겨줄 것도 몇 개 있기도 하고… 이건 자기가 일을 안 해도 줄 생각이었지만… 그리고.” “그리고?” “우선교섭권도 파란에게 일부 양도할 생각.” “몇 장?” “그전에 이번 공략조가 몇 명인지에 대해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야?” “아, 맞네.” “이번 튜토리얼을 던전을 공략한 친구들은 총 열네 명. 우리가 줄 수 있는 우선교섭권은 다섯 장. 이 정도면 엄청나게 무리한 거야.” “열네 명이나 돼?” “원래 이정도가 보통이야. 자기네 파티가 특별했던 거지.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누나 조금 무리한 거 아니지?” “무리한 거라고 말했잖아. 사과의 의미도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뭐에 대한 사과이려나….” “전부 다 알면서 이죽거리지 마. 그런 표정 지으면서 쳐다보지도 말고. 빨리 대답이나 해. 할 거야? 말 거야?” 싱글 생글 웃으며 묘한 표정을 보내자 빠르게 대답을 재촉하는 차희라의 얼굴이 보였다. 제법 귀여운 것 같은 느낌. 당연하지만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207 회귀자 사용설명서 207화 G.T.O (3) ‘해야지.’ 냉정하게 판단해 보면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도 하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당연하지만 우선교섭권 다섯 장이 탐이 난 것은 아니었다. 물론 타 길드보다 공략조를 영입하는 데 도움이 되기야 하겠지만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신입들을 천천히 살펴보는 일은 오히려 내가 차희라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들 중 하나. 누가 재능이 있고 누가 재능이 없는지 먼저 살펴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커다란 이점이다. 즐거운 보석 찾기를 대놓고 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거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이번 신입들에 대한 붉은용병의 선택이었다. ‘공략조고 나발이고 전부다 훈련 받게 할 거야. 물론 걔네들한테 조금 더 신경을 써주기는 할 거지만 그걸로 끝이라는 거야.’ ‘특별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래도 돼? 우선교섭권을 가지고 있는 의미가 없잖아, 누나.’ ‘자기, 나 차희라야. 이제 막 들어온 병아리들한테 잘 보이고 싶다고 특별 취급해 준다는 게 가당키나 해? 눈치를 봐야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 병아리들이야.’ ‘그렇네….’ ‘저번 튜토리얼 던전 때는 자기네 파티가 조금 특별한 케이스였고 파란에서도 급했기 때문에 이상희가 특별대우를 해준거지. 보통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아. 어차피 공략조고 생존조고 내 눈으로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인 애송이 들이고 제대로 한번 교육해 보는 게 낫다는 거야. 이번 년도 신입들을 엉망으로 교육시켰다는 소리가 나오는 건 내 쪽에서 사양이거든….’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네.’ ‘작년에 파란이 얼마나 욕먹었는지는 알고 있는 거지?’ ‘어?’ ‘니네 파티 영입하기에 바빠서 신입 교육을 거지같이 했거든…. 물론 각 길드나 클랜에 가서 다시 한번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체적으로 개판이었다는 거야. 말도 더럽게 안 들으니까 무리하게 숲에 들어가서 사망률이나 올리고 오고…. 다른 도시한테 쪽팔리게 말이야. 이번에도 그런 소리 나오면 안 되잖아?’ ‘아아아아….’ ‘붉은용병은 항상 완벽해야 돼. 우리 세컨드랑 선희영을 부른 이유도 바로 그거고….’ ‘뭐? 정말로?’ ‘기왕 협연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며칠 전에 나눴던 대화를 생각해 보니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공략조도 함께 훈련을 받게 한다는 건 차희라답다. 사실 아직까지 공략조를 본 적이 없어 그들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할 수 없었지만 당장 붉은용병에서 영입 준비를 하고 있지 않는 걸로 봐서는 수준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은 모양. 물론 은연중에 혜택을 주고야 있겠지만 급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은 확실히 재미있는 모습이었다. ‘작년에 파란이랑은 완전히 다른데….’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것처럼 우리에게 들이댔던 이상희와는 아예 다르다. 물론 당시 배경을 생각해 보면 이상희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가기는 했지만… 지금과 그때의 온도차가 너무 달랐기 때문에 이질적인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가장 의외였던 것은 정하얀과 선희영을 교관으로 초청했다는 것. 붉은용병의 사제 라인과 마법사 라인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스쿼드가 빈약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안기모 같은 애들도 있고….’ 수준 높은 마법사나 사제도 보유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그들을 부른 것을 보면 정말로 파란과 협연이라는 형태로 이번 튜토리얼 던전의 훈련을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정하얀과 선희영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피어나는 중.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기보다는 생각보다 선생님 역할을 하는 게 재미있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며칠 전에 훈련소를 오픈했고 주류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정하얀과 선희영은 이미 첫 번째 수업을 치렀다. 상태가 생각보다 좋은 걸 보니 확실히 기분이 좋은 모양. 이번 일의 뒤처리 때문에 여기에 처박혀 있어야 했던 내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기분 좋게 식사를 하고 있는 정하얀을 바라보니 괜스레 내가 다 기분이 좋아진다. 그녀가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 건 이쪽에서도 희소식. 선희영이야 원래 이런 일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녀 역시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린 것을 보니 이번 일을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영 씨는 정말 기분 좋아 보이시는군요.” “아, 그렇게 보였나요? 옛날 일이 조금 생각나서….” “네?” “예전에 잠깐 교단에 섰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 정말입니까?” “네. 물론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그만두기는 했지만 이렇게 다시 한번 비슷한 일을 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네요.” ‘뭔가 어울리는데.’ 새롭게 얻은 정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이미지가 맞는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지경. 물론 사회복지사나 유니세프 같은 곳에서 구호활동은 벌이는 모습도 그녀와 매치가 되기는 하지만 안경을 쓰고 교단에 선 모습도 싱크로가 완벽하다. “저도 초등학교 때는 선생님이 꿈이었어요, 오빠!” “아, 그래?” “네.” ‘이건 별로 안 어울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하얀이 선생님이 되는 그림은 그려지지가 않는다. “그거… 굉장히 잘했겠는걸?” “정말요?” “그럼… 수업은 조금 어땠어?”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오빠. 헤헤….” “그래?” “네. 사람들이 어째서 이해를 못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많더라고요.” “이해를 못 한다고?” “네. 아무리 설명해도 잘 이해를 못 해요.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고 해도 한 명도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그래도 대부분 착하더라고요.” “어떤 식으로 설명했는데?” “그냥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마력을 느껴보라고 해도 통 느끼지 못하더라고요.” ‘이거 안 되겠는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정하얀과 일반인은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다르다. 아무리 수업에 열정을 쏟아 부어도 정하얀의 설명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은 1%도 되지 않으리라. 마법 교관이 정하얀 하나가 아닌 게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희영 씨도 그렇습니까?” “네. 그렇지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략조는 보통 1차 전직을 마치기는 했지만 생존조 같은 경우에는 1차 전직도 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거든요. 마력이나 신성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하죠.” “음….” “지금은 심화 과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사제와 마법사는 이렇다는 걸 알아보는 시간이니까요. 재능이 있는 이들은 이 과정에서 전직할 가능성도 있고…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붉은용병에서도 아직까지 클래스를 구별해 놓지 않은 거겠죠?” “간단하게 말해서 조금씩 조금씩 간만 보여주는 걸로 족하다. 이 말씀이십니까?” “네, 기영 씨. 아직 어린아이를 피아노 학원도 보내고 태권도도 보내고 영어 학원도 보내보고… 한 번씩 원하는 걸 시켜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첫 수업이신가요?” “네. 아무래도 직군이 직군인 만큼 수업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어? 오빠 같이 가요! 저도 수업 있거든요. 헤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희영 씨는?” “저는 오늘은 더 이상 수업이 없네요. 그럼 끝난 이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기영 씨. 하얀 씨도요.” “네.” 사실 그다지 수업에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저들 중에 연금술에 대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은 없기도 하고… 물론 심화 과정 때는 제대로 된 교육을 하기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파란에서 열심히 일해 줄 노예들을 물색하는 거였으니까. 일단 비전투직군이나 생산직 연금술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시간을 가진 이후에 마법사로 전직한 이들을 대상으로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 개론의 기초를 설명하면 그걸로 끝. 수업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슬쩍 시간을 보니 이쪽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대충 식사를 한 다음에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한쪽 손에 연금학개론을 들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폼이 난다. 어째서 정하얀이 조금 신난 기분으로 수업에 임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빠는 무슨 반이예요?” “C반?” “아. 어제 그 반 들어갔었는데 애들이 정말 착하더라고요. 거기는 평균 나이가 조금 어려요.” “그래?” “네. 그래도 마법사 지망생 비율이 높아서 다들 의욕적이에요…. 그러고 보니까 여자애들 비율이 조금 높기는 높은데… 으득.” “아. 근데… 이러니까 꼭 선생님 커플 같지 않아? 하얀아?” “그, 그렇네요! 헤헤헤…. 그래요! 헤헤.” ‘생각보다 기분 괜찮네.’ 잠깐 위기가 있었던 것 같지만 생각보다 괜찮다. 훈련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처음이다. 연무장에서 훈련과 체력 단련을 하고 있는 이들이 눈에 보인 것은 당연지사. 바깥에서 훈련을 봐주고 있는 교관들이 슬쩍 인사를 해왔기 때문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오래 머물 생각은 물론 없다. 계속해서 눈알을 굴려보기는 했지만 그다지 눈에 띄는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이쪽이에요, 오빠.” “그래. 그럼 조금 있다 보자.” “네!” 정하얀은 B반의 수업을 맡은 모양. 조용한 교실에 정하얀이 들어가자마자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교관님 안녕하십니까!” “네. 모두 안녕하셨나요? 수업 시작하겠어요.” 뭔가 정하얀답지 않은 목소리. 왠지 모르게 위풍당당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훈련소가 오픈한 뒤로 시간이 좀 지난 만큼 통제하는 과정에서 이것저것 다양한 설명을 들어 제대로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 신입들은 괜찮은 모양이네.’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확실히 파란과는 다르게 붉은용병에서 체계적인 시스템을 마련하다 보니 벌써부터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약간의 기대감을 가진 것은 당연지사. 나 역시 B반을 지나쳐 곧바로 C반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선희영 교관 진짜 예쁘지 않냐?” “어. 나는 정하얀 교관님이 더….” “아 정하얀 교관님도 예쁘기는 하지… 귀여우시잖아. 여기 생활의 유일한 낙이라니까.” “그러면 뭐해. 정하얀 교관은 남자친구 있다고 하더라.” 교실 안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온 것. 조금 더 황당했던 것은 내가 교실 안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남자 두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눈치를 보고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옆 강의실에서 정하얀을 맞이했던 커다란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어?’ 내가 이쪽에 들어 온 지도 시간이 제법 지난 시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쉽게 정리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니 눈앞에 있는 게 누구인지 제대로 정보를 전달 받지 못한 것 같았다. 꼰대스러운 발상이기는 하지만 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몇몇은 대놓고 엎드려 있었고 몇몇은 이쪽을 보고 히죽거리고 있는 표정. 어처구니없지만 그 표정에서 보이는 감정은 틀림없이 멸시였다. ‘내가 누군지 이야기를 안 해놨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저들의 저런 차가운 반응도 이해가 가기는 한다. 처음에는 대부분이 전투직군을 희망하는 만큼 생산직에 관심이 없는 것이 당연. 비주류 과목을 맡고 있는 교사의 서러움을 왠지 모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물론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것보다 더 지독하다. 저 병아리들의 눈에서 자신들은 눈앞에 있는 사람과는 다르다는 표정이 언뜻 언뜻 스쳐 지나갔으니까. ‘허….’ 전투직군과 생산직군을 벌써부터 구분하는 적응력을 칭찬해 주고는 싶지만…. ‘사람 잘못 골랐는데….’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잠깐 동안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왔을 때 교실에 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업 진행 안 하세요? 벌써 오 분 지났는데. 그러니까… 비전투직군 담당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누가 들어도 싸가지 없게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 208 회귀자 사용설명서 208화 G.T.O (4) ‘허….’ 어이가 없어 자꾸만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눈앞에 보이는 이들은 어딜 봐도 병아리라고 분류할 수 있는 이들. 커다란 목소리로 선생님 어쩌구라고 말한 놈을 바라보자 곧바로 녀석의 상태창이 눈에 보였다. 1차 전직을 마친 것을 보니 공략조로 참가했던 것 같았지만 그다지 눈에 띄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묻어갔겠네.’ 열네 명으로 구성된 파티에서도 묻어갔을 것 같은 느낌. 이름도 얼굴도 그다지 기억해 놓을 필요 없다. 열심히 한다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한 방법으로 성장한다면 그다지 기대치가 느껴지지 않는 신인이라는 거다. ‘한소라?’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조그만 병아리가 다시 한번 더 입을 열어오는 것을 보니 기가차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선생님?”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 보는 것이 당연하리라. 이곳에 있는 병아리들에게 굳이 수작질을 하거나 지금에 와서 자기소개를 하는 것도 우스운 일. 이제는 약간의 사회적 체면이라는 게 생긴 만큼 저런 미친놈들을 머리 굴려 처리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이토 소우타 때처럼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이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다는 것. 내 감정에 반응했는지 자꾸만 허리춤에서 뽑혀져 나오려고 하는 율리에나가 느껴졌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자 한방 먹였다고 생각했는지 실실 쪼개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정하얀이 저들을 착하다고 표현한 게 방금 전의 일이라 더욱더 현실성이 없다. “선생님? 수업 진행 안 하세요?” “선생님이 아니라 이기영 교관입니다.” “아아아. 비전투직군 담당도 교관이라고 하는군요.” 저 여자의 말이 재미있었는지 여기저기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 나 역시 웃어넘기고 싶었지만 내 성격이 이런 일을 웃어넘길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후우….” 잠깐 한숨을 쉬자 묘하게 조용해진 장내. “한숨 쉬시지… 마시고요. 수업을….” 하는 소리가 그녀의 입 밖에서 튀어나오자마자 허리춤에서 율리에나가 그대로 뽑혀 그녀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디에선가 ‘꺄악!’ 소리가 들려왔지만 굳이 그 목소리에 반응하지는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간 율리에나의 영향으로 그녀와 나 사이에 있던 물건들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고 심지어는 창밖에 있는 유리창도 쩌적 이상한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있다. 눈 깜빡할 시간에 벌어진 일. 병아리의 목을 꿰뚫을 기세로 날아가던 율리에나가 멈춘 것은 그녀의 눈 바로 앞이었다. “어….” 미처 반응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의 단발머리가 율리에나의 영향을 받아 제자리로 돌아오기 전까지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자신이 방금 죽었을 지도 몰랐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한소라의 턱이 덜덜덜 떨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지렸네….’ 책상 아래로 노란색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걸 보니 겁을 집어먹어도 제대로 집어먹은 모양. “아아아….” 센 척하는 건 생각보다 즐겁다. “재미있군요. 이름이 뭔가요?” “아….” 실어증이라도 걸렸는지 제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 율리에나가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접근하자 그제야 조용히 입을 열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한소라… 입니다….” “한소라 씨군요. 뭐…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일단 배경 설명을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 수업에 불만을 가지신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 “전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일부 교육생은 아마 이런 의문을 느끼실 겁니다. 훈련할 시간도 부족한데… 어째서 비주류직군과 생산직군이 진행하는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음… 한소라 교육생의 옆에 앉아 있는 교육생이 한번 대답해 보세요.” “네?” “솔직하게 대답하셔도 괜찮습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아니요. 솔직히 대답하셔도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조, 조금은….” “아마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당연할 겁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럽게 괴물과 검을 부딪쳐야 되는 상황이 왔고 이런 장소에서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됐으니까요. 적응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여러분들도 대충은 이곳에 대해 이해하셨을 겁니다.” “…….” “힘을 가지고 있으면 대우받는다.” 말을 마친 이후에 잠깐 주변을 둘러보자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 벌써부터 이 차이점을 느끼신 분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은연중에 공략을 마친 공략조가 대우받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계실 테니까요. 실제로 이들은 대우받을 만합니다. 그만큼 적응력이 빠르다는 거고… 우리 사회가 좋아하는 경력 있는 신입의 표본이니까요.” “…….” “잠깐 이야기가 샜지만… 여러분의 생각이 정답은 맞습니다. 이곳은 힘을 가지면 대우받을 수 있는 장소가 맞아요. 실제로 이 세계의 몇 안 되는 강자들은 일반 플레이어들과 비교했을 때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특권을 누리기도 하고… 벌어들이는 재화 역시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소득 차이가 얼마나 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루에 1골드도 벌지 못하는 플레이어도 있는 반면에 하루에 1,000골드가 넘는 돈을 벌어들이는 플레이어도 있습니다. 몬스터의 사체는 돈이 되고 난이도가 높은 몬스터일수록 그 가치가 올라가니까요. 더 높은 등급의 던전 공략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웅 등급 이상의 던전을 공략한다는 건 곧 막대한 재화를 얻는 것과 다름이 없어요. 문제는….” “…….” “문제는 여기까지 올라가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겁니다.” 조금 흥미가 생겼는지 이쪽을 바라보는 교육생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네. 그다지 많지가 않아요. 모두가 처음에는 여러분들처럼 시작합니다.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하고 나도 잘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에 열심히 검을 휘두릅니다. 조심조심 몬스터를 사냥해 나가고 뭔가 성장하는 느낌도 들죠. 이쯤 되면 이 세계가 괜찮은 것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게임을 하는 것처럼 자신을 레벨업 시키는 게 재미있고 새로운 장비를 맞추는 것도 즐거워집니다.” “…….” “그러다 사고가 터지거나 한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곳이 게임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죠. 재능이 있는 사람과 재능이 없는 사람이 분류되기 시작하고 위로 쭉쭉 올라가는 다른 이들을 허망하게 올려다보기도 합니다. 아마 몇몇 분은 당장 이 교육소를 벗어나자마자 현실을 느끼게 될 겁니다. 밖은 생각보다 더 위험하니까요. 어째서 위로 올라가는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적을까요?” 대충은 알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은 그 과정에서 죽어요. 몬스터한테 산 채로 잡아먹히거나 살아남아도 어디 한 곳에 장애가 남아 빈민촌에 들어가서 구걸을 하며 살아간다는 겁니다. 남자들 같은 경우에는 인체 실험에 사용되는 일도 허다하고 여자들 같은 경우에는 타국에 노예로 팔려 가거나 창녀가 되기 십상입니다. 먹고 사는 게 생각보다 어렵거든요.” “…….” “위의 경우는 그나마 양반입니다. 몬스터에게 납치되서 평생 동안 몬스터의 부락에서 똥오줌을 받아먹다 결국에는 잡아먹히는 사람들도 있고… 사지가 잘려나간 채로 목숨만 부지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런 경우도 사실 양반이다. 실제로 플레이어들 중에서는 더 심한 꼴을 당하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게 나는 아니지만….’ “아마 이곳에서도 분명히 나올 겁니다. 대충 여러분들을 훑어봤을 뿐이지만 개인적인 감상을 말씀드린다면 아마 이곳에 있는 대부분이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거나 반병신이 되어 빈민촌을 떠돌아다니게 될 겁니다. 어쩌면 술집에서도 마주칠 수도 있겠네요. 아… 특히 한소라 교육생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네?” “보통 당신 같은 사람이 제일 먼저 죽거나 병신이 돼요. 물론 뭐 거기서 거기로 보이기는 하지만 왜… 가장 먼저 날뛰는 사람이 가장 먼저 최후를 맞이한다는 건 흔한 클리셰니까요.” “아….” “당신. 그리고 당신… 그리고 당신, 그 옆에 있는 교육생… 그리고 또 그 옆에 있는 교육생도… 아마 어디에선가 객사할 확률이 높을 겁니다. 단언컨대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들은 단 한명도… 아! 당신은 제외하겠습니다.” [플레이어 유아영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 - 유아영] [칭호 - 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 - 21] [성향 - 소심한 낙천주의자] [직업 - 백수입니다.] [능력치] [근력 - 11/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민첩 - 10/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체력 - 27/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지력 - 1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내구 - 12/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행운 - 15/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 - 01/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총평 - 체력과 근력의 잠재능력치가 높습니다. 내구와 마력의 잠재능력이 아쉽기는 하지만 훌륭한 전위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괜찮네.’ 공략조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괜찮다. 체력 능력치만 전설 이상 판정을 받은 것을 본 것은 처음. 이런 보석을 발견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엄청나게 거대한 흉부가 왠지 모르게 시선을 끌어당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렇게 쳐다보는 것도 당연히 실례. 갑작스러운 지목에 깜짝 놀라는 그녀에게서 곧바로 시선을 뗀 이후에는 곧바로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이름이?” “유… 아영입니다. 교, 교관님.” 생각해 보니 처음에 이쪽을 비웃지 않았던 이들 중에 한 명. 내 말에 모두가 그녀를 보려 고개를 돌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서려 있었지만 저들이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 교탁을 손가락으로 툭툭 친 다음 다시 한번 말을 잇자 이번에는 나에게 시선들이 꽂혔다. “유아영 교육생을 제외하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혀요.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 성장해야 겨우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런….” “원래 세상은 불합리해요. 정하얀 교관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봅시다. 그녀는 지금 린델을 대표하는 마법사 중 한 명입니다. 마도 길드에서 주목하고 있을 정도로 높은 성장치를 이루어냈고 실제로 그녀의 위에 있는 마법사보다 아래에 깔려 있는 마법사들이 더 많을 겁니다. 그녀가 이 모든 걸 이룩하는 데 걸린 시간이 얼마일까요.” “아….” “고작 1년입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건 충분히 이례적인 일이예요.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마법을 공부해도 그녀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시 내에 널려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아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 까놓고 이야기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 “당신들은 가능성 없는 쓰레기들이야.” “아….”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곳에 있는 겁니다. 어째서 비전투직군의 교관이 수업을 진행하는지 딱 보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어차피 밖으로 나가면 뒈져나갈 불나방들을 한 명이라도 구제하고 그나마 도시에 쓸모 있는 부품으로 만들기 위해 제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말, 말씀이….” “전혀 심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몬스터 사냥이나 전쟁에 나가도 당신들은 총알받이 그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할 겁니다. 도시에 기여하지 못할 바에야 망치질을 하든지 연금키트를 만지는 게 도시에 더 도움이 된다 이 말입니다. 쓸데없는 방향으로 노력하지 마세요, 멍청한 놈들아. 시간 아까우니까. 장담하는데 너희 같은 놈들은 다른 교관의 수업을 듣는 것보다 내 말을 듣는 게 이득이야.” 말을 마치고 조용히 교육생들을 바라보자 묘한 적의를 보내오는 것이 느껴졌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제대로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야 아직도 율리에나가 공중에 떠 있으니 그럴 만하다. 때마침 수업을 끝마치는 종이 울리는 중. 굳이 인사를 받지는 않았다. “그럼 다음 수업 때 보자, 머저리들아.” 곧바로 밖으로 나가니 재미있게도 정하얀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학생들이 창문 너머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찰싹 붙어오는 정하얀의 모습이 조금 재미있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정하얀에 대해서 떠들어 댔던 남자 두 명 역시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푸핫.” “재미있으셨어요? 오빠?” “아… 응. 생각보다 재미있더라. 학생들도 괜찮고….” “그렇죠? C반 애들이 정말로 다 착하더라고요.” “응. 특히 한소라라는 친구한테는 왠지 모르게 계속 시선이 가더라고….” “네?” “수업에도 열정적이고….” “아….” “얼굴도 귀엽고….” “그, 그, 그… 렇군요.” “공략조였던 것 같았는데 파란으로 영입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옆에 두고 싶거든.” “네? 네… 네…. 그렇게 됐으면…. 아… 저도 알아요…. 그 친구… 네… 헤헤헤…. 기억 난다…. 귀여웠죠… 그랬죠… 네….”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웃고 있는 정하얀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그녀의 행동을 일러바치는 것보다는 이쪽이 조금 더 효과가 좋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쪼잔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이런 소심한 복수는 꽤나 취향이다. ‘벌은 받아야지 오줌싸개야.’ # 209 회귀자 사용설명서 209화 불길한 느낌(1) “미친! 여우같이 생긴 뱁새눈 새끼가!” “괜한 문제 일으키지 마라, 한소라.” “짜증나 죽겠어. 짜증나 죽겠다고!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포션이나 만드는 연금술사 나부랭이가! 감히… 누구를… 누구를 훈계해?!” “사고 일으키지 말라고 분명히 이야기했다. 여기는 튜토리얼 던전이 아니야. 우리가 그곳에서는 왕이었을지 몰라도 여기에서는 막 들어온 신입이야. 어떻게 생각해도 최대한 웅크리고 있는 게 옳아.” “신입이긴 신입이지. 대형 길드들의 오퍼를 받고 있는 신입.” “아직 확정된 건 아니야.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몰라. 먼저 제의를 받았을 뿐이고 훈련소에서의 성장 정도와 시연회도 남아 있지. 심지어 일부 길드는 따로 입단 테스트도 본다고 하니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네 훈련에나 집중해. 물론 네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오빠도 그 새끼 수업 들어서 알고 있을 거 아냐?!” “글쎄…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은 그다지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 사람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 현실적인 이야기라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어. 물론 우리 반은 너희 반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아서 그런 강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다른 교관들도 나름대로 깍듯이 대하는 것 같은 느낌도 있었고….” “어련하시겠어? 정하얀 교관의 남자친구 되시는데? 깍듯이 대하는 게 당연하겠지.” “아 그래?” “어. 여우같이 생긴 뱁새눈 새끼가 정하얀 교관 남자친구라고… 날아다니는 검도 분명히 정하얀 교관이 만들어 준 걸 거야. 대도시에서도 손꼽히는 마법산데 그런 검 하나 못 만들겠어? 박쥐같은 여우 새끼. 여자 하나 잘 물어서 인생 핀 놈이 분명하다니까.” “글쎄….” “나는 못 참아, 오빠.” “뭐, 네가 어떻게 하든지 별로 상관은 없지만 최소한 이쪽에 피해를 끼치지 않게 하는 게 좋을 거야.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거든.” “뭐가?” “그 이기영이라는 사람.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해도 통 나오는 게 없어. 교관들도 말을 아끼는 것 같고.” “붉은용병 교관들이야 원래 사적인 질문은 안 받아주잖아. 오빠가 착각한 거겠지.” “글세…. 착각이면 좋겠는데…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리지 않는 걸 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나도 모르겠다. 네가 알아봐. 솔직히 나는 여기에 신경 쓸 여력 없거든. 당장 입단 테스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 “참나. 영원히 하나라고 튜토리얼 던전에서 그렇게 입을 털더니만….” “원래 상황이란 건 달라지게 마련이야. 너도 이상한 곳에 신경 쓰지 말고 입단 테스트나 시연회나 잘 신경 써. 다른 애들도 전부 그것 때문에 정신없으니까. 철 들 때도 됐잖아.” “됐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피해만 끼치지 마.” “알았다니까!”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영원히 하나는 개뿔….’ 튜토리얼 던전에서 함께했던 동료들이 도와줄 거라고 생각한 건 어디까지나 착각인 모양. 사실 커다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냉담한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들 멍청해가지고….’ 갑작스레 답답해진 것은 당연지사. 멍청한 놈들이 이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렇게 납작 엎드려 있을 필요가 있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정도로 납작 엎드려 있을 필요는 없다. 물론 거대 길드에 입단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된다. 그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안정적인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이상적이라고 생각해도 될 만한 일이니까. 그렇지만 현재 자신들이 받는 대우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못하고 있다. 공략조는 기본적으로 생존조와 받는 대우가 다르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이것저것 특혜를 받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째서인지는 뻔하다. 애가 타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저쪽 역시 이쪽을 영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거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 적응하지 못하고 던전에서 벌벌 떨다가 허송세월을 낭비한 생존조와는 다르게 자신들은 목숨을 걸었고 결국에는 원하는 것을 쟁취해 냈다. 이곳에 있는 길드와 클랜들이 더 많은 강자와 더 많은 인재를 영입하고 싶어 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적당히 튕기는 것 역시 중요하다. 만약에 열네 명이 똘똘 뭉친 이후에 협상을 진행했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 제의가 왔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원하는 길드와 클랜이야 어차피 널려 있으니까. ‘지금은 우리가 갑인데!’ 멍청한 사람들. ‘창렬이 오빠는 파란으로 가고 싶다고 했었고… 혜자 언니는 검은백조로 가고 싶다고 했었나…. 나머지는 붉은용병 아니면… 에휴….’ 단언컨대 만약 공략조의 전원이 클레임을 걸거나 타 길드로 들어갈 의사가 없다고 밝히고 협상을 진행했다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을 것이다. 그 연금술사에게도 이렇게 농락당할 일이 없었다는 거다. “제길….” 오줌을 지린 것을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진 것은 당연지사. 신경질적으로 강의실의 문을 열어젖히자 이쪽으로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보였다. 몇몇 여자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인 것은 당연지사.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일이지만 이런 풍경은 익숙하다. ‘줄 잘 서고 싶다는 거겠지.’ 자신은 이곳에서는 특권 계층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언니? 이야기는 잘 됐어요?” “아니. 오빠들은 별로 이번 일에 관심이 없나봐. 다들 입단 테스트랑 시연회 준비한다고…. 짜증나 죽겠다니까.” “입단 테스트라면 역시 붉은용병인가요?” “붉은용병도 있고 파란도 있고 그래. 다른 길드나 클랜도 있기는 한데… 아! 아직 너희는 모르겠구나.” “네. 저희들은 들을 수 있 는게 없으니까요.” “마도 길드도 있고 검은백조도 있고 다양해. 중견 길드는 사실 조건이 다들 괜찮은 것 같더라고….” “아. 언니는 어디로 가실 건데요?” “글쎄… 일단은 붉은용병에서도 제의를 받았고 넌지시이기는 했지만… 마도 길드에서도 제의를 받았지만 잘 모르겠네…. 파란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마법사로 계속 성장하실 거면 파란도 나쁜 선택은 아닌 것 같아요. 정하얀 교관님이 계시니까요.” “아직 파란의 관계자들이랑은 만난 적이 없어.” “네? 정말인가요? 역, 역시 그 사람 때문일까요?” “아마 그렇겠지….” 그 연금술사가 짜증나는 또 다른 이유였다. “의도적이겠죠?” “글세…. 확률이 높을 것 같긴 해.” “길드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이 높기는 높은 사람인가 봐요.” “영향력은 개뿔….” “저기… 유아영 있잖아요?” “유아영이 누구?” “가슴 커다란….” “아… 그 젖소?” “확실하지는 않은데 파란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뭐?” “파란 길드 마스터랑 면담도 했었대요.”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자꾸만 속에서 불길이 올라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튜토리얼이 진행되는 내내 도망치기 바빴던 멍청한 년이 파란의 입단제의를 받았는데 자신이 받지 못했다는 게 황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대충 감이 온다. ‘그놈이 복수하는 거야.’ 처음 만났을 당시에 태도가 건방졌다는 이유일 것이다. 의도적으로 이쪽을 배척하고 배재하려 하는 게 너무 티가 나 황당할 정도. 자신이 모르는 뒷사정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길드 휘장이라도 좀 달고 다니든가. 짜증나게….’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하… 씨발. 진짜 황당하네.” “그러니까요. 만약에 정말이라면 진짜 황당한 거 아닌가요? 저런 젖소가 뭐가 좋아서 영입제의를… 성적도 안 좋던데요? 체력 훈련은 괜찮은 것 같기는 했지만….” “뭐 뻔할 뻔자 아니겠어? 보나마나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길드에 영향력이 있다는 것도 전부 개소리야. 이기영 그놈이 여기서 왕 행세를 하고 있는 것도 전부 정하얀 교관 때문이고… 아마 파란에서도 마찬가지일 거야. 골칫거리일걸. 제비 놈 한 명한테 흔들리는 그딴 길드? 영입 제의가 들어와도 내가 차버릴 거야.” “정말인가요?” “…….” 당연히 거짓말이다. 다른 대형 길드도 나쁘지는 않지만 정말로 가고 싶은 길드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파란. 천재 마법사 정하얀에게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을 수도 있다는 이유도 있기는 하지만 파란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중형 길드가 가지고 있는 배경에 있다. 붉은용병과의 동맹.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이유다. 이제 막 날아오르기 시작한 파란으로 들어가 실권을 잡는 것이 붉은용병의 말단 길드원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이득. 규모가 크지 않은 만큼 이쪽에게 쏟아질 지원도 조금은 더 집중적일 것이다. ‘완전 꼬였어.’ 혹시나 정하얀 교관에게도 이번 일에 대해 말을 해놓은 것은 아닌지까지 생각이 미치자 괜스레 초조해졌다. ‘뭔가 수를 써야 되는데….’ 교실 문이 갑작스레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간 것은 당연지사. 순식간에 이쪽에 몰려 있던 떨거지 들이 자리로 달려가 착석했고 눈앞에 있는 교관이 인사를 하는 것을 기다렸다. 정하얀 교관이 수업을 위해 강의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항상 들어오면서 인사를 했던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 돌아오자마자 이곳을 바라보지 않은 채 대충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자리에 앉으세요.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네.” “저번 수업처럼 마력으로 글씨 쓰기를 할 거예요. 아직 마력을 느끼지 못하신 분들은 따로 빠져요.” “네, 교관님.” “시… 시간 없으니까 빨리빨리 움, 움직여요!” “아… 네!” 저번과는 다르게 왠지 모르게 싸늘해진 것 같은 분위기가 괜스레 눈에 띈다. 순식간에 자리에 착석하는 교육생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괜스레 신경 쓰였다. 겉모습도 조금 수척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고 비교적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모습은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떠올리게 했다. 짜증난다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고 있는 듯한 모습에 그 여우 놈이 생각난 것은 당연지사. 여기 있는 교육생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히 지 좋을 대로 포장해서 전달했겠지.’ 어째서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만남을 가지고 있는지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수업이 계속해서 진행되는 와중에도 굉장히 날이 선 것 같은 느낌. 대놓고 신경질을 부리는 건 아니었지만…. “바… 바보들 아닌가…. 똑, 똑바로 해요!” 라든지. “나는 이거 처음부터 할 수 있었는데… 설명해 줬잖아… 진짜… 바보야.” 라든지. “왜 이해를 못 하지? 답답해…. 이건 다 하는 거잖아요.” 라든지. “바보들이야. 바보들이라구… 진짜 멍청해… 진짜 멍청하다구….” 같은 소리를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그나마 화기애애했던 수업 시간이 순식간에 가시방석이 된 것은 당연지사. 최근에 들었던 수업과 온도차가 너무 극심해 무척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수업 내용도 조금 불친절해진 것 같은 느낌. 아직도 소수는 마력을 느끼는 걸 연습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마법사인 자신도 어려워하는 수업 내용을 다른 이들이 제대로 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중에서도 신경 쓰였던 것은 눈앞에 있는 마법사가 자신에게 보내는 시선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닭살이 돋는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필사적으로 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마력으로 허공에 글씨를 쓰는 수련 방법은 해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그렇지만 기대에 부응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아슬아슬하게 진도를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력으로 눌러줘야 돼.’ 낭중지추라고 했다. 자신이 열심히 한다면 결국에는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가치를 알아볼 것이다. ‘이 정도는 해야 돼.’ 특별하다는 걸 계속해서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대우받는다. 결국에는 입술을 꽉 깨물고 천천히 마력을 유형화해 글자를 띄우기 시작. 긴장이 풀리면 곧바로 무너질 것 같아 부들부들 떨면서 마력을 집중하자 천천히 이쪽을 바라보는 정하얀 교관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 잠깐 착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 아니, 뭔가 복잡한 표정이다. 혹시나 이쪽의 방식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틀림없이 아직까지도 마력은 유지되어 있었다. 뭔가를 굉장히 고민하는 것 같은 느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뭘… 고민하고 있는 거지?’ 순식간에 침묵이 드리운 장내에 괜스레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린 정하얀의 표정이 시야에 비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어어어?’ 히죽히죽거리는 표정에는 설명하지 못할 감정이 들어가 있다. 팔뚝에는 갑작스레 닭살이 돋아나고 등 뒤로는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 괜스레 식은땀이 흘러나온 것은 물론 자신도 모르게 턱이 덜덜 떨려왔다. 계속해서 히죽거리고 있는 표정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기는 했지만 지금 자신의 몸이 이상을 느끼는 게 저 표정 때문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뭐지… 왜 그러지….’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눈이 이상한 것 같은 것 같은 느낌. 뭔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눈이었다. “어… 아….” “잘… 잘했어요, 한소라 교육생.” “아… 네. 감사합니다.” “그나마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꽤 괜찮네요…. 다행이다…. 멍청하지 않아서….” “고맙습니다.” “한소라 교육생은 따로 수업을 받아도 될 것 같은데… 히히….” “아… 네.” “혹시 괜찮으면… 방과 후에 잠깐 이것저것 가르쳐 줄까요?” 자신을 알아준 건가라는 생각이 든 게 당연. 아무한테나 이런 말을 해오지는 않을 것이다. 기뻐하는 것은 물론 자랑스러워하는 게 옳다. 주변을 살짝 둘러보자 모두가 부럽다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중. 역시 다르다는 시선과 동경의 시선이 쏟아져 내려온다. ‘승낙해야지.’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옳다. 몇 세기에 걸쳐 나올 만한 천재 마법사의 과외를 받을 수 있는 기회니까.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대답이 입 밖에서 나오지 않았다. “가르쳐… 준, 준, 준다니까요?!” 고개를 들어 확인한 정하얀의 얼굴의 한쪽 입꼬리가 기괴한 방향으로 비틀려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 210 회귀자 사용설명서 210화 불길한 느낌 (2)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나와야 맞다. 이게 정답이라고 끊임없이 생각하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기회를 놓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머리로는 그걸 이해하고 있었지만 몸이 계속해서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승낙해야 돼.’ 계속해서 속으로 되뇌고 있었지만 입은 결국 자신의 기대를 배신했다. “저는… 그….” “네?” “방, 방과 후에는 조금 다른… 할, 할 일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아….” 지나치게 실망한 것 같은 정하얀 교관님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풀이 죽은 듯한 표정은 마치 주인한테 버림받은 강아지를 보는 것 같은 느낌. 살짝 내려간 눈꼬리와 커다란 눈에는 실망감이 가득 차 있었다. 바보 같았던 자신의 선택을 자책하는 것 도 잠시. 어째서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뭔가를 자꾸 중얼거리고 있는 정하얀 교관의 목소리가 괜스레 신경 쓰였지만 애써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느낌이 안 좋아.’ 그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쩌면 그 여우 놈의 함정일 가능성도 다분. 꽤나 쪼잔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수업을 따라가는 것만도 벅차.’ 물론 새로운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좋지만 계속해서 배우고 있는 숙제와 과제만으로도 이미 머리가 터져나갈 지경이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대기야 했지만 자신이 멍청한 선택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렇지만 굳이 이걸 정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호흡이 조금씩 원래대로 되돌아오고 있었으니까. 때마침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계속해서 작게 중얼거리던 정하얀 교관님도 천천히 교실 밖을 나가기 시작. 뒷모습이 굉장히 씁쓸해 보여 붙잡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굳이 손을 들지는 않았다. 같은 클래스의 교육생들이 이쪽으로 다시 몰려드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정, 정말로 대단하네요. 언니는….” “아….” “수업도 그렇고… 정하얀 교관님이 그런 제의를 해주실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그… 런가?” “네. 오늘 수업 분위기를 봤을 때는 틀림없이 그 연금술사가 뭔가 언질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능력을 보이니 결국 교관도 탐이 나셨던 모양이에요. 그분도 파란의 간부니까요. 어쩌면 조만간 파란에 제의를 받으실 수도 있으실 것 같은데요?” 옆쪽에 있는 떨거지 한 명이 곧바로 말을 이어왔다. “소라 언니는 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제의가 오든 오지 않든 별로 상관없지. 교관 제의도 단칼에 거절하시는 거 못 봤어?” “아… 그랬지?” “정하얀 교관도 조금 절박해 보이는 것 같았는데….” “그래?” “깜작 놀란 표정이었고….” “분명히 소라 언니가 성공하셨을 때였죠?” 자신들끼리 여러 가지 말을 주고받고 있는 것이 들려왔지만 왠지 모르게 잘 들리지 않았다. 아까 봤던 정하얀 교관의 표정과 뭔가 이상한 느낌이 계속해서 생각났기 때문이다. 살짝 운을 띄우니 다시 한번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혹시….” “네? 소라 언니.” “혹시 다들 이상한 거 못 느꼈어?”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하얀 교관님 말이야. 오늘 조금 이상한 것 같지 않았어?” “조금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시기는 했어요. 조금 신경질적이셨고…. 피곤해 보였다고 해야 되나? 좀 그런 느낌이었는데….” “아니,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조금 이상한 것 같은 느낌이.” “조금… 정박아스럽기는 했죠.” 자신이 원한 대답과는 조금 다른 대답. 옆에 있는 떨거지 한 명이 곧바로 입을 열어왔다. “얘! 누구 듣겠다. 풉. 사실 틀린 말도 아니지만….” “왜 그렇잖아? 사실 처음부터 조금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는데…. 그때는 그냥 말을 더듬는구나… 이 정도로 생각했었거든. 원래 천재는 다 저러는 줄 모르겠는데 조금 장애가 있는 것 같은 느낌 아니었어?” “천재들은 다 그런가?” “그런 게 천재면 하나도 안 부럽다. 바, 바, 바, 바, 바… 바보 아니야?” “미친! 성대모사 진짜 똑같아! 한번 만 더 해봐.” “여… 여러분들 은 멍, 멍, 멍청해요! 개도 아니고 왜 이렇게 멍멍 대는 건지… 풉. 그렇게 말하면 지가 더 멍청해 보인다는 건 모르나 봐.” “진짜 개 웃겨!” “조금 모자란 구석이 있으니까 그런 남자 만나고 다니는 거겠지, 뭐.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기는 있어. 남들이랑 의사소통하는 게 조금 문제가 있는 사람들. 어렸을 때 제대로 된 가정에서 못 배우고 자란 사람들이 조금 그런 식이더라. 모르긴 몰라도 트라우마 몇 가지는 분명히 가지고 있을걸.” “말이 좀 심하기는 한데 웃기기는 웃기네. 진짜 정박아는 아니겠지?” “모르지. 원래는 정상이었는데 마법을 너무 공부해서 돌아버린 걸지도… 그렇지 않나요? 소라 언니?” ‘내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던 건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떠드는 이들을 보니 조금은 심각하게 생각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몸이 안 좋았나 보네.’ 다들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때 자신의 몸 상태가 조금 좋지 않았던 것 같은 느낌. 계속해서 히죽거리면서 말을 더듬었던 모습도 지금 생각해 보니 굉장히 우습다. 당장 눈앞에 있는 떨거지들이 하는 성대모사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올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진짜 어딘가 조금 모자란 거 같기도 했고….’ 어쩌면 저들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슬쩍 말을 이었다. “글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원래 영화에서도 보통 그런 식이잖아. 조금 어디 돌아버린 사람들. 자폐증 있는 사람들도 기억력이 엄청 좋다는 사례는 있으니까. 마법에서도 그런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 정하얀 교관 같은 경우에는 선천적으로 마력이랑 친화력이 있는 것 같고….” “아, 그래요?” “어쩌면 정말로 돌아버렸을지도 모르지. 하하. 튜토리얼 던전에서의 트라우마로 실어증이 생긴 사람들도 있는데, 뭐. 그런 경우 아니겠어?” “아. 언니 드디어 웃었네요. 아까 까지만 해도 계속 심각한 표정이었는데.” “너희들 말이 너무 웃기니까. 나도 모르게 진짜 그렇게 생각할 정도였다니까. 정박아. 하하핫. 진짜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그 사람을 위로 올려다보던 내가 너무 바보 같아. 천재면 뭐 하겠어? 어차피 말더듬인데 말이야.” “그렇죠. 같은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 기왕이면 정신이 제대로 박히거나 말을 똑바로 하는 사람을 쓰는 게 길드 입장에서도 더 좋으니까요. 언니.” “그러네? 기왕 이렇게 된 거 파란으로 가서 확 집어 삼켜버릴까. 나라고 천재가 아니라는 보장도 없고… 내가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루면 정박아 더듬이 년보다는 나를 더 선호할 거 아니야? 파란 길드 마스터도 바보는 아니니까.” “언니라면 가능하실 거예요. 혹시 그렇게 되시면 저희도 잊으시면 안 돼요?” “내가 너희를 왜 잊겠어? 혹시 다른 길드로 가더라도 종종 연락은 하고 지내야지. 얘, 만약에 파란에 들어가서 길드마스터 눈에 들면 말단 파티원으로라도 들여 달라고 청원해 줄 수도 있고.” “정말인가요?” “물론 아마 가능할걸? 파란이 대형 길드도 아니고….”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확실히 다른 대형 길드랑은 다르겠죠. 영향력이 커지면… 지금 그 연금술사가 하고 다니는 걸 보면 설득력이 있네요. 혹시 파란에 들어가시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할 거예요?” “내가 들어갈 길드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안 되지. 어차피 그놈이야 정하얀 교관 옆에 붙어 있는 들러리니까. 둘이 헤어지면 그걸로 끝이고….” “지금 당장이요?” “남자 인생 하나 조지는 건 일도 아니야. 성적으로 희롱당했다고 하면 지가 뭐 어쩌겠어. 정하얀 교관, 아니, 그 정박아도 그놈한테 정 떨어질 테고 안 그래도 그놈이 눈에 가시처럼 느껴졌던 파란 길드에서는 옳다구나 하고 방출해 버릴 수도 있지. 잠깐 피해자인 척 연기하고 길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면 그걸로 이득 아니야?” “그렇게까지 하시게요? 아니, 지금 이 말 누가 들으면….” “걱정하지 마. 아까 정박아 어쩌구 할 때부터 마력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게 차단했으니까.” “와….” “아무것도 없는 곳인데 이렇게라도 살아남아야지. 능력도 능력이지만 가끔은 쉽게 쉽게 살아가는 삶의 지혜도 필요한 법이야.” “뭔가 언니는 정말로 성공할 것 같네요….” “원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좋아. 연약한 여자라는 것도 사회에서는 훌륭한 무기니까.” “뭔가 배운 것 같은 기분이에요.” “어? 언니. 누가 찾아온 것 같은데요?” “누구?” 한참 대화가 재미있어 질 때였다. 정말로 이 떨거지들을 데리고 가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 생각을 하던 차,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니 조용히 손을 들고 있는 남자가 시야에 비쳤다. ‘창렬 오빠?’ 함께 했던 공략조 중에서도 조금은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고 조금 차가워 보이는 인상 때문. 어째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모습 때문인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나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게.” “네. 그렇게 하세요, 언니.” 발걸음을 옮기는 게 당연할 것이다. 잠깐 심심함을 달래줄 이들과는 다르게 눈앞에 있는 남자는 조금 중요한 사람으로 분류되어 있었으니까. ‘복면은 왜 하고 다니는 거야?’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다. 그렇지만 티를 낼 수 있을 리가 만무. 조용히 다가가자 먼저 입을 열어오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무슨 일이예요? 오빠? 아! 그러고 보니 오빠 최근에 파란 길드 마스터랑 만났다 그러지 않았어요?” “…….” “거기도 입단 테스트 있대요? 들어가는 거 확정된 거예요? 아니, 계약금이랑 연봉은 얼마에 들어가신 거예요? 그냥 대충 싼값에 들어간 건 아니죠?” “…….” “우리 가치는 저들이 아니라 우리가 결정해야 돼요. 말 좀 맞추면 연봉이랑 계약금 둘 다 높여서 들어갈 수….” “그런 말 하려고 온 거 아니니까 입 좀 다물어. 목소리도 낮추고.” “나… 참… 그럼 빨리 말해요.” “난 솔직히 네가 싫다.” “그거 참 다행이네요. 저도 오빠 싫어하거든요.” “그렇지만 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그래도 공략조에서 서로 동거동락한 사이였으니까. 튜토리얼 던전에서의 일도 있고.” “그런 말 하지 말고 조금 더 생산적인 이야기 좀 해줘요.” “앞으로 네가 뭘 어떻게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파란과는 연관되지 말고 그냥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사는 게 좋을 거다.” “뭐예요? 갑자기.” “이건 경고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조용히 너만 생각해. 괜히 던전 안에서처럼 되도 않는 개수작 부리지 말고.” “뭐요? 던전 안에서 제가 뭘….”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넌 욕심이 너무 많아.” “이런 쓸데없는 말 말고 조금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야. 난 너한테 깊게 관여하고 싶지도 않고 입이 가볍다는 이미지도 만들기 싫으니까. 솔직히 지금 이 말을 너한테 전하는 것도 불쾌할 지경이고… 짜증 나거든.” “무슨 정보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게 내가 주는 정보야. 조용히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을 것.” “아니 그러지 말고… 파란 입단은 결정된 거냐고요?” “간다. 난 분명히 전했다.” “뭐야? 창렬 오빠!” 이야기를 마친 뒤에 다시 한번 복면을 올린 이후에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가관. 짧은 대화였지만 불쾌감이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속 시원하게 말하면 되지.’ 애매모호하게 말한 뒤로 자기 말 들으라니 짜증이 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인상이 절로 구겨지는 것은 물론 괜스레 혼잣말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개 창렬하네 진짜. 정보를 줄 거면 확실히 주든가. 누가 저딴 거 궁금하다고 했나?” 한마디를 내뱉은 이후에는 바로 발걸음을 돌리니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떨거지들이 보인다. 이쪽이 다가오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자신들끼리 열심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혹시 뒷담화라도 하는 건 아닌지 궁금했기 때문에 귓가에 마력을 집중 시키자 목소리가 조금 더 정확히 들려오기 시작. 당연하지만 욕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근데 언니가 파란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 맞아? 아까 분명 정박아얀 제안을 무시한 걸로 끝 아닌가?” “글세…. 그건 아닐걸? 만약에 그렇다고 해도 언니 계획이 성공하면 입단이야 거의 확실한 거고 우리도 그 멍청한 연금술사한테 한 방 먹이는 것 같아서 좋잖아. 생산직 주제에….” “언니가 파란으로 가면 우리도 파란 입단 가능성이 생기는 건가?” “글세…. 그건 아니겠지만 언니가 이것저것 챙겨주겠지, 뭐. 그리고 정박아얀 교관도 별로 포기할 것 같지는 않더라고 언니가 어지간히 탐이 났나 봐.” “왜?” “아까 강의실 나가면서 계속 중얼거리더라.” “뭐라고? 난 못 들었는데….” “뭐라고 그랬더라… 분명히.” “…….” “…….” “…….” “괜, 괜, 괜찮아… 아… 아직도 기회는 많, 많으니까… 할 수 있을 거야.” “성대모사 개 웃겨.” “나도 웃음 참느라 혼났다니까.” # 211 회귀자 사용설명서 211화 불길한 느낌 (3) ‘유아영….’ 당연히 영입대상 1순위였다. 아직 직업이 없고 특성도 개화하지 않았지만 근력 잠재 능력이 영웅, 체력 잠재 능력이 전설이라는 건 확실히 메리트가 있었다. 전위로 세우기에는 성향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파란으로 데려와 집중적으로 훈련시킨다면 충분히 커버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수동적이기는 하지만….’ 교육생의 숫자가 많은 만큼 그들의 성향 역시 무척 다양하다. 크게 분류한다면 약 세 가지 정도. 1. 본인 스스로가 움직이려는 이들. 대부분의 공략조가 이쪽에 속한다. 본인이 뭘 해야 할지 지금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장 잘 인지하고 있는 이들이기 때문에 이런 부류의 인간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강의나 정해진 훈련 이외에도 시간을 쪼개고 쪼개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2. 시킨 것만 하는 이들. 비율상으로는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강의나 교육도 열심히 하고 있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하지만 훈련이나 교육 시간이 끝난 이후에는 크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3. 밥만 축내는 이들. 마지막은 굳이 언급할 가치고 없는 쓰레기들. 아무 열정도 없고 성과도 없고 교육소에서 밥만 축내는 쓰레기들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교육이 끝난 이후에는 빈민촌으로 들어가거나 당장 먹고 사는 걸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끄응….’ 정확히 말하면 유아영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 놓여 있는 인물이었다. 밥만 축내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진도를 따라오고 있었고 심지어 체력 능력치가 전설임을 보여주는 것처럼 훈련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다. 솔직히 그녀가 재능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김현성 파티에 서식하면서 1년이 지난 시점. 그동안 많은 인물의 잠재 능력과 상태창을 보면서 가끔 하던 생각이 있다. ‘의외로 흔한데?’ 의외로 전설의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야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했다. 김현성 파티에서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건 나와 박덕구가 유일했고 매번 만나고 보는 인물들도 어딘가 하나는 특출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잠재 능력이 특별하지 않은 경우에는 특성과 직업이 특수한 경우가 많았으니 눈이 높아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막상 교육소에 도착한 이후, 제대로 들쑤시고 보니 전설 등급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그러고 보니까 조혜진도 전설 등급의 재능은 없었지.’ 영웅 등급을 가지고 있더라도 충분히 강해질 수는 있다. 영웅 등급 이하와 이상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단 영웅 등급이라는 건 능력치 90을 만들 수 있다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나쁘지 않은 거 아닌가.’ 아무튼 간에 중요한 것은 그녀가 인재라는 사실 하나라는 거다. 열정이 조금 부족하기는 했지만 훈련이나 수업 도중에 낙오하지 않고 쫒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칭찬해 주고 싶은 심정. 아마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C반에서 그녀는 묘하게 외톨이 같은 포지션을 취하고 있었으니까. ‘나 때문이겠지.’ 질투는 사람을 추하게 만든다. 심지어 그녀는 내가 입을 꺼내지 전까지는 커다란 흉부를 제외하고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을 테니 모두의 반감을 사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을 때 옆에서 선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입은 거의 확실할 것 같습니다.” “아, 유아영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다른 쪽이요.” “이창렬?” “네. 현성 씨도 마음을 거의 굳히신 것 같았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조금 반신반의하신 것 같기는 한데….” “그러고 보니 예리랑 대련도 했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네. 결과가 조금 좋았으니까요. 암살자를 지망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드신다고 하시고 전투 센스가 천부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희영 씨도 보셨습니까?” “네. 입회인이 필요하기도 했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야 해서…. 근접 직군들의 전투는 잘 모르겠지만 필사적인 것 같기는 하더군요. 시작하자마자 손에 쥐고 있던 모래를 집어 던지고 급소 공격도 서슴지 않고 예리도 조금 당황했었습니다. 입 안에는 독침도 숨기고 있었던 것 같았고… 그래서 복면을 쓰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아무튼 인상적이었어요.” “아아아….” 유아영 말고도 다른 영입 대상으로 생각한 이가 있다면 이창렬이라는 궁수였다. ‘잠재 능력은 조금 창렬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민첩 능력치 영웅 이상, 근력 능력치 영웅 이하, 지력도 영웅 이상. 나머지 능력치는 전체적으로 창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녀석에게 우선교섭권 중 한 장을 사용한 것은 녀석이 근접전을 전문으로 훈련했다는 것에 있었다. 궁수로 전직을 마친 뒤에 말이다. 궁수의 상위 직업인 암살자 계열로 성장을 생각하고 있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목표가 확고하다는 건 도움이 되니까. 전투센스가 뛰어난지 뛰어나지 않은지는 내가 직접 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근성은 있는 거겠지. 길드 마스터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 밑천을 드러낸 거나 다름없으니까.’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자리에서 모래를 집어 던지고 온갖 비열한 짓으로 대련을 풀어 나가는 것 자체가 일반인은 하기 힘든 발상이다. 어쩌면 우리가 녀석을 시험한 것뿐만이 아니라 녀석도 우리를 시험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볼 정도. ‘내 스타일이 이렇다. 어때?’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연히 김현성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타입은 아니다. 오히려 녀석의 행동을 천부적인 전투 센스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니 이창렬과 합이 맞는다고 할 수 있다. 정식으로 계약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말하자면 녀석은 준 길드원인 셈. 김현성과는 식사를 함께한 적도 있다고 들었으니 계약은 거의 확정된 거나 다름이 없다. “일이 잘 풀렸네요.” “네. 우선 영입권은 이제 3장이 남은 겁니까?” “예. 사실 그 둘 이외에는 그다지 눈에 들어오는 친구들이 없어서 일단은 계속 보류하고 있기는 한데….” “시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확실히 고민이 되기는 합니다.” 이번 영입을 김현성 파티를 제외한 길드의 2파티를 만들기 위함이기도 하다. 일단은 유아영과 이창렬 이외에 어떤 식으로 파티를 구성하는 게 좋을까 하는 것이 문제. 전투 성직자로 분류되는 안기모도 2파티로 넣는다고 가정하면 일단은 전위는 단단해지지만 지금 이 상태라면 후위가 너무 빈약하다. ‘마구잡이로 뽑을 수는 없으니까.’ 규모가 커지는 것보다는 질.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주문인 만큼 어떤 파티를 만들 것인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싹수가 보이는 이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영입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이들이 많다. 파란에 들어온다는 것은 압도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과 다름없는 만큼 자원이 아까워서라도 신중해 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최근 선희영과 내가 바쁘게 지내고 있던 이유였다. 정하얀이야 원래 길드 내부적인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으니까. “희영 씨, 공략조 문서 다시 한번만 읽어보고 싶은데… 아. 먼저 읽으셔도 됩니다.” “아뇨. 아뇨. 읽으셔도 돼요. 저는 슬슬 나가려는 터라…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거든요.” “네.” 읽고 있던 서류를 이쪽에 넘겨준 선희영이 고개를 살짝 숙인 이후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인사를 한 뒤 공략조의 간단한 프로필과 성적이 적혀 있는 문서를 읽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단순히 마음의 눈으로 확인한 것뿐만이 아니라 교육소에서 어느 정도의 성장을 이루어냈는지에 대한 지표 역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심코 다음 장을 넘기자 조금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한소라. 정하얀에게 넌지시 입을 연 이후에는 별 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 당연. ‘생각보다 성적도 괜찮네. 수업도 잘 따라오고 있고….’ 수업 때도 느낄 수 있었지만 나름 괜찮은 면이 있기는 하다. 당시 말을 조금 심하게 하기는 했지만 이 여자 같은 경우에도 공략조에 속해 있는 만큼 뭔가 있긴 있을 듯. 그래봤자 한계를 맞이하겠지만 쓸 만한 마법사의 비율이 적은 만큼 중견 길드나 대형 길드에서 데려가고 싶을 만한 인재라는 거다. 붉은용병에서도 넌지시 간을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굳이 이쪽에서 제지하지는 않았다. 이토 소우타나 이설호 영감탱이 때처럼 굳이 이 여자와 드잡이질을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곧 떨어질 년이고….’ 갑작스럽게 밖에서 똑똑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입을 열자 천천히 문이 열리며 임시 집무실을 방문한 이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뭐야?” 속으로 질문을 던진 다는 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상황.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 살짝 미소 짓고 있는 한소라였으니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뭔가 자신감이 가득 찬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은 꽤나 꼴불견.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앙큼한 생각을 하고 찾아왔는지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 보였다. “어째서 여기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하신가 봐요?”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다. 교육생이 이쪽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붉은용병이랑 면담이라도 있었나?” “정답이에요.” “교육생은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야.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휙휙 내저었지만 이윽고 들려온 말에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찾아왔어요. 정확히 말하면 제안하고 싶은 이야기요. 거래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아! 물론 그전에 이전에 제가 했던 무례한 행동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고 싶네요.” “…….”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조용히 율리에나가 떠오르기 시작. 한소라가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협박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어차피 소용없잖아요? 교관들은 교육생들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는 거 아니었나요?” “절대적이지는 않아. 그러니까 조용히 왔던 길 되돌아가는 게 좋을 거다.”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라니까요.” “후우….” “파란 길드에 들어가고 싶거든요.” ‘어쩌라는 건지.’ “도움이 되실 만한 이야기일 거예요. 사실 저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지만 파란에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좋은 조건으로 영입 제의를 주신다면 충분히 들어갈 용의가 있어요.”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콧대가 올라간 것 같다. 이쪽이 ‘허허허. 당돌한 녀석’이라고 웃으면서 계약이라도 해줄 줄 아는 모양. “파란 길드에서도 나쁜 제안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마법사 인적 자원은 조금 귀하잖아요?” “넌 자격미달이야. 그리고 거래는 서로 주고받을 게 있어야 성립되는 거고… 거래라는 단어는 내가 좋아하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누가 봐도 넌 나한테 줄 게 없어 보인다.” “글쎄요. 누가 자격미달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정하얀 교관의 품에 있으니까 자기가 정말로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요?” ‘미친년.’ “그리고 당신 생각은 완전히 틀렸어요. 나는 거래를 하러 왔고 이건 당신한테도 제법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일걸요?” “네가 줄 수 있는 게 뭔데.” “당신의 평판. 그리고 모든 것.” “뭔 개소리야.” 말을 마치자마자 갑작스레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찢어버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덕분에 좋은 구경을 하기는 했지만 어째서 저런 모습을 보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거 진짜 또라인데….’ 내가 맨 처음에 차희라를 찾아갔을 때 차희라도 이런 심정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는 정말로 사리분별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야 조금 대화가 진행될 것 같은데… 어때요?” 턱을 올리며 이쪽을 내려다보는 꼴은 가관. 어째서 저런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껏 한다는 생각이 성추문이라니…. ‘죽일까.’ 조금 귀찮아지기야 하겠지만 충분히 수습할 자신은 있다. 어차피 상대는 아무것도 없는 교육생이고 여론 조작 정도는 제법 간단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물론 시연회를 앞둔 이 시점에서 교관이 교육생을 살해했다는 점을 쉽게 덮을 순 없겠지만 저 얼굴이 짜증 나서 참을 수가 없다. 때마침 바깥에는 문을 두드리며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오빠? 들어가도 되나요?” 타이밍 좋게 정하얀이 등장한 것이다. 아니, 타이밍 좋은 게 아니라 저 여자가 계산한 거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제법 머리를 쓴 것 같은 느낌. 의기양양한 표정이 다시 한번 시야에 비친다. “저도 굳이 얼굴 붉히고 싶지 않거든요? 곧 있으면 정하얀 교관이 들이 닥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정하얀이 들어오면 위험한 건 내가 아니라 이 여자다. “당신이 쌓아온 모든 걸 잃고 싶지 않잖아요? 애인 있는 교관이 교육생을 불러 성추행 논란에 휩싸이는 건 그다지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고… 정하얀 교관과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일 텐데….” “정신 나간 년.” “칭찬 고마워요, 교관님. 원래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내 말이 뭘 의도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느낌. 갑자기 맥이 빠진다. 이런 애와 잠깐이라도 드잡이질을 하려고 했다고 생각하니 현자타임이 찾아온 것이다. ‘애 데리고 뭐 하는 짓인지 참….’ “후우….”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입단 건만 처리된다면 없었던 일이 될 테니까요.” “옆에 있는 책상 옷장에 망토 하나 있을 거다. 그냥 걸치고 조용히 나가. 그럼 아무 일 없을 거다.” “네?” “지가 똑똑한 줄 아는 멍청한 년. 잠깐이라도 너랑 놀아보려고 했던 내가 너무 한심해진다. 그냥 나가라고… 그럼 그나마 건질 수 있는 게 있을 테니까.” “정말 그냥 나가도 되겠어요? 후회하실 텐데요? 밖에 있는 정하얀 교관님 목소리 들리지 않으시는 거예요?” “더 이상 말 섞기도 짜증난다. 그냥 나가. 바쁘니까.” “전 분명히 기회를 드렸습니다.” “나도 기회는 줬다. 선택은 네가 한 거야.”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이쪽이 허세를 부리는 줄 아는 모양인지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 막상 하려고 생각하니 왠지 망설이게 되는지 머뭇거리지만 내 조언대로 옷장에 있는 옷을 걸치지는 않았다. 사실 망토를 걸치고 나가라고 한 것도 변덕에 가까웠다. 왠지 모르게 이쪽이 덩달아 한심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찾아온 현타로 인한 변심이다. ‘하얀이가 우는 것도 보기 싫고….’ 사실 이 이유도 지분이 제법된다. 나도 아주 쓰레기는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인생이 망하기야 하겠지만 그나마 사람처럼 살라고 조언한 내 배려를 무시한 이후에 문을 열어버리는 꼴은 가관. “아… 오빠!” 정하얀이 마주친 것은 옷을 거의 반쯤 벗고 있는 한소라의 모습일 터. “어…….” 오랜만에 정하얀의 표정이 제대로 일그러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 212 회귀자 사용설명서 212화 불길한 느낌 (4) 저런 표정은 미친 마법사와 저주받은 신단 이후로 제법 오랜만. 나도 모르게 살짝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다. 정하얀이 그때와 달라졌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최근에는 사람을 죽인 적도 없었고 이쪽이 싫어할 만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다. 실제로 많이 얌전해진 것은 당연지사. 그녀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건 거의 확신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거다. 아무튼 간에 정하얀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한소라를 바라보고서는 잠깐 충격을 받았는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 이윽고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하는 모습은 의외로 귀엽게 느껴졌다. “끄… 윽… 히끅.” ‘나중에 달래줘야지.’ 가학적인 성향이 없다고 생각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귀엽게 보인다. 정하얀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소라의 뒷모습은 제법 기뻐보였다.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흘러간다고 느낀 것이 틀림없으리라. 대충 생각해 봐도 저 멍청한 여자의 시나리오는 무척이나 간단. 이쪽을 성추문으로 보내버린 이후에 조건을 올려 파란으로 입단하고 싶다는 개수작이겠지만 저런 방법이 먹힐 리가 없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상대가 나빴다는 거다. 대기업의 오너들도 성추문에 시달리는 지구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저런 발상이 나오는 것도 이해가 가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지구가 아니다. 나 역시 기업의 오너가 아니고 사람들의 관심을 먹고 사는 연예인 같은 포지션에 있는 것도 아니다. “끄윽… 히끅….” 조금 복잡해 보이는 정하얀의 표정. 카스가노 유노 동침 사건 때 엄하게 혼난 게 자꾸만 기억에 남는 모양인지 자꾸만 머뭇거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또 혼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에는 고개를 숙인 이후에 반대쪽으로는 우다다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건 칭찬해 줘야겠다.’ 카스가노 유노 사건 때 한번 단단히 혼낸 것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 정하얀이 저런 반응을 보이니 눈앞에 있는 멍청한 여자가 뒤를 돌아본 것은 당연하리라. “후회할 거라고 말씀 드렸었죠? 이제 누가 당신을 지켜줄라나.” “…….” “사람 잘못 건드렸다는 걸 느끼게 해줄게요. 저도 이렇게까지 하기 싫었다는 건 알아 두시고요.” “그래. 알았으니까 빨리 나가.” “정하얀 교관을 찾아갈 거예요.” “그래. 하고 싶은 거 다 해봐라.” “정하얀 교관한테 달려가서 당신한테 성추행 당했다고 말할 거고 그 다음에는 붉은용병의 교관들에게 알릴 겁니다.” “너 눈치 없다는 소리 많이 듣지?” “제가 당신한테 묻고 싶은 말입니다. 아무튼 간에 마음껏 발버둥 쳐보도록 하세요.” “그래. 기왕 찾아가는 김에 하얀이한테 마음대로 하라고 꼭 전해주고.” “끝까지 허세는….” “바쁘다니까? 빨리 나가.” 나름 비릿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뒤에 눈물을 머금은 연기는 봐줄 만했다. 안기모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다. ‘한 70점 정도….’ 문이 쾅 닫힌 뒤에는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았는데 귀중한 시간을 버린 것 같아 기분이 더럽기는 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마침 본인이 알아서 정하얀을 찾아간다고 말했으니까. ‘생각해 보면 그다지 나쁜 계획은 아니었나.’ 만약에 그녀의 작업 대상이 내가 아니라 타 길드의 일반 교관이었다면 조금은 그럴 듯하다고 박수를 보내줄 만했다. 정하얀이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시간을 노린 것도 그렇고 조금 치졸하기는 했지만 본인이 약자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당돌하기도 하고….’ 어느 중견 기업에 일반 교관이었다면…. “최소한 지금처럼은 되지 않았겠네.” 적어도 결과가 조금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같이 험한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도…. ‘제대로 건드렸지.’ 정하얀은 의외로 영악하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힘의 차이를 제법 잘 이해하고 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여자를 처리할 때와 비교해 보면 제법 많은 게 달라졌다는 거다. 본인의 사회적 위치도 아주 잘 알고 있고 상대방의 사회적 위치와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서도 생각할 만한 여유가 생겼다. 누가, 어느 정도로 나한테 중요한 사람인지도 인지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차희라나 카스가노 유노, 이지혜와 디아루기아 같은 경우에는 내게 중요한 사람이라고 이미 분류를 마쳐놓았다는 것. 강한 사람, 오빠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 쓸모 있는 사람, 조금 싫지만 해를 끼치면 안 되는 사람. 정하얀의 속마음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관찰하다 보니 알 수 있었던 부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그녀의 성향이 아예 바뀐 것은 아니다. 정하얀은 여전히 질투심이 심하고 가끔 서늘한 표정을 보내올 때가 많다. 한소라 같은 경우에는 강한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도 아니다. 쓸모 있는 사람도 아니고 사회적 위치도 굉장히 낮다. 단순한 추측이지만 이번에는 참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육체적 접촉이 없었다는 건 정하얀이 더 잘 알고 있을 테지만…. ‘반응을 보니까 까먹은 것 같고….’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장의 충격에 모든 걸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상관없지, 뭐.’ 괜스레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정하얀의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에 이번 일을 제대로 하면 제법 큰 상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후위로는 누구를 데려오지….” * * *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는데….’ 여러 가지로 많은 계획을 짰지만 생각보다 타이밍이 더 좋았다고 생각했다. 가장 베스트는 정하얀 교관과 이 상태로 마주치는 것. 아니, 사실 그것보다 더 좋은 상황은 그 멍청한 연금술사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지만 가슴 아프게도 그놈은 이쪽의 손길을 거부했다. 지나치게 여유로운 모습에 혹시 이쪽이 모르는 다른 수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끝난 거나 다름없지.’ 모든 게 완벽하게 마무리됐다. 그쪽만 숨기는 패가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오산. 어떻게든 교관들을 통제해서 소문이 확산되는 걸 막으려고 하겠지만 이쪽도 나름대로 생각하고 준비한 것이 많다. 여기에서 조금 더 확실하게 가는 것은 정하얀 교관을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것. 아까 전 오열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평범한 여자라면 거의 대부분이 그런 모습을 보일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성폭행, 추행하는 현장을 보는 게 얼마나 충격적일지는 그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본래는 붉은용병부터 찾아가려고 생각했었지만 나라 잃은 표정의 정하얀 교관을 떠올리자 이쪽이 조금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많이 혼란스러울 테니 지금 찾아가 사실을 알리고, 조금 구슬리다 보면 그 여자가 이기영의 적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는 거다. ‘시간이야 조금 걸리겠지만 정박아 하나 설득하는 건 일도 아니지.’ 붉은용병에서 찾아가 여러 가지 조사를 받기 전에 그녀를 이쪽 편으로 끌어 들이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이기영 교관과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 있다. 그게 중요하다는 거다. 정하얀이 달려간 곳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몇몇 시선이 꽂힌다. 이런 건 확실한 증거가 되니 기쁜 것은 당연지사. 계속해서 튀어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애써 비집고 눈물을 흘리며 정하얀의 방문을 두들겼지만 대답이 없다. “들, 들어갈게요, 교관님. 흐흐윽….” “…….” 눈물 일발 장전 이후에 곧바로 문을 열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정하얀 교관이 시야에 비쳤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실례인 건 알지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이 여기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오, 오해하실 것 같아서….” “끄윽… 히끅….”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교관님… 저는 그냥 이, 이기영 교관님이 잠깐 임시 집무실로 오라고 하셔서… 그냥 영입 제의를 하실 줄로만 알았는데….” “히끅….” “오해예요, 정하얀 교관님.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에요.” “오해?” “네. 이기영 교관님과 그런 사이라서 그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 “말, 말씀드리기 굉장히 힘들지만… 이기영 교관님이… 흑….” “…….” “조용히 하는 말을 들으면 길드에 잘 말해주시겠다고… 저, 저는 당연히 안 된다고 했지만….” “히끅… 오빠가 그랬어?” 그렇지. “네. 이러면 안 된다고 말씀을 드리기는 했지만… 막무가내로….” “만, 만, 만… 만졌어?” “네….” “어… 어디 만졌어?” “말씀 드리기가….” “어디 만졌냐고 묻, 묻, 묻잖아!”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목소리에는 조금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기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정하얀은 훨씬 흥분한 상태였고 심적으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게… 가슴이랑….” “흐… 흐어어어어어어엉… 히끅… 어으아으으어어엉….” ‘이건 끝났네.’ 지금쯤 멍청한 연금술사는 붉은용병에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 있겠지만 저 정박아를 끌어들이면 반쯤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 “오빠가… 히끅… 뭐라고 그러면서… 만졌어?” “말씀드려도….” “빨, 빨… 빨리 말해!!” “매력적… 이라고 하시면서, 저는 물론 계속 안 된다고….” “매력적?” “네. 교관님이 있어서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자꾸 성적으로… 흐으윽… 끌린다고 하셨어요. 강제로 입을 맞추시고.” “…….”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치마를….” “아, 아, 아래도? 히끅….” “네.” “흐… 흐으으으윽… 히끅… 어으어으어으어아앙….” ‘진짜 엄청 질질 짜네.’ 충격적인 건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불로 온몸을 꽁꽁 감싼 뒤로 저렇게 울지는 상상도 못 했다. 나라라도 잃은 것 같은 울음소리에 정말로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정도였다. 그만큼 심적 충격이 크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쪽에 조금 더 유리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부분도 떠올려 보기는 했지만 아예 말을 나눌 상태까지 치닫는다면 곤란하다. ‘증언해야 되는데… 쯧. 귀찮게 됐네….’ “흐으으으으윽… 싫어… 싫어어어… 히끅.” “충격이 크시겠지만… 정하얀 교관님.” “죽, 죽여 버릴 거야….” “그러면 안 돼요.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히끅… 끄으으윽… 어으어어엉… 죽, 죽, 죽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미친년. 이거 진짜 미친년인데?’ “일단 붉은용병에 가서 상황을 설명 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 그렇게까지는 정하얀 님도 곤란하실 테고…. 사건이 커지니까 일단은 증언을… 물론 이기영 교관님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이시면….” “죽, 죽여도 될 거야. 쓸, 쓸모없으니까. 이번에는… 그렇지? 딱 이번 만 하는 거야. 정말로 마지막이야….” “네?” “안, 안 된다고… 그러면 안 돼! 오빠가 화낸다니까. 엄청 혼날지도 몰라. 이번에는 진짜야. 이번에도 접근 금지하면 어떡해?” “뭐… 지금 뭐라고… 하시는 건가요?” “그렇지만 쟤는 아무것도 없잖아? 빨강머리랑 장님처럼 오빠한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야! 오빠가 따로 주의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고! 아직 말하지 않은 거 아니야? 아니야! 다르다고! 이번엔 그, 그, 그렇게 크게 혼나지 않을지도 몰라!” “정하얀….” “그래도 될까? 딱, 딱, 이번만 해도 되는 걸까? 응… 재능도 없는 걸… 오빠가 이번에는 착각한 거야. 아직 영입 제의도 안 했으니까. 으으응! 저건 쓸모없는 쪽이야!” “교관… 님?” “그래! 역, 역, 역시… 역시 죽이자! 안 돼…. 죽이면 안 된다니까. 죽이면 오빠한테 들킬 거야.” “어?” 철컥. “죽이지만 않으면… 그래! 죽이지만 않으면! 그럼 그렇게 하자. 그렇게!” 방 문이 잠기는 소리. “히히힛….” 영문은 모르겠지만 갑작스레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됐을 때. 작은 단검이 가슴에 꽂혀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흘러나온 혈액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진 것은 당연지사. 그렇지만 입에서는 고통 때문이 아닌 공포 때문에 튀어나온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아악!” # 213 회귀자 사용설명서 213화 불길한 느낌 (5)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한 것이 당연하다. 뜨거운 가슴을 부여잡으며 뒷걸음질 쳤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가 않았다. 어째서인지는 뻔할 뻔자. ‘마법? 캐스팅도 없었는데… 이런 게… 가능해?’ 간단한 마법은 무영창으로 완성하는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수업 중에 들어본 적이 있지만 정말로 가능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도 포박 마법의 개량형.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들기는 했지만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아… 아….”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눈에 보이는 것은 새까만 방 안.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으스스한 분위기. 방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와 떠들었던 방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가슴에 단검이 박혀있기 때문이 아니다. 마력이 방 안을 가득 장악했는지 점점 숨을 쉬기가 힘들어지는 것은 물론 괜스레 호흡이 가빠졌다. “아… 아아아악!”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입에서 계속해서 비명 비슷한 소리들이 튀어나왔다. 뇌가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저절로 떨러오며 자신도 모르는 괴성을 내지른다. “이, 이러지 마! 아아아아악!” “…….” “살, 살려줘… 살려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안, 안 죽인다니까. 죽이면 안 돼.” “가까이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싫, 싫, 싫거든. 히히히힛.” 그때 느꼈던 불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깨닫는 것은 당연지사. 착각 같은 게 아니었고 몸이 아팠던 것도 아니었다. 그때 느꼈던 공포가 다시금 턱 끝까지 차오르기 시작. 가슴에 단검이 꽂혔다는 고통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밀폐된 공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산발이 되어 있는 머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저번처럼 완전히 비틀린 입가와 어딘가 공허하게 보이는 눈. ‘어떡하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좋지?’ 다른 생각이 날 리가 없다. 삐끗하면 죽는다. 아니,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미 머릿속을 점거하고 있는 생각은 어떻게든 이곳에서 이 장소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 하나. 턱이 덜덜 떨리는 것은 물론 몸도 떨려오기 시작. ‘알고 있었어.’ 이 여자가 완전히 돌아버린 년이라는 걸 이기영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망토를 뒤집어쓰고 나가라고 했던 거야.’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을 미리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하얀 교관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저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저는 단지….” “이이이익!!” “아아아아아악!”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손등에 무엇인가가 박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도둑! 창… 창녀!” 푸슉 푸슉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며 몸 여기저기에서 불쏘시개로 지진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진다. 제대로 비명도 지를 수 없을 정도로 몸 전체를 짓누르는 고통에도 온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게 너무 답답했다. “바보! 멍청이!” “아아아아악!” 공포스럽다. 고통과 공포 때문에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자기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파악할 수 없을 정도. “아파! 아파!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너무 여러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고통이 전해져 왔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무서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쪽 눈에 감각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팔 다리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죽을 거야.’ 분명히 여기서 죽는다. 이제는 비명, 아니,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을 때 즈음에서야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지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사실은 한참 전부터 깨닫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던 부분. 단지 제대로 말할 타이밍이 없었을 뿐이었다.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기에 바빴으니까. “거짓말… 이예요. 그런 일… 없었….” “…….” “그런 일 없었….” “어….” “없었어요….” 온몸에 감각이 없어졌을 때 즈음에 겨우 쥐어짜낸 목소리. 입에서 계속해서 왈칵 왈칵 피를 토하면서 겨우 내뱉은 소리에 방 안이 묘하게 조용해졌다. 순간적으로 그 악마가 이 방을 나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윽고 귓가로 조용히 들려온 목소리에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 라고?” “거… 짓말… 이예요. 그런 일 없었어….” “거짓말.” “진짜… 진짜예요…. 다 지어낸 말….” “어?” “전부… 지어낸 말… 죄송…. 살려… 주세요.” “어? 어? 정, 정말인가요? 어. 정말인 것 같아.” “살려주세요….” “큰일 났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혹, 혹시 여기에 들어온 거 누구 본 사람 있어요?” 조금 당황한 것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방금의 말 때문에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비정상인 것처럼 보였던 아까와는 제법 다른 목소리. 평소대로의 정하얀 교관의 목소리가 맞다. 점점 의식이 흐려지는 것 같았지만 의식을 똑바로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의 질문의 대답하는 건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네… 붉은용병 단원들… 몇 명….” 아마 본 사람이 없었다면 한소라라는 인간은 이곳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으리라. 사람을 죽이는 데 굉장히 무감각해 보이는 것 같은 표정과 얼굴. ‘제길….’ 생각해 보면 신호는 몇 가지나 있었다. 창렬 오빠의 조언도 그랬고 다른 동료들도 대부분 쓸데없는 일을 하지 말라는 조언을 해줬다. 심지어는 이기영 교관도 신호를 보냈다.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본 표정이 생각난 것은 당연지사. 남은 한 쪽 눈에서 울컥 울컥 하고 눈물이 튀어나왔다. “울지 마요.” “아무 말… 안 할 게…요. 살려주세요.” “안 죽인다니까요. 포, 포션 어디 있지? 그러니까… 이건 거짓말한 벌이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네요. 한소라 교육생! 교관님을 속이면 안 된다구요!” “네….” “그, 그런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하나요?” “죄송…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어, 어떡하지. 오빠한테 들키면 안 되는데….” “괜찮… 저… 자꾸 눈이 감….” “안, 안 돼요! 죽으면!” 아까와는 온도차가 너무 달라 당황스럽다. 따뜻한 뭔가가 몸 전체에 뿌려지는 것을 느낀 이후에는 그만 정신을 놓아 버렸다. 깨어났을 때는 최소한 이 방이 아닌 어디 다른 곳에서 일어나길 기도하면서 말이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심하게 했는데….’ 정하얀이 한 건 제대로 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해버릴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최근 알게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를 모두 풀어버린 모양. 만약에 정하얀이 선희영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한소라가 무난하게 숨이 끊어졌을 거라고 하니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그녀를 몰아친 셈이다. 당연하지만 정하얀의 행동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칭찬해 주는 건 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에 선택한 방향은 다른 쪽으로 잘했다고 이야기해 주는 것. 그녀를 망신창이로 만든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나쁜 짓을 하려고 한 교육생을 혼내줬다는 일에 대해 머리를 토닥여 준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하얀의 입장에서는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은 셈이 됐다. 단순히 질투심에 미쳐 날뛰었던 게 어쩌다 보니 나쁜 범인을 잡아버린 게 된 것이다. 선희영에게 부탁해 외부의 상처만 치료한 채로 나에게 데려왔을 때는 대역죄라도 저지른 죄인의 표정으로 있다가 사실 이런 문제가 있었다고 이야기를 해주니 곧바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상을 줄 것을 요구했다. 그 태세전환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나도 조금은 당황스러웠을 정도. 아무튼 간에 조금 바쁘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와는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거다. 그사이에 시연회가 지나갔고 교육생들의 대부분이 1차 전직을 마무리 했다. 생산직의 교육을 담당하게 될 이쪽 역시 마법사들을 불러 모아 본격적으로 연금술에 대해 강의했고 파란은 이창렬을 생각보다 창렬한 연봉으로 데려왔다. ‘본인이 원했으니까.’ 연봉이나 계약금보다는 수련할 수 있는 환경을 원한 것이다. 이름이 창렬이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정신 상태가 창렬하지 않다는 건 박수는 보내고 싶어지는 부분. 녀석이 원하는 것은 조용히 지낼 수 있는 좁은 방과 자신이 무기로 쓸 수 있는 영웅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특이한 놈.’ 물론 유아영과의 이야기도 잘 되어가는 도중. 김현성은 내가 그녀를 영입하고 싶다는 걸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영입을 주장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여 오고 있었다. 여전히 2번과 3번 사이를 왔다갔다 거리고 있었지만 전설 등급의 능력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지 날이 가면 갈수록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한소라가 정신을 차리며 수업에 나오기 시작한 것은 아마 이때 즈음이었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녀의 몸에는 어마어마한 후유증이 남았다. 일단은 마력 회로가 대부분이 망가졌다. 선희영의 말로는 약 1년이 지나야 겨우 회복할 수 있다고 하니 사실상 마법사로서의 인생은 끝난 셈. 물론 재기를 아예 노릴 수 없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았지만 아무튼 간에 몸 자체가 박살이 났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거다. 결국 한쪽 눈은 회복하지 못했고 다리를 조금 절게 됐다. 아마 얻은 후유증이 더 있었겠지만 굳이 티를 내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재미있었던 부분은 내가 주관하는 연금술 강의를 들으러 찾아왔다는 것.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그때… 살려 주시려고 해서… 감사했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상대하기 귀찮아 손을 휘저으며 옷 입고 나가라고 한 것뿐이었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내가 기회를 준 걸로 받아들인 모양. 물론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한소라가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었기 때문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수업에 집중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연금술사를 전업이라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인생을 포기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꽤 재미있었던 부분은 항상 몰려다니던 이들 사이에서 그녀가 은근슬쩍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것.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새롭게 형성된 그룹 안에서 순식간에 최약체로 등극해 버린 모양인 것 같았다. ‘역시 인간은 재밌지….’ 내 기억이 맞다면 한소라를 언니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던 이들이 갑자기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한 셈이다. 내가 본 건 한소라를 병신 취급하며 키득거리는 걸 본 것이 전부였지만 아마 실제로는 더 심할 것이다. 물론 동정심이 들지는 않았다. 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 다리를 쩔뚝거리는 게 조금 측은해 보이기는 했지만 내가 있는 장소와는 거리감이 있었고 그녀의 고통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누가 봐도 괴로운 인생을 살며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한소라는 정하얀과 의식적으로 마주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어쩌다가 마주치면 몸을 부들부들 떨다 오줌을 지려 버렸다. ‘도대체 뭘 한 거야.’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괴로운 것은 그것뿐만이 아닐 것이다. 오랜 부재로 시연회에도 나오지 못한 만큼 그 어떤 길드로부터도 오퍼를 받는 일이 없는 것이 당연. 당장 교육기간이 끝나면 갈 곳이 없는 입장에 처해 있다는 거다. 사실상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 그녀에게 흥미가 떨어진 나는 곧바로 후위 찾기에 집중했다. 미래에 알고 있는 많은 인재를 데려올 거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과는 다르게 김현성이 이번 회 차의 신입들에게 큰 관심을 쏟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기억력에 반신반의하는지 간혹 들려서 차분히 교육생들의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자기가 찾는 이가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인지 훈련장에서 훈련을 하는 근접 직군들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서론은 길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해 보자면 파란은 가지고 있는 우선교섭권 중 아직 세 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거다. 오늘도 어김없이 슬쩍 차희라가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처음부터 물어오지는 않았지만 어떤 식으로 대화를 시작하든 결국 하는 말은 평소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안 내보내도 괜찮아? 자기?” “뭘.” “그 한소란가 뭔가 하는 맹랑한 계집애 있잖아.” “뭐. 됐어.” “오.” “왜?” “그냥. 조금 아량이 넓어졌다 싶어서. 자기 원래 이런 거는 끝까지 찾아가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타입 아니었어?” “상대도 상대 나름이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있었으면 그냥 죽였을 거야. 그보다 걔네한테는 보상금은 얼마나 지급했어?” “한 사람당 백 골드 정도?” “많이 안 줬네? 아니 걔네 입장에서는 많은 건가.” “어차피 망할 계획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먼저 달려와 꼰질러 줬다는 데 의의가 있으니까. 착한 애들은 아닌 것 같지만 착한 일은 착한 일 아니야? 하여간 그 한소라인가 소라 아오이인가 하는 얘도 참 불쌍하기는 불쌍해. 그딴 년들 친구랍시고 지 계획 다 불어버린 게 웃겨 죽겠다니까.” “걔네 입장에서는 여기 붙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지 뭐.” “안 그래도 보상으로 붉은용병에 입단하면 안 되냐고 물어보더라. 확 뚝배기를 깨버리려다가 참았다니까. 그건 그렇고….” 드디어 본론이 나올 모양이다. “사용할 생각은 있는 거지? 자기? 슬슬 다른 길드도 못 기다려. 최대한 이적시장을 막고는 있는데 시연회에 온 애들 말고도 중소 클랜들도 빨리 열어달라고 난리라고…. 그냥 아무나 들이는 건 어때?” “끄응…. 우리 길드 마스터가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 애초에 파란은 소수 정예를 지향하고 있고….” “나 참. 매일 김현성, 김현성. 진짜로 둘이 뭐 있는 거 아니야?” “아니라고 했잖아.” “아니면 됐고, 뭐. 아무튼 간에 사용할 생각은 있는 거지? 검은백조에 박연주 그년이 난리야 난리. 둘만 동맹이냐고 소리까지 질렀다니까.” “그쪽에는 빚도 있으니까. 한 장은 양도해 줄 수도 있어. 그리고 우리 길드에서는 유아영 영입만 마무리 되면 그냥 열어도 될 것 같고… 아, 그리고 누나. 남은 한 장은 그냥 줄 테니까. 혹시….” “안기모?” “어?” “안 그래도 그 새끼가 파란으로 가고 싶다고 난리치던데….” “안 돼? 누나?” “별로 상관은 없지만… 돈은 받을 거야. 우리 길드에서도 그 새끼한테 투자한 게 있으니까.” “그건 괜찮아.” “뭐… 충성을 다한다 어쩐다 할 때는 언제고…. 안기모, 이 거지 같은 새끼. 자기도 너무 그 새끼 믿지 마. 아주 영악하다니까. 아직도 뒤통수가 얼얼해. 들어올 때는 여기가 내 무덤이라느니 한날한시에 붉은용병의 동료들과 함께 눈을 감겠다느니 개소리 지껄이고 파란으로 간다고 하는 거 봐. 희극 배우인줄 알았어. 아주. 자기도 언제 통수 맞을지 모른다. 미리 경고하는 거야?” “알았어….” 왠지 모르게 그런 이미지 이기는 하다. 차희라와의 대화는 즐겁지만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하는 부분. 의자에 앉아 있는 몸을 일으키니 곧바로 그녀가 이쪽을 바라보는 게 시야에 비쳤다. “면담하러 가? 자기?” “응. 유아영 만나러 가야지. 얘도 빨리 영입하고 싶은데 도통 넘어오지를 않네.” “원래 큰 애들이 그래.” “성희롱이야, 누나.” “어디가 크다고는 이야기 안 했는데?” 고개를 돌리니 이쪽을 놀리는 것처럼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뭔가 찔리는 느낌이 든 것은 당연지사. 황급히 집무실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 214 회귀자 사용설명서 214화 강원도 연애 박사 (1) 이곳에서 조금 생활하다 보면 보기 싫어도 조금씩 눈에 보이는 것이 있다. 파란의 특별한 관리를 받은 우리 파티는 느낄 수 없었던 것들. 원래 인간이라는 게 대부분 그렇기는 하지만 밀폐되고 한정된 이 장소에서는 그런 행동들이 더욱더 두드러진다. 이곳에 있는 교육생들은 공략조를 제외하고는 거의 동등한 출발선에 서게 된다. 같은 훈련을 받고 같은 수업을 듣는다. 저마다 그리고 있는 그림은 다르겠지만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대우받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만큼 교육이 마무리되는 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대부분이 필사적으로 변한다. 평소에 생각 없이 지내던 이들 역시 초조해지기 시작. 적절한 예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굳이 예를 들자면 수험생에 비유하고 싶을 정도였다.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비유해도 별로 위화감이 없다. 일단 시험일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모든 교육생이 발등에 불똥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중견 길드 정도는 들어가겠지. 그래도 나 정도면 린델에 있는 주력 길드 중에 한 곳에서 제의가 오지 않을까?’ 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것. 밥벌이는 할 줄 알았을 거라고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갑작스레 현실이 앞으로 다가오니 자신들이 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 와중에 공략조, 혹은 그나마 싹수가 있었던 이들은 수시 합격이라는 형태로 길드에 오퍼를 받은 이후 모두의 부러움을 받는다. 남아 있는 이들은 조금 더 초조해 지기 시작하고 그 초조함을 표출하기 위해 뭐라도 해보려 하지만 재능이 없는 이들이 단기간에 무슨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때 즈음에는 교육생들의 눈에도 어떤 놈이 될 놈인지, 어떤 놈이 떨어질 놈인지가 보이게 된다. 분명히 같은 수업을 듣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취가 다른 이들, 어느 한 가지라도 특출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눈에 보인다는 거다. ‘저 사람은 중견 길드에는 들어 갈 수 있겠네.’ 라든지. ‘부럽다. 붉은용병으로 입단한다는데?’ 라든지. ‘쟤는 연금술 성적이 좋으니까 나쁘진 않은 거 아닌가?’ 라든지. ‘파란의 제의를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고? 붉은용병한테도 제의를 받은 거야?’ 라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누구는 이미 꽃길을 걸을 게 예정되어 있고 또 누구는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문제는 이 모든 이가 같은 강의실을 이용하고 같은 식당을 이용하며 같은 숙소를 이용한다는 것에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형성되는 것이다. 한소라에게 알랑방귀를 끼던 시녀들이나 하인들 같은 경우가 우후죽순 늘어나기 시작. 아무것도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든 끈을 잡으려고 발버둥치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굉장히 많아진다. 잠깐이지만 입단 내정자들은 상류의 삶이 어떤 건지 느끼게 된다. 모두가 치켜세워 주고 대우해 주는 삶. 당연하지만 이런 이들은 행동하나하나가 조심스럽다. ‘이창렬처럼 다가오지 마라.’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특이한 놈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시녀들과 하인들이 가져다 주는 우월감이라는 떡을 조심스레 받아먹는다. ‘인맥이니까.’ 나쁘지는 않다. 어차피 사회로 나가면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게 될 테고 그나마 싹수가 보이는 이들과 끈을 만드는 건 이런 이들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 반대의 경우. 이런 이들과는 반대로 완전히 밑바닥에 추락해 있는 이들의 경우다. 무관심을 주는 것은 차라리 양반. 자신보다 더 괴로운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을 느끼는 이들은 어디에서나 꼭 존재한다. 입단 내정자도 아니고 재능이 있는 이들도 아니다. 중간 어딘가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이들은 약자로 보이는 이들을 괴롭히고 그것으로 자신의 처지가 저 녀석보다는 낫다는 우월감으로 하루하루를 자위한다. 하루 종일 교육소에 있는 것이 아닌지라 내 눈에는 전부 보이지는 않지만 쓰레기가 되어버린 한소라를 포함한 몇몇 이는 틀림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 같은 경우에는 그나마 덜했지만 가장 위에 있다가 추락한 한소라의 경우는 완전히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거다. 모두의 기대를 받고 있던 신인이 하루아침에 마력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는 장애인이 된 셈이었으니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고 생각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 그녀가 가장 위에서 추락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유아영 같은 경우에는 당연 반대의 경우. 밑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온 유형이었다. 물론 그녀가 크게 노력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위로 쑥쑥 올라갈 수 있는 유형의 인간이었으니까. 처음 수업에 들어갔을 당시에 나는 그녀의 가능성을 칭찬한 바 있다. 그 때문에 은근히 미움을 사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진가가 드러나자 그녀를 미워하던 대부분의 교육생들은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을 것 같은 충신인 양 행동하기 시작했다. 밑바닥을 찍고 있었던 근접 직군으로서의 평가와 성적은 최하에서 최상으로, 파란에게 입단 제의를 받았다는 소문이 뇌피셜에서 오피셜이 되자 마치 역병이라도 창궐하듯 이곳저곳에 있는 쓰레기들을 모아 끌고 다니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어버렸다. 지금 내 앞에서 박덕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유아영을 보자 확실히 세상이라는 게 불공평하기는 불공평한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큼… 거 그러니까. 그 우리 파란길드는 말이요. 그… 지원이 굉장히 잘 되어 있다고 그래야 되나…. 뭐, 아무튼 그런 식이요. 나도 옛날에는 사실 별거 없었는데 말이요. 파란에 들어와서 거 완전히 달라졌다니까. 그러니까… 그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전부 해줄 수 있소.” “아… 네.” “인생을 바꾸고 싶으면 파란으로! 거, 확실하다니까! 유아영 씨도 이미 들으셨을 거 아니요.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가 나지는 않았지만 파란의 길드 마스터 형씨랑 우리 형님은 제국 8좌의 자리에 내정되어 있고 또 누님은 얼마나 마법을 잘하는지, 피융 피융! 쾅! 아주 진짜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오.” “그렇군요.” “예리라는 꼬맹이는 얼마나 잽싼지 한번 움직이면 제대로 눈에 보이지도 않고 조혜진이라는 창잡이 누님도 있는데 창을 정말로 귀신같이 다루고 또… 또! 마도학자 정연 씨는 진짜로 똑똑하다니까. 아마 형님만큼 똑똑할 거요. 한 번 본 거는 거의 잊어버리지도 않는데 행정 업무도 기가 막히게 해내서! 그리고 선희영 누님은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신성력 뿌리는 거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니까. 아무튼 같이 던전에 들어가면 말이요.” “네.” “막 와르르 밀고 들어가서 길드 마스터 형씨가 검을 탁치면 몬스터들이 막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홀로로로로로! 하고 막! 홀로롤로!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누님이랑 형님이랑 정연 씨가 마법을 막! 일부는 통통통 일부는 막 자리 잡고 본격적으로 쾅쾅쾅! 예리 꼬맹이는 활도 잘 써서 활로 막 파바바바박! 하는데 그사이에 혹시 몬스터들이 들어올라 치면 귀신같이 조혜진 누님 창이 막! 요로케! 요로케 뱀처럼 움직이고!” “풉.” “막 뭐, 손 써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정리가 된다니까! 엄청 빠르고 엄청 안전하고. 요 전번에는 말이요.” “네.” “아, 일단 한 잔 더 받으쇼. 거 고기도 팍팍 먹고! 교육생 밥이 원래 좀 부실한 거 아니요?” “아니에요. 생각하시는 것보다 괜찮아요. 숙소도 괜찮고요.” ‘덕구야! 잘하고 있다!’ 작게나마 웃음을 터뜨리는 유아영의 모습을 보고는 내 생각이 들어맞았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 김현성과의 면담은 이미 수차례. 심지어 나와도 면담을 나눈 적이 있다. 당연하지만 길드의 카탈로그를 뿌린 것도 이미 한참 전이었고 혹시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연봉과 계약금을 계속해서 높여가며 이야기를 꺼냈던 적도 있었다. 친해지려고 먼저 다가간 적도 있었지만 애초에 사교 레벨이 그다지 높지 않은 김현성이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 리가 만무. 나 역시 유아영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제법 노력했었지만 묘하게 경계하는 느낌에 더 이상 다가가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며칠 전부터 박덕구를 투입한 게 드디어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장담컨대 박덕구의 친화력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이다. 조금 취향을 타기는 하지만 꾸밈이 없고 거짓이 없다는 느낌을 들게 하니까. 처음 식사를 한 자리에서 순식간에 그녀와 친해졌던 모습을 떠올리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서로 친하고 사이가 좋으신 것 같으시네요.” “아암! 당연하지.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소? 다른 사람도 물론 전부 친하기는 하지만 형님이랑 나랑 현성이 형씨는 그 뭐라고 말해야 되나. 튜토리얼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끈끈한 유대. 그 남자들만의 말할 수 없는 뜨거운 우정! 이런 게 있다고! 이제는 눈을 감고도 형님이랑 형씨가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니까!” 저건 분명히 착각일 것이다. “튜토리얼 하니까 생각났는데 말이요. 그때 형님이 딱! 몬스터 뚝배기를 돌로 내려친 다음에 말이요. 덕구야, 내가 할 수 있으면… 너는 더 잘할 수 있다. 키야! 내가 그 말 때문에 던전에서도 용기를 낸 거 아니요? 원래는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었는데 용기도 생기고 막!” ‘저 이야기는 몇 번째야.’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조금 낯부끄러워진다는 것이었지만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저번에도 해주셨어요, 덕구 오빠.” “그랬었나?” “네. 그래도 매번 들어도 기분 좋아지는 이야기네요. 두 분이 정말 친한 게 느껴져서.” “하하하. 실제로도 조금 그렇습니다. 물론 튜토리얼 던전에서 만난 덕구와 하얀이, 현성 씨와의 인연도 소중하기는 하지만 저희 파란 길드가 우선으로 하고 싶은 건 일단은 가족 같은 분위기라서 말입니다. 다른 길드원과도 허물없이 지내고 있는 편입니다.” “아! 그렇군요.” “네. 실제로 모두가 가족처럼 친하니까요.” “가족처럼 친하다마다! 형님이랑 누님은 곧 진짜 가족이 될지도 모르니까.” “아… 역시 두 분은 서로 사귀는 사이였군요? 들려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확실하지는 않아서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 단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둘을 이어준 게 바로 강원도 연애 박사, 박덕구요!” “네?” “내가 중간에서 다리도 좀 놔주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거 아니요. 누님이 조금 소심해서 내가 등을 떠밀어 줬다니까. 큼.” “강원도 연애 박사요? 그럼 두 분은 튜토리얼에서 만나서 사귀시기로 하신 건가요?” “네. 일단은 그렇습니다.” 뭔가 흥미로워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런데 관심이 있나.’ 아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가기는 했지만 아직 20대 초반인 그녀가 이런 연애담에 흥미로워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 내 입으로 막 이야기를 꺼내던 찰나 먼저 입을 열어온 것은 박덕구였다. “그게… 원래는 누님이 저렇게 천재이기는 하지만! 큼! 튜토리얼 던전에 있었을 때에는 조금 안 좋은 시기도 있었다오.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막 사람들한테 밉보여가지고….” “네.” “막 나쁜 사람들이 누님을 괴롭히고 따돌리고 이랬다는 거 아니요. 그때 우리 튜토리얼 던전에서는 우리 형씨가 생존자들을 한곳에 모으고 보호하고 있었는데… 아무튼 배분한 식량도 일부로 누님한테는 조금만 주고 그랬다니까! 이 썩을 놈들이!” “아….”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심지어 어떤 놈이! 누님을 막 어떻게 해보려고 해서! 아니, 이 이야기는 조금 그렇고. 아무튼 누님이 말은 못 했지만 당시에는 무척 힘들었을 거요.” “그렇군요.”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게 우리 기영이 형님이었지.”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쪽팔려.’ 그렇지만 나쁘지 않아. 내가 있는 쪽을 힐끔 힐끔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아영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으니까. “그때 기영이 형님이 우리 누님한테 이것저것 챙겨주기 시작해서 말이요. 물론 여기까지는 형님도 자기 여동생이 생각나서 누님을 돌봐준 거라고 말했었는데… 그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지 않소. 누님이 형님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까 내가 여기에서 이것저것 조언도 좀 해주고….” “네.” “원래 강원도에서 연애 박사 박덕구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큼. 큰일은 아니었소.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지는데 아무튼 간에 내가 누님한테 여러 가지 조언도 해주고 형님 몰래 팁도 팍팍 넣어주고 그러다 보니까 둘이 갑자기 가까워지고 그랬다는 거지. 누구든 강원도 연애 박사 손에 걸리기만 하면 아주 그냥!” “그렇군요.” “그래도 두 사람의 사랑이 싹 튼 것은 결국에는 두 사람 때문이 맞소. 누님이 용기를 냈고 형님도 결국에는 누님을 좋아하게 됐으니까. 두 사람의 사랑이 아름답게 마무리된 건 사실은 내 역할이 아니라 두 사람의 역할이 가장 컸다는 거요. 강원도 연애 박사는 그냥 거들기만 했다는 거지.” ‘이 돼지 새끼….’ 슬쩍 나를 바라보며 엄지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바라보니 괜스레 심사가 뒤틀리기는 했지만 적어도 유아영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모자라 마지막 말에는 제법 감명을 받은 것 같은 느낌. 그녀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응?” “괜찮으시면 혹시 상담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입단에 관련된 이야기이기도 해서요….” 당연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 215 회귀자 사용설명서 215화 강원도 연애 박사 (2) “물론! 연애 상담하면 박덕구 아니요?!” 조금 뜬금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당황한 나와는 다르게 박덕구는 벌써부터 콧김을 뿜으며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녀석이 정말로 강원도 연애 박사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온 상담 신청에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모양인 것 같았다. ‘누구지?’ 갑자기 맥이 빠지기는 했지만 나 역시 궁금해지기는 마찬가지. ‘혹시 김현성인가.’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는 덕구와 나와는 다르게 전형적인 미남일 뿐만이 아니라 언행이나 품성이 바르니까. 내가 여자였어도 녀석을 쫓아 다녔을 거다. 심지어 능력도 있으니 육탄전은 물론 주위 계집애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철벽 수비를 했을 게 분명하다. 충분히 마수에 걸려들 만하지. ‘아니면 교육생 중에 있나?’ 교육생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 길드의 제안을 미루고 미룰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로 궁금해지기는 했지만 어차피 답은 나오게 되어 있으니 기다리는 것이 인지상정. 굳이 나가달라고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내가 들어도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거,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쇼.” “저….” “아무거나 다 괜찮다니까.” 잠깐 숨을 들이마신 이후에 말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은 의외의 발언이었다. “사실은… 만나는 친구가 있는데요.” ‘이건 또 뭐야.’ “엉?” “저도 이기영 교관님과 정하얀 교관님처럼 튜토리얼 던전에서….” “아아아….”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이미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조금 의외. 그렇지만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야….’ 남자라면 이런 여자를 싫어할 리가 없다. 성격은 그렇다고 쳐도 외형이 일단 압도적이다. 얼굴은 조금 평범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전설적인 흉부의 위용은 모든 단점을 커버하고도 남는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튜토리얼 던전 안에서도 그녀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존재했으리라. “그럼 두 사람은 이미 사귀고 있는 게 아니요? 그다지 도움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것보다 유아영이 교내에 남자친구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분명히 처음에는 항상 혼자였던 걸로 기억. 다른 망둥이들이야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제법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조금 스토커스럽기는 했지만 그녀가 어떤 인간인지 파악하기 위해서였고 실제로도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못 봤지만….’ 단언컨대 남자친구라고 부를 만한 놈은 보이지도 않았다. 대화를 나눌 만한 친구도 없었고 항상 구석에서 혼자 행동했었다. 그녀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룰 때까지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시정잡배같이 생긴 양아치들밖에는 없었다는 거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예상이 가는 상황이 있기는 하다. “아니요. 조금 상황이 복잡해서요.” “큼. 사랑의 큐피드 역할은 할 수 없어서 유감이지만 그래도 상담은 상담이니까. 뭐,사랑의 고민이 있는 거 아니요? 그렇다면 이 박덕구지!” “네.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오빠랑 저는 튜토리얼 던전에서 만났거든요. 괴물한테 당할 뻔했던 걸 우연히 오빠가 구해줘서요. 딱히 누가 먼저 사귀자는 소리도 안 했고 상황이 상황인 만큼 연인다운 뭔가를 해볼 시간은 없었지만….” “음음…. 그렇구만. 우리 형님과 누님도 그랬지.” “그… 김현성 파란 길드 마스터님이 생존자들을 구해주셨다고 했나요?” “아암. 대단했다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빠도 비슷했어요. 할 수 있는 내에서 생존자들을 구했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위험한 길을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아마 저희들 때문에 공략에 참가하지 못하셨을 거예요. 공략조는 아니었지만 튜토리얼 던전에서 전직을 하셨으니까요.” “오!” “아무튼 간에 중요한 건 저도 오빠를 좋아하고 오빠도 저를 좋아했다는 거죠.” “거, 선덕선덕하구만.”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씀드리기는 힘들지만… 아! 또 무슨 일이 있었냐면요….” 조금은 더 들어주고 싶었지만 더 이상 기다리기가 힘들다. 두 명의 투머치토커의 이야기가 끝나려면 오늘 밤을 새도 모자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쓸데없는 일화를 듣는 걸 차단하고자 먼저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다행히 주제가 삼천포로 빠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잠깐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유아영 교육생?” “아! 네.” “조금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남자친구 분과 함께 다니시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물론 교육생이라는 특성상 그럴 수 없다는 걸 이해는 합니다만… 평소에 매번 혼자 계시는 것 같아서….” “아아아아…. 사실은 튜토리얼 던전에 나와서 막 교육을 받기 시작했을 때 오빠가 조금 거리를 두자고 하셨거든요. 아무래도 훈련에 조금 더 집중해야 하는 시기였으니까 이해는 돼요. 조금 쓸쓸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플레이어 유아영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풍요로운 가슴] ‘호구 당한 거구만….’ 퍼즐이 딱딱 짜 맞추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공략조는 아니었지만 일단 1차 전직을 마친 남자친구. 그리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던 여자친구. 세세한 설명 없이 곧장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사시, 공무원, 의대 같은 곳에 합격해 인생이 펴지길 기다리고 있는 남자가 여자를 뻥 차버린 상황과 굉장히 유사하다. ‘나 같은 쓰레기네 이거….’ 하나를 알면 열이 보이는 법이다. ‘이기영 같은 새끼.’ 아마 튜토리얼 던전에서 유아영을 끌고 다닌 이유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막말로 이야기하자면 성욕을 풀 대상이 필요했을 수도 있고 자기 대신 죽어줄 사람이나 유사시에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아직 권태기 같은 건 아니고요. 원래 오빠 성격이 조금 냉정한 편이라… 그래도 속은 따뜻한 사람이에요.” 말하자면 그녀는 어차피 버려질 사람이었다는 거다. 튜토리얼 던전에서 살아남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기 때문. 만약 버려야 할 상황이 왔다면 가차 없이 버려졌으리라. 이 다음 이야기도 뻔하다. 1차 전직을 마치고 튜토리얼 던전에서 나온 이후에 본인이 제법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달았을 테고… 자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었던 이 여자의 존재가 귀찮아졌을 것이다. 재능을 볼 수 없는 놈의 눈에는 이 여자의 장점은 가슴이 큰 것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물론 데리고 다닌 보험이 보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을 터. 태세전환하기에는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다. “이제 교육도 거의 끝나가니까요. 오빠도 예전처럼 다시 다가와 주시더라고요. 아직 길드에 제의를 받지는 못했지만 다른 클랜과 길드에서도 분명히 데려갈 거예요. 제가 고민인 건….” “아마 남자친구 되시는 분이 같은 길드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신 모양이군요. 혹은 파란에 함께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물어보라고 말하실 수도 있고요.” “어. 어떻게 아셨나요?” 그야 너무 뻔하니까. “그냥.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기영 교관님 말이 맞아요. 조금 보잘 것 없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만 저한테는 중요한 문제라서…. 사실 누가 기대를 해준 게 처음이라서요.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교관님이 해주신 말씀 때문이고… 또 교관님 마음에 응하고 싶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계속 오빠가 마음에 걸려서.” “어째서 함께 넣어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민폐를 끼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착하네.’ 눈 딱 감고 함께 들어가 달라고 말했다면 어쩌면 대충 자리를 만들어 줬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대우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정말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것은 그런 말을 꺼내는 게 민폐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마 저런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호구 잡힌 거겠지… 자리를 만들어 봐야 되나.’ 남자 쪽은 인성이 쓰레기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일단 계약만 성공시킨다면 쓸 수는 있다. 파티원으로는 쓰지 않더라도 다른 부분에서 쓸 곳이 생길지도 모르고 배짱부려 연봉을 올려달라고 개거품을 물지만 않는다면 쓰레기 한 명으로 인재를 구할 수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거래. 유아영이나 되는 사람을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짜증 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위치와 힘이라면 쓰레기 한 명 컨트롤하는 건 일도 아니다. 수틀리면 쓱싹 해버려도 되고…. ‘대충 골드 몇 푼 쥐어주면 되겠지, 뭐.’ 물론 진지한 연애 상담을 해주는 방법도 있지만 사실상 이게 제일 간단한 방법이라는 거다. 아니면…. ‘그냥 떨어뜨리는 게 낫나.’ 누가 봐도 호구처럼 보이는 가슴과 맹해 보이는 얼굴. 입만 조금 털어주면 쓸개고 겉옷이고 나발이고 다 줄 것 같은 표정을 보니 작업을 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형님, 제가 한마디 해야겠소.” 덕구 녀석이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연 것이다. “어….” “아영 씨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네?” “헤어지는 게 좋은 것 같소.” 조금 당황한 것 같은 얼굴. 새삼스레 진지한 표정의 박덕구가 조금은 낯설었다. 유아영의 반응을 살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 혹시나 네가 뭔데 나와 우리 오빠의 관계에 대해 단정 지을 수 있냐, 분노하는 것은 아닌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을 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지만 솔직히 좋은 사람 같지는 않소.” ‘너무 돌직군데….’ 조금 더 조심스럽게 말해주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녀석의 목소리는 무게감이 있다. ‘강원도 연애 박사 킹덕구….’ “아….” “사랑의 메신저로서 두 사람을 축복해 주지 못한다는 건 가슴이 아프기는 하지만 그 사람과 함께 하기에는 아영 씨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요. 내가 파란 길드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니까. 솔직히 형님이라면 아영 씨와 함께 그 사람을 길드로 데려오는 건 문제도 아닐 거요.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뭐, 그렇지.” “우리 길드의 티오에도 당연히 공석은 있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잘되는 걸 응원해 주고 등을 밀어주지는 못할망정 발목을 붙잡고 등에 업히려고 하는 게 대관절 남자라고 할 수 있겠소? 튜토리얼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시간을 두자는 것도 그렇고 너무 치졸하고 속이 옹졸한 사람이요. 아영 씨가 잘되니까 다시 다가온 게 아니라는 보장은 어디 있겠소.” “아….” 이 새끼는 뭔데 갑자기 이렇게 날카로워. “거, 뜬금없지만 옛날이야기 한번 하겠소. 예전에 우리 동네에 오영희라는 아지매가 한 명 있었는데 말이요. 남편 되는 놈이 다른 여자랑 눈 맞아서 서울로 도망갔다고 합디다. 아직 돌도 안 된 아기를 내버려 두고 말이요. 내가 막 고등학생되었을 때 그 영희라는 아지매가 하던 식당이 대박이 나서 막 다른 지역에 2호점, 3호점도 내고 막 그랬었는데… 그 바람난 남편이라는 놈이 쓰벌, 다시 되돌아와서 받아달라고 했다는 거 아니요.” “아….” “결국 그 아지매가 애도 딸려 있고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줬는데 말이요. 그 아지매 병으로 죽고 난 다음에는 도망친 그 여자랑 같이 와서 돈 펑펑 쓰면서 삽디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많다는 거요. 아영 씨는 딱 봐도 착할 것 같아서 하는 이야긴데….” “네….” “물론 내가 이런 충고를 해줄 정도로 오래 산 것도 아니요. 내 말을 들으라고 말하는 그런 꼰대는 아니고…. 위에 있는 입장으로서 말하는 것도 아니지만… 아! 술잔을 나눴으니 이제는 친구 아니요. 친구 입장에서 말하는 거요. 이건 아영 씨가 선택해야 되는 거요. 한번 잘 생각해 보쇼. 그 사람이 정말로 아영 씨가 생각하는 인간이 맞을까에 대해서 잘 한번 생각해 보쇼.” ‘이 돼지 갑자기 왜 이래.’ “만약에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다면 사랑의 메신저 박덕구가 전력으로 사랑을 응원해 주겠다니까.” 짧지만 나쁘지 않았다. 일단 목소리에 무게감이 실려 있으니 왠지 모르게 조금은 집중해서 듣게 되는 목소리다.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데 저 조언 아닌 조언을 정면으로 받은 유아영이 어떤 반응을 할지는 뻔할 뻔자. 단순히 꼰대나 자신을 파란으로 들여오기 위한 말이 아니라는 건 본인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애 박사 킹덕구의 조언을 조금 더 무게 있게 받아드릴 수 있다. 아마도 지금 혼자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맞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자꾸만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 콩깍지가 한 풀 벗겨지면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게 떠오르는 법이라는 거다. 만약에 정말로 그 남자친구라는 놈이 진심으로 유아영을 대했다면 캥기는 게 없겠지만 나는 녀석이 쓰레기가 맞다고 백퍼센트 확신할 수 있다. “잘… 잘 모르겠어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표정은 이미 울상인 것을 보니 몇 가지 생각나는 정황이 있는 모양. “만, 만약에 덕구 오빠 말… 이 맞다면… 어… 어떡하나요? 어떻게 해야 되나요?” 박덕구가 슬쩍 내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어왔다. “그야 우리 형님이 복수해 줄 거요!” 조금 귀찮아지게 생겼다. # 216 회귀자 사용설명서 216화 귀여운 복수 (1)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것을 가치로 둔다. 나 같은 경우에는 생존이었다. 김현성 버스에 올라타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했고 없는 재능으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움직였다. 목숨을 걸고 차희라를 찾아가 주사위를 던져보기도 했고 성향이 맞지 않는 미친 늙은이를 한 큐에 보내버리기 위해 하루 종일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위로 올라갈 수 있는지에 대해 하루 종일 고민하고 생각했었다는 거다. 다른 사람을 폄하하면 안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다른 가치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내게는 유아영의 고민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이해는 되지만….’ 물론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녀는 이제 20대 초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온갖 괴물이 사는 곳에서 마음을 둘 장소가 필요했을 것이다. 확실히 메리트가 있으니까. 일단 연인이라는 약속 자체가 서로의 정신적인 안정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유아영의 생각을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 튜토리얼 던전에서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정신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김현성에게 투영해 보면 되는 건가.’ 당연하지만 나 역시 따뜻한 회귀자의 품에서 엄청난 심신의 안정을 느꼈던 것으로 기억. 유아영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김현성에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걸 생각해 보면…. ‘이제야 이해가 가네….’ 지금 나와 그녀가 시도해 보려는 실험 카메라의 예를 들어봐도 무척 재미있다. 혹시나 김현성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제3자가 있고 이 제3자가 나에게서 김현성을 뺏어가려고 한다고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눈알이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거다. 슬그머니 옆을 바라보니 뭔가 초조해 보이는 유아영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오빠한테는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덕구 오빠 말을 들어보니 마음에 걸리는 게 몇 가지 있어서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요.” “유아영 교육생 입장에서는 조금 충격 받으실 수도 있으실 것 같은데….”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요. 그보다 이제는 정말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가요? 대화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들리지 않는 건가요?” “네. 확실합니다. 물론 마력에 민감한 이들이나 감각이 예민한 전사들한테는 통하지 않겠지만 여기는 훈련소니까요. 저희 모습을 보거나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교관들이 전부일 겁니다. 공략조도 볼 수 없을 겁니다.” “대단하네요. 마법이라는 건. 몸을 투명하게도 만들 수도 있다니. 아니, 이 경우에는 정하얀 교관님이 대단한 건가요?” “아마 다른 사람은 이 정도로 완벽하게 이런 마법을 다룰 순 없을 겁니다.” 공격 마법 말고도 정하얀이 잘할 수 있는 종류의 마법을 꼽으라면 당연 이런 종류의 스토킹 마법들이다. 정하얀은 위치 추적, 투명화, 수면 마법 같은 종류의 마법에 독보적일 정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스폐셜리스트다. 오죽하면 마도 길드에서는 정하얀 학파를 만들어야 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 ‘아마 내가 모르는 마법도 개발해 놨겠지.’ 단순한 가설일 뿐이지만 그녀가 내 심장 박동까지 체크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다. “아무튼 천천히 기다려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잡담이라도 하면서 기다려 보죠.” “올, 올까요?” “유아영 교육생은 그 사람이 오지 않는 걸 바래야겠죠.” 수업이 끝난 이후 빈 강의실로 찾아온다는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불합격이다. “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본 이후에 구석진 자리로 향하려던 때였다. 강의실의 문이 드르륵 열리기 시작한 것. 실험녀나 실험남 둘 중에 하나가 등장할 거라고 예상한 내 생각과는 다르게 모습을 보인 것은 네 명의 여성.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세 명의 얼굴. 그녀들에게 붙잡힌 한 인형을 보니 곧 등장한 여성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소라 시녀들이네.’ 물론 이제는 한소라를 괴롭히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녀들에게 붙잡힌 여자가 누구인지는 뻔할 뻔자. 팔과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고 안대를 쓴 채로 다리를 쩔뚝이고 있는 한소라였다. ‘허미….’ 이런 꼴을 보려고 투명화 마법을 받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강제 이벤트가 조금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유아영이 알면 안 되는데….’ 대외적으로 한소라는 정하얀의 마법 실험실로 부주의하게 들어갔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이쪽을 어떻게 해보려다가 벌을 받았다고 발표할 수도 있었지만 한소라의 꼴을 보면 그렇게 발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성희롱인가 뭔가 지껄이기에 화끈하게 폐인으로 만들어 줬습니다!’ 누가 봐도 후자로 발표하는 것보다 전자가 나아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표면상으로 아무 죄 없는 정하얀은 마법 실험실을 부주의하게 관리한 죄로 교관 자격을 박탈. 정하얀의 마법을 훔치려고 한 도둑 한소라는 소정의 위로금과 함께 정하얀의 실험실을 무단 침입한 죄를 묻지 않기로 하며 파란의 넓은 아량을 교육생들에게 보여줬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으니 저들이 여기 들어오든지 들어오지 않는지는 상관없지만 혹시라도 시녀1, 시녀2, 시녀3이 성희롱 사건이니 뭐니 지껄이는 것을 유아영이 듣는다면 충분히 난처해 질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거다. ‘100골드씩이나 받아 처먹었으니 아마 입은 다물고 있을 거야.’ 시녀들도 한소라를 보고 느끼는 게 있을 테니 입은 다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에 시녀들과 한소라가 이곳에서 이벤트를 벌이는 건 그다지 반갑지 않다. 이쪽이 생각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강제 이벤트가 벌어지기 시작. 끌고 온 한소라를 밀어버리니 그녀가 비틀거리며 강의실 끝의 구석에 쳐 박혔다. 당연하지만 이죽거리는 시녀들의 목소리도 귀에 들려온다. “꼴좋네. 여왕인 척하더니 이제는 완전히 장애인 다 됐네, 한소라 씨. 풉.” “그렇게 깝치고 돌아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이기영 교관님 말이 딱 맞았지. 원래 가장 설치고 다니는 애들이 가장 빨리 엿 되잖아.” “…….” “표정 봐라. 표정 봐.” “표정 풀어. 애꾸년아.” “왜. 우리가 마음에 안 드나 보지.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어? 자기한테 알랑방귀나 끼던 시녀들이 이제는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충분히 짜증날 만하잖아? 속으로는 우리 욕 무지하게 했을 거야. 그런데 소라 씨, 이제는 주제 파악 좀 하실 때도 됐잖아요!” “…….” 본격적으로 한소라를 쥐어 패는 시녀들을 보니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물론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정도가 조금 심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야야. 너무 심하게 때리지는 마.” “괜찮아. 티 안나. 붕대로 감고 있는 곳 위주로 조지면 되거든.” “아니, 저러다 죽으면 안 되잖아. 안 그래도 몸도 안 좋은데. 걷는 것도 힘들어 하는 년인데….” “걱정 마. 원래 이런 독한 년들은 맞을 체력이 따로 있어.” 이건 좀 명언이라고 생각했다. “비명 한 번 안 지르네. 진짜 독하다니까. 저기요, 소라 언니. 말 좀 하세요. 네? 당신이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우리들이 더 화나는 거라고 생각 안 해봤어요?” “…….” “야. 그거 가져와.” “아… 알겠어.” 물론 조금만 더 생각해 보니 어째서 저들이 한소라에게 저런 태도를 취하는 줄 알 수 있었다. ‘열등감 때문이구만.’ 공교롭게도 네 명 다 연금술 수업을 받는 학생들이다. 한소라 같은 경우에는 마력 회로가 박살 나 어쩔 수 없이 연금술을 선택했다고 한다면 나머지 세 명의 학생들은 연금술 과정을 이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는 거다. 재미있는 부분은 저들 중에 가장 우수한 성적을 가지고 있는 게 한소라 그녀라는 것. 애초에 나름대로 똘똘한 머리를 가지고 있으니 이해력도 빨랐고 필사적으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독하긴 독하지.’ 재능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녀는 누가 봐도 필사적이다. 아마 저 시녀들은 그게 아니꼬울 것이다. 완전히 망한 줄 알았던 여왕이 슬금슬금 기상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리가 없다. 유아영도 저들을 그냥 두고 보기가 쉽지 않은지 이쪽에 말을 건네기는 했지만 나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말, 말려야 되지 않을까요? 이기영 교관님?” “아니요. 일단은 지켜봅시다. 물론 세 명의 교육생은 징계 처리할 거고 한소라 교육생은 나중에 따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저희가 이곳에 투명 마법을 쓰고 숨어 있었다는 게 들켜서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아!” “개인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고….” “네? 뭐라고 하셨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한소라와 시녀들에게는 우리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 귓속말은 왜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일단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시녀 중 한 명이 가방을 들고 오며 이죽거리는 게 시야에 비쳤기 때문이다. “이게 뭐게?” “…….” “어디서 많이 본 물건 아니에요? 소라 언니?” “내… 내놔.” “우리 소라 언니가 드디어 아가리를 활짝 열었네. 풉. 왜 그렇게 무시하더니 이제는 이게 소중해지기라도 했나 봐요?” ‘히야… 진짜 악마들인데 저거….’ 시녀 중에 한 명이 꺼낸 건 다름 아닌 개인 연금키트. 실습용으로 학생들에게 분배한 싸구려 연금키트였다. “내놓으라고!” 저항하지 않던 한소라가 몸을 일으키며 쩔뚝거리며 달려들었지만 정상적인 다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손에 있는 물건을 빼앗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농락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나 조금은 가슴이 짠해진다. “내… 놓으라구!” “성대모사 개 웃겨! 푸하하핫!” “내놓으라고 했잖아!” “내놓으라구 했잖아아아! 싫은데? 안 내놓을 건데? 야, 받아!” “응!” 어린애를 놀리는 것처럼 연금키트가 든 가방을 서로 던지고 노는 꼴은 가관. 한 사람이 개인 연금키트를 놓치자 한소라가 쩔뚝거리며 다가가 연금키트를 꽉 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시녀들은 그 모습을 보고 그녀를 쥐 잡듯이 잡기 시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방을 놓지 않는 모습은 꽤나 강단이 있다. “우리 소라 언니 진짜 독하단 말이야. 야, 저거 부수자.” “어? 정말? 실습용으로 나온 비품인데?” “뭐 어때. 지가 알아서 하겠지, 뭐. 다시 받아오든 말든 그건 지 책임이고 우리는 알 바 아니야. 어디까지나 지 부주의로 지가 부순 게 될 테니까.” “하지 마….” “뭘 하지 마? 소라 언니, 이거 부수지 말아달라고요? 싫은데 어떡하나? 언제는 생산직 주제라고 했으면서 지금은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끌어안고 있네. 야, 잡아!” “하지 말라고 했잖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으니까.” “사과하기에는 늦었어요, 소라 언니. 풉.” 장담하는데 저 세 명은 미래에 훌륭한 악당이 될 수 있는 자질을 타고 났다. 나도 꽤나 쓰레기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저들이 하는 모습을 보니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해 볼 정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쓰레기 삼 자매는 어떻게든 가방을 발로 밟으려고 했고 한소라는 필사적으로 가방을 끌어안으며 안에 있는 내용물을 보호하고 있다. 마치 박덕구가 나를 보호해 주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모양새. 그렇지만….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 결국 두 명이 한소라를 직접 붙잡고 나머지 한 명이 신명나게 연금키트를 밟기 시작. 싸구려이기 때문에 가방 안에 있음에도 키트들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했잖아! 너희들!” “싫은데? 싫은데? 푸훕….” “내가 잘못했으니까 하지 말라고!” “싫은데? 야. 소라 언니 운다.” “흐으윽… 하지 마….” 쓰레기 삼 자매의 쓰레기력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차게 된다. 타인을 보며 쓰레기라고 느낀 것은 꽤 오랜만이다. 부서진 가방을 부여잡으며 끄윽 끄윽 울고 있는 한소라를 바라보니 저들도 흥이 식기는 식은 모양. 결국에는 발길을 돌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어야지, 소라야. 이제 주제 파악 좀 되지? 적당히 나대라고. 알았어? 괜히 열심히 하는 척하면서 동정 사는 거, 그거 역겹거든…. 애들아 이만 가자.”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 소라 언니, 우리는 이만 가볼게요.” “퉤! 아스가르드로 꺼져! 애꾸 오딘년아!” “푸하하하핫 개 웃겨. 오딘이래!” 당연하지만 한소라는 저들을 따라 나가지 않았다. 가방 안을 확인하고는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오열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괜스레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해진다. “흐어어어어엉….” 다시 한번 강의실의 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선수 교체인가.’ 씁쓸한 표정으로 한소라를 바라보고 있던 유아영의 표정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1번 선수 쓰레기 삼자매가 나간 이후 2번 쓰레기가 등판한 것이다. # 217 회귀자 사용설명서 217화 귀여운 복수 (2) ‘쯧.’ 강의실을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2번 쓰레기. 조금 훤칠한 키와 외모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당연하지만 혼자 온 것은 아니다. 옆에 붙어 있는 것은 제법 괜찮은 외모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플레이어 김기철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 - 김기철] [칭호 - 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 - 25] [성향 - 이기적인 낙천주의자] [직업 - 전사] [능력치] [근력 - 18/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민첩 - 18/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체력 - 18/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지력 - 18/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내구 - 18/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행운 - 18/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마력 - 08/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총평 - 그저 그런 능력치와 스탯을 가지고 있습니다. 별 볼일 없는 쓰레기입니다.] 당연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확인을 해도 특이사항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가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녀석의 성향이 유아영과 같은 낙천주의자라는 것. 물론 유아영은 ‘소심한’이 붙어 있고 녀석은 ‘이기적인’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둘이 제법 잘 맞는 부분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흥미로워졌다. 아무튼 간에 갑작스러운 손님 두 명이 강의실 문을 드륵 열고 놀란 표정을 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아무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먼저 온 손님이 있으니 신경 쓰일 만도 하다. 한소라를 확인한 이후에는 곧바로 말을 주고받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떡하지? 오빠? 다음에 와야 되나?” “또 언제 기회가 올 줄 알고… 이제 시간도 없는데 교관들이 안 돌아다니는 강의실도 여기밖에 없고.” “나중에는 실컷 할 수 있잖아.” “그래도 싫어. 지금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 저기요.” “…….” “죄송한데 여기 쓰시는 거 아니면 저희 좀 써도 되겠습니까?” “…….” 당연하지만 한소라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만무.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몸은 이미 나갈 채비를 마치고 있었다. 이미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서는 닭똥 같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한쪽 손으로 쓱쓱 닦으며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가관. 쩔뚝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꼴이 마치 비 맞은 강아지를 생각나게 한다. ‘진짜 불쌍하네.’ 물론 린델에는 한소라보다 불쌍한 사람이 널려 있기는 하지만 바로 앞에서 이런 이벤트를 목격하게 되니 괜스레 가슴이 쿡쿡 찔러왔다. 먼저 시비를 준 게 저쪽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동정심이 생겨나기는 한다는 거다. “뭐야? 대답도 없고. 몰골은 또 왜 저래? 오빠 쟤 알아?” “쟤 한소라잖아.” “한소라?” “응. 공략조였던 애.” “정말로? 그 마법사 한소라 말하는 거 맞아? 기철 오빠?” “너는 왜 이렇게 바깥소식에 둔감해?” “저거 하나 모르고 있다는 게 꾸지람 당할 일이야?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렇지. 관심이….” “쟤 정하얀 교관 연구실 털려다가 걸렸잖아. 욕심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운이 없었던 거지, 뭐. 하필 정하얀 교관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실험하고 있는 걸 잘못 건드렸다가 폭발했다더라.” “아아아….” “천재 마법사의 연구 결과물이니 훔치고 싶은 게 당연하다만은 정신이 나가도 보통 나간 게 아닌 거지. 덕분에 마법사들 중에서 쟤 원망하는 사람 많아. 정하얀 교관 강의가 조금 중구난방에다가 알아듣기 힘들기는 했어도 확실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거든. 나도 마력 운용 방법은 정하얀 교관 때문에 배운 거고…. 전사들한테도 도움이 되는 거니까 말 다했지, 뭐.” “아아아… 그런 거구나.” “잘못은 한소라가 했는데 정하얀 교관이 자격 박탈 당하니까 나로서도 아쉽지. 정하얀 교관이랑은 조금 더 친해졌어야 했는데….” “왜? 오빠 파란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직 확정된 건 아니야. 파란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갈 확률도 높고 그래도 그런 사람이랑 인맥을 만들어 놨다는 것 자체가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여기는 이미 사회야. 멍청하게 시간 보내는 것보다는 교관 하나하나랑 전부 친해져도 나쁠 게 없어.” “나한테 잘해주는 것도 그런 이유야?” “글쎄… 알고 싶어?” “됐어. 나도 오빠 덕분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뭐. 나도 캐쥬얼한 게 좋으니까.” “역시 네가 이래서 좋다니까.” 슬쩍 옆을 보니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유아영이 시야에 비쳤다. 괜스레 움찔거린 것은 당연지사. 그렇지만 옆에 있는 유아영은 정하얀이 아니다. 단검을 꺼내들지도 않고 캐스팅을 하고 있지도 않은 모습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마음에 걸리던 게 저 여자인지 아니면 다른 사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의 실험남과 실험녀는 제법 끈적끈적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중.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누가 봐도 가까워 보이는 모습이었고 무척 친근해 보이기까지 했다. ‘쯧쯧.’ [플레이어 김기철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호색한 여우] 고유 기벽을 확인하자 너무나도 예상 가능한 기벽이 튀어나왔다. ‘여자 좋아하는 모양이네.’ 예상하기는 했지만 확인하면 할수록 정이 별로 가지 않는 타입. 벌써부터 인맥을 관리하거나 교관들과의 관계를 신경 쓰는 것을 보면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 잘 처신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알맹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저런 놈들 치고 제대로 된 놈들을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여자 친구 있는데… 오빠 이래도 되는 거 맞아?” “너는 매일 그거 물어보더라.” “그야 그 편이 조금 더 흥분되니까. 오빠는 안 그래?” “조금은 그런 면도 있기도 해.” “유아영한테는 잘해야지. 그래야 파란으로 가는 거 아니야?” “이미 들어간 거나 다름없어. 아니면 다른 길드로 갈 수도 있고… 쓰다 버릴 여자가 보석일 줄 누가 알았겠어? 튜토리얼에서 데리고 다니길 잘했다니까.” “그래도 나 같으면 조금 더 조심하겠다. 물론 오빠랑 이러는 거 나야 나쁘지는 않은데… 불안하지도 않아? 그 젖소가 눈치가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냥 정착해 버려. 몸매도 좋고.” “몸매 좋은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 걔는 재미가 너무 없는 게 흠이라고… 결혼은 해도 연애는 하기 싫은 종류란 말이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그럼 연애는?” “그 소리가 듣고 싶은 거였어? 너랑 해야지. 이 계집애야.” “좋다아.” 쪽쪽거리기 시작한 한 쌍의 바퀴벌레를 보고 있자니 속이 조금 안 좋아지기는 한다. 당연하지만 내 옆에 있는 유아영 보다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일말의 기대감은 있었는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올 때는 빤히 쳐다보기는 했지만 이야기가 진행되고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몸을 떨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내 손을 꽈악 움켜쥔 것은 물론.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소라도 그렇고….’ 오늘만 여자가 서럽게 우는 걸 두 번이나 목격한 셈. 괜히 찝찝해진다. “그만 나갈까요?” “…….”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더 있어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요.” 강의실 문이 스스로 열리는 걸 보고 깜작 놀라기는 하겠지만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조용히 유아영을 데리고 문을 열자 깜작 놀랐는지 잠깐 안이 소란스러워지기는 했지만 저들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유아영의 상태는 한소라의 모습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아까 전에는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지금은 계속해서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안에 있는 감정을 쏟아내고 있는 중. 위로해 줘야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툭툭 어깨를 두드리자 이쪽으로 꽉 안겨 왔다. ‘이럴 줄 알았어.’ “꺼으어으어어엉… 끄으으윽….” 박덕구가 원망스러워지는 것이 당연. 이 사단을 만들어낸 강원도 연애 박사는 현재 발 뻗고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지만 가슴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위용 때문인지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흐어어어엉… 꺼어어엉….” 생각보다도 더 신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튜토리얼 던전이라는 배경의 특성상 더 많이 의지하고 더 많이 가까워졌을 터. 저렇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아본 적이 없어 제대로 공감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녀가 어느 정도로 가슴 아파하는지는 충분히 전해진다. 조금 진정한 것은 한참 뒤. “괜찮으십니까?” 아직도 훌쩍이고 있기는 하지만 방금보다는 훨씬 낫다.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진정이 되지 않는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오래 껴안고 있으면 린델에서 쉬고 있는 정하얀이 등장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슬그머니 그녀를 떨어뜨린 뒤에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유감입니다.” “아뇨… 훌쩍. 괜찮아요. 저도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고… 곰곰이 잘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많았으니까요.” “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눈으로 보니까… 흐으윽….” 다시 한번 눈물을 장전하려는 듯한 느낌. 슬픔에 공감이 가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열심히 위로의 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그녀의 파란 입단은 확실시 된 거나 마찬가지. 그렇지만 한 가지 일이 더 남아 있었다. 내가 벌인 일이 아니라 박덕구가 벌인 일이었다. ‘복수?’ 물론 그녀의 상태나 성향을 보면 크게 원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배신당한 마음 정도는 갚아주는 걸 원하고 있을 수도 있으리라. ‘죽이거나 폐인으로 만들 정도는 아닐 테고….’ 그건 내 주위에 있는 정하얀, 이지혜, 차희라 같은 사람들의 솔루션으로 어울리는 방법이지 이런 여자나 병아리들을 위한 해결책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마침 딱 맞는 적당한 방법이 생각나기는 했지만 굳이 움직이기도 귀찮은 일. 이제 한 가족이 될 사람을 위한 서비스로는 나쁘지 않지만…. ‘조금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최근 열심히 움직였으니 한순간 즐기는 여흥으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마침 조용히 입술을 깨문 그녀가 입을 열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제법 확고한 목소리였다. “파란에 입단할게요.” ‘나이스.’ “잘 생각하셨습니다. 본래 최고의 복수는 성공이라는 말도 격언도 있으니까요. 아마 전 남자친구 되시는 분 배가 꽤 아플 겁니다. 연봉도 계약금도 모두 최상으로 대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딱히 그런 마음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자신이 버리고 농락한 여자가 이렇게 아까운 사람인 줄 알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겁니다.” “좋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순히 말이 아니라 현실을 이야기 한 것뿐입니다. 유아영 씨, 당신은 재능이 있고 아름답고 똑똑한 여성이에요. 저기 강의실에 있는 멍청이한테는 사실 아깝죠. 유아영 씨만 괜찮으시다면 재미있게 골탕 먹일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추천 드리고 싶은데… 아, 물론 이건 파란에 입단하게 된 입단 선물입니다.” “네? 아뇨 굳이 그러실 필요는….” “저와 잠깐 만나도록 하시죠.” “네…?” “아. 물론 며칠 동안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육기간이 끝날 때까지만도 괜찮습니다. 본래 저런 남자가 개거품을 무는 상황이 자기 거라고 생각했던 여자를 다른 남자한테 빼앗기는 상황이거든요.” “…….” “그것도 자기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에게 말입니다. 뭐, 여러 가지 면에서요. 성적으로든 재력이든 권력이든….” “아….” 아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본래는 혼자 슬픔을 삭일 작전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대충 이야기를 꺼내자 그럴 듯하게 들리는지 혹하는 표정을 보내오고 있었다. 사람의 심리가 이래서 재미있다. 속에서 끌어 오르는 게 없을 리가 없다. 방금 그녀가 눈으로 본 장면은 충분히 충격적인 장면이다. 슬픔이 아직 가시고 있지는 않겠지만 가슴 한편에서는 복수심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스물스물 올라오고 있다는 거다. ‘곧바로 파란으로 들어오고 싶다는 것도 그런 이유일 수도 있고….’ 파란에 들어와서도 계속해서 질질 짜며 슬픔에 젖어 있을 바에야 차라리 화끈하게 털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속에 계속 담고 있으면 이후에 폭발할 여지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얀이나 희영 씨처럼 인성이 망가질 염려도 없겠지.’ 귀엽다면 귀엽다고 할 수 있는 복수.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사정없이 끄덕이는 유아영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그럼… 부탁드려요, 교관님.” 대신 기왕 할 거면 확실하게…. ‘오랜만에 똘똘이도 봐야겠네. 화이트 폴도 부르고….’ 차는 남자의 자존심이니까. # 218 회귀자 사용설명서 218화 귀여운 복수 (3) 유아영을 마지막으로 붉은용병과 파란은 실질적인 우선교섭권을 모두 사용했다. 물론 파란에 한 장이 남아 있기야 했지만 굳이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문제. 더 이상 타 길드와 클랜들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충분히 민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이적시장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미 몸이 달아올라 있었던 클랜들과 길드가 한순간에 훈련소로 쏟아진 것은 당연지사. 내가 보기에는 이번 신입들의 잠재능력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지만 붉은용병에서 직접 훈련을 진두지휘했다는 인식 때문인지 굉장히 반응이 좋았다. ‘실제로 다들 상태는 좋으니까.’ 파란이나 붉은용병, 검은백조, 혹은 마도 길드 같은 중견 길드가 보기에는 보잘 것 없을지는 몰라도 중소 클랜에 입장에서는 쓸 만한 훈련병들을 가지고 갈 수 있는 셈이니 기분이 좋은 것은 당연하다는 거다. 애초에 싹이 없는 것들에 대한 대우는 여전했지만 최소한 검을 휘두를 줄 아는 녀석들의 대한 대우가 꽤 좋아졌다. 덕분에 붉은용병이 관리한 이 훈련소는 유래 없는 입단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붉은용병에서는 타 클랜과 길드들에게 훈련소에 대한 정보와 교육생에 대한 정보를 개방했고 마찬가지로 훈련소에 있는 교육생들에게도 각 클랜과 길드에 대한 정보들을 공유했다. 카탈로그나 팸플릿 같은 길드 안내서들이 교육생 사이에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쉬는 시간에 토론을 나누거나 두 개의 카탈로그를 두고 고민하는 교육생을 보는 일이 흔해졌다. 거의 완벽하게 통제되던 정보들이 우후죽순 풀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교육 일정이 남아 있는 가운데에서 훈련소가 제법 떠들썩해지며 훈련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기는 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견학을 오는 스카우터들의 눈에 띄기 위해 아직까지 오퍼를 받지 못한 신입들은 이를 악물고 훈련에 임해야 했고 기존에 입단이 내정되어 있던 신입들 역시 자신들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 사실 수료식만을 앞두고 있는 현 상황은 훈련 시간을 제외하면 조금 풀어져 있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묘한 경쟁심리가 도처에 깔려 있었다. 물론 경쟁하는 것은 교육생뿐만이 아니었다. 각 클랜과 길드에서도 조금 과열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경쟁이 붙었다. 제대로 된 영입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입단 예정자에게 선물을 뿌린다든지, 다른 클랜을 비방한다든지 하는 일도 생겨났고 어떻게든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의 덩치를 불리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하는 걸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말이다. 이를 테면 길드 마스터나 스카우터들이 조금 더 고급스럽게 입고 등장한다든가. 힘이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잘 훈련된 정예와 함께 등장한다든가. 길드 식당을 자랑한다든가. 클랜의 복지나 길드의 예산, 심지어는 숙소의 퀄리티와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입을 터는 일이 잦아졌다. 의외로 효과가 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파란은 그들의 경쟁에 굳이 참여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길드 카탈로그도 뿌리지 않았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어째서인지는 뻔할 뻔자. ‘굳이 홍보할 필요가 없으니까.’ 파란의 영입은 사실상 이창렬과 유아영으로 끝을 맺었다. 더 이상 다른 신입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 귀찮게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 길드를 홍보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굳이 그런 귀찮은 짓은 하지 않아도 어차피 소문은 돌게 되어 있다. 훈련소 안에서 계속해서 정보가 풀리고 있었으니까. 시장이 열린 이후 이곳은 더 이상 밀폐된 장소가 아니게 됐다. 입단 제의와 길드에 대한 정보들이 담긴 문서를 읽는 신입들은 각 길드의 스카우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조금씩 파란의 김현성과 이기영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알게 됐고 당연하지만 그런 종류의 소식은 급속도로 훈련소 내에 자리를 잡았다. 당장 나만 해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완벽하게 바뀌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파란의 부길드 마스터이자 제국 제8좌로 내정된 것은 물론 신성 제국의 명예주교. 보너스로는 용병여왕의 정부. 꽤나 자랑스러운 타이틀 중에 교육생들이 몇 가지나 알고 있고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저들이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굳이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최근의 내 모습을 본다면 느끼는 바가 있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게 그리폰인가 봐….” “이기영 교관님 전용이야?” “린델에도 네 마리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한 마리는 붉은용병의 길드 마스터가 가지고 있고 한 마리는 검은백조 길드 마스터가 나머지 두 마리는 파란 길드 마스터와 부 길드 마스터가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누구한테 들었어?” “클랜 누나한테….” “아아아…. 결국 들어가기로 한 거구나?” “응. 덕분에 이것저것 들었는데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더라.” “진짜 장난 아니다. 자동차는 값으로 따질 수나 있지. 저건 값을 책정하기도 힘들다던데….” “신성 제국의 명예주교로 발탁된 사람인데, 뭐. 저 정도는 보통이겠지.” “뭐?” “그것뿐인 줄 알아? 아, 이건 아직 확정된 건 아닌데 말이야….” 뭐, 대충은 이런 식이라는 거다. 물론 보여준 것은 화이트 폴뿐만이 아니다. 이 세계에도 명품이라는 것이 있다. 지금까지는 대충 연금 실험복을 입고 움직였다면 마무리를 앞두고 있는 지금은 대놓고 비싸 보이는 옷들을 골라 입을 수 있었던 것. 물론 아직까지 교육생들이 이런 걸 구별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뭔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분위기라는 게 있는 만큼 이쪽을 올려다보는 시선을 즐길 수 있었다. ‘수업도 거의 마무리고….’ 사실 오늘은 교육이 있는 날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적으로 훈련소를 찾아온 만큼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다. 훈련소의 정문 앞에 적당히 자리를 잡자 숙소에 들어가거나 각자 할 일을 위해 훈련소를 빠져나가는 교육생들이 시야에 비쳤다. 귀에 조금만 마력을 집중해도 여기저기에서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오늘도인가 봐.” “부럽다….” “나는 별로 안 부러워.” “거짓말하고 있네. 어차피 여기는 일부다처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라는데….” “사랑은 없잖아.” “돈 많으면 없던 사랑도 생겨, 이년아. 어차피 이곳은 위험한 곳인데… 이기영 교관의 품으로 들어가는 게, 사랑 찾는 거지 놈이랑 같이 사는 것보다 천 배는 더 행복할 거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봐?” “뭐?”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능력 있는 사랑꾼보다는 만수르 세 번째 부인 자리가 더 땡긴다는 거야.” “왠지 공감이 되네….” “어디 졸부 세 번째 부인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만수르 세 번째 부인이라고….” 인사를 해오는 학생들에게는 손을 한 번 들어 올리는 것으로 끝. 친근하게 달라붙어 오는 교육생들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그런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괜히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여교육생들은 내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아는 만큼 말을 걸지 않는 것도 당연하리라. 잠깐 기다리자 왠지 모르게 기뻐 보이는 유아영이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세의 기적이야, 뭐야.’ 정문을 빠져나가던 교육생들이 길을 비켜주는 것은 순식간이다. 처음과는 다르게 유아영의 표정도 제법 당당하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관심과 질투를 부담스러워했던 것도 이제는 예전 이야기. 꽤나 시선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대외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마 그녀보다는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은 겉모습부터가 그렇다. 유아영의 몸에 걸쳐져 있는 것들도 대부분이 명품. 누가 봐도 같은 교육을 받고 있는 교육생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채 살짝 입을 여니 곧바로 대답해 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진짜 공주님이네….’ 실제로 여기저기에서 그녀를 부럽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그럼 갈까요?” “네, 이기영 교관님.” 활짝 웃는 모습도 연기가 아닌 것 같은 느낌. 당연하지만 그녀가 걸치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내가 선물해 준 것들이 맞다. 심지어는 손에 있는 반지들도 마찬가지. 처음 저 선물을 줬을 때를 떠올려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물론 재미있는 것은 유아영의 반응이 아니라 그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유아영은 공식적으로는 파란의 입단 제의를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 처음 저런 종류의 선물을 보냈을 때는 파란에서 그녀에게 바치는 소정의 뇌물 같은 것은 아닌지에 대한 추측이 있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져다 바치는 게 단순한 선물의 의미를 넘어서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무 당연하지.’ 처음 한 번이야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그게 두세 번, 심지어 대여섯 번을 넘어가면 바보라도 생각이 바뀌는 법이다. 자연스럽게 훈련소 내에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이기영 교관이 유아영 교육생에게 관심이 있다.’ 라는 소문을 시작으로. ‘파란의 입단시킨 것도 자기 옆에 두고 싶기 때문이라더라.’ 같은 느낌의 소식도 있었다. 그렇지만 마냥 긍정적인 시선이 오는 것들은 아니었다. 나 같은 경우야 어차피 여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으니 그다지 상관없었지만 갑작스럽게 공주님이 된 그녀에게 쏟아지는 불편한 시선들이 확실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불편한 시선들이 부러움이라는 감정으로 바뀌기까지 불과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단순한 질투심으로 그녀를 매도하기에는 그녀의 레벨이 너무 높아져버렸으니까. 질투 같은 저열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할 수 있는 법이다. 교육생들의 입장에서 유아영의 존재는 너무 높이 날아가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됐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올려다보는 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대기업 총수를 질투하는 노예는 없다. 보통 그들이 질투하는 건 족쇄가 큰 노예지 자신들의 위에 있는 사람은 아니다. 슬쩍 손을 내미니 이쪽의 손을 잡고 그리폰에 올라타는 모습도 이제는 익숙하다. 조금 달라진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자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안… 어울리나요?” “아니. 너무 자연스러워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런 말을 듣는 건 그것대로 부끄럽네요.” 말은 그렇게 내뱉으면서도 슬그머니 아래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기분이 좀 어떻습니까?” “솔직히 좋아요. 사실 할 때까지만 해도 조금 회의감이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기분이 더 좋아서 깜짝 놀랐어요.” “그거 다행이군요. 오늘은 뭐 특이사항은 없었습니까?” “네. 몇몇 사람이 이기영 교관님이랑 사귀는 게 맞냐고 물어본 적은 있었어요. 정하얀 교관님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쓸데없는 걸 물어보기도 했고요. 아직 사귀는 건 아니라고 말하니까 깜짝 놀라더라고요.” “그렇군요.” “아, 그리고 그 사람이….” “네.” “이제는 이기영 교관님을 만날 필요 없다고 하더라고요.” “불안해진 모양이군요. 하핫.” “네. 저한테 말은 안 했지만 분명히 불안해하고 있을 거예요. 안 하던 스킨십도 하려고 하고…. 물론 짜증나서 아프다고 하고 나왔지만… 풉. 처음에 조금 친해져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이 정도까지 오게 되니 자기가 버림 받을까 봐 무서운가 봐요. 덕분에 요즘 들어서 괜히 다가오려는 게 짜증난다니까요.” 대충 머릿속으로 상황이 어떨지가 그려졌다. 틀림없이 처음 선물 공세를 하기 전까지는 이기영 교관과 친해져도 나쁠 건 없다고 말했던 놈이 갑작스레 만나지 말라고 했다는 건 불안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는 증거다. ‘불안하지 않은 게 이상하지….’ 돈 많고 능력 있는 남자가 자기 동아줄을 계속해서 잡아채려고 하고 있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똑똑하고 머리 좋은 놈이 김현성에게 달라붙으면 불안감에 잠도 자지 못할 거라 확신할 수 있다. “또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요즘 달라진 것 같다고… 내가 아는 아영이가 맞냐고 오히려 쏘아 붙이더라고요. 솔직히 그때는 너무 황당해서 머리통을 쥐어뜯고 싶었어요.” “한 대 쳐버리지 그러셨습니까.” “정말로 그래도 되나요? 말씀해 주신 계획에는….” 조금 말이 많아진 것 같은 느낌. ‘얘 재미 들렸네.’ 한참 재미있을 때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고 싶으신 건 전부 해보셔도 됩니다. 애초에 계획이라고 해봤자 그냥 그림을 그린 정도고… 가장 중요한 건 아영 씨의 기분이 풀리는 거니까요.” “아… 네!”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219 회귀자 사용설명서 219화 귀여운 복수 (4)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조금 진부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쏟아지는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것도 곧 적응이 됐다. 물론 저들의 부럽다는 표정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게 단순한 연기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고 이런 것에 크게 가치를 두지는 않았으니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변 사람의 반응이 김기철에게 끼치는 영향이었다. ‘나쁜… 새끼.’ 다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짜증나는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 눈과 귀로 보고 들었던 역겨운 장면과 목소리가 자꾸만 들려오는 것 같아 참기 힘들 정도였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울컥 하고 눈물이 쏟아지려 한다. ‘짜증나.’ 그 사람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이번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지금 이 시간에도 방 안에서 혼자 누운 채 울음을 터뜨렸으리라. 처음에는 이기영 교관과 함께 이런 일을 꾸미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는 했지만 확실히 도움이 된다. 적어도 꽉 막혀 있는 답답한 가슴이 잠깐이나마 해방되는 느낌은 기분이 좋다면 좋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간질간질하게 마음 속 구석에 있는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는 감각. 뭐라고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답답함을 해소시켜준다는 게 중요하리라. 숙소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을 때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영아.” 들리는 목소리가 누구인지는 뻔할 뻔자. “왜?” “왜라니. 너 보고 싶어서 왔지.” 김기철이었다. 언뜻 보면 여유로워 보이지만 얼굴이나 행동 곳곳에 초조함이 나타나고 있었다. 울컥 하고 눈물이 튀어나오려고 한 것도 잠시였다.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은 여유가 생긴다. 아마 저 남자의 표정에 담긴 불안감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 시간에 나와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교육생들은 12시 이후로는 숙소에서 못 나오게 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너도….” “오빠랑 나랑은 상황이 다르다는 거 오빠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나는 외출권을 받은 거고 오빠는 무단으로 나와 있는 거잖아.” “정확히 말하면 무단으로 나와 있는 건 아니야. 나도 일이 있어서.” “무슨 일? 어디 클랜에 오퍼라도 받았어?” “뭐. 비, 비슷해.” “어딘데?” “중견 길드. 린델이 아니라 캐슬락 쪽에 있는 길드인데 거인 길드라고 알지 모르겠네.” 들은 적이 있기는 있다. 캐슬락 공성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한 이후로 메이저로 올라오게 된 길드였다. 본래 캐슬락은 작은바위라는 길드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지만…. ‘송정욱이라는 사람이 캐슬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후에 올라왔다고 했나….’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기영 교관님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분명 그렇다. 린델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교육생들이 노리고 있는 길드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으리라. 최근에는 입단 컷도 제법 높아졌기 때문에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김기철의 성적으로는 갈 수 없는 길드였다. ‘답답해.’ 조금씩이지만 짜증이 치미는 것은 당연지사. ‘답답해….’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속이 굉장히 답답했다. 물론 이 답답한 기분이 눈앞에 있는 남자가 잘되는 것을 보기 싫다는 저열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짜증나….’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 자체가 굉장히 짜증나는 상황.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게 툭하고 한 마디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 오빠 성적으로 갈 수 있는 곳 아니잖아.” 말을 하면서도 아차 싶을 정도. 조금 심하게 말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조금 일그러지는 김기철의 표정을 보니 왠지 모르게 답답함이 가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오빠 성적으로는 길드가 아니라 클랜 단위로 알아봐야 되는 거 아니야?”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뭔가에 홀린 것처럼 움직이는 입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하게 말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말이 저도 모르게 쏘아져 나가고 있다. “계약금이랑 연봉도 없이 가는 거면 그만두는 게 좋아, 오빠. 이기영 교관님한테 들었는데… 그런 경우는 정식 길드원이 아니라 몬스터 사체 운반 같은 일에 쓰일 가능성이 높다더라.” “너….” “전부 오빠 위해서 하는 말이야. 연봉이랑 계약금은 얼마나….” “꽤 돼.” “정말?” “응. 아영이 너랑 같이 가겠다고 말하니….” “나는 동의한 적 없는데. 왜 그걸 오빠 마음대로 결정해?” 기가 차서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을 지경.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너. 정말로 파란으로 갈 거야?” “그게 뭐 어때서. 계약금이랑 연봉 모두 최고로 대우해 준다고 하셨어. 복지 문제도 다른 대형 길드를 웃도는 수준이고.” “같이 들어가자고 한 건….” “나는 같이 들어가겠다고 말한 적 없어. 어디까지나 오빠 혼자만 그렇게 생각했었던 거지.” “거기 소문 별로 좋지 않은 거 몰라? 이기영이라는 사람.” “교관님이 왜? 처음에 이기영 교관이랑 친해지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한 건 오빠 아니었어? 오빠가 그렇게 하라고 했잖아. 그리고 절대로 나쁜 사람처럼은 안 보이던 걸. 그 사람, 오빠가 아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야.” “나도 들은 게 있지만… 여자관계도 복잡하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어. 이기영 교관이 얻은 권력…. 그게 정당한 방법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 같아? 겨우 연금술사가?” ‘복잡한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라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애써 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 “지구도 아닌데 이곳에서 그게 흠이야? 오히려 당당해서 좋던데. 어디서 몰래 헛짓거리 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능력 있는 사람은 대부분 그렇게 한다더라.” “그래서… 그게 좋아 보인다는 거야?”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나쁘지도 않아. 그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기영 교관이 너한테 보내는 관심이 진짜일 거라고 생각하지 마, 아영아. 네가 너무 착해서 세상을 잘 모르나 본데… 그게 다….” “관심이 진짜건 아니건 그게 중요해?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전부 다 합쳐서 얼마일 것 같아? 아마 오빠는 모를걸. 오빠는 평생 일해도 내가 걸치고 있는 것 중에 아무것도 사지 못할 거야. 나도 그냥 평범한 건 줄 알았는데 이 반지 있잖아. 2만 골드짜리라더라.” 눈앞에 있는 남자의 표정이 구겨질 때마다 속 안에 꽉 뭉쳐 있던 답답한 감정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틀림없이 저 감정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열등감.’ 지금 저 남자가 보이고 있는 건 분명 열등감이었다. “너… 그 사람이랑… 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내가 몸이라도 팔았을 것 같아?” “똑바로 이야기해. 유아영, 너….” “그랬으면 어쩔 건데?” 다시 한번 얼굴이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뭔가가 등 뒤로 찌릿찌릿 오는 것 같은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떤 것은 당연지사. 뭉쳐 있던 감정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면서도 마치 알콜중독자가 술을 찾는 것처럼 멈출 수가 없다. “너!” “그 사람… 있잖아. 대단한 건 재력이랑 권력뿐만이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야.” “모든 면에서 오빠 같은 사람이랑은 비교도 안 된다고. 꼭 내 입으로 이야기해야 돼? 여자로 태어나서 기쁘다고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니까.” “유아영!” 핏발이 선 눈과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이 보였다. ‘이런 뜻이었구나.’ 이기영 교관님이 했던 말이 괜스레 떠오르기 시작했다. ‘본래 저런 남자가 게거품을 무는 상황. 자기 거라고 생각했던 여자를 다른 남자한테 빼앗기는 상황이거든요.’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확히 무슨 상황을 말하는지 몰랐지만 지금 이렇게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이기영 교관님이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등 뒤로 계속해서 찌릿찌릿거리는 감각이 느껴지는 것은 물론, 가슴 속에 뭉쳐 있는 답답함이 한꺼번에 터져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 좋아.’ 저 열등감에 찌든 얼굴이, 괴로워하는 것 같은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함이 가신다. 조금 더 심한 말을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괜스레 입술을 오물 거렸을 때 든 생각은 하나. ‘이대로 끝내도 되는 걸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다. 그렇지만 이 남자가 괴로워하는 걸 조금 더 오래보고 싶고, 오랫동안 길게 보고 싶다. 지금보다 더 괴롭게 만들어 주고 싶다. 계속해서 머릿속으로는 이와 비슷한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괴로웠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저 사람도 괴로워야 돼.’ 그게 맞다. ‘너도 배신당한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알아야 돼.’ 다시 한번 이기영 교관님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흘려들으라는 듯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맴도는 목소리였다. ‘복수는 기분이 풀릴 때까지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찝찝하다고 하거나 의미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제대로 된 복수를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에요. 정말 제대로 된 복수를 하면 말입니다. 가슴이 뻥 터질 정도로 기분이 좋답니다.’ 확실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조금 더 이 기분을 느끼고 싶다. 조금씩 조금씩 아껴서 느끼고 싶다. 결국에는 천천히 그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화나서 해본 말이야. 실제로 그런 적은 없어.” “너….” 잠깐이지만 무척 안심하는 듯한 표정이 눈에 보인다. “…….” “…….” “아영아.” “왜?” “너 요즘 좀 이상한 거 알아?” “…….” “내가 요즘 좀 섭섭하게 해서 그런 거야? 혹시 잠깐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해서 그래?” “몰라….” “다 너를 위해서 한 말이었어. 나는 네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믿었고 내가 네 앞길을 막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렇지만 지금 네 모습을 보니 확실히 요즘 네게 너무 소홀했던 것 같다.” 개소리. 당연히 거짓말이라는 건 알고 있다. “미안해, 아영아.” “…….” 그렇지만 자꾸 입꼬리가 올라간다. 당연하지만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서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다. 한 번 더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다. “지금은 오빠 얼굴 보기 싫어.” “미안하다. 정말로… 그래도 이거 하나 만큼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거.” “일단 들어갈게.” “아영아! 유아영!” “그리고….” “응?” “사과는 받아들일게, 오빠. 내일은… 오랜만에 같이 밥이나 먹자.” 살짝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여는 순간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김기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괜스레 등 뒤가 다시 한번 찌릿했다. * * * 차희라의 방 한쪽에 비치된 쇼파에 앉아 문서를 훑어보고 있었을 때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위는 아직도 안 뽑았어? 자기?” “응. 2파티 만들어야 되는데… 도통 쓸 만한 애들이 없네. 기왕이면 신입으로 뽑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경력직으로 데려와야 되나봐.” “아마 조금 있으면 마도 길드에서 나오는 마법사도 조금 있을걸. 재계약만 하지 않으면… 우리 쪽에서도 몇 명 데려오려고 하는데 그쪽에서 알아봐.” “그런 것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쪽이 키워보고 싶어서. 불순물 없는 상태로.” “아. 그런 거 좋지. 그래서 신입을 뽑는 거기도 하고….” 확실히 경력직도 괜찮기는 하지만 같이 커야 할 두 명의 신입이 더 있는 만큼 후위 역시 신입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 최근까지도 계속해서 마음의 눈을 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거다 하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번에 마음에 드는 신입을 데려오는 건 힘들 것 같았다. 보통 마법사라는 게 마법에 대한 이해력, 마력에 대한 재능 그리고 필사적인 노력을 삼박자로 겸해야 하는 만큼 쓸 만한 이들이 흔하지 않다는 건 이해하고 있었다. 정하얀의 반의 반만 되더라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후우….” “바쁜 와중에도 그런 장난치는 건 조금 즐겁나 보네.” “은근히 재미있어.” “그건 자기 마음인데…. 유아영 일은 우리 세컨드한테 말한 거지?” “아… 응. 대충. 하얀이는 지금 린델에 있으니까. 뭐,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누나는 괜찮아?” “나는 원래 이런 거 좋아해. 조금 통쾌한 맛이 있잖아. 여기에 즐길 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나는 저런 공주님 대접 받기에는 너무 잘나신 몸이라 저런 종류의 카타르시스는 느낄 수가 없잖아? 대리만족이나 하는 거지 뭐.” “왜, 공주님 대접 받고 싶어?” “너 요즘 많이 기어오른다. 응?” 실실 입꼬리를 올리자 곧바로 역시나 곧바로 제제가 들어왔다. 조금 움찔한 것도 사실. 동등하게 말을 하게 된 지금도 여전히 차희라는 무서운 면이 있다. ‘그야 그 꼴을 봤으니까….’ 붉은 눈을 하고 침을 흘리며 미친년처럼 다가오는 모습이 아직도 선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너 방금 그때 상상했지.” “아니야… 누나.” “표정만 봐도 알아. 내가 잊으라고 하지 않았어?” “잊으라고 말한다고 잊을 수 있는 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길드 직원이 보고사항을 알렸다. 며칠 전부터 오라고 전문을 날렸는데 이제야 도착한 모양. 간만에 똘똘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기영 님. 저… 손님이 오셨습니다.” “제 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조금 있다 찾아가겠다고 전해주시고요.” “저기… 문이 너무 좁아서 들어올 수 있을지….” “네?” “그… 실례지만 밖으로 나가셔서 직접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아니 그럴 필요는… 디아루기아가 함께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지금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평소와는 다른 우렁찬 목소리. 자연스럽게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가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자 뭔가 익숙하지 않은 형상을 한 괴생명체가 시야에 비쳤다. ‘똘똘이?’ 마치 대형견, 아니, 맹수라도 되는 것 같은 크기. 순간적으로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똘똘아… 너 왜 이렇게 자랐어?’ # 220 회귀자 사용설명서 220화 성장한 똘똘이 (1)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봐도 분명히 똘똘이였다. 멍하니 선 채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디아루기아도 함께 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녀보다는 똘똘이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봤을 때만 해도 분명히 강아지 정도의 크기였던 걸로 기억. 덩치 큰 호랑이 정도로 자란 모습을 보니 당황스러워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이쯤 되니 녀석이 귀여운 게 아니라 무섭게 느껴진다. 주변 냄새가 신기한지 여기저기를 킁킁거리고 있는 녀석이 내 쪽을 바라보는 것은 순식간. 방어구라도 차고 나왔어야 하는 건 아닌지에 대한 걱정이 든다. 눈에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보였기 때문이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엑!” 거대한 괴성을 내지른 이후에는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물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 어째서 침을 흘리는지 괜스레 불안하기는 하다. 물론 유아기 때도 종종 그런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혹시 이쪽을 먹이로 보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항상 프로펠러처럼 흔들리는 꼬리는 괜스레 위협적이다. 잔뜩 기대하고 있는 표정,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자식인데 저대로 방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동안 똘똘이가 자라는 모습을 함께하지 못한 게 짜증났는지 디아루기아도 왠지 모르게 심통이 난 것 같은 느낌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반갑게 환영해 주는 게 베스트라는 거다. “아… 똘똘아….” 작게 입을 연 순간 이쪽으로 돌진하는 녀석의 모습은 가관. “헥헥! 헥!” ‘얘 왜 이래.’ “키에에에에에엑!” 네 발로 뛰어오는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 괜스레 자세를 잡게 된다. ‘어떤 식으로 저걸 받아내야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녀석이 이쪽을 덮쳐왔다. 엄청나게 묵직한 감각과 충격이 느껴지며 내 몸이 자연스럽게 땅바닥으로 처박혔다. “키엑! 헥헥! 키에에에엑! 헥헥!” 고통스러웠지만 그것도 잠시. 커다란 눈망울에 한가득 눈물이 고여 있는 모습을 보고는 녀석에게 괜스레 미안해졌다. “키에에에에엑! 헥헥! 헥헥!” 커다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가관이다. 그 와중에도 프로펠러처럼 꼬리를 흔드는 것을 보니 확실히 녀석은 똘똘이가 맞다. “오이구!” “키에에에엑!” “오이구! 우리 똘똘이 그동안 잘 지냈어요?” “헥! 헥!” 혓바닥으로 사정없이 이곳저곳을 핥는 것은 물론, 자꾸만 킁킁거리면서 여기저기 냄새를 맡는다. 이제는 예전처럼 손으로 들어서 안아줄 수는 없었지만 나 역시 녀석을 꽉 껴안고 이곳저곳을 쓰다듬었다.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키엑! 헥! 키엑! 헥! 키엑! 헥!” 박수 소리에 맞춰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모습도 예전 그대로다. ‘귀엽네.’ 그 와중에 어서 빨리 자신을 들어 올려 비행기를 태워달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내가 이 두 손으로 녀석을 들어올리기에는 힘에 부친다. 그 모습을 본 디아루기아가 천천히 걸어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갑자기 너무 빨리 자랐군요.” “항상 같이 있다 보면 얼마나 컸는지도 모르는 법입니다. 그동안 당신이 얼마나 우리 디아루리아에게 소홀했는지 새삼 느끼게 되는군요.” “조금 바빠서 말입니다. 원래는 한 번은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일이 잘 풀리는 않은 터라. 둥지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하니까요. 매번 똘똘이가 먹는 음식을 보내는 것도 저 아닙니까. 너무 나무라시면 조금은 섭섭합니다.” “그것만 한다고 해서 아버지의 의무를 다하는 게 아닙니다. 옆에 있어주는 게 더 중요하단 말입니다. 디아루리아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 생각해 보세요. 눈물을 뚝뚝 흘릴 정도로 그리워하지 않습니까. 괜찮니? 디아루리아?” “키에에에엑!” “아빠한테 화를 내는 게 아니란다, 디아루리아. 그냥 잠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혼내고 싸우는 게 아니란다. 사랑스러운 내 딸.” “키엑!” “매일 매일 함께 붙어 있어 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아니 삼 일에 한 번 정도는 함께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조금씩 사냥하는 법을 가르칠 텐데…. 다른 날은 몰라도 그 날은 꼭 함께해 주셔야 합니다. 디아루리아가 첫 사냥을 하는 날이니까요. 아버지가 봐주면 도움이 될 겁니다.” “아… 네. 물론입니다. 그럴 날이 있으면 미리미리 말씀해 주시는 게 좋을….” “지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조금은 불만이 있을 만했다. 확실히 한가득 눈물이 고여 있는 똘똘이의 모습은 내가 봐도 짠하다. 사실 시간으로 따지면 그렇게 오래 지났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내가 느끼는 것과 녀석이 느끼는 건 차이가 있을 것이다. 여전히 녀석의 혀가 이쪽의 볼을 핥고 있을 때 든 생각은 하나였다. ‘생존과 직결된 문제야.’ “이것보다 더 커지는 겁니까?” “아니요. 한 몇 달 간은 지금 크기를 유지할 겁니다. 물론 조금씩 자라기는 하겠지만 더 크려면 아직 한참 기다려야 됩니다.” “아아아….” 여기서 조금 더 커진다면 정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지도 모른다. “감당하기 조금 힘들어지겠군요.” “변하는 법도 배우고 말하는 법도 배우게 될 겁니다.” “아! 당신처럼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보통은 조금 오래 걸리는 게 정상이지만… 우리 디아루리아는 똑똑하니까요.” 자기 자식이 똑똑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곳이나 저곳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더 이상 바닥에서 구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점프를 하며 내 위에 올라타려고 하는 녀석이 보였다. ‘끄응….’ 당연하지만 쉽게 올라탈 수 있을 리가 없다. ‘무거워.’ 그동안 근력 능력치가 많이 높아졌기 때문에 일반 성인 남성보다는 강한 근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 정도나 되는 무게를 감당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똘똘이 녀석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 결국에는 이쪽에 거의 업히다시피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였다. 뒷다리와 꼬리로는 이쪽의 허리를 감고 있었고 앞다리는 가슴과 왼쪽 어깨를, 오른쪽 어깨로는 계속해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며 키엑 키엑 소리를 지르고 있다. “오늘은 같이 다닐까? 똘똘아.” “헥! 헥!” 이쯤 되니 천천히 마력까지 운용해야 되는 것이 현실. 이제야 조금이나마 편해진다.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걔가 디아루리아야? 아니, 똘똘이였나? 자기?” 차희라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끄에에에에엑!”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똘똘이 녀석은 붉은색 머리를 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소리를 내질렀다. 평소와는 소리가 조금 다르다. 기분이 좋아서 지르는 소리가 아니다. 뭔가 적의가 담겨져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얘 왜 이래?’ “끄에에에에에에엑! 끄엑!” “귀엽네! 똘똘이! 자기가 진짜 용의 선택을 받긴 받은 거구나. 린델에 있는 둥지만 봐도 실감이 나기는 했는데 그렇게 있는 모습을 보니까 조금 더 그럴 듯한데?” 그렇지만 그녀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슬그머니 눈을 밑으로 내리깔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눈앞에 있는 여자가 위험한 여자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이런 눈치가 빠르다는 부분은 확실히 나를 닮은 것 같았다. 물론 나 같은 경우에는 똘똘이의 유전자에 기여한 바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괜스레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됐다. “정말로 귀엽다. 고개 숙인 것 좀 봐. 똘똘이가 축 늘어졌어, 자기.” 그 이유가 바로 눈앞에서 손을 뻗고 있으니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똘똘이를 쓰다듬으려는 손을 디아루기아가 막아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겁을 집어먹지 않았습니까. 이만 물러나 주시지요.” “아….” 디아루기아를 위아래로 살펴보다 잠깐 뿔에 시선을 고정시킨 이후에 입을 여는 차희라의 모습이 보였다. “아. 당신이… 디아루기아?” “네. 당신은?” “차희라라고 부르면 돼. 겁먹은 건지는 몰랐는데…. 실수. 미안하다, 똘똘아. 그리고 디아루기아 당신에게도 미안하네요.” “아, 아니요…. 제가 조금 과민반응을….” 차희라의 저런 모습은 조금은 의외였다. 자꾸만 똘똘이에게 시선을 주는 걸 보니 은근히 귀여운 걸 좋아하는 모양. 물론 지금의 똘똘이는 단순히 귀엽다고 하기에는 너무 성장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잘 대해주려고 하는 모습을 보니 익숙하지 않았다. ‘아이들 좋아하나.’ 디아루기아의 말에 곧바로 사과를 건 내오는 것도 그렇고… 조금 실례되는 발언일 수도 있지만 뭔가 아기를 소중히 다루는 고릴라 같은 걸 본 느낌이다. 디아루기아에게도 곧바로 사과하는 걸 보면 그녀 역시 여자는 여자인 모양. 오히려 날이 선 반응을 보였던 디아루기아가 당황스러워하는 것이 보였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처음 뵙네요. 말은 놔도 괜찮지?” “상관은 없습니다만….” 왠지 모르게 죽이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이다. “자기는 이제 훈련소 가는 거지?” “어? 응.” “디아루기아? 우리는 잠깐 쉬러 가는 게 어때?” “네? 그렇지만… 아이를 돌봐야 돼서….” “잠깐 동안은 괜찮을 거야. 우리 자기가 잘 돌봐줄 테니까. 자기가 일하는 곳이 여기서 가깝기도 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금방 달려갈 수도 있고 조금은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만….” “잠깐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라도 나누자. 아무래도 지금 당신은 휴식이 필요해 보이거든.” 확실히 조금 그런 느낌이 있기는 했다. 뭔가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디아루기아도 내심 쉬고 싶은 듯한 눈치.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눈 밑에는 다크써클이 드리워져 있었고 항상 매끈매끈했던 피부와 머리카락도 푸석푸석해진 느낌이었다. 머리 위에 있는 길게 뻗은 뿔도 색깔이 조금 칙칙해진 것 같다. ‘피곤했으려나.’ 당연하지만 피곤하지 않을 수가 없다. 100이 넘는 체력 스탯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육아는 육아니까.’ 지금은 얌전히 내 등 뒤에 달라붙어 있기는 했지만 똘똘이가 한 번 발광하기 시작하면 아마 말리기가 쉽지 않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사람을 키우는 것도 힘든데 녀석을 키우는 일도 아마 보통이 아닐 것이다. 괜스레 죄책감이 치고 올라온 것은 당연지사. 나로서도 슬그머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좀 쉬는 게 좋겠습니다, 디아루기아. 오늘 하루는 제가 돌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제야 뭔가 안심하는 것 같은 눈치. 잠깐 동안 디아루리아에게 시선이 고정되기는 했지만 디아루기아는 결국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네. 안심하세요.” “똘똘이는 오늘 하루는 나랑 아빠랑 같이 있자. 알겠지?” “키엑! 헥헥!” “대신 얌전히 있지 않으면 다시 집으로 돌려보낼 거니까. 조용히 있어야 한다.” “키에에엑!” 말을 알아듣는 건 확실한지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여 온다. 디아루기아의 표정도 한층 밝아졌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네.” ‘별일 없겠지.’ 어차피 내가 제국 8좌의 내정되어 있다는 것은 교육생의 대부분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용에게 선택받은 자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는 교육생이 있기야 있겠지만 아마 오늘은 평소보다 더 시선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몬스터를 이용한 실전 교육 훈련도 있기는 했지만, 전설 등급의 몬스터를 보는 건 처음일 테니까. ‘아직 새끼라고는 해도….’ 똘똘이의 스펙은 상당한 수준이다. [전설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 흑암룡 디아루리아의 상태창을 확인합니다.] [이름 - 디아루리아] [칭호 - 똘똘이] [나이 - 1] [성향 - ??] [분류 - 드래곤] [능력치] [근력 - 32/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민첩 - 32/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체력 - 33/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지력 - 10/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내구 - 41/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행운 - 32/성장한계치 전설 이하] [마력 - 40/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총평 - 무척 흥분한 상태입니다. 이런 존재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행운이군요. 조심하도록 해주세요.] ‘아직 성향은 안 나왔네.’ 내구 능력치 41과 마력 능력치 40. 막말로 말하면 공략조가 한꺼번에 똘똘이에게 달려들어도 승부를 점칠 수 없는 수준이다. 물론 아직까지 똘똘이는 마력과 몸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싸움을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본능이라는 게 있는 만큼 똘똘이가 우위에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수료식도 이제 3일 남았고….’ 이곳에서의 일이 대충 정리가 되고 나면 조금 더 똘똘이에게 신경 써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아영도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인 것 같으니까….’ 최근에 다시 김기철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로 봐서는 뒤통수를 때려도 제대로 때려주고 싶은 모양.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기는 했지만 이런 정도까지 설계해 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낙천적이고 느긋하던 성격 뒤에 이런 면이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훈련소에 진입하니 역시나 여기저기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당연히 속닥거리는 목소리들도 들려온다. “저거… 드래곤 아니야?” “진짜야?” “와…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나 봐…. 여기서도 될 놈만 되나보다. 나는 뭐 선택 같은 거 안 받으려나.” “기껏해야 고블린한테나 받겠지, 뭐.” 따위의 목소리들이다. 물론 그 와중에 조금 이상했던 것은…. ‘얘 왜 이래.’ 등 뒤에 얌전히 매달려 있는 똘똘이의 상태였다. 남자 교육생이 옆을 스쳐지나갈 때는 별로 문제가 없다. ‘뭐야?’ 그렇지만 여자 교육생이 옆을 스쳐지나갈 때면 게거품을 물며 크릉크릉거리는 것이 문제. “끄에에에엑!” 심지어는 대놓고 다가오지 말라는 듯 이빨을 보이는 모습에 이 녀석이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며 누군가 접근하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 같은 눈빛. 어처구니없지만 저런 눈빛은 꽤 익숙하다. ‘정하얀?’ 항상 정하얀이 보여주던 모습을 똘똘이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니겠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발동시킨 마음의 눈. [전설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 흑암룡 디아루리아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어둠 속의 비틀리고 위험한 애정] [#못 말리는 파더콤] [#엄마도 짜증나] “끄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미… 미친….” 디아루기아가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는 걸 한발 앞서 깨달을 수 있었다. # 221 회귀자 사용설명서 221화 성장한 똘똘이 (2)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상태창을 내려다 봐도 여전히 결과는 같았다. [전설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 흑암룡 디아루리아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어둠 속의 비틀리고 위험한 애정] [#못 말리는 파더콤] [#엄마도 짜증나] ‘이게 뭐야.’ 혹시나 싶었던 게 진실이 되니 당황스러운 것은 당연지사.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쩐지 너무 달라붙어 온다고 느꼈지만 이런 방향으로 성장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거….’ 어이가 없어서 자꾸만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아마도 자리를 오랜 시간 동안 비웠던 게 원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귀여워해 주고 아껴줬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긴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고 얼굴을 보지 못한 만큼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이상한 방향으로 기벽을 개화한 것. ‘해시태그는 또 뭐야.’ 엄마도 짜증난다는 한마디는 우리 똘똘이만 바라보던 디아루기아의 가슴에 대못을 받는 발언이었다. 그나마 한 가지 안심할 수 있었던 부분은 성향이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 하나 뿐이었지만…. ‘이미 생성된 기벽은 변화할 수 있는 건가?’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성향이라도 잘 뜨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 조금 시기가 늦은 것 같기는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전력으로 교육에 신경 써야만 했다. ‘기벽도 바꿀 수 있으면 바꾸고… 성향도 최대한 좋고 안전한 걸로 뽑아야 돼.’ 그래야 이 극한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눈을 부라리며 주변을 경계하는 똘똘이의 모습은 가관. “얌전히 있어야 한다고 했지?” “헥헥!” “다른 사람들 위협하고 그러면 못 써.” “키엑!” “오늘 하루는 조용히 있어야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야. 안 그러면 곧바로 엄마한테 돌려보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알겠지?” “키에에에엑!”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 그렇지만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엄마한테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야 몇 달 만에 만났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지만 평소 귀여워만 보였던 것과는 다르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치솟아 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똘똘이를 디아루기아에게 보내고 싶은 심정. 그러나 피곤에 찌든 그녀를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없다. 일단은 이런 식의 반 협박으로 녀석을 제어하는 게 최우선이리라. 그렇지만 여교육생들이 지나갈 때마다 부들부들거리며 경계를 보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눈망울을 꿈뻑꿈뻑거리며 콧김을 뿜는 게 귀엽게 보였는지 대부분의 이들이 관심을 보였지만… 잘못 다가오면 물릴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강의실로 들어가니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교육생들이 시야에 비쳤다. 제법 긴장한 표정. 내가 자리를 잡자 인사를 해오는 모습들이 보였다. “교관님, 안녕하십니까.” “네. 반갑습니다. 여러분.” 무척 당연한 결과겠지만 이전과는 태도부터가 다르다. 물론 나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접한 게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이유로는 저들 대부분이 연금술을 메인으로 삼고 있다는 데 있다. 아마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깨달았으리라. 이 분야에서 내가 얼마나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지 말이다. 차희라보다 강한 강자는 대륙을 뒤지다 보면 나온다. 정하얀보다 마법에 익숙한 마법사 역시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알기로 나보다 뛰어난 연금술사는 대륙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나 플레이어들 중에서는 말이다. 드래곤 알케미스트라는 고유 전설 등급의 직업. 만약에 나보다 연금술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난 사람이 있더라도 용에 관련된 분야에서는 나를 따라올 수 있을 리가 없다. 다시 말하면 저들에게 나라는 사람은 별 것 아닌 생산직이라는 인식에서, 연금술 하나로만 정상의 자리에 올라간 위인으로 보여질 거라는 말이다. 연금술에 대한 인식을 바꾼 것은 물론 대륙 8좌에 이름을 올린 사람. 심지어 이 수업에 꽤나 헌신하기까지 했으니 나를 존경하는 놈이 하나둘 나타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대단한 것 같은데….’ 초반과는 다르게 내가 하는 말이라면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 가장 뒤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한소라도 하나라도 더 배워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눈을 부라리는 중이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수업을 할 생각이 없다. “사실 오늘은 수업이 없습니다.” “아….” 입을 열자마자 아쉽다는 눈빛을 보내오는 이들이 보였다. 대부분의 교육생들이 좋아하는 연금 실험 시간이었지만 아쉽게도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전부 가르쳤다. 여기에서 조금 더 전진하는 건 저들의 영역이라는 거다. “수료까지 딱 3일이 남은 시점이기도 하고… 기초적인 부분에서 가르쳐 줄 수 있는 부분은 대부분 가르쳤으니까요. 이미 연금술사로 전직하신 분들도 있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여러분들에게 지식의 일부는 전직 시 주입되는 기초 지식보다 훨씬 방대한 양입니다.”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 개론이기는 하지만….’ 영웅 등급의 서책에 적혀 있는 고급 지식들이다. 수업내용의 반의 반, 아니 그 반의 반만 따라가도 밥벌이 하는 정도에는 문제없다. “사실 오늘 연금 실험에 들어갔다고 해도 여러분들이 크게 달라지는 점은 없을 겁니다. 지금부터는 각자 공부해야 하는 영역이니까요. 지금까지는 제가 길을 제시해 줬다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는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제법 열심히 수업을 듣는 남자 한 명이 질문을 던져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럼 오늘 수업은….” “아마 조금 더 재미있으실 겁니다. 음… 여러분들이 궁금해하는 걸 해소하는 시간으로 바꾸도록 합시다. 아마 이쪽이 조금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어떤 질문이라도 상관없이 받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어떤 질문이 날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학술적인 질문이 대부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가장 처음 날아 들어온 질문은 꽤나 의외.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 그렇다면 이기영 교관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등 뒤에 붙어 있는 생물에 대해서…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교육생들에게 눈을 부라리고 있는 똘똘이가 신경이 쓰일 것이다. 대답하지 못할 질문은 아니었기 때문에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드래곤입니다.” “아….” 금방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마도 길드의 입단이 내정되어 있는 교육생 김민영이라고 합니다. 저… 이기영 교관님을 선택했다는 용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만 혹시 그 드래곤이….” “저를 선택한 드래곤은 이 아이의 어미 드래곤입니다. 아마 여러분이 린델로 가신다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도시 외곽의 커다란 둥지가 있으니까요. 크기로 따지면 아마 이 훈련소의 몇 배가 될 겁니다.” “우와….” “조금 더 알려드리고 싶기는 하지만 용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대부분이 기밀입니다. 굳이 저희 길드에서 막을 필요도 없이 제국 측에서 정보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주 기본적인 정보는 이미 시중에 풀려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죠. 다른 질문은 없습니까?” “저, 이기영 교관님?”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그… 용병여왕님과….” “네. 그녀와는 만나는 사이가 맞습니다.” ‘이딴 것도 질문이라고 하고 있네.’ 질문을 던진 쪽은 쓰레기 삼 자매 중 첫째. 이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 시간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 혹시 애인을 더 늘리고 싶으신 생각은 있으신가요?” 그 다음 질문은 조금 더 가관. 아무래도 지금 이 시간이 어디 고등학교의 담임선생님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애인을 늘리는 것에 쓰레기 삼 자매가 무슨 관심이 있어 질문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쟤네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키에에에엑!” 저 여자들의 질문이 답답했는지 똘똘이 역시 괜스레 키엑 소리를 내며 그녀들을 노려보기 시작. 짜증이 조금 나기는 했지만…. ‘어떤 질문이라도 상관없다고 한 건 나였으니까.’ 이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 줄 모르는 멍청함도 죄다. 저들의 입장에서는 좋은 팁을 받아갈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리는 셈이니까. 대충 대답하며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네. 그렇습니다.” 한소라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한소라입니다. 그… 아까 하신 말씀 중에 지금부터는 각자가 공부해야 되는 영역이라 말씀하셨는데… 정확히 무슨 뜻으로 말씀하신 건지 알고 싶습니다.” “네.” ‘좋네.’ 가장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어떤 식으로 성장해야 하는지 물어보는 질문이라고도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아마 앞이 깜깜했을 테니까. “으음… 간단하게 설명하면 한 학문의 심화과정에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지금 우리가 배우고 공부하고 있는 것이 자동차라고 예를 들어 봅시다. 여러분들은 이제 자동차라는 게 어떤 건지 깨달았습니다. 자동차가 어떻게 생긴 물체인지도 알고, 무슨 역할을 하는지도 잘 알고 있죠.” “네.” “조금 더 전문화시킨다고 생각해 봅시다. 네. 전문화요. 자동차라는 게 어떤 물건인지 깨달았으니 이제는 조금 더 집중적으로 파고들면 된다는 겁니다. 어느 쪽으로 파고들지는 물론 여러분들의 자유일 겁니다.” “아….” “일부는 자동차의 외형에 대해서 공부하는 분들도 있을 거고 엔진이나 내부의 어떤 장치에 대해 파고드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어쩌면 방향을 바꿔 오토바이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죠. 연금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더 전문화시키면 되요.” “…….” “포션, 호문클루스, 키메라, 촉매, 영역은 다양합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영역도 틀림없이 존재할 겁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교관님은 어떤 쪽으로 공부하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저는 처음에 생체 쪽을 전공했습니다. 물론 다른 쪽도 한 발씩 걸쳐 놨습니다만 메인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건 물약과 생체연구 쪽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후에는 용을 전문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아….” “한 분야의 선구자가 된다는 건 꽤 메리트가 있습니다. 고작 연금술로 뭘 할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사실 연금술사가 될 자격이 없는 분들입니다. 보세요.” 천천히 손에 마력을 모으니 파직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에서 마력이 튀었다.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내 뒤에 있는 칠판 양옆에서 한 쌍의 용의 팔이 생성되기 시작. 단순한 모형이 아니라는 것은 아마 저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교실 안에 있을 수 있는 크기로 사이즈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움직이기 시작한 팔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교육생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말… 도 안 돼….” “어?” 그 표정 안에 들어서 있는 감정은 일종의 경외였다. “어떻게… 이런 게 이건… 이건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신 건가요?” ‘노력과 경험, 전직 직업 보정, 천재 마법사의 지원와 헌신적인 드래곤, 마르지 않은 자원, 천부적인 운빨.’ 사실 가장 중요한 건 뒤에 있는 세 가지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질문에는 조금 대답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방금 보여드린 건 제 밥줄이라고 해도 무방하니까요. 어째서 연금술사가 단일 직업이 아니라 마법사의 상위 직업인지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시면 답이 나올 겁니다.” “아….” “여러분들이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실현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시기만 하면 초인이 될 수 있는 물약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정말 호문클루스나 현자의 돌을 만드시는 분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물론 평생이 걸려도 지금까지 한 수업 내용의 반도 깨닫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뭐 마지막 질문은 꽤 좋았습니다, 한소라 교육생.” “감… 사합니다.” “쓸데없는 질문들을 받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나서… 몇 마디하고 마무리 하도록 하지요.” “아….”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 “아마 대부분이 길드나 클랜에 오퍼를 받으셨겠죠?” “네.” “일부는 중견, 대형이고 일부는 소형이겠지만 뭐,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중요한 건 린델이 여러분을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 “제가 이 수업에 참여하게 된 이유도 도시 차원, 아니, 제국 차원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연금 지식을 일부 공유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실 겁니다. 세상이 변했어요. 제국 차원에서 연금술사를 필요로 하고 클랜과 길드에서도 연금술이나 다른 생산직에 조금 더 투자해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아….” “여러분들은 제국 차원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신 거예요.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최소한 밖으로 나가 꼴불견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도록 하세요. 여러분들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지 못한다면 다시 버려져 길바닥에서 구걸하며 살아가야 할 겁니다.” 내가 한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레 장내가 조용해졌다. 아마 속으로는 별별 생각을 다하고 있을 거다. “제가 여러분들을 최선을 다해 가르친 이유는 여러분들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국가사업이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제 이름이 먹칠하지 마세요. 여러분. 그리고….” “…….” “힘들 때 찾아오면 조언 정도는 해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수고하셨습니다.” # 222 회귀자 사용설명서 222화 성장한 똘똘이 (3)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딱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다. 정이 들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쓰레기 삼 자매들 같은 이들은 그다지 곱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열심히 하는 학생들에게는 정이 가기는 했다. ‘대단한 정은 아니지만….’ 당연히 학생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종류의 감정은 아니다. 힘들 때 찾아오면 밥 한 끼 사줄 수 있고… 별것 아닌 조언 한두 마디 해주는 것 정도. 딱 이 정도가 교관과 학생 사이의 적당한 거리라는 말이다. 사실 조금 다그쳤던 것과는 다르게 이들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걱정도 들지 않았다. ‘다들 지 밥벌이는 하겠지.’ 라는 생각이 깔려있었기 때문. 실제로 한소라를 포함한 몇몇 이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교육생이 중견 길드나 대형 길드에 들어갔다. 애초에 이번 교육의 목적을 생각해 보면 무척 당연한 결과였다. 처음부터 쓸 만한 연금술사들을 육성하는 게 이번 교육의 목적. 좋고 쓸 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연금술사들을 각 길드와 클랜에서 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성적이 조금만 특출해도 대형 길드에 오퍼를 받았고 마력 능력치가 높거나 지력 능력치가 높은 이들 역시 여기저기에서 밀려들어오는 제안에 행복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물론 전투직만큼의 계약금과 연봉을 챙겨갈 수는 없었지만 생산직치고는 과분할 정도의 계약금을 받고 새 출발을 시작한 셈이니… 마법도 제대로 쓸 수 없는 반쪽짜리 마법사보다는 좋은 대우를 받은 셈이다. 여담이지만 첫날에 조언을 무시한 채로 전투직을 선택한 이들은 대부분이 비참한 꼴을 당했다. 마력이 부족한 것은 물론, 이해력도 딸리는 마법사들은 갈 곳을 잃었고 재능이 없는 전사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몬스터 밥이 되거나 구걸을 하고 다닐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린델에서 연금술 붐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길드가 성적이 상위권에 위치한 한소라를 영입하지 않은 이유는 뻔할 뻔자다. 아마 정하얀의 연구실로 몰래 침입해 성과를 빼돌리려고 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민감할 테니까….” 보통 이런 성향을 가진 이들은 집단에서 배척받는다. 물론 진실은 어줍지 않은 계략으로 내게 부딪쳤다는 것이었지만 쓸데없는 성희롱 모함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보다는 이 정도로 상황을 마무리하는 게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 만약에 진실 그대로 외부에 발표되었다면 파란에게 밉보이기 싫은 모든 길드와 클랜이 그녀를 쳐내려고 할 것이 분명하다. ‘그보다는 이게 낫겠지.’ 교육 기간 내에 오퍼를 받진 못했어도 아마 본인이 직접 입단 지원을 하고 면접을 받는다면 어딘가에 들어갈 확률은 높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어디서든 쓰임새가 있는 셈이니까. “한소라라….” 나도 모르게 한 번 더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을 때 들려온 것은 똘똘이의 비명. “끄에에에에에에엑!” 곧바로 큰 소리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쓰읍! 조용히 있어야지!” “키엑….” 이런 경우는 무조건 단기간 내에 제압해야 된다. 정하얀을 보면서도 들었던 생각이지만 이런 성향이나 행동들은 초반에 강하게 억제하는 것이 옳다. ‘책으로 써도 되겠는데….’ 그만큼 이런 종류의 사람들의 행동패턴을 이해하게 됐다는 거다. 조금 얼굴을 찡그리자 역시나 이쪽의 눈치를 보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잠깐 소리를 질렀을 뿐인데 커다란 눈망울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다. 괜스레 죄책감이 휩싸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단호해지셔야 합니다, 아버님.’ 이라는 정체모를 목소리가 속 안에서 울려 퍼졌다. “디아루리아.” “헥…헥….” “둘이 같이 있을 때나 엄마랑 같이 있을 때는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때는 조심해야 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아빠도 디아루리아랑 같이 다닐 수가 없어요.” “키엑!” “똑똑하니까 아빠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거라 믿는다. 알았지?” “키에에에엑!” 때마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유아영… 그리고 김기철….’ 혹시나 다시 게거품을 물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렁그렁거릴 뿐, 다른 반응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 모습. 이쪽이 보인 강경한 태도가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마침 좋은 시험대가 된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끄덕였을 때 나를 발견한 유아영이 입을 열며 다가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이기영 교관님!” 옆에 있는 남자 역시 뭔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다. 그렇지만 녀석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의기양양함이 서려 있었다. “끄… 끄에에!” “쓰읍!” 한 번 경고를 해주니 역시나 조용해진다. “아, 유아영 교육생. 그리고… 김기철 교육생이군요.” 제법 사이가 좋아 보이는 모습. ‘얘도 은근히 잔인해.’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 전부 연기라는 걸 생각해 보면 조금이지만 소름이 돋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김기철이야 다시 한번 자신의 여자 친구의 마음을 돌려놨다고 생각했겠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다. “교관님. 저….” “생각은 많이 해보셨습니까?” “아니요. 아직은….” “그거 아쉽게 됐군요.” “수료식까지 대답을 미뤄도 될까요?” ‘이미 계약 했잖아, 너.’ 연기력 역시 상당한 수준. 안기모에 비견될 만한 연기력이다. “네. 물론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쪽이….” “안녕하십니까, 이기영 교관님. 김기철이라고 합니다. 유아영의 남자친구 되는 사람입니다.” “아아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야말로… 그동안 아영이가 꽤 많이 신세졌다고 들었습니다.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유아영 씨 같은 인재는 어디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당연한 일입니다. 하하하… 사이가 좋아 보이시는군요.” “예. 최근에 서로 오해가 조금 있어서….” 슬그머니 이죽거리면서 시동을 걸자 이쪽에 묘한 시선을 보내오는 게 느껴졌다. 감정의 정체는 열등감이다. 내 뒤에 매달려 그릉그릉거리고 있는 똘똘이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고 내가 입는 옷이나 풍기는 분위기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쯧쯧.’ 녀석의 얼굴을 보니 남자의 질투가 추한 이유가 뭔지 제대로 공감할 수 있을 정도. 슬그머니 유아영에게 시선을 돌리자 입꼬리를 계속해서 올리고 있는 게 기분이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다. ‘얘도 이상해지지는 않겠지.’ 이쯤 되면 슬그머니 걱정이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그녀 같은 경우에는 아직까지 위험한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는 귀여운 복수라는 타이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거다. 조금 불안했던 것은 그녀에게 시선이 고정된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는 거다. 위험한 것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다. “키에에에엑….”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똘똘이 역시 그녀의 흉부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눈치 없는 유아영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저번에 말씀하신 디아루리아가 이 아이로군요?” “네. 그렇습니다, 유아영 교육생.” “귀, 귀엽네요.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슬그머니 가슴을 밀착시켜오는 것은 물론 목소리도 조금 높아졌다. 누가 봐도 내게 이성적으로 보이고 싶다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혹시나 똘똘이가 발광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잠자코 있는 것을 보니 이 정도는 허용 범위 내에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몸을 부들부들 떨기는 했지만 공격 반응은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똘똘이보다 더 흥분한 것은 김기철. 입술을 꽉 깨물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얼굴에는 누가 봐도 적개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감정이 들어가 있었다. “사람 손을 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후에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더 괜찮을 겁니다. 금방 친해질 수 있거든요.” “정말인가요?” “네. 말이 나온 김에 내일 저녁은 어떻습니까?” 대답을 한 것은 김기철. “이기영 교관님, 아영이는 내일은 시간이….” “네! 물론이에요! 교관님.” 그 말을 짜른 것은 유아영이다. “아영아….” “시간 괜찮아요. 물론 괜찮죠. 교관님.” “하하. 그거 다행이군요.” “저… 교관님! 기왕 시간을 내는 김에… 이번에도 그… 부탁드려도 되나요?” ‘부탁하긴 뭘 부탁해, 이 여자야.’ 정확히 뭘 부탁한다는 건지 말하지 않았지만 말을 내뱉을 때 나오는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왠지 모르게 상기된 표정과 흥분한 것 같은 떨림. 이상한 쪽으로 긴장하고 있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오고 있으니 당황스러운 것은 오히려 이쪽이다. ‘천재.’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우리 둘 사이에 뭔가 야릇한 상황이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이 연기는 누가 봐도 안기모 이상이다. 유아영은 능숙한 연기를 선보이는 안기모에 비견될 정도의 인재였다. ‘얘는 진짜 영입해야겠다.’ 아마 자신도 자신에게 이런 재능이 있다는 걸 자신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장담컨대 안기모에게 제대로 된 지도를 받는다면 린델 여우주연상은 이미 따놓은 거나 다름이 없다. “그… 저번에 알려주신 거 굉장히 좋았어서….” ‘뭐가 좋았는데… 아무것도 안 했잖아. 우리….’ 갑작스러운 설정에 조금 당황한 것도 아주 잠시. 왠지 모르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종류의 연기에는 호응해 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아영 씨.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고… 아영 씨와 함께 있는 건 저로서도 즐거운 일이니까요. 저번에 미처 알려드리지 못한 것도 성심성의껏 지도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다만 그 기철 씨도 있는데….” “아뇨. 오빠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는 것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이기영 교관님이 더 잘 가르쳐 주시니까요. 그럼 그때 봬요, 교관님. 저희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네.” 물론 내일 밤에는 식사를 하고 조금 더 늦게 돌려보내는 정도겠지만 김기철은 그렇게 일이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모양. “무… 무슨 일인데? 내일 꼭 만나야 돼?” “아아아… 오빠는 알 필요 없어.” “뭐? 그게 할 말이야?” “아니, 왜 그렇게 사람 하는 일에 이것저것 참견하려고 그래? 그거 집착 아니야? 쿨하게 지내자고 한 건 오빠였잖아. 내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아영아… 그래도….” 천천히 멀어지는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요물이네.’ 헤실헤실 웃고 다니는 바보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엿 먹일 수 있는지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누가 봐도 김기철의 목소리는 초조하고 유아영의 목소리는 여유롭다. 대놓고 바람 피냐고 물어볼 용기조차 없는 모양. 처용가의 처용은 딱 저놈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완전히 갑을 관계가 뒤바뀌어 버렸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하다. 혹시나 내가 유아영과 조금 진한 애정표현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은 물론 우리 둘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인정할 수는 없겠지만 계속해서 머릿속으로는 하기 싫은 상상을 할 것이 뻔할 뻔자. 내가 한 가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은…. ‘어?’ 이쪽에도 한 명 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 아니, 드래곤이 있었다는 것뿐이다. ‘어어?’ “끼이잉…. 끼에에엑….” 누가 봐도 구슬프게 들리는 똘똘이의 울음소리는 가관. 방금 나온 대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갑작스레 등 뒤가 서늘해진다. 물론 똘똘이가 이 묘한 분위기를 알아챌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녀석이 웬만한 사람보다 똑똑하고 눈치가 빠르다는 걸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닭똥 같은 눈물이 계속해서 한쪽 어깨를 적시고 있는 것은 물론, 아무데도 가지 말라는 듯 허리와 다리로 나를 꼬옥 껴안고 구슬픈 울음소리를 계속해서 흘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입 밖으로 나온 한마디. “아… 아빠 바람 피는 거 아니다? 정말이야….” 정황상 쓰레기가 된 듯한 기분. “아빠는 똘똘이밖에 없어요. 엄마 두고 바람 피는 거 아니에요.” 아니, 이미 쓰레기였다. ‘제길.’ # 223 회귀자 사용설명서 223화 수료식(1) 별것 아닌 해프닝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내게 있어서는 중요한 문제였다. 아직까지 성향이 형성되지 않은 똘똘이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미 괴랄한 기벽이 자리 잡힌 상황. 만약 이기적인 혹은 계산적인, 같은 성향이 뽑힌다고 가정한다면 녀석을 키우는 데 커다란 문제가 생길 거다. ‘끄응….’ 정하얀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한 데 온순한 성향이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더욱더 그렇다. 아무튼 간에 중요한 것은 더 이상 똘똘이의 교육에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것. 디아루기아에게만 소중한 똘똘이의 교육을 맡겨 놓을 수는 없는 상황이 찾아왔다는 거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 크릉크릉거리며 자고 있는 녀석을 보니 이것도 괜한 걱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어찌 됐든 브레스로 성 하나를 날릴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가질 수도 있는 만큼 초기에 신경 써야만 한다. 슬그머니 똘똘이에게서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자 여전히 녀석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두 여자가 시야에 비쳤다. “정말로 귀엽네.” “네. 조금 피곤했던 모양이더군요. 최근에는 많이 흥분해서 잠도 잘 자지 않았으니까요.” 차희라와 디아루기아였다. 만난 지 삼 일만에 제법 친해진 듯한 모습은 꽤나 의외다. 차희라는 정하얀과도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나름대로 사교성이 좋다고 할 수 있겠지만 디아루기아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애초에 사교성이라는 게 제로라고 해도 그다지 위화감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차희라와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었는지는 대충 감이 왔다. 아마 차희라가 애엄마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해 주고 있었던 것이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연유이리라. 살살 똘똘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차희라의 모습은 마치 애완동물이라도 만지는 것 같은 모양새. 확실히 녀석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열심히 디아루기아와 수다를 떨고 있던 그녀에게는 한 마디 건넬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여유로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나, 수료식에는 안 나가?”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뭐,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에 있어봤자. 뭐 하겠어. 어차피 나는 축사나 한 번 외워주면 끝이고… 나머지는 전부 간부들이 알아서 하기로 했어. 자기는?” “나는 조금 더 있다가 나가려고. 오늘 여기 떠야 하는데 아직 정리하지 못한 것들이 좀 있어서… 방금 다 끝났어.” “시간 참 빠르네… 벌써 수료구나…. 아, 후위는 정했어?” “…….” “결국 못 데려가는구나.” “아니. 그냥 린델 안에서 찾으려고. 쓸 만한 마법사 찾기가 힘들어서 궁수 같은 애들도 한 번 보려고 했는데 마음에 차는 애가 없더라. 다들 수준 이하야.” “그 수준 이하의 애들을 영입하고 있는 다른 클랜과 길드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해본 소리야 당황할 필요도 없어.” “그거 참 짓궂네.” “그래도 한 마디 정도는 하고 싶은데 괜찮지?” “조언이라면 환영이야.” “파란은 애초에 커트라인이 너무 높아.” “역시 그래 보여?” “아니, 파란 이전에 자기가 조금 다른 사람들한테 엄격한 잣대를 들이 미는 것 같다니까.” “끄응…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사실 고민해 본 적은 없지만 차희라의 말을 들어 보니 왠지 그러고 있다는 생각 정도는 든다. “애초에 파란 구성원들이 조금 특이한 경우야, 자기. 김현성이랑 정하얀 두 천재는 그냥 논외로 치더라도 아. 김예리라고 했나? 꼬맹이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네. 선희영… 그 사제는 눈에 띄게 대단하지는 않지만 천부적일 정도로 신성력에 친근한 것 같은 느낌이지….” “응.” “조혜진 그 여자도 천재라고는 할 수 없지만 확실하게 재능 있는 부류야. 나는 노력하는 것도 재능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거든. 장담컨대 아마 김예리 그 꼬맹이가 아무리 강해져도 조혜진 같은 사람을 잡기는 힘들걸.” “으음….” “사실 이 정도나 되는 사람들이 다섯 명이나 모여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야. 보통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어딘가에서 길드나 클랜을 운영하고 있어야 하는 게 맞아. 뭐, 아무튼 간에 이 괴물들은 둘째로 치더라도 자기네 길드에도 평범한 사람들은 있잖아?” “그렇지.” “자기도 그렇고….” “응.” “마도학자인 황정연도 그렇고… 그리고 자기네 길드의 목소리 큰 뚱땡이. 아, 박덕구라고 했었지. 그 사람도 마찬가지지? 근데 내가 봤을 때는 이 사람들도 지금은 길드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구성원들이거든.” 확실히 맞는 말이다. “자기랑 마도학자야 본래 전투직군과 비전투직군에 한 발씩 걸쳐 있다고는 해도 박덕구는 그런 것도 아니잖아? 걔한테 조금 미안하기는 한데 사실 나는 금방 떨어져 나갈 거라고 생각했었어.” 사실 나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버틴 걸로도 모자라 꾸역꾸역 자기 위치에 자리 잡은 것 좀 봐. 길드원들이 그만큼 많이 도와주고 신경 써줘서 그런 거겠지만 그 돼지도 언젠가는 상위의 플레이어로 이름 좀 날리게 될걸.” “그러네.” 예전이었다면 차희라의 말에 고개를 저었겠지만 확실히 지금은 다르다. 물론 개인의 강함 같은 것으로 유명해진다기보다 이름 난 탱커 정도일 테지만 확실히 지금의 박덕구는 김현성 파티를 따라갈 수 있는 포텐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도 강해질 수 있어. 적절한 지원이랑 케어만 있으면 말이야. 우리 붉은용병의 입단 커트라인이 생각보다 낮은 것도 그런 이유고… 실제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 덜컥 눈에 띄는 경우도 있기도 하다니까?” “흐음….” “재능은 물론 중요하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경우도 있기는 있으니까. 근데 나는 사람을 볼 때 재능 말고 보는 게 한 가지 더 있거든.” “뭐?” “의지가 있는가.” “좋네.” “사실 내가 처음에 이곳에서 자기 부탁을 들어준 것도 그런 이유야. 웃기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넌 눈이 조금 달랐거든…. 보통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이들은 무슨 일이든 한 가지 정도는 해내는 법이야.” 확실히 일리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눈이 거의 모든 걸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한들, 꼭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박덕구가 이 정도로 성장할지는 전혀 몰랐었다. 이지혜가 검은백조에서 완벽하게 자리 잡을 거라는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고….’ “자기가 알아서 하기는 하겠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여기까지야. 나랑 같이 나가서 마지막으로 한 번 둘러보자. 어차피 수료식 끝나면 너희 길드 애들 데려가야 될 거 아니야.” “아… 누나 축사해야 하지?” “응. 귀찮기는 하지만 할 건 해야지. 디아루기아는?” 아마 같이 가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같이 움직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차희라. 디아루리아가 아직 자고 있는 도중이라….” “아. 그러면 끝나고 같이 올게.” “네.” 확실히 붉은용병은 붉은용병이다.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파란은 수료식이고 나발이고 그런 것도 별로 없었는데 말이지.’ 제법 모양새가 갖추어진 것 같은 느낌. 그러고 보니 차희라가 입은 복장도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평소에 그녀는 조금 노출이 있는 복장을 선호한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파티에서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봤을 때도 그랬다. 병아리들 앞에서 축사를 읽어야 되는 만큼 나름 격식은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꽤 멋들어진 갑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붉은용병이 아니라 붉은기사라 해도 별 문제 없을 것 같았다. 나 역시 나름 말끔하게 차려입었다고 했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 비교 되는 느낌이다. ‘멋있긴 멋있네.’ 단원들의 호위 아닌 호위를 받으며 훈련소의 연무장으로 향하자 도열해 있는 교육생들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단상에는 린델의 주요 길드 마스터들이 간이 천막에 앉아 교육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현성아!’ 당연하지만 사랑스러운 회귀자도 눈에 띈다. 옆에서 검은백조의 길드 마스터 박연주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녀석도 나를 발견했는지 미소를 보내오는 중. 경박스럽게 손을 흔들기는 싫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차희라는 교육생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단상 위로 올라갔다. 부동자세로 차희라의 붉은색 머리카락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교육생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고 보니 교육생들은 보는 게 처음인가.’ 린델의 실질적인 1인자이자 지금의 붉은용병을 있게 한 사람이다. 갑옷을 입은 채로 붉은 머리를 휘날리는 모습은 어딘가에 나오는 전장의 여신처럼 보인다. 보통 저런 종류의 사람들은 굳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뭔가 느낌이 오는 법.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티비라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 역시 그녀와 함께 단상 위로 올라간 것은 당연지사.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열심히 교육생들을 바라봤지만 아쉽게도 그다지 눈에 띄는 이들은 없다. 이창렬과 유아영은 수료식이 끝나고 이쪽과 함께 린델로 향하는 만큼 힐끔힐끔 나를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김기철은 잘 해결했으려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는 걸 보면 제대로 몇 방 먹여준 듯한 느낌. 어쩌면 수료식 이후에도 조금 더 먹여줄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창렬은 항상 쓰고 다니는 복면을 그대로 쓴 채로 서 있었는데 이쪽에게는 나름 호의적은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차희라가 축사를 위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쓸데없는 시간을 만들어 여러분을 이렇게 고생하게 해 미안하다. 어서 린델로 들어가 각자의 생활에 집중하고 싶겠지만 보통 이런 자리에는 쓸데없는 행사와 관례라는 게 있게 마련이거든. 사실 여러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크게는 없다. 길드의 간부들이 축사를 적어오기는 했지만….” ‘읽지 않겠지.’ “내 취향이 아니기도 하고 괜히 이런 거 읽는다고 폼 재는 것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인 조언이 필요하겠지.” 단상 위에 함께 서 있는 붉은 용병의 간부들의 표정을 보니 역시나 예상했던 모양이다. “사실…. 사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검을 든다는 건 필연적인 일이다. 너희가 생산직이든 아니면 전투를 하기 싫어하든 간에 언젠가는 검을 들 날이 올 거다. 도시가 몬스터들에게 공격받을 수도 있고 예상치도 못하게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플레이어들은 그렇게 살아가도록 설계되었다는 거다.” 흥미로운 이야기다. “그게 비전투직군들이나 의지가 없는 이들에게도 기초 체력 훈련 같은 쓸데없는 훈련을 시킨 이유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너희가 이해하기에는 이런 표현이 알아듣기 쉽겠지. 너희들은 전사로 이곳에 보내진 거고 전사로 키워진 거야. 지구의 관점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웃기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너희는 전사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이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확실히 오그라들 수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와닿는다. “물론 싸우는 방법은 모두가 다르겠지만… 뭐, 이런 이야기까지 한다면 너무 이야기가 길어지겠지. 하고 싶은 말은 이것 하나다. 쓸데없는 곳에서 뒈져서 나자빠지지 마라.” “…….” “…….” 조금 장내가 조용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더 큰 전장에서 보자, 병아리들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붉은용병의 깃발이 들어 올려진다. 단원들이 모두 차희라를 향해 경례 아닌 경례를 보내는 것으로 수료식은 마무리. 김현성과 함께 파란으로 가지 않고 붉은용병으로 갔어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도 한마디 할래?” 슬쩍 고개를 젓자 그제야 단상 위에서 내려오는 모습. 확실히 여유가 있다. ‘얘한테는 진짜 반하겠는데….’ ‘여자’라기보다는 차희라라는 사람 자체가 멋있다. 꾸밈이 없고 할 말은 하는 성격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리라. ‘멍 때리고 봤네.’ 덕분에 수료를 기다리는 교육생을 한 번 둘러볼 틈도 없었다. 쓰윽 둘러보려고 했지만 다른 길드들이 차근차근 계약한 인원들을 데리고 나가는 중이다. 교육생들을 린델로 옮길 마차에 몇몇 교육생이 올라서기 시작했고 2명의 예비단원을 맞이한 파란도 그건 예외는 아니었다. 유아영과 이창렬은 파란의 깃발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도중. 괜스레 한 사람이 시야에 밟힌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다른 인원들과 섞여서 마차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인원. 어디에서도 오퍼를 받지 못한 떨거지들과 섞여 있는 사람들 중에 괜히 한 여자가 눈길을 끌어 잡아 당겼다. ‘한소라.’ 마치 이지혜를 보는 것 같은 느낌. ‘데려올까’라는 생각도 해보기는 했지만 파란은 또 한 명의 연금술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물론 열정이 있는 만큼 써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미 이쪽과는 한 번 마찰이 있었던 만큼…. ‘보통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이들은 무슨 일이든 한 가지 정도는 해내는 법이야.’ 괜스레 차희라가 이곳에 오기 전에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습관적으로 그녀의 상태창을 바라봤지만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아니….’ 가장 결정적인 게 달라져 있다. 당황스러워 웃음이 튀어나올 정도. ‘얘 봐라….’ [직업-흑마법사] ‘이것 봐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야, 너 이리 와봐.” 한소라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아니, 이리로 와보세요. 한소라 씨.” 존대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건 변함이 없었다. # 224 회귀자 사용설명서 224화 수료식(2) 정체모를 두려움에 불안해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야 나였어도 저런 모습을 보였으리라. 내가 그녀였다면 이 시간 이후로는 절대로 파란과 연관되는 않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것은 물론 린델을 떠나 다른 도시로 옮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녀 역시 머리가 있다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그만큼 정하얀은 그녀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자리에 정하얀은 없었지만 나와 얽히는 것 자체를 싫어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직업으로 흑마법사를 선택했다는 게 조금 더 중요하게 다가왔다. ‘흑마법사.’ 어째서인지는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다. [흑마법사-희귀 등급-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원거리 직업입니다. 흑마법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마법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새로운 차원의 마법입니다. 악마에게 힘을 빌려온다는 개념 때문에 일부 종교집단에서는 흑마법에 강한 반발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 파괴력만큼은 다른 직업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초 흑마법 지식을 습득합니다. 마력이 4 올라갑니다.] ‘요것 봐라….’ 이미 마력 회로가 망가진 그녀가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었을 테니까. 마력에 대한 친화력을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마법사와는 달리 흑마법사는 그나마 마력의 영향을 덜 받는 클래스 중에 하나다. 나 역시 흑마법사와 연금술사 사이에서 무척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 박덕구는 흑마법사를 추천했었고 김현성은 연금술사로 전직하는 것을 추천했다. 전자 쪽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이라는 영웅 등급의 아이템에 낚여 연금술사를 선택했던 것이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그렇지만 가끔 생각나는 것이 있기는 하다. ‘연금술사가 아니라 흑마법사를 선택했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지금도 나쁘지는 않다. 내가 생각해도 과분한 대접과 대우를 받고 있었고 개인적인 성취도 훌륭한 수준이니까. 고유 전설 등급의 직업을 얻은 것은 물론 많이 모자란 무력도 어느 정도는 채워졌다. 그렇지만…. ‘흑마법사도 나쁘진 않았을 거야.’ 간혹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한다는 거다. 만약 흑마법사를 선택했다면 신성 제국에서 움직이기 불편했겠지만 저 영역은 내가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다. 궁금하기도 하고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소라가 입을 열어왔다. 당연하지만 무척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저… 말씀하신 거… 맞, 맞나요?” “네. 잠깐 마차에서 내리세요, 한소라 씨.” “아….” 불안하기는 불안한 모양. 그 표정과 얼굴을 확인하자 그녀가 이쪽에 복수하기 위해 흑마법사를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그녀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한들 정하얀에게 뭔가 해를 끼친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다. ‘조금 다행인가.’ 둘은 이미 레벨이 다르고 그 레벨차이는 메워지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그녀가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고개를 끄덕이며 출발을 기다리는 마부에게도 말을 전했다. 아직도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쩔뚝거리며 마차에 내린 그녀가 불안 한 듯 나를 바라보는 게 시야에 비쳤다. “먼저 출발하셔도 됩니다. 이분은 파란에서 린델로 데려가도록 하죠.” “네. 알겠습니다, 이기영 님.” “한소라 교육생은 저희 마차를 타고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따라오시죠.” “…….” “이런저런 이야기라도 나누면서 말입니다. 아, 다리가 조금 불편하신 걸 깜빡했네요.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온 것은 교육생을 실은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이기영 교관님….” “네?” “제가 혹시 무슨 잘못을 했나요? 저… 뭔가 혹시 실수한 것이 있다면 사,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아아…. 그런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직히 말하면 뭐 그 일은 벌써 잊었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이기영 교관님이 아니라 기영 씨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파란 부길드 마스터라 부르셔도 상관없고 뭐, 칭호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네?” “이제는 교관이 아니니까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 그 일 말씀이시군요. 그건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당신에게는 큰 해프닝이었겠지만 저는 그다지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이미 벌도 받을 만큼 받은 것 같고 사과도 한 번 받은 적이 있으니까요.” “그럼 왜….” “글쎄요. 제가 왜 당신을 불러 세웠을까요. 하필 수료식이 끝난 다음에 말입니다.” “…….” “쉽게 유추할 수 있으실 겁니다.” “혹시… 죽….” “함께 파란으로 갑시다.” “네?” “함께 파란으로 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대우는 나쁘지 않을 겁니다. 연봉도 괜찮은 선에서 잡아 드릴 거고 계약금도 남들만큼은 해드리겠습니다. 물론 유아영 씨나 이창렬 씨 만큼은 아니겠지만 타 길드와 비교했을 때 섭섭하지 않으실 겁니다.” “네?” “복지 내용이나 다른 부분은 카탈로그를 읽으면서 확인해 보시면 되고 계약 기간은….” “아….” “계약 기간은 종신입니다. 원래는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고 제국법상으로도 허용되지 않는 범위 내에 있는 게 맞지만 뭐, 당신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 “아니 저는….” “해야 할 일이 조금 많을 겁니다. 일단 기초 연금 지식 정도는 가지고 있으실 테니 연금 실험실에 부실장 자리에 앉힐 거고…. 아! 파란에서 신설한 제2파티의 후위를 맡으실 테니 그것 역시 염두에 두셔야 할 겁니다.” “저는… 마력이… 그리고 다, 다리도….” “다리는 별로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후위에게 요구하는 건 민첩함이 아니니까요. 문제는 마력 쪽인데… 고장 난 마력 회로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합시다. 물론 그래도 후유증은 남을 테지만 어차피 당신한테는 마력 회로가 살아있는지 살아 있는지 않은지에 대한 여부가 그다지 상관없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저는….” “한소라 씨. 우리 거짓말은 하지 않는 걸로 합시다. 제가 어떻게 알았는지 무슨 방법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고개만 끄덕이세요. 어차피 당신이 혼자 어디서 싸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신성 제국의 명예주교라는 호칭을 달고 있는 제 옆에 있는 게 조금 더 안전할 겁니다.” “…….” “제국이 자랑하는 이단심문관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받고 싶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그냥 조용히 계약서에 사인하세요. 파란은 인재를 가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나 장애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당연하지만 이미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진 얼굴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상황이 꼬였다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리라. 선택지에 거절이라는 답안은 없다. 반 협박을 담아 말했으니 아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깨달았으리라. ‘쟤는 나름대로 똑똑하니까.’ “하얀이는….” “딸꾹.” 정하얀이라는 이름을 내뱉자마자 딸꾹질을 하는 모습은 가관. 아마 나보다는 정하얀 때문에 파란으로 오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이 먼저 헛짓거리를 하지 않는 이상 그녀가 당신을 먼저 건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 마침 한 장 가지고 있었던 게 있었네요. 일단 사인부터 하세요.” “죄송합니다. 잘,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딸꾹. 제발 이… 러지 말아주세요.” “아니, 밑에 연봉이랑 계약금 적혀 있지 않습니까. 당신한테도 좋은 이야기.” “살려주세요. 제발… 다른 건 전부 괜찮으니까. 전부 제발… 제발….” “아이… 죽인다는 게 아니라니까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가고 싶지 않아요. 제발….” “계약금 조금 더 얹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제발… 교관님, 제가 멍청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괴롭히려는 게 아닙니다. 일단 사인부터 하세요.” 바지를 부여잡는 꼴은 가관이다. 그녀가 평생 동안 일해도 만질 수 없는 돈을 준다고 하는데도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게 어째서인지는 알 것 같지만 내 생각보다 정도가 심하기다. 그렇지만 그녀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뻔할 뻔자. 아마 범의 아가리로 얼굴을 들이대는 심정이겠지만 애초에 선택지 같은 건 없다. ‘얘는 진짜 쓸 만하겠는데….’ 희라 누나의 말이 맞다. 살아남으려는 의지도 충만하고 나름대로 필사적인 부분도 존재한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창렬이나 유아영보다도 기대가 되는 인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 ‘후위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에 이름을 서명하는 한소라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타이밍에 맞춰 파란의 깃발이 있는 곳에 합류한 유아영과 이창렬도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김현성이 이들을 인솔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들을 인솔한 것은 함께 온 길드 직원. ‘김미영 팀장?’ 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김미영 팀장, 이거 오랜만입니다.” “네. 부길드 마스터. 정말로 조금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현성 씨는?” “길드 마스터께서는 검은백조의 박연주 님과 업무상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죄송하다고 말씀하시고 인솔을 부탁하시더군요.” “음….” 정말 빠져도 제대로 빠진 모양. 아마 김현성도 상황이 난처할 거라고 생각했다.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조금 이상했던 것은 선희영도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 내가 주위를 둘러본 것을 확인한 것을 봤는지 제법 눈치 빠른 그녀가 입을 열었다. “희영 씨 역시 검은백조의 마차에 타서 함께 오시기로 하셨습니다.” “아! 정말로 업무상으로 할 이야기가 있었던 거였군요.” “예. 물론 오늘 저녁까지는 린델에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환영회 겸 다함께 식사를 하신다고 전해 달라 하시더군요.” “네.” “그보다 이쪽은….” “갑작스럽지만 영입하게 됐습니다. 행정팀을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제2파티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아….” 슬쩍 한소라를 바라보는 김미영 팀장의 시선이 그녀의 한쪽 눈과 다리에 머물렀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시선이 머문 곳은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는 모양. 나를 믿는 만큼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주는 것이다. “예. 도착한 이후에 곧바로 입단 수속 밟고 길드 조합에 신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계약서는….” “지금 막 계약했으니 확인해 주시고 적혀 있는 것보다 10% 정도만 더 얹어주세요.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싸게 데려온 듯한 느낌이 있네요. 그러고 보니 창렬 씨랑은 함께 튜토리얼 공략에 임했었지요?” “네. 부길드 마스터. 그렇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했으니까 충분히 믿고 따라와 주셔도 됩니다. 몸 상태가 조금 안 좋기는 하지만 충분히 제 역할을 해낼 겁니다.” “네, 이기영 님.” 붉은 복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창렬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기분이 안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한 명 들어온다는 일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 물론 저 녀석보다 더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건 유아영이었다. 한소라에게 잠깐 시선이 뺏겨 걱정했었는데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일이 더 잘 풀린 모양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영 씨는… 이기철 일은 잘 해결됐습니까? 그러고 보니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하군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아뇨. 굳이 도와주실 필요는 없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충분히 후련했거든요. 옆에 있는 김미영 팀장님도 도와주셨고… 물론 아직 조금 더 하고 싶은 게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건 나중에 따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얘는 너무 맛 들린 것 같은데….’ 도대체 김미영 팀장이 뭘 어떻게 도와줬는지, 또 앞으로는 뭘 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더 복수할 게 남았다고 생각하는 게 조금은 무서웠다. ‘그래도 나쁘진 않아.’ 전체적으로 조금 불만이 있었던 이번 차수에서 그나마 괜찮은 파티를 꾸린 것 같은 느낌이다. 유아영, 이창렬, 한소라. 저기에 경험 많은 안기모를 집어넣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밸런스 있는 파티 하나가 완성될 것이다. 뭔가 전부 모아놓고 생각해 보니 하나씩 나사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고…. 사실 안기모에게 이들을 맡긴다는 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녀석은 전위와 후위가 가능한 성직자다. 충분히 능력이 있고 앞으로도 성장할 여지가 남아 있다. ‘제대로 키워봐도 되겠는데….’ 물론 이들이 길드에 녹아들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될 문제가 많기는 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마차 한 대가 이쪽으로 들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마차에 타고 있는 한 사람의 존재. “오빠!”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 마중 나온다고 이곳으로 향한 것이겠지만 별로 반가운 타이밍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고개를 돌린 곳에 위치한 사람은 당연히 한소라다. 정하얀을 바라보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보인다. “앗… 아아아아아앗… 앗!” 경기를 일으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휘청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전력으로 축축해지는 그녀의 하체. 바지 끝에 걸린 노란색 물줄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직도 이러는 건가.’ 그동안 보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나아졌을 거라고 예상한 것은 어디까지나 내 착각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지 여전히 ‘앗! 아아’라는 효과음을 내며 시원해지고 있는 모습이 조금 불쌍하다. 내 생각보다 상황이 조금 더 심각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드는 정하얀을 보니 괜스레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잘… 잘못했….” ‘무슨 애를 파블로프의 개로 만들어놨어?’ # 225 회귀자 사용설명서 225화 파티(1) 사실 정하얀이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소라를 데려왔던 당시에도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선희영에게 치료를 받은 뒤에 데려온 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당시의 그녀는 넝마나 다름없었으니까. 정하얀과 그녀가 정확히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시 한소라의 상태를 생각해 보면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일을 당한 것만은 분명하다. 선희영에게 치료를 받은 이후에도 후유증이 남았으니 다른 말은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보다 트라우마가 강하게 자리 잡았나 본데….’ 정하얀만 봐도 오줌을 지릴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 모든 게 오해라는 게 밝혀진 지금 정하얀은 그다지 한소라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마차를 타고 도시로 돌아오는 내내 그녀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튜토리얼 훈련소에서 린델까지 오는 데 바지를 3번 갈아입었다. 만약 마차가 넓지 않았더라면 7번은 더 갈아입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한소라는 이쪽이 아니라 쿨쿨 긴 잠을 자고 있는 똘똘이, 디아루기아와 같은 칸을 사용했는데 사실 그마저도 조금 불편했던 것 같다. 뭔가 조치를 취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부분. 정하얀의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것은 물론 그림자만 비쳐도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니 이쪽에서도 뭔가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일단은 최대한 적응할 때까지 지켜봐 줄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이쯤 되니 한소라를 선택한 것이 실수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1파티와 2파티를 나눈다고 하더라도 2파티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던전이나 전장에 함께 설 수도 있다. 이런 부분을 생각해 보자면 한소라의 멘탈을 잡아주는 건 어느 정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나아졌으니까.’ 방광에서 더 이상 나올 게 없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에 와서는 시원해지지 않았으니 일단은 나쁘지 않은 출발이다. 일단 이쪽에서도 여러 가지로 안전장치를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첫 번째. 잔뜩 흥분한 맹견의 목줄을 쥐고 있는 건 이쪽이고 평소에는 입마개를 씌우고 다닌다는 걸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으리라. 물론 여전히 무섭기는 하겠지만 그나마 그녀가 경기를 일으키는 것을 방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해결책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마차는 린델의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유아영이 입을 크게 벌린 것은 바로 그때. 벌벌 떨고 있었던 한소라 역시 궁금했는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창렬 역시 관심이 없는 척하며 힐끔힐끔 보고 있다. “와….” 처음 린델을 봤을 때 우리 파티의 반응과 똑같다. 물론 저런 반응이 보이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편의 시설이나 즐길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 훈련소와는 다르게 린델의 곳곳에 이 도시가 어느 정도 문명화를 이루어냈다는 증거들이 보인다. 즐길 수 있는 문화 시설도 존재하고 일부 사람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넘친다. 아니나 다를까. 광장에 진입하자마자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파티 구합니다! 사제님만 오시면 바로 사냥 나갑니다. 부산물도 비율조정해서 나누어 드립니다. 사제님만 오시면 바로 갑니다! 도적 분은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희귀 등급의 아이템 처분합니다. 싸게 준비했으니 구경 좀 하고 가세요.” “호외요! 호외!” “던전 탐험 가실 분들 모집합니다! 일반 등급 던전입니다!” “린델을 강타한 베스트셀러, 연금술사와 천재 검사가 사랑하는 법 3권! 한정수량이 딱 93부 남았습니다. 딱 93번까지만 배포하겠습니다. 기다려 주신 분들은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제는 소설책도 파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끈 것은 광장 외곽에 몰려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뭔가 굉장히 소란스럽다. 거의 대부분이 여성들로 구성된 집단이 저 정체불명의 소설책을 사기위해 아등바등하고 있는 걸 보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뭐야! 장난해요? 어제 밤부터 기다렸는데 그게 말이 돼요?” “무슨 이벤트를 이따위로… 주최 측이 어디예요?” “돈은 상관없으니까. 남는 수량 있으면 빨리 풀어줘요!” “대형 길드 간부들한테는 미리 배포했다는 거 모를 줄 알아? 대형 길드만 독자예요?” 마치 파란에서 새로운 모델의 포션을 발표할 때와 비슷할 정도의 열기였다. ‘저거 돈 되겠는데….’ 확실히 사람들의 생활에 여유가 들어서니 이런저런 콘텐츠에 소비되는 골드량도 늘어난 것 같은 느낌. 심지어는 이미 한정판 소설을 산 사람들에게 가 자신에게 물건을 도로 팔 것을 종용하는 것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슬쩍 김미영 팀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김미영 팀장?” “네?” “저건….” “아. 그… 최근에 린델에서 유행중인 소설인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잘 팔리기는 하는 겁니까?” “네. 본래는 음지에서만 돌아다니던 소설이었는데 점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최근에는 실리아와 다완 쪽에도 유통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실리아와 다완 쪽에도 말입니까? 허… 거참. 그거 흥미롭네요. 확실히 요즘 콘텐츠 사업이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혹시 파란 쪽에서 준비하고 있는 아이템은 있습니까?” “아뇨. 아직 그쪽으로는 생각한 바가 없습니다만….” “괜찮으면 시장조사 포함한 보고서 올려주세요. 조금 느긋해도 상관없으니 확실히 해서 보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유통을 맡아도 재미있을 것 같긴 하고…. 아, 혹시 김미영 팀장도 저 소설 읽어봤습니까?” “네? 아… 네.”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김미영 팀장은 일중독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다. 나름대로 여가 생활과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안심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행이로군요. 혹시 내용이….” “설명 드리기 조금 복잡한 내용입니다.” “그렇군요. 하얀이는 읽어봤어?” “아니요. 저는 처음 봐요. 저런 게 있는지도 몰랐어요.” 확실히 아직 저런 종류의 콘텐츠를 즐기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소수인 모양이다. 아무튼 저렇게 사람들 사는 냄새를 전력으로 풍기고 있으니 신입들 역시 린델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은 모양. 제법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들이 보였다. 아마 지금쯤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물론 조금 더 속을 들여다 보면 인상을 찌푸릴 만한 것도 있지만 확실히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웃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 나름대로 활기가 있다. 도시 전체가 조금 더 활기차진 것에는 신입이 들어온 이유 역시 존재하겠지만 좋은 인상을 보여준 린델 시민 분들에게는 감사의 인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저런 풍경을 보는 와중에도 결국 마차는 광장을 지나 파란의 길드 하우스로 향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부르는 김미영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아. 네.” 자연스럽게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눈에 띈 것은 박덕구와 황정연.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꼬맹이, 심지어 그 옆에 자리한 것은 안기모였다. 꼬맹이보다 더 오랜만인 사람 역시 눈에 띈다. ‘조혜진도 왔네.’ 캐슬락에서의 일도 대충 마무리가 된 모양.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재미있었던 건 내가 없는 동안 파란의 길드 하우스가 증축을 했다는 것이었다. ‘보고로는 들었는데….’ 확실히 실제로 보는 것은 조금 다르다. 디자인 자체는 현대적이라기보다는 중세풍에 가까운 것 같았지만 뭔가 클래식한 멋이 있다. 신입들도 파란의 길드 하우스가 좋아보였는지 연신 눈을 꿈뻑거리고 있는 걸 보니 왠지 모르게 자랑스러워진다. 천천히 길드 하우스를 구경하려고 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아, 덕구야. 정연 씨랑 혜진 씨 오랜만입니다. 그리고 예리 너도….” “응….” “네. 오랜만입니다. 부길드 마스터….” “안기모 씨는?” “사실 저희 전 길드 마스터께서 나갈 거면 빨리 나가라고 하셔서 바로 짐 싸들고 나왔습니다. 며칠 전부터 파란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하….” “아! 그렇군요. 파란으로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리고 인사들 좀 나누시죠. 이번에 들어오게 된 신입들입니다. 왼쪽부터 유아영, 이창렬, 한소라 씨입니다.” 살짝 뒤를 돌아보며 소개를 하자 먼저 인사를 하는 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유아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창렬입니다.” “한… 소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기소개를 하는 이들을 보니 괜스레 흐뭇해진다. 유아영은 제법 발랄했고 이창렬은 창렬, 한소라는 여전히 정하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분위기를 정리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아영 씨는 전사 계열, 이창렬 씨는 암살자 계열이고 한소라 씨는 마법사 계열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신설될 제2파티의 주축 멤버로 키울 예정입니다. 일단은 숙소부터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 덕구야. 네가 안내를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정연 씨도 함께 부탁드립니다.” “뭐, 그런 일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요!” “지하부터 위층까지 차근차근히 안내하고 정연 씨는 곧바로 숙소를 정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창렬 씨는 가장 구석진 방으로 가고 싶다고 하셨으니 그렇게 하시고… 한소라 씨와 유아영 씨는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도록 해주세요.” “음음!” “저녁에는 회식이 있을 예정이니 저녁까지는 할 일을 모두 마쳐주시면 될 겁니다. 준비는….” 아마 길드 직원들이 전부 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지만 이쪽에서도 준비하고 싶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할게….” 처음 들어온 후배들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김예리였다. 벌써부터 본인이 선배라고 인식하고 있는 모양. 당연하지만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꼬맹이에게 이런 일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같이 가도록 하겠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부탁드립니다. 혜진 씨.” “네.” “저도 함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안기모 씨.” 많다면 많다고 할 수 있는 인원들이 한 공간에서 바글바글거리니 조금 정신이 없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런 분위기는 나쁘지는 않다. 나를 꽉 붙들고 있는 정하얀은 이곳 분위기가 어떻게 되든지 별로 상관없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똘똘이가 꽤나 오래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디아루기아도 오늘은 둥지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 정말로 오랜만에 전부 모일 거라고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자 생각보다 날이 빨리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새로 들어온 신입들은 여전히 파란의 길드 하우스를 탐방하고 있었고 김예리와 조혜진, 안기모 심지어는 정하얀까지 파티 준비를 하기 시작하니 일이 금방 끝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린델에 들어왔다는 소식에 자리를 잡고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이 문을 열고 자리에 들어섰다. ‘보고 싶었다, 자식아.’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보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 226 회귀자 사용설명서 226화 파티(2) 녀석 역시 그건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대놓고 표현은 못하고 있었지만 얼굴에 언뜻 언뜻 반가운 기색이 눈에 비친다. 그동안은 서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마주한 것이 은근슬쩍 반가워지는 것이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일하느라 바쁜 두 부부가 굉장히 오랜만에 여유를 맞이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히 한 집에 살고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음에도 서로 워낙 바쁘다 보니 출근하는 모습과 퇴근하는 모습밖에 볼 수 없었던 것. 딱 그렇게 예를 드는 것이 맞다. 나도 여유가 없기는 했지만 녀석도 녀석 나름대로 동분서주 뛰어다녔으니까. 물론 정확히 뭘 했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녀석이 다가올 미래를 준비한다는 건 확신할 수 있다. 김현성은 기본적으로 무척 부지런했고 허튼 일을 하는 법이 없었다. 좀처럼 허공에 삽질하는 일이 없다는 거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입을 열어오겠지만 녀석이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나. “오셨군요.” 우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눈치챘는지 일단 녀석 또한 조용히 입을 열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아닙니다. 현성 씨.” “원래는 함께 올 생각이었는데….” “분명히 검은백조와 업무상으로 일이 있었다고 하셨었죠.” “사실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네.” “아니, 이 이야기는 일단 파티가 끝난 다음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일단 즐기도록 하죠. 오늘 해야 할 일은 들어온 신입 분들을 환영해 주는 일이니까요.” “네.” ‘조금 심각한 것 같은데….’ 함께 오래 지내다 보면 눈치가 느는 법이다. 확실히 김현성의 표정이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 때문에 나오는 듯한 답답한 표정. 물론 그런 기색은 찰나일 뿐이었고 신입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금방 기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어쩐지 어색한 구석을 숨길 수가 없었다. ‘고민이 있는 거네….’ 정황상 드러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예상이 가는 일은 없다. 괜스레 검은백조의 박연주가 계속해서 김현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게 떠오르기 시작. 당시에는 그녀가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나름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느낌도 있다. ‘뭐 사고라도 친 건가.’ 붉은용병이나 검은백조가 위기에 빠지는 그림은 별로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일단 길드 마스터인 박연주 그녀가 건재한 상황이었고 이지혜와 대화를 나눴을 때도 별로 이상한 점을 찾지는 못했다. 지금 당장 고민해 봤자 뭔가 나오는 게 없는 만큼 괜한 걱정을 만들 필요는 없어보였지만 자꾸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김현성이 괜스레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린 이후에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당연히 모든 길드원의 시선이 녀석에게로 집중됐다. 자연스럽게 합류해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꼴은 가관. 뭔가 한마디 해야 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쪽에서 살짝 녀석을 밀어줄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 해주시죠, 길드 마스터.” “아암. 이렇게 다 같이 모인 자린데 형씨가 한마디 해야지!” “아….” 뭔가 당황한 것 같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내 말보다는 박덕구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녀석을 따라갔다. “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일단은 늦어서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오려고 온 건데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더군요.” “뭐 다른 것도 아니고 일 때문에 그런 거 아니요. 굳이 사과할 필요도 없소. 다 우리들 먹여 살리려고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거 아니요.” “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의 모임은 제가 계획하기는 했지만 실제 준비는 제가 하지 않은 만큼 축사를 하는 것 역시 영 부담스럽군요. 유아영 씨, 이창렬 씨, 한소라 씨 그리고 안기모 씨까지…. 교육소에는 제가 없었던 만큼 여러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여러분들이 좋은 사람이라 게 느껴집니다.” ‘어디가….’ 사실 성향보다는 능력을 위주로 두고 뽑았다. “물론 그에 겸비하는 실력도 있으시겠죠. 실제로 창렬 씨는 제가 직접 확인을 해보기도 했고요. 아무튼 간에 다들 만나서 반갑습니다. 뻔한 이야기처럼 들리시겠지만 저희 파란은 가족 같은 길드를 지향합니다. 아마 이 생각은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옳소.” “파란을 처음 설립한 이상희 님과 황정연 씨도 그렇고… 또 이곳에 처음 들어온 기영 씨와 하얀 씨와 덕구 씨, 그 이후에 들어온 예리와 희영 씨 그리고 혜진 씨까지 아마 똑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디아루기아 님도 마찬가지고요.” 확실히 친목질이 조금 지나친 경향이 있기는 있다. 물론 이런 친목질이라면 대환영이지만 말이다. “이런 길드를 함께 만들어 주신 단원 여러분들께 감사드리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파란을 선택해 주신 일을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마지막으로….” “…….” “파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키야. 새끼, 반하겠네.’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녀석이 잘생기기는 잘생겼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혜진과 김예리의 얼굴이 미묘하게 붉어지고 있는 걸 보면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 아마 이곳에 넘어오지 않았더라면 지구에서 모델이든 연예인이든 얼굴로 먹고 사는 직업을 했을지도 모른다. “다 같이 한잔합시다.” 마지막 대사에 가장 커다란 소리를 지른 것은 물론 박덕구였다. “마시자!” 그렇게 작은 파티가 시작됐다. 교육생 시절에는 먹어보지 못했을 화려한 음식들이 눈앞에 보이자 유아영은 시선을 빼앗긴 느낌. 정하얀과 선희영은 내 양옆에서 조용히 음식을 집어먹고 있었고 김현성은 이상희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회식자리이기는 하지만 인원이 10명이 넘다 보니 결국에는 따로따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물론 이런 자리에서 항상 독보적인 활약을 보이는 것은 박덕구. 녀석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릴 정도였다. “아니, 그런데 창렬이 형씨는 왜 그렇게 복면을 쓰고 다니는 거요?” “…….” “창렬이 아저씨. 입 안에 있어. 그거 있어… 독침.” “엉?” “나… 저번에… 한 번 싸워 봤었잖아. 입단 테스트 겸… 조금 더럽게 싸우지만 나쁘지 않아. 재능 있는 느낌이야.” ‘김예리, 이창렬과 대화를 나누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다른 쪽으로 가서 입을 털고 있다. “아. 한소라 씨는 거 다리 진짜 불편한 거요? 거, 아무 걱정하지 마쇼. 우리 형님이랑 희영 누님이 앉은뱅이도 일으키는 사람들이라니까! 아마 제대로 치료하기 시작하면 3일도 지나지 않아 벌떡 일어설 거요. 그렇지 않소? 희영 누님?” “시도해 봐야 되겠지만… 잘은 모르겠네요. 이미 한 번 치료해 본 적이 있지만 후유증이 남아서 물론 계속해서 운동을 하다 보면 지금보단 상태가 나아질 거예요.” “상태가 나아지다마다! 형님이 만든 기적의 물약 한 입 마시면 거 눈도 재생할 거요. 눈도 걱정하지 마쇼. 그게 안 되면 형님이 의안이라도 달아준다니까. 거, 분명하다니까!” “감, 감사합니다.” 아쉽게도 나에게는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능력 따위는 없다. 물론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한소라의 몸 상태를 완벽하게 만드는 건 내 능력 밖이다. “거 이야기는 들었소…. 뭐, 누님 마법 실험실에 들어갔다가 화를 당했다는 거 말이요. 그래도 걱정하지 마쇼! 우리 하얀이 누님이! 응? 용서의 아이콘 아니요. 용서의 아이콘. 이렇게 천사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딸꾹….” “그렇지 않소? 누님?” “네. 저, 저도 실수했는걸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래도 안, 안, 안 돼요?” “아… 아앗….” “걱정하지 마쇼! 거 요실금도 치료될 거요!” 여기저기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꼴이 마치 홍길동 같다. “여기 이 누님이 말이요. 거, 신입 분들은 보지 못했겠지만 사실 이 누님의 진짜 정체는 용이라니까.” 머리에 있는 뿔로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 “이 누님 본모습은 저번에 캐슬락 공성전에서 한 번 본 적 있는데… 아니 글쎄! 어떤 못된 던전에 있는 마법사 놈이 이 용 누님을 조종한 거 아니요. 그대 따악! 하고 이 누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게 우리 형님이라는 거지! 형님이 그때 뭐라고 했냐면….” “…….” “공격 중지! 공격 중지! 더 이상 공격하지 마! 라고 외치면서 따악 이 용 누님의 앞을 가로막는데… 크으! 형님이 여자였으면 그때 반했을 거요! 심지어는 이 용 누님의 딸! 그러니까 똘똘이를 한 손에 안은 채로 보호하고 있었다니까!” 괜스레 민망해졌다. “사실 그때 안 싸워서 다행이었지. 분명히 그 앞발로 한 대 후려맞았으면 바로 즉사했을 거요. 한 입에 삼켜지면 뭐, 반항도 못하고 바로 끝이지. 아무튼 간에 그것 때문에 이 용 누님이 우리 형님을 선택했는데 말이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이 용 누님 입에서 에네르기파 같은 것도 나간다고 하더오.” “브레스입니다.” “브레스나 에네르기파나 그게 그거지! 근데 또 이게 재미있는 게 형님이 또 그 브레스를 물약으로 만들었다는 거 아니요!” ‘이 자식이….’ 마치 최근에 있었던 스트레스를 모두 날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물론 나쁘게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녀석 덕분에 분위기가 한층 더 부드러워 지기도 했고 웃고 있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으니까. 물론 뭔가 와해된 정보를 뿌리고 있었기 때문에 듣는 입장에서는 마음이 편해지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 디아루기아와 나에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는 괜스레 부끄러워져 어딘가로 숨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렇지만 나를 제외한 대부분은 녀석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재미있게 놈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이 자리에 박덕구가 없었다면 분위기가 조금 침울해졌을 거다. 무엇보다 내가 입을 털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가장 기분이 좋다. ‘저것도 어떻게 보면 감정 노동이니까.’ 물론 녀석에게는 저게 감정 노동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녀석의 좋은 방향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기까지는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 연금술사를 한다고 했을 때는 거, 형님을 얼마나 말렸는지 모르오. 물론 그때도 형님을 믿기는 했지만 그래도 흑마법사 같은 멋있는 직업을 놔두고 연금술사를 선택한다니…. 지금은 전부 옳은 선택이라는 게 증명되기는 했지만 뭐, 그때는 나도 생산직을 무시했었다니까.” “아… 네.” “말하자면 생산직에도 무수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거요! 전부 자기가 하기 나름이라는 거지. 그걸 형님을 보고 깨달았소.” “생산직 말인가요? 덕구 오빠?” “아 아영 씨도 생산직에 관심이 있는 거요?” “아… 네. 처음에는 전투직을 생각하지 못했었고 사실 다른 쪽을 가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이기영 교관님이 가능성이 보인다고 말해주셔서… 이쪽을 진지하게 파보기로 한 거예요.” “아아아아… 그렇구만!” “그리고….” “엉?” “사실 지금 두 번째 전직을 앞두고 있어서요. 아직 선택하지는 않았지만요…. 그….” “어엉?” “대장장이가 선택지에 있어서요.” “…….” “…….” “…….” 갑작스럽게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가장 황급하게 살핀 것은 김현성의 표정. 녀석이 박덕구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조금의 당혹감이 들어가 있었다. 아마 예전 일을 떠올리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박덕구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장장이… 좋은 것 같은데….” ‘이 미친 돼지가….’ 조용한 분위기에서 들려오는 왠지 모를 묵직한 목소리. 충분히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김현성이 황급하게 입을 열어왔다. “아영 씨. 다른 직업은 혹시….” “아. 선택지는 두 개예요. 하나는 대장장이. 또 하나는 방어 전사라고 되어 있네요.” “나쁘지 않군요. 선택지가 두 개밖에 뜨지 않은 건 의외지만 아마 사냥을 겸비하지 않은 성장의 부작용일 겁니다. 방어 전사라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방어 전사… 뭐, 좋을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요…. 사실 직업 효과로 딸려오는 기초 방패 지식들은 전부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들이오.” 시동 걸지 마… 이 돼지 새끼야. 박덕구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시동을 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생각해 보쇼. 형님이 연금술사를 선택하기는 했었지만 지금 보여주는 화력자체는 응? 마법사들 이상이라니까.” 그건 내가 특수한 경우다. “조심스럽게 한마디 해보자면… 응? 원래 남들이 걷지 않는 특별한 길을 걷는 사람이 주목받는 거요! 거, 방패 들면서 몬스터 때려죽이는 망치로 무기까지 만들다니 이거 완전히 사기 아니요?” “일… 리가 있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성장에 격차가 생길 겁니다. 아영 씨는 재능이 있는 만큼 아마 영웅 등급, 더 높이 전설 등급의 직업으로 올라갈 수 있으실 겁니다.” “거, 한 마디 해보자면 전설 등급의 대장장이는 망치로 괴물 머리를 한 번에 뽀개 버릴지도 모른다니까.” “아니… 그런 건….” 무 논리에는 김현성도 기가 막히는 모양. “선택은 아영 씨 몫이겠지만 역시나 형님의 경우를 생각하면 무조건 대장장이요!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니까! 못 만드는 게 없는 천재 대장장이 유아영! 크으… 거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울림 아니요?” “물론 생산직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덕구 씨 말대로 기영 씨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고요. 그렇지만 아영 씨의 재능을 생각해 보면 정석의 루트를 타도 충분히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종합적인 면에서 생각해 보자면 역시 전사를 선택하시는 게 이상적일 겁니다.” 김현성의 말이 사실은 정론이다. 대장장이도 물론 필요하다. 그렇지만 유아영을 대장장이로 쓰기에는 여러모로 아까운 면이 많다. “아영 씨의 재능을 생각해 보면! 정석의 루트를 타지 않아도 강해질 수 있는 거 아니요! 린델에는 새로운 바람이 필요한 거요! 나는 확실히 대장장이를 추천한다니까!” “방어 전사입니다. 만약에 아영 씨가 방어 전사를 선택하신다면 이 방패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나를 연금술사로 꼬실 때와 비슷한 흐름. 김현성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이제는 박덕구도 애송이가 아니라는 거다. “만약에 대장장이를 선택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방패 기술을 전수해 주는 것은 물론 이 망치를 선물로 주겠다니까!” 언젠가의 던전 탐험에서 구해왔던 묵직한 망치. 김현성의 얼굴이 잠깐이지만 당혹감에 물들었다. “대장장이요! 원래 넒은 가슴을 가진 사람은 망치를 두드리는 거요!” “방어 전사입니다. 재능이 너무 아깝습니다.” “그 재능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니까! 대장장이요!” “방어 전사입니다!” “대장장이!” “방어전!” “대자아아아앙장이!” ‘미… 미친 돼지가….’ 더 황당했던 것은 왠지 모르게 나도 박덕구에게 설득되는 느낌이 든다는 것. 유아영은 자신이 던진 화두가 이렇게 과열될지 몰랐는지 당황스러워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방어 전사!” “대장장이! 무조건 대장장이요!” “방어 전사가 더 좋습니다. 확실합니다.” “방어!” “대장!” “방어 전사!” “대자응장이! 망치 나가신다!” 이게 뭐야. 유아영이 어떻게 하냐는 듯 나를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망치 나가신다!” # 227 회귀자 사용설명서 227화 파티(3) ‘설득되고 있어.’ 덕구 녀석이 처음 시동을 걸 때만 해도 이 자식이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그럴 듯해….’ 목소리에 묘한 울림이 있다는 건 둘째치고라도 박덕구의 말은 왠지 모르게 일리가 있다. 굳이 방어 전사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 방어 전사를 선택한 이점이라고 해봐야 관련된 근접 상위직으로 갈 수 있다는 것 정도. 물론 앞서 말한 것이 성장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낙천적인 그녀의 성향을 생각해 봤을 때 그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유아영은 훈련소에서도 그렇게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적성에 맞지 않는 거야.’ 재능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본인이 그 분야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분석이었다. 대장장이라는 직업 선택창이 뜬 것 또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박덕구는 대장장이 직업이 뜬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녀가 생산직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카테고리가 생겨났다는 거다. 물론 어떻게 생각해도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앞에서 버텨 줄 전위. 하지만 고급 방패 지식을 가지고 있는 박덕구가 유아영을 케어해 준다면 충분히 믿어볼 만하다. 나 역시 연금술로 마법사 못지않은 화력을 가졌다는 걸 생각해 보면 성장하는 방법과 타이밍만 맞는다면 대장장이도 충분히 전위로 사용할 수 있을 수도 있다. ‘잠재 능력도 나쁘지 않아.’ 체력 재능이 전설이라는 것 또한 대장장이로 써먹을 여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 걱정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김현성이 그다지 대장장이를 내켜하지 않는다는 거다. 당연하지만 미래에 유아영이 전사로서 큰 성공을 거두기 때문은 아니다. 김현성은 유아영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듯한 눈치였으니까.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아주 귀하게 구한 인재를 생산직으로 돌리기 싫은 것뿐이겠지만 시간만 있으면 유아영과 레벨이 비슷한 인재는 어떻게든 구할 수는 있다. 왜? 나에게는 마음의 눈이 있으니까. 미래의 인재를 영입할 수 있는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이쪽에 지고의 보물인 디아루기아가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녀는 드래곤 블랙스미스 같은 직업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는 거요? 역시 대장장이 아니요?” “글쎄….” “생각해 보쇼! 대장장이가 딱이라니까! 누가 봐도 대장장이 상 아니요? 대장장이 상이라니까!” 정말로 그렇게 보이기 시작한다. “망치를 들고 모루를 두드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쇼. 초고열 용광로 속에서 일하니까 화염 저항도 일반 전위보다 뛰어날지도 모른다니까? 불바다 속에서도 버틸 수 있을 거요.” ‘말도 안 되는 소린데….’ 이 영혼을 울리는 울림의 정체가 상상이 잘 안 된다. 슬쩍 유아영을 바라보자 그녀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중. 갑옷을 칭칭 입고 있는 것보다 뭔가 대장장이 같은 복장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앞서 말한 생각들도 점차 커져나가기 시작. “대장장이!” “방어 전사!” “대장!” “전사!” 그 와중에도 아직까지 김현성과 박덕구는 서로가 원하는 직업을 소리 높여 부르고 있었다. 이쪽에서도 뭔가 액션을 취해줘야 할 것 같은 타이밍. 결국에는 슬그머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쉽게도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기대를 배신하는 목소리였다. “대장장이… 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기영 씨?” 깜작 놀란 김현성의 얼굴이 가장 먼저 시선에 들어왔다. ‘미안하다, 자식아. 그런데 자꾸 마음이 대장장이한테 가네.’ 비 맞은 강아지 같은 김현성의 눈빛조차 박덕구의 영혼의 울림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물론 현성 씨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대충 이해가 갑니다만 아무래도 뛰어난 전사를 찾는 것보다 뛰어난 대장장이를 찾는 게 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국 전체를 뒤져보면 괜찮은 대장장이가 나오기는 하겠지만….” “네.” “개인적으로는 파란이 보유하고 있는 특수한 자원을 외부 길드나 바깥쪽에 공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기도 하고… 덕구가 말했듯이 전직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들은 덕구가 충분히 가르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고급 마력 운용 지식은 따로 배울 수 없을 겁니다.” “저 역시 고급 마력 운용 지식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화력 면에서는 다른 마법사에 비해 크게 밀린다는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건 기영 씨가 특별한 경우….” “그녀 역시 특별한 경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 물론 저는 단순한 예를 설명해 드린 것뿐입니다. 어디까지나 선택은 그녀의 몫으로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 이쪽에서 아무리 밀어붙인다고 한 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운명이 결정지어질 것이다. 사실 길드의 입장에서도 강제로 밀어붙일 수 있기는 하다. 특히나 유아영 같이 애초에 전투직으로 계약한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다. 대뜸 이야기도 안하고 대장장이로 전직해 버린다면 길드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난감할 수 있다는 거다. 그렇지만 파란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 강제로 직업을 바꾸라고 한다고 해서 효율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박덕구 녀석의 영혼의 울림은 이상할 정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김현성과 박덕구의 다툼은 어디까지나 추천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아영의 의견. 다시 한번 장내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 “…….” “…….” “사실은… 대장장이가….” “…….” “크으!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누가 봐도 대장장이 얼굴이었다니까!” ‘어딜 봐서.’ “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아, 네. 딱히 뭐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왠지 모르게 그쪽이 끌린다고 해야 되나…. 이런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시킨다는 느낌이라서요.” 이건 설득력이 있다. “아….” 이유를 들어야 된다고 생각한 회귀자 역시 슬그머니 미드로 시선을 옮기다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중. ‘너도 남자구나….’ 김현성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 유아영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물론 제2파티에도 해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훈련할게요. 이기영 교관님 말씀대로 제 나름의 방법을 찾으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생산직을 선택한다는 게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그렇군요.” 현실로 복귀한 김현성이 조금은 뚱한 표정. ‘미안하다니까, 자식아.’ 그렇지만 그 표정이 풀리는 것은 순식간. 유아영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지원해 주는 게 맞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모양이다. 디아루기아가 가지고 있는 자원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쳤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미래에 등장할 대장기술 따위를 생각해 보며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가슴이 시킨다는 말에 엄청난 설득력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전체적으로 일단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느낌이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겠군요. 길드에서 최대한 지원을 해드리는 방식으로….” “혹시 계약서에 적혀 있는 내용을 바꾸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셔도 돼요. 애초에 전투직으로 계약을 하신 거니까… 갑자기 저도 죄송해지네요.”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이 건은 이쪽에서 대신 말해줘야 될 것 같았다. “아. 그 건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영 씨. 대신 계약기간을 조정해야 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아영 씨가 대장장이를 선택하게 되면 만질 자원이 주변에 널려 있는 다른 것들과 조금 다를 수도 있는 터라….” “네. 그 부분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어요, 교관님.”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음! 음!” 만족스러운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박덕구는 기분이 좋은 모양. 혹시나 자신을 위협할 새로운 전위의 싹을 애초에 잘라버리려는 설계는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지만 박덕구는 내가 아니다. 아마 그런 생각 따위는 못 했으리라. 그렇지만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기는 한다. 박덕구의 입장에서는 얻어걸린 것뿐이겠지만 결과만 두고 생각해 봤을 때는 한 번쯤은 해볼 만한 추론이다. ‘애초에 처음 생산직 이야기를 꺼낸 것도 박덕구였고….’ 물론 녀석은 유아영의 직업 선택 목록창에 대장장이가 있는 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건 마음의 눈으로도 볼 수 없다. ‘설마 진짜 그런 건 아니겠지.’ “이거 드디어 길드 대장장이가 만들어주는 방패를 쓸 수 있겠구만!” ‘가지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닐 거야….’ 디아루기아의 뿔이나 비늘로 만든 무기가 가지고 싶어서도 아닐 것이다. 그나마 파란에서 정상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유일무이하게 박덕구뿐이다. 그렇지만 영혼의 외침의 결과물이 녀석에게 굉장히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내가 팍팍 밀어 준다니까! 훈련은 맡겨주쇼!” 새로운 새싹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린 것은 물론 자신의 방어구까지 만들게 하는 대담함. ‘이 새끼 바보 아닐지도 몰라.’ 왠지 모르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에는 유아영이 희미한 빛에 휩싸였고 박덕구는 한 번 더 자신의 입지를 지킬 수 있게 됐다. 다시 한번 커다란 소리가 들리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오고 갔지만 당연히 주제의 대부분은 유아영이나 한소라, 이창렬에 대한 것이었다. “뭔가 새로운 지식이 들어 온 거요?” “네. 지금 당장 한번 시험해 보고 싶네요.” “여러 가지로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기영 교관님.” 물론 그중에서도 제일 관심을 받은 것은 유아영이었다. 애초에 여러 가지 일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든 자리에서도 이런 대화가 오고가는 것을 보니 이미 우리도 뼛속까지 플레이어인 모양. 김예리도 이창렬과 제법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선희영도 한소라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일상적인 대화가 아니다. ‘여기에 적응하기는 적응했구나.’ 확실히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오늘 린델에 들어온 만큼 조금은 빠르게 끝내려고 한 자리가 끝나지 않는다. 결국에는 한두 명씩 술에 취해 숙소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애초에 미성년자인 김예리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길드 마스터의 엄명에 따라 조혜진과 함께 안으로 들어간 지 오래. 선희영과 황정연 그리고 신입들과 안기모도 하나둘 몸을 쉬기 위해 들어갔지만 정하얀은 꾸벅꾸벅 졸면서도 굳건히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박덕구와 김현성도 마찬가지. 어쩌다 보니 마지막에 남은 사람들은 튜토리얼 던전에서 만났던 네 명이다. “역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건 우리 네 명이구만!” “그러네. 튜토리얼에서 함께 나온….” “크으… 벌써 1년이나 지났다고 생각하니까 감회가 너무 새로운 거 아니요. 벌써 후임들을 키워야 될 때가 왔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신기하다, 이 말이요. 형님이랑은 계속 붙어 있을 것 같았지만 사실 형씨랑도 이렇게 오래 함께 지내게 돼서 기쁘다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조금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길 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 동안 잘 따라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쑥스러운 발언이라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조금 굳어 있는 것 같다. 당연하지만 저런 말에는 똑같이 간지럽게 받아쳐주는 게 옳은 선택이다. “당연한 일입니다. 동료니까요.” “…….” “…….” “형님….” 입을 열면서도 조금 오그라들었던 발언. 그렇지만 박덕구와 김현성이 뭔가 찡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서둘러 주제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현성 씨의 결정이 항상 합리적이기 때문이겠죠.” “아암… 그건 그렇지.” 녀석이 조금 진지하게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실….” “네?” “이번에는 조금 합리적이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 같은 느낌,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검은백조와 나눴던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예.” “그렇군요.” “위험한 일입니까?” “네.” ‘슈… 바….’ 조금은 걱정했던 일이 들이닥쳤다. # 228 회귀자 사용설명서 228화 균열 박물관 (1) “위험한 일입니까?” “네.” “그렇… 군요….” 회귀자의 품이 마냥 따뜻하지만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다. 이 대륙과 지금 이 상황을 게임에 비유한다고 한다면 김현성은 메인 퀘스트를 가지고 있는 네임드 NPC라고 할 수 있을 정도. 녀석이 여러 가지 사건의 중심에 선다는 것은 이미 확정된 이야기였고 그 과정에서 위기가 따라올 수도 있다는 것은 이미 인지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도 위험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처음 튜토리얼 때 정진호와 함께 공략조로 참가한 것 역시 위험을 감수한 일이었고 캐슬락 공성전도 위험한 일이었다. 당연하지만 내가 이런 이벤트에 별 부담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사랑스러운 회귀자를 믿고 있었기 때문. 혹시나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번개처럼 나타나 해결해 주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 큰 탓이다. 특히나 튜토리얼 던전 같은 경우에는 녀석이 합류함으로써 난이도가 대폭 내려간 것이 현실. 위험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딱히 긴장하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내 모든 결정은 이런 저런 요소들을 고려해 보고 결정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조금 위험하기야 하겠지만 가능성 있어.’ 따위의 생각을 하며 실행에 옮겼다는 거다. 실제로 김현성은 자신의 선택이 불러올 위험에 대해서는 경고한 적이 없었다. 혹여나 사건이 터져도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지만 최소한 같은 파티의 동료들은 죽지 않게 만들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얘가 이런 말을 꺼낼 정도면….’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하다는 뜻이다. 솔직히 어느 정도 불안감이 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무슨 일인지 들어도 되겠습니까?” “검은백조에서 지원 요청이 왔었습니다.” “거절하기 힘들겠군요.” “네.” 멍하니 있던 박덕구가 입을 열어왔다. “왜 거절하기 힘들다는 거요?” “빚진 게 많으니까.” “아….” “우리는 여러 가지로 검은백조한테 빚진 게 많아. 아직 전부 다 갚지도 않았고 내가 왕성에서 문제가 있었을 때도 우릴 도와주었지. 또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거든. 아마 네가 알면 깜짝 놀랄 거다, 덕구야. 조금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까지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고 있어.” 심지어 박덕구의 일로도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동맹이라고 하지만 파란과 검은백조, 붉은용병은 어디까지나 독립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집단이라는 거야. 당연히 개인의 이득을 위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지. 이 동맹이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이 집단이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 이상한 우정이나 린델을 지켜내야 한다는 목표 때문도 아니야.” “그렇지만 형님은 그 빨간 머리 누님이랑 꽤… 친근하게 지내고 있는 거 아니요?” “그건 나와 희라 누나의 관계지 파란과 붉은용병의 관계는 아니다. 물론 친해서 생기는 어느 정도의 이점은 있겠지만 단순히 그뿐이야. 내가 파란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만큼 그녀도 붉은용병을 우선으로 생각할걸. 실제로 현성 씨도 검은백조의 길드 마스터와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잖아. 공적인 일은 공적으로 사적인 일은 사적으로 그게 기본이야.” “아아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 동맹 중에 여러 분야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지원 받고 있는 게 우리 파란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지? 이미 우리는 충분히 배려 받고 있다는 거야. 애초에 우리 길드는 움직일 수 있는 재화나 능력으로 본다면 중견 길드지만 규모 자체는 작아.” “대충은 알 것 같은데….” “간단히 말하면 이 삼자동맹 관계에서 가장 맛있는 꿀을 빨고 있는 건 파란이라는 것. 그리고 이 꿀물은 공짜가 아니라는 것.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지. 그 동안 받아먹던 꿀물에 페이를 지급할 때가 됐다는 거야.” 내 말에 김현성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기영 씨 말이 맞습니다. 검은백조 길드에서 공식적으로 저희 파란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만약 이번 일이 위험하다 해서 발을 뺀다면 검은백조에게는 물론 붉은용병에게도 신뢰를 잃을 겁니다. 물론 다른 길드나 클랜에게도 마찬가지고요.” “아… 그런 거구만…. 말하자면 신의라는 거 아니요.” “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입장상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만약에 김현성의 말대로 이번 임무가 정말로 위험하다면 빚을 지운 것으로 모자라 빚을 달아놓을 수도 있다. 똑같은 일로 한 번 더 그녀들을 호출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나쁘지는 않아.’ 파란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위험을 맞을지 모른다.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게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원래 이 대륙은 리스크를 진 만큼 보상을 안겨다 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인 만큼 주사위를 던져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어떤 일입니까?” “던전입니다.” ‘이럴 줄 알았지.’ 전쟁이 일어나 다른 나라에 포로로 억류되어 있는 게 아니라면 검은백조에서 도움을 청할 부분은 이 정도 밖에 없다. “결론부터 설명해 드리자면 검은백조의 주요 간부진과 단원들이 던전 안에 고립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검은백조의 길드 마스터 박연주 씨에게 받은 부탁은 이 던전에 고립되어 있는 이들을 구조함과 동시에 던전을 공략하는 일입니다. 물론 박연주 씨를 포함한 검은백조의 주요 전력도 함께 움직이게 될 것 같고요. 공략 인원은 총 30명이 될 것 같습니다.” “음… 던전 안에 있었던 이들이 죽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던전 안을 빠져나온 생존자가 한 명 존재합니다. 증언에 따르면 던전 안에 있는 이들은 확실히 고립되어 있는 것이 맞습니다. 던전의 이름은 균열 박물관. 특이사항으로는… 무등급의 던전이라고 하더군요.” “빠져나온 생존자가 있었군요. 아니, 그보다는… 등급이 없다는 말입니까?” “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면 등급이 변화하는 종류의 던전이라고 들었습니다. 일반 등급의 던전이 될 수 있는 것은 물론, 전설 등급의 던전이 될 수도 있다는 거겠죠. 개인적으로는… 어쩌면 전설 등급 이상의 던전으로 변화할 수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네?” “물론 그렇게까지 될 확률은 현저히 낮지만….” 만약 정말로 전설 등급 이상의 던전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들어가는 것 자체가 무리수이며 자살 행위다. 애초에 지금껏 공략된 전설 등급의 던전도 몇 개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전설 등급 이상일지도 모르는 던전에 들어간다는 것 가정 자체가 틀려먹었다. 물론 생존자가 있다고 한다면 검은백조에서 이것저것 공략에 관련된 것들을 준비하기야 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 요소가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해볼 정도. ‘전설 등급 이상이면… 신화 등급인가.’ 일반 등급일 수도 있고 영웅 등급 일 수도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건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균열 박물관은 네임드 몬스터가 랜덤으로 나오는 종류의 던전입니다.” “아아….” “희귀 등급과 영웅 등급, 전설 등급과 신화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들이 균열 속에 봉인되어 있고 오로지 무작위로만 네임드 몬스터들을 내보낸다고 하더군요.” “그런 정보는 어떻게….” “아무래도 말로만 설명드릴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서를 보여드리는 게 좋겠군요. 균열 박물관 안내인이라는 던전 안내인에게서 나온 정보를 토대로 만들어진 보고서입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던전 안내인….’ 간혹 이런 종류의 던전이 있다는 걸 듣기도 했다. 아니, 실제로 겪어본 적도 있다. 조금 종류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사실 튜토리얼 던전에서 들리던 여자의 목소리도 던전 안내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이를 테면 던전 안내인이라는 것은 이 던전이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 던전이며 이 던전에서 이뤄야 할 목표가 뭔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이레귤러다. 예전 마도 길드에 의해 공략된 적이 있는 마법사의 탑 같은 던전에서 남아 있는 마법사의 잔존 사념, 튜토리얼 던전에서의 시스템, 아니면 던전을 배회하는 영혼 같은 것을 전부 포함해서 아우르는 말. 대놓고 균열 박물관 안내인이라는 게 있을 정도라면 이 던전은 조금 친절한 종류의 던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저주 받은 신단과는 딴판이네….’ 율리에나를 얻었던 저주받은 신단 같은 경우에는 정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 겨우 영웅 등급 판정을 받았던 던전이 파란이라는 길드 하나를 통째로 집어 삼킨 이유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특수 NPC가 붙는다는 건 나쁘지는 않다. ‘짜증나는 함정이나 복잡한 일은 없다고 봐도 되는 건가.’ 그만큼 다른 부분에서 사람을 쥐어 짤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일단은 나쁘지 않아.’ 적어도 저번처럼 공략 외적인 부분에서 머리를 굴리거나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거다. 검은백조의 생존자가 만든 보고서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확실히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생존자가 만든 보고서가 이 던전의 모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겠지만 적어도 정보가 아예 없는 것보다는…. ‘좋겠지.’ 꽤나 두껍게 만들어진 보고서를 차례로 넘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내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고 있는 걸 본 김현성도 이때만큼은 딱히 사족을 달거나 입을 열지 않았다.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다. ‘사실 내가 읽는다고 뭐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무등급 던전 균열 박물관 보고서.] [본 보고서는 균열 박물관 안내인의 안내을 받은 검은백조 길드의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진 보고서임을 밝힌다.] [안내인의 안내를 그대로 나열한 전반부, 균열 박물관이라는 던전에서 이루어진 일의 경과와 사건을 나열한 중반부와 공략을 위한 후반부로 분류한다.] “…….” [균열 박물관 안내인의 말에 따르면 균열 박물관은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비밀 결사, 균열 수호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지식과 보물의 총집체이며 안내인 막스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에고 반지이다.] [균열 수호자들은 기나긴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시간에 풍화되어 그 존재와 의의를 잃어버렸으며 안내인 막스가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균열 수호자이다. 던전의 입장한 이들 중에서 대표를 선출, 박물관의 정숙을 위해 탐험가는 30여 명으로 고정된다. 박물관 탐험가들은 안내인의 반지를 착용한 이후에 박물관 탐험을 시작하게 되는데 한 번 던전에 입장한 이들은 탐험을 마치거나 대가를 지불할 때까지 던전을 나갈 수 없으며 반 강제적으로 공략에 임해야 한다.] “…….” [던전 공략은 균열 수호자들을 봉인하거나 계약을 맺은 네임드 몬스터들 중 세 개의 개체를 쓰러뜨린 이후에야 완료할 수 있고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는 네임드 개체들은 본 대륙의 것뿐만이 아니라 밖에서 온 것 역시 존재한다. 일부 초월적인 존재는 봉인이 아니라 계약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 [박물관에는 총 500여 개의 개체가 존재하며 세 가지 종류의 전설 등급 이상의 네임드 몬스터, 서른 가지 종류의 전설 등급의 몬스터, 사백여 가지의 영웅 등급의 몬스터, 나머지 등급의 몬스터들은 희귀 등급의 몬스터로 분류한다.] ‘이거… 완전히….’ [선택되는 세 개체의 네임드 몬스터는 철저하게 무작위로 결정된다.] ‘…….’ [박물관 탐험의 보상 역시 세 가지이며 보상 역시 세 가지 종류의 전설 등급 이상의 무구, 서른 가지 종류의 전설 등급 무구, 사백여 가지의 영웅 등급의 무구, 나머지 등급의 무구는 희귀 등급 중… 중략.] ‘…….’ [보상 역시 철저하게 무작위로 결정된다.] ‘운빨이잖아….’ 전설 등급의 몬스터를 쓰러뜨리고도 희귀 등급의 보상을 받을 수도 있고 희귀 등급의 몬스터를 잡고도 전설 등급의 무구를 받아갈 수 있다. 조용히 내 옆에서 내가 읽고 있었던 보고서를 훔쳐보던 박덕구도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모양. “이거 완전히 창렬 뽑기 게임 아니요?” 녀석의 중얼거림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229 회귀자 사용설명서 229화 균열 박물관 (2) “이거 완전히 창렬 뽑기 게임이라니까요.” “우리 길드의 누구도 그런 말이랑 똑같은 소리를 하더라.” “누구요?” “박덕구.” “…….” “…….” “아! 그러고 보니 요조라 길드의 카스가노 유노 역시 이번 원정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는데….” “걔는 안 돼.” 조금은 단호한 발언에 이지혜가 의외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당연히 8좌 중에 하나로 손에 꼽히는 그녀가 원정에 참여해 준다면 박수를 보내는 게 맞지만 아쉽게도 그건 평범한 던전일 경우의 이야기였다. ‘행운 수치 제로.’ 카스가노 유노의 행운 수치를 생각해 본다면 도와준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민폐. 이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부정 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의외네요. 데려가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걔 행운 수치 낮아.” “아….” “그것도 절망적으로.” “조금 친근한 사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스탯도 공유할 정도의 사이였어요?” “그렇게 자세히는 모르지만….” “글쎄요. 어쩌려나….” 묘하게 이쪽을 흘겨보는 것 같았지만 딱히 다른 말을 해오지 않는 걸 봐서는 어찌되든 그다지 상관없는 모양. 애초에 그녀는 내가 누굴 만나든 간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한 가지 신경 쓰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이 쓸모가 있는가에 대해서다. 어째서 이쪽이 최후에는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인정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있기 때문에 이 작업이 무척 편해졌다는 것이다. ‘파란으로 데려올 걸 그랬어.’ 검은백조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 걸로도 모자라 완전히 날아오르고 있는 걸 보면 오히려 검은백조에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분명히 아쉬운 부분도 존재했다. ‘편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손발이 잘 맞는다는 게 어떤 건지 느낄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거다. 다시금 원정대원 프로필에 고개를 처박았을 때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이거 어렵네요. 행운 수치도 중요하고 그렇다고 해서 밸런스를 맞추기도 어렵고 편성자체에 이렇게 힘을 쏟아보는 건 처음이에요. 물론 다른 원정대의 편성도 분명히 까다로운 면이 있기는 했지만 이만큼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고요.” “….” “게다가… 이렇게 보니 정말 행운 스탯이 높은 사람이 많지 않네요. 오빠도 겨우 70대고… 생각보다 더 높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박물관 안에 고립되어 있는 이들은 평균 행운 수치가 몇 정도야?” “글쎄요. 30정도? 아마 마이너스 플러스로 15정도의 오차가 있을 거예요.” “망할 만하네.” 균열 박물관의 공략을 위해 가장 필요한 부분은 당연 행운 스탯의 공개였다. 굳이 내가 마음의 눈으로 훔쳐보면서 스탯이 높은 이들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이지혜는 이 던전의 공략을 위해 행운 스탯을 일부 한정 공개하는 것을 제안했고 검은백조나 파란의 일원들은 당연히 그 쟁점에 합의했다. 무난한 편성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제동이 걸린 것은 생각보다 행운 수치가 높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 가장 이상적인 것은 행운 능력치가 80이 넘는 이들로만 원정대를 구성하는 일이겠지만 행운 수치로 전설 등급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다른 일반 스탯에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보다 찾기 힘들었다. 플레이어들이 가지고 있는 스탯 중 가장 베일에 싸인 스탯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어떻게 올려야 하는지도 아직 규명된 바가 없었고 심지어는 어째서 행운 스탯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높은 행운 스탯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길을 걷다 객사하는 경우도 있고 카스가노 유노처럼 낮은 행운 스탯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성공가도를 달리는 경우도 있다. 근력 스탯이 오르면 강해진다. 민첩 스탯이 오르면 빨라진다. 다른 스탯에는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간단한 논리가 행운 스탯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거다. 물론 운이 좋아진다는 것은… ‘생산직한테는 영향이 없지는 않은 것 같지만….’ 아무튼 간에 이번 원정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높은 행운 스탯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원정대에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 물론 이들로만 원정대를 구성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현실적인 부분에서 목표로 잡고 있는 수치는 평균 행운 스탯 60이상. 이 정도의 행운 스탯을 가진 구성원으로 최소 전설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을 만든다. 이게 이번 편성의 핵심이었고 이지혜가 힘들어 하는 이유였다. “파란에서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같이 고민 중이기는 해. 일단 나랑 현성 씨, 하얀이, 희영 씨 이렇게 네 명은 확정이거든.” “덕구 씨는 안 데려가요? 이제 파란의 훌륭한 전력으로 성장한 거 아닌가?” “지금 그것 때문에 고민이 많아. 얘가 다른 부분은 다 좋은데 행운 수치가 이제 사십이거든. 얘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평균 행운 스탯이 확 줄어드니 문제지.” “우겨 넣어요. 일이 틀어졌을 때 그나마 오빠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스탯은 오빠랑 하얀 씨, 현성 씨가 높아서 별로 상관없을 거예요. 문제는 우리 검은백조 단원들이 문제죠. 디아루기아는 어떻게 한대요?” “아마 참가할 것 같은데… 던전이니 만큼 현신하기에도 무리가 있고. 무기를 잘 다루는 것도 아니니라서 그다지 환영하고 싶진 않아. 물론 스탯 자체가 높은 만큼 쓸모가 있기야 있겠지만….” “소중한 딸내미는 어떻게 하고요?” “만약에 함께 가게 되면 파란에 남은 길드원들이 전력으로 돌봐주게 될 거야. 똘똘이를 혼자 두는 건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본인이 가야된다고 생각하는데 뭐 어쩌겠어. 위험한 것도 사실이니까.” “인간 형태일 경우에는 행운 수치가 80대였죠.” “너희 길드 마스터도….” “네. 80대예요. 그렇게만 된다면 일단 전위는 나쁘지 않네요. 어떤 네임드 몬스터가 튀어나와도 유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 같고… 특히 덕구 씨는….” “확실히 도움이 되지. 애초에 전설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의 공격을 받아낼 수 있는 스펙을 가지고 있는 순수탱커는 귀한 편이니까.” “사제라인이 조금 빈약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것 같고 이거 후위 편성도 어려워지네요. 물리 저항이 높은 네임드가 나올지 마법 저항이 높은 네임드가 나올지 알 수가 없으니까 한 곳에 집중 투자하기도 어렵고….” “편성 자체는 조금 더 이야기를 해봐야 할 거야. 길드 마스터들끼리도 아마 여러 가지 이야기 나누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몬스터 잡는 거야 그쪽이 전문가고 우리야 공략전략팀으로 의견을 내는 것뿐이니까. 보고서 제출하고 명단 추려서 올리고 할 일만 하면 돼. 다음 회의는 언제였지?” “두 시간 뒤요.” “보급팀 좀 봐줘.” “편성은요? 우리 길드는 아직 조금 남았는데….” “내가 마무리할게.” 할 수 있겠냐는 듯 미심쩍은 눈으로 날 바라보기는 했지만 이지혜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저런 눈빛도 이해가 가기는 간다. 내가 검은백조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으니까. 검은백조를 들락날락 거리면서 이미 마음의 눈으로 특성과 대락적인 스펙을 확인한 바 있다. 간부급 이상 가는 이들은 당연히 기억해 두고 있는 만큼 혼자서 하는 게 조금 더 편하다. 특성이나 스탯, 직업에만 그치지 않고 성향까지 고려한 편성은 나 말고는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다. ‘모두가 상태창을 공개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사람들은 의외로 숨기고 싶어 하는 게 많다. 특히나 성향과 기벽 같은 경우는 더더욱. 흔하지는 않지만 남들이 상태창을 확인할 수가 없다는 걸 이용해서 거짓 정보를 흘리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런 관점에서 원정대를 구성할 수 있는 건 대륙에서 내가 유일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건 통계야.’ 편성은 곧 통계이기도 하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쌓이고 쌓인 검은백조의 원정데이터를 토대로 어느 쪽과 어느 쪽이 만났을 때 효율이 좋을지, 이 전사와 이 마법사의 궁합이 좋을 거라는 것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 그게 바로 편성이다. 던전 공략을 축구경기에 비유하고 원정대원을 11명의 선수로 생각해 본다면 금방 답이 나온다. 두 선수를 함께 기용했을 때의 승률이 몇 퍼센트였는지, 특정 선수가 홈에서 경기를 치를 때의 승률과 어웨이에서 경기를 치를 때의 승률이라든지. 특정 선수가 라이벌과 경기를 했을 때 보여주는 승률이 몇 퍼센트였는지. 경기의 승리는 곧 원정의 성공이며 경기의 패배는 곧 원정의 실패다. 물론 이런 종류의 방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어찌 됐건 단순한 수치화일 뿐이니까.’ 분명히 실전에서는 변수가 있고 그 변수에 대응하는 것은 온전히 원정대원의 몫이다. 책상에서 펜이나 굴리던 양반이 한 편성이 뭐가 의미가 있겠냐고 일부는 떠들어 댈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선수들끼리 경기를 치룰 수 있었다면 감독이나 코치 같은 건 필요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거다.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쓸데없는 우정의 힘이나 열정, 근성, 기백 같은 설명할 수 없는 종류 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 있다. 이전에 있었던 원정의 사망자와 부상자의 숫자. 특정 단원이 포함된 원정의 성공 확률. 나 같은 경우에는 이런 것도 가능하다는 거다. ‘어떤 성향을 가진 인간들이 주로 원정에서 실패하는가.’ 물론 나는 신이 아니다. 겨우 성향이나 기벽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 정도는 위험하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수치화해 비벼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야…. 우리 회귀자가 조금 불안해하고 있으니까. ‘뽑기만 잘하면 돼’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박덕구와는 다르게 김현성은 이번 원정이 결정된 내내 의외로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항상 자신감 넘쳐보였던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어째서 저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는 뻔할 뻔자. ‘겪어본 적이 있었나.’ 이것 역시 추측일 뿐이지만 녀석은 균열 박물관을 한 번 체험해 본 적이 있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이 던전에 대해 들어봤을지도 모른다. 예상할 수 있는 스토리로는 신화 등급의 몬스터가 뻥 하고 튀어나온 뒤로는 모든 동료들이 전멸. 그것도 꽤 일방적으로 당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표정은 조금 굳어 있었고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연신 시야에 비쳤다. 혼자서 검을 휘두르는 시간도 길어졌고 불안한 만큼 더욱더 공략 준비에 열정적으로 임했다. 아마 김현성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균열 박물관에 봉인되거나 계약을 맺은 존재들 중에 하나다. 지금의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몬스터가 분명히 있다. ‘형이 캐리해 줄게.’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런 부분에서는 도와줄 수 있다. 나 역시 이 정도로 집중해 보는 것은 오랜만이다. 아니, 이 정도로 바빠진 것은 대부분의 직책을 다른 이들에게 분재한 이후에는 정말로 오랜만이다. 내가 탄력이 붙은 걸 알아차렸는지 이지혜도 집무실을 나간 지 오래다. 원정대원의 구성에 집중하기를 한참. 회의는 시작됐고 내가 편성한 부대의 보고서는 김현성과 박연주에게 무사히 전달됐다. 물론. “현성 씨, 당신네 부길드 마스터… 정말로 유능하군요. 아니, 어떻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건가요?” 이쪽이 구성한 원정대는 곧바로 실시된 시범 훈련에서 검은백조의 길드 마스터조차 놀랄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운이 좋았네.’ 생각 그대로였다. # 230 회귀자 사용설명서 230화 균열 박물관 (3) 모의 훈련을 마친 원정 대원들이 숨을 헐떡이는 와중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양감에 휩싸였다. 일부는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고 일부는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 뭔가 알 수 없는 흥분감이 가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박덕구나 김현성 역시 주먹을 꽉 쥐고 있을 정도. ‘이해할 수 있지.’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당장 이 훈련에 참가한 나 역시 정체모를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아마 대부분이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스포츠든 게임이든 간에 이런 경우에는 재미있다고 느껴져야 정상이다. 물론 이건 종류가 다른 훈련이기는 했지만 악기를 켜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완벽한 합주를 성공시킨 셈이니 저런 표정을 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축구에 비유하자면 10명이 함께 완벽한 골을 만들어냈고 AOS게임에 비유하자면 다섯 명이 완벽한 한타를 만들어낸 셈. 뭔가 삐걱거리는 부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스무스하게 훈련이 끝이 났고 서른 명에 가까운 원정대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였다. 동선 역시 꼬이지 않았고 스왑이나 타이밍 역시 완벽했다. 이 원정대를 구성한 나조차도 깜짝 놀랐으니 다른 수식어가 굳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격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검은백조의 공략전략팀과 그들을 이끄는 길드 마스터 박연주였다. 그들에게는 다소 생소했던 편성을 들이밀었을 때만 해도 그다지 얼굴이 시원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 ‘조금 생소하네요. 저희 길드의 1군들도 조금 빠져 있고….’ 특히나 검은백조의 공략전략팀의 반응은 은근히 냉담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다. 나 역시도 첫 번째는 시험해 보는 것으로 생각했고 저들의 입장에서는 주요 1군 인물 몇몇이 빠진 게 아쉬워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번 시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한마디와 박연주의 긍정으로 시작한 훈련은 시작한 지 30분도 되지 않아 임시 원정대를 정규 원정대의 자리를 올려 버렸다.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결과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을 때 박연주도 장비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건 정말로… 당황스럽네요. 사실 공략지원팀이라는 걸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았는데…. 이건… 물론 실전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느낌이 너무 달라요.”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나보다 김현성이 조금 더 뿌듯해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 녀석의 얼굴에 왠지 모를 뿌듯함이 서려 있었다. ‘새끼….’ 저 표정은 녀석이 나를 믿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한 만큼 기분이 나쁠 리 없다. 오히려 다시 한번 이쪽이 쓸모 있음을 입증했으니 썩 만족할 일이다. “기영 씨는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줘서…. 사실 30명의 원정대의 편성과 구성을 맡겨본 적은 처음이라 조금 걱정했었는데 결과가 잘 나와서 다행이군요.” “처음이요?” “네. 아, 물론 캐슬락 공성전에서는 대규모 병력을 지휘한 적이 있었지만 30인 원정대의 편성은 처음입니다.” “하….” “항상 생각하지만 기영 씨는 참 재능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아니요, 현성 씨. 이건 재능이 있다 없다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수많은 사냥과 원정, 훈련 중에 오늘이 제일 완벽했다고 말하면 알아들으시겠어요? 이건 정말로… 이건 말도 안 된다고요. 심지어 기영 씨는 엊그제야 저희 길드원에 대한 정보를 받은으셨고… 단원들의 이름도 전부 외우지 못했을 텐데….” “하하하하.” “애초에 대규모 병력 편성과 원정대의 편성은 완전히 다른 문제예요. 상식적으로 이건 너무 이상하다고요. 게다가 평균 행운 스탯 60이상이라는 제한이 있었는데도 이정도 라면….” 불안해하던 김현성의 얼굴이 조금 풀어진 것을 보니 기분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왜 니가 더 뿌듯해하냐.’ 김현성뿐만이 아니다. 이번 원정에 참여하기로 한 박덕구와 정하얀까지 대놓고 콧대가 올라가 있었다. 검은백조의 다른 단원에게 계속해서 질문 세례를 받고 있는 걸 보니 확실히 저들도 흥미가 돈 모양. “우리 형님은 천재라니까! 거 천재요! 천재!” 박덕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런 식으로 칭찬하지 마, 이 자식아.’ 물론 나를 띄어주는 것은 좋지만 녀석은 항상 정도가 심한 것이 문제다. 원정대원들이 나름대로 친분을 쌓고 있는 상황에서도 박연주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중. 아직까지 당황하고 있는 표정에는 내가 더 당황스러워졌다. “어떻게 하신 건가요? 이건….” “간단합니다. 그냥 통계일 뿐입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탐험일지에 나온 보고서를 수치화해서 데이터를 만들어 놓는 건… 그건 저희 길드의 던전 공략전략팀에서도 하고 있는 일이라고요.” “지혜 씨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혜요? 아 물론 지혜도 유능하고 똑똑하기는 하지만….” 사실 아예 혼자만의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부대 편성은 거의 온전히 내 몫이기는 했지만 이지혜가 미리 만들어 놓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 원정대원의 동선이나 스왑 같은 부분은 실제로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 그녀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는 자신의 길드에게도 뿌리지 않은 데이터인 만큼, 그 도움을 톡톡하게 받았다고 하는 게 맞으리라. 게다가 이지혜는…. ‘지휘관이니까.’ 이지혜가 선택한 직업은 지휘관인 만큼 아무래도 이런 방향으로는 나보다는 조금 더 밝다. 말하자면 시스템도 인정한 시너지 효과가 있었다는 거다. 물론 이 정도의 결과물은 나조차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운이 좋았어.’ 본래는 시험 후 수정이란 과정을 반복해 겪어야 하는 일이 한 번만에 대박을 쳐버린 셈. 대충 때린 골프공이 그대로 홀인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최대 3일은 더 생각하고 있었던 편성이 한 큐에 성공해 버렸다. 아마 다시 한번 똑같이 해보라면 할 수 없으리라. “유능하기는 하지만 이건 너무 말이 안, 안 돼요. 기영 씨 괜찮으시면 혹시 검은백조에서….” 꽤 충격적이었는지 김현성의 앞에서 꺼내면 안 되는 말도 꺼내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 슬그머니 김현성이 헛기침을 하자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얼굴이 붉어진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 죄송합니다, 현성 씨. 제가 조금….” “괜찮습니다. 검은백조 길드 마스터. 원래 한 집단의 수장으로 있는 이상 인재가 탐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아! 영입제의는 아니었어요. 단지 정말로 신기해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뭔가 다른 방법이 있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꼭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은데….” “음….” 그러고 보니 눈앞에 있는 박연주에게는 덕구 문제로 개인적으로 진 빚이 있다. 뭐라도 팁을 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 것도 당연하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특성에 대해서도 말을 해야 했기 때문에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아마 검은백조의 전략팀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할 말은 해야지.’ 이것도 팁이라면 팁이다. “정말로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본래는 저도 3일은 잡고 있었던 일이었고….” “3일도 충분히 놀라워요.” “큼…. 아무튼 조금 말씀 드리기 힘든 이유도 존재하지만, 하나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아마 생소한 구성으로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유는 제가 외부인이기 때문일 겁니다.” “네?” “내부의 공략전략팀이 만든 편성이나 구성은 당연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듣기로는 공략전략팀은 어쩔 수 없이 은퇴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네. 맞아요.” “그 사람들도 인간관계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겁니다.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조금 더 마음이 가는 쪽에 유리한 편성을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죠. 검은백조의 2군에서도 재능을 썩히고 있는 이들이 분명히 존재할 겁니다. 제가 발견한 이들은 대부분 그런 부류고요. 저희 같은 소수정예 중심의 길드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지만… 검은백조나 붉은용병 같은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니까요.” “아아아… 그렇군요.” “이런 문제만 조금 해결되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더 나아질 겁니다.” “네. 조언 감사드립니다.” “아뇨. 저도 좋은 경험이었고 무엇보다 평소에 훈련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확실히 검은백조로군요.”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잠깐 이었지만 표정이 조금 서늘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지혜가 이전에 해줬던 말이 생각이 들었던 건 바로 그때. ‘여기 친목질 심해요. 딱히 여자들만 모여서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누가 봐도 편 가르고 싸우는 게 눈에 보일 때가 많다니까요? 나참.’ 이지혜가 검은백조길드의 단점이라며 한탄하듯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박연주의 표정을 보면 아마 비슷한 종류의 일로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모양.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번 원정이 끝난 뒤에는 길드 내부적인 물갈이가 있을 것 같았다. ‘괜히 미안해지는데….’ 이쪽과는 별로 상관없지만 나름대로 고군분투했던 던전 공략전략팀의 운명이 새삼스레 궁금해졌다. ‘이지혜에게는 잘된 일일 수도 있겠네.’ 어쩌면 내가 이런 말을 해주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곧바로 입꼬리를 올리는 걸 보니 확실히 내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생각들을 떨치자 이쪽에 말을 걸어오는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생하셨습니다, 기영 씨.” “아뇨. 고생이라고 할 정도는…. 이번에는 정말로 지혜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고 계속 말씀드리지만 운이 좋았습니다. 저도 깜짝 놀랄 만한 결과물이 만들어져서.” “굳이 겸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짜라니까 왜 안 믿어, 이 자식아.’ 더 이상 변명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말을 돌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혹시 출발은….” “기간이 조금 더 당겨질 것 같습니다. 본래 준비에 조금 더 시간을 잡으려고 했었는데… 원정대 편성이 이 정도로 빠르게 마무리 될 줄은 검은백조 측에서도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생각하시는 것처럼 일정 변경이 있을 것 같습니다.” “검은백조에게는 잘된 일이군요.” “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도 연주 씨는 꽤 초조해하고 있으니까요. 듣기로는 고립되어 있는 이들 중에 아끼는 단원이 많은 모양입니다. 최대한 빨리 구조하고 싶은 게 당연할 겁니다.” “그렇군요.” “네.” 슬쩍 고개를 들고 김현성을 바라보니 아까와는 다르게 불안해하는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최근에 조금 저런 표정을 많이 짓기는 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불안해 보이는 표정이다. 김현성에게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지만 뭔가 오줌 마려운 강아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금까지 뿌듯해하고 있었던 표정이 거짓말 같을 정도였다.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자꾸만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지만 제대로 나오지 않은 모양. ‘새끼… 또 고민이라도 생겼나.’ 내가 정답이 될 수는 없지만 녀석의 멘탈을 케어해 주는 것 역시 내 할 일이다. 뭔가 말하기 힘들어 하는 만큼 내 쪽에서 먼저 운을 띄울 수밖에 없었다. “혹시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이거 제가 너무 티를 낸 모양이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녀석이 민망해하는 것도 잠시. 이내 용기를 얻었는지 천천히 입을 열어오는 게 보였다. 아마도 공략에 관련된 일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저….” “네?” “혹시 그… 아까 검은백조 마스터는 영입제의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 “아, 방금 나온 말이로군요.” “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굉장히 우물쭈물거리는 입가와 불안한 눈빛. 녀석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단박에 눈치챌 수 있었다. ‘형 어디 안 간다, 자식아.’ # 231 회귀자 사용설명서 231화 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1) 녀석이 점점 더 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건 확실히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본래도 이기영이라는 사람은 김현성 왕국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번 일도 녀석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이 분명하다. 아니, 마음을 흔들어 놨다기보다는 갑작스레 퍼뜩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며칠 전에 물어왔던 질문이 생각나 피식 하고 웃음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형 어디 안 간다니까.’ 어디에서나 이쪽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이쪽을 떠보고 싶었으리라. 사실 객관적으로 봐도…. ‘내가 좀 능력이 있기는 있지.’ 본인에 대한 평가를 본인이 내린다는 게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사실 이기영이라는 사람이 파란에 끼친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다. 수입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파란의 포션 공장에서 생산되는 포션들은 린델뿐만 아니라 실리아와 다완까지 유통되어 막대한 부를 쌓아주고 있었고 포션뿐만이 아니라 행정 팀에서 추진하는 사업까지 서서히 날개를 펴고 있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사실 파란은 더 이상 원정을 나갈 필요가 없다. 포션 사업 하나만으로도 계속해서 놀고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내가 해낸 일은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다. 붉은용병과 검은백조와의 삼자동맹, 아니, 심지어 카스가노 유노가 있는 요조라 길드까지 포함한 사자동맹을 완성시킨 장본인이기도 했고 신성제국의 명예주교이기도 했다. 교황청과의 친분은 물론 유력 귀족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외교적으로도 이미 충분히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나 자신조차 디아루기아라는 용을 보유하고 있는 제국 8좌 중의 일원.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파란에서 나가 다른 길드를 세운다고 해도 부족한 것이 없는 셈. 김현성이 불안해하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일 거라는 거다. ‘왜?’ 녀석은 현재 나한테 줄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골드도 그렇고 직위도 그렇고 아이템도 그렇다. 초반에야 녀석이 주는 떡을 꿀꺽꿀꺽 잘 받아먹기는 했지만 현재 김현성과 나의 사회적인 지위와 위치는 거의 동등하다. 녀석에게는 조금 미안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내 쪽이 조금 더 우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희귀 아이템 하나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기뻐하던 과거의 순수했던 이기영은 이제 없다는 거다. 적절한 예라고 하기에는 힘들겠지만 굳이 예를 들어 보자면 학생 때부터 사귄 풋풋한 커플이 함께 성인이 된 셈이다. 자그마한 악세사리, 작은 이벤트, 비오는 날 함께 마셨던 따뜻한 커피 한 잔에 감동했던 것들이 점차 익숙해지면서 무뎌진 것. 어느 정도 눈이 높아지다 보니 무엇을 해줘야 할지, 무엇을 선물해 줘야 할지, 어떤 말을 해줘야 상대방이 기뻐할지 감이 안 오는 게 당연하다. 특히나 상대방 쪽에서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이뤄 부족한 것이 없다고 가정해 보면 명품 가방이나 지갑, 귀금속 같은 것들을 선물로 주기도 애매하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할 것이다. ‘이걸로 과연 기뻐해 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 부족한 상대에게 해줄 선물을 고르는 것은 쉽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의 선물을 고르는 것은 쉽지 않다. 인간관계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김현성이 난항을 겪고 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할 거라는 이야기다. ‘형은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다, 현성아.’ 당연하지만 비싼 선물이나 전설 등급의 아이템 같은 걸 바라고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기영 씨.” “아, 네.” ‘그래 이런 걸 원했어. 이 자식아.’ 슬그머니 이쪽을 향해 건네 오는 손에 들려 있는 커피 한 잔. 이런 사소한 걸 원했다는 거다. ‘정답이다, 자식아.’ 조금이지만 뭔가 대견스러운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살짝 기뻐한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얼굴에는 왠지 모를 뿌듯함 마저 감돌고 있었다. “어머… 어머….” “방금 봤어?” “호모나….” “분위기 좋다….” 조금 이상했던 건 주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선과 목소리들이 날아와 꽂혔다는 것. “타 왕국 쪽에서 들어온 커피라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조금 피곤해 보이시는 터라….” “감사합니다. 사실 어제 통 잠을 자지 못해서…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진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쪽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왜인지는 알 것 같은데….’ 이번 원정대에 포함된 남자가 네 명밖에 없다는 게 주요 원인일 것이다. ‘네 명이 끝인가.’ 어떻게 보면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 김현성, 나, 박덕구, 안기모를 제외하면 원정대원 전원이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 여기를 둘러봐도 여자, 저기를 둘러봐도 여자다. 최근 정하얀과 황정연이 조금 저기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원인이 이곳에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원정을 함께 나가는 정하얀은 조금 상황이 나은 편이었지만 박덕구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황정연의 표정을 보니 원정보다는 다른 것을 더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 뽑히지 못한 김예리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오매불망 김현성을 바라보던 저 꼬맹이가 인선에서 탈락되었을 때 보여준 표정은 아직도 기억난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김예리에게는 충분히 이례적인 일.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김예리의 안전 그리고 암살자 비율이 높은 검은백조에 굳이 김예리를 끼워 넣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겠지만 항상 1군에 포함되어 있었던 김예리의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그야 사랑하는 오빠가 이런 환경에서 몇 주가 넘는 시간을 보낼 거라고 생각해 보면….’ 나라도 충분히 걱정할 것이다. 주변을 슬쩍 둘러봐도 곳곳에서 여초 길드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들이 비친다. “생리대 챙겼어?” “네. 언니. 보급품으로 나온 거 미리 챙겨놨어요.” “원정 중에는 제발 안 왔으면 좋겠는데… 움직이기 불편하고 짜증난단 말야.” “그러게요. 여기는 약도 없으니까요. 누가 이런 마법은 개발 안 해 주나….” “이거 연금술로는 해결되지 않을까요?” 별것 아닌 것처럼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무방비하다고 하기보다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통 여자들끼리도 저런 이야기 하나.’ 내가 알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대륙에서 모험가로 성장한 여성들은 지구에 있는 여성들과 거의 180도 다르다는 것. 성 관념도 조금 더 자유롭고 행동도 조금 더 주체적이다. 신체 능력 자체가 이미 남자와 거의 동일하다 보니 조금 더 털털해지는 한편 남들의 시선 또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다른 것이 눈에 보인다는 거다. 내가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다는 듯 의자에 앉아서 스타킹 같은 종류의 방어구를 갈아입는 단원들도 눈에 보인다. 예쁘게 잘 빠진 다리가 시선을 끌어당긴 것은 당연지사. 정하얀이 괜스레 이쪽의 소매를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거 아니다, 하얀아.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관성 같은 거야.’ 암살자 계열과 궁수 계열들은 대부분 노출도가 있는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물론 저게 끝이었다면 김예리와 황정연이 저렇게 불안한 표정을 보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런 무방비한 이들보다 더 위험한 것은 괜스레 이쪽을 의식하고 있는 집단이다. ‘나쁘지는 않지.’ 대놓고 말하자면 이곳에 있는 네 명은 이 대륙을 기준으로 생각해도 나쁘지 않은 신랑감들이다. 애초에 모델 같은 비율과 연예인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김현성은 1년 만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인물. 얼굴은 조금 딸리기는 하지만 반갑지 않은 매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는 나 역시 마찬가지고…. 커다란 덩치와 터질듯한 근육을 가지고 있는 박덕구도 틀림없이 수요가 있다. ‘안기모도….’ 특징이 없는 것 같기는 했지만 한 때 배우를 지망했던 만큼 기본은 먹고 들어가는 얼굴. 중요한 것은 이들이 사회적 지위와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이들이라는 거다. 대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요소인 무력도 보유하고 있는 것은 물론 최근 떠오르는 벤처 회사의 간부들이니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한다. ‘다들 나이가 많으니까….’ 물론 나이야 전혀 상관없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인 만큼 괜찮은 인연을 잡고 싶은 마음이 있기야 있는 것 같았다. 보통 저 정도 수준에 올라선 플레이어들은 눈이 높다. 애매한 이들은 눈에 차지 않아 다가오기도 전에 차버리기 일수고 얼굴 반반한 놈들은 몇몇 골라 가지고 노는 분위기가 있기야 있었지만 그런 이들을 진심으로 대할 리가 없다.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건 남자나 여자나 지구나 대륙이나 똑같다는 이야기다. 이상하게도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의외로 박덕구였다. ‘하렘왕 박덕구….’ 황정연과 인사를 마친 뒤에는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니 조금이지만 부럽다는 생각해 볼 정도. 입술을 깨물고 있는 황정연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팔에 한 번 매달려도 돼요?” “상관은 없기는 한데… 큼….” “몸 탄탄한 것 좀 봐. 다 근육이야.” “키 정말로 크네요.” “거, 잘 먹고 잘 자다 보니 쑥쑥 자라더오.” 별것 아닌 말에도 빵빵 터지며 웃음꽃을 피우는 여성들의 중심에 있는 박덕구는 그야말로 강원도 연애 박사 그 자체. 김현성이야 자신들의 길드 마스터인 박연주가 점찍어 놓은 사람이니 다가오지 않는 게 편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마찬가지로 나 역시 용병여왕과의 관계가 있으니 다가오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소매를 꼭 붙잡으며 여기저기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정하얀 때문이겠지만 이쪽도 남자인 만큼, 은근슬쩍 박덕구가 부러워졌다. 남아 있는 이들의 표정과는 반대로 원정을 떠나는 이들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마지막으로 한 명만 더 합류하면 이번 원정대의 구성은 완벽하게 마무리가 되는 상황. 모두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끄에에에에엑!” 누구인지는 뻔할 뻔자. 특별 경호원 디아루기아였다. ‘데려오지 말라고 했는데….’ 분명히 여기까지는 데려오지 말라고 이야기를 해놓은 사랑스러운 똘똘이도 함께 등장하고 있다. ‘단호해져야 되는데….’ 헤어지는 마당에 끝까지 똘똘이를 데리고 온 걸 보면 아마도 뿌리치지 못한 모양. 디아루기아의 마음도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인사를 하는 게 더 안 좋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 어제 한 작별 인사는 뭐였는데….’ 그녀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출발을 기다리고 있던 원정대는 이미 분주해지고 있었다. “아… 도착했군요. 인사들 나누시고 출발하면 될 것 같습니다.” “네.” “끼이이잉…. 키에에에엑….” “다들 출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길드 마스터.” “지혜는 보급품 다 챙겨놨지?” “네, 언니.” “길드를 잘 부탁한다.” “걱정하지 마시고 잘 다녀오게요.” 이지혜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검은백조의 길드 마스터 박연주. “끼이이이잉…. 끼에에에엑!”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정연 씨. 남은 이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신입들의 훈련도….” “네. 맡겨 주세요, 현성 씨.” “예.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립니다.” “네.” “금방 돌아올게, 예리야. 혜진 씨, 출발 준비를….” “네, 길드 마스터.” 김현성과 내가 없는 동안 길드를 책임져 줄 황정연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것은 물론 김예리를 달래주고 있는 김현성. 그가 조혜진과 함께 문을 나가는 것이 보였다. 사방을 경계하던 정하얀도 떠날 때가 되니 남아 있는 인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에 한참이다. “끼이이잉…. 끼이이이잉…. 끼에에에에엑!” 그렇지만 이쪽은 저 집단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갈 수 없다. 똘똘이와 함께 성대한 이별식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끼이이잉… 끼이이잉….” “얌전히 있어야 한다, 디아루리아. 엄마는… 엄마는….” “끼에에에엑….”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 동안 친구 분들이 함께해 주실 거야. 둥지가 아니라 조금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놀 게 많으니까 심심하지 않을 거란다.” “끼이잉….” “이렇게 두고 가서 너무 미안하다. 아가….” “끄에에에에엑!” “똘똘아, 아빠랑 엄마는 잠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해요. 잘 참을 수 있지?” “끼이이잉… 끄에에에에에엑! 끄에에에에에엑!”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걸 보니 나도 가슴이 아프다. 물론이지만 디아루기아의 마음은 그야말로 찢어질 것처럼 아플 것이라고 생각했다. “디아루리아, 울면 엄마가 가기 힘들어지잖니….” “끼이잉….” “디아루기아, 이만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들 기다리고 있어서….” “잠깐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보자, 아가….” 모녀가 함께 슬퍼하고 있는 모습은 조금은 아름답게 보이긴 한다. 그렇지만 이미 원정대는 출발 준비를 마친 상황. 여기서 계속 시간을 끌기에도 뭔가 민망해진다. 마지막 포옹 한 번으로 이 시간을 마무리 하는 것이 최선이다. 활짝 팔을 벌린 디아루기아. “디아루리아….” 똘똘이가 팔을 벌리던 디아루기아를 지나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키에에에엑 끼이이잉! 헥헥! 끼이이잉!” 그녀를 지나쳐 이쪽으로 달려온 똘똘이가 낑낑대며 눈물을 쏟아대며 내게 달라붙어 오는 것은 순식간. “디아… 루리아?” “끄에에에에엑! 끼이이잉…. 헥…. 끼이이이잉!” 얼굴을 계속해서 가슴에 파묻은 채로 낑낑대는 게 조금은 불쌍하게 보일 지경. “끼이이이잉…. 키엑. 키에에에엑!” 심지어는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원정대원을 바라보며 괴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끄에에에엑! 끄에에에엑에에엑!” “얌전히 있을 수 있지 똘똘아?” “끼잉…. 끼이이잉….” “이번 일만 끝나면 일주일 내내 같이 놀아 줄게요. 그때까지 잘 참아야 한다.” “끼이이잉… 키엑….” 디아루기아가 나라라도 잃은 것 같은 얼굴로 내 얼굴을 핥고 있는 똘똘이를 바라보는 게 시야에 비쳤다. “디… 아… 루리아?” 누가 봐도 배신당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 232 회귀자 사용설명서 232화 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 “끼에에엑. 낑낑….” “디아루리아….”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냐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 역시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 모녀의 뜨거운 이별 장면을 볼 줄 알았지만 막상 내 눈에 보인 것은 딸에게 배신당한 어머니의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끼이이이잉….” 충격 받은 어머니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똘똘이는 여전히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꼬리를 흔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살살 머리를 쓰다듬자 낑낑거리는 소리가 순식간에 헥헥 대는 것으로 뒤바뀐다. 심지어는 냅다 몸을 뒤집어 배를 까는 행동은 가관. 자연스럽게 손이 볼록 튀어나온 배 쪽으로 향했다. 평소에도 강아지 같다는 생각을 간혹 했었지만 오늘따라 조금 더 심해진 것 같은 느낌. 조금 있으면 헤어지는 만큼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 모든 행동을 바라보는 디아루기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졌다.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은 물론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다. ‘평소에는 조금 다른 건가.’ 정말로 강아지만 한 크기였을 때는 쟤 어미도 쫄쫄거리며 잘 따라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도 이쪽에 조금 더 신경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청소년 정도의 크기로 성장한 현재, 디아루기아와 둘이 있을 때는 어땠을지 알 재간이 없다. 극도로 피로를 느끼던 얼굴로 유추해 봤을 때 엄마를 고생시키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이런 모습도 보여주지 않은 건가.’ 디아루기아의 반응으로 생각해 보건데 절대로 배를 까서 보여주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유 기벽에 해시태그로 적힌 ‘엄마도 짜증나’가 무슨 의미인지 대충은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같은 프로그램이라도 한 번 진행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너무나 헌신적인 어머니의 모습에 똘똘이가 제 어미를 만만히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건 안 좋은데….’ 이미 기벽이 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녀석만은 정상으로 자라줬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만큼 일단은 머릿속 한 구석으로 미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원정대원들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중. 슬슬 가야될 시간이니 만큼 다시금 똘똘이에게 입을 열자 즉각적인 반응이 튀어나왔다. “똘똘아, 아빠는 이만 가야 될 것 같은데….” “끼이이잉….” 역시나 가지 말라는 듯이 낑낑대는 모습은 가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금방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팔을 벌리는 것을 보니 안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살짝 녀석을 안으니 여전히 은근슬쩍 헥헥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 모습을 뭔가 허망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디아루기아. 정신을 반쯤 놓은 것 같은 모습에 이쪽에서도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똘똘아, 엄마랑도 작별인사 해야지?” 내 목소리에 디아루기아가 고맙다는 표정을 보내오고 있는 모습은 조금 귀엽다. 똘똘이는 뭔가 내키지 않는 것 같다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기회를 놓칠까 황급하게 다가온 디아루기아가 똘똘이를 껴안으며 겨우 눈물 나는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금방 올 테니까. 말 잘 듣고 있으면 하루 종일 같이 노는 거다?” “끼엑!” “디아루기아, 이만 출발할 시간입니다.” “알겠습니다. 디아루리아, 엄마는….” “키엑!” 원정을 떠나지 않는 황정연과 김예리에게 디아루리아를 떠넘기고 나서야 상황은 마무리. 물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성문으로 향하자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여기서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뒤돌아보시면 안 됩니다.” “그, 그렇지만….” “단호해지셔야 합니다.” “…….” “돌아보고 계속 대응해 주면 더 떨어지기 힘들어져요. 용의 생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지금 디아루리아는 충분히 혼자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도움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길드원들이 잘 챙겨줄 겁니다.” “…….” 뭔가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나는 전문가가 아니다. 육아는 해본 적도 없고 그 흔한 강아지 한 번 키우지 않았다. 괜히 뭔가 아는 척 나대는 것보다는 일단은 입을 닫고 있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끼에에에에엑!” 저 멀리서 울려오는 구슬픈 울음소리에 계속해서 움찔 움찔 반응하는 것을 보면 내가 없었다면 다시 디아루리아에게 달려갔으리라. 눈물을 꾹 참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괜스레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기영 씨. 아무리 그래도 예정보다 일찍 출발한다는 건 변함없으니까요. 뭔가 이해가 되는 상황이기도 해서….” 그렇게 말한 박연주가 이번에는 디아루기아를 보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디아루기아. 항상 둥지에 있는 모습을 봤었는데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는 건 처음이군요. 박연주라고 합니다.” “디아루기아라고 합니다.” “이렇게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슬쩍 고개를 끄덕이는 디아루기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치게 풀이 죽은 것 같은 느낌. 아마 똘똘이를 생각하며 속으로 슬픔을 달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일단은 마차에 오르시죠. 이틀 정도는 가야될 겁니다.” “네.” “안에 들어가서 좀 쉬세요, 디아루기아.” “네.” 총 다섯 개로 이루어진 마차에 가득 실린 짐이 보였다. 30명이나 되는 인원이 원정 중에 먹을 보급품이나 균열 박물관 쪽에 격리되어 있는 이들을 위한 응급처치 물품들, 갈아입을 옷 같은 사소한 것들이 쌓이다 보니 제법 요란한 원정을 떠나게 된 것이다. ‘얘네 마차는 진짜 좋은데….’ 파란이 머물고 있는 마차에 디아루기아를 먼저 들여보낸 이후 마차를 둘러보자 확실히 크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구입해야겠다.’ 애초에 소규모로 원정을 다니다 보니 커다란 마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 기존에 파란이 쓰던 마차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굳이 마차를 바꾸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안쪽으로 들어오니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마치 캠핑카를 방불케 하는 구성이다. 마차 안에 방이 있는 걸 보니 입이 떡 벌어진다. ‘정길드원 복지가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여초 길드인 만큼 이런 부분에 대한 복지는 확실한 모양. 미리 들어가 있던 박덕구와 안기모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었다.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거, 기모 형씨는 붉은용병이지 않았수? 이런 마차는….” “물론 커다란 마차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잘 관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시트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애초에 용병여왕님이 너무 편하게 다니는 원정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은 터라…. 오히려 이럴 돈으로 장비에 투자하는 게 낫다고 말씀하셨죠. 마법사와 사제들이 꼭 필요한 것도 문제고요.” “그게 무슨 소리요?” “아무래도 이 정도의 마차를 끄는 건 말들에게도 부담이 돼서 말입니다.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마법사들이 말에게 마력을 지속적으로 보내야 합니다. 물론 그 과부화를 관리하기 위해서 사제들도 신성력을 넣어줘야 하고요.” “아아아….” “아마 검은백조는 마부들을 따로 고용하고 있을 겁니다. 보통 재능이 없거나 진전이 없어 버려진 마법사들이 대부분이죠.” “거, 그렇구만….” “씁쓸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덕구 씨. 이건 그들한테도 좋은 이야기니까요. 임금도 생각하시는 것보다 세다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일자리를 창출한 셈입니다. 재능이 없어 붕 떠버린 마법사들에게는 안성맞춤일 겁니다.”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만! 형님, 우리도 이런 거 하나 하면 안 되는 거요?”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래야지!” 박덕구보다 더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여성 멤버들, 정하얀, 선희영, 조혜진이었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이런 편의시설을 이용하는 검은백조의 길드원들이 내심 부러웠던 모양이다. 때마침 방 안에서 짐 정리를 대충 끝낸 김현성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며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단원들도 들어왔고 앞으로도 한 파티 정도는 더 꾸릴 예정에 있으니까요.” 길드 마스터의 허가까지 떨어지자 다시 한번 얼굴이 밝아지는 모습은 꽤 재미있다. 물론 디아루기아는 그다지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애초에 이런 시설은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김현성은 살짝 미소 지으며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아까와 주제는 달라졌지만 이번 던전행을 위한 이야기인 만큼 모두의 시선이 금방 집중됐다. “그리고 이번 원정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네.” “앞으로는 따로 브리핑이나 훈련을 위한 시간은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원정간부 회의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 잠깐 잠깐의 변동사항을 전하는 시간이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일단 모두가 숙지해야 될 부분은 모두 서류화해 놨으니 읽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길드 마스터.” “아마 던전 안으로 들어가면 제법 바빠질 겁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시고 여유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네.” 말은 저렇게 하기는 했지만 원정을 앞둔 시점에서 여유를 즐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고 심지어 정하얀도 마냥 여유롭지는 않다. ‘던전 공략에는 항상 위험이 따르니까.’ 모두가 초행이 아닌 만큼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녀석의 출사표 아닌 출사표를 끝으로 마차는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김현성이 사전에 공지했던 대로 마차를 대고 쉬는 시간에는 변동사항이나 보고서를 토대로 한 짧은 브리핑 시간을 가졌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물품들을 정리하거나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지루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이런 반복적인 브리핑과 학습은 틀림없이 도움이 된다. 가끔 창밖을 바라보면 마차가 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곤 있지만 박연주가 제법 조급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확히 이틀이 지났고 더 이상은 마차로 들어가기 힘든 지역에 도착했을 때는 짐을 내려 행군을 시작했다. 함께 온 길드 직원들이 더 이상 진입할 수 없는 위험지역까지 왔을 때는 모두가 등 뒤에 커다란 가방 하나를 매고 있었으니 이번 원정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실상은 조금 다르지만….’ 사실 던전 공략은 그리 길지 않을 거다. 억지로 가방을 채워놓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이쪽도 던전에 고립될 가능성을 생각한 조치였다. 물론 원정대원들에게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눈치 빠른 이들은 아마 느끼고 있을 것이다. ‘실패할 가능성도 있어.’ 이번 원정을 기획한 간부들이 원정이 실패할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분명히 그럴 가능성도 존재한다. 만약 신화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가 나타난다고 가정한다면 지금 이 전력으로는 어떻게든 아득바득 버티는 것이 최선이다. ‘아니면 대가를 치르든지.’ 아무튼 간에 원정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하렘왕 박덕구는 검은백조의 여성길드원에게 둘러싸여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박덕구만큼은 아니었지만 안기모도 몇몇과는 굉장히 가까워졌다. 정하얀 역시 쉬는 시간에는 나에게 꼭 달라붙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으니 말 다한 셈. 선희영은 검은백조의 사제들과 뭔가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 같았고 남몰래 김현성을 짝사랑 하는 조혜진은 김현성과 박연주가 만나는 모습을 그다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풍경이 계속 바뀌고, 원정대는 누가 봐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을 것 같은 장소로 진입한다. ‘예쁜데….’ 끝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암벽의 갈라진 공간에서 보라색의 빛이 희미하게 뿜어져 나온다. 아마 균열 박물관은 저 암벽 안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작은 꼬마가 우리를 향해 인사를 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무등급 던전 균열 박물관에 입장한 것이다. # 233 회귀자 사용설명서 233화 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3) [무 등급 던전 균열 박물관에 입장하셨습니다.] [인원 제한 [30/30]을 확인했습니다.] [무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 [퀘스트 -박물관 탐방 (0/1)] 자연스럽게 메시지도 떠오른다. 퀘스트는 입장하는 순간 받는 퀘스트인 모양이다. 아마 박물관 탐방이라는 건 이 던전의 공략을 뜻하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메시지를 대충 확인한 이후의 주위를 둘러보니 시야에 비치는 것은 제법 화려한 석실. 암벽으로 둘러싸였던 외벽과는 반대로 안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재미있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눈앞에 있는 존재. 나름대로 귀여운 남자아이의 모습을 한 이는 마치 우리가 이곳에 올 것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던전 관리인 막스의 정보를 확인합니다.] [전설 등급의 특성 마음의 눈으로 던전 관리인의 더미를 간파합니다.] [관리인 막스의 더미] [관리인 막스에 의해서 만들어진 마력의 응집체입니다. 실체가 없는 허상이기 때문에 상태창과 정보창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박물관에 제한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역시 그런가.’ 노란색 머리를 한 남자아이의 상태창과 정보창을 볼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단순히 더미에 관한 설명이었다. ‘마음의 눈이 편리하기는 하네.’ 아마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사람의 경우, 녀석이 본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도 있겠지만 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 마음의 눈이 없었다면 아무런 의심도 없었으리라. 생김새는 뭔가 물건 같은 느낌이다. 눈에는 감정이 들어서 있지 않았고 정중한 자세에서는 왠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진다. 잘생겼다면 잘생겼다고 할 수 있는 외관은 솔직히 귀엽다고 느낄 정도였다. ‘호문클루스?’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균열 수호자들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관리인 막스는 호문클루스가 아니다. 애초에 완벽한 생명체를 창조하는 것은 이미 신의 영역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일. 물론 생명체가 아니더라도 이런 존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만큼 균열 수호자들의 대한 궁금증이 샘솟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야.’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날아 든 목소리. 그 목소리에 우리가 균열 박물관에 입장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했다. -균열 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박물관 탐험가 여러분. “…….”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들의 행동에 놀란 것은 오히려 저쪽이다. -이번에 오신 분들은 공격적이지 않으시군요. 보통 이곳에 들어오신 분들은 들어오셔서 곧바로 전투 준비를 하시곤 하는데…. 우리 역시 이곳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면 같은 반응을 취했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존재가 관리인인지 아니면 네임드 몬스터인지 구별할 방법이 없으니까. 조용한 침묵이 부담스러웠는지 박연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사전에 보고서를 읽은 만큼 대응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애초에 들어오자마자 시험이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느긋하게 박물관 구경을 하는 게 첫 번째. 이 녀석에게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캐내는 것이 두 번째라는 거다. “가장 최근에 이 박물관에 탐방한 탐험가에게 대충은 전해 들어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 박물관의 관리인이라는 사실도요.” -역시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주 전에 한 분을 보내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보내신 분들이로군요. “네. 정확히 말씀드리면 지금 박물관에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은 제 휘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그들은….” -생사의 여부를 묻는 것이라면… 네. 아직 살아 있습니다. 막스의 말에 크게 안심하는 듯한 박연주의 얼굴이 보였다. 최대한 빨리 온다곤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 만큼 불안했을 것이다. “다행이군요. 혹시나 그들을 다시 구해올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박물관 탐험을 완료하신 분들에게 전시된 물품을 드리는 것은 매우 합당한 보상입니다. 심지어 그분들은 박물관에 아직 전시되신 분들도 아니니까요. “…….” -사실 타 차원에서 소환된 존재에 대한 표본은 처음인 터라 그분들을 전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만 아무래도 박물관의 격이 떨어진다고 느껴진 터라 저로서도 조금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렇지만 오늘 이렇게 방문하신 손님들을 보니 아직 비어 있는 자리에 그분들을 전시하지 않은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무슨….” -인과율이 일그러진 영혼이 방문할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녀석은 확실히 김현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회귀니 뭐니 하는 소리는 지껄이지 않았지만 녀석의 눈에는 김현성이 다른 이들과 달라 보이는 모양. ‘마음의 눈이라도 있는 건가.’ 그럴 확률은 희박하다. 박물관 관리인으로서 전시할 수 있는 물품들을 바라보는 눈이 뛰어날 뿐이리라. 단순히 인과율이 일그러졌다고 발언했을 뿐 회귀자라는 것은 모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김현성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고 눈앞에 있는 응집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보기 힘들다고 하는 드래곤도 있군요. 그 다음에 시선을 돌린 것은 디아루기아. -혹시 몇천 년을 살아오셨습니까?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겁니까?” -실례가 되는 질문이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다만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말입니다. 예전에만 해도 드래곤들이 참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물론 드래곤들의 생태를 생각해 본다면 그들의 대가 언제 끊겨도 이상하지는 않지만… 아! 이거 실언했군요. 죄송합니다. 조금은 흥분했는지 눈에 띄게 말이 많아진 것이 보였다. ‘기계는 아닌 건가.’ 단순히 안내인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녀석도 감정이라는 걸 느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결점이 없는 인간이 아니다. 이 정보는 이후에 틀림없이 써먹을 수 있으리라. 나는 슬쩍 디아루기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직까지 똘똘이와 헤어진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저기압인 상태. 실례되는 발언을 돌직구로 맞았으니 기분이 안 좋은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굳이 화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똘똘이에 관련된 일만 아니라면 그녀는 이성적이고 정상적이다.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확실히 아이를 가지는 의무를 포기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저 역시 다른 분들을 뵌 지 오래되기도 했고… 종족의 의무나 관습 같은 것들은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아이를 가진 용들은 세 명도 채 되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아쉬운 일이로군요. 으음… 그러고 보니 당신은 후손을 남기셨군요. “겨우 최근입니다.” -아… 수호자 분들이 당신들이 중요한 존재라고 말씀하셨던 기억도 납니다. 드래곤들 역시 수호자님들과 마찬가지로 대륙의 균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이었으니까요. 후손을 가지고 계시고 있다면 아쉽지만 당신 같은 경우는 박물관에 전시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대신… 음… 드래곤의 뿔 정도라면…. “이런 곳에 제 뿔을 놔두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물론 공짜로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 그래요! 혹시 이거라면 어떻습니까? 충분히 좋은 거래가 될 겁니다. 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박물관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내부 기관이 움직이는 느낌. 얼마 지나지 않아 박물관 입구 벽에 있는 유리벽이 안으로 꺼지고 새로운 유리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미있었던 것은 그 유리벽 안에 한 가지 물품이 보였다는 것. 무척이나 큰 상자에 이것저것 처음 보는 도구들이 꼭꼭 채워져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저거….’ [드래곤 로드의 육아세트-전설 등급] [수만 년 전 존재했던 드래곤 로드가 출산율을 올리기 위해서 직접 제작한 육아 도구 세트입니다. 개량된 젖병과 뇌 활동을 돕는 장난감들, 아직 날기 힘들어 하는 아기를 위한 보조구 등 여러 가지 물품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 육아 세트는 다른 물품과 다르게 로드가 자신의 비늘로 직접 만든 수제품으로서 그 가치가 상당히 높습니다.] ‘무슨….’ 별별 게 다 전시되어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저딴 것도 전시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디아루기아의 눈이 희번뜩 변한 것은 바로 그때. 혹시라도 자신의 뿔을 냅다 반납하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아! 이건….” -어떻습니까? “이, 이 건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어떻습니까? 이대로라면 정말로 거래할 기세다. 당연하지만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 까지는 무조건 이쪽이 소유해야 한다. 제일 가치가 높다고 여겨지는 뿔을 박물관에 냅다 바칠 수는 없다. 개입하기는 싫지만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디아루기아, 비슷한 종류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어미의 머리에 뿔이 없어진 걸 알면 똘똘이도 무척 상심할 겁니다.” “그렇지만….” “같은 등급의 아이템으로 제작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비늘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드래곤 로드가 제작한 물품이라고 한들 아무래도 어머니가 직접 만든 게 조금 더 의미가 있을 겁니다.” “아… 그렇군요.” 대답을 하면서도 여전히 저 물건에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보니 홀려도 단단히 홀린 모양이다. 홈쇼핑을 바라보는 주부의 눈빛과 동일하다. “똘똘이도 그걸 더 좋아할 겁니다. 그리고… 가치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저건 중고라고요. 디아루기아, 당신이 만족스럽다면 거래하셔도 괜찮겠지만 저는 사랑스러운 똘똘이가 남이 사용하던 물품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는 건 싫습니다.” 마지막 말이 아마도 결정타. ‘중고품.’ 특히나 젖병 같은 걸 중고품으로 사용하는 어머니는 없다. 드디어 완전히 미련을 떨쳐낸 얼굴이 보여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물론 좋은 기회를 놓친 던전 관리인은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이쪽을 바라보는 중. 그 얼굴이 놀라는 표정으로 변한 것은 수 초도 걸리지 않았다. -당신은…. “네?” -당신도 놀라운 것을 가지고 있군요. ‘슈바….’ -어떻게 이런 미천하고 비루한 존재가 이런 귀중한 것을 가지고 있지요? 몸을 좀 더 자세히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녀석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지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다. ‘마음의 눈?’ 그나마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 자랑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 전설 등급 판정을 받은 것은 물론 아직도 여러 가지 기능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의 눈의 가치가 제법 될 거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신화 등급의 물품까지 보관하고 있는 박물관 관리인이 놀랄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조금 더 진화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건가.’ 여러 생각을 했지만 지금 이 상황에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어딜 보나 평범할 것 같은 내가 박물관에 전시될 뭔가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으니 궁금한 것이 당연. 황급하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사양하겠습니다.” -갑작스러웠다면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확실히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인지는 자세히 모른다. 뭔가 씨부렁거리고 있기는 하지만 당연히 내 눈을 들여다보게 할 생각은 없다. 이쪽이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걸 알아 차렸는지 조금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앞서 언급한 세 분에 비하면 격이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마나의 축복을 받은 인간도 있군요. 그리고 당신도…. 이번에는 정하얀과 박연주를 가리키고 있었다. ‘쟤도 뭔가 있기는 있나 보네.’ 하기야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으니 한 길드의 마스터 자리를 꽤 차고 있었을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보기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고 보니 조금 칭호가 특이했던 것 같았는데 아마 그걸 말하는 있는 것이리라. -무척 즐거운 날이로군요. 이런 중요한 분들을 그냥 모실 수는 없습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괜찮으시다면 직접 안내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직접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다. 말이 통하는 상대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당연하지만 이런 건 받아들이는 게 옳다. ‘빼낼 수 있는 데까지 빼내야 돼.’ 혹시나 등쳐먹을 구석이 있는지 머리를 굴려봐야 한다. # 234 회귀자 사용설명서 234화 신화적 존재(1) -저희 박물관에서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이템이라고 부르는 물건들 역시 존재하고 아까 보여드렸던 것처럼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물건들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물론 보관하고 있는 것은 무구나 장비뿐만이 아닙니다. “…….” -봉인하고 있는 존재나 계약을 맺은 이들 역시 존재합니다. 여러분들이 박물관 탐방을 직접 체험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이기도 하지요. 물론 타 차원에서 온 이들 역시 존재합니다. 균열을 통해 흘러들어온 이들은 이런 차원에 해를 끼칠 수 있는 만큼 중요한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 -많은 희생이 있었고 많은 싸움이 있었습니다. 균열 수호자 분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 균열을 봉인하는 데 성공하셨지만 그 이후에도 항상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해서 걱정하셨습니다. 때문에 항상 균열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 하셨지요. 박물관 탐험의 보상의 대부분이 여러분이 보물이라고 부르는 무구들로 이루어진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군요.” -물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릅니다. 그게 수호자 분들께서 탐험을 완료한 분들에게만 보상을 내리는 이유일 겁니다. ‘대충 어떻게 된 건지 감이 오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이 대륙에서 균열이라는 것이 열린 적이 있었고 그 균열을 통해 위협이 될 만한 이들이 흘러들어온 모양이다. 균열 수호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위협을 막아냈고 결국에는 균열을 봉인하는 데 성공한다. 아마 이 위협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자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균열 박물관이라는 건가.’ 나쁜 의도로 만들어진 건 아니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 변질된 것 같긴 하지만….’ 어째서 모든 네임드 몬스터와 모든 보상이 랜덤으로 책정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작자의 의도는 관심 없다. 위협은 종류와 시기를 알 수 없다느니 뭐 그런 이유일 것이다. 내 생각이 맞았다는 듯 관리인 막스가 입을 열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모든 보상과 시험은 무작위로 결정됩니다. 위협은 그 종류를 가리지 않으니까요. 저로서는 균열 수호자 분들의 뜻을 전부 이해할 수 없지만 아마 그런 이유일 겁니다. 사실 녀석의 말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주변에 쌓여 있는 아이템들이었다. [둠 비스트의 건틀릿-전설 등급] [균열을 통해 흘러들어온 둠 비스트의 건틀릿입니다. 과거의 전설적인 비스트 마스터가 사용하던 무구로써 모든 야수에 대한 친화력을 높아주는 것은 물론 동물의 영혼과 교감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틀릿 안에 있는 전설 등급의 야수 세 마리를 소환할 수 있으며 이 야수들은 전설적인 비스트 마스터와 평생을 함께해 온 벗이었습니다. 후략….] ‘허….’ 이것뿐만이 아니다. [서리대검-전설 등급] [패륜왕이 사용하던 저주받은 얼음 대검입니다. 죽은 자를 부릴 수 있다는 것 외에 자세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정보가 너무나 깊게 봉인되어 있어 마음의 눈으로도 간파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를 부려?’ 검을 하나 얻는 것만으로도 사령술사, 네크로맨서가 될 수 있다는 거다. 둠 비스트의 건틀릿 역시 마찬가지 전설 등급의 야수 세 마리를 부릴 수 있다는 게 너무나 황당해 말이 다 나오지 않을 정도다. 물론 율리에나도 전설 등급이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자아가 봉인되어 있는 만큼 조금 밀린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웅. 거리는 소리가 괜스레 들려오는 것 같았기 때문에 검의 손잡이를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역시 여러분들은 무구들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다루기에는 위험한 무구들이 많습니다. 자격이 없는 이들은 애초에 사용하는 게 불가능한 종류도 있고요. 아, 여기 이거 보이십니까? [신의 망치-신화 등급] [다섯 거신의 힘이 잠들어 있는 망치입니다. 빛의 화산신, 숲의 여신, 파도의 군주, 바람의 왕, 마음의 여왕의 힘이 잠들어 있습니다. 다섯 가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으며… 후략.] ‘허… 이런 게….’ 두 손으로 들기에도 힘들어 보이는 망치였다. 그렇지만 대충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진다. 평범한 사람이 들어도 곧바로 상위 등급의 플레이어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균열을 통해 흘러들어온 무구 중의 하나입니다. 등급으로 표현하자면 신화 등급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 망치에 다섯 거신의 힘이 잠들어 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당시 균열 수호자 분들이 이 망치 안에서 날뛰는 거신들의 힘을 봉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다른 무구들도 저마다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여러분이 아이템이라고 말하는 무구 중에서는 단연 이게 최고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막스의 얼굴에는 수집한 컬렉션에 대한 자신감이 맴돌고 있었다. 멍하니 전시된 망치를 바라보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 무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처럼 마음의 눈으로 아이템의 능력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 있다. 누가 보기에도 저것은 전 대륙을 뒤져도 나오지 않을 정도의 무구다. ‘슈바….’ 그 와중에도 재미있었던 것은 전시품의 하단에 적혀 있는 간단한 설명. ‘균열 수호자들도 아이템의 진짜 정체를 알아차리지는 못했나 보네.’ 여러 가지 시험과 조사를 하고 실제로도 확인했겠지만 내 특성으로 알 수 있는 정보의 반의 반도 적혀있지 않았다. 새삼스레 마음의 눈이 가진 위대함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간에 이곳에 있는 인원 전부가 대단하다는 눈으로 막스를 바라보니 괜스레 녀석의 콧대가 올라간 것 같은 느낌. -물론 다른 신화 등급의 무구들도 딱 두 가지 정도 존재합니다만 그래도 가장 자랑스러운 컬렉션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 역시 보상으로 얻을 수 있는 물품 중 하나입니까?” -아뇨. 이 물건은 보상으로 지급되지 않습니다. 아쉽지만 보상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전리품이라고 균열 수호자 분들께서 말씀하셨지요. 그렇지만 남아 있는 신화 등급의 아이템 두 정은 똑같이 랜덤한 확률로 지급될 예정입니다. “아….” 확률은 오백 분의 이. 김현성이 이런 종류의 무기를 얻는 다고 가정한다면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것이다. 아직 김현성이 전설 등급의 아이템도 없는 것이 가슴 아픈 현실. 전설 등급의 아이템만 얻어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설 등급까지 고려해 본다면 확률은 오백 분의 삼십이. 확률적으로도 나쁜 수치는 아니다.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건진다면 대박.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라도 먹으면 중박. 영웅 등급 이하로는 생각하기도 싫다. ‘그건 안 돼.’ -물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분이 합당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박물관 탐험을 완료하셔야 합니다. 다른 곳으로 한번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네.” 여기부터가 중요하다. 아이템이야 어차피 보상으로 받을 수 있다. 일단은 생존이 최우선. 뭘 받는 것 보다 누구와 싸우는 게 더욱더 중요하다. 꽤나 긴 시간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확실히 아까와는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 눈에 보였다. 멋들어진 곳에 장식되어 있었던 아이템들과는 달리 확실히 봉인되어 있는 것 같은 이들이 눈에 띄었다. 거대한 대형 괴물부터 아주 작은 몬스터까지. 균열 수호자들이 봉인하거나 수집한 존재들이다. 들어온 순간부터 마음의 눈으로 이곳저곳을 확인하며 머릿속으로 집어넣은 것은 당연지사. ‘정보를 모아야 돼.’ 탐험에 필요한 네임드 몬스터들은 총 세 마리. 어떤 놈이 됐든 간에 세 마리와는 반드시 부딪친다. 정보가 아예 없는 만큼 미리미리 대비해 두는 게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영웅 등급의 몬스터들은 일단 제외. 급한 만큼 전설 등급의 몬스터 삼십 마리와 신화 등급의 몬스터 세 마리를 집중적으로…. [격의 차이로 특성 마음의 눈이 적용되지 않는 대상입니다.] ‘저건… 뭐야.’ 무기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있는 녹색 피부를 가지고 있는 괴물. 거대한 뿔과 거대한 꼬리 그리고 주변을 떠다니는 일곱 가지의 무기.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것은 물론 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한다. ‘이딴 걸… 어떻게 이겨.’ 격이 다르다. 정말로 격이 다르다.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딴 것과 싸우라는 것 자체가 넌센스. 지금의 김현성이 한 다발로 달려들어도 이 녹색 괴물은 이길 수 없다. 나도 모르게 김현성을 바라보자 녀석이 조용히 녹색 괴물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만났던 건가?’ 단순한 공포심 이전에 뭔가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보였다. 1회 차에 이 던전에 들어온 김현성이 녀석을 마주쳤다고 가정한다면 이번 던전행이 위험하다고 말했던 게 이해가 간다. 박덕구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 괴물은 뭐요? 크으… 거, 생긴 거 한 번 멋지구만.” “건, 건드리지 마! 이 돼지 새끼야!”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른 것도 당연한 일. 혹시라도 녹색 괴물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탓이다. -아,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하지만 안심하셔도 됩니다. 단순히 전시관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여러분의 눈앞에 있는 것은 더미입니다. “더미?” -네. 잘 만들어진 모조품입니다. 사실 이런 존재들은 균열 수호자 분들도 완벽하게 봉인하기에는 힘이 드는 터라….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저 자리에 있었던 신화적 존재라고 들은 적만 있습니다. 아. 신화급에 대해서 보고 싶으시면 다른 분들도 보여드리겠습니다. 한 분은 균열 수호자 분들과의 오랜 계약으로 여기 머물고 계시고 나머지 한 존재는 음… 설명하기 어렵군요.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말하자면 이딴 괴물들이 두 명이나 더 존재한다는 것. ‘제기랄….’ 너무 쉽게 생각했다. ‘제길….’ 김현성이 위험하다고 말했던 것이 확 와닿는다. 오백 마리 중에 세 마리, 무조건 신화 등급의 세 마리는 피해야 한다. 지금 전력으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길 수가 없다. 전설 등급의 네임드 레이드 몬스터는 비벼지겠지만 저런 종류의 몬스터를 상대한다는 건 무리. 싸움이고 나발이고 꽁지 빠지는 게 도망치는 게 옳은 선택이라는 거다. 이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리인 막스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 여전히 균열 수호자들의 컬렉션을 자랑하는 데 여념이 없다. -여러분에게는 이 존재가 더 익숙할 수도 있겠군요. 대륙 고대신의 파편입니다. 여러분은 모르시겠지만 아마 여기 계신 드래곤께서는…. “아주 어릴 때 로드에게 들은 적은 있습니다. 어딘가에 봉인되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런 곳에 있었군요. 이건 제어가 가능한 겁니까? -네. 파편은 자아가 없습니다. 수호자님들의 봉인으로 인해 힘도 약해진 상태이고요. 아마 여러분이 이 존재를 상대하게 된다면 일정 시간만 봉인이 풀린 상태가 될 겁니다. 커다란 눈에 촉수가 달려 있는 괴물. 이것 역시 마찬가지다. 신화적 존재는 마음의 눈으로 파악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아까 봤던 괴물보다는 낫지만 이런 게 풀려난다면 마찬가지로 전멸한다. 굳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 보지 않아도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촉수 휩쓸기 한 방을 버티지 못하고 전위가 무너지고 후위는 혼비백산하며 엄마아빠를 찾게 될 것이 분명하리라. ‘절대로 안 돼.’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신화적 존재가 나오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괜찮을 거야.’ 무조건 괜찮을 거다. ‘괜찮을 거야.’ 분명히 나오지 않을 것이다. 1%도 채 되지 않는 확률, 원정대의 평균 행운 스탯은 60이 넘는다. 정말로 운이 나빠야 걸리는 게 신화적 존재들, 대부분은 영웅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가 걸리는 게 당연하다. 녀석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모두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녀석이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시간이 되었군요. “시간 말입니까?” -네. 오랜만에 격이 높으신 분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탐험가 분들이 오시고 몇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봉인이 풀리게 됩니다. 아, 벌써 시작됐군요. 다시 한번 바닥에서 드르륵 소리가 들렸고 우리가 있는 위치의 구조가 뒤바뀐다. 전시된 이들은 땅 속으로 꺼지거나 바닥으로 꺼지고 싸움이 시작되기 좋은 공터가 만들어지기 시작. 괜스레 불안감이 차오른다. -일단은 여길 바라보시죠. 무작위로 선정되기는 하지만 일단 여러분들께서 쉽게 적응할 수 있게 수호자 분들께서는 돌림판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 -이 표지판을 돌리며 마력을 집어넣으시면 무작위로 싸워야 할 몬스터가 선정되는 방식이지요. 대표를 한 분 선택하신 후에 표지판을 돌리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돌려 돌려 돌림판이야. 제기랄….’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이미 보고서로 접했던 이야기. 누가 이걸 돌릴지 역시 이미 결정되어 있다. 첫 번째는 행운 수치가 높은 박연주. 그녀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돌림판에 손을 댔고 모두가 긴장감을 품고 그녀를 바라봤다. ‘제발….’ 신화만 피하면 된다. ‘제발….’ 전설 등급도 힘에 부치기야 하겠지만 차라리 전설 등급의 몬스터 세 마리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낫다. [돌림판이 돌아갑니다.] 음성 메시지가 들린 이후 드그득 소리를 내며 커다란 돌림판이 돌아가기 시작. “제발!!” 이 순간만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일 것이다. # 235 회귀자 사용설명서 235화 신화적 존재(2)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서른 명이 한 곳을 쳐다보는 것이 미어캣 무리들을 보는 것 같아 우습기는 했지만 상황은 결코 우습지 않다. 저 웃기지도 않은 돌림판에 모두의 운명이 걸려 있는 상황. 맹렬하게 돌아가는 돌림판은 이쪽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력의 영향을 받으며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확률상으로 생각해 본다면….’ 확률로 생각해 본다면 신화 등급이 걸릴 확률은 현저히 낮다. 오백 분의 삼의 확률. 당연하지만 전설 등급의 몬스터가 걸릴 확률도 그리 많지 않다고 말 할 수 있다. 기왕이면 영웅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가 걸리는 게 이상적이겠지만 전설 등급의 몬스터가 나온다고 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어떤 타입이 나오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원정대원의 스펙 자체는 전설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다. 전설 등급 중에서도 승급을 앞둔 상위의 존재 같은 녀석들이 나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존재는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목구멍으로 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돌림판이 천천히 힘을 잃고 느려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직접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느려진 것이 눈에 보인다. 흰색으로 구별되어 있는 신화 등급의 지나갈 때마다 안도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황금색으로 구별되어 있는 전설 등급 역시 마찬가지다. “조, 조금만 더 가라!” 덕구 녀석이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 귀로 들려왔고 검은백조의 일원들도 무언의 응원을 보내는 것이 느껴진다. 툭,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돌림판이 느려진 곳에 위치한 곳은 황금색으로 구별되어 있는 자리. 바로 옆에 보라색 구간이 있건만 딱 한 칸을 넘기지 못하고 자리 잡은 모습이 보인다. “아…” 아쉬워하는 탄성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이 정도는 감내할 수 있다. ‘좋아. 해낸 거야. 이 정도면 해낸 거라고 봐도 돼.’ 신화는 아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안심할 수 있었다. [돌림판이 멈췄습니다.] [전설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 해골기사 바안이 선택되었습니다.] -해골기사 바안이군요. 영웅의 영혼을 지니고 있었던 이 대륙의 존재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뭐라고 열심히 설명을 하는 목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귀담아 듣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눈에 녀석의 정보가 전부 비치고 있었으니까. 녀석의 사연이나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 같은 건 어차피 관심 없다. 중요한 것은 공략할 수 있느냐 없느냐니까. ‘고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근접계.’ 고유 마법은 에너지 드레인과 서먼 스켈레톤. 후자는 대충 예상이 가긴 하지만 전자는 어떤 형식으로 발동되는지는 나오지 않아 다시 한번 하위 목록을 살펴보자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바닥의 마법진.’ 밟으면 안 되는 패턴이라는 건 눈을 감고도 때려 맞출 수 있다. 인간인 시절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덩치는 꽤 커다랗다. 보통 사람의 신장보다 확실히. 약 2미터가 넘는 것 같았고 기사라기보다는 마치 용병 같은 외관이었다. 마음의 눈으로 본 정보는 아니다만 이쪽에서 느끼기에 승급을 앞둔 상위의 네임드 몬스터는 아니다. 잘 쳐봐야 전설 초․중급. 분명히 이길 수 있다. 물론 외관 자체의 포스는 확실히 전설 등급이 맞다. 딸그락거리고 한 번 치면 부셔질 것 같은 느낌의 해골이 아니다. 녹색의 안광이 눈과 뼈마디 사이 틈틈히 빛나고 있는 것은 물론 들고 있는 무기 역시 제법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만약 혼자 만났다면 전력으로 도망쳤으리라. 그렇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다. 공략 방법도 제법 확실한 축에 속하는 것 같고…. ‘에너지 드레인만 피하면 되는 건가.’ 일단 포인트는 바닥에 생성되는 마법진을 피하는 것. 귀찮은 쫄 정리야 전위들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전자는 정하얀을 따로 불러내 말을 해놓는 것이 최선. 슬그머니 입을 열자 조용히 달라붙어 오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하얀아.” “네. 오빠.” “부유 마법 준비해 줘. 전원.” “아!! 네.” “타이밍은 내 쪽에서 신호를 줄게. 주문은 항상 트리플 캐스팅으로. 부유 마법은 항상 마지막 자리에 있어야 돼. 신호 받으면 그대로 나갈 수 있게 항상 준비해 놔.” “네. 그리고 마, 마법은… 화력을 조금 줄이면 네, 네 개까지 가능해요.” “그럼 그렇게 해줘.” ‘얘도 참….’ 박물관 관리인이 마나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라는 게 허언이 아닌 모양. 사실 쿼드러블 캐스팅 같은 경우는 단순히 마력과 친화력이 있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마나의 축복 이전에 4가지의 주문을 외울 수 있는 머리가 있느냐의 문제다. ‘천재.’ 물론 여러 가지 주문을 동시에 외웠을 때 화력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초반에는 어느 정도 패턴을 파악해야 되는 만큼 자잘한 마법으로 간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상황. 관리인 막스는 지금도 녀석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이미 저 해골 기사는 싸울 준비를 마쳤다. 그 모습을 봤는지 관리인 막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말이 조금 길어졌군요. 아무래도 제가 여러분들과 바인의 싸움을 기다리게 한 모양입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박물관 탐험가 여러분들. “전투 준비하겠습니다.” 김현성이 조용히 읊조렸고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막스의 목소리가 들려온 이후에 해골기사는 천천히 자신의 검을 들어올리기 시작. 후웅 하는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바람을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거리까지 커버 가능한 건가?’ 마력을 흘려보내는 종류일 것이다. 물론 당황하지는 않았다. 당연하지만 저런 종류의 공격에 대한 매뉴얼은 이미 한참 전에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방패를 든 전위들에게 신성력이 쏟아지고 그대로 탱커들이 앞을 가로 막는다. 마법사들은 주문을 외우고 김현성과 박연주를 제외한 전위는 모두 대기. “좋아.” 말을 하지 않아도 패턴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 ‘이래서 경력직, 경력직 하는 거구나.’ 모두가 어느 정도 경험이 쌓여 있는 이들이다. 머릿속에 구겨 넣은 매뉴얼 이전에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각자가 이해하고 있다. “그르르륵…. 그르르륵…” 녀석이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바닥에서 튀어나오는 해골병사들이 눈에 비치기 시작. 곧바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덕구, 현성 씨, 연주 씨가 메인입니다. 나머지 전위는 몸으로 벽을 만들고 병사부터 정리. 네임드는 오른쪽으로 따로 빼주세요. 다음 병사가 나오기 전까지는 원거리 직군들은 네임드 몬스터에게 화력 집중하고 다시 병사 나오면 병사부터 정리합니다. 패턴이 바뀌면 따로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방어 전담 마법사는 방금 같은 원거리 공격에 대응하는 실드 마법만 항상 유지해 주세요.” “거 알겠소!” 박덕구 말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모두가 알아들었을 것이다. 김현성, 박연주, 박덕구가 빠르게 튀어 나가 네임드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으니까. 일단은 저 셋이 출동하면 어그로가 끌리는 건 이미 확정된 이야기다. 녀석도 머리가 있는 만큼 후위부터 처리하고 싶겠지만 끈질긴 전위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니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이 당연. 일단은 소환한 병사들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아마 쫄들이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겠지만….’ 정하얀의 첫 번째 주문이 튀어나오는 것은 순식간. “……!” ‘개 빨라!’ 정체모를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마법. 이전에 내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커다란 화염의 구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동시다발적으로 말이다. 콰과아아아아앙!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며 소환되었던 다수의 해골바가지들이 개 박살이 나고 있었다. 이쯤에서 별 볼일 없는 뼈다귀들이 금방 쓰러질 거라는 생각했지만 그 정도로 약한 개체들은 아닌 모양. 적들 사이에 반투명한 방어 마법이 펼쳐졌다. ‘해골 마법사도 있나. 아니, 병과별로 소환한 건가.’ 괜히 전설 등급, 전설 등급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해골 궁수들이 활시위를 당기고 우리 진영에도 역시 실드 마법이 생성된다. 양 진영의 메이지들이 주문을 외운다. 조금 전투가 길어질 것 같은 느낌에 곧바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용 숨결 물약에 마력을 밀어 넣었다. 위이이이잉! 소리가 들려오고 난 이후에 내 손을 떠난 물약은 커다란 폭발 소리를 내며 적의 실드를 녹이기 시작. 마치 기회라는 듯이 우리 측의 마법사들이 외운 주문이 적쪽 진영에 떨어져 내린다. ‘좋아.’ 이곳으로 들이닥치는 쫄들 역시 앞 쪽의 전위가 훌륭하게 막아주고 있다. 반전이 일어날 수가 없는 상황. 후위가 안전하다는 건 그만큼 레이드가 잘 풀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병사들을 불러내는 것 자체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야.’ 하물며 이렇게 병과별로 소환한다고 한다면 이쪽의 생각보다 더 마력을 소모하고 있을 수도 있다. 녀석이 어떤 방식으로 싸워왔는지가 대충 눈에 보인다. 에너지 드레인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을 뽑아내고 서먼 스켈레톤으로 계속해서 해골들을 쏟아 붙는다. 술자인 기사, 본인 역시 김현성, 박덕구, 박연주의 합공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의 강자. 만약에 우리가 공략법을 모르고 있다면 애를 먹는 게 당연할 것이다. 에너지 드레인 자체의 대미지도 상당할 거라는 걸 생각해 보면 보통 녀석을 상대한 원정대원들은 첫 번째 드레인에 엄마 아빠를 찾으며 아비규환으로 변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본대 마법사들은 네임드 몬스터 바안에게 화력을 집중합니다. 남아 있는 병사들은 전위들이 직접 정리, 3파티 마법사는 계속해서 실드 마법을 유지합니다. 2차 소환 시작되면 전위는 다시 벽을 만드는 걸로 하겠습니다.” “네.” “2차 소환 시작됩니다. 2차 소환 시작됩니다! 먼저 병사들한테 화력 집중합니다. 사제들은 덕구한테 집중해 주세요.” 생각보다 조금 더 놀랐던 것은 박덕구가 예상보다 더 잘해내고 있다는 것. 물론 사제와 김현성, 박연주가 없었더라면 버티기 힘들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차근차근히 녀석이 휘두르는 검을 거북이처럼 막아내고 있었다. ‘장하다! 돼지 새끼야!’ 열심히 키워준 보람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네임드에게 딜 집중. 아니, 3차 소환 시작됩니다. 대규모 병력입니다. 메이지 30구, 궁수들은 메이지부터 저격합니다.” “네.” 나 역시 율리에나를 내보내며 입을 열었다. 물론 전투를 치르는 도중 부상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종류의 전투에서 눈 먼 화살이나 칼에 아예 맞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니까. 조금 짜증 났던 것은…. “전위 분들은 힘드시겠지만 최대한 상처 나지 않도록 해주세요. 병사들이 낸 상처를 통해 네임드 몬스터가 마력을 회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량이지만 주의해 주세요.” “네.” 미약하지만 녀석이 소환한 해골들에게도 드레인 능력이 있었다는 것. 3차 때 대규모 소환을 한 번 당겨 왔다는 건 녀석이 급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마 슬슬 올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대로 한쪽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네임드 해골바가지가 보였다. 녀석이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순간 급하게 입을 열었다. “정하얀!” “함께 뜬다!” 뭔가 귀여운 주문이 외쳐진 이후에는 30명의 몸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 바닥을 눈으로 확인해 보고서는 미리 부유 마법을 걸어놔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피할 수 있는 마법진이 아니네.’ 타겟의 위치에 생성되는 종류가 아니다. 지금 전투를 치르고 있는 이 공간 자체가 범위다. 하늘 외에 피할 수 있는 곳 따위는 없다. ‘사긴데….’ 민첩 수치가 높다고 하더라도 이 바닥을 밟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다. 충분히 전설 등급의 몬스터라고 할 수 있는 위용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 녀석이 가지고 있는 고유 스킬들은 확실히 규격 외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밸런스를 벗어낫다. 그렇지만…. ‘내 눈깔이 더 사기다, 해골바가지 새끼야!’ 이 순간 김현성에게 뚝배기가 터지고 있는 해골바가지가 왠지 모르게 초라하게 느껴졌다. ‘보상받자! 현성아!’ # 236 회귀자 사용설명서 236화 신화적 존재 (3) ‘무난했어.’ 격이 좀 떨어진다고 한들 네임드 몬스터를 아무런 피해 없이 잡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본래는 녀석이 조금 더 시간을 끌었어야 하는 게 맞다. 두 번째부터 어떻게 대응할 수 있었다고 한들, 첫 번째 에너지 드레인은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부유 마법을 캐스팅해 놓지 않았다면 일이 꼬였을 수도 있는 것은 이쪽이라는 이야기다. 굳이 표현하자면 알고 모르고의 차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첫 번째 드레인을 염두에 두고 마력을 팍팍 사용했던 해골은 김현성에게 뚝배기가 깨지며 리타이어. 그 과정에서 보여준 김현성의 모습은 입이 떡 벌어지기는 했지만 해골기사 바인의 최후는 전설 등급의 몬스터답지 않았다. 아무튼 간에 원정대는 커다란 뭔가를 희생하지 않고 녀석을 잡아냈고 두 번째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다. 물론 내가 기다리는 것은 이 하프타임에 실시될 작은 이벤트. 길드원들이 던전에 고립되어 있는 검은백조 역시 이 시간이 기다려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여러분은 강하시군요. “…….” -물론 격이 높은 분이 계시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바인이 이렇게 쉽게 쓰러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수호자님들이 여러분을 보시면 정말로 기뻐하시겠군요. ‘알았으니까 보상 내놔.’ 아마 모두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뿐이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탐험 중간마다 보상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무구 중 하나를 증정해드리는 것으로 이 역시 무작위로 선택됩니다. 방식도 아까와 같습니다. 탐험을 전부 완료한 이후에 세 가지를 한꺼번에 돌리실 수도 있습니다만.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만약 오백 가지 아이템 중에 원정대를 방해하는 아이템, 이를 테면 저주받은 물건이라든가 통제하기 힘든 물건이 나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런 종류의 아이템이 나올 확률은 전설과 신화 아이템이 나올 확률보다 적다. 매우 스무스하게 진행되는 원정이기는 했지만 도박을 해볼 필요는 있다는 거다. 막말로 저주 아이템을 받고 패널티를 먹어도 전설 등급의 몬스터에게는 어떻게든 비빌 수 있다. 그렇지만. ‘어차피 신화가 뜨면 전멸이야.’ 두 번째 혹은 세 번째에서 신화가 뜨면 무슨 짓을 하든 원정대는 전멸이다. 그나마 신화급 존재와 비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장비.’ 이쪽 역시 신화급 아이템으로 무장하는 것. 김현성은 망치를 사용하지 않지만 아까 봤었던 신의 망치 정도는 들어줘야 어떻게 비벼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단순히 아이템 하나로 원정대 전체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회귀자치고는 비루한 장비가 업그레이드된다면…. ‘김현성 장군님이 전부 다 해주실 거야.’ 어떻게든 녀석이 돌파구를 뚫어낼 것이다. ‘무조건 먹어야 돼.’ 그래야 팀이 안전해 진다. -아까 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여러분의 탐험을 방해하는 물건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막스가 이쪽을 걱정해서 저런 말을 해주는 건지, 아니면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빼기 싫어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아까처럼 대표가 나와 돌림판을 돌려주시면 됩니다. “네.” 박연주를 제외하고 그나마 높은 행운 수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와 디아루기아 그리고 정하얀 정도다. ‘디아루기아는 안 돼.’ 오히려 행운 수치가 높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아까 봤던 육아 세트 같은 거라도 나왔다간 헛웃음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정하얀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정하얀이 굴렸다간 어쩌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스토킹 물품이 뽑힐지도 모른다. ‘김현성도 나쁘지는 않지.’ 엄청나게 높지는 않지만 김현성 역시 행운 스탯이 준수하다. 지금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절박하게 무구를 원하고 있을 테니… 만약에 행운 스탯이 이런 상황에 도움을 준다면 보정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현성 씨가 굴려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이 이견이 없다면 말입니다.” “네. 그렇게 하셔도 되겠네요.” “현성 씨가 한 번 돌려보시죠.” “아뇨. 저보다는 조금 더 행운 수치가 높으신 분들이….” “현성 씨가 굴려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자 녀석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돌림판 앞으로 향했다. 짧은 숨을 내쉰 이후에 곧바로 돌림판을 돌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다시 한번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당연지사. “제발….” 기왕이면 신화급 무기가 나와 줘야 한다. 그래야 남은 두 번을 안정감 있게 진행할 수 있다. 김현성 역시 무척이나 절박한 표정. 녀석이야 점찍어둔 무기가 있기야 있겠지만 그동안 바쁘게 움직인 탓에 혼자 움직일 기회가 없었다. 율리에나를 나에게 빼앗긴 이후에는 줄곧 영웅 등급의 장비만을 찼던 서러운 나날. 그 서러운 나날들이 얼굴에 스쳐지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전설 등급이라도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분명히 하고 있겠지만 녀석이 뽑아야 되는 건 전설 등급이 아니다. ‘신화다! 현성아!’ 무조건 신화를 뽑아야 된다. 만약에 전설 등급을 뽑는다고 하더라도 승급을 앞두고 있는 상위 장비를 뽑아야만 한다. 이를 테면 아까 봤던 서리대검 같은 무구. 내 눈으로도 장비의 확인이 잘 안 되는 무구가 나오는 게 옳다. [돌림판이 돌아갑니다.] ‘제발.’ [희귀 등급의 무구, 대마법사 아이작의 마법검이 선택되었습니다.] “뭐?” -균열을 통해 들어온 물품 중 하나입니다. 격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고…. ‘그걸 묻는 게 아니야, 이 새끼야.’ 너무나 허탈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나만이 아니다. 모두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갑자기 튀어나온 마법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이 시험을 제법 쉽게 통과하기는 했지만 그 과정까지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해골기사는 확실히 전설 등급의 몬스터였고 원정대는 고생했다면 고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허비하며 승리를 쟁취했다. 그 보상이 저 마법검이라는 사실이 실소가 나올 정도. 김현성은 멍하니 자신이 뽑은 결과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희귀 등급의 물건은 10개가 채 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전설 등급의 확률보다 더 낮은 셈. 똥 손도 이런 똥 손이 없다는 걸 몸소 증명해 보인 것이다. 본인도 뭔가 울컥 하는 것이 있었는지 주먹을 꽉 쥐기는 했지만 그래도 검을 집어던지거나 욕설을 내뱉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희귀 등급의 검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뇨. 죄송할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뽑았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질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두 번째에서는 잘 뽑힐 겁니다.” “네….” “너무 풀 죽지 않으셔도 됩니다.” “맞아요. 현성 씨. 행운 스탯이 높다고 해서 이런 종류의 뽑기를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고… 방금 전 저도 전설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를 뽑을 것을 보면 어쩌면 이런 종류의 뽑기에 행운 스탯은 그다지 의미가 없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 애초에 행운 스탯이 높다고 해서 천운을 타고난 것은 아니다. 물론 스탯이 100 이상 넘어가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지만 린델 내에 빈민촌만 둘러봐도 이해가 안 되는 행운 스탯을 가진 이들이 몇몇 보인다. 행운 스탯이 제로인 카스가노 유노의 경우만 생각해 봐도 이 스탯이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미세하게나마 확률이 올라간다면 거기에 걸어보는 게 더 좋다는 거다. 김현성의 경우에는 이번에는 운이 없었을 뿐이다. 사실 지금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무작위가 맞는 건가.’ 이 던전에서 진행되는 모든 뽑기가 정말로 무작위인지에 대해서다. 아니, 무작위인지 아닌지 이전에 관리인 막스의 태도 역시 문제다. 녀석은 박물관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진다. 녀석을 만든 균열 수호자가 어떤 의도로 이곳을 만들었는지도 알겠고 녀석이 균열 수호자들을 존경한다는 사실 역시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물건들을 열심히 설명하는 것만 봐도 녀석이 어느 정도의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 녀석은 이 박물관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관리하고 싶어 한다. 균열수호자들의 뜻이라고는 하지만 지성체라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건 중 가치가 높은 물건을 빼내기 싫을 것이다. 관리인 막스는 완벽한 지성체는 아니지만 지성체에 가깝다. 진귀한 손님들이 도착했다며 제법 수다스러워진 것도 신호의 한 종류였다.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뭔가 다행이라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남들의 눈에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다른 눈을 가지고 있는 내게는 묘하게 감정이 전해진다. ‘기계인 척하지만….’ 녀석도 지성체의 한 종류다. 혹시나 녀석이 던전의 숨겨진 네임드 몬스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그건 아니야.’ 이 균열 박물관은 녀석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서 관리되고 있다. 그 시스템은 균열 수호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시스템이기도 하지만 이 대륙을 관리하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만약 깽판을 치는 게 가능했다면 다짜고짜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탈취한 이후, 녀석이 진행하는 박물관 탐험을 무시하고 밖으로 유유히 빠져나왔을 것이다. 튜토리얼 던전과 마찬가지. 퀘스트를 완료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이 박물관 역시 비슷한 경우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시스템에 대한 관리인의 접근 권한이 어디까지인가.’ 관리인 막스가 확률을 조작할 수 있는가, 없는가. 고민해 봤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일단 기본적으로 전시된 물품들을 관리하는 것이 주요 업무일 것이다. 드래곤의 육아세트를 보여준 것을 보면… 물건을 꺼내고 빼내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겨우 그뿐일 수도 있다. 생각이 많아지니 점점 머리가 아파지는 듯한 느낌. 곰곰이 여러 가지를 떠올리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여전히 막스는 이것 저것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대부분이 방금 뽑은 아이템에 관한 것. 희귀 등급이라고 한들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 그런지 조금은 아쉽다는 표정을 보내오고 있었다. -정든 물건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건 조금 아쉽군요. 격이 떨어진다고 해도 저희 박물관에 오랫동안 전시되고 있던 물건 중 하나였는데…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터라. “그렇군요.” 관리인이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막스.” -말씀하시지요. “박물관에 대한 당신의 권한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입니까.”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단순히 시스템을 유지하는 관리인이지 뭔가를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여부를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아마 진실일 거라고 생각했다. 관리인이 아니라 이 던전의 보스라면 애초에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군요.”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또 이렇게 됐군요. 다음 차례입니다. 두 번째를 완료하시면 박물관을 조금 더 여유롭게 둘러보실 수 있는 시간을 드리게 되니 조금만 더 힘내서 진행해 주세요. “그럼 다음은….” “제가 돌려보겠습니다.” “아, 네. 기영 씨도 행운 수치가 높았죠.” 이쯤에서 한 번 내가 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만 끝나면 조금 여유를 찾을 수 있는 만큼 확실하게 가고 싶은 심정. 녀석이 말하는 여유를 가지는 시간이 어느 정도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간동안 이 박물관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모아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부족해.’ 던전의 기본적인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지만 혹시 다른 방법이 있을지 또 누가 알겠는가. ‘영웅 등급.’ 박연주가 전설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를 꺼내 뒀으니 이번에는 영웅 등급! 똥 손 김현성이 깔끔하게 지뢰를 밟아줬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부담도 없다. [돌림판이 돌아갑니다.] 부담을 내려놓고 마력을 집어넣으니 돌림판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 영웅 등급의 보라색 칸, 희귀 등급의 보라색 칸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이곳으로 온 뒤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든 게 탄탄대로였고 제법 위험한 일도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이기영이라는 인간은 강운을 타고났다. 그렇지만 그 기대가 한순간에 꺾여버리는 것은 순식간. 천천히 느려지고 있는 돌림판의 위치가 굉장히 불안했기 때문이다. “자… 잠깐, 타임.” [돌림판이 돌아갑니다.] “잠, 잠깐만!” [돌림판이 돌아갑니다.] “제발 멈춰. 제기랄….” [돌림판이 돌아갑니다.] “아.” [돌림판이 멈췄습니다.] [신화 등급의 몬스터, 고대신의 파편이 선택되었습니다.] “…….” “…….” “…….” 장내에 드리운 무거운 침묵. 뭔가 상황을 뒤집어야만 하는 상황.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주… 주작이다!” # 237 회귀자 사용설명서 237화 신화적 존재 (4) “주… 주작이다!” 단순히 운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연치 않게 김현성이 내가 돌린 돌림판이 똥이라는 건 조금 수상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확률상 아예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단순히 운이 없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떤 개소리를 해서라도 신화 등급의 존재가 튀어나오는 걸 막아야 했다. ‘말도 안 돼.’ 자꾸만 드르륵 거리는 소리를 내며 고대신의 파편이라는 자식이 튀어나오려고 하는 중. 봉인이 풀리는 데 시간이 더 걸리는지 아니면 뭔가 호소력 높은 내 목소리에 막스 자식이 잠깐 시간을 늦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딴 놈이 튀어나오는 순간 이 파티는 10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전멸할 거라고 생각했다. “확률이 조작된 겁니다!”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않았던 정체모를 공포감에 괜스레 턱이 덜덜 떨려왔으니까. 하지만 관리인 막스는 이쪽이 하는 개소리에 관심이 있는 모양. 당연히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가 균열 수호자들을 존경하는 것이 맞다면 이 박물관이 모욕 받는 것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을 테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겠군요. 확률은 조작된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오백 분의 일의 확률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믿을 수 있는 방법이 없지. 그렇지 않습니까?” 입을 연 것은 안기모였다. ‘나이스 안기모.’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꽤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렇게 금방 합을 맞춰올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좋아. 이 새끼야.’ 녀석이 잠깐 동안 드잡이를 하는 사이에 이쪽이 해야 할 일은 간단.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지 생각해 봐야 돼.’ 신화 등급의 몬스터와 싸운다는 선택지는 아예 없다. 그런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체급 차이가 너무 커 싸운다는 가정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의 존재다. 굳이 예를 든다면 새총을 가지고 탱크를 향해 들이대는 격. 지금 이 파티가 녀석에게 도전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이 맞다. 김현성이 몇 수 숨기고 있다는 걸 가정해 봐도 그것 외에는 따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일단 합은 맞춰줘야지.’ 연기 톤의 대사를 마친 뒤에 안기모가 이쪽을 슬쩍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히 입을 열 수밖에 없으리라. “안기모 씨의 맞습니다. 확률 조작이 없다고 했지만 당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당신들의 의문에 답해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당신은 이 장소를 던전이라 칭하지 않고 박물관이라고 칭했으며 우리를 공략자가 아닌 탐험가라고 칭했습니다. 이 박물관이 던전이라면 당신이 저희를 납득시켜야 할 이유가 없지만 이 박물관이 일반 던전이 아닌 균열 수호자들이 만든 안배가 맞다면 설명은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선택이 아닌 의무…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관리자의 입장에서는 재미있으시겠지만 탐험가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희는 던전을 공략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박물관을 체험하고 탐험하기 위해 이곳에 와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네. 그렇습니다. 그렇고말고요.” 대답한 것은 안기모 하나다. 그렇지만 이미 슬금슬금 여론이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껴졌다. 아마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저들보다 더 똑똑하기 때문에 먼저 입을 연 것이 아니다. 나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의심했을 뿐이다. 아마 모두들 슬그머니 가슴 한편에 씨앗이 자라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러분의 입장도 이해했습니다. 제 눈에는 단지 탐험을 더 이상 진행시키지 않기 위한 행위로 보이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온 반가운 손님들이니 설명이 필요하기는 하겠군요.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박물관에 방문한 탐험가 분들의 결과를 수치화하면 납득하시겠습니까? 생각보다 더 눈치가 빠르다. 조금은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 저런 표정을 짓는 게 이상하지는 않다. 녀석이 사랑해 마지않는 균열 박물관이 한 순간에 주작이 판치는 더러운 곳으로 도박장으로 변할 위기에 처해 있으니 뭔가 수습을 하고 싶긴 할 것이다. 말은 ‘ㅏ’ 다르고 ‘ㅓ’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곳을 던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녀석은 이곳을 던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녀석에게 이곳은 균열 수호자들이 대륙의 인간들을 위해 만든 선물과 안배이며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역사들을 기록하고 보관한 장소다. “수치화한 데이터 역시 당신이 조작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는지도 궁금하군요. 애초에 당신의 본체는 어디 있습니까. 안내를 하는 것은 더미이지 당신 본인이 아닙니다. 당신이 이 박물관의 주인이 아닌 관리인이 맞다면….” ‘이런 식으로는 안 돼.’ 말을 하면서도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시간 끌기밖에 안 될 거야.’ 녀석이 던전 마스터가 아니라는 건 이미 확정된 이야기다. 균열 박물관이라는 걸 구성하고 있는 시스템이 말해주는 공략은 박물관의 탐험이지 관리인 막스의 죽음이 아니다. 녀석이 죽는다고 해서 던전이 공략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 이 시스템의 힘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저항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플레이어들은 대부분의 던전을 외부에서 때려 부순 이후에 공략을 시작했으리라. 율리에나를 만났던 저주받은 신단도 그냥 외부에서 마법을 폭격한 이후에 안정화시키면 된다. 이 방법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는 훨씬 안정감 있다. 정리하자면 던전을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는 거다. ‘룰을 따른다.’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제길.’ 이딴 곳에서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그사이 관리인 막스는 수치화된 결과물이 아니라며 증거를 내보이고 있었지만 이미 녀석의 목소리는 내게 들려오지 않았다. 대답할 여유도 없다. 오히려 나보다 흥분한 것은 박덕구였다. 씨익 씨익 콧김을 뿜으며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는 모습은 가관이다. 물론 안기모 녀석은 자진모리장단으로 녀석을 보좌하는 중. “형님 말대로 이게 정말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소! 애초에 조금 이상했다니까! 처음에 보자마자 우리 형님이랑 형씨를 전시하겠다는 둥 뭐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나. 조금 목적이 이상한 게 아니요?”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으면 잘 모르겠는데! 뭐 인과율이 일그러지니 마나의 축복을 받았느니 나는 그런 건 모르겠지만 멀쩡한 사람을 박물관에 전시하겠다는 소리나 하는 던전 관리인을 믿는 게 말이 되냐 이 말이오!” ‘잘하고 있다, 돼지야.’ 은근슬쩍 생각했던 거지만 확실히 녀석은 선동가의 자질이 있다. 목소리의 톤 자체가 왠지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게 룰입니다. 관리인으로서 희귀한 개체에 대한 욕심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확률 조작은 없었습니다. “이미 욕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에서 끝난 거 아니요? 당신이 정말로 관리인의 자질이 있었다면! 애초에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요! 균열 수호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륙을 수호해 왔다는 양반들이 만들었다는 관리인이 대륙에 사는 사람들을 전시하겠다는 건 정말로 이상하게 들린다니까!” -그것이야말로 인간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대륙을 구성하고 있는 건 당신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이 대륙에 암에 가깝지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는 간다. 지구에서도 저런 말이 들어본 적이 있었으니까. 아마 균열 수호자들이 지키는 것은 인간뿐만이 아닌 모양. 그들이 걱정하고 수호해 왔던 것은 아마 대륙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게 균열 수호자들의 사고방식이요? 그렇다면 대관절 왜 인간을 상대로 시험을 하고 왜 인간이 사용하는 무구들을 보상으로 주는 거요! 인간이 암이라는 건 균열 수호자의 생각이 아니라 당신 생각 아니요?” -그건 수호자님들의 뜻이지…. “애초에 이 박물관은 누가 보라고 만들어 놓은 건가? 내가 보기에는 당신은 관리인 박탈이라니까. 자기 농장에서 무슨 과일이 나오는지도 모르는 양반을 관리인으로 앉혀 놓았으니 아마 균열 수호자라는 사람들도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 저런 놈이 주작을 하지 않으라는 법 있소?” ‘잘한다.’ 예시로 든 말이 뭔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지만 확실히 지금 상황과 들어맞는다. 애초에 덕구 녀석이 흥분하면 이상한 부분에서 논리적으로 변하게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잘해주고 있다. 다른 사람들 역시 공감하고 있는지 서서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주로 박덕구의 하렘에 포함되어 있는 여성진이었다. “맞아요! 어떻게 생각해 봐도 이상하다고요. 희귀 아이템은 10가지 밖에 없는데 그게 뽑힌 것도 그렇고 또 신화 등급의 몬스터는 뭐람? 처음부터 전설 등급이 뜬 것도 지금 생각해 보니 확실히 이상하네요.” “맞아. 덕구 씨, 말 잘했어요!” 목소리를 높이는 건 안기모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은 균열 박물관이 아닌 관리인인 당신입니다!” “아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안기모 씨! 역시 배운 양반은 뭔가 달라! 저 막스라는 놈은 누가 봐도 사기꾼처럼 생겨가지고… 뭔 관리도 제대로 못하고! 우리 형님이 박물관 관리인 하면 더 잘할 수도 있을 것 같다니까! 형님을 박물관 관리인으로!” 끝에 가서는 결론이 이상해지기는 했지만 충분히 시간을 벌고 있다. 김현성 그리고 박연주와 함께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득이다. “어떡하면 좋을 것 같나요? 기영 씨.” “싸우는 선택지는 없습니다.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 되요. 지금으로서는 박물관 관리인과 거래를 하는 게 가장 유효하겠지만 막스라는 관리인에게 주어진 권한이 이 시스템을 막을 수 있을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 처음 말을 꺼낸 건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군요.” 박연주가 이제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부딪치는 선택지는….” 대답한 것은 김현성이었다. “불가능합니다. 전설 등급의 몬스터를 잡은 것과는 완전히 별개일 겁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면 그것도 고려해 봐야겠지만… 추천하고 싶지는 않군요. 아마 연주 씨도….” “네. 애초에 싸움이 안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다른 선택지가 보이지 않아서….” 모두가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이외의 선택지를 찾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관리인과 거래를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긴 하지만….’ -여러분들이 무슨 뜻으로 어떤 말씀을 하시던 간에 저는 이 박물관의 관리자가 맞습니다. 하는 일 역시 유지하고 관리시키는 것밖에는 없고요. 애초에 확률 조작이라는 것은 제 권한 밖입니다. 아쉽게도 이미 나온 선택지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요. 잠깐 동안 신화 등급의 존재가 나오는 걸 미루고 있기는 했지만… 아마 그 존재는 곧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겠지요. ‘역시나.’ -봉인이 풀리는 시간은 딱 한 시간입니다. 그 이상 파편을 풀어놓는 다면 수호자님들의 봉인이 풀릴 수도 있으니까요. 해서 이번 시험은 싸우는 것이 아닌 버티는 것이 되겠군요. “저거 저 사기꾼 같은 놈! 에잇!” -사기꾼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좋은 분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막되 먹은 손님이셨군요. 여러분들이 어째서 이렇게 운이 나쁘고 결국에는 신화 등급의 존재를 뽑았는지도 이해가 갑니다. 균열 수호자님들은 당신 같은 사람들이 이곳의 유물을 얻어가는 걸 바라지 않았던 겁니다! “거, 개소리 한 번 낭낭하네! 그동안 관리인 막스가 꽤나 마음이 상했는지 부들거리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3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서며 비난 여론을 확산시키자 제법 기분이 나빠진 모양. ‘거래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예상했던 대로 녀석도 기본적인 시스템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작도 아니야.’ 단순히 운이 더럽게 나쁜 거였다. 절로 손톱이 입가로 다가간다.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생각이 나기는 했지만 눈앞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를 보니 말 그대로 숨이 턱 막힌다. ‘제기랄.’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외관을 지니고 있는 존재를 묶고 있는 쇠사슬, 그리고 우리를 노려보는 것만 같은 고대신의 파편. 격이 다른 존재를 봤을 때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정하얀도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고 김현성 역시 검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디아루기아 역시 긴장한 모습. ‘한 시간? 버틸 수도 없어.’ 아마 모두가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뭐라도 반항해야겠다고 생각해 검이나 방패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잠깐 동안 어이없는 생각이 스쳐지나간 것은 바로 그때. 어차피 이러나 죽으나 저러나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 [고대신의 파편을 속박하고 있던 봉인의 일부가 벗겨집니다.] 메시지가 들려오는 순간 자그맣게 입을 열었다. 아마 모두가 내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전투 준비.” -행운을 빕니다. “봉인을 완전히 풀어 버릴 겁니다. 전원 파편을 가두고 있는 푸른색의 쇠사슬을 공격합니다.” -어? # 238 회귀자 사용설명서 238화 율리에나 각성(1)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들이 시야에 비쳤다. 그야 당연할 것이다. 저딴 게 풀려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하니까. 아마 그 이후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선택지는 이것밖에 없다. ‘부셔야 돼.’ 관리인 막스도 균열 박물관에 커다랗게 자리 잡은 시스템을 부수는 건 불가능하다. 플레이어의 입장에 있는 우리 역시 그건 마찬가지. 그럭저럭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는 이들이 있냐고 한다면 당연히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넌 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눈 앞에 있는 고대신의 파편은 그게 가능하다. 시스템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 신화 급의 무기가 보관되어 있는 전시관을 때려 부술 수도 있고 공략하지 않으면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한 이 던전의 탈출구를 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일이 잘못된다면 대륙에 커다란 위협을 우리 손으로 직접 풀어버린 게 되겠지만 녀석이 꼭 나쁠 거라는 보장도 없다. ‘고대신님! 믿습니다. 슈바!’ “무슨….” “반론은 듣지 않겠습니다. 현재로서는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중에 이게 가장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진심입니까?” “진심입니다.” 혹시 고대신의 파편이 정신 나간 놈이라면 대륙을 위해서 여기서 작렬하게 희생하는 게 맞다. 일이 꼬였을 때를 생각해 본다면 정말로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다. 대륙 전체가 불바다의 휩쓸리고 완전히 부셔져 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내가 살아야 돼.’ 전형적인 소시민적인 사고방식이지만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이야 대륙을 위해 한 몸 불사르는 성격이겠지만 나는 김현성 정도가 되는 위인이 아니다.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하고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의 목숨이 가장 소중하다. 얼굴도 모르는 놈들 대신 죽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거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대륙 전체보다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이 더 중요하다. ‘희생은 엿이나 먹으라 그래.’ 나와 내 주변 사람의 목숨이 대륙에 사는 모든 인간보다 더욱더 값어치 있다. 쓰레기 같은 생각이지만 어쩔 수 없다. “뭔가 다른 방법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일단은 봉인을 푼 이후에 생각합니다.” 김현성은 살짝 입술을 깨물기는 했지만 내게 무슨 생각이 있다고 느꼈는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만 무슨 뾰족한 수 따위는 없다. 말인즉슨 지금부터 일어날 상황에 대한 대처는 전부 애드립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것. 발 한 번 삐끗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렇지만 사전 설명 따위는 하지 않는 게 당연. ‘일단 우리가 살아야죠’라고 대답하기에는 김현성의 희생적인 성격이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내 목소리에 당황한 것은 원정대원뿐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고대신을 향한 것을 바라보고 있던 관리인 막스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사실 녀석이 가장 황당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나올 확률이 적지만 신화 급의 몬스터의 봉인을 완전히 풀어버리려고 한 미친놈들은 수세기 동안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처음일지도 모른다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무슨 짓이긴. 전부 살아남으려고 하는 짓이지. 어쩔 수가 있나. 던전 안내인이 바보천치인데 탐험가들이야 뭐 뾰족한 수가 있겠어?” -위험한 생각입니다. 이러지 마시고…. “푸흐흣. 말투가 제법 정중해지셨습니다, 관리인님. 그게 싫으시면 멈추시면 되지 않습니까.” -말씀드렸지만 저에게 그런 권한은 없습니다. 다,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확률조작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뭐라고?” -제가 한 말이 다소 무례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면… 사과를 드릴 테니…. “사과는 어디서 받으면 되나? 뒈져서 천당 가서 받으면 되는 건가? 입이나 다물어, 관리인 양반아. 난 뒈져도 혼자는 안 뒈지니까.” -당,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기나 하는 겁니까? “입 다물어, 이 새끼야. 우리라고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야.” -이기적인 인간들. 이 썩어빠진 인간들! 네놈들이 수호자님들이 걸어놓은 봉인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아? “글쎄. 내가 볼 때 위대하신 고대신의 파편님에게 검을 들이미는 것보다는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 응? 우리 박물관 관리인 막스는 어떻게 생각하려나. -디아루기아! 당신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저 존재가 세상 밖으로 나와도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 이쪽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디아루기아를 들먹이며 입을 여는 꼴은 가관. 디아루기아도 뭔가 표정이 어둡기는 하다. 나야 드래곤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균형을 바로잡는 존재들이라고 녀석이 언급했던 것을 보면 그녀는 저게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걸 원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나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저….” “우리 똘똘이가 애미 애비 없다고 놀림 받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네 마음대로 해, 여편네야.” 어머니는 강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디아루기아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 모습을 보고 관리인 막스는 다시 한번 뭐라고 소리를 내지르는 중. 애초에 저렇게 당황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즐겁다. 관리인의 표정이 구겨지면 구겨질수록 이쪽에는 희소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거다. ‘가능성이 있어.’ 균열 수호자들이 걸어놓은 봉인은 내부에 충격에는 어떨지 몰라도 외부의 충격에는 유약하다. ‘이건 가능해…. 분명히 구멍이 있는 거야.’ 저 정도의 존재를 봉인하고 박물관 탐험가들을 위한 시험으로 내몰았다. 그들도 고대신의 파편과 같은 신화적 존재라고는 해도 저런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오류가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물론 내 생각은 단순한 추측일 뿐이고 만약 내 말이 맞다고 가정해도 저걸 깨부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아까 했던 말대로 놈을 한 시간 동안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그럴 듯한 계획이라는 거다. 일단은 빠르게 오더를 내리는 게 더 중요했다. “관리인 막스의 개소리는 모두 무시. 디아루기아는 브레스를 준비하고 가장 화력이 큰 마법을 동시에 쏟아붓습니다. 현성 씨와 연주 씨도 가능하다면 폭발이 끝난 뒤에 직접….” “알겠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살해 달라는 주문과 다름이 없지만 일단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3. 2. 1.] [전투가 시작됩니다.] 공격이 날아 들어오기 전에 먼저 부셔야 한다. 예상대로 곧바로 봉인을 쥐어뜯으려 하며 발광하기 시작하는 고대신의 파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덜덜 떨려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감이 온몸에 드리운다. 그렇지만 압도적인 공포감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 “!!!!!!!!” 적어도 외관으로는 무척 듬직해 보이는 그녀가 현신한 것이다. 압도적인 크기의 뿔과 덩치, 그 위용은 누가 봐도 탄성을 내지를 정도. 이전에 본적이 있었던 거대한 모습으로 변한 그녀는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없는 마력이 집결하고 있다. 저 브레스의 여파가 이쪽에 끼치는 것만으로도 이쪽에게는 대미지로 다가올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화력을 집중해야 하는 만큼 보호 마법을 펼칠 여력은 없다. ‘충격파는 내가 막아야 돼.’ 충격의 여파는 용의 꼬리를 소환해 막는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저것 신경 쓰기에는 상황이 마땅치가 않다. 주머니에 있는 용숨결 물약을 일부 남겨놓은 채 마력을 주입하자 위이잉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정하얀 역시 주문을 내뱉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주문을 외우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 디아루기아와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을 정도의 마력이 집결된다. 모두가 정하얀을 놀란 눈으로 바라볼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으리라. 다른 마법사들 역시 주문을 외우고 심지어는 선희영 같은 사제들 역시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 기도문을 외운다. ‘가능해.’ 분명히 가능하다. 신호탄은 디아루기아의 브레스. 콰지지지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쏘아져 나간 빛은 순식간에 지면을 갉아먹으며 고대신의 파편을 억류하고 있는 쇠사슬에 쇄도해 나갔고 마찬가지로 정하얀의 앞에서도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구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느릿하게 다가간 구체는 천천히 빨라지며 마치 빨려 들어가듯이 봉인에 적중. 그 외에도 이것저것 여러 마법들이 봉인의 쇠사슬을 두드리고 있었다. 귀를 울리는 굉음이 들려온 것은 당연지사.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은 소리가 들려오지만 김현성과 박연주는 폭발의 여파를 뚫고 들어간다. 단일로 가장 큰 대미지를 줄 수 있는 만큼 약해진 부분을 비집고 들어가 해결해 줄 것이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내 눈에는 김현성과 박연주의 모습이 확실히 비친다. 걸려 있던 신성 보호막이 벗겨지고 피부가 찢겨지면서도 검을 놓지 않고 마력을 한 손에 집중한다. 폭발의 충격파를 감당하는 것도 충분히 부담스러운 일일 터.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기는 했지만 튀어나오려는 핏물을 억지로 들이 삼키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깨질듯 말듯 깨지지 않을 상대로 보이는 봉인의 쇠사슬을 보니 괜스레 짜증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죽으면 안 된다! 현성아!’ “덕구야, 현성 씨랑 박연주 회수 준비.” “아… 응! 알, 알겠소.” “사제들은 최대한 신성력 밀어 넣습니다. 희영 씨, 기모 씨! 제가 가리키는 위치에 집중적으로 신성력 밀어 넣어 주세요. 마법사들은 방어 마법 상시 준비하고 박덕구 포함한 전위들은 안쪽으로 진입. 디아루기아는 다음 꺼 준비되면 바로 쏴.” “형, 형님도 가는 거요?” “응.” 말할 시간이 없다. 어차피 김현성이 뒈지면 나도 뒈진다. 거대한 무언가가 우리를 덮쳐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파편?’ 거대한 촉수 중에 하나. 아직 우리를 타깃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저 몸을 푸는 것처럼 느껴졌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쪽은 숨을 죽여야 된다.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 나는 멍하니 위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뒈지나.’ 다행히 그 공격을 막아낸 것은 디아루기아. ‘제길.’ 기분이 좋지만 나쁘기도 하다. 날아 들어오는 촉수를 향해 브레스를 쏘아 보낸 것.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저딴 게 여기에 적중했다면 내가 뒈지는 것은 물론 틀림없이 전멸이었을 테니까. 다시 한번 충격파가 휘몰아쳐 몸이 뒤로 밀려날 뻔 했지만 박덕구가 나를 붙잡아줘 굴러가는 것은 피해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여러 가지 마법이 쏟아지고 김현성과 박연주는 그 안에서 봉인의 쇠사슬을 부수려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모자라.’ 턱없이 모자라는 것은 아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화력을 집어넣으면 될 것 같은데 제대로 부셔지지가 않는다. ‘제길.’ 뭔가 어디에선가 화력을 끌어올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머리를 굴리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괜스레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게 된 것은 바로 그때. “율리에나?”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율리에나! 나의 율리에나여!” “…….” “깨어나시오, 율리에나. 아아아, 나의 율리에나! 그대가 필요하오! 율리에나!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오!” 미친 사람 같겠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에나 나오는 톤으로 입을 여는 것은 의외로 수치스럽다. 그렇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이뿐이다. “아아아, 율리에나! 나의 사랑! 율리에나 깨어나시오. 제발! 제발 이 상황에 처해 있는 나와 내 동료들을 구원해 주시오! 나의 사랑 율리에나!” ‘제기랄.’ “율리에나! 제기랄! 율리에나는 개뿔!!” 이딴 것에 의존하려고 한 것 자체가 실수. 전멸이라는 그리기 싫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뭔가…. 굉장히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아아아아아! 게드릭! 나의 게드릭! 나의 게드릭!! “어어어?” -아아아아아! 나의 사랑 게드릭! 나의 모든 것! 내 전부! 내 삶의 등불이며 희망! 내 삶의 구원자. 나의 영원한 꽃! 게드릭!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의 게드릭! *후기 막스: 안… 안 돼! 박물관이! 내 박물관이! # 239 회귀자 사용설명서 239화 율리에나 각성(2) ‘좋아.’ “좋아!”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수습하는 게 조금 힘들어지기야 하겠지만 일단은 눈앞에 있는 과제부터 해결해야 되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습은 나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 중 하나다. “나의 율리에나! 드디어 일어났구려! 얼마나 당신을 기다렸는지 모르오.” -게드릭! 나의 게드릭 저 역시 오랜 시간 동안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을 그려왔습니다. “율리에나!” -게드릭! 내 주위를 둥둥 떠다니며 괴상한 소리를 내는 검을 바라보는 것은 조금은 무섭다. ‘넌 게드릭이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내 목을 꿰뚫어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던 탓이다. 그렇지만…. ‘괜찮아.’ 아직까지 그런 징조는 없다. 율리에나는 아직도 나를 게드릭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끼고 있길 잘했어.’ [게드릭의 청혼 반지-영웅 등급] [율리에나의 저주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저주받은 신단에서 발견한 게드릭의 청혼 반지. 별 다른 기능도 없는 이 반지를 습관처럼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다가올 위협에 항상 대처하는 건 소시민의 옳은 생활 방식 중의 하나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율리에나! 나의 율리에나! 이럴 시간이 없소. 율리에나!” -게드릭… 아아아! 내 사랑 게드릭! 입을 맞춰 주세요. 이 몸이 바스러지도록 저를 안아 주세요! ‘너 검이잖아….’ “율리에나! 그대의 힘이 필요하오. 고대의 신을 억지로 붙잡아 두고 있는 간악한 균열 수호자들의 봉인을 풀어야 하오.” -아아! 내 사랑 게드릭! 조금 더 사랑을 속삭여 주세요. 게드릭! 나의 등불! 나의 빛! ‘정신 나간 년!’ 애초에 통제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녀가 내 예상보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게드릭이라는 자식은 이 여자의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찾아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담컨대 스톡홀름 증후군의 한 종류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납치당한 것일 수도 있다. 왠지 모르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머리 한편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나를 도와주시오! 율리에나! 그대의 사랑이 필요하오.” -게드릭! 나의 게드릭! “율리에나! 세상이 위험에 처해 있소!” -아아아…. ‘제기랄!’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는 것은 당연. 여기서 율리에나와 입씨름을 하다간 파티원이 전멸한 이후에나 그녀가 움직여 줄 것이다. 일단은 율리에나를 붙잡고 달려 갈 수밖에 없다는 거다. 검을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조건 마력을 집어넣고 달려드니 확실히 뭔가 달라진 것이 있기는 있다. -게드릭! 당신의 따뜻한 마력이 흘러들어오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력이 제 몸속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습니다! 아아아! 나의 사랑 게드릭! 아아아! ‘제발 닥쳐!’ 제발 그 입을 다물어 줬으면 싶었다. 그렇지만 효과는 상상하는 것 이상. ‘어어어?’ -조금 더! 조금 더! 주세요! 게드릭! 당신의 사랑을 조금 더! ‘미… 미친년!’ [저주를 내리는 검 율리에나의 잠들어 있던 기능 중 하나가 해금됩니다.] [에이에스의 촉수] ‘좋아!’ 지금까지 율리에나가 가지고 있는 기능은 저주를 내리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상처를 입힌 것만으로 상대방에게 저주를 내리고 마력을 대량 소모한다면 광역 저주를 거는 것까지 가능하다. 앞서 말한 기능만 나열해도 충분히 전설급 아이템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심지어는 스스로 나를 지켜주기까지 하니 고개를 끄덕일 만한 아이템 중의 하나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율리에나가 가지고 있는 기능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유틸적인 부분 말고도 이 무구는 다른 종류의 힘 역시 가지고 있다. 그 기능은 이미 그녀와 김현성이 검을 부딪쳤을 때 확인한 바가 있다. “나이스!” 물론 에이에스의 검은색 마력은 이전에도 사용한 적이 있지만 지금 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마력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예전에 사용했던 것이 클로즈 베타 버전이었다면 지금 내 눈에 보이고 있는 모습은 몇 번의 업그레이드를 거친 느낌. 이전에 율리에나가 사용했던 검은색 마력의 촉수들이 그녀의 검을 중심으로 피어나오기 시작. 조금 불안했던 건 이 촉수들이 계속해서 나를 옭아매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그녀가 해를 끼칠 의도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심지어 바닥에서도 피어난 검은색 마력의 촉수들이 자꾸만 내 옷 속으로 들어오려는 느낌은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쳐올 지경. 다행인지 불행인지 촉수들은 내 행동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지만 언제 나를 옭아매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외관만 본다면 위협적인 것은 눈앞의 촉수겠지만 이 촉수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건…. -더… 더! 아아아! 게드릭 그대의 사랑을! 그대의 사랑을 조금 더! ‘그만 좀 빨아먹어!’ 미친 듯이 내 마력을 빨아먹고 있는 율리에나. 마력 스탯이 낮은 나로서는 당연히 부담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생명력마저 빨아들이고 있는 느낌에 소름이 끼쳐올 지경. 그렇지만 보여주는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조금 더 먹어!!’ 검 안에 든 기운이 내가 낼 수 있는 출력이 아니라는 건 굳이 측정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물론 내게 저 기운을 컨트롤할 여력은 없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검정색의 촉수들은 이미 내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 하지만 어차피 통제할 생각도 능력도 없다. 나야 이 넘치는 기운을 쇠사슬에 때려 박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거다. “덕구야!” “아… 알겠소!” 내 모습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박덕구가 이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한 것을 보니 왠지 모르게 장하다는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 촉수가 내 몸을 휘감고 있다고 해도 저런 폭발의 여파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박덕구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니가 대신 아파줘야겠다.’ 아니나 다를까. 내 몸에 투명하고 희미한 방패가 생겨났다. 남이 받은 데미지를 본인이 대신 받아갈 수 있는 박덕구의 특성이었다. 파칙 파칙거리는 손으로 땅을 짚자 곧바로 용의 꼬리가 바닥에서 튀어나오며 나를 쇠사슬이 있는 곳으로 올린다.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어차피 떨어져도 대미지를 입는 것은 박덕구. 지금은 검을 휘두르는 게 최우선이다. 깨질듯 말듯 깨질듯 말듯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봉인이 보인다. 당연하지만 폭발의 여파로 인한 대미지는 없다. 뜨겁지도 않고 피부가 벗겨지지도 않았다. ‘조금만 참아라, 덕구야!’ “기영 씨?” 여파를 뚫고 들어온 내가 신기했는지 ‘형이 왜 거기서 나와?’라는 말투의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 애초에 대답할 여력도 없고 계속해서 들려오는 폭발음 때문에 목소리를 잡아내기도 쉽지가 않다. “부셔져라! 슈바!” 검 안에 가득 들어있는 기운으로 그나마 약해 보이는 부분을 후드려 깐 것은 당연. 내 몸을 휘감고 있었던 마력의 촉수들과 여기저기에서 뻗대고 있었던 촉수들은 순식간에 쇠사슬을 향해 떨어져 내렸고 그나마 남아 있던 마력 역시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게드릭! 게드릭! 게드리익! 아아! 아! “깨져라! 깨져!”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두 번으로 안 되면 세 번. 검술은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가 휘두르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차도가 있다. 마치 몽둥이로 때리는 듯한 모양새이기는 했지만 봉인도 이미 한계였으니까. 봉인의 쇠사슬에 금이 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히 쇠사슬은 부서지고 있다. ‘좋아!’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김현성이 연기를 뚫고 튀어나와 내가 두드린 부분을 향해 검을 휘두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이 절로 든다. ‘한계였어.’ 율리에나에게 마력을 너무 많이 빼앗겼다. 더 이상 칠 여력도 없을 때 튀어나오니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다. 확실히 대충 휘두른 검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렇게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검이 금이 가는 쇠사슬에 맞닿은 순간 푸른색의 사슬이 깨지며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이스!” 김현성의 손이 내 허리를 붙잡는 것이 느껴진다. 내 몸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쇠사슬과 멀어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고대신의 파편의 모습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왔다. ‘잘한 짓… 맞겠지.’ 우리가 부순 것은 녀석을 칭칭 감고 있는 쇠사슬 중 단 하나다. 그렇지만 신화적 존재를 꽁꽁 옭아매고 있었던 봉인의 균형이 깨지니 순식간에 다른 쪽들도 터져나가는 게 시야에 비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녀석이 쇠사슬을 잡아 뜯어내고 있었다. 이쪽이 그렇게 힘을 들여 부숴버린 쇠사슬을 알 수 없는 기관으로 잡아 뜯는 녀석의 위용은 가히 장관. ‘엄청 세 보이는데….’ 세상에 뭘 풀어놨는지 그제야 실감이 오기 시작했다. 턱이 덜덜 떨려오고 몸 역시 부들부들 떨려온다. 걷기 힘든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대신의 파편이 봉인에서 풀려납니다.] [경고] [균열 박물관의 보호 프로그램을 작동합니다.] [경고] [프로그램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경고] [예비 프로그램을 작동합니다.] [경고] [고대신의 파편이 완전히 깨어납니다.] “그어어어어어어어어!!!!!!!!!!!!!!!” -아아아… 아아아아… 안 돼!!!! 관리인 막스의 비명소리와 고대신의 파편이 우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예비 프로그램?’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행히 균열 박물관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의 수습할 프로그램이 있기는 있는 모양. 물론 그 예비 프로그램이라는 게 정말로 이걸 수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화살은 내 손을 떠났다. ‘열심히 수습해 봐라.’ 이제는 책임이 관리인 막스에게 가 있다는 거다. 역시 엿이라는 건 먹는 것보다 먹이는 게 더욱더 달콤하다. 물론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녀석의 봉인을 푸는 것에 성공했다고 한들 우리가 위험하다는 사실은 여전했으니까. 세상의 위협 이전에 이쪽의 목숨이 달아나게 생겼다. 저 파편이라는 것은 사고 능력이 없는 것 같았으니 고대 신을 떠받들며 만세삼창을 하는 계획도 선택지에는 없다. 그렇지만…. “고, 고대신님! 만세!” “…….” “고대신님이 깨어나셨다! 고대신의 파편님을 위하여!” 일단은 외쳐볼 수밖에 없는 게 소시민의 사고방식이다. 만세가 닿았는지 닿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의 발버둥은 커다란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시작.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박물관의 외벽이 무너지고 있었고 굳건했던 전시관들 역시 형편없이 깨져나가고 있었다. ‘예상이 맞았어.’ 녀석은 시스템에 저항할 수 있다. “그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커다란 메인 촉수가 휘둘러지자 형편없이 깨져나가기 시작하는 박물관. -안… 안 돼에에에에!!!!!!!! 비명을 지르는 관리인 막스. 그 가운데 나는 원정대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부서진 곳으로 가서 아이템 좀 챙깁시다. 고대신의 영향을 받은 전시관이 몇 개 정도는 있을 겁니다.” *후기 이기영: 수습은 니가 해. 챙길 건 챙겨야지… ㅎㅎㅎㅎ # 240 회귀자 사용설명서 240화 신화 등급 아이템(1) 모두가 조금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와중에 아이템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이 상황에서는 아주 조금이라도 스펙을 올려놓는 것이 정답이다.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 있을 수도 있어.’ 부서진 전시관 중에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 있을지도 모른다. 뭐라도 해야 되는 상황에서 원정대원 전체의 스펙을 올리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물론 고립된 이들도 함께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걸 수습할 방법이 있는 겁니까?” “수습은 저희가 할 일이 아니라 박물관 관리인이 해야 될 일입니다. 예비 프로그램인지 뭔지가 발동됐으니 균열 수호자들이 걸어놓은 안배가 작동했을 겁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희의 몸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일단 빨리 이동을 부탁드립니다. 현성 씨. 지금 당장은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어서….” “아… 네.” 여전히 내 몸을 안고 있는 김현성을 올려다보니 녀석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더 처참한데….’ 사실 녀석의 몸도 정상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 폭발 속에서 계속해서 쇠사슬을 향해 검을 휘둘렀으니 망신창이가 되는 것이 당연. 내가 입은 대미지를 그대로 받은 박덕구도 상태가 말이 아니다. 선희영과 안기모가 계속해서 신성력을 뿌리고는 있었지만 완벽하게 회복되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게드릭… 게드릭! 그 와중에 율리에나는 계속해서 게드릭을 외치며 울부짖고 있는 중. 허리춤에 있는 검집에 그녀를 꽂아 넣으니 조금 잠잠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웅웅대는 것은 굉장히 불안해 보였다. ‘빠져나가는 것도 일이야.’ “옆쪽에 생긴 전시관 쪽으로 빠져나가겠습니다. 혹시 다른 몬스터들도 깨어났을 수도 있으니 몬스터 전시관 쪽과는 반대 방향으로 이동시키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 네.” “최대한 빨리 움직여서 몸을 조금이라도 회복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진입하죠.” 원정대원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모두가 쉬고 싶을 것이다. 마력을 한계까지 빨린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균열 수호자들이 걸어놓은 봉인을 깨부수기 위해 모두가 자신의 능력 이상의 마력을 사용했다. 모두들 체력 스탯이 높은지 정상적으로 걷고 있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나는 조금 더 엄살을 부려도 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진짜로 몸이 안 움직여.’ 물론 따뜻하고 안전한 김현성과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의도한 바가 아니기는 하지만 상황이 나쁘지는 않다. 몸이 지친 와중에도 이쪽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검은백조의 식구들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굳이 신경 쓰지는 않았다. ‘엄살 부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몸이 약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말을 마치자 모두가 디아루기아의 품에 안겨 커다란 구멍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 발광하고 있는 고대신의 파편을 내버려둔 채 전시관 쪽으로 진입했다. 등 뒤로 여전히 괴성이 들려오기는 하지만 녀석은 지금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 않고 있다. ‘당연할 거야.’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자신을 가둔 존재가 주변에 있다. 아마 이곳에 있는 걸 전부 때려 부수지 않고서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박물관의 상태는 무척 처참하다. 거의 대부분의 전시관들은 형편없이 부서져 있었지만 안에 들어가 있는 무구들 역시 완전히 박살이 난 상황. 마음의 눈으로 훑어봐도 등급이 보이지 않은 쓰레기들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쪽은 건질 게 없겠어.’ “다음 방으로 갑시다. 여기에 있다가는 여파가 우리 쪽에 미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일단 목표로 하는 건 관리인실입니다.” “관리인실 말인가요?” 질문을 던져온 것은 박연주였다. “네. 관리인 막스의 본체가 있는 장소가 있을 겁니다. 이곳에 없는 것을 보니 꽤 바쁜 것 같은데…. 더 이상 이쪽에 신경 쓰기는 힘들 겁니다. 일단 연주 씨는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받았던 반지 빼버리세요. 어차피 더 이상은 던전 관리인의 안내를 받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네. 안 그래도 그렇게 하려고 생각했었어요.” “그리고… 하얀아?” “네? 네! 오빠.” “하얀이는 여기 검은백조의 레인저 분들이랑 지금부터 지도를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단순히 마력 탈진 때문에 못 움직이는 것뿐이지 다른 상처는 없어.” “네. 오빠….” “하얀 씨가 지도를 그릴 줄 아는 건가요?” “아뇨. 대신 제 위치를 항상 체크하고 있습니다. 아마 도움이 될 겁니다. 제법 상세하고 정확할 겁니다.” “특… 이한 커플이네요.” 뭔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박연주의 말에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친구를 추적하는 여자친구와 대상자가 그걸 용인하고 있다는 게 조금은 신기하게 비치는 모양. 지구였다면 그다지 기분 좋지 않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언제 납치당하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르는 이런 곳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물론 내 기준에서지만….’ “희영 씨랑 기모 씨 그리고 다른 사제 분들도 일단은 조금 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탈진하면 원정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네.” “여유를 가지기는 힘들겠지만 조금 이라도 여유를 가지는 게 좋을 겁니다.” “거, 형님 말이 맞소. 마냥 급하게 움직인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사실 싸우기가 힘든 상태가 아니라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 아니요.” “맞다, 덕구야.” “그런 의미에서….” “안 그래도 저쪽과 조금 멀어지면 캠프를 차리려고 했어.” “밥도 먹는 거요?” “당연히 먹어야지. 다만 보급품을 몇 개 잃어버려서 아껴 먹어야 할 거다.” 휴식은 그만큼 중요하다. 여건만 된다면 한숨 자는 걸 추천하고 싶을 정도. 물론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아직도 굉음이 들려오는 걸 생각해 보면 사실 캠프를 차리는 것 자체도 추천하고 싶지 않다. ‘어쩔 수 없어.’ 말 그대로 원정대원들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라는 거다. 잠깐 한숨을 쉬고 있었을 때, 뭔가가 부셔지는 소리와 함께 고대신의 파편의 촉수 하나가 왼쪽 벽을 꿰뚫었다. “어잇! 깜짝야!” “저건….” “애… 애 떨어질 뻔했어요.” 정하얀 역시 깜짝 놀랐는지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걸 보면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원정대원을 진정시키는 것도 나 같은 사람이 하는 일 중 하나. 나 역시 놀라기는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마 저희를 노리는 게 아닐 겁니다. 단순히 꿈틀거리고 있을 뿐인 것 같은데… 일단은 저 촉수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동하는 게 좋겠군요.” “그, 그런데 왜 저건 가만히 있는 거요?” “글쎄…. 고대신의 파편이 나는 뭔지 잘은 모르니까… 뿌리라도 내리려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네. 어쩌면 이 박물관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던전 자체에서 흘러들어오는 마력을 흡수하려고 하는 중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보다는 하나만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알, 알겠소.” 박덕구를 다그치기는 했지만 나로써도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본체는 확실히 발광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정말로 잠식하려는 건가.’ 예전에 고대신의 파편에 대해들은 적이 있다고 했었던 디아루기아에게 이후에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인간의 형태로 돌아온 이후 뭔가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는 모양. 다행히 무척 심각해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언뜻 자괴감에 휩싸인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했다. 지금은 그 의무가 희미해지고 잊혀 졌다고는 했지만 본래 드래곤이라는 종족 자체가 하는 일이 대륙의 균형을 수호하는 일. 고대 신의 파편을 깨부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으니 아마 지금쯤 돌아가신 자신의 할머니라도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아무튼 간에 원정대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정하얀과 레인저들이 만든 지도를 바탕으로 박물관 자체의 구조를 파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에 고대 신의 촉수가 보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녀석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건 뿌리 내린 게 맞네.’ 균열 박물관이 고대 신에게 잠식당한 박물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에 대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움직이기 편해졌다는 것. 시스템에 의해 막혀 있던 벽면들이 플레이어에게 주는 충격에도 부서지고 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확실해. 좀 먹고 있는 거야.’ 박물관의 기능이 정지하고 있다는 전황들을 여기저기에서 파악할 수 있었다는 거다. 예비 프로그램이라는 걸 발동시킨 박물관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고 있을지도 궁금하기는 했지만 확인하러 가는 게 멍청한 일이라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다. 아직까지도 멀찍이서 굉음이 들려오는 것을 보면 여전히 박물관이 눈깔 촉수와 씨름을 벌이고 있는 도 중. 아마 지금쯤 저쪽은 난리가 났을 것이다. ‘제대로 막아질 리가 없지.’ 박물관의 기능이 정말로 정지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면 아마 봉인되어 있는 몬스터들 역시 깨어났을 수도 있다. 어쩌면 지들끼리 열심히 치고 박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물관이 살아 있다가 정말로 현실처럼 되어버렸을 수도 있다는 게 이쪽이 할 수 있는 간단한 추측. 아직까지 박물관이 무너질 기미가 없는 것을 보면 막스가 열심히 수습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막아낼 수 있나?’ 어느 쪽을 응원해야 할지 애매한 것이 사실. 물론 머릿속으로는 돌리고 있는 행복회로는 존재한다. 원정대가 고립된 이들을 구출, 아이템을 얻은 뒤에 박물관을 빠져 나간 이후 박물관이 고대신을 다시 봉인시켜 주는 게 완벽한 시나리오. 딱 뒤 끝 없이 짜인 시나리오다. 물론 항상 최악을 생각하는 내 성격상 마음 놓고 행복회로를 돌리기는 힘들었지만, 이쪽이 어떻게 대처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만큼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사고가 있었던 곳에서 조금 멀찍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였다. “엇… 여긴 조금 정상인 것 같은데….” 덕구 녀석이 조용히 입을 열어온 것. “확실히… 괜찮군요.” 조혜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신의 파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삼십 명이 몸을 쉴 정도로 넓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형님! 여기 아이템 널려 있소! 여기도 기능 정지한 것 같은데… 전시관도 말을 안 듣는 것 같은데? 어! 저기 전설 아이템도 몇 개 있는 것 같은데… 나 이거 가져도 되는 거요?” “오빠. 여기 지팡이 있어요! 이, 이것도 전설 등급 같아요!” “영웅 등급의 아이템도 몇 개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균열이라는 곳에서 흘러들어온 만큼 기존에 있는 등급보다는 상태가 좋은 것 같네요. 신성력을 올려주는 물품도 있는 것 같습니다, 기영 씨.” “희영이 누님도 욕심나는 게 있는 거요?” “욕심이 난다기보다는 다른 곳에 있는 성서가… 궁금해서….” 상태가 온전한 아이템이 남아 있다는 것.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입이 찢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모습은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기분이 좋을 만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눈까지 비비는 녀석 역시 있었을 정도니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으리라. 그렇지만.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을 때는 나 역시 커다랗게 입을 열릴 수밖에 없었다. ‘어….’ 희미하게 새하얀 색으로 빛나고 있는 검. ‘대… 대박.’ 조금 투박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대충 봐도 명검이라는 걸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검에서 쏟아지는 빛은 정확히 김현성을 가리키고 있다. ‘신… 신화 등급.’ 로또를 맞은 것이다. ‘현성아! 우리 안전한 거 맞지?!’ 오랜만에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후기 김현성: 기… 기영이 형! 이번 에는 내 거 맞는 거지? # 241 회귀자 사용설명서 241화 신화 등급 아이템(2) 꼬일 대로 꼬여 버린 이 상황을 앞으로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은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신화 등급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받고 있는 김현성의 모습은 그야말로 동화책에서나 나오던 용사며 영웅이다. ‘키야….’ 처음 김현성을 봤을 때부터 녀석에게 찰싹 달라붙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해 왔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녀석을 따라와서 다행이라는 느꼈던 적은 없었다. ‘장엄해! 현성아! 형 지리겠다!’ 원래 주인공이라는 건 대부분 녀석이다. 왠지 율리에나에게 선택받는 내 모습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다. 확실히 김현성이 나와 다르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새하얀 빛은 마치 김현성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녀석을 향했고 김현성은 천천히 손을 뻗는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물건이었다는 느낌으로. 시선을 빼앗긴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고대 양식으로 건축되어 있는 건축물. 고대신의 영향으로 이곳저곳이 부서지거나 깨어 있는 배경. 그 가운데 수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가 있으니 검은백조의 여성진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는 중이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실감한다. 어딘가의 종교 의식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은 마치 녀석이 신에게 선택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였다. 공중에 둥둥 떠 있던 검이 천천히 녀석의 손에 내려앉았고 환한 빛이 방 안을 가득 메우는 것은 순식간. 화아아아아아악!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검을 자신의 허리춤으로 가져간 녀석은 조금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박연주. 처음부터 검에 대한 정보를 볼 수 있었던 나와는 다르게 다른 사람들은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다. “주인의식에 성공한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설마, 신화 등급의 검인가요?” “예. 신화 등급의 검입니다. 아직은 제가 그 사용자로서의 역량이 부족한 터라 모든 기능을 사용할 수는 없는 것 같지만… 전설 등급의 아이템과 비교해 봐도 부족함이 없는 것 같군요. 일단 검은백조의 여러분들께는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뇨. 전혀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현성 씨. 주인의식이야 치루고 싶다고 해서 치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타인이 그걸 막을 수 있는 권리도 없으니까요. 방금 같이 무구가 스스로 다가왔다면… 더욱이요. 그리고 애초에 원정을 도와주시는 입장에 있었으니 문제 삼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배가 아프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현성 씨가 잘된 모습을 보니 오히려 기분이 좋네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솔직히 문제의 여지가 있을 만했다. ‘운이 좋네.’ 파란이 검은백조를 도와주는 입장에 있기는 했지만 값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지닌 물건을 아무런 합의 없이 가져간 것이나 다름이 없다. 꼬투리를 잡으려고 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 검은백조의 길드마스터 박연주가 김현성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주인의식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이 문제가 별 탈 없이 넘어간 것이다. ‘그래도 먹었으니까 일단 우리가 가져가는 게 맞지.’ 아무리 가치가 높다고 해도 사용자가 없다면 돌멩이나 다름없다. 아쉽지만 박덕구가 만지고 있는 전설 등급의 방패와 정하얀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전설 등급의 지팡이까지 우리 소유로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정하얀이 금색 빛에 휩싸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잘했다! 하얀아!’ 그녀 역시 주인의식에 성공한 것. “죄, 죄송합니다.” 일단 고개를 숙이는 정하얀의 얼굴에는 이미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다. 지팡이를 발견했을 때 기분 좋게 달려가는 것 같더니 결국 마력을 밀어 넣고 사고를 친 것이다. 이건 통제를 하지 못한 이쪽의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그렇지만 솔직히 기분은 좋다. 입꼬리가 괜스레 실실 올라가려고 하는 느낌을 꾹 억누르며 이쪽도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정하얀.” “죄송해요…. 오빠.” “덕구야, 너도 일단 방패 내려놔라.” ‘내려놓지 마.’ “덕구야.” ‘빨리 주인의식 시작해! 이 돼지새끼야. 일단 마력 밀어 넣고 처먹어! 형이 수습해 준다! 원래 이런 건 먹고 보는 거야.’ “아, 알겠소. 형님.” ‘일단 먹으라니까!’ 아쉽게도 내 속마음이 전달되지는 않은 모양. 눈치 없게 방패를 땅바닥으로 내려놓은 박덕구는 괜스레 입맛을 다시며 두 발자국 정도 물러섰다.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쓴 맛을 삼켜 넘기며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희영 씨도 일단 잠깐 내려놓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모 씨도 마찬가지고요. 조금 흥분하신 건 이해하지만 저희끼리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아이템 분배는 원정대장의 고유 권한이고 지금 이 원정대의 원정대장은 박연주 님이 맞습니다. 현성 씨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하얀이 너까지….” “죄송해요.” ‘죄송하긴 뭐가 죄송하니. 정말 잘했다. 다음에도 그렇게 하는 거야.’ 아무래도 던전에 나간 이후에는 정하얀에게 상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거, 누님도 모르게 그렇게 된 모양이오. 너무 혼내는 건… 원래 이런 상황에서 냉정함을 찾을 수 있는 건 이 박덕구 정도가 아니면 힘드니까. 아암 그렇지!” 눈치 없는 박덕구는 정하얀을 열심히 두둔하며 은근슬쩍 참을성 있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지만 저 돼지는 상이 아니라 벌이 필요하다. ‘너는 돌아가면 벌이야.’ 그렇지만 그걸 지금 당장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 멍청한 놈이라는 단어를 애써 목으로 삼켜 넘기며 박연주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기영 씨. 이미 저질러진 일이기도 하고…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보다는 축하를 드리는 게 맞는 것 같네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계속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지금 상황으로서는 스펙 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사람이 가져가는 게 맞습니다. 일단은 살아남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싶어요. 주인의식에 성공했다는 건 지금 이 자리에서 저 무구를 제일 잘 다룰 수 있다는 게 하얀 씨라는 뜻이니까요. 저희 마법사들도 괜찮아하고 있는 것 같고… 축하드립니다, 하얀 씨.” “감, 감사합니다….” ‘그렇지.’ 확신할 수 있다. 박연주는 천사가 맞다. 과하게 착한 모습은 다분히 김현성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일단 최대한 양보를 해주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니 다시 한번 김현성이 부러워지기 시작. 녀석의 연애는 굉장히 밝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일리가 있어.’ 당장 눈앞에 욕심보다는 일단은 살아남는 걸 전제로 생각한 부분도 굉장히 마음에 든다. 어째서 그녀가 가진 것 없는 이지혜를 기용하고 길드내의 대소사를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남은 아이템들은 일단 저희 쪽에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먼저 판단해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챙길 건 챙긴다는 부분도 마음에 든다. ‘김현성 부럽다.’ 조혜진과 박연주의 축하를 받으며 슬쩍 웃고 있는 모습은 정하얀에게 한쪽 팔을 봉인당한 나와는 대비된다. 그 와중에 율리에나는 눈치 없이 계속 웅웅거리며 말을 걸어오기 시작. 오랜만에 깨어난 여파인지 곧 잠잠해 지기는 했지만 아마 김현성이 이번에 얻은 신화 등급의 검은 율리에나와도 차이가 있으리라. 아무튼 간에 한 발자국 뒤에서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일단 파란 길드가 신화 아이템과 전설 아이템을 꿀 꺽한 셈이 된다. 남은 전설 아이템은 박덕구가 만지작거리던 방패 하나와 질이 좋은 영웅 등급의 아이템들. 방패야 주인의식을 치러야 하는 아이템이니 이쪽에도 기회는 있겠지만 사실상 영웅 등급의 아이템들은 검은백조에서 독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서로 분류되는 영웅 등급의 보조구가 가지고 싶은지 힐끔힐끔 하는 선희영의 시선도 확실히 신경 쓰였지만 지금 저 아이템을 달라고 하는 건 아무리 나라도 말하기가 힘들다. 당장 원정대 내에 있는 사제만 4명. 모두가 영웅 등급의 아이템을 장비하고는 있지만 저 성서를 원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주 무구가 아닌 보조 무구인 만큼 일반적으로 양손 지팡이를 착용하는 사제들이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본래 사람의 욕심이라는 건 끝이 없는 법이다. 일단은 기다려 봐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야…. [12기사단의 검-듀렌달-신화 등급] [신화 속, 12기사단의 수장이 사용하던 명검입니다. 그 어떤 것도 베어낼 수 있다고 알려진 이 명검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 빛이 바라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자세한 정보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듀렌달은 부러지지 않는다.] [피로 물든 붉은 보석-아네모네-전설 등급] [질투에 눈이 먼 여신이 남편의 애첩을 살해한 이후 그 혈액을 보석으로 만들어 장식한 지팡이입니다. 기본적으로 사용자의 마법을 증폭시켜주는 것은 물론, 보석에 내장되어 있는 고유 마법의 지식을 깨우치게 됩니다. 사용자의 성장치가 낮아 사용 가능한 고유 마법의 지식이 제한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마력이 10 올라갑니다. -저주받을 아네모네! 더러운 창녀 아네모네야! 너는 평생 그 보석 안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정도의 아이템을 꿀꺽했으니 영웅 등급의 아이템에 소유권을 주장할 양심이 남아 있지 않다. 고대신의 파편이나 전에 봤던 그 녹색 괴물처럼 신화 등급의 아이템은 내 눈으로도 확인할 수가 없지만 굳이 설명으로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게 있는 법이다. ‘저건 보물이야.’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검은 지고의 보물이다. 상태창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저 검은 부러지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다. 김현성의 검술 실력은 이미 대륙 8좌로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수준이 높았고 세간에서는 김현성이 경험 부족이 아니냐는 말도 떠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그건 녀석이 회귀자인지 모르는 멍청한 놈들이 지껄이는 헛소리일 뿐이다. 어떤 기능들이 숨겨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여러모로 부족함이 없는 우리 현성이가 저걸 사용한다고 가정하면 모든 걸 베어낼 수 있고 부러지지 않는다는 기능만으로도 충분히 밥값은 하고 남는다는 거다. 정하얀이 가지게 된 전설 등급의 지팡이 역시 말이 필요 없을 정도. ‘설명이 뭔가… 불안한데….’ 기분이 좋기는 하다. 전체적으로 파란의 등급이 한 단계 더 올라간 셈이니까. 질투에 미친 여신이 자신의 남편의 애인을 살해한 이후 그 혈액으로 보석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은 누가 봐도 불길할 수밖에 없다고 느껴지는 울림이지만 일단은 좋은 일이다. ‘아네모네….’ 정하얀과 궁합이 맞다면 맞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문제가 생길 것 같은 느낌. 사실 주인의식을 치르고 나니 커다란 지팡이는 별 관심도 없는 모양.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 있는 붉은색 보석이 박힌 지팡이가 시야에 비쳤다. ‘저럴 거면 왜 저렇게 빠르게 달려가서 선점한 거야.’ 분명히 지팡이를 발견한 이후에 굉장히 흥분하며 달려 나갔던 게 방금 전이다. 주인의식을 마치고 나니 단물이 떨어진 껌 마냥 뱉어내는 모양새가 우습다. 지팡이보다는 아무래도 지팡이에 내재되어 있는 능력치가 더 탐이 났던 것 같지만 나에게 혼이 나는 페널티까지 떠안으며 전설 등급의 지팡이를 차지하고 싶어 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별 생각 없이 히죽히죽 웃고 있는 정하얀의 얼굴을 확인한 이후 그녀가 무엇을 원한건지 깨닫는 것은 순식간. ‘마력 능력치… 97….’ 1년이 조금 지난 시점. 비공식적이지만 정하얀이 대륙 8좌에 비견되는 힘을 가지게 된 순간이었다. ‘자, 잠깐 타임….’ # 242 회귀자 사용설명서 242화 잠깐의 휴식(1) ‘이거 안 좋은데… 아….’ 정하얀과 상당히 오랜 시간을 붙어 다니며 그녀가 생각보다 영악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쓰레기 루트를 밟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정하얀은 생각보다 더 치밀하고 간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 순수했던 정하얀과는 다르게 죽이고 싶다고 해서 곧바로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는 거다. 당연히 지금껏 정하얀이 보여주는 음모는 귀여운 수준. 이를 테면 라이벌이 될 것 같은 여자의 나쁜 점을 은근슬쩍 이야기 한다든지 내가 자신의 눈물에 약하다는 걸 이용한다든지 따위의 어린애 장난이었지만 정하얀이 처음과는 달라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한번 눈 돌아가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건 여전하지만….’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그녀 역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다. 힘의 차이, 권력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물론 본인이 상대적 약자의 입장에 있다는 것도 그 누구보다 더 실감하고 있다. 차희라를 처음 만난 이후에 마법에 미친 듯이 열중한 것도 그런 이유. 강자라고 생각되는 이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도 어찌 보면 그런 이유였다. 물론 내게 중요한 사람인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인지를 구별하는 분별력이 생겼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녀가 훈련소에서 한소라를 넝마로 만들어 버린 배경에는 뒤탈이 없다는 생각 이전에 자신이 포식자의 위치에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기 때문이리라. 단순한 추측일 뿐이었지만 나는 정하얀의 행동 패턴을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해하고 있었다. ‘별로 좋지 않은데….’ 정하얀이 강해지는 것은 물론 반갑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무슨 사고를 치게 될지 알 수가 없으니 신경이 쓰이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마력 능력치가 97….’ 주요 능력치가 90대 후반에 들어선다는 건 대륙에서 강자로 들어서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차희라가 특성을 이용해 근력 능력치를 뻥튀기하기 전에 97의 근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생각해 봐도 설명이 된다. 이토 소우타도 민첩 능력치가 90대 후반이었고 지금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박연주 역시 90대 후반의 스펙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단순히 능력치로만 강함을 측정할 수는 없지만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아주 조금의 경험만 채워진다면 적어도 제국에서 10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제 본인도 그걸 인식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 아니 애초에 이미 인식하고 있다. 본인한테 필요한 건 시간이나 능력치를 뻥튀기 할 수 있는 아이템의 존재라는 걸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그래서 모두가 김현성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에 아이템을 선점한 것이다. 능력치를 얻은 이후에 헌신짝 버리듯 지팡이를 내버려 둔 걸 보니 한 번 더 내 생각이 맞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차희라나 카스가노 유노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있었지만 지금은 적어도 바로 뒤까지 바짝 따라붙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히히.” 자꾸만 히죽히죽 웃는 것은 전설 아이템을 얻었다는 기쁨보다는 내 예상 때문일 터. 지금 당장에야 문제가 없지만 초반에 확실히 잡아놔야 한다. 던전에서 나간 이후에 언젠가 다시 한번 재교육을 할 필요가 있으리라. ‘얘는 꼭….’ 주기적으로 멘탈을 잡아줘야 된다는 게 무척 귀찮기는 했지만 지고의 대마법사를 소환수로 부릴 수 있는 것치고는 싼 대가. 혹시 지금부터 사고를 치진 않을까 무척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그렇지는 않을 거야.’ 아직도 내 팔을 붙잡고 검은백조의 여성진을 경계하고 있는 정하얀을 바라보니 다시 한번 한숨이 튀어나왔다. 박덕구가 커다란 목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거, 형님! 누님! 밥 드쇼!” “오빠! 식사 준비됐나 봐요!” “벌써 그런 시간이네.” “네. 헤헤헤.” “크으…. 거, 진짜 음식 맛이 기가 막힌다니까! 그 연주 누님이 직접 만들었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눈깔이 띠용 튀어나올 뻔했다는 거 아니요!” “그래?” “이건 내 생각인데 아무래도 연주 누님이 우리 길드 마스터 형씨를 좋아한다는 것 같다니까! 그래서 솜씨 한번 부려본 것 같소. 이건 강원도 연애 박사 박덕구의 촉이요. 냄새가 나. 냄새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마치 자신만 알고 있는 듯 내뱉으며 바닥에 철푸덕 앉는 꼴이 가관이다. 슬그머니 김현성 쪽을 바라보니 역시나 박연주에게 붙들려 이곳으로 오지 못하고 있었다. 옆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조혜진의 얼굴이 괜스레 뾰로통해졌다. ‘얘도 질투하네.’ 내 앞에서는 항상 딱딱한 모습만 보여줬던 것으로 기억했는데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모양이다. “아직 원정 중입니다, 덕구 씨. 그런 사적인 이야기는….” “혜진 누님도 그다지 기분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데… 우리 형씨가 박연주 누님이랑 꽁냥꽁냥하게 분위기 좋으니까 기분이 조금 다운된 거 아니요?” “무슨….” “큼. 굳이 밝히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 연애 박사의 눈에는 전부 보인다니까.” “쓰, 쓸데없는 소리는 삼가….” “다른 길드 사람한테 홀랑 뺏기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가보는 게 좋을 거요. 저쪽 지금 분위기 좋은 것 같은데… 사랑의 전도사로서 그래도 조금 더 가까운 쪽이 우리 형씨와 잘되는 걸 응원하고 싶으니까. 이게 말이요. 같이 밥 먹는 게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사실 꽤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거 아니요.” “아….” “원래 밥 먹다가 누나가 자기 되고 자기가 여보 되는 거요. 벌써 검은백조의 누님들이 밀어주고 있는 것 같은데 빨리 가보라니까. 안 그러면 후회할 거요.” “그런….” “빨리 여보되기 전에 달려가 보는 게 좋을 거요.” “굳이 그런 이유 때, 때문은 아닙니다만… 갑자기 길드 마스터께 보고드릴 게 생각이 나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이기영 부길드 마스터.” “네. 혜진 씨. 힘내세요.” “정말로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보니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창을 챙길 여유도 없는 모양. 허둥지둥 대며 식판을 들고 일어나 김현성과 박연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좌우로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귀엽네.’ 저런 게 풋풋하고 예쁜 연애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다가오지 말라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 정하얀이나 선희영과는 뭔가 다르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선희영이 검은백조의 길드원들과 그다지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는 것. 아무래도 사제인 만큼 나름대로 자유분방한 면이 있는 저쪽과는 잘 맞지 않는 모양인 것 같았다.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오히려 싫어하는 것 같은 느낌. 물론 그걸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내 눈에는 그게 보였다. ‘얘랑도 면담 한번 해야 되는데….’ 그동안 방치하고 있기는 했지만 선희영도 주요 관리가 필요한 대상 중에 하나다. 그나마 그녀에게 신경을 끌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정하얀과는 다르게 자기 앞가림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단순한 생각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래 왔다. 김현성이 조혜진을 부관으로서 신뢰하는 것처럼 나 역시 선희영을 신뢰한다. ‘일 처리 확실하고… 이성적이고….’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사실 외모도 이쪽 타입에 가깝다. 뭔가 신성한 분위기를 풍기는 성당 누나 같은 스타일을 싫어하는 남자가 어디 있겠냐만은 선희영의 외관은 이쪽의 이상형이라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몸이 피곤하니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진 모양. 잠깐 선희영에게 시선을 뺏기자 정하얀이 내 팔을 꽉 움켜쥐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거 아니야, 하얀아. 흥분하지 마….’ 정하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자 박덕구가 다시 한번 말을 이어왔다. “거, 형님.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말이요.” “응?” “지금 정말로 기분 좋게 쉬고 있기는 한데… 정말로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소.” “뭐가?” “큼. 너무 편하게 쉬고 있는 건 아닌지. 뭐, 그런 생각이 듭디다….” “아아아아.” 사실 조금 그런 분위기이긴 하다. 어차피 영웅 등급의 아이템을 분류해야 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캠프를 차렸고 곧바로 식사를 준비한 이후에는 모든 원정대원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물론 레인저들이 로테이션으로 주변 수색을 해야 했지만 그 이후의 시간에는 정말로 프리하게 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조용히 앉아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양반. 아예 캠프 안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었고 검은백조의 몇몇 길드원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연금술사와 천재 검사가 사랑하는 법? 3권?’ 나도 모르게 책의 제목에 시선이 향하자 한번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 시야에 비쳤다. 확실히 린델을 강타한 소설이기는 한 모양이다. ‘저건 한번 읽어봐야겠네.’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저렇게 모두가 함께 모여 읽는 걸 보면 재미있기는 한 모양. 아무튼 간에 모두가 저렇게 마음 놓고 쉬고 있으니 녀석이 녀석답지 않게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벌려놓은 일을 완전히 모른 척하고 있는 걸로 보일 테니까. 그렇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요.” “아….” 선희영이 작게 입을 열어왔다. 당연하지만 그 말에는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희영 씨 말이 맞아. 당장은 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지금 다시 그쪽으로 되돌아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애매하게 쉬는 것보다는 아예 대놓고 쉬는 게 나을 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대신의 파편인가 뭔가도 잠잠해 보이고 아무튼 정신 놓고 쉬어도 돼. 참고로 오늘 하루는 여기에서 야영할 생각이다. 물론 짧은 시간이겠지만….” “정말이요?” “응.” ‘일단은 쉬는 게 맞아.’ 나라고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다. 갑자기 박물관이 무너져 내리고 고대신의 파편이 발광하기 시작하면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걱정되는 게 당연하다. 사실 지금 상황은 내가 상상하던 최악의 상황과 굉장히 유사했으니까. 그렇지만 정말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 촉수를 막아내느라 무리하게 출력을 뽑아낸 디아루기아는 회복에 집중하고 싶은지 입을 닫고 있었고 무엇보다 원정대 내 최대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김현성과 박연주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제법 망가져 있는 상태. 물론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얻어 스펙 업을 한 김현성에게 기대를 거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도 녀석의 몸 상태가 정상일 경우의 이야기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지만 마음의 눈으로 녀석이 어느 정도의 대미지를 입었는지가 눈에 보인다. 그야 그 폭발 속에서 무리하게 마력을 끌어올리며 검을 휘둘렀으니 저렇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리라. 원정대원들에게는 웃으며 별일 없을 거라고 말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제법 절박한 상태라는 거다. 이쪽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규격 외의 존재가 발광을 언제 할지 모른다는 게 가장 불안한 일. 또 관리인 막스가 이쪽을 제거 대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경우도 염두에 둬야 했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일단은 푹 쉬어, 덕구야. 레인저들도 계속 돌리고 있고 위치만 확인하면 당장 움직인 다음 처음부터 수습하기 시작할 거야.” “나는 괜찮소. 나보다는 형님이 걱정이지. 지금도 안색이 창백한 게 얼굴 정말 안 좋아 보인다니까.” “이건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는 종류니까 괜찮아.” 위기의식이 없던 박덕구가 저런 말을 해오니 괜스레 내가 더 불안해 진다. 이쪽도 회복에 집중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조금씩이라도 움직여야 될 것 같은 느낌. 슬그머니 디아루기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고대신의 파편.’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디아루기아가 유일. 타이밍 좋게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뜬 것을 보니 본인이 만족할 만큼 회복되었다고 느끼는 것 같다. 마침 이쪽도 식사가 끝난 상황. 조용히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녀 역시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간다는 걸 눈치챘는지 박덕구는 굳이 따라나서지 않았고 정하얀도 함께 일어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쪽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으니 결국 기다리기로 마음먹은 모양.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 것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그녀가 없는 게 대화하기 더 편하다. ‘일단 먼저 들어야지.’ 세상 멸망 어쩌고가 연관되어 있는 만큼 정보를 제한해서 푸는 게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이기적인 선택을 해야 했을 때 그 방아쇠는 내가 당겨야 할 테니까. 어느 정도 원정대원들과의 거리가 멀어지자 예상대로 디아루기아가 곧바로 입을 열어왔다. 그녀 역시 무척 급해 보이는 느낌. 확실히 상황이 심상치 않기는 한 모양이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디아루기아.” “대륙이 부서질 겁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렇다면… 수습을….” “앞으로 3만 년 이후에… 대륙이 붕괴할 겁니다.” “수습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겁니다. 어떻게 선조들을 뵈어야 좋을지…. 이 일을 해결하실 방법이 있는 겁니까?” “수습할 필요가 없겠군요.” 조금은 안심할 수 있는 소식이었다. 세상이 무너진다느니 붕괴한다느니 하는 소식에 벌벌 떨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내가 죽은 이후에 일이 터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디아루기아는 내 대답에 다소 황당하다는 반응. 그렇지만 자꾸만 기분이 업되기 시작한다. ‘3만 년이면! 슈바! 그냥 내버려 둬도 되는 거잖아!’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다. ‘못난 조상을 둔 후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죽은 이후에 세상이 멸망하든지 말든지 관심 없다. 쓰레기 같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일단 기분 좋게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욜로!’ # 243 회귀자 사용설명서 243화 잠깐의 휴식(2)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황당하다는 표정의 디아루기아가 시야에 비쳤다. 수습할 필요 없다는 말과 너무나도 기뻐 보이는 표정에 할 말을 잃은 것이 틀림없으리라. 너무 티를 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기분 좋은 걸 굳이 숨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3만 년이면 응? 인류가 멸망하고도 남겠다.’ 사실 인류가 멸망하든 멸망하지 않든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자꾸만 고대의 어쩌구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대륙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아니 실제로도 오래됐겠지.’ 디아루기아만 해도 4천 년을 살았고 드래곤 로드라는 양반도 분명히 존재했다. 이 대륙이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곳 인류의 역사가 오래됐다고 가정해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하다. 확률은 낮지만 3만 년이 지나도 이곳의 문명이 그대로 유지될 수도 있다는 거다. ‘용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느낌이 또 다른 건가….’ 디아루기아와 생명을 공유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나도 제법 오래 살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삼만 년이나 살지는 않을 것이다. 잠깐 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디아루기아가 다시 한번 입을 열어왔다. “수습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꼭…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는군요. 아니면 이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신 겁니까? 고대신의 파편은 서서히 대륙의 생명을 흡수할 겁니다. 대기에 퍼져 있는 마력을 빨아들이고 저희가 밟고 있는 대지 역시 좀 먹기 시작할 겁니다. 생명체는 그 위에서 하나둘씩 죽어갈 거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아! 설마 뿌리내린 촉수가 그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까? 그래서 박물관의 기능도 정지하고 있는 거로군요. 저희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저희는 안 전한 게 맞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정말!” “아니, 왜 이렇게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흥분하시지 마시고 천천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디아루기아.” “진정할 상황이 아닙니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니, 시원하게 브레스 날리던 게 방금 있었던 일 같은데 왜 제게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솔직히 봉인을 푸는 데 가장 크게 활약하신 분이 누군데….” “그, 그건….” “혹시 용의 수명이 3만 년 이상입니까?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 저희의 수명은 개체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통 만 년 안팎으로 그보다 더 오래 살아 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참고로 당신 역시 용의 배우자로서 저의 수명을 따라가 앞으로 약 6천 년 정도를 더 살아가게 될 겁니다. 중간에 무슨 문제가 없다면…….” 조금 길기는 하지만 오래 산다는 건 좋은 거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본인의 입으로 들으니 기분이 좀 싱숭생숭했다. “3천 년 후에 무너지는 게 아니니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우리 똘똘이도 1만 년 정도 편안한 생을 보낼 수 있고…… 만약에 똘똘이가 가진다면 음…… 그래도 별로 영향이 없겠군요. 손자까지는 무리없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째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라뇨. 방금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괜찮습니다. 후손들이 전부 수습해 줄 겁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미래는 후손들이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내가 내뱉고도 무책임하고 쓰레기 같은 발언이었다. 디아루이가의 표정에 대놓고 혐오스러운 감정이 표현되었지만 목숨을 걸고 다시 뛰어들 생각은 죽어도 없다. ‘미래는 후손들의 것이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말은 그럴 때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대륙이 부서질 겁니다. 이건 지금 수습하지 않는다면 확정될 이야기예요. 저희의 손으로 세상을 멸망시킨 것과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선, 선조들의 어떻게 뵈어야 좋을지… 아아아.” 확실히 용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니 느낌이 조금은 다르다. 300년 이후에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듣는다면 아마 보통 사람은 조금은 동요할지도 모른다. 나 같은 소시민이야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상관이 없지만, 김현성 같은 종류의 사람들은 어쩌면 큰 책임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거다. 아마 디아루기아가 그런 종류의 드래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수습해야 하는 일입니다. 절대로 수습해야 됩니다.” “목숨을 걸고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지만….” “아니, 디아루기아. 우리 조금만 더 솔직해집시다. 가장 중요한 게 뭡니까?” “무슨 소리를 하시려는 겁니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거 그게 바로 우리와 똘똘이 아닙니까.” “아니….” “그래서 당신도 고대신의 봉인을 푸는 데 일조한 것 아닙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만 입 꾹 닫고 모른 척하고 있으면 우리도 행복하고 똘똘이도 행복하게 살 겁니다. 솔직히 방금 전은 운이 좋았던 겁니다. 정말로 운이 좋았던 거예요. 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아마 공감할 것이다. 살아남은 건 요행이며 운이었다. 심지어 고대신의 파편은 우리를 적으로 인식하지도 않았다. 단순히 꿈틀 거릴 뿐이었고 그것을 막는 것조차 버거웠다. “대륙을 사랑하는 마음은 뭐, 이해가 갑니다. 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균형 어쩌고 하는 걸 보니까 뭔가 책임감도 느끼시는 것 같고요. 그렇지만 적당히 이기적이어도 된다는 겁니다. 수습하려고 자칫 잘못했다가는 전부 죽을 거예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홀로 남겨질 똘똘이도 생각해야죠.”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닫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당연하지만 얼굴에는 지독할 정도의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얘는 진짜….’ 고유 기벽조차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니 아마 똘똘이가 없었다면 내 한 몸 희생해 대륙을 지키자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똘똘이가 하루라도 빨리 엄마 아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저라고 대륙의 운명을 모른 척하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똘똘이에게 필요한 건 대륙의 운명이 아니라 부모 아닙니까. 까놓고 이야기해 봅시다. 똘똘이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대륙에 남겨질 사람들이 중요합니까.” “똘… 똘똘이….” “그래요. 똘똘이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니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큼….” “이, 이게 아닌데….”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디아루기아에게도 들리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예비 프로그램인지 뭔지가 발동이 됐고 지금 균열 박물관에서도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겁니다. 저들이 준비하고 있는 게 실패한다면 저도 최선을 다해서 막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손이 닿는 내에서 말입니다.” “네….” 어깨를 툭툭 치니 괜스레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아마 내 말에 조금은 공감하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지는 별로 상관없다. 나에게는 내 목숨이 가장 소중한 만큼 그녀에게도 똘똘이가 가장 소중하다. ‘다행이야.’ 똘똘이가 있어서 다행이다. “아, 참고로 말씀드리면 대륙의 붕괴니 세상의 멸망이니 이런 소리는 괜히 원정대원에게는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보통 인간들이야 저같이 생각할 게 뻔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혹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말을 조금 맞춰 놓읍시다.” “어떻게 맞추라는 건지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그야 당연히 고대신의 파편에 대해서죠. 지금까지는 당신이 몸을 회복하고 있어서 이것저것 물어오지 않았겠지만 아마 돌아가면 몇 가지 물어올 게 있을 겁니다. 지금 원정대원의 멤버 중에 고대신의 파편을 아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고 이 촉수가 어째서 박물관의 바닥에 박혀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도 당신뿐입니다. 모두 궁금한 게 많을 겁니다. 제가 대충 말해놓을 테니 거기에 신뢰감을 얹혀 줄 수 있는 소스만 뿌려주시면 됩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하기 싫으면 가만히 입 닫고 있어도 별로 상관하지는 않습니다만… 나쁜 일은 저 혼자만 하는 것 같아 조금 불편하긴 하군요. 똘똘이를 위한 마음을 보여주세요.” 입술을 꽈악 물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양새가 우습다. 뭔가 순수한 걸 물들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은 이러는 게 최선이다. 대충 어떻게 말을 맞춰야 좋을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도중이었다. ‘어?’ 조금 이상한 물체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 눈에 보인 것. ‘저건 뭐야….’ 우습게도 디아루기아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느낌.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주변 마력이 이상해졌다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틀림없이 디아루기아도 저 물체를 보지 못했다. 마음의 눈으로 투명한 물체를 힐끔 본 것은 당연지사. [아네모네의 눈] [피로 물든 보석 아네모네가 전해준 고유 마법 중에 하나입니다. 아네모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냥 정하얀이네… 휴….’ 고대신의 파편이 무슨 수작을 벌이는 것은 아닌지 긴장한 것도 잠시, 그냥 정하얀이 염탐한 것이라는 걸 깨닫고는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이거… 적응했나본데….’ 사실 안심한다는 표현도 웃기다. 사실은 충분히 소름이 끼쳐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내가 정하얀에게 꽤 적응했기 때문이리라. 물론 신기했던 것은 저 아네모네의 눈이라는 이기영 몰래카메라가 디아루기아의 눈까지 속일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생각해 보니까 이거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성취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당장 고유 마법으로 전해진 지식의 마법을 바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천재긴 천재인 모양. 아무리 술식이나 주문을 알고 있다고 한들, 마법을 바로 실현시키는 건 힘든 일이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잠깐 동안 탄성을 내지르기는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정하얀의 성장이 아니다. 뭘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이후에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원정대원들에게 말을 잘해놓는 것. 정하얀이야 어차피 인류나 대륙이 멸망하든 말든 그다지 상관없을 테고 내가 원정대원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챈다면 분명히 협력할 것이다. 대충 이야기를 마친 이후에는 원정대원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 정하얀이 만들어낸 아네모네의 눈은 계속 내 뒤를 따라오다 한순간 픽 하고 꺼져 버렸다. 이제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으니 아네모네의 눈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마법을 해체한 것이리라. “오… 오빠!” 잠깐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이산가족 상봉하듯 달려오는 모습은 조금 귀엽게 느껴지기는 했다. 정하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자 똘똘이인 양 그릉그릉 소리를 내는 것이 보였지만 그녀에게만 신경 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예상대로 식사를 마친 김현성과 박연주가 이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일단은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 먼저 이야기를 듣고 오셨군요.” “네.” “안심해도 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인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박연주가 궁금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낙관적인 내 표정에 슬그머니 희망이 생겨나는 모양. 다른 원정대원들도 모두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휴식을 취하고 있기는 했지만 역시나 내심 불안했던 모양이다. “일단은 디아루기아가 설명해 드릴 겁니다.” 살짝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어오는 순수한 유부녀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고대신의 파편이… 휴, 휴식기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무표정의 얼굴에는 남들이 알아볼 수 없는 지독한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 244 회귀자 사용설명서 244화 잠깐의 휴식(3) “휴식기 말씀입니까?” “네. 휴식기에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무언가 부작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계속해서 지금과 같은 상태를 취하고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봉인하고 있다는 표현한다면 여러분들이 더 이해하기 쉽겠죠.” “그거… 다행이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박연주. 그리고 안심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는 김현성. 다른 원정대원들도 모두 기뻐 보이는 표정이었다. 혹시라도 일이 꼬여 고대신의 파편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을 떠올렸을 수도 있으리라. 솔직히 상상도 하기 싫은 것이 당연하다. 그때 살아남은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였다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혹시나 녀석이 다시 한번 지랄발광을 하지 않을지 걱정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타이밍에 그 괴물이 휴식기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게 하기에 충분한 소식이라는 거다. 실제로도 녀석은 일종의 휴식기에 들어간 게 맞다. 물론 본체는 예비 프로그램과 힘 싸움을 벌이고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멀리 떨어진 촉수는 박물관의 시스템, 아니, 대륙 전체를 빨아들이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면 녀석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박물관에서 준비한 균열 수호자들의 안배도 있으니 일이 곧 수습… 될 것 같습니다.” “정말로… 일이 잘 풀렸군요. 기영 씨의 선택이 옳았을 거라고는….” “요행이었습니다. 실제로 위험했었고요. 운이 좋았죠. 조금 늦었지만 원정대에 폐를 끼친 것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사실은 도박이었습니다. 저희뿐만이 아니라… 린델에 있는 분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사과라뇨. 무작위로 신화 등급의 몬스터가 뜬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기영 씨가 일을 잘 수습해 주셨기 때문에 모두가 살아남았으니 일단은 감사의 인사를 받는 것이 맞습니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감사드리고 싶네요. 그때 보여준 기지가 아니었다면 아마 몇몇은 틀림없이 죽었을 거예요.” “그런 식으로 띄워 주시면 부끄럽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눈앞에 있는 상황만 수습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저도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든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일이 틀어졌다면 내 입장도 꽤 난처해 졌으리라. 솔직히 역적으로 내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대신의 파편이라는 것은 도대체 뭔가요?” “그건 디아루기아가 설명해 드릴 겁니다.” “아… 네. 사실 저도 자세히 아는 것이 없습니다. 살아온 시간이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저도 어머니나 할머니께 들었을 뿐이니까요. 태초부터 존재해 왔고 대륙을 위험에 빠지게 할 존재라는 것 정도밖에 아는 것이 없습니다.” “관리인 막스가 한 말이 맞기는 했군요. 정말로 황당하네요. 저희가 있는 곳이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고대신이니… 파편이니… 신화적 존재니 하는 소리를 들으니 정말로 실감이 안 나요. 아마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상태였다면… 더욱 실감나지 않았을 거예요.” “네.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4천 년이 넘게 살아왔지만 그런 존재들은 이야기로나 들어 왔습니다. 물론 이런 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것도 봉인된 채로 말입니다.” 디아루기아가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을 때 옆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초에 봉인하지 말고 죽이면 되는 거 아니요? 왜 이 박물관에서는 이런 귀찮은 짓을 한 건지 모르겠소.” “고대신의 파편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격을 얻은 이라기보다는 신 그 자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존재니까요. 균열 수호자들이라는 자들 역시 파편을 봉인시키는 게 최선이었을 겁니다. 물론 자신들을 너무 과신한 것이 실수였겠죠. 그 봉인이 깨질 줄은 아마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음… 그렇구만….” “휴식기에 들어갔다면 지금 박물관에 뻗어 있는 촉수는 뭡니까?” 안기모의 질문에는 내가 대답해도 상관없으리라. 지금까지는 잘해내고 있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말하는 게 불안불안한 느낌이 있었으니까. 물론 충분히 만족스럽기는 하다. 평소에도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니 그다지 위화감이 없다. 말하는 내내 죄책감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눈이 별로 좋지 않은 대중들은 그녀의 죄책감을 캐치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기존에 했던 추측이 맞습니다. 아마 박물관의 시스템을 다운시키려고 하는 거겠죠. 지금까지 자신을 묶어두고 있던 봉인이었으니…. 휴식기에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녀석의 본체는 예비 프로그램인가 뭔가와 힘 싸움을 벌이고 있을 겁니다. 물론 그마저도 얼마 걸리지는 않겠죠.” “아아아아. 그렇구만….” “그렇군요.”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한 이후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모두를 향해서였다. “정리해 보자면 커다란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비 프로그램은 휴식기에 취한 녀석을 봉인할 거고 아마 높은 확률로 봉인하는 데 성공할 테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디아루기아.” “네. 그 말이 맞습니다.” “저희는 봉인이 완료되기 전에 고립된 이들을 구출한 이후, 박물관을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침 시스템에도 구멍이 생겼으니 굳이 박물관 탐험을 완료하지 않아도 던전을 나가는 게 가능할 테니까요. 퀘스트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겠죠? 봉인이 완료된다면 다시 박물관이 시스템의 영향 아래 놓일 수도 있으니까….” 박연주의 대답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인 막스가 정말로 파편을 봉인하는 데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본체가 있는 곳으로 갈 생각은 없다. 지상으로 튀어나와 촉수로 세상을 후드려 까며 멸망시키는 종류가 아니라, 얌전히 대륙의 생명력을 빨아먹기만 하는 녀석이라면 굳이 힘들게 봉인에 한 손을 보탤 이유가 없다. 만약에 녀석이 봉인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 원정대가 봉인됐다고 믿으면 된다는 것. 뒤탈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아무튼 간에 결론을 말하자면… 최소한 저희들은 고대신의 파편의 영향에서 완벽하게 벗어났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네. 대륙 역시 안전합니다. 지금 당장은 안심하고 휴식을 취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디아루기아?” “네.” “…….” “대륙은… 대륙은….” “…….” “대, 대륙은… 안전합니다!” 디아루기아가 눈을 꽉 감으며 마지막 말을 쥐어 짜내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탄성을 냈다. 작게 주먹을 꽉 쥐는 사람들도 보였고 하이파이브를 하는 인원들도 보인다. 박덕구 녀석도 여성진과 포옹하며 기쁨을 나누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된다. “물론 기뻐하시기에는 이른 게 사실입니다. 아직 던전 공략 자체가 완료된 게 아니니까요. 말씀드렸다시피 고립된 생존자들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암 그렇고말고!” “사실 이 넓은 지역에서 고립된 이들을 찾는 것은 조금 힘들지도 모른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파티는 박물관의 관리실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관리실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을 잇자 김현성이 입을 열어왔다. 경험이 많은 녀석인 만큼 어떻게 그쪽으로 들어가야 할지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파편의 촉수를 타고 들어가면 박물관 관리인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겠군요.” “네.”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금 상황이 어떤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듯한 느낌. 아마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일단은 촉수를 타고 들어가 박물관 관리인 막스를 찾아내고….’ 생존자의 위치를 확인한다. 이 과정에서 관리인 막스의 행동에 따라 녀석을 메인 빌런으로 만들지에 대한 고민도 해봐야 될 것 같았다. 순순히 위치를 알려준다면 고맙겠지만 아마 이쪽에 받은 빅 엿이 있으니 우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물론 녀석이 이쪽의 호의적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차피 토해내게 될 거다.’ 장담컨대 지금 녀석은 이 원정대의 깽판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지금 당장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면 사태를 정리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이다. 관리인 실만 찾아 녀석과 마주친다면 이쪽이 갑이 될 확률이 높다. ‘아니면 그냥 해치워도 되고….’ 사실 관리인 막스는 이 던전에 숨겨진 히든 네임드 몬스터. 대충 들어도 아름답게 들려오는 울림. 행복 회로를 풀가동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상황을 정리하는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야지.’ 혹시나 원정대에서 입지가 적어질 녀석을 배려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치 빠르게 내가 열어준 길로 훅 들어오는 것을 보니 능숙하기는 능숙하다는 생각을 해볼 정도. 내가 한 번 긴장을 풀어줬으니 이번에는 녀석이 한 번 꽉 조여 줄 차례다. “지금 당장은 안전하겠지만 모두들 긴장을 늦추시면 안 됩니다. 파편이 휴식기에 들어갔다고는 해도 이 던전이 위험하다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관리인실로 가는 방향에 박물관을 지키기 위한 다른 프로그램이 있을 수도 있고… 파편의 영향을 받은 다른 몬스터들도 깨어났을 확률도 있습니다.” “…….” “관리인실을 찾아 들어간다고 해도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는 박물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고 지금은 한숨 돌린 것뿐이지 공략을 완료한 것이 아닙니다.” 이 자식이 너무 조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 “휴식을 취하는 것도 공략에 꼭 필요한 임무 중에 하나죠. 출발은 4시간 뒤에 하겠습니다. 모두들 전력으로 몸을 회복시켜 주세요. 꼭 아무도 죽지 않고 린델로 귀환했으면 좋겠습니다.” 확실히 회귀 전에 이런 던전 공략을 많이 참여하긴 한 모양. 적당히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원정대원들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좋네.’ 아마 내가 같은 말을 해도 이런 신뢰감을 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싫지만 외관도 대중에게 신뢰감을 주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다. 녀석의 잘생긴 얼굴은 그런 의미에서 이런 종류의 고양감을 심어주기에 적절한 셈. 굉장히 마음에 든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박연주와 조혜진, 심지어는 검은백조의 몇몇 역시 녀석에게 묘한 시선을 보내는 중. 여자가 잘생긴 남자를 봤을 때의 반응이라는 인터넷 게시물을 예전에 본 적이 있었지만 지금 저 분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 게시물 보다 더하다고 생각했다. ‘반했네. 반했어.’ 별것 아닌 연설에도 눈을 빛내는 이들을 보니 황당함을 넘어 당황스러울 지경. 아무튼 간에 김현성의 말대로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본래는 세 시간만 쉬고 이동할 생각이었는데 녀석도 조금 더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른 말로 하면 4시간 안에 완벽하게 몸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 안 그래도 쏟아지는 잠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꿀잠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와 같이 몸의 회복이 절실한 이들은 알아서 캠프를 차리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다시 한번 저마다의 휴식으로 방법을 취하고 있는 모습. 간이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꽤나 안락한 공간이 나를 반겼다. 당연하지만 불안한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진다. 물론 한결 마음이 편해진 나와는 다르게 시종일관 불편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디아루기아는 마음 놓고 쉴 수 없을 것이다. ‘쯧….’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어울리지 않게 중얼거리고 있는 디아루기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디아루리아를 위해서였어….” “…….” “사랑하는 내 딸을 위해서였어요. 어머니… 할머니, 죄송해요.” 양심이 쿡쿡 찔려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디아루리아를 위해서였어요. 흐윽.”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나 역시 죄책감이 엄습해 잠을 자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눈을 감은 순간 달콤하기 그지없는 수마 속으로 빠져들었다. ‘쓰레기 같네.’ 다시 한번 내 인성에 대해 의심하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솔직히. 잠은 달콤했다. 후기 디아루기아: 4천 년간 살면서 한 첫 거짓말이었어…. 더럽혀졌어…. # 245 회귀자 사용설명서 245화 박물관 관리인 막스(1) “일어나세요, 오빠.” “끄응….” “조금 있으면 출발할 시간이래요.” “으응….” 천천히 눈을 뜨자 천장보다 먼저 정하얀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놀라기는 했지만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익숙해졌어.’ 이런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이쪽을 찬찬히 살펴보는 모습은 매번 봐오던 장면이다. 슬쩍 몸을 일으키니 거리를 잠깐 벌려준다. 눈을 살짝 비비자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왔다. ‘이상하게 피곤하네….’ 꽤 숙면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온몸이 뻐근한 것 같고 기를 빨린 것 같은 느낌도 여전했다. 물론 마냥 피곤하지만은 않았다. 탈진 직전이었던 마력도 어느 정도 채워진 느낌. 쌩쌩해 보이는 것을 넘어서 얼굴이 반질반질해진 정하얀을 보니 아무래도 마력 스탯이 높으면 마력 회복력도 올라가는 모양이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시야에 비치는 것은 몇 발자국 뒤에서 나를 관찰하고 있는 정하얀. 작게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내가 몇 시간 정도 잔 거야?” “3시간 40분 정도예요.” “조금 더 빨리 깨우지 그랬어.” “너, 너무 곤히 잠드신 것 같아서요. 저도 모르게… 죄송해요.” “아냐. 사과할 일은 아니야.” “씻, 씻겨 드릴까요?” “아… 응. 부탁해.” 당연하지만 정말로 정하얀이 나를 직접 씻겨주는 것은 아니다. 정하얀이 슬쩍 주문을 외우니 뭔가 얼굴이 촉촉해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 실생활에서도 마법은 굉장히 편리하다. 물론 본인이 직접 씻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는 않아 조금 찝찝하기는 했지만 던전 안에서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라고 할 수 있으리라. 대충 짐을 챙기자 이미 캠프를 정리하기 시작하는 원정대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굳이 뭔가를 지시할 필요도 없다. 이미 모두가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 와중에 짬 좀 되는 원정대원은 비교적 느릿하게 움직인다. ‘빡세기는 빡세네….’ 이곳에 있는 검은백조의 길드원들은 대부분 베테랑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이미 서로 친해질 대로 친해진 병장들끼리 원정을 나온 셈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몇몇은 꽤 빠릿빠릿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니 검은백조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이들의 모습이 어떨지 눈에 선하다. ‘지옥이겠네.’ 여자들끼리 함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재미있다. 물론 지구에서도 간호사들의 위계질서가 빡세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굳이 이상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이쪽은 더할 수도 있겠지.’ 실수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곳이다. 아마 지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면 않았으리라. 머릿속으로 조금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영 씨, 일어나셨군요.” 사랑스러운 김현성이였다. “아… 네. 제가 조금 늦었군요.” “아닙니다. 휴식 시간은 네 시간 이었으니까요. 사실은 출발하기 직전에 깨워드리려고 했는데 하얀 씨가 텐트 안에 계신 것 같아서….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이 새끼 기특하네.’ 묘하게 나를 생각해 주는 게 기특했다. 아마 내 몸이 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상 입은 대미지는 박연주나 김현성이 더 많았지만 몸이 약하다 보니 마력이 빨린 것만으로도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게 된 것. “잠깐 손 좀 잡아도 되겠습니까?” “아… 네. 물론입니다.” 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뭔가 묘하게 시선이 집중된 것 같은 느낌. 뒷정리를 하던 검은백조의 단원들이 일순간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쟤들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은데….’ 뭔가 저번에도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다. 왠지 모르게 여기저기서 침을 꿀 꺽 삼키거나 훈훈한 미소를 보내오는 것이 보인다. 심지어 작게 탄성을 내지르거나 비명을 지르는 인원들도 있었지만 김현성에게는 저런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새끼….’ 조용히 눈을 감고 이쪽의 마력 상태를 점검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 멀리서 보면 제법 애틋해 보이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괜찮으신 것 같군요.” “네.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지만 배려해 주신 덕분에 푹 쉴 수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기영 씨.” ‘그렇게 웃지마, 이 자식아.’ 박연주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미소를 보내오고 있는 모습. 저들의 오해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아 불안해졌다. 그러고 보니 연금술사와 천재 검사가 사랑하는 법도 왠지 모르게 의심스러워지기 시작. 별것 아닌 소설처럼 생각했었지만 지금 탄성을 내는 이들이 대부분 그 책을 보고 있었다는 걸 떠올려 보니 가랑비처럼 내리던 의심이 홍수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슈바….’ 린델로 돌아가면 꼭 한번 읽어봐 정황을 파악해야만 했다. 뭐 아무튼 간에. 약간의 헤프닝이 있었지만 정리해보자면 원정 준비는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거다. 검은백조의 원정대원이 행동이 더욱더 빨라지기 시작한 것. 걸그룹의 위문 공연을 본 군인을 보는 것 같다고 하는 게 맞으리라. 조금 늦어질 것 같다고 예상한 내 생각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순식간에 정리되고 있는 모습은 기가 찰 정도. 박연주도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묘하게 기합이 들어가 있다. 역시 남자가 있으니 달라진 것 같다. 박연주가 이런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아마 그녀가 생각하는 이유가 아닐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출발하겠습니다. 브리핑 한 대로 목적지는 관리실입니다. 고대신의 파편의 촉수를 따라가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빠뜨린 거 없는지 마지막으로 체크하시고 행군 중에 촉수에 닿지 않게 조심하세요. 뭔가 사고가 터질 수도 있으니 마법사 분들은 로테이션으로 방어 마법 캐스팅해 주세요.” “네.” “충분히 몸을 회복한 만큼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겠습니다. 선두에는 현성 씨가 서신다고 하셨으니 최대한 빠르게 따라와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길드 마스터.” 간단한 브리핑 이후에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걷기 시작했다. 아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김현성이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치고 들어갔다는 것. 보통 이런 종류의 행군에서 선두에 서는 것은 궁수 직군을 가진 이들이다. 그들 중에서도 정찰과 함정 해체 같은 것에 특화된 레인저들에게 맡기는 것이 상식. 파란에서는 추적자 김예리가 이 직군에 포함되어 있었고 당연하지만 이 원정대에 함께 한 레인저들의 숫자도 세 명이 넘는다. 굳이 녀석이 총대를 맨다는 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레인저들보다 본인이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리라. 강자라면 모든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비슷한 직군이라고 해도 엄연히 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는 거다. 이를 테면 차희라 같은 경우에는 절대로 레인저들의 일을 대신할 수 없다. 우연히 발견한 함정을 때려 부수는 게 고작이리라. 처음에는 조금 탐탁지 않게 김현성을 바라보던 레인저들도 막상 행군이 시작되니 입을 떡 벌리고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걸 보면 답이 나온다. ‘1회 차에 레인저였나.’ 1회 차에서도 무조건 검사를 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 당연하다. 어쩌면 레인저 종류의 직업을 선택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김예리 같은 성장 루트를 탄 건가?’ 아니라면 수많은 경험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리라. 개인적으로는 처음부터 검사였다는 추측에 조금 더 힘을 실어주고 있기는 하지만 1회 차에 녀석이 검사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라 말인가. 계속해서 달리며 원정대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김현성을 보니 너무 편안한 리딩에 바지가 축축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될 정도. “함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속도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확인했습니다.” “전방에 다수의 골렘 확인. 처리했습니다.” “네. 확인했습니다.” “영웅 등급 이상의 몬스터 확인. 시스템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전투 준비.” “처리했습니다.” 정찰과 동시에 처리가 이루어진다는 게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다. 급이 낮은 영웅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는 곧바로 처리. 전설 등급의 몬스터는 운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김현성이 피해간 건지 아니면 정말로 우연히 마주치지 않은 건지는 알 재간이 없다. 실제로 김현성의 뒤를 따라가다 보면 깔끔하게 잘린 몬스터의 단면밖에는 보이는 게 없다. 제법 덩치가 커다래 보이는 녀석들도 목이 날아간 것을 보면 신화 등급의 검을 얻은 것이 도움이 되긴 된 모양. 덕분에 레인저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지만 굳이 이쪽에서 저쪽의 자괴감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빨라!’ 원정대가 진군하는 속도는 상상 이상. 던전 탐사가 아닌 평범한 달리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가 없다. 풍경은 계속해서 뒤바뀌고 눈에 보이는 오브젝트들도 달라진 것이 눈에 보인다. 커다란 방, 깨진 전시관이나 부서진 아이템들 대신 좁은 길이나 골렘 따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바닥에 박히거나 기둥을 휘감고 있는 촉수들의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끝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관리실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 당연. 얼마 지나지 않아 촉수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고 김현성은 멈추지 않은 채로 곧바로 검으로 벽을 가르며 나아갔다. 길은 끊겼지만 마력의 유동이 느껴지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박물관의 크기나 규모, 그리고 위험 요소 같은 자잘한 것들을 고려해 잡은 도착 시간은 길게 잡아 만 하루. 여섯 시간도 되지 않아 이곳에 도착했다는 건 커다란 영상을 보며 허둥지둥 움직이고 있는 눈앞의 막스 역시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안… 안 돼! [오류] [메인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어, 어째서 메인 프로그램이 작동되지 않는 거지? 벌써 침식당하고 있는 건가. 안,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오류] [메인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예비 프로그램이라도 보강해야 해. 이게 뚫리면 끝이야. 메인 프로그램에 들어갈 예비 마력도 모두 돌려야겠어. 그렇게 하는 게 맞아. 박물관은 망가지겠지만… 대륙을, 대륙을 지켜야 해. 균열 수호자님이 맡기신 일이야.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어. 끄으으으윽…. [마력을 예비 프로그램에 주입합니다.] 전투 준비를 하며 꽤나 비장하게 입장했건만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습은 가관. 금발 머리를 한 꼬맹이가 허둥지둥 움직이며 마법진으로 이루어진 장치를 조절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쪽이 들어온 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큼 여유가 없었던 건가….’ 여유가 없을 만하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홀로그램에서 보이고 있는 고대신의 파편은 푸른색 마력에게 붙잡혀 있는 것 같았지만 누가 봐도 저걸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예상했던 대로 예비 프로그램과 고대신의 파편이 힘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거다. 영상으로 봐도 여전히 끔찍해 보이는 모습. 저곳이 아니라 이곳으로 왔다는 게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다시 봉인해야 돼. 뭔가 말을 걸기도 힘든 분위기. 한 발자국 더 몸을 옮기자 그제야 원정대원들이 들이닥쳤다는 걸 눈치챘는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너희… 들이 어떻게…. 기계 같은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확실히 본체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모양. ‘어째서?’라는 표정이 제일 먼저 보였고 그 다음이 경악. 그 다음은 공포였다. 당황스럽게도 마지막으로 얼굴에 들어선 감정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책임감. 마법진으로 이루어진 장치를 꽉 껴안은 채로 소리를 빼액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안, 안 돼! 이… 이… 쓰레기들! 더러운 고대신의 앞잡이들아! 너희가 대륙을 파괴하도록 내버려 둘 것 같아?! ‘우리 악당 아니야, 이 새끼야.’ 뭔가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은 내 착각이 아니리라. 후기 막스: 대륙을 구해야 돼! 대륙을… 대륙을 구해야 돼! # 246 회귀자 사용설명서 246화 박물관 관리인 막스(2) 누가 봐도 불안해하는 표정이었다. 얼굴을 보니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눈에 보인다. 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온갖 불길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어장치를 소중한 것인 양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것을 보니 내가 저걸 부수기라고 할 줄 아는 모양. 제법 옳은 판단이기는 하다. 지금 당장은 나도 저 봉인이 유지되는 걸 바라고 있기는 하지만 수틀리면 망치지 못할 것도 없다. 뭐가 됐든 지킬 것이 생긴 사람은 약해진다. 물론 녀석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고민해 봐야겠지만 적어도 녀석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신기하네.’ 녀석뿐만이 아니다. 이 방을 구성하고 있는 것 모두 신기한 것 투성이. 사실 이 방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관리인 막스에 대한 관심은 현저히 내려갔다. ‘이건 보물이야.’ 마력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홀로그램이 그중 가장 압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영상매체는 물론 녹음기도 없는 세상에서 저런 종류의 기술이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 여기저기에서 빛나고 있는 마법진을 바라보자 저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대충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똑같은 걸 만들라고 하면 만들 수 없을 것 같지만….’ 최소한 원래 있는 걸 활용할 수는 있다. ‘권한이 필요하려나.’ 슬쩍 마음의 눈으로 확인하니 다시 한번 정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균열 박물관 제어장치-전설 등급] [관리자 권한을 필요로 함.] ‘역시….’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것 외에도 신기한 아티팩트들이 눈에 띈다. 이 박물관을 통제할 수 있는 기술의 집약체가 여기에 몽땅 들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두리번거리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그게 또 관리인 막스에게는 위협적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절대로… 절대로 너희들의 생각대로 되게 하진 않을 거다. ‘쟤는….’ 아직도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습은 귀엽게 느껴질 지경이다. 실제로 외관은 귀엽다. 균열 수호자들의 취향이 뭔지 아주 잘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툭 하면 부러질 것 같은 금발 미소년이라는 건 저런 걸 두고 하는 말이리라. 사실 녀석에게 느껴지는 힘도 그다지 크지 않다. 원정대원들은 전투준비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솔직히 이렇게 경계할 필요도 없다. 혹시나 위협이 될 만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 원정대원들과는 다르게 내 눈에 보이는 위험 요소는 전무하다. 관리인 실을 지키는 것은 바깥에 있는 골렘 정도가 전부였고 막스 역시 끽해야 영웅 등급의 몬스터 정도로 분류해도 될 것 같았다. 정리하자면 슬그머니 나서 봐도 될 만한 상황이라는 거다. 더미를 봤을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녀석의 본체를 보니 호구를 감지하는 센서가 계속해서 불을 올리고 있었다. 기묘한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원정대원들의 품을 뚫고 나와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물론 입가에는 한가득 미소를 담은 채였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박물관 관리인, 균열 박물관을 수호하고 계승한 막스님 아니십니까.” -너… 너! “그렇게 화내시면 섭섭합니다. 관리인님. 역시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하니 느낌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작은 꼬마의 모습을 하고 계셨군요. 어떻게? 잠깐 시간 되시면 대화라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 이 쓰레기 같은 놈! 이 쓰레기 같은 놈! 네놈이!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더러운 고대신의 하수인아! 네, 네놈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저희를 고대신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큼. 저희가 일을 조금 복잡하게 만든 것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그야 어쩔 수 없었지 않았습니까. 먼저 주작한 쪽은 그쪽이기도 했고 박물관 탐험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다지 선택지가 많지 않았으니까요.” -그, 그 더러운 입 다물어라! 확률을 주작한 적 따위는 없….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더러운 인간 놈들! 너희 같은 놈들을 손님으로 받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대화 좀 하자는데 왜 이렇게 게거품을 물고 달려드십니까. 박물관 관리인님.” -당, 당장 나가라! 당장! 경, 경비용 골렘은 어, 어디에…. “하는 거 없는 돌덩이라면 이미 처리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대화를….” -이이익!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대화가 통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 마음 같아서는 저 관리인을 히든 보스로 탈바꿈시킨 뒤 막스 레이드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싸우는 것보다 싸우지 않는 것이 얻을 게 더 많다. ‘싸우면 안 되지… 그러면 안 돼.’ 당연하지만 눈 앞에 있는 보물들이 똥 덩어리가 되는 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박물관 제어 장치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장치들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천문학적이다. 사용하기에 따라서 김현성이 얻게 될 신화 등급의 검보다 더한 가치를 지니게 될 수도 있다. 아니, 지니게 될 수도 있다가 아니다. 저 박물관 제어장치는 확실하게 듀렌달의 가치를 넘어선다. 아직까지 정신없는 원정대원들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거 같지 않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눈앞에 있는 걸 제대로 마주한다면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최소한 나한테는 저게 보물이야.’ 대륙에 들어온 이후 뭔가를 이렇게 격렬하게 원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결국에는 조용히 김현성과 박연주를 향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 여러분 죄송하지만 박물관 관리인과 협상을 하고 싶은데… 괜찮으시다면 맡겨 주시겠습니까?” 입을 열자 막스가 뭐라 발광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계속 무시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여럿이서 함께 있는 것 보다는 둘이 있는 게 효과적일 것 같아서… 부탁드립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 디아루기아가 함께 있어 준다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파란에게도 그렇고 검은백조에게도 그럴 겁니다. 검은백조에서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김현성이야 원래부터 이렇게 말할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문제는 박연주. ‘얘도 눈치 깐 것 같기는 한데….’ “고립된 이들의 소재 파악은 10분 내로 전달해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쯤 맹렬하게 머리가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나에게 맡겨보기로 한 모양. 자신에게는 뾰족한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린 결론일 수도 있겠지만 평소에 신뢰를 쌓아 놓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그렇다면 부탁해요.” ‘이래서 사람은 평소 행실이 중요해.’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지만 대외적으로는 이기영이라는 인간의 브랜드 이미지가 제법 괜찮게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가 천천히 관리실의 밖을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디아루기아만 조금 찝찝한 표정으로 이쪽의 옆에 자리 잡는 중. 비로소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장이 마련됐다. -협상? 협상? 네놈들과 그런 걸 할 것 같아? 당, 당장 사라지지 못해? 막스야 원래 저렇게 날뛸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잠깐 숨을 들이마신 뒤에 입을 열자 확실하게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 시야에 비친 것. 갑작스럽게 태세전환한 태도 변화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봐요.” -어? “지금 사태 파악 안 돼?” -뭐…. “잘나신 우리 균열 수호자들이 책임감은 낭낭하게 심어주셨는데 눈치는 심어주지 않으셨나 보네.”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모르겠지만…. “입 다물고 제 말이나 들으세요, 관리인님. 뭐, 대륙을 지켜야 된다느니 어째야 된다느니 떠드시던데… 저기 있는 봉인이 풀리길 바라고 있는 건 아니잖아.” -어? “아. 이상한 오해는 마력으로 만들어져 있는 뇌 한 쪽 구석으로 밀어 넣으시고…. 생각하시는 것처럼 나는 고대신의 하수인도 머시기도 아니니까. 봉인을 풀어버린 건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었을 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물론 상황이 어떻게 잘 풀리니까 기분은 확실히 좋네요.” -이상한 말 하지 말고… 당장!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시 한번 빽빽 대는 말을 듣기 싫은 것은 당연지사. “저거 풀려나면… 대륙이 허물어진다며?”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우리 여편네한테 들었지. 그렇지 디아루기아? 앞으로 저건 천천히 대륙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며 강해질 거라고… 그 기간이 아마… 3만 년이라고 했나?” -실제로는 조금 더 짧…. “당신은 이 대륙에 꽤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만 아쉽게도 나는 아니거든. 솔직히 3만 년 이후에 대륙이 망하든 온전하든 나랑은 뭐 상관없는 이야기라 이거야. 미래는 원래 후손들이 만들어가는 거고… 수습은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겠지 뭐.” -그, 그게 할 소리야? “이건 마력으로 이루어진 홀로그램인가. 지금 비치고 있는 걸 보면 위대하고 존엄하신 고대신의 파편님께서 응? 풉! 예비 프로그램인가 뭔가를 격렬하게 뿌리치려고 노력하고 계신 것 같은데…. 응? 내 눈이 옹이구멍이 아니라면 힘의 균형이 제법 팽팽해 보인단 말이지….” -어…. “자아. 이거 본 적 있지? 이 물약이 여기서 꽝 하고 터진다면 어떻게 될까? 저기 있는 제어 장치 중에 하나가 콰과광 망가지면서 예비 프로그램에 전달되고 있는 마력이 끊기면 어떻게 될까?” -그, 그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둘 것…. “엇. 흥분하시지 마시고요, 막스님. 디아루기아, 제압 좀 부탁드립니다.” 당황했는지 이쪽을 향해 손을 뻗으며 달려오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하지만 녀석이 디아루기아의 손에 잡힌 것은 뻔할 뻔자. 그녀에게 몸이 제압된 채 발버둥 치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이… 이이이익!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죄, 죄송합니다….” -다른 인간들은 몰라도 당신은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대륙의 균형을 지켜는 존재가 이런 일에 가담하면 안 되는 거잖아! 당신! 드래곤이잖아! 지금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는 거야?! “죄… 송합니다.” -대륙을 지켜야 한다고! 긍지 높은 드래곤 일족이라면 지금 당장 저 쓰레기를! 그게 대륙을 위한 길이야! “미안해요….” -말,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디아루기아의 얼굴에는 지독할 정도의 죄책감이 들어서 있었다. 왠지 모르게 너무 자신을 자책하는 것 같은 느낌. 물론 나도 정말로 녀석이 풀려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던 대로 풀려나든 활동하든 굳이 상관없기는 했지만 저런 녀석이 풀려나는 것보다는 얌전히 있어 주는 게 덜 찝찝하다. 물론 지금 당장은 이런 태도를 고수해야 하는 게 옳다. ‘좋지.’ 대륙을 미끼로 쓸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녀석의 반응이 너무 좋으니 솔직히 좀 흥이 오른다. “아주 볼만하겠네. 아주 볼만하겠어! 균열 수호자님들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시겠네! 자아. 폭탄 들어갑니다.” -하지 마! 하, 하지 마! “생각보다 튼튼한 것 같아서 한 병으로는 안 될 수도 있겠는데…. 이 물약에 마력 들어가면 2초 후에 콰과광! 대륙이 멸망한답니다!” -하지 마! 하지 마! “어허! 어른한테는 존댓말 써야지!” -하지 말아주세요! “아니야. 역시 폭탄으로 해치우는 것보다는 손맛이 필요해. 적당한 막대기 어디 없나.” -끄으으으윽…. 주변에 있는 적당한 막대기를 집어 들며 헛스윙을 하기 시작하자 녀석의 얼굴이 점점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이 보였다. 솔직히 저 제어장치를 이 막대기로 부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이런 무력시위보다 녀석을 더 불안하게 할 수 있는 건 없다. 제어장치를 향해 배트를 휘두르는 모션을 취할 때마다 동공이 흔들리는 모양새가 우습다. 조금 더 극적인 상황을 위해 막대기를 허공 높이 들어 올린 것은 당연지사. “자아. 이제 5초 후에 대륙이 멸망합니다. 쿵짝짝 쿵짝짝!” -안… 안 돼! “오!” -제발 이러지 말아주세요! “사!” 이쯤 되니 디아루기아도 불안한 모양인지 다급하게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당신 정말로 할 생각인가요? 당신!” -긍지 높은 용이여! 빨리!! “삼!” -안… 안 돼! “이!” -끄으으윽! “갑니다!” -원, 원하는 게 뭐야! 제어장치에 몽둥이 찜질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막스가 다급하게 입을 열어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방금 전에 내가 한 협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모양. 다행히 답을 찾는 것이다. 입꼬리가 히죽 올라간 것은 당연지사. 조용히 입을 열자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박물관.” 내가 들어도 단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어? # 247 회귀자 사용설명서 247화 박물관 관리인 막스(3) “뭘 또 못 들은 척하고 그러시나…. 박물관이라니까.” -어… 어어? “이 박물관. 내놔.”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박물관, 같이 한번 운영해 보자니까. 뭐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니고….” -네, 네가 관리인에 자리에 들어선다고 해도 저장되어 있는 물건을 가져가는 것은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아. 그건 허락되지 않은 일이야. “그건 나도 알아. 여기 오는 도중에 몇몇 개는 여전히 보호 받고 있다는 걸 확인했거든. 탐험을 완료해야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게 여기 규칙이니까. 그 규칙은 깨부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고. 내가 필요한 건 아이템이 아니야. 아! 내 정신 좀 봐. 일단 그전에 고립된 이들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들어야지.” -……. “참고로… 걔들 가지고 되지도 않는 거래할 생각은 하지도 마. 수 틀리면 진짜 전부 박살내 버릴 거니까. 나도 대륙이 붕괴하는 건 가슴 아파. 제발 나를 나쁜 길로 이끌지마. 응? 나 얌전하고 착한 사람이야.” 고립된 이들의 위치를 물어보자 눈알을 굴리는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 거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지사. 아마 현재 박물관에 있는 인간들을 상대로 거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택도 없지.’ 검은백조를 생각하면 당연히 고립된 이들의 구출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 작업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거래의 여지는 없다는 걸 못 박아 둬야 한다는 거다. 심사가 뒤틀리면 정말로 모든 걸 뒤 엎을 정도로 사이코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게 중요했다. -그렇지만… 그건…. “표정이 조금 불편해 보이네.” -어…. “이거 아무래도 내가 우리 박물관 관리인 막스를 불편하게 한 모양이네. 그렇지?” -아니 그런게 아니라…. 눈깔을 희번뜩 하게 뜬 것은 당연지사. 정하얀이 화가 났을 때의 표정을 최대한 유지하자 정말로 나를 사이코 바라보듯 쳐다보는 놈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아까도 나를 미친놈 보듯 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직접적이다. “내 부탁이 너무 무리한 요구였던 모양이야. 내가 아주 크은 실수를 할 뻔했어. 그렇지 않습니까? 디아루기아?” “그게….” “정말로 그런 모양이네! 내가 박물관 관리인 막스를 불편하게 했어! 내가 잘못했네! 격 떨어지는 필멸자가 잘못했어! 내가 감히 균열을 수호하는 박물관 관리인을 화나게 만들다니!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했구만!” 화가 났다는 듯 옆에 있는 벽면을 몽둥이로 두들기기 시작. 콰직! 쾅!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위력도 형편없다. 팔도 뒈지게 아프고 벽면은 부서지지 않았지만 효과는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아주 다 하지 마! 박물관 운영도 하지 말고! 탐험도 하지 말고! 봉인도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콰직! 쾅! 혼자서 하려니까 조금 힘들다. 역시나 이럴 때는 합을 맞춰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리라. 안기모나 박덕구라도 불러오고 싶었지만 디아루기아의 표정을 보니 외부의 도우미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 역시 막스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 ‘이거 연기야, 이 여편네야. 오해하지 마….’ ‘이런 게 내 아이의 아빠라니’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디아루기아의 얼굴에 수심과 걱정이 드리우고 있었다. 디아루기아가 최근 조금 이상해진 것도 사실은 나 때문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 오해를 풀고 싶기는 했지만 금발 머리의 꼬맹이를 보니 이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디아루기아의 표정을 보고, 이게 연기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이제는 숨이 차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자 부들부들 떨리는 동공으로 나를 바라보는 관리인 막스와 디아루기아가 시야에 비친다. 조금 무기력한 모습으로 보일 줄 알았는데 저들의 눈에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미친놈으로 비치는 모양.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후우… 후우… 후우….” -……. “막스 씨, 이런 이야기 들어봤어요?” -무슨… 소리를….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는 거…. 내가 지금 당신에게 큰 호의를 베풀고 있다 이 말입니다, 관리자 씨. 아주 좋은 제안이라니까. 모두가 행복해지는 엔딩이라고….” 타이밍 좋게 입을 열어오는 디아루기아. “수락하세요.” -당, 당신까지…. “어서요. 빨리요. 저 인간은 진심입니다.” 말을 애써 속으로 집어 삼키는 막스를 보니 굉장히 재미있었다. 디아루기아의 목소리에서 엄청난 신뢰감을 느낀 모양인지 박물관 제어 장치와 내 쪽을 번갈아 보는 게 시야에 비쳤다. 솔직히 내 돌발 행동이 결정적이었다기보다는 디아루기아의 어시스트가 결정적이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그녀 역시 대륙이 온전한 걸 기원하고 있는 만큼 최대한 막스가 거래를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똘똘이를 인질로 잡고 있었던 내 모습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질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표정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다. ‘그때가 진짜 쓰레기 같았지….’ 그나마 지금은 양호한 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후우….” “빨리 수, 수락하세요. 저 인간의 성향은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수락한다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겁니다.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있기는 하지만 저 역시 대륙이 붕괴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네. 절대로요.” -끄으으으으윽…. 디아루기아에게 제압당한 채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관리인 막스의 모습은 피해자 그 자체다. 조금 미안해지기는 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다.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막스 씨. 제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세요.” 결국에는 부들부들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 ‘해냈어.’ 다른 관리인을 들여올 권한이 녀석에게 존재했던 모양이다. 사실은 방법이 없다고 잡아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는 했지만 어찌됐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사실상 박물관 자체는 거의 모든 기능을 정지한 상태. 메인 회로에 남겨져 있던 마력을 예비 프로그램에 모조리 돌렸으니 이전과 같이 던전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미안하긴 하네.’ 사람 하나 잘못 들였다가 사랑스러운 보금자리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난 셈이다. 자랑하던 전시관들은 박살이 났고 그 안에 있던 물건들도 대부분 허망하게 부서졌다. 이곳에 들어온 첫 날 자신감 있게 박물관이 보유한 콜렉션을 자랑하던 녀석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자랑스러워하던 박물관이 순식간에 쓰레기장이 되어 버렸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내가 마치 역병처럼 느껴지리라. 눈물을 훔치며 입술을 꽉 깨물고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은 가관. 디아루기아는 왠지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포박하고 있던 손을 풀었고 녀석이 잠깐 마법진을 만지작거리자 곧바로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균열 박물관의 5등급 관리자 막스가 균열 박물관 관리인의 자리를 제안하셨습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직업은 변경되지 않습니다. 승낙 시 칭호가 생성됩니다.] [균열 박물관 5등급 관리자] [균열 박물관의 관리자 5등급으로 열람할 수 있는 정보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5등급 관리자의 기본적은 권한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좋네.’ 여러모로 천천히 살펴봤지만 문제되는 점은 없다. 노예 계약 같은 형태도 아니었고 디아루기아 때처럼 목숨을 공유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가볍게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이건 타이틀 같은 거구나.’ 혹시라도 전직을 하게 되면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도 있었지만 칭호가 생성된다면 환영이다. 곧바로 승낙을 선택하자 다시 한번 메시지가 들려왔다. [칭호가 생성됩니다.] [균열 박물관 5등급 관리자] [마력이 +1 올라갑니다.] ‘나이스!’ 그 와중에 들려오는 기분 좋은 소식에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 예상은 했지만 타이틀이 있는 칭호. 겨우 1밖에 올려주지 않았지만 더 이상 마력의 성장이 불가능한 나에게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다. 동시에 여러 가지 정보들도 상태창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균열 박물관 관리인의 권한과 책무 같은 게 적혀 있기는 했지만 자세하게 읽어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책무는 막스가 전부 하게 될 테니까. 나는 권한만 누리면 된다. 그렇지만 머릿속에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내린다. 순간적으로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인 덕분인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 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오?’ 가장 신기했던 건 마음의 눈으로도 전부 확인할 수 없었던 제어 장치들이 눈에 보였다는 것이었다. 5등급 관리자가 된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자세한 정보들을 마음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간단한 설명은 물론, 조작법과 매뉴얼까지 모조리 눈에 보인다. 마치 누군가가 이 사태를 수습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는 것같이 느껴질 정도로 친절하다. ‘그래도… 쉬운 작업은 아닐 것 같은데….’ 매뉴얼이 있음에도 이건 쉬운 작업이 아니다. 관리자의 시점에서 해결책을 그리며 바라보니 지금 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더 잘 알 수 있게 됐다. 만약 내가 저 몽둥이로 제어 장치를 후려치기라도 했더라면 정말로 박물관이 붕괴할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수습할 수 있겠어.’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질질 짜며 혼잣말을 하고 있는 막스가 눈에 들어온다. -끄으으으윽. 박물관은 끝났어…. 끝났다고…. 수호자님… 메텔 수호자님…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아이 또 왜 울고 그러십니까. 관리자님. 직장 동료가 들어왔는데 기뻐하지 않으시고….” “끄어어어어엉…. 끄으으윽….” “거, 잠깐 자리 좀 비켜 보세요. 밖에 있는 원정대원한테 생존자 위치 전달해 주시고요.” -또,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무슨 짓을 하긴 또 무슨 짓을 합니까. 이제는 내 박물관인데. 저 발광하는 고대신을 수습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잠깐만! 그건 함부로 만지면 안 돼! “당신이나 잠깐만 나와 보세요. 처음이라 잘 될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으니까.” -네가 뭘 알아!?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 아니, 근데 왜 자꾸만 반말이야? 어?” -뭐, 뭘 알아요? “나도 내가 뭘 아는지 몰라. 눈에 보이니까 아는 거지. 왜, 너는 안보여?” -안 보입니다…. “그것밖에 안 되니까 박물관을 개판으로 운영하지. 쯧.” -……. “박물관이 이 지경이 됐는데 4지구 보조 전력은 왜 안 돌리고 있었던 거야? 매뉴얼에도 나와 있구만….” -어? “메인 프로그램은 손상이 아니라 다운된 것 같은데… 예비 프로그램에 마력을 끝까지 때려 박지 않은 건 다행이네. 그리고 어? 쓰지도 않는 네 더미는 왜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건데? 당장 해체하고 그것도 마력으로 돌릴 거야. 저런 마력이라도 아쉬운 타이밍이니까.” 일을 하려니 조금 걸리적거린다. “좀 옆으로 비켜. 그리고 메인 전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전시품들에 들어가고 있는 마력 공급 전부 차단한다. 몇 개라도 살리는 게 낫지…. 이대로 갔으면 내가 박살 내기 전에 봉인이 완전히 풀렸겠네.” -어어어어? “어우…. 이거 정말 큰일 날 뻔했네. 디아루기아, 고립된 검은백조 원정대원은 5지구 32구역에 있을 겁니다. 생각보다 상태가 좋아 보이는 것 같은데 안심하라고 전해주시고 안내해 주세요. 그리고 막 사원.” 슬쩍 이름을 부르자 바짝 긴장한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보였다. -네? 뭐, 뭐 도와드릴 거라도… 있습니까? 뭘 할까요? 지금 당장 옆에서 보조를!! “커피 좀 타와.” 이 한 몸 희생해 대륙을 지켜야 한다는 감정이 무럭무럭 샘솟기 시작한 바로 그때였다.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전설 등급 퀘스트-대륙 구원(0/1)] [보상-(칭호) 대륙 수호자] [대륙 수호자] [대륙의 붕괴를 막은 원정대원에게 내리는 칭호입니다. 모든 스텟이 +1 영구적으로 올라갑니다.] 화로에 장작이 들어간 것. ‘소중한 후손들이 살아갈 대륙을 붕괴시키는 건 절대 용납 못 하지.’ 그림으로 그린 듯한 태세전환이었다. # 248 회귀자 사용설명서 248화 박물관 관리인 막스(4) 퀘스트를 받은 것은 나뿐만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대륙을 수호한 원정대원에게만 내리는 칭호라고 했으니 지금쯤 뒤에서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도 소식이 닿았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원정대원들이 관리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연주와 김현성을 필두로 정하얀과 박덕구가 들어왔고 선희영과 안기모 역시 다른 검은백조의 인원들과 섞여 관리실 안 쪽에 자리를 잡았다.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몇몇 보이는 것을 보니 고립된 이들의 구출도 확실히 마무리가 된 모양. ‘생각보다 상태가 좋네.’ 조금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애초에 막 사원은 이곳의 네임드 몬스터가 아니라 던전 안내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 마력 응집체다. 단순히 관리자에 불과한 막 사원이 저들을 핍박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성격도 호구에 가깝고….’ 아무튼 간에 관리실로 들어온 이들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고 있는 게 보였다. 대부분 보여주는 반응은 ‘형 거기서 뭐해?’라는 듯한 표정. 나도 지금 내가 보여주는 모습이 황당하니 저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생전 처음 보는 장치들을 무척 능숙하게 만지고 있는 것은 물론, 정말로 커피를 탄 막 사원에게서 커피를 받아들고 있으니 아까 전 모습과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설명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지사.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어온 건 박연주였다. “이건… 어떻게 된 건가요?” “거래를 했습니다. 고대신의 봉인을 수습해 준다고 말입니다.” “그, 그렇군요. 장치들은 어떻게….”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생각보다 이해하기 쉬운 시스템입니다. 사실 처음 보자마자 어떻게 작동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아서 거래를 제안한 겁니다. 눈에 띄는 오류가 몇 개 있어서 말입니다. 제가 기계에는 조금 강한 편이라….” “기계에 강하다는 말로 설명이 되는 수준이 아니지 않나요?” 아직도 목소리에는 의문이 가득 들어가 있었지만 마음의 눈 때문에 조작법의 숙지가 가능해졌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사랑스러운 회귀자 역시 놀라움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에는 뿌듯함이 들어섰다. 다시 한번 보물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내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녀석은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박덕구는 다시 한번 큰소리를 치며 입을 열어오는 중. “거, 우리 형님 천재 맞다니까! 키야! 우리 형님 쥑이네!” “그런 거 아니야.” “뭐,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처음 보고 딱! 거, 그렇게 했다는 거 아니요!” “…….” 정확히 말하면 머리가 좋은 게 아니라 눈이 좋은 게 된다. 어떻게 가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상관없다는 말도 있으니 결과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비칠 수도 있겠지만 눈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리라. 슬그머니 원정대원들을 선동하기 시작하는 박덕구의 말 때문인지 검은백조의 인원들의 머릿속에도 이쪽이 두뇌파라는 인식이 강하게 틀어박힌 모양. 원정을 떠나기 전에 했던 편성도 완벽했다는 걸 떠올리는 건지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대원들이 보였다. 박덕구와 김현성은 한 번 더 의기양양해졌고 묘한 시선을 보내는 검은백조의 일원들 때문인지 정하얀은 한 번 더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이들과 함께 떠들썩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여유가 없다. ‘바빠.’ 녀석의 봉인을 유지하고 있는 예비 프로그램은 마력을 채워 넣는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메인 보호 장치 같은 경우에는 균열 수호자들이 걸어놓은 안배가 저절로 움직이는 시스템이라면 예비 같은 경우에는 이쪽이 수동으로 움직여 녀석을 붙잡아야 하는 시스템. 어째서 막스가 아무 것도 못하고 이쪽을 붙들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계속 묶어 둬야 돼.’ 더러운 고대신의 파편은 아직 완벽하게 봉인된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물론 어떻게든 예비 프로그램을 깎아 내리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당장 영상에 비치고 있는 모습은 단순히 푸른색 마력이 녀석을 옭아매고 있는 것 뿐이지만 이 일은 생각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뚫리고 있는 구멍에 계속해서 마력을 주입해야 한다. 녀석이 힘을 주는 쪽에 이쪽 역시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거다. 마치 게임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디펜스 게임을 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총알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경우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비행기를 총알에 전부 박아 넣어야 된다고 하면 되는 건가….’ 물론 조작법은 1차원적인 게임에 비유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난이도가 올라가는 거고….’ 정리하자면 다른 일을 하면서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다. 심각한 표정과 다급하게 움직이는 손 때문인지 떠들썩한 분위기가 점점 조용해진 것은 순식간. 시간이 조금 지나자 들리는 소리는 마법진들이 가동되는 소리밖에 없었고 막 사원 역시 발을 동동 구르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 누가 봐도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손이 조금 모자란 것 같은 느낌. 김현성이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제가 뭐 도와드릴 게 있겠습니까?” ‘형 마음 아는 건 너밖에 없다.’ “으음… 네. 그러면 일이 더 수월해질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작업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막 사원, 이것 잠깐 맡고 있어. 쓸데없는 곳에 마력 주입하지 말고… 얼마 걸리지 않을 거니까 최대한 현상 유지해.” -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황급히 내가 앉아있던 자리로 가 마법진을 두드리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원정대원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마력 홀로그램을 하나 띄운 이후 상황을 브리핑하기 시작. “잠깐만 상황을 설명하겠습니다. 최대한 간결하고 빠르게요.” “네.” 다시금 입을 열려고 하던 찰나 박연주가 질문을 던졌다. 물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디아루기아와 함께 했던 거짓말 중에 일어난 설정 구멍은 대충 덮으면 되는 거 였으니까. “저기요. 실례지만 잠깐 질문 좀 드려도 될까요? 기영 씨?” “네. 말씀하시죠.” “그전에는… 저 고대신의 파편이 휴식기에 들어갔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네. 확실히 휴식기에 들어갔었습니다. 디아루기아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관리인 막스 역시 마찬가지라고 하더군요.” 물론 거짓말이다. “박물관에서 휴식기에 들어간 녀석을 재봉인하려고 했지만 고대신의 파편이 예비 프로그램의 활동을 눈치채고 저항하기 시작한 게 현 상황이라고 설명을 드리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고는 싶지만 그다지 여유가 없어서….” “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당연히 의문을 느끼실 테니까요. 본론으로 들어가면 보시는 것처럼 현재는 거의 모든 부분을 봉인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보시는 것처럼 봉인에 균열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지금 막 사원이 하고 있는 작업은 구멍이 난 예비 프로그램의 마력으로 덮어주고 작업이고요.” “으음….” “다행히 다른 곳에서 예비 마력을 끌어와 별 무리 없이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계속해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녀석을 붙잡아둘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처해야 할 작업원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드리면 이 일이 위험하다면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 거라는 겁니다. 물론 위험 부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니라는 거군요.” “아니요. 여러분이 위험해지는 건 제가 사전에 막을 겁니다. 이곳에 있는 예비 프로그램으로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알 것 같네요.” “일이 잘 풀리지 않다고 판단된다면 퇴로를 여는 것은 물론, 여러분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다 봉인이 깨진다면….” “애초에 봉인을 부순 것 역시 이쪽입니다. 어떻게든 수습할 방법이 있겠죠.” 수습할 방법 따위는 없다. 그러다 봉인이 무너진다면 3만 년 이후에 대륙이 무너지는 걸 기다려야 한다. 솔직히 대륙의 존폐는 개뿔, 아무 상관도 없지만 이쪽도 이번에는 잃을 게 생겼다는 게 가슴 아픈 부분. ‘내 박물관….’ 이 제어 장치들을 다시 사용할 수 없는 것은 물론, 활용할 수조차 없게 될 것이다. 박물관은 예비 프로그램을 잡아먹으며 관리실에 들어올 것이고 이 장소에 있는 모든 기능도 정지해 버리며 똥 덩어리로 변하게 되리라. ‘기왕이면 봉인은 막는 게 좋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묵직한 목소리로. “원정대원들의 생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움직이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형님이 그런 소리를 하니까 거, 묘하게 안심된다니까.” “알겠습니다.” “큼. 그리고 조금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하자면….” “말씀하시죠.” “모두 퀘스트를 받으셨을 겁니다.” 분명히 모두가 받았을 거다. [전설 등급의 퀘스트를 확인합니다.] [전설 등급 퀘스트-대륙 구원(0/1)] 실제로도 모두 상태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실 저는 대륙의 존폐보다는 여러분들이 생환하는 게 더 소중한 소시민입니다. 실제로도 앞서 일을 꼬이게 만든 것 역시 그런 부분 때문 이었고요. 갑자기 이런 식으로 퀘스트를 받으니 기분이 조금 묘해지더군요.” 사실 그다지 묘하지는 않다.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묘한 기분을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뭔가 책임감이라는 게 생겼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아, 물론 보상으로 내려올 칭호에 붙은 스탯이 탐이 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하.” 작게 웃자 모두들 쿡쿡거리는 게 시야에 비쳤다. 물론 책임감 따위는 없고 보상은 탐이 난다. 마력 스탯 1이 소중한 상황이니까. “생각해 보면 저희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만… 자꾸만 이 퀘스트가 무사히 완료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요.” 박물관을 위해서! “앞으로 린델에 살아갈 저희의 후손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내 본성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조혜진 그리고 방금 전까지 쓰레기 짓에 동참했던 디아루기아는 이놈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특히나 선희영과 안기모는 내 연설 아닌 연설이 마음에 든 모양. 묘한 고양감과 책임감이 가미된 원정대는 강할 것이다. 사기라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도 이런 일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 중 하나니까. “출발합시다.” “출발하겠습니다.” 김현성이 입을 열었고 원정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마지막까지 기가 차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디아루기아의 표정에 양심이 찔려오기는 했지만 지금 우리는 선택받은 대륙의 구원자가 맞다. ‘인류의 힘을 보여주마! 더러운 고대신의 파편아!’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꽤 억울한 일이 될 것이다. # 249 회귀자 사용설명서 249화 박물관 관리인 막스(5) 바야흐르 박물관을 지키기 위한, 아니, 대륙을 지키기 위한 싸움의 막이 올랐다. 고군분투하고 있는 막스에게 손짓하자 녀석이 다급하게 자리에서 비키는 것이 보였다. 불과 몇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충신으로 돌변한 녀석의 모습이 우습기는 했지만 녀석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절박하거든.’ 다른 부분에서는 몰라도 구멍 난 마력을 메우는 이 일련의 작업은 내가 녀석보다 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약해지고 있는 부분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첫 번째 이유. 시스템이 먼저 경고를 하기도 전에 어느 부분이 약해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더러운 고대신의 파편의 행동 패턴 역시 마찬가지다. 녀석의 정보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녀석이 어떻게 움직일지도 전해져 온다. 1분 1초가 긴박한 상황에서 취약 부분을 미리 접할 수 있다는 건 이런 상황에 대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해 오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최단 거리 정확히 안내한 거 맞지? 막 사원?” -네. 아마 조금 있으면 진입할 것 같습니다! “아주 좋아.” -또 지시하실 일이라도…. “일단 커피 다시 타와.” -네! 곧바로 마력 홀로그램을 바라보자 얼마 되지 않아 고대신의 파편이 있는 곳으로 들이 닥치는 원정대원들이 보였다. “음성 연결은?” -네. 이미 연결했습니다. 같이 오신 용사분들에게 전달하실 때는 가장 끝 쪽에 위치한 마법진에 마력을 넣으시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 “이 대표라고 부르면 된다.” -넵! 이 대표님. 확실히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는지 일처리가 빠르다. 멍청할 거라고 느꼈던 건 내 착각인 모양. 너무 허둥지둥 움직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놓치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아. 아아. 음성 테스트. 현성 씨, 제 목소리가 들리면 오른손을 들어주세요. 확인했다는 듯 한쪽 손을 들어 올리는 영상 속의 회귀자. 신화 등급의 검을 들고 있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믿음직스럽다. 다른 이들도 이미 전투 준비에 한참. 이쪽이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자잘한 것은 저쪽에서 알아서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설명해 드리지만 예비 프로그램의 마력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얀이를 제외한 다른 분들은 예비 프로그램을 향해 마력 주입해 주세요. 하얀이는 큰 주문 하나 준비하고 마찬가지로 디아루기아도 현신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녀석을 제압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마력이기는 하지만 원정대원들의 마력은 도움이 된다. 모두가 꽤나 수준급의 마법사들이었고 보유하고 있는 마력 스탯도 80이 넘는다. -근접직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천천히 마력을 주입해 주시면 됩니다. 잘해내고 있다는 듯이 여유롭게 이야기 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그다지 여유롭지 않다. 이쪽의 힘이 더 강해질수록 저쪽의 저항도 더 거세진다. 끊임없이 마법진을 두드리며 취약 부분에 마력을 밀어 넣는 일련의 과정은 솔직히 복잡하다. 여기저기에서 마력을 끌어다 쓰고 있지만 완전히 봉인하기에는 마력도 부족한 것이 사실. 막스가 타온 커피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긴 이후에는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에는 막스를 향해서였다. “혹시나 다른 구역에서 끌어올 수 있는 마력 있는지 확인해 봐.” -이 대표님, 지금 상황이….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미리 원정대원들을 데려다 놓기를 잘한 것 같네.” -아…. “최대한 막아보겠지만 어디 한쪽은 뚫릴 확률이 높아. 아직도 마력이 너무 부족해.” -그 드래곤 분의 마력을 주입한다면…. “뚫렸을 때의 대비도 해야지. 디아루기아는 보험이야. 보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그렇군요.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이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퇴로도 확보해 놔.” -네? “뭐, 인마. 너 왜 눈깔을 그렇게 떠? 혹시라도 일이 틀어져도 일단은 이쪽이 살아야 나중에 뒷수습이든 뭐든 하러 돌아올 거 아니야. 너, 박물관 안에서 튀어 나가지 않아서 잘 모르나 본데 지금 저쪽에 있는 얘들은 현 인류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야. 쟤들 아니면 수습할 애들 도 없다는 거야.” -아! 그런 거군요? “그렇지 않으면 전설 등급의 몬스터를 그렇게 쉽게 잡아내고 균열 수호자들이 걸어놓은 봉인을 깰 수 있었겠어? 너무 걱정하지 마, 막 사원. 솔직히 나도 이 박물관은 소중하게 여기니까. 여기 있는 걸 못 쓰게 된다는 건 조금 그렇지. 그리고 계속 말꼬리 잡지 마. 집중 안 되니까.” -네… 넵!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무는 녀석을 굳이 쳐다보지 않았다. 아마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건 녀석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마법진을 두드리며 마력을 주입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마찬가지로 입도 쉴 새 없이 움직인다. -하얀아, 캐스팅하고 있는 마법 그대로 유지하고 덕구 쪽에 있는 촉수 묶고 있는 쪽에 마력 조금만 더 주입해 줘. 그쪽 깨질 것 같다. 조금 짜증 났던 것은 녀석이 조금 더 영악해졌다는 것이었다. 집요하게 한쪽으로만 힘을 집중하기 시작한 것. 당연히 상대적으로 취약해진 쪽에 있는 마력을 끌어다 쓸 수밖에 없었다. ‘제길.’ 정하얀이나 디아루기아 같은 이들의 마력은 이후 탈출할 때를 위해서라도 최대한 온전히 보전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곧바로 뚫리는 것보다는 그래도 차근차근 몇 개라도 확실히 하는 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내 마력이 문제야.’ 제법 장기전을 의식해야 되는 상대. 계속해서 마법진에 마력을 쏟아 부으며 제어 장치를 조종하는 것 역시 일이다. 물론 마법을 쓰는 것처럼 커다란 마력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업이 제법 길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만큼 여분의 마력을 계속해서 남겨둬야 했기 때문이다. 뒤에서 멀뚱멀뚱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막 사원을 기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실제로도 녀석은 확실히 잘해주고 있다. 너무 의기양양해진 것이 조금 불안하긴 하긴 하지만 말이다. 뭔가 사고를 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이 대표님. 21번이랑 7번은 확실하게 봉인했습니다! “흥분하지 마. 어느 한쪽이 풀려나면 다른 쪽도 연쇄적으로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슬슬 조짐도 보이고… 있고….” -9번도 봉인에 성공했습니다. “너무 급하게 움직이지 마. 앞으로 내가 넣으라고 한곳에만 집어넣어.” -10번도 봉인 성공했습니다! “남은 잔존 마력 회수해.” -69번에!! “너, 이 새끼! 누가 그쪽에 넣으래!” -어? 6… 9… 69번에…. “69번 영상 한쪽에 빨리 띄….” 콰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촉수 하나가 봉인을 뚫고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우뚝 촉수를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 막스가 69번 쪽에 마력을 밀어 넣은 사이 대기하고 있던 녀석이 팽창하듯 튀어오른 것이다. 다시 한번 마법진을 붙들고 녀석을 향해 마력의 쇠사슬을 쏘아 보냈지만 붙들고 있기가 쉽지가 않다. ‘다른 것도 전부 깨질 수도 있어.’ 아니, 날뛰게 만든다면 틀림없이 전부 부서진다. 이미 이쪽의 손을 떠나가 버린 상황이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원정대원들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영상에 보인다. 저쪽의 상황은 이쪽에 들리지 않지만 소리를 지르는 김현성과 마법을 발동시키는 정하얀. 흥분한 녀석을 다시 안쪽으로 집어 쳐 넣어야 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표적이 확실했다는 것. -정확히 촉수만… 촉수만 때려야 합니다. 수십, 아니, 수백의 조그마한 마력이 계속해서 녀석의 촉수를 두드리는 모습은 장관. 아마 정하얀의 마법이리라. 화력이 강한 브레스는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는지 디아루기아 역시 몸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녀석을 붙잡고 있는 쇠사슬에 마력을 조금 더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지휘 통제실 유지하는 마력도 최소 전력 유지하고 전부 다 저쪽으로 전달해.” -죄, 죄송합…. “실수는 바로 잡으면 되는 거야, 막 사원.” -이, 이 대표님. 커다란 용이 입을 크게 벌리고 녀석을 물어뜯으려 하는 모습은 장관. 영상으로 봐도 지릴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그렇지만 녀석에게까지 대미지가 있는지는 미지수. 저 여편네가 무리하게 움직이다 객사하면 어떡하나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항하는 힘을 떨쳐 낼 수는 없는지 촉수를 뒤틀기 시작한 녀석 때문에 몸이 튕겨져 나가 벽 쪽으로 처박혔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서는 커다란 용에게 선희영와 안기모의 신성력이 전달되는 순간. 박연주와 검은백조의 인원들 역시 검을 들고 뛰어오르기 시작. ‘무슨….’ 신에게 뛰어드는 발키리들이라도 보는 듯한 기분. 공포를 모르는 여검사들의 모습은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느낄 것이다. ‘제길.’ 하지만 고대신에게까지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은 모양. 푸른색의 쇠사슬에 묶여 있는 커다란 메인 촉수에서 뻗어 나온 작은 촉수들이 그녀들에게 쏘아졌다. ‘저딴 것도 할 줄 알았던 건가. 대부분의 일원들은 검으로 촉수를 막아내지는 일부는 위험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다급한 상황. 박덕구가 그 사이를 뛰어들어 방패로 몇몇의 공격을 막아내고 창을 든 조혜진은 박덕구의 어깨를 잡고 올라서 창을 휘두른다. 후두득 후드득. 몇 가닥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뻗어져 나오는 공격에 조혜진이 눈을 감았다. 아무런 상처 없이 무사한 자신의 몸을 매만지고 있던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꼬리로 그 공격을 대신 받아낸 디아루기아일 터. 입가에 모이고 있는 커다란 마력 역시 시야에 비치고 있을 것이다. -브레스는 안 돼!! 아! 관통형! 관통형으로! 입에서 쏘아져 보낸 관통형 브레스가 그녀가 이빨로 상처를 냈던 커다란 한쪽 면을 꿰뚫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녀석을 붙잡고 있던 예비 프로그램의 쇠사슬 하나가 끊어진 순간이었다. 수많은 촉수를 검으로 잘라내며 관통 부위에 당도한 김현성이 영상에 비쳤다. ‘부탁한다… 슈바! 현성아! 천천히 검을 휘두르는 녀석의 모습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질 지경.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는 검이 촉수에 닿은 순간 촉수는 깔끔한 단면을 만들어낸 채로 완벽하게 양 등분됐다. “예에에에에에쓰!!!” -끄으으으으으윽! “봉인 시작해! 빨리 빨리 빨리! 다른쪽도 한꺼번에 봉인! 봉인!” -끄어어어어엉…. “울지 말고! 아니, 좀 나와!” 마법진에 마력을 계속해서 넣은 것은 당연지사. 요리조리 손을 놀리며 마법진을 두드리자 뒤에서 계속해서 막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 상단 지역 전부 봉인. 32번부터 41번까지 모두 봉인! 69번도 봉인 완료했습니다. 끄어어엉…. 차곡차곡 쇠사슬에 휩싸이는 녀석이 눈에 보인다. 여기저기에서 뻗어 나온 푸른색 마력의 쇠사슬은 마치 녀석을 처음 봉인했을 때와 같은 모양처럼 놈을 옭아매고 있었다. 이윽고 녀석을 긴 잠에 빠져들게 할 커다란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들어가기 싫다는 듯 발버둥 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사라져라! 이 더러운 악마야! 푸흐흐하하핫!” 이쯤 되니 기분이 업 되서 덩실덩실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 왠지 모르게 녀석의 커다란 눈이 관리실이 있는 쪽을 노려보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딴 것 따위는 아무런 상관없다. “내 박물관은 넘기지 않는다! 요놈아! 푸하하! 쿨럭! 쿨럭!” 너무 웃어서 헛기침이 나올 정도였다. 결국 녀석이 안에 쳐 박히고 푸른색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문 쪽에 마력의 형태가 일그러지고 그 가운데 사람의 형상을 한 마력의 결정체가 눈에 보였다. ‘저건 또 뭐야.’ 이쪽에 위협이 되는 요소는 아니다. 막스가 멍하니 영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니 저 여자가 바로 균열 수호자인 모양. 본인이라기보다는 잔존 사념 같은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뭔 사연이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막스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사념이 외우는 주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문은 순식간에 완성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룬 문자들이 커다란 문을 향해 날아간다. 다시 한번 푸른빛이 장내를 뒤엎고 다시 되돌아온 영상에 자리한 것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서로를 껴안고 있는 원정대원들이었다. “나이쓰으으으으!” [전설 등급의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전설 등급 퀘스트-대륙 구원(1/1)] [칭호가 생성됩니다.] [칭호-대륙 수호자] [모든 스탯이 1 올라갑니다.] [박물관 관리자 등급이 1등급 상승합니다. 균열 박물관 5등급 관리자 칭호가 균열 박물관 4등급 관리자로 변경됩니다. 균열 수호자 메텔의 간곡한 부탁으로 인해 새로운 칭호가 강제적으로 생성됩니다.] [막스의 보호자] “어?” 기쁨도 잠시, 이게 뭐냐는 듯 막스를 바라보자 묘하게 당황스러워하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 250 회귀자 사용설명서 250화 박물관 관리인 막스(6) 눈을 떴을 때 가장 처음 본 광경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해냈어.” “성공했어요!” 모든 게 낯선 것처럼 기억한다. 커다란 방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귀가 뾰족한 사람도 있었고 키가 작은 사람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키가 큰 사람도 있었고 녹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커다랗게 웃어줬던, 귀가 뾰족한 금발 머리 얼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네 이름은 막스야.” -막스? “응. 막스.” -막스! “그리고 내 이름은 메텔이란다.” -메텔? “응. 메텔.” -메텔! “이곳은 균열 박물관이라는 곳이야. 너는 우리 수호자들이 힘을 합쳐 만든 마력의 응집체고… 여러 가지 설명을 하기 전에 일단은 걸어볼까? 걸을 수 있겠어?” -아… 응. 당시에는 모든 것이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사람도, 주변에 너부러져 있는 물건도. 모든 게 새로웠던 걸로 기억한다. 발이 바닥에 닿을 때 느낀 차가운 감각. 피부에 닿는 마력의 감촉. ‘다행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다행이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돼 진심으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눈앞에 있는 것 모두가 자신을 축복해 주는 것 같았으니까. 시간은 흘렀다. 당연하지만 그날 이후로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자신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째서 탄생했는지에 대해서도 배웠고 균열 박물관이 존재하는지 그 의의와 관리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공부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수호자님들과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고 열심히 하면 칭찬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이해되니?” -네. 제이미 님. 이해할 수 있어요. 박물관에 있는 관리품 목록도 모두 외웠어요! “그래? 우리 막스 똑똑하네.” -감사합니다. 많은 지식을 습득했고. “너는 박물관을 관리하기 위해서 태어난 거야, 막스. 우리 수호자들의 의무를 네가 이어받기 위해서. 네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구나.”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올리버 님. 태어나서 정말로 행복한걸요. 정말로 기뻐요. 책임감이 뭔지 배웠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네 몸은 박물관 밖으로 나가면 흩어진다는 거 알고 있지? 이 박물관에 있는 마력이 네 몸을 유지시켜 주고 있는 거니까. 조심해야 한다.” -네. 스네프 님! 하면 안 되는 일이 뭔지도 알게 됐다. “네가 열심히 해줘서 기뻐. 음. 너는 나랑 조금 닮은 것 같은데….” -그런 말씀해 주셔서 영광이에요, 아이작 님. 오늘 떠나신다고 들었는데…. “응. 나는 여기 사람이 아니니까. 언젠가 또 볼 수 있을 거야. 잘 있어, 막스.” -아… 네. 물론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실제로 수호자님들과 함께한 시간들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박물관을 둘러보며 점검하는 것도 그랬고 수호자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그랬다.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호자님들.’ 하루에 몇 번씩이나 비슷한 생각을 할 정도였다. 대하기 조금 어려운 수호자님도 계셨지만 그 반대도 있었다. -메텔 수호자님! “막스! 오늘도 어땠어?” -네. 오늘은 관리실을 점검하고 봉인된 균열을 직접 보고 왔습니다. 스네프 님과 함께요. “어머. 혹시 그가 뭐라고 하지는 않았니? 잘 대해준 거야?” -네. 여러 가지 설명을 들었어요. 지금은 균열이 완전히 막혀 있지만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르는 만큼 저희가 끝까지 지켜봐 줘야 한다는 것 까지요. 그리고 이 박물관에 있는 물품들도…. “매번 하는 이야기인데 이제는 지겹겠구나….” -아니에요, 메텔 님. 제가 태어난 이유인 걸요. 저는 수호자님들의 뒤를 이어 박물관의 유지를 이어 받기 위해서 만들어졌으니까요! 열심히 해야죠! “…….” -메텔 수호자님? “너무 그렇게 짓눌려 있지 않아도 괜찮단다.”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내일 하루는 수업에 나가지 말고 같이 놀까?” -그래도 되나요? “물론. 하루 정도는 쉬어도 돼.” 특히나 메텔 수호자님과 함께 있는 시간은 굉장히 즐거웠다. 다른 분들도 분명히 친절하고 잘 대해주시기는 했지만 메텔 수호자님은 다른 수호자님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해주었기 때문이다. -메텔 수호자님, 부모님이 뭔가요? “그건 아버지와 어머니를 말하는 거야. 나 같은 엘프나 제이미 같은 인간들은 막스가 태어난 방식과는 다르게 태어나거든. 여자와 남자가 사랑을 나누면 여자의 배 안에 아이가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돼. 이걸 낳아주신 부모님이라고 부르지. 물론. 키워주는 개념도…. 아! 그보다 갑자기 부모님은 왜?” -스네프 님이 메텔 수호자님이 제 부모님 같다고 해서요. “그럼! 방식은 조금 다르지만 나는 막스의 부모님이나 다름이 없는 걸. 막스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데 가장 커다란 공을 세운 게 바로 나니까. 후훗. 스네프가 눈치가 좋네. 사실 나도 막스를 내 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었거든. 어때? 엄마라고 불러볼래?” -아, 아니요. “왜?” -그냥… 부끄러워요. “빨리 불러보라니까!” -나, 나중에요. 너무 부끄러워요. 정말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 떠올려 보면 이때가 가장 행복한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 걱정도 없었고 매일 웃고 가끔은 뛰어다니고 메텔 수호자님에게 어리광도 부렸으니까.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이미 님의 머리가 푸른색에서 하얀색으로 변할 정도의 시간이었고 올리버 님과 스네프 님 얼굴에 주름이 생길 정도의 시간이었다. 매일 화를 내던 스네프 님은 조용히 독서를 하거나 먼 곳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고 몸도 눈에 띄게 약해졌다. 올리버 님은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하셨고 매번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고는 했다. “미안하다.” -아니에요, 올리버 님. 저야말로 죄송한 걸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게 없어서…. “너에게 큰 짐을 지게 했구나.”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어요, 올리버 님! “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구나. 그래… 고맙구나.” -올리버 님? 메텔 수호자님! 올리버 님이 이상해요! 메텔 수호자님!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의 죽음을 겪었다. 아마 이 즈음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죽는구나.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실감하게 된 것이 딱 이 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 귀염둥이….” 그 다음은 제이미 님이 돌아가시고…. “매번 모질게 대해 미안하구나. 그래도 널 싫어하지는 않았다는 것 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막스, 박물관을 잘 부탁한다.” 그 다음에는 스네프 님이 사라지셨다. 메텔 수호자님은 다른 수호자님들이 한 분씩 눈을 감으실 때마다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고 식사를 하지 않으시는 날도 잦아졌다. ‘태어나서 불행한 건지도 몰라….’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수호자님들이 돌아가실 때나 메텔 수호자님이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실 때는 항상 저런 생각을 하곤 했다. 시간이 지나고 지나 이제는 커다란 박물관에 둘밖에 남지 않았을 때에도 같은 생각을 했다. 물론 마냥 불행하지는 않았다. 메텔 수호자님은 늙지 않으셨고 웃을 수 있는 일도 많았으니까. 함께 책을 읽기도 했고 박물관을 뛰어다니기도 했으니까.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눴고 수업도 멈추지 않았으니까. 슬퍼하는 시간보다 웃는 시간이 더 많아졌으니까. 함께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분명히 즐거웠다. 모든 게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메텔 수호자님 역시 무한하지 않았다. 제이미 님과 다른 분들처럼 예전과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즈음 메텔 수호자님은 방 밖으로 잘 나오지 않게 됐다. “연구를… 시작할 거야, 막스. 조금 바빠지겠지?” -네. 수호자님. “나오지 못할 일도 많을 것 같아. 딱 그 동안만… 박물관을 부탁해.” -네. 수호자님. 정확히 어떤 걸 연구하시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수호자님의 말처럼 얼굴을 뵙기가 힘들어졌다. -태어나서 불행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메텔 수호자님은 계속해서 어떤 연구에 몰두하셨고 그만큼 급속도로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가끔 바깥으로 나오셨을 때도 기침을 하는 일이 잦아졌고 가슴을 부여잡고 헐떡거리는 일도 많아졌다. 무서웠지만 웃을 수밖에 없었고 박물관 관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일을 해야만 했으니까. 메텔 수호자님은 가끔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내 몸에 이것저것 새로운 주문을 걸어주시고는 매번 같은 말씀을 하셨다. “사랑해.” 거짓말. 움직이기 어려워지셨을 때도 똑같이 말씀하셨다. “사랑한단다.” 거짓말. 몸 안에 있는 마력이 전부 다 사라졌을 때도 웃으며 말씀하셨다. “사랑한단다, 막스.” 거짓말. 마력을 전부 쏟아부어 나를 박물관 밖으로 데려갔을 때도 똑같이 말씀하셨다. ‘연구가 성공이야’라고 중얼거리면서도, 몸이 부서지면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사랑한단다…. 사랑… 한단다, 막스.” 전부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거짓말…. “…….” -사랑한다면… 그게 정말이라면 저를 만들지 않으셨어야 했어요. 끄으윽…. “…….” -정말이라면 이렇게 혼자 남겨두지 않으셨어야 했어요. 제이미 님도, 올리버 님도, 스네프 님도 저를 좋아한다고 하셨다면 이렇게 혼자…. 끄으윽…. 남겨두지 않으셨어야 했어요. 메텔 님은 거짓말쟁이야. 끄으윽….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으면서…. 거짓말쟁이야…. 이럴 거면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뻔했어요. 만들어지지 않는 게 더 좋을 뻔했다고요. “…….” -저는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말한 적 없어요. 박물관 안에서 계속 살아도 된다고 했어요. 이런 거 부탁한 적도 없어요. 저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으면… 저와 함께 있으셔야 했어요. 저한테 이러지 않으셨어야 했어요. “…….” -……. “…….” -저도… 저도 사랑해요! 저도 사랑해요. 그러니까 가지 마세요. “…….” -사실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사랑한다는 게 진짜 라는 것도 알아요. 그러니까. 일어나세요. 제발 일어나 주세요. “…….” -끄으으윽…. 제발…. 제발요. “…….” * * * “그게 끝이야?” -네…. 이후에는 설명 드린 대로 입니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박물관에 들어가서 수호자님들이 해주신 의무와 책무를 다하게 됐죠. 갑자기 박물관이 던전화되었을 때는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보다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끝마친 막스를 향해 악어의 눈물이라도 흘려야 되는 것은 아닌지 진지한 고민을 해볼 정도. 그렇지만 뜨거운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내게는 조금 현실성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감상에 젖기에는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아마 관리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원정대원들이 틀림없으리라. [막스의 보호자.] [수호자 메텔의 간곡한 부탁으로 만들어진 칭호입니다. 막스의 성장 여부에 따라 박물관 관리 등급이 올라갑니다. -죄송합니다. 부디 진심으로 대해주세요.] ‘어우….’ 나쁘지는 않다. 디아루기아 때처럼 목숨을 저당 잡힌 것도 아니었고 녀석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여부도 이쪽에 달려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자꾸만 찝찝해지기 시작. 심지어 이 메텔이라는 여자는 마지막 봉인을 책임진 이후, 그 사념체조차 무지개다리를 건너가 버렸다.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오는 상황이라는 거다. “그럼 잠깐 보였던 그건….” -아마 메텔 님이 남기신 잔존 사념이실 것 같아요. 아마 끝까지 제가 못미더우셨던 거겠죠. “그건 아니지. 아마도 네가 밖으로 나가는 걸 고려해서 남긴거라고 생각하는 게 정황상 맞아.” -아…. “아무튼 그래서… 지금 그 균열 수호자는 내가 너를 돌봐주기를 원한다는 거네. 아니 애초에 왜 그 날 밖으로 나가지 않은 거야?” -누, 누군가는 책임져야 되니까요. 저는 관리인이니까….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어, 막 사원. 어차피 이쪽이 손해 보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다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지가 문제지.” 뭐가 그리 초조한지 정하얀인 양 손톱을 깨물고 있는 모습. 이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나쁜 이야기는 아니야.’ 당연하지만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박물관 관리 등급이 올라가는 것 만으로도 이미 커다란 이득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 지금 당장 얻은 것이 너무 많아 정리하기 힘들었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이번 원정에 가장 커다란 대박은 이 박물관이다. ‘어차피 관리해 줄 사람은 필요하고….’ 물론 보호자가 됐으니 이전처럼 여기에 사는 방식이 아닌 조금 다른 방식이 되겠지만 녀석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하다. 이 장치들을 다룰 수 있는 건 나 외에 녀석이 유일하니까. 그 밖에도 이 장치들을 베이스로 양산형을 뽑는 데 걸리는 시간 역시 단축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봐, 막 사원.” -네? “혹시나 해서 하는 이야긴데… 여기 있는 장치들의 내부 설계는….” -저…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물론 코어장치들은 제가 어떻게 건드릴 수 없지만…. “이건? 이건 어때?” -아… 그 정도라면…. “호오… 또 다른 할 수 있는 일은 있나?” -아… 저것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대표님. “호오?” -이 대표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사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대표는 무슨… 아버지라고 불러도 돼. 아들.” -네? “푸흐흐흣.” 행복한 노후를 책임질 아들이 생긴 것이다. # 251 회귀자 사용설명서 251화 눈치 빠른 백조(1) 녀석과 뜻하지 않은 부자의 정을 나누기는 했지만 원정은 완벽하게 마무리됐다. 신화 아이템 한 정과 전설 등급의 아이템 두 정을 습득했고 질이 좋은 영웅 등급의 아이템 역시 얻을 수 있었다. 아쉽게도 방패는 박덕구가 아닌 검은백조의 손안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파란에서 방패마저 챙겨갔더라면 귀갓길 내내 얼굴을 들 수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잘됐어.’ 박덕구에게는 쓸 만한 방패를 하나 만들어 주면 된다. 파란에는 유능한 대장장이가 탄생할 예정이고 재료 역시 썩어빠질 정도로 많다. 중요한 건 이쪽이 저쪽보다 더 이득을 봤다는 사실 하나.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공이 가장 큰 사람이 파란의 주축 인물들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딱 알맞게 분배됨 셈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가야 될 관계인만큼 양심적인 배분은 필요한 것이 당연하다. 이쪽에서 챙긴 것들은 값으로 가치를 매기기 힘든 것들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칭호, 아이템 등 여러 가지를 얻었지만 당연 돋보이는 것은 김현성이 얻은 신화급의 무구와 내가 얻은 박물관 제어 장치. 당장은 모두의 초점이 신화 등급의 아이템에 맞추어져 있었지만 이곳에 있는 것들은 나에게는 그 어떤 성과보다 커다란 성과라고 하는 것이 맞다. ‘세상이 바뀔 거야.’ 생각하고 있는 것만 잘 풀린다면 커다란 변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할 수 있는 게 많아.’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것이 가능해진다. 하루라도 빨리 린델로 돌아가 연구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행군길이 더딘 것이 문제. 모든 원정대원이 체력적으로 한계를 맞았으니 속도가 느린 것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다지 초조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 주변을 벗어나면 마차가 들어올 테고 마차에 탄 이후에는 린델까지는 금방일 테니까. ‘행군 분위기도 좋고….’ 조금 당황스러운 이유였지만 이쪽에 새로 합류한 새로운 손님 덕분이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고립된 이들 역시 이 식구에게 조금 호의적이었다는 것. 예상은 했었지만 녀석이 고립된 검은백조의 원정대원들을 핍박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호의적인 면모를 보였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 단순히 내 추측일 뿐이겠지만 아마 녀석은 외로웠을 거라고 생각했다. ‘외로운 게 당연하지.’ 많은 시간을 혼자서 지냈다. 박물관이 녀석의 유일한 친구였고 실제로 그곳에 광적일 정도로 집착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홀로 지내는 외로움을 박물관으로 풀었다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물론 원정대원이 녀석을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끄으으으으윽….” “흐어엉….” 녀석의 이야기가 공개됐고 곧바로 동정 여론이 원정대를 뒤덮기 시작한 것. “끄어어어엉….” 특히나 박덕구를 중심으로 한 이 눈물 집단은 관리자 막스를 완벽하게 케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음은….” -사실 그때부터 쭈욱 박물관에서…. “외로웠겠구만….” -조, 조금 그렇기는 했지만 익숙하기도 했고… 박물관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요. “거, 아무말 하지 말라니까. 끄윽…. 형님 자식이면 내 자식이기도 하니까!” -아… 네. 물론 내가 막스의 보호자가 됐다는 사실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호칭일 뿐이었고 실질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법 충격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정하얀은 이쪽은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시큰둥했고 디아루기아도 별 상관이 없다는 느낌. 혹여나 똘똘이에게 소홀해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함께 자라는 형제가 있어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아무튼 간에 녀석은 역적의 포지션에서 원정대에서 가장 귀여움 받는 포지션으로, 완벽한 태세전환에 성공했다. 기계 같았던 더미와는 다르게 본체는 감정 표현에 충실하기도 했고 일단 그 외관이 끔찍하게 귀여웠기 때문이다. ‘더러운 외모지상주의.’ 검은백조의 단원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빼앗아 버렸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렇게 조용히 떠들썩한 무리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마차가 진입할 수 있는 지역까지 당도한 것이다. 소식을 미리 전해 들었는지 이미 나와 기다리고 있는 검은백조의 마차들이 보였다. 함께 나온 김예리와 황정연 역시 조용히 마차 위에 앉아 있는 모습. 파란의 병아리들은 함께 나오지 않은 모양. 뭔가 할 일이 있었을 것이다. 미처 손을 들기도 전에 저 멀리서부터 꼬맹이가 빠르게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오매불망 김현성을 기다려왔을 테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를 곧바로 지나치는 얼굴을 보니 괜스레 심사가 뒤틀렸다. ‘귀염성 없는 꼬마….’ 내가 오기만을 열렬히 기다리고 있는 똘똘이가 눈에 밟힌다. 황정연 역시 인사는커녕 박덕구에게 달려가는 걸 보니 이쪽의 생환은 반갑지 않은 모양. 그 와중에 김예리는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 김현성을 덮치듯 껴안았다. “철컹 철컹.” “네? 뭐라고 하셨어요, 오빠?” “아무것도 아니야, 하얀아.” 꽤나 찐하게 포옹하고 있는 꼴을 보니 내가 다 불안해진다. 김현성이야 여동생을 다루는 것처럼 꼬맹이를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내가 볼 때 저 꼬맹이의 눈빛은 이미 수상하다는 선을 넘어섰다. 눈치채지 못한 건 전형적인 주인공들의 고유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둔감함을 가지고 있는 녀석뿐이리라. “빨리 마차 안으로 들어가서 푹 쉬어요, 오빠.” “응. 그래야지. 관리실에서도 마력을 너무 많이 사용했고… 잠이라고 해봤자 세 시간 정도 잔 게 전부니까.” “아아아….” “혹시 따로 몸이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가요?” “네. 희영 씨. 어딘가 아프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푹 주무시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역시나 이쪽을 챙겨주는 건 선희영과 정하얀밖에 없다. 떠들썩한 박덕구와 곧 누군가에게 잡혀갈 것만 같은 김현성을 두고 마차에 오르려고 했을 때였다. “무사하셨군요, 기영 씨.” “아. 지혜 씨.” 이지혜 역시 자신의 길드 마스터를 마중 나온 것이다. 갑자기 등장한 이지혜를 정하얀은 조금 경계하듯 바라봤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 덕분인지 조금 긴장을 놓은 것 같았다. “어머. 하얀 씨, 오랜만이네요. 여전히 두 분이 붙어 있는 모습은 보기 좋네요.” “아. 지, 지혜 씨. 안녕하세요.” “희영 씨도 오랜만에 뵙죠?” “네. 오랜만입니다.” 그야 저런 식으로 친근하게 다가오면 가지고 있던 경계심도 허물어져 버리리라. 대놓고 나와 정하얀이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는 모습은 조금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항상 저런 식으로 정하얀을 띄워주기는 했지만 오늘은 뭔가 평소보다 기합이 들어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전해 들었나 보네….’ 오늘은 사적이 아니라 공적으로 볼 일이 있는 모양. ‘벌써 검은백조에 소식이 들어갔구나….’ 던전에서 먼저 나간 레인저 중에 한 명이 빠르게 달려가 린델에 소식을 전했을 때, 단순히 마중 나와 달라고만 이야기했을 리가 없다. 아마 던전 안에서 있었던 일은 물론 각 길드가 얻은 성과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심지어는 간이 공략 일지까지 전해 받았을지도 모른다. 검은백조는 린델 내에서 정보에 가장 민감한 길드 중 하나였으니까. 굳이 이지혜가 바쁘신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는 건 최소 길드 마스터인 박연주의 직접적인 전갈을 받았다는 이유밖에는 없다. 냄새를 잘 맡는다는 건 알았지만 린델에 들어가기 전부터 작업을 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박연주가 있는 쪽을 바라보니 이지혜와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혜 누나도 열심히 사네.’ 그녀 역시 길드 내에서 입지를 다지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거다. 아무튼 간에 즐겁게 정하얀과 선희영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타이밍을 재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도와주는 게 좋을 것 같아 한 번 헛기침을 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말을 걸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조금 중요한 이야기라 이런 자리에서 말씀드리기는 그렇고…. 소소하게 이야기라도 나누시면서 린델로 돌아가시는 건 어떠세요? 마차는 따로 준비해 놨어요.” “조금 피곤하기는 한데….” 살짝 말을 돌리니 찌릿 하고 이쪽을 쳐다보는 얼굴이 보였다. 굳이 해석해 보자면 ‘이러기야?’라고 말하는 느낌.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 번 놀려보고 싶어 운을 띄어봤는데 절박한 표정을 보니 언질을 받아도 단단히 받은 모양. “현성 씨랑 저희 길드 마스터도 함께요.” “그렇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혜 씨.” 정하얀의 얼굴이 울상이 되기는 했지만 이쪽에서도 어쩔 수가 없다. 정상회의라면 정상회의라고 할 수 있는 자리였으니까. 김현성 역시 박연주에게 언질을 받았는지 김예리를 떼어내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 덕분에 박연주와 이지혜는 뜻하지 않게 파란의 여성진에게 미움을 받은 것 같았지만 당장 저들에게 마음 받는 것보다는 눈앞에 닥친 문제가 더 중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여전히 눈에 띄는 화려한 내부가 보였다. 이곳에 올 때 탔던 마차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물론 귀빈을 모시듯 극진히 대접하겠다는 심정은 이해가 갔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떨어지는 게 있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원정은 파란 혼자서 마친 것이 아니다. 이쪽이 아무 말 없이 전부 해 처먹은 이후에 입을 싹 닦을 줄 아는 모양.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니야.’ 양심을 판 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등을 맡긴 동료의 뒤통수를 칠 정도로 썩어빠지지는 않았다. ‘아암.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니지.’ 아무튼 간에 겨우 넷이서 쓰기에는 지나치게 큰 마차 안에 나와 김현성은 자리에 앉았고 박연주와 이지혜 역시 편안한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차가 나온 이후에는 슬그머니 다도를 즐기며 잡담을 시작했고 조금 편안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이지혜가 진행을 보기 시작. 이런 자리에 무척 익숙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실질적으로 입을 열어오는 것은 모두 박연주였지만 우리 영혼의 단짝이 편안하게 분위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성공적인 원정을 축하하기 전에 이번 원정에 참가해 주신 데 감사를 표현하고 싶어요. 현성 씨.”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제안을 해주셔서 저희가 더 감사합니다. 그저 앉아서 감사를 받기에는 파란이 얻어간 것이 너무 커, 쑥스럽습니다.” “그만큼 활약해 주셨으니까요. 실제로 공략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현성 씨와 기영 씨고…. 여러모로 생각해 봐도 소유하실 자격이 있어요. 이미 주인의식을 치른 마당에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고요. 다만… 그… 지금 박물관에 대한 소유가 정확히 기영 씨에게 있죠?” “네. 정확히는 관리자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막스의 보호자이기도 하고요.” 혹시나 박물관의 소유권 분쟁이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이쪽이 조금 떼어주는 형태라면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반반씩 가져가자는 소리가 나온다면 장담컨대 동료고 나발이고 전부 뒤엎어 버릴 수도 있다. 물론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혹시나 해서 말씀 드리지만 저희는 박물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이 없습니다.” 눈치 빠른 이지혜가 한 마디 툭 치고 빠진 것이다. 박연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네. 지혜 말대로 저희는 기영 씨가 가지고 있는 것에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앞으로 기영 씨와 현성 씨, 파란 길드가 진행할 일에 대한 투자와 그에 맞는 정당한 지분 그리고… 아주 약간의 배려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으음….” 표현을 약간의 배려라고는 하기는 했지만 원하는 건 약간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검은백조가 없었다면 박물관도 없었다는 걸 잘 생각해 달라는 의미일 것이 분명. 사실 그녀들은 그 이상을 주장할 자격이 있다. 원정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나 역시 검은백조에게 일정 지분을 넘기려고 했었고 실제로도 공동사업의 형태로 일을 추진하려고 계획했었다. 조금 깜짝 놀랐던 것은… 그녀들의 행동이 굉장히 신속했다는 것. 이쪽이 무슨 일을 벌일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생각하지만…. ‘정말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네.’ 그야 저 박물관에 한 번 들어가 봤다면 바보가 아니라면 할 수 있는 생각이기는 하다. “사실 아직까지 사업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냥 이야기해 주세요, 기영 오빠. 저희가 하고 있는 생각을 하고 계신 게 맞는지 궁금한데….” “물론 생각하고 있는 게 두 개 정도 있습니다. 검은백조와 협연을 하는 그림도 그리고 있었고요. 박물관의 소유권은 어쩌다 보니 제가 가지게 됐지만 검은백조가 없었다면 얻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거 다행이네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생각하시고 있는 것들을 조금만… 들어봐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첫 번째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 등급의 던전 균열 박물관의 운영이고….” 예상했다는 표정. “두 번째는… 방송국을 만들어 볼까 합니다.”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이지혜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지금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언론의 완전 장악.’ 바야흐르 신성제국에 미디어 매체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 252 회귀자 사용설명서 252화 눈치 빠른 백조(2) “그 막스라는 꼬맹이가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오빠?” “응. 실제로 박물관에 있는 모든 기능을 가져오는 건 불가능해.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코어 장치들은 아직은 내가 손볼 수가 없거든. 아직은 관리 등급이 4등급밖에 안 되고…. 혹시 모르지. 1등급이나 2등급 정도가 되면 다른 수가 생길지도. 뭐, 사실 다른 기능은 그다지 관심도 없었어. 처음 봤을 때부터 신경 쓰인 게 바로 마력 홀로그램이었으니까.” “확실히… 대륙에는 없는 기술이죠. 그럴 만해요. 저라도 눈 뒤집혔을걸요. 안 그래도 오빠가 린델 내 기자들 전부 지지고 볶고 한 이후에 그쪽으로 연구하던 길드도 많았는데… 완전히 망했네요. 그쪽은….” “아냐. 이미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길드들에게도 도움은 받을 생각이었어. 가지고 있는 건 말 그대로 기술일 뿐이고… 상용화하기에는 모자르니까.” “그런 식으로 여기저기에서 도움 받으면 오히려 불리한 거 아니에요?” “놉. 사실 영상 기술이야 풀어도 상관없어. 물론 늦으면 늦을수록 이쪽에 유리하겠지만 중요한 건 영상이 아니라 어디서 그 영상을 송출하냐거든….” “아아아. 컨트롤 타워가 박물관 안에 있군요.” “정답. 어차피 검열은 이쪽에서 한다는 이야기야. 이건 SNS처럼 쌍방향적인 소통 방식이 아니니까. 우리 막 사원이 연구에 들어가면 불가능할 것도 없을 것 같지만… 그다지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도 않고. 대중을 바보로 만드는 데 바보상자만 한 게 없으니까. 왜 옛날부터 높으신 양반들이 그렇게들 많이 사용해 왔잖아.” “그렇기는 했죠. 연예인 염문 뿌리고 뒤로는 날치기로 법 통과시키고… 자극적인 방송 만들어서 사람들 바보 만들고… 어차피 대중은 개돼지라는 말이 괜히 튀어나왔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개돼지는 무슨. 소중한 수신료를 가져다주시는 고객들인데.” “왠지 그게 더 불안하게 들리는 데요.” “착각이야.” 나와 이지혜가 조금 더 편하게 대화를 나눴으면 하는 생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각 길드의 마스터들은 중요한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 자리를 떠나버렸다. 당연하지만 귀찮거나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아마 그동안 쌓아온 신뢰의 영향이리라. 사실 박물관 제어 장치야 엄연히 말하면 파란의 소유가 아닌 개인의 소유이니 김현성이 전권을 위임한 것은 당연한 일. ‘형이 이래서 너를 사랑하는 거야, 이 자식아.’ 김현성은 멍청이가 아니다. 이번 일이 얼마나 돈이 되고 얼마나 커다란 파장을 일으킬지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로 이야기를 해오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히 녀석은 욕심이라는 게 없는 것 같다. 백 번 생각해도 녀석을 선택한 것이 옳았다. 아무튼 간에 김현성은 나에게 이번 일의 모든 것을 맡겼다. 이지혜 역시 마찬가지. 지금 이렇게 나와 그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유였다. 물론 이지혜 같은 경우에는 나처럼 전권을 위임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단하지.’ 아무 무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일개 양민이 이런 중요한 협상 테이블에서 거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것은 대륙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다. 박연주가 그녀를 신뢰하는 것은 물론, 이지혜 그녀가 결과를 만들어 오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라는 거다. 잠깐 차로 목을 축이자 곧바로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래서 얼마나 해주실 거예요.” “글쎄.” “투자금은 상관하지 말라는 허락이 떨어졌어요. 우리 길드 마스터님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영호에 탑승하시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거든요. 길드 간부들도 다같이 한 마음 한 뜻이고… 그만큼 검은백조에서 저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시죠? 오빠?” “그러니까 지금 지혜 누나 말은 체면 좀 세워달라는 거네?” “직접적으로 말하면 그래요. 충분히 자격도 있다고 생각하고요. 지금까지 물심양면 앞뒤수발 다 들어줬는데. 아무리 제가 오빠한테 빠져 있다고 해도 여기에서 팽 당하면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을 것 같아요. 물론 제 권한이 커지면 오빠한테도 더 이득이 될 거라는 건 당연한 이야기고요. 서로 윈윈 해야죠.” “에이… 누나 말이 맞기도 한데 말은 똑바로 해야지. 실제로 지금까지 나만 이득 본 것도 아니잖아. 누나도 내 이름 많이 팔아먹었고… 정확히 말하면 지금까지도 서로 윈윈 이었는데… 혼자만 희생한 것처럼 이야기 하네. 조금 섭섭한데….” “아이. 오빠아….” “나한테 그런 애교 안 통하는 거 알잖아, 누나.” “저도 알아요. 그냥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해본거지.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놀리지 말고 빨리 결정해 줘요.” “큼….” 확실히 초조해하는 얼굴이다. 원하는 걸 못 얻어갔을 때를 생각한다기보다는 내가 자신을 어느 정도로 여기는지에 대해 시험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연하지만 이지혜를 홀대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검은백조에 이쪽과 곧바로 연결되는 커넥션이 있다는 것 이외에도 그녀를 아군으로 두면 득이 되는 일이 많다. 기본적으로 유능하기도 하고 이쪽과는 궁합이 잘 맞는 만큼 챙기는 게 당연한 선택이리라. “누나하고 싶은 대로 해.” 왠지 모르게 한번 해보고 싶은 대사였다. “정말요?” “물론 양심적으로.” “당연히 그래야죠. 길드에서 예상하고 있는 범위에서 한 3% 정도만 높게 부를 게요.” “그게 어느 정돈데?” “5퍼센트?” “음….” “너무 많아요?” “그 반대야 생각보다 너무 적어서. 검은백조가 던전 공략에 참가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깔끔하게 십으로 맞춰서 가자. 총 13% 정도면 되겠네.” “정말 그래도 돼요?” “응. 솔직히 나도 양심이 찔리기는 하거든. 이런 걸 전부 먹으면 탈나. 적당히, 적당히 나눠야 안전해진다니까. 괜히 혼자서 다해처먹다가는 어디서 유신의 심장을 쏘는 야수 같은 놈이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표현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알겠네요. 신경 써주신 만큼 투자금도 더 크게 밀어 넣어 드릴게요. 그리고 던전 쪽은….” “그쪽은 딱 오십 대 오십 가져가는 게 맞는 것 같아.” “아아아.” “박물관 제어장치는 기본적으로 내가 얻은 개인의 성과지만 박물관 자체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어, 누나. 공략 자체는 같이 진행한 게 맞으니까. 검은백조가 없었으면 얻지 못했을 거고.” 사실 박물관 자체도 내 소유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우방의 눈치를 아예 안 볼 수는 없다. 별것 아닌 사건으로도 크게 틀어지는 게 이런 관계인만큼 줄 때는 확실히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제어 장치는 내 거니까, 뭐.’ 커다란 배를 반으로 나눠 갖는다고 해도 어차피 조타와 조타수는 이쪽이 보유하고 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 리가 없다. “그럼 균열 박물관의 리모델링 비용은 저희가 조금 더 유치하는 걸로 할게요. 파티션도 분리해야 되니까 골드 좀 들어가겠네요.” “당연히 들어가야지. 세상에 처음 등장하는 던전 테마파크인데.” “던전 테마파크라기보다는… 강원랜드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요….” “혹시 어디 가서 그런 말하지 마….” “당연하죠.” “뭐, 아무튼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는 걸로. 이 정도면 체면 좀 세울 수 있겠어?” “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요.” 슬쩍 이지혜를 바라보자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입가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걸려 있는 것 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분 좋은가.’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다.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되어 좋은 건지, 아니면 내게 받은 호의 아닌 호의가 기분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가까운 듯하다. 최대한 평소와 같은 표정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계속해서 얼굴이 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저런 표정은 또 처음 보네.’ 시스템이 공인한 영혼의 단짝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보이는 것이 있다. ‘혹시 얘도 1회 차에 나랑 연관이 있나.’ 잠깐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기는 했지만 이 생각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었다. 이지혜가 슬금슬금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다가와?” “글쎄요?” “너무 가까이 붙지 마, 누나. 요즘 눈이 하나 붙었거든. 지금은 안 보이는 거 같기는 한데… 이게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겠네.” “눈이요?” “응. 뭐, 그렇게만 알아두면 돼. 어차피 조금 있으면 도착인 것 같고. 우리 지혜 씨랑 진한 시간 보낼 시간이 부족하네.” “정말 그러네요. 이야기하다 보니까 벌써 린델이네요. 오랜만에 둘 만 있는데 조금 사적인 시간이라도 보낼 걸 그랬어요.” “누나랑은 일 이야기하는 게 사적인 이야기하는 거지, 뭐. 원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하는 거랑….” “뒷이야기하는 게 가장 재밌죠.” “동감. 아무튼… 다음에 또 봐. 아니, 어차피 계속 보기야 보겠네. 박물관 일 때문에라도. 그거 누나가 총괄할 거지?” “길드 내에 견제세력 때문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높은 확률로 제가 맡을 가능성이 커요. 이번 협정에 1등 공신이기도 하니까. 뭐, 내일이라도 봬요. 하얀 씨 기분 나쁘지 않게 굳이 마중은 안 나갈 게요.” “응. 그렇게 해.” 천천히 마차가 멈춰서는 게 느껴져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검은백조의 인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안기모와 선희영이 보였다. 물론 저들뿐만이 아니다. 어색한 표정으로 악수를 하는 디아루기아의 모습도 보였고 박덕구를 둘러싼 여성진들의 모습도 보였다. 인원이 꽤나 되다 보니 인사하는 데도 한참이 걸릴 것 같은 느낌. 그중에 한 명이 이쪽에 달려와 뭔가 선물 같은 걸 안겨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원정 중에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안 그래도 나에게 접근하고 있던 정하얀이 그 모습을 보고 후다닥 달려오기 시작. 물론 선물을 넘긴 여자는 정하얀이 다가오기가 무섭게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뭔가를 도와준 기억은 없지만 자신은 도움 받았다고 생각한 모양. 고유 기벽을 확인하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직 죽지 않았구나, 이기영.’ 박덕구나 김현성 만큼은 아니지만 대중적으로 먹히긴 먹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검은백조의 인원들은 마차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손을 흔들었고 그렇게 우리는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두가 익숙하게 발걸음을 옮겼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 있는 것만 빼면 말이다. “이리 와, 막 사원.” -네…. 세상 밖으로 처음 나온 녀석이었다. 신기한지 린델에 도착한 이후에도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모습. 슬그머니 손을 내밀자 녀석이 그 손을 잡아오는 게 보였다. 저 멀리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 “디아루리아!” 디아루기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친 것만 봐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너무 알 수 있으리라. “똘똘아!” 오매불망 나를 기다리던 녀석이 마중 나온 것이다. 그사이 조금 더 큰 것 같은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발로 우다다 달려오는 녀석의 모습은 귀엽게만 보인다. 당연하지만 녀석은 어머니와의 멋진 재회 장면을 선택하지 않았다. 눈물을 흩뿌리는 디아루기아를 그대로 지나치는 것은 조금 가슴 아프게 보일 지경. 어쩔 수 없다는 듯 슬쩍 팔을 벌렸을 때 갑작스레 방향을 비트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어?” 눈에 비치는 모습은 상당히 비현실적. -아아아아아아악! 혼신의 일격을 담은 똘똘이의 몸통 박치기가 정확하게 막스의 가슴팍에 적중했다. “끄에에에에에에에엑!” [전설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 흑암룡 디아루리아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어둠 속의 비틀리고 위험한 애정] [#엄마도 같이 왔네] [#얘는 또 뭐야?] [#모르겠고 몸통박치기] [#성공적] # 253 회귀자 사용설명서 253화 세상에 나쁜 용은 없다(1) ‘이건 또 뭐야.’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행동이 멈춰버린 것은 당연지사.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는지 머리에 달려 있는 뿔로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막스의 얼굴은 확실히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독기를 품은 똘똘이의 얼굴과 눈을 꽉 감고 있는 막 사원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막 사원이 뒤로 넘어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끄에에에에에에에에엑!” 어딜 넘 보냐는 듯 콧김을 뿜고 난 이후 위풍당당한 자세를 유지하는 꼴이 가관이다. 덩치가 커 보여야 위협적으로 보인다는 건 용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인지 두 발로 몸을 일으켜 굳건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키엑! 헥헥!” 물론 이후에는 꼬리를 흔들어 온다. 이걸 쓰다듬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웃긴 일. 뭐라고 한 마디 쏘아 붙이려고 했을 때 먼저 들어온 것은 디아루기아의 고함이었다. “디! 아! 루리아!” 디아루기아의 똘돌이 사랑을 생각해 보면 혹시나 ‘왜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래요’를 시전할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눈에 들어가 있는 것은 황당함과 분노. 지금까지도 돌발 행동을 많이 보여준 녀석이었지만 이런 공격성을 내 보인 것은 처음인 만큼 확실히 교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리라. 잠깐 디아루기아에게 똘똘이를 맡긴 채 곧바로 막스의 상태를 확인하러 달려가기 시작. 고통이 익숙하지 않다는 듯 가슴팍을 부여잡고 있는 녀석은 자신의 몸을 더듬은 이후 황당하다는 얼굴로 몸을 내 쪽으로 밀착시켰다. “막 사원, 괜찮아?” “이, 이 대표님….” 본능적으로 이쪽과 함께 있는 게 안전하다는 걸 인지한 것이다. “끄에에에에엑!” 물론 그 모습을 보고 똘똘이가 비명을 지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디아루리아! 지금 뭘 한 거니?” “키엑!” “지금 그 태도는 뭐야. 네가 잘했다는 거니?” “끄에에엑!” “어째서 너는 항상….” “끄에에에에엑!”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이전에도 말하지 않았니? 어디서 그런 눈을 하고 엄마를 쳐다봐!” “키엑!” “엄마도 참을 만큼 참았어!” “끄엑!” “엄마도 드래곤이야! 드래곤!” 그 와중에 엄마에게 영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꼴은 가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콧김을 뿜어대고 있었다. ‘얘는 교육이 필요해.’ 확실한 교육이 필요하다. 이런 행동은 초기에 잡아줘야 하는 게 맞다. 지금이야 희귀 등급과 영웅 등급 사이라고 분류할 수 있겠지만 이후 전설급으로 성장한다는 걸 가정하면 평범한 몸통 박치기가 몸통 박치기가 아니게 될 수 있다. 애초에 방금 그것 역시 마찬가지. 막스가 평범한 꼬맹이였다면 크게 다쳤을 것이다. 이미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느낌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금부터라도 행동을 교정해야 했다. 결국에는 이쪽도 제법 진지한 포지션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조용히 입을 열어오자 똘똘이가 곧바로 고개를 휙 돌리기 시작. 디아루리아의 무심한 태도가 못내 속상한지 표정이 안 좋은 디아루기아 역시 고개를 돌렸다. “디아루리아.” “헥헥.” “지금 네가 한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지?” “헥….” “지금 당장 둥지로 돌아가. 오늘부터 외출 금지야. 노는 것도 전부 금지고 스스로 반성할 때까지는 놀아주지도 않을 거야. 이번에 원정 다녀오면 같이 지내자고 한 것도 전부다 취소고 같이 나들이 나가자고 한 것도 취소야. 간식도 금지니까 알아서 해.” “키엑?” 당황스럽다는 얼굴. 눈길도 주지 않자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하고 떨어졌다. “끼이이이잉… 키에에에엑….” 누가 봐도 나라라도 잃은 것 같은 표정이다. 용의 얼굴로 저런 불쌍한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 커다란 눈망울에서 연신 눈물이 떨어지는 모습은 언뜻 보면 귀엽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저 귀여움에 낚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자꾸만 시선이 가긴 하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키에에에엑! 끼이이잉. 끼이잉… 끼이이이잉….” 굳이 해석해 보자면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정도로는 택도 없다.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걸 교육해야 하는 것이다. 원정대원들은 한 번 더 막스가 괜찮은지 살피곤 길드 하우스로 돌아가는 중이다.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정하얀의 표정 역시 덩달아 심각해졌다는 것이었다. ‘얘도 느끼고 있는 건가….’ 자칫 잘못하면 자신도 똘똘이와 같은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방금 장면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을 테니까. 자신 역시 실수를 저지르면 똘똘이처럼 다른 곳으로 유배될지도 모른다고 느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다행인가.’ 안 그래도 저주받은 신단에서 주입한 약발이 슬슬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하얀 역시 다시 한번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 같은 느낌. 곧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상황이 찾아오는 만큼…. ‘일일이 케어해 줄 시간 없어….’ 사람 한 명, 한 명 일일이 케어해줄 시간이 없다. 물론 마력이 98이 되어 최상위권의 마법사가 된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주의가 필요하기야 하겠지만 일단은 당장 눈앞에 펼쳐져 있는 사업이 가장 중요하다는 거다. ‘당장은 안 터질 것 같으니까.’ 정하얀도 새로 얻은 힘을 스스로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만큼 당분간은 얌전하게 있어 줄 것이다. 방금 일어난 해프닝을 보고 있다면 더욱더 말이다. “끼잉… 끼이이잉….” -저 이 대표님. 왠지…. “신경 쓰지 마, 막 사원. 저런 행동은 고쳐야 되는 거니까.” -그렇지만 너무 서럽게 우시는 것 같아서…. “원래 저 나이 때 애들은 영악해. 적어도 며칠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곱씹어 봐야 돼.” -아… 네. “끄에에에에엥….” 뒤에서는 계속해서 똘똘이의 울음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할 일 많은데….’ 계속해서 내팽개치고 있었던 자식 교육인 만큼 이번에는 한 번 짚고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아무튼 간에 눈물을 흩뿌리는 똘똘이를 뒤로 하고 길드 하우스로 들어가자 오랜만에 보는 신입들의 얼굴도 시야에 비쳤다. 아침부터 망치질을 하고 있었는지 유아영은 조금 땀에 젖은 채로 반갑게 인사를 해왔고 이창렬도 고개를 숙이며 ‘수고하셨습니다’라며 우리를 맞이했다. 한소라 역시 최대한 정하얀을 피하며 개미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오기 시작. 다행히 파란의 새싹들에게 별다른 문제는 없어보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원정의 끝을 알리는 말을 내뱉었고 파티원들은 모두 저 마다의 방법으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시간은 우리에게는 휴식시간이기는 했지만 길드 직원들의 휴식 시간은 아니다. 사실상 저들은 지금부터 일이 생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김미영 팀장 역시 길드 직원들을 불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 당연하지만 길드 직원들을 총괄하는 입장에 있는 나 역시 마음 놓고 쉴 수가 없었다. 로비에 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내리기가 무섭게 할 일들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공식적으로 제국8좌 발표도 한다고 했는데….’ 이미 충분히 미룬 상황이라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는 일이다. ‘캐슬락 블랙마켓 쪽도 한번 들려야 하고….’ 제대로 일이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 ‘사업 들어가기 전에 분쟁도시 쪽 시장 조사도….’ 공화국 쪽으로도 제품이 들어갈 수 있는지도 생각해 봐야 되는 문제. ‘병아리들도 케어해 줘야 돼…. 흑마법 연구도 예정되어 있는 일이고….’ 그것뿐만이 아니다. 교황청과 연결고리가 끊기는 건 절대로 안 될 일이니 바젤 추기경과도 시간을 보내야 하고 마찬가지로 귀족부인들과도 다과회를 빙자한 뒷담화 타임을 가져야 한다. 그 와중에 박물관 제어장치의 연구와 여러 가지 사업들을 함께 진행시켜야 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편안하게 앉아서 쉴 여유가 없다는 거다. ‘하나씩 차근히 끝내자.’ 능력 있는 직원들에게 맡기기야 하겠지만 아예 맡길 수 없는 일도 존재한다. 길드 하우스로 돌아온 건 기쁘기도 하지만… 하나가 끝났다는 건 곧 새로운 하나의 시작. 이러다 단명하는 건 아닌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이쪽은 머리가 아파 뒈질 것 같은 상황. 그렇지만 모든 짐에서 해방된 박덕구는 벌써부터 떠들썩했다. “거, 형님. 남자들끼리 오랜만에 오붓하게 뜨끈한 물에 푸욱 몸이라도 담구는 게 어떻겠소? 기모 형씨도 갈 거고 형씨도 함께 들어간다고 했는데… 아, 창렬이도 함께 들어갈 거요! 막스도 같이 간다니까!” “개인 욕실도 있는데 뭐 하러….”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원래 이런 친목도모는 필요하다니까. 거, 공용욕실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다른 곳에 쓰라고 있는 거겠소? 이런 게 팀워크를 다지는 거요. 팀워크를!” “끄응…. 나는 조금 있다 들어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 있든지 해.” “거, 꼭 와야 된다니까!” “알았다, 덕구야.” 도대체 어디서 삘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단체 목욕에 단단히 꽂힌 모양. 그건 여성 팀도 마찬가진지 모두들 목욕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주범은 황정연과 박덕구이리라. “하얀 씨, 빨리 준비해요.” “아… 저, 저는… 괜찮….” “그러지 말고요.” 심지어 정하얀도 끌려가고 있다. 뭔가 도와달라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고는 있었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정말로 도와달라는 눈빛은 정하얀보다는 한소라 쪽. 아직 정하얀의 얼굴만 봐도 부들부들 떠는 상황이었다. 서로의 알몸을 보고 함께 목욕을 해야 한다는 건 그녀에게는 지옥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나도 들어가긴 해야 하나.’ 하긴 하더라도 일단 눈앞에 있는 일은 처리하는 것이 맞다. “김미영 팀장.” “네. 부길드 마스터.” ‘그나마 얘라도 없었으면 진짜 큰일 났을 거야.’ 장담컨대 김미영 팀장이 없었다면 이미 과로사했을 것이다. “혹시 자리 비운 사이에 편지 온 거라도 있었나요?” “아. 그렇지 않아도 말씀 드리려고 했었습니다. 바젤 추기경님으로부터 서신이 5개 정도 와 있었고 제시카 주교와 헬레나 이단심문관에게도 각 각 3개씩, 카트린 공작부인은 파티에 참여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답장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마를린 영애로부터는 정확히 144개의 편지가 도착해 있습니다. 그밖에도 타 길드는 물론 발신자를 알 수 없는 편지도….” ‘마를린 영애 144개는 또 뭐야.’ “발신자를 확인할 수 없는 편지요?” “네. 발신자 표시에는 약속 지키라고만 적혀 있었습니다.” ‘공화국 미친년인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많네요….” “네. 실리아에서 온 행사 초청장들도 많고 다완에서도 정식으로 초청장이…. 일일이 말씀드리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라. 아! 차희라 님께서도 린델에 도착하는 즉시 연락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끄응…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추려서 스케줄 정리해 주세요. 당연하지만 현성 씨 것도 같이요. 기왕이면 행선지 겹치지 않게 조정해 주시고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김미영 팀장 자녀분들이 지금 나이가….” “이제 막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물, 물론 길드 내 교육 프로그램에도 충분히 만족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는 게 더 좋다고 생각이 들어서….” “아아아. 그렇겠군요. 차라리 잘됐네요. 방금 같이 들어온 금발 꼬맹이도 그쪽에 들어갈 수 있는지… 아니 아니, 그냥 제 양자라고 말씀하시고 바로 진학 준비해 주세요.” “네.” “그리고… 검은백조랑 말 맞춰서 이번 원정에 대한 홍보도 부탁드리고요. 대륙 수호자라는 칭호를 얻었다는 게 중요하니 그 부분은 꼭 기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부길드 마스터.” “김미영 팀장이 있어서 그나마 좀 살 만한 것 같습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더 감사를 드려도….”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아뇨.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그럼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즐거운 시간되시길.” 막말로 쟤가 퇴사한다고 하기라도 했다간 이쪽의 입장에서는 대형사고다. 기회를 봐서 연봉이라도 한 번 더 올려줘야 될 것 같았다. ‘조금은 홀가분해졌어.’ 아직 일은 시작도 안했지만 그래도 조금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무거운 장비와 질척해진 짐을 내려놓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 박덕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욕실에 들어온 이후에는 나머지 장비들도 차곡차곡 벗어 놓기 시작. 아마 목욕이 끝난 이후에 길드 직원들이 수거해 가리라. ‘여기 와서 공중목욕탕은 처음인가….’ 사실 파란에 여러 가지 편의시설은 많지만 이용하는 건 처음인 것 같은 느낌. 대충 옷을 벗어 던지고 수증기로 가득 찬 욕실로 들어간 순간 박덕구의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크으….” “왜?” “키야….” “뭐?” “역시 형님은 형님이요!” 이자식이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수건이 허리춤으로 옮겨졌다. # 254 회귀자 사용설명서 254화 세상에 나쁜 용은 없다(2) “그런데 왜 갑자기 목욕이야? 취지는 좋기는 한데 너무 갑작스럽잖아.” 슬그머니 욕탕에 몸을 담그며 입을 열었다. 조금은 퉁명스럽게 불만을 내뱉기는 했지만 사실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네….’ 그동안 마법으로 간단히 씻기는 해왔지만 역시 이런 식으로 피로를 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물론 방에 있는 개인 욕실도 효과가 좋기야 하지만 아무래도 간부 공용 욕실로 만들어진 곳이라 그런지 조금 더 몸이 잘 풀어지는 느낌. 뭐, 분명히 예전에 리모델링 설계를 들었을 때 물 성분이 어쩌고 하는 설명이 있었는데 아마 그 효과인 모양이다. ‘미네랄 암반수 어쩌구 하드만.’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닌지 모두들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다. 특히 함께 원정을 나갔던 김현성과 안기모의 표정은 어느새 노곤 노곤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현성이가 여기에 있는 건 의외네.’ 사실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순순히 박덕구의 계획에 참가해 준 것도 사실 예상하지 못한 일. 김현성 같은 경우에는 왠지 모르게 이런 자리를 피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본인은 별로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이 새끼… 자신 있나 본데….’ 사실 김현성이 참가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회사의 사장님이 몸소 행차해 주시는 이런 자리를 피하는 것은 내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 질문을 던져놓고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을 때 박덕구가 별것 아니라는 듯 입을 열어왔다. “그야 친목도모라니까? 뭐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요.” “친목도모?” “아암. 친목도모지. 사실 신입들이 들어온 이후에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으니까. 끽해야 밥 한 번 먹으면서 환영회 해준 게 다고. 거, 우리야 튜토리얼 때부터 계속 같이 움직이고 같이 자고 뭐 그래서 친하지만 신입들은 그런 게 아예 없는 거 아니요. 여기 있는 창렬이도 그렇고!” “그렇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신입들을 내팽개치고 바로 원정을 온 게 마음에 걸려서 말이요.” ‘우리 돼지는 성격 하난 좋네.’ 솔직히 내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 이었다. 아마 녀석이 한 번 소외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더욱더 신경 쓰는 것이리라. 혹시나 새로 들어온 병아리들이 너무 뒤처지지는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는데….’ 이런 부분을 신경 써준다는 건 확실히 고마웠다. “그래서 정연 씨랑 같이 말 좀 맞췄다니까. 큼. 원래 단체 행사 같은 느낌이 들면 빠지기 조금 어려운 게 보통 아니요. 이렇게라도 억지로 살 맞대다 보면 다 친해지게 되어 있소.” “…….” “그리고 기왕 말이 나와서 하는 이야긴데… 사실 우리 남자 쪽이야 별 문제가 없기는 하지만 여자 쪽은 정말로 친한 느낌이 없다니까. 하얀이 누님이랑 희영이 누님도 그렇게 원정을 같이 다녔는데 아직까지 데면데면하고… 옆에서 보면 내가 다 어색해질 지경이요.” “확실히 친하다는 느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역시 우리 형씨도 그렇게 느끼는구만! 그리고 조혜진 누님도 매일 매일 원리 원칙만 외쳐대는 사람이다 보니 애초에 사교성이랑은 담 쌓은 사람 아니요? 예리 그 꼬맹이야 원래 대답도 제대로 안 하는 성격이고. 사실 이런 말 하면 조금 그렇긴 한데, 우리 길드의 여성 멤버들 중에는 정연 씨 말고는 성격들이 조금 개인주의적이라서….” “아아아아….” 생각해 보면 확실히 그렇다. 그 와중에 자기 피앙새를 챙기고 있는 모습은 당황스러웠지만 저 대사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파란의 여성 길드원 중, 그나마 제일 정상에 가까운 사람이 바로 황정연이다. “큼! 이런 베이스가 깔려 있는 상태에서… 한소라 그 사람은 하얀이 누님만 보면 벌벌벌 떨지…. 그나마 우리 가슴이 시키는 대장장이는 상황이 낫지만 정연 씨한테 들어보니 정말 총체적 난국이었다니까. 거, 오늘 마차 안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영이 형님이랑 현성이 형씨랑 같이 검은백조 마차 타지 않았소.” “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차라리 무슨 일이 있었으면 다행이게. 그 긴 시간 동안! 서로 한 마디도 안 했다는 거 아니요.” “어?” “진짜 내가 마차 안에서 괜히 눈치가 보였다니까! 그 먼 길을 떠나오는 동안… 예리랑 혜진이 누님이랑은 몇 마디 나눈 게 다고. 그나마 이야기가 나올라 치면 전부 일에 관련된 이야기에 정상적인 대화가 하나도 없었다니까! 이건 확실히 정상이 아니지! 그렇지 않소? 기모 형씨? 안기모 형씨!” “네. 만약에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랬을 겁니다. 뭐, 어떻게 무시하고 버틸 수 있을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아암. 그랬지!” “차라리 싸움이 일어나는 게 더 좋을 뻔했습니다… 딱딱해진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시도했지만…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더 좋을 뻔했죠. 아직도 그 표정이 잊히지가 않습니다.” 나와 김현성이 검은백조의 마차를 탔기 때문에 싸늘해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물론 박덕구는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더 신나게 입을 놀리기 시작. “창렬이도 한마디 하라니까!” “저는 아직 다른 분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서 말입니다.” “아암! 그, 그랬지. 그럼 거! 아영이와 소라의 관계는 조금 어떤지 말해줄 수 있나?” “딱히 뭐라고 정의할 정도로 연결점이 있는 건 아닙니다. 아까 덕구 형님이 썼던 표현을 빌려오자면 데면데면 하다는 게 어울릴 것 같군요.” “큼… 이거 보쇼! 이게 바로 파란 여성 멤버들의 현 주소라니까!” 조금 설득력 있는 것 같은 느낌. 아니, 확실히 설득되기 시작했다. “뭐,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이정도 뿐이고… 사실은 조금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것 같은 시기요. 이쯤에서 형님이랑 형씨가 힘 있게 쫘악 하고 나와줘야 하는데… 뭐, 단합 대회라도 한번 해야 되는 거 아니요? 나는 당연히 찬성이요. 다들 뭐라고… 말… 좀….” 시끄러웠던 박덕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을 때였다. “와아…. 아영 씨 정말 크네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 커질 수 있어요?” ‘어?’ 벽 너머에서 황정연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 지금까지는 대화의 집중하느라 듣지 못했던 소리다. 최대한 집중해야 겨우 들려올 것 같은 작은 목소리였지만 왠지 모르게 귀에다가 곧바로 때려 박듯 들리는 느낌이었다. ‘공사 개판으로 한 모양인데… 이거….’ 나름 괜찮은 업체에다가 돈을 쥐어줬는데도 불구하고 이러니 아주 날림으로 건물을 지은 모양. 이건 확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쪽의 목소리도 저쪽으로 옮겨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벽 쪽에서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왠지 모르게 자꾸만 귀로 마력이 들어간다. “잘,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어차피. 지방 덩어리에 불과.” “어머. 그건 아니지, 예리야. 얼마나 예쁜데….” “별로. 사람들이 너무 큰 건 별로 안 좋다고 했어. 응. 분명히 별로 안 좋다고 했어.” “글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일부 남자는 좋아하겠지만 아마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 겁니다. 통계적으로도 적당한 쪽이 취향이라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네. 그렇습니다. 적당한 쪽이 취향인 사람들이 분명히 많을 겁니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조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저 대사는 3박 4일 동안 반박해 줄 수 있다. 장담컨대 저 통계 수치는 날조된 수치일 것이 분명하다. “적당한 크기라면 역시 하얀 씨나 희영 씨 정도가….” “아뇨. 하얀 씨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봐도 평균 이상이고… 사실 희영 씨도…. 소라 씨 정도가 적당한 크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하얀 씨는 의외로 몸이 참 예쁘네요. 솜털도 하나 없으신 것 같은데.” “자, 자, 자꾸 보시면 부끄러워요.” “아, 죄송합니다.” 뭔가 자꾸만 상상하게 돼서 위험하다. 조금 더 자세한 묘사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어 황급히 자리를 뜬 것은 당연. 파란의 남성진 역시 화들짝 놀라며 욕탕에서 뛰쳐나왔다. 벽 너머로부터 묘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럼 조금만이예요. 제가 간지럼을 많이 타서….” “네. 알겠어요, 아영 씨.” “그, 그럼 저, 저도….” “아… 네. 그럼 하얀 씨도… 조금만이예요.” “별로 관심은 없지만… 저도… 부탁드립니다.” “잠, 잠깐만요! 그렇게 한꺼번에… 저, 저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여성진들 모두가 유아영의 압도적인 미드에 관심을 주고 있는 모양. 괜스레 더워졌기 때문에 빠르게 욕실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희가 착각을 했나 봅니다. 사이… 좋은 것 같죠?” 침묵이 드리운 장내에서 들려온 안기모의 작은 목소리. 그렇게 우기길 좋아하는 박덕구도 반박하지 못 한 채 고개를 숙여버렸다. 뭔가 제대로 된 마무리를 못해서 찝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목욕은 기분이 좋았던 게 당연. 그 와중에 혼자서 낑낑거리며 머리를 말리는 막 사원이 괜스레 가슴 아파 보였기 때문에 녀석의 머리를 수건으로 훌훌 털어버렸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 없어. 뭐라도 마실래? 아니 뭐, 마실 수는 있나?” -네. 기본적으로는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역시 박물관 밖으로 나오니 뭐라도 마시고 싶어지네요. “자, 여기 우유라도 먹어.” -감사합니다. “쯧. 아까 맞은 곳은 좀 괜찮고?” -네… 넵. 조금 욱씬거리기는 하지만 괜찮습니다. “네 누나 될 사람, 아니, 드래곤이야. 막 사원.” -아…. 뭔가 걱정하는 얼굴을 보니 조금은 우스워졌다. “내일부터는 바쁘게 움직일 생각해.” -네! “학교도 갈 예정이고… 연구도 빠르게 진행해야 하니까. 내 말 알아들어?” -아… 넵. 알겠습니다, 이 대표님. 그러고 보니 아직 녀석의 방을 정해주지도 않았다. 김현성에게는 먼저 들어간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인 뒤 막 사원을 데리고 나오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뜻밖의 디아루기아. ‘이 여편네가 왜 여기서 나와.’ 먼저 인사를 하기도 전에 황급하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뭔가 굉장히 민망해하는 느낌. 자신이 입을 열면서도 괜스레 내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뭐야?’ 둥지에 있어야 할 그녀가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다. 혹시나 녀석이 또 사고를 친 것은 아닌가 걱정되는 것이 당연했다. 곧바로 입을 열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내 예상과 달랐다. “저….” “무슨 일입니까? 혹시 똘똘이가 또….” “아!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지만….” “네?” “디아루리아를 이, 이만 용서해 주는 게 어떨까 싶어서….” “네?” “우리 디, 디아루리아가 너무 가여워서… 이미 충분히 벌도 다 받은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그… 같이 나들이 가는 걸 많이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많이 반성한 것 같으니까요. 저기… 그러니까….” 똘똘이 몸통 박치기 사건이 발생한 이후 3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물론 나도 이 육아에 있어서 잘한 것 하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 녀석이 이렇게 막장으로 커가고 있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만… 용서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255 회귀자 사용설명서 255화 세상에 나쁜 용은 없다(3)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시죠?” “이, 이미 충분히 반성하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게 반성을 하는 건지 예정되어 있는 일들이 틀어져서 억울해하는 건지는 모를 일입니다.” 둥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눈 감고도 보이는 것 같다. 아마 처음에 화를 내던 디아루기아도 똘똘이에게 내려진 형벌 아닌 형벌에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 아니, 애초에 내가 똘똘이에게 외출금지라는 말을 꺼낼 때만 해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된다고 것에는 분명히 공감하고 있었겠지만 둥지로 함께 돌아온 이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부짖는 똘똘이를 보니 마음이 약해진 것이 틀림없으리라. 당장 나 역시도 녀석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시선을 피했을 정도니 똘똘이를 지극히 아끼는 그녀의 반응이 어떤지는 뻔할 뻔자. 지금 이렇게 굳이 나를 찾아올 정도라는 걸 생각해 보면 녀석에게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에 답이 나온다. 아마……. ‘아빠한테 잘 말하고 올게.’ 라든가. ‘그냥 한 말이실 거야. 울지 마렴, 디아루리아.’ 라든가. ‘엄마가 도와줄게. 엄마만 믿으렴.’ 같은 방식으로 녀석을 달랬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땡깡을 부리는 꼬마 아이의 행동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예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똘똘이의 행동은 가지고 싶은 걸 사달라고 마트 한복판에서 드러눕는 꼬마와 다를 게 없다. 항상 그런 식으로 원하는 것을 얻었을 테니 이번에도 그 방법이 통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도 통했고….’ 디아루기아는 녀석이 드러누울 때마다 원하는 걸 끊임없이 사주는 부모님 이었던 셈. 어째서 녀석이 엄마를 우습게 보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들이도 금지라는 건 사실 그냥 해본 말이었습니다.” “아… 정말이십니까?” “네. 그렇지만 당신을 보니 이번에는 그냥 이대로 가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무슨 뜻으로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하기가….” “원하는 걸 전부 다 얻을 수 없다는 걸 가르쳐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뭐라고 할 입장이 아니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 똘똘이는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왔어요. 가끔은 떼를 써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무, 물론 말은 공감하지만….” “공감하신다는 분이.” “그렇지만 우리 디아루리아가 정말로 함께 나가는 걸 기,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 원정을 떠나기 전 해줬던 약속이지 않습니까. 디아루리아는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반성하고 있어요. 얼굴이라도 한 번 비춰주시고 잘 타일러 주시는 게….” “너무 물러요.” “디아루리아가 아빠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다마다. 기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왠지 모르게 찔리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자 이때다 싶었는지 다시금 말을 이어왔다.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당신이 둥지에는 들리지 않고 사랑을 주지 않았던 게 원인입니다. 안 그래도 아버지의 사랑에 목마른 아이를 그대로 방치한다는 건…. 물론 오늘 일은 디아루리아의 잘못입니다. 다만 아이가 숨을 쉴 구멍 정도는 열어 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그게 이유입니까? 단순히 똘똘이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입니다.” “저, 저를 뭘로 보고!” 어울리지 않게 얼굴이 붉어져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이쪽이 정곡을 찌른 모양. 그렇지만 사실 디아루기아의 말도 틀린 것은 없다. 막 이쪽이 똘똘이를 데려왔을 때는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을 정도로 바빴던 것으로 기억한다. 육아를 전적으로 디아루기아에게 맡겼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녀석과 시간을 보내면 많이 보내는 거였고 훈련소에 들어간 이후로는 한 달 이상을 보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나도 할 말이 없기는 없다는 거다. 그렇지만. ‘얘는 확실히 문제야.’ 고유 기벽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아마 똘똘이에게도 온갖 사랑과 관심을 쏟았던 것이 분명. 실제로 나와 함께 있을 때도 그녀가 똘똘이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마치 녀석을 상전 대하듯이 대한다고 느껴질 정도다. 애초에 디아루기아에게 자신의 삶은 없다. 모든 일이 똘똘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숭고한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건 당연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니 솔직히 그리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이건 얘한테도 문제야.’ 본인을 위해서라도 자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나에게도 뚜렷한 해결책이 없었던 것이 문제. ‘육아 어렵네.’ 솔직히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내가 지구에서 아이를 낳아본 것도 아니고 어디 유아교육과 같은 곳에 들어가 이론을 배워온 것도 아니다. 가지고 있는 지식이라고 해봐야 가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 같은 걸로 본 야매 지식뿐이었고 그마저도 즐겨보진 않았다. 아마 그건 디아루기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전문가가 필요해.’ 뭔가 현실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했다. 할 일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지만 이후에 똘똘이가 성장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결국에는 조용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오늘은 돌아가세요. 내일 아침에 찾아갈 테니까요.” “그, 그럼!” “아뇨. 내린 벌을 철회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만 그러니까… 우리 가족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네?” “아무튼 그렇게 알고만 계시면 됩니다.”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막 사원을 뒤로 하고 빠르게 서신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 * *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디아루기아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그… 전문가… 라는 분께 상담을 받는다. 이 말입니까?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왜 저희가 아이를 키우는 데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겁니까? 심지어 우리 디아루리아는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인데.” “뭐, 저도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빠지진 않을 겁니다. 뭐가 됐든 경험을 가지고 있고 배운 사람들의 조언은 도움이 되니까요.” “그건… 그렇기는 하지만….” “아… 혹시 어제 똘똘이는 제대로 잘 있었습니까?” “네. 어제는 아빠가 온다는 말을 듣고 잠들었었고… 오늘 아침만 해도 많이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나저나 그 전문가라는 분은 아이를 많이 키워본 사람입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단순히 유아교육에 국한된 것뿐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 걸쳐 있는 분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가족 심리치료사를 병행하고 있다고 하기도 했고… 이곳에 와서는 몬스터 행동분석가라는 감투를 쓰면서 여러 레이드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드래곤은 몬스터가 아닙니다.” “그건 당연히 알고 있지만 일단은 뚜껑을 따봐야 알겠죠. 사실 저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불러본 겁니다.” 예상했지만 디아루기아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 아무래도 그 전문가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은 모양. 당장 이 대륙에서 심리치료니 뭐니 하는 게 제대로 정착되어 있지 않으니 그녀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애초에 종족도 다르니까.’ 말하자면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다. 조금은 불편해 보이는 얼굴. 사실 나 역시 그렇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인간의 육아와 드래곤의 육아는 그 방식이 다른 것 같기도 했고… 단순히 몬스터라고 치부하기에는 용족들의 지능은 인간의 그것을 상회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똘똘이는 본능대로 움직이는 것 같기는 하지만.’ 시간도 없어 이지혜에게 도움을 받아 급하게 사람을 뽑았다. 이지혜 오피셜로는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그게 진짜일지는 두고 봐야 아는 일. 아무튼 간에 이쪽의 입장에서는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주는 걸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모르면 배워야지.’ 혼자서 꽁꽁 싸매고 있어봤자 문제를 푸는 속도가 더뎌질 뿐이다. 최소한 이쪽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배운 사람들에게 조언을 얻는 게 더 현실적이다. 둥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디아루기아와 자리를 잡고 기다리자 저 멀리서부터 사람 한 명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 인상 좋아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강현욱이라고 합니다. 그… 이지혜 님이 소개해 주신….” “아아. 네. 반갑습니다.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디아루기아입니다.” “이름 높은 분들을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설마 제가 이쪽과 연이 닿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하. 사람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더니 정말 신기하군요. 도시에 있을 때도 매번 이 커다랗고 웅장한 둥지를 보고 있었는데… 여기에 발을 들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것도 다 돈이죠. 뭐.” “저 같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겠죠. 하하. 어쨌든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박사님.” “그렇게까지 부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현욱 씨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파란 부길드 마스터.” “아… 네. 현욱 씨도 그냥 기영 씨라 불러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하하. 조금 부담스러운 호칭이니 이기영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생각보다 인상 좋은데…. 딱 그런 느낌이었다.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그다지 믿음직스럽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막상 만나서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사람 자체가 나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도움 되겠는데….’ 디아루기아도 나와 비슷한 기분인지 경계를 푸는 것처럼 느껴졌다. 함께 둥지로 올라가니 신기하다는 듯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기는 했지만 이것도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제법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게 시야에 비쳤다. “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현욱 씨?” “아. 일단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평소에 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따님과 행동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는지 먼저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뭔가 본격적인데….’ 벌써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공책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뭔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우다다 달려오는 똘똘이 때문인지 정말 저 사람이 있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렸다. “헥헥… 키엑! 끄에에에에에에엑!” 이번에도 역시 디아루기아가 먼저 달려가 봤지만 어머니는 가볍게 무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안기려는 모습에 역시나 녀석이 어제 있었던 일을 크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디아루리아.” 조용히 낮게 목소리를 깔자 그제야 낑낑대는 모습은 제법 영악하게 보일 지경. ‘얘 이거 문제 많은데….’ 지금 당장 다시 한번 다그치고 싶었지만 일단은 보는 눈이 있는 만큼 최대한 평소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이거 보라는 듯 디아루기아를 바라보자 얼굴에 수심이 드리운 것이 보인다. 눈물에 낚은 어머니 역시 녀석이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다. 그래도 똘똘이가 신나하는 모습을 보는 게 마냥 좋은지 한 발자국 뒤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함께 밥을 먹고 조금 이야기도 하고 놀아주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지난 상황. 배부른 똘똘이가 슬그머니 수마에 빠지고 나서야 강현욱 훈련사는 이쪽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무척 진지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운을 띄울지 궁금했지만 처음부터 꽤나 묵직한 팩트가 치고 들어왔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겠지만 디아루기아는 무척 충격 받은 표정으로 변했다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리라. “아이가 어머니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군요. 심지어는 완전히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아… 그게….” “게다가 아버지만 바라보고 있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이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일은 저렇게 행동하는 원인이다. “뭔가 이유가 있는 겁니까?”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되지 않은 아이들이 하는 행동에는 모두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여러 세세한 문제점이 보이기는 하지만 제 개인적인 판단으로 생각해 봤을 때… 가장 큰 문제는 보호자님들도 그렇게 사이가 좋아보이지는 않다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네?” “단순히 사이가 안 좋아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보호자 두 분이 서로에게 관심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 말고 따님 되시는 분 같은 어린아이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으로요. 몇 시간 동안 두 분이 대화를 나눈 시간이 채 30초도 되지 않다는 건 알고 계셨습니까?” “아….”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죄송하지만… 따님이 가지고 계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두 보호자님이신 것 같습니다. 이건 절대로 정상적인 형태를 하고 있는 가족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묵직한 팩트에 디아루기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256 회귀자 사용설명서 256화 세상에 나쁜 용은 없다(4) “그, 그게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아….” 누가 봐도 충격 받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딸의 일탈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 아마 여러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당장 나만 해도 왜 이지경이 됐는지 알 것 같은데….’ 애초에 정상적인 형태로 만들어진 가족이 아니었다. 디아루기아와 나는 이렇다 할 공통분모도 없었고 서로가 서로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다. 어떠냐고 묻는다면 조금은 불편해하는 편. 물론 안 좋았던 첫 만남의 인상은 커다란 둥지와 따뜻하고 질 좋은 음식들로 상쇄되기는 했지만…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도 그때의 인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부부라기보다는 그냥 함께 애를 키우는 사이. 말 그대로 그냥 함께 애를 보는 사이다. 당연하지만 스킨십 같은 것도 없었고 따뜻한 말 한 마디 나눠본 적이 없다. 똘똘이가 이 모든 행동을 모두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고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변화의 요소가 됐을 수도 있으리라. 우리의 표정을 확인한 강현욱 박사는 다시 한번 천천히 입을 뗄 준비를 했다. 전문가가 무슨 소용이냐고 이쪽을 타박했던 디아루기아는 어느새 전력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아직 정확한 진단이 끝난 상황이 아니지만 적어도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따님 되시는 분….” “디아루리아라고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네. 디아루리아 님께서 일단 아버지에게 과도한 집착 증상을 보이고 있는 건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조금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아마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초기 증상으로 보이는데… 두 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에 영향을 받고 있을 확률이 큽니다.” “아….” “보통 이런 종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빼앗기기 싫다는 감정으로 인해 생기는 집착이지만 두 분 같은 경우에는 조금은 종류가 다릅니다. 그중에서도 무척 희귀한 케이스로….” “네. 계속 말씀해 주세요.” “음. 설명을 드리기 전에 배경을 먼저 말씀 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이기영 님께서 가족에 할애할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것은 사전에 전해 들었습니다.” “아… 맞습니다.” “요즘 린델에서 가장 이름을 떨치시고 계시는 만큼 바쁜 게 당연하시겠죠. 문제는 그 덕분에 따님과 함께 보낼 시간이 줄어드시는 것일 테고… 이 부분은 이기영 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문제는 디아루리아 님은 부모님들이 자신에게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실질적인 원인은 조금 다릅니다만….” “아아아….” “저, 저 때문이라고요?” “예. 디아루리아 님은 아버지가 정확히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사회에서의 이기영 님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또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죠. 물론 들은 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따님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아버지가 자신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입니다.” “그, 그렇군요.” “어쩌면 보호자 분께서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이유를, 이기영 님이 디아루기아 님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있어서라는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이기영 님께서 타 여성분들과 함께 지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면 더욱더요. 실례되는 말일 수는 있겠지만 대륙에 넘어와서 이와 비슷한 경우를 본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인간이 아닌 몬스터였습니다만….” 혹시나 드래곤을 몬스터에 비유한 것으로 화를 당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그렇지만 들어도 나쁠 건 없다. 디아루기아야 확실하게 인간의 그것을 뛰어넘은 고등 생명체라고 할 수 있지만 똘똘이는 아직 이성이 본능을 앞서는 시기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흠. 전형적인 부계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는 그리폰들 사이에서… 분명히 이런 케이스가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폰 훈련소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저도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한 케이스죠.” “…….” “상황도 굉장히 유사했습니다. 수많은 암컷을 거느리고 있는 수컷이 유독 한 암컷에게 집착하기 시작한 이후였죠. 자연스럽게 다른 암컷들에게는 관심을 잘 주지 않고 발길도 돌리지 않은 것은 물론, 다른 암컷의 자식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결국 아버지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새끼 그리폰들 중 하나가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거 같더군요.” “그, 그게 뭔가요? 박사님.” 이제는 박사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몬스터인 그리폰을 예시로 둔 게 화가 나지도 않는 모양이다. “우리 어머니는 매력적인 여성이 아니구나. 그래서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구나. 그래서 나도 사랑받지 못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허….” “디아루리아 님의 경우에는 상황이 조금 더 심각합니다. 제가 설명 드린 케이스에 있던 그리폰은 일렉트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니까요. 어째서 디아루리아 님께서 보호자분께 심한 집착 증세를 보이고 있는지는 조금 더 알아봐야겠지만….” 그건 아마 고유 기벽 때문일 것이다. “아마 자신이 매력적인 암컷이 되어 아버지를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큽니다. 당연히 어머니를 무시하시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고요.” “그런….” “아마 어머니는 무가치하게 느끼고 있고 단순히 귀찮은 존재라고만 생각할 겁니다. 어째서 아버지와 함께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품고 있을 확률이 큽니다. 당연히 통제하기도 어려워지죠. 보호자님께서 따님을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계시다면 아마 그 정도가 더 할 겁니다. 보통 이 시기의 짐… 아니,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열을 매기기 때문이죠. 더 큰 사랑으로 극복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잘못 생각하시고 계셨던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증상이 가속되겠군요.” “이기영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아마 따님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좀 더 확고하게 해줄 뿐입니다. 물론 이 모든 건 추측에 불과합니다. 한 번 본 것으로 제 진단이 맞다고 확신을 내릴 수는 없겠죠.” 그렇지만 그럴 듯하다. ‘아니… 거의 귀신같은데….’ 특성으로 확인해 봤지만 당연히 사람이나 몬스터의 행동을 분석하는 특성 같은 것은 없다. 아마 수많은 케이스를 보고 들은 것은 물론 직접 일선에서 뛰어본 프로만이 내릴 수 있는 진단이리라. 지구에서나 대륙에서나 이런 재능으로 먹고 사는 것을 보면 확실히 범상치 않는 인물인 셈. ‘요건 친해져도 나쁘지는 않겠는데….’ 앞으로도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이었다. 디아루기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황급히 입을 열어오기 시작했다. “그, 그렇다면 방법이 없는 건가요? 계속 이대로….” 심지어는 울먹거리고 있는 모습. 그녀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하다. 사랑을 준만큼 무럭무럭 자라나기를 기대했던 똘똘이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단다. 심지어는 둥지 내 서열 최하위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충격받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가장 큰 감정은 정상적인 가정을 선물해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었다. ‘조금 불쌍한데….’ 어떻게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원인은 이쪽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아루기아야 자신이 잘못한 탓에 일이 이 지경까지 왔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정확한 원인을 짚어보면 누가 봐도 내가 범인이다. 어떻게든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리라. “무슨 방법이 있겠지.” “네.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아주 간단하고요.” “어머니로서의 권위를 되찾고… 저와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겠군요.” “네. 디아루기아 님도 그렇지만 이기영 님의 역할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기영 님부터 디아루기아 님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똘똘이뿐만이 아니라 디아루기아 에게도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것. “가능하다면 애정 표현도 많이 해주시고 따님에게 선을 그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영역은 어머니의 영역이고 네가 들어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어머니의 서열이 3위가 아니라는 걸 잘 이해시켜 주셔야 하고요.” “음… 그렇군요.” “당연히 디아루기아 님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이제까지는 아낌없이 사랑을 쏟아주셨다면 지금부터라도 그 사랑을 조금 줄여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쉽지 않으시겠지만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이기영 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도 많이 보여주시고요.” “네.” “물론 어려울 겁니다. 머릿속에 이미 고정되어 있는 생각을 바꾸는 게 쉽지 않을 테니까요. 괜한 걱정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아마 처음에는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일 확률이 큽니다.” “격렬한 거부 반응이요? 그럼 어,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그래도 계속 진행하셔야 합니다. 단호해 지셔야 합니다. 보호자 님.” “아… 네.” “따님에게는 마음이 약하신 것 같아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디아루기아 님.” “…….” “단호해지셔야 합니다.”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본 것만 같은 명대사. 디아루기아의 귓가에는 아마 저 목소리가 계속 맴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뭔가 결심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깨무는 모습. 심지어는 주먹을 꽉 쥔다. 막상 저렇게 해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이 가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결심을 해줬다는 건 칭찬하고 싶은 부분. ‘연기할 일이 많네.’ 안기모에게 개인 교습이라도 받아야 되는 건 아닌지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을 해 볼 정도였다. 그렇게 1차 상담이 시작되고 난 이후에 다음날. 김미영 팀장에게 억지로나마 모든 스케줄을 뒤로 미루게 해달라고 한 이후에는 다시 한번 둥지로 출근했다. 하루 종일 함께 있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 정하얀을 달래야 했던 것은 당연지사. 혹시나 또 그 눈으로 나를 감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막스와 함께 연구를 진행해 달라는 작은 숙제까지 내고 나왔다. 그나마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다면 이쪽을 훔쳐보지 않을 확률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다시금 잠에 빠져든 율리에나는 검집에 봉인하다시피 묶어놓은 이후에 방에 두고나왔다. 어차피 최근의 린델은 아직은 그 검을 제대로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간에 이쪽은 꽤 중요한 숙제를 앞두고 있었다. ‘똘똘이 갱생 프로젝트.’ 강현욱 박사의 솔루션을 시험해 보기로 한 첫 날이다. 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디아루기아 역시 준비가 되어 있는 건지는 의심스럽다. 아무튼 간에 활시위는 당겨졌고 화살은 시위를 떠나간 상황.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고서는 바뀌는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후우….’ 힘든 발걸음을 둥지로 옮기자 역시나 저 멀리서부터 헥헥 대고 있는 똘똘이가 시야에 비쳤다. “키에에에엑! 헥헥! 헥!” 제 어미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겠지만 정말로 이틀 연속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는지 지나치게 흥분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꼬리가 붕붕붕 흔들리는 것은 물론 침까지 흘리며 뛰어오는 모습은 가관이다. 커다란 눈망울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꽉 껴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단호해 지셔야 합니다, 보호자님.’ 슬쩍 몸을 피한 이후에 곧바로 둥지로 뛰어들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디아루기아를 품에 안았다. 미리 말을 맞춰놓은 덕분인지 그녀 역시 나에게 뛰어들듯 안기기 시작. 누가 봐도 어색한 애정 표현이다. “오셨어요?” “…….” “끄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바로 뒤에서 비명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257 회귀자 사용설명서 257화 세상에 나쁜 용은 없다(5) ‘아마 처음에는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일 확률이 큽니다.’ 괜스레 강현욱 박사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하늘이 떠나가듯 내지른 울음소리는 누가 들어도 지금 녀석이 흥분했다는 걸 알려준다. 슬쩍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보니 눈에서 불똥이 튀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쟤 왜 저래.’ 콧김을 씩씩 뿜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은 조금 무섭게 보일 지경. 지금 당장에라도 이쪽으로 몸을 던질 것 같은 자세였다. 디아루기아도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을 보인 것은 당연했다. 저 정도로 거칠게 반응할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야.’ 몸을 날려 저 어미에게 몸통박치기는 하지 않았으니 아직은 생각이라는 게 있는 모양. 물론 지금 당장에라도 몸을 날려 올 것 같은 자세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참았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아직 너무 늦지는 않은 것이다. 만약 초장부터 그런 모습을 보였다면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심각히 고민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똘똘이도 잘 지냈지?” “키에에엑!” 똘똘이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은 디아루기아와 인사를 한 이후. 뭘 하든 엄마가 첫 번째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강현욱의 솔루션이었다. 자꾸만 헥헥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쪽을 봐달라는 듯 방방 뛰고 있었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것 이외에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지만 눈을 애써 마주치지 않은 채로 디아루기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반말로 하고 싶었지만 이게 더 편하다. 다만 친근한 느낌을 듬뿍 담아 이야기하니 눈앞에 있는 용은 욕지기가 올라오는 모양인지 안색이 안 좋아졌다. ‘그야 그럴 만하지.’ 당장 나조차도 디아루기아가 보여주는 친근한 모습이 어색해 미칠 지경이다. 물론 인간으로 폴리모프 한 그녀의 외관은 충분히 아름답지만 이쪽의 취향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는 게 현실. 애초에 뭐 그런 마음도 들지 않는다. 물론 아주 정상적인 기벽을 가지고 있는 그녀 역시 내가 탐탁지 않아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일 터. 서로가 서로를 이성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당사자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연기를 해야 하니 어려운 게 당연하다. “아니요.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똘똘이는?” “아직….” “간단히 식사라고 해야겠군요.” “안 그래도 당신이 온다고 해서 준비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들어가시죠.” ‘어색해.’ 정말로 어색해 미치겠다. 최대한 친절한 표정을 유지하며 활짝 웃고 있는 디아루기아의 얼굴도, 그리고 왠지 모르게 한껏 꾸민 것 같은 외관도 무척이나 어색하다. 커다란 뿔을 중심으로 잘 정리되어 있는 머리는 오늘따라 더 찰랑거리고 있었고 화장이 필요 없는 피부에도 뭔가 바른 느낌. 옷차림 역시 조금은 신경 쓴 듯한 느낌이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맞았는지, 린델 광장을 돌아다니는 20대 여성들을 흉내 내려고 노력한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그리 어울리지는 않지만….’ 아무튼 간에 아름답다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외관이라는 거다. 똘똘이가 본인을 매력적인 여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에 충격이라도 받은 것이 분명하리라. ‘분명히 그렇겠지.’ 인간의 모습이 이 정도로 변했다고 생각하자 드래곤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물론 내가 드래곤들의 미의 기준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검정색 비늘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것이 분명. 아무튼 간에 이 가족 같지 않은 가족은 약간의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천천히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똘똘이는 계속해서 육탄공세로 이쪽의 관심을 돌리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조언을 받은 대로 필요 이상의 관심을 주지는 않았다. 물론 아무 반응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단하네.” 라거나. “귀엽네, 우리 똘똘이.” 기껏해야 이 정도가 전부다. 평소였다면 박수를 치며 녀석의 이곳저곳을 쓰다듬어 줬겠지만 이전만큼의 열렬한 반응은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디아루기아에게 더 많은 말을 건넸고 더 많은 시선을 보냈다. 물론 그걸 보고 잔뜩 흥분한 녀석이 또 소리를 지르기는 했지만 이곳부터는 너의 영역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 누가 봐도 최대한 디아루기아를 아껴준다는 듯이 행동했다. 똘똘이 자신이 2순위로 밀려났다는 걸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식사는 어떠셨습니까?” “맛있더군요.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앉아계시면 됩니다. 설거지는 제가 할 테니까요.”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요즘에는 사냥을 나가지도 않고….” “아닙니다. 제가….” “그럼 같이 하도록 하죠.” “정말로 괜찮은데….” “아뇨. 같이합시다.” 나답지 않은 발 연기. 장담컨대 똘똘이 녀석이 아니라면 속아 넘어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디아루기아와 합을 맞추는 게 힘들다. 그래도 상황 자체가 나쁘지 않다는 게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 단란하게 옆에 서서 접시를 쓱쓱 닦고 물로 행구는 과정은 굉장히 귀찮았지만 어깨가 살짝 닿고 있는 모습 자체는 로맨틱하다. 물론 웃음기가 하나 없이 서로 할 일만 하는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간지럼을 많이 탄다고 했었나.’ 이전에 한 번 실험하다 깔릴 뻔한 적이 있기 때문에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거품 묻은 손으로 슬그머니 디아루기아의 손을 매만지자 지금 뭘 하냐는 듯한 눈빛이 쏘아져 들어왔다. 물론 굳이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내 손을 뿌리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살금살금 손등을 긁자 금방 쿡쿡 거리기 시작하는 걸 보니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 간지럽습니다. 쿠쿡….” “하하.” 너무 뻔한 그림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효과적인 그림. 계속 이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건네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여는 쪽이었고 그녀는 들어주는 쪽이었다. 보통은 도시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를 이루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로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은 있다. ‘나쁘지 않은데….’ 애초에 오랜 시간 이야기한 적이 그다지 없었던 만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 수록 단점보다는 장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생각보다는 대화도 잘 통하고 의외의 곳에서 죽이 잘 맞았다. “쿠쿡. 그거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로군요.” “어? 정말 그렇습니까?” “네. 최근에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박물관 관리인은 조금 괜찮아 진 겁니까?” “지금은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니까요. 아무래도 보통 아이보다는 튼튼하니까요.” “하시는 일은 조금 어떻습니까?” “이제 막 연구에 들어갔으니 아마 금방 성과가 나올 겁니다.” “신기하군요.” “어떤 게 말입니까.” “한 장소에서 여러 방향으로 마력 홀로그램을 송출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예전부터 인간은 그랬었죠. 신기한 물건을 많이 만들어내고는 했습니다. 저는 사실 인간들에게는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조금 신기하군요. 제국의 옛 고서를 찾아보면 드래곤은 마법 수준이 상당히 뛰어나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보통 그런 오해를 많이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시면 답을 찾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저희 종족은….” “음… 필요하지 않겠군요.” “네.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배울 수는 있습니다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이들은 대부분 인간 세상에 관심이 많죠. 물론 이들은 다른 어른 분들에게 별종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고요. 어떻게 보면 인간들은 참 대단합니다.”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그들은 약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발전합니다. 무구를 만들고 마법을 배우고 새로운 것들을 계속해서 찾아 해맵니다. 물론 그 욕구가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때도 많았지만 이로운 결과를 가져올 때도 분명히 있었죠. 솔직히 말하면 당신에게도….”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 “흘려들으셔도 됩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말씀해 주시죠, 임자.” “그런 호칭은 지, 징그럽습니다.” “아이가 보고 있습니다.” “…….” “…….” “정말로 궁금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디아루기아.” “별것 아닙니다. 앞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당신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 용 숨결 물약이라는 것도 이전에 만든 혈청도…. 당신이 다른 인간에 비해 신체 능력이나 마력 친화력이 부족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 그렇죠. 굳이 나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첫인상과 다르게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울분이 터지니 언급하지 말아주셨으면….” “아. 알겠습니다. 풉.” “풉.” 내가 살짝 웃자 디아루기아도 슬그머니 웃음을 터뜨렸다. 저건 연기가 아니다. 첫 만남이 생각나자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온 것이리라. 그렇고 그런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온 걸 떠올려보니 본인도 황당한 모양이다. 인간과 함께 가정을 이루고 인간들이 사는 곳에 사는 자신의 모습은 분명히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짜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사는 삶도 썩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은근히 분위기 좋네.’ 역시 괜한 연기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쪽이 더 좋다. 어느 순간부터는 똘똘이의 우렁찬 비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이 분위기를 이어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살짝 손을 들어 디아루기아의 머리를 넘기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보였다. ‘예쁘긴 예쁘네.’ 커다란 뿔 때문인지는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묘하다. 얼굴이 묘하게 붉어진 것을 보니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정도 애정 표현은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마 지금쯤 속으로는 똘똘이를 위해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줘야 된다고 결의를 다시금 다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충분히 화목한 것 같은데….’ 조금 더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마에 뽀뽀하도 해줘야 되나 고민했을 때 똘똘이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엄마에게 떼어내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얘는….’ “끼이이잉. 끼이이잉… 끄에에엑!”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힘으로 나를 떼어놓으려는 모습이 가관이다. 몸에서 힘을 빼면 녀석에게 끌려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격렬한 저항이었다. “끄에에에에엑!” 심지어는 그 커다란 눈에서 이러지 말아달라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얼굴은 누가 봐도 비련의 여주인공이었으며 도둑고양이에게 남편을 빼앗긴 아내의 모습이었다. ‘이거 니 엄마야, 똘똘아.’ “끼이이잉… 끼잉….” 울컥 울컥 튀어나오려는 눈물을 보이는 것은 물론 자꾸만 지어미를 노려보는 꼴은 가관. 혹시나 강현욱의 진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건 필요한 일이다. ‘아암. 필요한 일이고말고… 가정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지.’ 천 리도 한 걸음부터. 지금에야 당장 엄마에게 아빠를 뺏기기 싫다고 난리를 치겠지만 계속해서 반복적인 학습을 하다보면 녀석도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 걱정되는 것은 ‘디아루기아가 녀석의 눈빛을 견딜 수 있느냐’겠지만 결의에 찬 표정을 보니 충분히 감내해 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랑 이야기하고 있잖니, 똘똘아. 자꾸 이러면 안 된다.” “끄에에에에엑!” “쓰읍! 계속 그렇게 떼쓰면 못써요.” “끼이이잉… 헥헥… 헥.” 어떻게든 시선을 끌어보려는 듯 내가 소싯적 가장 좋아했던 방방 뛰기 포즈를 선보였지만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저러고 있으니 가슴만 쓰라릴 뿐이었다. “자꾸 이러면 안 돼요. 가끔은 혼자 있을 수도 있어야지.” 디아루기아도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디, 디아루리아. 아빠 말 들어야지?” 확실히 단호한 어머니의 표정. 바로 그거라는 듯 디아루기아를 바라본 채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싫… 싫어!!!”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에 다시 한번 뒤를 돌아봤을 때, 내 눈에 비친 것은 디아루기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여자아이. “어? 똘똘이?” 더 이상 이 애칭을 사용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외관이었다. # 258 회귀자 사용설명서 258화 세상에 나쁜 용은 없다(6) ‘이게 뭐야.’ 무척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아직도 씩씩대고 있는 똘똘이의 외관은 누가 봐도 디아루기아의 딸. 머리에는 아직 덜 자란 뿔이 있었고 작은 키에 커다란 눈망울은 전성기 때 녀석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귀여움이 최고조였던 작은 똘똘이 시절. 덩치가 순식간에 커지고 나서는 볼 수 없었던 귀여움이다. 머리카락은 딱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고 피부 역시 어머니처럼 새하얗다. 처음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은 착실하게 옷을 입고 있다. 디아루기아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똘똘이가 입고 있는 옷 역시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 굉장히 유사했다. 심지어는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에서도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 지경. 둘이 인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앉아 있는 포즈가 매우 흡사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영향을 받기는 받는 모양인 것 같다. 입을 앙다물고 있는 표정도, 뿔 주위에 있는 머리를 매만지는 습관도, 한쪽 다리도 땅을 딱딱 치는 행동도 비슷하다. ‘진짜 닮았는데….’ 디아루리아가 나이를 먹는다면 외관 역시 무난하게 어머니를 따라갈 것 같은 느낌. ‘차이점이 있기는 한데….’ 그래봤자 붕어빵이라는 거다. 물론 내 팔을 꽉 껴안은 채로 어머니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본인에게는 이런 행동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사이에 디아루기아가 조금 흥분한 것 같은 모습으로 입을 열어왔다. 물론 똘똘이를 향해서였다. “디아루리아… 이게 어떻게 된 거니? 이렇게 갑자기….”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사태가 수습된 이후의 디아루기아의 표정이 조금은 기뻐보였다는 것. 정확한 설명을 듣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시기에 인간형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이례적인 일인 것 같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예상과는 다르게 디아루리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혼자 인간형으로 변신해 버렸으니 어쩌면 속으로 우리 딸은 역시 영특하다는 생각 따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비난하는 건 아니다. 당연히 할 수 있는 생각이기도 했고 기뻐할 만한 사건이기도 했다. 조금 불만이었던 것은 꼭 이렇게 티를 내야 했냐는 것에 있다는 거다. ‘잘 되고 있었는데….’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사태가 새로운 국면으로 흘러갔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긍정적인 부분도 있고 부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똘똘이를 컨트롤할 수 있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긍정적인 부분에 점수를 더 많이 주고 싶었다. 그전에도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적으로 말이 통하게 된다는 건 똘똘이를 제대로 달랠 수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 디아루기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로 아직까지 이쪽만 바라보는 모습은 가관. 디아루기아가 잠깐 동안 섭섭하다는 기색을 내비쳤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디아루리아, 엄마 말에 집중해야지.” 저 꼬마를 혼내는 건 굉장히 어색하다. 한마디 내뱉자 실수했다는 듯이 눈치를 본다. 내가 없을 때 디아루기아를 어떻게 대했는지 눈에 보일 정도. 용이 였던 상태였을 때도 아마 이런 태도로 하루하루를 보냈으리라. ‘얘는 진짜 보살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똘똘이에게 과도할 정도로 애정을 쏟아내는 어머니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모성애라는 건 원래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디아루리아, 기분은 조금 어때? 거, 걸을 수는 있겠니? 마력도 괜찮고… 대단하구나. 엄마는 100살이 넘어서야 디아루리아처럼 할 수 있었는데….” ‘그런 말 해주는 거 아니야. 이 여편네야.’ 장담컨대 띄워주면 띄워줄수록 디아루기아를 우습게 볼 것이다. 물론 내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이 나이대의 아이들은 대부분 단순하고 1차원적이다. “똑똑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또래 애들보다 마력도 높고….” ‘띄워주지마.’ “말도 곧바로 할 줄은 몰랐는데… 정말 대단하구나.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엄마한테 이야기해 줄 수 있겠니?” ‘띄워주지 말라니까.’ 도대체 어제의 조언을 듣기는 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진짜 팔불출이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결국에는 개입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 당연. 곧바로 입을 열자 나를 바라보는 똘똘이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다지 권위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권위적인 가장이 되어야 한다. “루리아.” “으응! 아빠!” “엄마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야지.” “아, 으응….” “그리고 자세도 똑바로. 그 동안은 아무 말 안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네 엄마는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저번에 했던 네 행동을 용서하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용서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 거야. 네가 성장해 성과를 이룬 건 물론 기쁘지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좋지 않아. 혹시 전부터 계속 엄마를 이런 태도로 대한 건지….” “그, 그건 아니예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조심해 줬으면 좋겠구나.” ‘잘 말했어.’ 특히나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엄마한테도 ‘잘못했습니다’ 해야지.” “잘… 못했습니다.” “괜, 괜찮단다. 디아루리아…. 우리 디아루리아가 사과를 다하고… 엄마는 괜히 눈물이 나네….” “가서 한 번 껴안아 드리고.” “응.” 고개를 꾸벅 숙이고 우다다 달려 들어가 푹 안기는 똘똘이의 모습에 어머니는 감격했는지 슬쩍 손을 눈가로 가져갔지만 솔직히 사태가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아직 내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고 왠지 모르게 연적을 보는 것 같은 눈빛도 여전했다. 지금 당장은 참지만 내가 자리를 비우면 언제든지 태세전환을 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이런….’ 인터넷에서나 보던 일이 현실로 그것도 더 심각하게 일어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변한 디아루리아의 모습을 보니 먼발치에 있었던 게 눈앞까지 치고 들어온 것 같은 느낌. 그만큼 용의 외관을 한 것과 인간의 외관을 한 것은 차이가 있다. 물론 돌봐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디아루리아는 어디까지나 애완동물 같은 느낌이 더 강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간형으로 변한 모습을 보니 없던 책임감도 생긴다. ‘이런 건 질색인데….’ 막연히 아빠가 됐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조금 더 자각하게 됐다는 거다. ‘이제 어쩌지….’ 괜한 생각에 빠졌을 때 들려온 것은 디아루리아의 목소리. “저 아빠. 그런데요.” “응?” “저도 이제 아빠랑 매일 같이 있을 수 있어요?” ‘이래서였는데….’ 커다란 부담감이 괜스레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연하지만 이쪽이 똘똘이의 진짜 관심사인 모양. 사실 디아루기아를 질투하는 마음도 마음이지만 역시나 떨어져 지내기 싫은 게 가장 큰 모양이다. 어째서 대륙에 와서 자리 잡은 플레이어들의 출산률이 떨어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다. 디아루기아는 똘똘이의 한마디에 또 가슴이 찡해졌는지 괜스레 가슴 아파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중. 이런 답을 주기는 싫지만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훨씬 낫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해.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당장 다음 주 부터도 할 일이 많아져서… 아빠가 바쁜 건 이해하고 있지?” “네….” “그렇지만 할 일이 조금 줄어들면 매일 있을 수 있을 거야. 물론 다음주부터라도 일이 끝나면 잠깐이라도 들릴 수 있도록 노력해 보마.” “정말요?” “물론. 자, 약속하자. 그 대신 루리아도 약속해 줘야 한다.” “어떤….” “첫 번째는 엄마 말을 존중해 주고 잘 대해 줄 것. 두 번째는 그저께 봤던 동생에게 사과하고 앞으로도 잘 지낼 것. 아… 한 가지만 더. 인간 세상에서도 사람들과 잘 섞이며 얌전히 지낼 것. 세 가지만 잘 지켜주면 아빠도 루리아가 너무 좋아질 것 같은데….” “지킬 수 있어요! 지킬 수 있어!” “정말?” “으응! 지킬 수 있어!” ‘아빠도 루리아가 너무 좋아질 것 같은데…’라는 대사가 결정적이었던 모양이다. 천천히 손가락을 걸고 약속까지 하니 기분이 좋은지 이쪽에 꽉 안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너무 좋아!” 가슴에 얼굴을 제대로 묻은 것 같은 느낌. 용이었을 때의 습성이 남아 있는지 꼬리 대신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것만 아니라면 봐줄 만한 모습이었다. 이제는 조금 묵직한 분위기의 아버지로 노선을 변경하고 싶었지만 막상 이런 식으로 앵겨오니 무거운 모습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밀어내기 어렵네.’ 지금 이 타이밍에 밀어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디아루기아와도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던 만큼 지금 당장은 쓰다듬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톡톡 두드려주니 발라당 누워 배를 만져달라는 듯 애교를 부리고 있다. 외관만 사람이지 하는 행동은 영락없이 똘똘이 그 자체. “그릉… 그릉….” 턱 아래를 슬슬 쓰다듬어주자 그릉 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꼴은 가관. 헥헥 대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만약 혓바닥이 길었다면 예전처럼 볼이라도 핥을 것 같은 기세였다.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키엑! 키엑! 키엑!” 방방 뛰며 특유의 울음 소리를 인간의 목소리로 내고 있는 모습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 ‘이래서 딸 바보가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일반적인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똘똘이였을 때의 한 행동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위화감이 없었다. 이렇게 보니 용의 모습이 언뜻 언뜻 보인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디아루기아를 발견한 것은 똘똘이 축제가 중 후반부에 들어서고 있었던 그때. 몇 발자국 뒤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이쪽으로 오라는 뜻을 담아 손짓하자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참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똘똘이는 옆에 있는 엄마를 굉장히 경계하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막상 함께 있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니면 나와 했던 약속이 떠올랐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현재 똘똘이보다 더 즐거워하는 것 같은 사람은 디아루기아. 매번 먼 발치에서 이루어졌던 똘똘이와 나만의 작은 축제에 한 일원으로 참가하는 게 상상한 것보다 더 기분 좋은 모양인지 방방 뛰고 있는 똘똘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은 엄마한테 달려들어 아까처럼 어색한 포옹을 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격해지는 감정을 참을 수 없는지 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돌리고는 했다. 강현욱 박사의 솔루션이 효과가 있었는지 없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녀석이 반응을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본 것 같은 느낌. ‘이게 가족이다. 가족.’ 아직 콩가루이기는 하지만… 불과 며칠 전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괜찮은 그림 하나는 만든 것 같은 기분. 딱 이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맞다. 물론. “아빠 너무 좋아!” 눈에 비치는 기이한 열망은 아직까지 불안하지만 저 정도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리고 굳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전설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 흑암룡 디아루리아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어둠 속의 비틀리고 위험한 애정] [#왜 똘똘이라고 안 불러주지?] [# 잘 모르겠지만 아빠는 내 거.] [#엄마한테도 안 줄 거야.] [#사랑은 변하는 거야.] 분명히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 259 회귀자 사용설명서 259화 공식발표(1) 똘똘이의 문제는 일단락 지어졌다. 단기간에 극적으로 똘똘이가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는 있었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극적으로 바뀐 것은 어디까지나 녀석의 겉모습 뿐이었다. 물론 아예 달라진 게 없는 것은 아니다. 디아루기아는 조금씩 조금씩이지만 집 안에서의 위치를 되찾아가고 있었고 똘똘이 역시 어머니의 자리를 인정해 주는 듯했다. 여전히 그녀가 나와 붙어 있을 때면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해 점프를 한다든가 하는 돌발 행동을 하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귀여운 수준. 눈에 확 보이지는 않지만 녀석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물론 이 변화가 똘똘이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디아루기아는 매일 매일 행복한 비명을 내지르는 중이다. 별것 아닌 똘똘이의 호의에 크게 감동하거나 이전과는 달라진 녀석의 행동을 곱씹고는 했다. 당연히 디아루기아는 받은 만큼 똘똘이에게 더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보기에 그다지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녀석이 엄마 품에서도 떨어져 봐야 한다는 게 내 개인적인 판단. 결과적으로 똘똘이는 막스와 함께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디아루기아는 드래곤인 똘똘이가 인간의 교육을 받는다는 게 내키지 않은 듯했지만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게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올바른 판단이었다. 물론 이런 결정은 강현욱 박사의 추천이기도 했는데 특이하게도 이번 솔루션은 똘똘이 때문이 아닌 디아루기아를 위한 솔루션이었다. 디아루기아에게 개인적인 시간, 즉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이가 생기고 난 이후에 점차 자신을 잃어버리는 어머니들이 많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육아 우울증?’ 디아루기아가 강현욱 박사가 지구에서 사용하던 테스트에서 무척이나 높은 점수를 기록한 것. 모든 수치가 천장을 뚫을 것처럼 되어 있었으니 걱정되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디아루기아는 그럴 리가 없다며 웃어넘기기는 했지만 수치로만 봤을 때는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의 판단. 표현하는 게 서투른 용이 가슴 한편에 스트레스를 쌓아왔던 것이다. 똘똘이가 학교에 간 사이에 할 수 있는 취미를 찾아보는 한편, 전력으로 그녀를 서포트하게 된 것은 당연지사. 디아루기아는 갑작스럽게 늘어난 자유 시간에 뭘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찾았지만 표정만은 나날이 좋아졌다. ‘나는 아니지만….’ 물론 나는 그녀와는 완전히 반대의 포지션에 서 있었다. ‘너무 바빠….’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로 몸을 쉴 새 없이 놀리기 시작한 것. 미뤄져 있는 일을 한 번 더 미룬 셈이니 이쪽으로 일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덕분에 한숨 돌릴 여유도 없다는 표현이 어떤 건지 몸소 깨우치게 됐다. 굳이 정리해 보자면 전체적으로 벌인 일은 세 가지였다. 1. 교황청 인맥 관리. 그 동안 만나지 않았던 바젤 추기경과 다시 한번 만나 해후를 풀었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현 신성제국의 교황이 나이가 너무 들어 곧 신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 당연히 세 명의 추기경 중에 한 명이 교황으로 선출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중에서도 바젤 추기경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를 본인에게 직접 전해 들었다. 만약에 바젤 추기경이 교황이 된다면 바젤 쪽에 줄을 댄 이쪽의 위상도 함께 올라가는 것이 당연지사. 어쩌면 명예주교에서 조금 더 높은 신분을 받을지도 모르는 만큼 정신없이 바젤 추기경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손바닥을 비벼댔다. 바젤 추기경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에 대주교로 올라선 제시카 대주교와 헬레나 이단 심문관과도 서로의 끈끈한 우정을 확인하는 기도회를 가졌다. 그 밖에도 교황청내에 관련된 인사들과 회식이니 봉사니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한 것은 당연했다. 주교급 라인은 굳이 내가 계속해서 관리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번 교황청 방문에는 선희영을 대동했다. ‘분위기 좋았지.’ 그야말로 모범적인 사제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선희영이 주교들과 친해진 것은 당연한 수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친밀한 것 같았기 때문에 바젤 추기경 이외의 일들은 전부 인계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2. 귀족들과의 인맥 관리. 교황청만큼 황제파를 관리하는 것도 중요했다. 물론 직접적인 끈이 교황청에 있는 만큼 사교계에는 그만큼 비중을 두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토 소우타 사건 때 큰 힘이 되어준 카트린 공작부인을 포함한 귀족부인 군단을 챙기는 일은 제법 중요한 일이었다. 바젤 추기경과의 해후가 끝난 이후에는 곧바로 귀족들의 사교회에 초대되어 여기저기에 불려다녔다. 이 시기는 정말로 정신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안 그래도 파란과 검은백조의 모험일지가 공개되어 박물관의 일로 여기저기가 떠들썩한 상황. 제국 8좌로 내정되면서 제법 관심을 받고 있었던 나에게 이런 후광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인지도가 하늘을 뚫을 것처럼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나와 함께한 귀족 부인들의 콧대도 덩달아 올라가기 시작했고 그만큼 다양한 정보도 접할 수 있었다. 바쁜 와중에 즐거웠던 뒷담화 타임에서는 제국의 황녀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그동안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제법 신선했다.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도 당연한 일. 3. 캐슬락의 블랙 마켓. 사교파티에서의 일이 끝난 이후에는 곧바로 마를린 영애의 고향인 캐슬락으로 향했다. 대외적인 이유는 마를린 영애의 초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캐슬락에 지어진 블랙 마켓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노예 투기장 같은 장사는 조혜진의 강력한 반대로 시도조차 못 했지만 그래도 이 블랙 마켓은 제법 괜찮은 수익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직접 확인해 본 감상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 ‘나쁘지 않아.’ 딱 이정도의 감상이었다. 조금 더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대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내가 직접 관리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보니 여러 가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돈 때문에 시작한 일도 아니었다. 이 블랙 마켓의 존재 이유는 이런 곳을 이용하는 고객의 명단을 확인하기 위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중에 요긴하게 쓰일 데가 있겠지.’ 고객 명단과 장부를 가지고 있다는 건 커다란 힘이 된다. 물론 철저히 비밀에 숨겨준다는 걸 필두로 광고를 하기는 했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어디 있겠는가. 쌓아놓은 서류와 장부, 위치를 추적한다면 가면 쓴 연놈들의 신상을 파악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물론 마를린 영애가 이쪽에 찰싹 달라 붙어왔기 때문에 너무 자세하게는 둘러보지 못했지만 대충 봐도 블랙 마켓은 5점 만점에 3.5점 정도.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후우….” 어디까지나 대표적인 일이 이 정도였을 뿐, 앞서 나열한 것이 내가 한 일의 전부는 아니다. 대외적인 일만큼 내부적으로 정리할 일도 많았다. 조금 난항을 겪고 있는 막스, 정하얀과의 마력 홀로그램 장치의 연구에 합류하는 한편, 이지혜와는 사업 준비에 들어왔고 본격적으로 박물관 단장을 시작됐다. 새로 들어온 병아리들을 지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소라와의 토론으로 흑마법사가 어떤 매커니즘으로 돌아가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고 유아영에게는 빠르게 대장 기술을 올리기 위한 본격적인 지원을 쏟아부었다. 새로운 포션에 대한 연구도 멈추지 않았고 박덕구가 사용하지 않은 혈청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런 와중에 정하얀의 멘탈 케어와 똘똘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다 보니 몸이 다섯 개라고 남아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이제 조금 숨을 돌리려고 치면 여기서 사건이 터지고 저기를 해결하려고 하면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예전에 김현성이 나에게 일을 쏟아줬을 때와 비슷한 것 같은 느낌. 그때와의 차이점은 김현성도 함께 갈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존재했다. ‘시간이 없었으니까.’ 말 그대로였다. 제국 내에서 더 이상 제국 8좌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이벤트를 늦추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무리하게 스케줄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앞전에 했던 모든 고생이 그나마 지금 여유 있게 움직일 수 있는 이유. 그렇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조금의 짜증이 묻어나 있었다. 나와 김현성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바쁜 시간을 보냈던 붉은 용병의 길드 마스터 역시 그건 예외가 아니리라. “정말 귀찮아 죽겠다니까. 뭐 공식적인 발표는 발푠데 각각 자유도시에 퍼져 있는 8명이 한꺼번에 모여야 할 이유가 있냐고… 그냥 황제가 정식으로 선포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러게….” “다들 바쁜 거 알고 있는데도 꼭 이딴 식으로 나온다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대만 애들이나 일본 애들도 짜증 난다고 할걸. 지구나 여기나 허례허식이 문제야. 허례허식이…. 이거 끝나고 또 파티나 뭐다 여러 가지로 사람 귀찮게 할 텐데… 짜증 나 죽겠네. 안 그래? 자기?” “그래도 황제 입장에서는 자기가 뭔가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을 테니까. 자세히는 못 들었는데 최근에 입지도 좁아지고 있는 것 같고….” “그래?” “응. 찌라시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귀족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그런 말이 떠돌아다니더라고. 최근에 교황청 쪽이 강세니까 그럴 만도 하겠지. 뭐, 아마 틀린 말은 아닐 거야. 저런 말이 나온다는 것부터 귀족들이 등을 돌리고 있다는 건데… 이번 기회에 자기가 건재하다는 걸 알리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게 쇼라는 걸 눈치챘겠지만 제국민이야 그런 거 관심이나 있겠어? 황제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아는 거지.” “그건 못 들었던 건데… 검은백조 마스터는 알고 있었어?” “네. 저도 들었던 이야기예요.” 김현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박연주에게 불똥이 튀자 그녀가 잠깐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내 앞에 앉아있는 차희라는 조금 심기가 불편하다는 표정.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또 우리만 모르고 있었네. 아주 그냥 삼자 동맹하지 말고 둘이 사이좋게 지내지 그래?” “…….” “솔직히 박물관 건도 많이 섭섭해. 자기, 자기가 나였어도 섭섭했을 텐데. 그렇지?” “죄송해요. 차희라 님. 붉은용병에게는 평소에도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던 터라… 마침 다른 던전에 나가신다는 소식을 전해 들어서 말씀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그냥 한 소리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마. 공략에 참가하지는 못했어도 투자할 수 있게 배려해 준 것만 해도 고마우니까.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것저것 재지 말고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그렇게 이해득실 따지는 성격도 아니고… 우방이 위기에 처했는데 병력들 보내주는 거야 당연한 일이니까.” “네.” 차희라가 말을 마치자 박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희라가 뭘 말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 느낌. 박연주가 이 동맹을 철저한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고 생각했다면, 차희라는 거기서 조금 더 벗어난 개념으로 이 동맹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항상 생각했던 거지만 단원들의 총애를 받고 있는 데는 무력보다는 저 성격의 영향이 더 클 것이다. ‘저렇게 하기가 쉽지가 않지.’ 나는 절대로 차희라처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계속해서 기다리기도 조금 신경 쓰였기 때문에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천천히 커다란 방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김현성, 차희라, 박연주가 앉아 있고 뒤에는 각각 부관들이 서 있다. 김현성의 뒤에는 조혜진이, 차희라의 뒤에는 이름 모를 붉은용병의 간부, 박연주의 뒤에는 이지혜가 서 있었다. 본래 파란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다니지는 않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파티 내에서 착출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행운의 주인공이 바로 조혜진이었다. 1회 차에서도 김현성과 밀접한 관계였다 보니 아무래도 김현성은 그녀가 이런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모양. 물론 나 역시 수행원을 데리고 왔다.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니 싱글 벙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 “…….” 정하얀이었다. ‘사실 얘도 여기 앉아 있어도 될 것 같은데….’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자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 가장 먼저 방으로 들어온 카스가노 유노의 뒤로 생전 처음 보는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국 8좌.’ 다른 세 명과는 분명히 첫 만남이었다. 그렇지만 김현성은 그렇지 않은 모양. ‘1회 차에 만났던 게 당연하겠지….’ 들어온 녀석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는 우리 현성이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 260 회귀자 사용설명서 260화 공식발표(2) 남자 두 명에 여자 한 명. 누가 봐도 카스가노 유노 바로 뒤에 들어온 이는 일본에서 함께 온 일원 중에 하나다. 정신없이 마음의 눈으로 들어온 이들을 확인해 본 것은 당연지사. ‘스즈미야 이부키.’ 직업명은 황혼의 암살자. 고인이 되어 버린 이토 소우타의 뒤를 이어 실리아를 책임지고 있는 강자다. 저쪽은 이전에 카스가노 유노에게 들어본 적이 있다. 들어온 지는 이제 삼 년차로 인재라면 인재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전체적으로 고른 스탯이 눈에 들어왔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민첩. 가지고 있는 직업과 특성도 전설 등급인 것을 고려해 보면 충분히 8좌 중 하나로 추대될 만하다고 생각했다. ‘강하겠네.’ 이토 소우타가 살아 있었다고 추정되는 1회 차에서도 빛을 냈는지 김현성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전 회 차에서도 이름을 날리긴 날렸던 모양. 성향도 나쁘지는 않고 고유 기벽 역시 정상인의 그것이다. 조금 소심한 것 같기는 하지만 실력은 확실해 보였다. 그 다음에 들어온 것이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 ‘대만 애들….’ 자유 도시 다완을 대표하는 거대 길드를 맡고 있는 길드 마스터들이었다. ‘천관위.’ 키가 크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걸 보니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는 굳이 말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마법사?’ 정확한 직업은 전설 등급에 랭크되어 있는 안개 소환사. 설명을 읽어보니 대충 어떤 마법을 구사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설 아이템 보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96의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얼마나 마법에 시간을 투자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 대륙 내에 제대로 된 마법사들이 흔치 않다는 걸 고려해 보면 저 남자의 성취는 무척 대단한 셈이다. 그래봤자. ‘하얀이보다는 낮네….’ 물론 무시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경험이나 숙련도,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수 같은 것을 생각해 보면 우열을 가리기 힘들 것 같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물론 정하얀이 지금까지 보여준 괴물 같은 모습을 생각해 보니 그녀가 밀리는 그림은 상상되지 않았지만… 저놈도 숨겨둔 몇 수 정도는 있을 거다. 그 다음으로 들어온 것은 긴 머리를 한 쪽으로 묶고 있는 여자. ‘위란.’ 위란 쪽은 전형적인 궁수. 딱 기분에 충실한 강자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직업명은 영웅 등급으로 원거리 저격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스탯도 준수하기는 했지만 눈에 띄는 것은 전설 등급의 특성 백발백중. 굳이 설명을 읽어보지 않아도 어떤 특성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눈앞에 있는 여자의 장비나 액세서리들이 꽤나 고가로 분류할 수 있는 종류였다는 것. 같은 브랜드를 착용하고 있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얘네 조합 좋은데.’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강자이기는 했지만 둘의 시너지 역시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안개 소환사가 시야를 가리고 원거리 저격수가 화살로 머리통을 날리는 그림이 절로 그려진다. 만약 내가 이들을 전장에서 사용한다면 저 둘은 무조건 세트로 붙여놓을 것이다. 아마 저 둘도 자신들의 조합이 좋다는 걸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두 길드가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거겠지.’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김현성의 반응도 그리 나쁘지 만은 않다. 이번에도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것을 보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에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나 악마 숭배자 이토 소우타 같은 놈들은 없는 모양. ‘괜찮네.’ 어떤 기준으로 8좌를 선정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여기에 있는 이들 중 자격이 부족한 이들은 없다. 굳이 하나를 꼽아보자면…. ‘내가 제일 트롤인가.’ 아무튼 간에 카스가노 유노는 슬그머니 이쪽으로 고개를 숙여왔고 나 역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인사에 답했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는 평범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는 모양. 두 눈을 감고 있는 것도 여전하고 단정한 복장도 그대로다. 슬그머니 자신의 자리를 찾은 뒤로도 계속 내 쪽으로 고개를 고정시킨 모습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내 표정을 읽었는지 곧바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스즈미야 이부키라고 합니다.” “이야기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천관위.” “아.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위란. 다완에서 왔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어색한 자기소개 타임. 이미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는 기존 강자들과는 다르게 이곳의 신입이라고 할 수 있는 나와 김현성은 세 차례의 악수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굳이 긴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공기가 꽤 무겁다. ‘당연한 건가.’ 이미 예전부터 이곳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저 마다의 방법과 저마다의 방식으로 명성과 힘을 얻은 이들이 한 자리에 있다.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침묵이 들어온 장내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대만의 마법사, 안개소환사 천관위였다. 들어올 때부터 조금 뚱한 표정이 눈에 띄었지만 아무래도 인선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공격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은근슬쩍 자신의 의견을 어필하고 있었다. “네 명, 두 명, 두 명….” “왜. 불만이라도 있어?” “아닙니다. 차희라 님. 굳이 불만이라기보다는 인선이 조금…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불만 맞네, 뭐.” “물론 린델에서 오신 신입 분들의 능력이 특출한 것은 인정하지만… 뭐, 아쉬워서 해본 소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다완에도 인재는 많은데….” “신경 쓰라고 말한 것 같은데?” “정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불만 있는 거 아니야?” “정말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희라 님.” “야… 이거 눈 봐라. 그러다가 한 대 치겠네. 너 웃긴다. 눈도 못 마주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적 이야기를….” “왜. 살려달라고, 너 그때 막 무릎 꿇고 그랬을 때는 안 그랬잖아.” “차희라 님….” 처음에 슬슬 물타기를 하며 분위기를 잡아보려고 했던 것 같았지만 나쁜 놈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과거가 있는 모양. 차희라와 예전에 마찰이 있었다는 걸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가 신입들의 앞에서 까발려지는 것이 당황스러웠는지 황급하게 수습하려고 하기는 했지만 녀석이 차희라를 통제할 수 있을 리가 만무. 당황스러워하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 차희라는 다시 한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관위야, 기분 나빠 하지 말고 들어. 제국 입장에서 배려해 준 건 우리가 아니라 너희야. 린델에서 적어도 한 석은 더 가져갈 수 있었는데… 너희 기분 나쁘지 말라고 배려해 준 거라고. 내 말 알아들어?” “아무리 그래도….” “왜? 내 말이 거짓말 같아?” 차희라가 슬그머니 정하얀 쪽을 바라보자 천관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째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같은 마법사라면 아마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세컨드도… 들어온 지 1년 조금 넘었지 아마?” “말도… 안….” “말이 왜 안 돼.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자기랑 우리 자기네 길드 마스터 김현성. 그리고 저기 있는 정하얀은 튜토리얼 던전 최단 시간으로 클리어한 플레이어야. 싹수가 보인다는 건 진즉에 알아봤지만 솔직히 나도 이 정도로 해줄지는 몰랐지. 뭐… 운도 좋았고 실력도 있고… 아무튼 그래.” “허….” “한 명 더 있기는 한데… 걔는 여기 끼기에는 조금 부족하고… 그래도 쓸 만하기는 한 것 같더라.” “불공평하군요.” “나도 가끔 그렇게 느껴. 어때? 제국 내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사가 보기에는….” “노코멘트하겠습니다.” 정하얀은 지금 흘러가는 상황을 자신과 상관없다는 식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차희라의 말 한마디에 다른 이들의 시선까지 모두 그녀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특히나 궁수 포지션에 있는 위란은 조금 더 노골적이었다. “린델에는 정말 인재가 많네요. 대륙 8좌에 들어온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신입이 둘이나 있고. 저 사람이 놀랄 만한 마법사도 보유하고 있을지는 몰랐는데… 사실 저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혹시 린델에 너무 과한 특혜를 주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실제로 보니까 다르긴 다르군요.” “과찬입니다.” “아니요. 단순히 있는 그대로를 말씀 드린 거예요, 파란 길드 마스터. 당신이 강하다는 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고… 남은 한 쪽은 비전투 직군이라 뭐라고 판단하기는 애매하지만 드래곤을 보유하고 있다는 거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거겠죠.” ‘바로 맞췄다.’ 그렇지만 꽤나 직접적이다. 그녀의 말에 김현성이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실제로 뛰어난 연금술사이기도 합니다.” “그건 알고 있어요. 다완 쪽으로 들어오고 있는 포션은 잘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덕분에 플레이어들의 생환율도 많이 올라갔고. 가격이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게 맞을 것 같네요. 아, 혹시 품에 있는 물건은 파실 생각 없으신가요?” 내가 가지고 있는 용 숨결 물약을 보고 하는 소리인 모양. 궁수인 만큼 눈썰미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이다. “기회가 된다면 그러고 싶지만 양산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전설 등급을 받은 포션이다 보니 한 번 제작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고요.” “그건 아쉽군요. 뭐, 아무튼 만나서들 반가워요. 다른 분들도 그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고… 붉은용병 길드 마스터도 그렇고 요조라 길드 마스터도 그렇고 그 동안 잘 지내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말 많은 건 여전하네.” “또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다. 차희라 님도 여전히 입이 험하시네요. 저 사람 때문에 기분 나쁘신 건 이해하지만 저한테까지 불똥이 안 튀었으면 좋겠는데…. 저 사람의 뜻이 다완의 뜻은 아니니까요. 같이 움직이기는 하지만 저는 이 인선에 단 한 번도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정말로요. 아! 또 이건 다른 말이기는 한데… 새로 들어온 신입은 상당히 안목이 좋네요.” “뭔 소리야?” 아마 같은 브랜드에서 나온 옷을 입고 있다는 걸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멀뚱이 쳐다보던 차희라도 갑작스레 탄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어째서 저런 말을 했는지 이해한 모양이다.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인데… 끝나고 회식 한번 할까요? 어때요? 카스가노 유노님이랑… 아, 그….” “스즈미야 이부키입니다.” “아. 이부키 씨는?” “저는 괜찮습니다. 만약에 그럴 시간이 있다면… 말입니다.” “아마 저쪽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느라 정신없겠지, 뭐.” “그렇겠네요. 어머. 그러고 보니 드레스 준비 안 해온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분위기가 꽤나 화기애애하다. 이토 소우타가 죽은 이후 실리아와 우리 쪽은 사이가 좋으니 별 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저 멀리 대만에서 오신 분들도 꽤 성격이 유들유들하다. 이전에 차희라에게 한 번 참교육을 당한 효과인 것 같았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상관없다. ‘한 울타리에 있다는 느낌이 있어서 일 수도 있고….’ 분명히 서로의 입장은 다르지만 어찌 됐건 간에 린델과 실리아, 다완은 신성제국이라는 커다란 울타리 내에 있다. 말하자면 운명 공동체인 셈. 이토 소우타 같은 미친놈만 없다면 이런 모습이 다분히 정상이다. “그나저나 신성제국도 진짜 웃기지 않아요? 그 동안 이런 거 할 생각도 안했으면서 공화국이 오호대장군인가 뭔가 발표하자마자 제국 8좌라니……. 이거 발표하면 뭐, 공화국에서 십존이라도 새로 발표하는 건 아닌가 생각된다니까요.” “정말 그럴까 봐 무서운데.” “안 그래도 요즘 분위기도 별로 안 좋은 것 같던데… 이러다 전쟁이라도 터지는 거 아닌지 몰라. 우리 무녀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으려나.” “분위기가 안 좋다고?” “원래 중국애들이랑 우리 애들이야 서로 싫어하긴 하는데 최근에는 조금 노골적인 것 같기도 하고요. 린델은 중앙에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공화국이랑 인접하고 있는 다완에서는 은근히 정황들이 눈에 보여요.” “…….” “싸움도 몇 번 있었고요.” “너희는 원래 매일 싸우잖아.” “말씀대고이긴 하지만… 평소와 다른 느낌을 받은 적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꽤나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냥 뇌피셜로 나온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갑자기 뭔 전쟁이야.’ 실제로도 이 시기에 전쟁이 일어났는지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 일단 김현성의 표정은 침착했지만….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것을 보고는 꼭 안전하다는 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성이 형이 지켜주겠지?’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품은 이번에도 안전할 것이다. # 261 회귀자 사용설명서 261화 공식발표(3) 지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대만과 중국의 관계는 복잡했다. 공화국 내에서 상주하고 있는 대부분의 중국인은 아직도 대만이 자신들에게 속해 있는 부속 국가라고 굳게 믿었고 당연하지만 대만인들은 그런 중국을 달갑게 보지 않았다. 지구가 아닌 대륙에서 이러고 있으니 다완에 입장에서도 당황스러운 게 당연한 일. 물론 지구에서의 국제 관계를 여기까지 끌고 들어오는 게 우스운 일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린델 내에서 반일 감정을 품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일도 아니다. 실제로 저 멀리 있는 이슬람 문화권 애들은 매일 같이 치고 박고 있었고 유럽 열강들이 자리 잡고 있는 왕국연합도 과거의 족쇄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중국과 대만의 관계는 조금 더 복잡했다. 다완에 있는 튜토리얼 던전은 공화국과 밀접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라도 튜토리얼 던전을 더 확보하려는 공화국과의 이해관계와도 일치된 것. 심지어 다완이 자리 잡은 곳은 옛날 공화국의 영토였단다. 덕분에 공화국에서는 도발 아닌 도발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 현재 시국이었다. 공화국에 터를 잡고 있는 중국인들은 ‘대만인은 우리 민족이다’라는 프레임을 걸고 넘어졌고, 공화국 총통을 비롯한 공화국민들은 ‘이 지역은 본래 우리 영토였다’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는 거다. ‘개판이지.’ 여기서나 저기서나 국제 관계는 여전히 개판. 이런 상황에서 제국, 공화국, 왕국, 이종족들은 우리들이 오기 전부터 신나게 싸우고 있었던 놈들이다 보니 바깥에서 보기에는 정상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내면은 상당히 썩어 들어가고 있다는 것. 굳이 전쟁이 터진다는 소식은 생각보다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플레이어도 플레이어지만….’ 이곳에 있는 지도자란 족속들도 순 개판 오 분 전이라는 거다. 그렇지만 아직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이 내 개인적인 판단. 이유는 당연히. ‘이 새끼들이 멍청이도 아니고….’ 진짜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었다면 오호대장군이니 제국 8좌니 뭐니 하는 것들은 발표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다. 본래 목줄이 달린 개가 제일 잘 짖는 법이다. 우리가 이렇게 강하다고 외쳐대고 있는 놈들이 정면승부를 벌일 리가 없는 게 당연. 만약 내가 제국의 황제나 공화국의 총통이라면 장담컨대 이쪽의 카드를 내보이는 멍청한 짓거리 따위는 하지 않는다. 지금 시기에 이런 종류의 발표는 어디까지나 무력시위에 불과. ‘이놈들이 또라이가 아니고서야 일을 벌이지는 않을 거야.’ 장담컨대 절대로 벌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건…. ‘안 좋아.’ 이제 막 자리를 잡고 날개를 펴는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부터가 꺼려지는 일.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공화국이 계속해서 다완 쪽을 도발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김현성은 심각한 얼굴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확히 사건이 터진 곳은 라이오스예요.” “거긴….” “중립국. 라오스를 비롯한 일부 동남아 애들이 소환되는 장소. 들어 본 적 있… 아니, 들어보지 못했을 리가 없겠네요. 국경 바로 아래 있는 곳인데….” “네. 자세히는 모르지만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우리 다완의 튜토리얼 던전은 공화국과 딱 붙어 있고 남쪽 아래에는 바로 라이오스가 있어서, 너나 할 것 없이 그쪽에 많이 들락날락거리거든요. 물론 그건 공화국 애들도 마찬가지고.” 중립국 안에서 싸우는 건 일단은 대륙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물론 안에서 전투가 일어난 건 아니에요. 뭐, 전투라고 해봤자 소규모였고 앞에 있는 희귀 던전 앞에서 어린애들끼리 투닥거린 게 전부였지만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고 점점 커진 거죠. 얻어맞은 애들이 자기네 길드 선임 길드원을 불러오고 그쪽 애들이 출동하니까 여기서도 안 나설 수가 없고. 대규모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마 누가 활시위라도 당겼으면… 빵!” “니들은 매번 그러잖아.” “여자의 감이라고 해야 되나. 궁수의 감이라고 해야 되나. 아마 차희라 님도 저랑 같이 계셨으면 비슷한 걸 느끼셨을걸요. 뭐라도 터지는 줄 알고 제대로 준비 안 하고 나온 걸 후회할 뻔했다니까요.” “중재는 없었고?”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싸움이 일어나지 않은 거죠. 제국 쪽에 정식으로 보고도 올렸고요. 그러고 보니 정식으로 항의한다고 했는데 뭐라도 했을지 모르겠네….” 몬스터들과 살을 맞대고 있는 우리와는 달리, 다완 쪽은 이런저런 고충을 겪고 있는 모양. 아마 저런 일이 일상다반사였던 것 같았다. 어떻게 생각해 본다면 별것 아닌 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런 사소한 징후들을 무시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여러 가지로 생각해야 될 일이 많다는 거다. ‘한 번 가봐야 되는 건가.’ 다완과 라이오스에 한 번 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 정확히 그쪽의 분위기가 어떤 건지 알아야 뭐가 됐든 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똘똘이가 또 난리 칠 텐데….’ 그리폰을 타고 최대한 짧게 일정을 잡는 방법도 나쁘지 않으리라.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도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결국 이 결론 없는 대화도 아무런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알현실로 모시겠습니다.” 제국의 황제를 만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천관위의 부관이 문을 열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가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희라가 몸을 일으키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 물론 가신은 허리를 조금 더 숙인 이후, 그녀에 질문에 대답했다. “일정이 어떻게 되지?” “폐하와의 저녁 식사 이후에는 딱히 다른 일정은 없습니다. 다만 내일 아침….” “아아아. 제국민들 앞에서 폼 한 번 잡아주면 된다는 거지.” “큼….” “안내해 줘. 징하게… 오래 기다렸는데 식사 시간은 조금 짧으려나.” ‘그럴 리가 없지.’ 모르긴 몰라도 식사 시간만 4시간에서 5시간은 잡아야 될 거다. 평범한 귀족과의 식사도 길게는 2시간 정도가 걸리니 황제와 함께하는 석식은 그 배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 벌써부터 진이 빠지기 시작했다. “아. 죄송합니다만… 수행원 분들은 따로 모시겠습니다.” “네?!”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 것은 다름 아닌 정하얀. 계속 같이 있는 줄 알았는데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깜짝 놀란 모양이다. “금방 끝내고 올 거야, 하얀아. 여기 지혜 씨랑 혜진 씨랑 같이 밥 먹고 있어.” “네, 오빠.” “자. 가요, 하얀 씨.” “아… 네.”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수긍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얘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아니까.’ 수행원들은 수행원들만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저 자리에서는 어떤 대화가 오고갈지도 궁금하기는 했지만 내 자리는 저곳이 아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가신들이 수행원 집단을 따로 모셔가기 시작했고 정하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내 위치를 확인한 이후에야 시야에서 사라졌다. 벌써부터 피곤하다는 얼굴로 걷고 있는 차희라와 정하얀이 사라진 내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 카스가노 유노. 슬그머니 미소 짓고 있는 것을 보니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앞에서는 김현성은 박연주와 위란과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었고, 천관위는 한 발자국 뒤에서 스즈미야 이부키와 함께 걸어온다. 차희라의 가까이에 있기 싫은지 몇 발자국 떨어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가신의 뒤를 따라가자 보이는 풍경들은 꽤 화려하다. 아무래도 신성제국의 최고 권위자 이다 보니 보통 귀족과는 클라스가 다르다. 누가 봐도 골드를 쏟아부었을 것만 같은 장식품이 나열되어 있었고 응접실로 가는 길 역시 화려하다. 제국의 황제를 위한 자리다. 허례허식을 좋아하는 양반들이 이런 걸 대충할 리가 없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오랜만에 보는 빅터하르트 할아범의 모습도 보였다. ‘호위라도 서는 건가.’ 잠깐 눈인사를 한 이후에는 가지고 있는 무장을 전부 넘기기 시작. 빅터하르트 영감과 친분이 있는 차희라가 시시한 말을 주고받는 것이 들렸지만 굳이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아마 ‘예의를 차려라’라든가 ‘경거망동하지 마라’ 같은 충고가 분명하리라. 대략적인 몸수색이 끝난 이후에 가신들은 경비병들과 함께 우리를 안내하기 시작했고 빅터하르트를 주축으로 다시 한번 붉은색 카펫을 밟았다. 커다란 문을 세 개 정도 지나쳤을까. 왠지 모르게 마지막 문일 것 같은 문이 열리고 난 이후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자리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황제의 모습이었다. ‘저게 뭐야….’ 뭐 대단한 모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차희라에게 이미 별 거 없는 노인네라는 정보를 접하기도 했고 실제로 제국에 체류하는 내내 신성제국의 황제가 유능한 인간이라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저건 내가 상상하는 모습 이하였다. 커다란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기는 했지만 그 왕관을 버틸 힘이 없는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눈에 총명함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의심과 독기에 찬 눈은 괜한 경계를 불러일으킬 정도. 주름진 얼굴과 왜소한 몸. 이 커다란 제국을 거느리고 있는 황제라고 생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저딴 게 무슨 황제야.’ 차라리 옆에 앉아 있는 여자가 여황제라고 한다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누구인지도 대충 알 것 같다. 마음의 눈을 발동시키자 다시 한번 내 생각이 맞다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신성제국의 황녀.’ 확실히 저쪽은 왠지 모를 아우라가 있다. 성향은 계산적인 혁신가. 기벽도 나쁘지 않고 스탯 역시 괜찮다. 눈은 마치 이쪽을 꿰뚫어보는 듯했고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지도자의 기품이 있다. 다시 한번 시선을 돌리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 죽어가는 늙은이 한 명. “다들… 자리에… 앉게….” 모기하나 때려죽이지 못할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모두가 사전에 배운 대로 예를 표했고 그 모습을 본 늙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함박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제국을 대표하고 있는… 영웅들을 봐서 영광이로군. 내가… 어째서 이곳에 자네들을 불렀는지 모두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네. 일단… 모두 자리에 앉게. 아, 그 전에 내 딸을… 소개해야겠군. 샤를롯트.” “제2황녀 샤를롯트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황녀님을 뵙습니다.” “너무 그렇게 예를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제국의 예법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여러분을 불편하게 할 목적으로 초대한 것이 아니니 고개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네.” “그렇지. 아암. 그렇고말고. 말 한번 잘했구나… 샤를롯트.” “송구합니다.” 모두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고 가벼운 대화와 함께 식사가 시작됐지만 목소리는 하나도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나오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쓸데없는 이야기였고 뭐 영웅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전부. “쿨럭… 쿨럭….” 저 기침 소리 말고는 솔직히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별것 없는 말에 웃어주는 것 자체가 고역. 장담컨대 저 노인네는 내가 맨몸으로 싸워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분명하리라. ‘이게 무슨 황제야.’ 정권 교체가 없다면 제국에 미래는 없다. 심지어 저 늙은이가 노망이나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계속해서 그런 생각이 들지만…. 나라는 인간은. 너무나도 권력에 약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기득권 세력을 향한 아첨. “역시 황제 폐하이십니다. 아주 눈에 총기가 가득하십니다. 하하하.” 대단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이 시야에 비쳤다. # 262 회귀자 사용설명서 262화 공식발표(4) 권력자를 구슬리는 건 아주 쉽다. 옆에 앉아 있는 황녀야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다 죽어가는 영감에게 잘 보이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 눈앞에 있는 황제가 젊었을 때는 어떤 모습으로 제국을 운영했는지, 어떤 일을 해왔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현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레임덕.’ 말 그대로 슬슬 차기 황제를 선포해야 하는 시기처럼 보이니 그런 현상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실제로도 후계자에 대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오는 만큼 기존에 있던 황제를 떠받들고 있는 이들은 이미 다른 배로 탑승하거나 다른 길을 물색하고 있는 중이리라. 이른바 권력 누수 현상. 물론 눈앞에 있는 황제가 권력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저 늙은이는 제국의 황제다. 고정 지지층이 있고 후계자를 선포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최고 결정권자다. 최소 3년이나 5년은 더 해먹을 수 있다는 거다. 문제는 황제 자신이 어떻게 느끼느냐. 아마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본인은 황권이 약해진다고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하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성향은 소심한 권력자. 누가 봐도 나랑 잘 어울리는 종류의 인간이다. 저런 종류의 권력자는 간신을 싫어하는 척하지만 그 누구보다 간신을 사랑한다. 인간이라면 직접적으로 아첨을 하는 인간을 싫어할 수가 없다. ‘너무 티 나게 비비면 안 되지만….’ 적당 적당히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만 하는 걸로 호감도 팡팡! 촛불이 꺼지기 전에 활활 타오른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 양반 역시 꺼지기 전에 빼먹을 수 있는 게 있다. “하하하. 그거…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대충 이빨을 털어줬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입가에 함박미소를 띄우고 있는 꼴이 가관이다. 벌써부터 나를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그러고보니… 연금술사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 “자네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가지고 있는 타이틀이 꽤 많았던 걸로… 음… 기억하고 있지. 제국에 연금술을 발전시킨 인물이기도하고… 드래곤에게 선택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내 기억이 맞다면… 확실할 텐데…. 샤를롯트?” “네. 폐하. 제국 8좌로 내정된 이기영은 자유 도시 린델에서 발족한 파란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이며 대륙 최초로 용의 선택을 받은 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최초로 교황청의 명예직을 받은 소환자이며 바젤 추기경과도 매우 친근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그랬어…. 교황청의 명예주교였지.” “운이 좋아. 친분이 닿을 수 있었습니다. 하하. 바젤 추기경은 성정이 불같은 면이 있지만 누구보다도 신성제국의 미래를 걱정하시니 그런 분과 친분이 닿았다는 건 제게 있어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나도 알고 있지.” “사실 제가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터라. 제국 내에 있는 다른 귀족과도 친분이 두텁습니다.” “오오, 그런가….” “캐슬락 백작과 카트린 공작부인, 엘리제 백작부인 같은 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친 황제파에 위치한 귀족들과도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빅터하르트 님과도….” 황제의 근처에서 그를 경호하는 빅터하르트 할배가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고 묻는 것 같지만 가볍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차희라 님과 제가 가까운 사이다 보니….” “아… 그런가. 하하하. 그렇군. 그러고 보니… 빅터하르트 자네가 저 붉은 머리의 이방인을 딸처럼 생각한다고… 했었지. 내 오랜 친우가 말년에 아주 좋은 사위를 얻었구만….” “송, 송구합니다. 폐하.” 빅터하르트 할배는 나와 그다지 연관되고 싶지 않은 것 같지만 저 사람과 나는 이미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아암… 그래. 그래야지….” 황제파와도 친분이 두텁다는 걸 알고 나니 다시 한번 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 와중에 저 샤를롯트라는 여자가 은근슬쩍 이쪽이 교황청과 연이 있다는 걸 황제에게 전한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저쪽은 내가 취향이 아닌 것 같았다. 너무 대놓고 간신처럼 행동한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황제도 황제지만 황녀 역시 주요 관리 대상이다. 물론 그녀 역시 내가 친 황제파의 귀족들과도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표정이 좋아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건 여전했다. ‘시간은 많아.’ 당장은 황제를 구슬리는 작업만 해도 그다지 상관없을 것 같은 느낌. 장담컨대 황녀 역시 내가 필요한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나는 이 신성제국 커뮤니케이션 집단의 중심에 있다. 괜히 이쪽을 경계하는 건 누가 봐도 황녀의 손해다. 만약 저 여자가 후계 구도에 관심이 있다면 더욱더 나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나저나 황녀님의 미모가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총기가 가득하신 모습을 뵈오니 누가 봐도 황제 폐하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우리 샤를롯트는 아름답지.” “그 또한 폐하의 덕입니다.” “아암… 그렇고말고.” 칭찬해 준다고 넙죽 받아먹는 모양새는 우습다. 황제가 아니라 샤를롯트를 향해 던진 아첨이었지만 아무래도 저 여자는 이런 종류의 칭찬이 그다지 와닿지는 않은 모양이다. 대충 어떤 스타일인지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친해지려면 시간 좀 써야겠는데….’ 오늘 이후로 또 볼 수 있을지가 문제지만 아마 어느 정도는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식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여러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하지만 질문은 나에게만 집중되지 않았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이곳에 있는 8명 모두가 관리 대상이었으니까. 다른 이들도 모두 황제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며 좋은 분위기를 이끌어가고는 했었지만 아무래도 관심은 이쪽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대륙 8좌는 기본적으로 각자 한 집단의 수장이며 남들의 위에 서는 게 자연스러운 이들이다. 아무리 기분을 맞춰준다고 한들 태어날 때부터 간신의 피가 흐르고 있는 이쪽과는 아첨의 급이 다르다. 이딴 걸 자랑스러워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해 봐야겠지만 부끄럽지는 않다. 이런 게 전부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처세술이라는 거니까. 아무튼 간에 황제는 다른 이들과 적당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슬그머니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는 기색을 내비치는 중. 제국 8좌 역시 황제를 이쪽에 떠넘기고 싶어 하는 느낌이었다. 특히나 차희라나 실리아의 스즈미야 이부키, 다완의 천관위 같은 경우에는 황제와의 친분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나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내는 걸 보니 확실히 이런 자리가 맞지 않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김현성은 특이하게도 황녀에게 집중하는 느낌이었는데 녀석의 표정을 읽기가 힘들어 1회 차에서의 황녀가 어떨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차기 여황이라도 되는 건가.’ 가능성은 높다. 애초에 황제가 이런 자리에 저 여자를 대동했다는 것부터 자체가 증거다. 아무튼 식사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딱딱한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고 황제가 편하게 대화를 나누라 어명을 내리며 모두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늙고 병든 황제 역시 본격적으로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이야기에 열중하기 시작. 애초에 내가 먼저 주제를 가져올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저쪽에서 넙죽 넙죽 질문을 던져오니 대답하기에도 편하다. 보통 꼰대들이 그렇듯 젊었을 때의 이야기에는 탄성을 내질러주고 황제폐하의 위대함을 칭송한다. 기분 좋은 황제는 다시 한번 허허허 웃어주고 자신의 위대함을 확인받을 수 있는 주제를 찾아 꺼낸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본래 화술이라는 게 그렇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계속해서 동조하면서도 나에게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요소를 찾게 하는 것. 그런 게 바로 호감을 사는 방법이라는 거다. 물론 그런 요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런 인간들이 뭘 원하는지는 1살 먹은 우리 똘똘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엘릭서. 으음… 엘릭서라고 했나.” “예, 황제 폐하. 아직 제가 성취가 낮아 자세히 알지는 못 하지만 연금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현자의 돌과 함께 이야기로만 전해져 오는 물약입니다. 모든 질병과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젊음을 되찾아 줄 수 있다고 전해지는 신의 선물이지요.” “허허. 그렇군. 어떻게… 연구에 차도는 있는 겐가.” “아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이야기로만 알려진 물건이라….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단기간 내에 성과를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으음. 솔직하게 말해주어 고맙군.” “제가 괜한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아니. 그건 아닐세. 오히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더 좋아. 자네는 으음… 다른 귀족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야.” “송구합니다.” “아니. 질책하는 게 아니니 그렇게 말할 필요 없네. 으음… 그래서 그 엘릭서라는 게….” 뭐, 대충 이렇다는 거다. 굳이 엘릭서에 대한 희망을 심어줄 필요는 없다. 나중에 자기를 속이려고 했느니 어쩌느니 말이 나오는 것보다는 깔끔히 불가능하다고 말해주는 게 나에게는 더 유리하다. 어차피 저런 인간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다. “추측하기로는 엘릭서라는 것은 현자의 돌을 촉매로 만들 수 있는 물약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현자의 돌의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 당연하지만 제 숙원 중에 하나이지요.” “오오…. 그렇군.” “엘릭서를 만들거나 현자의 돌을 보는 건 아마 모든 연금술사의 꿈일 겁니다. 언젠가는 꼭 이루어질 거라고 믿습니다. 당장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제가 드래곤에게 선택받으리라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언젠가는….” “으음 그렇지. 생각해 보니 드래곤의 선택을 받았다고 했지…. 내 평생에 용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같이 오는 것은 아닌지 기대했는데 아쉽게 됐군.” “네. 예상하시고 계시겠지만 제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야 그렇겠지. 그들은 감히 인간위에 있는 존재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으니까.” “다만… 이 자리에서 조금이나마 보여드릴 수는 있습니다. 물론 완전한 용은 아닙니다만.” 슬슬 떡밥을 뿌리자 역시나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얼굴이 보였다. 빅터하르트 영감이 입을 열었지만 단호한 황제의 말에 조용히 자리에 앉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쓸데없는 짓은 삼가….” “아닐세. 빅터하르트… 이기영 명예주교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송구합니다.” 나를 언제 봤다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갑작스러운 신뢰도의 상승이 기분 나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내가 용을 볼 수 있다는 건가.” 말보다는 직접 눈으로 보는 게 확실할 것이다.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고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황제 폐하.” 파칙 하고 손에 불꽃이 튀어 오르자 널찍한 응접실에 한쪽 벽면에서 천천히 용의 얼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직 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점점 형태를 만들어가는 드래곤의 머리는 누가 봐도 비현실적이다. “그워어어어어….” 방 안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다운그레이드되기는 했지만 커다란 눈과 위협적인 이빨 그리고 거대한 뿔은 어딜 봐도 흑암룡의 모습이다. 황제뿐만이 아니라 타 도시에서 온 8좌의 일원, 심지어는 샤를롯트까지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치한 쇼맨십이다. 정하얀의 마법이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보다 전장에서 쓸모 있다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김현성이 짐심으로 검을 휘두른다면 저 용의 머리는 깔끔하게 잘려나갈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선보인 연금술이 비주얼에서 먹고 들어간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허… 허허….” 기가 차는지 조용히 웃고 있는 황제. “이, 이런 건 어, 어떻게….” 말을 잊지 못하는 황녀. “연금술입니다.” 내 가치를 입증받기 위한 작은 이벤트였다. # 263 회귀자 사용설명서 263화 공식발표(5) “아주 제대로 해주셨네.” “응? 뭐가?” “뭐긴. 어제 있었던 일.” “아아.” “영감탱이야 그렇다고 쳐도 그 황녀도 입을 떡하니 벌리는 걸 보고는 나도 놀랐다니까.” 확실히 그런 느낌이었다. 황제에게 집중하느라 황녀의 표정을 살피지는 못했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더듬는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황제의 표정은 더욱더 가관. 늙은 영감탱이의 심장이 깜짝 놀라 멈추는 것은 아닌지 걱정할 정도였으니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으리라. 짧은 시연회가 끝난 뒤 여러 가지 질문이 날아든 것은 당연했다. 마법이나 신성력이 익숙한 이곳에서도 드래곤과 같은 개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신기한 모양이다. 물론 내가 만들어낸 것은 제대로 된 생명체가 아니지만 저들이 보기에는 별 다를 게 없는 모양. 두 눈을 비비던 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훤했다. 놀란 사람은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스즈미야 이부키는 카스가노 유노에게 사전에 들었던 것 같지만 다완에서 온 이들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단순히 운이 좋아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마법사인 천관위는 식사시간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왔고 궁수인 위란 역시 계속해서 묘한 눈빛을 보내오는 바람에 꽤 난처했다. 물론 그들의 시선보다 중요한 것은 황제의 반응. 기존에 밑밥을 뿌린 게 효과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식사가 끝난 이후에 나와 따로 대화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심지어 연금술을 지원하고 싶다고 이야기할 정도였으니, 겨우 다섯 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기에는 그 성과가 제법 큰 셈이다. ‘개꿀!’ 애초에 돈이 많은 나야 지원이고 뭐고 필요없지만 국고에 저장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희귀한 촉매에 관심이 생겼다. 제국적 지원, 무려 신성제국의 지원이다. 기대가 안 되는 것이 이상하리라. “지루해 죽는 줄 알았는데 덕분에 나도 좋은 구경했지, 뭐. 아마 몇몇은 자기한테 감사하고 있을걸? 그 늙은이 상대하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거든.” “그거야. 누나 같은 사람들 생각이지. 황제와 만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오는 것도 아니고, 이럴 때 눈도장 안 찍어 놓으면 언제 또 하겠어.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누나가 더 이해가 안 간다니까.” “싫은 건 싫은 거야. 굳이 그 영감이랑 친분 같은 거 안 만들어도 상관없어. 위란이나 박연주 같은 애들은 그런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는 한데… 뭐, 걔들도 좋아서 하는 일이겠어? 키야… 어제 자기 하는 거 보니까 딱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뭐?” “이 새끼는 즐기는구나.” “칭찬이지?” “물론. 체질이구나 싶었다니까.” “부정하지는 않을게.” 손바닥을 비비는 게 체질이라는 소리는 조금 가슴 아프게 들려오지만 즐긴 것은 맞다. 갑작스레 밀려오는 민망함에 슬쩍 고개를 돌리니 시야에 비친 것은 왕성 단상 아래에서 환호를 보내고 있는 군중. 스케일이 제법 클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신경을 많이 썼다. 들려오는 함성이 귀가 아플 지경이었고 곳곳에 장식된 제국의 깃발이나 장식물의 규모만 봐도 골드가 제법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다. 한쪽에 앉아 있는 귀족들 역시 모두가 제국을 대표하는 유력 귀족들이다. 한동안 시선이 머무른 곳에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는 마를린 영애가 보여 이쪽 역시 대충 손을 흔들었다. 거기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것은 교황청의 식구들. 교황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바젤 추기경을 포함한 3명의 추기경들이 있었다. 제시카 대주교와 공식석상에 잘 보이지 않는 헬레나 이단심문관장 역시 자리에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참석한 걸 보니 괜스레 기분이 뿌듯해졌다. ‘그래야지.’ “근데 이거 시작은 언제 하는 거야?” 불만 섞인 차희라의 목소리가 들려오기가 무섭게 커다란 목소리가 귀에 꽂히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 입장하십니다.” 단상 위로 모습을 드러낸 황제와 제국의 2황녀 샤를롯트.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1황녀로 추정되는 여자 역시 함께했다는 점이다. 자연스럽게 마음의 눈으로 상태창을 바라보자 곧 1황녀의 정보가 쏟아져 내렸다. ‘으음….’ 제국의 제1황녀 샤를리아. 성향은 독선적인 이기주의자. ‘키야….’ 눈이 옹이구멍인 황제도 제1황녀와 제2황녀 중 어느 쪽이 더 황위에 어울리는지 알고 있는 모양. ‘쟤는 절대로 안 되겠는데….’ 표독스러워 보이는 얼굴이 악녀답다. 눈에 가득 들어 있는 독기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샤를롯트를 향해 있었다. 얼굴에는 욕심이 그득해 보이는 것은 물론…. [고유 기벽-질투심 많은 마녀] 고유 기벽 역시 마녀란다. 무려 마녀다. 성격이 저런 식으로 형성된 이유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 뻔한 클리셰 같아 ‘굳이 설명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해볼 정도.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둘째와 사랑을 받지 못한 첫째. 자매들끼리의 황권 다툼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만 같은 이야기였다. 모르긴 몰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터지게 싸우고 있음이 분명하리라. 지금까지는 후계자 싸움이 그리 치열하지는 않았지만 본격적으로 황제의 건강이 안 좋아지거나 외부 요소가 개입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수면 위로 드러날 것이다. 혹시나 내 고유 기벽이 저쪽에 영향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긴 했지만, 악녀의 범주 내에 있다고 해서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얘는 피해 다니는 게 좋겠네.’ 아무튼 제1황녀와 제2황녀를 대동한 황제가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제국민이 모두 보이는 단상 앞에 서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연설이라도 하실 것 같은데….” “뭐… 그야 그렇겠지. 오랜만에 폼 잡을 수 있는 기회니까. 저거 하려고 8좌니 뭐니 한 거지.” 차희라의 말에는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음성 증폭 마법을 이용해 황제의 목소리가 쭉쭉 뻗어나가 커다랗게 들려왔지만… 솔직히 훌륭한 연설은 아니었다. ‘지루해.’ 엄청나게 지루하다. 목소리에서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 따위는 없었고 내용 역시 교장 선생님의 훈화말씀처럼 길게 길게 늘어져 참기 힘들 지경. 하품이 나와 참을 수 없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리라. “총애하는 신성제국 백성들이여. 이 자리를 함께 빛내주어….” 저 총애하는 신성제국의 백성들이라는 소리를 벌써 23번 정도 들은 것 같은 느낌. “오늘도… 위대한 제국의 힘을….” 저 위대한 제국은 약 35번 정도 말한 것 같다. 더 이상 참기 어렵다고 느꼈을 즈음 연설의 끝을 마무리하는 멘트가 들렸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 자랑스러운 우리… 제국민 들에게 제국이 가지고 있는 힘을… 제국을 수호하는 방패이자 제국의 적을 처단하는 검을 소개하고자 한다. 검은 머리의 이방인들은 그 동안 이 땅에서 함께 살아오며 제국의 발전에 수많은 기여한 바, 지금부터 호명하는 이들을 신성제국의 8좌로 임명하는 바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커다란 함성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드디어 황제의 길고 긴 연설이 끝났다는 환호성인지 아니면 제국 8좌를 위한 환호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자일 확률도 결코 낮지 않으리라. 황제는 군중의 함성에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이번에는 연설이 아니다. “제국 제1좌, 차희라.” 옆에 앉아 있는 차희라가 벌떡 일어나 단상의 앞으로 향했다. “나 먼저 나간다, 자기.” “응.” 제법 멋들어진 갑옷을 입은 채 당당하게 군중들의 앞으로 걸어 들어가는 붉은 머리가 눈에 보인다. ‘멋있네.’ 미친 듯이 열광하고 있는 군중들과 잘 어우러지는 그림. 황제를 대신해 차희라를 소개하고 있는 한 병사는 목이 터져라 그녀의 활약상을 외쳤다. 듣고 있는 내가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지만 저런 것도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연출이 너무 과하기는 하지만….’ 조금 더 담백하게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쁘지는 않다. 어차피 이러기 위한 자리니 이 정도가 적당하다. 황제가 기대하고 있는 홍보 효과도 충분. 대중이 열광하고 있으니 문제는 없다. 차희라 이후에도 한 사람, 한 사람 나갈 때마다 제국민들은 환호했다. ‘이거 왜 했는지 알겠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런 생각을 해볼 정도. 대중은 힘에 목말라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국 제3좌, 카스가노 유노.” 안개 소환사 천관위의 다음이 카스가노 유노. 이런 자리는 익숙하지 않은지 살짝 표정을 굳힌 채 앞으로 나가는 옆모습이 보였다. “제국 제4좌, 박연주.” 군중의 함성. “제국 제5좌, 위란.” 다시 한번 터지는 함성. “제국 제6좌, 스즈미야 이부키.” 그리고. “제국 제7좌, 김현성.” 몇몇 떨거지들이 나간 이후에야 자리를 박차고 나간 사랑스러운 회귀자. 가벼운 무장임에도 발걸음은 거침이 없다.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제국의 깃발은 펄럭이고 시선을 잡아끄는 묘한 느낌이 분위기를 더욱더 고조시킨다. ‘그림이네, 그림이야. 현성아!’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때마침 하늘에 있는 구름이 걷히며 햇빛이 쏟아지기 시작. ‘연출 죽이네!’ 아까만 해도 과하다고 생각했던 연출이 괜스레 괜찮게 느껴진다. 제국민들의 환호는 더욱더 커져가고 있었고 당연하지만 내 차례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국 제8좌, 이기영.” 그 다음에 호명된 이름이 바로 내 이름 석 자. 최대한 위풍당당하게 걸으려고 했지만 그들과 같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은 역시 무리다. 심지어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그렇지만 함성은 제법 크다. “자유 도시 린델을 대표하는 파란의 부길드 마스터이며, 용의 선택을 받은 자. 신성제국의 명예주교이며 대륙을 구원한 30인의 대륙 수호자의 1인. 제국을 대표하는 연금술사이자…….” 얻어놓은 타이틀이 꽤나 많다는 생각도 든다. 비공식적인 타이틀까지 합치면 조금 더 된다. 물론 불세출의 천재라는 둥, 전략과 지략의 귀재라는 둥, 말도 안 되는 타이틀도 함께 나오기는 했지만 저런 것도 다 홍보의 일환이니…. ‘눈 감아줄 만하지.’ 아무래도 이번 행사를 기획한 이들은 내 컨셉을 제국의 두뇌 같은 이미지로 잡은 모양. 보여준 모습이라고는 캐슬락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낸 것과 부대 편성이 전부였지만 공화국의 오호대장군에도 비슷한 게 있는 만큼 밸런스를 맞추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나쁘지는 않지.’ 거짓말이 조금 섞이기는 했지만 나를 천재로 만들어준다는 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애초에 내가 원하는 포지션이기도 했고 실제로 내가 대단하지 않더라도 대단하게 보이는 효과는 어마어마했으니까.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제국의 수도가 떠나가라는 듯 소리 지르는 군중과 손을 흔드는 인사들. 황제 입장에서도 기획자 입장에서도, 이 이벤트의 참가자인 우리 입장에서도 완벽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축제였다. 문제가 있었다면 이 이후에도 마련된 이벤트가 많이 있다는 것. 단상으로 내려와 행진 한 번 해주고 몇몇 제국민 대표들과의 악수회, 귀족들과의 파티 등등 쌓여 있는 스케줄이 많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냐고….’ 처음에는 제법 즐거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적 한계에 부딪칠 것 같았다. 늙은 황제가 몸소 이곳까지 행차해 내 손을 번쩍 들어 올려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자연스럽게 환호성이 터졌고 늙은 황제는 괜스레 내 등을 두드렸다. ‘이 늙은이, 간신 한 번 엄청 좋아하네.’ 이렇게 대놓고 간신을 좋아하는 황제도 흔치 않을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란 바젤 추기경도 슬그머니 내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이런 것까지 바란 건 아닌데….’ 이런 그림까지 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러 곳의 총애를 받는다는 건 좋지만 이런 식이라면 적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 물론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나를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샤를롯트의 시선이 느껴진 것이다. 그렇지만 좌 황제, 우 바젤 추기경은 생각보다 듬직했다. ‘내가 인마! 으이! 얘들이랑! 인마! 술도 먹고! 으이! 밥 먹고! 사우나도 가고! 마! 다했어, 인마!’ 어디에선가 들어봤던 대사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울리고 있었다. # 264 회귀자 사용설명서 264화 제1황녀 샤를리아(1) 사람의 호감을 사는 방법은 생각보다 쉽다. 인간관계 역시 대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렵지 않다. 밥 한 번 같이 먹고 사우나 한 번 같이 가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타인에게 얼마나 맞춰줄 수 있는가에 있다. 대상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원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무엇을 듣고 싶어 하는지. 대화하는 내내 생각하며 최대한 맞춰주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에는 굳이 저항하지 않아도 된다. 내 소신을 주장할 필요도 없다. 상대가 보수적인 타입이라면 나 역시 보수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맞장구 쳐주는 걸로 끝. 상대방이 진보의 입장에 서 있다면 진보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는 것으로 끝. 정말 겨우 이걸로 끝이라는 거다. 사형 제도로 예를 들어보면 더욱더 간단. 대상이 사형제도에 찬성하는 입장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정보와 대상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준비하면 된다. 조금 더 전문적인 이야기라면 더욱좋다. 사형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올리고 열띤 토론을 하며 대상의 말에 적극 동조한다. 당연히 대상은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 우리가 생각보다 잘 맞는구나! 우리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물론 내게도 소신이라는 게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반대의 입장에 있다고 해서 굳이 반대한다고 외칠 필요가 없다는 거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여기에서 탈락. 열을 내거나 대화 창구를 닫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내 입장을 상대방에게 전하고 싶다면 당장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시간을 조금만 더 들이면 된다. 대상이 우리가 잘 맞는 친구고 같은 입장을 표명하는 동료라고 인식한 순간부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 의견을 덧붙이면 된다. 온탕에 들어간 개구리는 열탕이 되어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게 대상과 친분을 쌓는 방법이고 간신이 권력자를 주무르는 방법이다. ‘바젤 추기경….’ 바젤 추기경 같은 경우에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을 들여 이 작업을 해왔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계속해서 동조하고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방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고 마찬가지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누기 위해 사전에 공부를 해가는 것 역시 필수. 신학에 능통해야 했고 이단과 악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대화를 하는 것보다 그의 지식 수준을 따라잡기 위해 공부하는 시간이 더 길었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서로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관계를 구축하는 데 걸린 기간만 수개월. 당연히 황제 역시 그 정도의 시간을 생각하고 작업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효과는 상상하는 것 이상.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 아무리 상대방의 마음에 들려고 발악하는데도 친해질 수 없는 경우. 대화의 주제와 성향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핀트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 당연하지만 늙은 황제는 그 반대의 경우였다. 핀트가 완벽하게 맞는다는 느낌이었다. 이 황제는 완벽한 형태의 간신을 원하고 있었고 나는 그 조건에 백 퍼센트 부합하고 있다. ‘키야….’ 이지혜와는 다른 형태의 영혼의 단짝.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이쪽이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제국 8좌 행진이 끝나고 파티가 시작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다. 장담컨대 이 황제가 다른 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더라면 계속해서 이쪽에 붙어 있었을 것이다. 늙은 영감 역시 해야 할 일이 많다. 유력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고 교황청의 인사들과도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바쁜 것이 당연하다. 물론 새로 제국 8좌로 임명된 8명의 이방인들도 바쁜 것은 마찬가지. 이런 모임이 있을 때마다 제법 주목받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자유 도시 린델, 실리아, 다완은 신성제국의 품 안에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독립된 지역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 도시들을 컨트롤하는 도시 내의 강자들도 마찬가지다. 간접적으로는 제국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이야기다. 상황이 완전히 변해버렸으니 유력 귀족들이 달라붙어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제국 8좌라는 이름으로 신성제국의 정치에 약소하게나마 힘을 실을 수 있게 된 것. 모르긴 몰라도 반 황제파에 선 귀족들이나 정세 변화에 민감한 이들은 오늘의 일을 더욱더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리라. “하하하. 제국민의 환호성이 계속해서 울리는 듯합니다.” “그야 그럴 만도 하지요. 어디 신성제국에 자리 잡은 모험가 분들의 유명세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졌습니까?” “아암. 암. 그렇고말고.” “요즘 아이들 중에 모험가의 일지를 읽지 않는 아이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특히나 린델에서 나온 모험일지들은 제가 봐도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많으니까요. 마치 동화책에서나 봐왔던 영웅이나 용사 같은 이들의 이야기라도 보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하하하. 영웅이나 용사와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황제 폐하가 직접 선포하신 제국 8좌는 이미 제국의 영웅이 맞지요.” “그렇고말고요!” 대충 이런 상황이라는 거다.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이런 저런 말을 떠들어대는 귀족들을 보니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한 사람에게 적어도 일곱 여덟 명 이상이 달라붙어 있다. 파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피곤해하는 이들이 많이 보인다. 차희라는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많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는 중.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지만 저게 빡치기 일보 직전의 표정이라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박연주는 제법 능숙하게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고 카스가노 유노의 경우에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이다. 사랑스러운 회귀자 역시 마찬가지. ‘귀족 예법도 배워놨었나.’ 확실히 손짓이나 몸짓 같은 것에 예법이 밴 느낌이다. 평소보다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 역시 그동안 귀족 부인들과 자주 몰려다니며 여러 가지를 배워왔지만 김현성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지는 못한다. ‘1회 차에 노력 좀 했었겠네….’ 따위의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자 금발 머리를 가지고 있는 귀족 하나가 말을 이어왔다. “제 딸아이도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소개된 모험일지를 사 달라고 난리가 아닙니다. 사고만 치는 철부지 인데 신기하게도 책만 쥐어주면 조용해지니…. 하하하.” ‘거짓말 하나는 잘하네.’ 그래도 내 환심을 사기 위해 저런 말을 했다는 거니 적당히 받아줘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것 참 영광이로군요. 나보트 남작님. 하하. 언제 한번 시간이 난다면 영지로 찾아뵈어도 괜찮을는지요. 물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찾아갈 생각 따위는 없지만 이 정도의 립서비스는 해주는 게 좋다. “아아! 그렇게 해주신다면 감사하지요!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나보트 남작이 다스리는 영지가… 아마 동서쪽 부근에 있는 가르시아….” “알아주시니 영광입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 사실 보잘 것 없는 작은 영지이기는 하지만 거울 호수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어 가을이면 뱃놀이를 즐기기 위해 찾는 장소입니다. 아마 연인과 함께 오시면 좋은 추억을 만드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내 옆에 꼭 달라붙어 있는 정하얀을 의식한 발언. 아무 말 않고 영업용 미소를 띄우고만 있었던 정하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니 함께 놀러가자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아… 저도 가본 적 있어요.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하늘을 수놓은 듯한 호수가 참 매력적인 장소였는데… 남편이 건강할 때는 매년 찾는 장소였었죠.” “카트린 공작부인도 다녀오셨군요.” “네, 이기영 님. 아마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이거 다른 분들도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내년에라도 당장 달려 가봐야겠습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당연히 갈 생각은 없다. 그 거울 호수라는 곳에 보물이라도 숨겨져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단순한 관광을 위해서 그 먼 곳까지 갈 여유 따위는 없다. ‘그나저나 분위기 참 좋네.’ 불과 하루 전에 대륙 8좌와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 같다. 여유를 즐기고 있는 귀족들을 보니 전쟁 같은 것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어느 곳이나 권력자들은 보통 이런 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잔을 들어 올리는 것은 물론, 하하호호 하는 웃음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메우고 귀부인들은 자신들의 사치품을 자랑한다. 제국의 미래를 이야기 하는 이들도 있기는 하지만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니 벌써 몇 잔 들이켠 모양이다. ‘탁상공론.’ 차라리 탁상공론이 났다. 술에 취한 채로 제국의 미래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아이러니다. 아마 제국의 일부 지식인들이 이 광경을 바라본다면 혀를 끌끌 차며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만약 그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다. ‘나야 뭐 개뿔 상관도 없지만.’ 제국의 미래 말고도 신경 쓸 게 많다. 겨우 그런 것보다는 지금 이 시점에 계속해서 나를 경계하는 샤를롯트 황녀가 더 신경 쓰인다는 거다. ‘너무 간신배처럼 굴었나.’ 당장 황제의 마음에 들겠다고 템포를 올린 게 그녀의 경계를 산 원인이었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황제가 너무 나를 마음에 들어 한 부작용이기도 했다.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생각하고 있는 게 다르다’ 이전에 그다지 핀트가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성향과는 별개로 왠지 모르게 친해질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 차기 황제에 가까운 만큼 사람인 만큼 노력이야 하겠지만 그만큼 시간 소비가 클 수밖에 없다는 거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다시 한번 작업 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딘가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 “죄, 죄송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저건 또 뭐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시녀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렸고 그 앞에 있는 여자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씩씩 대고 있었다. 대충 일이 어떻게 된 건지는 듣지 않아도 알 정도. ‘제1황녀.’ 제1황녀 샤를리아다. 입고 있는 하얀색 드레스에 와인이 엎질러져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시녀가 발이라도 헛디딘 모양. 술에 잔뜩 취해 붉어진 얼굴로 다시 한번 시녀의 뺨을 후려치는 모습은 표독스러운 악녀의 정석이다. 그 와중에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꼴은 가관. ‘키야….’ “네년이… 감히 네년이!”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죽, 죽여주시옵소서.” “검을 가져와라. 지금 당장 이년의 목을 직접 쳐내지 않고서는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으니. 어서!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게냐!” ‘저거 완전히 미친년인데.’ 본인의 실수가 아니고 술에 취했다고는 해도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마이너스 요인이다. 어째서 아까부터 그녀의 주변으로 다른 귀족들이 모여들지 않았는지 잘 알 것 같았다. ‘분노 조절 장애라도 있는 건가. 생각이 없는 건가.’ 성향과 기벽을 보고서는 저 여자가 답이 없는 쪽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보니 더욱더 그렇게 느껴진다. 몇몇 기사와 귀족이 그녀를 자중시키려고 하지만 이미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 술에 제대로 꼴아 있는 황녀의 모습은 망나니 그 자체였다.. 자주 봐오던 장면인지 황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혀를 차고 있었고 제2황녀 샤를롯트는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뭔가 재밌는 게 눈에 띈 것은 바로 그때. “아주 콩가루네. 이거….” 계속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는 시녀를 마음의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눈에 띈 사실. 별건 아니다. 다만 확실히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올 스탯 60이상. ‘저런 여자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고?’ 장담컨대 하늘이 무너져도 불가능한 일이다. 다분히 어떤 목적이 있어 일부로 와인을 엎질렀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를 테면 1황녀 샤를리아의 이미지를 깎아 내리려는 목적. 안 그래도 미친년을 더 미친년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이의 소행. 범인이야 누군지 뻔할 뻔자. ‘샤를롯트.’ 이유 역시 심플하다. ‘생각보다 욕심이 많구만.’ 황위를 위한 보이지 않는 싸움이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 265 회귀자 사용설명서 265화 제1황녀 샤를리아(2) “황녀님, 조금만 화를….” “어서 빨리 내 검을 가져오라고 말하였다!” “황, 황녀님!” “지금 당장!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게냐! 거기 아무도 없느냐!” 흥분한 황녀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확실히 취해 있다. 만약 1황녀 샤를리아의 성정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면 아주 최적의 타이밍에 일을 벌인 셈이다. 별것 아닌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에는 여러 가지 정황이 보인다. 지금 당장은 1황녀 샤를리아가 정신병자처럼 보이겠지만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제대로 설계당한 거네.’ 안 그래도 맛탱이가 간 것 같은 여자가 제정신을 못 차리는 상태에서 일을 벌였으니 아마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으리라. 범인이 정말 샤를롯트라거나, 아니면 그녀의 휘하에 있는 귀족이 벌인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원인제공자가 원하는 대로 사태는 더 이상 수습이 불가능 할 정도로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중. 비틀거리며 여기저기의 테이블에 부딪쳤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위에 있는 음식과 병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음 약하신 귀부인들은 깨진 유리 조각을 피해 꺄악! 소리를 내고 있었고 귀족 남성들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그 와중에도 상황파악 하지 못하고 있는 샤를리아는 고래고래 검을 가져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완벽한 피해자의 포지션에 서 있는 시녀는 우리 길드의 안기모 뺨치는 연기를 선보이고 있는 있었다. ‘막장이네…. 진짜 막장이다.’ 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연회장이 순식간에 시정잡배들이 싸구려 럼주를 들이키는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 역시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이 와중에 미친 여자의 아비이자 황제라는 놈은 더 이상 저 꼴이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혀만 차고 있으니, 어째서 1황녀가 저 모양 저 꼴이 됐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똘똘이 사건으로 인해 깨달은 가정교육의 소중함을 다시금 떠올려보게 됐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술에게 먹히신 분은 지금도 연회장이 떠나가라는 듯이 소리를 지르는 중이다. “감히! 네년들이 나를 무시해? 네년들도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그,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황녀님.” “아니라면 어째서 내 명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는… 우욱….” “황, 황녀님.” “놔라. 당장 놓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조금 취하신 것 같사옵니다….” “취하지 않았다.” “고, 고정하여 주시옵소서.” 옆에 있는 나보트 남작을 바라보니 녀석 역시 참담하다는 표정이다. 슬쩍 운을 띄운 것은 당연지사. 제1황녀에 관한 정보가 적은 만큼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보트 남작님, 저분은….” “네. 제국의… 제1황녀 샤를리아 님입니다.” 입을 꾸욱 다물고 있는 걸 보니 대놓고 황녀의 험담을 볼 만큼 간이 크지는 않은 모양. 그렇지만 녀석의 일그러진 표정 만 봐도 저 여자가 얼마나 막장인지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사건이 오늘이 처음일 리가 없다. 형태는 달랐겠지만 아마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을 터. 굳이 샤를롯트나 그녀 휘하에 있는 귀족들이 나서서 설계하지 않아도 저 여자 혼자 사고를 치고 다녔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한 번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이 이벤트를 마무리 하는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예상했던 대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에서 여성으로 이루어진 기사 단원들이 나타났고 샤를롯트는 파티에 참석해 있는 인원들을 진정시키는 한편 기사단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혼돈스러웠던 장내가 정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이 피곤하신 것 같은 모양이니 제1황녀님을 잘 뫼셔라.” “예.” “황녀님,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놔라! 이것 놓으라고 하였다!” 기사가 등장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발버둥치는 꼴은 가관. 이제 저런 걸 황녀라고 불러야 하는지 민망할 지경이다. 장담컨대 만약 저 꼴을 하고 있는 게 일반 귀족이었다면 진즉에 제압되어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으리라. 계속해서 발버둥 치는 것은 물론 기사들의 손을 뿌리치고 있으니 기사의 입장에서도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다. 혹시라도 다치지나 않을까 조심스럽게 다루려고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금 더 이 장면을 보여주고 싶은 건가….’ 만약 내가 샤를롯트였다면 최대한 제압의 시기를 늦췄을 것이다. 그래야 여기 있는 관중들이 제1황녀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인간인지 알게 될 테니까. 겉으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인다. ‘저런 게 황녀라니….’ ‘제국의 미래가 어둡구나….’ 순화해서 표현한 게 이 정도.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조금 바뀌게 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어어어어엇!” “꺄악!” 비틀거리며 기사들의 손을 뿌리치려고 한 황녀의 몸이 갑작스레 기울어진 것. 당황스럽게도 그녀가 넘어지는 방향은 이쪽이다. 의리 없는 나보트 남작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지만 나 역시 자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걸 받어, 말어….’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여기에 개입하는 게 옳은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이다. 이미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제1황녀와 연관되어 좋을 게 없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한 발 물러서 지켜보는 게 더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거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선 받는 게 맞다. 보는 눈도 많고 귀족 영애와 귀족 부인들도 많으니 철푸덕 넘어지며 개구리가 되는 꼴을 면하게 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아무런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은 것보다는 매너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옳다. 나중에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신체 접촉은 일단 논외. 빠르게 손가락을 튕기니 파칙 파칙 거리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서 용의 손바닥이 튀어나와 그녀가 떨어지는 것을 받아낸다. “이, 이것 놔라!” 여기사가 자신을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소리를 지르는 꼴은 추하다 못해 가슴 아파질 지경이다. 귀족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나와 그녀를 보고 있었고 용의 손에 기댄 채 발버둥 치던 샤를리아는 한참을 발악한 이후에야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체력이 다한 것이다. ‘뻗었나.’ 슬그머니 그녀에게 발걸음을 옮기자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 올린 얼굴이 보였다. 그 와중에 나를 올려다보는 걸 보니 아직 뻗지는 않은 모양. “너….” “괜찮으십니까? 황녀 전하.” “제법 괜찮구나. 이름이 무어냐.” “무슨 말씀이신지….” “생긴 것이 제법 괜찮다 이 말이다.”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튀어나왔다. ‘아주 바닥으로 기어들어가는구나.’ 마치 남창을 다루는 듯한 말투. “취하신 것 같사옵니다, 황녀 전하. 제가 편히 모실 테니 안심하시고 주무시옵소서.” “그래. 그래… 한번 모셔 보거라. 내 만족한다면 너에게 두둑한 금화를… 내릴….” 고개를 끄덕이며 졸기 시작하는 걸 보니 이미 체력적으로 한계였던 것 같다. 뭘 만족시켜야 두둑한 금화를 내린다는 건지 대충 예상이 가긴 했지만 일단은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 혀를 차던 황제가 이쪽에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보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직접 말을 걸어오는 것을 보니 이런 꼴을 보인 게 부끄럽기는 한 것 같았다. “큼… 못 볼 꼴을 보게 했군.” “여의치 마시옵소서, 황제 폐하.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습니다.” “쯧쯧…. 내가 얼굴을 다 들고 다닐 수가 없구나. 이기영 명예주교… 오늘 일은 꼭 보답하겠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하하.” “크흠… 아닐세.” “오히려 작은 손이라도 보탤 수 있어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주동자로 의심되는 제2황녀 역시 나쁘지는 않은 마무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벌써부터 장내를 정리하고 컨트롤하기에 여념 없다. 결국 이 소동에 패자는 단 한 명밖에 없는 셈. 여기사들에게 몸을 의지해 끌려가고 있는 샤를리아가 유일했다.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 내일 일어나마자 오늘 저지른 실수를 되새김질 할 것이다. ‘쪽팔리다 못해 도망치고 싶어질 거다.’ 중요한 사교회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로 행패를 부리다 기사들에게 끌려갔으니 누가 봐도 최악의 인상을 남긴 것이다. 오랜만에 함께 모인 유력 귀족에게도, 제국 8좌에게도, 교황청의 인사들에게도 말이다. 심지어 몇몇 주변 왕국에서 온 사절단도 있었으니 국제적으로 답이 없음을 광고한 셈. 물론 처음부터 짜인 각본이었지만 이런 경우에는 당한 쪽이 바보라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다. 오히려 너그럽게 시녀를 용서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평소와는 다른 인상을 심어줬을 수도 있었으리라. 와인을 생각 없이 들이켠 게 첫 번째 실수요, 정신을 놔버린 게 두 번째 실수다. ‘쟤는 황제 하면 안 되겠다.’ 오히려 샤를롯트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기 시작한 것은 당연. 한쪽은 악녀인 주제에 무능하기까지 하고 한 명은 성군의 자질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밀하다. ‘안 봐도 뻔한 싸움이네.’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누가 후계자로 선정될 지는 뻔할 뻔자. 옆에서 계속해서 말을 걸고 있는 이 멍청한 황제도 이미 제2황녀 샤를롯트를 후계자로 내정해 놓은 듯했다. “그래도 샤를롯트가 잘해주니 다행이지.” “하하하. 든든하시겠습니다.” “아암… 든든하다마다. 내 유일한 걱정거리가 아까 봤던 그 망나니라네. 오늘도 데리고 나오는 것이 아니었어. 쯧….” “누구에게나 어두운 시기는 있는 법입니다.” “그래… 이기영 명예주교의 말이 맞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그래… 그렇게 생각해야겠지….” 실망했다는 듯이 샤를리아의 흉을 보고 있기는 하지만 같이 욕해달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게 전해진다. 눈 밖에 난 자식이라고는 해도 황제의 자식이고 황제의 핏줄이다. 듣고 싶은 말은 걱정을 덜어주는 말일 거라고 생각했고 역시나 그 생각은 유효했다. ‘그래도 2황녀가 더 예쁘겠지.’ 가슴 아프지만 1황녀 같은 경우에는 반쯤 포기한 것 같은 느낌이라는 거다. 때마침 2황녀가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이미 모든 사태를 정리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와인은 엎지른 시녀 역시 이미 돌려보냈고 바닥도 말끔하게 처리되어 있다. 처음부터 소동이란 게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정리했다. 그녀가 유능한 인간임을 확실히 감지한 이쪽의 마음이 저도 모르게 선덕선덕해지기 시작했다. ‘샤를롯트 황녀 전하 만세!!’ 반의 반쪽짜리이기는 했지만 최선을 다해 충심으로 모실 준비가 되어 있다. 첫 단추가 살짝 잘못 끼워진 만큼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그만큼 뿌듯함도 클 것이다.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바퀴벌레를 바라보는 듯한 내 님의 표정. “고생하셨….” “폐하,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이만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이기영 명예주교는….” “제가 대신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건강이 걱정되니….”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구나.” 이쪽을 완벽하게 무시한 채로 황제 폐하를 데리고 가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썩어빠진 년이….’ # 266 회귀자 사용설명서 266화 제1황녀 샤를리아(3) “길들이기네요.” “…….” “그러니까 그 늙은이는 적당히 구워삶았어야죠. 누가 봐도 황제가 지나치게 호의적인 것 같던데, 황녀 입장에서 경계하는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대충 봐도 어떤 스타일인지 알 것 같고… 누가 봐도 오빠랑 잘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싫어하는 것 같던데. 이해가 안 되네. 오빠 같은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눈앞에 있는 인간에게는 호감형이겠지만 그 반대는 다르다. “이번에는 오빠 실수가 맞아요. 물론 저도 황제가 그렇게까지 오빠를 좋아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요.” “흠….” 파티가 끝난 이후에 잠깐 시간을 내준 이지혜의 말에 제대로 답할 수가 없었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최고 한두 달은 잡았던 계획이 하루 만에 끝장 난 상황이었으니 그녀가 나를 경계하는 게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황녀 입장에서도 오빠를 내치기는 어려울 테니까… 제국 8좌의 일원이기도 하고 다른 귀족들이나 교황청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죠. 아마 적당한 시점에 오빠에게 접선해 올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요.” “길들이기가 끝나고 나서?”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단순히 사람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밀어낼 정도로 바보는 아닌 것 같으니까. 만약에 그냥 오빠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러는 거라면 그 멍청한 1황녀랑 비슷한 수준이라고 봐도 되겠죠. 뭐, 그럼 제국은 끝장이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지.’ 이지혜가 말한 것 말고도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다른 귀족들과 많은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역시 그 원인일 터. 집단 내에서 내 영향력이 더 이상 커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차기 황권 주자나 다름없는 자신마저 이쪽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기영이라는 인간주식이 폭등할 거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많은 이들 앞에서 황제와 친근한 관계라는 걸 보였고 교황청과도 밀접한 관계라는 것은 모르는 이들이 없다. 최소한의 억제제가 필요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자신이고….’ 또 한 가지 이유는 혹시 내가 교황청에서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할 경우다. 황권과 교황청은 기본적으로는 신성제국의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미묘한 힘 싸움을 벌이고 있다. 만약 내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황제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샤를롯트가 이쪽을 개 무시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뭐,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쟁점은 이지혜가 말한 그대로다. ‘길들이기.’ 단순히 자신에게 납작 엎드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쪽을 입맛대로 주무르는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은 꽤 짜증 나실 거예요. 아마 오빠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위치를 조금씩 깎아내릴 거고….” “손발을 잘라내겠다는 거네.” “글쎄요. 그 정도까지 할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눈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만 밟아 놓겠죠. 그리고 그 이후에 접선. 솔직히 지금의 오빠는 황녀가 먹기에는 사이즈가 너무 크거든요. 적당한 사이즈로 줄여놓은 이후에 한 입에 삼켜 드시겠죠?” “이거 짜증 나는데…. 그 작업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나를 갉아먹으려고 한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교황청 쪽이나 카트린 공작부인 같은 확고 세력이야 별문제 없겠지만….” ‘그 이상을 잃어버릴 수도 있어.’ “그 이상 잃어버리는 걸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맞아.” 내 생각을 알아차리는 게 귀신같다. “글쎄요. 아마 그 정도까지는 하지 않을 것 같은데.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시는 게 좋을 수도 있어요. 지금 양보하면 이후에 더 큰 걸 얻을 수도 있고… 한 번 접고 들어간 이후에 천천히 황녀를 구워삶으면 되는 거 아닌가? 미지근한 곳에 던져놓은 개구리처럼. 오빠 그런 거 잘하잖아요. 같은 편인 척했다가 뒤통수 치는 거.” “칭찬으로 들을게.” 하고 있는 생각이 무척 비슷하다. 물론 나 역시 이 부분에서는 이지혜와 의견이 일치한다. 한 번 접고 들어가면 오히려 황녀를 이쪽에 입맛에 맞게 바꿀 가능성도 있다. 황녀가 쳐냈던 지지 세력도 다시 돌아올 거고 오히려 전보다 더 힘을 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기에는 오빠가….” “맞아. 난 의심이 많거든….” 빼앗아 가거나 밟아 놓으려는 것이 내 소신이나 자존심이라면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지만 그게 권력이나 어떤 물질적인 것이라면 양보하기 꺼려진다는 거다. “난 이런 부분에서는 절대로 양보 안 해.” “황녀랑 한 판 해보게요?” “아무리 그래도 차기 황권 주자한테 밉보이는 건 조금 그렇긴 한데… 방법은 생각해 봐야지. 아직 시간은 조금 있으니까.” “왠지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네요. 제가 준비해야 될 일이라도 있나요?” “아직은 없어. 이쪽에서도 생각해봐야 될 게 많으니까. 이 이야기는 잠깐 접자. 나중에 떠오르는 게 있으면 말해줄 테니까. 누나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줘. 안 그래도 머리 아픈 타이밍인데 짜증 나네. 아, 그보다 식사는 어땠어?” “무슨 식사요?” “왜 그때 우리들이 황제한테 접선하러 들어간 다음에 수행원들끼리 따로 밥 먹었었잖아.” “아… 뭐가 궁금해요?” “하얀이가 잘 적응했는지가 궁금하지.” “나쁘지는 않았어요. 말도 잘했고… 오빠랑 떨어져야 한다는 소리에 조금 짜증이 올라온 것 같기는 했었는데… 엄청 저기압이었죠.” “뭔 문제 있었어?” “다완에서 온 수행원 중에 한 명이 하얀 씨한테 꽤 관심을 가지더라고요.” “뭐?” “식사 시간까지는 괜찮았는데, 끝나고 나서 이야기 좀 하자고 그 남자가 살짝 어깨를 건드렸나….” “그래서?” “뭐, 그대로 으스러지더라고요. 저야 마법이니 뭐니 모르지만 공간이 그대로 일그러지면서 그 남자 팔도 같이 우두둑거리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비명 막 지르고 어깨까지 마력이 타고 올라가는 게 보이는데… 같이 온 수행원 중에 사제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그대로 불구가 될 뻔했다니까요.” “그걸 왜 지금….” “당연히 묻어 버리기로 서로 합의했으니까죠. 저야 오빠 만날 시간도 없었고요. 일 저지르고 나서 조금 당황한 게 보였는데… 오빠한테도 이야기 안 했을 거라는 제 예상이 잘 맞았네요. 이건 누가 봐도 문제가 될 수 있어서 그냥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어요. 남자 쪽에서도 실수가 없었던 건 아니니까.” “잘도 합의시켰네.” “숙녀의 몸에 손을 댄 게 잘못이죠. 뭐, 일이 커지는 건 그쪽도 원하지 않더라고요. 아무래도 린델의 세력이 가장 크니까. 이래서 권력이 좋은 거 아니겠어요?” 정하얀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 같았다. 붙어 있을 때는 티를 잘 안 내지만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불만이 쌓인 모양. 이지혜가 그나마 옆에서 수습을 해주고 있다는 게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돌봐줄 시간이 없으니까.’ 수행원으로 이지혜를 데리고 올 박연주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얘도 잘 적응하는 것 같고….’ 대부분의 수행원들이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무척 잘 적응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본인이 더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이지혜는 이지혜다. 이쪽이 자신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의식했는지 한쪽 머리를 넘기며 입을 열었다. “그것 외에는 별 사건 없었어요. 분위기가 조금 안 좋아지기는 했지만 뭐, 어쩌겠어요. 정작 윗대가리들은 친한데. 아마 얼마 안 있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예요. 그쪽도 하얀 씨에 대해서 대충이나마 언질 받은 것 같고, 태도가 달라진 것만 봐도 척이죠.” “그렇다면 다행이네. 혹시라도 커지면 이야기해 줘.” “그럴 일 없어요. 직접 나설 필요도 없고… 다만 하얀 씨한테는 잘 말해주세요. 수습하는 건 상관없지만 솔직히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거든요.” “응. 경고는 해둘게.” “그거 잘 됐네요. 아무튼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죠?” “고마워, 누나.” “뭘요. 나도 받은 게 있는데. 혹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줘요. 아, 그리고 황녀 관련해서는 꼭이요. 오빠가 노선을 정해야 나도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 “응.”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내 사랑.” 자리에서 일어난 이지혜는 살짝 내 볼에 입을 맞추고는 후다닥 나가버렸다. 평소처럼 몸의 대화 어쩌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정하얀이 은근히 신경 쓰였던 모양. 최근에 봤던 장면이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깜짝 놀랄 만했겠네.’ 아마 멍청한 남자의 으스러진 손 보다는 정하얀의 표정이 더 기억에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짜증이 머리까지 치솟았을 때 정하얀이 보여주는 표정은 항상 같이 다니는 나도 적응이 안 된다. ‘한마디 해야겠어.’ 이쪽이 물어봤을 때는 분명히 별일 없었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리 수습되었다고는 해도 거짓말을 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경고를 주는 것이 맞으리라. 안 그래도 요즘 너무 풀어준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앞으로는 떨어져야 할 시간이 더 생길 수도 있는 만큼 따끔하게 한 마디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때마침 문이 철컥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 누구인지는 뻔하다고 생각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리 와서 앉아.” 평소와 다른 목소리를 선보이는 것은 당연. 시작부터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는 걸 보여 줘야 효과가 있다. 애매한 태도는 이미 영악할 대로 영악해진 정하얀에게는 약발이 들지 않는다. 아마 지금쯤 자신이 실수한 것을 되새김질하며 들어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리라. “내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었나?” 확실히 고민하고 있는 느낌. 아마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니다. 차라리 오지 말고 문 앞에 서서 대답해. 지금은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 눈물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약해진다. 잘 들리지는 않지만 지금쯤 닭똥 같은 눈물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상과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기영 씨.” “어….” 찾아온 손님은 정하얀이 아니라 김현성. 순간적으로 얼굴이 빨갛게 변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를 바라보는 김현성의 얼굴. 혹시나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내 표정을 보고 자신이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 그렇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고 들어와도 되는지 고민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와서 앉으시죠. 하얀이인 줄로만….”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죄송하군요.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괜스레 서로 민망해지는 상황. 시선을 고정시키기가 어렵다. 이럴 때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옳다. 김현성도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본 나는 바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아. 조금… 음…. 뭐라고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인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네. 뭐라도 말씀해 주세요.” ‘시키면 해야지.’ 생각해 보면 김현성이 이쪽에 직접적으로 뭔가를 해달라고 요청한 적은 없었다. 이유 모를 뿌듯함과 함께 궁금증이 몰려들기 시작. 녀석이 뭘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타이밍에 갑자기 부탁이 있다는 것도 이상하다. ‘뭐지?’ 김현성은 꽤 진지한 표정. 민망했던 공기는 온데간데없다. 말을 이으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고민하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판단이 옳은지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녀석의 입이 열렸고 나는 조금 당황스럽게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제2황녀 샤를롯트가 황제가 되는 것을 막고 싶습니다.” # 267 회귀자 사용설명서 267화 제1황녀 샤를리아(4) ‘갑자기 뭐야?’ 누가 들어도 당황스러운 부탁이었다.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뭔가 고민하고 있다는 건 대충 눈치채고 있었지만 나 홀로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발언에 의문이 가득 찬 표정을 짓자 녀석이 다시 한번 아까의 말을 이었다. 이유를 물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내 얼굴을 보고 대충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눈치챈 모양. 당연하지만 이런저런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1회 차에 조금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을 테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죄송하지만…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이 은혜는 꼭….” “아뇨. 뭐 은혜라고 생각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뭔가 생각하시고 있으신 게 있는 거겠죠. 길드나 우리 파티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개인적인 일이라….” 그냥 길드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면 될 텐데도 굳이 개인적인 일이라고 선을 긋는 것을 보니 녀석도 참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쯧쯧.’ 그야 개인적인 일인 게 당연했다. 샤를롯트가 이쪽을 경계하고는 있었지만 신성제국이라는 커다란 집단을 생각해 보면 그녀가 황제가 되는 것은 이 제국을 위한 길이다. 현 황제는 황제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인물이었고 제1황녀 샤를리아는 누가 봐도 또라이에 가깝다. 물론 나로서는 황제나 1황녀가 더 다루기 쉽겠지만 제국의 발전을 더 무게감 있게 생각한다면 무조건 샤를롯트에게 한 표를 행사할 것이다. ‘행사할 필요도 없지.’ 샤를롯트는 이미 차기 황제나 다름없다. 제1황녀는 정신 나간 황실의 골칫덩이였고 후계구도가 제한적인 상황, 황제도 샤를롯트를 후계로 생각하는 것 같았으니 무슨 반전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그녀가 무난하게 황위에 오를 것이다. ‘실제로도 됐을 거고….’ 1회 차에서도 샤를롯트가 황제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가능성 정도가 아니다. 김현성이 그녀가 황제가 되는 것을 막고 싶다고 한 것은 1회 차의 황제가 그녀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다. 어째서 김현성이 그녀가 황제가 되는 걸 원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추측할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 ‘미치기라도 하나?’ 첫 번째는 샤를롯트가 미래에 사상 최악의 폭군이 될 경우.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샤를리아를 매장시키려고 한 것을 생각해 보면 그녀 역시 성격이 착하지만은 않다. 기벽과 성향은 선 쪽에 가깝지만 자신의 적이라고 판단한 이들에게는 검을 휘두르는 걸 주저하지 않는 모양. 나름 냉혹하다 할 수 있는 모습을 보면 그녀가 피에 미친 황제가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거다. 2회 차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야하는 김현성의 입장에선 1회 차의 폭군에게 다시 한번 나라를 맡기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당연. 그렇지만 김현성의 표정을 보고서는 이 추측은 한 쪽으로 미뤄 넣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회귀자의 얼굴에 그녀를 향한 증오는 없다. ‘숨기고 있을 수도 있지만….’ 뭔가 그녀를 측은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그로 인해 추측해 볼 수 있는 두 번째는 샤를롯트의 황제의 삶이 비참했던 경우다. 본인이 자괴감을 느꼈든 황제로서의 최후가 비참했든 간에 왕관의 무게를 그녀가 감당하지 못했을 경우. 샤를롯트가 스스로 황위에 오른 걸 후회하고 그걸 김현성이 옆에서 지켜봐왔을 수도 있다는 거다. 둘만의 이야기를 내가 알 리가 없지만 악의가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로 부탁을 하는 김현성을 보자 두 번째 추측도 나름 입맛에 들어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제1황녀가 역대급 성군이 되기라도 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세 번째 추측은 아니다. 내가 본 1황녀는 아집과 독기로 가득 차 있는 미친년이었고 도저히 구제할 방안이 보이지 않는 망나니였다. 만약 이 경우가 맞았다면 김현성은 제2황녀가 황제가 되는 걸 막고 싶다고 말하기 이전에 제1황녀를 황제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어야 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세 번째는 논외. 가능성이 있는 쪽은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다. 슬그머니 운을 띄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 제가 모르는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아… 조금….” “그렇군요. 사실 저도 처음 말씀드리는 거지만 제2황녀 샤를롯트는 저에게도 적대적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런 사람이 황제가 된다면 곤란하겠죠.” “네. 맞습니다. 그런 이유입니다.” “다시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아, 꼭 그러실 필요는 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선에서 적당하게… 그녀가 황제가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두 번째네.’ 두 번째가 맞다. 김현성은 샤를롯트에게 호의적이다. 그녀의 1회 차가 피에 미친 황제의 포지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의적일 가능성은 있지만 이런 추측은 이제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2황녀를 황제로 만드는 것을 김현성이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혹시나 또 질문을 던져올까 불안해하는 녀석의 얼굴을 보자 더 이상 쪼아대는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뭘 원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질문에 대답하는 게 곤란하신 것도 알겠고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받아온 게 많으니 갚는다는 의미도 있고… 그 이전에 동료니까요.” “그 말씀은….” 무척 감동했다는 표정. ‘그래야지.’ 이런 부탁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마침 나도 노선을 정했어야 했던 타이밍. 안 그래도 그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김현성이 길을 열어준 느낌이라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제2황녀와 아옹다옹할 것을 생각해 보니 머리가 아픈 것도 사실이다. 만만하다 만만하지 않다를 판단하기 이전에 개싸움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좋게 끝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당연. 어떤 식으로든 마찰이 있을 거고 만약 내가 이 개싸움에서 승리했다고 가정해도 샤를롯트는 상처 입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아무 상관없지만….’ 김현성이 그걸 용인해 줄까가 문제였다.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확인하는 것이 당연한 일, 슬그머니 입을 열자 잠깐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좋게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모양. “네. 부디 부탁드립니다.” 그 모습은 조금 씁쓸해 보이기는 했지만 나 역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샤를롯트는 적이다.’ 절대로 개인적인 앙금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김현성의 말이 아니었다면 무난하게 샤를롯트 루트를 탔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합리적인 결정이고 이득도 가장 크게 볼 수 있으니까. 저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어디까지나 김현성 때문이다. 그렇지만 입꼬리가 히죽 히죽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덕분에 안 그래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던 일상이 조금 더 바빠졌다. 이유야 뻔할 뻔 자. 어제의 일을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미 이지혜에게는 내가 움직일 노선을 전달했고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야 이기영이죠’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절대로 개인적인 앙금 때문은 아니었다. 조금 오해를 산 것 같기는 했지만 이지혜가 의욕적으로 움직인다면 편한 것이 사실. 물론 이지혜만 급하게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차희라도 ‘예상했던 대로네, 자기.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해’라며 도움을 줄 수 있는 쪽에서 주겠다고 이야기했고 카스가노 유노야 당연히 이쪽에 협력하기로 했다. 파란도 가만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현성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의욕적이었고 정하얀에게도 몇 가지 일을 맡길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나 역시 빨빨 돌아다니며 유력귀족과의 만남을 추진하고 있는 중. 평소대로의 스케줄이었지만 그 내막은 다른 것이 당연하다. 그 동안의 만남이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면 이번 만남은 그 친분을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열심히 모루와 망치를 두드렸으니 완성된 칼을 빼내 휘둘러볼 때가 다가왔다는 거다. 물론 완성된 무기들은 내가 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 있지만… 만약 눈치챈다면 파장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제2황녀의 자리는 확고했고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다는 건 곧 권력과 멀어진 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카트린 공작부인이나… 캐슬락 백작도.’ 내키지 않아 할 수도 있다. 아무리 이쪽과 저쪽이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들 샤를롯트를 적대한다는 주사위를 던지는 건 한 가문을 책임지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이야기다. 물론 교황청이야 이쪽을 지지해 주겠지만 황실과 교황청이 서로 크게 관여하지 않다는 걸 생각해 보면 명예주교라는 위치는 활용하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어려운데….’ 아직까지 샤를롯트는 내가 자신을 적대시한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을 터. 조만간 알게 될 만큼…. ‘노선을 잘 정해야 돼.’ 솔직히 생각해 둔 방법은 있다. 아니, 어차피 선택지가 제한되어 있다. 샤를롯트 캠프로 들어가 트롤짓을 해서 캠프를 완전히 분열시키든…. ‘샤를리아를 황제로 만들든….’ 솔직히 두 가지다 내키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그 외의 선택지는 없다. ‘다른 방식은 반역이야.’ 단두대의 목이 잘리고 싶지는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는 거다. 그 와중에 샤를롯트는 이쪽을 경계하고 있으니 논외. 결국에는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이건 어떤 의미로 제국에게는 재앙이다. 아마 김현성은 이것까지 고려해 나에게 부탁을 한 것이 틀림없을 터. 사실 제2황녀가 황제가 되는 걸 막으라는 건 제1황녀를 황제로 만들라는 말과 다름없다. ‘제국이 망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아니면 이쪽이 제1황녀를 컨트롤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물론 샤를리아 캠프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가 문제다. 제1황녀는 여전히 제국의 민폐녀고 이미 많은 귀족도 그녀를 등졌다. 아무런 지지기반도 없고 본인 역시 능력이 없다. ‘생각보다 험난하겠는데.’ 단순히 험난하다는 정도가 아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제일 확실한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지난 파티에서의 감사를 하고 싶다는 샤를리아를 만나고 있는 도중, 제1황녀가 머무는 곳의 시녀들의 얼굴을 보고서는 더욱더 아까와 같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미… 친….’ 대부분의 시녀들의 얼굴 쪽에 희미하게 신성력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답이 나온다. 미친 1황녀가 시녀들의 뺨을 샌드백 마냥 후려친 증거. 내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급하게 사제를 부른 것이 맞으리라. 마주치는 모든 시녀들이 겁에 질려있었고 혹시라도 뭔가 일이 터지지는 않을까 극도로 긴장해 있었다. 평소에 자신의 아랫사람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지는 뻔할 뻔 자. 장담컨대 이쪽에 거주하는 시녀들을 몸이 성할 날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은 저번에도 대충 느끼기는 했지만…. ‘제대로 쓰레기.’ 은근히 긴장되는 것도 사실. 본래는 최대한 샤를리아와 연관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지만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걸 어떻게 하겠는가. ‘한 번은 부딪쳐 봐야지.’ “저, 저… 황녀 전하. 이, 이… 이기영 님께서 오셨사옵니다.” 긴장했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시녀의 목소리 이후에 안쪽에서 생각보다 밝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 들어오시라 일러라.” “알겠사옵니다, 황녀 전하.” 어제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 조금 앙칼진 것 같은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조신하게 들리는 것은 내 착각이 아니리라. 문이 열리고 난 이후에 보이는 것은 응접실에서 풀 셋팅을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샤를리아의 모습이었다. 기벽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조금은 새침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여는 꼴은 가관. 어제 내가 봤던 그 여자와 동일인물이 맞는지 내 눈을 의심해 볼 정도였다. “샤를리아라고 합니다.” # 268 회귀자 사용설명서 268화 제1황녀 샤를리아(5) 황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있고 높게 솟은 코와 긴 속눈썹은 확실히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 핏줄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샤를롯트와 닮은 곳이 보이기는 하지만 얼굴 곳곳에 차이점이 묻어 나온다. 당연하지만 인상 자체가 그리 좋아 보이는 인상은 아니다. 얼굴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대변해 주는 도화지다. 계속해서 입꼬리를 올리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 표독스러운 얼굴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사실 그녀의 얼굴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그녀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들. ‘저게 다 얼마야.’ 누가 봐도 화려하다고 생각이 드는 종류의 온갖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는 것을 보니 내 눈이 다 휘둥그레 질 정도였다. 손가락에는 큼지막한 보석이 달린 반지와 정교한 조각으로 새겨진 무늬들이 있는 반지들이 끼워져 있었고 귀에 걸려 있는 작은 귀걸이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혹시나 목이 뻐근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려한 목걸이는 훤히 드러낸 가슴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애초에 입고 있는 드레스 역시 평범한 옷이 아니다. 이쪽이 알고 있는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다. 아마 왕국 안에 있는 유명 디자이너를 통해 만들어진 드레스가 틀림없으리라. 조금 특이했던 것은 상체 쪽의 노출이 상당했다는 점이었지만 야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과한 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그녀와 잘 어우러지는 듯한 느낌. 그녀를 살펴보다 인사가 늦었다는 걸 깨달은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속으로는 그녀의 몸에 걸치고 있는 것들 중 하나만 팔아도 굶주린 백성들 수만 명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겠다 같은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티를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 간단히 차를 먹을 생각인데 혹시…….” “간단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이야기는 들었겠지?” “네, 네. 황녀 전하.” 들었냐는 듯 샤를리아가 시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목소리를 떨며 답하곤 나갔다. 이 자리에서 빠져 나와 다행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신의 머리만 매만지고 있는 샤를리아와는 꽤 대조적이었다. ‘그나저나 얘도 철면피네….’ 초면에 누가 봐도 망나니 같은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상인인 척하는 모양새가 우습다. 최소한 뭐가 옳고 그런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셈이니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시녀들의 입장에서는 기가 찰 것이다.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았던 내 생각과는 다르게 시녀가 튀어 나가자마자 여러 종류의 다과와 함께 잔 두 개가 내어졌다. ‘엄청 빠른데.’ 기존에도 테이블에 세팅 되어 있는 것들이 있었지만 몇 명의 시녀들이 달라붙어 테이블을 마크하고 있었다. 불안해하는 표정과는 다르게 몸은 잘 훈련된 병사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당황스러웠던 점은 간단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뭐가 많다는 것. 이미 테이블에 놓인 다과의 종류가 10가지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빈 잔에 천천히 차를 따르는 이쪽의 시녀는 제발 이 차 맛이 입맛에 맞기를 기도하는 표정이었다. 1황녀 쪽의 잔을 따르고 있는 시녀는 실수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대로 자연스럽게 잔을 들어 올리니 이곳에 있는 시녀들의 얼굴이 나에게로 집중된다. ‘부담스러워.’ 어째서인지는 뻔하다. 아마 차가 입맛에 맞는지를 궁금해할 것이 분명. 여기서 부정적인 소리라도 쏟아냈다가는 저 시녀들의 손목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으리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자 예상대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두 명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맛이 좋군요. 물론 향도 마찬가지입니다.”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후훗. 혹여나 맞지 않으실까 걱정했는데.” “확실히 생소하기는 하지만 좋군요. 심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뭔가 나른해진 느낌입니다. 몸이 따뜻해진 느낌도 있고요.” “저 멀리 있는 엘프의 왕국에서 공수해 온 차입니다.” “아아. 그렇습니까.” ‘엘프 왕국은 개뿔.’ 갑작스럽게 몸에 찾아온 이상 신호에 조용히 손에 들려있는 차를 바라보자 차에 들어간 첨가물이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라플레시아의 꽃잎-일반 등급] ‘미약.’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 ‘이 또라이가.’ 사과와 감사를 위해 나를 부른 것치고는 설계하는 모양새가 우습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극소량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목적이 어떤 건지는 뻔히 보였다. 심장박동수가 조금씩 빨라지고 눈앞에 있는 여자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느낌이 든다. 계속해서 마음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미약 성분이 들어가 있는 것은 차뿐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샤를리아의 몸에서도 풍기는 향에서도 섞여서 나오고 있다. 설명하자면 이 커다란 방을 조금 씩 조금씩 메우고 있는 셈이다. 서로를 탐구하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양이라면 여자로서의 호감을 느끼게 하고 싶다는 의도가 더 큰 것 같다. ‘영향을 받고 있나.’ 모든 미친년이 고유 기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이 황녀는 내게 꽤 커다란 호감을 가지고 있는 모양. 기벽 이전에 내가 황제 앞에서 자신을 변호해 줬다는 소리라도 들은 것이리라. ‘이용할 수 있겠네….’ 그렇지만 이런 방식은 조금 불편하다. 약에 대해서는 면역력이 꽤 강했기 때문에 커다란 영향을 받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신호를 보내오는 게 짜증 난다. 그녀의 몸에서 풍겨져 오는 향기가 자꾸만 나를 간질이고 있었다. 외관은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다. 자꾸만 가슴 쪽으로 시선이 가고 저 표독스러운 얼굴에 입을 맞추고 싶은 욕구도 생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솔직히 그녀와 일 이외의 일로 엮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허공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아네모네의 눈도 굉장히 신경 쓰인다. ‘뭐 이렇게 신경 쓸 게 많아.’ 계속해서 불평불만을 쏟아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생각을 하는 나와는 반대로 샤를리아는 일이 잘되고 있다고 느끼는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일단은 이 말씀부터 먼저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일전에 저지른 무례에 대해서 정식으로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 저를 도와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말씀도 함께….” 기품 있는 황족처럼 인사하는 걸 보니 이런 교육을 받기는 받은 모양이다. 이쪽에서도 적당히 받아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 입장에서 그 날의 일은 지우고 싶은 치욕스러운 사건일 테니까. 그렇지만 앞으로 조금씩 대화를 위해서라면 서로 조금 더 솔직해지는 게 유리하리라. “괜찮습니다. 사과를 받을 일도 아니고 그런 말씀을 들을 정도로 대단한 도움을 드린 것도 아니니까요. 누구든 실수를 하게 마련이고… 무언가 힘드신 일이 있으신 거겠죠. 아니, 그전에 저는 어째서 황녀님께서 화를 참지 못하셨는지도 이해가 갑니다.” 역시나 당황스러워하는 얼굴이 눈에 보였다. 그렇지만 내 말에 선뜻 공감한다고 말하기 힘든 모양인지 일단은 변명부터 해야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당연하지만 내가 원하는 반응은 저런 반응이 아니다. “아. 화를 참지 못한 게 아니라… 제, 제가 너무….” “아니요. 중요한 파티를 위해 입고 온 드레스가 엉망이 되었으니까요. 그것도 한낱 시녀의 실수로 말입니다. 당연히 이해가 됩니다. 네.” “아닙니다. 제가 당시 조금 힘든 일이 있어서…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자제를 못 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내숭 떠는 모습. 아직도 핀트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말을 해야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황녀님, 저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저는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그 날 그 장소에서 황녀님의 시녀의 목을 잘랐다고 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거라는 겁니다. 저는 이기적인 사람이고… 저와 제 주변인만 괜찮다면 누가 어떻게 되든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 “아! 저 역시 샤를리아 님과 같습니다.” “같다고 말씀하신 게 무슨 뜻인지….” “저 역시 저에게 피해를 끼친 이에게 어떤 식으로라도 불이익을 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장담컨대 파티에서 저에게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겉으로는 웃을지는 모르겠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 “화를 참기가 힘들죠. 그런 상황은… 짜증이 치솟으면 바로 되갚아줘야 하고요. 내 화를 돋우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기분이 나아지고….” 이 정도까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내숭을 떨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가관이다. 그야 당연하긴 할 것이다. 어떤 의도로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소량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미약을 쓴 것을 보면 이쪽에 어느 정도 호감을 품고 있을 터. 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미친년이고 화를 참지 못한다. 제국에서 알아주는 망나니에 쓰레기 같은 여자다. 분노 조절 장애도 있고 아랫것들을 개돼지만도 못하게 바라보고 있는 황녀다. 그렇게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을 보니 어째서 그전에는 저 가면을 그렇게나 쉽게 벗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 자물쇠로 굳게 잠긴 가면을 풀기 위한 방법으로 이런 대화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농담입니다.” “아… 그, 들었던 대로 유, 유머 감각이 뛰어나시군요.” 억지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 나는 마시고 있던 차를 조용히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무례한 것 같지만…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네?” “사과의 말씀도 감사의 말씀도 제대로 받았고… 황제 폐화와의 약속이 있어서 말입니다.” “이, 이렇게 빨리….” “먹다 보니 마시고 있는 차도 입맛에 맞지 않는 것 같고… 내일 즈음에 다시 시간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아!” 곧장 몸을 일으키자 당황하는 얼굴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것을 보니 아무래도 화를 참기가 힘이 드는 모양. 아마 당연할 것이다. 지금 내가 보여준 행동은 황가에게 보여준다는 게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무례한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면을 벗지 않는 것을 보면 내 무례보다는 다른 포인트에서 짜증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오늘의 만남을 망쳐 버린 사람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 알 바 아니다. 몸을 적당히 일으키고 예를 표한 이후에 등을 돌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황급히 나를 지나치며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 황녀의 방문이 굳게 닫혔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방음 마법은 확실히 되어 있는지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죽일 놈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을 것이 분명. 만약 화를 낼 대상이 내가 아니라면 자신의 화를 다른 곳으로 쏟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속으로 딱 10초를 세고 뒤를 돌아 이미 닫힌 그 방으로 다시금 향하니 아까보다 더 당황하고 있는 시녀들의 얼굴이 보였다. “샤를리아 황, 황녀 전하!! 이기영 님께서!” 미리 외우고 있던 간단한 마법을 캐스팅. “사일런스.” “읍읍!”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목을 매만지고 있는 시녀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무, 무슨 무례를… 이기영 명예주교님. 다시 황녀님을 방문하실 거라면 제, 제가 먼저 황녀님께 의사를 전하겠습니다.” 파직! 파지직! 바닥에서 튀어나온 용의 꼬리가 말을 내뱉으려고 하는 시녀의 입을 막았다. 내 손으로 직접 황녀의 방문을 열어 재끼자 확실히 내가 예상했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처음 들려왔던 것은 역시나 황녀의 목소리.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는 짜악! 하는 찰진 소리와 함께 겁에 질린 시녀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손님을… 손님을 모시는 데 있어서 분명히 한 치의 실수도 없게 하라 일렀다. 내가 몇 번이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거늘! 내가! 내가! 중요한 분이라!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죽, 죽여주시옵소서. 죽여주시옵소서. 황녀 전하.” “오냐! 그게 소원이라면… 아.” 내가 밖으로 나간 지 1분도 되지 않은 시간동안 벌어진 화려한 이벤트의 모습은 가관. 들어간 시녀 중에 한 명은 이미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엎드려 빌고 있는 시녀 하나는 손바닥을 싹싹 비비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황녀의 모습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잠깐 동안 장내에 들어선 침묵에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예상이 맞았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황녀님과 저는 동류인 모양입니다.” 물론 저 미친 여자와 나는 같은 종류의 쓰레기는 아니다. ‘동류는 아니지. 그렇고말고. 내가 저 정도는 아니지.’ # 269 회귀자 사용설명서 269화 그 아버지에 그 딸(1) 누가 봐도 창백해져 있는 샤를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물론 당황스러울 것이다. 내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맞지도 않은 가면까지 썼는데 이런 식으로 본성을 들키니 여간 당황한 게 아닌 것 같았다. 시녀 둘 역시 마찬가지. 두 사람은 일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저들로서는 벌벌 떨고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듯이 샤를리아가 입을 열어왔지만 제대로 된 변명이 나오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다. 누가 봐도 정황은 명백했고 한마디로 빼도 박도 못 할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이건… 그러니까….” “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굳이 설명하실 필요도 없고요. 생각해 보니 마침 딱 식사시간이라 저녁이라도 함께하면 어떨까 싶었을 뿐입니다. 일단 이 상태로 계속 있는 것도 뭣하니 장내를 조금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문 밖도 부탁드립니다. 들어오기 전에 조금 거친 방법을 사용해서….” “아….” “그리고 좀 전의 무례는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황녀 전하. 아무래도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때에는 조금 더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니… 아니….” “황녀 전하는 제가 모실 테니 만찬을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직까지 엎드려 있는 시녀 둘을 일으키자 머뭇거리는 모습들이 눈에 보였다. 샤를리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그녀마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니 도망치듯 바깥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차는 맛있었습니다.” “다, 다행이군요.” “샤를리아 황녀 전하, 그렇게 민망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 방금 그건….” “다 알고 있습니다. 아래 것의 실수를 바로잡고 계신 중이셨지요.” “아… 네. 네. 그렇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손님 응대의 차질이 생겼으니 화가 나실 만합니다. 만약 제가 황녀님의 입장에 있었더라도 충분히 화가 났을 겁니다.” “네. 맞습니다.” “본래 한 번 말해서 되는 인간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인간이 있는 법입니다. 황녀 전하의 말씀을 새겨듣지 않았으니 저들이 벌을 받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만….” “이기영 명예주교님은….” “네?” “정말로 저를 이해해 주시는군요.” “네.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희는 동류라고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내가 악의는커녕 호의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아무래도 조금 더 솔직해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정도의 대화까지 용인이 되는지 그 선을 간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조금 부족한 이가 많습니다.” “그야… 황녀님과는 다른 이들이지요.” “대부분이 멍청하고….” “아, 그렇습니까?” “그 태생이 어디 가는 건 아닌지… 한 번 말하면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신경을 거슬리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저들 때문에 항상 스트레스를 받곤 합니다.” 조금 호응해 주자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어오는 것이 보였다. 신나서 입을 여는 것을 보니 황녀의 표정은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저 황녀와 오랜 친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 정도야 쉽다. “음음. 그러실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저도 이렇게까지 하는 건 가슴이 아픕니다만, 아무래도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필요하지요. 필요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네. 바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내숭을 완전히 버리기는 힘든 모양이다. ‘기강을 바로 잡는다’라는 걸 주제로 물타기를 해보려는 것 같지만 아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솔직하다. 그사이에 만찬이 준비되기 시작. 식당이 아니라 이곳에서 식사를 할 것이라고 미리 이야기를 해놨기 때문에 테이블을 세팅하는 동시에 에피 타이저가 준비되고 있었다. 시녀들은 극도로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까 이 방에 있던 이들과는 다른 이들이 들어왔지만 그들 역시 손을 덜덜 떨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황녀가 함박 미소를 짓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 모양. 내가 생각해도 분위기가 꽤 화기애애했으니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으리라. “후후훗. 사실은 아버님께 이기영 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해주셨는지 궁금하군요. 황제 폐하께서 또 저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을까 걱정이 됩니다.” “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번에 있었던 일로… 그… 제 실수에 대해 변호해 주셨다고….” “하하. 변호라는 말은 어울리지는 않는 말입니다. 맞는 말을 했을 뿐입니까요.”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님께서 몇 번이고 당부하시더군요.” “어떤….” “이기영 명예주교님께 꼭 사과하는 시간을 만들라고…. 물론 아버님 때문에 이기영 님을 이 자리로 모신 것은 아닙니다. 그때 제 실수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말씀 드리고 싶었고 무엇보다 이기영 명예주교님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이 커서….” “아하….”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불길하게 울리는 대목이긴 했다. 특히나 황제가 샤를리아를 먼저 움직였다는 소리는 당황스러웠다. 물론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혹시나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어떤 호기심을 품고 계셨을지 궁금하군요. 이해는 됩니다. 대부분의 귀족들 역시 저희 소환자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특히나 제국 8좌로 임명된 지금은 더욱더요. 혹시 모험일지 같은 것도….” “그렇지 않아도 어제 잠깐 동안 파란 길드에서 내놓은 일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하하하. 그건 참 영광입니다. 그나저나 이거 정말 우연이로군요. 사실은 저도 샤를리아 전하를 뵙고 싶었습니다.” “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지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기회가 닿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하.”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식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잠깐 말을 멈추고 시녀를 바라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어오는 이들이 눈에 보였다. 계속해서 뭔가를 말할 타이밍을 잡고 있는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도움을 준 모양이다. “저… 황녀 전하 스테이크는.” “레어로.” “저도 1황녀님과 같은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네.” “디저트는 한 시간 이후에 가져다 주셔도 됩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아서.” “네. 알겠사옵니다.” 사실은 웰던이 취향이지만 황녀와 같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거의 익히지도 않은 시뻘건 고기가 나오자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조금 당황스러웠다. 익숙하게 칼질을 하는 황녀의 접시에 핏물이 고였다. 기분 탓인지 괜스레 슥슥거리는 소리와 질감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스테이크를 한 점 썰어 놓은 샤를리아는 시녀들이 나간 이후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썰어놓은 걸 입가로 가져가지도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눈앞의 음식보다는 아까의 뒷이야기가 궁금했던 것 같았다. “그… 실례지만 저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시는지 들어도 되겠습니까.” “하하. 별건 아닙니다. 사실 이 황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만….” “네?” “오해하지 않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샤를리아 님, 일개 소환자가 황실에 대해 이렇고 저렇고 평가하거나 대담을 나누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2황녀 샤를롯트 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해 듣고 싶을 뿐입니다.” “무슨 의미이신지….” “현재 이 신성제국을 좌지우지 하는 비선실세가 제2황녀 전하라는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 “누, 누가 그런 망발을!!!!” “위대하고 지혜롭기 그지없는 황제폐하의 건강이 안 좋아지고 난 이후에 폐하께서 여러 가지 일을 2황녀 전하께 맡기신 거 같더군요. 유력귀족들 역시 제2황녀와 함께 움직이시는 분들이 많이 보였고 실제로도 능력이 출중하시기는 하시지만, 아니, 혹시나 제가 황실을 모독하는 것 같이 들릴까 두렵습니다.” “아닙니다, 명예주교님. 계속해서 말씀하셔도 됩니다.” “큼…. 실은 저희에게도 여러 제안이 온 적이 있어서….” 당연히 거짓말이다. 제안 같은 것은 온 적 없다. “조,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저희라고 하신다면….” “아. 8좌의 몇몇 인원에게만 은밀히 전한 이야기입니다만 후에 황제폐하가 붕어하신 이후, 자신의 편에 서주길 바라시는 것 같더군요.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황녀님을 적대시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아직까지’ 오지 않은 것뿐이다. 실제로 이쪽을 길들이려고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자신의 줄을 타라 간접적으로는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눈앞에 있는 황녀 역시 진실이 뭔지 밝혀낼 생각은 없는 모양. 사실 진실이 뭔지 궁금해하기 이전에 밝혀낼 능력도 없을 것이다. ‘샤를롯트… 샤를롯트’라며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동생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들어 찬 것 같았다. “그래서 대답은….” “아직까지 보류해 두고 있습니다만 사실 저희 제국 8좌 같은 경우에는 신성제국의 정치에 밀접하게 들어서는 것을 최대한 지양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방인들의 삶이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샤를롯트 황녀 전하께서는 미적지근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저희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세간에 들려오는 이야기만 놓고 보면 성정이 나쁘신 것 같지는 않지만 요새 하도 날조된 이야기가 많다 보니 제대로 믿을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네… 네. 그 말이 맞습니다. 제2황녀 샤를롯… 아니, 그 비열한 창녀에 대한 평가는 이미 날조되어 있습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모두 속고 있습니다.” “네?” “드리기 민망한 말이기는 하지만 되먹지 못한 년입니다. 제 어미의 비천한 핏줄을 잡아먹고 태어난 서녀를 정식으로 황녀로 들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우려하던 일이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 욕심이 하늘에 닿을 듯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황실의 일원이 되자마자 아버님을 홀리며 그 야욕을 드러내더군요.” “으음….” “짐짓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다 말하고 다니지만 궁으로는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끌어들이는지 그년이 기거하고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들려오는 교성에 귀가 아플 지경입니다. 피는 속이지 못하지요. 네. 그렇고말고요. 앞에서는 항상 미소를 짓지만 뒤로는 얼마나 더러운 짓거리들을 많이 일삼는지… 차마 말로 다 설명 드리지 못할 정도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샤를롯트의 이야기가 한 번 튀어나오자 이쪽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느낌이었다. 제2황녀에 대한 울분을 토하기에는 짧은 식사시간이 모자란 것이 당연했다. 입에 모터라도 달린 듯 험담을 토해내는 샤를리아를 바라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처럼 들려왔기 때문이다. “찢어 죽일 년입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황실을 더럽히고 황가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선황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아버님도, 아버님도 아버님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더러운… 저보다 더 소중히….”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은 물론,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표정은 가관이었다. 아까의 즐거웠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다.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심지어 얼마나 억울했는지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저 눈물은 진심으로 황가를 걱정하는 순수한 눈물이 아니다. 단순한 질투.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샤를롯트를 향한 아집과 독기와 분노.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한 비천한 핏줄에 대한 열등감. 그 억울함 때문에 흘러내리는 피눈물이리라. 슬그머니 손수건을 가져다 댄 것은 당연지사. 눈물을 닦아 내리자 깜짝 놀랐는지 뒤로 몸을 젖히는 그녀가 시야에 비쳤다. “아… 죄송합니다.” “이기영 님은… 상냥하시군요.” ‘어라?’ 왠지 모르게 위험하게 들리는 대사. 이대로라면 눈에 보이는 쇼파에 함께 드러누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팔을 슬쩍 빼며 황급히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별것 아닙니다. 저는 그런 일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세간의 말이라는 건 진실보다는 거짓이 많은 모양입니다. 하하.” “네?” “사실 제1황녀님에 대한 소문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네. 분명히 안 좋은 평가가 대부분이었죠. 그렇지만 이렇게 보니 확실히 다른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 황가를 생각하시고 총명하시며, 아름다우시고 여리면서도 강한 면모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 지혜로움과 언행이 마치 베니고어 여신님의 현신을 보는 듯하니….” “아….” “감히 말씀 드리건대….” “네….” “그야말로 차기 황제에 가까우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썰어놨던 고기를 한 입 베어 물자 제대로 익히지 않은 생고기 맛이 그대로 느껴졌다. 내 말을 듣고 입꼬리가 찢어질 듯이 올라간 샤를리아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 있는 음식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 중.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아첨 때문인지, 아니면 식은 고기 맛이 생각보다 좋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쾌감이라도 느끼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샤를리아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네.’ # 270 회귀자 사용설명서 270화 그 아버지에 그 딸(2) 그녀가 말하는 비천한 핏줄과 황가의 피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딱 한 가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제1황녀는 황제의 피를 제대로 이어받았다. 별것 아닌 아첨이 그렇게 기분 좋게 들리는 모양. 칭찬을 받아본 기억이 없는 건지 달콤한 말을 던질 때마다 몸을 부들거리는 모습은 익숙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저런 표정은 굳이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으리라. ‘얘로 진짜 괜찮을까.’ 수많은 칭찬과 아첨 중에서도 제1황녀는 샤를롯트보다 자신을 띄워주는 말에 제일 격하게 반응하곤 했다. 예상대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제2황녀님보다’로 시작하는 말이었다. 거의 마법의 문장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 제2황녀님보다 더욱 아름다우신 것 같습니다. 더 총명하십니다. 세간에서 들려오는 말과는 정반대이십니다. 물론 황실 모독죄로 잡혀가고 싶지 않은 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대놓고 샤를롯트의 이름을 말하진 않았다. 그러나 우둔한 샤를리아는 웬일인지 내 장황한 칭찬 속에서 제2황녀보다 자신을 치켜세우고 있다는 걸 귀신 같이 캐치해 내고는 했다. ‘이런 건 잘 알아듣네.’ 입꼬리가 찢어갈 듯이 올라간 표정은 마치 약이라도 한 것 같다. 그녀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이런 종류의 칭찬이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겠지.’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이 많다. 일단은 제2황녀의 어머니가 평민 출신이었다는 게 첫 번째. 영특한 제2황녀 덕분에 1황녀가 조금씩 망가지기 시작했다는 게 두 번째다. ‘이해는 돼.’ 어느 날 갑자기 평민의 핏줄이 2황녀로 추대되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심지어 그 2황녀는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영특했고 여러 가지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했단다. 1황녀의 입장에서는 기가 차는 것이 당연. 그녀의 스탯 재능이 거의 다 쓰레기처럼 보이는 것과는 반대로 2황녀는 영웅 이상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으니, 그녀가 어린 시절 얼마나 자신을 자책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기초 검술 지식 습득] [기초 마법 지식 습득] [기초 체술 지식 습득] [기초 수양 지식 습득] [기초 군사 지식 습득] [기초 교양 지식 습득] [기초 연금 지식 습득] [기초 정령 지식 습득] 그녀의 상태창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수 없이 길게 이어진 기초 지식 습득이었다. 사실 이 외에도 습득한 지식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단언컨대 유년 시절의 1황녀는 해보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본인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구르고 굴렀던 것이 눈에 보인다. 검술로 안 되면 마법으로, 마법이 안 되면 군사 지식으로, 그것도 안 되면 정령술로. 그렇지만 그녀의 여러 노력은 2황녀의 재능 앞에 모래성 무너지듯 허물어져 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때 어린 소녀가 느꼈을 감정이 어땠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떤 일을 계기로 제1황녀는 제대로 삐딱선을 타게 되고 결국에는 1황녀 궁에 머물러 술이나 퍼마시며 시녀들이나 괴롭히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 물론 앞서 말한 이야기들은 철저하게 샤를리아의 관점으로 서술되어 있다. 장담컨대 샤를리아, 그녀의 기벽이나 성정을 생각해 보면 제2황녀의 인생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으리라. ‘엄청 집요하게 괴롭혔겠지.’ 단순하게 괴롭힌다는 수준을 뛰어 넘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모를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을 수도 있고 뺨에 불이 나는 것은 일상이었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이 표독스러운 악녀가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2황녀 역시 피눈물 나는 유년 시절을 헤쳐 나가며 성장했을 거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밟히고 밝혀도 일어서며 강해진 여주인공 샤를롯트와 그녀를 아득바득 밟으려고 하는 악녀 샤를리아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권선징악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기승전결의 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그래. 내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잡초 같은 샤를롯트는 어느 순간부터 황실을 휘어잡을 정도로 성장, 유년 시절부터 먹어왔던 고구마를 사이다로 뻥 뚫어버릴 타이밍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현재 제1황녀 샤를리아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샤를롯트가 그녀의 손과 발을 잘라냈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한들을 좀먹었다. 우둔한 1황녀는 아마 목 끝까지 칼에 들어올 때까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없으리라. ‘그렇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또 아니다. 정통성이 제1황녀에게 있다는 건 그나마 기분 좋은 이야기다. 샤를리아는 아직 출발도 하기 전이지만 너무 늦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빵빵 터지고 있는 샤를리아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살짝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후후훗. 오늘처럼 많이 웃어본 게 얼마만인 줄 모르겠어요.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네요.” “하하하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생각보다 훨씬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황녀 전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벌써 날이 어두워졌고…. 괜찮으시다면 제가 따로 방을 내어 드릴 테니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가시는 게 어떠신가요? 명예주교님과 더욱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습니다, 황녀 전하. 마음 같아서는 밤이 새도록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아마 1황녀 전하께는 누가 되는 행동일 겁니다. 세간의 시선이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아아아….” “아마 여기저기에서 멋대로들 떠들어 댈 겁니다. 제 이미지가 깎이는 거야 상관없지만 황녀님께서 괜한 구설수에 오르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세간의 시선은….” “신경 쓰셔야 합니다. 대중이라는 건 원래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족속입니다. 황녀님과 함께 제국에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더라도 몇몇 더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오늘의 만남이 그런 식으로 비치지 않을 겁니다. 저는 황녀 전하를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아….” “아마 이런 부분 말고도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기강을 바로 잡는다는 황녀 전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둔한 자들이 많을 거라는 겁니다. 제2황녀님과 샤를리아 님의 차이점이 뭔지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인간은 앞과 뒤가 달라야 대중들의 호감을 살 수 있는 법입니다.” “…….” “물론 순수하고 거짓을 모르시는 샤를리아 황녀전하의 꾸밈없는 모습도 저는 이해합니다만… 좋은 재료를 어떻게 요리하는지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 대중에게 전해지는 정보 역시 어떻게 요리하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저야 황녀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황녀님의 마음씨가 얼마나 넓으신지 알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촌부들이 어떻게 감히 바다의 크기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 감사드립니다.” “우둔한 자들 역시 황녀님이 가지고 있는 지성과 교양을 가늠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황실의 기강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요.” 아마 막장으로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같은 성정이 안에서 올라오는 화와 아집을 막아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기영 명예주교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네. 그렇지요. 아둔한 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 그 누구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아요.” “네. 때로는 대중들에게 맞는 가면을 써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요. 큼….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을….” “저는 샤를리아 님과 같은 배를 타고 싶습니다.” “아!” “사실은 조금 더 시간을 지켜보자고 생각했었지만 오늘 샤를리아 전하와 대화를 나누니 제 고민이 얼마나 부질없고 쓸데없는 짓인지 깨닫게 되더군요. 저 역시 제국민에 입장에 있는 만큼 황녀 전하께서 얼마나 제국민들을 위하시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물론… 샤를리아 황녀 전하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었다는 것은 굳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하.” “아아아아….” “황녀 전하께서는 어떠십니까?” “네….” “저와 같은 배를 타시….” “물론! 물론입니다! 물론이고말고요! 이기영 명예주교님! 물론입니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꼴은 마치 잔뜩 굶은 아귀를 보는 느낌이었다. 내가 손을 살짝 내밀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내 손을 잡는 것이 보였다. 본인 역시 깜짝 놀랐는지 내 손을 놓아버리기는 했지만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없다. 마치 어두운 곳에서 등불을 발견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너무 쉬워….’ 구워삶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수월했다.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도 찾아주지도 않았던 상황. 그 가운데 떨어진 유일한 아군이라는 건 이해하지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것을 보니 당황스럽다 못해 헛기침이 나온다. “이렇게 환영해 주시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핫.” “제, 제가 너무 부끄러운 모습을….” “아닙니다, 샤를리아 님. 그런 모습을 보여주셔서 오히려 더 기분이 좋습니다. 큼… 그럼 오늘은 이만 자리를 마무리하는 게 좋겠군요. 아무래도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아… 네. 그렇게 하시지요.” 조금 아쉬워하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계속 이 방에 있다가는 정말로 정체모를 구설수에 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앞으로 같이 활동할 거라면 그녀의 행동을 교정해 주는 게 필요하겠지만 오늘 뺀 진도도 너무 급하다고 느껴질 지경이다. 실제로 그녀의 일정이나 행동 방식을 조언해 주는 것은 조금 더 사이가 가까워지고 난 이후에야 침범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거다. 슬그머니 자리를 일으켜 밖으로 방문을 열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녀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뒤에 서 있는 샤를리아의 표정을 확인한 것이 분명. 황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떠나보냈고 그녀와 같은 표정을 하는 건 나를 안내해 주는 시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 목욕 시중은 되었다. 내 혼자 알아서 할 터이니 당분간 방 안으로는 아무도 들이지 마라.” “네. 황녀 전하.” “그리고 이기영 님께서 또 언제 방문하실 것인지 꼭 여쭙거라.” “네. 알겠사옵니다.” 아랫사람을 대하는 샤를리아의 목소리가 굉장히 따뜻하게 들려온다. 심지어 시중도 되었단다. ‘느낀 게 있네.’ 돌아가는 발걸음이 굉장히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좋으면 사소한 잘못 정도는 용서해 주는 아량이 생긴 모양. 이런 생각을 하기는 싫지만 저런 부분은 확실히 나와 비슷하다. 수행원들의 식사 문제로 있었던 정하얀을 혼쭐 낼 거라고 다짐했건만 감정 잡기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안내해 주는 시녀들과는 별개로 황녀의 말을 전해들은 시녀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져 돌아보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 말을 해보라는 듯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어오는 이의 얼굴이 보였다. “이, 이기영 명예주교님.” “네. 말씀하셔도 됩니다.” “저… 혹시 언제 또 방문하시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글세…. 조금 더 생각을….” 단번의 어두워지는 시녀단의 얼굴. “아니지…. 그럼 내일 점심은 어떠신지 전해주시겠습니까?” “네. 아, 알겠습니다!” 시녀단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왜 저러는지 알겠네.’ 내가 미친 여자를 얌전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평소에 얼마나 미쳐 날뛰었으면 이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변화를 느낀 것은 단순히 시녀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제1황녀가 달라졌다.” 그 날로부터 정확히 삼 일이 지난 시점, 왕성을 강타한 훈훈한 소식 중 하나였다. # 271 회귀자 사용설명서 271화 그 아버지에 그 딸(3) 제1황녀가 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정신을 차렸다’라는 소문이 왕성 안에 퍼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이전과는 달리 보였으니 오랫동안 그녀와 함께 했었던 이들은 그녀의 변화를 더 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리라. 그 변화를 가장 처음 실감한 건 역시나 1황녀를 모시는 직속 시녀단. 아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놀라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민감하게 받아들였을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경우가 잦아졌고 작은 실수 정도는 관대하게 눈감아 주기도 했다. 그녀의 밑에서 온갖 지랄발광을 받아주고 있었던 시녀들의 행복회로가 맹렬히 돌아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재미있게도 이 시녀단은 오매불망 내가 1황녀를 찾기만을 기다렸는데, 그녀를 변화시킨 게 나라고 확신하는지, 묘한 움직임을 선보이고 있었다. 제1황녀의 명과는 관계없이 그녀를 이쪽과 더 가깝게 하기 위해 조직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이런 행동들이 귀엽게만 느껴졌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움직임을 보여야 했던 1황녀의 시녀단이 측은하게 느껴질 정도. ‘그래. 너희가 제일 고생했겠지….’ 굳이 저들이 돌리고 있는 행복회로를 태워버리고 싶지는 않았다는 거다. 나에게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였지만 그녀들에게는 이 조직적 행동이 생존권 투쟁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그녀들에게는 묘한 싸구려 동정까지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샤를리아와 함께 있을 때면 가끔 그녀의 시녀들의 행실에 대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고는 했다. 효과는 상상했던 것 이상. 다음날 시녀들을 마주쳤을 때, 그녀들이 보여주는 얼굴에는 마치 충성이라도 맹세할 것 같은 기세가 담겨져 있었다. 그냥 불쌍하다는 기분이 들어 툭툭 던져본 말치고는 효과가 좋다. 실제로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이후에는 내가 없었을 때, 샤를리아가 어땠는지 그녀의 시녀단이 직접 전해올 지경까지 와버렸다. 물론 일반적인 보고의 형태는 아니었다. 응접실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 그녀가 어땠는지 물으면 제법 성실하게 답해주는 것이 전부. ‘어제 명예주교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이후 무척 기뻐 보이셨습니다.’ 라든지. ‘독서하는 시간을 가지셨고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셨습니다.’ 딱 이 정도가 가 끝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시녀단이 이쪽에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써먹을 곳이 있겠지.’ 어떤 재료든 사용할 곳이 나오게 마련이다. 별 힘이 없는 시녀들이라도 분명히 쓸 데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실상 이번 일의 가장 큰 수혜자는 제1황녀의 시녀단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함박 미소를 지은 것은 그녀에게 괴롭힘 당하던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걱정하던 이들 역시 그녀의 달라진 행실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특히나 제국의 황제는 매일매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황실의 골칫덩이라고 여겼던 샤를리아의 변화는 자식들만 바라보고 사는 늙은이를 기분 좋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뭔가가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내가 무슨 마법을 부려 샤를리아의 정신 상태를 완전히 뜯어 고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인간이란 동물은 악해지기는 쉽지만 선해지기는 어렵다. 만약 고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단기간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고말고….’ 샤를리아를 교화시켜 황제로 만들겠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야기. 단지 대중에 어떤 식으로 비춰지는 게 좋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 비전을 제시했을 뿐이다. 말로 살살 구슬리며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해 전했다. 더불어 해야 할 일을 정리해 명단을 만들어 스케줄을 관리하는 것도 당연하다. 샤를리아는 샤를롯트 못지않은 독기와 아집을 가지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느껴왔던 패배감이 그녀의 자존감을 갉아먹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무능하고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간으로 자랐다. 아무도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을 때,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여동생에게 쏠려있을 때, 그녀가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았을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으리라. 단언컨대 샤를리아가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인간은 나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을 것이다. 본인을 인정해 주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 재활용도 안 되는 폐기물도 대단하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 결정적으로 그녀의 별것 아닌 행동을 제대로 포장해 시장에 내놓아 줄 수 있는 사람. 과자 봉지에 질소를 반 이상이나 채워 넣어 팔아먹을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시녀들에게 휴가를 내리셨다지 뭐예요.” “신전에도 꾸준히 다니시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1황녀 전하께서 마음을 다잡으신 모양입니다.” “아침 국무회의에도 참석했다고 들었습니다. 가장 끝에서 조용히 듣고 계시기만 하셨다는데….” “제국민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듣기로는 직접 시찰을 나가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는데 이미 일정도 잡아놓으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술도 입에 대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저번 만찬 모임 때 와인을 거절하신 걸 제대로 눈여겨봤었지요.” 제1황녀의 별 것 없는 행보에 들어갈 질소는 아주 간단하다. 조용히 입을 여니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역시 그 핏줄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하하하.” 늙은 귀족들을 단 한순간에 끌어 모을 수 있는 회심의 문장이었다. 보통 선거운동에 들어가는 슬로건들은 그 후보자를 대변한다. ‘기호 1번 샤를리아. 그 핏줄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제국에서는 이런 프레임을 내세우지는 않지만, 샤를리아의 별것 아닌 행보를 포장하기 위해서는 이런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다. 괜히 지구에서 정치하던 양반들이 서민을 위하니 경제를 살리니 지껄이는 것이 아니다. 서민을 위하는 후보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서민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경제를 살리겠다는 이들의 초점은 경제에 맞추어져 있다. 그들의 정책 방향도, 홍보도, 유세활동도 모두 같아 보이지만 당연히 차이점이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더 터무니없다. 내가 샤를리아에게 넣은 프레임은 제국민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제국의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후보자를 대표하는 슬로건이라고 볼 수도 없다. 무근본에 무논리도 없지만 일부 꼴통들에게는 마법 같은 단어. ‘정통성.’ “그렇고말고요! 샤를리아 황녀전하께서 황가의 핏줄을 제대로 이어받은 거야 두말하면 입 아프지요.” “그렇지요. 허허허. 잠깐의 방황이야 누구나 겪지 아닙니까. 어디 그 피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이야기로만 들었던 7대 황제 폐하의 젊은 시절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공부에 몰두하시고 쉰이 넘으신 뒤에야 황위를 물려받으셨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뤄놓으신 업적을 보면… 샤를리아 황녀 전하께서도 지금부터 시작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하하하.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아주 지들끼리 북치고 장구 치는 꼴이 가관이다. 한 마디를 던져놓는 것으로 내 임무는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충 손에 와인을 들고 구석진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정하얀이 내 뒤를 쫄레쫄레 따라온 것은 당연지사. 다른 쪽에서 같은 작업을 치고 있었던 이지혜 역시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피곤하지는 않아?” “아… 네. 오빠. 같이 있으니까요. 헤헤.” 정하얀과는 조금 오랜만에 대화하는 느낌이다. 물론 매일 보는 얼굴인 만큼 이야기야 항상 나누지만 결정적일 때는 챙겨주지 못한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차올랐다. 뭔가 해주고 싶지만 눈앞에 있는 정하얀은 그저 같이 있기만 하면 좋은 모양이다. 슬슬 머리를 쓰다듬자 기분이 좋다는 듯 점점 가까이 붙어온다. “짠 할까?” “네!” “그러고 보니 연구는 어땠어?” “아. 잘되고 있는 것 같아요. 일정을 조금 앞당겨야 해서 조금 바빠지기는 했는데 생, 생각보다 순… 조로웠어요. 며칠 안으로 프로토 타입을 만들어 본데요.” “언제쯤 될 것 같다는 말은 없었고?” “네. 그런 말은….” “음….” “조금 더 닦달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제2황녀는….” “계, 계속 주시하고 있어요.” “그래. 혹시라도 특이사항 있으면 바로 보고해 줘야 돼.” “네!” 살짝 손을 잡으니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마침 사교회장의 한가운데였고 슬그머니 발걸음을 이끌자 기쁜 모습으로 끌려오는 게 보였다. 사교댄스를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대충 스텝 정도는 밟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정하얀 역시 기분 좋게 헤실거리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입이 광대까지 치솟은 걸 보니 기분이 꽤나 좋은 모양. 마치 동화 속 공주님이라도 된 듯한 기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 역시 나쁜 기분은 아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기분이 제법 괜찮은 편. 종종 무서운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정하얀은 기본적으로 이쪽을 우선시한다. 오래 보다 보니 그런 모습이 적응이 되기도 했고 이상하게 귀엽게 느껴질 정도. ‘최근에 너무 조용한 게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마력 능력치가 오를 대로 올라 뭔가 액션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아네모네의 눈을 가끔 활용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짓을 해오지 않고 있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이 길어졌다는 걸 생각해 보면 무척 얌전해진 셈이다. ‘부족하다고 생각한 건가.’ 이쪽이 내린 퀘스트를 진행하는 시간 이외에는 모든 시간을 전설 등급의 지팡이에서 얻은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활용하고 있으니, 본인이 느끼기에는 얻은 것들에 대한 소화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으리라. ‘더 강해지고 싶은 거겠지.’ 물론 원하는 걸 얻은 이후에는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불안하긴 하다. 이지혜에게 들은 이야기만 생각해 봐도 언제 어디서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내 눈이 닿는 곳에서는 이상한 짓을 하진 않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 일들은 차곡차곡 진행되는 중이었다. 정하얀에게 맡겨놓은 샤를롯트에 대한 감시와 막스에게 부탁해 놓은 영상 홀로그램 기술 연구는 순풍을 맞은 듯 순항하고 있다. 시간 내에 맞출 수 있을지가 관건이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직 이 두 자매의 황권다툼이 수면 위로 올라오지도 않았고 지금 당장 영상 매체가 등장한다고 해서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균형을 맞춰나가야 하는 타이밍. 제1황녀의 입지를 조금 더 끌어 올리고 제2황녀에 관한 네거티브한 일을 진행할 시기다. ‘원래 권력자는 안 좋은 소문 하나쯤은 끌어당기고 사는 법이지 뭐.’ 그럴듯하게 날조된 근거 없는 헛소문을 뿌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회귀자가 그녀를 신경 쓰고 있는 만큼 적당한 수위를 지키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물론 샤를롯트의 입장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을 만한 프레임일 수도 있겠지만 생각하고 있는 것 중에는 그나마 이게 가장 양호했다. 그녀를 네거티브하게 만들기 위한 슬로건은 아주 간단. “역시 피는 못 속인다니까.” 같은 말이었지만 그 뜻은 분명 차이가 있다. 평민을 어머니로 두고 있다는 건 이런 사회에서는 커다란 약점이었으니까. ‘그 반쪽짜리 핏줄이 어디 가겠어?’ # 272 회귀자 사용설명서 272화 그 아버지에 그 딸(4) 샤를롯트에 대한 네거티브한 소문은 은밀하고 아주 느릿느릿하게 또, 악의적으로 진행됐다. 황궁 안부터 소문이 도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외곽에서부터 중앙으로 소문이 돌아오도록 설계했고, 규모가 크지 않은 쪽부터 큰 쪽으로 흘러가도록 진행했다. 일은 어렵지는 않았다. 검은백조와 카스가노 유노의 요조라 길드가 이쪽을 도와주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대규모 정보 길드라고 분류할 수 있는 검은백조는 이런 쪽의 일에 특화되어 있었고, 이토 소우타의 길드를 흡수한 요조라 역시 만만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대놓고 언론사를 움직이지는 않았다. 아직 그 정도의 타이밍이 오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파란과 붉은용병 역시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는 나를 대신해 김현성과 차희라는 다완의 8좌인 천관위와 위란에게 함께 움직여 줄 것을 설득하는 중. 사실 걔네들이야 제2황녀 쪽으로 붙어도 상관은 없지만 결국에는 같은 플레이어의 입장에 있는 우리와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다. 혹시나 그들이 제국민이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겠지만, 같은 린델과 실리아를 등질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어렵지 않다는 뜻은 단순히 정보를 푸는 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날조된 정보를 만드는 일 역시 굉장히 쉽게 쉽게 진행됐다. 이런 종류의 정보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있는 사실을 베이스로 만들었는가. 아무 근거 없이 날조된 정보보다는 적어도 의심해 볼 수 있는 구석을 첨가하는 게 효과적이다. 샤를롯트야 공격할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할지도 몰라도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녀가 제국민들을 무척 아낀다는 사실이 제대로 유효타로 들어간 것이다. “지혜 누나, 오늘 제2황녀 스케줄이 어떻게 되지?” “뭐, 오늘도 평소랑 같죠. 시민대표와 회담도 나누시고….” “아아. 별거 없네. 평소대로 진행해도 될 것 같아.” “그 천한 핏줄들과 방탕한 놀이 어쩌고 그거 말하는 거 맞죠?” 시민 대표들과 함께 제국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의 시민회담은 천한 핏줄과 방탕한 놀이를 즐기는 시간으로 탈바꿈되었고. “아 식사는 시녀들이랑 함께 간단히 드셨대요.” “음… 그것도 같이 뿌리자고. 천한 핏줄 그거.” “안 그래도 넣으려고 했어요. 기왕 시작한 일인데 제대로 밀어야죠. 한쪽은 천한 핏줄이고 한쪽은 고귀한 핏줄. 누가 봐도 행동은 반쪽짜리 쪽이 낫네요. 이거 진짜 재미있는데요?” 스스로를 낮추기 위해 시녀단과 함께하는 식사는 역시나 천한 피가 몸속에 흐르고 있다는 개소리로 둔갑했다. ‘얘도 참 신기하단 말야.’ 어머니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국민을 지극히 아끼는 성정에 발목을 붙잡히게 된 것이다. 애초에 이쪽이 붙잡지 않았다면 잡힐 리도 없었겠지만 이미 그녀가 이쪽의 눈에 띄었다는 게 중요했다. 사실 그녀에 대해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그녀가 이상적인 황제라는 걸 실감하게 되기는 한다. 아마 이지혜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저야 뭐, 아무 상관없긴 하지만 보면 볼수록 이게 잘하는 짓인가 싶네요.” “…….” “장담하건대 만약에 샤를롯트가 황제가 된다면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성군이 될걸요? 중간에 오빠 같은 사람들이 분탕질만 안 치면요.” “안 그래도 나도 그 생각하고 있어, 누나.” “솔직히 제국이야 어찌됐든 간에 우리가 상관할 게 아니지만 기왕 한배를 탄 거, 우리 배가 크고 안전한 게 좋잖아요? 저도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하얀 씨가 물어온 정보들을 보면 얘는 진짜 난 년이에요. 리더십도 있고 카리스마도 있고 강단도 있죠.” “…….” “약자한테 약하고 강자한테는 강하면서도 적당히 완급 조절을 하는 정치수완도 일품이고……. 애초에 오빠를 길들이겠다는 생각도 꽤 대담하자나요? 평민을 어머니로 둔 황녀가 본인의 힘만으로 이 자리에 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죠.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또 얼마나 지극한지… 그 외모에 그 재능에 그 지성에 그 인품, 1황녀가 질투하면서 미쳐 날뛰는 것도 무리도 아니죠.” “내 생각도 그래. 내가 여기 정치에 왈가왈부하는 것도 웃기지만… 모르긴 몰라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꽤 많겠지. 그런데 어쩌겠어.” ‘김현성이 안 된다고 하는데.’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 그녀 역시 크고 작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거다. “그게 그렇게 기분 나빴어요? 생각보다 속이 좁네요. 나는 그편이 더 좋긴 한데….” “그 때문이 아니라 했잖아. 솔직히 2황녀도 나쁘지 않다고는 봐. 어떻게 생각해도 1황녀보다는 훨씬 낫고… 그래도 그것뿐이야. 샤를롯트가 제국민을 위할지는 몰라도 우리들을 위하지는 않을걸. 차라리 이쪽 입맛대로 바꿀 수 있는 샤를리아가 더 나아. 조금 힘이 들기야 하겠지만 제국의 비선실세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그렇게 쉽게 놓치는 건 말이 안 되지.” “그건 오빠 말이 맞아요. 저도 그냥 해본 소리였고요. 아무튼 저는 계속 작업할게요. 타이틀은 정해졌으니까. 오늘은 어느 쪽부터 어떻게 뿌려야 좋을지 봐야 하거든요.” “뭐 움직임이 있기는 있어?” “없는 게 이상한 거 아니에요? 왕성까지 소문이 닿으려면 시간이야 걸리긴 하겠지만, 이 황녀가 세간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에 여간 민감한 게 아니라서요. 어느 쪽에서 악의적으로 흘린 소문은 아닌지 뒤를 캐고 있을걸요. 이거 걸리면 오빠랑 저랑 둘 다 모가지예요.” “어차피 꼬리야 잘라내면 돼. 우리가 안 했다고 시치미 떼면 그만이고.” “1황녀랑 요즘 찰싹 붙어 다니시던데, 시치미 떼는 게 쉽게 될지 몰라……. 아직 공식적인 행동이 없었을 뿐이지 오빠가 그쪽 라인 타려고 한다는 건 지나가던 개도 알걸요? 샤를롯트야 당연히 알고 있을 거고요.” “안 그래도 느끼고 있어.” 마침 나와의 약속에 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귀족이 늘고 있는 타이밍이다. 샤를롯트 캠프가 이기영을 정적이라 판단해 여럿 귀족들에게 더 이상 나와 만나는 것을 자제하라는 압박을 주고 있는 것이다. 카트린 공작부인이나 엘리제 백작, 마를린 영애 같은 이들은 아직까지 이쪽에 든든한 힘이 되어주고 있었고, 사실 그런 의사를 표현한 것은 친하지 않거나 쓸모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놀라웠던 것은 샤를롯트가 보여준 반응 속도. 나와 샤를리아와의 관계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왕성에서 묘한 주장들이 튀어나오고 있다는 것도 확실히 이상한 부분이다. 그 묘한 이야기의 방향 역시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다. ‘제국 8좌가 제국의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옳은가.’ 라는 타이틀의 주장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 수 있다. 애초에 이방인들을 제국 8좌로 임명한 것은 황제의 독단적인 행동이었고 이 행동에 반한다는 것은 황제를 거스른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샤를롯트는 황제의 결정을 정면으로 부정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을 은근슬쩍 흘린다는 것은 어떻게든 제국 8좌가 가지고 있는 권한과 행동 반경을 줄이고 싶다는 의사의 표현이리라. 백 골드짜리 물건을 흥정할 때 처음부터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불러 본래의 가격을 후려치려는 심보라는 거다. 물건에 조금 하자가 있다는 걸 핑계 삼아 가격을 깎고, 흠집이 났다는 걸 핑계 삼아 한 번 더 가격을 내리고, 가장 낮은 값을 제시한 이후에 이쪽을 데리고 오려는 것이 틀림없다. ‘생각은 이해가 돼.’ 애초에 제국 8좌라는 건 샤를롯트가 그리고 있는 그림에는 없었을 수도 있을 테니까. 말하자면 원하지 않았던 손님이요, 불청객이다. 1회 차에서는 이방인들이 적극적으로 그녀를 추대했을 수도 있겠지만 상황이 반대인 지금은 제국 8좌가 골칫덩이로 느껴졌을 것이다. 정리해 보자면 그날 이후, 서로 얼굴도 마주치지 않은 상태로 가벼운 펀치를 한 번씩 주고받은 셈. 눈치가 있는 귀족이라면 현재 황실의 분위기가 묘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리고 있을 것이다.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빠르다는 게 문제지만…….” “생각하고 있었던 게 조금 더 빨리 왔을 뿐이에요. 애초에 이런 흐름으로 가는 게 당연한 거고 2황녀 캠프가 유능하든 본인이 유능하든 둘 중에 하나라고 봐야죠.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일단 저희 쪽도 무난하게 진행되고 있으니까 소문이 왕성에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려보는 게 좋을 거예요. 그나저나 슬슬 1황녀가 찾을 시간 아니에요?” “응. 봐줘야지.” “책상에 스케줄 잡아놨어요. 검토해 보시고 그대로 진행하면 될 거예요.” “고마워.” “뭘요. 다 저 좋자고 하는 짓인데. 미래의 남편이 신성제국의 비선실세가 될 수 있는 기횐데… 이런 기회를 놓치겠어요? 도박은 싫어하지만 여기서 밀어주는 게 내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답니다.” “잘 받을게.” “잘해요. 잘. 아, 그리고 몇몇 개는 수위조절 같은 거 안 할게요. 아무래도 정말로 자극적인 거 몇 개 정도는 있어야 될 것 같아서요.” “적당히만 하면 돼. 아예 재기하지 못하도록 밟자는 취지로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알겠어요. 적당히 할게요. 적당히.” 이지혜가 말하는 적당이라는 기준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 번 정도는 검토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슬쩍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며 방을 빠져나가 내 방으로 향하던 도중, 내 방을 서성이고 있는 시녀 한 명이 시야에 비쳤다. 1황녀 시녀단 중 하나다.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자주 본 얼굴이라 그런지 기억에는 남는다.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나러 간 날 엎드려 손바닥을 비비고 있던 이가 틀림없으리라. 어째서 내 방 앞을 서성이는지는 뻔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 “아아아.” 슬그머니 마음의 눈으로 그녀의 이름을 확인한 이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리스 시녀님.” “말을 내려 주시옵소서. 누, 누군가 들을까 겁이 납니다.” “하하. 존대가 습관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보다 여기에는 어쩐 일로… 아니, 아니. 제가 괜한 질문을 했나 보군요. 안 그래도 슬슬 황녀 전하를 찾아뵈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정되어 있는 일이….” “제국 기사단을 독려하고 지금까지의 노고를 치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사소한 일이라 잊어버리고 있었다. 제국 기사단을 독려하러 기사단을 방문한다는 것 자체가 보여주기 식이다. 이런 일에도 이쪽을 찾는 것을 보면 이쪽을 꽤나 신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캠프에서 제안한 스케줄을 따르고 홍보 효과를 제대로 누린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자신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눈 먼 장님도 캠프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으리라. ‘너무 의존적인 게 탈이지만.’ “꼭 나쁜 것도 아니고….”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녀님께서는 아직 출발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어떤 드레스를 입고 가실지 고민 중이시라….” “아아아. 그러고 보니 제가 아직 말씀을 안 드렸었군요.” “네?” “드레스가 아니라 가벼운 무장을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경갑이지만 조금 고급스러운 느낌으로요. 기사단을 방문하는데 굳이 드레스를 입고 갈 필요가 없지요. 장담컨대 이쪽이 더 효과가 좋을 겁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하는지 알아들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아! 네!” 사소한 복장이라도 이런 디테일이 중요하다. “머리는 잘 묶어서 위로 올리고 액세서리는 최소화, 제국 기사단 인장이 딱이겠군요.” “네. 네.” “먼저 가서 세팅해 주시면 빠르게 뒤따라가겠습니다.” “네!” 후다닥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쪽은 잠깐 방에 들어가 다시 한번 잡아놨던 스케줄을 정리. 제국 기사단을 방문한 이후로는 궁정 마법사단을 방문 예정이다. ‘1황녀 코스프레 하는 날이네.’ 이런 식으로 스케줄과 복장, 심지어는 연설 내용마저 대필해 주니 마치 연예인 매니저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다시 한번 최종 점검을 한 이후에 밖으로 나서 항상 만나던 응접실로 향하자, 때 마침 준비가 끝난 샤를리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딱 내가 주문한 대로 되어 있다. 기사라고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가벼운 경갑과 훈련할 때 불필요한 액세서리는 없다. “명예주교님!” “샤를리아 님, 이거…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마침 저도 방금 막 도착해서….” “하하하. 확실히 드레스만 잘 어울리시는 게 아니시군요. 이런 모습도 무척 아름다우시니 복장이 황녀님 덕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는….”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는 황녀보다는 사실 시녀들이 더 대단해 보인다. 지옥에서 빡세게 구른 이들이라 그런지 확실히 저마다 가지고 있는 능력이 많다.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도 이쪽의 의도를 파악해 가벼운 메이크업까지 완벽하게 처리되어 있는 모습은 놀라울 지경이다. 대충 주문한 머리도 퀄리티가 꽤 높다. ‘얘네 장난 아니네.’ 뒤쪽에 병풍처럼 서 있는 시녀단은 내가 샤를롯트를 칭찬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해냈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녀들을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시선을 다시 샤를리아 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샤를리아의 미모를 다시 한번 칭찬한 이후에는 숙지사항과 주의사항을 다시 한번 브리핑했다. 어떤 동선으로 움직일지에 대한 설명을 한 이후 연설 내용이 적힌 쪽지를 건네자 찬찬히 읽고 검토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런 모습은 좋아.’ 능력이 없어도 의지가 있다는 게 중요하다. 본인 역시 자신감이 생겼는지 발걸음이 사뭇 당당하다. 그렇지만 그런 그녀의 얼굴이 찌푸려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제국 기사단의 연무장 앞에 보이는 또다른 사람. ‘얘 봐라….’ 한발 앞서 제국 기사단을 방문한 샤를롯트를 확인한 이후에는 나 역시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었다. ‘이건 노렸다고 보는 게 맞네.’ # 273 회귀자 사용설명서 273화 당근과 채찍 그리고 검(1) ‘쯧쯧….’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이쪽이 확인하기로는 그녀의 스케줄에 제국 기사단 방문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관할구의 지역 후보가 같은 장소로 유세활동을 벌이러 온 것이나 다름없으니 기가 차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입지가 좁은 1황녀와는 반대로 2황녀의 캠프와 지지 세력은 단단하다. 함께 온 유력귀족들을 보니 이쪽도 조금 덩치를 키워 방문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샤를롯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다는 표정을 짓고는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은지, 샤를리아 역시 손을 부들부들 떨며 핏발선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대로 행동하시면 됩니다, 황녀 전하.” 혹시라도 돌발행동을 할까 싶어 그녀에게 귓속말을 속삭이자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는 샤를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지만 마치 눈앞에 있는 여자를 찢어 죽여 버리고 싶다는 표정은 여전했다. ‘참을 수 있을까 모르겠네.’ 배다른 여동생만 생각하면 질투심에 피눈물을 흘릴 정도니 불안한 것이 당연했다. 제2황녀 샤를롯트에게도 그녀의 언니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들어 있겠지만 최소한 이런 자리에서는 드러내지 않는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이 가관이다. 그 모습을 보고 샤를리아는 자신의 여동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 여기는 무슨 일인 게냐.” “제국 기사단을 방문하시고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흔치 않은 자리인 만큼 혹시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사전에 연락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도움은 개뿔.’ “그래…. 고맙구나.” 황당한 말에 샤를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누가 봐도 기분이 나쁘다는 모양새였다. 대놓고 티를 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칭찬해 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림은 나쁘지 않아.’ ‘제1황녀와 제2황녀가 함께 제국 기사단을 방문했다’라는 건 괜찮은 뉴스다. 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소식. 무난하게만 진행된다면 둘 모두 썩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 윈윈이라고도 볼 수 있다. 황제야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테고 아무것도 모르는 제국민들 역시 이 자매의 우애에 대해 소리를 높일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샤를리아가 언제 지랄발광을 할지 모르겠다는 위험요소 하나뿐이었지만 최소한 지금 보여주는 행동 자체는 굉장히 무난했다. 아무튼 간에 이 자매는 더 이상의 대화를 하지 않은 채 기사단의 연무장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2황녀는 1황녀가 아니라 나를 힐끔 보곤 했는데, 여전히 이쪽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럴 만하겠지.’ 안 그래도 간신배 같은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 샤를리아가 무슨 행동을 할 때마다 나에게 귓속말을 해오니, 내가 뒤에서 그녀를 조종하고 있다는 걸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하다. 최근 그녀의 행동과 스케줄을 관리하고 있으니 그녀의 생각이 틀린 것만도 아니지만……. ‘너무 나쁘게는 안 봐줬으면 좋겠는데….’ 정적이라고는 하더라도 권력자에게 너무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게 소시민의 솔직한 심정이다. 연무장에 들어서자 제국 기사단의 부단장이며 이번 행사의 책임자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왔는데 두 자매가 동시에 찾아올지는 몰랐는지 제법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이, 이렇게 방문하시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1황녀, 2황녀 전하.” “혹시나 저희가 기사들을 귀찮게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군요.” “아닙니다. 단원들이야 샤를롯트 전하께서 방문해주신 것만으로도 무척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다행입니다만.” 샤를리아 역시 뭔가 말을 하려고 하지만 선수를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럴 줄은 알았는데….’ 이번 자리가 익숙한지 능숙하게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그녀와는 반대로 샤를리아의 포지션은 뭔가 애매하다. 대놓고 병풍이 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본인이 잘 느끼고 있으리라. “아….” 우물쭈물거리는 꼴이 가관이다.\ 어떻게든 주도권을 자신에게 되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이미 부단장과 샤를롯트는 그녀가 끼어들 수 없는 이야기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 2황녀는 이런 쪽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고민하시고 계시던 병력 개편 문제는 잘 해결되셨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제국 기사단이 기마대 위주의 병력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일반 보병과 방패수 비율을 높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요즘은 기마대만으로 병력을 운용하기에는….” “네. 황녀님 말씀이 맞습니다. 무리가 있는 게 사실이지요. 아무래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추진해 주신 기사단의 개인 물약 보급 역시 기대가 높습니다.” “그 이야기는 여기 계신 이기영 명예주교님과 나누시는 게 더 좋을 것 같군요.” “그러고 보니….” “네. 이번에 기사단에 보급되는 물약은 파란의 연금공방에서 직접 들여올 예정입니다. 대륙 최고의 연금술사가 제국에 있는데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하. 그렇군요. 사실 저도 파란에서 유통하고 있는 고급 물약을 써본 적이 있습니다. 평범한 기사들의 봉급으로는 구입하기 부담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포션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효과가 좋더군요.” ‘요것 봐라….’ 갑작스럽게 날아 들어온 당근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 샤를롯트의 채찍질이 기분 나빴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당근은 달콤하기 짝이 없다. ‘사과의 선물이라고 봐야 하나.’ 그 동안 제국에서 일반적으로 유통되었던 보급 물약을 생각해 보면 그 질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사들의 생존율이나 안전을 생각해 보면 당연히 파란의 연금공방에서 양산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물약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안 그래도 슬슬 제국과 직접 계약을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저쪽에서 미리 추진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유가 있겠지.’ 어차피 안정성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어떻게 생각해도 이쪽의 물약을 보급하는 것이 맞다. 군인에게 질 좋은 물건을 가져다주는 것은 지구에서도, 대륙에서도 상식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는 이야기. 물론 어딘가에서는 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도 있기야 하겠지만 최소한 제국은 본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기사단과 군인들을 홀대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서로 관계가 좋다 안 좋다는 따지기 이전에 내 포션을 채택하는 건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거다. 말하자면 샤를롯트의 입장에서는 그냥 툭하고 콩고물을 던져본 것에 불과. 내가 받아먹으면 좋고 받아먹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게 있다. ‘이간질?’ 그렇게 추측하는 게 맞다. 대놓고 불편해 보이는 샤를리아의 표정을 보고서는 나 역시 조금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는 싶지만 공사인 만큼 뭐라고 코멘트를 달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둘만의 대화에 잠깐 동안 등판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물론 완벽하게 소외되어 있는 샤를리아 역시 이쪽으로 함께 데리고 와야 했다. “가격이 비싼 것은 사실입니다만 품질은 의심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제국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해 주시는 기사단에 납품할 품목은 특별히 제가 신경을 쓰게 될 테니까요. 사실 파란도 이런저런 일 때문에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상황이지만….” 사실 굉장히 여유롭다.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가격보다는 훨씬 싸게 계약을 진행하게 될 겁니다.” 기회인만큼 최대한 남겨먹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 파격 디시는 없다. “사실 제1황녀, 샤를리아 전하께서도 2황녀님과 비슷한 생각을 언급하신 적이 있었는데… 하하하. 이거 참 우연이로군요.” 물론 그딴 소리는 들은 적도 없다. 불과 1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적지 않은 거짓말이 튀어나왔지만, 이런 건 선의의 거짓말인 만큼 부담이 없다. 슬그머니 샤를리아를 앞으로 내밀자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서는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대충 합만 맞춰줘라.’ “그렇군요. 샤를리아 전하께서도….”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제국 기사단의 부단장은 여전히 뿌듯하다는 표정이다. 이 타이밍에 비집고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닌지 샤를리아 역시 이 흐름에 탑승하려 입을 여는 것이 보인다. “부끄럽습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하하하. 두 분께서 기사단을 이렇게까지 생각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라가 안전해야 발전할 수 있는 법입니다. 제국 내 최고의 무력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제국 기사단을 위하는 것은 이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하고 있는 생각일 겁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샤를리아 전하. 하하하하.” ‘좋아. 잘하고 있어.’ 아까 전 내가 쪽지를 사전에 읽은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 이다. 물론 샤를롯트의 표정은 담담하다. 대충 예상했다는 느낌인 걸 보면 말 그대로 한번 던져본 것에 불과한 모양. 샤를리아가 비집고 들어간 자리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이쪽과의 거리를 좁힌 것을 보니 내가 생각한 게 맞는 것 같았다. 포섭이 안 되면 이간질이라도 해보겠다는 심보가 틀림없으리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샤를롯트와 샤를리아는 보여주기 식 훈련을 선보이고 있는 제국 기사단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는 중이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샤를롯트에게 더 호의를 보이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확실히 현재 누구에게 더 힘이 쏠려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인 것 같았다. 나 역시 제국 기사단의 연무장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샤를리아에게 계속해서 신경을 쓰면서도 마음의 눈으로 제국 기사단의 스펙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사단 수준이 꽤 높네.’ 빅터하르트 할아범이 최선을 다해서 키우고 있는 이들인 만큼 제국 최고 세력이라고 하기에 부끄럽지 않다. 대부분이 내구와 체력이 높은 것을 보면 말에 올라탔을 때의 파괴력은 그야말로 상상을 불허할 것 같다. 장담컨대 웬만한 중소 길드는 저들의 용트름 한 번에 곧바로 쓸려 나가게 되리라. 물론 제1황녀에게 그런 생각은 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이쪽이 전해준 행동과 동선을 최대한 따르기에 여념이 없다. ‘그래도 잘하고 있어.’ 격려의 말을 전하고, 그들의 무훈을 칭찬한다. 어차피 이런 종류의 순방이라는 건 대부분 실속이 없고 보여주기 식이다. 검술에도 능통한 제2황녀야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샤를리아는 저 정도까지 보여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되니까.’ 굳이 요란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다는 거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최선을 다해 제국을 지키는 검이 되겠습니다.” ‘아주 좋아.’ “제국이 안전한 것은 모두 그대들의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제1황녀 전하.” ‘그래 넌 그것만 하면 돼.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되는 거야.’ 사실 근력이 높은 기사들과 악수를 하는 건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일이다. 그들이 힘 조절을 한다고 한들, 내구가 약한 우리 같은 사람 입장에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미 수십 차례의 악수를 하고 퉁퉁 손바닥이 부어 있는 상황에서도 미소를 유지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독하기는 독한 모양. 딱 저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도중에 샤를롯트가 이쪽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담담한 어조에 담담한 울림이었다. # 274 회귀자 사용설명서 274화 당근과 채찍 그리고 검(2) 항상 같은 얼굴에 같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 다시 봐도 샤를리아와 닮은 점이 많다. 백금발의 머리카락도 그렇고 새하얀 피부색도 마찬가지다. 아마 멀리서 본다면 제대로 구별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면 표독스러운 얼굴을 가지고 있는 1황녀와 차이가 존재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황가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머리색이라도 달랐으면 조금 더 편했을 텐데….’ 더러운 핏줄을 가지고 있다는 물타기가 한결 수월하게 진행됐을 것이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샤를롯트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시금 귀 뒤로 넘긴 이후에 말을 이었다. “사람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네. 저도 제2황녀 전하의 말에는 동의하는 편입니다.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만… 어째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모르는 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저도 대충 알고 있고 당신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대해 대충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저는 샤를롯트 전하께서 무슨 말을 하시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이런 자리에서 말입니다.” “저는 지금 당신이 언니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에 대해 묻고 있는 겁니다.” 꽤나 직접적이라고 생각했다. 말을 아껴야 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다시 한번 말을 이어간다. “수다스러운 타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말을 아끼시는군요.” “사람을 잘못 보신 모양입니다.” “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게 맞지요. 조금 더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상식 밖의 행동을 보여주시고 계시니 말입니다.” ‘네 말이 맞아.’ 누가 봐도 지금의 샤를리아 쪽에 붙는다는 것은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다. 보통이었다면 샤를롯트가 던지는 채찍을 겸허히 받아들인 이후에 당근을 주워 먹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김현성의 부탁 그리고 그녀의 채찍이 얼마나 아플지에 대해 걱정한 내 겁이 죄인이었다. “당신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특히나 빅터하르트 님께 말입니다. 양보하는 걸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시더군요. 제가 당신에 대해 어느 정도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보였던 무례에 대해서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무례라니요. 누가 들을지 걱정됩니다, 황녀 전하.” “당신의 손과 발을 쳐내려고 한 행동에 대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명예주교님. 이해하시겠지만 저는 이기영 명예주교님의 존재가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명예주교님이 제 입장에 계셨다면 당신 역시 자신을 어떻게 억제할지 고민하셨을 겁니다. 한 사람이 너무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저 같은 사람에게는 위협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는 제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샤를롯트 황녀 전하. 어떻게 황실의 일원 앞에서 제가 가진 권력에 대해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종류의 대화를 나누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말을 해도 응해주실 것 같지는 않지만요. 그럼 주제를 바꾸어 보죠.” 샤를롯트가 잠깐 대화를 끊고 전방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때마침 제1황녀가 제국 기사단 순방을 마친 이후에 단상 위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적당한 자리에 착석한 이후에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보니 계속해서 옆 자리에 앉아 남은 대화를 하자는 모양. 애초에 다른 이들과는 말이 되어 있었던 모양인지, 달리 내가 앉을 만한 곳은 없었다. 혹시나 오해할지도 모르는 제1황녀에게는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 이후에 자리에 앉자, 제1황녀가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어놓은 연설문을 꺼내 단상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적어준 연설문이니 적어도 반 이상은 갈 것이다. 샤를리아는 당당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이쪽의 연설문을 읽어나가기 시작. 의자에 앉아 단상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은 박수를 보냈고 한층 더 자신감에 찬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개인적으로 기대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녀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싶었지만 다시 말을 걸어오는 샤를롯트 때문인지 1황녀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명예주교님.” “네?” “저는 당신이 저와 같은 배에 타셨으면 합니다.” “무슨 말씀을….” “말씀드리는 그대로입니다. 언니에게서 벗어나 직접 제 배 위에 올라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저는 의심이 많습니다. 또 걱정도 많고요. 아마 당신과 비슷한 종류의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명예주교님이 저와 함께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셔도 아마 사전에 계획하고 있던 작업을 멈추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의 권한을 축소시킬 거고 당신의 양보를 받아내려고 노력할 겁니다.” “아아….” “그렇지만 그 결과가 당신에게 좋게 돌아오리라는 것 하나는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당장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장담컨대 모든 결과는 제국과 당신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겁니다. 물론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계획하고 계신 결과보다 좋을 거라는 확답은 드리지 못하겠지만 최소한 지금 하고 계신 투자보다 위험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대충은 생각했었다. 아무래도 그냥 떠나보내기에는 내가 조금 군침 돌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아마 제1황녀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려는 내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았다. ‘탐이 나는 인재라는 건가.’ 물론 한 입에 씹어 삼키기에는 덩치가 크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다. 내 권한을 축소시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사실 태세전환을 아예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김현성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진지하게 배를 갈아타는 것도 생각해 봄직하다. ‘하지만.’ 이토 소우타 사건 때 빅터하르트 영감에게 말했다시피 나는 절대 이런 부분에서는 양보하지 않는다. 양보하는 건 타인이 되어야 하지 절대로 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실례가 될 수도 있지만 명예주교님에 대해서는 약간의 사전 조사를 마쳤습니다. 용에게 선택받은 자, 신성제국의 명예주교 같은 모두가 알고 있는 타이틀보다는 조금 다른 쪽에 관심이 가더군요. 언론이라는 매체를 린델에 뿌리내리고 여러 가지 변혁을 가져온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영광입니다.” “자유 도시는 기본적으로 제국과 분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분리되어 있는 만큼 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린델에 언론이 뿌리내리고 시작한 이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 내에서도 비슷한 기관이 생긴 것만 봐도 그러합니다. 당신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이지만 최소한의 양심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당신이 벌인 일들이 다수에게는 좋은 결과를 가지고 왔으니까요.” “그렇군요.” “아마 제가 생각하기에… 당신이 그런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이유는 타인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뇨.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대중의 눈치를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강자에게는 자신이 가진 것을 양보하지 않아도 대중들에게는 자신이 가진 것을 양보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조금 고민해 봐야겠지만.” “칭찬이 맞으니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예주교님, 제국에는 당신과 같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대중의 눈치를 보는 인재가, 다수의 눈치를 보는 정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잠깐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거 진짜 물건인데….’ 정말 제대로 된 물건이다. 영특한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머리가 좋다. 사고방식 자체가 여기에 있는 다수의 귀족들과 다르게 느껴질 정도, 단상 앞에서 내가 써준 쪽지를 앵무새처럼 읽고 있는 샤를리아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째서 그녀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야 이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정통성이고 나발이고 따르고 싶어질 것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는 말도 있지만 황제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은 이가 눈앞에 있다. 어릴 적 동화책으로만 봐왔던 위인의 성장기를 직접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 나도 모르게 태세전환 버튼을 눌러버릴 뻔했다. “아.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최근에 묘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 “비천한 핏줄이라든지 방탕한 놀이라든지, 밤마다 들려오는 교성 소리라든지. 굳이 반응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는 터무니없는 소문들이지요.” 예상은 했지만 이런 것까지 캐치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 꼬리를 잡지 못했고… 잡는다고 해도 소문의 근원지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기는 하지만 어디에서 흘러나오는지 심증은 있습니다.” “어떤 소문에 대해서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황녀 전하.” “명예주교님이 알아주기를 원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듣고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까 전 사과와 제의가 당근이었다면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채찍이니까요.” “…….” “저는 적에게 칼을 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명예주교님. 당신이 제국에 있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말로 제게서 등을 돌린다면 저도 칼을 빼들 수밖에 없습니다. 현명한 선택을 하셔야 할 겁니다.” ‘제길….’ “어째서… 아버님, 아니, 황제 폐하의 곁에서 간언하는 이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시면 답이 나올 겁니다.” ‘슈바….’ “이번에는 양보해 보시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전력으로 양보하고 싶다.’ 제대로 부딪치면 짜증 나는 일이 많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 그렇지만 이쪽에게도 이쪽의 사정이라는 게 있다. 제2황녀를 황제로 만들지 말라는 특명을 받은 만큼 그녀와 같은 배를 탈 수는 없다. 때마침 샤를리아가 낭독회를 끝낸 타이밍. “양보하실 마음이 생기셨다면 무릎을 꿇고 제 손에 입을 맞추세요. 저는 두 번 말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당신을 위한 당근도, 채찍도 여기서 마지막입니다. 다음에 뽑는 것은 검이 될 겁니다.” 딱 봐도 그렇게 보이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죄송합니다.” 이미 이쪽은 노선을 정했고 다른 선택지는 없다. 너무 멀리 온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와서 돌아가기에도 우습다. 태세전환의 욕구는 여전히 가슴속에서 펄떡펄떡 살아 숨 쉬고 있지만……. ‘한 번 양보하면.’ 계속 양보해야 한다.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뛰어오는 샤를리아만큼 샤를롯트가 어떤 인간인지 눈에 보였기 때문에 방금과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제국민의 안녕이고 그걸 위해서라면 나에게 계속해서 양보를 요구할 것이다. 굳이 뚜껑을 열어보지 않아도 결과가 뻔하다는 거다. 슬그머니 옆을 바라보자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샤를롯트의 얼굴이 보였다. 저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추측컨대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처음 한 말을 잘 기억하세요, 명예주교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거.” 인사도 하지 않고 곧바로 등을 돌려 사라지는 꼴은 가관. 샤를롯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해가 가지만 샤를리아가 그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다. “고생하셨습니다, 황녀님.” “잘한 게 맞나요?” “네. 아주 훌륭한 연설이었습니다.” 시키는 것도 잘해주고 있고, 이제야 막 자신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다. 지금 이 타이밍에 사고를 치는 것은 애비도 못 알아보는 패륜아도 하지 않을 짓이다.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내 확고한 믿음이 무너지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샤를리아는 그 정도로 멍청한 년이었다. # 275 회귀자 사용설명서 275화 한계가 있는 사람은 밑바닥을 드러내게 마련이다(1) 모든 게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 불안한 말을 한마디 남기고 떠난 샤를롯트 측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조용했다. 실제로 귀족이나 대중에게도 이쪽이 퍼뜨렸던 날조된 정보가 우후죽순 퍼지고 있었던 타이밍이었다. 제국 8좌에 대한 견제세력이 불어나고 있었던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다완 측에 있는 8좌가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나쁘다고만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는 거다. 물론 몇 가지의 불안요소는 존재했다. 내 생각보다 샤를롯트 캠프가 더욱더 거대했다는 것이 그 이유. 실제로 그들이 집결하는 속도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용의주도했다. 그들이 딱히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던 것이 문제. 개망나니나 다름없던 샤를리아를 지지한다는 건 생각보다 잃을 게 크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샤를롯트 캠프는 단순히 그 크기만 큰 것이 아니다. 그들 사이에는 묘한 유대감이 있었고 실제로도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뛰어가는 듯했다. 당연하지만 구성원들 자체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샤를롯트의 품에 있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해 캠프에 남아있는 인원도 있었지만, 적어도 핵심멤버들은 대부분 제국민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그걸 실천하는 이들이었고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세력 역시 결코 적지 않았다. 바닥에 깔려 있는 이들을 포섭하려고 하기는 했지만 당연히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실제로 사이가 돈독하던 귀족들의 얼굴까지 보기가 힘들어 졌다. 같은 사교회장에서 이야기정도는 나누었지만 핵심 귀족들은 나와의 일대일 만남을 기피하고 있었고 알게 모르게 소외되는 일이 많아졌다. 샤를롯트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인적 네트워크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넓었던 것이다. 이쪽 역시 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당연. 적어도 비슷할 정도로 덩치를 키워야 했다. 그래야 애매모호하게 서 있는 이들을 확실하게 끌어들일 수 있다. 샤를리아가 가지고 있는 정통성. ‘황제의 핏줄을 제대로 이어 받았다’라는 프레임을 계속해서 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1황녀에게는 뻥튀기 홍보를 제2황녀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네거티브한 소문을. 그 결과 내가 원하는 그림이 만들어지기는 했다. 사람들이 모였고 세력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렇게 모인 귀족들은 대부분 쓰레기 같은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력은 결코 작지는 않지만… 샤를리아 캠프에 있는 이들은 구태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설호 같은 늙은이들.’ 젊은 피나 혁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영감탱이들의 적폐축제. 그것이 바로 현재의 샤를리아 캠프였다. 물론 나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카트린 공작부인이나 엘리제 백작부인 그리고 이쪽에 갚을 빚이 있는 캐슬락 백작과 마를린 영애는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오고는 있었지만 그들 역시 한 가문을 이끄는 입장에 있는 만큼 결단을 내리기는 힘들어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샤를리아를 포장하는 것이었다. 고민하고 있는 귀족들에게는 그녀가 직접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이번 일에 이쪽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걸 잘 이해하고 있는 만큼 마치 공주 키우기 게임을 하는 것처럼 오만 정성과 노력을 쏟아 부었다. 물론 이지혜 역시 열심히 갈려나가고 있었지만 그녀보다는 내가 더 피곤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도 샤를리아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되는 그녀와는 다르게 나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밀착해야만 했으니까. ‘슈바….’ 말하자면 그녀가 흘리는 똥오줌을 전부 치워줘야 되는 입장에 있었다는 것. 다 큰 어른을 어르고 달래고 칭찬해 주고 띄워주는 것으로 모자라 복장부터 체크해 줘야 하니 피곤한 것은 당연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업무 외에 사적인 행동이나 질문 같은 대화들도 길어지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이쪽의 영역에 발을 들이려고 한다는 게 종종 느껴지고는 했다. 이를 테면 차희라나 정하얀과 무슨 관계냐고 물어본다든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본다든가 하는 정도가 전부였지만 고유기벽을 가지고 있는 이쪽은 혹시나 또 어떤 미친 상황이 벌어지진 않을까.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와 내가 신분의 차이가 있다는 것. 아마 그게 샤를리라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황가의 핏줄이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만약 샤를리아가 그것까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정말로 황제의 핏줄을 진하게 이어받은 셈이다. 아무튼 간에 샤를리아는 독하게, 또 군소리 없이 이쪽의 스케줄을 잘 따라오는 중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에 인정받는다는 생각이 그녀의 행동에 탄력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샤를리아의 대외 평가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제1황녀는 차곡차곡 자신의 인지도를 쌓았고 적폐축제의 한가운데에 있기는 하지만 나름의 세력도 일궜다. ‘제일 중요한 시기였어.’ 그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했다. 아직도 한참 모자르기는 하지만 이제야 이 무능한 1황녀는 샤를롯트와 동일한 출발선상에 선 것이다. 나름대로 교통정리가 잘 되어 있는 그쪽의 세력과는 다르게 샤를리아 쪽은 적폐 늙은이들의 밥그릇 싸움이 내부에서도 진행되는 중. 그나마 샤를리아가 나를 제일 신뢰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나 역시도 적폐축제에 가담해야 했을 것이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결과물이긴 했다. 조금 불안했던 점은 그녀가 이 상황을 어떤 관점에서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것.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샤를리아에게는 너무 급진적인 변화처럼 느껴졌겠지만 본인도 본인의 주제를 알고 있다면 크게 나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본인의 세력이 생겨 콧대가 올라갔다고 하더라도 이제 막 출발 지점에 선 만큼 적어도 주제파악은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실수였다. ‘제기랄. 제기랄!’ 이 멍청한 여자에게 그나마 한 줄기 희망을 본 게 내 실수였다. 제1황녀 샤를리아, 늘 만나던 카트린 공작 부인, 엘리제 백작부인, 마를린 영애와 함께 작은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도중.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일어난 일은 너무 현실성이 없어 당황스러울 정도. ‘멍청한 년. 멍청한 년!’ 샤를롯트가 말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 뜻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까지의 평화로운 분위기는 자취를 감추어 버린 지 오래. 눈앞에 보이는 장면은 혼란으로 가득 찬 장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꺄아아아아악!” “아아아악!” 자신의 얼굴을 부여잡은 채로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마를린 영애와 그녀를 챙기고 있는 카트린 공작 부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이다. 샤를리아는 뭐가 그리 분하고 짜증 나는지 씩씩거리며 마를린 영애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엘리제 백작부인 역시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문을 열고 난 이후에 기대한 장면은 4명의 여자가 하하호호 웃고 떠들며 우애를 다지는 모습이었건만 이렇게 개판을 만들어놨을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서 마를린 영애가 얼굴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고 있는지는 눈치챌 수 있었다. 작은 주전자를 들고 있는 멍청한 샤를리아. 그녀가 들고 있는 주전자 안에 있는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인지 샤를리아가 마를린 영애에게 가지고 있던 차를 그대로 뿌려 버린 것이다. 너무 당황스러워 잠깐 동안 멈칫했다. 그렇지만 다시 들려온 마를린 영애에 고통에 찬 비명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아아악!!” “마, 마를린 영애!” “이, 이기영 명예주교님! 저… 저것이! 감히!” 그 와중에 샤를리아가 마침 잘 왔다는 듯 나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지금 중한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은 가볍게 무시한 이후에 곧바로 마를린 영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상태를 본 나는 곧바로 그녀를 들어 올렸다. “아리스 시녀, 사제를….” “이, 이미 전해 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녀보다 무능한 년.’ 말 그대로 시녀보다 무능한 년이다. 무척 절박한 내 모습을 보고 그제야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저 구겨진 표정의 의미가 제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으면 좋겠다. 혹시나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얼굴을 구긴 것이라면 용 숨결 물약으로 뚝배기를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리라. “이, 이기영 님…. 아파요. 아픕니다! 흐으으으윽…. 아파요.”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마를린 영애. 아니, 아리스 시녀님! 제 가방에 포션이 있습니다. 일단 그걸로!” “아! 네!” “카트린 공작부인 그리고 엘리제 백작부인은 잠깐 마를린 영애를….” “아… 네. 알겠습니다. 명예주교님.”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다. 얼굴 전체에 뜨거운 차를 뒤집어썼으니 아픈 것이 당연하다. 상처 치료는 가능하지만 혹시라도 눈을 다쳤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아니, 흉터라도 남는다면 이 사태를 수습하기가 더 힘들어 질 것이다. 아리스 시녀는 헐레벌떡 이쪽의 가방을 가져오기 시작.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 울먹거리고 있는 엘리제 백작부인과 입술을 꽉 깨물며 어떻게든 마를린을 진정시키려고 하는 카트린 공작부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픕니다. 이기영 님…. 흐으윽…. 눈앞이 깜깜합니다. 아으어허헝….” “마를린 영애, 조금만 참으세요. 지금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사제님도 곧 오실 거고 다 괜찮아질 겁니다.” 멍하니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샤를리아와는 다르게 아리스 시녀는 마치 메스라도 건네는 간호사처럼 이쪽에 포션을 건넸고 이쪽은 곧바로 뚜껑을 따 마를린의 얼굴에 고급 포션을 콸콸 쏟아 붓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필요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항상 포션을 들고 다녔던 것이 유효했다. “한 병은 상처 부위에 뿌릴 거고 한 병은 천천히 마실 겁니다. 진통효과도 있을 테니 틀림없이 괜찮아지실 겁니다.” ‘괜찮아져야 돼.’ “네… 네… 네….” “천천히 눈을 떠보세요.” “네. 이기영 님….” ‘제기랄.’ 의사가 아니었지만 지금 마를린 영애의 눈이 정상이 아니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으리라. 아직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만큼 분명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따끔할 겁니다.” “꽉, 꽉 안아 주세요, 이기영 님. 흐으으윽….” “네. 네.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손을 꽉 잡아주자 마를린 영애의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느껴진다. 겁을 집어 먹는 것이 당연하리라. 천천히 눈에 포션을 집어넣자 갑작스레 온 몸에 힘이 들어가며 비명을 지르는 모습. “아아아아아악!” “괜찮을 겁니다, 영애. 조금만 참으세요. 다 회복되고 있습니다.” “네…. 끄으으으윽….” 다시 한번 마를린 영애의 몸을 들어 올린 이후에는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카트린 공작부인은 그대로 나를 따라 나섰고 엘리제 백작부인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버렸다. 그 와중에 아리스 시녀는 사제를 이쪽으로 데리고 오는 중.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던 마를린 영애는 탈진했는지 추욱 늘어져 버렸다. 급한 불은 꺼졌다. 그제야 조금 상황이 정리된 느낌이 들었다.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일단은 마를린 영애가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옮겨야겠습니다. 남은 치료는 그쪽에서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제가 폐하께 하사받은 방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명예주교님.” “감사합니다, 카트린 공작부인.”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니까요. 명예주교님, 마를린 영애는 괜찮은 건가요?” “아마 괜찮아질 겁니다. 흉터도 남을 것 같지 않고 눈도 회복될 겁니다. 그보다 갑자기 어째서….” “설명을 드리려면 깁니다만… 샤를리아 그 미친, 아니, 황녀 전하와 영애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전하께서 갑작스레 뜨거운 물이 든 주전자를 마를린 영애에게 집어 던졌습니다. 마를린 영애가 샤를리아 황녀 전하께 어떤 무례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고 그저 단순히 이기영 명예주교님과의 친분을 말하고 있었을 뿐인데….” “아….” “너무 갑작스럽게 그런 행동을 하셔서… 저도 도대체 뭐가 뭔지. 혹시나 마를린 영애가 황녀 전하께 누가 되는 행동을 했는지 떠올려봤지만… 제대로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씨발.’ 예상은 했지만 마를린 영애가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황급히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사제가 신성력을 쏟아 붓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계속해서 복잡해진다. 따라온 두 사람 역시 굉장히 초조한 모습으로 마를린 영애의 모습을 바라보는 중. 아마 가장 놀란 것은 저 둘이었을 것이다. 잘 보니 두 사람에게도 뜨거운 물이 튀었는지 화상을 입은 것 같은 자국이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긴박한 상황이라 자신을 챙길 여유는 없었던 모양. 양해를 구한 이후에 곧바로 그녀들의 상처도 봐주기 시작했다. ‘망했어.’ 완전히 말아먹었다. 지금까지 내가 한 고생 모두가 헛짓거리가 되어버렸다. 어째서 샤를롯트가 그간 적극적으로 응수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가장 가까이서 자신의 언니를 봐온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1황녀 샤를리아가 구제불능에 멍청이고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자멸할 것이라는 걸 말이다. ‘제기랄! 제대로 망했어. 제대로 망했다고!’ # 276 회귀자 사용설명서 276화 한계가 있는 사람은 밑바닥을 드러내게 마련이다(2) 선택지가 제한적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를린 영애가 어떻게든 몸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안정을 취해야 했다. 사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표현 역시 작금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카트린 공작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는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엘리제 백작부인 역시 아직까지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항상 티타임을 즐기는 멤버들 중 하나가 큰 화를 당했으니 저렇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 역시 입맛이 씁쓸하다. 마를린 영애를 그동안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주 얼굴을 맞댄 사이인 만큼 그녀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건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머릿속을 점거하고 있는 생각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것. ‘풀긴 뭘 풀어. 시발….’ 답이 없는 문제다. 애초에 이 멤버는 샤를리아 캠프로 들어오는 걸 고민하고 있는 멤버들이었고 적폐축제가 일어나고 있는 현 캠프에서 꼭 필요한 인물들이었다. 공화국과 맞닿은 경계, 동부 귀족의 중심세력이자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진짜들이다. 어디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는 줄 알고 샤를리아에게 납작 엎드려 혓바닥을 내밀고 있는 늙은이들과는 격이 다른 손님들. 그런 손님에게 무례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 뜨거운 물을 끼얹어 버렸으니 답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표면상으로는 샤를리아 캠프에 몸을 담가 만날 것을 종용한 나에게도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거다. 화해를 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 나 역시 샤를리아든 카트린 공작부인이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마를린 영애는 아직까지 내 손을 꽉 쥐고 있는 중이다. 카트린 공작부인의 무거운 입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괜스레 미안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일단은 이쪽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 같은 분위기.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요. 명예주교님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제가 명예주교님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이 생길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요. 정말요. 다만….” “네.” “현재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만 저희가 그쪽으로 함께 하기에는 힘들 것 같습니다.” ‘제길….’ 당연한 결과였다. 상황이 이렇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쪽과 함께한다고 한다면 나는 이들을 귀족이 아니라 성자라고 부를 것이다. “신경을 써주시고 자리를 만들어주시고 여러 가지로 저희를 도와주신 것은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카트린 공작부인, 엘리제 백작부인.” “물론 이기영 명예주교님을 봐서라도 2황녀 전하의 세력에 가담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겨우 2황녀의 세력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걸로 이 사태를 마무리 지을 리가 없다. 아마 속으로는 몇 번을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으리라. 아무리 황실의 사람이라고 해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당장 귀족사회에 오늘의 일이 퍼져 나간다면 샤를리아는 몰매를 맞아도 단단히 맞을 것이 분명. 심지어는 적폐 늙은이들 역시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는 황제를 그 누가 섬기고 싶어 하겠는가. 잠깐 한숨을 쉰 이후에 카트린 공작부인이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황녀 전하께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희는 정식으로 황제 폐하께 이 일에 대해 보고를 올릴 것이고 제1황녀 전하가 정당한 벌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십분 이해합니다. 저 역시… 1황녀 전하가 정당한 처벌을 받으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움직여 보겠습니다.” 나 역시도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지금 당장 저쪽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나도 쌍으로 묶여 적으로 인식될지도 모른다. 일단 중립을 지킨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트린 공작부인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이쪽에 말을 건네 오기 시작. 단순히 파벌싸움이 아닌 진심어린 조언이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영특하신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이를 더 먹은 입장에서 한마디 드리겠습니다. 그분과 함께하시는 건 명예주교님에게도 득이 되지 않을 겁니다. 발을 뺄 수 있을 때 빼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저도 혹시나 그분이 달라지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봤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뼈저리게 실감한 것 같습니다. 본래 성정이 포악하고 화를 참지 못하는 분입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꼭 현명한 선택을 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반드시 새겨듣겠습니다, 카트린 공작부인.” 그 말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제길. 제길.’ 마를린 영애가 사고를 당했다는 게 캐슬랙 백작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금방이다. 딸을 끔찍이 아끼는 캐슬락 백작이 무슨 짓을 해올지 걱정되는 것은 당연지사. 이 틈을 노리고 찔러들어 올 샤를롯트나 다시 한번 샤를리아를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할 황제의 반응 역시 신경 쓰인다. ‘입만 가져다 대면 되는 거였는데.’ 그걸 가져가지 않고 바닥에 던져버렸다. 지금 본인의 위치가 뭔가 대단하게 변했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모양. ‘멍청한 년! 인간 쓰레기!’ 진짜 쓰레기는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마를린 영애는 저희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명예주교님. 일단 돌아가셔서….” “아닙니다.” “아뇨.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응접실에 황녀님이 혼자 남으셨으니 어떻게 사태를 책임지고 정리할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저희는 솔직히 황녀님의 얼굴을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네.” 입 안에서 쓴 맛이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마를린 영애의 손을 한 번 꽉 잡아 준 이후에는 인사를 한 뒤 사고가 일어났던 현장으로 되돌아가기 시작. 중간 중간에 보이는 광경들은 확실히 개판 오 분 전이다. 장식되어 있는 것들은 여기저기 떨어져 깨져 있었고 빈 포션 병이 바닥에 나뒹구는 것도 보였다. 가면 갈수록 샤를리아의 시녀단 역시 그 모습을 보였는데…. 매번 이쪽에 보고를 올리는 아리스 시녀의 볼은 벌써부터 빨갛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바깥에서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일어난 일에 화를 참지 못한 샤를리아가 개짓거리를 시작한 모양이다. “아리스 시녀님.” “이기영 명예주교님!” “얼굴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명예주교님… 황, 황녀님께서 급하게 찾으셨습니다.” “그전에 치료부터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포션을 머금고 계시면 조금 좋아질 겁니다.” “이, 이 귀한 걸 어찌 제가 감히….” “괜찮습니다. 아까 빠르게 이쪽을 도와주신 답례입니다. 황녀 전하는 지금….” “아… 그… 괴, 굉장히 화가 나신 듯합니다. 아무래도 황녀님을 내버려 두고 명예주교님이 뛰쳐나간 게 충격이었던 것 같아서… 어서 빨리 이기영님을 찾아오라 명하셨는데 혹시 다른 시녀들을 마주치지 못한 것인지요.” “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아마 엇갈린 것 같습니다만.” “어서 빨리 들어가 보셔야 합니다. 많이 슬퍼하고 계십니다.” 지랄병이 났다는 걸 최대한 순화시켜서 이야기한 것이 분명하다. 내가 계속해서 포션을 내밀자 아리스 시녀는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입 안에 있는 포션을 머금었다. 볼이 부풀어 올라 오물오물거리기가 무섭게 입 안이 터진 상처가 회복되었을 것이다. “이럴 게 아니라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시녀님. 저 혼자 가도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분들과 함께 여기 바깥을 정리해 주시면 됩니다. 황녀 전하는 제가 잘 달래보겠습니다.” “아… 네.” 사실 뭘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감을 잡을 수 없다는 말이 어울리리라.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알 것 같다. 이쪽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고 평소처럼 마를린 영애는 신이 나서 이쪽에 대한 이야기를 조잘거렸을 것이다. 영애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내가 알 수 없지만 예전에 있었던 약혼이니 뭐니 이야기를 꺼냈을 가능성도 있다. 둘이서 주고받은 편지나 캐슬락에서 자신과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꺼냈을 수도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마를린 영애는 10대 소녀 팬이 가수를 따라다니는 행동과 굉장히 유사한 행동을 벌이고는 했으니까. 뭐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샤를리아는 그녀의 말을 듣고 치미는 화를 못 참고 주전자를 쓰로잉 해버렸다는 것. 그게 사건의 전말일 것이다. 마를린 영애가 혹시 그녀를 도발한 것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가능성은 적다. 영애는 조금 특이하기는 해도 미친 짓은 하지 않는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기다렸다는 듯이 샤를리아 황녀가 이쪽을 바라봤다. 어처구니없게도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이어서 입을 열어오는 꼴은 가관. 마음 같아서는 용숨결 물약을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기영 님! 이제야 오셨군요.” “…….” “카트린 공작부인이나 엘리제 백작부인에게 사정은 전해 들으셨습니까? 무,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를린 그 멍청한 것이 자꾸만 이상한 소리를 해대서….” “…….” “자꾸만 자신이 명예주교님과 약혼할지도 모른다느니 하는 되먹지 못한 헛소리를 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지요. 주고받은 편지도 많다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듣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이기영 님의 명예를 지켜드려야겠다고 생각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가서….” “…….” “일이 이렇게 커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 계집애는 당해도 쌉니다. 고작 백작의 딸이… 어떻게 감히 분수를 모르고….” “고작 백작의 딸이 아닙니다. 샤를리아 님.” “괜찮습니다. 이기영 님이 어떤 걸 걱정하시는지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변두리에 있는 자그마한 귀족의 힘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저와 이기영님이 함께 탄 배가 침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세력도 많이 모였고….” 이미 침몰하다 못해 맨틀까지 가라앉았다. 정하얀과 함께 보트를 타는 것 보다 이 여자와 타는 보트가 더 위험하다. 조금 늦게 깨달은 감이 있지만 그걸 이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자그마한 귀족이 아닙니다. 캐슬락 백작은 지난 십여 년 동안 공화국의 위협에서 제국을 지켜온 충신 중 하나고 마를린 영애는 그 캐슬락 백작이 가장 아끼는 금지옥엽입니다. 그 규모는 작지만 캐슬락 가문의 상징성이나 제국민들이 그들에게 보내는 신뢰와 믿음은 감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황녀님.” “괜, 괜찮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나 그런 정신 나간 계집….” 완전히 틀려먹었다. 애초에 어떻게 이번 일에 대한 수습이 아니라 그녀가 괜찮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왔어야 했다. 우발적으로 손이 나간 것도 아니고 계획적이었던 걸로 모자라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한 자각도 없다. 일단 화를 풀고 변명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니 이딴 걸 황제로 만들어 보겠다고 발버둥친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샤를롯트 황녀가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럽다. “캐슬락 공작부인도 마찬가지고 엘리제 백작부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캠프에 모인 어중이떠중이들 보다 그녀들은 더 가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 그렇지만… 그렇다면 꼬투리를 잡아서….” “그녀들도 바보는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 이번 일을 정식으로 항의할 거고 샤를리아 님은 또 폐하에게 징계를 받을 겁니다. 아무리 황가의 자손이라고 한들, 제국에 헌신하는 귀족을 이런 식으로 대우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이쪽으로 합류하느냐 아니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아예 황녀님에게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 지금까지 잘해왔으니 어떻게든….” “지금까지 한 게 있어야 수습할 수 있지요. 쉽게 쌓아올린 것은 쉽게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황녀님은 뭔가 대단한 걸 이룬 것이 아닙니다. 고작 출발선에서 막 발을 떼려고 시작하는 타이밍이었고 앞으로 계속 쌓아올릴 수 있는 탑을 스스로 무너뜨린 겁니다. 이번 일은….” “제, 제가 괜찮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네?” “분, 분명히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황제가 되면 전, 전부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빼액 소리를 지르는 꼴이 가관이다. 본인도 깜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더 이상의 잔소리는 듣기 싫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 황당하다 못해 실소가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 277 회귀자 사용설명서 277화 원하지 않은 설계(1) 용 숨결 물약을 던져버리는 상상을 자꾸만 하게 되지만 그렇게까지 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주제를 모르는 샤를리아는 잠깐 동안 벙어리가 된 내 모습에 더욱더 용기를 얻었는지 다시 한번 말을 이어오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근거도, 논리도 없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이었다. “소, 소리를 질러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괜히 그런 말씀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이기영 님. 문제가 얼마나 크든 전부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네?” “지금까지는 가진 바 세력이 없어 조용히 몸을 움츠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제 이름 아래 모여 있는 귀족들을 보세요. 샤를롯트와 비교해도 절대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게 뭔 개똥같은 소리야.’ “정당하고 정통성 있는 핏줄의 아래에 모인 분들입니다. 저와 뜻을 같이해 주실 분들이지요.” ‘그거 아니야….’ “아, 아버님께서도 저를 다시 봤을 겁니다. 제가 황제가 된다면 모든 게 다 해결됩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아마 조만간 누가 정말로 황위를 이어받을 사람인지에 대해 깨닫게 되실 겁니다. 분명히 올 겁니다. 이기영 님, 그때가 오면….” “네?” “이기영 님을 제국의 재상에 앉힐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그딴 거 필요하다고 한 적도 없어.’ 대단한 선물이라도 준비한 것인 양 말하는 표정이 우습다. 마치 ‘깜짝 놀랐지? 내가 너를 준비한 선물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당연하지만 지금 상황은 무슨 이야기가 나오던 현실성이 없다. 후계자로 선택을 받은 이후에 저런 소리를 해도 아직 흥분할 때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공 들여 쌓은 모래성을 발로 뭉개버린 직후에 저런 소리를 하니 믿음이 가는 게 이상하다. ‘이건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슬그머니 태세전환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은 당연지사. 장담컨대 충무공 정도의 충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선회를 생각해 봄직한 타이밍이었다. 샤를리아의 배는 이미 가라앉고 있다. 그 위에 올라타 있는 내가 누구보다도 그걸 잘 느끼고 있다. 어떻게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불가능하다. 줄타기 외길 인생을 걸어왔던 내 감각이 이토록 비명을 지르기는 처음. 내가 아무리 설득하고 난리를 친다고 해도 샤를리아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빨리 빠져나와야 해.’ 물론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 반대로 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제 대놓고 같이 행동하는 건 그만둡시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대충대충 수긍하며 살길을 찾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지사. 온갖 욕을 하고 있는 속과는 다르게 겉으로는 평소와 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그렇군요.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계실 줄은….” “네. 계속해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명예주교님.” “물론, 지금까지처럼은 해드리겠지만… 오늘 같은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나면 곤란합니다.” “네. 제, 제가 조금 성급했다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마를린 그 정신 나간 계집이….” “네. 네.” 무슨 말을 하든지 일단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더 이상 그녀에게 목을 매고 있다가는 이쪽이 화병으로 먼저 쓰러지게 생겼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내 기분이 풀린 줄 아는 모양인지 열심히 수다를 떠는 모습은 가관. 이것저것 조잘대면서 함박웃음을 짓고는 있었지만 어차피 며칠 동안은 보지 못하리라. 카트린 공작부인과 엘리제 백작부인 그리고 캐슬락 백작이 황제에게 정식으로 항의하기 시작한다면 황제의 입장에서도 그녀에게 벌을 내릴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모든 게 자기 생각대로 될 것 같겠지만 채 삼일도 지나지 않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제대로 깨닫게 되리라. 물론 내 예상이 빗나가는 일은 없었다. 분노한 캐슬락 백작이 다음날 아침이 되기도 전에 곧바로 황성 문을 두드렸고 황제와의 대담에 들어가 몇 시간 동안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하위 귀족을 건드린 것이 아니라 그동안 황가를 위해 열심히 싸워준 캐슬락 백작이었기 때문에 황제로서도 무시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하위 귀족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안 그래도 황권의 강화를 위해 제국 8좌라는 걸 만들어 놓고 쇼까지 해야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는 황제인 만큼 캐슬락 백작의 항의를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 무슨 이야기인지 듣진 못했지만 결국 황제는 샤를리아를 방 안에 구금하도록 명했다. 물론 적폐 연합 쪽에서도 마를린 영애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한다거나 하는 쇼맨십을 취하기는 했지만 이 좋은 기회를 샤를롯트가 두고 보고 있을 리가 만무.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여론을 흔들어대며 정통성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몸소 증명했다. 적폐 연합 최후의 저항 때문인지 샤를리아 황녀는 구금 기간 동안 최소한의 사람들과 만남을 가지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는데, 그중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녀가 직접 이쪽의 이름을 거론한 것이다. 카트린 공작부인을 포함한 동부 귀족에게는 샤를리아 쪽과 거리를 둬야겠다고 넌지시 밝힌 타이밍이기도 했기 때문에 내 입장이 조금 더 난처해졌다. 다른 이들과는 거리를 둬도 상관없지만 그녀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인맥 중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잘해준 덕분인지 처음 말했던 대로 이쪽의 정치적 입장을 이해해 주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내가 그녀들이었더라도 나를 좋게 보기만은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며칠 만에 분위기가 급변했고 다시 또 며칠 만에 분위기가 바뀌어 버렸다. 잘 오르고 있었던 주식이 갑자기 폭락해 버린 셈.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그 캐슬락 백작의 마를린 영애가….” “아. 물론 들었습니다. 샤를리아 황녀가 펄펄 끓는 차를 그대로 영애의 얼굴에 뿌려 버렸다고…. 소문이 사실인가요?” “네. 제가 명예주교님이 마를린 영애를 안고 뛰어가는 모습을 우연히 봤답니다. 창문 너머로 보여 자세히 보이지가 않아서 처음에는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 뭐예요?”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마침 자리에 있으셨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시력을 잃을 뻔했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도….” “상상하기 어렵네요. 캐슬락 백작이 많이 심란하시겠어요.” 귀족부인들은 밤이고 낮이고 이번 일에 대해서 떠들어 댔고 주류에 있는 귀족 남성들도 사건에 대해 자신의 의견들을 주고받았다. “쯧. 아무리 황가의 핏줄이라고는 해도 어떻게 지금까지 황가를 위해 묵묵히 캐슬락을 지켜온 백작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제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언가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지….” “설사 마를린 영애의 태도가 불손했다고는 하더라도 어떻게 펄펄 끓는 차를 그대로…. 사실 저희끼리라 하는 이야기지만 샤를리아 전하의 시녀들의 꼴이 말이 아닙니다. 평소 행실이 어떠실지 눈에 보입니다. 제국민이 있어야 제국이 있는 것인데… 어찌 그렇게 아랫사람들에게 막대하실 수 있는지….” “황제 폐하께서도 많이 심란하실 겁니다.” “실제로 어젯밤에는 잘 드시지도 않던 와인을 드셨다고 했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실지…. 제1황녀님이 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차라리 기대를 하지 않았으면 더 좋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심지어는 나만 믿고 움직이고 있던 제국 8좌들까지 문의를 해올 정도였으니 내 입장이 어떨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혹시나 해서 하는 이야긴데… 이거 괜찮은 거 맞죠? 대충 봐도 분위기 안 좋아 보이는데…. 혹시나 한 발 빼더라도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주세요. 차희라 님에게는 잘 설명해 주실 거라고 믿을게요. 아, 물론 지금 발을 뺀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안심해 주시고요.” “혹시라도 다른 계획이나 무언가 저희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다완의 위란과 천관위가 저런 식으로 말해와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는 거다. 이쪽이 힘들어 하는 와중에 김현성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신경이 거슬리는 이유 중 하나였다. 사랑스러운 우리 회귀자는 나에게 모든 일을 맡겨버리고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니기 시작했는데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그 종적을 찾기 힘들었다. 처음 기반을 다질 때는 이것저것 지원해 주었지만 뭔가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일이라도 벌어진 모양인 것 같았다. 차희라 같은 경우에는 실패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중. 확실히 정치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이들은 이 건이 실패해도 그다지 타격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만에 하나 샤를롯트가 무난하게 황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에게 직접적으로 피해가 오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물리적으로 어떤 해를 입는 게 아니라는 거다. 반역죄로 목이 달아나지도 않을 것이고 감옥에서 평생을 썩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나 같은 경우에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줄을 한 번 잘못 탔다는 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적 기반을 잃어버린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미 이쪽을 적이라고 인식한 샤를롯트는 내 팔다리를 잘라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고 나는 다시 한번 긴 싸움을 시작해야 될 것이다. 그 누구라도 그런 지옥 같은 상황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목숨만 부지하면 됐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 갈 땐 가더라도 하나라도 더 챙겨가야만 했다. ‘독한 년.’ 물론 상황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다시금 샤를롯트에게 접선해 보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있는 제2황녀는 이쪽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대놓고 적대하며 뒤통수를 노릴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2황녀 캠프에 있는 귀족은 이쪽에 경고의 말을 전해오기도 했다. ‘원래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안 되지만… 이기영 명예주교님을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당분간은 조용히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내부에서 무언가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귀족들과의 커넥션은 점점 끊겨가고 있었고 남은 것은 처음에 친분을 나눴던 이들이 전부. 당연히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얻기는 힘들었다. 물론 제국 8좌를 보고 움직이고 싶어 하는 세력은 있었지만 그 마저도 조심스러우니 대놓고 세력을 형성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비빌 수 있는 곳이라고는 오늘내일 하고 있는 황제밖에 없었다는 것. 정말로 엘릭서라도 개발해야 되나 같은 생각을 하며 황제의 방으로 출근을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황제 폐하.’ 잠깐 동안 샤를리아에게 향했던 충심이 다시 한번 황제에게로 옮겨졌다. 가장 중요한 일은 이 모든 사건이 가라앉고 내가 기반을 다시금 다질 때까지 황제가 건강해야 한다는 것. 황제의 시녀가 이쪽에 인사를 해오니 안쪽에서부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최근에 자주 봐왔던 얼굴이었건만 어제보다 더 힘들어 하는 얼굴이 눈에 보였다. 그렇게 술을 퍼마시니 건강에 무리가 오는 것이 당연. 제1황녀의 미친 행동이 오늘 내일 하는 황제의 하늘나라 편도 티켓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 내가 자신감 있게 비빌 수 있는 유일한 구석인 만큼 황제의 존재는 내게 소중하다. 솔직히 최근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 하고 있었다. “오오… 왔구만.” “황제 폐하, 몸은 괜찮으십니까.” “나야 항상 그대로지…. 괜찮네….” “하루라도 빨리 건강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하하하… 나야 항상 건강하네… 그보다 이기영 명예주교.” “네… 폐하.” “오늘은… 샤를리아를 만나고 온 겐가?” 자신이 싸놓은 똥을 이쪽으로 패스하려는 낌새가 느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 278 회귀자 사용설명서 278화 원하지 않은 설계(2) 제국에서 제1황녀의 존재는 골칫덩이다. 황제도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제1황녀에게 과중한 업무나 무리한 일을 시키는 것을 자제해 왔다. 혹시라도 그녀가 어디서 사고라도 칠까 염려했던 탓이다. ‘그뿐만이 아니지.’ 아버지로서도 그녀가 걱정되는 것이 당연. 만약 내가 황제였어도 제1황녀를 저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황제의 비호가 있어 괜찮지만 만약 이 영감이 베니고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간 이후를 생각해 본다면 이후 어떻게 될지는 무척이나 뻔하다. 아마 무난하게 제2황녀가 황위에 오를 것이고 1황녀는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 같은 사고를 친다면 단순 징계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그게 불안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야.’ 이 늙은이도 양심이라는 걸 가지고 있다면 절대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따라 유독 진지한 표정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생각하고 있는 게 나와 같지는 않을 거다. 그렇지만 내 행복회로와는 다르게 평소와 다른 분위기와 다른 말투는 눈앞에 있는 이 늙은이가 무엇인가를 노리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듯했다. ‘아니겠지.’ 지옥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제안을 해오지는 않을 것이다. 촉이 자꾸만 경고를 울리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문제. 이 영감탱이의 입에서 그 대사가 튀어나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에 잠깐 뵈었습니다.” “그래… 상태는….” “심리적으로 조금 불안하신 것 같기는 했지만… 자신의 잘못을 통감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지만….” 더 이상의 샤를리아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황제 폐하, 어제도 약주를 하셨다고 들었사온데….” “그랬지. 안 그래도 오늘 이기영 명예주교를 부른 이유도 함께 잔을 부딪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야. 오늘은 긴히 할 이야기도 있고….” “건강에 좋지 않사옵니다, 폐하.” “허허허. 명예주교는 정말로 나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아. 다른 충신들과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그대가 하는 말은 조금 다르게 들려오니… 그것 참 신기하지.” “폐하께서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누군들 다르겠습니까. 아마 폐하께서 그렇게 느끼시는 이유는 황제 폐하께서 저를 더 신뢰해 주시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내가 이기영 명예주교를 신뢰하고 있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하하. 황제 폐하의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면 분골쇄신 노력해야겠습니다.”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려고 해도 오늘따라 약을 먹었는지 쉽사리 넘어오지 않는다. 이미 마음을 다잡은 것 같은 모습. 그 동안 뭔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황제가 보여주는 행동이 더욱더 당황스럽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 수도 있어.’ 어쩌면 단순한 뇌내망상일지도 모른다. 황제에게 다른 골칫거리가 있고 어쩌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올지도 모른다. 샤를리아가 아무리 문제아라고 한들, 나는 제국민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이방인이니까. 어떻게 생각해도 많은 애로사항이 꽃피는 상황이라는 거다. 황제가 조용히 손을 들자 시녀 몇몇이 튀어나와 잔에 와인을 따르기 시작. 이렇게 둘이 함께 와인을 마실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크나큰 영광이건만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불안감에 말을 돌리고 또 돌려봤지만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이 말만은 해야겠다며 돌진해 오는 황제를 막을 수 있을 리가 만무. 결국에 황제는 자신의 속 안에 있는 말을 끄집어냈고, 나는 예상이 맞았다는 사실에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이기영 명예주교는 샤를리아를 어떻게 생각하나?” ‘이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이런 질문을 해올 수가 없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을 잠깐 동안 하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슬그머니 주제를 바꾸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훌륭한 점도 갖추신 분이옵니다. 화를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정을 가지고 계시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계획하고 있는 일을 밀어붙이시는 걸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결단이 있고 추진력이 있으시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책임을 지시는….” “아니. 내 질문의 뜻은 그게 아니라네. 이기영 명예주교.” “위대하신 황제 폐하. 죄송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정확히 어떤 뜻으로 그, 그… 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혹여나 1황녀 전하가 또 어떤 결례를 저질렀는지요.” “아닐세. 그런 뜻으로 이야기 한 게 아니야. 조금 더 명확히 묻는 것이 좋겠군. 나는 지금 이기영 명예주교가… 내 딸 샤를리아를 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어본 것이네.” 눈앞에 있는 이 황제는 사이코패스가 맞다. “어, 어떤 뜻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지….” “말… 그대로의 의미일세.” ‘제기랄.’ 여자로서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기회만 주어진다면 용숨결 물약을 던져 버리고 싶다’라는 말이 입 끝에 맴돌았지만 그런 대사를 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를 지옥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황제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 ‘네 똥은 네가 치워야지… 그걸 내가 왜 치워.’ 일단은 칭찬부터 시작해서 거절의 뜻을 밝히는 것이 옳다. “어떻게 말씀을 올려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샤, 샤를리아 전하의 그 미모는 마치 보석처럼 아름다우십니다. 낭랑한 목소리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목소리라 해도 부족함이 없으시고… 그 고귀한 핏줄이 빛이 바라지 않게 항상 그 기품을 유지하고 계시니… 어디에서 온 줄 모르는 이방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분이시지요.” 나쁘게 않게 마무리를 지었다고 생각했건만, 이 사이코패스에게는 내가 뒤에 전한 말은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허허허. 그렇지. 그 아이가 성격이 모난 구석이 있어도 자기 어미를 꼭 빼닮았는지 보석처럼 아름답다는 명예주교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닐세. 사실 어렸을 때에는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뽑힐 정도였으니 그 미모가 어디 가겠는가.” “아… 네….” “한참 때는 이곳저곳에서 혼담이 들어오기는 했었다네. 아암….” “그렇군요.” “내 이기심 때문에 샤를리아를 잡아두고 있었지만 이제는 떠나보낼 때가 된 게야.” “아… 예….” 그 한참동안 여기저기에서 들어오던 혼담이 어째서 뚝 하고 끊겼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기본적으로 황제나 샤를리아의 마음에 차는 이들이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장담컨대 모두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고 거리를 벌린 것이리라. 황실의 제1황녀와 연을 맺게 돼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그녀와 함께 해서 잃어버릴게 더 많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 역시 같다. ‘얻긴 뭘 얻을 수 있겠어.’ 제2황녀와 제1황녀의 사이는 물과 기름이다. 황실의 일원이고 나발이고 하기 전에 제1황녀와 연관된다는 건 제2황녀를 적으로 돌린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미 나는 그녀의 적이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샤를롯트를 감당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실망도 크고 여러 가지 생각도 많았지.” “네….” “여러 가지 들려온 이야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샤를리아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이번 일을 겪고 난 이후에 다시 한번 깨달았네. 그 아이에게 누군가를 다스리는 자리는 어울리지 않아.” “꼭 그렇지만은….” “죽기 전에 그 아이가 가정을 이루는 것을 꼭 보고 싶네. 이기영 명예주교.” “그, 그렇게 할 수 있으실 겁니다.” “아암. 그렇게 되어야지. 그래야 내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철부지를 그냥 두고 떠나가기에는….” “그, 그런 말씀은 삼가 주시옵소서. 폐하께서는 건강히 오랫동안 제국의 통치자로 남을 것입니다.” “허허허. 고맙군. 이기영 명예주교, 자네는 알고 있었지?” “…….” “누가 봐도 알고 있겠지만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아. 혹여나 내가 떠난 뒤에 둘째가 제 언니에게 몹쓸 짓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라네. 나도 그렇고 내 아버지인 선대 폐하께서도 그런 과정을 겪었어. 샤를롯트는 영특하지만 필요한 일에 손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지. 아마 제 언니에게도 똑같을 게야.” ‘슈바….’ “샤를리아. 그 망나니도 내 딸일세. 나는 우리 첫째가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해. 자신이 좋아하고 잘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 아이도 욕심을 버리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 모르겠습니다. 폐하.” “허허허. 자네는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부분에서는 둔하군.” “송구스럽습니다.” “어째서 그 아이가 마를린 영애에게 몹쓸 짓을 했는지 들었네. 나도 그 아이에게 구금을 내리는 과정에서 언성을 높였지. 눈치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가 자네를 많이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나마 그 동안 얌전했던 것도 모두 자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였던 것 같고.” “…….” “그 아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네도 샤를리아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씨발.’ 당연하지만 그런 티를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무래도 이 미친 여자가 되는 대로 개소리를 지껄인 모양.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나도 여러 가지 방향을 생각해 보기는 했지만 많은 고민 끝에 이게 제일 좋은 선택지라 확신할 수 있었지. 아암. 그렇고말고.” “폐하….” “샤를리아를 데려가 주게.” ‘이 나쁜 새끼!’ 뭔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황제가 결론을 말해버렸다.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 저런 결론에 다다른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만 솔직히 도망쳐야겠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전력질주로 황성을 벗어나리라. “북쪽에 남아 있는 영지가 있다네. 좋은 곳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한적하고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이지.” 나도 알고 있다. 어마어마하게 춥고 뭐 먹을 수 있는 게 없는 곳이다. 제국 내에 있는 북부 영지는 대부분이 그런 식이다. “이방인에게 영지를 내린다는 데에 귀족들의 반발은 있겠지만 자네라면 아마 그들도 대충 수긍할 게 분명하겠지. 샤를리아와 함께 그곳으로 가 유유자적 인생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게야. 샤를롯트도 변방에 있는 언니에게까지 손을 쓰지는 않을 거고 애초에 이기영 명예주교가 그 아이를 들여 준다면 아마 다른 이방인들의 눈치가 보여서라도 무리한 짓은 하지 않겠지.” “그… 게… 그러니까.” “이방인이라는 걸 신경 쓰지 말게. 자네들도 이미 제국민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교황청의 명예주교이자 제국 8좌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자네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어. 그 무엇보다 내가 이렇게 명예주교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지 않나. 당장 눈앞에 있는 신분의 격차는 무시해도 돼. 아암. 그렇고말고.” ‘신분의 격차는 개뿔….’ “허허허. 물론 좋은 사위를 얻고 싶은 내 욕심도 조금은 들어가 있다는 걸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네. 이기영 명예주교.” 심지어는 내가 이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는 모양. 아무 죄책감 없이 사람을 지옥의 불구덩이로 집어넣으려고 하는 황제의 얼굴을 보자 저도 모르게 안면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 279 회귀자 사용설명서 279화 원하지 않은 설계(3) 황실의 세 명이 작정하고 차례대로 나를 돌아버리게 하려는 듯한 느낌. 이 자식도 갑작스럽게 미워지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나에게 이런 시련을 내려준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도 슬그머니 원망스러워진다. 황제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속으로는 이미 제2황녀를 황제로 내정하고 있는 것 같았던 느낌. 물론 제1황녀에게도 희망이 없었던 건 아니었겠지만, 아마도 이번 사건이 결정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앞서 말한 대로 최소한 제1황녀를 안전하게 생활하게 하겠다는 생각일 터. 문제는 저 늙은 사이코패스의 계획이 나의 희생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생각이 있으면 그딴 거랑 살림 차리고 싶겠냐고.’ 내가 저걸 받아들이는 순간 최소 몇 명은 목이 날아갈 거다. 요즘 얌전히 있어주는 정하얀을 말리는 것도 일이고 차희라 역시 불편해할 가능성이 크다. 장담컨대 내가 제1황녀와 함께 북부에 살림을 차린다면 그 다음날 제1황녀는 싸늘한 시체로 발견될 것이리라. 그 책임이 누구한테 갈지에 대한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아니, 애초에 그녀와 함께 북부로 간다는 것은 중심 권력과 멀어진다는 소리와 다름이 없다. 외곽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여생을 마무리하는 그림이 나쁘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눈앞에 있는 황금을 두고 떠나갈 생각은 없다. ‘무조건 거절해야 해.’ 당연하지만 이건 무조건 거절해야 하는 이야기다. 나는 젊은 나이에 보트를 타고 싶지 않다. “폐하.” “허허허.” “그…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아시다시피 제가 지금….” “아아아. 매번 함께 다니는 마법사 수행원과 붉은용병의 용병여왕은 용인할 수 있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미 만남을 가지고 있는 이들까지 만나지 말라는 건 너무 과한 처사지. 허허허. 샤를리아 그 아이가 질투가 워낙 심해서 아마 이기영 명예주교가 고생 좀 할 것이야. 아암. 아마 그렇게 되겠지.” ‘웃으면서 할 이야기가 아니야….’ 저딴 소리를 저렇게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눈앞에 있는 늙은이가 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든 모양이다. 그 박덕구도 이 정도의 설계를 준비하지는 않으리라. 대놓고 나를 엿 먹이려는 그림에 정신이 멍해진 것은 당연지사. 황제의 기분이고 나발이고 생각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한 번…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폐하.” “그렇지. 중요한 문제니 이기영 명예주교에게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지. 이해할 수 있네.” “아무리 생각해도 저에게는 부담스러운 제안이고 이야기라… 물론 황제 폐하의 제안은 감사하지만, 솔직히 제가 샤를리아 황녀전하에게 어울리는 사람인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겸손도 지나치면 독이 되는 걸세. 허허허. 이기영 명예주교는 부족한 것이 없네. 아암. 그렇고말고. 그 누가 우리 사위를 부족하다고 하겠나. 한번 잘 생각해 보게. 물론 시기상조인 만큼 오늘 우리끼리 나눈 대화는 다른 이들이….” “네. 아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시간이 많이 늦었구만. 이만 들어가 보게나. 아 그리고…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대답은 최대한 빨리 해주는 것으로 해줬으면 좋겠군.” “네. 위대하신 황제 폐하. 심사숙고 후에 대답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암. 그래야지.”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폐하.” “그래. 들어가 보게, 이기영 명예주교.” ‘제기랄.’ 황제에게서 등을 돌리자마자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무래도 이 황실 집단은 나를 귀찮게 하는 것으로 모자라 내 인생을 박살 내려고 모의라도 하는 모양. 지금까지 머리가 아픈 상황을 몇 번이나 겪어 왔지만 그중에서도 황제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어떻게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시 제2황녀에게 달라붙어 그녀를 황제로 만들든, 그도 아니라면 내 몸을 위탁할 제3세력을 찾아보든 교황청을 대놓고 황실로 끌어들이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리라. 애초에 김현성이 제2황녀를 황제로 만들면 안 된다고 한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만큼 움직임이 제한적인 게 골치 아팠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녀석의 주문이 너무 과했다는 거다. 내 능력을 높게 사주는 것은 고맙지만 미치광이 1황녀를 황제로 만드는 것은 무슨 개짓거리를 해도 불가능한 이야기다. 샤를롯트를 완전히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면 안 된다는 제한까지 붙어있으니 포와 차를 떼고 장기를 두는 듯한 느낌이다. 샤를리아라는 거대한 짐을 들고 싸우기에는 상대가 만만치 않다. ‘스트레스 받아.’ 가만히 있어도 짜증이 치솟는 상황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리라. 자연스럽게 회귀자를 찾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일단 방 안에서 한 번은 들려야 했기 때문에 빠르게 걸어 들어가 문을 열자, 뭔가 이상한 자세로 쇼파에 누워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어처구니없게도 얼굴에 내가 벗어놓은 겉옷을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무슨 일을 하려고 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얀이야?” “오, 오… 오빠? 오… 오셨어요?” “응. 오랜만인 것 같은데….” “네… 네.” 당황스럽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자 얼굴을 감싸고 있던 겉옷을 황급히 옆으로 쑤셔 넣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답지 않게 무척이나 민망해하는 표정. 정하얀을 위해서라도 서둘러 화재를 바꾸는 편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에 적당한 주제를 잡아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린델은 여전하지?” “네. 그… 연구도 성과를 내고 있고요. 또… 덕구 오빠로 잘 지내고 또… 새로 들어온 한소라랑… 유아영이랑… 그… 안기모 씨, 창렬 씨 모두 다 희귀 등급의 던전을 공략완료했대요.” “그거 다행이네. 아, 밀린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자. 지금은 볼 일이 있어서. 혹시 현성 씨는….” “오늘은 늦게 들어오시는 것 같았어요. 요, 요즘 현성 씨도 많이 바쁘신 것 같아요. 혜진 씨가 그러는데… 최근에는 혜진 씨도 현성 씨 얼굴을 보기 힘들다고 하시더라고요.” “혜진 씨는 지금 방에 있나?” “네. 같이 밥 먹고 들어갔으니까요.” “괜찮으면 불러다 줄 수 있을까?” “무, 물론이죠!” 김현성이 자리를 비웠다면 그 부관인 조혜진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정하얀은 후다닥 밖으로 나갔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조혜진과 함께 그 모습을 드러냈다. 린델에 볼일이 많은 정하얀도 오랜만이기는 했지만 멀지 않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조혜진의 모습은 그보다 더 오랜만이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쁘게 움직였는지는 말해주는 것 같아 괜스레 입맛이 씁쓸해졌다. 나와 조혜진을 이 방에 둘만 두고 갈 생각이 없는지 정하얀은 한쪽에 은근슬쩍 자리를 잡았고 조혜진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이쪽에 꾸벅 인사를 한 뒤에 테이블 앞에 앉았다. 뭔가 마음고생이 많았는지 얼굴이 안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입니다, 혜진 씨.” “네. 오랜만입니다. 부길드 마스터.” “최근에는 현성 씨와 함께 움직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냥 던져본 말에 조혜진의 표정이 무척 어두워졌다. 아마도 이게 마음고생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분명히 수행원으로 수도에 함께 왔건만 녀석이 혼자만 싸돌아다니고 있으니 책임감 강한 그녀가 자괴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이쪽의 예상이 맞았는지 조혜진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네. 그렇습니다. 길드 마스터께서 요즘 조금 개인적인 업무에 집중하시고 있는 듯해서….” “그렇군요.” “네. 그러고 보니 길드 마스터께서 기영 씨께 전해달라고 한 전언이 있었습니다.” ‘역시나.’ “바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 힘들겠지만 부탁한다고…. 이번 일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돌아와 합류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할 말이 없어진 것은 당연지사. 뭔가 솔루션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염없이 기다리라는 말에는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이 나쁜 새끼.’ 물론 아직 황제가 죽거나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도 건강이 악화된 것은 아니다. 김현성이 황제가 언제 하늘나라로 가는지 대충 알고 있다면 이 싸움을 조금 길게 보고 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기영이라는 인간의 정치적 입지가 갉아 먹히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가만히 있을 여유가 없다. 겁이 많은 이쪽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일어날 일에 대비하고 변수를 생각해 놓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안 그래도 황제의 말에 궁지에 몰린 타이밍. 제2황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순간 나를 포함한 제1황녀의 적폐세력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어쩌면 샤를롯트가 대놓고 1황녀와 이쪽의 만남을 추진할지도 모른다. 보기 싫은 두 사람을 동시에 유배 보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비춰질 테니 내가 샤를롯트였더라도 우리 두 사람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싶을 것이다. 아까보다 조금 더 스트레스를 받게 된 것은 당연지사. 내가 느끼기에도 목소리에서 은근슬쩍 짜증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실례지만 현성 씨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아예 모르고 계시는 겁니까?” “네. 저 역시 지금 무슨 일을 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네.” “뭔가… 사람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이요?” “예. 사람입니다. 길드 마스터 역시 자신이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특이하게도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이라도 가면무도회 같은 사교 파티에는 꼭 참석 하셨는데…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듯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아….” “혹시나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싶어 제안을 해봤지만 고개를 저으시더군요. 혼자 움직이는 게 더 편할 것 같다고 말씀하신 뒤에는….” “혜진 씨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으로 다니기 시작했군요.” “네. 그렇습니다. 제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조금 더 힘이 될 수 있는 수행원이 됐어야 했는데….” “아뇨. 아뇨. 혜진 씨 잘못이 아니니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따로 뭔가를 위해 하고 계시는 일이 있을 겁니다. 네. 분명히요.” ‘중요한 일인 건가.’ 녀석이 놀고만 있지 않으리라는 것은 애초에 이쪽도 알고 있었다.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해놓고도 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김현성에게는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일이 급하게 느껴지는 모양. 가면무도회는 왜 나가는 건지, 사람은 또 뭔 사람을 찾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장담컨대 앞으로의 미래에 굉장히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해해야 돼.’ 이해해야 된다. 그게 맞다. 내 입지가 좁아지는 것은 짜증나고 열이 오르지만 지금 김현성이 하고 있는 일은 겨우 정치적 입지를 챙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일 가능성이 크다. ‘이쪽은 아직 시간도 많아. 그래. 이해하는 게 맞아.’ 앞서 말했던 대로 황제의 건강은 정상이다. 녀석도 뭐가 중요하고 뭐가 더 중요하지 않은지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지금 당장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더 급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 그래야지. 더 중요한 일부터 해결해야지.’ 그렇지만 점점 입술이 삐죽 튀어나오기 시작. 녀석도 힘든 것은 당연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너무 이쪽을 내팽개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이 집안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싸돌아다니는데 집안이 잘 돌아갈 리가 없다. 안사람은 당장 너무 힘들어 허리와 어깨를 두드리고 있는데 호강시켜 주겠다며 밖으로 싸돌아다니는 바깥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위로와 따뜻한 말 한마디건만 바깥 놈은 뛰어다니기에 여념이 없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그런 장면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씨….’ 고개가 끄덕일 만하건만 괜스레 마음속으로는 짜증이 치솟아 오르는 상황이라는 거다.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왠지 모르게 이 분한 느낌은 지워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쪽을 아예 버려두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게 더 중요하다 이거지. 그래 그렇다 이거지.’ 황실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김현성에게도 섭섭해지기 시작. ‘다 뒤집어 버릴까….’ 제2황녀가 황제가 되면 안 되는 조건. 그것만 맞춘다면 일이 어떻게 되더라고 별로 상관없을 것이다. 재기하지 못할 정도만 아니면 된다고 했으니 다소 거친 방법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그래… 뒤집자.’ 슬슬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 280 회귀자 사용설명서 280화 원하지 않은 설계(4) ‘샤를롯트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위로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니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합리화하는 걸로 끝낼 문제가 아닙니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봤어야 했습니다. 그래요. 그랬어야 했습니다.’ ‘제국민을 위해 내리신 결단이었습니다.’ ‘그 제국민을 위해 다른 무고한 제국민을 제 손으로 죽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더 많은 이들이 죽었을 겁니다. 제국을 지키는 기사와 병사들도, 그리고 폐하만 바라보고 있는 많은 선량한 이들 역시 모두 죽어갔을 겁니다. 그 역병은….’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증상이 일어나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는 것도, 대기로 오염되어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것도, 오염된 땅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백작, 그들은 아직 언데드가 아니었습니다. 틀림없이 인간이었어요. 고통에 찬 그들의 비명은 언데드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아이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아니, 똑똑히 들립니다.’ ‘무슨….’ ‘그들이 제게 말을 걸어오는 게 들립니다. 이 우둔한 황제에게 배신당해 죽어간 제국민들이 저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많이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폐하.’ ‘아니요. 아닙니다. 저는 틀림없이 정상입니다.’ ‘폐하….’ ‘아주 어렸을 때….’ ‘네.’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직 돌아가시기 전이셨을 때 해주신 말이 기억이 납니다.’ ‘…….’ ‘모나지 말라고 하셨지요. 조용히, 쥐 죽은 듯이 평범한 생활하며 순간순간을 즐기라고 하셨습니다. 황실과 떨어져 중심이 아닌 바깥에서 평화롭게, 남들처럼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실 때 역시 비슷한 말을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에 저는 많이 어렸지요.’ ‘폐하….’ ‘어머니가 이곳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모두 보고 있었습니다. 제국에서 특권 계층이 아닌, 힘없는 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그 누구보다 제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국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네. 그래서 황제가 되고 싶었어요. 언니를 제 손으로 내치고 아버지의 기대를 배신하고 심지어는 손에 많은 피를 묻혔습니다. 교황청과 싸우고, 백작 같은 이방인들과도 싸워왔습니다. 그렇게 이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지요.’ ‘…….’ ‘그렇게 이 자리에 오르고 나니 결국 저 역시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뇨. 처음부터 저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아등바등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시 한번 피를 묻혔고 그렇게 몇 년을 살아왔습니다. 권력을 잃어버리는 게 무서워 그렇게… 살았습니다. 제국민을 위한 제국을 만들겠다는 다짐은 피로와 부담감에 짓눌렸고 제 어렸을 적의 꿈은 현실에 점점 마모됐습니다. 문득 거울을 봤을 때는 제가 그렇게 증오해 마지않는 언니의 얼굴이 비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이 자리는 저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는 왕관의 무게를 버틸 수 없는 사람이고 죄를 씻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힘이 듭니다. 그래요…. 너무나도 힘이 들어요. 언니의 예전에 말했던 대로… 결국에 비천한 핏줄은 이 무게를 견딜 수 없나 봅니다.’ ‘폐하….’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태어난다면 어머니의 말대로 살아보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남들처럼. 남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웃고 떠들고 많은 아이를 가지고 가정을 꾸리고… 그렇게 살아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실 겁니다.’ ‘하핫. 물론 결혼이란 것을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만약 백작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그런 삶을 살아도 무척 행복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잡담은 여기까지 합시다. 다시 몸을 일으켜야죠.’ ‘몸을 편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굳이 나설 필요도 없으십니다.’ ‘괜찮습니다. 어서 빨리 남은 일을 마무리해야지요. 제국민을 불에 태워 제국을 지켜야지요.’ ‘샤를롯트 님.’ ‘오늘도… 내일도… 또 그 다음날도 제국민을 죽여 제국을…. 그렇게 제국을…. 하… 하하핫. 그렇게 지켜야지요.’ 잠깐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슬쩍 바닥에 있는 모래를 움켜쥐었다. 분명히 이 장소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샤를롯트와 대화를 나눴었고 이곳에서 죄 없는 제국민이 죽었다. 일반인들이 언데드로 변하는 역병이 퍼진 장소. 대륙 인구의 1/4를 죽여 버린 병이 창궐하게 된 첫 번째 지역이었다. 슬그머니 손을 펴자 쥐고 있던 모래가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눈앞에 있는 이들이 시선이 들어왔다. 너무 많은 시간을 감상에 젖어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어…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저를 알고 있군요.” “…….” “소문이 여기까지 닿은 모양이군요. 평범한 사람은 알아볼 수 없을 겁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어찌 저희 같은 사람들이 귀, 귀하신 분을 몰라뵐 수 있겠습니까. 그, 그보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 이십니까? 이 작은 마을에 혹시 어떤 일이라도 있으신 건지….” “조사를 나왔습니다. 제국에서 허락되지 않는 마법을 사용하는 결사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찾아 왔습니다만… 여러분들의 반응과 작금의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염려하고 있던 말이 사실이었던 것 같군요. 이런 지하에 이런 장소가 있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시, 실례지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잘 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비밀결사 살라단. 제국 내에 있는 흑마법사 연합. 창설된 지는 24년, 규모는 약 670여 명 정도로 제국 외곽 지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 창설 목적과 그 존재 의의는 클랜원들의 영생. 제 말이 틀렸습니까.” “도,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저희는 잘… 모, 모르겠습니다.” “일단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네?” “혹시 가면 쓴 남녀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무표정에 칙칙한 검정색 가면입니다. 가면은 마력으로 처리되어 있고 고위 마법사가 아니면 디스펠 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남자의 키는 평균 정도고 여자는 조금 작은 편에 속합니다. 서로를 단짝이라고 부르고 실제로도 매우 가까운 관계일 겁니다. 아, 그리고 남자 쪽은 여러분들과 같은 흑마법사입니다. 아마 이곳에 왔다면 바로 알아볼 수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살라딘에 가입된 클랜원일 수도 있겠군요.” “흑마법사?” “네. 흑마법사입니다. 본 적이 있으시다면 분명히….”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 그보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 하시는 건지… 저희들은 잘 모르겠습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군요.” “물론입니다. 살라딘이고 흑, 흑마법이고 저희는 아는 게 없사옵니다, 나리.” “아닙니다. 제가 한 말의 의미는 당신들이 가면을 쓴 이들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이 장소에 모이신 분들이 흑마법사라는 건 이미 확인했으니 굳이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살라딘의 흑마법사들을 만난 적 있습니다. 북부의 가르텔, 남부의 발라, 동부의 헤블, 이곳이 벌써 네 번째입니다.” “미… 미친….”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가면 쓴 남녀를 본 적이 없으시다면… 여러분들의 클랜 마스터는 어디에 있습니까?”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다시 한번 입을 떼려고 한 타이밍에 들려온 것은 캐스팅된 주문이 발현되는 소리. “주… 죽어!” 검은색과 녹색의 구체와 화살들이 들이닥친 것은 순식간. 몸을 숙이고 검을 휘두르자 다가오고 있던 커다란 구체가 반으로 쪼개졌다. ‘독.’ 흔치 않은 마법. 구체의 파편에서 나온 이물질이 옷에 튀자 치이익 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력으로 숨을 멈추고 발걸음을 놀리는 것은 순식간. 칼을 빼들고 달려드는 순간 거대한 덩치를 지닌 괴물이 소환진에서 올라와 이쪽을 덮쳤다. 언젠가 본 적이 있었던 하급 악마. 검에 마력을 집어넣고 휘두르는 것으로 녀석을 처리한 이후에는 눈앞에 있는 흑마법사의 팔을 날리고 저주를 외우고 있던 흑마법사의 몸통을 베었다. ‘악마 소환사가 하나, 사령술사가 하나.’ 사방에서 해골로 만들어진 병사들이 쏟아지지만 검을 크게 휘두르자 병사들이 허물어졌고 사령술사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지난번과 같다. ‘수준이 낮아.’ 이쪽이 너무 강해진 것은 아니다. 1회 차 때 봤던 이들의 모습과는 확실히 수준 차이가 있는 느낌. 당시에 대륙 전체를 공포로 몰고 간 살라딘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네임드 악마들을 소환하는 악마소환사도 없었고 기껏해야 하급 악마나 중급 악마가 전부. 애초에 4차 전직을 마친 이들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뭔가 계기가 있었던 건가.’ 몇 년 뒤 이들의 수장을 자처한 가면 쓴 남자가 무슨 수를 썼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아직 만나지 않은 거야.’ 정확히 언제부터 활동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시기는 아닌 모양. 황권다툼이 수면 위로 드러난 시점에서도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가 활동하는 것은 지금보다 좀 더 이후라는 이야기다. 애초에 지금 이 시기는 남자 쪽이 활동하고 있을 시기가 아니다. 처음부터 남자 쪽을 찾은 것도 아니었으니 별로 아쉽지는 않았지만…. 그렇지만 여자 쪽도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다는 건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가면 쓴 여자는 지금 이 시점에 분명히 황성 안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 물론 1회 차에서는 황성에 들락날락거릴 일이 없었지만, 언젠가 수도에 들어갔을 때 샤를롯트 캠프의 유력 귀족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본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숨어 있는 건가. 아니면 미래가 바뀐 건가. 만약 활동하고 있다면 굳이 모습을 숨길 이유가 없을 텐데….’ 제2황녀가 정치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 모종의 이유로 미래가 바뀐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가면 쓴 여자가 마검사 정진호를 비롯한 살인여단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것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정진호의 죽음 이후, 자리 잡을 곳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 이 추측이 맞다면 제2황녀를 궁지로 몰아가면 쓴 여자를 꾀어낸다는 건 애초에 성립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2회 차에 가면 쓴 여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튜토리얼 던전에서 정진호의 죽음이 만들어낸 긍정적인 나비효과라고 생각해도 되리라. 천천히 지하로 내려가자 살라딘의 연구 결과물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 알아볼 수 없는 것도 많았지만 이 연구물들을 기반으로 역병이 시작 됐다는 걸 생각해 보면 대륙에 존재해서는 안 될 물건. 예상했던 대로 아직 초기 단계인 듯했다. 손에서 마력을 일으키자 자그마한 불꽃이 튀어 올랐고 그들의 연구자료 위로 떨어진 불꽃은 어느새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에 타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는 제국민들과 절규하며 미쳐 버린 샤를롯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지만, 고개를 흔들어 나쁜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그녀의 목소리가 떠오르기 시작. ‘조용한 숲속에서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고 싶습니다. 힘이 들겠지만 시녀들이 없는 생활도 해보고 싶고요. 주점에서 들려오는 음유시인의 노래를 듣고 싶고. 네. 그렇게 살고 싶어요. 저는 당신을 조금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으니 제 감정이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어머니가 말씀하시던 감정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부디 행복하세요, 백작. 다음 생에서는 조금 더 평범한 사이로 마주칩시다. 서로 웃으며, 그렇게 마주칩시다.’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고는 곧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긴 지하를 올라온 이후에 시야에 비치는 것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마을. ‘어?’ 마을의 광장 한쪽에서 굉장히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야?’ 마법으로 어설프게 변장을 하기는 했지만 저 커다란 덩치를 숨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얼굴을 본 게 오래 된 파란의 원년 멤버. ‘덕구 씨?’ 린델에서도, 수도에서도 멀리 떨어진 대륙의 외곽에서 어떻게 박덕구가 이곳에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마 기영 씨가 무언가 심부름을 시킨 것이 틀림없으리라. 지금쯤 한참 여론을 진정시키기에 여념이 없을 테니까. ‘무슨 일이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곽 쪽에 저들이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지령을 받았다는 이야기. 몰려 있는 군중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덩치 큰 남자의 연설에 환호를 보내는 중이다. 궁금한 마음에 발걸음을 옮기며 귀에 마력을 집어넣었을 때였다. 묘하게 이끌리는 목소리에서 들려온 내용은 이쪽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고 있었다. “제국민에! 제국민에 의한! 제국민을 위한 나라! 제국의 주인은 황족이 아닌! 제국민이요!!” “뭐, 뭐야… 이건….” 분명히 1회 차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이게 뭐야….” # 281 회귀자 사용설명서 281화 원하지 않은 설계(5)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봐도 광장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은 박덕구였다. 무슨 일로 이곳에 있는지도 당황스러웠지만 주먹을 꽉 쥐며 여기저기에 소리치는 모습은 그보다 더 당황스럽다. “제국의 주인은 제국민이 맞다니까! 잘 생각해 보쇼! 제국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야 황제 폐하가 아닙니까.” “그렇지 않소! 절대로 그렇지 않소! 여러분이 있어야 제국이 있는 거요!! 제국의 주권은 제국민에게 있는 게 맞소! 모든 권력은 제국민으로부터 나와야 바른 나라라고 할 수 있는 거요! 황제 폐하가 아무리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여러분 없이 무엇을 할 수 있겠소!” “옳… 옳습니다! 옳습니다!!” ‘이게 뭐야….’ 군중 속에 섞여 열심히 환호를 보내는 사람 역시 눈에 익숙한 사람이다. ‘안기모 씨?’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영락없는 제국 평민의 모습이었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상 마법을 벗겨내면 틀림없이 익숙한 모습이 나올 것이다. 안기모뿐만이 아니다. 얼굴만 기억하고 있는 파란의 길드 직원들도 보이기 시작. 몇 명이 이미 소리를 질러대며 주변 분위기에 고양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태초부터 베니고어 여신님께서는 이 대륙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가 평등하다고 말씀하셨다니까!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시오! 친애하는 제국민 여러분들! 베니고어 여신님의 비호 아래 살아가는 이 제국이 정말로 평등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오! 이 배운 것 없는 무식한 놈 역시 사랑하는 가족을 가난과 굶주림이라는 악마에게 보내야 했다니까!” “어이구….” “저런….” “옥수수 죽이라도 먹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이 무식한 놈의 일상일 터인데! 황궁에 자리 잡은 도둑놈들은 매일매일 술과 고기로 축제를 벌이고 있소! 대관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냔 말이오!” “그렇지!” “제국민에, 제국민에 의한, 제국민을 위한 정치! 지금 이 나라에게 필요한 게 그거요. 우리 스스로가 계몽해야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다니까! 제국의 주인이 제국이라는 걸 우리를 멸시하는 자칭 고귀한 핏줄들에게 일깨워야 할 필요가 있소!” “옳은 말씀입니다!” “당연한 말이요! 그렇고말고! 거두절미하고 투쟁해야 한다니까! 우리같이 배운 것 없는 멍청한 놈들이라도 제국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니까!” “뭐, 뭘 하면 되는 겁니까?!” “친애하는 동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일단은 빨리 여기 있는 책이나 한 권씩 받아드쇼! 우리 형님, 아니, 우리와 뜻을 함께하고 있는 분이 직접 집필하신 서적이요!” “그렇지만… 이건 황실에 대한 반역이 아닙니까.” “황가에 대한 반역이라니! 그 황실의 핏줄들이 베니고어 여신께 반역을 저지르는 것이지! 우리는 이런 책도 읽으면 안 된다는 말이요? 무기를 든 것도 아니고 직접적으로 황제 폐하의 앞에 침을 뱉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우리가 반역죄를 뒤집어 쓴단 말이요. 제국은 황제 폐하의 것이 아니라 제국민들의 것이고 여신님의 것이요! 고작 책도 읽지 못하게 하는 나라가 정말로 정상으로 보인단 말이요? 그게 정상으로 보인다면 지금 당장 영주님께 달려가서 내 죄를 밝히시오! 내 떳떳하게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할 터이니!” “민, 민주주의 만세!” “민주투사 만세!” “내 이름은 바크더쿠요! 민주투사 바크더쿠요!” 그 동안의 어쩔 수 없이 꽤 오래 자리를 비우기는 했다. 실제로 세상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 살라딘이나 가면 쓴 남녀의 뒤를 캐는 일은 조심스러워야 했고 은밀해야 했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 마치 세상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 늙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 가릴 것 없이 서적에 손을 대고 있다. 목소리가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조금 늙어 보이는 노인이 입을 열어온 것이다. “자네는 이방인인가?” “아… 네.” “이방인이 왔던 곳은 왕이나 황제 같은 것이 없다고 들었었는데… 그 말이 참인가?” “그, 그렇기는 합니다만.” “정말로 그런 나라가 있기는 있었구만. 아, 여기 이 책이나 한번 읽어보게나.” 슬쩍 책을 받아 들자 제법 작은 크기의 책이 손에 들어왔다. 숨기기 쉽게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제작된 것을 보니 아마 검열에 대해서도 신경을 쓴 모양. 신성한 민주주의라고 적힌 책의 하단에 신원미상의 집필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오스칼?’ 오스칼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덕구 씨가 말했던 것처럼 이걸 집필한 사람은 기영 씨일 것이다. 아무렇게나 책을 펴자 빼곡하게 적힌 글자들이 보인다. [제국통치에 제국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제국민의 인권은 보장되어야만 하며 모든 제국민에게는 법률과 그를 이행하는 절차가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인권과 평등법칙은 제국민이 누려야할 ‘기본권’이며 이 평등법칙은 베니고어 여신님의 뜻에 따라 제국뿐만이 아니라 대륙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통용되는 이야기다.] ‘허….’ [제국은 제국민들의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 주는 복지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앞서 나열한 것이 바로 국가와 국민이 맺은 계약이다. 제국은 기득권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계약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며 민중은 이것에 대해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제국의 주권은 제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해야 할 것이다.]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말들을 섞어 놓은 느낌이었다. 정치학자들의 논리를 대륙에 가져와 입맛에 맞게 변화시킨 것이다. 여신 아래 만인이 평등하다는 베니고어 여신의 교리를 방패로 삼고 있는 것이 보인다. ‘확실히 기영 씨 솜씨야.’ 글에서는 그 사람의 성격이 보이는 법이다. 페이지를 계속해서 넘길수록 책 안에서 튀어나오는 내용들은 가관. 제국의 또 다른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교황청은 완전히 분리시켜서 서술하고 있다. 무척이나 여러 말이 적혀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만인의 평등은….” “베니고어 여신님의 뜻이다. 바로 그거요! 그게 오스칼 님이 하고 싶은 말이라니까! 거 참 이해력이 빠른 형씨구… 현, 현성 씨? 여, 여긴 어떻게….”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당황하는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바크더쿠 씨, 잠깐 이야기 좀 하는 게 좋겠습니다.” 씁쓸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 * * 이건 틀림없이 먹힌다. ‘먹힐 수밖에 없어.’ 국민의 99.9%가 베니고어 신자라는 걸 생각해 보면 먹히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이야기다. 성서에 몇 번 나오지도 않은 문장을 부풀릴 대로 부풀려 정치적으로 해석했다. 종교를 민주주의에 엮어버렸으니 이 서적이 탄력을 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급하게 집필했기 때문에 구멍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민중은 이런 구멍에는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신 아래 만인이 평등하다. 이 문장이 가지는 무게와 달콤함은 일반 제국민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일 테니까. 심지어 일반 성직자들에게도 무척이나 달콤하게 비춰졌을지 모른다. 모닥불에 앞에 앉은 채로 천천히 책을 덮자,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덕구 씨와 기모 씨가 시야에 비쳤다. 타닥타닥, 나뭇가지가 타는 소리가 듣기 좋았지만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명을 좀 들어도 되겠습니까?” 오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한 것이 당연. 그렇지만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저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보다 내가 먼저 말을 해야 될 것 같은데… 거, 길드 마스터 형씨는 왜 여기에 있었던 거요?”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정리가 되면 말씀드리겠지만 우선은 흑마법사에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뭐, 교황청이나 황실에 의뢰라도 받은 거요?” “그렇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럼 덕구 씨는….” “뭐, 나야 우리 형님 심부름이지. 벌써 이번이 12번째요. 수도랑 멀리 떨어진 곳부터 천천히 작업하라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거… 그 이지혜 씨 있잖소. 지혜 씨가 집어 주는 곳부터 이 책을 전파시키라는 특명을 받았다니까! 신기하게도 이 작업 하는 동안 귀족이나 기사 같은 양반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거 아니요. 그렇지 않소? 안기모 씨?” “네. 덕구 씨 말대로 입니다. 동부 쪽으로 병력이 집중된 상황이니 지금 저희가 있는 서부 쪽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 걸 겁니다. 그보다 길드 마스터는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네. 일에 조금 집중하다 보니….” “왕성에도 돌아가시지 않은 지 시간이 좀 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중간에 사정이 조금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이제 막 돌아가려고 하던 차에 여러분을 마주친 겁니다. 그… 역시 이 책을 만든 것은 기영 씨인가요?” “정확히 말하면 형님 혼자서 만든 건 아닌데… 지혜 씨랑 같이 만들었지. 희영 누님도 왕성에 종종 가서 도움을 주고 그랬던 것 같았소. 뭐, 아무렴 어떻겠소. 그보다 현성 형씨, 형님이 애타게 찾았던 것 같은데… 혹시 서로 못 본 지 오래된 거 아니요?” “네. 사실은… 조금 지났습니다.” “거, 형님이 그렇게 형씨를 찾았었는데… 쩝.” “아. 그랬습니까?” “아암. 그렇다마다! 왕성에서 조금 안 좋은 모양인지 별로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소. 사실은 요즘에도 매일 저기압인 것 같다니까. 입이 삐쭉 튀어나와가지고 막 형님이 조금 화났을 때 하는 그런 표정 하고 다니는데, 하얀이 누님이 눈치를 보고 있는 걸 보면 내가 얼마나 안쓰러운지.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와서 민주투사 바쿠더쿠까지 하고 있는 거 아니요.”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아암. 확실히 그런 느낌이 있었다니까.” “혹시 이 책은….” “아. 그렇게 막 짜증 내면서 만든 책이요.” “끄응….” ‘그럴 만할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일을 맡겨놓은 이후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기영 씨라면 잘해낼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1황녀를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은 기영 씨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마 힘들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내가 아는 샤를롯트는 유능한 황제였고 샤를리아는 구제 불가능한 망나니. 이쪽 역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말하자면 이쪽이 실수를 저지른 셈이라는 게 된다. 평소에는 정말 믿음직한 사람이지만 가끔 이렇게 자신의 불만을 표현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한 만큼 이기영이라는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도 대충 보인다. 조혜진 사건 때도 그랬고, 그 외에도 아주 사소한 일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모르는 게 이상할 것이다. ‘불만을 표현한 거야.’ 덕구 씨의 말을 생각해 보면 이건 기영 씨 나름의 불만을 표출한 거라 생각하도 무방하리라. ‘고려하지 못했어.’ 확실히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을 뿐, 이기영이라는 사람이 느낄 불안감이나 갉아 먹힐 정치적 위신을 계산하지 못했다. 문제는 단순한 불만 표출이라고 하기에는 저지른 일이 너무나도 크고 급진적이었다는 것. 옛말에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다. 바깥일에 치중하느라 안쪽의 상황에 너무 소홀했던 것이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선물이라도 가져가는 게 좋을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 282 회귀자 사용설명서 282화 부디 혁명하라(1) “이건 무조건 먹힐 거예요, 오빠. 장담하는데 무조건 먹혀요. 진짜 잔머리 하나는 잘 돌아간다니까? 어떻게 종교랑 이걸 엮을 생각을 했어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생각이야.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지. 애초에 이방인 중에 베니고어 여신 교리 외우고 있는 사람이 사제들 빼면 나밖에 없잖아. 혁명 정도는 누나도 생각하고 있는 선택지였고 대단한 건 아니지, 뭐.” “그렇기는 하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아직 제국민의 시민 의식이 이런 걸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아냐 아냐. 제국민도 의식수준이 꽤 높아. 그 누구보다 제국민을 사랑하시는 황실의 2황녀님께서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의식수준을 높이고 계셨거든. 상황 자체는 언제든지 터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어. 단지 계기가 없을 뿐이었지.”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어요? 제국민을 꽤 높게 쳐주네요.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번 일의 일등공신은 베니고어 여신 교리라고 보는데. 실제로 반응을 보면 생각보다 더 뜨거워요. 운이 좋으면 교황청까지 끌어들일 수 있으니 그것보다 더 하고요.” “나도 개인적인 생각을 이야기하는 거야. 애초에 시민혁명이라는 게 그래. 이런 종류의 혁명은 대부분….”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걸 이야기 하고 싶은 거죠? 경제권은 가지고 있지만 지배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본가들이 주도한다는 거.” “응. 맞아.” 눈앞에 있는 이지혜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을 보니 그녀도 나만큼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재미없을 리가 없지.’ 애초에 이지혜는 이런 상황을 좋아한다. 민중이나 일반인이 이쪽이 짜놓은 판대로 움직이는 것. 그런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으니 그녀가 권력에 심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얼굴을 치켜 올리니 계속해서 말해보라는 듯 나를 바라보는 이지혜가 보였기 때문에 이쪽 역시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물론 지구에서 일어난 일과 역사를 여기에 대입해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야 될 문제야. 하지만 부족한 것만 채워지면 꼭 그렇게 못 하리라는 보장도 없잖아.” “부족한 게 뭔데요?” “무력.” “아아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지구와의 차이점은 역시 무력이지. 경제권만 가지고 있어도 되는 지구에서의 부르주아들과는 다르게 이쪽은 한 가지 조건이 더 붙으니까 그만큼 더디게 느껴졌을 뿐이야.” “이곳에서의 부르주아 계급은 경제력에 무력까지 플러스해야 된다는 거네요. 혁명 같은 게 안 일어 날 법도 해요.” “내 생각도 그래. 애초에 이곳의 권력자들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무력 때문이었다고 봐. 이곳의 기사들만 봐도 민간인 수십을 상대할 수 있다고 봐도 되는데…. 그런 상황에서 권력자에게 반항이나 해볼 수 있겠어? 사실 혁명을 위한 준비는 거의 다 되어 있었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지.” “어떤 걸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가난, 굶주림, 불평등, 권력층과 소외계층의 격차, 자라나고 있는 시민의식. 그리고….” “언론도 있네요.” “맞아. 언론이 결정적이지. 또 다른 이유로는 신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을 예로 들 수도 있겠네. 경제권과 무력은 가지고 있지만 지배권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 “이방인들.” “응.” “그 외에도 몇몇이 더 있어요. 사설 용병대라든지, 아니면 마탑에 처박혀 있는 마법사들이라든지. 오빠 말대로 혁명의 계단에 오르는 조건들은 이미 조금씩 충족되고 있었던 거네요. 모든 게 연결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거죠?” “내 생각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해. 문제는 이걸 어떻게 터뜨리는가지.” 그 외에도 다른 문제가 존재하기는 했다. 일단 급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조건이 가장 커다란 문제. 자연스럽지 않은 혁명이나 개혁은 아무리 잘 치러져도 부작용을 가지게 마련이다. 운이 좋아 이 일이 성공적으로 치러진다고 하더라도 이 제국은 틀림없이 어떤 부작용을 떠안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난 정치학자가 아니니 그런 건 예상할 수도 없고 쥐뿔도 관심 없다. 다가올 문제들을 예상하는 것은 내 능력 밖. 지금 당장은 이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순식간에 끝내야 해.’ 또 다른 불안요소는 바로 공화국의 존재다. 단순한 상상일 뿐이지만 만약 상황이 터진다면 제국 내에서 치러지는 혁명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한꺼번에 터뜨리고 한꺼번에 몰려 들어가 해결해야 한다. 기존 권력자들과 제국민들이 아옹다옹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외부의 압력을 받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카트린 공작부인, 엘리제 백작, 마를린 영애 같은 이들을 놓칠 수 있다는 것도 걱정하고 있는 문제들 중 하나였지만 이들 같은 경우에는 보호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국민에게 존경받는 귀족들은 새로운 계급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다소 억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강제적으로라도 혁명에 참가 시키는 것이 맞다. ‘그렇게 해야 돼.’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걱정되는 것은 제2황녀의 존재. 이쪽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먼저 선수를 쳐올 가능성이 있는 만큼 조심, 또 조심하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망해버릴 수도 있어.’ 반역죄로 몰린다면 제국 8좌고 용의 배우자고 명예주교고 나발이고 끝장이다. 샤를리아와 함께 황제를 만나거나 쉴 새 없이 캠프를 돌리며 정치싸움을 거는 것이 바로 그 이유. 당장은 시선을 돌릴 수 있겠지만 한계가 찾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 누나. 그러고 보니까 2황녀 쪽은 어때? 반응이 좀 있어?” “아뇨. 꽤 조용해요. 샤를리아 쪽 적폐 늙은이들이 들고 일어선 걸 해결하느라 바쁜 건지 아직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생각해 보니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네요. 아무리 외곽부터 조용히 작업하고 있었다고 한들, 자기 욕하는 것도 귀신같이 캐치하던 여자가 조용히 있는 것도….” “그렇지? 당장에라도 숨통을 끊으려고 달려들 것처럼 말한 것치고는 이쪽에 대한 압박이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야.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숨도 못 쉴 것 같았는데… 교황청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건가?” “그럴 수도 있고요. 아니면….” “응?” “그냥 단순한 제 생각인데… 그… 갑자기 떠오르기도 했고. 제국의 2황녀가 제국민들을 그렇게 아낀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지혜가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가능성도 열어두는 게 좋을 거예요.” “그건 너무 억측 아니야?” “저도 그냥 멋대로 상상해 본 거예요. 어차피 물증도 없고 소설 써보자면 이런 상황을 원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거죠. 오빠가 말한 것처럼 제2황녀 역시 이방인들이 신 부르주아 계급이라는 걸 인지하고 계획을 짰을 수도 있어요. 적어도 관심이 있었다면 여러 가지 정황을 캐치하고 있었을 거예요. 엄청나게 커진 언론만 봐도 충분히 생각해 봄 직 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오빠가 언론을 키우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던 생각이었겠지만… 이미 이 신성제국에는 여러 언론이 자리 잡았죠. 이방인뿐만 아니라 제국민도 제국 신문을 만들어서 팔고 있는데 누가 봐도 전조라고 부를 수 있는 일 아닌가? 제2황녀가 바보가 아니라면 제국신문이 출간됐을 때부터 냄새 정도는 맡고 있었을 거예요. 심지어 이제는 마력 영상 홀로그램도 나오고 있는데. 만약에. 아주 만약에 제2황녀가 마력 홀로그램… 그것까지 캐치하고 있었다면 정말로 그녀가 이런 상황을 주도하고 싶어 했다고 생각해도 돼요.” “그러니까 누나 말은 2황녀가 신 부르주아 계급에 중심에 서 있는 나를 일부로 도발한 거다. 그 말이야? 억지로 조이고 위협해서 내가 이렇게 움직이기를 원했다고? 이방인들을 움직이려고?” “소설이라고 했잖아요. 근데… 이게 또 끼워 맞추니 말은 되네요. 애초에 제국민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도 그렇고…. 솔직히 오빠를 길들이려고 한 것도 조금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해요. 당장 칼을 휘두를 것처럼 위협했지만 실상 오빠의 팔다리가 완전히 잘려나간 건 아니었잖아요? 물론 아예 안 잘랐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확고 세력은 건들지도 않았어요. 저는 그게 그쪽에서 오빠를 다시 끌어들일 생각을 하는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거든요.” “애초에 그녀가 원했다면 나한테 직접 말을 했겠지.” “말했으면 오빠가 그걸 들어줬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생각해도 절대로 안 그랬을 것 같은데? 애초에 그걸로 2황녀 뒤통수나 칠 생각이나 했겠죠. 오빠 같은 쓰… 아니, 그… 뭐라고 표현해야 되지? 아! 멋있는 간신 같은 사람들한테는 봉건제나 절대군주제가 더 유리하잖아요. 오빠랑 저랑 잘 맞는 것 같아서 말하지만 이번에도 수 안 틀렸으면 혁명이고 나발이고 안 했을 거예요. 그냥 그 상태로 꿀이나 빨고 있었겠지.” 솔직히 부정할 수 없었다. 만약에 제2황녀가 담담히 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면 나는 그걸 무기로 황녀의 뒤통수를 후려 갈겨버렸을 것이다. 뭔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이지혜가 써놓은 소설 쪽으로 마음이 가기 시작. 특히나 2황녀와 함께 나눈 대화들이 갑작스레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국 기사단 연무장에서 나눈 대화. 당시에는 별것 아닌 대화처럼 느껴졌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의심이 가는 점이 많다. ‘실례가 될 수도 있지만 명예주교님에 대해서는 약간의 사전 조사를 마쳤습니다. 용에게 선택받은 자, 신성제국의 명예주교 같은 모두가 알고 있는 타이틀보다는 조금 다른 쪽에 관심이 가더군요. 언론이라는 매체를 린델에 뿌리내리고 여러 가지 변혁을 가져온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변혁. ‘자유 도시는 기본적으로 제국과 분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분리되어 있는 만큼 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린델에 언론이 뿌리내리고 시작한 이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 내에서도 비슷한 기관이 생긴 것만 봐도 그러합니다. 당신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이지만 최소한의 양심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당신이 벌인 일들이 다수에게는 좋은 결과를 가지고 왔으니까요.’ 다수에게 유리한 결과. ‘아마 제가 생각하기에… 당신이 그런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이유는 타인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뇨.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대중의 눈치를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강자에게는 자신이 가진 것을 양보하지 않아도 대중들에게는 자신이 가진 것을 양보하는 사람입니다.’ 대중을 위한 양보. ‘칭찬이 맞으니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예주교님, 제국에는 당신과 같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대중의 눈치를 보는 인재가, 다수의 눈치를 보는 정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이지혜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점점 더 그녀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조금 원망스러운 회귀자가 어째서 그런 여자가 황제가 되면 안 된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어떤 쓰레기 같은 놈이 중간에서 그녀를 미치게 했음이 틀림없으리라. 1회 차에서는 이런 종류의 운동이 없었던 걸 예상해 보면 아직은 속단을 내릴 타이밍이 아니긴 했지만. 언론의 빠른 등장으로 인해 상황이 바뀌었다고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상황도 아니다. 여러 가지 정황이 보이는 상황, 그렇지만 정확한 물증이 없으니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그녀를 향한 심증은 계속해서 그 싹을 틔어내고 있었다. 마지막에 나에게 해준 말조차 이제는 의심스럽게 들려온다. ‘저는 적에게 칼을 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명예주교님. 당신이 제국에 있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말로 제게서 등을 돌린다면 저도 칼을 빼들 수밖에 없습니다. 현명한 선택을 하셔야 할 겁니다.’ 정말로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궁금한 것이 당연. 그녀가 말하는 현명한 선택이 무엇이었는지 그녀가 적이라고 규정하는 이는 어떤 사람인지, 그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원하는 게 이것이라고 가정한 뒤라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군주제에 칼을 들이미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나 그대는 앞으로의 제국에 필요하다. 그대는 제국에 변혁을 불러일으켜 올 것이니 제국의 중요한 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만약 그대가 정말로 내 기대에, 대중에게 등을 돌린다면 칼을 빼들 것이다. 그러니… 부디….’ “혁명하라.” “네? 뭐라고요? 갑자기 뭔 소리예요. 이미 하고 있잖아요.” “씨발….” “뭐? 왜요?” “누나 말이 맞는 것 같아.” 정확히 말하면 나와 이지혜 같은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합류한 쪽이었지만…. 제2황녀. 샤를롯트 역시 우리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 283 회귀자 사용설명서 283화 부디 혁명하라(2) “신성한 민주주의.” “네?” “오스칼이라는 자가 집필한 책입니다. 아마 이기영 명예주교, 그 사람이 써내 유통한 것이 틀림없겠죠. 다들 읽어보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참으로 흥미로운 서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방인들이 살던 곳에서는 이런 사상이 일반적으로 깔려 있나 보군요. 알고는 있었지만 저희 제국은 후퇴하고 있었던 게 맞았군요.” “…….” “이방인 한 사람이 며칠 만에 완성한 이 서적이 현 제국의 체제를 전면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동안 제국의 기득권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지고 제국민을 이끌어 왔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요.” “황녀 전하께서는… 이 신성한 민주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훌륭합니다. 무척이나 훌륭해요. 물론 베니고어 여신님의 교리를 바탕으로 민주화를 이끌어낸다는 생각은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저희가 바라는 이상과는 상충하는 면이 있으니까요. 하나 어찌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이게 최선이라는 것에는 저 역시 반박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직 황권 체제에 익숙해져 있는 제국민을 일어서게 하기 위해서는 여신님의 뜻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겸사겸사 교황청의 지원을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어떤 면에서 본다면 여신님의 교리를 끌어온다는 것은 천재적인 발상입니다.” “확실히….” “네. 다소 부작용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만큼 효과적입니다. 불안해하는 제국민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을 겁니다.” “생각하고 계신 일이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전하.” “이제부터 시작이지요. 네. 지금 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 호응해 오는 이들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눈 밑이 다들 퀭한 것을 보니 어제는 책을 읽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모양. 그야 그럴 게 뻔했다. 눈앞에 보이는 이 작은 책은 엄밀히 말하면 제국의 최초로 유통된 새로운 종류의 성서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이방인들의 대륙에서 온 사상과 이상의 결정체가 들어가 있는 서적이었다. 물론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이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생각했다. 당장은 제국의 현 체제를 뒤엎어 버리는 것이 최우선 과제. 아주 예전부터 조금씩, 조금씩 진행해 온 일이 이제야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예상이 옳았어.’ 그를 궁지로 내몰면 체제를 붕괴시킬 거라는 판단이 옳았다. 물론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급진적이었던 터라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그가 유능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아 이쪽의 결정이 옳았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최소한 6개월은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제국 전체에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어떻게, 어디서부터 움직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자신과는 다르게 완벽하게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입이 떡 벌어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리라. 시민 혁명.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들어 있었던 염원이자 꿈이었다. 생각해 보면 첫 시작은 몇 년 전 이방인 차희라와 빅터하르트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였다. ‘빅터 할아버지, 우리가 있었던 곳은 귀족이고 황제고 없었다니까. 이런 예법 같은 건 배운 적도 없어.’ 딱 한마디, 정말로 딱 한마디였다. 정말로 우연히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계속해서 떠오르는 목소리. 당시 황제가 되는 것으로 생각이 꽉 찼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처음은 분명히 그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황제가 다스리지 않는 나라. 귀족이 없는 나라. ‘그런 게 가능한가?’ 머릿속에는 의문이 가득 들어선 것은 당연지사. 물론 제국과 살을 맞대고 있는 공화국을 생각해 보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공화국 같은 경우에는 사정이 더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특수 집단에 권력이 치우쳐진 공화국은 모든 인간의 해방을 표방하고는 있었지만, 일당독재체제로 그 총통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방인 차희라가 말한 황제와 귀족이 없다는 의미와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이방인들이 온 대륙은 예법을 배울 필요가 없는 장소다. ‘평등한 거야.’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한 것과는 달리,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우연히 들은 몇 마디에 그동안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이방인들의 대륙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답답함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고 결국에는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은 이방인들을 성으로 초대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곳이 어딘지. 어떻게 그런 곳이 존재할 수 있는지. 황제가 없다면 어떤 이가 나라를 통치하는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방인들과 대화를 나눴지만 질문에 정확한 답을 해줄 수 있는 자를 찾기는 어려웠다. 겁을 집어먹은 이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왕성에서 이방인의 대륙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처럼 여겨졌으니 평범한 이방인이 겁을 먹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알 수 있었던 기본적인 정보만으로도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지사. 몇 년에 한 번씩 지도자를 선출하는 선거. 시민이 뽑는 대표, 탄핵. 권력의 대한 국민의 견제, 이방인의 대륙의 대한 역사. 모든 것이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왕성의 초대된 이방인들로만 그 궁금증을 해결할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을 때에는 곧바로 바깥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보는 눈이 많아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틈이 나면 이방인들이 세운 자유 도시를 둘러보고는 했다. 그들의 삶은 어떤지, 그들의 어떤 일을 하는 건지, 새로운 대륙에서 들어온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한 것들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상향이라고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곳 역시 가난이 존재했으며 빈민과 차별이 존재했다. 황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무력에 의해 위로 올라선 지도자들이 있었고 언뜻 보면 현 제국의 상황과 그다지 다른 게 없어 보였다. 회의감을 느끼고 돌아가려고 했을 때 눈에 보였던 것이 바로 언론의 태동. 말 그대로, 눈으로 확인한 것은 언론의 태동이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바뀐 것 같은 기분. 타인의 눈으로 봐도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하위 계층에 속해 있던 이방인들이 들고 일어났고 그들이 직접적으로 권력자들을 보이콧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동안 숨죽이고 있었던 이들이 하나가 되어 움직였던 것은 마치 이야기로만 들었던 사건들의 작은 버전. 절대로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천천히 뒤바뀌기 시작했다. 자유 도시 린델에 자리 잡은 거대길드 검은백조는 다른 이방인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심지어 며칠이 지나지 않아 검은백조의 지도자가 뒤바뀌어 버렸다. “말도 안 돼….” 하위 계층의 이방인들은 그 어떤 피도, 그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고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무혈혁명.’ 그걸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이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지사. 당시 언론이 피해자로 다루고 있었던 이기영, 아니, 언론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던 이 이방인을 관찰했고 심지어는 황녀의 권한까지 사용해 가며 뒤를 캐기 시작했다. 왕성에 들어와 악마숭배자 이토 소우타를 색출해냈던 것. 캐슬락을 성공적으로 지켜냈던 것. 용에게 선택을 받고 교황청의 직위를 얻은 것으로 모자라 많은 귀족에게 사랑받고 있었던 것. 물론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일 때가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었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냐가 더욱더 눈에 들어왔다. 그가 가진 무기는 용이나 그가 만든 포션뿐만이 아니다. 화려한 언변이나 인맥 역시 그의 무기라 할 수 있지만, 그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언론이라는 장치와 그걸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하나하나 배워간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린델에서 일어난 그 사건은 새로운 희망이자 빛이 되어버렸다. ‘준비가 필요해.’ 제국을 바꿀 수 있다. ‘제국민 역시 일어설 수 있어.’ 뜻이 있는 이들을 하나로 모아야 했다. ‘현 체제가 부당하다고 여기고 있는 귀족, 깨어 있는 지식인. 분명히 존재할 거야. 분명히.’ 이방인들이 역시 도움을 줄 것이다. ‘그를 움직여야 해.’ 그동안 쉬지 않고 달려오던 것이 드디어 성과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무엇인가를 이룬 건 아니었지만 만약 누군가 기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리라. 마침 들려온 목소리에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황녀 전하.” “네.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기쁜 마음을 감추기는 어렵습니다.” “저… 황녀님.” “네.” “죄송하지만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죄송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말씀하셔도 됩니다, 남작.” “다름이 아니오라. 혹시나 이번 일이 끝나면… 어떻게 하실지 궁금합니다.” “아아. 그야 여러분과 같을 겁니다. 아마 평범한 여생을 살아가게 되겠지요. 물론 어렵겠지만 아버지도 언니도 새로운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예전에 저희 어머니가 말씀하신 생활을 말입니다.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하하.” “황녀님, 그렇지만 항상 말씀드렸던 것처럼….” “남작, 저 역시 다른 제국민과 다르지 않은 사람입니다. 운이 좋아 그들보다 더 교육받을 수 있었고 운이 좋아 그들보다 더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에 대해 알아보는 동안 깨달을 것이 많습니다. 저는 남들의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그대들처럼 평범한 사랑을 하고 싶고 평범한 연애도 해보고 싶습니다.” “황녀 전하다운 말씀이시네요. 하하. 혹시나 마음에 두고 계신 분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하하. 그거야말로 백작부인다운 질문이십니다.” “어쩌면… 명예주교님을 항상 지켜보시던 게….” “하하하하하. 아닙니다. 그는 흥미가 가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제 타입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그의 상사라고 할 수 있는 분이 조금 더 제 취향에 가깝지요. 경들 앞에서 제가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오늘은 여기서 헤어집시다. 내일부터는 다시 바빠질 테니까요.” “네, 전하.” “편안한 밤 되세요, 전하.”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천천히 자리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보였다.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신성한 민주주의를 다시금 살펴보자 이전에는 미처 이해할 수 없었던 사상이 조금 더 명확하게 머릿속에 박히기 시작. 당분간은 이 책을 반복해서 읽느라 시간을 정신없는 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국의 주권은 제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제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어디선가 이 글을 읽고 있을 다른 이들 역시 지금 자신과 상황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마구간에서, 또 어떤 이들은 불이 다 꺼진 학교에서, 또 어떤 이들은 작은 촛불에 의지하며 이 책을 읽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황성 안에서도 이 책을 읽고 있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눈을 피해 서적을 공유하고 서로 토의하는,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며 그렇게 민중은 계몽하고 있을 것이다. 이 작은 성서가 혁명의 시작이요, 제국민들의 빛이 될 것이다. “그자는 천재야.” 작은 책을 꽉 껴안은 채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명예 혁명.” 계획대로만 된다면 제국은 아무런 피도 흘리지 않은 채 한 단계 진일보 할 수 있을 것이다. # 284 회귀자 사용설명서 284화 부디 혁명하라(3) “명예혁명은 개뿔.” “틀림없어요. 노리는 게 바로 그거겠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이네요. 혁명을 위해 들고 일어설 제국민을 안정시킨 뒤, 제2황녀와 단합한 귀족들이 기존 기득권을 압박해 체제를 바꾸자는 계획이겠죠. 이게 바로 제국민의 뜻이다! 같은 명대사 한 번 날려주고요. 그것 말고는 생각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제국민이 피를 흘리는 걸 샤를롯트 그 여자가 바랄 리가 없으니까요.” “듣기 좋은 소리긴 하네. 무혈혁명, 명예혁명.”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역시 다시 한번 1황녀 쪽에 붙어서 2황녀를 반역죄로 몰아가는 게 나으려나?” “그건 안 할 거야. 원래 그런 멍청한 사람과는 같이 일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다른 선택지는 전부 논외. 혁명은 진행될 거야.” “장단에 맞춰주겠다는 거예요?” “그건 아니지. 샤를롯트가 원하는 방향과는 조금 달라. 내가 원하는 건 명예혁명이 아니라 투쟁의 완성으로 만들어지는 혁명이거든. 애초에 혁명을 시민 쪽에서 주도한 것과 제2황녀 측에서 주도한 것과는 차이가 있지. 내가 뒤통수가 얼얼해서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야, 누나. 일이 그렇게 끝나면 샤를롯트는 분명 제국의 상징으로 남을 거야. 명예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공화국이 숟가락 얹는 걸 막아야 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하다는 거지. 협상 테이블이 잡힌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다는 거야.” “그쪽에서도 무슨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그냥 기분 나빠서 뒤엎어 버리려고 하는 건 아니죠?” “단순히 기분이 나빠서 아무 죄 없는 제국민들이 피 흘리게 할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야. 지분이 2% 정도 있기는 한데 미비한 수준이니 다른 이유가 더 크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는데.” “글쎄요. 내가 생각하는 오빠는 그 정도로 쓰… 아니, 멋있는 간신이니까요.” “제국의 상징은 샤를롯트가 아니라 오스칼이 될 거야.” “아아아아! 끝까지 비선실세로 남으시겠다. 이건 좋은 소식이네요.” “솔직히 웃기지.” “뭐가요?” “이쪽이 뭘 터뜨릴 줄 알고 제국민들이 일어서는 걸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여줄게. 신성한 민주주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인데….” “언론으로 끓어오르게 한다는 건 예상하고 있을 거예요. 대비도 다 되어 있을 거고. 제2황녀는 이미지도 좋으니 미지근한 걸 터뜨렸다가는 곧바로 수습될걸요? 뭐 좋은 거라고 가지고 있어요?” “그건 비밀. 한번 맞춰봐. 기대해도 좋아.” “어렵네요. 아직 상용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마력 홀로그램을 쓰실 거라는 건 예상이 가는데…. 그 안에 들어갈 콘텐츠가 문제네요. 단기간에 끝내려면 대륙 전체가 끓어야 되고 민중을 화나게 만들려면 보통 내용 가지고는 안 될 텐데…. 귀족 하나가 평민들 쥐어 패는 몰래카메라라도 찍었어요? 아니면 샤를리아 평소 행실이라도 찍었나? 사실 촬영할 시간도… 아! 하얀 씨한테 시키신 일이 그거였네요. 전에 말한 보이지 않는 눈이 달렸다는 것도 그런 의미고….” “그건 정답. 그래도 내용은 말해주지 않을 거야.” “악취미네요. 뭐, 오빠가 준비한 일인 만큼 콘텐츠는 따로 걱정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민주투사 오스칼 역할을 누가 할지에 대해서도 빨리 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저쪽에서 준비할 시간을 안 주고 몰아치는 게 중요할 것 같으니까. 아무튼 전 일어날게요, 오빠. 준비할 일도 있고. 아! 그리고 이건 덕구 씨한테 온 물건. 편지도 들어 있는 것 같은데 그 광년 달래러 가기 전에 한번 읽어 봐요.” “응. 고마워, 누나.” “아. 그리고 마를린 영애한테 온 감사의 편지 44통도 있어요.” “그건 나중에 읽어볼게.” “그럼 그렇게 해요.” 슬그머니 편지를 이쪽 테이블에 두고 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안 그래도 샤를리아를 만나러 가기 전에 시간이 조금 남은 타이밍. 덕구 녀석에게 최근에도 정기보고를 받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아마 이번에도 쓸데없는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다. 보고 싶다. 언제 올 거냐. 정도의 내용일 것이다. 평소와 다르게 조금 두툼한 것을 보니 뭐 다른 것이라도 채워 놓은 모양. 아마 어딘가의 특산물 같은 거라고 생각하며 마력으로 봉인되어 있는 봉투를 찢고 녀석의 편지를 꺼내들 때. 그동안 받아왔던 글씨체와는 조금 다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덕구 씨에게 대충의 사정은 들었습니다.] “어?” [그동안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기영 씨에게 큰 짐을 지워드린 뒤, 일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김현성?’ 편지를 보낸 것은 김현성이다. 조금 익숙한 글씨체라고 생각했는데 녀석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얘가 왜 덕구랑 같이 있어?’ 분명히 박덕구는 외곽에서 작업을 치고 있었던 걸로 기억. 민주투사 바쿠더쿠가 되어 미친 듯이 활약하고 있을 녀석이 어떻게 김현성과 함께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연히 박덕구를 만났다는 설명이 있는 것을 보니 사람 인연이라는 게 정말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간에 녀석의 편지를 읽으니 무언가 사연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 뭔가를 굉장히 설명하려고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사실 그런 변명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구구절절 사과의 말을 적은 걸 보니 본인도 본인이 너무했다는 걸 인지하는 모양이다. 진심 어린 사과의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지기 시작. 바쁜 일이 있었고 녀석은 그 할 일에 최선을 다했다. 물론 겨우 이정도로 가지고 있던 찝찝한 기분이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거다. [갑작스러운 변화와 예상하지 못한 일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기영 씨를 믿고 맡긴 만큼, 끝까지 기영 씨를 믿겠습니다. 사실은 조금 다른 방향을 생각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기영 씨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죠. 피해를 최소화하여 안정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어 내실 거라고 믿습니다.] 어느 정도 피를 흘리는 걸 감수할 수 있다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김현성 역시 완벽한 무혈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기영 씨가 어떤 걸 걱정하시는지 예상이 갑니다. 아마 계획하고 계신 일들 중 가장 걱정이 되는 건 공화국의 개입이겠지요.] ‘영 맹탕은 아니야.’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공화국의 개입은 최대한 억제할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부디 이 일이 기영 씨가 그리는 그림에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계속해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고 또 죄송합니다.] ‘이건 다행이네.’ 확실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쪽의 계획에 나쁘지 않게 반응하고 있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김현성이 내부의 일에 신경을 크게 쓰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게 가장 기분이 좋다. 전부다 뒤집겠다고 결심했지만 민중의 성스러운 투쟁이 녀석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 솔선수범해 공화국의 개입을 막는다고 해줬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다. ‘좋아!’ 구구절절 써내려간 편지의 끝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문구를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 [편지 뒤, 또 다른 봉투에 선물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보다는 기영 씨가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보내봅니다.] “아니 얘는 뭘 또 이런 걸 보냈어?” 소포는 박덕구가 보낸 특산물이 아니라 김현성이 보낸 선물. 허겁지겁 녀석을 꺼내본 것은 당연했다. 나도 모르게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아니… 또 무슨 이런 걸 보내고 난리야. 나 참.”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무한의 가방-영웅 등급] “이거 죽이네…. 키야….” [전설적인 사냥꾼이자 가죽세공의 장인, 샤넬리아 에르메스가 수세기 전에 만들어 놓은 무한의 가방입니다. 드레이크의 가죽을 장인이 직접 마감한 이 가방은 모험가를 위해 만들어진 만큼 편리한 것은 물론, 방어구와도 같은 내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한의 가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내장된 아공간은 그 규모가 광할하며 물품 역시 매우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습니다. 행운 스탯을 +3 올려주는 부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현성 님, 충성 충성!” 안 그래도 필요했던 물건이었다. 덩실덩실 춤추고 싶은 마음이 자라난다. 원망스러운 마음 역시 사르르 녹는 것을 보면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뇌물에 약하기는 한 모양. 심지어 튜토리얼 던전 때 김현성이 들고 다녔던 가방보다 더 좋아 보이는 느낌이었다. 직업 특성상 여러 가지의 포션을 들고 다녀야만 했던 나에게는 꼭 필요했던 아이템. 이런 걸 갑자기 어떻게 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박덕구와 함께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니고 있는 만큼 야밤에 몬스터의 보물창고 같은 것을 털었을 것이다. 슬그머니 가방을 한번 매보니 확실히 어울리는 느낌이다. 심지어 가방에 손을 넣자 뭔가가 잡히기 시작했다. ‘센스까지!’ 안쪽에 고급 촉매들이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신기한 소재가 많은 것을 보면 녀석 나름대로 엄선해 선별한 것 같았다. 입가가 계속해서 히죽히죽 올라가는 것은 당연지사. 필요한 시기에 딱 필요한 물건을 보내주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심지어 이쪽의 계획을 무조건 밀어준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내 눈치도 조금은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제2황녀보다는 이쪽을 조금 더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브레이크는 사라졌다. 김칫국 마시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혁명 이후를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서기 시작한다. ‘곧바로 실행해도 문제없겠어.’ 미루고 있었던 마지막 일. 신성한 민주주의의 저자, 이쪽의 대역 오스칼을 결정하는 게 사실상 마지막 조각이었다. 기왕이면 민주투사 바쿠더쿠처럼 밑바닥에서부터 혁명을 함께 지도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방인이어서는 안 되고 귀족도 조금 애매한 것 같은 느낌. 샤를리아처럼 멍청하지 않고 샤를롯트처럼 똑똑해서도 안 된다. 다시 태어날 신생제국의 지도자, 신성한 민주주의의 저자 오스칼은 적당히 머리를 굴릴 줄 알면서도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조금 대놓고 표현하자면 이쪽이 컨트롤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거다. 문제는 주변에 그런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애초에 이기영의 인맥은 평민과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 알아서 좋은 인간들과 인연을 맺다보니 자연스럽게 귀족이나 교황청의 인물들만 만나게 된 것. 밖이라도 나가봐야 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기영 명예주교님. 이기영 명예주교님. 화, 황녀님이 찾으십니다.” 밖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온 것. 반사적으로 문을 열자 최근에 꽤나 자주 마주치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아! 아리스 시녀님!” “아… 네?” “잠시만. 잠시만 방으로 들어오시죠.” “네? 그게 무슨…. 아! 이럴게 아니라 샤, 샤를리하 전하께서….” “잠깐만 시간 좀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침대나 소파에 앉으시죠.” “명, 명예주교님? 저… 소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저… 저… 너무 가, 갑작스럽습니다. 명예주교님. 이, 이 일을 황녀님이 아시면… 그, 그리고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물론 어떻게 밀어붙이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저 같은 미천한 시녀가 어찌 감히…. 그러니까!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무슨 엉뚱한 상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적임자는 꽤 가까운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둘이 있을 때는 말씀을 낮추셔도 됩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오스칼 님.” 마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오돌오돌 떨고 있는 아리스 시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 285 회귀자 사용설명서 285화 아리스의 편지(1) [왕성에서 아리스 올림.] [평안하신지요, 어머니. 아리스입니다. 조금씩 날이 추워지고 있는데 멀리 떨어져 계시는 어머니가 어떻게 지내시고 계시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동생들은 학교에 잘 다니고 있는지 할머님 건강은 괜찮으신지 집에 들어간 지 오래 되어서 걱정됩니다.] [아마 어머니도 부족한 딸이 어떻게 지내시고 있을지 걱정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저는 잘 지내고 있고 제1황녀님께서는 여전히 저를 무척이나 예뻐해 주시니까요. 항상 일 잘하는 시녀라고 칭찬해 주시고 가끔 머리도 쓰다듬어 주신답니다.] [지난번에는 중요한 손님을 모시는 데 커다란 일을 해내서 황녀님께서 직접 포상을 내리실 정도였어요. 물론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닌 다른 시녀단 여러분 모두가 힘써주신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죠. 아, 사실 오랜만에 편지를 보낸 것은 어머님께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예요.] [사실은… 이 일을 그만둬야 하는 사정이 생긴 것 같아요. 물론 함부로 그만둘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전에 말씀드렸던 그분께서 힘을 써주신 덕분에 나갈 수 있게 됐습니다. 아는 것 없고 배운 게 없기는 하지만 그분이 열렬히 저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돼서…. 마음 약한 저는 어쩔 수 없이 그분을 따르기로 했답니다.] [써놓고 보니 조금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분이 저를 첩으로 들이신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물론 그렇게 된다면 소원이 없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분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아아! 그리고 앞으로의 생활금도 계속 보낼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무튼… 무언가 중요한 일이 시작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제 인생이 바뀔 것 같다는 느낌도 들고요. 아직은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아. 이제 나갈 시간이네요. 자세한 이야기는 이후에 시간이 날 때 하겠습니다! 나중에 또 편지할게요, 어머니. 건강하셔야 해요!] * * * [린델에서 아리스 올림.] [린델로 왔어요. 어머니! 이방인이 사는 자유 도시라 그런지 뭔가 신기한 것 투성이네요. 저번에 말씀드렸던 분께서 저를 직접 이쪽으로 직접 보내주셨답니다. 난생 처음 그리폰이라는 걸 타봤는데 얼마나 떨리는지….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이었죠. 같이 계신 분들도 모두 착하고 좋은 분들이세요.] [다들 능력 있는 마법사나 검사 같은 분들이시니 제가 이분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아요. 그리고 소문이 자자한 드래곤님도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답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커다랗고 위용 있는 모습에 그만 그 자리에서 다리가 풀려버렸지 뭐예요.] [사실 조금 무섭기는 해요. 드래곤님이 아니라 그냥 현재 제가 처한 상황이 그래요. 갑자기 환경이 변하게 된다는 건 저 같은 사람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니까요. 마을의 자랑이라고 했던 긴 금색 머리도 짧은 단발로 잘랐고 난생 처음 어울리지도 않은 검도 차보게 됐답니다.] [거울을 보니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뭐예요? 물론 그분께서 잘 어울린다고 말씀하셔서 안심했지만 그래도 여자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을 것 같아 가슴이 아파요.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불안하기도 하고요. 제가 도대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만 하답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 계신 어떤 마법사님께 미움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작은 드래곤님도 저를 미워하고 있고요. 심지어 사제님 역시 차갑게 대하시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미움 받는 건 익숙하지만 이분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데 너무 걱정되네요. 역시 제 미천한 신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걸까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조금 씁쓸하네요.] * * * [캐슬락에서 아리스 올림.] [캐슬락에 왔어요! 그리고 오랜만에 그분도 뵐 수 있었답니다. 사실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여러 가지를 배우기도 했고요. 그분이 하신 말씀을 전부 이해할 순 없었지만 틀린 것 같진 않았어요. 범상치 않은 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분께서 그토록 커다란 생각을 하시고 계시고 있을지는 누가 알았을까요.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저희를 위해 보내주신 사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답니다.] [둘째 날에는 캐슬락 백작님도 뵙게 됐어요. 그분께서 제게 아무 말 하지 말라고 하셔서 조용히 있었지만 따로 방 안으로 들어가신 백작님과 그분께서 큰 목소리로 토론하시는 걸 들을 수 있었답니다.]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캐슬락 백작님께서도 그분의 말씀에 동감하고 계신 것 같았어요. 최근에 마를린 영애가 큰 화를 당한 적이 있었거든요. 무언가 약속이 오간 것 같기는 하지만 제가 신경 쓸 이야기는 아니겠죠. 결국에는 일이 잘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에요.] [이야기를 들으니 카트린 공작부인과 엘리제 백작 같으신 분들도 캐슬락으로 향하시고 계신다고 하네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 일이었는데 제가 생각한 것보다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 불안해요. 내일 중요한 연설을 앞두고 있어서 더욱더요.]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제국을 위해 힘써주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은 만큼 저 역시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다음 편지는 다른 곳에서 올리게 될 것 같아요. 건강하게 지내셔야 해요. 오늘은 조금 큰돈을 붙이게 됐어요. 깜짝 놀라시지 마시고 아무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돼요. 나쁜 돈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되고요. 이만 줄일게요.] * * * [장소를 알 수 없는 곳에서 아리스 올림.] [제가 첫 연설이 무사히 끝났다고 말씀을 드렸었나요? 정신이 없으니 써놓은 편지를 보냈는지 헷갈려요.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와는 달리 벌써 4번째 연설을 했답니다. 무척 떨리고 걱정되기는 했지만 열렬히 환호해 주시는 분들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지금은 조금 적응이 된 것 같기도 하고요.] [사실 지금까지는 그저 그분께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최근 들어 제 생각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 같아요. 네. 저도 그분의 영향을 받은 거겠죠. 저를 둘러싼 배경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넓어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됐답니다. 사실 캐슬락 이후로 그분을 뵌 적은 없어요. 그렇지만 그분이 제게 선물하신 책을 보면 항상 그분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답니다.] [이것도 전부 베니고어 여신님의 뜻이겠지요? 달라진 것은 저뿐만이 아니에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시간이 지날 때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조금씩 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네. 모두가 변하고 있는 거겠죠.] [오늘은 오랜만에 그분이 다시 저를 찾아와 주실 것 같아요. 듣기로는 바젤 추기경님과 함께 오신다고 들었는데… 아마 또 중요한 이야기를 하실 것 같아요. 제가 이런 자리에 있어도 되는지. 항상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분의 말씀대로라면 제가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겠죠. 편지 줄일게요, 어머니.] * * * [실리아에서 아리스 올림.] [제국 8좌 분들과 회담을 가졌어요. 한 분은 자리에 안 계셨으니 7좌 분들이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헤헤. 처음에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는 그분들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공부를 하고 있던 것이 성과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필사적으로 움직여야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매일 매일 연설을 하는 만큼 부족한 것이 있으면 안 되니까요. 물론 오늘도 연설을 할 것 같아요. 오늘은 이방인 분들을 대상으로요. 그분들께서 저를 받아들여 주실지 걱정되기는 하지만 제국 7좌 분들도 웃으며 저를 맞이해 주셨으니 이방인 분들도 틀림없이 좋아해 주시겠죠?] [용병여왕님도 그렇고 무녀님도 그렇고 환영한다며 두 팔을 벌려주셨거든요. 특히 무녀님께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가셨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 궁금하답니다. 소문으로는 그분께서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하셨는데 혹시 제 미래에 좋은 일이 생기는 걸까요? 어쩌면 그 분의 첩으로 들어가게 될지도! 그렇게 될 수도 있겠네요!] [이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난 건데 사실 그분께서 지금 황녀님과 혼담이 진행 중이라는 걸 들었어요. 네. 그 샤를리아 님이요. 샤를리아 님이 그분을 사모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움직일 줄은 전혀 몰랐어요. 다행히 그분은 샤를리아 님께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지만요. 그 개### 죽# 버## 좋# 텐## 그렇죠? 잉크가 엎질러졌네요. 헤헤. 별 내용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 그리고 제가 저번 편지에 바젤 추기경과 만남이 있었다고 말씀드렸었나요? 네. 다행히도 바젤 추기경님과 이야기가 좋게 된 것 같아요. 애초에 그분께서는 바젤 추기경님과 워낙 긴밀한 관계라 걱정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예상대로 바젤 추기경님께서도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셨네요. 저에게 악수를 청하며 잘 부탁한다고 말씀해 주셨고요. 이건 그분께서 말씀해 주신 건데요. 사실 이번 일이 잘 끝나면 바젤 추기경님께서 교황의 자리에 오르실 수도 있대요! 물론 이건 비밀이랍니다! 어머니! 꼭이요!] * * * [어딘가의 지하에서 아리스 올림.] [어머니. 정말로 오랜만에 편지를 드리네요.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그동안 너무 정신없이 움직였거든요. 일이 조금 꼬이기도 했고요. 편지를 보낼 시간이 없었어요. 생활금을 저번에 크게 붙인 적이 있으니 경제적인 어려움을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혹시나 전부 써버리지는 않으셨겠죠? 어머니 성격이라면 그럴 리가 없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시간이 없어 줄여야겠어요, 어머니. 제가 무사히 지낸다는 사실만 알아주셨으면 했어요. 혹시나 해서 오늘도 생활금을 따로 붙여드립니다. 그분께서 주신 돈이니 너무 놀라지 마세요.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보낸 편지는 전부 불에 태워주세요. 그 누구에게도 말씀하지 말고요. 부탁드려요. 꼭이요. 전부 불에 태워주셔야 해요. 전부 다요.] * * * [이제는 제게 주어진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요. 어머니. 정신없이 그분의 뒤를 쫓는다는 게 벌써 여기까지 왔네요. 사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요. 그분의 말씀을 전부 이해하는 것도 힘들고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런 작은 힘이라도 도움을 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겨요. 그분께서도 제가 변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헤헤. 물론 여전히 ‘아리스 님은 아리스 님이십니다’라는 말씀도 해주셔서 안심할 수 있었죠.] [당연하지만 그분과도 조금 더 친밀해졌고요.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부끄럽지만 그분과 작은 입맞춤을 할 수 있었답니다. 그분이 제게 마음이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실 제 쪽에서 용기를 냈거든요. 아직도 그분의 깜짝 놀란 표정이 잊혀지지 않네요. 그동안의 일이 저를 강하게 만든 것 같아요.] [평소였다면 절대로 그렇게 움직일 수 없었을 텐데…. 헤헤. 아무튼 그분께서도 그렇게 기분 나빠 보이진 않았어요.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셨거든요. 그 이후에는 마법사님께 미움 받은 것 같기는 했지만 저도 더 이상 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어요.] [사실 처음에는 조금 마음에 드는 정도였어요. 그분의 첩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전부였었죠. 그분은 능력도 있고 수려하시니까요. 그렇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같은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동안 제 마음이 점점 커져 감당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어요.] [아. 물론 커진 것은 그분에 대한 마음뿐만이 아니랍니다. 제국을 위하는 제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사명감을 가지게 됐다는 말을 했었나요? 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사명감을 가지게 됐어요. 저는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미천하게 자랐지만 세상에 미천한 삶이란 건 없었어요. 그분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어요.] [제 동생들도 저도 그리고 어머니와 할머님도 모두가 같다고. 황녀님과 저도 똑같은 인간이라고. 아주 예전부터 그분은 이걸 알고 계셨던 거겠죠. 그래서 제게 존대해 주셨던 거예요. 샤를리아와는 다르게 말이에요.] [어머니.] [어쩌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저뿐만이 아닌 저와 뜻을 함께하는 제 동지들 모두가 위험해질 거예요. 그렇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 목숨을 던져서라도 어머님과 동생들이 살기 좋은 제국을 만들 테니까요. 피를 흘려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흘려야 한다고 그분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네. 처음에는 저도 무서웠지만 이제는 무섭지 않아요.] [그분이 희생될 제국민을 위해 흘리신 눈물만큼이나 저도 제 모든 걸 던질 준비가 되어 있어요. 더 이상 그분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절대로.] [네. 절대로. 제 모든 걸 바쳐서라도.] [저는 모든 걸 던질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제가 죽더라도 제가 제국을 위해 흘린 피는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되어 있을 겁니다.] [어머니.] [저는 투쟁할 겁니다. 그 동안의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고 그렇게, 민주주의를 위해. 대의를 위해. 신성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할 겁니다.] [삼 일 후에는 절대로 바깥에 나오지 마세요.]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집에 계세요. 아마 그쪽으로 제 사람들이 갈지도 몰라요. 그들이 어머님과 동생들을 보호해 줄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삼 일 후에는 절대로 바깥으로 나오지 마세요. 절대로요.] [제국의 수도에서 오스칼 올림.] # 286 회귀자 사용설명서 286화 반쪽짜리 혁명(1) ‘시간 한번 빠르네.’ 아니, 사실 조목조목 따지고 보면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체감상으로는 2년 정도가 흐른 것 같은 느낌. 주변의 많은 것이 달라졌으니 이런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아마 이렇게 느끼고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샤를롯트.’ 그녀 역시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 가지를 꼽으라면 당연히 속도였다.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그보다 더 중요했다. 공화국이 개입하기 전에. 황실에서 어떤 대응을 하기 전에. 샤를롯트가 무엇인가를 조금 더 준비하기 전에 터뜨릴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녀 역시 이쪽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당연지사. 서로 그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행동에 맞춰줄 것에 동의했고, 그녀 역시 내 뜻에 따라 움직이기는 것에 동의했다. 암묵적인 동맹을 맺기로 한 것이다. 적과의 동침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애매하지만 예전에 그녀가 말했던 대로 나는 현재 그녀의 배 위에 올라타 있었다. 나는 이방인들과 교황청 그리고 일부 귀족, 그녀는 깨어 있는 시민대표들과 자신의 세력에 속해 있는 귀족들을 규합했다. 그리고 전 대륙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제국민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성한 민주주의에 적혀 있는 사상을 빠르게 전파하는 것은 물론, 본격적으로 그들 안의 열망을 일깨웠다. 아마 혼자였다면 이토록 빠르게 일을 진행하진 못했을 것이다. 제국민들을 계몽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사실상 이방인들이 대륙에 자리 잡은 그 순간부터 이 사상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쪽이 상상하고 있던 것보다 더 빠르게 물살을 타고 있는 상황. 그녀가 동부에서 움직이면 이쪽은 서부에서, 그녀가 남부에서 움직이면 우리는 그 반대에서. 차이점은 온건이냐, 더욱더 급진적이냐. 그것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그녀가 이쪽에 맞추고 있었던 셈이 된다. 샤를롯트 역시 신성한 민주주의를 차용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덕분에 제국민을 규합하기가 더욱 수월했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리라. 어느 정도 사상이 뿌리내린 이후에는 황실 역시 이쪽의 움직임을 눈치채기 시작. 신성한 민주주의를 금서로 지정하는 한편 이쪽의 뒤를 캐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황제가 이 일의 총책임자로 샤를롯트를 임명했다는 점이었다. 총책임자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꼬리가 잡힐 리가 없었다. 한번 웅크리는 시간이 있기는 했지만 혁명의 전초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나와 샤를롯트가 의도하지 않은 수많은 비밀결사가 만들어졌고 이들은 모든 제국민의 계몽하길 바라며 저마다의 활동을 선보였다. 교황청의 바젤 추기경은 차기 교황이 되기 위해 제국민들의 등에 탑승하기로 결정했고, 나와 친분이 있는 일부 귀족들 역시 내 계획에 찬동했다. 귀족들을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틀리면 그들을 제거할 생각으로 임했을 정도. 하지만 황실 자체에 피로감을 느낀 캐슬락 백작과 카트린 공작부인은 결국 내 말을 받아들였다. ‘혁명이 끝난 이후에도 우리의 권력은 유지될 것입니다.’ 신성한 민주주의가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권력을 잃지 않는다. 귀족과 일부 부르주아 계급 그리고 우리 이방인 역시 마찬가지. 오히려 더 큰 권력을 얻게 될 것이란 비전을 제시했고 그렇게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롯트가 원하는 진짜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성에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 이면에 있는 꿀 덩어리에 대해서는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그 와중에도 차기 지도자로서 낙점한 오스칼은 열심히 자신의 책무를 다하기 시작. 일부 집단에게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불리는 이 여성 역시 시간의 흐름을 체감케 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굳이 따지고 본다면 샤를롯트보다는 그녀가 더욱 정신없는 생활을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낱 시녀에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기까지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보다 그녀가 더 열심히 노력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쪽의 말을 제대로 따라준 것이 유효했다. 처음 아리스 시녀를 채택할 때만 해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건만, 그녀는 내가 지정해 놓은 조건에 놀라울 정도로 부합하고 있었다. 슬쩍 창문 쪽을 바라보자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가 시야에 비친다. 짧은 단발에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 하나. 그녀가 배운 것은 교양 검술뿐이었지만 짧은 시간 내에 성취를 이루어냈다. 지니고 있던 재능 이상으로 노력한 덕분.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황급히 뒤 돌아보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사실 표정이나 얼굴 자체는 예전과 별로 다를 게 없다. 그렇지만 묘하게 바뀐 분위기와 눈에서 비치는 감정이 이쪽의 계획이 들어맞았다는 증명한다. “오스칼 님.” “아… 명예주교님. 둘만 있을 때는 아리스로 불러주시기로 하셨잖아요.” “하하. 네. 그러기로 했었죠. 큰일을 앞두고 있다 보니 조금 정신이 없었나 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명예주교님. 모든 게 잘 풀릴 거예요. 생각하시고 계신 일이 잘 되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하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큰 짐을 나누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그런 말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실은 처음 명예주교님이 저를 불러주셨을 때는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지금은 너무 기쁘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사명감도 느끼고 있고요. 네. 정말로 그래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인 걸요.” “아리스 시녀님, 아니… 아리스 님도.” “아뇨. 아뇨! 시녀님이라고 불러주시는 게 더 괜찮아요. 그편이 더 좋아요.” “그렇지만….” “아니, 꼭이요. 둘이 있을 때는 꼭 그렇게 불러주세요. 명예주교님마저 저를 오스칼이라고 부르면 뭔가… 조금… 혼란스러울 것 같아서요.” “이해합니다. 굳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러고 보니 식사는 하셨나요? 하지 않으셨다면 준비를 서둘러야….”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사실 아리스 시녀님이 잘 계시는지 확인하러 온 게 전부라.” “그럼 차라도 대접해 드릴게요!” 제국 민주주의의 상징에게 차를 얻어먹는 기분은 나쁘지 않다. 이래서 아리스 시녀를 미워할 수 없다. 한때 샤를리아의 밑에서 여러 가지 스킬을 갈고 닦은 만큼 향 좋은 차가 등장하는 것은 순식간. 한 모금 들이키는 것만으로도 온갖 피로가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괜찮으신가요?” “물론입니다, 아리스 시녀님. 그러고 보니 계속 바깥을 바라보고 계시던데 혹시나.” “네. 어머님과 동생들이 잘 지내고 있을지 걱정되어서요.” “이미 파란의 길드원들이 보호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약 제가 잘못되더라도 아리스 님의 가족은 꼭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말씀은 삼가해 주세요. 혹시라도 명예주교님이 다치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요. 그럼 이제… 나갈 시간인가요?” “네. 나가시죠, 오스칼 님.” “네, 명예주교님.” ‘귀엽네.’ 입술을 꽉 깨무는 모습이 나름대로 귀엽다. 그렇지만 표정은 점점 진지해지기 시작. 아마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만큼 그녀도 만감이 교차하고 있으리라. ‘힘들었겠지.’ 하지만 그만큼 보람차기도 했을 것이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 표정을 굳힌 오스칼을 보니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잔뜩 긴장하고 있는 막스와 정하얀.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일 설명한 만큼 저들 나름 긴장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이쪽을 힐끗 바라보고서는 볼을 부풀렸는데 아무래도 아리스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은 모양. 물론 정하얀의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겠냐만은 최근 아리스 시녀와 붙어 다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저기압 상태가 조금 길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챙겨줘야지.’ 열심히 노력하고 참아준 만큼 이번 일이 끝나고 그녀를 달래주는 것은 이미 확정된 이야기다. 살짝 손을 흔들어주자 활짝 웃는다. 바로 옆에 있는 박물관 관리인 막스는 자신에게 손을 흔든 줄 아는지 양팔을 들고 폴짝 폴짝 뛰는 중. 준비가 되었냐는 수신호를 보내자 팔로 원을 만든다. 오랜만에 보는 선희영과 꼬맹이 김예리, 황정연 역시 자리해 있는 모습. 김현성에게 불려간 조혜진과 아리스 시녀의 가족들을 보호하러 간 병아리들을 제외하면 파란의 멤버들이 전원 모인 셈이다. 물론 민주투사 바쿠더쿠와 아르기모는 여전히 제국민 사이에 섞여 때를 기다리는 중. 아리스 시녀, 아니, 오스칼이 단상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시작이야.’ 이쪽이 미리 작성해 준 연설문을 보지도 않고 말로 내뱉는 것을 보니 이미 내용을 전부 외운 모양. 저 정도 노력도 하지 않았던 샤를리아가 괜스레 떠오른다. ‘백번 낫지. 훨씬 유능하지. 암.’ 연설 마지막 부분에 집중하고는 싶지만 이쪽 역시 따로 할 일이 있는 만큼 정하얀과 막스가 있는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말을 걸어온 이지혜. 조잘조잘 말을 걸어오는 것이 오스칼과 제국민들의 함성을 뚫고 귀에 들어온다. “이제 시작이네요.” “응. 그렇지 뭐.” “그동안 궁금해서 죽는 줄 알았는데 드디어 볼 수 있겠네. 혹시나 샤를롯트가 제국민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건 아닌지 정말로 궁금했거든요. 그게 가장 중요하니까.” “그녀가 내가 준비한 한 방을 수습할 수 있다면 난 샤를롯트를 신이라고 부를 거야.” “그만큼 자신 있는 거겠죠? 솔직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닌데…. 실현 가능성이 크지는 않죠. 역사적으로 보면 명예혁명이나 무혈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영국에서도 한 번 있지 않았나?” “아아. 제임스 2세를 국외로 망명시킨 그거요? 그게 민주화를 이뤄낸 건 아니잖아요. 권리주의가 장전됐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그리고 그것도 피를 흘리기는 했을걸요? 샤를롯트가 이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델로 삼고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부패하고 무능한 건 물론 독선적인 황실, 종교적인 문제고 섞여 있고… 국민들 역시 불만을 품고 있는 상황.” “세계사는 잘 모르는데….” “몰라도 돼요. 어차피 뻔하니까요. 아주 많이 변질되기는 했지만 들고 일어선 제국민들을 수습하고 그동안 꿍쳐놨던 병력을 풀어 국민들과 함께 들어가 황제를 압박하겠다는 계획이죠, 뭐. 영국의 무혈혁명 같은 경우에는 외부에서 병력이 들어왔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사실 별로 다를 건 없다고 봐요. 피를 흘리기는 흘리겠지만 그래도 최소화할 수 있을 거고요. 좋은 계획이죠. 좋은 이상이고…. 개인적으로는 샤를롯트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사실 존경심마저 든다니까요.” “누나가 그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는데 의외네.” “원래 역사적인 철학자나 혁신가, 이상가들은 그녀 같은 법이예요. 조금 예가 다르기야 하겠지만 공산주의를 세상에 내놓은 이들이나 국가의 체제로 선택한 이들이 멍청해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그 사람들뿐만이 아니죠. 모든 정치 이상가들은 천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에요.” “누나 말이 맞아.”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죠, 뭐.” “그건 나도 알 것 같은데.” “뭘까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야.” “개인적인 생각이라면 오히려 환영이네요.” “다른 인간들도 자신의 이상을 쫒아올 거라고 믿었다는 거.” 샤를롯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더 이상 관심 없지만 그녀가 제국민들과 자신의 캠프에 있는 이들을 철썩 같이 믿었다는 건 조금 가슴 아픈 이야기다. 장담컨대 그녀의 세력 안에서 그녀의 사상에 공감하지 않은 이들이 몇쯤은 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내부 사정이 아닌 내가 탄 배가 어떤 길로 목적지로 향하느냐. 지금까지 배를 운행하고 있던 것은 그녀였지만, 이 순간부터는 내가 하게 될 것이다. 마침 우리의 오스칼이 연설을 한창 흥미롭게 진행하고 있는 상황. 딱 괜찮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하얀아, 막스. 영상 내보내.” 이 좋은 걸 우리만 볼 수는 없다. 창문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커다란 마력 홀로그램. 공중에서 생겨난 화면은 수도에 있는 제국민들이 전부 볼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깜짝 놀란 대중들이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은 아마 오스칼의 얼굴일 것이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이지혜는 눈앞의 영상을 바라보다 막스가 준비하고 있는 홀로그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법 경악한 표정으로 말이다. “저… 저, 저게 뭐예요?” “뭐긴 뭐야. 다음에 내보낼 영상이잖아.” “그건 알고 있어요. 제가 드리는 질문은… 안에 있는 내용이 뭐냐는 뜻이잖아요.” “내가 운영하는 블랙마켓에 들락날락거리는 귀족 나으리들의 명단과 그들의 활약상 모음이지.” “미… 미친. 오빠… 정말로 이거….” “푸흐하하하핫.” “이, 이건 정도가 심한 것 같은데. 이건… 너무….” “왜? 누나.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것 같아?” “아뇨…. …좋네요. 솔직히… 조금 축축해졌어요.” 어디가 축축해졌다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혜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떨렸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당연. 마력 홀로그램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이들의 분노가 폭발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영상을 본 기득권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 287 회귀자 사용설명서 287화 반쪽짜리 혁명(2) -뜻을 함께 해주시는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이렇게는 처음 인사드리는 것 같습니다. 저를 만나신 분들도 계시고 간접적으로 저를 알고 계시는 분들도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오스칼. 신성한 민주주의의 저자이자 부족하지만 시민혁명단의 수장직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과 같은, 평범한 제국민 중에 한 사람입니다. * * * “저… 샤를롯트 님.” “저도 보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게….” “명, 명예주교 측에서 준비한 것 같습니다.” “환상 마법인가요?” “아마 아닐 겁니다, 황녀님. 이런 대규모의 환상 마법을 보인다는 건 설사 대마법사라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어느 정도 준비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건 대체….” “…….” “…….” “영상. 영상이에요.” “네?” “마력으로 이루어진 영상이란 겁니다. 언젠가 이방인들이 사는 도시에 저런 게 있다는 걸 들었습니다. 네. 틀림없어요. 분명히 그럴 겁니다.” “그건… 도대체….” “자세한 설명을 드리기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분명 저걸 어디에선가 내보내고 있는 발신지가 있을 겁니다.” “발신지 말씀이십니까?” “네. 그대는 마법사가 아닙니까, 백작. 어딘가에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수도 내에 있는 마력의 파장을 누군가 꼬아 놓은 것 같아 제 능력으로는 어떻게….” “멈춰야 합니다. 저걸 내보내서는 안 돼요. 절대로. 절대로! 많은 피가 흐를 겁니다. 백작! 빨리 저걸 멈춰야 해요. 멈춰야 합니다. 아아… 이걸 어떻게….” “이미… 느, 늦었습니다. 어떻게 수습 할 수가….” * * *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으셔도 됩니다.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보는 것은 환상 마법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를 평등하게 바라보시는 베니고어 여신님이 저희를 위해 내려주신 선물이며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들을 하나로 묶어 일으킬 수단입니다. 저희가 볼 수 없는 것들을 비쳐주시는 베니고어 여신님의 거울이며 축복입니다. * * * “이기영 명예주교…. 이기영 명예주교는 어디… 어디 있느냐.” “오, 오늘 린델로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 폐하. 잠깐 밀린 일을 하고 돌아오신다고….” “저… 저건 도대체… 지금 이 현상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이가 있으면 당장 불러오라. 아무나 좋다. 아무나….” “오스칼입니다, 폐하. 지금 저 위에 보이는 이가 바로 오스칼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어째서 저자의 얼굴이 하늘에 떠 있는지에 대한 것을 물어본 것이다. 이 아둔한 것아! 궁정 마법사들은 뭘 하는 게냐. 누구라도 저걸 멈추게 하라. 지금 당장!” “폐하. 고, 고정하시옵소서. 지금 궁정 마법사들이 방도를 찾고 있습니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 * *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여러분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판단해 주십시오. 그리고 직접 움직이셔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신성제국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저희를 미천한 핏줄이라며 무시하고 자신들을 고귀하다 부르짖는 귀족들의 진짜 모습이 어떠한지. 이들이 얼마나 지독한지! 여러분이 직접 확인하고 판단하셔야 합니다. 지금부터 저 오스칼이 여러분들께 보여드릴 장면은 다소 충격적이고 잔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며 저희들의 삶 그 자체입니다. 부디 눈을 돌리지 말고 똑바로 바라봐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어떤 곳에서 살고 있었는지 부디 제대로 직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 * * “아주 좋아.” 담담히 입을 여는 아리스 시녀의 모습이 보였다. 잘해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침착하게 분위기를 이끌어 주고 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마력 홀로그램에 당황한 이들을 진정시키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이방인은 막스와 정하얀이 선보인 새로운 기술에 무척이나 놀란 기색이었다. 아리스 시녀가 신의 선물이라고 입을 연 것이 유효했는지 제국민들 역시 빠른 시간 내에 평정을 되찾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화면 안에 선 오스칼은 굳이 다른 주석을 붙이지는 않았다. 자기소개를 하고 담담히 함께해 줄 것을 청한 뒤, 이후에 나오는 장면을 봐주길 종용하고 있었다. 옳은 판단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런 영상에 불필요한 코멘트가 필요할 리가 없다. 앞으로 눈앞에 보일 있는 장면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파괴적이고 위력적일 것이다. 오스칼의 얼굴이 사라진 이후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부패한 귀족들의 단면. 팝콘이 필요할 정도로 상황이 재미있어지고 있었다. 소도시 바인에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는 하이안 남작. 제법 이미지가 좋다고 할 수 있는 대도시 바티칸에 카리브 공작. 높은 세율로 인해 이미 많은 원성을 사고 있는 부쉬 백작. 그 외 많은 이들이 블랙마켓의 VIP들이다. “푸흐하하하핫.” 언젠가는 써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명단. 이런 상황에서 터뜨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처음에는 두려움. 그 다음에는 호기심. 그 이후에는 분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분노하고 있는 이들이 상상된다. 당장 우리와 함께 있는 이들도 손발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상황. 저런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데 화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꺄아아아아악!! 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제발… 제발! 캐슬락 지하에 있는 블랙마켓은 문을 닫게 되겠지만 어차피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곳은 많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제국 내에 있는 대부분의 인간이 청소될 테니 수요도 줄어들 것이다. 타국을 상대로 새로 장사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은 느낌. 사실 모든 귀족이 저런 것은 아니고, 영상으로 비춰지고 있는 모습 역시 약간의 편집과 과장을 거치기는 했지만 대중에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게 마련이다. 차마 영상을 보지 못하겠는지 눈을 돌리는 있는 동지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 -하하하…. 이거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습니다, 공작님. -이곳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백작. -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하하.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농한 번 던져 본 것뿐이니 그렇게 고개 숙일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조금 예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 백작 말이 맞습니다. 정말로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입니다. 제국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하는 만큼 가끔 이렇게 머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요. 이곳도 사실 옛날 같지는 않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위안이 됩니다. -사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작님. 확실히 요즘은 밋밋하긴 하지요. 해서 제 영지에는 따로 공간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공작님께서도… 아니, 제국민에게 존경받는 공작님께서는 힘드시겠군요. -인간 같지도 않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쯧. 이게 다 우리 아들 녀석 때문입니다. 저도 마음 같아선 부쉬 백작 같이… 아! 이건 궁금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부쉬 백작의 영지가 세율이…. -네 높지요. 높습니다. 그렇지만 뭐,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다른 영지에서는 너도나도 이방인들을 들이고 있는데. 사실 제 입장에서는 그들을 도저히 영지 내로 들이기 싫어서 말입니다. 힘만 센 놈들이지 그들 역시 천한 피를 타고난 자들이 아닙니까. 영 마음에 드는 곳이 없습니다. 황제폐하께서도 좀 그렇지요. 그들에게 작위를 내린다 만다 하는 것부터가 이미 저희들에겐 굴욕이 아닙니까. 별 수 있겠습니까. 다른 영지에 뒤처지기 싫으면 영주민들을 쥐어짜내는 수밖에 없지요. 하하하하. 그러고 보니 공작님께서도? -저희 영지는 조만간 개방하게 될 것 같습니다. 백작, 시대의 흐름이 이런데 어떻게 거부하겠습니까. 다른 이들에게 뒤쳐질 수는 없지요. 사실 저도 그들이 전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괜찮은 이들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 -------말입니다. 다른 이방인들답지 않게 제법 좋은 구석이 있더군요. 아주 사람이 된 사람이에요. -아아아아… -------들어봤습니다. 확실히 그런 소문이 있더군요. 저는 애초에 그들과 담을 쌓고 사는 터라… 공작님이 그렇게 까지 말씀하시니 언젠가 한번 일정을 잡아 봐야겠습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라는 이름 정도는 음성 처리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백작. 그렇게 세율을 높이면 말입니다. 제국민들이…. -하하하. 당연히 재고해 달라는 청원이 올라오지요. 뭐, 그런 것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면 그만입니다. 공작님, 어차피 그 미천한 놈들은 개 돼지들입니다. 가볍게 무시하거나 잘근잘근 밟아주면 알아서 조용해집니다. 어디서엔가 들어본 대사를 치는 꼴은 가관. 대본을 줘도 저것보다 잘해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일부 부패한 귀족들이 평소에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잘 보여주는 그림이라 할 수 있으리라. -반발이…. -그럼 더욱더 세게 밟아주면 되지요. 공작님, 이놈들은 말입니다. 마치 잡초와도 같아서 뿌리까지 뽑아내지 않으면 계속 계속 자라납니다. 한 번 밟을 때 제대로 밟아 줘야지요. 애초에 신분 자체가 다르다는 걸 계속해서 인식시켜 줘야 하고 가축 다루듯 다루면 알아서 조용해집니다. 하하하. 어떠십니까 ,공작님 흥미가 있으시면 언제 한번…. -시간이 된다면 한번 들려보도록 하지요. -만약 방문하신다면 최선을 다해서 모시겠습니다. 하하하. 현재 집결해 있는 모든 동지가 저 걸 보면서 분노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영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시야에 비치는 모습들은 가관. 애초에 저것 하나만 준비된 것이 아니다. 한 번 터뜨릴 때 제대로 터뜨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만큼 이 제국에 있는 이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 배가 산처럼 나온 귀족들이 온갖 산해진미를 쌓아두고 먹는 모습은 기본으로 깔려 있다. 굶주린 제국민들을 대비해서 보여주는 연출은 마치 비극적인 독립영화 같다. 아녀자를 희롱하는 귀족. -제… 제발 그만해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아무 죄 없는 이들을 잔인하게 처형하는 귀족.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제발…. 손녀 뻘 되는 이들에게 더러운 짓거리를 일삼는 쓰레기. 가난한 제국민, 차별받고 억압받는 지식인. 몬스터 사냥에 동원된 소년병과 그 최후. 각계각층을 위한 배려도 빼놓지 않는다. 이방인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는 이들이나 교황청에 대해 불만과 폭언을 퍼붓는 이들까지. 애초에 이방인이나 바젤 추기경은 분노가 아닌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겠지만 동기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파노라마처럼 튀어나오는 마력 홀로그램이 저들의 혼을 빼앗기에 충분한 것은 당연지사. 수도 전체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살짝 다가온 이지혜가 조용히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빠, 이거 제국 전체에 송출되고 있는 거 맞죠?” “응. 정확히 말하면 각 본부에서. 다른 지역에 있는 우리 동지들은 이곳의 상황도 같이 지켜보고 있고… 신호탄은 오스칼 님이 쏘아주실 테니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여야지.” “오빠 말이 맞았어요.” “뭐가.” “지금 분위기 보이죠? 샤를롯트가 이걸 진정시킬 수 있다면 저는 그녀를 신이라고 부를 거예요. 진심으로요. 무혈혁명은 이미 물 건너갔어요. 만약 샤를롯트가 이걸 보고 있으면 틀림없이 표정을 구기고 있을 거예요.”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영상은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영상에서 비치는 얼굴은 다름 아닌 제1황녀 샤를리아의 얼굴이다. 미친 광녀의 활약상은 마치 1,000만 관객 영화의 주연배우처럼 스크린을 가득 채우기 시작. 대단한 장면이 너무 많아 편집하는 데도 상당히 애를 먹었다. 시녀의 뺨을 후리는 것은 물론 그들을 모욕하고 사치품으로 몸을 치장한 모습은 누가 봐도 악녀다. 이쯤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과 대사가 나온다.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다시 고개를 들자 꽤나 비위 상하는 표정으로 명대사를 내뱉은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제국민들이 먹을 빵이 없어? 하핫.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뭐 그런 걸 고민을 해? 이지혜 역시 기가 차는지 다시 한번 이쪽에 질문을 던져온다. “진짜 저딴 소리도 했었어요?” “당연히 주작이지. 누나.” 그렇기 때문에 효과가 있다. 저 주작은 역사가 인정한 주작 중의 주작이었으니까. # 288 회귀자 사용설명서 288화 반쪽짜리 혁명(3) “생각보다 빠르게 터지지는 않네요.” “반항하는 방법을 모르는 거야. 무섭기도 하도 분노하고는 있지만 속에 있는 걸 어떻게 터뜨려야 하는지 모르겠지.” “이해는 되지만 조금 섭섭하겠어요?”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그렇게 섭섭하지도 않아. 어느 정도 예상하기도 했고, 다른 세력에 탑승했다고 한들, 지금까지 줄곧 사육당하던 이들이 지들 의지로 울타리에서 튀어 나올 수 있겠어? 아마 신호탄이 터지면 너나 할 것 없이 뛰쳐나올걸? 당장 여기 있는 애들 표정을 봐. 장담하는데 함께 싸웁시다. 이 말 한마디면 모든 게 끝나.” “머릿속에 사상을 우겨넣는 과정이 조금 급하기는 했죠. 뭐, 저도 알고 있어요. 그냥 아쉬움에 한소리 해본거지. 어떻게? 지금 터뜨릴까요?” 조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모든 제국민의 분노가 폭발 직전에 있는 상황. 사실 샤를리아의 명대사만으로도 충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장면인 만큼 조금 멋진 연출이 필요했다. 예를 들자면 민주투사들의 숭고한 희생 같은 게 나와야 한다는 거다. 계획하고 있는 것 중 하나이기는 했지만 그저 신호탄으로 사용하기에는 오스칼이라는 브랜드의 가치가 꽤 대단했다. “잠깐만 기다려. 어차피 아직 연설도 다 안 끝났으니까.” 사실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샤를롯트다. 타이밍은 확실히 나쁘지 않다. 민중을 수습하고 함께 거리 행진을 하기에는 굉장히 괜찮은 시점. 그렇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부적인 문제라도 생긴 모양이다. 샤를롯트의 의견에 찬동하는 깨어있는 귀족들은 여전히 그녀와 함께하겠지만 내가 터뜨린 영상을 보고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심지어는 그녀의 캠프 내에서도 영상에 등장한 귀족들이 있었으니, 지금쯤 그들을 달래려고 진땀을 빼고 있을 것이다. 제국민들의 분노를 수습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과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마찰 정도는, 굳이 미래를 보는 눈이 없어도 예측할 수 있다. ‘내가 급하게 움직인 만큼.’ 그녀 역시 급하게 움직였다. 서로가 피차 부작용을 떠안고 있는 상황. 이지혜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던 바로 그때였다. “모든 제국민들은 반역자의 사탕발림에 현혹되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왕성에서 음성이 증폭된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 계획을 철회하라는 듯 손을 내젓자 이지혜 역시 알겠다는 사인을 보냈다. ‘좋네.’ 이런 썰전도 나쁘지는 않다. 샤를롯트가 먼저 대응해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제국민들을 향해 먼저 입을 연 것은 왕성의 대리인. 같은 값이면 황제폐하가 나오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지만 겁 많은 늙은이가 이런 자리에 직접 나설 리가 없다. 오늘내일 하는 늙은이는 지금쯤 나나 샤를롯트를 애타게 찾고 있을 것이다.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혹시 모를 무력사태를 위해 기사들이 안에서 튀어나왔고 마법사들은 어떻게든 마력 홀로그램을 멈추기 위한 방도를 찾고 있는 게 보인다. 마력 홀로그램을 향해 화살을 쏘는 궁수들의 모습은 가관이다. 반응이 즉각적인 것을 보면 저쪽에서도 위기감을 가지고 있는 모양. 제국민을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커다란 무엇인가가 터져 나온다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 ‘그렇게 무능하지는 않아.’ 병사들을 풀어 거리에 나와 있는 제국민들을 집으로 들여보내려고 하고 있지만 손을 든다고 해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실제로 강제적인 연행도 진행되고 있는지 수도 곳곳에서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 어떻게 위기를 느낀 권력자들의 행동패턴은 지구나 이곳이나 다를 게 없는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다시 한번 말한다. 모든 제국민은 반역자에게 현혹되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모두가 거짓이며 마법으로 조작된 내용이다. 제국민들이여, 그대들이 보고 있는 건 베니고어 여신님이 내리신 축복이 아니라 악마의 속삭임이다. 오스칼은 제국의 반역자다! 그녀와 뜻을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이들과 그녀를 따르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신성제국을 좀먹는 악이다!” ‘슬슬 대응해야지.’ 오스칼 쪽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전이었다. 아리스 시녀로서는 보여주지 않는 잔뜩 성이 난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나라를 좀먹는 것은 그대들이 아닌가! 더러운 황족들, 지금까지 이 제국을 수면 아래로 끌어 내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대들이었다. 하늘 위를 보라. 그대들이 한 짓은 악행에 죽어간 제국민들이 알고 있으며 여신님이 알고 계시다. “어디서 그 더러운 입으로 여신님을 입에 담느냐. 반역자야.” -반역자는 그대들이다. 여신 아래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신의 뜻을 거역하는 바로 그대들이다! 계급을 나누며 차별을 일삼고 미천한 핏줄과 고귀한 핏줄을 구분하는 그대들이야말로 반역자다. 그대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황족이었는지 떠올려보라. 그 고귀한 피들이 행한 짓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라. 혹시라도 말이 막히지는 않을까 걱정한 내 우려와는 달리 오스칼은 따박따박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이지혜가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저건 대본 아니죠? 오빠?” “응. 아니야. 아마 본인 생각일걸.” “쓸 만하네요. 샤를리아보다 더 나아요.” 마침 나도 딱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오스칼은 본인이 먼저 앞장서 황권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훌륭한 그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대들이 있기 때문에 제국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제국민이 있어야 제국이 있는 것이다. “황제 폐하가 있어야 제국이 있는 것이다. 이 반역자야. 지금 네 모습을 보라. 진실된 얼굴은 보이지 않은 채 선동하는 네 모습을 보라. 제국민들이여, 오스칼은 그대들을 위험 속으로 빠뜨리려는 악마다.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절벽 위에서 그대들의 등을 떠미는 사악한 마녀다. 그 누구라도 좋다. 저 마녀를 잡아오는 자는 이유와 신분을 막론하고 작위와 상금을 내리겠다. 마녀는 처형되어야 한다. 처형되어야 해!” -나는 숨은 것이 아니다. 여신의 반역자들이여! 영상을 보내주고 있는 정하얀을 똑바로 쳐다보던 아리스 시녀가 등을 돌린 것은 순식간. 성큼성큼 문 밖으로 걸어 나가려고 하는 것이 보인다. ‘어?’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다. 대본에는 없었던 행동이지만 제국민들 앞에 직접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좋다. 이쪽은 정하얀에게 빠르게 손짓하기 시작. 오스칼이 세상에 등장할 때가 되었으니 모든 제국민이 그녀가 있는 위치를 확인하도록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명예주교님.” “뜻대로 하셔도 됩니다, 오스칼 님.” “네.” 분위기를 잡아주기 위해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깃발을 집어 든다. 이제는 심볼이 되어버린 신성한 민주주의의 로고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오스칼은 그렇게 제국민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선보였다. 제국의 수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꼭대기의 시계탑. 그곳에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아리스 시녀의 모습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충분하다. 멍하니 영상을 바라보고만 있던 제국민들은 어딘가 익숙한 풍경에 너도 나도 그녀가 서 있는 시계탑으로 고개를 돌린다. 점점 고양되는 분위기는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 ‘완벽해.’ 완벽하다. 이 정도 연출이라면 굳이 신호탄으로 희생양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나는 숨지 않는다.” -나는 숨지 않는다. 그녀가 시계탑의 꼭대기에서 내뱉고 있는 말을 여신의 거울이 그대로 비춰주고 있다. 눈앞에 보이고 있는 걸 환상 마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던 이들의 얼굴에 확신이 깃든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시계탑으로 뛰어 들어오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병력들은 그들을 막는다. 여기저기에서는 커다란 소리가 튀어나오고 준비했던 불길이 하나둘 치솟는다. 마법과 화살들이 쏟아지지만 미리 준비한 방어 마법에 의해 차단당한 것은 당연지사. 무서울 만도 하건만 그 사이에서 계속해서 말을 내뱉고 있는 민주투사의 모습은 내가 그리고 있던 그림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숨지 않는다. 여신의 반역자들이여. 나는 이 자리에서 제국민들의 등을 떠미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그들의 앞에 설 것이다. 황제는 어디에 있는가! 숨어 있다고 나를 비난한 그대가 말해보라. 지금 이 상황에서 황제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각성했네!’ 말문이 트였다는 표현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리라. 단언컨대 그녀의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빛나고 있는 시기일 것이다. -제국민이 흘린 피와 땀으로 자신을 치장한 황녀는 어디에 있나. 그대들이 선전했던 신성한 핏줄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그대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게 아니다. 황실의 개들아. 이 잘못된 체제를 만들고 그 뒤편에서 달콤한 독주를 마시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은 것이다. “제, 제국의 2황녀 샤를롯트입니다! 그대들의 열망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침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 급하게 튀어 나왔는지 미처 음성증폭도 하지 못한 채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은 가관. 어울려 주고 싶지만 이미 기차는 떠나갔다. 지금 이 자리에서 행해지고 있는 역사적 그림을 망치고 싶지 않다. “하얀아, 우리 쪽 볼륨 키우고 혹시라도 샤를롯트 쪽으로 가는 음성 증폭 마법이 있으면 전부 차단해. 천관위 님도 함께 부탁드립니다.” “네! 네! 오빠.” 여러 가지 소리에 묻혀버린 샤를롯트의 목소리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심지어 사방에서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으니 여럿 기사들이 뛰쳐나와 그녀를 다시 안쪽으로 들이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보다 제국민들을 사랑하시는 2황녀께서는 이러지 말라는 듯 그들을 뿌리치고 있지만, 이런 위험한 상황에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어떻게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일이 틀어졌다는 건 저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 대신 수도에 울리는 것은 탄력을 받은 우리 오스칼 님의 낭랑한 목소리. -제국민들이여! 다치는 것이 두려워 왕성의 뒤에 숨어 있는 이들입니다. 지금까지 저희를 비천한 핏줄이라 멸시하며 힘과 권력이 제국민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저 권력의 개들의 진짜 모습입니다. 신의 거울에서 비쳤던 것처럼 그들의 관심사는 제국을 통치하고 우리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수탈하고 착취하며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것만이 그들이 원하는 전부입니다. 캐슬락 백작, 카트린 공작 부인, 엘리제 백작 부인 같은 일부 깨어 있는, 시민혁명지지선언문에 함께해 주신 분들을 제외한 이 나라의 모든 귀족은 사회의 암 덩어리나 다름이 없습니다. 시킨 것은 확실히 하는 게 마음에 든다. 스폰서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할 일. 조금 불안해하는 내 인맥들은 아마 지금쯤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이다. 힐끔 곁눈질로 나를 바라보는 오스칼의 얼굴. 지금 시작해도 되겠냐고 질문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말 잘 듣는 건 마음에 드네.’ 샤를리아가 처음부터 그녀 같았더라면 굳이 이런 귀찮은 일을 하지 않았어도 되었으리라. 나는 결국 입을 열었고 오스칼은 내가 말한 것을 그대로 대중들에게 전달했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깃발을 치켜 올리며 자신의 검을 뽑아 들며 그렇게 안에 있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일어 나셔야 합니다! “제국민들을 위한 제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국민들을 위한 제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동지 여러분.”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그 누구보다 제가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제가 먼저 피 흘리겠습니다.” -여러분들보다 제가 먼저 피를 흘릴 것입니다. 대의를 위한 피를, 여러분들을 위한 피를 흘리겠습니다. “깨어나라.” -깨어나십시오! “많은 분들이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많은 분들이 함께할 것입니다. 진실된 신의 뜻을 알아주고 진정으로 제국을 위해 기도해 주시는 교황청과 저희를 지지해 주시는 일부 귀족, 이제는 한 가족처럼 함께 녹아든 이방인들까지 모두가 제국민 여러분들과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투쟁.” -일어나! 무기를 드십시오! 스스로의 권리를 스스로가 되찾으십시오! 친애하는 제국민 여러분. 투쟁의 때가 다가왔습니다! 이제는 싸워야 할 때입니다. “마무리.” -신성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일어나! 싸우고! 투쟁하라! 내 동지들아! 수도 전체에서, 아니, 제국 전체에서. 커다란 함성이, 귀를 울리는 폭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289 회귀자 사용설명서 289화 반쪽짜리 혁명(4) 말 그대로, 혁명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숨어 있던 이방인과 병력들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쏟아져 나왔고 화염 마법이 사방에서 터져 나온다. 시민혁명단은 제국민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고 그들과 함께 불나방처럼 불길 속으로 몸을 내던진다. 다수가 모이면 공포심은 사라지고 터져 나오는 광기는 전염된다. 제국의 수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이 혁명은 스폰서들이 다스리는 영지를 제외한 각 도시의 마력 홀로그램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여지는 중. 타 도시의 시민들 역시 검을 들고 소리를 내지르며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는 게 그다지 이상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하얀아, 상황 어때?” “다, 다른 도시도 전부 비슷한 것 같아요. 오빠 생각대로 됐어요!” 확실히 막스가 관리하고 있는 홀로그램을 바라보자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진다. 오히려 수도보다 더욱더 흥분한 군중들이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고 있는 상황. 실황중계를 해주는 화면을 보자 뭔가 찌릿찌릿한 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코멘트를 달 수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다. ‘개돼지 발언으로 커다란 활약을 보여준 부쉬 백작이 관리하고 있는 중소도시 조지나.’ 투입되어 있는 이방인들은 린델의 가로쉬 앤 캐쉬 클랜.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는 갈오식이라는 놈이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보여주는 모습을 보니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선동 실력도 수준급이라고 할 만한 수준. 나중에 자리를 따로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개돼지가 아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제국의 주인이 될 것이다! -일어나라! 동포들아! 투쟁하고 혁명하라! -우리는 개돼지가 아니다!! 제국의… 주인이 될 것이다!! 단언컨대 이곳보다 열정적으로 혁명에 임하는 곳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억압되어 있는 만큼 터져 나오는 게 커다란 것이다. 슬그머니 바티칸 영지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도 보기 좋은 장면이 그려진다. 대형 길드의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일리다리 길드의 악마사냥꾼 임리단은 본인이 가장 앞장서 민중을 이끌고 있다. 전직의 영향으로 눈에서 초록색 기운을 뿜어내고 있기는 하지만 같은 편이라면 든든할 것 같은 외관이다. -친애하는 동지들이여. 우리들의 손으로 운명을 잡아끌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피하고 있을 수많은 없습니다! -우와아아아아아! -캐슬락 영지에서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흘린 피는 무의미한 피가 아닙니다. 제국을 위해 살아갈 터전을 위해서입니다! 수도에서도 이미 동포들의 총궐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승리가 눈앞에 있습니다! 여러분 싸웁시다! 모든 준비가 되었습니다. 준비가 안 된 것은 바로 저들입니다. ‘저 여자도 괜찮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영지에서 여러 방법으로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괜찮은 지역 같은 경우에는 벌써부터 힘의 방향이 기울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특히나 공화국과 살을 맞대고 있는 쪽은 빠르게 정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해 이방인들과 명예귀족들을 밀어 넣었는데 그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동부는 캐슬락 백작, 카트린 공작부인, 엘리제 백작부인의 텃밭. 가장 커다란 세력들이 함께해 준 만큼 빠르게 정리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조금 힘들어 하는 지역도 보이는 것 같지만 안전한 곳에 있는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바젤 추기경은 물갈이를 시작하고 있을 테고….’ 이단 심문관 헬레나와 제시카 대주교를 포함한 교황청의 인사들을 끌어 들였으니 아마 성공적인 정권교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바젤을 제외한 또 다른 추기경 한 명도 바젤을 밀어준다고 하는 상황. 세 명의 템플러 중 두 명이 우리와 함께하는 셈이니 기분이 더욱더 좋아진다. 바젤 추기경이 교황의 자리에 올라간다면 나 역시 명예추기경에 자리에 오를 수도 있는 만큼 가슴이 선덕선덕해진다. ‘현성이도 잘해주고 있을 거야.’ 아직까지 공화국이 움직이기에는 이른 타이밍. 내부적으로 이 사건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군대를 끌고 오는 것만으로도 삼 일이 더 걸린다. ‘그전에 혁명은 마무리되겠지, 뭐.’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병력을 모두 죽일 필요도 없다. 필요한 건 일부 귀족들의 목. 일반 제국민에게 칼을 빼드는 것을 거부하는 병사들과 마력 홀로그램이 보여준 장면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자신들에게 봉급을 주고 있는 귀족들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제국민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은 샤를롯트의 병력 역시 어쩔 수 없이 이쪽을 따라오고 있으니 이미 혁명은 반쯤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 지금도 충분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대로 불에 타는 장작에 기름을 끼얹어 주고 싶은 것이 나 같은 놈들의 심정. 한 가지 영상을 더 내보내도 나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얀아, 안기모 준비해.” “네? 안기모 씨요?” “지금 여기에서 영상 찍고 곧바로 내보낼 거야. 숭고한 희생 장면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 역할에 민주투사 아르기모가 필요할 것 같거든.” “아아. 네! 안기모 씨! 안기모 씨! 오, 오빠가 불러요.” 이런 종류의 혁명에는 숭고한 희생 장면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는 법이다. 지구에서부터 배우를 꿈꿔 왔던 린델의 안기모는 이미 사정을 전해 들었는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중, 전 대륙에 뻗어나갈 스크린 데뷔다. 본래는 녀석을 희생시킬 생각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리얼한 장면을 내보냈다간 일부 제국민들이 겁을 집어먹을 지도 몰랐으니까. 이들의 희생은 처참하고 처절한 죽음이 아니라 숭고하고 감동적인, 영화 같은 죽음이어야 한다. 내장이 쏟아지고 피가 흘러내리는 장면을 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준비되면 말씀해 주세요. 안기모 씨.” “네. 부길드 마스터. 이거 어떻게… 동선을 짜야 하는지….” “제국 갑옷을 입고 있는 병사들에게 화살을 맞는 장면입니다. 물론 화살은 가짜니 안심하셔도 되고요. 기왕이면 민주투사 아르기모가 혁명에 가담한 소녀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장면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예리야! 너도 이리 와봐.” “나. 이런 거 이제 안 한다고 했잖아. 나도 덕구 아저씨처럼 바깥으로 나갈래. 오스칼 지켜야 한다며.”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해보자. 저번에도 잘했으니까. 이번에도 잘할 수 있을 거야. 두 분 모두 대충 마법으로 위장해 주시고 정확히 10분 후에 큐 사인 들어가겠습니다. 어차피 내보낼 장면은 한 장면뿐이니까 부담 없이 해주시면 됩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정말… 하기 싫은데….” “이번이 마지막이야. 진짜로. 약속할게.” “정말로 이번이 마지막이야.” “응. 그럼 준비해. 애드립 너무 많이 치지 말고. 대본은 여기 지혜 누나가 설명해 줄 테니까.” “응.” 프로 하나에 아마추어 하나였지만 준비가 되는 것은 순식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파란의 길드직원 몇 명이 제국 병사의 갑옷을 입고 등장했고 안기모와 김예리는 시작해도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하기 싫다고 말한 것과는 다르게 꼬맹이 김예리는 뭔가 기대하는 표정이다. 말로는 싫다고 했지만 꽤 즐거운 듯하다. ‘솔직하지 못하네. 꼬맹이가.’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제법 박진감 넘치는 연기가 시작된다. 김예리는 자신의 몸보다 커다란 시민 혁명단의 깃발을 들고 힘겹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지만 눈에 있는 혁명을 향한 갈망은 숨길 수가 없다. 표정 연기가 가히 압권, 내가 다 살이 떨려온다. 어색했던 박덕구 때와는 다르게 두 번째는 완벽한 몰입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연습이라도 한 건가.’ 거울을 보며 연기를 연습하는 김예리는 잘 상상이 되지 않지만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체질이라는 셈이 된다. 침을 한 번 꿀떡 삼켰을 때 김예리의 입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 “신성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투쟁하라! 혁명하라! 모두 함께 싸워 쟁취하자!” 깃발을 들고 뛰어다니는 장면은 그야말로 민주투사의 모습이다. 투입한 엑스트라들이 함께 검을 휘두르고 이 좁은 공간에서 나름대로 멋진 연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활을 든 병사는 그 잔혹하고 비열한 화살을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소녀를 향해 조준했고 민주투사 아르기모의 눈에서는 불길이 타오른다. ‘키야!!!’ 순간적으로 고민하는 아르기모의 표정은 확실히 몰입감이 있다. 바크더쿠와 함께 혁명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아르기모는 대의와 소녀를 지켜야 한다는 쌍방의 감정이 교차한다. “죽어라! 이 더러운 반역자야!!!” 파란의 길드 직원 한 명이 저도 모르게 애드립을 장전했지만 나쁘지는 않다. 비열한 기득권의 더러운 화살이 순진한 소녀를 향해 날아가는 순간 그 앞을 막아서는 것은 우리들의 영웅 아르기모. “커헉!” 푹푹푹! 여러 발의 화살이 안기모에게 박혔다. 안기모의 모습은 제법 멋지게 흔들린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거나 살려달라고 울부짖지도 않는다. 화살이 박힌 곳에서는 영화 같은 피가 흘러내린다. 점점 더 눈빛에서 힘을 잃어가는 아르기모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작은 소녀. “아!” 화면은 다시 아르기모를 비추고 어째서인지 다음 화살은 날아오지 않는다. 뭔가 이상하기는 하지만 지금 이 장면에 누가 그런 개연성을 따질 수가 있을까.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이방인이 그들을 제압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아아아!” “괜찮습니다…. 괜찮… 습니다.” 다급한 김예리의 외침과 죽어가면서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는 아르기모. 화살에 맞은 채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있는 모습은 대놓고 신파적이다. 그렇지만 이런 세상에는 이런 신파가 먹힌다. “일어나야지요. 네. 제 동지들이 함께… 싸우고 있습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이까지…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쯤 되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있었지만 대중들이 이걸 실제상황이라고 받아들일 걸 생각해 보면 용인해 줄 만하다. 여전히 아르기모는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한다. 그 몸을 이끌고 굳건히 서 무기를 들다 그렇게 허물어진다. “내가 흘린 피는… 제국민들을 위한… 자랑스러운….” 중얼거리는 모습.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신성한 민주주의여… 만세.” 그렇게 녀석은 멋들어지게 눈을 감는다. 김예리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있는 상황. 그렇지만 눈물을 닦아내고 민주투사가 가지고 있던 무기를 집어 든다. 심하게 오그라드는 설정이기는 하지만 편집을 거치면 제법 봐줄 만 하게 변신할 것이다. 한손에는 깃발을, 다른 손에는 검을 쥐고 왕성을 바라보며 고함을 내지른다. “컷!” “…….” “…….” “이제. 정말로 안 할 거야.” “우리 김 배우! 연기를 왜 이렇게 잘해? 정말 완벽했어. 안기모 씨 역시 굉장히 멋졌습니다. 막스, 지금 당장 이거 송출해.” “넵!” “그 뭐야.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적당히 노이즈 넣고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넵!” 묘하게 기뻐 보이는 표정의 김예리와 성공적인 데뷔를 치룬 안기모는 위장을 풀고 다시금 이방인들을 지원할 준비를 마친다. 그사이에 그들이 찍은 영상은 약간의 편집 과정을 거쳐 전파를 타고 안 그래도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작에는 다시 한번 기름이 쏟아진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신성한 민주주의여! 만세! 만세!” “베니고어 여신님이 함께하신다! 일어나 투쟁하라!” “아르기모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마라!! 깃발을 들고 일어나자 민중들아!” 왕성으로 향하려고 하는 이들과 그걸 막으려고 하는 이들의 싸움. 바크더쿠의 보호 속에서 민중과 함께 투쟁하고 있는 오스칼을 보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기 시작. 제법 정체되고 있는 타이밍. 이럴 때 든든한 지원군이 등장하는 것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갈 준비합시다.” 황제와 샤를리아의 통수를 강하게 후려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290 회귀자 사용설명서 290화 반쪽짜리 혁명(5) 사방이 불길로 둘러싸여 있었다. 여러 비명이 터져 나왔고 입술을 꽉 깨물며 흘러내리는 투구를 고쳐 잡을 수밖에 없었다. 자꾸만 시야를 가리니 불편하다. 숨소리가 더욱더 거칠어지는 것은 물론 입에서는 괜스레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제기랄. 제기랄….” “발사! 발사하라! 저들은 제국민이 아니라 마녀에게 홀린 반역자들이다! 화살을 멈추지 마라! 절대 황성으로 들어오게 하지 마라! 손에 인정을 두지 마! 저들을 이곳으로 오지 못하게 하라!” ‘반역자. 반역자야.’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쉽사리 활시위가 당겨지지가 않는다. 아마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닐 것이다. 바로 옆에 있는 동료 역시 화살을 당기지 못하고 있었다. 제발 맞지 말라고 기도를 드리며 하늘로 쏘아 보내는 게 고작이다. ‘제기랄! 제길! 씨발!’ “하늘을 바라보지 마라! 악마의 속삭임이다. 베니고어 여신의 축복이라는 것은 거짓된 이야기다! 저건 여신의 거울이 아니야! 오스칼의 말은 전부가 거짓말이다! 그들의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믿지 마! 오직 황제 폐하만이 옳다! 당황하지 마라! 당황하지 마!” 거침없이 소리를 내지르지만 백인장 역시 얼굴에 불안함이 감돌았다. 당황하지 말라고 연신 입을 열고 있는 것을 보니 어쩌면 본인에게 전하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마 자신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악마의 속삭임은 무슨!’ 정말로 황성에서 말한 것처럼 저 것이 악마의 속삭임이라면 지금쯤 교황청의 이단심문관들이 저들을 막으러 나왔어야 했다. 심지어 일부 사제들 역시 제국민들과 함께하는 상황. 이방인 사제뿐만이 아니라 실제 교황청에서 기도를 드리는 사제들 역시 함께하고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교황청에서도 저들이 틀리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만약에 교황이나 다른 추기경들 역시 눈앞에 있는 여신의 거울을 확인했다면 어떤 이가 선이고 어떤 이가 악인지 제대로 인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저것은 절대 거짓이 아니다. 실제로 부쉬 백작이 다스리는 영지에서 나고 자란 자신은 그곳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굶주린 제국민과 자신의 배를 채우기 바쁜 귀족. 오늘 하루도 제발 잘 지나가기를 걱정하며 살아야 했고 매일 밤 다른 사건이 생기지 않기를 베니고어 여신께 기도 드려야 했다. 어째서 우리의 삶은 이토록 비참한가. 정말로 베니고어 여신님이 계시다면 어째서 우리들을 돌보아 주지 않으신가에 대해 매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맞는 거야.’ 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여신을 반역한 귀족과 황족들이다. ‘여신의 아래 만인은 평등하다.’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처음부터 귀한 자와 귀하지 않은 자를 구분하셨을 리가 없다. 여신의 거울은 여신이 민중에게 내린 깨달음의 성서이며 무기이다. 깨어 있지 않은 모든 민중을 계몽시키기 위해 내리신 장치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민중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개돼지로 여기는 것은 물론 수탈해야만 대상으로만 보고 있는 귀족. 제국민의 세금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황족.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고? 무슨… 미친 소리를 하고 자빠진 거야.’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아직도 북부나 서부의 외곽에 있는 도시에는 빵은커녕 풀죽도 먹지 못하는 민중이 수천, 수만이다. 수도로 오기 전에는 케이크 같은 것은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지금 자신이 받고 있는 봉급으로도 사려면 각오를 해야 하는 종류의 사치품이다. 언제나 항상 민중을, 제국민을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황족들은 자신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귀족들이, 황족들이, 이 제국의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 단면을 본다면 이상한 일도 아닐 것이다. 청렴하고 사치를 하지 않기로 유명한 제2황녀 샤를롯트 님 역시 평민의 기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을 품위 유지비로 사용한다. 단언컨대 황족이 가지고 있는 금고를 해방한다면 수만 명의 제국민이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 “일어나야 합니다! 함께 일어납시다! 이 제국은 황족의 것이 아닙니다. 베니고어 여신님의 것이며 모든 제국민의 것입니다!” “오스칼 님을 따르자!” “신성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깃발을 든 채 민중을 이끄는 오스칼의 모습은 매번 듣던 모습과는 다르다. 그녀의 인상은 마치 자유의 여신처럼 강렬했다. 사제들이 내보내는 축복과 신성력 속에서 빛을 받고 있는 황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 그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저도 모르게 하늘 위를 바라보자 여신의 거울에 새로운 이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 시야에 비친 것은 아직 어린 소녀였다. 커다란 깃발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는 소녀. 조금 일찍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면 아마 딱 저 정도의 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착잡한 마음에 다시금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인 것은 자신과 같은 갑옷을 걸치고 있는 제국의 병사.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여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소녀를 향해 시위를 당기고 있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에서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안, 안 돼!” ‘어린 아이까지 쏘는 건가…!’ 자신 역시 제국의 병사라는 입장에 있다. 하지만 저런 소녀를 향해 시위를 당길 이유가 무어 있단 말인가. 입술을 깨문 입에는 힘이 들어가고 손은 부들부들 떨려온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녀의 앞을 가로막은 한 남자 때문에 소녀가 목숨을 건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지만 화살에 맞은 남자는 비틀거리며 땅바닥에 쓰러지기 시작. 천천히 눈을 감는 모습을 바라보니 괜스레 가슴이 먹먹해진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신성한 민주주의여… 만세.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제길.’ 지금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모든 민중이 싸우고 있다. 심지어는 이전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귀족들 역시 시민혁명지지선언문을 낭독하고 있고 제국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이방인들 역시 여신의 뜻에 하나가 되어 성스러운 검을 들고 있다. 어째서 저들의 편에서 함께 검을 들지 못하고 저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야 하는지. 어째서 우리들을 괴롭히고 억압한 이들을 지켜야 하는지. 그 어떤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마.” “선배님.” “마이크,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다른 생각은 하지 마. 우리는 운이 없었던 거야. 어쩌다가 저들의 반대편에 서게 됐을 뿐이야. 지금 우리가 이대로 등을 돌린다면 제국민이 아니라 뒤에 있는 기사의 검에 맞아 죽을 거다. 너뿐만이 아니야.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적어도 몇 천은 넘을 거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게 우리 같은 놈들의 삶이다, 마이크.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거…. 그게 우리 삶이야. 나라고 좋아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것이 아니야.” “여신님이 천벌을 내릴 것입니다, 선배님. 죽어서도 편해지지 못할 거예요.” “아니. 여신님도 용서해 주실 거다. 그래… 분명히 용서해 주실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그렇게 등을 두드려 주실 거다.” “그렇지만….” “…….” “…….” 콰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앙! “멈추지 마라! 손을 멈추지 마!” “여러분들도 제국민입니다! 함께 일어나 싸웁시다! 그대들의 검이 향해야 할 곳은 같은 제국민이 아닙니다! 황실의 병사, 기사들이여. 같이 일어납시다. 같이 싸웁시다!” “아아아악! 방어 마법을 준비해!” “적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라! 지금 당장은 폐하를 지키는 것만 생각해야 한다. 폐하를!” “그대들의 황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겁니까! 제국의 병사들이여!” “마녀다! 오스칼은 마녀야! 차라리 귀를 막아라! 귀를 막아! 제국의 병사들이여! 황제 폐하의 검이 되기로 충성을 맹세한 사실을 잊지 않았다면 화살을 퍼부어라! 악마에게 홀린 이들을 구원하라!” “사제! 사제를 불러!” “우리는! 그대들을 향해 검을 드는 것이 아닙니다! 무기를 내리세요! 무기를 내리고 여신의 뜻을 가슴에 품고 싸우세요!” “황제 폐하를 지켜!” “제가 여러분들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뒤섞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폭음과 비명들이 계속해서 섞여서 들려오고 있다. 백인장의 말 그대로 차라리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거야.’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황제 폐하를 위해 싸우기로 여신님께 맹세했다. 그 맹세를 저버릴 수는 없다. 선배의 말대로 이곳에서 죽더라도 여신님은 이해해 주실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고 잘했다며 등을 두드려 줄 것이다. 입가가 일그러지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황제가 황성을 빠져나간다!” ‘어?’ “황제와 샤를리아 황녀다! 황성을 빠져나가고 있다!” ‘그… 그게 무슨….’ 다시 한번 고개를 위로 올리자 여신의 거울이 비추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빠르게 황성의 뒷문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모습은 가관. 그들뿐만이 아니다. 황성에 머물러 있던 일부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숨어 있던 것으로 모자라 싸움이 벌어지려고 하는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 나쁜 개새끼들! 이 더러운 놈들아! 네놈들이 그러고도 제국을 다스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냐!” 저게 바로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대상이다. 이 커다란 제국의 절대자로 군림하던 이의 모습이다. 눈에 불꽃이 튄 것은 당연지사. 저도 모르게 화살을 조준해 여신의 거울에 비친 황제에게 쏘아 보냈을 때였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에 맞은 화살이 맥없게 바닥으로 떨어진 것. “어….” “저게… 뭐야….” 커다란 그림자가 점점 수도에 드리우는 것이 보인다. 방금 전까지 볼 수 있었던 여신의 거울은 무언가 거대한 물체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마치 밤이라도 된 것처럼 잠깐 동안 해를 가린 생명체의 모습은 가히 압권. 어떻게 저렇게 거대한 몸을 가진 이가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다. “아아아… 아아….” 저게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이야기 속으로만 내려오던 존재. “진짜… 진짜 있었어.” 주변에 있는 다른 병사들 역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기 시작. 콰드드드드득! 콰지지지지지직!! 병사들을 그대로 지나친 이후, 거대한 발톱이 황성에 박힌다. 후드득 후드득 황성의 파편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 거대한 생명체는 황성의 위를 자신의 둥지인 양 점거하기 시작했다. 그워어어어어어어! 피부가 진동해 올 정도로 거대한 소리가 땅을 울리고 그 하울링에 시끄러웠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드래곤.’ 어째서 저런 생명체가 이곳에 있는지는 뻔할 뻔자. 용에게 선택받은 이방인. 제국 8좌이며 신성제국의 명예주교.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드래곤의 머리 위에 작은 인간이 뿔을 잡은 채로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딜 그리 바삐 가십니까, 황제 폐하.” # 291 회귀자 사용설명서 291화 반쪽짜리 혁명(6) “어딜 그리 바쁘게 가시고 계십니까. 황제폐하.” ‘나이스야.’ 무척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나도 모르게 기분 좋은 미소가 그려지는 것은 당연지사. 황제와 귀족들에게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으리라. ‘도망치고 있었네.’ 황제 쪽을 잘 캐치해 준 정하얀에게도 상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다. 역사적으로 봐도 국가적 위기를 맞이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도망친 것은 언제나 기득권이었으니까. 담담하게 최후를 맞이하거나 끝까지 백성들과 함께하는 이들은 손에 꼽힐 만큼이나 적다. 당연하지만 저 우둔한 황제와 적폐축제를 벌이는 귀족들이 그런 아름다운 선택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한 집단의 수장이 안전해야 한다는 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 행동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한 것은 온전히 그들의 책임. 여신의 거울이 비추고 있는 황제를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병사들의 표정에는 이미 불신이 가득했다. ‘타이밍도 나쁘지 않고.’ 멍하니 디아루기아를 바라보며 하나둘 무기를 떨어뜨리는 모습은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 사실 드래곤은 무적이 아니다. 몸 상태가 성치 않은 상태로 싸우기는 했지만 실제로 캐슬락에 모인 이들은 디아루기아를 죽기 직전까지 밀어붙였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면 그녀의 아이를 인질로 잡은 악당 덕분에 몇 시간 동안이나 샌드백을 두드렸을 뿐이지만 그래도 승리라면 승리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거다. 드래곤의 단단한 가죽도 마력을 밀어 넣은 마법이나 검을 맞으면 뚫리게 마련이다. 기본적인 저항력이 강하기는 하지만 드래곤 역시 체력의 한계도 있고 내구의 한계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가 아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상징성이 더욱더 중요하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 모양인지 속으로 말을 걸어오는 디아루기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진의 한가운데에 있는데… 정말로 이걸로 괜찮은 겁니까?] ‘물론. 애초에 제대로 싸우려고 했으면 멀리서 브레스나 쏘아대면 되는데 뭐 하러 여기까지 들어왔겠습니까? 자잘한 공격은 우리 쪽 마법사들이 보호해 줄 겁니다. 굳이 지금 여기서 인간들을 밟아 죽일 필요도 없고 적당히 폼 잡으면서 소리나 지르시면 됩니다.’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뭔가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라….] ‘착각입니다, 디아루기아. 구경거리가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겁니다. 그러니까 마력 같은 것도 팍팍 집어넣어서 그워어어어 한 번 더 울어주시면 됩니다. 혹시 뭐 피어 같은 거라도 사용하실 수 있으시면 해주시고요.’ [약속은 지키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어딘가에 등장하는 투명한 드래곤은 아니지만 아무튼 간에 디아루기아는 다시금 힘차게 울부짖었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 그 소리를 듣고 일부 병사들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 미리 이야기를 해놨던 시민혁명단 쪽까지 그 여파가 미칠 정도였으니 굳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한 설명은 필요가 없다. 당연하지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민중이나 병사뿐만이 아니다. 황제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중. 재미있었던 것은 늙은 영감의 얼굴에 한 줄기 희망이 솟아나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나를 구원자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나와 디아루기아가 이 폭동사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분명. 이쪽이 아직까지 자신의 통수를 후려갈긴 줄 모르고 있으니 나라꼴이 이렇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오오. 이기영 명예주교! 드디어 와주었군. 드디어 와, 와주었어!” “…….” “내 자네가 올 줄 알고 있었지. 충성스러운 자네가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 당장. 지금 당장 저 반역자들을 모두 죽여 버리게…. 다, 당장!” “…….” “이… 어리석은 반역자들. 허… 허헛. 그게 드래곤인가 보군. 믿음직스럽네. 명예주교. 아암. 너무나도 믿음직스럽구만.” “…….” 황제뿐만이 아니다. 함께 있던 귀족들 역시 아이돌이라도 만난 삼촌 팬들처럼 열렬한 응원을 내보내고 있다. 크게 소리를 내지르고는 않지만 마치 로미오를 만난 줄리엣 같은 눈빛을 보내고 있는 샤를리아의 모습은 가관. 그렇지만 굳이 그녀와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 “명예주교님! 하하하핫! 오실 줄 알았습니다! 저 더러운 반역자들을 지금 당장 죽여 버립시다!” “명예주교님! 명예주교님! 기다렸습니다!” “어서! 저들을 쓸어버리게! 명예주교! 저 악마들을 지금 당장 몰아내야 하네!” 애초에 이방인들 역시 이 혁명에 가담했다. 어째서 내가 자신들의 편이라고 여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이리라. 나라도 황성에 자리를 잡고 제대로 포효하고 있는 드래곤을 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가열 차게 돌아가는 행복회로를 부수고 싶어진 것은 당연. 잠깐 정적이 찾아온 장내에 이쪽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의 아군이 아닙니다. 하핫.” “어?” “저 역시 시민혁명단의 일원이자 오스칼 님을 따르는 제국민 중 하나라 이겁니다. 폐하.” 믿기 싫다는 얼굴. 저런 표정을 보는 것이 제일 재미있다. “자, 장난은 되었네… 명예주교. 허… 허허… 내가 이거 명예주교를 너무 섭섭… 하게 한 모양이구만. 그, 그래! 무엇이 문제였나. 명예주교. 여, 역시 북부에 영지를 준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구만….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네.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말해보게나. 내,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걸 주겠네! 명예주교!” “하하하. 제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폐하.” “그, 그럼 무엇을 원하는 겐가. 내 자네의 말이라면 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네.” “폐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셔도 제가 원하는 건 이루어질 겁니다. 폐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나를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배신감을 느끼게 해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분이 좋다. 숨을 크게 들어 마신 이후에 커다란 목소리를 내뱉는 것은 당연. 정하얀의 음성 증폭 마법이 날아 들어왔고 이윽고 내 목소리는 다시금 수도를 커다랗게 울리기 시작했다. 여신의 거울도 나와 디아루기아를 비추고 있으니 아마 전 제국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으리라. “저 모습을 보십시오! 제국의 병사들과 황제를 따르는 기사들이여!” “명, 명예주교….” “그대들이 지키자고 했던 황제의 모습을 그 눈에 똑똑히 새겨 보십시오! 저게 바로 그대들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키자고 했던 구 제국, 기득권의 실체입니다. 그대들을 희생양으로, 버린 말로 전장에 내몰아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목숨을 부지하려는 이들입니다! 저것이 과연 제국에 어울리는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그게 무슨…. 명예주교!!” “제국에 필요한 것은 제국민을 착취하고 자신들의 안위를 챙기는 이가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도 먼저 앞장서서 그대들을 위해 싸우는 이들입니다!!” 딱 적당한 타이밍에 절묘하게 카메라가 오스칼 쪽으로 돌아간다. 땅바닥에 뒹굴었는지 흙먼지는 뒤집어쓴 것만 같았고 부서진 갑옷사이에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머리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맺힌 오스칼의 얼굴은 그야말로 내가 이전에 말했던 지도자의 모습에 어울린다. 다시 한번 손짓하자 정하얀의 카메라는 황제 쪽을 비추기 시작. 잔뜩 겁에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은 오스칼의 모습과 대비되었다. 아마 저 황제를 위해 싸우는 이들은 대부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게 내가 충성을 바친 대상이구나.’ 현자타임이 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무기를 버리십시오! 제국의 병사들이여! 무기를 버리고 우리와 함께 싸우십시오! 그대들 역시 제국의 일원이고 우리와 함께할 자격이 있습니다. 여신의 거울이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느 쪽의 편에 설지에 대한 판단은 여러분이 직접 하셔야 합니다. 모든 것은 베니고어 여신님의 뜻입니다. 여신님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저! 이기영 명예주교가 여러분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바젤 추기경님과 많은 사제님들! 신성기사단이 역시 저희와 함께할 것입니다! 추악한 기득권의 편에 서겠습니까. 아니면 신성한 민주주의에 품에 안겨 영광스러운 여신의 성전에 함께하시겠습니까!” 슬그머니 선희영 쪽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여기저기에서 신성력이 뿌려진다. 이쪽과 함께하고 있는 모든 사제는 물론 이방인들마저 다함께 신성력을 뿌려대니 그 모습 또한 장관이다. “여신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신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저희는 지금껏 그 말씀을 잊고 살아왔습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지만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여신님께 죄를 저지른 것은 저들의 탓입니다. 베니고어 여신님의 뜻을 반역한 저들을 몰아낸다면 우리는 스스로 여신님께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제국민 여러분! 성전에 함께 하십시오! 여신님에게 대항하지 마시고 여신의 검이 되십시오!” 찬송가와 기도회라도 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천추의 한이다. 그렇지만 효과가 없을 리 없다. 신성력에 둘러싸여 찬란한 빛을 내 뿜고 있는 시민혁명단. 숨기 급급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제국의 병력. 병사들은 하나둘 무기를 버리고 갑옷을 벗기 시작하고 제국의 편에 섰었던 사제들 역시 진영을 바꾸기 시작한다. “저,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저 역시 여신의 편에 서 검을 들겠습니다.” 백인장이나 일부 기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장관이네. 장관이야.’ 지금까지 여러 태세전환을 봐왔지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은 유래 없는 대규모 태세전환이다. 제국민의 99.9%가 베니고어 여신님의 신자. 종교와 이념을 섞어놓는 게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저 더러운 기득권들의 목을 치고! 제국민을 위한 신성한 민주주의를 되찾아오는 것만이 우리의 죄를 회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러부운! 민주투사 아르기모의 희생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함께 갑시다!” “이, 이기영 명예주교오오오오! 샤를롯트는 어디에 있느냐! 샤를롯트는! 당장 저… 저! 커… 허어어억!” 항상 개미만 한 목소리로 이쪽을 짜증 나게 만들었던 황제의 고함소리는 가관. 뒷목을 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다리가 풀렸는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져 버린다. 샤를리아는 믿기 힘들다는 얼굴과 이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귀족들을 밀치고 자신의 얼굴을 내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가 황제는 버려도 자신을 버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이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명예주교님이 저를 버릴 리가 없습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 저도 함께 있습니다! 저 샤를리아입니다! 샤를리아입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과 사랑을 속삭였던 샤를리아입니다. 함께하자 약속을 드렸던 샤를리아입니다!” 사랑을 나눴던 기억은 없다. 자신의 목소리가 닿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이미 여신의 거울은 그들을 비추고 있지 않다. 대신 다시 한번 나를 비추고 있었고 다시 한번 오스칼을 비춰주고 있었다. 미디어라는 것이 이래서 무섭다. 이미 제국민과 혁명단은 흥분할 대로 흥분한 상황. 황성으로 들어가는 문을 지키던 병력은 반절 이상이 태세전환을 마쳤고 이미 시민혁명단은 황성으로 침입하고 있다. 안에 있는 여럿 귀족들이 피를 흘리는 것은 이미 예정된 이야기. 물론 나와 디아루기아는 굳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일은 해결되어 있을 것이다. 갑작스레 지금 황제를 잡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눈에 보이는 건 아직까지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는 샤를리아의 얼굴. ‘쯧.’ 황제는 이미 실신하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라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이 느껴졌다. “샤를롯트 황녀 전하 역시 우리 시민혁명단을 지지해 주고 계십니다!” 나름의 폭탄 발언이다. 나만 원망 받는 것은 조금 억울하기도 했고, 혹시라도 어딘가에서 숨어 있을 샤를롯트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민중은 소리를 내질렀지만 황제와 샤를리아의 표정은 전력으로 일그러지는 중. “커허어어억!” 발작이라도 온 것처럼 경기를 일으키는 황제와 비명을 지르는 샤를리아. “샤를롯트! 샤를롯트! 너였구나! 너였어. 네가 명예주교님을! 네가!”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놓치기 싫은 종류의 가족 드라마다. ‘쯧쯧. 콩가루도 이런 콩가루가 없구만….’ # 292 회귀자 사용설명서 292화 반쪽짜리 혁명(7) 물론 그 콩가루에 이쪽의 지분이 몇 퍼센트 정도 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없다. 사실 저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이제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 일이 마무리되고 있는 지금도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다. 황권은 어차피 박살 났다. 만에 하나 이 혁명이 완성되지 못하더라도 땅에 추락한 황권을 다시 하늘 위로 올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말 그대로 이번 일이 실패할 가능성은 제로. 질질 끄는 힘 싸움 기간이 제법 길어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기존 기득권들이 보여준 흥분한 모습은 미묘한 위치에 있었던 이들의 마음을 돌리기에 충분했다. 내가 만약 제국의 병사였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태세전환 버튼을 눌렀으리라. 이제 저들에게 남은 것은 진심으로 황제를 모시는 충신과 몇몇 기사 그리고 결국에는 여신의 편에 서는 것을 선택하지 못한 병사가 전부. 제국 기사단의 빅터하르트 영감이 어떻게 움직일 건지에 대해서 조금은 걱정되기도 했지만 별 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을 보니 희라 누나가 잘 막아주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흘러가는 상황을 보면 굳이 희라 누나를 보낼 필요도 없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정도였다. ‘이번에도 그 영감은 선택하지 않았을 거야.’ 그가 지키는 게 제국인지 아니면 저 늙은 황제인지 본인 역시 혼란스러울 것이 분명하다. 반역자라는 이름의 대다수의 제국민에게 그가 검을 휘두르는 장면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가 황제에게 검을 휘두르는 장면도 상상하기 힘들다. 이번에도 영감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것이다. 그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휘두르는 것을 무서워하니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당연. ‘똑똑하다고 해야 하나, 멍청하다고 해야 하나.’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 빅터하르트는 멍청이 중의 멍청이다. 황성의 아래에서는 계속해서 고함과 비명이 들려오는 중. “여신의 반역자들을 찾아라! 여신의 반역자들을 찾아내! 왕성 안을 전부다 뒤져!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분명히!” “시녀들은 죄가 없습니다! 죄 없는 이들을 해치는 것은 여신님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했듯이 그들 역시 우리와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 미친 반역자들이! 무릎을 꿇어라! 다,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할까! 더럽고 미천한 평민들이 어딜 감히! 나에게 손을 대는 것이냐!” “살려주십시오. 제발… 제가 잘 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이단 심문관들을 무얼 하고 있는 게냐! 당장 여신의 반역자들이 악마와 결탁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않고!” “끌어내라! 모두 끌어내!”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섞여서 들려온다. 그야말로 집단 광기나 최면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 여전히 오스칼은 민중을 이끌고 있었고 왕성 안에 있는 죄 없는 이들을 보호하는 한편, 숨어 있는 귀족들을 색출해 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이단심문관들도 출동하는 것을 보니 이미 교황청 내부에서 펼쳐진 바젤 추기경의 일 역시 잘 마무리된 것 같았다. 이미 제국민들이 수도의 뒤편 입구까지 봉쇄하며 조여 오고 있으니 황제와 샤를리아는 이미 잡힌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안 그래도 여신의 거울이 죄 많은 이들을 계속해서 비추고 있는 상황이니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브레스라도 한 번 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푸흐하하하하핫.” 정리하자면 웃음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라는 거다. 그 와중에 나를 빤히 바라보는 정하얀의 표정이 보인 것은 당연지사.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신난다는 듯이 시야에서 사리지는 모습이 보였다.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제1황녀에게 향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 방금 전 사랑을 나누고 어쩌고 입을 털어 댔으니 속으로 쌓인 것을 풀러갔을 것이다. ‘승리네.’ 슬그머니 디아루기아에서 내려오자 이쪽으로 오는 반가운 얼굴들이 시야에 비쳤다. “아이고, 바젤 추기경님!” “이기영 명예주교!” “어떻게?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바젤 추기경님.” “아암. 덕분일세! 명예주교. 잘 해결되고말고! 조금 가슴 아프기는 하지만 여신님의 새로운 뜻이니 어찌하겠는가. 이것도 전부 여신님을 위한 일이니 기뻐해 주실 걸세.” “아암. 그렇고말고요. 여신님께서도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여 주실 겁니다, 추기경님. 하하하하. 그나저나…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됐다면 지금부터는 바젤 추기경님이 아니라 바젤 교황님이라고 불러야 되겠군요. 이거 부럽습니다, 교황님. 조금 더 여신님께 가까이 다가가신 것이 아닙니까. 하하핫.” “아직 즉위식도 하지 않았는데 교황은 무슨! 허허허. 뭐 곧 그렇게 될 것 같네만… 그런 이기영 명예주교야말로 명예주교가 아니라 명예 추기경이라고 불리게 되는 것 아닌가?” “네? 그게… 무슨….” “하하하.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괜찮네, 명예추기경.” “아니 바젤 추기경님… 너, 너무 갑작스러워서 잘….” “사실은 이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네, 명예추기경. 교단에 아직까지 전례가 없기는 하지만 차기 교황인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 데 감히 누가 내 말에 토를 달겠는가. 하하. 사실은 명예추기경이 아니라. 베니고어 교단에 추기경으로 이기영 신도를 올리고 싶었지만 딱딱한 내부 규정도 있고 또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너무 억압되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 이 정도밖에 해줄 수가 없었네.” “아… 바젤 추기경님…. 저한테는 너무 과분한 자리입니다.” “과분하긴 무슨! 이기영 명예추기경이야말로 이 자리에 합당한 사람이 아닌가! 내가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말이야!” “저야 항상 여신님을 섬기는 것밖에는 하는 일이 없습니다, 바젤 추기경님.” “바로 그 점이 내가 명예추기경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야. 하하하. 사람이 욕심이 없어! 욕심이! 어떻게 이렇게 욕심이 없는 사람이 다 있나. 하하하하. 어디 이기영 명예추기경 같은 이방인이… 아니, 사람이 흔한가! 이기영 명예추기경이야말로 여신님께서 내리신 복일세!” “과, 과찬입니다, 교황 성하.” “하하하하. 그런 인사는 되었네, 명예추기경. 그 호칭은 즉위식이 끝나면 하도록 하세나. 하하하. 아! 그리고 명예추기경이라고는 해도 추기경으로서 누리는 혜택은 모두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 놓을 테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게.” ‘나이스! 나이스!’ 속으로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겉모습으로는 이러실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치고는 있지만 누가 이런 자리를 마다하겠는가. ‘명예추기경이야.’ 수많은 특권은 물론, 3인의 템플러가 이기영이라는 개인의 안전에 반응한다. 신성제국의 숨기고 있었던 비밀병기 중에 하나가 이쪽의 그림자 무사가 되는 것이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라는 게 올바른 표현이리라.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바젤 추기경님. 그러고 보니 제시카 대주교와 헬레나 이단심문단장은….” “아! 제시카 대주교는 왕성으로 들어가 여신의 뜻을 실현시키는 이들을 돕고 있고 헬레나 이단심문단장은 아직도 교황청에서 기존의 죄지은 자들을 처단하고 있네만…. 실은 나 역시 자리를 지켜야 하지만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드래곤과 함께 온 것을 보고 바삐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네. 하하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저런 초월적인 생명체의 선택을 받았다는 건….” “모든 게 여신님의 듯이지요. 하하. 뭐 별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확실히 너무 빨리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교황청에서는 아직도 일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헬레나가 마무리하고 있다고 하니 안심하고 나올 수 있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왕성 안에는 아직도 한창 드잡이 질이 진행되고 있는 도중. 아마 이쪽과의 온도차가 꽤 심각할 것이다. 사실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런 자리에서 차까지 마시는 건 눈치가 보인다. 슬그머니 병력에 휩싸여 다가오고 있는 이들이 다시금 시야에 비친다. 눈에 마력을 집어넣으니 눈에 보이는 건 시민혁명 지지선언을 해주신 우리 쪽의 귀족들. 일부는 한숨 돌렸다는 표정으로 일부는 입꼬리를 올리며 다가오고 있다. 저들 역시 우리가 승리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카트린 공작부인! 엘리제 백작부인!” “이기영 명예주교님! 아! 바젤 추기경님도 계셨군요.” “오오. 이거 참 오랜만입니다. 카트린 공작부인.” “바젤 추기경님도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하하하. 계몽한 민중들로 하여금 여신님의 새로운 뜻을 설파할 수 있게 된 날입니다. 얼굴이 좋은 게 당연하지요. 그러고 보니 이기영 명예주교와 이야기를 나누러 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야기들 나누시지요.” “아뇨. 괜찮습니다, 바젤 추기경님. 말씀대로 좋은 날인데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요? 이기영 명예주교님께는 사실 감사 인사를 드리러 온 것뿐이라 어디로 떠나시면 제가 더 부담스러워요. 함께 계시죠.”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바젤 추기경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는 황권과 갈라져서 싸우던 교황청은 옛말. 새 시대가 찾아온 만큼 굳이 서로 이빨을 보이며 으르렁거릴 필요가 없다. 카트린 공작부인을 위시한 귀족들과 바젤 추기경의 교황청은 그 누구보다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나 역시도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말을 이었다. 훈훈한 분위기는 더욱더 훈훈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좋다. 아직 시민혁명단이 열심히 싸워주고 있는 와중에 승리의 축배를 드는 모습이 조금 적폐세력 같기는 하지만 사실 별로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제국의 다음 기득권이라는 건 은연중에 확정된 사실이다. “하하. 카트린 공작부인도 참…. 감사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제가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게 맞습니다.” “아니에요, 명예주교님. 저희 동부 귀족들, 아니, 이제는 귀족이 아니죠. 참… 아무튼 명예주교님께서 저희를 신경 쓰지 않으셨다면 저희 역시 여신님의 성전에 서지 못했을 거예요. 명예주교님께서 저희에게 해주신 일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겁니다. 당시에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게 한 점에 대해서도 사과드리고 싶네요. 워낙 민감하고 막중한 사안이라.” “당연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카트린 공작부인. 오히려 저야말로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하고요. 동부 귀족 여러분들께서 함께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일이 이렇게 잘 풀리지 않았을 겁니다.” “아뇨. 오히려 저희야말로 제국민들과 뜻을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다만….” “하하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트린 공작부인. 시민혁명 지지선언에 함께해 주신 귀족 여러분들은 따로 의회에 자리를 마련해 두겠습니다. 아니지. 제가 마련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 제국민 여러분들이 마련해 주실 겁니다. 하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다시 한번 인사드릴게요, 명예주교님.” “엘리제 백작부인도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다 민망해 집니다. 하하하.” 대조적이다. “꺄아아아아악!” “아아악!” “아파… 아파! 살려줘! 살려줘!”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여신을 배반한 반역자들을 단 한 명도 놓쳐서는 안 된다!” “민주투사 아르기모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마라!” “신성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여신님을 위하여!” 바로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이곳에서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은 확실히 대조적이다. 내가 이 그룹에 속해 있다는 거에 쾌재를 부르고 싶은 부분. 조금 양심이 찔리기야 했지만 사회란 건 어차피 이런 법이다. “그럼 슬슬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디로….” “하하하. 이번 일을 제대로 마무리 하셔야죠. 공작부인! 바젤 추기경님도 함께 가시죠. 영광스러운 제국민의 승리입니다. 이런 날 추기경님이 빠지면 되겠습니까.” “이거 참….” “네. 함께 가요, 추기경님. 제국민들에게 인사를 해두셔야죠. 이제는 교황 성하가 되실 분인데.” “큼. 그럼 그렇게 합시다. 위대한 여신의 군대가 승리했으니 당연히 축하를 해주어야지요!” 말 그래도 이제 막 자리를 옮기려 했을 때였다. 제법 가까운 곳에서 또 다른 집단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 것. 일그러진 저 얼굴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슬쩍 손뼉을 친 것은 당연지사. 짝짝짝 박수 소리가 들리자 반사적으로 손뼉을 맞부딪치는 동부의 귀족들의 모습도 시야에 비쳤다. “하하하하. 이번 혁명에 숨겨진 일등 공신이 아니십니까. 샤를롯트 전하! 하하하하하. 그리고 우리 혁명단을 지지해 주신 귀족 여러분들! 참으로 감사합니다. 샤를롯트 전, 아니 아니. 이제는 황족이 아니지요. 샤를롯트 님!” “당… 당신….” “자자자. 함께 움직이시지요! 제국민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공에 대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자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주먹이 시야에 비쳤다. # 293 회귀자 사용설명서 293화 반쪽짜리 혁명 (8)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히 보인다. 쌍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뻔뻔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따지거나 한마디 하고 싶은 얼굴, 그렇지만 다가오는 바젤 추기경과 카트린 공작부인을 보고서는 그대로 입을 닫아버리는 게 시야에 비쳤다. 사실 그녀가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것 역시 방금 전 이쪽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아직까지 이 불길에 휩쓸릴까 전전긍긍하며 숨어야 했으리라. “하하하. 저도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샤를롯트 님이 이번 일의 숨은 공신이셨나 봅니다.”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됐어요. 황녀 전하.” 당연히 따봉을 받을 만하다. 단언컨대 나 혼자 움직였다면 절대로 이렇게 빠른 시간에 혁명을 완성할 수 없었으리라. 슬그머니 입을 열자 다시금 이쪽으로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보인다. “말씀을 드리지는 못했지만 사실 샤를롯트 님이야말로 이 혁명의 1등 공신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신성한 민주주의를 함께 퍼뜨려 주시고 또 여러 가지 방향에서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지요! 커다란 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민들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신다고 하니 다른 황실분들 역시 샤를롯트 님 정도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마 그랬더라면 민중들이 궐기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 “하하하.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샤를롯트 님. 아무래도 우리 샤를롯트 님께서 감격에 겨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꿈에도 그리시던 혁명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만하지요. 아! 그리고 2황녀 전하를 따르시는 귀족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이리로 오시지요. 사실 시민혁명지지선언문에 함께 해주시지는 못하셨지만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함께 했다는 사실은 모든 제국민들이 알아 줄 겁니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고 있는 일부 귀족들이 보였다. 카트린 공작부인과 엘리제 백작부인 역시 다른 귀족들의 손을 잡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중, 처음에 조금은 불안해했던 귀족들은 어느 순간부터 인가 샤를롯트 진영을 벗어나 이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느 쪽이 대세인지를 벌써부터 파악한 것이다. ‘그래야지.’ 정말로 샤를롯트의 뜻에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이들은 아직까지 그녀와 함께하고 있었지만 단순한 숫자 채우기나 개인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던 이들은 벌써부터 태세전환 버튼을 눌렀다.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자꾸만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었지만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그녀가 무언가를 따질 수 있을 리가 만무. 아마 자신보다는 자신의 뒤쪽에 있는 귀족들을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쪽의 말 한마디면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와 함께한 귀족들까지 제국민들의 심판을 받는다는 걸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하하. 조금 웃으셔도 됩니다. 샤를롯트 님 조금 피가 흐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민중의 승리가 아닙니까.” 속을 긁으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지는 않지만 내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슬그머니 악수를 청하자 내 손을 꽉 쥐는 꼴은 가관. ‘아오 아파.’ 그녀의 심정이 어떤지를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하하하. 이거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샤를롯트 님과도 친분이 있을 줄은 몰랐네만…….” “대단한 친분은 아닙니다. 바젤 추기경님. 같은 뜻을 향해 달려가다 보니 어떻게 연을 맺게 된 것이지요. 샤를롯트 님께서도 여신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아주 각별합니다.” “그건 잘 알고 있네! 샤를롯트 님이 아주 큰 결단을 내렸구만. 쉽지 않을 결정이었을 텐데…….” “그만큼 제국민들과 여신님을 생각하시고 계시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하하. 자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제가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성난 민중이 보일 수도 있으니…… 아마 저와 함께 계시면 안전할 겁니다. 샤를롯트 님.” “…….” “너무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녀님. 뭐 이 정도가지고 배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샤를롯트 님이 제게 해주신 것들이 진짜 배려이지요.” 찍소리도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상한 통쾌함이 밀려들어 온 것은 당연지사. 실실 웃는 내 얼굴에 펀치라도 한 번 먹이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그녀는 지금 철저히 을의 입장에 있다. 아마 속으로도 내 의도가 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리라. 정확히 말하면 어째서 자신을 살려두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이 당연, 지금까지 같이 활동해 왔다고는 하지만 확실히 나와 샤를롯트는 이번 혁명을 분기점으로 다른 노선을 타기 시작했다. 내 입장에서 더이상 샤를롯트라는 인물은 필요가 없다. 김현성이 내게 한 부탁을 알 리가 없는 그녀는 지금쯤 머리를 굴리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래. 내가 널 왜 살려두고 싶겠어.’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나오는 것은 혁명 이후의 뒷정리와 수습에 대한 것이 전부일 터. 그렇지만 그 일은 그녀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 ‘아니지. 그건 아닌가.’ 대다수의 귀족들이 죽었으니 혼란을 빠르게 수습할 수 있는 인물도 필요하다. 오스칼과 시민 혁명단의 간부라고 할 수 있는 이들도 있기는 하지만 며칠 전까지 업무에 업자도 모르는 이들이 한 나라를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다. ‘샤를롯트 진영의 귀족들도 같이 움직여야겠네.’ 그게 맞다. ‘살리기를 잘했어.’ 샤를롯트를 살린 것은 어디까지나 김현성의 부탁 때문이었지만 이쯤 되니 그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 황실이 제국민에게 주권을 되돌려 주는 그림도 그릴 수 있으니 어떻게 생각해도 샤를롯트의 존재는 신의 한 수다. 여러 가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도 여기저기에서는 비명 소리들이 들려온다. 대부분이 적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비명 소리. 나는 커다란 감흥이 없지만 그녀는 그 소리를 듣는 게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아. 저기 여신의 거울을 보게나! 이기영 명예추기경. 악독한 황제와 사치밖에 모르는 1황녀가 드디어 여신을 따르는 군중들에게 사로잡혔나보군. 쯧쯧. 참 경우가 없어. 경우가. 어떻게 한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는 황제가 자신을 지키는 이들을 두고 도망칠 수가 있는지…… 쯔읏. 그렇지 않습니까, 카트린 공작부인.” “네. 바젤 추기경님. 황실의 사람들은 원래부터 자신들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어요. 아. 오해하지 마세요. 샤를롯트 님을 염두에 두고 한 소리는 아니니까요.” 때마침 여신의 거울에서도 시민 혁명단이 황제와 그 일당들을 처리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샤를리아의 상태가 제법 괜찮은 걸 보니 정하얀은 한발 늦은 모양. 그렇지만 빼액 빼액 소리를 지르는 꼴은 아직 여전하다. -샤를롯트…… 샤를롯트 이 더러운 년! 모든 게 네년 탓이다. 모든 게! -……. -이거 놔라! 이거 놔! 나는 제국의 황녀다! 감히 네깟 놈들이…… 네깟 놈들이! -……. -이거 놓으라고 하였다! 당연하지만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동부 귀족들의 표정은 싸늘하다. 마를린 영애에게 뜨거운 차를 끼얹은 걸 아직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저 사람들도 참 무서운 사람들이야.’ 이쪽과 한편이라는 게 다행스럽다. 아무튼 간에 영상에 비치는 샤를리아를 기점으로 비명 소리 대신 함성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혁명단에게 질질 끌려오고 있는 기존 기득권들의 모습은 나름대로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 누가 봐도 이번 게임은 시민 혁명단의 승리다. 저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그나마 남아 있던 저항세력들도 빠르게 정리가 되어 있었고 백기를 들거나 무기를 버리고 투항을 선택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민중의 승리입니다!” “제국민의 승리입니다! 저희 시민 혁명단의 승리입니다!” “베니고어 여신에게 축복이 있으라!”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튀어나오는 한편. “저 죽일 년!” “당장 저 더러운 여신의 반역자들의 목을 쳐야 합니다!” “죽여라! 죽여!” 한 번 더 피를 바라는 이들은 광기에 잠식되어 소리를 내지른다. 감격적인 승리에 눈물을 흘리는 이들의 모습도 보이고 여신께 기도를 올리는 자들도 보인다. 누가 봐도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신의 거울은 다시 한번 오스칼 쪽을 비춘다. 이쪽에서 차기 지도자로 낙점한 만큼 그녀의 홍보는 선택이 아닌 필수. 여전히 오스칼의 모습은 숭고해 보인다. 신성한 민주주의에 깃발을 들어 올리고 여러 가지 상처를 내버려 둔 채로 혁명단을 지휘하는 모습은 확실히 아름답다. ‘키야…… 사람 하나는 잘 뽑았네.’ 본래는 희생양으로 쓰는 것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제국이 그리고 있는 이상 그 자체다. 똑바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오스칼의 입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은 순식간. -투항하십시오! 아직까지 베니고어 여신님의 반대편에서 이자들을 위해 저항하고 있는 제국민 여러분들은 무기를 버리십시오! 더 이상의 피를 흘리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제국민들의 승리입니다. 터져 나온 환호성. 그야말로 제국이 떠나갈 듯이 울리는 환호성이다. -네. 그렇습니다. 제국민들의, 시민 혁명단 여러분들의, 민중들의 승리입니다! ‘좋네, 좋아.’ -여러분들의 흘린 피로 일구어낸 승리입니다. 여신님의 승리입니다! ‘아주 좋아!’ -그렇지만 여러분, 이 승리는 저희들의 힘만으로 일구어낸 것이 아닙니다. ‘물론, 물론, 그래야지.’ -우리 시민 혁명단을 지지해 주시는 모든 이방인과 그 이방인들의 중심에 서 계신 제국 8좌 여러분들, 또 한 시민 혁명단을 지지해 주신 일부 귀족 여러분들 역시 오늘의 승리를 함께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지! 고거지!’ -교황청의 바젤 추기경님과 또 제국을 위해 커다란 결단을 내려주신 샤를롯트 님 역시 오늘의 승리에 주역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말 잘한다! 우리 아리스!’ -우리 시민 혁명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해 주신 그분들도 이 자리에 함께할 자격이 있습니다! ‘바로 그거야.’ 슬슬 올라갈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함께 자리에 있는 얼굴에 자부심이 깃드는 것은 당연지사. 함께 해주신 시민 혁명단 여러분들은 어느새 우리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 오스칼의 적절한 선동과 지원이 빛을 발한 것이다. “명예추기경, 이제…….” “아아. 함께 올라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전에 보는 눈도 많으니 입고 있는 옷들도 대충 찢고 흙먼지도 조금 묻히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함께 싸웠다는 인상을 남겨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본디 대중들이란 건 이런 모습에 환호하는 법입니다.” “아 맞네요. 이기영 님의 말이 맞아요. 확실히 저희 옷만 너무 깨끗하면 조금 이상해 보이겠네요.” “자자. 제가 조금씩 들 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샤를롯트 님도 이리 오시지요. 원래 이런 건 보여지는 모습이 더 중요한 법입니다. 하하하하하.” 이쪽이 조금 손을 쓰기 시작하자. 확실히 이곳에 있는 모두가 격전의 투쟁을 함께한 것 같은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오스칼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는 와중에도 환호성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누가 봐도 완벽한 제국민들의 승리. 그렇지만 단상 위에 올라갈 수 있는 이들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이쪽이 꼽아놓고 뽑아놓은 시민 혁명단의 간부님들과 설 줄을 잘 선택한 우리 기존 기득권 여러분들. 이방인들과 일부 교황청의 인사.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대중은 개 돼진데 뭐.’ 이런 종류의 혁명은 본디 미디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푸하하하하핫! 우리들의 승리입니다! 제국민 여러분들!!” 그 말 그대로였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294 회귀자 사용설명서 294화 반쪽짜리 혁명(9) 뒷정리는 내 생각보다 더 빠르게 진행됐다. 민중들은 제국의 신 기득권으로 자리 잡은 우리들에게 열렬히 환호했고 시민혁명단은 오늘의 승리를 기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오스칼의 말대로 민중의 승리였고 제국민의 승리였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그들의 생각에 초를 치는 선택지는 없었던 것이 당연. 대다수의 민중이 이 혁명을 자신들이 이루어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내가 지향하는 바였다. ‘그게 좋지. 그게 좋아.’ 어떻게 생각해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상황. 곧바로 단두대를 가지고 와 여신의 반역자들의 목을 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는 있었지만 혁명단의 간부나 귀족, 특히나 샤를롯트는 그런 야만스러운 일처리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처리는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이루어졌어야 했고 또한 인도적으로, 민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표면적으로는 정당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거다. 물론 이 재판은 신 기득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겠지만 이번 정권은 무언가 다를 거라는 희망을 심어주는 게 중요했다. 당장 단두대에 목이 날아가든 며칠 후에 목이 날아가든지 간에 어차피 결과는 같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가 처형을 당하고 어떤 이가 축배를 드느냐’ 였다. ‘승자의 편에 선다는 건 달콤하지.’ 샤를리아나 황제는 어쩔 수 없었지만 줄을 잘못 탄 대다수의 귀족 역시 목이 댕겅 날아가게 생겼다. 사실 이번 혁명에서 그나마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샤를리아를 중심으로 한 능력 없는 쓰레기들을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샤를롯트 역시 이 의견에는 반박하지 못하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피가 흐르기야 했지만 제국민을 착취하고 수탈하던 귀족들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직 혁명이 완전히 마무리 되지 않은 도시들이 있지만 늦어도 오늘 새벽, 아니면 내일 아침 즈음에 점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제국의 암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한꺼번에 도려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제국민들 좋고, 나도 좋고, 모두가 윈윈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싸구려 술을 들이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즐거워진다. 슬그머니 옆자리를 차지한 이지혜도 입꼬리가 사정없이 올라가 있는 걸 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나쁘지는 않아.” “오빠.” “응?” “한참 즐거운 시간에 미안하긴 한데, 잠깐 일 이야기 좀 해도 괜찮죠? 지금 당장 처리해야 되는 일이 몇몇 있어서요.” “물론이지, 누나.” “음…. 일단 황성에 보관해 놓은 곡식이나 재화 문제예요.” “중요한 건 따로 체크해서 보관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해도 될 것 같아. 품목별로 분류해서 정말로 이쪽의 도움이 될 것 같은 물건들은 미리 보관해 두고….” “으음… 그럼 오빠 말대로 재화들이랑 황성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것들은 일단 킵하고 곡식들은 전부 개방하는 게 좋겠네요. 당장은 승리에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래도 조금 남을 것 같은데….” “그럼 귀족들이나 조금 챙겨줘. 서부나 남부 귀족들도 잔뜩 쌓아두고 있을 테니 당장 모자라지는 않겠지, 뭐. 그보다 밖은 어때? 처리는 잘 됐어?” “안 그래도 시체 옮기느라 바빠요. 서둘러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죽었네요.” “별 수 없지. 황성이 보유하고 있는 기사나 마법사도 호구가 아니니까. 그나마 희라 누나가 빅터하르트 영감을 붙들고 있어줘서 다행이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상황이 조금 더 힘들어졌을걸. 그 할아버지가 전선에 나선다고 해도 제국민을 베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영감은 제국의 상징 중 한 사람이니까.” “그렇긴 하죠.” “아. 그리고 사망자들은 전원 국립묘지에 안치해 줘, 누나. 황성 쪽 불필요한 공간 싹 밀어버리고 구석 쪽에 민주투사 국립묘지 하나 만들어 놓는 것도 좋겠네. 추가로 우리 민주투사 아르기모랑 바크더쿠 무덤도 잊지 말고. 조금 중요한 인물들은 비석이라도 좀 큰 거 세워주고.” “그것까지는 너무 힘든데…. 일 너무 떠맡기는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바쁜데….” “나도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이 있다니까.” “글쎄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은데… 한가하게 술이나 마시고 있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잖아요.” “이게 다 사회 생활이라니까. 아마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본격적으로 바빠지게 될 거야. 원래 이런 건 시작하는 것보다 뒷처리 하는 게 더 어려우니까.” 그 말 그대로. 사실 신경 쓸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재산피해를 최대한 줄이려고 하기는 했지만 제국 전역에서 민중들이 들고 일어선 만큼 그 피해 액수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당장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개인 재산과 황성에서 쌓아두고 있던 재화 그리고 교황청의 성금 등으로 버틸 수는 있었지만 생산시설 자체가 망가져 버린 도시의 경우에는 문제가 조금 더 심각했다. 쓸 만한 기사들이 죽었다는 것 역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부분. 기사 하나를 만들기 위해 들어가는 재화를 생각해 보면 그 피해가 막중한 셈이다. 첫 등장 빼고는 안전한 후방에서 편안한 생활을 즐긴 만큼 실제로 일어나는 전투현장을 자세히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전투가 끝난 이후의 제국의 모습은 확실히 처참했다. 단칼에 썰려나간 제국민들도 많이 보였고 미처 마법으로 보호하지 못한 이들이 완전히 타버린 모습도 종종 보였다. 사실 그들보다 더 처참했던 것은 여신에게 반기를 든 황제의 병사들. 마지막 열차에도 탑승하지 못한 이들은 보는 내가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끔찍하게 죽어 있었다. 그만큼 민중의 분노가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이리라. 물론 이방인 중에서도 사망자가 나오기는 했다. 이름난 기사나 마법사들을 상대하기 위해서였으니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는 했지만, 제국 8좌나 린델의 갈오식, 임리단 같은 네임드들은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만약 황제가 도망가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방영되지 않았더라면 전투가 조금 더 길어져 더 큰 전력 피해가 생겼을 수도 있을 것이리라. 사실 이런 내부의 문제 같은 경우에는 시간이 지나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다. 이런 걱정 아닌 걱정은 이런 내부의 문제로 일어날 외부에 문제에 있다. ‘공화국, 왕국 연합, 이종족 왕국.’ 외세세력이 혁명에 숟가락을 올리거나 혼란을 틈타 공격해 들어오는 것은 방지하기는 했지만 현재의 신성제국은 전력이 깎였다면 깎였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왕국 연합 쪽에서 이 혁명을 어떻게 생각할지, 공화국은 갑자기 바뀐 정권에 어떻게 반응해 올지, 이종족들은 그들의 사절단을 보내올 것인지가 초유의 관심사였다. 대륙에 떨어진 묵직한 한 방. 모르긴 몰라도 지루했던 대륙의 정세를 뒤흔들기에 충분하리라. 긍정적인 방향인지, 부정적인 방향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이지혜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것이 보였다. 어차피 그녀 나름대로 정리할 일이 있었겠지만 갑작스러운 손님의 등장에 잠깐 동안 자리를 피해준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샤를롯트 님.” 묘하게 달아오른 얼굴.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조금 취기가 올라온 것 같았다. “자리를 옮겼으면 합니다. 조금 조용한 곳으로요.” 대놓고 취한 것 같은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는 건 사실이었지만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 쪽은 정하얀이 보고 있을 테고 박덕구 역시 나를 신경 쓰고 있을 테니 안전은 보장된다. ‘이 여자가 갑자기 칼침을 날려 올 리도 없고.’ 뒤통수를 거하게 맞기는 했지만 생각이 있다면 그런 짓은 해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파티에서 숙녀를 에스코트 하는 건 신사의 기분이다. 살짝 손을 내밀자 꺼림칙한 표정으로 이쪽의 손을 잡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지난 번 악수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실려 있는 모양인지 그녀에게 내민 손이 아프다. 발걸음을 옮겨 거대한 창문을 열자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만한 발코니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한쪽에 자리를 잡았고 나 역시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밀어버리지는 않겠지.’ 내가 한 짓이 있으니 자꾸만 무서운 생각이 든다. 하지만 조용히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나를 죽이기 위해 이곳으로 부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어째서 저를 살리신 겁니까.” 야밤에 대담이라도 하자고 부른 것 같은 느낌. 마침 심심하던 차였으니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물론 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에 대한 답은 서지 않았지만 적당히 대답하는 것 정도는 어떻게든 할 수 있다. ‘김현성이 너 살리래’라는 대답은 정답이 아니다. “샤를롯트 님이 제게 했던 말과 비슷한 이유일 겁니다. 당시 제국에는 대중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하. 딱 그런 이유입니다. 굳이 척을 질 이유도 없고요. 아. 그게 정답이라면 정답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대답을 바꾸겠습니다. 제가 당신과 굳이 척을 질 이유가 없었다는 게 이유입니다.” “굳이 척을 질 이유가 없다니….” “함께 혁명을 향해 달려온 동료가 아닙니까. 물론 당신과 제 방식에는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둘 모두에게 이상하는 결과가 만들어 졌습니다. 제국민은 승리했고 기존 기득권과 적폐세력은 힘을 잃었지요.” “그리고 새로운 기득권과 적폐세력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죠. 당신, 그리고 당신과 함께한 사람들이 말입니다.” “원망하는 말투지만 그냥 웃으며 넘기겠습니다. 샤를롯트 님, 만약 이 혁명이 무혈혁명으로 완성되었다고 하더라고 새로운 기득권들과 새로운 적폐세력이 자리잡는 것은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신 휘하에 있는 귀족들이 당신과 같은 꿈을 가져 당신 곁에 있는 게 아니니까요. 물론 정말로 당신과 같은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이들이 한두 명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 당신 캠프에 있던 대다수의 귀족이 권력을 놓는 걸 선택하진 않을 겁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녀 역시 내 말에 공감하고 있는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이건 마약이나 다름없어요. 누군가의 위에서, 민중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은 마약이나 다름없습니다. 샤를롯트 님 같은 숭고한 이상가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제 말에 공감할 겁니다.” “그래서 민중을 죽였군요. 당신이 마약이라고 부르는 그 권력 때문에 수많은 제국민과 죄없는 병사들이 죽어야 했던 거예요.” “민중들은 제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그들이 원하는 가치를 위해서 싸운 것이지요. 민주투사들의 숭고한 희생을 의미 없다고 표현하시면 제국민들이 퍽이나 좋아하겠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가치를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제국민들을 세뇌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날조된 정보를 풀고 그들을 선동하며 벼랑 끝까지 몰아붙인 겁니다.” “제가 몰아붙인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귀족과 황족들이 저지른 짓입니다. 날조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신의 거울이 비추고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에 근거한 내용입니다, 샤를롯트 님.”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이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발코니에 있는 테이블을 쾅하고 내려치자 금이 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상당 수준의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실제로 저런 모습을 보니 조금은 무섭다. 그렇지만 이쪽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샤를롯트가 정말로 원하는 그림이 뭔지는 알고 있었지만 내 욕심 이전에 반박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반박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정말로 명예혁명이 일어났었다면… 지금과는 많은 게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장담컨대 상황이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적어도 수많은 피가 흘러내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니, 그것 이전에 이런 여러 가지 상황에 직면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기존에 있던 생산 시설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이고 병력을 그대로 유지하며 타국의 개입에 저항할 수 있었을 겁니다. 왕국 연합에게 위화감을 심어주지도 않았을 거고 많은 제국민이 가족을 잃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눈앞에 보이는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으리라는 의견에는 공감할 수 있지만, 부작용이 없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건 의미 없는 죽음이 아닙니다, 샤를롯트 님. 절대로 의미 없는 죽음이 아니에요. 제국민이 피를 흘리고 제국민들이 직접 들고 일어났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만약 당신이 개입했다면 이 나라의 제국민들은 평생을 수동적으로 살았을 겁니다. 다음에 또 이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다시 한번 당신 같은 사람이 도와줄 거라고 생각해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그건 비약입니다.” “비약이 아닙니다, 샤를롯트 님. 당신은 알 수 없겠지만 이는 이방인들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학습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족속입니다. 지배자도 그렇고 피지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지배자들은 지배자를 자신의 손으로 한 번 끌어내려 봐야 해요. 당신 같은 이들의 도움 없이. 자신들의 왕을 죽여 봐야 합니다. 그게 역사적 학습입니다, 샤를롯트 님.” “인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뇨. 인간은 멍청합니다. 모두가 당신 같이 이상을 바라보고 사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학습해야 알아듣는 인간들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도움이 될 겁니다. 많은 피가 흘리기는 했지만 이건 틀림없이 큰 교훈이 되었을 겁니다. 이후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을 두려워할 거고 피지배자들 역시 자신들이 지배자를 끌어 내려 그들의 목을 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겁니다. 샤를롯트, 당신은 이전에 대중의 눈치를 보는 정치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죠. 장담컨대 지금부터 총대를 멘 이들은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을 겁니다. 반쪽짜리 이기는 하지만 저는 제가 만든 결과물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생각합니다. 저는 양심적인 사람이고 제국민을 수탈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승리는 제 승리가 아닌 제국민의 승리로 기억될 거고 이 역사는 영원히 제국민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겁니다.” 내 말을 듣고 다시 한번 입을 열어오려고 하는 샤를롯트가 시야에 비쳤다. 틀림없이 반박하고 싶을 것이고 반박할 말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화를 더 나눈다면 밑천이 털린 것 같은 느낌.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자 입을 다물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더 이상의 썰전이 의미 없다고 판단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마!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드리겠습니다.” “네.” “당신이… 이방인들의 나라는….” “네. 확실히 표면적으로는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나라가 맞습니다.” “그곳은… 그곳은….” “아아아. 무슨 질문을 하실지 알 것 같군요. 뭐…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것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 “여기든 거기든 어차피 기득권이라는 놈들이 하는 짓은 똑같습니다.” 산타클로스가 있을 거라고 믿는 소녀의 꿈을 부수기는 싫었지만 현실은 잔인한 법이다. 푸욱 고개를 숙인 샤를롯트의 뒤로하고 적당히 발걸음을 옮기자 나를 맞이하러 온 정하얀과 카스가노 유노를 볼 수 있었다. 모두들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괜스레 생각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모든 걸 잊게 해줄 것이다. 각자의 방식과 각자의 방법으로 누구는 기쁨을 나누고, 누구는 후회를 곱씹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기득권들은 그 자리에 있을 거고 언제나 그렇듯 민중들 역시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 295 회귀자 사용설명서 295화 시간이 흘렀다(1) [신성제국의 역사는 제국력 1093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막을 내렸다.] [황실과 일부 귀족들의 패악질을 참지 못한 민중들의 뜻이었고, 이단과 배교자, 반역자들을 처단하고자 했던 베니고어 여신님의 뜻이었다. 혁명이 완성된 11월 9일로부터 정확히 일주일간 반역자들에 의한 재판이 시작되었고, 별개로 일주일이 지난 시점인 23일, 시민혁명단에 의해 신민의회라는 기관이 만들어졌다.] [신민의회는 제국민들의 대표로 선꼽힌 200인의 구성원이 헌법과 인법을 재정하거나 통상 국정운영을 논의하는 것에 의의를 둔 기관이다. 시민혁명 지지선언을 함께한 42인의 귀족들과 60인의 이방인 그리고 시민혁명단을 구성했던 일반 민중 98명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새로 출범한 신성민주교국의 위대한 첫 번째 발걸음이었다.] [이들의 첫 번째 의제는 다름 아닌 배교자들의 처우였는데 교황청은 시민혁명단의 뜻을 존중해 이들의 재판을 민중에게 양도했다. 신민의회에서는 역사적인 첫 투표가 이루어졌고 찬성 299표 기권 1표로 반역자들의 처형이 결정. 29일을 끝으로 황실의 마지막 핏줄인 제2황녀 샤를롯트를 제외한 모든 황족이 사형에 처해졌다. 집행은 무척이나 인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전 제2황녀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곧바로 임시정부가 수립됐으며 신민의회의 주최로 교국 총선거가 실시됐다. 바야흐르 신성민주교국에 자랑스러운….] “자랑스러운 첫 번째 총선거였습니다.” “…….” “아직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사건이지만 저희 신성민주교국에 사는 여러분들이라면 꼭 알아야 할 내용이에요. 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쟁취한 승리였던 것은 굳이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오늘 배운 내용은 이후에 있을 시험에서도 나올 확률이 높으니 꼭 알아두셔야 합니다. 자, 그럼 여기서 질문입니다. 어제도 배운 내용이에요. 우리 민주교국에서 투표권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저, 저요! 저요! 저요! 저요!” “네, 루리아 학생. 답해볼까요?” “베니고어 여신님을 믿고 있는 모든 교국민과 이방인입니다!” “정답이에요. 아주 잘하셨어요. 칭찬 카드 한 장을 드릴 테니 이후에 수업 끝나고 꼭 받아가세요. 루리아 학생이 대답한 것처럼 시민 혁명단의 리더이시자 지금은 저희 신성민주교국의 지도자이신 오스칼 님께서 임시정부 수립이후 가장 처음 하신 일이 바로 제국민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일이었어요.” “네!” 정답을 외친 뒤에 의기양양하게 뒤를 바라보는 디아루리아가 시야에 비쳤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계속해서 헤실헤실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모습은 가관. 손은 들었지만 자신을 어필하지 못했던 박물관 관리인 막스는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보내오고 있다. ‘귀엽네.’ 자신이 활약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어지간히 기분 좋은 모양이다. 디아루기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참관한 수업이었지만 저런 표정을 보니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교육이 잘되는지도 봐야 하고….’ 디아루기아와 막스가 어떻게 지내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 당연하다. 매일매일 아빠 노릇을 해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정이 든 만큼 어떻게 크고 있는지는 보고 싶다. 사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개인적인 이유 말고 다른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궁금했던 것은 현재의 교육 과정 그 자체. 국정교과서의 발행과 그에 맞는 교육은 외부의 일만큼 중요한 일이다. 겨우 몇 년 해먹으려고 이 사단을 낸 것은 아니다. 적어도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은 더 해먹어야 하는 만큼 시민들의 교육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어차피 막스와 디아루리아에게는 역사 교육은 중요한 것이 아니니 한 귀로 듣고 흘리라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그 이야기가 옆자리에 있는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검술이나 마법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하게 평가되는 것이 바로 역사과목이라는 거다. 오늘의 어린 꿈나무들은 몇 년 뒤에도 이쪽의 충실한 유권자가 되고 그 자식과 그 자식 역시 우리에게 한 표를 행사하는 소중한 손님이 된다. 여신의 거울까지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이런 작업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긴 했지만 그래도 보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방심하다 훅 가는 거 한순간이니까.’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제국 전역에 교육기관을 설치하고 있는 이유였다. 슬쩍 옆쪽을 바라보자 디아루리아를 바라보며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디아루기아가 눈에 띈다. 다른 부모들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 물론 묘하게 이쪽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도 보였다. 예전 귀족이나 유명한 모험가 부부의 아들, 혹은 잘나가는 자산가의 자식들이 모이는 사립학교이기는 했지만 이쪽은 바젤 교황성하께 직접 직위를 받은 신성민주교국의 명예추기경이자 자유도시 린델, 아니, 교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 저들이 이쪽의 눈치를 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웃기지.’ 대놓고 말해 제국 내에서 이쪽보다 권위가 높은 인간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 비공식적인 직위까지 생각한다면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는 꼽을 수 있다. 민중이 대혁명을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뒤집을 수 없는 신분의 격차가 남아 있다. 많은 것이 변하기는 했지만 핵심은 그다지 변한 게 없는 것 같은 느낌. 내가 샤를롯트에게 했던 말처럼 어차피 결정적인 건 변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 디아루리아 정말로 똑똑하지 않습니까?” “누구를 닮았는데 똑똑한 게 당연하지요.” “네. 확실히 저를 쏙 빼다 닮았습니다.” 디아루리아가 영특한 것은 나를 닮아서일 확률이 크다. 자신할 수 있다. “이제 곧 있으면 역사 수업은 끝날 시간이군요. 다음에는 검술 시연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법 시연도 있고요. 서둘러 이동합시다. 아, 그리고 디아루리아는 방과 후 활동으로 연금술도 배운다고 하니 그건 당신이 꼭 지켜봐 주세요.” “보채지 않으셔도 움직일 겁니다. 그런데 디아루기아, 이거… 굳이 배울 필요가 있는 겁니까? 사실 똘똘이한테는 그다지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처음 학교에 가라고 한 건 당신이지 않습니까?” “사회생활을 배우라는 의미였지… 이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뭐든 일단 배워놓으면 좋은 겁니다. 사실 드래곤으로서는 필요하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우리 디아루리아가 배우고 싶다고 하기도 하고… 이런 행동 자체는 뇌 성장에 굉장히 많이 도움 됩니다. 저만 해도 기본적인 전투술 같은 것은 숙지하고 있으니까요. 전부는 아니지만 대륙의 역사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전문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아아. 그랬었죠.” “이유가 어떻든 간에 머리를 많이 쓴다는 건 확실히 도움이 됩니다. 특히나 이 시기에는 더욱이요. 이미 또래 아이들보다 마력량도 많습니다.” “다른 또래 드래곤이 없는데 어떻게 비교를 합니까.” “딱 보면 압니다. 후훗.” 딸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을 것 같은 느낌. 괜스레 내가 다 얼굴이 붉어진다. 조금은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헬리콥터 맘이 다된 것 같았다. 물론 예전처럼 거리를 벌리지 않고 이쪽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게 차이점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똘똘이의 표정을 보니 엄마와 내가 붙어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자. 그럼 역사 수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곧바로 검술 시연이 시작될 테니 학생들은 무장하고 학부모님들은 미리 연무장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디아루기아의 말처럼 되는 것을 보니 정말로 스케줄까지 달달 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무튼 간에 교사의 말대로 이쪽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물론 그 와중에 이쪽에 인사를 하러 오는 다른 이들을 맞이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명예추기경님. 하하하. 이거 여기에서 뵐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네. 오랜만입니다, 첸코 의원. 하하. 이거 참 우연이로군요. 그때 이후로 처음 뵙는 거 아닙니까? 어째… 요즘 의회는 좀 어떻습니까.” “항상 좋습니다. 오스칼 님 역시 여전하시고요. 사실 해결해야 될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라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뭐, 처리하기 곤란한 문제라도 있습니까?” “뻔하지요. 또 왕국 연합입니다.” “아아아아.” “혁명 이후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공화국에서도 축사를 보내왔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영… 답답하기만 합니다. 외교부는 대체 일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아무래도 아직도 내부가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 강합니다.” “뻔하겠지요. 아마 그쪽 역시 내부에서 혁명이 터져 나오지는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을 겁니다. 자신들의 나라에도 혹여나 불씨가 튀지는 않을지,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겠지요.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의원. 아마 시간이 조금 지나면 뭐가 됐든 해결책이 나올 겁니다.” “음. 그렇군요.” “네. 사실 이번 제 중립국행 역시 그 건과 관련된 일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역시 그러셨군요.” “왕국도 계속해서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순 없을 겁니다. 그쪽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은 대부분 저희에게 호의적이니.” “여신의 거울을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네. 맞습니다. 현 교국민들도 그렇지만 사실 이방인들은 여신의 거울에 무척이나 익숙합니다. 왕국의 기득권들과는 반대로 그곳에 자리 잡은 이방인들은 꼭 여신의 거울을 수출해 주기를 바라고 있을 겁니다.” 즐길 거리 하나 없는 이 척박한 땅에 갑작스레 텔레비전이 등장했으니 이방인들이 기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당장 린델이나 실리아 다완에서도 여신의 거울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하늘을 뒤덮는 거울이 아닌 각 세대에 놓을 수 있도록 크기를 작게 만들어 보급한 것이 결정적. 짧은 기간이었지만 드라마나 영화 같은 기획도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고 실제로 시험 삼아 방영한 ‘전투의 달인’은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다. 네임드, 이 바닥에서 몇 년을 구르고 구른 장인들이 전투에 필요한 팁과 노하우와 자신들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니 반응이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방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국민들 역시 이 바보상자에 하나둘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장담하건데 아마 각 왕국은 여신의 거울을 수출해 달라는 이방인들의 요구에 진땀을 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문화와 기술도 무기야.’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칼이나 창보다 더 위협적이다. 그렇게 잠깐 다른 길에 빠져 있을 때 또다시 들려온 것은 디아루기아의 목소리. “지금이 디아루리아의 차례입니다! 지금 하고 있습니다.” “아아. 네. 갑니다. 가요.” 검술시연이 시작되기는 했지만 너무나도 뻔한 결과에는 기대감이 줄어든다. 기본적인 신체능력만으로도 이미 주변 꼬맹이들을 압살할 수 있는 우리 똘똘이. 예상했던 대로 양민들을 상대로 자신의 신체능력을 담은 검술을 선보이고 있다. 대놓고 인성질을 한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웬만한 모험가보다도 나은데….’ 심지어 함께 검을 집어든 상대를 단번에 끝내지 않고 자신을 띄우는 용도로 사용하는 모습. 누가 봐도 검술 실력 자체는 상대방이 나은 것 같은 느낌이지만 상대 꼬맹이는 우리 똘똘이의 민첩함과 근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마무리를 하기 전에 꼭 상대방에게 향하던 검을 멈추고 다음 검술을 선보인다. ‘상대가 너무 불쌍한데….’ 검술을 배운지 오래된 꼬마 역시 입술을 꽉 깨물며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고양이가 아무리 발톱을 단련한다고 해도 호랑이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기본적인 스탯에서 차이가 너무 심각하니 검술 시연이 아닌 농락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둔재라고 할 수 있는 나는 왠지 모르게 꼬마 쪽으로 감정이입이 되는 것 같다. 옆에서 손뼉을 치며 꺄르르 웃고 있는 디아루기아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우리 디아루리아 참 잘하지 않습니까. 저는 검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이미 저기 있는 다른 아이들과 봐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제대로 시작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이지요.” ‘니 딸 드래곤이야. 그리고 저건 힘으로 밀어 붙이는 거고….’ “상대방이 다치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모습은 또 얼마나 착한지….” ‘배려가 아니라 농락인데….’ “제가 참 주책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주책 맞아.’ 하고 싶은 말이 자꾸만 목구멍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승자는 디아루리아.” “잘했다. 우리 딸! 디아루리아! 최고다! 최고야! 디아루리아!” 승리포즈까지 취하며 나를 바라보는 똘똘이의 모습은 가관. 누굴 닮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성 질 하나는 수준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296 회귀자 사용설명서 296화 시간이 흘렀다(2) 흐른 시간만큼이나 세상은 변했다. 정확히 말하면 제국, 아니 이제는 신성민주교국이라고 부르는 나라와 그 주변 정세가 달라진 것뿐이었지만 적어도 내부에서는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단 제국을 아우르는 계급이 완벽하게 사라졌다는 것. 물론 비공식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계급이 있기야 했다. 대다수의 귀족들은 여전히 막대한 부를 가지며 의원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었고 샤를롯트 역시 의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공식적으로나마 신분제가 폐지됐다는 것은 일반 민중들도 환호를 보낼 만한 이야기였다. 귀족이나 황족 같은 특권 계층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물론 사제들이라는 특권 계층이 있기야 했지만 애초에 교국이라는 타이틀을 쓰고 있는 만큼 교황청이 누리고 있던 특혜들에 대해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신성한 민주주의를 토대로 이전보다 더 큰 힘을 휘두르고 있는 상황, 신에게 봉사하는 사제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라면 응당 누려야 하는 특권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는 것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쪽이 생각한 그대로. 아직 배포가 전부 끝나지는 않았지만 여신의 거울은 각 세대마다 하나씩 보급됐고 여신의 거울으로 송출되는 이쪽의 콘텐츠는 모조리 현 정부와 이방인들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포장되어 방영됐다. 정보가 많이 풀리기는 했지만 일반 민중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굉장히 제한적이었던 것이 당연. 아주 조금이라도 나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애초에 심사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텔레비전의 이름이 무려 여신의 거울이다. 이 물건이 여신의 축복이라고 알고 있는 대다수의 교국민들이 바보상자에 사로잡힌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야기라는 거다. 그 결과 언론으로 여론을 흔드는 작업은 말 그대로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 되어버렸다. 아주 예전에 읽었던 조지 오웰의 소설처럼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야 했지만 애초부터 바라던바. 우리 안이 편하면 동물들은 우리 밖으로 나가지 않기 마련이다. 지난 시간 동안 교국민들을 가두는 사육장의 문은 열려 있었지만 아무도 사육장의 밖을 나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행복해하면 그걸로 끝이지 뭐.’ 진실에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여신의 축복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부의 문제는 우리의 아리스 오스칼에게 맡겨도 충분하다. 조금 삐걱거리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내 의도대로 잘 움직여주고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본인이 열의가 있고 의욕이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교국 내부보다는 외부의 이야기였다. ‘왕국 새끼들이 정신이 나갔나.’ 방금의 첸코 의원에게 들었던 것이 묘하게 머릿속에 남은 것은 당연지사. 이쪽의 행보 하나하나에 민감해하는 왕국연합이 문제 아닌 문제였다. 물론 당연한 반응이기는 했다. 근처라고 할 수 있는 나라에서 혁명이 터져 황족의 목이 달아났으니 자신들이 다스리고 있는 왕국에도 비슷한 종류의 혁명이 터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에서 있었던 세계사만 살펴봐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자꾸 교국을 배척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교국 기사들의 숫자가 크게 줄어든 만큼 해외세력과 척을 지는 건 피하고 싶은 상황이라는 거다. ‘동맹’ 교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동맹이 필요했고 공화국과의 사이를 개선시키는 작업 역시 필수였다. 교국 내에서만 이야기를 풀어내기에는 한계에 부딪친 것은 당연지사. 이기영의 첫 번째 외교무대로 중립국 라이오스를 선택한 것은 너무나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물론 디아루기아에게는 이 소식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오늘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거군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며칠 전부터 이야기해 두기도 했고… 최근에는 일을 끝낸 이후에는 항상 둥지에 들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하지 않았던 일이었으니 아버지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생색을 내거나 협상의 카드로 내세울 만한 일이 아니라는 거 아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크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오늘은 이렇게 수업 참관에도 함께했으니….” “본래대로였다면 몇 달 전에 지켜져야 했던 약속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애초에 휴교를 때리고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에 들어간 학교에 어떻게 수업 참관을 가겠습니까. 이렇게 더 좋은 환경에서 더 크게 참관에 함께 했으니 솔직히 그 일로 저를 탓하는 건 부당합니다. 그리고 기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소린데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열과 성을 똘똘이에게 쏟았고 똘똘이도 충분히 즐거워하는 마당에 자꾸 이렇게 불만을 표현하시면 저도 섭섭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면 제가 둥지를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 중에 혹시라도 똘똘이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겁니까?” “무슨….” “이를테면 디아루기아, 당신이 저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든가….” 디아루기아를 도발하기 위해 던진 말이기는 했지만 순식간에 디아루기아의 표정이 썩어들어 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시는 겁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 대놓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슈바… 나도 인기 많은 사람이야.’ 조금 독특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는 하지만 적어도 저런 취급을 당할 정도는 아니다. 벌레라도 보는 것 같은 얼굴에 열이 오른 것은 당연지사. 마침 똘똘이, 아니 디아루리아와 막스가 모든 수업을 마치고 뛰어오는 것이 보여 디아루기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흠칫 몸을 떨기는 했지만 똘똘이의 앞에서 그녀와 나는 사이좋은 부모를 연기한다. 최대한 몸을 밀착시키자 디아루기아는 나를 흘깃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이쪽을 떨어뜨릴 수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 눈앞에 있는 디아루리아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아직까지 강현욱 박사의 솔루션은 진행되고 있는 도중이었으니까. “아빠! 나 오늘!” “모두 다 지켜보고 있었단다. 디아루리아.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눈에 보이더구나.” “히히히힛!” “이런 수업 말고도 엄마가 가르쳐주고 있는 것도 열심히 하고 있는 거지? 디아루기아는 조금 어땠어?”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디아루기아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아까 전까지만 해도 썩은 표정을 짓고 있던 디아루기아 역시 딸을 위해 사랑을 연기하고 있었다. “저도 잘 봤어요, 여보. 그보다 참 대단하더구나, 디아루리아. 특히 마지막 검술시연은 정말….” “…….” 물론 뒤틀린 황천의 기벽을 가지고 있는 똘똘이의 눈에 우리 둘의 모습이 아니꼽게 보일 것이다. 눈을 흘기며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매섭다 못해 무서워진다. 디아루기아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이쪽이 무한한 사랑을 주겠다는 기세로 애정표현을 시작하니 너무 이러지는 말라는 듯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한번 망해봐라, 여편네야.’ 치졸하고 소심한 복수였지만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아. 우리 막내아들도 오늘 잘 봤어.” “네 넵.” “디아루리아랑은 사이좋게 지내고 있지?” “아… 네… 넵. 아버지.” “응!” 사실 그다지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다. 첫 만남의 몸통박치기를 잊지 못한 박물관 관리인 막스는 여전히 똘똘이를 어려워하고 있었고 똘똘이는 여전히 자신의 동생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건 보통 시간이 해결해 줘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고 있었다. 아무튼 간에 나름대로 커다란 과업이라고 생각했던 수업 참관이 마무리된 상황, 둥지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 식사를 하고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 어느덧 라이오스로 출발해야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예상대로 똘똘이는 울며불며 이쪽의 바지를 붙잡았고 잘 표현은 하지 않지만 관리인 막사원도 섭섭해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엄마 말 듣고 잘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막사원도 박물관 관리 잘하고, 일이 생겨서 오픈은 조금 더 늦춰야 될 것 같다만….” “넵. 알겠습니다.” “그래. 똘똘… 아니 디아루리아. 이번에는 정말 얼마 걸리지 않을 거니까 괜찮아.” “으응.” “자. 안아줄 테니까. 이리와.” 냉큼 뛰어 들어오는 모습은 꽤나 귀엽다. 심지어 오랜만에 드래곤 폼으로 달려 들어와 멈칫했을 정도. 키에에에에에에에엑! 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굴에 잔뜩 타액이 묻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딸과 아버지의 눈물 나는 이별식에 막스도 괜스레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슬쩍 손짓하자 눈치를 보며 다가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얘도 조금 달라지기는 했어.’ 묘하게 어리광이 늘었다. 원래 우리 똘똘이는 인간 폼일 경우에도 대놓고 달라붙어 헥헥거리고 키엑 키엑 거리기는 했지만 막스 같은 경우에는 눈치를 심하게 보는 것 같은 포지션을 취할 때가 많았다. 아무래도 너무 갑작스럽게 이쪽과 연을 맺다 보니 생긴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마력 홀로그램의 탄생을 가속화시킨 1등 공신인 만큼 내 쪽에서는 최고의 케어를 해주고는 있었지만 막스가 이쪽을 편하게 대하는 가와는 다른 이야기였다. 최근에 들어서야 이런 행동을 조금씩 하니 녀석 역시 달라지기는 달라졌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괜스레 한 번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걸로 작은 미소가 피어나오는 걸 보니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귀엽네….’ 괜스레 바뀐 변화나 환경에 대한 생각을 해보자 길드 하우스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오만가지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달라진 것은 배경과 막사원뿐 만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파란 역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일단은 이창렬, 유아영, 한소라, 파란의 2파티로 데려온 병아리들은 더 이상 병아리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버렸다. 특히나 이창렬은 나도 깜짝 놀랄 정도의 성장을 이루어냈는데 스텟과 능력치보다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야비하고 치사한 전투센스가 눈에 띄었다. 유아영은 대장장이로서 디아루기아의 비늘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고 탱커로서는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뛰어난 체력을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버티는 종류의 전위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소라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 애꾸눈에 절름발이인 것은 여전했지만 그녀는 마물의 단계를 뛰어넘어 악마와의 직접 계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흑마법사로서 성장하고 있다는 게 나와 그녀와의 비밀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안기모는 여전하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박덕구의 그녀가 된 황정연과 함께 2파티를 1파티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불가능하겠지만….’ 파란의 메인파티는 현 교국, 아니, 대륙 최고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제는 명실상부 순정 탱커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는 박덕구, 녀석 같은 경우에는 너무 변함이 없어서 탈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었지만 실력 역시 제자리에 멈춘 것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몰래카메라를 당하기 싫은 건지 미친 듯이 훈련에 열중해 나쁘지 않은 위치까지 올라갔고 실제로 김현성의 영원한 부관 조혜진과 대련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왔다. 원래 천재로 분류할 수 있는 꼬맹이 김예리는 무서울 정도의 성장을 이루어냈고 이제는 더 이상 꼬맹이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은 외관으로 자라기는 했지만 어째서인지 유독 한 곳 만큼은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선희영 역시 정상급의 사제로 성장한 것은 마찬가지. 그녀는 내가 이전에 받았던 명예주교라는 칭호를 받았고 그 자리에 걸맞은 신성력을 보유하게 됐다. 굳이 정리를 해보자면 파란은 강해지고 또 강해졌다. 단순히 무력뿐 만이 아니라 정치적 위치도 감당할 수 없을 까지 올라갔다. 사실상 탄탄대로의 성공길을 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물론 그렇게 성장하는 와중에도 왠지 모르게 이쪽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불안요소는 존재했다. 정확히 말하면 두 가지, 한 가지는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 그리고…. 녀석보다 더 불안함을 증폭시키고 있는 나머지 하나는 최근에 유독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정하얀이었다. ‘너무 조용해. X발…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토록 나를 불안하게 할 수 있다는 것도 능력 아닌 능력이라 할 수 있으리라. 분위기는 마치 폭풍 전의 고요함. 괜스레 똥줄이 타는 게 기분 탓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 297 회귀자 사용설명서 297화 시간이 흘렀다(3) 사실 김현성 같은 경우에도 커다란 문제는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녀석은 여전히 길드 마스터로서의 업무를 훌륭히 수행했고 교국 8좌로서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었다. 병아리들을 데리고 영웅 등급의 던전을 다녀오기도 했고 당연하지만 개인의 성장 역시 결코 등한시하지 않았다. 샤를롯트에게는 조금 미움받기는 했지만 그녀와 주기적으로 만나며 관계를 재구축한 듯 보였고 조혜진이나 철컹 철컹 김예리와 대놓고 러브 코미디를 찍는 한편, 검은백조의 길드 마스터 박연주와도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졌다. 잘생기고 능력 있는 놈이었으니 여자들이 꼬이는 것은 당연지사. 어떻게 생각해 봐도 무난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는 거다. 교국의 내부 정리로 모두가 바쁘기는 했지만 비교적 여유롭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녀석이 그 여유로움을 불편해한다는 데 있었다. ‘쯧….’ 이러고 지내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던 것은 당연했다. 아마 몇 달 전의 일이 결정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별건 아니다. 정리해 보자면 길드원들에게 일어난 작은 이벤트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조금 재미있다고 분류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약 두 달 정도를 무게 잡고 있었던 우리 회귀자가 길드원들을 소집한 이후 야심 차게 원정길에 올랐던 것. 당시 배경이 한 참 내부 정리에 바빴던 시기였기 때문에 원정 자체가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당연히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녀석이 모든 길드원을 전부 소집하는 일이 흔하지 않은 만큼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미래에 일어날 재앙 중 하나를 대비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김현성의 얼굴에 감돌았었고 나 역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현성은 사망자를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혹시라도 일이 꼬일 수도 있었으니까. 다른 길드원들 같은 경우에는 모두 의아해하면서도 원정길에 오르기는 했지만…. 막상 뚜껑을 까보니 놀라울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앞에 보였던 건 일반등급의 지하던전 뿐이었고 원정대는 김현성을 바라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미래의 재앙이나 김현성을 위기로 몰아붙일 흑막 대신 자리한 것은 아기자기하고 작은 몬스터들, 심지어 비선공몬스터였기 때문에 후반부터는 아예 돗자리를 깔고 캠핑을 즐기기 시작했다. ‘저… 요즘 너무들 바쁘신 것 같아서… 이런 자리를 준비해 봤습니다. 그… 단합대회입니다. 단합대회… 네. 그렇습니다. 푹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거짓말에 재능이 없는 녀석의 떨리는 얼굴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자신의 기억이 틀린 것은 아닌지 꼼꼼히 던전을 뒤지기는 했지만 무언가 발견될 리 없었던 것은 당연. 미래가 바뀌었다는 걸 본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녀석은 안심한 것 같기도 했지만 반대로 눈에 띄게 초조해진 것 같기도 했다.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 본인이 뭔가 초조해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게 가슴 아팠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상황이기는 했다. 지금 녀석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일이 한둘이 아니었을 테니까. ‘미래가 너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본래 1회차대로였다면 지금쯤은 나와 박덕구가 지내고 있었던 도시가 지도에서 사라지고 덕구 녀석이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타이밍이다. 폐허 속에서 카스가노 유노가 나를 발견한 시기. 어느 정도의 시간 오차가 있기야 있겠지만 대충 시간상으로 계산해 봤을 때는 그게 맞다. 검은색 세계의 나는 지금쯤 카스가노 유노의 방에서 요양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자세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 수 없지만 무려 도시 하나가 지워진 사건. 1회 차에서 이 사건이 회자되지 않을 리가 없다.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내가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바라봤던 도시는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개박살이 나있었으니까. 이번 회차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더러운 살인마 정진호도 성장하기 전에 죽여 살인여단의 탄생을 막아냈고 악마숭배자 이토소우타 역시 명예주교의 활약으로 린델을 휘어잡거나 악마를 소환하지 못하게 됐다. 카스가노 유노의 요조라 길드도 나와 만남으로써 움직임이 커졌다. 언론이 탄생해 일부 권력자들이 눈치를 보게 됐고 교국에는 신성한 민주주의가 들어섰다. 굵직굵직한 사건만 해도 벌써 여러 가지. 나비효과라는 게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다는 거다. 이토 소우타나 정진호의 끄나풀이나 그들과 함께했던 이들 역시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애초에 머더러 클랜 자체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다. 자유도시 실리아나 린델이 치안에 신경 쓴 덕분이기도 하니 녀석이 알고 있는 미래의 재앙들이 사라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응당 기뻐해야 될 일이 맞겠지만 녀석으로서는 불안하기도 할 것이다. 대륙을 관통하는 커다란 그림은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미래를 알고 있다는 메리트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 김현성은 그 불안감을 더 강해져야 한다는 집착이나 훈련에 쏟아부었다. 혼자서 대륙을 돌아다니는 일이 잦아졌고 누군가의 꼬리를 밟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분명히 여유로울 수 있는 상황이지만 본인을 더 채찍질함으로써 불안감을 날려 버리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 새끼가 초조해하니까….’ 괜스레 나도 초조해진다. 김현성 같은 경우에는 이게 전부였다. 딱 그게 전부다. 그렇지만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어? 형님!” 넋을 놓고 길을 걷고 있던 도중 들려온 목소리. “아. 덕구야.” 고개를 돌리니 그다지 변한 게 없는 박덕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덩치가 조금 커진 것만 빼고는 여전히 그대로다. 헐레벌떡 이쪽으로 뛰어들어와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은 가관. 누가 봐도 이쪽의 호위를 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쉽게도 나는 위협에 놓여 있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하다니까. 거, 전서구 하나 넣어줬으면 둥지 쪽으로 마중 나갔을 거요.” “위험은 무슨… 타국도 아니고 린델 안인데 뭐… 혹시 하얀이는 같이 안 왔어?” “누님은 오늘도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 같은데… 함께 마중 가자고 했었는데 마무리해야 될 일이 있다고 거절하더라니까.” ‘이런 게 불안해.’ 단언컨대 평소의 정하얀이라면 절대로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묘하게 조용한 것으로 모자라 그녀의 행동에도 작은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누님이랑 조금 떨어진 시간이 있는 것 같은데… 혹시 둘이 싸운 건 아니요?” “싸우기는 무슨.” “혹시 뭐 고민 같은 거 있으면 이 연애박사 박덕구에게 상담 한 번 받아보는 걸….” “그런 거 아니야.” “거, 아무리 형님이라고 해도 고민 한 두 개쯤은 있을 거 아니요. 언제든지 허심탄회하게 말해도 형님이라면 환영이요.” ‘차라리 싸운 거였으면 좋겠다. 이 새끼야….’ 그 말이 맞다. 정말로 사랑싸움 같은 걸 했다면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았을 거다. 사실 평소와 행동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아직까지 정하얀이 이쪽의 스토킹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데 있었다. 아네모네의 눈으로 간혹 이쪽을 바라보기도 했고 얼굴을 마주치면 예전과 변함이 없이 미친 듯이 달라붙어 온다. 자신이 먼저 데이트를 나가자고 주장할 때도 많았고 심지어 어떻게든 스킨십을 하겠다는 움직임 역시 여전하다. 달라진 것은 이 전처럼 24시간 붙어 있지 않았다는 것. 하루에 평균적으로 함께 있는 시간을 계산해 보면 불과 5시간도 되지 않는다. 하루 온종일 이쪽과 붙어 있으려고 하던 예전과 비교한다면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혹시나 철이 든 것은 아닌지에 대해 떠올려보기는 했지만 확률은 적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냐. 어쩌면 정말로… 철이 든 거 일 수도 있지만….’ 사실 뭔가 스스로를 억제하려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커다란 예로 희라 누나나 카스가노 유노를 만나러 갈 때도 경기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심지어 저녁을 먹으러 나가거나 바쁜 일 때문에 길드 하우스로 돌아가지 않아도 이쪽을 찾아오지 않았다. 입술을 꽉 깨물면서 손을 흔들고 빨리 돌아오라고 말하는 건 여전했지만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야 환영할 만한 이야기였지만 정하얀 본인이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고 있는 느낌. 바로 옆에서 보고 있으면 정하얀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손톱을 하도 깨물어 오른쪽 손톱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퀭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도 많았다. 심지어 혼자 중얼거리거나 큰 소리로 바보 멍청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도 목격했으니 살이 떨리는 게 이상한 상황은 아니다. 당장은 조용히 잘 지내주고 있었지만 상태는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이런 상황이 몇 개월 동안 지속되다 보니 내 쪽에서 먼저 다가간 적도 있을 정도였다. ‘이거 밀당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정하얀이 밀당을 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이게 작전이 맞다면 반쯤은 성공한 것이 맞다. 실제로 이쪽이 정하얀에 대해 신경 쓰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니까. “뭐 하고 있는데?” “뭐 평소랑 똑같은 거 같던데… 거, 하얀이 누님도 라이오스로 함께 가는 거 아니요?” “응.” “그 준비를 한다고 하고 있는 다고… 들었던 것 같았는데….” ‘진짜 철 들었나.’ 짐을 먼저 싸놓고 우리를 기다리는 정하얀의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지만 만약에 박덕구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철이 들었을 가능성을 떠올려 봐도 될 것 같았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린델의 길드 하우스에 도착. 길드 직원들이 나를 반겼고 병아리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과도 하나씩 인사를 주고받는다. “희영 씨.” “아. 오셨군요. 기영 씨. 지금 바로 떠나셔야 되는 건가요? 교황청의 일로 상의드릴 일이 있는데….” “네. 짐 챙기고 곧바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길지 않은 이야기라면….” “아니요. 그렇다면 다음에 시간을 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죄송해하실 필요 없어요.” 선희영과 인사를 마친 이후, 함께 가기로 한 한소라를 챙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정하얀만 보면 터져 나왔던 요실금 증상도 어느 정도 고쳐지기도 했고 실제로도 유능하니 부관으로 데려가기에는 적절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짐을 챙겨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믿음직스러운 면이 있다. 함께 가기로 한 차희라와 카스가노 유노를 이번에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쪽 역시 짐을 챙기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얘 진짜 뭐 하고 있는 거지… 정말로 준비하고 있는 건가.’ 물론 그 순간에도 궁금한 것은 정하얀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다. 길드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은 것은 처음. 저도 모르게 행복회로를 돌리려는 바로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옆 방의 문이 튕겨져 나온 것. “해… 해냈어. 해, 해냈다구… 됐어! 히히히힛! 이제 됐어!!” 정말로 기분 좋은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익숙하다. 은근슬쩍 방문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방 안에 있던 정하얀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나는 입안에 고여 있던 침을 목구멍으로 삼켜 넘길 수밖에 없었다. ‘뭐야….’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오는 상황. ‘마력… 마력 능력치… 구십 구.’ 순간적으로 뒤를 훽 돌아보는 정하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298 회귀자 사용설명서 298화 마력 능력치 99(1) “오, 오빠! 해, 해냈어요!” “아… 응….” “드, 드디어 해냈어요!!” 잔뜩 흥분한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얼굴 역시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우다다 달려오더니 안아 달라는 듯 꽉 팔을 벌리는 모습은 가관. 이렇게 대놓고 달려온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살짝 팔을 벌려 등을 다독여 주자 킁킁거리며 더욱더 안쪽으로 파고들려고 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평소대로네.’ 평소대로다. 여전히 달라진 게 없긴 하지만 몸 안에서 요동치는 마력이 무척이나 신경 쓰인다. ‘마력 능력치 구십구….’ 나도 모르게 되새김질하게 되는 그 이름. 어처구니없지만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건 조작된 내용이 아니었다. 당황스러워 헛기침이 나올 정도, 물론 그녀가 성장할 거라는 건 예상을 했지만… 이토록 빠르게 올라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특정 스탯이 90대로 들어서면 눈에 띄게 성장이 느려진다. 성장한계치가 영웅 등급 이상이라면 위로 올라가는 게 거의 불가능했고 전설 등급 이상이라고 하더라도 스탯 하나하나 올리는 것이 쉽지가 않다.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90의 마력 능력치에서 전설 등급의 아이템과 주인의식에 성공해 능력치를 뻥튀기한 케이스. 순간적으로 마력이 올라가기는 했지만 당연히 비정상적인 성장 루트였고 부작용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스펙업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점핑했던 길을 복습해야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거다. 우여곡절 끝에 98의 마력 능력치를 손에 넣었지만 마력 능력치 1을 올리기 위한 시간은 약 3년에서 4년 정도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사실. 실제로 김현성 역시 정하얀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소화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거라 판단했고 전설 아이템인 아네모네에서 숙지한 마법을 배우는 것에만 1년 정도의 시간을 쏟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걸 뒤집었어.’ 그걸 완벽하게 뒤집었다. 정하얀의 현재 마력 능력치가 99라는 소리는 피로 물든 보석 아네모네에서 흡수한 마법능력을 전부 소화했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다. 그걸로도 모자라 한계돌파를 감행한 셈. 최근에는 마법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갑자기 성장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거였구나.’ 그동안 조용하던 이유가 이거였다. 모르긴 몰라도 자기 자신에게 무슨 제약이라도 걸어놨던 모양. 자세한 내용은 내 알 바 아니지만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자제하기 같은 자신과의 약속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기뻐하며 박수를 보내야 하는 게 당연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 명실상부 초인의 반열에 올라갔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표정이 잘 펴지지 않았다. ‘어디까지 올라온 거지.’ 전투력 측정이 잘 되지 않는다. ‘X발… 김현성보다 센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다. 정하얀의 성장 밸런스는 지나치게 마력과 지능에 특화되어 있었고 애초에 마법사의 대인전은 검사나 전사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화력 면에서는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게 개인적인 판단. 전투력 측정기 박덕구를 활용해 보고 싶지만 아무리 박덕구라도 지금의 정하얀의 마법을 맞으면 순식간에 통구이가 되어버릴 것이다. 단순 화력만 생각해 본다면 린델, 아니, 교국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낮은 전투 숙련도와 지나치게 빠른 성장으로 인해 얻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감안해도 마력 능력치 99의 무게감은 줄어들지 않는다. 기쁜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공존한 것이 당연. 그렇지만 일단은 성장을 축하해 주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인데?” “아! 마, 마력 능력치가 올랐어요. 이제는 구십구예요! 그동안 사용할 수 없었던 마법도 사용할 수 있고 생각만 하고 있던 것들도 시, 실험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네!” “정말 대단하네. 현성 씨도 몇 년이 걸릴 거라고 했었잖아.” “그, 그래도 열심히 했어요. 오빠 생각하면서 열, 열심히요. 그동안 오빠한테 여러 가지로 신경 써드리지 못한 것도 그, 그런 이유였고요.” 신경을 안 쓴 것치고는 제법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이제는 조금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어요. 헤헤.” “그거 잘됐네. 나는 또 하얀이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줄 알고 있었거든.”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절대로! 아무래도 오빠랑 항상 같이 있으면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어서….” “아… 응….” 그 다른 생각이 어떤 생각인지는 대충 상상이 가기는 했지만 무슨 생각이 드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캐묻지 않았다. “어떻게 조금 피곤하지? 잠도 못 잔 것 같은데….” “네. 사실은… 조금 그래요.” “역시 라이오스는 나 혼자 다녀오는 게 좋겠지?” “아니요! 머, 멀쩡해요! 하나도 안 피곤해요! 가, 같이 자요. 아니, 같이 가요. 오빠. 짐 정리도 거의 다 끝나가니까!” 어차피 떼놓고 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슬쩍 방을 바라보자 마치 폐허라도 된 것 같은 안이 시야에 비친다. 이쪽의 짐을 챙겨놓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짐도 챙기지 않은 것이 확실하리라.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그녀를 떼고 가고 싶긴 했지만 이 상태의 정하얀을 혼자 내버려 두는 것도 여간 신경 쓰인다. 약간의 내적 갈등이 있었지만 데리고 가는 것이 올바른 선택. 혹여나 내가 다른 말을 해올까 허겁지겁 방 안으로 들어가 짐을 챙기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입꼬리는 한 것 올라가 있었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가 없는 모양. 뭔가 자신감도 엄청나게 올라간 것 같은 느낌이다. 필요한 짐은 라이오스에서 전부 사려는 모양인지 간단하게 옷과 화장품을 챙기는 것이 보였다. 이쪽 역시 방 안으로 들어가 대충 짐을 챙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정하얀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미리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박덕구와 한소라를 볼 수 있었다. 한소라는 정하얀이 내려오자 살짝 흠칫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 싱글벙글 기분 좋은 웃음을 입가에 올리고 있는 정하얀의 상태가 좋다는 걸 깨닫고 무척 안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길드 마스터 형씨한테는 인사 안 드리고 갈 거요?” “어제 드렸다. 오늘은 현성 씨도 할 일이 있어서 마중 나오지 못할 거라고 했고… 빨리 출발하자 늦겠네.” “거, 형님이랑 누님이 늦게 나와서 이리 늦은 거 아니요. 그래도 빨리 움직이면 시간 안에는 도착할 거요. 정 안 되면 내가 세 명 다 들고 뛰면 되고.” “그건 사양하고 싶은데… 일단 움직이자. 조금은 늦어도 상관없을 거야.” “알겠소.” 이쪽을 마중 나온 이들과는 다시 한번 인사를 마치고 등을 돌린다. 그 와중에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었던 김현성도 모습을 비쳤다. 반가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굳이 미사여구를 붙인 인사는 하지 않았다. 최근 항상 불안해 보였던 녀석의 표정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고 녀석 역시 내 손을 붙잡으며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예.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현성 씨.” 오래 떨어지지 않을 계획인 만큼 작별인사는 이것으로 끝. 붉은용병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실례를 범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발을 놀린다. 정하얀은 내 팔을 꽉 붙잡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박덕구는 혹시라도 시간에 늦을까 초조한 표정, 한소라는 정하얀과의 안전거리를 착실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정하얀은 그동안 떨어진 걸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양. 점점 더 안쪽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조금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원하는 걸 하게 해주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굳이 기분을 나쁘게 해서 좋을 건 없었으니까. ‘빠르게 강해지면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런 이유도 있기야 하겠지만 아마 조금 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떠올려 보면 정하얀이 처음 힘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은 진짜 강자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이후였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힘이 필요했던 상황을 겪었었고 그 기억은 정하얀을 이끌어 주는 원동력이 돼 그녀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내 예상이 맞다면 조금 머리가 아플 수도 있는 상황을 겪을 수도 있으리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약속 장소 앞에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몇몇 이가 시야에 비친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는 이의 모습은 확실히 매력적. 붉은색 머리를 휘날리고 있는 여자, 붉은 용병의 길드 마스터이자 교국의 의원 중 하나. 명실상부 린델의 넘버원이라고 할 수 있는 용병여왕 차희라였다. 다짜고짜 이쪽으로 달려 들어와 어깨에 팔을 걸친 채로 입을 열어오는 모습은 여전했다. 정하얀은 잠깐 흠칫하기는 했지만 차희라를 빤히 바라보는 것 말고는 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조금 늦었네. 자기?” “아. 일이 조금 늦게 끝나서….”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은… 뭐 보나마나 길드 하우스에서 꾸물거리다 늦었겠지. 아무튼 간에 출발하자. 아. 세컨드는 오랜만이네?” “네….” “어때 그동안 잘 지냈어?” “나름….” 그렇지만 정하얀의 표정이 제법 묘해 보인다. 대놓고는 아니었지만 마치 차희라를 재보고 있다는 느낌. 적의가 든 표정은 아니었지만 뭔가 천천히 시동을 걸려고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슈바… 쟤 왜 저래.’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차희라를 위아래로 살펴보는 정하얀은 손가락을 계속해서 까닥거리고 있었다. 나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로 마차 안으로 데리고 가던 차희라 역시 움직임을 우뚝 멈춘 것은 당연한 일.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정하얀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그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내가 작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하얀 위험측정기 한소라는 발을 절뚝거리며 전투력 측정기 박덕구의 뒤로 자리를 옮겼고 박덕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뭔가 폭탄이 터질 것 같은 느낌. 굳이 내가 뭐하고 나서기도 애매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고 정하얀 역시 딱히 차희라에게 무례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왜. 뭐 할 말이라도 있어?” “딱, 딱히… 그렇지는….” “그런데 사람을 그렇게 쳐다봐? 응?” “제… 제가 어떻게 봤는데요?” ‘너네 X발 이러지 마….’ 갑작스럽게 주변이 조용해진다. 라이오스로 함께 가기 위해 모인 이들도 물론이고 주변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들도 어느덧 들려오지 않는다. 베니고어 여신님께 기도라도 드리고 싶은 상황. 불행인지 다행인지 정하얀이 슬쩍 고개를 숙이자 차희라는 한 번 입꼬리를 올리고서는 다시 한번 나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물론 어깨 위에 올린 팔과 묘하게 밀착시킨 가슴의 포지션도 여전했다. “들어가자. 자기.” 정하얀이 조그맣게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 “그 팔… 치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혼자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지만 대놓고 들으라는 듯한 목소리였다. “오, 오, 오빠가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 “…….” “…….” “뭐?” ‘너네 X발 진짜 이러지 마….’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정하얀. 뭐라고 말로 형용하기 힘든 차희라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 299 회귀자 사용설명서 299화 마력능력치 99(2) 공기가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점점 더 숨을 쉬기가 힘들어진다. 마력이나 살기 따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체모를 압박감이 느껴졌다. ‘슈바….’ 정하얀 역시 따로 위협적인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 상황. 차희라를 대놓고 적대시하는 미친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행동이 조금 묘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뭐라고 딱 잡아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았지만 적당한 예를 찾아보자면 기어오르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정하얀과 차희라는 상하관계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이 관계에 우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차희라다. 붉은머리를 하고 있는 광녀는 린델 내에 있는 유일한 분노조절장애 치료사였고, 그 치료는 어떤 부분에서는 정하얀에게 유효했다.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극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다 보니 정하얀 쪽에서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 정하얀이 갑작스럽게 이런 포지션을 취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마력 99.’ 이제는 자신이 더 강하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으리라. ‘무슨 동물의 왕국이야 뭐야.’ 이제는 지금까지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정하얀의 머릿속에서 차희라에 대한 저울질이 끝나버린 것. 정면으로 부딪쳐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반기를 들어 올린 것이 맞다. 정하얀의 내부에서부터 시작된 작은 투쟁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리리라. 신성제국에서 일어난 혁명을 되새김질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암컷을 독차지하고 있는 수컷에게 이빨을 보이는 젊은 도전자를 보는 것 같은 느낌. 격렬한 몸싸움이 연상되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내 경우에는 성별이 뒤바뀌어 있었지만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점점 더 불편해지는 상황 속에서 천천히 말을 주고받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가관. 장담컨대 이 두 사람이 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으리라. 이미 멀찍이 떨어진 한소라처럼 말이다. “뭐?” “오빠가… 부,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다, 다른 건 아니고요….” “…….” “…….” “다른 이유가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착, 착각… 이세요….” “…….” “…….” “착각은 무슨….” “저, 정말 착각인데…. 진짜예요.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라고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냥 오빠가 부, 불편해 보여서….” “동생, 넌 내가 병신으로 보여?” 분위기가 급변한 것은 순식간. 당연히 개입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차희라가 입 다물라는 듯이 나서려는 이쪽을 가로막는다. 성큼성큼 정하얀 쪽으로 다가가는 것은 순식간이다. 약간의 키 차이가 있다 보니 차희라는 정하얀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정하얀은 차희라는 올려다보고 있는 포지션. 당돌하게 차희라를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띈다. “지금 네가 조금 거슬린다는 거 알고 있지.” “잘 모르겠는데….” “…….” “…….” “말이 짧네.”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 데 왜 눈을 그렇게 치켜떠?”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 그냥 평소대로고… 그, 그냥 언니가 저를 아니꼽게 보고 있으신 것 같은데… 어, 언니 저 맘에 안 들죠.” “…….” “너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나보다. 그렇지?” “…….” “뭘 믿고 이런 지랄을 하고 있는지는 알 것 같은데 뒈지기 싫으면 눈깔 내려.” “네?” “두 번 말 안 한다, 병아리야. 그 여리여리한 모가지 뒤틀리기 싫으면 당장 눈 깔라고.” 갑자기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숨 쉬기가 힘들다 같은 종류의 느낌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무언가가 목구멍에 걸린 것 같다. 차희라가 있는 대로 기세를 끄집어내 정하얀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살기인지 마력인지 개뿔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것 빼고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기까지 여파가 미칠 정도였으니 정하얀 본인이 느낄 압박감은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슈바….’ 마음의 눈으로 차희라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조금씩 조금씩 지력 스탯이 내려가고 있는 게 실시간으로 보인다. 당연히 근력 스탯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는 중. 지력을 깎고 근력을 올리는 고유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한바탕할 것 같은 느낌에 저도 모르게 발이 움직인다. 그나마 차희라가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애초에 그녀의 칭호가 피에 미친 광녀, 신성제국의 붉은 광녀라는 걸 생각해 보면 본래 성정은 이성적인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 자리한 위치와 한 집단의 지도자라는 상황이 그녀에게 정상인 코스프레를 시키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스스로 쇠구슬을 달고 있는 암사자였고 성질을 죽이고 있었던 미친개였다. 젊은 도전자가 잠자고 있던 사자의 콧털을 건드린 게 맞다. ‘그만해, 하얀아….’ 몇 년 동안이나 그녀가 린델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데에는 전부 이유가 있다. 사실 정하얀이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보인다. 마력 스탯은 99고 실제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판단하건대 웬만한 강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굳이 예를 들자면 가로쉬 앤 캐쉬의 갈오식이나 임리단 같은 이들 역시 정하얀에게 비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차희라의 경우에는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근력 98.’ 기본 근력이 98, 게다가 언제든지 유동적으로 지력 스탯을 옮겨 근력 스탯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 ‘근력 101, 103, 106.’ 계속해서 근력이 올라가고 있는 모습, 그만큼 지력이 내려간다. 혹시나 저번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한편, 정하얀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정하얀이 드래X볼의 스카우트 같은 것을 달고 있다면 계속해서 전투력이 올라가고 있는 차희라를 바라보며 당황할 것이 틀림없으리라. 아니, 굳이 그런 물건이 없더라도 본인이 가장 잘 느끼고 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눈에 묘한 독기가 가득 찬 것이 점점 더 흥분하려는 것 같은 얼굴이다. 캣파이트가 아니라 유혈전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하얀은 간접적으로 그녀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붉은 머리의 광녀는 지금 새로운 도전자를 찍어 누르려고 하고 있다. 장담컨대 정하얀이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뭐가 됐든 사건이 터졌으리라. ‘자기가 더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나.’ 적어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나 역시 정하얀이 강하다는 걸 의심하지 않았고 실제로 차희라에게 비벼볼 수도 있을 거라고 판단하기는 했지만 선물상자를 까보니 경험이나 연륜 같은 게 다르다는 걸 확인 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강한 거야.’ 클래스가 용병여왕임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들지 않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랬다. “…….” “…….” 그렇게 약간의 시간을 서로에게 사용하고 있었을 때, 마침내 어느 한쪽이 꼬리를 내리기 시작. 당연하지만 이 기싸움의 승자는 새로운 도전자가 아니라 왕좌를 지키고 있었던 붉은 머리 광녀. 정하얀이 그녀의 말대로 천천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해.’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지 묘한 각도로 시선을 피한다. 뭐가 그리 억울한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고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제 막 세상이 자기 거라고 여기고 있었을 때 넘을 수 있다는 생각한 벽이 다시 한번 자기 앞을 막아내니 억울함의 눈물이 터져 나온 것 같았다. “끄으으으윽….” “처음부터 이랬으면 서로 불편할 일도 없잖아.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말했지.” “히끅….” “뭐라고 했는지 잘 기억은 안 나는 데… 살기 죽이는 법 좀 배우라고 했었나? 그럴 거야. 그렇지 자기? 오늘은 한 가지 더 가르쳐 줄게, 동생.” “히끅….” “확신이 없으면 시도하지 마. 덤비지 말라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그렇게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됐다. 무척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간이 무척 많이 흐른 것 같다. 땀 때문에 상의가 축축해질 정도. 차희라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정하얀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도전자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저렇게 과민반응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움직였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자기도 여기에 와서 잘 좀 이야기해 봐. 뭐 위로도 좀 해주면 좋고, 말 좀 알아듣게 해놓으라고….” “아… 응. 누나.” “혹시 나중에 일 터질까 봐 먼저 선수 치는 건데, 다음에도 이런 일 있으면 나도 가만히 못 있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기싸움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분위기가 무겁기는 했지만 이후에 정말로 다른 상황이 터지는 걸 고려하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차희라도 정하얀의 성정을 조금은 눈치채고 있고 그녀가 어느 정도까지 올라왔는지도 고려하고 있다. ‘분명히.’ 두 사람의 감정이 격해진다면 정말로 이쪽이 어떻게 손 쓸 수도 없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으리라. ‘친해지길 바라, 라도 찍어야 하나.’ 어떻게 생각해도 그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간에 차희라는 기분이 더러워졌다는 말을 끝으로 먼저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정하얀은 이쪽의 눈치를 보며 혼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상황. 솔직히 말하면 자신은 죄가 없고 억울하다는 표정이 더욱더 눈에 들어온다. 살짝 손짓하니 우다다 달려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계속해서 히끅히끅 딸꾹질을 해대고 있었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조금 애매한 것 같았다. 직접적으로는 먼저 욕을 하거나 시비를 건 것도 아니고 조금 태도가 건방졌다는 것 이외에는 문제가 없다. 오히려 조금 과한 처사를 보인 것은 차희라. 물론 숨은 뜻을 생각해 보면 상황이 달라지기야 하겠지만 내 쪽에서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을 잡기 힘들었다. ‘일단 다그치기는 해야지.’ 물론 내부적으로 불만이 쌓일 수도 있다는 걸 고려한 사항이다. 당장은 이번 여행에서, 아니, 이후로도 차희라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무조건 지양해야 한다. 혹시라도 내가 차희라를 더 소중히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심어주면 안 되기 때문에 당근과 채찍을 절묘하게 사용해야 되는 것은 당연지사. 박덕구와 쉬야가 마려운 것 같은 표정의 한소라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내고 정하얀과 마주하자, ‘나 지금 슬퍼요. 안아 주면 안 될까요?’ 같은 표정이 시야에 비친다. 처음에는 일단 훈계. 안아주는 것은 그 다음이다. ‘김현성이 부럽다. 제기랄….’ 그쪽의 캣파이트는 이쪽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조혜진과 꼬맹이, 심지어는 박연주까지 하하호호 사이좋게 다니며 식사를 하거나 쇼핑을 다니는 걸 목격한 적도 있다. 장담컨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여편네들의 그런 모습은 꿈에서도 볼 수 없으리라. ‘서로 통수를 쳤으면 쳤지….’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 따위는 볼 수 없으리라. 고민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점점 더 김현성이 부러워지는 상황. ‘분명히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야.’ 아무래도 이쪽은 전생에 지은 죄가 많은 모양이다. # 300 회귀자 사용설명서 300화     중립국 라이오스(1)     불안한 감이 있었지만 정하얀을 다그치는 것은 적절한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무슨 미친 짓을 하는 거냐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조금씩, 조금씩 성질을 건드리려고 했던 정하얀이나 과민반응을 한 차희라. 잘못은 둘 모두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차희라 쪽을 두둔하다가는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일단은 태도를 지적한 뒤에 조금 더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는 걸로 시동을 걸었고, 실제로 불편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물론 그 와중에 나를 생각해 줘서 고맙다든가, 네 마음은 잘 알고 있다든가 하는 립 서비스를 날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처음 불 같이 다그칠 때에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지만 그 이후에 날아 들어온 당근에는 사르르 표정이 녹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본인의 생각대로 모든 게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마무리가 당근으로 끝났다는 것에 만족한 것이다. ‘제길.’ 여전히 본인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 물론 엄중한 경고에는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이 약발이 어느 정도까지 갈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채찍에 좌절하는 만큼 당근에 회복하는 속도도 무척이나 빠르다. 전에 일어난 일은 어떻게 생각해도 앞으로 일어날 재앙의 예고편이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힘을 얻은 이후로 곧바로 차희라에게 이빨을 들이민 것을 보면 다른 이들에게는 더 달려들 것이 뻔하다. 부릉부릉 시동을 걸려고 하는 폭주기관차를 바로 옆에서 보는 것 같은 느낌. 이걸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당장은 조용하더라도 언젠가는 사건이 터질 것이다. 애초에 마법이라는 것은 나 역시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다. 보통의 마법사만 해도 그러할 진대 정하얀 정도 되는 마법사가 탄력을 받았을 때에 어떤 걸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장담컨대 이쪽은 예상하지 못한 마법이 튀어나올 수도 있으리라. ‘힘들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정하얀은 이쪽에 무척 소중하다. 어떻게 보면 이건 등가교환이나 다름이 없다. 정하얀 정도의 마법사를 다루는 대가가 겨우 멘탈을 케어해 주는 정도라면 오히려 싸게 먹히는 장사라는 거다. 문제는 이상하게 위험해지는 것이었지만 미래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감내할 만하다. 물론 케어해 줘야 하는 사람이 그녀뿐만은 아니다. 하지만 차희라는 정하얀보다 훨씬 더 케어하기 쉽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그나마 말이 통하는 이들 중 하나. 최소한 미치기는 전까지는 말이다. 내 입장에서는 두 사람이 아무런 마찰 없이 그대로 있어주는 것이 가장 베스트.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니다. 같은 마차 안에 들어선 와중에도 묘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한 것. 물론 정하얀이 차희라에게 어떤 시비를 거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는 건 그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연애 박사 박덕구나 정하얀 위험 감지에 특화된 한소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최근에 하얀이 누님이 조금 날이 선 것 같은 느낌이었다니까!” “아… 그래.” “아암. 내가 몇 번이나 말해왔던 거 아니요. 그동안 거 바빠서 제대로 뭘 할 시간도 없었는데 여리고 여린 누님이라도 스트레스를 받는 게 당연하지!” “…….” “내가 볼 때는 분명히 리프레시가 필요한 시기가 온 것 같은 느낌이요. 사실 그 용병 누님도 조금 날이 선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말마따나 하얀이 누님 눈빛이 조금 살벌했던 거 아니요. 거 딱 뭐라고 정의하기는 힘든데… 솔직히 나도 조금 무서웠다니까. 조금 미안한 소리기는 한데 그냥 자리를 피해버리고 싶더라니까.” 슬그머니 한소라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괜스레 몸을 바들바들 떨어오는 게 시야에 비친다. “연애박사 박덕구의 눈으로 본 게 확실하니 믿어도 문제없소. 솔직히 형님이랑 하얀이 누님이랑 거 잘 지내고 있는 거 같기는 하지만 진도도 너무 느리기도 하고 또 형님이 워낙 인기가 좋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다른 여자 분들이 막 이렇게! 요렇게! 달라붙는 거 아니요. 큼큼. 아무리 여기 대륙의 연애관이 자유롭다고는 하지만 누님 같이 여리고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는 사람들은 이런 일에 지나치게 스트레스 받는 법이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렇지 않나?” “네… 물론이죠….”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이는 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정보인 건지 궁금했지만 박덕구의 말에 태클을 걸 기력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정하얀의 최대 피해자인 한소라 역시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 박덕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사회생활을 위해서인지 일단은 고개를 끄덕인다. 다만 입술을 꽉 다물고 혹시라도 닥쳐올 실제 상황에 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 한번 둘이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게 좋은 거 아니요. 거, 그 나보트 남작인가 뭐시긴가 하는 사람 영지, 아니, 이제는 나보트 의원이지! 거기에 거울 호수 같은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쪽으로 언제 놀러나 가서 뱃놀이도 즐기고 천천히 저녁도 먹고 어쩔 수 없이 마차가 끊기는 게 최고일 거 같은데….” “거울 호수 보러가려면 여기서 한참을 돌아서 가야 돼. 그리고 마차가 끊길 일이 뭐가 있어. 그리폰이 있는데.” “당연히 그런 건 다 핑계 아니요? 원래 다 그런 거요. 큼큼. 내가 뭐라고 딱히… 말은 못 하는데 다 그런 거 아니요.” “언젠가는 놀러 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말이요?” “휴식은 라이오스에서 취하면 될 거야. 그쪽에서도 제법 신경 써주고 있을 테고. 물론 그 이후에는 정신없이 움직여야겠지만 그래도 쉴 수 있다는 게 어디야. 아무튼 네 말대로 하얀이랑 같이 외출이라도 해야겠네.” 심지어는 카스가노 유노의 라이오스행 역시 예정되어 있다. 검은 백조에 있는 이지혜를 제외하면 그나마 이쪽과 많이 연관되어 있는 이들이 모두 모이는 셈이다. 유노와는 한 번 사건이 있었던 만큼 찔리는 부분이 있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슈바….’ 당시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어물쩡 넘어간 것은 물론. 오히려 역지사지로 화를 내며 위기를 모면하기는 했지만 꿍쳐두고 있는 게 많은 정하얀이 그 사건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 차희라에게도 이빨을 드러낸 만큼 카스가노 유노에게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걔는 차희라랑은 또 다른데….’ 제국 8좌에 오를 만큼 강하기는 하지만 카스가노 유노는 어디까지나 지원형. 굳이 전투력을 매겨 보자면 카스가노 유노는 정하얀을 감당할 수 없다. ‘신단 때처럼 미친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정하얀 회귀 사건 이후로 그런 미친 생각을 아직까지 하고 있을 리는 없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는 만큼 박덕구의 말처럼 둘 만의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한 일이리라.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박덕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주제가 바뀌지 않은 것을 보니 녀석도 이 사건을 꽤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물론 나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그 용병 누님이랑 하얀이 누님은 어쩔 거요? 나는 솔직히 무조건 하얀이 누님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영 분위기가 불편한 거 아니요. 원래 대놓고 싸우는 것보다 저런 분위기가 더 무서운 거요. 차라리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건 자살 희망자들이나 하는 생각일 거야.’ “안 그래도 요즘에 대륙에서 요런 문제가 많다고 들었다니까? 다들 일처다부, 일부다처 하다 보니까 당연히 이런 기싸움 같은 게 펼쳐지는 거 아니요. 거, 예전에 같이 술자리 함께했던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도 마누라를 두 명이나 두고 있다고 들었소.” “아. 누구?” “아마 형님도 알고 있을 텐데… 갈오식이라고” “당연히 알고 있지. 그 친구 제법 쓸 만하던데…. 어떻게 연이 닿았어?” 안 그래도 끈을 만들어 놓으려고 했던 놈이었다. 덕구 녀석과 친분이 있는 걸 보니 굳이 이쪽까지 나설 필요는 없는 모양이다. “당연히 연애상담이지! 좌우지간 뭐 본인이 클랜도 운영하고 있고 능력도 있으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인 것 같은데 문제는 이 두 명 사이가 너무 안 좋다는 거 아니요. 서로 눈만 마주치면 노려보는 건 예사에 매번 막 뒷담화하고 언성 높이고, 싸우고 그러다 보니까 그 친구가 가운데 끼어서 엄청 고생하고 있더라니까?” ‘그게 무슨 고생이야…. 그 정도면 양호한 거지.’ 겨우 그 정도였다면 나 역시 그냥 웃어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덕구는 녀석을 예로 들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장황하고 긴 이야기라 솔직히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큼… 거 뭐, 대충 이렇게 됐다는 거요. 형님도 이럴 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된다니까? 가운데 끼어 있는 사람이 어찌어찌 팍팍 잘 조율해서 균형을 맞추는 게 좋은 거요. 힘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유명한 격언도 있지 않소.” “들어본 적 없는데.” “뭐 어쨌든 간에 이런 부분에서 형님의 역할이 그 누구보다 중요하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요. 뭐가 됐든 한번 자리를 만들고 둘을 친하게 만드는 게 모두가 고생하지 않는 방법이라니까? 물론 그전에 하얀이 누님을 먼저 챙기는 게 중요하지만. 기왕 형님이 여러 사람이랑 연을 맺을 거라면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관계를 개선하는 게 맞지. 장담컨대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면 정말로 위험해질 거요.” 생각하지 않고 말한 것일 테지만 위험해질 거라는 말은 좀 더 진중하게 다가온다. 박덕구의 말이 백번 맞다. ‘어떻게든 해야 돼.’ 계속해서 이런 상황을 만들면 정말로 좋은 보트 위에 올라서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김예리와 안기모라도 불러서 다시 한번 연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 마차와 라이오스에 그들은 없다. ‘거의 다 왔나.’ 그러고 보니 이렇게 마차에 탄 지도 꽤나 오래된 느낌. 박덕구, 한소라와의 대화 도중에 슬쩍 마차 밖을 바라보니 제법 빠른 속도로 배경이 지나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때려 맞췄을 뿐이었지만 교국과는 다르게 이국적인 풍경이 많이 눈에 띈다. ‘중립국.’ 대륙 내에서 유일하게 중립국을 표방하고 있는 국가. 교국이나 공화국처럼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국가 중에 하나다. 남부에 자리한 만큼 따뜻하고 음식들 역시 다양한 것은 물론, 바다에 인접하고 있으니 교국과 공화국의 이방인들이 자주 찾는 휴양지 겸 여행지다. 이곳에 온 목적 자체가 애초에 휴식이나 정하얀 케어와는 거리가 멀긴 했지만 박덕구의 말대로 뭔가 조치를 취하는 게 맞다. “풍경 한번 죽이네…. 그렇지 않소, 형님? 소라도 이런 풍경은 처음 아닌가?” “네. 당연히 처음이긴 한데….” “아무튼 형님, 이건 기회요. 원래 이런 장소가 사람들을 더 개방적으로 만드는 장소 아니요! 분명히 누님도 뭔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거요.” 무슨 마음의 준비인지는 조금 더 알아봐야겠지만 기왕이면 마음의 준비 같은 건 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물론 모든 건 내 희망사항. 계속해서 달리던 마차가 어느덧 자리에 우뚝 멈췄고 마차의 문이 열리며 조금 앳된 느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이오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 린델의 용병여왕님.” 중립국에 도착한 것이다. # 301 회귀자 사용설명서 301화 중립국 라이오스(2) 마차 안에서 내리자 아름다운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다른 지역에 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전형적인 백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교국민들과는 생김새부터가 다르다. 굳이 지구에 있는 인종과 비교하자면 남미 사람들을 보는 것 같다. 건강하고 탄력 있는 피부와 윤기 있는 흑발의 머리카락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것은 그들의 복장 양식이었는데 전형적인 중세시대를 연상케 하는 교국과는 다르게 다들 가벼운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야 더우니까.’ 남쪽으로 많이 내려와서 그런지 날씨가 상당히 덥다. 당장 나 역시도 이 갑갑한 옷을 던져 버리고 싶을 정도. 온도 조절 마법이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는 마차 안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본격적으로 밖으로 나오자 힘들기는 하다. ‘아… 멍청하게.’ 한 가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이쪽을 둘러싸고 있는 라이오스의 인사들의 복장. ‘별일 없겠지.’ 다들 지나치게 프리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이 장소에서는 이게 일반적인 복장이겠지만 솔직히 어디로 눈을 둬야 할지 고민해 봐야 할 정도로 시선처리가 어렵다. 무희들이 입는 옷들처럼 남녀 가릴 것 없이 자신들의 탄탄한 몸을 과시하고 있으니 자연스레 정하얀이 신경 쓰인다. 마차 안에서 마법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던 정하얀은 역시나 밖으로 나오자마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조심하면 돼.’ 멍청하게 열심히 눈을 굴리지만 않는다면 별 다른 사고가 생기지는 않으리라. 안 그래도 오기 전에 한 바탕 꾸중을 들었으니 정하연도 모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저쪽에서 인사를 건네 왔으니 이쪽에서도 인사를 하는 것이 맞다. 이국적인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차희라는 인사를 끝냈기 때문에 나 역시 한 발 다가갔다. ‘15살, 16살?’ 눈에 보이는 것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꼬맹이. 다른 이들처럼 갈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윤기 있는 흑발을 땋은 머리 위에 올려져 있는 독특한 양식의 장식이 눈에 띄었다. 제법 당당한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마에 있는 붉은 다이아몬드의 문양을 툭툭 건드리는 것은 라이오스의 오랜 관습. 어색하기는 했지만 나 역시 저런 방식으로 인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마에는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지만 최대한 라이오스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걸 내비쳐야 했으니 당연한 행동이다. 눈앞에 있는 이가 보통 꼬맹이였다면 아마 고개만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마무리 했겠지만…. ‘라이오스의 27대 국왕 프리스티나.’ 밖을 하도 싸돌아다닌 탓에 탄 것처럼 보이는 꼬맹이의 정체가 국왕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평범한 꼬마 대하듯 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중립국 라이오스의 프리스티나라고 합니다.” “이야기는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프리스티나 님. 만나서 뵙게 돼서 정말로 영광입니다. 직접 나오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나친 환대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명예추기경님. 저야말로 교국의 중요 인사이신 명예추기경님을 뵐 수 있어 영광입니다.” “조금 더 편하게 대해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중요한 손님이니까요 우선 안으로 모시는 게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쉽지 않겠는데.’ 잠깐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 대화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걸 얻기 힘들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가드가 단단하네.’ 저쪽에서도 우리가 어째서 이런 먼 곳 방문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이 사절단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라이오스와의 동맹. 묘하게 중립국이라는 단어에 힘을 줘서 말하는 것과 이쪽을 편하게 대할 수는 없다는 태도에서 절대로 이쪽의 일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얘네 입장에서는 그렇겠지.’ 본래 중립이라는 것도 자신들의 나라를 지킬 힘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신성민주교국과 공화국의 남부지역에 끼어 있는 이 작은 나라는 두 국가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유약하다. 네임드 강자의 숫자나 병력의 질, 심지어는 이방인들 역시 수준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오스가 중립국의 위치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교국과 공화국 사이에 끼어 있는 상황 때문. 과거부터 매일 같이 치고 박고 있었던 두 국가 사이에 줄타기를 하다 보니 이런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라이오스는 두 국가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다. 바다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라이오스를 통해 곧바로 상대 국가로 넘어 갈 수 있다는 것도 그랬다. 공화국의 입장에서는 만약 라이오스가 제국과 손을 잡는다면 본인들이 밀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제국의 입장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제국과 공화국은 라이오스라는 나라를 쪼개버리는 방법도 고려한 적도 있었으니 라이오스는 두 나라 사이에서 원치 않은 고통을 받아왔던 셈이다. 약간의 변화가 생긴 것은 2차 대륙 전쟁 이후, 제국과 공화국이 전쟁으로 인해 서로 공멸할 수도 있는 상황까지 치달았고 어쩔 수 없는 휴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다. 라이오스는 공화국이나 제국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을 거라는 완전중립을 선언했고 제국과 공화국은 이를 받아들이고 존중했다. 당시의 공화국과 제국이 어째서 라이오스의 중립선언을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가 맞물려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라이오스가 상대 진영 쪽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걱정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당시의 지도자들끼리 휴전 협정과 함께 다른 뒷이야기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라이오스의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현명했다는 것. 정치적 수완 역시 보통이 아니고 줄 타는 실력 역시 보통이 아니라 확신할 수 있었다. ‘대단한 거야.’ 열강들 사이에서 등 터져 가면서 자주권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교국이나 공화국 만큼은 아니지만 그들 역시 힘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 있는 이방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라이오스를 살아가는 국민들은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리라. 슬쩍 뒤를 돌아보니 정하얀은 박덕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뒤를 따라오고 있었고 한소라는 나름대로의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장은 안심해도 되겠네.’ 심기가 불편한 듯 사방을 경계하고 있기는 했지만 당장 터질 것 같은 표정은 아니다. 내일이나 내일 모래 즈음부터 함께 놀러가자는 이야기를 넌지시 꺼낸다면 당장 기분이 풀려 싱글벙글 웃고 다니리라. 그런 그녀와는 별개로 이번 사절대의 주요 인원인 나와 차희라는 프리스티나와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중. 굳이 마차를 이용하지 않고 길을 걷고 있는 게 특이하기는 했지만 이 꼬맹이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대충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은 곳이네.’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있다. 생활수준 자체는 그리 높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저들이 행복해하는 걸 알 수 있다. 대륙도 지구처럼 국민행복지수를 조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평가를 내린다면 이 나라는 틀림없이 상위권에 랭크될 것이다. 프리스티나를 향해 환호를 보내고 있는 백성들과 그들의 인사에 하나하나 화답해 주고 있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도시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치고 그들에게 동화된 관광객들의 모습은 어색하지 않다. 다완 쪽에서 휴양 온 이들, 교국의 복장 양식과는 조금 다른 복장을 하고 있는 이들은 아마도 공화국민일 터. 묘한 긴장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륙법상 분쟁지역으로 분류되지 않은 이곳에서의 마찰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이런 곳이 다 있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은 그림이 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머리에 잔뜩 뭔가를 올린 꼬맹이가 다시 한번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두 분께서 이곳을 찾아주신 것은 처음이라 알고 있습니다.” “네.” “네. 맞습니다.” “두 분이 저희 라이오스를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하군요.”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뻔하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올지 역시 예상이 된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정론이라 딱히 반박하기 어려울 것 같은 느낌. 차희라는 슬그머니 내 쪽으로 대답을 패스했고 나는 털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모두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게 봐주시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교국민들의 이상을 위해 함께 싸워주신 이기영 명예추기경님께서 그런 말을 해주시니 괜스레 기분이 좋군요.” 살짝 웃으며 다시 한번 말을 걸어온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이 보시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 나라 역시 몇몇 문제를 떠안고 있습니다만 저는 선대 국왕들께서 이룩하신 것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물론, 지키고 싶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 “두 열강들 사이에서 매번 고통 받던 나라를 여기까지 끌고 오는 데 정말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1차 대륙 전쟁과 2차 대륙 전쟁. 그 외에도 수많은 소규모 전쟁들과 대기근, 외부세력의 침략으로 저희 라이오스의 이상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서도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물론 저희 라이오스를 중요하게 생각해 주시는 교국과 공화국의 인사들에게는 감사하다만… 솔직히 심정을 이야기하자면 과한 관심이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기영 명예추기경님께서 이곳을 찾으신 이유도 그건 때문이시겠지요. 먼저 이야기를 꺼내시기 전에 완곡한 거절의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이전처럼 저희 라이오스는 어느 쪽에 설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공화국 쪽에도 똑같은 말을 전했으니 교국과 공화국의 지도자 분들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를 테면 다시 한번 개고생을 하고 싶지 않다는 거다. 공화국이나 교국 중, 어느 곳 한 쪽으로 무게 추가 흔들린다면 지금까지 이루어놨던 모든 걸 다 잃을 수 있는 상황이다. ‘공감할 수 있지. 있고말고.’ 마치 정하얀과 차희라라는 두 열강을 사이에 둔 이기영을 보는 듯한 느낌. 이쪽이나 저쪽이나 곧 죽어도 중립국을 외쳐야 되는 상황이다. 단언컨대 지금의 나는 소설, <광장>의 주인공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중립국을 외칠 준비가 되어 있다. 정리해 보자면 이쪽은 중립을 유지해야 되지만 라이오스가 중립을 지키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는 상황이라는 거다. ‘쓰레기 같은데.’ 전형적인 내로남불의 정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그 문제 때문에 방문한 것은 아닙니다, 프리스티나 님.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차차 말씀을 드리겠지만 너무 성급하게….” “그렇군요. 명예추기경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조금 성급했지요. 하지만… 조금 더 저희의 뜻을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을 환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 라이오스는 항상 이곳을 찾아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고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곳을 찾아주신 여러분 사절단을 환영해 드리는 것도 저희가 할 일 중에 하나이고요.” “감사합니다.” “멀리서 온 친구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이곳의 오랜 관습이며 자랑입니다.” “아아….” “피곤하실 테니 들어가는 즉시 방을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라이오스가 처음이라고 하셨지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연인들이 즐길 것이 많습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차희라 님과 이기영 님이 이방인들의 대륙에서부터 좋은 인연을 만들었다 들었는데… 천천히 둘러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으실 겁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인사를 한 것은 차희라였다. 그녀는 당장 기분이 좋은 것 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뒤를 돌아보기가 두려워지는 상황. 나와 마찬가지로 녀석 역시 이쪽의 중립을 박살 내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방금의 각도기는 상당히 날카로웠다. “이렇게 보니 두 분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점점 뒤쪽의 온도가 내려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얘 지금 일부로 이러는 거 아니지?’ 날아 들어온 연타에 조금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랑을 속삭이면 평생을 함께한다는 바위가 있는데 라이오스를 찾으시는 많은 분들이 함께 찾으시곤 합니다. 내일이라도 시간이 나시면 두 분이서….” ‘그만해.’ 악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당장에라도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볼을 있는 가득 부풀리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이 시야에 비치고 있었으니까. # 302 회귀자 사용설명서 302화 중립국 라이오스(3) 날카롭게 치고 들어오는 공격은 불안했지만 라이오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사절단 방문을 축하하는 연회가 벌어지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이국적인 풍경 때문인지, 특유의 국민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서 많은 이들이 라이오스를 찾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들은 다툼을 싫어하고 조화나 융화를 중요시한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자신을 다스리고 절제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특이한 몇몇이의 행동은 지구의 불교를 생각나게 했다. 실제로 교국과는 다르게 라이오스에서 눈에 띄는 직업은 수도사와 고행자. 사제 직군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은 교국이 보유하고 있는 신성기사단과는 그 본질부터가 다르다. 성기사가 추구하는 것이 신에 대한 믿음이라면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정신의 수양. 어떻게 보면 종교 문제로 마찰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라이오스 국민들이 베니고어 여신의 우방이라 분류할 수 있는 마하마라 여신을 믿고 있기 때문이리라. 마하마라 여신의 교리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신도들의 수양과 행복. 이들이 이런 국민성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그들이 모시고 있는 신의 교리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좋은 곳이야.’ 그렇다 보니 전체적으로 나라 자체가 소박하고 사치가 없다. 하지만 교국의 손님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을 리가 만무. 이들의 입장에서는 제법 성대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성대한 연회를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혹시나 사절단에게 실수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교국은 엄연히 대국이다. 시민혁명을 겪은 이후에도 여전히 교국은 대륙 정세의 중심에 서 있다. 교국을 대표하는 우리 사절단에게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뻔하다는 거다. 그 동안 많은 자리에 불려나가기는 했지만 이토록 편하게 접대를 받는 것은 처음. 무희의 춤은 아름다웠고 그들의 문화와 음악 역시 보고 듣기에 좋다. 정말로 오랜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취한 느낌이었으니 끝나 갈 때 즈음에는 거나하게 술에 취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연회는 어떠셨습니까.” “즐겁고 과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분에 넘치는 환대를 해주시니 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만족스러우셨다니 다행이군요. 음식과 술이 입에 맞으실까 걱정했었는데… 조금 안심이 됩니다. 머무시는 동안에는 사용하실 수 있는 별채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붉은용병 분들과 파란 분들이 따로 사용하실 수 있게 했으니 함께 오신 사절단 분들과 묵으시면서 내일부터라도 천천히 라이오스를 둘러보셨으면 합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프리스티나 님.” ‘대우가 좋긴 좋네.’ 아까부터 느끼기야 했지만 어떻게 해야 이쪽이 기분 좋을 수 있을지 알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냥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것도 아니다. 이미 프리스티나는 이쪽과 함께하자는 제안에 완곡한 거절의 뜻을 밝혔으니 이 연회는 사과의 표현도 겸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미 날이 많이 어두워진 상황이라 이만 잠을 청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살짝 몸을 일으키자 몰려있던 취기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생각보다 술이 독하나.’ 달콤한 술이라고 생각해 무작정 들이키다 보니 이런 상황이 펼쳐진 것이리라. 안 그래도 오랜 여행 때문에 몸이 피곤한 상황. 이쪽이 힘들어 하고 있다는 걸 대충 눈치챘는지 아무 말 없이 다가온 박덕구가 슬그머니 중심을 잡아줬다. 정하얀 역시 혹시나 뻇길까 싶어 이쪽의 팔을 잡았고 그 사이에 차희라가 이쪽의 바톤을 넘겨받았다. 직접 꼬맹이를 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슬그머니 손을 휙휙 젓는 것을 보니 빨리 들어가 보라는 뜻. 박덕구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쪽은 대충 인사를 한 뒤에 연회장을 나올 수 있었다. ‘엄청 피곤한데….’ 박덕구와 정하얀은 비교적 괜찮아 보인다. 아무래도 스탯 차이가 있다 보니 이쪽이 조금 더 빨리 취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한소라도 나처럼 피곤해 보이지는 않은 것 같아 괜스레 낮은 체력이 서러워졌다. “허이구. 거, 너무 달린 거 아니요? 이렇게까지 취한 건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글쎄다.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하네.” “형님 마음도 조금은 이해가 되긴 되오. 오랜만에 기분 좋은 자리였으니까. 사람들도 전부 다 좋아 보이고 말이요.” “뭐 그렇지.” “아무튼 간에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누님이랑 같이 여기저기 좀 돌아다녀 보쇼. 거 듣자하니 여기저기에 신기하고 볼거리가 많은 모양이오.” “그래?” “뭐, 진실의 동굴이라는 것도 있다는데 몇백 년 전에 발견된 여신의 유산이라고 말이 많았다니까. 나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대륙법으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나 보호물들이 여기저기에 몰려 있는 모양이오. 라이오스에서는 멸종위기에 놓인 몬스터들을 사냥 금지하는 법도 있다고 하니 이런 것들이 잘 보존되어 있지 않겠소?” “엄밀히 말하면 교국도 베니고어 여신에 관련되어 있는 것들은 엄중히 관리하기는 해.” “아 교국도 그런 게 있소?” “응.” “아무튼 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장소 같다니까.” “응.” ‘피곤해 뒈지겠네.’ 옆에서 자꾸만 정하얀이 건네는 술을 받아든 부작용이리라. 정하얀은 이쪽이 걱정되는지 팔을 붙잡고 영차영차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사실상 둘 다 박덕구에게 끌려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야에 비친 것은 커다란 별채. 여기저기에 이국적인 양식이 드러나 있는 것은 여전했지만 별채의 안쪽은 교국의 그것과 유사했다. 아마 교국의 사절단이 올 때마다 사용했던 장소가 틀림없으리라. “여, 여기서부터는 제가 할게요.” “어엉?” “제가 침실까지 부축해 드릴 수 있어요.”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되겠네!” “네. 그, 그럼 그렇게 해요.” 박덕구는 잘 됐다는 듯 이쪽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뭔가를 할 여력이 없다. 당장에라도 졸음이 쏟아질 것 같았으니까. 벌써부터 비몽사몽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사실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도 힘들다. ‘씻을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다.’ 마법은 이럴 때 상당히 유효하다. 넓은 방으로 들어온 이후에는 그대로 침대로 널부러진 것은 당연지사. 정하얀이 ‘씻, 씻겨드릴까요?’라고 말해 개미만 한 목소리로 긍정의 신호를 보냈다. 물론 조금씩, 조금씩 수마로 빠져드는 와중에도 라이오스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급한 상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현재 교국은 믿을 수 있는 동맹국이 필요하다. 매일 으르렁거리는 공화국은 애초에 논외. 왕국연합 같은 경우에는 이쪽을 경계하다 못해 칼을 들이밀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비빌 수 있는 구석이 있는 곳은 라이오스나 이종족들이 끝이다. 계속해서 중립을 외치고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좋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마땅히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문제다. 꼬투리를 잡아서 질질 끌거나 공화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만…. ‘너무 급하게 다가가는 건 안 좋아. 시간을 조금 두고 보자.’ 겉으로는 잘 대해주고 있지만 이들은 이미 우리를 충분히 경계하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공화국의 인사들과도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리라. ‘머리 아파….’ 편안하게 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일중독이 맞다. 국왕 꼬맹이의 말대로 내일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푹 쉬었으면 좋을 것 같은 느낌. 그 생각을 끝으로 나는 눈을 감았고 햇빛이 얼굴을 비추는 감각과 동시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벌써 아침이 찾아온 것이다. “아으…. 머리야.” “오빠, 일어나셨어요?” “아, 하얀아. 지금 몇 시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문 쪽에서 커다란 그릇을 든 채로 서성거리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친다. “지금 세 시예요.” “세 시?” “네. 지, 지금쯤 일어나실 것 같아서 따뜻한 스튜를 조금 가져왔어요. 제가 직접 만든 거요! 마침 딱 맞게 일어나셨네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 “네.” “몇 시간밖에 안 잔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몸이 피곤하지?” “어, 어어… 어제 무리하셨으니까요.” 그 말이 맞다. 슬그머니 정하얀을 바라보자 함박웃음을 짓다 못해 입꼬리가 올라간 게 눈에 보인다. 아무래도 오늘은 기분이 좋은 모양. 어제 무희가 등장할 때부터 볼을 부풀리고 있어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하룻밤 새 짜증이 풀린 것 같았다. 잠도 푹 잤는지 생기가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모습. ‘피부도 엄청 탱탱하네.’ 술자리를 같이 했다고는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마법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피부에 윤기가 흐르는 게 마치 오일이라도 발라놓은 것 같이 보였고 전체적으로 기분이 좋아졌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 모습에 나 역시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여러 가지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 그나마 저런 모습을 보여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떻게… 피곤하실 테니 이거 드시고 조금 더 주무시는 게….” “아냐. 여기까지 와서 잠만 자기에는 조금 아까우니까. 포션 한 병 따고 적당히 움직이면 돼. 희라 누나는? 아니지. 덕구도 아직 안에 있어?” “아. 두 분이랑 소라 씨는 밖으로 나갔어요. 붉은용병 단원 분들도 전부다요. 오늘 하루는 라이오스를 둘러보실 생각인가 봐요. 오빠가 일어나면 연락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래?” “네.”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움직이자. 아……. 잠깐, 하얀아.” “네… 네?” “내가 요즘 조금 무심했지?” “아, 아니요…. 오빠는 바쁘시니까. 하, 하실 일도 많고 이해할 수 있어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 살짝 이마에 뽀뽀를 해주니 고개를 푹 숙인 게 보인다. 귀까지 붉어진 모습이 조금은 귀엽게 느껴진다. 아무튼 간에 이곳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정하얀이 가져온 밍밍하고 이상한 스튜를 들이켠 뒤에는 곧바로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아리스 시녀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교국의 지도자를 시녀로 부리는 그림은 내가 봐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몸이 피곤하다 보니 별 생각이 다 든다. 평소에는 확실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이럴 때 없으니 괜스레 아쉬워 진다. 정하얀이 아무리 이쪽을 챙겨주려고 노력한다고 한들, 프로와 아마추어의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갭이 존재한다. 마음은 고맙지만 나를 챙겨준다고 헐레벌떡 뛰어다니는 정하얀의 행동은 오히려 이쪽의 준비를 늦추고 있었다. “슬슬 나가자.” “네!” “오랜만에 데이트 같네. 그렇지?” “아! 네! 그, 그렇네요!” ‘그래. 오늘 하루는 서비스해 준다.’ 어차피 이후에는 차희라와 합류해야 하겠지만 짧은 시간이라도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게 정하얀에게는 중요하리라. 안 그래도 기분 좋아 보이는 타이밍이니 여기에서 정점으로 올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당분간 조용해질 수도 있고 차희라와의 관계도 조금씩 개선시키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걱정 하나는 덜 수도 있겠는데….’ 정하얀 덕분에 이쪽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 그렇지만. 모든 게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모르게 꼬일 것 같다고 직감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나가 왜 거기서 나와?’ 이제는 기억도 흐려지고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여자는 굉장히 익숙하다. 처음 마주친 것은 블랙마켓에서 였고 두 번째는 차희라의 폭주 때문에 도움을 받았을 때였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공화국 인맥, 공화국에서 자랑하는 오호대장군의 일원으로 전설 등급의 무기, 여신을 벌한 채찍, 울드의 소유자. 내가 본 기벽 중 가장 개떡 같은 기벽을 가지고 있는 인간 중 하나였다. ‘샤오린?’ 황급하게 발걸음을 뒤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슈바….’ 찔리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 303 회귀자 사용설명서 303화 범의 아가리(1) ‘운수 좋은 날도 아니고….’ 내 눈이 옹이구멍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샤오린이다. 마음의 눈에 비치는 정보 역시 그녀가 이전에 내가 본 사람이 틀림없다는 걸 확인시켜 준다. 스탯의 성장이 있지만 기벽도 같고 직업이나 모든 부분이 완벽하게 일치한다. 항상 끌고 다니는 똘마니들 역시 여전하다. 똘마니들 중 한 명이 들고 있는 가방에는 틀림없이 전설 등급의 무기가 들어 있을 터. 거리에 있는 가게들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제 막 별채를 나와 기분 좋게 라이오스를 산책하려고 했던 타이밍. 길거리에서 반갑지 않은 얼굴을 만났으니 곧바로 발걸음을 돌리는 건 자연스러운 행동이리라. ‘슈바.’ 가까운 시일 내에 자리를 만들겠다는 조건으로 도움을 받은 이후 벌써 1년이 넘어버린 상황. ‘약속 꼭 지켜’라고 적혀 있던 편지가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정하얀이나 차희라와 비슷할 정도로 머리가 돈 강자였으니 뭔 짓을 해올지 알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특히나 정하얀과 저 미친년을 마주치게 했다가는 중립지역에서 사고가 날 수도 있다. 정하얀은 갑작스럽게 발걸음을 돌리는 내 모습에 조금은 놀란 얼굴로 두리번거린다. 깜짝 놀랐다는 샤오린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어?” 대놓고 놀랐다는 듯한 목소리가 길거리에 울려 퍼지는 것은 순식간. 정하얀은 조금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 같았지만 미친 여자의 목소리는 귀에 똑똑히 들려온다. ‘눈치챘나.’ 라이오스의 국민들과 관광객들로 꽉 찬 거리의 중심에서 유독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와 순간적으로 정하얀의 팔을 끌어당길 수밖에 없었다. ‘빨리 가자. 빨리 가.’ 뒤만 바라보고 무조건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저쪽이 이쪽을 발견했는지는 눈치 못 챈 상태. “오빠 방금….” “지금은 굳이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고 싶지는 않아.” “아… 오, 오빠.” 공화국의 미친년과 밀회를 하기로 약속했다는 정보는 굳이 정하얀이 알 필요가 없다. 조금은 감동받았다는 정하얀을 이끌고 사람이 몰려 있는 지역을 빠져나오는 것은 순식간.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은 있었지만 괜스레 더 불안해진다. ‘반대쪽으로 돌아가는 게 좋나.’ 아니면. ‘희라 누나를 바로 만나러 가는 게 좋을까.’ 떨어질 수만 있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 정하얀이 속삭이듯 말했다. “저, 오빠.” “응.” “사람이 붙은 것 같아요.” “뭐?” “저희를 뒤 따라 오는 사람들이 세 명 있어요. 정확한 위치는 가늠이 안 되지만 아까 본 사람이 데리고 있었던 사람들 같아요.” “붉은용병의 그림자들이 아닌 게 확실해?” “네. 그 아저씨들은 아니에요. 아까 그 여자가 데리고 있었던 사람들 같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확실한 것 같아요.” ‘아….’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그냥 내버려 둬. 천천히 따돌리면 되니까. 그 사람은?” “그 여자는 안 보이는 것 같구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들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아직도 거리가 조금 멀고요. 호, 혹시 아는 분들인가요?” “조금….” 저쪽에서도 큰 문제를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것은 듣던 중에 반가운 이야기. 차라리 곧바로 찾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년도 제대로 돈 년이야.’ 블랙마켓의 VIP였고 눈만 봐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게 느껴지는 여자다. 기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목 조르는 로맨티스트’라는 말이 뭘 뜻하는 건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이 나이에 목이 졸려 죽고 싶지는 않다. 제대로 된 생각이 박혀 있지 않은 것은 물론, 열이 오를 대로 올랐을 수도 있는 만큼 무언가 리액션이 있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정하얀은 그 리액션에 반응할 확률이 높다. 라이오스에 있는 걸 확인했으니 따로 연락을 해보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을 정리한 것은 순식간. 일단은 이쪽 역시 저쪽을 발견하지 못 한 척 빠르게 자리를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적당히 정하얀을 끌고 다니며 최대한 사람이 많은 곳으로 이동한 뒤에는 도시의 외곽을 돌아다니기 시작. 그 와중에 정하얀은 방해받았다고 느낀 모양인지 볼을 부풀렸지만 내가 이 데이트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정하얀은 이쪽을 미행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실황으로 중계하고 있었고 언제 채찍을 든 미친년이 나를 찾아올지 걱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정하얀 역시 상당히 날이 선 상태. 린델 테러사건을 떠올려 보면 그녀가 민감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그때 당시에도 처음 시작은 이런 식이었으니까. 결국에는 이 가게, 저 가게 골목을 돌아다녔고 종종 정하얀의 마법에 도움을 받으며 미행을 떨쳐 낼 수 있었지만…. ‘여기가 어디야.’ 제법 멀리까지 와버린 것이 문제였다. 길을 잃은 것도 아니고 옆에는 가장 든든한 보디가드도 있는 만큼 당황하지 않았지만 돌아갈 길을 생각하니 막막하다. 라이오스를 제대로 즐길 생각에 기대하며 나왔었지만 괜스레 한숨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놓고 티를 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정하얀 역시 조금 씁쓸해한다. 애초에 단 둘이 나온 게 굉장히 오랜만이다. 실제로 무척 기대하고 있었던 시간이었고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시간이 날지 모르는 만큼 정하얀에게 오늘은 무척 소중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행복했던 계획이 뜻밖의 불청객에게 방해를 받은 셈. “다음에 또 나오는 게 좋겠다. 오늘은 조금 정신이 없었네.” “네… 오빠.” 정리하자면 정하얀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준다는 최초의 목적은 이미 무너진 상태라는 거다. 괜찮은 곳에서 식사라도 하는 게 그나마 정하얀의 기분이 풀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근처 괜찮은 곳 역시 전부 영업을 하고 있었고 때 마침 식사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정하얀의 손을 잡고 적당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희라 누나한테는 또 뭐라고 말하나.’ 정하얀의 기분을 풀어줘야 하는 만큼 차희라에게도 시간을 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프다. 적당한 곳을 결정하고 안으로 들어서자 시야에 비치는 내부가 꽤나 마음에 든다. 나름대로 고급스러운 느낌도 있었고 사람들로 꽉 채워진 좌석 역시 괜찮아 보인다. 조금 이상했던 것은 갈색 피부를 가진 라이오스 인들이 아닌 검은 머리를 하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 심지어 교국민들과는 조금 다른 듯 한 느낌의 백인들 역시 눈에 띈다. ‘이건 또 뭐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 것은 순식간. 불안한 내 마음을 대변하듯 마음의 눈은 재빠르게 반응한다. [플레이어 발렌틴 알렉산드로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발렌틴 알렉산드로] [칭호-로나프의 괴물, 로나프의 학살자, 공화국의 오호대장군] [나이-39] [성향-단순무식한 살인자] [직업-로나프의 싸움꾼-영웅 등급] [직업효과-기초 무투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무투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무투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마력 운용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97/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민첩-89/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체력-91/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지력-31/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내구-87/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행운-32/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마력-61/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특성-분노조절-전설 등급] [총평-낮은 마력이 아쉽기는 하지만 근력과 민첩, 체력이 훌륭하게 밸런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성향과 기벽이 둘 다 별로 좋지 않습니다. 저런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건 굳이 추천 드리지 않겠습니다. 플레이어 이기영이 빨리 죽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미친….’ 눈에 띄는 것은 박덕구만큼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백인. 아니, 앉아 있는 모습만 봐도 녀석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느낌이다. 얼굴에는 길게 상처가 나 있었는데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을 더 쓰레기 같이 만들어 주고 있었다. 흔하지 않은 무투가인 것 같았고 직업 효과로 고급 마력 운용 지식을 가지고 있는 걸로 봐서는 이미 경지에 들어선 모양. 성향 자체도 위험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공화국의 오호 대장군이라는 칭호였다. ‘슈바….’ 녀석 말고도 눈에 띄는 이가 한 명 더 있다. 테이블의 중심에 앉아 있는 녀석이었고 검은 머리에 나와 비슷한 체형을 가지고 있는 인물. 저쪽은 중국인이 틀림없으리라. 조금은 야비해 보이는 이쪽과 다르게 편안한 인상이 눈에 띄었지만 능력치 자체는 편안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플레이어 진청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진청] [칭호-책사, 전장위의 현자, 공화국의 오호대장군] [나이-30] [성향-계획적인 전술가] [직업-군단 마도사-전설 등급] [직업효과-기초 마법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마법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마법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소환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마력 운용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65/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민첩-75/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체력-89/성장 한계치 희귀 이상] [지력-99/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77/성장 한계치 희귀 이상] [행운-67/성장 한계치 영웅 이하] [마력-97/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특성-열람이 불가능합니다.] [총평-완벽한 밸런스를 가지고 있는 마도사입니다. 플레이어 이기영과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해질 정도의 스탯과 잠재 능력이 눈에 띄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아쉽게도 마력 수치는 더 이상의 성장이 불가능해 보이기는 하지만 99의 지력 수치와 높은 기본 스탯이 그 단점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남은 한 명 역시 공화국의 오호대장군이란다. 그 외의 떨거지들 역시 대충 봐도 상당한 실력자. ‘회식이라도 하는 거야, 뭐야.’ 어서 빨리 이 장소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지사. 눈치 없는 정하얀은 이쪽의 얼굴을 보고서는 빨리 들어가자는 듯이 이쪽을 재촉하고 있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안 그래도 갑작스러운 손님의 등장에 이쪽으로 묘하게 시선이 쏠려 있는 상황. 박덕구보다 덩치가 커다란 러시아인도 그렇고 마법사로서 말도 안 되는 스탯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중국인 역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게 이상한 건가.’ 어쩌면 알아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쪽의 얼굴은 생각보다 털렸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교국의 인물이라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가장 처음 몸을 일으킨 것은 커다란 몸을 가지고 있는 발렌틴 알렉산드로. 과장하지 않고 이쪽의 세 배는 될 것 같은 덩치가 눈에 띈다. “제국인, 아니, 이제는 교국인인가.” 가래가 끓는 듯한 목소리는 듣기가 거북하다. 중국인 진청은 테이블을 툭툭 건드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재미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저 자식은 이쪽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정하얀이 서서히 마력을 풀고 있는 게 느껴져 일단은 손을 꽉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쪽은 둘이고 저쪽은 다수다. 심지어 공화국의 오호 대장군이라는 게 두 명이고, 정하얀은 모르겠지만 당장 나는 전력으로 취급받기가 힘들다. 만약에 싸움이 난다면 무조건 죽는 건 이쪽이라는 거다. ‘중립 지역이지만….’ 전투가 일어나지 않은 보장은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인지는 모르겠지만 심지어 뒤 쪽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병신 같은 새끼들. 그걸 놓쳐? 쓸모없는 놈들. 쓰레기 같은 놈들.” ‘제기랄….’ 퇴로까지 완전히 차단당했다. 벌컥 문을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예의 그 채찍녀. 저쪽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겠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샤오린 님, 여기 계셨군요!” “당신….”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모릅니다. 하하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름다운 미모도 여전하십니다.” 오늘 하루 행복해야 할 정하얀이 사정없이 표정을 구기고 있었다. # 304 회귀자 사용설명서 304화 범의 아가리(2) 샤오린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이 새끼가 왜 여기에 있어?’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 갑작스럽게 날아 들어온 아부성 멘트에 미처 반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황당한 모양이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덩치 큰 러시아인과 군단 마도사 진청 역시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와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연을 맺은 적이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손님인가.” 진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발렌틴이 아쉽다는 어투로 혼자 중얼거리는 게 들려온다. 어째서 아쉬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장소를 빠르게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 진정하라는 듯 정하얀의 손을 꽉 쥐어주자 그제야 정하얀의 호흡이 조금 안정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질투하는 건 아니구나.’ 그녀 역시 극도로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는 상태. 대충 봐도 자신과 같은 급이라고 할 수 있는 강자가 세 명이나 자리해 있었으니 혹여나 내 안전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신경 쓰지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면 무언가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혹시나 일이 터질 상황을 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 “연락이 조금 늦어서 죄송합니다, 샤오린 님.” “연락이 늦었다는 정도로 말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지 않나?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약속을 안 지키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물론 저 역시 연락을 드리고 싶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지난 시간 동안 교국이 굵직한 사건들을 연달아 겪어서 말입니다. 어떻게든 해보려 해도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서… 저도 참 힘들었습니다.” “글세…. 아까 우리 마주친 것 같았는데 그건 제 착각이었나 보네요. 그리고, 숙녀를 만나러 왔으면 혼자 오는 게 응당 예의인데 옆에 여자를 끼고 들어오는 건 또 무슨 경우람? 게다가 내가 이쪽으로 올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슈바…. 그건 또 생각 못 했네.’ 첫 멘트를 잘못 쳤다.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모릅니다.’ 대신, ‘우연입니다’ 같은 대사를 쳤어야 했다. 이쪽이 공화국의 이방인들의 뒤를 캐고 다닌 것 아니냐고 책망하는 듯한 어조. 진청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린다. ‘미행당하고 있었나.’ 라든지. ‘이쪽의 움직임을 신경 쓰고 있었나.’ 따위를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으리라. 당연하지만 개뿔 그딴 건 없다. 정말로 우연히 들어왔을 뿐이었고 샤오린 역시 우연히 만났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도시 외곽에 있는 장소에 교국의 권력자가 들어왔다는 건 이들의 입장에서도 의심스러울 것이 당연할 것이다. 뭔가 목적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마 사람을 착각하신 모양입니다. 이곳을 찾아온 것도 우연이고요. 그나저나 항상 여전하십니다.” “당신도. 입 하나는 여전하시네요.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의 태도가 다른 것도 여전하고. 그 많은 장소 중에 이곳에 딱 들어왔다는 게 우연이라고? 어떻게 이곳을 찾았고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한테는 별로 상황이 좋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죠? 반가운 손님이라도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오면 불청객이 되는 법이에요. 물론 나는 그다지 상관없기는 하지만 내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궁금한데…. 당당하게 찾아온 것 치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 같고. 잡아먹어 달라고 스스로 걸어 들어온 초식동물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확 잡아먹어 버릴까?” ‘슈우발….’ “누구지?” “아. 발렌틴 님도 아마 아는 사람일 텐데….” “그러니까 누구냐고 묻고 있잖아.” “최근에 교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사람이잖아요? 린델에 자리 잡고 있는 파란의 부길드 마스터, 용의 선택을 받은 자, 신성제국에서 최초로 직위를 받은 이방인, 교국 8좌, 용병여왕의 정….” 굉음과 함께 녀석이 있던 한쪽 벽면이 무너져 내린 것은 바로 그때.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럽게 벽을 향해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반사적으로 소리에 반응한 정하얀이 곧바로 눈을 치켜뜨고 손을 움직인다. 수인을 맺고 있었지만 뒤쪽에서 검이 뽑히는 것은 순식간. 단검 하나가 정하얀의 목에 겨누어 졌지만 정하얀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빠르게 입을 벌린다. 죽더라도 주문을 외우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지만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정하얀을 잃을 수는 없다. “그만!” 움직임이 우뚝 멈추고 목을 향해 쇄도하고 있던 단검 역시 움직임을 멈춘다. 정하얀의 새하얀 목에서는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샤오린은 단검을 내린다. “외웠으면 죽었을 거야. 여기에 있는 사람들도 반쯤은 죽었을 것 같지만…. 방금 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흥분하지 않아도 돼요. 마법사 아가씨. 저 아저씨가 조금 다혈질 이거든.” ‘그러니까 왜 저러는 건데.’ “아아. 옛날에 그 붉은 고릴라랑 일이 좀 있어서요. 그때 처참하게 깨졌지 아마? 얼굴에 난 상처가 그 고릴라 작품이고. 용병여왕 이야기만 나오면 저런 식인데… 용병여왕 뭐시기는 말하지 않았던 게 좋았으려나.” 쿡쿡거리는 얼굴이 눈에 보였다. 단순한 장난치고는 수위가 꽤 높다. 안 그래도 터지기 직전의 폭탄 같이 보였던 녀석은 핏발이 선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것은 물론 이쪽을 압박하는 기운 역시 쏟아지기 시작. 순간적으로 다리가 후들거릴 뻔했지만 약한 척하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양이 앞에 생쥐가 된 것 같은 느낌. 정하얀이 입술을 꽉 깨물며 내 손을 잡자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녀석이 사전 예고 없이 주먹을 휘둘러 온 것은 바로 그때. ‘개… 미친!’ 풍압 때문에 주변에 있는 물건들이 전부 날아가 버리고 공기가 찢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정하얀은 입술을 깨물었고 이쪽 역시 손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뒤에 있는 샤오린이 신경 쓰이는 것은 당연. ‘맞으면 죽어.’ 그대로 피떡이 되어 짓눌려 버리리라. 사실 믿고 있는 구석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죽음의 공포가 눈앞까지 들이닥치자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기댈 수 있는 년을 찾게 된다. 하지만 샤오린은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욕이 튀어나오기는 했지만 서둘러 수인을 맺는다. 정하얀 역시 다시금 마법을 외우려는 모습. 움직이려던 손가락이 멈춘 것은 우리들의 앞 쪽에 자리한 샤오린을 발견했을 때였다. 채찍을 두 손으로 감은 채로 녀석의 공격을 막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 ‘샤… 샤오린 최고다!!’ 다시 한번 굉음이 들려오고 저 둘의 목소리가 이쪽에 전해져 왔다. “뭐 하는 거야. 죽이려고? 내 손님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이거 놔.” “싫다면 어쩔 건데? 당신이야말로 떨어져. 성질나오기 전에.” “너….” ‘여기도 개판이구만…’ 어떻게 생각해도 분위기의 정리가 필요하다. 잔뜩 흥분해 있는 멧돼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되었는데 샤오린 역시 정면으로 저 정도의 공격을 막는 것은 힘에 부치는지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중장거리 타입이었으니 조금 무리해서 공격을 막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제발 누군가가 이 상황을 말려줬으면 좋겠다. 서서히 소변이 마려워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저쪽에서 정상인 한 명이 끼어있는 모양. 그야 이 두 미친 연놈들을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목줄이 필요한 게 당연하다. “그만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발렌틴 님. 샤오린 님. 이곳은 분쟁지역이 아닙니다.” 가장 뒤에서 간을 보고 있었던 녀석. ‘군단 마도사?’ 진청이었다. 신기했던 것은 녀석의 말 한마디에 분노조절 장애와 미친 여자가 천천히 몇 발자국을 물러났다는 것. 여전히 덩치는 손을 떨고 있었지만 테이블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것으로 화를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샤오린도 군말 없이 몇 발자국을 물러나 옆에 있는 똘마니에게 팔을 치료받기 시작.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편안한 인상의 기생오라비는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더 이상 했다가는 저희도 안 좋은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그는 이방인 최초로 명예추기경의 칭호를 받은 이고…. 교국의 교황청에서 관리하고 있는 템플러들의 비호를 받고 있는 이들 중 하나입니다. 저도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샤오린 님이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그들 중 하나가 막아섰을 겁니다.” ‘잘 알고 있는데….’ 나도 그렇다고 말로만 들었을 뿐이지만 사실상 템플러가 정말로 튀어나오는지는 시험해 본 적이 없다. 템플러들 자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어떻게 이쪽을 보호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단순히 위험에 반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방금 엄청 위험했잖아…. 왜 안 튀어나온 건데.’ 뚝배기가 터진 이후에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기는 한다. “라이오스 내에서는 아직 교국의 사절단이 들어와 있고… 대륙법상으로도 중립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금기. 당연하지만 타국의 인사를 죽이는 것 역시 위법입니다.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는 건 이곳이나 저쪽이나 피하고 싶은 일이라…. 특히나 요즘 같이 민감한 시기에는 말입니다. 발렌틴 님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는 용병여왕이 아니지 않습니까.” “…….” “이곳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기회는 있을 겁니다. 사실 제 입장에서는 그런 일이 터지지 않는 게 가장 이상적입니다만…. 아.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습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 공화국의 오호대장군 중의 하나이자 공화국 군사의 자리를 겸하고 있는 진청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야기는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사실 전해들은 적은 없지만 녀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온다. 뭔가 그럴 줄 알았다는 느낌이다. ‘지력 99.’ 편안한 인상이기는 하지만 대충 봐도 생각이 많을 것 같이 느껴지는 타입. 단순한 지력 수치가 머리가 똑똑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는 아니지만 눈앞에 있는 이 마법사는 상당히 머리가 좋아 보였다. 칭호로 책사를 달고 있는 것도 그렇고 열람되지 않은 특성이 있다는 것도 그렇다.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신화 등급 급의 특성을 가지고 있거나, 카스가노 유노나 나와 같은 눈깔 사용자라는 것이 되니 호기심이 동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수준이 높네.’ 조금 차분한 분위기에서 한 번 더 깨달을 수 있었던 사실은 이들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수준이 높았다는 것. 단순히 버텼을 뿐이었지만 저 샤오린은 차희라를 상대로 30분 이상을 상대한 적이 있었고 발렌틴 알렉산드로 저놈은 움직이는 폭탄 그 자체였다. 칭호도 그렇고 성향 자체도 그렇다. 사람 좋아 보이는 진청 역시 뛰어난 스탯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니 어떻게 봐도…. ‘8좌보다 강한 건가.’ 물론 8좌에도 차희라나 김현성 같은 괴물들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눈앞에 보이는 이들은 제국 8좌의 하위 스쿼드를 상회할 정도의 스펙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테면 다완의 궁수나 박연주, 천관위 같은 이들은 눈앞에 있는 녀석들을 감당할 수 없다. 스탯이나 특성, 무구의 상태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만 강함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격차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음…. 이곳을 찾아와 주신 이유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들어도 상관없겠죠. 일단은 인사를 하는 게 맞을 것 같군요. 아! 자리에 앉으시지요. 숙녀 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쪽이 앉기 편하게 슬그머니 의자를 빼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정하얀은 녀석의 친절이 불쾌하다는 듯 살짝 인상을 구겼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정하얀에게 끼를 부리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개자식.’ 정하얀 그녀가 세상에 둘도 없을 인재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 남자로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 됐든 이쪽의 기분이 더러워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녀석은 그런 이쪽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음… 아직 식사를 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이곳은 제법 시간이 걸리는 편입니다. 뭐 식사를 기다리시기 전에 잠깐 간단한 게임이라도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금은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갑자기 무슨 미친 소리야.’ # 305 회귀자 사용설명서 305화 간단한 게임(1) “게임 말입니까?” “네. 단순한 놀이입니다. 체스나 장기 같은 게임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물론 그것보다는 조금 더 복잡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당신이라면 금방 이해하실 겁니다.” ‘갑자기 게임은 무슨 게임이야. 미친 자식이….’ 그딴 건 상관없으니 그냥 빨리 집으로 되돌아가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가 만무. 지금 이쪽이 다른 일에 휘말리지 않고 안전히 있을 수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눈앞에 있는 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일단은 안전한 건가.’ 분쟁 지역에서 문제를 일으키기 싫다고 하는 것을 보니 복잡한 일에 연루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모양. 지금 당장은 이쪽에 묘한 호의를 보내오고 있는 것 같지만 본래 언제 뒤집힐 줄 모르는 게 사람 속내다. 일단은 녀석의 말에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장단에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분위기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고 이 자식은 확실하게 샤오린과 발렌틴을 컨트롤하고 있다. 녀석에게 이 둘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무력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손을 뻗어오지 않는 러시아산 박덕구를 보면 답이 나온다. ‘괜찮아.’ 고개를 돌려 정하얀을 바라보자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살짝 어깨를 두드려 주자 조금은 진정하는 듯하다. 죽을 뻔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인지 식욕이 뚝 떨어졌지만 녀석이 권하는 대로 움직여줄 수밖에 없었다. “식사는 제가 대접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보다 게임에 대해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혹시나 이런 종류의 게임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뇨. 처음 봅니다만….” 녀석이 똘마니들 중 하나가 가져온 것은 우습게도 커다란 보드게임. 수십 가지의 장기 말로 구성되어 있었고 맵 자체는 마치 실제의 지형을 따왔다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숲, 바다, 사막, 평야, 성벽. 장기말 들의 구성 역시 굉장히 다양하다. 왕, 기사, 마법사, 기사, 사제, 백성, 정확히 뭐라고 딱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녀석의 말대로 장기나 체스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은 느낌. 다만 그것보다 더욱더 복잡하다. 전투 말들에게는 보급품을 전달해 주어야 했고 병과마다 분류되어 있는 병력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필요한 자원을 충족해야 했다. 병사들 역시 굉장히 세분화 되어 있었는데 궁병이나 보병, 기마병 같이 기본적으로 대륙에서 운용하고 있는 병과들이 많이 보였다. ‘게임은 개뿔….’ 이 판은 전쟁의 축소판이다. 물론 녀석의 말대로 게임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어느 정도의 룰이 갖추어져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기본적인 룰을 제외한다면 실제 전쟁과 굉장히 유사하게 만들어져 있다. ‘의도가 뭐지.’ 기본적인 의도가 궁금해지기는 하다. 어쩌면 정말로 여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쪽을 시험해 보겠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굉장히 기대하고 있는 눈빛을 보면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지만 지략의 천재 어쩌구 하는 것은 전부다 날조된 정보들이 대부분. ‘뭔가 오해하게 만든 것 같은데….’ 하지만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기본적인 룰은 항상 그렇듯 같습니다. 왕이 죽으면 패배. 가지고 있는 모든 말을 잃어도 패배입니다. 혹시나 궁금한 것이 생기거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셔도 됩니다.” “네.” “추가로 어느 정도 핸디캡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굳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요.” “기분 나빠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이로군요.” ‘기분이 나쁘긴 왜 나빠.’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천만의 말씀. 본래부터 이쪽은 남보다 유리하게 시작하는 쪽을 즐긴다. 적당히 시간 떼우기 용으로 상대해 주는 것뿐이지만…. ‘이건 기회지.’ 살짝 정하얀 쪽으로 눈치를 보내니 이쪽이 뭘 원하는지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공화국의 군사라고 했으니 이런 종류의 전략 시뮬레이션에는 밝은 것이 당연. 아쉽게도 이쪽은 체스나 장기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평범한 말놀이가 아니니 조금은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몇 십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 이… 개자식. 미친 고인물이!’ 시작부터 병력과 보급이 우위에 있었던 상황. 그렇지만 게임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당황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이쪽이 처음이었다고는 하지만 내가 미숙함 이전에 녀석이 너무도 잘했다. 조금씩, 조금씩 이쪽의 말들을 갉아 먹으며 숨통을 조이는 꼴은 가관. 어떻게 보다 많은 병력을 유지하고 있던 내가 궁지에 몰릴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말을 옮기면 옮길수록 점점 더 상황이 꼬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실제로도 이쪽의 진영은 시작부터 쑥대밭이 나고 있었다. 더 짜증 나는 것은 녀석이 이쪽을 봐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흥미진진하다는 처음의 표정과는 다르게 조금씩 짜증 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국, 아니, 교국의 천재….” 중얼거리는 꼴은 가관. 아쉽지만 천재라는 건 홍보의 일환일 뿐이다. 제국 8좌를 발표했을 당시에 황실에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많이도 뿌려댔으니 저런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녀석이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따금 싸늘하게 이쪽을 노려보는 표정에는 확실히 멸시의 감정이 들어가 있다. ‘아니, 멸시랑은 다른가….’ 지금 보여주는 표정은 지루한 얼굴도, 무시하고 있다는 얼굴도 아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저 새끼 왜 저래.’ 조금은 의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 게임이 막 중반을 향해 흘러가고 있을 때였다. “혹시 적당히 하고 계신 건 아니십니까? 이곳에 있는 다른 이들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 그대로 게임일 뿐이고 승패에는 관계없이 저희는 마찰을 일으킬 마음이 없습니다.” ‘그게 뭔 개소리야.’ “조금은 진심으로 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이미 이쪽은 피똥이 나올 정도로 힘을 주며 진심으로 임하고 있다. 진짜로 내가 접대 게임을 하고 있었다면 아슬아슬한 시점에서 가까스로 져주는 방법을 선택했을 거다. 그게 로비고 상대방의 마음에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이니까.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이 새끼야.’ 적어도 이 게임에 익숙했었다면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밀리지는 않았으리라. 본래 룰 안에서 움직이는 게임이라는 건 항상 사기 칠 방법이 존재하니까. 만약 병법에 밝았더라면 발버둥이라도 쳐볼 수 있었겠지만 그쪽은 지휘관을 선택한 이지혜의 영역이지 내 영역이 아니다. 기본적인 공부를 해두기도 했고 스스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레벨이 달라.’ 애초의 이쪽은 녀석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 이후로 약 10수 정도가 더 흐른 상황, 앞 쪽에 있는 미친 녀석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간만에 좋은 여흥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충분히 명예추기경님을 배려해 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명예 추기경님께서는 저와 진심으로 겨룰 마음이 없으신 것 같군요.” ‘겨루긴 뭘 겨뤄, 이 미친놈아.’ “가벼운 내기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명예추기경님께서도 조금 흥미가 동하실 것 같으니….” “무슨?” “앞으로 100수 안에 제가 이긴다면 제 승리, 그게 아니라면 명예추기경님의 승리라고 합시다. 내용은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아, 손가락을 거는 것으로 합시다. 열 손가락 전부. 잘은 모르겠지만 단순한 내기라면 교황청의 템플러들도 용인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순간적으로 욕이 튀어 나올 뻔한 것은 당연지사. 이 더러운 고인물은 뉴비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없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살짝 고개를 들어 녀석의 얼굴은 봤지만 이미 눈은 나를 보고 있지 않다. 어떻게든 이쪽의 본심을 끌어내겠다는 심정으로 게임에 100% 집중한 모습이 눈에 띈다. ‘진심이야.’ 고인물의 눈에 고여 있는 것은 티끌 하나 없는 진심. 성향으로 봤을 때 녀석은 도박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다. 이미 자신에게 승기를 기울었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단순히 이쪽의 본심을 끌어내려는 욕심의 발로 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이쪽은 본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게 없다. 뭔가가 있으면 그걸 꺼내서라도 보여주고 싶은 심정. ‘이 미친 자식!’ “이, 이겨 버려요! 오빠! 봐주지 말아요!” ‘봐준 거 아니라고.’ 정하얀 역시 내가 이길 수 있다는 듯이 두 주먹을 꽉 쥐고 응원을 보내고 있으니 눈앞 미친놈의 얼굴에는 조금의 긴장감이 감돈다. ‘씨발, 누가 이지혜 좀 데리고 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하다. 100수 안에 끝내겠다고 호언장담한 미친놈은 본격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 애초에 대항하는 것 따위가 불가능하다. 이쪽의 아둔한 뇌로는 저 고인물의 생각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거다. ‘버텨야 해.’ 지지 않는 것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패배의 조건은 왕이 죽으면 안 된다는 것과 말의 전멸을 막는 것. 곧바로 말을 놀리자 내 의도를 파악한 녀석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끝까지 싸워주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당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충분한 호의를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명예추기경님은 끝까지 저를 무시하시는 것 같습니다.”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정말로요.” “…….” 정상인인 줄 알았던 녀석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녀석의 역린을 건드린 모양. 만약 어처구니없게 패배한다면 손가락뿐만이 아니라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 다른 표현은 필요 없으리라. 하지만 이쪽의 행동은 변함없다. 중반부터 말린 경기를 뒤집는 것은 불가능. 애초에 이 건 턴제 게임이다. 공간이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녀석이 한 칸을 앞으로 옮기면 이쪽은 한 칸을 뒤로 물리면 된다. 뒤는 생각하지 않고 버티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100수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왕을 살리는 걸 우선으로.’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 기사 하나는 비교적 움직이기 편한 평야로 내보내고 궁수나 암살자는 숲으로 도망친다. 마법사는 적의 시선을 끄는 용도로만 사용하고 백성들은…. ‘버린다.’ 백성들이 턴마다 공급해 주는 보급품을 최대한 확보한 이후, 시간을 끄는 용도나 길을 막는 용도로 밀어 넣는다. 본대를 향해 달려드는 백성들을 죽이는 것만 해도 녀석은 턴 하나를 소모하게 된다. 이게 만약 게임이 아니라 실전이었다면 나는 천하의 둘도 없는 개새끼가 됐을 테지만…. ‘어차피 게임이니까 상관없지 뭐.’ 솔직히 실제 상황이 오더라도 이렇게 행동할 수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녀석이 만족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저 고인물이 이기영이라는 인간에 대해 파악하고자 했다는 게 목적이라면 그 목적의 일부분은 이룬 셈이다.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 미안하다.’ 녀석의 주요 병력을 우리의 훌륭한 백성들이 막아주는 사이 이쪽의 왕은 뒤로 내빼기 시작. 일반 병사 역시 최후의 최후까지 사용하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밀어 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곡 차곡 이쪽을 잡아먹고 전진하는 놈의 군대는 숨이 막힐 지경. ‘니가 무슨 제갈공명이라도 돼?’ 앞으로 20수, 20수 안에 이쪽의 왕이 녀석의 병사에게 잡히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 306 회귀자 사용설명서 306화 간단한 게임(2) 앞으로 20수다. 녀석이 움직일 말의 위치와 내가 도망갈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해 봤을 때, 적어도 20수 안에는 녀석의 병력이 이쪽에 당도한다. 녀석이 호언장담했던 100수까지는 아직 조금 더 남은 상황. 버틸 만큼 버텨 봤지만 놈은 앞서 던진 미끼를 무시하거나 도망친 병력을 쫓아가는 데 턴을 소비하지 않았다. 왕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왕에 병력을 더 붙였어야 했나.’ 병력의 전멸을 막으려고 사방팔방으로 던져놓은 미끼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셈. 하나 하나 잡다가는 백수 안에 이쪽을 잡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내 손가락….’ 물론 다시 붙일 수는 있지만 그래도 고통스러운 건 싫다. 가슴 속 한구석에 저 미친 고인물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당연. 곰곰이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버틸 만큼 버텼지만 퇴로는 이미 막혔고 사방팔방으로 이쪽을 조여 오고 있다. 왕을 뒤로 물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백성들은 이미 대부분이 장기말로서 최후를 맞이했다.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고 녀석이 힐끔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것인지 조용한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아직도 이쪽이 적당히 자신을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미 몇십 분 전에 나온 식사는 이쪽을 기다리다 못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고 게임을 보고 있는 이들은 조용히 내 쪽을 응시한다. 판을 볼 줄 아는 이들은 수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슈바….’ 선택지가 없지만 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것은 물론 마치 모든 게 이쪽의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듯한 미소를 내비친다. 잠깐이지만 갤러리들의 얼굴에는 약간의 의아함이 들어선다. 어째서 이런 상황에서 이쪽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모든 게 개짓거리이자 연기. 그냥 허세였고 여유로운 척하는 것에 불과하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던 내가 갑작스레 실실 쪼개고 있으니 진청 역시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녀석에게 이쪽의 다음 수는 다를 거라는 생각을 심어준 것이다. ‘다르긴 개뿔.’ 병법은 내 영역이고 장점도 아니다.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에는 부끄럽지만 이쪽이 그나마 가지고 있는 장점은 선동과 날조, 사기와 협잡. 그리고…. ‘심리전.’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게임에서는 그나마 이런 장난이 먹힐 여지가 있다. 손가락을 튕기자 파직 하고 테이블에서 자그마한 용의 팔이 생겨나기 시작.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든다. 그야 그럴 것이다. 그다지 쓸모 있는 능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용을 연성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왕. 그리고 왕과 함께 움직이는 본대를 이쪽이 연성한 연금술의 산물이 붙잡았고 천천히 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도 걸려들었다는 얼굴의 미소는 그대로 유지. 상대의 기분을 긁는 야비한 표정을 계속해서 내보낸다. 퍼져나갔던 병력은 오히려 녀석의 심장으로 파고들게 만들고 그나마 평야에서 시간을 끌어준 기사단 역시 발걸음을 돌린다. 어처구니없는 악수요, 아무의미도 없는 한 수였다. ‘먹혀라. 제발… 먹혀라.’ 녀석이 이쪽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게 정답이라면 이건 먹힐 수 있다. 아직, 이쪽이 완전히 힘을 잃은 것이 아니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병력 그리고 왕과 함께 있는 병사들 역시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할 만한 여지가 있다. 보급품 역시 마찬가지. 충분하지는 않지만 녀석의 왕에게 닿을 수 있는 물품들은 조달할 수 있다. 백성들이 없으니 더 이상의 생산은 불가능하지만…. ‘병사들에게 있는 보급품을 기사에게 옮기면 돼.’ 물론 병사들은 고립되어 죽는다. 하지만 기사의 칼은 상대 진영의 왕에게 닿을 수 있다. 반격할 생각 따위는 없지만 내가 던진 이 의미없는 한 수가 녀석도 이해하지 못하는 신의 한 수가 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 녀석이 조용히 이쪽을 바라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먹혔나.’ 어째서 이런 수를 둔 것인지 고민하는 듯한 얼굴. 곰곰이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우습다. 이 다음 수가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생각할 여지는 만들었다. 너무 과한 허세는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으니 적당히 거만 떠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이해해 보라는 듯이, 받아 보라는 듯이 살짝 다리를 꼬며 녀석을 응시했고 녀석은 내가 둔 수가 정말 이게 맞는지 판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말은 없다. 아니, 불필요하다. 녀석과 함께 온 공화국의 갤러리들이 멋대로 해석해 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예상대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녀석이 판단력을 잃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갤러리들의 소리에 조금은 흔들려줬으면 싶었다. 눈에 깃든 것은 의심과 확고한 일념. 한쪽은 내 수를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할 테고, 남은 한쪽은 상관없으니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녀석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싸움에서 일단은 한 번 두고 보자는 쪽이 승리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녀석이 말을 손에 움켜쥐기 시작.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판을 바라봤고 녀석은…. ‘됐어!’ 한 수를 더 두고 보는 것을 선택했다. ‘푸핫.’ 물론 한 턴을 더 벌었다고 해도 이쪽이 끝장 난다는 것은 예정되어 있는 일이지만 적어도 한 방 먹인 듯한 느낌은 있었다. 속아준 건지, 정말로 속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에 이쪽의 의도대로 움직여주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테이블 위에 아직도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용의 팔로 다시 한번 말을 집어 든다. 녀석의 얼굴에 기대감이 깃든다. 이쪽이 다음에 무엇을 할지 기대하는 듯한 표정. 당연하지만 보여줄 것은 개뿔 아무것도 없다.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한 쇼였지만 정말로 녀석은 내게 숨겨진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병신.’ 아마 경기가 끝나고 녀석이 이 대전을 천천히 돌아본다면 방금의 한 수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는 걸 눈치챌 것이다. 다시 한번 내가 말을 들어 올렸던 바로 그때였다.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튕겨져 나간 것. 문뿐만이 아니라 입구가 완전히 박살 나 있는 상황.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굉장히 반가운 사람이 시야에 비쳤다. “희라 누나?” 내 손가락을 지켜주기 위한 천사가 강림한 것이다. ‘슈우발! 차희라 최고다!’ 살아남은 손가락은 반드시 그녀를 위해 사용하리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샘솟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차희라만 온 것이 아니다. 박덕구와 한소라 역시 자리하고 있었고 붉은용병 단원. 그리고…. ‘카아아아스가노 유노호우!’ 두 눈을 감은 채 이쪽을 다급히 찾는 얼굴이 보였다. 저 얼굴이 저렇게 반가워 보이기는 또 처음. “뭐….” 진청은 잠깐이지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됐고 용병여왕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머리를 놓아버리는 러시아산 박덕구는 그녀를 향해 돌진한다. 앞을 막아선 것은 전투력 측정기 코리안 박덕구. 쾅 하는 굉음이 들려오며 코리안 박덕구가 튕겨져 나갔지만 녀석은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켜 러시아산에게 돌진한다. “이 버러지가… 죽여주마.” “거, 인사가 너무 거친 거… 쿨럭. 아니요?”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샤오린은 채찍을 빼들었고 다른 공화국의 떨거지들 역시 전투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나를 찾으러 온 우리의 구원자들 역시 눈에 독기를 품고 있는 상황이다. 진청은 몸을 일으켰고 다시 한번 러시아산 박덕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발렌틴 알렉산드로. 제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 “차희라 님, 오랜만입니다. 그리고… 카스가노 유노 님도 오랜만이군요.” “네 인사나 받자고 여기에 찾아온 거 아니야, 쥐새끼. 사람 하나 돌려받으러 온 거지.” “아,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교국 8좌의 이기영 님을 저희가 핍박한 것이 아닙니다만… 오히려 이기영 님께서 저희쪽에….” “입 다물어라. 정신 놓는 꼴 보기 싫으면… 지금 내가 움직이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 자기랑 저 미친 채찍녀한테 진 빚 때문이니까.” 진청이 살짝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샤오린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샤오린은 슬그머니 팔을 누그러뜨리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캐슬락에서 저 고릴라가 미쳐 날뛴 걸 잠깐 말려준 적이 있었거든요. 아마 그거 때문일 거예요.” “맞아. 아무튼 간에 이유가 어찌 됐든 이벤트는 여기서 끝이야. 아, 발렌틴도 여전하네. 어때 그동안 잘 지냈어?” “이 잡년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꼴이 꼭 개와 고양이 같다고 생각했다. 공화국과 교국은 대륙인들 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끼리도 사이가 안 좋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지만 반갑지는 않다. 만약에 사고가 일어난다면 녀석들의 품에 있는 나와 정하얀이 제일 먼저 휩쓸릴 가능성이 크다. 대륙법상으로도 중립지역에서 사고를 치는 것은 금기 아닌 금기였고 나와 마찬가지로 진청 역시 커다란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하는 눈치다. 어느쪽의 전력이 우위라고 말할 수 없지만 차희라와 카스가노 유노, 정하얀의 스쿼드는 결코 약하지 않다. 아직 저 고인물의 능력이 미지수이기는 하지만 부딪친다면 사망자는 분명히 나온다. 뭐가 어찌됐든 간에 일단은 공기를 꽉 채우고 있는 적의를 잠재우는 것이 먼저였다. “실례지만 이만 일어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진청님.” “아….” 아쉽다는 눈빛. 그 다음을 보지 못한다는 게 어지간히 아쉬운 모양이다. 이쪽은 제법 당당하게 몸을 일으켰고 당연하지만 아무도 이쪽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진청이 내가 내민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녀석 역시 이곳에서 마찰을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으니 이 자리는 여기서 마무리되는 것이 맞다. 대충 악수를 하며 인사를 주고받는 훈훈한 분위기가 생겨나자 희라 누나 역시 긴장을 약간은 푸는 것 같은 느낌. 아무래도 녀석을 조금 더 놀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녀석을 향해 살짝 입을 열었다. “그대로 갔으면 내기는 제가 이겼을 겁니다.” 당연히 개소리지만…. “재미있어 졌겠군요.” 녀석은 고개를 숙여 판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샤오린 님,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장담컨대 이번에도 안 주면 미쳐 날뛸지도 몰라요. 붉은 고릴라 눈치가 보여서 배웅은 못 나갈 것 같으니까 잘 들어가세요.” 당연히 샤오린과는 약속을 잡을 생각이다. 내부를 신경 쓰기에 바빴던 전과는 다르게 공화국에게 흥미가 생겼다. 저 진청이라는 놈이 어떤 놈인지, 남은 공화국의 오호 대장군은 누가 있는지, 기본적인 정보들도 캘 것이 많다. 이쪽이 샤오린과 인사를 하고 있는 사이 정하얀은 역시 진청과 무언가 말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무언가 쪽지를 받아드는 것이 보인다. 녀석이 처음 정하얀에게 내비쳤던 관심이 진심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정이 안 가네, 저놈은.’ 누군가가 이쪽이 가지고 있는 것에 손을 데려고 하면 기분이 나쁜 것이 당연하다. 슬그머니 정하얀을 바라보자 화들짝 놀라며 이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막 정하얀에게 인사를 건네려고 했던 녀석은 잠깐 표정이 굳은 것 같은 느낌. 정하얀은 이쪽의 팔을 꼬옥 붙잡았고 나는 그녀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킨 건 제대로 했는지 확인해야 했으니까. “방금 거 녹화했어?” “전쟁 게, 게임 말씀하시는 거 맞으시죠?” “맞아. 집에 돌아가면 바로 분석할 거야. 이지혜한테도 영상 보내고 하얀이는 피곤하겠지만 오늘 나랑 같이 밤새는 게 좋겠다. 괜찮지?” “네… 네! 무, 물론이죠. 물론이고 말고요.” “아. 그리고 나는 네가 저런 사람이랑 이야기 섞는 거 별로 안 좋아해. 내가 무슨 말하는지 알겠어?” 나는 되고 너는 안 돼. 전형적인 내로남불 쓰레기의 정석. 내 표정에 깃든 책망을 엿본 것인지 정하얀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게 시야에 비쳤다. 순진한 정하얀은 본인이 바람이라도 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307 회귀자 사용설명서 307화 정하얀 사용설명서(1) ‘짜증 나네.’ 말 그대로였다. 애초에 이쪽이 정하얀을 등한시 한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녀는 이쪽을 지지해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잊고 있었어.’ 정하얀의 가치에 대해 잊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녀는 김현성이 튜토리얼부터 예의주시하던 천재 마법사다. 정하얀이 일반인이 생각할 수 있는 상식 선을 벗어나 있다는 걸 떠올려 보면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검은색 세계의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나 역시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천재.’ 그저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것이 사실. 전설 등급 이상의 마력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그녀만큼 성장이 빠르거나 마법에 익숙하지 않다. 재능 있는 수많은 마법사 중에서도 정하얀은 압도적일 정도로 성장이 빠르고 강하다. 김현성이 알고 있는 미래의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 꼭 필요한 인재. 애초에 회귀자인 김현성의 성장속도를 순수한 재능만으로 따라잡고 있으니, 이것만 봐도 그녀는 규격 외라는 꼬리표를 달기에 충분한 셈이다. 단순한 추측이지만 정하얀은 앞으로 닥쳐올 미래에 꼭 필요한 마법사였고,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이들이 봐도 충분히 군침을 흘릴 만한 인재였다. 오늘처럼 상대 진영 놈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거다. 단순히 강하게만 보였다면 오히려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으리라. 누가 보기에도 정하얀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해 보였고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다루기 쉬운 사람이 없으니 벌레가 꼬이는 건 당연하다. 만약 내가 정하얀의 반대 진영에 있었다고 해도 일단은 그녀를 꿰어내기 위해 온갖 개짓거리를 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저 고인물 역시 정하얀에게 호의적인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 같은 마법사인 만큼 그녀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봤을 것이고 운이 좋다면 데려올 수 있을 거라고 느낀 것이 틀림없다. ‘절대 안 되지.’ 열과 성을 다해 키운 달콤한 과실을 도둑맞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사실은 정하얀의 지나친 애정이 부담스러워 조금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지만 막상 누군가 우리 소중한 대마법사를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니 기존에 없던 사랑도 생기기 시작한다. ‘아쉽긴 아쉬워.’ 한편으로는 진청이 관심을 가진 게 정하얀이라는 사실이 아쉽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정보를 빼내기 위한 역할로 던져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판단했으리라. 아무튼 간에 정하얀은 이쪽의 말이 끝난 이후 허둥지둥 당황하기 시작. 밀고 당기기의 개념이 없는 순진한 처녀는 혹시나 이번 일로 내가 자신을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저 사람이 말을 걸었을 뿐이고… 저, 저는….” “…….” “저 그, 그런 여자 아니에요!” 갑작스레 터져 나온 영혼의 외침. 정하얀이 말하는 그런 여자가 뭘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추측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이쪽은 그런 남자가 맞다. 화들짝 놀라며 달라 붙어오는 모습이 가관. 조금 더 강도를 높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황급히 무엇인가를 북북 찢는 것이 눈에 보인다. 얼떨결에 받아든 진청의 쪽지라는 것을 확인한 것은 순식간. 손으로 쪽지를 찢는 것으로는 모자랐는지 마법으로 그걸 불태우고 심지어는 땅바닥에 떨어뜨려 발로 밟고 있었다. 마치 더러운 물건이라도 만진 것처럼 말이다. 재미있었던 사실은 그 장면을 진청이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인상이 구겨진다. 녀석이 의도가 어떻든 간에 눈앞에서 저런 모습을 보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게 이상하리라. ‘내가 침 발라놨으니까 건드리지 마.’ 라는 표정을 보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정하얀은 그 와중에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슬쩍 던진 말이었는데 이토록 과민반응할 줄은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히… 끄윽. 저 그런 여자 아,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히끅. 바람 같은 거 피우는 거 아니에요. 정말이라고요….” 오해를 만든 장본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노려보기까지 하니 더욱더 흥미진진해졌지만 더 이상 자극하면 이쪽의 양심이 닳아 없어질 것 같았기 때문에 그녀를 향해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 내민 손을 보고 화들짝 달려오는 모습은 확실히 귀엽다고 할 수 있을 정도. 전방을 보니 여전히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사랑스러운 구조대원의 모습들 역시 시야에 비친다. “알고 있어, 하얀아. 그냥 한 소리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저, 정말이에요. 히끅… 정말이에요.” “알고 있다니까. 나도 그냥 해본 말이야.” 대충 분위기를 정리해 주는 것은 당연지사.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거친 숨을 몰아쉰다. 진청에게 보내는 원망의 눈초리도 변함이 없다. 사실 저쪽에 대한 볼 일은 이것으로 끝. 공화국 인사들은 끝까지 이쪽을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야 희라 누나가 저 정도로 무섭게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공화국 쪽에서 교국의 진영 쪽으로 넘어가자 가장 먼저 이쪽을 반긴 것은 다름 아닌 박덕구. 러시아산 도플갱어의 공격을 몸으로 막은 덕분인지 딱 보기에도 성치 않은 모습이 눈에 띈다. 그래도. ‘서 있는 게 어디야.’ 형편없이 튕겨나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녀석의 공격을 한 번은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소?” “그래, 덕구야. 문제없다. 나보다는 네 몸부터 챙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방금 공격 맞고….” “뭐, 속이 좀 뒤틀린 거 같긴 한데 큰 문제는 아니요. 사제님들한테 치료도 받아서 버틸 수 있다니까. 그보다….” “어쩌다가 여기 온 거야? 자기?” 박덕구의 말을 이어받은 것은 우리들의 구원자 차희라. 표정에는 조금의 짜증이 담겨져 있었는데 아마 스스로 위험한 상황을 초래한 이쪽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차희라 역시 내가 제 발로 범의 아가리에 기어들어갔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 내가 차희라였어도 이곳에 우연히 들어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것이다. “정말로 우연이야. 사실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긴 한데 설명하자면 조금 길고…. 아무튼 고마워, 누나. 안 그래도 조금 불안해지던 타이밍이었거든.” “중립 지역이 아니었으면 너 죽었을 거야. 아무리 우리 세컨드가 옆에 있다고 하지만 너무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건 안 좋아. 내 말 알아들어?” “응.” 대충 봐도 표정이 좋지 않은 느낌이다. 공화국과 교국은 항상 크고 작은 분쟁을 겪고 있기는 했지만 사실 이방인끼리도 이토록 사이가 좋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같은 이방인이라는 사실로 뭉치지 못할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어 보이는 느낌. 전장에서 여러 번 부딪쳐 왔다면 아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현재는 별 탈 없이 지낸다고 하더라고 과거에 싸워왔던 이들끼리 서로 웃으며 인사를 건네기에는 무리가 있다. ‘최근에 들어온 애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심지어 카스가노 유노 역시 썩 편한 표정은 아니다. 살짝 눈인사를 하니 표정이 활짝 펴진 느낌이다. 아무튼 간에 차희라는 끝까지 공화국 인사들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 정하얀도 저기압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귀환길이 꽤 암울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바빠지겠는데….’ 그 와중에 계속해서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서는 생각은 앞으로의 일에 대한 것. 공화국과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만큼 이런저런 정보들을 모아야 했다. 일단 그들이 정말로 우리의 적인지부터. * * * ‘제발. 제발 아무 일 없이 넘어갔으면…. 제발….’ 처음부터 이곳에 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마치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시작부터 뭔가 불길한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계속해서 같은 생각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기영 교관님, 아니, 이기영 부길드 마스터와 함께 움직이는 것 역시 부담스러워 살이 떨린다. 혹시라도 저번 같은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온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최근 며칠 동안 같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정하얀 님이 시야에 비쳤다. 굳어 있는 얼굴. 저 얼굴이 폭발하기 직전의 것이라는 건 그 동안의 경험으로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힐끔힐끔 시선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방광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일이 터졌을 때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아뇨….” “그러고 보니 형님이 시킨 일은 어떻게….” “일단 문제는 없어요. 여전히 프리스티나 국왕이 조금 단호하기는 하지만 부길드 마스터는 처음부터 이번 일에 시간이 많이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고…. 너무 티 나게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서요.” “아암. 그렇구만. 형님이 괜히 데려온 게 아니라니까. 처음에 형님이 후배를 데려가자고 했을 때부터 눈치챘지만 아무래도 행정 쪽 업무도 맡기려고 하는 것 같았다니까. 그렇지 않소, 누님?” “아… 네.” 하지만 저쪽 역시 정하얀의 눈치를 보는 건 똑같다. 자신과는 조금 불안해하는 포인트가 다른 것 같았지만 대놓고 기분이 안 좋다는 걸 표현하는 것은 물론, 밥을 먹다가도 뚝뚝 눈물을 떨어뜨릴 정도였으니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마치 초상집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 이 모든 일의 원흉을 떠올리니 원망스러운 마음이 가슴 한쪽에서부터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요…’ 지금도 마찬가지.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아침부터 정하얀 님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무섭다. 처음 정하얀을 마주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 누… 누님, 너무 걱정하지 마쇼.” “끄윽…. 저, 정말 그런 여자 아닌데…. 히끅….” “저, 저번에 그건 형님이 그냥 해본 말이라고 했으니까. 아, 아무 상관도 없는 거라니까? 지금 형님이 누님이랑 같이할 시간이 없는 건 어디까지나 바빠서 그런 거요. 바빠서….” “그, 그렇지만….” “누님뿐만이 아니라 나랑 여기 있는 소라 후배도 형님 본 지 오래된 거 아니요. 심지어는 용병여왕님이랑 그 무녀님도 형님이랑 밥 한 끼 먹어본 적도 오래됐다고 하더라니까. 아무래도 형님 입장에서는 그, 여기에 온 김에 공화국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소? 내가 감히 장담하는데 누님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형님이 최근에 여기 안 들어오는 건 절대로 누님 탓이 아니요.” “옛, 옛날에는 아무리 바빠도 꼭 한 번은 안아줬었는데…. 그 날 이후로는….” “전부 누님 착각이라니까. 사실 내가 볼 때는 별 다를 거 없어보였는데. 오히려 은근히 더 신경 써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누님이 조금 과민반응하고 있는 것 같소.” “그렇지만… 히끅….” 저 예상이 맞았으면 싶었다.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그나마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을 거라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이야기였다. “끄윽…. 다 그 사람 때문이야. 데, 데이트도 다시 해준다고 했는데. 끄윽… 그, 그날 이후로 다른 말도 없는데… 데이트도 전부 취소됐어….” “정말로 누님 탓이 아니라니까.” “나, 그런 여자 아닌데…. 히끅. 그, 그 사람이 오해하게 만들었다구….” “그런 것 같기도 하고….” “…….” 조금씩, 조금씩 눈이 이상해지고 있다는 걸 느낀 것은 당연. 갑작스레 예전 일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제발 이러지 말아주세요. 제발, 제발 평화롭게 지내게 해주세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딱딱하게 굳어가는 정하얀 님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제발요. 제발요…. 제발 참아주세요.’ # 308 회귀자 사용설명서 308화 정하얀 사용설명서 (2) ‘어떡하지?’ 다리가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려온다. ‘도, 도망칠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눈앞에 있는 덕구 선배는 아직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있지 못한 것 같았지만 이전에 한 번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자신은 저게 무엇을 뜻하고 있는 건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뭔가 대화의 핀트가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 계속해서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기가 무섭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의 생각에 매몰됐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현재의 이기영 부 길드 마스터는 정말로 바쁜 상황인 게 맞았기 때문. 안 그래도 중립국의 문제로 정신없는 상황에서 공화국이라는 변수가 끼어들었으니 여러 가지 루트를 생각해 놔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 오죽했으면 간단한 일 몇 가지를 이쪽에 일을 맡길 정도였으니 현재 얼마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정하얀에게 있었다. ‘도대체 뭐라고 한 거야….’ 부 길드 마스터를 마중 나가는 그 자리에 나가지 않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하얀 님의 반응을 보면 바람 핀 것이 아니냐고 꾸지람이라도 들은 모양. ‘완전히 내로남불이잖아.’ 부 길드 마스터 본인의 여자관계가 그리 깔끔하지 않다는 건 린델은 물론 교국도 알고, 하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떻게 두 눈 똑바로 뜨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 단순히 낯짝이 두껍다는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 대사다. ‘전부 그 사람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본래 예정되어 있던 데이트들이 갑자기 취소된 것은 물론, 최근 함께하는 시간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자 모든 원인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화국의 오호 대장군 중 하나에게 화살을 돌린 것이다. 물론 단순한 예상이고 억측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눈치를 보며 커다란 일이 터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자신의 입장상 정하얀 님의 행동 하나하나에 민감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서둘러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문제. 놀랍게도 먼저 자리를 피한 것은 덕구 선배였다. “아. 이거 훈, 훈련 시간이구만. 누님 먼저 나가 봐야 겠… 큼. 오늘 저녁에 볼 수 있으면… 크흠.” ‘치, 치사한 사람.’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건의 영역을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믿었는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발이 잘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오히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고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린다.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에 입술을 꽉 깨물며 최대한 시선을 옮긴다. “어, 어떻게 하지?” “네… 네… 네?” “어떻게 하면 되지… 오빠가 계속 미워하면 어떡하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인지 아니면 혼잣말을 하고 있는지 판단이 되지 않는 상황. “그러니까….” 분명히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뭐가 됐든 정답은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잘 움직이지 않은 다리를 두드리며 몸을 움직이는 순간 갑작스레 이쪽의 손을 꽉 쥐는 감각이 느껴졌다. “꺄, 꺄아아아악!” 순간적으로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에 비명이 튀어나왔지만 아직까지도 장내는 조용하다. “소, 소라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해야 돼요?” ‘나한테 물어 보지 마.’ “히끅… 오빠한테 미움받기 싫은데… 틀림없이 아, 아무 곳에서나 막, 몸 함부로 굴, 굴리고 그런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히끅.” ‘그건 네가 아니라 걔야… 걔가 그러고 있는 거라구!’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애써 삼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저 단어를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일이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 최대한 용기를 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시야에 비치는 것은 닭똥 같은 눈물을 닦으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자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뭔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 남자를 잘못 만난 여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괜스레 입맛이 쓰다. ‘위로해 주는 게 맞겠지.’ 일단은 그렇게 하는 게 정답이다. “덕구 오빠 말대로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까지 생각하시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냥… 하신 말씀이신 것 같고… 실제로도 많이 바… 쁘시니까요.” “분, 분명히 오빠 눈빛이 평소랑 좀 다른 것 같았단 말이에요… 히끅. 막 싫어하는 것 같았단 말야….” “착각하신 게 분명해요. 네. 저, 저랑 계실 때도 얼마나 정하얀 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요. 착하고 좋고 사… 랑하는 사람이라고 매번 그렇게 이야기하세요.” “정말? 아… 오, 오빠랑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 “물… 론! 단둘은 아니었어요! 네! 단둘이 있던 건 아니었어요! 덕구 선배도 함께 있었어요! 네! 단둘이 있었을 리가 없죠. 네. 하하하… 그, 그렇게 있지는 않았어요.” “아아아… 그렇구나.” “그리고 그냥 한 번 해본 말이든 아니든 간에 그, 그런 말을 들었다는 건 오히려 좋은 거 아닐까요?” “뭐, 뭐가? 뭐가 좋은 건데요?” 짧은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에 몸이 다 떨려온다. 한 번 삐끗하면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위험했어.’ 특히나 이기영 부 길드 마스터와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는 뭔가 오해를 만들 만한 여지가 있었다. “정확히 부 길드 마스터가 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런 사람이랑… 히끅!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어요.” “네. 그게 좋은 거예요!” “그게 뭐가 좋다는 건데….” ‘째려보지 마… 제발. 제발….’ “질… 투하고 계시고 있다는 거잖아요.” “질투?” “네. 이기영 부 길드 마스터는 정하얀 님께서 다른 남자들이랑 말하는 걸 보기 싫으신 거예요. 틀림없이요. 만약에 하얀 님을 좋아하지 않으셨다면 그런 남자랑 뭘 하든…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셨겠죠.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건… 소유욕을 가지고 계시고 있다는 거예요. 오히려 좋은 거죠.” “그, 그, 그런 거예요?! 소유욕?” “네. 물론이죠.” “오빠가 질투를 했어요?” “저야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오빠가 질투했데….” “네. 맞아요.” “오빠가 질투를 했어!” “네!” “나를 소유하고 싶대!” “네! 바로 그거예요!” 잘 말해준 건가. 라고 고민해 봤지만 딱히 정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일단 당장은 울음을 그치고 있는 상태. 너무 기분이 들뜬 것 같아 불안한 점은 있었지만 신난 듯한 정하얀의 얼굴을 보자 점점 더 숨쉬기가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잘 말해준 게 맞을까.’ 하지만 계속해서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게 문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체불명의 불안감이 가슴 속 한구석에서 싹트고 있었다. ‘만약에….’ 부 길드 마스터가 질투한다는 걸 깨닫고 다시금 같은 일을 시도하려다 정말로 미움받아버렸을 경우. 이런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나고 다시 한번 끄윽 히끅 거리는 상황으로 치닫는다면 이번에는 화살표가 자신 쪽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소, 소, 소라 씨 때문이야. 소라 씨 때문이에요! 히끅… 나 진짜 이러기 싫었는데… 전부 다 네 탓이야!’ 라고 말하며 단검을 찔러오는 정하얀의 모습을 떠올리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뭘 말하든 그 앞은 지옥이지만 최소한 자신에게 화살표가 돌아오는 건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저번에는 정말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아니, 다시 한번 그런 일을 겪을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그나마 최근에 조금씩 행복을 찾아가고 있던 참이다. “그, 그리고!” “네?” “그리고 그 사람이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게 분명해요. 네. 나쁜 의도요. 부 길드 마스터는 사람을 잘 보는 편이니 그 사람이 뭔가 다른 생각이 있다는 걸 눈치챈 거겠죠. 정하얀 님께서 다른 남자분들이랑 이야기하시는 건 크게 신경 쓰시지 않잖아요? 그 사람이 뭔가 다른 생각이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기분이 나빠진 거고요.” “아… 그, 그렇구나.” “네. 물론 제 말이 전부 정답이라는 건 아니지만 아마 확률상으로는 그랬을 확률이 높다고 봐요. 정하얀 님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렇지? 그, 그 나쁜 사람 때문이지?” “네.” “어떻게 하지?” “네?” “나는 오빠밖에 없다는 걸 증명해야 되는데. 그, 그런 나쁜 사람한테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걸 증명해야 해요.” “굳이 증명할 필요는….” “내가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 걸 오빠가 알아야 돼… 응. 맞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조금 더 알아야 돼요. 질투도 좋고, 소, 소유욕도 좋지만… 나는 오빠가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건 싫어. 그야 그럴게… 으응. 나는 오빠밖에 없는 걸. 우리 순수를 증명해야 돼. 나쁜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으응… 우리 탓이 아니야.” 점점 더 공기가 무거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네. 정… 하얀 님 탓이 아니에요.” “그 사람 탓이지?” “굳이 잘못한 사람을 찾자면…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나는 오빠밖에 없는데 괜히 나한테 말을 걸어서 오빠가 괜한 의심을 하게 했잖아. 나를 이상한 여자로 보게 했잖아. 그러니까 그 사람 잘못이 맞지.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우리 데이트를 방해한 것도 그 사람이고… 그때 그래도 처음에는 분위기도 좋았었는데… 같이 식사도 하고 정식으로 하, 하나가 될 수도 있었다구! 그래… 근데 방해받은 거잖아.” “아… 그게….” “방해받은 거야. 방해받았다고… 방해한 걸로도 모자라서 엉뚱한 걸로 시간을 뺏었어. 생각해 봐. 그때 사실은 위험했어. 소중한 오빠가 걔네들한테 죽었을 수도 있었을 거야. 그 사람들은 필요 없는 사람들이지. 위험한 사람들이고.” ‘틀, 틀렸어.’ 계속해서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은 공포스럽다. 자꾸만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상황. 고양이 앞의 쥐도 이것보다는 무서워하지 않으리라. “맞아. 그 사람뿐만이 아니야. 그 여자도 오빠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덩치 큰 사람도 오빠한테 주먹을 휘둘렀잖아. 생각해 봐. 오빠를 바쁘게 하는 것도 그 사람들이잖아. 만약에 그 사람들만 없었으면 매일 매일 같이 놀러 다닐 수 있었을 텐데… 왜 라이오스로 와서 사람을 불, 불편하게 만드는 거야? 공화국에나 처… 처박혀 있어야지! 멍, 멍청이들이! 바보들이! 아직 못 가본 곳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덕구 오빠도 이번 여행이 기회라고 했었는데! 그 기회를 전부 망쳐버렸어. 전부! 전부 망쳐 버렸다구!” “제… 제발….” “없애 버려야겠어. 죽여야 돼.” “살려주세요….” “죽여야 돼… 깡그리 청소하는 거야. 조금 더 강해졌어야 했는데… 그 사람들도 강하니까….” “제발요. 제발 살려주세요.”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은 물론 점점 하의가 축축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 꽉 감은 눈 사이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저 분노가 향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입으로는 살려달라는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전에 느꼈던 악몽이 새록새록 머리를 좀먹기 시작한다. 살려달라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와중에 계속해서 들려오는 정하얀 님의 목소리가 점차 사그라든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장내. ‘나갔나.’ 라고 생각할 때 즈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라 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당연하지만, 들려온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309 회귀자 사용설명서 309화 정하얀 사용설명서 (3) 상황이 꼬였다는 건 확실히 기분 나쁠 만한 일이었다. 애초에 어느 정도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다는 건 올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더 일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이곳에 온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성과를 바라는 것 자체가 도둑놈 심보다. 내 제안이나 질문을 살살 피하는 프리스티나를 보면 어쩌면 이 동맹제안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기상조지.’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다. 상대 쪽에서도 이쪽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는 만큼 대놓고 움직이기보다는 사전작업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 기대했던 한소라도 열심히 움직여주고 있었고 이쪽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라이오스의 인사들과 보내고 있으니 지금은 기초토대를 쌓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으리라. ‘공화국 새끼들… 짜증 나네….’ 본래 초조해하지 않아도 될 작업이 초조해진 이유는 뻔할 뻔 자.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불안요소는 다름 아닌 공화국의 존재다. 교국 8좌 중 세 명이 움직였고 공화국 역시 중요인사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라이오스를 방문했다. 이들이 단순히 관광을 즐기기 위해 온 것이라고 한다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저만한 인원들이 여행을 위해 뭉쳤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고 아마 녀석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오스와의 동맹.’ 어떻게 보면 매년 치러지는 인사치레 같은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스케일이 커진 것 같은 느낌. 그만큼 대륙의 정세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였기 때문에 이번 일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만약에 라이오스와 공화국이 동맹을 맺는다면 날카롭게 망명각을 잴 수밖에 없는 상황. 교국에서 이뤄놓은 게 많은 만큼 여기 있는 것들을 버리고 떠나가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다. ‘그렇고말고….’ 당장 교국의 지도자가 나에게 커피를 타서 가져다 바치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만큼 이곳에서 떨어지고 있는 꿀단지는 놓치기 싫다. 이래저래 중요한 사안들이 뭉쳐 있는 만큼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이미 정해진 사안. 덕분에 최근 하루하루가 굉장히 단조로워 지고 있었다. 하루의 시작은 프리스티나를 비롯한 중립국 라이오스의 인사들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별건 아니지만 라이오스에서 지내고 있는 이방인들과도 만남을 가졌고 교국에서 생산되고 있는 메이드 바이 이기영의 포션 판매의 공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이 만족할 정도로 조건이 좋은 계약을 제안하는 한편 만약 라이오스가 교국과 함께 할 수 있을 때 나눌 수 있는 이득에 대해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다. 어떻게 보면 로비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퍼주기, 물론 이 조건이 좋은 계약은 아직까지 실행되지는 않았다. 내가 거부하고 있다기보다는 중립국에서 이런 계약들을 탐탁지 않아 하는 상황, 받는 게 있다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가드가 두터워.’ 손님들을 환영한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어떻게 봐도 공화국과 교국은 라이오스의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득보다는 중립국이라는 본인들의 입장을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소귀의 경 읽기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두드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교국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밑밥을 많이 깔아 놓는 게 최선. 아마 공화국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 반대 진영의 인사들이 라이오스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극단적인 외교전략을 실행시킬 수가 없다. 두 세력이 어떤 제안을 하고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는 서로가 확인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지만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본래는 휴식 아닌 휴식을 취하면서 라이오스와의 대화에 집중했어야 했다. 여러모로 복잡한 사안이 얽혀 있기 때문에 정하얀이나 차희라와 예정되어 있던 일정을 모조리 스킵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혜에게는 고인물과의 대국 내용을 곧바로 전송한 것은 물론 막스와 함께 패턴이나 습관을 분석하라고 지시를 내린 상태. 내 뇌로 녀석을 따라갈 수가 없으니 조금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직 제 수준으로는 힘들 것 같은데요? 오빠도 느끼셨지만 처음은 적당히 하고 있었던 느낌이라… 데이터로 사용할 수도 없을 것 같고… 물론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만요. 일단은 계속해서 시뮬 해볼게요. 솔직히 자신은 없어요.] 이쪽이 보낸 영상을 본 이후의 반응. 그래도 이런 쪽에 밝은 이지혜가 이런 말을 해올 정도였으니 불안함이 스멀스멀 차오르는 게 당연했다. 이건 라이오스 영입 전쟁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잠재적으로 이쪽의 적이 될 이들에 대한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본래 오호대장군인지 뭐시긴가 하는 놈들이 강하다는 건 이미 확인한 사항이었지만 실제로 내가 본 이들의 모습은 기존의 들었던 정보 이상. 러시아산 박덕구는 코리안 박덕구와 차희라를 합쳐 놓은 것만 같았고 샤오린 역시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진청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한 두뇌파라고 하기에는 높은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마검사라고 봐도 될 정도로 신체능력이 좋다. 어차피 녀석이야 전쟁이 터지면 뒤에서 지시를 내리는 입장에 서게 되겠지만 이들이 8좌의 하위 스쿼드보다 강하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조금 충격적이었다. 만약 남은 두 명의 수준이 이들에게 미치지 못한다면…. “더 강해요.” “네?” “저보다 더 강하다고 말했잖아요? 외부에 알려진 이야기는 아닌데 어차피 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공화국 5인 중에서는 제가 서열이 최하위예요. 아니, 어떻게 보면 발렌틴 그 사람이랑 비슷하다고 볼 수 있으려나. 싸워 본 적도 없고 본래 이런 스펙만으로 강함의 크기를 판단할 수는 없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대충 어림짐작하고 있을 뿐이랍니다.” “으음….” “우리 군사님은 제외하고 말하는 거예요. 서열상으로는 그분이 2번째 위치에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마법사인 만큼 어떻게 측정하기가 애매하고…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 쪽 넘버원은 정말로 강하다니까. 아마 보면 깜짝 놀랄걸. 그런데…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샤오린 님.” “잘 모르기는… 정보를 빼내고 싶은 건 이해하는데… 너무 그런 쪽으로만 질문하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이잖아?” “착각일 겁니다. 뭐, 샤오린 님도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셔도 됩니다. 정보를 빼낸다기보다는 교환에 의미가 있으니까요.” “네가 원한 정보 교환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남녀가 둘이 만나는 데 이런 딱딱한 이야기라니 싫은 게 당연하잖아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와인 한 잔 곁들이면서 식사하고 있는데… 안 그래도 그쪽은 나한테 빚진 것도 많은데 조금 정도는 여기 기분도 생각해 주는 게 좋을 텐데….” “물론 이전에 도움 주셨던 일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만… 현재 저희 상황도 있고… 또 이렇게 둘이 만나기 시작한 것도 며칠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아무튼, 큼… 이번에는 샤오린 님의 차례입니다.” “그럼 질문, 나 어떻게 생각해요?”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이런 식으로 샤오린과 시간을 보낸다는 건 이미 확정된 사안이었다. 정보도 정보였고 그녀의 말대로 이쪽은 갚아야 할 빚이 있었으니까. ‘당돌하네.’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더 거침이 없다. 물론 앞에 있는 샤오린은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의 나이가 22살. 이 정도 수준까지 올라오기까지 시간도 꽤 걸렸을 테니 10대 중반, 혹은 후반부터 이곳에 들어와 활동했으리라. 가지고 있는 재능도 남다르니 어린 나이에 온갖 기대를 받고 올라와 엘리트 코스를 밟고 서 있게 된 셈. 심지어 외모도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어떻게 본다면 지금까지 내가 본 여성들과는 확실히 다른 타입. 비슷한 말이긴 했지만 섹시하다는 말보다는 야하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풍겨오는 인상이다.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민중 수탈자’ 샤를리아 황녀같이 표독스러운 인상도 있기는 했지만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색기가 있다. 입고 있는 차이나 드레스의 깊게 파인 옆면도 그렇고 기다란 속눈썹과 손가락, 불그스름한 얼굴과 나를 바라보는 눈빛, 심지어 행동 하나하나에서 이쪽을 유혹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져 온다. 정하얀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정하얀의 유혹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계속해서 싸구려 정보를 듣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확 저지르고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미친 짓이야.’ 장담하건대 그건 미친 짓이다. 저건 암사마귀고 파리지옥이다. 좋다고 달려들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말하자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는 거다. 지금 당장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인으로 보이지만 그녀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녀를 처음 만난 장소가 애초에 블랙마켓, 아닌 것 같지만 성정 자체도 무척이나 잔인하다. 김현성 역시 그녀를 빌런 취급했었으니 1회 차에서 뭐 하고 다녔을지는 뻔할 뻔 자.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건 다음 날 아침 질식사한 변사체로 발견되고 싶다는 뜻과 다름이 없다.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관심이 가고요.” “그건 다행이네요. 어떤 면이 그런가요?” “글쎄요. 정확히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 샤오린 님은 제가 어떻게 보이십니까?” “그건 질문이죠?” “네. 질문입니다.” “조금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되나요?” “네. 물론입니다.” “…….” “…….” “당신 정말로 야하게 생겼거든요. 매력적으로….”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보다는 대놓고 저런 말을 한다는 게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원래 이런 느낌은 잘 받지 않는 편인데… 정말로 이상하다니까. 사실 내 타입과는 거리가 조금 먼 것도 사실인데… 자꾸만 나를 간질간질하게 만든단 말야… 달콤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데 이렇게 설명하면 알아들을 수 있으려나요? 당신 몸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같고 당신 입술은 과즙이라도 발라져 있는 것처럼 보여요. 마법을 쓴 것도 아닐 텐데….” “큼….” “다른 사람들 눈에도 이렇게 비칠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니 웃기지.” 아마 차희라나 정하얀의 눈에는 샤오린이 묘사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칭찬이라면 감사합니다.” “당연히 칭찬이에요. 표현이 길고 천박하긴 했지만 이성적으로 끌린다는 이야기를 한 거니까요.”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게 보인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차오르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뭐야.’ “어….” ‘저거 뭔데?’ 문제는 그녀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 땅이 조금씩 울리기 시작하고 하늘 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X발… 저게 뭔데.’ 거대한 마력의 응집체가 도시의 외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치고 있었다. # 310 회귀자 사용설명서 310화 정하얀 사용설명서(4) 한 번 눈을 비볐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비치는 광경은 여전히 같다. 꿈이 아니다. 확실히 검붉은 커다란 구체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게 맞다. “저게 뭐야….” 샤오린 역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 창밖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나보다 더욱더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어째서 그녀가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뻔하다. ‘저기….’ 마법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장소는 공화국에서 온 이들이 지내고 있는 장소였으니까. ‘미친….’ 콰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마력이 도시를 보호하는 보호 마법에 부딪치기 시작.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이들은 그 어처구니없는 장면에 비명을 내지른다. 우지직, 우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도시를 지키는 기본적인 마법이 부서지고 거대한 마력은 순식간에 그 틈새로 빨려 들어간다. 이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이쪽까지 충격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게 신기할 지경.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히 목표한 지점만 노리는 종류의 마법인 것 같았다. 원소 종류도 아니다. 뭔가 흑마법 같기도 했지만 그런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단순히 공간을 그대로 집어 삼킨다는 표현이 어울리리라. 그야말로 밀도가 높은 마력의 응집체. 대놓고 화력이 높은 것보다 저런 식으로 주문을 완성하는 게 더욱 난이도가 있다. 도시를 보호하는 기본적은 마법이 순식간에 으깨진 것 역시 그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미친… 미친!’ 운석이 떨어지는 걸 보고 있는 공룡들보다 더 놀란 가슴을 부여잡게 된 것이 당연지사.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이곳을 도망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생각이 든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서 저건 이해할 수 없는 자연재해나 다름이 없다. ‘정말 자연재핸가….’ 쿠와아아아아아아아!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 효과음이 귀에 울리기 시작. 특정 장소에 떨어진 구체는 맹렬히 회전하며 있었던 공간을 완전히 집어 삼키고 있다. 마치 종이를 스테이플러로 찍은 것처럼 보이는 깔끔한 단면만 남고 그 안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다른 장소에서도 검붉은 마력이 떨어진다. 그렇게 많다고 할 수 있는 숫자는 아니었지만 도시를 아비규환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운이 좋았는지 무기물을 닥치는 대로 들어 삼키는 게 대부분. 직격한 곳은 저곳뿐이다. 쿠와아아아아아! 연쇄적으로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난 이후에 보이는 광경은 그 어떤 마법으로도 본 적이 없는 풍경.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아니, 저게 뭐야.’ 마법이 나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학문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건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는다. 인위적인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더라면 마법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 버렸을 거다. 마력 폭풍처럼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특이한 자연현상 중 하나라고 단정 지었을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할 말을 잃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명을 내질렀던 식당 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적막만 흘렀다. 어디에선가 들려온 아기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모두가 황급히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나가봐야겠어요.” “같이 가겠습니다.” 잠깐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여 오는 샤오린의 얼굴이 보인다. 함께 가도 별 문제가 없다고 느낀 것이 틀림없으리라. 곧바로 식당의 바깥을 빠져나가니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는 주변 풍경이 보였다. 라이오스에서 파견한 조사단들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고 수도사들과 고행자들이 혹시 모를 부상자를 찾아다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뒤늦게 나온 마법사들 역시 일찍이 움직인 모양. 내 생각보다 더 반응이 빠르다는 건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여기는 마법사 수준이 낮아.’ 저들이 뭔가를 알아낸다는 걸 기대하기는 힘들다. 아마 주변을 통제하고 뭔가를 하는 척하는 게 한계이리라. 그 와중에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민간인들. 사실 샤오린의 똘마니들 역시 저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대놓고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감을 못 잡는 느낌이다. 나도 저들과 별로 다르지는 않다. 지금 당장은 2차 폭격이 날아오지 않을까 걱정해야 했으니까. 구태여 샤오린에게 딱 달라붙어 있는 것은 그런 연유다. 빠르게 달려 첫 번째 마법이 떨어진 곳으로 향하는 것은 순식간. ‘개…….’ 장소에 당도한 이후 눈에 비치는 모습은 장관이라면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거 다 뒈진 거 아니야?’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된지는 모르겠지만 장담컨대 제대로 말려든 이들은 시신도 건지지 못했으리라. ‘고인물이랑 덩치도 뒈졌나….’ 일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왕이면 죽었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 하지만 몇몇 인간이 모여 있는 걸 보니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몰려든 인파를 해치고 나아가자 며칠 전에 봤던 고인물과 덩치 그리고 몇몇 이의 모습이 보인다. 살아남은 똘마니는 겨우 세 명. 나머지는 전부 죽었다. 어떻게 이 난리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쪽 팔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방향으로 비틀려 버린 덩치를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녀석이 고인물을 구해낸 것이 틀림없으리라. “제기랄…. 쿨럭. 제길.” 몰려든 사제들에게 치료를 받으며 연신 기침을 토해내고 있다. 곧바로 치료 마법을 받아 팔은 살릴 수 있겠지만 몸을 전부 회복하기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한편으로는 저런 것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생각하긴 했지만 녀석 역시 무리한 모양. 진청은 다른 이들을 진정시키는 한편 깔끔하게 잘린 단면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녀석 나름대로 분석을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쪽이 한 일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기 시작. 하필 공화국 애들이 지내고 있는 곳에서 가장 커다란 피해가 났으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리라. “혹시나 해서 하는 이야긴데… 이거….” “장담하건대 교국과 이번 일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 “…….” “정말인가요?” “네.” 이번에는 정말 하늘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샤오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딴 짓을 저지를 정도로 이쪽이 멍청하지 않다는 걸 이해해 준 모양. 중립국 안에서 공화국에게 선제공격을 날렸다는 건 대충 생각해도 극도로 민감한 사항이다. 대륙법에 의거, 타국들의 질시와 질책을 받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일. 라이오스와 동맹을 맺기 위해 이 장소에 머물고 있는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지를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물론 녀석들도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고맙겠지만…. ‘발목 잡힐 여지는 있겠는데.’ 꼬투리를 잡으려면 어떻게든 잡을 수 있다. 일단은 이쪽 역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 같은 느낌. 함께 오기는 했지만 서둘러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가서 이야기 나누시는 게 좋겠습니다, 샤오린 님. 저도 따로 상황을 살펴봐야 될 것 같아서….” “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저 덩치가 또 흥분하기 전에…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까봐야 알겠지만 당장은 당신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거든요. 그 정도는 이해해 주세요.” “네. 물론입니다.” ‘이해는 개뿔…. 자작극이 아니면 다행이지.’ 확률은 낮지만 그럴 확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사망한 건 공화국 쪽의 인물들이었지만 저걸로 인해 더 곤란해질 쪽은 우리였으니까. “멀리 마중은 안 나갈게요.” “예.” 말을 끝으로 샤오린은 진청과 발렌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라 뭐라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들려왔지만 잘 들리지는 않는다. 당장은 공화국 쪽으로 연락을 취할 테고 아마 곧바로 조사단이 파견 나올 것이다. 물론 교국 쪽 역시 조사단을 파견할 거라고 생각했다. 힘없는 라이오스는 조사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무력집단이 나라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없을 거고 결국에는 상황이 더 복잡해질 것이다. ‘얘네 입장에서도 황당하기야 하겠지만….’ 이미 사건은 터졌고 더 이상은 되돌릴 수가 없다. 지금쯤 라이오스의 국왕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것이다. 슬그머니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자 벌써부터 다른 이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조사에 들어간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대충 봐도 교국 진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였지만 그래도 민감한 사항인 만큼 이것저것 알아봐야 하는 건 당연한 일. 정하얀이라면 뭔가 알아낼지도 몰…. ‘시발….’ “제기랄.” 절로 혼잣말이 나온다.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계속해서 입가에서 맴돈다. 아직 확정지을 상황은 아니지만 혹시나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겠지.’ 아니. 아니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범인이 맞더라도 정하얀은 범인이 아니어야 한다. ‘동기도 애매한데.’ 사실 그렇게 애매하지도 않다. 99의 마력을 찍었을 때부터 무언가 사고를 일으키리라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 당장 차희라 때문에 억눌려 있기는 했지만 정하얀이 언제든 폭주할 수 있단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최근에 무척 조용하기는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불안한 부분이 있었다. 공화국과의 사건이 생긴 이후로는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심지어는 식사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물론 간혹 만나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게 정하얀을 케어해 줄 정도라고 단언할 자신은 없었다. 오랜만의 데이트는 엉망이 됐고 심지어는 이상한 오해도 받았으니 이 모든 게 공화국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충분히 극단적인 짓을 저지를 만하다. 옆에서 누군가 말려줄 사람이 없었다면 말이다. ‘아냐. 아닐 수도 있어. 아닐 거야.’ 그렇지만 내 상식 내에서, 이 정도의 마법을 선보일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고, 당연히 그중 1순위는 정하얀. 그녀다. 똥오줌 가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생겨난 것은 순식간. 일단은 정신없이 교국 진영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제길. 제길!’ 물론 속으로 올라오려는 욕지거리를 애써 삼켜 넘기면서. 허겁지겁 뛰어가자 확실히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들. 이 난리가 났는데 밖으로 나와 보지 않았을 리가 만무하다. 아주 제대로 자리를 잡고 라이오스에서 온 이들 역시 다가오지 못하도록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숙소 근처에서 사고가 생긴 만큼 이쪽은 우리가 관리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대사관이나 다름 없는 장소. 이런 조치를 누가 취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판단은 완벽했다. 곧바로 겉옷을 집어 던지고 안으로 들어서자 붉은용병의 길드원들이 나를 안내했고 카스가노 유노와 함께 온 마법사들 역시 마력을 추적하거나 떨어져 나온 파편을 수집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늦었네, 자기. 어디에 있었어? 마법 떨어진 거 봤어?” “응. 그거 보고 달려온 거야. 잠깐 다른 곳에서 상황 보고 있었고. 이거….” “아니, 잠깐만 혹시나 해서 먼저 물어볼게 있는데. 이거 자기가 한 거야?” “아냐. 나는 모르는 일이야.” “확실해?” “응. 진짜 아니야.” 어째서 내가 했는지 묻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차희라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또 무슨 짓거리를 했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모양. 차희라가 뭔가를 말해오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이쪽이 그녀의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급한 건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하얀이 못 봤어? 누나?” “저기 있잖아.” 내 질문의 뜻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이동시키자 이쪽을 등친 채 열심히 조사에 임하고 있는 정하얀을 볼 수 있었다. ‘네가 한 거 아니지?’ 단숨에 이쪽에 안겨오지 않는 모습은 확실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는 정하얀을 불렀고 그녀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제발….’ # 311 회귀자 사용설명서 311화 정하얀 사용설명서 (5) “하얀아.” “아… 오, 오, 오빠 오셨어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우다다 달려오고 있는 게 시야에 비쳤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은 표정, 아니, 조금 다르기는 하다. 왠지 모르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정체 모를 죄책감 역시 시야에 비친다. 그렇지만 그 감정은 찰나. 지금의 정하얀은 확실히 평소대로의 모습이다. “하얀아 너….” 살짝 말을 꺼내니 입술을 앙다물고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 본인도 걱정되는지 심호흡을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정하얀은 거짓말에 재능이 없다. 특히나 이쪽에 하는 거짓말은 절망적일 정도로 티가 난다. 만약 정하얀이 거짓말을 하려고 한다면 지금처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질문을 던지려다 주변을 바라보게 된 것은 당연.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거짓말에 서투른 정하얀이 ‘사, 사실은….’이라면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런 장소에서 물어보는 건 적절하지 않다. “네?” “아니, 아니다.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자.” 보는 눈이 너무 많다. 만약에 정하얀이 이 일을 저지른 게 맞다면 아는 사람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붉은 용병과 요조라 길드의 길드원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는 만큼 조심해야 했으니까. 지금 당장 정하얀을 끌고 가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은 느낌. 어쩌면 이번 일은 정하얀이 벌인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마력을 소비한 기색이 없어.’ 두 눈을 확실히 뜨고 봐도 그렇다. 마력 99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같은 마법을 한 번 사용하면 탈진현상 정도는 와야 정상이다. 너무나도 정상처럼 보이는 안색 때문에 혹시나 정하얀이 범인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는 했지만….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 아무리 정신을 놓았다고 한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일을 터뜨렸을 리 없다. 만약에 범인이 그녀라면, 정하얀 역시 무언가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일을 던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아마 증거나 꼬리 같은 것들은 진작에 처리했으리라. 공화국의 숙소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도 함께 날려 버린 것 역시 교국이 의심받는 상황을 피하고 싶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물이리라. 마력탈진을 겪지 않은 것 또한 그 일의 연장선. 일단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박덕구를 바라보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덕구야.” “엉?” “하얀이 데리고 가서 밖에 좀 나갔다 와.” “이 시기에 갑자기 무슨… 무슨 의미로 말하는 거요?” “아마 이번 일에 휘말린 민간인이나 다른 사람들도 있을 거다.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수습작업을 도와주는 일에만 집중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아아아….” “중립국 애들 도와주라는 이야기다. 마법으로. 가는 김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걸 구호물품으로 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아무튼 메인은 마법이야. 할 수 있는 내에서 최대한 잘 도와줘야 한다. 이 일은 너한테 맡기마.” “아아! 오! 그런 거였구만! 크으… 역시 형님이요.” “무슨….”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챙기려는 모습이… 역시 다르긴 다르다니까. 이게 의인이지 의인! 항상 무심한 듯하지만 그 누구보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요! 의인 이기영! 울림이 다르다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다녀오기나 해.” “아암. 한시가 급한 상황이지. 그렇고말고. 맡겨주쇼! 완벽하게 해결할 테니까.” “요조라 길드의 마법사들 몇몇도 동행하고. 하얀이는 도시 한 바퀴 돌고 온 이후에 이야기 좀 하자.” “네…. 오빠.”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에 점점 불안감이 깃든다. 정말로 오줌이라도 마려운 것 같은 표정. 계속해서 눈을 바라보자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는 게 눈에 보인다. 말을 더듬지 않은 것을 보니 평소와는 다르게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가 그런 거 맞잖아. 슈바….’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정하얀의 얼굴을 보고 반쯤 확정 지을 수 있었다. 어떻게 일을 벌 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쟤가 한 거 맞아.’ 이번 일의 주역은 정하얀일 확률이 높다. 만약 아니더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여야 했다. 조금 더 빨리 여기서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마법의 발현자로 의심받을 수 있는 만큼 체내에 마력의 여유가 있다는 걸 다른 이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봉사활동은 어디까지나 덤이다. 운이 좋으면 라이오스에게도 잘 보일 수 있으니 지금 당장은 정하얀을 내보내는 것이 맞다. 아무튼 박덕구와 정하얀 그리고 요조라 길드의 몇몇 마법사들은 이쪽의 재촉에 빠르게 이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 일이 터진 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딱 적절하기도 한 타이밍이기도 한 것 같았다. “다녀올 테니 조심 좀 하쇼, 형님. 혹시나 아까 그게 또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럴 가능성은 적으니까 일단 다녀오기나 해. 이쪽은 방어마법 전부 구축하고 있을 테니까.” “거 알겠소.” 박덕구와 정하얀이 더 이상 눈에 비치지 않게 되어 있을 때, 이쪽 역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정하얀이 증거를 꼭꼭 숨겨 놨다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혹시 그녀가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종류의 마법이 어디서 터져 나왔는지 알아내야 했다. 이미 교국에서 온 다른 마법사들과 카스가노 유노가 대놓고 샘플을 채취한 이후 반응을 보고 있는 상황이다. 내가 가까이 다가서자 환영한다는 듯한 얼굴들이 시야에 비쳤다. 이쪽 역시 마법에 커다란 지식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연금술은 이런 부분에선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심지어 이쪽은 마음의 눈도 가지고 있으니 기존 마법사들보다 백배는 더 도움이 되리라. [??? 흩어진 마력결정-전설 등급] [준신화 등급 마법 ??? 의 영향을 받은 결정입니다. 고급 촉매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곧바로 돗자리를 깔고 눈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하자 이것저것 보이는 것이 많다. [??? 잔존마력-전설 등급] [준신화 등급 마법 ??? 의 영향으로 대기에 떠돌아다니고 있는 잔존마력입니다. 7시간 후에 흩어질 예정입니다.] ‘준신화 등급….’ 발현된 마법의 등급이 준신화 등급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마력 99 이상의 효율을 가지고 있는 종류의 주문이라는 것. 확실히 이 눈으로 보기에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다. 준신화 등급이라는 등급 판정을 받았으니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실제로 마법이 떨어질 당시에도 눈에 비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 생각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곧바로 플라스크를 열어 연구 가치가 있어 보이는 것들을 수집하는 것 또한 일, 마력결정이나 파편, 잔존마력 같은 것들은 다른 이들이 볼 수가 없으니 내가 직접 일을 하는 것이 더 빠르다. 다른 마법사들이 마력만 묻은 쓸데없는 돌멩이를 샘플이랍시고 줍는 꼴을 보면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이건 내 눈으로 봐도 구별하기가 쉽지가 않다. ‘잘했네.’ 아마 흔적들 역시 통째로 집어삼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리라. 실제로 가까이 다가가 삼켜진 단면을 보면 완벽하게 깔끔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흔적이 있는 곳은 대부분이 이런 단면들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들, 그 외에는 흔적조차 보이지가 않는다. 이런 식으로라면 마법의 발현지를 찾기도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대기에 떠돌아다니고 있는 잔존마력이 앞으로 7시간 후에 사라진다는 걸 생각해 보면 흔적을 찾기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이 마법의 영향을 받은 파편들이 촉매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아직 정확한 쓰임새를 알 수는 없었지만 전설 등급의 촉매인 만큼 여러 가지 쓰임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이 마법 자체 역시 굉장히 흥미롭다. ‘마치 공간이 통째로 삼켜진 것 같은데….’ 확실히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발렌틴의 팔이 잘리지 않고 기형적인 방향으로 뒤틀린 것을 보면 공간에 삼켜지기 전에 팔을 빼냈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녀석은 힘으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인력에 저항했고 팔이 부서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잃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만약에 조금 더 구체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거나 저항하지 못했다면 녀석의 어깨, 혹은 몸 전체가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피하는 게 늦거나 저항할 수 없는 이가 대상이라고 한다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다. 심지어는 혈액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아니야…. 사라지는 게 아니야….’ 이건 공간에 삼켜지는 게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아주 작은 물질 하나를 발견했을 때. 먼지 한 톨 같은 크기로 만들어진 작은 조각이다.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일반 핀셋보다 더욱더 작게 만들어진 핀셋으로도 제대로 잡히지 않을 정도. 심지어는 그 어떤 정보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돌멩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뭔가 이상해.’ 순간적이지만 저게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당연. ‘미친….’ 사라지는 게 아니다. ‘압축됐어.’ 이 마법의 영향을 받은, 이 장소를 깔끔하게 삼켜버린 단면이 이 작은 조각으로 압축되어 버렸다. ‘미친… 미친…. 슈바….’ 어차피 뭐에 맞나 뒈지는 건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공화국의 피해자들이 이 작은 조각으로 압축됐다고 생각해 보면 절로 모르게 식은땀이 나오는 게 당연. 이건 구의 형태가 폭발하는 그 순간부터 주변에 있는 걸 먼지 한 톨로 압축시켜 버리는 종류의 마법이다. 사람이 어떻게 인지하기도 전에 빨아들이고 압축시켜 버린다. 순식간에 뼈와 혈액이 으스러지고 무와 비슷한 형태로 되돌아간다. 당황스럽지만 이 먼지 한 톨이 돌멩이라도 들고 있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물건에 이 일대를 파먹은 지면이 들어 있는 셈. 만약 마력을 가지고 있거나 그에 준하는 걸 이런 형태로 압축시킬 수 있다면, 어떤 의미로는 쓸 만한 에너지 자원이 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너무 무서운데….’ 이건 너무 무섭다. 처음에는 제발 정하얀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마법에 대해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차라리 정하얀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딴 마법을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쓴다고?’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는 것과 비슷한 레벨의 자연재해로 느껴지는 수준, 이게 정하얀이 벌인 일이라면 수습할 수는 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이 마법을 발현시킨 게 맞다면 수습을 개뿔 빠르게 도망치는 방향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태세전환 버튼을 누르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 ‘제발 하얀이 작품이어야 돼…. 제발….’ 그 와중에 불안했던 점은…. 이 작은 물질에서 자꾸만 익숙하지 않은 검은색 연기가 눈에 비쳤다는 것. 아주 미세해서 눈치채지 못할 정도인 것은 물론 다른 종류의 잔존마력이 더 많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수많은 잔존마력 중 흑 마법으로 추정되는 마력이 존재했다는 게 자꾸만 신경 쓰였다. 기억 속에 밀어 넣고 있었던 사람 하나가 생각난 것은 당연지사. ‘한소라 어딨어.’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얘 어디 있어…. 슈바….’ # 312 회귀자 사용설명서 312화 정하얀 사용설명서 (6) ‘정하얀 혼자 한 게 아니야.’ 단순 추측일 뿐이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혼자만의 솜씨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무리 용의주도해졌다고는 하지만 정하얀이라면 이 정도로까지 일을 용의주도하게 처리하지 못했을 거다. 일단은 마력이 어디서 흘러나왔는지도 탐지가 불가능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사람과도 마력의 파장이 달랐고 두세 번은 꼬아서 주문을 완성한 듯한 느낌. 마법적인 능력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누군가 외부의 도움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서둘러 시선을 돌린 것은 순식간. 지금 이 장소에 한소라가 없는 게 굉장히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만약에 공화국 쪽에서도 흑 마법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면 이쪽 역시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소라를 버림 패로 사용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제 레벨 업에 탄력을 받고 있는 흑 마법사를 버림 패로 사용하기에는 아깝다. ‘말도 안 돼.’ 오만가지 생각에 빠져있을 때 말을 걸어온 것은 실리아의 카스가노 유노.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자 고개를 끄덕여 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주인, 아니, 이기영 님. 혹시 무언가 찾고 계신 게 있으신지….” “딱히 별건 아닙니다만… 혹시 저희 길드의 한소라 본 적 없습니까?” “아… 아마 숙소에 있을 겁니다. 몸이 조금 안 좋다고 한 걸 들은 적이 있는데… 문제가 생긴 것인지요? 아니면 뭔가 밝혀낸 게 있으신지요?” “일단 뭐라고 말하기 애매하기는 하지만 단서는 잡은 것 같습니다. 카스가노 님은 이곳의 마무리를 부탁드립니다. 이건 제가 모아놓은 샘플입니다. 유사한 것들은 전부 챙겨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특히나 마력결정은 꼭 챙겨주셔야 합니다. 이후 단서나 새로운 연구에 쓰일지도 모릅니다.” “아….” “상위소재로 사용할 수 있는 촉매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이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요.” 물론 압축된 촉매는 이쪽이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뭔가 다른 반응이 있는지 지켜봐야 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대외적인 일은 차희라 님이 맡아주실 겁니다. 만약에 공식발표가 있다면 다시 이쪽으로 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가능하다면 다른 지역 쪽에서 일어난 흔적 역시 조사해 주시고 필요하다 싶으신 건 전부 챙겨주시면 됩니다.” “네. 편한 대로 하시옵소서.”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카스가노 님은 이 마력을 추적하는 게 가능합니까?”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살펴봐야 알겠지만 만약에 추적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시간을 쏟게 될 것 같습니다.” “혹시 눈으로는….” “송, 송구하오나 제가 볼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닌지라… 다만 근시일 내에 라이오스를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사, 사실은….” 무척 뜸을 들이고 있었다. 괜스레 속이 타고 답답해진 것은 당연지사. 슬그머니 운을 띄우자 그대로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예의 그 마법이 떨어졌을 당시 이 도시가 폐허가 된 장면이 제 눈에 보였습니다. 물론 아주 잠깐일 뿐이었고… 시기 역시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이건 또 뭐야….’ 괜스레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당장 떨어진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라이오스가 폐허가 된단다. “이기영 님에게 말씀드리는 게 좋을지 고민을 했습니다만….” ‘고민할 게 있는 건가. 무조건 말하는 게 맞잖아.’ 조금은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말을 이어오는 그녀의 대사에 어째서 말하기를 주저한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제가 입 밖으로 내뱉은 미래가 어떤 결과로 만들어질지는 저 역시 알 수 없사옵니다. 과거와는 다르게 미래는 아주 작은 날개짓으로도 바뀔 가능성이 있는 터라… 혹여나 이기영 님께서 제가 본 미래와 연관이 있다면… 제가 말씀을 올린 것 때문에 본래의 미래가 만들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미래에 대해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본래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까?”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 이 말씀을 드린 것 또한 제가 본 미래로 가게 될 과정 중의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만… 혹시나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인 만큼 말씀을 드리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하나 이후의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만큼, 일단은 라이오스를 빠져나가는 일도 생각해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했습니다.” 아주 확실하게 이해했다. 방금 카스가노 유노가 나에게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말미암아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 일반 촌부가 방금의 이야기를 들어도 미래가 뒤틀릴 가능성이 있다. 보나 마나 동네가 떠나가라 위험을 경고하고 다닐 테니까. 심지어 이쪽은 많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자고 어쩌면 이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카스가노 유노가 본 미래를 막으려고 하는 행동이 오히려 일을 가속시키는 촉진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거다. ‘복잡한데….’ 확실히 이렇게 단편적인 장면만 본 경우에는 확실히 조심해야 될 점이 많다. 1회 차의 카스가노 역시 말실수 때문에 불행하다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했으니까. “일단은… 마음속에 새겨듣고 있겠습니다.” “부디 조심히 움직여 주시옵소서.” “아. 그보다… 혹시 라이오스는…” “아직 공식적인 발표는 없사옵니다. 방금 차희라 님께서 교국의 조사단 파견을 정식으로 요청했고 라이오스에서도 일단 받아들였습니다. 2차 피해가 우려되는 만큼 저희들보다는 자국 내 민간인들을 더 신경 쓰고 있는 터라. 우리 사절단으로 온 전문도 비슷한 이야기인데 혹시나 원하신다면….” “아니,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들이 해올 대사는 뻔하다. 갑작스러운 사고에는 유감.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대기 공화국에는 심심한 위로를 표현할 것이고 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중립국에서도 작금의 상황은 문제가 많다. 정치적으로 꼬투리를 잡으려고 한다면 무조건 잡을 수 있다고 봐도 된다. 그만큼 민감한 사항인 만큼 곧바로 입장을 정리하지는 못할 거라는 거다. 사실 이쪽도 라이오스가 어떻게 나올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전자보다 더 신경 쓰이는 문제가 생겼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라이오스 불바다설에 불안감이 증폭되기 시작한다. ‘정하얀이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다. 당장 1차 사건을 터뜨린 것도 정하얀이었으니까. 지금부터 정하얀을 자극할 만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고 멘탈을 잡지 못한 정하얀의 폭주로 라이오스가 쑥대밭이 된다는 정하얀설. 가능성은 낮지만 이게 외부의 공격, 혹은 자연재해 따위의 현상이고 2차 임팩트가 시작되면서 폐허가 되는 설 역시 존재. 하지만 누가 봐도 첫 번째에 무게가 실리는 건 어쩔 수 없으리라. 카스가노 유노가 내게 잘 말해준 것이 맞다. 그녀의 발언은 지금이라도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었으니까. ‘조심하면 돼.’ 최대한 자극하지 않게 조심하고 다시 한번 단단하게 멘탈을 잡아준다. 물론 그전에 한소라를 찾아야 하는 것 역시 필연적인 일. ‘뭐가 이리 복잡해.’ 상황이 꼬일 대로 꼬인 것 같았지만 최우선 과제는 흔적 지우기와 정하얀 케어 하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자 숙소가 곧바로 눈에 띈다. 평화로웠던 아까 전과는 반대로 붉은 용병의 단원들이 타인들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쪽 역시 간단한 절차를 거쳤을 정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저런 종류의 검문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안쪽으로 진입한 이후에는 일단 무작정 한소라의 방문 앞으로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 별다른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문을 열자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소라 씨.” “아… 네. 부길드 마스터.” “내가 왜 찾아왔는지 알고 있죠?” “잘은… 무슨 일이시죠?” “시치미 떼지 말고.” “혹시 밖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저도 뭔가 일이 터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오늘은 조금 몸이 안 좋아서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확실히 연기 실력이 수준급이다. 애초에 얘는 이런 쪽으로 발달되어 있으니 김예리와 안기모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닌지 고민을 해볼 정도였으니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으리라. ‘진짜 모르는 건가.’ 라는 생각을 잠깐 하기는 했지만 눈에 언뜻언뜻 공포라는 감정이 들어선 것을 보면 꼭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다. ‘정하얀을 무서워하는 거겠지.’ 이번 일을 발설하지 말라고 정하얀에게 단단히 경고를 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저건 이쪽을 엿 먹이기 위한 연기가 아니라 본인이 살기 위한 발버둥이다. “한소라 씨. 저 이렇게 말장난할 시간 없어요. 뭘 걱정하시는지는 알겠는데 빠르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해야 되니까. 하얀이를 걱정하고 있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제가 조치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조치해 드릴 테니까요.” “정말로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정, 정말로….” “빨리 말해요. 시간 없으니까.” “진짜로 모르는 일이에요. 왜, 왜 이러시는 건지.” 그렇지만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 뭘 상상하는지 모르겠지만 동공이 흔들리고 팔과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 같은 모습도 시야에 비친다. 어딜 봐도 이러지 말라고, 제발 나한테는 묻지 말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조금 안 좋게 시작하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측은한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은 당연. 하지만 이쪽 역시 저쪽의 사정을 봐줄 상황이 아니다. “제발 이러지 말아주세요. 정말로 아무것도 몰라요.” ‘뭘 이러지 말아 달라는 건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도 이해가 안 가요.” “제가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소라 씨. 대충은 다 알고 있어요. 오늘 일어난 일에 연관이 있다는 거.” “정말로….” 이미 시간이 많이 끌렸다.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간 것은 당연, 한소라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표정이 감돈다. 최대한 몸을 웅크리는 것을 보니 뭔가를 숨기고 싶어 하는 느낌. 팔을 부여잡자. 제발 이러지 말라는 듯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간단한 마법을 외우자 곧바로 슈욱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상의가 반으로 갈라진다. 당연하지만 내가 예상했던 장면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가슴 쪽을 뒤덮은 커다란 검은색 반점. ‘마력 탈진 현상.’ 빼도 박도 못할 완벽한 증거였다. 당연하지만 한소라의 입에서는 곧바로 변명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 이건 그런 게 아니에요. 생각하시고 있는 그런 게 아니에요!” 깜짝 놀랐다는 듯이 중얼중얼거리며 외치고는 있지만 증거가 너무나도 명확하다. 이번 일을 벌인 것은 한소라와 정하얀이 맞다. “정말로 오해예요. 이건 그… 그러니까. 오해예요.” “오해는 무슨….” “정말로 아니에요. 이건 오해예요. 네! 오, 오해예요! 제발… 살, 살려주세요.” “괜찮습니다.” “살… 살려주세요.” “제가 왜….”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는 채로 중얼거리는 그녀가, 입을 여는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순식간.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자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슈바….’ # 313 회귀자 사용설명서 313화 정하얀 사용설명서(7) ‘제기랄….’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얗게 변한 것은 당연지사. ‘망했어.’ 어째서 한소라가 계속해서 살려달라고 외치는지 불 보듯 뻔했다. “이건… 그러니까 그… 제발….” 사시나무 떨 듯이 오돌오돌 떨고 있는 한소라의 모습은 불쌍하다 못해 애처롭게 보일 지경. 어떻게 보면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다. ‘빌어먹을 타이밍에….’ 이유야 어찌됐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보일지는 뻔할 뻔자. 애초에 상의를 탈의한 한소라와 내가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정하얀에게 반가운 그림이 아니다. 오해가 있다고 설명을 해야겠지만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정하얀의 정신머리가 돌아버리고 있다고 생각한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더 당황스럽다. ‘나타나도 꼭.’ 어째서 이런 타이밍에 나타난 건지 궁금할 따름. 이쪽이 한소라를 찾아갈 거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인 역시 들킬까 불안한 마음에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 분명하다. 물론 지금 보이는 그림은 정하얀이 예상한 그림보다 더욱더 충격적인 장면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나와 한소라가 이런 시기에 밀회를 즐기는 건 말도 안 되지만 정하얀에게 그 정도를 떠올릴 상식이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고생하지는 않았을 거다. 정하얀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한소라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것인지 입술을 꽉 깨무는 것이 보인다. 이건 당연히 수습해야 한다. 눈에 닭똥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다.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순식간에 반대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은 가관. 곧바로 ‘정하얀’이라고 외치며 뛰어가려고 했지만 누군가 내 발목을 꽉 붙잡는 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본 곳에 자리한 것은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있는 한소라. ‘얘는 또 왜이래.’ “이것 좀.” “혼자 두지 마세요…. 제발 혼자 두지 마세요.” “이것 좀 놔요.” “제발 혼자 두지 마세요. 제발 살, 살려주세요. 말씀 좀 잘해주세요. 방금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씀해주세요. 제발요. 제발 부탁드려요. 콜록. 제발….” “아니, 일단 이것 좀….” “안 돼요. 안 돼. 놓고 가지 마세요. 놓고 가지 마요. 혼자 두지 말아주세요. 시키는 건 뭐든 할게요. 놓고 가지 마. 놓고 가지 말라니까! 제발… 어어어엉….” 한소라를 붙이고 따라가는 건 당연히 마이너스다. 막말로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 부인을 불륜녀와 함께 데리고 가는 꼴. 일단은 놓고 가는 게 베스트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마치 고목나무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내 다리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내 유약한 근력 수치로는 이 여자를 떨쳐낼 방법이 없다. “방금 건 사고였다고 말씀해 주셔야 해요. 저, 저한테는 아무 관심도 없다고 말씀해 주세요. 제발… 길가에 돌멩이보다 하찮게 생각한다고 말해주셔야 돼요. 콜록.”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아아아안안 돼요! 놓고 가지는 마세요. 놓고 가지는 말아주세요! 아까 것도 전부 설명해 드릴게요. 놓고 가지 말아주세요. 혼자 두지 마. 제발… 제발 혼자 두지 마…. 콜록. 살려줘… 살려달라고! 이 나쁜 새끼야!” 사례라도 들렸는지 계속해서 콜록거리고 있는 꼴이 가관이다. 본래 한소라가 정하얀을 무서워 한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보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상태가 더 심각하다. 아예 정상적인 사고가 마비되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최근 좀 나아졌다고 생각했던 내가 우스워질 지경이었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여기서 시간이 더 끌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자꾸만 머릿속으로는 카스가노 유노가 봤던 미래가 떠오른다. ‘라이오스 불바다 설.’ 정확한 시기를 알 수가 없다는 게 굉장히 신경 쓰인다. 혹시나 그게 바로 오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나 역시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만약에 카스가노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정하얀이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버린다면…. ‘수습할 수도 없을 거야.’ 그건 내가 수습할 수 있는 영역을 완전히 벗어난 이야기다. 계속해서 이곳에서 시간을 끌리는 것도 지양해야 할 일. 일단은 얘를 데리고 가는 게 최우선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푹 쉬고 입을 열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일단 일어납시다. 빨리. 지금부터 찾으러 갈 거니까.” “네?” 하지만 곧바로 들려온 말에는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여왔다. “그게 싫으면 여기….” “갈게요! 갈게요! 당연히 가야죠. 당연히. 당연히 갈 거예요. 같이 가요. 빠, 빨리 준비해야 되니까. 빨리…. 네. 빨리 가야죠. 그래야 이 오해를 풀 수 있죠.” 서둘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하지만 다리가 풀린 건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있다. 마치 갓 태어난 얼룩말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모습과 오버랩 된다. 이쪽은 곧바로 상체를 가릴 수 있는 상의를 집어 던졌고 한소라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소라 씨한테 오는 피해는 없을 테니 진정하셔도 됩니다. 방금 건 오해였다고 잘 말할 테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겁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네.” “그리고 아까 전에 물었던 일에 대해서도 상세히 대답해 줄 것. 그게 싫으면 여기 혼자 계시면 됩니다.” “당… 연히 말씀… 드려야죠. 네. 당연히….”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따라오시면 될 겁니다.” “알겠어요. 네. 전부 다 할게요. 시키는 건 전부 다 하고 말씀도 드릴게요. 대, 대신 꼭….” “방금 그건 잘 말해보겠습니다.” 자신 있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나부터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너만 엿 되는 게 아니야, 소라야…. 나도 마찬가지야.’ 정하얀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서둘러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다. 계속해서 카스가노 유노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째서, 어떤 방식으로 라이오스가 폐허가 되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왠지 모르게 그 일이 목전까지 닥쳐왔다는 느낌이 든다. 정하얀의 폭주로 폐허가 된다는 것도 전부 추측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지금 생각나는 건 그것밖에 없다는 거다. 재빠르게 달려가 찾고 싶었지만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달리는 한소라 때문에 그것도 여의치 않다. 혹시나 자신을 두고 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한소라의 얼굴이 보였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함께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말로 야생의 정하얀이 한소라를 습격하지 않을 보장이 없는 건 아니다. 나와 떨어진 걸 노린 이후, 훈련소에서 끝내지 못했던 이벤트를 마무리 짓기 위해 출몰할 수도 있다. 어차피 멀리가지는 않았을 테니 상황을 정리해 보며 찾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아까 전에 있었던 일이나 이야기해 봅시다, 소라 씨.” 달리면서 말까지 하려니 힘든 모양이다. 혹시나 낙오될까 곧바로 입을 열어오는 모습. 그만큼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필사적인 의지가 느껴졌다. “정확히 어, 어떤 것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단 어째서 소라 씨가 마력 탈진 현상을 겪었는지부터.” “마법을 발현시킨 대상이 저니까요.” “소라 씨가 아까 같은 종류의 주문을 발현할 수 없다는 건….” “아니요. 저는 단순히 마지막 시동어만 외우고 말 그대로 발현만 시켰을 뿐이에요. 어떻게 하신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정하얀 님이 저에게 주문을 양도해 주셨어요. 양도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단발성이니까요. 물론 그마저도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거기에 제 마력을 전부 다 합쳐서 뽑아낸 마법이 보신 마법이에요.” ‘정하얀이니까 가능한 건가.’ 말하자면 어마어마한 마력이 잠깐 동안 한소라의 몸을 빌려 발현된 셈이다. 아마 이건 흔적을 찾기 어렵게 하기 위해 마력을 한 번 꼬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한소라가 주문을 발현한 사이 정하얀은 또 다른 주문을 외웠을 테고 틀림없이 그 작업은 이후에 벌어질 조사에 혼동을 주기 위한 주문일 가능성이 크다. 주문을 완성한 사람은 정하얀이지만 발현자가 흑마법사. 이것 역시 계획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문에서 정하얀이 사용할 수 없는 흑마법의 향기가 느껴진 것도 이 때문이리라. 어느 정도 궁금증이 해결된 것 같은 느낌. 퍼즐이 딱딱 맞춰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미리 말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겁니까?” “죄송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탓하는 건 아니다. 한소라가 저런 행동을 했다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어째서 둘이 합이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다가 이야기가 나왔고 한소라는 정하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흑마법사 아니랄까 봐.’ 정하얀이랑 계약이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은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당황스럽다. 물론 한소라의 입장에서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들이닥쳤을 테니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없었던 것. 오히려 정하얀의 계획에 무한 긍정하며 그녀를 보조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흔적을 찾지 못하게 손을 써 놨어요. 굳이 제 몸으로 마법을 발현한 것도 그 이유였고 말려보려고 했지만….” 말려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그 정도의 용기가 있을 리가 없다.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셔서….” “…….” “생각하시면 생각하실수록 자기 생각에 갇히시는 것 같았어요. 모든 일이 잘못된 게 그… 공화국 사람들 탓이라고…. 혼자서 결론을 내버리시는 것 같았어요.” “도대체 뭐가.” “부길드 마스터가 자기를 이상한 여자로 생각하는 게 싫다고 하시면서… 저는 오히려 질투하신 것 같다 말씀드렸고, 처음에는 무척 좋아하셨지만 그 이후로도 부길드 마스터가 굉장히 바쁘신 바람에….” “더 불안해졌다는 말입니까?” “네. 이후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계속해서 중얼거리시더니 결국에는…. 이제는 자신을 미워하게 된 것 같다고 말씀하시거나 부길드 마스터를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다고… 일을 해결해야겠다고. 저는 그게 이런 걸 뜻하는 건 줄 몰랐어요. 순수를 증명해야 한다면서… 계획에 함께해 달라고 해서…. 당연히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몰랐지만 그, 그냥 살고 싶어서… 아프기 싫어서… 흐그윽….” ‘슈바….’ 서러움이 폭발했는지 횡설수설 말을 내뱉는 모습은 가관. 눈물이 떨어지는 모습은 솔직히 조금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잘못은 나한테 있는 것 같은데….’ 반갑지 않은 손님의 등장에 정하얀을 순간적으로 밀어버렸다. 물론 이후에 당겼다고 생각했지만 정하얀의 입장에서는 이게 당기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 문제. 저주받은 신단 사건 이후로 무척이나 조용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케어가 되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이 패착이었다. 얌전한 정하얀 때문에 나 역시 긴장을 놓고 있었다. 결국에는 터질 만한 게 터진 것이다. ‘눈을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다는 건 또 뭔데.’ 진청 같은 놈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에 경고를 한 번 던졌을 뿐이다. 어째서 그게 자신이 이상한 여자가 되는 거고 순수를 증명해야 되는 일이 되는 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인물의 입장에서는 쪽지 한 번 잘못 건넨 것으로 평생의 원한을 받게 된 셈. ‘망했어.’ 점점 더 종말 엔딩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카스가노 유노가 봤던 미래가 내 눈 앞에서 계속해서 아른거린다. ‘다 같이 죽자는 엔딩은 아닐 거야. 그렇지? 그게 맞지?’ 어쩌면 지금도 자신의 순수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뛰어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부 다 끝내지 못한 일을 스스로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이쪽이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건 확실하다. 서둘러 눈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자 주먹을 꽉 쥐고 밖으로 우다다 뛰어가고 있는 정하얀의 뒷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 314 회귀자 사용설명서 314화 정하얀 사용설명서(8) 서둘러 그녀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계속해서 절뚝거리며 최대한 뒤처지지 않게 따라오려고 하는 한소라 때문인지 움직이는 게 너무 느리다. ‘놓고 갈까.’ 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내 표정을 귀신같이 알아챈 한소라가 입을 열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놓고 가지 마세요. 최대한 빠, 빨리 달릴게요. 헉… 헉….” “…….” 마음 같아서는 업어서 가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 다만 그 광경을 정하얀이 또 보는 것은 아닌지 무척이나 무섭다. 그것보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도대체 뭐 하러 가는 건지 궁금할 따름이다. 일단은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마무리 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이쪽에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혹시나 도시에 운석이라도 떨어뜨릴까 걱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시 한번 카스가노 유노가 했던 말이 스쳐지나간다. ‘엄청 심각한 건가 이거….’ 이런 일로 도시가 폐허가 된다면 어처구니가 없어 표정을 구길 수도 없으리라. ‘제기랄…. 제길.’ 최대한 눈에 마력을 집어넣고 계속해서 정하얀을 쫒는다. 안 그래도 장내가 정리되지 않아 혼잡한 도시 안을 우다다 뛰어다니니 이쪽에서도 따라잡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일단 도대체 어느 쪽으로 달리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안 그래도 쑥대밭이 되어 있는 공화국 놈들이 있는 장소.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 하러가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한소라도 한소라였지만 일단은 이쪽이 본인을 미워하고 있어서, 라는 감정이 먼저였던 모양. 마음의 눈이 제발 대상의 마음도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정하얀이 지금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할 지경이었다. 본래부터 정하얀은 평범한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번에는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나마 가장 그럴 듯한 추측은 마법을 사용하러 간다는 것. 골목골목을 정신없이 누비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정하얀이 어디로 향하는지 윤곽이 잡히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계속해서 도시의 외곽으로 빠지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공화국 놈들이 묵는 장소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의아해졌다. 한소라가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디로 향하고 계신 건지 알 것 같아요.” “어딥니까?” “해변 쪽이에요. 일단 설명은 함께 움직이면서 드릴게요.” 굳이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버릴 마음은 없었지만, 한소라 자신으로서도 나름의 안전장치를 구축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법진을 만들어 놓은 곳이 있어요. 기본적으로는 정하얀 님의 마력을 제 몸에 가두는 역할을 하기 위한 장치였지만 정하얀 님께서 제가 만든 마법진을 커스텀하셨거든요. 마법의 출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이라고 하셨는데….” “그걸 아직까지 지우지 않은 겁니까?” “죄,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정하얀 님께서 혹시나 이후에 쓸 일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일이 실패한다면 다시 한번 와야 할지도 모른다고 일단은 1차 이후에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제기랄. 아무리 그래도 흔적을 남기시면 어떡합니까.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곳입니까?” “마법진의 장소는 찾을 수 없을 거예요. 복잡한 종류의 마력결계가 쳐져 있어서 정하얀 님과 제가 아니라면 들어갈 수 없어요. 물론 장소 역시 이중 삼중으로 꼬아 놓았기 때문에 문제는 없고요. 찾거나 파훼할 수 있는 사람은 경지에 들어선 마법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불행하게도 라이오스에는 경지에 이른 마법사가 한 명 더 체류하고 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일을 수습하고 공화국 쪽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꼬리를 잡지 못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런 게 남아 있다면 최대한 빨리 흔적을 지워야 하는 게 맞다. 그 고인물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다면 어쩌면 그 장소로 당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참 많이도 하셨네. 슈바…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마법 발현지를 물색한 것은 물론 트랩을 깔고 심지어는 그걸 이중 삼중으로 꼬아 놨단다. 내 기준에서는 준비만 생각해도 한 달을 넘게 걸릴 것이다. 정하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은 느낌. 머리가 좋은 편에 속하는 한소라 역시 도움을 줬으니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된 것은 물론. 말려주는 사람도 없으니 폭주기관차처럼 일을 진행시켰을 것이다. 지금 정하얀이 향하고 있는 장소가 그곳이 만다면 확실하게 다음 마법을 발현하러 간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물론 첫 번째보다 화력이 더욱더 클 것이라는 건 안 봐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빨리 가야 돼.’ 적어도 정하얀이 마법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도착해야 한다. “지름길은?” “그런 건 잘 몰라요. 일단은 해변 쪽으로 향하시면 돼요.” “조금 더 빨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은 업히거나 안기시는 게.” “그건 안 돼! 제, 제발…. 혹시나 정하얀 님이 보실 수도 있어요. 그건 안 돼요.” 다시 한번 발작을 일으키려고 하는 모습에 조금은 측은해졌지만 사실상 한시가 급한 상황. 반가운 얼굴이 눈에 띈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형님! 형님도 여기 온 거요? 거, 누님이랑은 만났소? 잠깐 볼일이 있어서 돌아간다고 했었는데….” ‘나이스 타이밍, 박덕구!’ 무너진 잔해를 정리하고 있는 박덕구였다. 봉사활동하기에 여념이 없었는지 얼굴에 덕지덕지 뭔가를 묻히고 있었는데 나와 한소라를 보는 얼굴에 반가움이 깃든다. 우리 역시 합류하기 위해서 찾아 온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박해 보이는 우리 얼굴을 확인한 이후에는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모양. “뭔 일 있소?” “마침 잘 됐다. 여기 한소라 씨 좀 안고 따라와. 소라 씨는 덕구에게 아까 말씀한 장소를 말씀하시면 됩니다.” “거, 무슨 난리라도 난거요? 무, 무슨 일이요? 이게.” “일단은 따라와. 설명은 나중에 해줄 테니까.” “누님은 어디 간 거요?” “일단 아무 말하지 말고 뛰어.” “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기야 하겠지만….” “급한 일이니까 빨리.” “알겠소.” 믿음직한 타이밍에 만난 믿음직한 지원군. 내 기대에 화답하듯 박덕구는 한소라를 번쩍 들어 올려 달리기 시작했고 나 역시 곧바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정하얀을 쫒으면 쫒을수록 점점 더 사람이 없어지는 곳으로 향하는 느낌이다. 하얀 모래사장이 있는 바다가 보였다. 언젠가 무조건 와보기로 한 곳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되고 나서야 오게 되었으니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감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 죽느냐 사느냐, 망하느냐 아니냐의 기로에 서 있는 걸 보면 노을이 지고 있는 바다도 예쁘게 보이지가 않는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요?” “소라 씨.” “아, 거의 다 왔어요. 조금 만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돼서….” “여기서부터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소라 씨는 길만 안내해 주세요. 덕구야, 몇 발자국 뒤에서 따라오는 게 좋을 것 같다.” “거, 알겠소. 무슨 이 상황에 던전이라도 들어가는 거요?” 정답은 아니지만 기분만큼은 비슷하다. 사람이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외곽 해변에 야생 몬스터마저도 버려버린 동굴로 진입하려고 하니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아마 저 안쪽도 미로처럼 얽혀 있을 것이다. 아주 예전에 버려진 던전을 재활용한 셈. 한소라가 주문을 외우자 마력 결계가 희미해졌고 그 순간 박덕구와 나는 안쪽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마치 비밀번호라도 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이쪽이 지나간 이후에는 곧바로 마력결계가 생성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말로 던전이라도 들어온 것 같은 느낌.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정하얀이라면 지금 이 파티원들로 공략을 실행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어느 정도 안쪽에 발을 들이자 여러 가지 결계들이 보이니 한소라가 그때마다 비밀번호를 눌러댄 것은 당연.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한쪽 길로 이어지는 통로로 갈 수 있었는데, 한소라와 박덕구보다는 이쪽이 먼저 진입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함께 가자고 했던 한소라도 나보다 먼저 정하얀을 마주칠 생각은 없는 모양. 슬그머니 손짓하자 곧바로 고개를 끄덕여 왔고 나 역시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시야에 비치는 것은 마법진에서 생성된 빛이 쏟아지는 동공. 보통 던전의 보스 몬스터들이 자리 잡게 생긴 것 같은 외관이기는 했지만 아름답다면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리리라. 그 마법진 한가운데 있는 것은 당연 정하얀. 오랜만에 보는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보였다. “하얀아.” “히끅.”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누가 봐도 심적으로 많이 몰려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조금 있으면 끄, 끝, 끝나요.” ‘뭐가 끝나는데….’ “이, 이번에는 확실히 할 수 있을 거예요! 그, 그러니까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줘요. 이제 말 안 할게요. 히끅.” ‘용서하기는 뭘 용서해.’ “그, 그 사람이 잘못한 거예요. 저 이상한 여자 아니에요.” “나는 이상한 여자라고 말한 적 없어. 방금 전에 한소라 씨랑 함께 있었던 것도 오해였고. 이리로 와야지.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이쪽으로 와야지.” “오해라는 건 알아요. 그래도 오빠가 저를 바라보는 누, 눈, 눈빛이 달라졌단 말이에요. 나 진짜 그런 여자 아닌데…. 데이트도 많이 해준다고 했는데…. 전부 다 취소됐어. 히끅. 다 그 사람들 때문이야. 바다도 같이 가준다고 했는데 전부 취소 됐다구….” “아니라니까. 그런 게 아닌데….” “지금도 나, 나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히끅. 그래서 안 만나 줬던 거잖아요!” ‘그런 게 아니야. 슈바….’ 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도대체 어디서부터 풀어줘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이 이렇게까지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게 왜 이렇게 되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하얀의 생각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예, 옛날에 덕구 오빠가 그랬단 말이에요. 한 번 의심하면 계속 의심하게 된다고…. 나도 그랬단 말야.” ‘박덕구 이 돼지 새끼. 쓸데없는 말 좀 그만해.’ “오, 오빠도 계속 의심할 거야. 그 나쁜 바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기 전까지는 계속 의심할 거야!” “나는 의심 같은 거 안 해, 하얀아. 정말이야.” “말로는 안 그렇다고 하면서 지, 지금도 의심하고 있잖아요. 가벼운 여자라고 생각하잖아요! 눈만 봐도 알 것 같단 말야. 히끅….” “아니야. 그렇지 않아. 절대로….” “맞아. 계속 의심할 거야. 계속 의심할 거라고.” “아니라니까. 슈바….” “내 순수를 증명해야 돼!” ‘증명할 필요 없다고…. 그만 좀 증명해.’ “지금 당장!” 동공이 우르르 울리기 시작한 것은 순식간.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마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바다 엔딩은 안 돼.’ 카스가노 유노의 목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번진다. “정하얀!” “순수를 증명해야 돼!!” ‘미친!’ 쿠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위에서 흙먼지가 떨어진다. 마법진의 빛은 계속해서 정하얀을 비추고 사방에 있는 마력이 그녀에게 모이기 시작. “하얀아,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얼마나 너를….” “없어져야 돼. 그 바보들이 없어져야 돼!” 사랑한다는 미사여구를 계속해서 중얼거리지만 이미 맛탱이가 갔는지 마력은 조금도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마법이 발현되면 틀림없이 의심당한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 라이오스와의 동맹은 물거품이 되고 오히려 대륙의 정적으로 찍혀 교국 멸망 시나리오가 실현될지도 모른다. ‘너무 방치했어.’ 밀기만 하고 당겨주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심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것이다. 계속해서 마법이 고조되고 동공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어느 순간 귀를 찢을 것처럼 커진다. 마법이 발현되기 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 아마 정하얀의 입에서 주문이 터져 나오는 순간, 장담컨대 라이오스의 일부는 폐허가 되어버리리라. ‘망했어. 시발. 망했다고….’ “아아아아아아아아!” 주문 시전자의 눈과 입에서 검붉은 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이쪽 역시 커다란 목소리로 마법의 주문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겨, 결, 결혼하자.” 순식간에 장내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 315 회귀자 사용설명서 315화 정하얀 사용설명서(9) “겨, 결, 결혼하자.” 순식간에 장내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정말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마치, 우뚝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으리라. 요동치는 마력도, 소리를 지르며 주문을 외우려고 했던 정하얀도 어느 순간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다. 동공을 울리는 소음 역시 함께 멈춘 것은 당연지사. 너무나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나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산발이 된 머리로 검붉고 불길한 빛을 뿜어내던 정하얀 역시 어느 순간 정상적으로 돌아와 있다. 안광은커녕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고 있었고 마력의 영향으로 인해 하늘로 둥둥 떠오르기 시작한 머리카락도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았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모습이 가관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첫 번째. 곰곰이 떠올려 보더니 깜짝 놀란 듯한 얼굴을 하는 게 두 번째다. 물론 마지막은 자신이 들은 게 정말인지 답을 달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네?” ‘제기랄….’ “네?!” ‘슈바….’ “결, 결, 결… 겨겨르….” 자꾸만 중얼거리는 듯한 표정은 누가 봐도 아까보다 더 맛이 간 느낌. 이게 잘한 짓인지 판단하기 무척이나 힘들다. 애초에 이런 방식으로 당근을 주는 게 버릇된다면 틈이 날 때마다 도시 멸망 시나리오를 찍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그것 말고는 정하얀을 말릴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 또한 사실. 만약 어중간한 대사를 던졌다가는 그대로 마법이 떨어졌을 것이다. 윽박질러 보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더욱더 맛이 갈 가능성을 떠올려 보면…. ‘이렇게 하는 게 맞아.’ 당장 정하얀을 말리기 위해서 던진 최고의 선택이었다. 아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 다시 한번만요.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세요.” 왠지 모르게 다시 말할 순 없었다. 정체 모를 불안감이 내 목구멍을 꽉 막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와서 그냥 해본 소리라고 한다면 아까보다 더 큰 재앙이 들이닥칠 수도 있으리라. 결국에는 눈을 꽉 감고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결… 혼하자, 하얀아.” 그래도 기억에 남을 프로포즈인 만큼 최대한 형식적인 자세를 취해야 되는 것은 당연했고, 이미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한 정하얀은 충분히 감동한 것 같지만 기왕 하는 김에 제대로 수습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주머니에 몇 가지 아이템을 넣어놨던 기억이 있다.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입수한 반지를 꺼내 들었다. “너를 보는 눈, 눈빛이 달라진 게 아니라. 그…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아아아… 아아아….” “서운했다면 미안해.” 사실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었기 때문에 수습하기는 힘들다. 도대체 뭘 돌아볼 시간이 필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말이 술술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방향으로 봐도 지금 이 시기에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당황스러운 이야기. 하지만 아무 말이나 내던져도 정하얀은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교국이 망하는 것보다는 나아.’ 어차피 정하얀과는 떨어질 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 리스크도 크지만 메리트는 그 리스크를 상회할 정도로 크다.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10년 뒤 나와 정하얀의 관계는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칼에 맞을 수도, 함께 살 수도 있는 엔딩에서. ‘조금 더 좋은 선택을 한 거야.’ 그나마 둘 중에 조금 더 나은 선택을, 조금 더 빨리 한 것이라 자위하는 게 맞다. 어느 날 갑자기 단검에 맞은 뒤에 압축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가슴 한편 깊숙한 곳에서 왠지 모를 씁쓸함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어. 슈바….’ “그동안 신경 써주지 못하고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오히려 우, 우리 관계에 대해 돌아볼 수 있게 된 시기였던 것 같아. 이번 일로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고….” ‘정말로 돌아보고 싶다.’ 자꾸만 정하얀처럼 말을 더듬게 된다. 거짓말에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정말로 내키지가 않는다. “아아아… 아아아, 오빠아…. 히끅. 흐그으으윽.” “대답은 나중에 해도….” “아니에요! 아니, 아니, 아니에요! 지금! 지금 할래! 지, 지금 할래요!” ‘나중에 해도 돼….’ 제발 조금 시간을 줬으면 싶었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목이라도 맬 것 같은 기세. 이쪽이 먼저 물어보기도 전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정하얀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네…. 할게요. 할게요. 흐어어어엉… 할게요. 한다구요. 할 거라고요. 무조건 할 거야. 하늘이 무너져도 할 거예요. 히끅, 히끅….” ‘제길.’ 내 손에 들린 반지를 잡은 뒤에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얼굴에는 엄청난 감동과 성취감이 교차한다. 내가 끼워주기도 전에 본인이 먼저 왼손 약지에 반지를 장착한 모습. 순간적이었지만 방금 정하얀의 움직임은 악마 숭배자 이토 소우타를 상회했다. ‘제기랄!’ “드디어 된 거야. 드디어….” 평소대로 혼잣말을 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행복해 보인다. 이쪽의 표정과는 상당히 대비될 것 같았지만 나 역시 억지로라도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두 손으로 계속해서 눈물을 닦고 있는 정하얀은 내 표정을 볼 여력이 없는 것 같기는 했지만 혹시나 다른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이런 작업은 필수라고 할 수 있으리라. 아직까지 밖에서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한소라와 박덕구에게 사태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고 말해야 했지만, 정하얀은 그칠 생각이 없는 모양. 진정했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다시 한번 눈물이 튀어나온다. “흐어어어어어엉… 사랑해요. 사랑해요. 나는 오빠밖에 없어요. 히끅.” “나도 사랑해.” 오히려 우다다 달려들어 꽉 안겨 들어오자 이쪽의 가슴팍이 금방 축축해졌다. “절대로 안 놓칠 거야…. 절대로.” “…….” 그 와중에 중얼거리는 말에 왠지 모를 오한을 느꼈다. 몇십 분이나 안긴 이후에야 천천히 떨어지는 모습. 뽀뽀를 해달라는 듯 까치발을 들고 천천히 눈을 감는다. 생각해 보면 로맨틱한 장면이기는 하다. 여전히 수많이 빛이 형형한 마법진 사이, 수십 가지의 색이 서로를 비추었고 동공 아래에 고인 물웅덩이가 그 빛들을 반사한다. 그 한가운데 반쯤 안긴 채 이쪽의 키스를 기다리고 있는 정하얀. 이쪽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굉장히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이미 정하얀의 머릿속에서는 오늘의 일이 굉장히 왜곡된 채로 비칠 것이다. 한쪽에게는 공포로 기억될 수도 있는 이 공간이 다른 사람에게는 축복처럼 느껴질 테니 그것 하나는 아이러니하다. 괜스레 방금 전까지 눈에서 검붉은 안광을 쏘아대며 비명을 지르던 정하얀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많은 유부남, 유부녀가 결혼에 대해 장난삼아 안 좋은 소리를 쏟아내고는 하지만 이쪽의 경우에는 단순 장난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생존에 특화된 이 저주받은 몸뚱이는 한껏 내민 정하얀의 입술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 한참이나 서로 입술을 포갠 이후에 퉁퉁 부은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재빨리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 한 정하얀이 빠르게 입을 열어온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히끅… 시, 식은 언제 올릴까요? 혼인 신고서는 어떻게….” “아, 그건….” “아이는 어떻게 해야 되요? 저는 아, 아, 아기는 없어도 괜찮아요. 오빠가 아기만 신경 쓸까 봐 걱정 돼서…. 그, 그래도 오빠가 원하는 만큼은 낳을 수 있어요! 얼마든지요! 식은 올린 다음에 바로 여행도 가는 거죠?” “그러니까….” “저 모아놓은 돈도 많아요! 아! 파란 길드에서 계속 머무실 건가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오빠만 좋으면 어디든지 다 괜찮아요!” “아… 응.”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둘이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오빠가 그건 싫어할 테니까. 그래도 최대한 조용한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 그렇죠? 그리고 신혼여행은 거울 호수로 가요. 꼭 보고 싶었거든요. 배도 타고 싶고… 호, 호수에 함께 있으면 굉장히 낭만적일 거예요. 그, 그리고 매일매일 아침밥 해드릴게요. 자, 잘은 모르겠지만 그… 밤에 하는 것도 열심히 공부하고! 또! 전부 다 공부하고! 히끅… 너무 좋아요. …요리 학원도 다닐게요.” “일단 그, 그런 건 차차 둘이 이야기해 보자. 일단은 서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네… 네. 그리고 또….” “그… 리고… 당분간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왜, 왜요?” “아직 해결해야 되는 일도 많이 남았고… 사실 지금 당장에라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여러 가지 상황이 얽혀 있으니까.” “네에?” “그리고….” “네.” “조금 더 제대로 자리를 잡고 하고 싶어.” 일단 저질러 놨으니 수습해야 되는 것은 당연한 일. 하기 싫은 결혼을 미루는 전형적인 쓰레기들의 발언이었다. 깜짝 놀랐다는 얼굴이 순간 스쳐지나가기는 했지만 정하얀으로서도 이 정도는 양보하는 게 맞다. 만약에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면 차희라의 분노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대놓고 전형적이긴 한데….’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 사실 이미 자리를 잡을 대로 잡았기 때문에 더 이상 잡을 자리도 없지만 자리를 잡는다는 말 또한 마법의 단어였다. “저, 저는 괜찮아요. 아무렇게나 해도 돼요. 그, 그냥 둘이서만 해도 괜찮고…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오, 오빠만 있으면….”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래도….” “일단 이 이야기는 나중에 같이 하자. 너무 초조해 생각하지 말고… 서로가 같은 마음이라는 게 가장 중요한 거니까.” “네….” “그리고 좋… 은 날이기는 하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 해야 될 것 같다. 일단 돌아가서 이야기하자.” “아….” 그제야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는지 얼굴이 새파래졌다. 확실히 방금 전은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 같았다. 당황하는 바람에 얼떨결로 내뱉은 마법의 주문이었지만 이걸로 당분간은 정하얀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정하얀의 입장에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달콤한 일이었을 테니까. 혹시라도 잘못을 저질렀다가는 결혼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기도 할 것이다. ‘나쁘지 않아.’ 적어도 컨트롤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 생긴 것이다. 달콤한 미끼일수록 조금 더 잘 통하는 법이다. 걱정이 되는 것은 이 떡밥마저 전부 다 사라졌을 경우이지만 최소한 1년은 얌전히 있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 지금도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했으니까. ‘이번 일을 벌인 책임.’ 그걸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얼떨결에 흥분하고 폭주한 뒤에 일을 터뜨리기는 했지만 이 일의 심각성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맨 처음 봤을 때는 정신머리가 나간 사이코 같은 모습을, 식 이야기가 나온 이후에는 세상 다가진 것처럼 행복한 모습을, 현재는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생각보다 더 불안해하는 표정. 정하얀이 조심스레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 오빠….” “…?” “누, 누, 누가 찾아온 것 같아요.” 어떻게 하냐는 듯한 대사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무섭게 외부의 문제가 들이닥친 것이다. “이런….” # 316 회귀자 사용설명서 316화 빛의 이름으로(1) “뭐라고?” “누, 누가 찾아온 것 같아요. 바, 바깥에서 결계를 해제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확실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지금 확인할 수 있어?” “한번 확인해 볼게요….” 정하얀이 천천히 주문을 외우는 것이 보인다. 아네모네의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려고 하는 게 틀림없으리라. 지금 당장 밖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이쪽도 뭔가 조취를 취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천천히 감은 눈을 뜬 정하얀의 얼굴에 약간의 당혹감이 감도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구야?” “…….” “빨리.” “그, 그 사람이에요.” “뭐?” “그 사람이요. 그 공화국 사람들.” “…….” 슬쩍 이쪽의 눈치를 보는 정하얀은 뭔가 내가 또 이상한 오해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 그렇지만 그런 오해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점점 더 이쪽도 불안해지기 시작. 겨우 수습한 불길이 다시 타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도 당연하다. 아니, 이제는 내부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도 아니게 됐다. 애초에 정하얀을 말린 이유는 이쪽이 흉수로 지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대륙의 공적으로 몰리는 걸 회피하기 위해서였고 이쪽과 라이오스의 동맹을 성사시키기 위함이었다. 지금 이 꼴을 들킨다면 동맹은 허사가 되는 것은 물론 대륙의 정적으로 찍혀 주변국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으리라.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슈바….’ 그만큼 진청 그 녀석이 유능하다는 증거이리라. 이쪽의 흔적을 밟고 움직일 수 있는 만큼 마법적 소양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범한 마법사로서는 흔적 자체를 느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정하얀이 이중 삼중으로 꼬아놓은 마법 발현을 탐색한다는 건 능력치가 90이 넘은 다른 마법사들도 불가능하다는 거다. 어쩌면 이쪽의 움직임 때문에 꼬리 밟힌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국 쪽이 빠르게 움직였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쪽의 꼬리를 밟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이쪽이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붙잡게 된 것은 당연. 수많은 마력결계와 거대한 마법진.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정하얀이 마법의 발현자라는 사실은 지나가던 개도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어떻게 봐도 지금 이쪽은 궁지에 몰린 쥐나 다름없다. ‘망했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스트레스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마법진 지금 지울 수 있나?” “지, 지울 수는 있지만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요. 어쩌면 흔적이 남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지금 첫 번째 결계를 뚫고 들어온 것 같아요.” ‘제기랄.’ “어떻게 할까요?” “잠깐만.” “두 번째 결계도 뚫은 것 같….” “뭐?” “세 번째에 당도한 것 같아요.” ‘뭐가 이렇게 빠른데?’ “혹시 다른 곳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가 있나?” “아니요. 그런 건… 하, 한번 찾아볼까요?” “아니야.” 찾는다고 해도 없던 길이 생겨날 리는 없다. ‘제기랄, 제길….’ 빼도 박도 못한 현행범. 살인 용의자가 현장에서 경찰에게 발각된 것 만큼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박덕구랑 한소라는….’ 생각해 보니 아직도 동공의 밖에서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박덕구와 한소라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 일단은 둘에게 이번 상황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리라. 허겁지겁 동공을 나오니 시야에 비친 것은 초조한 얼굴로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한소라.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박덕구는 덤이다. “일은 잘 해결된 거요? 아니, 그보다는 여기에는 도대체 왜.” “설명은 나중에 할게.” “거, 아까부터 설명해 준다고 말한 거 아니요. 너무 궁금해서 미쳐 버릴 것 같다니까.” 박덕구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얼굴이다. 아마 내 표정을 보고서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당연하지만 한소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의 경우에는 대놓고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할 뻔자. 정하얀과의 일이 틀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 일은 잘 해결되신 거 맞죠?” “네. 그쪽 일은 잘 해결됐습니다.” “정… 말인가요?” “네.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표정이 너무 좋지 않으셔서….” “조금 다른 일이 생겼습니다. 일단은 안쪽으… 아니, 소라 씨만 들어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덕구야, 너는 일단 계속해서 경계. 만약에 일이 생기면 곧바로 부르마.” 전후 사정을 모르는 덕구 녀석은 일단은 제외. 녀석의 성격에 이쪽이 도시를 박살 냈다는 사실을 듣는다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예상하기 힘들다. ‘박덕구는 모르는 게 나아.’ 이번 도시를 박살 낸 게 정하얀과 한소라의 콜라보라는 사실은 숨기는 게 맞다. 하지만 녀석의 답답함이 이미 한계치에 다다른 모양. 커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거, 진짜 무슨 일인 거요!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왔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를 모르겠소. 아까까지만 해도 동공이 우르르 쾅쾅 홀롤로롤로로 소리를 내질 않나. 아니, 하얀이 누님은 안에 있었던 거요? 아까 그건 하얀이 누님이 한 게 맞는 거요? 막 소리를 지르는 것도 같은데… 대관절 이게 뭔 상황인지 설명을 해줘야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 보기라도 할 거 아니요!” “조금 있다가 다 설명해 줄게.” “혹시….” “뭐?” “혹시 오늘 있었던 일….” ‘이 돼지가 생각보다 눈치가….’ 순간적이지만 가슴이 철렁한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이후에 나온 말에는 주먹을 꽉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꼬리라도 잡은 거요? 범인이라도, 아니, 그 힌트라도 잡은 거요? 그래서 마법사들끼리만 움직이는 거요?” ‘이 새끼….’ “그런 거 아니요?” ‘이 사랑스러운 돼지 새끼!!’ 순간적이지만 번개가 머리 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 어째서 이걸 생각하지 못했는지 당황스러울 지경. 커다란 힌트를 준 이 돼지가 사랑스러워진다. ‘너 이 새끼!!’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갓덕구의 추측에는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그거야!!’ 그림으로 그린 듯한 완벽한 해결책. 물론 여러 가지 변수가 있기야 하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현재로서는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맞다. 덕구야. 네 말이 맞아. 슈바! 네 말이 맞아! 어떻게 알았어?! 푸히하하핫!” 흐뭇한 미소를 보내는 것은 순식간. 정답을 맞힌 뿌듯함이 순간적으로 박덕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이요? 아암.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럴 줄 알았다니까! 형님 마음을 딱 하면 알아차리는 게 이 동생이 하는 일 아니요! 크으… 내가 바로 형님 동생 박덕구 아니요! 아니 근데 그 일을 내게 숨길 게 뭐가 있소! 퀴즈라도 낸 거요?” “아직 라이오스나 다른 사람들에게 까지 알릴 만한 이야기가 아니야.” “거, 나한테까지 숨길 이유가 뭐가 있소! 거참 섭섭하구만.” “시기가 되면 말하려고 했어. 널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직까지 확실한 게 없어서 그래.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아무튼 간에 들켰으니 어쩔 수 없네. 네 말이 전부 맞다, 덕구야. 푸핫. 네 말대로 우리는 정하얀과 나 여기 있는 소라는 오늘 떨어진 마법의 주동자를 찾고 있었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떤 결론에 도달했거든.” “아니 그래도….” “너무 섭섭해하지 마라. 전부 생각이 있어서였으니까. 일단 다시 한번 안쪽의 상황을 살펴봐야 할 것 같으니까 안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 누군가 오는 사람이 없는지….” “경계라도 서라, 그 말이요?” “그럼. 믿고 맡길 수 있는 게 너 밖에 없다. 덕구야, 할 수 있겠지?” “당연히 할 수 있다마다! 그런 일이라면 맡겨주쇼! 이 동생이 개미새끼 한 마리도 접근 못 하게 든든히 버티고 있을 테니까! 아암 든든히 버틸 거라니까!” “키야! 믿음직스럽다, 우리 덕구!” “거 믿음하면 박덕구 아니요! 형님이 그렇게 말하니 어깨가 무거워 지는구만!”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이니 방패를 치켜 올리는 박덕구의 모습이 보였다. 안기모나 김예리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느낌. 박덕구 몰래카메라의 2탄이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그럴 일이 없다. ‘이 새끼 바보 아닐지도 몰라.’ 어떻게 이렇게 적절한 순간에 등장해 적절한 타이밍에 도움을 주는지 알 수 없다. 이곳으로 올 때도 그랬고 방금도 그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음의 눈으로 박덕구를 살펴봤지만 콧김을 뿜으며 방패를 들고 있는 녀석은 여전하다. 그 와중에 한소라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애초에 일의 주동자 중 하나인 한소라는 저런 얼굴을 할 자격이 없다.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느낌. 아니, 이미 슬금슬금 터져 나오고 있다. 서둘러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소라 씨는 안쪽에서 조사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네?” “빨리요. 급합니다.” “무… 슨 일인데요. 저,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거 맞나요? 혹시….” “생각하시는 거 아니니까 빨리요. 급합니다.” “저, 저… 저, 어떻게 되는 건 아니죠? 마, 많이 화나신 거 아니죠?” “그런 거 아니니까 빨리 들어오세요.” “정말인가요? 정말? 저 희생되는 건….” “그 일 때문에 부른 게 아닙니다. 일단 빨리 안으로 들어오세요. 이건 부탁이 아닙니다. 필요한 일이에요.” “저, 정말….” “거, 빨리 들어가 보쇼, 후배. 다 흉수를 잡기 위해서 필요한 일 아니요! 위험하다고 피하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은… 아무튼 간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천인공노할 쓰레기 놈들은 없어져야 한다니까! 어디 사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형님 손에 걸려들었으니! 반드시 자기 죗값을 치를 거요! 아암! 그렇고말고! 완전 박살이 날 거라니까! 의인 이기영한테 걸려드는 순간 악당이란 악당 놈들은 벌벌 떨 거요!” “그래. 반드시 흉수를 찾아야지. 그렇지! 덕구야, 그럼 부탁한다. 원래 범인은 꼭 현장에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 여기로 다시 찾아올지도 몰라. 어쩌면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다는 걸 알고 있을 수도 있고.” “괜찮으니까 맡겨주쇼. 하얀이 누님과 형님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단단히 버티고 있을 테니.” 박덕구의 문제는 일단락. 서둘러 한소라에게 눈빛을 보내자 정말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동공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초조한 모습의 정하얀을 봤는지 움찔 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나를 확인한 정하얀이 우다다 달려오는 모션을 취하자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하얀과 이쪽의 문제가 해결됐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살았어….” 심지어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 그렇지만 여유 있게 내버려 둘 시간은 없다. “살았어…. 다 해결된 거야.” “전부 다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소라 씨.” “네?” “한 가지 일만 더 합시다.” “무… 무슨.” “소환 가능하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 317 회귀자 사용설명서 317화 빛의 이름으로(2) “가능하죠?” “가, 가능하기는 한데…. 그건… 아직 시도해 본 적도 없고….” “한번 해봅시다. 아무래도 준비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지금 도대체 이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묻고 싶은 표정이다. 당연히 황당할 만도 하다. 애초에 흑마법사인 한소라가 계약을 맺는 건 이쪽에서도 최대한 지양해왔던 일이었고 실제로 소환할 수 있는 악마들의 정보가 굉장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건 해야 되는 일이다. 조금 더 치밀한 설계를 위해서도 이 과정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오늘 떨어진 마법에서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는 게 그 첫 번째 이유. 다른 이유들도 많기는 하지만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없다. 지금은 최대한 시간에 맞춰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괜찮습니다. 마력은 하얀이가 빌려줄 수 있고 모든 준비는 이 장소가 해결해 줄 겁니다. 소라 씨는 그냥 몸뚱이만 빌려주시면 됩니다. 대신 이후에 포상은 확실하게 해드리는 걸로 하겠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타 지역으로 전출을 보내드릴 수도….” 물론 전출 보낼 생각은 없지만 눈이 번쩍 뜨였는지 미끼를 물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하, 할게요!” “정확하게 언제라고 약속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최대한 소라 씨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보겠습니다. 혹시 소환이라는 게….” “정보가 너무 적어서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어요. 일단 정하얀 님의 마력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 괜찮을 것 같지만… 제가 할 수 있을지가 걱정돼서…. 아마 중급 악마나 상급 악마 정도가 소환될 거라고 생각….” “중급 악마와 상급 악마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도시에 떨어졌던 마법 정도는 할 수 있는 개체가 나와야 합니다.” “그 정도를 할 수 있는 개체는… 악마 중에서도 흔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일단은 노력해 볼게요.” 전출이라는 떡밥에 희망을 가지고 열의를 불태우는 것을 보니 정말로 정하얀과는 함께 있기 싫은 모양이다. 그 당사자인 정하얀은 이전의 실수를 만회한다는 듯이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데,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이쪽의 계획이 어떤 건지 대충은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 왔지?” “아직 조금 남았어요. 시간은 충분할 것 같아요, 오빠.” “그럼 곧바로 시작하자. 소라 씨, 혹여나 따로 소환진이나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게 있는 겁니까?”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악마들 마다 소환하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고 들었고 마력만으로도 소환이 가능한 개체가 있으니. 심한 경우에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마력은 일단 충분하니까요.”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면 다행입니다만… 일단은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으니까요. 지금 바로 시작합시다.” “네.” 이쪽의 말이 끝난 이후, 한소라는 헐레벌떡 마법진의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하얀 역시 마찬가지. 아까처럼 노도와 같은 마력의 폭풍은 없었지만 그래도 상당하다고 할 수 있는 마력이 모인 것은 순식간. 마법진을 통해 한소라에게 마력이 쏟아지는 것 역시 시야에 비쳤다. 계속해서 수인을 외우며 중얼거리는 한소라의 모습은 가관이다. 한때 재능 있는 학생이었던 만큼 주문을 외우는 데 흐트러짐이 없다. ‘성공하겠는데.’ 하지만 점점 마법진이 빛을 잃어 가는 것이 보인다. 대충 봐도 좋은 징조는 아니다. 소환이 실패할 가능성을 떠올렸는지 정하얀은 다시금 마력을 밀어 넣었고 한소라 역시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쪽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게 당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약한 마력을 마법진으로 밀어 넣는 순간, 한소라가 서 있는 자리에서 흑색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쿠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동공이 울리고 아까까지만 해도 밝은 빛을 뿌려댔던 마법진들이 모조리 흑색으로 뒤바뀌었다. 검은색 빛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지만 현재 내 눈으로 보이는 것은 검은색 빛이다. ‘뭐야.’ 상상했던 것보다 더 커다란 마력의 파장이 느껴져 당황한 것은 당연지사. 결국에는 빛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을 지경까지 와버렸을 때 눈앞에 뭐라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존재가 자리한 것이 시야에 비쳤다. ‘저게 뭐야.’ [거짓과 선동의 악마 벨리알-신화 등급] [72악마 군주] [???] ‘뭐 저딴 게 튀어나왔어….’ 공중에 뜬 채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외관을 지닌 괴물이다. 한소라는 자신이 이룩한 결과물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안 그래도 좋지 못한 몸으로 소환의식을 진행한 여파인지 휘청거리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재미있구나. 하나도 재미없다. 대충 보기만 해도 압도되는 것 같다. 잘은 모르겠지만 완전히 소환된 상태라고는 하기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쪽이 당황스러울 정도의 존재감을 내뿜고 있다. 목소리에 담긴 저음이 마치 뇌를 뒤흔드는 듯한 느낌이다. 박물관에서 본 고대신의 파편과 커다란 뿔을 가지고 일곱 개의 무기를 든 마족보다 강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녀석 역시 이쪽은 쳐다볼 수 없는 상위의 존재. ‘신화급이야.’ -정말로 재미있어. 어째서 이 몸을 이쪽으로 불러 들여올 수 있었지? 이 마법진의 영향도 아닐 테고 이 나를 소환하는 조건을 충족시키기에는 제물이 부족했을 텐데…. 아쉽지만 이런 방식의 소환은 계약 조건에 위배된다. 이 흑마법사는 그릇이 작아 나를 담을 수 없기도 하고… 조건을 전부 충족시키지도 못했어. 하지만 조금 더 센 놈이 튀어나왔을 뿐이다. 달라지는 건 없다.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쉬기 위해 최대한 공기를 들어 마시자 그제야 뭔가 안정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한소라는 아직까지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는데 아마도 저쪽의 소환한 여파가 꽤 큰 것 같았다. 이곳에서 말을 거는 게 맞는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말을 꺼내는 게 맞다. 이쪽은 시간에 쫒기고 있었으니까. “부, 부름에 답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너로군.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가관. 혹시나 이쪽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 넙죽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무슨 말씀이신지….” -너로구나. 필멸자여. 네 역겨운 마력이 나를 이쪽으로 불러들였다. “네?” -나와 이 정도로 파장이 잘 맞는 인간을 본 적은 정말로 오랜만이로구나. 이 정도로 적성이 맞는 인간이 이 길을 걷지 않다는 게 아쉽군. 흐음… 어쨌든 간에 이왕 이렇게 현세로 나오게 되었으니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 직접 계약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이 나를 소환한 이유가 있을 테니 들어는 주마. 그래. 오랜만에 나와 파장이 맞는 이를 만난 기념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데.’ 마력의 파장이고 성향이고 뭐가 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녀석이 이쪽에게 호의적이라는 사실 하나만은 환영할 일이다. 물론 녀석이 거짓과 선동의 악마라는 탈을 쓰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웃는 얼굴로 이쪽의 통수를 치지는 않을지에 대해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악마는 소환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 적어도 상위의 악마가 아닌 이들은 그렇다. 물론 시스템에 일부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신화 등급의 이들이 어떨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녀석을 의심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지금 와서 녀석을 떠나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의심이 많은 것 또한 마음에 드는구나.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역겨운 인간이야. ‘칭찬이야, 욕이야. 슈바.’ -하지만 의심할 필요는 없다, 필멸자여. 너희들은 귀한 이들이다. 72악마 군주들을 불러올 수 있는 이들이 흔한 것이 아니지. 나를 소환한 그릇 역시 더욱더 성장할 여지가 있고 마력의 축복을 받은 여자도 그렇다. 물론 우리보다 좋은 눈을 가지고 있는 역겨운 인간. 너도 마찬가지다. 간접 계약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을 소환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만 그릇의 상태로 봐서는 다음 소환은 어려울 것 같고… 이 내가 간단히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주마. 너희들이야 알 턱이 없다만 이것 역시 실적이라 할 수 있으니. “실적 말씀이십니까?” -뭐, 네가 알 필요는 없는 이야기다. 계약을 따낼 수 있다는 건 우리들에게도 이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편하겠지. 정말로 아쉽게 됐군. 네가 만약에 나와 직접 계약이 가능했더라면 우리 72군주들 중에서도 아주 오랜만에 직접 계약을 따낼 수 있었을 텐데…. 뭐, 잡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일단은 계약서부터 받는 게 읽어보는 게 좋겠군. 간접 계약이긴 하다만 그래도 계약은 계약이지. “…감사합니다.” -부족하기는 하지만 대가는 나를 소환한 마력으로 하지. 물론 이번 일에서 내가 느낄 즐거움이나 역시 포함된다. 제발 나를 즐겁게 해줄 내용이라면 좋겠는데…. 눈앞에서 흑색의 계약서가 생성되는 것은 순식간. 악마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능력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녀석들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불지옥 속에서 낄낄 대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계약서에는 나름대로 체계가 잡혀 있다. 간접 계약일 텐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 항목에 문제가 될 부분 역시 보이지 않았다. ‘괜찮은데?’ 혹시나 했지만 진심이었다는 걸 깨닫는 것은 순식간. 72악마 군주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악마가 이쪽에 호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계약서에 사인을 해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흑마법사인 한소라. 이쯤 되니 나 역시 흑마법사를 했어도 나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아쉽다.’ 만약 내가 흑마법사를 선택했다면 정말로 녀석과 직접 계약을 노려봤을 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흑마법사를 선택했던 1회 차에는 정말로 계약을 맺었을 수도 있으리라. 아무튼 간에 지금 당장은 그림의 떡. 지금은 꼼꼼히 계약서를 살펴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아직까지 정신없어 보이는 한소라가 내 쪽을 힐끔 보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당연지사. 계약에는 문제가 없다는 걸 표현한 것이다.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한소라 역시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 경우에는 조금 특별한 경우니 세 명을 모두 계약자로 인정하도록 하지. 물론 계약 상대는 그릇으로 제한할 수밖에 없지만 그녀 혼자서는 이 몸을 불러올 수 없었을 테니.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벨리알 님.” -아첨할 필요 없다, 역겨운 인간. 하하하핫. 그보다 빨리 원하는 걸 말하라. 전후 사정은 모르겠지만 원하는 것이 있어 나를 부른 것이 아닌가. 그야 물론이다.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 역시 고개를 끄덕여 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어울려 주실 일은 무척 간단합니다, 벨리알 님.” -말해보라. “몇몇 인간들을 속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 하나면 됩니다.” 눈앞에 있는 악마의 입꼬리가 한 것 올라가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정말로 기분 좋은 부탁이라는 듯이 말이다.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부탁이로구나, 역겨운 인간. 악마숭배자 이토 소우타, 이미 지옥에 가 있는 녀석에게 뜻밖의 동료를 만들어 주게 될 것 같았다. ‘악마 소환사, 진청!’ 대륙에 어둠은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것이 맞다. 빛의 이름으로. # 318 회귀자 사용설명서 318화 빛의 이름으로(3) 함께 온 부관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마 눈앞에 펼쳐진 결계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 역시 마법사. 이것의 가치를 못 알아볼 리 없다. 저런 얼굴을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신기한 겁니까? 루드밀라.” “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 역시 이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이니…. 놀라지 않는 게 이상하겠죠.” “마치… 마치 던전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군사님.” “엄밀히 말하면 던전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 장소에는 시스템 판정이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놨다고 생각하는 게 편할 겁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더욱더 대단한 거 아닙니까? 이 정도의 마력결계를 인간이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인데….” “아무래도….” “네.” “특화되어 있는 마법사라면 가능하겠죠. 이건 마력 문제라기보다는 술식의 문제니…. 보시면 상당히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마법을 잘 알고 있는 이라 할지라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는 없을 겁니다. 이 정도면 관련 직업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등급은 최소 전설 이상을 판정받았을 확률이 큽니다.” “전설 등급이라니….” “아마 교국 8좌나 공화국의 오호대장군, 그에 준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이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구태여 가장 적절한 인물을 꼽자면 교국의 무녀 정도가 있겠군요. 혹은 마도왕국에서 숨기고 있는 마법사거나….” “그렇지만 그녀는 마법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주술사에 가까운….” “물론 이건 그녀의 작품은 아닙니다. 그녀의 주술은 저희가 사용하는 마법과는 메커니즘이 다릅니다. 만약 그녀가 일을 벌인 것이라면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을 겁니다. 당연하지만 교국이라면 그렇게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을 거고요.” “그렇다면 군사님.” “네.” “이 결계를 만든 사람과 오늘 아침에 마법을 떨어뜨린 사람은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겁니까?” 갑작스럽게 들어 온 질문. 물론 그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두 마법은 동일 인물이 시전했다고 보기 어렵다. 가공할 만한 위력을 가진 마법과 자신 역시 파훼하기 어려울 정도의 결계마법의 사용자가 같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은 대륙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이야기다. 예컨대 두 마법은 완전히 속성이 다른 종류의 마법이다. 한 가지만 제대로 파더라도 경지에 오르기가 쉽지 않은 마법을 두 가지 모두 대성한다는 건 천재 위에 있는 천재라고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동일 인물이 아닐 확률이 큽니다.” “역시나… 그렇다면 이건 특정 집단이 저희를 노린 것이라고 보는 게 맞겠군요.” “네. 아마 국가 차원에서 이쪽을 노리고 설계했다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국가 차원….”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교국일 가능성은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딱 집어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의심 가는 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쪽이 알고 있는 이기영이라면 딱히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화국에 몸을 담고 있는 이방인이 중립국에서 습격을 받아 죽었다. 단어로 나열하면 단순한 사건에 불과한 것 같지만 이 사실이 가지고 올 정치적 문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아직 그를 잘 알지는 못하나, 그는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는 걸 선호한다. 그의 지난 행보는 항상 자신의 안전이나 정치적 위치를 신경 쓰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실제로 그날 부딪쳤던 단순한 놀이에서도 그런 성향을 엿볼 수 있었다. ‘이게 교국이 벌인 일이라고?’ 두 세력을 음해하기 위한 정치공작이나 공화국의 자작극이라는 게 더 설득력 있다. 아무리 교국이 안정되지 못했다고 한들, 이런 멍청한 짓을 벌일 정도로 어리석진 않을 것이다. 라이오스와의 동맹이라는 과업을 떠안고 있기는 하지만 그 어떤 인사도 이런 멍청한 수를 내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상황 자체는 이용할 만해.’ 만약 두 세력이 부딪치기를 바라는 제3세력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곧바로 교국에 항의 아닌 항의를 보냈으리라. 이들이 누군지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만큼 대외적으로 움직이는 건 최대한 지양해야 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마력결계를 해체하는 게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루드밀라는 비롯한 함께 온 마법사들 역시 깊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애초에 궁수들이 흔적을 밟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부분 또한 놀라운 부분. 마력 결계가 주기적으로 이 장소 안의 흔적을 자력으로 지우고 있는 것은 물론, 다른 방법으로도 추적할 수 없도록 계속해서 방해하고 있었다. ‘마치 마력이 살아 있는 것처럼.’ 스쳐지나간 생각이지만 어울리는 표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 마력결계를 형성하고 있는 마력이 정말로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있는 느낌.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두 눈으로 보이고 있는 광경이 그러하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추적에 혼선을 겪고 있는 것은 당연지사. ‘정말로 인간이 한 게 맞는 건가?’ 몇백 년이 지난 흔적들까지 읽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른 레인저들은 이 흔적을 밝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른 궁수들은 공화국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엘프들 중에서도 흔하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없으리라. 설사 그들이 온다고 하더라도…. ‘정확하게 흔적을 읽을 수는 없을 거야.’ 희미하게 남아 있는 흑마법의 잔향이 아니었다면 이곳까지 올 수도 못했을 것이다. ‘흑마법이라… 흑마법.’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군사님.” “네.” “어떻게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떠신지 건의를…. 저희야 어떻게 되도 상관없지만 군사님에게 혹여나 문제가 생기시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저들의 생각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건 미룰 수 없는 일이다. “괜찮을 겁니다. 보험도 준비해 놨고 아마 공화국에서 온 조사단이 도착하고 있을 테니…. 저 역시 위험부담을 떠안고 있다는 건 알지만 이 흔적을 쫓는 것만 해도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마법의 발현 직후 대기에 떠다니는 마력이 유지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보통 다섯 시간 정도입니다. 이 경우에는 약 일곱 시간에서 여덟 시간 정도가 걸릴 것 같지만 결코 긴 시간이 아닙니다.” “일곱 시간….” “그만큼 마력의 농도가 짙다는 겁니다. 적어도 대기에 떠다니는 마력의 잔향이 남아 있을 때까지는 계속해서 꼬리를 밟아야 합니다. 만약 오늘 안에 이 흔적을 밟지 못한다면 그 이후에는 모든 게 정리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총통께서 걱정하실 겁니다, 군사님. 만약에 이 정도의 마법을 발현한 이가 군사님을 노리고 있다면….” “제 한 몸은 건사할 수 있습니다. 일단 휴식은 여기서 끝입니다. 방금 보다 더 서둘러 움직이겠습니다.” “네.” “곧바로 마법 준비해 주세요. 제가 리드하겠습니다.” “예.” 탄력을 받은 만큼, 비공식 조사단이 동굴을 해치고 나가는 것은 순식간.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무언가 불길한 마력이 느껴진다. 결계가 풀리면 풀릴수록 안쪽에 차단되어 있던 마력이 흘러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안에 있어.’ 증거, 혹은 이번 일에 힌트가 될 만한 게 안에 있다. ‘함정일 수도 있지만…’ 습격에 대한 보험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그렇게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기가 무섭게 커다란 동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 물론 그 안에 있는 모습은 이쪽의 예상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군, 군사님… 이거.” “저도 보고 있습니다.” “군사님… 이건… 이건 도대체.” “악마….” “악마?” 무척이나 커다란 형상을 한 외관을 지닌 괴물. 그 얼굴을 불의 번개와도 같았고 눈동자는 심연에서 타오르는 불길 같다. 입은 바위의 갈라진 틈 같았으며 커다란 날개는 구겨진 하늘을 꾸역꾸역 집어넣은 듯했다. 겉모습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것 같다. 그 위용을 뭐라고 표현하기조차 힘들다. 수많은 흑색의 마법진들 사이에 자리한 그 모습에 한낱 인간은 너무나도 작고 초라하다. 모두가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몇몇 이는 다리를 후들거린다. 그 위압감에 서 있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나 역시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것이 최선. ‘이게… 이딴 게… 존재한다고? 이 대륙에?’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생각이 들기 시작. 대륙에 돌아다니는 동안 규격 외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존재를 많이 지켜봐 왔지만 이 정도로 두려움을 자극하는 존재는 없었다. ‘이딴 게… 이딴 말도 안 되는 게….’ “도, 도망….” “아닙니다, 루드밀라. 도망칠 필요 없습니다.” “네?” “봉인되어 있습니다.” “아….” “누군가 악마를 봉인한 것 같습니다. 원래부터 이 장소에 자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 악마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누가 저 정도의 존재를 이곳에 봉인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흑마법사인가요?” “네. 그것도 꽤나 고위의 흑마법사… 라고 추정됩니다. 흑마법에 대해서 잠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 정도의 고위 악마를 부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아마….” 도시를 파괴한 것은 아마 저것의 힘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눈앞에 있다.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 쓰인 마법진도 비교적 최근의 것. 이 악마를 봉인하기 위한 구속 마법 역시 눈에 띈다. 모든 것을 압축시켜 버리는 그 마법에 어째서 흑마법의 잔향이 묻어나 있었는지, 대기에 떠다니는 마력의 농도가 지나치게 높은 이유 역시 모조리 설명할 수 있다. ‘노리는 게 뭘까.’ 확률은 낮지만 그 마법이 공화국만을 노리지 않았을 경우도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추측이지만 교국이나 공화국, 혹은 중립국의 앙심을 품고 있는 흑마법사들이 벌인 일일 가능성도 있다.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는 흑마법사 클랜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번 일로 생각해 봐야 하는 경우의 수가 늘어났다. 이유야 어찌됐건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일을 알려야 한다는 것. “일단은 곧바로 공화국에 보고를… 라이오스에는 그 다음입니다. 곧바로 이 근처를 전부 통제해 주시고 파견 온 이들도 여기로 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세요. 최우선 사항입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여러분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겁니다. 아무것도요.” “무, 물론입니다. 군사님.” “그럼… 지금 당장….” 이라 말을 꺼냈을 때였다. 동공의 한쪽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낸 것. ‘저건 뭐야….’ 워낙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최대한 눈의 마력을 집어넣자 어디에선가 본 적 있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기… 영?’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의외의 공간에서 의외의 인물과 마주친 셈이었으니까. 신성교국의 명예 추기경이 봉인된 악마와 함께 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들려온 목소리. “당신이었군요. 이곳에 악마를 소환한 소환사가… 정말로… 당신이었습니까?” “네?” “당신이냐고 물었습니다, 진청.” “무슨….” ‘헛소리지.’ # 319 회귀자 사용설명서 319화 빛의 이름으로(4) 물론 녀석에게 개인적인 앙심은 없다. 다만 이쪽의 꼬리를 밟은 게 우연히 녀석이었을 뿐이다. 잠재적인 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또한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사실 뭐가 됐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누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지가 아니다. 이쪽이 궁지에 몰린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뿐. 지금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최우선적인 행동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마침 적절한 타이밍에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나타난 셈이다. 오히려 녀석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만약 녀석이 계속해서 활동한다면 이쪽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다. 단기간 내에 이만큼이나 쫒아왔다. 만약 시간을 더 준다면 이 모든 일이 우리가 한 것이라는 알아차릴 것이다. ‘이놈이어야 해.’ 차라리 여기 와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점점 머릿속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단은 입을 열었다. 천천히 워밍업부터 해야 되는 것은 당연.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몰아세우는 그림보다는 이런 그림이 더욱더 보기 좋다. “정말로 당신이었습니까?” “무, 무슨 소리를….”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 감돈다. 이쪽이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에 대해 파악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사항은 이쪽이 오해 아닌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 뭐부터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입을 열어오는 게 눈에 보였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역시 흔적을 찾고 왔을 뿐입니다. 아니, 애초에 당신들은 어째서 이곳에…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묻고 싶군요.” “그게 정말입니까?” “저희 역시 이곳에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당신들을 믿지 못하는 건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영 님. 어째서 우리가 이쪽에 있는지 묻기 전에 어째서 당신들이 이곳에 있는지부터 증명해야 할 겁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겁니까?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다른 방법을 동원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무력을 동원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저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청 님.” ‘확실해.’ 아직까지는 이쪽으로 화살을 돌린 것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연기야 자신이 있었지만 정말로 일이 생각대로 풀리자 내 자신이 자랑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물론 속으로야 교국을 의심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는 아니다. 녀석의 말대로 이쪽이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지 설명이 되지 않으니 어느 정도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당연한 일.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슬그머니 튀어나온 박덕구가 대놓고 녀석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정하얀 역시 마찬가지였다. 벌써부터 주문을 외우려고 하는 모습에는 누가 봐도 긴장감이 감돈다. 사실 나 보다는 박덕구의 연기가 더욱더 일품. 애초에 연기가 아니니 더욱더 실감이 난다. 처음 동공으로 녀석을 들어왔을 때 경악하다 못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어떻게는 실수를 만회해야 한다는 정하얀의 비장함과 정말로 이 상황을 걱정하는 박덕구의 콜라보가 훌륭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완벽해.’ 만약 안기모와 김예리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더욱더 훌륭하게 미션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덕구야.” “형님.” “일단은 경계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으니까.” “그, 그렇지만… 일단은 경계를 푸는 건 아닌 것 같소. 혹시 저 사람이 이 커다란 괴물을 소환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으니까.” “아니야. 함정일 가능성은 있지만 대놓고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그럴 만한 사람은 아니야. 어쩌면 서로 오해가 있을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일단은 경계 풀어. 이건 부탁이 아니다, 덕구야.” “거, 형님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 대신 딱 달라 붙어 있을 거요. 솔직히 이 장소에 형님을 오래두고 싶지 않다니까. 만약 저런 게 깨어나기라도 하면….” “그, 그래요, 오빠! 악마도 그렇고… 저, 저, 저 나쁜 사람이 혹시….” 그 와중에 터져 나온 정하얀의 연기는 가관. 대놓고 그녀를 쳐다보자 입을 꾹 닫는다. ‘넌 말하지 마’라는 내 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얼핏얼핏 녀석을 향해 살의를 내비치는 것이 보인다. 어떻게 생각해도 정하얀을 전면으로 내세우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무튼 간에 이쪽의 발언으로 조금은 긴장이 완화되는 듯한 느낌. 내가 한 발 더 내딛자 그제야 진청 진영도 어느 정도 경계를 누그러트린 것 같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안전에 민감해하고 있는 것 같다. 마법사들은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었고 진청 역시 조용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저게 보통이지….’ 내가 녀석이었어도 혹시나 이쪽이 자신들을 습격할 가능성은 있는지 고려할 것이다. 만약 이게 실제상황이고 우리가 저 악마를 소환해 놓은 것이라면 증거인멸을 위해 자신들을 습격하지 않을지 걱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쪽이 원하는 건 녀석들의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 사실 박덕구가 아니었다면 이런 대화도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악마를 두려워하고 있는 킹덕구의 모습은 정말로 우리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 “제길…. 거, 대화 나눌 거면 빨리 나누쇼. 아니, 그보다도 일단 이 자리부터 어떻게 해야 되는 거 아니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물론 박덕구를 향해서는 아니었다. “일단 경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청 님. 저희는 대기 중에 떠다니는 마력의 흔적과 오늘 떨어진 마법에 남아 있는 흑마법의 잔향을 추적해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교국 차원에서 움직인 건 아닙니다.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인 만큼 교국에서 파견된 조사단이 먼저 움직이기 전에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대기 중에 떠다니는 마력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일을 해결해야 했으니까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화국 쪽에는 아직 알리지 않았지만… 마력 결계는 어떻게?” “그건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곳까지 다다를 수 있었습니까? 마력 결계의 파훼는….” “저희 역시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하나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리죠. 이 일은 저희가 벌인 게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증명할 수 없으나 이후 본격적으로 조사를 한다면 흔적들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본격적인 조사단이 오면 안 되지.’ “라이오스에는….” “아직 올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일단 공화국 쪽에서 일을 처리하려고 했습니다만….” “일이 달라졌겠군요.” “네. 당신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요. 그보다… 이곳에는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떠보겠다 이거지?’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들어오기 불과 몇 시간 전이었고 봉인된 악마와 마법진을 발견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이쪽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걸 감지했고 저는 그를 이 사단을 낸 장본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흔적과 어마어마한 힘을 품고 있는 존재를 소환된 채 사라질 이유가 없으니까요. 다시 한번 찾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 “오늘 있었던 마법으로 끝내지 못한 어떤 목적을 끝내려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전혀 다른 목적이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말해 공화국의 자작극일 확률에 대해서도 떠올려 본 것은 아니지만….” “죽은 것은 공화국의 이방인들입니다, 명예추기경. 말조심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말실수가 있었군요.” “단언컨대 공화국은 이번 일과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교국과 공화국의 싸움을 부추기는 제3세력이 존재한다는 가정이 더 설득력 있을 겁니다. 만약 정말로 당신이 주장하는 대로 이번 일과 교국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말입니다.” “제3세력.”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입니다. 하지만 마력 결계와 오늘 떨어진 마법 그리고 눈앞에 있는 악마의 상관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건 한 집단의 소행일 가능성이 큽니다. 단순한 추측일 뿐이지만… 흑마법사 클랜의 작품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군요. 흑마법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게 없지만 그래도 저희가 눈으로 보고 있는 대상이 보통 존재가 아니니….”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던 바로 그 때였다. 갑작스레 동공에 묵직한 기운이 내려앉은 것. 위험을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박덕구다. 정말로 깜짝 놀란 얼굴로 우리를 챙긴다. 아마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리라. 진청 일행 역시 크게 뜬 눈으로 일단 녀석을 바라보는 중. 혹시나 무언가 움직임이 있을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커다란 악마의 감긴 눈이 천천히 떠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봉인된 게… 아니었….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땅 밑에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외관을 지닌 괴물들이 튀어나온다. “제기랄….” 진청 역시 크게 당황한 표정이다. 박덕구는 정말로 놀랐는지 최대한 방패를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혹시나 박연주 때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불안해하는 듯 보였다. 정하얀은 다소 과장된 연기로 입술을 꽉 깨물었고 이쪽 역시 호응하며 진영을 만들기 시작. “함정? 진청 님, 일단은 이곳을 함께.” “네. 그렇게 하는 게….” “어….” “어?” 둘 모두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취한 것은 당연지사. 나는 연기였지만 녀석에게는 실제 상황이었다. 저렇게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눈으로 보고 있다면 저런 감정을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확히 교국의 진영 쪽을 위협하고 있는 이형의 괴물들. 그에 비해 진청과 그의 똘마니들은 오히려 괴물들에게 보호받고 있는 듯한 모양새다. “저… 정말로 당신이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 “이… 쓰레기 같은 놈! 네놈이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런 짓을!” 잔뜩 흥분한 듯한 박덕구의 목소리는 덤. “이게 무슨….” “처음부터 이쪽을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었던 겁니까?” “그게 아닙니다. 뭔가 오해가.” “정말로 라이오스에 마법을 떨어뜨린 것도… 당신이 한 짓이라는 겁니까?” “오해입니다. 지금 상황은 저희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렇지만 몬스터들이 공격하는 것은 우리뿐이다. 모든 게 다 연기였지만 제법 박진감 넘치는 표정으로 방패를 휘두르는 박덕구 덕분에 실감이 난다. 녀석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이번 사건 해결에 숨은 일등공신은 녀석이라 할 수 있으리라. “제길. 전투 준비! 전투를 준비해!” 그와 동시에 눈앞에 있는 악마 군주 역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의 계약자, 진청이여. 너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다. 어서 이 봉인을 풀어라! 그렇다면 더 큰 힘을 손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거짓과 선동의 군주다운 타이밍 이었다. 그 이후에 튀어나온 것은 녀석의 욕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인 만큼 이쪽이 뭘 원한 건지 깨달은 것이다. “이 쓰레기 같은 놈이!!!!!”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게 즉흥이기는 했지만 마치 자로 잰 것만 같은 설계였다. -힘을 원하는가! 진청! 네가 원하는 건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 320 회귀자 사용설명서 320화 빛의 이름으로(5) 사방에서 악마들이 달려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박덕구는 최대한 마법사들을 밀집시킨 채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어떻게든 우리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깃들어 있었다. 괜스레 고마운과 미안함이 교차되었지만 지금 이쪽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니다. -어서 내 봉인을 풀어라, 계약자 진청이여! 더 큰 힘을 손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미친 자식들이! 개자식들! 개자식들이!!” -너에게 무한한 힘을 내려주마! 계약자여! “이기영! 이 개자식!” ‘키야… 저 양반 물건이네. 물건이야.’ 어째서 자신과 이렇게 파장이 잘 맞는 인간이라고 말한 건지 알 것 같다. 마치 처음부터 한 극단이었던 것처럼 내가 원하는 대사를 날려 주는 솜씨가 엄청나다. 무엇보다 자신이 가장 즐기는 느낌이라 만족스럽다. 짓과 선동의 악마 군주라는 타이틀처럼 저런 식으로 행동했을 때 상대방이 괴로워하는 모습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물론 나 역시 녀석과 같은 생각이다. 잔뜩 일그러진 녀석의 얼굴을 보니 정하얀 때문에 얻은 스트레스가 쫙 풀리는 느낌이다. 역시나 가끔은 이런 이벤트를 벌여줘야 삶이 활기를 되찾는다. -이 도시! 아니 이 대륙을 완전히 부술 수 있는 힘을 내려주마! 계약자여! “이, 이 저급한 쓰레기가!” -어서 봉인을 풀어라! 진청! 어서! 그림 자체가 너무 완벽하게 마땅히 꼬집을 만한 것이 없다. 봉인된 72악마 군주가 진청을 향해 계약자라 외치는 상황. 녀석은 이쪽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고 박덕구와 우리는 악마들에게 둘러싸인 채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정말로 연기가 맞는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으니 그림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이쪽 역시 사방팔방에 용숨결 물약을 뿌렸고 정하얀은 재빠르게 캐스팅을 하며 악마들을 공격한다. 허물어지는 녀석도 있지만 빈자리에 금방 다른 악마들이 생겨났다. 만약 연기가 아니었다면 오줌을 지려 버렸을 것이다.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한소라 같은 경우에는 무척이나 힘들어 했는데, 그 모습이 더욱더 생동감을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지지 마라, 덕구야. 하얀아. 이대로 저런 악마가 세상에 풀려난다면 라이오스가 무사하지 못할 거다. 버티는 게 아니라 뚫어내야 해. 저 악마의 봉인이 풀려나게 하지 마! 소라 씨는 괜찮습니까?” “흑마법에 침식된 것 같아요, 오빠. 소라 씨가….” 미리 맞춰놓은 대사를 읊기 시작. 기왕이면 조사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지만 혹시나 한소라까지 안 좋은 일이 미칠 가능성을 고려한 변명 아닌 변명이었다. “소라 씨, 조금만 더 버텨 주세요. 흑마법에 저항해야 합니다.” “형님! 일단은 몸을!” “지금 몸이 중요한 게 아니야. 내 말 들어라, 덕구야. 오늘 내가 여기서 죽어도 저 악마는 봉인해야 한다.” “혀, 형니임!” 괜스레 울컥하는 덕구 녀석의 얼굴은 가관. 사실 이 대사를 말하는 것도 쪽팔린다. 그래도…. ‘이건 교황청에 보낼 영상이니까.’ 교황청 편집본도 따로 준비하는 게 맞다. 조금 오그라들기는 하지만 이런 종류의 영상은 나이가 지긋하신 권력자들에게서 기립박수를 받을 만하다. 아마 바젤 교황님께서도 무척 좋아하시리라. 목에 걸린 로자리오를 꽉 쥔 것은 당연지사. 눈을 감고 베니고어 여신님에게 기도를 드리는 장면도 하얀 카메라에 담는다. “베니고어 여신이시여, 당신의 종이 오늘 목숨을 잃어도 절대로….” “내가 오늘 죽어도! 형님만은 절대로 죽게 만들지 않을 거요!” 그 와중에 내 기도를 듣고 있던 박덕구는 각성 아닌 각성을 하기 시작. 저번보다도 더 성장한 녀석이 본격적으로 방패를 휘두르니 하급 악마들은 우후죽순 쓰러진다. “이 더러운 악마의 하수인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렇게 금수 같은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요! 자신의 동료까지 팔아먹으며 이득을 취하려고 하다니!” 쓸데없는 정의감으로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녀석에게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하얀 역시 주문을 준비하고 있기는 하다. 불타는 눈으로 진청을 노려보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녀석이 꼴 보기 싫었던 모양. 방금 전까지는 방해가 됐던 눈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리니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세상을 파멸시키려는 악마소환사에게 분노를 보내는 정의로운 마도사의 진실된 눈. 정하얀이 가지고 있는 살의는 이정도로 포장할 수 있다. “지지 마. 봉인을 푸는 것은 막아야 한다.” “이런 저급한 장난질에….” ‘걸려들지. 왜 안 걸려들겠어.’ 녀석도 알고 있다. 이쪽이 마력홀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걸 녀석이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나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말 다 한 거지, 뭐.’ 아마 지금쯤이면 깨달았을 수도 있으리라. 이쪽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고 어째서 말도 안 되는 성과들을 올릴 수 있었는지. 그 날 내가 내걸었던 한 수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실제 능력으로 이룬 건 그다지 많지 않다. 대부분이 블러핑이고 헛소문이며 선동과 날조다.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을 보니 확실히 모든 걸 눈치챈 모양이다. 정정당당한 머리싸움을 기대하고 있었다면 조금 미안해진 셈이다. 애초에 저쪽과 이쪽은 영역이 다르다. ‘발버둥 쳐도 소용없을 거다.’ 이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정보다. 흑마법의 잔향이 느껴진다거나 마력이 인도했다. 라는 말처럼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것보다 더욱더 신빙성 있는 정보다. 선동은 한 문장으로 할 수 있지만 그걸 해명하려면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증거가 필요하다. 단순히 한 문장으로 이러할진대 이런 영상의 파급력을 우습게 본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 아마 이 물건이 풀린다면 녀석은 이걸 해명하기 위해 평생의 시간을 쏟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아쉬웠던 것은 라이오스 위에 지금 당장 마력 홀로그램을 띄워놓을 수 없었다는 것. 만약에 조금 더 치밀하게 이 계획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편집본 없이 영상을 내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게 당신들의 자작극이라는 걸 모를 거라 생각합니까! 이런 되도 않는 자작극에 사람들이 속을….” 이제야 조금 정신을 차렸는지 열심히 자기변명을 외치고는 있지만 이미 온도차가 있다. 심지어는 녀석의 옆에 있는 마법사들마저 녀석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아무도 속지 않을 겁니다. 이런 자작극에는 그 누구도 속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명한다고 해도 겨우 저 정도의 대사. 어차피 편집본에는 저 대사가 악마의 목소리로 바뀌어 버릴 것이다. “커헉!” “혀, 형님!” “괜찮다, 덕구야. 그보다는 빨리!” “이 나쁜 놈들이 감히 형님을!” 게다가 녀석이 아무리 외치고 있다고 한들, 이미 이곳과 저곳은 그 처절함이 다르다. 여기에 영상 편집까지 적절히 치고 들어올 테니 이 일이 대중에게 이게 어떻게 보일지는 뻔할 뻔자. 게다가 적재적소에 치고 들어오는 벨리알도 한 건 해주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에 와서 망설이는 것인가. 계약자여! 어서 내 손을 잡고 봉인을 풀어라! “닥, 닥쳐라 악마. 그 더러운 입으로 나를!” -계약자여!! 어떻게든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깨달을 것이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이쪽을 죽이는 것. 증거 인멸이다. 놈이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망설이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그렇지….’ 지금 여기서 자신 역시 공격에 가담하는 순간, 이미 꼬인 상황이 더 꼬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이리저리 오도 가도 못하는 꼴은 가관. 이 그림이야말로 진짜 장군이며 체크메이트. 이쪽에게 100수를 준다고 했던 얼굴이 괜스레 오버랩된다. ‘나는 100초 준다, 이 새끼야. 고맙다. 진짜 너무 고맙다!’ 적재적소에 녀석이 치고 들어와 정말로 다행. 오히려 이곳을 찾아줘서 정말로 고마워진다. 녀석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쯤 머리 꽤나 굴리고 있었으리라. ‘어떻게 할래?’ 이쪽을 죽일래 아니면 멍청하게 당하고 있을래. 그것도 아니면 도망칠래? 물론 그 어느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와 벨리알을 계약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자신들의 생사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벨리알과 그런 종류의 계약을 맺은 건 아니지만 계약 내용을 알지 못하는 저들이야 조심스러워지는 게 당연하다. -계약자여! 어서! “제길….”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이쪽의 머릿속으로 악마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요, 존경스럽고 위대하신 벨리알 님.’ [아부할 필요 없다고 하였다, 역겨운 인간.] ‘아부가 아닙니다. 어찌 아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요. 그보다 이렇게 따로 말을 걸어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 별건 아니다. 다만 계약 내용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니.] 순간적이지만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왠지 이럴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뒤통수를 때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안심해도 좋다, 필멸자여. 그대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니니.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대는 중요하다. 72군주는 현세로 불러올 수 있는 이들이 그렇게 흔한 게 아니야.] ‘그렇다면 원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계약 내용은 분명 몇몇 사람을 속여 달라는 것이었지.] ‘그렇사옵니다만….’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대가 속이는 것은 전 대륙에 있는 인간들이 아닌가.] 눈치 빠른 새끼. [명색이 거짓과 선동의 군주인 내게 장난질을 치려고 하다니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역겨운 인간인지 모르겠군. 장담컨대 그대는 내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아도 충분히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가,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나 역시 계약서에 장난을 조금 해놓았다. 사실 벌을 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해서 말이야. 대가를 조금 더 받아가는 걸로 만족할 생각이다. 해서 네가 읽은 계약서 말이다만….] ‘네.’ [혹시 그 계약서와 저 흑마법사가 읽은 계약서가 동일한 계약서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어?’ 계약서는 한 장이었다. 나와 한소라는 틀림없이 같은 계약서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 보고 있는 내용이 달랐을 거라는 걸 깨닫는 건 순식간. ‘이런 멍청한 실수를…. 미친!’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한소라는 그대로 사인해 버렸다. 당연히 동일한 글씨를 읽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다. 거짓과 선동의 악마라는 걸 조금 더 염두에 두었어야 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역겨운 인간. 내가 말하지 않았나. 그저 대가를 받아갈 뿐이라고 저 흑마법사가 아무 의심 없이 사인한 이유 역시 네가 긍정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말하자면 그대가 벌일 법한 일이었기 때문에 서명했을 거라는 말이다.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면 네가 부리고 있는 흑마법사가 먼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하오면… 그 내용은.’ [말하지 않았나. 대가를 받아간다고. 단지 그것뿐이다.] 정말로 눈 깜빡할 사이.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 몸집을 키운 악마가 대도시 라이오스를 향해 몇 개의 커다란 구를 떨어뜨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순식간에 카스가노 유노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도시가 폐허가 될 거라는 그 황당한 예언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여기에 있는 이들 모두 커다랗게 입을 벌리는 중. 녀석을 유지하고 있던 마력이 충분하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도시 전체에 있는 인간들이 모조리 몰살당하는 그림은 나오지 않을 것 같지만 누가 봐도 큰 피해가 생길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한소라 슈발!’ 말하자면 한소라는 내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에 찬성했다는 사실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는 게 된다. ‘사람 보는 눈이 너무 기가 막히잖아….’ 이쪽이 의심받는 상황만 아니라면 이 정도는 용인해 줄 수 있다. 하지만 기왕이면 쑥대밭이 되는 것보다 온전한 상태로 들어오는 게 더 좋다.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해지는 순간에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구체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이걸로 진청을 더 옭아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솔직히 몇 초 동안은 고민했지만….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생.] [위기에 빠진 라이오스를 구해주세요. 최대한 빨리. 이 나쁜 놈(0/1)] “정하얀!!!!” 역시나 빛은 승리하는 법이다. # 321 회귀자 사용설명서 321화 빛의 이름으로(6) 쿠르르르릉.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늘이 갈라진다. “신이시여.”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 역시 다르지 않다. 수많은 신하들이 모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야에 비치는 것은 거대한 악마.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외관을 가지고 있는 이형의 괴물이었다. 도시를 집어삼킬 수도 있을 것 같았던 악마가 입을 열자, 하늘이 갈라지며 이해할 수 없는 크기의 검붉은색 구체가 떨어졌다. -계약자, 진청이여. 네가 원하는 바는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것이 현실이라 믿기 싫었다. 아무런 전조 없이 갑작스럽게 닥쳐온 도시의 위기에 프리스티나는 할 말을 잃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고맙다! 고맙구나! 계약자여!! ‘진청?’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째서 공화국 군사의 이름이 저 악마의 입에서 언급되었는지 보다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현실적인 장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전부 죽을 거야.’ 저런 게 떨어진다면 수많은 국민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도시를 공격했던 것과 같은 검붉은 구체의 마력. 서둘러 재정비했던 도시의 보호마법은 우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진다. ‘어머니… 아버지.’ 무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중립국 라이오스. ‘지켜야 한다.’ 네, 아버지. ‘백성 위에 네가 있는 것이 아니란다, 프리스티나. 그들이 있어야 비로소 네가 존재할 수 있는 거란다.’ 네, 어머니. ‘왕가는 국가를 위해 지키지 존재하는 것이다, 프리스티나. 우리 왕가가 가치로 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 네, 아버지. ‘잊지 말거라. 그들이 있어야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걸 잊지 말거라, 프리스티나.’ 네, 어머니. “안 돼.” 전부 다 죽을 거야. “안 돼…. 안 돼!!” 사랑하는 백성들이 전부 죽을 것이다. 호흡이 거칠어진다. 사방팔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들이 다시 한번 마법을 전개하지만 하나둘 울컥, 피를 토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아아. 신이시여. 제발… 제발 구해주세요. 제발.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라이오스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제발 구해주세요. 제발.” “프리스티나 님, 피하셔야 합니다! 빨리!” “신이시여.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프리스티나 님!” “제발!!” 콰지지지지지지직.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구는 점점 더 도시에 가까워지기 시작. ‘끝났어.’ 모든 게 끝났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아아아아아….” 콰과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구를 막아선 마법이 시야에 비친 것. “어….” 그것은 찬란한 빛이었다. 너무나도 눈이 부셔 제대로 눈도 뜰 수 없을 정도로 찬란했다. “아아아… 신이시여.” 만약 오늘 라이오스가 살아남는다면, 장담컨대 앞으로 라이오스를 살아가게 되는 모든 이들에게 당시 라이오스를 구한 것은 찬란한 빛이었다 말하리라. * * * ‘마력 색깔 좀 바꿔야겠는데… 그림이 별로 안 좋아.’ 악마와 같은 검붉은 마력으로 저걸 막는 그림이 그다지 좋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정하얀을 탓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쉽다면 아쉽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일단은 저걸 막을 수 있는지가 가장 큰 문제였지만 기왕이면 조금 커다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그림이라면 더욱더 만족스러웠으리라.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손을 잡아주세요. 뿌득(0/1)] “뭐?” [마력의 축복을 받은 인간의 손을 잡으라고. 정하얀 손 잡으라고, 이 쓰레기야. 두 번 말 안 한다. 빨리 손 잡아(0/1)] 조금 재미있는 상황. 마음의 눈으로 비춰지는 총평이나 시스템상으로 보이는 퀘스트 창에 주관적인 의견이 들어가 있다고 추측한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도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비칠지는 알 수 없긴 하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게 맞아.’ 아마 김현성을 회귀시킨 놈과 동일인물일 확률도 있으리라. 이쪽이 김현성에게 충성을 맹세하자고 했던 그 즈음에 마음의 눈의 봉인이 풀린 적도 있었던 것은 물론, 시스템이 박덕구가 뒤처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 또한 이걸로 설명이 된다. 확실히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와 그 품에 안겨 있는 이쪽은 초월적인 존재의 인도를 받고 있는 것이 맞다. ‘럭키! 럭키! 욜로 타임!’ 조금 의문스러웠던 것은 하나. ‘이렇게 직접적으로 개입해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해답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런 게 매일매일 가능했다면 상황이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인즉, 초월적인 존재 역시 이쪽에 이런 퀘스트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무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일이야 어찌됐든 간만에 떨어진 꿀맛 같은 전설 등급의 퀘스트. 보상으로 꽤나 짭짤한 것을 받으리라는 건 당연지사. 마법을 시전하는 정하얀의 손을 꽉 잡을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듯한 정하얀의 얼굴이 보인다. 함박웃음을 보이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행복한 모양이다. 그야 프로포즈를 막 받은 상황에서 일어난 스킨십이니 기분이 좋을 만도 하다. 정말로 거짓 없는 순수한 미소에는 바보같이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물론 이후에 들려온 시스템의 목소리가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전설 등급의 퀘스트를 완료합니다.] [마력의 축복을 받은 인간의 손을 잡아주세요.(1/1)] [퀘스트 보상으로 새로운 직업이 개방되었습니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직업을 선택해 주세요.] [직업] [빛의 연금술사-준 신화 등급] [신에게 선택받은 이들만 전직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빛의 연금술사입니다. 마력이 신성력을 함께 가지게 됩니다. 마력이 +5 올라갑니다. 다른 설명은 필요 없고 넌 진짜 개새끼야. 이 역겨운 놈. 진짜 너 진짜 구제 불능의 쓰레기다. 진짜.] ‘주… 준! 신화 등급! 요, 욜로!’ 순간적이지만 눈이 번쩍 뜨인 것은 당연지사. 사실 뒤에 적혀 있는 욕은 보이지도 않는다. 겨우 마력이 5가 올라갔다는 건 확실히 섭섭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뭐가 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우선 일단 눈에 띄는 것은 마력색이 변한 점이다. 찬란한 금빛. 누가 봐도 찬란하게 보이는 빛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힘내라! 우리 존재! 정하얀!’ 이쪽이 손을 잡자 정하얀 역시 점점 빛으로 물들기 시작. 내 영향인지, 아니면 단순히 손을 잡았기 때문에 정하얀의 마력이 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더 찬란한 빛이 도시를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빛을 뿜고 있는 나 역시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을 지경. 사실 속으로는 계속해서 벨리알에게 말을 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볼 필요는 없었다. 퀘스트도 퀘스트지만 악마와의 계약도 중요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막아도 되는 것이지요? 그… 그건 계약 조건에 없었으니….’ [상관없다. 다만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쪽으로 올 수 있음을 기억해라, 역겨운 인간. 빛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겨움이 바라지 않으니 점점 더 탐이 나는구나. 어떻게 한낱 인간이 이토록 순수하게 더러울 수 있는 것인지…. 그녀가 이토록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너를 보내주지 않으려는지 알 것 같군.] ‘그녀라고 하심은….’ [지금 네게 말을 걸고 있는 또 다른 존재 말이다, 인간. 아무튼 항상 기억하라, 역겨운 인간아. 네가 간절히 원한다면… 언제든지 우리는….] [강제 영웅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악마 군주랑 말 섞지 마, 이 쓰레기야.(0/1)] [이 정도는 괜찮지 않….] [말 섞지 말라고 했다.(0/1)] [큼. 뭐 이 정도에서 적당히 물러가는 것 역시 괜찮겠지. 아무튼 마무리는 해주는 것이 좋겠지. 재미있게 발버둥 쳐라, 역겨운 인간. 대화는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 당장은 이쪽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인 이 와중에도 계속해서 정하얀은 기를 쓰고 눈앞에 있는 것을 막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 입술을 꽉 깨물고 연신 이이익거리는 모습은 조금 처절하기까지 하다. ‘이거 막을 수 있겠지….’ 미약한 마력도 보태야 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쪽의 마력은 그녀를 빛나게 하는 것이 전부다. 아니, 사실 도움이 되고는 있는 것 같았다. 찬란한 황금색 빛은 착실하게 벨리알의 기운을 몰아내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이이이이익! 이이이이이익!” 방금 전까지 도시를 파괴하려고 했던 정하얀이 어떻게든 이걸 막으려고 한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인생이란 게 원래 이런 법이다. ‘이건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벨리알이 마력을 거두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의 마력을 정하얀의 몸에 한 바퀴 돌리자 뭔가 조금 더 그녀가 활력을 얻은 듯했다. 미약하지만 정말로 신성력 역시 품고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지사. 이 ‘준 신화 등급’의 직업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하얀을 코에서 왈칵 코피를 쏟아내는 중. 이쪽 역시 슬슬 힘에 부친다. 당연하지만 이건 혼자보고 느끼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장면이다. 슬쩍 한소라를 보자 그 힘든 와중에도 정신이 번쩍 든 모양. 입모양으로 내보내라는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리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이런 장면에 편집 따위는 필요 없다. 미리 준비하지 못해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몇몇 지역에 영상 홀로그램이 떠오르기 시작. 린델과 교국 전역에서는 이 장면이 커다랗게 방송되고 있을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라이오스에도 크게 설치했어야 했는데….’ 아마 마력 홀로그램이 나가기 시작한다면 붉은용병이나 요조라의 길드원들이 인구 밀집 지역에 거울을 설치하기 시작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주, 준비됐어요.” “오케이. 사인 보내.” “네. 네. 부길드 마스터.” 박덕구가 정신없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었을 때 전역에 퍼지기 시작한 방송. “으아아아아아!” 빛으로 물든 나와 정하얀을 보고 있을 사람들을 떠올리니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빛은 지지 않을 것이다, 악마야!” -크크크큭! 와볼 테면 와라! 하찮은 인간! 계약자여, 어서 나머지 봉인을 풀어라! 이 하찮은 필멸자에게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진청! 어서 이 봉인을 풀지 않고!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 세계를 네 손아귀에 안겨주마!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 녀석 역시 맛장구를 쳐준다. 뭘 해보지도 못한 채 파랗게 질린 진청의 얼굴은 가관. 장담컨대 제갈공명이 한 트럭을 타고와도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빛이 악마를 태울 것입니다! 여러분! 힘을 보내주십시오. 우리가 이 간악한 악마를 막아낼 수 있게 힘을 보내주십시오!” -겨우 인간 따위가! 감히이이이!!! [말 섞지 말라고 했잖아.(0/1)] 불만을 품고 있는 이가 있는 것 같지만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티키타카였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322 회귀자 사용설명서 322화 라이오스의 영웅(1) 도시에 검붉은 구체가 떨어지는 순간 마리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뭔가 커다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인지할 수 있었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으니까. “모두 지하로 들어가세요! 반복합니다. 모두 지하 대피소로 들어가세요! 실제 상황입니다. 훈련이 아닌 실제 상황입니다. 가까운 보호 마법이 펼쳐진 지정 건물로 들어가세요. 반복합니다. 지하대피소 혹은 보호 마법이 펼쳐진 지정 건물로 들어가 대기하세요!” “꺄아아아아악!” “신이시여. 신이시여.” “뭐 하고 있는 거야, 마리나. 피하라는 말 안 들려? 지금 빨리.” 순간적으로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꿈처럼 느껴졌던 주변 풍경이 여전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레아.’ 내 딸. 집에 혼자 남겨져 있을 딸이 떠오른 것이다. ‘제발… 신이시여. 제발.’ 뒤에서 계속해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허겁지겁 뛰기 시작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지만 반도 이르지 못한 느낌. 반대쪽으로 도망치는 사람들 덕분에 나아가기 요원했다. 모두 대피소 혹은 아직까지 보호 마법이 유지되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마리나!” “놔! 놔요! 이거 놔!” “일단은 대피소로 가자. 레아도 이미 몸을 피했을 거야. 빨리….” “이거 놓으라고 했잖아요. 제발. 이거 놔요. 제발… 확인이라도 해야 돼요. 안전하게 피했는지 확인이라도 해야 한다고요!” “제길. …여기서 기다려.” “제임스?” “최대한 빨리 다녀올게. 여기서 기다려. 아니, 안전한 곳에서 기다려.” “아….” 황급히 반대쪽으로 뛰어가는 제임스의 모습이 보였다. 당연히 함께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문제. 공포 때문인지 아무리 힘을 줘도 풀려 버린 다리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다. “제발 무사하기를…. 사랑하는 레아와 제임스 둘 모두 무사하기를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기다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마치 수 시간을 기다린 것만 같다. 불안함에는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왔고 턱과 다리가 덜덜덜 떨려왔다. 서서히 도시에 닿기 시작한 구체는 마치 모든 걸 집어삼킬 것처럼 대지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아주 조금 남아 있는 희망이 사라질 즈음에 저 멀리서 레아를 안고 있는 제임스의 모습이 비쳤다. 커다란 목소리로 입을 때려고 한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검붉은 구체가 시계탑과 부딪친 것. 커다랗게 들려오는 굉음 때문에 귀가 아프게 느껴진다. “위험해! 제임스! 위험!” 순간적으로 하늘을 바라본 것이 당연. 거대한 탑의 파편이 떨어지자 레아를 꽉 안은 채로 엎드리는 제임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두 명이 순식간에 파편 무더기에 깔리는 그림은 상상하기도 싫다. 하지만 잠시 후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이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고 한 비명이 차마 목구멍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얼어버린 듯. 시간이 정지한 것 같다. “아, 안 돼!!” 차마 두 눈으로 볼 수 없었다. 눈을 꽉 감고 울음을 터뜨리자 신기하게도 희미하게 딸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엄마… 엄마….” ‘뭐… 야.’ 어떻게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천천히 눈을 뜨자 도시를 빛 무리가 감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탑에서 떨어진 파편 역시 그 빛 무리에 휩싸여 점점 더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찬란한 빛.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이다. 레아는 조심스럽게 옷깃을 잡아당기고 있었고 제임스도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하늘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와주신 거야.’ 기도가 닿았다. 신에게 드린 기도가 닿았다. “기적이다. 기적이야.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레아…. 레아!” “아니야. 마리나 기적이 아니야.” “네?” “기적이 아니야…. 이건… 기적 같은 게 아니야.” 레아를 꽉 껴안으며 저도 모르게 제임스의 시선을 따라간 것은 당연. 두 눈에 비친 것은 참혹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형님! 형님! 조금만 참으쇼. 조금만! 조금만 버티면 될 거요! -아아아아아아아!! -이 더러운 놈들! 제길. 제길! 형님!! 조금만 더 버티면 지원이 올 거요! 그때까지만 버티쇼. 너무 무리하다가 죽으면 안 되는 거 알고 있는 거요? 너무 무리하지 마쇼. 내가 경고했소. 너무 무리하다가 쓰러지면 내가 용서 안 할 거요. 내가 용서 안 해! 눈앞에 보이는 장면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참혹함에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제임스… 저거….” “어떻게 된 일인지는 나도 잘 몰라, 마리나. 하지만… 교국에서 온 이들이 악마와 맞서고 있는 것 같아. 지금 도시를 감싼 빛 무리 역시 그들이 만든 것 같고. 여신의 거울이라고…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정말로 보게 될 줄이야.” “위험해 보이는 것 같….” 그 말 그대로였다. 누가 봐도 아슬아슬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수많은 악마들에게 둘러싸인 채 방패와 검을 휘두르는 덩치 큰 남자. 그는 자신의 안위를 챙기기보다는 뒤에 있는 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크고 작은 이형의 괴물들을 방패로 후려치거나 검으로 베지만 주변을 가득 채운 어마어마한 숫자에 이미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지 오래. 저 상태로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정도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점점 더 포위망을 좁혀오는 괴물들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자 이제는 몸으로 공격을 막아섰다. 팔을 물어뜯기고 다리를 절면서도 자신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은 채 궁지에 몰린 동료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조금만 더 버티쇼. 조금만. 이번에는… 이번에는 꼭. 이번에는 꼭 상처 하나 없이 데려갈 거요. 그때 같은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요! -아아아아아아아!!! -지난번처럼 그런 식으로 마무리하게 두지는 않을 거요. 그렇게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요! 그렇게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지 않을 거란 말이요! 이 더러운 자식들아!! 형님한테는 손가락 하나 못 댄다. 개자식들… 개자식들! 이쪽으로 와라. 이쪽으로 와!!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덩치 큰 청년의 눈에 한가득 고인 눈물이 고통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바보라도 알 수 있으리라. 저것은 불안감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그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자신보다 더 고통스러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불안이다. 그 말 그대로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방패를 든 덩치 큰 청년이 많은 것 같았지만 옆에 있는 검은 머리 여자 역시 정상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말라비틀어진 손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마법을 쏘아 보내고 있다. 누가 보아도 위태로워 보인다. 걸어 다니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다. 온몸이 마치 악마에게 먹혀버린 듯 처참하다. 피부가 갈리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마치 기포가 터지는 것처럼 몸에 있는 피부들이 터져나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허억. 허억. 하아…. 조금만, 조금만 버티자. 조금만. 거의 다 끝났어. 조금만 더 버티자. 아직 쓰러지면 안 돼. 소라야, 넌 할 수 있어. 쓰러지지 말자. 절대로 쓰러지지 마. 아직 조금 더 할 수 있어. 저들이 어떤 힘을 사용하는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혼잣말을 하는 저 여자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이상하리라. 겉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그녀 역시 어떻게든 그 안에 있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형님, 형님! -잘되고 있어요. 모든 게 잘되고 있어요. 그들이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감싸고 있는 이들 역시 눈에 보인다.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 둘은 서로 두 손을 꽉 잡은 채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저 둘이 지금 이 도시에 떨어지고 있는 검은색 구체를 막아서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그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도시를 감싼 찬란한 빛처럼 그 둘 역시 온몸이 빛나고 있었으니까. -아아아아!! 입과 코에서 울컥 피를 토하며 빛의 방패를 유지하고 있는 여자. -으아아아아아아!! 마찬가지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함께 빛을 쏘아 보내고 있는 남자.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 그리고 방패를 든 덩치 큰 남자의 말에 현재 저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었다. -무리하면 마쇼. 이대로 죽으면 정말로 용서 안 할 거요! 이대로 둘이 먼저 가버리면… 끄윽…. 정말로 용서 안 할 거요! 나도 따라 죽을 거라 이 말이요! -아아아아아아아아!! -힘들면 포기해도 된다니까… 아무도 형님이랑… 끄윽. 누님을 비난하지 않을 거요. 아무도 비난하지 못할 거요. 이미 할 만큼 했다니까. 끄으윽… 이미 할 만큼 했소. -집중해, 덕구야. 집중해라. 쿨럭. -혀, 형님. 설상가상으로 남자 쪽이 피를 토하기 시작한다. -돌아보지 말고 집중해! 나는 괜찮아. 나는 괜찮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계속해서 피를 토하면서도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여자 역시 눈에 보인다. -죽지 마쇼…. 제발 부탁이요. 제발… 제발…. 신님. 신님. 하느님. 부처님. 베니고어 여신님. 제발. 형님이랑 누님 좀 살려주쇼. 제발… 제발 있다면 끄윽…. 제발. 우리 착한 형님이랑 누님 데려가지 마쇼. 제발… 평생을 이렇게 산 사람들이요. 제발 이런 걸로 데려가지 마쇼! 이런 걸로 죽는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소? 너무 억울한 것 같다니까!! -아아아아아아아!!! -차라리 내가 대신 죽을 거라니까. 차라리 나를 데려가쇼. 차라리… 데려갈 거면 나를 데려가쇼. 끄으윽…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빛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덩치 큰 청년이 이제 포기해도 된다고 괜찮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가득 메운 빛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위, 위험한 건가요? 저분들이…. 제임스, 위험한 건가요?” “죽을 수도 있어.” “네?” “아니…. 이미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야. 몸 안에 있는 모든 마력을 뽑아서 사용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나는 고블린밖에 잡아본 적 없는 하급 용병이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이건 인간이 발현할 수 있는 종류의 마법이 아니야. 아마도… 이 도시를 지켜낸다고 해도. 이 마법을 발현시킨 저 두 사람은… 죽을 거야.” “어… 째서 그렇게까지….” “나도 몰라. 나 같은 사람들은 평생을 가도 저런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왈칵 눈물이 튀어나왔다. 계속해서 소리치고 있는 덩치 큰 남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발….’ 옆을 바라보자 살며시 손을 모으고 있는 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 옷깃을 잡아당기며 자신과 함께하자는 듯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기도하자는 것처럼 말이다. 조용히 하늘을 향해 손을 모으며 눈을 감은 것은 당연지사. ‘무사하기를…. 제발 저 숭고한 이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일이 없기를….’ 그 직후. 분명히. 틀림없이 우연이겠지만.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 323 회귀자 사용설명서 323화 라이오스의 영웅(2) ‘할 만큼 했다! 완벽했다, 덕구야! 미안하긴 한데 네가 캐리했다!’ 아무리 연기가 박진감 넘친다고 한들 진짜보다 생동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정말 이걸 영화로 만든다면 박덕구는 남우조연상까지 노릴 수 있을 정도로 메소드 연기를 보여주었다. 눈물이 글썽글썽 한 채 동료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인 모습은 그야말로 처절함 그 자체였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것이 조금 가슴 아프기는 했지만 워낙에 튼튼한 녀석인 만큼 며칠 안으로 체력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오히려 문제가 되는 건 정하얀과 한소라다. ‘나도 문제가 있고.’ 참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울컥 울컥 피를 토하고 싶은 상황. 얼마 없는 마력으로 정하얀을 보조하려고 하니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리라. 사실 내가 준 신화 등급, 빛의 연금술사로 전직하지 못했다면 정하얀도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이쪽이 나누어 주는 마력이 그녀의 몸을 회복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하는 게 맞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몸 안에 있는 마력을 소진한 것도 모자라 생명력까지 소진하고 있는 셈. 마력을 소비하면서도 마력을 회복하는 정하얀의 괴물 같은 친화력도 친화력이었지만 신성력의 성질을 띠게 된 내 마력이 아니었다면 이미 내부가 완전히 망가져 리타이어했을 거라는 거다. ‘아니 그 이전에….’ 저 벨리알이 완전하게 소환된 형태였다면 이미 도시 안으로 마법이 떨어지고도 남았을 터. 아무튼 간에 중요한 것은 나와 정하얀이 진청의 부름을 받아 소환된 악마의 마법을 훌륭하게 막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흑마법에 대해서는 쥐뿔 아무것도 모르지만 악마군주가 현세에 머무르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누가 봐도 슬슬 마무리를 해도 괜찮은 타이밍인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 슬그머니 벨리알을 바라보니 녀석 역시 은근슬쩍 고개를 끄덕여 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형님, 너무 무리하지 마쇼. 조금만 더 버티쇼.” 그 와중에도 폭풍 눈물을 쏟으며 방패를 휘두르는 박덕구의 모습은 내가 봐도 숭고하게 느껴진다. 아무튼 간에 빛 무리에 휩싸인 나와 정하얀을 진청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보았다. 이미 이쪽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는 상황. 악마에게서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정하얀과 내 모습이 미디어를 타고 나간 순간, 이미 이 설계는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차라리 제발 공격해 줬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벨리알이 쳐놓은 어둠의 장막 때문인지 공격 마법 역시 캐스팅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자신들을 호위하는 이형의 괴물들 때문에 바깥으로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무척 난처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극한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진청의 이름을 외치고 있는 악마군주 벨리알의 찾아가는 서비스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계약자여, 아직 부족하다. 아직 부족해. 빛에 지지 마라, 계약자여! “제기랄. 제길….” 이제 슬슬 끝내야 되는 타이밍이라는 걸 서로가 인지한 것은 순식간. 이미 하늘이 뚫려 동공이라고 부를 수 없는 장소도 천천히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증거라고 걱정했던 모든 것이 빛 무리에 휩싸여 터져나간다. 정하얀과 한소라가 만든 이 장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박덕구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악마들 역시 빛의 영향을 받아 허물어지고 심지어는 우리가 밟고 있는 땅바닥 역시 움푹 파인다. 어마어마한 마력의 영향인지 몸은 공중으로 살짝 떠오르고 빛은 어둠의 장막을 걷는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 뭐라 표현하기 힘든 소리. ‘빛의 용사네. 빛의 용사야 아주.’ “아아아아아아아!!” 마지막 남은 한줌의 마력까지 모조리 정하얀에게 털어 넣자 정하얀 역시 조금 더 출력을 올린 것은 당연지사. 하늘을 감싼 검붉은 색의 마력이 빛의 방패의 영향을 받아 갈라진다. ‘키야. 장관이네. 장관이야.’ 찬란한 빛이 어둠을 집어 삼키는 장면은 마치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아름다운 광경. 이쯤 되면 모두가 이 모습을 보고 기도를 올리고 있으리라. 라이오스는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교국에서는 커다란 함성과 함께 지지 말라는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써먹어야 할 대사를 일발 장전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하늘을 수놓은 찬란한 빛이 점점 검붉은 구체를 집어 삼킬 즈음에 정하얀은 내 손을 꽉 잡고 다시 한번 소리를 질러댔다. 사실 이쪽은 소리를 지를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일단 장단에 맞춰주는 것이 좋다. “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마무리가 다가왔다는 걸 눈치챘는지 벨리알 역시 최후의 연기를 선보인다. 박덕구 못지않은 처절함이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놈들이… 감히! 네놈들이 이 나를! 이 악마군주를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냐! 계약자 진청이여, 어서 남은 힘을 쏟아 부어라! 여기서는 잠깐 당황한 악마소환사의 얼굴을 클로즈업. 도시를 노리는 공격이 힘을 얻는 장면 또한 한 번 더 클로즈업. 열정적인 카메라우먼 한소라의 화면 전환 능력이 포텐이라도 터진 것처럼 자연스럽다. -우윽…. 더러운 빛의 졸개들이. 제기랄…. 제길! 제길!! 감히 인간 따위가!! “아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최후의 힘을 폭발시키는 듯한 강한 연출. 나 역시 정하얀의 손을 꽉 잡은 채 한계까지 내 몸을 몰아넣는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찾아온 정적. 이후에 하늘을 가득 메운 것은 폭발적인 빛. 말 그대로 빛의 폭발이라는 단어가 아닌 것으로는 저 광경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눈을 제대로 뜨기도 힘들 지경. 천천히 되돌아온 시야에 검붉은 구체는 이미 없다. 대신 자리한 것은 중립국 라이오스로 떨어지기 시작한 빛의 가루들. 정하얀은 추욱 늘어지기 시작했고 이미 오래전에 한계를 넘어선 한소라 역시 피를 토하며 부들부들 발작을 일으켰다. 박덕구는 방패를 들고 혹시 모를 진청의 공격에 대비한다. 나 역시 쓰러지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조금은 더 서 있어도 될 것 같은 분위기. 적어도 눈앞에 보이는 상황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기 전까지. 긴장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도시 전체를 울리는 커다란 함성에는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간다. 여론이 완전히 이쪽에 자리 잡은 것이다. 그 함성에 벨리알 역시 천천히 역소환의 과정을 겪으며 마지막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인간. 물론 나에게 따로 들리는 목소리는 덤이다. [오늘 일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역겨운 인간. 조금 더 화려하게 일을 끝내기도 했고 결과적으로는 네게 좋은 일이 된 것이 아닌가. 명색이 거짓과 선동의 군주가 뒤통수를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조금 장난을 친 거라고 알아줬으면 좋겠군.] 장난지고는 그 정도가 조금 심하기는 했지만….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야.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벨리알 님. 언제 시간이 나신다면 자리라도 한번 만들어 보고 싶은데….’ [끄응…. 점점 더 탐이 나는군.] ‘저도 벨리알 님과 함께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영웅 등급의 퀘스트를 생성됩니다. 악마군주랑 말 섞지 말라고 했지.(0/1)] [그럼 나는 이만 들어가 보겠다. 현세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적기도 하고… 아무튼 네 말처럼 정말로 다시 만날 날이 왔으면 좋겠군.] ‘편안한 밤 되십시오, 벨리알 님.’ -나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잊지 마라, 인간들이여. 오늘이 마지막일거라 생각하지 마라! 끝까지 화려하게 마무리해 주고 계신 벨리알의 모습은 열일하는 사장님의 정석이다. 빛의 휩싸인 채로 역소환 당하는 모습 또한 굉장히 장엄했다. 그 와중에 도시를 응시하는 타오르는 불길의 눈동자도 공포감을 심어주기에는 충분. 일단은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아마 이번 사건으로 인해 저쪽 역시 얻는 게 있었을 것이다. 거짓과 선동의 악마가 전 대륙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데 함께 했으니 녀석의 말대로 실적이라는 게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이미 떠나버린 악마군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규격 외의 존재에게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하며 이 상황을 시청하고 있었던 눈앞의 진청이 이제는 더 중요해졌다. ‘슬슬 사람들이 올 때가 됐는데.’ 빛의 진영은 완전히 리타이어 직전의 상황. 그나마 박덕구가 방패를 들고 최대한 우리를 보호하려고 하지만 녀석 또한 위태롭다. 그와 대비해서 어둠의 진영은 상대적으로 말끔한 모습을 선보이고 있으니 지금 이 타이밍에 공격을 받는다면 위험한 것이 당연하다. 악마소환사 진청은 그 여파에도 불구하고 마력을 소진한 기색이 없다. ‘저거 잡아 처넣으면 모든 게 끝나.’ 때마침 들려온 것은 다수의 발자국 소리. 붉은용병 길드와 차희라, 요조라 길드와 카스가노 유노가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후에 일이 어떻게 될지 절로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 물론 공화국에서 파견 온 조사단 쪽도 악마소환사 진청 쪽으로 헐레벌떡 달려오기는 했지만, 이미 라이오스 안에 있는 녀석들은 독 안에 든 쥐다. 예상대로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려는 뒷모습이 보인다. 나였어도 라이오스에서 조사를 받는 선택지는 피하고 싶었으리라. 이토 소우타와 마찬가지로 악마관계자들의 마지막은 항상 도망치기. 이것이 빛을 등진 저주받은 어둠의 최후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온다. “악마소환사가 도망친다! 악마소환사 진청이 도망친다! 푸핫. 악마소환사가 도망친다!” 가슴 속에서 토혈이 올라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울컥 하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혈액. 순식간에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제대로 들리지가 않는다. 삐이 하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멍하다. 마치 렉이라도 걸린 것처럼 몸도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어어어?” 슥슥 코를 닦으니 코피가 흘러내리기 시작. “제기랄…. 놓치… 지 마…. 악… 사….” 심지어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아프지는 않다. ‘이러다가 뒈지는 건 아니겠지.’ 무리하게 마력을 사용한 출력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아마 며칠 후면 푹 쉬고 일어날 수 있으리라. “혀, 형님! 형님! 형님!!” 울부짖고 있는 박덕구의 얼굴도 흐릿하게 보인 것은 당연지사. “하얀이랑… 한… 소라… 따로 챙겨. 카스가노 유노한테… 맡….” “알겠다니까. 말하지 마쇼. 알겠으니까 말하지 마쇼!” “악마 소환사… 꼭 잡아….” 녀석의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차희라와 카스가노 유노의 목소리도 섞여서 들려온다. “주인… 정신을… 차리….” “괜찮아? 자기? 괜찮… 은 거 맞아?” 삐이이이이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기 시작. 이제는 진짜 한계다. 정말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이거 쓰러질 때도 잘 쓰러져야 되는데….’ 일단은 목에 걸려 있는 로자리오를 꽉 쥔 것은 당연. 바젤 교황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되리라. 선 채로 기절하는 연출도 선보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그건 너무 과하다. 나름 괜찮은 것 같은 선택지는 정하얀을 보호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것. 함께 빛에 휩싸인 동료인 만큼 이건…. ‘먹히겠지.’ 주변이 조금 시끌벅적해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에는 그마저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전설 등급의 퀘스트가 완료.] [위기에 빠진 라이오스를 구해 최대한 빨리. 이 나쁜 놈.(1/1)] # 324 회귀자 사용설명서 324화 라이오스의 영웅(3) “길드 마스터. 길드 마스터! 예리 씨, 혹시 길드 마스터 보셨습니까?” “나도 잘 몰라. 내가 기모 아저씨한테 묻고 싶었던 건데…. 근데 이거 위험한 상황 맞는 걸까? 왠지 모르게… 저번에 우리… 그… 덕구 아저씨 때….” “큼. 이번에는 정말일 겁니다. 그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예리 씨. 아무리 부길드 마스터가… 그,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 “아. 그렇지…. 미안. 내가 잘못 생각했어. 의심하는 것보다는 걱정하는 게 먼저. 맞아. 내가 잘못했네. 요즘 너무 생각하는 게 이상해 진 것 같아. 뭔가 오염되는 것 같은… 아무튼 미안해.” “사과는 부길드 마스터께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보다 이걸 어, 어떻게 해야 할지. 길드 마스터가 보이지 않으니….” “안기모 씨.” “아, 선희영 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혹시 길드 마스터 보셨습니까?” “먼저 나가셨습니다. 영상이 나오기 시작한 직후에… 디아루기아 님과 함께요. 일이 끝난 후에나 도착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그렇군요. 혹시 따로 언질은….” “따로 언질은 없으셨습니다만, 일단 혜진 씨와 함께 곧바로 라이오스로 향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출발은 한 시간 후입니다.” “네?” “길드에 잡혀 있는 모든 일정을 취소한 이후 모든 파티원이 라이오스로 향할 겁니다. 이견은 받지 않습니다. 이상입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아영 씨와 창렬 씨에게도 전달하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 “…….” “저, 선희영 님.” “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길드 마스터는 무사하실 겁니다.” “네. 가… 감사합니다.” * * * “교황 성하.” “이 쓸모없는 것들! 이 쓸모없는 것들!” “죄, 죄송합니다.” “명예추기경…. 명예추기경은 아직도 누워 있는 것이냐. 아직도… 도대체… 도대체!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신성기사단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게야! 템플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게야!” “템플러들은 아직 신호를 바, 받지 못한 상태라… 그, 그리고 다른 추기경님들과 교황 성하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때문에 교국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명예추기경이 일어나지 못할 지경이 될 때까지 싸우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었단 말이냐! 이 아둔한 것아! 그래서 지금 저지경이 될 때까지 그걸 내버려 두고 있었어!! 이 멍청한 것들! 이 멍청한 것들!” “교황 성하….” “닥쳐라! 쓸모없는 것들! 네놈들이 이곳에서 탁상공론을 벌이고 있을 때, 명예추기경은 홀로 악마와 대적하고 있었어. 그 누구도 모르게 어둠과 싸우고 있었다. 혹시라도 명예추기경이 죽기라도 한다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아니! 당장! 내가 직접 갈 것이다. 내가 직접! 명예추기경이 일어날 때까지 이 내가 그 곁을 지킬 것이다!” “자리를 지키셔야 합니다, 교황 성하. 명예추기경도 교황 성하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겁니다. 그리폰을 타고 날아가도 며칠이 넘게 걸리는 거리입니다. 무사하실 겁니다. 틀림없이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무사하실 겁니다. 틀림없이….” “아니. 그렇다면… 명예추기경을 이쪽으로….” “최대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라이오스에 계시는 게… 저, 저희 역시 침통한 심정입니다. 하지만 만약 명예추기경이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교황 성하가 교국에 남아 계셔야 한다 말하셨을 겁니다.” “…….” “…….” “그래…. 그대들의 말이 맞다. 그대들의 말이 맞아. 제시카 대주교의 말이 맞다. 명예추기경도 내가 자리를 비우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지. 그럼 사람이었어. 남을 위해서. 베니고어 여신님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어.” “…….” “무사하기를… 무사하기를… 베니고어 여신님이여. 당신을 따르는 종을 버리지 말아주시옵소서. 제발… 이 늙은 종이 다시 한번 기도드리겠나이다. 제발….” * * * “제가 직접 라이오스로 가겠습니다.” “네?” “제가 직접 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스칼 님.” “이기영 님이 홀로 싸우고 계십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요. 교국을 위해, 아니, 대륙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신 분입니다. 이번에도 홀로 희생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그대들이 뜻이 어떠한지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번 일의 마무리는 제가 직접 짓고 싶습니다. 라이오스가 먼저 동맹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오고 있습니다. 이후의 일도 이기영 님께 맡길 수는 없어요. 교국을 위해, 대륙을 위해 힘써주신 만큼 저 역시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사절단을 준비해 주세요. 직접 라이오스를 방문하겠습니다.” “오, 오스칼 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겠습니다.” “카트린 의원….” “정식으로 이방인들에게도 지원 요청을 하겠습니다. 마침 파란 길드와 교황청에서도 움직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프리스티나 국왕과의 대담 일정 또한 최대한 빠르게 잡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최대한 빨리 일을 끝맺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트린 의원. 이기영 님, 제발… 살아만 계셔주세요. 살아만….” “분명히 괜찮으실 겁니다. 분명히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일어나실 겁니다. 분명히요.” * * * “사람 짜증 나게 정말.” “왜요? 지혜 언니? 아, 언니 숨겨둔 애인 때문이구나. 역시 걱정되세요?” “걱정은 개뿔. 아마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할걸? 지금쯤 일어나서 신나게 춤추고 있을 게 분명한데 걱정될 게 뭐가 있겠어. 아니, 그렇지는 않으려나. 그 악마소환사인가 뭐 시 긴가 놓쳤다는 거 들으면 화내고 있을 수도 있겠네. 아무튼 걱정 같은 건 안 해. 애초에 지금 기절해 있다는 것도 전부 보여주기 식이라니까. 분명히.” “표정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정말로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누가 봐도 그렇게 보여요. 평소랑 표정도 다르고… 손톱은 왜 또 물어뜯고 있어요?” “내가 언제 손톱을 물어뜯었다고 그러니? 너도 참 웃긴다. 계속 기어오를래? 시킨 일은 전부 했어? 지금 일은 다 끝내고 와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데 왜 이 사람은 연락을 안 받아? 일어나 있으면 괜찮다고 이야기라도 좀 해주든가. 짜증 나게 정말.” “걱정하는 거 맞잖아요.” “너!” “그러지 말고 한번 가보세요. 얼굴이라도 비춰주면 정말 좋아할걸요? 너무 질척거리면 매력 없어 보인다는 언니 생각도 이해가 되기는 하는데 그래도 내 님이 누워 있으면 병문안이라도 가야죠. 안 그래도 주변에 이상한 라이벌들 많은데. 마지막에 그 마법사 여자랑 손잡으면서 쓰러지는 거 못 봤어요? 너무 질척거리는 것도 매력 없지만 너무 관심 없는 척하는 것도 매력 없다니까요? 혹시 알아요? 연락도 안 받는다는 거 보면 언니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죠.” “그럴 사람은 아니야.” “그래도….” “그래도… 한번 가보는 건 나쁘지 않겠네. 물론 네 말을 듣는 게 아니야. 그냥 마땅히 할 일도 없고 얼굴 정도는 비춰줘야 할 것 같거든. 앞으로 라이오스에서 중요한 일이 생길 텐데. 가봐야지. 일의 진상도 궁금하고… 지금 바로 출발하자.” “네?” “빨리 가자니까? 연주 언니한테 그리폰 빌리면 빨리 가니까. 출발하자고.” “그렇지만 저, 아직 준비가.” “어차피 필요한 게 있으면 도착해서 사면 돼. 일단은 출발하자. 빨리.” “아… 네…. 지혜 언니.” * * * “감사합니다.” “저에게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프리스타나 님. 사실 함께 사절단으로 온 저희도 모르고 있었고… 무엇보다 라이오스 국민들의 절실한 기도가 아니었다면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니요. 저희는….” “결과적으로는 일행 모두가 목숨을 잃지는 않았으니까요. 하하.” “많이 걱정되시겠습니다. 차희라 님.” “괜찮을 겁니다. 아니, 그것보다는 익숙합니다. 본래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타입인지라. 함께하다 보면 걱정할 일이 많습니다. 그때마다 항상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어났으니 이번에도 분명 그럴 겁니다.” “역시… 그렇군요. 교국의 명예추기경은 그런 사람이었군요.” “그보다 프리스티나 님. 왕성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만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모두들 본인의 삶이 있을 텐데. 며칠 동안 저렇게 모여 있다는 건… 물론 저희로서는 충분히 감사하지만 그래도 식사도 하지 않고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니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닙니다. 만일 저러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분들이라도 생긴다면….” “아뇨. 괜찮습니다, 차희라 님. 모두 본인의 의지로 모이셨고 기도를 드리는 분들이십니다. 그만큼 라이오스의 국민들이 이기영 명예추기경님과 다른 영웅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이겠지요. 모두가 여신의 거울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습니까. 물론 차희라 님이나 다른 분들의 마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겠지만 저희 국민들 그리고 저 역시 이기영 명예추기경께서 어서 빨리 정신을 차리셨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신께서 현세에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저희의 기도가 닿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발적으로 모여주신 분들을 위해 왕성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니까요. 사실 왕성이 큰 도움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성들 스스로가 앞다투어 음식을 나누고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베풀고 있습니다. 물론 충분한 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모두가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희생에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수백년이 지나도 명예추기경과 영웅분들의 업적은 영원토록 라이오스에 기억될 겁니다. 네. 영원히요.” “영광입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더 영광스럽습니다, 차희라 님.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 * * “소라 씨.” “네? 부길드 마스터. 부르셨….” “오늘 저녁은 뭡니까?” “아! 오랜만에 고기인 것 같아요.” “웬일로….” “카스가노 유노님께서 몰래 반입해 오신 것 같더라고요. 안 그래도 사람들한테 왕성이 완전히 둘러싸여서 쉽지 않으셨을 텐데….” “이유야 어찌됐건 오랜만에 고기 뜯을 수 있겠군요.” “네. 그보다 부길드 마스터.” “말씀하시죠, 소라 씨.” “언제 정신을 차렸다고 발표하실 건가요? 지금 라이오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꽤 되는 것 같은데….” “아아! 한 삼 일 정도는 더 누워 있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고마운 줄 알죠.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에 있다. 그렇게 언 플 한 번 해놓으면 괜찮을 겁니다. 아, 말 나온 김에 그런 소문 좀 퍼뜨려 주세요.” “어떤 소문을.” “오늘 밤이 고비다. 오늘을 못 넘길 확률이 높다.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아… 네.” “사람들 우는 소리 때문에 왕성 밖이 시끄럽겠지만 다음날 일어나는 그림이 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가져온 거 주세요, 소라 씨. 반나절이 넘게 누워 있었더니 배고파 죽겠네.” “네. 부길드 마스터. 저… 그리고 저… 전출은 언제쯤….” “아시다시피 지금 세간의 이목이 워낙 집중되어 있어서… 조금 더 기다려야 될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일만 마무리되면 최대한 안전한 업무로 배정해 드릴 테니까요. 아, 이거 정말로 맛있네요. 업진살이라 그런가.” “네!” “입에서 살살 녹네. 크으… 업진살 살살 녹는다!” “그러게요. 정말로 맛있네요.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왕성 앞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먹으니 더 꿀맛인 것 같습니다. 살살 녹는 것 같습니다. 정말… 이러다가 이거 동상이라도 세워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푸하하하핫.” # 325 회귀자 사용설명서 325화 라이오스의 영웅(4) 흐뭇하게 왕성의 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다. 물론 찝찝한 부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모든 게 대부분이 이쪽의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하면 그 이상이라고 할 수도 있었으니 다른 표현은 필요 없으리라. 지난밤에도 왕성의 밖에 모인 이들 때문에 어떻게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 한 나라에 영웅이 된다는 건 귀찮기는 하지만 확실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슬그머니 바깥을 바라보니 아직까지도 이쪽의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기도를 드리는 중립국 국민들이 보인다. 남녀노소, 대륙인 이방인 할 것 없이 모여 있는 모습은 감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 라이오스의 국왕 프리스티나가 병상에 누워도 이런 장면은 만들어지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다. ‘당연히 저래야지.’ 그 날 저들이 여신의 거울로 본 모습은 그야말로 희생의 정석. 영웅들의 모습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어떻게든 이쪽을 지키려고 한 전사 박덕구, 어두운 마력에 노출된 채, 말라비틀어진 몸으로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던 한소라, 결정적으로 빛에 둘러싸인 채로 악마의 공격을 막아냈던 나와 정하얀, 계속해서 피를 토하고 가슴을 부여잡은 채 한계에 이르렀음에도 라이오스인들을 지키려고 했던 모습은 쌍팔년도 영웅전기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미지였다. ‘완벽한 그림이었어.’ 다시 한번 생각해도 뿌듯해진다. 아니나 다를까. 바깥에서는 벌써부터 커다란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 아마 이쪽이 병상에서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틀림없으리라. ‘현성이도 왔다고 했었지.’ 가장 빨리 일어난 박덕구와 함께 오매불망 이쪽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은 당연 사랑스러운 회귀자.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소리에 무척이나 오랜 시간 동안이나 바깥을 서성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내 가슴이 다 찡해질 정도였다. ‘그래. 형도 네 맘 이해한다.’ 다소 황당했던 퀘스트에서 느낄 수 있었던 건 녀석이 초월적인 존재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 아니, 지원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초월적인 존재가 녀석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번 일 역시 이쪽이 김현성의 품 안에 있었기 때문에 캐리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준 신화 등급이야. 준 신화 등급.’ 준 신화 등급으로 올라간 보상이 겨우 마력 5라는 건 굉장히 의아하고 짜증 나지만 그래도 직업의 등급이 ‘준 신화’라는 건 이례적인 이야기다. 심지어 마력이 신성력의 성질까지 띄고 있으니 교국, 아니, 대륙에서 유일하게 신성력과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된 셈. 당시에는 조금 황당하기는 했지만 초월적인 존재가 정하얀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점에서 생각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때 내가 정하얀의 몸을 치유하지 않았더라면 장담컨대 정하얀은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정하얀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네.’ 분석 아닌 분석을 해보자면 위에서 이 모든 걸 바라보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는 김현성뿐만이 아니라 정하얀 역시 죽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 이를 테면 김현성이 회귀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이 실제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면 정하얀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도 이해가 간다.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괴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성장할 수 있는 길이 남아 있다. 보이지 않는 위협을 대비한다고 생각해 봤을 때 정하얀이라는 패가 없어진다는 건 나로서도 상상하기 싫을 것이다. 여러 가지 버프를 받기는 했지만 도시 전체에 떨어지는 대규모의 공격을 막아낸다는 건 일반인들의 기준으로도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업적이다. [빛의 연금술사 -준 신화 등급] [신에게 선택받은 이들만 전직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빛의 연금술사입니다. 마력이 신성력의 성질을 함께 가지게 됩니다. 마력이 5 올라갑니다. 다른 설명은 필요 없고 넌 진짜 개새끼야. 이 역겨운 놈. 진짜 너 진짜 구제 불능의 쓰레기다. 진짜.] ‘얘는 나만 너무 싫어하는 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나만 너무 싫어하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한가. 내가 그들의 주위에서 떨어지는 꿀을 맛있게 받아먹고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무튼 간에 슬슬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교국에서도, 교황청에서도, 라이오스에서도 많은 손님들이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 슬그머니 옆쪽을 바라보니 일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카스가노 유노의 결계 안에서만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 정하얀의 눈치 아닌 눈치를 보고 있는 한소라는 덤. 세 명이서 한 병동을 써야 하는 건 누군가에는 굉장히 즐거운 일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한소라와는 달리, 정하얀은 아직까지 얼굴이 창백했는데 걱정되는 것이 당연했다. 아무리 준 신화급의 마법을 후려갈기고 마력 스탯이 99라고 한들 무리하게 마력을 끌어다 쓴 부작용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표정은 나빠 보이지가 않는다. 이쪽이 라이오스 국민들이 걱정하는 것을 즐기듯, 정하얀 역시 내가 자신을 걱정하는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묘하게 닮아가고 있는 거 같단 말이야.’ 왼손 약지의 반지를 소중한 듯 끌어안고 있으니 당장 몸이 힘들더라도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얀아, 몸은 조금 괜찮지?” “네, 오빠. 아직까지는 마법을 쓰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 그래도 문제없어요. 괜찮아요. 콜록콜록. 정말로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콜록. 돼요.” 계속해서 기침을 하는 게 연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정하얀의 몸 상태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정말 괜찮은 거야?” “네. 정말로 괜찮아요. 으으윽…. 정말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콜록.” 심지어 가슴을 부여잡는 꼴은 가관. “콜록콜록. 죄, 죄송해요. 사실 안 괜찮아요. 콜록. 오, 오빠가 조금만 쓰다듬어주면 더 괜찮아질 것 같아요. 그 마력 있잖아요.” “아… 어어.” “가슴이 너무 아파요. 콜록. 가슴이… 가슴이 너무 아파요.” “응.” “너무 아파요. 오, 오, 오빠….” 더불어 이제는 적당한 핑계거리도 생겼다. 이쪽의 마력이 신성력까지 겸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하얀은 이미 알고 있다. 깨어난 이후에 벌써 수십 번도 넘게 마력을 보내주고 있었지만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듯 슬그머니 가슴을 내민다. 살짝 손을 얹자 움찔하는 모습은 이상하게 귀여워 보인다. “하윽….” 잠깐 이상한 소리를 냈지만 일단은 필사적으로 마력을 내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조금 있다가 손님들을 맞이하려면 지금 마력을 뽑아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네. 거, 거기서 더 왼쪽이요. 가운데 말고… 시, 심장 쪽이 아파요. 심장 쪽으로 해주세요. 심장… 심장이 너무 아파요.” “이제 좀 괜찮아?” “하으윽… 아뇨. 조금만 더… 조금만 더요. 시, 심장 가운데가 너무 아파요. 콜록. 으으으윽… 하윽. 가운데가 아파서 거기에….” 심장 가운데가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소리에 얼굴이 붉어진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한소라는 어디다가 눈을 둬야 할지 몰라 한다. 이쪽 역시 민망하기는 마찬가지. 서로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지속되었고,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와 한소라를 구해준 셈이다. 정하얀은 아쉽다는 듯 나를 바라봤지만 이 어리광을 언제까지 받아줄 수는 없다. “나머지는 나중에 해줄게.” “네….” 시무룩한 얼굴. 하지만 절제해야겠다는 얼굴이기도 했다. 아직 철이 들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뭔가 여유를 되찾은 듯했다. 이게 모두 프로포즈의 영향 아닌 영향이라 할 수 있으리라. 침대보를 대충 정리하고 반쯤 몸을 일으켰고, 정하얀에게 마력을 빨린 영향인지 조금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본래부터 창백한 정하얀과 애초에 회복이 느린 한소라 역시 만만치 않은 느낌. 벌써부터 박덕구의 목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 좀 미안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하니 튀어나오려던 양심의 가책도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한번 이쪽 일행의 모습을 관찰하던 바로 그때였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것. 그 동안 방 안을 뒤덮었던 일부 결계가 해체됨과 동시에 재빠르게 몇몇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혀, 형님! 형님!”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박덕구의 목소리였지만 아리스 시녀, 아니, 이제는 오스칼이라고 불러야 하는 인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명예추기경님!” 헐레벌떡 뛰어옴과 동시에 이쪽에게 안기는데 무척 당황스럽다. 걱정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깃들었다는 것은 금방 눈치챌 수 있을 정도. “흑… 흐으으윽…. 몸은,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아… 네.” “어디 다치시진 않으셨는지요. 어떻게…. 흐으윽. 저를 알아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오스칼 님. 이곳까지 오실 필요는 없었는데…. 제가 걱정을 끼친 모양이군요.” “흐으으윽….”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래도 한 국가의 수장인 만큼 조금은 의연한 모습을 보여줄 거라 생각했건만, 마음속에 있었던 불안을 숨기지 못했던 모양이다.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괜스레 정하얀이 신경 쓰이는 것은 당연지사. 완전히 이쪽에 얼굴을 파묻은 모습 때문에 걱정 아닌 걱정이 샘솟기 시작한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확실히 불쾌하다는 정하얀의 모습이 보인다. 일단은 얌전히 있어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전혀 다른 감정이 얼굴에 깃들어 있다. ‘저건 뭐라고 해야….’ 그 감정의 정체가 우월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 은근슬쩍 코웃음을 치는 것은 물론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쓰다듬고 있다. 얼핏 가소롭다는 표정이다. ‘효과가 있다고 봐야 되는 건가….’ 물론 이걸 효과가 있다고 하기에는 애매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좀처럼 얼굴에 자리한 우월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껴안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초조해했지만 내가 살짝 그녀를 떼어내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그때의 한 방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니 입꼬리가 올라가기는 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 이쪽의 병실로 찾아온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얼굴에 담자 그동안 보지 못했던 반가운 얼굴들이 눈에 들어온다. “형님. 형니임…. 끄윽. 누님도 괜찮은 거요? 소라 후배는 좀 어떤 거요? 다 아무 이상 없는 거요?” “그래, 덕구야. 아무 이상 없는 것 같다. 조금 멍하기는 하지만 몸은 전부… 나은 것 같다.” “아직도 정상이 아닌 거 아니요?” “아냐. 아냐. 정말로 괜찮다. 몸에 이상은 없어. 다른 사람들도 전부 마찬가지야.” 눈물 콧물을 흘리며 질질 짜고 있는 박덕구. 함께 온 길드원들 역시 눈에 보인다. 선희영도 크게 안심하는 표정이었고 정말로 놀랐다는 얼굴의 조혜진, 왠지 모르게 죄책감에 휩싸인 것처럼 보이는 김예리, 여전히 실실 웃고 있는 안기모. 유아영이나 김창렬도 보인다. “다행입니다. 부길드 마스터. 하늘이 도운 거라고 밖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뒤에서 이쪽을 흘겨보는 이지혜의 얼굴을 보니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게 내심 섭섭했던 모양. 그래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보인다. 자신의 차례는 나중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라이오스의 인사들은 물론 교황청에서 내 상태를 보러온 이들까지 하나씩 인사를 나누다 보니 괜스레 피곤해지기 시작. 하지만 모두 이쪽을 걱정하고 있어준 감사한 이들이다. 카트린 공작, 아니, 카트린 의원이나 엘리제 의원 같은 이들 역시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그 동안 열심히 쌓아왔던 여러 인맥들이 오랜만에 깨어난 내 모습에 훌쩍이고 있다. 힘없이 미소를 보내며 그들의 걱정에 화답한 것은 당연,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시야에 비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아.” “기영 씨.” “현성 씨!”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이었다. # 326 회귀자 사용설명서 326화 라이오스의 영웅(5) “기영 씨.” “현성 씨!” ‘이 새끼….’ 사실 떨어진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만큼 고생 아닌 고생을 했다는 생각에 괜스레 씁쓸한 미소가 감돌기 시작. 결과적으로 일이 잘 풀려서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오기야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동안은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봐도 운이 좋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만약 뭔가 한 가지가 삐끗했더라면 라이오스를 도망쳐야 했거나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 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김현성 이 자식 역시 나름대로 마음고생 하며 열심히 움직였겠지만 결과적으로 생각해 보면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긴 것은 이쪽이라는 게 된다. 김현성이 멘탈을 잡고 있었을 때 실제로 이쪽은 생사를 오간 것이다. 녀석 역시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터. 꽤나 침통한 표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당연하리라. ‘그래. 인마. 형 많이 아팠다. 정말로 많이 아팠다. 그리고 힘들기도 했어. 정말로 힘들었다고… 슈바. 이게 다 널 위해서야. 그러니까 조금 더 슬퍼해도 된다.’ 사실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힘들었다는 걸 표현하고 싶어지는 듯한 느낌. 잘생긴 얼굴이 안 본 사이에 꽤 수척해져 있었고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박덕구처럼 질질 짜고 있지는 않았지만 녀석 역시 이쪽을 걱정하기는 걱정했다는 거다. ‘정이 생각보다 많은 건가.’ 사실 이 정도로까지 김현성이 나를 걱정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유대감이 쌓였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마력홀로그램이 나가자마자 디아루기아와 함께 이쪽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꽤나 놀랐을 정도, 심지어는 적의 꼬리를 잡기보다 덕구와 함께 방문 앞을 지켰을 정도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사건을 마무리 짓는 것보다는 내 옆을 지키는 걸 선택한 것이다. “현성 씨. 오랜만이로군요. 콜록.” 정하얀의 기침에 옮은 것처럼 절로 콜록거리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 생각하고 행동했다기보다는 몸이 먼저 엄살을 부리고 있다. 심지어 정말로 아파 오기 시작한 것 같아 당황스럽다. 인간은 생각하는 대로 몸이 바뀐다고 했던가. 누군가 가슴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물론 숨을 쉬기가 어렵다. “괜찮으신 겁니까?” 역시나 헐레벌떡 이쪽으로 다가오는 김현성의 모습. 지금 당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누가 봐도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입꼬리가 자꾸만 실실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마음의 눈으로 본 스펙 역시 훌륭하다. “네. 괜찮습니다. 현성 씨. 그보다… 여기까지 오실 필요는 없었는데….” “아닙니다. 당연히 먼저 오는 게 맞습니다. 정말로… 정말 걱정했습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기영 씨. 몸은….” “하하. 콜록. 괜찮습니다. 현성 씨. 정말로요. 기적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몸의 회복이 빠르다고 들었으니까요. 저보다는 하얀이나 덕구, 소라 씨가 더 고생하기도 했고… 정말로 콜록.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자꾸만 콜록거리는 게 신경 쓰이는 모양인 것 같았다.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누가 봐도 괜찮지 않은 모습. 혹시나 가방 속에서 엘릭서 같은 거라도 꺼내는 게 아닌지 내심 기대하기는 했지만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 사용했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녀석은 계속해서 콜록거리는 내 곁으로 다가오기 시작. 물론 다른 이들 역시 걱정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묘한 분위기 때문인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심지어는 슬그머니 이쪽으로 다가와 가슴에 손을 얹기 시작. ‘뭐야 이 새끼 왜 이래. 왜 이래?’ 순간적이었지만 정하얀의 눈이 무척 동그랗게 변한다. 나와 김현성을 바라보던 대부분의 여성 관객들 역시 왠지 모르게 붉어진 얼굴이었는데, 맨 뒤에서는 어머어머 같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심지어 이쪽이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라 뭔가 더 찝찝해진다. 혹시나 내가 몸을 일으키는 게 불편하지는 않을까 녀석이 먼저 몸을 숙여온 것이다. 잠깐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이쪽의 몸에 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다. 예상대로 기다렸다는 듯이 이쪽에 마력이 쏟아지기 시작. 녀석의 마력에 몸을 회복시키는 기능 같은 것은 없지만 내 몸에 마력을 한 바퀴 돌려 몸이 정상인지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방금 전에 정하얀에게 마력을 털어 넣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현재 김현성이 느끼고 있는 건 완벽하게 비어 있는 내 마력이다. 짐짓 심각한 표정. 사실 이쪽은 숨이 조금 헐떡거리는 것밖에는 이상한 점이 없지만 그래도 남은 여파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녀석은 의사가 아니다. 하지만 마력으로 내 몸을 몇 바퀴 돌리고 나자 정말로 몸이 편안해지고 나른해진다. ‘한숨 때리고 싶은데 이거.’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마사지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 몸의 내부를 마력으로 시원하게 주물러 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신성력의 성질을 띠게 된 내 마력으로는 이런 건 불가능하다. 대륙의 강자들이 특권처럼 가지고 있는 고급운용마력지식.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런 게 가능한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다. 김현성 적도의 섬세한 컨트롤이 불가능하다면 이 정도로 편한 기분은 느끼지 못했으리라. 조금 이상했던 것은 장내가 극도로 조용해지고 있었다는 것. 나와 김현성을 둘러싸고 있는 갤러리들이 입을 꼭 다물며 이쪽이 보여주고 있는 이상한 광경에 몰두하고 있었다. 특히나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라이오스의 시녀들은 나와 정하얀을 바라봤던 한소라 만큼이나 붉어진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별 게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거 슈바….’ 혹시나 몇몇이 ‘호모나 세상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김현성의 마력이 몸 한 바퀴를 돌 때 즈음에 얼굴에 홍조가 생기자 갑작스레 탄성이 튀어나온다. 당연하지만 이건 마력의 영향일 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나를 걱정해 주는 자리가 갑작스레 이상하게 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이제 괜찮습니다. 현성 씨.” 더 이상 이 자리에 있다가는 이 자리가 본질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서둘러 녀석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충분합니다.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현성 씨 마력이 워낙 커다란 터라… 더 이상 제가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그렇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부드럽게….” “아니요. 마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제다 끝났다고 생각했건만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들의 얼굴이 더 붉어진 것 같다. 서둘러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로… 괜한 걱정을 끼친 것은 아닌지 염려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명예추기경. 정말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라이오스 인들은 절대로 이기영 님과 다른 영웅분들의 희생을 잊지 못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프리스티나 님. 하지만 어떻게 이게 저희들만의 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분들의 보내주신 기도가 아니었다면 그날 저희는 그 악마를 막을 수 없었을 겁니다. 정말로 기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많은 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아….” “그렇게 크게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아마 다른 분들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틀림없이 저희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슬쩍 정하얀과 한소라, 박덕구를 바라보자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프리스티나는 여전히 마음이 성치 않은 모양. 이마를 툭 두드리는 라이오스의 오랜 관습으로 인사를 해오는 것으로 모자라 이쪽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눈에는 눈물을 한가득 담은 채였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드셔도 됩니다. 프리스티나 님. 그리고 다른 라이오스의 인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이러시면 제가 더 난처해집니다. 콜록.” “아. 명예주교님.” “기영 씨.” 기침 한 방에 이곳에 있는 모두가 움찔거리는 꼴은 조금 우습다. 분위기는 점점 더 훈훈해진다. 계속해서 울상이었던 박덕구도 기운을 찾았고 눈시울이 붉어졌던 김현성 또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디아루기아는 나를 쓰레기 보듯 바라보고 있었는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죽을 위기 따위는 없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실제로 내 몸에 이상이 가면 그녀가 가장 먼저 신호를 느끼게 되어 있으니 저런 표정을 하는 것도 당연하리라. 나뿐만이 아니라 정하얀과 한소라도 몸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야 장내는 겨우 평소와 같아졌는데 그 와중에도 이쪽에 감사를 표하는 라이오스 인사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이번에는 바깥에 있는 이들에 대해서였다. “그러고 보니 바깥이 조금 떠들썩한 것 같았는데 혹시나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아니… 그보다 일은 제대로 마무리가 되었는지도….” “일단은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푹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명예 추기경님.” “하지만… 그 악마 소환사 진청이….” 사실은 알고 있다. 이미 차희라에게 모든 경과를 다 전해 들었으니까. 도시를 파괴하려고 한 악마 소환사가 라이오스를 벗어난 것도 알고 있었지만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 지속적으로 라이오스에 신경 써주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했으니까. “일단은 몸을 회복하는 걸 신경 쓰셔야 합니다.” “하지만 바깥이….” “괜찮습니다. 명예추기경. 바깥이 떠들썩 한 것은 악마 소환사 때문이 아니라… 명예추기경 때문입니다.” “네?”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도통….” 사실은 알고 있다. 프리스티나는 살짝 웃으며 창문의 커튼을 걷기 시작. 살짝 문을 열자 기분 좋은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하다. 공식적으로는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아….” 시야에 비친 것은 수많은 라이오스 인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장면이다. 수도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모여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인파. 가히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광경. 이쯤에서 슬그머니 일어서야 하는 것은 당연, 물론 체력이 없으니 비틀거리게 되기는 했지만 박덕구가 나를 꽉 잡아준 덕분에 넘어지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연출한 장면은 아니었지만 나쁘지는 않다. 살짝 손을 들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 심지어는…. ‘얘네들은 왜 울고 난리야….’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순진한 라이오스인들을 보니 내가 다 웃음이 나온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함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등 뒤가 찌릿찌릿 거린다. 서로 울고불고 얼싸안고 있다. 마치 축제라도 일어난 것 같은 분위기다. “하… 하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프리스티나를 바라보자 그녀 역시 조용히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본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모여주신 분들입니다. 영웅분들의 희생을… 지켜본 이후 여러분들이 일어나기만을 저희와 함께 기다려주셨습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요.” “정말… 감사한 광경입니다.” “광장에.” “네?” “괜찮으시다면 광장에 여러분들의 동상을 세우고 싶습니다.” ‘키야아아아… 출세했다, 기영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살짝 웃었지만 프리스티나는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함박웃음을 보내왔다. “라이오스는 절대 여러분들의 희생을 잊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요.” 동맹은 이미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다. 모두가 기쁘게 미소 짓고 있는 상황, 바깥에는 함성이 들려오고 방 안에서는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정리해 보자면 모두가 기쁜 상황이라는 거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마음이 불편한 사람 역시 존재하기는 했다. 살짝 뒤를 돌아보니 고개를 숙인 채 눈치를 보고 있는 카스가노 유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카스가노 유노.’ 어째서 혼자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뻔하다. ‘잘못한 게 있으니까.’ 이유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 본인의 입으로 먼저 고백하기는 했지만 쉽게 용서하기에는 문제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모호하다. 아직 다른 이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더러운 악마 소환사 진청. 녀석이 라이오스를 빠져나가게 도운 것이 바로 그녀였다. # 327 회귀자 사용설명서 327화 라이오스의 영웅(6) 모든 일은 완벽하게 마무리됐지만 뒷마무리가 조금 찝찝하다. 아니, 사실 짜증나는 마음보다는 기쁜 마음이 더 크기는 했다. 결과적으로 생각해 보면 진청을 놓친 것 말고는 모든 게 이쪽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악마소환사가 버젓이 살아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불안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렇고 라이오스의 국민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공화국에 정식으로 악마소환사 진청을 넘기라고 요청을 했지만 아직은 묵묵부답. 사태를 조금 더 긴밀히 파악하겠다는 말 이외에는 들려오는 이야기가 없다. 물론 정황을 긴밀히 파악하겠다는 공화국의 발언은 변명이요 개소리다. 저들이 뭔가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우리가 악마와 대적했던 그 장소는 이미 지도에서 지워져 있었고 빛 무리 이외에는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심지어 라이오스에서는 공화국의 인사들이 넘어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 남은 증거라고는 이토소우타의 심증과 우리가 찍어놓은 여신의 거울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생각해도 저들이 정황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소리를 지껄인다는 것은 어떻게든 진청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거라 해석해도 상관없으리라. 공화국이 교국만큼 흑마법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어난 사건은 중립국 전체에 영향을 끼칠 만한 사건이다. 공화국의 이방인들 역시 죽었고 어떻게 보면 국제 문제로 얽힐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이런 모든 배경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은 일단은 진청의 이야기를 듣고 녀석을 보호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녀석은 이번 사건에 대해 해명하는 동시에 자신의 죄를 나에게 뒤집어씌우려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워낙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이쪽에게 폭탄이 떨어질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하지만 그래도 원한을 가지고 있는 상대가 살아 있다는 점에서는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 물론 이쪽에서도 열심히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악마숭배자 이토소우타에게는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최근 녀석의 이름이 자꾸만 거론되는 이유였다. “악마숭배자 이토 소우타. 그리고 이번에는 악마소환사 진청이라니….” “…….” “혹시 명예추기경님께서는 뭔가 두 사람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아마… 없다고 하기는 힘들 겁니다. 둘이 언제 접촉했는지, 원하는 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같다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요. 어둠은 이미 우리 대륙에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흑마법사들로만 이루어진 집단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영향력을 넓히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진청의 꼬리를 밟은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지만….” “교황청에서 생각한 것보다 상황이 더 심각한 것 같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거군요.” “네. 아마 그들만의 소통 창구가 있을 겁니다. 현재 공화국에서 진청을 보호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공화국 역시 그 뿌리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이미 완전히 물들었다고… 생각하는 게….” “벌써 그렇게까지… 신이시여….” “교국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그 누구도 이토 소우타가 악마숭배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실리아에서 활동했던 그 오랜 기간 누구도 이토 소우타가 악마숭배자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토 소우타가 그대로 교국을 집어 삼켰었다면 저희 역시 지금의 공화국과 비슷한 포지션을 취할 수밖에 없었겠죠. 어쩌면 교국 역시 라이오스처럼 커다란 위협을 마주하게 됐을지도 모릅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군요.” “공화국뿐만이 아닙니다. 각 국가나 도시에도 악마의 손길이 닿은 곳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네. 틀림없어요. 분명히 그럴 겁니다. 일단 제가 이번 일에 대해서 보고서를….” “아! 명예추기경님. 그럴 필요 없으십니다. 마음만은 감사하지만 지금은 일단 명예추기경님의 몸을 회복하는 것 최우선으로 생각해 주세요.” “네? 하지만….” “교황성하가 직접 전하셨습니다. 명예추기경님께서 분명히 정신이 든 이후 곧바로 움직이실 거라고 하시면서… 절대로 무리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로 걱정이 많으시다는 건 이해하지만 몸을 충분히 쉬게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명예추기경님께서 얼마나 교황청과 베니고어 여신님을 생각하시고 계시는 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다시 여신님의 전선으로 뛰어드는 것은 여신님께서도 원하시지 않을 겁니다. 일단은 몸을 회복하는 게 먼저입니다.” “…….” 그 와중에 조금 짜증 났던 점은 이쪽의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 엄살을 부린 것으로 엄청난 효과와 이득을 챙기기야 했지만 이쪽을 과잉보호하는 이들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던 탓이다. 사실 이런 상황은 교황청 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오스칼 님.” “둘이 있을 때는 아리스 시녀라고 불러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명예추기경님.” “아. 네. 아리스 시녀님. 제가 실수했군요. 하하.” “어떻게. 차는 입맛에 조금 맞으세요? 다과도 조금 준비했어야 하는데 급하게 오느라 시간이 없어서….” “하하.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아리스 시녀님이 타주시는 차를 먹으니 벌써부터 몸이 회복되는 기분입니다. 그보다 중립국과의 동맹은….” “네. 잘 진행되고 있어요. 일부 이 종족 왕국 역시 저희와 뜻을 함께 하는 걸 원하고 있기도 하고… 아니, 이건 잊어주세요. 지금 당장은 몸을 회복시키는 게 최우선인데 제가 또 일 이야기를 드렸군요. 명예추기경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지금은 안정을 취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지금 상황이….” “못미더워하신다는 걸 알지만 저희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아리스 시녀님….” “폐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일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주신다면….” 교국의 지도자 아리스 시녀, 아니, 오스칼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는 김현성 역시 이쪽을 아기 새를 보호하듯 보호하기 시작했다. 이번 일이 녀석에게도 충격적이었는지 간이고 쓸개고 전부 줄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성 씨, 이제 슬슬….” “아닙니다. 기영 씨. 아직 조금 더 누워 계셔도 됩니다. 길드와 관련된 업무는 혜진 씨와 희영 씨가 함께 봐주시고 있습니다. 저 역시 힘쓰고 있고요. 그동안 너무 정신없이 달려오셨습니다. 조금 더 쉬셔도 됩니다.”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따뜻한 눈빛을 발사하며 몸을 쉬라고 종용하고 있기는 했지만…. ‘너, 정치 감각 제로잖아.’ 걱정이 없이 지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나마 믿음직스러운 우리 조혜진과 선희영이 열심히 움직여 주고 있는 덕분에 현 사건과 관련된 사항들이 스무스하게 풀리고 있는 느낌. 사실 깨어나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지만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지는 성격상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누워 있는 와중에 영웅들을 기리는 동상이 라이오스의 광장에 올라가고 있었고 심지어 연금술사와 천재검사가 사랑하는 법 6권이 라이오스에 등장했다. 광장에 세워지는 동상이 점점 뚜렷한 모습을 되찾는 모습이 눈에 보일 때마다, 돌아다니는 라이오스의 시녀들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됐다. 실질적으로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지만 교국에서 유행하던 베스트셀러가 라이오스를 강타한 것을 보면 짧은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다. ‘도대체 뭔 소설인 거야. 그렇게 재미있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하니 신기한 것은 당연. 아무튼 간에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이쪽을 둘러싸고 있는 일은 점점 변하고 있다는 거다. 사실 악마소환사의 다음 움직임이 어떨지에 대한 불안감은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공화국은 묵묵부답. 이 즈음에 나 역시 대외적인 일을 완전히 손에서 놓아버렸다. ‘교국이 그렇게 무능하지는 않지.’ 이미 상다리 부러지게 밥상을 차려 눈앞에 대기시켜 놓은 상황, 만약에 이런 상황에서도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면 내 미래를 위해서라도 다른 왕국으로 망명을 가는 게 맞다. ‘대신….’ 외부보다는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준신화 등급, 빛의 연금술사라는 직업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연구일정을 잡은 것은 물론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또한 사랑스러운 회귀자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의 해결. 정하얀이나 차희라를 비롯한 관리가 필요한 인물들의 관리, 이지혜와의 좌담회 등등. 여러 가지 바쁜 일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감정을 빠르게 해소시켰다. 물론 그 와중에도 처리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두 번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죄송합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악마소환사의 동료가 될 준비를 마친 카스가노 유노가 바로 중요한 쟁점이었다. “아무리 죄를 물으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주인님께서 좋지 않게 생각하신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선택을 한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흐으으윽! 버리지 말아주시옵소서. 제발 소녀를 버리지 말아주시옵소서.” 조용히 바라보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모습은 가관. 어떤 이유로 카스가노가 녀석을 살려 보낸 건지는 벌써 몇 번이나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미래가 꼭 맞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이번 사건으로 확인한 나는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쪽이 기절해 있을 때 여러모로 챙겨준 것도 그녀였고 이후 뒷수습과 언론 플레이에도 가장 활발히 움직여 준 것이 바로 그녀다. 대놓고 미워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지혜는 정말로 카스가노 유노를 믿을 수 있냐고 물어오기는 했지만 내 입장에서 카스가노 유노는 충분히 매력적인 패다. 하지만 카스가노 유노와 이쪽이 1회 차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혹시 통수치려고 기 모으고 있는 건 아니겠지?’ 충분히 걱정할 만한 이야기라는 거다. 결과적으로 1회 차, 검은색 쓰레기 이기영은 카스가노 유노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카스가노 유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는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단순히 정신이 망가진 것뿐이다. 확률은 적지만 의심이 많은 나로서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 ‘1회 차의 복수를 설계한다기에는….’ 여러모로 어색한 점이 많다. 일단은 그녀의 생사여탈권을 이쪽이 쥐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나 검은색 세계를 바라보다 나에 대해 다른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의심의 시선을 거두기 어렵다. “…….”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뭐, 다시 한번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였으면 좋겠군요.” “자세히는 설명할 수 없사옵니다. 허나 진청 그자가 그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최후를 맞이해서는 안 됩니다. 주인님께서… 주인님께서….” “…….” “주인님께서 위험에 처할 수도 있사옵니다.” 정말로 나를 걱정하고 있을 확률이 반 이상. 하지만 나를 지옥으로 보내기 위한 완벽한 설계를 머릿속에 담고 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여러모로 머리가 아파지는 사안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 328 회귀자 사용설명서 328화 검은색 세계의 우리(1) 사실 의심이 생긴 것은 이지혜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 봐요.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어떻게 생각해도 결정적인 상황에서 타인을 도왔다는 건 마이너스라고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그 악마소환사 진청인데. 라이벌 하나 줄이자고 이런 말 하는 게 아니에요. 정말로 걱정되서 하는 말이지. 원래 뒤통수 잘 때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한 상황에서 뒤통수 맞고 다닌다니까. 그거 흔한 클리셰라고요.’ 진청을 놓아준 게 카스가노 유노라는 것을 이야기한 직후의 들려온 목소리였다. 당연하지만 틀린 말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물론 뒤통수 잘 때리고 다니는 사람이 잘 맞는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카스가노 유노 같은 경우에는 한 번 정도 생각해 봐야 하는 게 맞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녀와의 만남이 작위적이었던 것은 사실. 물론 카스가노와 나 사이에는 범접할 수 없는 안전장치가 있다.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경계를 푸는 것은 지양해야 했다. 조금 다른 말이기는 하지만, 어딘가에서 유행하던 명대사처럼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다. 아마 내 표정에 깃든 의심을 알고 있기 때문에 카스가노 유노 역시 초조해하고 있는 것이리라. 다른 사람보다 더 분위기에 민감한 카스가노 유노가 겉으로 보이는 온도 차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살짝 분위기를 잡은 채 정면을 바라보자 눈에 띄게 초조한 얼굴을 한 그녀다 다시금 말을 이어왔다. “당시에는 주인님께서 정신을 잃고 계시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설명을 드릴 시간이 없었사옵니다. 이해하시기 힘드시겠지만 적어도 제 행동이… 주인님을 위해서였다는 것만 알아주시옵소서.” 그건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어떤 미래에 대해 봤는지 지금도 설명 못 하는 것이 문제. 이쪽이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면 그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테지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사옵니다. 틀림없이 제 눈으로 미래에 대해 보았사온데, 마치 희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사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시옵소서.” 이런 상황이 문제였다. 물론 그녀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싶기는 하다. 내가 깨어난 직후 자신의 죄를 고백해 온 것 역시 그녀였고 심지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말하겠다고 했으니까. 일부로 벌을 받기 위해 일을 꾸몄다기에는 너무나도 스케일이 큰 장난. 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매일 같이 찾아와 잘못했다고 비는 카스가노 유노를 보면,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확률은 한 없이 제로에 가까울 것 같다. 그러나. ‘아니야. 의심할 필요 없어. 어차피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이 안 돼.’ 위험부담이 있기는 하지만 카스가노를 믿지 않고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 줄기 의심의 끈은 잡아야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일단은 카스가노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전제로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미래를 본 것이 확실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검은색 세계도 아니옵고 과거 역시 아닙니다. 그것만은 확실하옵니다. 제가 본 것은 틀림없이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난 이후 인 것 같았습니다만….” “위험해 처하게 된다는 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뭐라고 설명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목숨이 위험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주인님의 입지나 상황이 위험하다고 표현해야 할지…. 그 마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 미래를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한 직후 확인해 보기 위해 몇 번이나 노력했으나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예 넙죽 엎드려 부복하는 꼴이 가관이다. 뭔가 이쪽이 더 민망해지는 것 같은 장면이기는 했다. “미래가 바뀌었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거나 떠올리지 못했을 확률은 존재하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최근에 제가 말씀드린 미래가 실현되지 않았듯이 미래가 바뀐 것은 제가 장면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사옵니다. 그보다 말씀을 낮춰주시옵소서. 부디 말씀을… 제발 낮춰주시옵소서. 흐으으윽.” 크게 불안해하는 얼굴이다. 사실 이럴 때면 정하얀과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이쪽이 말을 높이는 게 자신을 노예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전조로 받아들이는 모양. 단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존대를 하다 보니 그다지 구별하는 것에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말을 높이고 내리는 게 그녀에게는 무척 중요한 것 같았다. ‘저번에도 높이지 않았었나.’ 사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이런 분위기에 타인 대하듯 존댓말을 쫙쫙 뻗고 있으니 저쪽이 불안해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리라. 물론 말투 같은 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 당장은 카스가노 유노가 탐탁치 않으니 존댓말이 나가기는 했지만, 그녀의 답답한 모습에 짜증이 치솟자 반말도 함께 튀어나온다. “미래가 변할 수도 있다는 건 카스가노 유노 님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번에도 도시가 폐허가 되지는 않았고요.” “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를 보내야 한다는 느낌이…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다시 말하면 단순한 감 때문에 그를 놓아줬다는 게 되는 겁니까? 내가 난처해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조,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네. 아마…. 죽여주시옵소서. 흐으으윽.” “사실 너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납득이 안 돼.” “저 역시 당혹스럽사옵니다. 흑… 그동안 많은 것을 봐왔지만 안개가 낀 것처럼 보이지 않고 기억나지 않은 적은 처음입니다. 마치 외부에서 누군가 개입한 것처럼… 네. 누군가 방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옵니다.” “외부에서 개입….” “네. 그렇사옵니다. 정말로 이런 적은 없었는데…. 죽여주시옵소서.” 사실 그동안 카스가노 유노는 계속해서 같은 변명을 해왔지만 저 외부의 개입이라는 말이 오늘따라 새롭게 들려온다. ‘이거….’ 왠지 모르게 의심이 가는 게 있기는 하다. ‘시스템인가.’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초월적인 존재는 현세의 일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개입할 만한 여지가 있다. 만약 카스가노 유노가 본 미래가 녀석이 원하지 않는 미래, 혹은 알리기 싫은 미래라면 그녀의 머리에 안개가 낀 것 같은 현상은 설명이 된다. ‘그럴 듯해.’ 유노가 이쪽의 통수를 칠 생각이 없다는 걸 전제로 생각해 보면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는 거다. 한 가지 의문점은 어째서 초월적인 존재가 그녀가 본 미래를 기억하지 못하게 막았냐는 것. 시스템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녀석에게 충분히 호의적이었다. 실제로 녀석도 나에게 많은 투자를 하기도 했고, 욕 아닌 욕을 해대지만 결과적으로는 항상 이쪽에게 떡을 던져주고 있었다. 물론 우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이유야 뻔했다. 내가 사랑스러운 회귀자에게 납작 엎드려 있었으니까. 현재도 찰싹 달라붙어 있는 걸 생각해 보면 지금 와서 태세 전환 버튼을 누르기에는 타이밍이 조금 이상하다는 거다. 마침 준신화 등급의 직업을 얻었고 심지어는 신성력까지 사용 가능한 체질이 되어버렸다. 이번 업적은 완벽했고 악마 역시 몰아낼 수 있었다. 어떻게 봐도 이쪽은 초월적인 존재의 아군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미루어 봤을 때, 세울 수 있는 가설은 두 가지. 첫 번째는 이쪽을 바라보는 초월적인 존재가 하나가 아닌 경우.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는 한 추론이다. 어쩔 수 없이 나를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는 한편,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놈이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위험에 처하게 된 미래를 카스가노가 떠올리지 못하게 조치한 것은 혹여나 이쪽이 위험을 피할 상황을 고려해서 일수도 있다. 말하자면 내가 위험에 처하거나 심할 경우 죽기를 바라고 있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외에 떠올려 볼 수 있는 남은 한 가지…. 그러니까 초월적인 존재들이 나를 적대하지 않을 경우에 생각할 수 있는 나머지는. ‘현성이 때문인가?’ 내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상황이 어떤 식으로든 김현성과 관련되어 있을 경우다. 뜬금없기는 하지만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느껴졌다. 시스템과 초월적인 존재는 세계관의 주인공인 김현성을 애지중지 키우기도 했고 실제로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내가 수많은 혜택을 받은 것 역시 그 이유. 만약 내가 김현성의 적으로 시작했더라면 이 정도로 선물을 결코 쏟아내진 않았으리라.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 카스가노 유노가 본 장면이 김현성이 나를 적대하고 있는 장면이고 만일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됐을 경우에는. ‘현성이 통수도 후려 버리려나….’ 초월적인 존재는 내가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뒤통수를 때리는 미래를 경계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정이 많이 들었는데. 나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닌데….’ 물론 실제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뭐 어차피 그냥 추론이니까.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흥미롭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이 두 가지 가설은 성립하는 것이 불가능. 두 이야기 모두 악마소환사 진청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둘 중에 하나가 진실이여도 카스가노 유노가 악마소환사를 살려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외부의 개입이라는 소리에 괜스레 머리를 강타한 가설이기는 했지만 영양가 없는 추론이었다. 퍼즐 조각은 모인 것 같았지만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 느낌. ‘1회 차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나.’ 이건 너무 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알아봐서 나쁠 건 없다. 하지만. ‘볼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지.’ 그동안 시도는 수차례 해왔지만 카스가노는 박덕구의 날 이후로 나와의 연결에 성공한 적이 없다. 매번 고개 숙인 채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카스가노의 모습은 마치 발기부전을 겪는 중년의 모습이다. 시도할 때마다 실패하다 보니 본인도 자신감을 잃었는지 먼저 함께하자는 말을 건네는 경우도 적어졌다. 실망하고 짜증 난 내 얼굴을 보기가 무서웠던 것이리라. “검은색 세계는….” 갑작스레 튀어나온 혼잣말 카스가노가 깜짝 놀란다. 순식간에 얼굴에 절박함이 감돈다. “노, 노력해 보겠습니다. 힌트가 될지도 모르는 만큼 이번에는 꼭….” “할 수 있겠어?” “오늘은 컨디션도 좋습니다. 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대하는 표정을 짓는다. 정면을 바라보자 카스가노는 천천히 감은 눈을 뜨고 연신 낑낑댔다. 어떻게든 미래, 혹은 검은색 세계를 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는 있었지만 잘 되지 않는 모양인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 ‘이번에도 잘 되지 않으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하는 표정이다. 애초에 볼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연결하고 싶다고 연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실망이 물밀듯이 올라온다. ‘이번에도 못 하겠네.’ 하도 이런 상황을 많이 겪다 보니 이제는 좀 느낌이 온다. 낑낑대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고개 숙인 똘똘이 같은 표정. 결국에는 슬그머니 뜬 눈을 감은 채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 그 절박한 얼굴에는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해야 한다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터무니없는 부탁이옵니다만….” “…….” “그… 저, 저번에 주인님과 제가 연결되었을 때 저희의 신체 역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계신지요.” “기억은 하지만.” “가능성은 낮지만 한번 시도해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어쩌면 입맞춤이나 그, 그에 상응하는 행위로 연결될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얘는 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하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나쁘지 않으리라.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손을 잡고 살짝 입을 맞추는 것은 순식간. 무척이나 붉어진 얼굴만큼이나 마력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전히 눈동자에 깃든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고개 숙인 똘똘이 같은 표정이다. ‘아 답답하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하다. ‘이번에도 잘 안 되면 어떡하지.’ 혹은. ‘버려질 거야. 실패하면 버려질 거야.’ 방법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신감의 문제. 전형적인 고개 숙인 친구들의 모습이었다. 그동안은 내버려 두고 있었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자신감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잘할 수 있을 거야.” “아….” “이번에는 잘할 수 있을 거다. 천천히. 마음 편하게 먹어도 돼. 옳지. 그렇게. 천천히. 지금은 그냥 마음을 편하게 먹고 몸을 맡긴다고 생각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살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적극적으로 스킨십을 시도하자 뭔가 반응이 오는 느낌이 든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은 물론 금붕어처럼 허공에 입을 뻐끔댄다. “아아아… 아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사실 널 의심한 적도 없어, 카스가노. 단지 투정부렸을 뿐이지. 내가 널 아낀다는 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번에도 그럴 거야. 조급하게 시도하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하자.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돼. 마음 편하게 먹고 천천히. 옳지. 그래. 옳지….” 그냥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시도했을 뿐이지만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숨을 불어넣자 고개 숙인 똘똘이의 표정을 하고 있던 카스가노가 점점 고개를 든다. 마치 용트림이라도 하는 것 같은 굳건한 모습. ‘설마 이런 걸로 되겠어?’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직후 순식간에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는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나이스!’ 카스가노 개인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발기부전을 해결한 것이다. # 329 회귀자 사용설명서 329화 검은색 세계의 우리(2) [제한적인 정보를 열람합니다. 전설 등급의 특성, 마음의 눈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좋아.’ [플레이어 카스가노 유노의 특성, 본질과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는 눈이 저항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우연. 두 번째는 외부의 개입으로 검은색 세계를 훔쳐볼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굉장히 부드럽게 넘어온 것 같다. 특성의 등급은 변함이 없었지만 직업이 준신화로 진화한 영향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인간 자체의 격이 올라간 것 같은 느낌. 기분이 좋은 것이 당연하리라. 전조는 저번과 같다. 순식간에 이쪽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동시에 보이고 있는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기 시작. 마치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감각이었지만 이상은 없다. 이미 몇 차례나 봐왔던 만큼 당황스럽지도 않다.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앞으로 펼쳐질 미래만큼은 아니었지만 검은색 세계 역시 나에게 충분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뭐지. 뭘 보는 거지?’ 기왕이면 이번에 있었던 일의 힌트, 그게 아니라면 저번에 봤던 장면을 이어서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일단은 검은색 세계의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뭘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은 짜증 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쓸데없는 장면을 볼 수 있어도 그게 어딘가. 잠깐이지만 사랑스러운 회귀자와 같은 선상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메리트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순식간에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지나가기 시작. 예고도 없이 시야에 비친 장면은…. ‘어?’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린 사랑스러운 회귀자와 가면을 쓰고 있는 녀석. 생각보다 더 처참해 보이는 김현성과 녀석을 내려다보고 있는 가면 쓴 남자. 아니, 성별도 명확하지 않다. 녀석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조차 힘들다. 왠지 모르게 실루엣이 나와 닮은 느낌이지만 이쪽과는 미묘하게 분위기가 다르다. 정황상 저 쓰레기가 김현성을 몰아붙인 느낌이다. 아무리 회귀하지 않았다고 해도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생각해보면…. ‘이 새끼가 1회 차 빌런이구나. 이 더러운 쓰레기.’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광경이 내 가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이곳이 어떤 장소였는지조차 눈치챌 수 없을 정도. 세계의 종말이 오면 이렇게 변할까 싶을 정도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시체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고 심지어 그 시체가 실시간으로 부패하고 있다. 여기저기에서는 아직 살아 있는 인간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고 몸이 녹아내리거나 자해하고 있는 이들도 보인다. ‘생지옥이네, 생지옥이여.’ 무언가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당연히 어떤 것에 영향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만약 내가 저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힌트라도 찾을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이미 흘러갔던 장면을 바라볼 뿐이다. ‘도대체 뭐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눈앞의 장면이 정확히 언제쯤 일어난 일인지도 파악하기도 힘들다. ‘우리 현성이 죽은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을 잠깐 해보기는 했지만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검은색 세계의 엔딩은 아닌 모양.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 묘령의 여인이 김현성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 역시 정상이 아니다. 서 있는 게 기적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몸이 망가져 있다. 당연하지만 김현성의 앞을 막아선 이가 누구인지 이쪽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같은 파란 길드 소속이니 알고 있는 게 당연하리라. 조혜진. 김현성의 부관. 그나마 정치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파티원이었고 규격 외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괴물에 준하는 창술을 갖춘 실력자다. 이쪽과는 간혹 술을 함께 마시는 친구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녀의 망가진 모습이 기분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창 하나에 의지한 채 서 있는 모습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다. 심지어 입고 있는 옷의 대부분이 찢어져 있는 모습은 가관. 어디에다가 눈을 둬야 할지 힘들 정도다. ‘이건 본의가 아니야….’ 사실 그녀의 민망한 차림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검은색 세계의 이쪽도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은 느낌. 사실 민망하다기보다는 처절해 보이는 외관이었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리라. 아무튼 간에 처참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가면 쓴 남자를 노려보는 눈빛은 그녀가 내가 아는 조혜진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윽고 땅바닥에 머리를 내리찍으며 천천히 입을 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살려주십시오.’ ‘…….’ ‘…….’ ‘네?’ ‘살려… 주십시오.’ ‘푸핫! 신창이라고 불리며 존경을 받았던 여자가 내뱉을 만한 대사는 아닌 것 같은데. 목숨이 아깝기는 한가 봅니다.’ 목소리는 변조된 것 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이 더러운 빌런의 말투가 나와 굉장히 흡사하다. ‘부디… 살려주십시오. 제 목이라면 기꺼이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부디. 부디 길드 마스터만은….’ ‘…….’ ‘부탁드립니다. 자비를, 부탁드립니다.’ 내가 아는 그 조혜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비굴하다. 언제나 당당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흙먼지와 오물이 된 모습으로 이마를 땅바닥에 가져다 댔다. 단순히 굴욕적이라고 말할 상황이 아니다. 자존심이 고고한 그녀가 저런 모습을 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조혜진은 웬만해선 자신의 뜻을 굽히는 일이 없다. 같은 인물인지 이미지가 매치가 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건 가면을 쓴 녀석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 과장되게 놀란 제스처를 취한 녀석이 다시 한번 말을 이어왔다. ‘아아. 그쪽이었군요. 그쪽이었나 봅니다. 참, 김현성 이 사람은 인망도 좋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대신 죽는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지. 부럽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부디. 부디.’ ‘어떻게 할까…. 사실 오늘은 죽이려고 찾아왔지만 당신 같은 사람만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집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몇 번 겪었고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게 어떤 건지 뼈저리게 알고 있거든요. 저는 이런 인류애를 좋아해요. 멋있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모습이기도 하고요. 마치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장면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니, 존경하는… 무슨 감정인지는 제 알 바 아니지만 그래도 소중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모습은 숭고합니다. 네. 숭고해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슬프기보다는 기분이 나빠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고 구역질이 나옵니다. 떠올리기 싫은 장면이 자꾸만 떠올라서 무척 힘이 든다 이 말입니다. 타인의 신파는 제가 하고 있는 일에 죄책감을 불러일으켜요. 아, 혹시 제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하신다면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조혜진 님. 저도 엄연히 사람입니다. 사람.’ ‘…….’ 보면 볼수록 찝찝한 감정이 새록새록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저 가면 쓴 악당 놈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조금 전부터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엄연히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바라보고 있는 검은색 세계다. 적어도 그녀나 그녀와 연결되어 있는 나, 둘 중에 하나는 등장했어야 했다. 욕이라도 내뱉고 싶은 심정. 생각해 보면 그럴 듯하기는 하다. 검은색 세계의 이기영은 구제가 불가능한 쓰레기 중에 쓰레기였고 브레이크를 밟아주던 박덕구를 잃은 뒤에는 완전히 정신을 놔버렸다. 목적은 당연히 녀석의 복수. 박덕구가 죽은 시점에서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여기까지 닿았다고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왠지 모르게 딱 들어맞는 느낌이다. 조혜진이나 김현성의 외관으로 몇 년 정도가 지난 시점인지 때려 맞추고 싶었지만 마력에 영향을 받아 늙지 않은 둘의 외관으로는 유추하기가 어렵다. 아무튼 간에 불안감은 점점 더 차오르기 시작.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는 만큼 성급한 판단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들려오는 가면 쓴 쓰레기의 말은 가관이었다. ‘보세요, 조혜진 님. 계속해서 머리가 지끈거리지 않습니까. 저 역시 당신 하나로 만족하고 싶지만 자꾸만 머리가 아파오는 바람에 조준이 잘 안 될까 걱정입니다. 혹시나 당신 뒤에 있는 사람이 맞을까 봐요.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되죠. 기껏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려고 했는데 제 손이 미끄러져서 실수가 벌어지면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다면….’ ‘아아. 그만 두세요, 혜진 씨. 그건 아닙니다. 그건 아니에요. 자결해라! 랜서! 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쪽도 복수의 일환이니까 마무리 정도는 제 손으로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두통만 가시면 됩니다. 두통만요. 그럼 전부 해결됩니다.’ ‘제가… 뭘 하면 되는 겁니까.’ ‘굳이 뭔가를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사실 뭘 시켜야 할지도 모르겠고 말이죠. 저와 함께 가자고 해도 당신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게 뻔하니까요. 저도 폭탄을 떠안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뭐, 됐습니다. 이 두통은 제가 알아서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약속은 지킵니다.’ 어디에선가 화살이 날아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순식간에 조혜진의 몸에 화살 다발이 박히기 시작. ‘쿨럭….’ 조혜진은 고통보다는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조혜진의 얼굴에 가면 쓴 남자는 다시 한번 말을 내뱉는다. ‘조혜진 님. 당신 길드의 마스터는 살아 돌아갈 겁니다.’ ‘고… 맙습….’ ‘이런 상황에서 감사까지 받으면 더 슬퍼집니다. 저에게 감사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말이나 하세요. 당신 같은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유언을 전해드릴지는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보다는 더 나을 겁니다.’ ‘하아… 하아. 길… 드 마스터.’ ‘네네.’ ‘길드 마스터.’ ‘네네네.’ ‘좋… 좋아… 했….’ ‘네네…. 확실히 받았습니다, 조혜진 님.’ ‘…….’ ‘아… 벌써 죽으셨군요.’ ‘…….’ ‘사실 당신은 싫지 않았었는데….’ ‘…….’ ‘어쩌겠습니까. 서로가 처한 상황이 다른데. 뻔한 대사기는 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만났다면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저는 당신의 적이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당신을 존경했어요. 마지막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사실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신창의 최후는 숭고하기보다는 굴욕적인 게 더… 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당신은 이미 죽었는데.’ 저 쓰레기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대충 알 것 같다. 검은색 세계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조혜진은 신창이라고 불릴 정도로 명성 높은 이방인이다. 숭고한 죽음보다는 굴욕적인 죽음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틀림없으리라. 하지만 조혜진의 주변을 쉽사리 떠나가지 못하는 걸 보니 본인의 말대로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는 모양. 뭘 고민하는지 뻔하다. 조혜진의 시체를 이대로 내버려 둘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절대로 저 가면쓰레기와 내가 동일인물은 아니지만 나였더라도 박덕구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 조혜진이 저런 최후를 맞이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 결심이 섰는지 천천히 손을 뻗는다. 굴욕적인 최후를 언급한 것과는 다르게 그녀의 시체에서 검은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창을 들고 재가 된 자리에 꽂아 놓는다. 천천히 뒤로 돌아 얼굴을 가린 가면을 벗고, 남자는 중얼거린다. ‘기분 더럽네.’ 동일인물이 아닐 거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녀석의 얼굴은. 완벽하게 이쪽과 같은 얼굴이었다. # 330 회귀자 사용설명서 330화 검은색 세계의 우리(3) 순간적이지만 정신이 멍해졌다. 반가울 리가 없었다. 누가 봐도 인간 쓰레기 빌런처럼 보이는 1회 차의 이기영에게 저주를 퍼붓고 싶어졌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 자체가 상당히 달라졌다. 다크써클이 깊게 내려와 있었고 지금보다 살도 많이 빠졌다. 현재의 나와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머리가 무척이나 복잡해지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생각을 정리하기가 힘들었다. 막장 루트를 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스케일이 커다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탓이다.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이 사단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은 정신을 잃었고 조혜진은 죽었다. 주변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고 사망자 역시 집계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많다.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듯한 모양새, 아니, 틀림없이 전쟁일 것이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거 혹시….’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그동안 발에 땀나도록 찾아다닌 놈이 이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순식간. 조혜진을 죽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원한을 살 만하다. 샤오린이 이쪽을 가면남이라고 불렀을 때, 김현성이 보여준 반응을 떠올려보자 내 가설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보여준 민감한 반응이 샤오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가면남에 중점을 뒀을 수도 있겠다. 직후 보여준 어색한 표정 역시 무척 신경 쓰이기 시작. 조금 더 상황을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이쪽을 몰아내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 장면의 뒷이야기를 보고 싶은 나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영상을 되감기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혜진에게 화살이 떨어지던 장면으로, 내가 처음 김현성을 바라보고 있던 장면으로,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기 시작한 장면은 이제는 뭐가 뭔지도 알아보기 힘들다. 이게 뭔지는 대충 알고 있다. 저번에도 이런 식으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었으니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시간을 되감고 있다는 것. 중간 중간 흥미로울 것 같은 장면들이 눈에 띄지만 당연히 저게 무슨 상황인지, 어떤 건지 정확히 알 순 없었다. 카스가노 유노와 내가 함께 있는 모습 역시 순식간에 지나간 이후에 비치는 모습은…. 정하얀? 정하얀과 내가 함께 있었다. ‘오빠, 사랑해요. 진심으로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이건 또 뭐야. 어째서 정하얀과 내가 함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가 보기에도 꽤나 달달해 보인다. 특히나 놀라웠던 것은 정하얀의 눈빛. 지금 같은 광기나 집착 따위는 없다.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 순박한 소녀 같은 눈빛이었고 툭 하면 부러질 것만 같은 느낌이다. 커다란 눈망울도 여전했고 어깨까지만 내려오는 머리, 심지어 잘 꾸미지 못하는 외관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여운 얼굴을 보니 내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지만, 지금의 정하얀은 정말로 귀엽다. 이윽고 눈앞에 튀어나오는 모습은 가관. 심지어 사랑을 나누는 장면까지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펼쳐진 광경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다이나믹하다. 검은색 세계의 나에게 매달리다 시피 하는 정하얀을 바라보는 건 양심이 찔리기야 했지만 어차피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나 본인. 그나마 자신 있게 마주할 수 있다. 물론 얼굴이 붉어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다. 현세의 나도 정하얀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찝찝함은 금방 사라진다. 그 와중에도 정하얀의 행동 하나하나가 굉장히 수동적인 것이 눈에 띈다. 무척 적극적인 지금과 비교해 보면…. ‘그냥 다른 사람 같은데.’ 혹시나 얼굴이 닮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정하얀. 울고불고 하는 모습도 여전했고 어떻게든 내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보인다. ‘네. 오빠 말이 맞아요! 오, 오빠를 만난 건 운명인 것 같아요. 운명이요. 틀림없이 운명일 거예요.’ 라거나. ‘자, 잘, 잘못했어요. 정말로 히끅…. 잘못했어요.’ 이런 모습들은 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정하얀을 만났는지도 잘 모르겠다. 박덕구가 옆에 없는 걸로 봐서는 정하얀과 만난 것은 박덕구가 죽은 이후. 너무나도 정보가 없기 때문에 더욱더 관심이 생긴다. 정하얀과 내가 1회 차에도 접점이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지금 정하얀에게 이쪽이 시달리는 것도 전생에 지은 죄를 갚기 위해서인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 만큼 괜스레 주의 깊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저 쓰레기 같은 놈이 정하얀에게는 어떤 짓을 하는지 궁금했던 탓이다. 하지만 보이는 모습은 그것과는 정 반대. 장담컨대 이상적인 남자친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 정하얀은 항상 밝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 와중에 조금 의아했던 점은 그녀와 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 어디서 만나는지는 알 수 없다. 마법 연구실 같기도 했고 커다란 방 안이기도 했다. 타인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내가 정하얀에게 감금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1회 차의 정하얀은 2회 차의 정하얀이 하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도대체 뭐야.’ 궁금하기는 했지만 궁금증은 금방 사라진다. 답을 찾았다기보다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광경에 할 말을 잃었기 때문이다. 한 번 더 훅 하고 장면이 지나간 이후 비친 모습은 가관. 정하얀은 학대당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학대당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쪽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는 모습이 보인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집착하고 혹시나 미움 받을까 자신에게 행해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쪽을 안아주는 모습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정하얀의 애정은 어떻게 봐도 무조건 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헤헤. 사랑해요.’ 웃으면서. ‘너무 좋아요. 바보같이 품에 안긴다. 검은색 쓰레기는 입꼬리가 스물스물 올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간다. 정하얀이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다시 한번 풍경이 뒤바뀌기 시작. 이후에 비친 장면은 조용히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정하얀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검은색 세계의 내가 이상한 수정구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수정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은 너무나도 똑똑히 내 시야에 비친다. 당시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산발이 된 머리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는 그녀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 ‘뭐야 이게.’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천장 위에 달려 있는 밧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방안에 있는 물건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혀져 있다. 편지를 계속해서 읽고 있는 모습은 가관. 무슨 내용인지까지는 보이지 않지만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수십, 아니, 수백 장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바보 같이 웃으면서 편지를 읽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으로 보건대 저 많은 양의 편지에는 꽤 행복했던 추억도 적혀 있었던 것 같았다. 한 차례가 아니라 이쪽과 정하얀이 만남을 가지는 내내 받아오거나 써왔었던 편지 같았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얼굴은 일그러지고 눈물이 터져 나온다. ‘좋아해요. 사랑해요. 흐윽. …그러니까 돌아와 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돌아와 주세요.’ 물론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혼잣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검은색 세계의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녀는 주변을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였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더 잘할게요.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이제 싫어졌다는 말은 하지 마요.’ ‘…….’ ‘히끅. 흐그윽. 제발요. 부탁이에요. 보고 있다면 다시 말을 걸어줘요, 오빠. 평소처럼요. 이렇게는 싫어. 이렇게 헤어지는 건 너무 싫어.’ ‘…….’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잖아요. 저는 전부 기억해요. 용기내서 고백한 것도 그때 깜짝 놀란 오빠 표정도. 그리고 우리가 맺어진 것도 전부 기억해요. 처음 맺어진 날도, 그리고 싸운 날도, 오빠가 화를 낸 날도 전부 다 기억해요. 전부 다요. 보고 싶어요. 정말로 보고 싶어…. 정말로… 이제 다시는 싫다는 소리 안 할게요. 오빠가 시키는 건 전부 다 할게요. 이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도 상관없어요. 어떻게 되도 괴롭지 않아요. 오빠만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 다시 돌아와 주세요. 싫어졌다는 말은 하지 마요. 시키는 건 전부 다 할 테니까. 흐윽. 흐으윽….’ ‘…….’ ‘운명이라고 했잖아요. 우리가 만난 건 분명히 운명일 거라고 했잖아요.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다시 만날 거라고 말했잖아요. 계속해서 같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히끅…. 그건 너무 싫어. 오빠가 없는 건 너무 괴로워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어요. 아무것도요. 차, 차,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아. 차라리….’ ‘…….’ 하지만 계속해서 머뭇거리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결심은 했지만 쉬울 리가 없다. ‘히끅. 히끅….’ 하는 딸꾹질 소리도 들려왔고 계속해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천장을 바라보기도 하고 바깥을 바라보기도 한다. 의자 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 역시 수차례. ‘너무 괴로워…. 아무 생각도 않나…. 무서워. …도와주세요, 오빠. 제발 도와주세요. 다시 예전처럼 웃어줘요. 히끅. 흐으으윽.’ 머리를 부여잡고 웅크리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시선은 천장에 고정된 밧줄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괜스레 입맛이 쓰다. ‘그래…. 오빠가 말했어.’ ‘…….’ ‘우, 우리는 다음 생에서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었어. 맞아. 잠깐 아픈 것뿐이야. 잠깐만 괴로우면 편해질 거야. 깜깜해지지 않을 거야. 다음 생에서도 만난다고 했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히끅….’ ‘…….’ 그녀는 몸을 떨었다. 천천히 의자를 밟고 올라가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어 보인다. 자신 스스로가 목숨을 끊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별거 아닌 이유로 목숨을 끊는다고 말하는 부류도 있지만, 각각이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무게는 모두 다르다. 살아갈 용기보다 죽을 용기가 더 컸을 때밖에 이루어지지 않는 극단적인 선택이다. 바보 같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솔직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괴롭게 느껴진다. ‘후우. 후우…. 오빠도 알아줄 거야.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줄 거야. 내가 주, 죽었다는 걸 알면 평생 기억해 주겠지? 어쩌면 후, 후, 후회할지도 몰라. 슬퍼할지도 몰라. 나는 사라지지만 평생 기억 속에 남을 수도 있을 거야. 잊히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나아. 응. 그, 그게 더 나아. 다음 생에서도 우리는 만날 거니까. 오빠가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으응… 맞아.’ ‘…….’ ‘아니야. 어, 어쩌면 구해주러 나타날지도 몰라. 오, 오빠는 항상 내, 내가 괴로워할 때 와줬으니까.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 줄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거야. 히끅… 어쩌면 그럴 수도….’ 뚝뚝. 눈물이 계속해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목소리는 점점 떨린다. 숨소리는 조금씩 거칠어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흐느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흐으으으윽. 히끅.’ ‘…….’ ‘흐으으윽…. 히끅. 제발. 제발….’ 머뭇거리기를 수차례. 하지만 정하얀은 결국 결단을 내린다. 스스로 걸어 천천히 밧줄을 목에 매달기 시작한다. ‘켁… 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충분히 줄을 자르려면 마법으로 자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 때문에 더욱더 보고 있기 괴롭다. 검은색 세계의 이기영이 보고 있는 수정으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자 순식간에 내 몸이 빨려 들어간다. 눈 바로 앞에서 바둥거리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친다. ‘구… 구해줄… 켁. 올 거야. 오빠는… 올 거야.’ 당연하지만 와줄 리가 없다. 하지만 정하얀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린다.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조금 이상했던 것은 그녀가 어느 한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 착각이겠지만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은 틀림없이 내가 있는 곳이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봤지만 이쪽의 뒤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빛을 잃어가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나다. 지금의 상태가 타인의 눈에 비칠 거라고 생각도 못 했지만 죽어가는 정하얀의 눈에는 보이는 모양. 물론 내 착각일 수도 있고 정하얀이 보는 것이 환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의 정하얀은 나를 바라보고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와닿고 있었으니까. ‘와줬어. 구하러… 와줬어.’ 점점. 몸이 늘어진다. 달려들어 저 밧줄을 끊고 싶지만 당연히 나는 검은색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가 없다. 입을 열어보지만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다행. 다행…. 이제는 정말 함께….’ 이상하게도.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정하얀의 눈에서도 마찬가지다. 버둥거리는 몸으로 손을 뻗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사랑….’ 그걸로 끝. 미동도 없는 모습에, 이상할 정도로 입술이 꽉 다물어졌다. # 331 회귀자 사용설명서 331화 검은색 세계의 우리(4) 동요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박덕구 때와 마찬가지다. 동요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충격이 꽤나 크다. 그래도 정이 들었던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다. 괴롭지 않을 리가 없다. 아니, 내가 이 정도로 크게 동요할 거라고는 사실 스스로도 몰랐다. 물론 정이 든 것은 사실이지만 가끔 정하얀이 짜증 나게 느껴질 때도 있었으니 이런 이질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아무튼 간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차피 이건 2회 차, 내가 있는 시간대에서는 벌어지지 않을 일일 뿐이다. 지나치게 몰입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몰입하게 되는 상태에 있다는 게 짜증 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정하얀은 아주 행복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1회 차와는 다르다. 호흡을 조금 고르자 그제야 조금 심신이 안정되는 듯한 느낌. 그 와중에 무척 당황스러웠던 것은…. 정말로 지은 죗값을 치르는 거였잖아. 슈바. 농담 아닌 농담이 현실이 되어버렸다는 것. 단순히 잘못했다 정도가 아니라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정황상 정하얀을 절벽 끝까지 몰아서 절벽으로 뛰어 내리라고 종용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 벌을 내가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점점 더 당황스러워지기 시작. 사실을 말하자면 정하얀이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된 것은 8할이 내 탓이었지만 그래도 남 탓을 할 거리가 있으면 탓하게 되는 게 소시민적인 사고방식이다. 몰려오는 씁쓸함에 다시금 입맛을 다셨을 때, 다시 한번 나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 뒤바뀐다. 가장 최근에 카스가노와 링크했을 때 역시 꽤나 많은 것을 보게 된 느낌이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 이쪽이 힘을 실어준 것이 약빨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보게 된다는 건 운이 좋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아마 지금 보게 될 장면이 시간상으로는 가장 빨리 일어날 일이 될 것 같았다. 박덕구가 죽고 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 무척 야위어 있고 독기로 가득 찬 검은색 세계의 나를 확인한 순간, 그런 생각이 머리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지, 지금 검은색 세계에 있는 내가 어디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지하수로 같이 보이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버려진 던전 같기도 하다. 그러나 검은색 세계를 볼 때 너무 불친절하다는 건 어쩔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쪽이 향하는 장소가 좋은 곳은 아니라는 거다. 저런 장소를 지난 이후에 꿀과 젖이 흐르는 땅에 도착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 맞지 않는다. 예상대로 어두운 곳 한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오랜만이네요. 그러니까… 이기영이라고 했었나요? 헷갈린 건 미안해요.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하지는 못해서….’ ‘아뇨. 괜찮습니다.’ ‘더 이상 이쪽은 찾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 솔직히 말하면 살아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죠. 이렇게 보니 반갑네요.’ ‘사연이 있었습니다. 뭐… 별로 궁금하진 않으실 것 같지만.’ ‘당신 말이 맞아요. 중요한 건 어떻게 살아 있는지가 아니죠. 당신이 어째서 이곳을 찾아왔는지. 몇 년 전, 제 제안을 확실히 거절하셨는데… 아, 그러고 보니 덩치 큰 남자는 죽었나요?’ ‘…….’ ‘오래 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예상이….’ ‘…….’ ‘솔직히 그 덩치는 그때까지 살아 있던 게 기적….’ ‘그 입 다물어.’ ‘네?’ ‘그 입 다물라고 했다. 한 번만 더 지껄이면 네 입을 그대로 찢어버릴 테니까.’ ‘제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지금 그 말 저한테 한 게 확실해요?’ ‘그럼 너한테 했지, 더러운 년아.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니 뭐니 개짓거리나 하다가 뒤통수 맞고 싸구려 매음굴이나 굴러다니던 년이.’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선희영?’ ‘이 미친 자식이….’ 넌 또 왜 거기서 튀어 나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현 파란 길드원인 선희영. 그 끝이 좋지 못했을 거라는 건 대충 예상했지만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일면식이 있었던 모양. 그다지 사이가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반가운 사람이다. 지금과는 생김새도 무척 다르다. 갖은 고생을 한 게 드러난 얼굴. 그래도 선한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과는 다르게 얼굴에 조금의 광기가 서려 있었다. 빈민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싸구려 매음굴을 돌아다녔다고 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너무나도 달라진 모습에 입이 벌어진 것은 당연지사. 조금 의문점이 있었던 것은 어째서 김현성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냐는 것이다. 아마 음지에서만 활동했거나 대외적인 일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하는 게 맞으리라. 어쩌면 비교적 빨리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상황에 그건 크게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당신 죽고 싶어?’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정신 나간 년.’ ‘너!!’ 어째서 이 장소에 그녀가 있냐는 것보다는 여기가 어떤 장소인지가 더 신경 쓰인다. 예전에 찾아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소리고, 했던 제의를 거절했다는 건 또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예상이 가는 게 없는 것은 아니다. 기왕이면 이쪽의 예상이 틀리기를 바라는 게 맞지만 더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만. 거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희영 씨. 그리고… 기영 씨는… 이거 정말로 오랜만이군요.’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 1회 차의 또 다른 빌런이자 김현성의 적. 그리고. 살인여단의 주인. 당연하지만 2회 차에 봤던 모습과는 무척 다르다. 마음의 눈으로 스탯을 보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다. 사실 굳이 볼 필요도 없다. 녀석이 강자라는 건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생김새도 여전하다. 허리춤에는 여러 자루의 검을 달고 있고 입고 있는 장비는 경갑옷. 가벼운 움직임을 선호하는 건 여전한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청난 쓰레기로 성장한 것 같은 모양새. 이런 쓰레기 자식을 2회 차에 훌륭하게 처리한 내 자신이 자랑스러워진다. 자리한 것은 녀석뿐만이 아니다. 이기철? 튜토리얼 던전에서 불타는 좀비의 먹이가 되어버린 녀석이다. 왠지 모르게 친숙한 이름을 한 범죄자도 눈에 보였고 그밖에도 다양한 놈들이 눈에 띈다. 물론 전부 지금의 나는 모르는 얼굴이다. 멤버는 대충 봐도 10명이 넘어보였고 모두가 상당한 수준에 오른 강자처럼 보였다. 그야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그렇게 기겁할 정도로 악행을 떨쳐온 녀석들이니 힘을 갖춘 건 당연한 일이리라. 차희라나 박연주 같은 교국 8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 바로 밑 단계에서는 이름을 날릴 만한 녀석들의 모임. 여단은 내가 기존에 상상하고 있었던 모습보다 더 강했다. 아무튼 간에 정진호의 반가운 인사에 검은색 세계의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에 답하기 시작. 분위기가 꽤나 험악했지만 검은색의 이기영은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네. 오랜만입니다.’ ‘끄응. 이거 곤란하군요.’ ‘…….’ ‘다시는 저희를 찾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보내드린 것으로 기억하는데…. 애초에 당신은 저희 제의를 거절한 순간 죽었어야 했습니다. 살려드린 건 제 변덕이었고 배려였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찾아오실 줄이야. 아, 물론 반가운 이야기를 하러 오셨다면 거친 방법은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상황에 따라서는 당신은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 ‘찾아온 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좋지 않은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네네.’ ‘조금 민망하기는 하지만 전에 받았던 제의에 대한 답을 번복하고 싶어서 찾아온 거니까요.’ 역시나. ‘글쎄요. 반가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당신을 영입하려고 했던 시기와는 입장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영 씨를 필요로 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다지 필요할 것 같지 않아서 말이죠.’ ‘도움이 될 겁니다.’ ‘도움이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기영 씨가 뛰어나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고요. 하지만 한 집단에 머리가 둘 이상 있으면 조금 난잡해질 것 같은 터라. 아, 무슨 말씀인지는 알아들으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여단은 벌써 머리를 구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당신보다 뛰어날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개인적으로는 당신을 들이고는 싶지만 다른 멤버들의 의견도 중요하죠. 물론 기존 머리의 입장이 가장 중요하겠죠? 어디까지나 여단의 멤버들의 의견이 최우선 사항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호의적이지만 일단 가장 중요한건 우리 가족이니까요.’ 과장되게 주변을 둘러보는 녀석의 모습은 가관. 그 목소리에 화답하듯 몇몇 이들이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죽여요.’ ‘죽이자.’ ‘나도 죽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찬성.’ 입을 연 것은 남녀 쌍둥이. 빼빼 마르고 키 큰 남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 다리가 없는 녀석 역시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식들 얼굴은 지금 기억해 놓는 게 좋으리라. 만나면 곧바로 죽여야 할 녀석들이 여기 다 모여 있다. 특히 방금 반대표를 던진 놈들의 얼굴은 틀림없이 기억했다. 약간 의아했던 것은 선희영이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다는 것. 아마도 고유 기벽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성격은 조금 신중하다. 잠깐의 말싸움이 있기는 했지만 두고 보자는 입장을 취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아무래도 의견은 반반으로 갈릴 것 같기는 한데, 그전에 동기에 대해서는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단에 들어올 마음이 생긴 이유가 뭡니까? 예상이 가지 않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당신 입으로 직접 듣고 싶군요.’ ‘복수.’ ‘대상은?’ ‘대륙 내 썩어빠진 모든 인간.’ ‘하… 하핫. 푸하하하하핫!’ ‘웃긴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아닙니다. 웃겨서 웃은 것이 아닙니다. 하하하. 훌륭합니다. 훌륭해요. 하핫. 그런 열정이 중요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복수를 하고 싶다는데. 기영 씨, 그거 아십니까? 여기 들어온 이들이 모두 같은 이유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는 충동 때문에, 누구는 쾌락 때문에, 단순히 돈이나 살인이 좋아서 들어온 이들도 있고 인간에게 실망해 들어온 이도 존재합니다. 모두가 제각각이기는 하지만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이유를 별 볼일 없다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마 여단에 대부분은 당신의 뜻에 공감해 줄 거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부정적인 에너지를 먹고 자라요. 특히나 명확한 방향성이 존재한다는 게 마음에 듭니다.’ ‘그렇다면….’ ‘그래도 일단은 불가합니다. 기존의 머리가 찬성한다면 저 역시 찬성표를 던지는 것으로 하죠. 음… 그래서 일이 이렇게 될 것 같은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가 뒤를 돌아보자 앉아 있던 여성 한 명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 그녀가 정진호가 말한 머리인 모양.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 재미있게도 그녀가 쓰고 있는 가면이 이후에 내가 쓰고 다니던 가면과 같은 디자인이었다. 천천히 가면을 벗은 여자가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고 입을 여는 것이 보인다. ‘여단에 오신 걸 환영해요.’ 어처구니없게도 가면을 쓴 여자 역시 이쪽에게도 익숙한 얼굴. 이지혜. 시스템이 영혼의 단짝으로 공인한 그녀였다. # 332 회귀자 사용설명서 332화 검은색 세계의 우리 (5) 깜짝 놀란 것도 잠시였다. 순식간에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 직후에는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안 되는데… 따위의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 그야 이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리라. 이후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으니까. 여단의 멤버들 역시 눈에 전부 담지 못했고 앞으로 이들의 행보에 대해서도 보지 못했다. 그중 가장 궁금했던 것은 이지혜가 도대체 뭣 때문에 저곳에 있는지에 대한 것. 1회 차에서도 그냥 뒈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마 여단에서 활동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2회 차에 이지혜는 여단에 가입하지 않고 어차피 여단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마치 드라마를 보다가 끊긴 것 같은 찝찝한 기분. 여단이 남몰래 활동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면 괜스레 더 찝찝해진다. 허무맹랑한 추측은 아니다. 정진호가 없으니 그 세력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 하지만 이쪽이 실제로 확인한 여단 멤버들은 대가리가 없다고 해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무능력한 이들이라고 하기엔 가지고 있는 전투력과 개성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만약 기존의 추측대로 여단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 개개인은 남몰래 활동하고 있을 수도 있다. 정신을 차리기는 싫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천천히 감은 눈이 떠지기 시작. 혹시나 다른 것을 볼 수 있을지에 대해 기대해 보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번 건 여기서 끝인 모양이다. 검은색 세계와는 다른 익숙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슈바….’ 누워 있는 곳은 침대. 혹시나 이번에도 카스가노와 즐거운 시간을 카스가노 유노는 의자에 앉은 채 내 옆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원하는 건 얻으셨사옵니까?” “반 정도는… 일단은 고맙다. 어째서 네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 네가 봤던 미래가 뭔지도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고….” “도움이 됐다니 정말, 정말로 다행입니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생각을 정리하실 시간이 필요하신지요.” 복잡한 이쪽의 표정을 눈치챈 모양이다. “잠시 자리를….” “아니, 굳이 자리를 피할 필요까지는 없어. 그보다 혹시 한 번 더 볼 수는….” “죄송합니다. 주인님. 그건 불가능합니다. 죽, 죽여주시옵소서. 벌이라면 달게 받….” “아니. 괜찮다.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몸에 괜찮은지 여부에는 상관없이 이렇게 계속해서 미래나 검은색 세계를 보는 건 불가능한 것 같았다. 카스가노 유노의 힘은 이치를 벗어난 능력이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연속으로 그런 걸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쉽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매달려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일단은…. ‘시간 순서대로 배열을 해볼까.’ 두서없이 진행된 이야기를 되짚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박덕구가 죽은 이후의 검은색 세계의 이기영이 무엇을 했는지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시간상으로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1. 검은색 세계의 이기영은 박덕구가 죽은 이후에 여단에 들어갔다. 카스가노 유노와 함께 들어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가장 처음 몸을 담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그야 목표가 생긴 시점에서 세력이 필요하다는 느낀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 여단이 검은색 이기영이 하려고 하는 일에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집단인 만큼 이기영이 가입하려고 위험을 무릅쓴 것도 이해가 된다. 이지혜가 어째서 그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 이후의 이야기는 굳이 보지 않아도 뻔하다고 생각했다. 차마 눈뜨고는 보지 못할 쓰레기 짓들을 저질렀을 거고 계속해서 덩치와 세력을 불렸을 것이다. 계속해서 여단과 함께 움직였는지 대에서는 생각해 봐야겠지만 최소한 입지를 다질 때까지는 함께 활동했을 확률이 높다. 2. 그 이후에 일어난 것이 정하얀의 죽음. 1번 이후로 시간이 많이 지난 시점. 여단이나 이지혜와 함께 활동했는지도 미지수, 카스가노 유노와 함께했는지도 명확하지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쪽이 정하얀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는 것 하나. 이유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당시 정하얀은 린델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 파란 길드에서 활동한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검은색 세계의 쓰레기는 정하얀을 적으로 인식했다. 어째서 정하얀을 끌고 가지 않았는지는 생각해 봐야 될 문제지만 결과적으로 검은색 쓰레기는 정하얀을 버렸고 그 결과 그녀는 목을 매달았다. ‘정말로… 이제 다시는 싫다는 소리 안 할게요. 오빠가 시키는 건 전부 다 할게요. 이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도 상관없어요.’ 라고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그녀는 분명 비슷한 종류의 말들을 중얼거렸다. 아마 어느 시점에서 이기영이 그녀에게 이쪽에 협력해 함께 쓰레기 짓을 하자는 것을 종용했을 것이고 지금과 달리 마음이 약했던 1회 차의 정하얀은 이쪽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아군 측에 정보를 팔아넘기거나 시시한 심부름은 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결정적인 곳에서는 등을 돌리지 못한 셈. 그 결과 버려졌고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현재의 정하얀이라면 시키지 않아도 할 일을 선택하지 못한 것이다. ‘환경이라는 게 참 중요하긴 해….’ 1회 차의 정하얀과 2회 차의 정하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이쪽을 만난 시기밖에 없다고 추측해 보면 현재 그녀가 이상해진 결정적 이유가 나라는 게 된다. 부정할 이유는 없지만…. ‘씁쓸하긴 하네….’ 정하얀과 내가 상성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다. 아무튼,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어째서 정하얀과 내가 함께 지내는 모습에 손뼉을 치며 기뻐했는지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1회 차, 김현성 진영의 사람들에게는 정하얀의 자살 사건이 이렇게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대마법사가 웬 쓰레기에게 작업당해 완전히 망가진 사건. 나와 그 쓰레기를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김현성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사이좋은 커플의 애정행각에 훌륭한 방패막이 생겼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정하얀을 데려가면 안 되는 상황에서도 김현성은 이쪽과 정하얀을 1+1으로 묶어서 원정으로 내보냈다. 심지어는 훈련소나 왕성에 가는 길에도 묶어서 보낼 정도였으니 녀석이 얼마나 1회 차 같은 일을 피하고 싶어 했는지도 이해가 간다. 정하얀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혹시나 이 자식도 박덕구처럼 이상한 설계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진실을 알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 질만 하다는 거다. 아무튼, 그다음 벌어진 일은…. 3. 대규모 전쟁, 혹은 테러. 그 결과 조혜진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었다. 이건 명확하지 않은 것이 많다. 일단 1회 차 김현성 진영을 공격했던 정확한 집단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 문제. 물론 이쪽의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그때 봤던 광경은 개인이나 여단이 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도시 하나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고 김현성 역시 넝마가 되 일어나지 못했다. 조혜진은 나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조혜진에게 화살을 쏜 이들의 모습도 확인하지 못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내분, 혹은 타국과의 전쟁 같은 대규모 전쟁 시나리오를 이쪽이 기획했다는 것. 하지만 이것 역시 딱 들어맞는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김현성은 특정 나라에 대한 분노를 보낸 적이 없었던 것은 물론, 오히려 갈등을 최소화하며 힘을 최대한 비축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니까. ‘김현성이 회귀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야.’ 물론 그 이유에 나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지만 어쩌면 인류의 적 같은 게 툭 하고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시스템을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지.’ 김현성을 회귀시킨 초월적인 존재의 행동을 생각해 보면 답이 조금 더 명확해진다. 정하얀을 살리고 싶어 했고 이쪽을 김현성에게 붙여주고 싶어 했다. 이미 1회 차의 흑막으로 추정되는 내가 회귀자에게 딱 달라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회귀한 이유는 존재해. 분명히.’ 김현성과 시스템은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비하고 있다. 악마일 수도 있고 천사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제3의 세력이 갑자기 툭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도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니기에 깊게 생각하는 것은 지양해야 되는 것이 맞다.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째서 이런 장면들이 눈에 보였느냐는 것. 또 이걸 어떻게 활용할 수 있냐는 가다. 당연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유노가 본 미래는…. ‘김현성이 나를 위협하는 장면이 맞겠네.’ 초월적인 존재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내게 알리기 싫은 장면이다. 내가 만약 유노에게 그 사실을 전해 들었다면 뭐가 됐든 액션을 취했으리라. 김현성을 등지는 극단적인 짓은 저지르지 않았겠지만…. ‘또 모르지.’ 뭐가 됐든 이쪽이 1회 차의 빌런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게 이번 검은색 세계를 보고 온 최고의 성과다. 어째서 유노가 나를 지키려고 진청은 내보냈는지 바로 이해가 간다. 생각하면 아주 간단한 문제다. 본인은 어째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에 대해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카스가노 유노의 선택은 그야말로 최선의 선택이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카스가노를 바라보자 괜스레 그녀의 얼굴이 사랑스러워진다. ‘키야… 고맙다.’ 순간적이지만 마음속에 싹튼 의심 역시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 두 손으로 얼굴을 잡자 깜짝 놀랐다는 듯 흠칫 하기는 했지만 이마에 뽀뽀 세례를 퍼붓자 살짝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감, 감사합니다.” “아니… 내가 더 고맙지. 네 선택은 옳았던 것 같다.” “송구합니다. 어찌 제가 감히.” “아냐. 네 선택이 맞았어. 진청이 현재 우리 손에 있거나 죽었었다면 더 힘들어졌을 것 같거든….” “정확히 무슨 말씀이신지….” 카스가노 유노는 김현성이 회귀자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녀석이 찾고 있는 게 가면남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 심지어 외부의 개입으로 본 것을 잃어버렸으니 오늘 본 것과 진청을 내 보내는 것의 상관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슬그머니 입을 여는 것은 당연, 내 말을 듣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카스가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참… 그 악마소환사를 놓친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조금 더 확실한 증거를 잡는 게 맞다. ‘그 새끼가 범인이야. 아암. 그렇고 말고 무조건 그 자식이 범인이지.’ 녀석에게 걸린 타이틀은 악마소환사뿐 만이 아니다. ‘1회 차, 가면쓰레기 진청….’ 1회 차에서 여단에 가입한 이후, 정하얀을 자살하게 만든 것은 물론, 조혜진을 죽게 만들고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뒤통수를 수도 없이 때린 장본인, 김현성이 수도 없이 찾아다닌 흑막이자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 가면쓰레기. 단순히 악마소환사인 줄 알았던 녀석의 참된 정체였다. ‘이 분리수거도 못 할 것 같은 가면 쓰레기 자식!!’ 마음속에 있는 빛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 333 회귀자 사용설명서 333화 인생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1) 내가 확인한 것은 이미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이 당연. 남을 속이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 실제로 가면 쓰레기 진청에게 맹렬한 분노를 느낄 정도였으니 거짓말 탐지기를 대령해도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다. ‘더러운 악마소환사. 쓰레기 자식. 분리수거도 못할 쓰레기 놈이 여기에 있었어.’ 그야말로 피눈물이 나오는 상황이요,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었던 검은색 세계였다. 더러운 가면 쓰레기 진청이 1회 차의 정하얀을 농락했다는 것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진다. 사랑하는 나의 예비신부가 과거에 웬 더러운 놈팽이에게 고통 받은 것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조혜진을 죽게 만들고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쳤다. 이번에는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도 분노하지 않는 게 이상하리라. 내 분노를 느낀 모양인지 카스가노 유노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중. 아직까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중요한 걸 보여줘서 고맙다, 카스가노.” “당연한 일입니다, 주인님.” “검은색 세계의 가면 쓰레기를 내 눈으로 직접 봐서 다행이야. 빛의 진영을 궁지로 몰아넣은 더러운 자식의 정체를 파악한 거잖아. 그렇지? 만약에 오늘 이걸 보지 못했으면 어떻게 될 뻔했어? 아마 우리에게 커다란 위협이 됐을 거다.” “네?” “그 악마소환사 진청이 검은색 세계를 위협한 대악당일 줄이야.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야… 정말인지 예상도 못 했다니까. 그렇지 않아?” “네? 아… 아, 네. 맞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주인님.” “알아들은 게 확실하지?” “네. 정확히 알아들었습니다.” 은근슬쩍 운을 띄우자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똑똑한 만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리라. 김현성이 회귀자임을 모르는 카스가노는 어째서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에 대해 의아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바로 가면 쓰레기의 정체가 누구냐는 것. 나는 이미 못을 박았고 카스가노 유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색 세계의 주인님께서는 저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냈지요. 분명히 제가 주인님을 고립된 던전에서 구출한 이후에 함께 살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가면을 쓴 진청이 여단에 가입했을 당시에 말입니다.” “아아. 응. 그랬었지?” 그 와중에 카스가노 유노는 쓸데없는 설정을 첨가하기 시작. 조금 사심이 들어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오히려 이런 세세한 설정까지 건드려준 카스가노에게는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 혼자 뭘 상상하는지 배시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머릿속으로 동인지나 팬픽이라도 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검은색 세계의 유노의 바람을 들어준 셈이니 기분이 좋을 만도 하다. 일단 마음속에 담겨져 있는 무거운 짐은 모조리 벗겨진 상태. 이후에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해진 바 없지만 해야 할 일이야 뻔하다. 사랑스러운 회귀자에게 이쪽의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 더러운 악마 소환사 진청이 가면 쓰레기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전하는 것이 이번 미션의 목표다. 그 와중에 카스가노가 조심스레 입을 열기 시작.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질문일 것이다. “그보다 주인님, 조금 건방진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지만… 어째서 검은색 세계를 신경 쓰는지 궁금한 거겠지?” “네. 물론 주인님이 내키지 않으신다면 말씀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혹시나 제가 도울 것이 있을까 싶어….” “으음….”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한데…’ 카스가노 유노는 무조건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조금 더 일을 스무스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김현성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전하는 게 좋을까 싶기도 했지만 역시 그건 조금 더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지.’ 분명히 고민할 여지가 있다. 그녀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존재하니까. 하지만 직접적으로 그녀를 움직였을 때의 메리트 역시 상당히 크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만은 밝혀도 나쁠 게 없다는 쪽으로 생각이 쏠리기 시작. 어차피 그녀도 반쯤은 회귀자다. 카스가노가 스스로 1회 차를 볼 수 있다는 것을 김현성에게 밝힌다면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일을 진행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거야! 슈바! 처음부터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어째서 그동안 그녀를 활용할 생각을 못 했는지 이쪽이 멍청하게 느껴질 지경. 카스가노를 출동시키는 것은 무조건 이쪽에 이득이 된다. 결심을 했으면 입을 여는 것이 당연하다. 천천히 말을 내뱉자 커다랗게 입을 벌리며 이쪽을 바라보는 카스가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회귀자라는 거 혹시 들어본 적 있어?” 당연히 고개를 젓는 모습이다. 카스가노 유노는 검은색 세계가 1회 차라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상태였다. 물론 이쪽의 반응에 대충 예상은 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남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천천히 설명을 하기 시작하자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내용의 무게와는 다르게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담담하게 김현성이 회귀자라는 사실과 유노가 바라봤던 검은색 세계가 김현성이 겪었던 1회 차라는 사실을 전했고, 김현성이 가면 쓰레기 진청을 찾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카스가노 유노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 우습게도 이쪽을 의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당연히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이야기에 그런 의심을 품지는 않은 모양. 지금까지 불투명했던 검은색 세계의 정체에 대해서 확신을 전하는 순간 카스가노 유노는 갑작스레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얘 뭐야. 왜 이래? 울 것까지는 없잖아. 대충 예상하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라는 생각이 든 것이 당연지사. 천천히 이쪽을 바라보며 입을 여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군요. 흐으윽… 그랬던 것이었군요.” “그래.” “주인님께서는 파란 길드 마스터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알고….” “맞아. 지금 함께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뭐, 아무튼 방금했던 이야기는 우리 둘만 아는 이야기다.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 혹시 다른 분들은….” “다른 분?” “마법사나 용병여왕님.” “그녀들은 몰라. 정하얀이나 차희라 말고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어. 이건 너와 나만 알고 있는 이야기다.” “아! 성,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둘만의 비밀…. 둘만의 비밀이로군요.” “망극할 것까지는 없고.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아마 지금부터는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알 거라고 믿는다. 자세한 건 이후에 대충 설명해 주면 될 것 같고….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이건….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하나 주인님, 혹시….” “응?” “혹시 제가 검은색 세계에서 주인님에게 드린 말씀을 기억하시는지요.” “정확히 어떤 걸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너무 많은 말을 들어서.” “주인님을 붙잡기 위해 제가 드렸던 거짓말 말입니다.” “아아….” “주인님과 제가 행복하게 사는 미래를 봤다고 말했었지요. 그곳에서 주인님은 모든 것을 잊고 저와 함께, 아주 행복하게 지내게 될 것이라 말했었습니다. 제가 주인님을 찾은 것은 계속해서 제가 봤던 미래가 눈에 밟혔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틀림없이.” “그랬었지.” “당시에는 주인님을 떠나보내게 하지 못하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박덕구 님을 잃으신 주인님의 역린을 건드린 어리석은 말이었습니다만, 혹여나… 그때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떠올린 탓에….” “무슨 뜻이지?” “1회 차의 제가 2회 차의 미래를 봤을 수도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옵니다, 주인님.” “아….” 순간적으로 망치로 머리를 세게 후려 맞은 느낌이었다. 사실 1회 차의 카스가노가 2회 차의 미래를 봤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지 못했다. 그 미래를 본 당시에는 카스가노가 단순히 나를 말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추측이 영 신빙성 없지는 않게 들려온다. 2회 차의 카스가노 역시 한정적이지만 1회 차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어쩌면 1회 차의 카스가노 역시 2회 차를 들여다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검은색 세계의 유노에게는 2회 차 역시 미래의 일부였을 테니까. 만약 그런 거라면…. ‘대박인데?’ 슬슬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 “아마 검은색 세계의 저는 죽어가면서도 2회 차에 대해 떠올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슬프고 벅차올라서… 흐윽.” “그렇군…. 너는….” “주인님을 위해 죽었사옵니다. 검은색 세계의 저다운 마무리였고 그녀 역시….”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나? 이전에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고 했었지. 혹시 그 동안 본 것이 있나?” “그건….” 별거 아닌 질문에 무언가 말하기 힘들어 하는 것 같이 보였다. 명확하게 알지 못했던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 굳이 내가 알지 않았으면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쪽 역시 입을 다물기 시작. 내 표정을 본 카스가노가 막 말을 해오려던 찰나, 그냥 손을 올려 그녀가 입을 여는 것을 막아버렸다.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 아는 게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됐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아무튼 간에 다시 한번 고맙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이, 이제 저를 믿어주시는 것이신지요.” “음….” “아….” 뜸을 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장난. 하지만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보고는 곧바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대신 대답이 되었으리라. 활짝 웃고 있는 카스가노의 얼굴이 보인 것은 당연.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만약 정말로 검은색의 카스가노가 본 것이 2회 차의 미래라면 이쪽에게는 이미 꽃길이 펼쳐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래는 바뀔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행복 엔딩이 탑재되어 있다는 훈훈한 소식 덕분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이 좋다. 슬그머니 카스가노를 바라보며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나도 네가 봤던 미래가 현재의 미래였으면 좋겠구나. 아니, 틀림없이 이루어질 거야. 만약 다른 미래라고 하더라고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 “아… 주, 주인님. 그렇게까지!” 무척이나 감격에 찬 얼굴.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을 때였다. 뭔가 커다란 실수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당시에 유노가 이쪽에 말했던 내용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한 것. ‘이 집에서 당신과 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저희는 해, 행복해 보였습니다. 아이를 두 명이나 가지고 있었고 아직 이름을 듣지는 못했지만 틀림없이 착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어?” 슬쩍 고래를 돌리자 시야에 비친 것은 아직도 얼굴을 붉힌 채 눈물을 쏟고 있는 카스가노 유노의 얼굴. “어?” “부족한 몸이지만 최선을 다해 주인님을 모시겠사옵니다.” “아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부디 다시 한번 절을 받아주시옵소서.” “아니, 잠깐만.”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괜스레 침을 삼켰을 때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정하얀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몸에 힘이 들어갔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녀가 아니었다. # 334 회귀자 사용설명서 334화 인생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2) “들어가도 돼요?” “네. 물론입니다.” 이지혜의 목소리였다. 이쪽이 존댓말을 하는 것을 듣고 안에 누가 있을 거라는 걸 예상했는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조금은 딱딱해 보였다. 타인 앞에서는 어디까지나 사무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은 당연. 나를 본 이후 곧바로 카스가노를 흘겨보는 걸로 어서 빨리 옆에 있는 여자를 치워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업 차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드릴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파란 부길드 마스터.”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카스가노 유노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아마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 쟤는 저런 부분이 마음에 든다. 만약 이 자리에 있는 게 그녀가 아니라 정하얀이었다면 떼를 써서라도 나가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차희라였어도 마찬가지. 애초에 차희라가 이 자리에 있다면 이지혜는 발길을 돌렸을 거다. 조금 이상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것만 빼면 카스가노 유노는 지극히 정상인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다. 그나마.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파란 부길드 마스터.” “네, 카스가노 유노님. 고생하셨습니다.” 이쪽에 인사에는 미소를 보인 뒤 방문을 나가는 뒷모습은 홀가분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 담긴 함박 미소를 눈으로 확인한 모양인지 이지혜의 얼굴이 조금은 뾰루퉁해졌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 “응?” “오빠 얼굴 말고 방금 나간 여자요. 요조라 길드의 카스가노 유노. 아주 세상 다가진 표정이던데 최근에 정하얀 그 여자도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나만 빼고 뭐 즐거운 이야기라도 돌고 있나 봐요? 아니 그보다 제가 했던 말 기억하는 거예요?” “뭐?” “저 여자, 믿을 수 있냐고요.” 슬쩍 눈을 흘기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얘가….’ 나 역시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왠지 모르게 검은색 세계에서 봤던 그녀와 오버랩 됐던 탓이다. ‘정말로 신기하네.’ 이지혜의 스펙으로 튜토리얼 던전에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아니, 그녀의 성격을 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기야 했겠지만…. ‘갑자기 여단에서 얘가 툭 튀어나올 줄은 누가 알았겠어.’ 하나하나 천천히 따지고 보면 튜토리얼 던전에서 정진호와 만난 것은 아니다. 정황상 싸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가 그녀보다 이쪽을 먼저 영입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였으니까. 아마 그녀 역시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여단에 자리를 잡았다고 추측하는 것이 맞으리라. ‘영혼의 단짝이라더니.’ 1회 차에서 그녀와 내가 언제까지 같이 활동하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오랜 기간 동안 활동했으리라 생각했다. 같은 가면을 쓰고 있는 것도 그렇고 검은색 세계의 나도 그녀가 쓸모 있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정하얀도 그렇고 이지혜도 그렇다. 심지어 선희영과 카스가노 유노 역시 1회 차에 이쪽과 관련이 있었으니 사람 인연이라는 게 굉장히 신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얘도 여단에 들어온 목적이 복수였던 건가?’ 가능성은 충분하다.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와 그 일당들은 본래 미친 연놈들이 모인 집단이었지만 이지혜와 나는 기본적으로 회색 인간에 가깝다. 그녀 역시 이쪽을 등질 이유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거다. 물론 그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황상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지혜를 빤히 바라보자 그녀답지 않게 살짝 민망해하는 표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뭐, 뭘 사람을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부끄럽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뭐 사업 차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었나?” “그냥 한 소리예요. 그냥 얼굴 보러 온 게 맞아요. 뭐, 기왕 온 만큼 겸사겸사 다른 이야기도 하려고 하기는 했는데…. 어떻게 사람 하나 보기가 이렇게 힘든지 몰라? 병문안 예약 뚫으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요?” “안 그래도 슬슬 일어날 참이었어. 주변에서 자꾸 쉬라고 해서 오히려 문제지.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마침 잘 왔네. 최근에는 좀 어때?” “그다지 변한 건 없어요. 공화국은 여전히 묵묵부답이고. 조사하겠다고 말하기는 하는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거죠. 아! 교국 쪽은 정식으로 대륙재판에 이번 일을 언급하려고 준비중이예요. 공화국 쪽에서는 당연히 불응하겠지만 국제적인 시선을 신경 쓰는 거겠죠? 오스칼 그 사람이 제법 유능해서 깜짝 놀랐다니까요. 아무튼 간에 여러 가지 방향에서 압박은 계속 넣고 있어요. 이번에 공화국에서 대륙법을 위반했다는 자료를 주변국에 배포하고 있고… 사실 반응은 꽤 좋아요.” “그건 반가운 소식이네.” “몇몇 흑마법에 민감한 국가들에서는 이미 국민 여론이 등을 돌렸고… 아, 특히 이종족 쪽에서 분위기가 정말 좋다니까요.” “이종족?” “엘프들도 흑마법이라면 질색하잖아요. 뭐, 나도 걔네들이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그래?” “혹시… 사절단 온다는 건 못 들었어요?” “못 들은 것 같은데…. 엘프들이 지금 라이오스로 오고 있어?” “네. 아마 동맹은 삼자로 시작될 것 같아요. 교국을 주체로 엘프 왕국, 이제는 중립국이 아닌 라이오스까지. 와, 오빠 정말로 소외당하고 있었네요. 무슨 어린애도 아닌데 이런 것도 비밀로 하나 몰라? 이번 기회에 정말로 푹 쉴 수 있겠네요. 아아, 부럽다.” “그렇게 기분 좋지는 않아. 가만히 있으면 불안한 게 사실이고….” “그것도 일중독이에요. 아무튼 대충 배경은 말씀드렸던 그대로예요. 공화국이 무슨 배짱으로 악마소환사를 감싸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걔네들도 머리가 복잡할 걸요. 듣자하니 진청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개인 세력도 큰 것 같던데. 도려내기에는 너무 큰 종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뻔하겠죠, 뭐. 실제로 그가 계속해서 결백을 주장하고 있는 것도 한 몫 단단히 하고 있을 거고요. 진실이야 뭔 상관이겠어요. 이미 그쪽은 악마소환사로 도장이 찍혔는데….” “그렇지?” “표정 한번 사악하네요. 진짜 그 사람은 어쩌다가 이런 일에 휘말렸을까…. 전생에 나라라도 팔아먹었나 보네요. 아무튼 알아둬야 할 건 이게 전부예요. 아! 아까 전에 엘프 사절단 이야기했었죠? 이건 저도 명확하지는 않은데 라이오스를 방문하는 엘프 사절단 중에 꽤나 거물이 섞여 있다는 모양이에요.” “그래?” “네. 사실 누군지는 몰라요. 그쪽은 워낙 폐쇄적이라 정보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고…. 아마 사절단이 라이오스에 도착하면 오빠를 가장 먼저 찾을 수도 있겠네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협상에는 관여하고 있지 않다고는 해도, 이 모든 게 라이오스를 지킨 빛의 영웅들 덕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근데 어때요? 영웅이 된 기분은?” “그걸 굳이 말로 해야 해? 밖을 봐, 누나. 동상이 세워지고 있는데 말 다 했지, 뭐.” “겸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네요. 이런 쓰레기 같은 면이 좋다니까.”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물론 칭찬이죠.” 슬그머니 다가온 이지혜가 이쪽에 슬쩍 걸터앉았다. 실실 웃고 있는 표정이었는데 이유야 어찌됐든 이쪽이 무엇인가를 이루어가고 있는 게 기분 좋은 모양. 처음 이지혜가 이쪽에 손을 내밀었을 때 내뱉었던 대사를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오빠 같은 남자를 왕으로 만들 수 있는 여자.’ 미 대통령의 일화까지 들먹여가며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이쪽이 여기까지 올라온 데 이지혜의 도움이 아예 없었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물론 대부분이 내 덕이기는 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움직여주었는지 알고 있다. 실제로 그녀는 마치 이쪽의 보이지 않는 손과 발 같은 느낌이었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그러고 보니까 예전에….” “아. 기억하고 있었나 봐요.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게 질척거리는 것 같아서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는데. 어때요. 내 지분은 몇 퍼센트 정도 돼요?” “글쎄….” “그러지 말고요. 뭐 사실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지만, 내가 말했었잖아요. 오빠가 미친 마법사나 용병여왕이랑 뭘 하든 상관없다고. 어차피 마지막에 사랑받는 건 나 같은 종류의 여자라니까. 그건 기억나요?” “기억나.” “어때요. 지금은 내가 매력적으로 보여요?” “물론.” 거짓말, 혹은 인사치례로 건넨 말이 아니다. 실제로 이지혜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슬그머니 그녀 쪽을 바라보자 내 말을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는지, 피식 웃는 얼굴이 보였다. 본인 나름대로 굉장히 만족한 것 같은 표정. 사실 아까 카스가노와 정하얀을 언급했을 때는 은근슬쩍 불안한 표정도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내 얼굴을 보니 마음속에 남아있는 불안감이 확실히 날아간 것 같았다. “아무튼 간에 이제 어쩔 거예요?” “할 게 있나? 지금처럼 가는 거지, 뭐. 충분히 잘해주고 있어. 이쪽도 슬슬 일어나서 활동하긴 해야지. 누나한테 듣긴 했지만 실제로 필드에서 알아보는 거랑은 차이가 있으니까. 계속 누워 있느라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감이 안 와. 이쪽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공화국이 무슨 배짱으로 버팅기고 있는지 모르겠고…. 애초에 조금….” “분위기가 이상하기는 했죠. 뭔가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실제로 다완에서는 계속해서 소규모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요. 어쩌면 건수를 잡고 싶은 건 이쪽이 아니라 저쪽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누가 알겠어요? 선물 상자는 까봐야 아는 거지.” “맞아. 확실히….”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기는 있지.’ 내 개인적인 문제도 중요하긴 하지만 대외적인 부분 역시 정리할 부분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거다. 아무튼 간에 당장 급한 것은 김현성의 일. 슬쩍 운을 띄우자 곧바로 입을 여는 이지혜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혹시 현성 씨는 지금 뭐 하는지 알고 있어?” “아. 아마 현장에 있을걸요?” “현장?” “악마가 소환된 장소요. 최근에는 덕구 씨랑 계속 현장에만 기웃거려요. 솔직히 거기서 뭐 건질 게 있다고 그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얼굴 보면 조금 무섭다니까요. 그래도 요즘엔 표정이 좀 풀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아, 한참 튜토리얼 던전에서 무표정으로 있었을 때. 그때 같아요.” “아….” “아마 지금도 한참….” ‘이거 안 좋은데….’ 사실 김현성이 그 장소에 있다는 것만 해도 뭔가 탐탁치가 않다. 하물며 유노를 통해 1회 차를 바라본 지금 내 심정이 어떨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라. 똥줄이 타도 이렇게 탈 수가 없다. 아직까지 이쪽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언제 나에게 화살이 날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불안감이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했다. “뭐예요. 표정이 꼭….” “지금 그쪽으로 사람 보내서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전해줘, 누나.” “네?” “뭐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다. 그런 거 있잖아.” “아니 갑자기 왜….” “빨리.” “일단 알았어요. 토씨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전하면 되는 거죠?” “응.” “네. 그럼 잠깐 전했다가 다시 들어올게요.” ‘일단 이걸로 가자.’ 일단은 우리 회귀자가 최대한 현장에 기웃거리는 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뭔가 급해 보이는 내 표정에 이지혜가 재빠르게 밖으로 나가 사람을 부르자 순식간에 바깥이 떠들썩해졌다. 물론 엄살을 피우기에는 내 몸 상태는 너무나도 정상이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다. 당장 급한 불을 끄기엔 갖춰진 준비물들이 너무 부족하다. 일단 몸이 아픈 것을 빌미로 김현성을 내 쪽에 붙잡아 둘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게 먹히느냔 건데….’ 물론 김현성이 나를 아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굳이 예를 들자면 현재 김현성은 아주 중요한 일을 눈앞에 둔 바깥양반이다. 안사람이 아프다고 해서 일을 완전히 내팽개치지는 않을 것이 분명. 당장 몸이 아픈 나보다 1회 차 쓰레기의 뒤를 밟는 게 더 중요하다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기영 씨!” ‘어?’ “몸은 괜찮으십니까?” ‘이 새끼, 뭐 이렇게 빨리 와?’ 눈에 보인 것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김현성. ‘키야!’ 누군가 말했던가. 살면서 진정한 친구를 하나라도 얻는다면 성공한 인생이라 할 만하다고. 이기영 인생 26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살아왔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형은 널 믿었다, 현성아!!!’ # 335 회귀자 사용설명서 335화 후유증(1) ‘아직 10분도 안 지났잖아!’ 현재는 폐허가 된 그곳은 결코 이곳과 가깝지 않다. 말 그대로 이지혜가 사실을 전하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으리라. 안 그래도 높은 민첩 수치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 마력까지 사용 해가며 순식간에 달려온 셈.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빠르게 도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는 김현성을 보니 무리한 게 확실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만큼이나 빨라질 수 있는 건가.’ 민첩이 높은 인간들이 얼마나 빨라질 수 있는지는 악마숭배자 이토 소우타 때도 이미 느낀 바 있었지만 이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아무튼 김현성의 모습에 마음 한 구석이 행복으로 꽉 찬 것은 당연지사. 어느 정도 액션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더 커다란 결과였기 때문이다. ‘한 점 부끄럼 없다!’ 심지어 왕성 내부에 있는 이들보다 더 빠르게 도착할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있을까. 방금 전까지 이상한 걸 보고 있다 보니 괜스레 미안해지기는 했지만 어차피 이미 마음 속으로는 그 짓을 저지른 건 내가 아니라고 자기최면을 걸고 있는 상태. 쓰레기 같지만 현재의 나는 당당한 눈으로 김현성을 마주볼 수 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군요.” “콜록.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하 이상 없습니다. 잠깐 발작을 일으켰을 뿐입니다. …전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제가 일을 방해한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물론 알리기 싫었다는 뜻을 전하는 것은 당연. 기침도 섞어주고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은 촉촉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본다. 이 즈음에 대사 하나를 날려줘도 나쁘지 않으리라. “저는 건강합니다. 일단은 하고 계신 일을 마무리 지으셔야죠.” “아닙니다. 급한 일은 아닙니다.” ‘안 급하긴 뭐가 안 급해. 지금 그것보다 급한 일이 어디 있다고.’ 하나 있기는 하다. 바로 절친한 친우가 병상에 누워 있다는 것. ‘현성아, 형도 네가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줄지는 몰랐다.’ 튜토리얼 던전에 있었을 때와 비교해 보면 여러 면에서 변화가 있었다. 정하얀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박덕구야 뭐, 변함이 없는 것 같기는 했지만 녀석 역시 조금은 달라진 점이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달라진 사람을 손에 꼽으라면 당연 김현성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지혜의 말처럼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녀석이 표정이 풍부해진 것이다. 지금처럼 절박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심지어는 웃음을 터뜨릴 때도 많다. 이 자식은 선천적으로 정이 많은 종류의 인간이다. 나 역시 ‘김현성’호에 합류한 동료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또 처음. 2회 차를 막 시작했을 때는 나름대로 큰 사명감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기야 했겠지만 사람의 본성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 자식은 기본적으로 호인이다. ‘1회 차의 일과도 연관이 있을 거야.’ 조혜진뿐만이 아니라 많은 동료들을 잃었던 게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는지 녀석은 다급하게 이쪽의 손을 잡아오기 시작. “잠깐.” “콜록. 정말로 괜찮습니다, 현성 씨. 단순한 발작입니다. 제 몸은 제가 제일 잘 압니다. 네. 이제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타이밍 좋게 이지혜와 함께 의료진이 달려들어 온다. 그래봤자 사제 집단이었지만 순식간에 분주해진 병실의 분위기가 그럴 듯하다. 김현성의 표정도 짐짓 심각해지기 시작. 마력이 이쪽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아마 녀석 역시 딱히 발작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애초에 발작 같은 건 없었으니까. “저, 길드 마스터. 잠시만….” “네.” “저희가 상태를 지켜보겠습니다. 일단은 자리를 비켜주시는 게….” “네. 알겠습니다.” “이지혜 님, 혹시 상태가 어땠는지… 정확히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저도 정확하게는 몰라요.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으시더니….” 고위 사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에 내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잠깐 발작….” “네. 가슴 쪽을 부여잡으시더니 발작을 일으켰어요.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도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너무 고통스러워하시기도 했고요. 혹시 파란 부길드 마스터의 몸에 문제가 있는 건가요?” “저희도 한번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아마 후유증을 안고 계실 확률이 큽니다.” “후유증 말씀이세요?” “네.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만.” ‘이건 또 무슨 새로운 설정이야.’ 잠깐 멈칫 한 것도 사실. 하지만 걱정으로 가득 찬 김현성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후유증을 떠안고 있는 설정도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애초에 김현성에게 짐을 집어 던지기 위한 작전의 일환이었으니 당황하기보다는 박수를 보내는 것이 맞다. ‘이 자식도 아픈 사람을 의심하지는 않을거야.’ 안전장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거다. “마력회로가 망가진 것은 아니라고 판단해 이제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어쩌면 저희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사랑스러운 회귀자 역시 뜸을 들이는 고위사제를 비롯한 의료진의 표정에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저쪽에서 북 치고 장구 쳐주고 있으니 다물고 있는 게 맞다. “너무 희귀한 경우라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할지…. 일단은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환자 분도 계시는 자리니까.” “아뇨.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기영 씨.” “괜찮습니다, 현성 씨. 제 몸이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는 알아야 하니까요.” 입을 꽉 다물고 있는 모습. 침통하다는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잠깐 눈치를 보고 있는 사제단은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어오기 시작. 교국을 대표하는 의료진답게 꽤나 그럴듯한 추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심지어 꽤나 예리하기까지 하다. “혹시 명예 추기경님의 마력이 신성력의 성질을 띠게 됐다는 사실은 알고 계셨습니까?” “네. 저는 어찌된 영문인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전에 교황청에서 비슷한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었으니까요. 혹시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까?” “저도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애초에 마력과 신성력을 공유하고 있는 경우는 처음 있는 경우라…. 아마 전 대륙을 뒤져도 나오지 않을 희귀한 케이스일 겁니다.” “네.” “물론 신성력의 성질을 띠게 된 것이 나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명예추기경님의 몸이 빠르게 활기를 되찾아 간 것은 신성력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네.” “하지만 보, 본래… 본래 명예추기경님의 몸과 마력회로가 완전히 망가져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가정한다면….” “네?” “완전히 망가졌어야 하는 몸이 정상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만약 신성력의 성질을 띤 마력 때문이라면….” “아….” “저희도 알지 못하는 부작용을 안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 방금 전에 있었던 발작처럼 마력을 사용하거나 특정 행동을 동반했을 때 오는 후유증을 가지게 됐을 확률이 클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딴 후유증 같은 건 없다. 너무 쌩쌩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춤도 출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저쪽에서 그렇다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완전히 망가져 가루가 될 뻔한 몸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마력의 성질을 띠고 있는 신성력! 이런 드라마틱한 설정이 또 어디서 굴러 들어온단 말인가. 이지혜는 잠깐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하기는 했지만 갑작스레 눈물을 쏟기 시작. 안기모나 김예리 따위는 씹어 먹을 수 있어 보이는 연기력이었다. ‘얘 진짜 장난 아닌데.’ 김현성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침통한 표정이다. 이 대륙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마력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저런 얼굴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대륙에서는 마력이 없는 것보다 팔이 없는 게 더 낫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니 지금의 내가 처한 상황은 마치 비극의 주인공 그 자체다. “그럴 수가….” “물론 아직 확답을 내릴 정도는 아닙니다. 일단 명예추기경님이 당장 마력을 운영하는 것에도 문제가 없어 보이고… 회로 자체는 멀쩡합니다. 물론 계속해서 마력을 사용하신다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가급적이면 최대한 사용을 자제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번 같은 일이나 전처럼 격한 전투를 벌이시는 건 최대한 지양하셔야 합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뭔가 씁쓸한 내 표정은 이 분위기를 살리는 감칠맛 역할을 하게 되리라. 김현성은 굉장히 복잡한 얼굴. 눈물을 쏟지는 않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팔이 녀석의 감정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이건 모험가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다. 이 긴 여정에서 낙오할 수도 있는 위기가 닥친 것이다. 슬쩍 이지혜에게 눈빛을 쏘자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눈치챈 모양.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제 역할을 다 해준 의료진을 데리고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물론 이쪽은 원래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슬슬 판을 깔기 시작. 지금 이 타이밍에 신파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하… 하하. 다행입니다. 몸에 큰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후유증이라고 해도 뭐 별건 아닐 겁니다. 애초에 몸이 약하기도 했고 사실 저는 마법에 재능이 있는 편도 아니었으니까요. 연금술에 마력이 크게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이전처럼 생활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물론 마법을 사용하는 데에는 영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 “하하하. 예전처럼 활동할 수 있습니다. 현성 씨께서 많이 배려해 주신 덕분에 험한 일은 피해 오기도 했고… 몸이 조금 힘들 뿐입니다. 이전처럼 연금 마법을 사용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네. 아예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니까요.” 웃고는 있지만 현재의 내 표정은 꽤나 상실감을 안고 있는 이의 얼굴이다. 몰래카메라를 하도 한 덕분에 이쪽의 연기력도 물이 오른 느낌. 김현성이 침통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정말로 가슴 아픈 사람만 할 수 있는 표정이다. 심지어 눈이 붉어진 것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죄송… 합니다.” ‘아니, 니가 그렇게까지 하면 내가 너무 쓰레기 같잖아.’ “죄송합니다. 전부 제 잘못입니다.” ‘현성아, 이러면 내가 너무 미안해진다.’ “죄송… 합니다.” “하하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 쪽에서도 단순한 추측이라고 말했고 몸은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고개를 들어주세요, 현성 씨. 파란의 길드 마스터가 보여주는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른 길드원들에게 항상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셔야죠.” “…….” “당연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덕구나 하얀이가 알고 싶게 하지 않아요. 분명히 죄책감에 시달릴 겁니다. 아, 소라 씨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송… 합니다.” “현성 씨 잘못이 아닙니다.” 아마 자신이 함께하지 못했다는 데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 이 자식은 뭐 별걸 가지고 다 죄책감을 느낀다는 생각도 든다. ‘이러니까 1회 차에 그렇게 뒤통수를 맞았지, 이놈아.’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은 얼마 남지 않은 양심을 사정없이 쑤셔온다. 한마디 해주는 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 이쪽의 엄살 때문에 녀석이 흔들리는 건 이쪽에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건 녀석을 더 단단히 해줄 수 있는 기회다. 본래 저런 주인공 같은 인간들은 동료의 희생 아닌 희생을 겪으며 성장하는 법이니까. 뭔가 상황이 묘해지기는 했지만 이건 말이 필요 없는 베스트 포지션 그 자체다. “고개 들어, 이 자식아.” 잠깐 깜짝 놀란 듯한 얼굴을 하기는 했지만 내 말투를 굳이 꼬집어 오지는 않았다. “조금 귀찮아졌을 뿐 달라지는 건 없다. 이전처럼 활동하는 데는 전혀 문제없다는 거야. 물론 여러 가지 제한이야 있겠지만 네가 고개 숙일 일은 아니야. 애초에 튜토리얼 던전에서 네가 아니었다면 난 죽었을 거다. 감사를 해도 내가 하는 게 맞아.” 오그라 들기는 하지만 이런 대사는 잘 먹힌다. “…….” “네가 뭔가 짐을 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사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물론 네가 가지고 있는 짐이 우리를 위한 일이라 믿고 있고, 나는 뒤처지거나 낙오하는 게 아니야. 그냥 조금 늦게 걸어갈 뿐이야. 그러니까.” “…….” “어깨 펴.” 툭하고 어깨를 손으로 치는 것으로 마무리. 고개 숙이고 있던 자식이 슬그머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그럼, 길드 마스터. 잠깐 바깥 공기라도 쐬러 갑시다. 드릴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대충 판은 깔아 놨다. 무슨 이야기부터 하는 게 좋을지 아직 정리하지는 않았지만 나눌 이야기가 많다. ‘일단은….’ 진청이 정하얀에게 추파를 던진 것부터 시작하는 게 맞으리라. ‘내 소중한 예비신부를 지켜야지!’ # 336 회귀자 사용설명서 336화 후유증(2) 조금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와 봤다는 생각이 든다. 하도 누워 있었더니 걷는 게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을 지경. 그렇지만 기분은 좋다. 라이오스 왕성 안에 있는 산책로를 돌아다닐 뿐이었지만 확실히 외국에 나와 있다는 느낌이다. 형형색색 화려한 색들의 꽃들이 즐비해 있는 교국과는 다르게 라이오스의 정원은 잘 정돈되지 않은 느낌의 녹색. 우거진 나무와 줄기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것도 마음에 들고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김현성은 슬그머니 이쪽을 부축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는데 내가 어깨를 펴라고 해도 도무지 펴지지가 않는 모양. 응급처치를 한 덕분인지 표정이 좀 풀리기는 했지만 마음 한구석을 좀 먹은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도대체 뭣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사실 조금은 예상이 된다. 그동안 김현성은 길드의 일보다는 개인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실제로 길드에 체류하고 있는 시간 보다 체류하지 않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 만무. 녀석으로서는 1회 차의 잘못됐던 일을 바로 잡으려고 했던 것이었겠지만 미래가 많이 뒤바뀐 현재에 와서는 굉장히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는 거다. 굳이 표현하자면 1회 차의 망령에 사로잡혀 정말로 중요한 일을 놓쳐버린 셈. 가면 쓰레기 진청이 공화국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던 것은 통한의 실수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쪽이 발발거리고 돌아다니다 커다란 후유증을 안게 됐으니 길드원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책임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경우에는 녀석이 붙어 있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뭐, 저렇게 생각해 주는 걸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다. 당장 지금도 굉장히 지극 정성으로 나를 돌보고 있는 느낌. 절대로 넘어질 일은 없지만 혹시나 다리가 풀려 넘어질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 왠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을 돌아다니는 이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자꾸만 시녀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괜스레 눈에 띄기 시작. 장소를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봤지만 아마 우리들의 목소리는 저들에게 닿지 않을 것이다. “하실 말씀이라는 게….” “조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해 보는 것은 당연. 너무 티 나게 진청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의구심을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김현성이 나를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조심해도 나쁠 건 없다. 마침 녀석이 먼저 운을 띄우기 시작. 눈치가 없진 않은 모양이다. 이쪽이 무슨 말을 꺼내려 하는지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라이오스에서….”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정확한 경과에 대해서는 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기영 씨. 당장 부담을 주고 싶지 않고요. 이번 일은 제가 다 알아서….”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계속해서 누워만 있는 것도 조금 답답하고 이번 일은 저에게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네. 정말로 중요합니다. 아마 덕구는 모르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기도 하고요.” “무슨 의미이신지?” ‘지금 해도 되려나.’ 김현성의 생각을 알 수가 없으니 여러모로 답답한 면이 많다. 일단 녀석이 진청을 가면남으로 확실히 의심하고 있는지조차 궁금하다. 정황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높지만 혹시나 1회 차에서 진청이 가면남과 함께 있는 모습을 김현성이 확인했을 경우에는 스토리가 조금 꼬일 수도 있다. ‘만약….’ 만약에 1회 차에서 진청과 김현성이 절친한 사이였다면? 혹은 진청 역시 가면 쓰레기와 적대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면? 진청 역시 가면남에게 살해당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면? 위 예시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1회 차의 미래에 진청이 가면남이 아니라는 확실한 정황을 가지고 있다면 김현성은 악마소환사, 가면 쓰레기 진청을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하고 있을 수도 있다. 제3세력이 녀석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한 공작이라는 걸 전제로 조사를 시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만약 정말로 김현성이 이번 사건을 제3세력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조사에 임하고 있다면 경솔한 발언은 오히려 의심을 살 수도 있다. 천천히, 하지만 조심스럽게 진청이 가면 쓰레기라는 의심의 싹을 틔어 내야 한다. 1회 차에 김현성이 확인했던 모든 정황이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 시작의 열쇠가 바로 정하얀.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일단은 말을 내뱉는 게 정답에 가까우리라. 고민할 필요는 없다. 곧바로 설명을 시작하자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하얀이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말하고 싶은 건 아주 단순하다. ‘진청 새끼가 자꾸만 우리 하얀이한테 집적거렸다.’ 물론 저렇게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형식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다만 여러 가지 MSG를 첨가하자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정답을 줘서는 안 된다. 진청이 가면 쓰레기라는 사실은 김현성 스스로가 깨달아야 한다. “하얀 씨 말씀이십니까?” 조금은 의아한 표정. 하지만 나름대로 진지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김현성 역시 얼굴을 굳히고 있다. “물론 제 착각이고 기우였다면 좋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서.” “네.” “사실 처음 공화국의 이방인들과 마주쳤을 때….” 하나하나 사건을 뒤집어 가며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어디에선가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어! 형님! 형씨!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요!” ‘아… 제기랄. 박덕구!’ 애써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자 더욱더 큰 소리로 입을 열어온다. “형님!! 나 여기 있다니까!”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는 모습은 가관.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면 좀 좋으련만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통에 난입한 녀석 때문에 분위기가 애매해졌다. 슬그머니 사라지라는 손짓을 하기는 했지만 그걸 이쪽으로 오라는 표현으로 받아들였는지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이쪽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형님. 아니, 벌써 움직일 수 있는 거요? 몸에는 별 이상 없고? 아까 뭐 아프다고 하지 않았소? 현성이 형씨가 갑자기 왕성 쪽으로 막 뛰어 가는 거 보고 뭔 일인가 했는데… 정말 걱정했다니까? 이렇게 움직인 걸 보니까 그래도 괜찮은 거 같기도 한데. 거,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이는구먼.” 크게 숨을 쉬는 모습에는 원망만 할 수도 없다. 정말로 걱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을 열심히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김현성과 함께 있던 녀석에게도 내가 발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닿았을 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는 있었지만 벌써부터 눈시울이 붉어진 녀석을 보니 괜스레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 일단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만큼 녀석을 뒤로 물릴 수밖에 없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몸은 정상이다, 덕구야. 뭐 달라진 점도 없고. 아무튼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넌 하얀이한테….” “아! 형님도 누님 걱정하고 있었던 거요? 거 걱정할 필요 없소. 일단은 내가 정연 씨 보고 누님 좀 챙기라 이야기해 놨으니까. 안심해도 된다니까? 아마 개미 새끼 한 마리도 하얀이 누님 병실에 침입하지 못할 거요.” ‘이 돼지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형님이랑 형씨가 걱정할까 봐 나만 알고 있었던 건데. 거참…. 역시 형님은 못 당하겠다니까. 역시 형님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덕구 씨.” 나도 녀석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까에 이어 김현성도 무척이나 궁금한 표정. 나뿐만이 아니라 박덕구마저 정하얀을 언급하고 있으니 정말로 정하얀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의아한 김현성의 표정과 내 일그러진 표정에 자기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아 주면 좋으련만 녀석은 커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기 시작. 잠깐 머리를 감싸 쥐기는 했지만 녀석의 목소리에는 환호성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진청 악마소환사 쓰레기놈이! 하얀이 누님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거 아니요!” ‘덕구야! 슈바. 사랑한다!’ “물론 확실하지는 않다니까. 하지만 형님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이제는 당당하게 밝힐 수 있을 것 같다니까!” ‘이 돼지 새끼….’ “확실하다니까!” ‘왜 이렇게 도움이 되는 거야….’ 이 자식은 바보가 아닐지도 모른다. 항상 했던 생각이지만 오늘따라 더욱더 그런 생각이 내리 꽂히기 시작했다. 당장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던 10초 전과는 다르게 일단은 박덕구의 수다 타임에 합류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당연지사.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보다는 녀석이 말하는 게 더욱더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훨씬 더 직접적일 테니까. “그 더러운 악마소환사 쓰레기가 누님한테 막 응? 쪽지까지 건네면서 엄청 집적거렸다니까! 당시에는 누님이 워낙 매력 있고 착하다 보니까 벌레가 꼬이는 거겠지 하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수상한 거요. 그러다 오늘 제대로 된 결론을 내렸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래 그거야, 자식아.’ “나는 마력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수상한 마력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는 거 아니요! 사실 그때 하얀이 누님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 같기는 했는데, 형님도 굳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언급 안 했지. 나는 무슨 봉사활동 하고 있다가 형님이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 갔을 뿐이니까. 그 악마소환사가 그 자리에 떡하니 있는 줄 누가 알았겠소?” “그렇군요.” “이건 그냥 내 추측이요. 형씨, 어쩌면 그 악마소환사가 일부러 하얀이 누님을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된다니까! 그 날 형님이 있는데도 쪽지까지 주면서 껄덕거린 것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악마의 봉인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는 게 가장 수상했지. 아암 그렇고말고! 어쩌면… 그 썩을 놈들이 누님을 제물로 바치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 거 아니요!” ‘그건 또 새로운 해석인데….’ 이쯤 되면 작가를 해도 될 정도의 스토리텔링 능력이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 증거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이미 진실이 된다. “마력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는 나도 누님이 마력의 축복을 받았다는 건 알고 있는데, 그놈들이 그런 것 하나 몰랐을까? 아마 자기들의 힘으로는 악마를 완전히 소환하지 못했을 거요. 필연적으로 마력이 큰 누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거고… 처음부터 모든 게 짜여진 함정이었던 거요.” “가능성은 있을 수도 있겠군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쩌면 지금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을 수도 있지!” 자신의 추리가 어떠냐는 듯 이쪽을 바라보는 박덕구. 내가 쓴 시나리오와는 달랐지만 이건 또 이것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한 김현성은 표정을 굳히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녀석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우 이걸로는 의심의 싹이 뿌리를 내리기는 힘든 모양. 저 허무맹랑한 추측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바로 내 역할이다. “기영 씨가 말하려고 했던 게….” “네. 다르기는 하지만 비슷합니다. 물론 착각이라면 좋겠지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늦었지만 저 역시 뭔가 이상한 징후들을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박물관 원정 당시 막스가 하얀이에게 마력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라고 말했던 적 있었는데, 기억하십니까?” “네.” “제가 봐도 정하얀의 몸은 순도 깊은 마력의 결정체입니다. 흑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만약 제물로 사용한다면 그녀보다 더 질 좋은 소재는 찾기 힘들 겁니다. 어쩌면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요. 무엇보다 자꾸만 이상한 것들이 눈에 밟힙니다. 정확히 말하면 밟혔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여기에서 한 번 뜸을 들여주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중요한 이야기를 꺼낼 차례였으니까. “공화국이 라이오스를 빠져나가기 전에, 하얀이의 주위를 맴도는 몇몇 이들을 본적이 있습니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만….” “…….” 여기에서 1회 차에 봐왔던 얼굴들이 힘 있게 등장해 줘야 한다. 내가 여단에 들어가는 것에 반대표를 던졌던 쓰레기들. 1회 차의 사소한 복수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아무튼 짐을 떠넘길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이들이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김현성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다. “궁수로 보였던 남녀 쌍둥이, 한쪽 다리가 없는 청년, 큰 키의 빼빼 마른 남자.” 확실히 표정을 굳히는 모습. 이제야 윤곽이 잡히는 모양이다. 녀석은 중얼거렸고 녀석의 목소리에 박덕구의 얼굴도 구겨지기 시작했다. “…여단.” 완벽한 정답.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 337 회귀자 사용설명서 337화 후유증(3) 아직 시작에 불과했지만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가슴 한편이 편안해진 것은 당연지사. 이렇게 편안한 감정을 느끼는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도 든다. 가면 쓰레기가 빛의 진영을 위협하는 걸 간접적으로 방해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가슴 한편이 콕콕 찔리지만 어둠의 세력이 날뛰는 걸 두고 볼 수 있을 리 만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만큼 사랑스러운 회귀자에게 무거운 숙제를 던지는 게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라 생각했고, 그 방법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여단과 진청 쓰레기에 대한 대화가 끝나고 난 이후, 녀석이 조금 더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여러 가지로 머리가 복잡해진 김현성이 최우선 과제로 무엇을 꼽았는지는 뻔한 일. ‘혜진 씨를 하얀 씨에게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정하얀에 대한 보호조치였다. 혹시나 가면 쓰레기 진청이 1회 차처럼 정하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언제 어디서 여단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정하얀에게 조혜진을 붙인 것은 최선의 선택이라 할 만하리라. 일단은 녀석 역시 라이오스에 남아 내정에 힘을 쓰는 상황. 나와 정하얀도 당장 이 곳에서 몸을 회복하고 있으니 녀석이 싸돌아다니지 않는 이유가 우리를 돌보기 위해서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 머리 깨질 거야….’ 가면 쓰레기가 진청이라는 심증은 있다. 어쩌면 머릿속으로 반 정도는 녀석이 가면 쓰레기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언가 액션을 취하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김현성 역시 만능은 아니다. 하고 싶다고 해서 모든 걸 전부 할 수는 없다는 거다. 현재 가면남 진청은 공화국의 보호 아닌 보호를 받고 있었고 더러운 여단도 어딘가 이쪽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공화국 본진으로 쳐들어 간 이후, 가면 쓰레기 진청을 암살하거나 어디 있는지도 모를 여단 멤버들을 잡아 올 수는 없다. 김현성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거다. 물론 그 범위가 무척 넓다는 게 녀석이 가진 이점이기는 했지만 공화국 솔로 플레이는 누가 봐도 자살 행위에 가깝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초조한 것은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 조금 의외였던 것은 녀석이 의외로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녀석 나름대로 성장한 건지 아니면 1회 차의 가면 쓰레기 진청에게 통수를 맞은 기억이라도 떠올렸는지 몰라도, 만족할 만한 행보를 선보이고 있었다. ‘아주 좋지.’ 드라마틱한 급 전개나 반전 대신이라고 하기엔 뭣 하지만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선택한 것은 현재 라이오스를 둘러싸고 있는 이 상황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것. 삼국 동맹의 결성을 위해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물론, 교국 이방인들의 결속에 힘을 쏟았다. 중형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라이오스를 들락날락거렸고 교국 8좌 회담을 직접 성사시키는 한편 왕국연합에서 체류하고 있는 이방인들을 규합하려는 움직임을 선보였다. 우리 현성이가 달라졌어요! 정신없이 싸돌아다니며 성과는 찾아내려 하기보다는 눈앞에 있는 과제부터 차근차근 처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네 성장에 형이 눈물이 다 나올라 그런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다짜고짜 공화국으로 홀로 훌쩍 떠난 이후, 사태가 막장으로 치달은 이후에야 헬프를 치는 그림이 나왔을 수도 있으리라. 말재간이 없는 녀석이 많은 세력을 규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도 자체는 충분히 아름답다. 물론 중요한 것은 그 목적과 당위성이기는 했지만…. ‘그건 너무 뻔하지.’ 아마 적에 대한 대비거나 공화국 쪽에 압력을 놓기 위한 움직임. 내 입장에서는 전쟁이 터져도 그리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지만 김현성은 진청과 공화국을 따로 분리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이건 김현성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교국의 삼자동맹 쪽에서 액션이 있다면 공화국 쪽에서도 액션이 있을 수도 있다. 공화국 쪽에서 진청을 버릴 생각이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만약 현재 공화국이 흑마법과 여단에 완전히 오염된 것이라면 오히려 뒤통수를 때릴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현재 내가 필드에 나가 있지 않기 때문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순 없지만 이지혜의 말처럼 분위기가 묘한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묘한 분위기를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큰 활약을 해준 박덕구 역시 꽤나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김현성의 입에서 나온 여단이라는 소리에 자극을 받은 건지 항상 빼먹지 않은 훈련 시간을 더욱 길게 잡았다. 길드 마스터와 길드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박덕구가 이런 모습을 보이자 라이오스의 체류하고 있는 길드원들 역시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은 당연지사. 결과적으로 길드에서 몸이 편한 것은 박덕구를 제외한 빛의 영웅들이 유일했다. 정하얀은 하루하루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드디어 분리된 방을 얻게 된 한소라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잠깐의 평화에 나 역시 해야 하는 일들을 다시 본 것은 당연. 디아루기아와 함께 똘똘이, 막스와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 길지는 않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똘똘이와 디아루기아는 나름대로 만족한 것처럼 보였고, 막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정을 돌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돌보는 것도 너무나도 당연한 일. 빛의 연금술사라는 직업을 조금 더 긴밀히 파악하기 위해 연구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연구 기반이 전부 린델에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리 오랜 기간을 쉰 건 아니지만 확실히 좀이 쑤시기는 한다. 김현성이나 오스칼, 다른 길드원들과 프리스티나가 만족할 정도의 시간을 칩거한 이후에야 이제는 괜찮다는 의견을 내밀었고 복귀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의료진의 확답역시 받아냈다. 엘프들과 라이오스, 교국의 삼국 동맹이 복귀할 타이밍으로는 나쁘지 않다는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엘프 왕국 에베리아의 공주. 엘레나가 라이오스를 방문하다.] [베일에 둘러싸인 엘프 왕국 에베리아의 엘레나 공주가 라이오스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커다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에베리아의 사절단이 라이오스로 온다는 것은 이미 크게 알려진 소식이었지만 그 사절단 안에 엘레나 공주가 있다는 것은 파격적인 인사 편성이 아니냐는 추측이다.] [엘프 노예 문제나 이종족 차별 등으로 오랫동안 타국과의 교류를 삼가 왔던 에베리아가 이런 급진적인 행보를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엘레나 공주의 측근에 말에 따르면 이번 라이오스 악마 소환 사건을 이겨낸 신성교국의 이기영 명예추기경을 비롯한 빛의 영웅들에게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힐 단계가 아니라 발언하며 논란을 일축했지만 에베리아 왕국 역시 이번 악마소환 사태에 대해 커다란 유감과 분노를 표시했다. 현재 에베리아 왕국은 교국과 라이오스의 동맹군의 호위를 받으며 오는 25일부터 31일까지 라이오스에 머무를 예정이다. -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아주 좋네.’ 아마도 이게 이지혜가 말했던 중요한 손님인 모양인 것 같았다. 슬그머니 내려다보자 쌓여 있는 기사들이 눈에 보이기는 했지만 굳이 읽어보려 하지는 않았다. 기사의 내용 정도는 당연히 숙지하고 있다. 이쪽이 방금 읽었던 것과는 다르게, 다른 기사들은 전부 이지혜의 손을 거쳤으니까. [악마 소환사 진청,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린델일보 박성경 기자.] [라이오스 악마 소환사건의 전말. -교국신문 메를리아 기자.] [어째서 공화국은 진청을 두둔하는가. 흑마법과 공화국의 오랜 역사에 대하여. -다완일보 천위 기자.] [라이오스의 영웅이 된 빛의 영웅들,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어떤 사람인가. 바젤 교황님 특별 인터뷰 포함. -교황청 매거진.] ‘키야…. 이건 한번 읽어보고 싶네.’ 당연히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도 눈에 띈다. 대충 기사를 집어 들자 훈훈한 내용이 시야에 비친 것은 당연. 이기영 명예 추기경은 모든 종교인의 귀감인 것은 물론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대륙을 위해 내리신 보물이라는 것. 바젤 교황이 나를 아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따뜻한 마음을 전해 들으니 괜스레 훈훈해진다. ‘바로 이거지. 아암. 그렇고말고.’ 타이틀만 봐도 어떤 내용이 수록 되어 있는지 느껴질 정도의 편파적인 기사.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물론 흐뭇해진다. 엘프 공주인지 뭐시긴지가 이쪽을 보고 싶다고 한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입꼬리가 올라가자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아, 하얀아.” 덜컹 문을 열고 등장한 것은 정하얀. 바로 뒤에는 정하얀을 밀착 마크하는 조혜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1회 차에 그들을 가면 쓰레기 진청의 손에서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생겼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벌렸다. “헤헤헤.” “몸은 좀 어때?” “그, 그, 그… 조금 전보다 괜찮아진 것 같은데 그래도 아직까지 아파서… 하복부가 콕콕 하고 쑤셔요. 막 누가 발로 차는 것처럼…. 심장도 아프고요.” “그래? 오늘 일 끝나고 잠깐 시간 좀 내볼까?” “저, 정말요?” “응. 어차피 일정도 길지 않으니까. 자, 이리와.” 다시 한번 말을 잇자 우다다 돌진해서 꼬옥 안긴다. 너무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도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때의 표정이 떠올라 만날 때마다 한 번쯤은 꼭 안아주고 싶어진다. ‘더러운 가면 쓰레기 진청.’ 자꾸만 품속으로 파고드는 것 때문에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세이프. 정하얀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앞을 바라보자 조혜진의 얼굴 역시 시야에 비쳤다. 슬그머니 말을 걸어오는 모습. 사실 무슨 말을 해올지는 이미 알고 있다. 이미 수 백 번도 들었던 이야기였으니까. “정말로 괜찮으신 게 확실한 겁니까? 부길드 마스터?” “벌써 몇 번이나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는 멀쩡합니다, 혜진 씨. 아니, 그리고 평소처럼 말하셔도 됩니다. 부길드 마스터는 조금 딱딱…” “지금은 임무 수행 중입니다, 부길드 마스터. 그리고… 아무리 건강을 회복하셨다고 한들 너무 무리하시는 건 위험합니다. 사실은 오늘 일정도 취소하고 싶었습니다만.” “아. 그럴 수는 없지요. 이종족 연합을 동맹에 끌어들이는 첫 걸음이니까요. 엘레나 공주가 우리들을 보고 싶어 했으니 얼굴은 비춰주는 게 맞습니다. 사실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고.” “에베리아 측에서도 괜찮다고….” “괜찮습니다, 혜진 씨. 절대로 무리하는 게 아닙니다. 하하.” 술자리에서는 그마나 부드러워지기는 하지만 확실히 공적으로 일할 때의 조혜진은 딱딱해도 너무 딱딱하다. 하지만 이 딱딱한 대화도 정하얀의 마음에는 들지 않은 모양. 서둘러 이쪽의 옷을 끌어당기며 관심을 자기 쪽으로 돌리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에 이런 패턴을 많이 겪어봤지만 사실 쓸데없는 이야기가 대부분. 하지만 이번 만큼은 제법 흥미가 가는 소식이었다. “오빠 그거 알아요?” “뭐?”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엘프 공주가요. 영혼의 깨끗함을 구별할 수 있대요!” 뜬금없는 발언에 이상한 걱정이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했다. # 338 회귀자 사용설명서 338화 후유증(4) “정말?” “네.” “어디서 들은 이야기야.” “라이오스 사람들이요.” 확신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었지만 자신감 있는 정하얀의 얼굴을 바라보자 왠지 모르게 설득력 없이 들려온다. 물론 정하얀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시선을 끌기 위한 거짓부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진실을 판가름해 줄 사람을 찾게 되는 것은 당연. 이게 정말이냐는 듯 슬쩍 조혜진을 바라보니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사실입니다. 정확히는 저도 알지 못하지만… 하얀 씨처럼 들은 적은 있습니다.” “네?” “진실인지 아닌지 구별할 방법이 없긴 하지만… 가끔 엘프들 중에서도 특별한 개체는 그런 능력을 타고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영혼의 깨끗함을 구별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선, 악을 구별하는 건지 그 차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사실 엘프에 대한 정보가 워낙 적어서 무엇 하나 정확한 바가 없을 겁니다. 특히나 하이엘프에 대해서는 말입니다.” “하이엘프 말입니까?” “네. 대륙인 사이에 전승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엘레나 공주가 몇 천 년 만에 태어난 하이엘프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듯하게…. 아! 깨끗한 영혼을 바라보는 하이엘프에 대한 이야기는 교국의 동화책이나 설화에서도 종종 등장합니다.” “아….” ‘이거 오히려 더 설득력 있어지는 데….’ 이 대륙에서 동화책이나 전승, 설화에 등장했다는 건 터무니없다는 뜻과는 거리가 멀다. 여긴 지구가 아니니까. 대부분의 동화책이나 전승 설화 같은 것은 실화를 토대로 한 것들이 많았고 실제로 그로 인해 발견된 던전이나 몬스터도 많다. 애초에 용도 있는 곳이니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 영혼의 깨끗함을 바라보는 엘프가 튀어나온다고 해도 절대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거 왠지 걱정되는데….’ 사실 캥길 건 없다. 이쪽은 이미 라이오스를 아니, 대륙을 구한 영웅 중에 영웅이다. 영혼의 깨끗함으로 선악을 판단한다고 해도 어떻게 이쪽을 매도한다는 상황 자체가 일어나기 힘들다. 생각해 보면 크게 걱정할 필요 없었다. 빛기영의 마력은 신성력으로 가득 차 있고 칭호 역시 ‘대륙수호자’라고 박혀 있으니까. 일이 조금 꼬이기는 했지만 라이오스를 구한 것도 사실 중의 사실. 어쩌면…. ‘내 영혼이 조금은 깨끗해졌을지 누가 알겠어.’ 최근에 한 착한 일을 손꼽아도 셀 수 없이 많다. 1회 차에 조금 꼬이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현재는 김현성의 품에서 빛의 진영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 때문에 은근슬쩍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사실 뭐가 됐든 상관없지만 한 왕국의 권력자에게는 일단 잘 보이고 싶은 게 소시민의 심정이다. 결국에는 조혜진을 향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아픈 척하는 건 지양해야 했지만 이 정도의 엄살은 괜찮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혜진 씨, 혹시 여기 휠체어 있습니까?” “네?” “아무래도 갑자기 숨이 차서….” “…….”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지만 조혜진은 일단 군말 없이 이쪽의 부탁을 들어주는 중. 잠깐 밖에 나간 이후에 휠체어를 끌고 나오는 얼굴은 왠지 모를 자괴감에 휩싸여 있었다. 아까 전 이쪽을 걱정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한숨을 내쉰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은 눈치챈 모양이다. ‘이 정도 오바는 해줘야지.’ 영혼이 약간 더러울지라도 깨끗하고 숭고한 겉모습으로 승부를 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콜록. 콜록.” 최근 너무 메소드 연기에 심취한 영향인지 뜬금없이 기침이 튀어나왔지만 휠체어를 밀고 있는 조혜진의 기척은 싸늘했다. 물론 걱정하는 듯한 정하얀의 표정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자 꽤 빠른 시간 안에 접견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을 여는 라이오스 경비들의 얼굴에 이쪽을 향한 무한한 존경심을 보자, 휠체어에서 일어나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무럭무럭 솟아난다. 이마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는 라이오스 특유의 인사법을 흉내 낸 이후 안으로 들어가니 뻘줌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한소라와 박덕구가 보인다. 물론 김현성도 함께 자리해 있다. 이쪽이 휠체어를 타고 등장할지는 예상 못 했던 모양인지 조금 허둥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무슨 일입니까? 기영 씨, 혹시 다시….” “아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성 씨. 잠깐 어지러워서 말입니다. 걷거나 움직이는 건 문제가 없지만 혹시나 에베리아의 사절단 여러분들께 못난 모습을 보일까 싶어 이렇게라도 참석하게 됐습니다. 오스칼 님과 프리스티나 님과 함께하는 회담은….” “이후에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에베리아 측에서 일단 기영 씨와 하얀 씨를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싶다고 요청을…. 기영 씨, 이럴게 아니라 몸이 안 좋으시면 들어가 있으셔도 됩니다. 굳이 이러지 않으셔도 삼국동맹은 큰 문제없이 성사될 겁니다.” “하하. 삼국 동맹을 위해서 온 게 아닙니다.” “거, 형님 갑자기 또 몸이라도 안 좋아진 거요?” “그런 거 아니다, 덕구야. 현성 씨께 말한 그대로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지만….” “괜찮다니까.” 여기저기서 걱정해 온다. 내가 봐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그림이다. 어째서 기업 총수들이 휠체어를 타고 등판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 아무튼 슬슬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할 즈음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엘레나 공주님 입장하십니다.” 반대쪽의 문이 열리며 몇몇의 엘프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 ‘엄청 빨리 왔네.’ 이쪽을 보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교국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쪽이 정말 대륙을 구원한 영웅이 되긴 한 모양. 입꼬리를 올리며 그들을 바라보자 확실히 인간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인상이었고 걸음걸이조차 신비하게 느껴진다. 이전에도 엘프들은 본 적은 있었지만 여전히 이국적이고 신기한 외관.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들을 바라볼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그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얀색 면사를 쓰고 등장한 엘프. 입고 있는 옷이나 분위기만 봐도 저쪽이 엘레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음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곧바로 그녀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 내렸다. [엘프 엘레나 에베리아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엘레나 에베리아] [칭호-하이엘프, 에베리아의 공주.] [나이-231] [성향-호기심 많은 옹호자] [직업-엘룬의 수호자-전설 등급] [능력치] [근력-19/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민첩-20/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체력-3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92/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35/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행운-90/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마력-91/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특성-영혼을 바라보는 감각-전설 등급] [상대방의 영혼을 느낄 수 있습니다.] [총평-전체적으로 몸이 약하지만 훌륭한 스탯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사제 계열로 분류할 수 있는 전설 직업, 엘룬의 수호자와 영혼을 깨끗함을 구분할 수 있는 전설등급의 특성이 눈에 띕니다. 물론 플레이어 이기영은 굳이 시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결과는 뻔하니까요.] ‘아… 저거 정말이었잖아. 슈바.’ 잠시 뜨끔한 것은 당연지사. 물론 저 특성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지는 모른다. 설명 역시 굉장히 짧고 단순하다. 하지만 총평의 말에 급 불안해지기 시작. 그 와중에 면사를 벗은 엘레나의 외관을 보자 그 불안감도 조금씩 흩날려 가기 시작했다. 에메랄드색 눈동자와 같은 색의 머리카락. 외관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종족 자체가 다르다는 이질감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미의 관점으로 봐도 그녀는 충분히 미인이었다. ‘미친….’ 아니, 단순히 미인이라고 단어로 그녀를 정의할 수 없다. 아름답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개체를 보는 기분이다. 너무 멍 때리고 쳐다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정하얀을 바라봤지만 이쪽이 선물해 준 반지를 쓰다듬으며 자신을 잘 컨트롤하는 모습. 내가 내지른 프로포즈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 들려온 것은 엘레나 공주의 목소리. “반갑습니다, 여러분. 에베리아 왕국의 엘레나입니다. 이름 높으신 영웅 분들을 실제로 만나 뵈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마치 옥구슬이 은쟁반 위를 구르는 소리였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몸을 뒤쪽으로 빼게 된다. 아름답다고 인식한 뇌와는 다르게 왠지 모르게 목소리에서 거부감이 느껴졌기 때문.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을 때 가장 처음 인사를 건넨 것은 김현성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엘레나 역시 슬쩍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는 사이였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내가 김현성에 대해 잘 파악하게 됐다고 한들, 뒷모습만으로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파란 길드의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부족합니다만 라이오스를 구한 영웅들이 몸을 담고 있는 길드의 마스터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파란 길드!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라이오스를 지켜내신 영웅들이 몸 담고 계신 곳이었지요. 아… 역시나.” “네?” “네… 그렇군요. 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가관. 아니, 심지어 뜬금없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얼굴에서 보석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비주얼이다. 다만 김현성의 손을 잡은 이후 갑자기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만은 확실히 당황스럽다. ‘뭔가 느끼고 있는 건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의 영혼에서 무언가를 본 것 같다. 혹시나 김현성의 1회 차를 훔쳐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그런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영혼을 바라볼 수 있다는 말과 검은색 세계를 훔쳐볼 수 있다는 말은 전혀 다르다. 심지어 마음의 눈으로 본 설명 자체도 굉장히 단순하다. 내 눈이나 카스가노의 눈과는 다르게 그녀가 가지고 있는 특성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아,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이런…. 실례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갑자기… 저도 모르게. 정말로 죄송합니다. 잠깐… 죄송합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대놓고 뭐 하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비공식적인 자리이기는 했지만 굉장히 중요한 모임이었으니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박덕구가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거, 혹시 영혼이라도 막 들여다보고 그런 거요?!” “네?” “거, 여기저기에서 그렇다는 소리가 들립디다. 하이엘프 공주님은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다 없다 어쩌고 저쩌구. 막 그런 소리를 하는 것 같던데, 사실 내가 이런 걸 믿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우리 형씨 보고 갑자기 운 게 마음에 걸려서 말이요. 뭐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도 기왕이면 알려주면 좋겠소.”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침묵이 흐른다. 나 역시 박덕구가 저런 걸 대놓고 물어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혹시나 외교적 결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불안한 마음에 그녀를 바라봤지만 딱히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김현성이 살짝 눈치를 주자 박덕구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 그 와중에 엘레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덕구 씨.” “아… 내가 실수한 거요? 거, 미, 미안….”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김현성 님, 괜찮습니다. 오히려 대답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실 직접적으로 그런 걸 물어보실 줄은 생각 못 한 터라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굉장히… 순수하고 투명하시군요.” “날 알고 있는 거요?” “물론입니다. 여신의 거울로 봤을 뿐이지만… 실제 모습도 제가 상상했던 그대로군요. 후훗. 아, 질문을 하셨지요. 제대로 된 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답변해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이요?” “네. 물론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크게 비밀이라 할 수도 없으니까요. 음… 정확히 말하면 영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아까 제가 결례를 범한 것 역시….” “현성이 형씨 영혼이 그렇게 느껴졌기 때문인 거요?” “네. 그 표현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제가 사과를 드려야 되겠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김현성 님. 본의로 알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느껴지는지라.” “아닙니다, 엘레나 공주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나 불편하시다면….” “거, 불편할 게 뭐가 있겠소. 영혼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우리가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눈으로 보듯이 느낀다는 거 아니요?” “네. 적절한 표현입니다.” “뭐, 그렇다면 상관없지. 큼. 오히려 이쪽에 잘된 일이지. 우리 형님의 투명한 영혼을 보면 아주 놀라 자빠지겠구만!” 왠지 모를 불안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즈음, 자신감 넘치는 박덕구의 발언은 가관. ‘그만해, 이 돼지새끼야.’ 녀석의 돌발 발언에는 슬그머니 한 발 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 339 회귀자 사용설명서 339화 후유증(5) ‘쓸데없이 기대감 증폭시키지 마.’ 어째서 엘레나가 기뻐 보이는 얼굴을 하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저 엘프는 타인이 어떤 영혼을 가지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박덕구는 냄새를 맡는다는 저렴한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시각, 촉각, 후각과 같지만 다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으리라. 굳이 예를 들자면 그녀는 지금 좋은 향기를 맡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좋은 촉감을 느끼고 있는 셈. 김현성에게서는 커다란 감동을 받은 것 같았고 박덕구에게는 순수하고 투명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장소에 둘러 쌓여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소라는 괜찮으려나.’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엘레나가 뭔가를 느낀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둘러댈 여지가 있고, 결정적으로 영혼과 직업의 상관관계를 감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미 정하얀과 함께 한소라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작업을 쳐놓은 상황. 심지어 그것으로도 모자라 카스가노 유노까지 합류하며 여러 정황을 은폐했다. 결과적으로는 고위 사제들조차 그녀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까지 와버렸다. ‘전설 등급의 특성이지만 확실히 애매하긴 하네.’ 엘프 공주의 영혼 발언에 불안해졌는지 한소라가 살짝 이쪽을 바라봤지만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당연지사. 그 와중에 박덕구는 그녀와 함께 본격적으로 인사를 나누는 중이다. “거,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를 안 한 것 같은데. 파란의 박덕구요.”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박덕구 님. 엘레나 에베리아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으음.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거요?” “네. 영웅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조금 부끄럽습니다만 이름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도….”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는 거요?” “아!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말씀 드렸듯이 제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영혼뿐입니다. 여러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왕국에 있는 동안 신문과 잡지라는 것을 많이 접해왔기 때문입니다.” “아아아. 그러고 보니 그 날 이후로 그런 게 많이 나오기는 했지. 그게 거기까지 닿았구먼.” “사실 저희 왕국은 아직까지 교국과 라이오스의 물건을 반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여러분들에 관련된 이야기는 벌써 대부분이 알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연극으로 만들어질 정도고 음유시인들은 여러분의 업적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죠. 그 날 여러분이 보여주신 희생과 기적은 단순히 라이오스뿐만이 아니라 저희 엘프들의 가슴속에도 뿌리 깊게 박혔기 때문입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장엄한 모습이었지요. 저는 그리 오랜 시간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제가 봤던 광경 중에 가장 찬란한 광경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그, 그렇게 말해주니 거 영광이요. 사실 내가 한 일은 거의 없지만. 크흠. 이거 괜히 부끄럽구만. 아, 여기 있는 소라 후배도 큰 힘이 되어 줬다니까. 아마 소라 후배가 아니었다면 나 혼자서 버틸 수 없었을 거요.” 박덕구답지 않게 쑥스러운 모양이다. 바로 눈앞에서 저런 말을 들으니 확실히 낯간지러울 만도 하다. 괜스레 얼굴을 붉히며 한소라에게 바통을 넘기는 모습은 가관. 아무튼 간에 박덕구의 소개 아닌 소개에 한소라도 앞으로 튀어나와 인사를 나눴다. “한소라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한소라 님.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걱정한 것도 사실. 하지만 딱히 달라진 기색은 없다. ‘어?’ 한소라가 개과천선하기는 했지만 이전에 알아주는 쓰레기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놀라운 결과라고 할 수 있으리라. 박덕구나 김현성처럼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는데 제법 기뻐 보인다. 심지어 먼저 손을 잡아오기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는 정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거 나도 나름 괜찮겠는데.’ 적어도 한소라랑 비슷한 수준의 영혼은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아니, 한소라보다는 이쪽이 낫다. 이기영 인생 26년, 하늘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타이밍. 오히려 박덕구 때보다 더욱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며 가슴 한편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한참이나 그녀와 시간을 보내고 난 이후에는 정하얀의 차례. 김현성이 행사를 보는 진행자인 양 정하얀을 소개했고 다시 한번 어색한 자기소개 시간이 오고갔다. “정하얀이라고 합니다.” “여, 영광입니다. 정말로 영광입니다.” 박덕구와 한소라 때도 충분히 기뻐 보이기는 했지만 정하얀이 등장한 이후 그녀의 얼굴은 더욱더 가관.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아이돌을 만난 팬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얘 이거 설마….’ “어떻게, 몸은 이제 다 회복하신 건가요?” “네? 아… 네.” “그, 그것보다 정식으로 인사부터 올리겠습니다. 이미 계속 들어 알고 있겠지만 엘레나 에베리아라고 합니다. 정말…. 정말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남들을 돌볼 수 있으셨는지…. 죽음을 각오하신 그 숭고한 모습은 대륙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습니다. 이 대륙에 들어오신 지 2년도 안 되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순수한 마력을…. 아! 이럴게 아니라,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로 감동했습니다. 어떤 것부터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드리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머릿속이 갑자기 하얘져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니요. 죄, 죄송할 것까지는 없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악수를….” “괘, 괜, 괜찮지만….” “영광입니다. 정말로 영광입니다. 역시 모든 게 제가 생각했던 그대로였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거의 확실하네.’ 착각이 아니다. 기품이 넘치는 얼굴은 여전하지만 묘하게 흥분한 모습이 마치 10대처럼 보인다. 200살이 넘는 나이로 저런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라 할 수 있으리라. 잔뜩 흥분한 채 정하얀의 손을 잡는 모습에 정하얀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엘프 왕국의 공주는 이쪽의 영웅담에 푹 빠져 있다. 사실 대부분의 라이오스인과 교국민이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 여자의 경우에는 정도가 조금 더 심한 것 같은 느낌. 이쪽에 관한 기사나 잡지 인터뷰 같은 것은 모조리 독파한 것 같았고 심지어 여신의 거울로도 여러 번 그 장면을 봤다고 하니 내 예상이 맞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나마 라이오스인은 우리의 모습을 실제로 봐왔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그녀는 타국에게 배타적인 왕국에 틀어박혀 매체로만 이쪽을 접한 셈. 이쪽에 이상한 환상을 품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그나마 라이오스인들 때문에 이런 경우에 적응을 하긴 했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정하얀이 당황하고 있다. 뭔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해오고 있으니 안 그래도 인간관계에 서툰 그녀가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박덕구의 부연 설명이 날아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거, 우리 하얀이 누님의 투명하고 맑은 영혼에 깜짝 놀랐다는 거 아니요?” “맞습니다, 박덕구 님. 이토록 순수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시다니. 이건….” “역시 내 그럴 줄 알았지.”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본래는 이런 말씀을 잘 드리지 않는 편입니다만 정하얀 님께서는 정말로….” “역시 우리 누님이라니까. 역시 내가 말한 대로 아니오? 내가 살면서 우리 누님처럼 깨끗하고 착한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니까? 사실 처음 봤을 때는 어떻게 이렇게 착한 사람이 다 있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엘프 공주님이 말하는 걸 보니 이제야 조금 알 것 같구먼. 거, 누님 옆에 있는 분이 우리 형님이요. 여신의 거울로….” “네. 알고 있습니다. 얼굴 역시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영광입니다, 이기영 님.” “아뇨.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이, 이럴 게 아니라 감사의 인사부터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의 인사라면 충분히 받았습니다, 엘레나 님. 애초에 감사를 받자고 한 일도 아니니 고개 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이번에는 앞서 말씀드린 일들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예전에 엘프를 구출해 주신 적이 있지 않으셨는지요?” “아!” “조금 오래된 일이라 기억 못 하실 수도 있지만… 이기영 님께서 당시 고통 받던 저희 아이들을 구해주셨다는 소식을 분명히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이었군요.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금 멀찍이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와… 이게 이렇게 되네. 이래서 사람은 평소에 착하게 살아야 된다니까.’ 남모르게 행했던 선행이 플러스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런 게 카르마지! 아암. 그렇고말고!’ 애초에 이 엘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만큼 점점 더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쪽에 말을 건네고 있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 그녀가 내 영혼을 어떻게 느끼는지는 상관없지만 이쪽을 우러러 보는 표정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어 보인다. 잠시 걱정했던 게 바보처럼 느껴질 지경. 이 휠체어도 준비하지 않는 게 좋을 뻔했다. “당시 이기영 님께 구원받은 저희 아이들은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 사절단에도 함께하고 싶어 했지만 아무래도 아직까지 밖에 나가는 것을 꺼려하는 터라. 둘을 대신해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하하하.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겸손하시다니. 혹시나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아직까지 걷기 힘드실 줄은….” “콜록콜록. 괜찮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해 주신 덕분인지 몸은 멀쩡합니다. 조금 호흡이 불편할 뿐입니다. 정말로 마음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콜록. 사실 저 역시 실제로 공주님을 뵙고 싶었으니까요. 만약 공주님께서 제안해 주지 않으셨다면 먼저 공주님을 찾아뵈었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악수 한 번….” “네. 물론입니다, 엘레나 님.” 내 예상과는 다르게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뜻밖의 미담이 공개되자 다른 이들 역시 놀랐다는 표정.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엘프들을 위해 힘썼을 줄이야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본래 미담이라는 건 전혀 의도치 않은 상황에서 밝혀져야 더욱더 효과적이다. 엘레나의 표정 역시 굳이 말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기쁨으로 충만하다. 악마군주 벨리알의 역겹다는 표현은 아무래도 악마들에게 역겹게 느껴질 정도로 신성하다는 표현이었던 모양. 엘레나가 한발 앞으로 몸을 옮겼던 그때였다. “우웁.” ‘음?’ 이쪽을 향해 귀를 팔딱거리며 팬심을 드러냈던 엘프가 갑작스레 인상을 찡그리며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한 것. “아.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으읍. 이런 실례를… 아, 왜 이러지. 이럴 리가. 우읍.” ‘아니.’ “우웁. 우웁.” ‘너 왜 그래. 슈바.’ “저, 잠깐. 우….” ‘아니, 이건 너무 심하잖아.’ “우웨에에에에엑.” 이쪽의 계산에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행동이었다. # 340 회귀자 사용설명서 340화 후유증(6) “기뻐 보이십니다, 엘레나 님.”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작게는 라이오스를, 크게는 대륙을 구한 영웅들을 뵙는 일입니다. 여신의 거울로만 접하던 그분들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아! 저기 보세요, 루드비히. 동상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게 정말이었나 봅니다.” “네. 그렇군요.” “가장 앞에 서 있는 전사 분이 박덕구 님, 마법사님이 한소라 님, 가운데에 계신 두 분이 바로 정하얀 님과 이기영 님이십니다. 루드비히도 알고 있지요? 그 날 떨어진 악마의 마법을 막아낸 영웅들 말입니다. 아아. 저토록 장엄한 모습이라니. 저희 왕국에서도 저분들의 업적을 기려야 할 겁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에게 요청 드렸지만 고려해 보겠다는 말씀만 하실 뿐, 딱히 생각이 없으시니…. 아! 그거 알고 계십니까? 루드비히?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은 말입니다. 그 신앙이 얼마나 독실하신지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대륙을 위해 내린 사람이라는 평이 자자합니다.” “네.” “교국 교황청에서 직접 발표한 글에서는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삶을 어둠과의 투쟁 그 자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마를 숭배하는 이방인, 이번에는 직접 악마를 소환한 공화국의 간악한 계획을 저지했으니 정말로 베니고어 여신님이 내리신 사도일 가능성도…. 아니! 어쩌면 베니고어 여신님만이 아니라 엘룬 님께서 내리신 사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저희 역시 그분과 인연이 닿지 않았습니까. 물론 공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생각해 보면 볼수록 그럴 고개가 끄덕여지는 추론이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이 삼국동맹의 추진을 직접 명하셨다는 게 믿겨지십니까? 결과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이 다리가 되어주신 겁니다. 운명. 마치 운명처럼 말입니다.” “엘레나 님, 들뜨신 것은 이해가 갑니다만….” “네. 당연히 어머님과 아버님이 해주신 말씀은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나 가급적 사적으로 그들과 얽히는 일은 지양해야 합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루드비히.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건 없습니다, 엘레나 님. 부디 왕성 안에서는 얌전히 행동해 주시고 그들과 접촉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영웅들이라고 한들, 그들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저희 아이들은 이기영 명예추기경께 구원받….” “하아….” “인간이라고 다들 같지는 않습니다, 루드비히.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저는 믿습니다. 그들 중에도 깨끗한 영혼을 가진 이가 존재할 겁니다.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 날 라이오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세요. 그들은 겁에 질리지도, 도망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발로 똑바로 선 채, 악마의 위협을 정면으로 마주 섰습니다. 그 어떤 엘프나 이종족도 그들처럼 행동하지는 못할 겁니다.” “…….” “무엇을 걱정하시는 압니다. 하지만 대륙을 지킨 영웅들마저 함부로 폄하하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엘레나님. 죄송합니다.” “아뇨. 저한테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 이제 곧 도착이로군요.” “네.” “드디어 그분들을 뵐 수 있겠군요. 정말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네.” 긴장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몸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자꾸만 쿵쾅거린다. 대륙을 구한 영웅들을 마주하는 일이다. 떨리지 않는 게 이상하리라. ‘정신없어.’ 딱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어울리리라. 왕성에 도착하고 라이오스인들과 교국의 중요 인사들에게 환대를 받았지만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차분하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자꾸만 목이 말라온다. 심지어 주변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 루드비히가 걱정된다는 듯 입을 열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엘레나 님,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습니다, 루드비히. 무언가 마실 게 있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지금 제 모습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평소대로의 모습입니다, 엘레나 님.” “시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아니 빛의 영웅들은 어디쯤….” “현재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그, 그분들을 기다리게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예상보다 조금 더 일찍 자리를 잡으셨던 터라.” “당장 접견실로 향해야겠습니다. 그분들을 기다리게 하다니, 이런 무례가.” “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지사. 다시 한번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더 이상 그분들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접견실 문이 열린 이후에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 어떻게든 마음을 컨트롤하려고 하기는 했지만 실상은 자신이 무슨 말을 쏟아내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동경하던 영웅들은 상상했던 그대로였으니까. 수많은 악마들을 막아내던 박덕구 님, 몸이 문드러지면서도 주문을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한소라 님, 저 뒤에 있는 두 사람은 정하얀 님과 이기영 님이 분명하리라. 박덕구 님의 커다란 덩치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차근차근 인사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으니까. ‘어떻게 이렇게 순수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을까.’ 박덕구 님을 봤을 때는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티 없이 맑은 느낌이다. 또한 우직하고 투명하다. 마치 때 묻지 않은 어린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실제로 뜬금없는 질문을 해왔을 때는 조금 놀랐지만 곧바로 사과를 해오는 모습에는 작게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한소라 님 같은 경우에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기는 했다. ‘유약해.’ 무척이나 작고 유약하다. 결정적으로 겁을 집어 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위태한 느낌이었고, 순식간에 허물어 질 것처럼 불안정했다. ‘어떻게 그런데도… 저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쉽게 내던질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저렇게 작고 유약한 영혼을 가지고 거대한 악마에게 맞설 수 있었을까. 그 누구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리라. 그녀가 악마에게 맞서는 데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애써 부여잡고 정면으로 악마들을 마주하던 모습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왈칵 하고 눈물이 튀어나올 정도. 하지만 이후에 보인 영혼에는 커다랗게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정하얀 님!’ 그분이다. 빛에 둘러싸인 채 왈칵 피를 토하며 마법을 사용하던 대마법사. 여신의 거울로 마주했을 때 역시 놀라움의 연속이었지만 실제로 본 정하얀 님은 더욱더 놀라운 사람이었다. ‘말도 안 돼….’ 사랑으로 꽉 차 있는 영혼은 무엇인가 고장 난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 그만큼 거대하고 압도적이다. 이런 종류의 영혼은 지금껏 느껴본 적 없었다. 다른 것들은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질투, 분노, 행복, 슬픔, 같이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원초적인 감정이 거대한 하나의 정신으로 묶여 있다. 나도 모르게 경외심이 솟아난 것은 당연. 수 만년 동안 정신을 단련한 성인이라도 저런 종류의 영혼을 가지고 있을 수 없으리라. 저 사랑이 어떤 사람을 향하고 있는지는 뻔할 뻔 자. ‘이기영 명예추기경님. 이기영 님이야. 정말… 실물이야.’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몸은 정상이라는 말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만나고 싶었다는 말에는 가슴이 두근거렸을 정도.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표현한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 없다. 혹시나 해서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살펴보기는 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무척 평범하게 느껴진다. 의아함을 느낀 것도 잠시. 악수를 나누기 위해 발을 옮긴 순간 느껴진 것은…. ‘이게 뭐야.’ “우웨에에에엑.” 속 안에 꽉 차 있는 역겨운 영혼의 덩어리였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저런 성인이 이런 영혼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공포스럽다거나 사악하다는 종류가 아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순수하게 역겨운 영혼이다. 등에 소름이 돋는다. 나도 모르게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다. 최대한 참으려고 했지만 참을 수 있을 리가 만무. 곧바로 허리를 굽혀 토악질을 해대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콜록… 콜록.” “기영 씨.” “콜록. 콜록콜록. 저, 저….” “기영 씨. 괜찮으십니까?” “사, 사제를… 부탁….” “기영 씨! 지금!” “혀, 형님. 가, 갑자기 무슨 일. 빠, 빨리 희영이 누님이라도!” “오빠, 오빠!” 눈앞에 있는 이가 갑작스레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기 시작한 것. 숨을 헐떡거리는 그 사람 주변으로 다른 이들이 몰려들었다. “발작! 발작입니다.” “흐어어어어엉. 오빠아…. 히끅. 오빠아!” “건드리지 마세요, 하얀 씨. 몸을 만지면 더 위험해집니다. 혜진 씨는 빨리 의료진부터 불러주세요.” “발작이라니. 그게 뭔 소리요? 응?” “후유증입니다.” “그게 도대체….” “지난 번 악마 소환 사건 이후에….” “그러니까! 갑자기 그게 뭔 소리요? 후유증은 또 뭐고! 형님이 저번에 아프다고 한 건 별거 아니라 하지 않았소!” “기영 씨가 알리는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설명은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덕구 씨.” “이, 이렇게 가만히 놔두면 안 되는 거 아니오? 마력이라도 주입해야….” “단순히 마력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싫어! 싫어! 오빠, 오빠아!!!” “괜찮을 겁니다. 틀림없이 괜찮을 겁니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상황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 역겨운 영혼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처럼 강하게 느껴진다. ‘이게 도대체….’ 그 와중에 접견실에 사제를 비롯한 의료진들이 들이닥친다. 눈물을 펑펑 쏟고 있는 정하얀 님과 불안하게 보이는 한소라 님. 박덕구 님과 김현성 님 역시 무척이나 침통한 표정. 경과가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고통스럽게 신음을 흘리는 이기영 님은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음속 한 구석에 작은 추론이 떠오르는 것은 순식간. 어쩌면…. “시, 신성력이 듣지 않습니다. 몸 상태는 분명히 정상이실 텐데….” “당신 사제 아니요? 빠, 빨리 어떻게 좀 해보쇼! 어? 우리 형님 좀 살려보란 말이오!” “몸은 틀림없이 정상입니다. 이, 이런 종류의 발작은 처음이라….” “흐어어어엉. 오빠아…. 흐어어어어어어엉.” 어쩌면…. 자신이 빛의 용사들을 만나게 된 것은 엘룬 님의 계시일지도 모른다. # 341 회귀자 사용설명서 341화 후유증(7)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현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당황한 이들의 얼굴과 뒷모습이 눈에 보인 것은 당연지사.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장내에 교국의 지도자와 라이오스의 프리스티나 님 역시 허겁지겁 달려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하지만 인사를 할 틈은 없었다. 곧바로 이기영 님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인파 속으로 사라졌으니까. 일찍이 자리해 있던 교국의 고위사제들의 신성력은 그야말로 끊임없이 방 안을 활짝 밝히는 중. 그 가운데,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이다. 기도를 드리는 이도 있었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이도 있다. 연신 고위사제에게 말을 건네는 박덕구 님의 모습과 울부짖는 정하얀 님. 그 모습은 처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른 이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초조한 모습이다. “끄으으으. 흐어어어어엉. 오빠아….” “괜, 괜찮을거요. 틀림없이 괜찮을거요. 진정하라니까.” “흐어어어어엉. 히끅. 안 돼. 싫어어어어….” “거, 의사 양반, 무슨 방법이라도 없는 거요?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요?” “몸은 정상입니다. 트, 틀림없습니다. 분명히 몸은 정상인데… 원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일단은 신성력을 주입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후유증을 겪고 계신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렇게 까지 괴로워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며, 명예추기경님께서는 계속해서 괜찮다고 말씀하셔서….” “그걸 믿은 거요!? 이게 어딜 봐서 정상이라는 거요! 우리 형님 성정을 알면서도 그걸 그대로 받아들인 거요?” “저, 정말 죄송합니다, 박덕구 님. 저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명예추기경님께서….” “나한테 죄송할 게 아니지! 도대체 어디가 아픈지 원인을 알아야 할 것 아니오!” “진정하세요, 덕구 씨. 소리를 지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요, 현성 형씨. 무슨 후유증을 앓고 있는지부터 알아야지 뭐라도 어떻게 조치를 취할 거 아니오? 무,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래도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알아야겠소.” “자세한 사정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날 이후로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는 것밖에는…. 상식적으로 아무런 부작용이 없을 리가 없겠죠. 특히 기영 씨의 신체로 그 정도 출력의 마력을 뿜어냈으니 하얀 씨보다 더욱 커다란 리바운드를 받아들였을 겁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속에서는 충격이 중첩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그럼 평소에는 어떻게….” “기영 씨가 몸을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영 씨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체질 때문입니다. 신성력과 마력을 공유하고 있는 특별한 체질 말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은 저 역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덕구 씨와 하얀 씨에게는 특히나 비밀로 해달라고 말씀하셔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 아니오. 형씨가 고개 숙일 문제가 아니오. 나였어도 형님이 그렇게 말했다면 입 다물고 있었을 거요. 혀, 형님은 분명히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요. 바쁜 시기니까. 중요한 일이니까 괜히 짐이 되기 싫었던 거요.” “…….” “다른 사람들한테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혼자서 삭히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니까. 매일 가슴을 쥐어뜯으면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의연하게 행동했을 거요.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고작 우리가 걱정하는 게 싫어서 그렇게, 웃으면서 버티고 있었던 거라니까.” “…….” “끄윽…. 대신 아플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요. 나는 정말로 못 보겠소. 형님이 이렇게 괴로워하는 건 때려 죽여도 보지 못할 것 같다니까.” “이해합니다. 저도 같은 심정입니다.” “제길. 제길!” 박덕구 님은 등을 돌린 채 주먹을 꽉 쥐셨다. ‘내 생각이 맞아.’ 물론 처음에는 단순한 의심이었다. 하지만 저들의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킨 것은 당연지사. 아직 모든 게 확실하지는 않지만 만약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이 정말로 베니고어 여신님과 엘룬 님의 계시를 받으셨다면, 이쪽 역시 무엇인가의 인도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현재 라이오스의 접견실에서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모든 게 퍼즐처럼 짜 맞추어진 하나의 커다란 계시일지도 모른다. ‘맞아.’ 어떻게 생각해도 그렇게밖에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물론 이쪽의 추측이 맞는지 틀렸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코를 찌르는 악취가 더욱 역해지는 중이다. 물론 내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있지만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지금도 가슴을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영웅의 영혼이 희미해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작은 빛조차 완벽한 어둠에 휩싸여 있다. “잠시 자리를 내주세요. 제가….” “뭐?” “제게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엘레나 님은 아까까지…. 그러고 보니 어째서 형님을 보고….”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명예추기경님의 영혼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 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그,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는 거요?” “말 그대로입니다. 현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의 상태는 단순히 후유증이 들어섰다고만 판단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만약 정말로 몸에 이상이 없다면 육체에 새겨진 상처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교국의 고위사제분들이 눈치채지 못하실 정도라면 더욱더요.” “육체의 상처가 아니라면… 여, 영혼의 상처라도 된다는 거요?” “일단은 그렇게 설명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영역인지도 불분명하지만…. 명예추기경님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틀림없이 문제가 생길 겁니다. 저 역시 이번 일의 결과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모릅니다. 한 가지 명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현재 명예추기경님의 상태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는 것입니다. 손을 쓰지 않으면 곧바로 무너져 내릴 정도로요.” “알기 쉽게 설명해 주쇼.” “오염됐다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오염… 말입니까?” “네. 어떻게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 날 악마의 힘에 정면으로 저항하다 얻은 부작용으로….” “엘프 공주님이 방금 구역질을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요?” “부… 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아니요.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소. 그만큼 형님의 상태가 처참했다는 거니까. 이, 이해할 수 있다니까. 그보다 영혼의 문제가 생기면 어, 어떻게 되는 거요?” “오염되어 무너지는 이들을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만 아마 신체부터 무너지기 시작할 가능성이 큽니다. 못에 고인 물이 썩으면 그 주변도 함께 영향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현재의 명예추기경님의 상태가 딱 그렇습니다. 아마 저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고 계실 겁니다.” “그, 그럼 어떻게 좀 해보쇼. 빨리! 빨리 형님 좀 어떻게 해주쇼!” 고개를 끄덕이자 영웅들이 일단 자리를 비키주었다. 두 눈에 깃든 것은 기대와 의심이다.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섭섭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소리였으니까. “혹시나 뭔가 잘못되거나 다른 징후가 보이면….” “의심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저는 에베리아 왕국을 대표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지 결코 영웅 분들께 해를 끼치기 위해 자리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제가 이기영 님께 해를 끼치려고 한다면 제 목을 치셔도 됩니다.” “엘레나 님! 그런!” “괜찮을 겁니다, 루드비히. 걱정하지 마세요. 전부 다 잘될 겁니다. 어째서 제가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엘룬 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겁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역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평정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아마 눈앞에 있는 영웅일 터. 고통스러운 것은 이쪽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악마에게 저항한 숭고한 영혼이다. ‘괴로워.’ 마치 이쪽의 영혼마저 썩어 문드러질 것처럼 역하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까지 순수함이 남아 있다는 게 놀라울 지경. 본래의 영혼이 어땠는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감각에는 최대한 머리를 흔들며 앞에 서자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 비친다. 숨 쉬기가 힘든지 계속해서 호흡을 헐떡였고 핏발이 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온다.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는 비참한 비명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사정없이 떨리는 다리와 비틀려 있는 몸은 이 괴로움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거대한 악마를 앞에 두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던 영웅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것에서도 괴로워하지 않았던 이 빛의 영웅은 영혼의 오염에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괴로워하고 있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숭고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까지 한 인간이 이타적이고 성스러울 수 있을까. 혹여나 내가 걱정할까, 이기영 님은 애써 비명을 삼키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린다. 썩은 구더기를 만지는 듯한 감각이었지만 다시 한번 입술을 꽉 깨문 이후에 다음 손을 포갠다. ‘역겹지도 더럽지도 않아.’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계속해서 몸 안 속에 있는 기운을 밀어내기 시작. 완전히 잡아먹히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룬이시여 이 숭고한 영혼 때문에 저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줄 압니다. 당신의 종이 부탁드리오니 부디 이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을 내려주시옵소서.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디 부탁드립니다. ‘부디… 제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고 그를 결코 저버리지 않겠나이다.’ 소름끼치는 감각을 애써 짓누르며 계속해서 그의 손을 잡고 있을 때였다. “아!” 눈앞에 있는 이의 숨이 천천히 안정된 것. 기형적으로 꺾인 허리도, 부들부들 떨리던 다리도 모두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괴로워하던 영웅은 그 자리에 없다. 오히려 의아하다는 눈으로 자신의 몸을 만져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눈에 띈다. ‘계시였어. 계시가 맞았어!’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 합니다.] [내 소중한 딸아… 도망…(0/1)] [알 수 없는 이유로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취소됩니다.] 뭔가 조금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 합니다.] [계시의 이행(0/1)] 내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형님! 형님!” “오빠, 오빠. 흐으으윽.” 커다란 환호성이 들려오는 순간, 작게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엘룬이시여.” # 342 회귀자 사용설명서 342화 양치기 소년(1) ‘열연이었다! 슈바!’ 지금까지 많은 거짓말을 해왔지만 이번에는 나조차도 놀랄 만큼의 메소드 연기였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을 정도. 연기에 혼을 실었다는 표현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심지어 중반부터는 실제로 고통스러웠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정말로 아픈 사람이 된 것처럼 눈알을 돌리자 촉촉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엘레나의 얼굴이 비쳤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 조금 오버한 것 같기는 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적절한 판단이었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기고 조용히 넘어가도 상관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민감한 시기인 만큼 이런 작은 해프닝도 용납할 수 없다. 버리고 간 담뱃불이 종국에는 커다란 불로 번질 수도 있는 법. 방금의 행동은 작은 불씨를 소화기로 냅다 뿌려버린 응급처치다. ‘아주 좋아. 아주 좋지! 이게 바로 빛기영이지. 아암. 그렇고말고.’ 빛기영은 영원히 빛기영으로 남아야 하고 이 방패막은 끊임없이 유지되어야 한다. 순간적인 기지와 물오른 연기력으로 위기를 벗어난 나 스스로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 물론 기쁜 와중에도 왠지 모를 씁쓸함이 감도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벨리알의 ‘역겨운 영혼을 가진 인간’이란 표현한 것이 완전히 들어맞은 셈. 아닐 거라 홀로 씁쓸히 위로하기는 했지만 정황상 녀석의 말을 완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토할 정도는 아니잖아.’ 아주 조금 상처받았다. ‘구역질은 너무 심했어.’ 그렇지만 곧바로 고개가 저어진다. 영혼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것 좀 깨끗하다고 해서 초월적인 존재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니다. 아무튼 다행이라 생각한 부분은 엘레나가 이쪽을 크게 의심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는 것. 오히려 완전히 이쪽을 믿는 것처럼 느껴진다. 얼굴에 들어선 표정은 누가 봐도 나를 걱정하는 듯하다. 물론 내 옆에 함께 있는 게 괴로워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함박웃음을 보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오래 감상할 수는 없었다. 곧바로 달려 들어온 정하얀의 몸통박치기를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흐어어어어엉. 오빠. 오빠아.” 제대로 놀랐는지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다. 박덕구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았고 김현성은 숨을 크게 내쉬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다시 한번 개소리를 일발장전 한 것은 당연지사. 별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는 단순히 모르는 척하는 것뿐이었으니 슬슬 진실을 알아보고 싶다는 모양새를 취하기만 하면 된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혀, 형님 정말로 괜찮은 거요?” “아… 그래. 괜찮다, 덕구야.” “정말로 괜찮은 거요? 정말로 아프지 않은 거요?” “괜찮다. 정말 괜찮아.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숨긴 것도… 미안하고.” “끄으윽….” “…….” 다시 한번 눈물을 일발장전하려는 박덕구 덕분에 확실히 부담스러워진다. 목이 메는지 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다른 이들의 얼굴을 보면 이 짓도 두 번 할 건 못된다. 그새 사람이 많이들 모였는지 오스칼의 얼굴에도 걱정이 가득했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명예추기경님.” “네. 고통이 좀 가셨습니다. 못난 꼴을 보여드렸군요. 제가 바보 같았습니다. 하핫.”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오스칼 님, 방금은….” “에베리아 왕국의 엘레나 공주님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엘레나 님이… 도움이요?” 의아하다는 표정을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악마에게 영혼을 고문당하고 있는 빛기영은 어째서 이 고통이 가신 것인지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오스칼은 천천히 일어나 엘레나에게 고개를 숙였고 나는 더욱더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상황이 너무 긴박해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군요. 오스칼이라고 합니다, 엘레나 님. 교국은 오늘 주신 도움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겁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엘레나 에베리아입니다. 고개 숙일 필요 없습니다, 오스칼 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영웅을 돕는 일이고 저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명예추기경님, 위험한 상태에 있는 추기경님을 안정시켜 주신 분이 바로 엘레나 님이십니다.” “정말입니까?” 반문을 하자 이쪽을 바라보는 엘레나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저도 모르지만 이기영 님의 상태를 안정시킨 것은 제가 맞습니다.” “어떻게 이걸…. 혹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명예추기경님, 아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터무니없이 느껴지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오해하지 마시고 제대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말을 이어오는 엘레나가 눈에 보였다. 이쪽의 예상과는 완전히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들어맞는 부분이 있었다. 대충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그 날 이후 나에게는 후유증이 남았고 그 후유증이 남은 곳은 사실 신체가 아니라는 것. 영혼이니 뭐니 지루한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교국의 사제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좋네.’ 어떻게 생각해도 신체의 이상을 찾을 수가 없었으니 다른 쪽으로 화살을 돌리는 게 당연하다. 영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이들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실제로 내가 회복되는 것을 확인했다. 엘레나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하이엘프들의 전승을 알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지금쯤 다들 머릿속으로 전승에 대해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계속해서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많아지기 시작. 나 역시 그 무리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믿기 힘든 이야기입니다만… 이제야 조금 설명이 되는군요.” “네. 현재 명예추기경님의 영혼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 역시 이렇게 순수하게 역한 영혼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치료가 끝난 지금은 어떻습니까?” “저는 치료를 해드린 것이 아닙니다, 명예추기경님.” “네?” “단순히 명예추기경님의 고통을 덜어드린 것뿐입니다.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만 실질적인 치료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침식은 진행되는 중일 테고… 제 미약한 힘으로는 명예추기경님을 둘러싸고 있는 역한 기운을 단기간에 몰아낼 수 없었습니다. 응급처치. 네. 단순히 응급처치를 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전과 비교해 어느 것 하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관심이 없을 리가 없다. 녀석에게 가장 중요한 일일 테니까. “그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작 증세를 보일 수도 있다는 겁니까?” “실망시켜 드리기는 싫지만 그럴 가능성이 클 겁니다. 물론 적절한 치료와 관리를 받는다면 상태가 조금은 호전될 수 있겠지만, 그마저도 명확하지 않고…. 뭔가 다른 방도를 찾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싫습니다만 어쩌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그럼 형님은 어떻게 되는 거요?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 말이요? 아니, 형님이 죽을 수도 있단 말이요?” “…….” “…….” “그건 아닐 거다, 덕구야. 조금씩 상태가 나아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 “아니, 그걸 어떻게 형님이 판단할 수 있다는 거요? 어느 날 갑자기 또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겠소. 그… 시, 실례지만 엘레나 님이 계속 형님을 아플 때마다 지켜봐 줄 수는 없는 거요? 내, 내가 무엇이든지 하겠소. 부, 부디….” “그건 불가합니다.” 박덕구의 쌩뚱 맞은 말을 가로막은 것은 에베리아의 엘프 공주가 아닌 함께 등판한 수행원. 당연한 반응이다. 아무리 이쪽의 생명이 달려 있다고 한들, 엘레나는 몇 천 년 만에 태어난 고귀한 하이엘프였고 심지어 일국의 공주이기까지 하다. 웬 개똥 같은 놈의 영혼의 치유사 노릇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 어느 정도는 타협의 여지가 있겠지만 아마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나도 이게 편하지.’ 물론 나 역시 이쪽이 편하다. 계속해서 저 여자가 달라붙어 있는 다면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꽃 필 가능성이 크니까. 정하얀이란 문제도 있고 더 이상 꼬리를 밟히기도 싫다. 어떤 이유든 엘프 왕국에서 엘레나를 두고볼 리가 없다. 예상했던 대로 녀석이 다시금 진지한 목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엘레나 공주님께서는 왕국을 지키셔야 하는 몸입니다.” “그, 그렇지만.” “맞다, 덕구야. 무리한 부탁은 드리는 게 아니야. 서로의 입장 차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방금 덕구가 드린 말은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명예추기경님.” “네?” 뭔가 살짝 일이 꼬였다는 생각이 든 것은 엘레나의 얼굴에 들어선 책임감을 인지했을 때였다.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네?” “박덕구 님이 말씀하신 대로 계속해서 명예추기경님의 곁에 남아 상처를 돌보겠습니다. 이대로 빛의 영웅을 죽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엘레나 님, 무슨 말씀을!”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루드비히. 어머니와 아버지께도 그대로 말씀드릴 겁니다. 저는 계속해서 이 분의 곁에 있을 겁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불가합니다.” “어머님이나 다른 분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만약 제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제 지위라면 기꺼이 그 족쇄를 벗겠습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엘레나 님, 경솔한 발언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어떤 말씀을 하고 있는 알고 계시는 겁니까?” “루드비히, 제게 중요한 것은 직위가 아닙니다.” “어째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절대로 착각이 아닙니다. 정말로 엘룬 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대륙의 위기에 저에게도 주어진 역할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에요.” “…….” “…….” 서로를 한참을 바라보던 두 엘프의 모습에 장내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쟨 갑자기 뭔 계시타령이야.’ “제가 오늘 이 영웅 분들을 만나게 된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개소리냐고.’ “저에게도 역할이 있었던 겁니다.” 저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뭔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모양. 그게 이쪽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모르는 상태기 때문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저는 당신을 살리기 위해 이곳에 온 것입니다, 명예추기경님.” ‘미친….’ 고개를 꾸벅 숙여오는 모습은 가관. 도대체 그 계시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 여자가 나를 곤란하게 만들 거라는 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머리 아파지는데…. 아….’ # 343 회귀자 사용설명서 343화 양치기 소년(2)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 끝난 이후, 곧바로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이쪽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엘레나를 진정시킨 뒤에는 왠지 모를 침묵이 장내에 감돌고 있었다. “계시는 또 뭐고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는데 각설하면, 형님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요?” 박덕구가 입을 연 것은 당연. 정하얀은 또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김현성 역시 크게 동요하는 것 같았다. 입술을 꽉 깨문 표정은 저번에 녀석이 보여준 표정과 완전히 같았다. ‘너무 열연이었나.’ 갑작스레 엄청난 후회가 밀려든다. 아직까지도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엘레나 공주를 엘프 보좌관들이 데려갔고, 장내에 더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안 좋은데….’ 김현성이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일단 다른 분들은 잠깐 나가주시겠습니까? 기영 씨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 괜찮으시다면 덕구 씨도 남아 주세요. 혜진 씨는 하얀 씨를 부탁드립니다.”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해올 것 같은 느낌. 파란 길드원들은 물론, 사제나 오스칼까지도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굳이 박덕구를 남기는 걸 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쪽을 설득시키고 싶은 모양.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반갑지 않다. “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요? 일단은 계속 요청을 드리는 게 낫지 않겠소?” “…….” “…….”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일국의 공주가 뭐가 아쉬워서 이쪽을 치료하는 걸 전담하겠어? 그녀가 원한다고 해도 에베리아 측에서 틀림없이 문제로 삼을 것이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현성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이야기는 담아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기영 씨.” “현성 형씨 말이 맞다니까?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오. 무릎을 꿇든 아니면 다른 쪽으로 생각을 해보든 일단은 엘레나 님께 계속해서 치료를 받는 게 맞다니까?” “쓸데없는 소리야.”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요.” ‘제기랄.’ 일이 조금 복잡해졌다.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말을 걸고 있는 박덕구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엘레나를 이쪽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다. 김현성은 계속해서 굳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중. 뭔가 방도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답이 나오지 않는지 인상을 더욱 구겼다. 그야 김현성도 내 말에는 일정 부분 공감할 것이다. 말은 쉽지만 자칫 잘못하면 삼국동맹 자체가 허사가 되어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물론 확대해석이겠지만 아주 작은 계기로 틀어질 수도 있는 게 정치적 관계다. “계속 머무르게 할 수는 없는 거요? 그 엘프 공주님도 남겠다고 하는데 문제될 일이 있소?” “그러니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했잖아.” “나는 간단한 문제고 뭐고 나발이고 모른다니까! 형님이 죽게 생겼는데 지금 그게 대수요? 교국 측에서 최소 몇 달간이라도 형님을 돌봐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하면 틀림없이 그쪽에서도 들어줄 거요.” ‘이 돼지 새끼가 진짜. 그만 좀 해.’ “끄윽….” “이 돼지 새끼.” “형님도 생각 좀 고쳐먹으쇼. 남아 있는 사람들도 생각해야지. 지금 뭐 다른 거 걱정할 시기요? 죽이든 밥이든 치료는 받아야지!” “너, 이 새끼 진짜. 이게 어떻게 만들어진 자리인 줄 알아?” 뭐라고 한마디 쏘아 붙이려고 하던 때였다. 김현성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아뇨. 굳이 그녀를 이곳에 머무르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기영 씨가 에베리아 왕국으로 함께 가시면 됩니다.” “네?” ‘제기랄.’ 순간적으로 욕이 튀어 나올 뻔했다. ‘제기랄.’ “그러니까… 현성 씨 말씀은….” “네. 에베리아 왕국으로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엘레나 님께 라이오스에 머무는 것을 요청드리는 건 확실히 무리가 있지만, 기영 씨를 에베리아 왕국으로 보내는 건 가능하니까요.”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네. 물론 반가운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하실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기영 씨가 낫는 일이 그 무엇보다 최우선입니다. 그걸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시국에 벗어나는 건 조금….” “별문제 없을 겁니다. 기영 씨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아무리 그렇지만 이건….” ‘슈바. 무슨 개뿔 치료할 것도 없는데 치료하겠다고 이 난리야? 완전 망하게 생겼는데….’ 커다란 거짓말에는 커다란 책임이 따른다. 여러 문제에 머리가 지끈거린 것은 당연지사. 순식간에 똥줄이 타는 것만 같다. 차라리 동맹에 영향을 끼치더라도 억지로 엘프를 이쪽에 데리고 있는 것이 낫다. 가장 머리가 아픈 부분은 김현성과 떨어진다는 것에 있었다. 아무리 내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고 한들 아무래도 김현성과 떨어져 에베루아 왕국으로 가는 것 자체가 반갑지 않다. 내가 없는 동안 녀석이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닌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절대 안 돼. 말도 안 되지. 암.’ 당당하게 말을 꺼냈지만 분위기는 꽤나 싸늘했다. “현성 씨,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기영 씨. 이곳에 남아 끝가지 상황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기영 씨의 건강이 최우선입니다.” “정말로 괜찮은데….” “아니, 어떻게 그 꼴을 하고도 그런 말을 하쇼! 내가 그런 말을 믿을 수 있겠소? 형님이 괜찮다고 말한 건 괜찮은 게 아니요! 물론 여러 가지 걱정이 많다는 것도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형님 몸이 최우선이오. 그게 맞지. 그게 맞소! 형님, 어차피 삼국동맹이 완성되면 에베리아 왕국도 곧 개방 될 테고 그러면 형님도 엘프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들어 갈 수 있을 거요.” ‘제기랄!’ “아니, 정말로 괜찮다니까. 정말로 문제없습니다. 게다가….” “아니요, 기영 씨. 이번만큼은 반론을 듣지 않겠습니다. 기영 씨는 무조건 에베리아로 갑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저를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 전부 에베리아로 갈 예정입니다.” “아니… 그게 도대체….” 슬그머니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 정말 제정신인가?’ 물론 나로서는 환호할 만한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김현성과 달라붙어 있으니까. 하지만 녀석의 개인적인 일들을 떠올려 보면 결코 녀석이 합리적인 결정을 한 거라고 볼 수 없었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긴지 알고 있는 건가?’ 대외적인 일도 대외적인 일이지만 김현성에게는 이제야 막 여단과 가면 쓰레기의 꼬리를 잡았다. 이미 몇 발자국 멀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발 가까이 다가선 것이다. 그런 타이밍에 이쪽에 발목이 잡혔으니 어떻게 보면 짜증을 내도 이상할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에베리아로 함께 움직인단다. ‘진짜 뒤통수 여러 번 맞을 만하네.’ 나와 가면남을 저울질한 이후 지금은 이쪽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 동료의 죽음에 트라우마가 있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내 생각보다 더 심한 느낌이다. 여러 정치적인 문제마저 뒤로하고 내게 시간을 쏟을 정도였으니 녀석의 호구성에는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이러니까 뒤통수 맞지….’ 하지만 속마음과는 다르게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 아직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나마 최악은 면했다. 혼자 움직이는 것보다는 함께 움직이는 게 백번 낫다. 심지어 그 마음마저 전해지고 있으니 속으로는 점점 기분이 좋아진다. 김현성에게 이렇게나 보호받는다는 사실은 그만큼 더 안전해진다는 뜻과 일맥상통하니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현성씨까지 함께 갈 필요는….” “아니! 그게 맞소! 형씨뿐만이 아니지. 다른 파란 길드원도 전부 함께 움직일 거요!” “하지만 시국이….” “일단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전부 잊어주세요. 몸을 회복시키는 것에만 주력해야 합니다.” “…….” “분명히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할 텐데.’ 회복은커녕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엘레나가 무슨 짓을 해도 이쪽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라는 건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표면 위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것도 문제라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눈치챌 텐데….’ 큰 귀가 계속해서 착각 아닌 착각을 해준다면 다행이기는 하지만 혹시 사소한 트러블이라도 생긴다면 귀찮은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몸 상태가 계속해서 좋아지는 연기를 선보인다고 해도 영혼은 전혀 나아지지 않을 테니까.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 일단은 버티고 버틸 수밖에 없는 상태. 그 와중에 궁금한 것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 김현성과 박덕구, 정하얀이 함께한다는 건 이해가 가지만 어째서 길드원 전원이 가야 한다는 것인지는 설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정말로 내가 걱정되는 것이 맞다면 녀석 혼자 움직이거나 정하얀이나 박덕구만 붙이는 게 옳다. 파란 길드원 전부를 에베리아로 데려간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인력낭비요, 무리수. 당장 녀석이 이렇게 움직인다는 것부터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얼굴 속에 드러난 궁금증을 눈치챈 모양인지 조용히 입을 여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네?” “어쩌면 기영 씨의 몸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네? 그건 대체….” “그게 정말이요?” “네. 물론 아직까지 명확하게 말할 단계는 아닙니다. 가능할지 가능하지 않을지도 미지수고요.” “형님 몸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단 말이요?” “만약에 성공한다면 말입니다.” “형님이 죽지 않는다 그거요?” ‘씨발….’ 괜스레 불안감이 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란 게 감조차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추측이지만 영혼을 치유하는 샘 물을 툭 하고 떠와서 마셔보라고 권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딴 걸로 치유가 될 리가 없다. 종국에는 의심 엔딩을 피할 수 없다는 거다. 김현성과 함께하는 것도, 함께하지 않는 것도 불안한 상황. 굳이 선택하자면 전자가 더 낫기는 하지만 차악이 최악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제기랄. 어떻게 해야 되지?’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을 때 이쪽의 어깨를 두드리는 회귀자의 얼굴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다시 한번 약속드리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영 씨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언제부터 내가 죽을병에 걸리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의 표정은 내가 지금까지 본 녀석 중 가장 열의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나 안 죽어, 이 새끼야.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살 거야.’ # 344 회귀자 사용설명서 344화 양치기 소년(3)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살 거라고.’ 물론 이런 소리를 입 밖으로 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삶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은 지금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현성이 형씨 말이 맞소. 절대로 형님을 죽게 만들지 않을 거요.” ‘제기랄.’ “현성 씨, 발작은 잠시 뿐입니다. 그 외에 시간은 정말로 건강합니다.” 하도 구라를 치고 다니다 보니 이제는 내가 정상이라고 말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느낌. 동화 속 양치기 소년의 심정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이쪽이 정상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지만 김현성과 박덕구의 눈에는 동료에게 짐이 되기 싫은 의인 정도로 비치는 모양. 솔직히 이쪽이 정말로 죽을병에 걸렸다면 모든 걸 걸고서라도 에베리아 왕국으로 향하고 싶다. 단언컨대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에베리아로 달려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문제. 항상 최악을 생각하는 만큼 이번에도 최악의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일단은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패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 최우선. 어떻게 생각해도 에베리아 왕국으로 떠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게 비칠 수도 있는 만큼 너무 거절만 하는 것도 좋지만은 않다. ‘방법이 있기는 있는 거야?’ 확신에 찬 김현성의 표정을 보니 정말로 뭔가 방법을 가지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엘릭서 레시피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아마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크다.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장소는 분명히 에베리아 왕국. 던전 보상이든, 엘프들이 가지고 있는 보물이든, 신화급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추측해도 될 것 같았다. 현재의 내 영혼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정도밖에 없었으니 위처럼 생각하는 것이 맞다. ‘던전인 건가? 아니면 뭐 엘프들의 보물이라도 있는 거야?’ 파티원 전원이 움직인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전자일 확률이 크다. 물론 후자일 가능성도 충분히 높다. 후자를 얻는 과정에서 무력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1회 차의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정보 중 비교적 정확히 들어맞는 게 던전의 위치밖에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확률은 더욱더 올라간다. 묘한 발언을 한 것부터가 이미 어느 정도 상황을 암시한 것이나 다름없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에베리아 왕국, 세계수의 숲은 그 동안 이방인의 손길이 닿지 않았고 삼엄한 경비 때문에 그 안을 들어가 본 이들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당장 하이엘프 엘레나만 하더라도 이쪽과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비슷한 능력이나 인간들의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넘쳐날지도 모른다. 그중 내게 도움이 되는 물건이 있을 가능성도 분명 존재하리라. 우연의 일치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마침 딱 타이밍이 맞은 셈. 어쩌면 녀석이 삼국동맹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간 것 역시 이번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럴 듯해.’ 물론 그전까지는 내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생각은 못 했겠지만 후유증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상황이 조금 더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 마음속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물론 내게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영혼의 상처 같은 건 개뿔 없었으니까. 머리를 부여잡자 이쪽을 곧 죽을 사람처럼 쳐다보는 모습은 가관. 현재 이들에게 나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게 아닌데….’ 이제 와서 거짓말이었다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출발은 내일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너무 갑작스럽….”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조금만 더 지체해.’ “쉽지 않은 원정이 될 겁니다.” ‘그럼 그냥 집에서 쉬자. 현성아…. 제발 부탁이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라이오스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장 기영 씨가 신경 쓰실 일도 아니고요. 기영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교국에는 유능한 사람이 많습니다. 저로서는 최대한 일과 멀어지는 것을 추천하고 싶지만 기영 씨가 원하신다면 계속해서 상황을 살펴 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보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진 없다, 이 새끼야.’ “형씨 말이 맞소. 오스칼님도 프리스티나님도 심지어 교황청에서 오신 분들이나 라이오스 사람들도 모두 열심히요. 형님을 걱정 끼칠 수 없다면서… 다들 우리와 똑같은 생각인거요.” ‘알겠으니까. 감동 좀 하지마.’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는지 말을 삼키는 박덕구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대체 지가 말하고 지가 감동하는 건 무슨 상황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녀석이니 만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리라.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 문제. “하지만 에베리아의 허락은.” “오늘 안으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아마 그들 역시 동의할 겁니다.” 지금으로써 믿을 수 있는 것은 에베리아가 이쪽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 하지만 거절할 리가 없다. ‘제발 거절해라. 가고 싶지 않아. 시발… 가고 싶지 않다고….’ 기분은 복잡 미묘했다. 이쪽을 위해 이 모든 일들을 기획해준 것은 고마웠지만 그 행위의 결과가 이쪽에게 똥으로 돌아오게 될 거라는 사실은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꽤 괜찮은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물론 무리수일 수도 있지만 조금은 비벼볼만한 구석이 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보고 싶습니다, 현성 씨.” “네.” “제 몸을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이 혹시나 위험을 동반할 수도 있는 일입니까?” 김현성이 잠시 멈칫 했다. 순진한 녀석답게 거짓말이 잘 튀어나오지 않는 모양. 결국에는 숨을 내쉰 뒤에 말을 걸어왔다. “위험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이거지!’ “백 번 양보해서 에베리아로 가는 것마저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현성 씨.” “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몸을 정상으로 되돌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현성 씨.” “그렇지만….” “…….” “…….” “제 몸을 살리자고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이런 시기에 원정이라니. 어떻게 생각해도 비상식적입니다. 현성 씨는 현성 씨 나름대로 할 일이 있을 겁니다. 다른 이들도 전부 마찬가지고요. 저는 파란 길드원들을….” 다른 사람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또 이야기는 달라진다. 당장에라도 덩실덩실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 “나는 그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할 수 있소.” “네가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마.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 구하려다가 엄한 사람 잡게 될 수도 있어. 물론 현성 씨와 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바로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게 맞아. 내 일은 그 다음이야. 적어도 확실한 준비를 하지 않는 이상 이런 원정은….” “가, 감수할 수 있어요! 히끅.” 쾅하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 ‘이건 또 뭐야.’ 정하얀이다. 여태 눈물, 콧물을 질질 짰던 모양.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아니, 도대체 지금 무슨 드라마를 찍는 건지 물어보고 싶다. 심지어 그녀의 뒤 쪽으로는 파란 길드원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제기랄. 이건 또 뭐냐고!’ 어떻게 보면 매우 감동적이라고 볼 수 있는 장면이겠지만, 모든 게 거짓말인 현 상황에서는 싸구려 신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괜스레 내 볼이 붉어지기 시작. 왠지 모를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선희영, 항상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내왔던 안기모와 김예리까지 왠지 모르게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다. 김창렬과 유아영 역시 마찬가지. 사실 김창렬과는 그렇게 커다란 접점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쪽과 함께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내는 정하얀. 마도학자 황정연 역시 잘됐다는 듯 포근한 미소를 보내온다. ‘굳이 떼거지로 몰려와서 이럴 필요는 없잖아. 이것들아….’ 심지어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마디씩 내던지기 시작. 손발이 없어지는 기분이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저도 괜찮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하하하. 그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었지요. 제가 이 길드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이기도 하고요. 이번에는 제 차례입니다.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고 해도 함께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나도. 함께 해줄게, 기영 아저씨. 좋아하지는 않지만… 죽는 건 싫으니까. 그리고 별로 위험하지 않을 거야. 현성이 오빠가. 있으니까. 응. 우리도 이제 강하고.” 시동을 건 것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안기모와 김예리였다.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절대로 이기영 님께서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겁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현재의 파란을 만드신 분이잖아요? 기영 씨와 함께 연구하는 건 제 삶의 낙 중에 하나인데 그걸 빼앗길 수는 없죠.” 선희영과 황정연 역시 말을 걸어온다. 마음은 고맙지만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점점 더 얼굴이 붉어진다. 이 신파의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부끄럽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부길드 마스터는 지금의 저를 만들어 주신 은인이세요. 이번에야말로 도움이 되고 싶어요.” 김창렬, 유아영도 나름대로 결연한 표정이다. 차라리 조혜진처럼 애매모호한 얼굴이 정신건강에 더 이로울 것 같았다. 한소라는 누가 봐도 함께하기 싫은 얼굴이었지만 분위기에 탑승한다는 걸 깨달은 모양인지 한발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히끅. 히끅.”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며 푹 안기는 정하얀은 덤. 쟤는 도대체 여기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엘레나 공주까지 눈물을 훔치고 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 싸구려 신파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파란뽕을 치사량으로 들이켠 박덕구와 김현성이 조용히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절대로 죽게 만들지 않을 거요. 절대로.” “결정된 것 같군요. 보세요. 기영 씨는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가 아니긴 뭐가 혼자가 아니야.’ 기왕이면 이 자리를 뜨고 싶다. 하지만 너무나도 진지한 이들의 얼굴 때문에 결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 한 방울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완벽에 가까운 외통수. 조금 더 생떼를 부리고 싶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다른 말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무척이나 감동받았다는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모두들… 너무 감사합니다.” 대외적으로도 내부적으로도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시점. 커다란 거짓말에 낚인 원정대가 이쪽의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엘프들의 터전으로 첫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역사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억할지도 모른다. 빛의 영웅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원정을 떠난 용사들로 말이다. ‘이제부터 거짓말은 자제해야겠다.’ 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이번까지만 하고.’ # 345 회귀자 사용설명서 345화 양치기 소년(4) 사실 최후의 저항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을 만큼 모든 일이 무척이나 빠르게 진행됐다. 바로 다음날 원정을 떠나겠다는 말이 그냥 한 말은 아닌 모양. 모임이 끝난 이후에 곧바로 원정 준비를 하러간 길드원들을 보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물론 길드원들의 고생 때문에 흘러나오는 눈물은 아니다. 오히려 이쪽을 궁지로 몰아넣은 길드원들은 조금 더 고생했으면 싶은 게 솔직한 심정. 혹여나 엘프들이 이쪽의 에베리아 행을 거절하지는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것마저 무참히 무산됐다. 엘프 쪽에서는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 정말로 우리 파티가 원하는 걸 직접적으로 물어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안 그래도 엘레나 공주 때문에 근심거리가 생긴 엘프들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소식이었을 것이다. 물론 루드비힌가 뭔가 하는 엘프는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엘레나 공주의 격한 주장 끝에 미약한 반대파 여론은 무참히 박살 났다. 삼국동맹 역시 무척 원활하게 진행된 것은 당연지사. 엘프와 더불어 하루라도 더 시간을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오스칼과 프리스티나가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각국의 지도자들마저 이쪽을 에베리아라는 구렁텅이로 처넣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모든 게 물 흐르듯 해결되었다. 신성교국과 라이오스 왕국, 에베리아 왕국이 복잡한 서류에 지장을 찍는 속도는 태세전환을 하려고 기를 모으는 내 행동보다도 빨랐고 그 결과 모두가 만족스러워 했다. 누구에게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은 동맹이었다. [삼국동맹 성사, 이종족 간 화합의 첫 번째 발걸음.] [오는 26일, 신성교국과 라이오스 왕국, 에베리아 왕국의 동맹이 성사됐다.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고 유연하게 동맹이 성사된 것에 각 국의 지도부들은 크게 만족을 표시했다. 특히나 지금껏 인간들에게 배타적이었던 에베리아 왕국의 변화에는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라이오스의 왕성에서 열린 대회에서 삼국동맹 선언문이 낭독됐고 민중들의 환호성 속에 새로운 이상향 속에 한 발을 크게 내디뎠다. 교국의 지도자 오스칼은 ‘이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이종족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커다란 디딤이다’라는 뜻을 밝혔고 에베리아의 대사 루드비히 또한 엘프와 인간의 화합에 중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삼국동맹은 악마소환사 진청을 보호하고 있는 공화국을 규탄하며 대륙의 흑마법의 멸절에 함께해 줄 것을 호소했다. 아직까지 말을 아끼고 있는 공화국의 이후 행보에 모두가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삼국동맹은 29일 정식으로 대륙재판소에 이번 일을 회부할 계획이다. -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제기랄.’ 서류에 도장이 찍히고 기사가 나오는데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내용도 무척 만족스러웠고 대륙재판소에 이번 일을 회부시킬 계획도 마음에 들었지만 불만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이토록 빨리 끝낼 수 있었다면 어째서 그동안 지연해 왔는지 묻고 싶을 정도. 조항 하나하나를 교국과 라이오스가 양보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그걸 또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 엘프 측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위 아더 원이 된 이상한 상황에 쓴웃음이 터져 나온다. 어떻게 보면 이득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내가 삼국을 하나도 만든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출발할 시간입니다, 기영 씨.”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고 싶건만 김현성은 나에게 작은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벌컥 문이 열리며 등장한 녀석이 슬쩍 이쪽에 손을 내미는 모습이 괜스레 미워 보인다. “함께 가시죠.” “네. 준비는 어떻습니까?” “준비는 완벽합니다. 길드원들의 상태도 그 어느 때보다 좋은 것 같고요. 특히나 덕구 씨를 중심으로 참 열정적입니다. 원래 열정적인 사람이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열의가 넘칩니다.” ‘박덕구 이 새끼가 제일 나빠.’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별일 없을 겁니다.” “네….” 똑바로 걸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쪽을 한쪽 팔로 지탱해 주는 모습은 가관. 내가 힘이 없는 이유가 아프기 때문이라 생각하는지 김현성은 내게 힘을 주려 노력했다. 괜스레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나 안 아파. 사실 전부 다 거짓말이었어.’ 지금 와서 외쳐본다고 한들, 양치기 소년의 공허한 외침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이미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머릿속에는 나를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없는 모양이다. 계속해서 발을 옮기는 와중에 이쪽을 힐끔 힐끔 바라보는 이들이 보인다. 아직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소문이 쫙 퍼져 있는 것이다. 파란 길드가 빛의 영웅 이기영의 몸을 회복시키기 위한 원정을 떠난다는 소식이었다. 소문의 근원지가 도대체 어디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높은 확률로 박덕구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자 왕성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길드원들과 엘레나, 또 각국의 주요 인사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희라 누나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는 카스가노 유노와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이지혜, 오스칼과 프리스티나까지. 교황청의 인사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새벽부터 이쪽을 기다린 모습이었는데 한 명씩 한 명씩 인사를 주고받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최근 뭔가 저기압인 것 같은 차희라는 막상 이쪽을 바라보자 슬그머니 다가와 등을 두드렸고 카스가노 유노 역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스칼이 뭔가 덕담 비슷한 말을 던지기는 했지만 솔직히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교국의 고위사제나 다른 이들 역시 비슷하기는 마찬가지. 물론 영업용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는 했지만 나도 모르게 내재되어 있는 씁쓸함이 담긴 미소가 튀어나왔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사실 오히려 그런 표정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들어맞은 것 같았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이지혜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눈물을 훔치는 연기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쟤도 진짜….’ 내가 장담할 수 있다. 엘레나가 이지혜를 본다면 구토는 물론이거니와 토혈을 할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사실 조금 더 이쪽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데려가고 싶지만 아쉽게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원정에 나서는 것은 파란 길드원뿐이다. 김현성이 다른 이들의 참전을 극구 만류하기도 했고 솔직히 그 결정은 나도 동의하는 부분. 우리가 에베리아에서 원정을 마치기 전까지 필드를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간에 전체적인 분위기는 마치 초상집 분위기. 하지만 왠지 모를 희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번 원정의 책임자인 김현성에게도 끊임없는 독려가 쏟아졌고 원정대는 한 발 옮기기 위해 왕성의 문을 열었다. ‘아, 진짜 이러지 마. 이건 또 무슨 신파야.’ 시야에 들어온 모습은 장관이자 가관이라 할 수 있는 모습. ‘제발 이러지 마. 내 양심을 공격하지 말라고. 이 새끼들아.’ 사실 양심은 멀쩡했다. 끝없이 이어진 라이오스 주민들의 모습이야 저번에도 본 적이 있었으니까. 함성이 아니다. 무척이나 숙연한 분위기다. 솔직히 평소 같았으면 기분 좋았을 광경이었건만 왠지 모르게 힘이 잘 나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쓰러져 있을 때 모인 모습을 보고서는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다르다. 하나같이 손을 흔들며 이쪽을 응원하는 모습이 마치 벌 받을 때가 왔다고 외치는 지옥의 악귀들처럼 보인다. “저번보다 더 모인 것 같은데? 대단하구만….” “네.” “역시 형님이오.” 옆에 있는 박덕구는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정하얀은 고개를 끄덕인다. 김현성은 여전히 내 옆에 딱 붙어 발걸음을 옮기는 중. 자꾸만 여기저기에서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목소리들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히, 힘내세요.” “힘내세요!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디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라이오스를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명예추기경님을 위해 매일매일 기도드리겠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라이오스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거예요. 꼭 다시 한번 들려주세요.” “희망을 잃지 마세요. 저희도 이기영 님 덕분에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부디 희망을 잃지 말아주세요.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이기영 님이라면 틀림없이 이겨내실 겁니다!” 솔직히 장관이라면 장관이다. 우리 원정대가 지나가는 길목을 제외한 모든 장소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다. 집안 창문에서 소리를 지르는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지붕에 올라가 있는 이들도 보인다. 공통점은 모두 눈물을 장착하고 있다는 것. 라이오스의 경비병들이 인파를 통제하기 힘들어 보일 정도니 다른 말이 필요 없으리라. 어떤 꼬마 하나가 대열에 이탈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경비병들이 꼬마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지만 이 와중에도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한다는 저주받은 두뇌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 슬그머니 경비병을 저지하자 꼬마 하나가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 편지 한 통과 초콜릿 하나를 내 손에 쥐어준다. [고맙습니다, 빛의 용사님. 엄마 아빠를 구해주시고 저도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많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꼭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봤으면 좋겠습니다. 매일매일 기도하겠습니다.] 삐뚤삐뚤한 글씨였다. 글자 크기도 서로 달랐지만 꼬마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똑바로 쓰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건 좀 강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의 벽은 무너지지 않는다. 앙증맞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이쪽에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힘내세요! 힘내세요!” “이름이 뭐니?” “레아, 레아예요. 꼭 건강해지셔야 해요, 용사님!” “고맙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마무리. 다시 한번 씁쓸함이 올라오기는 했지만 김현성은 이쪽이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살짝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보이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이 광경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니 작품이었구나.’ “모두가 기영 씨의 몸이 하루빨리 건강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 모습들을 보세요. 기영 씨를 응원하는 이들이 저렇게나 많습니다.” ‘나도 보인다. 현성아.’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기영 씨도 희망을 잃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잃은 적도 없어….’ “다 안심하쇼! 형님은 우리가 꼭 정상으로 되돌릴 테니까! 다들 안심하쇼! 끄윽….” “부탁드립니다, 박덕구 님!” “믿으라니까! 반드시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니까! 형님을 꼭 구할 거요!”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기영 님!” 그 와중에 박덕구가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니 다시 한번 환호성이 튀어나온다. 박덕구는 왜 눈물을 흘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녀석이 자꾸만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환호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길드원들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사명감이 깃든다. ‘제기랄.’ “갑시다, 여러분.” “네, 길드 마스터.” 목표가 있는 집단은 강하다. 한 단계 성장한 파란 길드원들과는 다르게 속에서는 자꾸만 불안감이 피어나오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응원의 소리만큼이나 말이다. # 346 회귀자 사용설명서 346화 엘프들의 도시 (1) “기분이 좀 어떠십니까? 명예추기경님?” “네, 편안합니다. 얼마 만에 이렇게 편하게 있을 수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당연히 반어법이었지만 엘레나는 내 말에 들어 있는 가시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 기쁘다는 듯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온다. 듣지도 않은 신성력을 보내며 오늘도 보람찬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나병환자를 치료하는 것 같은 모양새. 그녀는 참아본다고 참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한 기운이 사라지지는 않는지 천천히 입을 여는 모습이 보였다 밀폐된 공간에서 오랫동안 함께 있었으니 솔직히 이만큼 버티는 것도 대단하다. 나야 내 영혼이 어디가 역겨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이쪽을 만나자마자 안에 있는 것을 모조리 게워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버틴 것도 용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잠, 잠깐 바람 좀 쐬고 와도 되겠습니까. 윽읍.” “네 물론입니다.” 싱긋 웃으며 마차 안을 벗어난 이후에 들려오는 소리는 가관. “우웁. 우웁.” ‘전부다 들려…….’ “우웨에에에에엑.” ‘전부다 들린다고…….’ “우우우욱… 우웨에에엑.” “엘레나 님… 엘레나 님.” “하아… 하아… 네.” “괜찮으신 겁니까?” “네. 괜찮습니다. 루드비히.” “너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루드비히. 저보다는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이 더욱더 힘드실 겁니다. 제게 주어진 사명인 만큼 열심히 임해야지요. 고작 이 정도 가지고는 힘들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하…….” “하지만… 엘레나 님, 그자는…….” 중간부터 방음 마법을 펼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모양인지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나 다름없다. ‘나이팅게일이 따로 없네.’ 들리지는 않지만 무슨 말을 나누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루드비히를 비롯한 엘프 수행원들은 그녀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을 것이고 이상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엘레나는 괜찮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치료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신성력을 밀어주는 별것 아닌 과정이었지만 수행원들에게는 마치 뒤틀린 황천의 역병이 가득한 공간으로 자신들의 공주님이 발을 들이미는 것처럼 보였을 터. 하루에 몇 번씩이나 구토를 반복하는 공주님을 두고 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심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아마 저쪽은 더 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슬쩍 창문을 바라보자 끊임없이 뒤바뀌는 풍경이 보이기 시작. 마치 기차라도 탄 것 같다. 마차를 끄는 말에게 여러 가지 버프를 때려 박은 채로 달리고 있으니 빠른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심지어 마차는 흔들림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길드 내에 있는 마법사와 사제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장담컨대 그냥 행군하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하게 느껴질 것이리라. ‘이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다니까.’ 물론 현 상황에서 내가 괜찮다는 말을 해봤자.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그 동안 건강해 진 것 같다고 수 없이 이야기를 꺼내왔지만 모조리 묵살 당했다. 사실 지금에 와서는 억지로 거짓말을 유지해야 하는 지경까지 와버렸다는 거다. 갑자기 멀쩡한 척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이쪽은 아직까지도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중. 물론 엘레나의 치료가 효과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발작의 주기를 조금씩 늦추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색을 굳히는 이 엘프 공주 덕분인지 다른 길드원들 모두가 안심하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마지막으로 발작을 일으킨 것이 11시간 전. 최초 8시간에서 11시간으로 발작 주기를 조금씩 늦추고 있었으니 지금쯤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 적절하리라. 왠지 모르게 아픈 느낌이었기 때문에 하기는 싫었지만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 낑낑대는 목소리를 애써 목구멍으로 구겨 넣는다. 포인트는 들키고 싶지 않아 한다는 데 있다. 현재의 빛기영은 팀원들에게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최대한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비참한 비명소리를 억누르며 누군가 보고 있을 때처럼 온몸을 비튼다. 메이저 좀비영화에 출연해도 될 정도의 움직임. 나 스스로에게 연기대상을 수여할 만한 무빙이었다. “아…… 아악…….” 물론 끝내 참지 못한 비명소리는 밖으로 새어 나가기 시작. 덜컹 문이 열리며 다시 한 번 엘레나가 모습을 드러내는 걸 보니 내 목소리를 확인한 것 같았다. “이기영 님! 이기영 님!” “아아아악!” “루드비히! 명예 추기경님의 팔을 붙잡아 주세요.” “네.” “다시 한 번 침식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명예추기경님. 제가 함께 있습니다. 제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으으윽.” 입술을 꽉 깨물고 눈물 몇 방울을 흘리는 것은 당연지사. 물론 엘레나 공주 자신도 눈물을 쏟으며 이쪽에게 신성력을 밀어 넣고 있다. “이겨내실 수 있을 겁니다. 이기영 님. 싸우셔야 합니다.” “끄윽…….” “부디 포기하지 마세요. 받아들이지 말고 끝까지 저항하세요.” “뭐요. 형님이 또…….” “오, 오빠!” 내 연기를 직접 보기 위해 찾아온 갤러리들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이닥친 것은 당연. 순도 깊은 신성력이 들어오니 보약이라도 먹은 것 같이 건강해져야 정상이겠지만 왠지 모르게 이 여자의 신성력은 고통스럽다. 저번에 느꼈던 것이 착각이 아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몇 차례나 치료를 받아보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아프다. 물론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한계까지 신성력을 뽑아낸 엘레나가 헉헉 거리며 숨을 몰아셨을 때 겨우 진정하는 연기를 선보일 수 있었다. “흐어어어엉…….” “괜찮은 거요? 형님은 괜찮은 거요?” 하지만 이후에는 잠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몸이 노곤 노곤해진다. 땀으로 범벅이 된 엘레나와 눈물 콧물을 짜고 있는 박덕구와 정하얀과는 대비되는 그림. 오늘도 쓰레기 1스택을 쌓았다는 생각이 살며시 들기는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이다. 일단은 이 거짓말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막 눈을 감고 잠에 빠지려고 했을 때 들려오는 목소리는 가관. 이쪽에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조금은 괜찮아진 거요? 지금 주무시고 계신 거 맞는 거요?” “네. 다행히 정신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거,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니까. 지금은 조금 편안해 보이는데 발작 주기도 눈에 띄게 길어지고 있고… 일단은 응급처치라도 된 것 아니요?” “아뇨. 저도 좋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주기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 건 환영 할 만 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상태가 좋아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안은 오염되어 있고 제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려 있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제 힘에 저항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설마 이렇게까지 썩어 있을 줄은… 단순히 제 힘만으로는 완벽히 상태를 호전시키는 것은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네. 여전히 침식은 진행 중이고 아직도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요?”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일단은 제가 힘이 닿는 데까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거, 정말로 고맙소. 진심으로… 이거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지…….”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게 주어진 일이니까요.” “아! 그, 그리고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셔도 됩니다.” “시간,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지… 아직까지 여유가 있는 거요?” “…그건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내일이 될지 아니면 1년 후가 될지. 지금으로써는 최소한 이기영 님께서 견뎌 주시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지요. 모든 건 명예 추기경님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 그렇다면 문제없겠구만. 다른 건 몰라도 형님은 정신력 하나는 강하니까. 침식이고 오염이고 나발이고 전부다 날려 버릴 거요. 아마 가만히 놔두면 10년도 거뜬 할거라니까. 분명히 그럴 거라니까… 이거 한, 한시름 놓을 수 있겠구만… 아암, 그렇고 말고…….” “네. 분명히 이겨내실 겁니다.” 왠지 모르게 울먹거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박덕구의 목소리와 아직도 내 손을 연신 주물럭거리며 훌쩍이고만 있는 정하얀. 사실 저런 대화를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니건만 괜스레 부담스러워진다. ‘아니, 얼마 남지 않기는 뭘 얼마 남지 않아.’ 당장이라도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무척이나 숙연한 분위기에 눈을 뜰 수조차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일이 일어나다보니 오히려 무덤덤해진다. 이제는 하루 일과가 되어버린 똥꼬쇼에 파란 길드원들은 하루하루를 마음 졸이고 있고 달리는 마차 안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거, 오랜만에 푹 주무시고 있는 것 같은데…….” “이만 자리를 피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도착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이라도 쉬게 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하얀 님께서도.” “저는 여, 여, 여기 있을 거예요.” “…….” “여, 여기 있을 거야.” “정하얀 님.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만.” “여기 있을 거야… 히끅. 여기 있을 거예요.” “거, 누님은 잠깐 같이 있게 해주쇼.” “그렇지만…….” “형님도 그걸 원할 거요. 어차피 몇 시간 있으면 도착이니까. 이러지 말고 어서 나갑시다.” “네.” 도대체 내가 원할 거라는 건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 번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슬그머니 몸에 힘이 들어간 것은 당연지사. 그동안의 경험상 이쪽이 자고 있을 때는 항상 정하얀이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옆에 눕는 것 말고는 다른 행동을 해오지 않고 있다. 오히려 계속해서 끄윽 끄윽 거리는 목소리만 들려오기 시작한다. “히끅… 흐어어엉…….” ‘아, 진짜.’ “히끅… 히끅…….” ‘울지 마…….’ 이쯤 되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양심 한구석이 쑤셔오게 마련. 적막해진 방안에 계속해서 훌쩍이는 소리만 들려오다 보니 굉장히 부담스럽다. 노곤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한숨 더 때리고 싶건만 이 분위기에서는 도저히 잠을 청할 수도 없다. “히끅… 아프면 안 돼요. 히끅.” “…….” “히끅…….” “…….” ‘언제 도착하는 거야. 거의 다 왔다며.’ 계속해서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지만 소리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상황, 감은 눈으로 세 시간 정도를 더 보내고 나서야 바깥이 분주해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좋아.’ 어떤 상황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신없이 달리던 마차의 속도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에베리아 왕국에 가까이 온 것이다. 정신없이 울고만 있던 정하얀도 슬쩍 몸을 일으킨다. 정확히 뭘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창밖을 바라보고 있음이 분명. 어느 순간 마차가 멈춰 섰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 누님. 아무래도 도착한 것 같은데 밖으로 좀…….” “오빠는요?” “아무래도 조금 만 더…….” “아니다. 덕구야. 일어났어.” “끄응… 조금 더 자도 되는데 뭐 벌써 일어나고…….” “기왕 도착했는데 에베리아 왕국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구경해야지.” 몸을 일으키자 곧바로 정하얀이 내 팔을 붙잡았다. 박덕구 역시 아기 새 다루듯 이쪽을 다루기 시작. 결국에는 마차 밖까지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뭔가 언밸런스한 그림에 이쪽이 오히려 불편해 진다. “에베리아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선두에선 김현성은 누군가와 악수를 나누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조혜진이나 다른 이들 역시 다르지는 않다. 사실 녀석들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현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앞도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와…….”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였다. # 347 회귀자 사용설명서 347화 엘프들의 도시 (2) 엘프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폐쇄적인 정책을 유지하고 있는 이종족들 중에서도 가장 베일에 쌓여 있는 이들이었고 심지어 인간들과의 관계도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캐슬락을 한 번 뒤집어 놓은 이후에는 교국에서 엘프 노예를 찾기가 힘들어졌지만, 사실 지금도 대륙 어딘가 에서는 암암리에 엘프들이 거래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엘프들은 더욱더 자신들에 대해서 숨기는 것을 선택했고 그 결과 엘프의 숲은 정체를 그들 말고는 알 수 없는 미지의 땅이 되어버렸다. 라이오스를 처음 봤을 때도 상당히 놀란 것이 사실. 그렇지만 에베리아 왕국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압도적인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진짜…….’ 그야말로 경외심이 들 정도의 자연 광경이다. 울창하게 우거진 녹색 숲과 형형색색으로 아름다움을 밝히고 있는 꽃, 사이즈부터 다른 커다란 나무는 그 끝을 올려다보기가 힘들 정도였고 폐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 역시 다르다. 내가 이런 표현을 쓰는 것도 어처구니없지만 마치 온몸이 정화되는 기분. 물론 실제로 정화가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도시 중앙에 자리잡혀있는 커다란 나무다. 도무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나무는 주변광경과 묘하게 잘 어우러져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세계수?’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그 세계수가 맞다. 희미한 빛을 뿜고 있는 나무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그 와중에 엘레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기분이 좋은 모양. 계속해서 쓰레기통에 뒹굴다 공기 좋은 곳으로 왔으니 기분이 좋을 만도 했다. 정신없이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와 중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왠지 모르게 익숙해 보이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닮았네.’ 엘레나와 같은 에메랄드색 머리카락에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남자. 누가 봐도 그녀와의 연관성을 유추해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일행의 리더인 김현성과 인사를 나눈 뒤에 이쪽으로 향한 모양. 나이는 300살. 아버지라고 하기에는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으니 아마 남매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특이사항으로는 가지고 있는 무력이 상당했다는 것. 교국 8좌나 오호대장군 정도의 수준에 이른 실력자. 녀석 말고도 강자가 몇몇 더 있겠지만 일단 간판으로 쓸 수 있는 실력자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건 상당히 기뻤다. “에베리아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기영 님.” “당신은……?” “엘리오스 에베리아라고 합니다. 편하게 엘리오스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엘리오스 님.” “아닙니다. 굳이 예를 표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야말로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보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시다 들었습니다만…….”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유감입니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저 역시 여신의 거울을 통해 이기영 님께서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희 엘프들을 대표해 대신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게 조금 딱딱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이쪽을 환영하는 이들도 있는 반면 경계를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기 시작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시죠. 머무실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무장한 이들이 슬쩍 이곳을 감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표면상으로는 이쪽을 보호하기 위해서겠지만 이쪽으로부터 다른 엘프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생각도 든다. 재미있었던 것은 다른 엘프들이 이쪽을 마치 동물원 원숭이 보듯 구경하고 있었다는 것. 옹기종기 모여 있는 꼬마 엘프들도 그랬지만 신기한 모양의 건물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도 눈에 띈다. 수군거리고 있는 이들도 있었고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는 이들도 있다. 대충 반응을 보자면……. ‘반 정도는 환영받고 있다는 건가.’ 다른 말로 하면 나머지 반에게는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배척한다기보다는 경계한다는 느낌이 더 강했지만 그거나 이거나 뜻은 같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다시 한 번 엘리오스가 입을 여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인간들이 이곳으로 들어온 것은 556년 전 이후로 처음입니다.” “…….”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신기하게 비춰질 겁니다. 너무 기분나빠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간혹 적대감을 표출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해 주신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이곳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조금 걱정했습니다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모두가 어느 정도 인간들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빛의 영웅들에 대한 혐오는 아닙니다만 우리 종족들은 아직까지도 여러 아픔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왕궁 근처를 벗어나면 아직도 이종족 사냥꾼들을 볼 수 있고 어딘가 에서는 이종족 노예가 거래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지요.” “…….” “물론 교국이 노예거래 금지법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 중 하나라는 건 알고 있지만 대다수의 엘프들은 그런 구분을 두지 않을 겁니다. 저에게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만 몇몇의 엘프에게 인간들이란… 그저 탐욕적이고 위험한 자들일 뿐입니다.” “이분들은 다른 분들과는 다릅니다. 오라버님. 여신의 거울에서 보였던 모습은…….”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엘레나. 나는 지금 우리의 손님들을 탓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그저 사실 그대로를 설명드리는 것뿐이다.” ‘굳이 그렇지만은 않은데…….’ 물론 이 엘리오스라는 엘프가 우리들에게 적대감을 표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방금의 대화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조용히 있어달라고 이야기해 준 셈. 확실히 삼국 동맹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저쪽과 이쪽이 느끼는 온도차는 다른 모양인 것 같았다. ‘재미있게 됐네.’ 말 그대로였다. ‘뭔가 구린 게 있기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단순한 망상이지만 해볼 법한 추측이기는 하다. 문서에 도장을 찍기는 했지만 고작 인간 몇 명이 들어와 있는 걸로 크게 동요하고 있는 이들을 보면 이곳의 분위기가 어떤지 대충은 눈에 보인다. 단순히 커다란 위협에 함께하겠다고 손을 내민 걸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들 역시 외부적이나 내부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 역시 필요에 의해 우리 쪽에 손을 내밀었을 수도 있다는 거다. ‘뭘까.’ 물론 지금 당장 어떤 정황이 보이지는 않는다. 당장 보기에는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장소처럼 보였으니까. 당연하지만 무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다. 병사들의 수준은 전체적으로 높은 것처럼 보였고 그중에서도 쓸 만한 궁수들이 많이 보인다. 인간 쪽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정령사들의 비율이 마법사보다 높다. 까놓고 말해 강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게다가 도시 근처에 펼쳐져 있는 결계 역시 수준급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들이 어째서 삼국동맹에 들어오기를 청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이유가 있기는 있겠네.’ 여러 가지를 추측하기에는 주변 배경지식이 부족한 상황, 한 번 더 생각으로 빠져보려고 했을 때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숙소에 도착한 것이다. “저희 왕국에 머무르실 때까지는 이곳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오늘은 밀린 피로를 푸시고 국왕폐하와의 만남은 천천히 일정을 잡아보겠습니다. 아. 남는 시간에 도시를 둘러보는 것은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제한구역에는 접근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네.” “제가 이분들께 직접 도시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오라버님.” “아니, 너는 잠깐 아버님을 뵈어야겠다. 엘레나. 손님들에 대한 안내는 루드비히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하지만…….” “아버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그럼 여러분 편안한 시간을…….” “잠깐. 엘리오스 님.” 갑작스레 김현성이 훅하고 치고 들어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야. 현성아 또 왜 그래…….’ “가능하다면 지금 따로 국왕폐하를 만났으면 합니다.” “네?” “실례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한시가 급한 일이라. 잠깐 시간을…….” “지금은 시간이 늦었…….” “부탁드립니다.” ‘…너 왜 그래, 인마.’ 허락할 때까지 계속해서 부탁하겠다는 태도는 확실히 갑작스럽다. 도대체 뭐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제법 진지한 모습에 엘리오스 역시 당황한 듯한 얼굴, 엘레나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모르긴 몰라도 이쪽과 관계되어 있는 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무례한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에는 녀석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슬쩍 다시 한 번 말을 있는 엘리오스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아까와는 명백하게 다르다. 뭔가 경계하고 있는 듯한 얼굴. “이유를 먼저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국왕폐하께서 직접 들어야 납득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엘리오스 님.” “…….” “결코 에베리아에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 긴 침묵이 흐른다. 김현성은 조용히 엘리오스를 바라보고 있었고 엘리오스 역시 마찬가지다. 장신의 엘프가 커다랗게 한숨을 내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일단 청을 올려드리겠습니다. 김현성 님은 저를 따라 오시지요. 엘레나. 너는 잠깐 방으로 돌아가서…….” “아니요. 저는 이분들과 함께 있겠습니다.” “엘레나.” “상황은 대충 전해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라버님. 제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후우…….” 저 새끼 머리 아프겠는데……. 자연스럽게 동정이 간다. 저 심정이 어떤 심정인지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결국에는 녀석 역시 동생의 고집을 당해낼 수는 없었던 모양. 엘리오스가 이쪽에게 인사를 한 뒤에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런 녀석을 뒤따라 가는 김현성의 뒷모습이 눈에 보였다. 살짝 엿본 녀석의 표정은 가관. 무척 중요한 면접은 앞둔 취준생 같은 얼굴에는 왠지 모를 비장함까지 감돌고 있었다. ‘도대체 뭐야?’ 아무런 정보도 없으니 불안한 것이 사실.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나도 녀석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거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국왕과의 독대가 필요하단다. 혹시나 덜컥 왕국의 보물이라도 넘기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고는 해도 그 정도로까지 무리수를 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불안한데… 혼자 보내기 불안한데…….’ 함께 따라 나서고 싶지만 이미 이쪽의 몸은 다른 이들에게 꽉 붙잡혀 있다. 기왕이면 내 몸을 치유할 수 있는 수단이 발견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일이 너무 커지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일이 마무리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엘레나는 이쪽의 상태를 살피며 다른 길드원들을 안내하고 있었고 다른 길드원들 역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지만 이쪽의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불편한 상황이 더 불편해질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김현성이 밖으로 나간 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어디에선가 분주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 무장한 이들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연스럽게 옆에 자리해 있는 엘레나를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 밖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엘레나 님.”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그 무기를 손에서 내려놓으세요!”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알 수 있었다. ‘김현성 이 새끼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무리수를 던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 348 회귀자 사용설명서 348화 엘프들의 도시(3) 귀에 마력을 집중하니 옆방에서도 커다란 소리가 들리기 시작. 무장을 하고 있는 기사들이 방 안으로 들이닥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시발…. 도대체 뭐라고 한 거야.’ 순간적으로 품속에 손이 들어간다. 용 숨결 물약을 던지는 게 좋을지 않을지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순식간. 엘레나 공주는 크게 당황했는지 계속해서 소리를 치고 있었지만 그다지 이쪽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분명히 일렀습니다!” “엘리오스 님의 명이십니다.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닙니다. 잠깐 동안 손님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게 지금 보호하려는 이들의 태도입니까. 아무리 오라버님의 명령이라고 한들 더 이상은 제가 참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엘레나 님. 엘레나 님도 함께 계셔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완전해 새 됐다는 것. 물론 저 엘프들에게서 이쪽을 향한 살의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쪽을 억류하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편하게 느껴질 리 없다. ‘이거 완전히 죽 쑨 것 같은데.’ 여기에서 탈출이라도 해야 되는 것은 아닌가 진지한 고민을 한 것은 당연지사. 옆 쪽 벽면이 무너진 것은 바로 그때. 후두득 힘없게 떨어지는 벽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커다란 방패를 들고 있는…. “부길드 마스터!” 유아영이었다. 그 옆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어김없이 복면을 쓰고 있는 김창렬. “이쪽으로 넘어오세요. 빨리 이쪽으로!” 일단은 몸을 일으켜 허겁지겁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지사. 유아영이 내 몸을 꽉 하고 붙잡는 것이 느껴진다. 커다란 미드 역시 느껴지지만 안 그래도 정신없는 상황에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 순간적으로 엘레나의 손을 잡자 그녀 역시 이쪽으로 딸려 들어온다. “꺄악!”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갑자기. 저도 갑자기….” “함정? 함정인건가요? 부길드 마스터?”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영 씨, 혹시 다른 이들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제가 알고 있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대답한 것은 김창렬이다. 이름과는 다르게 가지고 있는 재주만큼은 창렬하지 않다. 뭐가 됐든 간에 일단은 길을 여는 것이 급선무인 만큼 빠르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죽이는 것은 최대한 지양합니다.” “네.” 설명은 간결히, 대답도 짧다. 곧바로 유아영은 침대에 너부러져 있던 투구를 쓰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김창렬 역시 유아영이 뚫어놓은 벽으로 진입하려 하는 엘프들을 막는다. 재미있었던 것은 둘의 수준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높았다는 것. 기회가 있을 때 마음의 눈으로 천천히 살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 곧바로 수인을 외우며 손가락을 튕기자 커다란 용의 꼬리가 바닥에서 튀어나와 김창렬이 막고 있는 벽을 메운다. 뭐라고 따로 지시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김창렬은 유아영과 함께 문 쪽으로 달라붙었고 밀려들고 있는 병사들을 뚫어내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부길드 마스터!” “하얀이부터 찾습니다.” 말이 끝나기 전에도 뿜어져 나오는 커다란 마력의 유동. 당연히 저정도의 마력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정하얀밖에 없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커다랗게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죽이지 마!” 일단은 외쳐봤지만 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불안한 마음으로 마법이 떨어지는 것을 기다렸던 것도 잠시, 내 목소리가 들렸는지 다행히 마력이 사그라진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커다란 마법이 떨어지는 것은 막았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아아아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한쪽 엘프들 몇 명이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이 보인다. 단순히 마력을 주입해 밀어 넣어 다가오고 있는 병력들을 밀쳐낸 모양이다. 폭음이 들려온 곳은 분명히 정하얀의 방. “소리가 들린 곳으로 갑니다.” “네.” 내 말에 유아영이 다시 한번 투구를 두드리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투구 상단에 있는 얼굴가리개가 내려왔다. 제대로 보일지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런 걱정은 애초에 할 필요가 없다.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 두툼한 갑옷을 입고 망치를 휘두르는 모습은 대장장이가 아니라 메인 탱커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일 지경. 박덕구와 김현성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곳곳에서 둘의 움직임이 배어 있는 느낌이다. 애초에 재능도 출중했으니 이정도까지 성장한 게 이상하지는 않다. 물론 김창렬 역시 마찬가지, 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유아영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게 눈에 띈다. ‘이거 잘하고 있는 건가.’ 그 와중에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정말로 이들이 우리를 죽일 의도가 없어보였다는 것. 하지만 무장한 군대를 보낸 것만으로도 정황은 명백하다. 정말로 우리를 단순격리나 보호하기 위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다른 얘들부터 찾는 게 좋겠지.’ 최소한 길드원들은 전부 모인 상태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맞다.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용의 머리가 튀어나온다. 심지어 이번에는 마력이 용의 입가에 모였지만…. “브, 브레스다!” “피해!” 브레스 같은 걸 쏠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거짓말. 순간적으로 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몸을 옮긴 이들 사이로 유아영이 나를 이끌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고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얼굴을 붉혔지만 이미 막차는 떠나 간 뒤. “코너 돌면 바로 네 명.” “준비하세요. 아영 씨.” “네. 부길드 마스터.”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미끄러지듯 몸을 움직이며 품속에 있는 포션에 마력을 밀어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유아영도 망치를 횡으로 휘두르려고 했지만 익숙한 얼굴에 곧바로 손을 놓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커다란 방패에 막혀 버린다. “어이구 깜짝이야. 형님! 아영 후배도 있구만!” “기영 씨!” “부길드 마스터!” 박덕구, 한소라, 황정연 그리고 선희영까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한소라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박덕구, 황정연의 모습. “형님 괜찮은 거요? 대관절 이게 무슨 상황이요?” “일단 하얀이부터 찾을 거야.” “아마 누님은 괜찮을 거요. 혜진 씨랑 함께 있으니까.” “안기모 씨랑 예리는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어?” “아마 그쪽은….” 쾅! 위층에서 폭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힐끗 창문을 바라보니 바깥으로 뛰어 내리고 있는 안기모와 김예리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우리도 간다.” “누님은 괜찮은 거요?” “혜진 씨랑 같이 있다며. 금방 내려오겠지.” “아, 알겠소. 꽉 잡으쇼, 형님.” “정연 씨랑 소라 씨는 부유 마법 준비해요.” “네. 부길드 마스터.”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박덕구와 유아영이 방패로 강하게 벽을 후려쳤고 순간적이지만 벽에 후두득 무너져 내렸다. 내가 뭐라고 말을 내뱉으려 하는 사이에 박덕구가 내 허리를 잡았고 곧바로 땅으로 사정없이 몸이 떨어져 내린다. 엘레나 공주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데, 내가 더 묻고 싶을 정도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김예리를 찾아봤지만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 떨어지는 와중에 고개를 돌리니 한 쪽 벽에 딱 매달린 채 버티고 있는 김예리가 보인다. 허리에는 대롱대롱 줄이 달려 있었는데 와이어의 끝에는 안기모가 매달려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중. 이쪽을 확인한 김예리는 곧바로 안기모가 매달려 있던 줄을 끊어버린 이후 점프. 어떻게 공중에서 움직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특정 부위가 자라지 않아서 슬픈 소녀는 박덕구의 어깨를 잡고 파티에 합류했고 허겁지겁 떨어지고 있는 안기모에게는 한발 먼저 빠르게 부유마법이 떨어졌다. 이윽고 박덕구에게 매달려 있는 나와 엘레나, 김예리, 유아영과 함께 있는 한소라까지 내려오자 곧바로 선희영이 입을 열었다. “모이세요.” “네.” 딱 한마디 했을 뿐이지만 꽉 뭉친 파란 길드원 사이로 빛이 내린다. 버프 계열의 신성 주문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점점 몸에 활력이 돋아나기 시작. 설명은 길었지만 순식간에 일어난 일련의 과정에 엘레나는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었다. “대, 대단해….” 나도 공감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리 현성이가 쉬는 동안 가만히 있지는 않은 모양인지 나조차도 놀라울 정도의 파티원들의 성장치가 눈에 띈다. 스탯이 완성이 되지 않은 이들도 보이지만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완벽하게 상쇄시켜 주고 있다. 놀란 것도 잠시다. 곧바로 다음 루트로의 이동을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엘리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공격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부디 무기를 버려주시기 바랍니다.” “오라버님!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넌 잠깐 조용히 하거라, 엘레나. 약속드립니다.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세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여러분을 안전하게….” “그게 그거 아니요?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건지. 말을 해야 될 것 아니요.” “이곳에서는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일단은 무기를….” ‘제길.’ “…….”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당연하다. 엘레나의 표정을 보니 확실히 그녀도 모르는 얼굴이다. 일반적으로 김현성 때문에 생긴 오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혹여나 엘프들이 공화국 측과 연관되어 있는 가능성을 배재할 수는 없다. “먼저 무슨 일인지 듣고 싶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부디 통제에 따로 주셨으면 합니다. 더 이상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양국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지금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당신들이라는 걸 인지해야 합니다.” “절대로 위협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놀라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에 들려있는 무기를 버리기에는 부담스럽다. 이쪽이 우위에 있을 때는 대화를 선택하는 것이 맞지만 누가 봐도 현재의 길드는 궁지에 몰려있는 상황이다. 만약 무기까지 버린다면 어처구니없게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다. 퇴로까지 놈이 막아버린 상황. 엘레나를 인질로 잡고 빠져나가는 그림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건 그것대로 내키지 않는다. ‘일단 저 새끼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데.’ 최소 8좌 급의 강자. 만약 여기에서 도망친다고 해도 일단 녀석을 어떻게 하는 게 최우선 사항이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 것은 순식간, 전력은 나쁘지 않다. 박덕구와 유아영이 전위를 봐주고 안기모와 선희영으로 지속력도 챙길 수 있다. 정하얀이나 조혜진이 합류해 준다면… 녀석은 물론 병력도 충분히 뚫고 나갈 수 있다. ‘저 새끼가 문제지…’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두드리던 바로 그 때였다. ‘김창렬 이 새끼는 또 어디로 간 거야?’ 녀석이 보이지 않았던 것. 혼자만 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정도로 창렬한 놈은 아니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느낌은 온다. ‘한 번 해봐?’ 시도는 나쁘지 않다. 기왕 뚫어내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기습으로 시작하는 게 더 아름다울 테니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빠르다. 순간적으로 수인을 외우자 내 움직임을 눈치 챈 파티원들이 반응한다. 엘리오스 역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검을 뽑지만 순간적으로 녀석의 옆에서 단검을 든 김창렬이 튀어 나왔다. ‘김창렬 이 비겁한 새끼! 나이스다!’ 녀석이 등을 돌려 김창렬의 양 손을 붙잡지만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비겁한 녀석의 입에서 암기가 쏟아지기 시작. 항상 쓰고 다니던 붉은색 복면의 기적을 체험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엘프는 그 마저도 고개를 돌려 피해버린다. 물론 그 틈에 김예리가 한 발 먼저 빠르게 김창렬을 붙잡고 있는 놈의 손에 단검을 날렸고 박덕구와 유아영은 곧바로 방패를 부여잡고 앞 쪽으로 커다란 발걸음을 성큼 내 뻗었다. 기습은 실패로 돌아갈 지언정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뚫어 낼 수 있어.’ 이쪽의 계산에 실수가 있었다면 김창렬이 녀석의 품을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쳐 박힌 김창렬을 짓누르고 있는 엘리오스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진심입니다. 무기를 버려주세요. 해를 끼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 349 회귀자 사용설명서 349화 엘프들의 도시 (4) ‘제기랄….’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절대로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 “….” “이렇게 한다면 믿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김창렬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녀석이 자신의 손을 위로 들어 올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정말로 싸워야 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과민반응한 건가.’ 절로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정말로 이쪽을 어떻게 하고 싶었다면 김창렬을 인질로 삼는 게 이상적이었을 테니까. 잠깐 동안 침을 삼켜 넘겼을 때 김창렬은 살짝 일어나 민망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죄송합니다라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왔지만 녀석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잘했다는 의미로 어깨를 살짝 두드리자 녀석이 다시금 고개를 숙여왔다. 잠깐의 소강상태로 길드원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상황, 모두가 어떻게 하느냐는 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최고 결정권이 나에게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이럴 때는 모두의 눈빛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후….’ 결국에는 나 역시 한발 물러나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녀석에게는 적의가 없어 보이기도 했고 일단은 대화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선은 존재한다. “무기는 가지고 있겠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 정도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원하신다면… 다만 통제에는 꼭 따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통제를 말씀하시는 건지….”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시고 아버지와 김현성 님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함께 기다려주시면 됩니다. 저희가 위협을 느끼지 않는 선에서 움직여주신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안으로 들어간 이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곳에서 말씀드릴 이야기가 아닙니다.” “네.” 뭔가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기는 있는 한 것 같았다.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표정은 세상 모든 근심을 전부 가지고 있는 얼굴. 아무튼 간에 일단 이 갑작스러운 해프닝은 조금 허무하게 마무리됐다. 때마침 정하얀과 조혜진이 입구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는데 저들도 이쪽을 보고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지한 모양. 정하얀의 판단이라기보다는 조혜진의 판단으로 보인다. 침착하게 상황을 두고 본 것이다. “오빠!” 우다다 달려오는 정하얀을 살짝 안아 주고 난 이후에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이쪽이 저쪽이 개판을 만들어 놓은 잔해를 다시금 뒤돌아보는 것은 살짝 민망하기는 했지만 진지한 분위기 덕분인지 그런 기분은 금방 사라졌다. 재미있었던 것은 이쪽을 통제하기 위한 엘프의 숫자가 무척이나 적었다는 것. 엘리오스가 있기야 했지만 녀석은 정하얀으로 충분히 퉁 칠 수 있다. 혹시나 상황이 터진다면 이점은 오히려 우리에게 있다는 거다. 물론 밖에는 다른 엘프들이 길을 막고 있기야 하지만 당장 전투가 일어난다면 유리한 것은 이쪽이다. 어째서 이들이 이런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지는 뻔할 뻔 자. 우리가 믿을 만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질문이 있다고 했었지….’ 보안이다. 다른 이들은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임이 분명하리라. 녀석이 우리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는 현재 김현성이 에베리아의 왕과 나누고 있는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잠시 후면 알게 될 일. 대충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천천히 입을 열어오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방금의 무례는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니요. 서로 간의 실수가 있었으니까요. 지금이라도 오해를 풀어서 다행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래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 “엘레나에게 들으신 겁니까?” “네?” “아, 아닙니다. 오라버님. 저는….” “너에게 물은 것이 아니다, 엘레나. 나는 지금 이기영 명예 추기경님께 묻고….” “무슨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오라버님. 도대체 어째서 이런 행동을 취하시는지도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륙의 위기를 막아주신 영웅분들께 이런 무례라니요. 우리답지 않은 행동입니다.” 엘레나의 말에 엘리오스가 슬쩍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아무래도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모양. 나 역시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다면 답답함이 풀릴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이쪽은 알고 있는 정보가 없다. 차라리 녀석이라도 뭔가를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동안 굳은 얼굴을 하던 엘리오스가 입술을 달싹 거린 이후 다시 한번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 고민하는 표정은 있었지만 어차피 우리도 알게 될 거라는 계산이 선 것 같았다. “파란 길드 마스터께서 세계수의 상태에 대해 알고 계시더구나.” “네?” “정말로 네가 전한 것이 아니란 말이냐?” “맹세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어째서….” “엘룬께 맹세코?” “네. 오라버님. 정말로 모르는 일입니다. 단언컨대 세계수에 대해서는 다른 말을 꺼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김현성… 이 새끼….’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이 실수했다는 것 하나만큼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흘러가는 흐름상 김현성이 현재 왕성에서 나누고 있는 이야기는 엘프 중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비밀.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마을을 방문한 인간이 보안이 걸려 있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으니 난리가 난 것은 당연지사. ‘엘레나에게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였구나.’ 이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추측을 했겠지만 엘레나에게 들었을 리가 만무. 김현성은 그저 1회 차에 있었던 일에 대해 전했을 뿐이다. ‘이 새끼는 이걸 있는 그대로 말해버리면 어떡해.’ 녀석의 입장에서는 단 하루라도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해서였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이야기해 버린 것은 성급한 처사였다. 엘프 측에서 뭔가 감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적어도 사전 작업을 조금은 했었어야 했다. 녀석들 입장에선 갑작스레 튀어나온 이방인이 자신들만 알고 있는 비밀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으니 당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답답한 자식.’ 사실 김현성이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는 아니다. 1회 차에 대한 정보를 풀 때도 항상 나름대로의 변명거리를 만들어 놓은 이후에야 움직이는 것을 보면 부족하지만 최소한의 생각은 하고 움직인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무리수를 던진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이쪽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 정말로 한시가 급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이런 일이면 물불 안 가리는구나.’ 우리와 엘프들의 의문은 신경 쓰지도 않은 모양. 1회 차의 통수를 맞은 원동력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조금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쪽을 위해서 감행한 행동이니 원망할 수도 없다. 여러 가지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감수하고서라고 이쪽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 이런 똥 치워주는 게 내 역할이지. 뭐.’ 기왕이면 이대로 원정 자체가 무산됐으면 하는 기대가 있기는 했지만 엄연히 국제 문제로 치달을 수 있는 만큼 이 정도는 실드를 쳐주는 것이 맞다. 그나마 이 정도면 즐거운 뒤치다꺼리. 세계수의 상태라는 단어에 힌트를 얻은 이후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순식간. 그나마 할 만한 변명으로는 이 정도가 가장 적절하리라. 살짝 입을 열자 곧바로 나를 바라보는 엘리오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외부인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알고 계셨나 보군요.” “당신도 알고 계신 겁니까?” “아뇨.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짚이는 일은 있습니다.” “그게 무슨….” “교국에는 미래와 과거를 내다볼 수 있는 이방인이 존재합니다. 물론 제한적입니다만 그녀는 엄연히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레나 공주님처럼 말입니다.” “…….” “무엇에 대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전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저야 뭐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길드 마스터께서는 교국의 무녀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사실은 이쪽과 조금 더 친하지만. “그 말씀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타입입니다. 장담컨대 다른 이들은 모르고 있을 겁니다. 혹시나 몇몇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에베리아에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단언할 수 있습니까?”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교국의 무녀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 역시 타국에게는 말씀드려서는 안 되는 기밀입니다. 교국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 10명이 채 넘지 않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오스 님.” “그렇군요.” 우리는 이제 한배를 탔으니까. “그럼, 정확히 무슨 일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후우….” “불편하시다면….” “아닙니다. 어차피 알게 되실 일이기도 하고… 명예 추기경님이 무슨 뜻으로 방금과 같은 말씀을 하셨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 말씀이 맞습니다.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시대가 아니지요.” “…….” 살짝 한숨을 쉰 녀석이 본격적으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대충 예상이 가기는 하지만 궁금한 것도 사실. 하지만 직접 입으로 듣는 것과는 또 느낌이 다르다. “명예 추기경님께서는 어째서 저희 엘프들이 어떻게 그렇게 기나긴 시간 동안 외부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글쎄요. 방금 엘레나 님에게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네. 세계수 때문입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자식아.’ “정확히 말하면 세계수에서 뿜어내고 있는 강대한 마력 때문입니다. 저희 왕국은 세계수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숲과 식수는 물론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폐쇄적인 입장을 계속해서 고수 할 수 있었던 것도 세계수 때문이라고 생각하셔도 될 겁니다. 에베리아 왕국은 자원의 고갈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 자세히 말하는 거 같은데….’ “외부인의 침입을 막아주는 결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커다란 인력의 소모 없이 세계수의 존재 자체만으로 저희들은 커다란 위험들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네. 지금까지는요.” ‘따로 마법사가 있는 게 아니었네.’ 어쩐지 수준이 너무 높다고 생각했다. “과거형이로군요.” “네.” ‘냄새가 나네.’ 간단한 이야기다. “언제부터였습니까?” “42년 전부터입니다.” “…….” “42년 전부터. 세계수의 뿌리가 계속해서 썩어가고 있습니다.” 부정할 여지가 없다. 무척 간단한 이야기다. 아무리 이쪽의 똥꼬쇼가 있었다고 한들, 엘프들이 꽁으로 이쪽에 손을 내밀었을 리가 없다. ‘너희들도 힘들었구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교국과 라이오스뿐만이 아니다. # 350 회귀자 사용설명서 350화 엘프들의 도시 (5) 이들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답은 금방 나온다. 에베리아 왕국이 지금까지 폐쇄 정책을 유지하면서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자체가 바로 세계수 때문이라는 것. 이제야 뭔가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륙의 자원은 무한하지 않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에베리아 왕국이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자원이 끝이 없다는 거네.’ 어떤 매커니즘으로 도시가 돌아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다수의 엘프가 세계수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토양이나 식수 역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방어 체계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도 에베리아 왕국은 끊임없이 외부의 위협에 저항해 왔다. 지금이야 이종족 노예거래 금지법을 채택하고 있는 국가가 많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권위 있는 귀족들은 대부분 엘프 노예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심지어 국가 단위나 영지 단위로 에베리아 왕국을 침공했다는 전례마저 있을 정도였으니 그때의 상황이 어땠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세계수는 이들의 생활은 물론 왕국의 존폐에도 깊게 관계되어 있다. 한데 그런 세계수가 썩어가고 있단다. ‘망하기 일보 직전이라고 봐도 되는 거네.’ 이들의 입장에서는 빠르게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 만약에 이대로 세계수가 무너진다면 에베리아의 미래야 불 보듯 뻔하다. 자원에 허덕이게 되고 외부의 위협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조금 과장해 본다면 사방에서 이들을 물어뜯기 위해 군대를 보낼지도 모른다. 그게 현실이 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도층들을 불안하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때마침 라이오스 악마 소환이 터져준 셈. 교국은 여전히 강국으로 분류할 수 있는 나라였고 중립국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라이오스의 이미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무조건 이쪽과 합류하는 게 자신들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을 거라는 거다. 외부와 교역할 수 있다면 한정적인 자원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고 심지어 다른 위협까지 예방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이 흑마법에 부정적이라는 것 역시 선택을 부추기는 데 도움을 줬겠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자신들의 위기에 있다. 고개를 살짝 엘레나를 바라보니 짐짓 심각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동맹에 정치적인 이유가 숨어 있을 거라는 건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순진하네.’ 그에 비해 엘리오스는 이 모든 걸 염두에 두고 움직였을 것이 분명하다. 혹여나 교국에서 이걸 빌미로 늘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교국에서도 에베리아는 놓치기 싫은 먹잇감이다. 이들과 함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대외적인 이미지도 그렇고 숲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들도 많았으니까. 물론 이들의 자원이 바닥나기 일보 직전이라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동등한 조건으로 동맹을 진행시키지는 않았을 거다. 어떻게 보면 사기를 맞은 셈. 뒤통수가 지끈거릴 정도가 아니었지만 소소한 피해를 입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세계수의 뿌리.”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징후를 발견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원인을 직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썩어들어간 면적이 아주 협소했지만 현재는 뿌리의 1/3가량이 완전히 오염된 상황입니다. 침식 속도가 굉장히….” “빠르군요.” “네. 심지어 계속해서 가속화되고 있기도 하고요.” “얼마나 남은 겁니까?” “길게 봐도 30년입니다.” ‘아니, 너무 빠른데….’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 현성 씨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형씨가 말이요?” “네. 아직까지 아버님과 대화 중이실 겁니다.” “혹시 제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일단은 국왕 폐하와 아버님께서 대화를 마치실 때까지는 이곳에 함께 계셔주셨으면 합니다. 절대로 여러분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시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죄송해하실 일이 아닙니다.” 혹시나 이쪽이 뿌리를 노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나 역시도 녀석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오히려 이 정도라면 과하지 않은 처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처음이 조금 꼬이기야 했지만 겨우 격리조치라는 건 저쪽에서도 충분히 배려심을 보이고 있다는 증거다. 물론 이후에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의 경우가 궁금해지기는 한다. ‘김현성이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니까.’ 이러나저러나 김현성이 이쪽으로 돌아와야 정확한 일의 정황을 파악할 수가 있다. 때마침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반가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애써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저 새끼.’ 아무리 나를 위해서라고 한들 이쪽에 한마디도 없이 일을 벌였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당연히 김현성이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는 얼굴에는 왠지 모를 뿌듯함이 감돌고 있었다. ‘성공한 건가.’ 최소한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몇 명의 엘프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김현성은 들어오자마자 길드원들에게 설명 아닌 설명을 하는 중. 함께 들어온 엘프 역시 엘리오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제법 화기애애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에는 괜스레 침이 말라온다. 이번에도 혹시 속으로 꿍쳐놨다가 갑자기 일을 터뜨릴까 걱정된 것은 당연한 일.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표정을 굳히며 녀석을 마주치지 않고 곧바로 방문으로 들어가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지만 녀석이 꿍쳐놓은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너는 내가 왜 화났는지 모르겠어?’ 조혜진 때 이후로 정말로 오랜만에 써먹는 것 같은 스킬. 잠깐 뒤를 돌아보자 김현성과 살짝 눈이 마주쳤는데 잘못은커녕 자신이 해냈다는 듯 해맑은 미소를 지어오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표정을 찡그린 것은 당연한 일.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허겁지겁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 막 닫히려고 하는 방문을 붙잡고 이쪽을 따라 들어오는 꼴은 가관. 다른 길드원들은 이게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김현성이 따로 제지했는지 함께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저 기영 씨.” “…….” “기영 씨….” “…….” 가볍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무시하는 게 맞다. “엘리오스 님에게 대충 전해 들었다고… 다행히 이야기가 잘 풀린 것 같습니다. 물론 조금 더 생각해 본다고 하시기는 했지만 빠르면 내일 안으로 확답을 해주신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긍정적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고요.” “그렇군요. 잘됐습니다.” “저도 이야기가 이렇게 잘 풀릴 줄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아… 네. 그렇군요.” 표정을 싸악 굳히며 기분 팍 상해부렀스 스킬을 시전하자 저번과 같이 조금 초조해하는 얼굴이 보였다.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성과를 내면 칭찬이라도 해줄 줄 알았던 모양이다. 어처구니없어 헛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은 상황. 어떻게 말을 꺼내는 게 좋을까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을 때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죄송합니다.” “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본래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조금 충동적으로 일으킨 일이라. 또… 몸도 안 좋으신데 여러 가지 생각으로 부담을 드리기 싫었습니다.” ‘아 이러면 또 내가 민망해지는 데….’ 잘못한 걸 알고 있는지 사과부터 해오는 모습은 녀석 역시 내성이 생겼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조금 더 짜증을 부리고 싶기는 했지만 반응을 보니 그럴 필요까지도 없을 것 같다. “후우….” “정말로 죄송합니다.” “현성 씨. 적어도 저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되지 않겠….” “죄송합니다.” 마치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 ‘약해지면 안 돼.’ 라고 생각은 해봤지만 축 처진 어깨에는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분위기는 대충 만들어졌으니까. 더 이상 녀석을 압박할 필요도 없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자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조금이나마 풀린 내 표정에는 안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현성 씨가 이번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일단 카스가노 님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대충 둘러댔습니다.” “아!” “저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어떻게 현성 씨가 이 문제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경위가 아닙니다. 적어도 저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해준 게 얼만데.’ 물론 녀석이 변명을 만들 시간이 부족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이 문제에 대해 쉽게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자신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니까.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뇨. 사과를 받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네. 절대로요.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 ‘이 눈치 없는 새끼.’ 숨기고 있는 게 있으면 빨리 자진 납세하라는 표현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다.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히자 다시금 비 맞은 강아지의 표정을 선보이는 녀석이 눈에 보인다. 한 번 더 직접적으로 말을 해야 알아들을 수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다시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저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들을 자격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 “하지만….” “…….” 조금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선보이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이야기를 꺼내는 게 옳다고 생각한 모양.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김현성의 얼굴이 눈에 보인다. “어디까지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성 씨가 에베리아가 겪고 있는 현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까지 들었습니다.” “네. 이유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물론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 추측에 불과하지만….” ‘추측은 무슨.’ 김현성이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 곧 정답이다. “아마 던전의 영향을 받고 있을 겁니다.” “네?” “저주받은 신단 때를 떠올려 보시면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이해하다마다. 모든 던전이 그렇지는 않지만 특정 던전은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영향을 미친다. 간단히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에베리아 왕국 내에 던전이 생성됐다는 것. 던전이 세계수를 오염시키고 있는 건지, 아니면 양분을 빨아들이고 있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던전의 보상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인지는 모르겠지만 셋 중에 뭐가 됐든 꽤 높은 등급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크다. 녀석이 위험하다고 표현한 것은 아마 이런 연유일 것이다.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는 겁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제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는 묻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네.” “던전의 이름은 뒤틀린 악마의 연못입니다. 주력 몬스터들은 악마들이 대부분이고 네임드 몬스터도 마찬가지 일 겁니다. 등급은 전설 등급 이상입니다. 던전 공략은 네임드 몬스터 처치를 비롯한 연못의 정화이며 아마 그곳에서 기영 씨의 몸을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세 번째구나.’ 자세한 정황은 아직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세계수를 치료해 줄 수 있는 연못이 내가 가진 질병 역시 치료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군요. 뒤틀린 연못이 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거 분위기가 꽤 좋은데.’ 조금 압박을 주었다고 해서 이렇게 술술 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간단한 정보만 알 수 있다는 생각했지만 현재의 표정이 꽤나 볼만하다. 입술을 계속해서 달싹달싹 움직이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이 보인다. 뭔가를 고백하고 싶은데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모양. 녀석이 뭘 고민하고 있는지 뭘 고백하려고 하는지 깨닫는 것은 순식간. ‘그래. 현성아. 마음껏 다 털어놔도 된다. 형 이해심 넘치는 거 알잖아.’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뭘 말입니까?” “어째서 제가….” “이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지 말입니까?” “네.” “괜찮습니다.” “네?” “거기까지는 말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야 궁금하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굳이 현성 씨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정답이지.’ 나는 너를 믿는다.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라는 눈빛을 쏘아 보내는 것은 당연. 언뜻 감동받은 듯한 녀석의 표정이 보인다. 심지어는 죄책감에 둘러싸여 있는 얼굴. 이렇게 무한한 신뢰를 주는 나에게 계속해서 거짓말을 해도 되는 게 옳을까라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왠지 끈적하게 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홀로 고개를 끄덕인 녀석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기영 씨.” “네.” “그러니까….” ‘빙고!’ “미친 소리처럼 들리시겠지만. 사실….” 속으로 환호성을 내지른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형님!! 형씨!! 거 좀 나와 보쇼!”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한 적절한 훼방꾼. ‘저 새끼는 진짜….’ 절로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갈 정도였다. # 351 회귀자 사용설명서 351화 김현아 (1) ‘저 돼지새끼는 도움이 되는 거야. 마는 거야.’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전혀 의외의 상황에 분탕질을 쳐놓기도 한다. 모처럼 김현성의 입에서 회귀했다라는 말을 막 들을 수 있었던 타이밍. 녀석으로써도 굉장히 고심을 많이 했을 것이다. 미묘한 분위기에 본인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보물 상자를 풀어보려고 했음이 분명했다. 이 짧은 틈은 김현성에게 다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시간을 줄 것이다. 정신없이 몰아치던 와중에 방해꾼이 튀어나온 것이다. 물론 기차가 완전히 떠났다고 말할 타이밍은 아니다. ‘아직 가능해.’ 곧바로 김현성을 바라보며 입을 연 것은 당연한 일. “현성 씨 하려고 한 이야기가….” “…….” “…….”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길.’ “나중에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고 현재 풀어야 할 문제도 있으니까요.” ‘이럴 줄 알았어. 씨발 이럴 줄 알았다고.’ 기왕이면 한 번 더 조르고 싶다. 하지만 너무 티가 나게 묻는 것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는 게 맞나?’ 사실 진실을 밝힐 고민을 한 번쯤 해봤다는 것만 해도 이쪽에는 큰 성과.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비밀을 밝힌다는 시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신뢰받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첫 번째 시도가 있었으니 두 번째, 세 번째 시도는 조금 더 쉽게 나타날 것이다. 아직까지 입가에는 찹찹함이 감돌고 있기는 했지만 일단은 기차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럼 다음에….” “…….”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김현성이 문을 열자 이쪽을 바라보는 길드원들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인다. 물론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던 박덕구. 왠지 모르게 기뻐 보이는 표정이 눈에 띄었지만 딱밤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표정이었다. 재빠르게 이쪽으로 달라 붙어온 정하얀이나 선희영과 조혜진도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와 김현성이 방에서 대화를 나눈 사이에 기분 좋은 소식이라도 들은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무슨 일입니까? 덕구 씨.” “나보다는 엘리오스 님한테 듣는 게 더 빠를 거요. 큼큼. 거 좋은 소식이요.” 박덕구의 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은 꽤나 긴장한 듯한 얼굴. 뒤쪽에서 다른 엘프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엘리오스가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몇 가지 말씀드려야 할 사항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이 전까지의 무례에 대해서는 거듭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사과를 도대체 몇 번을 하는 거야.’ 아무래도 정말로 미안했던 모양이다. 본래 성격이 유하다고 소문난 엘프들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이쯤 되면 이쪽도 조금은 지겹다. 아무튼 간에 녀석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지금부터 녀석이 하는 대답 여하에 따라 우리 파티가 가야 할 길이 결정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방금 전 아버님께 칙서를 전달받았습니다.” “…….”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 “아버님께서는 파란 길드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아우….’ “에베리아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 파란 길드 여러분들을 지원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만… 몇 가지 조항에 동의를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그거지.’ “상관없습니다. 지금 바로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아… 네. 일단 저를 비롯한 엘프들이 함께 움직여야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여러분들끼리 움직이게 하기에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불안하신 게 당연하니까요.” “그럼… 또 한 가지는 이번 일을 밖으로 발설하지 않겠다는 조항입니다. 물론 아무 효과도 없는 문서입니다만 최소한 한 번씩은 확인을 해주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형식적으로라도 안심을 하고 싶다는 게 위원회의 입장이라…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 “교국에 무녀에게 전해 들은 내용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카스가노 님이 본 광경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불편하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부디 부탁드립니다.” ‘우리 현성이 거짓말 잘 못하는데….’ 고개를 틀어 김현성을 바라보자 확실히 곰곰이 고민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카스가노 유노에게 미래를 전해 들었기 때문에 이번 정황을 알고 있다는 건 이쪽이 대충 끼워 맞추어준 거짓말이다. 아마 그녀와는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쪽이 나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 순간이었다. 김현성이 조그만 목소리로 입을 열어온 것. “에베리아의 멸망입니다.” “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자식은 지금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1회 차인 건가.’ 아마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얼굴 속에 담긴 진심을 느낀 것은 엘리오스 역시 마찬가지. 곧바로 반문해 오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그게 정말입니까?” “저는 들은 대로 말씀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정확한 시기는 저 역시 듣지 못했지만 에베리아 왕국이 커다란 전화에 휩싸인다고 들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커다란 전쟁이 일어나고 인류와 이 종족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이곳을 최후의 거점으로 삼고 투쟁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종국에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거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언뜻 들으면 종말론을 외치는 사이비 교주가 저주의 말을 퍼붓고 있는 것 같았지만 꽤나 진지한 표정은 녀석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에 설득력을 실어주고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원인이나 다른 것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제가 들은 것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그렇다면 세계수는….” “썩지 않을 겁니다. 저희가 이곳에 왔으니까요. 미래는 변할 수도 있습니다. 엘리오스 님. 그녀가 눈으로 보는 게 정확한 미래는 아닙니다. 아주 작은 행동으로도 분명히 변화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말입니다.” ‘이건 성장했다고 봐도 되는 건가?’ 1회 차의 정보에 많이 의지하며 움직였던 과거와는 조금 다른 행보다. 본인이 직접 나서서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모습.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현성 성장은 항상 이쪽에 도움을 주고 있으니까. 물론 개인의 성장도 성장이지만 녀석이 잠깐 동안 푼 정보 역시 흥미가 돋는다. ‘최후의 저항? 연합?’ 지금처럼 공화국과 교국의 전쟁이 아니다. 아마 가면쓰레기 진청이 혹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적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리라. ‘만약에 그렇게 되면… 세계수가 썩은 건 그 전에 해결됐었다고 봐도 되는 건가.’ 물론 추측이다. 하지만 세계수가 유지되는 결계가 무너진 에베리아 왕국이 최후의 저항의 장소가 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생각해 봐도 믿기 힘들다. 물론 이곳의 방비가 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높은 성벽으로 이루어진 캐슬락이나 교국 같은 느낌이라고는 볼 수 없다. 만약 세계수가 완전히 무너졌는데도 불구하고 이곳을 최후의 장소로 선택했다면 1회 차의 지휘관들은 머리에 든 것도 없는 똥 덩어리라 한 바가지 욕을 쏘아 보내도 모자라다. ‘현성이가 해결 방법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정황상 녀석이 직접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현성이 말하는 최후의 저항 이전에 세계수는 치료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적어도 들은 적은 있는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세계수가 치료된 이후에 이곳에서 싸움이 있었고 결국 인류는 대패. 이후에 다른 전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이 회귀한 시점 역시 멀지 않을 것이다. 흥미롭게 생각해 볼 만한 일이 많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은 없는 상황. 분위기가 흘러가는 게 심상치 않게 느껴진 탓이다. ‘제기랄….’ “그렇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천천히 상의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뇨. 움직이면서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그 말씀은….” “지금 곧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엘리오스 님 곧바로 엘프 쪽의 원정대를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만… 먼 길을 오느라 무리하셨을 텐데… 조금이라도….”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부족한 설명과 브리핑은 움직이는 중에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좀 쉬어도 돼.’ “물론 이후에는 충분한 휴식시간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전 길드원은 지금 곧바로 떠날 준비를 해주세요.” “현성 씨. 아무리 그래도… 지금 모두가 많이 지쳐 있….” “아니요. 괜찮아요.” “저희도 괜찮습니다. 아직까지는 체력의 여유가 있습니다.” “뭐 기모 형씨고 그렇고 나도 그렇고 체력에는 여유가 있으니까. 아영 후배나 다른 사람들도 다 충분하지 않나? 오히려 형님이 조금 필요한 것 같은데 조금 자는 게 낫지 않겠소? 거 조금 불편할 것 같으면 내가 업고 움직일 수도 있소. 아니면 수면마법으로 재워서 데려가는 것도 괜찮고. 형님은 한숨 자고 깨어나 있으면 곧바로 모든 일이 해결되어 있을 거요. 아! 그러고 보니 형님도 같이 가야 되는 거요?” 이건 또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니 고개를 끄덕여 오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네. 힘드시겠지만 기영 씨도 함께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 시간은 딱 30분 드리겠습니다.” “거, 짐도 안 풀어 놓기를 잘 했구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다 현성이 형씨 때문이요.” “준비됐습니다.” “저도 준비됐어요.” “나도.” 사실 준비고 나발이고 할 것도 없었다. 박덕구의 말 그대로 짐도 제대로 풀지 않은 채였으니까. 김현성이 급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건 항상 생각했었지만 이렇게까지 하이패스로 일이 진행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살짝 입을 열어봤지만 그마저도 헛된 저항. “보급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베리아 측에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라고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요. 아마 오라버님께서 모두 준비하시고 계실 겁니다.” “엘레나 님도 함께 가시는 겁니까?” “네. 미약하지만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혹시나 제가 없는 사이에 명예 추기경님께 문제라도 생긴다면 큰일이니까요. 저밖에 치료할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아뇨. 저희야말로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한데 목적지는 어디로….” “일단은 요정의 숲부터 조사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요정의 숲 말씀이십니까?” “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야 되겠네요.” 뭔가 묘한 표정의 엘레나가 눈에 들어와 말을 건네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위험한 곳입니까?” “위험한 장소는 아닙니다만….” “네.” “요정들은 장난치는 걸 좋아하니까요.” “네?” “그러고 보니 여러분들은 요정에 대해서 잘 모르시겠군요. 하긴… 대륙인들에게도 잊혀진 이야기일 테니… 물론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요정들의 힘은 특별하기는 하지만 인체에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잠깐 동안 신체의 외형을 바꾸거나 성별을 바꾸는 게 고작이니까요. 그중에서도 조금 짓궂은 장난을 치는 아이들이 있지만 모두 기본적으로 착한 아이들이랍니다.” 조금은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 352 회귀자 사용설명서 352화 김현아 (2) “대륙에서 볼 수 없는 것도 당연할 겁니다. 요정들이 살아가는 데는 환경이 굉장히 중요하니까요.” “환경 말씀이십니까?” “네. 저희의 오랜 조상님들이 활동하실 때에는 대륙 곳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현재는 에베리아 왕국 말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요정들은 오염되지 않는 숲에서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뭐, 멸종동물 같은 느낌인 모양이구만… 1급수 지역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이 말이요?” “예. 그 말이 맞습니다. 박덕구 님. 안 그래도 인간들의 무분별한 개발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들이… 조금 더… 아. 죄송합니다. 이런 말을 드리려고 했던 것이 아닌데….” “아닙니다.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역시!” “하지만 엘레나 님. 꼭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세계수의 보호를 받고 있는 엘프들과는 달리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목책이나 성벽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원들이 전부 숲에서 나온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인류의 생존과 발전에 희생은 필수 불가결했을 겁니다. 만약 엘프들에게 세계수가 없었다고 가정해 보시면 일이 조금 재미있어질 겁니다.” “아.” “엘프들 역시 목책을 쌓고 성벽을 만들어야 했을 겁니다. 끝없이 열매가 맺히는 일도 없으니 많은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농사를 지을 땅이 필요할 수도 있었겠죠. 식수를 위해 수로도 만들어야 했을 테고 지금까지와는 많은 게 달라졌을 겁니다.” “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물론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게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인지 경계가 애매해졌지만… 만일 인간들에게도 세계수 같은 수단이 주어졌다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라질 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 부분은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환경이 달라지면 많은 게 달라지는 법이죠.” “그렇군요.” “쓸데없는 이야기가 조금 길어진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명예 추기경님.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주신 것 같아 편협한 시각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그보다 이제 슬슬….” “네. 지금쯤 요정의 숲으로 들어서고 있을 겁니다.” “벌써 도착한 거요?” “꼬박 하루를 달려서 왔으니까요. 지금부터는 마차를 타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니 내려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하얀 님. 선희영 님도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정하얀과 선희영의 얼굴이 보였다. ‘쟤네 표정 안 좋네.’ 재미있게도 정하얀은 조금 나은 편이다. 끊임없이 엘레나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폭발하지 않은 것을 보면 확실히 프러포즈가 효과가 있기는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가 현재 내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결정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선희영은 조금은 어두운 표정, 어째서 그녀가 저런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사실 이 거짓 부렁쇼가 진행되기 전, 이쪽의 주치의 포지션에 있었던 것은 선희영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 떨어질 일이 많았었는데 자신의 할 일까지 빼앗기게 되니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가 나를 봐주는 일련의 과정은 그녀에게는 그나마 이쪽과 조금이라도 연관될 수 있는 끈이나 다름없었으니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물론 아직도 이전과 같은 상태인지는 잘 모른다. 알게 모르게 선희영이 이쪽을 관심을 표시하고 있는 것 같아 의식적으로 살살 밀어내고 있던 도중이었으니까. 어두운 표정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쪽의 계획이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정하얀에 비해 극단적이지 않을 뿐이지. 쟤도 조금 이상해졌다는 걸 생각해 보면 행동을 자제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거다. 조금씩이지만 멘탈을 조금씩 이나마 해결해 줘야 할 필요가 있다. 살짝 미소를 지어주자. 조금 기분이 풀렸는지 입꼬리를 올리는 중. 무척이나 환한 미소가 눈에 띄었다. 항상 생각해 왔지만 확실히 외모는 이상형에 가깝다. 물론 외모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마차의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다른 마차에서 막 내리기 시작한 파티원들을 바라볼 수 있었는데 사실 이런 광경이 익숙하지 않았다. 본래대로였으면 커다란 마차를 다 함께 타고 왔겠지만 아무래도 커다란 마차가 들어서기 힘든 도로의 특성상 조금씩 인원을 나눠 타고 왔기 때문. 물론 그 광경보다 더 시선을 자리 잡은 건 주변의 풍경이다. “와….” 정하얀이 커다란 탄성을 내질렀고. “아름답군요. 정말 아름답네요. 이곳은….” 선희영이 다음 말을 이었다. 물론 나 역시 입이 벌어진다. 에베리아에 처음 왔을 때도 같은 반응이기는 했지만 지구에서도 볼 수 없는 색깔의 꽃들이 바다를 이루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곳에는 몬스터들도 살지 않는 겁니까?” “네. 이곳 역시 세계수의 보호를 받고 있는 구역 중 하나니까요. 물론 야생동물들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아이들도 잘 찾지 않는 장소인 터라… 아까 말씀드렸듯 요정들은 장난이 조금 심한 편입니다. 아마 면역이 없는 아이들은 깜짝 놀라 피하게 됐을 겁니다.” “가급적이면 조용히 다녀오는 게 좋겠군요.” “네.” 이쪽이 잠깐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도 길드원들은 마차에 실린 짐을 풀고 행군할 준비를 마치고 있다. 김현성이 살짝 신호를 보내니 대형이 갖춰주는 것은 순식간, 엘프 측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다. 훈련이 잘되어 있는 있다는 건 실감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또 느낌이 다르다. 심지어 마차 안에서 김현성과 따로 대화를 나눈 모양인지 두 대형이 제법 상호 보완적이다. 완벽하게 어우러졌다는 느낌은 아니지만 잘 버무려진 듯한 모습. 확실히 고개를 끄덕일 만했다. 힐러보다 내 안전을 더 중요시하는 게 그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평소와 별로 다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러나저러나 배려받고 있다는 건 기분 좋다는 거였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파티는 천천히 행군하기 시작했다. 물론 선두는 김현성, 이곳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 저곳으로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다. 물론 발걸음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는데 위험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귀찮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리라.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자 지루하고 힘든 것이 사실. 오랜만에 저주받은 체력이 원망스러워졌다. 스테미나 포션을 한 모금 들이킨 이후 살짝 표정을 구기자 곧바로 나를 바라보는 엘레나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명예 추기경님. 좀 괜찮으십니까?” “네. 물론입니다.” “힘드시면 꼭 말씀을 해주셔야 합니다. 영혼이 쇠약해지면 신체가 망가지는 것처럼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니까요.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선두에 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엘레나 님. 사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습니다.” “거절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슬슬 날도 어두워지고 있고 모두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니… 아무래도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정말로.” 하지만 이미 휴식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정하얀이 살짝 앞을 두드려 의사를 전하기 시작하자 선두에 서 있는 김현성에게 소식이 전해지는 것이 순식간, 엘프들 역시 발걸음을 멈추고 적당한 터를 잡기 위해 모두가 짐을 풀고 있다. 이제 막 날이 어두워진 타이밍. 살짝 눈앞에 빛이 반짝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오빠. 방금….” “나도 봤어. 하얀아.” 뭔가 반딧불이 같은 느낌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조그맣게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는 것. 기본적으로 번역마법이 장착되어있는 이방인들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다. 조금 의아했던 것도 잠시. 오늘 하루 종일 떠들었던 것에 대해 떠올리자 지금 눈앞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정이구나.’ 상상했던 것과 비슷하게 생겼다. 손바닥보다 조금 다른 크기에 잠자리 날개에서는 계속해서 자그마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인간보다는 엘프에 가까운 듯한 외형, 기본적으로 굉장히 귀엽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으리라. 이상하게 정하얀 근처로 많이 모여들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이들이 모이는 장소가 순도 깊은 마력이 모여 있는 숲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정하얀에게 모여들고 있는 장면이 이상하게만은 보이지 않았다. 무척이나 순수한 마련이다 보니 절로 요정들을 끌어당긴 것이다. “다행히 많이 몰려들지는 않았군요.” “아. 이게 많이 몰려들지 않은 겁니까?” “네. 날이 어둡기도 하고 조용히 움직인 보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 기준으로 충분히 많기는 했지만 이들의 기준으로는 아닌 모양이다. ‘예쁘네.’ 그 와중에 엘프들은 익숙한지 묵묵히 캠프를 차리는 중, 굳이 요정들한테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그와 반대로 대부분의 파란 길드원들은 주변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신기한 걸 많이 봐왔지만 이건 또 처음 보는 광경일 테니 시선을 빼앗길 만하다. 귀여운 걸 안 좋아하는 척하는 김예리는 완전히 빠져든 모습. 물론 벌써부터 이들이 주는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도 존재했다. 김창렬은 항상 쓰고 다니던 붉은색 복면을 빼앗겼고 박덕구는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되어버렸다. 이상하게도 몇몇 요정들이 한소라에게는 작은 돌맹이들을 집어던지고 있었는데 아파 보이지는 않지만 본인은 제법 충격인 모양. 그녀 역시 여자인 만큼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미움받는 게 반갑지 않은 것 같았다. 어째서 인지는 알 것 같았지만 별일 아닌 척하는 게 당연. 다른 이들은 두말할 필요 없다. 학자 모드로 돌아간 황정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많은 요정이 그녀의 머리카락과 쓰고 있는 안경을 잡아당긴다. 유아영의 모습은 더욱더 가관. 꽤나 많은 수의 요정이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 심지어 커다란 미드의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녀석도 있었으니 시선을 주기에는 꽤나 민망한 장면이었다는 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꺄악!” “그만하렴. 이, 이제 그만하렴.” 물론 엘레나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다. 요정 몇몇이 그녀의 귀를 트렘플린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용하고 있다. 커다란 귀에서 폴짝폴짝 뛰는 놈들의 표정을 보니 여간 행복한 게 아닌 모양이다. ‘얘네 정말 귀찮구나.’ 때마침 이쪽으로도 몇 마리가 돌진해 오기 시작한다. 딱히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귀찮은 느낌. “다가오지 못하게 할 수는 없는 겁니까?” “아… 네. 쫓아낼 수는 있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더 많은 친구들을 불러올 거예요. 아마 아이들도 곧 잠들 시간이니 저녁 식사를 마치면 조금 잠잠해질 겁니다. 그 전까지는 ….” 라고 엘레나가 말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였다. 천천히 김현성이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 녀석에게도 많은 수의 요정들이 달라붙어 있었는데 아마 무언가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뭔가가 이상해진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 착각이 아니다. 김현성의 체형이 점점 변하는 것이 보인다. 본인도 이상함을 감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 눈에 보였다. “어?” 얇은 목소리. “귀찮게 됐군요.” 어깨까지 내려온 긴 머리카락. 녀석들의 장난에 첫 번째 제물이 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기영 씨. 혹시 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그건 내가 너한테 칠 대사야.’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많이 봐줘야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오빠가… 여동생이 되어버렸어.” 김예리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괜스레 크게 들려왔다. # 353 회귀자 사용설명서 353화 김현아(3) “오빠가… 여동생이 되어버렸어.” 너무 적절한 표현이라 뭐라 할 말이 없다. 조용히 주변을 응시하자 여전히 끔뻑끔뻑 김현성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실소가 튀어나온 것은 당연지사. 미리 이야기는 들었지만 현재 눈앞에 일어난 장면이 상당히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높게 잡아도 17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관. 성별뿐만이 아니라 나이마저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키와 팔다리가 줄어들었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생머리가 눈에 띈다. 윤기가 나는 흑발이라는 것은 이걸 두고 하는 모양. 마치 기름이라도 발라놓은 것 같았지만 신기하게도 바람에 흔들린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외모는 본래의 김현성을 그대로 여자로 옮겨놓은 듯한 얼굴. 평소에도 잘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성별을 바꾸니 엘프에게도 꿀리지 않을 것 같은 모양새다. 본인은 자각 못 하는 것 같지만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외모였다. 이건 주관적인 평가가 아니다. 힐끔힐끔 녀석을 바라보고 있는 파란의 파티원, 심지어는 엘프들 역시 신기한 듯 눈을 돌리고 있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더욱더 재미있었던 것은 녀석의 행동, 10대 후반의 소녀가 하기에는 조금 나이 든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 왠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예를 들면 턱을 쓰다듬는다든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린다든지 따위의 행동인데, 묘하게 어울리지 않은 느낌이 상당히 귀엽게 느껴졌다. ‘이 새끼 이거 너무 귀엽잖아.’ 물론 두근거린다는 느낌은 아니다. 애초에 나이도 어릴 뿐더러 알맹이가 김현성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 번 정도는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으리라. 뭐라고 할 말이 없는 상황. 괜스레 엘레나를 바라보자 침착하게 입을 여는 모습 역시 시야에 비친다. “일시적인 겁니다.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으실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네. 기본적으로 요정의 숲이 아니면 마법이 유지되지 않을 뿐더러 요정의 숲을 벗어나거나 시간이 조금 지나면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특이하게도 일반적인 디스펠은 불가능하지만….” “이유가 뭡니까?” “아마 마법의 구동 방식이 다르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요정들이 쓰는 마법은 애초에 마법인지 아닌지 그 경계도 굉장히 애매하니까요. 저 역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한 가지는 단언해 드릴 수 있습니다. 크게 문제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엘레나의 말에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김예리나 조혜진은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중. 눈에 띄게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불안했던 모양이다.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라는 걸 생각해 보면…. ‘여기 들어와 본 적이 없다는 거네.’ 별일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제법 놀랐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들었던 이야기를 재확인한 이후에 작게 미소 짓는 걸 볼 수 있었으니까. 연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도 요정들의 장난은 처음 겪어 본 것이 맞다. 말인즉슨 이번 던전을 본인이 직접 겪어보지는 않았다는 것. 전설 등급 이상이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 보면 피크닉을 다녀오는 것 같은 분위기로 원정을 진행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거다. ‘경험해 봤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하지만 자꾸만 몰려들고 있는 요정들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지는 것이 문제. 재잘거리며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니고 있는 모습과 진지한 분위기는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았다. 다들 조금이지만 얼굴이 풀어진 것이 보인다. 김현성이 뭐라 한마디 쏘아 붙이려 입을 열려다 뭔가 결심한 듯 입을 꾹 다문 것을 보니 하루 정도는 이런 시간을 가져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휴식도 중요하니까.’ 다른 이들도 암묵적으로 허락이 있었다는 걸 인지한 모양이다. 먼저 입을 열어온 것은 안기모였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군요. 정말 신기합니다. 길드 마스터도 그렇고 아, 예리 씨도… 마법의 영향을 받았군요.” “뭐?” “성별 말입니다.” “기모 아저씨… 나는 그대로야.” 순간적이지만 얼굴이 굉장히 무서워진 느낌. 뭔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안기모 역시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제, 제가 눈이 삔 모양입니다.” “…….” “우, 우리 쪽에서는 현성 씨 말고는 변한 사람이 없군요. 뭔가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그냥 요정들 마음 아니요? 여기 와서 별 신기한 광경은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먼 것 같다니까. 현성이 형씨가 저렇게 변하는 모습도 보고…. 아무리 잠깐이라지만 거 이름이라도 바꿔야 되는 거 아니요? 김현아라고 하는 게 괜찮을 것 같은데.” “무례입니다.” “거, 혜진이 누님은 너무 딱딱해서 탈이요.” “길드 마스터로 충분합니다.” “큼. 그러니까 다 농담이라고 한 거 아니요. 그냥 쓸데없는 소리 한번 지껄여 보고 싶었소. 특별한 경험일 것 같기는 한데 왠지 나는 합류하고 싶지 않다니까.”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일걸.” “저는 조금 보고 싶을지도….” 이상한 말을 하는 황정연의 말에 담긴 저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기 싫다는 김예리의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나 역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다. 요정들도 눈이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는 순간.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한소라는 요정들에게 공격 아닌 공격을 받고 있는 중이다. 왠지 모르게 쟤는 조금 짠하다. 그 외 다른 여성 길드원들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간단히 때울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조금 본격적이다. 김현아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는 것 같았는데 아마 내일은 던전 안에 들어갈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뭔가 말하려고 하지 않았었나?’ 고개를 돌리자 녀석 역시 이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온다. 나보다 조금 컸던 녀석을 내려다보니 조금은 묘한 기분. 내 어깨를 툭툭 치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그러고 보니 아까 대답을 듣지 못한 것 같았는데… 불편하신 건 괜찮아지신 겁니까?” “네. 사실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만… 엘레나 님께서 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셔서 말입니다. 피해를 끼치기는 싫었는데….” “아닙니다. 어차피 거의 다 도착한 참이었으니까요. 안 그래도 하루 정도는 편하게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모두 군말 없이 따라주긴 했지만 후위 분들은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하얀 씨도 희영 씨도. 소라 씨나 정연 씨도요.” “계속해서 마력을 소모했으니… 현성 씨는 괜찮으십니까?” “네. 물론입니다. 체력적으로는 문제가… 아, 혹시 지금 상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입고 있는 옷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별 문제 없습니다. 키가 작아진 것만 빼면 말입니다. 전투하는 데도 무리가 없어 보이고 외관만 달라졌을 뿐이지 신체 능력은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제가 덕구 씨나 아영 씨의 포지션이었다면 제법 불편했겠지만 오히려 몸집이 작아지니 유리한 부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쪽이 효율이 더 나올지는 금방 답이 나오겠죠.” ‘그걸 물어본 건 아닌데….’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섬세하고 날렵해진 느낌이라고 해야 될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혜진 씨.” 제법 빠르게 식사가 준비됐는지 김현성 쪽으로 조혜진이 슬그머니 스튜가 담신 그릇을 넘겼다. 물론 이쪽에게도 한 그릇이 배달 된 것은 당연지사. 김현아는 입가에 수저를 가져다 대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아무튼 간에 조금 차도가 있어 보여서 다행입니다. 발작 시기도 점점 늦춰지고 있으니… 네. 정말로 다행입니다.” 싱긋 웃는 모습은 가관. 심지어 입가에 스튜 국물을 묻힌 채 입을 열고 있다. 잠깐 동안 바뀐 신체가 적응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 “정말 예쁘지 않습니까?” “네?” “이 장소 말입니다.” “아, 동감합니다. 아마 지구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일 겁니다. 하하.” “네. 물론 그렇겠죠. 지구 어디를 찾아봐도 이런 곳은 없을 겁니다.” “…….” “…….” “기영 씨.” “네.” “조금 뜬금 없는 소리지만 사실 저는 이곳에 온 걸 원망한 적도 많았습니다.” “아마….” “네. 아마 대부분 그렇겠죠. 영문도 모른 채 이곳으로 끌려온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퀘스트는 뭔지 도대체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울고불고 소리친 적도 많았습니다.” “의외로군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다른 분들 앞에서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근데… 사람이 참 간사하지 뭡니까. 어느새 이 장소도 정이 들었나 봅니다. 꼴 보기 싫었던 성벽이나 린델도 가끔은 보고 싶고 이런 장소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도 큽니다. 물론 기영 씨나 다른 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사실 이렇게 가까워질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기영 씨를 신뢰하게 될지도 몰랐고요.” ‘나도 그래, 인마.’ “웃기는 말이지만 오히려 요즘은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행 말입니까?” “네. 여러분을 만난 게, 이렇게 인연이 만들어 진 게 말입니다. 뜬금없지만 앞으로 시간이 많이 지난 이후에도 이 광경을 함께 봤으면 합니다. 그러니… 우리 조금만 더 힘내 봅시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뻗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살짝 손을 맞잡은 것은 당연. 녀석이 날 일으키자 자연스럽게 일어설 수 있었다. “조금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했군요. 하지만 진심입니다.” “아뇨.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마침 노을 진 배경이 굉장히 눈에 띈다. 노을마저 녀석을 도와주는 듯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정하얀이 뭔가 무서운 눈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건 바로 그때. 굉장히 오랜만에 입가가 비틀린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무섭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 같다만 누가 봐도 기형적인 표정이다. ‘쟤 또 사고치는 건 아니겠지.’ 순간적으로 김현아의 손을 놓아버린 것은 당연지사. 슬슬 손을 놓을 타이밍이라 이상하지 않았는지 녀석은 여전히 싱글벙글 미소 짓고 있다. ‘그만 웃어. 이 새끼야.’ 멈추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괴수 대격돌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불안한 마음에 정하얀에게 손짓한 것은 순식간. 갑작스레 얼굴을 밝히며 이쪽으로 달려와 안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하하. 이거 제가 너무 시간을 많이 뺏은 모양이군요. 그럼 저는 잠깐 다른 엘프들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오늘 푹 쉬면 내일은 던전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기영 씨를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잘 버텨주실 거라고요.” “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까치발을 들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는 모습에 왠지 모르게 양심이 찔린다. 두 눈 가득 들어있는 것은 강한 신뢰와 믿음. 던전을 눈앞에 둔 목전이라 이번 일의 마무리가 더욱더 신경 쓰인다. ‘이거 진짜로 김현성이 오해라도 하면 큰일이겠는데….’ 혹시나 가면쓰레기 진청을 이쪽이라고 오해한다면 큰일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말로 믿었던 사람한테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일은 없으니까. 물론 이쪽은 결백하지만 혹시 이번 치료가 듣지 않거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경우를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저 귀쟁이가 문제야.’ 김현성의 솔루션대로 녀석의 방법이 먹힌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만하다. 뭔가 찜찜하기는 했지만 영혼이 깨끗해진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경우가 가장 커다란 문제. 거짓말도 한두 번, 아주 작은 변수로도 상황은 충분히 꼬일 수 있다.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해결책을 찾아보고 있었지만 딱히 제대로 된 솔루션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 문제다. 처음에는 던전행 자체를 방해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기는 했지만 김현성이 최후의 저항 어쩌구를 입에 담았던 시점부터 그 계획은 아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던전은 클리어 되어야 하는 게 맞다. 그게 미래의 위협에 대응하는 방법이다.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역겨워 보이는 건가?’ 계속해서 고민 아닌 고민에 빠지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하얀이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치려나….’ 이상할 정도로 김현아를 노려보고 있는 정하얀. 팔이 아플 정도로 나를 꽉 잡은 그녀를 바라보자 순간적이지만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 이걸 생각 못 했지.” ‘왜 지금까지 저 엘프를 물들일 생각을 안 해봤을까.’ 그 말 그대로였다. # 354 회귀자 사용설명서 354화 쉬운 엘프, 쉬운 엘레나 (1) ‘이걸 왜 지금까지 생각 못 했을까.’ 조금은 심각한 표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괜찮은 해결 방법을 찾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김현아와 김예리, 김창렬이 함께 던전에 대한 단서를 얻어 온 이후에도 계속해서 헛웃음이 튀어나오는 상황, 앞쪽에서 무언가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크게 집중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우리 현성이가 꼭꼭 숨기고 있었던 던전이 발견됐다는 소식이었을 테니까. 이쪽의 예상이 맞았는지 던전에 진입할 준비를 마치고 있는 길드원들과 엘프들이 시야에 비쳤다. 엘레나 역시 흥분한 표정을 보인 것은 당연지사. 나를 한 번 돌아보며 귀를 위아래로 움직이는 모습은 꽤 재미있다. 무척 순진하고 순수해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니 어째서 지금까지 이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 어떤 의미에서는 정하얀과 김현아에게 감사하고 싶어진다. ‘정말로 영혼이 깨끗해질 필요는 없지.’ 그 말 그대로. 정말로 치료가 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내 상태를 볼 수 있는 건 그녀뿐이었으니까. 저 에메랄드 귀쟁이 엘프가 나를 불편해하지만 않으면 된다. 만약 김현성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그녀가 치료가 끝났다고 믿게 만들면 일이 풀릴 가능성도 있다는 거다. ‘만약에 기벽이 바뀐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에 대해 궁금하다. 벨리알은 분명히 이쪽을 역겨운 영혼이라고 칭했지만 구토를 하거나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가진 기벽에 내재된 효과일지도 모른다. 현재의 엘레나 같은 이들에게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겨운 영혼이겠지만 정하얀에게는 그렇게 비춰지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정하얀에게 엘레나가 가지고 있는 특성 따위는 없지만 만약에 가지고 있다 하더라고 구역질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엘레나의 기벽이나 성향이 뒤바뀐다면 나를 바라보는 관점 또한 바뀔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조금 어렵겠지만 도전할 가치가 있어 보이는 작업, 마침 엘레나와 함께 있을 시간도 많다고 볼 수 있으니 한 번쯤은 시도해 봄 직하다. ‘이런 건 특기가 아닌데….’ 물론 마음이 편치는 않다. 순수한 엘프 하나를 구렁텅이로 끌어들이라는 것은 다시 태어난 빛기영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주문. 심지어 이런 쪽은 내 특기라고 볼 수도 없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이 순진한 엘프가 불의에 사고를 당하는 안타까운 사건까지 고려해 볼 정도였으니 그것보다는 이쪽이 싸게 먹히는 장사다. 물론 당장 계획을 실행시키기에는 여러 가지 애로사항들이 꽂히기는 하지만…. “오빠 혹시 어디 불, 불편하신가요?” “아, 아니야. 하얀아.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다, 다행이다.” 마침 그 애로사항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 하지만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이제 막 던전에 진입할 준비를 마친 파티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으니까. 계속해서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을 준비하면서 걷다 보니 이렇게까지 당도해 있다는 것 역시 생각하지 못했다.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 물론 그런 여유를 즐길 시간은 없다. 한시가 급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만큼 곧바로 진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리라. 출발하기 전부터 이걸 깨달았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기차는 떠난 뒤, 현재 내가 처한 상황 내에서 일을 잘 처리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이건 나에게만 주어진 시간제한이 부여된 퀘스트. 던전의 진입한 순간부터 던전이 공략되기 전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엘레나에게 진정한 의미의 빛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줘야 한다. 괜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기자 곧바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설 등급 던전 뒤틀린 연못에 입장하셨습니다. 인원 [23 / 34]을 확인했습니다.] ‘여전하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분위기와 압박감. 이제 조금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이 묘한 분위기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뒤틀린 연못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마치 공포의 정원 같은 분위기. 사실 식물이 있다는 것 빼고는 그다지 별다른 공통점도 없다. 지하를 통해서 들어온 이곳은 전체적으로 습기가 차 있고 축축했고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뿌리와 식물들이 모두 썩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녹색을 유지하고 있었던 정원과는 차이가 있다. 한동안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황, 본격적인 출발을 하기 전에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지 엘리오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말씀이 사실이었군요.” 당연히 대답한 것은 김현성. 에베리아의 레인저들도 찾아낼 수 없었던 단서를 어떻게 이토록 쉽게 찾았는지에 대해 설명할 시간이다. 어차피 운이 좋았습니다. 라고 말하겠지만 뭐 어떤가. 받아넘길 수 있기만 하면 그만이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요정들의 인도가 있었으니까요. 저 역시 이렇게 일찍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지역은 이미 조사를 마친 지역이었는데….” “던전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 당연할 겁니다.” “하지만… 정말로 놀랍군요.” “거, 옛날부터 우리 길드 마스터가 던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는 거 아니요. 별로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니까. 소환된 이후로 찾거나 공략한 던전이 10개도 넘을 거요. 그렇게 자책할 일도 아니고… 던전 하나 찾아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이방인 중에서도 특출 난 경우니까.” “…….” ‘커버 잘 쳐줬네.’ “덕구 아저씨. 말이 맞아. 예전부터. 현성이 오빠… 아니, 길드 마스터는 이런 곳 찾는 데는 선수.” “그렇군요. 어째서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신들이 이토록 성장할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뭐, 사실 발견하는 것도 발견하는 거지만 공략하는 게 그것보다 더 중요하지. 형씨… 아니, 길드 마스터와 형님이 없었으면 우리 길드는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없었을 거요.” “그렇습니까?” “아암. 그렇고말고 우리 길드가 던전 공략한 이야기를 풀면 하루 종일 떠들어대도 모자랄 거요. 끄응. 그래도 등급이 전설 등급이니까 조금 불안하기는 한데… 엘프 여러분들은 던전은 좀 익숙한 거요?” “사실 익숙하지는 않습니다.” “정말이요?” “네.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면 굳이… 물론 아예 가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들과 비교하기는 힘들 겁니다. 에베리아 왕국에는 던전이 많지 않으니까요.” “또, 그건 모를 일이요. 지금 이곳처럼 여기저기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내가 생각해도 방금의 발언은 개소리였다. 누가 봐도 던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느낌. 조금 믿음직한 모습을 기대했건만 오히려 조금 어색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엘프 측이었다. ‘쯧쯧.’ 정말로 경험이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어째서 이만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 왠지 모르게 어색한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뭔가 말하기 애매한 어정쩡함이 있다. ‘기사단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이걸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교국이 보유하고 있는 교국 기사단이 던전 공략에 익숙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용병들이나 전문 트레저 헌터들과는 다르게 이런 이들은 던전 자체에 무지하다. 전쟁이나 대인전을 치루는 것과 던전을 공략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 이들은 전자의 스폐셜 리스트들이지 후자의 스폐셜 리스트라고 볼 수는 없다. ‘물론 기본기야 존재하겠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는 대처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숲이 아니니 움직임도 제한되어 있을 테고 뒤틀린 연못이라는 던전 자체의 탁한 기운 자체도 엘프들에게 맞지 않는 모양. 감시 아닌 감시를 위해 따라온 이들이었지만 어쩌면 이들이 방해가 될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익숙하지 않으시다고 하니… 전체적으로 대형을 재편성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일단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영 씨와 엘레나 님을 중심으로 대열을 만드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만… 엘리오스 님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후위에 서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레인저나 정령사분들, 나머지 전사분들은 허리를 맡아주시고 전위는 저희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음….” ‘별로 마음에 든다는 표정은 아니네.’ 나 같으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엘프 측에서는 온전히 전위를 맡기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이 원정은 나보다는 세계수를 치료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원정이다. 엘프의 일이고 엘프들에게 주어진 과업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너무 파란 길드의 위주로 돌아가기 시작한 그림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개인이라면 앉아서 꿀 빨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들은 거대한 왕국에 속해 있는 집단.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볼 수밖에 없다는 거다. ‘얘네도 생각보다 멍청하지는 않아.’ 사실 진영이 어떻게 되든 간에 이쪽은 상관없다. ‘던전 공략은 현성이가 잘 알아서 해줄 테고….’ 나는 내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공략에도 신경 쓰기에는 시간도 부족하고 능력도 없다. 당장 눈앞에 터진 일부터 해결해 보려 하는 게 맞다. ‘어떻게 방향성을 잡는가.’ 아기 새를 바라보듯 바라보는 김현성과 길드원들의 감시망도 피해야 한다. 무엇보다 엘레나가 정확히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파악해야 한다. 작업을 치는 건 준비물이 전부 준비된 이후다. ‘얘가 진짜 문젠데.’ 물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정하얀. 개인 간호사라는 보호막을 두르고 있는 엘레나에게 마법을 날리지는 않겠지만 폭주한다면 무슨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뒤틀린 연못에서 둘만의 뱃놀이를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떠올려 본다면 백번 조심해도 모자람이 없다. 지금 당장 싱글벙글 웃으며 반지를 매만지고 있다고 한들, 언제까지 얌전하게 있어줄 보장이 없다는 거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어떻게든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 그 어떤 것보다도 이게 최우선 사항이다. 대화를 하지 않으면 시작도 없다. 아무런 이벤트도 일어나지 않는데 무슨 사건이 일어날 리가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할 여지가 있어야 한다. ‘던전 공략에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되지?’ 챙겨온 식량을 생각해 보면 보면 최소 10일은 넘게 걸리는 원정. 캠프 역시 10번 이상 만들어진다 가정해 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슴을 부여잡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마침 걷는 것도 힘든 타이밍. 마차는 없지만, 인력거를 타고 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남아도는 인력은 충분하니까. “콜록… 엘레나 님 숨을 쉬기가….” “네?” “콜록. 콜록….” 시동을 걸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집중되는 기분, 냅다 들어 누워 버리자 다시 한번 장내가 떠들썩해졌다. 마치 장난감을 사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초등학생 같은 모양새. 이런 똥꼬쇼는 최대한 자제해야겠다고 일 전에도 다짐했지만 원래 인간의 다짐이라는 건 쉽게 깨지는 법.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본격적으로 개 거품을 물기 시작하니 발등에 불똥이라도 떨어진 듯 급해지는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원래 뒤틀린 장소의 뒤틀린 공기는 순수한 영혼을 좀먹을 수밖에 없다. 외부와의 차단이 절실해지는 순간. 물론, 미녀 엘프 간병인이 함께여야 한다는 것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걷기 싫다. 이 새끼들아!’ # 355 회귀자 사용설명서 355화 쉬운 엘프, 쉬운 엘레나(2) ‘이거 너무 편한 거 아닌가.’ 계획대로긴 하지만 너무도 안락하여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스리슬쩍 밖을 바라보니 여전히 고군분투하는 길드원과 엘프들이 시야에 비쳤다. 갑작스레 나타난 몬스터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건 까다로울 만하네.’ 확실히 까다로울 만하다. 김현성의 말처럼 뒤틀린 연못의 주력 몬스터는 대부분 악마다. 그래봤자 벨리알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저급 악마들이었지만 이 던전은 희귀 등급이나 일반 등급이 아니다. 엄연히 전설 등급 판정을 받은 던전이었으니 최소 전설 등급의 악마, 혹은 몬스터가 등장한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애초에 신화 등급의 존재와는 비교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 지금까지의 경험상 신화 등급이라면 적어도 전설 등급보다 서너 계단은 높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그런 의미에서 이쪽이 가지고 있는 준신화 등급 직업, 빛의 연금술사 역시 활용할 방법이 무궁무진했지만 최근 침대에만 누워 있느라 연구다운 연구를 못 한 것이 문제.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시스템의 벽을 두드릴 만한 물약을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희망사항이지만….’ 확실히 몸이 편하니 생각이 한쪽으로 샌다. 입술을 꽉 깨물고 전투에 임하고 있는 원정대원들은 아마 이런 여유조차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최소 영웅 등급 이상의 악마와 드잡이하는 이들의 표정이 꽤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박덕구와 유아영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감돌고 있었고 정하얀이나 다른 이들의 표정을 말할 것도 없다. 안 그래도 어려운 던전을 엘프들과 함께 최대한 빨리 돌파하려하다 보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되는 것이다. ‘여유도 사라진 것 같고….’ 물론 원인은 나에게 있다. 안 그래도 영혼의 오염으로 생사를 오가는 빛기영이 괴로워하고 있으니 공략을 빠르게 완료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겨버린 것. 혹시나 사고가 생기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악마의 머리통을 쪼개버리는 김현아의 신위를 확인하자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인력거에 탄 채 편한 여행을 시작한 지 약 세 시간이 흐르고, 김현아호는 여전히 순항중이다. 계속해서 힐끔힐끔 바깥을 바라보자 이쪽과 같은 공간에 있는 엘레나가 천천히 입을 열어왔다.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예추기경님. 아무 일 없을 겁니다.” ‘그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나쁠 건 없다. “어떻게든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혼자만 누워 있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아니요. 아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바깥에 나가시는 건 최대한 지양해야 합니다. 이 뒤틀린 연못이라는 장소와 악마들이 뿜어내는 오염된 마력이 이기영 님의 영혼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지금 경솔하게 움직이는 것은 오히려 상황을 더욱더 악화시킬 게 분명합니다. 파란은 강합니다. 저희 에베리아의 엘룬나이트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저도 믿지 못해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만….” “믿으셔야 합니다. 동료 분들께서도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거야 그렇겠지.’ “별문제 없이 던전 끝에 닿을 수 있을 겁니다. 바깥에 있는 분들 생각보단 명예추기경님 자신을 먼저 생각해 주세요. 그래야 동료 분들 또한 안심하고 싸울 수 있을 겁니다.” “네. 그렇게 생각해야겠죠.” 침통한 표정을 유지한 것은 당연지사.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엘레나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성향-호기심 많은 옹호자] 성형은 호기심 많은 옹호자. [엘레나 에레리아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에메랄드 색 망상하는 꽃] 기벽은 에메랄드 색 망상하는 꽃. 그녀의 성장 배경을 떠올려 보면 납득이 된다. 에베리아 왕국에서만 처박혀 지내던 엘프인데다가 기본적으로 인간이나 타국에 관심이 많은 것을 보면 왠지 모르게 비슷한 기벽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마음에 들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마음에 든다고 대답하리라. 성향이나 기벽 자체는 괜찮다. 호기심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고 고유 기벽과의 궁합도 좋다. 무엇보다 현실을 모르는 꿈 많은 소녀 같은 성격이라는 게 가장 좋다. 세상살이에 찌든 사람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이런 쪽이 더 낫다는 거다. ‘얘를 어떻게든 해야 된다는 건데….’ 일단 가장 중요한 과제는 완료한 상황. 좁은 공간이 불편하기야 했지만 그래도 둘만 있을 수 있다는 건 커다란 성과였다. 심지어 마법으로 외부와 차단되어 있으니 대화를 나누기에는 제법 괜찮은 타이밍. 물론 그녀가 나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는 문제는 남아 있었지만 사이가 진전되거나 그녀의 사고방식이 바뀔수록 이쪽을 받아들이기 편해질 것이다. ‘어떤 방향에서 흔들어야 할지 감이 안 오는 게 문제지만.’ 일단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조금 더 가까워져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첫 번째도 대화, 두 번째도 대화, 세 번째도 대화다. 최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야 한다는 거다. 그녀에 대해서 더 알아야 하고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도 파악해야 한다. 서로 교감을 나누는 데 필요한 첫 계단은 서로에 대해 이해하는 거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괜찮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닙니다, 명예 추기경님. 아무리 오염된 영혼이라고 한들, 더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 눈에는 그 안에 들어 있는 고결함이 더 들어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다, 야.’ “…….” “정말입니다, 명예 추기경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여신의 거울로 명예추기경님과 빛의 영웅 분들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광경이었습니다. 네. 아직도 그 모습을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생생합니다. 네 명의 영웅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거대한 악마에게 마주섰던 모습은 몇 백 년이 지난 이후에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엘레나님. 다른 이들이었어도 모두 똑같이 행동했을 겁니다.” “아니요. 실제로 그곳에 있는 제 모습을 떠올려 봤지만 수백 번 생각해도… 주저앉는 것 이외에는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빛의 영웅 분들께서는 제게 용기를 주신 겁니다.” “용기 말입니까?” “네.”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만 저는 200년 평생을 에베리아 왕국에 틀어박혀 살았습니다. 모든 엘프가 그러하듯 말입니다. 루드비히와 엘리오스 오라버님은 왕국 밖은 항상 위험하다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저는 다른 인간 분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접하며 자라왔습니다. 바깥은 무섭고 위험한 곳이라고 매번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계속 왕국에만 머물러 계셨군요.” “네. 제게 왕국의 밖은 그저 무섭고 두려운 곳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용기를 주신 건 빛의 영웅 분들이라고요. 아마 여신의 거울을 보지 못했었다면 저는 아직도 에베리아 왕국을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제 사명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혹시 하이엘프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네.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시간 동안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또 엘레나 님께서 하이엘프라는 것도 말입니다.” “사실 하이엘프라고 해서 뭔가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세계수의 축복과 엘룬 님께 축복을 받았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 없으니까요. 물론 역사적으로는….” “네?” “역사적으로 항상 선대 수호자 분들은 커다란 역할을 맡아오셨습니다. 아주 먼 옛날, 인간의 나라가 갈라지지 않았을 때부터, 인간과 이 종족들이 하나가 되어 싸워왔던 시절부터 선대의 수호자분들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직접적인 위험과 마주하셨습니다. 동화책이나 역사책에 나오는 엘프 동료라는 건 전부 선대의 수호자님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도 무언가 주어진 역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기영 님께서 직접 찾아주셨습니다.” “저번에 말씀하셨던 사명이라는 게….” “네. 저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이기영 님의 오염된 영혼을 치유하고 빛의 영웅 분들과 함께 하라는 엘룬 님의 계시를 말입니다.” 당최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시작부터 이쪽에 호의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건 어떻게 봐도 사실인 것 같았으니까. ‘저렇게 착각해 주면 더 좋고.’ 정말로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써먹을 수 있는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암. 써먹을 수 있고말고.’ 본인이 알아서 북치고 장구 쳐주는 데 이걸 요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잠깐 고민하기는 했지만 결정을 내리는 것은 순식간.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 곧바로 똥꼬쇼를 펼쳐야 할 타이밍. 표정을 찡그리자 황급하게 이쪽으로 다가와 상태를 살피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 가득 다급해 보인다. 시동을 걸자 황급하게 신성력을 이쪽으로 보내오는 게 느껴졌지만 당연히 효과는 없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의 치료가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 최대한 호흡을 멈추며 눈물을 쏟는 것은 순식간. 빛기영 연기 인생 26년,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괜찮으십니까? 명예추기경님, 괜찮으십니까?” “커… 헉….” “명예추기경님!” 팔을 부들부들 떠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니,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작업. 이제 신성력으로 나를 치료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이쪽에 신성력을 쏟아내지만 제대로 치료가 될 리 만무. 계속해서 발광하듯 온몸을 떨자 엘레나의 얼굴에 금방 당혹스러움이 감돈다. “아, 안 돼.”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며 그녀를 바라보자 바깥에 도움이라도 청할 모양인지 좁은 가마 안의 창문을 바라보는 것이 눈에 띈다. 하지만 한참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 그 와중에 내가 준비한 이벤트는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온몸을 비틀거리며 팔을 공중으로 내뻗는다. 뭔가를 쥐어 잡는 것처럼 나를 구원해 달라는 듯 애절한 눈빛을 선보인다. “엘룬이시여. 엘룬이시여… 제발….” “커… 헉… 하….” “엘룬이시여.” 이쪽의 고통이 느껴진 모양인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가관.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허공으로 치솟은 내 팔을 그녀가 꽉 잡은 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쪽의 상태가 안정된 것은 바로 그때. “어?” 눈물로 가득 찬 얼굴에 드리운 것은 안도의 한숨과 의문. 방금 전까지 온몸이 부서져 죽어버릴 것 같았던 내가 갑작스레 안정되는 기적을 체험했으니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아….” ‘그래….’ “설마….” ‘그 설마가 맞아.’ 영혼의 침식은 2페이지에 돌입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신성력이 아니다. 오직 엘룬에게 선택받은 하이 엘프 만이 빛기영을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 올릴 수 있다.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 합니다.] [그만해라! 이 저주받을 악마야!(0/1)] [알 수 없는 이유로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취소됩니다.] # 356 회귀자 사용설명서 356화 쉬운 엘프, 쉬운 엘레나(3) ‘좋아. 괜찮아.’ 방금 뭔가 지나간 것 같았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건 엘레나의 반응이었으니까. 뭔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지만 정상이 된 내 모습에 크게 안심했는지 숨을 고르는 모습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많이 놀란 것이 눈에 보일 정도. 귀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에메랄드 색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다. 하지만 자신보다는 이쪽을 챙기는 게 더 급하다고 생각한 모양. 곧바로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괜찮….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엘레나 님.” “다행입니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갑자기 든 생각치고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반응을 보니 결과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진다. 조금 충동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메리트는 분명히 존재한다. 전설 등급의 직업과 전설 등급의 특성. 마력과 행운 능력치는 90이상. 하이 엘프의 종족 특성과 이후 에베리아 왕국에 막강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기대되는 인재. 예전이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쪽으로 데려오려 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살림살이가 나아졌기 때문에 인재에 크게 목을 매지 않았지만 이만한 이를 소환수로 들일 수 있다는 건 리스크를 짊어질 이유가 된다. 아주 쉬운 방법으로 주사위가 던져졌다. 기왕 결심하고 움직일 거라면 확실하게 하는 게 낫다는 거다. 천천히 입을 열자 당황스러워 하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표정이 안 좋으신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제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거나….”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네. 네…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보다 지금 상태는 좀 어떠신 것 같으십니까?” “글쎄요. 평소보다 조금 더 편안한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네.” “그렇… 군요.”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네?” “방금도, 또 이렇게 함께해 주신 것 말입니다.” “아… 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쩌면 엘룬 님의 계시라는 게….” “네.” “정말로 있는 모양입니다.” “…….” “사실 저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조금은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 엘레나 님.” “네? 알고 계셨….” “물론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는 진단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만 여기저기에서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으니까요. 사실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고… 제게 주어진 역할이 여기까지인가 하는 생각도 많이 했었습니다.” “…….” “엘레나 님이 엘룬 님께 저를 위한 계시를 받았다고 말씀하시니… 어쩌면 제가 이 대륙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조금 더 있나 봅니다. 라이오스에서 있었던 일보다 더욱더 중요한 일 말입니다. 하하. 콜록. 콜록.” “이기영 님!” 황급히 두 손을 잡아오는 꼴은 가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살피는 표정 역시 여전하다. “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엘룬 님께서 명예추기경님을 도우라고 명하신 이유가 있을 겁니다. 네. 분명히요. 그리고… 네. 저와 이기영 님을 만나게 해주신 다른 이유 역시…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통 저렇게 생각하겠지.’ “다른 이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요.”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뭔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붉어진 얼굴은 많은 생각이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 사실 저런 반응을 보여주는 게 당연하리라. ‘남자 손이나 제대로 잡아본 적 있겠어?’ 200년 가까이 숲속에 처박혀 있던 엘프다. 애초에 남녀 관계에 굉장히 무지한 것 같이 보였던 캐릭터였다. 악수를 하자며 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잡아오거나 치료를 위해 가슴에 손을 올리는 행동에 그다지 위화감을 못 느끼는 것이 그렇다. 지금까지의 치료 행위가 이성 간의 접촉이었다는 건 아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방금과 같은 조미료와 설정이 추가되면 또 내용이 달라진다. ‘혹시 엘룬 님에게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닐까.’ 라든지. ‘이분과 만나게 한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든지. 이처럼 한 번 인식하기 시작하면 단순한 치료 행위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다는 뜻. 꿈 많은 소녀에게 신의 뜻이나 운명이라는 소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소재.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이 나와 엘레나의 만남을 주선했다는 말보다 더 달콤한 말은 적어도 이 대륙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륙에 유통되는 수많은 로맨스 소설에서 등장하는 대사들이 모두가 하나같이 신의 뜻, 계시와 인도, 운명 따위라는 걸 생각해 보면 답은 뻔히 나온다. 상상으로도 이런 개소리들이 먹히는 배경일 터인데 심지어 그녀에게 일어난 일은 엄연한 현실. 180도 달라진 모습을 기대할 순 없겠지만 분명히 이쪽을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할 수 있겠는데.’ 빠르지만 견고하게 관계를 구축한 이후에는 머릿속에 여러 가지를 쑤셔 넣기 쉬워진다. 아니, 심지어는 쑤셔 넣을 필요도 없다. 잘만 하면 그런 작업 없이도 원만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상황. 어디에선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바깥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달려있는 작은 창문 사이로 한 쌍의 눈이 보인 것. 정하얀이 얼굴을 가져다 대고 안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순식간. 등 뒤를 뱀 한 마리가 훑는 감각이다. ‘제기랄.’ 잠깐 뜨끔하기는 했지만 가마에서 천천히 얼굴을 떼는 정하얀을 보자 그녀가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단순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뭔가 걱정하는 표정을 보니 이쪽도 사람인지라 양심이 찔려오기는 한다. ‘더 잘해줄게, 하얀아.’ 쓸데없는 다짐이기는 했지만 잠깐 동안 올라온 양심의 가책을 억누르는 것이 당연. 지금은 일단 눈앞에 들이닥친 똥부터 해결해야 한다. 계속해서 무릎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콰득! 콰아아아앙!!! “꺄아아아아아악!” 처음 들려온 것은 커다란 목소리. 귀가 깨질 듯이 울리는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귀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가마에 커다란 충격이 느껴진다. 순간적으로 작은 창문으로 바깥을 쳐다봤지만 파티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디론가 굴러 떨어지고 있는지 몸이 작은 가마 안을 정신없이 부딪치고 있다. 엘레나와 몸이 뒤엉킨 것은 당연지사. 어떻게든 몸을 고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주문을 외우기도 쉽지가 않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야. 씨발!’ 엘븐나이트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가마꾼들이 뭔가 사고를 친 것이 분명하다. 혹시나 정하얀이 사고를 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그럴 가능성은 제로다. 걔가 이쪽에 해를 끼치는 장면은 몇 백 번을 시뮬레이션 해도 상상하기 어렵다. 엘레나를 죽이면 죽였지 마차를 날려 버리는 선택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다. ‘사고가 터진 거야.’ 정황상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다. 방심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 당연. 엘프들이 어리버리하게 움직일 때부터 뭔가 일이 꼬일 거라고 예상했어야 했다. 김현성이나 정하얀이 현재 이쪽을 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투 중이거나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다면 아예 가마 째 고립되어 버릴 가능성도 존재한다. 바깥의 상황을 알 수 없다는 게 오히려 독이 된 상황. 소리까지 막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건 이 가마가 워낙 튼튼하다는 점이겠지만 한참이나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떨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꽤나 깊숙한 곳까지 내려온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떨어지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뭔가 수를 내야 한다는 생각이 꽂히는 것이 당연하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제… 기랄!” 콰득! 쾅! 콰드득! 하지만 그것마저도 쉽지 않다. 여러 소리를 내며 가마에 외부의 물체와 부딪치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안전을 위해 미리 걸어놓은 마법들이 아니었다면 이미 부서져 버렸을 것이다. ‘부유 마법도 안 걸어주는 건가?’ 정하얀이나 황정연, 한소라 같은 마법사들이 이쪽을 캐치할 여력이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김현성도 달려오지 않는 걸 보면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다. 창문 사이로는 더 이상 빛도 들어오지 않는 상황. 필사적으로 엘레나를 끌어안고 손뼉을 튕기자 용의 꼬리가 나와 엘레나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마차 외부에 있는 보호 마법이 우릴 보호해 주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이 존재하는 만큼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은 최대한 마련해야 한다. ‘제기랄. 제기랄.’ 콰앙 하는 굉장한 소리가 들린 순간 몸을 움찔거렸지만 소리에 비해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애초에 마차가 부서지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지경. 도대체 방어 마법을 몇 중첩이나 걸어놨는지 모르지만 신주단지 모시듯 보호한 보람이 있다. ‘우리 마법사들이 유능하기는 하네.’ 내부에도 충격 완화를 걸어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가마 안을 굴러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멍조차 들지 않은 것 같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살짝 캐스팅을 외우자 작은 빛과 함께 주변이 천천히 빛나기 시작했다. 애매한 자세로 몸을 일으키자 이쪽을 꽉 껴안은 채 파르르 떨고 있는 엘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움찔 움찔 귀를 움직이는 것을 보니 현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잘 진행되고 있는 원정이 어떻게 이렇게 막장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괜스레 입술을 깨물었을 때 곧바로 이쪽에 얼굴을 바짝 붙인 엘레나가 천천히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표정이 어땠는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이, 이기영 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된 일인가요?”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뭔가에 충격을 받고 떨어진 것 같은데….” “여, 여기는 어딘가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바깥에도 보이는 건 없고… 일단은 바깥 상황을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최악의 경우 일행과 멀어졌을 때를 생각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고립됐을 가능성이요.” “그런….” “일단은.” 이곳이 어디인지, 함께 떨어진 이들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 김현성이 선물해 준 무한의 가방을 뒤적여 곧바로 용 숨결 물약을 꺼내들었다. 혹시 모를 상황이 존재하는 만큼 몸을 빼낼 준비를 마친 것이다. 엘레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일단은 천천히 가마의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끼익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온다. 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이 동공의 부피가 꽤 커다란 모양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진 것은 바로 그때. 혹시나 이쪽을 구하러 온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눈에 보인 것은 전혀 의외의 인물. ‘제기랄.’ 심지어 살아 있지도 않다. 시야에 비친 것은 상반신만 남은 채 추락한 엘프의 시신. “이거 큰일 났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입술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 357 회귀자 사용설명서 357화 쉬운 엘프, 쉬운 엘레나(4) 분명 가마를 끌고 있었던 엘룬 나이트 중 한 명이었다. 떨어진 충격 때문에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지만 마음의 눈이 우리와 함께 있었던 그 엘프라 말해주고 있었다. ‘원래 있던 곳에서부터 떨어진 건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내가 모르는 사고가 있었고 원정대가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 하나. 그 외에는 모든 게 불분명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마차 안에 처박혀 있었던 나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길이 없었다. ‘후위에는 누가 있었지?’ 파란 길드는 대부분 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가마에 가까이 붙어 있었던 것은 후위면서도 접근전이 가능한 안기모와 이 가마를 끌었던 엘프들. 이 불쌍한 녀석 역시 이런 모습이 된 걸 보니 아마 사고는 뒤쪽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게 타당하리라. ‘안기모는 무사한 건가?’ 이곳으로 함께 떨어지지 않았다면 무사하다고 봐도 될 것 같지만 혹시 중간에 걸렸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다른 길드원들 역시 떨어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지면이 무너지기라도 한 건가.’ 별별 상상이 다가지만 명확한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라는 것. 어찌 됐던 간에 던전 내에서 고립된 것이라면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전설 등급의 던전. 몸을 지켜줄 수 있는 전위도 없고 보급품 역시 한정되어 있다.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 보통 상황이 아니라는 걸 인지한 탓이다. 일단 소지품을 점검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가지고 있는 게 뭔지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휴대용 연금키트. ‘이건 맨날 가지고 다니는 거고….’ 약 5일 정도 먹을 수 있는 식량과 식수. ‘아껴 먹으면 20일은 먹을 수 있어.’ 디아루기아 촉매. ‘이건 넉넉하게 챙겨왔고.’ 전설 등급의 체력 물약 10병. 그 외 잡다한 촉매와 재료. ‘조금 부족해….’ 기본적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으로 나쁘지 않은 것 같지만 역시 문제는 몸을 지킬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린델에 꼭꼭 처박아둔 율리에나가 괜스레 그리워진다. 잠에서 한 번 깨어나게 한 이후에는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일이 없어 놔두고 다녔던 것이 통한의 실수. ‘돌아가면 다시 가지고 다녀야겠네.’ 최근 좀 물렁하게 지냈다는 자기반성도 해본다. 괴물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자기발전에 너무 소홀했던 것도 사실. 필드에서 뛰다 보니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그래도 최근 나태하게 지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지금 후회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고개를 한 번 흔든 이후에 곧바로 엘프의 품을 뒤적거린 것은 당연지사. 혹시나 쓸 만한 게 있는지 찾아봐야 했기 때문이다. 제법 꼼꼼히 뒤져봤지만 그나마 건질 수 있었던 것은 허리춤의 단검 하나. 사실 사용법 따위는 알지도 못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개털이네.’ “이, 이기영 님.” 다시 한번 천천히 주변을 살폈을 때 들려온 목소리. 돌아오지 않아 불안했던 모양이다. “거기에 계신 겁니까? 명예추기경님.” “네, 엘레나 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가겠습니다.”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겨 마차로 돌아가니 안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엘레나가 시야에 비쳤다. 귀를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공포에 질린 것 같다. 그나마 나를 보자 안심했는지 숨을 몰아쉬었지만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마치 튜토리얼 던전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사람들을 보는 것만 같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가지고 있는 능력치에 비해 실전 경험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귀찮은 짐이 생겨 버린 셈. “바, 밖은 조금 어떻습니까?” “그다지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현재 저희가 있는 장소도 알 수 없고 주변에 보이는 게 없어서…. 일단 마차의 보호 마법이 유지될 때 까지만이라도 원정대를 기다려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들이 무사하다면 이곳으로 내려올 테니까요.” “네. 명예추기경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금방 찾으러 와주시겠죠. 네. 분명히요.” ‘나도 그렇게 쉽게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 “명예추기경님.” “네.” “만에 하나 드리는 말씀이지만… 혹시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은 경우에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찾아올 겁니다.” 찾아오지 않을 리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일로 길드원들이 죽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싫을 뿐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김현성이 이런 곳에서 리타이어한다는 건 상상이 가지 않는다. 정하얀 역시 마찬가지. 그 두 명이 살아 있다면 던전 공략보다는 이쪽을 찾는 걸 선택할 것이 분명. 나와 엘레나가 어디로 떨어졌는지도 알고 있을 테니 원정대를 정비한 이후에 곧바로 이곳으로 향하게 되리라. ‘수습하기까지 시간은 좀 걸리겠네.’ 정하얀이 울고 불고 난리칠 걸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그 현장에 없는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마 모두가 정하얀을 말리기 위해 진땀을 빼고 있을 게 뻔하다. ‘아네모네의 눈이 안 보이는 건 조금 그렇기는 한데….’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시전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정하얀의 스토킹 카메라는 사정거리가 길지는 않으니까. “문제는 그동안 저희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 겠죠. 지금 당장은 안전하지만 언제 몬스터들이 달려들지 모르니까요. 가마에 걸려 있는 보호 마법이 계속해서 유지되면 좋겠지만 아마 길어야 하루일 겁니다. 식량도 넉넉하지 않고요.” “얼마나….” “아껴도 10일 정도면 바닥날 겁니다.” “그런….” “일단은 최대한 아끼면서 버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엘레나 님께서도 따로 짐 같은 건….” “제, 제 짐은 모두 루드비히가 관리하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보다.” 지면이 갑자기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바로 그때. “…….” 눈앞에 있는 엘레나가 갑작스레 숨을 죽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땅이 움직이는 것 같은 미묘한 감각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문을 열고 다시 한번 주변을 살핀 것은 당연지사. 착각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지면이 움직이고 있었다. “잠깐….” “위, 위험합니다. 이기영 님.” “지금 이거…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네?” “지면이 통째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분명히요.” 아니. 단순히 움직이는 게 문제는 아니다. 잠시 후에는 굉음과 함께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시발. 이거 혹시.’ 서둘러 엘프 시체가 있던 곳으로 달려간 것은 당연지사. 뭔가 찜찜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반신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시체는 아까와 별 다를 게 없어보였지만 단면이 무척 신경 쓰인다. 깨끗하게 잘리거나 힘에 의해 찢겨진 것이 아니다. 레인저처럼 흔적을 읽을 수는 없지만 그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다. 마치 거대한 스테이플러로 물어뜯긴 모양새. 표면이 거친 것은 물론 이상한 타액까지 묻어 있다. [살리트의 타액-준신화 등급] [연금술의 촉매로 활용할 수 없는 소재입니다.] ‘제기랄….’ 마음의 눈으로 계속해서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 조금이라도 행복회로를 돌리고 싶지만 마음의 눈으로 둘러본 광경은 다시 한번 내 기대를 배신한다. [살리트의 위장-준신화 등급] ‘시발.’ [살리트의 위장-준신화 등급] 어느 곳을 둘러봐도 눈에 보이는 곳은 변함이 없다. ‘먹힌 거야.’ 지금 나와 엘레나가 떨어진 곳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 몬스터의 위장이다. 저 엘프는 이빨에 뜯겨 상반신만 넘어온 것이 분명. 하반신은 이 사이에 끼어 있거나 아직까지 그곳에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와 엘레나가 타고 있었던 가마는 운 좋게 곧바로 이쪽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빠져나가야 해.’ 이곳에 있다가 소화되어 버린다는 사실은 박덕구라도 알고 있는 사실일 터. 동료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간 그전에 녀석에게 소화되게 생겼다. “엘레나 님, 밖으로 나오세요. 지금 바로 이동해야 될 것 같습니다.” “네?” “현재 저희가 있는 곳이 몬스터의 뱃속인 것 같습니다. 일단은 지금 있는 장소를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 무슨….” “설명은 이동하면서 드리겠습니다.” 내 목소리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깥으로 나오는 엘프는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그야 몬스터의 뱃속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 당연하리라.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요?” ‘그건 내가 너한테 묻고 싶다.’ 당연하지만 이 몬스터의 기관은 인간의 완전히 다르다. 뭐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디아루기아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기 보다는 뭐라도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게 더 편한 것은 당연. 물론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디아루기아 신체 탐방이 의외의 곳에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디아루기아의 기관은 섭취한 모든 것을 마력으로 분해해 체내로 전달한다.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녀석 역시 비슷한 매커니즘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준신화 등급의 몬스터. 대부분의 일반, 희귀 몬스터들의 소화기관보다는 조금 더 상위의 기관으로 움직인다고 추측하는 게 더 합리적이다. 서둘러 사방을 살펴본 것은 당연지사. 분해한 에너지를 체내, 특히 심장 쪽으로 전달하는 기관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이곳저곳을 살펴봤지만 워낙 넓어 꼼꼼히 살펴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 하지만 마력이 흐르는 곳은 분명히 존재한다. “엘레나 님,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혹시나 소리가 들리는 곳이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 “엘레나 님?” “…….” “엘레나 님!” “아… 네, 네! 이기영 님. 방금 뭐라고 말씀….” ‘아…. 얘 맛탱이 간 것 같은데.’ 무리도 아니다. 갑자기 몬스터의 뱃속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저렇게 반응할 것이다. 오히려 비명을 지르며 발광하지 않는 게 용하다. 순간적으로 버릴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현재 상황에서 뭐라도 할 줄 아는 사제가 하나 있다는 건 무조건 도움이 된다. 천천히 그녀의 손을 움켜잡자 움찔 하고 나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귀는 파들파들 떨고 있었고 예상대로 공포감에 휩싸여 있다. 화를 내기보다는 달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한 것은 순식간.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입을 열자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눈에 보인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레나 님.” “아… 네… 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제가 반드시 지켜드릴 테니까요.” “…….” 이런 손발이 없어지는 소리도 이제 제법 적응이 된다. 물론 방금 대사는 거짓말. 실제로 위기가 닥친다면 버리고 갈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런 대사라도 해두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시 한번 손을 잡자 그녀의 손에도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아직 눈은 공포에 질려 있지만 무언가 결심한 모양인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여 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닙니다. 제, 제가… 설사 제가 어떻게 되더라도 이기영 님만은 반드시. 반드시….” ‘그래. 그런 마음가짐 좋다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둘이서요.” “네. 둘이서.” “그럼.” “저… 명예추기경님.” “네.” “특별한 일이 아니면 계속해서 손을 잡고 계신 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혹시나 또 발작을 일으키실지 모르니까요.” “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얘는 진짜 너무 쉬운데.’ 묘하게 붉어진 얼굴은 분명 착각이 아니다. 평범하게 잡고 있던 손을 돌려 꽉 하고 깍지를 끼우자 조금 긴장한 듯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358 회귀자 사용설명서 358화 쉬운 엘프, 쉬운 엘레나(5) “다른 분들은 무사할까요?” “무사할 겁니다. 함께 떨어진 분 빼고는 다른 흔적이 없었으니까요. 지금 분명히 저희가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네.” “아마 이 몬스터가 뒤틀린 연못의 던전 보스일 확률이 높을 겁니다. 세계수를 썩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고요. 어째서 마지막에 있어야 할 던전 보스가 갑작스레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15일 안에 다른 원정대원들 역시 이곳으로 당도할 수 있을 겁니다.”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어째서 던전의 보스가 갑자기 툭 하고 튀어나왔는지 예상이 간다. 단순한 가정에 불과하지만 아마 녀석이 자리 잡은 곳은 뒤틀린 연못의 중심부일 가능성이 클 터. 이곳이 던전화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던전에 있는 악마들을 유지하는 것에는 막대한 마력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대륙에 체류하는 게 불가능한 악마들을 이곳에 머무르게 해주는 비자가 바로 뒤틀린 연못이나 세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인 것. 네임드 몬스터인 살리트는 뒤틀린 연못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녀석이 아무 계획 없이 갑작스레 던전 초입으로 산책을 나왔을 리가 없다. 우연히 이쪽이 발견됐다기보다는 처음부터 노렸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그 이후에 전투가 벌어진 것 같지도 않으니까.’ 그냥 가마만 삼킨 이후 곧바로 내뺐다는 거다. 김현성이나 다른 길드원들이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찰나였을 것이고 후위를 지키던 엘프들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것이 원인. 물론 준신화 등급의 몬스터라는 걸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후위가 미처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와중에 의구심이 생긴 것은 어째서 나를 노린 것인가에 대한 것. 물론 예상하는 답이야 있다. 악마군주인 벨리알도 내가 탐난다고 했으니 살리트 역시 내가 탐이 났으리라. 여기서 또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이 새끼는 도대체 왜 나를 삼켜 버린 거지?’ 벨리알은 분명히 나를 죽일 의지가 없다는 것을 표현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했다. 악마에게 계약이라는 건 곧 실적. 심지어 꼭 한 번 다시 만나면 좋겠다며 호의를 드러냈을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가 없으리라. 살리트가 나를 죽이기 위해 삼켰다는 건 내가 알고 있는 악마의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사고가 불가능한 건가?’ 본능으로 움직이는 종류일 수도 있다. 악마로 분류된 모두가 72군주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종류는 아닐 테니까. 조금 더 녀석의 정보를 확인하면 좋으련만 내게 주어진 정보는 고작 이 정도다. 아직 전설 등급인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게 아쉬웠다. 그나마 녀석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볼 수 있는 것 역시 내가 가지고 있는 직업의 영향 때문이리라. “그보다… 저, 정말 다행인 것 같습니다.” “네?” “만약 이기영 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저는 그곳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나마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엘레나 님이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저희가 몬스터의 안에 있다는 사실도 이기영 님께서 알아내셨고… 저는 아무것도…. 네. 겁만 집어 먹고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무척 겁이 납니다. 명예추기경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실 수 있는지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라… 크게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하하. 저도 생각보다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사실은 엘레나 님과 똑같습니다.” “네?” “저도 똑같이 겁이 많은 사람이라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글쎄요.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상황이 익숙하기도 하고.” “…….” “엘레나 님이 함께 계신 것도 영향이 있겠죠. 혼자였다면 아무래도 버티기 힘들었을 겁니다. 의지할 만한 사람이 있다는 건 그만큼 도움이 되니까요.” “아… 그,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마 엘레나 님께서 지금 제 손을 잡아주시지 않았더라면 벌써 쓰러져 버렸을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감사합니다.” “앗.” 작은 통로를 타고 다니던 와중에 에메랄드 색 엘프가 짧게 소리를 질렀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보니 아마 한계에 다다른 모양. 그럴 만도 했다. 제대로 된 휴식 없이 이틀은 걸었으니까. 슬슬 나 역시 체력적으로 한계인 상황이다. 이런 행군 경험이 없는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기본 스탯이 높은 편이니 여유 체력은 있을지 몰라도 발은 온전치 않을 것이다. “잠깐 쉬었다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그럴 수는….” “마침 저도 힘들었던 타이밍입니다. 이틀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걸어왔으니까요.” “…….” ‘나 진짜 힘드니까 그렇게 죄책감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 동안 주변을 둘러봤지만 마땅히 이상한 점은 찾지 못했다. 혹시나 체내에 다른 몬스터를 키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직까지는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한 상황. 만약 휴식을 취한다면 지금이 적절한 타이밍이다. 다음 기관으로 이동하는 통로의 안이었고 몸을 숨기기에 적절한 지형을 하고 있었으니까. ‘뭐, 그게 도움이 되겠냐만은….’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살짝 자리에 주저앉은 뒤에 옆자리를 두드리자 조심스럽게 옆에 앉은 모습이 보였다. 고통스러운지 인상을 찡그리는 모습. 내가 생각한 그대로라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잠깐 발을 봐도 되겠습니까?” “네? 아닙니다. 괜찮….” 대답을 듣지 않고 조심스레 장화를 벗기자 확실히 물집이 터져 엉겨 붙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장화에 피가 달라붙어 아파보이기는 했지만 고통보다는 부끄러움이 더 커다란 모양. 다시 한번 얼굴을 붉히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괘, 괜찮습니다. 제가 스스로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시지….” “걱정하실 것 같아서. 하지만 이, 이제 괜찮습니다. 이기영 님.” “아니요. 신성력은 아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체력을 안배해야 합니다. 마침 제게 포션이 있으니 이걸로 치료를 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네?” ‘미쳤다고 이런 이벤트를 그냥 넘기겠어.’ 최우선 사항은 당연히 이곳에서 살아서 나가는 거지만 작업 역시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고지가 코앞이라는 느낌도 있었고 생각보다 그녀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마의 안에 있어서인지, 이미 내게 익숙해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역질을 하거나 인상을 찌푸리지는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 천천히 발을 매만지는 와중에도 다른 거부 반응이 없다. 오히려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는 거다. 품에 있는 포션을 하나 꺼내든 뒤 천천히 그녀의 발 위로 쏟으니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귀를 움찔거리는 엘레나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 농도가 짙기는 한데 뭐, 이런 게 더 괜찮겠지.’ 상처 부위에 천천히 포션을 부은 이후에 천천히 발을 매만지기 시작하자 확실히 귀가 파닥거리는 게 보인다. 최대한 숨을 참고 있었지만 부끄럽기는 한 모양. 조금 과민 반응하는 것 같은 얼굴을 보니 엘프족 여성에게는 발을 보이는 게 굉장히 부끄럽게 여겨지는 것 같았다. ‘엄청 작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신체에 비해 발이 조금 작은 듯한 느낌. 어떻게 여겨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최선을 다해 그녀의 발을 치료할 수밖에 없었다. 기왕 하는 김에 종아리 쪽으로 손을 올렸지만 크게 당황하거나 저항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괜찮다는 표현인 것 같았다. “근육도 함께 풀어 들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아… 네. 그러실 필요는….” “아마 근육의 피로를 푸는 데도 효과가 탁월할 겁니다.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제가 만든 포션은 여러 가지 효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 상태로 조금만 계시면 괜찮아질 테니 기다릴 동안 짧게 식사라도 하는 게 좋겠군요.” “네.” “받으세요, 엘레나 님.” “아뇨. 이렇게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저보다는 명예추기경님께서 드시는 편이….” “저는 익숙합니다. 오히려 이럴 때는 많이 먹지 않은 편이라. 아까 먹은 걸로도 충분히 배가 부릅니다. 빨리 받으시죠. 보잘 것 없는 식사지만 짧게나마 허기를 달랠 수 있을 겁니다.” “가,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살짝 웃어주는 것으로 마무리. 마지못해 내가 넘긴 것을 받아든 엘레나의 얼굴이 눈에 보인다. 이렇게 도움만 받아도 되는지 죄책감에 휩싸인 얼굴이기도 했지만 묘하게 기뻐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너무 잘 풀리는 있고요.’ 예상보다 차도가 빠른 게 의아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꼭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괜히 액션 영화나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커플이 클라이막스를 키스로 장식하는 게 아니다. 더 절박하고 더 위험한 상황일수록 호감을 느끼기 쉽다는 거다. 그게 긴장에 의해 빠르게 뛰는 심장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가슴 속에서 우러러 나오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눈앞에 있는 이 순진한 엘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계시에 매달려 있는 상태. 부자연스러운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조금 신경 써주는 것으로 호감을 얻는다면 당연히 이득. 원정대가 살라트가 있는 곳까지 도착한 이후에 맞부딪친 이후에는 곧바로 내 몸을 회복시키는 이벤트가 시작될 테니 미리미리 신경 쓰는 게 좋다. ‘오고 있는 거 맞겠지?’ 아까도 먹었던 육포를 씹으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살살 드는 것은 당연지사. 혹여나 원정대가 사고를 맞이했을 때를 대비해서 녀석의 심장으로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이 잘 해결될지는 미지수다. 외부뿐만이 아니라 내부도 단단한 녀석. 용 숨결 물약으로 대미지를 입힐 수 있을지조차 확언할 수 없다. ‘이 여자도 공격력이 높아보이지는 않고….’ 뭐가 됐든 간에 안주하면 죽는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당장 놈의 위장에서는 빠져나왔지만 다른 기관에 있다고 하더라도 분해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내 손을 잡은 샤를리아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느낌을 받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얘 왜이래?’ 조금은 긴장하고 있는 듯한 얼굴. 혹시나 무슨 상황이 터진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그런 얼굴은 아니다. 뭔가 굉장히 물어보고 싶다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었지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 혹시나 또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지 기다렸지만 들려온 것은 전혀 의외의 이야기였다. “저… 명예추기경님.” “네.” “혹… 혹시 말입니다.” “네. 엘레나 님.” “명예추기경님과 정하얀 님은 그… 어, 어떤 관계이신지….” ‘얘 봐라.’ 드디어 물어봤다는 듯이 입술을 꽉 깨물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 ‘요 당돌한 것 봐라.’ 어쩜 이렇게 내가 기다리고 있는 말을 해줬는지 귀엽게 느껴진다. 한쪽으로는 일이 꼬였지만 다른 한 쪽으로는 일이 잘 풀리고 있는 듯한 느낌. 조금 불안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엘레나를 보며 나는 환한 미소를 보내며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 359 회귀자 사용설명서 359화 쉬운 엘프, 쉬운 엘레나(6) “살아 있을 거요. 누님도 분명히 살아 있다고 이야기했으니까. 분명히 살아 있을 거요. 암! 그렇고말고.” “…….” “거… 표정 좀 푸쇼. 무, 물론 나도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지만 누님이 그렇다고 이야기했으니까. 분명히 무사할 거라니까! 형님이 거, 옛, 옛날부터 바퀴벌레 같은 면이 조금은 있었다는 거 아니요. 우리 형님은 사막에 혼자 떨어져도 살아남을 사람이요.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건 틀림없이 뭔가 방법을 찾았다는 증거나 다름없으니까…. 틀림없다니까? 무조건 무사할 거요. 무조건. 아암. 그렇고말고.” “…….” 괜스레 침을 꿀꺽 삼켰다. 침울한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모두들 평소 같지 않다. 계속해서 괜찮다는 듯 입을 열고 있었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박덕구 님의 모습도 그랬고 평소답지 않게 멍한 표정을 유지 하고 있는 선희영 님도 그랬다. 물론 가장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파란의 길드 마스터 김현성. 누가 봐도 쉽게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였다. 최대한 억누르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비집고 나오는 살기 때문에 주변이 일그러져 보일 정도였다.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최소한 기억에는 없다. 물론 나는 주로 정하얀 님과 부길드 마스터와 함께 다녔기에 길드 마스터와는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었지만, 저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동기인 유아영이나 창렬 오빠에게 들어 왔으니까. 평소에 무표정으로 보내는 시간이 많았지만 부길드 마스터나 조혜진 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간혹 미소를 짓기도 했고 자신이 길드에 막 입단 했을 때에는 웃음으로 마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입을 닫아버리는구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때는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모양. 이틀 전부터 지금까지 한 마디도 내뱉지 않은 것을 보면 단순히 화가 났다는 수준을 넘은 것이 분명하리라. 이번 원정에서는 제법 많은 모습을 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거듭 사과드리겠습니다.” “…….”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심지어 엘프 쪽의 리더와도 말을 섞지 않고 있으니 어느 정도로 분노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에게 사고의 책임이 있다고 하기에는 힘들지만 굳이 몇 명을 꼽자면 부길드 마스터와 엘프 공주가 타고 있는 가마를 지키던 엘프들 이었으니까. 회피하라는 명령을 무시한 채 검을 뽑아든 것은 엄연히 그들의 잘못이다. 아마 보잘 것 없는 자존심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멍청해.’ 종류는 다르지만 마치 예전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부길드 마스터의 침식 속도가 빨라진 이후, 원활한 공략을 위해 엘리오스를 제외한 다른 엘프들이 후방 경계를 맡은 것은 물론 구경꾼 신세가 되었으니 자신들도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문제는 그들이 상대해야 했던 게 이 던전의 네임드 몬스터였다는 것. 땅 속에서 튀어나와 가마를 삼키고 몸을 내뺄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허리를 숙이는 우두머리 엘프의 가까이로 다가간 조혜진 님이 입을 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길드 마스터께서는 현재… 상심이 크신 것 같아. 원정 내용에 관해서 의견을 주고받으실 상태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나 원정에 관련된 이야기라면 제가 직접 말씀을 전하거나 할 수 있는 내에서 합의점을 찾아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엘리오스 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엘레나 공주님 역시 함께니…. 지난 일에 대한 질책보다는 최대한 서둘러 네임드 몬스터가 있는 곳으로 진입하는 게 최우선 과제일 것 같습니다. 휴식시간은 최소한으로, 길드 마스터를 중심으로 최대한 빠르게 돌파하겠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주어진 보급품의 범위 안에서 틈틈이 개인적으로 식사를 해주시고 수면 시간 역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한 시가 급하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살아 있을 거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부길드 마스터가 그런 곳에서 죽는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실제로도 살아 있기는 했지만…. ‘그 인간이 죽을 리가 없지.’ 절대로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죽어서도 안 된다. 만약 부길드 마스터의 몸에 해라도 생긴다면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는 저 사람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 자꾸만 다리가 후들거려 애써 다른 곳을 쳐다보려고 했지만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또한 괜스레 조심스러워진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누가 봐도 정상 같은 상태가 아닌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계속해서 뚝뚝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고 어딘가 불편한 듯이 표정을 찡그리고 있다. 만약에 정말로 부길드 마스터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지금 쌓아두고 있는 분노의 화살이 불특정다수를 향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싸늘한 표정으로 엘프 쪽의 진영을 힐끔거리는 정하얀 님을 보며 갑작스레 이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이나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 * *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야 물론 사랑하고말고.’ 가끔 정신을 놓으며 돌이킬 수가 없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싫어하느냐 좋아하느냐를 묻는다면 당연히 좋아하는 쪽이다. 1회 차 가면 쓰레기에게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가지고 있고 2회 차에서의 일 역시 일말의 책임감 정도는 느끼고 있다. 나를 생각해 주는 것도 마음에 들고 최근 행보는 제법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정도면 사랑이지, 뭐.’ 물론 최대한 내 말에 신뢰감을 주기 위한 메소드 연기를 펼치기 시작한 것은 당연. 어째서 엘레나가 이런 걸 물었는지 답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엘레나 역시 정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여신의 거울로 그 장면을 봤다면 나와 정하얀을 그저 사이좋은 오빠 동생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지금 굳이 이 건에 관해서 물어온 이유는 그녀 자신이 내 입으로 확인 받고 싶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뻔하지 뭐.’ “그, 그렇군요. 역시….” “네. 처음 만났을 때도 지금 같은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단 둘은 아니었지만 던전 안에서 우연히 마주쳤었죠.” “아….” 확연히 어두워지는 얼굴. 표정을 관리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는 모양. 귀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다. 어느 정도까지 넘어온 건지는 아직 가늠할 수 없지만 이런 질문을 해왔다는 것 자체가 그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할지 이쪽은 종잡을 수조차 없다. 여러 가지 떡밥을 뿌려 던지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감내하는 것은 그녀의 몫. 계시라는 소재가 들어간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마음고생하고 있을 엘레나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양심이 콕콕 찔려오기는 했지만 이미 쏘아올린 공을 다시 집을 수 있을 리 만무. 나는 네가 왜 이런 걸 물어오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기도 힘들다. ‘연기하는 것도 쉽지 않네.’ 하지만 적성에는 맞는 것 같다. 다시 한번 입을 여니 천천히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이 눈에 보이기 시작. 물론 아직도 귀는 떨리고 있다. “부족한 제 옆에 항상 있어주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때부터 쭉 함께였지만 마땅히 해준 것도 없고 오히려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웃는 모습이 굉장히 귀엽고 가끔은 화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는데 그마저도….” “네. 저, 정하얀 님은 무척 아… 름다우시죠. 영혼 역시 사랑이 흘러넘치시고요.”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기는 합니다.” “네?” “운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혹시 엘레나 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는 않으셨습니까?” “정확히 어떤 생각을 말씀하시는지.” “신께서 미리 저희의 운명을 점지해 주신다는 것 말입니다.” “무, 물론입니다. 저 역시 계시를 받고….” “하하. 제가 말씀드리는 건 엘레나 님이 말씀하신 거창한 이야기와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엘레나 님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조금 보잘 것 없을지도 모릅니다만… 대륙에 얼마나 많은 이방인과 대륙민이 살고 있는지를 떠올려보면 괜스레….” “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운명이라는 것 말입니다. 제게 있어서는 하얀이와 만난 일이 그렇게 느껴집니다. 수많은 사람 중, 그녀를 만나고 또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었던 건 분명히 우연이 아닐 겁니다.” “…….” “제가 온 곳에서는 이런 소리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다고요. 아마 그녀와 저는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을 겁니다. 틀림없이요.” “네… 네….” 엘레나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운 것은 바로 그때였다. 딱히 뭐라고 표현하기는 뭐하지만 무언가 죄악감에 휩싸인 느낌. 조금 짜증을 내는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나쁜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마이너스한 에너지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는 것. 그동안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표정이다. ‘성공하고 있다고 봐도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조심스럽게 그녀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 “그, 그렇지만. 무,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예.” “그런 문제는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 신의 뜻이라는 건 그렇게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엘레나 님. 혹시나 제가 실례되는 말씀을 드린 것은 아닌지…. 다소 민감한 내용이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엘룬님의 교리에 대해서는 제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터라.”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기영 님. 네. 그렇지 않습니다. 제 말은 그런 것이 아니오라… 교리와 다르다는 것이 아니오라 무, 물론! 정하얀 님과 이기영 님과의 관계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저는 혹시나 이기영 님께서 신의 뜻을 왜곡하실까 걱정돼서….” 장담컨대 나보다는 그녀가 신의 뜻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있을 것이다. “아, 그렇군요.” “저 같은 경우에는 지, 직접 신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네. 분명히 전해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신해서 말씀드릴 수 있었던 겁니다. 하, 하지만 이기영 님께서는 저와는 조금 다, 다르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에게 베니고어 여신님의 뜻을 전파하는 입장에 계시는 만큼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되지 않을까 싶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씀드린 겁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그… 제가 건방졌다면….” “아닙니다, 엘레나 님.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엘레나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조금 경솔했습니다. 신의 뜻을 왜곡해서 일어난 종교적 사건들을 생각해 보면 우려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네. 네! 그, 그것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직도 제법 표정이 어둡다. 횡설수설 말하고는 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이 뜻하는 바는 그거다. ‘정하얀과 내 만남은 운명이 아니라는 거네.’ 이렇게 저렇게 말을 돌려 이야기했지만 핵심은 그걸 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제법 귀여운 사고방식. 내 눈에는 조심스레 의도한 대로 와주는 게 귀엽기만 비쳤지만 그녀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죄악감에 휩싸여 있었다. ‘바로 그거야.’ 쓰레기가 되는 방법은 간단. 자기 자신이 쓰레기라는 걸 인지하고 그 죄악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첫 번째다. 그걸로 죄악감을 느끼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든. 우선순위는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엄연히 그 다음 챕터도 존재한다. 이 경우에는 조금 더 쉽다. ‘합리화하게 되거든.’ 인간이나 엘프나 다르지 않다. 생각하는 모든 동물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합리화하게 되어 있다. 순진한 엘레나 공주처럼. 잘못이나 부정적인 에너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더욱더. # 360 회귀자 사용설명서 360화 엘룬 쓰레기(1) 물론 내 말이 전부 옳다는 건 아니다. 사실 이건 내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다. 사람마다 케이스는 확연히 다르니까.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행동을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참회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본 적이 없어서 문제지만….’ 대륙이나 지구 어딘가에 존재하기는 할 것이다. 애초에 성악설을 믿는 이쪽은 후자보다는 전자가 설득력이 높게 느껴진다. 물론 그녀가 후자의 타입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녀가 전자다운 행동을 할 거라 믿는다. 후회할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글러먹었다는 증거였으니까. 진짜 성인은 애초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도 않는다. ‘아암. 그렇고말고.’ 내가 기대한 것처럼 금방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지만 이쪽을 바라본다거나 혹은 속으로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기색을 내비칠 때마다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양심에게 응원을 보낸 것은 당연지사. ‘이제 그만 버틸 때도 됐다. 화끈하게 포기해라!’ 라든가. ‘이제 그만 쓰러져라. 엘레나의 양심아!’ 같은 응원이었다. 에베리아 왕국에 남은 마지막 양심답게 저항이 꽤 거칠기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질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녀와 내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엘레나는 현명한 선택에 한 발 더 내디딜 것이다. 그 날로부터 하루하고도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날 때까지 엘레나는 제법 말을 조심하게 됐다. 사실 나는 그녀와는 정반대였다. 은근슬쩍 정하얀의 이야기를 주도한 것은 당연지사. 물론 그녀가 민감해할 운명이니, 계시니 하는 말을 직접적으로 내 뱉지는 않았지만 그런 뉘앙스의 대화를 진행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상당 부분 찝찝할 수도 있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살라트의 내부 탐험을 하는 와중에도 엘레나는 점점 더 내게 달라붙어오고 있는 중. 솔직히 개인적으로 준비한 다른 일련의 작업들은 전부 필요 없게 느껴질 정도. 물론 엘레나가 티가 나게 나에게 추파를 뿌려댔다는 뜻은 아니다. 현재 처한 상황이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엘레나 자체가 그럴 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저쪽은 먼저 유혹하기보다는 상대를 계속해서 기다리는 쪽. 하지만 그녀가 원하든 원치 않든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항상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만큼, 여러 가지 행동을 함께하는 만큼 스킨십 같은 것은 불가피하다. 심한 경우에는 생리현상을 해결할 때도 함께 있어야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실제로 내가 엘레나에게 정이 갈 정도였으니 그녀가 나를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어떻게 보면 모든 배경과 상황이 엘레나 러브 이기영 운명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점점 더 나와 그녀가 극한의 상황에 마주하며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만큼 그녀의 입장에서는 내가 밀고 있는 정하얀 이기영 운명론을 부정하고 싶어질 것이다. 생각대로 그녀가 정하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그날로부터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부정하는 대신 합리화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 합리화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온다. 어쩔 수 없는 거야. 혹은. 이게 올바른 길이야. 아직까지 얼굴에는 죄악감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처음에 비한다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아직 어색하기는 했지만 엘레나 200년 인생을 통틀어 처음 타인을 음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이 너무 하수처럼 보여 귀여워 보였을 정도. 아니나 다를까 옆쪽에서 굉장히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고개를 돌리자 못된 마음을 먹은 엘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귀를 연신 움찔거리는 것을 보니 슬슬 시동을 걸 생각인 모양이다. 이미 우리가 있는 위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이 여자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저, 명예추기경님.” “네, 엘레나 님.” “여, 역시 정하얀 님께서는 조금 질투가 심하신 겁니까?” 뜬금없이 이딴 걸 물어보는 것 자체가 이미 하수라는 증거라는 거다. 여우짓도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어색한 연기에는 기가 찼지만 이쯤에서 한 번 속아 넘어가 주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한번 귀가 움찔거려왔다. “사실 조금 심한 정도가 아닙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사실 다른 여성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모습도 귀엽게 비치기는 하지만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죠. 애초에 조금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 그렇군요. 역시 질… 투심이 많은 여성보다는 이해심이 너, 넓은 여성이 더 이상형이라 생각하시는 건지….” ‘그건 이지혜 사고방식이다, 야.’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기냐 아니냐를 설명하자면 당연히 이해심이 넓은 쪽이 좋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여러 사람을 만나는 만큼 이성, 동성의 만남을 구분 지을 수는 없으니까요.” “역시 그렇군요.” “네. 한데 그건 왜?”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딱히… 그저 제가 정하얀 님의 영혼을 마주했을 때 느껴졌던 것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저번에는 분명히 사랑으로 가득 찬 영혼이라고….” “무, 물론 정하얀 님께서는 사랑으로 가득 찬 영혼을 가지고 계시지만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던 부분도 존재합니다. 순… 수하지만은 않은 영혼이라고 말씀드리는 게 좋을지…. 자세하게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이기영 님께서 모르는 부분이실 겁니다.” ‘제대로 때려 맞췄네. 돗자리 펴라.’ “혹시나 하얀이도 악마에게 영향을….”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네. 그렇지는 않아요. 그, 그건 오롯이 정하얀 님의 본성이라….” “그렇군요.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로 신기합니다. 타인의 영혼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어떻게 보면 불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아! 혹시 서로 잘 맞는 영혼들도 구별할 수 있는 겁니까? 예를 들면 영혼의 파장이 잘 맞는다거나 서로 궁합이 좋다거나.” “물론입니다. 아주 딱 들어맞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저와 하얀이는 어떻습니까?” 순간적으로 들어온 질문에 고민하는 저 얼굴이 정말로 재미있다. 현재 내가 처해있는 힘든 상황을 응원이라도 해주는 것 같은 느낌. 찔려오는 양심과는 반대로 괜스레 가슴은 두근거린다. 조용히 눈치를 살피는 순진한 엘프의 모습은 가관. 하지만 결국에는 눈을 꽉 감고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번에도 그녀는 양심을 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실… 망할지도 모르시겠지만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네. 정확히 말씀드린다면 안 맞는다고 말씀드리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네… 정… 확합니다.” 일을 저지르고 난 이후에야 어두워지는 얼굴은 더 중독성 있다. 순간적인 욕심을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지른 일을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가 후회하지 않게 도와주는 게 이쪽의 역할. 자신의 양심을 배신한 결과가 고통이 아닌 즐거움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일류 쓰레기에 한 발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그렇다면 저와 엘레나 님은 어떻습니까.” “네?” “죄송합니다. 이건 제가 조금 무례한….” “아닙니다. 네. 그런 표현을 한 게 아닙니다. 저는 단지 조금 놀라서… 네. 다, 답을 드려야지요.” “…….” “부끄럽습니다만 있는 그대로 말씀을 드리자면….” “네.” “영혼의 파장은 굉장히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네. 궁합이 좋냐 좋지 않냐를 물어보시는 거라면 단연코 좋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거짓 하나 없는 진실입니다.” 나를 처음 봤을 때 안에 있는 것을 시원하게 게워낸 건 이제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 헐레벌떡 받아드는 꿀을 핥아 먹는 모습이 제법 재미있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끝난다면 조금 아쉬운 것이 사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아마 조금 더 받아먹고 싶을 것이다. 마음속에서 일어난 죄책감에 발라야할 연고도 좀 필요할 테고 마실 물도 조금 필요할 것이다. “엘레나 님의 말씀대로라면 혹시 엘룬 님께서 내려주셨다는 계시가 전혀 다른 내용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하하.” “네?”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 “그럼 슬슬 다시 이동해야 되겠군요. 기왕이면 하루 더 묵어가고 싶지만 심장까지는 아직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명예추기경님, 그보다 아까 해주신 말씀은….” “하하.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갑자기 생각나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현재 저희가 처해 있는 상황도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은근슬쩍 아련한 눈빛을 발사. 마찬가지로 엘레나의 눈 역시 아련함을 한 스푼을 더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지는 않았다. 부수적인 이야기도 이야기였지만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입장 자체에는 변화가 없다. “네.” “아마 내일이면 주요 기관이 있는 쪽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제 추측이 옳다는 가정 하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아마 생각하시는 바가 맞으실 겁니다. 이곳까지도 별 탈 없이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요. 한데 만약 주요기관 쪽에 도착하시면….” “제가 가지고 있는 물약이나 엘레나 님의 신성력이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보통 외부의 공격보다는 내부의 공격에 취약할 테니까요. 언제 일행이 도착할지 모르니 준비는 미리미리 해놔야겠지요.” “역시… 계속 연금술을 공부하신 것도 전부 그 연유 때문이었군요.”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와 같은 방법으로는 힘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전에도 베니고어 여신님께 새로운 힘을 얻기도 했지만 병상에 누워 있느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이기영 님께서도… 신탁을 받으셨군요.” “아.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았나 보군요.” “네.” “일개 연금술사에 불과하지만 여신님의 배려 덕분에 과분한 힘을 얻었습니다. 문제는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어! 어쩌면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니가 무슨 수로?’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어와 꽂힌다. 하지만. 문뜩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니 어쩌면 정말로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거….’ 어쩌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거 정말 선물인 거 아니겠지?’ 그녀가 받았다는 계시를 생각하니 한 번 더 고개가 끄덕여지기 시작. 어쩌면 엘레나는 엘룬이 내게 준 선물일지도 모른다. 만약 내 가정이 맞다면 조금 더 즐거워지는 상황이다. 엘룬 이 자식이 생각보다 더 비정한 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당연지사. ‘키야. 이 자식도 진짜 쓰레기네.’ 설마하니 자신의 딸을 넙죽 넘겨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361 회귀자 사용설명서 361화 엘룬 쓰레기(2) 생각해 볼수록 그럴 듯하다. 아마 엘레나가 생각하는 계시와 내가 생각한 결론은 거리가 멀겠지만 그녀가 받은 계시는 나를 치료하라는 종류임이 틀림없을 터. 나 역시 그 정도의 내용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시스템이 내려준 직업, 빛의 연금술사와 엘레나 와의 관계에 연관성이 있다는 가정은 상상해 보지도 못했다. ‘생각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누가 이걸 상상이나 했겠어?’ 전설 등급의 직업 엘룬의 수호자. 유일무이의 하이엘프. 단순히 수식어로 설명하자면 짧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하이엘프와 신의 사도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세계수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마력의 영향을 받아 태어난 존재가 하이엘프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애초에 세계수 자체가 준신화 등급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현재 우리를 삼키고 있는 악마를 현세에 머물도록 유지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에베리아 왕국 전체를 감싸고 있었으니까. 그 세계수의 영향을 받고 엘룬에게까지 선택받았단다. 존재 자체만으로 전설 등급 이상의 판정을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거다. 말하자면 그녀는 엘룬의 딸이며 엘룬의 분신. 엘룬이라는 작자가 소중하게 키운 자신의 딸을 넙죽 넘기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이 새끼가 이렇게 비정한 쓰레기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초월적인 존재도 완벽하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 하지만 나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딸까지 팔아먹는 쓰레기도 위에 있을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다. 악마라고 봐도 모자람이 없는 자식. 이정도면 엘레나가 불쌍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비정한 쓰레기.’ 단언컨대 녀석 같은 쓰레기는 지상에도 흔하지 않으리라. 물론 녀석이 어떻든 간에 이쪽과는 하등 상관없다. 오히려 환영하고 싶다. 정황이야 어떻게 됐든 나에게 이득이라면 과감히 받아들이는 게 맞다. 어차피 초월적인 존재 역시 내가 김현성에게 더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의미로 선물을 던진 것이 분명.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겠지만 녀석들이 퍼주는 것에도 전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 이번 일로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시스템을 관장하는 이들이 한 놈이 아니라는 것. 대륙에서 신이라고 불리는 놈들이 하늘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엘룬 이 쓰레기도 시스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거구나.’ 당연히 이 모든 건 내 상상이다. 아직 정확한 것은 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나와 김현성이 녀석들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것. 자신의 딸을 가져다 바칠 정도니 거의 무조건적인 호의라 생각하는 것이 옳다. ‘이딴 걸 도와주지 말고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나 도와주지.’ 물론 아쉬움에 터져 나오는 불평불만.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볼 때 초월적인 존재들이 인간의 죽음이나 삶에 크게 관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정말로 불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엄청난 페널티를 부과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초월적인 존재가 나와 김현성의 사이가 갈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엘레나가 빛의 연금술사가 사용하는 연금술의 촉매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후자가 사실이라면 소리를 질러야 함이 옳다. 계속해서 히죽거리며 엘레나를 바라보자 무슨 영문인지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뭔가 흠칫 하고 몸을 잠깐 떤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혹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신지요.” “방금 전에 도움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네. 당연히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조금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굉장히 실례되는 부탁일 수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설마 자신이 연구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모양. 사실 그녀의 동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이건 시도해 봐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기왕이면 살살 구슬리는 게 조금 더 일하기 편하다. 상황도 상황이었고 그녀가 어떻게 나에게 협력해 주느냐에 따라 연구에 질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맞다. 그녀의 손을 다시금 꽉 잡은 채로 입을 열자 묘하게 얼굴이 붉어진 그녀의 엘레나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제가 엘레나 님의 몸을 한번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뭔가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 영문을 모르겠지만 마치 홍시가 된 것 같은 얼굴 때문에 다시금 자세한 설명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최대한 핵심만 전달한다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진행시켰으니까. 말하는 내내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여왔고 때로는 탄성을 냈다.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아무래도 그녀 자신이 나와 조금 더 강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쁘게 다가온 것이리라.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이기영 님. 한데 어떤 식으로 도움을 드려야 할지에 대해서는 잘….” ‘그게 문제야.’ 초장부터 피검사를 하거나 벗어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물론 그 이후의 일 역시 문제로 다가올 수도 있다. 디아루기아의 촉매를 발견하고 연구하는 데 들어간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 이곳에서 새로운 종류의 물건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다. 소지하고 있는 장비와 촉매 역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것은 당연지사. 용 숨결 물약과 강화의 혈청은 수많은 가설과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자산의 산물이다. 수백 개가 넘는 연금키트로 수천 번이 넘는 실험이 있었기 때문에 단기간에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다는 거다. ‘슈바…. 나는 천재가 아닌데.’ 아무 것도 없는 시점에서 곧바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무리. 이론을 정립하는 데만 몇 십 년이 걸리고 실험도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엘레나가 옆에 있기야 하지만 그녀를 보조해 주는 다른 촉매들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하다. 많아야 네 번, 혹은 다섯 번이면 가지고 있는 재료가 모두 소진될 것이 분명. 조금은 다른 방향을 생각해 봐야 했다. 살라트의 몸을 촉매로 사용하는 것은 무리. 타액 역시 가공이 불가능하다. [살리트의 타액-준신화 등급] [연금술의 촉매로 활용할 수 없는 소재입니다.] 혹시나 해서 챙겨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준신화 등급의 몬스터를 촉매로 활용하는 것은 무언가 조건이 걸려 있는 모양. 빛의 연금술사가 하이엘프 엘레나를 촉매로 활용하듯 이쪽 역시 특정 직업을 얻어야 촉매의 활용이 가능해 질지도 모른다. ‘확 전향해 버릴까?’ 물론 방법 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한소라가 없으니 시도 자체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벨리알이라면 어쩌면 이쪽의 목소리에 반응해 줄지도 모른다. 마법진도 대충 외우고 있고 애초에 자리한 곳이 살리트의 안이라 할 수 있으니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엘레나가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납득시킬 수 있겠지 뭐.’ 하지만. ‘빛의 연금술사를 버리는 건 조금 아깝지….’ 물론 아깝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살아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 계속해서 녀석의 안쪽을 탐험하다가는 이쪽이 먼저 지치게 생겼다. 김현성을 기다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함부로 개입할 수 없다는 건 이해하지만 이쯤 되면 위에서 뭔가 액션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싶다. ‘이 새끼들 이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한 거 아닌가?’ 그동안 빛의 진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바쳤건만 돌아온 건 겨우 준신화 등급의 직업. 베니고어 여신 교단의 명예추기경으로 헌금은 얼마나 냈었지? 하는 생각도 훅 하고 들어온다. 단언컨대 지금껏 나보다 많은 액수의 헌금을 낸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물론 현재는 그 헌금의 대부분이 나에게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신의 이름 앞에 헌금을 붙이기야 했다. ‘맞아. 그렇지. 백 번 생각해도 그렇지.’ 라이오스 사건은 또 어떤가. 조금 사소한 위기가 있기는 했지만 그 사건의 파급력이야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 전 대륙으로 내가 선보인 기적이 방송을 탄 것은 물론 통계적으로도 베니고어 여신교도가 크게 증가했다. 아니, 증가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미 천장을 뚫었다. 악마가 계약으로 실적을 올리는 것처럼 하늘 위에 있는 존재도 신도에 의해 실적을 채우는 것이라면 내가 교단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적자야. 이 쓰레기 새끼야. 적자라고. 네가 저지른 패악질 때문에 수습하느라 적자고 파산했다고 제기랄…. 완전 난리도 아니라고.(0/1)] 그것뿐만이 아니다. 베니고어 여신을 민주투사로 만든 것 역시 빛기영의 위업. 여신의 거울로 베니고어 여신에 대한 찬양가가 전 대륙에 울려 퍼지지 아니한가.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너 미친 거지? 그걸 위업이라고? 니가 지금 여기 상황을….(0/1)] 그뿐인가. 항상 김현성의 옆에서 녀석을 보좌한 것은 물론 목숨을 바칠 기세로 충성을 다했다. 그 충성에 대한 대가가 겨우 이것이라면 차라리 벨리알 쪽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지상의 일에 크게 개입하는 것은 금기야. 우리 이러지 말자. 마음은 이해하지만 너라면….(0/1)]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이미 마음의 쓰라린 상처를 입은 상황. 기왕 악마에게 먹힌 김에 아주 영혼까지 깔끔하게 전향하는 것도 나쁘지….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이봐, 기영이. 우리 이러지 말자. 지금은 상황이 좀 안 좋아. 나도 여건이 없어. 신력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여기저기에서 빌려야 되는 상황이야. 이미 많이 빌렸고 더 이상은 정말 불가능해.(0/1)] 나는 지금 죽기 직전에 상황이다. 식량도 5일치밖에 남지 않았고 다리도 퉁퉁 부었다. 김현성과 함께하는 길은 영광만이 함께할 줄 알았건만 너무나도 춥고 배가 고프다. 믿음에 대한 대가가 겨우 배고픔과 목숨의 위협이라니. 여신을 등진 이들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이곳에서 꺼내달라는 소리 같이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강림해서 모든 상황을 해결하라는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절대로 이런 걸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조금 더 편한 길을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책임이 아닐까? 여기까지 했는데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타협은 없다. 녀석도 비정한 쓰레기 엘룬을 조금 더 본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알아들어? 정말로 타협 같은 건 없는 거야.’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쓰레기 새끼(0/1)] ‘어쩔 수 없….’ [준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오른손 들기(0/1)] [퀘스트 완료 보상] [빛 폭탄 물약 레시피-준신화 등급] 믿음에 대한 답. ‘베니고어 여신 만만세.’ 역시나 하늘은 믿는 자를 내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여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올라서는 순간. 마음이 빛의 기운으로 가득 차는 듯한 기분이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넌 진짜 쓰레기야. 진짜.(0/1)] # 362 회귀자 사용설명서 362화 엘룬 쓰레기(3) ‘아주 좋습니다. 아주 좋고요.’ 마음속까지 빛으로 깨끗해지는 듯한 기분. 빛의 위대함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덕을 쌓다 보면 언젠가는 이쪽에 돌아오는 게 있게 마련. 절로 입가에 웃음이 머무른다. 구경도 해본 적 없는 준신화 등급의 퀘스트가 고작 오른손 들기라는 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손가락 펴기가 아닌 게 다행이다. 비장한 표정을 유지하며 살며시 오른손을 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즐거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 최근 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준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완료됩니다.] [오른손 들기(1/1)] [퀘스트 완료 보상] [빛 폭탄 물약 레시피] [신성력이 첨가된 하이엘프의 눈물(0/1) 세계수의 잎(0/1)] [준신화 등급 - 빛의 연금술사 전용 촉매.] 그 외 다수의 촉매가 리스트화 되어 좌르륵 보인다. 몇몇은 확실히 이쪽이 보유하고 있는 게 맞다. 물론 가장 중요한 두 개가 빠지기는 했지만 분위기를 보니 이미 엘레나가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세계수의 잎 역시 그녀가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여신님께서 이런 쓸데없는 레시피를 던져줄 이유가 없을 테니까. 지금 상황에서 쓸 만한 레시피를 던져줬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이거 혼자서 했으면 절대로 성공 못 했겠네.’ 세계수의 잎이 재료로 들어가는 사실 이전에 레시피 자체가 무척이나 복잡하다. 생각보다 신경 써야 할 것도 많고 대충 던져보는 식으로 만들어서 가닥을 잡을 수 있는 종류의 레벨이 아니다. 뭐라도 해보겠다고 쓸데없는 도전 의식을 불태웠다가는 아까운 촉매들만 날아갈 뻔했다. ‘몇 년은 걸렸겠는데.’ 심지어 내가 사용한 적이 없는 기법들 역시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보통 연성진이나 촉매를 다룰 때는 마력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를 테면 연금술이라는 자동차에 마력이라는 기름을 넣는 거라 설명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존경해 마지않는 베니고어 여신님의 빛의 연금술은 마력이 아닌 신성력이 기름이며 연료다. 기존의 것과 차이가 있는 게 당연하리라. ‘혹시나 했었는데. 정말로 맞긴 맞았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대충 한번 시도해 본 게 이렇게 잘 풀릴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시 한번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것은 당연. 역시 나의 사랑스러운 베니고어 여신님이 항상 우리를 지켜봐주고 계시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거지! 바로 이거지!’ 내 가설이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당연하다. 이 대륙은 몇몇의 신에 의해 보호되고 있고 퀘스트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자신들의 뜻을 전달한다. 너무나 깊숙한 개입은 당연히 금지되어 있고 그들은 잘못된 행동에 대한 페널티를 받는다. 어쩌면 김현성을 회귀시킨 알타누스라는 자식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페널티를 받았을 확률이 크다. 방금 걸로 베니고어 여신 역시 뼈아픈 출혈이 있었을 테고…. 물론 내가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이쪽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며 행복회로나 돌리면 된다는 거다. 계속해서 미소를 짓고 있자 엘레나가 궁금한 듯 이쪽을 보았다.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좋은 소식은 나누면 배가 된다. “계시를 받았습니다.” 가장 적절하고 아름다우며 확실한 단어. 이 말만큼 안심이 되는 소리가 또 없다. “네?” “일단 천천히 걸어가면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당장 제가 필요한 것은 신성력이 들어간 하이엘프의 눈물과 세계수의 잎입니다. 혹시 엘레나 님이….” “에베리아 왕국의 엘프라면 모두가 세계수의 잎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마 엘레나 님의 눈물이 들어간다면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촉매로 변환시킬 수 있는 모양입니다.” “이기영 님, 무엇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는 알 것 같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따라가기가 힘듭니다. 조금만 천천히 상황을….” “설명은 이후에 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가 베니고어 여신님께 계시를 받았다는 겁니다. 어째서 엘레나 님과 제가 만나게 된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아마 틀림없을 겁니다.” 재료 조달 노동자와 사장님의 관계. 핫산과 사장님. 하지만 그걸 그대로 입에 담을 리가 만무하다. ‘비정한 쓰레기 엘룬이 널 팔아 넘겼단다.’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 대신 조금 더 달콤한 열매를 던져주는 게 합리적이리라. 어차피 그녀의 일을 해결하는 것도 머릿속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물론 전부 다 던져주진 않는다. “어, 어떤….” “엘레나 님이 제게 꼭… 필요한 사람….”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 원래 달콤한 과실이라는 건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위치에 있어야 더욱 탐 나는 법이니까.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그녀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아마 내 얼굴에 들어선 표정이 무엇인지 그녀는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손을 꽉 잡은 것은 물론 그녀를 갖고 싶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쉬운 엘프의 얼굴이 굉장히 붉어졌다. 아마 눈치가 없지 않다면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발을 내딛지 못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틀림없이 느끼고 있다. ‘아. 드디어 알아줬구나. 깨달았구나. 아니, 깨닫고 있는 도중일지도 몰라.’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긴장했는지 귀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 모습. 하지만 얼굴에는 묘한 감정이 떠오른다. ‘배덕감? 성취감?’ 아마 비슷한 종류일 것이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고 기쁨에 몸부림치는 표정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가 자신을 원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아마 자신이 정하얀을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와이프가 있는 남편을 뺏는 불륜녀의 심정을 느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어떤 감정을 느끼더라도 이상하지는 않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게 부정적이라는 사실만 인지하고 있으면 된다는 거다. 내 손을 꽉 쥔 채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보인 것은 당연지사. 왠지 모르게 입술을 꽉 다문 모습은 귀엽다. 말은 필요 없다. 엘레나의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무척 긴장하고 있는 얼굴. 귀는 추욱 내려갔지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다. 언뜻 죄책감이 느껴지기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기분 좋은 긴장으로 뒤바뀌리라. 예상했던 대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이겼어.’ 라든가. ‘드디어 알아주신 거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뻔하다. 아직 승리의 축배를 들기에는 이른 것 같기는 하지만 결정타를 날리기에는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다. 마침 우리들의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힘을 써주신 덕분에 시간 자체도 굉장히 넉넉해진 상황. 조금 정도는 다른 일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솔직히 적당히 긴장이 풀린 게 마치 캠핑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다. ‘한 번쯤은 더 갇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천천히 내 팔을 잡아당기는 게 느껴진다. 자신을 봐달라는 듯이 고개를 돌리자 멈칫 하기는 했지만 귀엽게도 다시 한번 몸을 밀착시켜 왔다. 여전히 이래도 되는 것인지 고민 하는 게 포인트. 그렇지만 내가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앞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깨, 깨달아 주셨군요.” “…….” “저,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한참 전부터 깨닫고 있었지만 모, 모르는 척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이… 이제는 모든 걸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물론 이기영 님께서 이미 사랑하시는 분이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조금 갑작스럽습니다만… 엘레나 님 제가 방금 말씀드린 뜻은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아니요. 이기영 님도 이미 아, 알고 계신 걸로 압니다. 틀림없이요.” ‘얘 봐라.’ 제법 마음을 굳게 먹은 것처럼 보인다. 덜덜덜 떨리는 다리와 파르르 떨리는 귀가 재미있다. 그 와중에도 이런 말을 해오는 것을 보니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은 과실에 욕심이 생기는 모양이다. “이기영 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지, 지금 한 발 더 내딛지 못하시는 건 분명히 죄책감 때문일 겁니다. 이기영 님은 너, 너무 상냥하시니까요.” ‘그래. 나 상냥하다.’ “이기영 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는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다고. 그때는 정하얀 님과 이기영님께서 연결되어 있다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다르다는 걸 깨달으셨을 겁니다. 네. 분명히요. 저를 똑바로 바라봐 주세요, 이기영 님. 운, 운명의 상대는… 정하얀 님이 아닙니다. 부디….” ‘오우야.’ 내가 그녀를 독려해야 되는 상황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독려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곳에서 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럴 시간도 없고요. 그보다 엘레나 님, 조금 흥분 하신 것 같습니다. 조금만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으시면 아마….” “아니요. 이런 장소라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겁니다. 지금이라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겁니다. 저를 똑바로 바라봐 주세요. 제 눈을 피하지 마시고 똑바로 바라봐 주세요.” 심지어 울먹이기까지 한다. 얼른 쏟아지는 걸 담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분위기는 아니다. “부디 바라봐 주세요. 감정을 숨기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죄책감을 느끼신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 “안아주세요.” “…….” “안아주세요.” 한 번 물꼬가 트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절박해 보인다. 떨어질 듯 말 듯한 열매를 바라보며 기도라도 하는 것 같다. 나 역시도 이정도로 저돌적으로 달려 들어올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아마 그녀에게도 꽤 충동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오랜 생각 끝에 나올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 애가 많이 탔던 모양. 떨어지는 과일을 바라보며 허겁지겁 입을 내벌리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그녀가 얼마나 용기를 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엘레나는 수동적인 면모가 조금은 강하다. 최근에 와서는 조금 능동적인 성격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200년 동안 왕국에 갇혀 있었던 시기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이 정도까지 말한다는 건 아마 엘룬 쓰레기가 등을 떠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신의 말씀과 계시라는 게 좋긴 좋다. 상황과 배경의 특수성도 좋고. ‘열매에 독이 들었는지는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네.’ 파르르 떨리는 귀. 다가와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대는 것이 보인다. 물론 나는 거부하는 척할 뿐, 거부하지 않았다. 입술이 닿는 것은 순식간.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취소됩니다.] 잠깐 찾아온 불청객에 움찔하기는 했지만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야 뻔했다. 아마 엘레나는 중간부터 눈치챘을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열매가 생각만큼 달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시간이 지나 내가 잠을 청하는 와중에도 괴물의 안에서는 그녀가 훌쩍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자신을 합리화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취소됩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다른 사람의 울음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 363 회귀자 사용설명서 363화 빛기영 가라사데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노라(1) 다음날 아침은 무척 상쾌했다. 물론 여전히 역겨운 악마 냄새가 진동했지만 기분 좋은 소식과 함께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해 주셨던 물건입니다.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합니다, 엘레나 님.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준신화 등급-빛의 연금술사 전용 촉매] [신성력이 첨가된 하이엘프의 눈물] [준신화 등급-빛의 연금술사 전용 촉매.] [세계수의 잎] ‘마이 프레셔스….’ 반짝반짝거리는 것들을 보자 내 손이 다 덜덜 떨려올 지경. ‘마이 프레셔스!!!’ 나만을 위해 준비된 재료라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당연히 이건 값으로 따질 수 없을 정도의 보물이다. 작은 포션 병에 담긴 소량의 액체와 작은 나뭇잎 하나. 저 촉매들이 앞으로 일으킬 파급력을 생각하면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려도 되는 상황이라는 거다. 지금 당장 일어나 댄스라도 선보이고 싶었지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 리 만무. 눈앞에 있는 엘프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릴 때부터 예상하기는 했지만 어젯밤 많은 생각을 하게 된 모양.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런 선물을 준비한 건 상당히 대견해진다. 자괴감에 휩싸여 하룻밤을 보내는 와중이었는데도 결국에는 나를 위해 이런 선물을 준비해 준 것이다.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자 눈이 퉁퉁 부은 얼굴이 보였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힘들어 하는 모습. 귀는 추욱 처져 있었고 아직도 얼굴에 알 수 없는 죄책감이 감돌고 있었다. 천성이 착하다는 건 바로 이 엘프 같은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거짓말 한 번 해본 적 없는 여자가 갑작스레 차오른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한 시점. 내 기준에서는 아주 조금 힘든 일이겠지만 그녀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시간이었으리라. 안 그래도 지금까지 죄책감과 알 수 없는 배덕감이 공존하고 있었던 상태. 마침표를 찍은 기분이 꼭 좋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얘를….’ 비정한 엘룬에게 다시 한번 화살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왕 엎질러진 물이고 일은 벌어졌다. 믿고 있던 신에게 까지 내쳐진 가슴 아픈 엘프. 재기불능이 되기 전에 꺼내 주는 게 맞다. 앞으로도 그녀는 나와 계속 함께 해야 했으니까. 천천히 손을 잡자. 잠깐 동안 움찔하는 모습. 반사적으로 오히려 손을 피하려고 하는 모습은 제법 재미있다. 물론 결국에는 피하지 않고 손길을 받아들인다. 배덕감이 주는 저릿한 쾌감이 다시 한번 그녀의 죄책감을 뒤 덮은 것. 아마 나와 이야기를 하거나 함께 있을 때에는 사태가 심각해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제 일은….” “네… 그…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엘레나 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저도 같은 마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 “조금 상쾌해진 기분입니다만… 물론 이런 걸 치료라고 불러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전과는 무언가 다른 느낌입니다. 엘레나 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보이십니까?” “그러고 보니….” “네.” “그랬던 거군요. 그… 그랬던 것이었군요.” ‘그래… 맞다. 네가 다 맞다.’ 아무래도 이제는 역겹게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다. 아직 완벽하게 달라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구역질을 할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그녀의 성향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증거였고 순진한 엘프의 마음에 내가 들어갔다는 증거였다. 어느 정도로 자리 잡았는지는 아직 확실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아마 내가 손을 놓아버리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현재 그녀가 자신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내 존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만약 커다란 방패막마저 사라져 버린다면 어떤 행동을 할지 불 보듯 뻔하다. 어쩌면 가면쓰레기에게 농락당한 1회 차의 정하얀 같은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아암. 그렇고말고.’ 황금 알을 낳는 거위, 아니, 소중한 엘레나를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엘레나는 혼자 중얼거리는 중. “그랬군요. 네.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군요. 이기영 님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네. 필요했던 일이었습니다. 네….” 혼이 조금 빠진 것 같기도 하다. 손을 꽉 잡아 준 것은 당연지사. 살짝 입을 맞추니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오히려 본인이 조금씩 매달리고 있다. 입술을 떼니 눈에 보인 것은 무척이나 붉어져 있는 얼굴. 앞으로 며칠간은 이런 종류의 작업을 쳐줘야 할 것 같았다. 호기심이든 쾌감이든 뭐가 되든 상관없다. 안 좋은 생각을 하는 걸 막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거다. ‘어쩔 수 없지 뭐.’ 우여곡절이야 있었지만 일단은 기존에 생각했던 작업은 충분히 성공이라고 할 만하다. 불안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정하얀처럼 위험하게 만들지도 않았고 적절한 부분에서 아주 잘 타협했다. 적당히 오염됐고 적당하게 잘 만들어졌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엘레나의 가슴 속에 파고들었다는 거다. 그 무엇보다 하이엘프 엘레나와의 진심 어린 교감으로 오염된 영혼이 치료됐다는 것이 중요했다. 다음 챕터는 뻔할 뻔 자. 엘레나의 가슴 속으로 한 번 파고들었으니 이번에는 나를 삼킨 이 더러운 자식의 가슴을 향해 돌진할 시간이다. ‘네가 날 소화시킬 수 있을 줄 알았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이 더러운 악마가 빛으로 둘러싸인 영혼을 소화시키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가정이다.  “일단 바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드신다고 하신 건….” “중간 중간 시간이 있을 겁니다. 촉매 자체는 움직이면서도 준비할 수 있으니까요. 대충 머릿속에 전부 들어가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혹시 또 무슨 일이 터질 수도 있는 만큼 곧바로 자리를 옮긴 것은 당연. 엘레나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이윽고 시작된 기행에는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공이 필요한 촉매를 움직이면서 준비하는 게 신기하게 비친 모양이다. 아니, 그녀가 엘프라는 걸 생각해 보면 어쩌면 연금술 자체에 신기하게 비칠지도 모른다. 엘프라는 종족 자체가 연금술과 친하다고 보기는 힘드니까. “신기하군요. 물론 저번에도 보기는 했지만….”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지는 건 좋다. 잠깐 동안 안 좋은 생각을 막아주기도 하니까. “그… 이기영 님께서는 만드는 방법이나 순서도 모두 외우고 계신 겁니까?” “네. 익숙하니까요. 아마 몇 시간 후이면 준비될 것 같습니다. 이후에는 곧바로 연금키트를 사용해 물약을 제조하면 됩니다.” 현재 내가 새로운 물약을 제조하는 건 단언컨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물론 난이도가 아예 없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컨닝 페이퍼를 읽고 시험을 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마치 천재라도 된 기분을 느낀 것은 당연지사.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계량과 센스. 설명서를 읽으며 작업에 임할 뿐이었지만 엘레나는 마치 대단한 것이라도 목도한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바고 있다. 중간 중간 존경해 마지않는 베니고어 여신님의 빛을 바라본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펙트 한번 좋네.’ 확실히 마력이 신성력을 품게 되니 마력을 내뿜을 때마다 빛이 터져 나온다. 가진 바 신성력은 적지만 준신화 등급의 영향인지 촉매에 마력과 신성력을 입힐 때마다 성스러움이 쏟아진다. ‘이게 빛의 기운이지. 아암. 그렇고말고.’ 오랜만에 제대로 된 연금술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잠깐 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컨닝 페이퍼를 읽으며 진지한 자세로 시험에 임한다. 빛이 뿜어져 나오며 어떻게 설명하기도 힘든 소리가 튀어나온다. 나조차도 이게 뭔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뭔가 대단한 기적을 선보이고 있다는 기분 하나는 확실하다. 이제 막 완성을 목전에 둔 타이밍. 갑작스레 녀석이 움직인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분명 착각이 아니다. 엘레나 역시 나와 비슷한 표정. 녀석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느낀 것이 분명하리라. 물론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처음이 아닌 만큼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우리가 여기에 머무른 동안에 몇 차례 움직임이 있었다. 기껏해야 몸을 뒤척이는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 하지만 다시 한번 일어난 충격에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기영 님.”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속도를 조금 올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최대한 떨어지지 않게 붙잡으면서요.” “네.” 다시 한번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여기서 떨어진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 다시 한번 뜻밖의 여정을 계속하게 될지도 모른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쓸데없는 생각을 하자마자 흔들리는 안. 곧바로 수인을 외우고 손바닥을 튕기며 몸을 고정시킬 지지대를 만든다. 단순히 몸을 뒤척인다거나 달리고 있는 종류가 아니다. ‘이거….’ 마치 싸움이라도 벌이고 있는 듯한 모양새. 한쪽 팔로 엘레나를 꽉 껴안자 그녀 역시 눈을 꽉 감고 내 몸을 붙잡기 시작했다. ‘현성인가!?’ 다시 한번 거대한 굉음이 들려오며 녀석의 몸이 크게 흔들린 순간. 자연스럽게 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온 거야.’ 파란 길드원들과 에베리아 왕국의 엘룬 나이트들이 당도한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이기영 님.” “아무래도 원정대가 도착한 것 같습니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확실할 겁니다.” 원래 원정대가 이곳에 당도할 시간보다 약 삼 일이 더 빠르다. 원정대가 무척 급하게 움직였다면 얼추 시간이 맞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 일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마 원정대도 힘겨워 할 가능성이 큽니다. 엘레나 님과 제가 도움을 준다면 조금 더 쉽게 네임드 몬스터를 공략할 수 있을 겁니다.” “네.” “일단 안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몸을 부딪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얼굴을 붉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얘는 이 와중에….’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으니까. 외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방금 말했던 대로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준신화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 아무리 김현아와 정하얀을 중심으로 한 파란 길드라고 한들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안하고 전투에 임할 것이다. 아마 체력적인 페널티 역시 떠안고 있음이 분명할 터. 3일이나 일정을 단축시켰을 테니 체력이 약한 후위의 경우는 한계를 맞았으리라. 조금 머리가 복잡하기는 했지만 손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신성력을 옮겨내고 담아낸다. ‘제기랄.’ 디아루기아의 촉매를 생성해 몸을 고정시키는 와중에 실험까지 하게 되니 돌아버릴 노릇. 하지만 점차 결과가 가까워진다. 엘레나 역시 만약을 대비해 충격을 막아줄 수 있는 장막을 만들고 초조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기도라도 드리는 것 같은 얼굴. 비정한 쓰레기 엘룬을 향한 기도였겠지만 효과가 있다는 건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준비한 촉매를 연성한 이후 신성력을 쏟아내자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의 빛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나이스!’ # 364 회귀자 사용설명서 364화 빛기영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노라(2) 맹렬히 회전하는 빛. 이미 키트를 벗어나 병 안에 들어간 결과물은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의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금방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릴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빛만 뿜어대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 괜스레 불안한 마음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거 베니고어가 통수 친 건 아니겠지….’ 혹시나 갑자기 터져 버릴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존경해 마지않는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독실한 신도이자 김현아의 자랑스러운 우군인 나를 버린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시스템의 관리자라고 예상되는 초월적인 존재들 중에서도 틀림없이 쓰레기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엘룬 쓰레기처럼. ‘아니야. 그래도 우리 베니고어 여신님은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지.’ 이미 많은 것을 희생하셨을 테니 여기서까지 독실한 신자의 뒤통수를 건드리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신성력을 조금 더 주입하는 게 맞으리라. 불안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터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엘레나 님 신성력입니다.” “네?” “계속해서 이곳에 신성력을 보내주세요. 분명히 효과가 있을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맡겨주세요.”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다.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병에 신성력을 밀어 넣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히 저게 터질까 봐 무서워 엘레나에게 토스한 것은 아니다. 내가 가진 신성력보다 엘레나의 것이 조금 더 농도가 짙은 것이 사실. 마치 황금 알이라도 받은 듯 녀석에 계속해서 신성력을 주입하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 더 출력이 필요한 것 같아 나 역시 연료주입에 합세했다. 다시 한번 더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 가끔씩 격동적으로 흔들리는 녀석의 모습에 잠깐 겁을 집어먹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내가 원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역시 틀리지 않았어. 베니고어 여신님 만만세.’ [준신화 등급의 물약, 빛 폭탄 물약의 조합에 성공합니다.] [마력 1이 올라갑니다.] [빛 폭탄 물약 - 준신화 등급] [빛의 연금술사 전용 소비 아이템-일일 사용량 제한(3/3)] [준신화 등급의 직업, 빛의 연금술사만이 연성할 수 있는 고유의 물약입니다. 베니고어 여신의 배려와 엘레나의 희생으로 인해 만들어진 이 물약은 사용자의 신성력을 주입한 직후 사용자의 적과 아군에게 반응하는 거대한 빛 폭발을 일으킵니다. 아군은 중상을 즉시 회복하게 되지만 적군은 폭발의 영향에 그대로 노출됩니다. 하루에 세 번 사용 가능한 물약입니다. P.S 쓰레기 같은 놈.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다. 나도 더 이상은 한계야.] 나이스! 나이스! 개꿀! 개꿀! “이기영 님, 된 것 같습니다. 해냈습니다. 저희가 해냈습니다!” “네. 저도 보고 있습니다. 엘레나 님.” “저, 정말로 이런 게… 이런 물건이….” “모든 게 전부 엘레나 님 덕분입니다.” “아닙니다. 이기영 님께서 이룩하신 결과물입니다. 네. 이 순수한 빛으로 둘러싸인 신성의 결정체는 이기영 님의 위업입니다.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정말….” “과찬입니다. 저 혼자였다면 이런 물건을 만들지 못했을 테니까요.” 나 역시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크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힘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녀석을 한 손에 들고 춤이라도 땡기고 싶었지만 일단은 물약을 품 안으로 집어넣는 것이 최선. 조금 더 자세히 그 영롱한 모습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여유가 없다. 물약의 내구도를 생각하면 단순한 충격으로 깨질 리는 없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이라는 게 존재하는 만큼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김현성이 선물해 준 무한의 가방, 이곳이라면 안심할 수 있다. 곧바로 놈을 쑤셔 넣고 몸을 움직이자 엘레나가 나를 붙잡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기분 좋아 보이네.’ 얼굴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흥분이 감돈다. 이미 세상이라도 구한 것 같은 표정. 심지어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언뜻 존경심이 서린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이해한다. 이해해.’ 준신화 등급. 물론 신화 등급에는 한 단계 떨어지나 이 물약은 엄연히 신화 등급의 언저리에 걸려 있다. 대륙에서는 엄연히 규격 외라고 부를 수 있는 물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단언컨대 화력은 내가 기대하는 것 이상이리라. 심지어 아군은 곧바로 중상에서 회복시켜 준단다. 조금 부족하기야 하겠지만 어쩌면 고위 사제의 신성력을 상회하는 성능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단점은 하루에 사용 한도가 정해져 있었다는 것. 베니고어가 막아놓은 것인지 아니면 규격 외의 물건이기 때문에 제한이 걸려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떻든 하등 상관없다. ‘적와 아군도 구분 가능하다는 건.’ 어떻게 봐도 이 물건은 소리를 지를 만하다. ‘가즈아! 베니고어 여신님 만만세다!’ 가장 어려운 미션을 넘었으니 이 다음은 사실상 식은 죽 먹기. 심장 쪽으로 들어가 내 품에 있는 녀석을 던지면 모든 게 해결된다. 밖에 있는 원정대원들도 해피하고 나 역시 해피한 상황. 이미 내 오염된 영혼은 치료가 완료 되어 있다. 더럽혀진 영혼을 다시금 정화한 새로운 힘을 얻은 빛기영의 위업에 모두들 입을 벌리게 되리라. 현재 이쪽이 처해 있는 상황이 제법 힘이 들기는 했지만 이후에 벌어질 훈훈한 결과물을 예상하자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물론 발걸음을 옮기기는 쉽지 않다. 아직도 밖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진행되는 도중. 아니, 솔직히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지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녀석이 단순히 혼자 지랄발광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니까. 어떻게든 밖에 상황을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무척 아쉬울 뿐이었다. ‘여기 상황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상황이 반전된 것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고 있을 때였다. 어디에선가 조금 익숙한 마력이 느껴진 것.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게 내 착각이 아니라면 이 반가운 기운은 그녀의 것이 맞다. ‘정하얀?’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물론 엘레나를 품에 안고 있다는 걸 깨달은 이후에는 깜짝 놀랐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아마 이해해 줄 것이다. 조금 불안한 면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내가 그녀를 안고 있다는 것보다는 내 생사를 확인했다는 것에 더 큰 의의를 두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자 역시나 익숙한 눈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아네모네의 눈.’ 확실히 원정대가 이곳에 당도한 것이다. 커다란 눈이 쫄랑쫄랑 나를 따라오는 것이 눈에 보인다. 살리트의 저항력을 뚫고 들어온 것으로도 모자라 내 위치를 정확하게 찾은 것은 소름이 돋을 지경. 물론 외부나 내부를 공격하는 마법은 아니었기 때문에 저항력 판정이 평소와 달랐겠지만 그래도 이런 마법을 선보인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정확히 아네모네의 눈 쪽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 역시 고개를 끄덕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를 확인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 ‘예상이 맞았네.’ 지금까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나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 게 들어맞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 이 사단이 난 것은 원정대원 때문 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도 맞았었다는 거네.’ 전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내가 그리 신경 쓰인 모양. 쓸데없는 마력을 사용할 시간에 좀 더 집중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도 든다. 이쪽이 원했던 대로 내 뜻을 외부의 인원이 받아들이기 더 편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대한 묶어놔. 심장 쪽으로 달릴 테니까.” “네?” “그리고 여기 말고 바깥쪽에 집중하고.” 분명히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 틀림없으리라. 하지만 아직까지 아네모네의 눈은 나를 따라오고 있는 상태. 아네모네의 눈을 바라보며 손짓하자 내 뜻을 알아차렸는지 곧바로 마력이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좋았어.’ 어느 정도 진행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뜻은 확실하게 전달했다. 녀석이 입는 충격이 이쪽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터. 하지만 사정 봐주면서 레이드를 진행시키기에는 적이 제법 강하다. 녀석의 내구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정하얀과 김현성의 공격 외의 다른 공격은 제대로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물리적인 충격을 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내부까지 공격이 닿지 않은 것이다. 덩치가 워낙 큰 만큼 현아의 칼질 역시 한계가 있는 상황일 터. 만약 끝장을 볼 수 있었다면 살리트는 벌써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으리라. ‘도와줘야 된다는 거네.’ 절대 마무리 일격이 탐나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아주 좋아.’ 정하얀에게 전달한 메시지가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확연히 움직임이 줄어든 느낌. 녀석의 움직임을 당장 억제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물리적 충격을 줄 수 있는 마법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더 움직이기 편해진 것은 당연지사. 그 모습에 엘레나가 입을 열어오기 시작했다. “이기영 님, 지금 혹시….” “네. 원정대 쪽에서 현재 저희 위치를 확인한 것 같습니다. 아마 조금 있으면 신호가 올 겁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정말로.” “하얀이가 저를 찾은 것 같습니다. 전투의 양상이 달라진 것을 보니 바깥쪽에서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 같고요.” “잘… 되었군요.” “빨리 움직이시죠. 아마 몇 분 이내로 신호가 올 겁니다.” “네… 네!” 다시 한번 육중한 충격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 잠깐 움찔하기는 했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무엇인가가 위에서부터 녀석을 누르는 압력이 느껴졌으니까. 발버둥 치는 것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놈은 확실히 어느 한구석에 고정되어 있다. 내부는 흔들리기는 하지만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얼마 안 남았어.’ 다리가 아프고 숨이 찬다. 하지만 막타를 향한 열정, 아니, 원정대원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다는 각오 때문인지 안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솟았다. 괜스레 그 동안 고생한 것 역시 떠오르기 시작. 물론 살리트에게는 고마운 점도 많다. 녀석 덕분에 얻은 게 결코 적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어둠이 빛을 삼키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 됐다. 아쉽지만 녀석과는 여기에서 결별할 시간. [살리트의 심장] 목적지에 당도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이정표. 거대한 심장이 세차게 움직이는 장면은 압도적이기는 했지만 당연히 멍하니 녀석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사실 지금까지 받았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무한의 가방에 들어있던 것을 손으로 집어든 것은 순식간. ‘네가 날 먹을 수 있을 알았어?’ 녀석이 소화시키기에는 빛기영이 가지고 있는 빛의 기운이 너무나도 찬란했던 것이 분명하리라. 새로 만든 빛 폭탄 물약에 신성력을 쏟아부은 것은 당연지사. 녀석이 내 손을 떠나자 순간 눈이 멀 정도의 찬란한 빛이 포션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시발….” 뭐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빛. 이 장면을 찍어 놓을 수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외침.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명대사였지만 꼭 한 번 외치고 싶어진다. “빛이 있으라!!” 빛기영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노라.’ 그 말 그대로. [달성할 수 없는 위업을 달성합니다.] [새로운 칭호가 생성됩니다.] # 365 회귀자 사용설명서 365화 빛기영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노라(3) ‘정말로 살아 있는 걸까….’ 이런 의문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계속해서 불길한 마음이 솟아나기 시작. 사실 이런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괴물이 마차를 한 입에 삼켜 버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엘룬 나이트들이 저지른 실수. 함께 온 인간들을 원망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입안에 쓴 맛이 감돈 것은 당연. 인간들에 비해 엘룬 나이트들이 너무나 유약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상황 판단은 물론 정신 상태까지. 특유의 오만함으로 무장한 엘룬 나이트들과는 다르게 이 인간들은 항상 침착하고 겸손하다. 실제로 겸손하다는 뜻이 아니다. 적의 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지언정, 이들은 결코 자만하지 않는다. 만약 이 인간과 엘프의 기본적인 스펙이 같다고 가정해도 나이트들과 그들의 차이는 결코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엘룬 나이트뿐만이 아니야.’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충분히 신경 쓸 수 있는 거리에 있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못했다. 그 압도적인 크기와 위용에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렸다.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괴물. 다시 한번 눈을 감고 녀석의 모습을 떠올려 봐도 다리가 덜덜 떨려올 정도. 다른 엘프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있는 이들은 다른 종류의 걱정 따위는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롯이 이기영이라는 인간의 생사. 그 거대한 괴물이 얼마나 커다랗고 어느 정도로 강한지에 대해서는 전해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사고의 충격으로 반쯤 정신을 놓은 것 같은 마법사나 완전히 입을 닫아버린 파란의 길드 마스터. 그리고 그를 지켜보고 있는 작은 암살자와 창을 든 여전사는 이해가 간다. 백번 양보해서 커다란 방패를 짊어진 전사까지 포함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직 경지에 닿았다고 말하기 힘든 이들의 얼굴도 공포로 일그러지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믿고 있는 거겠지.’ 그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 지는 뻔한 일. 자신보다 긴 검을 든 채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파란의 길드 마스터를 믿고 있는 것이리라. 실제로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전투는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 딱 그런 표현이 어울린다. 속도는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였고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거대한 악마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검으로 인간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지 말해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마치 전신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불안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원정대는 강하다. 단언하건데 이들이 상대하지 못하는 몬스터는 대륙 위에 찾아볼 수 없으리라. 하지만 상대도 상대 나름이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가정들이 떠올랐지만 이 괴물이 저 괴물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진입해도 승부를 점칠 수가 없는 상황. 체력적 페널티를 떠안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떠올리자 괜스레 고개가 저어졌다. ‘이런 페이스로 괜찮은 건가?’ 현재 원정대원들이 충분히 무리하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모두가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전투가 없어도 행군하기 어려운 지역을 악마들과 몸을 부딪치며 넘어왔다. 수없이 많은 전투를 지나 이곳에 도착한 여파로 몇몇 이는 이미 한계를 맞이한 상태. 이런 몸으로 그 악마를 상대한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엘리오스 님, 정말로 이대로 계속해서 진행해도 괜찮은 겁니까?” 생각에 빠졌을 때 마침 들려온 질문. 고개를 돌리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한 엘룬 나이트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 무리하게 원정을 진행하고 있는지 의심이 갑니다. 물론… 저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지금 이 상태라면 싸우기 전에 패배하는 전투가 될 겁니다.” “나도 알고 있다.” “외부에 지원요청을 하는 게 좋은 것은 아닌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고려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질문을 던져온 엘프는 공포에 질려 있다. 괜스레 씁쓸한 웃음이 지어졌다. 저 질문에 내면에 담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나온 웃음의 뜻을 눈치챘는지 얼굴이 붉어진 녀석이 보였다. 하지만 틀린 소리는 아니다. 상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괴물. 체력을 회복하지 않고 네임드 몬스터를 상대한다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자 창을 든 여자,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지사.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기 때문이다. “조혜진 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엘리오스 님.” “네.” “길드 마스터께서 던전의 끝에 가까워졌다고 판단. 지친 엘프분들은 이대로 휴식을 가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곳에서 잠깐 체력을 회복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본대는….” “본대는 계속해서 원정을 진행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파란의 한소라, 김창렬, 유아영은 이곳에 남아 엘프 여러분과 함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합니다. 길을 뚫어놓을 테니 이후 정리를 부탁드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심인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몸을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의 시야에 들어왔으니까.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던 마법사는 벌써 일어서 걸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다른 이들의 상황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에게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나 역시 같은 기분이다. 엘레나를 잃는다고 생각한다는 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다. 결국에는 입에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아니, 꼭 함께하고 싶습니다. 나이트 중에서도 체력의 여유가 있는 자가 있을 겁니다. 부족하지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엘리오스 님. 오히려 저희가 부탁드리고 싶었던 심정이라. 함께해 주신다고 하시니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감사하실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 곧바로….” “네.” 천천히 무장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당연.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한 일이었지만 신기하게도 효과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몸은 떨린다. 하지만 이번 일은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두려움이라고는 보이지 않은 인간들을 바라보니 아까의 생각이 더 확고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이동하던 원정대는 점점 더 속도를 높인다. 알 수 있다. ‘끝에 다다르고 있는 거야.’ 점점 더 안쪽으로 진입할수록 이전에 느꼈던 압박감이 계속해서 전신을 강타하기 시작.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몸이 먼저 거부감을 느끼는 감각은 익숙하지 않다. 다른 이들의 얼굴에도 점점 각오가 들어선다. 지금껏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김현성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숨조차 쉬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때였다. “쉼 호흡.” “네… 네.” “진입 준비합니다.” “네.” “정하얀 씨와 선희영 씨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겠습니다. 혜진 씨와 예리는 최대한 후위의 보호에 집중. 정연 씨는 하얀 씨를 최대한 보조해 주시고… 힘들겠지만 안기모 씨가 파티원의 전체적인 회복를 감당하시게 될 겁니다.” “저 혼자서 말입니까? 길드 마스터?” “네. 신성력의 대부분은 대미지와 버프 유지로 제한합니다. 전위에 부담이 가겠지만 덕구 씨는 최대한 개인 물약으로 버텨주시면 됩니다.” “알겠소.”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매뉴얼대로 몸을 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단 덕구 씨가 남는 것이 아니라 제가 마지막에 남습니다. 그리고.” “네.” “엘리오스 님 역시 전투의 주축을 담당하시게 될 겁니다. 분명히 효과가 있을 겁니다. 엘리오스 님이 가지고 있는 힘과 적의 힘은 상극에 가깝습니다. 두려운 건 알고 있습니다. 부끄러워하실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적 역시 엘리오스 님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계속 떠올리신다면 움직이기 편할 겁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 “진입합니다.”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동공 안으로 진입한다. 시야에 비친 것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장소. 뒤틀린 연못이라 전해 들었지만 바로 앞에 있는 것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호수에 가깝다. 그리고 그 호수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바로 세계수의 뿌리. 그리고 전에도 본 적 있는 흉측한 마수가 뿌리를 감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저 외관을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까. 전체적인 이미지는 뱀에 가깝다. 하지만 수만 개의 이빨이 달려 있는 입은 절대로 평범한 뱀이라고 할 수 없다. 마치 시체의 거죽을 뒤집어 쓴 것만 같은 외관. 녹지 않은 얼음 같은 눈이 동시에 자신을 응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알 수 없는 소름에 몸이 떨려온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방금 전 들었던 이야기를 되새기며 잡힌 검을 고쳐 잡는다. 거대한 두 개의 혀를 낼름거리지만 관심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는 모습은 가관. ‘싸울 가치도 없다는 건가….’ 마치 벌레를 보는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 벌레처럼 보이겠지.’ 저 압도적인 존재 앞에 인간이나 엘프는 마치 벌레처럼 보이리라. 그런 녀석의 눈이 경계태세에 들어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뒤 쪽에서 폭발적인 마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도, 돌, 돌려줘. 히끅. 돌려줘.” “…….”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전투 준비.” “내놔! 내놓으라구! 내놔! 내놔!” “진입.” 감히 측정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마력. 그 마력은 순식간에 마법이라는 형태로 변화를 시도한다. 캐스팅되는 것은 5개의 마법. 거대한 화염을 비롯한 자연계 마법들이 생성된 이후, 이형의 괴물에게 내리꽂히는 모습은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것 같은 이야기다. 땅이 갈라지고 폭음이 터져 나오는 것은 순식간. 검을 든 소녀는 당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곧바로 전투태세에 들어가는 모습은 전율스러울 정도. 그 와중에 마법은 결국 거대한 괴물에게 틀어 박혔고 놈을 바닥에 처박히게 했다. ‘말도 안 돼….’ 대미지가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물리적인 충격 때문인지 놈의 몸이 밀려나는 것이 확실히 눈에 보인다. ‘미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마법사를 중심으로 방진이 만들어지기 시작. 선희영이라는 이름의 사제가 기도를 드리자 곧바로 방진을 감싸는 투명한 막과 함께 사방에서 빛 무리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신성화.’ 고위사제 중에서도 쓸 수 있는 이가 얼마 없다고 알려져 있는 신성 마법. 벌레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였던 마수의 눈이 뒤바뀐다. 순식간에 몸을 일으킨 녀석이 곧바로 전방을 향해 쇄도하는 순간, 어디에선가 날아온 참격으로 인해 녀석이 고꾸라졌다. 시야에 비친 것은 검을 들고 있는 소녀. 파란의 길드 마스터이자 원정대의 리더. 교국 10강이자 신에게 선택받은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존재.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쓰레기 자식.”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 366 회귀자 사용설명서 366화 빛기영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노라 (4) “쓰레기 자식.” 분명 검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마수가 옆으로 고꾸라졌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 인간이 저 정도의 참격을 뿜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은 것은 당연하리라. 눈앞에 있는 마수는 과장해서 말한다면 거대한 언덕이요, 산이다. 그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 마수가 한 인간이 휘두른 검에 균형을 잃었다는 것은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서도 의구심이 남을 정도였다. 같은 길드원들 역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다른 설명은 필요 없으리라. 지금까지는 힘을 숨겼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허억. 허억. 허억….” 계속해서 거친 숨을 쉬고 있는 마법사와는 다르게 눈앞에 있는 검사는 흐트러짐이 없다. 잠깐 동안 주먹을 꽉 쥐게 된 것은 당연지사. 한낱 인간이 이 정도까지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전율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절로 존경심이 들어선 것은 당연지사. 그가 들어선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대미지가 없나.’ 공격을 받은 녀석이 멀쩡한 것이 문제. 아마 평범한 몬스터였다면 첫 번째 참격에 몸이 반으로 잘려나갔을 것이다. 아니, 첫 번째로 터져 나왔던 마법으로 이미 커다란 상처를 입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정도 공격으로도 녀석의 외피를 뚫어낼 수는 없었던 모양. 다시 한번 견제용 마법과 엘룬나이트들이 쏘아낸 화살이 날아들었나 커다란 효과가 있을 리 만무. 단순히 시간을 버는 게 고작이다. 물론 뒤에서는 예의 그 마법사가 다시금 캐스팅을 외우고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딱히 효과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화풀이로 마법을 쏘아대 봤자 외피에 물리적인 충격을 주는 것이 고작이리라. ‘이건 아니야.’ 어떻게 봐도 장기전으로 갈 확률이 높다고 할 수 있는 상황. 정하얀이라는 마법사가 자신의 출력을 감당하지 못한 채 리타이어한다면 팽팽하다고 할 수 있는 균형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현재 녀석의 외피에 상처를 줄 수 있는 수단은 그녀의 마법과 파란 길드마스터의 검.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이성을 잃은 것 같은 마법사의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안 돼.’ 소리를 치려고 했지만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켜 몸을 날려 온 마수 덕분에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거대한 방어막과 함께 거대한 방패를 든 사내에게 여러 가지 보조 마법이 내려와 꽂힌다. 이미 입안 한 가득 포션을 머금은 전사는 몸을 가릴 정도로 방패를 치켜든다. “덕구 씨! 보호 마법부터!” “거, 알고 있다니까! 걱정 마쇼, 형씨! 여기서 죽지는 않을 거라니까!” 콰직! 원정대원들을 지킨 방어 마법이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그 틈에 방패를 든 전사는 한 발자국 앞으로 들어가 마수의 머리를 빗겨 쳐낸다. 녀석의 경로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힘이 있다고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말 그대로 절정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기예. 혹여나 버틸 수 있는 힘이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하기는 했지만 때마침 날아든 마법이 힘을 보탠다. “정연 씨, 나이… 커헉!” “덕구 씨!” 만약 실수했다면 곧바로 전멸이었다. 황정연이라는 마법사가 마법을 쓴 타이밍과 방패를 빗긴 타이밍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다면 장담컨대 방패를 든 전사는 방금의 공격으로 피떡이 되어버렸으리라. 방어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패를 든 전사의 몸이 완전히 부서진 상황. 황급히 포션을 들이켠 동시에 전투사제의 회복 주문이 계속해서 날아 들어와 꽂힌다. 전위가 만들어 준 타이밍. 이후에 이성을 잃은 마법사의 마법이 들어와 꽂힐 거라 생각했지만…. “주문 취소. 하얀 씨는 기영 씨를… 찾습니다.” “아! 아! 아아! 네! 네!” 아직 완전히 이성을 잃지는 않은 모양. 캐스팅하고 있는 마법을 취소시킨 그녀를 확인한 순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법이 쏟아지지 않는다면 근접직군의 차례. 전위가 만들어 준 타이밍. 곧바로 달려 들어간 순간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는 버프들. ‘완벽해.’ 무기에는 희미하게 신성력이 서린다. 선희영이라는 사제의 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 나 역시 최대한 안에 있는 기운을 검에 몰아넣고 검을 내질렀지만… 공격이 들어간다는 감각이 없다. 압도적인 내구에 모든 공격이 막히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대미지를 입혔는지 입히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원하는 것은 장기전. 한 사람이라도 실수하면 전멸. 이 팽팽한 상황을 유도해 주고 있는 이가 바로 파란의 길드 마스터. 무척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간다. 원정대는 계속해서 녀석의 공격을 버티고 있었고 녀석 역시 참격과 마법을 계속해서 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상황. 불리한 것은 이쪽이었지만 그 절박함과 불안함이 완벽한 집중력을 끌어낸다. 아마 모두 나와 다르지 않은 상태이리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눈앞에 있는 마수를 마주하고 있는 규격외의 인간 같은 경우에는 홀로 다른 세상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 일종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법이 터져 나오고 검이 휘둘러진다. 보호막이 깨지는 동시에 회복 주문을 외우는 사제의 목소리가 들린다. ‘집중.’ “집중!!!” “할 수 있소. 조금만 더 집중!” 나 역시 마찬가지. 입술을 꽉 깨물고 부족하지만 검을 휘두른다. 아무리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두드리다 보면 결국에는 깨진다. 지금 이 일련의 과정은 떨어지는 물로 바위의 구멍을 내는 작업. 그 한 번을 위해 수십, 아니, 수백, 아니, 수천 번의 견고한 탑을 쌓는 과정. 무너지지 않게 계속해서 균형을 잡아가며 위태위태한 것을 계속해서 독려하며 그렇게 탑을 쌓는다. 적에 대한 두려움은 가라앉고 실수에 대한 압박감은 점차 사라진다. 혹시나 발을 헛디디더라도 뒤를 봐줄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걸 깨닫고 있기 때문이리라. 상황이 반전된 것은 바로 그때. “우, 움직임을 멈추게 해요.” “그게 무슨 소리요? 누님.” “오, 오빠가 말했어요. 오빠가… 분명히 말했어요. 최대한 묶어놓으라고. 심장 쪽으로 달리고 있다고.” “그게 참이요? 형님이 살아 있는 거요? 괘, 괜찮은 거요?” “네. 히끅. 살아 있어요. 멀쩡해요. 상처도 없이… 히끅. 흐어어어엉….” “기, 길드 마스터 형씨!” “이미 들었습니다. 작전을 변경. 최대한 녀석의 움직임을 묶어놓습니다.” “거 알았다니까! 다들 기운내쇼!” ‘이건….’ 반사적으로 마법사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여오는 모습이 보였다. 엘레나 역시 살아 있는 것이 분명. 저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진다. 희망을 버리지 않은 보람이 있다. 진심으로 그렇게 느껴졌다. 기뻐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지금껏 계속해서 굳은 표정을 유지했던 파란 길드 마스터 역시 어느덧 입가에 미소가 들어가 있다. 누가 봐도 안심하고 있는 표정. 살아 있다는 건 계속해서 들어서 알고 있었겠지만 직접적인 소식을 듣자 기쁜 기색을 숨기기 힘들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곧바로 작전의 내용을 바꾸는 것 역시 그 여파일 터. ‘위험할 수도 있어.’ 본래는 녀석의 갑옷에 금을 가게 한 이후에 내부로 화력을 밀어 넣는 상황을 염두에 뒀음이 틀림없다. 그렇게 하기 위한 장기전이었고 실제로 작전은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는 도중. 지금 와서 갑작스레 노선을 변경한다는 건 사실상 무리수에 가깝다. 하지만. ‘믿고 있는 거야.’ 이들은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 서로를 믿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고려하지 않고 임할 수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묶어줬으면 한다. 단지 그걸로 끝이다. 그 어떤 부연설명도 없었던 그 말에 원정대 전체가 노선을 변경했다. 길드 마스터도 마법사도, 다른 이들 역시 그 어떠한 이견 없이 곧바로 방향을 선회했다. 평소였다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했겠지만 이들과 함께 한 시간을 떠올리자. 자신 역시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 자리해 있는 이들이 이토록 신뢰를 보낼 정도의 인물이라면 분명히 무언가 방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고개를 끄덕인 채 몸을 날린다.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기 위해 최대한 검을 꽉 쥔다. “못에서 최대한 떨어뜨립니다.” “알겠소.” 거대한 마력이 다시 한번 터져 나온 것은 당연지사. 안에 있는 마력을 전부 끌어온 것 같은 모양새. 앞은 신경 쓰지 않는다. 혹여나 자신이 공격당하리라는 것도 고려하지 않는다. 최대한 녀석의 몸을 연못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창을 든 여전사와 단검을 든 소녀가 몸을 날린다. 녀석의 숨을 크게 들이 마신 것은 바로 그때. ‘브레스?’ 정확히 주문을 외우고 있는 마법사를 향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기운. 맨 처음 달려든 것은 방패를 든 남자. “위험합니다!!” 터져 나온 목소리에도 불구. 남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죽는 게 무섭지도 않은가!’ 전사의 몸이 녹아내리는 끔찍한 영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을 때,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파란 길드마스터가 녀석의 등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눈으로 가늠할 수 없는 속도. 사실 뭘 한 거지는 알 수도 없다. 하지만 목 부근에 갈라지며 피를 흘리고 있는 마수를 보며 그, 아니,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는 사실만 추측할 뿐이었다. 균형을 읽은 녀석의 입이 공중을 향하고 거대한 기운을 담은 브레스가 뿜었다. 동공의 천장이 무너지고. 파편들로부터 원정대원을 보호하기 위한 마법이 실현되고 동시에…. 마력으로 이루어진 쇠사슬이 녀석을 칭칭 묶어 나가기 시작했다. 촤르르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뻗어 나온 빛을 품은 쇠사슬은 말 그대로 마수의 몸을 꽉 잡아내고 쇠사슬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의 보조 마법과 바인드 마법들이 쏟아져 내렸다. 심지어는 근접직군들 역시 마력을 보내오고 있다. “이이이이이익!” 마법을 유지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판단이 서지 않는 상황. 잘못하면 지금 당장 쇠사슬이 끊어질 수도 있다. ‘얼마나 남은 거지?’ 초조한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혹시나 이번 일이 실패했을 경우에 일어난 일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믿어야 돼.’ 저들이 자신의 동료를 믿는 것처럼 이쪽 역시 저들을 믿는다. ‘엘룬이시여.’ “이이이이이이익!” ‘엘룬이시여!’ 기적을. ‘신이시여.’ 기적을!!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 거요! 조금만 더!” 기적을!!! “엘룬이시여!!!” 기적을!!!! “기적을!! 이들의 믿음과 숭고한 투쟁에 대한 보답을!!!” “이이이이익!” “엘룬이시여어어!!!!” 그리고. 세상이 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신께서 기도를 들어주신 건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엘룬의 이름을 외친 직후. 틀림없이 녀석의 안쪽에서부터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녀석의 상처 부위와 비늘을 사이로 계속해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마수는 계속해서 비명을 내지른다. 녀석이 울부짖음을 토해내는 아가리 속에서도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빛이 쏟아져 나온다. 감히 재단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거대한 신성력. 지금까지 얻은 상처들이 순식간에 아물어 간다. “말도 안 돼….” 다른 수식어가 필요할 리가 없다. ‘빛….’ 찬란한 빛 사이, 가슴속에 꽉 차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빛이… 있으라.” # 367 회귀자 사용설명서 367화 빛기영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노라(5) “빛이 있으라!!” ‘고맙다! 엘룬 쓰레기! 네 딸은 잘 받아간다!!’ [달성할 수 없는 위업을 달성합니다.] [새로운 칭호가 생성됩니다.] [빛의 성자] [마력이 1 올라갑니다.] ‘욜로!!!’ 감격하여 소리를 지를 뻔한 순간이었다. 절로 주먹이 꽉 쥐어진 것은 당연지사. 마력 능력치야 반쯤 포기하고 있었지만 이런 선물이 달갑지 않을 리가 없다. 빛의 성자 이기영. 신의 선물을 거절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베니고어 여신님의 마음을 제일 잘 헤아려주는 신도 중의 참 신도. 지금 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 같은 일은 바라보고 있자면 빛의 성자라는 칭호가 내려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마력 +1 적립이고요.’ 이 기세로 마력 60을 넘는 것 아닌가 하는 행복회로를 돌린 것도 잠시. 눈앞에 펼쳐지는 숭고한 광경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너무나도 환한 빛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해야 정상이건만 이상하게도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너무나도 눈에 잘 들어온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찬란한 광경에 엘레나 역시 멍한 표정으로 전방을 바라보는 중. 뻗어나간 빛은 나와 엘레나를 감싸고 녀석의 심장을 에워싼다. 화아아아악!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신성력. 아름답다는 단어조차 지금 이 광경을 서술해 주기에는 부족함이 있으리라. 엘룬 쓰레기가 딸을 내몰았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빛 폭탄에서 엘룬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야 엘레나를 촉매로 완성했으니 당연한 결과. 다시 한번 하늘 위의 쓰레기의 결단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어디까지 빛이 뻗어나가고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효과가 기대 이상이었다는 것. 밖이 아닌 안에서 터뜨렸기 때문에 더 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뻗어나간 빛들에 의해 갈라지고 있는 내부는 경이롭게 느껴질 정도. 설명은 길었지만 빛이 뻗어나간 시간은 찰나. 처음 목표물이라고 할 수 있었던 놈의 심장은 이미 빛으로 사라지고 있다. ‘크으으으으. 이게 빛의 힘이지! 아암 그렇고말고!’ [전설 등급의 던전, 뒤틀린 연못의 공략을 완료합니다.] [새로운 칭호가 생성됩니다.] [세계수의 수호자.] [마력 1 올라갑니다.] ‘마력 +2 적립! 얼쑤 지화자!’ 던전 공략은 방금의 마무리 일격으로 완전히 끝을 맺었다. 준신화 등급의 몬스터치고는 너무나도 허무한 결말. 그동안 제법 다리가 아프기는 했지만 빛의 영향 때문인지 그것마저 쌩쌩하게 느껴질 지경. 배고픔에 당장 업진살 생각이 나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로 열심히 챙겨먹은 덕분에 그다지 급하지도 않다. 연이어 들려온 행복한 소식에 저도 모르게 상태창을 열어본 것은 당연지사. 조금 오랜만에 열어본 것 같았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플레이어 이기영의 상태창과 재능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이기영] [칭호-용병여왕의 정부, 베니고어 신성제국의 명예추기경, 용의 배우자, 최초 발견자, 용을 실험한 연금술사, 대륙 수호자, 균열박물관 4등급 관리자, 막스의 보호자, 빛의 성자, 세계수의 수호자.] [나이-26] [성향-용의주도한 전략가] [직업-빛의 연금술사-준신화 등급] [직업효과-기초 마법 지식 습득] [직업효과-기초 연금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연금 지식 습득] [직업효과-특수 소환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연금 지식 습득] [직업효과-용전문 연금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25/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25/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30/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93/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25/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75/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53/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장비] [마력방패의 반지-희귀 등급]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영웅 등급-연금술사 전용] [저주를 내리는 검 율리에나-전설 등급-주인의식] [용 숨결 물약-전설 등급-소비 아이템(제한 없음)] [빛 폭탄 물약-준신화 등급-소비 아이템(1/3)] [특성-마음의 눈-전설 등급] [고유기벽-거짓말쟁이의 유혹] [총평-세#수의 신 엘# 이 ##### ##### 알 수 없는 이유로 총평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수의 신 엘 뭐시기는 또 뭐야?’ 마력이 무려 53. 전혀 성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꾸역꾸역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한가득 미소가 그려진 것은 당연. 제법 골치 아픈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다 못해 크게 한탕 했으니 행복회로가 풀가동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남은 문제는 무척이나 사소하다. ‘어떻게 등장하는 게 좋을까.’ 아무래도 제 발로 걸어 나가기에는 조금 민망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 많은 시간을 녀석의 안에서 보낸 만큼 구출되는 그림이 조금 더 적절하리라. 정하얀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가련한 레이디를 보호하는 이미지 메이킹을 추가하는 것도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때마침 느껴지는 외부의 충격에 살며시 그녀를 안으며 등을 돌린 것은 당연지사. 별일이야 없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고기 방패가 되어주겠다는 액션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이기영 님….” “전부 끝났습니다, 엘레나 님.” “정말… 정말로 끝났군요.” 시원섭섭하다는 얼굴이다. 체력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많이 지쳤는지 귀가 축 처져 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은 모양. 혹시나 이곳에서 조금 더 갇혀 있으면 좋을 텐데… 따위의 하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지만 엘레나는 정하얀이 아니다. 본인도 본인 나름대로 복잡한 감정을 숨기기 힘든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간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나야 뭐 어찌되든 상관없긴 하다. 물론 곁에 두면 유리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일국의 공주가 한낱 길드원이 된다는 사실 자체는 왕국 쪽에서도 달갑지 않게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면 당연히 머리가 아플 만한 타이밍. 나 역시 잠깐 동안 고민되었지만 생각에 오래 빠져 있기엔 힘들었다. 외부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마치 동굴에 빛이 들어오는 것처럼 위에서 빛이 흘러 들어온다. 커다란 동공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은 내가 만든 빛보다는 못 했지만 나름 봐줄 만 했다. ‘상쾌하네.’ 흘러 들어오는 공기 역시 맑게 느껴진 것은 당연지사. 사실 별 다른 차이가 없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악마의 안보다는 무조건 쾌적할 것이다. 나와는 다르게 엘레나가 크게 숨을 들이 마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안에 있었던 시간이 무척이나 답답했던 것이리라. “오빠! 오빠! 오빠!” 역시나 처음 들려온 목소리는 정하얀의 것. 목소리가 들리는 위를 바라보자마자 점프하듯 뛰어내리는 정하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엘레나를 잡고 있던 손을 놓은 이후에 정하얀을 받아들었다. 근력 수치가 제법 올랐다고 생각했지만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든 그녀를 받아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모양. 받아든 동시에 곧바로 넘어져 버렸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흐어어어어엉.” 당연하지만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웃게 만든 시간보다 울게 만든 시간이 더 많았던 것은 아닌가에 대해 자기반성을 한 것도 잠시. 꽉 껴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으니 어느새 히끅거리는 목소리만 들려오기 시작했다. 살짝 고개를 돌리니 엘레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인다. 혹시라도 난리를 치지 않을까, 걱정하긴 했지만 타고난 성정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히끅. 히끅.” “걱정 많이 했지?” “네….”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으니 조금씩 진정하는 듯했다. 평소였다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광을 했겠지만 최근 성장했는지 몸을 비키는 것이 보였다. 물론 내가 일어서자 곧바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만큼 조금 귀찮은 정도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부유 마법으로 천천히 공중으로 몸이 떠오르자 자연스레 살리트의 안을 벗어나게 된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엘리오스 및 엘프들과 파란의 길드원. 박덕구는 엉망이 된 얼굴로 벌써부터 눈물을 일발 장전하고 있었고 선희영 역시 눈물을 훔치고 있다. 그 외도 다르지 않다. 황정연이나 김예리, 조혜진도 반가운 표정. 안기모야 말할 필요도 없다. 병아리들 같은 경우에는 전투에서 빠진 듯 보였는데 무척 적절한 조치였다고 생각했다. 사실 파란 길드원들의 반응보다 더 신경 쓰였던 것은 엘프 쪽의 반응이었다. 헐레벌떡 뛰어와 엘레나를 품에 안고 그녀의 안위를 살피는 와중에도 나를 귀신 보듯 쳐다보는 모습은 어떻게 봐도 재미있다. ‘밖에서도 보였나 보네.’ 틀림없이 엘룬 쓰레기의 힘을 느낀 것이 분명. 마치 신성한 것을 대하듯 약간의 거리마저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가관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걸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들어온 것은 덕구 녀석의 목소리와 길드원들의 격려 타임. 제법 뻔한 시간이었지만 당연히 기분은 좋다. 뒤이어 들어온 한소라와 김창렬, 유아영도 마찬가지. 너무나도 한꺼번에 많은 질문이 들어온 덕분에 대답하기도 쉽지 않을 지경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어색한 웃음만 짓고 있을 때였다. “기영 씨.” “아. 길드 마스터.” 아직까지 변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김현성, 아니, 김현아. 왠지 모르게 김현성이라는 말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뭔가 복잡한 표정을 담은 녀석의 얼굴을 보자 왠지 모르게 울컥한다. ‘걱정했구나, 이 새끼. 걱정 마라. 형은 멀쩡하다.’ 마치 죽어가던 아기 새가 살아나는 기적을 목도한 어미 새의 표정. 뭐라고 말을 이으려고 하지만 자꾸만 목이 메는지 입가에 맴도는 말을 집어넣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래… 인마. 형 살아 있다.’ “저….” “하하하. 뭐 이렇게 살아 있게 됐습니다.” “…….”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덕분에….” “아니… 저….” “자세한 설명은 복귀하면서 드리겠습니다. 저도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아 저 사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이야기해 봐야죠. 조금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찾아와 주실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현성 씨.” “그러니까….” “감사합니다.” “아뇨. 감사할 일이….”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유야 어떻게 됐든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무사하게 됐으니까요. 아, 그리고 오염된 영혼의 치료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드려야 할 것 같은데….” “…….” ‘진짜 엄청 걱정했나 보네.’ 딱 눈에 보이는 표정이 그렇다. 정하얀이나 박덕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느낌. 이미 펑펑 울고 있는 둘과 다르게 눈물만 흘리지 않았을 뿐이지 표정은 똑같다. 정말로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자 긴장이 풀린 것이 틀림없으리라. 최근 꽤 다채로운 얼굴을 봤다고 생각했었지만 정말로 울기 직전까지 내몰린 얼굴을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온몸에 덕지덕지 흙이 묻어 있는 모양새는 가관. 그걸 털어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자꾸만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 뭔가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아직도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잠깐 크게 숨을 쉰 이후에 입을 연 것은 당연. ‘다녀왔습니다.’ 따위의 3류 일본 만화에서나 튀어나올 명대사를 외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내가 직접 입 밖으로 내뱉기에는 오글거리는 면이 있다. “그러니까… 음. 이렇게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하하.” 이 정도로도 충분. 녀석이 나를 꽉 껴안아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시바, 깜짝이야. 이 새끼 이거 왜이래?’ 뜨거운 남자의 포옹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 본인도 모르게 몸이 움직인 것 같았지만 문제는 녀석의 현재 신체가 남자가 아니라는 데 있다. 신장 차이도 있다 보니 오히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양새. 괜스레 주변이 신경 쓰인다. 정하얀은 애써 이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지만 이런 가십을 좋아하는 황정연은 탄성을 내지르는 중. 물론 그 이후에 들려온 목소리에는 나도 녀석의 어깨를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정말로… 무사해서… 다… 다행입니다.” 거짓 하나 없는 진심처럼 느껴졌다는 것 정도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거다. 현성아! 그거야!’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 368 회귀자 사용설명서 368화 쉬어 가는 유니콘(1) 상황이 대충 정리되기가 무섭게 박덕구가 입을 열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행군 내내 입을 쉬지 않고 있는 중. 여느 때의 파란 길드와 같다. 문제는 녀석이 조금 시끄러웠다는 것뿐이었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소. 우리 형님은 사막에 혼자 떨어져도 살아남을 사람이라니까. 크으… 사실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불안하다. 불안하다. 했을 때도 나는 눈 하나 깜빡 안 했다니까! 당연히 살아 있을 줄 알았지. 우리 형님이 어디 보통 사람이요? 거, 무사히 있는 걸로 모자나 그놈의 심장을 박살 낼 줄이야. 크으.” “운이 좋았지. 예전에 디아루기아에 대해 조금 알아봤던 게 도움이 됐을 뿐이야. 여러 가지 도움도 있었고….” “역시나 같은 파충류라서 내부 구조가 같았던 거요?” “그런 건 아니지만….” 만약 디아루기아가 박덕구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틀림없이 이를 갈았으리라. ‘아니. 아예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지….’ 잠깐 동안 속으로 녀석을 힐난하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다. 디아루기아 본인이야 굉장히 기분 나빠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이야기. 사실 파충류라기보다는 상위의 존재의 구조라고 생각한 것이 내 개인적인 추론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 아직 확정된 이야기도 아니었고 나도 다른 존재들의 신체를 탐험해 본 적이 없으니 무어라 확답을 내릴 수가 없는 만큼, 어쩌면 박덕구의 개소리가 개소리가 아닐 확률도 존재한다. 둘의 구조가 비슷한 게 이세계 파충류라는 커다란 틀에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거다. 만약 살리트와 디아루기아가 일말의 공통점이 없었다면 심장으로 도달하는 시간이 더욱더 길어졌을 터. ‘그렇게 생각해 보면….’ 정말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그뿐만이 아니지. 몸도 회복하고 세계수도 치료하는 걸로 모자라 새로운 위업을 달성한 거 아니요? 형님한테 흘러나오는 빛의 기운에 욕심이 생기거나 위협을 느낀 게 틀림없다니까. 그러니까 냉큼 물어가 버린 거지. 아. 그러고 보니… 이제 정말로 몸은 이제 괜찮은 거요?” 다음 질문에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닌 엘레나. 애초에 박덕구가 주시하고 있는 대상이 내가 아니니 그녀가 대답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네. 물론 아직까지는 완벽하게 치료가 됐다 확답을 드리기가 힘들지만 적어도… 영혼의 오염으로 인한 신체의 붕괴를 걱정할 시기는 지났다고 봅니다.” “오! 그게 정말이요?” “네. 틀림없습니다. 다만 앞으로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는 치료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아암. 전문가가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아무튼 간에 거… 모쪼록 잘 부탁합니다.” “잘, 잘,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고, 고마워요. 엘레나 공주님.” “아… 닙니다, 정하얀 님. 이건 제게 주어진 일이니까요.” 말을 더듬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정하얀을 보니 뭔가 양심 한구석이 찔리는지 귀가 축 내려가 있는 엘레나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사실 양심이 찔리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 정하얀이 저런 반응을 보여줄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장 중요시 하는 게 내 안전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표시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아예 적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네모네의 눈으로 나와 그녀가 찰싹 달라붙어 있는 걸 목격했었으니 당연히 보여줄 수 있는 반응. 그녀를 흘겨보기도 했고 나를 억지로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기도 했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내가 그녀에게 가까이 가지 않기를 표현한 것이다.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는 눈치가 빠른 만큼 엘레나가 미묘한 반응을 보이는 것 역시 눈치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하얀이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박수를 보낼 만했다. 최근에 연달아 일어난 사건이 얼마나 그녀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는지 알려주는 대목. 본의는 아니었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메소드 연기를 수백 번 넘게 보여준 것이 유효했다. 현재의 엘레나가 내가 완벽히 치료된 사실에 대해 입을 열 리가 없다. 어떻게든 숨기고 함께 있으려고 할 거라는 거다. 빛 폭탄 물약의 물자 조달은 어느 정도 안심. 정하얀의 반응도 그레이트. 이 귀환 길은 어떻게 봐도 승자의 귀환길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현성이와의 뜨거운 우정도 확인했고.’ 왠지 모르게 미묘한 엘프들의 존경을 얻어내는 것에도 성공했다. 새로운 직업에 걸맞은 능력을 얻었고 제일 머리 아픈 정하얀의 문제마저 무난해지고 있다. 어떻게 생각해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맞으리라. 그중에서도 가장 최고라고 꼽을 수 있었던 것은 김현성이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확인했다는 것. 개선 길 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을 경계하며 나를 중심으로 방진을 짜주고 있는 모습을 보면 더욱더 그렇게 느껴진다. 혹시나 전과 같은 상황이 일어났을 때 자신이 손을 쓸 수 있는 거리에 나를 자리 잡아 놓은 것 같다.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아무 생각 없이 옆에 찰싹 달라붙어 걷고 있었지만 그녀를 제외한 다른 길드원들은 길드 마스터의 특명으로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엘프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구태여 다른 말이 필요할 리가 없다. 물론 분위기가 그리 무겁지는 않다. 박덕구는 계속해서 이것저것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고, 조혜진의 입가에도 묘한 웃음이 들어서 있다. 힘든 원정을 마친 유아영, 한소라, 김창렬 역시 어딘가 조금은 풀어진 표정. 어디까지나 본인의 맡은 바 임무를 괄시하지 않았기에 터치를 받지 않는 것뿐이다. 풀어줄 때 풀어주고 조여줄 때 조여 줘야 한다는 것은 김현아도 알고 있는 사실. 지금 이 상황에서 녀석이 길드원들을 조이는 것은 나에게도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슬슬 요정의 숲이네.’ 이미 던전 안을 벗어났으니 사실상 위협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김현성 마저 애매하게 잡고 있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고 그렇게 다시 한번 즐거운 분위기가 원정대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 형씨는 언제까지 김현아 버전으로 있는 거요?” “김현아가 아니라 길드 마스터입니다, 덕구 씨.” “아… 혜진 누님은 너무 딱딱해서 탈이라니까.” “무례….” “아니요. 괜찮습니다, 혜진 씨. 악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아마 곧 벗어나게 될 겁니다. 아무래도 뒤틀린 연못이 요정의 숲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터라 장소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효과가 끝날 때가 됐으니 아마 곧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엘리오스 님?” “아… 네. 요정의 숲을 벗어나면 금방 원래대로 돌아오실 겁니다. 그나저나 묘하게 조용한 것 같습니다. 곧바로 요정들이 몰려들 줄 알았는데….” “거,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런 거 아니요? 전부 다 그쪽으로 몰린 게….” “요정의 숲은 철저히 통제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예상보다 던전을 일찍 빠져나오기도 했고… 마중 나올 엘프들도 아직 소식을 전해 듣지는 못했을 겁니다. 먼저 간 레인저들도 아직 왕궁에 도착하지 못했을 거고요.” “으음….” “어….” 당연히 귀찮은 녀석들은 튀어나오지 않았으면 싶다.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녀석들에게 시달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니 기분이 좋은 것이 사실. 더 이상 돌멩이를 맞지 않아도 되는 한소라는 대놓고 웃음 짓고 있었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으리라. ‘이거 혹시….’ 뭔 일 난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솟아난 것은 당연. 완전히 외부와 단절하고 있었던 지난 10일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이지혜를 비롯한 실권자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나 공화국과의 일이나 협상이 잘못됐을 경우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올 지경. 김현아나 조혜진도 비슷한 걸 생각하고 있는지 인상을 굳히고 있었지만 이윽고 들려온 소리에는 조금 안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 저기….” 이윽고 한 무리에 요정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 심지어 저번에 만난 숫자보다 많다. “아… 안 돼.”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는지 한소라가 중얼거렸지만 주변을 가득 메운 요정들의 숫자를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점점 모여들고 있는 중. 요정들에게 맞는 돌멩이가 고통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귀엽다고 할 수 있는 아이들에게 매도당하는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분명. 한소라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만약 한소라에게도 귀가 달려 있었다면 지금쯤 축 쳐져 있을 것이 분명하리라. “저번보다 많은 것 같은데….” “이건… 하하.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인가 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엘프 양반.” “유니콘인 것 같습니다.” “네?” “요정들이 저 정도로 모여 있는 걸 보면 아마 유니콘이 틀림없을 겁니다. 간혹 요정의 숲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볼 수 있을 줄은….” “그게 정말이요? 거 유니콘인지 뭔지 하는 게 진짜로 있는 거요?” “덕구 아저씨는 바보. 드래곤도 있는 곳인데… 유니콘도 있다고 이상 할 건 없지.” “아 그, 그렇구만.” 김예리와 엘리오스에게 말에 눈이 크게 떠진 것은 박덕구뿐만이 아니다. 한소라에게 돌팔매질을 감행하는 요정들을 기다리고 있던 나 역시 눈을 커다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눈에 마력을 집중하니 확실히 말 같은 형체가 보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하얀색으로 빛나는 것은 물론 이마에 기다란 뿔을 달고 있는 것은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 동물의 것이 맞다. ‘진짜야.’ [유니콘 라리사-전설 등급] [요정의 숲 어딘가에 서식하고 있는 전설 등급의 몬스터입니다.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수의 잎과 세계수의 연못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순결하고 순수한 사람에게 커다란 호의를 느낍니다.] [전설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 유니콘 라리사의 상태창을 확인합니다.] [이름-라리사] [칭호-요정의 숲의 신수] [나이-3,473] [성향-순결한 이상주의자] [분류-유니콘] [능력치] [근력-94/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민첩-104/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체력-100/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지력-99/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내구-82/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행운-112/성장 한계치 전설 이하] [마력-99/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총평-해치지 마라.] 원정대가 있는 쪽을 바라본 이후에는 잠깐 동안 깜짝 놀란 것 같지만 해를 끼칠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 판단한 모양인지 신경 쓰지 않은 모습. 오히려 흥미가 동한 것인지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까지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들 입을 벌리고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솔직히 나 같은 경우엔 다른 것들이 눈에 더 들어온다. ‘저게 다 얼마야….’ 아니, 돈이 문제가 아니다. 신성력을 담은 것 같은 찬란한 갈기. 어떻게 봐도 저건 촉매 그 자체나 다름없다. 꼬리나 털, 가죽, 심지어는 눈물이나 혈액까지. 머리 위에 달려 있는 뿔을 조금만 긁는다면 준신화 등급의 촉매로의 정제도 가능할 것 같다. 침이 꿀꺽 넘어가는 반응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달려가 토벌해 버리고 싶은 심정. 하지만 분위기를 보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신수로 분류할 수 있는 동물, 심지어 이쪽에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하니 어떻게 손을 대기가 힘들다. 세계수의 연못을 마시고 살아간다 했으니 커다란 문제를 해결해 준 우리에게 호감을 느끼는 모양. 디아루기아 수준의 지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 정도의 상황 판단은 가능한 것 같았다. “엘레나, 한번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 “네? 오라버님… 저….” “다가가도 되는 거요? 엘프 양반?” “하하. 유니콘과 관련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아마 문제는 없을 겁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전해 듣기로는 유니콘은 순결한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 처녀를 좋아한다는 그… 전설 같은 걸 말하는 거요?” “성별은 관계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할아버님께서도 어릴 때 유니콘의 등 위에 올라 탄 적이 있다고 말씀하신 걸 들은 적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순결하고 순수하다는 것 역시 어떻게 해석하기 나름이라… 정확히 유니콘이 좋아하는 이가 어떤 이들인지는 아직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애초 유니콘을 실제로 본 이는 손에 꼽을 만큼 적으니까요.” “아아아아. 뭐, 그런 거구만.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은데? 크으… 형님이라도 보고 뛰어오는 거 아니요?” ‘절대 그럴 일 없다. 이 돼지 새끼야.’ 장담컨대 저 뿔에 박히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유니콘의 등장에 파란 길드원 일동은 왠지 긴장한 것 같은 느낌. 그 와중에 엘리오스는 계속해서 자신의 여동생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엘레나, 어서 가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하하.” “아뇨. 오라버님, 저는….” “하하하.” 엘프의 얼굴에 점점 당황스러움이 들어서고 있었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 369 회귀자 사용설명서 369화 쉬어가는 유니콘(2) 점점 더 구겨지는 얼굴. 살짝살짝 뒷걸음질치고 있지만 엘리오스에겐 엘레나의 묘한 행동이 보이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표정이다. 저 유니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가 자신의 여동생이라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저, 저는….” 엘레나가 머뭇거리는 와중에도 유니콘은 이쪽으로 다가왔다. 처음에 신기하게만 쳐다봤던 박덕구 역시 점점 더 유니콘이 가까이 다가서자 당황했는데 괜스레 입을 한 번 더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크으. 거 정말로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거 안전한 거요? 갑자기 공격하거나 막 그러는 거 아니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슬쩍 김현성을 바라보는 박덕구의 모습이 보인 것은 당연지사. 엘리오스의 말을 듣고 판단하겠다기보다는 김현성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네. 괜찮을 것 같습니다.” 김현성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보기에도 적의가 없는 만큼 원정대는 녀석을 굳이 제지하거나 막지 않았다. 하지만 김현아 같은 경우에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한 대비는 하고 싶은 모양. 슬쩍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니 내가 자신의 안정거리 안에 있는 게 좋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파란의 길드원들은 뭔가 반응들을 보여주고 있다. 왠지 모르게 정하얀은 그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왜 저래?’ 내가 알기로 정하얀은 남자친구를 사귄 적은 물론 관련된 적조차 없다. 물론 내가 그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정하얀의 행동을 유추해 봤을 때, 굳이 유니콘을 통해 순수를 증명할 필요조차 없다. 아니, 애초에 그런 걸 증명한다고 해도 그 어떤 메리트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현재는 현재, 정하얀이 과거 연애사에 대해서는 지금의 내가 굳이 신경 쓸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근데 이거….’ 하지만 문득 한 생각이 뇌리에 꽂히기 시작. 내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의 정하얀의 행동이 괜스레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혹시….’ 그동안 내가 자고 있을 때마다 엄한 짓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같은 망상을 한 적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망상에 불과. 정말로 정하얀이 뭔가를 하고 있을 거라고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정하얀이 권한 술을 많이 먹고 잔 날이면 기가 빨리는 듯했지만 그렇게까지 막장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나를 힐끔 힐끔 보는 정하얀을 보니 그 가정이 사실이 아닐까에 대한 의혹이 들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순간적으로 내가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바로 옆에 있던 정하얀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다시 한번 순수를 증명해야 한다고 날뛰지 않을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쪽에서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본인이 먼저 위풍당당하게 첫 걸음을 떼기 시작. 본인의 입장에선 순수를 증명하기 위한 행동, 당연히 얼굴은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유, 유, 유니콘이네요.” 말투도 부자연스럽다. 오히려 생각 없이 이쪽에 다가온 유니콘이 더 놀란 것 같다. 조용히 정하얀을 살피는 모습은 뭐라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말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녀석은 지금 틀림없이…. ‘고민하고 있어.’ 이걸 세이프로 쳐야 될지 말아야 할지 무척이나 고민하는 듯하다. 순수를 증명하는 데 무슨 고민의 여지가 있는 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유니콘 라리사는 틀림없이 일생일대의 고민을 펼치고 있었다. 그럴수록 정하얀은 더욱더 당당한 표정. 자신은 아무 거리낌 없다는 듯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몇 번이나 정하얀의 근처를 살피며 그녀를 유심히 살핀 유니콘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하얀의 앞에 자신의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마치 쓰다듬어 달라는 느낌. 정하얀의 얼굴이 단박에 밝아졌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귀, 귀여워라…. 귀여워라. 이거 봐요. 오빠! 이거 봐요!” “아아… 응. 보여.” 보고는 있지만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본인은 본인의 순수를 증명해 기쁘기만 한 모양. 물론 나도 괜스레 안심이 되긴 한다. 내 망상이 망상에 불과했다는 게 밝혀진 셈. 어째서 유니콘이 일생일대의 고민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직접적인 사랑 나눔은 없었다. ‘그래. 그렇게 막장일 리가 없지.’ 물론 상상하기 싫은 선택지가 하나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렇게 막장일 리는 없어.’ 우리 정하얀이 그렇게까지 막장일리는 없다. 괜스레 고개를 저으며 전방을 바라보자 내친김에 녀석의 등을 타려 하는 정하얀이 보였지만 그건 내키지 않는지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긴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착하지. 착하지이.” “…….” “유니콘 차, 착하지? 이리 와야지.” 조금 당황했는지 유니콘을 부르기는 했지만 한 번 등을 돌린 녀석은 다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하얀의 얼굴에 언뜻 아쉬움이 스쳐 지나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했다고 생각했는지 한껏 미소 지으며 돌아왔다. 마치 개선장군 같은 모양새. 순수 증명 퀘스트를 완료했다고 느끼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유, 유니콘이 많이 힘든가 봐요. 헤헤.” “응. 그래 보이더라.” 본인이 만족하는 만큼 정하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것으로 마무리. 하지만 내 눈은 다음 유니콘의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 녀석이 정말 이 원정대에 호의적이라는 걸 확인한 만큼 녀석이 누구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박덕구와 황정연을 지나치고 엘룬 나이트들을 지난 녀석이 자리한 곳은 다름 아닌 조혜진의 앞. ‘…….’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어진 조혜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쟤도 연애 잘할 것 같은 이미지는 아니었지.’ “이건 다릅니다. 저는… 그….” 방금 전 정하얀보다 수백 배는 당황한다. “저, 저는 연애 경험도 풍부하고…아니 풍부하지는 않은데… 그러니까 이건….”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가관. 손사래를 쳐야 할지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야 조혜진의 나이를 생각하면 연애 한 번 못 해봤다는 게 부끄럽게 느껴질 만도 하다. 하지만 본인이 부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김현성에게는 가볍게 보이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뭔가 적당한 합의점을 찾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것 따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고자에 가까운 조혜진은 오히려 입을 열면 열수록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여, 연애 같은 건 많이 해봤습니다. 하지만 제가 혼전순결주의자라… 네! 혼전순결주의자라! 그, 그렇다고는 해도 경험이 없었던 건 아니고… 아니 경험이 있기는 있는데 없다고 해야 할지….” ‘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유니콘은 순수한 사람도 굉장히 좋아한다고 들었으니까요.” “네. 그, 그렇습니다. 제가 좀 순수해서… 그러니까 이건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자폭하지 마….’ 심지어 더 불쌍했던 것은 김현성이 조혜진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내 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 이것저것 변명만 선보이고 있건만 막상 내님은 관심도 없는 상황이라는 거다. 조혜진만큼 슬픈 상황도 흔치 않을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조혜진이 당황하든 말든 유니콘은 친근한 기색을 내보이며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에 자신의 목을 부비는 중, 그녀의 얼굴이 다시 한번 붉어졌다는 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심지어 저러다 치욕사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차라리 확 잡아버려라.’ 마침 조혜진은 창잡이이니 기마술을 배워두면 써먹을 때가 있으리라. 물론 빛의 성자 이기영은 언제든지 유니콘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오, 그래 그거야.’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하얀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 마치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모습은 아까와는 차이가 있다. 누가 보기에도 기회라고 할 만하건만 조혜진은 아직도 붉어진 얼굴을 가다듬기에 여념이 없다. 만약 내가 그녀였다면 무작정 유니콘의 등 위로 올라가고 봤을 것이다. 다시 한번 유니콘이 일어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은 그때. 제법 다급한 표정으로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몸을 옮긴다. 혹시나 유니콘에게마저 선택받는 것은 아닌가, 기분이 좋아진 것은 당연. 하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때 마침 근처에 있는 엘리오스는 괜스레 엘레나의 등을 떠민다. 올라타기에 실패했던 정하얀 역시 혹시나 다시 자신에게 오는 것이 아닌가, 기대하는 표정을 선보였다. 하지만 먼저 시동을 건 것은 엘프 남매. “엘레나, 한번 쓰다듬어 보려무나.” “아… 네… 네.” 반신반의 하는 표정으로 손을 뻗어 보건만 엘레나를 가볍게 지나친 녀석의 모습은 가관. “풉.” 하는 소리와 함께 정하얀의 입에서 승자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 생각보다 가벼운 사람이었나 봐요, 오빠. 그, 그렇죠?” “아… 응….” “오, 오빠도 조심하셔야 돼요. 치료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순수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 모르니까….” 심지어 작게 귓속말을 해온다. 가볍게 엘레나를 모함하고 있었지만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내 쪽에서 뭔가 액션을 보일 수 있을 리 만무. 무언가 충격 받은 것 같은 엘리오스의 표정을 뒤로한 채 정하얀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녀석은 선희영과 김예리에게도 작은 호의를 보였고 유아영과 한소라는 가볍게 지나쳤다. 김창렬을 비롯한 파란의 남자 단원들이나 엘룬 나이트들에게도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은 걸 보니 이곳에 있는 남자들 중 순수한 놈은 없는 모양. 혹시 정말 나에게도 기회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언뜻 마주친 녀석의 눈빛을 읽은 뒤로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 가까이 안 간다, 이 새끼야. 더러워서 안 가.’ 한참을 배회하던 녀석이 자리한 곳은. “아….”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앞. “…….” 김현성은 당황하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천천히 웃음 지으며 녀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는 걸로 끝. “귀여운 녀석이군요. 하하.” 심지어 등을 툭툭 치기까지 한다. 정하얀의 얼굴에는 묘한 패배감이 감돌고 애초에 비교 대상조차도 아니었던 엘레나는 아직까지도 당황스러운 표정. 엘리오스와 함께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나는 저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원정대원들은 어느새 김현성의 앞에 있는 유니콘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녀석은 기분 좋은 듯 가볍게 몸을 털기 시작했다. “올라타도 된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거, 형님이 한번 올라타 보쇼. 아니면 혜진 누님이 올라타시든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만 저 위에 타면 좋은 거 아니요?” “글쎄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혜진씨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만… 혜진 씨는 기마술에도 익숙하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아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기연이라고 할 수도 있건만 조혜진은 무척이나 난감하다는 표정. 그야 저런 걸 타고 전장에 등장한다면 틀림없이 수치사 할 것이 분명하다. 적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반면 놀림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등에 탄다고 해서 유니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시도라도 해보는 게 좋을 겁니다. 혜진 씨, 어서요.” “아니 저는… 그러니까.” 계속해서 미소 지으며 조혜진의 등을 떠미는 녀석의 모습은 가관. 심지어 그 한마디에 그녀의 등을 떠미는 쪽으로 여론이 형성된다. 박덕구는 계속해서 올라타기를 종용하고 있었고 안기모와 다른 여성길드원, 심지어는 엘룬나이트들도 어서 올라가보라는 듯 그녀를 재촉한다. 점점 더 얼굴이 붉어지는 조혜진의 모습에 내가 다 눈물이 나올 지경.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런 게… 분명히 거절 당할 겁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래도 한번 시도해 보는 게 좋은 거 아니요?” “분명히 거, 거절 당할 겁니다.” 아쉽지만 그럴 확률은 제로에 수렴. 시간이 조금 지나자 박덕구는 대놓고 그녀의 등을 떠밀었고 결국 조혜진은 울상을 지은 채 유니콘의 위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뭔가 거부반응을 보일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유니콘은 오히려 기쁘다는 듯 투레질을 하고 있다. 둘의 몸이 잠깐 동안 밝게 빛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바로 그때. “오오오오오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박수를 보내는 원정대원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얼굴을 붉히고 있는 조혜진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플레이어 조혜진이 새로운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칭호-완전무결의 순결한 처녀] [칭호-유니콘의 주인] 조혜진 나이 어느덧 26세. 기연이라면 기연이었지만 본인은 전혀 기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 370 회귀자 사용설명서 370화 운수 좋은 날(1)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 “…….”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무어라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지만. 왕성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혼자 변명하고 있는 조혜진의 모습은 뭔가 짠해 보일 정도였다. 자신의 완전무결한 순수함을 외면하기 위한 그녀의 행동은 어찌 보면 사실 조금은 슬퍼 보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걸어가면 차라리 낫겠지만, 본인이 저렇게 제발을 저려주니 이쪽에서 뭔가 반응을 보여주기가 어렵다. 물론 이해는 간다. 존경스럽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엘룬 나이트들의 눈빛을 견디기 힘든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쪽을 향해 확실히 말을 걸어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본인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 정도는 들려온다. ‘대단한 인간입니다.’ ‘완전무결한 순결함. 존경할 만한 인간인 것 같습니다.’ ‘유니콘의 선택을 받다니….’ 따위의 중얼거림. 내가 들었던 것은 조혜진이 듣지 못할 리가 없다. “하… 하하.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운이,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정말 특이하기도 하죠. 지, 지구에 있었을 때는 인기도 제법 많았으니까요.” ‘거짓말.’ 물론 외관은 충분히 예쁘다고 할 수 있지만 단언컨대 조혜진에게 먼저 다가간 남성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이 유니콘이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할 겁니다. 네. 틀림없이요.” 하지만 칭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칭호-완전무결의 순결한 처녀] 도대체 저 완전무결의 타이틀은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 조혜진 인생에 김현성을 제외하고 이성과의 접전이 없다시피 한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니 그녀가 조금 측은해 보였다. 지구에 있을 때도… 대륙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 심지어 둔감한 김현성은 자신이 조혜진과 썸을 타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느낌이다. 머리가 백발이 돼서도 유니콘 위에 앉아 있는 조혜진의 모습이 곧바로 떠오른다. ‘불쌍해….’ 물론 그녀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연애박사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박덕구는 어째서 조혜진이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미 눈치챘는지 조용히 말을 걸어오고 있는 중. 사실 녀석의 조언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혜진이 완전무결의 순결함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것이 맞다. “거, 부끄러운 일이 아니요.” “…….” “물론 다른 사람보다는 조금 느리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라니까. 누구한테나 다 짝이 있다는 거요.” “그러니까 저는… 그런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상담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니까.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자신 있소. 형님도 마찬가지고. 그렇지 않소? 형님?” “물론입니다. 친구 좋다는 게 뭡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네. 평범하게 지냈습니다. 평범하게요….” “거 그렇게 변명할 필요 없다니까. 혜진 누님한테 문제가 있는 게 아니요. 이건 누구나 다 겪을 수 있는 일이라. 일단은 받아들이는 게 첫 번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소. 계속해서 회피하다가는 정말로 연애하기 힘들어 질 거요. 이것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의 연장인데… 너무 자신한테만 채찍질 하는 것도 안 좋은 버릇이라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니까.” ‘이 새끼 정말인가. 생각보다 진지한데.’ “딱 보면 척이라니까? 정말이요. 자기 눈을 조금 낮추는 것도 방법이 될 수도 있고… 아, 그리고 무엇보다 혜진 누님은 그 동안 엄청 바쁘게 지냈던 거 아니요. 시간이 부족했던 게 당연하지.” “네…. 확실히 시간은 부족했지만.” 항상 김현성과 붙어 다녔던 걸 생각해 보면 결코 시간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은 뭐 하기 힘들지만 언제 시간이 날 때 이야기하면 적절히 코치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니까. 형님도 같이해 줄 거요. 그렇지 않소?” 사실 무슨 코치를 해야 할지는 감이 잡히지 않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혜진의 뒤를 따라오는 유니콘을 생각하면 일단 말이라도 이렇게 해 놓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촉매가 필요한 나야 조혜진이 완전무결 어쩌구를 유지하면 기분이 좋은 것이 사실. 만약 정말로 김현성과 그녀가 연애라도 하는 날에는 저 유니콘이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이지.’ 친구한테는 미안하지만 한 7년에서 10년 정도는 독수공방하며 지내줬으면 좋겠다. 저 유니콘에게서 뽕을 뽑을 수 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덕구 씨의 말이 맞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중에 한번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영 씨의 이야기도요….” “거, 잘 생각했소.” “정말로 잘 생각하신 겁니다.”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건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천추의 한. 기분이 좀 꾸리꾸리 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그냥 꽁으로 얻은 것 같은 기분인데….’ 물론 내가 유니콘을 얻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길드원 건데… 내 거나 다름없지 뭐.’ 니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 어떻게 생각해도 소리를 지를 만한 상황이다. 뿔 달린 말은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런 건 내 알 바가 아니다. 빛의 연금술사로 전직하고 나서 첫 번째로 얻은 물건이 빛 폭탄 물약. 앞으로 두세 개의 포션이 개발 가능해진다 가정하고, 그 물약의 성능 역시 빛 폭탄에 뒤지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면 준신화 등급이라는 직업에 어울리는 힘을 얻었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부족한 마력으로 창질이나 하고 지냈던 지난 시간이 떠오른다. 내가 줄을 제대로 섰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물론 나만 기쁜 것이 아니다. 원정대원들에게도 이번 원정대의 입장에서 봐도 이번 원정은 대 성공이나 다름이 없다. 일단은 살리트의 사체. 나로서는 가공이 불가능한 물건이지만 파란 길드에는 나 말고도 생산직이 한 명 더 있다. ‘유아영.’ 녀석의 외피는 김현성이나 정하얀의 공격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다. 물론 마력과 뒤틀린 연못에 영향을 받고 있어 상향 판정을 받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단단했던 외피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박덕구와 유아영을 풀 무장 시킬 수 있는 것은 물론 녀석의 뼈로 무기의 가공도 가능하다는 거다. 가장 큰 성과인 이기영의 치료는 두 말할 것도 없고 동맹국의 완벽한 신뢰도 얻어냈다. 피해는 사망한 엘룬 나이트 둘. 가슴 아프기는 하지만 이쪽과는 별다른 접전이 없는 녀석의 죽음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소를 희생해 대를 얻었다고 봐도 된다. ‘아암. 그렇고말고.’ 그것뿐인가. 던전에 들어와 있는 동안 자신을 혹사시켜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씩 성장한 모습들이 보인다. 유아영, 한소라, 김창렬이 성장 측면에서는 이득을 많이 봤지만 기존 파란 길드원들도 다르지는 않다. 무난했던 안기모는 조금 더 무난해졌고 애초에 재능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김예리의 경우에는 한 번 더 벽을 뛰어 넘었다. ‘조혜진은 뭐, 말할 필요도 없지.’ 선희영이야 가만히 놔둬도 혼자 무럭무럭 자라나 있고 박덕구의 스펙업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이야기다. 김현성은…. [플레이어 김현성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김현성] [칭호-알타누스의 회귀자, 이 회 차를 시작하는 검사, 이겨내지 못한 자, 희생을 등에 업은 자. 깨달은 자. 검의 축복을 받은 검사. 정상을 오르고 있는 무인. 대륙 수호자. 듀렌달의 주인. 세계수의 수호자.] [나이-23] [성향-선의의 중재자] [직업-검의 좌-고유 전설 등급] [직업효과-기초 검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검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검술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마력운용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95/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민첩-103/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체력-101/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지력-75/성장 한계치 영웅 이하] [내구-95/성장 한계치 영웅 이하] [행운-99/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97/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특성] [특성-신-전설 등급] [특성-검-전설 등급] [특성-합-전설 등급] [특성-일-전설 등급] [장비] [마법 저항의 망토-영웅 등급] [발망의 촘촘한 마력갑옷-전설 등급] [세레나의 민첩한 바람장화-전설 등급] [12기사단의 검-듀렌달-신화 등급] [총평-뒤통수치지 마라. 진짜 뒤통수치지 마라. 정말 뒤통수치면 나 죽고 너 죽는 거다. 한 번 경고했다. 절대로 뒤통수치지 마라.] ‘키야… 든든하네.’ 안 본 사이에 더욱더 성장한 모습이 눈에 띈다. ‘직업은 언제 바뀌었데?’ 분명히 기존 직업은 전설 등급이었던 걸로 기억. 잠깐 체크 안 한 사이에 고유 전설 등급을 얻은 것을 보니 확실히 성취가 있기는 있는 것 같았다. 본래 영웅 등급이었던 검술전문가는 사라지고 그곳에 자리 잡은 것은 전설 등급의 특성 4개. 평범한 플레이어가 하나의 전설 특성도 가지기 힘들다는 걸 고려해 보면 충분히 박수를 보낼 만하다. 능력치는 또 어떠한가. 말이 필요 없는 민첩 104, 체력은 101, 그 외 다른 능력치도 절대 낮은 것이 아니다. ‘봉인은 아직 못 푼 건가….’ 듀렌달이라는 신화 등급의 검을 아직 살리지 못하는 것 같다. 저 검은 충분히 명검. 애초에 김현성은 순수한 검사를 지향하는 만큼 상태창 자체가 굉장히 담백하다. 여러 가지 복잡한 것 없이도 충분히 강자라는 거다. 녀석이 가지고 있는 경험이나 시스템으로 판단이 불가능한 검술을 생각해 보면 본래의 상태창보다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많다고 봐도 무방하다. 만약 언젠가 저 12기사단의 봉인을 푼다면 어쩌면 단신으로 살리트를 상대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능력치가 더 성장해야겠지만. ‘알타누스 베니고어 버프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차희라가 김현성보다 더 강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 적은 있었지만 확실히 이렇게까지 성장하니 지력을 최대한으로 깍은 차희라와 비벼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 시작. 누가 더 강하냐 같은 가십에 관심은 없지만 어찌됐든 가장 든든한 이들이 이쪽의 아군이라는 사실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완벽한 원정. 살짝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본래의 성별으로 되돌아온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 저거 끝났네.’ 위험한 발상이지만 이상하게도 왠지 모르게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돌아왔군요.” “축하해, 오빠.” “고맙구나, 예리야.” “축하드립니다. 길드 마스터.” “감사합니다, 혜진 씨.” 얻은 건 많고 잃은 건 적다. 설렁탕이라도 사들고 집으로 복귀하는 기분. 너무나도 좋은 운수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계속해서 피어오르기는 했지만 겨우 열흘하고 며칠이 지난 시점에서 바깥이 개판이 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기쁜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벅차다. 저 멀리서 먼저 튀어나갔던 레인저가 허겁지겁 뛰어오는 것이 눈에 보인 것은 바로 그때. “잠시 대기합니다.” ‘제기랄.’ 항상 그렇듯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뭔 일 터진 거 아니야?’ 본래는 레인저가 아니라 원정대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이들이 마중 나왔어야 했다. 단신으로 뛰어오는 엘프의 얼굴은 어떻게 봐도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다친 것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까지 계속해서 쉬지 않고 뛰어온 모양. 그만큼 빠르게 전해야 할 소식이 있는 것이다. 제발 별것 아닌 소식이었으면 하는 기도를 했지만, 점점 더 녀석이 가까워질수록 내 희망 사항이 무너지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저거… 무슨 일이라도 난 거 아니요? 왜 갑자기.” 역시 운수 좋은 날에는 안 좋은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무슨 일입니까?” 입을 연 것은 엘리오스. 한참이나 숨을 헐떡거리던 전령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후우… 전쟁. 전쟁입니다.” “시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 371 회귀자 사용설명서 371화     운수 좋은 날(2)     ‘왠지 모르게 불안하더라니….’ 사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확률을 낮게 잡았을 뿐이지.’ 거의 일어나지 않은 일 정도로 분류했었다는 거다. 공화국의 극단적인 선택은 자충수가 될 수 있었기 때문. 어디까지나 명분은 우리 측에 있었다. 국제관계가 중요하지 않은 듯 중요한 대륙의 현 상황에서 악마 소환사 진청을 두둔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물론 모든 나라가 교국이나 라이오스, 또는 몇몇 이종족처럼 악마에 민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무리수지.’ 신을 등진다는 건 적어도 대륙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다. 물론 백번 양보해 공화국의 악마 무리가 그런 방향으로 자신들의 노선을 결정했다고 해도 여전히 의문점은 존재한다. 전쟁이란 건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준비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적어도 내가 공화국의 지도자의 입장에 있었다면 조금 더 길게 보고 움직였으리라. 그게 맞다. 물론 공화국이 예전부터 이번 전쟁의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아니지. 그래도 무리수인 건 마찬가지야.’ 생각해 보면 교국 8좌의 천관위와 위란이 공화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이야기한 적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상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전쟁 시나리오를 들이밀 타이밍은 아니었다. 절대로 녀석들은 먼저 방아쇠를 당길 수 없다. 두 집단의 힘의 크기가 비슷하다고 가정하면 더욱더. 만약, 아주 만약에 놈들이 먼저 방아쇠를 당긴다고 한다면 이유는 두 가지. 아니, 세 가지 정도. 정신이 나갔거나 이길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전쟁이 필요한 상황이거나. 내부의 위협을 외부로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고 별다른 피해 없이 교국을 삼킬 자신이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꼭 저쪽에서 먼저 터뜨렸다는 보장도 없다. 전쟁이 어떻게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전해 듣지 못한 것이 사실. 하지만 불편한 상황이 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왕국연합 쪽도 신경 쓰이고….’ 교국이 혁명사상을 전파하는 걸 위험하게 생각하는 몇몇 나라 역시 공화국에 협력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공화국이나 교국이나 왕정을 선택하지 않다는 건 마찬가지지만 피의 혁명으로 이루어진 교국과는 다르게 공화국은 황제에서 총통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뿐이었으니까. 각국의 지도자들은 여신의 거울로 일궈낸 민중의 승리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고 있었을 수도 있다. 생각하면 끝이 없다.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밀려들어오는 잡생각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이 당연. 물론 나만 머리가 아픈 것은 아니다. ‘저거….’ 김현성 역시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쟁이 나면 안 되는 건가. 아니면 시기가 빨랐던 건가.’ 1회 차의 현 시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한 것은 당연지사. 심지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 유리한 건지 불리한 건지 알 수조차 없다. 단지 예상할 뿐이다. 현재의 김현성이 보여주고 있는 표정은 전쟁을 반기는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1회 차의 가면쓰레기 진청을 골로 보낼 수 있는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확실히 마찰을 반기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당장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김현성을 회귀하게 된 이유가 적어도 공화국 때문이나 1회 차 가면쓰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 현재 녀석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전력 손실이다. 1회 차에서 있었던 미지의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병력의 손실. 만약 멀지 않은 미래에 정말로 커다란 사건이 터진다고 가정한다면 인간들끼리 치고 박고 물고 뜯고 있는 것이 반갑지 않은 게 당연하리라. 김현성은 물론이고 베니고어나 엘룬쓰레기도 입을 열어오지 않고 있는 상황. ‘보안 등급이라도 걸려 있는 거야 뭐야. 아니면 나한테도 말할 수 없는 건가?’ 혹여나 가면쓰레기가 미지의 세력 편에 붙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일 만도 하다. 이거나 저거나 제대로 알 수 없는 건 투성이였으니 머리가 아픈 것이 당연했다. 제대로 된 노선을 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발단에 대해서는 아직 듣지 못했지만 이미 일은 터졌다. 문제는 이 전쟁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냐는 것. ‘말리기라도 해야 되는 건가?’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으로 전쟁을 한다면 이 전쟁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전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만약 교국이 승리한다고 해도 커다란 피해를 떠안게 되리라. 당장 눈앞에 일을 해결한다고 해도 이후에 닥칠 일을 제대로 대비할 수 없게 된다는 거다. 침묵이 내려앉은 장내에 천천히 입을 뗄 수밖에 없었다. “현성 씨. 이거….”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감이 잡히지 않아서.” “일… 단은 서둘러 왕국으로 돌아가 상황을 살펴야 될 것 같습니다.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브리핑을 받아야 하니까요. 혹시 에베리아 왕국도 영향 안에 있습니까?” 질문에 대답한 것은 엘프 전령. 알고 있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은지 불안한 목소리로 말을 해오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렇지 않습니다만 현재 병력이 왕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아마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교국과 라이오스로 향하는 지원 병력을 고립시키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맞네.’ 세계수의 마력이 유지되고 있는 이상 병력을 무식하게 들이밀 수는 없을 것이다. 원하는 것은 에베리아 왕국의 고립. 병력만이 아니라 보급 역시 차단하려고 함이 틀림없으리라. “교국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네, 명예추기경님. 교국은….” “네.” “현재 다완 쪽의 전선은 이미 무너졌고 캐슬락은 적 병력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라고 들었습니다.” ‘시발. 생각보다 심각한데….’ 이미 다완 전선이 무너졌다는 것만 해도 충격적인 소식이다. 캐슬락까지 함락되면 린델까지는 쭉 밀리게 될 것은 분명한 일. 린델까지 밀리면 수도도 금방이다. 애초에 다완 전선이 무너졌다는 건 라이오스 측의 상황도 그리 운이 좋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아….’ 심지어 상황이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기까지 하다. “최대한 빠르게 복귀하겠습니다.” “네.” 김현성의 말에 동의한 길드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서둘러 발을 옮긴 것은 당연지사. 잠시 풀어졌던 긴장이 다시금 확 들어선 기분이었다. 에베리아의 왕궁에 가까이 들어서자 확실히 몇몇 전황이 보인다. 많은 병력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 몇몇 이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감돈다. 아직 에베리아 전선 쪽에서는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태. 나 역시 곧 저들과 같은 표정을 짓게 될 것이다. 계속해서 왕성이 가까워지자 병사들과 경비병들이 시선을 보낸다. 간단한 절차 후에는 인사를 건네기 모습. 엘프 측의 지휘관 몇몇이 엘리오스와 김현성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나마 조금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몇몇이 보이고 있었다는 것.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한 무리가 시야에 잡히기 시작했다. 똑바로 눈을 뜨고 쳐다봐도 여기에 자리 잡고 있는 이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야 당연할 것이다. 종족자체가 달랐으니까. ‘드워프?’ 확실히 드워프가 맞다. 어떻게 봐도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외관, 짧은 키에 얼굴을 가리는 커다란 수염, 어딘가에서 읽었던 묘사 그대로였다. 제법 높은 위치에 있는 녀석인지 무장 상태도 좋은 느낌. 갑작스레 등장한 녀석에 김현성과 엘리오스도 당황한 듯한 얼굴이었다. 의아해하고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원정대원 전체가 웅성거리는 것이 들려온다.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됐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너무 순식간에 여러 가지의 일이 생겨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가 끄덕여지기는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녀석이 여기에 있다는 건 안 좋은 소식은 아니었으니까. “오랜만입니다, 볼고르 님.” “엘리오스. 반갑군. 이렇게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원정은 성과가 있었나?” “네. 다행히 무사히 끝났습니다만…. 볼고르 님이 이곳에 있다는 것 혹시….” “우리도 힘을 보태기로 결정했다네.” “불행 중 다행이로군요.” “인간의 연설에 감동을 받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하하. 그러고 보니 중요한 손님이 있었군. 만나서 반갑소. 파란 길드 마스터. 그리고 교국의 명예추기경. 볼고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군.” “만나서 반갑습니다. 볼고르 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네?” “작은 인간 여자에게 들었던 그대로군. 그동안 고생 많았네.” ‘이건 또 뭔 소리야.’ “아. 그러고 보니….” “네.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 어째서 여러분이 저희와 함께해 주시게 된 것인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5일 전에 왕국으로 인간들이 찾아왔다네. 그리고 국왕 폐하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 엘프나 그 인간 여자가 폐하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야기가 잘 풀렸다네. 나 역시 감명 받기도 했고… 그게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지.” ‘좋네.’ 그저 가만히 당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삼국동맹 측에서도 뭔가 움직임이 있었던 것. 현재 어느 정도로 성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덩치를 키우는 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왠지 모르게 이 일을 누가 주도했는지 알 것 같다. 작은 인간 여자라고 한다면 생각나는 이는 한 사람밖에 없다. ‘이지혜?’ 라이오스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모양이다. 드워프와 대화를 나누며 계속해서 고개를 돌리자 확실히 검은백조의 길드 문양을 박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아마 지금쯤 내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자세한 내막을 알아야겠다고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김현성과 엘리오스, 드워프 볼고르에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정황을 듣는 거야 해야 할 일이지만 기왕이면 조금 더 자세하게 듣고 싶다. “현성 씨.” “네.” “잠깐 따로 알아봐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가서 말씀을 듣고 계시면 이후 찾아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의아하다는 표정이었지만 김현성은 잠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왔다. 회의실에 모두가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네. 알겠습니다, 기영 씨. 다른 분들께서도 숙소로 돌아가 재정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영 씨는 장비 수리와 개인 보급품 확충을. 다른 분들은 휴식이 필요하시다면 편하게 계셔도 좋습니다. 이후 노선이나 현 상황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시간을 내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덕구 씨, 희영 씨, 혜진 씨는 저와 함께 갑니다.” “네. 길드 마스터.” “거, 알겠소. 이쪽은 걱정 말고 잘 다녀오쇼.”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네.” “하얀아.” “네. 오빠.” “잠깐 먼저 들어가서 눈이라도 붙이고 있어. 아직 몸이 전부 회복되지 않았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바로 찾아갈게.” 대답은 듣지 않았다. 뭔가 떨떠름해 보이기는 했지만 정하얀도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도 크게 소비했고 기본적으로 몸이 약한 만큼 체력적 한계를 맞았으리라.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현재로서는 몸을 회복시키는 게 최우선 사항이다. 이윽고 김현성은 엘레나와 엘리오스를 비롯한 이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고 길드원들 역시 본인에게 주어진 일을 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정하얀을 제외한 이들의 얼굴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감돈다. 전쟁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알고 있기 때문에 보일 수 있는 표정. 인간과 몬스터는 다르다. 그동안 인간들과의 전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현 상황에서는 그 누구라도 불안한 기색을 내비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리에서 혼자 떨어진 이후에야 한 명의 검은백조 길드원이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 “명예추기경님, 잠깐….” “네. 안내해 주셔도 됩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뻔할 뻔자. ‘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이지혜가 있는 곳으로다. # 372 회귀자 사용설명서 372화 운수 좋은 날(3) “마중 못 나가서 미안해요. 할 일이 워낙 많아서요.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어서 보고서 작성이 늦어졌거든요. 사실 하루에 일어난 일을 다 정리하기도 바빠요. 뭐 무사할 거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생각보다 더 쌩쌩한데요?” “칭찬이지?” “물론이죠.” 검은백조 길드원의 안내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지혜가 곧바로 자리를 일으키며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오랜만에 본 것 같은 기분에 반가움이 생기기는 했지만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겉모습은 그대로. 작은 키와 나이에 맞지 않게 어려보이는 외관도 여전하다. 최근에 잠을 잘 못 잔 모양인지 조금 쾡 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신을 부여잡고 있는 것을 보니 최악 중의 최악은 면한 것 같았다. “일단 앉아계세요. 차 한 잔 타드릴 테니까. 그나저나 정말 놀라셨겠네요.” “당연하지. 혹시나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게 정말로 이렇게 터질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도대체 이게… 아니, 그전에 누나는 왜 여기 있는 거야?” “여기가 제일 안전한 것 같으니까 여기 있는 거 아니겠어요?” “…….” “…….” ‘얘는 진짜 쓰레기네.’ 너무나도 당당한 표정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것은 당연지사. 본래 이지혜가 쓰레기 같다곤 생각했지만 내가 생각보다 행동이 더 재빨랐기 때문이다. 다완 쪽이나 캐슬락, 혹은 라이오스에 있는 것보다는 여기에 있는 게 안전한 것이 당연하다. 기본적으로 세계수라는 방어체계가 깔려 있고 최소한 직접적인 위협은 없으니 가장 안전한 곳을 꼽으라면 여기가 맞다. 내가 놀란 것은 그녀가 지나치게 당당했다는 것.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얼굴은 빛기영의 시선으로 봐도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뭐예요. 그 표정은. 실례라고요. 이런 곳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경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물리적 충격도 저한테는 최소 치명상이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 줘야 한다고요. 솔직히 오빠였어도 헐레벌떡 이쪽으로 뛰어왔을걸요.” ‘부정할 수 없지만….’ “지금 속으로는 동의한 거 맞죠?” 순간적으로 뜨끔하기는 했지만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은 당연. 이때다 싶어 입을 열어오는 이지혜의 얼굴이 다시금 시야에 비쳤다. “뭐, 사실 정말로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에요. 적어도 할 일은 있었으니까. 오는 길에 드워프들 봤으면 어째서 제가 여기 있는지 대충 아시겠네요.” “아. 맞네. 걔네들은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눈물로 호소했어요.” “…….” “라이오스 사건 때 돌아다니던 영상이랑 그동안 오빠가 힘들어 했던 것들 편집해서 보여주면서 눈물로 호소한 게 유효했죠. 드워프는 단순하거든요. 정도 많고. 물론 정말로 이유가 그것밖에 없었던 건 아니었겠지만 아마 본인들이 얻을 이득이나 이권 같은 것보다는 눈물의 호소가 먹혀들었을 걸요. 어때요. 이것도 꽤나 명연설이었는데 한번 볼래요?” “아니…. 괜찮아.”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여기 있어야 오빠랑 빨리 만나지 않겠어요? 딱딱한 상황실에서 전달받는 것보다는 이렇게 듣는 게 편하잖아요. 으음. 어디에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감이 안 오는데… 어디서부터 듣는 게 편해요?” “그야 물론 처음부터.” 내 말이 끝난 직후 이지혜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뭔가 생각할 게 있을 때 보이는 제스처. 괜스레 내 모습이 오버랩되기는 했지만 일단은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가 입을 연 것은 약 3분 정도가 지난 이후. 계속해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왠지 모르게 기분 좋게 들려온다. 하지만 이지혜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반갑지만은 않았다. “처음은 다완이었어요. 사실 이 부분은 조금 의견이 분분하기는 한데, 교국이 먼저냐 공화국이 먼저냐가 중요 쟁점이겠죠. 당연히 저희 입장에서는 저들이 먼저 들어온 게 맞고요. 걔들 입장에서는 이쪽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주장 중이죠. 아무튼 간에 거기서 일어났던 작은 마찰이 조금 커졌고… 그게 빵 하고 터진 게 전부예요.” “딱히 선전포고는 없었던 건가?” “그 이후에 있었어요. 다완 전선에서 죽은 이들을 걸고 넘어졌지만 사상자가 있었던 건 저희 쪽도 마찬가지였었거든요. 어떻게 봐도 먼저 시비를 걸어온 거나 다름없죠. 그것도 다분히 의도적으로요. 다른 조건이나 배상에 대한 이야기도 없었어요. 그날 밤에 곧바로 병력으로 밀고 들어왔거든요. 저쪽에서도 계속해서 준비하고 있었다고 봐야죠? 물론 기습에는 대비할 수 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수일 만에 다완 전선을 뒤로 물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 이후에는 바로 위에 있는 캐슬락 쪽에도 영향을 미쳤고….” “…….” “캐슬락이 현재 고립되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대충은. 하지만 이렇게까지 상황이 안 좋아질 수도 있나?” “마도 왕국을 비롯한 몇몇 왕국이 반대쪽에서도 밀고 들어왔거든요. 그사이에 캐슬락은 고립됐고 지금까지 오게 된 거예요. 저희 쪽에서도 캐슬락은 버릴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니까. 지원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공화국 연합 측에서는 엘프 왕국을 압박하기로 결정한 거고….” “그래서 누나가 드워프들을 설득시키기 위한 특사로 파견된 거구나.” “네. 비슷해요. 캐슬락 쪽에서도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텨주고는 있지만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그 누구라도 알고 있을 걸요. 교국과 라이오스 측에서도 최대한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캐슬락 쪽이 위험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오빠 일행이 딱 맞게 도착한 셈이네요. 안 그래도 밀어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시점이었거든요.” “…….” “저희 목적은 캐슬락에 지원 병력을 보내는 거예요. 적어도 10일 안에. 만약 실패한다면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거예요. 캐슬락을 잃으면 린델까지는 또 금방이고.” “린델까지 닿으면 수도까지는 또 금방.” “그렇죠. 또 궁금한 거 있어요?” “왕국연합 쪽은 전부 돌아선 건지가 궁금한데.” “아니요. 마도왕국을 비롯한 주축 왕국 몇 개. 물론 정확하지는 않아요. 추측하기로는 그쪽도 반으로 갈라진 걸로 예상하고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게 많나요.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거지.” “사실이라면 불행 중 다행이라고 봐도 되는 거겠네?” “물론이죠. 사실 왕국 연합 쪽이 참전한 이유가 궁금하기는 한데… 교국 측에서는 혁명사상의 전파를 경계하는 걸로 판단하고 있어요. 바로 옆나라에서 그런 게 터졌는데 내부적으로 문제가 없었을 리가 없으니까. 안 그래도 근질근질했을 거예요. 마침 공화국이 터져주니 이때다 싶어서 달려든 느낌도 있고.” “나도 그렇게 보여, 누나. 그 외에 다른 이유가 맞물려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고 봐야지. 악마소환사 쓰레기 진청을 계속해서 품고 있을 만하네. 어차피 전쟁을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다면 굳이 큰 손해를 보면서 쳐낼 이유가 없지. 공화국이 흑마법사에 민감한 것도 아니고….” “뭐, 그렇죠? 아무튼 간에 이건 보고서예요. 방금처럼 약식으로 설명한 게 아니라 조금 더 자세히 써져 있을 거예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웬만한 정보는 다 들어가 있겠네요. 그거 한 번….” “아, 누나 궁금한 거 하나 더.” “물어보세요.” “캐슬락에 누가 있지?” “카스가노 유노.” “그리고?” “캐슬락 백작, 아니, 지금은 의원이죠. 저희 길드 마스터도 캐슬락에 있어요. 같은 교국 8좌의 천관위도 캐슬락에 있고. 당장 무너질 상황은 아니에요. 스쿼드가 그리 나쁘지는 않으니까. 최소한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봐야죠.” ‘나쁘지는 않네.’ 무녀 카스가노 유노, 안개 소환사 천관위, 개개인의 무력이 압도적이라고 말하기에는 힘든 이들이었지만 이들 역시 교국 8좌에 랭크되어 있는 이들이다. 특히나 수성전에 특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스쿼드. 캐슬락이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버티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이지혜가 전해준 보고서를 정독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 자세한 경과를 읽어보니 조금 더 당황스러워 진다. ‘전쟁을 하고 싶었다고 봐야 하네.’ 다완 전선에서의 마찰은 애초에 계획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든 명분을 쥐어 짜내기 위해서 꼬투리를 잡은 듯한 느낌. 아마 이 시점에서는 이미 마도왕국과 이야기가 되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패가 더 좋다고 생각해 카드를 뒤집은 셈. 앞전에 내가 예상한 것이 조금은 들어맞았다. 물론 전쟁의 발단이나 배경에 대해 때려 맞췄다고 해서 기뻐할 수 있을 리 만무. 현재 더 중요한 것은 발단보다는 정황이다. 때마침 눈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지도. 병력의 상황까지 기재되어 있는 미니맵 느낌의 지도였다. “누나, 이건….” “아. 이것도 보여드려야겠네요. 이게 가장 최신으로 업데이트된 지도예요. 병력의 상황도 가장 최신이고요.” “그렇게 최악이라고는 볼 수 없네.” “그나마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봐야겠죠.” 그 말대로, 상상했던 것만큼 막장인 상황은 아니다. 크게 보면 다완전선이 밀리고 캐슬락이 고립된 것은 맞지만 소소하게 이득을 챙기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두 개의 전선을 제외하면 동부 전선도 나쁘지 않았고 심지어 서부 전선은 밀고 있는 형국. 적들의 보급로를 끊을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불편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처음 들었던 상황에 비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교국이 그렇게 무능하지는 않지.’ 핵심은 에베리아 왕국의 병력과 보급을 캐슬락 쪽으로 가지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 이 보급로가 자리 잡는다면 앞으로의 상황을 이끌어가는 게 커다란 도움이 된다. 이종족 연합의 병력을 합류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어린애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었다. 어떻게 봐도 뚫어내느냐 마느냐의 싸움이라는 거다. ‘이건 조금 익숙한데….’ 지난번에 했던 전략 시뮬레이션의 수법과 비슷하다. 여기저기서 천천히 조여 오며 아득바득 이득을 챙기려고 하는 수법. 그리고 손발을 잘라내려고 하는 것까지. 아주 판박이나 다름없다. 가면쓰레기, 악마소환사 진청. 이건 녀석의 작품이 맞다. 조금 의아했던 것은 라이오스 안에 들어가 있는 병력이 현저히 적었다는 것. 적군 아군 가릴 것 없이 최소한의 병력만 배치하고 있는 건 확실히 당황스럽다. 곧바로 입을 연 것은 당연한 일. 내 상식으로는 어떻게 생각해도 현재의 라이오스 전선의 상태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이오스는 왜 이래?” “아. 깜빡 말씀을 안 드렸네요. 여기는 잠깐 정전 상태예요. 용병여왕님이 있거든요.” “근데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공격하니 별 수 있나요.” ‘정신줄 놨구나.’ “그쪽 국민들 대피시킬 때 용병여왕님이 정신을 놔서 현재는 그 상태예요. 들어가자니 병력 손해가 있을 것 같아서 두 집단 모두 몸을 사리고 있는 상태인 거죠. 현 상황에서 네임드 몇 빼서 그쪽으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극심한 부담이거든요.” ‘분명히 시간제한이 있을 텐데.’ 차희라가 가지고 있는 특성 피에 미친 광녀는 분명히 한 시간의 시간제한을 달고 있었다. 아직까지 라이오스에 그녀가 있다는 건 마음의 눈으로는 본 그녀의 상태창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라이오스가, 아니, 희라 누나가 그 상태가 된 지는 얼마나 지났지?” “8일이예요.”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 373 회귀자 사용설명서 373화 PTSD(1) ‘8일….’ 꽤 긴 시간이다. 그 8일 동안 라이오스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니 당황스러울 지경. 물론 최소한의 병력을 남겨두고는 있겠지만 사실상 라이오스는 전장에서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다. 얼마나 미쳐 날뛰길래 일이 이지경이 된지는 모르겠지만. ‘이해는 돼.’ 캐슬락 사태 당시 차희라의 근력이 117까지 올라갔다는 걸 생각해 보면 피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만약 내가 공화국에 입장이었어도 딱히 조치를 취하기 힘들었을 거라는 거다. 안전하게 제압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교국 8좌나 오호대장군 정도의 네임드들을 보내야 대처 가능. 그것도 단신이 아니라 세트로 묶어서 보내야 한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지.’ 현재 팽팽하게 전선이 유지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네임드들을 따로 빼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캐슬락 탈환과 에베리아 고립작전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도중이라면 라이오스에 비중을 두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교국 측에서도 뭔가 하고 있는 게 있나?” “일단은 기다리는 것밖에는…. 사실 라이오스의 외곽 쪽에는 붉은용병이 전선을 담당하고 있어요. 아마 일이 끝나면 자기들 여왕님을 회수 하려는 거겠죠.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기는 있었나 봐요. 그때는 이십 며칠간 저 상태라고 들었는데….” “그때는 상황이 어땠는데?”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알고 있는 사람도 없고 그냥 쓰러져 있었던 여왕님을 데려온 게 전부더라고요.” ‘그럴 수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어와 꽂히기는 했지만 충분히 고개를 끄덕여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생존자가 없으면 가능하지.’ “생존자가 없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여왕님이 과거에 무슨 일을 벌였는지, 또 지금 라이오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몰라요.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 보면 여왕님도 잘 지내고 있는 거겠죠. 저도 그쪽에 조금 더 비중을 주고 싶기는 하지만 어쩔 수 있나요. 당장은 캐슬락이 더 급한데. 라이오스 쪽은 오빠가 어떻게든 해주겠죠. 뭐.” ‘내가 하긴 뭘 해. 이 나쁜 년아.’ 빛기영은 자살 희망자가 아니다. 캐슬락 몬스터 웨이브가 있었던 당시에 기억은 나에게도 악몽이나 다름이 없다. 하물며 그때의 차희라는 정상적으로 미쳐 있는 상태였다. 완전히 정신 나간 지금은 발견되자마자 신체가 찢겨지게 되리라. 어쩌면 골반이 두부마냥 흐물흐물 부셔져 다져지게 될지도 모른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 뒤로 소름이 돋을 지경. 괜스레 고개를 흔들었을 때 이지혜가 다시금 입을 열어왔다. “일단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할까요?” “그러는 게 좋겠네. 슬슬 전선 쪽도 보고 싶었는데.” “안 그래도 보여 드리려고 했어요. 그것 때문에 나가자고 한 거고요.” 천천히 문을 열자 대기하고 있던 검은백조 길드원들이 시야에 비쳤다. 이지혜가 따로 부리는 호위단. 하나 같이 수준이 나쁘지 않은 것을 보니 검은백조의 길드 마스터 박연주가 이지혜를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이지혜 본인이 자신의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덤. 발걸음을 옮기자 아까 봤었던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병사들. 며칠 안으로 전투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좋든 실든 전쟁은 사상자를 만들어낸다. 길게 잡아야 앞으로 10일. 10일 안에는 저 앞에 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이들과 몸을 부딪치게 될 것이다. 목책으로 올라갈수록 녀석들의 진영이 눈에 잘 들어왔지만 솔직히 기쁘지는 않았다. 작심하고 에베리아 쪽을 틀어막겠다고 결심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성전에 유리한 이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들 쪽으로 먼저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 심지어 이쪽은 공성전을 하게 생겼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보이는 것 흙과 목책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벽. 단기간 내에 쌓아올릴 수 없는 작품이었지만 마법이 있다면 간이 성벽을 세우는 것은 일도 아니다. 물론 캐슬락 성벽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조잡하지만 그래도 저런 종류의 벽이 있다는 건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커다란 압박으로 다가온다. “상대 지휘관은 누구지?” 아마도 마법사. “아직 확인 안 됐어요. 뭐, 그래도 오호대장군 중에 한 명은 붙어 있겠죠? 눈앞에 보이는 걸로만 판단해 보면 전위보다는 후위일 테고. 혹은 마도왕국의 네임드일 수도 있겠네요. 보시는 것처럼 저희 앞의 상황은 그리 좋지만은 않아요. 병력도 열세인데 공성전까지 해야 되는 상황이니까. 열세에 있었지만 오빠가 합류했으니 조금은 나아지겠네요. 현성이 오빠도 있으니까. 아, 생각해보니 하얀 씨도 있네요.” “하얀이는 여기에서는 못 써먹어.” “왜요?” “조금 더 길게 봐야지. 최대한 빠르게 몸을 회복하라고 지시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마법 몇 번 사용하는 걸로 리타이어야. 그마저도 범위가 큰 마법은 최대한 지양해야 하고. 그리고 우리 길드 마스터는….” ‘최대한 숨기고 싶은데….’ 현재 가장 정보가 안 풀린 이가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사랑스러운 회귀자. 그래도 명예추기경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김현성은 정보가 아예 없다시피 하다. 장담컨대 공화국에서는 김현성을 그리 높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으리라. 대륙에 들어온 지 5년도 안 된 애송이. 내가 사기꾼이라는 걸 알고 있는 가면쓰레기 진청은 어쩌면 김현성 역시 비슷한 놈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녀석이 우리 회귀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중요한 것은 적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현저히 적다는 것. 상황이 급한 것은 인지하고 있지만 첫 패부터 가장 강한 패를 들이미는 것은 수 싸움에서는 지양해야 될 일이다. 기왕이면 짧게 끝내고 싶은 전쟁이지만 언제든지 길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가지고 있는 무기를 초장부터 들이대는 멍청한 놈이 어디 있겠어.’ 물론 어딘가에는 있겠지만 최소한 내가 즐겨 쓰는 방법은 아니다. “아껴두려고요?” “그게 가능하다면.” “단순히 밀어낸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건 알고 계시죠? 피해 없이 제대로 밀어내는 게 중요해요. 전투 이후에 캐슬락까지 갈 수 있는 병력이 없다면 싸운 것 자체가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거니까. 심지어 저쪽은 버티기만 해도 된다고요.” “그것도 이해하고 있어.” 저들의 역할은 수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쪽의 발을 잡아두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흙과 나무의 성벽은 어디까지나 그걸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저들에게 있어서 간이 성벽은 버려도 전혀 문제가 안 되는 종류의 물건이다. ‘그래도 어쩌겠어.’ 뭐가 됐든 병력을 들이밀어야 되는 상황. 괜스레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게 된다. 그렇게 무너지지 않은 성벽을 슬쩍 쳐다봤던 바로 그때였다. “여기 계셨군요.” 때마침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고개를 돌리자 녀석뿐만이 아닌 지휘부의 얼굴들이 눈에 보였다. 모두가 함께 시찰이라도 나온 모양. 엘리오스와 드워프 볼고르 그리고 아직 이름을 외우지 못한 이들까지 전장에서 움직여줄 소중한 일꾼들이다. “어머, 볼고르 님.” “아! 작은 인간 여자로군.” “잠깐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었어요. 여기 계시는 명예추기경님께 상황도 조금 설명드릴 겸해서요.” “그렇구만. 어떻게, 그동안 잘 지냈나?” “네. 덕분에요. 볼고르 님도 여전히 듬직하시네요.” 곧바로 접대용 미소를 장착하는 이지혜의 모습은 내가 봐도 놀라울 지경이다. 하지만 그녀나 나나 별반 다르지 않다. 나에게 질문해 오는 김현성에 목소리에 이쪽 역시 절로 사람 좋은 미소가 지어진다. 뭔가 자괴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전해 들으신 겁니까?” “네. 조금 상황이 복잡해진 것 같더군요. 대략적인 구도 역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지혜 씨가 설명을 제법 자세하게 해주셔서.” “기영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뭘 어떻게 생각해, 이 새끼야.’ “글쎄요.” 내가 녀석에게 묻고 싶은 대사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같다. 현재로서는 무조건 길을 뚫어놓는 게 가장 중요하다. “지휘부에서는 앞으로 5일 후를 시기로 잡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더 늦어진다면 캐슬락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게….”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만.’ 녀석이 나에게 허락을 요구하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게 제법 재미있다. 사실 이쪽 역시 병법에 강하지는 않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운 것이 전부. 너무 사기를 치다 보니 이쪽으로도 제법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중요한 것은 녀석이 내 의사를 물어왔다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김현성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내게는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무척 초조해 보인다. ‘당연한 건가.’ 그동안 웅크리고 있었던 1회 차의 악마. 가면쓰레기 진청이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 악마의 손아귀를 빛의 진영 쪽에 내밀었다. 여러모로 당한 것이 많은 것으로 추정되는 김현성으로서는 갑작스레 초조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뒤통수를 얼마나 맞은 거야.’ 재미있게도 녀석이 나를 의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빛기영이 악마의 손아귀에 오염당하지만 않았더라면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해결했어야 하는 타이밍. 시간을 많이 지체했고 그만큼 가면쓰레기에게 시간을 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얼굴 자체가 불안으로 물들어 있는 상황. 항상 김현성의 얼굴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물론 최대한 빠르게 길을 뚫어내는 것은 저 역시 인지하고 있지만 혹시나 무언가 함정이 있는 것은 아닌지…. 조금 더 신중히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네? 함정 말입니까?” ‘딱히 함정처럼 보일 만한 건 없는데…. 뭐, 그런 게 있었나?’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함정처럼 보이는 것은 없다. 이건 간계나 술수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척이나 담백하고 심플한 문제다. 압박을 떨쳐내고 당도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 여기에 무슨 함정을 첨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곰곰이 떠올려 봐도 어떻게 생각나는 것이 없을 정도. 아무리 1회 차의 가면 쓰레기라도 하더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여러 가지를 준비할 수 없었으리라. 시간도 부족했고 아직은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제한적이다.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세작을 이용한 작업이나 집단과 집단 사이의 마찰을 유도하는 것. 물론 진청의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다시 한번 미니맵을 쳐다봐도 딱히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는 타이밍. 하지만 김현성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불안함이 물들어 있었다. “분명히 뭔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히요.” “아아. 네….” “적어도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자세히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아니.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 “기영 씨도 조금만 더 알아봐 주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굉장히 조심스럽게 꺼낸 김현성의 부탁에 일단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 한다. 하지만 지금 김현성이 보여주고 있는 행동은 건너려고 한 돌다리의 성분을 분석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뭔가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얼굴. 자신 있게 착각이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 새끼 무슨 PTSD라도 걸린 건가.’ 딱 그 짝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 374 회귀자 사용설명서 374화 PTSD(2) “뭔가 부자연스러운 점이나 이상한 정황이 보이지는 않습니까?”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만 좀 해라.’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현성 씨. 걱정하시는 부분에 대해서는 지휘부가 최대한 신경 쓰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해는 되지만 너무 걱정하시는 것도 안 좋습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네.” “혹시 디텍팅 마법은….” “이미 그쪽은 확인을 끝냈습니다만… 다시 한번 정밀히 조사할 수 있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전혀 못 알아들었잖아. 슈바.’ 걱정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조금 피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상 진입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있는 시점. 갑작스럽게 이 작전에 합류하게 된 만큼 다른 부분을 신경 쓰기도 충분히 힘에 부친다. 기본적인 것들을 체크하기에도 바쁜 시간. 매일 같이 찾아와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김현성의 모습은 정말로 PTSD라고 겪은 듯한 모양새였다. ‘이 새끼….’ 지금 보여주는 표정 역시 대놓고 불안하다는 얼굴.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표정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어제의 표정이 다르고 오늘의 표정이 다르다. 심지어 나조차도 영향을 받아 이대로 들어가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정도로.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정을 늦추거나 다른 방향을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전력상에서도 충분히 우위에 있다고 판단해도 될 상황이었고 뚫어내지 않는다면 불리해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김현성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시간을 늦출 수는 없는 타이밍이었다. 이곳에서 허송세월을 보낸다는 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캐슬락을 버린다는 말이나 진배없었으니까. 살짝 고개를 돌려 사랑스러운 회귀자를 힐끔 쳐다본 것은 당연지사. 겁을 집어먹은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더 걱정하는 것 같은 얼굴이다. 김현성이 현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였다. “성벽 자체가 함정일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성벽 자체에 어떤 마법이 있을 수 있고 또 성벽을 지키는 병력에게 폭약 마법이 내장되어 있을 가능성도….” ‘저만한 병력을 희생시킨다고?’ “내부의 감시 역시 조금 더 철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드워프에 대한 경계를 조금 더 철저히… 조금 뜬금없지만 역병에 대한 조사 역시 진행해야 됩니다.” “역병 말입니까?” ‘갑자기 무슨 역병드립이야. 이 자식아.’ “현재 대치 중인 병력이 집단 감염이 됐을 확률도 고려해 봐야 합니다.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염되는 종류의 바이러스로….”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폭약 마법도 폭약 마법이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집단 감염 드립에는 잠깐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의 말대로라면 현재 우리를 막고 있는 병력 전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 보균자라는 이야기. 이런 발상은 또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건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진청쓰레기라고는 해도 그 정도로 비인도적인 선택을 할 리가 없다. ‘그야 가면쓰레기도 그 정도는 아니지….’ “조금 지나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결국에는 조심스럽게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다. 다시 한번 천천히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괜스레 나도 슬슬 똥줄이 타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영 씨.” “저만한 병력을 단순 함정을 위해 희생시킨다는 건… 공화국에서도 내리기 쉽지 않을 겁니다.” “공화국을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 “진청 그자가….” “…….” “진청 그자를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아직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아니지만 악마 소환사 그자는 피아 구분을 하지 않을 겁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을 거고 공화국의 병력이라 할지라도, 혹은 민간인의 희생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꼭 기억해 주셔야 합니다.” “무슨….” “그자가 공화국이나 어떤 집단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단순히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장치라고 가정하시고 움직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심지어 그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도요. 병력을 얼마만큼 희생해서 승리를 일구어 냈는지에 대해 고려할 만한 인간이 아닙니다.” ‘이 새끼 너무 하는데….’ 아무리 진청쓰레기라고 해도 그 정도로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은 아닐 것이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닐 텐데.’ “적어도 인도적인 방법이나 대륙법으로 지정된 전쟁법은 고려할 거라 가정하시면 안 됩니다. 여자나 아이도 마찬가지고요. 오히려 사회적으로 약자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이들일수록 장기 말로 사용될 확률이 큽니다. 소년병 같은 경우에는 특히 더 주의하라고 전파해 주십시오.” “네. 아, 알겠습니다.” “그 밖에도 외부에서 오는 보급품이나 물건에는 손대지 않도록….” “네.” “특히 적 병력이 사용한 보급품 일수록 더욱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전투가 끝나는 즉시 사용한 보급품은 즉시 폐기해야 합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미친 소리처럼 들리시겠지만 전투가 끝난 직후를 더 조심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현성 씨. 가슴 속에 새겨듣겠습니다.” “…….” “…….” “감사합니다, 기영 씨. 아… 그럼 마저 주무시면….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새벽에 찾아와서.” “아뇨. 아닙니다. 어차피 오늘은 일찍부터 일어나 있을 참이라. 그리고 이런 방문은 오히려 반갑습니다.” ‘그런데 좀 작작 찾아와라.’ 오늘만 벌써 세 번째다. 오후에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그리고 새벽에 한 번. 한 번에 생각해서 좀 말해주면 좋으련만 가만히 있다가도 뒤통수 맞은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 아마 아침식사나 점심식사를 마친 직후에도 다시 한번 찾아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리라. 김현성이 가면쓰레기에게 뒤통수를 어떻게 맞았는지 간접 체험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기는 하지만 확실히 왠지 모르게 양심이 콕콕 찔려온다. 물론 가면쓰레기와 나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1회 차의 현성이를 보호해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솟았기 때문이다. 인질극은 기본 옵션. 온갖 쓰레기 짓을 전부 들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그동안 김현성이 해준 이야기가 전부 녀석이 경험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렇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 또한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 병력이 바이러스 보균자라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정말로 지금 그 작전이 실행 중이라 가정 한다면 가면쓰레기는 천하의 개 쌍놈이자 쓰레기가 맞다. 의도적으로 병력을 죽으라고 내보내는 꼴. 더욱 압권인 것은 눈앞에 있는 병력이 자신들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는 거라고 생각하며 싸울 거라는 상황. ‘이게 진짜 기만이지. 기만.’ 말 그대로 기만이다. 가면쓰레기 진청이 녀석들에게 심어놓은 사상, 전쟁을 일으킨 대외적은 명분, 자신의 진영이 정의라고 외치는 이유 모두가 개소리고 저들을 희생시키기 위함이다. 보통의 전쟁이라는 게 모두 그런 식이기는 하지만 일부러 보균자를 만들어 전쟁에 투입시킨다는 것은 가면쓰레기 말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발상이다. 물론 눈앞의 적 병력은 보균자가 아니다. 내가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눈으로 보이는 정황들이 그렇다. “그래도 뒈질 거라는 건 변함이 없지만.”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지. 아암 그렇고말고.’ 아무튼 간에 기쁜 소식은 있다. 일단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진청쓰레기가 가면쓰레기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는 것. 아직도 긴가민가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보여주는 반응으로는 거의 확정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걸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하루에 몇 번씩 찾아와 자신의 불안감을 성토할 리가 없다. ‘일단은 안정권 있다고 봐도 되는 거야.’ 혹시 몰라 준비해 놓은 게 몇 가지 더 있기는 했지만 이쯤 되면 굳이 작업을 칠 필요도 없다. 사실 작업은 다른 쪽으로 쳐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진청이 간악한 술수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시 회귀자의 시선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다른 건 다 되도 그런 상황이 펼쳐지는 것만은 막고 싶다. 새로운 자작극이라도 선보여야 할까 고민했을 때였다. “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온 것. 이미 김현성이 밖으로 나간 이후에 한참이나 지난 이후. ‘한 세 시간 지났나?’ 혹시나 잠자다가 꿈이라도 꾼 이후에 다시금 경고 아닌 경고를 해주러 온 것이 아닐까 걱정된 것은 당연지사. 곧바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갑작스레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시발.’ 순간적으로 놀라는 게 당연한 반응. 적과 전선을 맞닿은 상황이었고 언제 암살자가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당도할 수 있었는지 몰라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곧바로 몸을 일으킨 것은 당연. 벽 쪽에 몸을 붙이고 곧바로 가방에 손을 집어넣는다. 손에 잡힌 것은 용 숨결 물약. 괜스레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머리에서 흐른 땀이 턱을 흘러 떨어져 내린 순간,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오는 인형이 시야에 비친다. “하얀이야?” “아! 아! 일, 일, 일, 일어나 계셨네요.” 눈에 보이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정하얀. 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깜짝 놀랐네. 진짜.’ “무슨 일이야?” “아, 아까 낮에 잠… 잠을 너무 많이 자서요. 잠이 안 와서 그냥 그… 네… 그….” 무척 당황한 얼굴. 아마도 또 방에 기어들어오려고 한 것 같았다. 우물쭈물거리는 모습에 기가 차기는 했지만 적당히 머리를 쓰다듬은 이후에는 살짝 웃음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푹 쉬어야지.” “그, 그, 그렇지만 정말로 잠이 안 와서요.” “마력은 어느 정도로 회복됐는데?” “크게 회복됐다고 말하기는 힘들어요. 아무래도 최근에 계속 무리한 것 같아서 아직은 조금….” “이번에는 무리하면 안 돼. 최대한 전투에서 빠져 있어야 하는 거 알지?” “네. 물, 물론이죠.”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개입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잠깐 밖으로 나갈까?” “네!” 함께 산책을 하는 게 기분 좋은지 연신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너무 방심했는데, 이거.’ 물론 그 와중에도 이쪽은 자기반성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하얀이어서 다행이지.’ 물론 외부의 침입은 거의 불가능 하다. 에베리아 왕국은 세계수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단순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인만큼 만약 8좌급의 암살자였다면 뚫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호위 좀 달라고 해야겠는데….’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하지만 최소한 시간을 벌어줄 호위는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목책 위로 올라가자 제법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오늘도 여전한 성벽 역시 눈에 띄었다. ‘며칠 안 남았나.’ 목책을 지키고 있는 경비들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당연.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항복하십시오. 음성 마법으로 증폭된 목소리. ‘선전 활동이네.’ 커다란 음성 마법을 틀어 본인들이 일으킨 전쟁을 합리화하는 시간. 항복을 종용하고 함께해 줄 것을 권고하는 시간. 교국의 현 체제와 상태를 비판하고 자신들이 정의라는 것을 어필하는 시간이다. 비유하면 적군에게 보내는 전략 확성기나 다름없다. ‘뭐, 저런 것도 중요하긴 하지.’ 이쪽은 오늘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지만 꽤나 공을 들인 티가 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친애하는 이종족 엘프 여러분. 그리도 일부 드워프 여러분에게 고합니다. 저희 반교국연합은 여러분의 적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속고 있습니다. 대륙을 어지럽히는 교국의 간악한 거짓말에 속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저희 반교국연합은 여러분의 적이 아닙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즉시 병력을 물릴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쯧.’ 말을 내뱉는 꼬라지가 가관이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정하얀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뭐 선전활동 한번 해보자고?” 이런 활동이 어떤 이점이 있는지, 상대 지휘부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 375 회귀자 사용설명서 375화 언제나 팩트는 승리하는 법이다(1) ‘멍청한 인간들.’ 물론 상대의 의도를 알았다고 해서 저런 종류의 선전 활동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투나 전쟁을 치르기 전 상대방의 사기를 조금이라도 꺾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심지어 반 교국 연합인가 뭐시기는 본인들의 생각이 옳다고 느끼기까지 하니 선전에 공을 들이는 건 당연하다. 살짝 주변을 둘러보니 자리 잡고 있는 엘프들은 저 목소리가 익숙한 모양. 아마 상대 진영의 성벽이 자리 잡힌 시점부터 듣고 있었던 것이리라. ‘우리 쪽 대응은 없나?’ 없을 리가 없다. 살짝 입을 열어 물어보았다. 내 질문에 성벽을 바라보고 있던 엘프 경비원 하나가 대답해 왔다. 흔치 않은 여성 검사. 자연스럽게 능력치를 보자 수치가 나쁘지 않다. ‘의외네.’ 경비를 보고 있을 뿐이지만 가지고 있는 능력치는 엘룬 나이트 정도다. 아마 엘리오스의 눈에 제대로 들지 못한 것 같다. “항상 들려오는 겁니까?” “네, 명예추기경님. 보통 하루에 두 번 정도 들려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측의 대응은 어떻습니까?” “왕국 역시 주기적으로 음성 증폭 마법을 이용해 반 교국 연합 쪽으로….” “그렇군요. 흠…. 어떻습니까. 직접적으로 사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적들의 말이 전부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저희 역시 반 교국 연합이 원하는 바가 뭔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런 터무니없는 말 따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죠.” ‘교육은 되어 있네.’ 이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내용이라고 한들, 지속적으로 저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누군가는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어차피 저들도 많은 사람을 움직이는 걸 바라진 않을 것이다. 단 한 명만 영향을 받아도 효과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한 명이 만들어낸 불안감은 아주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부대 내로 퍼질 것이다. 불안감이나 의구심은 마치 암세포처럼 계속해서 퍼져 나간다. 규모가 클수록 지휘부에서도 미처 파악하기 힘들다. 상급자는 신이 아니다. 아무리 병력 관리를 철저히 한들 고문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다. 그걸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교육. 일종의 세뇌 활동이라는 거다. 우리는 잘못이 없다. 바로 우리가 정의며 저들은 악이다. 어디서 먼저 선제공격을 날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부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명분은 이럴 때 상당히 중요해진다. 병력의 규모나 질 그리고 병과. 네임드가 전장에 끼칠 수 있는 능력과 기용할 수 있는 방향. 대륙의 전장에서는 수많은 변수가 있지만 병력의 사기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은 병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음성 증폭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 고개가 끄덕여질 만한 선전이었다. -교국은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악마소환사라는 웃기지도 않은 자작극을 벌여 중립 지역을 분쟁지로 만든 것은 물론, 본인들이 한발 앞서 전쟁을 종용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것으로 모자라 지난 14일, 결국 먼저 전쟁을 선포하고 병력을 밀고 들어왔습니다. 수많은 민간 사상자가 생겼고 이에 우리 반 교국 연합은 전쟁의 깃발을 꺼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을 원하는 미치광이 집단이 더 이상 대륙을 활개치고 다니도록 좌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종족 여러분이 아는 신성교국은 이전의 교국이 아닙니다. 신성한 민주주의라는 사상의 탈을 쓴, 금서를 내들고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숨은 폭도에 불과합니다! ‘…….’ -현재 교국의 지도자로 있는 오스칼이야말로 진정한 여신의 반역자이며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입니다. 심지어 그녀는 교국을 이끄는 지도자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교황청의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말을 따르는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꼭두각시 정도는 아닌데….’ 조금 뜨끔하기는 했지만 평정심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 대화를 나눈 엘프 경비병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으니까. 심지어 입을 열어오기까지. 무척 조심스러운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저….”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저희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명예추기경님.” “…….” “감히. 이곳에 있는 엘프들 전원 저들이 하는 소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간혹 이렇게 열의가 넘치는 눈빛을 마주하면 너무나도 부담스럽다. 티 없이 맑은 엘프 경비병의 순수한 눈빛에 왠지 모르게 양심 한구석이 저리기 시작한다. 정하얀은 나를 믿어주는 엘프가 괜찮아 보였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꽉 잡아오는 중. “그, 그럼요. 전부 다 거짓말이에요.” “저, 저는 여신의 거울을 통해 이기영 명예추기경님께서 악마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봤고 실제로도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노예경매장에서 저희 친구들을 구해주신 이야기나, 거대한 마수의 안에 있는 동안 엘레나 님을 지켜주셨다는 일까지 말입니다.” “…….” 그야 지켜주기야 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싶어진다. “모든 엘프가 한마음 한뜻일 겁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이 저런 말에 상처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딱히 상처받은 건 아닌데….’ “마, 맞아요, 오빠. 괜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최선을 다해서 위로해 주려는 것 같다. 나보다는 본인이 더 화난 모양. 사실 이쪽은 저쪽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지 무덤덤하기만 하다. 그 와중에도 선전내용은 점점 더 격해지고 있다. -우리 반 교국 연합은 언제든지 여러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부디 저희 연합과 척을 지는 것을 피해주십시오. 우리는 여러분과 싸우고 싶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하는 것은 오직 대륙의 정상화입니다. 신을 사칭해 전 대륙을 농락하는 사기꾼과 신의 등 뒤에 숨어 민중을 착취하는 교황청, 꼭두각시 여왕과 그녀를 따르는 폭도를 타도하는 것만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여러분이 싸움을 싫어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부디 심사숙고해 주십시오. 이종족 여러분과 그 지도자 분께선 부디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저들의 말이 끝난 이후에는 오히려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래도 자꾸만 이쪽이 신경 쓰이는 모양.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지 뭐.’ 물론 조금 민망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전체적인 여론이 이렇다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물론 사기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을 멈춰서는 안 된다. 엘프 대부분이 저 말을 믿지 않겠지만 혹시 드워프를 포함한 다른 이들 같은 경우에는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어제 전부 다 읽어봤어야 했나.’ 이쯤 되니 이쪽의 선전 내용이 궁금해진다. 이지혜가 읽으라고 준 보고서에는 분명히 적혀 있을 것이 분명. 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금 내용을 살펴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물어보면 되지, 뭐.’ 눈앞에 있는 엘프 누나한테 물어보면 그만이니까. “에베리아 왕국 측에서는 어떤 내용을 담은 선전을 하고 있습니까?” “다양합니다. 주로 공화국 인간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라이오스 사건 그리고 그들이 전쟁을 먼저 일으켰다는 내용의 선전도 멈추지 않습니다. 비인간적인 실험이나 무자비하고 생각이 없는 벌목 활동 그리고 무분별한 사냥에 대한 비판까지. 매번 내용은 다르지만 이 정도가 보통입니다.” “그… 렇군요.” ‘벌목 활동이랑 무분별한 사냥은 도대체 뭐야.’ 엘프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만한 이야기겠지만 대다수의 인간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없을 거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장담컨대 콧방귀를 끼고 있을 것이다. ‘그런 걸로 죄책감을 느끼기야 하겠어.’ 이런 종류의 선전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문을 느끼게 하는 것. 물론 벌목이나 사냥 같은 것에 의문을 품고 있는 인간이 있을 리가 없다. 조금 더 직접적인 방법이 필요한 시점. 사실 목 아프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이미 가장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으니까. “하얀아.” “네?” “여신의 거울 준비하자. 소라랑 같이.” “어, 어떤 걸요?” “라이오스에서 있었던 거 아직 남아 있지? 다른 거 필요 없고 그냥 그것만.” “이, 이것만 그냥요?” “응. 할 수 있겠어? 물론 상대 진영 측에서도 보일 정도로 크게.” “한소라 교육생, 아니, 소라 씨가 도와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거 잘됐네. 마력이 많이 소비되는 일은 아니지?” “저, 정연 언니한테도 도와달라고 할게요. 그리고 다른 엘프 분들께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준비되면 바로 이곳으로 오는 거다.” “네!” ‘그럼 나는 시간 좀 따로 빼달라고 하면 되는 거고.’ 사실상 문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엘프 여자는 이쪽이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궁금한 모양. 뒤늦게 전방을 바라보는 척하고 있지만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그사이에 정하얀은 몸을 허겁지겁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다른 게 필요 있겠어?’ 하루 종일 이야기하는 것은 입만 아프고 머리만 아프다. 그대로 뜻이 전달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효율도 그다지 좋지 않다. 음성 증폭 마법에 들어가는 마력량도 상당한 수준. 당연히 문명의 힘을 빌리는 게 더욱 효과적이다. 자리를 지키고 있기를 얼마간, 정하얀의 부름에 허겁지겁 뛰어온 한소라와 황정연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력 홀로그램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것도 이제는 프로급이나 다름이 없다. 거대한 마력 홀로그램이 에베리아 왕국 측의 위에 크게 떠오르자 하늘뿐만 아니라 이곳에도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괜스레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설명할 시간 정도는 필요했기 때문이다. “선전하는 시간 외에는 계속해서 띄워 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디가 선이고 어디가 악인지는 아마 저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지휘부에는 제가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부대에도 전파 부탁드립니다. 너무 놀라실 필요 없다고요.” “지금 곧바로 전파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얀아, 곧바로 테스트하고 마력 홀로그램 작동시켜. 혹시 안 보일 수도 있으니까. 악마소환사 모습은 자세하게 클로즈업하고.” “네!” “준비되면 곧바로 신호.” “주, 준비됐어요.” “그럼 곧바로 송출.” “됐어요, 오빠.” 어떤 장면을 내보낼지 두말하면 입 아프다. 빛기영과 친구들이 전설을 만든 그 서막. 악마소환사 진청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미 팔린 얼굴이다. 고생 한 김에 조금 더 고생해도 될 것 같았다. 초장부터 하이라이트. 아무리 공화국이 흑마법에 민감하지 않다 한들, 저런 장면을 보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듯한 청량한 목소리. ‘특별 출연 벨리알 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나의 계약자 진청이여. 너희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다. 어서 이 봉인을 풀어라! 그렇다면 더 큰 힘을 손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신의 거울에 떠오른 것은 어떻게 봐도 악마와 손을 잡은 채 빛을 위협하고 있는 진청. 악마소환사, 가면쓰레기 진청이 보여줬던 그날의 본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백날 선동과 날조로 떠들어봐야 팩트는 못 이긴다. 이 새끼들아!’ 팩트의 힘은 위대하다. # 376 회귀자 사용설명서 376화 언제나 팩트는 승리하는 법이다(2) ‘어딜 감히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려고 들어?’ 증거 없는 말로 떠들어봐야 어차피 선동과 날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거다. 제대로 된 증거야말로 가장 확실한 팩트. 어떻게든 이쪽의 이미지를 구기고 싶다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 -나의 계약자, 진청이여. 너희의 바람은 이루어 질 것이다. 어서 이 봉인을 풀어라! 그렇다면 더 큰 힘을 손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거지.’ -계약자 진청이여. 이 힘이 가지고 싶지 않은가.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힘이다. ‘아암 그렇고말고.’ -크크크큭…. 하하하하하! ‘벨리알 님, 만세다! 씨밤바!’ 언제 봐도 실감나는 연기. 안기모나 이지혜조차도 한 수 접어줄 것 같은 메소드 연기의 벨리알에게는 당연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하늘 위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거대한 화면 안에서 나오는 장면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있는 악마소환사 진청쓰레기의 모습이다. 빛의 진영을 핍박하는 장면은 덤. 아마 공화국 진영 쪽에서는 저 장면을 처음 보는 이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공화국과 교국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만약 교류가 있었다고 해도 정보통제에 민감한 저들이 저런 영상이나 소문이 나돌아 다니게 둘 리가 없다. 물론 알게 모르게 알고 있는 이들이야 있겠지만…. ‘이런 건 처음 봤을 거다, 이 새끼들아.’ 아마 저들 역시 교육을 받기는 받았을 것이다. ‘공화국의 군사 진청은 죄가 없고 모든 것은 교국의 선동이며 날조다. 모두가 지어낸 이야기이고 조작된 이야기다. 절대로 믿어서도 안 되고 또 동요해서도 안 된다. 교국의 선동전술에는 절대로 말려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교국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꼬투리를 잡고 있다고, 악마와 내통하고 있는 것은 신의 등 뒤에 숨은 교국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루에 몇 번씩이나 떠들어 대며 전쟁에 출사표를 던졌을 터. 병력의 대부분이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로 듣는 것과 직접 자신이 증거를 목도하는 것에 대한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인간은 의심하는 동물이거든.’ 지휘부에 의문을 품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적. 물론 이 영상의 여파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을 거라 굳게 믿고 있다. 당연히 공화국 병사들의 멘탈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교국이나 엘프만큼 흑마법에 민감하지 않다고?’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어. 지금 이 상황에 민감하다, 민감하지 않다가 눈에 들어오겠어? 응?” 이건 심미안에 관련된 이야기다. 마력 홀로그램으로 출력되고 있는 벨리알의 모습은 내가 봐도 심장이 떨려올 정도. 벨리알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악마의 이미지보다 더욱 악마 같다. 현세에 드러낸 녀석의 모습이 정말로 벨리알의 본모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출력되고 있는 외관은 그렇다. 얼굴을 불의 번개와도 같았고 눈동자는 심연에서 타오르는 불길. 입은 바위의 갈라진 틈 같았으며 커다란 날개는 구겨진 하늘을 꾸역꾸역 집어넣은 듯하다. 겉모습만으로도 이질감이 느껴지고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저런 걸 보고도 자신들이 정의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정신 나간 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아암. 빛이 괜히 빛이고, 어둠이 괜히 어둠이겠어.’ 이런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인간은 내가 알기로 존재하지 않는다. 빛으로 둘러싸인 빛기영과 구역질이 나올 만큼 오염된 뒤틀린 악마의 진영. 어느 쪽이 정의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현재 이 마력 홀로그램을 보고 있는 갤러리들 역시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조금 무리해서 눈에 마력을 집어넣기 시작. 꽤나 먼 거리라고 할 수 있지만 특성의 영향 때문인지 저 멀리까지 놈들의 얼굴이 보인다. ‘새끼들. 사색이 됐네. 사색이 다 됐어.’ 이방인은 그나마 낫다. 하지만 공화국민으로 보이는 녀석들의 표정은 가관이다. 멍하니 마력 홀로그램을 보고 있는 그 모습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일그러져 있었다. 교육을 받았고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저 모양 저 꼴. 몇몇은 이미 얼굴에 불안감이 들어서고 있다. 물론 이방인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몇몇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기도 했고 탄식을 내지르기도 했다. -더러운 빛의 종자들아. 이게 바로 지옥 마법의 힘이다. 계약자 진청이여, 네가 원하는 바는 이루어질 것이다! ‘키야!’ -고맙다! 고맙구나! 계약자여!! 때마침 영상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는 중. 아주 약간의 각색이 첨가되기는 했지만 모두가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며 팩트다. 이 대륙에 조작 감별사 같은 건 없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이 박진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이는 없으리라. 상대 진영이 난리가 난 것은 당연지사. 허겁지겁 뛰어다니며 사태를 수습하는 공화국 측 지휘관들을 보니 계속해서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뭐라고 소리를 치는 모습. 물론 이쪽에 들려오지는 않았지만 어떤 말을 하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예상이 된다. ‘현혹되지 마라!’ 라든지. ‘저건 만들어진 영상이다. 진실이 아니야. 현혹되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최선을 다해서 멘탈을 수습하려고 하지만 언 발에 오줌을 누는 것에 지나지 않다. 저런 식으로 생난리를 치는 게 오히려 의문을 품고 있는 이들의 의구심을 키울 것이다. 녀석들이 이대로 가만있을 수 있을 리 만무. 다시 한번 증폭이 된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 이제 그만할까요?” “아냐. 아냐. 뭘 벌써 끝내? 한 번만 더 보자.” “네!” 교육에는 가장 중요한 것은 뻔할 뻔자. ‘반복 학습이 중요하죠.’ 외울 정도로 머리에 집어넣는 게 중요하다. -지금 당장 조작된 내용의 영상의 송출을 멈춰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보내고 있는 영상은 모두 조작된 내용입니다. 여러분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자작극에 불과합니다. 이종족 여러분, 부디 날조된 것에 현혹되지 마시고 진실에 눈을 떠 주시기 바랍니다. -계약자여! 힘을 원하는가! -공화국은 악마와 내통한 적이 없으며 진청에게도 그 어떤 흑마법의 징후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결백합니다. -어서 봉인을 풀어라! 진청! 네가 바로 나의 계약자다. -바로 저들이 대륙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교국의 사악한 무리들이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대륙을 집어삼킬 수 있는 힘을 내려주마, 진청. ‘키야.’ 말하는 족족 마력 홀로그램이 받아쳐주는 느낌이다. 당황했는지 계속해서 뭐라 소리치고 있었지만 제대로 들릴 리가 만무. 선동과 날조된 내용을 내보내는 공화국의 마법사들이 오히려 더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무리 주작된 것이라고 외친다고 한들 눈앞에 팩트가 펼쳐지니 정신을 못 차린다. 현혹된 엘프 여러분들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 부대의 멘탈을 더 걱정해야 하는 타이밍. 물론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 종족 여러분은 지금 즉시 조작된 내용의 영상 송출을 멈춰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속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만든 자작극입니다. 공화국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더러운 수작에 불과합니다. ‘그래 이 새끼들아. 백날 떠들어 봐라.’ -형님…. 형님! 누님! 조금만 참으쇼. 조금만! 조금만 버티면 될 거요! -흔들리지 마십시오. 이 모든 건 조작된 내용입니다. 악마를 소환한 것은 공화국이 아니라 교국입니다. -이 더러운 놈들! 제길. 제길! 형님! 조금만 더 버티면 지원이 올 거요! 그때까지만 버티쇼. 무리하다 죽으면 안 되는 거 알고 있는 거요? 너무 무리하지 마쇼. 내가 경고했소. 너무 무리하다가 쓰러지면 내가 용서 안 할 거요. 내가 용서 안 해! 엘프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게 주작이라고 외치고 있지만 마력 홀로그램으로 튀어나오고 있는 박덕구의 처절한 모습은 감동을 일으키기에 충분. 한소라도 마찬가지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한 모양새. 다시 봐도 괜스레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미 빛으로 물든 채 한계를 맞고 있는 나와 정하얀의 모습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신성한 빛에 둘러싸인 채 악마소환사 진청쓰레기가 소환한 벨리알에게 대항하는 모습은 마치 동화 속에서나 언급되는 영웅의 모습 그 자체. 아무래도 실제 상황이다 보니 내가 보기에도 영상이 무척 잘 뽑힌 것 같았다. 더러운 악의 무리들에게 둘러싸인 채 중립국 라이오스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명장면. 마력 홀로그램으로 나오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에 괜스레 엘프들 역시 숙연해지고 있었다. “하얀아, 음성 증폭 마법. 지금 바로 홀로그램에 내 얼굴도 내보내.” “넵!” 이쯤에서 툭하고 튀어나오는 게 타이밍상 맞다. 천천히 목소리를 가다듬은 것은 당연지사. 오랜만의 복귀다 보니 아무래도 조금 긴장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입은 술술 움직이기 시작. 이쪽의 아가리는 역시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프레임이 중요하지. 프레임이.’ 어떤 프레임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교국과 공화국이 겪고 있는 정치적 갈등은 일단은 논외. 교국과 공화국이라는 국가는 이번 프레임에서 완전히 제외시키는 것이 옳다. 생각하고 있는 커다란 프레임은 빛과 어둠이다. 서로 다르다가 아닌 옳고 그름이며 상식과 비상식이다. 이번 전쟁을 두 국가의 갈등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어떻게 봐도 멍청한 일. 이번 전쟁은 삼국 동맹과 반 교국 연합의 싸움이 아니다. ‘정의와 악의 싸움이고.’ ‘팩트와 날조의 싸움이고.’ ‘빛과 어둠의 싸움이지.’ 천천히 목소리가 송출되기 시작. 커다란 화면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차분하게 말을 내뱉자 곧바로 음성증폭 마법이 걸린 내 목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빛과 함께 하십시오, 여러분.” -빛과 함께 하십시오, 여러분. ‘좋고요.’ -빛의 편에서 저희와 뜻을 함께해 주십시오. 대륙을 위해 저희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검을 향해야 할 대상은 우리 서로가 아닙니다. ‘음질도 좋네.’ -우리는 공통의 적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적을 인류는 함께 목도하고 있습니다. 방금 전 여러분이 확인하신 것이야말로 증거이며 사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적입니다. ‘흐름 나쁘지 않고요.’ -삼국 동맹은 대륙을 어지럽히거나 질서를 파괴하려고, 혹은 전쟁을 일으키려고 동맹을 출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대륙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인류와 이종족, 여신님이 내려주신 땅과 그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방금 전의 마력 홀로그램을 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결코 거짓이나 조작된 내용이 아닙니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며 몇 달 전 라이오스에 내렸던 악몽이며 우리가 함께 이겨내야 할 시련입니다. ‘아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대륙 곳곳에는 아직도 악마의 세력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라이오스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며 악마군주를 소환하는 것에 성공한 진청 같은 이들이 아직도 곳곳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 교국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교국은 기억합니다. 악마숭배자 이토소우타가 일으켰던 그 수많은 일을… 교국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하게 아려온다. # 377 회귀자 사용설명서 377화 언제나 팩트는 승리하는 법이다(3) -교국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각 왕국이나 대륙 각지에 악마의 하수인들이 숨어 있습니다. 교국의 악마숭배자 이토 소우타, 공화국의 악마소환사 진청처럼 그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둠의 세력은 계속해서 빛을, 대륙을 좀먹고 있습니다. 권력을 이용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그림입니다. 여러분, 부디 눈을 뜨십시오. 악마의 목소리에 현혹되지 마시고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바라봐 주십시오. 제법 진지한 눈으로 성벽 위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이미 촉촉하게 젖은 눈가. 내가 생각해도 제법 그럴 듯하다. 은은하게 몸을 휘감고 있는 빛은 내가 하는 말에 신뢰감을 더해주고 있다. ‘이래서 빛기영 빛기영 하는 거 아니겠어.’ 다시 생각해 봐도 내가 빛의 연금술사라는 직업을 얻은 것은 신의 한수라 말하고 싶다. 이런 말을 지껄이고 있는 와중에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이 흉측한 어둠이었다면 설득력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대륙의 멸망이며 몰락입니다. 여러분의 가족, 여러분이 살아가는 터전, 여러분이 지켜야 하는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겁니다. 여러분의 적은 인류가 아니라 지금 당신들을 그 자리에 있게 만든 악마와 그 하수인입니다. 악마소환사 진청에 의해 뿌리까지 썩어버린 현 공화국 정권이야말로 여러분이 검을 겨눠야 할 대상입니다. 거짓 하나 없는 팩트라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부디 무기를 버려주십시오. 함께 손을 잡고 더 큰 위협에 대항해야 합니다. 악마소환사 진청을 비롯한 악마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한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국가 간의 갈등이나 종족 간의 갈등을 버리고 모두가 한발 내디뎌야 합니다. 빛을 향해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은 어째서 그 자리에 계십니까. 무엇을 지키기 위해 전장으로 나오셨습니까. 무엇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자리해 있습니까? 삼국동맹은 여러분의 적이 아니라 함께 발을 맞출 동료입니다. 빛의 이름 아래 대륙에 살아가는 모든 이가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내려야 하고말고. -일어나십시오. 어둠에 삼켜지지 마시고 빛과 함께 하십시오. 빛의 이름 아래 대륙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엘프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제법 감명이라도 받은 듯한 모양새. 적 진영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이미 여신의 거울이 튀어 나왔을 때부터 동요하고 있던 공화국 병사들은 이쪽이 뿜어내고 있는 은은한 빛에 감화되어 있다. 최대한 대응하려는 지휘부의 모습이 보였지만 한발 늦었다. 본격적인 설전에 들어가기 전에 한마디 정도는 더 내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둠의 힘은 너무 강대합니다. 삼국동맹의 힘만으로는 이 대륙을 구할 수 없습니다. 작은 촛불은 어둠을 밝힐 수 없지만 여럿이 모이면 어둠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을 저는 라이오스 사태를 경험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촛불입니다.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이도, 갑작스러운 전쟁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이도, 모두가 어둠을 밝힐 수 있는 빛입니다. 반대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진청 군사가 악마 소환사라는 것은 날조된 증거입니다. 대륙을 농락하고 교국의 꼭두각시를 내세우는 이기영 명예추기경이야말로 대륙의 공적입니다. 라이오스 사태 역시 그의 자작극이며 그가 여신의 거울이라 선전하는 것 또한…. -날조라는 것은 그대들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확실한 증거 없이 실체가 없는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야말로 날조입니다.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믿으십시오. 들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을 믿으십시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강대한 악마가 계약자라고 부르는 것이 누구입니까. 라이오스에 커다란 절망과 위험을 주었던 이가 누구입니까. 대륙법으로 시행되는 재판을 거부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가 누구입니까. 아마 여러분은 삼국동맹이 정식으로 재판을 회부되었다는 사실 역시 모르고 계실 겁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이 모든 혼란을 초래한 이후 가장 안전한 곳에서 숨죽이고 있는 이가 누구입니까! 저는 현재 여러분의 앞에 서 있습니다. 악마소환사 진청과는 다르게 여러분과 대화하기 위해 지금 이곳에 서 있습니다! -현혹되지 마십시오. 여신의 거울로 보이는 것은 모두 진실이 아닙니다. -지금 그대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대 역시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준 신호에 곧바로 카메라를 돌리는 정하얀에게는 엄지손가락을 보내고 싶다. 현재 마력 홀로그램이 비추고 있는 것은 공화국의 대변인.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러시아 사람인가?’ 이방인인지 러시아 사람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마음의 눈으로 확인하자 곧바로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플레이어 예브카리나의 상태창과 잠재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예브카리나] [나이-34] ‘러시아 사람 맞구만.’ 굳이 다른 쪽은 볼 필요도 없다고 느껴진다. 애초에 비전투형처럼 보이기도 했고 실제로 능력치도 초월적이라고 말하기에는 힘들다. 이지혜처럼 처참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자체 음성 증폭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 아마 진청 쪽 라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초조한 얼굴은 조금 귀엽게 느껴질 정도. 하지만 본분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어떻게든 이쪽을 물어뜯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하다. 이후에 어떤 말을 해올지도 예상이 간다. ‘빛과 어둠이라는 프레임을 부정하든가.’ 혹은. ‘반대로 뒤집어씌우려고 하든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저분도 곧 악마 관계자로 다시 태어나게 될 테니까. * * * -지금 그대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현재 그대의 모습 역시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째서 이 자리에 있는 거지.’ 마음속으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건 익히 들었지만 교국의 수도나 린델에 자리해 있을 거라는 지휘부의 판단이 무너진 것이다. ‘아니.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현재 모든 병력이 에베리아를 틀어막고 있었으니까. 캐슬락 공성전이 시작된 이후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다면 전체적인 전황은 더욱더 유리해진다. 린델, 그다음은 수도. 이 전쟁은 승리를 향한 물살을 타게 된다. 문제는 현재의 상황에 자신을 포함한 많은 이가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부정하는 수밖에 없어.’ 모두는 아니지만 병사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 특히나 공화국민들의 모습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물들어 있다. 몇몇 이방인 역시 혼란스러워 하는 것은 마찬가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앞선 영상은 그만큼 충격적이었으니까. 보통 흑마법사라고 해봐야 하급 악마나 중급 악마를 부르는 것이 끝이다. 감히 마주하기조차 두려운, 악의로 가득 찬 초월적인 괴물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직접 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덜덜 떨려올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저런 게… 대륙에 존재한다고?’ 여신의 거울에 비친 악마군주의 모습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울부짖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이해할 수 있다. 대륙을 노리는 어둠이 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하지만 이 장소를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딱히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니다. 대륙 곳곳에 숨어 있는 악의적인 존재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모험가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들이라면 전부 알고 있을 테니까. 하물며 악마라면…. 물론 나는 진청 군사님을 믿는다. 하지만. ‘만약 저 영상이 조작된 것이라고 해도.’ 파괴적인 것은 마찬가지. 자세한 상황을 전해 들은 나 역시도 의심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는 걸 피할 수가 없다. 혹시나 진청 군사가 정말로 악마의 하수인이라면? 정말로 대부분의 공화국민들이 진청군사의 말에 속고 있는 것이라면? 눈앞에 있는 저 명예추기경이 빛의 선택을 받은 자라면? 군사의 목적이 공화국의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악마숭배자 이토소우타, 악마소환사 진청. 그리고 정말로 대륙에 뿌리내리고 있는 집단이 존재한다면….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한 시점. 이미 말려들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이야. 분명히… 날조된 내용일 거야.’ 의문을 품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자꾸만 머릿속에서는 이상한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 하지만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이미 자신을 비롯한 공화국은 거대한 물살을 탔고 평범한 이들이 이 물살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야.’ 병사들을 다독이고 명예추기경의 말에 대응한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것뿐이다.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하는 것은 찰나. 숨을 내쉰 뒤 곧바로 입을 열자, 곧이어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신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직접 봐도 불안하게 비춰진다. 하지만 이게 최선. ‘선전이고 전술이야. 절대로 의문을 가지지 말자.’ -모든 것은 적의 선전이고 전술입니다. 아군의 사기를 꺾기 위한 기만전술입니다. 아, 악마를 소환한 것은 진청 군사님이 아닙니다. 교국의 명예추기경이야말로 라이오스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이번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만들어진 치밀한 각본이며 공화국을 빼앗기 위한 수작입니다! 저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진짜 악마는 저들입니다. 민중을 속이고 선동하며 기만하는 저들이야말로 대륙에 자리 잡아서는 안 되는 악마들입니다. 신성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내걸고 일으킨 폭동 때문에 얼마만큼의 피가 흘렀는지 우리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맞아.’ -중립국 라이오스를 자신들에게 끌어 들이기 위해 라이오스 국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펼친 자작극입니다. 악마소환사는 진청 군사님이 아니라 교국의 명예추기경과 그와 함께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정말일까. 목숨을 걸고 라이오스를 지킨 저들이 정말로 악마를 소환한 장본인이라고 해도 괜찮은 걸까.’ 연기가 아니었다. 덩치 큰 전사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저항하고 있었고 이기영 명예추기경과 마법사는 계속해서 울컥 울컥 피를 토하며 초월적인 힘에 저항하고 있었다. ‘정말 연기였던 걸까.’ -모… 든 것이 함정입니다. 판단력을 흐리려는 자작극입니다. 어째서 교국이 중립국인 라이오스를 끌어들이려고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째서 이종족을 끌어들이려고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노리고 원하는 것이 바로 이 전쟁입니다. 우리의 것을 빼앗기 위해 검을 들고 공화국을 부정하며,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삼국동맹입니다. 이 모든 상황이야말로 악마소환사 이기영이 원하는 바입니다! 그가 바로 악마를 소환한 장본인이다! 진청 군사님께서 그럴 리가 없어! 커다란 일갈이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디 거짓부렁을 입에 담는 것이냐! 나는 베니고어 여신님과 엘룬의 선택을 받은 성직자이며 신의 선택을 받은 사자다! 이 더러운 악마의 하수인아!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신성한 빛이 터져 나온 것은 순식간. 제대로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다. # 378 회귀자 사용설명서 378화 언제나 팩트는 승리하는 법이다. (4) “동, 동요하는 병사들은 있습니까.” “없… 습니다. 카리나 님.” ‘거짓말이야.’ “다른 쪽은 조금 어떻습니까.” “저, 저희 쪽도 없습니다. 물론 평소 같은 분위기라고 하기는 힘들긴 하지만 쓸데없는 소문의 확산은 최대한 막고 있는 터라… 관련 교육은 물론 입단속도 철저히 하고 있으니 사기의 영향을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없을 리가 없어.’ 분명히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찬란한 빛으로 둘러싸인 채로 소리를 내질렀던 명예 추기경. 안 그래도 라이오스 사태를 눈으로 직접 확인했던 직후다. 전쟁의 공포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병사들이 저런 걸 보고 불안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조작이 아니었던 거야.’ 여신의 거울로도 본 적이 있었던 커다란 빛, 심지어 그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신성한 빛이었다. 대륙에 그리 오랜 시간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의 신성력을 목도한 것은 처음. 단순한 눈속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눈속임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신의 선택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버렸을 정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기영 그자가 공화국에서 선전하고 있는 대로 정말로 악마소환에 한 손을 거둔 이들 중 하나가 맞거나 관련되어 있다면 지금의 신성력은 어떻게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모든 성직자들이 선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경지에 이른 성직자들은 대부분 두터운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신을 위해 봉사하며 어려운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오직 신을 위해서 살아간다. 명예 추기경이 보유하고 있는 신성력은 각 교단의 성녀나 성자를 상회할 정도.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초월적인 존재들과 동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 그가 정말 악마와 관련이 있다면…. ‘지금과 같은 신성력을 얻는 것은 불가능해.’ 추측이 아닌 확신. 신성력이 정확히 어떤 매커니즘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는 자신 역시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악마소환사나 흑마법에 연관이 있는 자가 저런 종류의 신성력을 얻지 못한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절대로 그자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브카리나. 절대로요.’ 진청 군사님이 해주신 말씀이 갑작스레 떠오른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다면….’ 만약 진청 군사님에게 어떤 목적이 있었다면 감내하고 받아드렸을 것이다. 공화국의 이득을 위해 공포스러운 존재를 소환한 것이 맞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솔직히 말씀해 주셨다면…. ‘의문을 품어서 어쩌자는 거야. 군사님이 그럴 리가 없잖아.’ 지휘통제실의 불안은 곧 병력 전체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괜스레 입술을 꽉 깨물게 된 것은 당연지사. 밖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예브카리나 님. 비숍 상 사제님이 뵙고 싶으시다고….” ‘제길.’ 어떻게 생각해 보면 예상되어 있는 수순이었다. “들어오라 전하세요.” “네. 그대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직후 시야에 비친 것은 백발을 하고 있는 노인이다. 얼핏 보면 볼품없는 늙은이로 보일 수도 있지만 눈앞에 있는 이를 할 일 없는 노인이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공화국에서도 교단은 존재한다. 물론 교국처럼 국가의 기반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사제들이 필수적인 이 사회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위치는 결코 적지 않다. 군부에 몸을 담고 있는 사제들도 마찬가지.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는 건 교단 자체를 외면한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상황이 달갑지 않다. 저 노인이 무슨 말을 해올지에 대해 대충은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비숍 사제님.” “큼…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라네. 예브카리나.” “어제 일에 관련해서는 이미 입장을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관련해서는 따로 드릴 말씀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공화국의 입장은 이미….” “물론 밝혔지만…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잠깐 다른 이들을 물릴 수는 없겠는가.” “그럴 필요 없습니다. 비숍 사제님.” “부탁일세.” “…….” “…….” ‘이래서 싫었던 거라고.’ 절로 한숨을 내쉬게 된 것은 당연지사. 저 말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 위치로 돌아가 다시 한번 부대를 살피도록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 “…….” “그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비숍 상급 사제님.” “이야기를 한 번 나눠봐야겠네만….” “네? 그게 무슨….” “교국의 명예 추기경과 내가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겠다 이 말일세. 따로 자리를 마련해준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사제님이라고는 해도 방금의 발언은 흘려들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자와 만나보겠다니요. 지금은 전시입니다. 저희의 임무는 이곳을 사수하는 것이고 그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캐슬락으로 가는 지원군과 보급품을 차단하는 것이 제 일이지만. 사제님과 그자를 만나게 하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공화국을 지키는 일이야.”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야 말로 공화국을 지키는 일입니다. 사제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 “정말로 방금의 것을 보고도 전혀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그자의 신성력은 거짓이 아니야. 정말로 진청 군사의 말대로 그자가 악마를 소환하고 군사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하나? 악마 소환사나 그와 관련된 일을 한 자가 그만한 신성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베니고어 여신이 웃겠군. 신들은 현세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세. 그릇되고 잘못된 인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런 신성력을 내리지 않는다 말일세! 그자는 성인이며 성자며 빛의 선택을 받은 자가 맞아. 하늘이 내린 성인….” “그자는 사기꾼 입니다! 비숍 상급 사제님!” “어떻게 한낱 사기꾼이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어제 우리가 목격한 것은 여신의 거울로 본 것이 아니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고 현실이었네. 사제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어. 그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이기영 명예 추기경과의 만남을 주선해야 하네.” “하지만!” “그대는 공화국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왔는가. 예브카리나. 나는 어릴 때부터 공화국에서 자랐고 지금도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네. 공화국에게 해가 되는 것은 절대로 할 생각도 마음도 없네. 단지 알고 싶을 뿐이야.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진실이 맞는지에 대해서… 자네가 진청 군사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나 역시 진청 군사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 하지만 적어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그자가 정말로 신의 선택을 받은 자가 맞는지.” “진청 군사님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제삼자의 소행일 수도 있지.” “진청 군사님께서도 제삼자의 소행일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게 이기영 명예 추기경의 함정이었다고….” “그것 역시 삼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존재해. 눈만 봐도 알 수 있네. 저자는 그럴 만한 짓을 할 위인이 아니야. 빛의 선택을 받은 인간일세. 악마를 소환해 군사를 함정에 빠뜨린다니… 차라리 악마가 봉사 활동을 한다는 걸 믿겠군.” “…….” “무엇보다 이기영 명예 추기경 본적도 없는 진청 군사를 위한 함정을 팔 수 있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 악마와 그곳에 있었던 모든 것, 악마가 소환되기 위해 떨어졌던 마법이… 정말로… 고작 진청 군사 한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고?” “공화국을 압박하기 위한 전술로….” “이기영 명예 추기경은 라이오스에 진청 군사가 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네.” “그걸 어떻게 단언할 수 있습니까. 비숍 사제님.” “자네도 여신의 거울로 직접 보지 않았는가. 그때 라이오스에서 일어난 일을 모든 중립국의 국민들이 보고 있었어. 진청 군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공포스러운 존재를 이기영 명예 추기경이 종 부리듯 부리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만 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이기영 명예 추기경과 말을 맞춰 진청 군사를 속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대륙을 위협할 수 있는 악마가 한 인간의 말을 듣고 오직 진청 군사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연극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심지어 불과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그 모든 걸 계획하고 실행했다 이 말인가? 우연의 우연이 겹쳐도 쉽지 않은 일이야. 나는 지금 지극히 상식의 선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세. 예브카리나. 정말로… 정말로 이기영 명예 추기경이 대륙을 혼란에 빠트리고 싶어 했다면 그 악마를 다시 한번 소환했을 게야. 이런 귀찮은 짓을 하지 않았겠지. 그자가 그럴 리가 없어.” ‘제기랄….’ 부정하고 싶다. 하지만 부정하기 힘들다. 비숍 사제님의 말에 틀린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이오스에서 일어났던 그 엄청난 사건의 실상이… 한낱 인간의 말을 듣고 진청 군사를 속이기 위한 연극을 한 거라니… 지나가던 개도 믿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제삼자가 있고 교국과 공화국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게 더 현실적이다. 이래서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점점 더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은 당연지사.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어떻게… 단언할 수 있습니까 비숍 사제님.” “그래서 대화를 해보겠다는 게야.” “…….” “그래서 대화를 하고 싶다는 걸세. 내 눈으로 직접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신의 선택을 받은 사자가 맞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 “대륙을 실제로 위협하고 있는 존재가 실존하고 있는지.” “…….” “듣고 싶은 것이 많아. 그 자의 말 대로 우리들이 뭔가 잘 못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네. 우리가 검을 들어야 할 대상은 서로가 아니야.” “대화는….” “부탁일세.” “허가해 드릴 수 없습니다.” “예브카리나!” “공식적으로는 말입니다.” “아….” “공식적으로 허가를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만약 비숍 상급 사제님께서 이기영 명예 추기경을 만난다는 게 밝혀진다면… 사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겁니다. 적들의 선전 전술로 활용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고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으로는 만날 수 있도록 조치를 해보겠습니다. 물론 그건 저들의 동의가 필요한 부분이겠지만요. 일단은 저희 뜻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빠르면….” “최대한 빠르게.” “알고 있습니다. 비숍 상급 사제님. 전쟁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자신이 현재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하기에는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해졌으니까. 하지만 비숍 상급 사제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이유 정도는 알고 있다. ‘진실을 알고 싶으니까.’ 서신을 보낸 지 약 한 시간이 지난 직후. 에베리아 왕국으로부터 똑같이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커다란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 하지만 이기영 명예 추기경의 편지는 완벽한 긍정을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저 역시 이번 일을 대화로 풀어나가고 싶습니다. 빛의 사랑을 받으시는 비숍 상급 사제님의 결단과 아름답고 고귀한 예브카리나 님의 양보에 경의를 표합니다. - 이기영 명예 추기경 올림.] “어떤가… 예브카리나 자네도 함께 갈 텐가.” 그 질문에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 379 회귀자 사용설명서 379화 언제나 팩트는 승리하는 법이다. (5) ‘저는 이곳에 남아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그런가.’ ‘네, 만약 세 시간 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그럴 일은 없을 걸세.’ ‘아뇨, 만약 세 시간 내로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곧바로 병력을 보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딱 세 시간입니다. 비숍 사제님.’ ‘알겠네, 세 시간 안에는 꼭 돌아오도록 하지.’ ‘조건은 이번 만남을 선전에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꼭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돌아오신 직후에는….’ ‘예브카리나, 자네에게도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전하도록 하지.’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비숍 상급 사제님.’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 고맙군.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그럼 다녀오도록 하겠네.’ ‘입구까지는 함께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정확히 2시간 22분 전에 나눈 대화가 계속해서 기억 속에 맴돌고 있었다. 잘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내려꽂힌 것은 당연지사. 전시 중 대치하고 있는 병력 간의 소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 일은 확실히 예외라고 부를 만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급 부대의 허락조차 구하지 않았다. 이기영 명예 추기경과 공화국의 상급 사제의 만남. 이쪽에서 먼저 제안해 온 것을 그렇게 쉽게 수락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함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 교국에 입장에서는 충분히 함정이라고 판단할 만하다. 공화국은 이기영 명예 추기경을 비방하는 내용의 선전을 주로 담고 있었고 실제로 그를 대륙의 공적으로 지목했었으니까. 하지만 약속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그의 모습은 지나치게 평온해 보였다. 정말로 함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얼굴. 잠깐 마주쳤을 뿐이었지만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다. 공화국 진영이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째서 나는 비숍 사제님과 함께 들어가지 않은 걸까.’ 이곳을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변명.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 말 그대로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자신이 믿고 있는 공화국이,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이 무너질까 무서웠을 것이다.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와 직접 마주할 자신은 없다. 모순적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겁쟁이니까. ‘싸워야 할 사람이기도 하고….’ 괜스레 창밖을 바라보니 아직도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작은 텐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궁금한 게 당연.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예브카리나 님.” “아. 쥔윙 와 있었군요.” “…….” “아마 괜찮을 겁니다. 저쪽에서도 딱히 모난 짓을 해오지는 않을 거니까요. 아무리 비공식적인 대담이라고는 해도 사제들끼리의 대담입니다. 비숍 상급 사제님은 물론이거니와 그 역시 그런 멍청한 짓을 해오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비숍 상급 사제님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조금 꽉 막힌 곳이 있으시지만, 그분이야말로 공화국에 정말로 필요한 사람입니다. 절대로 본국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분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저희를 못 미더워 보이시겠죠. 저희는 이방인이니까요.” “그렇기도 하겠군요.” “네.” “한데 카리나 님.” “예.” “이유가 뭡니까?” “이유 말입니까?” “예,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비숍 사제님의 체면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요.” “…….” “진청군사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요. 누군가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말입니다. 아마….” “네.” “아마도 전쟁은 공화국에서 먼저 일으켰을 겁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높은 확률로요.” “그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리고 최대한 억누르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고요. 물론 공화국이 잘 못 되어 있더라도 저는 공화국의 편에, 군사님의 곁에 함께 할 겁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쥔윙. 하지만….” “네.” “진실이 뭔지는 알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끌려다니고 싶지는 않아요. 비숍 사제님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싸워야 하는지는 알아야 해요. 최소한 저는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쥔윙은 한 번도 공화국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까?” “없지는 않습니다만… 카리나 님처럼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카리나 님이 가지고 계시는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깊게 빠지시는 것도 좋지 않을 겁니다. 생각해보니 군사님께서는 항상 그런 카리나 님을 걱정된다고 말씀하셨죠.” “정말인가요?” “네, 생각이 깊은 것은 장점이지만 너무 빠지는 것은 단점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런 성격 탓에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말씀….” 괜스레 씁쓸한 웃음이 지어졌다. 자존심 상하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쪽이 아닌 지키는 쪽으로 배정받은 것 역시 사실은 그런 이유. 캐슬락 쪽이 아닌 에베리아와 대치하고 있는 것이 그런 연유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군사님께서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장소에서 더 빛을 발하실 거라 하셨습니다.” “…….” “…….” “하하, 그건 기분 좋은 소식이네요. 저를 생각해 주고 계셨다니 정말로… 기분 좋은 소식이네요.” “이기영 명예 추기경 그자의 말을 절대로 믿지 말라고 한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네. 그것 역시….” ‘분명히 이유가 있겠지.’ “싸우는 이유라고 말씀하셨죠. 조금 전에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쥔윙.” “현재 카리나 님을 믿고 있는 이들을 위해 싸운다는 걸로는 이유가 부족합니까?” “아….” 왠지 모르게 머릿속이 깔끔해지는 듯한 기분이 든 것은 당연지사. 복잡했던 것이 한꺼번에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정리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의심의 씨앗은 가슴속에서 자라나고 있었고 여러 가지 생각들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뭘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눈앞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당장은 그것뿐이다. 어찌 됐건 전투는 벌어질 거고 실수하면 많은 이들이 죽는다. 공화국의 병사들과 교국의 병사들이 부딪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 어느 쪽이 아군인지 어느 쪽이 적군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렇군요… 네, 그렇네요.” 입가에는 알 수 없는 희미한 미소도 번진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간단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전술이라는 것은 효율적으로 이기는 방법이다.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며 전투에서 승리하는 방법이다.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슬슬 일어나 볼까요. 세 시간이 지났습니다.” “네. 카리나 님.”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비숍 사제님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이기영 명예 추기경. 그자가 함께 걸어오고 있다는 것. 물론 호위들이 함께 이기는 하지만 너무나도 태연한 모습은 조금 신기하게 보일 정도였다. 조금은 찢어졌다고 할 수 있는 눈, 오똑한 콧대와 이상하게 붉어 보이는 입술. 전체적으로 잘생겼다고 하기에는 힘들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야하게 느껴지는 듯한 얼굴이다. 하지만 미소를 보이자 무척이나 선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예타 카리나 님. 어려우신 결정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니요. 명예 추기경님. 약속은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대화는….” “물론 선전에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그런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저도 즐기는 편이 아니니… 어떻습니까?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조금 아쉬운 것 같은데 함께 대화라도 나눠보심이….” “아닙니다, 곧바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호의는 감사드리지만, 지금은 적이니까요. 이후, 모든 일이 끝나면 한 번 뵙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죽지 않는다면… 제가 먼저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군요, 서로 죽지 않는다면… 네. 그렇게 결정하셨군요.” “…….” “아쉽지만… 음… 아니… 음… 정말로 아쉽게 됐습니다. 저 역시 싸움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만… 현재 저희가 처한 상황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카리나 님.” “물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쪽도… 이쪽도요. 그럼 전장에서 뵙겠습니다.” “네, 만나는 곳이 전장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안녕히.” 천천히 등을 돌린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인 것은 당연지사. 심지어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까지 들려온다. “형님 말대로 여기까지 나오긴 나왔지만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다니까. 거, 나는 심장이 철렁철렁 한데 형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거요?” “왜 아무렇지도 않겠어. 나는 믿은 것뿐이다. 덕구야 저들도 그리고 너도.” “거, 고마운 말이기는 한데 조금 쑥스럽구만. 일단은 빨리 돌아가는 게 좋겠소. 혹시 추격조가 따라올지도 모르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형님은 너무 사람을 잘 믿어서 탈이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대상은 아마 여신의 거울로 봤었던 그 전사가 틀림없으리라. 왠지 모르게 익숙했던 얼굴이라 생각하던 차. 관심이 가기는 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앞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까요. 카리나 님. 지금이라도 레인저들을….” “아닙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어차피 만나게 될 테니까요.” “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보다 비숍 사제님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 “비숍 사제님?” “아… 불렀나?” “네, 이야기는 잘 나누셨는지….” “뭐, 그렇다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조금 시간을 더 보내버렸지. 이거 미안하게 됐군.” “아뇨, 괜찮습니다.” “흐음… 여전히 싸울 생각이구만….” “네,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마 상황을 바꿀 수 없는 건 명예 추기경 역시 마찬가지 일 겁니다.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이니….” “아쉽게 됐군.” “그보다 의문은 좀 풀리셨습니까, 사제님?” “사실 풀렸다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그래도 속은 좀 시원해졌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대충은 알 것 같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 것 같아. 이 늙은이의 눈이 확실하다면 그는 신의 선택을 받은 사자가 맞다고 할 수 있을 걸세. 아니 확신할 수 있어. 그는 베니고어 여신에게 선택을 받은 성자가 맞아.” “그게 사실입니까?” “암….” “그렇다면 라이오스 사건은….” “그가 저질렀을 리가 없지.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거짓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더군. 또 흘릴 피에 대해서 걱정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성자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래도… 저희는 싸울 생각입니다.” “그렇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그보다 손에 들려 있는 건….” “아, 포도주일세.” “네?” “교국의 고위 사제들만 마실 수 있다는 신성한 포도주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나? 오늘 마시고 조금 남은 걸세. 선물로 가져가라더군. 독이 들어있거나 위험하거나 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어떤가 같이 들어가 한잔할 텐가?” “아니요, 저는….” “함께 취하자는 이야기가 아닐세. 카리나, 잠깐 내 이야기를 들어주게나.” “그건….” “아마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게야.” # 380 회귀자 사용설명서 380화 언제나 팩트는 승리하는 법이다(6) “아마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게야.” 왠지 모르게 모든 것이 찜찜한 기분이 든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해야 했으니까. 현재 공화국 진영이 가지고 있는 단점은 적군의 정보가 무지하다는 데 있다. 에베리아 왕국이 보유하고 있는 세계수의 영향. 이기영 명예 추기경이 에베리아에 체류하고 있는지도 최근 알았으니 다른 표현은 필요 없으리라. 숨기고 있는 카드가 그것뿐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멍청한 일. 여러 가지 카드를 숨기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뭔가 정보가 있을 수도 있어.’ 아주 작은 대화에서도 여러 가지를 추측할 수 있기 마련이다. 이 수성전 아닌 수성전을 효과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꼭 수비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야.’ 그 말 그대로, 쟁점은 얼마나 시간을 끄느냐에 있다. 시간상으로 생각하면 빠르면 내일, 조금 느리면 그다음 날부터 전쟁이 시작될 확률이 높다. 적 병력이 캐슬락으로 도착하지 못하게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하니 최소 5일은 붙잡아 놔야 한다. 적들이 도착하더라도 캐슬락을 점령한 이후가 되어야 한다는 거다. “상황은 유리해.” 성벽은 견고하고 병력은 우위다. 공성전의 입장이 아닌 수성전에 입장에 서 있다. 마법사들의 체력 분배와 사제들을 중심으로 긴 장기전을 유도한다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거야.’ 결단코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윽고 조금의 시간이 지난 직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인지는 뻔할 뻔 자. 조금 복잡한 표정을 한 채로 방 안으로 들어오는 비숍 사제님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어떻게 봐도 어두운 얼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싸우고 싶지 않으신 거야.’ 아마 틀림없으리라. 사제의 입장에서는 어떨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싶으시다는 말씀이 뭡니까, 비숍 상급 사제님.” “별건 아닐세. 아마 나보다는 예브카리나 자네가 더욱더 듣고 싶은 게 많을 것 같다만….” “그 말이… 맞습니다, 상급 사제님. 현재 정보가 부족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교국 측에서 어떤 카드를 가지고 있는지. 또 안에서 어떤 대화들이 오갔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단순한 사제들끼리의 대담이었어. 아마 듣는다고 해도 뭘 캘 수는 없을 걸세. 애초에 나눈 것은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고…. 평화와 공존, 그리고 새로운 발걸음에 대해서였네. 여신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고 또 우리 사제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도 했지. 모시는 신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뿌리는 같으니…. 하하. 이기영 명예 추기경. 그 사람은 원래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무신론자였다고 하더구만. 상상할 수 있겠는가? 무신론자라니… 이 대륙에서 무신론자라니!” “실제로 저희가 온 곳에서는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신성력 같은 게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다고 들었네. 이방인들이 온 지구라는 곳에서는 말이야. 재미있었던 것은 종교 때문에 일어난 전쟁도 그 중 상당수를 차지했다는 게야. 물론 이곳도 성전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지구라는 곳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겠지.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가 가지고 있는 신앙심을 위해 싸웠다고 들었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신을 위해,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신성력도 내리지 않는 신을 위해 싸운다고….” “분명히 그랬었습니다. 아니, 아마 지금도… 싸우고 있을 겁니다.”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현재는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네. 물론 왜곡된 싸움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야.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가치로 내걸고 싸우는 그 신앙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어. 어째서 베니고어 여신님과 엘룬 님이 그자를 자신들의 사자로 내세웠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네. 이기영 명예 추기경, 그자의 신앙은 순수해. 너무나도 하얀 사람일세.” “네?” “그는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진짜 사제야. 자신이 가려고 하는 길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아. 신의 이름으로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말일세. 심지어는 그가 바리안 님의 교리까지 공부하고 있었다더군…. 하하하. 다시 한번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시간이 됐어. 나는 과연 신의 이름을 내걸고 싸운 적이 있었나. 내가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나는 지금껏 바리안 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서 말일세.” “여러 가지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비숍 상급 사제님은 앞으로도 많은 것을 함께해 주실 겁니다.” “아니, 내가 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네. 신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그렇지 않습니다, 사제님.” “길을 열어주게나.” “네?” “길을 열어야 하네. 그들에게는 대의가 있고 우리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어. 싸움을 피해야 하네. 공화국민들이 쓸데없는 피를 흘릴 이유가 없어. 그가 원하는 것은 빛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되는 것이 전부일세. 악마 소환사 진청을 잡아 이 혼란을 종식시키는 것이 그거 원하는 전부야. 길을 열고 함께 캐슬락으로 향해야 하네.” “네?” “그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네. 예브카리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비숍 상급 사제님. 지금은 전시입니다. 길을 열다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그리고 진청 군사님께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 비숍 사제님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네. 정말로 본인이 떳떳하다면 어째서 대륙재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인가. 어째서 교국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는 것으로 일관했던 것인가. 그자는 악마 소환사가 맞아.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네.” “취하신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내일 마저 듣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돌아가 주십시오.” “나는 지금 허투루 하는 이야기가 아닐세, 예브카리나. 내가 똑똑히 봤다고!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자는 악마 소환사가 맞아…. 제대로 된 종교 재판을 받아야만 하네.” “취하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비숍 사제!” “진청 그자는 악마 소환사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예브카리나!”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다면 군법으로 다스리겠습니다!” “…….” “…….” “미안하네…. 내가 잠깐 흥분한 것 같으니….” “후우…. 아닙니다. 사제님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같이 한잔 마셔 주겠는가.” “저는 괜찮습니다, 사제님. 머리가 아프니 돌아가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오늘의 일은 불문에 부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알겠네…. 알겠어.” “말씀을 많이 드리지는 못했지만 저는 사제님을 많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웃으면서 뵙고 싶습니다.” “…….” 천천히 밖으로 나가는 사제님의 뒷모습이 보인 것은 당연지사. 축 처진 어깨가 괜스레 시야에 들어왔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조차 알 수가 없을 지경. 입술이 꽉 깨물어진다. 테이블 위에 따라져 있는 포도주가 괜스레 시야에 들어온다. 저도 모르게 녀석을 들어 올린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이내 인상을 구기며 비숍 사제가 따라준 그 술잔을 바닥으로 던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선택이 실수였다는 걸 인지한 탓이다. “빌어먹을.” 그리고. “자네는 그 술을 마셨어야 했네, 예브카리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린 것은 순식간, 어두운 방문의 틈 사이로 보이고 있는 것은 백발을 하고 있는 노인이다. 눈은 광기로 가득 차 있고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적의가 감돈다. 주문을 외우는 것은 당연. 하지만 갑작스럽게 달려든 노인의 손에 들린 단검을 보는 순간, 갑작스러운 공포와 당황스러움이 머릿속을 덮쳤다. 이런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비숍 사제의 모습은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아아아아아아악!” “자네는 그 술을 마셨어야 했어! 내가 건넨 그 신성한 포도주를!” “이…. 이 미친 늙은이가!” “내가 미쳤다고? 내가 미친 것 같아! 미친 것은 네년이지. 이 더러운 악마의 하수인 년이!” “무슨… 소리를!” “네놈들 악마 숭배자 놈들의 계획을 우리가 모를 것 같으냐! 캐슬락에 다시 한번 그 악마를 소환하려고 하는 계획을! 그곳에 있는 모든 이를 제물로 삼아 다시 한번 완전한 악마의 소환을 꾀하려고 하는 걸 모를 것 같아? 바리안 님에게 계시를 받은 내가 뻔히 보이는 그 수에 속을 줄 알았단 말이냐!” “이 미친!!!” “나는 보았다! 미래를 보았고 실제로 체험했단 말이다! 나 역시 계시를 받았다! 바리안 님의 계시로 공화국이 불바다가 되는 것을 보았어! 네놈들이 캐슬락에서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전부 깨달았다 이 아둔한 것아! 이 전쟁을 어째서 일으키려고 했는지 전부 깨달았단 말이다!” “이거… 놔!” “감히 이기영 명예 추기경을 해하려고 들어? 그가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해하려고 들어?! 그는 바리안 님의 아들이며 선택을 받은 사자다! 네깟 악마 하수인 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미친… 늙은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은 느낌. 발버둥을 쳐보지만 다시 한번 배에 틀어박힌 금속 때문에 말을 내뱉기가 힘들었다. “나도 싸울 것이다. 공화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바리안 님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이기영 명예 추기경과 뜻을 함께할 것이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하지만 정신을 제대로 붙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지사. 더듬더듬 팔을 뻗자 무언가 알 수 없는 형태의 물건이 손에 잡혔다. 그대로 머리로 내려친 것은 당연.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비숍 사제가 땅바닥으로 쓰러지자 구속이 풀린 몸에서는 절로 켁켁 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확실한 것은 비숍 사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 전방을 다시금 바라보자 깨진 머리가 신성력으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더러운 악마의 하수인아.” “아니…. 나는 그런 게….” “이 더러운 년!” “나는 그런 게 아니야!!!” 다시 한번 칼을 내뻗는 사제를 향해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내려친 것은 순식간. 순간적으로 둔탁한 감촉이 느껴졌지만 이미 공포에 휘둘린 몸은 통제를 벗어난다. 살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이성을 던진다. “나는!” “으헉!” “악마의!” “크허어억….” “하수인 같은 게 아니야!” “커헉!” “단지 지키고 싶을 뿐이야!” “아아악!!” “공화국을! 군사님을 지키고 싶을 뿐이야!” “이… 더… 운… 하….” “죽어!” “…….” “죽어! 이 변절자!” “…….” “죽어어어!!!” 얼굴에 끈적끈적한 뭔가가 튄 것은 당연.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니 손에 들려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리안 님의 조각상. 검과 방패를 든 채로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바리안 님의 조각상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조각상을 보니 왠지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온다. 거대한 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미처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 보고를 위해 들이닥친 병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게 눈에 보였다. “예브카리나 님! 이종족 연합이 성벽으로 몰려들고 있습니… 다…. 무, 무슨 짓을….” “…….” “무슨 짓을!!!”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온몸에 힘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으니까. ‘역시…. 군사님이… 옳았어. 군사님이…. 옳았던 거야.’ 괜스레 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자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브카리나. 절대로요.’ “역시… 군사님은…. 틀리지 않았어….” # 381 회귀자 사용설명서 381화 성전(1) ‘계획대로는 아니네.’ -죽어! -……. -죽어! 이 변절자! -……. -죽어어어!!! ‘살벌하다. 살벌해.’ 그 말 그대로, 여신의 거울에 비치는 예브 카리나는 사실상 악마의 하수인과 다름없어 보인다. 바리안 님의 조각상을 들고 공화국에서 존경받았던 사제의 머리통을 후려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사이코패스 살인마. 1회 차 여단의 일원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 아니, 여단 정도가 아니다.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악마 하수인이다. 벨리알도 기쁘다고 박장대소를 터뜨릴 정도의 외관이었다. ‘저거 물건이네 물건이야.’ 얼굴이 피로 뒤범벅이 된 것은 물론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있다. 입고 있는 의복 역시 마찬가지로 피투성이. 저 정도면 현장에서 잡힌 현행범이나 다름없다. 사실 의도한 바와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이런 흐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지사. 본래대로였다면 정의를 위해 움직이고 계시는 비숍 사제님이 죽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자 역시 충분히 써먹을 수 있는 곳이 있을 테니까. ‘비숍 상급 사제님이 너무 급하게 움직이셨네.’ 신성한 포도주가 비숍 상급 사제의 입맛에는 그다지 맞지 않는 모양. 급한 상황이라고 설명했지만 저 정도로 서둘러 움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런 종류의 부작용 때문에 최대한 사용을 자제하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적격자였으니까.’ 빈손으로 보내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있었다는 거다.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걱정한 것과는 별개로 만들어진 결과 자체는 나쁘지 않다. 어찌 됐건 적 지휘관은 거의 초죽음 상태가 됐고 마침 타이밍 좋게 공화국의 병사가 들이닥치기까지 했으니까.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 리 없다는 말이다. 비숍 사제의 처절한 순교는 곧 부대 내에 퍼지게 될 것이고. 백번 양보해 저들이 악마 하수인의 정체를 숨기고 감추려고 한들 여신의 거울을 통해 모두가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사실 따로 작업을 칠 필요조차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쪽에서 여러 소리가 겹쳐 들려오는 중. 기왕 순교하는 김에 제대로 순교하겠다고 마음이라도 먹은 모양이다. 휘하 사제들에게도 어느 정도 내용에 대한 전파를 했던 것이 틀림없으리라. ‘공화국의 사제들도 제법이야.’ 무시했던 내가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 공화국의 사제들은 교국과 조금 다르지 않을까 의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신을 위한 마음은 모두가 같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비숍 상급 사제의 희생적인 행동에 힘입어 공성전이 조금 더 손쉬워 진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안 그래도 이제 막 출전을 앞두고 있는 시점. 괜스레 밖을 바라보자 출전 준비를 마치고 있는 병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함께 싸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무래도 나에게는 안전한 후방 지원이 제격이다. ‘연설 같은 것도 해야 하고.’ 때마침 방문을 천천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조심스레 밖으로 나가자 엘레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제법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 든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굳이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괜스레 옆에 있는 정하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출전을 앞두고 있는 지금은 약간 진지해질 타이밍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천천히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 “네?” “아마 병사들에게도 큰 용기가 될 겁니다, 이기영 님. 너무 무거운 역할을 맡긴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엘레나 님. 무거운 역할이라고 말씀하시니 민망할 뿐입니다. 마땅히 지켜야 할 장소입니다. 이곳 역시 이제는 제게 있어서 고향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오히려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명… 예추기경님.” “…….” “…….” “그럼 갑시다, 엘레나 님.” “네.” 살짝 얼굴이 붉어지는 엘레나를 봤는지 정하얀이 짐짓 표정을 찡그렸지만 그리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아직 내 몸이 완벽하게 회복되지는 않았으니까. 단상의 위로 올라가는 순간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얼굴들이 천천히 시야에 비치기 시작. 어쩔 수 없이 전장에 서야 하는 파란의 길드원도 조금 긴장한 듯하다. 그나마 다른 이들은 의연해 보였지만 이런 대규모 전쟁이 처음인 유아영은 제법 긴장하는 듯한 모습. 태연한 김창렬이 조금은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박덕구는 얼굴에 알 수 없는 초조함이 깃들었다. 김현성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 ‘심란해 보이네.’ 물론 김현성은 조금 더 준비를 한 이후에 들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겠지만 지금이 적기다. 당장 급한 것은 캐슬락을 지원하는 것.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라는 거다. 김현성이 기다려 마지않는 함정을 만들어야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당장 그런 도박을 할 자신은 없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군대를 최대한 유지하며 캐슬락 전선으로 향해야 했으니까. 아무튼 간에 계단을 오를수록 점점 시야가 확장되기 시작. 후방에 위치한 지휘관으로서 내려다보니 어떻게 봐도 안전해 보인다. 물론 안심하는 듯한 표정을 보여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건 중요한 전쟁의 시작이었고 대부분의 병력은 내가 상상하기조차 힘든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천천히 고개를 양옆으로 돌리자 저마다의 방법으로 불안감을 해소시키고 있는 이들이 눈에 보인다. 어떤 이는 자신의 검이나 투구를 매만졌고, 또 어떤 이는 기도를 하고 있다. 또 어떤 이는 동료의 손을 잡거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조용히 눈앞의 적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상 위에 서 있는 내 목소리를 기다린다는 것 하나. ‘압박감이 느껴지긴 하네.’ 아무런 생각 없이 이 광경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괜스레 구겨진 의복을 정리하며 입을 떼자 곧바로 귀를 기울이는 병사들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싸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입니다.” -싸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입니다. 시작은 가볍게. 하지만 목소리는 가볍지 않다. 무척이나 조용해진 장내. 다시 한번 입을 떼자 곧바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네. 바로 명분입니다. 어째서 싸워야 하는지, 어째서 검을 들어야 하는지, 어째서 목숨을 바쳐야 하는지, 어째서 소중한 생명을 빼앗아야 하는지에 대해 목도하고 제대로 마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검을 들어 올렸습니다. 우리는 싸우기로 마음을 먹었고 지금 적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어째서 검을 들어 올렸습니까. 우리가 검을 든 대의와 명분은 무엇입니까. 대답이 들려올 리 없다. 어차피 답을 찾으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모두가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까. 어째서 검을 들고 두려운 적과 마주하고 있습니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째서 이 자리에 깃발을 들고 서 있습니까. 모두가 알고 계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아마 모두가 인지하고 계실 겁니다. 이 싸움은! 이 싸움은 미래를 위한 싸움입니다! 우리의 대의와 명분은 누가 먼저 침략했는지, 누가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혔는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명분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마땅히 누려야 할 미래에 있습니다. 이 말이 맞다. -종족 간의 번영을 위한 미래! 이종족과 인간의 완벽한 화합이 함께하는 미래입니다. 서로 적대하며 싸우기 위해서가 아닌 화합과 조화로 이루어진 미래입니다. 저는 이곳에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동안 이종족의 반대편에 서 있던, 인간이었던 제가 이제는 여러분과 함께 전장에 서 있습니다. 공통된 적에 맞서기 위해 현재 저는 이곳에 자리해 있습니다. 당장은 작은 발걸음이지만 곧 커다란 도약으로 이어질 것이며 우리가 함께 일구어내어야 할 이상향입니다. 슬그머니 옆에 있는 엘레나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엘룬쓰레기의 딸이자 빛 폭탄 물약의 소중한 재료는 내 말에 조용히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녀에게 방금 말보다 더 달콤하게 들릴 문장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물론 다른 대다수의 엘프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화합과 조화라는 건 좋지.’ -그 미래는 이 대륙과 빛을 위한 미래입니다. 어둠이 드리운 대륙이 아닌 빛과 함께하는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베니고어, 엘룬, 바리안, 대륙 위에 존재하는 모든 빛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미래입니다. 이건 중요하다. 그동안 너무 많이 언급해 짧게 끝내기는 했지만 빛을 위한 미래는 두 번 말해도 부족함이 없다. 목소리에는 확신을 담고 다시 한번 병사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내 몸을 감싸는 신성력은 덤. 지난 선전 활동에서 보였던 찬란한 빛을 기억하는지 몇몇 신앙심 깊은 엘프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미래는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들을 위한 미래입니다! 우리의 사상과 자유,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위한 미래입니다. 이것 역시 중요하다. 물론 규제가 아닌 획일화 되겠지만 가치로 안고 싸우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소재다. -그 미래는! 우리의 후대를 위한 미래입니다. 앞으로의 대륙에서 살아갈 우리의 후대를 위한 미래입니다. 우리의 아들들이 살아갈 곳은 어둠으로 가득 찬 대륙이 아닐 겁니다. 우리의 딸들이 살아갈 곳은 인간과 이종족이 서로를 향해 검을 드미는 장소가 아닐 겁니다.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갈 곳은 올바른 사상과 철학이 자리한 곳일 겁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을 위해 자리해 있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미래를 위해, 저마다가 꿈꾸고 있는 미래를 위해 이 자리에 있습니다. 누구는 가정을 위해, 또 누군가는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기 위해, 또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또 누군가는 신과 함께하는 미래를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여기서 숨을 멈추고.’ -우리는 강합니다! 한번 내질러 준다. -대의가 있고 명분이 있는 이는 강합니다. 대의가 있고 명분이 있는 군대는 강합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신의 이름 아래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각자의 이상향을 그리기 위해 그렇게 승리할 것입니다. ‘좋구요.’ -미래를 향해 발을 걸어갑시다. 모든 병사가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얼굴에는 확신이 깃들었고 모두가 무기를 고쳐 잡는다. -그 발걸음이 바로 미래를 위한 걸음입니다. 함께 싸웁시다. 우리가 그리는 이상향을 위해. 우리의 후대들을 위해!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를 위해! 나아갑시다! 함성이 터져 나온 것은 순식간. 예의상으로 내지른 소리인지, 아니면 단순히 공포를 잊기 위해 내지른 소리인지는 구별할 수 없다. 하지만 함성이 점점 커진다. 드워프는 평소와 같이, 엘프들은 평소와는 다르게. 수많은 병력이 각 부대의 지휘관들의 신호에 맞춰 투구를 고쳐 쓰고 한 번 더 발걸음을 내디뎠다. -전군! 전진! 커다란 전장 안에 빼곡히 들어선 병사.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함께 갑시다! 빛과 함께 싸우는 자들이여! ‘아무나 빛 좀 뿌려봐라!’ # 382 회귀자 사용설명서 382화 성전(2) 안 그래도 장관인 모습을 더 장관으로 만들어줄 VFX(Visual FX)가 없으니 뭔가 섭섭하게 느껴진다. 정말로 빛의 군대가 돌진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 사실. 하지만 위에서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런 전투에서 어느 한쪽에 손을 들어주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았다. ‘빛만 뿌려주면 되는데 그걸 안 해주네. 섭섭하다! 베니고어야!’ 섭섭한 마음이 솟아오르기는 했지만 하늘 위의 초월적인 존재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지지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물론 체험한 적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없어도 나쁜 건 아니니까.’ 현재 보이는 장면만 해도 충분히 이상적이라는 거다. 이쪽은 빛의 군대고 저쪽은 악마의 군세. 누가 정의고 누가 악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 싸움이나 다름없다. 만족스럽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들려온 것은 옆에 있는 엘레나의 목소리. “……!” 주문을 외우는 순간 신성력이 아군 병력을 뒤덮는다. ‘키야!’ 내 눈이 정확하다면 버프 종류의 신성 마법이 들어간 것이 틀림없으리라. 엘룬쓰레기가 힘을 내려주지는 않았는지 발현된 신성력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구색은 맞췄다는 데 의의가 있다. ‘진짜 너무 쩨쩨한데. 엘룬쓰레기….’ 자신의 딸을 팔아넘길 때부터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도움 하나 주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녀석다웠다. 아무튼 간에 빛의 군대는 엘레나가 내뿜은 신성력에 영향을 받기 시작. 정작 주문을 발현한 엘레나는 귀가 추욱 늘어졌다. 가지고 있는 신성력의 대부분을 소진한 것처럼 보였다. 거의 모든 병력을 휘감았으니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물론 전장에 함께 서려는 것은 아니다. 이지혜가 있는 상황실로 위치로 옮길 뿐이다. 언제 어디서 눈먼 화살이 날아올지 모르는 곳에서 드잡이를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가자, 하얀아. 엘레나 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아. 하아. 저는 이곳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싶습니다. 혹시라도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요.”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엘레나 님. 이번이 마지막 전투는 아닙니다.” “네, 명예추기경님. 가슴속에 새겨듣겠습니다.” ‘새겨들을 필요는 없는데….’ 혹시라도 리타이어해서 회복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면 이후 전투에서 그녀의 능력을 써먹기 힘들어 진다. 안 그래도 뒤틀린 연못에서 소모한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타이밍. 이후를 바라봐야 하는 이쪽으로서는 전력을 최대한 숨기고 아껴야 한다. 정하얀에게,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에게도 이번 전투에서 다른 미션을 주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 정하얀의 임무는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여신의 거울을 유지하는 것이 전부고 김현성은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는 역할이 끝이다. 몇 번이나 날뛰지 말라고 말을 해 놨으니 커다란 반전이 없는 이상 내 말에 따라 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김현성이 힘을 써준다면 더 손쉽게 승리를 가져갈 수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전력을 노출하는 것 자체가 꺼림칙하다. 현재는 적당히 전장을 누벼주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물론 파란 길드원을 케어하는 것은 김현성의 역할이다. ‘아암 그렇고말고.’ 엘프나 드워프 몇몇 죽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확실히 속물 같은 생각이지만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다. 눈에 마력을 집어넣으니 검을 검 집에 넣은 채 주변을 살피는 김현성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다른 길드원들이 있는 위치를 눈에 담아두려 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고.’ 적어도 걱정 하나는 덜 수 있다는 데 의의를 두는 게 맞으리라. 아무튼 제대로 된 공성전이 시작되기 전에 빨리 상황실로 가야 했기에 발걸음을 옮기자 곧바로 간이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설치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마력 홀로그램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지혜. 그 외 검은 백조의 몇몇 사람과 엘프, 드워프 측 지휘관까지 함께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주 좋은 환경이고요.’ 실시간으로 전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이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커다란 메인 화면에서는 병력 전체의 모습이 눈에 보이고 다른 거울에서는 각 부대가 따로 보인다. 물론 네임드들 같은 경우에도 따로 화면을 빼둔 것은 당연지사. 김현성을 비롯한 파란 길드원, 엘리오스와 드워프의 영웅들처럼 전장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영웅들은 따로 관리해 주는 것이 맞다. 이곳이 현대의 전장이라면 굳이 저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겠지만 대륙의 전쟁은 현대전과는 차이가 있다. 체스로 비유하면 편하다. 일반 병사들은 폰, 다른 영웅들은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는 비숍이며 나이트며 퀸이며 룩이다. 폰들 역시 잘 사용한다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다른 말의 중요성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영웅급 이상의 모험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히 몇 칸을 더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병력을 통솔하며 병사들의 앞에 앞장서고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폰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마치 지금처럼. “이리스, 이리야. 정령마법 준비. 격돌 전 방어 마법 구현합니다. 휘하 정령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령사 엘프 자매였었나?’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략적인 스펙은 알 수 있다. 교국 팔좌급이라 보기에는 애매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네임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가진 이들. 순식간에 그들의 등 뒤에 튀어나온 이형의 존재는 엘프들이 정령이라 부르는 이들이 확실하리라. -아아아아!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 뱉기 시작하자 곧바로 병사들을 감싸고 있던 방어 마법이 확실히 기존과 달라졌다. 정하얀도 신기한지 오랜만에 눈을 빛내며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 이지혜가 다시금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적 궁수와 마법사의 마법이 다시 떨어질 예정. 다시 한번 방어 마법 구현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상황실에 울려 퍼진다. 아마 저 목소리는 여신의 거울을 통해 그대로 전파될 것이다. ‘통신병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각 지휘관과 네임드 영웅들에게 신호를 내보낼 테고.’ 적들의 화살과 마법이 떨어지기 전 상황을 전달 받은 이들은 곧바로 방어 마법을 구현할 것이다. ‘전술의 천재 좋아하네.’ 가면쓰레기 진청은 물론 이 자리에 없다. 하지만 녀석이 지휘봉을 잡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전술의 천재고 나발이고 그 이전에 갖추고 있는 인프라의 수준이 다르다. 말하자면 녀석은 전술 전략은 아무리 노력해 봐야 보드 게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우리가 갖추고 있는 체계와의 차이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병력 전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또 세부적인 사항을 파악할 수 있는지. 녀석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상황실에서 전장으로 전달되는 명령의 하달 속도 역시 두말하면 입 아프다. ‘이건 템빨이거든.’ 여신의 거울로 갖춘 부대 지휘 시스템의 인프라는 후방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설 등급의 아이템. 무제한에 가까운 시야. 개인에게 전달이 가능한 통신체계. 심지어 적들의 마법이 날아오는 타이밍까지 계산할 수 있다. 이딴 걸 가지고도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이지혜의 자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다. 한차례 위기가 넘어간 이후, 이지혜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눈에 보인다. “파란 부길드마스터. 그리고 하얀씨도 오셨군요.” “오랜만입니다. 지혜 씨.” “네. 그렇네요.” “현재 상황은….” “좋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적 병력은 확실히 혼란스러워 보이고 저희 쪽은 그렇지 않거든요.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울 뿐이죠 뭐. 덕분에 조금은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물론 조심해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지만. 혹시 뭔가 전달할 사항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뇨. 아직은 없습니다. 굳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고요.” “연설은 감명 깊게 들었답니다, 명예추기경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제가 더 영광이죠. 뭐.” “어떻게. 이번 전투는 자신 있으십니까?”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물으시는 건가요?” “…….” “아니면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을지에 대해 걱정하시는 건가요. 단언컨대 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오… 아니, 명예 추기경님.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줬는데도 무능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거든요.” ‘좋은 자세야. 좋은 자세.’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다. 가면 쓰레기 정도라고 하기에는 힘들지만 그녀 역시 병법에 재능이 있다고 하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지한 나는 뭐가 뭔지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확실히 빛의 군세가 악마의 군세를 몰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3부대 지원. 엘리오스 님이 갑니다.” ‘좋고요.’ “선봉은 엘룬 나이트들이 섭니다. 사제들과 마법사들은 엘룬 나이트를 원호.” ‘아주 좋아요.’ “4부대는 성벽을 오르지 않습니다. 대기합니다. 대기.” ‘그거야, 지혜 누나. 바로 그거야.’ “7부대 휘하 마법사들은 성벽의 위를 공략, 성벽 위로 올라간 전사들은 저항하지 않는 바리안의 사제들은 보호조치합니다.” ‘욜로!’ 점점 성벽이 아군의 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이 보인다. 성벽의 외곽 쪽은 이미 정령들에 의해 무너져 내린 지 오래. 꾸역꾸역 밀고 들어가는 방패를 든 드워프들은 적들의 입장에서도 상대하기 까다롭게 보였다. 병과 자체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활용하고 있는 느낌. 적은 제대로 대응하고 대응하지 못했고 준비가 된 연합군은 무척 유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장관인데.’ 함께 상황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작전부의 다른 인원들 역시 제법 놀랐다는 표정이다. 이렇게 원활하게 일이 진행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물론 어느 한쪽을 기점으로 저항하고 있는 이들이 있기는 하다. -막아!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 최대한 밀어내다 보면 이길 수 있다. 하지만 녀석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에 화살이 꽂혔다. -아아아아아악! 녀석뿐만이 아니라 일반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 -커허어어억. 살려줘. 살려줘…. -어머니. 어머… 니…. -지휘부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사제들은 도대체 뭘… 커헉! -살려주세요. 살려…. -지원! 지원! 사제! 사제들은 어디있… 쿨럭. 혼란스러워 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지휘관의 부재. 물론 예브카리나 이후, 곧바로 인계가 되기야 했겠지만 그럼에도 혼란스러운 것은 변함이 없다. 사제들이 들고 일어났으니 유지력 자체도 문제가 있을 것이 분명. 여러 불안요소 중에서도 녀석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아마 멘탈일 터. 괜히 앞전에 대의와 명분을 가지고 있는 군대가 강하다 말한 것이 아니다. 머릿속에 의심을 품은 채로. 혹시나 자신들이 악마의 개수작에 놀아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채로 검을 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녀석들 중 대부분은 단순히 살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것뿐이리라. 뇌 속에 마구니가 든 채 싸우는 군대만큼 상대하기 쉬운 이들도 없다는 말이다. “역시 명분이 있는 군대는 강하다니까.” 빛의 군세가 악마의 군세를 때려잡는 광경은 무척이나 흐뭇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 383 회귀자 사용설명서 383화 성전(3) 대부분의 인간은 유약하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 처한 이들일수록 약해진다. 서로 죽이고 죽는 상황을 평범한 인간이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거야.’ 그렇기 때문에 대의와 명분은 더욱더 중요해진다. 신을 위해서 싸운다. 나라를 위해서 싸운다. 가족을 위해서 싸운다. 따위의 생각을 하게끔 교육하는 게 바로 그러한 이유. ‘우리가 옳다’라는 명분 역시 마찬가지다.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와 침략하기 위해 싸운다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저들의 경우에는 대의와 명분을 잃었다. 중간 지휘관들은 나름대로의 사명감에 불타 열심히 소리치지만 저런 외침이 일반 병사들의 귀에 들어갈 리 없다. 전쟁의 시작부터 그 목적까지 의심을 하고 있는 상황. 혹여나 자신들이 악마 소환사에게 속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미 뇌에 마구니가 낀 것이나 다름없다. 단지 공포에 질려 화살을 쏘아 보내는 것이 최선. 소리를 지르며 상황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이들은 오히려 양반이다. 싸우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 부기지수. 수세에 몰릴수록 상황은 더욱더 악화된다. 눈에 보이는 효과와 팩트라는 건 이만큼 강력하다. 아마 현재 여신의 거울로 비치는 장면은 녀석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하리라. -죽어! -……. -죽어! 이 변절자! -…… -죽어어어!!! 예브카리나가 공화국의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비숍 사제를 바리안 님의 조각상으로 후려치는 장면은 이번 선전에서 백미 중 백미다. 한참이나 아군 병력이 들어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공화국 병사들이 보인다. 물론 앞 상황이 삭제되기는 했지만 어차피 대부분의 인간은 과정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어째서 악마 하수인 예브카리나가 비숍 사제들을 죽였을까. 그러 이유보다는 그녀가 그의 머리통을 후려친 상황 자체에 집중한다는 말이다. 물론 인간이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자극적인 기사나 뉴스, 찌라시에 낚여 불타오르는 현대인들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하물며 공화국민들은 찌라시 정보에 익숙하지 않다. 효과가 더욱더 클 수밖에 없다는 건 굳이 언급할 가치도 없으리라. 비명과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전장. 쉴 새 없이 명령을 하달하는 이지혜를 뒤로하고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자 열심히 활약하고 있는 파란의 길드원들이 보였다. 꽤나 무난하게 움직여주는 모습들을 보니 내가 다 자랑스러울 지경. 그중 조금 눈에 띄는 것은 박덕구였다.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뭔가 움직임이 평소와 같지 않은 느낌이다. 방패를 들고 앞으로 성벽의 위로 올라가기는 했지만 능력치답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간혹 토끼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고 전투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 가관. 오히려 옆에 있는 유아영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선배님. 앞! 앞! -거, 알고 있다니까! -살려…. 살려줘…. -……. -움직여야 해요. 선배님! 선배님! 어디 상태 안 좋으신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지만…. -명령 떨어졌어요. 4부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고…. 지금 움직여도 되는 거죠? -으… 응.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 확실히 우물쭈물거리고 있다. 전쟁의 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살려달라거나 어머니를 부르짖는 적군 병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 이 새끼.’ 입술을 꽉 깨물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저렇게 어처구니없는 꼴을 보여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완전히 적응할 거라고는 기대도 않았지만 그래도 중간은 해줄 거라고 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지경. 지금 당장 귀환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볼 정도였다. 저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면 눈 먼 화살에 맞기 딱 좋으니까. 옥이야 금이야 키워놨더니 밥값도 못 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방구석에서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아들내미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새삼스럽게 왜 저래?’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거다. 혹시나 정말 몸이 안 좋은 것이 아닌가 중얼거리다 문득 뭔가를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 그동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이 새끼가… 경험이 있었나?’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녀석이 경험을 했던 장면 자체가 떠오르지 않는다. 간접적으로는 많이 봐왔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이 직접 손을 쓴 적은 없다. 내가 처음 손을 썼던 유석우 때도 눈을 꼭 감고 있었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자리를 슬그머니 피하기도 했다. 물론 같은 인간과 몸을 부딪친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직접적으로 마무리를 한 적은 없다. ‘진짜 없는 것 같은데?’ 솔직히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륙에 들어온 이상, 누구라도 한 번쯤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운이 나쁘면 튜토리얼 때부터. 그게 아니라면 대륙에 들어온 이후가 될 수도 있다. 같은 인간이 아니더라도 인간형의 몬스터가 될 수도 있고 범죄자나 도적이 상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기억상 박덕구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없다. 그동안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게 바보같이 느껴질 지경. 확실히 마음이 여리기는 여린 모양이다. 조금 더 앞으로 밀고 들어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쭈뼛대는 모습이 눈에 띈다.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는 모습. 속으로는 욕이 튀어나왔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센 척하는 돼지의 멘탈이 얼마나 약한지 대충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배님! 선배님! -지, 지금 간다니까. -지원이에요! -으… 응. 그 정신없는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멍청한 짓을 보고 있자니 속이 탄다. 결국에는 천천히 이지혜를 향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박덕구 외 유아영은….” 뭐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명령을 하달했다. “7부대는 전선에서 이탈해 항복한 이들과 사제 보호에 집중합니다. 최우선 사항입니다. 7부대는 전선에서 이탈해 항복한 이들과 사제들에 대한 보호에 집중합니다.” “명령 전달 받았습니다.” 통제실에서 내려진 명령이 닿았는지 다시금 입을 여는 박덕구와 유아영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선배님! -으응? -명령 다시 떨어졌어요. 아까와는 내용이 다르고요. 전장에서 이탈해 항복한 이들과 사제를 보호하래요. 최우선 사항이에요. -아. 그렇구만. 빠, 빨리…. -네. 위치 전송되고 있어요. 제가 앞장설까요? -아니. 내가 앞장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럼 그렇게 해요. -조심! -아,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나마 조금 얼굴이 밝아진 것은 분명 내 착각이 아니리라. 하지만 조금 밝아진 그 표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한 얼굴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어째서 갑작스레 저런 종류의 명령이 떨어져 내렸는지 대충 눈치챈 것이다. 박덕구와 유아영이 포함된 7부대의 본래 목적은 사제들에 대한 보호조치 따위가 아니다. 엄연히 관련 임무를 맡은 부대가 따로 존재했고 이미 사전 브리핑을 통해 공지한 내용. 7부대의 목적은 다른 부대가 성벽 위로 올라오는 것을 지원하는 일이다. 여신의 거울을 통해 상황에 맞춰 명령을 하달하겠다고 이야기를 해 놨으니 내가 자신의 꼴사나운 모습을 봤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여유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전선이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면 녀석을 따로 빼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상황이 좋으니 할 수 있는 행동.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마구니가 끼어 있는 악마의 군세는 점점 더 그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사제들이 전장에서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너무 쉽게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고민이 들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건가.’ 애초에 에베리아 전선 쪽을 막고 있는 병력과 성벽은 속빈 강정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단순히 시간벌기 용도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지만 버티기에 중점을 둔 전력이지 승리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다른 쪽에서 지원이 오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아니, 굳이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다. 전 대륙에 넓게 펼쳐져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는 전선, 많은 수의 유동 병력을 둘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가면쓰레기 역시 마찬가지다. ‘이 새끼들도 여유 있지는 않아.’ 녀석들의 입장에서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캐슬락 공략. 가면쓰레기가 에베리아 전선을 버린 건지 버리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에베리아 전선보다 캐슬락 전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병력을 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을지도 모른다. 뭐,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이쪽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었으니까. 만약 적 지휘관과 사제라인이 탄탄했다면 적들이 캐슬락을 공략하는 걸 두고 봐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 에베리아 전선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적 지휘관은 후퇴를 외치고 있고 실제로 철수하는 이들이 눈에 띄기 시작.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이들도 보인다. 죽음을 무릅쓰고 싸움에 가담조차 하지 않았던 사제들은 덤. 전투가 시작되고 나고 불과 8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전투가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전선 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지혜 씨.” “네. 그렇게 하세요, 명예추기경님. 저는 상황실에서 일을 마저 마무리….” “그럼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전투의 승리를 발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귀가 울릴 정도의 함성이 들려오고 있다. 전체적인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지휘부뿐만이 아니다. 일반 병사들 역시 승리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점령되지 않은 지역보다 점령한 지역이 더욱더 많다는 게 대충 봐도 느껴질 정도. 이후 병력을 다시금 점검해 봐야겠지만 대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피해가 적은 것처럼 보였다. ‘이걸 어떻게 올라갔데?’ 발걸음을 옮기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성벽. 생각보다 높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목도하니 감히 올라갈 엄두도 낼 수 없을 것 같다. 주변 병사들을 챙기며 계속해서 걸어가자 어느덧 덕구 녀석이 있는 곳까지 당도했다. 포로들, 사제들을 데리고 있던 녀석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지만 한 번 슬쩍 쳐다보자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큰 의미가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녀석에게는 질책의 뜻으로 받아들여진 모양. 기가 죽은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사실 한마디 해주고 싶기는 하지만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녀석이 아니다. 몇 가지 조언이나 나무라는 것 정도는 이후에도 할 수 있는 일. 지금은 그녀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본래는 비숍 사제 역할이었지만 그분이 죽어 버렸으니 할 수 없이 대리인을 세울 수밖에 없다. 교화된 악마 하수인이라면 선전효과도 충분할 것 같고 모르는 사람한테 맞는 것보다는 아는 사람에게 통수를 맞는 게 가면쓰레기의 입장에서도 조금 더 얼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철퍽거리는 소리와 감각이 기분 나쁘기는 했지만 내 쪽으로 조용히 다가온 김창렬을 보니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살아 있습니까?” “네. 부길드마스터. 살아 있습니다.” “그거 참 다행이군요. 혹시 상태는 조금 어떻습니까?” “아직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응급처치가 잘 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안정을 취한 이후에는 깨어날 수 있을 겁니다.” “아주 좋네요. 아. 지금 한번 봅시다. 방 안에 있습니까?” “네.” 김창렬이 방으로 안내하였다. 언제 봐도 실력은 혜자스럽다. 특히나 본인이 응급처치를 했다는 건 박수를 쳐줄 만한 부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도 세심하게 챙겨주는 부분이 마음에 든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머리가 깨진 채 죽어 있는 비숍추기경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침대에 보인 것은 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예브카리나. 뺨을 툭툭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군… 사님…?” “아쉽지만 명예추기경입니다, 예브카리나 님. 하하핫.” # 384 회귀자 사용설명서 384화 이기는 자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1) “군… 사님…?” “아쉽지만 명예추기경입니다, 예브카리나 님. 하하핫.” 다채로운 표정이 제법 재미있었다. 아직 정신이 제대로 들지 않았는지 천천히 손을 뻗는 모습은 가관. 하지만 의식을 찾으면서 진청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모양.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닮기는 닮은 건가.’ 생김새는 확연이 다르지만 체형이 비슷하다 보니 그렇게 느낄 만하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몽롱했을 테고, 김현성이 나를 가면쓰레기로 오해할 뻔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확실히 실루엣 자체는 닮은 모양. 녀석의 모습을 떠올려 봐도 가면을 씌워 놓으면 구분하기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항상 진청쓰레기와 함께 다녔던 그녀도 저런 소리를 할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아무튼 간에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당연지사. 보고 싶었던 군사님 대신 이죽거리는 나를 보았으니 저런 표정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아주 오랜만에 보는 얼굴. 이 대륙에 들어온 이후에 저런 얼굴을 보는 건 꽤나 오랜만이다. 엘레나의 경우에는 구역질을 해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얼굴 한편에는 존경심과 함께 알 수 없는 동경심이 묻어나 있었다. 하지만 예브카리나의 얼굴은 전혀 다르다. 호의적인 감정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봐도 적의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상대하기 싫은 쓰레기를 바라보는 것 같다. 길거리에서 개똥을 밟아도 저런 표정을 하지는 않는다. 조금 가슴이 아프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패배자의 입장이었다면 제법 열이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언제 어디서든 승자는 관대해지는 법이다. ‘암. 나는 관대하지. 그렇고말고.’ “하하하. 재밌는 표정이군요. 그렇게 죽을죄를 지은 것 같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오히려 당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입니다. 조금은 감사하셔도 됩니다. 물론 여기 있는 우리 창렬 씨에게 인사하는 게 먼저겠죠.” “…….” “뭘 그렇게 죽일 것처럼 보고 그러십니까. 그래도 생명의 은인이 아닙니까. 이렇게 편히 있을 수 있게 도와주고… 다른 포로들과는 다르게 당신은 특별취급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 “사람이 말을 걸면 대답하는 게 예의 아닙니까, 카리나 님. 그렇지 않습니까? 창렬 씨?” “예. 부길드마스터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하지 않습니까.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세요. 아니면 음… 몸이 아직도 많이 안 좋으신 겁니까? 포션이라도 한 병 챙겨드려야 했나?” 실실 미소를 띄우며 이죽거린 것은 당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없다. 심지어 최대한 이쪽을 경계하며 노려본다. 그다지 사이가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퉤!” 끈적거리는 뭔가가 얼굴에 묻은 것은 바로 그때. “…….” “…….” 순간적으로 김창렬이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내 손짓에 멈춰 섰다. 얼굴을 천천히 매만지니 그녀의 침이 맞는 모양. 사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더러운 인간.” “하하. 한국 속담 중에서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는데…. 뭐, 러시아까지 통용되는 말은 아닌가 봅니다. 물론 지구에서의 이야기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지만 서로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는 나라에서 태어난 저로서는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이토록 포로를 신사적으로 대우하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제 신사적인 행동에 대한 보답이 겨우 타액이라니 이거 조금 슬퍼지려고 합니다, 예브 카리나 님.” “쓰레기 같은 놈.” “어떻게. 우리 악마 소환사 진청께서는 안녕하십니까? 라이오스 때 이후로 한 번도 뵙지 못했는데. 사실 그분 때문에 그동안 제가 제법 힘들었습니다. 자세히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에베리아 왕국에 있었던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었고요. 몸이 부서질 정도로 악마를 막았지만… 아, 창렬 씨는 이제 나가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사태가 대충 정리될 때까지는 이곳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대로 전파하겠습니다, 부길드마스터.” “감사합니다, 창렬 씨.” 뭔가 조금 걱정하는 얼굴이었지만 현재 그녀의 상태를 보고서는 안전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물론 나 역시 그런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김창렬을 내보낸 것이다. 아무리 내 능력치가 높지 않다고 한들, 이제 막 깨어난 마법사를 제압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괜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김창렬이 살짝 방문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잠깐이었지만 밖에서 들린 잡음들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빛의 승리입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것은 모두가 함께 이룬 승리입니다. 공존을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이고 미래를 향한 도약입니다. 베니고어 여신님과 엘룬 님의 승리이며 이종족 연합의 승리입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무래도 밖에서도 선전 활동에 힘을 쓰고 있었던 모양.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지혜의 것이다. 그사이에 전투가 완전히 마무리 된 것이리라. 슬쩍 앞을 바라보니 씁쓸해하는 예브 카리나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내가 이곳에 있는 걸 보고 예상은 했겠지만 막상 저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은 가관이었다. 내가 하기는 싫지만 남이 짓는 것은 매번 봐도 즐거운 표정이다. “네. 뭐, 전투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자칫 잘못했으면 무의미한 피가 더 많이 흘렀을 겁니다. 공화국의 사제님. 아, 저기 머리가 으깨진 채로 누워 있는 비숍 상급 사제님이 아니었다면 일이 조금 더 어렵게 진행됐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신을 위해 순교하신 분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걸 깜빡했군요. 좋으신 분이었는데 말입니다. 너무 아쉽게 가신 것 같아 저도 마음이 아프기만 합니다.” “…….” “바리안 님의 석상으로 머리를 후려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정말 대단했습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보고 있는 제가 오금이 다 저릴 정도였는데 말이죠. 공화국의 마법사들은 근접 전투훈련을 따로 받는다는 소문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도 했고요. 어떻게, 둔기술이라도 따로 배우신 겁니까?” “…….” “사람이 질문을 던졌으면 대답하는 게 예의가 아닙니까, 예브 카리나님. 아! 혹시나 해서 말씀입니다만 당신의 둔기술을 다시 한번 펼칠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방금 뜨끔 하신 겁니까? 하하.” “죽여.” “뭘 또 죽이라고 하고 그러십니까. 신에게 선택받은 사제가 살인 같은 일을 쉽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지요. 아무리 악마의 하수인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같은 생명이 아닙니까. 베니고어 여신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너그러운 편입니다. 물론 바리안 님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내가 입을 열 것 같아?” “당신이 알고 있는 싸구려 정보도 물론 탐이 나기는 하지만 정말로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잠깐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게 전부입니다. 네. 정말로 그게 전부예요. 어떻습니까? 예브 카리나 님. 이번 전쟁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 “말하기 싫으시면 듣고만 있고 계셔도 됩니다.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입니다. 물론 다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터뷰를 따서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사용하는 치졸한 짓거리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 “사기꾼 자식. 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 “베니고어 여신님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저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혼란스러운 건 이해하지만 제가 정말로 사기꾼이었다면 엘룬 님과 베니고어 님께서 저를 사자로 선택하셨겠습니까? 가장 마지막에 거짓말을 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사람을 사기꾼이라 칭하시다니요. 신벌이 무섭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아! 신벌이 무서웠으면 애초에 악마 소환사의 밑에 있지도 않았겠군요.” “네가 꾸민 이야기라는 건 다 알고 있다. 더러운 놈. 군사님께는 죄가 없어. 이제는 네가 어떤 인간인 줄 알아. 너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고 구제 불능이야. 너를 조금이라도 믿은 게 내 최고의 실수야. 재밌어? 사람들을 속이고 마음대로 가지고 놀면 네가 뭐라도 되는 것 같이 느껴져?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사기꾼이지. 지금은 네가 이렇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언젠가는 네 거짓에 대한 대가를 꼭 치를 거다. 역겨운 쓰레기 자식. 내 말을 잘 기억해. 너는 분명히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서늘한 팩트가 날아 들어와 꽂힌다. 가슴속에 날아 들어온 묵직한 한 방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당황스러울 정도. 조금이지만 가슴이 뜨끔할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연 것은 당연.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금 섭섭하군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말을 해줄까? 내가 네깟 놈한테 목숨을 구걸하며 벌벌 길기라도 할 줄 알았어? 죽이든 고문하든….” “아, 그런 야만스러운 짓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혹시나 육체적 고통에 대한 걸 걱정하시고 계신다면 안심하셔도 됩니다. 당신은 죽지도 않을 거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지도 않을 겁니다.” “회유가 통할 거라면 사람 잘못 짚었어. 빌어먹을 사기꾼 새끼. 나는 짐승이랑은 같이 일하지 않거든.” “계속 그렇게 아픈 곳을 쿡쿡 찌르시는군요. 안 그래도 방금 상처가 다 낫지도 않았는데. 팩트로 후려치는 솜씨가 제법이십니다, 이거. 하하.” “퉤!” “어이쿠! 두 번째는 맞아드리지 않습니다, 카리나 님. 조금 진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원하는 건 대화라고요. 적어도 여섯 시간 안에는 이야기가 잘 끝났으면 좋겠는데… 음…. 내키지는 않지만 서로 조금 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예브 카리나 님. 앞전에 말씀하신대로 저는 빌어먹을 사기꾼자식입니다.” “네 입으로 들어봤자 놀랍지도 않아. 너는!” “전부 다 맞습니다. 네. 개새끼도 맞고 빌어먹을 쓰레기도 맞습니다. 저도 그다지 합리화를 좋아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충분히 그렇게 느끼실 수 있다는 것도 일부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대가를 치르지는 않을 겁니다. 예브 카리나 님.” “뭐?” “대가를 치르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린 나이도 아니신데 아직도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으면 쓰나요. 하하. 대가는 패배자들이 치르는 거지 승자의 몫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여기에 있고 당신은 지금 숨을 헐떡거리며 침대에 앉아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승자는 누구고 패자는 누구일까요? 누가 봐도 각이 나오지 않습니까?” “…….” “권선징악이라는 건 소설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예요. 아! 물론 제가 징벌당하는 쪽이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브 카리나 님이 저를 그렇게 생각하시니 이해하시기 편하게 예를 든 것뿐입니다. 애초에 이런 종류의 전쟁에 선과 악이 있기는 합니까? 나쁜 놈, 착한 놈이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이념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를 뿐이지요.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번 전쟁은 공화국이 먼저 일으켰다는 거.”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닙니다. 당신은 분명히 알고 있어요. 분명히.” “…….” “그걸 알면서도 교국이 먼저 침략을 어쩌고저쩌고 선전활동을 한 것은 그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사기꾼이라면 당신도 사기꾼입니다. 물론 제가 조금 더 악질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같은 부류라는 말입니다.” “개, 개소리 집어 치워! 미친 자식!” “대가는 저 같은 사람이 치르는 게 아니라 제 말에 휘둘리는 사람들이나 하는 겁니다, 카리나 님. 이미 알 거 다 아시는 분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겨지지가 않네요. 대…대가를 반드시 치를 거야! 반드시는 개뿔.” “…….” “다시 한번 머릿속에 저장해 놓으세요. 이기는 사람은 대가를 치르지 않습니다. 저희가 살던 곳이나 대륙이나 그건 똑같아요.” # 385 회귀자 사용설명서 385화 이기는 자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2)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예브 카리나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이미 그녀도 알고 나도 알고 있는 이야기다. 심지어 저기 저쪽에 누워 있는 바젤 추기경도 알고 있는 이야기. 그저 다시 한번 머릿속에 박아 넣어준 것뿐이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이기는 사람은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진리. 이 얼마나 심플한 법칙인가. ‘아암 그렇고말고. 무조건 그렇지.’ 이 말보다 더 깔끔한 문장도 없다. 온갖 말로 권선징악에 대해 포장해 봐야 어차피 우리 삶은 저런 식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거다. 눈앞에 있는 예브 카리나 역시 내 말에 공감하고 있는 모습. 그저 입술을 꽉 깨물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저런 반응은 공감한다는 것과 진배없다. 한 번 더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대화를 지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 “대답하기 싫은 것 같다만…. 뭐, 긍정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조금 전에도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우리 같은 이들은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이라고요. 만약 예브 카리나 님이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셨다면 대가를 치르는 건 제가 됐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아쉬우시겠습니다. 푸핫.” “나는 당신이랑 달라. 넌…. 넌 쓰레기야.” “동족혐오?” “나는 너 같은 쓰레기가 아니야! 비열한 사기꾼 자식.” “자꾸만 사기꾼이라고 하시니 기분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만, 제가 신의 선택을 받은 사자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카리나 님. 신성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요. 하핫. 진청 그자가 악마소환사라는 것도 정황상 맞는 이야기고 말이죠. 도대체 당신과 내가 한 거짓말에 어떤 차이가 있길래 이렇게 열을 올리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사기를 증진시키기 위해 선동과 날조를 일삼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전쟁터로 끌고 오는 것에 동조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보면 당신을 비롯한 공화국의 수뇌부들이 더 악질적입니다. 저야 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변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신들은 본인들을 합리화할 수단조차 부족합니다. 먼저 시비를 건 것도 그쪽,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도 그쪽, 선전포고를 먼저 한 것 역시 그쪽입니다. 누가 쓰레기고 누가 사기꾼이라는 겁니까?” “개소리 같은 궤변은 집어 치워! 이 쓰레기 같은 인간. 나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게 아니야. 네, 네 수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거야. 당신은 최소한의 윤리의식이라는 게 결여되어 있어. 대륙법과 전쟁규정이라는 게 괜히 생겨난 게 아니야. 비, 비숍 상급 사제님은 그럴 만한 사람이….” “화려한 둔기술에 뚝배기가 깨져나간 비숍 사제님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나 참. 혹시나 오해하실까 봐 하는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전쟁 규정법을 어기면서 활동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괜찮은 포도주를 한 병 선물했을 뿐이에요.” “내가 하는 말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 “너도 내가 하는 말이 뭔지 알고 있잖아, 예브 카리나. 나는 전쟁 규정법 같은 걸 어긴 적이 없어. 설사 내가 비숍 상급 사제를 뒤에서 조종했다고 한들 규정법에 어긋난 것도 아니라는 걸 알잖아. 합리화하고 있는 건 너야. 내가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 속으로 자위해 봐야 네 처지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 같으니까. 그러니 나를 매도하고 있는 거야, 너는.” “퉤!” “그렇게 해야 네 기분이 조금 더 풀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애초에 네가 정말 나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면 이 전쟁에 나오지도 않았을 거야. 깊은 숲속에 처박혀 윤리 공부에나 열을 올리고 있겠지. 결국엔 너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거야.” “나는 공화국 병사들과 군사님을 위해서!” “아….” “…….” “…….” “아하. 역시 그랬군요. 하하하.” “뭐? 너 지금….” “혹시나 했는데 정말인가 봅니다. 방금 말은 거짓말이 아니지요. 그렇지요?”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거리….” “뭐, 방금 제가 드렸던 말은 전부 농담이라는 겁니다. 굳이 혼란스러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당신은 저랑 확실히 다른 인간입니다. 인정하겠습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에요.”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얼굴이다. 예브 카리나는 나나 이지혜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고유기벽과 성향이 항상 정답을 이야기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예브카리나는 확실하게 나와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너는 책임감이 강한 프렌즈구나.’ 말 그대로. 갑작스레 달라진 내 태도에 얼굴이 구겨진 것이 눈에 보일 정도. 초조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니 방금 본인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있는 것 같았다. 예컨대 조금 전 궤변은 그녀를 흥분시키기 위한 사전 작업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약점을 잡기 위한 대화. 그녀를 다룰 수 있는 수단을 얻기 위한 재료였다. “정말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음. 확실히 그렇겠군요. 왜 악마소환사 진청이 당신을 이 자리에서 기용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전황이 흘러가지 않았다면 제법 귀찮게 됐겠네요. 병력 피해를 최소화하고 야금야금 이득을 보고 버티셨을 테니까. 당신의 목적은 전장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에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뭐, 뭐?” “당신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악마소환사는 당신에게 승리하는 걸 기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버티면서 엘프들을 붙잡아 두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는 거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투를 피하고 싶어 하는 성향도 보이시는 것 같고. 말 그대로 캐슬락 공선전이 끝날 때까지 이 전선을 유지하고 버텨주는 것밖에 바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그 임무를 완전히 망쳐 버리셨네요. 뭐, 제가 에베리아 왕국에 체류 중이라는 걸 모르고 계셨을 테니 대충 이해는 가지만 악마소환사의 입장에서는 제법 아쉽게 느껴졌을 겁니다. 어? 뭘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고 그러십니까. 악마가 당신에게 별 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건 당신도 대충 눈치채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지원군이 오지 않았던 거예요.” 사실은 조금 더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아마 예브카리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야. 현재 전선….” “전선에 여유가 없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굳이 이곳까지 올 상황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고요. 당신이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큼, 그 사람은 당신을 생각하지 않나 봅니다. 슬프죠. 일방적인 사랑만큼 가슴 아픈 것도 없어요.” “네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네. 물론 배신하지 않으시겠죠. 하하하.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예브 카리나 님. 저는 지금 무슨 저급한 이간질 같은 걸 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방금은 성격 나쁜 저의 장난으로 생각해 주세요. 뭐, 당신과 이 병력이 버림받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어디까지 팩트긴 하지만! 그런 걸로 사람 멘탈을 흔드는 저급한 술수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빛의 선택을 받은 사자로서 적절한 행동이 아니죠. 암. 그렇고말고요.” “…….” “조금 더 합리적인 방법이 있는데 제가 왜 괜히 생고생을 하겠습니까. 말이 나와서 말입니다만, 사실은 저기 누워계시는 비숍 상급 사제님이 해주셔야 했을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자리 하나를 미리 마련해 놓기도 했고요. 무척 중요한 자린데… 누군가가 소중한 사제님의 뚝배기를 박살내 버린 탓에 마련해 놓은 자리가 공석이 되어버렸지 뭡니까. 버림받아 슬픈 마음은 이해를 합니다만 그래도 일은 해줘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죽여.” “이야기도 듣지 않으시는 겁니까?” “네가 어떤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아. 그냥 죽여.” “왜 자꾸 죽이라고만 말씀하십니까.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결정하셔야죠.” “죽여! 차라리 죽!” “포로가 상당히 많습니다. 예브 카리나 님. 항복하신 분들이 제법 많아요. 함께해 주시는 우리 바리안 님의 사제님들도 마찬가지고.” “당신….” “이거 참. 처치 곤란입니다. 포로가 많다는 건 저희 쪽에서도 꼭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유사시에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적 병력이기도 하고, 많은 포로를 책임질 보급품을 전달하는 것도 일입니다.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 같은 사제답지 못한 생각을 해버렸지 뭡니까. 잘은 모르지만 중국 역사 중에서도 장평대전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항복한 30만의 병력을 그대로 생매장해 버린 사건 말입니다. 이건 우리 악마소환사님이 더 잘 알고 있겠군요.” “개자식….” “물론 저는 그런 일을 벌일 정도로 쓰레기는 아닙니다만,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으니까요. 혹시라도 일이 잘못 됐을 경우에는 눈물을 머금고 결단을 할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개자식! 네가 인간이야?!”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제가 그런 미친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건 예브 카리나 님이 더욱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정치적으로 잃는 게 많을 겁니다.” “개자식! 쓰레기 같은 새끼!” “아무리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라고는 해도 회개하려하는 이들을 저버리는 건… 가슴이 아프겠죠. 정말로 그런 짓을 해버린다면 후의 역사서에서도 저를 좋게 평가하지는 않을 거고요. 무엇보다 제 양심이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예브 카리나 님. 저는 양보하지 않아요.” “…….” “저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피하는 건 상대방이 해야 할 일이지 제 일이 아닙니다. 저는 결정을 내렸으니 양보하는 건 당신이 되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제 눈을 보세요.” 은근 슬쩍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혐오감이 깃들어 있는 표정은 아주 천천히 공포로 물든다. “제가 못할 것 같습니까?” “…….”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예브 카리나 님. 분명히요. 당신이 만약 제 제안을 거절한다면 저는 포로의 반을 버릴 겁니다. 당신은 악마의 하수인으로 처형될 거고 적당한 사람을 찾은 이후 똑같은 제안을 한 번 더 할 거예요. 물론 후임분도 거절한다면 남은 포로의 반을 버릴 거고요.” “당신…. 당신이라는 사람은….” “억지로 끌려온 이들이 아닙니까. 예브 카리나 님. 웃으면서 고향에 돌려 보내줘야죠. 어쩌다가 전쟁터에 끌려오기는 했지만 저 사람들도 전부 남의 집 귀한 자식들입니다.”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빤히 얼굴을 바라보자 흔들리고 있는 동공이 눈에 보인 것은 당연. 속으로는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따로 일에 대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고….’ 본인의 역할이 무엇일지는 이미 예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선택을 조금 편하게 해드려야 하나…. 일단 포로 중에 악마의 하수인이 있는지 색출부터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삼분의 일 정도는 악마에게 오염 당했을 확률이 높아서… 이런 분들은 빨리 정화작업을 거쳐야지요. 네. 그렇고말고요.” “자, 잠깐.” “결정하셨습니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 하지만 이미 반쯤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여러 가지로 신호를 보내오고 있다. 흔들리고 있는 눈이 그렇고 달짝 거리는 입술이 그렇다. 목덜미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그렇고 거칠어지는 호흡이 그렇다. “저는 양보하지 않습니다.” 결정타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그래도 조용히 말하자 효과가 있는 모양.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악마 같은 인간.” “어허. 그거 신성모독입니다. 예브 카리나 님.” 반쯤은 혼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이었다. # 386 회귀자 사용설명서 386화 이기는 자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3) “확실히 까다롭군요.” “네, 군사님. 아무래도 성벽 자체가 마력방어에 워낙 특화되어 있다 보니 더욱 그렇습니다. 교국의 무녀가 펼치고 있는 결계도….” “공략하기 쉽지 않겠죠.” “네. 순수한 공성전밖에는 답이 없는 상황입니다. 강한 물리적 충격을 줄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드래곤이라도 오지 않는 한 성벽 자체를 무너뜨리기 힘들 겁니다. 캐슬락 안쪽의 보급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면 아마 시간이 더욱더.” “오래 걸렸겠죠. 아군 병력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몇 차례 문을 두드려 본 것치고는 피해가 적습니다. 저들 역시 최대한 화살을 아끼고 있는 터라….” “캐슬락은 중요합니다.” “…….” “하지만 모든 걸 쏟아 부을 정도는 아닙니다. 린델이나 수도로 가는 길은 동부전선만이 아닙니다. 실리아 전선 쪽은 어제부로 완전히 밀어냈고… 다완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 그대로 캐슬락은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걸 쏟아 부을 정도는 아니다. 말하자면 캐슬락 전선은 누구나가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파이. 이 커다랗고 중요한 전선을 가장 완벽한 미끼로 만들어내기 위해 쌓아올린 시간을 생각하니 감회가 무척 새로웠다. 적, 아니, 심지어 아군조차 눈치챌 수 없게 설계된 이 커다란 그림은 진청 군사님의 수완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스레 느끼게 해주었다. 병력 이동이나 현 전선을 커다란 지도로 한눈에 들여다본다면 그 누구라도 공화국이 캐슬락을 노리고 있다 판단하리라.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던 과거에도 캐슬락은 항상 공화국의 걸림돌이었고 교국에게는 뚫리지 않는 철벽의 요새였다. 타 동부 전선이 모두 공략 됐을 때도 항상 캐슬락을 얻을 수는 없었고 역사적으로도 캐슬락은 곧 일종의 상징처럼 자리 잡혔다. ‘뚫어낸다면….’ 반대로. ‘뚫리지만 않는다면….’ 그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물론 캐슬락을 단순한 상징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여전히 캐슬락은 교국과 공화국 사이에 있는 가장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고 이곳을 얻음으로써 생기는 이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컸으니까. 동부 전선에 병력을 밀어 넣자 캐슬락을 지키기 위해 네임드들이 자리 잡은 것 역시 그러한 이유. 교국 8좌 중 세 명이 이 작은 성을 지키기 위해 자리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교국이 자랑하는 주요 병력 역시 일치감치 캐슬락에 똬리를 틀었다. 한쪽에 투자한 만큼 상대적으로 타 지역에 투자하는 병력의 질과 양이 주는 건 자연스러운 일. 캐슬락은 단단해졌지만 중요하지 않은 지역들은 그만큼 물렁해졌다. 아주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다. 크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들을 보는 것이 그의 방식. 캐슬락으로 들어가는 보급을 차단하고 타 지역에서 오고 있는 지원군을 자른다. 동부 전선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점수를 따기도 하고 심지어 일부 지역을 내주기도 한다. 한 번, 한 번은 무척 작다고 할 수 있지만 모아놓고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치가 아니다. 상대 입장에서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은 분명한 일. 하지만 공화국의 의도대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캐슬락이 뚫리면 그 다음은 린델, 그 다음은 수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까. 전체적인 전장의 흐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설계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능력. 아마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이 상태가 지속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변수가 없는 한은. ‘그래. 변수가 없는 한.’ 하지만 최근 에베리아의 상태에 대해 떠올리자 괜스레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는 이후에 따로 날아온 서신이 없었기 때문.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 본대에서도 따로 정찰조를 보냈었다. 물론 이것이 과민방응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통신체계가 제대로 발달되지 않은 이곳에서 각 상황마다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물론 전체적인 상황에 대한 보고가 들어오긴 하지만 거리가 거리인 만큼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통신병이 잡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겠지. 별일 없을 거야.’ 틀림없이 별일 없을 것이다. 속으로 자위하고 있지만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것이 사실. 한 번 더 고개를 흔들고 옆을 바라보자 시야에 비친 것은 자신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였다. 그 광경을 보고서는 천천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얼룩져 있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거,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군사님. 그자가 에베리아 전선에 있었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겁니다.”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카티아.” “표정이 어둡습니다, 군사님. 작전부는 에베리아 전선이 쉽게 뚫리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고요. 이기영 명예추기경, 그자는 사기꾼에 불과합니다. 남을 기만하고 선동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인물이라 군사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변수에 따라서 조금 더 달라질 수도 있다고 예상하고 있습니다만 언니는 절대로 어처구니없게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 겁니다.”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려 하기도 하고요.” “저도… 걱정이 됩니다. 안 된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죠. 사실 그래서 언니를 말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마! 아마! 언니 역시 군사님의 뜻을 알고 계셨을 겁니다. 이해하기도 했고요. 언니 스스로가 결정한 일이니까요. 믿고, 결과를 기다리시면 됩니다. 분명히 좋은 소식을 전해주실 겁니다.” “물론 그렇게 해야겠죠. 카티아, 당신은 괜찮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네…. 아무 문제없습니다. 언니가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요.” 솔직히 초조한 마음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버틸 수 있을 거야.’ 그 누구보다 자신이 그녀를 가장 잘 알고 있다. 애초 병력의 구조상 단기간에 뚫어낼 수 있다고 하기는 힘들다. 사제 비율이 높았고 비숍 상급 사제가 함께 하고 있는 성벽이다. 마음이 약해 모진 일을 할 수 있는 성격은 못 되지만 언니 역시 그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쉽게 당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어린애처럼 동요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 지금 이 시간에도 여러 전선에서 전투가 지속되고 있다. 에베리아 전선만 특별취급해서는 안 된다. 힘든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 최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베리아 전선의 역할은 시간을 버는 것 외에는 없어. 지금은 동부 전선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게 맞아.’ 서부 전선은 마법사 증원을 요청했고 북부 전선 역시 사제를 필요로 하고 있다. 보급부대가 원활하게 돌아다니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모든 전선을 컨트롤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루에도 손으로 셀 수조차 없는 숫자의 병력이 죽어난다. 지금껏 조용했던 에베리아 전선도 이제야 막 전투에 합류했을 뿐이다. 그렇게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던 바로 그때였다. 갑작스레 문이 열리며 작전부의 일원 한 명이 들어온 것. “군사님.” “말씀하셔도 됩니다.” “에, 에베리아….” “네.” “에베리아 전선이 무너졌습니다. 혀, 현재 정확한 피해 규모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병력이 포로로 붙잡힌 것으로 보이며 현재 캐슬락 쪽을 향해 진군할 준비를 해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 “…….” “뭐, 뭐라고요?” “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카티아 님.” “어, 어떻게….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자세한 정황은 알지 못합니다. 퇴각하던 병력 역시 모조리 발목이 묶인 것으로 보이며… 따, 딱히….”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요!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습니다!” 순간적으로 안 좋은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냉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냉정해질 수 있을 리가 없다. 적들의 입장에서 이건 공성전이다. 아무리 마법으로 단기간에 세운 가벽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쉽게 무너질 만한 성벽이 아니다. 병력의 규모와 질을 생각해 본다면 이토록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일이 진행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 쉽게 전투가 끝났다고요? 말도 안 돼요. 뭔가 착오가 있을 겁니다. 소식을 전해온 이들이 누구죠? 귀환을 마친 정찰 부대는 어디에 있습니까.” “현재….” “그들을 이쪽으로, 아니,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정확히 어떤 걸 봤길래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카티아 님!” 허겁지겁 문을 열고 뛰어든 것은 당연지사. 깜짝 놀란 병사들의 얼굴이 보였지만 신경 쓸 수 있을 리가 만무. 정찰대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많은 이들이 몰려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레인저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직접 들어야겠습니다.” “가까이 오시면 안 됩니다, 카티아 님.” “무슨 소리를!” “현재 에베리아 전선에서 보내온 물건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는 도중입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 “비키세요! 지금 당장!” “저주가 묻어 있는 아티팩트 일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아니,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정신이 없다. 계속해서 머릿속으로는 안 좋은 생각이 들기 시작. 괜스레 손이 덜덜 떨려오는 것은 물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누군가가 조용히 옆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그때.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까지 방에 있었던 진청 군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덤. 묘하게 안심되는 목소리에 망치질 하듯이 두근대는 심장이 조금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티팩트라면 제가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명령입니다. 물러나도록 하세요.” “하지만.” “명령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함정을 해체를 할 수 있는 레인저들과 마법사들이 물러나는 것은 순식간. 시야에 들어온 것은 봉투에 담겨져 있는 서신과 긴 막대 모양을 한 정체불명의 장치였다. “군사님, 이건….” “해를 끼치는 종류의 아티팩트는 아닙니다. 아마 그들의 말로는 여신의 거울, 마력 홀로그램 장치일 가능성이 큽니다. 1회용으로 보이며… 한 번 실행되면 자동적으로 폐기되는 구조입니다. 다른 함정이나 마법적인 효과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그게 마력 홀로그램이라면 저희 측에서도 활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뇨. 불가능합니다. 영상을 송출하는 컨트롤 타워가 없으니까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히 일방적인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보다 이게 에베리아 전선에서 보내온 물건이 확실합니까?” “네. 정확히는 저희 전서구의 다리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정황상 에베리아에서 보내온 서신이라고 판단해서….” “아마 메시지겠군요. 마력을 조금 집어넣으면 곧바로….” 그렇게 군사가 천천히 장치에 마력을 집어넣었을 때였다. 반투명한 막이 막대 위에서 떠오르기 시작. 시야에 비치는 것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언니, 예브 카리나의 모습이다. 곧이어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아아아. 지금 시작해도 되려나? 보고 있습니까? 보고 있는 거 맞아요? 천천히 옆으로 자리를 옮긴 채 털썩 주저앉는 모습은 가관. 고개를 숙인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언니와 장난치듯 그 옆에서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녀석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무사히 닿았으면 좋겠는데. 아… 일단은 자기소개부터 드려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간단히 자기소개 좀 해주시겠습니까? -33살… 예브… 카리나입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 387 회귀자 사용설명서 387화 이기는 자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4)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정말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은 물론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다. 마력 홀로그램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면 속의 사람은 틀림없이 언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은 물론 바들바들 떨고 있다. 심지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모습은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 어떻게 저렇게 된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에베리아 전선이 완전히 망가졌고 저 빌어먹을 개자식은 언니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있다. 의문점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리라. ‘조작된 거야.’ 조작된 내용인 거야. 어쩌면 현실을 마주하기 싫을 수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다른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장면이 거짓말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화면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자기소개 잘 들었습니다. 예브 카리나 님. 그래도 조금 부족할 것 같은데… 본인이라는 걸 조금 더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몇 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가시간에는 보통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십니까? -독서… 입니다. -조금 의외네요. 이곳에 온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7년 전입니다. -좋아하는 음식은? -스튜. -으음. 조금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그녀의 모습이 조작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아실 겁니다. 의심이 많은 여러분을 위해 조금 더 이런 시간을 가지고 싶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없어서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저는 26살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직업은 신의 사자. 취미는 신학 공부. 특기는 기도 드리기입니다. 아마 제 얼굴을 모르시는 분은 없으실 겁니다. 그렇지요? 예브카리나? -네. 그렇습니다. -아아. 몇 명이서 이걸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부터 여러분이 여신의 거울로 보실 장면은 조금은 자극적일 수도 있습니다. 기왕이면 자리를 피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악마소환사 진청에게 보내는 메시지지 다른 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아니니까요.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본 영상을 불법복제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시도는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어차피 저희가 가지고 있는 컨트롤 타워에서 송출 허가를 내줘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아실 겁니다. 마력 홀로그램에 장난을 치려는 시도도 의미가 없을 거고요. 어차피 아티팩트는 1회용입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10초를 센 이후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지금부터 보시게 될 장면은 자극적인 장면일 수도 있으니까요. 자! 예브 카리나 님은 일어나셔서 준비하셔야죠.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안 좋은 생각이 스쳤다.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기도 전에 진청 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십! 구! 팔! 칠! “다른 분들은 나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역시 명령입니다.” “알겠습니다.” “저, 저도 봐야겠어요, 군사님. 아니 제 눈으로… 직접 봐야 해요. 부탁드립니다. 제발 남아 있게 해주세요. 제발.”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불안하기는 하지만 목도할 수밖에 없다. 직접 지켜봐야 하는 일이었고 내가 감내해야 할 일 이었으니까. -일. 자! 그럼 본격적으로 대화를 해 봅시다. “어?” -예브 카리나 님도 다시 앉아주시고요. 하핫. 방금 깜짝 놀란 거 맞으십니까? 어허 참. 혹시 제가 예브 카리나 님께 이상한 짓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저한테 낚이신 겁니다. 이렇게 보여도 저는 명색이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비도덕적인 일은 최대한 지향, 아니, 지양하고 있습니다. 예브 카리나 님을 해코지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 -하지만 이 마력 홀로그램은 진청 군사님께서만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봐서 굳이 좋을 건 없으니까요. 남몰래 보낸 연애편지 같은 걸 다른 이들이랑 함께 본다면 편지를 보낸 제 입장이 뭐가 되겠습니까? 뭐, 사실 공화국 친구들과 함께 봐도 전혀 상관은 없지만 가급적이면 혼자 보시는 걸 추천드린다는 겁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네. 지금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조금이지만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게 맞아요. -……. -제가 쓸데없는 구설수에 휘말리는 걸 싫어해서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해놓았습니다만… 만에 하나 이 영상이 전 대륙에 퍼져나가도 저는 별로 손해 볼 게 없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겁니다. “미친 자식….” “…….” 분하지만 그의 말이 맞다. 만약 이 영상을 전 대륙으로 뿌린다고 해도 현재 흘러가고 있는 여론 전체를 뒤흔들 수는 없으리라. -자. 그럼 제가 왜 갑자기 이런 영상을 찍어 우리 악마소환사님께 보낸 걸까요. 크게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세부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조금 더 나오는 게 있겠지만 일단은 두 가지만. 첫 번째는 예브 카리나 님이 제 손에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네. -아주 감사하게도. 예브 카리나 님은 저희 신성연합군에 합류하기로 결정해 주셨습니다. 악마의 하수인으로 살았던 지난날을 참회하고 빛을 위해 싸워주시기로 아주 단호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 -아무래도 예브 카리나 님이 그동안 당신을 꽤나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진청 군사님 같은 건 머릿속에서 지워진 것 같지만 그와는 별개로 제가 군사님의 여자친구를 빼앗은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기는 합니다. 물론 이건 농담입니다. 너무 심각하게 신경 쓰지는 마세요. 중요한 것은 현재 그녀가 저와 뜻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니 그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 예브 카리나 님도 기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의 포부라도 밝혀주도록 해주세요. -……. -뭐 하고 계십니까. 앞으로의 포부를 밝혀주셔야죠. -저, 저는…. -네네. -저는 지, 지난 악마의 하수인으로 살았던 지난 과오를 회개하고 이,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성은을 입어 다… 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이제는 다시는 어둠의 진영에 서지 않을 것이며 빛의 진영에 앞장서 악마의 권세를 몰아내는 것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조금 더 단호하게! -저, 저는 빛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베니고어 여신님의 편에서 공화국의 악마 무리들을 구원하는 데 앞장설 것입니다! 진심이 아니다. 울먹거리는 목소리만으로도 그 정도는 눈치챌 수 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군사님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잘했습니다. 우리 예브 카리나. 아주 잘했어요. 뭐,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그렇게 됐다는 겁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린 건지 아주 잘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자, 그럼 하나는 끝났고… 나머지 하나가 더 남았군요. 사실은 앞전에 말씀드린 이유는 구색 맞추기에 불과합니다. 개인적으로 제 수완에 대해 자랑하고 싶기도 했고… 이런 종류의 메시지를 보낼 때 이유가 겨우 하나라면 조금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코너를 만들게 됐습니다. 겸사겸사 속도 뒤집어 놓을 겸. -……. -물론 본격적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건 일종의 선전포고입니다. 공화국도 교국 쪽에 선전포고를 했으니 저 역시 그에 대한 대답을 들려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사실은 경고의 의미가 더 큽니다. 저희 연합군은 지금부터 공화국의 심장으로 들어갈 겁니다. 네. 그 말 그대로예요. 현재 이곳에 있는 이종족들과 함께 곧바로 공화국의 수도로 진격할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로서는 가장 전쟁을 빨리 끝날 수 있는 쪽이 그쪽이라 판단하고 있는데. 쓸데없는 희생은 최대한 배제하고 싶거든요. 모두 신과 나라를 위해 일해주신 일꾼들인데 이런 식으로 목숨을 잃는다니 어떻게 생각해도 아깝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심 끝에 이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요. 우리 군이 공화국의 심장을 찌르는 건 불과 20일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네. 정확히 20일입니다. 그동안 캐슬락에서는 불가피한 희생이 생기기야 하겠지만 더 큰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거겠죠. 교국은 캐슬락을 버릴 수 없다. 이건 조금이라도 병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깨달을 수밖에 없는 사안. -물론 믿기지 않으실 겁니다. 당연히 믿기지 않으실 거예요. 미친 생각이고 말도 안 되는 시도라고 생각하시고 계시겠죠. 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저는 공화국의 심장으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지금부터 군을 돌려 곧바로 동부 전선을 넘을 겁니다. 아마 당신들이 이 영상을 보고 있을 즈음이면 출발 준비가 끝나 있을 겁니다. “허세야.” -허세 같은 게 아닙니다. “기만이고 개소리지. 나는 널 알고 있어, 이기영.” -기만도 아니고 개소리 같은 것도 아닙니다. “넌 지금 무서운 거야. 그래서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 거야. 그때 우리가 뒀던 체스 때처럼 본인이 불리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겁먹은 개 마냥 짖어대는 거야. 정공법으로 행동한다면 밀릴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딴 유치한 심리전에 내가 말릴 것 같아? 이 전쟁이 장난처럼 느껴져? 이건 가위바위보가 아니야. 네가 주먹을 내겠다고 엄포를 내놓는다고 해서 흔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사기꾼 자식.”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물론 믿기 힘드시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악마소환사님. 하지만 저는 절대 이런 부분에서는 굽히고 들어가지 않아요. 저는 양보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서로 마주쳤을 때 길을 비켜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 되어야 해요. 저는 분명히 공화국의 수도로 들어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당신은 이곳으로 오게 될 겁니다. 저를 막으러 병력을 보내오실 거예요. 캐슬락을 조이고 있는 병력을 물릴 수밖에 없게 될 겁니다. “피하는 건 네가 될 거다.” -피하는 건 당신이 할 일입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아.” -저는 움직일 겁니다. “개소리라는 걸 알고 있어.” -초조해하시는 건 압니다. 당하신 게 있으니까요. “그건 네가 빌어먹을 사기꾼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야!” -머리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뒤통수를 맞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 똑똑한 사람일수록 후두부가 더 먹음직스럽거든요. 제가 많이 쳐 봐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기영 이 개자식! 이죽거리지 마! 이 쓰레기 같은 더러운 사기꾼 자식!” -바로 지금 이 상황처럼 말입니다. “뭐?”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끝났습니다. 기왕이면 제법 멀리 떨어지는 게 좋을 겁니다. 정확히 5초 후에 이 작은 물건이 폭발할 예정입니다. 디텍팅 마법이 가능하다고 해서 방심하시면 쓰나요. 디텍팅 마법에 걸리지 않는 마법도 있다는 걸 눈치채셨어야죠. “군사님!” “제길!” -오! “지금 바로!” -사! “방어 마법을 캐스팅하겠습니다!” -삼! “……!!!” -이! “이쪽으로 오십시오!” -일! “카티아!” -콰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이고! 아이고오! 방금 움찔하신 거 다 봤습니다. 군사님! 아이구. 우리 군사님은 순진도 하셔라! 푸흐하하하핫! 또 속으셨네요. 푸흐하하하하핫! “이….” -또 속으셨습니다! 푸흐하하하하핫! 디텍팅 마법에 걸리지 않는 마법이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정말로 마법사 맞습니까? 푸흐. 하하핫! “이….” -그리고 이렇게 작은 촉매에 마법이나 다른 수단이 부여해 봤자 화력이 얼마나 하겠습니까. 기껏해야 파직 하면서 부서지는 게 고작입니다. 푸흐하하하핫. 이러면 안 되는데 움찔했을 군사님 얼굴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이! 쓰레기 같은 사기꾼 자식!” -그럼 안녕히! 수도에서 뵙겠습니다, 군사님.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리겠어…. 개자식.” -원하시는 게 전부 이루어지길 기도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아!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으음…. 또 속으셨습니다, 군사님. 콰아아아아아앙! # 388 회귀자 사용설명서 388화 싸구려 심리전(1) “…….” “콜록! 콜록! 콜록! 군사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눈속임입니다. 피해는 없습니다. 카티아, 당신은 좀 어떻습니까.” “콜록. 네. 저, 저도 괜찮습니다.” 뿌연 연기 때문에 계속해서 기침이 나왔다. 연기가 걷힌 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군사님의 일그러진 표정. 괜스레 얼굴을 빤히 바라보게 되었다.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당연한 일.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나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려오고 있을 정도. 물론 이 모든 감정이 온전히 그자에 대한 분노나 적개심 때문만은 아니다. 불안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언니의 현 상태에 있다. ‘괜찮은 걸까. 괜찮겠지? 아니, 괜찮아 보였어.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심한 짓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척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는 했지만 일단 마력 홀로그램 속에 언니는 무사해 보였으니까. 정당한 포로의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한숨 돌릴 수 있다는 표현이 적당하리라. 현재로서는 살아 있다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 걱정하는 표정이 티가 났는지 옆쪽에서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예브 카리나는 무사할 겁니다.” “네….” “그자는 예브 카리나를 필요한 말로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도 득이 될 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당장 죽이거나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예요. 어째서 예브 카리나가 그자에게 협력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니는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분명 뭔가 약점을 잡혔을 겁니다.” “네. 저 역시 카리나를 믿고 있습니다. 틀림없이요.” 잠깐 동안 이야기를 나누자 곧바로상황을 살피기 위해 문 근처를 서성이는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 더 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들어온 작전부의 일원들에게 브리핑을 해주는 것이 우선. 무엇이 최선이고 무엇이 차선인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 섭섭해질 수밖에 없다. 눈앞에 있는 진청 군사님의 브리핑에 예브 카리나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눈에 담겨져 있는 것은 오롯이 이기영 명예추기경에 대한 분노. 화가 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만. 이토록 흥분하고 이성을 잃은 것 같은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와 같이 차분하던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물론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사람이 보내는 미묘한 신호라는 것이 있다. 눈빛 그리고 호흡. 아주 작은 신호지만 제대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봐왔던 그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어쩌면 군사님이 가지고 있는 감정은 배신감일 수도 있다. 처음 교국의 명예추기경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군사님은 그에게 일종의 동질감까지 느끼는 듯했다. 그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 깨달은 것은 물론 웃기지도 않은 방법으로 궁지에 몰리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것이 틀림없으리라. 물론 이번 마력 홀로그램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끝까지 농락이고 기만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화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괜스레 한숨을 내쉬는 상황에도 아직까지 브리핑은 계속되고 있는 중. 약식에 불과하지만 자세하다면 자세하다 말할 수 있는 수준의 설명. 금방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이들 사이로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자의 말대로라면 에베리아의 군대가 현재 공화국의 수도로 향하고 있다는 건가요?” “아뇨.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말이 결코 거짓일 확률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거짓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명예추기경 그자는 방금 공포탄 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을 부풀리고 또 부풀리고 과대포장하는 사람이에요. 정말로 공화국의 수도로 향할 거라면 이렇게 미리 전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초조해 봤자 달라지는 일은 없다. 손톱만 물어뜯고 있을 수는 없는 만큼 다시금 군사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일리는 있어.’ 공화국의 수도로 향한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발언. 만약 내가 교국 진영 소속이었다면 그의 주장을 말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리라. 아직 다른 전선들 역시 팽팽하게 유지되어 있는 타이밍. 수도로 진격한다, 안 한다를 판단하기 이전에 넘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직 에베리아 왕국의 병력은 전선조차 넘지 못했다. ‘미친 짓이야.’ 무리하게 전선을 밀어내고 뚫어낸다고 한들, 자신들의 병력만 갉아 먹는 꼴이다. 그런 극단적인 결정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 그럼 군사님. 방금 영상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건지….” “혼란을 주기 위해서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전부 거짓말이고 기만입니다. 말하자면 이건 퍼포먼스고 쇼맨십에 불과합니다. 그자는 광대처럼 카메라를 앞세우고 연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퍼포먼스….” * * * “모두 쇼로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브 카리나 님.” “모두 연기예요. 당신이 카메라에 담은 모습. 전부다 당신의 본래 모습이 아니에요.” “아니 절 언제 봤다고 본래 모습, 본래 모습이라고 하십니까. 낯선 사람이 아는 척하는 것만큼 기분 나쁜 것도 없습니다, 카리나 님. 아. 이제는 낯선 사람이라고 하기엔 제법 가까워졌으니… 음. 뭐, 당신 말도 일리가 있다고 치겠습니다.” “과장된 표정과 몸짓과 도발하듯 이죽거리는 표정, 모두가 거짓입니다. 자기 자신이 대담한 수를 던질 거라고 과장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할 거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건가요?” “아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겠네요. 원래 동물들마다 저마다 생존하는 방법이 다르지 않습니까. 겁을 먹으면 덩치를 키우는 짐승들은 지구에서도 많지 않았습니까. 본래 인간은 자연에서 배우는 법입니다.” “금방 탄로 날 겁니다. 아니, 군사님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포식자들이 멍청해서 속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바보라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예브 카리나 님.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생각보다 효과가 있습니다. 조금 예가 다르기는 하지만 거지꼴로 데이트 신청을 건네는 남성과 잘 빠진 양복을 빼 입고 데이트 신청을 하는 사람을 두고 누가 좋냐고 물어본다면 백이면 백 후자를 선택할 겁니다. 이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동물들은 본래 빤히 보이는 수작에 놀아나기도 합니다. 인간도 동물이고요. 겉모습과 포장이라는 건 그만큼 효과가 있습니다. 아, 그리고 그렇게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딜을 넣어봤자. 제 얼굴은 철판이라 딜 교환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당신 얼굴만 찌푸려질 뿐이에요.” “…….”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끼쳤지만 다른 말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현재 상황이 저주스러웠다. ‘이 사람은 멍청한 사람이 아니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런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그는 결코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아마 그건 자신보다 영상을 보고 있을 군사님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누구보다 남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데 정통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마력 홀로그램은 어떻게 생각해도 단순한 심리전이라고 하기 힘들다. 모든 대사, 모든 표정이 그렇다. 영상의 시작부터 자극적이며 집중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나를 마치 물건처럼 다뤘던 것도, 삼류 양아치 같은 행동하며, 그의 발언 모두 퍼포먼스다. 가벼운 거짓말로 상대방을 속이고 자신은 언제든지 상대를 속일 수 있다고 인지시킨다. 능력을 과시하고 쓸데없는 궤변으로 정신을 흔들어 놓는다. 터져 나온 공포탄과 그전에 있었던 쇼 역시 마찬가지. 앞전에 나왔던 모든 행동과 말투와 도발이 모두 보여주기다. 모든 게 공화국의 수도로 향한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쇼. 생각할 만한 여지가 없게 느껴지는 것이 이상하다. ‘그는 공포탄 같은 사람이야.’ 그것만큼 어울리는 표현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자를 단순한 공포탄으로 비유하는 것은 과소평가다. 거짓 탄환 속에 진짜를 숨기고 있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군사님도 알고 있을 거야.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답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만. 솔직히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제 뜻을 전하는 것보다는 혼란을 주는 게 목적이었거든요. 사실… 저보다는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예브 카리나 님. 장담컨대 제가 어떤 생각을 할지 알고 있어요.” “아뇨. 저는….” “제가 한 말 기억하고 있잖아요, 예브 카리나. 그들에게도 분명히 전했습니다. 저는 양보하지 않는다고요. 그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저는 이미 들어간다고 결정을 내렸고 그 들에게도 통보했습니다. 어떻게 반응할지는 그들이 결정해야 할 겁니다.” “…….” “저는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는 상관없습니다.” * * *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자는 군사나 책사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기꾼이며 모사꾼이고 남을 속이는 것 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폄하할 정도의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군사님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찝찝한 감정이 날아 들어왔다. ‘인정하기 싫으신 거야.’ 이 추측이 맞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방심하고 있거나 상대를 얕잡아 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 역시 자신의 상황이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캐슬락의 현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인 전황이 설명해 줍니다. 저 마력 홀로그램을 보내온 것은 본인의 불안을 숨기기 위한 행동이기도 할 겁니다.” “그렇다면 이기영, 그자가 노리는 것은 아마….” “병력의 분할. 지휘부의 혼란. 가장 원하는 것은 현재 캐슬락 공략을 준비하고 있는 병력을 뒤로 물리는 것. 어떤 식으로든 액션을 취하는 것 자체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군사님, 저들이 공화국의 수도로 향하는 게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라이오스를 통해 공화국으로 향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수 있을….” “그것 역시 염두에 두고 발언한 게 틀림없습니다. 흔히 써먹는 수법입니다. 만약에 우리 수도로 향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런 영상을 보내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실제로 가능하기 때문에 던진 거라고 보는 게 맞는 거겠죠. 용병여왕이 머물고 있는 라이오스를 생각해 둔 발언이라고 파악합니다.” “…….” “그자는 캐슬락을 버리지 못합니다.” “네?” “아마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아니, 그럴 겁니다. 그자는 캐슬락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에는 이쪽으로 찾아올 겁니다.” “군사님 그 말씀은….” “……예전의 저였다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단순한 기만전술이고 그자의 말은 귀담아 들을 가치도 없다고 말입니다.” “…….” “아마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수도로 향할 겁니다. 틀림없이요.” * * * “그럼….”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또 물어보고 그러십니까. 예브 카리나 님. 저희는 수도로 향할 겁니다. 캐슬락은 버릴 거예요.” “당신… 진심인가요?” “그을쎄요…. 진심일까요. 거짓말일까요?” # 389 회귀자 사용설명서 389화 싸구려 심리전(2) “아마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수도로 향할 겁니다. 틀림없이요.”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십니까?” “그는 사기꾼이지만 담이 큰 사람입니다. 주사위를 던져야 할 타이밍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아마 다완 전선을 옆으로 지나 라이오스에 체류하고 있는 붉은 용병과 합류. 운이 좋으면 용병여왕과 함께 공화국의 심장으로 들어가려는 계획이겠죠. 라이오스에 남아 있는 보급품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수도까지 닿을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슬아슬하겠지만요.” “확실히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본인이 먼저 들어가겠다고 알린다는 게 저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캐슬락을 미끼로 다른 전선에서 이득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캐슬락에 있는 병력을 빼주기를 바라는 거죠. 아무 의미 없이 보였던 퍼포먼스의 목적은 바로 그겁니다. 조금이라도 캐슬락이 숨을 쉬게 만드는 것. 이건 기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벌일 정도로 캐슬락의 상태가 안 좋다는 걸 이야기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진청 군사님께서는….” “본대는 캐슬락에 남길 겁니다. 적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보다는 조금 더 확실하게 숨구멍을 틀어막도록 하지요. 물론 최소한의 병력을 편성해 적의 진군을 지연시킨 이후 보급품을 최대한 소모시켜 퇴로가 없는 병력을 쳐낼 겁니다. 조금 돌아가게 되겠지만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정석이야.’ 말 그대로 정석에 가까운 편성이다. 캐슬락에 대한 압박을 유지하면서 곧바로 공략전에 들어가는 것. 적 병력은 수도로 향하게 되겠지만 이곳에 있는 병력의 일부를 뺄 수 있다면 진군을 지연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발목이 잡힌 적은 보급품을 소모하게 될 것이고 결국엔 천천히 고립되며 말라 죽게 될 것이다. 몇 가지 변수를 더 생각해도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선택. 하지만 전혀 위험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적들이 수도로 향하지 않는다면?’ 만약 이기영 명예추기경과 그의 군대가 수도로 향하지 않는다면 캐슬락 전선의 입장이 조금 당황스러워 질 수도 있다. 어느 정도의 비율로 병력을 나눌지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지만 1/5, 아니, 1/7을 다른 곳으로 투자하는 것도 위험부담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바위를 낸다고 말하고 가위를 내는 싸구려 심리전에 당할 수도 있다는 거다. 고작 말 몇 마디에 병력 전체가 흔들릴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군사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어떻게 봐도 자신의 판단이 맞다고 확신하는 듯한 얼굴. 단순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다. 분명히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수도로 향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천천히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마음속 한구석에서 피어나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군사님.” “말씀하셔도 됩니다.” “혹시 수도로 보낼 병력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신 건지.” “총병력의 1/6입니다.” “그건….” “보급물자 역시 적지 않은 물량을 지원하게 될 겁니다. 캐슬락에서 일어날 싸움보다는 수도에서 일어날 싸움이 더욱 장기전이 될 테니까요.” “그… 군사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저들이 수도로 향하지 않는다면….” “않다고 하더라도 캐슬락 공략은 가능합니다. 만약 그들이 수도로 향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현재 캐슬락에 모여 있는 전력이라면 분명히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실 수 있는 겁니까.’ 하는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째서 제가 이렇게까지 확신하는지 궁금하신 표정이군요.” “죄, 죄송합니다. 군사님.” “해답은 아주 간단하니까요.” “그게 무슨….”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아주 고마운 메시지를요.” * * *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또 물어보고 그러십니까, 예브 카리나 님. 저희는 수도로 향할 겁니다. 캐슬락은 버릴 거예요.” “당신… 진심인가요?” “그을쎄요. 진심일까요. 거짓말일까요?” 누가 봐도 놀리는 표정이다. 이죽거리는 얼굴에 마법을 박아 넣을 수 있다면 수백 번이라도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다혈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 쪽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저 이기영 명예추기경을 만나기 전의 이야기. 살살 속을 긁어 놓으며 도발하는 표정은 어째서인지 화를 불러일으킨다. 아마 자기 자신도 인지하고 있으리라. 괜스레 고개를 돌리며 다른 곳을 바라보자 보기 싫은 얼굴을 더 들이미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으음. 사실 아직 답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카리나 님.” “네?” “정확히 말하면 영상이 나가기 전까지는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싸구려 심리전이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던져본 게 전부입니다. 현재의 군대가 약하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저는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며 이기고 싶거든요. 무의미한 피해가 일어나는 건 당연히 지양해야지요. 모두가 저희를 위해 일어서 준 일꾼 아닙니까.” “방금 그 영상이 고작 그걸 위해서였다는 겁니까?” “정확히 말한다면 그렇습니다. 반응을 떠보고 싶었거든요.” “그건….” “말 그대로 반응을 떠보고 싶었습니다.” “멍청한 생각입니다. 반응을 보고 난 이후에 움직이는 건….” “압니다. 알아요. 캐슬락 전선에 있는 공화국이 먼저 움직인 이후에 저희 병력을 움직이는 건 멍청한 짓이라는 거. 저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소규모 별동대를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덩치가 큰 병력을 움직이는 일입니다. 상대보다 두세 걸음이나 늦게 움직인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죠. 제가 말씀드린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반응을 보고 싶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혹시 그 아티팩트에….” “도청장치 같은 것도 없습니다. 우리 둘의 사이좋은 모습은 그 시점 이후로 완벽하게 폐기됩니다. 애초에 이곳에서 저곳을 훔쳐 볼 수 있었다면 이런 귀찮은 짓거리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끄응. 그런 장치가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요.” “그렇다면….” “조금 예상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브 카리나 님. 제가 떠보고 싶은 건 악마소환사의 반응이 아닙니다. 네. 바로 당신의 반응이었습니다.” “…….” “사실 저도 확신하기는 힘들지만 뭐, 원래 똑똑하신 분들은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지 않습니까.” “…….” “저는 당신이 틀림없이 어떤 메시지를 보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들어맞았어요. 자, 그럼 우리 한번 영상을 돌려 봅시다. 당신과 제가 찍은 찐한 영상을 천천히 다시 돌려보는 게 좋겠네요. 손가락. 그리고 눈동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손가락. 그리고 눈동자 그리고 다리.” -33살… 예브… 카리나입니다. “여기서 손가락.” -조금 의외네요. 이곳에 온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7년 전입니다. “여기서도 새끼손가락.” -첫 번째는 예브 카리나 님이 제 손에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서는 눈동자. 솔직히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모스부호 같은 것도 아니고 무슨 암호인지도 모르겠는데…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겠죠. 어차피 공화국에서만 사용하는 암호이자 신호 같은 걸 테니. 아니면 악마소환사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악마의 대화일 수도 있고요. 빛의 선택을 받은 저로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신이 악마 소환사에게 메시지를 주려고 한다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망상입니다. 떠보려는 생각이라면… 잘못 짚으셨습니다. 저는 아무런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어요.” “음.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확실히 평소 행동과도 별 차이 없고 그냥 흘려 넘긴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정도니까요. 근데, 예브 카리나 님. 저는 눈이 조금 좋아요. 남들보다 아주 조금 뛰어난 정도지만 관찰력이라는 게 조금 뛰어난 건가 봅니다. 계속해서 예브 카리나 님이 악마의 메시지를 전하는 게 보입니다. 아직 정화가 덜 된 모양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글쎄요.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확인을 해보면 되는 문제고…. 물론 당신이 보낸 암호들을 해석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솔직히 해석할 필요조차 없게 느껴지네요. 아! 이 부분은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깐 빨리 감기.” -저는 사기꾼 같은 게 아닙니다. 물론 믿기 힘드시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악마소환사님. 하지만 저는 절대 이런 부분에서는 굽히고 들어가지 않아요. 양보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서로 마주쳤을 때 비켜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 되어야 해요. 저는 분명히 공화국의 수도로 들어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은 이곳으로 오게 될 겁니다. 저를 막으러 병력을 보내오실 거예요. 캐슬락을 조이고 있는 병력을 물릴 수밖에 없게 될 겁니다. “여기서도 손가락. 다시 한번 되돌려서 볼까요?” -저는 절대 이런 부분에서는 굽히고 들어가지 않아요. 저는 양보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조금 움찔 하시는 것 같네요. 예브 카리나 님. 다시 한번 봅시다.” -저는 양보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이네요. 당신에게도 분명히 똑같은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실제로 이 문장은 지금의 저를 있게 만들어준 제 가치관의 일부입니다. 한 다섯 번 정도는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 “누군가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한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작업입니다, 예브 카리나 님. 쓸데없는 쇼도 해야 하고. 그에 맞는 행동도 보여야 하지요. 자, 여기서 문제 한번 내봅시다, 예브 카리나 님. 당신이 생각하는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라건대 양보하지 않는 사람으로 비쳐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머릿속에 집어넣었는데도… 콜록! 아, 실례. 다시 말하겠습니다.” “…….” “그렇게까지 반복해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줬는데도 악마소환사에게 보낸 지금의 메시지가 부정의 뜻이라면 제가 조금 슬퍼지지 않습니까?” -저는 양보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여기서 보이는 손가락 한 번, 이건 분명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생각해 볼 만한 여지가 있다. 혹은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수도로 향할 것이다. 혹은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다. 제 망상이 어떻습니까. 제법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틀립니다. 당신의 생각은 틀립니다. 헛짚고 있습니다.” “아뇨. 틀릴 리가 없습니다. 해석은 잘 못하겠지만 아마 틀림없이 제 생각이 맞을 거예요. 아마 지금까지 열심히 회의를 하고 있을 진청 쓰레기도 당신이 보낸 메시지 덕분에 제가 수도로 향할 거라고 믿고 있을 겁니다. 크으. 동료애라는 건 좋습니다. 그렇지요?”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이기영 명예추기경. 당신은 지금 쓸데없는 트집을 잡고 있습니다. 겨우 손가락을 움직였다고 캐슬락에 있는 본대가 흔들린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머, 멍청한 생각입니다. 저는 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을뿐더러…. 당신도 말도 안 되는 추측으로 병력을 움직이는 건 좋지 않을 겁니다. 도박이예요.” “크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만 저는 당신만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브 카리나 님. 저는 악마소환사 진청을 믿습니다. 짧은 영상 중에 그가 당신이 보낸 신호를 캐치할 거라고 믿는 거고 또 그가 당신을 신뢰한다는 걸 믿습니다. 꺼지지 않는 동료애! 저는 그런 걸 믿고 있어요. 크으….” “말도 안 되는 헛소리….”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해요, 예브 카리나 님. 자, 그럼 여기서 다시 한번 문제 나가겠습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예브 카리나 님께 제가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어필하고 또 어필했는데 말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제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이 가십니까? 양보하지 않고 수도로 진격할까요? 아니면 그 반대일까요.” “…….” “저는 제가 한 말을 끝까지 지키는 신의 있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내 뱉은 말과 신념을 아무렇지도 않게 뒤바꾸고 태세전환을 일삼는 개새끼일까요.” “…….” “정답은… 후자였습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태세전환을 일삼는 개새끼가 맞습니다. 제가 아주 또 양보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해낸답니다, 예브 카리나 님. 멍! 멍멍! 멍! 푸흐하하하핫! 갑시다! 캐슬락으로!” “…….” “캐슬락으로 가즈아!! 멍!멍!멍!” “개… 개새끼.” “저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십니까? 본래 사람이라는 건 어쩔 수없이 신념을 저버릴 때도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예브 카리나 님.” # 390 회귀자 사용설명서 390화 우정과 사랑, 믿음의 힘(1) “어떻게 여행길은 좀 편안하십니까?” “개새끼….” “너무 그렇게 매도하시면 기분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제 입장에서도 여러 가지 양보해 드린 겁니다. 배신당했는데도 포로들이 멀쩡하지 않습니까? 제가 정말 사이코패스 같은 쓰레기였다면 현재 아군이 붙들고 있는 포로들을 전부 생매장했을 겁니다. 이렇게 함께 전쟁터로 끌고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 “예브 카리나 님께서는 빛의 진영 쪽에서도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될 거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 물론 당신에게 맡겨진 역할은 겨우 이정도가 끝이 아닙니다. 기왕 빛을 위해 일해주시기로 마음먹었는데 겨우 이 정도로 끝나면 쓰나요. 앞으로도 열심히 일해주시게 될 테니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합니다.” “군사님이 흔들릴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흔들리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그자는 신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하물며 신도 뒤통수를 맞는데 제까짓 게 뭐라고 버티겠습니까. 머리 좋은 사람도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는 아주 많아요. 당신처럼요.” “알고 싶지 않습니다.” “타인을 믿을 때 그런 경우가 종종 일어나죠. 성공한 사업가가 가까운 친구에게 뒤통수를 맞아 파산한다거나, 보증 잘못 서서 한 방에 훅 간다거나. 사기 같은 거 절대로 당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간혹 무너지는 경우가 그거예요. 타인을 너무 많이 믿는 거.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멍청해서 뒤통수를 맞는 게 아닙니다.” “군사님은….” “믿기 힘드시겠지만 이런 저라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 세 명 정도는 있습니다. 아니, 네 명이지요. 이런 제가 멍청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언컨대 제가 진청 군사의 입장이고 제가 믿는 이가 포로로 잡혔다면 저 역시 그들을 믿을 겁니다. 물론 여러 가지 합리적 의심은 따라 오겠지만 그런 부분을 제쳐두고서라도… 믿고 싶을 겁니다.” “…….” “진청 군사가 믿는 것은 제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예브 카리나. 물론 제가 어떻게 움직일 거라는 생각이 깔려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그가 믿고 있는 건 당신이란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작전은 굉장히 의미 있고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겁니다. 만약….” “…….” “만약 우리가 수도로 향하지 않고 캐슬락으로 향한다면 공화국이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신의를 지킬 줄 모르는 개새끼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믿었던 예브 카리나 님이 빛으로 교화되어 저와 함께했다고 생각하게 될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만약 당신이 준 힌트를 믿고 있다면 후두부에 크게 충격을 받을 텐데. 아마 이만저만한 게 아닐 겁니다. 어쩌면 공화국 역사상 가장 커다란 통수를 친 위인으로 추앙받으실 수도 있으실 겁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 “압니다. 공화국의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결코 예브 카리나 님을 탓할 리가 없다는 거. 감히 누가 예브 카리나 님 같은 분을 탓하겠습니까? 어디까지나 불안하고 걱정되어서 드리는 말입니다. 뭐, 결과는 시간이 알려주겠지요. 자! 일단 갑시다! 편성도 어느 정도 마무리 된 것 같고, 이제는 움직이는 것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 “재미있으실 겁니다. 우정과 믿음의 힘을 이용해 빛이 승리하는 스토리는 굉장히 흔한 클리셰 아닙니까? 하지만 그만큼 먹어주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푸흣!” * * *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아주 고마운 메시지를요.’ ‘메시지 말씀이십니까? 그건….’ ‘예브 카리나에게서 받은 메시지입니다. 카티아, 당신의 말이 맞았습니다.’ ‘언, 언니가 언제….’ ‘마력 홀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 내내 입니다.’ ‘그, 그랬군요. 그랬어요. 그랬던 거군요.’ ‘네. 아직 그녀 역시 저희와 함께 싸우고 있습니다.’ 방금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자 괜스레 주먹이 꽉 쥐어졌다.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현재 언니가 처해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백 번 걱정해도 부족함이 없다. 에베리아 전선은 완전히 무너졌고 언니도 이기영 명예추기경에게 붙잡혔으니까. 하지만 이쪽도 계속해서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거야.’ 그 말대로.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활로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에도 메시지를 보낸 언니와 그걸 캐치해낸 군사님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해석된 메시지의 내용 자체는 대단하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전해 들은 것은 고작 전체적인 병력의 규모. 현재 에베리아 전선의 상황,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수도로 갈 확률이 높다는 것 정도가 전부다. 간단한 수화로 전할 수 있는 정보량에는 한계가 있기에 이 정도를 받아들이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그전까지 정보가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눈에 띄는 성과다. 수도로 병력을 얼마나 보낼지에 대해서도 언니의 메시지가 있었기에 정할 수 있었다. 에베리아 전선의 병력을 고려하고 그걸 바탕으로 편성한 부대. 떠나는 병력뿐만이 아니라 남아 있는 병력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변수가 생기더라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병력을 캐슬락에 남겨둔 것은 군사님다운 행동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재정리된 부대는 누가 봐도 입을 벌리기에 충분. 심지어 현재 동부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공화국 병력의 일부도 차출했으니 그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정리하자면 혹시 모를 적의 습격을 대비할 수 있는 병력을 유지한 채 에베리아군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부대를 정리한 것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편성에는 위험 부담이 존재한다. 전선을 유지하는 병력을 조금씩 줄여야 했고 가장 중요한 캐슬락 역시 주요 병력을 수도로 보내야 하는 도박을 감행해야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수를 감행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군사님의 판단이니까.’ 그 말대로 아마 모두가 믿고 있는 것이리라. 군사님이 남은 병력만으로도 버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판단했다면 따르면 된다. 지금까지 공화국은 그렇게 움직여왔고 실제로도 커다란 성과를 내왔다. 이곳에 있는 지휘부가 모두 군사님의 판단을 믿고 있다. 당연히 그 판단에 대한 의심은 없었고 실제로도 편성 자체는 완벽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잡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군사님에 대한 불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 불신이었다. “편성 자체는 저희가 뭐라 말씀을 드릴 수가 없을 정도로군요. 적 병력에 정령사의 비율이 높은 것이 걱정됐었는데 아마 충분히 그들의 발을 묶어 놓을 수 있을 겁니다. 보급의 문제도 완벽해 보이고. 흠, 다완 전선 쪽이 조금 힘을 잃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만….” “다행이로군요.” “물론 조금 걱정이 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놓치신 게 있다는 말이 아니오라…. 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제 입장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라 사료되옵니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그….” “…….” “일단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이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에… 에베리아 전선이 그렇게 쉽게 무너진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예브 카리나 님이 전해오신 에베리아 병력 규모를 고려하면 더욱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라이엇 님.” “물론 카티아 님께서 계신 자리에서 이런 말을 드리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저는 혹시나 예브 카리나 님께서….” “…….” “예브 카리나 님께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이엇 님, 언니가 배신이라도 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능성 자체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에베리아 전선에 있는 사제들의 숫자, 병력 규모, 성벽의 크기를 생각해 보면 하루 만에 공략되었다는 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까? 예브 카리나 님께서는 보, 본인의 입으로 이제는 교국의 편에 서겠다 말씀하시기도 했고…. 저, 저는 마력 홀로그램을 보지는 못했지만 단순한 포로라고 하기엔 상태 역시 무척 좋아보였습니다.” “마치 언, 아니, 예브 카리나 님이 고생이라도 했어야 한다는 말이로군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충분히 생각할 여지는 있습니다. 에베리아 전선이 공략된 일에 예브 카리나 님의 입김이 들어가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어째서 그토록 빨리 공략되었는지 설명이 됩니다. 계속된 적들의 선전활동에 혹여나 잘못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 아닌지…. 그리고 그 결과 극단적인 선택을 하신 것이 아닌지 걱정됩니다.” “말도 안 되는 모함입니다. 군사님, 들을 가치도 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한 번쯤은 생각하셔야 합니다, 군사님. 저도 이런 생각을 하기는 싫습니다만 그녀가 변절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주셔야 합니다.” “당신… 정말로 언니가 나를 두고 교국 쪽으로 넘어갔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언성을 높일 상황이 아닙니다, 카티아님! 저는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패전의 책임은 에베리아 전선의 총지휘관인 예브 카리나 님께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번 일은 감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한번 말해봐.” “그만.” “…….” “…….” 갑작스럽게 장내가 조용해졌다. 눈앞에 있는 늙은이의 발언에 괜스레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저 발언에 정치적 의도가 없을 거라고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우 같은 늙은이.’ 언니가 군사님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건 여기에 있는 누구나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공화국에게서 등을 돌린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죽었으면 죽었지 정말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암호로 알려온 정보가 거짓 정보라는 말부터 어처구니가 없다. 하물며 에베리아 전선 때부터 배신을 하고 있었다는 의혹을 굳이 지금 들이미는 것은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리라. ‘내가 있는데도 배신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야?’ 조용히 군사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카티아의 말도 라이엇 님의 말씀도 옳습니다.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한 일입니다.” 저도 모르게 커다란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당연지사. “군사님!”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면 생각해 봐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예브 카리나의 변절 역시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고려해 따로 대비하고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가능성 자체는 낮습니다. 제가 그녀와 함께 지낸 시간이 길기 때문이 아닙니다. 합리적으로 판단해도 그녀가 등을 돌렸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아….” “그녀는 교국과의 접점이 없습니다. 공화국을 배신할 동기도 시간도 없었을 겁니다. 어째서 에베리아 전선이 그렇게 빠르게 함락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지만 단언컨대 그 이유가 그녀의 변절 때문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이엇 님. 저 역시 모든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으니까요.” “쓰, 쓸데없는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이야기였습니다.” 조용히 말을 끝냈고 무조건적으로 언니를 믿는다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고개를 돌리자 어떤 확신에 가득 차 있는 군사님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믿고 계신거야.’ 전에 했던 말처럼 아마 틀림없이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군사님이 언니를 믿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현재 보여주고 있는 표정이 그걸 설명해 주고 있다. 괜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계셔.’ 아마 언니는 틀림없이 저 믿음에 보답해 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군사님, 적 병력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느 곳입니까.” “저, 정말로 수도로 향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좋아.’ “지금 곧바로 움직이겠습니다.” # 391 회귀자 사용설명서 391화 우정과 사랑, 믿음의 힘(2) “지금 곧바로 움직이겠습니다.” “네.” “편성된 병력은 바로 출발합니다. 아마 늦지 않게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겁니다. 캐슬락 공성전 역시 정확히 두 시간 이후에 진행합니다.” “그 말씀은….” “삼 일 안에 캐슬락을 점령합니다.” “네.” “불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혹여나 변수가 있다고 해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힘들고 지친 시기라는 거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사건에 머리가 아프기도 하고 의심하시는 분들 역시 분명 계시겠지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우리 는 강합니다. 끌려 다니지도 쉽게 무너지지도 않을 겁니다.” “…….” “일어납시다. 싸워야 할 시간입니다.”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고 느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조용히 입을 열고 있는 군사님의 표정에서 알 수 없는 신뢰가 생겨난다. 별 다른 내용이 있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저 표정과 행동은 묘하게 사람을 고양감에 휩싸이게 한다. 저도 모르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마 저 눈빛에 담겨져 있는 신뢰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믿어주고 계신거야.’ 나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지휘관, 그 동안 함께 움직이고 동고동락했던 병력. 이건 일종의 자신감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이런 군대를 키워온 본인에 대한 자신감이기도 하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뽑은 이들에 대한 신뢰이기도 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군사님을 따라 하나둘 몸을 움직이기 시작. 기왕이면 캐슬락 공성전에 함께하고 싶었지만 내 임무는 다른 곳에 있다. “카티아.” “네, 군사님.” “혹시라도 좋지 않은 정황이 보인다면 곧바로 캐슬락으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군사님.” “항상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모든 가능성을요.” “네.” “잘해내실 거라 믿습니다. 캐슬락 공략이 끝난 뒤에는 저 역시 들어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발걸음을 옮긴다.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깊게 생각할 시간이 없다. 출발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회의실에 바깥을 나오자 곧바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덤. 이미 출발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지금 당장 움직인다. 빨리빨리 움직여! 보급 물자도 챙겨놔! 준비는 아직 멀었나?” “…….” “해가 떨어지기 전에는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 “출발 준비는 됐습니까?” “네. 거, 거의 다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점검을 마치면 곧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깃발을 들어 올리는 군대의 모습이 보였다. 발걸음을 옮기고 준비된 말에 올라타자 반대쪽 병력이 모여 있는 곳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려온다. 아마 캐슬락 공성전에 진입하는 병력임이 틀림없으리라. ‘가능성은 있어.’ 공성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캐슬락 자체는 한계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안쪽에 있는 보급품도 바닥. 성벽에 내장되어 있는 마력 그리고 안에 있는 병사들의 체력. 많은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오늘 안에 공략이 가능하다는 것은 결코 헛소리가 아니다. 병력을 일부 빼기는 했지만 캐슬락에 있는 전력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인프라가 그걸 증명해 준다. 교국이 됐든 공화국이 됐든 이번 전투로 어느 한쪽은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어쩌면 종전을 바라볼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거다. 전력상으로 보면 아군이 유리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 하지만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겨야 해.’ 그 말 그대로. 이번 싸움은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다. 캐슬락에서의 전투도, 수도로 진격해 오는 에베리아군을 막는 일도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다. 많은 아군이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건 이미 예정된 이야기.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숲속에 펼쳐진 꿉꿉한 안개가 괜스레 더 음울하게 느껴졌다. “출정합니다!” * * *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건지 궁금한데… 만약 잘못된다면 캐슬락은 물론이고 다완까지 위험해질 거다.” “자꾸 그렇게 불평해야겠어?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내가 괜히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위란. 캐슬락은 명백히 한계야. 카스가노 유노와 나 그리고 박연주가 있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거다. 교국 8좌 중 세 명이 모여 유지하고 있었던 균형이었어. 이기영 그자가 뛰어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도박이야. 그녀들에게는 더 이상 버틸 만한 여력이 없어. 하루, 아니, 이틀 동안 결계를 유지하지는 못할 거다. 다완 전선도 마찬가지야. 그나마 네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밖에 밀려나지 않았….” “그만 좀 쫑알거려. 남자가 쪽팔리게. 누군 도박이라는 걸 몰라서 이러는 것 같아? 그나마 현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 따르는 거야. 어차피 다완 전선은 무너졌어. 거기에 있었던 내가 제일 잘 알아. 병력을 투자하는 것도 헛짓거리처럼 느껴졌던 타이밍 이었다고…. 개자식들….” “하지만.” “하지만은 또 무슨 하지만이야. 당신이 이렇게 쫑알거릴 때마다 당신이랑 손잡은 게 후회된다니까.” “이하 동문이다.” “솔직히 당신도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 “…….” “성과가 말해주고 있으니까. 실제로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원하는 대로 판이 움직이고 있고, 당신을 캐슬락에서 빼내온 것도 그렇고. 우리가 이렇게 현재 라이오스에 진입해 있다는 것도 그래. 폭주한 여왕님을 조용히 시킨 것도 그자가 준 페로몬 어쩌구 포션 덕분이었고. 같은 교국 8좌라고는 해도 꽁지 빠지게 도망치면서 버티기만 했던 우리보다는 생각하고 움직이는 저쪽이 100배는 낫다니까? 무엇보다.” “…….” “공화국의 병력과 함께 움직이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이런 거 상상해 본 적 있어?” “그래서 불안하다는 거야.” “글쎄. 나야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화국 쪽의 사제들은 이기영 명예추기경 쪽에 충성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상대가 악마소환사라고 하니 사제들 입장에서도 치를 떨 만하지.” “그런가.” “너무 많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주어진 일만 하면 되니까. 마력은 충분하지?” “물론.” “그건 다행이네. 혹시나 캐슬락에서 다 빨리고 왔을까 봐 걱정했는데. 최후의 저항을 펼칠 힘은 남겨 놨나 봐? 여전하다니까.” “칭찬으로 듣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위란의 말이 맞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 활로를 찾은 것은 같은 교국 8좌인 이기영 명예추기경. 그가 나타나주지 않았다면 제대로 된 전쟁을 펼칠 수 없었으리라. ‘유능한 자식.’ 절대로 적으로 돌리기 싫은 종류의 사람.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자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자의 인격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치밀함과 대담함 때문이다. 에베리아 전선을 하루 만에 끌어들인 것으로 모자라 공화국의 사제들을 아군으로 만든 수완은 당황스러울 정도. 이 전쟁의 전황을 이렇게 바꾸어버린 것이 고작 말 몇 마디라는 게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차희라 님이 목을 맬 만해.’ 용병여왕이 이곳에 갓 들어온 신입과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당연히 헛소문으로 취급했다. 단순히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것은 아닌가 싶었을 뿐. 자연스럽게 그 기억은 잊혔고 시간이 얼마 지난 이후에는 용병여왕의 정부에 대해서는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이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교국 8좌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기 전까지 말이다. ‘보통 수완이 아니야.’ 용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 뛰어난 연금술사라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평범하다. 차라리 함께 있었던 마법사가 같은 교국 8좌였다면 신빙성 있게 느껴졌으리라. 본신의 무력은 최약. 주변에 강한 동료와 함께하고 있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무력을 가지고 있는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교황청과 황제 측의 입김이 들어갔다고 생각해서 당연히 그 결정에는 의문을 품었고 실제로도 반발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본 이후에는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그가 올린 성과나 업적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 이루어낸 일은 전부 나열할 수조차 없다. 순식간에 제국을 교국으로 만들었고 교국의 명예추기경의 자리에 올랐다. 그동안 반쯤은 겉돌고 있었던 이방인들을 교국이라는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였고 실제로도 일부 이방인을 위한 정책을 내밀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기득권을 위한 정치와 법. 어떻게 생각해도 자기 자신만을 위한 법이었다. 그자에 대한 불안감이 싹 튼 것은 바로 그 즈음이다. 적대한다거나 싫어하게 됐다는 의미가 아니다. 말 그대로 싹 튼 것은 일말의 불안이다. 그자가 뛰어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된 것이다. ‘이자는 신의 사도 같은 게 아니야.’ 교국에서 선전하고 있는 것처럼 선하거나 신성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철저하게 자신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고 자신 주변에 있는 것들을 위해 움직인다. 주변 상황을 모두 이용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내가 평가한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악이라면 악. 물론 반신반의 하기는 했지만 캐슬락을 빠져 나온 이후에는 더욱더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람 하나 정도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출구. 지금은 완벽히 무너져 내린 블랙마켓을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출입구.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비밀 통로다. 내가 캐슬락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 다시 한번 생각해도 웃음이 튀어나올 만한 상황이다. 그가 이런 비밀 출입구를 알고 있었다는 건 모두의 추앙을 받는 교국의 명예추기경이라는 자가 블랙마켓의 주인이라는 것과 진배없었으니까. 눈앞에 공화국으로 가는 숲이 보인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괜스레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에베리아 전선의 지휘관이군. 우리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나? 아, 그러고 보니 명예추기경에게 들은 적이 있지. 예브 카리나라고 했던가? 그게 당신이었나 보군.” “당신은….” “…….” “…….” “날 알고 있는 건가?” “이… 이제 알겠군요. 그자의 생각이 뭔지. 이제 알겠어요. 어, 어떻게 당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겁니까. 당신은 지금 캐슬락에 있어야 하는 게… 캐슬락에 있어야.” “그전에 나를 알고 있냐고 묻지 않았나?” “제길…. 개, 개자식…. 개자식! 분명 포로들은 손대지 않는다고!” “다시 한번 묻겠다. 나를 알고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나?” “교국 8좌…. 안개 소환사 천관위.” “정답이야.” “무슨 짓을.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글쎄. 나는 명령에 따를 뿐이라… 이런 짓을 하는 게 별로 기분 좋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군. 이건 전쟁이니까.” “당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그 자식도 정말 미친놈이라니까. 아,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전해주라고 하더군. 먼저 약속을 어긴 건 그쪽이라고. 사실은 아무것도 상관이 없었겠지만 말이야. 그냥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해. 내가 생각해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 392 회귀자 사용설명서 392화       우정과 사랑, 믿음의 힘(3)     “안개가 심하군요.” “조금 쉬었다 가는 게 어떻습니까, 카티아 님. 본래 이 부근은 새벽에 안개가 심한 터라, 혹시나 적들이 매복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욱더 그럴 겁니다. 더군다나 병사들 역시 굉장히 지쳐 있는 상황이니….” “아니요. 계속 행군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속도를 조금 늦춰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계속 늦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에베리아군이 어느 쪽으로 움직였는지는 확인되었습니까?” “정찰부대가 확인하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오리무중입니다. 규모가 큰 병력이 라이오스를 지났다는 보고는 들어왔지만 안개가 들어선 이후에는….” “공화국 쪽으로 향하고 있기는 한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혹시 캐슬락 쪽에서는….” “아직 아무런 서신도 받지 못했습니다.”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려야겠군요. 타 부대 쪽은 어떻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적의 군세와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지 않아 일단 퇴로와 보급로를 끊고 있는 상황에 있습니다. 추가로 용이 목격됐다는 정보 역시 들어오고 있습니다.” “드래곤….” 괜스레 허리춤에 달려 있는 검을 매만지게 되었다. ‘너무 조용해.’ 전체적인 상황은 이쪽이 원하는 대로 잘 설계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범위가 넓기는 했지만 안쪽으로 들어온 적 병력을 포위한 상황이었고 실제로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보급로를 끊은 것은 물론, 증원군 역시 들어올 구멍이 없다. 동부 전선 전체에서 조금씩 차출한 병력이 전 방위에서 적을 조이며 주변을 견제하고 있으니 숨을 쉴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곳에 들어온 적이 할 수 있는 일은 전진뿐이다. ‘퇴로가 막혀 있으니까.’ 안개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너무 조용해 적막만이 감돌고 있는 이 숲은 이상한 불안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병력이 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아니, 자신들을 추격하고 있는 병력을 최대한 떨쳐내기 위함인 것이 분명. 흔적도 잘 남지 않고 안개가 끼어 있는 이곳은 저들이 숨어 있기에 최고의 장소다. 하지만 그뿐이다. 조여 오는 포위망을 뚫을 수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단지 시간 끌기밖에 되지 못한다. 혹시 게릴라전을 펼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지만 전투를 하려는 움직임이나 정찰하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해.’ 적이 가지고 있는 패를 생각해 보면 이렇게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잠깐 멈추겠습니다.” 순간 안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기는 했지만…. ‘아냐. 적은 이곳에 있어.’ 결코 적지 않은 규모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는 정보는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다. “뭔가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가장 가까운 아군은 어디에 있습니까?” “근처에 춘위 님이 이끌고 계시는 병력이 있는 걸로 확인됩니다. 서남쪽에서 내려오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합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게 좋겠군요. 캠프를 차리도록 하겠습니다. 병사들을 쉬게 해주세요. 딱 다섯 시간입니다.” “예.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변으로 정찰부대를 보내주세요. 혹시나 뭔가 이상한 징후나 다른 흔적이 보이면 곧장 보고하도록 합니다.” “역시 마음에 걸리시는 게….” “네. 없지는 않습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력의 농도가 조금 높은 것 같습니다. 본래 이 지역은 이렇게 안개가 많이 끼어 있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오늘처럼 심한 날은 많이 없지만 보통 이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이상해.’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다. 자꾸만 온몸을 간질이는 느낌. 숨을 한 번 크게 들어 마시자 어딘지 모르게 텁텁한 공기가 들어온다. 갑작스레 머리가 핑 하고 돌 정도. 이유 없는 불쾌함이 몰려든다. 축축한 땅바닥이나 공기 때문이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이들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단순히 긴장감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몸은 계속해서 불쾌하다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제길.’ “짜증 나.”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목소리. 입 밖으로 내뱉고 난 이후에 내가 더 놀랐다.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하지만 딱히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이제는 저런 소란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입니까?” “몬스터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벌써 8번째인가요?” “예.” “이 지역 몬스터들은 비교적 온순한 걸로 알고 있는데…. 처리는, 아니, 제가 직접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요.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곧바로 몸을 옮겼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후방 대열에 이르니 몬스터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그것보다 눈에 띄는 것은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중형 몬스터.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굉장히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녀석이 계속해서 괴성을 내지르며 저항하고 있었지만 많은 숫자의 인간에 대항할 수 있을 리 만무. 평범한 인간도 아니라 정예병이다. 영웅 등급 정도의 몬스터가 버틴다는 것이 어불성설. 막 검을 꺼내들려고 했던 바로 그때였다. “나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직접 정리하겠습니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비치는 것은 부관의 얼굴이었다. 왠지 모르게 붉게 충혈 된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모두 조금씩 눈에 핏발이 서 있다. ‘뭔가 잘못 됐어.’ 뭔가 잘못 됐다. 지금까지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주변을 둘러보자 자꾸만 이상한 점들이 눈에 밟힌다. 순식간에 몸이 잘려 나뒹굴고 있는 몬스터의 비명을 뒤로한 채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부관.” “네.” “잡은 몬스터를 조사하도록 하세요. 이후 혹시나 다른 몬스터들이 보인다면 곧바로 생포합니다. 어떤 마법이나 저주에 영향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꼭 조사해 주셔야 합니다. 신체나 정신에 문제가 생긴 병사가 있는지도 확인해 주시고요. 현재 저희가 먹고 마시는 식수와 보급품도 모두 체크합니다.” “마법이나 저주의 흔적은 없습니다. 식수와 보급품 역시 모두 정상입니다만….” “연금. 연금 지식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가 부대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몬스터를 분석해 주세요. 최대한 빠르게요.” “네. 그렇게 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이상해.’ 미묘한 신체의 변화. 물론 아직까지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결코 웃어넘길 수 있는 종류는 아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연금술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증폭되기 시작. 혹시나 이게 함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적 병력이 만약 본대에서 빠져나온 분대들을 노리고 함정을 팠다고 가정한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분대를 잡아먹기 위해서 캐슬락을 버린다고?’ 어떻게 생각해도 수지가 맞지 않은 교환. 현재 적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라고 해도 무방하다. 캐슬락 공성전은 이미 한참 전에 시작되었고 공성전이 끝난 이후에는 본대가 수도로 향할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건 시간 싸움이다. 동등한 교환이 되려면 적어도 공화국 내부에 타격을 주어야 수지가 맞다. 떨어져 나온 병력을 상대로 시간을 끄는 행위는 적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하는 작업. 시간이 끌릴수록 불리하다는 걸 그 누구보다 그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현재 이 숲 안에 들어와 있는 적의 행동은 마치 숲속에 남아 있는 걸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이 공화국 병력의 발을 묶으려는 듯한 동선. 적은 힌트를 조금씩 결합시키자 커다란 하나의 그림이 만들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끼 병력이라고 하기에는 숫자가 많아.’ 꽤나 커다란 규모.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본대에 가져다 박을 수 있는 종류의 규모다. 인선이 화려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아직까지 정확한 숫자가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공성전에도 쓰일 수 있는 이 병력을 단순히 몇몇 분대의 발을 묶기 위해 사용한다는 건 결코 수지에 맞는 장사가 아니다. ‘의도가 도대체 뭐지. 도대체….’ “저… 카티아 님.” “네.” 막 입을 열어오려는 마법사의 이마에 구멍이 뚫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 “전투 준비!” “전투 준비이이!!!” 퓨슉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에 화살이 박혔다. 그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커다란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화살은 어디서 날아왔습니까.” “동북쪽입니다. 동북쪽입니다!” “바로 전투를 준비합니다. 진영을 세우고 별동대를 꾸려 적 병력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합니다.” “네.” 앗 하는 사이에 다시 한번 화살들이 날아와 아군 병사에게 꽂힌다. “제길. 어째서? …빨리 움직입니다. 일단은 병력을 뒤로 물리겠습니다. 반대쪽으로 갑니다. 길을 잃는 병력이 생기지 않게 최대한 전파합니다.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최대한 빠르게!” “후퇴! 후퇴!” “실드 마법 캐스팅하도록 합니다. 이후에 있을 2차 공격에 대응….” “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악!” “주, 죽어! 이 더러운 악마의 하수인들!” “개자식들이!” “정화시켜 주마! 더러운 악마 놈들! 더러운 악마자식들!” ‘제기랄.’ 옆쪽에서 터져 나온 비명. 적이 어왔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점점 더 진형이 무너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안 좋아.’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개 속에서 적 병력과 섞이는 걸 바라는 지휘관은 없을 것이다. 숫자의 우위가 있다고 해도 그딴 걸 바라는 군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열을 유지합니다! 대열을 유지! 빨려 들어가지 않고 대열을 유지합니다. 방패로 밀집하고 대열을 만들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모여!” “빨리 모여!” “아아아아아악!” 옆에서 들려온 비명에 자연스럽게 땅을 박찬 것은 당연한 일. 검을 꺼내들자 바로 옆에서 하얀 안개를 뚫고 튀어나온 한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핏발이 선 눈, 입에서는 침을 질질 흘렸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공포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외관이다. 단검을 들고 무작정 달려드는 모습은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더러운 악마 놈들! 히, 히이이익! 죽어! 죽어!” “뭐?” “네놈들을 크푸히히! 내버려 둘 것 같아!? 이 더러운 놈들! 시, 신이 네놈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미, 미쳤….” “죽어어어어어어어어!!” “개자식!” 검을 휘두르는 것이 당연. 너무나도 쉽게 머리와 목이 분리된 채로 쓰러진 인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 뭐야. 이게… 뭐야….”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잡음과 비명이 유난히 더 크게 들려온다. “이게… 뭐야.”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목과 몸통이 분리된 인형의 외관. “바리안의 신도….” 틀림없이 공화국의 사제들이 입고 다녔던 의복이었다. # 393 회귀자 사용설명서 393화       우정과 사랑, 믿음의 힘(4)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것은 당연지사. 어째서 공화국의 사제가 게거품을 문 채 달려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탓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둘러봤지만 뿌연 안개 덕에 시야가 잡히지 않는다. 눈에 마력을 한계까지 집어넣어도 달라지는 게 없다. 의아한 일 투성이다. 한계까지 마력을 끌어올렸지만 그럼에도 흐릿한 시야는 돌아오지 않았다. “함정! 함정이다! 최대한 밀집해!” “아아아아아악!” “밀집해서 대응한다! 떨어지지 마!” ‘어디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어디로 밀집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사방팔방이 전부 안개에 휩싸여 있었으니까. 아군과 적군이 섞이고 있다는 것만 간신히 인지할 수 있는 상태. 현재 병력을 둘러싼 안개가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몸을 짓누르는, 기분 나쁜 느낌은 지금까지와는 명백히 달랐다. ‘마력의 농도가 높아.’ 그 말대로. 지금까지는 그 어떤 마력의 흔적도 느낄 수 없었지만 현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는 어떻게 봐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마치 던전 안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마법. 마법인가.’ 떠오르는 사람은 있다. 하지만 그자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캐슬락에서 수성전을 하고 있어야 할 안개 소환사가 이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 안 그래도 사방에서 압박을 받고 있는 캐슬락에서 중요 네임드를 빼낸다는 것은 어떻게 봐도 무리한 일이다. 아니, 애초에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 분명히 캐슬락은 아군 병력에 둘러 싸여 있었고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올 수 없도록 단단히 틀어막고 있었으니까. 그를 비롯한 일부 병력이 캐슬락을 빠져나갔다면 틀림없이 아군의 레이더망에 잡혔어야 했다. 괜스레 호흡이 가빠지고 머릿속이 붉어지는 느낌이다.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되뇌고는 있지만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다. 사실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 그렇지만 이미 복잡해진 머릿속은 다른 종류의 생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더러운 악마! 히히히히힉! 더러운 악마아아아!!!” 무차별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는 저들은 어떻게 생각해도 제정신이라 보기 힘들었다. 한 발 뒤로 물러선 다음 검을 휘두르자 피가 튀어 얼굴을 적신다. 내장이 쏟아지고 비명이 계속해서 귀에 들어와 꽂힌다. “아아아아악!” 한쪽 팔이 완전히 날아갔음에도 거품을 물고 달려오는 모습은 마치 광인이나 좀비를 연상케 했다. 입술을 꽉 깨물며 다시금 목을 날리자 그제야 축 늘어진다. 바로 옆에서 달려 들어온 이 역시 상태는 마찬가지.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자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허물어지는 인형이 시야에 들어왔다. 앗 하는 사이에 뒤쪽에서 안개를 뚫고 나온 적군 한 명. 막 검을 들어 목을 날리려던 찰나 들려온 목소리에 황급히 검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접니다! 접니다, 카티아 님!” “미… 미시카!” “여기에 계셨군요.” “다른 이들은, 아니, 그전에 현재 정황이 어떤지 파악할 수 있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사실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저도 어쩌다가 이곳에 닿은 터라. 그, 그보다 일단은 입과 코를 가릴 수 있는 뭔가를 준비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나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안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아마 천관위일 겁니다. 이 정도나 되는 지역 전체에 안개를 뿌릴 수 있는 이는 그밖에 없을 테니까요. 어떻게 그가 캐슬락을 빠져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건 틀림없이 그의 작품입니다. 아마 기존에 깔려 있는 안개에 촉매를 이용해 자신의 마력을 덮은 것 같습니다만 이전과는 다르게 마력의 농도가 무척이나 노골적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알아낸 사실이 더 있습니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진위여부는 상관없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네… 다, 단순한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 이 안개 마법이나 특이한 종류의 약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혹은 저주일 수도 있고요. 저도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만… 사제의 정화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것을 보면 다른 수단이 사용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옥에 떨어져라!! 히히히히힉!” “조심!” “가, 감사합니다. 카티아 님.” “계속 말씀하세요. 길은 제가 뚫겠습니다.” “네, 네.” “다른 수단이라는 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개인적으로는 연금술로 이루어진 물약의 한 종류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아마 흥분제나 각성제, 일부 환각증상을 유도하는 종류일 겁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안개에 노출되면 노출될수록 더 큰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앞서 부대를 습격했던 몬스터 역시 아마 이 안개에 영향을 받았을 확률이 큽니다. 물론 말씀드렸다시피 전부 제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합니다. 마법이나 사제의 정화 주문이 듣지 않는다면 그 정도밖에는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없으니…. 큰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도움이 됐습니다. 네. 충분히요. 아마 미시카의 추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저 역시 조금씩이지만 신체가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이건 정신 마법과는 조금 다른 종류입니다. 만약 그런 마법이었다면 지금까지 효과가 지속되지는 않았겠죠. 아마 저항력이 낮으면 낮을수록 빠르게 효과를 받을 겁니다. 그리고 효력이 유지되는 시간 역시 마찬가지겠죠.” “네. 맞습니다. 보유 마력이나 체력이 낮으면 낮을수록 더욱더 치명적인 것으로 판단합니다. 아마 이기영 그자가 만든 물약을 천관위가 안개로 만들었을 확률 역시….”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군요.” “제가 추측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가 전부입니다. 카, 카티아 님. 혹시 지금부터는 어떻게 하실지….” “일단은 병력을 재정비합니다. 마법사들을 찾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안개를 몰아냅니다. 그게 첫 번째입니다. 다른 타개책은 없습니다.” “예.”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이겠습니다. 미시카, 딱 달라붙어서 따라오세요.” “네!” 사실 큰 성과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일이 어떻게 터지고 어떤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는지에 의의가 있다. 문제는 그다음.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느냐가 가장 큰 문제다. “죽어! 죽어! 죽어라! 바리안 신이 네놈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이거 놔!” “개자식들! 개자식들! 죽어! 이 미치광이 새끼들!” “죽는 건 네놈들이 될 것이다. 저주받을 악마의 자식들아!” 안개를 해치고 나가면 나갈수록 보이는 모습은 가관. 무기를 든 이들이 병사 하나를 둘러싸고 계속해서 찍어 내리고 있었고, 어느 한쪽에서는 손으로 얼굴을 뭉개버리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움직이고 싶다. 당연히 움직여 저들을 구하고 싶었지만 어느 쪽이 아군이고 어느 쪽이 적군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이 문제. 바리안의 사제복을 입고 있는 이들 뿐만이 아니다. 공화국의 군복을 걸치고 있는 이들부터 휘장을 달고 있는 이들까지. 심지어는 민간인들로 보이는 이들까지 섞여 있다. 이미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상황이 가속화 되고 있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죽어어어어!” “아군이다! 아군이야! 휘두르지 마!” “죽어! 꺼져! 가까이 오지 마! 아무도.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마! 개자식들!” “이 미친 자식!” “가까이 오지 말라고오오!” “뭉쳐! 뭉쳐!” “밀집 대형으로! 밀집 대형으로 방어한다! 밀집대형으로!” “가까이 오지 마! 이 미친 자식들아! 아아아아악!” “신이 네놈들을 벌할 것이다!” “더러운 악마 새끼들이! 저리 사라져라! 죽어!! 베니고어 여신과 바리안 신이 함께하실 것이다. 이 천벌을 받은 놈들!” “죽여! 전부 죽여!” “아군이다. 휘두르지. 아아아악!” “아군이다! 아군이야! 게브! 나야! 나!” “아아아아아악!” ‘제기랄….’ “제길….” ‘제기랄!’ “카티아 님.” “꽉 붙으세요. 아마 후위 병력은 마법사를 중심으로 대형을 유지하고 있을 겁니다.” “예… 예.” 지옥이라는 말보다 이 광경을 더 잘 설명해 주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피가 튀고 끈적끈적한 바닥에서는 자꾸만 역한 냄새가 올라온다. 몸이 점점 축축해지고 머리카락은 땀에 젖는다. 비명과 고함이 귀를 찌르고 살려달라는 목소리와 흥분한 목소리들이 머릿속에 자꾸만 울려 퍼진다. 숨을 들이마실수록 점점 더 어지러워진다. 아마 나 역시 눈이 붉어졌을 터. 약의 효과를 받고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될 정도였다. 물론 영향을 받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잔뜩 흥분한 아군 병력은 이미 이쪽을 덮친 적군 병력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자리한 이들은 모두 적으로 비치고 있으리라. 겁에 질려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다 아군을 베는 이들이나 이미 적에게 둘러싸여 처참하게 난도질당하고 있는 이들, 시간이 지날수록 광기가 안개 안을 잠식한다. 비명과 정신 나간 웃음소리만 들리는 이곳은 이미 전장이라고 할 수조차 없다. ‘뭐와 싸우고 있는 거지. 도대체….’ “죽어!!!” “살려. 살려줘…. 살려!! 나는 아니, 나는 아니야! 커허어어억.” “네깟 놈들이 공화국을 넘보게 할 것 같….” “이러지 마. 가까이 오지 마!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전부 잘못했으니까 가까이 오지 마. 제발 이러지 마. 내가….” “살려주세요. 제발. 엄마….” “죽여! 죽…. 히이이이익!” “죽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살려줘.’ “…….” ‘살려줘. 카티아… 도와줘. 나를… 구해줘.’ “언니….” 안개 때문이 아니다. 점점 더 시야가 이상하게 변하는 느낌. 환청이 들려오고 환각이 보인다. 검을 계속해서 휘두르자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이들의 얼굴이 악마처럼 일그러진다. ‘환각이고 환청이야.’ 모든 게 환각이고 환청이다. 그걸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점점 더 정신이 마모된다. 마치 마법. 아니, 마치 저주처럼 느껴질 정도. “미시카… 제대로 따라오고 있습니까.” 살짝 뒤를 돌아봤지만 안경을 쓴 사내는 시야에서 사라진 뒤다. 입술을 꽉 깨물어 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런 상태에서 그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카티아 님!”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 시야에 비친 것은 커다란 덩치를 하고 있는 괴물. “지, 지금.” “죽어….” “네?” “죽어… 죽어버려! 이 괴물 새끼!” “그게 무슨… 커헉.” 괴물의 목이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 하지만 눈을 똑바로 뜨자 이름 모를 병사의 머리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점점 더 숨을 쉬기가 어려워지고 알 수 없는 공포감에 점점 표정이 일그러진다. 사방이 붉게 변해 빙글 빙글 돌아가고 있는 느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자꾸만 눈에서는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자꾸만 정신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구해줘… 카티아.’ “너희는 정화되어야 한다! 정화되어야 해.” ‘카티아.’ “구원을 내릴 것이다. 빛의 구원을! 빛의 군대가 너희를 몰아낼 것이다.” ‘살려줘, 카티아!’ “빛의 구원을!” “닥쳐! 닥쳐!! 닥쳐어어어어!!!” # 394 회귀자 사용설명서 394화       우정과 사랑, 믿음의 힘(5)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군. 이런 장치를 쓰는 건 처음이라. 아무튼 보고하도록 하지. 상황은 거의 마무리 되고 있다. 적 본대는 혼란에 빠졌고 주요인물에 대한 생포에 대한 부분은… 음. 가능하다고 확답을 내릴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일단은 최대한 신경 써보도록 하지. 준비가 되는 대로 곧바로 이들을 캐슬락으로 보낼 예정이다.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이쪽이 아니라 그쪽에서 신경 써야 되는 부분일 테고. 그쪽에서의 전투는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아마 문제 없을 거다. “괜찮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기왕이면 자료화면 같은 것도 준비해 주면 좋을 텐데. 이 사람도 참 융통성 없다니까. 자기 할 말만 하고 끝이야.” -혹시 궁금해할 것 같아. 전체적인 상황을 보내도록 하지. “아, 보내려나 보네요.” -빛의 구원을 받을 것이다! 누가 감히! 누가 감히! 악마 소리를 내었는가! -커허어어…. 아아아아악! -우웨에에에에엑…. -그 입 다물어라! 이 더러운 교국의 앞잡이들아! -아군이다! 공격하지 마! 아군이야! 멈춰! 아아아아악! -더러운 악마의 하수인들! 저주 받을 악마들아! 바리안 님이 네놈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불지옥에 떨어져 죽어서도 영원히 고통 받으리라! -미친 사이비 교도 새끼가! 죽어! 죽어어!! -신의 사도는… 죽지…. 나는… 죽어서도 싸울…. “…….” “…….” “생각보다 끔찍하네요.” “그러게.” -내가 보고할 내용은 이걸로 끝이다. 네 말대로 이건 보낸 이후에 곧바로 폐기할 예정이고. 아, 추가로 여기 아가씨가 할 말이 있다고 하더군. 본래는 안 된다고 했지만 나보다는 네가 그녀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이 정도는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오, 오빠. 자, 잘 지내시죠? 저…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소라 씨도 마, 마찬가지고요. 벌써 얼굴을 못 본 지 이틀이나 지났네요. 이… 이틀이나요. 보, 보고 싶어요. 히끅. 너무 보고 싶어요. 잘 지내는지도 너무 걱정되고…. 몸은, 몸은 괜찮으신 거죠? 매 끼니 꼬박꼬박 챙겨 드시고 치료도 매일매일 받으셔야 해요. 꼭이요! 최대한 빨리 마무리 하고 돌아갈게요. 기다려주세요! 쪽! 쪽! 쪽! “…….” “…….” -사, 사랑해요. 히힛. “우웩. 못 볼 걸 봤네요.” “너무 그렇게 반응하지 마. 귀엽기만한데 어때서.” “귀여운 건 사실이지만 같은 동성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만은 보이지 않네요. 누구는 저런 거 못해서 안하는 줄 아나. 제대로 된 애교 한번 보여줘요?” “아니…. 누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 행동은 아니니까.” “외관 자체는 내가 더 귀엽지 않나? 하얀 씨보다는 내가 조금 더 작고 앙증맞은 편 아니에요? 저쪽은 은근히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가서 귀엽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고요. 어딜 보더라도 저런 콘셉은 제가 가져가야 하고 하얀 씨 외관에는 오히려 방해, 아니, 사람이 말하는데 귀는 왜 이렇게 자꾸 후비적거려요? 무시하는 거 아니죠?”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왠지 모르게 귀가 간지러워서.” “누가 오빠 욕하고 있나 보죠. 뭐. 욕먹을 짓을 하도 하고 다니니까. 이상하지도 않은 일도 아니지.” “말이 심한 것 같은데, 누나.” “틀린 말은 아니니까. 풉! 특히나 이번 건 조금 악랄했다는 거 알고 있죠? 그쪽 작전에 투입된 애들은 입단속 확실하게 해야 할 거예요. 만약 알려지더라도 제가 손을 썼다고 발표하기는 하겠지만 괜히 이미지가 손상되면 안 되죠. 성스러운 군대잖아요?” “아암. 그렇지. 성스럽지. 그렇고말고. 뭐, 사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거기서 일어난 일은 어디까지나 불운한 사고로 처리될 거고 죽고 죽이는 전쟁에서 윤리 따지고 드는 것도 우습지 않아?” “대륙법으로도 정신을 뒤흔드는 저주나 마법 같은 건 엄연히 금기예요. 흑마법도 마찬가지고요.” “내 건 마법이나 저주가 아니니 세이프. 흑마법 역시 교국이 사용한 게 아니게 될 테니 세이프.”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신다니까.” “칭찬으로 들을게.” 과장스럽게 박수를 보내는 이지혜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내 인성에 감탄한다는 표정을 보내고 있었지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꼴이다. 계획에 적극 찬성하는 것으로 모자라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 써준 숨은 공로자가 이제 와서 양심 운운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우습다. 물론 그녀의 진심은 아니다. 반쯤은 놀리는 표정이었고 무엇보다 본인이 기분 좋아 보였으니까. 계속해서 방금 영상을 돌려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꼴은 가관. 함정에 빠진 적군. 지휘관으로서는 당연히 기분 좋을 만한 일이기는 하다. 아군의 피해는 전무, 쓸모없는 포로들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하기에는 성과가 좋다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콧노래 흥얼거리는 건 좀 오바지….’ “흥…. 흐으으흥….” 심지어 고개도 까딱까딱 움직이며 리듬을 타고 있다. 이지혜를 보면 항상 하는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쟤보다는 내가 덜 쓰레기라는 위안이 된다. “진짜 이런 걸 보면 오빠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든다니까요? 제가 조금 덜 악랄하다는 걸 깨닫게 해주잖아요? 진짜 악랄하다니까. 악마가 소환되면 오빠를 형님으로 모실 거라니까요. 아, 이미 한 번 모셨나?” “…….” 아무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 왠지 모를 자괴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더 이상 영혼에 상처를 받기 전에 말을 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진지한 주제로 입을 열자 성실히 대답해 오는 이지혜의 얼굴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도착은 언제지?” “슬슬 됐어요. 아마 지금쯤이면 적군에게도 우리 병력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갔을 거고요. 조금 더 은밀하게 움직이고 싶기는 한데 역시 우리 악마 소환사는 공성전을 치르는 와중에도 정찰대를 돌리는 걸 소홀하지 않네요.” “기왕이면 깜짝 놀래주고 싶었는데. 이거 아쉽게 됐네.” “놀라 뒤집어질걸요? 정찰대는 계속 잡아내고 있으니까 정확한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적도 파악하지 못할 거예요. 기껏해야 구색만 맞춘 지원부대라고 생각하는 게 고작이겠죠. 공화국 쪽으로 우리 부대가 들어갔다는 건 다 알고 있는 사실일 테고. 여기저기에서 남은 병력 끌어 모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물론 전부 간파하고 있을 가능성도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간파?” “그냥 추측이에요. 하지만 대비해야 될 문제이기도 하고요. 원래 이런 큰 병력을 이끄는 입장에 있다 보면 모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거든요. 사실 전체적으로 상황이 무난하기는 해요. 아니, 너무 무난해서 문제죠.” “정확히 어떤데?” “일단은 병력의 움직임. 정확히 파악은 되지 않지만 곳곳에서 차출된 병력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게 신경 쓰이네요. 말 그대로 보험이란 거죠. 이를 테면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는 병력. 전장을 유지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잔존 병력이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전장에 사람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니까요. 보급도 생각해야 하고 실드 마법으로 보호할 수 있는 근접 직군의 비율을 생각해 보면 더욱이요. 본대에서 분대가 분리되기는 했지만 분대가 빠져도 저언혀 상관없다는 거예요.” “…….” “아직까지도 타 전선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건 바로 그런 이유라고 할 수 있겠죠? 타 전선에서 숨이 트이기야 했지만 말 그대로 숨이 트였을 뿐이에요. 이전에 손해 본 걸 메우려면 조금 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하고요.” “다른 정황은?” “있죠.” “…….” “거의 모든 동부전선이 먹혔다는 것 역시도 생각해 봐야 될 문제예요. 린델 쪽으로 움직이는 저희 동선을 적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환호할 만한 일이지만 다시 말하면 저희 역시 동부 전선의 바깥쪽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말과 다름없는 거잖아요. 서로 최대한 신경 쓰고 있기는 하지만 적 병력이 바보도 아니고. 지금 안개 소환사가 있는 곳에 들어와 있다는 그 병력들, 그 병력들의 정확한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문제예요. 일부는 훌륭히 함정에 걸려들기는 했지만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을까요? 안개의 숲에서 길을 헤매고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흠….” “오빠가 예전에 넘긴 전략 시뮬레이션 데이터에서의 악마 소환사는 정석으로 상대방을 조이고 물고 늘어지는 성향이 강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실전과 게임은 다르니까요. 오히려 그런 성향일수록 한 번의 기습이 효과적으로 다가올 수 있거든요.” “누나 말이 만약 맞다면….” “네. 현재 숲에 있는 병력들 역시 버리는 패였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너무 간 것 같기는 하지만 애초 예브 카리나는 개뿔 신경도 안 쓰고 있었을 수도 있고요.” “…….” “표정 풀어요. 그래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니까. 적 병력의 일부를 안개의 숲에 불러올 수 있다는 것 만해도 대단한 성과예요. 최대한 많은 숫자가 덫에 걸려들었으면 싶지만 그걸 바라는 건 너무 날로 먹겠다는 도둑놈 심보고….” “만약 누나가 진청이라면 어떻게 할 건데?” “글쎄요? 오빠랑 똑같지 않을까요? 오빠는 어떻게 할 건데요?” “수도를 핑계로 나불거리며 먹기 좋은 미끼를 안개에 숲으로 보내고….” “방심한 사이에 본대를 친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이랑 똑같은 짓.” ‘이 쓰레기 새끼.’ 왠지 모르게 스스로를 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부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지혜의 말은 당연히 납득 가능한 설명이다. 현재 안개 소환사 천관위가 있는 곳에 정확히 얼마만큼의 병력이 들어갔는지 확인할 수 없다. 심지어 모든 분대가 안개의 숲으로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도 의심을 해볼 만한 부분. 일부 병력은 안개의 숲으로 보내고 나머지 병력을 뒤로 돌렸을 가능성 자체를 배제할 수 없다. 이지혜가 꼼꼼히 바라보는 지도에 시선을 두었다. 어느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고 있는 이지혜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맞아요.” “만약 이 추측이 맞다면 캐슬락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이곳에서 마주칠 확률이 높아요. 정확히 말하면 기습을 당한다고 말하는 게 올바른 표현이겠네요. 우리에게는 불리하고 적들에게는 좋은 지형. 캐슬락에 있는 본대도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한참 공성전에 정신이 없기는 하겠지만 자기한테 빅 엿을 먹인 상대가 코앞에 있는데 눈이 안 돌아갈 사람이 있겠어요? 그리고 제 입으로 말하기엔 조금 죄송하지만 오빠가 도발 할 때 표정이 워낙 띠꺼웠어야죠. 장담컨대 부처가 봐도 빡칠 만한 표정이라고요.” “그건 좀 상천데… 아무튼 누나가 여기까지 읽었다면… 대책은 있는 거 맞지?” “일단은 적들이 함정을 파 놓지 않았다고 기도하는 게 첫 번째. 만약 파 놓았다고 한다면 뚫어내는 것 밖에 답이 없어요. 여기서 부터는 전술의 영역이죠.” ‘전술.’ 말은 쉽다. 하지만 악마 소환사가 이런 부분에 수완이 좋다는 건 그녀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 앞전에 얻은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도 이지혜는 악마 소환사를 이긴 적이 없다. 실제로 이지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말해왔을 정도. 물론 그 이후로 그녀가 얼마나 칼을 갈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악마 소환사는 확실히 강하다. 초조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병력들은 계속해서 진군하기 시작.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굉음이 들려온 것은 순식간. 왠지 모르게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괜스레 더 기분이 더러워 진다. “씨발….” “…….” “대책은 있는 거지?” “물론이죠.”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기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저도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고 게임과 실전은 다르다는 걸 보여줘야하니까요.” 하지만 이후에 들려온 목소리에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준비한 전술이 있기는 있다는 거네?” “준비 했다기 보다는 원래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게 맞죠.” “그러니까 그게 뭔….” “전술 김현성.” “어?” “전술 김현성이요. 그게 제가 준비한 전술이에요.” “아….” “오빠가 저보다 더 잘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꼭꼭 숨겨 왔던 거고.” “푸흐하하하핫. 아. 그렇네… 키야… 그걸 깜빡 하고 있었구만! 내가 우리 현성이를 깜빡 하고 있었어!” 이것도 전술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파괴력은 전술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 괜스레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은 내가 조증에 걸렸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신들의 아집으로 만들어낸 불세출의 괴물. 알타누스에 의해 회귀한 존재이자 베니고어 여신의 총애를 얻고 있는 진짜 신의 사자. 신화등급의 무구, 가지고 있는 스텟 자체만으로도 이미 괴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 말 그대로 자잘 자잘한 전술이 필요할 리가 없다. 전술 김현성 자체가 바로 이쪽이 가지고 있는 전술이다. “전술 김현성 투하해!!” “이미 준비 됐어요.” # 395 회귀자 사용설명서 395화 회귀자 사용설명서(1) 이곳에서의 전쟁과 현대전은 확연히 다르다. 이미 몇 번이나 언급했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이 대륙에서 한 개인이 전쟁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말하자면 정하얀이 라이오스에서 보여준 모습. 안개 소환사 천관위가 현재 안개의 숲에서 하고 있는 행동. 다완과 실리아를 밀어내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공화국의 오호대장군도 마찬가지. 신화 등급을 넘나드는 근력을 보유하고 있는 차희라는 또 어떠한가. 단신의 몸으로 라이오스 전체를 마비 상태로 만들었고 실제로도 전황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물론 차희라의 경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맞물려 있기는 했지만 개인이 끼칠 수 있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에 대한 적절한 예로서는 부족함이 없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들은 전술핵이나 다름없다. 축소해서 말하자면 누구는 전투기고 누구는 탱크다. 검과 화살을 들고 싸우는 전장에서 갑작스레 탱크로 밀고 들어오는 적군을 상상한다면 누구나 다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군이 전략병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우리도 보유해야 한다. 평범한 화살과 검으로 뚫어낼 수 있는 내구를 가지고 있는 전사가 있다면 그 전사를 꿰뚫을 수 있는 궁수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이 대륙의 전쟁의 역사는 그렇게 발전해 왔다. 약간의 변화가 생긴 것은 이방인이 떨어진 뒤. 결과 자체가 달라진 것이 아니다. 달라진 것은 오롯이 과정. 튜토리얼 던전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가 나라의 국력을 말해주는 지표가 됐으니까. 그만큼 이방인의 등장은 이들에게도 충격적. 그동안 팽팽히 유지되고 있던 관계에 새로운 강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들도 무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구가 뛰어난 검사의 내구도 두드리다 보면 부서지게 마련이고 마법사의 경우에는 더하다. 잠깐 방심을 푼 사이 어디에선가 날아 들어온 화살에 저세상으로 승천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지고 있는 검사도 끊임없이 언젠가 지치게 마련이고, 무시 못 할 화력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도 금방 마력이 바닥 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네임드들을 견제해 줄 적이 존재한다면 생각보다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축소된다는 거다. 그렇다면 김현성의 경우에는 어떨까. 예를 들어 우리 쪽의 전술병기를 견제할 수 없는 적 전술병기가 없다는 가정을 해본다면 어떨까. ‘말이 필요 없지.’ 자그마치 신에게 선택을 받은 인간이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재능도 일반인이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데 본인 역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스탯창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 용병여왕이 신화 등급을 넘나 들 수 있는 근력 수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 자식은 모든 부분에서 만능이다. 지력을 제외한 모든 수치가 90 이상. 보유하고 있는 전설 등급의 특성 4개. 소설 속의 주인공이고 만화 속의 주인공 같은 인간. 장담컨대 현재의 김현성은 인간계 최강이라 자부할 수 있을 정도다. 적어도 내가 본 인간 중에 김현성을 뛰어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마법과 화살에는 즉각 대응하라! 마법사들은 어서 방어 마법 유지해! 소란스러워진 병력들과 동떨어진 위치에서 숨을 숨기고 있는 김현성. 무척이나 침착해 보인다. 회귀자의 품 안에서라면 전쟁터 한복판에서 잠도 잘 수 있을 것 같다.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었고 손목과 몸을 푼다는 듯이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사제들의 버프가 쏟아지고 마법사들의 보조 마법 역시 녀석에게 집중되기 시작. 누가 봐도 전장의 주역은 이 자식이라는 생각이 쏟아질 것 같은 외관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적습을 받은 병력자체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 물론 기본적인 대비는 하고 있었지만 기습이라면 기습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계속해서 폭음이 들려오는 중.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상황을 보고 있는 나와 이지혜 같은 경우에는 별 다른 충격이 오지 않았지만 아마 바깥쪽에 피해가 쌓이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후드드득…. 후드득…. “아군 병력을 잡아먹기 위한 병력은 아니네요. 진군을 늦추거나 피해를 누적시키기 위한 병력.” “그래? 누가 봐도 잡아먹고 싶은 모습인데?” “그만큼 필사적이라는 거겠죠. 기왕이면 병력을 제대로 보존하고 움직이고 싶었는데 손해가 아예 없을 수는 없겠네요. 일단 지형이 불리하기도 하고. 제 입장에서도 피하고 싶었지만 이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고 봐요. 차라리 이곳에서 부딪친 게 다행일 수도 있고요.” “전술 김현성 투하는 언제야?” “그렇게 막 쓸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최대한 효과적으로 써야 전술 김현성이라는 소리를 듣죠. 네임드는 어디에 쓰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활용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요. 일단은 보자…. 최소한의 길을 여는 게 중요하겠네요. 최대한 리스크 없이 폭탄을 배달시키는 게 제 일이예요.” “흠…. 뭐, 그래. 누나가 알아서 하겠지 맡겨도 되지?” “네. 일단은요.” “나는 잠깐 밖에 나가서 상황 좀 보고 온다.” “괜히 눈먼 화살 맞지 말고 대충 보고 들어와요.” 이지혜가 괜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살짝 바깥으로 발걸음을 떼자마자 온갖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 온도가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이런 상황을 겪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규모가 다르다 보니 피부에 와닿았다. 하늘 위에서는 온갖 종류의 마법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아군 병력은 최대한 밀집해 방어 마법을 캐스팅한다. 콰과아아아아아앙!! 콰드드드득!!! “마법사 지원 부대! 실드 캐스팅! 실드 캐스팅!” “최대한 마력을 모은다! 빨리 빨리 이동해! 폭격 범위에서 벗어난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아아아악!” “사제! 사제!” “대응 마법 준비 명령입니다! 최우선 사항입니다.” “마법진 확인 이후 캐스팅한다.” “캐스팅 준비!” “발사!” “……!” ‘벌써 대응사격인가. 반응 빠르네.’ 부대가 잘 훈련되었다는 증거. 내가 훈련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뿌듯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컨트롤 타워가 있으니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잘 대응한다. 하지만 이쪽보다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자리해 있는 적에게는 마법이 잘 닿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테면 고지전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 악마소환사가 꽤나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전사들은 대형을 유지한 채로 최대한 전진, 최대한 후위에 피해가 없도록 한다. 최우선 사항이다.” “확인.” “방어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는 애들 중심으로 최대한 모여! 꾸역꾸역 밀고 들어간다!” “제기랄! 저 새끼들 올라오게 하지 마!” 지휘통제실에서 이지혜가 계속해서 명령을 내리고 있고 부대는 실시간으로 그 명령을 따라 움직인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단순히 적에게 다가가고 있을 뿐이지만 디테일한 부분까지 지시를 내리는 것은 그저 닥치고 돌격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아군 피해가 문제가 아닌데 이건….’ 마법사들의 마력과 사제들의 신성력이 계속해서 소모된다는 것이 문제. 만약 이곳을 제대로 뚫어낸다고 해도 다음 전쟁을 지속할 만한 체력이 남아 있을지가 문제다. ‘원하는 게 이거구나.’ 적들은 충분히 병력을 뺄 수 있다. 이쪽의 체력을 깎아 놓는 걸로도 이미 이득, 만약 병력에 막대한 피해를 준다면 말 그대로 대박을 친 것이나 다름없다. 여러모로 우리에게는 불리하고 적에게는 유리한 상황. 언제 전술 김현성을 출동시킬지 그 타이밍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아아아악!” “의무병! 의무병!” “5소대에 화염마법 직격! 실드가 깨진 걸로 보입니다.” 때마침 아군 병력에 피해가 생긴 상황. 혹시라도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 가장 적절할 때를 알아서 구별하고 있을 테니까. 지휘 통제실에서 자세한 상황을 물어봐야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던 찰나. ‘어?’ 시야에 비친 것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는 얼음. 정확히 말하면 창의 모양을 한 얼음이다. ‘아니 얼음이 맞나?’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 저런 게 이토록 가까이 올 때까지 어째서 캐치하지 못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지휘 통제실에 자체적으로 걸려 있는 방어 마법을 관통한 채 이쪽으로 날아드는 창의 모습에 등골이 서늘해질 지경. 딱 하고 캐스팅을 했지만 생성되고 있는 용의 방패는 녀석이 날아오는 속도보다 느리다. 단순히 ‘아프다’로 끝날 만한 공격은 아니다. 둔한 몸이 움직여주지 않는 것이 짜증 나게 느껴진 것은 당연지사. 최대한 몸을 비틀어 치명상을 피해보자고 했지만 바로 앞쪽까지 날아든 녀석은 별의별 생각을 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능력자가 있는 거야.’ 암살이나 저격에 특화되어 있는 이가 있다. 이 정도로 먼 거리까지 보이지 않는 창을 형상화해 던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네임드가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다. 그렇게 최대한 몸을 기울였던 바로 그때였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온 것. “어?” “괜찮으십니까?” 눈에 보인 것은 내 옆에 자리하고 있는 김현성. ‘네가 왜 여기 있어? 아니, 이 새끼 여기로 언제 온 거야.’ 분명히 돌격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본대와는 조금 떨어져 있는 위치. 언제부터 저게 나에게 날아오고 있는지 눈치챈 건지는 모르겠지만 순식간에 이쪽으로 온 것을 보니 귀신이 곡할 노릇. 사실 조금 더 놀라운 것은 녀석의 외관이다. ‘졸라 잘생겼네.’ 반쯤 이쪽을 안은 채, 한쪽 팔로는 보이지 않는 창을 완전히 부서버렸다. 유리인지 얼음인지 모를 반짝반짝 한 것들이 가루가 되어 녀석의 얼굴을 비춘다. 가만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터된 사진을 보는 느낌. 때마침 찾아온 햇빛까지 놈을 도와주니 무슨 화보나 영화의 한 장면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왠지 모르게 애매모호한 자세로 녀석에게 입을 열려던 찰나 김현성 쪽이 먼저 입을 열어왔다.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영 씨. 밖은 위험합니다. 일단은 저격수를 처리할 때까지 만이라도… 모두 기영 씨를 노리고 있을 테니까요.” “네.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보호 마법이 이렇게 쉽게 뚫릴 줄은 몰랐던 터라.” “아마 관통에 중점을 둔 마법일 겁니다. 특성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고요. 위협적이기는 하지만 통제실 안까지는 닿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일단은 빨리 안으로….”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성 씨.”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네. 그보다 지금… 여기 계셔도….” “조금 늦기는 했지만 무리는 없을 겁니다. 때마침 명령이 떨어진 타이밍이라. 그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네. 다녀오시죠.” “아! 그리고 계속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여러 상황을 고려하며 최대한 주의하셔야 합니다, 기영 씨. 지휘통제실에도 꼭 전달 부탁드립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이만.”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것을 보니 어안이 벙벙하다. 혹시나 나를 노리는 게 또 올까 싶어 황급히 통제실로 들어온 것은 순식간. 벌써부터 달리기 시작하는 김현성의 모습이 마력 홀로그램에 비쳤다. 어디로 달리는지 역시 뻔할 뻔 자. ‘각 재고 있었던 거구나.’ 나에게 창을 던졌던 놈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뭐가 저렇게 빨라.” 그 말 그대로, 눈으로 제대로 확인하기가 힘들게 느껴질 정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팔방에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핵 떨어진다!” # 396 회귀자 사용설명서 396화 회귀자 사용설명서(2) “방금 뭐예요? 무슨 남자가 공주님 안기를 당해요?” “봤어?” “당연히 봤죠. 그러니까 위에 나가서 그렇게 기웃거리면 어떻게 해요.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오빠 얼굴은 살아 움직이는 도발 토템이나 다름없다고요.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린데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는 것 좀 자제해요. 그러니까 전쟁 통에도 그런 소설이 팔려나가잖아요. 교국이 유지하고 있는 전선 쪽에 여군들 생환율이 그렇게 높은 거 알아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는데 다음 권 기다려야 된다고 억울해서 죽지도 못 하겠대요. 도움은 되지만 괜한 구설수에 휘말리는 게 별로 안 좋다는 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시면서….” “무슨 소설?” “몰라요?” “알긴 아는데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상한 부분에서 둔하다니까.” “응?”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나저나 다친 곳은 없죠?” “응. 누구 덕분에 멀쩡하네.” “몸조심 좀 해요. 현성 씨 없었으면 어휴. 일단 화면 좀 보세요. 계속해서 네비게이션 찍어줘야 하니까. 이건 오빠가 하는 게 더 낫겠네요. 저보다 현성이 오빠를 더 잘 이해하고 계시기도 하고.” “이게 무슨 화면이야?” “전술 김현성 전용 마력 홀로그램이요. 일반 카메라로 움직임을 따라가기가 벅차서 1인칭이에요. 기본적인 루트는 정해져 있는데… 오빠가 할 일은 네비게이션, 좌표 찍어주시고 목표물 설정해 주시고… 그 외 자잘한 부분에서 지원해 주시면 됩니다. 현성이 오빠 능력을 고려한 이후에 판단하면 돼요. 잘 알고 계시죠? 사실은 제가 맡고 싶지만 오빠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저는 다른 지점도 봐야 하거든요.” “준비 확실히 했네.” “톨보이를 쓰려면 제대로 써야죠. 엄연히 체력이랑 마력에 한계가 있는 사람인데, 아! 무리는 시키지 않는 게 좋아요. 그럼 저도 집중 좀 할게요. 상대도 만만치 않은 것 같으니까.” “밀리고 있는 건 아니지?” “밀리고 있는 건 아닌데… 불안요소가 아예 없는 건 아니네요. 지금부터예요. 집중.” “응.” ‘얘가 확실히 난년이긴 난년이네.’ 괜스레 그런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방법을 사용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김현성 1인칭 시점. 이쪽의 지시사항이 전달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게임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그것도 자동사냥이 되는 게임. 굳이 내가 컨트롤을 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전술 병기 김현성은 알아서 척척 적을 해결해 주니까. ‘이거 괜찮은 것 같은데… 아니, 쩌는데?’ 물론 전쟁터 안에서의 김현성의 판단력은 믿을 수밖에 없다. 녀석의 전투 경험은 이쪽의 수십 배.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대상을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대규모 전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김현성의 시야는 한정되어 있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전장 자체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없다. 혼자 흥분하다 고립될 수도 있을 것이고 지원이 필요한 지점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을 보조하는 게 바로 내 역할. 커다란 뷰 카메라 하나와 김현성이 달고 있는 개인 카메라 하나. 장담하건대 이것보다 내게 잘 어울리는 역할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현성보다 내가 녀석의 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떠올려 보면 더욱더 그렇다. ‘좋아.’ -곧바로 뚫겠습니다. “네, 현성 씨.”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한 김현성의 모습은 감히 일반인의 시선으로 판단할 수 없을 정도. 이지혜의 말이 맞다. 아마 개인 카메라가 아니었다면 녀석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조차 눈치챌 수 없었으리라. ‘이거 인간 맞아?’ 주변 풍경이 무척이나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단순히 빠르다는 말로는 이 속도를 설명할 수 없다. 열차를 타고 지나가는 것보다 더 빠른 느낌. 순식간에 검이 뽑히고 순식간에 앞 쪽에 있는 적의 팔다리가 날아간다. 앞서 벤 적 신체의 일부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김현성은 이미 다른 곳에 자리 잡고 검을 휘두르고 있다.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무기를 흘리고 한 바퀴 회전하자마자 공중으로는 적들의 무기와 팔이 튀어 오른다. 물론 그것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기 전에 김현성은 이미 그 지점을 벗어나 있다. -후드득 터엉! 적이 보여주는 반응은 각양각색. -아아아아아악! -뭐야! 뭐야? 이게… 이게 뭐야! -막아! 올라오지 못하게 해! 최대한 막아! -방금! 아아아아아악! -제기랄! 의무병! 의무병! 사제!!! -이게 무슨 미친 경우야! 시발! 정신없는 속도감. 오히려 루트를 안내하는 이쪽의 반응이 더 느리게 느껴질 정도다. 김현성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일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빠른데.’ 11시 방향 A101. -확인했습니다. 이후 9시 방향 B21. -확인했습니다. 루트 변경. 남서쪽. 당도한 이후, 적 마법사 사살. 곧바로 E포인트로. -확인했습니다. 칼이 춤을 춘다. 내가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 목표물을 전선에서 이탈시킨다. “지혜야, 이지혜.” “…….” “지혜 누나!” “네… 네? 왜요. 저도 지금 바빠요.” “내 쪽으로 여신의 거울 몇 개만 더 보내줘. 각 포인트마다 하나씩. 빨리.” “왜요?” “너무 빠르게 움직여서 확인이 안 돼. 빨리. 조금 더 넓게 봐야겠어.” “자, 잠깐만요.” “응.” 잠깐 이쪽의 상황을 확인했는지 이지혜가 곧바로 각 포인트를 비추는 거울들을 보내왔다. 실시간으로 보내지고 있는 모습에 정신없이 손과 눈을 놀린 것은 당연지사. 내가 눈알을 굴리는 속도보다 김현성이 움직이는 속도가 더 빠르니 이쪽도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어처구니없어 헛기침이 나올 정도. 단언컨대 내가 눈깔 사용자라 이 정도로 반응할 수 있다. 이지혜였다면 중간에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좌표를 지정하고 계속해서 좌표를 찍어준다. 목표물 설정하고 이 전술 핵 병기를 가장 필요로 하는 전장이 어디인지 실기간으로 파악한다. ‘부족한데, 이거. 개부족해. 머리가 너무 딸려.’ 내가 김현성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끊임없이 정보를 전달해 줘야 하건만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이쪽도 답답해서 뒈질 것 같다. 주제도 모르게 첫 차로 람보르기니를 주워 탄 것 같은 느낌.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성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건 한편으로는 비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포기할 리가 만무하다. 손가락을 놀리며 전장의 위치를 계속해서 뒤바꾸며 김현성이 달고 있는 개인화면 역시 멈추지 않는다. 김현성이 멍 때리는 시간을 만들어 줘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길을 인도해 주는 인도자가 얼 타고 있다면 녀석 역시 이쪽에서 내려주는 지령에 의심을 품게 될 것이다. ‘머리 아파.’ 이쪽은 딱히 천재로 아니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다. 눈으로 받아들이는 정보를 뇌가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즈음 코 밑이 축축해지기 시작. 비릿한 피 냄새가 계속해서 입가에 감돈다. 힘들지만 조금씩 김현성의 움직임에 따라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은 기분. 머리를 툭툭툭 두드려 주고 싶지만 그럴 시간 따위는 없다. 적들도 전술핵에 대응하는 병기들을 내보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르다. -이 개자식! 죽어어어! 라고 외치며 위풍당당하게 등장했던 돼지 하나는 목이 잘려나가며 리타이어. -실드 마법 유지해! 실드 마법! 조금만 더 시간을 벌어! 라고 외치며 캐스팅을 외우던 녀석은 손목이 잘리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는다. 죽이는 녀석과 죽이지 않는 녀석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알 수 없지만 김현성 나름대로의 명확한 기분이 있는 모양. 개인적으로는 전부 죽이면 좋지 않을까 싶지만 오히려 부상자를 만듦으로써 생기는 이점도 존재한다. “213.41 지역에 캐스팅하는 마법사 확인됩니다. 목표물은 적 본대로 추정.” -확인했습니다. 이번 것만 해결하고 처리하겠습니다. “다음.” -확인. “다음.” -확인. “다음.” -확인. 제법 먼 거리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당도할 거라고 믿는다.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낸 뒤 곧바로 날리자 적의 실드 마법이 부서지며 그대로 캐스팅 하던 녀석의 이마에 박혔다. -처리. ‘개빠르네.’ 하지만 방금 건 마력을 조금 소모한 행동. 물론 지금은 티도 안 나지만 이후를 생각하면 마력을 아껴 놓는 것이 옳다. “페이스 조금 늦추셔도 됩니다. 페이스 조금 늦추셔도 돼요.” -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보고 있는 풍경이다.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을 목전에 둔 병사들과 일부 네임드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단순히 화면으로만 보고 있을 뿐이지만 그들의 호흡과 김현성의 호흡, 현장의 긴박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위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수백 다발의 화살이 한꺼번에 날아들고, 김현성만을 상대하기 위해 꾸려진 소대나 마법들이 계속해서 가로막으려 한다. 한발 뒤로 물러섰을까 싶으면서도 공격을 흘려보내거나 막아내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을 정도. 이 정도의 신위를 목도한 적은 없다. ‘이거 너무 센 거 아니야? 밸런스 파괴 아니야?’ 신들이 만들어낸 역작이라는 것이 괜한 표현이 아니다. 어떻게 인간이 이 정도까지 강해질 수 있을지에 대한 순수한 경외감이 자꾸만 들어서기 시작한다. 피하거나 벤다. 막거나 벤다. 이 단순한 과정을 수백 번 반복하는 모습 자체가 경이롭다. ‘맞아. 그 말이 딱이야.’ 대부분의 병사는 일검조차 견디지 못한 채 팔이 잘리고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녀석 역시 최대 십 수를 버티지 못한다. 아마 지금쯤 적 지휘관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할 뻔 자. 단언컨대 병력 한복판에 움직이는 핵이 떨어졌다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그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은 실제로 내가 목도하고도 믿기지 않으니까. 적 병력의 움직임이 조금 달라졌다고 느낀 것은 바로 그때. ‘이거 압박 들어오는데.’ 전체적으로 보이는 병력의 일부가 김현성에게 집중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지혜 누나.” “…….” “지혜 누나!” “…….” “자기야! 여보!! 임자!!!” “네? 네? 또 왜요?” “사제 하나, 마법사 하나만 더 붙여줘. 주문 최대 사정거리가 긴 네임드로. 아니, 그냥 각 지역 사제랑 마법사 명단 만들어서 이쪽으로 바로 보내.” “괜, 괜찮겠어요?” “뭐가?” “오빠 코피 나요.” “괜찮으니까. 일단은 붙여봐. 빨리.” “아, 알았어요. 무, 무슨 저보다 더 많이 쓰는 것 같은데….” “여신의 거울이나 띄워줘. 빨리.” 눈앞을 가득 메운 여신의 거울, 아니 마력 홀로그램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장관. “이거 조작법 매뉴얼이라도 만들어야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혼자서 중얼거려 봤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도 든다. “그거 재미있겠네요. 타이틀은 뭔데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딱 어울리는 타이틀을 속으로 되뇌었다. ‘회귀자 사용설명서.’ “바로 요거지! 현성아! 사랑한다!! 시발!!” # 397 회귀자 사용설명서 397화 회귀자 사용설명서(3) ‘이게 가능한 건가. 이런 게… 정말로 가능하다고?’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찝찝했던 것이 사실. 전쟁터의 한가운데, 지령을 받고 움직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가 일어나는 곳은 언제 어디서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 시시각각 상황이 변화하는 것은 물론, 지휘관이 상정한 예측범위 밖의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목적지였던 A포인트에 변수가 나타나 위치를 옮겨야 할 수도 있고, 좌표로 찍힌 곳에 눈 먼 화살이나 마법이 떨어질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대회전이나 대규모 전투에서에서 병력을 부대 단위로 움직이며 진영을 세우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개인에게도 그런 상황을 부여한다는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여신의 거울을 이용해 넓은 시야로 전장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한들 갑작스러운 변수에 대응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내 역할이니까. 처음 작전에 들어간 이후에는 역시나 지지부진했고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약간의 시간이 지난 이후, 막상 상자를 까보니 내 상상이상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단순히 루트나 장소의 좌표를 찍어주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휘통제실에서 적재적소에 도움이 필요한 곳에 나라는 무기를 집어넣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목표물 설정이나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 써주는 것은 또 다른 문제. 인간이 시각적으로 받아들이고 판단할 수 있는 뇌의 용량에는 한계가 있다. 전부 다 볼 수도 없을 뿐더러 받아들인 정보를 정리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거다. 만약 내 움직임이 느리다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이 정도 속도에 반응한다는 건, 일반인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저는 조금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성 씨.’ 그가 이전에 말했던 것이 바로 이걸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겠다. 그 말 그대로, 이건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책사나 군사도 이런 걸 실행할 수 없으리라. 계속해서 내부 평가가 올라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 처음 만났을 때는 제법 쓸 만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평범한 인상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지금은 없어서는 안 될, 자신을 이끌어 주는 친우가, 형제가 되어 있다. 이런 천재가 1회 차에는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궁금할 지경. 튜토리얼 던전에서 검을 놀려 그를 구한 일은 1회 차와 이번 회 차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적!’ 눈앞에 화살을 당기는 궁수들이 보이지만 딱히 움직이지 않는다. 어차피 곧바로 좌표가 찍힐 테니까. 예상대로 곧바로 신호가 들어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C포인트 321.12입니다. “확인했습니다.” 방벽이 두텁지만. ‘뚫고 나갈 수 있어.’ 거대한 방패와 도끼를 든 거한이 무기를 휘둘렀다. 검을 휘두르자 기분 나쁜 감촉이 느껴지며 피 분수가 뿜어져 나온다. 계속해서 발을 놀리며 움직이고 쉴 틈을 주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지령이 떨어지는 상황. 몸은 자연스레 목소리에 반응한다. 끊임없이 말을 하거나 좌표를 발신하는 것은 마치 바로 옆에 있는 느낌을 주었다. 등 뒤를 지켜주는 동료도 이것 보다 더 든든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이뿐만이 아니다. ‘버프가 끝나 가는데.’ -C포인트 321.69 “확인.” 마침 딱 장소에 도착하니 곧바로 몸에 신성력이 쏟아지기 시작. 내게 신성력을 넣어준 사제 역시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저 사제가 받은 지령은 정확한 포인트에 신성력을 떨어뜨리는 것이 전부일 터. 아마 내 움직임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으리라. ‘이해할 수 있어.’ 저 사제가 현재 어떤 기분인지 이해할 수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 역시 아군이 느끼는 감정과 같다. 너무 황당해 기가 찰 지경. 이런 게 가능하리라는 건 상상도 해본 적 없다. 이건 마치 나를 위해서 만들어진 무대나 다름이 없다. 적을 베고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일이 없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법과 화살 따위는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왜. 어차피 해당 지점에 아군의 보호마법이 떨어질 테니까. 콰아아아아아아앙!!! 큰 소리와 함께 하늘 위에 펼쳐진 장막이 적군의 마법을 막는다. 방어 마법을 캐스팅한 아군 마법사는 멀찍이서 황당하다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분명 몇 분 전 적군이 있던 곳에 실드 마법을 캐스팅하라는 어처구니없는 지령에 대한 결과물을 눈으로 직접 목도한 탓이다. ‘이건… 전장을 읽고 있는 거야.’ 그 말 이외에는 이 상황을 표현할 길이 없다. 중간중간 어쩔 수 없이 생긴 상처는 이동하는 내내 곧바로 치료된다. 몸에 걸려 있는 버프는 절대로 끊어지지 않고 한계 유지시간이 없는 것처럼 유지된다. 지정한 포인트에 움직이기만 해도 가까운 아군 사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신성력을 넣는다.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거나 뚫어내기 애매하다고 판단하는 곳이 있다면 한발 먼저 마법이 떨어져 길을 열어준다. 주변에서 함께 병력을 밀어내고 있는 전사 역시 마찬가지. 그들이 적 병력을 밀어내는 사이 빈 공간이 열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적군의 얼굴이 보인다. ‘말도 안 돼.’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일종의 쾌감이다. 전투를 썩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손발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을 때나 느낄 수 있는 쾌감이다. “죽어! 이 괴물 자식! 커헉!”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진 적군 뒤로 들려오는 아군의 목소리. “현성 씨, 뒤!” 외침이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딱히 주의하라는 말이 없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커다란 비명이 들려왔다. 살짝 고개를 돌린 곳에 자리한 것은 이마에 박힌 채 뒤로 넘어가고 있는 적군의 얼굴. 화살을 쏜 아군 궁수는 지금껏 다른 이들이 보였던 표정을 선보인다. 아마 나와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은 전부 이 감정을 느낄 수 있으리라. 아무런 법칙이 없는 것 같아도 아군은 거미줄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음 위치로 이동합니다. “확인했습니다.” -다음. “확인했습니다.” -페이스를 늦춰주셔도 됩니다. 체력에 신경 써주세요. “확인.” ‘이 사람은 천재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커헉!” “이 미친 괴물이! 죽어! 막아! 저 새끼 올라오지 못하게 해!” “마법이랑 화살을 아끼지 마! 한 발만 맞히면 된다. 한 발만!” “하지만!” “닥치고 시위 당겨! 저 새끼 올라오게 하지… 컥!”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잠깐 숨을 고르고 있는 사이 다시 한번 신성력이 쏟아지며 버프가 교체된다. 뒤를 돌아본 이후에 보인 광경은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을 지경이다. 지금의 성장치 역시 결코 낮다고 할 수는 없지만 거의 성장이 끝났었던 1회 차에서도 이렇게 만족스러운 전투를 해본 기억이 없다. 이건 전쟁이라고도 볼 수 없다. 과거의 내가 거친 오프로드를 달렸다고 한다면 지금은 포장된 도로를 무척 고급스러운 세단을 몰며 달리는 느낌. 가지고 있는 마력과 배기량은 비슷하지만 도로의 상태가 차원이 다르다. 괜스레 주먹을 꽉 쥐게 된다. ‘하루 종일 싸울 수도 있을 것 같아.’ 물론 과장이다. 하지만 이런 상태의 전장이라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다. -주의. 12시 방향. “확인.”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목소리에 반응하니 예의 그 창을 볼 수 있었다. 순식간에 이쪽으로 뻗어 나온 창은 틀림없이 조금 전 기영 씨를 노렸던 마법. 검을 들고 베어내자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터져나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정확한 좌표 찍어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현성 씨를 목표물로 설정한 것 같습니다. “네. 확인하고 있습니다.” -갑니다. “네.” 발을 떼려는 순간 다시 한번 쇄도해 오는 창. 곧바로 다음 좌표로 이동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적 병력 일부가 창에 맞아 바스라진다. “아아아아악!” 막는 것인지 피하는 것인지 딱히 대답이 없는 것을 보면 개인의 재량에 맡기는 게 맞다고 판단한 모양. 잠깐 상황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곧바로 다음 공격이 쇄도해 오고 있었으니까. ‘막는다.’ 검을 위로 휘두르자 다시 한번 쨍그랑 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막고.’ 쨍그랑! ‘피하고.’ 콰드드드드득!! ‘막는다.’ 쨍그랑!! 병력이 밀집해 있는 곳에서 움직이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아군 병력이 계속해서 길을 열어준다. 지휘통제실에서는 최대한 안전하게, 최단 시간으로 움직일 수 있는 좌표를 전송해 온다. 아직까지는 창을 던지는 상대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적의 위치야 지휘부 쪽에서는 제대로 확인하고 있을 것이다. 유리창이 어깨를 살짝 스치고 지나간 것은 바로 그때. ‘괜찮아.’ 대미지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깊지는 않다. ‘집중.’ 다시금 창이 날아들었고 다시 한번 베어냈다. 쨍그랑! 쨍그랑! 콰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앙!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가고 주변은 엉망이 되고 있다. 상대가 상대이니 이런 상황이 펼쳐진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하지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적군에게 피해를 누적시키며 계속해서 목적지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고 있다. 아마 상대 역시 내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걸 파악하고 있으리라. -속도 조금 올리겠습니다. “확인.” 어째서 갑작스레 속도를 올리는 지는 뻔한 일. 아마 녀석이 움직이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계속해서 날아들었던 창 역시 조금은 뜸해졌다. 변수가 많아지자 목적지가 계속해서 뒤바뀌지만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 아마 정상적으로 싸움이 진행됐다면 조금은 힘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장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에도 많은 시간을 써야 했을 테니까. 체력적으로 지쳤을 것이고 사방에서 몰려오는 병력을 감당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리 만무. 이미 창이 어디에서 날아오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고 심지어는 떨어질 위치 역시 상정해 주고 있다. 그 외에 공격들은 신경 쓸 필요조차 없다. “묶어놔! 최대한 묶어놓는 거다! 거리를 벌릴 때까지 최대… 아아아아악!” “미, 미친! 게니아!” “최대한 묶…. 커헉!” 다시 한번 발에 마력을 불어넣고 최대한 땅을 박찬다. 주변 풍경이 바뀌는 것은 순식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남자가 바로 앞에서 창을 쏘아 보낸다. “개자식! 죽어!” -마지막 공격은 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확인.” 확실히 몸을 비튼다면 거리를 다시 내주게 될 것이다. 인파 사이로 모습을 감추기 전에 기회를 잡는 것이 옳다.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창을 피하지 않은 채 검을 휘두르자 커다랗게 놀라는 남자의 동공이 눈에 들어왔다. “미친 자식!” 파킹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빛난 것은 바로 그때. 몸으로 공격을 받았음에도 대미지가 없다. 검을 휘두르며 본능적으로 곁눈질을 하자 나 대신 데미지를 받고 있는 박덕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타인의 대미지를 대신 받는 특성을 발동시킨 것이 틀림없으리라. ‘끝을 알 수 없다니까.’ 등 뒤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 398 회귀자 사용설명서 398화 회귀자 사용설명서(4) ‘말도 안 돼.’ “C포인트 321.12.” -확인. “C포인트 321.69.” -확인. ‘뭐 저런 게 다 있어?’ 전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입을 떡하고 벌릴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눈알을 굴리고 있음에도 따라가기 벅차다. 이미 이쪽은 한계를 맞이한 상황. 여기까지 해낸 것도 잘한 거라고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전황은 계속해서 뒤바뀌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이쪽이 받아들이는 정보 역시 변화한다. 어처구니없어 기가 찰 지경이다. 조금 무리하다 싶게 내린 지령도 아무 무리 없이 수행하는 모습에 황당했다. 속도가 너무 빨라 루트를 실시간으로 수정해야 할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제길.’ 조금 적응이 됐다고 생각해 판을 벌린 것이 문제. 마법사나 사제를 투입하지 말았어야 했다.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분위기를 탄 김현성을 보조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쉽지 않았다. 아군의 위치에 계속해서 녀석을 투입하는 것과 버프를 교체해 주는 것이 한계다. 떨어지는 마법을 막는다거나 길을 뚫기 위해 미리 전사를 투입시키는 것은 어떻게든 해내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곳까지 손을 뻗기에는 능력이 후달린다. ‘디테일한 부분은 무리야.’ 교체하는 버프의 종류나 마법이나 신성력 이외의 지원은 무리라고 할 수 있는 상황. 사방팔방에 퍼져 있는 영웅 등급이나 전설 등급의 특성을 가진 이들의 고유능력까지 더해진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편하게 움직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김현성은 더 움직일 수 있다. 녀석의 행동을 제약하는 게 이쪽이라는 생각에 신경이 쓰였다. 그나마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김현성이 내 지령을 받음으로써 생기는 단점도 분명 존재한다. “페이스를 늦춰주셔도 됩니다. 체력에 신경 써주세요.” -네. ‘그래 좀 쉬자….’ -커헉! -이 미친 괴물이! 죽어! 막아! 올라오지 못하게 해! -마법이랑 화살을 아끼지 마. 한 발만 맞히면 된다. 한 발만! ‘페이스 늦추라고, 이 새끼야….’ -닥치고 시위 당겨! 저 새끼 올라오게 하지…. 컥!!! -아아아아악! -적은 하나다! 적은 하나! ‘천천히 해, 이 나쁜 새끼야!’ -전사들은 뭐 하고 있는 거…. -마법! 마법으로 막아! 마법으로! 아아아아악! “수고하셨습니다, 현성 씨.” -아닙니다. ‘페이스 좀 늦추라니까. 신나가지고, 슈발.’ 신나게 움직이는 김현성을 보조하는 것만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눈으로는 정보를 계속해서 받아들이고 있지만 받아들인 정보를 연산하는 뇌가 버티지 못하기 때문. 김현성이 빠르게 움직일수록 내 쪽에 부담이 올 수밖에 없다. 시야를 꽉 채운 마력 홀로그램을 전부 눈에 담고 있는 것으로 모자라 쏟아지는 정보를 정리하고 있으니 둔한 머리에 무리가 가는 게 당연. ‘이거… 지력 보정은 받고 있는 건가.’ 내가 어느 정도까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애초 지구에 있을 때는 이렇게까지 머리를 혹사시켜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데 그나마 높은 지력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정도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만약 튜토리얼 때의 나였더라면 이 상태를 15초 이상 지속하지 못했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사실 5초가 한계일지도 모른다. 뇌가 과부화되면 코피가 흘러나오는 건 만화나 영화에서나 튀어나오는 장면인 줄 알았던 이쪽이 바보 같이 느껴질 지경. 극적인 연출을 위한 거짓말이라고 박장대소하며 비웃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심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 지금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프다. 하지만 계속해서 눈을 움직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코피를 닦을 시간조차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김현성은 지휘통제실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이 새끼 왜 이렇게 나를 혹사시키는 거야?’ 조금 천천히 움직여 줘도 나쁘지 않으련만 마치 이쪽의 한계를 재단하려는 듯 신나게 움직이는 모습이 가관이다. 마침 조금은 여유가 있는 타이밍인데도곧바로 몸을 날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이쪽 역시 저쪽을 억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잠깐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 어디에선가 날아든 창이 김현성의 어깨를 스치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아.” -괜찮습니다. ‘제기랄….’ 한쪽 어깨에 상처가 난 모습을 보니 괜스레 가슴이 아파올 지경. 물론 스쳤을 뿐이지만 내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저런 상처는 없었을 것이다. ‘놓쳤어.’ 입술을 꽉 깨물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자존심이 조금 상했기 때문이다. 김현성을 향해 창을 던진 녀석을 찾는 것은 순식간. 아마 김현성을 목표물로 설정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다치면 안 된다, 현성아.’ 이쪽의 생각보다 적이 김현성을 목표물로 설정하는 것이 느렸다. 다른 쪽을 지원하고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 오류. 아마 큰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나선 만큼, 녀석으로서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왔을 것이다. 섣불리 싸움을 걸었다가 당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터다. ‘이거 까다로운 타입인데.’ 자만해 주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본인의 한계를 알고 있는 이들이 귀찮다. 심지어 퇴로까지 확보해 놓은 모습을 보니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하는 듯하다. 다시 한번 놈이 창을 생성해 집어 던지자 믿을 수 없는 빠르기로 날아들었다. 주변에 어떤 것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당연. 박덕구와 유아영이 있는 부대를 움직이고 주변 마법사들에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좌표를 계속해서 전송, 왼손과 오른손을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도 일이다. 혹시나 손이 꼬이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력 홀로그램 안에서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김현성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최대한 효율적으로 상황에 맞게 움직이게 하는 일. 생각보다 재미있다. 녀석은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창을 피하거나 베면서 이쪽이 인도해 주고 있는 곳으로 움직인다. 이 기분은 일종의 쾌감이다. 퍼즐이 딱딱 떨어지는 느낌. 묘한 기분을 선사해 주기에 충분하다. 적재적소에 지원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이 회귀자는 무료로 모든 적을 싹쓸이 해준다. ‘이 회귀자는 무료로 적을 쓸어 줍니다!!’ 유리로 만들어진 창이 사방팔방 날아다니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그것을 피하거나 손으로 쳐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말 그대로 범인은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리라. 적 네임드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다시 한번 예상 루트를 지속적으로 김현성에게 전달한다. 내 말을 듣고 움직이는 거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빠른 반응. 내가 전달한 목적지와 루트를 정확히 따른다. 사각에서 계속해서 견제를 하는 까다로운 상대. 투창사라기보다는 저격수에 가까운 모습이다. 만약 거리가 좁혀져 있는 상태였다면 게임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겠지만, 상대 역시 부대 단위에게서 도움을 받고 있다. 마법사와 사제, 앞을 지킬 수 있는 전위가 항상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창을 던지고는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몸을 뒤로 빼는 모습 역시 여신의 거울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창을 던지는 모습은 얄밉게 느껴질 정도. ‘머리 아파지는데.’ 김현성의 체력은 최대한 보존해야 한다. 하지만 저 정도의 강자는 무조건 처리하는 것이 이득이다. “7부대는 좌표 찍어준 곳으로 진입.” -확인. 아군과 적군의 피해가 계속해서 누적된다. 김현성이 최대한 막아주고 있지만 계속해서 떨어지는 유리의 창을 전부 다 막아낼 수는 없다. “지혜야, 길 좀 뚫어줘.” “네? 어디요?” “지금 좌표 찍은 곳으로 7부대 진입시킬 거야. 최단 시간에 올라갈 수 있도록 신경 써주면 돼. 이미 내가 최대한 가깝게 붙여놨어.” “그럴 여유가 없는데, 으….” “최우선 사항. 빨리. 적 네임드 잡을 거니까 이쪽에 조금만 더 집중해.” “아, 창잡이! 한번 해볼게요. 길만 열면 되는 거죠?” “응. 최대한 빠르게만. 나머지는 이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네. 알았어요.” 전체적으로 병력이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길이 없을 것 같았던 루트가 계속해서 변화한다. 김현성의 눈에도 그런 루트들이 눈에 보이는지, 녀석이 발걸음을 옮기려는 곳이 내가 지시한 루트가 완벽히 일치한다. 상황을 전체적으로 돌아볼 수 없는 김현성이 저렇게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뻔하다. ‘감각.’ 보고 움직이거나 판단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 말 그대로 수많은 시간을 전장에서 보냈던 녀석에게 생긴 감각일 것이다. 본인이 인지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병법을 공부했어도 대성할 수 있는 재목이리라. “마지막 공격은 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확인. 7부대가 길을 뚫고 김현성이 몸을 옮기는 것은 순식간. 검을 휘두르는 김현성의 얼굴이 보인다. 쓸데없는 드잡이를 피하는 것이 유리하다 생각해 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이쪽의 말이 어떻게 들릴지 궁금해졌다. 조금이라도 이쪽을 의심한다면 쉽사리 행동으로 옮길 수 없을 터. 그러나 김현성은 너무나도 당연히 자신에게 날아드는 창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 시발! 믿음으로 가는 거다. 현성아!’ 일그러진 상대의 얼굴이 비친다. 김현성의 몸에 닿은 창은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나갔다. 김현성을 놀란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 놈이 커다랗게 소리를 지른 것은 바로 그때. -아이기스! “어?” 왼팔에 생성된 커다란 방패. ‘미친!’ 놈이 다시 한번 오른팔에 유리의 창을 생성하여 김현성에게 뻗었다. ‘위험한가? 위험한 거 아니야?’ 마음의 눈으로 확인한 정체불명의 방패를 보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7부대가 녀석을 둘러싸고 있는 부대로 향하고 있었지만 이미 김현성은 적에게 노출된 상황.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미리 마법사를 콜하지 않은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고유능력을 걸어줬던 박덕구에게는 두 번째와 세 번째를 감당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파고들지만 딱히 돌파구가 없는 상황. “피….” 피하라고 소리치기도 전에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몸이 흐릿해진다. 갑작스레 적의 등 뒤로 자리 잡은 이후에 곧바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 창을 들고 있는 녀석의 눈에도 당혹스러움이 감돈다. 김현성은 분명 놈의 정면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뒤를 잡히니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방패를 든 팔을 통째로 날려 버리는 것은 물론, 주변에 있던 적 병사들의 팔 역시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으로 치솟았다. 아마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눈이 아니었다면 나도 방금 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적이 아티팩트를 발동시킨 시점에서 적 병력의 가운데로 이동, 적이 김현성이 없어졌다는 걸 파악하기 전에 이미 방패를 든 팔은 잘려나가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악! -막아! 마, 막아! -커헉! “대박….” 조금이나마 걱정했던 나 자신이 우습게 느껴질 지경. ‘이 새끼는… 끝을 알 수 없다니까.’ 그 말대로였다. # 399 회귀자 사용설명서 399화 만약 적이라면(1) “이건 정말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제대로 싸우는 건 처음 보는데 이건 뭐라고… 어떻게 이런 사람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강할 수 있죠?” 입을 벌린 채 중얼거리는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조용히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걸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 광경이 납득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물며 정신없는 전쟁터 한가운데에 있는 이들은 어떨까. 전체적으로 맵을 살펴볼 수 있는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것이다. ‘전술 김현성. 전술 김현성.’ 이지혜의 입장에서는 농담으로 던진 단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력 홀로그램에 비친 맵 곳곳에 전술 김현성이 떨어진 흔적들이 보인다. 심지어 마구잡이로 때려죽인 것도 아니다. 죽이기보다는 깔끔하게 전투불능으로 만든 것이 대다수.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저렇게 얼이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거다. 저런 상태로 살려 놓는 게 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건 지나가던 개도 안다. 물론 나 역시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녀석이 강하다는 건 이해하고 있었지만 개인이 이 정도로 전장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게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네임드들이 전황을 뒤집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김현성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규격 외의 존재들이 보여주는 모습 중에서도 격이 다르다. 물론 여러 상황이 맞물리기는 했지만 착실하게 지령을 완수하는 놈이 조금은 낯설어 보일 정도였다. 검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화면으로 바라보자 괜스레 등 뒤로는 쭈삣쭈삣 소름이 돋기 시작. 온몸에 털이 전부 곤두선 것 같은 기분의 정체는 바로 경외다. 마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용사 같은 느낌이었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그래. 현성아, 니가 최고다. 키야.’ 아마 이지혜의 경우는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 할 것이다. 그나마 가까이서 녀석의 활약상을 봐 왔던 나와는 달리 김현성의 본 실력을 목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테니까. 녀석의 스텟창도 들여다 본 적이 없으니 느끼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아직도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은 가관. 지휘하던 부대에 지령을 넣은 이후에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대단하지? 마지막에 검 휘두르는 거 봤어? 아니 그전에 마법사 잡는 건?” “그런 걸 제가 어떻게 봤겠어요. 그리고 저게 대단하다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봐온 네임드 모두 괴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저 괴물은 그중에서도 이해할 수 없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특별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요. 인간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운데, 겨우 대단하지라니. 현성 씨 정말 사람 맞아요?” “그럼 뭐겠어?” “글쎄요. 다른 건 몰라도 특별하다는 것 하나는 알겠네요. 생각해 보면 튜토리얼도 그래.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물론 옛날 기억 같은 건 지금 제가 느끼고 있는 심정이랑은 비교도 안 되지만 그때부터 사람이 묘하긴 했죠.” “푸핫. 그래?” “물론 이번 작품은 오빠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아니, 오빠도 제 눈에는 똑같아 보이긴 하네요. 조금 덜 할 뿐이지. 그래도 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세상 정말로 불공평하네요. 오빠가 왜 죽자 살자 현성 오빠한테 매달리는지 대충은 알겠어요. 네. 정말로… 지금 꿈꾸고 있는 거 아니죠?” “아니야. 사실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대충 예상은 했지만. 우리 길드 애들 반응 보면 이해가 가지?” “꼭 오빠 길드뿐만이 아니라 주변 병사들 표정만 봐도 충분히 이해돼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저런 게 마음먹고 한 명 죽이자고 달려들면 장담컨대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아무도요.” “그렇긴 하겠지만…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누나. 어차피 저런 종류는 우리랑 종족이 다르다고 보면 되니까. 그나저나 부대는?” “괜찮아요. 지금은 타 지휘관에게 승계한 상태니까. 위기가 되는 구간은 지났고 적 네임드도 생포했으니 아주 약간은 여유가 생겼어요. 물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일단 지금은 최대한 빠르고 안전하게 전투를 마무리해야 해요. 그런 다음 부대를 재정비하고 캐슬락으로 향해야죠. 여기서 시간이 끌리는 건 악마 소환사 그 사람이 가장 바라는 일일 거라고요.” 이지혜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당연지사. 적 지휘관을 잡았을 뿐 전투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물론 현재 상황을 판단해 본다면 승자와 패자가 정해졌다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쥐도 가끔은 고양이를 문다. 아무리 낙관적인 상황이라고 한 들, 마음 편히 있을 수는 없다는 거다. 아마 아직도 캐슬락에서는 공성전과 수성전이 진행되는 도중일 터. 이 전투의 목적이 본대의 진입을 지연시키기 위해서였다면 진청의 입장에서도 반 정도는 성공이라 할 수 있으리라. ‘생각보다는 빠르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느려.” 전투가 끝난 이후 사후처리, 병력의 컨디션 상태 등등을 고려해 보면 대승이지만 대승이라고 할 수 없는 싸움. 적군의 피해가 크기는 하지만 아군의 피해도 결코 적은 수준은 아니다.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다음 싸움을 무리 없이 펼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나마 김현성이 자리해 있어서 다행이다. 만약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활약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상황이 꼬였으리라. 아무튼 작금의 상황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 조금 더 무리해서 병력을 이끌고 캐슬락에 도달하느냐. 아니면 조금 느리더라도 온전한 컨디션을 유지하느냐. ‘답은 정해져 있지만….’ 그래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슬쩍 고개를 돌려 이지혜를 바라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건지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다. 책상과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는 모습은 누가 봐도 무언가를 고민하는 모습. 하지만 어떤 게 현명한 선택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귀환입니다, 현성 씨.” ‘어쩔 수 없지.’ -전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이대로 괜찮은 겁니까. “일단은 귀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한 번으로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니까요.” -네. 확인했습니다. 생포한 적과 함께 귀환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캐슬락 공성전을 펼치고 있을 적과 마주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이후에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른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전력을 최대한 유지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리라. 특히나 네임드의 체력 관리는 필수 요소 중 하나다. 중간에 회귀자가 퍼지기라도 한다면 여러모로 상황이 불행해진다. 내가 입을 열자 이지혜도 다시금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며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모습. 하지만 여전히 얼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근심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쟤 왜 저래?’ “누나, 뭔 일 있어?” “아니요.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요.” “지금 이대로 가는 게 맞겠지?” “아, 네. 병력 컨디션을 걱정하시는 거네요. 저도 불안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캐슬락도 아직은 무너지지 않은 것 같고, 물론 위태롭다는 건 알고 있지만 조금 더 버텨주기를 바라는 게 맞죠. 만약 잘못 들어갔다가 이쪽까지 피해가 오면 거기서 전쟁은 끝이니까. 아마 저쪽에서 가장 원하고 있는 상황이겠죠.” “만약 진청 손에 캐슬락이 넘어간다면….” “그럼 다시 한번 상황이 복잡해지는 거겠죠. 그때는 대륙법이고 국제사회고 전부 무시하고 생화학 병기라도 풀어야 되지 않나 싶어요. 그게 아니라면 피해가 막심할 거예요.” 그 말 그대로 단순히 복잡해진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거점을 잃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사실상 이번 전투로 어느 한쪽은 회생 불가능한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전쟁을 끝낼 수 있을 정도, 서로 투자한 게 많으니 무리는 아니리라. 교국이 소모한 병력과 보급은 숫자로 셀 수 없을 정도. 물론 그 정도의 물량을 소비한 것은 공화국 쪽 역시 마찬가지다. 다음 싸움에 전쟁이 끝난다는 건 과장이라 할 수도 있지만, 만약 전쟁이 끝나지 않더라도 팽팽한 전세가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현 전황이 그렇다. 악마 소환사도 동부 전선에 있는 모든 병력을 불러 모았고 교국 역시 여유가 없다. 최소한의 방어 군대를 제외한 이종족 연합을 전부 데리고 왔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으리라. 녀석 역시 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음이 분명. 필요한 것이 거점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음이 틀림없다.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자 아직도 전장에 머물며 조금씩 도움을 주고 있는 김현성과 적 병력과 투닥거리는 아군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귀환하라고 했음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는 모양. 하지만 이쪽으로 계속해서 향하는 것을 보니 말 그대로 한 손 거드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 그래. 무리하지는 마라, 현성아. 푹 쉬어야지.’ 그 와중에도 적은 끈질기게 아군을 물고 늘어지는 중. 충성심이 강한 놈들로만 구성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등바등 대는 꼴이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그냥 저걸 쓸어버려야 하나….” 전형적인 발목 잡기에 조금 마음이 초조해진 것은 당연. 말 그대로 현 캐슬락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먹겠다고 소리를 지르는 꼴이니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디아루기아를 먼저 보내는 게 좋을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곧바로 길을 뚫어야 하는 건가.’ 체력에 여유가 있는 이들을 1차로 보내기엔 위험 부담이 있지만 한 시가 급한 만큼 도박을 감행할 필요는 있다. 어떤 것을 생각해도 협의가 필요한 타이밍. 살짝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굳은 얼굴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는 이지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심각한 얼굴은 마치 세상 근심을 모조리 떠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벌써 세 번이다. 보통 그녀가 일을 할 때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걸 떠올려 보면 확연히 다른 모습. 전투에서 승리한 군사의 표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두워 괜스레 나 역시 불안해질 정도였다. ‘슈바. 뭔 일 터진 거 아니야?’ 혹시라도 내가 읽지 못하는 걸 읽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누나, 왜 그래?” “네?” “뭐 문제라도 있어?”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전황도 나쁘지는 않고요. 그냥 혼자서 망상 한번 해봤어요.” “무슨 망상.”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생각이요.” “…….”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쟤가 만약 적이라면 어떻게 할까. 이런 생각?” 고개를 똑바로 들어 이지혜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작은 여자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어떨 것 같아요? 만약에 김현성이 우리 적이라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얘 봐라….’ 농담으로 던진 소리라고 하기엔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과 분위기였다. # 400 회귀자 사용설명서 400화 만약 적이라면(2) “어떨 것 같아요? 만약에 김현성이 우리 적이라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농담으로 던진 말이 아니다. 아까부터 계속 고민 하고 있었던 게 이게 맞았던 모양. 대충은 이지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본 광경이 그만큼 충격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다시 한번 표정을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조금 불안해 하는듯한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평소답지 않게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고 심지어는 얼굴이 푸르죽죽해져있다. ‘이거 걱정하고 있는 거구나.’ 높은 확률로 김현성이 적이 됐을 경우를 상상한 것이 분명. 솔직히 한 번쯤은 할 수 있는 생각이기는 하다. 나 역시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으니까. 저런 광경을 봤다면 더욱더 그렇다는 거다. 아마 이걸 본 다른 권력자들은 모두가 이지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녀석이 보여준 모습은 충격적이었고 경이로웠다. 한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위로 올라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지표. 나 같은 경우야 빛과 함께해 그나마 위화감이 덜 하긴 하지만 김현성이 전장에서 보여준 모습은 온갖 견제를 받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그녀로써는 김현성이 적이 됐을 때의 모습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감당할 수 있겠어요?” “글쎄.” “…….” “…….” “이상하게 보지 말라고 했잖아요. 저는 당당하게 물어볼 수 있는 걸 물어본 거예요. 솔직히 저도 이 정도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다고요. 만약에 김현성이 적이 된다고 생각해보니까 갑자기 없던 불안함도 몰려 들어와서 그래요. 참고로 저는 자신 없어요. 난 저런 게 적이라면 깔끔하게 지지 쳐요. 뭐 오빠랑 같이 있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비빌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것도 쓸 말이 있어야 가능 하죠. 맨몸으로 저런 거랑 부딪치는 건 무리예요.” 나 역시 마찬가지, 갑작스레 날아 들어와 검을 날린다면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는 세상인데…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현성이 오빠가 오빠를 밀어내려고 하면 방법이 없잖아요? 물론 저 사람이 무골호인에 바보 같이 착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또 호구나 손해 보는 짓을 하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기도 하고… 그건 튜토리얼 이후만 봐도 답이 나오죠. 오빠가 현성오빠를 믿는 건 이해하지만 언제 변할지 모르는 게 사람 욕심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찢어질 가능성이 낮은 건 아니에요.” “글쎄 사실 찢어질 것 같지는 않은데… 그리고 지금 상황에 이런 이야기가 왜 나와?” “지금 상황이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그냥 대비 할 수 있을 때 대비하자는 거지. 나중에 일 터지고 나서 대비하면 무조건 늦어요. 쓸데없는 소리해서 죄송하기는 한데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네요. 미친 듯이 불안 한 거. 왜 모험을 끝낸 용사 일행을 숙청시키려고 하는 클리셰가 태어났는지 이해가 된다니까요? 너무 날카로운 검은 위험하잖아요?” “그럴 일 없어.” “장담할 수 있어요? 오빠 의심 많잖아.” “…….” “참고로 제 욕심 때문에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랍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인거지. 내 남자가 1등 되고 싶은 걸 보고 싶어서 그 라이벌을 쳐내자고 말하는 건 절대로 아니에요. 내가 욕심이 조금 많은 건 맞지만 그 정도로 싸이코 패스는 저얼대, 저얼대로 아니라고요. 전 그냥 확답을 듣고 싶은 거예요. 찢어질 일이 없는지, 또 만약 적으로 만난다면 감당할 수 있는지. 만약 컨트롤 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그게 뭔지.” 천천히 고민에 빠진 것은 당연지사. ‘욕심이 없기는 개뿔이….’ 솔직히 이지혜의 욕심이 1%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건 믿을 수 없다. 이지혜의 성향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다. 그녀로써는 나를 견제하거나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권력이 앞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만약 이번 전쟁이 끝난다면 대륙은 평화의 길로 접어든 것이나 마찬가지. 물론 어떤 퀘스트가 더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회 차를 알 리가 없는 이지혜의 눈에는 틀림없이 그렇게 비치고 있을 것이다. 싸움은 끝. 이제는 나누어 먹을 일만 남아있구나. 라고. 그렇게 생각해 보면 김현성의 포지션이 애매하기는 하다. 지금까지는 파란의 길드 마스터라는 것 정도가 끝. 가지고 있는 권력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이번 전쟁이 끝나도 그렇게 되리라는 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당장 이번 전투에서 벌인 활약상 역시 점수를 받을 만 하다는 거다. 이미 대중은 김현성이 어느 정도로 강하다는 지에 대해 알게 됐다. 커다란 힘에 커다란 책임이 따른 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건 조금 다르다. 커다란 힘에는 커다란 권력이 따른다. 그 말 그대로.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힘은 필연적으로 권력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굳이 교국이 아니더라도 어딘가에서 자리하나 얻을 확률이 높다는 거다. 대외적으로도 명예추기경 이기영이 속해있는 길드의 길드마스터라고 알려져 있을 테니 그에 걸 맞는 자리를 받는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일. 여기에서 이지혜의 고민이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감당할 수 없는 초월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권력을 갖는다는 게 달갑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언제든지 우리들을 견제할 수 있고 우리들의 목을 칠 수 있는 존재가 성장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물론 그녀가 이쪽을 걱정하고 있는 것은 맞다. 나 역시 그 건에 대해서는 몇 번은 생각해 본 적이 있었으니까. 괜스레 김현성의 얼굴을 떠올린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이 내게 검을 겨누는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혹시나 이쪽을 1회 차의 가면쓰레기라 오해할 확률은 존재하지만 들어놓은 보험이 많으니 여기저기 잘 빠져 나갈 자신이 있다. ‘이번 것만 마무리 하면 일이 잘 풀릴 수도 있다는 거고….’ 녀석이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나를 버린다는 것 또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최소한 지금까지 봐온 김현성의 모습은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게 인간관계라지만… ‘그럴 리가 없지.’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순식간, 천천히 입을 열자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찢어질 일은 없어.” “정말이죠?” “응. 절대로 갈라질 일은 없으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 그리고 누나.” “네?” “너무 욕심 부리면 탈나는 거 알지?” “제, 제가 뭐라고 했나요? 알고 있어요. 지금까지 행동하는 걸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이야기라고요.” “누나 말대로 내가 야망 같은 게 없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만큼 내 주제나 한계도 잘 파악하고 있거든. 현성이 쪽에서 나랑 척지고 싶다고 해도 내가 그 쪽이랑 척질 생각이 없어. 조금 다른 쪽으로 생각해봐. 저런 게 내 편이면 우리 적들이 나한테 뭐라고 할 수나 있겠어?” “흐음….” “저런 사람이 우리 편 이라고… 장담하는 데 내 손가락질 한 번에 덜덜 떠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게 될 걸, 말하자면 나는 핵 단추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거야.” “그렇게 단언 할 수 있어요? 오빠가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도 저쪽에서 그런 생각을 안 하리라는 보장은 없는데. 그리고 욕심 부리자는 게 아니잖아요. 가지고 있는 걸 뺏기지 말자는 거지.” “지혜 누나.” “네?”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뺏길 사람으로 보여?” “…….” “정말로 그렇게 보여?” “아니요.” “그럼 여기서 대화는 끝. 아무 문제없으니까. 앞으로 그런 말은 입 밖으로 내 뱉지마. 내 앞에서든 다른 사람 앞에서든. 절대로 이걸로 왈가불가 하지 말고. 만약에 그런 상황이 오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현 상황에서 괜한 분란 만들 필요 없다는 거 누나가 더 잘 알고 있다고 믿어. 지금은 악마 소환사 일만 생각해도 머리가 깨질 것 같다고.” “알겠어요. 그러니까 사람 좀 그렇게 보지 마요. 정말로 걱정 되서 한 소리니까. 오빠가 문제가 없다면 믿을게요. 네. 믿어야죠.” “쓸데없는 생각할 시간 있으면 앞에 있는 전투나 마무리 해줘. 누나. 캐슬락으로 갈 병력 편성도 마찬가지고.” “네.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대화는 이걸로 끝. 입을 꾹 다물고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비치기는 했지만 입술이 삐죽하고 튀어나온 게 뭔가 불만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뭔가 탐탁지 않아 하는 듯한 느낌. 혹시나 나 모르게 쓸데없는 일을 벌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하지 말라는 걸 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쓸데없는 짓 하지마. 누나.” “알겠다니까요. 그러니까 그만 해요. 아무 짓도 안 할테니까. 대신 나중에 뒤통수 맞고나서 후회하지 마요.” 밖에서 문을 똑똑 두드린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오네요.” 문을 두드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하다. 후다닥 뛰어나간 이지혜가 천천히 문을 여니 조용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김현성이 시야에 비친다. “아! 현성오빠!” “갑자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정말로 고생하셨어요. 정말 대단하시더라고요.” 순식간에 표정을 뒤바꾸고 환하게 웃는 이지혜의 모습은 조금은 무섭다. ‘여우가 따로 없네.’ 그 말 그대로, 방금 전까지 감당 어쩌구를 말한 사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태세전환이다. 나보다 더 빠른 전환러를 꼽자면 그 순위에 당당하게 이지혜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 장담 할 수 있다. “바쁘실 텐데….” “아니요. 전혀요. 마침 전투도 마무리 되는 중이고요. 그런데 무슨 일로….” “딱히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 그저 어떤 식으로 상황이 흘러가는 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아… 네. 네. 앉으세요. 어떻게 차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지혜씨.” 이지혜와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 안으로 들어오는 김현성이 이쪽을 힐끔 바라보는 것이 눈에 보인다. 어지간히 지휘통제실이 궁금했던 모양, 이유는 모르겠지만 조금 흥분 한 것처럼 보였다. 마치 놀이동산에 온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느낌. 특히나 내가 앉은 자리를 기웃거리는 게 조금은 우습다. “이 곳이로군요.” “현성 씨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저보다는 기영씨가 더… 대단하군요. 이걸 전부 컨트롤 하고 계셨던 겁니까?” “컨트롤 하고 있다라고 표현할 정도는 아닙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저 정보를 분석해 전달해 드린 것 정도에 불과해서….” “뭘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러세요. 기영씨. 코피도 흘릴 정도 였으면서. 저도 그런 건 처음 봤다니까요. 손이랑 눈을 한 번도 안 멈추고 전투가 지속되는 내내 마력 홀로그램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어요. 현성오빠도 그걸 한 번 봤었어야 했는데….” “아….” 그 와중에 이때다 싶어 활약상을 전해오는 이지혜의 모습은 당황스러울 정도. 조금 민망하기는 했지만 나이스 어시스트였다. 갑작스레 걱정이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현성이 눈에 보였으니까. “그렇군요.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네. 아무 문제없습니다. 잠깐 무리한 정도라… 굳이 이상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요. 지혜씨가 많이 도와주셔서… 말입니다.” “다행이로군요….” “에이. 그래도 결정적인 건 전부 기영씨가 했죠. 뭐. 저야 귀찮은 잡무 같은 걸 해드린 게 전부고요. 아. 그 팔에 들린 건 뭔가요?” “아. 깜빡했군요. 사실 이걸 전해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것 좀 보라는 듯이 이지혜를 바라보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김현성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아주 작은 방패. 적 네임드가 가지고 있었던 전설등급의 방어구였다. ‘걱정 붙들어 매라 지혜야.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까.’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는 게 당연했다. ‘형은 널 의심한 적이 없다. 현성아.’ # 401 회귀자 사용설명서 401화 만약 적이라면(3) [완전하지 않은 아이기스의 방패 -전설등급] [하늘의 신이 전쟁의 여신에게 내린 방패였습니다.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던 예전과는 달리 이 방패는 몇 개의 조각으로 분리되었습니다. 방패에 담겨져 있었던 마력 덕분인지 뜯겨져 나간 부분에도 불구하고 방패는 그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인 항마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많은 마력을 사용하여 짧은 시간동안 아이기스 방패의 일부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소환된 아이기스의 방패는 치명적인 공격을 무조건 적으로 막아줍니다.] ‘키야. 명품이네. 명품.’ 여신의 거울을 통해서 먼저 확인을 해보기는 했지만 사실은 명품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였다. 치명적인 공격을 무조건 적으로 막아준다는 설명만 봐도 이 아이템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 물건인지 말해준다. 사실은 탱커들에게나 어울리는 물건, 이런 물건을 나에게 준다는 건 녀석이 얼마나 나를 생각하는지 알려주는 지표나 다름없다. “아… 이건….” “얻은 물건입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현성 씨. 저한테 어울리는 물건은 아닙니다.” “아뇨. 받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이건 기영씨가 가지고 있어야 할 물건 같습니다. 혹시나 앞전에 일어났던 사고 같은 게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앞전이라면….” 확실히 기억이 나긴 난다. 괜히 밖으로 나가 상황 좀 살핀다고 했다가 창 맞아 골로 갈 뻔 한 기억이 있기는 있다. 이쪽은 벌써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일. 이걸 신경 쓰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키야… 봐라. 지혜야. 이게 우리 현성이다. 누가 감히 현성이 앞에서 뒤통수 소리를 내었는가!’ “제게는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 애초에 저는 막으면서 싸우는 타입이 아니기도 하고… 기영씨가 보험용으로 들고 다니는 게 더 좋을 겁니다. 안 그래도 호위를 붙여드리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기영씨가 이걸 받아주셔야 저도 조금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아무리 그래도….” “꼭 받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까지 말씀하신다면… 네. 감사히 받겠습니다.” 사실은 냉큼 받아들이고 싶은 심정이기는 했지만 적당한 거절은 한국인의 미덕이다. 어차피 이쪽에서 손사레를 쳐도 김현성은 기어코 내 왼쪽 팔목에 방패를 꽂아 넣을 것이다. 못이기는 척 방패를 받아들고 장착시키는 것은 순식간, 철컥하는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내 한 쪽 팔을 기분 좋게 감싸는 감각이 느껴진다.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몸을 보호할 수단이 하나 생겼다는 건 아름답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움직이기 편한 게 마음에 든다. 무식하게 커다랗고 무거운 방패가 아니다 보니 가지고 다니기 더욱 괜찮다. ‘이거 시바. 이제 나도 좀 강한 거 아닌가? 이제 좀 센 것 같은데?!’ 근본이 없기는 하지만 나름 공격력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방어구까지 보유하게 된다면 근접 직군 몇몇도 상대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상상. 애초에 적 네임드가 이 방패를 들고도 김현성에게 털렸다는 걸 생각해보면 무구가 전부라고는 볼 수는 없다. 고마운 마음에 녀석의 얼굴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에는 나를 향한 무한한 신뢰가 깃들어져 있었다. “그… 다만.” “네?” “덕구씨에게는 비밀로….” “아….” “제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덕구씨 보다는 기영 씨에게 어울린다는 판단이 서서. 물론 개인 적인 판단 입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덕구씨가 섭섭해 하실까봐 걱정 됩니다.” “하하. 네. 알겠습니다. 덕구에게는 비밀로 하는 게 좋겠군요.” “다른 길드원 들에게도….” “네. 다른 길드원 들에게도 비밀로 하겠습니다.” ‘이 새끼 왜 이렇게 귀엽냐.’ 걱정하고 있는 표정은 왠지 모르게 깨물어 주고 싶다. 다시 한번 이지혜 쪽을 바라 본 것은 당연지사. 뭔가 수상하다는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눈빛이 꽤 부담스러웠다. 일단 김현성에 대한 의심은 옅어진 것 같았지만 다른 의미의 의심을 하고 있는 듯 한 느낌. 심지어 얼굴에는 정체 모를 초조함 까지 느껴졌다. “현성 씨는 조금 쉬는 게 좋겠네요. 다음 싸움은 더 길어질 테니까요. 현재 적 병력도 조금씩 후퇴하고 있는 도 중이고….” “발목은 전부 잡았다는 건가?” “저쪽 역시 다음 싸움을 대비해야 하기는 하니까요.” “사…실은 그것 때문에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기영씨에게는 저번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아직도 뭔가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해서….” “아… 네… 말씀해 주세요.” ‘이 새끼 또 시작이네. 또 시작이야.’ 너무 후려 맞아 뭉개질 대로 뭉개진 김현성의 뒤통수가 다시 한번 PTSD를 호소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처음 보다는 덜 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마지막 싸움을 앞둔 만큼 여러 가지 생각이 든 것 같았다. “뭔가 함정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너무 무난하다고 해야 할지….” “함정이요?” “네.” 김현성 후두부 현상을 처음 본 이지혜는 당연히 이게 무슨 소리냐는 반응. 뜬금없이 함정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진지한 분위기로 대화를 이끌어 내려고 하니 당황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 오빠 왜 이러냐는 듯 나를 바라보는 이지혜의 표정을 보니 그녀 역시 밑도 끝도 없는 김현성의 함정드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놀랐다는 듯한 모션을 취하며 대화를 받아주고는 있지만 어서 빨리 이 이상한 아저씨 좀 떼어달라는 이지혜의 표정은 여러모로 압권이다. ‘이 사람 왜이래요?’ 라는 표정을 쏘아 보내는 이지혜.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뒤통수 고통동반 현상을 호소하는 김현성. 사실 웃고 넘길 수 있는 해프닝이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웃고 넘기기에는 아까 전 이지혜가 했던 말이 괜스레 신경 쓰였다. ‘확실히 악마 소환사가 잘 해주기고 있기는 하지만….’ 뭔가 가면쓰레기 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문제. 놈은 더 악랄해야 했고 주도면밀해야 했다. 정공법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파괴력이 있기는 하지만 가면쓰레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정직하다. 김현성의 기억 속에서 등장한 가면쓰레기는 그야말로 악마의 화신이요. 인간쓰레기의 끝판왕이라 봐도 무방. 온갖 역겹고 변태스러운 짓을 일삼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였다. 현 전장에서는 김현성이 이야기하고 있는 더러운 짓거리는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는 내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녀석이 이걸 무난하게 넘어가 준다면 좋겠지만 만약 마음속 한 구석에서 일말의 의심이 생겨날 경우에는 정말로 이지혜가 말했던 차선책을 세워놔야 할 수도 있다는 거다. ‘손 많이 가는데….’ 생각해보니 지금 이 상황도 굉장히 위험한 것 같은 느낌. 이렇게 세 명이 좁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는 게 갑작스레 미친 듯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쟤도 가면쓰레기 였잖아…. 눈치 까는 건 아니겠지?’ 어쩌면 나와 이지혜를 1회 차의 가면쓰레기 커플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괜스레 한 발자국 걸음을 떨어뜨린 것은 당연지사. 물론 가면에는 음성변조 처리를 비롯한 여러 가지 마법이 걸려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상한 오해를 받는 건 피하고 싶다. “현성 오빠가 말한 것들.” “네….” “솔직히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는 말 할 수 없겠어요. 당연하지만 대륙전쟁법에서는 금기라고 불려 지는 일들이고… 심지어 몇 가지는 너무 잔인해서 전쟁법에서 조차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네요… 사실… 제 입장에서는 너무 황당한 이야기라… 만약 정말로 그런 함정을 파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사람을 인간이 아니라 쓰레기라 부를 거예요. 아니 인간쓰레기라는 말로도 부족하죠. 분리수거도 안 되는 오물이죠. 오물.”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한 번 여러 가지 방향에서 생각은 해 볼게요. 현성 오빠. 돌다리도 두드려보면서 건너는 게 맞으니….” 이지혜의 말이 굉장히 가슴을 찌르기는 했지만 일단은 천천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준비된 것들이 있다고 해도… 아마 대놓고 사용하기는 힘 들 겁니다.” “네?” “현 공화국의 내부 상황과 전장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런 비인도적인 전술을 사용하는 것은 악마 소환사 진청에게는 독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자는 아직도 본인이 라이오스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 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으니까요. 명분도, 병사들의 사기에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공화국 내에서의 입지도 줄어 들테고… 무엇보다 국제사회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을 테니….” “음… 그렇군요.” “아직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채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 마저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지, 지난 번에는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그런 부분에서는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현성 씨.” “하지만….” “네.” “만약 다른 상황을 고려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려있다면… 혹시….” 어물쩡 어물쩡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주먹을 꽉 쥔 것은 당연지사. 그 와중에 갑작스레 입을 연 이지혜가 눈에 보인다.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전쟁 역시 악마 소환사 진청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걸 놓지 못해서 벌어진 이유가 크다고 생각해요. 그런 종류의 사람이 궁지에 몰린다면… 음.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시죠? 원래 잃을게 없는 인간은 잔인해지는 법이니까요.” ‘이지혜 이 가면쓰레기 같은 년.’ 여기서 박덕구 같이 판을 흐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김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꽉 쥔 모습은 가관. 얼굴에는 근심걱정이 들어서고 있었지만 악마 소환사가 그런 쓰레기 같은 짓을 해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준비를 하긴 해야 하나.’ 보험으로 몇 가지 생각한 게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실행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할 수밖에 없는 부분.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끝나가고 있었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캐슬락에 당도할 테니까. 이야기를 나누던 이지혜가 여신의 거울을 보며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퇴각하는 이들은 쫒지 않습니다. 병력을 최대한 빠르게 재정비 하고 곧바로 캐슬락으로 넘어갑니다. 각 부대로 새로운 편성을 전달, 선발대는 곧바로 이동합니다.” -확인했습니다. “부대 전체 전파 사항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현상이나 조금이라도 수상한 부분이 있다면 곧바로 지휘 통제실에 보고 부탁드립니다. 아주 작은 사항도 전부 보고 합니다. 추가로 여유가 있는 레인저들과 마법사들로 구성된 정찰대를 따로 편성해 혹시 모를 상황과 변수에 대비할 수 있는 전담반을 따로 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확인했습니다. “병력들을 다독여 주십시오. 마지막 싸움입니다.” -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김현성을 이지혜의 전달 사항이 꽤나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불안함이 가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인 모양. “그럼 저는 여기서 부관들이랑 준비좀 하고 있을게요. 기영씨랑 현성오빠는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쐬세요.” “아닙니다.” “정말로 바람만 쐬고 돌아오라는 게 아니에요. 부대 전체가 지쳐있어요. 아마 두 분이 함께 계신다면 지친 병력들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겸사 겸사 피로회복 포션 보급도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아. 특히나 여군들이 밀집한 쪽은 꼭 들러주세요. 그게 더 도움이 될 거예요.” ‘그게 왜 도움이 돼.’ 뭔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402 회귀자 사용설명서 402화 사기 증진(1) “생각보다 컨디션이 괜찮은 것 같군요.” “하지만 몸에 쌓여 있는 피로감은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최악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주 낙관적이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여유를 갖고 싶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죠.”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이지혜가 최대한 신경 써보겠다고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하기는 한 모양. 다시 한번 뒤통수가 지끈거리는 증상을 호소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그런 말은 꺼내오지 않았다. 만약 둘만 있는 장소였다면 곧바로 입을 열 것 같기는 했지만, 현재 다른 병력과 함께 움직이고 있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 만무. 김현성을 디스하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녀석도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암, 그거다. 현성아.’ “아마 몇 시간 안에는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저희가 현재 그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거고요.” “혹시….” “아뇨. 물론 아까 같은 전투가 다시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부터 목적지까지는 병력이 매복하기 적절한 지형이 아닙니다. 방금 저희가 상대한 적 병력이 각 전선에서 차출한, 말 그대로 시간을 벌기 위한 잉여 병력에 불과합니다. 이외에 타 병력을 따로 저희 쪽에 보낸다는 건 공화국 쪽에서도 쉽지 않은 결정일 겁니다. 방금의 전투로 본인들이 얻고 싶은 건 전부 얻어갔을 테니까요.” “예를 들면 무엇 무엇이 있는 겁니까?” “정보, 시간, 컨디션 정도라고 보면 될 겁니다.” “아….” “물론 저희 쪽의 부담이 쌓여 있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여유가 없는 것은 저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심적으로도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서부 전선 쪽과 북부 전선을 밀고 있다고는 한들, 캐슬락 쪽에 많은 것을 투자한 걸 회수하고 싶을 겁니다. 운이 좋으면….” “마지막 전투가 될 수도 있겠군요.” “예. 만약 전쟁을 지속한다고 해도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흘러가지 않을 겁니다.” ‘용의주도하기는 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다음 전투에 사활을 걸고 있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다. 아마 그 악마소환사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잉여 병력을 이쪽에 보낸 것은 발목을 붙잡아 보겠다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이쪽의 정확한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정확하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패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한 미끼라고 봐도 무방. 이미 이쪽은 쓸 수 있는 패를 모조리 까발린 채로 돌진하고 있다는 거다. 전술 김현성 같은 경우가 가장 큰 예다. 숨기고 싶었지만…. ‘숨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김현성을 투입시키지 않았다면 아직까지도 그곳에서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 우리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녀석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캐슬락을 미끼로 대놓고 이쪽의 정보를 빼내려고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건 알면서도 당해줄 수밖에 없는 종류의 개짓거리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패를 최대한 숨긴 채로 이쪽이 가지고 있는 패를 확인하는 것. 세밀한 부분까지 컨트롤하며 사람 신경을 긁는 움직임은 어떻게 보면 변태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이건 그만큼 효과가 있다. 당장 이쪽이 캐슬락에 있는 병력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 역시 그 연장선, 전체적인 상황을 자체평가 해보자면 끌고 있는 쪽은 저쪽이고 끌려다니는 쪽은 우리 쪽이라는 말이 된다는 거다. “아.” “괜찮으십니까?” “아…. 네.” ‘슈바…. 쪽팔리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다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그나마 김현성이 잡아줬기에 망정. 만약 땅바닥을 굴렀다면 병력의 앞에서 개망신을 당했으리라. “그러고 보니 무리하셨다고 하셨죠. 혹시….”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넘어졌을 뿐이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피로가 축적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그 무엇보다 몸도 신경 써주셔야 합니다. 아직 뒤틀린 연못의 영향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네.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기영 씨 혼자만의 몸이 아닙니다. 조금 더 신경 쓰시는 게 맞습니다.” 단순히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은 당연지사.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스레 분위기가 훈훈해진다. 그가 내 몸을 일으킨 이후에 등을 툭툭 두드리는 행동은 마치 순정만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주인공의 모양새. 곧바로 웃으며 이야기를 건네오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어째서 김현성 하렘이 그렇게 김현성에게 환장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등 뒤에서 뭔가 따가운 눈초리들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 심지어 정체 모를 탄성도 들려왔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왠지 모르게 나와 김현성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병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부분이 여군으로 구성되어 있는 모습, 심지어 인간들뿐만 아니라 엘프들도 섞여 있었는데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는 반응이 이상하게 재미있었다. ‘엘레나 같네….’ 사실 병력의 컨디션이 그리 좋다고 하기에는 힘들었다. 막 전투가 끝난 이후였고 뒷수습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곧바로 행군길에 올라야 했으니까. 하지만 반짝반짝 눈이 빛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 전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래서 명분이 중요하지. 암, 그렇고말고. 평소에 교육시켜놓기를 잘했다니까.’ 막 행군길에 올랐을 때는 사실 지금보다도 더 상황이 좋지 않았었다. 나와 김현성의 부대 순회가 효과가 있을 거라는 이지혜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모양.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기 때문에 나 스스로가 의아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단순히 피로회복포션을 나누어주고 몇 마디 나누는 것이 전부였지만 주변은 물론 비교적 떨어져 있는 부대까지 좋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물론 저런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에는 뭣 하지만 공식적으로 나는 베니고어 여신과 엘룬의 선택을 받은 신의 사자였으니까. 교국의 병사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당연, 신앙심이 뛰어난 엘프들의 경우에는 더하다. 김현성의 경우는 어떨까?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가진 파급력보다는 조금 덜 하기는 했지만 녀석도 충분히 경외의 시선을 받을 만했다. 앞의 전투에서 김현성이 보여준 모습은 인간들은 물론 이 종족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긴 모양. 조금 관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강한 자에게 경외감을 느끼는 건 인간뿐만이 아니다. 엘룬 나이트를 비롯한 엘프들에게도 그랬고 드워프들의 경우에는 더했다. 말하자면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내가 만약 검을 배우는 입장에 있었다면 김현성을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존경의 대상이 직접 함께 행군하고 걸어가는데 기분 나빠할 이들은 없다. 사단장이 갑작스레 부대방문을 한다면 치를 떨기야 하겠지만 이 경우는 그 경우와 예 자체가 다르다. 중요한 것은 나와 김현성이 있는 것만으로도 부대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 병력과 계속해서 행군하며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였다. 아까부터 김현성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여성 엘프들을 바라보니 확실히 얼굴이 잘생긴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인 모양인 것 같았다. 녀석이 뭔가 액션을 취할 때마다 작은 탄성들이 들려오니 역시나 이 대륙에도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졌다. 심지어 지금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싱긋 웃을 뿐이었지만 또다시 주변 부대를 술렁이게 하는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만 좀 해라 이 새끼야. 아니, 쟤는 왜 코피까지 흘리고 그래.’ 심지어 코를 막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도 생겨나기 시작. 내가 당황스러워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이것저것 쌓인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처음 불안해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 정도는 긴장이 풀린 모양. 심지어 전쟁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도 해오는 것을 보면 김현성 역시 이런 종류의 대화가 그리웠던 것 같았다. 주제도 꽤나 다양했다. “혹시 검술을 배워볼 생각이 없으십니까?” “네?” “기영 씨는 제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눈이 더 좋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공격을 볼 수 있다면 대응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요…. 저는 그다지 몸 쓰는 데는 재능이….” 이런 종류의 대화나. “빨리 길드 하우스로 돌아가고 싶군요.” “네.” “한 삼 일 정도는 푹 잤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네. 그냥 잠만 자고 싶습니다.” “감당해야 할 업무량이 늘어나겠군요.” “아….” “농담입니다. 김미영 팀장이 일을 잘 해주고 있으니 아마 충분히 휴식시간을 즐기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런 종류의 영양가 없는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만 모든 대화가 가지는 공통점은 있다. 그 공통점은 가정이다. 이 전쟁이 끝난 이후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가정.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대화라는 데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새끼도 사람이기는 하네.’ 사소한 사건들까지 불안함을 지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잠깐이나마 여유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사실 조금은 재미있고 신기한 모습이라고 하는 게 맞다. 내 머릿속에 그려진 김현성의 이미지와는 얼추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하니까. 한참이나 신나게 떠든 녀석이 다시 한번 말을 걸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그러고 보니 기영 씨.” “네.” “혹시 덕구 씨에게는 가보셨습니까?” “아. 아니요. 사실 에베리아를 떠나온 직후부터는 쭉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사람들을 챙길 틈이 없었습니다. 혹시 뭐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딱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한 번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힘들어 하시는 것 같으니까요.” ‘하긴….’ “아무래도 전쟁이라는 것 자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들과 검을 부딪친 것 처음이라…. 마음이 여리시니까요.” ‘여려도 너무 여려서 문제지.’ 아마 녀석이 강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본인이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 대신 본인이 죽일지도 모르는 공포에 사로잡힌 것. 웬만한 칼이나 화살로는 상처 하나 안 나는 녀석이다 보니 전쟁터에서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이 있는 게 틀림없다. 물론 선천적으로 녀석이 순한 게 가장 큰 이유가 되기야 하겠지만 버프를 받기 전 박덕구였다면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이다음 전투 역시 마찬가지고….’ 지금까지는 나와 이지혜가 최소한의 케어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마지막 전투에서도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차라리 나오지 않는 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 차라리. ‘편성에서 빼버릴까.’ 후방 지휘통제실을 틀어막는 임무라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파고들며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녀석 말고 다른 길드원들 역시 신경 써볼 만한 여지가 있다. “길드의 상태는 조금 어떻습니까?” “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는 다들 잘 적응해주고 있고…. 심지어는….” “아…. 네. 그랬었죠.” “네. 혜진 씨 같은 경우에는 정말로 유명해졌으니까요. 안 그래도 보기 힘든 유니콘 위에서 전장을 휘젓는 모습이 엘프들에게 큰 감명을 준 모양입니다. 순결한 창. 어떻게 생각해도 혜진 씨에게 어울리는 별명인 것 같습니다.” “네…. 네.” ‘아마 본인은 질색했겠지만….’ 단순히 질색한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어떻습니까, 기영 씨. 한 번 길드원들이 있는 곳으로….” “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덕구와는 한 번 이야기를 해봐야 될 것 같아서….” “아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 그리고.” “네.” “아직 피로회복포션을 드시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 병 드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마음만으로도 고맙다. 새끼야.’ “괜찮습….” 이미 남몰래 두 병이나 비우기는 했다. 더 이상 먹으면 오히려 배가 부를 것 같은 느낌. 막 포션을 거절하려던 찰나 시야에 비친 것은 이 상황을 바라보는 갤러리들이다. ‘뭐야….’ 나와 김현성을 바라보며 걷고 있는 부대 전체가 저 포션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착각이 아니다. 여기서 저 포션을 받지 않는다면 부대 사기가 크게 꺾일 것 같다는 기분마저 들기 시작했다. 살짝 손을 빼니 크게 실망했다는 표정과 함께 정체 모를 탄식 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뭐야. 시불….’ 선택의 여지가 없다. 결국에는 손을 뻗어 포션을 받아들자 짝짝거리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작은 응원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게 뭔데….’ 박덕구에게 향하는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 403 회귀자 사용설명서 403화 사기 증진(2)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길드원들의 얼굴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정하얀과 한소라는 안개의 숲으로 가 있어 정확히 상태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최근에 보내온 통신에서 보인 모습을 떠올려 보면 예상 외로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한소라는 정하얀과 계속해서 붙어 있어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지만 꼭 필요한 일을 해줘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안하긴 한데….’ 그녀 같은 경우에는 정하얀과 함께 있을 때 능률이 오르기도 하고 심지어 조합도 좋다. 본인이 무척 불편해하기는 하지만 케미가 좋으니 감독의 입장에서는 둘을 떨어뜨려 놓을 수 있을 리 만무. 이번 전쟁만 끝나면 저 멀리 떨어뜨려 놓을 거라는 희망을 주고는 있지만 솔직히 그러기가 쉽지 않다. 한소라와 같이 들어온 유아영과 김창렬 역시 무척 잘 적응했다고 할 수 있는 예. 체력 스탯에 전설 등급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유아영은 이런 종류의 장기전에 특화되어 있었고 김창렬은 눈에는 잘 띄지 않아도 항상 1인분을 해준다. 함께 전장에 선 것은 아니었지만 마력 홀로그램으로 본 그들의 모습은 제법 인상적이었다. 오매불망 김현성만 바라보는 김예리와 조혜진은 굳이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을 정도였고 그건 선희영 역시 마찬가지. 앞서 말한 셋은 다른 중소 클랜의 마스터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안기모도 마찬가지고.’ 굳이 등급을 매기자고 한다면…. 김예리, 조혜진, 선희영. 이 셋은 명실상부 파란의 1티어. 본래 붉은 용병 소속이었던 안기모와 박덕구의 그녀, 마도학자 황정연이 1.5에서 2티어 정도고…. 한소라를 포함한 병아리 3명이 2에서 3티어 정도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물론 이건 파란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대륙 전체를 7개 정도의 단계로 분류했을 때가 이 정도. 당연히 대륙 8좌나 공화국의 오호대장군 같은 이들은 포함하지 않았다. 규격 외의 존재들은 사실 이런 종류의 수치로 강함의 정도를 구분하는 게 별 의미가 없으니까. ‘박덕구는….’ 정확히 말하면 1.5정도. 많이 쳐주면 1티어 나쁘게 쳐주면 2티어다. 선희영, 조혜진, 김예리 같이 애초 초월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는 다르게 순수하게 노력으로 만들어진 케이스. 공격력이 없는 게 흠이지만 단순한 고기방패로써는 규격 외라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이번 전쟁에서 그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공격력이 거의 없다고는 해도 그건 비슷한 등급에서의 이야기다. 상대적으로 등급이 낮은 이들이 박덕구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리 만무. 칼에 맞으면 아픈 척이라도 하는 조혜진이나 김예리와는 다르게 이 돼지는 웬만한 공격에는 눈 하나 깜빡 하지 않는다. 본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전장에서 폭군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발 물러서는 모습은 가관. 물론 이해는 간다. 녀석의 성정을 생각해 보면 이런 환경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처음에는 조금 짜증도 나고 답답하기는 했지만. ‘받아들여야지 어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해준다고 한들, 본인이 마음먹지 않는다면 억지로 떠미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이전 전투는 그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준이라 두고 볼 수 있었지만 다음에 일어날 전투는 높은 확률로 사고가 날 확률이 크다. 차라리. ‘너는 그냥 집에 있어라.’ 언젠가는 등을 떠밀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박덕구 하나 뺀다고 전선이 무너질 일은 없을 뿐더러 지휘부가 적의 습격을 받아도 방패가 되어줄 수 있을 테니 어떻게 봐도 합리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맞다, 덕구야. 이번 전투에서는 딱히 나갈 필요 없어. 따로 분대를 구성해서 적의 기습에 대비할 수 있는 후방부대로 갈 거다. 아영 씨나 창렬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해도 되는 건가요?” 사실은 안 되지만. ‘권력 좋다는 게 뭐겠어.’ 안 되는 것도 되게 만드는 게 현재의 내 위치다. 물론 형편성에 어긋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애초에 나는 그런 걸 신경 쓰는 타입도 아닐뿐더러, 우리 길드원 몇 명 빼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유아영이나 김창렬도 혹시나 죽을 수 있으니 열외. 김예리와 조혜진도 합리적인 선택인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몰래 병아리들을 걱정하고 있었던 병아리 책임자 안기모야 언급할 필요도 없다. 기쁜 표정으로 입을 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잘 됐군요. 안 그래도 조금 걱정하고 있었던 차였는데. 덕구 씨에게 맡기면 안심이기도 하고… 네. 여러모로 잘 된 것 같습니다. 아마 이후에 일어날 전투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를 테니까요.” “응. 그게. 맞아. 그리고 이건 현성 오빠 판단?” “아니. 지휘부의 판단. 아무래도 후방 지휘통제실이 위험에 노출될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고 가정했고 이건 그에 대한 대응책이야.” “음. 그렇군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아! 예리나 혜진 씨는 아마 처음에는 현성 씨와 함께 움직이게 될 겁니다. 이후에는 떨어질 수도 있지만….” “정말?” “네. 희영 씨는 평소대로….” “엘레나 님과 함께 있으면 되는 건가요?” “네. 아마 안전하실 겁니다.” 고위 사제의 안전은 병력 전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아마 선희영이 위험에 빠지게 되는 일은 없으리라.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뭔가 침울한 얼굴의 박덕구가 눈에 띄었다. 은근히 눈치가 빠른 만큼 후방 편성의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뭔가 자괴감에 휩싸인 얼굴. 하지만 딱히 내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음…. 뭐, 뭐. 따로 할 일은 없는 거요?” “딱히 없다. 너 하나 빠진다고 달라질 전황도 아니고.” “거, 그렇다면… 지휘부의 판단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진짜 어지간히 나가기 싫은 모양이네.’ 입술을 꽉 깨물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말을 해오지 않는다. 차라리 겁을 먹거나 무서워서였다면 조금 짜증이 났겠지만 녀석다운 이유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거….” “별일 아니다, 덕구야. 네가 맡은 임무만 확실히 해주면 돼.” “그건 걱정 마쇼. 그리고… 미, 미안….”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나도 네가 옆에 있어주는 게 더 안심되니까.” “그거라면 맡겨주쇼. 형님 몸은 털끝 하나 건들지 못하게 할 거니까. 음. 꼭 그렇게 할 거라니까.” “그래. 고맙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모습은 귀엽게까지 느껴진다. 뭔가 안심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무언가 나무라기라도 한 줄 알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 기운 내라는 듯 어깨를 툭툭 치자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잡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이후로는 아까 김현성과 나눴던 이야기의 연속. 길드원들과도 통 이야기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적당한 소재를 찾아 화두를 던지자 여기저기에서 입을 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선희영은 조용히 내 옆쪽에 자리 잡았고 박덕구는 조금 기운을 차렸는지 슬슬 농담을 던지고 있다. 꼬맹이는 그다지 관심 없는 척하고 있었지만 나오고 있는 이야기를 그 누구보다 귀담아 들으려고 하는 듯한 느낌. 과장해서 말하면 뭔가 가족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집에서 개고생 하고 있을 율하한테는 미안하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거다. “전쟁이 끝나면… 피크닉이라도 가는 게 어떨까요?” “나는 찬성. 그런데 어디로?” “글쎄요. 나보트 의원의 영지에 있는 거울 호수가 그렇게 유명하다고 하던데 뱃놀이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어때요? 부길드 마스터.” “나쁘지 않은 생각 같습니다, 정연 씨.” “사실 저도 교국에서 오래 몸담고 있었지만 그쪽은 통 가보지 못했거든요. 분명히 무척 예쁘겠죠? 로맨틱해라.” 사실 주제도 뭔가 비슷하다. 많은 종류의 이야기가 오가기는 했지만 그 뿌리는 같다. ‘전쟁이 끝나면.’ 전쟁이 끝난 이후에 무엇을 할까. 이 전쟁이 그렇게 오랜 시간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파란 길드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아마 병력 전체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행군하는 일반 병사, 조금은 떠들썩한 드워프들, 심지어 엘프들까지. 모두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도 계속 그런 생각을 해 본 것은 당연지사. 어느새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니 이런 종류의 대화가 그리웠다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딱딱한 이야기 외에 다른 잡담을 한 지 오래 됐다는 것 역시도 깨닫게 됐으니까. ‘만나러 오길 잘했네.’ 뭔가 성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길드원들을 격려하는 것도 성과라 하면 성과라 할 수 있겠지만 눈에 보이는 종류는 아니다. 시간이 아깝지 않을까 하고 떠올려 봤지만 김현성의 말을 듣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피곤했던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느낌. 복잡한 생각으로 꽉 차 있던 머릿속을 한 번 리프레시 했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아마 길드원들 역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슬쩍슬쩍 대화에 참가하자 어느덧 천천히 해가 저물기 시작. 부대 전체에 무언가 차분한 긴장감이 맴돈다. ‘거의 다 왔나보네.’ 목적지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지휘통제실에서 각 부대의 야전지휘관들에게 싸움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를 준 것이 분명. 곳곳에서 병사들이 분주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열을 정비하거나 보급품과 장비를 확인한다. 기도를 드리는 이들도 곳곳에 눈에 띄는 상황. 비슷한 입장에 처한 건 파란 길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봐야겠네요. 모두, 다치지 마세요.” “네, 희영 씨.”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부길드 마스터.” “네.” 후방지원조에 포함된 선희영과 황정연도, 전방에 위치한 조혜진과 김예리와 안기모는 앞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서로를 꽉 끌어안거나 악수를 하는 모습도 보였는데 의외로 선희영과 조혜진의 사이가 가깝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지사. 점점 부대에 무거운 침묵이 드리울수록 반대로 멀리서는 커다란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 마법으로 만들어진 폭음과 많은 숫자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함성, 지형자체도 굉장히 익숙하다.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분명히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장소다. 캐슬락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각 부대는 모두 전투 준비!!” 지휘부는 굳이 연설을 하기 위해 시간을 끌지 않았다. 현재의 상황이 어떤지는 정확히 봐야 알겠지만 곧바로 전투 준비 명령을 내린 이지혜의 판단을 보니 상황이 급하기는 한 모양. 병사들과는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모두의 얼굴에 약간의 긴장감과 고양감이 깃들어 있는 게 느껴졌다. 내가 하는 일은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이 전부. “전투 준비! 깃발을 올려라! 각 부대는 곧바로 적 부대를 향해 진격할 준비를!!” 지금껏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들의 가운데 있으니 이들이 느끼는 압박감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진다. 투구를 고쳐 쓰고 깃발을 들어 올리며 창을 앞으로 내민다. 여러 가지 종류의 버프가 쏟아지고 마법사들이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느껴진다. 부대는 진군할 준비를 마쳤다. 지금쯤 지휘통제실에서 어떤 명령이 떨어졌는지는 뻔할 뻔 자. 나도 모르게 중얼 거린 소리에. “전군 진격.” 커다란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군! 돌격하라!!!” 귀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 404 회귀자 사용설명서 404화 마지막 전투(1)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말 그대로 장관. 오죽했으면 저들과 함께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거대한 함성을 내지르며 창을 들고 평원을 달리는 이들의 모습을 보니 고양감마저 생긴다. “돌격!!” “돌겨억!!” “우와아아아아아아아!!!” “베니고어 여신님을 위하여!” 말을 타고 달리는 기마대 위로 신성력이 계속해서 떨어져 내린다. 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묘한 열기가 아군 진영에서 피어오르기 시작. 지휘 통제실로 향하는 것도 깜빡 잊고 멍하니 저 광경을 바라볼 정도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적 본진에서는 마법들이 떨어져 내리고 우리 측 병력을 지키기 위한 방어 마법이 아군을 감싼다. 가지고 있는 마법 전력은 서로 엇비슷하다. 물론 적이 전력을 숨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우리 병력이 적에게 도달하는 것 자체는 수월할 것 같은 느낌이다. 병력 전체를 감당할 수는 없었는지 군데군데 떨어진 마법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아군 병력에 피해를 주고 있었지만 이 정도 피해는 미비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방패를 들고 아군 병력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적 병력을 보니 녀석들이 확실히 이쪽을 기다려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돌진해 오는 기마대를 막기 위한 장치가 땅 위에서 솟아오르고 몇몇 기마병이 자신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땅바닥을 나뒹군다. 해당 지역에 곧바로 신성력이 떨어지지만 이미 나가떨어진 병력의 생사를 장담할 수 있을 리 만무. ‘아직까진 나쁘지 않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주변 정황을 파악하는 것은 순식간, 이지혜의 판단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 역시 전체적인 상황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미 진영을 갖추고 있는 적을 보니 확실히 우리가 당도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캐슬락은 미끼. 원하는 것은 대회전. 이를 테면 이 평원은 녀석이 만들어낸 무대. 원하는 정보를 취하고 원하는 타이밍에 원하는 싸움을 하기 위한 설계라고 봐도 무방했다. 병력의 질과 양은 딱히 어느 쪽이 우월하다 말할 수 없을 정도. 공성전 자체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 걸 보면 어떻게 생각해도 내 판단이 맞다고 할 수 있으리라. 차라리 저쪽이 성을 먹고 있는 상태였다면 조금 더 여유를 가질 수도 있었으리라. 대형을 재정비하고, 캠프를 세우고 전선을 구축하고 여유 있게 증원군을 기다릴 수도 있었다. 물론 성이 아직까지 먹히지 않은 건 다행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상황 자체를 설계한 게 녀석이란 것 자체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숨겨둔 수나… 보험이 있다는 것. 그 말 말고는 지금 현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전쟁을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었다면 조금 더 길목을 틀어막는 것에 집중했어야 했다. 질질 끌며 어떻게든 현 본대가 캐슬락에 도착하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이 맞다. 악마 소환사의 지휘부에서 어떤 결론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저쪽 역시 이번 전쟁을 길게 끌고 싶진 않을 터. 어떻게 생각하면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고 볼 수 있으리라. 차이점은 정보의 양. 이건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형님, 들어가지 않는 거요?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니까.” “아니. 바로 들어갈 거야.”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간이 통제실로 들어간 것은 당연지사. 여전히 마력 홀로그램을 부여잡고 병력을 컨트롤하기에 여념이 없는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쪽을 곁눈질로 바라보자마자 곧바로 입을 여는데, 약간의 짜증이 묻어 있었다. “오래 걸렸네요. 뭐 하러 거기서 멍하니 있었어요? 빨리 와서 이거나 좀 도와주지.” “누나가 알아서 잘하고 있겠거니 생각했어. 그것보다 상황은 어때?” “나쁘지도 좋지도 않아요. 일단 우리 본대를 적 병력까지 밀어 넣는데 성공은 했지만… 아! 피해가 크지 않다는 것 하나는 마음에 드네요.” “그럼 뭐가 문제야?” “문제가 없는 게 문제예요. 그냥 불안할 뿐인 거지. 확실히 저쪽도 준비를 많이 하긴 했네요. 화면에 비치는 네임드들 보여요?” 슬쩍 여신의 거울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확실히 네임드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러시아판 박덕구와 샤오 린, 진청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무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전투를 기다리고 있다. “라이오스에서 봤던 얘들이 다 있네. 모르는 얼굴도 좀 보이고….” “아직 전부 다 파악되지는 않았어요. 각 지역에서 이렇게까지 데려온 걸 보면 이 전투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봐도 될 거예요. 덕분에 타 지역은 여유가 생겼겠지만 지금 그거 좋아할 타이밍도 아니고… 아무튼 앞전에 창 던지는 놈을 잡아놓길 잘했네요. 저 라인업에 그 자식까지 합류했다고 생각하면 조금 불편할 것 같거든요.” “캐슬락에서의 지원을 바라는 건 힘들겠지?” “캐슬락은 지금 전투 중인 게 아니라 갇혀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마왕에게 잡혀간 공주님 같은 느낌이랄까. 이게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네요. 공주님을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가 없으니까.” “예가 적절하네.” “네. 그리고 이거 다시….” “아. 전술 김현성.” “아직 떨어뜨리지는 않을 거예요. 일단 오빠도 대기하고 있어요. 길이 열리거나 상황이 불리해지면 그때 투입할 테니까. 그전까지는 6, 7부대 맡아주시면 될 것 같아요. 지금 좌표 전송할게요.” “응, 누나.” 전투는 이제 막 초입이다. 여신의 거울에서 비친 모습은 서로가 검과 창을 부딪치는 병력들은 악을 쓰고 상대방을 밀어내려고 하는 도중. 먼 곳에서 바라보면 각 부대가 확실히 진영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까이서 보면 병력과 병력들이 조금씩 섞이고 있다. ‘이건 괜찮네.’ -이 더러운 악마의 하수인들아! 신이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미친 자식들, 악마는 네놈들이다! -난쟁이들 못 들어오게 막아! 난쟁이들! -누구보고 난쟁이라는 게냐!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인간 놈들이! 이미 대열을 갖추고 있는 녀석들과는 다르게 이쪽이 지향해야 하는 바는 저 대열을 무너뜨리는 것. 그런 의미에서 대열을 찢고 들어가는 드워프들은 확실히 고개를 끄덕일 만 했다. 작고 단단한 몸, 질 좋은 갑옷으로 완전무장한 저 병력은 어떻게 생각해도 이런 전투에 유리하다. 커다란 도끼를 들고 휘두르며 방패를 든 적 병력을 뚫어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작아서 할 수 있는 전투가 있다. 인간이 중형이나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는 방법이 그렇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쳐 중심을 무너뜨리거나 집요하게 하체를 공격해 체력을 소모시킨다. 저들은 그런 방면의 스폐셜 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 조금씩,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 길로 아군 병력이 물밀 듯이 밀고 들어가는 게 눈에 보인다. ‘옳지!’ 한쪽에서는 거대한 정령들이 정령마법을 뿌려댔다. 커다란 한 방은 없었지만 지속적으로 상대의 신경을 긁고 있다는 건 칭찬할 만한 일이다. 일단 병력 자체가 뻥튀기 된다는 느낌이 좋다. 소환사 하나가 최소 둘에서 셋을 유지하고 있으니, 힘이 부족한 전선에 힘을 보태주기에 충분하다. 물론 상대적으로 밀리는 곳 역시 존재했지만 소강 상태를 맞이한 장소보다는 이미 뚫어낸 지역 쪽에 집중하는 게 낫다. 마치 람보르기니에 탑승한 운전자의 심정으로 김현성 전용 화면을 연결하자 이쪽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을 볼 수 있었다. -출발하는 겁니까? “네. 일단 좌표 찍어드리겠습니다.” -네. “처음부터 무리하시지 마시고 섞이기 시작한 병력에 힘을 보태주는 식으로….” -네. 확인했습니다. 이미 한 번 해본 만큼 다음 작업은 조금 더 수월한 것 같은 느낌. 일단은 김현성이 포함된 아군 병력을 전략적 포인트에 안치시키는 게 목표다. 혼자가 아니라 병력이 갈 길을 열어줘야 하기 때문에 이전처럼 정신없는 느낌은 아니다.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뭔가 아쉬운 기분. 이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머리가 김현성의 움직임을 기억하고 있다. 녀석 하나를 움직일 때는 느끼지 못했던 답답함이 자꾸만 숨을 턱턱 찌르고 있었다. ‘그래도.’ 김현성은 김현성. 함께 간 김예리나 조혜진을 비롯한 이들과는 당연히 시너지가 좋다. 질이 좋은 병력으로만 구성했으니 그럴 만도 하건만 지금 현재 보여주고 있는 모습 역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지원 요청! 원군 요청해! 최대한 빨리… 원군 요청! -사제! 불러! -지원이… 커헉! 이런 상황에서 발이 묶이면 안 된다는 건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계속해서 병력을 움직이며 안에서 깎아내리는 식으로 운용. 김현성을 중심으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가는 모습은 확실히 신의 군대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어 보였다. ‘지금 꺼내도 괜찮지 않을까.’ 상대 마법사, 사제 분대와의 거리가 조금 애매하기는 하다. 김현성을 따로 내보내도 될지 안 될지 판단이 잘 서지는 않지만. ‘수 틀려도 탈출할 수 있겠지?’ 이쪽에서 계속해서 좌표를 찍어준다면 가능할 것이다. 조금 더 이득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여기서는 김현성의 능력을 믿는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드워프 부대에 병력을 맡긴 이후 사랑스러운 회귀자에게는 따로 명령을 하달. 수십 개의 마력 홀로그램이 내 시야 앞에 그대로 노출된다. 시작하기도 전부터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이 묘한 기분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는 생각에 그대로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코에서는 다시금 코피가 흘러내렸지만 이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좌표 보내겠습니다. 단독 행동입니다. 멀리 떨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현성 씨.” -확인.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의 목소리도 조금 들뜬 느낌. 곧바로 김현성이 적 병력의 뛰어드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는 나 역시 조금 홀로그램에 집중했다. 마치 눈앞에 화면 속에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감각. 두 번째임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목표 설정. 적 마법사 분대부터 처리하겠습니다.” -확인. 아까보다 더 길을 찾기 힘들다. 적은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고 길을 만들기는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주변 병력의 영향을 받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길로 김현성을 밀어 넣는다. 투입되자마자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놀라울 지경. 검을 휘두르고 찌르고 몸을 돌리며 전진하는 모습은 역시나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 적들이 보유하고 있는 네임드들 중에서도 이 정도의 움직임이 가능한 이들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이전에 있었던 전투와의 차이점은 김현성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는 것. ‘그만큼 여유가 없는 거야.’ 마냥 기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방팔방에서 마법이 쏟아지고 검과 창이 날아 들어와 꽂힌다. 어떻게든 전진하고는 있기는 하지만 아마 녀석 역시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집중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무기와 팔다리가 공중으로 치솟고 비명이 들려왔지만 규격외의 검사는 멈추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이동한다. 본대와의 거리가 조금 멀어진 느낌. 급하게 분대 하나를 안쪽으로 조금 더 투입한 이후 경과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 막 김현성이 적 마법사 분대에 앞에 섰을 때였다. ‘어?’ 콰지지지지지지직! 하는 커다란 굉음과 함께 정체불명의 마력이 이쪽을 훑고 지나간 것. “누나, 방금….” “제길…. 제길! 오빠, 지금 여신의 거울 살아 있어요?” ‘시발.’ 이지혜의 앞에 있는 마력 홀로그램이 단계별로 꺼지기 시작한 것이 눈에 들어온 것은 순식간. 사태를 파악하는 머리보다 입이 한 발 더 빠르게 움직였다. “현성 씨! 후퇴!” 피융! 하는 소리와 함께 이쪽의 눈앞에 있던 마력 홀로그램 역시 암전. “이 개새끼….” 악마소환사 새끼가 노린 게 무엇인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 405 회귀자 사용설명서 405화 마지막 전투(2) “이 개새끼….” 악마소환사 새끼가 노린 게 무엇인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지휘체계의 혼란. 어떻게 보면 외통수를 맞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현재 전장에 나가 있는 야전 지휘관들과 일부 병력이 느낄 혼란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었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일순간 마비됐다. 사태의 심각성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군이 혼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너무 의지했어.’ 그 말 그대로였다. 병력 전체를 마치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던 수단이었다. 하지만 너무 일방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한 컨트롤 타워에 수많은 병력에 대한 통제권이 달려 있다는 것. 이 장점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 아군이 가지고 있었던 이점이 한순간에 날아갔다는 거다. 이쪽이 여신의 거울을 통해 병력을 통제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라면 깨닫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에 대한 대응책이 벌써 마련되었을 거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 전투와 지지난 전투의 포석이 이걸 노리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궁금해지는 것은 어떤 식으로 이쪽의 컨트롤 타워를 완전히 마비시킬 수 있었는가. ‘어떻게 마비시킨 거지?’ 마법이라는 건 외에는 정확한 수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마도공학으로 이루어진 아티팩트를 무효화하는 수단이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유기적으로 연결된 마력을 일순간 끊어버렸을 수도 있다. 악마소환사 진청 본인이 바로 경지에 오른 마법사. 지난 전투를 직접 시찰했을 가능성도 결코 낮지 않다. 여러 생각과 추측이 머릿속에 날아 들어와 꽂혔지만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닌 결과. 어떻게 아군 측에 엿을 먹였느냐 보다 이 엿을 어떻게 되갚아 주느냐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너무 긴박한 상황에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시발….” “당황할 필요 없어요. 마력 홀로그램이 없어도 지휘체계를 유지할 수는 있으니까. 이전처럼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가능할 거예요. 네. 가능해요.” “보수할 수는 없는 건가?” “마력 홀로그램은 오빠 관할이잖아요. 그 아들내미라도 데려오지 그랬어요. 뭐… 온다고 해도 별로 효과가 있을 것 같지가 않지만. 언제 다시 재개될지 모르지만 현재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일단 병력을 수습하는 게 먼저지. 이제 막 적응하던 참이었는데 이거 심기 불편하네요. 정말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인데.” “…….” “솔직히 말할 게요, 오빠.” “응.” “이길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상대 지휘관이 저보다 다섯 수 정도는 더 내다보고 있는 것 같거든요. 여신의 거울이 있다면 어떻게든 비벼볼 수 있었겠지만 지금 이 시점부터는 무리예요. 최대한 버티기는 하겠지만….” “안 좋은 소식이네.” “저도 자신 있게 이길 수 있다 말하고 싶지만 혹시라도 무너질 걸 대비해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 하니까. 극심한 피해를 볼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해요.” 자연스럽게 지휘통제실을 벗어나며 입을 열어오는 이지혜의 모습에는 정체모를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다른 종류의 지휘체계를 마련해 놓았다는 건 다행이라 말할 수 있지만, 이건 말 그대로 대타에 가깝다. 기존보다 효율이 떨어질 뿐더러 익숙하지도 않다. 현재 상황에 이점은 명백히 가면 쓰레기가 가지고 있다. 아마 이지혜가 굳이 저런 식으로 입을 열어온 걸 보면 그녀로서도 이다음에 대해서는 쉽사리 장담할 수 없는 모양. 다섯 수나 앞서 있다는 것은 녀석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지혜 그녀가 나보다 더 녀석을 잘 알고 있으니 부정확하다 말할 수는 없으리라. 어쩌다 한 번 마주친 나와는 반대로 그녀는 진청의 데이터로 이루어진 프로그램과 함께 수백 번이 넘는 종류의 게임을 시뮬레이션 했다. 여신의 거울이라는 아이템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이 체스 놀이는 그녀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다. 내 생각이 맞다는 듯 손톱을 물어뜯으며 인상을 구기는 이지혜와 함께 밖으로 나서자 다시 한번 전체적인 전황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제기랄.’ 당연하지만 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마치 기회라는 듯 아군 병력을 전체를 싸먹기 위해 팔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병법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나도 현재 아군 병력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깨달을 수 있을 정도. 대기하고 있던 네임드들 역시 전장에 참가했는지 거대한 폭음이 연속적으로 들려오기 시작.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는 적 병력에 아군이 휩싸인다. “지금 수습할게요.” 수신호나 깃발을 들어 아군 병력을 컨트롤하고 있었지만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물어뜯는 적 병력 때문에 그것마저도 쉽지 않게 느껴질 지경. 병력도 병력이지만 적진 한가운데 고립된 김현성의 소식 역시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최대한 마력을 집중하고는 있지만 녀석의 모습이 보일 리 만무. 쉽게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위기에 빠져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변 병력들의 질이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혹시나 다른 네임드들이 손을 보탠다고 가정하면 위험해질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오매불망 이쪽을 기다리고 있을 사랑스러운 회귀자를 생각하면 여기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다는 거다. ‘김현성이 뒈지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 전쟁의 승패도 승패지만 이 이후의 일도 문제. 초월적인 존재들이 회귀시킨 존재가 뒈진다면 이후 대륙의 앞날이야 불 보듯 뻔했다. ‘그건 안 돼.’ 회귀자의 옆에서 달콤한 꿀을 빨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야 한다는 이쪽의 계획이 엉망이 된다. ‘죽으면 안 돼.’ 뭐라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애초에 녀석을 사지로 밀어 넣은 것은 이쪽이었으니까. ‘시발…. 김현성.’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순식간. 곧바로 입을 열자 입을 커다랗게 벌리는 이지혜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누나.” “네?” “나 내려간다.” “네. 그건 알아서. 네? 미쳤어요?” “예비대 준비해 줘. 지금 바로 출발할 거니까.” “뭐….” “어차피 딱히 방법도 없다며? 병력은 누나가 컨트롤하면 되니까. 나는 딱히 할 일도 없고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야. 안쪽에서도 전체적인 명령을 하달할 지휘관이 하나 정도 있으면 좋으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상황 안 보여요? 최대한 수습은 하고 있지만, 뚫고 나가는 것도 문제라고요. 저 안에 스스로 기어들어간다고요? 죽을 거예요. 분명히 죽을 거라고요.” “어차피 전쟁에서 지면 뒈지는 건 마찬가지야.” “…….” “나도 내 한 몸 지킬 정도는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누나. 오래오래 기생충처럼 남 등골 빼먹으면서 잘 살아야지. 전부다 이뤄놓고 여기서 뒈지면 억울해서 제대로 눈도 못 감을걸.” “그건 알지만….” “나 간다.” “…….” “…….” “알아서 해요. 제길. 멍청한 인간. 정말로 죽어도 난 몰라요.” “안 죽어.” 그 말이 맞다. 만약 여기에서 칼이라도 맞는다면 억울해서 눈도 제대로 감을 수 없으리라. 괜스레 입술을 깨물며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순식간. 지휘통제구역을 완벽하게 벗어나자 후방을 보호하는 부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현 상황이 비관적인지 하나같이 표정들이 좋지 않다. 아마 지휘부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걸 실시간으로 확인했을 테니 이쪽보다 더욱더 불안했으리라. 그나마 상황을 조금이라도 파악하고 있었던 우리와는 반대로 저들의 입장에서는 그저 혼란스러운 모습만 보였을 테니까. 심지어 나까지 바깥으로 튀어 나오자 걱정이 확신이 된 듯한 얼굴들을 보이고 있었다. 슬쩍 곁눈질로 그쪽을 흘겨보자 허겁지겁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후방 부대로 편성된 박덕구였다. ‘아, 이 새끼가 있었지.’ “혀, 형님!” “…….” “이게 무슨 일이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요?” “자세한 이야기는 이후에. 문제가 생겼다, 덕구야. 병력 준비시켜. 지금 곧바로 내려갈 테니까.” “저기로 간다. 이 말이요?” “현성 씨가 고립되어 있어. 혜진 씨와 예리도 마찬가지고. 아직 괜찮은 것 같기는 하지만 곧 적군에 휩쓸릴 거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생겼길래….” “설명하자면 길어. 아무튼 지금 당장.” “나, 나도 가도 되는 거요?” ‘이 돼지 새끼….’ 슬그머니 녀석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솔직히 함께 가겠다고 말할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야기를 꺼내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이곳에 있기가 미안했던 것 같았다. “도,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같이 내려가 봐야겠소. 형님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옆에 있는 게 더 든든할 거요. 형님 몸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할 거라고 말하지 않았소.” “그래… 고맙다.” “고마워할 일도 아니요. 다, 당연한 일이지. 그러니까 지금 우리 길드원들을 구하러 간다는 거 아니요.” “그게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그런 이유뿐만은 아니야.” ‘전장 안에서 사태를 수습해 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내려가 제대로 자리를 잡는 게 최우선 사항이다. “아, 아무튼 알겠소. 그러면 병력은….” “아마 누, 아니, 지혜 씨가 준비해 줄 거다. 후방에는 최소한의 부대만 남기는 걸로. 규모가 크지는 않겠지만 뚫고 들어가 합류할 정도는….” “알겠소. 그럼 빨리.” ‘일처리 하나는 빠르네.’ 박덕구가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을 때 이미 편성을 마친 부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 역시 가지고 있는 걸 정비하는 것은 순식간. 굉음이 들려오고 있는 전장을 바라보자 괜스레 심장이 떨려오기는 했지만 이대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보단 뭐라도 시도해 보는 것이 맞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간다.” “너무 갑작스러운데…. 거, 정말로 괜찮은 거요?” “괜찮다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없지만… 뭐, 그냥 갑자기 불안해져서 한 소리요. 이거,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렇게 형님 옆에 서서 싸우는 게 얼마만인 줄 모르겠다니까.” “기분 탓 아니야. 실제로도 오래됐으니까.” “이렇게 둘이 서 있으니까 튜토리얼 때도 생각나고… 뭐 그렇소.” “쓸데없는 잡담은 끝. 간다.” 박덕구가 괜스레 방패를 두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걸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방패를 든 아군 병력이 계속해서 검으로 방패를 두드리기 시작. 투구를 고쳐 쓰는 병사들 사이에 있으니 괜스레 식은땀이 흘러나온다.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에 대해 심각히 고민해 봤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이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점점 더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는 병력들 사이에 내가 섞여 있다는 게 잘 실감이 나지는 않은 것은 당연지사. 괜한 함성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전쟁터에서 고함을 치며 돌격하는 이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화살과 마법들이 떨어져 내리고 병력들이 발을 굴리는 소리가 심장을 두들긴다. 어떻게 발걸음을 출발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 ‘제길.’ 적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아군과 적군이 부딪쳤을 때 부대 전체가 받는 충격이 이쪽에 떠밀려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콰드드드드득. “으아아아아아악!” “개자식들! 죽어!” “베니고어 여신님을 위하여!” 끊임없이 귀를 때리는 소음과 적의. 마침내 전장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제기랄!’ # 406 회귀자 사용설명서 406화 마지막 전투(3) 전투에 임하는 게 처음은 아니다. 현장을 떠나 있기는 했지만 파란의 초창기부터 김현성을 따라다니느라 온갖 위험을 마주했고 실제로 근접 전투 역시 심심치 않게 치러왔다. 하지만 그건 소규모나 던전의 경우. 이렇게 인간들 틈 사이에서 대규모의 전투를 치르는 것은 처음이다. 화면으로 상황을 바라볼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온갖 인간이 만들어내는 열기.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소음과 비명. 땀 냄새와 섞인 피 냄새.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괜히 내려왔나.’ 굳이 안전한 후방 자리를 내팽개치고 전장 한가운데에 들어서니 심기가 불편했지만 이미 기차는 떠났다. 지금 와서 후회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부대의 전열이 느낀 충격이 그대로 뒤에도 전달되는 느낌. 적 병사들 사이로 꾸역꾸역 섞이기 시작하는 전위들이 시야에 비친다. 쾅! 콰득! “아아아아아악!” “제기랄!” “밀집해! 밀집!” “개새끼!” “아아아아아악!” 콰직! 물론 그마저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내게 허락된 시야는 갑옷과 방패로 둘러싸인 채 고군분투하는 아군 전위들의 뒷모습이 전부였으니까. 아마 내가 눈깔 사용자가 아니었다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었으리라. 혼란스러운 머릿속과는 다르게 내 눈은 계속해서 주변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다. 쓰러진 이들 덕분에 발걸음을 옮기기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계속해서 적 병력을 뚫고 나가는 아군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 다시 한번 상황을 차분히 살펴보자 박덕구가 인상을 구기며 방패를 휘두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적군을 방패로 밀치는 녀석을 보니 정말로 튜토리얼이 때가 떠오른다. 녀석이 막고 이쪽이 찌른다. 물론 현재는 그렇게 하진 않지만 당시 든든했던 놈의 모습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다. 튜토리얼 몬스터에게나 먹혔던 방법이기는 했지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제한된 이곳에서도 꽤나 적절한 방법이리라. 나를 대신해 창을 든 병사들이 방패를 든 전위의 뒤에서 공격하고 있다. “형님,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 거요?” “너는 앞만 봐라.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거, 아, 알겠다니까. 그보다 어느 쪽으로 가는 거요?” “서쪽. 일단은 가장 가까운 부대에 합류하는 게 먼저.” “알겠으니까. 제대로 따라오는 거요? 다른 건 몰라도 꼭 저기까지는 데려갈 테니까.” “알겠으니 집중해, 덕구야.” “형! 님이나! 잘 따라오쇼!” 최대한 서둘러 이동한다지만 움직임이 더디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했다. 용 숨결 물약이라도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아군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런 무기를 마음껏 쓸 수도 없는 법. 연금소환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이쪽의 위치가 발각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비대로 급하게 편성한 병력. 적 병력을 뚫어낼 정도는 되지만 집중적인 공세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 만약 현재 이 병력에 내가 섞여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적 마법사들이 우리가 있는 위치로 마법을 쏟아부으리라. 안쪽에 있는 본대와 합류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우선 사항이다. 예비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리라. “뚫어내!” “밀리지 마! 밀리지 마! 어떻게든 본대로 보낸다. 어떻게든!” “커헉!” 저들의 임무는 나를 본대로 보내는 것. 한 명, 한 명 쓰러지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짧게 신성력을 보내주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손을 잡아주거나 끌어주고 싶지만 리타이어한 이들에게 신경이 끌린다면 이곳에 고립될 것이다. 아무리 양심이 없는 개새끼라도 이쪽을 위해 목숨을 걸어주는 이들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제기랄. 제기랄.’ 콰득! 콰지지직! “막아! 막아!” “앞에 막으쇼! 마법 떨어지니까 방패 들어! 방패 들으라니까! 뭐 해! 방패 들어!” “화살! 화살! 아군 마법사는 뭐 하고 있는 거야!” “사제! 사제!” 바로 옆에서 사제를 부르짖던 병사의 가슴에 화살이 박힌다. 그사이 한 놈이 창을 들고 달려왔지만 커다란 방패가 앞을 가로막는다. 잠깐 틈이 생긴 곳을 다시금 아군 병사가 메꾼 것이다. 슬쩍 아래를 바라보니 가슴에 화살이 꽂힌 병사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군 전투사제가 급하게 녀석의 상태를 살피기는 했지만 이미 가망이 없는 상황. 물론 최대한 신성력을 밀어 넣어 생을 연장시키려고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가망이 없는 이에게 자원을 소비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래서 시발 전쟁 전쟁 하는 거네. 시발….’ 개인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다수의 죽음은 통계라고 누군가 이야기했다. 딱 그 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군의 죽음을 슬퍼할 시간조차 없다. 누가 죽었고 누가 살았는지 생사를 확인하는 것부터 불가능하다. 죽어간 이 모두 각자의 사연이 있겠지만 전쟁이라는 큰 배경으로 봤을 때는 그저 사망자 1에 불과하다. 그 누구도 죽어가는 이들은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하겠습니다.” “가, 쿨럭. 감… 사 합니다.” 울컥울컥 피를 토하며 조용히 눈을 감는 병사의 모습에는 괜스레 숙연해진다. 물론 나 역시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말 한마디 건네는 것 정도는 쉽다. 비교적 편하게 눈을 감은 병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입안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리타이어한 병사들을 내버려 두고 현 예비대는 계속해서 나아가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차 전장의 소음에도 익숙해진다. 죽어나가는 이들에게도 무감각해진다. “죽어!” “아아아아아악!” “개자식들! 개자식들! 개자식들!” “조금만 더 힘내자! 이 새끼들아! 조금만 더!지지 마! 조금만 더 뚫어내면 돼!” “안쪽에는 손끝 하나 못 대게 하라니까!” “화살! 화살! 방패 들어! 방패 들어! 사제랑 마법사 보호! 보호!” 쏟아지는 화살 비. 커다란 방패가 시야를 가린다. 방패를 뚫고 들어오는 화살도 섞여 있는 것을 보면 적군에 많은 마력을 활용할 수 있는 궁수가 섞여 있는 모양. 하지만 그 피해가 그리 크지는 않다. 박덕구를 포함한 아군은 다시 한 번 방패를 들고 주변 이들을 쳐내거나 베며 앞으로 나아간다. 고지가 그리 멀지 않은 느낌. 옆쪽에서 커다란 굉음과 비명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제기랄.’ 아군 병력이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며 바깥으로 튕겨져 나간다. 자세한 상황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뻔했다. ‘적 네임드?’ 콰드드드드득! 콰지지지지지지직! “아아아아아악!” “막아! 막… 아. 오지… 켁!” ‘어떤 놈이야.’ 저 멀리서 무식하게 달려오는 개자식의 얼굴은 꽤나 익숙하다. 박덕구 만큼이나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인. 발렌틴 알렉산드로. 공화국의 오호대장군, 로나프의 학살자, 로나프의 싸움꾼. 라이오스 사태 때 정하얀의 마법에 오른팔을 다치면서까지 악마 소환사 진청을 구해낸 개자식. 마치 전차처럼 아군을 밀고 들어오는 녀석의 모습에 입술을 꽉 깨문 것은 당연지사. ‘위치가 발각된 건가?’ 아마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집중적으로 마법 포격이 떨어지지는 않았으니까. 아마 이 예비대를 본대와 합류시키기 싫기 때문에 녀석을 이쪽으로 투입시킨 모양이다. 너무나도 쉽게 중갑을 입은 전사들을 날려 버리는 모습은 어째서 저 정도의 힘을 지닌 이들을 규격 외라 부르는지 잘 알려주고 있었다. 굉음을 내며 피를 뒤집어쓴 녀석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중형 몬스터. ‘아군 지원은 없는 건가.’ 이지혜도 이쪽을 신경 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군 병력에게 완전히 감싸진 아군의 상황상 시간 안에 지원해 주지 못할 확률이 클 것이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틀림없이 아군 병력이 길을 뚫고 있을 것이다. 사국동맹의 깃발이 눈으로 확인되고 있으니까. 하지만. ‘저게 시간 안에 올까?’ 물론 와주면 좋겠지만 와준다고 해도 문제. 저 미친 고릴라를 막아야 한다는 건 이쪽에게도 커다란 부담이다. ‘아니. 막을 수는 있어.’ 지금 있는 병력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연금소환과 용 숨결 물약으로 시간을 버는 건 가능하다. 만일을 대비해 빛 폭탄 물약도 가지고 있으니 어쩌면 저 무식한 새끼와 잠깐이라도 비빌 수 있을지 모른다. 내 옆에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방패가 함께하고 있으니까. 문제는 그 이후, 내 위치를 확인한다면 본대와 합류하기도 전에 예비대는 적 병력의 견제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당장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최대한 빠르게 막고 최대한 빠르게 마중 나온 병력과 합류. 불안한 감은 있었지만 그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에 가깝다. 입을 여는 것은 순식간. 박덕구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덕구야, 전투 준비해라.” “이길 수 있는 거요?” “가능할 거다. 준비나 해. 저거 마중 나가야 하니까.” “…….” “…….” “형님.” “왜.” “나도 바보는 아니요.” “뭔 개소리야. 갑자기.” “대충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다, 이 말이요. 지금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도 알고 형님이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도 알고 있다니까. 아니, 형님이 여기 있다는 걸 적이 알면 안 되는 거… 뭐, 그거나 이거나 똑같긴 하지만.” “닥치고 준비나 해, 돼지새끼야. 정말 급하니까. 농담 받아줄 시간도 없고.” “형님은 먼저 가쇼. 여기는 내가 맡을 테니까.” “지랄하지 마. 이게 만화영화 같아? 괜히 명장면 만들려고 무리수 두지 말고 입 다물고 전투 준비나 해. 농담하는 거 아니니까.” “먼저 가라고 했소. 여기는 내가 맡을 거요. 아마 남은 병력이 본대까지 데려다 줄 거요.” “무슨 개소….” 순간적으로 박덕구가 내 어깨를 잡았다. 워낙 커다란 몸이다 보니 내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 이상하게 이전에 봤던 모습이 계속해서 오버랩 된다.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서 봤던 1회 차의 기억이다. “꼴사나운 모습 보여서 미안하다니까. 어째서 형님이 그렇게 침착하게 전장에 서 있을 수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소. 배려해 줘서 고맙고 함께해 줘서 고맙고 또 고맙소. 멍청한 소리처럼 들릴 거라는 거 당연히 알고 있소. 형님이 날 많이 믿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개 같은 짓 하지 마!” “형님이 할 수 있으면….” “지랄하지 마! 주제도 모르는 미친 돼지가!” “나는 더 잘할 수 있다니까.” 녀석이 나를 휙 밀쳤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밀린 나를 아군 전사들이 받아들었다. 박덕구와 이쪽의 사이로 다시 한번 전쟁에 휘말린 병력들이 뒤섞인다. 로나프의 싸움꾼이 커다란 몸을 이끌고 쇄도해 오는 것은 순식간. 주제도 모르는 돼지가 커다란 방패를 등지고 놈의 팔을 부여잡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콰아아아아아앙! 커다란 충돌 음과 함께 두 손을 맞대고 있는 장면이 내가 볼 수 있었던 마지막 장면. “이 멍청한 돼지새끼!!”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 407 회귀자 사용설명서 407화 디아루기아, 율리에나(1) “이거 놔! 이 개새끼들아!” “위험합니다!” “이거 놓으라고 말했다, 개자식들아!” “이러시면 안 됩니다, 명예추기경님. 부디, 부디 참아주십시오.” “제기랄. 제기랄!” “죄송합니다, 명예추기경님. 하지만….” “제기랄! 개 시발 멍청한 돼지새끼! 멍청한 새끼!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이 멍청한 돼지새끼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화를 참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깜짝 놀란 병사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들은 마치 모두가 헛것이라도 본 듯한 반응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사람이 그 명예추기경이 맞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빤히 보일 정도였다. ‘제기랄.’ “제길….” 순간적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뻗친 덕에 기존에 있던 이미지를 완전히 말아먹어 버렸다. 남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또 처음. 욕은커녕 타인을 대할 때 언성도 높이지 않고 꼬박꼬박 존대했던 내 평소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저들이 당혹스러워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나 역시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 평소였다면 제법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현재는 그럴 기분도 아니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내려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도 계속해서 화가 솟구치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흥분하는 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고맙게도 병사들의 표정이 이성을 되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냉정해야 해.’ 침착해야 하고 냉정해야 한다. 화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화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쓸데없는 흥분은 독이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 돼지새끼…. 돼지새끼! 멍청한 돼지새끼!’ 물론 그럼에도 화는 제대로 사그라지지 않는다. 어떻게 생각해도 박덕구가 발렌틴을 상대로 이긴다는 게 불가능하다고 느껴졌기 때문. 녀석이 크게 성장했다는 건 인정한다. 내구 스탯은 규격 외에 근접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튼튼하다는 건 전투와는 또 다른 이야기. 상대가 그저 그런 병신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로나프의 싸움꾼은 공화국에서 가장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5인 중에 한 명이다. 걱정이 안 되는 것이 이상하리라. 아니, 애초에 승산은 없다. 어떻게 생각해도 박덕구가 녀석을 이길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생각나지 않는다. 남은 일은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 몸 하나는 튼튼한 녀석이니 쉽게 죽지는 않겠지만 죽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대한 수비적으로 상황을 유도한다고 해도 매순간이 위기라는 점은 변함없을 것이다. 녀석뿐만이 아니라. 근처에 발목이 잡혀 있는 아군 병력 또한 열세. 사지로 발을 뻗은 거나 다름이 없다. 아군 병력의 기수가 이지혜에게 이미 수신호를 넣어놨겠지만 지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박덕구가 버틸 수 있을지가 관건. 자꾸만 개소리를 했을 때부터 알아 봤어야 했다. ‘지가 무슨 영화 주인공인 줄 알아.’ 이미 돌아가기에는 늦었다. 차라리 본대와 합류한 이후 지원병력을 구성한 뒤에 나가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리라. 지금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건 어리석은 판단이다. ‘그래 이게 합리적인 판단이야.’ “합리적인 판단, 합리적인 판단…. 제기랄. 그래.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야.” 어떻게 생각해도 이게 맞다. 최대한 빠르게. “최대한 빠르게.” “저… 명예추기경님?” “최대한 빠르게.” “명예추기경님.” “아, 네.” “저. 죄, 죄송합니다.” “아뇨.” “…….”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못난 모습을 보였군요.” “아닙니다. 다, 당치도 않습니다. 못난 모습이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단 최대한 서둘러 본대와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동선은 제가 직접 지시합니다.” “혹시….” “아뇨. 그쪽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본대와 합류한 뒤 뚫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휘부에서도 아마 정보가 들어갔을 테니 무언가 조치를 취해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름 모를 병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혹시나 이쪽에 대해 뭔가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했지만 오히려 더욱더 충성스러워진 느낌마저 든다. 나야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괜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지사. 아직도 전투는 진행 중이다. 천천히 본대와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병력이 이동하고 있는 게 느껴졌기 때문에 길을 잘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위에서는 가면쓰레기와 이지혜가 머리싸움을 벌이고 있을 것이 분명. 실시간으로 전황이 달라지는 것 또한 바로 그 영향이리라. ‘이건 다행이네.’ 아직 본대가 완전히 싸 먹힌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출구를 찾거나 약한 곳을 찌르고 있는 것이 분명, 안에 있는 병사들은 싸우기에 바쁘지만 아마 위에서 이 광경을 본다면 제법 재미있는 모습이 펼쳐지리라. ‘돼지한테는 잘 된 일이야.’ 계속해서 그쪽에 고립되지 않아도 될 테니 운이 좋으면 다른 부대에 합류할 수 있으리라. 아군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눈으로 확인되자 점점 조급해진다. 눈앞에 있는 부대 역시 우리를 확인했는지 이쪽으로 향하기 시작. 적 병력의 저항이 거세기는 하지만 충분히 뚫어낼 수 있을 만한 범주에 있다. 그사이에 이쪽을 본대로 보내기 위한 병력이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게 시야에 비쳤다. 살이 깎여 나가고 있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리라. “마법! 마법이다! 방어 마법 캐스팅해!” “보호! 보호!” 그 순간 다시 한번 떨어지는 거대한 화염구. 콰드드득!! 방패를 든 몇몇 병사가 불길에 휩싸이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아아아악!” 방금 건 시작에 불과. 본격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불덩이는 어처구니없게도 양측에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뭔가 오류가 있었거나 컨트롤 미스. 아니면 대놓고 노린 거일 수도 있겠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법은 계속해서 피해를 누적시켰다. 물론 이쪽이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아군과 적군을 넘고 전진 또 전진. 다시 한번 아군 병력에 커다란 충격이 전해져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뭔가 공격이 들어온 것은 아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부대와 드잡이를 하고 있는 적과 예비대가 몸을 부딪친 것. 적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겠지만 아군은 뜻밖의 지원에 힘입어 분전하였다. “조금만 더 밀어! 이 새끼들아! 밀어내! 지원이다! 지원 병력!” ‘지원 병력이라고 하기엔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팽팽하게 대치하던 전장에 변수를 주는 것 정도는 된다. 이쪽 역시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봤자 연금마법으로 조금씩 대미지를 줄 뿐이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물론 마력을 아껴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여유가 없다. 안 그래도 계속해서 시간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 광기에 휩싸인 전장은 각 개인에게 커다란 혼란으로 다가온다. 살짝 주변을 살펴보자 적 부대가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아냈을 정도로 짜증이 치솟는 상황이었다. 가면쓰레기 측에서 원군을 보낸 모양. 순간적으로 인상을 찌푸린 것은 당연할 것이다. 소소한 이득을 챙기기 좋아하는 녀석의 성격상 떨어져 나온 분대와 예비대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다. 현재 눈앞에 있는 부대를 예비대와 함께 싸먹으려는 생각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지만 이건 피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회피할 수는 있다. 분대를 그대로 둔 이후 루트를 바꾸면 괜찮겠지만. ‘그건 안 돼.’ 다시 한번 새로운 길을 찾는 건 무리수다. 눈앞에 있는 아군과 합류해 함께 길을 뚫는 게 더 빠르다. 정확히 병력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또 어떻게 전황이 돌아가는지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계속해서 들어오기 시작. ‘본대와의 거리는 얼마나 되지?’ 빠르게 헤쳐나간다면 충분히 기대하고 있는 시간 안에 맞출 수 있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이미 전투 준비는 되어 있다. 이곳은 전장의 한가운데였으니까. 방금 전 중얼거린 말의 뜻은 예비대와 아군 부대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새로운 이들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것. ‘어렵겠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잠깐 숨을 들이 삼키자마자 곧바로 여기저기서 비명과 고함이 들려왔다. 피가 튀고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는 전장의 한가운데 있다는 게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입술을 꾹 닫고 수인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병장기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계속해서 때린다. 금방 섞이기 시작한 병력들 사이로 기존해 자리해 있던 부대 역시 예비대에 합류한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적 병력을 책임지고 있는 이의 얼굴이 제법 익숙하다. 죽었다 살아난 얼굴.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부대. 떨어져 나왔다기보다는 적들이 꼬리 자르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 적절하리라. 계속해서 소소한 이득을 보기 위해 병력을 돌려 깎으며 대미지를 축적시키고 있다. 버티다 못해 떨어진 병력들은 이런 식으로 사냥한 이후 다시 한번 겉을 긁어낸다. 소름 돋을 정도로 세심하고 변태새끼 같은 전술. 이전에 함께했던 게임에서 보여줬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밀리고 있는 거야.’ 이지혜가 고생깨나 하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는 게 당연했다.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면 현재 우리와 합류한 아군 병력이 떨어져 사냥당하는 일은 없었어야 했다. 정신없이 얻어맞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고통 받고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상황이 좋지는 않아.’ 박덕구는 발렌틴과 마주했고 김현성은 고립되어 위치도 파악할 수 없다. 김예리와 조혜진이 포함되어 있는 부대 역시 마찬가지. 심지어 본대에는 계속해서 대미지가 쌓이고 있다. 지금 당장은 괜찮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몇 시간이 지났다고 가정했을 때, 전력 차는 눈에 띌 정도가 되리라. 어떻게든 현 상황을 반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아주 작은 구멍이라도 괜찮다. 구멍만 있다면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 ‘빛 폭탄 물약을 써야 되나.’ 당연히 기각. 범위가 넓기는 하지만 한정되어 있다. 겨우 이 정도 병력에 쓰려고 가져온 물건이 아니다. ‘아니면 어그로라도 끌어야 하나.’ 나쁘지는 않다. 분탕질 치는 쥐새끼 한 마리 정도는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순식간. 적과 병장기를 부딪치고 있는 부대를 향해 명령을 전달하려 했을 때, 옆 공간을 비집고 들어온 적군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암살자?’ 어떻게 덩치들을 뚫고 접근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지사. 물론 우선할 행동은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벗어나는 것. 몸을 뒤로 빼며 손을 들어 올렸지만 이쪽이 연금소환을 실행하는 것 보다 적의 단검이 목에 닿는 것이 더 빠르다. 옆쪽에 있는 전사 역시 창을 뻗고는 있었지만 저딴 창에 맞아줄 놈이었다면 이곳까지 당도하지도 못했으리라. ‘제기랄!’ 나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던 그때.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검이 놈의 정수리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율리…. 율리에나?” 서둘러 하늘을 올려다 본 것은 당연지사. 눈에 보인 광경에는 환호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얼굴 본 지 오래된 마누라가 도착한 것이다. # 408 회귀자 사용설명서 408화 디아루기아, 율리에나(2) 콰득! 콰지지지직! 적 병력을 개미처럼 밟아버리는 모습은 기가 찰 지경. 거대한 뿔을 가지고 있는 드래곤의 모습은 외관만으로 경외감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실제로 적 병력들의 반응도 그렇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든 녀석이 있는가 하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녀석도 있었고 심지어는 눈을 비비고 있는 녀석도 있다. 용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사전 브리핑을 통해 전해 들었겠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과 실제로 목도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특히나 본래 이곳에 자리 잡았던 대륙인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다.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거대한 크기. 본능적으로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거대한 눈, 거대한 이빨과 발톱, 광택이 나는 흑백색의 외피는 어지간한 방어구보다 단단해 보인다. 아마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내구 수치는 일반 병사의 공격 정도는 가볍게 무시한다. 기본적인 마법 저항력 역시 상상이상. 괜스레 콧대가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물론 쉽게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약점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전장에서 이보다 듬직한 아군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제….” “공격! 공격! 마법 쏟아 부어!” “드래곤이다! 드래곤!” “날개를 공략해! 날개! 브리핑대로 하면 충분히 잡을 수 있어!” “전담부대 위치 확인! 드래곤 전담 부대 위치!” 벌써부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었지만 우리 자랑스러운 드래곤 장군님에게는 인간 동무를 비롯한 인민들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 모양. 부피가 커다란 꼬리를 한 번 휘두르자 주변에 있는 적 병사들이 한꺼번에 하늘로 솟구쳤다. 땅을 긁고 올라간 꼬리가 방패를 든 병력을 쓸어버리는 모습은 말 그대로 장관. 콰드드드드득! “어어어?” “피해!” 콰아아아아아앙! 마치 마법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모양새. 물론 겨우 이걸로 끝날 리가 없다. 숨을 크게 들어 마신 이후에 적이 있는 쪽에 브레스를 쏘아내자 커다란 빛줄기가 순식간에 뿜어져 나왔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은 한참이나 뒤로 밀려나기 시작. 거대한 방어 마법진이 브레스가 떨어진 곳을 감싸 안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우직우직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금이 간 보호 마법 사이로 쏟아진 브레스는 고스란히 적군에게 피해를 안겨주고 있는 중이다. 독박육아의 울분을 토해내듯 입에서 뿜어져 나간 브레스의 위력은 보기만 해도 오줌을 지릴 정도였다. 얼마나 피해를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속 시원한 장면이라고 하기에 충분했다. ‘사랑해, 임자!’ 나도 모르게 열렬한 응원을 보내게 된 것은 당연지사. 신나게 덩실덩실 봉산탈춤이라도 추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억울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주변에 보는 눈들만 아니었더라면 이미 디아루기아의 다리에 달라붙어 열렬한 입맞춤을 보내고 있었으리라. 그만큼 디아루기아는 속 시원하게 주변 적군의 뚝배기를 깨부수고 있다. 그녀와는 조금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율리에나 역시 마찬가지로 활약 중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에고소드는 좁고 밀집된 전장의 사이로 파고 들어가 일반 병사들의 목을 거침없이 꿰뚫었다. 물론 어느 정도 수준이 높은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기는 했지만 율리에나를 감당할 수 없는 병사들 역시 넘쳐난다. 사방팔방 모기처럼 날아다니며 종횡무진하는 한 자루 검의 모습은 정말로 신기하게 느껴진다. ‘이래서 에고소드! 에고소드!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형적으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한 종류의 인간. 내가 그런 인간이라는 걸 부정하지는 않지만, 내 전투능력 역시 이런 성격을 따라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양민 학살자!’ 나 스스로 내리기에는 조금 기분 나쁜 별명. 하지만 이 단어보다 내 전투능력을 잘 표현하는 말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입꼬리는 이미 찢어질 정도로 올라간 것은 당연지사.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늦지 않게 온 겁니까? -게드릭! 나의 게드릭! -늦은 건 아닌지 묻지 않습니까, 당신! -나의 게드릭!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건가요! 어째서 그동안…. -정말로 오랜만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길래…. 막스와 루리아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겁니까? 얼굴 보기도 참 힘들군요. 그래서 그 아픈 몸은 전부다 회복되신 게 맞습니까? 참으로 아프셨겠습니다. 네. 정말로요. -게드릭, 게드릭! -당신 제 말 듣고 있는 겁니까? 들리면 들린다고 뭐라도 대답을! -게드리익!! 순간적으로 머리를 뒤흔드는 소음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오히려 기분이 좋다. 듣기 싫은 잔소리와 게드릭을 울부짖는 목소리가 이토록 사랑스럽게 느껴진 것은 처음. 아마 서로가 서로의 울림을 듣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열심히 쏟아내고 있었으니까. 조금 머리가 울리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짜증이나 미친 짓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일단은 디아루기아 먼저. ‘아니요. 딱 맞게 도착해 주셨습니다, 디아루기아. 어떻게, 우리 똘똘이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잘 지내고 마다요. 당신이 아프다는 소식은 또 어디서 전해 들었는지 따라나서겠다는 걸 말리는 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네. 정말로 고생했었습니다. ‘걱정할 만한 상태는 아니라고 말씀하시면 좋았을 텐데.’ -그럼 아버지가 자신을 보러오지 않는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 합니까? 물론 당신도 당신 나름의 삶이 있고 일이 있다는 건 이해하고 있지만… 이런 쓸데없는 전쟁 때문에 가정을 등한시하는 일은 없도록 해주세요. 막스도 많이 섭섭해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루리아와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도록 해주세요.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네.’ -인간들은 어째서 매번 이렇게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건지….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가 일으킨 전쟁이 아닙니다. 저들이 시작했고 저들이 먼저 터뜨린 전쟁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소중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함이니 정상참작을 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디아루기아. 가만히 놔뒀다간 소중한 둥지가 있는 린델까지 병력을 밀고 들어올 텐데 그것만큼 최악의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이 안에서 가정을 지키는 동안 저 역시 바깥에서 가정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 ‘큼. 큼.’ -여전히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군요. 당신이라는 인간은…. 후우…. ‘뭐 전부 사실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시 한번 울분을 토해내는 얼굴에 왠지 모르게 짜증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딱히 반박할 수는 없는 모양인지 열심히 꼬리를 후려치는 걸로 화를 삭이고 있다. ‘그보다 지금….’ -박덕구라는 인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는 길에 그쪽으로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내렸으니까요. ‘네?’ -붉은 머리를 한 인간 말입니다. 차희라 그 사람. ‘요, 욜로….’ -욜로가 뭡니까? 대충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차희라가 박덕구 쪽으로 갔다고 생각하자 커다란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올라간 입꼬리가 더더욱 올라가기 시작했다. 러시아산 박덕구의 뚝배기가 완전히 산산조각 날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단은 이동할 준비를 해주세요.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위험할 겁니다. 하늘에 올라가 지속적으로 견제해 주시는 것도 좋고요. 아니… 그것보다는 함께 본대 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오랜만에 만난 부부의 대화치고는 형식적이고 딱딱했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계속해서 몸을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라 제대로 대화에 집중할 수 있을 리 만무. 이 와중에도 계속해서 율리에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통에 제대로 대화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게드릭, 게드릭 외치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때려대고 있는 중. 빠르게 대화 채널을 바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게드릭! 내 목소리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게드릭! 게드릭! 게드리리이기익! 게드리이이익! 한 번 숨을 가다듬고 마음속으로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아직까지 율리에나를 만날 준비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대충 스토리는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아아. 나의 율리에나.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겁니까.’ -게드릭! 목소리가 닿았군요. 게드릭! 나의 모든 것. 나의 사랑. 나의 전부!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게드릭! 나의 게드릭! ‘그동안 그대를 만나지 못한 것은 바로 저들 때문이오. 이 더러운 악마의 무리들이 지난 시간 나를 감금하고 고문하고 겁박했소. 그동안 얼마나 그대가 보고 싶었는지 모르오. 나의 율리에나여!’ -아…. ‘이 악마의 무리들은 대륙을 악마의 소굴로 만들려고 하고 있소.’ 사실 저번에 마력을 쪽쪽 빨리던 기억 때문에 그녀를 기피했을 뿐이었지만 충분히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괜찮은 변명. 조금 더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 사랑이라도 속삭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녀의 상태를 보니 사전 설명 같은 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더러운 놈들이. 이 더러운! 이 더러운 놈들이 감히!!! “…….” -찢… 찢어 죽일 것이다. 네놈들을 찢어죽일 것이야! “이게 뭐야.” -쓰레기 같은 놈들. 감히, 감히! 율리에나 주변에 검은색 기운이 가득차기 시작한 것.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든 것은 당연했다. 검은색 희미한 연기가 뭉치는 것은 물론 무언가 이상한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통제를 벗어난 분노로 인해 전설 등급의 무구 ‘저주를 내리는 율리에나’가 강제로 각성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뭔 소리야….” [율리에나의 봉인이 일시적으로 풀리며 실체화가 진행됩니다. -지속시간 60분] “뭐?” -네놈들, 네놈들. 네놈들이! 가암히! 감히! 나와 게드릭을 방해하려해? 네놈들이 감히이이이이!! “…….” ‘이런 미친.’ 입을 떡 벌리게 된 것은 당연했다. 시스템의 메시지에 혹시나 하며 율리에나를 살펴봤지만 정말로 실체화가 진행 중이다. 예전 저주받은 신단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눈. 괴기스럽게 생긴 검은색의 미친 여자 한 명이 그 자리에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본인이 몸을 가지게 됐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통제가 불가능해 보였다. 심지어 저주받은 신단에서 만났던 때보다도 강해 보인다. 대충 봐도 전설 등급 정도로 보이니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가아아암히! 감히! 나의 게드릭…. 나의 게드릭을 감금하고! 또, 또! 겁박하… 겁탈해? 네놈들이? 네놈들이!? 겁탈 당했다는 설정은 없었다. -주제도 모르는 놈들이! 저주, 저주가 내리리라. 저주가! 내리리라!! 네놈들에게 전부 저주가 내릴 것이다!! 죽어서도 고통 받을 것이다. 영원히! 영원히 뼛속까지 고통 받게 하리라!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그 괴기스러운 외모는 무언가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나보다 더 당황한 것은 전투를 치루고 있는 병사들. 저주를 뿌리는 것은 물론 사방에서 검은색 촉수를 불러내 주변의 적들을 찢어 죽이고 있다.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 꼴은 심지어 악마에게 영혼을 판 광녀처럼 보일 지경. ‘저건 모르는 척해야겠는데.’ 그 말이 맞다. # 409 회귀자 사용설명서 409화 디아루기아, 율리에나(3) 필사적으로 모른 척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게 당연했다. ‘미쳤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전투가 진행될수록 내 생각보다도 율리에나가 정신이 나갔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는 저렇게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간다.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과 재회했던 것도 잠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마의 세력이 자신의 연인을 납치하고 감금한 상황이다. 두 사람이 이전에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렇게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스토리에 괜스레 가슴이 먹먹해지기는 했지만 일단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그녀가 보여주는 모습이 그만큼 괴기스러웠기 때문. -저주가! 저주가 내리리라! 저주가! 네놈들의 주검을 이끌고 온갖 대륙을 돌아다닐 것이다. 죽어서도 고통 받을 수 있게 가장 비참한 죽음과 마지막을 선사해 주리라! 이 쓰레기 같은 놈들! 이 더러운 놈들! 네놈들의 시체를 짓밟고 네놈들과 관련된 모든 이를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영겁의 고통을 받게 하리라! 검은색 연기가 밀집해 있는 적 병력을 감싸는 것은 순식간. 계속해서 정화 주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지만 율리에나의 저주는 신성력으로 컨트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단기간에 효과를 보는 종류의 능력은 아니었지만 전쟁터에 가운데 선 병력에 영향을 주는 것은 충분.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제기랄! 가까이 오지 마!” “아아아아아아악!” “막아! 오지 못하게 해! 어머니, 어머니!” “사, 살려…. 도망쳐! 도망쳐! 다 죽을 거야! 우리는 다 죽을 거라고!” 이쪽이 기분 좋아질 대사를 외치고 있는 녀석부터 뜻밖의 효자가 된 녀석까지. 찢어진 입을 벌리며 검을 휘두르는 율리에나의 모습은 검사라기보다는 미치광이에 가깝다. “오지 마!” -받아 마땅한 고통이다! 꺄히하하하핫! 벌레 같은 인간들! 흉측한 인간 놈들! 네놈들이 받아 마땅한 고통이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어어어어!! 그녀에게서 사방팔방 뻗어 나오는 촉수들이 적군 병사의 갑옷을 너무나도 쉽게 뚫어냈다. 심지어 촉수에 찔린 이들은 쉽게 죽지도 않는다. 부들대며 온갖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이들을 보니 이미 저주의 영향을 받고 있는 모양. 이미 죽은 병사의 시체를 몇 번이나 난도질 하고 있는가 하면 검의 손잡이로 계속해서 머리를 후려치는 모습도 보인다. 전투가 진행될수록 저주의 영향을 받은 적 병사들이 혼란스러움에 소리를 질러댔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공포를 느끼는 게 당연하리라. 심지어 나 역시 이 공간에 함께 있고 싶지 않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순식간. 아군 병력도 질린다는 듯이 율리에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괜스레 양심이 찔려와 한마디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위험하군요. 제, 제가 억눌러 왔던 봉인이 풀린 모양입니다.” “아….” 당연히 개소리지만 일단은 이렇게 우길 수밖에 없다. 누구한테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병사들을 보니 약간이지만 안심할 수 있었다. ‘이래서 평소 이미지가 중요해.’ “그, 그렇군요. 명예추기경님, 그럼 저건….” “일단 여러분은 길을 따라 본대와 합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명예추기경님은….” “저는 먼저 가 있겠습니다.” “어떻게….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뜬 이후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디아루기아를 바라보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모양이다. 나 역시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주변 병사들은 혹여나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나를 보호하고 있었지만 현재 이곳은 확실하게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율리에나가 온갖 시선을 다 끌어주고 있었기 때문. 고군분투해 주는 그녀와 함께 싸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절대로 율리에나와 같은 공간에 있기 싫어서가 아니다. 이쪽 나름대로 해야 하는 일이 있었으니 이건 불가항력에 가깝다. ‘그래. 이건 불가항력이야.’ -게드릭! 게드리이이이익! 내가 멀어지고 있는 것을 눈치챘는지 뒤쪽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귀가 떨어질 것 같이 들려왔다. 유리창을 긁는 듯한 목소리는 오금이 저려올 정도. 서둘러 이쪽으로 오고 싶은 것 같지만 이미 그녀의 주위로 몰려오는 적에게 발목을 잡혔다. 바야흐로 율리에나 레이드가 시작 된 것이다. -게드릭! 감히! 네놈들이! 네놈들이! 나의 게드릭을! 당장 비키지 못해?! 벌레만도 못한 인간 놈들이! “둘러싸!” “저주에 영향받지 않게 주의한다. 전위들은 앞을 지켜!” “검에 베이지 마라!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며 원거리전으로 끌고 간다. 정화 마법 유지해!” 전쟁터 한가운데서 펼쳐진 이상한 싸움의 모습은 장관이라면 장관이라 말할 수 있는 장면. -비켜! 비키라고! “아아아아아악!” “제기랄!” -저주가 내리리라! 저주가! 나와 게드릭을 방해하는 모든 이는 저주를 받아 처참히 죽어갈 것이다! “커헉!” -아아! 게드릭!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나의 게드릭!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당신의 작은 아기 새가 곧 당신을 찾아가겠습니다! 어떻게 봐도 아기 새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외관. 괜스레 식은땀이 흘렀지만 최선을 다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조금이라도 저 정체불명의 생명체와 멀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 뛰자 이윽고 내가 올라타기 쉽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디아루기아가 시야에 비친다.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가지고 온 게 실수였나 보군요. “아뇨.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단지…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단 위로 올라가겠습니다.” -당신을 태우고 싶지는 않지만…. “…….” -알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황급히 발걸음을 옮긴 이후 뿔 부분을 꽉 손에 쥐자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했던 예비대가 점점 작게 보이기 시작. 모두 감동이라도 한 모양새다. 적절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동화 속 주인공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의 예를 표현하는 것으로 마무리. 역사서에 나오는 영웅들의 출사표 같은 느낌을 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용과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중의 선망을 받기에 충분하다. 하물며 신의 선택을 받은 사자가 용을 타고 있다. 무언가 내가 전부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 맹목적인 시선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저들의 입장에서는 동경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리라. 이제는 익숙한 시선을 겸허히 받아들일 때도 됐다고 생각했다. “부탁드립니다, 명예추기경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짧게 인사를 나눈 뒤, 화살과 마법이 솟구치는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디아루기아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멋있는 척을 한 이후에야 그녀의 뿔을 두드리며 입을 열 수 있었다. 이미지 관리는 중요하니까. “갑시다, 디아루기아.” -하늘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지상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당신을 상대하기 위한 전담부대가 이곳으로 향하고 있을 테니까요. 굳이 이점을 살리지 않을 이유가 없죠. 아, 그리고 날기 전에 날갯짓 한번 해주시고 커다랗게 하울링도  부탁합니다. 모두 이쪽을 쳐다볼 수 있게.” -저는 구경거리가 아닙니다만.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광대 흉내를 내라는 게 아닙니다. 쇼를 보여주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이게 다 사기를 높이기 위한 작업입니다. 당신도 당신의 존재가 얼마나 상징적인지 신성한 민주혁명 때 목도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저들한테 뽐낸다고 생각하시고 멋지게 포즈 한번 잡아주세요.” -그다지 내키지 않습니다만. “이 싸움은 역사 속에 기록될 겁니다. 아마 당신과 제 모습 역시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 나올 겁니다. 용의 선택을 받은 인간 같은 걸로 말입니다. 우리 디아루리아가 배울 역사책에 등장하는 겁니다. 악마의 군대에 대항하는 빛의 연금술사와 그의 와이프! 당신도 대륙에 얼마 남지 않은 용으로서 균형을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저들이 악마의 군대가 맞기는 합니까? “암요. 그렇고말고요. 만약 악마의 군대가 아니라고 한들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편인데. 아, 그렇다고 해서 저들이 어둠의 군대라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라이오스에 악마군주를 소환한 건 틀림없이 적들의 수장이 맞습니다. 악마 소환사 진청. 그자가 이 일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 “정말이라니까요. 자, 빨리 똘똘이에게 존경받는 부모가 되어 봅시다. 우리 디아루리아 역시 인간들의 존경을 받을 겁니다. 틀림없이요.” -…….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 고개를 들어 올린 채 커다란 소리를 내지르는 모습은 누가 봐도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다. 아군과 적군 가릴 것 없이 디아루기아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점프하듯 하늘로 뜬 이후에는 여러 마법들이 그녀를 목표로 올라오기 시작. 물론 저런 멍청한 공격에 맞아줄 정도로 디아루기아는 느리지 않다. 위협이 되는 공격이 있기야 하지만 하늘에서 요리조리 공격을 피하는 모습은 마치 잘 만들어진 공중 전투 신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나는 그녀의 위에 있으니 4DX를 경험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얼굴로 쏟아지는 바람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쉬기도 힘들 지경. 입을 열기 쉽지 않아 속으로 말을 걸자 다시 한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른 것은 피하셔야 됩니다. 아마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마법일 겁니다. 속박 마법에 한 종류처럼 보이는데 걸리면 그대로 추락할 겁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마력의 밀집도를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겠군요. ‘기본적인 홀드 마법은….’ -아마 저항할 수 있을 겁니다. 그보다 떨어지지 않게 꽉 붙잡고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푸른색의 커다란 마력 밧줄이 사방팔방에서 디아루기아를 향해 날아들었다. 가지고 있는 용 숨결 물약을 꺼내 던지자 커다란 소리와 함께 푸른색의 마력 밧줄이 터져나간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녀를 향해 뻗어오는 공격은 쉽게 피하기 힘들어 보였다. 디아루기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 듯. 수준 높은 마법사가 쏘아 보낸 마법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 모양인지 피할 수 없는 것들은 상쇄시키고 있었다. 단순히 요리조리 피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이런 행동은 적 지휘부의 신경을 긁기에 최적의 행동이리라. 직접적인 피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적군에게 피해가 누적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디아루기아를 위한 전담 부대와 전담 마법이 만들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거다. ‘우리 현성이는 어디 있나.’ 계속해서 찾고 있기는 했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물론 쉽게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마법을 피하고 있는 디아루기아의 등 위였으니까. 소강상태에 접어들 때마다 최대한 살피고 있지만 워낙 범위가 넓다 보니 전부 다 체크하기가 쉽지 않다. 한 가지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에 목표물로 설정했던 마법사 부대가 근처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 아무래도 이쪽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무사하겠지.’ 이곳을 보고 있다면 틀림없이 본대로 몸을 움직이고 있으리라. 현재 아군 전력에 여유가 생기고 있었으니 충분히 몸을 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쪽에서 거대한 마력의 유동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마력의 유동이 아니라 거대한 압력이었다. ‘뭐야, 저게.’ 어처구니없게도 하늘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은 운석. “미친….” 똘똘 뭉쳐 있는 본대를 향해 커다란 운석 하나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어썸하네. 진짜. 진청, 이 쓰레기 같은 새끼….” # 410 회귀자 사용설명서 410화 기쁘다. 빛기영 강림하셨네(1) 교묘하게 잘 짜인 덫. 캐슬락으로 얼마나 해 쳐먹으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쌍욕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적군 입장에서도 이걸 최적의 상황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저쪽에서도 충분히 마음이 급했던 것이 분명. 최대한 병력을 밀어 넣은 뒤 준비한 마법을 떨어뜨리고 싶었겠지만 갑작스레 등장한 변수들로 인해 작전이 꼬인 것이 분명했다. 만약 내가 진청이었다면 아군 마법사의 체력을 조금 더 깎아 놓은 이후에 저 마법을 발동시켰으리라. 물론 현재 타이밍이 결코 아쉬운 시기라고 말할 수는 없다. 본대는 여전히 적 병력에게 감싸인 형국이었고 저 마법이 아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정말로 떨어진다면 그 시점에서 전쟁은 끝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밑에서도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당연하다. 심지어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마력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적군 마법에 대응할 수 있는 방어 마법진을 구성하는 것이 확실하리라. 하지만 급조된 방어 마법이 저 운석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어째서 적이 계속해서 캐슬락에 틀어 박혀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준비하고 있었던 건가.’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확률은 높다. 단순히 캐슬락을 미끼로 삼은 걸로 끝난 것이 아니다. 저런 종류의 마법을 펼치기 위해서 시간과 인력이 필요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전쟁이 시작된 시점, 아니, 어쩌면 내가 메시지를 보낸 이후부터 준비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지휘부 쪽에 저 마법을 실현하고 유지하는 장치가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아군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범위도 제한하는 것은 물론 정확한 좌표, 심지어 혹시 모를 오류들을 계산해야 된다고 가정했을 때 라이오스에서 떨어졌던 마법보다 체계적이다. 공화국에서도 유능한 마법사들이 많은 것은 알고 있지만 아마 이 마법에 도움을 준 것은…. ‘마도 왕국.’ 안 봐도 비디오다. 어쩌면 이건 메시지이자 복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라이오스에서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진청 쓰레기의 의지가 달린 집념의 한 방이라 해석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마음의 눈으로 상공을 올려다보았다. [준신화 등급의 마법] [메테오] 현현한 마법의 등급은 무려 준신화 등급. ‘막을 수 있나?’ 빛 폭탄 물약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한 번으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최대한 마력을 벗겨낸 이후 터뜨려야지 그나마 비벼볼 수 있으리라. 물론 그렇다고 성공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저건…. “일단 최대한 가까이.” 그래도 시도할 수밖에 없다. 저런 게 떨어지면 내가 이뤄놨던 모든 것을, 앞으로 얻을 모든 것을 잃게 되니까. 디아루기아가 잠깐 머뭇거린 사이 거대한 방어 마법진이 아군 병력의 위에 드리우기 시작. 이윽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충돌음이 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본대에서 구성한 방어 마법이 운석을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잠깐 동안 기대하기는 했지만 녀석을 주춤하게 만든 것이 전부. 하늘에 있는 구름과 공기를 몰아내며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가 부자연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우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보호막이 완전히 박살 나버린 상황. “브레스! 브레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뭐라도 전부 때려 박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했다. 내 목소리에 숨을 크게 들이마신 디아루기아의 입에서 다시금 거대한 빛이 쏟아지는 게 보인다. 그녀를 잡고 있던 내 몸이 뒤로 밀려날 정도, 하늘에서 운석을 향해 브레스를 쏟아내는 용의 모습은 신화 속에서 나올 만한 장면이기는 하지만 그게 현실로 일어나니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제기랄. 아직 부족한데….”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더 가까이 갔다가는 분명 휩쓸립니다. “아뇨. 위로 올라갑니다. 막을 수 있어요.”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수단은 가지고 있습니다.” -……. “그냥 올라가요. 좀! 믿음이 없네, 믿음이.” -그다지 신뢰가 가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믿음이야 원래부터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것 같고요. 말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운석에 접근하는 디아루기아. 그사이 다시 한번 아군의 방어 마법이 캐스팅되고 다시 한번 운석이 반투명한 막에 부딪쳤다. 약간의 기대를 해보기는 했지만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더욱 간단히 부셔져 내린다. 물론 마법 자체에 내장된 마력을 계속해서 깎아내리는 걸로 무의미한 일은 아니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순간적으로 오른팔을 바라보자 시야에 비친 것은 김현성이 선물해 준 작은 방패. [완전하지 않은 아이기스의 방패-전설 등급] [하늘의 신이 전쟁의 여신에게 내린 방패였습니다.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던 예전과는 달리 이 방패는 몇 개의 조각으로 분리되었습니다. 방패에 담겨져 있었던 마력 덕분인지 일부분임에도 방패는 그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인 항마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많은 마력을 사용하여 짧은 시간 동안 아이기스의 방패 일부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소환된 아이기스의 방패는 치명적인 공격을 조건 없이 막아줍니다.] ‘이걸로도 통하는 건가?’ 치명적인 공격을 무조건적으로 막아준다는 설명은 있지만 이건 전설 등급 이하의 것에만 반응할 확률이 크다. 애초에 준신화부터는 규격 외. 박물관 때를 생각해 보면 이 자그만 방패가 저렇게 커다란 마법을 막을 수 있을까 싶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브레스. 다시 한번.”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상관없습니다. 일단 저것부터 막습니다. 기왕 마지막으로 쏘시는 김에 있는 마력 없는 마력 탈탈 털어 넣어요.”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겁니다. 다시 한번 토해내는 용의 숨결. 그사이 다시 한번 방어 마법진이 생성된다. 정확히 밑에서 어떤 소리가 튀어나오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아군 마법사들은 비명을 내지르고 있으리라. 어쩌면 라이오스 때의 정하얀처럼 피라도 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런 마법을 현현시킨 적군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이후가 어찌되든 양쪽 마법사는 당분간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리라. ‘아마 지금도 한계일 거야.’ 전장을 둘러볼 여유는 없지만 보지 않아도 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로 괜찮은 겁니까? 정말로? 무슨 수가 있는 겁니까? “아이기스!” 불안해하는 디아루기아를 뒤로 하고 세 번째 보호막이 박살 난 직후 곧바로 소리쳤다. 작은 방패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자 눈앞에 거대한 방패 하나가 생성되기 시작. 이펙트 하나는 화려해 보이지만 얼마나 버텨줄지는 알 수 없다. 디아루기아의 머리 위에서 계속해서 방패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역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방패가 우직거리며 부서진다. “아이기스! 아이기스! 아이기스!” ‘치명적인 공격을 무조건 적으로 막아주기는 개뿔!’ 만약 돈 주고 구매했다면 무조건 환불했으리라. 마력은 이미 무식할 정도로 많이 집어 삼킨 상태. -더 이상은…. “알겠으니까 빼! 빼! 빼요! 지금 빨리!” 콰지지직! 콰드드드득! 거대한 방패가 부서지자 몸이 탈 것 같은 열기가 느껴진다. 눈앞에서 바로 거대한 운석이 떨어지는 걸 목도한 것은 아마 전 인류를 통틀어 나밖에 없으리라. 이대로 뒈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 그사이 다시 한번 네 번째 보호막이 하늘 위를 감싼다. 순간적으로 녀석이 멈칫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점점 땅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다. ‘조금 더 깎는 게 좋을까?’ 내재된 마력을 조금 더 줄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 만무. 일단은 품안에 있는 물약 두 개를 꺼내든 이후 하늘 위로 집어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새끼! 빛의 힘이나 맛봐라! 개자식아!” 이걸로 막아지면 좋겠지만 그렇게 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화아아아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빛이 주변을 밝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눈이 멀 것 같은 빛. 거대한 빛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는 운석을 좀 먹기 시작했다. ‘그래. 그거다! 슈바! 그거야! 힘내라! 슈바! 힘내! 이 새끼야!’ 화아아아아아아아악! 운석의 일부가 빛 무리에 완벽히 휩싸인 광경은 내가 가지고 있는 물약이 효과가 있다는 걸 말해주는 듯했다. 닿은 곳부터 순차적으로 거대한 굉음을 내며 빛이 되고 있다. 일어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지만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작전이 맞아 떨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고 있는 녀석이 뭔가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인 것은 바로 그때. “어?” 운석이 반으로 쪼개진 것이 시야에 비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한쪽은 완전히 빛 무리에 휩쓸리고 있지만 나머지 한쪽은 그렇지 않다. 떨어져나간 반쪽이 그대로 아군 병력을 향해 떨어지는 모습은 가관. “디아루기아! 브레스! 브레스! 브레스!! 브레스!!” -무, 무리…. 그보다 중심을! 떨어집니다! 떨어져요! “제길! 제길!!” 순간적으로 얼굴을 구겼을 때 떨어지던 반쪽이 다시 한번 깔끔히 잘려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어떤 놈일지는 뻔할 뻔 자.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런 걸 잘라낼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을 리가 없다. ‘현성아! 시바! 믿고 있었다!’ 물론 지금 저걸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빛 폭탄 물약이 운석을 완전히 집어 삼킨 이후 폭발의 충격에 디아루기아가 땅으로 고꾸라지고 있었기 때문. 최대한 뿔을 꽉 붙들기는 했지만 당장에라도 튕겨져 나갈 것 같다. “제길!!” -꽉 붙잡…. 콰아아아앙!! “콜록! 콜록! 콜록! 디아루기아! 디아루기아, 괜찮습니까?” -버틸… 만합니다. 당신은…. “저도 괜찮습니다.” ‘운석은 어떻게 됐지?’ 묘하게 주변이 조용하다. 그보다는 전장 전체가 조용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와 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디아루기아를 바라보는 병력들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 이 침묵은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본 충격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해도 방금 그걸 막아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라이오스 때는 반쯤 주작이었지만 그 비슷한 것을 막는 것에 성공했다. 그 와중에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빛의 가루들은 병력 전체를 감싸고 있는 중. 내가 독실한 신자였다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할렐루야를 외칠 만한 광경이라 할 수 있으리라. “베니고어의 재림…. 베니고어의 재림이다….” “베니고어 여신님의 재림이다!” ‘이거 분위기 좋은데.’ 이런 효과까지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지만 내 생각보다 반응이 좋다. ‘효과가 좋을 만하네.’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운석의 가루들이 완벽하게 빛의 장막을 만들어내고 있다. 마치 빛의 커튼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 그 가운데 용을 탄 사내의 모습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완벽하다. 과도한 마력을 사용한 덕분에 다리가 후들거리기는 했지만 본능적으로 한마디 꺼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음성 증폭 마법을 걸고 입을 뗐다. -싸움을! 멈춰주십시오! 친애하는 공화국 여러분! 뭔가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느낌. -무기를 버려주십시오! 역시 난 전장에 설 때보다 입을 털 때가 즐겁다. # 411 회귀자 사용설명서 411화 기쁘다. 빛기영 강림하셨네(2) 입을 털기에 적절한 타이밍이기는 했다. 한차례 위기가 지나가기는 했지만 아군이 열세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마법사들의 마력은 물론 디아루기아도 여유가 없는 상황. 준신화 등급의 마법에 둘러져 있는 마력을 깎아내기 위해 한계까지 브레스를 뽑아댔으니 지치는 것이 당연하리라. 아마 김현성도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녀석이 슈퍼맨이라고 한들, 전장에서 체력을 소비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 커다란 마법을 받아냈으니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 정상이라면 이 이상 힘을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본인에게 안 좋은 영향이 있으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남은 빛 폭탄도 한 병이고….’ 아군은 여전히 적에게 둘러싸여 있다. 적의 마법사들도 한계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기에 완전히 불리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상황이 좋지 않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이 방법이 먹힐지 않을지는 미지수지만 일단 열심히 입을 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간만에 전장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타이밍이었으니까. ‘심지어 그림도 좋고.’ 빛 무리가 내리는 가운데 있는 신의 사자. 피아를 가리지 않고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다시 한번 천천히 뻗어나간 목소리. 일시적이지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여러분! 싸움을! 멈춰주십시오! 친애하는 공화국 여러분! 무기를 버려주십시오! “베니고어의 재림이다.” “베니고어 여신의 재림이다.” “명예추기경님….” “명예추기경님! 위험합니다!” 아군 갤러리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공화국 측의 반응이다. 재빨리 눈치를 살 핀 것은 당연지사.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한 반응을 보인 이들도 있지만, 머뭇거리는 이들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가 더욱 많은 느낌. 사전에 교육을 받은 이들이니 내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 역시 이해는 간다. 그럼에도 일단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기에 내 목소리는 분명히 전달될 것이다. -무기를 버려주십시오. 더 이상의 싸움은 서로에게 무익합니다. 더 이상의 전쟁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것입니다. 이 싸움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싸움은 여러분의 이익과 가족을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검을 들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는 겁니까. “…….” -여러분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광기로 얼룩진 이 싸움은 공화국을 위해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교국은 결코 공화국을 침범한 일이 없으며, 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베니고어와 엘룬의 선택을 받은 사자로서 지금 제가 하는 말에 거짓이 있다면 두 신이 저를 벌할 것입니다. 제가 거짓을 고하고 있다면 베니고어 여신께서 저를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결코 교국은 먼저 공화국을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신 내용은 결코 진실이 아닙니다. 눈을 뜨십시오. 눈을 뜨십시오! 눈을 떠 여러분이 진정으로 봐야 할 것을 바라봐 주십시오! 대응은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힘을 모아 싸워야 할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상황을 바라보며 웃음 짓고 있습니다. 현 상황을 초래한 악마 소환사 진청은 공화국이라는 방패에 숨어 여러분을 전쟁터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안위와 대륙의 혼란을 위해 공화국과 교국의 싸움을 조장하고 선동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검을 맞대고 있는 것이야말로 대륙에 뿌리내린 악의 세력이 바라는 일입니다. 우리의 적은 서로가 아니라 앞으로 이 대륙에 다가올 위협입니다. 언젠가 닥쳐올 그 위협을 위해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 “…….” -모든 인류가 힘을 하나로 모으지 않는다면 앞으로 다가올 위협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기를 버려주십시오, 여러분. 더 이상의 싸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음모와 선동으로 일어난 이 전쟁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어째서 아무런 대응이 없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쪽의 말에 대응하는 순간 말리고 말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공화국 측 병사들이 내 말에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실제로 신성력을 사용하는 사제들은 조금 더 말을 들어봐야겠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런 것 따위 상관없을 것이다. 방금까지 서로에게 검을 휘둘렀던 상황. 갑작스레 이런저런 말을 한다 해서 불씨가 꺼질 리가 만무하다. 만약 여신의 거울이 있었다면 확실한 선동이 가능했겠지만 팩트 없이 말로만 떠드는 것은 확실히 설득력이 없다. 계속해서 이 상태라면 아주 작은 신호탄으로 이 전쟁에 기름이 뿌려질 것이 분명. 악마 소환사 쪽은 굳이 내 말에 대응할 필요도,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리라. 하지만 계속 입을 열 수밖에 없다. -국가와 그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우리는 검을 내리고 손을 맞잡아야 합니다. 교국은 공화국의 우방으로서 결코 여러분에게 먼저 검을 들이밀지 않을 것입니다. 갈등의 역사는 이 전쟁 이후로 사라질 겁니다. 그렇게 노력할 것입니다. 검을 버려주십시오. 오늘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 첫 걸음입니다. 지속된 전쟁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큰 발걸음입니다. 싸움을 멈추십시오. 싸움을 멈춰주십시오! 문제는 그 기름이 무엇이냐는 것. -우리는 더 큰 가치를 향해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무기를 버려주십시오! 계속해서 입을 열고 있었던 바로 그때. 이쪽을 향해 날아온 화살 한 발. ‘이 새끼.’ 황급히 마력을 끌어올린 것은 순식간.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지만 제법 힘이 실려 있다. 손가락을 튕겨 급하게 벽을 세우기는 했지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뒤로 밀려난다. 한심하게 땅바닥을 구르지는 않았지만 아마 새로운 신호탄이 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때마침 다시 한번 적 진영에서 폭음이 들려오기 시작. 주작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측에서 들려온 폭음을 시작으로 다시 한번 흥분한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기랄!” “멈추지 마! 함정이다!” “명예추기경님! 이 더러운 자식들이!” “마법사들은 뭘 하고 있어!” “무기 들어! 무기! 전투 준비한다! 각 부대는 모두 전투 준비!” “밀리지 마! 버텨! 버텨!” “명예추기경님을 보호해! 남은 마력으로 보호 마법을 빨리!” 말은 길었지만 다시금 광기가 내려앉는 것은 순식간. 밀집된 병사들 사이로 계속해서 밀고 들어오는 적과 어떻게든 밀리지 않기 위해 버티는 아군. ‘이거 안 좋은데….’ 확실히 좋지 않은 상황. 이대로 전투가 지속된다면 어느쪽이 이기더라도 큰 피해가 생겨날 것이다. 물론 아군이 불리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대로 이긴다고 하더라도 서로에게 상처밖에 남지 않은 승리다. 주변국만 환호할 상황이 될 터. 물론 내가 원하는 바는 그런 상처뿐인 영광이 아니다. “아아아아아아악!” “더러운 악마의 하수인들이!” “개자식들! 가만히 놔두지 마! 화살 퍼부어! 화살!” -싸움을 멈춰주십시오! 더 이상의 싸움은 불필요합니다. 친애하는 공화국 여러분! 여러분은 속고 있습니다. 이 이상 악의 세력이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힘들 거라는 건 알지만 싸움을 멈춰주십시오! 증오와 분노를 버리고 광기를 떨쳐내야 합니다.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죽여!!! 제기랄!!” -싸움을 멈추세요! 여러분! 이 이상 무의미한 피를 흘려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밀리지 마!” -싸움을 멈춰주십시오! 여러분! 싸움을!! 멈춰주세요!! “이 더러운 공화국의 개들아!” “교국의 꼭두각시들! 가만히 놔두지 마!” 목이 터져라 외쳐보지만 이미 한번 광기가 휩쓸고 간 전쟁터에 내 목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다. 의도적으로 끼어 있는 프락치들은 오히려 더욱더 커다랗게 목소리를 높이며 전장에 혼선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억지로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는 이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지만 그런 이들을 다 잡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똑똑하네. 시발.’ 아마 내가 녀석들이었어도 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이 분명. 유리한 상황에 서 있는 만큼 대화 채널을 완전히 차단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느꼈으리라. 아쉽기는 한데. 조금만 더 전장의 분위기가 가라앉았었다면 전투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수습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 ‘제기랄. 이거 잘 안 풀리겠는데….’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마 더러운 악마 소환사 측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끝났다.’ 라든지. ‘이대로만 가면 돼.’ 라든지. ‘드디어 결정타야.’ 등등 숨겨왔던 비장의 수가 무위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충분히 이득을 봤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그럴 줄 알 거야. 분명.’ 조금 이르지만 벌써부터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준비한 선물 하나를 받기 전이었다면, 충분히 그렇게 행동할 만하다. -싸움을 멈추십시오!! 잠시 머리가 아프기는 했지만 멀리서 보이는 이지혜의 신호에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내 예상보다 빠르기는 했지만 충분히 기분 좋은 상황. 박장대소라도 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천추의 한처럼 느껴졌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지금 저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가 모르고 있어야 했으니까. 나는 전혀 모르고, 가면 쓰레기 진청이 알고 있어야 하는 일이다. 몇몇 이는 벌써부터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 아마 사랑스러운 회귀자 역시 입술을 깨물고 있으리라. “더러운 새끼들!” “이 악마 같은 공화국 새끼들아! 네놈들이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이 더러운 자식들! 개자식들!” “악마 소환사….” “무슨 개소….” -제길! 전투 준비! 전투 준비!! 갑작스럽게 변한 나의 태세전환에 적들도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다면 내가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지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저 멀리서 보이고 있는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병력. 안개의 숲에서 특별히 모셔온 지원군. 물론 내가 데리고 온 것은 아니다. 아! 비공식적으로는 내가 모신 게 맞지만 공식적으로는 악마 소환사 진청 쓰레기가 모셔온 지원군이 될 것이다. “어, 언데드….” “언데드?” 공화국의 갑옷을 걸치고 공화국의 깃발을 들고 있는 언데드들.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이 더러운 악마 소환사야!! 악마 소환사 진청이 안개의 숲에서 희생시킨 자신의 병력을 언데드로 만들어 끌고 온 것이다. -신이 네놈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 더러운 악마야!!! 신의 이름으로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가면 쓰레기. 악마 소환사 진청. 갑자기 나타난 뜻밖의 언데드에 기존 병력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 412 회귀자 사용설명서 412화 기쁘다. 빛기영 강림하셨네(3) 시야에 비치는 광경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 저 언데드들을 보고 탄식을 내뱉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아까와 같다. 아군 측은 너무나 황당한 장면에 입을 벌리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고 적군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다. 일단 저게 정말로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알 수가 없는 상황. 다급한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저것이 악마 소환사 진청이 만들어낸 지원군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공화국 병력은 아직까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길….” “전투 준비! 전투 준비해! 최소 영웅 등급 이상의 언데드들이다.” 누군가가 말한 그대로. 한소라와 정하얀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언데드들은 흔히 볼 수 있는 일반 등급이나 희귀 등급의 언데드 들과는 급이 다르다. 최소 영웅 등급 이상, 간혹 리치들도 눈에 띌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솔직히 나도 이 정도까지 해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예상하지 못했다. 항상 상상 불가능한 모습을 보여준 정하얀이었지만 정말로 악마의 군대를 만들어 버렸다고 느껴질 정도. 종류는 다르지만 바로 앞전에 떨어진 메테오와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을 업적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하긴 벨리알까지 소환했는데… 이게 뭐 대수겠어.’ 물론 악마군주가 소환되는 것과 비교하면 질이 조금 떨어진다 말할 수 있기는 하지만 검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는 그들의 모습은 충분히 위협적이라 할 만했다.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더 그럴 듯하다. 단신으로 있었던 벨리알과는 달리 일단은 숫자로 느껴지는 압박감 같은 게 있었으니까. 현재 김현성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뻔할 뻔 자. 조금 약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그 동안의 경각심을 만족시켜 주고도 남으리라. 사실 조금 더 악랄한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여러 가지 후보들을 물색해 봤지만 이 정도가 딱 인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마지노선. 더 이상의 설계는 내 양심상 할 수 없어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 체력적으로 지쳐 있는 타이밍. 적군도 아니라 공화국 병사들을 언데드로 만들어 버린 광기어린 가면쓰레기 진청의 모습은 1회 차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 전쟁의 승리와 혼란을 초래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악마. 그게 바로 진청쓰레기의 진짜 정체였다. “크르르르르….” “케에에에에에에엑!!!” 종류도 다양. 단순히 병력을 많아 보이게 만들기 위한 하급 스켈레톤부터 생전 그대로의 능력을 유지하고 있는 언데드,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는 다크나이트들과 리치. 죽어서도 장기말이 되어 고통 받고 있는 죽은 자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악마 소환사에 대한 원망과 충성심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천천히 입을 연 것은 당연. 지금처럼 좋은 타이밍은 좀처럼 오지 않는 다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이게 바로 악마 소환사의 정체이며 목적입니다!! ‘아암 그렇고 말고.’ -저 언데드들을 보십시오. 공화국의 깃발을 들고 있는 저 타락한 존재들을 눈으로 직접 바라보십시오. 이 전쟁은 교국과 공화국을 위한 전쟁이 아닙니다. 한 타락한 악마의 음모와 선동으로 만들어 계획된 전쟁입니다. 눈을 뜨십시오! 눈을 떠 저희와 함께해 주십시오. ‘함께 하즈아!! 가즈아!!!!’ -서로를 향해 검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대륙의 존망이 걸려 있습니다. 저 타락한 존재들의 손에 대륙을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교국이지만 다음은 공화국입니다. 함께 검을 들어주십시오! 이 땅에 살아가는 대륙의 모든 종족을 위해 힘을 모아 주십시오!! ‘하나가 되자!!’ -이미 공화국의 지도부들이 자리한 곳은 악마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신의 편에 함께 서십시오! 빛과 함께해 주시기를 간절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빛의 군대와 함께해 주십시오! ‘빨리! 이 새끼들아! 한시가 급하다!’ 마치 선거에 나가는 정치인 같은 출사표. 제법 강단 있게 말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분위기가 조금 축 쳐진 느낌이다. 최대한 이빨을 털고 있지만 아직도 공화국의 병력들은 제대로 호응해  지 않고 있는 상황. 하지만 내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고는 판단할 수는 없다. 아군을 향해 공격해 오지 않고 있는 이들만 봐도 그건 알 수 있다. 계속해서 공격을 울부짖던 적 야전 지휘관들과 광기에 몸을 담은 전쟁에서 동료를 잃은 이들까지 공통된 적의 등장에 침을 삼켜 넘길 뿐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 아까와는 확실하게 다른 상황. 증거 없이 날조로 중얼거렸던 이전과는 다르게 현재 우리들이 보고 있는 것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내부적으로 혼란이 들어서는 것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나 다름없다는 거다. “뭐, 뭐야. 이게….” “정말로 아군의 지원 병력인가?” “신이시여….” 특히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우리 사랑스러운 바리안의 신도들. 공화국을 위해 전장에 섰던 신앙심 깊은 사제님들은 눈을 감고 자신들의 신을 찾고 있었다. -바리안 님의 신도 여러분! 함께해 주십시오! 신을 위해 싸워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누구하나 먼저 움직이고 있지는 않지만 효과는 있다. 방금과는 다르게 발등에 불 똥이라도 떨어진 듯 내 외침에 대응하고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기껏해야 대변인의 목소리가 들려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들리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악마 소환사의 목소리. 최대한 침착한 척하고 있지만 조금 흥분한 게 느껴질 정도의 목소리였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리라. 지난 라이오스 사태 때에 이어 다시 한번 악마 소환사로서의 업적을 쌓게 생겼으니 저리 흥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벌써부터 악마 관계자에게 칭찬 받을 생각에 온 몸이 달아오른 게 틀림없으리라. ‘쓰레기 같은 새끼.’ -모두가, 모두가 조작된 내용입니다. 저 언데드들은 공화국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전투에 혼란을 주기 위한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자작극에 불과합니다. 라이오스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흑마법으로 모두를 기만하고 있는 악마입니다. -나는 베니고어와 엘룬에게 선택받은 빛의 사자다. 하늘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악마 소환사와 그의 하수인 무리들아! 내게 주어진 빛은 너희 악마들을 심판하기 위한 빛이다. 순진한 병사들을 속여 무의미한 피를 흘리게 하고 오직 대륙에 혼란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너희들을 심판하기 위한 빛이다. 만약 내가 저 어둠의 군세들과 그 어떤 연관이 있다면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신이 나에게 신벌을 내릴 것이다. 이 신성력이 바로 그 증거이며. 네 거짓을 부정하는 가장 커다란 힘이다! -닥쳐라! 이 더러운 사기꾼 자식. 대륙에 혼란을 주고 있는 것은 네놈이다. 신의 이름 뒤에 숨었다고 네가 행한 더러운 짓거리들이 세탁될 거라고 생각지 마라! 진실은 언제고 밝혀질 것이다. 네가 지금껏 교국에서 행한 더러운 짓거리들을 우리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신성한 민주주의를 방패로 제국에 혼란을 초래한 것도 네놈이 블랙마켓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전부 알고 있다. -어디서 거짓을 고하고 있는 것이냐. 더러운 악마 소환사. 네가 지금 내뱉고 있는 말이 선동과 날조다. 공화국민들이여! 저 악마 소환사가 내뱉고 있는 말은 전부 거짓부렁입니다. 교국과 공화국이 처해있는 현 상황처럼 저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악마의 속삭임입니다. 저자의 말처럼 교국이 공화국을 침략한 적도, 저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제국의 혼란을 초래한 적도, 블랙마켓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전부 사실이 아닌 거짓입니다. 들리는 것을 믿지 마십시오. 보이는 것을 믿어주십시오! 선동과 날조가 아닌 진실에 눈을 뜨십시오! -진실은 밝혀질 것이다! 이 더러운 사기꾼 자식!!! -빛이 곧 진실이다! 악마 소환사 진청!!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빛이 아니다. 만약 그 빛이 진짜라고 해도 네놈에게 그런 힘을 내린 신이 정상일 리가 없어…. 정상일 리가 없어! -신이 내린 신성력을 부정하는 것은 곧 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늘이 노할 악마야! 여신의 거울에 담긴 네놈의 모습이 곧 진실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신성력이 진실이다. 전쟁에 흘려져 있는 피가 곧 진실이고 현재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이의 모습이 곧 진실이다! 미래에 어둠에 삼켜질 모든 인류의 모습 역시 진실이다! 어디서 감히 네놈이 진실을 입에 담은 것이냐! 혀끝에서 나오는 더러운 말에 모두가 농락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런 미친 자식이!!! 지금 공화국에서 언데드들을 부릴 이유가 어디 있단…. -여러분 맞서 싸우십시오!! 저와 함께 해 주십시오!! 대답하기 애매한 대답은 빛을 담은 진심의 목소리로 응수. -그런 짓을 할 이유가…. -함께해 주십시오!! 빛과 함께 하십시오!! 사실 말싸움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다. 벌써부터 정신 나간 언데드 부대들이 게거품을 물며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고맙게도 언데드 군대는 착실하게 교국과 공화국을 구분 짓고 있었다. 공화국의 병사들은 가만히 내버려 둔 채로 교국 병사들을 향해 검을 뻗고 흑마법을 뿌리고 온갖 역겨운 짓거리들을 자행하고 있다. 계속해서 아니라고 말한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케에에에에엑!” “신성력! 신성력이 더 필요하다!” “그에에에에엑!” “막아!!! 제기랄! 더러운 악마 소환사 새끼! 신이 두렵지도 않은 것이냐! 이 악마들아!!” “대륙을 위해 검을 드세요! 어둠의 편에 서지 마십시오!” “아아아아악!!!” 언데드에게 밀리기 시작한 빛의 군세는 내가 봐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 아마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는 빛 무리들이 아니었다면 사상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모습이다. “지지 마!” “절대로 쓰러지지 마라! 우리들은 엘룬의 이름을 걸고 싸우는 에베리아의 기사들이다! 대륙에 아직까지 빛이 있음을 알려라!” “사제! 사제에에에!!!” “부상자는 뒤로 빼! 최대한! 최대한 밀집해서 언데드들을 막는다!” 진지 빨기 좋아하는 엘프 여러분들은 눈물까지 흩뿌리며 어둠에 저항하고 있다. 언데드라면 치를 떠는 드워프들과 교국의 기사 역시 마찬가지. 아직까지 커다란 사상자는 나오지 않고 있었지만 언제 죽는 병사들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모두가 똘똘 뭉쳐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버티지 못했으리라. -어둠을 밝히는 것은 빛입니다. 우리들은 작은 촛불이지만 하나하나가 모여, 함께한다면 끝끝내 어둠을 밝힐 수 있습니다. 작은 힘이 절실할 때입니다. 부디 깨달아 주십시오! 유명한 노래에 나올 것만 같은 구절을 중얼 거린 이후에 나 역시 몸을 옮기기 시작한다. -지금 당장 교국의 사기꾼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모든 게 저들의 자작극입니다! 언데드와 공화국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우리 병력이 교국에 타격을 준다면 진짜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질 것입니다. 다시 한번 검을 들어 싸우십시오! -싸워야 할 대상은 서로가 아닙니다! 인류는 진짜 적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눈을 크게 뜨십시오. 빛이 곧 진실입니다! -공화국 병사들은 당장 검을 들어라! 검을 들어! -교국의 병사들은 공화국의 군대에게 검을 겨누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그들은 적이 아니야! 싸워야할 대상은 그들이 아니다! -이 미, 미친 자식이! 그딴 사기극에 누가 속을 것 같아?! -모두… 힘을 하나로 모아주십시오!! 빛이 여러분과 함께할 것입니다! 악마 소환사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라이로스 때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가 바로 이 언데드들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미친 소리에는 대응하지 않는다. 전 병력은…!!! -빛의 함께할 것입니다! 빛이 여러분과 함께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기영!! -커다란 위협 앞에 우리들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성전은 인류를 하나도 만들어 줄 것이다. 아직 축배를 들기에는 이른 상황.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희망에 찬 BGM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413 회귀자 사용설명서 413화 기쁘다. 빛기영 강림하셨네(4) -빛이 함께할 겁니다! 빛이 여러분과 함께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커다란 위협 앞에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전 병력은 들어라! 절대로 교국의 간사한 거짓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십시오! “이걸 담아둘 수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네….” 그 말 그대로였다. 눈앞의 상황을 기록할 수 없다는 게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번 전쟁의 끝에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정도 언질을 받기는 했지만 실제 광경은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것 이상이었다. “이런 걸 담아둬야 되는 건데….” “이지혜 님, 방금 뭐라고….”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 네.” “그보다 여신의 거울 복구는 아직 인가요?” “네. 사실 아직까지는 차도가 없습니다만… 곧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에 떨어진 마법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통신체계를 틀어막고 있는 마력의 힘이 약해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자연스럽게 회복할 수도….” “최대한 서둘러 복구해 주세요. 최우선 사항입니다.” “네. 노력해 보겠습니다.” “단순히 노력하겠다는 말로 끝나면 안 돼요.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네!” ‘진짜로 쓰레기라니깐….’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기를 쳐도 이렇게 스케일이 크게 치는 쓰레기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멀찍이 떨어진 이곳에서 보기에도 공포스러운 위압감을 뿜어내는 언데드 무리. 아군 병력을 공격하는 그 모습은 대륙의 인간들을 도륙하기 위해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의 군대라 봐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이 정도 숫자의 언데들을 본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리라. 그들과 몸을 부딪치고 있는 빛의 군대 역시 묘사할 필요가 없다. 커다란 빛 무리에 둘러싸인 아군 병력들이 똘똘 뭉쳐 어둠을 막아내는 모습은 숭고해 보일 지경. 이게 조작이라는 걸 알고 있는 나도 울컥할 정도의 명장면이라 할 수 있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 만무하다. 잘 짜인 각본처럼 진행되는 일련의 상황은 실제로 공화국 측에도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 빛이고 어느 쪽이 어둠인지, 상황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으니까. 아마 티를 내지 않을 뿐, 본인들의 머릿속에 있던 것들이 와장창 무너져 내리는 기분일 것이다. 아직까지 저들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결정적인 계기가 없기 때문. 모두 마음속으로는 어떤 행동이 옳은지 깨닫고 있음이 분명. 그렇기 때문에 현재 타이밍은 무척 중요하다. 공화국 병력이 악마 소환사의 감언이설에 영향을 받기 전에 최대한 믿음을 심어줬어야 했다. ‘이건 역사적인 장면이야.’ 대륙의 역사가 천 년, 아니, 만 년이 지난 이후에도 모두가 기억할 만한 장면. 라이오스 사태 때부터 현 시간까지 이어진 이 이야기는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영웅담으로 영원히 남아 기억 될 것이다. ‘그리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려올 정도. 괜스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옆에서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지혜 님, 병력들은 이제 어떻게….” “아뇨. 더 이상은 의미가 없을 것 같네요. 이 이상 명령을 내리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고…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의 몫이에요. 이겨내고 이겨내지 못하고는… 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현 시간 부로 지휘부에는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겠습니다. 후방 부대를 비롯한 모든 병력은 곧바로 전장으로 내려가 아군을 지원합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부관들 역시 최대한 손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보인다. 그만큼 현재 상황에 막중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얼굴에 들어선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책임감. ‘숭고한 인간들이 많아서 다행이야.’ 나 역시 저 파티에 함께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신의 거울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게 하는 것이다. 언데드가 여기 있다는 건 정하얀이 귀환했다는 뜻. 어쩌면 이곳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여신의 거울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게 할 수 있으리라. -교국의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사기꾼이며 기만자다. 전 병력은 흔들리지 말고 교국의 병력을 막아라!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된다! ‘더럽게 말 많네.’ 정상적이지 않았던 시스템이 갑작스레 돌아온 것은 바로 그때. “이, 이지혜 님.” “지금 저도 보고 있어요.” “더 이상 이걸 유지할 마력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분 좋은 소식.’ “바로 띄워주세요.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모습을 여신의 거울에 최대한 많이 담아야 합니다. 아직 디테일한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공화국의 병력만으로도, 교국의 병력만으로도 이겨낼 수 있는 싸움이 아닙니다. 두 집단이 힘을 합쳐야 이겨낼 수 있는 싸움이에요. 지금 곧바로 부탁드립니다.” “네.” 만약 언데드들이 교국의 병력과 공화국의 병력을 구분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상황이 쉬워질 수도 있었겠지만, 악마 소환사 진청을 제대로 옭아매기 위해서는 아군 병력을 적으로 설정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떠밀리듯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먼저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기존에 있는 사실을 어떻게 연출하고 편집하느냐에 따라서 그림이 달라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지금 그가 가장 원하는 그림이 무엇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곧바로 제어장치에 손을 대는 것은 순식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에서 여신의 거울이 크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군 후방 진영에 선전용으로 크게 자리 잡은 메인 홀로그램에서 나오는 장면은 고군분투 중인 아군. 이기영 명예추기경이나 김현성 같은 영웅들을 담는 것이 아니다. 카메라에 담은 장면은 어디까지나 일반 병사. 공감을 자아낼 수 있고 자신들과 같은 처지인 소시민들의 모습이었다. ‘이게 맞아.’ -막아! 제임스! 제임스!! 신성력을!! 들어오지 못하게 해! 명예추기경님을 보호해야 한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버틸 수 있어. 계속 버티면 지원군이 올 거다. -부상자는 뒤로 빼! 치료를! -신성력에는 더 여유가 없는 건가? -이 더러운 자식들…. 이런 짓을 하고도 용서 받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방패 들어! 창을 내리지 마! 대륙의 존망이 걸린 싸움이다. 절대 밀리지 마. 절대로 밀리지 마라!! 뒤에 가족이 있다. 여기서 밀리면 모든 게 끝장이야! -마리아!! 연출된 화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현실이다. 개인적인 이기심과 이득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밀려드는 어둠에 저항하고 있는 일반 병사들의 모습은 조금은 찡하게 느껴질 정도. 피를 흘리며 계속해서 사제를 부르짖는 이도 있었고 동료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방패를 드는 전사들도 있었다. 큰 상처를 입은 이들은 물론 피를 토하며 신성력을 운용하는 사제들도 눈에 보인다. 모두가 빛의 장막에 둘러싸인 채로, 각자의 모습을 가지고 고군분투 하고 있다. ‘이건 먹힐 여지가 있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이의 모습이 아니다. 현재 여신의 거울에서 나오고 있는 장면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의 모습이다. 정말로 검을 겨누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누가 옳고 그른지. 본인들의 모습을 투영한 장면들이 계속 지나간다.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지사. 현재 상황에 동조하기는커녕 머뭇거리고 있는 공화국 병력을 움직이게 하기에 충분하다. ‘움직여.’ 물론 지금까지 칼을 맞댄 이들이 함께 싸운다는 것 자체는 무리수. 아군과 적군의 구분을 없애는 게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움직여!!’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으리라. 이 장면은 서로가 하나 되는 그림을 위해 만들어진 장면이다. ‘움직여!!’ -막아! 제기랄!! 최대한 버텨! -신성력이…. -최대한 버티면서 응수한다. 지휘부에서 아마 곧 지원군을…. -방패 들어. 포기하지 말고… 방패 들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함께 싸워주십시오! 함께! 함께 싸워주십시오! -이 더러운 시체들이!! 그의 판단이 틀릴 리가 없다. ‘움직여!!’ “움직여! 이 멍청한 공화국 놈들아!! 아직도 진짜 적이 누군지 모르겠어! 교국이 당하면 그걸로 끝날 것 같아? 그 다음은 너희 멍청한 공화국이라는 걸 왜 모르는 거야! 칼 들고 싸워! 멍청한 놈들! 저 시체들을 보고도 고민하고 있는 놈들은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칼 들어!! 스스로를 지키라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라고!!! 이 꼭두각시 새끼들아!” 크게 소리치며 괜스레 앞에 있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친 바로 그때였다. 외곽에 잡혀 있는 영상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면이 모습을 드러낸 것. 갑작스런 외침에 주변 부관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미지를 챙길 때가 아니다. 현재 여신의 거울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확인한다면 그 누구라도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기랄…. -제길. 검을… 검을 들어라! 일단은 언데드들을 몰아낸다. 일단 언데드들을 몰아내는 것부터 시작한다! -교국을 도와! -그건…. -바리안 님을 위한 일이다. -신성력을, 신성력을 지원해야 합니다. 여유가 있는 바리안의 신도들은 모두 저를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싸움은 나중입니다. 언데드를 정화합니다. 바리안의 성기사들은 왼쪽부터! 움직인다! -바닥에 깔아! 바닥에! -제길…. 나도…. “그래, 그거야. 그거라고!!” 주먹을 꽉 쥔 것은 당연하다. 바리안의 신도들과 성기사의 비율이 높은 구역에서 퍼져나간 작은 도움은 순식간에 후방에 있는 커다란 거울로 송출된다. 아직은 작은 그림이다. 여신의 거울로 송출하기에는 아주 작은 그림이다. 하지만 그만큼 필요한 그림이기도 하다. 어쩔 줄 몰르는 이들을 다루는 데 가장 적절한 것. 군중심리만큼 저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도 없다.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듯한 화합의 물결이 천천히 전장에 자리 잡히기 시작. 송출되고 있는 영상은 계속해서 이 아름다운 장면을 홍보하며 적군과 아군의 화합을 종용한다. 저쪽에서도 기가 막히게 타이밍을 재고 있었는지 때마침 언데드들 역시 공화국의 병사들에게도 검을 내 뻗었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인류와 인류가 아닌 빛과 어둠의 전쟁이 시작된다. 쌍팔년도 만화영화에서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구역질나는 클리셰. 하지만 그만큼 효과적이기도 하다. “클리셰가 괜히 클리셰겠어?” 사실 더 이상은 볼 필요도 없다. 남은 문제는 이 큰 그림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에 대한 것뿐이니까. 물론 너무 손쉽게 끝내버리는 그림도 좋지만은 않다. 이후의 역할은 내 역할이 아니지만 오빠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본래 위기에 빠진 이들에게 따라오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후대들이 공부하게 될 역사책에 적힐 내용은 조금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 414 회귀자 사용설명서 414화 기쁘다. 빛기영 강림하셨네(5)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대화합에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불안했던 것도 사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름다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아마 악마 소환사로서는 가장 보기 싫었던 그림일 터. 솔직히 내가 녀석의 입장에 있어도 현 상황을 어떻게 뒤집어야 할지 고민 했을 것이다. ‘답이 없겠지.’ 외통수를 때려도 제대로 때려 버렸다는 거다. 살인사건의 현장에서 흉기를 든 채로 형사들과 마주친 거라 봐도 무방하리라. 라이오스 때와 큰 차이가 없다. 모든 증거와 정황이 녀석을 악마소환사로 가리키고 있었고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은 완전히 틀어막았다. 물론 녀석을 위해 준비한 선물은 이게 끝이 아니다. ‘인정해.’ 당연히 인정할 수 있다. 녀석은 뛰어난 군사다. 전쟁 도중에는 녀석에게 몇 번이나 뒤통수를 맞았고 실제로도 위험했던 적이 많았다. 여러 가지 머리를 써봤지만 대부분 간파당했고 심지어 준비한 연막에도  놈의 함정에 제 발로 기어들어가게 됐을 정도였다. 만약 오늘 현장이 아니라 지휘부에 있었다면 몇 번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으리라. 그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다. 녀석은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없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전쟁이나 전투와는 관계가 없다.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지식이나 병법 같은 것들을 현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다는 거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 분위기는 녀석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 대화합의 물결이 일어나 모두가 하나 되고 있었고 공통의 적을 상대로 인류가 손을 잡고 언데드들을 몰아내고 있다. 이 상황에서 지휘권이고 진영이고 신경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선택지는 두 가지. 하염없이 멍 때리며 현재 상황을 바라보든가. 지난번처럼 최선을 다해 도망치든가. 물론 후자의 경우에는 도망칠 수 있는 수단이 있을 때의 이야기. 더 이상 음성증폭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녀석의 목소리에는 대응할 필요도 열을 낼 필요도 없다. 현재의 상황에 충실하고 주어진 역할을 대중 앞에 선보이는 것. 그것 외에 내게 주어진 미션은 없다. ‘잘 마무리해야 돼.’ 클라이막스인 만큼 그 무엇보다 마무리가 중요하다. 후방에서 안전하게 상황을 지켜볼 수 있기도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 만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싸우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는 나 같은 놈도 창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정치인들이 간혹 보여주는 보여주기식 똥꼬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건 확실하게 효과가 있다. “대륙을 위하여!!!” “빛을 위하여! 베니고어 여신님과 엘룬, 바리안 님을 위하여!!” “깃발을 들어 올려라! 대륙에 아직까지 빛이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자! 베니고어의 아들딸들이여!” “화살을 멈추지 마!” 틀림없이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계속해서 저항하는 인류의 모습은 희망찬 메시지를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아마 밝은 미래를 떠올리고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창을 들고 전선에 서자 얼굴을 마주하기도 싫은 흉악한 언데드들의 모습이 눈앞에 드러났다. 뭔가 날 보고 움찔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녀석들 역시 충실히 자신들의 역할을 이행하는 도중. 일반 병사들과 함께 힘겹게 녀석들을 막는 장면은 동상으로도 만들어 질 만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은 땀과 오물로 범벅이 된다. 그림은 충분히 만들어졌다. 아! 물론 주변 인물들을 걱정시키는 장면 역시 빠져서는 안 된다. “명예추기경님! 안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위험합니다!” “하아. 하아. 가만히 구경만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명예추기경님!” “모두가 함께 싸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공화국의 병사들까지도요. 만약 제가 몸을 숨긴다면 많은 이가 저를 비난할 겁니다. 후우. 제게 주어진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저도 언데드들과 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듣지 않겠습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네….”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습니다. 모두 힘을 내주세요.” 사실 내가 이 전선 앞에 나와 있는 것 자체가 커다란 민폐. 내가 괜찮다고 말한들, 주변에서 괜찮을 리가 없을 테니까. 당장 나를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이들의 활동범위가 제한된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하지만 이런 홍보 효과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 내 장단에 맞춰준다는 듯 여신의 거울은 이쪽을 비추고 있다. 조금 더 극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게 가슴 아플 지경. 하지만 계속해서 신성력을 뿜고 있는 모습은 충분히 신의 사자라고 할 만하다. “명예추기경님께서 함께하신다!” “명예추기경님이 함께하신다! 검을 들어!” 사기를 높여주는 게 긍정적인 효과라면 긍정적인 효과. 징그러운 언데드들과 뒤엉켜야 한다는 게 기분이 조금 나쁘기는 하지만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뭔가 새로운 장면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즈음 거대한 녀석 하나가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 녀석이 나를 해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등골이 서늘할 정도였다. ‘이 자식이랑 조금 놀아주면 되겠는데….’ 눈물 콧물 다 뺄 만한 감동 상황을 연출할 생각에 입꼬리가 찢어지기는 했지만 순식간의 녀석을 둘러싸는 아군 병력이 눈에 보인다. 이쪽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모양. 김예리와 안기모, 박덕구가 없는 이곳에서 감동 상황을 연출하기란 쉬운 게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주작질이 쉬운 게 아니야.’ 조금은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미적지근하게 마무리가 된다면 조금 찝찝해지는 것이 사실. 아군 병력은 물론 인류 전체가 위험에 빠졌다는 인상을 줘야 김현성도 납득할 수 있는 마무리가 될 것이다. 슬쩍 여신의 거울을 보자 눈에 보이는 것은 얼굴을 굳히고 있는 사랑스러운 회귀자. 자세히 얼굴을 바라보니 제법 피곤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만도 하지.’ 무사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것은 물론 마력 부족 현상을 겪고 있는 놈을 보니 가슴이 괜스레 찡해졌다. 조금 쉬어도 되건만 아직도 초조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은 가관. 이미 예상하고 있는 상황인 듯 아직도 불안해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이거 어느 정도는 들어맞은 건가.’ 당연히 언데드 대란을 일으키기 잘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언데드들은 진청을 위한 선물이기도 했지만 김현성을 위한 선물이기도 했다. 가면쓰레기가 너무 맥없이 쓰러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한 작업. 문제는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이걸로 만족하는가. 악마소환사의 경우에는 충분히 만족시킨 것 같지만 아무래도 아직도 불안해하는 김현성을 보니 뭐가 더 남아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걸로도 모자라?’ 이 정도면 충분히 가면쓰레기답다고 생각했지만 아군을 언데드로 만들어버리는 간악한 술수도 워밍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다른 걸 새로 준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준비할 시간도 아이디어도 없다. ‘슈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조금 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것. 그 이상 뭔가를 하는 것은 오히려 부작용을 안게 되리라. 아주 약간의 찝찝함이 남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전쟁이 끝난 이후에 대충 얼버무린다면 충분히 커버칠 수 있다. 아니, 준비한 묵직한 한 방으로도 충분히 의심 자체를 지워버릴 수 있다. 다시 한번 창을 든 것은 당연지사. 최대한 병력들과 함께 언데드들에 대항하는 그림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그림. 하지만 무언가 위기감이 부족하다. ‘여기서 일어나는 애들도 있어야 더 실감날 것 같은데….’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신호를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숨이 끊어졌던 공화국 병사들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 그래봤자 하급 언데드지만 안 그래도 지쳐가는 병력에게 부담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하리라. “적이….” “그래봤자 하급 언데드다! 전선을 무너뜨리지 마!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틴다!” “지친 병사는 후방으로! 체력이 남아 있는 부대가 앞을 지킨다!” “베니고어 여신이시여!” 점점 더 탄력을 받은 언데드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을 점령하고 있다. 아무래도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좀 다르게 받아들인 것인지 정하얀과 한소라가 본격적으로 힘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어딘가에서는 전설 등급의 언데드라도 튀어나온 듯한 느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전선 자체가 밀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다. ‘이거 슈바. 너무 셌나. 진짜 버티기 어렵겠는데….’ 천천히 무너지고 있는 전선. 체력적으로 지친 이들이 유지하고 있던 대열이 무너지고 그 사이로 언데드들이 꾸역구역 밀고 들어오는 모습 역시 눈에 들어왔다. “지원을! 신성력으로 지원해!” “하지만….” “무너지고 있는 쪽부터 지원한다. 공화국 병력들은 최대한 교국을 돕는다.” “아아아아아악!” “지지 마! 버텨!!” 내가 생각한 것보다 전선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조금 더 굳건히 버텨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래도 모든 병력이 체력적으로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당연한 건가.’ 교국과 공화국이 전력으로 부딪친 바로 이후다. 김현성도 마찬가지였지만 각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네임드들 역시 어마어마한 부담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 일반 병사들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미 충분히 위기라고 할 수는 있었지만 김현성이 상상하고 있는 위협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여기서 조금 더 조여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엔 이미 많은 병력에게 맡겨진 부담이 너무 크다. ‘조금 더 극적일 때….’ “제길! 제길!! 버텨!!” “13부대가 무너진다! 13부대 지원해! 지원!” “공화국 병력이… 언데드 부대에.” “아직 살아 있어. 지금 당장 부대를 구성해서 구하러간다.” “여유가 없습니다.” “제길! 제길!! 신이시여!!” “베니고어 여신이시여! 진정 저희를 버리나이까! 베니고어 여신이시여!” ‘조금 더 극적일 때….’ “엘룬이시여! 힘을! 힘을!! 대륙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조금 더, 조금 더….’ “엘룬이시여!!” 주변 진영을 구성하고 있는 부대의 대열이 하나둘 뚫리기 시작. 좁은 틈새를 꾸역구역 밀고 나온 언데드들이 사제와 마법사들을 덮치고 있다. 심지어 공화국의 일부 병력들은 완전히 언데드에 휩쓸리는 중. 계속해서 신을 찾는 상황이 어색하지 않다.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고 싶어 고개를 든 순간 여신의 거울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박덕구의 모습이 보였다. 공화국 병사를 공격하고 있는 언데드를 방패로 뭉개는 녀석을 본 순간 자연스럽게 품에 있던 것을 들이켰다. 찔려오는 양심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 사방에서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들려오는 소리가 일순간 삼켜지기는 듯한 느낌. 나를 중심으로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은 순식간. 화아아아아아악! 일순간 세상이 밝아진다. 시선이 집중된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상처받은 양심 때문인지 나를 보는 병사들의 눈을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다. 최대한 시선을 피하기 위해 눈을 감은 순간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 “현신이다… 현신.” “베니고어 여신께서… 강림하셨다.” ‘바로 요거죠?!’ 계산하고 있었던 그대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만들어놨던 두 번째 카드는 확실히 제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베니고어 강림 코스프레.’ 빛 폭탄 물약의 복용으로 딸려오는 효과였다. ‘내가 바로 베니고어 그 자체다! 이 새끼들아!’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너… 진짜 이 새끼. 이거 놔! 이거 놔! 말리지 마! 엘룬 너 이 새끼 이거 못 놔? 이 개새끼들아! 저 새끼가 지금! 나도 더 이상은 못 참아!(0/1)] [알 수 없는 이유로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취소됩니다.] 희망이 없는 전선. 어둠이 군세에게 밀리고 있는 빛의 군세. 모든 빛이 어둠에 삼켜질 때 등장한 가장 커다란 빛. 기술명. ‘여신강림.’ 물론 단순한 개구라. 하지만 몸이 빛으로 휩싸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 415 회귀자 사용설명서 415화 기쁘다. 빛기영 강림하셨네(6) 용 숨결 물약은 복용이 불가능한 물약이었다. 브레스를 쏟아내는 기관과 비슷한 형태의 유리병을 제작하고 디아루기아의 마력과 혈액을 촉매로 비슷한 폭발을 일으키는 원리의 물약. 연금술의 정수라고 보기보단 여러 복합적인 기술이 사용된 폭탄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터지기 위해서 만들어진 물건이니 복용이 불가능한 것은 당연. 애초 그녀의 혈액은 마실 수도 없다. 아직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강화의 혈청 이 설명해 주듯이 혈액을 마시는 것 자체가 위험을 동반한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녀석은 그렇지 않다. 존경해 마지않는 베니고어 여신과 엘룬 쓰레기가 직접 선물로 내려주신 이 따끈따끈한 녀석은 적과 아군을 확실하게 구분한다. 빛 폭탄 물약은 단순히 터지기만을 위해 제작된 물약이 아니라는 거다. [빛 폭탄 물약-준신화 등급] [빛의 연금술사 전용 소비 아이템-일일 사용량 제한(3/3)] [준신화 등급의 직업, 빛의 연금술사만이 연성할 수 있는 고유의 물약입니다. 베니고어 여신의 배려와 엘레나의 희생으로 인해 만들어진 이 물약은 사용자의 신성력을 주입한 직후 사용자의 적과 아군에게 반응하는 거대한 빛 폭발을 일으킵니다. 아군은 중상을 즉시 회복하게 되지만 적군은 폭발의 영향에 그대로 노출됩니다. 하루에 세 번 사용 가능합니다. P.S 쓰레기 같은 놈.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다. 나도 더 이상은 한계야.] 말 그대로 거대한 빛 폭발을 일으키는 물약. 이걸 마시면 어떻게 될까. 그런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물론 답은 금방 나온다. 굳이 여러 가지 가정을 만들 필요조차 없다. 나 이전에 이걸 복용한 녀석이 있었으니까. ‘살라트가 그랬었지.’ 정확히 말하면 복용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녀석은 이걸 체내로 받아들인 적이 있다. 놈의 경우에는 괴로움에 몸부림쳤지만 당시 놈의 몸을 뚫고 나간 빛은 아군 원정대에게 까지 닿았고 실제로 그 효과를 입증했다. 마신다고 하더라도 효과에는 변화가 없다는 거다. 적군에게는 대미지를, 아군에게는 회복을. 제한된 범위, 심플한 능력, 심플한 기능. 다른 말이 필요할 리가 없다. 복용한다고 해서 초월적인 힘을 얻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극적인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당연하지만 신이 강림하는 것도 아니고 신성력이 크게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기능은 같다. 그래 기능은 같다. 겉모습이 조금 달라진다는 것만 빼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실눈을 뜨자 순식간에 사방으로 뻗어나간 빛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몸속에서 계속 화아아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느낌. 뱃속이 조금 부글거린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이상은 없다. 오히려 기분이 조금 좋다고 느껴질 정도. 상처를 모조리 회복시키는 것으로 모자라 피로마저 날아가게 한다. 나를 밝히고 있는 빛이 계속해서 병력을 휘감고 있는 모습은 장관. 쓰러져 있던 이들 역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화살이나 마법에 휩쓸린 이들 역시 자신의 몸을 매만진다. 엘룬과 베니고어의 합작으로 만들어낸 이 커다란 기적에 공화국 교국 가릴 것 없이 모두 다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눈멀겠다. 슈바.’ 천천히 퍼져나간 빛이 보여준 모습은 내가 봐도 자랑스러울 정도의 광경. 순간적으로 전쟁터를 환하게 비친 빛 때문인지 일순간 전투가 마비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운석이 떨어졌을 때, 언데드가 나타났을 때 그리고 현재. 일순간 전장에 정적이 찾아온 것은 그들과 마주하고 있던 언데드들 마저 빛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리라. “강림하셨다.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강림, 강림하셨다.” 개뿔. 강림한 것도 아니지만 저렇게 생각해주길 바란 것은 당연지사. 슬쩍 고개를 돌려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니 완전히 빛 그 자체가 되어버린 빛기영이 시야에 비쳤다. 환한 빛이 몸을 빛내고 있는 것은 물론 환한 빛이 계속해서 주변을 맴도는 중. 눈에서 쏟아지는 안광은 당연히 신성해 보인다. 얼마 남지 않은 신성력으로 부유마법을 중얼거리자 내 몸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 입을 벌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사전 작업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생각하기도 했지만 극적인 순간에 터뜨린 효과인지 눈물까지 흘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가히 가관이라 할 수 있을 정도. “베니고어 여신님…. 베니고어 여신님!” -그대들의…. “흐으으윽.” ‘그만 좀 울어라. 이놈들아. 말 좀 하자. 그만 좀 울어.’ -그대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입을 연 순간 곧바로 조용해지는 장내. 계속해서 들려오던 진청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상황. 언데드들은 일순간 움직임을 멈춘다. 뭔가 초월적인 힘에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정하얀이 병력들을 컨트롤 하고 있는 것뿐이었지만 언데드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연기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눈앞에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쳐져 있는 것처럼 마임을 하고 있는 모양새는 가관. 눈으로 봐도 이해할 수가 없다. 수많은 이들이 그 광경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만족스럽게 입을 열자 다시금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알고 싶은 것이 많을 겁니다. 어째서 저, 베니고어가 이 자리에 자리해 있는지. 어째서 몇 천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던 제가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이야기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현재의 대륙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뿐입니다. “…….” “…….”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일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 세계를 위협하는 세력은 아직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지금 보고 있는 수많은 저주받은 존재들과 현재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악마의 하수인. 이 위협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모든 고난은 앞으로의 역경과 비교하면 아주 작은 것들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좋고요.’ 아무리 나라도 이정도의 사기를 치면 조금은 떨리게 마련. 혹시 말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불안하기는 했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쉽게 입이 열리기 시작한다. -엘룬의 아들딸들이여. 바리안의 아들딸들이여. 그리고 이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이의 아들딸들이여. 제가 오늘 이 신성하고 순수하며 그 어떤 이들보다 깨끗한 이 인간의 몸을 빌린 것은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이 메시지를 전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면서. -대륙을 안전을 위협하는 이들은 실존합니다. 숨을 한 번 멈춰주고.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대륙을 그들의 색으로 물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 여러분들이라면 이겨내는 것이 가능 합니다. 하나 되십시오. 이 세계에 살아가는 모든 이가 힘을 모은다면 우리는 충분히 이 위협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빛의 이름 앞에 하나 되어 모든 고난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한 어조로 대사를 마무리. -부디 마음을 굳게 먹으십시오. 악마소환사 진청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계속해서 녀석을 언급하는 건 굳이 할 필요가 없다.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단어로 끝. 아마 이 정도만 해도 우리 사제님들께서는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눈치챌 수 있으리라. “아아. 베니고어 여신이시여….” “베니고어 여신님. 베니고어 여신님!” 애타게 베니고어 여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는 침착한 미소로 화답. 내 역할은 끝이다. 천천히 손을 들어 저주받은 언데드들에게 손을 뻗자 벌써부터 괴로워하는 저주받은 이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케에에에에엑!” “끄르르륵. 끄르르륵.” -그대들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손을 천천히 젓자 주변에 있는 언데드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기적….” “여신이시여….” “케에에에에에에에엑!” -……. “크르르륵.”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남은 한쪽 손으로 원을 그리자 역시나 언데드들이 허물어진다. 물론 신성력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눈속임용으로 빛이 나아가고는 있었지만 저 빛은 고등 언데드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지 않다. 아마 따끔한 수준 정도. 그럼에도 언데드들이 도미노처럼 풀썩풀썩 쓰러지고 있는 이유는 당연히 정하얀에게 있다. 손을 뻗음과 동시에 술식을 해지하면 끝. 잘 짜인 대 사기극이지만 여기까지 온다면 당연히 결과는 그럴 듯해 보인다. 마치 이러기 싫다는 듯 눈물 한 방울 정도 떨어뜨리는 것도 필수. 베니고어 여신님은 언데드를 무로 되돌리면서도 눈물을 흘리신다. 당연하지만 빛 폭탄 물약을 삼켜 버린 지금은 눈물마저 밝게 빛나고 있다. 전장을 가득 메웠던 언데드들이 파도타기를 하는 것처럼 무로 돌아가는 모습은 내가 봐도 신성해 보일 정도. 조금 오버하는 것 같지만 이정도는 되어야 기적이라 부를 만하다. 어느새 너나 할 것 없이 사제들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만 봐도 대충 분위기가 어떤지 예상할 수 있으리라. -고통 받았던 모든 이가 축복받을 것입니다. 이쯤 되면 손을 움직이는 것도 조금 힘들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 ‘끝났어.’ 단언컨대 끝난 거나 다름이 없다. 아니, 확실히 끝났다. 지금 보이는 모습에 그 어떤 변명이나 말이 들어올 리가 없다. 진짜 베니고어가 강림해도 베니고어를 가짜라고 몰아낼 수 있을 정도의 믿음.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은 그 정도의 감정이 들어서 있었다. 교국 공화국 가릴 것이 없다. 바리안의 신도들은 혹시나 내가 바리안을 다시 언급할까 바라보고 있었고 엘룬을 모시는 엘프들 역시 신에 대한 존중을 내보이고 있다. -이후의 일을 이 땅 위의 주인인 여러분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허락도 받지 않고 몸을 빌렸군요. 이 신성한 인간 또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을 보는 것은 어렵겠지만, 항상 기억해 주십시오. “베니고어 여신님….”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저희는 언제나 항상 여러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항상 기억해 주십시오. “…….”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마지막 말을 마친 이후에 타이밍 좋게 머금었던 빛이 사라지기 시작. 당연히 하늘에 떠 있던 내 몸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물론 당황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누군가가 나를 캐치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조용히 떨어지는 내 몸을 받아낸 것은 김현성도 박덕구도 아닌 일반 병사들. 마치 콘서트에서 관객석으로 뛰어내린 가수를 받는 것인 양 앞다투어 손을 뻗는다. 차이점이 있다면 제법 경건하게 느껴졌다는 것. 의식이 없는 나는 단순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지만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으로 무기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흐으으윽….” “어머니….” 전쟁은 끝났다. 그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는 이는 없었지만 아마 모두가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눈을 뜨니 하늘을 가렸던 구름이 지나가며 빛이 쏟아지는 것이 보인다. 전쟁은 끝났다. “끝났구나.” “네. 명예추기경님… 끝났습니다.” 혼잣말에 대답해오는 경비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살짝 웃음 짓는 것은 당연지사.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기억나지 않으시는 겁니까?” “네. 빛에 휩싸인 것까지는 기억하지만, 아니, 그 이후에도… 기억은 나지만…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정신이 몽롱합니다.” “아마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바닥에 내려온 이후에 고개를 든 순간 보이는 것은 나를 향해 인사를 올리고 있는 교국과 공화국의 병사들. 뭔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재미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느낌. 어쩌면 모두가 내가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전쟁은 끝났습니다.” 커다란 환호성이 들려왔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 416 회귀자 사용설명서 416화 살기 좋은 세상(1) -전쟁은…. 전쟁은 끝났습니다. 네. 전쟁은 끝났습니다. 더 이상 서로를 향하 검을 뻗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많은 오해가 있었고 그만큼 서로를 적대하던 기간이 길었습니다. 단순히 이번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서로 싸우며 상처 입히고 경쟁했던 그동안의 역사가 역시 이제는 모두 막을 내렸습니다. 증오를 버리는 것. 복수심을 벌리는 것. 분노를 내려놓는 것. 그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소중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 -교국과 공화국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아끼는 이들을 잃었습니다. 누구는 사랑하는 이를, 또 누구는 소중한 전우를, 또 누구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모두가 극복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서로가 검을 겨누던 적이 손을 마주잡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더욱더 큰 가치를 위해 한 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조금 더 성숙해져야 합니다. 아픔을 딛고 그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 -공화국 여러분은 고개를 드십시오. 여러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교국의 여러분은 손을 뻗어 주십시오. 그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거대한 흐름 앞에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는 그 누구보다 우리가 더욱더 잘 알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개를 드세요. 눈물을 흘릴 필요도 주저앉아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함께 갑시다. 이 증오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모두가 함께 움직입시다. 서로가 추구하는 가치는 다를지 모르지만 우리는 커다란 과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 대륙을 위협하는 이들은 실존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대륙 곳곳에 숨어 신들이 빗어낸 이 땅을 노리고 있습니다. 오늘 베니고어 여신께서 여러분들께 남긴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앞으로 다가올 고난과 역경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개를 드십시오! 오늘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곧 새살이 돋을 것입니다. 먹구름이 걷히고 태양빛이 쏟아지는 지금처럼…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피로 얼룩진 이 땅 위에도 꽃이 필 것입니다. -……. -함께 갑시다. 신의 뜻 아래 우리들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묘하게 조용해진 장내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은 숙연해지는 게 당연하리라. 본래대로라면 한참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들이 들려왔겠지만 여신의 거울에서 흘러 들어오는 영상을 본 이후에는 이 장소도 조금 진지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옆에 있던 닉이 입을 열어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조금은 듣기 싫은 목소리였지만 오늘은 녀석이 떠들어대는 걸 참아 볼 생각이다. 전쟁 이후 벌써 일주일이 흐른 상황. 여러 가지로 아는 게 많은 녀석인 만큼, 여러 가지 정보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참… 대단하신 분이야.” “아암. 저건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다니까. 그러니까 여신의 거울에서도 매일같이 나오고 있는 거 아니겠는가?” “대단하고말고. 저분이 어디 보통 분이신가. 아마 저러기도 쉽지 않을 거야. 저분 역시 가장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신 분이 아닌가. 실제로 라이오스 사태 때는 돌아가실 뻔하기도 했고. 에베리아 왕국에 있었던 것도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보면 사실 가장 큰일을 겪으신 거나 다름없지. 사실 저 상황에서 아무 조건 없이 공화국 병사들의 손을 들어준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릇이 크신 거지.” “아암. 그렇고말고. 나도 저 자리에 있었는데 정말 대단했다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 실제로 공화국 병사들도 질질 짜기는 했었는데 아마 걔네들 같은 경우에는 나보다 더 했겠지. 사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의 몸에 베니고어 여신이 강림하신 것도 직접 봤었는데 말이야.” “정말인가?” “그렇고말고! 여신의 거울로 보는 거랑은 상대도 안 된다니까? 손을 막! 한 번 슉 하니까 언데드 놈들이 막! 한 번에 허물어지고! 왼쪽 손을 한 번 더 휘두르니까 완전히 빛에 휩싸여서 펑퍼펑펑펑펑! 베니고어여신께서 강림하신 것 말고도 그전에도 창을 들고 전장에 직접 뛰쳐나오셨다니까. 믿겨지나?” “허….” “아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 거야. 실제로 그 악마 소환사 놈은 끝까지 숨어 있다 끌려나오지 않았는가. 쯧. 참 저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끔찍하다니까 끔찍해. 지금까지 공화국병사들과 치고 박다가 결국….” “그렇게 끝나면 다행이지. 아마 그 전장에서 살아 돌아올 수도 없었겠지. 아무튼 그래서… 지금 명예추기경님은 뭘 하고 있는 지 아는 사람 있나?” 당연히 닉에게로 시선이 집중된다. 녀석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잔에 들려 있는 물을 벌컥 벌컥 들이켠 뒤에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 이게 좀 말하기 힘든 내용인데….” “그러지 말고 좀 알려주는 게 어떻겠나. 이렇게 내가 오늘 밥도 살 테니까.” “아마 곧 여신의 거울로 공식적인 내용을 전달받을 수 있을 텐데. 아니 이건 여신의 거울로 전달받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우리가 몇 년 친구인지 잊은 건 아닐 거라고 믿네, 닉.” “큼. 이게 정말 말하기 힘든 내용이라… 자네들이 제대로 입단속을 한다고 하면 시원하게 말해주겠네. 정말로 약속해야 하는 내용이야. 파란 길드에 김미영 팀장님의 특별 지시사항이라 나도 어렵게 구한 정보라서.” “아암. 그렇고말고. 내 입을 꼭 다물고 있겠네. 그러니 좀….” 슬쩍 비어 있는 잔에 맥주를 채워주자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여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사실은… 건강이 그리 좋지는 않으신 것 같더라고.” “뭐?” “쉿.” “조용히 해. 마이클! 제기랄.” “아. 미안하네. 미안해. 너무 갑작스러워서….” “생각해 보면 갑작스러운 일도 아니지. 어디 인간의 몸으로 신을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인가? 그분이 아무리 베니고어 여신님을 담을 그릇이라 하더라도 무리가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야. 안 그래도 병상에서 일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라고 했었으니까. 그나마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고는 있지만….” “그게 사실인가?” “사실이고말고. 저번 라이오스 때처럼 또 많은 이가 성 앞을 지키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시는 것 같더라고…. 그렇게 우리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셨으면 서도 여전히 우리 같은 놈들을 신경 써주시고 계신 거지.” “허….” “물론 대외적인 이유도 있고.” “대외적인 이유?” “현재 그분이 평화의 상징 같은 게 아닌가. 사실상 전쟁을 완전히 종결시키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고 만약 그런 분께서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겠어? 지금 논의되고 있는 이야기가 전부 뒤집어 질까 걱정하시는 게 틀림없으신 거겠지.” “튜토리얼 던전들을 완전히 통합해 하나의 교육소로 운영한다는 거?” “그것뿐만이 아니지. 공화국과의 동맹 문제나 대륙종전선언문, 대륙평화협정, 새로운 이종족 차별금지법의 발의. 정치적, 경제적, 심지어 군사적으로 얽혀 있는 게 많아. 물론 나도 전부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 같이 다들 민감한 사안인데… 안 좋은 몸을 이끌고 계속해서 대외활동을 하는 것 역시 그런 이유라고 하더라고. 뭐, 가슴 아픈 일이지. 측근들이 그만큼 도와주고는 있지만 그래도 모든 걸 직접 해결하셔야 속이 시원한 모양이야. 김미영 팀장님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파란 길드 내에서도 조금 만류하는 분위기이기는 한데 어디 그분 열정을 꺾을 수가 있겠는가. 최근에 잠깐 쉬게 된 것도 김현성 님의 부탁 때문이라고 그러더라고….” “전쟁영웅.” “그러고 보니 그분도 굉장했지. 그런 사람들이 한 명도 아니라 두 명이나 교국에 몸을 담고 있다는 것도 전부 다 복이야.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복을 내려주신거지.”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긴데… 혹시 진청에 대해서 새로 들어온 정보는 있나?” “뭐, 그 개자식이야. 매번 똑같지. 당장 목을 쳐도 시원치 않을 개자식. 어째서 그런 놈을 재판대에 올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이야. 아직도 자기는 악마 소환사가 아니라고 울부짖고 있는데. 아, 지금 나오는구만. 여신의 거울 좀 보게나.” -공화국의 큰 혼란에 빠뜨렸던 악마 소환사 진청의 재판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가운데, 모든 이의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린델방송의 김성경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김성경 기자? -린델방송의 김성경 기자입니다. 지난 2일 공화국에서 악마 소환사 진청의 신병을 인도받은 교국의 이단 심문관 헬레나가 마를린 의원과 함께 마침내 수도로 도착했습니다. 전 대륙에 관심이 쏠려있는 사건이었던 만큼 그 어느 때보다도 이곳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교국이 자랑하는 신성기사단은 물론 이례적으로 교황성하와 오스칼 님께서도 직접 자리한 모습입니다. -나는 악마 소환사가 아니야. 나는 악마 소환사가 아니란 말이다. 꺼흐으윽. 이기영 이 개자식. 이기영!! 이기여어어어엉!!! 나는 악마 소환사가 아니란 말이다! 콜록! 네놈들은 속고 있다! 진짜 악마는 그 자식이야! 그 자식이 진짜 악마라고! -입 막아! -나는 악마 소환사가 아니란 말이다! 나는 언데드도 악마도 소환한 적이 없단 말이다…. 나는 아니야!! 콜록! 콜록!! -일각에서는 곧바로 처형하는 것이 대륙의 안전을 꽤하는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확한 사건의 진상을 파악과 대륙에 뿌리내린 어둠의 세력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교국 이단 심문관의 입장입니다.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해 봤을 때 수사는 이단 심문관에서만 그치지 않고 여러 기관을 통한 다방면의 기관에서 조사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공화국이 악마 소환사 진청에 대한 조사 협조를 최대한 지원한다고 약속한 가운데 모든 대륙의 관심이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김성경 기자였습니다. -네. 다음 소식입니다. 조금은 딱딱한 이야기로 마음이 무거우셨을 분들을 위한 소식입니다. 베스트셀러 천재 검사와 연금술사가…. “저저… 악마 소환사 저거!” “저런 때려죽일 놈! 퉤!” 다음 소식이 미처 나오기도 전에 여기저기에서 고함 소리와 함께 욕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여기도 다르지 않다. 아마 모두가 똑같은 마음일 것이 분명.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모습에는 기가 찬다는 반응이었다. “저런 쓰레기 같은 새끼. 도대체 조사할 게 뭐가 있다는 거야! 당장 단두대에 올려 버려야 된다니까.” “쯧. 여신의 거울에 비친 얼굴 봤나. 눈깔도 아주 벌게져 가지고. 누구 하나 때려죽일 기세더만! 처음에 잡혀 올 때도 저런 모습이었다니까. 공화국 병사들한테 붙들린 채로 오는데 어찌나 소리를 지르던지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니까?” “저놈뿐만이 아닌 게 더 문제지. 여기저기에 어둠의 세력들이 숨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나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처형하는 데 한 손 보태고 싶지만, 여러 가지 정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처형할 수는 없지. 정확한 절차가 있어야 한다는 게 교국의 입장이기도 하고. 신성한 민주주의 혁명 때도 그랬으니까. 저런 쓰레기 같은 놈이라도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은 정당한 재판을 받게 하고 싶으신 거야. 그것도 모르고 저렇게 날뛰는 꼴이라니….” “악마 소환사가 괜히 악마 소환사겠는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지. 아무튼 간에 내일은 다들….” “아, 오랜만에 사냥이나 나가볼 생각이네. 몬스터 사냥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전쟁이 길어져서 조금 개체 수가 늘기도 했고.” “사냥 나가기에는 몸이 조금 편치 않은 거 아닌가? 사울? 아직 상처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본다. “뭐, 그렇긴 하지. 사실 나 같은 놈이 열심히 해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만은…. 그래도 언젠가 써먹을 때가 있지 않겠어. 조금 더 쉬고 싶기는 하지만 베니고어 여신님과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해주신 말씀처럼 한 발 나아가야지. 명예추기경님도 쉬지 않고 있는데 나도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뭐, 그럼 먼저 일어나겠네. 좋은 이야기 고마웠네, 닉.”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 사울.” “응. 그래야지.” 천천히 주점의 문을 열자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전쟁이 끝나고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달라진 것들이 보였다. 엘프들과 드워프들이 거리를 거니는 광경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 다양한 건축물이나 달라진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세상.’ 그 생각 그대로. “참 살기 좋은 세상이야.” 조용히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참 살기 좋은 세상이야.” “역, 역시 그렇죠?” “우둔살 살살 녹는다.” “사, 살, 살살 녹는다아. 헤헤헤힛.”  # 417 회귀자 사용설명서 417화 살기 좋은 세상(2) “아, 이거 모이지 말라고 했는데 왜 또 모여서 이러고 있는 거야? 나 참.” 조금 퉁명스레 말하기는 했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최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밖을 바라보자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 시민들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끝이 없는 인파는 라이오스 때와 엇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만약 여건만 마련되었다면 린델 전체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으리라. 린델뿐만이 아니다. 캐슬락, 다완, 실리아, 에베리아의 엘프와 드워프 왕국까지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의 인파가 모여 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다. 심지어 아무 연관이 없는 왕국 연합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단다. 라이오스 때처럼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고 언론 플레이를 한 것도 아닌데도 이 정도. 그만큼 내 이미지가 좋다는 뜻이었으니 보기 불편한 광경일 리가 없다. ‘특히나 이번 건 더 좋았지.’ 아직도 여신의 거울에선 이번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송출되는 중. 온몸이 빛에 휩싸인 한 인형이 팔을 휘두르자 수만의 언데드가 한꺼번에 허물어지는 광경은 기적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니, 어떻게 봐도 기적 그 자체. 그 이후 하나가 되어 나아가라는 메시지를 주신 베니고어 여신님의 모습은 감히 한낱 인간이 재단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한 모습이라 할 만했다. 나조차도 눈이 멀지는 않을까 걱정할 정도의 외관. 신에 대한 믿음으로 꽉 차 있는 교국 국민들이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서는 말이 필요 없는 게 당연지사. 만약 저런 걸 보고 사기라 지껄이는 인간이 있다면 길거리에서 돌을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으리라. ‘그렇고말고.’ 어쩌면 돌에 맞아 죽는다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기적에 힘입어 얻은 것을 떠올린다면 더욱더 그렇다. 사실 이번 전쟁은 대륙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많은 이가 죽거나 고통 받았고, 심지어는 악마 소환사의 사악한 술수로 인해 죽어서도 편히 눈감지 못한 이들도 생겨났다. 저주받은 언데드가 대륙 전체에 안겨줬던 정신적인 충격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정도. 많은 인적 피해와 물적 피해가 있었고 어떤 지역의 경우에는 복구가 불가능하다 판단할 정도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교국과 공화국의 전력은 이전과 비교했을 때 형편없을 정도로 깎여나갔다. 생산시설 자체가 망가진 지역이나 완전히 지형 자체가 바뀌어 버린 지역. 권위 있는 복원 마법사들과 고명한 전문가들은 마법이 있는 이 대륙을 기준으로도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몇 십 년이 더 걸릴 수 있다고 판단했고, 가장 중요한 인적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물론 이런 저런 충격과 후유증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륙은 한 가지 가치를 향해 나아가게 됐다.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것. 이전까지 있었던 모든 경쟁과 대결의 역사를 벗어 던지고 미래에 다가올 위협에 대비하기로 의견을 모은 것이다. 아직까지 여러 가지 협의할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에 공식적인 발표나 선언을 미루고 있었지만, 대륙의 모든 지도자가 한 자리에 모이는 건 시간문제나 다름없어 보였다. 한 전쟁에서 일어난 기적이 대륙 전체를 뒤바꾸어버렸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현재의 빛기영은 어떻게 봐도 대륙의 중심이나 다름없다. 여신강림도 여신강림이었지만 온몸을 바쳐 전쟁을 막았고 전후수습 역시 무척 훌륭했다. 공화국의 모든 병사를 용서한 것도 옳은 선택이었고 모두와 함께 나아가자 선언한 것도 옳은 선택이었다. 베니고어 여신의 재림. 베니고어 여신의 아들. 베니고어 여신의 대리자. 여러 가지 수식어가 함께하는 것으로 모자라 심지어 베니고어 여신님이 대륙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주신 이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 조금 오버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들지만 손짓으로 악마들을 쓸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 역시 같은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이쪽이 베니고어 여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것도 맞고 그녀와 소통하고 있는 것도 맞다. 재림이고 아들이고 현신이고 대리자고 반 정도는 맞는 이야기라는 거다.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연히 내 가치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떡상. 그야말로 수직상승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다. 기영코인의 가치는 원래 높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단가가 더 높아졌다. 이 코인에 투자하지 못한 이들은 땅바닥을 치고 후회하고 있는 것은 당연지사. 그동안 조금이라도 나와 적대했던 모든 이가 선물 공세를 시작했다는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으리라. 괜스레 입꼬리를 올리며 실실 웃고 있었을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니 시야에 비치는 것은 제법 익숙한 얼굴. 한 손으로 안경을 올린 채 인사를 하고 있는 인형의 정체는 이쪽의 개인 비서. 물론 정확한 직책은 비서라고 하기에 힘들지만 최근 하고 있는 역할이 그러니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으리라. “김미영 팀장님.” “아! 식사하시는 도중이셨군요.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거의 다 끝나기도 했고, 준비를 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보다시피 여기에 앉아 있으면 누워서 바깥을 구경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어서 말이죠. 아무튼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조금 심심하던 차였거든요. 뭐 새로 들어온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이후 일정은….” “네.” “바로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네, 부길드 마스터. 일단 가벼운 소식부터… 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공화국 의원들을 비롯한 대륙 각국의 귀족들이 보내 온 선물 목록입니다. 현재 길드 하우스 창고에 보관 중이며 특이사항으로는 공화국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고대 연금 서적을 비롯한 촉매가 있습니다. 그 외 동부의원 연합 그리고 공화국의 총통께서도 개인적으로 쾌유를 빈다는 메시지와 함께 선물을 보내주셨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이래서 권력이 좋다. “추가로 개인적으로 만나 뵙고 싶다 청하기도 하셨지만….” “아, 그건… 그다지 내키지 않습니다. 현재로서는 움직이기 힘들 뿐더러 다른 이들의 시선 때문에 행동하기가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개인적인 만남은 제가 따로 연락을 드린다고 전해주세요.” “네. 그대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왕이면 잘 포장해서 부탁드립니다.” “네.” “추가로 오스칼 님께서도 직접 병문안을 오시고 싶다고….” “음. 오스칼 님께도 굳이 찾아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아마 한창 바쁘실 테니까요. 그러지 않아도 수도는 바로 들릴 예정이니 그렇게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러고 보면 바젤 교황님도 뵈어야 하네요. 여러 가지로 궁금해하는 것도 많으실 테니…. 아! 그보다 길드원들은 조금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덕구나 현성 씨나.” “박덕구 님은 병상에 계십니다. 치료에는 차도가 있는 것 같아 며칠 안에 회복하신다고는 하지만 현재까지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으음. 그 발렌틴 알렉산드로 개자식은 아직 감옥에 있는 거죠?” “네.” “이단 심문관 헬레나한테 특별히 잘 부탁한다고 전해주시고, 아니, 이건 제가 따로 연락을 드리는 게 좋겠네요. 뭐, 며칠 안으로 전부 회복된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길드 마스터 같은 경우에는….” “네.” “최근 조금 생각하실 게 많은 것 같습니다. 창밖을 바라본다든가, 뭔가 고민하시고 계시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 딱히 다른 말은 없으시지만 평소와 다른 건 분명합니다. 물론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언제 한 번 부길드 마스터께서 이야기를 꺼내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흐음.” ‘이 새끼.’ 사랑스러운 회귀자에 대한 보고에는 괜스레 팔걸이를 툭툭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걱정 아닌 걱정이 샘솟았기 때문이다. ‘다 끝났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병문안 차 이곳에 왔을 때도 뭔가 분위기가 묘하기는 했지만 길드하우스에서도 비슷한 상태인 모양. 기분이 조금 찜찜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직까지도 멍 때리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김현성이 이번 전쟁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다른 건 몰라도 결과에 있어서는 굉장히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회 차가 얼마나 개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녀석의 반응으로 추측하건대 이 시점까지 각 대륙의 세력들이 개싸움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설마 그렇게 멍청한 짓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싫지만… 심지어는 알 수 없는 위협이 터진 이후에도 개싸움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 작은 밥그릇 하나 더 차지하겠다고 피터지게 싸우는 것으로 모자라 서로가 서로를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있었다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1회 차는 정말 지옥이었겠네.’ 가면 쓰레기의 활약으로 막장으로 치달았던 1회 차와 비교한다면 현재는 환골탈태했다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 조금 피해가 있기는 했지만 현 상황을 1회 차와 비교한다면 세발의 피다. 전 대륙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피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말하자면 대륙은 위협에 다가올 체력을 완전히 보존한 거나 다름없다. 어째서 녀석의 상태가 이상한지는 모르겠지만. ‘진청이 가면 쓰레기가 아니라는 오해하는 건가?’ 내 기준에서는 상당히 어렵기는 했지만 김현성이 느끼기에 진청이 제법 싱겁다고 느껴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녀석을 그렇게 괴롭혔던 가면 쓰레기가 자신은 악마 소환사가 아니라고 소리치며 추한 모습으로 잡혀 나오는 광경을 봤을 때. 김현성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판단하기 무척 어렵다. 심지어 가면 쓰레기 진청은 아군 병력에게 붙들리면서 나왔다. 녀석에 대해 약간의 존경심을 가졌던 나 역시 그 모습을 보고 온갖 정이 다 떨어졌을 정도. 카리스마 넘치던 가면 쓰레기의 모습 대신 그 자리에 자리한 것은 단순히 악에 받친 찌질이 한 명이었다. 김현성이 그 순간 느낀 감정은 허무함일까 아니면 통쾌함일까. 녀석의 생각을 알 수가 없는 나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녀석은 축 쳐진 상태. 언젠가 한 번 멘탈을 다듬어 줘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지금은 그럴 시간도 부족하다. ‘그나마 일을 해주긴 해서 다행이지.’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파란 길드원 전체가 힘들어졌으리라. 갑작스레 다른 생각을 하느라 팔걸이를 툭툭 건드리는 내 모습을 본 모양인지 김미영 팀장은 조용히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중. 깜짝 놀라 입을 열자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 “…….” “아. 죄송합니다, 김미영 팀장님.” “아닙니다. 혹시 계속 말씀드려도….” “네. 그렇게 해주셔도 됩니다.” “방금 바젤 교황께서도 한 번 뵙는다고 하셨던 일의 연장선입니다만.” “네. 일정은 최대한 빨리 잡아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 다음 주 내로 시간이 날 겁니다.” “실은 바젤 교황께서 급하기 찾으시는 일이 있습니다.” “네? 진청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아니면 재판 일정을….” “아뇨.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그… 뭐라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네.” “베니고어 님의 여신상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네?” 훈훈한 가운데 들려온 거지 같은 소식. ‘이건 또 뭐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위에서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아 얘는 또 왜 이래?’ 갑작스레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 418 회귀자 사용설명서 418화 위쪽에서 생긴 문제(1) 갑작스레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시발. 이거 괜히 불안한데.’ 본래 익숙하지 않은 상황은 반갑지 않게 마련. 초조한 마음에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해 오는 김미영 팀장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눈물 말입니까?” “네. 정확한 이유와 원인은 현재 교황청에서도 조사하고 있는 도중이라 전해 들었습니다. 아직 대외적으로는 알리지 않은 내용이기도 합니다. 교국민들의 혼란을 고려해 보면 그게 당연합니다만….”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 있는 시기와 타이밍이 아니긴 하죠. 아니, 그런 내용이라면 어떻게 이야기할 수도 없을 겁니다.” “네. 몸이 불편하신 건 알고 있지만 바젤 교황께서 하루라도 빨리 수도로 오시길 바라셨습니다. 기왕이면 오늘 내로….” “끄응.” “내키지 않으시다면 제가 말씀을 따로 드려….” “아뇨.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 때문이 아니에요. 내키지 않는 게 아닙니다.” ‘가기는 가봐야 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젤 교황의 부탁이다. 다른 일도 아니도 베니고어 교단의 일이다. 내가 가보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아파 뒈지는 한이 있어도 이런 자리는 무조건 참석해야 한다. 다른 일이라면 가볍게 무시할 수도 있지만 내가 가진 권력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나온다는 걸 생각해 보면 뺄 수 있을 리가 만무. 문제는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라는 것. 별거 아닌 괴기현상으로 취급하기에는 사안이 너무나도 무겁다. 특히나 교국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왜 갑자기 피눈물을 흘리고 난린데. 슈발.’ 심지어 여신상에 그런 이상 현상이 생길수도 있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다. 어째서 그동안은 이런 수단을 사용하지 않은 건지 통탄스러울 지경. 어떻게 봐도 불길한 징조다. 교황청에서 딱히 다른 리액션이 나오고 있지 않은 이유는 교국민들의 혼란을 막기 위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리라. 만약 이게 대외적으로 잘못 전파됐을 때의 혼란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일 터. ‘안은 이미 지옥이겠지.’ 성정이 화끈하신 바젤 교황의 성격으로 미루어 봤을 때, 아마 내부 분위기는 지옥 그 자체일 터. 나에게만은 친절한 우리의 바젤 교황님이 한 번 야마가 돌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는 만큼 한차례 침을 삼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사실 기본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원래 신이라는 족속들은 조금 째째한 면도 있고 간혹 이상한 짓을 하기도 하니까. 이를테면 엘룬 쓰레기처럼. 하지만 최근에 꽤나 커다란 컬 터뜨렸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는 만큼 조금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 할 수 있으리라. 물론 난 도둑이 아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여신강림이 개구라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경우. ‘망할 수도 있어.’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게 우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 조금 이른 생각이기는 하지만 교황청 쪽에서 먼저 눈치를 까고 나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려고 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여신상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도 전부 이쪽을 심문하기 위한 개수작. 물론 이 경우는 그리 심각한 사안이라고 볼 수는 없다. 베니고어를 통해 다시금 나의 순결함과 순수함, 신성함을 증명할 수 있으니까. 조금 짜증 나는 경우는 이보다 조금 더 발전한 경우. ‘베니고어가 통수치려고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베니고어가 본격적으로 이쪽의 통수를 후려치려는 경우다. 교황청에 있는 수많은 사제 중, 베니고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가 한 명도 없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비약. 누구 하나는 분명히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 거고 석상 피눈물을 신호탄으로 이쪽에게 물을 먹이려는 수작질을 설계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1회 차 때 내가 조금, 아주 약간, 그러니까 미세먼지 정도로 대륙의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현재 대륙에는 안정이 찾아왔고 신의 아들딸들은 발돋움할 준비를 마쳤다. 위험요소라고 생각되는 나를 잡아 족쳐도 이상한 타이밍은 아니라는 거다. 사냥이 끝난 개는 잡아먹힌다는 옛 사자성어가 떠오른 것은 당연지사. 내가 방심한 사이를 틈타 위쪽에서 이쪽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건 너무 간 건가.’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래도 내가 해준 게 얼만데. 이딴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시발 더러운 새끼들….’ 세계를 구한 것도 여러 번, 사랑스러운 회귀자를 물심양면으로 도운 것은 물론 인류를 하나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엘룬 쓰레기가 버린 딸을 받아줬고 바리안이 싸놓은 똥까지 훌륭하게 처리했다. 그게 어디 보통 똥인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건드리려 하지도 않았으리라. 베니고어 여신의 교도들에게 더욱 강한 믿음을 심어줬고 가장 강한 교단을 만드는 데 커다란 손을 보탰다. 신성한 민주주의로 그녀의 이름을 드높였으며 사악한 언데드들을 처리해 신의 위엄을 공고히 세웠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빛의 이름으로 악마까지 처단하고 라이오스의 국민들까지 위기에서 구해냈다. 박물관에 있는 고대신을 재봉인했으며 대륙의 미래에 위협이 되는 온갖 요소들을 사전에 처리해 미래에 대한 리스크를 줄였다. 혜자 중의 혜자. 이런 혜자도 없을 거라 단언할 수 있다. ‘그런 나를 이제 와서 쳐내겠다고? 말도 안 되지. 이게 진짜면 말도 안 되지. 신의 탈을 쓰고 그렇게 할 리가 없지.’ 악마 72군단 벨리알도 그렇게까지 나를 대우하진 않을 것이다. 선물을 줬으면 줬지 이런 대우는 말도 안 된다. 정식으로 항의해도 모자랄 지경. 아니, 정말로 녀석들이 악마도 하지 못할 생각을 하는 거라면 지금의 결심을 전력으로 후회하게 만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내 말 들려? 나를 정말 이렇게 내 치겠다고? 이 새끼들아? 내 말 들리냐고. 만약에 등 돌리면 너네랑 나 전부 다 뒈지는 거야. 알아들어?’ 정말로 그렇다. ‘김현성이 니네 편일 것 같아?’ 하지만 하늘에서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초조해지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레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 김현성이 갑자기 커다란 생각에 빠진 것도 혹시나 나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개 같은 악마 놈들. 이딴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혹시나 잠깐 동안 이쪽의 모니터링을 놓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몇 분이나 지났는데도 강제 퀘스트가 생성되지 않는 걸 보면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 아까는 단순한 의혹이었지만 의심이 점점 더 확산되기 시작. 계속해서 테이블을 두드리며 하늘에서 내려올 퀘스트를 기다려봤지만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다. 가능성은 두 가지. 1. 위에 뭔가 문제가 생겼든가. 2. 방금했던 생각처럼 정말로 이쪽을 토사구팽하려고 준비 중이든가. 만약 전자라면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나겠지만 정말로 놈들이 후자를 선택한 것이라면 그 선택이 얼마나 그지 같은 선택인지 전력으로 부정해 줄 것이다. 천천히 자리를 일으킨 것은 당연지사.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김미영 팀장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부길드마스터?” “아무래도 수도로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정은 어떻게 준비해드리는 게….” “오늘 저녁에는 떠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조금 급하게 움직이는 감이 없지 않지만 그만큼 시급한 사안이니까요. 아무래도 정말 교단에 문제가 있기는 있는 것 같습니다.” “함께 가실 수행원으로는….” “수행원으로는 정하얀과 박덕… 아니, 조혜진을 데리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추가로 카스가노 유노와 희라 누나에게도 연락을 넣어주세요. 팀장님. 그리고… 디아루기아와….” “엘레나 양에게도 연락을 넣는 게 좋을까요?” “지금 린델에 있습니까?” “네. 어제 파란 길드 입단서를 수리했고 오늘부로 정식으로 파란 길드원입니다. 직책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잘됐군요.” “전부 함께 수도로 향하시는 겁니까?” “네.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음… 네. 검은 백조 길드를 비롯한 린델 내 길드에는 제가 지금 써드릴 서신을 보내주시고… 아.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끝날 겁니다. 그리고… 엘프와 드워프들에게는 이 서신을 부탁드립니다. 한소라 씨에게는 이걸 따로 전해주시면 됩니다.” “네.” “그리고 지금 써드리는 서신 역시 수도에 도착한 이후, 사건이 터진다면 곧바로 여신의 거울을 통해 대륙에 퍼뜨려 주시면 됩니다, 팀장님.” “부길드마스터, 죄송합니다만 사건이라는 건….” “만약 정말로 사건이 터진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 만약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받으신 건 곧바로 파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만약을 위한 일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디아루기아의 둥지로 제가 적어드리는 물품들을 넣어주시고요. 은밀하면 은밀할수록 좋습니다. 당연하지만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들은 보안입니다. 밖으로 나가면 입 밖으로 내지도 티를 내지도 마세요. 팀장님.” “무, 물론입니다, 부길드마스터. 하, 한데… 이건 그… 혹시….” “김미영 팀장님이 뭘 상상하시는 지는 예상이 갑니다만… 하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만약을 위해 준비하는 일이니까요. 네. 만약을 위해서요.” “그, 그럼 지금 바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부길드마스터.” “잘 부탁드립니다, 김미영 팀장님.” “예.”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서는 김미영 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괜스레 든든해진다. ‘능력 있는 사람을 밑에 둔다는 건 좋아.’ 단언컨대 나보다 몇 배는 똑똑한 사람일 것이다. 처음 들어와서 일이 잘 풀리지 않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운이 없어서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조금 덜 이기적이었든가. 만약 김미영 팀장이 없었다면 파란에서의 생활이 몇 배는 더 힘들어졌으리라. 괜스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순식간. ‘지혜 누나한테는 미리 알리는 게 좋을까.’ 만약 거짓된 신 베니고어와의 관계가 틀어진다면 시작될 깽판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리고 현성이도….’ 이지혜도 이지혜지만 사랑스러운 회귀자를 꼬시는 것 또한 급선무. 이쪽은 조금 다루기 어렵겠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를 바탕으로 충분히 넘어오게 할 수 있다. 이번에 교단으로 함께 데려가는 건 조금 애매하기는 하지만. ‘지속적인 관리와 케어가 필요하니까.’ 물론 이 모든 게 내 망상일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 진실일 경우를 고려하면 수 백, 아니, 수 천 번을 대비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용하고 버릴지언정 이용당하고 버림받는 건 빛기영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타락해 버린 여신 베니고어와 그를 따르는 쓰레기 일당들에게 언제든지 빛의 철퇴를 먹여줄 준비를 해야 한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아니. 아니야. 이거 오해야… 그러니까. 전부 설명할 수… 있… 오해! 베니고어 님! 말 좀!! 안 돼!!! 오해라….(0/1)] [알 수 없는 이유로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취소됩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퀘스트 생성이 중단됩니다.] “타락한 신에게는 빛의 철퇴를.” 어김없이 퍼부어줄 수 있다. # 419 회귀자 사용설명서 419화 위쪽에서 생긴 문제(2) 뭔가 메시지가 뜬 것 같기는 했지만 당연히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이미 마음속에서는 의심의 씨앗이 싹을 튼 것으로도 모자라 꽃봉오리가 맺혔다. 지금 와서 내 사고를 막아보려고 한들,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거다. 백 번 양보해 아주 약간은 의심의 시선을 거둘 수 있지만 준비하고 있는 걸 캔슬할 정도로 착해빠지진 않다. ‘내가 그 정도로 멍청할 것 같아?’ 내가 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 이 메시지는 일방적으로 들려온 메시지다. 누가 보내온 건지도 모를 퀘스트. 심지어 이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퀘스트 생성을 중단한단다. 신뢰도가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일시적으로 퀘스트 생성이 중단됩니다.] ‘알 수 없는 이유는 개뿔….’ 어쩌면 문제가 생겼다고 연막을 친 이후에 뒤통수를 후려치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베니고어는 모르겠지만 엘룬 쓰레기라면 충분히 가능한 행동. 자신만을 믿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엘레나를 과감하게 버린 걸 보면 베니고어가 나를 버리는 장면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애초부터 이 타락한 신들에게 인정과 의리는 없다. 자기 자신의 탐욕과 이득을 위해서라면 아들딸들의 뒤통수를 칠 준비가 되어 있는 못된 부모들. ‘가시는 길 편하게 보내드리겠습니다.’ 고려장이라는 잘못된 풍습을 혐오했던 나지만 이번만큼은 지게에 베니고어를 싣고 산으로 올라갈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아직까지 실행 버튼을 누르지는 않았지만 만약을 위한 안전장치도 불안한 것이 사실. 상대가 타락한 신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아직도 부족하다. 이지혜에게 따로 넣을 매뉴얼을 작성하며 가지고 있는 물품을 점검하는 것은 순식간. 일단은 나 자신이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강제 각성의 후유증으로 조용해진 율리에나와 갖가지 효능을 가지고 있는 포션들, 전설 등급의 방패 아이기스를 장착하는 것은 물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무장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한다. 겉모습은 마치 원정이라도 떠나는 모양새. 단순히 수도에 다녀온다고 하기에는 과하지만 그제야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나도 어느새 현지인이 다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 조용히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다시 한번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구인지는 뻔할 뻔 자. 활짝 웃으며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하얀아?” “오빠, 부르셨어요?” “아. 잠깐 기다려. 곧 나갈 테니까. 이야기는 들었어?” “네. 수, 수도로 가신다고요. 급한 일이 생기셨다고….” “응.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가게 됐는데. 괜찮은 거지?” “네. 무, 물론이죠.” “희라 누나도 같이 갈 거야. 엘레나와 혜진 씨도.” “…….” 조금은 뾰루퉁한 얼굴. 인선에 대해서는 이미 전해 들었겠지만 막상 내 입으로 다시 들으니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다. “크게 신경 쓰지 마. 일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게.” “아!” 팔을 살짝 벌리자 조용히 안기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스스로가 내뱉은 오글거리는 대사에 닭살이 돋아나기는 했지만 받는 대상은 저런 대사를 즐긴다. 고객에 입맛에 맞추며 목줄을 채워두는 게 중요하다. 정하얀 역시 주요인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김현성과 마찬가지. 대체 불가능한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마법사 정하얀은 인간들도 모자라 신들도 탐내는 종류의 인간이다. 본래 잘 케어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어루만져주는 게 중요하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맡은 바 임무도 잘해주고 있고 결혼이라는 안정제로 분노조절을 완화시켜주고 있는 지금 정하얀의 상태는 최상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최근에는 바닥을 쳤던 자존감 역시 하늘을 뚫을 정도로 올라가고 있는 상태. 어마어마하게 강해지기도 했고 프로포즈를 받음으로써 달라진 뉴타입 정하얀은 내가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걸 참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목숨을 걸고 얻은 결과가 겨우 이 정도라 생각하면 조금 씁쓸하기는 했지만 이런 심적 안정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서론이 길기는 했지만 여기서 중한 것은 현 정하얀의 정신 상태는 굉장히 안정되어 있다는 거다. “그런데 갑자기 무, 무슨 일이에요? 조금 더 푹 쉬셔도 조, 좋을 텐데. 계속 누워계시지 않고….” “교단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떤 사고가 생길지 모르니까. 그보다 엘레나는 같이 안 왔어?” “혜진 씨랑 밖에서 준비하고 있어요. 떠날 준비요. 이, 일주일은 있는 다고 하셨으니까. 길드 직원들도 짐을 챙기고 있고요. 그, 그럼 오빠. 수도로 가시면 교단에서 주무시는 건가요?” “응.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아. 아니면 따로 건물을 빌릴 수도 있을 것 같고. 상황에 따라 달라질 거야. 일단 우리도 밖으로 나갈까?” 어째서 내 잠자리가 중요 요소인지는 모르겠지만 교단에서 자는 걸 그리 반기지는 않는 모양. 이런 종류의 냄새는 동물적으로 캐치하는 만큼 뭔가 불길한 걸 느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슬쩍 정하얀을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한쪽 팔을 꽉 잡는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조금은 민망했지만 잠자코 발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내가 눈치를 준다고 한들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이윽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자 금방 길드의 그리폰 이륙장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시야에 비친 것은 둘. 그리폰들을 사육장에서 꺼내고 있는 조혜진과 그 모습을 몇 발자국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엘레나.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던 엘프는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정하얀을 보고는 표정을 굳혔고 조혜진은 평소대로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나 참….’ 무언가 아련해 보이는 표정의 엘레나의 얼굴이 보인다. 입술을 꽉 깨문 것이 혹시라도 폭발하지 않을까 무섭다. 기본적으로 마음이 약한 엘레나가 (구)정하얀 같은 행동을 보이지는 않을 거라 판단하고 있지만 혹시나 이쪽이 모르고 있는 모습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에베리아 왕국의 반대를 뚫고 나와 이곳에 있는 게 증거 아닌 증거. 사실 그녀도 내 동료라고 할 수 있는 몸이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하하 호호 웃고 있지만, 실상은 타락한 신들에게 버림받은 선배. 하늘을 향해 원망이라는 탄도를 발사할 준비를 마친 대포동 미사일이나 다름없다. 이후 언론플레이에서도 커다란 활약을 보여줄 수도 있는 만큼 각별한 관리와 취급을 요하고 있는 상태.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자 침울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 처량한 모습이 엘룬 쓰레기에게 버림받아 생긴 결과물이라 생각하자 다시 한번 하늘 위의 존재에 대한 적개심이 피어올라왔다. ‘저렇게 여리고 여린 엘프를….’ 입술이 꽉 닫아버린 것은 당연지사.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레나는 쭈뼛쭈뼛거리며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부… 길드마스터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엘레나 님.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하하.” “아….” “길드의 일원이신 건 맞지만 아무래도 엘레나 님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일반적인 길드원으로 다루기가….” “그렇게 특별대우 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부디….” “아니요. 특별대우를 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파란은 그렇게 딱딱하지 않을 뿐더러… 개인적인 친분도 있으니까요. 저도 다른 파티원들과 현성 씨에게 의식적으로라도 딱딱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엘레나 님도 평소대로 행동해 주시면 됩니다. 아무튼 조금 늦었지만 파란 길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엘레나 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뇨. 제가 드려야 하는 말씀인 걸요. 잘 부탁드려요, 이기영 님. 그… 리고 정하얀 님도요.” “네,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 그, 그리고 파란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감사합니다.” “출발 준비는 끝났습니까? 혜진 씨?” “네, 부길드마스터. 차희라 님이 도착하시면 곧바로 출발해도 될 것 같습니다. 디아루기아 님은 이후에 합류하기로 하셨고 카스가노 유노 님도 수도에서 뵙는다고….” “아, 그렇군요. 고생하셨습니다.” “당연히 해야 될 일입니다.” 일 처리 빨라서 좋긴 하다. 희라 누나도 함께 간다는 건 환호성을 지를 만한 소식. 잠깐 동안 그녀에 대해 떠올리자 곧바로 한쪽에서 붉은 머리를 한 인형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붉은 용병의 수행원을 몇몇 데리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평소대로의 그녀의 모습이 맞다. “오랜만이네, 자기. 아니, 오랜만이라고 하면 안 되는구나. 며칠 전에도 봤으니까.” 전쟁이 끝난 이후 곧바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를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평소답게 푸석푸석한 머리가 정돈되지 않은 듯한 느낌은 왠지 모르게 갈기가 빨간 사자를 떠올리게 할 정도. 조금 달랐던 건 눈 밑에 다크서클이 퀭하게 져 있다는 것. “어디 아파?” “욕구불만.” “…….” “…….”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자기도 알다시피 조금 오랫동안 미쳐 있었거든. 그 후유증이라고 보면 돼. 이렇게 오랫동안 정신을 놓고 있었던 건 정말 오랜만이기도 하고, 최근에는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라.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제기랄. 숙취에 시달리는 것보다 10배는 더 괴로워. 그걸 입는 게 아니었는데.” “광전사 세트?” “봤어?” “아니. 직접 보지는 못하고 이야기만 들었지. 갑옷도 걸치고 무기도 들고 있었다고. 그거 전설 등급 아이템이야?” “맞아.” “한번 보고 싶은데.” “정말로 보고 싶어?” “아니….” “잘 생각했어. 나도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거든. 그보다… 이렇게 옹기종기 다 불러 모은 이유는 뭐야? 피크닉 가기에는 무장상태도 제법 훌륭한데. 수도 안에 던전이라도 발견 됐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준비성이 철저한 거라고 생각해 줘.” “뭐. 자기가 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흠…. 기왕 가는 김에 이번에는 느긋하게 쉬다 왔으면 좋겠는데. 말 그대로 느그읏하게. 그렇지 않아, 자기?” 힘없이 웃으면서도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무섭게 느껴진다. 대놓고 이쪽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육식동물 앞에 초식동물이 된 느낌. 아니, 기분 탓이 아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한차례 살피는 모습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나 다름없었다. 정하얀이 내 옷깃을 꽉 잡은 것은 바로 그때. ‘너네… 또 그러지 마.’ 이 사람들이 부딪치면 일이 어떻게 되는지는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저번에야 어떻게 잘 끝났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잘 끝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결국에는 천천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느긋하게 쉬는 건 중요하지.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그리폰에 올라타자. 누나랑 하얀이랑 엘레나 님이랑 같이 타고, 나는 혜진 씨랑 타는 게 좋을 것 같네. 그렇지? 그렇지 않습니까? 혜진 씨?” “…….” “…….” “…….” “자. 그럼 빨리 올라오세요, 혜진 씨.” “…….” “빨리요.” “불쾌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저도 마찬가지니까 어서 타기나 해요.” 순식간에 자리를 잡은 이후, 조혜진의 등을 꼭 붙든 것은 당연. 세 명의 여인들은 조금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보내고 있지만 다행히 질투하는 모습을 보내오지는 않았다. 다만 저들이 함께 그리폰에 타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는 저 자리에 있는 게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너무 꽉 붙잡지 마세요, 부길드마스터. 정말로 불쾌합니다.” 물론 다른 의미로는 조금 상처 받고 있었지만 말이다. # 420 회귀자 사용설명서 420화 위쪽에서 생긴 문제(3) 눈길을 사로잡는 풍경도 매번 보다보면 질리게 마련. 수도로 가는 광경이 딱 그랬다. 산과 도시, 산과 마을, 산과 강, 끊임없이 펼쳐져 있는 풍경은 아름답기보다는 물린다. 수도로 도착했을 때 봤던 광경이 더 훈훈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명예추기경님!” “여신님의 대리자!” “베니고어 여신의 축복을!” 멀리서 환호를 보내고 있는 교국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준 것은 당연지사. 입구에서 내려 한 명 한 명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조금 아쉬울 지경이었다. 서둘러 움직일 수밖에 없는 현 상황이 괜스레 아쉬워졌다. “꽉 잡으세요. 곧 도착입니다.” “네. 혜진 씨.” “너무 꽉 잡으시면 부담스럽습니다. 과한 신체적 접촉은 최대한 지양해 주세요.” ‘어쩌라는 거야.’ “죄송합니다.” “…….” “…….” 아쉬운 맘을 품은 채 그리폰이 착륙한 곳은 구 황성, 현재는 교국의 지도자 오스칼이 기거하고 있는 장소였다. 벌써부터 마중 나와 있는 이들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카트린 의원과 엘리제 의원. 마를린과 오스칼을 비롯한 소중한 아군 여러분. 이런 표현이 맞을 줄은 모르겠지만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사교계 복귀 같은 느낌. 실리아에서 한발 먼저 출발해 도착해 있는 카스가노 유노도 보였고 그 외에 자리 잡은 소중한 인맥들이 시야에 비친다. “명예추기경님.” “오랜만입니다, 오스칼 님. 이렇게 마중 나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당연히 마중 나와야지요. 대륙을 구한 영웅이시니까요.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완전히 회복이 되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늦게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니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도리어 제가 죄송합니다. 차라도 먼저 대접해 드리고 싶지만….” “일이 끝난 이후에 들리겠습니다.” 구 아리스 시녀, 현 오스칼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지는 게 보였다. 일이 끝난 이후 한번 들리겠다는 말이 제법 달콤하게 들려왔던 모양. ‘얘도 여전하네.’ 남자처럼 짧았던 머리가 어느새 조금 길어 단발이 되었다. 차를 대접하고 싶다는 말이 단순한 접대용 멘트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한껏 미소가 지어졌다. 만약 일이 터진다면 황성 쪽에서도 주도적으로 움직임을 취해줘야 하는 만큼 미리미리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지만….’ 그만큼 오스칼과 이쪽은 돈독하다. 애초에 그녀를 저 자리에 올려놓은 게 나라는 걸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 물론 나와 사이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다. “카트린 의원님. 그리고… 엘리제 의원님. 마를린 영애도 오랜만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얼굴보기가 힘들어 지는 것 같네요. 명예추기경님은. 후훗.” “하하. 농담에 뼈가 있는 것 같습니다, 카트린 의원님.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최근 시간이 없었던 터라….” “뼈가 있다니요. 명예추기경님이 교국을 위해 큰일을 해주시고 있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저희가 잘 알고 있답니다. 그리운 마음에 한 실언이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만큼 뵙고 싶었으니까요.” “저도 여러분과 함께하는 티타임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얼마나 생각이 나던지.” “정말인가요? 명예추기경님?” “네, 마를린 영애. 정말이고말고요.” “아마 그건 마를린 의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명예추기경님. 저희와 만날 때마다 명예추기경님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라니까요.” “정말입니까?” “카, 카트린 의원님!” “지금 얼굴 붉어진 거 보이시죠?” “하하.” 아직까지도 쌍팔년도 러브코미디물의 액션을 보여주고 있는 마를린 영애. 그리고 그에 전력으로 호응해 주고 있는 카트린 의원과 엘리제 의원의 모습도 여전하다. 이전과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귀족의 예법을 거의 생략했다는 것. 변화하는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나 스스로도 제법 뿌듯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 뒤로 고개를 돌려 인사를 나눈 것은 카스가노 유노를 비롯한 실리아 사람들. “또 뵙는군요.” “네. 주, 아니, 이기영 명예추기경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그 외에 다른 인물들과도 형식적인 인사를 마친다. 어깨를 두드려주거나 덕담을 나누는 쓸데없는 스몰톡을 하는 건 인맥관리의 연장선. 함께 온 차희라 역시 반가운 얼굴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고 있다. 그 와중에 정하얀은 카스가노 유노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마 오래전에 있었던 사건이라도 떠오른 모양. 괜스레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기는 했지만 잠시 후 위풍당당하게 콧대를 올리는 정하얀을 바라본 이후에는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나저나 명예추기경님, 갑작스레 수도에는 무슨 일로….” “하하. 실은 교단에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교단 말입니까?” “네. 정확한 이유는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요.” “아마 사소한 문제일 겁니다, 오스칼 님. 아직은 크게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안 그래도 최근에 교황청이 조금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교단 내부의 일이나 제가 크게 간섭할 수는 없지만 분위기가 썩 좋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바젤 교황 성하도 최근에 근심이 많으신 얼굴이었고…. 뭔가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셔도 된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아마 바젤 교황님 역시 기쁘게 받아들이실 겁니다. 어쩌면 오늘 내로 공식적인 발표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네.” ‘얘한테도 비밀로 하고 있는 건가?’ 어느 정도 납득은 된다. 어차피 교국은 정치와 종교의 개념을 거의 완벽하게 분리하고 있으니까. ‘얘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네.’ 함께 움직이고 있었던 파트너가 갑작스레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심정이 어떨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었지만 아마 속은 타들어 갈 것이 분명. 내가 아직은 신경 쓸 일이 아니라 못을 박아두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찝찝해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을 때였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인원들이 시야에 비친 것. 누구인지는 뻔한 일이다. 신성기사단에게 둘러싸여 있는 바젤 교황이었다. ‘인원이 꽤 많네.’ 물론 일반적인 호위 병력이기는 하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는 저 신성기사단에게도 의심의 시선이 머물게 된다. 기본적으로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하고 있는 마음이 컸지만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이놈의 멘탈 때문인지 별 쓸데없는 걱정들이 휘몰아친다. 물론 당장 걱정할 이유는 없다. 만약에 사건이 터지더라도…. ‘전력은 충분해.’ 굳이 초조한 모습을 보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거다. 지금 당장은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유리한 것이 당연. 눈에 띄게 입꼬리를 올리자 저 멀리서 나를 본 바젤 교황 역시 입이 찢어지듯 미소를 보내오는 게 눈에 보였다. 거짓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의심의 씨앗이 조금은 사그라진다. 현재 바젤 교황이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교단에서 나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바젤 교황님!” “이기영 명예추기경!” 깜짝 놀랄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순식간이다. 어미 새를 기다리던 아기 새 같은 통한의 외침. 줄리엣의 죽음을 바라본 로미오의 목소리도 이처럼 격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목소리에 들어선 것은 안도감과 그리움. 여기 자리한 다른 이들처럼 얼굴 본 지 꽤 됐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예상보다 더욱 좋은 반응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좋아.’ 성큼성큼 다가오니 함께 자리한 신성기사단의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지기 시작. 조금 더 가까이서 바젤 추기경의 얼굴은 확실히 눈에 띄게 수척해 보였다. 평소처럼 깔끔한 모습은 여전했지만 잠도 자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했는지 살이 많이 빠진 모습. 진청쓰레기를 수도로 옮길 때 보였던 모습이 불과 일주일 전 이건만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눈물이 고이고 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알려주는 대목. 다 늙은 할아버지의 약해진 모습을 보자 손을 꽉 잡은 손에 괜스레 힘이 들어갔다. 내 손을 잡은 채 오스칼을 비롯한 의원단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가관이다. 물론 격식에 어울리는 행동은 아니다. 바젤 교황이라면 하지 않을 실수였지만 그가 얼마나 심적으로 힘들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대목인 것 같아 마음이 찡해졌다. “정말 큰일을 해주었네, 이기영 명예추기경. 린델로 찾아가지 못해 얼마나 신경이 쓰이던지….”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바젤 교황님. 주변에 알려진 것보다 몸 상태는 훨씬 괜찮습니다. 오히려 정말로 린델로 오셨다면 제 마음이 더 불편했을 겁니다.” “그런가…. 아암. 그렇지. 자네라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겠지. 잘 와주었네. 아주 잘 와주었어, 명예추기경.” “교단의 일입니다. 제 일이기도 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심란하시겠습니다.” “그렇지…. 명예추기경, 혹시 최근에 베니고어 여신님에게서 들려온 목소리는 없었나?” “네. 최근에는….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기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럴 것이 아니라 빨리 상태를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바젤 교황님.” “그렇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빨리 움직이세.” “예.” 짧게 대답한 이후 서둘러 이동. 물론 소중한 내 호위 군단과 함께다. 바젤 교황의 반응 때문에 경계심이 조금 풀어졌지만 기왕이면 함께 움직이는 게 훨씬 좋으니까. 신성기사단에도 딱히 제지를 하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내 사람들이 함께 들어가는 걸 용인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나를 신뢰한다는 거네. 나쁘지는 않아.’ “바젤 교황님, 이상 현상이 생긴 시기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네. 정확히 그저께 새벽 2시 즈음이라고 알고 있네. 여신상에 기도를 드리던 일반 사제가 최초로 발견했고 10분 이후에는 나 역시도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베니고어 님을 볼 수가 있었지. 면목 없지만 아직까지도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이단심문관들과 주교 이상 사제들이 최선을 다해 움직이고는 있지만….” “…….” “별다른 차도가 없네. 여신상이 있는 본당은 현재 주교급 사제만 출입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고 혹시 모를 소문의 확산을 억제하기 위해 최대한 조심하고 있지만 어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는가.” ‘그럴 수밖에 없겠지.’ 갑작스레 본 예배당의 출입을 제한하는 것은 물론 주교급 이상의 사제들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그 이하의 사제들에게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다.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표정을 굳히고 있는 사제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 본당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워지는 분위기는 괜스레 식은땀을 흘러내리게 했다. 바젤 교황을 선두로 천천히 본당의 문을 열자 시야에 비치는 모습은 가관. ‘왜 또 울고 난리야.’ 그 이질적인 괴기 현상에는 입을 벌릴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근데 저거 촉매로 쓸 수는 있는 건가….’ 마음의 눈에 들어오는 정보도 마찬가지였다. # 421 회귀자 사용설명서 421화 위쪽에서 생긴 문제(4) [베니고어 여신상의 통한의 피눈물-준신화 등급] [준신화 등급의 촉매로 분류되는 여신의 눈물입니다.] ‘쓸 수 있겠는데?’ 어떻게 쓸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지 않아 뭐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지만 일단 사용할 수는 있다. 혹시나 신화 등급은 아닐까 기대했지만 시스템에서는 저 물건을 여신의 눈물이 아닌 여신상의 눈물로 분류하고 있는 모양. 쩨쩨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신화 등급을 얻으려면 베니고어라도 족쳐야 한다는 거네.’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이 장소에서 저런 물건을 만난 것 자체가 행운이다. 아직까지도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는 촉매를 채취하고 싶어진 것은 당연지사. 바젤 교황과 다른 이들이 함께 있지 않았더라면 일단 저 석상에 달라붙었을 것이다. “신이시여….” 다시 한번 여신상을 살피기가 무섭게 바젤 교황의 탄식이 들려왔다. 계속해서 이곳에 자리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슴이 미어지는 모양이다. 물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바젤 교황은 교단 내에서도 믿음이 가장 확고한 신자들 중 하나였고 실제로도 가장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여러 가지 정치싸움과 알력싸움이 있기야 했지만 괜히 저 자리에 올라가 있는 게 아니다. 여신상의 외관과 더해진 그 모습은 확실히 숙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 그녀가 조금 덜 억울하게 생겼더라면 저렇게까지 슬퍼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으리라. 베니고어의 전체적인 외관은 미형이다. 물론 저 여신상의 모습이 실제 하늘에 있는 베니고어의 모습과 일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녀는 어디에 놔도 꿀리지 않을 외형을 가지고 있다. 조금 특이사항이 있다면 왠지 모르게 억울하게 생겼다는 것. 틀림없이 미형이긴 하지만 얼굴 곳곳에 억울함이 묻어나 있었다. 저런 얼굴로 피눈물까지 쏟아내니 정말로 여신이 슬퍼하는 모습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흐으으윽. 여신이시여….” 바젤 교황뿐만이 아니다.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주교급 이상의 사제들 정체모를 탄식을 내뱉는다. 기도를 하는 척했지만 주변을 살피는 것은 순식간. 저 석상에서 무언가 다른 이상 현상이 터지지는 않을지 걱정된 탓이다. ‘베니고어 여신님, 우리 사이 아직 그대로죠? 제 뒤통수를 노리고 있는 건 아니죠?’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다시 한번 신전 쪽 인사들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들 역시 뭔가 움직이려는 낌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나를 낚기 위해 이곳에 데려온 것도 아니고 베니고어 여신에게 언질을 받은 것이 아니다. 저들도 이 이상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판단해도 될 것 같다. 아직 결론을 내리기는 이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베니고어가 타락해 미쳐 버렸다는 뇌내망상은 내려놔도 괜찮을 것 같았다.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 “어, 어떤가, 명예추기경. 여신님의 목소리가….” “음….” ‘이걸 뭐라고 해야 돼?’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있게 구라파티를 열고 싶기는 했지만 일단은 고개를 젓는 게 당연. 하지만 뭔가를 깨달았다는 언질을 해준다면 교단 측의 반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흔드는 액션을 한 번 보인 것은 당연지사. 나라를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유지하는 건 빛기영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일. 입을 열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들리지 않습니다. 여신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허….” “사, 사실… 어째서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이시는지 예상이 가는 부분이 있기는 있습니다. 물론 제가 경솔하게 입을 열기에는 이른 시기인 것 같지만….” “그게 뭔가!” ‘득달같이 달려드는데?’ 사막을 수십 일 동안 헤매던 여행자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한 표정. ‘얘 이거 연기 아니네.’ 아까부터 계속해서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어서 말하라는 듯한 바젤 교황의 표정을 보자 어느 정도 확신이 든다. 아직 베니고어는 타락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바젤 교황님.” “어서 말해보게, 명예추기경.” “…괜찮으시다면 잠깐 자리를 피해주시겠습니까. 여신님과 단 둘이….” “아암. 그, 그렇게 하겠네. 그렇고말고! 뭣들 하는 게야. 어서 나가지 않고!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여신님의 상태를 살펴보신다고 하지 않은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본당에서 나가게! 시, 시간은 어느 정도면 되겠는가. 명예추기경.” “조금 오래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기다려 주십시오, 바젤 교황님. 여신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제 모든 것을 걸고 꼭 밝혀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명예추기경. 잘 좀 부탁해.” ‘알겠으니까 손 좀 놔. 아프다….’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하게나. 무엇이든지!” “네. 꼭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명예추기경이 와줘서 정말로 다행이야. 정말로….” “아닙니다, 바젤 교황님.” ‘알겠으니까 빨리 나가라. 나도 머리 아프다.’ “꼭 좀 잘 부탁하네. 꼭!” ‘좀 나가….’ 두 손을 꽉 붙잡은 채로 신신당부 하고 있는 모습은 가관. 결국에는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바깥으로 나가는 이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하얀과 차희라를 비롯한 이쪽의 보험 역시 정말로 괜찮겠냐는 듯 나를 바라보기 시작.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괜찮을 것 같다 듯 고개를 끄덕이자 교황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도 보였다. 저 여성 군단이 따로 어떤 시간을 보낼지 궁금하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저쪽이 아니라 이쪽. ‘당연히 내 할 일은 해야지.’ 생각이 복잡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할 일은 하는 게 맞다. 항상 가지고 다니던 연금키트를 꺼낸 이후에는 곧바로 피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위치에 셋팅. ‘좋아.’ 뚝뚝 떨어지고 있는 피눈물을 받아내는 빈 유리병이 괜스레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한두 시간 정도만 기다려도 가득 채워지리라. “선물이나 하자고 뜬금없이 울고 있지는 않을 테고…. 얘 진짜 뭐 문제 생겼나?” 어떻게 생각해도 문제가 생길 여지는 없다. ‘악마와 전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어디에 감금된 것도 아닐 테고.” 내가 떠 안겨준 수많은 업적이 전부 베니고어 여신의 공적치로 쌓여있다는 걸 가정하면 오히려 행복에 소리를 질러야 하는 게 맞다. 어쩌면 이건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일 수도 있다. 인류를 하나로 만들어 대륙을 위기에서 벗어난 기쁨의 피눈물.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할 없다. 우스갯소리지만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이유 또한 파티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는 거다. ‘직무유기고 직무태만이야.’ 물론 방금 가정이 들어맞았을 경우의 확률은 확연히 낮다. 하지만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저 피눈물에 대한 설명이 없다면 나로서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변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원인을 파악하지는 못했으니 결과를 멋대로 파악하고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일단 바젤 교황을 비롯한 교단 고위직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변명은. ‘악마를 한 번 더 팔아먹으면 될 것 같은데….’ 구시대적인 발상이기는 하지만 이것만큼 좋은 게 없다. 곳곳에 숨어 있는 악마 하수인들을 빠르게 처리하라는 신탁. 그 악마의 하수인들로 인해 대륙의 정기가 훼손되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도 문제가 생겼다고 둘러대면 적절하리라. 안 그래도 악마 소환사 진청 말고도 처리해야 될 놈들을 몇 놈 솎아낼 참이었다. 이쪽에 비협조적이었던 인물들은…. “전원 악마 관계자니까. 대륙의 미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거고….” 교국과 마도 왕국, 공화국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 멀뚱멀뚱 구경만 하고 있었던 개자식들 역시 마찬가지다. ‘중립이 제일 병신이다’라는 명언처럼 녀석들 역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모두를 적으로 만든다는 소리는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이전의 생쇼가 전부 무의미해지는 만큼 핵심 인물 몇 명만 추려내도 될 것 같았다. 마도 왕국의 원로 마법사 메디리브. 세상의 균형 어쩌고저쩌고 지껄이는 이 개자식이 기거하고 있는 마법사의 탑은 사실…. “악마의 첨탑이었던 거지…. 정말 큰일 날 뻔했어. 하마터면 악마한테 당할 뻔했네.” 전쟁을 일으키는 데 가장 앞장섰던 공화국의 대장군. “악마 72군단장의 하수인, 72군단장들의 쉼터. 기회를 줄 수야 없지.” 아무것도 가담하지 않았던 왕국 내에서도 솎아낼 이들이 많다. 악마의 협곡에 기거하고 있는 악마 협곡 관리자. 바다를 오염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는 악마 하수인 총괄 해협의 군주. 한 개인이 아니라 단체 단위로 조져야 되는 이들이 많다. 물론 싸울 수 있는 병력들이 사라진다는 건 가슴 아프기는 하지만 어차피 이런 놈들은 있어도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다.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이들이기도 했고 가만히 놔두기에는 세상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이라는 거다. 명분도 있겠다. 이유도 있겠다. 이번 기회에 싹 한 번 쓸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당연지사. 내가 생각해도 나쁘지 않은 변명이다. 대륙에 퍼져 있는 악마 관계자를 전부 처리하는 과업이 순식간에 완료되지는 않을 테니 시간을 질질 끌다. 다른 이유를 생각해 놓으면 된다. 바젤 교황이라면 충분히 내 생각에 공감해 줄 것이다. 벌써부터 악마 관계자 여러분들의 리스트를 하나둘 머릿속으로 정리하게 된다. ‘정보는 진청한테 받았다고 하면 되겠네.’ 녀석이 악마 관계자들을 전부 밀고했다고 조작하면 충분히 그럴듯한 내용을 완성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하늘에서는 문제가 생겼을지 모르겠지만 땅에는 문제가 없다. 오히려 너무 잘 풀리고 있어 행복해질 정도. 괜스레 고마운 마음이 들어 저도 모르게 여신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을 때였다. “진짜 억울하게 생겼네.” [제발. 흐으으윽. 제발… 주신이시여…. 제발….] “뭐?” [내 목소리 들려? 내 목소리 들려? 이기영 이 개자식아! 허어어어엉….] “뭐야?” [내 목소리 들리냐고!] “들리는데….” [살았다…. 살았어. 다행이다. 정말… 정말로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 우, 우리 사랑스러운 이기영 명예추기경! 나 배신한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은 한 적도 없어. 절대로 한 적 없다고. 전부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야. 천천히 설명해 줄 테니까. 허튼짓 하지 마.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우리 지금처럼만 가자. 허튼 짓 하지 마. 절대!!] ‘뭐야 이건….’ 잠깐 석상에서 손을 떼자마자 들려오지 않는 목소리. 편한 방법 놔두고 어째서 이런 방법으로 접선을 하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살포시 손을 올려놓자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너 좋아해. 한 번도 배신한다거나 그런 생각은 한 적도 없어. 으응. 그렇고말고. 쓰레기라거나 나쁜 새끼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우리 사이 좋았잖아. 그러니까 우리 서로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말자. 타락한 신 베니고어. 그거 아니야. 나는 타락한 적도 없고 대륙을 적으로 돌린 적도 없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폭포수처럼 쏟아져 오는 말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참이나 타락한 신 계획에 대해 떠들고 있었던 베니고어가 결론을 이야기 한 것은 바로 직후였다. [나… 파산했어.] # 422 회귀자 사용설명서 422화 위쪽에서 생긴 문제(5) [나 파산했어….] ‘무슨 파산을 해?’ [나… 파, 파산해서 그래…. 아무것도 없어서…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나오고… 막 그러는 거야. 절대로 그런 거 아니야. 타락한 거 아니라고…. 흐으으윽. 그러니까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걸 유용한 정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조금 기쁘기는 하다. 내 가설이 아주 약간은 들어맞았다는 거니까. 악마는 계약으로 실적을 올리고 신들은 믿음으로 실적을 올린다. 그녀가 파산했다고 말했다는 건 수중에 있는 돈을 모두 잃었다는 게 아니라 아마 보유하고 있는 신성을 잃었다고 표현한 것이리라. [맞아.] ‘어떻게 그동안 모은 신성을 다 날릴 수 있는 건데? 이해할 수가 없는데. 사치라도 부린 거 아니야?’ [뭐? 이, 이 개새끼. 이 쓰레기 새끼! 네 입에서 그딴 소리가 나와?!] ‘…….’ [아니지. 아니지. 이러면 안 되지…. 내가 미안해. 내가 정말로 미안해…. 이기영 명예추기경, 내가 가장 아끼는 신도가 이기영 명예추기경인거 알지? 나 타락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그런 짓 하면 안 돼.] ‘…….’ 화를 냈다가 살살 달래는 이중인격 사이코의 모습은 충분히 타락했다고 할 만했다. 하지만 일말의 정신은 유지하고 있는 모양. 일단 어째서 이런 형태로 연락을 취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퀘스트를 생성하는 데도 신성이 들어간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겨우 그것조차 보내지 못할 경우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 […….]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다. 쉽게 답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우리 베니고어 여신님, 이 미천한 신도가 뭘 궁금해하는지 알고 계신지요?” [기… 본적인 퀘스트는 이미 정해져 있어. 예를 들어 전직 퀘스트나 던전에 들어갔을 때 받을 수 있는 퀘스트는 시스템이 관리하고 있고… 강제 퀘스트나 개인에게 보내는 퀘스트 같은 경우에는 달라. 우리가 직접 신성을 사용해 보내는 거야. 당연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신성이 소모돼. 신은 인간의 일에 개입할 수 없어. 원래 그게 원칙이야. 강제 퀘스트 같은 경우는 그 법칙에 위배되는 행위고. 물론 그 내용이나 난이도에 따라 들어가는 신성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래. 완료 이후에 지급되는 보상도 마찬가지고.] ‘좋은 거 알아가네.’ [기존에 있던 신성은 전부 다 털렸고 빌리고 빌렸던 신성도 전부 다 털어 넣었어. 내 자랑스러운 신도… 이기영… 끄읍… 명예추기경을… 후읍… 위해서.] “그래서 우리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파산했다는 원인이 저라고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그런 건 아니시죠?” [무, 물론… 전부 내 잘못이지. 전부…. 아, 아무튼 그래서 이런 식으로밖에 접선할 수 없었어. 강제 퀘스트를 생성할 수도 없고…. 그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으니까.] “신이 베니고어 여신님 한 분밖에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엘룬 쓰레기도 있고… 다른 분들을 통해서도 연락을 해주시면 되셨는데…. 비록 잠시뿐이었지만 어째서 이 신도를 져버리신 건지 궁금합니다.” [서, 설명할 수 있어! 이 대륙을 관리하는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야. 엘룬, 바리안, 그밖에 다른 신들도 전부 파산 상태야. 내가 여기저기에서 신성을 많이 땡겨 써서 그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너무 많아서… 그래… 심지어 외부에서도… 일이… 조금 안 좋게 됐거든. 질 나쁜 놈들한테 걸려들어서….] ‘대륙 운영을 똥구멍으로 했나.’ [그런 건 아니야. 나… 나의 자랑스러운 이기영 명예추기경. 그, 그리고 그런 말은 신성모독이야.] 아니라고 부정하고는 있지만 확실히 운영을 똥구멍으로 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관리했길래 잘 굴러가던 대륙을 순식간에 말아먹을 수 있단 말인가. 베니고어 하나의 파산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이 대륙을 관리하고 있던 모든 이가 줄줄이 소시지처럼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은 충분히 당황스러울 만했다. 이런 예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대륙은 하늘 위의 존재들의 작업장 같은 곳이다. 이들은 이 대륙을 통해 신성을 얻고 그 신성으로 이 대륙을 관리한다. 당연히 써야 할 일도 많을 것이다. 악마들도 견제해야 하고 자연적인 일도 해결해야 할 테니까. 심지어 사제들이 사용하는 신성력의 일부도 그들의 힘이라 가정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게다가 대륙은 이미 인구가 적정선을 유지하고 있다. 더 이상 쉽게 늘어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런 대륙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신성은 많지만 한정적일 터. 그런데도 그걸 모르고 졸부처럼 펑펑 써댔으니 이 비참한 최후는 어쩌면 예정된 이야기라 볼 수 있으리라. 여기에서 심각한 듯 질질 짜고 있지만 결국에는 이 모든 게 자기 자신 탓이라는 거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눈에 보이네.’ 위에도 비슷한 개념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 세상을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렇다. 베니고어가 엘룬쓰레기나 바리안 같은 이들을 대상으로 신성을 빌렸고 그걸로도 모자라 주변 왕국의 신들도 끌어들인 것. 대륙의 신들은 결국 집단 보증까지 쓰게 됐고 보증에 힘입어 베니고어는 외부에서도 신성을 끌어다 썼다. 아주 잠깐은 행복했을 거다. 낭낭한 신성으로 낭낭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어느 날을 기점으로 외부에서 땡겨 온 신성이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늘 위에 IMF가 터져버린 거나 다름이 없는 상황. 어째서 베니고어가 친절하게 달라붙는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거 망할까 봐 걱정하는 거네. 햐…. 대단하네. 대단해.’ 지금도 신성은 고정적으로 들어오고 있는 게 틀림없다. 여기서 타락한 신이 어쩌고, 악의 오염을 받은 베니고어가 미쳤다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나도는 순간 신도가 줄어들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심지어 악신으로 몰린 베니고어의 여신상을 때려 부수려 폭도들이 들어올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타락한 베니고어 작전이 잘 먹혔을 때의 경우지만 반만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퀘스트 하나 보낼 여력이 없어 허덕이는 베니고어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신들의 신성이 전부 털렸을 때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반가운 상황은 아니다. 소멸되거나 지상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이거이거…. 우리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지금 많이 힘드신가 봅니다.” [이래서 눈치 빠른 개….] “뭐라고요?” [아니…. 그, 그렇지 않아. 이기영 신도. 대부분 맞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나는 항상 이기영 신도에게 친절했는걸.] “처음엔 그렇지 않았잖아요. 베니고어 여신니임.” [그, 그, 그건 엘룬이야. 엘룬이 네 담당자였어. 중간부터는 담당자가 바뀐 거라. 나도 잘 모르는 내용이고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 봐,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 이기영 명예추기경. 내가 이기영 명예추기경한테 해준 것들. 빛 폭탄 물약도 있고! 준신화 등급의 직업도 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힘, 힘써줬잖아? 내가 이기영 명예추기경을 싫어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신도들도 늘려주고 베니고어 교단을 위해 최선을 다해 힘써주고 있는데. 우리는 한 팀이잖아. 처, 처음에는 엘룬이 담당자였어. 정말이야! 엘룬 쓰레기 그 자식이 담당자였다니까!] “그 자식 정말로 구제 불능 쓰레기네.” [나… 도 가끔 그렇게 생각해. 자기 딸도 팔아치운 놈인데, 뭐. 나는 절대로 내 아들딸들을 버리지 않아. 특히나 우리 이기영 명예추기경 같은 이들은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지. 내가 언제 섭섭하게 한 적 있었어? 우리는 한 팀이잖아. 한 팀.] 정말로 엘룬 쓰레기가 내 담당자였을 확률은 적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녀석의 쓰레기력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안 그래도 엘룬은 소문이 별로 안 좋아. 엮여서 별로 좋을 것도 없고 그보다 이기영 명예추기경. 할 말이….] “아니, 아니, 내가 먼저 할게.” [으응…. 그렇게 해. 나의 자랑스러운….] “안 그래도 이런 기회가 생기면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거든 그동안은 일방적이었지만 드디어 쌍방향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창구가 생긴 거잖아. 물어볼게 많으니까 서론은 집어 치우고 이야기할게. 일단 궁금한 거 첫 번째. 지금 너는 어디에 있지? 여기 여신상에 들어가 있는 건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정확히 말하면 아니야. 본신은 여전히 위에 있지만… 인간의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워.] “그래?” [어딜 만져, 이 새끼야!!] “없다며.” [일부만 숨어 있는 거야. 이, 일부만…. 일부만… 숨어있는 거라고. 빚 갚으라고 독촉하는 새끼들 때문에… 이 개새, 아니, 나의 사랑스러운 이기영 명예추기경.] “진즉에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요. 그리고 겨우 여신상 한 번 쓰다듬은 거 가지고 왜 이렇게 과민반응하고 그래. 어차피 느껴지지도 않을 거면서. 그런데 너 진짜 이렇게 생겼어?” [비슷해…. 꿈에서 내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조각가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거니까. 그럼 이게 두 번째 질문이야?] “아니야. 그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고. 생각보다 예쁘네. 솔직히 내 타입이야.” [그, 그런 말 많이 듣기는 해…. 그, 그래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돼. 신성모독이니까.] “음…. 아무튼 두 번째 질문.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되지?” [뭐?]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솔직히 궁금하잖아. 네가 너 자신도 모르는 초월적인 존재를 만났다고 상상해 봐. 물어보고 싶은 게 당연할걸.” […….] “…….” [오해하지 말고 들어, 명예추기경. 베니고어의 이름을 걸고 말하는 건데… 그건 나도 몰라.] “뭐?”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나도 몰라. 그건 내 권한이 아니야. 우리도 말할 수 있는 부분과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보안이 걸려 있는 문제와 그렇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거지. 근데 그건… 그 질문은 어디에도 통용되지 않아. 아예 모르는 일이야. 인간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죽음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소멸되면 어떻게 되는지 나도 몰라.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믿어줬으면 좋겠어.] “음… 믿을게.” [정말?] “정말. 어차피 정말로 들을 수 있다는 기대도 안 했으니까. 왠지 모를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럼, 보안이 걸려 있는 이야기는 해줄 수 있다는 거네?” [그것도 무리야. 물론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보안이 걸려 있는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전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 내가 입을 연다고 한들 네게 목소리가 전달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럼 개뿔 알려줄 수 있다는 게 없다는 거 아니야?” [질문에 따라 달라. 궁금한 게 뭐야?] “…….” […….] “우리를 여기에 끌고 온 이유는 뭐야?” […….] “나무라는 건 아니야. 나는 지금 이 생활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으니까. 이것도 그냥 궁금할 뿐이야.” [보안이 걸린 일은 아니네. 하지만 자세히는 이야기할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해.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너희를 끌고 온 게 아니야. 저쪽에서 너희를 떠넘겼고 우리는 그걸 받아 준 거지.] “무슨 소리야. …지구에서 우리를 떠넘겼다고?” [정확한 내용은 이야기해 줄 수 없어. 하지만 정말이야. 물론 이방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고 가혹한 일이라는 건 알아. 튜토리얼 던전이라는 게 그렇지. 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었어. 들어온 인간 모두를 받아들일 수는 없으니까. 물론 방법이 폭력적이었다는 것도 인지하지만 그것 역시 우리가 결정한 사항이 아니야. 하지만 내 이름을 걸고 맹세컨대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미안… 내가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건 이게 끝이야. 어째서인지 도대체 어떻게 일이 진행된 건지는 전부다… 말할 수 없어.] “보안이라 이거지.” [정말 유감이야.] “뭐가?” [차, 차원에 버림받았다는 이야기…. 정말 유감이야.]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듯한 목소리였다. # 423 회귀자 사용설명서 423화 위쪽에서 생긴 문제(6) “그게 뭐 어때서?” [아무리 너 같은 쓰레, 아니, 사람이라도 그런 이야기를 듣게 해서는 안 됐는데….] ‘도대체 뭐라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은데.’ 솔직히 아무렇지도 않다. 지구에서도 뭔가 일이 있었고 지구를 관리하는 이들이 우리를 떠넘겼다는 사실 자체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걸 슬퍼하고 딱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내 관점에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다. 막말로 체감이 오지 않는다. 부모한테 버림받았다고 한다면 눈물깨나 흘릴 만하겠지만 부모님도 아니고 지구한테 버림받았단다. 스케일이 너무 커 어디서부터 슬퍼해야 할지 액션을 잡기가 힘들다는 거다. ‘신은 신인 모양이네.’ 인간과 생각하는 관점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처음 발광을 떨었을 때와 분위기를 비교해 보면 매우 조용해진 느낌. 내 질문에 진지한 대답을 하는 것을 보니 눈앞에 있는 여신상이 조금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생각에 빠져 있었을 때 다시 한번 베니고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한다면 다행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됐어. 우, 우리 입장에서는 조금 슬픈 이야기거든.] “난민이라도 받아준 거라고 보면 되는 거네. 음… 고마워하면 되는 거지?”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니까.] “음…. 그럼 네 말은 지금 지구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건가?” [그곳은 항상 문제가 있었어. 이곳도 마찬가지지만…. 뭔가 평소와 다른 문제가 생겼다고 묻는 거라면 정답. 하지만 자세한 상황은 이야기해 줄 수 없어. 애초에 그곳은 내 관할도 아니니까. 게다가 그곳은 자신들을 감추고 하고 싶어 하거든….] “흠….” [음…. 잠깐만. 네 여동생을 걱정하는 거라면 안심해도 돼. 오히려….] 율하야 남극에 혼자 떨어뜨려놔도 살아남을 성격이니 크게 걱정되지는 않는다. “아니. 율하 이야기는 됐어.” [그럼 질문은 여기에서 끝이야?] “하나 더 있는데.” [뭔데?] “김현성. 이것도 보안이야?” [일부는 보안. 내가 모르는 부분도 있고. 하지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부분은 있어. 정확히 뭐가 궁금한 거야? 1회 차?] “김현성이 회귀한 이유. 그리고 김현성을 회귀시킨 알타누스라는 건 도대체 뭔지.” 사실상 메인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가장 궁금했던 이야기니까. 잠깐 동안 조용해진 것을 보자 이것 역시 말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는 모양. 천천히 여신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한참이 지나서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귀한 이유는 알타누스가 그걸 원했기 때문.] “…….” [알타누스는 우리와 같은 신이자 관리자야. 그리고 김현성의 담당자이기도 했고.] “예상대로네. 알타누스는 어디에 있지? 내가 만날 수 있는 건가?” [아니. 불가능해.] “왜?” [알타누스는 이제 없거든.] “아….” [그녀는 죽었어. 아니, 소멸했다는 표현이 조금 더 어울리겠네. 시간을 되돌린 대가를 치른 거지. 하지만 그 의지는 우리가 이어받고 있어.] ‘역시 그런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강제 퀘스트를 돌리고 직업을 내리는 것 또한 신성이 든다. 만약 회귀 같은 비상식적이고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실행한다고 했을 때 얼마큼의 신성이 들지에 대해서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으리라. 단순히 하늘 아래에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완전히 되돌려 버린 거니까. 아마 알타누스는 베니고어보다 상위 신일 가능성이 크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여신상 안에 자신의 일부를 숨기고 있는 베니고어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쯧.’ [알타누스는 그 남자를 사랑했어. 그리고… 그의 삶에 공감하기도 했고. 수많은 고민 끝에 자신을 희생해서 다시 한번 이 모든 걸 되돌리겠다고 생각한 거야. 물론 그때의 나는 그녀를 말렸던 것 같지만… 나는 그녀를 존중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신은 아마 없을 거야. 그 감정은 우리 사이에서 통용되는 가치거든.] “1회 차가 어땠는지는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이미 대충 알고 있잖아. 카스가노 유노라는 특별한 인간을 통해서. 나도 자세히는 몰라.] “너희도 1회 차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모든 걸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알타누스의 의지는 기억하고 있지.] “나는 그 알타누스의 의지가 뭔지도 개뿔 몰라, 이 양반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카스가노 유노도 볼 수 있는 검은색 세계를 너희가 보지 못한다고?” [인간의 가능성을 우습게 보지 마. 그녀는 특별해. 정하얀이라는 인간과 차희라라는 인간도 마찬가지고. 인간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당장 너만 해도 그 마음의 눈이라는 건… 아니, 아니다. 물론 우리 중에서도 네가 말하는 검은색 세계를 볼 수 있는 이들은 존재하지만 그것 역시 제한이 존재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차원을 관리하는 건 훨씬 복잡하고 어려워. 만약 우리가 정말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었다면 알타누스가 김현성을 회귀시킨 일도 없었을 거야.] “가능성?” [그래. 가능성. 알타누스도 그걸 본 거겠지.] “너희도 완벽하지는 않구나.” [맞아. 완벽하지 않지. 그걸 잘 기억해. 나의 자랑스러운 이기영 명예추기경. 우리도 완벽하지 않아. 불완전하지. 대륙 위에 있는 이들과 서있는 위치가 다를 뿐,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아. 너는 그걸 잘 기억해야 해. 우리도 완벽하지 않다는 걸.] “그렇게 강조할 필요는 없는데. 그건 너만 봐도 알 것 같고. 그보다 질문 하나를 애매하게 피해간 것 같은데. 베니고어 여신님, 내가 궁금한 건 김현성이 회귀한 이유야. 알타누스의 의지라는 대답이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정확히 어떤 위협이 있었고 무엇 때문에 회귀했는지야. 까놓고 말하면 실패한 이유야.” [그건 보안에 걸려 있지 않아. 하지만 이야기해 줄 수 없어. 카스가노 유노, 혹은 김현성을 통해 듣거나 보는 게 좋을 거야. 한 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네 생각이 맞다는 거야.] “뭐?” [위협은 존재해. 김현성이 대비하고 있는 건 그 위협이야. 그리고 이, 인정하기는 싫지만 너, 너는 지금까지… 자, 잘해주고 있고….] “으음. 역시 그랬네. 칭찬은 고맙게 받을게. 그런데… 생각보다 별로 들은 게 없는 것 같은 기분인데….” [어, 어쩔 수 없어. 정말로 어쩔 수 없다고…. 나라고 말해주기 싫은 줄 알아? 나도 좀 편해지고 싶다고!] “아, 하나만 더 물어볼게.” [끄으윽. 끄으으윽. 궁금한 게 많네. 이제 나도….] “그게 당연한 거지.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서 영문도 모르는 일에 휘말렸는데 너 같으면 안 그러겠어? 아무튼 질문 간다. 우리는… 음… 지구로 되돌아갈 수 있는 건가?” [되돌아가고 싶어?] “아니 별로.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야.” [불가. 너희는 이제 이곳의 주민이야. 다른 곳으로는 갈 수 없어.] “막상 대놓고 들으니까 조금 섭섭하긴 하네.” 물론 딱 그 정도다. 애착이 없냐고 하면 거짓말. 하지만 이미 일이 벌어진 거 뭐 어쩌겠는가. 대놓고 지구로 되돌려 달라고 생 때를 쓸 수도 없다. 전부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지구는 우리를 내쳤고 베니고어를 비롯한 이들이 우리를 받아준 것 같으니까. 슬쩍 여신상을 올려다보니 아직까지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베니고어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이,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징조 같은 거라…. 나도 누, 눈물은 그쳤다고.] “무슨 징조? 대륙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징조?” [비… 슷해.] ‘슈바.’ “아무튼 신성을 회복하면 모든 게 정상으로 되돌아온다는 거지?” [기본적으로는 맞아. 아, 아무튼 이번에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아. 말해봐. 뭔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심각해?” [조금 심각한 이야기야.] ‘도대체 뭐야.’ 뭔가 걱정하고 있는 말투. 하지만 이후의 목소리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기 시작했다. [호, 혹시 말이야. 알 수 없는 이유로 퀘스트 생성이 중지됩니다. 라는 거… 들은 적 없어?] “뭐? 들어본 것 같은데….” [그, 그거에 관련된 이야기야.] “네가 이 모양이니 당연히 생성이 중지되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니… 시발….” [미, 미안해. 나의….] “지, 지랄하지 마. 시발.” 순간적으로 입술을 꽉 깨문 것은 당연지사.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추론 가능한 이야기다. 신성이 없어서 퀘스트를 내릴 수가 없단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어차피 대충은 예상했던 이야기였으니까. 문제는 현재 저 상태를 겪고 있는 게 베니고어뿐만이 아니라는 것. 다른 이의 경우에는 쟤보다는 상황이 좋기야 하겠지만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다. 모두 다 가라앉고 있는 배에 탑승한 한 가족이라는 거다. 불안감에 입술을 깨물었을 때 다시 한번 베니고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직업이나 튜토리얼 던전 같은 최소한의 시스템은 유지되겠지만… 전설 등급의 던전과 일부 영웅 등급의 던전도… 막힐 거야. 그, 그리고 잠들어 있던 레이드 몬스터들도 전부 보, 봉인될 거고….] “그건 왜 막아? 그건 왜 막냐고… 그건 왜 막냐고….” [일부 던전은 위험하니까. 박물관 같은 경우를 생각해 봐. 그, 그러니까 그런 종류의 던전들은… 너희 말로는 모니터링하는 신들이 꼭 필요해. 우리가 던전화시켜 놓은 곳도 존재하지만 그렇지 않고 자연적으로, 혹은 균열 때문에 생긴 곳도 많거든. 들어간 인간도 위험해질뿐더러 만약 공략에 실패하거나 문제가 생긴다면 수습이 불가능해지니까. 우리도 막긴 싫지만 이건 해야 하는 일이라….] ‘시발….’ 문제가 조금 더 심각해졌다. 현재 상황을 보자면 더욱더 그렇다. 인류가 하나로 힘을 모은 것은 아주아주 박수를 치고 싶은 이야기. 하지만 그게 끝이라면 최악으로 치닫는 것은 마찬가지다. 얘들은 치고받으면서 강해진다. 그건 부정할 여지가 없다. 1회 차에 인간 전력이 그나마 강해질 수 있었던 것도 서로 치고 받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깎아냈던 그 시절에 멍청함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갈등으로 인해 발전할 수 있었다는 걸 이야기 하는 거다. 김현성이 대비하고 있던 위협이 실존한단다. 예상하고 있지만 베니고어에게 이걸 막 들은 타이밍이다. ‘던전을 막아 놓을 수밖에 없다고?’ 성장하는 길이 막히는 거나 다름이 없다. 특히나 특수 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들락날락거리는 영웅 등급과 전설 등급의 던전. 이딴 걸 막아 놓았을 때의 혼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터. 심지어 레이드 몬스터까지 막아놓는다면 사태는 더욱더 심각해진다. 몬스터 사체로 생산하는 모든 가공 공장이 문을 닫을 거고 남아도는 인력은 길거리를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무력뿐만이 아니라 경제에도 커다란 타격을 받는다 봐도 무방하다는 거다. 던전이 있기 때문에 보급품이 팔린다. 던전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돈을 버는 이들이 생기고 쓰는 이들이 생긴다. 이미 자리 잡은 이 시스템은 이미 너무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자리 잡아 버렸다. 조금 과장한 비유지만 현대 사회에 석유가 없어진 거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라는 거다. ‘완전 개털 되겠는데 이거….’ 물론 메이드 바이 이기영 포션의 판매량 또한 바닥을 칠 것이다. ‘기영코인 떡락.’ “제기랄….” ‘기영코인 떡락!!’ “제길.” ‘거울 호수 가즈아!!!’ 과장된 반응이기는 하지만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이 자꾸만 연상된 것은 당연지사. 혼란스러운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한번 이쪽의 속을 긁는 베니고어에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 그리고… 당분간 전 대륙에 퀘스트 생성이 중지될 거야. 어, 언제 재개될지는 잘 몰라….] “…….” […….] “야 이 미친 트롤러년아!!!!!” 진심을 담은 목소리였다.  # 424 회귀자 사용설명서 424화 위쪽에서 생긴 문제(7) 일순간 찾아온 정적. 베니고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하이톤의 목소리로 응수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 개미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모습은 이상할 정도로 치졸하게 느껴졌다. […….] “…….”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뭐?” [나라고 이렇게 하고 싶어서 이렇게 된 게….]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니야.] “…….” 솔직히 나도 할 말이 없기는 했다. 무능한 베니고어가 파산한 이유에는 분명히 나와 관련된 신성이 개미 좁쌀 정도의 영향을 미쳤을 테니까. 물론 개미 좁쌀도 크게 잡은 거다. 조심스레 판단하건대 미세먼지 정도로 작은 영향을 끼쳤다 봐도 무리가 없으리라. ‘아니, 아니. 사실 그것도 아니지. 나 같은 경우에는 행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은 거고… 그거랑 이거랑은 완전히 다르지.’ 백번 양보해 내가 그녀의 파산에 크게 보탰다고 한들…. ‘이건 아니지 않나?’ 그 말 그대로. 이건 너무 스케일이 크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한순간에 대륙의 질서가 무너지게 생겼다. 아마 베니고어가 방금 지껄인 이야기는 아주 일부일 터. 만약 정말로 사건이 터진다면 퀘스트와 던전이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 외에도 무수히 많은 부작용을 떠안게 될 것이다. 대륙을 관리하던 관리자들이 일순간 손을 놓아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아니, 다름없는 게 아니라 아예 놓아버렸다는 표현이 맞다. 나침반이 없는 여행자요, 조타수가 없어진 커다란 배라는 거다. 점점 더 열불이 나기 시작하는 것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베니고어는 계속해서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중얼거리는 중. 해답 없는 상황에 저도 모르게 한 숨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후우….” […….] “…….” [미, 미안….] “…….” [미, 미안해…. 나의 자랑스러운 명예추기경. 내가 이기영 명예 추기경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지? 이, 이건 이기영 명예 추기경 탓이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방금 내가 한 말은 잊어. 그렇게 해줄 수 있지?] “참나….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내가 뭘 잘못한 게 있기는 했어? 전부 네가 저질러 놓은 똥이지. 진짜 웃긴다. 너도. 그렇게 아래쪽에서 신성을 퍼줘도 겨우 그 정도밖에 못 해? 무능력한 것도 정도가 있지…. 솔직히 나는 그쪽 관계자가 아니라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반성해야 한다고 봐. 네가 인간인 나한테 욕먹는 게 기분 나쁘겠지만 이건 진짜 너를 모시는 신도로서 하는 충언이야. 충언.” [끄으으으으윽.] “아니면 어디로 빼돌리기라도 했어?” [끄읍끄읍읍.] 뭐라고 계속해서 쏘아 붙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하지만 그게 생산적이지 않은 행동이라는 건 표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원인이 아니라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것. 오늘 이곳에 와서 내가 들었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또 다른 위협이라고 봐도 돼.’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단순히 레이드 보스가 나타나 때려잡을 수 있는 문제였다면 오히려 더 심플하게 접근할 수 있었으리라. 이건 그것보다 조금 더 복잡한 문제. 사회적인 문제였고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였다. “생각해 둔 해결책은 있나?” [아니. 그런 건…. 너무 갑작스럽게 일이 터져서 우리도 어떻게 손 쓸 방도가 없었어. 거품이 터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제길….’ [아, 아무튼 그렇게 됐어. 그래도 기본적인 시스템은 돌아가게 될 거야. 조금 불안정할 수도 있겠지만….] “불안정하다고? 정확히 어디가 불안정하다는 건데?” [그, 그것도 아직 확실하게는 몰라.] ‘이게 말이야, 방구야.’ 딱 그 말이 맞다. “그래서… 갑자기 나한테 이런 걸 이야기한 이유는 뭐야. 싼 똥이라도 치워달라고?” [반… 은 맞아. 네,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지만 최소한 대륙에 일어날 혼란을 잡아줬으면 좋겠어서….] “나보고 대륙을 운영해 보라는 거야?” [그건 아니야. 그건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내 말은 그 말 그대로 야. 너, 너무 갑자기 많은 게 바뀌면 대륙에서 살아가는 아들딸들이 굉장히 혼란스러워 하잖아. 그걸 조금… 수습해 주면 좋을 것 같아서…. 우리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그런 거 잘하잖아.]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이 네가 싼 똥 치워달라는 말이잖아. 혼란스럽지 않게 한다고 해서 끝날 문제는 아니지. 지금 네가 말한 시스템이 마비되는 순간 어느 정도의 파급이 오게 될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거지?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오는 건 당연하고 몇몇 나라 같은 경우에는 너희처럼 파산하게 될 거야. 일반국민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거야. 굳이 말 안 해도 당연히 알 수 있는 거고. 그것뿐만이 아니지. 일시적이지만 레벨업을 할 수단을 잃어버린다는 것도 걱정해야 될 사안이고.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 줄은 알아? 이런 건 수습한다고 해서 수습되는 게 아니야. 그냥 버티는 게 되는 거지.” […….] “정확히 언제 되돌아오는 건데.” [빠르면 삼 년…. 사실 자세히는 잘 몰라. 지금 같은 속도로 빚을 갚을 수 있으면 기간은 앞당길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영웅 던전과 전설 등급의 던전은 그보다 더 빠르게 열릴 수 있어.] ‘진짜 큰일 났는데 이거….’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하고 있는 모습에는 괜스레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빨라도 삼 년이란다. 베니고어가 이쪽의 통수를 건드리는 스토리가 가장 최악의 스토리라 생각했건만, 이 역시 최악이기는 마찬가지. 전자나 후자나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복잡해진 머리를 조용히 쥐어뜯으며 입을 열자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온다. “또 다른 할 말 있어? 뭐 전해야 될 말이나. 내가 알아야 될 거.” [아니…. 그게 전부야.] “…….” [면목 없어….] “네가 나한테 면목 없을 게 아니지. 자기 스스로에게 면목 없어야지. 아무튼 됐다. 나는 따로 생각 좀 해볼래.” [뭘? 뭘? 뭘? 따로 생각해?] “말 그대로야. 따로 생각해 본다고.” [호, 혹시 뭐 딴 마음 먹는 건 아니지?] “무슨 딴 마음?” [그… 그거…. 타락한 신 베니고어랑 뒤통수 계획 같은 거….] “그런 건 아니라니까. 그거 안 할 거야. 이번 일에 대해서라고. 일을 해결하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도 꺼. 네 이름도 적당히 팔 거니까. 그것도 알아두고.” [아,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명예 추기경의 말이라면 그, 그렇게 해야지! 그런데… 정말로 다른 마음먹은 건 아니지? 명예추기경? 내, 내가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지? 괜, 괜한 이상한 짓은 안 하는 게… 우리는 한 팀이잖아. 그렇지?] “안 한다니까. 뭘 불안해하고 그래. 나 그렇게 막 남의 뒤통수 치고 다니고 그러는 사람 아니야. 너희랑 척질 생각도 없고. 그냥 따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너 같으면 골 안 아프겠어?” [그,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아무튼 난 간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너무 오래 기다린 것 같았으니까. 네가 울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적당히 둘러댈 거야.” [응.] “그리고 보상도 준비해 놔. 빠방한 놈으로. 이번 일 제대로 해결하면 바로 받으러 갈 거야.” […….] 대답을 듣지 않은 채 살포시 손을 때자 시끄러운 목소리가 곧바로 사라졌다. 여신상을 올려다보니 아직도 피눈물이 흐르는 중. 혹시나 싶어 다시 한번 몸을 대봤지만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 역시 이곳에서의 볼일이 끝난 것이다. 조금 멀찍이 떨어져 여신상을 바라보자 더욱더 황당하게 느껴진 것은 당연.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눈 것도, 너무 의외의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전부 신기하게 느껴졌다. ‘너무 예상왼데….’ 당연히 문제가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의 대형 사고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온다. 어디서부터 해결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물론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주 간단하게 이 문제를 축소시켜 봤을 때 이 건에 대한 원초적인 해결 방법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신앙심을 높이는 것.’ 최대한 빨리 베니고어를 비롯한 이들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맞다. 그동안 쌓아왔던 이미지 덕분에 마침 대륙에는 신에 대한 믿음이 공고히 자리 잡고 있는 상태. 신성을 쓸어 모아 베니고어에게 몰아 준 뒤, 불안정한 대륙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게 가장 중요하리라. 최소한 2년, 아니, 1년 안에는 대륙에 있는 모든 신을 기사회생시켜야 한다. 신들을 조금 더 빠르게 사회생활로 불러들일 수 있는 인생재활, 아니, 신생재활 컨설턴트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문제에 대한 대체자원을 마련하는 것.’ 전자는 어거지로 시기를 앞당길 수 있겠지만 사실은 이 부분이 가장 쉽지 않다. 퀘스트와 던전의 대체자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 말하자면 일자리를 창출하라는 거나 진배없다. 성장하는 것은 물론 보상을 얻고, 심지어는 골드도 모을 수 있는 공간. 길거리를 배회할 이방인들의 일자리. 만약 이걸 해결하지 못한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할 일 없어진 고위 레벨의 이방인 들이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희귀 등급 던전과 일반 등급 던전으로 들어가는 일도 많아질 거고, 자연스럽게 한창 성장해야 할 초보자들도 성장에 발이 묶이게 될 것이다. 자리싸움 같은 것 또한 빈번하게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본다면… 이렇다. 베니고어가 똥을 싸놓은 이 3년간. ‘인류의 성장이 완전히 정체될 수도 있어.’ 그 말 그대로, 제자리걸음은커녕 퇴보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물론 내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덩실덩실 춤을 출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그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튼 간에 여러모로 진퇴양난에 빠진 상황.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해결책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툭하고 던진 말이 괜스레 가슴에 콕 하고 박혀왔던 것은 바로 그때. “던전을 만들 수도 없고, 시발.” ‘…….’ “나 이미 가지고 있잖아.” 그동안에 바쁜 일정 때문에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던 게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황급히 마음의 눈을 발동시키자 눈에 보이는 것은 한쪽 구석에 묵혀두고 있었던 칭호. [균열 박물관 4등급 관리자] 생각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막아놓은 거 아닌가?’ 한 번 확인을 해봐야 할 사안이지만 균열 박물관은 그대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여긴 신들의 관할이 아니라 내 관할이었으니까. 애초에 균열 박물관은 무 등급 판정을 받은 던전이기도 했고 실제로도 개장을 앞두기도 했었다. 클로즈 베타 서비스는 종종 시행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 오픈 베타를 하지 않았던 곳이다. 아직 사업계획서의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았다. 전설 등급과 영웅 등급의 이방인을 수용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몬스터의 숫자도 제법 있었고 막스가 제작한 키메라들도 많다. 던전 입장이 완전히 불가능해진 지금, 균열 박물관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도 없을 정도. ‘거기서 포션도 팔면 되니까. 아니, 팔 게 포션밖에 없겠어?’ 포션 사업이랑 외식 사업, 숙박 사업도… 조금 더 발전하면 기념품 사업이나 카지노 사업 같은 것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골드는 원래 돌고 도는 거다. 다른 건 몰라도 경제 하나는 확실하게 돌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균열 랜드….” 정체된 대륙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마법의 장소. 그럴듯한 해결책에 입꼬리를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 425 회귀자 사용설명서 425화 승자와 패자(1) 디테일한 부분을 수정하긴 해야겠지만 기본적인 틀 정도는 안고 가도 상관없다. 고민해 볼 부분이 존재하지만 대략적인 기틀은 잡은 상태. 이지혜와 사랑스러운 내 아들, 박물관 관리인 막스가 마지막으로 점검을 했던 게 몇 달 전이었으니 베니고어의 멍청한 짓거리가 대륙에 영향을 주기 전에는 충분히 오픈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지사. 천천히 문을 열자 불안한 얼굴로 서성이던 이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모이는 게 느껴졌다. 가장 처음에 들어온 얼굴은 역시나 바젤 교황. 제이나 대주교와 헬레나 이단심문관도 함께 위치해 있었는데, 그 둘을 제치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내 손을 잡는 모습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게 만들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 어느 정도는 받아줄 수 있다. “명예추기경! 어떻게. 베니고어 여신님의 목소리는… 들었는가?” ‘네, 들었습니다. 그 멍청한 년이 아주 여기 전부 다 말아먹으려고 작정했습니다. 베니고어를 믿지 마세요, 교황님.’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 만무. 일반적인 이야기를 꺼내도 상관없으리라. “네. 확실히 들었습니다. 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어렴풋이 그분과 교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참인가?” “네. 사실… 저로서도 이런 방식으로 신탁을 받게 된 것은 처음인지라,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바젤 교황님.” “아니, 아닐세. 여신님과 함께한 시간이 아닌가. 그보다 뭐라…. 뭐라고 하시던가? 건강하시던가?” “사실….” “안 좋은 소식인가 보군.” “네. 좋은 소식은 아닙니다.” “허… 허…. 여신님께 무슨 일이 생겼다, 이 말인가?” “하지만…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기도 합니다. 여신님은 아직 무사하십니다. 하지만 이걸 시작으로 대륙 곳곳에 이상 현상이 생길 수 있음에 대한 경고를 해주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베니고어 님을 비롯한 대륙의 신들께서 현재 무척 약해진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바젤 교황님이라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그 이유는… 대륙 곳곳에 뿌리내린 악마의 세력이 대륙의 정기를 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악마의 하수인들은 대륙 곳곳에 자리를 잡고 신성한 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 이… 쳐 죽일 놈들….” 부들부들 떨며 경련을 일으키는 바젤 교황을 보니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맞아 떨어지면 당장에라도 신성기사단을 이끌고 돌진할 것처럼 느껴졌다. ‘나쁘지 않은데?’ 바젤 교황이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일전의 여신강림 사건이 결정적이었던 모양. ‘이상하지는 않지.’ 베니고어 여신이 직접 내 몸에 들어와 빛기영과 소통하고 있다는 걸 몸소 증명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는 걸 믿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리라. ‘이것도 써먹을 수 있겠어.’ 생각해 보니 박물관을 급하게 움직일 필요도 없다. 대부분의 던전이 막히기는 했지만 대륙에 영웅 등급의 던전과 전설 등급의 던전은 많다. 악마 관계자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장소가 모조리 던전. 시스템상으로는 던전 판정을 받지 못한 곳이기는 하지만 뭐 어떤가. 인간을, 아니, 악마를 죽여도 경험치는 오른다. 보상과 경험치, 아이템과 명성, 악마관계자 메디리브가 거주하고 있는 악마의 첨탑은 전설 등급의 던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들어갈 수 있는 인원도 한정되어 있고 군대가 아니라 파티 단위로 움직여야 하는 장소다. 그 외 수많은 악마 관계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던전 역시 마찬가지. 하루에 수십, 아니, 수백 개의 던전을 만들 수도 있는 게 현 대륙의 상황. 인류가 하나가 되는 걸 방해하는 잡놈들은 모조리 악마새끼들이다. 심지어 각자가 모시고 있는 신들을 위해 싸우는 성전이기도 하니 신성 역시 얻을 수 있는 것은 당연지사. 이 정도라면 베니고어를 비롯한 다른 신들 역시 발 뻗고 편하게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키야…. 완벽하다. 완벽해. 베니고어야, 이게 운영이다.’ 조금 애매한 부분도 확실히 존재하지만 디테일한 부분이야 이후에 끼워 맞춰버리면 그만이라는 거다. 잠시 바젤 교황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다시 한번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뿌리를 내린 곳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는가. 이기영 명예추기경.” “확실하게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꼬리를 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젤 교황님.” “든든하네…. 든든하구만. 과연 이기영 명예추기경이야. 이기영 명예추기경이야말로 진정으로 베니고어 여신께서 내려주신 사자일세. 수많은 전장을 발로 뛰어다니고 수많은 위협과 함께하면서도 이렇게 버젓이 서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뭐겠는가.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아니었다면 교단도 지금처럼 왕성하게 성장하지는 못했을 게야. 명예추기경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네. 자네 같은 사람이 여신님의 곁에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야. 참으로….” “아닙니다, 바젤 교황님. 오히려 베니고어 여신님은….” “…….”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항상 지켜보고 계시다고,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허….” 이건 베니고어밖에 모르는 바보를 위한 서비스. 단순히 흘리는 말로 한 마디 했을 뿐이었지만 내 손을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 이후에 보인 모습은 더더욱 가관. “그, 그게 참인가.” “예.” 주책없게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다 늙은 할아버지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은 확실히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비록 거짓말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이런 서비스를 해주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여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베니고어 여신이시여.” “…….” “베니고어 여신님만을 섬기던 내 지난 세월은 결코 틀리지 않았던 게야.” “예. 아마… 전부터 쭈욱 지켜보고 계셨을 겁니다. 그분은 항상 저희와 함께하시니까요.” 물론 정말로 보고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바젤 교황이 기분이 좋다면 그걸로 됐다.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다른 갤러리들 역시 이 훈훈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아마 교단의 고위 인력들은 나보다 더 기분이 좋으리라. 그동안 바젤 교황의 분노를 받아내느라 힘들었을 것이 분명. 그의 기분을 풀어준 나에게 감사의 눈빛까지 보내는 녀석도 있을 정도였다. “머, 먼저 들어가겠네. 명예추기경.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오늘은 하루 종일 여신님께 기도를 올려야겠어.” “잘 생각하셨습니다, 교황님.” “그리고 대륙에 뿌리내린 더러운 악마 하수인들의 소재가 파악되는 즉시 교단 측에 알려줄 수 있도록 해주게나. 직접 신성기사단을 보낼 터이니.” “예.” “감히 여신님을 해하려고 들어? 이단심문관 헬레나.” “네.” “헬레나 심문관은 오늘 악마 소환사 진청에게서 대륙에 퍼져 있는 다른 끄나풀에 대한 심문을 시작하게. 한 시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네. 교황 성하.” ‘아. 진청 새끼 오늘 이거… 힘들어지겠네.’ 진청이 고통 받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재판이 얼마 남지 않아 비교적 몸이 편할 타이밍이었건만 뜻밖의 모진 고문을 받게 될 녀석에게는 잠깐 동안 묵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로서도 기왕이면 진청의 입에서 악마들의 소재지가 나오는 게 편하기는 하다. 언제 한번 접선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리라. 비교적 귀찮은 협상 과정이 있기야 하겠지만 뭐, 어떤가. 누가 강자고 누가 약자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 상태. 이쪽이 뭔가를 제안하면 저쪽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으니까.’ 기왕 하는 거 지금 들려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제가 직접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젤 교황님.” “그렇게 해주겠는가?” “예. 저 역시 베니고어 여신님이 걱정되어 참을 수 없습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한번 설득해 보겠습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그리 말해준다면 든든하지. 아암!” “여신님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자네만 믿겠네.” ‘그래. 나도 너만 믿는다.’ 한차례 포옹을 한 이후에 멀어지는 바젤교황의 모습을 보자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드디어 일이 끝났다는 걸 깨닫자, 적당히 거리를 두며 서성거렸던 정하얀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왔다. 조혜진과 카스가노 유노는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걸러오고 있었고 엘레나는 여전히 눈치를 보고 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데려온 이 전력이 잉여전력이 되어버렸다. 물론 휴가 같은 목적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겠지만 서로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 문제. 희라 누나 역시 빠르게 다가올 줄 알았건만 그녀는 조금 다른 게 궁금한 모양이다. “자기.” “응?” “베니고어의 목소리… 정말로 들은 게 맞아?” “못 믿겠어?” “하도 구라를 치고 다니다 보니…. 뭐, 자기 업보지 뭐.” “…….” “…….” “정말이야, 누나. 솔직히 나도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일이 잘 풀렸지. 아마 누나가 궁금할 질문도 내가 전부 했을 것 같은데…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그보다 중요한 문제도 있거든. 들으면 놀랄걸?” “뭔데?” “퀘스트 생성이 당분간 중지될 거야. 전 대륙적으로. 물론 각 지역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직업 관련이나 튜토리얼 던전을 제외한 퀘스트는 없어.” “농담이지?” “전설 등급 이상의 던전도 출입이 제한될 거고. 알아보니까 저기 위에 무슨 일이 생긴 게 맞더라고.” “기분… 좋은 소식은 아니네. 그리고 상당히 신기하기도 하고…. 자기, 정말로 신들이랑 교감하는구나?” “운이 좋았다니까.” “아무튼… 상당히 시끄러워지겠는데…. 이거, 해결할 수는 있는 거야? 아니 그전에 그 당분간이라는 시간이 어느 정도야?” “삼 년. 물론 줄이려고 하면 줄일 수도 있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대충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어. 진청한테 가보는 이유도 바로 그거고. 원래 그 얼굴을 별로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또 보게 되네.” “흐음.” “저, 저는 그 사람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하얀아. 근데 어쩌겠어. 필요한데. 아,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따라올 필요 없어. 다들 적당한 곳에서 쉬고 있어주면 될 것 같아. 일 끝나고 저녁이나 같이 먹자.” “그렇게 하지. 뭐, 안 그래도 나도 수도에 볼일이 있었거든.” “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잠깐 대화나 나누러 가는 거니까요.” 정하얀이 자기도 데려가 달라는 듯 눈빛으로 호소해 왔지만 한 명을 데려가면 모두를 데려가야 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을 만큼 깔끔하게 혼자만 왔다 갔다 해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사실 조금 늦기는 했다. 감옥에 쳐 넣은 이후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으니까. ‘이 새끼도 참 명줄이 길단 말이야.’ 교단 내에 위치한 지하 심문실로 발걸음을 옮기자 곧바로 어둡고 축축한 실내가 나를 반겼다. 빛기영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는 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 426 회귀자 사용설명서 426화 승자와 패자(2) ‘여기 오는 건 처음인가.’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이단심문관들이 운영하는 심문실 같은 곳은 솔직히 나 같은 사람과 어울리는 곳이 아니다. 뭔가 축축하고 어두운 느낌이 무슨 던전에라도 들어온 기분. 당연히 무슨 사고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심적으로 불안해진다. 그야 그럴 수밖에. 사방에서 비명과 신음이 새어나오는 중. 심지어 죽여 달라고 외치는 녀석도 있다 보니 담이 약한 나로서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뭘 하고 있길래 죽여 달라는 소리가 나오는지 알 수 없다만 굳이 보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장면이 있다. ‘이런 건 어떻게 계산되는 걸까?’ 베니고어 교단은 본래부터 이단심문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고 자신감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바젤 교황의 등장으로 인해 교단 내 이단심문관들의 입지가 상승했고 배경적 상황이 맞물려 커다란 부흥을 맞이한 것. 모든 종교가 이단심문관이나 악마사냥꾼 같은 이들을 운영하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의 베니고어 교단은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그 규모가 자라났다. 그렇기 때문에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마이너스 감정을 뽑아내는 공장이 베니고어 파산에 기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다.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아.’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베니고어의 독실한 신자이자 바젤 교황의 진정한 우군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조금 민망하기는 하지만 이런 공간은 악마들에게나 어울린다. 빛 뒤에 어둠이 있다고 한들, 빛의 이름으로 운영되는 시설이라기에는 거리가 멀다. 만약 이런 장소가 베니고어의 신성을 깎아 먹고 있다고 한다면 그녀가 파산한 것도 이해가 간다. 버는 것도 많았지만 그만큼 사용한 것도 많았던 것이다. “위쪽도 어렵겠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명예추기경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헬레나 이단심문관님.” “…….” “…….” “저, 명예추기경님. 혹시나 장소가 불편하시다면 제가 따로 악마소환사를 불러….” “아닙니다. 헬레나 심문관님. 솔직히 유쾌하진 않지만 이런 장소가 필요하다는 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불편하다기보다는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그 누구도 맡지 않으려는 일입니다. 자부심을 가지셔도 됩니다. 이건 더러운 일이 아니라 그 어떤 일보다도 신성한 일입니다.” “…….” “분명 베니고어 님께서도 이 광경을 보신다면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하.” 물론 베니고어 여신이었다면 인상을 찌푸리며 이딴 짓 하지 말라고 울부짖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 리 만무. 베니고어에게는 안 좋은 소식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종류의 장소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나 다름없다. 너무 악이어서 문제지만 어쨌든 간에 필요악이라는 거다. 나로서도 규모를 축소해 베니고어에게 들어가는 신성의 양을 늘리고 싶었지만, 이곳의 규모는 결코 축소할 수가 없다. 베니고어가 오염되어 육체가 썩어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장소는 계속해서 운영되어야 한다. 이런 내 의견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천천히 풀어지는 헬레나 이단심문관의 얼굴이 보였다. 솔직히 얘랑 둘이 있는 건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신이 자신을 바라봐 준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 모양. 조용히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명예추기경님.” “네, 헬레나님.” “저… 언제 한번 제이나 대주교님과 함께 기도회를 열까 하는데….” “초대해 주신다면 당연히 찾아가겠습니다. 당장은 조금 힘들겠지만 헬레나 이단심문관님과 제이나 대주교님과 함께 드리는 기도회는 제게도 큰 기쁨입니다. 당연히 참가해야지요.” “…….” “그… 보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네. 그러시다면.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천천히 멀어지는 뒷모습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동안 많이 얼굴을 마주치기는 했지만 그녀와 단 둘이 이 정도로 이야기해 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제시카 대주교와는 성격이 정반대건만 어떻게 둘이 그렇게 쿵짝이 잘 맞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무튼 간에 저쪽의 임무는 이걸로 끝. 이쪽의 임무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쯤이었나.” 괜스레 중얼거리며 문 앞에 자리를 잡았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다. 다른 장소라는 질적으로 다르게 특별 관리를 받는 듯한 모양새. 여러 가지 신성력의 결계가 쳐져 있는 걸 보니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용히 내 신성력을 주입하자 결계가 깔끔하게 풀린다. 몇 번이나 비슷한 행동을 한 이후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철문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주 오랜만에 보는 외관이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나는… 아니야….” “…….” “나는 악마소환사가 아니란… 말이다.” “…….” ‘진짜 불쌍하네.’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꼴은 가관. 온몸에 상처가 나 있고 전설 등급의 금속으로 이루어진 쇠사슬로 양발과 양손이 구속되어 있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정체모를 십자가 같은 것에 매달려 있었는데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도구들이 한 쪽에 즐비해 있었다. 어디에 쓰이는지는 모르겠지만 기괴한 모양만으로도 보기 싫어진다. 어떻게 생각하면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 이토록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제정신을 유지하는 저 정신력이 놀랍다. 만약 나였다면 저 쇠사슬이 팔에 장착되는 순간 내가 모르는 것까지 전부다 나불댔을 것이다. 과연 한 시대를 지옥으로 만든 가면쓰레기다운 정신력. 어째서 김현성이 과거에 녀석에게 당했는지를 잘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나는 악마 소환가 아니야. 나는 공화국의 진청이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중얼거리는데, 아무래도 나를 이단심문관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어떻게 인사를 꺼내야 할지 민망한 것도 사실. 마음의 눈으로 몸 상태를 체크한 이후에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매달린 녀석을 풀어줄 수 있었다. 굳건히 서 있을 줄 알았건만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힘없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대화를 할 수 없는 상태 아니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조금 귀찮아 지는 것은 당연. 하지만 살짝 입을 열자 녀석이 곧바로 이쪽을 바라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 랜만입니다.” 마치 그리운 연인을 만났을 때와 같은 다정한 어투. 어떻게든 협상에 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건만 예전의 인성을 버리지 못한 가면쓰레기는 급격한 발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너….” “이런 식으로 다시 마주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그동안 식사도 못 하셨을 텐데, 물과 배를 채울 만한 요깃거리도 가져왔습니다. 이단심문관들 몰래 이걸 빼내오느라 무척 힘들었지 뭡니까. 하하하.” “너….” “그렇게 쳐다보시면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너. 너! 이기여어어어엉!” “뭐, 뭐야! 왜 이래!” 이래서 검은머리 짐승은 거두지 말라고 했던가. 정성을 다해 준비했건만 기껏 준비한 음식들을 쳐내며 이쪽으로 달려드는 모습은 마치 튜토리얼 던전의 아귀와 같은 모양새. 은혜도 모르는 범죄자의 얼굴이었다. “개자식! 죽여 버리겠어!!!” 어떻게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두 다리로 굳건히 몸을 일으켜 주먹질을 해오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물론 모양새만이 아니라 스탯 자체도 아귀급으로 하락한 녀석이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리 만무. 신사적으로 대우해 주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공격에 내재되어 있던 잠재된 폭력성이 드러나 버렸다. 거북이처럼 둔하게 휘두른 오른쪽 훅을 피한 뒤 왼쪽 옆구리에 바디 블로우. 약자에 대한 예우 차원으로 마력을 넣지 않았지만 진청의 몸이 크게 흔들린다. “커헉!” 쓰레기가 된 것 같지만 간만에 맛보는 강자의 기분. 이미 전투력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음에도 다시금 왼손을 휘둘러 오는 녀석에게 질풍과 같은 발차기를 내질러 주었다. 힘이 실리지는 않았지만 곧바로 벽에 부딪치는 진청의 모습은 굉장히 처참하다. ‘이거… 의외로 격투에 소질이 있는 거 아니야?’ 괜스레 주먹을 꽉 쥐어볼 정도. 하지만 바닥에 주저앉아 피를 토하는 녀석을 바라보자 상처뿐인 승리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그 와중에도 녀석은 흥분한 모습을 버리지 못한 채 커다란 목소리로 명을 재촉하는 중.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주먹을 휘둘러오지 않았다. “죽여 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어어! 쿨럭.” “아니. 뭘 자꾸 죽여 버린다고 그러십니까, 진청 군사님.” “이기영 개자식! 이기영 개자시이익….” “저는 대화를 하려고 왔습니다, 군사님. 시비를 걸려고 온 게 아니에요. 참고로 방금 싸움은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아무리 저라도 제대로 걷지도 못할 사람을 때리는 취미는 없으니 대륙과 같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그리고… 내장을 조금 다치신 것 같은데 제대로 대화할 정도로는 신성력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딱 고통스럽지 않을 정도로만요. 너무 치료해 버리면 다시 한번 달려들지 않겠습니까. 저는 폭력을 싫어하는 사람이니 대화로 해결합시다.” “너…. 너!” “그렇게 억울해하시는 걸 보니 제 기분이 더 안 좋습니다, 진청 군사님. 당연히 억울한 것도 이해는 가지만 서로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니었습니까? 애초에 전쟁을 먼저 일으킨 것은 당신과 공화국이고 저희야 대응해 승리를 취한 것뿐이지 않습니까. 그 와중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입힐 만한 순간이 있었지만 이미 승자와 패자가 가려졌으니 진 쪽은 깔끔하게 이긴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야지요.” “개자식….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이번이 아니면 다음에라도 반드시. 죽어서도 네놈을 저주하고….” “죽어서 저주하는 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일단 적당한 곳에 앉기라고 하세요. 말했다시피 대화를 하려고 찾아왔으니까요. 결코 쓸데없는 말을 하려고 찾아온 게 아닙니다. 당신한테도 굉장히 좋은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대화는….” “말 그대로 대화입니다. 아니, 오랜만에 옛날이야기 같은 걸 하는 것도 즐거울 것 같고요. 원래 호적수라는 건 지난 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지는 법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당신을 상대하는 건 정말로 힘들었다고요. 중간에 탈주하고 싶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름 명승부라면 명승부지 않았습니까.” “그 입 다물어.” “확실히… 승부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참고로 사기꾼과는 대화를 안 한다 따위의 졸렬한 모습은 보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도 당신을 악마소환사로 만들어 버리기는 했지만 당신도 저를 전쟁을 일으킨 쓰레기 자식으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만약 제가 패배했다면 전범으로 이 자리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있었을 겁니다. 서로서로 이해할 부분은 이해하자 이 말입니다.” “…….” “…….” “지금 와서 당신이 억울해하는 게 코미디 같은 상황이 아닙니까. 흥분은 조금 가라앉혀 주세요. 그래야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까.” 내 말이 맞다. 만약 이쪽이 진청에게 패배했다면 아마 현재의 녀석과 비슷하면 비슷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륙에 혼란을 일으킨 전범 이기영으로 단두대에 목이 썰려나갔으리라. 내 발언에 공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악마소환사이자 가면쓰레기 진청이 조용히 나를 바라보기 시작.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것 같은 느낌이다. 본인이 쳐낸 물을 다시금 입 안으로 들이키며 입을 여는 모습이 보였다. “…….” “…….” “원하는 게 뭐지?” 조금은 생각을 정리한 것 같다. 방금과 같이 추한 모습이 아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당당한 모습. 과연 1회 차 최대 빌런다운 멘탈이었다. “당신이 증언해 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 427 회귀자 사용설명서 427화 승자와 패자(3) “당신이 증언해 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뭐?” “말 그대로입니다. 당신이 증언해 주셨으면 하는 게 있어요. 역시 간 같은 거 안 보고 시원시원해서 마음에 듭니다. 보통 이런 협상을 하다보면….” 상당히 짜증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눈앞에 있는 자식은 조용히 나를 바라볼 뿐, 쓸데없는 소리를 해오지는 않았다. 일단은 이쪽이 말하는 걸 들어보고 판단하겠다는 거다. 다시 한번 뒤통수를 맞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는 걸 보니 그야말로 대인배 중에 대인배라 할 수 있는 수준. 저런 멘탈이 어디에서부터 우러나왔는지는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잃을 게 없으니까.’ 지금에 와서 뒤통수를 맞는다고 한들 녀석은 잃을 게 없다. 반쯤 자신을 놓은 듯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될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자신이 현재 을의 위치에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으니 충분히 대화가 통할 만도 하다. 모든 게 괜찮은 상황 같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약간 경계심이 든 것도 당연. 일어나서는 안 될 상황에 대비 아닌 대비를 한 뒤에 다시 한번 진청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내가 먼저 물어보겠다. 대화를 원한다고 했으니 이 정도는 용인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현재 바깥은 어떻게… 됐지?” 인간이라면 궁금할 수밖에 없다. 감옥에 틀어박힌 이후에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었을 테니 물어보는 게 당연하다. 현재 녀석이 알고 있어도 별 쓸모없는 정보를 알려 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 승리에 대한 결과를 자랑하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패자와 나누는 대화가 은근히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뭐, 아주 자알 돌아가고 있습니다.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전쟁은 끝났습니다. 인류는 하나가 됐고 다가올 악마의 위협에 대비해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당신 하나로 인해 전 인류가 모인 셈이니 이 부분은 당신에게 감사를 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공화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전쟁을 일으켰는지 모르게 입을 싹 닫는 모습이 제법 일품이더군요.” “…….” “저도 저지만 그쪽은 정말로 치워야 할 쓰레기가 많다고 느낀 거 아니겠습니까. 공화국의 몇몇 사람은 아주 대놓고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당신이라 선동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아무 죄가 없고 이 모든 건 악마 소환사 진청의 사악한 계략으로 이루어졌다는 거죠. 물론 교국을 비롯한 대륙의 모든 왕국은 그들의 이야기에 수긍하고 있고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교국은 공화국을 용서했다는 겁니다. 뒤로 받은 게 조금 있기는 하지만 너도 이기고 나도 이기는 그림을 완성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개자식들….” “보기 좋게 토사구팽당한 겁니다. 키야…. 뿐만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도 악마 소환사 진청이라면 치를 떨며 돌멩이를 집어던지는데 그걸 공화국이 선전 요소로 사용하고 있지 뭡니까? 저도 쓰레기지만 거기도 충분히 쓰레기 같은 놈들이 많습니다.” “지금 와서 이간질하려고 한들 네가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이건 이간질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씀 드린 것뿐입니다. 당신은 공화국의 권력자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완벽하게. 심지어 당신을 따르던 이들에게도요.” “…….” “…….” “물론 여전히 고통 받는 이들은 존재합니다. 당신과 함께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당신의 수족들. 이 사람들의 충성심은 저로서도 조금 놀랐지 뭡니까. 아직까지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교단에서 고문을 받다 보니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무사한 건가.” “네. 무사합니다. 재판이 끝난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모두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상태라… 어떻게 말이 통하지 않지 뭡니까. 적당히 회유하고 구슬려 봐도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고 고개를 저어대니 정말 부관들 하나는 잘 두셨습니다.” “…….” 여러 가지로 찝찝하다는 얼굴은 가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잘 느낌이 오지는 않는다. 물론. ‘그럴 만도 하긴 해.’ 녀석의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하리라. 나라도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 자신을 따르던 이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들어도 달갑게 들리지 않을 테니까. “더 궁금하신 건 없으십니까? 아니, 그보다 흥분은 조금 가라앉으신 겁니까? 아까와는 반응이 사뭇 달라서….” “개소리. 지금 당장에라도 네놈을 때려죽이고 싶은 심정이다. 다만….” “이해합니다, 진청 님.” “네 말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는 이야기다. 사기꾼 자식….” “…….” “그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쁜 쪽 아니면 착한 쪽?” “내 사람들 말이다.” “재판이 끝난 이후에 죽을 겁니다. 당신과 함께요. 처형 방법은 최대한 인도적인 방법으로 진행될 겁니다. 대륙에 해악을 끼친 악마 소환사와 그의 하수인들이라고 한들 모두가 공존하는 새 시대에 쓸데없이 잔인한 방법을 기용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고통 받을 새도 없이 슥삭일 겁니다. 제가 만든 포션을 사용하는 방법도 고려 중이고요. 아마 그게 덜 고통스러울 겁니다. 꿈에 빠지듯이 스르르륵 잠들면 고통스러웠던 곳과는 영영 이별. 혹시 압니까? 죽으면 지구로 되돌아 갈 수 있을지. 이곳에 있는 것보다는 화끈하게 죽는 게 더 편하실 거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게 네 제안인가? 정말 그게 끝이라면 지금 당장 나가는 게 좋을 거야. 이미 여기에 있는 동안 그런 고통은 많이 겪어봤으니까. 내가 그런 말에 혹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아뇨. 당연히 이게 아닙니다. 겨우 이정도가 끝일 리가 없지요. 아, 우선 제안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이거 한번 보시죠.” 품안에 있는 걸 슥 내밀자 내가 내민 것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다음 설명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는데, 표정을 보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고 느껴진다. 이미 가면쓰레기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 “정적들?” “비슷합니다. 더불어 당신을 매몰차게 버렸던 공화국의 인사들이 명단도 포함되어 있고요. 그 명단에 적혀 있는 이들은 전부….” “처리할 생각이로군. 참으로 너답다. 쓰레기 같은 생각이야.” “네. 전부 악마의 하수인들입니다. 제가 밝혀도 별문제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당신이 말해주는 게 더 그림이 좋지 않겠습니까? 겸사겸사 당신을 배신한 이들에 대한 복수도 할 겸. 몇몇은 필요도 없는데 서비스로 넣어드린 겁니다. 지금 대륙 상황이 좀… 경험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상황이거든요. 아! 만약 받아들이시겠다면 특히나 저 악마의 첨탑 관계자들을 가장 힘 있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대륙을 하나로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 “있어도 쓸모없는 자들입니다. 방해가 되는 이들일 게 뻔해요.” “…….” “가치관이 다른 이들이기도 하고요. 저도 기왕이면 다 품고 가고 싶지만… 이것도 전부 여신님의 뜻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너는….” “네?” “너는 정말로 여신의 선택을 받은 사자인가?” “그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여신과 소통하고 있어요.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이 세계의 여신님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제가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그렇습니다. 제가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건 거짓이 아닙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미친 자식들. 제기랄. 미친… 자식들…. 어째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건… 신성 모독입니다. 한 낱 인간이 어찌 감히 여신의 뜻을 알겠습니까?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편하실 겁니다. 당신이 제게 당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제가 신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보다 우월하고 또 똑똑해요. 대륙인의 기상이 느껴진다 이 말입니다.” “이죽거리지 마라, 개자식.” 내 중얼거림에 무척 허탈해하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마치 삶의 모든 걸 부정당한 듯한 표정. 누가 보면 나라라도 잃은 게 아닌지 생각하게 할 얼굴이었다. 진청은 어째서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건지에 대해서는 물어볼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나름대로 대인배적인 사고방식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방금 한 이야기가 효과가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선택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제가 드린 제안은 이게 끝이고 당신에게 돌아갈 혜택 또한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게 끝입니다. 받아들일지 받아들이지 않을지는 온전히 당신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선택지가 있나? 어떻게 생각해도 네가 날 살려주는 선택지에 대해서는 떠오르지 않는데….” “놀랍게도 그것 역시 선택지에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당신이 그 선택지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큼. 아무튼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납득이 되실 겁니다. 만약 당신이 제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의 첫 번째 선택지입니다.” “말해라.” “당신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겁니다. 비참하게 살아가게 되겠지만 아무튼 간에 목숨은 건질 겁니다. 공식적으로 당신은 처형당한 게 될 거고 모든 사람은 당신이 죽었을 거라 생각하게 될 겁니다. 지하감옥 비슷한 곳에 들어가 그곳에서 계속 지내시는 겁니다. 식사도 나오고 잠자리도 나름대로 푸근한 곳이죠. 대충 유배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시는 게 편하실 겁니다.” “…….” “그리고 두 번째 선택지는… 대충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당신이 목숨을 잃는 선택지라고 보면 될 겁니다. 말 그대로, 당신은 깔끔하게 죽을 겁니다. 재판도 원활하게 진행되고 제가 말씀드린 이 명단에 대한 발표도 대중에게 발표하고 모종의 방법으로 이 대륙과 작별을 고하는 거죠. 대신.” “…….” “대신 오명을 벗을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악마 소환사 진청은 사실 미지의 세력에게 세뇌당한 것이고 그의 희생으로 인해 대륙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라는 걸로 가는 게 좋겠군요. 아니면 이 명단에 있는 자들이 당신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다고 봐도 될 것 같고요. 처형당하는 그림보다는 음… 제정신이 돌아온 뒤 자신이 행한 짓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정적들에게 당하는 그림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워낙 벌려 놓은 게 많아 디테일한 부분은 조금 더 손을 봐드리겠지만… 아무튼 큰 그림은 이렇다는 겁니다. 명예롭게 가는 거죠. 아! 대신 이 경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릴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 “전 대륙의 욕을 얻어먹으며 구질구질하게 끝까지 살아남든지 아니면 공화국의 정적들을 처리하고 최소한의 명예를 지킬 건지. 선택지는 두 개. 이정도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널 믿을 수 있나.” “그건 당신 자유죠. 솔직히 진청 님은 이미 제 손을 떠났습니다. 한때 살짝 존경하기는 했지만 이제 그런 감정도 없기도 하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크게 관심이 가지도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일로 머리가 깨질 지경이라서요. 제가 이런 제안을 드리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복잡한 상황을 조금 더 쉽게 풀어나갈 수 있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첫 번째 선택지와 두 번째 선택지를 합친다는 선택지는 없습니다. 저도 뒤가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라서 말이죠. 거절한다면 여기서 끝입니다. 당신은 악마 소환사로서 죽을 거예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죽을 겁니다. 대륙을 악마에게 팔아넘긴 최악의 쓰레기로요.” “…….” “자, 어떻습니까. 제법 구미가 당기지 않습니까? 삶이냐 명예냐. 제 경우에는 완벽히 전자겠지만….” “한 가지만 더.” “죄송합니다만 협상은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이들에게 배려를 해줬으면 좋겠다. 그들에게는 죄가 없어. 이 이야기는 오롯이 너와 내 선에서 끝나는 것으로 하지.” “…….” “…….” “부탁이다.” “뭐. 그 정도라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적당히 빼돌리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니. 아무튼 빨리 대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녁 약속이 밀려 있어서. 삶입니까, 명예입니까? 아니면 이런 개자식과의 거래는 받아들이지 않으실 겁니까.” “…….” “…….” 잠깐의 시간이 흐른다. 아마 쉽지 않은 결정이겠지만 나는 녀석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답이 너무나도 쉬워 굳이 문제를 낸 이유도 없을 것 같은 느낌. “명예.” 녀석이 바라는 건 그거다.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야.’ 녀석뿐만이 아니다. 제2황녀 샤를롯트 역시 마찬가지. 우리 황녀님과 공화국의 군사는 두 가지 선택지 중 후자를 고르는 이들이다. 내 입장에서는 신기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샤를롯트의 경우는 녀석처럼 죽지는 못했지만 그녀 역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후자를 선택했으리라. ‘뒈지면 명예 같은 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이름뿐인 명예나 개인적 가치는 언제든지 쓰레기통에 버려버릴 수 있다. 아마 내가 녀석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살려 달라 아부를 떨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녀석은 어떻게든 명을 이어나가는 것보다 명예로운 죽음을 더 선택하고 싶은 모양. 슬쩍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니 나를 바라보는 악마 소환사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미 모든 걸 놔버린 듯한 얼굴은 조금이지만 찝찝한 기분을 느끼게 할 정도. ‘그게 너랑 내 차이점이야.’ 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 “대충 이야기는 끝난 것 같은데… 뭐, 그럼 슬슬 일어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약속은 지켜라.” “네. 이런 상황에서까지 거짓말을 할 정도로 쓰레기는 아닙니다. 바로 처리되지는 않겠지만 역사는 당신을 악마 소환사로 기록하지 않을 겁니다. 여신의 이름을 걸고 드리는 맹세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 물론 여신의 맹세 같은 건 나와는 개뿔 상관이 없다. 하지만 녀석에는 위안을 주는 대사였는지 조금은 의심의 눈빛이 사그라지는 게 보인다. “제가 준 명단은 이미 다 외우셨을 거라고 믿고 폐기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제대로 할 수도 없겠지만 괜한 입을 놀린 결과물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알고 있다.” “그럼 이만.” “언젠가 네가 저지른 짓들이 너를 좀먹는 날이 올 거다.” “그럴 리가요. 정말로 그런 게 있다면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원래 승자는 아무런 리스크도 지지 않는 법입니다.” “…….” “그럼 정말로 안녕히.” 혹시 재판일이 된다면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이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녀석과 이렇게 독대를 하고 있는 것 말이다.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은 만큼 공식적인 자리나 여신의 거울을 통해 얼굴을 보기야 하겠지만, 한때 공화국의 중심에 섰던 적이 있었던 군사는 여기에서 끝났다. 삶을 포기한 그 시점에서 말이다. 슬쩍 밖으로 나가며 뒤를 돌아보자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녀석이 보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병신 새끼.’ 나는 평생 가도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 428 회귀자 사용설명서 428화 그래도 얘가 제일 무섭다(1) 사실 진청에게 넣어놓은 것은 일종의 보험이었다. 녀석이 세뇌 당했다고 다시 한번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이야기다.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일도 많고 여러 가지로 걱정해야 할 일도 많다. 어떻게 생각해도 지금 당장 처리하기에는 생각해야 할 사안이 많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녀석에게 세뇌나 이용이라는 키워드를 뒤집어씌운 이유는 뻔할 뻔자. ‘나한테 도움이 되니까지.’ 그 말 그대로였다. 녀석에게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나에게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확률이 높다. 최근에 생각이 많아지고 있는 김현성이 바로 그 원인. 개인적으로는 나에게 씌워진 가면쓰레기 용의가 완벽히 벗겨졌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니, 솔직히 처음부터 용의가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나를 오해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런 보험은 몇 개를 만들어도 부족함이 없다. ‘만약에….’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김현성이 나를 1회 차 빌런으로 오해할 경우를 위한 변명거리라는 거다. ‘세뇌 당했을 가능성도 생각하게 만들면 좋을 것 같은데….’ 1회 차의 가면쓰레기는 자기 자신의 의지로 그런 악독한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끊임없이 내면의 악과 싸워온 비운의 캐릭터가 더 어울린다. 매일 밤 자신이 저지른 짓에 괴로워하며 그 몸에 수많은 자해로 가득한 상처를 만든 고독하고 상처받은 남자. 가면 역시 울고 있는 눈을 가리기 위한 수단이라는 중2병적 설정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설정은 조금 그렇다고 생각해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그래도…. ‘이거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은 설정이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이런 프레임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게 그나마 최악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누군가는 이미 다 끝난 마당에 그런 쓸데없는 상황까지 생각해 가며 움직여야겠냐고 이쪽을 비웃겠지만 백 번을 조심해도 한 번 틀어지면 모든 게 끝이다.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니 넣을 수 있는 보험은 모조리 넣어두는 게 맞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진청 녀석이 너무나도 쉽게 이 일을 받아들였다는 것. ‘당연한 건가.’ 어차피 복수 말고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복수할 수단이나 기회가 없어지니 더 추해지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내가 본 녀석의 모습도 충격적일 정도로 녀석은 많이 망가져 있었으니까. 프라이드가 강한 만큼 현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이 괴로웠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 일은 잘 해결될 것 같고….’ 과정이 짧지는 않았지만 가닥은 잡혔다. 퀘스트와 던전이 막힌다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균열랜드와 악마관계자들이 거주하는 던전을 통해 해결. 전자의 경우에는 막스가 알아서 잘 해주고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이지혜에게 맡기면 일을 빠르게 끝낼 수 있으리라. 물론 균열 박물관은 내가 직접 진두지휘해 과금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잠깐 동안 심장이 철렁 했던 것도 사실. 마침 딱 맞는 맞춤형 솔루션의 등장은 오히려 어깨춤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불편한 식사 도중 잠시 떠오른 생각은 기분 좋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 하지만 곧바로 말을 걸어오는 차희라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기분 좋아 보이네, 자기. 입에는 좀 맞아?” “응, 누나. 이거 맛있네. 살살 녹아.” “모처럼 수도에 들어왔는데 곧바로 떠나야 된다니. 김샜네. 제법 오래 있을 줄 알고 기대했는데. 여기도 혁명 이후에는 많이 바뀌어서 구경할 것도 많아, 자기.” “나도 기왕이면 조금 돌아다니고 싶긴 한데… 급한 일이 생겨서. 말했잖아. 당분간 퀘스트 생성이나 던전 생성 같은 게 전부 정지된다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솔직히 저녁도 길드에서 먹으려고 했었는데…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 여기라도 들린 거지.” “진청 일은 제대로 마무리 했고?” “응. 나쁘지는 않아.” 이어서 말을 걸어온 것은 엘프 공주 엘레나. “저… 이기영 님, 다시 물어 죄송하지만, 그 말이 정말인가요?” “아… 네. 엘레나 님. 베니고어 님께 직접 전달 받은 메시지이니 아마 확실할 겁니다. 혹시 엘레나 님께서는 엘룬 님과 소통이 가능하신지요.” “생각해 보니 무척 오래 전부터… 그분이 느껴지지가 않았어요.” ‘네가 버림받아서 그런 거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말씀하시길 위쪽에 커다란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대륙에 뿌리 박혀 있는 악마의 영향이 그분들이 계시는 곳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더군요.” “그, 그럼 어떻게….”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땅 위에 뿌리내린 악마들을 빛의 힘으로 몰아내고 다시 한번 그분들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증명한다면 베니고어 님과 엘룬 님을 비롯한 모든 이에게 축복이 다시 한번 내릴 것입니다.” “노력해야겠군요.” “네. 더불어 역시 신경 쓸 게 많습니다. 여신들이 이방인들을 위해 직접 관리하시는 던전 같은 경우에도 완전히 그 기능을 정지했으니 아마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올 겁니다. 그 혼란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몬스터의 자제나 사냥 의뢰 같은 것은 이제는 우리 사회에 너무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으니까요. 그나마 몬스터의 숲이 있는 캐슬락 동부 쪽은 괜찮겠지만 상대적으로 숲이 작은 실리아는 조금 더 문제가 심각할 겁니다. 카스가노 유노 님은 혹시….” “사실 따로 생각해 놓은 것은 없습니다, 명예추기경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시면 그것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물론 이방인들이 느낄 혼란에 대처해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동감하고 또 동감하옵니다. 이 대륙을 유지하고 균형을 잡아주고 있는 시스템에 뭔가 이상이 생기고 있다는 건… 아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모든 이방인이 깨닫게 될 것 입니다. 공식적인 발표를 하고 감히 명예추기경님을 위협하는 이들을 위한 철퇴를 가다듬어야지요.” “네. 말씀 감사합니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살짝 미소를 보내고 있는 카스가노 유노의 모습이 보였다. 문제는 미소를 보내고 있는 게 그녀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 양 옆에는 차희라와 정하얀이 자리해 있었고 그 옆에는 카스가노 유노와 엘레나. 또 그 옆에는 조혜진이 앉아 있었다. 안전을 위해 이 모두를 데리고 온 건 후회하지 않지만 역시나 이런 상황이 오게 되면 어느 정도 후회를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사건사고가 터지지 않았으니 이 멤버를 모이게 한 게 더욱더 후회된다. ‘좌불안석, 가시방석. 슈바….’ 말 그대로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저들이 서로 싸우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 한 사람도 서로를 쳐다보는 인원이 없다. 오롯이 나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자신만의 이야기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꼴은 가관. 이런 상황에서 눈치를 보지 않는 자식이 없다면 녀석에게는 틀림없이 박수를 보냈으리라. 한 사람이 질문을 하고 한 사람과 대화를 하면 마무리가 될 즈음에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 그 사람과의 담소가 끝나면 바로 대기하고 있던 그 다음 타자와 함께 대화의 장으로 쓸려 들어간다. 말하기 좋아하는 나로서도 버티기 힘들다.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지만 마치 인간 케이크가 되어서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 한 조각씩 떼어 먹히는 느낌. 돌려 먹히는 기분이다. 또는 마치 압박 면접장에 나온 것 같다. 아무래도 일에 관련된 일에 이야기가 많이 나오다 보니 정하얀의 경우에는 끼어들 수가 없어 의기소침해하는 것도 불안요소 중에 하나. 폭발할 확률은 제로지만 그래도 정하얀은 정하얀. 언제 돌발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없다. 물론 이대로만 끝나 준다면 무난하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 하지만 그 상황에 조용히 돌을 던진 것은 조용히 밥을 먹고 있는 조혜진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 “하얀 씨 손에 못 보던 게 있군요. 아티팩트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선물이라도 받으신 건가요?” ‘이 씨바….’ 진청과 샤를롯트가 먹인 뒤통수보다도 더욱 쓰라린 통렬한 한방. ‘쟤는 또 왜 저걸 끼고 온 거야.’ 순간적으로 모두의 시선이 정하얀의 왼손 약지로 모여든다. 모두 대충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처음. 이 자리에 앉은 이후부터 줄곧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던 정하얀은 소중한 결혼반지를 살짝 손으로 가리는 치밀한 행동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적절하지 않은 예지만 절대 반지를 숨기는 골룸의 모양새. 하지만 저 행동이 정말로 반지를 숨기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는 건 어린애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손으로 반지를 가리고는 있지만 저 행동은 다분히 자랑하려는 의도다. 한껏 올라간 콧대와 자신감이 생긴 눈동자가 바로 그걸 말해준다. 자신은 이곳에 있는 여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물론, 나는 너희와는 다르다는 뜻을 심어준 것이다. “아… 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길.’ 어색한 연기. 이곳에 자리한 다른 여인들을 비웃는 정하얀의 표정은 내가 봐도 띠껍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렇게 귀엽게 생긴 얼굴이 이렇게 얄미워 보이기도 힘들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절대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얼굴도 다르지 않다. 모두가 절대반지라도 본 것처럼 움찔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면 아래 묻어두고 있었던 문제가 갑작스레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들키면 안 될 것이라도 들킨 것처럼 소중히 반지를 손가락에서 뺀 이후에 조용히 품에 집어넣는 꼴이 가관이다. 카스가노 유노는 뚫어지게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미 사전에 반지에 대해 알고 있던 엘레나 역시 씁쓸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반지야?” “아, 아무것도요. 그, 그냥 오빠가 선물해 준 거.” “그러니까. 뭔데?” “비, 비밀이에요. 두, 둘만의 비밀. 헤헤.” “…….” “둘만의 비, 비밀이니까. 절대로 말하면 안 되거든요.” 차희라의 말에는 싱긋 웃으며 대답해 주는 정하얀의 모습은 가히 압도적이다. 지금까지 내가 내 정적들에게 한 도발보다, 방금 정하얀의 말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 유치하고 어처구니없는 도발이기는 하지만 이런 종류의 도발은 먹힐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의외로 차희라는 제법 유순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도발에는 어울려주지 않겠다는 어른의 기개가 느껴진다. ‘역시 우리 희라 누나!’ 카스가노 유노와 엘레나는 조금 부러워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쟤네들한테도 한 마디씩 하긴 했었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소중한 사람, 함께 있고 싶다, 따위의 말을 지껄인 적이 있는 걸로 기억한다. 아마 그 기억을 되새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틀림없이 부럽기는 하지만 괜찮다고 속으로 자신을 다독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괘, 괜찮은 것 같은데….’ 조혜진이 폭탄을 떨어뜨린 것치고는 제법 나쁘지 않은 결과. 식사가 끝날 때까지 별다른 사건은 터지지 않았고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 되는 듯했다. “그럼… 자리에서 일어날까?” “네.” “바로 린델로 가는 건가요?” “저는 실리아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엘레나 님.” “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카스가노 유노 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자기. 그리고 세컨드. 빨리 와. 시간 없다며?” 차희라가 앉아 있던 테이블의 한 쪽이 종잇장처럼 뜯어져 꼬깃꼬깃 접힌 채 버려져 있는 걸 목격하기 전까지는…. ‘저 식탁 쇠로 만들어진 거잖아. 슈바….’ 차희라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 429 회귀자 사용설명서 429화 그래도 얘가 제일 무섭다(2) 정확히 말하면 특수금속으로 만들어진 테이블이었다. 오리하르콘이나 미스릴 같은 전설 등급의 금속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쇠는 쇠다. 최소 영웅 등급 이상의 판정을 받아 무기로 가공해도 나쁘지 않을 퀄리티의 자제. 이딴 자제로 테이블을 만들었다는 것도 황당하지만 그걸 손으로 쥐어 으스러뜨린 근력을 목도하니 당황과 공포의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 맞아. 얘 이런 얘였지.’ 단순히 금속을 베어내거나 마법으로 형태를 변형시키는 게 가능한 이들은 넘쳐나겠지만 단순한 완력만으로 이런 게 가능한 건 전 대륙을 뒤져봐도 5명이 채 안 될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심지어 마력을 일으키는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수히 손가락으로만 이 광경을 이루어냈다는 말이 된다는 거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본 것도 잠시,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에는 괜스레 더 그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뭐해? 빨리 오라니까. 집에 갈 시간이잖아. 응?” “…….” “뭐해? 자기.” “으응. 지금 갈게.” 분명히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하지만 미묘하게 일그러진 것 같은 얼굴은 차희라가 얼마나 기분이 안 좋은지 알려주는 것 같다. 폭발하지 않은 건 이런 일에 화를 내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인지하고 있기 때문. 그 말 그대로, 정하얀의 어린아이 같은 도발에 대응하기에는 차희라라는 이름이 가지는 위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생각해 보면 차희라가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정하얀을 비롯한 몇몇이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냈을 때 경고를 하는 정도뿐. 그마저도 결국에는 웃으며 스무스 하게 넘어갔고 한 번 상황이 마무리 된 이후에는 지난 일에 대한 언급도 없다. 말하자면 대인배 중의 대인배요, 위인 중의 위인이다. ‘이건 뒤끝이 있다는 건데….’ 불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말하고 기분이 나쁘다면 그 자리에서 표현했어야 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차희라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한다. 속 안에 꽁 하고 숨겨놓은 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갑작스레 불안감이 증폭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하얀은 승자의 미소를 흘리며 당당하게 붉은 머리의 옆을 지나가는 중. 흥분한 야수가 갑작스레 손을 들어 정신 나간 마법사의 뚝배기를 부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등 뒤가 부르르 떨린다. 파국도 그런 파국이 없으리라. 더욱더 무서운 것은 최악의 베드엔딩이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이건 바로 케어해야 돼.’ 눈 가리고 아웅이겠지만 이건 케어 하는 게 맞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이후, 오스칼과 마를린, 카트린 의원들을 비롯한 이기영 인맥 군단과 뜨거운 작별인사를 나눌 때도 괜스레 차희라를 신경 쓰기 시작. 조혜진이 그리폰 위에 올라타 어서 자신의 뒤에 타라 고개 짓을 했을 때 조심스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는 차희라 님과 함께 타고 가겠습니다.” “네, 부길드마스터.” 조금이라도 섭섭해했으면 기분이라도 좋으련만 내 말에 조혜진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 오히려 울상이 된 것은 정하얀 쪽이다. 이건 아니라는 듯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듯이 애타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 힘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쏠리거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내 신체의 균형 역시 무너질 수도 있다. 정확히는 좌우 균형이다. “그럼 주인님, 박물관 건으로 린델에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해. 유노.” “네.”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대화를 나누곤 곧바로 실리아로 향하는 카스가노 유노를 보낸 이후. 곧바로 붉은 머리에게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지사.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왠지 모르게 싸늘하다. 한 대 쥐어박고 싶어 하는 듯하다. 물론 그런 사고는 벌어져서는 안 된다. 차희라가 한 대 쥐어박는 순간 내 뚝배기는 두부처럼 터져 버릴 것이다. “왜? 세컨드랑 타고 가지. 응?” “아니 그냥. 겸사겸사 할 말도 있고….” “무슨 말?” “뭐, 딱히 정확히 말이 있다기보다는 누나랑 둘만 시간 보낸 게 언젠지 잘 기억이 안 날 정도라서… 유유자적하게 그리폰 위에서 대화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 “…….” “올라타.” “…….” 슬그머니 눈치를 본 것은 당연지사. 그만큼 쫄리는 상황이었다. 이후 정하얀의 향후행보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은 불길이 치솟은 곳을 달래주는 것이 중요하다. 정하얀과 우리 엘프 공주님, 조혜진을 태운 그리폰이 하늘로 솟아오른 직후에는 천천히 누나가 타고 있던 그리폰도 떠오르기 시작. 밑에서 열렬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 팬클럽 여러분에게는 웃어주었지만 내 입가에 웃음이 사라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래. 얘도 한 번 케어해 줄 때가 됐어.’ 린델 최고의 무력집단을 거느리고 있는 이 여편네의 중요성은 이미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지금의 내게는 크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차희라는 차희라고 붉은 용병은 붉은 용병이다. 여전히 린델 내에서 중요한 포지션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물론 권력의 한가운데 있다. 내가 조금 컸다고 한들 마음대로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거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여러모로 이쪽을 도와준 의리를 생각하면 매몰차게 떨쳐낼 수 있을 리 만무. 아니, 애초에 그녀를 떨어뜨리려고 했다간 내 머리가 먼저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린델로 돌아가는 내내 입을 꾹 닫고 있는 모양새는 가관. 솔직히 차희라가 이런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의외로 귀여운 면도 있네.’ 그녀의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이렇게 살짝 삐진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생소하다. 물론 그런 감성적인 감정은 잠시 넣어둬야 하는 것이 당연. 지금은 어떻게 이 용병여왕의 기분을 풀어줄까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하지.’ 생각해라, 빛기영. 자존심 같은 건 신경 쓰지 마. 내가 이런 태도를 보였을 때 정하얀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떠올려. 정답은 정해져 있다. 이런 게 통할지, 아니, 이런 걸 내가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얼굴에 철판을 깔아보는 거야. “내가 누나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 “고맙기도 하고… 솔직히 여기까지 온 게 누나 덕분이잖아. 처음에 만났을 때도 날 많이 믿어줬고.” 애교. 어쩌다 보니 삐진 남친을 풀어주는 여친의 포지션이 된 것 같았지만 차희라에게는 이 방법이 효과적이다. 그녀가 원하는 건 자신을 이끌어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그런 걸 바라고 있었다면 나에게 접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목소리에 잔뜩 애교를 묻히고 살살 그녀를 간질인다. 머리를 등에 비벼 보기도 하고 허리를 꽉 잡은 손을 배 쪽으로 옮겨 깍지를 낀 채 은근슬쩍 자극한다. 어울리지는 않지만 최대한 교태를 부려 그녀의 청각을 자극. 조혜진이었다면 나를 그리폰에서 밀어내 버렸겠지만 내 고유기벽에 효과를 받는지 몸을 자꾸만 움찔거린다. ‘키야. 이거 호스트바에서 일해도 되겠네. 네가 최고다.’ 아무래도 조금은 재능이 있었던 모양. 왠지 모르게 분위기를 타기 시작한다. 여포와 동탁을 손에 들고 가지고 논 초선의 기분이 이러할까. 세상을 가지고 논 양귀비와 클레오파트라의 심정이 이러할까. 괜스레 치명적인 놈이 된 것처럼 코스프레를 해대는 건 내가 생각해도 역겨웠지만, 반응이 좋으니 신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섹스심볼 이기영!!’ 나 자신에게 구역질이 나오기는 하지만 동서고금 남녀불문하고 이런 앙탈은 실패하는 법이 없다. “화 풀어, 누나아.” “…….”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그리고 단순한 선물이었고 하얀이가 많이 안 좋았던 일이 있어서 기분 풀어주려고 준 거야. 누나도 알고 있잖아. 내가 누나 많이 좋아하는 거. 그렇지?” “…….” “누나 붉은 입술도, 붉은 머릿결도 전부 다 너무 좋아. 항상 당당한 모습도 그렇고. 정말로 화난 건 아니지? 내가 오버하고 있는 거지?” ‘근데 얘는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진짜 극대노하기라도 한 건가.’ “어쩔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 나도 물론 누나가 첫 번째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지만….” ‘진짜 삐졌나?’ 뒷모습만 보이니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이런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이 필살기가 먹히지 않는 모양. 결국에는 현성이가 사준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가방에 손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쓸 만한 반지가 있나.’ 준비가 되지는 않았지만 준비한 것처럼 시도하는 게 중요. 혹시나 정하얀이 폭주할 일이 있을까 봐 여러 가지 뇌물을 가방에 집어넣었건만 마땅히 쓸 만한 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정하얀이 폭주할 때를 대비해 하나씩 끼워줄 반지들. 초조함에 고개까지 빼꼼 내밀며 물건을 찾자 마침 그녀와의 상징도 같은 붉은색 반지가 눈에 띄기 시작. 반지를 꺼낸 이후에는 슬그머니 그녀의 한쪽 팔을 어루만졌다. 아직도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지만 순순히 한쪽 팔을 이쪽에 떠넘기는 걸보니 이런 스킨십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물론 진짜는 지금부터. 설마 반지를 끼워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 자신의 왼손으로 들어가는 차가운 금속을 느꼈는지 몸이 조금 움찔 하는 것이 보인다. 녀석을 완벽하게 밀어 넣자 천천히 팔을 빼내어 자신의 손을 보는 모습은 왠지 모를 설렘이 느껴졌다. ‘여기서 결정타.’ 소녀처럼 폭 안긴 이후. “차희라,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반 정도는 진심인 말을 중얼거린다. 뭔가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직후. “어?” 갑작스레 잘 날아가고 있던 그리폰이 경로를 이탈한 것. 먼저 가고 있던 선발대는 현재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경로를 이탈한 그리폰들은 전속력으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뭐야. 이게 뭐야.’ 혹시나 벌집을 건드린 것은 아닌지 긴장한 게 사실. 하지만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누, 누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들려오는 것은 계속해서 거칠어지고 있는 숨소리. ‘개….’ 만약 그리폰 레이스가 있다면 트로피를 들어 올릴 것만 같은 경기력이다. 단숨에 지상으로 내려온 그리폰은 내가 알 수도 없는 장소에 들어가는 곳으로 모자라 이상한 동굴을 거쳐 계속해서 저공비행을 하기 시작한다. ‘여기가 어디야….’ 아마도 버려진 던전 안. 차희라는 지금 이곳이 어딘지 알고 가고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녀를 꽉 껴안은 채 온 몸으로 바람의 저항을 견디는 것뿐. 마침내 그리폰이 알 수 없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 꽉 감았던 두 눈을 떠 주변을 둘러 볼 수 있었다. “여기 어디야?” 꽉 막혀 있는 것은 물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장소. “라이ㅌ….” 조심스레 불을 키자 정말로 작은 던전 같은 공간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것은 눈동자가 붉어진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마리 짐승. 충혈된 것도 모자라 핏발이 선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난 이럴 생각 없었어. 근데… 네가 먼저 유혹한 거야.” “어?” “자기가 먼저 유혹한 거라고.” “어어?” 균열박물관에서 고대신을 마주친 것만 같은 압박감. 몸이 굳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고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차희라의 얼굴이 보였다. 갑작스레 진청의 마지막 대사가 생각나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언젠가 네가 저지른 짓들이 너를 좀먹는 날이 올 거다.’ 이 새끼가 이걸 말한 건 아니겠지. # 430 회귀자 사용설명서 430화 그래도 얘가 제일 무섭다(3) ‘살았구나, 슈바. 살았구나. 기영아. 해냈다. 살았구나.’ 천천히 눈을 뜬 뒤 처음 든 생각. 이만큼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 날도 없으리라. 승리의 혼잣말을 내뱉으려고 했지만 목이 완전히 말라버렸는지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숨을 쉬기가 힘들어져 허겁지겁 손을 뻗어 포션을 열었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 때문인지 잘 열리지가 않는다. 몸 전체의 기력이 극도로 쇠약해진  느낌.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골든타임을 놓치는 게 될 것 같은 기분에 초조해진다. 서서히 생명의 불씨가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을 때 기적적으로 포션병이 열렸다. 벌컥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생명수와도 같은 녀석들이 안으로 쏟아지기 시작. 물론 이것만으로도 전부 회복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응급처치는 한 것이다. 마치 사우나를 한 뒤에 이온음료를 마실 때의 쾌감이 든다. “죽을 뻔했다.” 농담이 아니다. 정말로 죽을 뻔했다. 사실 어제 일이 어떻게 됐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 몇 시간 이후에는 곧바로 리타이어. 중간중간 잠에서 깨기는 했지만 기억나는 것은 오롯이 찰랑거리는 붉은 머릿결과 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붉은색 눈동자였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물론 행복한 시간이기는 했다. 심지어 이상하게 뒤집힌 상황에 약간의 흥분까지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도 처음이 끝. 현재 몸 상태는 대륙으로 온 이후 최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마치 정기가 다 빨려나간 느낌. 몸무게를 재보지는 않았지만… 단언컨대 5㎏ 이상이 빠져나갔으리라. 더욱 최악인 것은, 아니, 이건 아니다. 아무튼 간에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다. ‘어쩌지.’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걱정되는 것은 단연 정하얀의 존재였다. 아마 중간부터는 차희라와 내가 경로를 이탈해 이상한 곳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깨달았을 터. 울고불고 생난리를 치지 않을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이곳으로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도 신기하다. 아니, 아마 찾아오지 않은 게 아니라 찾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않았다는 건 정하얀의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종의 이유로 이쪽의 좌표를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현재 나와 차희라가 있는 이곳이 그녀가 입장할 수 없는 장소라는 이야기가 된다. ‘던전인가?’ 총 수용 인원이 2인밖에 안 되는 던전? 아니면 탐지마력이 닿지 않는 장소?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돌아갔을 때의 파장을 생각하니 다시 한번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없는 린델에서 벌어지고 있을 상황이 두려운 것은 당연지사.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일어났어, 자기?” “아… 으응.” “미안해. 내가 좀 심했지?” “아니야. 나도 좋았어.”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는 게 문제지만. “그렇다니 다행이네.” 가까이에서 본 차희라의 얼굴은 정말로 좋아보였다. 최근에 보였던 푸석푸석한 머리카락과 피부는 마치 새로운 생명을 얻은 듯했고 다크서클도 완벽하게 사라져 있었다. 비포와 에프터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달라진 얼굴은 나 역시 탄성을 자아내게 할 정도. 세상만사 오만 걱정과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 버린 것으로 모자라 영양제라도 맞은 모습이다. 현재의 차희라는 그야말로 베스트 컨디션. 생명의 어머니라도 내려와 축복을 내린 모양새였다. “기다려. 아침만 먹고 가자.” “아침까지?” “대단한 건 아니야. 대충 기분만 내본 거지 뭐. 아니면 아침 먹고 가볍게 운동이라도 한 다음에 출발할까, 자기?” 죄 없는 동물을 노리는 베어그릴스의 눈빛. 소중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기 전에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걸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다. “아니야. 바쁘다고 했잖아. 안 그래도 할 일 많은데…. 그나저나 누나 정말로 좋아 보이네.” 괜스레 목소리의 끝이 떨린다. “내가 욕구불만이라고 이야기했었지? 어제까지만 해도 머릿속에 먹구름이 낀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완벽하게 깨끗한 느낌이야. 완벽해. 정말로.” 대신 내 육체의 피곤과 고통을 등가교환했지. 사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이 장소에 차희라와 함께 있다는 것. 진지하게 말하건대, 만약 이런 장소에 정하얀과 함께 있었다면 지금처럼 여유롭게 있을 수 없었으리라. 혹시나 이곳에 나를 가두지는 않을지, 따위의 온갖 걱정을 했어야 했을 테니까. 적어도 차희라는 그런 미친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이상한 거 고민하지 마. 나 가두지 마. 씨바. 가두지 말라고….’ 고심 끝에 결국에는 몸을 일으킨 차희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갖춘 채 자꾸만 아쉽다는 듯이 이 장소를 바라보지만 서둘러 나가길 바라는 내 요청에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파란에는 연락해 뒀어.” “언제?” “새벽 5시쯤. 잠깐 자기가 정신 잃었을 때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는 않겠지만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자기.” “응?” “이 반지 청혼반지라 봐도 되는 거지?” “…….” “…….” “비… 슷해.” 물론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느껴져 전력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희라는 뿌듯하다는 얼굴로 계속해서 왼손 약지에 장착된 반지를 바라보는 중. 오늘따라 유난히 발걸음이 가벼워 보이는 이유는 어제 있었던 사건뿐만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긴 어디야?” “나도 몰라. 던전 비슷한 곳 같던데. 몬스터도 몇 마리 있기는 하더라. 지금은 없지만. 아, 그리고… 바쁘다는 건 균열랜드 이야기?” “맞아. 안 그래도 지금 그거 손보러 가야 해. 던전 자체는 무리 없이 개장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서브 콘텐츠들이 부족하거든. 가서 사업 이야기 해야지. 계획서는 대충 머릿속에 있기는 한데 실행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니까.” “대충 뭐랑 뭐?” “던전 외에 팔아먹을 게 좀 많아? 그 앞에서 장사하면 백퍼 대박 나, 누나. 박물관 불고기, 박물관 백숙 같은 거라고 대충 이름 지은 다음에 그 가격에 배, 아니, 세 배를 받아먹어도 장사가 될걸? 전투식량이나 포션 같은 던전 보급품은 말할 것도 없고… 던전특구, 관광특구, 경제특구 같은 헛소리도 낭낭하게 집어넣어 가격도 때려 버릴 수도 있고 전형적인 어느 나라 장사방법이기는 하지만 뭐 어쩌겠어. 대체제가 없는데. 무조건 대박 나. 무조건.” “너무 피 빨아 먹는 건 아니고?” “정당한 이용료를 지불받을 뿐이야. 던전이 사라진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몬스터 던전이 되는 건데 폭리 좀 취하면 어때. 더군다나 그 던전을 관리할 사람도 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양심 장사라니까? 이거 무조건 양심 장사야.” “규모가 좀 큰 걸 생각하고 있나 본데… 초기 투자 비용은 좀 들겠네.” “파란에 저장되어 있는 자금으로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긴 하지만….” “붉은 용병에 있는 것도 가져다 써.” “뭐? 진짜?” “대충 투자라는 개념이라고 보면 될 거야. 네 말 들어서 손해 본 적도 없고 어차피 네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이 네 돈인데, 뭐. 부담 느끼지 말고 가져다 쓸 수 있는 만큼 가져다 써. 다른 건 걱정하지 말고. 인력 쪽도 내가 어떻게 손봐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필요한 거 있으면 말만 해, 자기.” ‘키야. 기브 앤 테이크 확실하네. 그래! 결혼하자, 희라야! 결혼 가즈아!!’ 물론 한번 해본 생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방금 차희라의 발언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해볼 만하게 만들 정도였다. ‘역시 여자는 능력이 있어야 해.’ 본래 차희라가 너그럽고 쿨하기는 했지만 거기에 플러스로 따뜻함과 상냥함이 추가된 것만 같았다. 그리폰에 올라탈 때부터 린델로 향할 때까지, 차희라의 상냥함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행복회로가 맹렬히 돌아가고 있던 것도 잠시 점점 린델에 가까워질수록 버리고 괜스레 쓸데없는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버리고 온 폭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최근 정하얀이 조금 얌전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하얀은 정하얀. 꺼진 정하얀도 다시 봐야 한다. 언제 다시 그 불씨가 위로 올라 올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별문제 없겠지.’ 대놓고 발광하진 않았으리라. 그래도 계속되는 반복학습 끝에 내가 그런 모습을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비행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초조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앉아 있는 한 인형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따뜻한 차희라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황. 착륙장의 한쪽에서 양 무릎을 모은 채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이의 모습은 틀림없이 정하얀이다. 멀리서부터 그리폰을 발견했는지 우다다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래…. 니가 뭔 잘못이 있겠냐. 전부 내가 쓰레기지. 그래도 이번에는 제발 조용히 넘어가자.’ 마침내 그리폰이 린델로 떨어졌을 때 우다다 달려온 정하얀이 나에게 푹 안겨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 아무 말 없이 계속해서 품에 안기려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귀엽다. 하지만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차희라를 바라보는 시선은 귀엽지 않다. 미치광이로 돌변하기 일보 직전의 눈빛이 가관이다. 경고가 생각났는지 살기는 띄우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한이 들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야기는 들었지? 잠깐 깜빡하고 있었던 볼일이 있어서 자기랑 던전에 좀 다녀왔어. 세컨드도 한 번 다녀오는 게 좋겠네.” 적어도 정하얀과 내가 그 장소에 들어갈 일은 없다. 높은 확률로 명예추기경 실종이라는 기사가 헤드라인에 뜰 확률이 높다. 아무튼 간에 차희라는 나를 한 번 안아준 것은 물론 심지어는 정하얀의 어깨까지 툭툭 두드렸다. 반지를 낀 손으로. 조금이지만 구겨진 프라이드를 회복한 것이다. “그럼 나는 먼저 간다. 자기.” 물론 남은 한쪽은 자존심이 구겨졌다. 억울하고 분한지 꾸역꾸역 튀어나오는 눈물을 어떻게든 입술을 깨물며 막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이거 진짜 어떻게 해야 되냐?’ 더욱더 가슴 아팠던 것은 지금 일어난 이 신경전이 싸움 측에도 끼지 않는 유순한 신경전이었다는 것. 나를 둘러싸고 있는 광년들이 전력으로 부딪쳤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정하얀, 차희라 두 괴물을 제외하고서도 그렇다. 카스가노 유노는 그나마 이쪽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지만 최후의 승자 선언을 한 이지혜도 다른 종류의 괴물이다. ‘아니. 차라리 이지혜가 제일 나아.’ 그나마 가장 현실 감각이 있으니까. 조용히 지내기는 했지만 우리 엘프 공주님도 뭔가 마음의 병을 안고 있는 느낌.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로 볼일이 있어서 그런 거야, 하얀아.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오늘은 일 끝나고 연극이라도 보러갈까? 균열랜드 일만 마무리 한 다음에 바로 올게. 아마 몇 시간 안 걸릴 거야.” “…….” “그만 울어. 이해할 수 있지?” 끄덕 끄덕. “어제부터 계속 여기 나와 있었던 건 아니지? 빨리 들어가서 한숨자자, 하얀아. 피곤할 텐데. 방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끄덕 끄덕. “착하지.” “오.” “…….” “오, 오빠….” “응?” “우, 우, 우리. 우리 결혼 언제 해요? 결혼…. 결혼한다고 했잖아요. 네?” 그래도 얘가 제일 무섭다. “끄으윽. 결혼한다고 했잖아요…. 끄으으으윽.” 약발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 431 회귀자 사용설명서 431화 생명의 위협(1) 물론 이 약발이 벌써 떨어졌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장담컨대 이 결혼 드립은 정하얀에게는 신화 등급의 포션이요, 엘릭서에 가까운 만병통치약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그 어떤 화도 가라앉힐 수 있는 지고의 영약이라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너무 풀어놓은 건가.’ 지난 시간이 조금은 후회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정신없이 바빴다고는 하지만 관리를 소홀히 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 물론 엘레나와 함께 살라트의 뱃속에 있었을 때는 어쩔 수 없기는 했지만. ‘아니, 그것도 아니야. 생각해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지.’ 막 자기반성을 시작하려는 타이밍이었지만 지금껏 내가 한 일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소홀한 것도 아니다. 정하얀이 정신을 놓았을 때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는 만큼 그 바쁜 시간에도 어느 정도는 시간을 투자해 그녀를 다독이는 자리를 가졌었다. 이를테면 짧은 데이트.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쉬는 시간에는 항상 정하얀을 끼고 있었고 심지어는 틈틈이 스킨십을 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아주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그녀를 케어했다는 거다. 평소였으면 이 정도로 충분히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었을 터. 이렇게 현타가 빠르게 찾아온 것은 어쩌면 그녀의 전체적인 기대치가 올라갔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손을 잡거나 입을 맞추는 것, 함께 여가활동을 즐기거나 식사하는 것. 본래대로였다면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겠지만 결혼이라는 약으로 인해 제한선이 높아진 것이다. 한 번 강한 약을 투여 받으니 강한 면역력을 가지게 된 것과 같은 이치. 더 이상 어정쩡한 약은 듣지도 않게 된 것과 일맥상통.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누군가의 명대사처럼 그녀 역시 이쪽의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예비 신부니까 당연한 거야. 나는 예비 신부니까 이 정도는 해줘야지. 이제 이런 거는 당연한 거구나. 맞아. 이제는 당연한 거야. 내가 정확히 정하얀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대충 이러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진도를 잘 조절했어야 했는데.’ 뭔가 광기에 물든 것 같은 정하얀의 얼굴을 바라보니 내 쪽에서 실수가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라이오스에서 투여한 약은 확실히 그 시점에서 사용하기에는 너무 이른 수였다. 그동안 당연한 권리였던 걸 다시금 회수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정하얀의 얼굴을 본 시점에서 그 의견은 아웃. 줬다 뺏는 게 가장 치사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방금의 생각을 배재한 것이 아니다. 정하얀 자신이 응당 누려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권리들을 하나씩 빼앗아 간다면 아마 이쪽이 골치 아파지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결혼 한다고 했잖아…. 끄으으윽.” 머릿속으로 상상하기 싫은 장면을 떠올리고 있는 중에도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듯 울부짖는 정하얀의 모습은 가관 중의 가관. 얼굴에 차희라에 대한 원망과 나에 대한 불신이 서려 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다. 대놓고 적의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됐건 이쪽에 불만을 표현한 것이나 진배없었으니까. “지금은 바쁘다고….” “결… 혼한다고 했잖아요. 끄어어억. 언제 할 건데…. 언제. 어, 언제!” ‘얘 목소리 높이는 것 좀 봐. 미쳤나 봐….’ “그렇게 목소리 높인다고 해결될 일이….” “끄으으으윽. 차희라 너무 싫어…. 너무 싫어어. 너무우으으으!” ‘니가 먼저 도발했잖아.’ 심지어 혼잣말을 시작하는 꼴은 가관. 너무 작아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혼잣말을 하고 있다. 평소 정하얀이 내게 소리를 지른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이야기. 현재 그녀가 극도의 흥분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소리라도 질러야 되나?’ 커다란 힘은 더 커다란 힘으로 제압해야 되는 법. 조선 시대에 태어난 양반가문의 8대독자처럼 어딜 감히 언성을 높이느냐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의 눈은 모진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은 충신처럼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개 무서워.’ 마치 폭탄이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 “누가 그렇게 목소리 높이래!” 당황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커다란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끄으으으윽.” 하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팔을 덜덜 떨고 있는 모습에 이건 통하지 않는 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 이미 내 목소리가 들리는 상태가 아니다. 김현성이라도 불러와 이 망나니를 제압해야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 몸을 조금 뒤로 빼고 싶건만 내 옷깃을 붙잡은 그녀의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만약 밀실이었다면 오줌을 지리고 말았으리라. ‘이건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에서 더 강한 약을 투여할 수는 없는 상황. 한 발자국 더 상한선을 높여 버린다면 이후에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을 벗어날지도 모른다. 도끼눈을 치켜뜬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을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이 샘솟기도 했지만. 일단은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수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처럼 살살 달래볼까? 아냐. 그건 아니야. 제대로 망할 수도 있어.’ 혹시나 또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 당연. 유혹의 결과를 내 온몸으로 만끽했던 기억이 머릿속에 들어와 꽂힌다. 하지만. ‘이것밖에 없어.’ 그리폰 위에 둘밖에 없었던 이전의 상황과는 달리 지금은 린델에 한 가운데. 유니콘 사건 때 보았다시피 정하얀은 그 누구보다도 순수한 포지션을 지키고 싶어 한다. 차희라처럼 무턱대고 덮치는 그림은 나오지 않을 거라 장담, 또 장담할 수 있다. ‘효과는 이미 입증된 거나 다름없고.’ 방법은 조금 다르겠지만 당장 화를 내고 있는 정하얀을 달래기에는 충분하리라.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던 정하얀을 천천히 떼어내자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내 기준 최대한 고혹적인 미소를 밀어 넣으며 정하얀을 바라보는 것은 물론 얼굴을 가까이 대며 눈가에 입을 맞췄다. “울지 마, 하얀아.” “끄으으으윽?”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이후에는 귀를 살살 매만지기 시작. “지금은 상황이 조금 안 좋다고 이야기했잖아. 일적인 이야기라면 이해해 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고… 이런 걸로 떼를 쓰면 앞으로 나도 조금 힘들어져.” “아아아….” 별것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오감을 자극하는 터치다. 예상했던 것처럼 정하얀을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이대로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 “아으아아아아아.” 단언컨대 이쪽이 기대했던 리액션 이상이라 할 만했다. 오줌을 참고 있는 것만 같은 엉거주춤한 자세가 굉장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나라고 왜 하얀이랑 빨리 맺어지고 싶지 않겠어?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고 있는 거야. 매일매일 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봐. 이렇게….” 심장의 두근거림은 공포로 인한 두근거림이기는 했지만 귓속에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것은 물론 나 나름대로 그녀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사실 지금까지 정하얀과의 스킨십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형식적이었던 전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 정도는 그녀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 최대한 페로몬 팍팍 뿌리려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아으아아아아아아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 직후. “하아. 하아. 하아.”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지는 것은 물론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오묘하게 변해가는 눈. 안 그래도 이성을 잃은 눈이 기괴하게 변하고 있다. 왠지 모르게 정하얀의 피부가 홍시처럼 붉게 물들었고 자꾸만 몸을 배배 꼬기 시작. 울고 있는 건지 웃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개 망….’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어? 나 왜 이래. 어?’ 졸음이 쏟아지는 것은 물론 다리가 풀리는 것만 같다. 점점 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최선을 다해 올려보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감기는 눈은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지경. ‘니가 그런 거야? 정하얀?’ 마법은커녕 마력을 끌어 올리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차희라의 여파가 지금 찾아온 건지 정하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천천히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귓가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덤이다. “마, 많, 많이 피곤하세요?” 들려온 목소리는 아까처럼 광기에 휩싸이지 않았다. 정말로 걱정하는 눈빛. 하지만 그 안에 깃든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욕망이 번들거린다. “제,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바, 방, 방까지. 오늘 하루는 푹 쉬어야 되겠다. 헤헤. 히. 히히힛.” “아… 응. 갑자기 몸이 너무… 포, 포션….” “머, 먹, 먹여드릴 테니까. 일단은 여, 여기 기대세요. 여기로.” “지금 당자….” “아, 알겠어요….” “…….” “…….” “…….” “…….” “일어… 나 봐요.” “…….” “오빠, 일어나 봐요. 회의한다고 했으면서 뭐예요? 이게?” “이지혜…?” 눈을 천천히 떴다. 지금이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날이 밝은 것을 보니 정신을 잃은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정하얀과 함께인 줄 알았건만 내 옆에 자리한 것은 뜻밖에도 이지혜였다. 황당함 걱정이 공존하는 표정.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정하얀은 어디 가고 왜 얘가 있어?’ “어? 정말로 일어났네요? 그냥 한 소리였는데.” “뭐, 뭐야? 나 오래 자고 있었어?” “3일 동안 잠들어 있었어요.” “뭐?” “딱 삼일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요. 그리고 오빠 정말로 어디 몸 안 좋은 거 아니에요?” “그게 뭔 소리야.” “교황청에 템플러가 찾아왔다니까요?” “뭐? 템플러가 갑자기 왜 와?” “저도 그쪽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는데…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신호가 갔다던대요? 상태를 확인하고 괜찮은 것 같다고 말한 뒤에 돌아가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난리 났었어요. 특히나 엘레나, 그 엘프 공주님이 오빠 건강을 살피고 있었던 도중에 그런 거라…. 믿을 수 있는 여자 맞아요? 사제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목숨이 위험해지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아무래도 수상하다니까.” ‘이건 또 뭔 소리야.’ “갑자기 뭔 엘레나? 아니, 엘레나는 지금 뭐 하고 있어?” “방금 치료 끝났을걸요. 지금은 쉬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어디서 자꾸 숲 냄새 나지 않아요?” “잘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하얀이는 없었고?” “3일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했잖아요. 정하얀이 오빠 데리고 오고 난 이후에 반나절 정도가 지났나? 계속 깨어나지 않는 걸 보고 엘프 공주님이 오빠 상태를 본다고 방으로 들어갔었나 봐요. 그 뒤로 세 시간 정도 지난 다음에는 곧바로 교황청 템플러가 들이닥쳤고요. 저도 템플러 나오는 건 처음 봤는데. 정말 대단했다니까요?” 명예추기경이 된 이후에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던 템플러의 첫 출동.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생겼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엘레나?’ 얘 이름은 또 왜 튀어나오는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굉장히 불명예스럽게 베니고어의 곁으로 갈 뻔했다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목숨을 잃었다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었으리라. 괜스레 씁쓸한 마음이 든 것은 당연지사. 나도 모르게 이지혜의 얼굴을 바라보자 괜스레 몸을 밀착시키는 그녀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그나저나 오빠 오늘따라 왠지 섹시해 보이네? 평소에도 그렇기는 한데. 지금은 더….” ‘너까지 이러지 마, 슈바….’ 진심 어린 속마음이었다. # 432 회귀자 사용설명서 432화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저 세계 생활(1) 기력이 쇠약해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알 것 같다. 삼 일 동안 내리 잠만 자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 당연. 수차례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던 템플러가 이번에 나를 찾아온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게 단순 코미디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차희라까지는 버틸 수 있지만 그 이후에 벌어진 엘레나의 죄책감 넘치는 도둑질은 빛기영의 몸을 완전히 아작 내버렸다. 콧노래를 부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 이지혜는 오랜만에 기분이 좋은지 리듬까지 타고 있는 상황. 홍조가 띈 얼굴과 땀으로 촉촉한 얼굴이 묘하게 섹시하게 느껴졌다. 물론 2회 차를 시작할 여력은 없다. 악마의 저주를 받은 몸이 이러할까. 벌써 몇 차례 포션을 들이켰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다. 최소 준신화 등급의 쇠약 저주를 아무런 아티팩트 없이 몸으로 때려 맞은 것 같은 느낌. 농담이 아니라 정말 이 예가 딱 들어맞는 것만 같았다. “삼 일 동안 꼼짝 없이 잠들어 있었다고?” “네. 몸이 너무 피곤해서 그렇다고 하던데…. 전문가들은 크게 이상은 없다더라고요. 포션을 수액으로 내보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요. 오빠가 만든 물약 말고도 세계수의 어쩌고 하는 것도 동시에 들어가고 있으니 이번 기회에 건강하나는 제대로 챙기셨을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다. 지혜야.’ “템플러도 한 번 둘러본 이후에는 뭔가 착각이 있었던 것 같다고 중얼거리고 밖으로 나갔어요. 그 이후에도 내리 잠만 잔 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만큼 몸이 피곤했잖아요?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었고.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이상해요? 사제라도 불러올까요?” “아니. 아직도 피곤해서. 미치겠네…. 세계수의 어쩌고 맞은 거 맞아? 잠만 잤는데 뭐가 이렇게 힘들지. 정말로 몸이 병신이 된 건가. 누가 나한테 에너지 드레인 같은 마법 걸고 간 거 아니지?” “슬슬 나이 먹는 거죠. 뭐, 오늘 보니까 아직 팔팔한 것 같지만. 아니면 내가 그만큼 매력적이었던가.” “…….” “우리 궁합 좋잖아요. 안 그래요?” 이지혜의 쓸데없는 소리에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는 손으로 괜스레 침대 옆 책상을 더듬거리자 곧바로 무엇인가가 툭하고 떨어져 내렸다. [면회자 명단] [이지혜] AM 08:43-AM 09:50 [차희라] AM 11:00-AM 12:14 [정하얀] PM 15:03-PM 15:10 [엘레나] PM 18:05-PM 20:02 [차희라] PM 22:23-PM 23:03 [차희라] AM 05:02-AM 06:04 [이지혜] AM 08:23-AM 09:10 [정하얀] AM 09:21-AM 09:29 [정하얀] AM 10:55-AM 11:05 [정하얀] PM 12:11-PM 12:22 [정하얀] PM 15:42-PM 15:52 [엘레나] PM 18:05-PM 20:02 [#   #   #   #   #   #] ‘이건 또 뭐야.’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 면회를 주기적으로 와줘서 정말로 고마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걸 금방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이렇게 생각해 주니까 정말로 눈물이 나오네?’ 그래도 개인적인 시간과 쉴 수 있는 시간은 필요하다 생각했는지 중간 중간 여유를 준 것도 눈에 띈다. 정하얀의 용무는 굉장히 빨리 끝나는지 조루인 양 10분 간격으로 단타를 치고 있었고 차희라는 1시간, 엘레나의 이름은 많이 보이지는 않지만 규칙적인 성격에 걸맞게 연속이나 같은 시간에 들어와 2시간을 채우고 돌아가셨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이지혜 역시 단골. 유기적으로 시간을 조정해 들렸다 간 것이 그녀의 성격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다.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자 괜스레 헛기침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중간중간 다른 이들의 모습도 보이기는 했지만 삼 일 동안의 면회 내역은 거의 다 이 사인방. 그만큼 나를 생각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절로 감사의 눈물이 흘러나온다. 혹시나 무언가 엄한 짓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아니. 그럴 리가 없겠지.’ 아무리 이 사람들의 정신이 이상해도 나름 환자인 내게 그런 돌발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괜스레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이후에는 아무 말 없이 포션 한 병을 까 목구멍으로 들이밀기 시작. 다시 한번 생명수와도 같은 녀석이 안쪽으로 쏟아져 내리는 걸 느꼈다. ‘내가 이러려고 연금술사를 선택 했나. 자괴감 들어.’ “포션 엄청 많이 마시네요.” “피로회복제 비슷한 거야. 원기회복겸. 진짜로 몸이 쇠약해진 게 느껴지거든.” “많이 달려오기도 했으니까요. 솔직히 조금 쉴 때도 됐잖아요? 몸이 정상이 아닌 게 이상한 거죠. 그래도 별문제는 없다는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래도 며칠간은 무리하지 말라는 지령이 떨어질 거예요. 오빠 몸이 어디 홀몸인가요. 그 삼 일 사이에 교국, 아니, 대륙도 난리가 났었고…. 아, 이건 이미 오빠가 알고 있는 내용이려나?” “퀘스트가 없어졌다는 거? 추가로 던전도 사라지고. 그거 내가 가장 처음 들은 게 맞아.” “으음. 바젤 교황 말이 맞았네요. 본래는 오빠가 발표했어야 되는 것 같았는데 아시다시피 병상에 누워 있던 관계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요. 바젤 교황이 직접 대륙에 그 뜻을 전파하셨어요.” “잘하셨네. 대중들 반응은 어때?” “어떨 것 같아요?” “으음.” “그야말로 난리였죠. 뭐, 안 나는 게 이상하지. 그동안 대륙을 유지해온 시스템을 한꺼번에 뒤집혀 버렸으니까요. 그나마 이방인들이 할 일이 있어서 다행이었죠. 잘 아시겠지만 악마 소환사 진청이 대륙의 퍼져있는 악마관계자들에 대해 증언했잖아요? 덕분에 모험자 길드에서는 뿔뿔이 흩어진 악마의 던전을 향해 원정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고. 그리고… 균열 랜드도 있으니까요.” “그건 아직….” “이제 오픈 앞두고 있어요, 오빠.” “뭐? 그게 완성이 됐다고?” “오빠 기절한 날 차희라 님이 직접 찾아와서 말해줬거든요. 이거 지금 진행해야 된다고. 오빠가 대충 그림을 어떻게 그릴지 예상이 돼서 그냥 진행시켰는데, 이거 괜찮은 거 맞죠? 김미영 팀장님이 많이 도와줬고요. 아, 그 사람 능력 좋더라고요.” “아끼는 인재지. 연봉이나 더 올려줘야겠네.” “그렇게 해주세요. 기왕이면 포상금도 두둑하게 넣어서. 자금은 파란에서 30%, 붉은 용병에서 60% 대줬고요. 검은 백조에서 5%, 카스가노 유노가 따로 5% 정도…. 자잘한 건 전부 제한한 이후에 말씀드리는 거예요. 드워프랑 막스 그리고 린델 내 마법사들과 인력 노동자들을 활용해서 유통망 설치하고 최소한의 것만 올렸어요. 사실 시간이 없어 상권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긴 해요. 직접 가셔서 체험해 본다면 더 좋으실 걸요.” “빠르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건 너무 빠른데?” “딱 모양만 갖춰진 정도예요. 원래부터 막스가 계속해서 준비는 하고 있었으니까요. 외부적인 부분은 가다듬을 게 많지만 막상 박물관 안쪽은 아무 이상 없어요.” ‘그럴 만하지.’ 이제야 실체가 드러났을 뿐인지 하루 이틀 준비한 게 아니었으니까. 이지혜를 바라보자 괜스레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 네가 혜자다. 역시 우리는 영혼의 단짝이 맞아.’ 어떻게 이렇게 가려운 곳을 벅벅 긁어주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 다시 한번 그녀가 사랑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다시금 이지혜가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만족한다는 표정이네요.” “그렇지. 고마워, 누나.” “그럼 저도 이제 받아도 되는 거 맞죠?” “어?” “차희라 손가락이랑 정하얀 손가락에 있었던 인X니티 스톤… 아니, 그 반지요. 저도 줘요. 세 번째라는 게 짜증 나기는 하지만 나도 충분히 자격 있으니까. 평소에는 안 끼고 다닐 테니까 안심하고.” “아. 응….” 딱히 안 된다고 하기에도 말하기 힘든 타이밍이다. ‘안 줄 이유도 없고.’ 애초 이지혜가 지금까지 해준 걸 생각하면 충분히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상태라 모양은 나지 않았지만 커다란 노란색 보석이 박힌 반지를 꺼내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 넣기 시작. 무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던 이지혜였지만 막상 손가락에 자리한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았는지 쿡쿡 웃어댔다. “일어나실 수 있으시면 식사라도 하러가죠.” “못 일어날 정도는 아니야. 그런데 누나는 계속 여기 있었어?” “균열 랜드 오픈 준비로 바빠서 계속 바빴으니까요. 저희 길드로 못 돌아 간지도 꽤나 됐네요. 누가 보면 파란 길드인 줄 알겠네.” “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키자 의외로 제 기능을 하는 신체가 놀랍게 느껴졌다. 막상 걸으니 건강한 것만 같은 기분. 밖으로 나서자 나를 바라보고 인사를 해오는 이들까지 시야에 비친다. 대부분 깜작 놀랐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허겁지겁 이것저것을 챙겨주기는 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연 엘레나. 이쪽으로 쉽사리 오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 자꾸만 주저하는 모습. 재미있게도 얼굴에는 지독할 정도의 죄책감이 서려 있다. ‘쟤는 진짜 뭔 짓을 했길래 저래?’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은 물론 귀를 붉히고 있는 모습은 평소의 그녀의 모습과는 약간 다르게 느껴진다. 현재의 몸 상태에 대한 이야기라도 나눠보려고 했건만 일단 후다닥 반대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에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이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딨지?’ “파란 길드원들은 다 어디 갔어?” “어디 갔겠어요. 박물관 가 있지. 말했잖아요. 마무리 준비 중이라고. 덕구 오빠도 이틀 전에 깨어나서 바로 합류했고. 붉은 용병 단원들도 아마 많을 거예요. 사실 오늘 아침에 떠난 거였는데, 아쉽게 됐네요.” “홍보는 때리고 있고?” “네. 계속해서요. 어차피 사라진 던전의 대체재라 먹힐 수밖에 없어요. 뭐, 이건 오빠가 더 잘 알고 있겠지만….” 식당에 도착하자 간단한 요깃거리를 내놓은 채 우물거리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설계도면이라 할 것도 없지만 도면은 한번 봐주시면 될 것 같고….” 나 역시 숟가락을 움직인 뒤에 균열 랜드의 정확한 모습을 바라보기 시작. ‘나쁘지 않은데.’ 김미영 팀장과 이지혜의 합작이라면 충분히 믿을 만한 느낌. 자세한 건 직접 체험해 봐야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현재의 시장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는 예상할 수 없었지만 기본적인 구성은 박수를 보낼 만하다. ‘생각한 그대로야.’ 전형적으로 서민 등골 빼먹는 구조다. “굳이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아뇨. 봐야 해요. 오빠 의견을 반영한 게 아니니까. 아니면 직접 체험해 보는 게 나으려나?” “방법이 있어?”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에요? 오빠가 관리하고 있는 곳이잖아요? 그냥 들어가기엔 조금 그렇기는 한 데. 이참에 한번 변장이라도 하고 서민체험 해봐요. 기분 전환도 할 겸. 초급자 코스, 중급자 코스, 상급자 코스로 나뉘어져 있으니까요. 등급으로는 희귀, 영웅, 전설.” “그게 좋으려나….” 몸이 찌뿌둥하기도 하고 딱히 바쁜 타이밍도 아니다. 린델에 온 뒤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낼 거라고 예상했건만, 주변 인물들의 캐리에 의해 균열 랜드의 오픈을 앞두고 있는 상황. 무엇보다 현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조금 벗어나고 싶은 타이밍이다. ‘던전에 들어가는 게 차라리 덜 위험할 거야.’ 목구멍으로 다시금 피로회복 포션을 밀어 넣으며 비슷한 생각을 해버렸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는데.” “진심이에요?” “물론.” “그냥 한 번 던진 소리였는데, 이상하게 받아버렸네요. 그럼… 어떻게 파티는 따로 준비를 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광장에 파티 많은데, 뭐. 내가 직접 구해서 가지.” 균열 랜드가 얼마나 일반인들의 고혈을 빨아먹을 수 있는지는 서민의 시선으로 봐야 비로소 정확하게 느낄 수가 있다. # 433 회귀자 사용설명서 433화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저 세계 생활(2) 대충 몸을 점검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 것은 당연지사. 조금 더 늦게 광장으로 간다면 파티를 구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짐을 점검하는 나를 바라보는 이지혜의 표정은 조금은 황당해 보였다. 정말로 내가 이런 행동을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정말 가게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런담. 그냥 여기서 푹 쉬지 그래요?” “아니. 안 그래도 한번 둘러보려고 했다니까. 테스터들을 밀어 넣기도 전에 오픈하는데 급했던 만큼 불안한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정확한 문제점이 뭔지는 직접 파악해 봐야지.” “언제부터 그렇게 열정적이었어요?” “그만큼 중요한 일이야.” 갑작스럽게 원정을 떠나는 이유가 꼭 그것만은 아니지만 내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이건 정말 중요하거든.’ 물론 이지혜와 김미영 팀장이 잘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능력이 있는 것과 던전이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느냐는 전혀 다른 이야기. 백 번 양보해 그들이 박물관 관리자였다면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대륙에 있는 박물관 관리자는 나와 막스뿐이다. 그것도 녀석은 5급. 나는 4급. 오늘 오픈 될 박물관의 총책임자가 바로 나라는 이야기다. 이 정도로 규모가 큰 사업을 진행하는데 CEO가 코빼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거다. 대륙의 명운이 걸려 있는 만큼 허투루 진행하고 싶지는 않다는 게 솔직한 욕심쟁이의 심정이었다. 균형 있게 빨아 먹는지 봐야 해. 너무 심하게 빨아먹어서도 안 되고 너무 약하게 빨아먹어서도 안 된다. 계속해서 희망을 심어주면서 아슬아슬하게 손해를 누적시키는 게 중요하다. 플레이어의 성장 역시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장사이니 만큼 그들을 절박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균열 랜드의 존재 의의다. 이방인들을 필사적으로 만드는 것. 추가로, 엄청난 금전적 이득을 파란으로 가지고 오는 것. 말은 쉬워 보이겠지만 여러모로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항. 내가 직접 서민체험을 해보는 게 딱히 이상한 그림은 아니라는 거다. “오빠는 얼굴이 너무 팔렸는데… 그건 어떻게 하려고요? 마법으로 대충 버무리는 것도 무리일 것 같고….” “대충 변장해서 나가면 되지 않나. 의외로 흔한 얼굴인데.” “솔직히 말하면 흔한 얼굴은 아니죠. 특징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머리스타일이랑 평소 입고 다니는 장비만 조금 손보면 얼핏 달라지기는 할 것 같아요. 이기영 명예추기경이라는 게 딱 스탠다드한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 이미지만 벗어나면 괜찮을지도…?” “…….” “아니, 그래도 안 되겠네요. 일단 얼굴이 너무 눈에 튀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니까.” “그래도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죠. 아니면 가면이라도 쓰고 갈까요? 조금 수상하기는 하지만….” ‘이 사람이 어딜 큰일 날 소리를! 지혜야! 정신 나갔니?’ “그건 기각.” “하긴. 괜한 경계심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으니. 희귀 등급 들어갈 거는 아니죠? 영웅 등급?” “응.” “그럼 마법도 기각이네요. 전부다 눈치챌 테니까. 아! 잠깐만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네요. 여기서 기다려요. 금방 다녀올 테니까.”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마치 욕탕에서 뛰쳐나오며 유레카를 외치는 듯한 표정. 뭔가 뾰족한 수가 생각난 것이다. 나 역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잠시 후 이지혜가 가져온 해결책에는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거면 되겠죠?” “뭐야? 얘네들은 또 어디서 났어?” “혜진 씨가 유니콘 데리고 왔을 때 숨어온 애들이에요. 괜찮죠?” “괘,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이건….” “어차피 효과도 며칠 안 간다면서요? 딱 적당할 것 같으니까. 이걸로 해요.” “나쁘지는 않겠네.” * * * “철우 오빠?” “…….” “철우 오빠!” “아, 민지야.” “어때요? 쓸 만한 사람은 있어요?” “아니. 그다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린델에서 후위 구하기가 어렵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찾으니까 정말로 힘드네. 조금 괜찮다 싶으면 전부 일행이 있고…. 사실 우리 전위도 그렇게 탄탄한 건 아니라서 우리가 원하는 마법사들 눈에는 성에 차지 않을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무리해서라도 마법사들을 클랜에 들였어야 됐나 봐.” “그게 말이 쉬운가요. 괜히 들였다가 성장하지 못하면 그건 그거대로 낭패니까. 무늬만 마법사들이 많은 것도 문제고…. 파란 길드에 정하얀 같은 사람 어디 딱 안 나타나주나. 그럼 정말로 잘해줄 텐데….” “정하얀이야 워낙 특이한 케이스니까. 중견 길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법사라도 아쉬운 심정이야. 그만큼 마법사 풀이 적다는 거겠지.” “그러지 말고….” “응?” “이왕 이렇게 된 거 악마의 첨탑에라도 지원해 보는 게 어때요? 보급품도 많이 준다는 이야기도 있고 공격대에 들어간다면 지금보다는 파티 구성하기가 쉽지 않겠어요? 같은 공격대에 들어간 마법사들과 친해지면 클랜으로 들어오라 은근슬쩍 제안할 수도 있고… 마도 왕국이잖아요? 괜찮은 마법사들은….” “그건 안 돼.” “아….” “아직 위험해. 우리 수준으로 끼어들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글쎄요…. 듣기로는 옆집나무 클랜도 악마의 첨탑으로 향한다고 하던데….” “등급 판정으로 따지면 최소 영웅 등급 이상의 던전이야. 이제 막 영웅 등급으로 진입한 우리에게는 무리가 있어. 물론 공략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구태여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고 봐. 균열 박물관에서 경험을 쌓은 이후에도 늦지 않아.” 말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사실 마도 왕국 행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파티를 구성해야 하는 균열 박물관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많은 인원을 필요로 하는 악마의 첨탑은 아직 자리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연줄이 있기도 했고 보급품 지원도 결코 적지 않다는 걸 생각해 보면 보상으로 얻는 게 더 클 수도 있다. 물론 받은 보급품을 어느 정도 남겨왔을 때의 이야기지만 여러모로 고민해볼 가치가 있다는 거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아직 클랜의 스쿼드로 갈 수 있는 곳은 영웅 등급이 전부다. 그것도 중급 이상을 넘어가면 위험한 사고가 터질 확률이 높다. 지금껏 클랜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던 이유는 조심하고 또 조심했기 때문.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무리하게 이득을 취하려는 행동은 언제나 사고를 불러일으킨다. “오빠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이해해 줘서 고맙다.” “아뇨. 대건이 오빠도 오빠라면 분명히 반대할 거라고 하던 걸요. 그냥 아쉬운 마음에 제가 한번 찔러본 거지. 기대도 안 했어요.” “대건이도?” “네. 어려서부터 함께해 온 친구 아니랄까 봐. 둘이 정말로 마음이 잘 맞는다니까요. 어떨 때 보면 정말로 질투 날 것 같아.” “하하하.” “웃지 말고요.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고요. 클랜마스터랑 부클랜마스터가 사이가 너무 좋은 거 아니냐고 소외감 느낀다는 클랜원이 정말로 있다니까요?” “그렇게 느끼게 했다니 미안하네…. 클랜원들한테 사과라도 해야 되는 건가? 그나저나 대건이는 지금 어디에 있어?” “주점 쪽에서 파티 구하고 있어요. 아침부터 술 퍼마시고 있는 마법사가 원정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급하다는 거겠죠. 조금 있으면 출발해야 되는 시간인데…. 으으. 정말 사람 너무 없어.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그 악마 관계자들… 싸그리 잡아서 불구덩이로 집어넣고 싶다니까요? 하필이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사실 그렇게 나쁘게 볼 것도 아니야.” “네?” “애초에 영웅 등급의 던전이 계속해서 풀려 있다고 한들, 우리가 그 던전을 낙찰하거나 발견하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조금 있으면 튜토리얼 던전이 열릴 테고… 이번에는 전 대륙이 하나가 돼서 교육소를 운영할 거라고 하잖아? 아마 많은 대형 길드가 던전 경매에 대해 많이들 신경 쓰고 있었을 걸? 길드에 들어오게 될 초보자들을 키워줘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클랜이 가진 자금으로는… 영웅 등급의 던전을 낙찰 받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거지. 그렇다고 운에 기댈 수도 없고.” “하긴….” “풀이 조금 좁기는 하지만… 그래도 던전에 갈 수 있다는 게 어디야? 여신이 직접 관리하고 있는 던전이라면 분명히 이방인들에게도 친화적일 테고. 또 대형 길드들도 중소 클랜을 지원해 준다고 발표했으니까. 이건 어떻게 봐도 기회라고 봐도 무방해.” “그렇죠.” “초조해하지 말고 기다리면 분명히 올 거야. 우리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두 명쯤은 있을 테니까.” “세 시간 동안 구하다가 더 안 구해지면….” “일단은 출발하는 게 좋겠지? 박물관 앞에서도 낙오한 마법사가 분명히 있을 테니까.” “제발 있었으면 좋겠네요.” 단순한 희망사항. 던전에 앞에서 파티를 구하는 마법사라니, 어떻게 생각해도 넌센스에 가깝다. 하지만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는 노릇.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만큼 필사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괜스레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것은 당연지사. “저희 우정 클랜과 함께하실 소중한 마법사분을 모십니다. 전위는 탄탄하고 사제도 보유하고 있는 클랜입니다. 목적지는 균열 박물관 영웅등급 던전이며.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즐겁게 사냥하실 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능력치와 직업은 일부만 공유했으면 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찾아와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오시면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우정 클랜입니다!” “싸우지 말고 사냥하실 마법사분 모셔요! 저희 클랜마스터 오빠가 정말로 사람이 많이 좋아요! 꼭 좀 찾아와 주세요!”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함께 입을 벌리는 국민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하지만 광장을 꽉 채운 파티들이 모두 소리를 지르자 목소리가 금방 묻힌 것은 당연지사. 괜스레 들고 있던 팻말을 더 들어 봤지만 파티원을 구하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아보였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지팡이를 든 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인 것. ‘어?’ 전체적으로 미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얼굴. 찢어진 눈과 새하얀 피부, 피처럼 붉은 입술이 눈에 띈다. 온몸을 로브로 가리고 있었고 걸음걸이가 묘하게 어색해 보인다. 발이라도 다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엉거주춤한 자세였다. 자세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얼굴이다. ‘무슨 사람이…’ 저렇게 생겼지? 섹시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서큐버스가 이러할까. 쭉 찢어진 눈은 이상한 음욕을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 전체적으로 야하게 생겼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리라. 사람의 외모를 평가할 때 어울리는 말과는 거리가 멀지만 딱 그 말이 맞다. 지금껏 많은 사람을 만나왔지만 이런 생각이 든 외모는 처음이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었다는 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잠깐 동안 멍하니 그 사람을 바라봤을 때, 이질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 눈앞에 서서 치명적인 입술을 뗐다. “마… 법사기는 한데, 조금 다른 갈래의 마법사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파티에 가입이 가능할까요? 균열 박물관으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저도 모르게 하체에 힘이 들어갈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자기소개를 먼저 드려야겠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정 클랜 여러분. 소환 마법사 이기연이라고 합니다.” # 434 회귀자 사용설명서 434화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저 세계 생활(3) ‘불편하네….’ 나름대로 괜찮을 거라 생각해 이지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치마를 입은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양. 골격이 달라진 게 느껴졌기 때문에 걷는 게 어색하다. 쏟아지는 시선은 익숙했지만 이기영 때 받았던 시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빤히 이쪽을 훑어보는 이들의 눈빛도 신경 쓰인다. 심지어 대낮부터 술에 취한 이들은 대놓고 위아래로 훑는다. 닳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상관은 없지만 기분이 나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남자새끼들이란….’ 나를 포함해 어딜 가나 똑같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보이기 시작. 아주 아름답다고는 볼 수 없지만 나름대로 매력적이라면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는 외관이었다. ‘그래… 이정도면 만족스럽지.’ 적당히 호감을 불러올 정도는 된다는 거다. 파티 구인에 뺀찌를 먹지 않을 정도의 얼굴. 사실 파티를 구할 때 무슨 얼굴이 중요하겠느냐만은 생김새 역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기업이 면접자의 외모를 중요시하게 된 것과 같은 이치. 기본적으로 잘 알려진 모험가라면 이런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애초에 원정이라는 것 자체가 사람을 깐깐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생전 처음 보는 남과 며칠을 함께 뒹구는 것은 물론, 한 치 앞을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등 뒤를 맡겨야 한다. 이런 저런 문제가 생길 거라는 걸 미리 가정해 본다면 인상은 그만큼 중요하다. 딱 봐도 사기꾼처럼 생긴 녀석이나 딱 봐도 머더러처럼 생긴 녀석과 함께 원정을 떠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기연은 커트라인에 들어갈 정도는 된다는 거다. 괜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기니 광장 안에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이 시야에 비쳤다. ‘누구로 하는 게 좋을까….’ 적당히 간을 보는 것도 중요. 이런 종류의 고생을 해 본적은 없는 만큼 막연하게 숨이 턱하고 막힌다. ‘일자리 구하기 쉽지 않겠는데….’ 딱 그런 심정. 물론 그게 나에게 통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함께 사냥 가실 전위 분들 모십니다!” “근처에 있는 고블린 부락으로 원정을 떠날 궁수 분을 찾습니다! 길눈이 밝은 분이었으면 합니다. 오시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사람을 구하는 파티만 많은 것이 아니다. “희귀 등급에 랭크되어 있는 암살자 직군입니다. 불러주시면 아무 곳이나 갑니다. 경험 빵빵하고 딜도 잘 넣습니다. 다른 도적들과는 다릅니다. 제발 써먹어 주세요! 힐도 필요 없습니다! 닥치고 붕대나 감겠습니다!” “영웅 등급의 사냥꾼입니다! 네놈을 추격해 주마! 함께하실 클랜원 분들 구합니다! 제발요!” 파티는 구하는 개인의 숫자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개인의 숫자가 더 많다. 커다란 목소리로 끊임없이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은 대부분 도적 직군. ‘딱 보니까 쟤네들은 하층민들이네. 이건 원래 알고 있었던 이야기고.’ 광장 피라미드에 가장 아래에 위치한 이들이다.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것은 사제와 마법사 그리고 쓸 만한 탱커. 특히나 마법사 풀이 적은 게 인상적이었다. 파란 길드는 마법사 걱정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이 현상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이 세계가 게임이었다면 이런 현상이 생길 리 만무. 대충 버튼만 누르면 마법이 나가는 어딘가와는 다르게 이 세계의 마법은 엄연히 학문 취급을 받고 있다. 머리가 좋은 것은 물론 그 이상을 필사적으로 노력을 해야 얻을 수 있는 칭호가 바로 마법사라는 거다. 희귀 등급의 마법사도 귀한 것이 이 대륙의 현실. 영웅 등급에 이른 마법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대형 길드에 소속되어 있거나 고급 인력으로 취급되어 여러 현장을 돌아다닌다. 연구원으로 처박혀 있는 공무원 같은 이들도 있고 심지어는 밖으로 나가는 게 무서워 사냥 한 번 나가보지 않은 마법사도 결코 적지 않다. 물론 그런 이들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주변 상황이 이러니 실력 있는 마법사의 대우가 어떨지는 뻔할 뻔 자. 몸으로 떼우는 도적이나 암살자 같은 이들은 썩어 넘쳐나기 시작하고, 그 결과 고급 직종이라 분류되는 이들의 신분의 격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렸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야생에서 통용되는 이야기. 애초 좋은 마법사들을 보유하고 있는 대형 길드의 생태계와는 완전히 다르다. 아마 지금 내게 쏟아지는 눈빛들 중에서도 반 정도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으리라. 어찌됐건 이쪽은 마법사들이 들고 다니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으니까. “마법사님, 혹시 영웅 등급 이상이시면 악마의 첨….” “죄송합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필드에 나가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죄송합니다.” “희귀 등급 레이드 몬스터를….” “죄송합니다. 레이드 몬스터는 조금….” “시간이 되시면 조용한 곳에서 차라도 한 잔.” “죄송합니다.” “정말 아름다우….” “죄송합니다.” 끝에 가서 뭔가 이상한 게 섞여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아무튼 이런 대우를 받게 된다는 거다. 어딜 들어가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어디든지 들어갈 수 있다. 물론 내가 무늬만 마법사라는 걸 깨닫는다면 시선이 조금은 달라지겠지만 이 지팡이와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다. 아무 데나 골라서 가도 되는 위치에 있다는 걸 깨닫고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지만 내 생각과 딱 들어맞는 파티가 눈에 안 띄는 게 흠. ‘그래도 한 번 뿐인데….’ 기왕이면 딱 조건에 들어맞는 파티를 찾고 싶다. 이제 막 희귀 등급에서 영웅 등급으로 승급한 파티. ‘자금력도 조금은 있고 나름대로 내실이 탄탄한 애들이면 좋겠는데.’ 딱 균열 랜드에 입맛에 맞는 손님이다. 영웅 등급에서 이제 막 전설 등급으로 진입한 이들도 나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게 될 경우에는 나 역시 숨겨진 패를 까발릴 수밖에 없으니 아웃. 눈에 띄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희 우정 클랜과 함께하실 소중한 마법사분을 모십니다. 전위는 탄탄하고 사제도 보유하고 있는 클랜입니다. 목적지는 균열 박물관 영웅 등급 던전이며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즐겁게 사냥하실 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능력치와 직업은 일부만 공유했으면 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찾아와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오시면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우정 클랜입니다!” ‘우정 클랜?’ “싸우지 말고 사냥하실 마법사분 모셔요! 저희 클랜 마스터 오빠가 사람이 정말로 좋아요! 꼭 좀 찾아와 주세요!” ‘사람이 좋아?’ 당연하지만 들어본 적도 없는 듣보. 그야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질 뿐이지 이 생태계에서는 나름대로 한자리 가지고 있는 이들처럼 보였다. 능력치도 나쁘지 않아보였고. ‘이철우 그리고 국민지.’ 특이하게 사제가 길드의 클랜마스터인 모양. 옆에서 빼액 소리를 지르고 있는 여자는 도적 직군, 정확한 직업명은 꽤 길었지만 딱 평균이 되는 능력치라고 생각해 마음의 눈을 접어버렸다. 남자도 여자도 딱 내가 원하는 정도의 스펙을 가지고 있는 인물. 시장이 닫히기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적당히 골라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지사.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자 나를 빤히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마법사이기는 한데… 조금 다른 형식의 마법사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파티에 가입이 가능할까요? 균열 박물관으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아! 자기소개를 먼저 드려야겠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정 클랜 여러분. 소환 마법사 이기연이라고 합니다.” “…….” “소환 마법사 이기연입니다.” “…….” ‘뭐야, 이 새끼?’ “저기요? 제 말 안 들리시나요?” “아! 죄, 죄송합니다. 그, 그러니까….” “소환 마법사 이기연입니다.” “네! 네. 반갑습니다, 이기연 님.” ‘이거 허당 아니야?’ 허둥지둥하는 모습은 가관. 영웅 등급이면 초보자 티는 벗을 때도 되었는데 저런 모습을 보니 괜히 불안해진다. 혹시 잘못 발을 들인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는 능력치가 거짓말을 할 리 만무.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헛기침을 한 뒤에 나를 바라보는 이철우가 눈에 보였다. “죄송합니다. 잠깐….” “아뇨. 아뇨.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파티 합류가 가능할까요?” “그 전에… 소환 마법사가 어떤 직군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허당은 아니네.’ “아. 제가 너무 급했네요. 물론입니다.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가장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 “소환사와 마법사의 가운데 형태를 띠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우실 거예요. 일반 등급의 기본적인 마법은 사용가능하지만 그 이상의 마법은 조금 힘들어요. 무리하면 희귀 등급의 마법까지 가능하다고 보시면 되겠네요. 특기로 하는 마법은 소환 마법이기는 하지만 소환수를 장시간 함께 데리고 다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찰나지만 타격을 주는 건 가능하고요.” “음….” “조금 애매한가요?”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파티원들의 동의를 구해야 할 사안이라… 물론 저희 파티를 찾아주신 건 너무나도 감사합니다만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다 보니….” ‘하… 슈바…. 특수직업 차별 금지다, 이 새끼야.’ “영웅 등급의 직업이고 전직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어요. 스탯도 딱 영웅 등급에 맞추어져 있고요.” “그렇군요.” ‘이래서 정석 파티는 짜증 나는데.’ 성향과 기벽을 보니 왠지 모르게 틀에 박힌 성격 같다. 그다지 커다란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도 고민하고 있는 모양새는 가관. 물론 파티장으로서 녀석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짜증 나게 마련이다.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는 와중에도 점점 광장에 사람들이 줄어드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엿이나 먹으라고 말한 이후에 깔끔하게 뒤를 돌아보고는 싶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정석이 아닌 특수직군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제대로 깨달았기 때문. 아마 이 파티가 아니라 다른 파티를 가더라도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리라. ‘마법사도 아니고 소환사도 아니니까. 애매하게만 비쳐지겠지, 뭐.’ 내가 생각해도 애매한 능력이다. 애매한. “아, 안 될까요? 오늘은 꼭 나가봐야 될 것 같은데… 하으. 어쩌지.” “물론 가능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 하지만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앞이 아니라 뒤쪽이었다.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니 눈에 보인 것은 방패와 둔기를 메고 있는 전사. ‘김태건?’ 내구와 체력이 높은 전형적인 전위. 막 인사를 보내기 전에 전방에 있는 이철호가 김태건을 반겼다. 나를 뺀 이후에 자신들끼리 대화에 진입한 것이다. “태건아.”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잖아. 영웅 등급의 직업이고 스탯도 맞추셨다고 말하시는 데,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 이대로 여기에 있는 것보다 차라리 밖으로 나가 뭐라도 하는 게 나아. 자세한 이야기는 목적지로 향하면서 들어보면 되고. 정 아니다 싶으면 사례비라도 드리면 되니까.” “네. 아마 실망하시지는 않을 거예요. 틀림없이요.” “그렇다면….”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 그 옆에 있는 국민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그 이후에 내뱉은 대사 역시 가관. “저는 일단 반대예요.” ‘아, 쟤는 또 왜 저래?’ “오빠들 생각도 이해는 되지만 저는 조금…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린델에서 먹고 살기 힘들다 진짜. ‘같은 여자잖아. 시바. 협력 좀 하고 살자.’ # 435 회귀자 사용설명서 435화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저 세계 생활(4) “안 될… 까요?” “왜 그래? 민지야?” ‘그래. 너 왜 그래? 내가 뭘 잘못했냐. 나는 사냥 좀 나가면 안 되냐? 응? 나는 던전 좀 나가면 안 돼?’ “딱 봐도 경험이 그다지 많지는 않으신 것 같은데. 제 말 맞나요?” ‘무슨 개소리야. 나처럼 경험 낭낭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다른 사람들이랑은 좀 다른 경험이기는 하지만. “다리에 근육도 없으시고 팔도 마찬가지네요. 손도 너무 고우시고 손톱에도 상처 하나 없으신데…. 어떻게 봐도 원정을 많이 다녀보신 몸이 아닌 것 같아서요. 개인 보급품은 어디에 두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그 가방 샤넬리아 에르메스 맞죠? 명품 브랜드. 예쁘기만 한 쓰레기.” ‘무슨 개소리야. 우리 현성이가 선물해 준 거다, 이년아. 무한의 가방이라고. 쓰레기 아니야. 너는 평생을 벌어도 못 사는 가방이야.’ “상식적으로 원정을 떠나는데 저런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겉보기에만 좋지 실용성은 완전 꽝이라고요, 저 가방. 던전에 남자 꼬시러 가는 거 아니잖아요? 최소한의 준비는 해주셨어야죠. 아무리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개인 보급품까지 신세지는 건 조금 아니죠. 그렇지 않아요? 텐트나 캠프 같은 건 저희 쪽에서 어떻게 해드릴 수 있지만 기본은 해주시고 파티신청을 하시는 게 맞아요, 이기연 님. 철우 오빠랑 태건 오빠도 어디서 꿀리지 않는 사람인데…. 그리고 풀메라니…. 정말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딱 봐도 민폐라고요. 상식적으로 원정 가는데 화장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기나 해요? 거기서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메이크업 하시게요?” ‘얘, 얘 왜 이러니. 미쳤나 봐, 진짜. 너 왜 이래? 왜 이렇게 날이 섰어?’ 뭔가 맞는 소리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리 만무. “메, 메이크업 안 했는데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 “…….” “…….” “네?” “메이크업 하고 온 거 아니에요. 자세히 보시면 아실 텐데….” “그럼 그 입술이랑 피부가… 속눈썹은 마스카라….” “전혀 아니에요. 한번 보세요.” 무한의 가방은…. ‘밝히기 좀 그렇지.’ “가방은 죄송해요. 제가 연구실에만 틀어박힌 지 오래 돼서…. 맬 수 있는 게 이 정도밖에 없어요. 연구실 나오기 전에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은 전부 처분했거든요.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라서…. 마, 말 못할 사정도 조금 있고요.” “아무리 그래도….” “원정 경험이 사실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믿어주신다면 열심히 해볼게요. 적어도 민폐가 되는 일은 없게 하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어느 정돈데요?” 그래도 빛기영은 일말의 근육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이기연은 정말로 여리여리 그 자체. 이 몸 가지고 영웅 등급의 던전은 물론 전설 등급의 던전도 클리어 했다고 말하는 건 여러모로 무리수가 있다. 어차피 믿어주지도 않을 테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선에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게 맞으리라. “희귀 등급 던전 두세 번? 필드에는 그것보다 더 많이 나가봤어요.” “거짓말. 그런 몸이 아닌 것 같은데….” ‘이 계집애야, 무슨 청문회 하니?’ “안 믿어주시면 제가 할 말이 없지만… 정말이에요. 조금 오래되기는 했지만요.” 정말로 청문회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 정도까지 하면 보통 어느 정도는 져주기 마련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이쪽에 극딜을 퍼붓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 이런 식이라면 들어오지 말라는 말이나 진배없다. 원정 전부터 분위기를 완전히 말아 먹고 있는데 그 누가 이런 파티에서 원정을 진행하고 싶겠는가. 서로가 절박하지 않았다면 벌써 쫑난 것은 물론 서로의 머리카락을 뜯고 있었으리라. ‘그래 씨바. 내가 이해해 준다.’ 사실 내가 그녀였어도 나를 파티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린델의 개미들은 더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양. 목숨이 달린 문제라고 생각하니 그나마 고개가 끄덕여진다. 솔직히. ‘내 실수이기는 하네.’ 메이크업 부분에서는 쓸데없는 오해가 있기는 했지만 원정을 나간다는 사람이 백팩 하나 메지 않은 건 실수 중에 실수다. ‘너무 모르고 살았다. 너무 귀하게 컸어. 기연이 이 계집애야.’ 첫 원정 이후로는 가방을 메 본 적이 없다. 애초에 기본적인 도구들은 전부 샤넬리아 에르메스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 그 전까지는 박덕구가 가방을 들어주거나 길드 직원들이 물품들을 정리했다. 병아리 시절은 이제 기억도 안 난다는 거다. 게다가 내가 병아리였을 때와 쟤들의 병아리 시절이 같을 리 만무. 저들은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내 던져진 입장이었고 나 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고액 연봉을 받고 시작했었다. 내가 경력이 꽤 되는 베테랑이라고 한들, 저들의 생태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하… 이거 실수한 건가. 실수 한 거 맞네.’ 더 이상 뭐라 변명할 수 없는 상황. 갓기연의 처분은 저쪽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다른 파티에 가고 싶었지만 역시나 늦게 나왔는지 구직시장이 문을 닫고 있는 상황. 애절한 표정으로 국민지를 바라봤지만 아직도 그녀의 표정은 냉랭하다. ‘얘는 확고하네.’ 포기는 없다. 한쪽이 확고하다면 다음 사람을 공략할 뿐이다. 조용히 이철우를 응시한 것은 당연. 받아달라는 눈빛을 쏘아 보내자 곧바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얘는 처음부터 우호적이었지. 나이스요오오오. 우리 기연이 화이팅!’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 민지야. 죄송합니다, 이기연 님.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네?” “착한 아인데 가끔 이렇게 흥분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기본 보급품을 챙기지 않은 것은 저도 조금 의아하기는 하지만… 뭔가 사정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키야. 바로 이거죠.’ “그럼….” “함께 가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태건아, 어때?” “나는 처음부터 찬성이었는데, 뭐. 민지야, 그렇게 입술 삐죽 내밀지 마라. 네가 걱정하는 부분은 이해하고 있지만… 아쉬울 게 없는 건 저분이야. 마법사가 하나 있는 것만으로도 원정길이 얼마나 편해지는지 생각해 보면 감지덕지다.” “그, 그렇지만.” “일단 사과부터 해야지.” 두 남자는 무언의 눈빛으로 버릇없는 계집애를 바라보기 시작. 결국 백기를 든 것은 혼자 발광을 하던 계집애다. “죄송해요. 제가 무례했어요.” “아니요. 괜찮아요. 충분히 오해할 만하기도 했고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겠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기연 씨. 뭐 하냐, 철우야. 임시 파티 계약서 드리지 않고.” “계약서도 쓰는 건가요?” “형식적인 절차입니다.” ‘별게 다 있네.’ 조심스레 종이뭉치를 꺼낸 사제가 내민 계약서를 바라보자 몇 개의 조항이 눈에 들어온다. 복잡하지도 않고 아주 간결하다. 그야말로 형식적인 계약서. 탈주나 트롤짓에 대한 조항과 보상과 분배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마 법적인 효력은 크지 않을 것이다. 여신의 거울을 24시간 풀로 돌리지 않는 이상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단순히 경각심을 심어주려는 의미라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조금 잡음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간에 파티를 구하는 것은 성공. 이쯤 되니 궁금한 것은 저들의 인적사항과 디테일한 부분이다. “4명이서 들어가는 건 아니죠?” “네. 동료가 3명 더 있습니다.” 딱 적당하네. “아마 숙소에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클랜 하우스는 어디쯤 있나요? 서부 지역?” “부… 끄럽습니다만 아직 클랜 하우스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장비를 먼저 사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서….” “아….” “이거 부끄럽습니다.” “아니요. 정말 탁월한 선택이신데요? 조금 더 발전하시려고 하시는 거니까요. 처음부터 장비에 투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데, 잘 판단하셨네요. 어쩐지 그래서 이렇게 장비가 번쩍거리셨구나. 로브도 영웅 등급 아닌가요? 질이 정말 좋은 것 같은데….” “아니요. 희귀 등급입니다.” “인물이 받쳐주시니 그렇게 보였나 보네요. 후훗.” “그, 그, 그, 그나저나 기연 씨는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저는 얼마 안 됐어요. 이제 2년 됐나…. 이제 곧 3년이네요. 철호 씨랑 대건 씨는….” “저희는 이제 4년 됐습니다.”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네? 나쁘지 않아.’ 4년 차에 영웅 등급 입성이라면 성장이 무척 빠른 편이다. 평균적으로 이 정도 스탯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약 6, 7년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생각 없이 움직이는 클랜은 아닌 모양.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있고 바닥에서부터 올라오고 있는 이들이라 생각하고 있는 게 맞다. 사람 하나는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보통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이후에는 위에서 한 번쯤은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얼굴을 익혀 놓는 게 손해는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일단 함께 원정을 하기로 했으니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는 것은 기본. 접대 하는 게 몸에 밴 만큼 기본적인 아부에 함박웃음을 짓는 두 명을 볼 수 있었다. 국민지는 아직도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나마 마음을 가다듬은 것 같다. “기본적인 보급품은 전부 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네. 저희 클랜은 항상 넉넉하게 움직이는 편이라. 가방 하나 더 준비하는 것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고요. 시작부터 신세만 지는 것 같은데… 죄송해서 어쩌죠?” “당연합니다. 한 팀이니까요.” “멋있으셔라…. 듬직하세요. 마음이 든든하네요.” 역시 아부는 패배하는 일이 없다. 기분 좋은 미소지게 하는 미소를 흘리자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바젤 교황을 녹인 아부가 빛을 발하는 순간. 조금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자 시야에 비치는 것은 작은 숙소. 아직까지 클랜 하우스가 없다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이 숙소에 짐을 놓고 생활하는 것 같았다. 이철호는 잠깐 기다리라며 안쪽으로 들어간 이후 그 빈자리를 챙기는 세 명의 여자가 시야에 비쳤다. ‘궁수 하나, 근접검사 하나, 무투가 하나.’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미소를 흘리며 인사했지만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반응은 없다. 김태건이 소개를 시켜주니 그제야 인사를 해오는 느낌. “인사들 합시다. 이번에 함께 원정에 가게 될 기연 씨. 소환마법사라는 직업이시고 3년 차에 영웅 등급에 올랐다고 하네.” “특수 직업?” ‘왜 스캔하고 그래.’ “잘 부탁드려요, 기연 씨.”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3년 차에 영웅 등급이라니 대단하네요.” “운이 좋아서….” 모두 아까 전 국민지의 표정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조금이지만 나를 무시하고 있는 표정. 아니, 무시한다기보다는 경멸한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병아리들이 뭘 알겠어. 이따 언니가 보여줄게, 계집애들아. 준신화가 뭔지.’ 준신화 등급의 짬에서 우러나오는 아우라. 그걸 본 순간 저 계집애들이 태세전환하는 그림이 빤히 보인다. 하지만 그 다짐이 무너지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밑바닥부터 올라온 이들의 저력을 무시한 것이 실수 아닌 실수. ‘씨바…. 마차 타고 가면 되는 거 아니야? 왜 걸어 가는 건데. 마차가 있는데 왜 걸어 가냐고. 그거 낼 돈도 없어?’ “아으. 하아….” ‘무거워. 슈바. 개무겁다. 이거 못 들고 갈 것 같은데…. 내 어깨야…. 뒈질 것 같다. 덕구야 씨바 짐 좀 들어줘라. 어디 갔니, 덕구야. 보고 싶다, 박덕구!!’ “하아. 하아. 하으윽.” 저도 모르게 자꾸만 신음이 튀어 나오기 시작. 이 거지 같은 신음은 멈추려고 해도 도무지 멈춰지지가 않는다. ‘도대체 왜 안 쉬냐. 제발 좀 쉬자. 물 좀 먹고 가자, 이 새끼들아.’ “하읏으으으읏.” ‘내 허리. 내 어깨! 이기연 죽는다, 이 새끼들아!!’ “응기잇. 으…. 응기잇!!” “제가 조금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여성 클랜원들의 경멸어린 눈빛이 다시 한번 쏟아지기 시작했다. # 436 회귀자 사용설명서 436화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저 세계 생활(5) “아으. 하아.” “…….” “하아. 하아. 하으윽.” “…….” “하읏으으으읏.” “…….” ‘하….’ 이기연이라는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같은 여자가 들어도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기가 차서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예의 있게 행동하라는 철우 오빠의 엄포를 들은 이후라 쉽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흘러나오려는 욕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보고만 있으니까 진짜 가지가지 하네. 진짜 미친 거 아냐? 저거 일부러 그러는 거 맞지?’ 100%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던 게 사실. 혹시 하는 생각은 해봤지만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얼굴은 화장으로 떡칠하고 명품 가방을 든 채 근처에 서 있었던 것을 보면 무조건이다. 물론 본인은 화장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했어.’ 했어야 했다. ‘어딜 구라를 쳐?’ 남자들이 보기에는 모르겠지만 같은 여자의 눈은 못 속인다. 원정 준비보다 이성에게 잘 보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틀림없다. 아니, 차라리 그런 타입이면 양반. 단순히 여우짓을 한다거나 은근슬쩍 얄미운 짓을 한다면 그나마 참을 수 있었으리라. 저런 타입이 어떤 타입인지는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흔하지는 않지만 린델에서는 생각보다 저런 종류의 여자를 많이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 ‘싸구려 같은 년. 아니, 같은 게 아니지. 싸구려니까.’ 그 말 그대로. 다른 표현이 필요 있을 리가 없다. ‘3년 차에 영웅 등급에 진입해? 그게 말이 돼? 지가 무슨 파란 길드 정하얀 후계자야?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왜 오퍼를 받지 못하고 있을까아?’ 거짓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능력치를 속일 정도로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을 테니 아마 영웅 등급에 진입하긴 했을 것이 분명하다. 스탯과 직업만. 문제는 그녀가 영웅 등급을 진입한 방법에 있다. 전투의 흔적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다리와 손. 흉터 하나 없는 몸은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아주 잘 말해준다. 심지어 아주 기본적인 지식도 탑재되어 있지 않다. 임시 파티 계약서도 처음 본 듯한 얼굴이었고 마법사가 기본적으로 해줘야 할 일도 모르고 있다. 던전에 들어가기는 했을 것이다. ‘싸워본 적이 없어서 문제시겠죠.’ 이쯤 되면 답은 뻔하다. 아무런 재능도 연줄도 없는 여자가 이런 푸시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이거 스폰이네. 그것도 대형 길드 간부급한테.’ 정확히 말하면 스폰을 받았던 여자가 틀림없으리라.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다. 몸을 바치는 대가로 여러 가지 생활의 편의를 제공받는 것은 물론, 중․소규모 원정에 데리고 나가 억지로 경험치를 먹여 현재의 능력을 얻었을 거라는 건 저 여자의 행동거지만 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동안 미심쩍었던 행동들이 다 설명이 된다. ‘소환마법사는 개뿔.’ 1차 직업으로 마법사를 선택하기는 했지만 머리가 딸려 적응하지 못하고 소환수와의 친화력도 별로라 허공에 붕 뜬 케이스. 억지로 경험치를 먹으니 전직은 해야겠고 결국에는 시스템에서도 그 어떤 선택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몸이 편하니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것저것 건드려 본 것에 불과. 이름은 번지르르 하지만 직업 고유의 기술은 거의 없을 거라고, 지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딱 보면 척이지.’ 심지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도 눈에 그려진다. ‘버려진 게 분명할 테고요?’ 자신을 총애해 주던 대형 길드의 간부에게 버림을 받고 거리로 내 몰린 것. 스폰서와 저 여자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와중에도 아득바득 명품 가방은 챙겨 보겠다고 용쓰는 모습은 비굴하기까지 하다. 아마 몸만 덩그러니 거리로 내 몰려 당장 잘 곳과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처한 것이리라. 환락가에 들어가는 대신 선택한 것이 원정이라는 것도 우습다. 처음부터 저 여자는 원정 따위 관심도 없었다. 관심이 있는 건 괜찮은 남자를 물어 적당히 자리를 잡는 것. 철우 오빠나 태건이 오빠를 물어보려는 거다. 행동거지를 보면 더욱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조금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멍청이. “하아. 흐으응. 네? 네? 그래도 될까요? 너무 민폐 끼치는 것 같아서….” “이런 행군이 익숙해 보이시지는 않으셔서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짐은 이쪽으로 주셔도 됩니다. 굳이 거절하지 않으셔도 되요. 파티원끼리 돕는 건 당연하니까요.” “그렇지만… 정말로 이대로 넘겨드리기가 너무 죄송한데….” “괜찮습니다, 기연 씨.” “아니, 정말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철우 씨. 염치가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이러지 않으셔도 된다는데 입은 웃고 계시네요?’ “공략 중에 쓰러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게 더 낫습니다. 기연 씨는 체력에 신경 써주세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감사합니다, 철우 씨. 그 호의 감사하게 받아들일 게요.” “그리고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법사가 체력적으로 힘들어 한다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을 테니까요.” “네. 배려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결국에는 가방을 지는 것은 철우 오빠와 태건 오빠. 이제야 살았다는 듯이 기지개를 쫙 펴는 행동은 굉장히 익숙해 보인다. 그 와중에 샤넬리아 에르메스를 꽉 손에 드는 모습은 가관.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마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나뿐만은 아니리라. 같이 길드에서 생활하고 있는 3인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저 여자….” “본 적 있어요? 언니?” “아니. 최소한 우리 숙소 근처에서는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근데 뭐, 안 봐도 뻔하지 않아?” “네. 뻔하죠. 참… 사람은 역시나 안 변하나 보네요. 쪽팔리지도 않은가? 그렇게 얻은 힘이 자기 힘인 줄 알고 있는 것 같고. 기본도 모르는 주제에….” “내 말이. 왜 갑자기 여기까지 와서 저 지랄을 하는지 모르겠네. 기존 스폰한테 버려지기라도 했나 봐.” “적당한 남자 하나 물어서 사모님 행세하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요즘 그걸로 과거세탁 많이들 하잖아요. 어디서 소문은 들었는지 몰라도 우정 클랜에 이철우 김태건 정도면 요즘 주가도 올라가고 있고. 솔직히 오빠들 괜찮잖아요. 직업도 한 명은 전위에 한 명은 사제고. 대형 길드를 못 간 게 아니라 안 간 사람들. 미래가 유망하다고요. 저거 꽃뱀이 공사 치고 있는 거랑 비슷한 거예요. 완전히 들러붙으려고. 아까 언니랑 만나기 전에도 가관이었어요. 눈웃음 살살 치면서 멋있다, 듬직하다. 이딴 소리가 지껄이고. 속 보이게. 순진한 철우 오빠는 또 그냥 웃더라고요. 사람이 착해도 너무 착해서 탈이지. 어떤 사람이 저런 여자한테 홀라당 벗겨지는지 그동안은 이해가 안 됐었는데 철우 오빠 보니까 너무 이해되는 거 있죠?” “조금 억울해 보이는 목소리네. 이야기는 해봤니?” “네. 출발하기 전에 은근슬쩍 이야기 해봤는데…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이상한 의심은 하지 말라고 꾸중까지 들었어요.” “어머어머. 웬일이니.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이는데. 딱 봐도 엄청 밝히게 생기고 은근히 싼 티 나지 않아? 밤일 하는 애들 중에 저렇게 생긴 애들 널리고 널렸어. 신음 소리 일부러 내는 것 좀 봐. 속이 딱 보이잖아. 요즘에도 저런 게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천박해가지고….” “더 웃긴 건 뭔지 아세요?” “뭔데?” “이번 원정이 잘 풀리면 저 여자 클랜원으로 받는 그림도 생각해 보고 있나 봐요. 말도 안 되죠. 진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로 저런 사람이랑 얼굴 맞대고 살 거 생각하면 벌써부터 심각해져요.” “어머어머. 정말이니? 그건 아니다. 얘.” “제 말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것 같다니까요.” “네가 가서 이야기해 보는 건 어때?” “뭐라고요?” “그냥 협박 미스무리하게 갈 수도 있고. 선택은 네 몫이지만, 경고 한번 해주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정말로 저 여자가 스폰 받아서 큰 거라면 무서워서 원정 진행은 할 수 있겠니? 벌벌 떨기 급급할 텐데….” “그것도 그렇네요. 그, 근데 그러다 중간에 원정 진행 취소되면 어떻게 해요? 철우 오빠, 이번 원정 엄청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그러네. 근데 나는 저 꼴 계속 못 볼 것 같아. 저런 애들 때문에 다른 여자들도 싸잡아 욕먹는 거야. 원정을 할 거면 모험가처럼 행동해야지, 어? 무겁다고 징징거리고 툭하면 티내고. 애초에 이 대륙에서는 여자라고 보호의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차희라 님 같은 사람들 봐. 본받지는 못할망정 꼭 저렇게 자기가 여자인 걸 티내고 이용하는 애들이 있다니까? 그래서 문제야. 문제.” “그러니까요. 짜증 나, 정말.” 조용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잠깐 쉬었다 가겠습니다.” “벌써?” “네. 아주 조금만요. 제가 조금 힘들어서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하다, 태건아.” “아니야. 마침 나도 조금 쉬고 싶은 참이었는데. 캠프를 차리는 것 까지는 오바인 것 같고, 적당히 자리 잡고 식사라도 합시다. 요깃거리 있으면 그거라도 좀….” ‘정말… 착해서 탈이라니까.’ 잠깐 동안 휴식시간을 가지는 이유가 철우 오빠 때문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 이기연인가 뭔가 하는 여자를 배려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굳이 자신이 힘들다는 걸 어필하면서 그녀를 감싸준 것은 보면 정말로 무골호인인 모양. 조용히 철우 오빠를 바라보자 물을 떠 그 여자에게 건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 바보라니까.’ 눈웃음을 살살 치며 물을 받아드는 이기연의 모습도 눈에 잘 들어온다. 심지어 물을 받아들 때 손을 스친 것 같아 보인다. 무척 붉어진 철우 오빠의 얼굴을 보니 거의 확실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 그 다음에 보인 모습은 가관. “아, 이런….” “괜찮으십니까?” 저 물컵은 하필이면 왜 저 불여시의 가슴 쪽에 엎질러졌을까? “자꾸 칠칠치 못한 모습만 보이는 것 같네요. 사실 어젯밤에 조금 피곤한 일이 있어서…. 평소에는 그렇지 않은데…. 정말 죄송해요.” 밤에는 항상 힘드시겠죠. “그보다 손수건 같은 게 있으면 잠깐 빌려 주시겠어요?” “네… 아, 알겠습니다.” “이건 제가 시간 날 때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땀도 닦아도 괜찮나요?” “네, 네, 괜찮습니다.” ‘하.’ 괜스레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은 심정. “그럼 잠깐만….” “네.” “저도 잠깐 다녀올게요, 언니.” “응. 적당히 해.” 천천히 뒤를 밟는 것은 당연지사. 방금 대화처럼 협박이나 다른 걸 하려고 하는 게 아니었지만 한마디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파티원들과을 지나 이기년이 지나왔던 곳을 성큼성큼 걸어가자 때 마침 이쪽을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민지 씨,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세요?” “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네. 대답해 드릴 수 있으면….” “혹시 누구였어요?” “네?” “검은 백조? 파란? 붉은 용병? 아니면 다른 쪽인가? 무조건 대형 길드라고 생각했는데… 중견 이상은 되죠? 아직도 그런 거 해요? 대형 길드나 되가지고? 진짜 쓰레기 같은 남자들 많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다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시치미 떼지 않으셔도 되요.” “그러니까 지금 무슨 말씀을….” “누구한테 스폰 받았던 거예요?”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 437 회귀자 사용설명서 437화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저 세계 생활(6) “검은 백조? 파란? 붉은 용병? 아니면 다른 쪽인가? 무조건 대형 길드라고 생각했는데. 중견 이상은 되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다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시치미 떼지 않으셔도 돼요.” “그러니까 지금 무슨 말씀을….” “누구한테 스폰 받았던 거예요?” ‘얘는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순간적으로 붉은 용병의 단장 차희라의 이름이 생각난 것은 당연지사. 이기영이 차희라에게 스폰을 받아 성장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이기연은 아니다. ‘뭐 이상할 게 있었나?’ 어째서 갑자기 스폰 이야기가 나오는지 궁금한 것이 당연하리라. 뭔가 켕길 만한 행동을 한 기억은 없다. 적어도 이번 원정을 진행하는 동안은 내가 이기영이라는 사실을 걸릴까 굉장히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대형 길드 이야기는 꺼낸 적도 없다. 파란이나 붉은 용병, 검은 백조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가 없게끔 행동했다는 거다. ‘혹시 가방 떠넘긴 것 때문에 그래? 나 지금 텃세 때문에 견제당하고 있는 거야? 아니, 그럼 슈바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어떡해?’ 어지간하면 참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다. 고급화 되어 있는 빛기연의 몸뚱아리에 이런 육체노동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이를테면 이 모든 게 단순한 텃세라는 추측. 이 추측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니 린델의 고인물들에게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외지인이 싫으면 지인팟으로 가든가…. 왜 받아놓고 지랄이야, 지랄은…. 던전 문화 한번 그지 같이 만들어놨네. 니네가 이끼야 뭐야?’ 간혹 이런 문제가 터지는 경우가 있다고 들은 적 있다. 인원이 부족해 보여 파티원으로 받곤 이후에는 나 몰라라. 지인끼리 단합해 한 명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분배 자체도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설계하는 방식의 비매너 플레이. 교국법상으로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엄연히 대중에게 배척당하는 행위다. 이 여자도 그런 부류가 아닐까 생각하니 조금은 머리가 아파올 수밖에 없었다. ‘아냐. 그렇다고 하기에는 남자애들이 너무 협조적인데….’ 너무 세상 물정 모르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때.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대형 길드의 후원을 받은 마법사가 장난삼아 원정을 나왔다는 그림으로 비춰질 만도 하다. 계약서가 처음 튀어 나올 때도 의아한 표정을 보였었고, 무엇보다 3년 차에 영웅 등급이라는 성장치는 후원받는 마법사가 아니면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재능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가 대형 길드나 중견 클랜으로 오퍼를 받지 못했다면 정답은 뻔할 뻔 자. ‘후원이지, 뭐.’ 솔직히 질문 자체가 달갑지는 않았다. 파티에 합류해야 하는 건 대형 길드의 후원을 받는 이기연이 아니라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이기연 이었으니까. 어떻게 변명을 하는 게 좋을까? 잠깐 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을 때 다시 한번 앞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모르는 척 하는 것 좀 봐. 뭘 그렇게 순진한 척을 굴어요? 이미 뻔한데. 얼굴에 다 쓰여 있어요, 기연 씨.” ‘일단은 잡아떼자.’ “정말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갑자기 후원이라뇨?” “후원? 그래. 그것도 후원이기는 하지. 네 몸 팔아서 받는 후원. 그게 스폰이지. 안 그래요?”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아니, 도대체 무슨 말을….” “나도 다 알 거 아는 년이에요. 린델 바닥에서 구르고 굴렀다고요. 들어온 지 4년 차면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다 안다고요. 어떻게 3년 차에 영웅 등급을 찍을 수 있었는지도. 아무것도 없다는 당신이 왜 그런 명품들을 걸치고 있는지도. 기본적인 원정에 대한 상식이 없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기연 씨 행동거지가 너무 뻔하게 보이잖아요? 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원정 와서도 그딴 식으로 하고 싶어요?” ‘왜 이래, 너? 내가 뭘 어쨌다고. 내가 뭘 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것 같은데. 이제부터라도 새 삶 찾으려고 발악하는 거라면 더 이상 그딴 식으로 살지 마세요. 눈웃음 치고 엉덩이 살랑살랑 흔들면서 아부 떨고 살면 즐거워요? 자기도 부끄러울 거 아니야.” “…….” “괜히 순진한 오빠들 꼬드기지 말라고요. 어디서 우정 클랜이 유망하다는 소리를 주워듣기는 들었나 봐요? 노린 거… 맞죠? 알고 접근한 거면 진짜 소름이다, 소름.” ‘무슨 개소리냐, 이년아. 우정 클랜이고 사랑 클랜이고 나발이고 듣지도 못했는데. 니 생각이 더 소름이다.’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저희 같은 진짜 모험가들도 욕을 먹는 거예요. 철우 오빠예요? 태건이 오빠예요? 취집해서 신분세탁 할 생각은 집어 치우라고요. 어차피 철우 오빠 같은 사람은 당신 그 더러운 몸뚱이에는 관심도 없겠지만… 제가 보는 게 불편해서 그래요. 원정 중에 이러는 건 아니죠. 저기요, 기연 씨. 이건 경고예요.” “경고?” “네. 경고요. 일이 이렇게 됐으니 원정이 끝날 때까지는 함께 움직일 테지만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라는 경고요. 신분세탁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실력으로 보여줘요. 같잖게 가슴 내밀고 신음 흘리면서 분위기 흐리지 말고. 아니면 제가 아는 인맥 총 동원해서 이 구역에서 완전히 묻어버릴 테니까. 알아듣겠어요?” ‘뭐, 인맥을 총동원해?’ “별로 예쁘지도 않으면서… 어중간하게 생긴 것들이 더하다니까.” “…….” ‘그래도 너보단 내가 더 예뻐. 호박같이 생긴 게….’ “쓸데없는 데 집중하지 말고 공략에나 집중하자고요. 화장도 좀 지우고.” “화장 안 했….” “아, 진짜!” “…….” “…….” 아, 진짜! 얘를 어떻게 해야 되지? 무언가 켕기는 게 있다면 조금 덜 억울했을 것이다. 눈웃음은 물론 엉덩이도 흔든 적이 없다. 가슴을 내밀었다는 건 또 무슨 개소리인지 알 수 없을 지경. 단언컨대 절대로 그런 여자로 비칠 만한 행동을 한 기억이 없다. 차라리 대형 길드의 정식 후원을 받고 있다는 게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해도 될 만한 수준이다. 옷도 제법 수수하게 입었고, 샤넬리아 에르메스를 들고 있기는 하지만 장비 수준 역시 딱 평균. ‘조신 그 자체였잖아. 조신 그 자체!’ 현모양처의 정석이요, 조신의 여왕이었다. 그러나 꽤 노력했는데도 대중의 평가는 싸늘. 당황스럽지 않은 것이 이상하리라. 밀려드는 억울함에 뭐라 말을 하기 전에 국민지는 한마디 더 내뱉고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 “창녀같이 살지 말아요.” 나름 명대사를 친 줄 아는지 의기양양하게 발걸음을 옮기고는 있지만…. ‘내 복장보다는 니 복장이 더 심하지 않아?’ 그 말이 딱 맞다. 적어도 나는 로브로 전신을 가린 편. 눈앞에 있는 여자는 도적이랍시고 몸에 딱 달라붙는 타이즈를 입고 있다. 도대체 가슴 부분은 왜 파였는지 알 수 없지만 적나라하게 가슴골이 보일 정도. 아직도 노출도가 곧 방어력이라고 생각하는 모지리가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쉽게 말하면 라인이 전부 다 드러날 정도라는 거다. 누가 누구 보고 창녀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조신녀는 이기연. 몸을 함부로 굴리는 쪽은 국민지다. 괜스레 거울을 바라보자 다시 한번 전체적인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어떻게 봐도 조신한 그 얼굴. 이건. ‘질투? 정말로 텃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잠깐 동안 정의의 철퇴를 내릴지 고민해 본 것은 당연지사. 상황정리는 빠를 것이다. 이기영이라는 사실을 밝힌 이후 곧바로 뚝배기를 사정없이 연타. 우정 클랜 같은 소규모 클랜은 말 한마디로 대륙 내에서 완전히 지워 버릴 수도 있다. 그뿐인가. 말실수의 대가로는 조금 심하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악마의 졸개들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문제는 현 상황에 나 스스로가 마법을 풀 수 없다는 것. 물론 믿고 안 믿고는 저들의 자유지만 괜히 다른 구설수에 휘말릴 수도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니 지금 나서는 게 오바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끌리는 게 없네.’ 사실 조금 귀찮기도 하다. 파티를 구해 원정을 떠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여기서 한 번 뒤집으면 기분은 조금 나아지겠지만 다시 한번 파티를 구해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 내가 이 나라의 명예추기경이라 외쳐봤자 미친년 취급받지 않으면 다행. ‘별일은 없겠지, 뭐.’ 빛기영이었다면 참지 않았을 모욕적인 언사. 어떻게든 저 깨어 있는 시민의 뒤통수 때리고 싶었지만 내게 머물고 있는 현자의 기운은 내가 흥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번 일 끝날 때까지만 조용히 있자, 기연아.’ 확인할 것만 한 이후에 응징은 천천히 주면 된다. 일단은 저 파티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만 얻은 이후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이성의 끈을 부여잡으며 발걸음을 옮기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파티원들이 시야에 비친다. 바보 같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남성들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고소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여성 4명. 아마 국민지가 나머지 떨거지들에게 방금 무용담을 전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한 방 먹였다고 신났네.’ 불 보듯 뻔하다. ‘그래 많이 웃어둬라. 많이 웃어둬. 이젠 귀엽다, 이년들아.’ 얌전하고 순수한 것은 물론 조선시대로 돌아가도 조신하다는 소리를 들을 이기연을… 어째서 그런 여자로 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여성군단들에게는 아까 일어난 사건 아닌 사건이 통쾌한 일처럼 비춰질 터. 그녀들의 표정이 조금 달라진 것은 이철우와 이태건이 내게 접근한 이후였다.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아. 제가 기다리게 했나 봐요. 죄송해요, 철우 씨.”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도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난 참이라.”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당연한 일입니다.” “마음 편하게 함께 다녀오시면 됩니다, 기연 씨. 안 그래도 지인 팟에 끌려오시니 분위기 자체가 불편하셨을 텐데…. 저희 쪽에서도 최대한 배려해 드리는 게 맞죠. 그렇지 않냐? 철우야?” “그래. 네 말이 맞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부담 갖지 마시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걷기 힘드시면 업혀서 가셔도 되고요. 하하. 농담입니다.” “후훗. 클랜 분위기 좋네요.” “만약 소속되어 있는 곳이 없으시다면 가입이라도… 이것도 농담입니다.” “태건 씨도 참….” 내가 생각해도 형성되어 있는 분위기는 훈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두 남정네들과 대화를 하는 동안 점점 더 썩어가고 있는 갤러리의 얼굴을 보니 어째서 갑자기 나를 찾아와 극딜을 넣은 뒤 사라졌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하….’ 너무 뻔해서 오히려 눈치채기가 힘들다. ‘키야. 너네 진짜로 질투하는구나?’ 클랜의 중심인 두 남정네들이 내 발이라고 핥을 기세로 달라붙어 오는 걸 부러워하고 있음이 분명. 이 조신한 매력은 따로 작업을 치지 않아도 나 스스로를 여왕벌로 만든다. ‘여왕벌 그 자체!!’ 저 두 놈을 나에게 뺏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다. 철우 씨를 어지간히 신경 쓰고 있었는지, 국민지의 얼굴은 특히나 가관. 평소의 정하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다른 여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통쾌함이 머물었던 아까의 얼굴은 이미 없다. 푸르죽죽한 얼굴은 썩고 있다 가정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 어떻게 할까 고민한 것은 당연. 하지만 여기에서는 일보 후퇴. 살짝 한 발 떨어지자 안심하는 듯한 표정들이 눈에 띈다. ‘나도 고추들한테는 관심 없다, 이년들아. 우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응?’ 원활한 진행을 위해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 하지만 이 미친 남정네들은 뭘 잘못 처먹었는지 하루 종일 나에게 접근하며 스몰톡을 날려대고 있었다. 현 시점부터. 균열 랜드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뭐야. 시바. 이 새끼들 왜 이래? 왜 이렇게 앵겨? 왜 이렇게 앵기는 건데?’ 발정이라도 한 모양새였다. # 438 회귀자 사용설명서 438화 균열 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1) ‘하, 이 새끼들 이거 성향이랑 기벽도 완전 메이저에 정상인데.’ 애초에 가장 평범하고 노멀한 놈들을 골랐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기벽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여성진들 역시 마찬가지다. 김현성이나 과거의 엘레나처럼 완전무결한 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일그러진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모양. ‘이 새끼들아, 좀 떨어져라. 가까이 오지 마. 말도 작작 걸고.’ 귀찮을 정도로 말을 걸어오고 있는 것은 물론 호감을 얻기 위해 똥꼬쇼를 펼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 역시 남자기 때문에 잘 알 수 있다. 간이고 쓸개고 다 떼어주려고 행동하는 것은 물론 발가락 사이에 낀 때라도 핥을 기세. 내 타입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지만 이기연이라는 인간이 생각보다 매력적인 인간이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우정 클랜의 여성멤버 4인방은 더욱더 나를 노려보는 중. 나도 이 새끼들을 밀어내고 싶지만 도저히 밀어내지지가 않는다. 단순히 파티원이 받아야 할 친절 이상의 친절을 받고 있다. 배짱은 없는지 쓸데없는 짓을 해오지는 않았지만 움직이기 귀찮아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래도 일단 도착하긴 했네.’ 남정네들과 발악과 여편네들의 경멸어린 눈빛을 견디느라 힘들었지만 결국엔 마차 없이 이곳으로 오는 것에 성공했다. ‘이따 포션으로 마사지라도 해야겠다. 시바…. 다리 아파 뒈지겠네.’ 대단한 것을 이룩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과의 도전이라고 봐도 무방한 거리를 행군했다. 튜토리얼 던전을 제외하면 이 정도로 걸어본 기억이 없다. 당시에는 필사적으로 움직이느라 몰랐지만 등 따시고 배부른 지금, 이만한 거리를 그냥 이동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하지만 이렇게 막상 도착하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잘해놨는데?’ 그 말 그대로. 시간이 없어 대충 휘갈겼다는 이지혜의 말과는 다르게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질이 좋아 보인다. 도로도 확실하게 깔려 있고 공사 중인 곳도 많이 보이긴 하지만 제대로 된 상가의 형태를 하고 있는 곳도 보인다. 공사되고 있는 규모는 거의 대도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그야 전 대륙에서 인간들이 몰린다고 생각하면 이 정도도 부족하긴 하다.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확실히 더 괜찮아지겠네.’ 균열 랜드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도착했네요.” “생각보다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하.”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 내로 입장은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마 충분히 가능할 거예요. 처음부터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고 들었던 터라…. 일단 신고부터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조금 늦어도 내일 안에는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조금 늦었네.’ 파티를 구하는 것도 늦었고 걸어오는 것도 느렸다. 하지만 그리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어차피 파티의 입장에서는 행군으로 지친 몸을 회복해야 했고 나는 이곳을 조금 더 둘려봐야 했으니까.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잘 알아놔야지. ‘오히려 좋고요.’ “일단 숙소부터 구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 상태로 계속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까요.” “네.” 클랜마스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지사. 천천히 걷고 있는 와중에 여러 종류의 모험가들이 보인다. 심지어 한참 전부터 냄새를 맡은 놈들도 있었는지 제법 고위 모험가들도 눈에 띈다. 인종도 다양. 백인이나 흑인들도 보이는 것을 보니 몇몇은 그리폰이라도 타고 날아온 모양인 것 같았다. 정신없이 길을 걷고 있는 와중에 파티의 움직임이 멈춘 곳은 커다란 주점. 숙박업도 겸하고 있는 곳이다. 뭔가에 홀린 듯이 안쪽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사방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균열 여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모험가님들! 혹시! 저희 여관은 처음이십니까?” ‘서비스 좋네.’ “네. 방금 막 도착했습니다만 혹시 남는 방이 있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모험가 여러분! 현재 각 호실 별로 딱 20개로 남는 방이 있고요! 저희 여관에서 서비스하는 룸은 네 종류로서 일반 등급, 희귀 등급, 영웅 등급, 전설 등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카탈로그를 보시면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으니 참조해 주시고요. 일반 등급은 하루에 1골드, 희귀 등급은 5골드, 영웅 등급은 20골드, 전설 등급은 50골드입니다. 1인 기준이고 서비스 비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금액입니다.” ‘어우야….’ 하루에 10만 원, 50만 원, 200만 원, 500만 원. 심지어 서비스 비용도 포함되어 있지 않단다. ‘지혜야, 씨바 니가 사람이냐. 가격이 무슨 씨바…. 실화야? 빼먹어도 적당히 빼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절로 그려진다. 나에게는 어린애 장난 같은 금액이지만 이제 막 성장하는 모험가들에게는 분명히 부담되는 가격. 예상대로 우정 클랜 여러분의 표정은 순식간에 썩어 들어가는 중이다. 돈을 벌러 왔다가 돈을 쓰고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클랜마스터는 대놓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부클랜마스터는 카탈로그를 넘긴다. “클랜마스터, 너무 비싼 거 아닐까요?” “하지만 따로 방법이 없으니….” 나 역시 슬그머니 카탈로그를 펼친 것은 당연지사. 전설 등급에 랭크되어있는 룸을 보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키야. 내 방보다 더 좋은 거 같은데?’ 으리으리한 게 아주 대궐이나 다름이 없다. 서비스 품목으로 나오는 것도 만만치 않다. 피로 회복 주문을 외울 수 있는 사제가 24시간 대기 중이란다. 메이드 바이 이기영 포션도 기본으로 지급되는 것은 물론, 나오는 식사도 고급 레스토랑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다. 장기간 투숙하고 있는 고객들을 위해 여러 가지 편의가 제공되는 것은 물론, 전설 등급 이상의 회원들만 따로 사용할 수 있는 연무장도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평생 살아도 지장 없을 정도. ‘여기서 살고 싶다….’ 영웅 등급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예전에 내 방을 보는 느낌. 전체적으로 고급스럽다는 인상도 있고, 전설 등급의 방보다는 서비스의 질이 낮아졌지만 충분히 감안할 수 있는 수준. 물론 희귀 등급부터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마치 원룸을 보는 느낌. 그나마 있을 건 전부 있지만 솔직히 저런 곳에서 자면 편히 잘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마지막 일반 등급은 내 기준…. ‘돼지우리나 다름없잖아.’ “일반 등급으로 잡아야겠죠?” “네. 여기… 일반 등급으로….”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말도 안 돼. 이, 이런 데서 어떻게 자…. 하으.”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순식간. 괜스레 눈초리가 따갑다. 여성진들이 나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내는 것이 느껴진다. 실수했다는 걸 깨닫기는 했지만 이 발언을 한 것에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 ‘그만 좀 봐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니까. 그리고 솔직히 니네도 여기서 자기 싫잖아. 시바…. 화장실도 공용이래. 얼마나 더러울지 상상이 돼?’ 솔직한 것은 죄가 아니다. 내 표정이 그렇게 별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덩치 큰 놈 쪽이었다. “하루 정도는 조금 무리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철우야, 예산은 충분하잖아. 우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장비 맞추느라 남은 돈이 많지는 않아. 클랜 하우스를 사려고 모은 돈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정말 건드리면 안 되는 돈이니 아무래도….” “하루 정도는 편하게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일이면 던전에 들어가게 될 텐데 그때까지는 푹 쉬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봐도 일반 등급의 방은 오히려 컨디션을 망치게 할 것 같은데. 원정 전에 항상 100%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게 바로 너 아니야? 우리 좀 쓸 때는 쓰자. 막말로 너랑 나랑은 상관없겠지만 우리 여성 클랜원들은….” “저는 괜찮아요.” “저도요.” “노숙도 많이 했는데요, 뭐.” ‘난 안 괜찮아. 이년들아. 착한 척하지 마.’ “…….” 저도 모르게 표정이 침울해진다. “기연 씨도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거 아닙니까?”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다리만 빼면….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푹 자면 나을 것 같아요.” “봐라, 철우야. 어디 여기에서 발이나 뻗고 잘 수 있겠어? 최소한 희귀 등급에서는 묵어야 그나마 쉰 느낌이 날 것 같은데….” ‘잘한다, 덩치.’ “어차피 던전 공략을 완료하면 우리 나름대로 성과가 있을 테니까. 다시 채워놓는다는 생각으로 눈 딱 감고 한 번만 쓰자. 계속 여기서 이렇게 실랑이 하는 것도 부끄럽고. 안 되겠냐?” “실패할 가능성은….” “내가 노력할게. 부탁한다, 철우야.”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그래. 바로 그거야.’ 희귀 등급의 방으로 결정. 성에 차지는 않지만 기분 좋은 미소가 그려지기는 한다. “희귀 등급의 방으로 하겠습니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모험가님. 현재 던전 공략을 위해 희귀 등급의 방을 찾아주신 여러분께는 오픈 프로모션으로 파란 길드에서 제조한 희귀 등급의 체력포션을 드리고 있거든요.” “그,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개쓰레기 하위 라인이네. 줘도 안 먹는 거.’ 하지만 우정 클랜 사람들의 얼굴이 그나마 밝아지는 게 보였다. 하룻밤에 50만 원이나 받는 주제에 쓰레기 저급 포션으로 생색내기. 전형적인 팔이피플의 상술이었다. 그나마 기분 좋으라고 던져준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지 접수원은 다시한 번 친절한 표정으로 모험가들의 등쳐먹을 준비를 하기 시작. 하나하나가 성과제일 테니 지금 부터가 중요할 것이다. “박물관을 공략해 주실 모험가분들이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수속은….” “방금 막 도착해서 아직 신청은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만약에 신청서가 필요하다면 지금 바로 마치고 들어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모험가님들! 그럴 필요는 없으십니다. 저희 균열 여관에서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니까요. 던전의 등급은 어떤 등급으로 하시겠습니까?” ‘모험가 친화적이야. 이건 마음에 드네.’ “영웅 등급입니다.” “영웅 등급의 던전, 총 500골드 되겠습니다. 하지만 오픈 프로모션으로 300골드에 이용 가능하시고요!” “네.” “총 여섯 분 등록해 드렸습니다. 출발은 내일 오후에나 가능할 것 같고요. 체크아웃하신 다음에 곧바로 저희 안내원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혹시 원정 보험이 필요하시다면….” “원정 보험이 뭡니까?” “혹시나 원정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를 대비한 보험입니다. 소중한 모험가 여러분의 목숨은 단 하나뿐이니까요. 저희 균열 랜드에 소속되어 있는 실력자들이 24시간 특수한 상황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고위 사제 역시 포함되어 있는 보험이니 생존율이 올라가겠죠? 가끔은 고수분들이 사냥을 도와드릴 때도 있다고 하네요. 가격은 숙소와 동일합니다. 일반, 희귀, 영웅, 전설로 구별되어 있고요.” “…….” “…….” “자금이 부족한 분들을 위해….” “…….” “대출 서비스도 진행해 드리고 있습니다.” ‘와…. 이지혜 진짜 너 너무 쓰레기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쓰레기다! 그런데! 사랑한다, 지혜야!’ 마지막 대사에는 나조차도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대출 서비스입니다.” 방금까지 귀여웠던 종업원의 목소리가 악마의 목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 439 회귀자 사용설명서 439화 균열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2) 대출? 대추울? 눈을 빛내고 있는 여관 종업원의 모습은 일순간 이지혜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니가 사람이냐 지혜야?? 넌 진짜 인간이 아니다.’ 나 역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기는 했지만 대출 시스템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균열랜드의 이익을 극대화시킬 작은 거인의 비장의 무기. 하지만 그만큼 효율적이기도 했다. ‘진짜 악랄하다. 이지혜 진짜 괜히 가면쓰레기가 아니구만, 이거.’ 나 역시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느낄 때가 많았다. 물론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 갑작스레 밀려들어오는 자괴감에 고민에 빠진 적도 있다. 지금 와서 이지혜가 하는 걸 바라보니 그간의 고민이 전부 해소되는 느낌. 이기영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한 들 가면 여자 앞에서는 원자력 발전소 앞의 반딧불이요, 밀려드는 쓰나미 앞의 어린이용 풀장. 도를 넘은 악랄함에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균열 랜드에 들린 모험가들을 모두 빚쟁이로 만들려는 심산.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뭐가 됐든 이곳에 와서 돈을 쓰는 모험가들은 부푼 꿈을 안고 던전에 진입할 것이 분명. 예상하지 못한 지출은 쌓이게 마련이고 결국 생각지도 못한 커다란 돈을 소비하게 된다. 던전에 들어간 이후 공략에 성공하면 그동안 날렸던 것들을 복구할 수 있겠지만 단 한 번이라도 삐끗하게 된다면 그 시점에서 이미 통장 잔고는 마이너스. 이런 이들이 쉽사리 균열 랜드를 떠날 수 있을 리가 없다. 손해를 보는 원정만큼 비참한 것도 없으니까. 다시 한번 부푼 꿈을 안고 도전한다거나 최소한의 피해는 메우기 위해 치밀한 분석과 연구 끝에 던전에 진입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던전에 가기 위한 소비를 시작한다. 숙박료, 보급품, 장비, 던전 입장 비용, 보험 비용, 식사 등등. 머무르는 것 자체가 돈이요, 소비 활동. 재도전한 던전에서 좋은 성과를 가두더라도 기존에 사용했던 것들을 퉁치기에는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하….’ 결국에는 인간쓰레기 이지혜가 파놓은 덧에 개미지옥처럼 빨려 들어가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다. 균열 랜드를 나온 이후에는 이미 빚쟁이가 된 상태. 평생을 벌어도 이자밖에 갚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대륙의 사냥터를 떠돌아다니게 되리라. 조금 가슴 아픈 결말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 취지는 맞다. 모든 걸 잃기는 하겠지만 어쨌거나 그동안의 경험으로 녀석들은 강해질 거고 열심히 살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과거 나태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온 종일 몸을 굴리게 될 거라는 거다. 조금 가슴이 아프기는 했지만 과감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프지 않은 주사는 없다. 정체되어 있는 대륙에 놓을 뜨거운 백신. 이 커다란 그림은 엘룬 쓰레기는 물론 베니고어마저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 것이다. ‘키야….’ 혼자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눈앞에 있는 여관 종업원은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우리 파티를 바라보고 있는 중. ‘그래. 그럴 만하지.’ 저 여관 종업원이 우리에게 판매하는 모든 것이 성과일 터. 보험을 들게 하는 것은 물론 대출까지 땡기라고 유혹하는 눈빛에는 나 역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를 유혹하는 눈빛에는 그 어떤 이도 버틸 수 없으리라. “대출도 있구나….” “균열 랜드는 모든 게 모험가님들의 편의를 위해 마련되어 있으니까요. 고객의 편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자는 게 저희 균열 랜드의 모토입니다.” ‘입에 침 한 번 안 바르고 거짓말 하는 클라스 보소.’ “아무래도 불편하신 점이 많으실 테니까요. 모험가 분들은 원정에만 집중하실 수 있게 여러 가지 종류의 서비스가 아주아주 많습니다. 원정보험이나 대출 상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출은 조금 그렇고… 원정보험은 정확히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앞서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사실 원정 보험 같은 경우는 일반적인 모험가 분들은 기피하곤 합니다만… 통계적으로 봐도 영웅 등급의 파티의 던전 생환율이 높지 않다는 걸 생각해 보면 충분히 들어놓을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사고가 난 이후에는 그 누구도 보상해 주지 않으니까요. 물론 경험이 많으신 모험가의 경우에는 실패했을 때의 매뉴얼을 충분히 숙지하고 계시겠지만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파티나 처음 호흡을 맞추시는 분들은 꼭 원정보험을 드신 이후에 들어가는 게 추세입니다. 더불어 파란 길드와 검은 백조 길드, 붉은 용병 길드에서도 원정 보험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모로 강조하고 있고요.” “으음….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파티….” “네. 아무래도 그런 경우가 많으니까요. 사냥 중에 발생하는 사고뿐 만이 아니라 파티원들과의 마찰이나 분배 문제에도 모험가 분들이 직접 신경 쓰실 일이 없게 중재하는 역할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낚이지 마, 이 새끼들아.’ 하지만 이미 낚여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생각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지 않아요, 오빠? 저희끼리 왔다면 문제없겠지만 외부인도 하나 들어왔으니까. 호흡이 맞는지도 아직 확인하지 못했고….” ‘나 쳐다보지 마, 이년들아.’ 아니나 다를까 득달같이 달려들기 시작하는 꼴은 가관. 물론 이 홈쇼핑 호스트 역시 마찬가지다. “아! 마법사 분께서 새로 들어오신 파티원이신가 보군요. 확실히 불안하시겠죠. 물론 우리 아름다우신 마법사님을 무시하는 발언은 아닙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모인 파티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까요. 한 사람당 몇 십 골드로 일어날 사고를 미리 예방할 수 있는 건 확실히 메리트가 있는 선택이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끄응. 이런 건….” “아냐, 태건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말씀대로 무슨 사고가 벌어질지 모르니까. 일반 등급의 보험으로 부탁드립니다.” “탁월하십니다, 고객님. 계약서 잘 읽어보시고 사인해 주실 부분에 사인해 주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네.” “혹시 균열박물관의 던전은 다른 던전과는 다르게 모든 방식이 랜덤으로 진행된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그게 무슨….” “3종의 보스몬스터와 3종의 보상 아이템이 모두 랜덤으로 나오게 됩니다, 고객님. 무난하게 사냥을 마치고 귀환하는 분도 계시지만 뜻하지 않은 몬스터를 만나게 돼 고생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은데요? 예를 들면 독속성의 몬스터나 저주를 사용하는 몬스터를 만나 안타까운 일을 당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혹시나 해독제나 저주를 해주하는 아이템을 가지고 오셨는지요?” “아, 아닙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모험가님들. 그런 일에 대비하기 위해 저희 균열 랜드에서는 특수몬스터 대응 패키지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빛의 연금술사 이기영 님이 직접 만드신 11종의 포션과 그에 상응하는 소비 아이템이죠. 가격도 무척이나 합리적이랍니다.” ‘작작 좀 해라, 이놈들아. 이 악마들아.’ “물론 그 하위 버전의 패키지도 판매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11종 포션을 추천해 드리고 있습니다. 유통기한이 있는 저급 포션과는 다르게 빛의 연금술사 이기영 님이 만드신 포션은 시간이 많이 지나도 그 효과가 변함이 없으니까요. 체온을 유지해 주는 온도 유지 포션 같은 경우에는 방한대책이나 방열대책을 따로 마련할 필요가 없어 무척이나 효과적이랍니다. 화속성이나 빙속성 몬스터들에게도 효과 만점! 가격도 시중에서 판매되는 가격보다 훨씬 저렴하게 책정하고 있습니다.” “이건 괜찮네.” “생각하지도 못하는 돈이 너무 많이 나가는 것 같은데….” “아니, 잘 생각해 봐라. 철우야. 이건 사 놓으면 좋은 거야. 만약에 이번 원정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후에도 계속 사용할 수 있으니까. 패키지가 하나 정도는 있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생각해 보시고 결정하시면 됩니다. 파란 길드에서도 직접 구매하실 수 있는 상품이니까요.” “필요하지 않을까? 너도 해독 주문에는 그다지 자신 있는 게 아니잖아. 영웅 등급의 독속성 몬스터라도 갑자기 튀어나온다면….” “그건 그래….” “천천히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싱글 벙글 웃는 여관 종업원의 모습은 가관. ‘얘 누구야?’ 갑작스레 궁금증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왜 이런 능력자가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었어?’ 이런 능력자는 제대로 된 대우를 해줘야 한다. 프로 홈쇼핑 호스트처럼 구매욕을 일으키는 목소리와 완벽에 가까운 서비스 접대. 물건을 설명하는 낭랑한 목소리는 듣기 좋기까지 해 절로 지갑에 손이 가게 할 정도. 내 물건을 내가 사고 싶을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다. “현장에서 바로 구매해 주시면 고급 체력 포션 3종 세트를 사은품으로 드리겠습니다.” “구입하겠습니다.”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고객님.” 균열 랜드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이 파티가 사용한 금액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 ‘와, 진짜 제대로 벗겨 먹는 구나.’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파티 역시 종업원에게 붙잡혀 여러 가지 말을 전해 듣고 있다. 특수 몬스터 대응 패키지를 모두 품 안에 하나씩 끌어안고 있는 파티원들의 모습은 가관. 심지어 희귀 등급의 파티 역시 패키지를 소중한 보물처럼 끼고 있다. ‘희귀 등급의 파티는 저걸 살 능력도 없을 텐데?’ 100% 확률도 대출 받은 것이 틀림없으리라. 저건 무조건 대출. 심지어 내 포션이 영웅 등급 이상의 몬스터에게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걸 생각해 보면 닭 잡으려고 소 잡는 칼을 산 셈이나 다름없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종류의 인간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벗겨지고 있다. 유아영이 만들어 놓은 장비 목록을 살펴보는 녀석부터. ‘저것도 무조건 대출이네.’ 쓸데없는 소비 아이템을 구입하는 녀석들까지. 쉬러 온 건지 쇼핑을 하러 온 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이런 부분은 정말 좋네.’ 일단 편의성이 좋다는 것 하나는 정말로 칭찬해 주고 싶은 부분. 이곳저곳 들릴 필요 없이 모든 시스템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관에 진입하는 순간 던전 진입 신청과 원정 보험을 알아 볼 수 있고 심지어 대출이나 무기 구입까지 가능하다. 귀찮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고 원정 그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거다. 물론 돌아다니길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상가가 마련되어 있지만 굳이 나가지 않아도 이곳에서 모든 용무를 해결할 수 있다. 카탈로그의 뒤를 넘겨보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두꺼워 보이는 책에는 균열랜드에 대한 모든 서비스가 나열되어 있으리라. 하나의 컨트롤 타워로 상가 전체가 운영되고 있는 강점. ‘편의성.’ 물론 가격단합이나 후려치기 같은 약간의 부작용이 있을 수는 있지만…. 대륙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아주 사소한 문제나 다름이 없다. ‘보이십니까? 메텔 관리자. 당신의 박물관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모습을요.’ 천국에 계신 막스의 어머니도 분명 함박웃음을 짓고 있으리라. 조금 문제가 되는 부분은 너무 심하게 벗겨 먹는 게 아니냐는 것. 조금 노골적인 상술에 불편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잠시. 식당에서 벌어진 광경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크으. 오늘 아침에 들어와서 이걸 얻었다는 거 아니요?! 무려 전설 등급의 아이템! 진실의 여왕의 목걸이! 균열 박물관! 완전 혜자라니까!” 죽은 줄로만 알았던 민주투사 바크더쿠의 모습. 아니, 이번에는 러시아 출신의 이방인 바크 세르게이였다. “여러분도 빨리 들어가쇼! 혜자도 이런 혜자가 없다니까!”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심지어 그 옆에 자리한 것은 안기모와 김예리. ‘너네 나 모르게 연기하고 다니지 마.’ “균열 박물관! 완전히 혜자 그 자체라니까!!!” 왠지 모르게 힘이 들어간 목소리는 나 역시 균열박물관을 혜자라고 느끼게 할 정도였다. # 440 회귀자 사용설명서 440화 균열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3) “기연 씨 표정이 조금 안 좋으신데….”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으레 모험가라면 파티를 구한 이후 친목도모를 위한 시간을 보내게 마련이다. 간단한 미팅을 넘어 회식, 대규모 원정일 경우 단합대회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파티원간의 호흡과 친분이 중요하다는 증거라 할 수 있으리라. 물론 사적으로 친해지는 걸 경계하는 집단도 존재하지만 적어도 린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출신의 이방인들은 이런 이벤트를 즐긴다. 내 입장에서는 그저 쉬고 싶었던 것도 사실. 하지만 이 클랜의 일원들은 이런 종류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짐을 풀고 균열 여관 아래에 비치된 주점에서 푸짐한 저녁식사와 함께 럼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나온 음식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서민이 된 기분에 나 역시 잔잔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바크 세르게이와 아르기르모를 보기 전까지는. “크으. 오늘 아침에 들어와서 이걸 얻었다는 거 아니요?! 무려 전설 등급의 아이템! 진실의 여왕의 목걸이! 균열 박물관! 완전 혜자라니까! 여러분도 빨리 다녀오쇼! 이건 진짜 안 가면 손해 보는 장사요! 베니고어 여신의 축복이라니까!!” ‘저 새끼 진짜….’ “균열 박물관 고맙다!! 이것뿐만이 아니라니까! 고급 촉매들도 잔뜩!! 오늘 밤은 전설 등급의 방에서 한 번 잘 수 있겠구만!” 겉보기에는 백인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 내 눈에는 틀림없이 박덕구와 안기모로 보인다. 그 와중에 콘셉 잡고 분위기 있는 러시아인 연기를 펼치고 있는 예트니 코바의 모습은 가관. 이 주점이 모스코바의 지하주점으로 보일 정도의 흡입력이다. ‘연기하기 싫다더니….’ 몸은 솔직한 꼬맹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즐기고 있는 모습은 이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라가 있는 여배우.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았었다면 틀림없이 연기자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 버렸다. 내가 이곳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좌중을 휘어잡은 바크 세르게이는 목걸이를 흔들며 입을 열기 시작. “오늘 여기에 있는 술값은 전부 내가 계산할 거라니까!!” ‘그만해, 이 새끼야. 그런 것 좀 하지 마.’ 틀림없이 사비로 해결할 거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물론 걸릴 가능성은 전무. 쓸데없는 걱정이기는 하다. 애초에 이곳에 들어와 있는 이들 중에 저 마법을 간파할 수 있는 이는 없다. 커다란 주점은 퀄리티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봤자 사회의 하층민들이 이용하는 공간. 전설 등급에 올라갔다고 하더라도 저걸 간파하기는 쉽지 않거니와 애초 이런 주점으로 올 리가 만무하다는 거다. ‘전부 다 프라이빗 룸에 있거나 프리미엄 어쩌구 붙어 있는 곳에서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겠지.’ 이기연이 아니라 이기영의 몸으로 왔다면 나 역시도 이런 곳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으리라. 우리 일꾼들 독려차원이라면 또 몰라도. 내가 자꾸만 저 반대쪽을 의식하는 것을 본 모양인지 눈앞에 있는 덩치가 말을 걸어왔다. “아시는 분들입니까?” “아뇨. 시끄러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에요.” “저런 사람들은 꼭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최근에 공화국 쪽에서 떠오르고 있는 신성들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아마 그들일 겁니다. 저 덩치 큰 자가 바크 세르게이…. 근육으로 꽉 찬 덩치와는 다르게 직업은 마법사라고 하더군요. 사용하는 마법의 속성은 특이하게도 물리 속성이라고 합니다.” ‘나도 못들은 정보를 니네는 도대체 어디서 들은 거냐. 얘네 커뮤니티도 은근 잘 활성화 되어 있네…. 그리고 이 멍청한 새끼야. 물리 속성 마법이 이 세상에 어딨냐?’ “그 옆에 있는 전사는 버서커라고 불리는 아르기르모. 한 번 피 맛을 보면 쓰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저 무기에 쓰러진 자들만 수천이라고….” ‘쟤 사제야…. 전투사제기는 한데… 피 맛은 보지도 못할 거다.’ “그리고 저 여자는 그들을 이끄는 클랜 마스터 예트니코바. 특이하게도 무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치명적인 춤으로 남녀 가리지 않고 매혹시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치명적인 유혹기술은 개뿔…. 예리야, 희망사항을 연기에 집어넣으면 안 된다. 꼬맹이 주제에 발랑 까져가지고…. 현성이가 길드 사무실에서 통곡하겠다. 그딴 설정 좀 잡지 마. 제발 잡지 말라고.’ 태클을 걸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다. 보통 저런 종류의 연기는 디테일이 중요하다. 빛기영이라는 감독이 빠진 저 연기집단은 이미 그 혼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칭찬하고 싶은 부분도 존재하기는 한다. ‘저런 건 괜찮아….’ 득탬했다는 걸 동네방네 떠벌리는 건 확실히 지양해야 할 일이지만 그 목적이 균열박물관 홍보에 있다면 또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실 무엇보다 녀석이 건강하다는 게 가장 안심이 되는 부분이었다. 이미 이지혜에게 들어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오히려 평소보다 더 건강한 느낌. 처음부터 다치지 않았던 거 같았다. ‘돼지 새끼….’ 여전한 모습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이쪽을 발견하지는 않을까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다른 곳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완전히 다른 것에 집중한 모습. ‘저 정도면 굳이 신경 안 써도 되겠네.’ 저곳에서 일어나는 대화보다는 현재 이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대화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하다. 애초에 그게 목적이었으니까. “예트니코바, 바크 세르게이…. 한 단계 더 올라가겠군요. 무슨 아이템인지 정확히 보이지 않지만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라니 부럽습니다. 한 편으로는 저희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도 들어 기쁘기도 하고요. 생각보다 확률이 나쁘지 않은 모양인 것 같습니다.” “글쎄요. 그건 까봐야 아는 거지만… 그만큼 균열 박물관에서 준비된 콘텐츠가 많다는 거겠죠, 오빠. 저 사람만 본 게 아니에요. 여기저기에서 아이템 자랑을 하는 사람들을 꽤 봤거든요. 솔직히 너무 많은 골드를 투자한 것 같아서 조금 걱정했었는데… 우리 클랜도 저런 아이템이 하나 나와 준다면 소원이 없겠는데….” “무조건 그렇게 만들어야지. 민지 네 말대로 생각보다 지출이 컸으니까. 최소 영웅 등급의 아이템이 나와 줘야 이번 손해를 복구할 수 있을 거다. 총 3번의 기회가 있다고 했으니 가능성은 충분할 거야. 만약에 실패했다고 하더라고 큰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면 되고….” “포션을 산 건 잘한 일인 것 같아요. 안 그래도 빛의 연금술사가 파는 포션을 사용해 보고 싶었는데… 물론 이번에는 사용할 일이 없으면 더 좋겠지만.” “내 말이 맞잖아. 그 포션을 사는 건 장기적으로 봐도 이득이라니까. 이번 한 번만 하고 모험가 생활 청산 할 거 아니잖아. 앞으로 계속 쓴다고 생각하면 백 번은 남는 장사야. 그나저나 기연 씨는 여기 음식… 입맛에 맞으십니까?” “…….” 솔직히 별로 입맛에 맞지는 않는다. 어색하게 미소를 흘린 게 무언의 대답이 된 모양. 당황하는 녀석들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하체의 숙주가 된 멍청한 놈들은 허둥지둥했고 여성 멤버들에게는 다시금 경멸의 눈빛이 쏟아진다. ‘아, 이거 또 실수했네.’ 내가 생각해도 미움 받을 만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다. “아뇨. 아뇨. 맛있어요. 다만 속이 조금 안 좋아서요. 어떻게 이렇게 만난 것도 기념인데 저희 다 같이 짠 할까요?” “그거 좋을 것 같군요.” “균열 박물관 원정을 위하여!” “위하여!” “성공적인 원정을 위하여!!” 잔을 부딪칠 때는 슬쩍 국민지 쪽을 향해 시선을 보냈지만 아직도 분위기는 싸늘하다. 아무래도 찍혀도 제대로 찍힌 모양. 너무나 조신한 행동이 반감을 사버리고 만 것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뭐, 니네 손해지 어쩌겠냐.’ 이 정도까지 했는데도 벽을 만들면 나로서도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 별 다른 미련을 두지 않고 꿀꺽꿀꺽 손에 들려있는 걸 목구멍으로 보낸 것은 당연. “파하….” 오랜만에 마시는 시원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기분 좋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다른 건 다 별론데. 이건 진짜 먹을 만한 것 같다.’ 커다란 소시지.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먹다보니 정말로 맛있다. 특히나 겉에 발라져 있는 소스가 일품. 커다란 녀석을 한 입에 들어 넣고 싶지만 역시나 무리가 있다. “으음. 흐음.” 일단 떨어질 것 같은 소스부터 처리. 그 이후에는 야금야금. 어느 정도 준비가 됐다 싶을 때 크게 한 입을 베어 문다. “이건 정말로 맛있네요. 으으음.” 얼굴이 붉어져 있는 두 남자. 다시금 경멸의 눈빛을 뿌리고 있는 네 여자.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형이 눈에 보인 것은 바로 그때.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4명의 남자. ‘니네 뭐야?’ 빤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 쌍팔년도 무협소설에나 나오던 객잔 신이 튀어나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 예상이 실현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랑 같이 한잔하는 게 어때? 이름이 뭐야, 아가씨?” “그런 비실비실한 놈들이랑 놀지 말고 우리랑 놀자고.” “거기 누님 이름이 뭐야?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린델에서 왔어?” 어떻게 된 게 이런 놈들은 항상 같은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우리 파티의 두 남정네는 완전히 무시하고 말을 내뱉고 있는 놈들은 딱 봐도 질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우리 쪽 덩치 태뭐시기 역시 험악한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 “뭐?” ‘객기 부리지 마라, 태건아. 너보다 센 거 같은데….’ 상태창으로 모든 싸움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앞에 있는 술 취한 개저씨들은 우리 파티보다 전력적으로 강하다. 막상 싸움이 시작되면 수적 우위로 비등비등하겠지만 솔직히 싸워야 할 이유도 없다. 괜한 소란을 일으키는 건 이쪽에서 사양. 여러모로 복잡해지는 것은 물론, 원정자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옆에 있는 이철우는 나와 비슷한 생각이신지 최대한 중재시키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중재가 될 리 만무. “이러지 마시고 잠깐 밖에 나가서 이야기하시죠.” “철우야, 말이 통할 놈들이 아니다. 꼭 있지 이런 사회의 쓰레기 같은 놈들.” “아니. 우리가 뭘 했다고 쓰레기라 뭐라 그래? 같이 놀자고 한 게 죄야?” “우리 파티원이 불쾌해했으면 죄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말을 걸어오는 당신들이 잘못한 거 아닌가? 서로 터치 안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우리야 저 숙녀분이 불쌍해서 말 한 번 걸어본 건데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 아닌가 몰라.” “뭐?” “너희 같은 놈들이랑 있으면 고생할 게 뻔히 보이는 데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겠어? 그렇지 않아?” “이 개자식들이, 뭐?” “태건아! 그만!” “한번 해보려고? 그럼 해보든가.” “밖으로 나와! 개자식!” 일촉즉발의 상황. 그래봐야 애들 장난이지만 나름대로 분위기는 진지하다. 희귀 등급의 파티는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고 있었고 갑작스러운 소란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하…. 이거 진짜 피곤한데.’ 빛기영으로 있을 때는 휘말리지 않아도 될 트러블에 휘말리니 심기가 불편한 것은 당연지사. 그래도 경비대가 도착하기 전에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달래고 돌려보내야겠네. 나중에 따로 민원도 넣고.’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물리 마법.” “어?” “백드롭.” 가장 가운데 있던 양아치 중 한 명이 바닥으로 처박히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박덕구 너 이 새끼!’ 뜻밖의 히어로가 등장한 것이다. “거, 조용히 술이나 마십시다.” # 441 회귀자 사용설명서 441화 균열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4) 물리마법 백드롭. ‘무슨 물리 마법이야. 그냥 잡아서 뒤로 넘긴 거구만….’ 어처구니없었던 것이 사실. 하지만 그 위력만큼은 나쁘지 않다. 물리마법 백드롭을 정면에서 받은 양아치 한 놈은 이미 무지개다리를 건너기 직전. 로브를 입은 것은 물론 지팡이를 등에 메고 있는 박덕구는 그야말로 물리 마법사 그 자체였다. ‘이렇게 보니까 세긴 세네.’ 박덕구가 1회 차에 비해 많이 강해졌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아래의 시선으로 올려다보니 녀석이 실제로 얼마나 강해졌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클리셰의 희생양들은 별것 아닌 놈들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영웅 등급에 오른 강자들이다. 1회 차의 박덕구를 상회하는 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거다. 그런 이들을 한 번의 캐스팅으로 땅바닥에 꽂아버리는 위용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파란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괴물이 많은 파란에서의 박덕구의 위치는 잘 쳐줘야 고기방패. 파티 플레이에서는 충분히 유용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대인전에서는 전투력 측정기라고 라고 불릴 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인다. 유니콘을 얻고 괴물이 된 조혜진이나 가늠할 수 없는 재능을 지닌 김예리를 포함한 다른 격수에 비해 한참이나 딸리기는 하지만…. 말도 안 되는 내구 수치는 양민 학살에 완벽하게 들어맞고 있었다. 약한 자에게는 그 누구보다 강한 남자 박덕구, 아니, 바크 세르게이. “꼭 이런 놈들이 있다니까.” 그 묵직한 목소리에 우정 클랜의 여성 한 명이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물리 마법의 위용을 목격한 장내에는 이미 커다란 침묵이 가라앉았다. 이쯤이면 양아치들이 도망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지만 스펙이 상위에 다다른 녀석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 “넌 또 뭐야!” “물리마법. 아이언 스킨.” “아아아아아악! 내 손!” “물리마법. 아이언 스트롱 암.” “이 돼지 새끼가!” 심지어 아무렇지도 않게 공격을 튕겨 낸다. 마법도 튕겨낼 것 같은 물리마법의 위용에 양아치들의 얼굴은 당혹으로 물들기 시작. 결국에는 한 녀석이 허리춤에 걸린 검을 빼 들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댄다. 막 검집에서 검을 뽑아 휘두르려는 계획이었겠지만 바크 세르게이의 옆에 있는 파티원들이 그걸 두고 볼 리 만무. 결국에 검 집은 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왜. 피에 미친 광전사. 버서커, 아르기르모가 녀석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으니까. “경고하지. 뽑으면… 죽는다.” ‘무게 잡지 마….’ 병신 같지만 멋있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이 미친놈들이! 우리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 다시 한번 커다랗게 들려오는 목소리. 클랜마스터인 예트니코바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은 바로 그때. “매혹의 춤.” 저게 무슨 매혹의 춤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중에서 대여섯 바퀴를 빙글빙글 도는 움직임이 화려하기는 하다. “모두! 매혹당하기 싫다면 눈 돌리는 게 좋을 거요.” 마무리는 평범한 발차기. 목이 뒤로 돌아간 게 아닌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헐떡헐떡 숨을 들이 쉬는 걸 보니 일단은 살아 있는 모양. 매혹의 춤의 효과를 알고 있는 장내의 모험가 모두 고개를 돌렸지만 매혹이고 유혹이고 나발이고 전부가 개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평범한 발차기가 정확히 관자놀이에 빨려 들어가는 걸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최대한 섹시한 포즈로 자세를 취하고 있기는 했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김예리의 모습은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 ‘예리야… 너 커서 뭐가 되려고 그래…. 진짜 아저씨가 눈물이 난다야.’ 팜므파탈에 알 수 없는 로망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너무나도 손쉽게 정리된 장내. 균열 여관의 가드들이 달려오기도 전에 끝나버린 쓰레기 청소에 주점 안이 조용해졌다. 모두 놀랍다는 표정이다. 대충 상대방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는 수준에 오른 만큼, 이 쓰레기 양아치들의 능력이 딸리지 않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을 터. 공화국에서 새롭게 등장한 3명의 신성을 본인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저런 얼굴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몇몇 강자는 바크 세르게이를 예의주시 하고 있다. 아마 오늘이나 내일 안에 접선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여기 돌아가는 것도 이렇게 보니까 재미있기는 하네.’ 작은 규모의 클랜들이 서로 연합하고 갈라지거나 치열하게 눈치싸움을 하는 모습이 특히나 인상적. 스카우터처럼 보이는 몇몇이 귓속말을 하거나 마법으로 대화를 차단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자신들이 하는 대화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기를 원하고 있음이 분명. 틀림없이 이 공화국의 신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리라. 폭풍의 중심이 된 예트니코바가 앞으로 클랜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다. 그것보다는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 때마침 입을 열어오는 바크 세르게이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거, 뜻하지 않게 소란을 일으켜서 미안하게 됐소.” “아닙니다. 오히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라도 할 것도 없다니까. 내가 쓸데없이 끼어든 건 아닌지 걱정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마찰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던 터라….” “아하! 원정을 앞두고 있었구만.” “네. 그렇습니다.” “하긴 원정 전에 이런 사고에 말렸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혹시나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 아니요. 내일 일정에 지장이 생길지도 모르고. 정말로 방해한 것은 아닌지 걱정했는데 이거 다행이구만. 그래서 어디에서 온 거요?” ‘이 새끼는 왜 이렇게 말을 붙이려고 그래?’ 적당히 이야기 끝내고 얼른 지 자리로 돌아가면 좋으련만 계속해서 말을 건다. 박덕구가 수다 떠는 걸 좋아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처음 만난 파티에게도 이렇게 사근사근 말을 걸어올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우정 클랜 역시 녀석의 이런 인성이 나쁘게 보지는 않은 모양. 결국에는 입을 여는 클랜마스터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린델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공화국…. 아니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잠깐 합석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이 새끼 나름 똑똑하네.’ 우정 클랜의 마스터 이철우. 나름대로 합리적이다. 아니,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우정 클랜이 영웅 등급으로 분류할 수 있는 클랜인 것은 맞지만 녀석들 같은 경우에는 이제 막 올라온 병아리에 가깝다. 예트니코바를 비롯한 이 공화국의 신성들은 전설 등급을 목전에 두고 있는 클랜으로 보일 터, 인맥을 쌓아서 나쁘지 않으리라. ‘겸사겸사 균열 박물관에 대한 정보도 듣고 싶은 거겠지.’ 물론 나에게 반가운 상황이 아니다. 혹시나 의심의 눈길이 쏟아지지는 않을까 불안했던 것도 사실. 하지만 예트니코바를 비롯한 그 일당들은 나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아… 꼭 그럴 필요는 없는데.” “이 주점의 술값을 모두 계산하신다고 하셨으니 안주 정도는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 거,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면 이거 어쩔 수 없겠구만.” “감사합니다.” “일단 통성명부터. 바크 세르게이요. 여기는 아르기르모. 또 여기는 우리 클랜마스터인 예트니코바 님.” “반갑군.” “…….”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콘셉질을 하는 안기모와 대꾸조차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김예리. 조금 당황스러울 만도 하건만 이철우는 고개를 끄덕인 이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린델, 우정 클랜의 클랜마스터 이철우입니다.” “음….” “여기는 저희 클랜의 부클랜마스터 김태건. 이쪽은 암살자인 국민지. 또 여기는….” 계속해서 파티원들의 소개를 해주고 있던 녀석의 눈동자 어느 순간 내 쪽에 머물렀다.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난처한 거겠지. 아마 직접 나 자신을 소개하는 게 맞으리라. “이번 원정에서 우연치 않게 우정 클랜 파티에 합류한 이기연이라고 합니다.” “…….” “…….” 순식간에 시선이 집중된다. 특히나 빤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박덕구의 시선은 가관. 안기모도 천천히 내 얼굴을 살펴보고 있다. 걸려도 상관은 없지만 기왕이면 모른 척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한 순간 박덕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소?” “네?” “아, 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인데…. 끄응. 분명히 본 것 같은데….” “착… 각이실 거예요. 저는 린델 밖을 벗어난 적이 없는 터라.” “킁킁.” ‘뭐야, 얘 왜 이래?’ “익숙한 냄샌데…. 정말로 본 적 없었나?” ‘네가 개야?’ 이렇게 되니 분위기가 꽤나 묘해진다. 갑작스레 우정 클랜의 주축 여러분들이 바크 세르게이를 경계하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실수라는 걸 깨달은 녀석은 조용히 앞에 있는 소시지를 주워 먹기 시작했다. 물론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은 덤. 어느새 균열 박물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이들이 정보를 얻기 위해 여러 가지를 물어보는 동안에도 녀석은 나를 살폈다. ‘이 새끼는 이상하게 눈치가 빠르다니까.’ 다행히 강원도 연애박사가 나에게 개수작을 부려오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떻게 봐도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다. “그래서… 균열 박물관은 좀 어떻습니까?” “아마 괜찮을 거요. 우리는 희귀 등급의 검 하나. 영웅 등급의 방어구 하나가 나왔는데 솔직히 이 정도만 됐어도 본전은 쳤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전설 등급의 목걸이라니…. 솔직히 상상도 못했다는 거 아니요.” “실례가 아니라면 난이도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그러고 보니 영웅 등급으로 신청하셨겠구만. 내 말이 맞소?” “네. 그렇습니다. 아직 초입이지만 경험을 쌓기에 이만한 장소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난이도는 그리 나쁘지는 않을 거요. 우리에게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었으니까. 사실 우리도 전설 등급으로 진입하고 싶었는데… 전설 등급으로 찾아 들어갈 수준은 아니라…. 그래도 다음부터는 아마 들어갈 수 있게 되겠지. 오늘 얻은 이 아이템을 바탕으로 한층 더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녀석의 역할은 확실히 바람잡이가 맞다. 맥락도 없이 목걸이를 흔들면서 강해질 수 있다며 말하는 모습이 딱 그렇다. 아마 이지혜에게 전설 등급의 아이템을 자랑하고 오라는 미션을 받았으리라. 엄연히 자랑질이기는 하지만 우정 클랜 여러분들의 시선에는 부러움이 감돈다. 영웅 등급의 던전에서 전설 등급의 목걸이가 나왔다는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이미 홍보로 듣기도 했었지만 자신들의 눈으로 실제로 확인한 셈. 한참 전에 준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가지게 된 나는 이제는 전설 등급이라는 네이밍이 슬슬 물리지만, 이 세계에서 전설 등급이라는 건 절대로 무시할 만한 게 아니다. 파란 길드에서도 보유하고 있는 전설 등급의 아이템은 그리 많지 않다. 당장 안기모나 선희영 같은 이들도 전설 아이템 보유자가 아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지고의 보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강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치트. 로또에 열광하는 건 지구에 있는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아마 균열 박물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아이템은 수천 종일 거요. 어째서 그런 것들을 보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아이템의 수량이 정해져 있다는 거겠지.” “아….” “수가 제한되어 있다는 뜻이 뭔지 알겠소? 균열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전설 등급의 아이템은 먼저 가서 먹는 사람이 임자라는 거요. 물론 확률이야 낮겠지만 충분히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도박이라는 거지. 보통 모험가는 영웅 등급의 벽에서 콱 하고 막혀 버리거든. 더 이상 내가 성장할 수 없다고 한계가 느껴질 때. 그럴 때 도움이 되는 게 이런 아이템이지.” “그렇군요.” “우리 같은 일반 서민 모험가들이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 것만으로도 균열 박물관은 가치가 있다니까?” ‘설득되는데? 자식, 말 잘하네.’ “그리고… 이곳에서 치러지는 비용은 모두 이후를 대비한 군자금이라고 합디다.” “네?” “지금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대륙을 위해 싸우기 위한 자금들이라는 거요.” “아….” “아마 들어본 적이 있을 거요. 위협이라는 거 말이요.” “확실히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건….” “헛소문이나 헛소리가 아니오. 대륙을 위협하는 존재는 실존한다니까.” 한 치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는 묵직한 목소리. 무척이나 커다란 짐을 지고 있는 듯한 표정. ‘너 진짜 3회 차 아니냐.’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이 돼지새끼 도대체 몇 회 차야….’ # 442 회귀자 사용설명서 442화 조신한 이미지(1) “그건….” “아암. 파란 길드에 우리 형, 아니, 파란 부길드마스터이자 교국의 명예 추기경인 이기영이라는 분이 한 말씀이지. 위협은 실존한다.” “…….” “우리 같은 무식한 놈들이야 그게 무슨 소리인지. 또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이곳의 상태가 대관절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지만… 현재 대륙 상황을 보고 있자면 그게 꼭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아니요. 갑자기 일부 퀘스트도 먹통이 되어버렸고 던전도 말을 듣지 않으니까. 실제로 교국과 공화국, 왕국 연합, 심지어는 이종족 연합까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연합하고 있소.” “그런….” “갑작스러운 소식에 혼란스러워진 대륙을 잠재우기 위해 억지로 그런 분위기를 만들지 않을 뿐이라는 거요. 이미 여러 대형 길드와 국가들이 위협에 대비한 훈련을 하고 있고 그걸로도 모자라 비밀리에 여러 회담이 오가고 있다니까. 아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정보가 풀리겠지 않겠소?” “악마 소환사 진청 이후에 많은 악마 던전들이 생겨난 것도 그 위협의 여파인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니까. 아무튼 간에 현재의 배경이 이렇다는 거요. 그동안 잠적해 있던 우리 클랜 역시 그런 대륙의 위기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거고. 어찌 됐건 우리의 터전 아니요. 할 수 있는 만큼 해 봐야지.” “무거운 이야기를 들어버린 것 같은 기분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저희 클랜은 당장 먹고 사는 것만 생각했었는데….” “뭐, 다들 그런 거 아니겠소. 그래서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이 대단하다는 거 아니요?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으니까.” “잘 알고 계시는군요.” “아암. 잘 알다마다. 어디 그것뿐 인가? 분명히 이 균열 랜드도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있는 거라니까. 소문으로는 공화국에 빚을 지고 들어가고 있다고 하던데… 거기에 군자금까지 모으려면 얼마나 빠듯할까. 거 생각해 보쇼.” “음….” “우정 클랜마스터가 파란 길드, 검은 백조, 붉은 용병 또는 다른 대형 길드의 입장이라 생각해 보라 이 말이요. 당신들 같았으면 이 균열 박물관이라는 걸 민간인들에게 개방 했을까?” “그건.” “몇몇은 그런 선택을 했겠지만 대부분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니까. 당장 여러 대형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파티만 계속해서 굴려도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데, 뭐 하러 이렇게 젖과 꿀이 흐르는 던전을 겨우 요정도 가격만 받고 빌려준단 말이요? 어떤 미친놈이 대륙에서 남이 더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냐, 이 말이오. 어째서인지 뻔하지. 그 무엇보다 대륙의 균형적인 성장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거요. 우리 명예추기경님은 그렇게 생각한 게 틀림없다니까!” “균형적인 성장….” “그거요! 균형적인 성장.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 그리고 아이템. 어떻게 봐도 이건 이 던전 관계자들이 손해 보는 장사라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거요.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소. 열심히 성장해서 이후 일어날 위협에 한 손이라도 보태는 것. 그게 우리 클랜이 균열 박물관에 온 목적이요. 아마 다들 그렇겠지. 그렇지 않소? 여러분!” “말 한번 잘한다, 바크 세르게이! 공화국 놈 주제에 좋은 소리만 하는 구나!” “당연히 그렇지! 그렇고말고! 여기 와서 한 잔 받아가게나!” “옳소! 무조건 옳지!” 갑작스레 대중에게 의견을 구하는 녀석의 목소리에 다시 한번 주변이 떠들썩해졌다. 대부분의 모험가는 바크 세르게이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중. 심지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보내는 파티도 있다. 얼굴이 벌게진 것이 술주정 부리는 것 같지만 이런 자리에선 저런 놈들의 목소리가 도움이 된다. 이번 일로 혹시나 평판에 금이 갈까 걱정하기는 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돼지 새끼 진짜….’ 회귀한 거 아니야?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농담 삼아 던진 생각이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지난 행적이 의심된다. 쓸데없는 타이밍에 미친 듯이 유용한 이 돼지의 위력은 가히 발군. 물론 평소에는 트롤짓 아닌 트롤짓을 하기는 하지만 정말로 필요할 때 어김없이 달려와 킬 패스를 넣어준다. 이번 역할도 균열 박물관에 대해서 선동하는 것으로 역할이 끝이 아닌 모양. 이지혜가 어느 정도까지 지시를 했는지 모르나 그 이상을 해주는 느낌이었다. 아마 오늘 자리에서 후반의 나온 이야기들은 대부분은 지시받은 것이 아닌, 녀석이 직접적으로 하고 있는 생각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떠들던 녀석이 갑작스레 입을 연 것은 40분 정도가 지난 이후였다. 이만 자리를 마무리하자는 뉘앙스를 풍겨온 것이다. “큼. 시간도 오래 됐는데 이만 올라가는 게 좋겠구만.” 조금은 뜬금없는 타이밍.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이르다고 할 수도 없다. 우리 파티가 내일 원정을 나간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나름대로의 배려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쪽에서 먼저 자리를 끝내자는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걸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인성 보소….’ 절로 존경심이 들 정도. 녀석의 호의를 깨달았는지 이철우의 눈에도 고마움이 감돈다. “저희도 내일 일찍부터 준비해야 하는 터라…. 오늘 좋은 말씀 그리고 도와주신 것까지 너무 감사했습니다, 바크 세르게이 님.” “모험가끼리 돕고 돕는 거지, 뭐.” 누가 봐도 훈훈한 장면. “올라가시죠, 기연 씨.” “네. 철우 씨.” 선배와 후배가 서로 서로 인사를 나누고 고개를 끄덕인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찜찜한 만남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우정 클랜에게는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다. 여러 정보도 얻은 것은 물론 올바른 생각과 정신을 머리와 가슴속에 새길 수 있었으니까. ‘그렇지. 그렇고말고. 이런 기회가 흔하지 않지.’ 나 역시 작별인사를 나누는 그룹에 합류에 열심히 손을 흔든 것은 당연. 바크 세르게이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또 볼 수 있으면 보자니까.” 무사히 위기를 잘 넘긴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건 개인적인 희망사항에 불과했다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똑똑- 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 슬쩍 문을 열자 시야에 비친 것은 술병을 흔들고 있는 안기모와 박덕구. 특히나 박덕구는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와라.” 함박웃음을 보내고 있는 녀석. “오랜만이요, 형님.” 정말로 오랜만인 것 같다. * * * “예리는 왜 안 왔어?” “매혹의 춤 때문에 안 왔다는 거 아니요. 아마 지금쯤 숙소에서 이불을 발로 뻥뻥 차고 있을 거요. 아니, 그나저나 형님 방이 왜 이렇게 작은 거요? 조금 더 커다란 곳으로 옮겨도 되나?” “아냐. 이정도면 충분해. 불편하기는 한데… 지금 와서 방 바꾸는 것도 웃기고. 여기에 짐도 다 풀어놨으니까.”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그나저나 그… 형님 말씀대로면 사찰인가 뭔가 때문에 이기연 상태로 보내고 있다는 거요?” “음. 뭐 그렇지. 사실 간단한 변장만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일반 변장은 힘들 것 같아서. 그리고 이 몸도 생각보다 크게 불편하지는 않더라구.” “어쩐지 어디서 자꾸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니까. 아니, 얼굴은 미묘하게 다르긴 한데 자꾸만 냄새가 나는 거 아니요.” “무슨 냄새?” “거, 형님한테 나는 냄새가 뭐겠소. 희미한 약품 냄새랑. 뭐 이것저것 섞인 냄새지.” “겨우 그걸로 알아차렸다고?” “사실 다른 게 있지! 가방 아니요, 가방. 형님이 매일 들고 다니는 가방을 보니까 나도 모르게 형님 생각이 나더라니까. 그리고 이름도 너무 비슷하지 않나! 솔직히 처음에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한 번 형님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게 있어서 눈치챈 거 아니요! 귀신은 속여도 박덕구 눈은 못 속인다니까!” “…….” “지금부터는 누님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요?” “누님은 개뿔. 부르던 대로 불러라. 안기모 씨도 그냥 편하게 계셔도 됩니다. 오랜만의 술자리니까요.” “감사합니다, 부길드마스터. 그나저나 이거 정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부길드마스터가 이렇게 아름다워지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로 가방으로 힌트를 주지 않으셨더라면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길드는 조금 어떻습니까?” “똑같습니다. 아무래도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 유지․보수에 정신없습니다. 손봐야 될 때가 생각보다 많으니까요. 길드마스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정신없이 보내고 계시죠. 아! 어떻게 길드마스터에게 아직 연락은 넣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도 불러 봐도 되겠습니까? 아니면 하얀 씨라도….” “아니요. 그렇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바쁜데 이쪽까지 신경 쓰이게 하기는 싫습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이 일은 두 분만 알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기왕이면 예리까지만요.” ‘절대로 정하얀이 알게 하지 마….’ “그럴 줄 알고 예리 씨에게는 미리 말을 해놨습니다.” 고맙다, 기모야. “아암. 내가 또 입 하나는 무겁지. 나만 믿으라니까.” 넌 안 믿긴다. 이놈아. 호언장담하며 가슴을 텅텅 치고 있지만 당장에라도 달려 들어가 정하얀에게 이번 일을 보고하지는 않을까 겁이 날 정도였다. 물론 평소 박덕구가 입이 무거운 녀석이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정하얀에게는 한없이 가볍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 주제가 조금 더 이야기되기 전에 급하게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콘셉을 그따구로 잡았어? 물리마법사… 그리고 피에 미친 광전사는 뭡니까? 기모 씨?” “큼. 면목 없습니다. 예전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역할이라…. 그래도 매혹의 춤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중입니다.” “확실히 그건… 조금 심했지. 예리 그 꼬맹이 발랑 까져가지고. 언제 한번 파란 길드에서 성교육수업이라도 진행해야겠습니다.”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푸훕 하고 술을 뿜어버린 안기모가 눈에 보였다. 좁은 방안에 이렇게 셋이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자 분위기가 제법 좋다. 확실히 이런 시간을 굉장히 오랜만에 보내는 것 같은 느낌. 특히나 박덕구와 술자리를 언제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녀석이 질릴 만도 하건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니 지루할 틈도 없다. “상처는 괜찮냐.” “뭐, 몸 튼튼한 거 빼면 시체 아니요. 아니, 오히려 형님이 괜찮은 거요? 템플러들까지 왔다고 들었었는데….” “몸에는 아무 문제없다. 조금 피로가 쌓였는데 그것 때문인 것 같더라고….”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부길드마스터. 그런데 이건 언제 끝내실 겁니까.” “던전만 잠깐 들어갔다가 나올 겁니다. 얼마 걸리지도 않을 거고요.” “흐음…. 그렇군요. 왠지 모르게 이 자리를 이렇게 끝내기가 아쉬워서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번 일 전부 끝내시면 또 이렇게 한잔하시는 게.” “나는 찬성이요.” “물론입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나 역시 오랜만에 즐거운 자리를 끝내기가 아쉽다. 슬쩍 밖을 바라보니 어느덧 새벽. 지금 자도 몇 시간 못 잔다는 걸 깨닫고는 잠깐 동안 멍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정도는 숙면이 가능하다. ‘피로회복 포션 먹으면 되니까.’ 꾸벅꾸벅 졸기가 무섭게 눈치 빠른 안기모가 입을 열기 시작. 이만 나가주는 게 좋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이만 일어납시다, 덕구 씨. 내일 던전에 들어가시는데, 저희가 부길드마스터를 너무 붙잡은 모양입니다.” “크흠. 아, 이거 이대로 끝내기는 너무 아쉬운데…. 형님, 한 시간만 딱 놀다 갑시다.” “나온 다음에 놀아줄게. 나도 웬만하면 같이 있고 싶은데 진짜 피곤해서 못 참겠다.” “그럼 할 수 없지만….” “빨리 나가, 이 새끼야. 잠 좀 자자.” 녀석을 툭툭 밀어내자 마지못해 일어서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그럼 부길드마스터, 조만간 뵙겠습니다.” “뭐,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하쇼. 달려갈 테니까.” “응.” 그렇게 문을 열고 녀석들을 배웅하려고 하던 바로 그때였다. “아.” 짧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니 시야에 비친 것은 우정 클랜 소속의 여자. 왜 이런 시간에 나와 있는지 모르겠지만 경악한 표정으로 나와 아르기르모를 바라보는 게 눈에 보였다. 뒤이어 방에서 튀어나오는 바크 세르게이의 모습까지 확인하자 진한 혐오감이 얼굴에 깃들기 시작. 마치 벌레를 바라보는 표정이 이러할까. 치울 수 없는 인간쓰레기를 보는 표정이 이러할까. 뭘 오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깨달은 순간 나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간다. “…….” “…….”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원정 하루 전 남자 둘을 방으로 끌어들이는 미친년. 빛기연이 비치기연으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순간.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다급히 문을 닫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조신한 이미지는 끝장났네, 시바.’ 평소에 쌓아왔던 조신한 행실이 실수 한 번에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443 회귀자 사용설명서 443화 균열박물관 리모델링(1) [무 등급 던전 균열 박물관에 입장하셨습니다.] [인원 제한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무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퀘스트-박물관 탐방(0/1)] 솔직히 들어오기 전까지가 고역이었다. ‘시바…. 돼지 새끼. 수습도 안 하고 튀었어.’ 사실은 시간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정신없이 박물관으로 뛰어와야 했으니까. 여성 4명의 경멸어린 눈빛에 절로 주눅이 들 정도. 어제의 일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조차 없었다. 마치 더러운 벌레라도 보는 양 의식적으로 이쪽을 피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 이철우와 김태건도 이 소식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접근해 오는 것을 보면 믿지 않거나 듣지 못한 모양. 아니면 딱히 상관없다는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듣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녀석들이 이쪽에 친절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경멸의 눈빛은 더욱 심해지는 중. 기분 좋은 상태에서 시작하고 싶건만 그리 순탄하게 진행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런 거 아니라고…. 빛기연이지, 비치기연 아니라고….’ 속으로 중얼거려 봤지만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 그야말로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박물관 입성은 좋은 돌파구가 되어주었다. 파티원 모두가 새로운 환경에 시선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익숙한 상태창, 익숙한 배경이었다. 하지만 미묘하게 달라진 느낌.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다. 무 등급 던전이었던 균열 박물관은 완전히 익숙한 듯, 새로운 장소로 재탄생 되었다. 칙칙했던 지난 장소와는 다르게 정말로 박물관다운 모양새를 갖춘 것이 첫 번째. 인원제한이 없어진 것이 두 번째다. 넓은 장소에 모여 있는 이들만 해도 수백 파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느낌. 다른 방에서 시작한 파티를 생각해 보면 아마 박물관 안에 들어서 있는 인원은 더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전투를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도 사실. 하지만 균열 박물관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막스는 그런 형식을 채택하지 않았다. 안쪽에 있는 콜렉션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는 게 바로 우리 아들내미의 소소한 취미니, 자신의 콜렉션을 구경시켜 준 이후에야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바크 세르게이와 아르기르모에게 들었던 그대로. 사전 정보가 없었던 파티는 깜짝 놀란 표정이지만 대부분 알고 있었다는 듯 익숙해 보인다.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것이리라. 커다란 동공의 안. 감상에 빠지기가 무섭게 이철우가 말을 걸어왔다. “대단하군요. 확실히… 정말로 대단합니다.” “네. 저도 그렇게 느껴지네요. 솔직히 이런 광경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공을 들이긴 했어.’ 멋들어진 전시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 아이템과 몬스터. 비교적 사람들의 시선이 잘 모이는 곳에서는 메인이라고 불려도 될 정도로 멋진 전시물을 장식해 놨다. 국민지를 포함한 4인방 역시 정신없이 박물관을 둘러보는 중. 잠깐이지만 어제의 사건은 전부 잊은 것처럼 보였다. 멍하니 그 모습을 구경하던 모든 파티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균열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모험가 여러분. 던전 관리인 막스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니 오랜만에 보는 아들내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던전 관리인 막스의 정보를 확인합니다.] [전설 등급의 특성 마음의 눈으로 던전 관리인의 더미를 간파합니다.] [관리인 막스의 더미] [관리인 막스에 의해서 만들어진 마력의 응집체입니다. 실체가 없는 허상이기 때문에 상태창과 정보창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박물관에 제한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똑같네.’ 더미라지만 반갑다. 우리 똘똘이와 함께 헤어지기 싫다고 찡찡거렸던 녀석의 모습이 기억났으니까. 여기에서는 이토록 근엄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굉장히 귀엽게 느껴질 지경이다. -오늘도 많은 모험가 분이 찾아와 주셨네요. 박물관 탐험이 시작되기 전 주의사항과 함께 여러분이 숙지하셔야 할 몇 가지 사항을 공지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원하시는 탐험은 이런 전반적인 숙지사항을 거치며 박물관을 둘러보신 이후에 진행됩니다. 전시물 관람이 끝난 이후에는 각 파티로 흩어져 직접 박물관을 경험하게 될 예정이니 관람 중 파티원을 잃어버리는 것에 유의해 주세요. -아! 참고로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전시관에 함부로 손을 대시면 패널티를 얻게 됩니다. 일부 품목에 대해서는 퇴장조치를 하는 등의 강경조치를 취하고 있으니 꼭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진행 시원시원하다. 박물관 관리인이라고는 하지만 마치 가이드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 억지로 근엄한 척했던 예전의 막스와는 다르게 아주 약간의 귀여움 마저 느껴졌다. -본격적인 설명을 드리기 전에 저희 박물관의 역사에 대해 알아봐야겠죠? 균열박물관은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보다 더욱 오래된 장소입니다. 균열 수호자분들이 균열을 봉인하기 위해 만드신 곳이고, 또 기억하기 위해 만든 장소입니다.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 기나긴 세월 동안 균열 수호자님들은 이곳에 스스로를 가두시고 오롯이 봉인에만 집중하셨지요. 균열 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는 물품이나 존재는 모두 균열을 통해 흘러들어온 것들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 들어온 것들이나 박물관에서 직접 만들어진 아이템이나 키메라들도 존재합니다만 기본적인 균열 박물관의 성격은 이렇습니다. “신기하군요.” -균열 수호자 분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 균열을 봉인하는 데 성공하셨지만 그 이후에도 항상 균형이나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해서 걱정하셨습니다. 때문에 항상 균열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박물관을 만드신 겁니다. 박물관 탐험의 보상 대부분이 보물이라고 불리는 무구들로 이루어진 이유 또한 동일하겠죠? 모두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보고 있다. 아마 저런 표정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륙에 살아가는 동안 균열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고 있었던 놈들이 대부분일 테니까. 균열 수호자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시간도 전에 이 대륙을 보호하고 있었다는 것과 여기에 있는 것들이 전부 세상에 풀리지 않았다는 것. 모두 놀라운 일일 것이다. 물론, 한 번 와본 것으로 모자라 균열 박물관 4급 관리자의 칭호를 달고 있는 나는 전부 알고 있는 내용. 굳이 놀랄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게 하는 새로운 구조물에 등장에는 나 역시 커다랗게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잠깐 왼쪽을 바라봐 주시겠습니까? 박물관 탐험가 여러분, 부끄럽습니다만 소,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이 세상에 있게 해주신 어머니와 아버지입니다. ‘내가 왜 저기 있어.’ 균열 수호자 메텔과 내가 착 달라붙어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은 가관. 심지어…. ‘메텔 수호자는 왜 임신하고 있는 건데?’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저거 명예추기경 아니야?” “닮은 사람이겠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시간도 전이라는데… 복장도 다르잖아. 양식도 완전히 다르고.” “그런가.” “균열 수호자 뭐시기라잖아. 닮은 사람이겠지 뭐.”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시지만. ‘멋대로 죽이지 마라, 아들.’ -제 가슴속에는 살아계시는 분들입니다. -메텔 수호자님, 어머님과 아버님은 균열 박물관의 발전과 관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셨습니다. 이분들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의 저도, 균열 박물관도 없었을 겁니다. 물론 지금의 대륙도 없었겠죠. 당황스러워 실소가 나왔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특히나 메텔 수호자가 임신해 있는 부분이 압권. 내 모습을 한 동상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그 배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심지어 배에 입까지 맞춰주신다. 배에 귀를 가져다주는 둥 아주 메텔에게 지극정성이라 할 만했다. ‘골렘이구나.’ 조각품들이 서로 사랑스러운 눈길을 주고받는 모습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애정이 느껴질 정도. ‘막 아들… 누가 이런 거 만들라고 했어. 누가… 영혼결혼식 시켜달라고 했어…. 막 아들! 아빠도 사람이야! 사람!’ 손 한 번 만진 적 없건만 메텔을 임신시킨 게 되어버렸다. 얼굴도 한 번 본 게 전부다. 정하얀이 저 모습을 보고 있다면 대뜸 캐스팅을 외워 동상을 폭발시켜 버릴 것이리라.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해지기도 했다. 막 아들이 어떤 심정으로 저런 걸 만들었는지 대충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끝나고 한 번 안아줘야겠네.’ 진한 부자 간의 시간을 가져줘야겠다고 다짐해 볼 정도. 슬쩍 막스의 더미를 보니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있는 꼴은 가관. 아마 실제로도 부끄러워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못난 아버지를 둔 아들에게 미안하네….’ -그,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요? 옆에 놓인 아이템들이 바로 전설 등급의 아이템입니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봐주세요. 노파심에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전시되어 있는 아이템은 모두 시스템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스스로의 행동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와아.” “이것 좀 보세요. 이거…. 철우 오빠!” “기연 씨, 이리 좀 와보시죠. 이런 지팡이도 있습니다.” “아, 네.” ‘난 이미 전부 다 봤다, 철우야. 그러니까 너한테 말 거는 얘들도 좀 상대해 줘라.’ “전설 등급의 지팡이입니다. 정말로 전설 등급의 아이템도 보유하고 있는 거였군요. 박물관 카탈로그에도 나와 있는 아이템입니다.” -전설 등급의 아이템의 경우는 영웅 등급의 난이도에서 아주 낮은 확률로, 전설 등급의 던전에서는 낮은 확률로 뽑으실 수 있습니다. 영웅 등급의 아이템은 희귀 등급의 난이도에서 낮은 확률로, 같은 영웅 등급의 던전에서는 일반 확률로 뽑으실 수 있으시고요. 더불어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양산형 영웅 등급의 아이템도 있으니 이 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 좀 보세요! 신화 등급의 망치예요. 태건 오빠, 이런 건 값으로도 따질 수 없겠죠?” “기연 씨, 여기 로브 한 번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영웅 등급의 난이도에서도 등장하는 아이템인데 제법 확률이 좋은 것 같습니다.” ‘너도 마찬가지야. 김태건 이 자식아.’ -여기에 있는 이들이 전설 등급의 몬스터입니다. 신화 등급의 존재 역시 3종을 보유하고 있지만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신화 등급의 몬스터를 제외한 2종은 현재 극도의 주의를 요하는 상태라 감상하기 힘든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얘도 오랜만이네….’ 저번에 한 번 봤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무기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있는 녹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는 괴물. 거대한 뿔과 거대한 꼬리 그리고 주변을 떠다니는 일곱 가지의 무기. 저번에 봤던 모습 그대로다. 녀석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들은 모두가 침을 삼키는 중. 아마 내가 녀석을 처음 봤을 때 한 생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리라. ‘이딴 걸 어떻게 이겨….’ 그 말 그대로. 이건 압도적인 존재다. 평범한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괴물. 심지어 이 괴물이 진품이 아니라 잘 만들어진 모조품이란다. 웅성거리는 인간들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막스가 미소 지었다. -아마 여러분이 신화급 존재를 상대하실 수는 없으실 겁니다. 큼큼. 지난번에 조금 사고가 있었던 터라…. 본래는 신화 등급도 여러분의 탐험에 넣어야 하지만 그… 양해 부탁드립니다. 박물관 4급 관리인의 권한으로 녀석들을 완전히 봉인시켜 버렸다. 이딴 건 세상에 나오면 안 되는 놈들이라는 거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왔을 때는 마음의 눈으로 저 녹색의 괴물이 보이지 않았었다. ‘격이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은 될 것 같은데….’ 마음의 눈도 성장했고 직업도 준신화 등급 판정을 받았으니까. 어떻게 보면 비등비등한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마음의 눈을 발동시키려던 때였다. 어깨에 통증이 느껴진 것. 심지어 몸도 앞으로 밀린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비친 것은 국민지 패거리. 사과는커녕 모르는 척 지들끼리 재잘대고 있는 모습은 가관. ‘인성 나오게 하지 마라…. 이 계집애들아.’ 조금씩, 조금씩 인내심이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 444 회귀자 사용설명서 444화 선즙필승(1) 따돌림이라니…. 아마 어젯밤에 있던 사건이 결정적이었으리라. 그동안의 조신한 이미지를 전부 말아먹을 정도로 큰 사건이었으니까. 솔직히 나라도 그녀들 같은 행동을 취했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저들 입장에서 이번 원정은 클랜의 향후 방향을 결정할 정도의 커다란 이벤트일 터. 푹 쉬고 힘을 비축해도 모자랄 판에 굴러들어온 돌이 밤새 술판을 벌였다. 어떻게 봐도 지탄받아 마땅한 행동이기는 하다. 조금 일을 크게 벌리면 당장 파티에서 제명시키고 여러 가지 단체에 찔러 공론화시켜도 할 말이 없는 사건. 만약 내가 우정 클랜원이었다면 높은 확률로 짤리거나 그에 걸맞은 패널티를 받았으리라.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개념 없다는 꼬리표를 달기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거다. ‘슈바….’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 특히나 대놓고 비웃는 얼굴이 그랬다. 무슨 계획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에 빅엿이라도 먹일 생각에 행복해하고 있는 얼굴들. 솔직히 마음에 드는 얼굴은 아니었다. 빛기연은 엿을 먹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풉.” “푸흡.” “킥킥.” 몸이 휘청거리기가 무섭게 고막을 강타하는 비웃음 소리. “후우.” 애들 장난에 장단 맞춰주기는 싫지만 자꾸만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이 계집애들….’ 전방을 바라보자 벌써 멀찍이 떨어져 수다를 떨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그 와중에도 막스는 계속해서 박물관에 대한 설명을 진행하고 있는 중. 아버지가 여기에서 어깨 빵을 당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눈치챌 만도 한데….’ 아마 천천히 구성원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본다면 충분히 내가 이기영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녀석이 김현성이 특이하다는 것과 내가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간파할 만하다. 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케어하려다 보니 그렇게 살펴볼 시간은 없는 모양. 누가 봐도 정신없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 이해해 줄 만했다. ‘조금 흥분한 것 같기도 하고….’ 자기 할 말만 쏟아내고 있고 박물관 탐험가들도 호응을 잘해주니 신이 난 모양이다. 마치 공부라도 하는 것처럼 막스가 하는 말을 필기하는 녀석도 있는 것은 물론 박물관 전시관에 있는 몬스터나 아이템을 스케치하는 녀석까지 등장하기 시작. 앞으로 한 번이 아닌 만큼 이 장소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습득하려는 의도이리라. 물론 이렇게 공부하는 녀석들만 있는 건 아니다. 정말 박물관이라도 온 것처럼 이곳저곳을 기울이고 있는 놈들 역시 꽤나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보상을 미리 알려주는 던전은 없다. 던전의 네이밍이나 등급에 따라 어떤 종류의 아이템이 나올지 예상할 수는 있지만 균열 박물관처럼 대놓고 전시해 놓는 곳은 없다는 거다. 안 그래도 제삿밥에 관심이 많은 모험가들이 흥미진진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게 당연했다. “저기 봐요.” “이런 건 구하기 힘들 텐데….” “대륙 양식의 무기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한번 써보고 싶네요. 특수능력으로 뭘 갖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잘 팔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노릴 만한 게 있는지 조금 더 알아보자고.”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진지한 목소리들. 박물관이 한순간에 호황을 맞이한 만큼 막스의 입이 찢어지고 있었다. 진지한 관람객들의 반응에 힘을 얻은 것이다. 약간 크게 들려온 혼잣말에도 반응하는 꼴은 가관. 평소대로의 막 아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것들이 전부인가?” -물론 여기 있는 아이템이 전부는 아닙니다. 저희 균열박물관에서는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다고 말할 수 있는 아이템들 역시 계속해서 수집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유물급 아이템들 말입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물건은 거의 대부분 박물관에서 보관 중에 있습니다. 당연히 그런 물건들 역시 보상목록에 포함되어 있고요. 아마 여러분이 놀라실 만한 물건도 있을 겁니다. “그렇구나….” -부족한 아이템의 물량 역시 저희 박물관에서 특수 제작한 아이템으로 충당하고 있으니 다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나 다른 질문이 있으십니까? “정확한 확률은 어떻게 되는지….” -정확한 확률은 공개해 드리기 어렵습니다. 그건 균열수호자님들이 직접 지정하신 것들이라…. 다만 모든 것이 무작위로 이루어지며 여러분이 원할 시에 추가 기회를 부여해 드리고 있다는 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 슬슬 박물관 탐험을 시작해야 될 시간이 찾아왔군요. 마음 같아서는 여러분과 함께 하루 종일 박물관을 둘러보고 싶지만 시간을 조금 더 지체한다면 이후에 들어올 분들께서 피해를 보는 터라…. 박물관에 오신 모든 탐험가는 골렘의 통제에 맞춰서 움직여주시기 바랍니다. 파티원을 잃어버리시거나 섞이지 않게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통제에 따라주지 않으면 강제퇴장 조치 될 수 있습니다. “기연 씨, 이쪽입니다.” “네, 철우 씨.” “빨리빨리 움직입시다.” “길 막지 마요! 전설 등급 던전 파티 먼저 지나갑니다.” 강제퇴장 조치 당한다는 발언이 결정적이었는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고 있는 이들이 눈에 보인다. 몇 백 골드를 쏟아 부어 들어온 던전일 테니 쫓겨나고 싶을 리 만무. 마력골렘의 인도에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모험가들의 모습은 영 적응되지 않는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던 파티원들이 속속들이 모이고 각각의 자리로 안내되기 시작. 물론 우리 파티도 예외는 아니다. 멀찍이 떨어져 전사용 아이템을 구경하고 있었던 김태건과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 국민지 4인방 역시 이철우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민지야, 아이템 목록은 정리해 놨지?” “네. 시간이 없어서 전부는 아니지만 쓸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전부 체크해 놨어요. 근데 크게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보니까 메인 전시관에 전시된 아이템들은 쉽게 뽑을 수 없는 것들인 것 같고…. 몬스터들도 마찬가지예요. 혹시나 전설급 몬스터나 신화급 몬스터가 나오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했는데 그럴 확률은 없거나 희박한 것 같았어요.” “그래. 수고했다.” “아니요. 당연한 일인데요. 뭐.” “아마 이쯤에서 대기인 것 같은데. 어제 들은 이야기로는 여유시간이 조금은 있겠지만 지금부터라도 전투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속에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로 요깃거리를 해도 괜찮고 음. 들어가기 전에 장비들 미리 점검해 두고. 이미 아침에 모두 확인했겠지만.” “시간이 없어서 확인하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이런 시간이 있다는 건 좋은 것 같아요. 그렇죠. 기연 씨?” 힐끔 날 바라본 이후에 입을 연 것을 보니 다분히 날 저격한 말처럼 들렸다. 아니, 애초에 내 이름을 불렀으니 나를 저격한 것이다. ‘시간이 없기는 했지.’ 하지만 굳이 이런 타이밍에 입을 열어왔다는 의도가 궁금했다. 본격적으로 박물관 안으로 진입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시바… 혹시….’ 여전히 김태건과 이철우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지 못하는 상황. 하지만 최대한 웃음을 참고 있는 4인방을 보자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사탄도 울고 갈 년들… 니들이 날 쫓아내려고 하는구나.’ 눈엣가시였던 이쪽을 진입 직전 밀어내려고 계획한 것이 분명. ‘마법사 필요 없어?’ 정확히 말하면 내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저들의 입장에서 빛기연은 무임승차자처럼 보일 테니까. 어제 바크 세르게이에게 이야기를 듣고는 6명이서 공략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모험보험을 믿고 있을 수도 있다. 따로 마법사를 구해놨을 수도 있지만 결론은 일이 틀어져도 비빌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어처구니가 없어 당황스러울 지경. 굳이 여기까지와 간을 보기 시작한 저의가 뭔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개고생시키고 싶다, 이거네.’ 4명이 함께 입을 모아 이철우와 김태건에게 입을 털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거다. 조금 더 결정적인 순간에 엿을 먹이고 싶었을 테니까. 프로 엿 제조사라면 당연히 생각해 봄직한 행동이다. 별건 아니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당연했다. ‘니들이 사람이냐.’ 선량한 모험가를 이런 식으로 대우해서는 안 된다. 다시 한번 국민지가 입을 열어온 것은 내가 막 입을 떼려고 했을 때였다. “그런데 오빠들… 어디서 썩은 해산물 냄새나지 않아요?” “무슨 냄새?” “저도 잘 모르겠는데 뭔가 썩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이상한 비린내 같은데…. 그렇게 말하기에는 조금 더 지독한 그런 냄새요. 오징어 썩은 냄새 같은데… 으… 정말 더럽고 역겹네요. 이거 저밖에 안 나요?” “저도 나요.” “저도요.” “우웩. 우우웁….” “…….” 김태건과 이철우는 얘들이 뭘 잘 못 먹은 건 아닌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마 이 발언의 목적이 뭔지는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오빠들.” “무슨 일인데 그래? 자꾸?” “글쎄요. 저 여자한테 물어보는 게 좋으실 거예요. 아무래도 이상한 냄새는 저 사람한테서 나는 것 같으니까.” “뭐?” “민지야,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제가 괜한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에요. 철우 오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니까요. 애초에 저거 모험가도 뭣도 아니에요. 무임승차하려는 꽃뱀이지. 굳이 같이 진입할 필요? 없어요. 저 사람 구하느라 허비한 시간이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차라리 없는 게 도움이 될걸요?” “민지야!” “처음부터 이기연 저 여자한테 이번 원정은 진지하지도 않았어요. 어떻게든 오빠들 꼬셔서 신분세탁 하려는 것 목적밖에는 없었다니까요? 몸 팔고 영혼 파는 사람이랑 던전에 들어가 봤자 힘들어질 뿐이에요.” “당장 사과해.” “아뇨. 사과 못 해요. 저 여자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뭐?” “어제 새벽에 미정이 언니가 봤거든요.” “뭘 봤다는 거야. 도대체.” “바크 세르게이랑 아르기르모. 두 사람이 저 여자 방에서 나오는 거.” “정말입니까?” “네. 제가 눈으로 직접 확인했어요, 철우 오빠, 태건 오빠. 저 여자랑은 눈까지 직접 마주쳤고요.” “…….” “…….” “저, 그러니까 그건 오해….” “야심한 밤에 남녀가 뭘 하고 있었을라나? 원정 앞두고 있다는 자각은 있으셨던 거죠? 기연 씨?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건가? 몸도 튼튼하셔라. 행군할 때는 그렇게 질질 짜더니 남자 둘이랑 놀아날 체력은 있었나 봐. 얼마 받으셨어요? 그렇게 하는데 얼마 받았냐고요? 아니, 애초에 접선은 어떻게 한 거지? 몸 파는 사람들끼리의 커뮤니티라도 있는 건가? 저도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어요. 분위기 좋았고 굳이 이렇게 산통 깨고 싶지는 않았는데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아서요. 참다 참다 못해서 말씀드린 거예요. 이런 던전은 모험가들을 위해서 있는 거지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곳이 아니에요.” “아니….” “어떻게 할래요? 당신 발로 직접 나가실래요? 아니면 제가 직접 끌어내 드릴까요?” ‘슈바.’ 슬쩍 주변을 살펴본 것은 당연했다. 대충 여론이 어떤지 파악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일단은 힘이 되어줄 남자 둘. 하지만 이철우와 김태건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 보인다. 국민지는 모르겠지만 미정인지 뭔지 하는 여자가 거짓말을 할 성격은 아닌 모양이다. 무언가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 정치인생 27년. 이런 곳에서 정치질을 당해 궁지에 몰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물론 타개책은 존재. 하지만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이미 안구는 활발한 활동을 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거의 무의식에 가깝게 펼쳐진 행동. “히끅. 흐그윽.” 평소와 다른 울음소리가 내 귀에 직접 들려온 것은 당연지사. ‘선즙필승….’ 0.5초도 지나지 않아 악어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히끅….” # 445 회귀자 사용설명서 445화 선즙필승(2) 선택지가 딱 이것밖에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채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눈에서 흘러나온 즙은 이것이 가장 정답에 가깝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리 만무. 계속해서 닭똥 같은 악어의 눈물을 뽑아내자 이철우와 김태건의 동요하는 얼굴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했다는 표현이 어울리리라. “그런 게 아니라….” “하….” 당연하지만 국민지 4인방의 표정은 썩어 들어가는 중.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얼굴이다. 선즙필승이라는 과감한 스킬을 사용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모양. 분위기를 살피며 태세를 정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이 계집애들아.’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었던 그림은 분명 이런 그림이 아니었을 터. 공개적으로 개망신을 준 이후에는 모든 것이 무난하게 진행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철우와 김태건의 지지를 받은 이후에 정식으로 파티에서 추방할 것을 건의하고, 만약 그게 불가능할 경우에는 다소 강경하게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계획이 선즙 한 방에 무너지는 순간. 너무나도 서럽게 들리는 내 울음소리는 어느새 조용해진 장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내가 들어도 서럽다.’ “흐으윽.” 물론 그녀들이 선택한 것은 예상하고 있었던 예의 그 강경책. 무척 뾰족한 목소리가 다시금 귀가 들어와 내리 꽂혔다. “와 진짜… 어이없네. 뭘 잘했다고 울어요?” “히끅….”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요? 진짜 어이없네.” “완전히 미친년 아니야? 저거?” “진짜 내가…. 하.” 하지만 통할 리가 없다. 이미 이철우와 김태건은 이미 선즙 오오라의 영향을 받고 있다. 국민지외 4인방과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습은 마치 베를린 장벽, 캐슬락 성벽보다 든든한 그 모습은 내가 어떤 트롤짓을 해도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이미 여론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데도 화끈한 목소리를 쏘아내주기까지 하니 감사한 것은 당연지사. 철저하게 피해자로 위장한 위장전술은 빛기영의 몸보다는 비치기연의 몸으로 펼치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너희 지금 뭐 하는 거야?” “오빠도 방금 들었잖아요. 저 여자 오빠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처음부터 조금 이상했다니까. 아무것도 없이 파티 신청한 것도 그렇고요. 저런 여자랑 같이 던전에 들어가라고요? 더 위험하면 위험했지 도움도 안 될 거예요.” “내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어, 국민지?” “쓸데없는 짓이 아니라니까요? 그게 더 파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지. 오빠들 속고 있는 거예요.” “기연 씨, 괜찮으십니까? 진정하시고….” “히끄으윽.” 여러 말이 소란스럽게 들려오지만 당연히 눈물을 멈추지 않는다. 이쪽을 위로하는 이철우부터 국민지 포함 4인방과 대치하고 있는 김태건까지. 선즙은 절대로 지는 일이 없다는 오랜 격언이 다시 한번 심장 속에 틀어박혔다. “와, 진짜 황당하네. 진짜로.” “이렇게까지 하고 싶어요?” “국민지.” “우리 잘못 아니라니까요! 아까 한 이야기 못 들은 거 아니잖아요?” “너희가 뭔가 오해했겠지. 기연 씨는 그런 사람 아니야.” ‘니가 날 언제 봤다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냐, 철우야. 아무튼 고맙다. 잊지 않으마. 근데 사람 너무 쉽게 믿는 거 아니다.’ “오해는 무슨 오해예요. 미정이 언니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게 있는데. 이봐요, 기연 씨. 제 말이 틀려요? 오늘 새벽에 우리 언니랑 마주쳤잖아요?” 여기서가 중요하다. 물론 조금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적절한 변명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클, 클랜 영입 제의를… 히끅. 받았을 뿐이에요. 저도 깜짝 놀라서… 정말로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히끅. 없었어요. 없….” ‘음란한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 머릿속에 있는 그 더러운 생각이다.’ “그 새벽에 클랜 영입제의? 그런 변명을 누가….” ‘누구긴 누구야. 니네 오빠들이 믿지.’ “새벽 일찍부터 떠난다고 하셔…. 히끅.” “말을 좀 제대로 해주시겠어요?” “죄송합니다. 흐그읍. 죄, 죄송합니다.” “아니요. 기연 씨가 죄송할 일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죄송….” 실제로도 목이 멘다. 누가 이 광경을 보고 연기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얼마나 억울했는지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가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말을 전부 막아주고 있었다. 물론 어리숙해 보일 것이다. 자기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해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꼴은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저 4인방 한정. 이철우와 김태건은 정말로 뭔가 잘못 됐다는 듯이 빛기연을 달래주기에 여념이 없다.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을 믿는 거예요? 그 새벽에 영입제의를 하러 왔다고요? 새로운 클랜원 영입하는 데 클랜마스터는 어디에 있었던 건지 모르겠네. 그 말, 믿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죠?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거 본인도 인지하고 있죠?” “죄송합니다. 히끅. 제가… 잘못했습니다.” “기연 씨 잘못이 아닙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요…. 제가 잘못….” ‘내가 바로 정의다.’ “잘못했습니다….” ‘이게 바로 빛기연이다!’ “끝까지 지가 피해자지? 끝까지?!” “죄송….”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이철우의 품에 살짝 안긴 것은 당연지사. 순진한 녀석은 잠깐 깜짝 놀란 듯싶었지만 병신은 아닌지 어깨를 두드려주기 시작했다. ‘이것도 못 하면 병신이지.’ 얼굴을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무척 붉어져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다. 슬그머니 눈을 흘긴 것은 당연. 조금 더 확실한 한 방을 위해 비웃음을 일발 장전한다. 저쪽이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나니까. 이철우의 품에 살짝 안긴 채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것은 당연. 정확히 국민지와 눈이 마주친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다른 여성 3인방은 김태건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계속해서 우는 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입꼬리를 올리기 시작. 아마 국민지의 눈에는 눈을 반달로 뜬 불 여시가 미소를 흘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얼굴. 나름대로 화를 잘 참고 있어 칭찬해 주고 싶은 심정. 움직이는 도발 토템 같다는 평가를 받은 이후라 조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악마 관계자들도 이 비웃음에는 화를 참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순진한 사제 이철우의 드넓은 가슴에 본격적으로 머리를 가져다 대며 아양 아닌 아양을 떨기 시작하자 천둥과도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불여시가! 오빠한테서 안 떨어져!” “…….” “…….” “입 조심해. 국민지!” “이 시발 걸레 같은 년이! 방금 못 봤어요? 방금 나보고 비웃었잖아. 시발! 나 비웃었잖아!” “국민지!” “너!!” ‘너무 추하다, 민지야.’ 갑작스레 달려온 그녀는 누가 봐도 정신이 나간 것만 같다. 이철우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앞을 막아섰지만 연약한 사제의 몸으로 민첩한 도적을 막을 수 있을 리 만무. 결국에는 그녀가 내 팔을 정확히 가격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단순히 밀어내고 싶을 뿐이었겠지만 받아들이는 쪽은 그렇지 않다. 오랜만에 헐리웃 액션을 선보이며 땅바닥으로 떨어져 나가자 황급히 나를 부축하는 이철우가 눈에 띈다. 씩씩거리는 표정의 국민지는 본인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인지 아연실색. 국민지 외 여성 3인방의 얼굴도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어찌됐건 몸에 손을 댔고 결국에는 상처를 입힌 것이다. 내가 잘못했어도 결국에는 그녀들이 잘못한 것이다. 누가 봐도 가해자와 피해자는 명백한 상황. 베를린 장벽들이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미, 미아….” “지금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결국에는 커다란 노성이 울려 퍼졌다. “오, 오빠….” “아직 원정도 끝나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해야겠어?!” “그게 아니라….”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 자각하고 있는 거야? 작작 좀 해라, 국민지. 작작 좀 하라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잠깐인데… 그것 하나 참기 힘들어? 너 이런 애였어?” ‘명대사 나왔다. 키야. 너 이런 애였니!! 철우야! 연기자로 영입해도 되겠다! 드라마 대사 오졌다!’ “오빠, 그게 아니라 저 여자가….” “듣기 싫다. 민지야, 지금 네 얼굴 보기도 싫어.” “오, 오빠.”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 민지의 모습은 조금은 측은하게 느껴졌다. 보잘 것 없는 애송이들을 상대로 선즙이라는 가드 불능기를 펼친 것이 미안할 정도. 뒤늦게 즙을 짜고 있는 것 같지만, 후즙은 선즙에 비해 그 효과가 미비하다. 부모에게 배신이라도 받은 얼굴을 보니 국민지에게 이철우라는 사람은 제법 중요하게 여겨지는 모양. 하지만 냉랭한 철우 씨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사과해.” “어…?” “당장 기연 씨에게 정식으로 사과해.” “하지만.” “나를 더 실망시키지 마, 민지야. 지금 최대한 좋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사과해.” 자존심을 굽히라는 말과 진배없는 발언.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결국에는 국민지는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혹시나 단검이라도 날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 아닌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입을 꽉 다문 채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니 그 정도로 미친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일을 벌인 상황. “죄… 송합니다. 끄으으윽.” “…….” “제, 제성합니다. 끄으으으으으윽. 잘못… 했습니다.” ‘그래. 잘못한 거 알면 됐다, 민지야. 언니한테 함부로 깝치는 거 아니야. 이게 사회생활이다. 즙은 뒤에 짜는 게 아니라 앞에 짜는 거야. 무조건 선즙이 유리한 거야.’ 사실 조금 더 궁지로 몰아넣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하지만 국민지가 이 정도까지 해줬다면 나 역시도 뭔가 액션을 보여줘야 한다. 이후 원정을 들어가야 하기도 하고 이렇게 감정의 골이 상한 상태에서 서로의 등을 맡겨야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으니까. “아뇨…. 제가 더… 죄송합니다. 부족한 게 많아서… 여러 가지로 오해하게 만든 것 같아서.” 손을 만지고 살짝 껴안아주기까지. 이쯤 되면 작은 전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여성 3인방 역시 순서대로 고개를 숙여 왔다는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제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기연 씨.”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아뇨.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으니 그렇게 고개 숙이실 필요 없어요. 제가 행실을 똑바로 하지 못한 탓도 있으니까요.” ‘진짜 착해져도 너무 착해졌다, 기연아.’ 평소였다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년들을 완전히 박살 내버렸을 것이다. 겨우 이 정도로 끝내준 것만 해도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감사의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마음씨도 예쁘네.” 김태건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어떻게 생각해도 옳은 말이었다. # 446 회귀자 사용설명서 446화 우정 클랜 우정에 금가는 소리(1) ‘이거 근데 이 상태로 잘할 수 있으려나.’ 이철우의 표정이 현재의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어떻게 봐도 작금의 상태로 뭔가를 한다는 건 무리수에 가깝다.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가라앉아 있는 것은 물론 파티원들이 커다란 갈등을 겪은 이후였으니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사과를 주고받아 억지로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기는 했지만 겨우 몇 마디 주고받았다고 해서 지난날의 앙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까보다는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국민지의 표정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참는다. 혹은 이번 원정까지만 조용히 있자는 느낌이 강했다.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을 뿐이지 표정 자체는 충분히 적대감이 있다고 말할 만했다. 만약 내가 우정 클랜의 클랜마스터였다면 분명히 파티를 뒤로 물렸으리라. 현재 상황에서 원만하게 전투를 끝낸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니까. 하지만 이번 원정을 뒤로 물린 다는 건 우정 클랜의 선택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웅 던전 입장 비용, 희귀 등급의 방값, 보험비와 그 외 잡다하게 빠져나간 비용을 생각해 보면 더욱이. 돌아간다는 것은 곧 빚더미에 앉는다는 말이다. ‘진짜 머리 아플 것 같은데….’ 그 말대로. 안전을 위해서라면 파티를 한 번 더 재정비하는 것이 무조건 옳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알고 있는 선택지였지만, 적어도 이 클랜은 이번 손해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내실이 탄탄하지는 않다. 너무 분탕을 친 것은 아닌지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은 당연지사. 그나마 보험이 있기에 망정이다. 만약 보험마저 없었다면 커다란 손해를 볼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던전을 빠져나갔으리라.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으니까. 이런 상황을 초래한 건 어디까지나 국민지 일행이었지만 어느 정도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나 역시 미안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괜스레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노력해 볼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기연 씨… 무리하지 않으시고 지시사항에만 잘 따라주시면 됩니다. 혹시 어떤 문제가 생겨도 저희 쪽에서 잘 수습해 보겠습니다.” ‘이놈 이거….’ 뭔가 커다란 기대를 하지는 않는 눈빛.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가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굉장히 섭섭해졌다. ‘그래. 니 마음대로 생각해 봐라. 누나가 다 알아서 해줄라니까.’ 주변 인물들이 너무 괴물이라 그렇지 나도 그렇게 약한 편은 아니다. 최소한 영웅 등급에서 비빌 정도는 된다. 아니, 오히려 조금 유능한 편에 속할지도 모른다. 디아루기아의 촉매로 날개나 꼬리를 만들었던 드래곤 알케미스트의 능력은 사용하기 조금 그렇지만 그전 직업이었던 고유 영웅 등급 생체연금소환사의 능력은 아직 건재. 예전과는 다르게 전설 등급의 촉매가 가방 안에 수두룩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물론 내 기본 능력 이상의 몬스터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게 현실이지만 최소한 이 정도 등급에서 빌빌거릴 정도로 빛기연은 약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패왕이라고 할 만하다. 홀로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김태건은 파티원들의 멘탈을 잡기에 여념이 없다. ‘그래. 그 정도는 해줘야지.’ 국민지를 따로 불러 잘 이야기를 하는 한편, 다른 세 여성의 멘탈도 케어하기 시작. 효과는 미비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확실히 국민지 외 4인방의 표정도 어느 정도 풀렸고 이번 원정이 끝날 때까지만 참아보자 생각하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국민지 패거리의 두 여성은 뭔가 이 파티에 정이 떨어진 것 같지만, 투자한 게 있는 만큼 이번 원정까지는 열심히 뛰어줄 것이다. 뇌피셜에 불과하지만 이번 원정 이후로는 우정 클랜의 행보가 그리 좋지만은 않을 것 같은 느낌. 이철우 바라기인 국민지야 클랜에 남을 것 같지만 남은 이들은 그렇지 않다. 혹시나 이번 원정 이후에 우정 클랜의 우정이 박살 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상황. 클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철우와 김태건도 이런 분위기를 느끼고 있기 때문에 저들을 잘 타이르려고 하는 것이리라. 이번 원정이 어떻게 끝나느냐. 거기에 이 클랜의 운명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축 멤버들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비장함이 감돌고 있는 게 바로 그런 이유였다. -우정 클랜 파티는 1분 후 진입 예정입니다. “모두 일어나시죠. 서로 조금 인상 찌푸릴 일이 있기는 했지만… 들어가고 난 이후에는 아까의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민지야.” “노력할게요, 오빠. 그리고 다시 한번 죄송해요.” “아니요.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민지 씨.” -영웅 등급의 박물관 전투실로 입장합니다. 모든 몬스터는 세 차례에 걸쳐 등장하며 높은 확률로 영웅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가 출연하게 됩니다. 보상 역시 세 차례에 걸쳐 지급되며 확률은 랜덤입니다. 전투실 오른쪽에 있는 돌림판을 돌려주시는 즉시 전투가 시작되니 이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돌림판도 여전하네.’ “신기한 시스템이네.” “그렇지…. 조금 애들 장난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위험은 진짜니까. 모두 준비는….” “준비됐어요.” “저도요, 오빠.” “네.” “그럼, 곧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돌림판이 돌아갑니다.] 모두 나름 긴장된 눈으로 돌림판을 바라보고 있다. 까다로운 몬스터가 나온다면 이후 전투에서도 문제가 생길 테니 무난한 녀석으로 나왔으면 바라는 듯한 모습. 아마 모두가 희귀 등급의 몬스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게 가장 남는 장사니까. 물론 그렇게 쉽게 일이 진행될 리 만무. [돌림판이 멈췄습니다.] [영웅 등급의 하위 네임드 몬스터 타락한 나무의 정령 엠브로시아가 선택되었습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다. ‘나쁘지 않은데?’ 목 속성의 몬스터라면 그나마 상대하기 편한 축에 속한다. 성직자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언데드나 애초에 상대하기 까다로운 독 속성 몬스터.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빠지는 화 속성 같은 것보다는 백 배는 낫다. 화 속성의 아티팩트가 가장 흔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 정도라면 무난하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으리라. “나쁘지 않군.” “응. 처음치고는 잘 걸린 것 같네. 일단 모두 전투 준비. 처음은 패턴을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태건아, 부탁한다.” “음.” “어그로가 확실히 끌릴 때까지는 마법이나 다른 공격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연 씨 같은 경우에는 따로 신호를 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전투 준비. 시작.” 철커덩, 철커덩거리는 소리와 함께 썩은 나무 자식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순식간. 덩치가 생각보다 커다란 느낌이라 아까 같은 여유가 얼굴에서 사라지기는 했지만 적당한 긴장감이 있는 편이 낫다. 곧바로 달려들기 시작하는 김태건과 김태건의 몸에 온갖 버프를 쏘아 주시는 성직자 이철우. 국민지 역시 돌발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만큼 김태건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이들의 능력치는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만했고 딱히 모난 곳이 있다고 하기에는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내 착각에 불과했던 모양. ‘뭐야… 이 새끼들 지금 뭐 하는 거지?’ 용맹하게 달려들어 커다란 몬스터에게 투닥거리는 꼴은 가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돌진했던 김태건은 어느새 녀석과 일기토 아닌 일기토를 벌이고 있었다. 자신의 용맹함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는 심정은 이해가 갔지만 이건 솔로 사냥이 아닌 파티 사냥. 파티원들이 들어올 공간까지 마련해 줬던 박덕구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거 덕구가 진짜 재능 있었던 거 아니냐….’ 박덕구 재능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사실 이철우 녀석도 마찬가지. 우리 파란에 메인 사제라고 할 수 있는 선희영과 질적으로 다르다. 사제는 단순히 힐만 넣고 버프만 넣어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멍청이가 많지만 엄연히 사제 역시 손 빨을 타는 직업 중에 하나다. 어느 정도의 신성력을 보유했냐만큼이나 어떤 타이밍에 주문을 걸어주는가 역시 중요하다. 더욱더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은 그나마 저 둘이 나은 편이었다는 것. 아무 의미 없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탱커의 시선만 분산시켜 주는 국민지. 쓸데없이 화살을 당기는 레인저. 서브 탱커 겸 근접 딜러의 역할을 부여 받은 여자 한 명은 도대체 뭘 하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파란에서의 포지션을 구분하자면 조혜진의 포지션과 굉장히 유사하건만, 자신이 뭘 해야 하는 건지 길을 잃은 게 보인다. 가장 최악인 것은 검을 들고 있는 여자. 즉 파티에서 김현성의 역할을 맡고 있는 녀석이다. ‘완전 쓰레기 아니야. 이거…. 저게 사람이냐?’ 애초에 우리 파티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는 하다. 개인 능력만 따지고 본다면 감히 언급하기가 미안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파란이 영웅 등급이었던 시절 때도 결코 저러지는 않았다. 개개인의 스펙은 낮았지만 팀플레이 하나 만큼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릴 만했다는 거다. ‘얘들은 어떻게 사냥하는지 잘 모르는 거야.’ 딱히 멘토가 없었음이 분명. 병아리 시절부터 사랑스러운 회귀자에게 빡세게 굴려졌던 우리 파티와는 태생 자체가 다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저들의 입가에는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보이기 시작. “시작이 좋군요.” 라고 지껄이는 이철우의 얼굴은 ‘이게 바로 우정 클랜이다’라고 말하는 듯했고 한 것도 없으면서 비릿하게 웃고 있는 국민지의 표정도 볼만했다. 본인들의 능력에 아주 대단한 자부심이라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슬슬 본격적으로 딜을 넣어도 될 것 같은데!” ‘그럼 지금까지는 뭐였던 건데… 이 새끼들아.’ “기연 씨, 바로 캐스팅 부탁드립니다.” “네.” “너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력을 아껴주시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저희가 전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뭘 믿고?’ “네.” 지루하다 못해 귀찮게 느껴진다. 이 정도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준신화의 힘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무한의 가방에 손을 뻗으니 평생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던 촉매가 손에 들어온다. [불의 거인의 정제된 마력 가루-전설 등급] 고작 영웅 등급의 몬스터를 처치하기 위해서 준비됐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비싼 촉매. 애초 영웅 등급 잡으려고 전설 등급의 촉매를 쓴다는 게 수지 타산에 맞지 않는다. 물론 돈이 썩어 나는 빛기연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지 허공에서 커다란 불의 주먹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 “태건 씨, 잠깐.” “네.”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닌지 마법이 떨어진 타이밍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바닥에서 튀어나온 커다란 손이 녀석을 붙잡는다. ‘이 새끼 왜 안 죽어?’ 아무리 전설 등급의 촉매를 사용했다고 한들, 공격력이 약하다는 고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모양. 확실히 효율이 좋다고 하기에는 힘들다. 디아루기아의 촉매라면 조금 더 나았겠지만 현재 내가 사용하고 있는 방식은 고작해야 고유 영웅 등급의 연금마법이었으니까. 물론 대미지가 아예 먹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딱 한 번에 정리되지 않았다는 건 아쉬워 할 만했지만 누가 봐도 타락한 나무의 정령은 대미지를 받고 있다. 손가락을 튕기자 다시 한번 커다란 주먹이 내리 떨어진다.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불의 거인의 상체가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커다란 녀석이 상대적으로 작은 나무의 정령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니 반칙처럼 보일 지경. 타락한 나무의 정령은 억울하다는 듯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지만 불의 거인은 빨간 불에도 멈추지 않는다. 콰득! 콰아아아아앙!! 콰지지직! 콰아아아아아아앙!!! 쿠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지금까지 사용한 촉매의 가격만 해도 천문학적이라고 하기에 충분.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우정 클랜 여러분은 커다랗게 입을 벌릴 뿐이었다. “말도… 안 돼….” ‘말 돼!’ # 447 회귀자 사용설명서 447화 우정 클랜 우정에 금가는 소리(2) 곤죽이 된 것은 물론,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버린 타락한 나무의 정령의 몸은 성한 곳이 없다. 화 속성에 제대로 두드려 맞았다는 걸 보여주듯 온몸이 시꺼멓게 그을렸고 제대로 된 형태를 유지하지도 못한 수준이었다. 압도적인 질량에 의해 한참 동안이나 두들겨 맞았으니 제대로 된 형태를 유지할 리 만무. 오히려 저 정도에서 그쳤다는 게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결과 자체는 고개를 끄덕일 만했지만 다시 말하면 녀석이 저런 꼴이 될 때까지 두들겨 패야 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뭐가 됐든 이들이 놀라워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리라. 이철우는 물론 김태건 그리고 국민지 외 4인방까지, 내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1인분만 해줘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놀랍다 못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신위를 보였다. 아직까지도 4인방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중. 그 정도로 빛기연의 업적은 대단했다. 마법 몇 발로 영웅 등급의 몬스터를 때려잡은 셈이다. 아마 저들의 눈에는 내가 천재 마법사 정하얀처럼 비치지 않을까. 최소한 지금 모여들고 있는 눈빛을 보면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이철우와 김태건은 눈을 비비고 있었고 국민지 외 4인방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다. ‘이제 좀 믿음이 간다, 이거지. 응?’ 바크 세르게이와 아르기르모가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무리하게 나를 찾아와 영입 제의를 한 이유에 대한 퍼즐을 맞추고 있음이 분명. 아까까지는 감도 잡지 못했겠지만 현재는 그 퍼즐이 무척이나 쉽게 들어맞고 있을 것이다. 왜. 답이 너무 뻔했으니까. ‘능력이 있으니까 똥줄이 타서 영입제의를 하러 왔겠지, 이 계집애들아. 이게 바로 클래스의 차이야. 클래스의 차이. 너희가 이런 영입제의를 못 들어봐서 그런 오해를 하는 거야.’ 전투가 완전히 끝난 이후에도 약 1분 동안이나 침묵이 내려앉은 상황. 이쯤 되니 어떤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지도 고민된다. ‘단순히 운이 좋았어요’라고 하기에는 보여준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내가 행동방향을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뭐라고 말을 잇기 전에 쏟아지는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 “대단하군요…. 그,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한 겁니까? 기연 씨.” “네? 그냥 평소대로… 보통 마법사들도 전부 할 수 있는 일 아닌가요?” “아니요.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보통의 마법사들은 이런 화력을 낼 수 없을 겁니다. 캐스팅 속도가 빠른 것도 그렇지만 마법의 위력이 영웅 등급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라.” ‘그야 당연하지. 전설 등급의 촉매를 쏟아 부었는데 영웅 등급이랑 비교하면 안 되지.’ “죄, 죄송합니다.” ‘그래. 니네는 또 뭐가 죄송하니?’ “아니요. 그렇게 죄송해할 필요 없어요.” “저희가 오해를 한 것 같아서….” “그런 오해는 많이 받았는걸요. 익숙하니까요. 정말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언니 정말로 죄송해요.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언제부터 내가 네 언니가 된 거냐.’ “아니에요, 미정 씨. 그럴 수도 있는 거죠.” ‘계집애들이 태세전환이 만만치 않아.’ “말 편하게 하세요. 기연이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진짜 대단하다. 나 같으면 염치가 없어서 그렇게 못 하겠다.’ “네, 물론이죠.” “마력이 높지 않으셨던 것 같았는데 정말 대단하신 건 같아요!” 심지어 비벼오지 않을 것 같았던 국민지마저 은근슬쩍 비벼오고 있다. ‘능력이라는 게 대단하긴 하다.’ 솔직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유희라면 유희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런 인정을 받는다는 게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쌍팔년도 소설책에 나왔던 드래곤이 왜 그렇게 허구한 날 인간인 척 싸돌아 다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온몸을 간질이는 쾌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 하는 김에 서비스도 조금 뿌려준다.’ “아! 그리고 아까 사냥하다가…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는데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기연 씨.” “그… 제가 사실은 여기에 오기 전에 붉은 용병에 네임드 몬스터 대응팀에 몸을 담은 적이 있어서요. 받아들이는 건 여러분 마음이지만, 아무래도 제가 보기에는 자꾸만 눈에 띄는 부분이 보여서.” “붉은 용병 말씀이십니까?” “네. 잠깐이었지만요.” “그게 정말입니까? 허.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기분 나쁘지 않게 들으셨으면 좋겠어요.” “기분이 나쁠 리가요.” “일단 태건 씨는 조금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있으신 것 같아요. 물론 몬스터와 정면에서 마주하면서 몸을 부딪쳐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으시겠지만 팀 내 사제를 믿고 조금 더 시야를 넓게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서브 탱커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얼굴이 붉어진 녀석의 눈에 보였다. 괜히 말했나? 싶었지만 이것도 전부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 이번에는 국민지 4인방에 포함되어 있는 서브 탱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또 파티 내의 서브 탱커의 역할은 메인 탱커가 리타이어했을 때 등장하는 걸로 끝이 아니라는 건 알고 계신 거죠? 두 분이서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스왑 과정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요. 서브 탱커 분이 조금 더 믿음을 줘야 앞에 있는 메인 탱커도 조금 더 여유로워질 수 있어요.” “아… 네.” “두 분이 제 역할을 해줘야 근접 딜러 분도 행동반경이 넓어질 수 있고요. 또 암살자 클래스에게 파티원들이 바라는 게 많은 건 아니에요, 민지 씨. 움직임이 많은 건 좋지만 오히려 신경을 쓰이게 하는 움직임이라…. 차라리 평소에는 원거리 지원을 하시는 게 좋겠어요. 석궁 다루실 줄 아시잖아요? 그렇죠? 어그로가 좀 더 꽉 잡혔다면 근접으로 싸우시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요.” ‘니가 김예리도 아닌데 그렇게 움직이면 안 되지.’ “가장 포지션이 애매한 건 파티 내 근접 딜러 분인데… 아무리 내구 스탯이나 체력 스탯이 낮다 해도 너무 몸을 사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부상을 우려하시는 거라면 이해가 가지만 검사 클래스면 어쩔 수 없어요. 공격이 날아오면 무조건 피하거나 탱커들이 막아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검을 들어야 해요. 조금 잔인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중상을 입을 각오를 하셔야 돼요. 레인저도 마찬가지고요. 어그로 잡히기 전까지 툭툭 던지는 화살이 탱커한테 많이 스트레스를 준다는 건 알고 계신 거죠?” “네.” “또 철우 씨도 신성력을 낭비하시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방금 나온 몬스터 같은 경우에는 버프가 없어도 충분히 태건 씨가 버틸 수 있었어요. 첫 버프 이후부터는 팀 내 근접 딜러에게 몰아주시는 게 더 좋으실 거예요. 치유주문 타이밍도 잘 생각해 주시고요. 큰 공격이 떨어지기 전에는 캐스팅이 준비되어 있어야 해요. 그래야 떨어지고 난 이후에 곧바로 신성 주문이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개개인의 능력은 다들 좋으신 것 같은데 호흡이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라서…. 파티원 분들의 포지션을 이해해 주시면 훨씬 더 결과가 좋을 거예요.” 너무 팩폭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눈빛에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기존에 보여줬던 내 능력이 도움이 됐음이 분명. 사실 갓기연 개인이 가지고 있는 화법도 커다란 역할을 했을 것이다. 탱커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서브탱커와 사제가 조금 더 잘해줬다면, 서브탱커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근접 딜러가 조금 더 잘해줬다면, 이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시킨 것. 개인이 지적당한다면 그저 기분 나빠 하는 걸로 끝이겠지만 집단 전체에 조금씩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면 결과가 조금 달라질 수도 있다. ‘훌륭하죠. 아주 훌륭해요. 너무 착한 거 아니냐, 기연아.’ 잠깐 몸을 담은 파티를 위해 너무 많은 서비스를 해준 것은 아닌지에 대해 고심해 볼 정도.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이들의 얼굴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조금 갑작스러웠던 것은 갑작스레 이 자리에 있는 파티원들이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안달이 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 마치 대형 길드의 스카우터의 눈에라도 띈 것 같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 자세 좋다. 그런 열의가 중요한 거야. 너희 자질은 나쁘지 않아. 충분히 오퍼 받을 수도 있다.’ 파란은 녀석들을 영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혹시나 운이 좋다면 다른 대형 길드에서 우정 클랜이라는 하나의 파티를 영입할지도 모른다. “일단 보상부터 돌리시고… 다음 네임드 몹은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해보시겠어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한 대비는 제가 해드릴게요.” “이거 감사합니다, 기연 씨. 도움만 받는 것 같군요.” “아니요. 이렇게라도 도움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죠. 뭐, 일단은 보상 돌림판부터 돌려보죠.” “아. 네.” [돌림판이 돌아갑니다.] [돌림판이 멈췄습니다.] [희귀 등급의 아이템 전사의 뿔피리가 선택되었습니다.] “끄응. 희귀 등급의 아이템인데….” “아직 두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으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태건아.”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그럼 다음 몬스터는 민지 네가 돌려볼래?” “네. 오빠.” [돌림판이 돌아갑니다.] [돌림판이 멈췄습니다.] [영웅 등급의 하위 네임드 몬스터 지옥수문장 카르사크가 선택되었습니다.] ‘음. 얘도 괜찮네.’ “바로 전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당연하지만 얼굴에는 비장한 표정이 감돈다. 아까와 마찬가지. 이철우의 버프가 김태건에게 쏟아지고 김태건이 몬스터의 사정거리 안에 진입하며 전투가 시작된다. ‘아까보다는 낫겠지?’ 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아예 기틀이 없었던 전과는 다르게 현재는 최소한의 기틀은 잡혀진 상태라고 할 만했으니까. 하지만 그것 역시 내 착각에 불과한 모양. “스왑! 스왑!!” “근접 딜러 너무 들어가면 안 돼!” “태건아! 고개 돌려줘야지!!” “버프는 왜 안 와! 버프!!” ‘슈바. 이거 개판인데.’ “민지야! 화살! 쏘지 마! 쏘지 마! 딜 중지! 딜 중지!!” 잘못 생각했다. 주문이 너무 갑작스러웠는지 진영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개판 오 분 전이라고 봐도 할 말이 없는 수준. 아까처럼 싸웠다면 시간이 걸리더라고 잡을 수는 있었겠지만 지금 녀석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전멸 일보직전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서브 탱커와 메인 탱커의 스왑 과정은 기괴했고 심지어 제대로 스왑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중상을 입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내 말을 중상을 입으라는 말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근접 딜러는 무리하게 들어가 어그로를 개판으로 만드는 중. 국민지는 석궁이 익숙하지 않은지 카사라크의 왼쪽 눈알에 석궁을 때려 박아 몬스터에게 광폭화라는 선물을 주었고 레인저는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철우는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곧이곧대로 근접딜러에게 버프를 밀어 넣고 있다. 광폭화로 인해 탱킹을 힘들어 하는 김태건은 보이지도 않는 모양. ‘얘들 뭐 하는 거냐. 진짜.’ 이대로 간다면 누구하나는 높은 확률로 요단강 건널지도 모른다. 아니, 거의 백퍼센트라고 봐도 무방하다. 무조건 한 놈은 건넌다. 결국에는 또다시 아까와 같은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불의 거인이 등판해 지옥수문장 카사라크의 뚝배기를 건드리기 시작하자 상황이 겨우 마무리됐다. 깊은 숨을 몰아쉬고 있는 파티의 모습은 가관. 혹시나 이 꼴사나운 모습의 공을 내 것으로 돌리지는 않을지 걱정되기는 했지만 양심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녀석들이 선택한 것은 그것보다 더 최악의 방법. “철우야, 너만 믿고 있었는데… 버프가 너무 안 들어오더라.” 기적의 남 탓. 우정 클랜의 우정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거 아니야, 이 새끼들아.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어. 니들 사이 박살 내려고 한 게 아니었다고.’ # 448 회귀자 사용설명서 448화 우정 클랜 우정에 금가는 소리(3) “철우야, 그래도 나는 너만 믿고 있었는데… 버프가 너무 안 들어오더라.” 별것 아닌 대사이긴 했지만 본래 모든 문제는 저 별것 아닌 것에서 시작된다. 이미 많은 이가 알고 있으리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교훈… 최소한 한국에서 온 모험가라면 이 말의 뜻을 모를 리가 없다. 사실 딱히 이철우를 노렸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말투였다. 아쉬운 소리에 한 번 내질러 본 대사. 푸념하듯이 중얼거린 것을 보면 책임을 회피하거나 정치질을 시작하기 위해서라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째서 갑자기 저런 아쉬운 소리를 지껄였는지는 뻔했다. ‘부끄러운 거겠지.’ 방금 전 형편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변명하기 위해 지껄이는 것에 불과하리라. 지금 이 순간에도 얼굴을 붉히고 있는 김태건은 방금의 모습이 진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여기는 듯했다. 허둥지둥 대며 몬스터와도 마주하지 못했던 꼴사나운 행태는 지금 떠올려도 내 얼굴이 다 붉어질 정도. 일반인들은 그게 뭐가 문제냐 말하겠지만 최소한 영웅 등급 전사의 행동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1회 차 박덕구가 던전 안에서 보였던 트롤짓보다도 더 꼴불견이었다. 하물며 몇 년이나 칼밥을 먹었던 사건의 당사자가 얼마나 부끄러워할지에 대해서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 터. 말을 마친 뒤에도 힐끔 힐끔 이쪽을 바라보는 것을 보니 나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이유도 지분이 있을 것 같았다. ‘지 잘못 아니라 이거여. 저런 놈들이 문제야. 저런 놈들이.’ 이철우 역시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는 마찬가지. 갑작스레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이다. “미안하다. 근접 검사한테 조금 더 투자한다는 판단이었는데… 기연 씨도 그렇게 이야기했었고….” 말끝을 살짝 흐린 이철우의 시선이 머문 것은 예의 그 검사가 자리한 곳.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은근슬쩍 책임을 회피하는 솜씨가 정치인 못지않다. “은혜 씨가 너무 무리하게 들어간 것도 있죠. 어그로를 잡기가 힘들었으니까.” “저는 기연 언니 말대로… 했어요. 목숨을 걸고 움직였다고요. 중상을 입을 각오로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해지죠.” “그것도 전부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지. 그냥 막 들어간다고 능사가 아니잖아?” “아니, 애초에 처음 문제는 카사라크의 눈에 화살이 박히면서부터였어요. 거기서부터 꼬인 거니까.” ‘처음부터 꼬인 거였다. 이 새끼들아.’ 하지만 이들 중 몇몇은 그 의견에 공감하는 모양인 것 같았다. 사실 굳이 명장면을 꼽자면 몬스터를 광폭화시킨 그 공격이 베스트3 안에 들어갈 만하다. 국민지 당선 유력. 방금 전 형편없었던 싸움의 책임이 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 떠넘기는 꼴은 가관. 꼼짝없이 당선될 거라고 생각했던 국민지 역시 유연하게 상황을 빠져나간다. “스왑 과정에서 박히게 된 화살이라서 어쩔 수 없었어요.” 이렇게 되면 김태건과 서브탱커의 당선이 유력해진다. 스왑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건 부정할 여지가 없었으니까.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접전에 누가 이 던전의 트롤러가 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계속해서 돌아가기 시작하는 화살표는 마치 균열 박물관에 돌림판을 보는 듯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민지야. 하… 백업이 없는 상태에서 스왑하는 게 얼마나 부담되는데….” ‘여기서 미정이가 치고 들어오네.’ 클랜명과 어울리지 않게 떠넘기기가 계속되고 있는 중. 하지만 이 정도라면 아직 수습해 볼 만하다. 아직은, 아직까지는 모두의 태도가 미적지근하고 굉장히 소극적이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들은 사이가 꽤 좋아보였고 서로에게 싫은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몇 차례에 걸친 국민지 포함 4인방들의 트롤짓을 웃으며 받아줬던 이철우만 봐도 그건 답이 나온다. 물론 불안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아마 비치기연 오해사건. 이 커다란 사건이 이들이 목소리를 내게 된 계기라 단정 지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끈끈한 믿음으로 구축된 관계에 펼쳐진 아주 작은 균열. 여성 파티원들의 가슴 속 한편에 남성 파티원들에 대한 섭섭함이라는 마구니가 침투하고 만 것. 지금만 봐도 이철우를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이철우 바라기인 국민지는 아직까지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지만 최소한 다른 이들은 확실하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클랜 마스터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녀들뿐만이 아니라는 것. 자신의 불알친구를 바라보는 김태건의 눈빛에 미묘한 감정이 실려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이 새끼 질투 하나보네.’ 명백한 질투심. 차희라를 바라보는 정하얀처럼 대놓고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고 있는 것 같았지만 틀림없이 이철우를 바라보는 시선에 질투심이 섞여 있다. 무엇에 대한 질투심인지 고민했던 것도 잠시. 계속해서 발정 난 것처럼 달려들던 두 녀석이 떠오른 것은 당연지사. 어쩌면 녀석이 보내는 질투의 원인이 빛기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철우의 품에 안겨 아양 아닌 아양을 떤 게 바로 첫 번째 이유. 클랜 마스터랍시고 조금 더 많은 정성을 쏟은 게 두 번째 이유다. ‘브리핑 때도 잘하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었나?’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클랜 마스터로서의 체면은 구겨지지 않게 조심조심 말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클랜원들 앞에서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권위에 스크래치가 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그게 김태건을 자극했을 수도 있으리라. 이철우가 자신보다 더 유능하고 능력 있는 남자로 비춰지는 게 갑작스레 아니꼬와 진 것이다. 그 와중에 자신은 전위로서 온갖 추태를 부리며 커다란 똥을 쌌으니 민망함이 배가 됐을 터. 확실히 이런 경우에는 서포터 같은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유리하다. 대놓고 똥 싸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으니까. 아무튼, 지금의 사단이 만들어진 원인은 수컷의 질투라고 봐도 무방. 점점 더 목소리가 커져가는 우정 클랜에게 내가 취해야 할 조치는 간단했다. 일단 싸움을 말리고, 패배했다고 생각하는 김태건의 기를 살려주자. “그러니까 거기서 왜! 몬스터가 광폭화 상태로 들어간 것도 제대로 확인 못 한 거야? 이런 싸움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잖아.” “조금 더 집중할 곳이 있다고 이미 말했잖아. 네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는 알겠는데, 그게 온전한 내 잘 못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것 같다.” “그렇지. 너는 항상 그런 식이지.” 여기서 개입. “아뇨. 아뇨. 다들 잘하셨어요. 제가 처음인데 조금 무리한 주문을 드린 것 같기도 하고… 파티마다 사냥 방식은 다른 법인데, 제가 너무 아무렇게나 말한 것 같네요. 기존의 여러분 방식으로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아요.” ‘이 개노답들아. 대륙의 미래가 어둡다. 진짜 어떻게 하냐.’ “아닙니다. 기연 씨. 기연 씨가 말씀해 주신 부분들은 저희도 항상 느끼고 있었습니다. 숙련도가 부족했다고 말하는 게 오히려 맞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첫 몬스터는 굉장히 무난한 흐름이었던 것 같았는데… 어떻게 봐도 제가 쓸데없는 말을 드리는 바람에 혼란만 가중된 것 같네요. 파티 플레이라는 게 하루 이틀 손발을 맞춰서 되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으셔도 돼요, 태건 씨.” “…….” “태건 씨가 재능 있는 전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몬스터를 상대하는 호흡이나 거리를 벌리는 것만 봐도 얼마나 경험이 많으신지 다 보인답니다.” ‘입 찢어지네. 입 찢어져. 이 새끼. 딱 그거 두 개만 볼만했다.’ “못난 모습을 보여서…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니요. 전위로 보여주실 수 있는 건 전부 보여주셨어요. 태건 씨 잘 못이 아니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버프가 없는 상태로 광폭화된 네임드 몬스터를 잠시나마 붙잡을 수 있다는 건 다른 전위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죠.” 싱긋 웃어주는 것으로 마무리. 그제야 조금 진정하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기연 씨 말이 맞습니다. 버프만 있었으면 더 잘 상대할 수 있었을 겁니다.” ‘거기서 그런 이야기는 왜 해, 미친놈아.’ 김태건의 뒤끝어린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이철우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얌전한 녀석답지 않게 눈썹이 꿈틀 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얼굴이 달아오른 게 흥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했잖아, 태건아.” “아니, 내가 뭐 다른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아쉽다고 한 건데…. 혼잣말 하듯이 한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철우야.” “어떻게 신경이 안 쓰이겠어? 그리고 나도 신성력을 관리해야 되는 사람인데. 애초에 네가 그렇게 무식하게 달려가지만 않았어도….” “뭐? 네 신성력이 부족한 게 내가 파티원들을 지키려고 달려갔기 때문이라는 건 아니지?” “하…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그런 의미가 아니긴. 그런 의미로밖엔 안 들리는데.” ‘그만해. 이 새끼들아.’ 이대로라면 이철우의 당선이 유력하다. 불알친구마저 등을 돌려 버렸고 앞전의 국민지에게 커다란 노호성을 내질러 비호감으로 찍힌 상태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국민지 외 여성 3인방이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 대놓고 디스하는 건 아니었지만 제대로 된 정치공작이라 할 만했다. 태세전환을 하는 속도가 심상치 않아 이런 종류의 싸움에 강할 거라 생각은 했었지만 은근슬쩍 물어뜯는 포지션은 마치 사냥에 임하는 늑대무리를 연상케 할 정도. 이 상태라면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당선이 확정될 것이다. ‘그건 막아야지.’ 사실 어찌되든 상관은 없긴 하지만 이 모든 게 내 선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자 일말의 책임감이 느껴진다. 어찌됐건 이들을 이쪽으로 끌어 들인 것은 나였으니까. 최소한 쑤셔놓은 상처에 소독약 정도는 뿌려도 되지 않을까. “다들 잘하셨어요. 딱히 누구의 탓도 아니니까. 모두 열 내지 않으셔도 돼요. 이러니까 제가 너무 죄송하네요. 괜한 말씀을 드린 것 같고…. 다들 표정 푸세요. 모험가 분들은 종종 이런 경우 많이 겪으시잖아요.” ‘그래 딱히 누구의 탓도 아니지. 니들 전부가 문젠데.’ “…….” “…….” “원정 진행해야죠?” “네. 마저 진행해야겠죠.” “그래요. 그렇게 합시다.” “그러고 보니까 보상도 확인을 안 해봤네요.” 이미 커다란 상처를 떠안게 된 파티. 그래도. ‘반전의 여지는 있어.’ 영웅 등급 이상의 아이템이 나와 준다면 다시 한번 파티원의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다.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파티원들의 얼굴이 그나마 나아진다. 보상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보물 상자를 여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이들의 얼굴은 누가 봐도 크게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는 게 좋겠지.” “일단 진행부터 하는 게 좋겠어요. 오빠들.” “그래….” “아까 전은 희귀 등급이었죠. 영웅 등급만 나와줘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 꼭 영웅 등급이 나와야겠네요. 2번째 몬스터는 촉매로 쓰기에도 애매하니까….” “끄응. 확실히 제한적이겠네.” “일단 돌려보면 알겠죠. 시작하죠.” “그럼 돌릴게요.” “베니고어 님, 제발….” 여성 몇몇이 손을 꼭 감고 기도를 드리는 게 시야에 비쳤다. 베니고어의 신성을 오르게 하는 뜻밖의 박물관 효과. ‘이거 은근히 효과 있겠는데.’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박물관은 베니고어를 비롯한 신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간에 짧은 기도회 이후에는 과감하게 여성 한명이 돌림판을 돌리기 시작. [돌림판이 돌아갑니다.] ‘가즈아!’ “보라색! 보라색!!” [돌림판이 돌아갑니다.] “영웅 등급! 영웅! 아니면 전설!” [돌림판이 돌아갑니다.] “제발! 제발!” [돌림판이 멈췄습니다.] “영웅 등급! 영웅 등급 떠!” “제발….” ‘가즈아! 베니고어의 힘으로 가즈아!’ 띠링! [일반 등급의 아이템, 천재검사와 연금술사가 사랑하는 법 원고판(무삭제-19세 미만 구독불가)가 선택되었습니다.] “…….” “어?” “…….” 김태건이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방패를 집어 던지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시부랄!” 원정은 끝났다. # 449 회귀자 사용설명서 449화 우리 현성이(1)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원정이 끝났다. 물론 나머지 한 번의 기회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당장 기분은 나빴지만 정해진 횟수는 채워야 했고 혹시나 다음에는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또 한 번의 희귀 등급의 아이템. 마지막 네임드 몬스터 사냥에서 온갖 추한 꼴을 보여준 것치고는 무척이나 초라한 결과물이었다. 막대한 손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 이들이 거의 전 재산을 건 모험은 희귀 등급의 아이템 두 정과 천재검사와 연금술사가 사랑하는 법 무삭제판을 끝으로 비참하게 마무리되었다. 그야말로 상처뿐인 원정. 분위기가 거지 같았다는 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 역시도 일이 이렇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다. 우정 클랜 애들이 운이 없는 건지, 박물관의 현실이 이렇게 지독한 건지는 한번 알아 봐야겠지만 적어도 눈앞에 있는 이들에게 닥친 시련은 현실이었다. ‘사업자 입장에서는 개이득이라고 할 만하지만….’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패잔병들의 모습은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 정도. 모두가 하나 되어 이 위기를 해결하고자 머리를 맞대도 부족하건만, 앞서 일어난 사소한 다툼은 아직도 이들을 과거 냉전시대로 들이밀고 있었다. ‘우정 코인 떡락.’ 계속해서 클랜을 운영할 힘이 남아있는지가 궁금할 지경. 아니, 그보다 이 클랜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국민지를 제외한 여성 3인방의 눈빛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니 저들 역시 나름대로 생각이 남아진 모양이다. ‘떡락은 손절이다’라는 지고의 격언을 잊지 않았는지 손절 타이밍을 보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순진한 이철우는 저들의 탈주를 예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탈주의 냄새가 이미 코끝을 찌르고 있다. 장님도 우정 클랜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끝났네.’ 정말로 확신할 수 있다. 근 일주일 내에 우정 클랜이 완전히 침몰할 거라는 걸.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부터 가라앉을 수도 있다. “…….” “…….” ‘나도 빨리 손절해야겠는데.’ 약간의 책임감이 생기기야 했지만 고개를 한 번 흔들자 그런 마음도 말끔히 사라졌다. 내 할 일은 전부 해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네임드 몬스터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내 지분이 70%가 넘어간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저…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오빠들.” 입을 연 것은 국민지. “글쎄. 일단 숙소에 가서 생각해 봐야지. 아직 며칠 묵을 돈은 남아있으니까. 아이템도 여기서 처분하는 게 더 좋을 테고. 대출이라도 해서 다시 한번 들어오든지. 아니면 다른 노선을 찾든지 해야겠다. 손해를 많이 보기는 했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으니까.” ‘대출은 하지 마라.’ “조금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요? 애초에 박물관에 어째서 이런 책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고….” “말 들었잖냐. 소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대륙의 물품들도 가지고 있다고. 베스트셀러의 원고판이라면 박물관에 전시될 가치가 있었다고 판단한 거겠지. 나도 납득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격은 꽤 쏠쏠 할 거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얼마나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가격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팔 수 있도록 해봐야지. 제길.” “어렵겠네요.” ‘경매에 붙이는 게 쉬운 건 아니지.’ 확실히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 비싼 가격에 팔릴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전부 희망사항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 손해를 메우기에는 부족할 것이 분명. 경매 수수료도 어마어마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실제로 먹을 수 있는 건 얼마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 수수료 정도는 내가 처리해 주마.’ “그 정도는 제가 처리해 드릴 수 있어요.” “네?” “경매장에 조금 연줄이 있어서요. 맡겨주시면 판매하고 대금은 따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양도 계약서를 따로 작성해도 되고요. 아무래도 수수료가 만만치 않아서…. 따로 말씀을 잘 드리면 어느 정도 이해해 주시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아니요. 아닙니다. 따로 계약서를 작성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습니다. 연줄이 있으시다면 오히려 부탁드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 기연 씨는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뭘 어떻게 해. 나는 내 할 일 하러 가야지.’ 이쯤해서 손절하는 게 타이밍상 맞다. “글쎄요….” “일단은 식사라도 하러 가시죠. 실패한 원정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드릴 말씀도 있고….” ‘영입 제의는 아니길 빈다, 이 새끼야. 어떻게 니들이 나를 품을 생각을 하냐? 이 양심 없는 놈. 그건 아니지.’ 막 거절의 뜻을 내비치려 했을 때였다. 국민지외 여성 3인방이 먼저 타이밍을 빼앗아 온 것. “오빠, 저희도 따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어?” “안 좋은 상황에 이런 말씀 드리기 정말로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저희는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뭐?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사실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거였는데 타이밍이 이게 맞을 것 같아서요.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어차피 딱히 계약기간 같은 것도 없었으니까. 이쯤에서 찢어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클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김태건 역시 화들짝 놀라는 모습.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표정을 보니 쉽지 않을 것 같다. 클랜이 존망의 기로에 서 있는데 총원 6명인 클랜에서 3명이 갑작스레 빠져나간단다. 저런 표정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저 여성 3인방을 뭐라 욕할 수도 없는 상황. 갑자기 들어온 불여시에게 미쳐 내정을 소홀히 한 클랜마스터와 부클랜마스터의 책임. 우정 클랜이 겪어야 할 뜨거운 홍역이었다. “따로 정산은 안 받아도 돼요. 여러모로 힘드실 테니까. 다만 희귀 등급의 아이템 한 정은 따로 챙겨갈게요. 그건 괜찮죠?” “그건 상관없지만, 아니, 이게 아니라. 우리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는 게 어떨까. 이대로 대책 없이 떠나버리면… 조금. 너희에게도 그리 좋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제대로 된 거취가 정해지고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뇨. 오빠들 마음은 이해하지만 우정 클랜이랑 저희와는 상성이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오늘 사냥에서도 조금 그랬고. 또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도 한 몫 하고요. 정말로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언니들,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갑자기.” “민지야, 너도 잘 생각해 봐. 정말로 계속 몸담고 있을 만한 곳인지.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 그래도 밖에서 만나면 서로 아는 체해요, 오빠들. 가끔 비정기적으로 만나서 사냥 같은 걸 해도 되고요. 민지는 꼭 따로 연락하고…. 기연이 언니도 저희가 따로 연락드릴게요.” 빠르고 냉혹한 손절이었다.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전 우정 클랜의 여편네들의 마음은 홀가분해 보였지만 다시 한번 우정 클랜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다소 민망한 상황이 펼쳐졌다. 나라라도 잃은 것 같은 얼굴의 김태건과 이철우. 물론 빛기연이 저들의 처지를 봐줄 만한 인성의 소유자는 아니다. 손절은 빠르게. 애송이들에게 선수를 빼앗겼다는 게 은근히 자존심 상한다. “죄송합니다. 저도 따로 해야 될 일이 있어서요.” “네?” “그… 원정은 즐거웠어요. 철우 씨, 태건 씨. 민지 씨도 조금 오해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즐거웠고요.” “이렇게….” “아무래도 여기는 제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서요. 사실 저 같은 경우에는 어딘가의 소속되는 걸 불편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죄송해요.” “기연 씨, 잠깐 이야기 좀.” ‘구질구질하게 달라붙지 말자.’ “아뇨.” “기연 씨, 어떻게 이런 식으로….” ‘뭐, 인마. 우리가 무슨 사이였다고 갑자기 이런 식으로야?’ “기연 씨, 저희 클랜과 함께하는 원정이 불편하셨다면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제 얼굴을 봐서라도 부탁드립니다.” 니 얼굴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야. 철우야, 니 얼굴은 아무 상관없어. “사실은 이렇게 드릴 말씀이 아니지만 다음 원정. 그리고 가능하시면 함께 클랜을 꾸려 움직였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저희가 많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부디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그렇네요. 저도 함께하고는 싶지만… 정말로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일단 함께 숙소로 가서 식사라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번에 도움도 많이 받았고 뭐라고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 장담컨대 숙소로 들어가 식사를 하는 순간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걸려들고 말리라. 저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나를 붙잡아 놓으려고 할 것이 분명. 만약 여기서 우정 클랜이 빛기연이라는 재원을 얻는다면 모든 손해를 메우고도 남을 막대한 이득을 얻게 된다. 내가 어느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다른 말이 필요할 리 없다. “그, 그래요 언니…. 같이 가요. 제가 죄송해요.” 심지어는 국민지까지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 지금 당장 대형 길드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재원을 공짜로 영입하겠다는 도둑놈 심보에는 헛기침이 나올 정도였다. “기연 씨.” ‘이제 그만해라, 이 새끼야.’ 심지어 덜컥 손을 잡아오는 꼴은 가관. 얼굴이 왠지 모르게 굉장히 진지하다. “그…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습니까?” “아뇨. 그런 건 없는데.” “제 착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더, 던전 안에서 뭔가 기연 씨와 제가 같은 감정을 교감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무슨 감정.’ 가끔 이렇게 착각하는 놈이 있다. 잠깐 잘해줄 뿐이었는데 대단한 감정이라도 주고받은 것처럼 달라붙는 이들. 순진하게 생긴 녀석은 굉장히 붉어진 얼굴로 이상한 대사를 내뱉지만, 겨우 이런 수단이 철옹성 같은 빛기연의 마음을 흔들 리 만무하다. 오히려 조금 더 기분이 나빠진다. 남자새끼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오히려 소름이 끼친다. “저는 철우 씨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불편하기도 하고요. 손 좀 놔주시겠어요?” “기연 씨.” “그 손 놔라, 철우야.” 심지어 덩치 큰 녀석도 이 난장판에 등판했다. 도시 한복판에서 펼쳐진 사랑과 전쟁. 김태건 자식도 갑작스레 등판해 나와 이철우 사이에 마주 선다. 덜컥 다른 손을 붙잡고 공주를 지키는 기사인 양 이철우와 대립하는 모습은 꼴불견 중에 꼴불견. 시선이 점점 모여들고 있는 것 같아 당혹스럽다. “두 분 다 이것 좀 놔주시겠어요?” “기연 씨, 제발 한 번만 더 생각을…. 따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그때였다. 다소 강경한 수단을 사용하려던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놓으시죠.”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본 순간 시야에 비친 것은 두 오징어와는 레벨이 다른 외모. 조각 같다는 표현 말고는 달리 형용할 수 없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한 자루의 검. 무장은 조촐하지만 가슴에 박혀 있는 휘장은 갑작스레 등장한 인물의 신분을 알려주고 있었다. 더 이상의 외모 묘사는 나 자신이 비참해져 입에 담을 수 없다. ‘이 새끼, 뭐야. 왜 이렇게 잘생겼어.’ 파란의 길드마스터.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이었다. “두 번 말하지 않겠습니다. 놓으세요.” # 450 회귀자 사용설명서 450화 우리 현성이(2) “파란 길드마스터?” “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두 명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지 물어보는 듯한 표정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 단신으로 도시 한복판을 돌아다니는 녀석과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키야. 이 정의로운 자식.’ 아마 장정 두 명이 아녀자 한 명을 희롱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참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어찌됐건 자신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일단 인사드리겠습니다, 파란 길드마스터. 하지만 이건 파란 길드마스터가 생각하시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린델에서 활동하는 우정 클랜으로….” “여성분이 싫어하지 않습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연 씨. 뭐라고 말 좀….” 도움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지만 이미 손절 타이밍은 한참 전에 지난 상황. 손목이 자유로워지자 황급히 김현성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쓰레기 같았지만 아무래도 녀석들과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파란 길드마스터.” 그림으로 그린 듯한 태세전환. “기연 씨!” “철우 씨, 원정은 즐거웠지만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방금 하셨던 행동이 얼마나 무례하셨는지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얻은 아이템은 처분하는 즉시 곧바로 보내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조금 머리를 식힌 이후에 연락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런….” “다음에 만날 때는 웃으면서 만났으면 좋겠어요.” 내가 말을 끝내자 얼굴이 흙빛이 된 녀석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울상을 하고 있는 이철우는 조금 불쌍했지만 볼일은 끝났다. 확인할 수 있는 건 전부 확인했고 전체적으로 현재 모험가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이상 쟤네들이랑 같이 다닐 이유가 없다는 거다. 언제나 손절은 냉혹한 법. 나를 힐끔 바라보던 이철우는 이내 김현성이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기연 씨. 상처를 드릴 의도는 아니었는데…. 기연 씨 말씀대로 머리를 조금 식히고 뵙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원정 함께해서 정말로 즐거웠고 꼭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묵었던 숙소에서 기다릴 테니 경매 대금은 그쪽으로 부쳐주시면 됩니다. 그럼….” “네. 들어가세요. 따로 배웅은 드리지 않을게요.” 풀이 죽은 게 꼭 나라 잃은 느낌이다. 어버버 하고 있는 김태건도 나에게 고개를 숙이곤 이철우의 뒤를 따랐고 국민지도 녀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주 잠깐의 유희가 끝난 이후, 슬그머니 김현성을 봤지만 딱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눈치 못 채고 있나?’ 황급히 자리를 옮기거나 내가 이기영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선택지도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나쁘지 않은 느낌이 든다. 최근 김현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디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으니까. 중간에 정체가 들킬 가능성에 대해서도 떠올려 봤지만. ‘쟤는 눈치 더럽게 없으니까.’ 대놓고 힌트를 주지 않은 이상은 알아 챌 것 같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의심하지 않는 기색. 박덕구와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덕구가 회귀했으면 이 새끼야. 벌써 세계의 위협이고 나발이고 3년 안에 막아낼 수도 있었겠다.’ 농담 삼아 던진 생각이었지만 왠지 정말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간에 녀석은 사심 하나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 숙이고 자신이 가던 길로 마저 향하기 시작. ‘뭐야. 이대로 가?’ 오히려 다급해진 것은 내 쪽이었다. “파란 길드마스터!” 다행히 돌아봐 주기는 한다. “네?” “감사했습니다. 마침 조금 곤란하던 차였는데.”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럼.” “저기!” “네.” “감사의 인사로 차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혹시 시간 있으신가요?” “딱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 시바 눈치 없는 새끼!’ 왜 녀석을 둘러싸고 있는 여성진이 매일같이 똥 씹은 표정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눈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영원히 고통 받는 박연주, 조혜진, 샤를롯트, 김예리. 그들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지 대충은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 온몸으로 눈치를 줘도 제대로 받아먹지도 못했을 거라 장담한다. 딱히 녀석을 붙잡을 명분이 없는 상황. 혼자 입꼬리를 내리고 있었을 때 나를 천천히 살펴보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뭐야.’ “닮았군요.”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인연인 것 같은데 잠깐 차, 아니, 식사라도 하시죠.” 가슴이 철렁했던 것도 잠시. 이윽고 들려온 녀석의 목소리에는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닮았다는 건 아네. 심장 떨어질 뻔했네.’ 운이 좋았다고 말해도 될 것 같았다. 빛기영과 얼굴이 묘하게 닮은 게 놈의 호감을 산 것이 분명. 보통 김현성은 남에게 먼저 식사나 차를 제안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낯선 사람이라면 일단 피하거나 경계한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은 녀석의 방어막이 많이 완화됐지만 튜토리얼에서 막 튀어 나왔을 때는 전혀 이렇지 않았다. 식사는커녕 동석도 하지 않았던 것이 현실. 녀석의 성장의 조금은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야 많겠지만 결과적으로 유해진 것이다. 단순히 빛기영과 닮았다는 이유로 저런 제안을 해올 정도라면 나에 대한 호감 역시 아직 충분하다는 것. 너무 1차원적인 걱정은 일단 구석으로 몰아놔도 상관없으리라. “네. 그렇게 하도록 해요. 파란 길드마스터와의 저녁식사라니. 제가 더 감사하죠.” “…….”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놀리고 싶어진다. “이거 데이트 신청인가요?” “아,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 건….” 우물쭈물하는 듯한 얼굴. 왠지 평소 같은 느낌이라 조금은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시 호흡을 가라앉힌 녀석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이렇지 않습니다. 남에게 함부로 식사를 권하거나 시간을 내달라고 하는 타입도 아니고요. 그런데….” “네?” “오늘은 조금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든 것 같습니다.” ‘현성아, 너 선수 아니냐.’ 별것 아닌 대사. 하지만 저 외모로는 무슨 말을 해도 여심을 찌르기에 충분하다. 만약 여기에 있는 게 내가 아니었다면 거의 확정적으로 김현성 하렘에 합류했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우연이네요. 저도 마찬가진데.” “그거 정말로 우연이로군요. 그럼 일단 움직이시죠.” “그런데… 혼자 나오신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다른 길드원 분들은….” “아직 업무 중일 겁니다. 저도 오랜만에 바람을 쐬러 나온다는 게 이렇게 돼서.” “답답하셨나보군요.” “네?” “보통 그렇잖아요. 일하시다가 답답하실 때 한 번쯤 바람 쐬러들 나오잖아요? 그 말이었어요. 표정을 보니 정말로 답답하실 일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제가 정곡을 찔렀나요? 후훗.” “조금… 답답한 게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표정을 읽는 데 익숙하신가 보군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파란 길드마스터께서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타입인 것 같으셔서….” “제가 말입니까?” “네. 언뜻 보면 무표정이신 것 같지만 미묘하게 알 것 같거든요. 왠지 모르게.”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네요.” “그래요? 조금 의외네요. 주변 분들에게 많이 들어봤을 것 같은데….” “하하.” 멋쩍게 웃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본래는 걸음이 훨씬 빨랐던 것으로 기억. 하지만 천천히 속도를 맞춰주는 걸 보니 영 맹탕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눈치 없는 것치고는 매너가 몸에 배었다. 아마 이런 점이 녀석을 좋아하는 여성들이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현성아, 시바. 너무 멋있는 거 아니냐. 적당히 해라. 반하겠다. 이 새끼야.’ 생각했던 것보다 대화가 스무스하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화술 스탯이 희귀 등급으로 추정되는 녀석치고는 꽤나 노력해 주는 모습. 적당히 호응해 주는 것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미소를 짓고 있으니 대화하기가 편하다. 갑작스럽게 성사된 소개팅 같은 자리였지만 생각보다 위화감이 없다. 마치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는 느낌에 나 역시 이것저것 재지 않고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아마 그건 녀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식당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마찬가지. 의자를 빼주는 모습은 정말로 녀석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앉으시죠.” “이런 매너는 부담스러운데… 여성분들과의 자리가 익숙하신가 보네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숨기지 않으셔도 돼요. 파란 길드마스터 정도 되시는 분이 주변에 여자가 없다는 게 더 이상한 걸요.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건 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라 받아들여도 될까요?” “끄응.” “농담이에요, 농담.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말입니까?” “유명인이시잖아요. 린델에 해주시는 것만 봐도 답은 금방 나오죠. 아! 와인도 시켜도 되나요?” “네. 물론입니다. 식사 제안은 제가 드렸으니.” “그럼 부담 없이 고를게요.” “네.” 안 그래도 고급진 것들을 목구멍에 들이고 싶었다. 그동안 먹었던 건 소시지 말고는 맛있다고 하기에는 힘든 것들뿐이었으니까. ‘분위기는 좋은데.’ 여기서부터 대화의 방향을 어떻게 꾸려나가느냐가 중요. 녀석이 나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리라. 분위기는 좋긴 하지만 녀석이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어째서 최근 조금 이상한 행동을 보였는지에 대해 스스로 내뱉을 리 만무. 생전 처음 본 여자에게 주절거릴 정도로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입은 가볍지 않다. 오히려 조금 무거운 편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벌써부터 선을 긋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대놓고 유혹해 봐?’ 그건 기각. 수많은 미녀 사이에서 하렘라이프를 즐기고 있는 녀석이 반응할 확률은 낮다. 차라리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편이 유리할 수도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말하지 못할 말도 거리감이 있는 사람에게는 하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까. 녀석이 지금 나에게 가지고 있는 호감도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내가 먼저 고민을 이야기하고 녀석의 고민도 들어봐 주는 식. 이런 노선을 타는 게 가장 적당 하리라. 당장 본론부터 꺼내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움직여 경계심을 키울 필요가 없다. 적당히 분위기를 즐기는 게 첫 번째. 간을 보는 게 두 번째다. “박물관에 들어갔다 오신 겁니까?” “네. 정말 좋은 곳이더라고요. 무엇보다 모험가 보험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어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게 도와주잖아요. 물론 어느 정도 위험이 있어야 하는 것도 인지하고 계시지만 누구나 전투에 대한 불안감은 가지고 있잖아요.” 일단 가장 가까운 주제부터 조지는 것은 물론. “사실 예전에 멀리서 뵌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도 잘생겼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훤칠하시네요. 그런 말씀 많이 들으시죠?” “많이 듣는 편은 아닙니다. 간혹 듣기는 합니다만.” “후훗.” 가벼운 농담 따먹기도 빼먹지 않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는 것도 수 시간째. 녀석이 지루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기색이 없다. 오히려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니 적당히 분위기에 취한 모양. 조금 멀었던 의자와 의자 사이의 거리도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을 보면 마음의 경계심 또한 허물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이거 시발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는 것. 조금은 거리조절을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451 회귀자 사용설명서 451화 우리 현성이(3) ‘거리 조절 좀 하자.’ 여기에서 더 가까워지는 것은 당연히 지양해야 한다. 이기연의 포지션은 김현성과 끈끈한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하룻밤 불장난을 저지를 생각은 없지만 마치 원나잇 상대 같은 담백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 우연히 만나서, 우연히 깊은 대화를 주고받고, 서로 미련 없이 헤어지는 깔끔한 관계. 너무 친해졌다가는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내밀어져 있던 몸을 슬그머니 뒤로 젖힌 것은 당연지사.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김현성은 내 신호를 거리감을 두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순히 자세를 바꿀 뿐이라고 생각한 모양. 애초에 이런 액션에 일일이 반응하는 녀석도 아니지만 중요한 자리인 만큼 이런 행동에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네.’ 물론 대화는 지속된다. 가벼운 이야기부터, 조금은 사적인 이야기까지. 조금 의외였던 것은 김현성 역시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중얼거렸다는 것. 사실 자세한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힘들었다. 녀석이 말해오는 건 기껏해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게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조금씩이나마 끌어내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군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드네요. 린델을 대표하는 길드마스터의 입장이라는 게 편치만은 않나 봐요.” “네. 여러 가지 정치적으로 얽혀 있는 이야기가 많으니까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교황청 쪽도 생각해야 하고 주변 도시들의 입장도 충분히 고려해 봐야 합니다. 잘난 듯이 말했지만 사실 저도 이런 쪽으로는 젬병이라….” “하지만 파란 길드는 잘해내고 있잖아요? 무력도 무력이지만 정치적인 면도….” “아마 제 친우 때문입니다.”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나를 언급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친우… 아, 명예추기경님.” “네.” ‘키야. 현성이가 날 친구라고 해주고…. 내가 다 눈물이 나네? 현성아, 형이 아낀다.’ “소문대로 사이가 돈독하신가 봐요?” “글쎄요. 최소한 저는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조금은 이상하죠. 가끔은 형제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니까요.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상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현성아, 형이 니 마음 다 안다. 형도 마찬가지야.’ “아마 명예추기경님도 같은 생각을 하시고 계실 거예요. 제가 두 분에 대해 아는 건 아니지만 이야기 같은 건 많이 들어왔거든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까?” “후훗. 명예추기경님께서 파란 길드마스터에게 얼마나 충성하는지는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잖아요? 사실 충성심이라는 표현이 조금 어울리지는 않지만….” “하하. 네. 충성심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 겁니다. 오히려 조금 부끄럽습니다. 충성이라니….” “우정이라고 말하는 게 더 듣기 편하시겠어요. 그렇죠. 우정. 사실 조금 부럽기도 해요.” “네?” “이곳에서 그런 관계를 찾을 수 있다는 거.” “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거 쉽지 않잖아요. 까딱하면 뒤통수에 칼 맞을 수 있는 곳인데…. 마음 놓고 사람을 믿을 수 있다는 게 어디 쉽나요.” “이해합니다.” “…….” 확실하지는 않지만 딱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타이밍. 이미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고 분위기도 충분히 무르익었다. 지금보다 더 시간을 끈다면 오히려 흐지부지될 가능성도 존재하는 만큼 마음을 굳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 감정 한번 잡고 천천히 입을 열자 나를 바라보는 김현성의 시선이 느껴진다. “사실.” “네.” “사실 저도 그런 사람이 있었거든요. 파란 길드마스터에게 명예추기경 같은 사람. 친자매처럼 느껴졌던 사람이요.” “그 말씀은….” “네. 지금은 없어요. 사고가 있었고 결국에는 죽었어요. 제 잘못 때문에요.” “네?” “흔히 있는 이야기예요. 믿지 못했거든요.” “아….” “언니는 저를 믿었는데. 저는 언니를 믿지 못했어요.” “…….” “…….” “제가 처음 만난 분한테 무슨 말씀을 드리는 건지 모르겠네요.” 눈물을 흘리는 추접스러운 짓은 하지 않는다. 찰랑거리는 눈물을 머금은 채 이야기를 꺼내는 게 더 효과적이었으니까. 슬쩍 김현성의 표정을 살피니 많이 당황한 눈치. 갑작스레 분위기가 인간극장으로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눈에는 진지하게 나를 위로해 줘야겠다는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마 위로해 주고 싶을 것이다. 녀석 역시 동료를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테니까.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드렸네요. 우는 여자는 매력 없는데….”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취향 한번 특이하시네요.” “큼. 못 당하겠군요.” “죄송해요. 반응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뭐… 아무튼 그래요.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고 대륙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었죠.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고 어느 정도는 극복했으니… 굳이 그런 표정 지으며 위로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현성 씨.” “네.” “그럼 한잔 더 할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정말로 유감입니다.” “계속 이렇게 우울하게 만들 거예요? 빨리 짠 해요. 짠. 으… 독하네요. 이 와인은.” 녀석이 살짝 웃으며 술을 들이켜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미소가 자연스럽지는 않다.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먹혔나.’ 표정만 보면 제대로 먹힌 것 같다. 조금 노골적이라 걱정했는데 다른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모양. 조금 기쁘기도 했지만 다른 의미로는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방금 이야기가 먹혔다는 건 현재 김현성이 나를 조금이나마 의심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진배없었으니까. ‘현성아, 시바. 형 진짜 가슴 아프다. 내가 뭘 했길래. 자꾸만 이렇게 형을 의심하냐. 형 가면쓰레기 같은 사람 아니다. 진짜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이야.’ 하지만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대륙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되는 장면이 있기는 있었다. 아마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보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 밟히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는 걸 생각해 보면 합리적 의심은 충분히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다. 형제라고 하지 않았던가. 형제는 본래 싸우면서 크는 법이다. 다시 한번 천천히 입을 연 것은 당연. 내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에는 김현성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차례. 물론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또 그 표정이네요.” “네?” “답답하다는 표정이요. 바람 쐬고 싶어졌어요?” “정말로 남의 표정을 읽는 데 익숙하시군요.” “얼굴에 드러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무래도 제가 괜한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마침 저도 생각할 만한 게 있었을 뿐입니다. 신뢰에 관한 이야기요.” “명예추기경 말씀이신가요?” 김현성은 쓴 웃음을 보내왔다. 아마 긍정의 뜻이겠지. “뭔가 문제가 있나요?” “아니요. 타인에게 문제 같은 건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저한테 있습니다.” “네?” “제 인간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답답함이 아니라 자괴감이었군요.” “네. 굳이 표현하자면 그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자괴감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이야기인지 들어도 될까요.” “…….”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 뒤로 빼려나.’ 조금 아쉬워지려는 찰나. 다시 한번 입을 열어오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의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네?”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의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정말로…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개인적인 문제요.” “아….” “신뢰에 보답하지 못하는 게 가슴이 아픕니다. 아닌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속에서는 계속해서 쓸데없는 감정이 생겨나고, 결국에는 제대로 마주할 수 없을 정도까지 와버리더군요. 언제부터, 어쩌다가 이렇게 된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성이 망가진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 바보 같은 새끼. 현성아… 너 왜 이렇게 착해 빠졌냐.’ 불안하기도 했지만 기쁘기도 했다. 녀석이 대충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은 확실히 내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문제는 그걸 자신의 잘못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1회 차에 너무 뒤통수를 처맞았기 때문인지 사람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PTSD에 걸렸다고 판단하고 있는 모양이다. 본인도 무척 괴로워하는 모습. 자기 입으로 형제라고 말하면서도 슬슬 나를 피한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야 그렇게 뒤통수를 맞았는데 그럴 만도 하지…. 이해할 수 있다, 현성아.’ 실제로 공화국과의 전쟁에서도 극심한 PTSD를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 연장선인 모양. 사실 김현성의 말처럼 모든 잘못이 김현성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합리적으로 의심해 볼만한 사건이나 정황이 있었다. 하나하나 퍼즐을 맞추지 않고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을 뿐이지 무의식 속에 퍼즐을 숨기고 있다는 거다. 쾌재를 지를 만한 것은 본인이 먼저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는 것. 딱히 내가 뭘 하지 않아도 본인이 먼저 나서서 브레이크를 걸어주고 있다. ‘기영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의심하면 안 돼.’ 따위의 생각으로 브레이크를 걸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녀석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심각할 만하다. 아무 죄 없는 나를 자꾸만 가슴 속에 있는 마구니가 의심하라 소리치는 상황이었으니까. “자꾸 이런 생각을 하는 제 자신을 볼 때마다 인간성이 마모되고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아요.” “…….” “정확히 어떤 상황에 처하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느끼기에 파란 길드마스터는 인간성이 마모된 사람이 아니에요. 위로하려고 드리는 말이 아니에요. 단 몇 시간뿐이지만 저는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현성 씨는 좋은 사람이라고.” “…….” “제 말이 맞아요.” “저도 취했나 봅니다. 이런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제가 먼저 이야기를 드렸었으니까요. 이런 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경험을 겪은 선배로써 말씀드리자면.” “네.” “대화를 많이 해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아….” “솔직하게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이야기를 전부요. 분명히 도움이 될 거예요. 계속해서 뒤로 미루는 건 좋지 않아요. 형제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셨잖아요.” “네.” “명예추기경님도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충분히 현성 씨를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아….” ‘그래 이 새끼야. 서로 마음속에 있는 건 훌훌 털어내야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한잔 더 할까요?” “네.” ‘나쁘지 않았어.’ 충분히 자연스러웠다. 이런 식으로 통수를 치는 게 조금 가슴 아프지만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머릿속에 있는 마구니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느껴진다. 생각보다 더 좋은 결과에 슬그머니 기분이 좋아진 것은 당연.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녀석과 함께하는 술자리라 조금 오버해서 마셔 버렸다. 슬그머니 정신이 알딸딸해지는 느낌. 김현성이 보기에도 내가 제법 취해 보였는지 걱정하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으흥.” “이만 일어나는 게 좋겠군요. 숙소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괜찮다니까요. 그렇게 걱정 받을 정도로 약하지는 않으니까. 조금 더 마셔요.” “아니요. 지금 데려다 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데려다 주지 마, 새끼야.’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있다. # 452 회귀자 사용설명서 452화 우리 현성이 (4) “아니요. 지금 데려다 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제기랄.’ 슬그머니 녀석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물론 잘생긴 얼굴 속에 다른 감정이 들어 있지는 않다. 혹시라도 이상한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닌가, 걱정했었지만 말 그대로 쓸데없는 걱정에 불과했던 모양. 귀갓길에 혹시 모를 사건에 휘말리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애초에 유니콘이 인증한 초식남이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 깔끔하게 호의를 받아들여도 되는 건 아닌지에 대해 고민도 해봤지만 역시나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게 아름다워 보였다. ‘아냐. 이 새끼도 남자니까.’ 어떻게 사건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다. 방금 깨달은 사건이기는 했지만 아까부터 분위기가 꽤나 묘하다. 우연히 만난 두 남녀, 평소 같지 않은 행동, 술에 취한 것은 물론 서로에게 이상한 유대감마저 느끼고 있다. 만약 정상적인 남녀 관계였다면 곧바로 균열 모텔로 돌진해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 물론 우리는 균열 모텔로 돌진할 생각 따위는 없다. 사실 그것보다는. ‘효과가 얼마나 남았지?’ 요정이 걸어놓은 마법 효과가 슬슬 끝날 타이밍이라는 게 더더욱 문제. 술사와 받아들이는 대상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요정의 장난이 유지되는 시간은 3일이 한계다. 오늘이 딱 3일째라는 걸 생각해 보면 어떻게 생각해도 조심하는 게 맞다. 차라리 이 전에 들켰다면 상관 없겠지만 죽은 언니마저 팔아가며 구라를 친 것을 떠올려 보자 몸을 사려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들키는 순간 김현성 안에 있는 의심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게 되리라. ‘조금 더 효과가 유지되기는 할 거야.’ 빛기영은 마법 저항력이 약했으니까.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는 만큼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과는 반대로 꼬부라지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 내가 생각해도 술이 된 여자의 목소리다. 김현성의 얼굴에 다시 한번 걱정스러운 감정이 감돈다. 슬그머니 옆을 바라보니 비어 있는 술병들이 시야에 비쳤다. 언제 이렇게 먹었는지 모르겠다. 분위기가 좋았고 이상하게 술도 잘 받는 날이었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취하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라는 걸 금방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막 원정을 마치고 되돌아 온 타이밍. 크게 힘을 들인 것은 아니었지만 근 3일 동안 몸을 무리하게 굴렸으니 몸 전체가 피로감을 느끼고 있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평소의 주량을 오버해서 마셔댔으니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눈치는 없는 주제에 내 상태에 대해서는 귀신같이 파악하고 있는지 녀석의 얼굴은 이미 근심에 휩싸여 있다. 뜻하지 않은 위기를 맞이한 만큼 가방을 로브 안 쪽으로 더욱더 밀어 넣은 이후 다시 한번 녀석을 바라본다. “이만 일어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숙소는 어디로 구하셨는지….” “따, 딱히 구하진 않았어요. 구하기 전에 막 현성 씨와 마주쳐서…. 아마 균열 여관에 방은 많을 테니 그쪽에 가는 게 좋겠네요.” “아직 구하지 않으셨다면….” “네.” “파란 길드 지부로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균열 여관에 있는 방보다는 지낼 만하실 겁니다.” ‘쓸데없이 친절해지지 마라. 이 자식아.’ “아뇨. 아무래도 그건 좀…. 이미 여러 가지로 폐를 끼쳤는데 더 이상 그럴 수는 없어요. 이렇게 좋은 식사도 얻어먹었는데, 저를 너무 부끄럽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현성 씨.” “아닙니다.” “조금 부담스러워서.” “괜찮습니다.” “저도 정말로 괜찮아요.” ‘이 새끼 왜 이렇게 강경해?’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불안감이 갑작스레 물밀 듯이 밀고 들어오는 상황. 곧바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아니, 애초에. ‘내가 거절한다고 해도. 얘가 가만히 있을까?’ 아마 미행을 해서라도 내가 균열 여관으로 들어가는 꼴을 확인하려고 할 것이다. 이놈은 그런 놈이니까. 차라리 빠르게 데려다 달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위험 부담은 있지만 그나마 할 수 있는 선택 중에서는 가장 그럴 듯하게 느껴졌다. 일단은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주변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 순식간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탁자를 잡고 간신히 균형을 유지했다.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녀석의 몸이 보였던 탓이다.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정말.” “정… 그렇다면 근처까지만 부탁드릴게요.” ‘웃지 마라, 현성아. 정들겠다.’ “네.”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고 레스토랑의 밖으로 나가자 어느덧 날이 어둑해졌다. 하늘 위에 수놓아진 별은 괜스레 탄성을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 없던 분위기마저 생겨나게 하는 배경에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따라 별이 많이 떠 있는 것 같군요.” “정말로. 그러네요. 하아….” “괜찮으신 겁니까.” “조금 어지러운 것 빼면 문제는 없어요. 이거 죄송해서 어떡하죠. 끝까지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정말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주셨으니 그 답례라고 생각하시면….” “제가 뭘 했나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해드린 것뿐인데요. 아마 주변 분들에게 물어보셨어도 다들 같은 말을 해주셨을 거예요. 큰 도움을 드린 것도 아닌데, 그렇게 치켜세워 주시니 조금 민망하네요.” “…….” 살짝 새침한 표정을 유지. 거리에 있는 조명 덕분인지 괜스레 녀석의 얼굴이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걷기 너무 힘든데…. 너무 오바했어. 시바…. 기연아, 왜 그랬니. 왜 정신을 놓고 놀았니.’ 당연하지만, 평소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실수다. 오랜만에 우리 동생이랑 같이 논다는 생각에 정신을 놓고 마셨다. 걷는 게 힘들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김현성의 제안을 받아들인 걸 다행으로 생각해 봐야 할 정도였다. 최대한 서둘러 걷고 있는 것 같지만 풍경이 계속 그대로인 느낌. 심지어 내가 비틀거리는 것도 느껴진다. 아무리 균열랜드의 치안이 좋다고 한들, 이런 밤에 여성 혼자서 돌아다니는 건 적절하지 않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칼질 한 번에 거대한 몬스터의 목을 날릴 수 있는 괴물들이 즐비한 장소니까. 혼자 정신을 놓고 다니다 낭패를 본 이들이 많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김현성의 입장도 이해가 가기는 한다는 거다. 여러 대화를 천천히 나누면서 걸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김현성의 얼굴에는 걱정이 묻어나오는 중. 하지만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이었다. 어깨를 빌려 줘야 할지 업어줘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할 뻔 자. 혹시나 손이 닿는 게 불편하지는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얘 진짜 쑥맥이네.’ 의도하지 않은 신체적 접촉을 조심하기 위해 거리를 두는 건 이해하지만 이 정도면 병신이다. 만약 내가 실제 여성이었다면 녀석의 이런 친절에 오히려 짜증을 냈으리라. ‘자신감 있게, 손도 잡고! 마! 은근 슬쩍 어깨동무도 하고! 마! 은글슬쩍 인마! 다 해야지, 인마!’ 물론 내가 그런 상황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신체적 접촉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녀석의 행동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적정 거리를 유지한 채로 발걸음을 맞춰주고 있는 모습. 혹시나 이쪽이 쓰러질 때를 대비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매너 있어 보인다기보다는 연애경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안 그래도 느린 걸음이 더욱 느려지는 중. 그나마 균열 여관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한참은 걸릴 것이다. 몸 한 구석이 이상 신호를 보내온 것은 바로 그때. ‘왜, 이렇게 뜨겁지.’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갑작스레 몸이 뜨거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안 그래도 힘든 몸이 더욱더 힘들어진다. 갑작스러운 이상 현상에 당황한 것은 당연지사. 따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괜스레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마법.’ 내게 덧씌워진 마법이 풀리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 조금 있으면 벗겨질 것 같다. 의심이 아닌 확신. 아주 조금씩이지만 체내에 있는 마력이 타는 것이 느껴진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마력이 아니다. 외부에서 들어와 있는 마력. 방심 하는 순간 안에 있는 게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제기랄.’ 나도 모르게 거칠어지는 숨.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기고는 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아직도 균열 여관은 멀고 김현성은 나를 호위하듯 바라보고 있다. 거친 숨소리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자 녀석이 나를 바라봤지만 저런 호의는 전혀 반갑지 않다. “하아….” “괜찮으십니까?” 대답할 여유도 없다. 내 몸을 떠나려고 하는 마력을 붙잡아두는 데 정신을 집중해야 했으니까. 여기서 마법이 풀려 버리면 모든 게 끝장이라는 생각에 초조해지기 까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현성은 요지부동이다. ‘빨리 가라, 현성아.’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여기서 부터는… 흐읏. 혼자 갈 수 있어요.” “네? 하지만.” “어두운 골목은 지나왔고… 이제 큰, 큰길이니까….” 오줌이라도 마려운 것 같은 목소리. 내가 들어도 상태가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얼마 안 남았으니 끝까지 데려다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밤에는 위험하기도 하고요. 큰길이라고 한들….” “정말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 ‘틀렸어. 이 새끼 들을 생각이 없어.’ 확실히 외골수적인 성향이 있다. 뭐라고 해도 듣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에 침을 삼켜 넘긴 것은 당연지사.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려는 마력을 계속해서 붙잡고 있기에도 힘에 부친다. 말하랴, 걸으랴, 마력 유지하랴, 머리가 어지러운 상태에서 자꾸만 어려운 미션이 하나씩 추가되는 기분. 정신을 놓아버리면 구멍이라도 뚫린 둑처럼 모든 게 콸콸콸 흘러내릴 것만 같다. ‘김현성… 야 이 씨….’ 조금 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조금 무리수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 녀석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 아니 분명히 이건 먹힌다. 김현성의 성격이라면 틀림없이 통한다. 생각은 수십 가지. 하지만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목구멍에서는 바로 준비된 대사가 튀어나온다. 순진한 우리 현성이를 쫓아내기 위한 빌드업. “정말로 혼자 갈 수 있어요, 현성 씨. 정말로요. 걱정하시는 건 이해하는데 제가 너무 불편해서 그래요.” “하지만….” “이 정도까지 말씀드렸으면… 의사표현을 확실히 한 것 같은데…. 그만 돌아가 주세요.” “조금만 더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 정말 괜찮아요.” 슬쩍슬쩍 기분 나쁜 티를 냈지만 역시나 알아차리는 것이 느리다.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였지만 깊게 생각하지는 않은 듯한 느낌. 넘어질 것처럼 살짝 비틀거리자 거미줄을 향해 돌진하는 나비의 몸짓으로 날아와 내 어깨를 붙잡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다행이라는 듯 나를 바라보는 순진한 회귀자의 눈빛. 하지만 그 눈빛이 당혹스러움으로 바뀌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왜. 굉장히 불편하다는 표정의 비치기연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테니까. “죄….” 사과가 먼저 튀어나오기 전 말을 끊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 그런 여자 아니에요. 파란 길드 마스터.” ‘미안하다, 현성아….’ “네?” ‘진짜 미안해….’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저 그런 여자 아니라고요. 아까부터 너무 노골적이신 거 아닌가요?” 지금까지 수많은 쓰레기 짓을 하면서도 몇 번 반응하지 않았던 양심의 가책이 가열차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김현성의 표정.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미안해….’ # 453 회귀자 사용설명서 453화 우리 현성이(5) 사랑스러운 회귀자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 한쪽이 저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반문한다면 양심의 가책이 가시기라도 했겠지만 이 순진한 새끼는 자신의 무얼 잘못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모양. 상황 자체가 조금 억지스러웠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죄책감과 비슷한 무언가가 얼굴 한쪽에 감도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그럴 만하지.’ 사실 충분히 오해할 만할 여지가 있었다. 숙소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제안을 계속해서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질척거리며 달라붙었던 모습은 레이디를 지키는 기사라기보다는 발정난 양아치. 온갖 일을 다 겪은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조신하고 또 조신한 빛기연의 입장에서는 뭔가 흑심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심지어 마지막에 신체접촉마저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어깨를 파악하고 붙잡았잖아. 심지어 배도 건드리지 않았나? 엉큼한 새끼 이거….’ 물론 우리 현성이는 넘어지려고 한 나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뿐이겠지만, 온전한 처녀의 몸을 떡 주무르듯이 주물렀다면 응당 그 책임을 져야 하는 법. 마음을 조금 더 독하게 먹어야만 했다. 생각해 보니 고급 마력 운용지식을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면 굳이 손을 쓰지 않고도 나를 붙잡을 수 있었다. 잠깐 잊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벌어진 녀석 답지 않은 실수. 아마 본인 역시 그 실수에 대해 인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모든 정황에도 불구하고 겸허히 내 말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괜스레 탄식을 자아내게 했다. ‘1회 차에 그렇게 통수를 맞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이거.’ 차라리 나를 먼저 만나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혹시나 웬 꽃뱀 같은 계집애가 달라붙었다면 사고가 났어도 단단히 났을 테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하다. 파란 길드마스터 성추행 의혹 같은 타이틀의 기사가 린델에 돌아다니는 것보다 끔찍한 상황은 없다. 물론 나는 그런 기사가 나가게 내버려 둘 생각 따위는 없다. 아니, 애초에 녀석이 다른 지지배와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게 상상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 공부 한다고 생각해라, 현성아.’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다. 절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거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아암. 아프니까 청춘이지.’ 어차피 인생을 살면서 몇 번 정도는 이런 상황에 직면할 것이 분명. 그때가 돼서 많이 아픈 것보다는 빛기영이 안배한 성장통을 겪어보는 게 낫다. ‘나는 그나마 사정을 봐주기라도 하니까.’ 귀신같은 합리화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기 시작. 그 와중에도 김현성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내가 먼저 치고 들어가야지.’ “분명히 거절의사를 밝혔는데도 이런 식으로 나오시니 저를 값싼 여자 취급 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네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분위기가 좋았다는 건 인정 할게요, 파란 길드마스터. 즐거운 시간이었고… 그럴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에요. 제가 오해의 여지를 드렸다면 죄송하지만 저는 절대로 그럴 생각 없었어요. 저를 구해주시고 좋은 식사를 대접해 주신 것도 너무 감사하지만 그 대가가 이런 거였다면 차라리 도움 받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 같네요.” “그게 아니라.” 조금은 냉정하게. “하룻밤 같이 보낼 여자가 필요하면 다른 곳에서 알아보세요.” “아니.”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하시나 봐요?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요?” “아뇨.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분이 상했다는 티를 팍팍 내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할지 당황스러워 하는 것이 보인다. 어떻게든 오해라는 걸 설명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기는 했지만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내 말에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 혹시나 자신이 무례했던 것은 아닌지에 대해 떠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물론 녀석이 딱히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데려다 준다고 말하는 것 정도로 이런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무리수. 신체적 접촉은 어디까지나 넘어질 뻔한 나를 잡아주기 위함이었고 끈질기게 달라 붙어왔던 것 역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사실 김현성을 무례한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비치기연을 예민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아니, 오히려 미친년에 가깝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함정에 빠뜨린 셈이나 다름없으니까. 머릿속으로 그런 계산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보이는 모습만으로 판단하자면 전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 걸려들어도 제대로 걸려든 모양. 당연히 그 1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극한의 연기력이다. 입술을 꽉 깨문 것은 물론 눈에는 약간의 눈물을 머금는다. 실망했다는 표정과 함께 자괴감에 휩싸인 복잡한 감정도 얼핏 보여준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비련의 여주인공의 표정이 이러할까. 거울로 현재의 얼굴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김현성의 표정만 봐도 연기력은 충분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길게 이야기를 끌 필요도 없다. 애초에 길게 끌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계속해서 이런 상황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불리했으니까. 치고 빠지는 게 더 효과적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런 분인 줄 알았다면….” “오, 오해입니다. 정말로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상처를 받으셨다면 죄송하지만… 믿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로 다른 마음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나요?” “…….” “…….” “어?” “…….” 거기서 멈칫 하면 안 되지, 이 새끼야. 조금은 있었어도 자식아 일단은 잡아떼야지.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현성아, 너도 남자구나.’ 개미 손톱만 한 호감이었겠지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심지어 고개를 숙여오는 꼴은 가관. “죄송합니다. 불편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 뭐라고 변명이라도 좀 해라. 바로 사과하는 거 아니다, 현성아. 이런 상황에서 사과하면 지는 거라고….’ 너무나 진심 어린 사과에 오히려 이쪽이 더 민망해진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저쪽에서 적당히 흥분하거나 변명을 해줘야 조금 더 긁어 먹을 구석이 생긴다. 억울할 만도 하건만 녀석은 치졸한 변명 대신 마음을 담은 사과를 선택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가면 오히려 이상한 쪽은 빛기연. 결국에는 나 역시 한발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실랑이할 시간도 없었으니까. “후우….” “…….” “알겠으니까. 고개 드세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현성 씨 모습을 보니까 저도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요. 그럴 분이 아니신데…. 제가 부끄러운 생각을 한 모양이에요. 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 “조금 취한 건 사실이지만 저는 세 살 먹은 어린애가 아니에요. 엄연히 영웅 등급 판정을 받은 모험가고… 무엇보다 혼자 돌아갈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걱정하시는 건 이해하지만 너무 과한 친절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거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이번에도 이전처럼 나오시면 정말로 쓸데없는 오해를 하게 될지도 몰라요. 아니, 솔직히 지금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고요. 현성 씨 의도가 어떠셨던 간에 받아들이는 제 입장에서는 충분히 모욕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제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지 아실 거라고 믿어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좋은 쪽으로 시작된 만남. 마무리까지 좋게 끝내고 싶네요. 좋은 인상만 남기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예.” “오늘은 이만 봤으면 좋겠어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하게 됐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사과하지 말라고….’ “네.” ‘X나 조신했어. 시바.’ 조선 시대급 조신함이라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행동이었다. 스스로에게 뿌듯함이 느껴지는 것도 잠시, 어려운 미션을 해결했다고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잘 정리해서 마무리한 건지 의구심이 들기는 했지만 일단은 상황 자체가 나쁘지 않다는 거다. 김현성 역시 이 이상 고집부리는 게 무리수라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모양. 미행이라도 하는 건 아닌지 걱정 아닌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한 번 실수했다는 걸 인정한 만큼 쓸데없는 짓을 해오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멀찍이서 바라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겠지. 이제 남은 것은 균열 여관까지 되돌아가는 것. 머리가 빙빙 돌기는 했지만 최대한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다. 당연하지만 쓰러지거나 비틀거려서도 안 된다. 조금이라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순간 녀석의 오지랖이 다시 한번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이미 육체와 정신은 한계. 방심하는 순간 마력이 봇물 터지듯 흘러내릴 것 같다. 입술을 꽉 깨물고 온몸에 힘을 주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긴다. 나름대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 뒷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걱정되는 것이 사실. 커다란 길에 있는 큰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니 혹시나 넘어지지 않을지 신경 쓰인다. ‘시이바… 망할 것 같은데….’ 순간적으로 몸이 비틀거렸던 것은 바로 그때. 난간을 붙잡고 기적적으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걸 참을 수 있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신발 한쪽이 벗겨진다. ‘X데렐라도 아니고 시바!’ “기연 씨! 신발이….”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저 소리에 반응할 수 있을 리 만무. ‘아직도 보고 있었어. 이 스토커 같은 새끼. 제발 집에 좀 가!’ 되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지금으로서는 녀석이 나를 앞질러 신발을 전해주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는 모양. 뒤에서 뭔가 기척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제발….’ 멀게만 느껴졌던 균열 여관이 점점 가까워졌다. 순간적으로 긴장을 놓아버릴 것 같았지만 최대한 서두른다. ‘제발!’ 덜컹. “안녕하세요. 균열 여관에 오신 것을 환영!” “전설 등급. 방. 빨리.” “아… 네.” “잔돈은 필요 없어요.” 금화 뭉텅이를 던진 이후에는 곧바로 위로 향한다. “체크인은….” “지금 바로 올라갈 거예요.” “네.” “방 번호.” “지금 안내를….” “필요 없으니까. 빠, 빨리요.” “네.” ‘제정신이면 여관 안까지 따라 들어오지 않겠지.’ 하지만 방 안에 들어갈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는 없는 노릇.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은 느낌, 마치 소변이라도 마려운 기분이다. 안내고 나발이고 필요 없다고 한 이후에는 곧바로 방 안에 들어섰고 이윽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안전공간에 당도할 수 있었다. “세이프….” 몸 안에 있던 마력이 전부 빠져 나간 것은 바로 그때. 슬쩍 고개를 돌려 거울을 확인하니 시야에 비친 것은 익숙한 남자의 모습. 사실 빛기연의 모습도 굳이 나쁘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이 모습이 더 정감이 간다.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당연지사. 맨발이 괜스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훌륭히 미션들을 완수했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모든 게 완벽했어.’ 김현성이 신발 주인을 찾는다는 헛 짓거리만 하지 않는다면 더욱더 완벽한 원정이 될 것 같았다. # 454 회귀자 사용설명서 454화 결과 및 평가(1) 잠깐의 유희는 끝났다. 곧바로 쓰러져 잠들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 만무. 처리해야 할 일도, 생각해야 할 일도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증거를 태우는 것. 처음부터 이기연이라는 사람이 없었던 것보다는 타 대륙으로 이동했다고 꾸미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곧바로 방을 옮기는 한편, 그동안 사용했단 물품들 역시 모조리 폐기. 행정적인 처리를 위해 이지혜에게 연락을 넣고 나서야 어느 정도 상황이 마무리 됐다고 판단했다. 아마 내일 새벽 즈음이면 이기연이라는 인간은 저 멀리 있는 왕국 연합에 있는 것으로 처리되어 있으리라.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따위의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기왕이면 조심하는 게 좋다. 조금 꼼꼼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니니까. ‘더군다나….’ 김현성이 비치렐라가 흘리고 간 신발을 버리거나 내버려 두면 별 상관이 없겠지만 아무래도 그런 장면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약간의 호감도 느끼고 있다고 본인의 입으로 고백했으니 아침이 되면 직접 찾아올 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물론 본인이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내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뒤일 터. 편지라도 남기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봤지만 괜한 여지를 주는 것 보다는 깔끔하게 손절해 버리는 게 녀석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좋은 추억으로 남겨줘야지. 으음. 그렇고말고.’ 너무 끈질기게 달라붙는다면 던전에서 죽었다고 처리를 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 아무튼 간에 이번 일은 내 기억 속에서도 날려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난 일에 연연하기에는 밀린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정하얀의 탐지 마법에 혼선을 주던 요정 마법이 풀렸으니 아마 정하얀도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느끼고 있을 터. 시간이 늦었으니 지금은 꿈나라에 가 있겠지만 그녀 역시 아침이 된다면 곧바로 이곳으로 향할 것이다. 조금 일찍 일어나 곧바로 파란 길드의 지부로 가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대충 정리만 하고 빨리 자야겠네. 끄응….” 조금 커다란 일을 끝낸 이후에 상황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는 것은 습관이 된 것 같은 일과 중 하나다. 머리가 좋지 않다 보니 이런 식으로 한 번쯤은 되새김질을 해주고 행동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일단….’ 균열 박물관부터. ‘이건 나쁘지 않았지.’ 확실히 모험가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구성이었다. 생각보다 반응도 좋았고 시스템 자체도 잘 자리 잡았다는 걸 금방 느낄 수 있었다. 가격대도 딱 적당한 수준. 조금 비싼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여러 가지 서비스가 포함되어 있으니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할만 했다. 개인적인 별점은 먹인다면 5점 만점에 4점 정도. 완벽한 정답이라고는 하기에는 애매 했지만 정답에 가까웠다. 여기서 더 쳐낼 필요도 더 할 필요도 없다. 드랍률이나 피어오르는 불만에 따라 여러 가지 콘텐츠나 서비스를 내놔야겠지만 민폐 여신의 빈자리를 급하게 매우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문제는 오히려 다른 쪽에 있다. 걱정이 되는 부분은 다름 아닌 우정 클랜. 정확히 말하면 현재 린델에 포진 중에 있는 모험가들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사실 관계를 한번 확인해 봐야 했지만 우정클랜, 본인들의 말대로라면 녀석들은 이제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유력 클랜 중에 하나. 그 정도 수준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유력 클랜이란다. 한숨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우정 클랜은 우리 파란 길드의 동맹도 아니고 뭣도 아니지만 미래에 같이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걱정이 되는 게 당연하리라. ‘수준이 너무 낮아. 아니, 수준 문제가 아니야.’ 녀석들이 보였던 꼴사나운 모습을 떠올려 보니 떠안고 있던 불안함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 균열박물관이 등급이나 스펙적인 부분을 메워줄 수는 있겠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다. 1회 차에서의 현 상황이 어땠는지 생각해 보면 내가 어째서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답이 나온다. 정확히 1회 차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내 예상이 맞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 중이었을 확률이 높다.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이든, 이방인과 대륙인과의 전쟁이든 간에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우정 클랜의 이철우나 김태건도 전장터의 한 가운데 있었음이 분명, 경험치를 쌓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쌓였을 거라 자부할 수 있다. 매일 불안감에 하루를 보내야 했을 거고 피와 고통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싸워야 하는 것은 물론, 동료의 죽음을 딛고 일어서야 했으리라. 1차원 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2회 차가 1회 차보다는 낫다. 적어도 쓸데없는 손실을 줄이고 힘을 모으긴 했으니까. 하지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현재의 상황도 썩 좋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1회 차의 환경은 싸울 수 있는 인구를 줄이는데 기여했지만 쓸모없는 녀석들을 담금질하는데 커다란 손을 보태기도 했다. 장담컨대 여러 가지 사건에서 살아남아 김현성과 마지막까지 싸웠던 이들은 일당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베테랑들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에 현재의 모험가들은 어떠한가. 영웅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를 잡는 데도 한심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그런 역전의 용사들을 데리고도 1회 차에 실패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아무리 병력이 많다고 한들, 우정 클랜 같은 놈들을 데리고 성공할 수 있을 리 없다. “이건 문제야….”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위협이 언제 어디서 터지는지는 알아 봐야겠지만 김현성의 반응을 보자면 근시일 내에 터진다고 말하기에는 어렵다. 그렇게 바빠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문제는 그 시간까지 준비된 이벤트가 없다는 것. 갈등도 없고 전쟁도 없다. 다툼도 없고 성장도 없다. 균열박물관이나 악마 던전 같은 이벤트로 스펙적인 부분은 맞출 수 있겠지만 멘탈적인 부분은 맞춰줄 수 없다. 위기에서 피어나오는 선택받은 용사 같은 놈들도 없을 거고 동료의 죽음에 각성하는 영웅 같은 놈들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왜? 평화로우니까. 난세는 영웅을 만들고 군대를 더 강하게 만든다. 개소리처럼 들리지만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없는 갈등이라도 만들어야 될 것 같은 느낌. ‘가면이라도 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봤지만 현재의 대륙은 인위적인 갈등이라도 감지덕지. 조금 더 위기를 맞을 필요가 있다는 거다. 문제는 위기를 어떻게 뿌리느냐에 대한 것. ‘박물관에 있는 신화급 몬스터라도 풀까?’ 그건 기각. 그 촉수 같은 고대신 놈이나 머리에 뿔 달린 놈이 풀려난다면 수습이 불가능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호랑이 사냥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곰을 잡겠다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 ‘전쟁이라도 일으켜 봐?’ 이건 그나마 생각해 볼만하다. 찢어진 상처를 봉합하고 다시 찢는다는 게 조금 모양새가 그럴 뿐이다. 하지만 이 선택지 역시 기각. 어떤 놈들을 희생양으로 삼을지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없고 현재의 상황에 초를 치는 것은 최대한 지양해야 할 일이다. 이제 막 대륙이 하나가 된 타이밍, 갈등 하나 뿌리자고 내 손으로 치료한 환자의 죽빵을 날릴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면. ‘벨리알을 섭외하는 건 힘드려나.’ 마침 악마 놈이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협력해 줄 것 같은 기분도 든다. 하지만 녀석한테 뒤통수를 맞았던 걸 떠올려 보면 불안한 부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여러 가지를 떠올려 봤지만 머리만 아픈 상황. 침대 위에 털썩 하고 몸을 눕혀도 딱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아니, 애초에 이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다. “현성이가 필요하지.” 김현성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정확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뭔지, 개선해야 될 방향이 있다면 그 이유와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아봐야 했다. 지금 당장은 본인의 무력을 키우는데 집중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녀석 역시 무언가 플랜을 가지고 있을 터. 마음 같아서는 김현성만 믿고 편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었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굉장히 감이 안 좋은 녀석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너무 믿는 건 안 좋아.” 그 동안의 김현성이 보여줬던 행적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오히려 모든 게 완벽하다 생각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차라리 불안해하는 게 더 나을 지경. 아무튼 이것도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보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 현 상황에서 가장 베스트는 김현성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밝히는 거겠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만큼 아쉬워 할 수만은 없다. 심지어 이쪽에 대한 의심이 떠나지 않는단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털어주기만 해도 다행이라는 거다. ‘고백만 해준다면….’ 회귀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앞으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미리 들을 수만 있다면…. 일이 얼마나 쉬워질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꿈 같은 이야기지. 슈바….’ 장래희망 같이 막연한 이야기다. 내가 먼저 마음의 눈 있다는 사실을 밝혀도 상관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현 시점에서는 무리수. 어떻게든 김현성과의 대화로 정보를 빼내야만 했다. ‘어차피 조만간 대화할 테니까.’ 제한적이지만 카스가노 유노도 있고 앞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바탕으로 방향을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은 느낌. 해답이 없는 상황에 괜스레 방안을 서성거리다 뜨거운 물로 간단히 샤워를 한 이후 다시 한번 침대에 몸을 눕혔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아침. ‘시바… 너무 무리했나 보네.’ 최근에 몸을 심하게 굴렸는지 삭신이 쑤신다. 뭔가 근본적으로 피곤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숙취가 없는 것 하나는 다행이라 할 수 있으리라. 시간은 아직 이른 아침. 간만에 정하얀 꿈을 꾼 것 같았는데 제대로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조금 부끄러웠던 것은 내용이 꽤나 야했다는 것. 딱히 욕구불만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꿈을 꾼 걸 보니 오랜만에 남자의 몸으로 되돌아온 부작용인 것 같았다. “에취! 으….” 심지어 감기 기운도 있는 것 같았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창문이 열려 있는 모습.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제 잠깐 열어놓은 이후에 닫지 않고 그대로 잠든 것 같았다. “너무 안일했네. 시바… 암살자라도 들어오면 어떻게 하려고…. 이기영 멍청한 새끼.” 물론 현재 내 몸에는 이상이 없으니 아무 문제없다. 가볍게 얼굴을 닦은 이후에 차를 한 잔 마시고 괜스레 창문 밖을 한 번 바라본다. 쏟아지는 햇빛을 몸으로 받으니 괜스레 건강해지는 것 같다. 여유로워지는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는 상황. 순간적으로 멍을 때리다 보니 갑작스레 어젯밤에 꿨던 꿈이 생각나 얼굴을 붉힐 수 밖에 없었다. ‘오늘도 깨끗하게 하고 왔으니까. 깨, 깨끗하게.’ 이게 무슨 개꿈이야. 고개를 흔들어 봤지만 흐릿한 기억이 점점 더 생생해지는 듯한 느낌에 점점 더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 이건 또 무슨 부작용인 건지 모르겠다. 혹시나 요정이 마법을 걸면서 다른 마법을 집어넣은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으리라. 밖에서 똑똑 하는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때. “오, 오빠아….” “하얀이야?” “네, 네.” “혼자 왔어?” “네.” 천천히 문을 열자 시야에 비치는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에 보는 정하얀. 기분이 좋은지 히죽히죽 웃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이윽고 덮치듯 달려들어 나를 껴안는 모습에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 조금 달랐던 건 자꾸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 ‘왜 이러지.’ 장담컨대 지금까지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얘가… 왜 이렇게 섹시해 보이지.’ 아니 감정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뭔가에 길들여진 것만 같은 느낌.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몸이 정하얀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런 적 없었는데….’ # 455 회귀자 사용설명서 455화 결과 및 평가(2) 객관적으로 보면 정하얀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최곤존엄이라 분류되는 희라 누나와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충분히 볼륨 있는 몸을 가지고 있었고 아담한 체형과 커다란 눈망울 역시 확실히 귀엽다고 할 만했다. 마력이 외모의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처음 만났을 때보다 확실히 예뻐졌다. 조금은 무감각했던 예전에 비해 본인이 외모에 관심이 많아지기도 했고 최근 더욱더 하얗게 변한 피부와 분홍색 입술은 만화에서나 나올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이제는 얼굴도 흐릿해진 유석우라는 놈이 집적댈 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거다. 종합해 보면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귀여운 여동생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 결코 이런 반응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나도 남자인 만큼, 육탄공세 아닌 육탄공세를 해오는 정하얀에게 가끔 두근거렸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현재 몸이 보내오는 신호는 이상하다 말할 만했다. ‘왜 이래….’ 딱히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평소와는 다르다. 아침부터 신나게 뛰어왔는지 희미한 땀 냄새와 살결냄새가 자꾸만 후각을 자극한다. 흥분제라도 마신 것 같은 기분에 머리를 흔든 것은 당연지사. 아무 이상 없었던 몸이 자꾸만 움찔 거리는 상황은 확실히 반갑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리는 것은 물론 묘하게 호흡도 거칠어진다. 나를 꽉 껴안은 정하얀의 몸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할 만했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더 익숙한 기분. 올라오는 신체적 반응에 몸을 엉거주춤하게 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나를 본 정하얀이 그 꼴을 두고 볼 수 있을 리 만무. 거머리처럼 몸을 딱 붙이고 하체를 최대한 가까이 하려 기를 쓰는 모습은 그 의도가 궁금할 정도였다. 입꼬리가 광대까지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 은근슬쩍 흉부를 밀착해 오거나 하체를 최대한 앞으로 내밀고 있는 기행 자체도 문제. 평소였다면 코웃음도 안 나올 정도로 어색했던 정하얀의 유혹 타임이 지금은 서큐버스와 독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자극적으로 느껴진다. 뭔가 마법을 걸어온 것은 아닌지에 대해 의심을 해볼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얘가 미쳐가지고 매혹 마법이라도 외운 건 아니겠지.’ 가능성은 낮다. 만약 매혹 마법이었다면 이런 사고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니까. 정하얀이 연금술에 대해 약간의 조예가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미약 같은 거라도 뿌리고 온 건 아닌지 의심되기는 했지만, 그런 종류의 물품이라면 내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정말로 요정 마법의 부작용은 아닌지 의심이 가는 상황.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던 만큼 일단은 정하얀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정하얀이 조금 아쉬운 얼굴을 했던 것도 잠시.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주고 등을 토닥거려주자 다시 한번 입가가 찢어지는 게 시야에 비쳤다. ‘단순해서 좋아요.’ “그동안 잘 지냈어?” “네! 잘 지냈어요. 여기저기에 조정할 게 많아서요. 소, 소라 씨랑 같이 계속 움직였었거든요. 지난 며칠간은 정말로 너무 바빠서… 따로 다른 일을 할 시간도 없었어요. 마법이 들어갈 일이 생각보다 많아서, 공사도 전부 마법으로 했고….” “한소라?” “네. 소라 씨요.” ‘얘는 괴로웠겠는데.’ 아직까지도 정하얀에게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파란의 병아리. 이제는 병아리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번 작업에 희망찬 미래를 그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균열 랜드에 파란길드의 지부가 생겨났으니 이쪽으로 전출하고 싶다는 커다란 희망사항을 품고 있으리라. ‘당연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을 테고….’ 그녀의 희망사항을 들어줄 수 없다는 게 가슴 아플 뿐이다. ‘연봉이라도 올려줘야겠네.’ 본인은 연봉 따위에 관심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자신을 아껴주고 있다는 건 자각했으면 싶었다. 물론 본인은 내가 주는 총애를 최대한 피하고 싶겠지만 한소라가 대륙 유일무이의 흑마법 자원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아끼지 않을 수가 없다. 공화국과의 전쟁에서도 커다란 활약을 해준 것은 물론, 어쩌면 생각하고 있는 대륙 강화 계획에 써먹을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불안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하다. 김현성이 오해 아닌 오해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의 존재는 폭탄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아니, 사실 그건 내 옆에 딱 달라 붙어 있는 정하얀 역시 마찬가지. 믿을 만한 아군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얘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정하얀이 뭣 모르고 입이라도 나불거리는 날에는 빛기영의 행복라이프는 거기서 끝. 물론, 정하얀이 내게 해를 끼치는 짓은 하지 않겠지만 성정 자체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만큼 각별한 취급을 요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친절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본래도 웃음기가 섞인 얼굴로 정하얀을 대하기는 했지만 귀여워 죽겠다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기 시작.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하얀의 기분이 업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동안 힘들었겠네. 쉬지도 못하고….” “조, 조금 힘들었어요. 그래도 해야 되는 일이니까.” ‘키야. 대견스러운 거 봐라. 하얀이가 이런 말도 해주고 내가 기뻐서 눈물이 다 나오네….’ “아무리 그래도… 외롭지는 않았어?” “조, 조금은? 사실 많이 외로웠어요.” “그럼… 같이 아침이라도 먹고 갈까? 여기도 천천히 둘러보고. 대충 둘러보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네! 네! 네! 저는 당연히 좋아요!” 조금 돌아가기야 하겠지만 곧바로 일터로 달려가는 것보다는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즐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정하얀의 입장에서도 굉장히 잘 참아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근에 결혼 문제로 한 번 폭발 할 뻔하기는 했지만 그것 외에는 딱히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다. 며칠 떨어졌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지도 않고 갑작스럽게 난입해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동안의 교육의 성과가 비로소 나타나고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일차적으로 본인이 잘 참아주고 있다는 사실이 유효했다. 특별한 상을 주는 것도 아님에도 이 정도로 참을 수 있다는 것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 짜투리 시간을 내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천천히 짐을 챙긴 이후에는 곧바로 정하얀과 함께 밖으로 나가기 시작. 팔짱을 끼고 가슴을 최대한 밀착시키는 자세 때문에 다시 한번 몸을 움찔 거리기는 했지만 문제는 없다. 이제는 유명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 만큼 시선이 집중되기는 했지만 정하얀은 오히려 보란 듯이 몸을 곧게 펴고 거리를 걸었다. 마치 영역표시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 뜻밖의 데이트에 쉴 틈 없이 재잘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거, 저, 저것도 제가 만들었어요.” “그래?” “저, 저것도요. 저기 있는 다리도 제가 만들었고요. 소라 씨가 도움을 주기는 했는데 거의 혼자 했어요!” 우리네 아버지들이 한강대교를 자신이 만들었다고 중얼거리는 것처럼 자신의 위업을 자랑하기도 했고. “그, 그래서요. 그때 막 사람들이 찾아와서 조금 깜짝 놀라기는 했는데 괜찮았어요. 몇 명이 저한테 말도 걸고 그랬는데 대답도 안 했어요. 다른 남자들이랑은 눈도 안 마주쳤고요.” “꼭 그럴 필요는 없는데….” 자신이 얼마나 조신한 현대판 열녀인지에 대해 주장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는 영양가 없는 대화였지만 조금 지친 정신을 쉬게 해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하는 게 가장 적절하리라. ‘날씨도 좋고.’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 이런 평화를 즐기는 건 나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려 있고 각자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도 보인다. 테라스에 나와 식사를 한다거나 분수대 주변에서 잡담을 나누고 잡화점이나 무기점에서 쇼핑을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이런 분위기에는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만하기는 했지만 어제 든 생각 때문인지 마음이 편치 않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원래는 목숨을 걸고 싸움터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 더욱더 그렇다. 마음의 눈으로 한 번씩 둘러봐도 딱히 인상적인 사람이 있다고 하기는 힘들다. 그나마 교국이나 공화국, 이종족 연합은 상태가 조금 좋다. 지난 전쟁에 참가하지도 않았던 왕국 연합이나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외국인들은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모양새. 위협이 있다고 공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양이다. 평화로운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평화로운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올 정도였다. “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었어.” “고,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고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고… 나중에 생각이 정리되면 이야기해 줄게. 그럼 슬슬 길드 하우스로 돌아가자. 지부도 하얀이가 만들었어?” “…….” “하얀아?” “네? 아… 네. 뼈대만 제가 만들었어요. 아, 안쪽은 전부 김미영 팀장님이 해주셨어요. 가구도 린델에서 주문제작 해서 가지고 왔고…. 아! 길드 하우스 1층은 상점가로 이용하고 있어요. 포션 상점이랑 아영 씨 대장간으로…. 2층부터 파티원들이 이용하는 길드 하우스고 린델에 있는 것보다도 더 커요. 연무장도 크고 연금공방도 크고 그, 그리고 방도 커요.” “그럴 만하네. 린델에 있는 건물은 기존부터 있었던 건물이니까. 단순히 너비로 치면 이쪽이 더 넓기도 하고… 다른 클랜들도 많이 들어오겠는데.” “유력 클랜 몇 개는 벌써 토지 매입도 고려해 보고 있대요. 검은 백조랑 붉은 용병은 벌써 들어와 있고요.” “똑똑하네.” 몇 가지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면 계속해서 거리를 거닐자 익숙한 엠블럼이 눈에 띄기 시작. 정하얀이 말했던 파란 길드의 지부에 도착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확실히 규모가 있다. 파란의 길드 하우스보다 훨씬 더 커다랗고 세련됐다. 1층의 상가에는 유아영이 만든 무구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그 옆에 있는 포션 상점에는 모험가들이 벌써 모여 있었다. 길드 하우스로 들어가려면 다른 입구를 통해 가야 하는 모양. 천천히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비친 것은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인형이었다. “부길드마스터.” “아, 혜진 씨.” “오신다고 말씀하셨으면 마중을 나갔을 텐데…. 오늘 도착하신 겁니까?” “네. 잠깐 여기저기 둘러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커다란 건물의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김현성의 부관이자 내 하나뿐인 친구. 꽁지머리를 한 채 커다란 건물의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 모습은 평소답지 않게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뇨. 딱히.” “그런데 왜 밖에서….” “길드마스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성 씨요?” “네.” “같이 나가지 않으신 겁니까?” “그…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사람을 조금 찾아보신다고…. 혼자서 다녀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상이 맞았네.’ 대충 어디로 향했는지는 당연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알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답은 뻔하니까. 왠지 모르게 불안으로 가득 찬 조혜진의 얼굴은 가관. 나라라도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어오는 모습에는 나도 모르게 기침을 콜록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 부길드마스터.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만….” “네?”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뭘요?” “길드 마스터가 여, 연애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 456 회귀자 사용설명서 456화 조혜진 사용설명서(1) “콜록! 콜록! 콜록!” “오, 오, 오빠 괜찮으세요?” “콜록!” “오, 오빠.” “콜록! 콜록!”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조혜진의 목소리에 사레가 걸려 버렸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기침에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혹시나 건강에 이상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는 정하얀이 마치 사제라도 불러올 것 같은 기세였기 때문에 급하게 손을 들어 그녀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잠깐 사레 걸린 거니까. 큼! 크흠! 큼!” “무, 무, 물이라도 가져와 드릴까요?” “아냐. 어차피 들어갈 건데, 뭐….” “괜찮으신 거 맞으시죠?” “응.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정말로 사레 걸린 거라니까.” “그, 그래도….” “괜찮아.” 한참이나 콜록거린 뒤에도 정확한 정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건 무슨 또 뚱딴지같은 소리야.’ 조혜진이 무언가 착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별것 아닌 정황을 토대로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이 틀림없으리라. 너무 어처구니없는 발언이라 심장이 벌렁거린 것은 당연지사. 쓸데없는 말이라고 일축하고 싶지만 나라 잃은 조혜진의 표정은 여전했다. 그 와중에 계속해서 밖에서 서성거리는 모습은 가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현성이 혼자 균열 여관으로 간다고 했을 것이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 조혜진은 초조한 마음으로 길드의 앞을 서성거렸을 것이다. 방구석에서 한가하게 녀석을 기다리기는 건 그녀의 성격상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렇게 불안하면 차라리 미행을 하든가. 아니면 따라간다고 고집을 부리든가 해야지. 이 멍청한 여자야.’ 물론 김현성이 그 미행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낫다. 김현성도 김현성 나름대로 답답하기는 하지만 이 여편네 역시 마찬가지. 어째서 두 사람의 사이에 진전이 전혀 없는지 알 수 있었다. 괜스레 속으로 멍청한 여자라 그녀를 꾸짖고는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들어봐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또 여기서 서성거린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안에서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서요.” “그 말씀은… 부길드마스터도 듣지 못하셨던 겁니까?” “네. 저도 처음 들어본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혜진 씨가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지도 모르겠는데… 그거 확실한 정보는 맞습니까? 제가 알기로 현성 씨가 만나는 사람은… 검은 백조의 연주 씨 정도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관계도 연인 사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고요.” “그, 글쎄요…. 사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덕구 씨가….” “네?” “거의 확실하다고….” “네?” ‘박덕구 이새끼는 또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거야.’ 조금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쪽에서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이상한 부분에서 트롤링을 일삼기도 하는 녀석이었으니까. 이번에는 후자인 모양.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 형님! 아니요?” “…….” “형님!”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는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시야에 비친 것은 커다란 덩치의 박덕구. 오랜만에 보는 것도 아니고 저 돼지는 반갑지도 않다. 오히려 점점 더 걱정되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도대체 무슨 소식을 듣고 무슨 이빨을 털었길래 김현성의 타임라인이 연애 중으로 바뀌어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저 돼지가 진짜.’ 왠지 모르게 득의양양한 표정은 가슴 속에 있는 불안감에 불을 지피기 시작. 성큼성큼 걸어온 녀석이 나를 꽉 껴안았을 때에도 그 불안감은 가시지 않는다. “거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인데… 진짜 반갑구만. 그나저나 형님, 그 소식 들은 거요?” “뭐?” “거, 우리 형씨가 묘령의 여인과 늦은 밤, 심야의 데이트를 즐겼다는 사실 말이요. 바로 어젯밤이었다니까!” 말은 저렇게 하지만 본인이 먼저 확대해석해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으리라. “워낙 늦은 밤이어서 목격자가 몇 명 없기는 한데 틀림없다니까. 나도 깜짝 놀랐다는 거 아니요. 솔직히 우리 형씨는 여자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남자는 남자였던 거지.” “천천히 설명해. 정확히 뭔데?” “큼큼. 아, 형님은 아직 못 들은 건가. 어차피 나중에 듣게 되겠지만 미리 이야기해 줄라니까 제대로 들으쇼. 거,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형씨가 요 근처 식당에서 웬 아름다운 여성이랑 무척이나 끈적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거 아니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를 두고 와인을 마셨다는데 거의 그 정도면 확실한 거나 다름없지. 형씨 성격에 조금 이상하게 생각되는 일 아니요. 생각해 보쇼. 어디 우리 형씨가 밤늦게 다른 여자랑 와인 짠하고 쪽쪽 할 사람이요?” 끈적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심지어 쪽 하지도 않았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우리 형씨가 먼저 스캔들을 만들지 누가 알았겠소. 이건 내가 감이기는 한데… 아마 그 여자도 보통이 아닐 거요. 어떤 불여시인 줄은 몰라도 분명히 경험이 보통이 아닐 거라니까. 한편으로는 조금 걱정되기도 하지. 꽃뱀 같은 게 우리 형씨를 물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으니까.” ‘그거 나야, 이 돼지 새끼야.’ 옆에 있는 조혜진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떠벌리는 데 여념 없는 모습은 확실히 선동의 귀재라고 할 만했다. 녀석이 저렇게 계속해서 입을 털게 내버려 둔다면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묘령의 여자가 파란 길드마스터의 애까지 뱄다는 헛소문이 퍼질 것 같은 느낌. 김현성이나 다른 이들에 대해 신경을 쓰느라 이 돼지가 이런 떡밥에 관심을 가질 거라는 걸 계산하지 못했다. 무척이나 흥분했는지 상기된 얼굴은 가관. 다행히 김현성의 상대를 조사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박덕구가 작정하고 파고들면 정체가 금방 드러나고 말리라. “역시….” “아직 단언하기에는 이릅니다, 혜진 씨. 사무적인 관계로 만난 사람일 수도 있고요. 아무래도 균열 랜드 초기니 상인부터 유력 클랜의 클랜마스터까지 만나야 할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런가요?”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는 거 아니요. 일로 만났다는 사람들이 찹살떡처럼 끈적끈적해졌다는데…. 그거 이상한 거 아니요? 거, 듣기로는 그 두 사람 모습이 몇 년은 만난 연인 사이 같았다고 합디다. 안 그래도 우리 형씨가 낯을 많이 가리는데 처음 만난 사람이랑 그렇고 그런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리고 이건 그냥 내 추측인데….” “네.” “최소 1년은 숨기고 있었을 것 같은데… 그동안 우리도 몰랐던 비밀 연애 같은 걸 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니까.” ‘입 닥쳐, 이 돼지 새끼야.’ “이렇게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애초에 말도 안 되고, 또 남의 연애사에 우리가 이렇게 떠드는 것도 웃기지.” “그렇기는 한데…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인 거 아니요? 형씨가 만약 결혼이라도 하고 덜컥 애까지 생기면 우리한테도 형수님이랑 후계자가 생긴다는 건데…. 당연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자세히 알아봐야지. 야심한 밤에 둘이 돌아다녔다는 것부터 뭔가 낌새가 이상하기도 하고…. 심지어 오늘 아침에도 길드 하우스를 떠나서 안 들어왔으니까. 정황상 백퍼센트나 다름없지. 음음. 그렇고말고.” “그건….” “뭔가 일이 있기는 있다는 거요. 분명히 부끄러운 거겠지. 길드원들한테 알리기도 조금 그렇고 또 현성 형씨 같은 사람은 이제 유명인이나 다름없으니까 언론도 신경 써야 될 테고.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걸 보면 형씨도 슬슬 대외적으로 알리는 게 어떨까, 생각해 보고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니까. 다시 말해 간을 보고 있다는 거지.” 도대체 왜 이 돼지 새끼의 말은. ‘설득력 있는 거지?’ 분명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1년 전부터 김현성이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헛소리는 어떻게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말하자면 퍼즐 조각이 맞지 않는 개연성 없는 이야기. 하지만 이 돼지 새끼는 맞지도 않는 퍼즐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데 성공했다. 단순한 헛소문을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억지가 다분한 개소리로 공감을 이끌어낸 것이다. 조혜진은 이미 박덕구의 추측에 60% 이상의 신뢰를 보내고 있는 느낌. 박덕구가 파놓은 함정에 제대로 걸려들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1년 전부터 연애를 하고 있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내 생각에는 일적으로 만난 게 맞을 것 같은데. 굳이 지금 와서 공개하려는 의도가 없어 보이는데. 타이밍도 이상하고 상황 자체도 자연스럽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덕구 네가 잘못 짚은 것 같다.” “솔직히 형님 말도 일리가 있기는 한데 왠지 모르게 냄새가 난다니까?” “무슨 냄새?” “우리 형씨의 상대랑 형씨가 엄청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을 것 같다는 냄새 말이요. 이게 정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는 모르겠는데 가끔 이렇게 촉이 올 때가 있다니까. 내 경험상 이럴 때는 거의 100% 확률로 들어맞았고.” ‘이 귀신같은 새끼.’ 적어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다는 건 제대로 맞췄다. 마치 베일 것 같은 예리함에 나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을 삼킬 정도였다. “그리고… 조금만 관점을 다르게 생각해도 답은 쉽게 나올 수 있다니까. 지금에 와서 공개하려고 계획한 게 아닌 거요.” “그게 뭔 소리….” “공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건 아니요? 이를테면 거, 덜컥 아기라도 생겼다든가.” “네?!” ‘무슨 개소리야, 이 새끼야.’ “대충 설명이 되지. 지금까지 숨겨왔던 애인을 갑작스레 세상 밖에 내놓은 건데 시기상으로 생각해 보면 대충 맞는 것 같고… 요즘 형씨가 얼굴이 성치 않았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요. 아마 나라도 심란했을 테지. 지금이야 평화로워졌다고 하지만 대륙에서 아이를 키울 생각 만해도 정신이 아찔해지는데 어휴….” ‘니 생각이 더 아찔하다.’ “어쩐지 요즘 혼자 산책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들었소.” “그건 너무 무리수….” “또 다른 정황도 있다니까. 생각해 보쇼, 형님, 혜진이 누님. 솔직히 형씨가 우리한테 말도 없이 휙휙 사라진 게 어디 한두 번이요? 심지어는 일주일, 이주일 연락이 안 될 때도 있었는데. 제대로 어딜 다녀왔는지도 말해주지도 않고… 뭔가 일을 하러 왔다 갔다 하기는 했을 테지만 며칠 정도는 그 여자를 만나는 데 시간을 쏟았던 게 틀림없겠지. 이제야 조금 궁금한 게 풀리는 것 같다니까.” ‘어떻게 얘는 그걸 이렇게 이어붙일 수 있는 거야.’ 스토리텔링의 대가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오죽했으면 박덕구에게 한수 배워간다는 생각을 할 정도. 선동은 한 문장으로도 가능하지만 그걸 해명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김현성에게 실드를 쳐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한 기세에 눌려 변명하기도 쉽지가 않다. 단지 저녁식사를 같이했을 뿐이다. 이 돼지 새끼는 그걸 하루만에 1년간 만난 여자친구가 김현성의 아이를 임신한 걸로 만들어버렸다. ‘이… 미친놈이.’ 딱히 할 말이 없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꼴을 그대로 지켜볼 수 있을 리 만무. “너무 성급한 것 같다, 덕구야. 만약에 정말 그렇게 큰일이었다면 현성 씨가 우리한테 말을 해줬겠지. 그리고 길드마스터가 밖으로 나가 있었을 때의 스케줄의 대부분은 내가 알고 있어. 여자를 만나거나 할 여유는 없었을 거다.” “그렇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혜진 씨. 덕구가 착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사, 사실… 조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기는 했어요. 어제 밤새 무슨 편지를 쓰시는 것 같아서.” “네?”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서재에 틀어박혀서 편지를 쓰셨는데….” “프로포즈용 아니요?” ‘그런 거 아니야, 이 새끼야.’ 아마 사과의 편지일 것이다. 김현성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밤에 한 사과로도 성에 차지 않았던 거다. 아마 신발을 돌려주면서 사과의 편지도 함께 전하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곧바로 서재에 틀어박힐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별다른 내용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박덕구가 떠들게 놔뒀다가는 숨겨진 아이까지 있는 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된 것은 당연지사. 듣는 귀를 조심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자 그제야 조금 잠잠해지는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부길드마스터?”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조혜진답지 않은 얼굴이었다. # 457 회귀자 사용설명서 457화 조혜진 사용설명서(2) 조혜진,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다. 박덕구가 만들어놓은 개소리는 김현성 하렘에 포함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옆 동네 집안 사정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솔직히 순조로울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나마 가장 적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검은 백조의 박연주와 우리 꼬맹이 김예리일 터. 구석에서 매혹의 춤이나 연마하고 있는 김예리는 아직 꼬맹이라 논외로 칠 수 있다지만 박연주는 그렇지 않다. 몇 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에서 봐도 매력적인 여성으로 보인다는 거다. 그런 박연주조차 돌덩어리 바라보듯 바라본 게 바로 철벽남 김현성. 둔감한 건지 병신인 건지 모르겠지만 녀석의 성벽이 견고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박연주가 이럴 터인데 다른 이들의 상태가 어떨지에 대해서는 불 보듯 뻔하다. 유니콘에게 정식으로 선택받은 완전무결한 처녀 조혜진. 코웃음도 안 나오는 매혹의 춤 전승자 김예리. 샤를롯트 얘는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 둘과 비슷하면 비슷했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4명의 트롤러들이 모여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옆 동네의 사정일 터. 그런 배경에 엄청난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정황상 김현성의 여자친구라고 의심되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 것. 평화에 취한 것은 대륙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익숙함이라는 평화에 취해 적당히 사이좋게 지내며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려는 평화조약에 도장을 찍었겠지만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외부에 침략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쯧. 미리미리 준비를 해놨어야지.’ 애초에 서로가 항상 전투태세에 들어가 있었다면 이런 슬픈 결과는 나오지 않았으리라.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조혜진의 얼굴은 가관. 이 충격적인 소식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정신을 못 차리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계속해서 밖에서 서성거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합니까? 별거 아닐 테니까 일단 들어가요. 밖에서 이렇게 서성거리면 안 좋습니다. 덕구가 한 이야기는 거의 뇌피셜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요. 아직 뭐가 딱 하고 정확히 결정된 게 아닙니다. 연애한다는 것 자체도 황당한 이야기고.” “그렇지만 정체불명의 여성과 끈적한 시간을 보냈다는 건 사실이잖습니까.” “원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소문은 부풀려지게 마련입니다. 실제로는 끈적이고 뭐고 없었을 거예요. 사람들은 항상 자극적인 소식을 좋아하니까. 그리고 현성 씨가 데이트 좀 하면 어떻습니까. 따로 여자친구가 있는 것도 아닌데. 혜진 씨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않아요?” “…….” “…….” “저, 저는 그저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길드마스터가 걱정돼서….” “뭐가 걱정이 되는데요?” “혹시나 질이 안 좋은 여성일 수도 있으니까요. 길드마스터의 부관으로서 당연한 걱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길드의 운영 방향도 그렇고 또 갑작스럽게 외부인, 그러니까 그 묘령의 여성을 내부로 들인다는 건 위험부담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걱정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내부적인 일은 제가 거의 다 처리하고 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혜진 씨. 애초에 그 여자가 길드로 들어온다고 결정된 것도 아닐 뿐더러, 만약 뭔가 다른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제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덕구 말은 일단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덕구야, 너도 쓸데없는 말은 조금 자제해야지. 그렇게 웃으면서 꺼낼 만한 주제는 아니야. 대중에게 주목받는 만큼 안 좋은 소문 같은 것들은 최대한 막아야지.” “아….” “파란 길드는 기업이나 다름없어. 그리고 파티 멤버들은 곧 그 기업의 얼굴이고. 우리 길드마스터는 굳이 두 번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지?” “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소. 나, 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길드 직원들한테만 했고…. 절대로 외부인한테 이야기 한 적은 없다니까.” “조금 더 조심하자는 이야기야.” 슬쩍 까칠하게 반응하자 왠지 모르게 풀이 죽은 얼굴이 보였다. ‘이 자식 이거….’ 안 그래도 양심이 슬슬 찔려왔던 타이밍에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어깨를 툭툭 건드리자 슬그머니 미소를 되찾는 게 보였다. “나는 완전히 모르고 있었는데… 아무튼 알려줘서 고맙다.” “커흠…. 뭐, 당연한 거요. 이런 소식이라면 나한테 맡기라니깐. 없는 정보도 물어올 수 있으니까.” ‘없는 정보는 물어오면 안 되지.’ “그래. 그래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불문에 붙이는 게 낫겠다. 길드원들 입단속 잘하고…. 특히 예리한테는 정확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따로 관심 가지지 말라고 전해. 김미영 팀장님한테도 길드 직원들 입에서 함부로 쓸데없는 소문 도는 일 없도록 하라고 전해줘. 이번 일 처리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거, 맡겨주쇼.”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하기도 쉽지가 않다. 의연한 척, 사태를 정리하는 척, 월드 클래스인 척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내 심정도 조혜진과 다르지 않다. ‘시바….’ 꼬리가 너무 길면 밟힌다. ‘김현성의 입이 무거워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애초 박덕구 안기모 김예리에게 이기연에 대해서는 숨기라고 전달 사항을 걸어놓지 않았더라면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으리라.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김현성은 묘령의 여인에게 사과의 편지와 신발을 전달하기 위해 균열 여관을 돌아다니고 있을 터. 한 번만 삐끗해도 일이 틀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더 담백하게 마무리 지었어야 됐는데.’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남아 있음이 분명했다. 제대로 된 사과를 하기 전까지 이 일에 집착할 김현성을 생각하니 머리가 다 아파올 정도였다. ‘이건 아니야….’ 혹시라도 왕국 연합까지 직접 찾아와 비치렐라에게 구두를 돌려주는 그림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따로 이지혜에게 행정적인 처리를 부탁해야 될 것 같은 느낌. 조금 더 먼 곳으로 떠나야 했다. 안기모와 박덕구의 입을 잘 관리하고 김예리도 매혹의 춤을 빌미로 삼아 입을 막는다. 비치렐라에 쏟아지는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관심이 조금 멀어지다 보면 평소와 같은 하루가 찾아오게 되리라. 좋은 추억으로 남기고 비치렐라가 기억 속에서 페이드아웃 된다면 모든 게 완벽하다 말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외골수인 녀석의 성격. 뭔가 김현성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쏠리게 만들 만한 떡밥이 있다면 조금 더 무난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만. ‘그러기가 쉽지가 않은데….’ 아니, 그 전에 지금 상황이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인지 궁금해진다. 세상을 구하는 막대한 사명을 짊어졌다면 조금은 더 빡세게 움직여야 하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며 녀석을 비난하려 했을 때였다. 갑작스레 김현성의 현 상태에서도 생각이 미친 것. ‘아니야. 이것도 아니지. 이렇게 생각하면 또 위험하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 혼자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여 봤지만 김현성의 스케줄을 떠올리자 절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훈련 또 훈련. 훈련이 끝나면 업무를 보고받고, 다시 한번 훈련을 하는 게 녀석의 전형적인 하루 일과였다. 1회 차의 미래에 대비하려고 홀로 바깥을 싸돌아다니는 것은 물론, 혼자 떠안은 과제가 수십 가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걱정 아닌 걱정을 한 적이 많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현재 녀석에게 필요한 것은 절박함이 아니라 휴식이리라. 잠깐의 평화도 즐기지 못하는 김현성을 나무라는 것은 최대한 지양해야 할 일. 1회 차에서 수 십 년, 2회 차에서도 몇 년을 자신을 돌보지 않고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어쩌면 이번 비치렐라 사태는 쉬고 싶다는 무의식이 만들어낸 집착 일지도 모른다. 녀석이라고 왜 달콤한 연애를 하고 싶지 않겠는가. 놀고 싶고, 쉬고 싶고, 인생도 즐기고 싶을 것이다. 20대 젊은 청춘에 영문도 모르는 곳에 끌려와 개고생을 했고 심지어는 두 번째 인생에서도 막중한 책임감을 지며 살아가고 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는 타이밍. 지난 밤 즐겁게 웃던 녀석의 모습을 떠올리자 솔직히 조금 측은하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휴식. 맞아. 휴식이 필요해.’ 정신적으로 마모되고 있다는 증거도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형제를 의심하고 있다는 현 상황도 그렇다. 본인이 자각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마구니가 머릿속에 들어가 있다는 게 궁지에 몰렸다는 증거. 내가 만약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정신과 담당의였다면 휴식을 권했으리라.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생각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점점 더 고개가 끄덕여 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긴다면 넓은 시선으로 현 상황을 바라볼 수 있고 굳이 내가 어떤 조치를 취하기 전에 마구니 역시 자취를 감출 것이다. “혜진 씨.” “네?” “최근에 길드마스터 스케줄의 변화는 있습니까?” “아뇨. 매번 똑같으십니다. 훈련과 업무를 병행하시고… 그것 외에는 다른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다. 아마 어젯밤은 녀석에게는 일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나 역시 이번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았던가. 녀석이라고 휴식을 취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아니, 오히려 좀 쉬어야 된다. 문제는 그 휴식 방법에 대한 것. 기왕이면 비치렐라와의 데이트를 즐기라고 권해보고 싶었지만 세상에 없는 사람과 데이트를 즐길 수는 없다. 아쉽지만 그 대용품이라도 물색해 봐야 할 것 같은 느낌. 연애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기야 하겠지만. ‘여자 문제는 여자 문제도 덮는 게 효과적일 것 같기도 하고….’ 가장 간단한 방법이기도 하다. 애매하게 접근한다면 또 훈련과 업무에 미쳐 자기 자신을 몰아붙일 테니까. 슬그머니 오른쪽을 바라보자 보폭을 맞추며 걸어가고 있는 조혜진이 괜스레 눈에 띈다. “혜진 씨.” “네?” “잠깐만 머리 한번 풀어보세요.” “갑자기 무슨 말씀을….” “잠깐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머리 한 번만 풀어보세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갑작스러운 제안에 슬그머니 표정을 찌푸린 조혜진. 하지만 순순히 머리를 푸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꽁지머리에 있던 머리끈을 풀자 긴 머리카락이 목과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녀와 블랙마켓을 돌아다닌 적도 있다. ‘드레스도 꽤 잘 어울렸던 것 같았는데….’ 평소에 너무 선머슴처럼 하고 다녀서 빛이 바래졌을 뿐이지 그녀 역시 충분히 미인이다. “예쁘네요.” “불쾌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아….” “아니야, 하얀아. 당연히 우리 하얀이가 더 예쁘지.” ‘시바 X될 뻔했네.’ “지금 사람 놀리는 겁니까.” “아닙니다, 혜진 씨. 그런 게 아니에요.” ‘시바.’ 갑작스레 찾아온 짧은 위기에 고개를 저으며 필사적으로 수습했지만 조혜진의 얼굴은 똥이라도 밟은 것처럼 구겨져 있었다. 물론 정하얀은 미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고. 당연히 이해가 간다. 머리를 풀어보라고 해서 풀었더니 자기 여자친구보다 못생겼다는 욕을 면전에서 먹은 셈이었으니까. 아무리 이런 부분에서 별 관심이 없는 조혜진이라도 충분히 기분 나쁠 만한 빌드업이었다. 하지만 똥 씹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던 것도 잠시. 이윽고 나온 내 목소리에 깜짝 놀라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혜진 씨.” “네?” “현성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 458 회귀자 사용설명서 458화 조혜진 사용설명서(3) 조금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차분한 얼굴을 하고서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글쎄요. 어떤 의도로 질문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길드마스터는 훌륭하신 분입니다. 목표를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도 그렇고, 평소 행실도 그렇고, 옆에서 보고 있자면 정말 존경할 만한 요소가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도 웃기지만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분입니다.” “아니, 그런 형식적인 대답 말고요.” “네?” “이성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여쭌 겁니다.” “네?” “이성이요. 이성.” “갑자기 그게 무슨….” “길드마스터 좋아하는 거 아닙니까?” “어,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건지 궁금합니다, 부길드마스터.” “다 이유가 있어서 물어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중요한 일이니까.” “이게 뭐가 중요한 일입니까. 지금 저를 놀리려고 하시는 거라면…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무례한 장난은 삼가해 주세요.” “아니, 놀리는 거 아닙니다. 친구로서 궁금해서 드리는 질문이지. 솔직히 얼굴에 전부 보이는데 뭘 그렇게 빼고 그러십니까. 현성이 좋아하잖아요.” “제가 어떻게 감히….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길드마스터를 존경하는 마음을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 경솔한 마음은 품은 적도 없고 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길드마스터의 부관으로서….” “아니. 그런 말 하지 말고. 솔직히 좋아하잖아요.” “아닙니다.” “좋아하잖아요.” “아닙니다.” “아니, 좋아하잖아!” “아, 아니라니까! 아니라고!” 당황했는지 순간적으로 빼액 소리를 질러오는 모습. 민망했는지 괜스레 목소리를 가다듬는 모습이 보였다. 나 역시 당황한 것은 당연지사. 반응이 조금 격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부정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욱더 강경한 것 같은 느낌. 뜻밖의 질문에 정하얀마저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는데, 반응을 보니 조혜진이 김현성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았다. ‘얘는 원래 다른 애들한테 관심 없으니까.’ 아마 김현성과 조혜진이 평소에 뭘 하고 다니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눈이 한층 더 부드러워진 것을 보니 저쪽과 내가 엮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마음에 드는 모양. 정말로 단순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후우….” “…….” “후우. 큼큼. 갑작스레 소리를 질러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부길드마스터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아까의 일 때문에 오해하신 것 같은데 그건 정말 길드마스터와 파란 길드를 걱정해서 드렸던 말씀이었습니다. 결코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아니, 뭐가 이상한 겁니까. 도대체. 남녀가 서로 붙어 다니다 보면 그런 감정이 생길 수도 있는 거지.”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 “솔직히 지금 부정하는 게 더 이상해 보입니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얼레리꼴레리 하는 것도 아닌데. 이러니까 유니콘이 그렇게 환장을 하는 거 아닙니까. 나이가 몇 갠데 이런 걸로 얼굴 붉히고 그래요.” “그것도 오해가 있는 겁니다. 지구에 있을 때 제가 얼마나….” “뭐요?” “이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신여고 테크니션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강원도 연애박사 박덕구 같은 소리하고 있네. 또.’ 본인이 입을 열면서도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다. 사실 조혜진이 우신여고 테크니션이든 아니든 간에 그런 것들은 이쪽과 하등 관계없다. 중요한 것은 조혜진이 김현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냐. 사실 답은 정해져 있다. 본인이 나에게 말을 꺼내기 부끄러워할 뿐이지, 아마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애초 조혜진이 김현성에게 은밀하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길드원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 함께 있을 때 묘하게 얼굴을 붉히는 것도 그랬고 부관이라는 위치를 변명삼아 은근히 옆자리를 사수하는 것도 그랬다. 본인은 잘 숨기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건 김현성뿐이리라. ‘확 다른 애를 밀어볼까.’ 여러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으로서 검은 백조 박연주로 시작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지만, 왠지 모르게 얘는 보면 볼수록 짠하다. ‘우리 혜진이 고생 많이 했지….’ 1회 차에 가면 쓰레기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도 그랬고 죽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도 그랬다. 개인적으로 마음이 맞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만큼 기왕 누구 하나를 민다면 얘를 밀어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은 느낌. 아마 김현성의 정신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 그 무엇보다 본인이 녀석을 아끼기도 하니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초개처럼 자신의 목숨마저 집어 던질 정도였으니 김현성의 짝으로도 결코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신여고 테크니션이든 뭐든 관심은 없는데. 솔직히 도와주고 싶어서 물어본 겁니다. 아니, 도와준다기보다는 필요한 일처럼 느껴져서요.” “뭐가 필요한 일이라는….” “현성 씨 관련된 일입니다.” “네?” “옆에서 보면서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요? 현성 씨가 정신적으로 많이 몰려 있다는 거.” “그건….” “저도 대충은 알고 있어요. 굳이 숨길 필요 없습니다. 쉬는 거 본 적 없죠?” “그렇지는 않습니다. 길드마스터께서는 항상 적절한 휴식을….” “훈련 사이사이에 몸을 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업무가 끝나고 중간에 잠깐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해 묻는 게 아니에요. 말 그대로 정상적인 사람이 갖는 휴식에 대해 묻는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져 있다든지, 문화생활이나 취미생활을 즐긴다든지. 그 것도 아니면 개인적인 여가 시간을 가지는 것도 상관없고요. 옆에서 항상 같이 행동하면서 눈에 보이는 게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는지 말씀드린 거예요.” “어,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 본래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최근에는 딱 달라붙어 생활한 적이 없어 혹시나 물어봤는데 역시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모양. 김현성 내부에 많은 변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근본적인 부분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괜스레 심각해진 조혜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제야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 “혜진 씨가 길드에 오기 전에도 쭉 그런 상태였어요. 지금은 그나마 조금 나아진 편이고요. 본 적 없는 게 당연할 겁니다. 솔직히 길드원끼리 식사를 할 때 말고는 뭘 먹는지도 모르겠는데 간단한 전투식량으로 식사 때우거나 하고 있지는 않아요?”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저도 지금까지는 애써 외면해 왔지만 생각해 보니까 상황이 심각한 것 같더라고요.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질 낌새가 없다는 것도 그렇고 아마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본인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건 이해는 가지만 우리 길드마스터 같은 경우에는 정도가 조금 심한 편이죠. 끊임없이 걱정하고 끊임없이 대비하고 끊임없이 움직이잖아요. 어디 그게 사람 사는 것처럼 보입니까. 기계도 그렇게는 살지 않을 거예요.” “…….” “그래서 말입니다만… 솔직히 저는 어젯밤에 현성 씨가 따로 여성분과 만남을 가졌다는 소식에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트레스를 푸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하고요.” “그건!” “물론 저도 혜진 씨가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압니다.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여자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의심스럽고 정황상 찝찝한 부분이 없지는 않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따로 우리 길드마스터가 쉴 수 있는 구석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마침 그 후보로 혜진 씨 얼굴이 생각난 거 아닙니까.” “만든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혹여나 제가 길드마스터에게 마음이 있다고는 해도 길드마스터께서는….” “그건 모르는 거 아닙니까. 제가 이런 말 하는 게 우습게 들리겠지만 솔직히 혜진 씨 정도면 어디서 꿀리지 않습니다. 우신여고 테크니션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성 씨랑 시간을 많이 보내기도 하고 누구보다 유리할 겁니다. 그리고.” ‘잘 이해하고 있기도 하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대충 이해가 갑니다만… 사실 어째서 도와주신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안이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요. 물론 제가 길드마스터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저 궁금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실 그 묘령의 비치렐라가 바로 나고 그래서 아주 난감한 상황이야. 우리 현성이가 자꾸 헛물켜고 헛짓거리 할까 봐 불안하니까 네가 등판해줬으면 좋겠다. 겸사겸사 현성이 멘탈도 좀 잡아주고. 걔 힘들어 하잖아. 옆에 누구라도 있어야 좀 쉬겠지.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 만무. 결국에는 적당한 변명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저 욕심 많은 거 잘 알잖아요. 굴러들어온 돌이 갑자기 파란에 들어온다는 것도 조금 이상하고, 솔직히 덕구 말은 거의 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영 실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니까. 기왕 현성이가 짝을 찾는다면 아는 사람이면 더 좋을 것 같아서… 사실 이게 제일 큽니다. 개인적으로도 혜진 씨를 응원하고 있었는데 마침 딱 좋은 타이밍인 것 같아서요. 그래서 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 “부길드마스터가 도와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도움이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요. 애초에 저는….” 말은 강단 있었지만 표정은 복잡했다. 말과는 다르게 속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터.  년에 날렸다는 둥, 우신여고 테크니션이었다는 둥 여러 개소리를 펼치기는 했지만 조혜진이 남자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모태솔로라는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뭘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가까워져야 하는지,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여러 가지로 혼란에 빠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변에는 아름답고 능력 있는 여자들이 아주 넘쳐나고 심지어는 정체불명의 임신녀까지 등장한 상황. 어떻게 해야 하냐고 애잔하게 쳐다보던 몇 분 전의 자신의 모습은 벌써 잃어버린 모양이다. “아쉽지만 그럼 어쩔 수 없네요.” “…….” “검은 백조 연주 씨한테나 연락 넣어봐야지.” “아니, 애초에 그런 걸 돕는다는 게 조금 이상한 겁니다. 부적절한 방법이라면 제가 막겠습니다.” “별로 부적절한 방법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합리적으로 조언을 해드리는 거지.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길드마스터를 위한 겁니다. 갑자기 나타난 불여시한테 순진한 현성이가 낚이면 누가 책임진답니까? 우리 길드의 아버지 같은 사람인데 제가 또 그런 꼴은 조금 보기 그래서… 솔직히 혜진 씨도 이건 같은 생각이잖아요. 부끄러우시겠지만 그렇게 부정 안 하셔도 됩니다. 친구 좋다는 게 뭡니까. 이래 보여도 제가 현성이랑 밥도 먹고 사우나도 가고 고마 다 한 사인데… 장담하건데 팍팍 밀어드릴 수 있습니다.” 장내에 약간의 침묵이 가라앉았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얼굴이 복잡했다는 건 너무나도 뻔했다. 왠지 모르게 긍정적인 신호를 보이고 있다. 결국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조심스레 입을 여는 조혜진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네가 그럼 그렇지.’ “어, 어떻게 도와주실 수 있는 겁니까?” “스타일링 바꾸고, 화장도 좀 바꾸고, 행동도 교정하고….” “네.” “무엇보다 제 말만 잘 들으면 됩니다. 며칠 동안은 제 인형이나 아바타처럼 움직인다고 생각합시다.” # 459 회귀자 사용설명서 459화 조혜진 사용설명서(4) 시간이 아주 약간 흘렀다. 정하얀, 한소라를 포함한 마법사들은 혹독한 스케줄을 강요당했고 그에 보답하듯 균열 랜드는 기획했던 모습이 되어갔다. 이제는 완공 전인 건물보다 완공 후의 건물이 더 많은 상황. 마법사를 포함한 인부들이 어느 정도로 힘을 썼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바쁜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행정적인 처리를 계속해야 했던 나 역시 제대로 숨 돌릴 시간이 없었던 것은 당연. 김미영 팀장과 이지혜, 박덕구의 그녀 마도학자 황정연, 심지어는 선희영까지 불러와 밤을 새우는 날이 지속되었다. 파란에 입단한 신입 엘레나는 균열 랜드를 찾은 엘프나 이종족을 담당했고 길드 유일의 대장장이인 유아영은 하루 종일 망치질을 쉬지 않았다. 균열박물관에 보상으로 쓸 만한 아이템을 대줘야 했기 때문이다. 대장장이 겸 서브 탱커로 데리고 온 유아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라 할 만했다. 살라트의 뼈나 디아루기아의 비늘로 만든 갑주들은 충분히 고급 아이템으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퀄리티가 높았고 영웅등급은 물론 전설등급에 오른 이들 역시 유아영 컬렉션에 큰 관심을 보였다. 포션 사업과 더불어 파란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새로운 사업이 물꼬를 틀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폭발적인 성장에 나 역시 한층 더 바빠진 것은 당연지사. 쓸 만한 대장장이를 길드직원으로 들이는 한편, 연금공방과 같은 공장 시스템을 새로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유아영이 직접 제작하지 않은 하위 장비들 역시 엠블럼을 찍어 컬렉션으로 내보낸 것. 타깃은 희귀 등급의 모험가들. 고급화된 장비를 통해 올린 수익 역시 상당했지만 하위 품목으로 얻는 수익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아니, 어느 시점에서는 오히려 전자를 뛰어 넘었다. 사실상 저가 장비였지만 파란의 엠블럼이 찍혀 있으니, 하위 모험가들의 지갑을 여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균열랜드에 들어가는 초기 투자비용을 유아영 컬렉션으로 전부 회수 했을 정도였으니 다른 언급이 필요할 리가 없다. 물론 새로운 시장으로 인해 덕을 본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다. 본래 불티나게 팔려나갔던 포션 컬렉션 역시 묵직하게 자리를 잡아 훌륭한 수익을 뽑아내 주었고 그 외 다른 부분에서 일어난 수익 역시 입이 떡하니 벌어질 정도였다. 길드 직원들뿐만이 아니라 파티원들까지 업무에 투입되어야 했던 이러한 배경은 지치기도 했지만 행복하기도 했다. 붉은 용병이나 검은 백조 같이 균열 랜드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 길드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차희라는 가끔 밤에 찾아오는 것 외에는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안 그래도 만나기 힘든 박연주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부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지혜의 말에 따르면 갑작스레 등장한 임신녀를 찾는다는 것 같았지만 이지혜가 흘리는 거짓 정보에 아직 단서를 찾지는 못한 상황. 이지혜에게는 항상 고마웠지만 이번에 보여준 활약에는 절로 엄지손가락을 들게 되었다. 정보 길드라고 분류할 수 있는 검은 백조의 수사망에 혼선을 준 셈이니까. 겉으로 보이는 일들이 너무나도 잘 풀리고 있어 어안이 벙벙할 정도. 하지만 대륙이 떠안고 있는 문제들은 여전했다. 모험가들은 갑작스레 찾아온 평화에 절어 있었고 신성을 모으는 것 역시 진전이 느린 것 같아 보였다. 바젤 교황을 닦달해 예전보다 더욱더 큰 예배를 드리고 있었지만 무능의 아이콘 베니고어가 아직까지 신성을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기도의 질 때문 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목숨이 달아날 정도의 상황에 처해 필사적으로 기도를 드렸던 예전과는 다르게 등 따시고 배부른 지금은 형식적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느낌이 강했으니까. ‘기도에 진심을 담아야지, 진심을!’ 그래도. ‘이건 언젠가는 처리될 일이니까.’ 말 그대로, 이건 언젠가 처리될 일이다.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될 사항이라고는 볼 수 없다. 악마 던전 시리즈와 균열 박물관 시리즈가 이전에 있었던 모든 걸 대체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기본은 해주고 있다. 조금은 더 버틸 수 있다는 거다. 이런 배경에 현재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과제는 딱 2가지. 평화에 찌든 개돼지들을 조금 더 열정적으로 굴리는 방안을 떠올리는 것. 또 하나는 잘 풀리지 않은 내부적인 일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전자에 대해서는 틈틈이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번듯한 해결책은 없는 상황. 일단은 당장 눈앞에 닥친 두 번째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여겼다. 물론 그 문제가 무엇인지는 뻔할 뻔 자. ‘현성아….’ 사랑스러운 회귀자와 관련된 문제였다. 물론 녀석과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해후는 꽤 감동적이었고 평소와 같이 수많은 선물과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스폰녀에게 선물을 가져다 바치는 호구의 모습이 이러할까. 꼬박꼬박 이쪽의 안부를 물어오는 녀석의 모습도 여전했고 식사나 술자리 같은 자리나 길드원이 모두 모인 자리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딱 그것뿐이었다.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진솔한 이야기나 이후에 필요한 정보 같은 것은 얻을 수 없었다. 벽이 쳐져 있다는 느낌 정도는 아니었지만 약간의 거리감이 있는 느낌. 물론 나 혼자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김현성은 예전의 모습과 별 다른 차이가 없었으니까. 가지고 있는 의심도 조금은 걷어낸 것 같았고 조금 더 돈독해졌다면 돈독해졌다고 말할 만했으니 어쩌면 정말로 모든 게 내 착각 아닌 착각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있는 것을 전부 털어 넣을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하고 싶은 내 욕심은 아직까지는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회귀한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밝힐 수 있을 정도의 끈끈한 관계. 그 정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거다. 이쪽이 초조해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비치렐라가 떨어뜨리고 간 구두의 주인을 찾는 것에 여념이 없는 상황. ‘이것도 말해오지 않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사람 하나를 찾아달라고 부탁이라도 해올지 알았던 내 입장에서는 조금은 맥 빠지는 일이었다. 녀석이 개인적인 부탁을 꺼린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손을 써볼 수단이 사라진 것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 정신을 제대로 쉬게 할 수 없다는 것. 김현성과 더 가까워지고 다음 단계로 향하기 위해서는 일단 녀석의 고질적인 문제부터 해결해야만 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조혜진. 비치렐라에 대한 호기심도 벗겨낼 겸 김현성의 마모된 정신에 영양제를 주입하는 방안은 약간이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 입장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전부 사냥이라는 방향이라고 볼 수도 있으니 만족하는 게 당연했다. 빌드 업 자체는 굉장히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일단 조혜진과 김현성의 관계가 무엇인지, 김현성이 조혜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분석하는 것부터.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뢰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은근슬쩍 물어본 녀석의 속마음이었다. 우리 현성이가 조혜진에게 연애감정을 품지 않았다는 건 연애고자도 알 수 있었다. 실제 사랑스러운 회귀자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그녀다. 처리해야 할 업무가 달라 김현성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나와는 반대로 비슷한 업무를 보는 둘은 거의 매번 붙어 다닌다. 훈련도 같이. 업무도 같이. 휴식도 같이. 식사도 같이. 어시스트를 가장 잘 받아먹을 수 있는 자리에 포지셔닝을 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정상적인 남녀라면 정분이 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짜투리 시간에 서로의 육체를 남몰래 탐하고 있다고 해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 ‘서로의 육체를 탐하고 있기는 하지.’ 매일매일 대련을 하고 있으니까. 굳이 이쪽의 도움이 없었더라고 조혜진 스스로가 충분히 해냈어야 했다는 거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위치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치였다. 김예리처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고 박연주 같은 입장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김현성의 탓이라기보다는 조혜진의 탓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본인이 먼저 여자로 보일 생각이 없다. 유능한 부하, 신뢰할 수 있는 친구, 믿을 만한 동료의 포지션을 고수하고 있으니 안 그래도 둔한 녀석이 조혜진에게 그런 흑심을 품을 수 있을 리 만무. 심지어 알 수 없는 전우애까지 생성된 상태라고 할 수 있었으니 정황 자체가 그리 좋지는 않아보였다. 비치렐라 사태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 녀석이 고자가 아니라는 것. 1회 차를 겪었다 한들, 녀석도 다른 팔팔한 20대 청년들과 다르지 않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성으로 인식하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 같습니다.” 바로 이거다. 심각한 분위기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조혜진이 반문했다. 조금은 어두운 표정. 벌서 몇 차례나 이런 회의 아닌 회의를 거치고 있지만 여전히 머리에는 의심이라는 마구니가 끼어 있는 모양. 아직 그 성과가 드러나기 전이니 저런 표정을 보내는 것이 당연했다. “이성이요?” “네. 이성입니다. 우리 현성이가 혜진 씨를 여자라고 인식하게 하는 게 최우선입니다. 아마 지금까지의 모습만 봤을 때는 기껏해야 동료나 친구, 부하, 직장 후배 같은 느낌이 전부일 겁니다. 여자의 모습보다 전사의 모습을 오랫동안 봐왔으니까요.” “그렇군요.” “네. 그런 겁니다. 혜진 씨가 매력이 없는 게 아닙니다. 본인이 먼저 그런 포지션을 자처하고 있으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계속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떨어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돕니다.” “네?”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방향을 말씀드린 거니 그렇게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함께하는 스케줄 같은 경우는 관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떤 관리가 필요하다는 건지 저는 잘….” “훈련 시간은 뺍니다.” “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몸이 안 좋아졌다고 대충 변명 휘갈긴 이후에 함께하는 훈련은 무조건 제외합니다.” “그렇지만 그건!” “야외 업무도 조금은 줄이고요. 아니, 이것도 전부 뺍니다. 당분간은 행정업무만 같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거지 같은 갑옷도 당분간은 금지입니다.” “거지 같다니….” “그 갑옷 벗기는 합니까?” “무슨 망발을 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잘 때는… 그리고 갑옷을 벗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제안입니다. 제 임무가 뭔지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말했잖습니까. 당분간 훈련이나 야외 업무, 임무도 전부 제외한다니까요. 당분간은 굳이 갑옷 입을 일이 없는 겁니다. 1년 365일 똑같은 갑옷 걸치고 나타나는데 현성이가 퍽이나 좋아하겠습니다.” “1년 365일 다른 갑옷이 아닙니다. 여벌 갑옷도 제대로 활용하고 있으니까요.” ‘이 여자가….’ 이러니 녀석이 조혜진을 여자로 볼 리가 없다는 거다. 심지어 1회 차에서도 이 여편네를 여자로 본 적이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상황이 조금 더 심각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조금 더 극단적인 처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 말 듣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상식적인 요구가 아니라면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충분히 상식적인 요구입니다. 아무튼 다 필요 없고 지금부터 갑옷은 입지 마요. 당분간을 평상복으로 입을 겁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 조금 그렇기는 한데 솔직히 혜진 씨는 충분히 예쁘고 매력적이에요. 그 거지 같은 퍼런색, 보노보노 생각나게 하는 갑옷, 그것만 벗어도 훨씬 나아질 거라니까요. 지금 이 순간부터 벗는 겁니다. 이 순간부터.” “…….” “자 갑옷 이리 줘요.” “…….” “벗으니까 훨씬 낫네.” “뭘 입으면 되는 겁니까?” “지금부터 준비해 드릴 겁니다. 이런 쪽으로는 밝은 친구가 있어서. 화장부터 옷차림까지 전부 다 바꿔 봅시다.” “뭔가 본격적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불안합니다.” “당연히 본격적으로 갈 겁니다. 묘령의 여자한테 소중한 현성이를 뺏길 수는 없으니까요. 혜진 씨도 그게 싫어서 지금 저랑 이러고 있는 거 아닙니까. 길드를 위해서요.” “…….” “자, 그럼. 지혜 씨, 들어오셔도 됩니다.” 다시 한번 입을 연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형의 모습이 보였다. 조혜진은 깜짝 놀란 얼굴. 그녀가 여기에 올 줄은 생각지 못한 것 같다. 나와 친하다는 건 알고 있었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거겠지.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요?” 이 업계에 스페셜 리스트. 무언가 짐을 바리바리 싸온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진짜 엉망이네요.” 하늘에서 팩트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 460 회귀자 사용설명서 460화 조혜진 사용설명서(5) 이지혜를 등판시킨 이유는 뻔했다. 그나마 내 기준에서 가장 여성스럽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 주변을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애초에 편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차희라나 화장이라는 수단이 필요 없는 외모를 가진 엘레나. 현대에서 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쌍팔년도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 카스가노 유노, 아니, 얘는 쌍팔년도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오히려 메이지 유신에 가까운 느낌.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뭐라 말하기도 애매했다. 본인은 무척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아직까지는 덜 여문 모습. 이제 막 꾸미기 시작한 대학생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굳이 분류하자면 디아루기아도 엘레나와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애초에 그 둘은 인간과 거리가 멀었으니 이렇게 언급하는 게 적절하지는 않다. 그나마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선희영.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한 모습은 수많은 남심을 홀리기에 충분했지만…. ‘이런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지.’ 그 말 그대로였다. 애초에 비치렐라의 어머니인 이지혜가 있는데 굳이 선희영을 불러올 필요가 없다. 멀리서 본 이지혜는 변신의 달인이요, 변장의 달인이라고 할 만한 수준. 내가 남의 외모를 평가할 처지는 아니지만 이지혜는 제법 평범한 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주변에 있는 수많은 괴물들과는 다르게 작고 귀여운 인상. 차희라처럼 육감적이지도 않고 카스가노 유노처럼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게 예쁜 것도 아니다. 디아루기아와 엘레나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굳이 엘레나와 비교를 해보자면 그녀는 공작이요, 이지혜는 아기 참새. 그럼에도 가까이 붙어 있을 때 큰 차이가 없다. 이지혜 역시 충분히 아름다운 여성이고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거다. 이건 마법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누군가처럼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깃털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이 아기 새는 형형색색의 깃털들을 가지고 와 자신의 몸을 부풀리는 방법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지혜라는 인간의 개성이나 영혼의 단짝이라는 것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눈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어떻게 봐도 대단한 능력. 심지어 얘는 튜토리얼 때도 비교적 멀쩡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었다. 씻을 곳도 없고 화장실도 없는 장소에서도 항상 자기 자신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거다. 새삼스레 예전을 떠올려 보니 조금이지만 소름이 돋는다. ‘뭐지, 진짜?’ 원래 다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지혜는 자신을 가꾸고 관리하는 것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외모와 성격이 남의 호감을 이끌어 낸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 그런 그녀가 야생의 상태로 몇 년이나 지낸 조혜진의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 만무. 가슴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튀어나오는 그녀의 말은 조혜진의 애매한 가슴에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여자 맞아요?” “생물학적인 부분을 물어보고 계신다면 맞습니다. 성별은 일단….”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뭐, 솔직히 비난할 일은 아니기는 한데… 사람마다 라이프스타일은 다른 거니까.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죠. 그래도 저랑은 너무 다른 인생을 사는 것 같아서 오히려 제가 더 놀랍네요. 아!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지는 않네요. 손톱 관리도 하시는 거 보니까.” “이건 훈련에 방해가 돼서….” “…….” “…….” “아, 아무튼 간에 총체적 난국이네요. 기영오빠 말대로 일단 와보긴 했는데…. 그래도 본판은 예쁘시니까 아마 조금만 손보면 이전보다는 훨씬 나아질 거예요. 당연하지만 이건 연주 언니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언니 라이벌 돕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네요. 화장은 원래 안하고 다니시는 건가요?” “어차피 땀을 많이 흘리면 지워지지 않습니까.” “여기에 워터프루푸 제품 같은 건 없지만, 마법은 호구가 아니랍니다. 간단한 코팅 마법으로도 그 정도는 보안할 수 있다고요. 이건 관심이 없다고밖에 볼 수 없겠네요. 린델에 널린 게 메이크업 샵인데 한 번도 안 가봤어요? 검은 백조에서도 관련 샵들 많이 런칭했는데….” “네. 죄송합니다만 시간이 없어서.” “시간이 없다는 건 변명이죠. 매일 1시간 일찍 일어나고 30분 늦게 자면 돼요. 다음에는 샵도 한 번 데려가 봐야겠네. 없는 게 많지만 웬만한 건 대체할 수 있다고요. 그럼… 어디 보자. 입술은 조금 매트하게 바르는 게 나으실 것 같고… 그리고 저기 있는 푸르스름한 갑옷은 뭐예요? 평소에 저런 거 입고 다녀요? 아무리 갑옷이라고는 해도 신경을 조금 쓰셔야 할 것 같은데….” “색깔이 예, 예쁘지 않습니까.” “아니요. 안 예뻐요. 변비 걸린 보노보노 얼굴 색 같다고요.” “예리가 함께 골라준 갑옷입니다.” ‘키야… 김예리! 이 사탄도 울고 갈 쓰레기.’ 아까부터 저 촌스러운 갑옷이 눈에 밟힌다고 했다. 김예리가 함께 골라줬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장담컨대 조혜진을 먹이려는 수작이 분명. 만약 그게 아니라면 김예리 역시 절망적인 센스를 타고났을 거다. 아무튼 돌아가는 정황은 나쁘지 않은 상황. 이지혜가 정확히 어떤 진단을 내리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무언가 효과가 있는 것 같기는 했다. 들어오자마자 강력한 팩트를 퍼붓는 모습은 엄지를 치켜 올리게 될 정도였다. 워낙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확신을 담아 입을 여는 이지혜의 태도가 전문가를 만난 것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모양이다. 실제로도 이지혜는 전문가가 맞았으니 조혜진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늘 뭐 다른 스케줄은 없죠?” “오후 훈련이 남아 있습니다. 이후에는 봐야 할 업무도 조금 있고요.” “오후 훈련, 그건 빼는 게 좋겠네요.” “네?” “그건 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어요. 일단은 따라와요. 씻는 것부터 차근차근 알려드릴 테니까. 도대체 무슨 제품을 쓰는데 머리카락 상태가 이런 건지 한번 봐야겠어요. 오빠는 잠깐 여기서 기다려요.” “응.” 뭔가 머뭇거리는 조혜진의 손을 꽉 붙잡은 이지혜가 그녀를 욕실로 데려가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것. “속옷도 바꿔야겠네요. 나이가 나인데… 이런 디자인은 조금 그렇죠. 보는 사람이 기겁을 하고 도망갈 걸요. 내가 남자였으면 진짜 싫었겠다.” “…….” “그리고 정리할 곳도 조금 많으신 것 같은데. 잠깐.” “어, 어디에 손을 대는 겁니까?” “가만히 있어보라니까요?” “손대지 마세요! 손대지 말라니까! 더 이상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저도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거든요?! 도와주려고 하는 거니까 좀 조용히 있어 봐요.” “악!” 단말마의 비명과 조금씩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상황.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조혜진의 비명과도 같은 하이톤 목소리와 농후한 민달팽이를 떠올리게 하는 이지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성취감이 느껴지는 이지혜의 표정과 상처받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조혜진의 모습이 묘하게 대비된다. 그런 조혜진을 화장대에 앉힌 전문가는 드디어 이것저것 입을 열며 자신의 솜씨를 뽐내기 시작. 조금 과장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일단 제가 쓰는 제품만 가지고 왔어요. 비싼 것도 몇 개 섞여 있고요. 매번 도와드릴 수는 없으니까 스스로 하는 것도 배워보는 게 좋겠네요. 아, 머리부터 정리해야지. 많이 자르지는 않을게요. 그냥 정리만 할 거예요. 웨이브 한번 줘보고.” “알겠습니다.” “눈썹도 정리해 드릴 거예요. 대충 라인을 남겨 놓을 테니까 잘보고 따라가면서 그리시면 돼요.” “아, 알겠습니다.” “입 살짝 벌리고. 옳지….” “음….” “너무 막 칠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게 어울리실 것 같네요. 본판이 좋은 사람은 이래서 부럽다니까. 피부도 정말 좋네요. 탄력 있고,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가? 그리고 무엇보다 몸매가 진짜 끝내주네요. 저도 꾸준히 관리하고 있기는 한데… 이런 건 반칙이죠. 비율도 좋고, 지구에 있었으면 모델 했어도 됐겠어요. 농담이 아니라.” “마, 말씀 감사합니다.”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요. 당당해야죠. 예쁜 사람은 자기가 예쁘다는 걸 잘 알아야 한다니까요. 힘든 점도 있지만 잘만 이용하면 인생 사는 게 얼마나 편해지는데. 외모지상주의는 여기든 저기든 남녀 가리지 않고 똑같다니까. 이런 얼굴이면 남자 꼬시기 정말 쉽겠다.” “…….”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중간중간에 알 수 없는 용어를 쓰며 설명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내 입장에서는 알아듣기 쉽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지혜 그녀가 정말로 잘해내고 있다는 것. 극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느낌은 입을 벌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율하가 왜 뷰티 유튜버들을 구경했는지 알겠네.’ 기본적으로 재미있다. 일단 이지혜가 끊임없이 조잘대다 보니 오디오가 비지 않는다. 슥슥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은 추억의 밥 아저씨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쟤는 진짜 유튜버 같은 거 했으면 잘됐겠다.’ 당연하지만 계속해서 달라지는 조혜진의 모습도 흥미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대충 길드 직원들이 수많은 옷을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 커다란 행거 수십 개가 커다란 방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은 나도 처음 보는 광경. 하나의 옷장을 가지고 있었던 조혜진의 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 커다란 방을 옷들이 가득 매우고 있다. 얼마나 많은지 이쪽과 저쪽을 분단시켜 버릴 정도. 실제로 지금은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로 대충 준비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일어나요. 옷 좀 입어보게. 혹시 마음에 드는 옷 있어요?” “딱히… 굳이 꼽으라면 저, 저 파란색 드레스는 어떻습니까.” “파란색을 왜 이렇게 좋아해요? 그리고 드레스 빼고 평상복 중에 골라봐야죠. 드레스 입고 업무 보는 모습은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장소에 어울리는 복장이 있는 법이에요. 그런 걸 생각해 보자고요. 괜히 오버할 필요 없이 깔끔하게 갑시다. 깔끔하게. 개인적인 취향인데 솔직히 제가 과한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꼭 머리에 이상한 장식 같은 거 하는 사람들 있는데 그거 완전히 아웃이라고요. 코스프레 하는 것도 아니고… 포인트는 기본 악세나 가방으로도 충분해요. 잠깐 일어나서 만세 해봐요. 입고 있는 옷 전부 벗고요.” “그렇지만….” “어차피 저쪽에서 이쪽은 안 보여요. 잠깐 몇 개 좀 대볼게요. 옳지. 음….” “이건….” “잘 어울려요. 충분히 예쁘고요. 질투 날 정도로.” “정말입니까?”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일인데.” “그렇지만….” “자아. 한번 봅시다. 오빠, 다 됐어요. 와서 한번 봐요.” “응.” 수많은 옷의 무덤을 헤치고 앞으로 전진하자 이윽고 천천히 조혜진의 얼굴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딱히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말로 아름다웠다는 것. 살짝 웨이브가 진 머리에 블라우스와 치마. 간단한 구성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게 된다. 화려하다는 느낌은 없다. 하지만 목에 걸린 목걸이가 옷과 굉장히 잘 어우러진다. 얼굴은 또 어떠한가. 본래도 예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마법으로 버무린 변신은, 동일인물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옆에서 뿌듯해하고 있는 이지혜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니 본인도 이 아웃풋이 충분히 만족스러웠던 모양. 영웅 등급의 퀘스트라도 클리어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떻습니까.” “아름답네요.” “놀리려고 하시는 말씀이라면….” “아뇨. 정말로 아름답다니까요. 아직 거울 안 봤어요?” “자세히는….” “그럼 한번 봐요. 농담인지 아닌지 보면 압니다.” 본인이 가장 깜짝 놀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현성이 보러 가도 되겠다, 야.’ # 461 회귀자 사용설명서 461화 조혜진 사용설명서(6) ‘조혜진, 메이크업 오버, 성공적.’ 조심스레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조혜진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하지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저런 표정을 짓는 게 당연하리라.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나 역시 믿기지 않았으니까.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는 만화 같은 반응은 가관. ‘이게… 나?’ 같은 오그라드는 대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말 돼요. 얼마나 힘을 썼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죠. 제 화장도 이렇게 공들여서 하지는 않아요.” “노, 놀랍군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는 건지….” “생각보다 크게 변한 건 아니에요. 조금 억울한 느낌이지만, 어디까지나 본판이 좋았으니까요. 내가 봐도 예쁘네. 제길, 예쁜 것들은 다 죽어야 한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변할 수 있을 줄은….” 나도 상상 못 했다. 달라질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긁지 않은 복권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의 날카로운 창 같았던 조혜진은 온데간데없다. 모든 남자의 워너비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외모에 김현성 따위는 손가락으로도 꼬실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샘솟기 시작했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조금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일이라 판단했던 것이 사실. 그 기간을 단축하게 생겼으니 덩실 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다음 미션은 뭐예요?” “본격적으로 들어가 봐야지. 고생했어, 지혜야. 자. 일단 장비부터 받으세요, 혜진 씨.” “장비 말입니까? 무슨 장비가 필요합니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바타처럼 움직이게 될 거라고요. 아네모네의 눈이 항상 따라다닐 거고… 여기, 이건 수신기입니다. 귀 안 쪽에 넣으시면 됩니다.” “…….” “…….” “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겁니다. 이런 거 없으면 창이나 휘두르고 있을 텐데. 현대였다면 문자로 조언해 드릴 수 있겠지만 그런 게 아니잖아요.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해야 되는데… 솔직히 혜진 씨를 믿을 수가 있어야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미션은 꼭 따르셔야 됩니다. 부끄러워하거나 거부하는 순간 분위기 싸해진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본격적으로 밀어 드리려고 하는 거니 숟가락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꼭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최우선 사항이에요. 약속해 주세요.” “그건….” “약속해 주세요.”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면….” “약속한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괜찮을 것 같은데.’ 본인의 입으로 알겠다고 말했으니 아마 이쪽의 말을 따를 거라고 생각했다. 조혜진은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한 인간이니까. “자자. 그럼 나갑시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어디긴 어딥니까. 우리 현성이 집무실이지. 업무 남아 있다면서요.” “이 상태로 나가는 겁니까?” “그럼 푸르딩딩한 갑옷 입고 가려고 했어요? 어차피 평상복입니다. 길드 내에서는 편하게 다닐 수도 있잖아요. 매번 갑옷 입고 다니는 게 질리지도 않습니까. 아무튼 빨리빨리 움직여요.” “네… 아, 알겠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정말로 나가야 하나 움찔움찔거리는 모습은 괜스레 화를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 하지만 심정이 어떤지는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조혜진은 저 갑옷을 벗어본 적이 없다. 길드 하우스의 밖에서는 당연했고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그 마저도 몇 달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한 이벤트. 주어진 임무가 호위라는 걸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지만 그 누구도 조혜진에게 하루 종일 갑옷을 입으라고 명령한 적은 없다. 어째서 그녀가 저런 스타일을 고수하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무거운 갑옷이 편하게 느껴진 것이 분명 하리라. 갑작스레 풀 세팅을 하고 길드 안을 돌아다니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허들이 높은 주문이라는 거다. ‘얘도 참….’ “자신감 가지세요. 거울 봤잖습니까. 몬스터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찌르시는 분이 뭐가 무서워서 그렇게 겁을 먹습니까?” “겁먹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뭔가 어색해서….” “어색할 것도 많네요. 그만 주춤 거리고 빨리 문 열고 나가기나 하세요. 무슨 던전 진입하는 것보다 더 긴장하는 것 같은 표정이야.” “알겠으니까 그만 재촉하셔도 됩니다. 후우.” “아니, 좀 빨리 나가요.” “아, 알았다니까요.” “…….” “…….” “좀 나가요!” “아, 알았다니까!” 계속해서 멈칫거린다.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국에는 사족을 하나 붙일 수밖에 없었다. “…….” “…….” “하. 진짜 예쁘다니까 그러네.” “…….” “누가 봐도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솔직히 제 입으로 이런 말하는 게 자존심 상할 정도로 아름답게 보여요. 걱정할 필요 하나 없습니다. 평소처럼 사냥 나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아니면 임무 같은 걸 한다고 생각해도 되고요. 첩보 활동 같은 거 한다고 생각하면 훨씬 쉽겠네요. 어려워하지 않으셔도 되니까 일단은 움직입시다.” “알… 겠습니다.” 조혜진의 등을 탁 하고 밀어버리니 그녀답지 않게 툭 하고 밀려나는 모습이 보였다. 살짝 뒤를 돌아본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감돌기는 했지만 닫히는 문사이로 뭔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이 보였다. 그녀가 준비됐으니 이쪽도 대충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피식 웃으며 곧바로 방 한쪽으로 들어가 상황실을 세팅하기 시작하니 제법 그럴듯한 모양이 만들어진다. 마력 홀로그램 모니터만 5대. 조금 오버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아주 약간의 감정도 곧바로 캐치해야 하는 작업인 만큼 오히려 부족한 상황. 단어 그대로의 의미로 밀착취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오늘 가장 수고해 준 이지혜 역시 조심스레 작업실의 셋팅을 돕고 있었는데 무일푼의 노동에 끌려와 고생해 준 것치고는 그리 나쁜 표정은 아니다. 오히려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이번 작업이 내심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고마워, 누나.” “뭘요. 다 필요한 일인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앙큼하단 말이야.” “뭐가?” “굳이 모른 척할 필요 없어요. 오빠 생각이 뭔지 알 것 같으니까.” ‘내 생각이 뭔데…?’ 평소 이지혜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 대충 눈치챌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뭔 소리를 하냐는 듯 그녀를 슬짝 바라보자 테이블을 정리하며 입을 열어오는 이지혜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현성이 오빠 쪽에 자기 사람 하나 꽂아 넣으려는 거 맞죠? 확실히 슬슬 생각해 볼 때긴 하네요.” ‘그건 또 뭔 소리야.’ “오빠가 그 사람 생각하는 거 보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런 보험 몇 개 들어서 나쁠 건 없죠. 중전 만들기 같은 느낌 들어서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저는 이런 생각까지는 못 했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치밀하다니까. 역시 그래야죠. 그래야 내 이기영이지.” ‘얘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멍청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방향으로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지혜의 생각과는 다르게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녀석을 잡아주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그런 부가적 효과를 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조금 더 먼 미래를 보자면 더욱더 그렇다. 하늘이 무너져도 이쪽은 김현성과 영원히 붙어 있겠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력이 계속해서 커질 거라고 가정해 보면 여러모로 복잡해지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지금은 없는 파벌이 생겨날지도 모르고, 파란 내에서도 정치적 싸움을 해야 하는 시기가 생길지도 모른다. 물론 이미 압도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이쪽에 반하는 이들이 생긴다는 전제 자체가 성립되기 힘들겠지만, 이후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만큼 조혜진을 꽂아 넣는 그림이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굳이 예를 들자면 황궁에 비를 꽂아 넣는 이 대감의 포지션. 말로는 불쾌하다 어쩐다 하지만 조혜진과 나 사이에 묘한 유대감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 여겨졌다. ‘괜찮네.’ 물론 단기간에 실효성을 볼 수는 없는 프로젝트지만 투자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뭐, 꼭 그런 것 때문인 건 아닌데… 누나 마음대로 생각해. 저쪽도 좀 치워줘. 아무래도 홀로그램 하나 더 놓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뭐, 어련하시겠어요. 이거 저도 같이 해도 괜찮은 거죠?” “애초에 그게 편할 것 같아서 부른 거야. 누나 업무는 다 끝났어?” “네. 조금 남아 있기는 한데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일단 대충 셋팅 끝나고 빨리 앉아요. 궁금해 미칠 것 같으니까. 사실 개인적으로 보면 조금 부정적이기는 한데… 저도 일이 어떻게 될지는 궁금하기도 하네요. 솔직히 저는 현성 오빠 고잔 줄 알았거든요. 아니면 호모나 섹상에일 가능성도 생각해 봤고요. 우리 연주 언니한테도 별 반응도 없고, 튜토리얼 던전 때를 생각해 보면 더 그렇죠.” “왜?” “내 입으로 이런 말 하지만 저도 어디 가서 꿀리지는 않잖아요? 눈길도 안 주는 거 보고 솔직히 자존심 엄청 상했다니까.” “하긴….” “오빠랑 저녁 먹었다는 이야기 듣고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지금은 많이 나아지기는 했는데 솔직히 낯선 사람이랑 밥 먹는 캐릭터는 아니잖아요.” “나도 놀랐어. 아, 저기 마력 연결 좀.” “네네. 음. 이쯤 되면 제법 볼만 해진 것 같은데… 뭐 더 필요한 거 없어요?” “아니, 크게 없어.” “그럼 시작할게요.” “응. 부탁.” 이지혜가 준비를 하자마자 꺼져 있던 마력 홀로그램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조혜진이 바라보는 정면. 조혜진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 시점. 심지어 몸 전체가 보이는 홀로그램도 있다. 손짓 발짓도 충분히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몸으로 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방법도 있는 거니까. 물론 섹슈얼한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다. 가장 처음 눈에 보였던 것은 잔뜩 긴장한 조혜진의 표정. 마치 클럽 한가운데 놓인 아웃사이더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인사들 사이에 파묻힌 사회 부적응자의 표정이라 할 만했다. 평소처럼 당당한 발걸음과는 다르게 어색하고 주눅 들어 보이는 움직임이 인상적이었다. ‘저건 뭐야.’ 곧바로 교정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 적당히 입을 열자 깜짝 놀라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마이크 테스트. 아. 뭐, 죄지었어요? 움츠려 들지 말고 당당하게 좀 걸읍시다. 당당하게. 그렇다고 너무 팍팍 걷지 말고 조금 조심스럽게 걸어요. 허리 좀 펴고 가슴도 쫙 펴고. 기껏 꾸몄는데 길드 직원들한테도 한번 보여줍시다. 아, 이거 들리죠? 들리면 입술 한 번 쓰다듬어요.” 들리는 거 맞네. “잘했어요. 지금 자세 괜찮네요. 어디 가지 말고 곧바로 들어갑니다. 업무하러 가는 거예요. 긴장하지 말고 평소처럼 한다고 생각합시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가끔 첫 술에 배 부르는 경우도 있기는 한데, 그런 경우는 일어나지 않는 경우라고 생각합시다.” -그,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제가 무슨 소리 했습니까? 그리고 웬만하면 허공에 대고 말하지 마요. 자자, 괜한 고민 말고 빨리 문 여세요. 천천히 열고 천천히 닫읍시다.” 살짝 얼굴을 붉힌 조혜진이 숨을 크게 몰아쉬고 문을 잡아 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행동이 무척 조심스러웠는데 아마 저건 평소에도 저럴 거라고 생각했다. 김현성이 있는 집무실로 들어가는 일이었으니까. 마력 홀로그램에 김현성이 시야에 비친 것은 당연, 열심히 일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녀석이 보여주는 예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새끼, 구두는 왜 쳐다보고 있어?’ 책상 위에 놓인 신발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 462 회귀자 사용설명서 462화 조혜진 사용설명서(7) ‘무슨 신데렐라도 아니고….’ 녀석이 비치렐라를 찾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녀석의 스케줄 표를 보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뻔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훈련과 업무 말고도 다른 스케줄이 갑작스레 생겼으니 쉽게 알아차리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도 조금 된 이야기. 비치렐라가 저 멀리 왕국 연합으로 떠난 것으로 모자라 유랑생활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뒤로는 따로 밖으로 나가는 일이 굉장히 뜸해졌다. 담백한 이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쪽을 둘러싸고 있는 복잡한 사건이 흐릿해졌다는 것에 쾌재를 부른 것은 당연지사. 그 결정타로 준비하고 있었던 게 바로 조혜진이었다. 그러할진대…. 분명 그러할진대. 아직까지 저 신발에 집착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짜 외골수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째서 녀석이 저것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한 호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실수에 대한 후회라고 판단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한 순간의 실수로 좋은 인연을 상처 입혔고 그에 대한 사과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회귀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 특성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본인의 실수를 어떻게든 바로잡으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엄한 데서 스트레스 받고 있으면 안 되는데….’ 안 그래도 정신건강을 염려하고 있던 타이밍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다른 문제로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 조혜진을 투입하는 시점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주먹을 꽉 쥐었지만 녀석은 조혜진이 들어온 것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시바.’ 이쯤 되니 조금 민망해진 것은 조혜진. 한껏 꾸미고 힘을 주고 등장했건만 내 님은 그녀가 등장한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이거 상처 입겠는데.’ 본인이 겉모습이 달라졌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안 그래도 이유 모를 부담감에 주눅 아닌 주눅이 들어 있는 상황이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김현성이 보여주는 리액션을 기대했다는 건이 분명. 선머슴 같기는 해도 쟤도 여자긴 여자니까. 본인이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든 망상이 순식간에 날아간 것으로 모자라 안 그래도 부족한 자존감에 더욱더 커다란 상처가 생겼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는 없다. “첫 번째부터 완전 꼬였네요.” 옆에서 중얼거린 이지혜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저앉을 수 있을리 만무. “혜진 씨. 가볍게 헛기침이라도 하세요. 그리고 평소처럼 인사하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 “혜진 씨, 제 말 들려요?” -……. ‘시발! 빌어먹을 아바타 오작동!’ 한 번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첫 번째 명령부터 오작동을 일으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제기랄!’ 최악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는 조혜진의 얼굴을 보니 내가 다 애가 탄다. “다른 생각하느라 저런 거예요. 아직 당신 얼굴은 보지도 못했고 정신 차리고 다시 한번 갑시다. 헛기침 한번 해봐요. 바로 반응할 테니까. 헛기침 해보라니까요. 가만있을 거예요? 인사라도 합시다. 좀.” -기, 길드마스터 -……. 1차 시기 실패. -길드 마스터? -아, 혜진 씨? 다행히 2차 시기는 성공이다. 깜짝 놀랐다는 듯 전방을 보곤 구두를 서랍 안으로 집어넣는 녀석의 모습은 가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션이었다. 본인도 민망하기는 했는지 슬그머니 서류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태세전환을 하고 있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조혜진의 겉모습은 언급하지 않았다. 뭔가 리액션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것은 당연지사. 항상 갑옷을 입고 다니던 본인의 부관이 갑작스레 평상복을 입고 풀세팅을 하고 등판했다. 사람이라면 넌지시 말을 건네는 게 도리다. ‘예쁘다’라든지 ‘아름답다’라는 말은 오버일지 몰라도 ‘평상시와 옷차림이 조금 다르시군요’라는 말 정도는 들어야 이 노력이 보상받는다. 너무나도 평소와 같은 느낌에 이지혜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 왠지 모르게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조혜진도 그녀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단 자리에 앉아요.” -이, 일단 자리에 앉아요. -이미 앉아 있습니다만…. ‘미친.’ “그대로 말하라는 게 아니에요. 시바. 말 그래도 자리에 앉으라고요, 혜진 씨.” -아! 아… 아! 네. -네? “대답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 멍청한 여자야. 나 엿 먹이려고 작정했어?” -아… 무것도 아닙니다. 길드마스터 -확실히…. -네? -혜진 씨 지금…. -네. ‘왔나?’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 오후 훈련에 나오지 않아서 조금 걱정했는데… 괜찮으신 겁니까? 열이 조금 있으신 건 아닌지… 오늘은 들어가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부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내가 상정할 수 있는 상황을 벗어나고 있다. 진심으로 조혜진을 걱정하는 말투와 어조. 나라도 김현성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평소에는 그렇게 똑 부러졌던 여자가 괴상한 혼잣말을 지껄이는 것은 물론 평소와 완전히 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다. 혹시 머리에 이상이 생겼거나 열이 오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뜻밖의 축객령에 조혜진은 무척 당황한 표정. 어떻게 하냐는 듯이 카메라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에는 괜스레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별거 아니라고 둘러대세요. 그리고 그렇게 티 나는 표정 짓지 말고요. 일단은 자리에 착석해서 평소처럼 움직여 봅시다. 딱히 다른 거 하지 마요. 미션 같은 것도 안 드릴 테니까. 말 그대로 그냥 업무 본다고 생각하세요.” -……. 다행히 이번에는 정확히 입력이 전달됐다. -아닙니다. 길드마스터 몸이 안 좋은 것은 맞지만 기본적인 업무를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보다 죄송합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아니요. 괜찮습니다. 갑자기 몸이 아픈 걸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혜진 씨한테도 휴식이 필요하니까요. 그보다 어디 약속이라도 나가시는 겁니까? ‘왔다.’ “그렇다고 합시다.” -네. -평소와 옷차림이 조금 다른 것 같아보여서…. 주제넘은 참견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아,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보기 좋군요. 의외의 모습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이게 맞지. 진짜 언급 안 해줬으면 섭섭할 뻔했다, 현성아.’ 옆에 있는 이지혜도 크게 안심하는 듯 한 표정. 조혜진의 반응이야 불 보듯 뻔했다. 살짝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얼굴을 붉히고 있었는데 마치 세상을 다가진 듯했다. 누가 보면 김현성과 약혼이라도 한 줄 알 것이다. “이딴 거에 일일이 기뻐하는 반응 보이지 마세요. 이건 솔직히 당연한 겁니다.” 김현성도 영 맹탕은 아니다. 만약에 정말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더라면 연애 사이코패스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을 터. 반응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조혜진의 얼굴은 이미 활짝 펴져 있다. 다시 한번 주의를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무표정한 얼굴보다는 웃는 얼굴이 백번 나으니까. 저렇게 웃으니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분위기도 달라진 것 같다. 조금은 자신감을 찾은 듯한 얼굴로 본인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나쁘지 않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딱히 이룬 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악의 첫 만남을 제외하면 나름대로 시작이 좋다. 조혜진의 자존감을 올리는 것도 성공했고 김현성에게 달라진 조혜진의 이미지를 박아 넣는 것에도 성공했다. 현재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조혜진의 반응만 봐도 평소에 저런 멘트를 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직 축포를 터뜨리기에는 이르지만 언제나 시작이 반이다.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조혜진과 김현성.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펜으로 종이를 긁는 사각사각 소리만 들린다. “괜히 의식하지 마시고 평소대로 하세요, 혜진 씨. 지금 반응 보려고 이러고 있는 거니까. 혜진 씨 달라진 모습에 다른 액션이 있는지, 현성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조금 캐보려고 하는 거니까요. 힘드시겠지만 저는 없는 사람 취급하세요. 절대로 의식하지 말고요.” 그러나 움직임이 달라지지 않는다. “평소처럼 대화도 좀 주고받고 잡담 좀 하고 그렇게 해요. 이제 와서 부끄러워 할 필요 없잖습니까.” -이게 평소대로 하고 있는 겁니다. 말을 해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리하고 있는 서류 뭉치에 슬쩍 글을 적어 놓는 게 시야에 비쳤다. “업무시간 동안 서로 아무 말도 안 주고받는다고?” -효율이 떨어지니까요. “…….” 생각보다 더 엉망이다. 조혜진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계속해서 일에 집중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가관. 간혹 말을 주고받기는 했다. ‘커피 드시겠어요?’ ‘서류 좀 주세요.’ 같은 영양가 없는 대화. 애초 조혜진이 혼자 이룩한 게 별 거 없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 아예 걸음마조차 시작하지 못한 아이한테 무리한 주문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떠올려 볼 정도였다. 계속해서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반응을 볼 수가 없다. ‘일 참 열심히 하시네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괜스레 내가 다 초조하고 어색하다. 종이 넘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장내. 그 와중에도 저 멍청한 여자는 현 상황만으로도 좋은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정체불명의 위기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무언가 다른 방향을 강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느껴 조심스레 입을 열자 곧바로 반응해 오는 조혜진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가야 돼.’ “방금 현성이한테 약속 있다고 말한 거 기억나죠? 기억나면 짧게 고개 끄덕여요.” -……. “잠깐 밖에 나갔다가 10분 후에 다시 들어가요. 주머니에 보면 연극 관람 티켓 2장 있을 겁니다. 검은 백조에 친구랑 함께 보러 가기로 한 연극이었는데 갑작스레 검은백조에 일이 생겨 약속이 취소됐다는 걸로 합시다. 마침 표는 두 장이고 한 명이 없는데 은근슬쩍 같이 가자고 제안 한번 해봅시다. 거절은 없습니다. 무조건 이렇게 말씀하셔야 됩니다.” -어떻게 그런 걸 말합니까. “데이트 신청 같은 거 아닙니다. 데이트 아니고요. 착각하지 마세요. 아직 그 정도 아니니까. 어디까지나 약속이 취소된 거고 그래서 땜빵 멤버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부담감 느끼지 말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세요. 조금 부끄러워하는 연기 곁들여주면 좋고요.” -알겠습니다. 전반전에 깔아놓은 빌드업을 생각보다 빠르게 사용할 시점이다. 조혜진의 어설픈 연기력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말하기 쉬울 것이다. 감정 배제하고 없는 사실을 나불대는 장면이었으니까. 하지만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예상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 모습에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오히려 문제는 다른 쪽에서 발생했다. -그래서… 마침 한 자리가 남아서 말입니다만 괘, 괜찮으시면 함께 보러 가시겠습니까? -연극 말입니까? -네, 길드마스터. 최근 유행하고 있는 연극입니다. 제목은 잠자는 숲속의 연금술사로… 최근에 유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침 균열 극장에서 극단이 찾아온다고 하더군요. -아… 그 연극. -알고 계시는 겁니까? 그래. 가는 거야. -네. 들어본 적 있습니다. 기영 씨가 전에 재미있을 것 같다는 말했었던 것 같은데 저는 아직 업무가 조금 남아서…. 괜찮으시면 기영 씨와 다녀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 이, 이… 그 누구보다 나를 생각해주는 고마운 새끼!’ 이중적인 마음이 교차하고 있었다. # 463 회귀자 사용설명서 463화 조혜진 사용설명서(8) 잠깐 함께하는 자리를 가졌을 때 언급한 이야기였다. 식사 때였는지, 회식 때였는지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다. 대화의 주제를 찾기 위해 대충 던진 이야기였고, 그렇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화제를 찾기 위해 냅다 내던진 말을 누가 전부 기억하고 있겠는가. 다들 그러려니 하는 거지. ‘아, 요즘 그 연극이 인기가 많다는 것 같더군요. 시간이 나면 한번 보러가야겠습니다.’ 딱 이 정도. 물론 나는 그 정체불명의 연극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볼 생각도 없었다. 아직까지 문화산업까지 손을 뻗칠 생각은 없었으니까. 막말로 김현성이 언급해 주지 않았더라면 계속 잊고 있었으리라. ‘아니… 고맙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현성아.’ 절로 당황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어떻게든 조혜진과 김현성을 엮어야 하는 이쪽의 입장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이었으니까. 김현성이 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확인했지만 조혜진의 회심의 신청을 거절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방금 발언은 조혜진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으니 이 미션에 작은 문제가 생겼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이건 진짜로 아무 생각 없는 거야.’ 그래도 조금은 관심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 불과 몇 분 전이었다. 아니, 관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자로서 의식하고 있다고는 생각했다. 별 5개를 얻은 각성 조혜진이 워낙 아름답기는 하지만 비 각성 조혜진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는 여성이고 무엇보다 그녀가 김현성에게 은근슬쩍 관심을 표현해 왔기 때문이다. 자기 좋다는 여성을 매몰차게 버릴 남자는 없다. 조혜진 정도의 미인이라면 더욱더. 심지어 얘는 능력도 만만치 않다. 그녀가 대놓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연애고자의 눈으로 봐도 의심되는 정황이 몇 가지 있었다는 거다. 은근슬쩍 거리를 좁히거나, 다른 여성들이 가까워지는 것을 견제하는 것 따위의 행동 말이다. 김현성은 그것 역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조혜진이 자신을 의식하는 것도, 방금이 데이트 신청을 돌려서 한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다. 이 나쁜 새끼를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 나도 모르겠다. -……. 예상하지 못한 발언에 조혜진 역시 몸이 굳은 모양. 나라도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이미 보고 왔다고 하는 게 좋겠네요. 하얀이랑 같이 보고 왔다고. 연극도 제가 추천해 준 거라고 합시다. 표도 구해다 준 거고요. 큐.” -부길드마스터께서는 이미 하얀 씨와 다녀오셨다고 하셔서… 연극티켓도 부길드마스터께서 직접 구해주셨습니다. “업무는 얼마 안 남았으니까. 빨리 마치고 다녀오자고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가끔은 휴식도 필요하다고 대충 이빨 치면서요.” -남은 업무가 그리 많지 않으니 빠르게 마무리 짓고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요즘 길드마스터께서 무리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설령 조금 모자라다고 한들 길드마스터를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일과 훈련만 병행하면서 생활하신 지도 꽤 오래되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잘해주네. 조금 허들이 높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더 주문해도 될 것 같았다. “기왕이면 길드마스터랑 같이 가고 싶다고 해요.” -……. “빨리 해요.” -그, 그리고 기왕 보러가는 거라면 길드마스터와 함께 가고 싶습니다. -……. -……. ‘좋아.’ 잠깐의 정적. 이윽고 들려온 김현성의 목소리에는 가볍게 주먹을 쥐는 세레모니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혜진 씨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몇 시 티켓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8시 30분입니다. -지금 당장 준비하는 게 좋겠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무, 물론입니다. 길드마스터. ‘가즈아!’ 1차 관문은 일단 돌파. 나만큼 기뻐하는 조혜진의 얼굴이 홀로그램에 비친다. 작지만 커다란 발걸음. 조혜진으로서는 인류의 도약이나 다름이 없는 발걸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아직 축포를 터뜨리기에는 이르지만 분명히 성과가 있다고 이야기할 만했다. 남녀가 함께 데이트를 나간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모양새는 똑같은데. 일단 한번 뚫어놓은 상태라면 다음번은 더욱더 경계심이 옅어질 것이다. “어우 생각보다 잘해주고 계시는 것 같아서 제가 다 뿌듯하네요. 지금처럼만 해주시면 됩니다. 지금처럼만.” 홀로그램 속에 조혜진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 현성이도 조금 당황스러워 하는 것 같습니다. 혜진 씨가 평소랑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일단 겉모습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무표정으로 있기는 하지만 본인도 내심 놀랐을 겁니다.” -……. “큼큼. 일단 이성으로 인식하게 하는 게 최우선 과제 같아요. 욕을 하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현성이가 혜진 씨를 이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말이죠. 굳이 예를 들자면 부관이나 기사, 아니면 직장 동료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먼저 박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방금 일어난 거절은 마음속에 담아두셔도 돼요. 어차피 데이트 신청도 아니고 뭣도 아니었으니까.” -네. “연극 보는 것 정도는 딱히 드릴 미션이 없기는 한데… 아까 말씀드린 문제를 해결하는 게 최우선 과제 인 것 같습니다. 일단 이성으로 인식을 해야 뽀뽀를 하든 손을 잡든 하죠. -……. “스위치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오늘 같은 날과 평소의 혜진 씨를 구분 짓는 것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처럼만 가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 같습니다.” -음…. “평소처럼 주변을 경계하실 필요도 무기 같은 거 챙길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그 복장 그대로 보폭 맞춰서 바로 옆에서 걸으세요. 너무 큰 것부터 시작하려고 하지 말고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해나갑시다. 호위는 따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쪽에서 주변을 살피고 있으니까요. 위험요소 같은 건 없습니다.” -……. 정말로 호위 임무를 무시해도 되는 건지 고민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윽고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불안하기야 하겠지만 내가 호언장담을 하니 어느정도 믿음이 선 모양이다. 여러 가지 기본적인 것을 전달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김현성은 준비를 끝냈다. 녀석 역시 제법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것. 혹시 기본 무장을 하고 나서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 정도로 경우가 없는 놈은 아닌 모양이다. 장소에 맞는 복장 정도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시죠. -네. 길드마스터. ‘달달하네. 달달해. 풋풋하다. 야.’ 이윽고 두 사람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괜찮은데?’ 겉모습으로만 보자면 연인으로 봐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조혜진이 내 생각보다 더 훌륭히 미션을 소화해 내고 있는 것이다. 평소처럼 사방으로 눈을 부라리며 길을 걷지는 않을지 걱정한 것이 사실. 김현성과 함께 있을 때 조혜진이 경계를 늦추는 모습은 본 적 없었으니까. 애초에 김현성은 호위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 녀석 역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조혜진은 어떤 사고에도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로 녀석의 발언을 일축 시켰었다. 그런 그녀가 정말로 주변의 위험을 배재한 채 김현성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보폭을 맞추는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 과장하자면 굳이 이쪽이 따로 코치를 해줄 필요가 없을 정도다. 조금 아쉬웠던 건 여기까지 와서 업무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지만 아마 저게 저 둘의 스타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지나치다 싶을 정도에만 적절히 개입해 커트했고 대화가 끊기면 새로운 화두를 곧바로 건넸다. 당연하지만 모두 김현성이 좋아하는 이야기였다. ‘첫 번째는 장비.’ “그러고 보니 이번 균열 박물관에서 재미있는 아이템이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딱 이정도만 말하면 됩니다, 혜진 씨.” -길드마스터, 그러고 보니 이번 균열 박물관에서 재미있는 아이템이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아, 저도 들었습니다. 요즘 공화국에서 한참 떠오르는 파티가 얻었다고…. 재미있게도 이번이 두 번째라고 그러더군요. 바크 세르게이라고 했던가요. 지난번에는 목걸이 이번에는 검이라니…. 목걸이는 직접 사용하고 검은 경매장에 올린다고 들었는데 어떤 기능인지 정확히 게시되어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비싸게 팔릴 거라고 들었습니다. 경매장 최고가가 붙을지도 모른다고 들었는데. -안 그래도 최근에 경매장 최고액이 경신됐다고 그러더군요. -그 무구인 겁니까? -아뇨. 무슨 한정판 책이라고 들었습니다만. 크게 관심을 두지 안하서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그 검 말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신나게 떠드는 것이 눈에 보인다. ‘우리 현성이가 장비에는 진짜 환장하지.’ 당장 신화 등급의 검을 들고 있어 다른 검을 쓰지 않을 뿐이다. 전설 등급의 검을 본인이 독식하고 있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마 평화로운 시대가 오면, 마음의 드는 검은 모조리 수집하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하기도 해봤다. 실제로 지구보다 이쪽이 더 익숙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자신의 장비를 애인처럼 아끼고 있었으니까. ‘두 번째는… 차.’ 마시는 차가 아니라 달리는 차다. 대륙을 기준으로는 차가 아니라 그리폰이라고 불러야겠지만 이것 역시 김현성이 관심을 가지는 것들 중 하나였다. 처음에 멋들어지는 검은색 그리폰을 선물해 줬을 때도 느꼈지만 의외로 이런 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물론 크게 티를 내는 것은 아니다. 주기적으로 안장을 교체한다든지, 자신이 직접 세차, 아니, 목욕을 시켜준다든지 말이다. 간혹 가다 깃털 정리를 해주는 정도였지만 김현성의 평소 생활을 생각해 보면 이것도 충분히 이례적인 일이다. 최근에는 내 그리폰 화이트 폴과 녀석의 그리폰이 짝을 짓게 되어 화이트 폴이 알을 품은 상태. 그 사실을 알았을 때의 김현성이 미묘하게 기뻐하던 반응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 기준으로 역대급 감정표현이라 칭할 만했다. 그리폰 특성상 정상적인 교배가 거의 불가능했는데도 어떻게 자연교배에 성공한 것이다. 기적 같은 일이었으니 녀석이 기뻐할 만도 했지만 그날 본 김현성의 표정은 틀림없이 덕후의 표정이었다. 그것도 덕질하고 싶어 하는 덕후의 표정. 간혹 대화 주제를 찾을 때 그리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제법 쓸 만한 소재였다. 사실 녀석이 좋아하는 것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이런 것들이 녀석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몇 안 돼는 소재. 아마 조혜진 스스로가 가장 많이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관심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조금이지만 녀석은 말이 많아졌으니까. -예전에 제가 린델에 있을 때, 그러니까 혜진 씨가 오기 전에 말입니다. 가끔 저렇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진짜 고마울 거다.’ 김현성 키워드는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나만의 비밀이었다. 조혜진에게 생각보다 많은 걸 해주는 느낌에 괜스레 고개가 끄덕여지기 시작. 그 이후로는 사실 일사천리라고 할 수 있었다. 뭔가 성적 긴장감이 흐르는 시간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는 것은 충분히 박수를 쳐 줄 만했다. 옆에서 재잘거리는 이지혜가 리액션 강의까지 몸소 코치해 주니 어색한 표정의 조혜진으로도 어느 정도 커버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김현성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정도 생각은 하고 있지 않을까. ‘조혜진한테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1회 차에서도 보지 못했을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이런 이벤트가 일어날 시간도 없었을 테니까. 일단 이 정도면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라는 거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안 나는 요상한 예술 연극을 함께 관람했을 때도 분위기는 좋았고 필사의 설득과 연계로 와인바로 끌고 가는 것에도 성공했을 때는 쾌재를 질렀다. 대화 주제는 당연히 이전에 봤던 연극. 두 사람이 함께 공유하는 추억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대화하는 것도 더 쉬워진다. 누구 하나 흥분하지 않은 담백하고 단순한 대화였지만 모두 나빠 보이는 기분은 아니었다. 적당히 와인도 한두 잔 들어갔으니 주먹을 꽉 쥐게 된 것은 당연지사. 이쯤에서 꺼내든 카드는 지금까지 수많은 커플들을 있게 한 전통의 강호. ‘오빠, 나 조금 취한 것 같아.’ 물론 당장의 성과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조혜진이 보호받아야 할 여성일 수도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모든 게 생각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이 시점. 의외의 반응에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조혜진의 얼굴이 붉어지자 김현성이 곧바로 길드에 연락을 취한 것이다. -여성 직원들 좀 불러 오겠습니다. 아무래도 혜진 씨가 조금 취하신 것 같습니다. 변명에도 녀석의 표정은 강경했다. ‘시바…. 그런 거 하지 마, 이 새끼야.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이름 모를 비치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 김현성이 얻게 된 부작용이었다. # 464 회귀자 사용설명서 464화 조혜진 사용설명서(9) 역사적이었던 첫 외출은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아니, 사실은 조금 비참하게 마무리됐다. 괜찮다고, 혼자 걸을 수 있다고, 길드에 연락을 취하는 것을 거절했던 조혜진이었지만 강경한 김현성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이후 곧바로 길드의 경비들이 도착했고 취해버린 조혜진을 편하게 모시고 갔다. 그 와중에 김현성은 조혜진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상태로 걷고 있었는데, 혹시나 의도치 않은 신체적 접촉이 있을까 걱정하는 듯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아픈 머리를 부여잡게 되었다.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체모를 비치에게 뒤통수를 맞은 후유증이 확실했다. ‘어떤 년이야…. 가장 강력한 수단 하나가 사라져 버렸다. 미묘한 스킨십은 이성간의 관계를 가깝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물론 동의되지 않은 스킨십은 단순 성추행범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지만 김현성과 조혜진이 그 정도로 서로에게 심리적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둘이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함께 걷는 동안 어깨가 살짝살짝 스친다든지, 팔을 흔들며 손등과 손등이 스친다든지 같은 일은 의외로 팽팽한 성적 긴장감을 부여해 주는 이벤트들. 지구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쌍팔년도 콘텐츠에서 괜히 팝콘 먹다 손잡게 되는 거지 같은 클리셰가 흥행한 것이 아니다. 남녀 사이에는 찌릿찌릿하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사실 저 나이쯤 되면 같이 술 먹다 실수하곤 선 실수 후 연인, 분위기에 취해 조금 더 가까워지다 입술 박치기 하고서는 급속도로 관계발전. 같은 루트를 노릴 수도 있었지만 애초에 그런 루트들은 쟤네들이 상상할 수 있는 전개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작은 이벤트가 중요했다. 별것 아니지만 서로를 이성이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스몰 스킨십 이벤트는 김현성 공략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장면 중에 하나였다는 거다. 그 가능성이 완전 차단된 상황. ‘수단이 줄어들었는데.’ 심지어 김현성 쪽에서 주의 깊게 조혜진을 살펴보고 있으니 그런 게 가능할 리 만무. 어깨를 스치려고 해도, 손등을 마주 데려고 해도 녀석의 괴물 같은 반사신경이 모든 희망을 철저하게 박살 내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었다. 물론 그 이후에 이런 만남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온갖 변명을 해가며 김현성을 필드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고 실제로 둘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것도 꽤 많이. 그 와중에도 김현성은 조혜진의 개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물론 조혜진이 자신의 개인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슬그머니 뒤로 몸을 빼는 것은 당연했고 아예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심지어 모르는 척 대놓고 노리고 들어갈 때는 마력까지 사용하며 위기에서 벗어났다. 누가 보면 조혜진이 문둔병 환자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적극적인 회피였다. 하지만 조혜진은 이런 정황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양. 애초에 걔 머릿속에는 ‘스킨십은 사귀고 나서’라는 공식이 맴돌고 있었을 테니 그런 반응은 예상할 수 있었다. 만약 기적이 벌어져 둘이 잘 된다고 해도 얘는 왠지 모르게 혼전순결 같은 걸 유지할 것 같은 이미지였다. 물론 자의가 아닌 타의로. 사실 스킨십이라는 이벤트를 제외한다고 해도 이 모든 일이 조혜진으로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성과. 함께 극장에 간 이후 늦은 밤까지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녀에게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심지어 그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만남을 가지고 있었으니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을 거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따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고. 하지만 결코 기분 좋게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현성이 저거… 손가락 하나로도 꼬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분명 비치기연 때는 그랬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발가락으로도 꼬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작스레 태산처럼 높아진 거대한 성벽은 단 1미리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잘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속은 하나도 없었다는 거다. 이지혜가 직접 아바타를 움직이기도 해봤지만 결과는 더욱더 최악. 매번 미소 짓고 있었던 조혜진과는 다르게 본부의 분위기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기뻐하는 조혜진에게는 미안하지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이벤트였다고 생각했는데 최소 10년짜리 장기 이벤트였다. 물론 성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번 이벤트의 목적은 김현성의 휴식이었으니까. 실제로 녀석은 꽤나 괜찮은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조혜진한테 관심이 없어서 문제지.’ 우리 조혜진으로 만들어낸 억지구실은 김현성을 훈련장과 집무실 밖으로 몰아냈고, 강제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녀석이 여유를 찾게 하는데 성공했다. 함께 카페에 가서 시간을 떼우기도 하고, 다시금 연극을 보거나 경매장에 가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카지노를 다녀와 쌓아둔 돈을 날린 적도 있다. 이런 게 녀석에게 스트레스로 느껴지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본성은 외향적인 인간인지 점점 더 표정이 밝아졌다. 심지어 구두타령이나 신발타령도 하지 않았다. 서브 목적 달성에는 난항을 겪고 있었지만 메인 퀘스트는 답을 찾아가고 있는 상황. 정확한 진단은 내릴 수 없었지만 녀석의 머릿속에 끼어 있는 안개가 점점 걷히는 느낌이었다. 정확한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조혜진이 아닌 내가 등판한 적도 있다. 당연하지만 김현성과 함께한 자리에서는 하루 종일 조혜진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 아름답다는 직접적인 수식어까지 써가며 그녀를 위한 빌드업을 마련했다. 아직 머릿속에 마구니가 끼어 있기는 한 것 같았지만 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있으니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효과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랜만에 나도 녀석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점점 더 쉬는 게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 푹 쉬어라. 쉬는 게 남는 거다. 푹 쉬어라, 현성아.’ 지금이 아니면 쉴 수 없다. 앞으로는 더 바빠질 거고, 녀석의 마모된 정신에 산소를 공급해 줄 기회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심지어 녀석을 위한 인위적인 축제를 열어버렸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다. 대륙 그리폰 축제를 열었고 조혜진과 함께 보내버렸다. 김현성은 같은 그리폰 소유자인 나와 함께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이쪽에게 그럴 여유를 부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꽤나 크게 연 축제에서는 그리폰 안장과 부속 물품, 그리폰에 대한 온갖 것이 전시됐고 여러 가지 종류의 관련 대회에서는 수많은 참가자들이 울고 웃었다. 없는 예산으로 김현성을 위한 이벤트를 열었을 뿐이었지만 생각보다 대륙의 반응이 좋아 흑자가 났다는 건 소소한 이득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김현성 개인에게는 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그리폰 대회가 기폭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이 본인의 의지로 휴식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삐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내 기준에는 부합하진 않지만 녀석의 기준에선 고개를 끄덕일 만한 수준정도로 변했다는 거다. 기회다 싶어 조혜진을 포함한 파란의 모든 인원이 녀석에게 휴식을 권했고, 나 역시 함께 시간을 가질 때마다 휴식의 중요성에 대해 입을 열고 또 열었다. 일부로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었고 조혜진을 투입하는 주기도 점점 더 늘려나갔다. 처음에는 무척 불안해했던 김현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쪽의 말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는지 노는 일에 조금 더 적극적이 되었다. 여유가 생겼고 조급해하지 않았다. 훌륭한 변화였다. 아마 본인이 더 자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쉬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검 따위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깨달음이니 뭐니 잘 모르겠지만 소소한 성취도 생긴 모양. 당연한 결과였다. 무식하게 망치질만 한다고 좋은 검이 탄생하는 게 아니니까. 물에도 담가줘야 하고 가끔은 열기도 식혀줘야 한다. 쉴 새 없이 달려온 김현성은 이러한 과정을 그 누구보다 필요로 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궁예질에 불과하지만 시기가 조금 더 늦어버렸다면 부러졌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 느낌. 똥줄이 타 급하게 움직이는 것보다는 한 발자국 템포를 낮추는 게 정답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 ‘그런데 왜 나는 씨바….’ 이상하게 이쪽은 더 바빠졌다. 여러 가지로 처리해야 될 사항이 많았으니까. 휴식의 중요성에 대해 입을 열고 또 열기는 했지만 녀석이 논다고 나까지 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요령이 좋아 적당, 적당히 쉬면서 하고는 있었지만 갈려나가고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일단 김현성을 위한 스케줄을 만드는 것부터가 커다란 업무였다. 솔직히 대륙 그리폰 축제를 여는 것부터가 엄청난 일이다. 이 정도 규모의 일이 우리 하자! 라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짠 하고 완성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외주업체에게 잔업을 맡기기는 했지만 굵직한 일들은 이쪽이 처리해야 했으니 날밤을 새야 했던 것도 당연지사. 쓰러져서 잠들고 일어나면 매번 더 피곤한 것 같은 기현상은 내 몸이 상할 대로 상했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정하얀은 더 활기찬 것 같기는 했지만. 덕분에 며칠간은 피로 회복제를 달고 살았다. 그 와중에 조혜진이라는 아바타를 조종해야 했고 미래에 대한 준비도 해야 했다. 힘들지 않은 게 이상하리라. 평소처럼 교황청의 바젤 교황과 우리 아리스 시녀, 아니, 오스칼과 만남을 가졌고 카트린 의원들과도 여러 가지에 대해 협의했다. 잠깐 여유가 생겼다고 치면 정하얀과 차희라와 경쟁적으로 만나야 했고 파란에 적응하기 시작한 엘레나도 케어해야 했다. 디아루기아를 포함한 우리 똘똘이와 박물관 관리인 막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기도 했다. 어떻게 본다면 사람을 만나는 것도 휴식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절대로 휴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똘똘이랑 놀아봐라. 그게 휴식처럼 느껴지나. 최근 조용했던 똘똘이는 다시금 꼬리를 쳐대며 이상한 야심을 드러내고 있었고 정하얀과 차희라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도 일이었다. 추가로 디아루기아의 잔소리를 받아주는 것도 조금이지만 힘들었고. 하지만 내가 갈려나간 만큼 대륙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고 있었다. 약해진 전력에 대한 대안으로는 부족하다 느껴지기는 했지만 대륙 총 합동 훈련이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고 날짜도 정해졌다. 새로 들어오는 신입들에 대한 준비도 완벽했다. 대륙 전체가 하나가 되기 위한 여러 가지 합의서에는 점점 서명이 늘어나고 있었고 각 창고에 군량도 점점 더 늘어났다. 불안요소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뼈대 정도는 세운 것 같은 느낌이라 할 수 있으리라. 물론 이 모든 성과에 대해 김현성이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할지에 대해서는 들어봐야겠지만 말이다. 중간에는 하도 답답해 카스가노 유노를 찾아갔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는 상황. 여러 가지를 보기는 했다. 주로 내가 그녀를 괴롭히고 또 괴롭히고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괴롭히고 얘랑도 응응하고 쟤랑도 응응하는 내용. 영양가 따윈 없었던 검은색 세계 순회였다. 심지어 사이가 안 좋아 보였던 여단의 선희영과도 응응응응 응응 응응응 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코피를 흘렸을 정도. 생각해 보니 영양가가 조금 있기는 있다. 쓸데없는 지식이지만 그래도 지식은 지식이니까. 선희영과 여단에 대해서도 조금 더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몇 가지 일을 제외하면 모든 배가 순항하고 있는 느낌. 그 와중에 침몰하고 있는 배도 존재하기는 했다. ‘우리 조혜진호.’ 혜진코인이 떡락하고 있었다. “부길드마스터. 저… 슬슬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게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와 함께 말이다. ‘아직도 혜진코인 손절 안 한 흑우들 없제?’ 깜짝 발언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고백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465 회귀자 사용설명서 465화 조혜진 사용설명서(10) ‘얘가 뭘 잘못 먹었나.’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가장 들어와 꽂힌다. 조혜진이 저런 발언을 먼저 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조금 능동적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 적은 많았지만. 그녀가 이런 부분에서 소극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줬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물론 아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선머슴 같기는 했지만 얘도 여자는 여자였고 이런 부분에는 내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러나저러나 김현성은 이 미련한 여자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최근 들어 녀석과 끊임없이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즐겼다. 내 기준에서는 그게 뭐가 데이트냐 라고 생각하만 그녀로서는 충분히 꿈같은 시간이었을 터. 한 발자국 더 움직여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아마 무엇보다 자기 마음을 숨기기 힘들었을 것이 분명. 마음고생 많았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보통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그렇다. 알아서 척척 연애 잘하고 이 남자 저 여자 가리지 않고 행복 속에 사는 슈퍼 인사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조혜진 같은 인간은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말하지 않으면 답답해 뒈질 것 같고 속에 있는 마음을 계속 전하고 싶고, 침대에만 누우면 현성이 얼굴이 아른거리고, 심지어 밥맛도 떨어진다. 너무 답답해 차라리 확 말해 버리면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해서 결국에는 사지로 기어 들어가는 종류의 인간. 그게 바로 조혜진이었다. ‘고백은 도전이 아니라 확인이야, 혜진아.’ 혼자 끙끙 앓다가 도전한 사람의 패배율은 70% 이상. 고백은 서로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었던 이성이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아니, 솔직히…. ‘지가 무슨 10대도 아니고….’ 정하얀이나 차희라 엘라나, 이지혜와 내가 ‘우리 사귀지 않을래? 오늘부터 1일이다!’하고 맺어진 건 아니지 않은가. 보통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저런 과정은 생략되게 마련. 조금 이르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조혜진의 나이 정도면 그래야만 했다. 그냥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손도 잡게 되고 마. 뽀뽀도 하고 마. 다 하고 마. 그러다 보니까 서로 좋아한다는 소리도 하게 되고, 이런 식으로 약속처럼 굳어지는 관계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다. ‘물론 마음이 있는 것 같다. 만나보자’라고 시작하는 관계도 흔하지만… 이 여자처럼 혼을 담은 필사의 고백 같은 걸 갑작스레 지르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특히 이런 애매한 관계일수록 최대한 지양해야 될 일이기도 하고. 슬쩍 아닌 것 같다고 운을 띄워 봤지만 조혜진은 물러설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괜히 멀어지는 거 아닌가. 이거.’ 라는 생각이 대뇌의 전두엽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자신만만하게 도와줄 수 있다며 조혜진을 전쟁터로 밀어 넣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 자신감이 소폭 줄어든 상황. 나름대로 잘 어울린다는 느낌도 있었고 1회 차의 인연도 있어서 발을 들였는데 이 전장터는 이미 패배할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어떻게 봐도 현재로서는 희망이 없다. 김현성은 조혜진을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금은 그랬다. 일단 다급하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괜한 사람 하나 상처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본의는 아니었지만 현성이 쉬게 해준다고 순진한 사람 이용한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왜,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된 겁니까. 솔직히 저는 조금 이르다고 보는데…. “그냥… 시기가 찾아왔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때가 되긴 뭘 돼. 그냥 니가 답답해서겠지.’ “뭘 시기가 찾아옵니까. 아직 뭐 시작한 것도 없는데. 이런 말씀드리기는 조금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조금 더 길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조금 정신이 없기도 하고 굳이 뭐 그런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계속 관계 유지하면서 은근슬쩍 붙어 있는 게 더 괜찮은 방법일 겁니다. 계속해서 만나다 보면 뭐 정도 들고… 그렇고 그렇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길게 봐요.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애초에….” “아니요. 지금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길드마스터나 저한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드리는 말은 허락이 아니라 통보를 드리는 거고요. 지금까지 도와주셔서 감사했지만 지금부터는 혼자 힘으로 해보고 싶습니다.” ‘너 진짜 왜이래.’ 뭔가 빨리 끝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는 쉴 틈 없이 흘러가게 될 거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을 테니까. 어느 쪽이 됐든 딱 결판을 보고 일에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일 수도 있고…. 솔직히 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뭔가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는 것. 처음엔 계속해서 부정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도 그랬다. 마음속으로 계속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인정할 때라는 걸 깨달은 모습 같기도 하다. 아마 1회 차의 조혜진은 이 답답함을 애써 꾹 눌러왔을 것이다. 말 그대로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당시 김현성한테 애인이 있었을 수도 있고, 살아남는 게 최우선인 배경에서 연애놀음 할 시간 따위도 없었을 거다. 죽기 직전이 돼서야 자기가 뭔 생각을 하게 된 건지 깨달았겠지. 반면 지금의 조혜진은 조금 다르다. 김현성과 직장상사 관계가 아닌 남녀의 입장으로 만나다 보니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다. 녀석이 본인한테 마음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수도 있고, 그래서 빨리 매듭 짓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이라고 판단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혜진답기는 하다. 얘는 미련하고 융통성 없고 꼼수도 부리지 않는 주제에 정직하기까지 하다. 본인에게 불리하고 피해가 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가시밭길을 걸으려는 성격이 여기까지 도진 것이다. ‘말려도 소용없겠는데….’ 결국에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마음대로 해요. 근데 지금까지 도와준 게 진짜 아까운데…. 조금 길게 보면 가능하거든요. 아니, 생각해보니 딱히 도전이 실패한다는 보장도 없고. 잘되면 축하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게 되면 말씀드리러 오겠습니다.” “뭐, 잘될 겁니다.” “네.” ‘그러네. 진짜 실패한다는 보장도 없네.’ 김현성은 의외로 무른 부분도 있었으니까. 누가 봐도 매력적인 이성이라고 느껴지는 조혜진을 바라보니 거부하는 게 또라이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어차피 여기는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곳이고 얘는 보트 태우려고 하는 얘도 아니다. ‘그래. 뭐, 혜진아, 가즈아! 혜진코인 떡상 가즈아!’ “언제 할 겁니까?” “지금요.” “…….” “…….”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뭔 심경의 변화라도 있어요?” “조금은.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조금 그렇습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생각을 아직 다 정리하지는 않은 상태라…. 솔직히 그동안 부길드마스터 덕분에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조금 치사하다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고… 무엇보다 말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든 게 큰 것 같습니다. 계속 지금처럼 지낼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죠.” “곧 총합동 훈련도 있으니까요. 본격적으로 바빠지는 건 당연한 거고. 여기까지가 딱 좋은 것 같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뭐가 고마워. 그런 말 마. 진짜 너무 미안해진다. 야.’ “고마워할 거 없습니다. 다 저 좋자고 한 일이었는데.” “아니요. 당연히 본의가 아니었겠지만 기영 씨가 아니었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말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건 맞아. 시바….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다, 야.’ “그럼….” “성공할 겁니다. 혜진 씨.” “감사합니다.” 난데없이 찾아와 입을 연 조혜진은 그렇게 슬그머니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슬그머니 그녀를 확인하니 연무장 뒤에 있는 실내 정원으로 향하는 것 같아 보였다. 아마 저기가 결전의 장소인 모양. 겉모습부터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화장도 빡세게 했고 옷도 잘 챙겨 입었다. 내가 도와준 것도 아니었고 이지혜가 도와준 것도 아니다. 본인의 힘으로 세팅한 것이다. ‘예쁘긴 예뻐.’ 실내 정원 앞에서 커다랗게 한숨을 쉬는 듯한 모습. 그녀가 막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나는 그냥 마력 홀로그램을 꺼버렸다. 솔직히 양심이 찔리기도 했고. 왠지 모르게 저런 필사의 고백 같은 걸 바라보는 게 익숙하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실례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 원래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왠지 모르게 보면 안 될 것 같다. ‘성공했을까 몰라.’ 솔직히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하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잘 됐으면 좋겠다. 김현성 상태가 좋아지긴 좋아졌지만 제가 옆에 있으면 더 좋아지는 건 예정되어 있는 일이고 무엇보다 잘 어울린다. 성격도 비슷하고. 괜스레 내가 다 초조해지기 시작. ‘잘되야 하는데….’ 안 그러면 너무 미안한데…. 괜히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사람한테 바람 넣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된 것 같다. 물론 이쪽의 조언을 무시하고 최후에 선택한 건 그녀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따지면 시작은 요 입이다. ‘그러니까 내 말 좀 듣지.’ 확실히 얘는 나랑 상극이다.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은 사람이었고, 간혹 불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왠지 밉지 않다.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검은색 세계의 가면쓰레기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사실 당신은 싫지 않았는데’라고. 솔직히 내 성격에 얘를 이렇게 걱정하는 것도 웃기긴 하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놈들 모두와 정이 들었다고 하는 게 맞으리라. 초조하게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시간은 점점 흐르기 시작.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때 즈음에 결과가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예상이 됐기 때문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빛기영과 어울리지 않는 욕을 지껄이며 실내 정원에 당도한 것은 순식간. 당연하지만 문을 열자 보이는 건 조혜진이었다. 김현성은 자리에 없다. 위풍당당하고 갑작스레 나타나 고백해야겠다고 선포했던 것과는 다르게 눈에는 어울리지 않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너 울지 마… 야.’ 정확히 말하면 아직 울고 있지는 않다. “우, 울지 마세요. 좀….” 하지만 위로 받으면 울고 싶어진다고 하던가. 내가 천천히 입을 연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니 저도 모르게 와락 안기는 꼴은 가관. 울음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지만 꽉 다문 입 사이로 계속해서 끄윽 끄윽 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 ‘울지 마. 슈바…. 무조건 현성이랑 이어줄게. 10번 찍어서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 야.’ “끄윽.” 현성이 이 매몰찬 새끼…. 그래도 좀 받아주지.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게 걔 선택이면 존중할 수밖에 없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괜스레 민망해져서 조혜진의 어깨를 계속해서 토닥여 주었고 그녀는 한참이나 울고 나서야 겨우 내 품에서 떨어졌다. 민망함에 입을 연 것은 그 이후로 약 3분 정도나 지난 이후. “후회해요?” “아닙니다. 히끅… 시원섭섭합니다.” “그러게 조금만 기다리라니까.” “부길드마스터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알지만 그냥 제 입으로 직접 말해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제는 전부 끝난 이야깁니다.” ‘아직 안 끝났어. 넌 진짜 기다려라, 혜진아.’ “아무튼 간에… 이만 돌아가시죠.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넌 진짜 내가 이어준다. 시바…. 목숨 걸고….’ “오랜만에 럼주 콜?” “네. 그렇게 하죠. 오늘은 조금 마셔야겠습니다.” 단순한 망상이지만 어째서 얘가 갑작스레 이런 포지션을 취했는지 알 것 같다. 그동안 제법 풀어졌던 조혜진이었으니까. 갑옷을 입은 시간보다 예쁜 옷을 입는 시간이 더 많았고 창을 들던 손은 작은 가방을 들고 다녔었다. 묶고 다녔던 머리카락은 불편한 웨이브 진 머리카락이었지. 발걸음을 옮기면서 머리를 하나로 묶는 모습이 보였다. 현재 차림과 어울리는 머리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혜진과 딱 맞는 머리스타일. 어쩌면 얘는 슬슬 이걸 그만 둬야 되는 타이밍이라 느꼈을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이대로 가다간 나태해지거나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였고 잠깐의 휴식을 즐겼지만 이제는 다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야겠다고 느꼈던 것이다. 휴가 아닌 휴가를, 이번 휴식을 본인 나름대로 마무리하려고 한 것이 분명했다. 그 마무리가 그녀에겐 김현성이었고. 다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간 그녀를 바라보며 나 역시 괜스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왠지 모르게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 같았으니까. “끝났네.” “네?” “혜진 씨 보고 한 이야기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이에요.” 휴가는 끝났다. 그리고. 싸울 수 있는 모든 이가 집결하기 시작했다. # 466 회귀자 사용설명서 466화 대륙 합동 훈련(1) “그럼… 대륙 내에 있는 전 병력이 모이는 거요?” “아무래도 그렇게 하기는 힘들걸. 대형 클랜과 길드. 그러니까 우리 교국으로 따지면 교국8좌를 비롯한 린델의 3대 길드, 실리아에서는 카스가노 유노가 이끌고 있는 요조라, 다완에서는 안개 소환사 천관위와 원거리 저격수 위란이 공동 운영하고 있는 길드 정도가 되겠네. 공화국이나 왕국연합, 그 외 중소국 에서도 굵직하고 덩치가 큰 이들을 보내 올 거야.” “규모가 생각보다 큰 것 같은데.” “덕구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클 거다.” “음.” “너무 대형 길드끼리 해 먹는 그림이 나오면 반발을 얻을 수도 있으니까. 탑급이 아니더라도 규모가 있는 몇몇 클랜과 길드도 함께 가야지. 국가에서 다루고 있는 무력 집단도 신경 써야 하고.” “최근에 엄청 바쁘던 게 그것 때문이었구만.” 사실 다른 이유도 상당부분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대륙 총 합동 훈련이 가지고 있는 비율도 적다고는 할 수 없다. 인선을 뽑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본래는 오스칼을 비롯한 교국의 의원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이기는 했지만 현 교국의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내 입김이 들어가지 않을 리 만무했다. 교국 내에서 쓸 만한 중형 클랜 명단을 전부 추려내고 그 명단 내에서도 친파란 성향인 이들을 다시 선별한다. 우리가 남이가 스킬을 사용하는 게 양심에 걸리기는 했지만 솔직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비슷한 능력과 비슷한 덩치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같은 후보로 올라온다면 아무래도 다루기 쉬운 쪽을 더 선호하게 마련이다. 단순한 훈련이라고 하기에는 걸린 게 커다란 이번 모임은, 사실 참가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이권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으니까. 너무 3대 길드에 우호적인 클랜 만 선별한 게 아니냐는 불만을 불식시키기 위해. 전혀 연관성이 없는 클랜 하나를 들인 것 이외에는 모두 이기영의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편하게 가야지. 편하게.’ 슬그머니 바깥을 바라보자 유니콘을 탄 채로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조혜진의 모습이 보였다. 옆에서 함께 그리폰을 타고 있는 김현성과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아 보이는 얼굴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마무리가 좋지 않아 멘탈에 영향이 갔을 거라 걱정했지만 벌써부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건 조혜진뿐만이 아니라 김현성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무래도 둘은 저번 사건을 아무 일도 없었던 일로 하기로 무언의 합의를 한 모양이다. ‘뒤끝은 없어서 마음에 드네.’ 실제로 조혜진 떡락사건 이후에 둘이 함께 다니는 모습을 종종 본 적이 있었다는 걸 떠올려 보면 더욱더 그렇다. 아무튼 간에 그 사건 이후에 조노보노가 퍼런색 갑옷을 버렸다는 게 가장 커다란 성과. 차인 이후에 회귀라도 한 것처럼 예전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걱정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퍼런색 갑옷은 짐짓 마음에 걸렸던 것 같았다. ‘다 괜찮은 거지, 뭐.’ 최상의 결과는 아니었지만 최악의 결과는 아니었다. 일단 처음 목적이었던 김현성의 휴식에 대해서는 엄지를 치켜 올릴만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깨달음인지 뭔지 무협지에나 나오던 걸 얻은 이후로는 이전보다 더 마음에 여유를 두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으리라.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박덕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어왔다. “형님, 그러고 보니까 요즘 혜진 누님이랑 우리 형씨랑 분위기가 조금 묘하지 않소?” ‘귀신같은 놈.’ “딱히 뭐라고 말해야 될지는 모르겠는데 둘 사이에 뭔가 큰 사건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요. 왠지 모르게 촉이 온다니까. 둘이 밖에 자주 나갈 때만 해도… 이 후각이 발동하지 않았었는데 저번 주 형님이랑 혜진이 누님이랑 같이 술 먹고 들어온 날 이후로 분위기가 묘하단 말이야.” ‘시바… 이쯤 되면 맡겼어야 되는 거 아닌가.’ 본능적으로 얘한테 맡기면 둘을 이어주는 게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강원도 연애박사니 뭐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본인의 입으로 중얼거려서 신뢰감이 가지는 않지만, 이렇게 냄새를 잘 맡는 걸 보면 뭐라도 해낼 것 같다. 실제로 정하얀과 나 역시 녀석이 이어준 게 아닌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조혜진에게 녀석을 붙이고 싶었지만…. ‘그럴 타이밍은 아니지.’ 현 상태의 김현성과 조혜진을 다시 한번 흔들고 싶지는 않았다. 둘 모두 겨우 안정을 찾아가는 타이밍이었으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훈련에나 집중해라, 덕구야. 예전보다 많이 발전하기는 했지만 아직 부족하다는 거 누구보다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 ‘그런 표정 짓지 마.’ 잠깐 흘겨봤을 뿐인데도 주인한테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결국에는 다시 한번 녀석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요즘 좀 어떤데?” “큼. 거… 뭐, 나야 항상 큼. 항상 열심히는 하고 있기는 한데….” “그렇기는 한데?” “최근 좀 벽에 막힌 듯한 느낌이요. 뭘 해도 좀처럼 달라지는 것 같지 않고… 여기저기에 물어보고 있는데 좀처럼 성장하는 것 같은 느낌이 안 든다니까.” “고급 마력 운용 지식은 어떤데? 아직 그쪽으로는 조금 더 성장할 여유가 있을 것 같은데.” “그쪽은 영 어려워서…. 혜진이 누님이나 예리한테 물어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고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아무래도 마력을 다루는 센스 같은 게 부족한 느낌이랄까. 그래도 일단은 계속 노력하고 있소.” ‘그거야 당연하겠지.’ 김현성, 김예리와는 다르게 녀석은 이미 자신의 성장치를 거의 꽉 채웠다. 지금도 충분히 전설급 탱커로서 쓸 만하지만 여기에서 더 극적인 성장을 보여주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력 수치가 낮으니 고급 마력 운용지식을 다루는 데 한계가 있을 테고… 그 능력치의 한계는 곧 상위 모험가로서의 한계라고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테니까. 박덕구의 경우에는 이제 본인의 능력보다는 아이템이나 그 외적인 것으로 버무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다. 일단 전설급 탱커로 자리 잡은 것만 해도 박수를 쳐줄 일이니까. 녀석에게 김현성이나 김예리 같은 역할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또 우리 형씨가 팍 하고 달라지지 않았소. 그래서 또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물어보기도 했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뿐이라. 이게 진짜 신기한 거요. 같은 검을 휘두르는 입장에 있는데 검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니까. 나 같은 경우에는 이해하고 휘두른다는 느낌이 전혀 없거든. 그런데 형씨는 다르더라니까.” “뭐가?” “자기 자신이 펼치는 검술을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 말이요. 전직하거나 특성을 얻었을 때 얻는 지식을 자기 걸로 만들었다는 예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무슨 말 하는지 알겠네.” 이를테면 정하얀과 내 차이라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스킬을 사용하듯 마법을 펼치는 것과 그 마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펼치는 것의 차이다. ‘이게 재능의 영역인 거지.’ 현대인이 검이나 마법에 대해서 뭘 알겠는가. 정하얀이나 김현성 같은 경우가 특이한 경우인 거지. 하지만 궁금증이 들기는 한다. 정하얀도 깨달음이고 어쩌고를 맞이한 적이 있는지. “하얀이는 어때?” “네, 네?” 은근슬쩍 말을 건네자 찰싹 달라붙기에 여념이 없었던 정하얀이 입을 열어왔다. “계단 하나를 뛰어넘었다고 느낄 때가 있었어?” “아! 네… 네. 다, 당연히요. 무슨 느낌인지 정확히 설명드리는 건 확, 확실히 어렵기는 한데…. 막 아래가 간질간질간질 했다가 그게 머리 위 까지 올라와서 퍼엉 하고 터지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퍼엉! 퍼엉! 퍼퍼어엉! 막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고 손이랑 발가락도 덜덜덜 떨리고… 눈동자도 막 위로 계속 올라가는 것 같고…. 순간적으로, 아니, 몇 시간 동안은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어서… 그 뒤로 마력도 파악하고 올랐어요.” “신기하네.” 아마 이쪽은 평생을 가도 느끼지 못할 기분이리라. 저런 건 일반인의 영역이라고 볼 수 없으니까. “엘레나 님은….” “저 같은 경우에는 하얀 씨와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신을 만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계단 하나를 올랐구나 하는 느낌이 있었으니까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찌릿찌릿한 느낌 이후에는 곧바로 신을 목도 할 수 있었죠. 자애롭고 사랑 넘치시는 신성력을 제 안에 직접 부여해 주신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베니고어 실제로 만났는데도 깨달음이고 나발이고 없던데. 아니 신성력을 받은 건 맞긴 하네….’ 연금술사라는 클래스가 괜히 비전투직군이라 불리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애초에 연금술사는 생산직이다. 그나마 망치를 휘두를 수 있는 파란의 대장장이 유아영과는 다르게 정말로 생산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연금 소환 마법은 깨달음이라는 거창한 말이 필요 없는 마법이 아닌, 골드로 조지는 기술이고 이쪽의 밥줄이라고 할 수 있는 물약 시리즈도 마력이 올랐다고 효율이 오르는 게 아니다. ‘그나마 직업이라도 준신화여서 다행이지….’ 아니면 이 괴물들 사이에서 물약만 만들고 있을 뻔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마차에 앉아 있는 엘레나와 정하얀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던 마차가 갑작스레 멈춰 선 것. 한쪽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한소라와 선희영 역시 조용히 이쪽을 바라봤다. ‘아직 도착할 시간대가 아닌데.’ “덕구야, 혹시 무슨 일 있나 잠깐….” “알겠소.” 후위들을 보호하기 위해 함께 마차 안에 있었던 박덕구 마저 슬그머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선희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어왔다. ‘얘는 진짜 왜 이렇게 점점 예뻐지냐.’ 검은색 세계의 기억이 갑작스레 떠올라 괜스레 얼굴이 붉어진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아뇨.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앞에서 사고라도 생겼나 봅니다.” “보호 주문이라도 외워 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겁니다.” 바깥으로 나갔던 박덕구가 다시금 마차 안을 두드렸던 건 바로 그때였다. “형님.” “몬스터라도 나타났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무래도 다른 나라랑 도시에서 온 사람들 때문에 교통정리가 안 되고 있는 모양이요. 입구가 좁아서 한 번에 다 못 들어가고 있으니까. 왕국연합 어디 대형 길드랑 저 위에 북부에 있는 대형 길드 마차도 부딪친 것 같다니까.” “…….” “…….” “선두는 뭐 하는데?” “타국 인사들이랑 잘 조율하고 있는 것 같은데… 조금만 기다리면 아마 해결될 거요.” “뭘 기다려.” “엉?” “기다릴 필요 없어.” “그럼….” “깃발 들고 그냥 밀고 나가.” “그게 지금 입구가 꽉 막혀서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됐다. 내가 직접 나갈 테니까. 바깥으로 나갑시다. 여기서부터는 마차에 내려서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네, 오빠.”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길드마스터.” 안 그래도 마차에 있었던 게 답답했던 참이다. 바깥으로 나가니 확실히 소란스러운 느낌이 있다. 병사들은 무슨 일인지 앞쪽을 확인하려 했고 김현성과 조혜진은 잡담 중이다. 아무래도 그냥 밀고 나가는 그림은 그려보지도 않은 모양. 김현성을 둘째치고라도 조혜진까지 양보의 미덕을 안고 살아가는 동방예의지국에 일원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덕구야, 깃발 들어라.” 사방에서 시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 467 회귀자 사용설명서 467화 대륙 합동 훈련 (2) ‘우리가 기다릴 짬밥은 아니지.’ 교국 내에 있는 유력길드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앞에 설 자격이 있다. 모험가들의 수준이 가장 높은 이유도 있고, 무엇보다 단일 국가로써 가지고 있는 힘이 가장 커다란 국가였으니까. 왕국연합이니 무슨 연합이니 하는 것들이라고 해봐야 덩치가 커다란 공화국과 교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거다. 물론 공화국이 한풀 꺾인 지금은 어느 쪽이 탑독 인지 굳이 계산해 볼 필요도 없다. 최근 일어난 몇 가지 사건으로 인해 파란 길드의 주가는 천장을 뚫을 것처럼 치솟아 올라가 있었으니까. 외부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 가지고 있는 자금줄과 사업능력, 파란길드는 어딘가에 대기업이나 다름이 없다. 우스갯소리로 파란의 포션 공장의 불이 꺼지면 대륙의 모험가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 그것뿐만이 아니다. 파란이 망하면 린델도 망한다는 개소리가 성행하는 중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현재 파란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조금 과장된 감이 없지 않지만 세세하게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린델이 망한다는 건 오바에 가깝지만…. 오히려 우리가 주목받게 된 배경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파란이라는 단일 세력이 가지고 있는 무력, 현 대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가치였다. 제한이 있다고는 하지만 신화 등급의 검을 들고 설치는 파란의 길드 마스터 김현성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보여준 말도 안 되는 모습들을 내가 봐도 입이 떡하니 벌어졌으니까. 등급을 먹이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평가하기로는 당연히 SSS급, 용병여왕 차희라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고, 심지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인지 차희라보다 김현성을 더 높게 쳐주는 분위기가 만연하고 있었다. 김현성과 차희라 본인은 굳이 그런 명성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내가 보기에도 현재의 김현성은 차희라와 비슷하거나 더 강하다. 나머지 길드원도 마찬가지다. 탱커가 귀하기로 소문난 이 동네에서 박덕구는 공격력이 약하지만 최고의 탱커로 매번 언급되는 이들 중 한 명이었고 조혜진이나 김예리는 점점 주가가 폭등하고 있었다. 지난 전쟁에서 보여줄 게 없었던 하얀코인과 소라코인은 하락 조짐을 보이고 있었지만 라이오스의 영웅으로서 괜찮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병력 전체에게 버프를 걸고 유지했던 엘레나 역시 SS급의 사제라고 이름을 날리고 있는 상태, 박덕구의 그녀, 황정연과 신임할 수밖에 없는 안기모는 부족한 파란의 스쿼드를 메워 주는 소중한 전력으로 그에 걸맞은 대우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선희영도 제법 유명해졌고….’ 무엇보다 김창렬과 유아영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규모 자체는 중소 클랜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구성원 하나하나가 한 클랜이나 길드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개성 있는 이들이다 보니 유명해지는 것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아마 호사가들의 입장에서도 덩치만 크고 실속 없는 대형길드들보다는 이쪽이 더 이야깃거리가 많았으리라. 배경이 이렇다 보니 파란의 엠블럼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없는 건 당연한 거고. 시선이 집중되는 것 역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박덕구가 이래도 되나 싶은 얼굴로 깃발을 크게 들어 올렸고 그게 무슨 신호인지 아는 이쪽은 천천히 말을 몰고 김현성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세계인들에게 우리 민족이 얼마나 예의 있는 민족인지에 대해 설파하고 싶어 했던 조노보노와 김현성도 눈치가 없지는 않은지 슬그머니 대열을 형성하기 시작. 당연히 선두는 우리의 얼굴마담 김현성이다. 물론 우리 현성이와 돈독한 관계라는 걸 홍보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지니고 있는 나는 녀석의 오른쪽 뒤, 조혜진의 포지션은 왼쪽 뒤다. 그 뒤로 길드 깃발을 들어 올리고 있는 박덕구와 도열해 있는 파란 길드가 모인 것은 순식간, 김현성이 타고 있는 그리폰이 슬쩍 발걸음을 옮기자 길을 막고 있던 인원들이 눈치를 보며 길을 비키기 시작했다. ‘키야….’ 조금이지만 쭈삣쭈삣 하고 소름이 돋는다. 바로 앞 열에 있던 이들이 길을 비키자 그 앞에 있던 이들도 자연스럽게 밀리게 되고 그 앞에 있는 이들까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껴 슬금슬금 눈치를 보고 있다. 시작은 군중심리에 불과했지만 어느새 길을 막고 있는 이들은 어느덧 홍해처럼 갈라지며 파란 길드가 걸어가고 있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파란….” “선두에 선 게 김현성이야?” “유니콘에 타고 있는 건 조혜진일 테고….” “저 엘프가…. 엘레나. 파란에 입단했다는 게 정말이었나. 헛소문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저거 봐. 선희영이야. 진짜 선희영이다.” 따위의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는 이들. ‘궁금하기는 하겠네.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일 테니까.’ “이기영.” “빛의 연금술사, 대륙의 영웅.” “파란의 2인자. 어떻게 봐도 남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닌데…. 재미있군.” 뭐가 재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엑스트라 같은 대사를 던지는 녀석들도 일부 존재한다. 오그라드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뭐라 딱히 말하지 못할 카타르시스는 있다. 그동안 개처럼 구르고 고생했던 게 보상받는 듯한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리라. 항상 장난기 넘쳤던 몇몇 녀석들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게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굉장히 딱딱한 얼굴로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고 파티원들의 뒤를 따르며 따라오는 길드 직원들의 얼굴에는 언뜻언뜻 자부심이 비치기 시작한다. 심지어 박덕구 녀석까지 굳은 표정, 녀석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조금 우스워 보이기는 했지만 나 역시 어울리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만큼 누구를 놀릴 상황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거물인 척, 대단한 놈인 척.’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홍해처럼 갈라져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인원들의 얼굴은 모두 제각각, 동경의 시선, 질투의 시선, 온갖 감정이 뒤섞인 듯한 모습을 바라보는 인간군상은 재미있다고 말할 만했다. “김현성….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괴물인데….” ‘눈 제대로 달려 있는 놈이 한 명은 있네.’ “이전보다 더 성장한 건가.” “기가 차는군. 이게 들어온 지 5년도 안 된 모험가라고?” “소문이나 마력 홀로그램이 과장된 게 아니었잖아. 제기랄.” 물론 그 와중에도 이쪽은 쉴 새 없이 마음의 눈을 놀리기 시작. 마주친 적 없었던 타국의 강자가 어느 정도 수준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고.’ 어떻게 보면 딱 평균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 교국 8좌 정도에 랭크되기는 모자라지만 안기모 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한 클랜이나 길드의 중역을 맡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낮은 건가.’ 안기모를 기용한 건 전투능력이나 센스, 근접사제라는 특수성 때문이지 재능이나 스텟 때문은 아니었으니까.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파란 길드 마스터.” “…….” “맨하튼 길드의 길드 마스터. 카일리 예일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돼서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 ‘왠지 익숙한 얼굴.’ 시야에 비치는 것은 키가 큰 여자였다. 전체적으로 슬림한 체형에 금발 머리, 파란색 눈, 아름답다면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이다. 전체적으로 한껏 꾸민 것 같다는 인상에 자신감도 있어 보였다. 어째서 그녀가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뻔할 뻔 자. 마음의 눈으로 전체적인 스텟을 확인하니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 자격이 있다고 여겨졌다. ‘자신감 뿜뿜할 만하고요.’ 마법사계열, 교국 8좌 하위 스쿼드 급. 성향은 열정 넘치는 야심가. 특성도 쓸 만하고 전체적으로 잘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가지고 있는 스펙 자체로만 봤을 때는 안개 소환사보다 쓸 만하다. 물론 그놈이야 특수능력이 있으니 비교할 수 없지만 굳이 비교해 보자면 딱 그 정도였다. ‘재미는 있네.’ 말 그대로였다. ‘얘도 1회 차 때 한 가락 했을 것 같은데.’ 슬그머니 김현성의 눈치를 본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뭔가 다른 액션은 없다. 아군이었는지 적군이었는지 구분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는 모양, 마검사 정진호를 만났을 때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을 보니 이름 모를 가면쓰레기와 그 일당들처럼 쓰레기 짓은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물론 확률은 낮지만…. ‘감정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고.’ 우리 현성이도 제법 성장했으니까. 뭐, 솔직히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과거의 적이 꼭 다시 적이 되리라는 법도 없고…. 무엇보다 대륙 내에서 전쟁을 완전히 끝내려고 하는 지금으로서는 1회 차의 빌런이라고 해도 마냥 빌런으로 대우할 수는 없다. 그 누구보다 김현성이 이걸 제일 잘 이해하고 있을 거고…. 사실 그보다 더 중한 것은 어째서 이 여자가 갑자기 이쪽에 접근해 친한 척을 하느냐다. 단순히 인사를 건넨 것 가지고 너무 확대해석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세상에 이유 없는 행동이라는 게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이런 타이밍에 슬그머니 끼어든 것도 신경 쓰인 것은 당연지사.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심정이기는 했다. 함부로 말을 걸면 안 된 것 같은 분위기에서 갑작스레 말을 거는 게 쉬운 건 아니었으니까. “카일리 예일 님이셨군요.” “들어 본 적 있으신가요?” “사실 제 견식이 짧아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서부에서 명망 높은 마법사 한 분이 계시다는 걸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지구에서 무척 유명했던 사람이라는 것도 말입니다.” “그것까지 알아봐 주실 줄은 몰랐는데…. 영광입니다, 파란 길드 마스터.” “아니요. 오히려 제가 더 영광입니다.” ‘아.’ 어쩐지 얼굴이 익숙하다고 했다. ‘배우였구나.’ 제대로 이름은 모르지만 스크린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순식간. 원체 그런 쪽에 관심이 없어서 눈치채는 게 느렸지만 파란 길드의 몇몇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린델에도 연예인이었던 사람 몇 명 보고는 별 반응이 없었는데, 아무리 녀석들이라도 실제로 얼굴을 보니 신기하기는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쪽이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이시겠죠. 만나서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네. 저도 반갑습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실물이 더 아름다우신 것 같습니다.” “영광입니다. 명예추기경님.” 지금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슬쩍 내비치자 알아서 떨어져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금 목표물로 김현성을 설정하는 모양새, 은근슬쩍 옆에 끼어들어 와 함께 향하는 모습은 내가 봐도 발군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얘 똑똑하네.’ 담이 세고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성격이다. 적당히 욕심도 있는 것 같고…. ‘하기야….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남았겠지.’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보통 유명인들은 그 끝이 별로 좋지 않다. 특히 여성일 경우에는 더욱더. 대부분 튜토리얼에서 영 좋지 못한 꼴을 당하게 된다는 걸 떠올려 보면 이 여자의 성공은 꽤 놀랍다고 할 수 있는 수준, 아마 그녀의 성공을 도왔던 원동력이 지금 같은 행동일 것이다. 적당히 유명세를 이용하고, 적당히 녹아들고, 도박도 할 줄 안다. 아무도 손을 들려고 하지 않을 때 손을 들고 발표를 할 수 있는 사람. 조금 시선이 집중되기는 했지만 저 여자는 김현성과 함께 이야기하며 안쪽으로 먼저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먼저 안쪽으로 들어간 거야 사실 별것도 아니지만 녀석과 친분을 쌓았다는 걸 외부에 노출시키는 건…. ‘의미가 있지.’ 지금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을 다른 권력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뻔할 뻔 자. ‘지금 와서 인사하면서 끼어들기도 애매할 거고….’ 왕년의 여배우는 이렇게 쉽게 녹아들 수 있었는지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인지 제법 환하게 웃고 있다. 호랑이 등에 탄 여우. 딱 그런 표현이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재밌네.’ 확실히 여러 가지 종류의 인간들이 모이는 자리는 재미있다. “오, 오빠. 저, 저 여자 누군지 알아요?” 하지만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다. # 468 회귀자 사용설명서 468화 대륙 합동 훈련(3) ‘얘 또 맛탱이 간 거 아냐?’ 순간적으로 좀 쫄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걱정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조금 기분이 안 좋은 것 정도로 끝났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다. 굳이 분류하자면 극소노 상태. 이 정도라면 충분히 안심할 수 있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중노와 안색이 새하얗게 변하고 4번 이상 말을 더듬는 대노. 혼잣말을 시작하는 극대노에 비교하자면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 본인이 보기에도 매력적인 여성이 훅 들어와 친근하게 대한 게 기분 나빴던 것이 분명하리라. 보통의 여성들에게도 견제 아닌 견제를 하지만 미인에 대해서는 그보다도 엄격했으니까. 저 카일리 예일이라는 마법사가 김현성이 아니라 내게 달라붙었다면 중노로 발전했을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나에게 별 관심이 없다.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야기였다. ‘도사 다 됐네. 도사 다 됐어.’ 몇 년간 정하얀이라는 혹 아닌 혹을 달고 다니다 보니 이제 눈치까지 볼 수 있게 된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이제는 정하얀 사용설명서라는 책을 집필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관심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구에 있을 때 유명한 배우였던 것 같은데… 이름은 잘 몰라. 워낙 그런 데 관심이 없어서.” “아… 그렇구나. 본 적 있어요. 저 사람…. 자,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영화 같은 거 많이 보지 않아서….” “그래?” “네. 그, 그런데 오빠… 지구에 있었을 때 호, 혹시 조, 좋아하는 연예인이라든가…. 있, 있으셨나요?” 뜬금없이 날아든 질문이지만 이게 공명의 함정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멍청이 같이 고개를 끄덕인다면 그 연예인은 물론이거니와 그녀를 닮은 이들까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게 되리라. “아니. 사는 게 바쁘다 보니까 누가 누군지도 잘 몰랐어.” “아아…. 그, 그렇구나아.” “응. 하얀이는 어땠어?” “저, 저도 그랬어요. 집에… 티비 같은 것도 없었고 영화관… 같이 갈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햐… 또 짠해지네.’ “그래?” “네….” 괜스레 코끝이 찡해지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언니 두 명에게도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정하얀의 얼굴을 보니 다시 한번 짠해진다. 저 슬픈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 밖으로 내뱉는다는 게 포인트. 이제는 별로 상관없다는 말투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정하연, 정하은이라고 했던가.’ 첫째 언니가 정하연 둘째 언니가 정하은. 연락이 끊기게 된 시점이 조금 애매한 것 같아 대륙으로 소환되지 않았을까 찾아봤지만 성과가 없었다. 정하얀이 두 언니들과 어머니에 대해 언급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한다는 이유도 한몫했고, 실제로 소환자 기록소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정말로 연락을 끊어버린 듯하다. 저 짠한 마법사가 내게 집착하는 이유도 버림받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서 비롯된 거라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가슴 아파진다. ‘아즈모단도 기립박수 보낼 년들… 혹시나 만난 일 있으면 통수나 시원하게 쳐줘야지.’ 안타까운 마음에 정하얀의 머리를 쓰다듬자 기분이 좋다는 듯 입꼬리가 히죽 올라간다. 여기서 더 하면 뭔가 이상해질 것 같아 급하게 손을 떼고 마무리. 그 와중에 파란 길드의 직원들과 함께 온 교국의 병사들은 거대한 건축물 안으로 들어섰고 조혜진의 통제에 따라 각자 배정받은 장소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쉼터로 향하는 것은 간부를 제외한 길드원이 전부. 교국의 중요 인물인 빛기영과 파란의 길드마스터인 김현성은 잠시 후에 회의에 참여해야 한다. 조혜진이 잠깐 다른 볼일을 보고 있는 사이 길드원들을 책임질 수 있는 선임은 선희영. 슬슬 떠나야 하기에 입을 열었다. “희영 씨, 길드원들 데리고 배정 받은 장소에서 대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훈련을 하셔도 되고… 주변을 한 번 둘러보셔도 되는데 타국의 병력이랑 접촉하는 것만 자제해 주시면 됩니다. 사실 별 상관없지만 괜한 분란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정치적으로 예민한 국가도 몇 있고…. 식사는 따로 하셔도 되는데 웬만하면 일반 병사들과 함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알겠어요, 기영 씨.” “감사합니다.” “아뇨. 감사할 일도 아닌데요. 당연한 일인걸요. 잘 다녀오세요.” 얘도 살짝 맛탱이가 간 사람이지만 저렇게 웃으면서 말하는 걸 보니 괜스레 마음이 편해진다. 아무래도 미친 짓을 온몸으로 받아내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모양. 솔직히 이쯤 되니 선희영은 정상인처럼 보인다. 상대적으로 정신 나간 여자들이 주변에 많은 효과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하얀이도….” “어, 어디 가시는데요?” “회의. 현성 씨랑 엘레나 님이랑 같이 다녀오게 될 것 같아. 아무래도 조금 오래 걸릴 것 같고….” “에, 엘프는 왜요?” “이종족 연합의 간부 자격.” “아아…. 그… 렇구나. 차, 차희라도 같이 가나요?” “아마도.” ‘중노 진입.’ 입술이 삐쭉삐쭉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심지어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있다. ‘대노 진입 직전.’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내버려뒀다간 자연스레 대노에 안착하게 되리라. 대노에 안착하는 순간 극대노로 향하는 건 순식간일 테니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주는 걸로 막아섰다. 이제는 떨어져 있는 걸 참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엘레나와 차희라만 함께 갈 수 있다고 하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마 차희라와 같은 공간에 있는 걸 반기지 않는 거겠지.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올게.” “네….” 조금 시무룩해지기는 했다. 마음 같아서는 정하얀을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문제. 자리에 모인 모든 간부급 인원들이 부관까지 데리고 나서면 회의장이 시장바닥이 될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했는지 입술이 삐죽 나온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하얀의 머리를 쓰다듬자 조금씩 입술이 들어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이 엘프는 기쁘다는 듯 밀착하고 있고. 아직도 그녀에게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정하얀은 딱히 엘레나를 제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탐탁지 않아 했다. 둘 사이에 김현성이 껴 있었다면 그나마 조금 나았겠지만 눈치 없는 김현성은 그 여자와 먼저 회의실로 향한 상태. 왠지 모르게 뒤에서 계속해서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별일 없겠지.’ 왠지 모를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회의실로 향한 것은 순식간. 사실 회의실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무척 크다. 워낙 모이는 사람이 많다 보니 이런 장소를 마련한 듯. 전 대륙에 있는 권력자와 유력 길드의 마스터들이 모인 자리. 마치 국회의사당 같다고 하는 게 어울리리라. 중앙은 커다란 마력홀로그램과 함께 회의를 진행할 사회자가 서게 될 단상이 있었고 중앙을 중심으로 둥근 형태의 커다란 책상과 고급스러운 의자들이 즐비해 있었다. 교국은 중앙 가장 위쪽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에 비쳤다. 교국 8좌, 천관위와 위란과도 잠깐의 인사를 나눴고 카스가노 유노와도 눈인사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차희라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 중견 길드의 마스터들 역시 자리해 있었는데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야 긴장할 만하다. 그나마 이런 자리에 익숙했던 기존 인물들과는 다르게 쟤네들은 이런 자리 자체가 처음이니까. 이 회의가 대륙의 운명을 결정짓는 첫 번째 발걸음이라는 걸 떠올려보면 더욱더 그렇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회의 시작 전, 서로 인사를 나누거나 지들끼리만 아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놈들이 대다수다. 어떻게든 인맥을 만들어보겠다고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킨 놈들과 본래 쌓아놓은 인맥이 꽤 되는지 비밀 이야기를 주고받는 놈들. 사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이오스와 공화국, 이종족 연합에서 온 이들과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고 쓸 만해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괜스레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내게 먼저 찾아온 이들을 향해 친한 척 미소를 날려주는 것 정도야 당연한 거고. 중견 클랜 같은 경우에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받아먹을 게 없나 간을 보고 있었다. 김현성도 마찬가지. 자신을 찾아온 이들과 악수를 하기 시작했지만 얼굴에는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참….’ 대륙의 위기를 막아보겠다고 모인 것치고는 대부분이 속물적이다. 아마 진심으로 이번 사태에 심각성을 느끼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으리라. 심지어 공화국과 라이오스, 교국과 이종족 연합에서도 미래에 닥칠 위협을 먼 미래 보듯 보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타국의 인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뻔할 뻔 자. ‘언젠가 대륙에 운석이 떨어진대!’ 같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있는 인원도 있을 수 있다는 거다.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빛기영의 몸에 친히 강림해 주신 베니고어가 너무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다는 게 원인이라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 겨우 ‘위협은 실존한다’ 정도로 말한 게 끝이었으니까. 솔직히 자세히 말했더라도 그다지 달라지지는 않았을 거다. 본래 인간이란 족속은 위기가 턱 끝까지 닥쳐야 움직이게 설계되어 있으니까. ‘진심으로 움직이기는 쉽지 않지.’ 아마 휩쓸리는 입장에 있는 이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김현성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이 별로 좋지는 않아 보였다. ‘이제 실감이 나는 거지, 뭐.’ 아마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면 더 할 거라고 생각했다. 1회 차에 일어났던 모든 이벤트를 막아내 이제 힘을 모으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확신했겠지만…. ‘상황을 보니 개판일 것 같거든.’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없어도 느끼는 게 있을 것이다. 전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대한 돼지가 묵직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박덕구 같은 느낌이 아니다. 근육덩어리와는 다르게 저 돼지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몸의 성분은 90% 이상이 지방덩어리. 솔직히 숨 쉬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녀석뿐만이 아니다. 온갖 사치품으로 치장한 남자도 있고 싸우는 게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도 드문드문 보인다. ‘이딴 게 대륙의 운명을 결정하는 집단의 수장이라고?’라고 의심되는 이들이 한 트럭은 되는 듯하다. 김현성이 이 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나마 상황이 조금 나아 보였던 린델에 틀어 박혀 있었기 때문에 보지 못했던 그림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불가능해.’ 이 꼴로 위협을 맞이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 망상에 불과하지만 김현성은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에 들어오기까지만 해도 희망으로 가득 찼던 얼굴이 완벽하게 절망으로 가라앉고 있는 게 눈에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첫 번째 회의가 시작됐다. 상황의 심각성에도 불구. 회의는 단 2시간 만에 막을 내렸고 그날 각 대륙의 수장들은 친목도모를 외치며 4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사치스러운 회식을 가졌다. 대륙인들이 벌어다 주는 세금으로 말이다. ‘개판이구나. 개판이야!’ 어떤 나라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469 회귀자 사용설명서 469화 대륙 합동 훈련(4) 솔직히 회의 내용이 뭐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렇게 모여주셔서 감사 어쩌고, 이번 훈련의 당위성과 목적에 대해서 어쩌고, 모의전을 비롯해 단체 훈련을 어떻게 진행하는지에 대해서 또 어쩌고, 훈련 계획표에 대한 설명과 여러 가지 탁상공론이 오고 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 뒤로 기억나는 건 내가 봐도 놀라울 정도로 사치스러운 술판밖에 없었다. ‘재밌기는 했지.’ 요 며칠 동안의 스트레스가 완전히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역시 남미 애들이 잘 놀아.’ 화끈하기도 화끈하고 진짜 제대로 노는 게 뭔지 알고 있는 놈들이었다. 적당히 비위도 맞춰주는 것도 프로급이고 여성들도…. 아무튼 남미 애들이 소환되는 지역의 대륙인들이 모시는 신이 음주가무의 신이니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할 리가 없다. 보급품으로 식사를 연명하는 일반 병사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부정부패. 그 중심에 서 있는 우리 내 고인물들은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애초에 신경을 썼으면 혈세로 술판을 벌일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녀석들에게는 조금 유익한 시간이었을 터. 지난밤이 돈을 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실제로 나는 외적으로 아주 만족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아마 어젯밤 나와 형, 동생, 친구하기로 했던 녀석들 중 일부는 방구석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으리라. 비위 조금 맞춰주고 대륙의 포션 사업을 쥐고 있는 인물과 호형호제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커다란 이득인지 모르고 있는 놈들은 이 자리에 없다. 다들 어디서 권력 맛 좀 본 녀석들이었고 그만큼 고인 놈들이었으니 내 생각이 맞으리라. 권력은 고이게 마련이고 고인 것은 썩는다. 두 말하면 입 아프지만 몇몇 놈은 아주 훌륭하게 썩어 있었다. 중소 클랜들 고혈 빨고 올라온 놈들이 대다수. 웃기지만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 자리에 올 수 있을 정도의 길드나 클랜이, 더러운 사건 한두 개 걸치고 있지 않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당장 어딘가에 있는 대기업들도 여러 가지 문제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딱 봐도 답이 나온다. 검은 백조도 물론이거니와 파란도 불법과 합법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한 적이 많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수긍이 가는 면이 있기는 했다. ‘얘들은 정도가 너무 심한 거고…. 우리는 양심 장사 하는 거지 진짜. 파란이 혜자지, 혜자.’ 물론 정상적인 길드나 클랜 역시 존재하기는 한다. 붉은 용병처럼 소속감 있고 도시를 대표할 만하다고 할 수 있는 대표 길드. 이런 애들은 보통 길드마스터부터 다르다. 살이 뒤룩뒤룩 찐 놈들과 달리 전투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고 실제로도 훈련을 멈추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놈들도 수준이 낮다는 것에 있었다. 이제는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따뜻한 우정 클랜 길드원들을 보고도 헛웃음을 터뜨렸던 나다. 전체적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타국의 도시에 유력 길드라고 해봐야 우정 클랜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 그중에 몇몇 특출한 인재가 있기는 하지만 교국 8좌급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20명 내외. 솔직히 이런 인원이 20명 정도가 된다는 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전체적인 수준을 평균으로 내놓는다면 많이 쳐줘야 C등급 정도. 평균 S등급은 꿈이겠지만 적어도 A등급은 되어야 다가올 위협에 대비하든지 말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두말 하면 입 아프지만 나보다 더 생각이 많아지는 건 김현성일 거라고 생각했다. 휴식의 중요성을 몸소 알게 된 녀석이 지난 번 회식에서 술 한 모금 대지 않았다는 걸 떠올려보면 아마 속으로는 똥줄이 타도 제대로 타고 있을 것이다. 뭔가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모자라 이번 회차가 도대체 뭐가 잘못됐는지,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자기반성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는 거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룩한 2회 차의 결과물을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과자봉지를 뜯었지만 질소가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김현성은 멘탈이 약간 나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뜯어 고쳐야 할지 고민되겠지, 뭐.’ 나 역시 고민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솔직히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슬그머니 전방을 보자 한쪽에 모여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병사들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몇 분전에 시작한 타국의 모의전이 막 끝난 시점이었다. “하하하. 역시나 철혈기사단의 힘은 허명이 아니었군요. 아무리 모의전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쉽게 뚫릴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실제 전쟁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공략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왕국이 가지고 있는 마법의 반도 사용할 수 없었던 모의전이었는데… 지형도 지형이었고요. 오히려 이 정도의 병력을 잃은 게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제대로 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패배는 저희 쪽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과연 지옥불의 게르한 님이 이끄시는 마법병단입니다.” “철혈공의 실력 역시 헛소문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 “게르한 님만 하겠습니까. 하하하.” ‘아주 지랄 똥을 싸고 있다. 진짜.’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고 있는 두 집단의 수장의 표정은 가관.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던 김현성의 얼굴은 더욱더 가관이다. ‘그래. 무슨 마음인지 이해한다.’ 내가 보기에도 조금 그런 면이 있었으니 놈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뻔하다. 모의전 내용 자체도 어처구니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서로 물고 빨고 하는 것에 여념이 없는 놈들을 보고 김현성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머릿속에 들어가 녀석의 마음을 읽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와중에 놈들은 이쪽으로 다가와 입을 열기 시작.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기영 명예추기경님.” “과연 대단하더군요. 지옥불의 게르한 님이 이끄시고 계시는 마법병단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지옥불의 게르한은 개뿔. 정하얀과 비교한다면 모닥불이나 다름없다. “이거 영광이로군요. 모의전에 패배했는데도 그렇게 잘 봐주셨을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형 자체가 수성에 어울리는 지형이 아니었으니까요. 처음부터 병단 쪽에 불리하게 마련된 지형이었습니다. 앞이 단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사들을 막아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는 그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전위가 취약한 마법병단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고 싶었던 거였지만.’ 그딴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물론 철혈기사단의 돌파력이 그만큼 강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만… 두 분이 거느리고 있는 병력들이 얼마만큼의 수라장을 겪으며 성장했는지 잘 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하하. 이거 부끄럽습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께서 제 얼굴에 금칠을 다 해주시는군요.” “느낀 그대로를 말했을 뿐입니다. 게르한 님.” “감사합니다. 아… 그나저나 다음 모의전은… 아. 북부와 서부에 대결이로군요. 북부의 모험가들이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데… 조금 거칠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커다란 사고가 없었으면 합니다.” 북부는 자존심은 강하지만 실력은 없었던 것 같았다. 흥분한 북부 모험가들이 눈에 보이는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 서부를 향해 자살특공대를 돌진시키는 것으로 마무리. 분해하는 북부인들이 시야에 비쳤는데 차라리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쟤네는 이기고 싶다는 의지라도 있었으니까. 철혈공과 게르한의 어린애 장난은 정말로 한심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런 새끼들이 물을 흐리는 거야. 슈바.’ 가지고 있는 실력의 한계도 한계였지만 더욱더 개판이 되는 게 당연하다. 본인이 이끌고 있는 병력의 컨디션을 걱정하고 있으니 병력을 빡세게 굴릴 리 만무. 훈련이 끝나면 곧바로 실무를 뛰어야 할 병력들이니 얘네들 입장에선 걱정이 될 만도 하지만 그래도 굴리는 수준이 너무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이해는 된다. 대륙에선 사람이 곧 재산이었으니까. 포션이나 신성마법이 있다고는 하지만 피로도는 쌓이게 마련이고 쌓인 피로도는 이후 일정에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내가 경영자의 입장이었어도 내 선수들을 함부로 굴리기는 싫었을 거다. 수익을 비롯한 모든 것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니까. 물론 이 새끼들이 트롤러인 이유는 겨우 저것뿐만이 아니다. ‘전력은 왜 숨기고 있는 거야. 이놈들은…. 볼 것도 없는 놈들이 더하다 진짜.’ 전력을 숨기면서 모의전에 임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다. 없는 것까지 꺼내 죽을 똥 살 똥 싸워도 김현성의 성에 차지는 않겠지만 정말로 가진 걸 다 꺼내 싸운다면 이것보다 볼만해질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수준이 낮다 해도 칼밥 먹은 모험가. 목숨이 걸려 있는 만큼 숨겨진 한 수 정도는 있는 게 당연했으니까. 당장 마음의 눈으로 보이고 있는 것도 몇 개 있다. 어째서 이놈들이 적당 적당히 싸우고 있는지는 뻔했다. 타국에, 타클랜에, 타길드에, 타동맹과 타지역에 본인들이 가진 전력을 전부 내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전력을 숨김이야 뭐야.’ 안 그래도 보기 힘든 모의전을 더 보기 힘들게 만드는 건 이 장소에 있는 이들이었다. 적당히 호응해 주기도 지친다. 아니, 솔직히 마음 같아선 가면이라도 쓰고 뒤집어 버리고 싶어진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진심으로 하지 않는 놈들에게는 한 방 먹여주고 싶다. ‘그래도 참아야지.’ 생각하고 있는 게 없었다면 결코 지금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 이런 꼴을 두고 보고 있냐고 묻는다면 정답은 하나밖에 없다. 이 상태가 지속되어야 우리 현성이 무거운 입이 열릴 것 같았으니까.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베니고어에게 선택을 받은 빛기영이라고 한들, 회귀자도 아닌데 먼저 나서서 미래에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고 피를 토하며 큰소리치는 것도 웃기기는 하다. 김현성이야 내가 먼저 으쌰으쌰하며 다 함께 나아가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주길 바라겠지만 오히려 적당 적당히 평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유효하다고 느껴졌다. 인맥 관리 열심히 하고,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고, 남들 비위 적당히 맞춰주면서 웃어주는 평소의 이기영. 이게 내 생각대로 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마 며칠이 지나면 김현성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기영 씨는 다가올 위협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지만.’ “…….” ‘그 위협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구나.’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하는 게 최종 목표라는 거다. 얻고 싶은 건 김현성의 입에서 나오는 말말말. 정확히 위협이 뭔지, 어느 정도로 위험한 건지, 가능하다면 회귀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들어보고 싶다. ‘정확히 뭔지 알아야 대비를 할 거 아니냐, 현성아.’ 나 역시 암 걸리는 상황에 있는 건 똑같았지만 일단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다하다 안 되면 찾아오겠지 뭐.’ 김현성의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 470 회귀자 사용설명서 470화 이간질(1) “위하여!” “위하여!!” ‘지랄 났네. 아주 지랄 났어.’ 벌써 5번째 모임, 이곳에 온 지 고작 5일이 지났다는 걸 생각해 보면 5번의 회식을 가졌다는 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참 대단들 하다. 대단해.’ 놀고, 먹고, 씹고, 뜯고, 즐기고는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놀게 되면 조금 물리기 마련이다. 우리 김현성이 입을 열어오길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쯤 되면 움직여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가 없다. 대륙의 거의 모든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전부 모이는 자리, 훈련 같지도 않은 훈련을 하며 허비한 시간이 벌써 5일이다. 내 나름대로는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곧바로 달려오지 않은 김현성을 보고는 아직까지 시간의 여유가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X라에몽을 찾는 진구처럼 곧바로 달려오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 사실. 하지만 예민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는 일단 혼자 어떻게든 해보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아무리 해봐라. 그게 생각대로 되나.’ 사실 은근슬쩍 베니고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다가올 위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었지만, 굳이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녀석이 먼저 내 쪽에 다가오는 그림이 조금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으니까. 여러모로 유리한 점도 많고. 질문을 김현성이 아니라 내가 먼저 할 수 있다는 메리트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한 사이 벌써부터 주변에서는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역시 땀을 흘린 뒤에 마시는 맥주는 맛이 각별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기영 명예 추기경님.” “네. 그런 것 같습니다. 하하. 이렇게 좋은 분들과 함께 있으니 더욱더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요. 이것 참……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 가 봅니다. 전 대륙이 이토록 화합할 수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대륙이 하나가 될 수 있게 도와준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게 말이야 방귀야.’ “잔이 비어있네요. 한잔 받으세요. 명예 추기경님.” “감사합니다. 자밀라 님.” “소문으로만 들었었는데…… 그동안 너무 뵙고 싶었거든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찾아뵙기도 쉽지 않았고 또 그동안 교국과 저희 왕국의 국교가 단절되어 있었으니까요. 정말,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사실, 자밀라 님처럼 아름다운 여성분이 있으신 줄 알았더라면 제가 먼저 찾아뵀을 겁니다.” “빈말이라도 기분 좋네요. 후훗.” “빈말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받은 느낌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두 분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이거 이러다가 오늘 밤에 어딘가로 사라지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게르한 님도 참…… 짓궂으세요.” 하하 호호 즐거운 분위기에 주변을 둘러보자 오늘도 시간을 허비하기 여념이 없는 적폐 여러분들의 모습이 다시 한번 시야에 비쳤다. ‘김현성이 이 꼴을 봐야 하는데.’ 대부분이 각 왕국의 유력길드를 맡은 이들이었는데 그다지 정상적인 놈들이 없다는 게 특징 아닌 특징이었다. 지옥불의 어쩌구와 철혈 어쩌고 별명이나 직업명 하나는 거창한 놈들이지만 이름값을 하는 놈들은 몇 놈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그저 그런 쓰레기들, 특히 내 옆쪽에 앉아 있는 자밀라라는 여성의 행동은 가관이라 할 수 있으리라. 짓궂다고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진심으로 한 소리는 아닌 모양,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얼굴과 표정은 솔직히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가슴을 훤히 내놓고 있는 복장과 은근히 유혹하는 듯한 말투는 이게 한 클랜을 대표해서 온 지도자인지 쇼걸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 아슬아슬하게 커트라인에 합격한 유력 클랜이라고 들은 적은 있었지만, 훈련보다는 다른 곳에 관심이 가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그녀의 접근을 반길리 만무. 최근 중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정하얀을 생각해 보면 솔직히 이런 자리도 조금씩 부담스러워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 어떤 것보다……. ‘적폐 흉내 내기도 참 힘들잖아.’ 이 사회의 암덩어린 척 연기하며 비위 맞춰주는 것도 참 힘들다. 사회의 정의를 추구하는 도덕 사회의 일인으로써 이런 적폐 축제에 참여하는 게 부담스러운 것은 당연지사. 마음에도 없는 행동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마치 잘 맞지 않는 남의 옷을 입은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 다른 말이 필요할 리가 없다. 물론 아주 가끔은 덩달아 즐기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적폐 축제는 이기영이라는 인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서로를 밀어내려고 하는 N극과 N극이요. 이혼한 부부 사이나 다름이 없다. ‘아 연기하기 진짜 힘들다.’ “게르한 님. 제가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이것 참 영광입니다. 명예 추기경님.” “영광일 것도 많습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반응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훈련 중도 아니고 친목 도모를 위해서 모인 회식 자리 아닙니까. 훈련도 최선을 다해 완수했으니 친목 도모 역시 최선을 다해야지요.” “역시 명예 추기경님 이세요.” “자밀라 님도 한 잔 더 받으시죠.” “네, 물론이에요.” “자밀라 님이 많이 취하신 모양입니다. 어깨라도 빌려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게르한 님의 어깨보다는 명예 추기경님의 어깨가 더 좋은걸요.” “하하하. 이거 정말로 오늘 두 분이 일이라도 치르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게르한 님.” “이거……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럼 어떻게 제가 이런 말을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두 분이 밀착하고 있는 모습이 이렇게 자연스러운데…….” 하…… X바 진짜 연기하기 너무 힘들다. “명예 추기경님께서도 기분 좋으신 모양입니다. 최근에 본 얼굴 중에 가장 환하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좋은 분들과 함께 있는데 기분이 좋은 게 당연하지요.” “여기 안주 좀 드세요. 명예 추기경님. 제가 먹여드려도 되나요? 아…….” “자밀라 님…….” “아이 그러지 말고요. 아…….”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역시나 이런 역할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나저나 말입니다. 명예 추기경님.” “네. 게르한 님.” “갑작스럽게 이런 말씀 들리기 조금 죄송합니다만…… 최근에 있었던 모의전 말입니다.” “어떤 모의전을 말씀하시는 건지…….” “대도시 린델 연합과 왕국 남부연합…….” “아아아아아. 기억이 납니다. 네. 모의전이 있었었죠.” “큼. 사실은 조금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서…….” “네? 우려할 게 있었습니까?” “린델 연합이 필요 이상으로 거칠게 모의전을 진행하고 있다는 여론이 있어서 말입니다. 물론 훈련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린델 연합의 클랜 마스터 분들의 마음도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 처사가 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왕국 남부연합 쪽의 모험가 중에서는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있고요.” “무슨 말씀 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물, 물론 린델 연합을 나무라는 것은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도 완전히 배제 한 채로 말씀드리는 거고요. 다만 이기영 명예 추기경님이 계신 린델 연합에 안 좋은 소문이 퍼지게 될까 걱정이 돼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아…… 게르한 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확실히 부상자가 제법 많았었죠. 포션으로 치유한다고 하지만 축적된 피로도까지 치료할 수는 없고…… 저도 보면서 조금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습니다.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더군요.” 부상자가 많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일 범주 안에 들어가 있었다. 사망자가 나온 것도 아니었고 김현성이 생각하고 있는 모의전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적폐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 내 고인물들께서는 린델 연합의 이유 모를 투지가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조금이지만 이해가 되기는 된다. 한쪽은 적당히 하자는 느낌으로 훈련을 하고 있었다면 한쪽은 죽자 살자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양쪽 병력의 온도 차가 무척이나 심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김현성의 절박함이 보이는 모의전이기는 했지만, 가슴 아프게도 녀석의 투지는 우리 적폐 여러분들께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았다. ‘너무 만화 같은 상황을 기대한 거 아닌가.’ 굉장히 1차원 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 열정 넘치는 모습으로 달려들면 상대도 뜨겁게 받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 통한의 실수, 대륙 연합에 새로운 활력을 밀어 넣기 위한 김현성만의 비장의 수는 처음부터 이상한 방향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물론, 이쪽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김현성의 계획이 실패하고 있다는 건 내 계획에 한 발자국 가깝게 다가간다는 말과 진배없었으니까. 하루라도 더 빨리 김현성이 기영에몽을 외치며 달려왔으면 좋겠다. “아. 명예 추기경님도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군요.” “사실 저희 길드 마스터께서 이번 훈련에 조금 열의가 넘치시는 상태라…… 이건 제가 따로 한번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최소한 마법 병단과 함께 훈련할 때는 쓸데없는 부상자를 만들지 않는 방향으로 이끌어 보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로서도 일단 말씀을 드리는 것 정도에 불과해서…… 조금 더 도움이 됐으면 좋겠지만……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아…….” “이런저런 이유로 저는 이번 훈련에는 참여하지 않는 걸로 길드 마스터와 합의를 본 상태라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건…….” “다른 업무를 배정받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훈련만큼 중요한 일들도 많으니까요. 병력의 운용이야 본래 길드 마스터의 고유 권한이고…… 사실상 린델의 삼대 길드가 함께 움직이는 터라 이런 부분에서는 크게 도움 드리기 힘듭니다.” “아…… 그렇군요.” “네.” “그, 그래도 이기영 명예 추기경님이 아닙니까. 교국에 최초로 직위를 부여받고 교국의 지도자의 신임을 얻고 있는 분이신데……. 제삼자의 입장에 서 있는 제가 함부로 말 할 입장은 아니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네?” “파, 파란 길드 마스터가 이기영 님을 견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뭔 소리야 이새끼들은…….’ “하하. 그런 게 아닙니다. 조금 오해가…….” “큼……. 사실 파란길드가 어디 파란 길드 마스터 혼자 키운 길드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기영 명예 추기경님이 아니었다면 그런저런 3류 길드로 전락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훈련에서 완전히 배재하다니…….” ‘뭔 배재를 해. 내가 안 한다고 한 거구만…….’ “사냥이 끝난 개는 잡아먹힌다. 저희 나라에서도 비슷한 속담이 있습니다. 제 걱정이 쓸데없는 걱정이었으면 좋겠지만…….” ‘응 쓸데없는 걱정이야.’ “혹시나 파란 길드 마스터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말 한 번 거지같이 하네. 이 새끼는.’ 바보가 아니라면 깨달을 수 있는 상황,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지만, 이때다 싶어 달려드는 꼴은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목적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게르한이라는 놈이 뭘 원하는 건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간질.’ 이런 놈들 데리고 성과를 내야 하는 김현성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암만 떠들어 봐라. 이 새끼들아. 현성이랑 내가 찢어지나.’ # 471 회귀자 사용설명서 471화 이간질(2) 보통 이런 경우를 작업 친다고 표현한다. 호구하나 잡고 사기 칠 때 하는 것과 비슷한 짓거리라는 거다. 이 새끼들이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속내가 있는 건지 아직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당연히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대륙에 닥쳐올 위기를 막기 위해 모인 인원들이라고 한들, 기본적으로 여기에 모여 있는 이들은 모두 타인들이었으니까. 지금 사이좋게 지낸다고 해서 마지막까지 사이좋게 끝난다는 보장이 없다는 건 그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이야기,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 견제하고 있는 집단들이 많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파란의 경우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명실상부 최강, 발을 뻗고 있는 사업만 수십 가지, 소수의 인원이 무색할 정도의 전투력은 다양한 영역에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단순히 린델 내에서만 국한되어 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 조그만 길드가 대륙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보니 그 영향력을 조금 줄이고 싶다고 판단한 길드들이 많다는 건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겉으로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사바사바 거리고 있겠지만 뒤에서는 무슨 생각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 포션 사업을 하다 수입이 반 토막 난 자식도 있을 거고, 여러 불법적인 사업이 완전히 막혀버린 놈들도 있을 거다. ‘이 새끼도 그렇고, 저 새끼도 그렇고.’ 안 그래도 슬슬 견제가 들어올 때라고 느끼기는 했지만, 이쪽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으려고 하는 놈들이 그 대상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이 합동훈련이 있기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작업이었을 터, 파란 길드에 대한 조사가 내부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고 파란 길드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했을 것이다. 김현성과 이기영의 사이를 틀어지게 하는 것으로 영향력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판단이 섰을 거고…… 실행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했겠지. 바깥에서 보는 파란의 이미지는 절대 선에 가까웠으니까. ‘나쁜 방법은 아니네.’ 나 역시 비슷한 방법을 강구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외부에서 보기에 파란의 권력 구조는 지극히 기형적이다. 김현성은 부 길드 마스터인 내게 상상도 할 수 없는 권한을 쥐여주고 있었고 나는 그 권한을 바탕으로 사방에 영향력을 휘두른다. 파티에 대한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도 불분명하고 심지어 대외적으로는 이기영 명예 추기경이라는 인간의 위상이 더 높다. 하나의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는 없다지만 파란의 경우에는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상황, 아슬아슬해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만약 김현성과 내가 찢어진다는 뉴스가 대륙에 퍼졌을 때 파티를 열 권력자가 한 트럭이 넘는다고 장담할 수 있다. ‘지난 5일 동안…….’ 은근슬쩍 설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슬그머니 허리를 뒤로 젖히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자 괜스레 슬퍼지기 시작했다. ‘난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쁜 새끼들.’ 정하얀 마냥 찰싹 달라붙어 있는 자밀라도 그렇고……. ‘사랑했다. 나쁜 년아.’ 물론 아직 의심하기에는 이르다. 실제로 우리 적폐 축제 여러분들과 나는 그동안 둘도 없이 돈독한 시간을 보냈었으니까. 사람 믿기 좋아하는 나지만 이번만큼은 김현성처럼 의심병이 도진 것일 수도 있다. ‘아암. 사람은 쉽게 의심하면 안 되지.’ 일단 떠보고 싶기는 하다. 정말로 내가 빌드업 당하고 있는 건지는 확인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슬그머니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길드 마스터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에 저를 쳐낼 생각이셨다면 진작에 쳐내시려고 하셨겠죠.” “크흠…….” “명예 추기경님…… 이런 말씀 드리기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사람이라는 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미 파란길드는 예전의 그 파란 길드가 아니고요. 다들 그렇듯 열정 넘치게 움직이던 시절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그런 길드가 아니지 않습니까. 몸을 한번 움직일 때마다 대륙 전체가 주목하는 길드이기도 하고…… 처음에는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셨을 수도 있지만, 점점 더 명예 추기경님의 권한이 커지는 걸 걱정스러워하시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 현성이 그런 사람 아니야. 이새끼들아.’ “게르한 님의 말이 맞습니다. 명예 추기경님. 파란 길드 마스터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해 준비를 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끄응…….” ‘득달같이 달려드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하하…… 보험을 들어놓는다고 생각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무언가 행동을 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준비를 하는 걸로도 충분히 도움이 될 테니까요. 저희 왕국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즐비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암요. 아마 대륙 전체를 두고 봐도 많을 겁니다. 집단 내에서 길드 마스터 외의 인물이 영향력이 커지는 걸 두고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을 수도 있지만 아마 속으로는 명예 추기경님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베니고어 여신에게 선택받았다는 그 상징성도 그렇고…… 빛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그 힘도 그렇고…… 실제로 린델과 교국 내에서는 명예 추기경님의 인지도가 더 높지 않습니까.” “두 분의 신뢰가 돈독한 건 이미 전 대륙에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 “…….” “여러분들 왜 그러세요. 우리 명예 추기경님 불편하시게…… 이런 좋은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꼭 나누셔야겠어요?” 슬그머니 침묵으로 일관하자 반응이 온 것은 자밀라 쪽이다. 중재하는 척하며 게르한을 비롯한 적폐 여러분께 눈빛을 보내는 모습은 가관, 마음의 눈이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찰나의 시간 동안 이루어진 시선 교환이었다. ‘너무 대놓고 작업 치지 말라는 거겠지.’ 이상하게 비칠 여지도 있을 테니까. 그 목소리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적폐 여러분들을 보자 괜스레 한숨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 놈도 빠짐없이 한통속이었구나. 이놈들.’ 확실히 내가 봐도 빌드업이 너무 성급해 보이기는 했다. 잠깐 틈을 보였다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꼴을 보니 다른 쪽으로도 영 재능이 없는 모양이다. 그만큼 우리가 친밀하게 지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만약 나라면 더 조심스럽게 움직였을 것이다. 5일이 아니라 한 달을 사전작업 기간으로 잡고, 안 좋은 소문을 조금씩 조금씩 흘린 이후에 지금과 같은 상황을 연출했을 것이 분명, 이 자식들도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겠지만 때마침 먹음직스러운 떡밥이 보여 참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대화의 흐름을 생각해 보면 튀어나올 만하기는 했다. ‘히야. 진짜 세상에 믿을 새끼. 현성이 말고는 없구나.’ 지난 5일간의 시간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는 듯한 배신감. 욕심 많은 적폐 놈들에게 마음을 주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뭐가 그렇게 필요했니. 포션 사업이야? 아니면 린델이 너무 커진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어? 무기사업까지 뻗어 나가서 그래? 아니면 자유무역협정이 불공정해 보였어?’ 마음에 걸리는 건 사실 한둘이 아니긴 하다. “게르한 님이 조금 취하신 모양이에요. 자자. 쓸데없는 말을 빨리 잊으시고 빨리 한 잔 더 받으세요. 명예 추기경님. 다른 분들도 나쁜 뜻은 없으셨을 거예요. 다들 명예 추기경님이 걱정돼서 노파심에 한 말씀씩 드린 걸 테니 너무 괘념치 마세요.” “이거…… 정말로 죄송합니다. 명예 추기경님. 제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서…….” “저도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표정 푸세요. 명예 추기경님. 저를 봐서라도요. 네?” “큼…… 여러분들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닙니다. 잠깐 다른 생각이 들었던 터라…….” “다행이로군요. 불편하셨다면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명예 추기경님.” “하하하……. 아닙니다. 다 이 못난 사람을 걱정해주셔서 해주신 말씀들이 아닙니까. 오히려 제가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게 맞습니다. 사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건 시기상조인 것 같지만 한 번쯤은 고민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정말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혹시라도 고민이 깊어지신다면 언제든지 상담해 드릴게요. 명예 추기경님.” “네, 만약 그때가 되면 꼭 자밀라 님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짠 할까요?” ‘티키타카 오지네. 이 새끼들.’ 게르한을 비롯한 몇몇 적폐들이 공격이라면 내 옆에 있는 자밀라는 완급조절을 해주는 포지션에 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놈들인지 원대한 뜻을 위해 급하게 결성된 파티인지는 모르겠지만 호흡 하나는 칭찬해 주고 싶은 기분, 만약 자밀라와 이쪽의 사이가 조금 더 깊어진다면 나와 김현성 사이를 벌리기가 더 쉬워질 것이다. 베갯머리 송사보다 효과가 좋은 방법도 몇 개 찾아보기 힘드니까. ‘너랑은 끝이야. 이년아.’ 원래부터 그럴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조금 더 강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상황 자체는 재미있다. 교국 안에 있을 때만 해도 누군가 나를 향해 작업을 쳐온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특히나 이기영 명예 추기경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는 이들은 더욱더 그렇다. 말 한마디 하기도 전에 엎드려 기는 이들이 대다수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 자식들의 반응이 무척 신선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호구로 보였나.’ 정보가 없다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기영 명예 추기경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대륙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하고 불사르는 성인의 이미지였으니까. 파란의 매체나 교국의 국민이나 아주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들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거다. “사실…….”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은근슬쩍 이야기를 꺼낼 것처럼 간을 보자 설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적폐들의 얼굴은 가관. “혹여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기보다는……. 그냥 최근에 길드 마스터와 사이가 소원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라…….” 몇 놈이나 되려나. 또 누가 누가 연루되어 있으려나. “말씀하시기 힘들겠지만…….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명예 추기경님과 저희 사이 아니겠습니까.” 나한테만 붙어 있는 것도 아닐 거고 말이야. 김현성에게 붙어 있는 인간이 누구인지도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만 조진다고 해서 이간계가 완성되는 건 아니니까. 때려 맞추기에 불과하지만 아마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김현성에게 말을 걸었던 그 여자가 아닐까. ‘카일리 예일?’ 처음 이후에도 김현성과 함께 있는 걸 몇 번 본적이 있다. ‘거의 확실하네.’ * * * “오늘도 혼자 계시는 건가요? 파란길드 마스터?” “아…… 케일리 님이군요.” “업무 보느라 많이 힘드시겠어요.” “익숙합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아직 식사하지 않으신 것 같으셔서 함께 식사라도 할까 하고요. 저녁 늦게 드시잖아요? 실례가 안 된다면…… 파란의 식당에서 함께 먹어도 괜찮을까요? 불편하시면 그냥 돌아…….” “아닙니다. 안 그래도 말씀드릴 게 있었는데……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곧바로 가시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파란 길드 마스터.” # 472 회귀자 사용설명서 472화 이간질(3) 김현성. 파란의 길드 마스터. 직업은 알려지지 않았음. 검사 계열의 근접 직군일 가능성이 높음. 전설 등급 이상의 무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직업 역시 전설 등급으로 추정됨. 민첩 능력치가 최소 90을 넘겼을 거라고 판단되며 근접 직군답지 않게 높은 마력 수치를 지니고 있음. 정보가 적어 어떤 성격인지 파악하기 어려움. 훈련과 업무로 시간 대부분을 보내고 여가 시간을 거의 가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음. 전형적인 모범생 타입으로 술과 여자를 멀리하는 것이 특징. 이기영. 파란의 부길드 마스터이자 라이오스의 영웅, 교국의 명예 추기경. 드래곤의 선택을 받은 자. 파란의 길드 마스터 김현성과는 튜토리얼 동기로 마법사 정하얀, 전위 박덕구와 함께 던전을 공략함. 최소 전설 등급의 연금술사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직업명은 알려지지 않았음. 육체적 능력은 미약하지만, 최소 95가 넘는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 베니고어의 열렬한 신도이며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함. 교국민들이나 모험가들 가리지 않고 여러 방면에서 봉사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청렴하고 희생적인 성격.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게 특징 아닌 특징. 이전에 읽은 보고서를 떠올리자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참…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몰라.’ 한 명은 훈련과 업무밖에 할 줄 모르는 샌님이고 한 명은 희생정신이 투철한 사제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필드에서 살아남아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대륙 전체를 좌지우지할 힘을 가진 듀오라기에는 평범하다 못해 실망스러울 정도. 물론 무력이 중요한 이 세계에서 김현성이 가진 무력은 그들의 평판을 올리는 데 도움을 줬을 거다. 하지만 이 장소가 어디 무력만으로 돌아가는 세상인가. 교국의 상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람 사는 곳은 어딜 가나 똑같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들이 린델의 3대 길드라고 불릴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궁금증이 인 것은 당연지사. 실제로 정보과에서도 그 부분을 가장 중점적으로 파고들었고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이유를 들었을 때 조금 맥 빠지는 경험을 해야만 했지만, 적어도 이쪽에서는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붉은용병과 검은백조.’ 김현성은 검은백조의 길드 마스터 박연주와, 이기영은 용병 여왕 차희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것. 김현성과 박연주의 사이에 대해서는 아직 정보가 적었다. 반면 이기영의 경우에는 용병 여왕과 지구에서부터 깊은 관계에 있었다는 정보를 받을 수 있었다. 파란 길드가 본격적으로 린델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후, 서로를 견제하던 검은백조와 붉은용병이 갑작스레 공동전선을 펼치기 시작한 정황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웃기지도 않아. 진짜.’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파고들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린델의 중심은 파란의 듀오다. 당장 이 둘이 찢어진다면 파란은 가지고 있는 힘의 반도 지키지 못할 것이 분명. 검은백조와 붉은용병의 사이까지 예전의 관계로 돌려놓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대륙에 가장 강한 영향력을 뿌리고 있는 린델의 3대 길드가 와해되는 것이다. 타 국, 타 도시, 타 길드로서는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는 소식이라 할 수 있으리라. ‘언제까지 3대 길드가 다 해 먹는 꼴을 봐야 해?’ 집단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라면 누구라도 할 수밖에 없는 생각이었다.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어쩌겠어. 너희들이 찢어져야 우리도 숨 쉴 구멍이 생기는 데….’ 괜스레 웃음이 나오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 웃음을 꽉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일할 시간이었으니까. “역시 파란은 대단하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카일리 예일 님.” “아뇨. 대단한 걸요. 5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 규모라니… 자제는 전부 린델에서부터 챙겨오신 건가요?” “예. 최대한 간소화하고 싶기는 했지만, 길드 직원들이 따로 고생하는 걸 기영 씨가 좋아하지 않는 터라….” ‘어련하시겠어.’ “전부 균열랜드에서 쓰고 남은 자제들입니다. 조립식으로 양산되어 있어서 간단한 마법으로 만들 수 있고요. 지금 당장은 간이 천막을 사용하셔야겠지만,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일리 예일 님을 비롯한 다른 길드에게도 이런 건물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네? 그게 정말인가요?” “네.” “그, 그럼… 비용 처리는….” “비용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파란 길드에서 전부 부담하기로 이미 협의가 된 상태니까요.” “그런… 그래도 되는 건가요?” “지금 당장은 대륙 합동 훈련에서 성과를 보는 게 최우선 사항입니다. 저희 길드도 그렇지만, 다른 분들 역시 훈련 외에 다른 부분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숙면을 취하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부분에서 능률이 올라갈 겁니다.” ‘진짜 돈 많네.’ 보유하고 있는 자산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런 걸 무료로 지급한다고?’ 저도 모르게 입을 떡하니 벌릴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간이로 지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길드 하우스. 왕국에 있는 맨하튼의 길드 하우스보다 더 규모가 크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실제로도 커다랄 것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조립식으로 양산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지만, 벽면의 자제는 싸구려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마법? 아니면 연금술의 일종?’ 뭐가 됐든 상관은 없다. 중요한 건 이게 곧 수중에 떨어진다는 거였으니까. ‘얼마만큼이나 호구인 거야?’ 사람이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쓸모없는 길드 직원들을 고생시키기 싫다고 숙소를 올린 이기영이나, 원활한 훈련을 위해 그걸 전부 무료로 지급하겠다는 김현성이나…. 사실은 병신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바보처럼 당하고 있는 거겠지.’ 아직 결과가 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이미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김현성에 대한 정보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적다. 하지만 이기영에 대한 정보는 그렇지 않다. 대략적인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천천히 물들이고 있는 중. ‘이렇게 쉬울지 누가 알았겠어.’ 본래 깨끗한 사람일수록 쉽게 타락하기 마련, 그렇기에 이기영은 타락시키기 적당한 대상이었다. 전도가 목적인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선천적인 성격이 타인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었다. 실제로도 타인의 말에 잘 휘둘리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베니고어의 교리나 주변 지인들에게 피해만 가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 부탁도 잘 거절하지 못한다. 교국의 의원들이 괜히 그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명예 추기경은 이용하기 편하니까.’ 아마 여러 가지 국가 행사에 얼굴마담으로 불려 다니는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일 거로 생각했다. 이렇게 휘둘리기 쉬운 사람이 아직 그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놀랍다. ‘청렴하고 결백해?’ 청렴, 결백은 개뿔….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 술이든 여자든 약이든 간에 제대로 접하지 못했을 뿐이다. 교국의 귀족들과 차를 마시는 것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즐거운 시간을 선사할 자신이 있었고, 그 생각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잘 들어맞았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재미가 들렸는지 부르지 않아도 쓰레기들과 어울리고 있는 중. 만약 교국의 백성들이 명예 추기경이 어울리는 자리를 본다면 자신의 눈을 비비며, 믿지 않을 것이 분명하리라. 술에 취해 여자와 스킨십을 하고 온갖 더러운 소리에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은 그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모습일 테니까. 겨우 5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기영이라는 순백색 도화지는 조금씩 검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운이 좋으면 완전히 꼭두각시로 만들 수도 있겠는데….’ 방법은 쉽다. 마시고 있는 술에 약을 타는 방법도 있고 여자로도 다룰 수 있다. 물론 이런 방법은 둘 사이가 완전히 끝난 이후겠지만, 그것도 금방이다. 김현성은 지속해서 이기영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듣게 될 거고,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친우에게 실망하게 될 테니까. 김현성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변을 슬그머니 살펴보니 어느새 식당에 도착한 상황. 일반 병사들이 이용하는 식당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에 조용히 탄식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마침 식사하는 인원들이 보인다. 하얀색 피부를 가지고 있는 여자와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남자. 머리를 묶은 자도 보였고 아직 학생으로 보이는 이도 보인. 지금 눈에 보이는 이들이 누구인지는 뻔할 뻔 자. ‘파란의 정예.’ 정하얀, 박덕구를 비롯한 파란의 파티원들. 모의전에서 매번 괴물 같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이들이었다. 아무래도 이제 막 식사를 끝낸 모양, 조용히 눈인사하는 모습들이 시야에 비쳤다. 잠깐 움찔하기는 했지만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딱히 나쁜 짓을 하려고 찾아온 게 아니었으니까.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아마 곧 식사가 준비될 겁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파란 길드 마스터.” “아니요. 제가 더 감사합니다. 카일리 예일 님. 매번 훈련에 도움을 주시는 것 같아 안 그래도 따로 인사를 드리려고 했었는데….” “아니요. 린델의 3  길드가 해주시는 것들에 비교하면 별것 아닌 걸요. 저희 길드가 하는 것들이야 아주 사소한 일들이고….” “진지하게 훈련에 임해주시는 것만 해도….” “당연한 일이에요. 어떻게 주최한 훈련인데… 얻어갈 건 얻어가야죠. 조금 분위기가 어수선하기는 하지만, 아마 곧 다들 적응할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제가 이렇게 도와드리고 있잖아요?” “맨하튼 길드가 보여주시는 모습에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아, 드시죠. 카일리 님.” “항상 이 시간에 드시는 건가요?” “사실은 조금 더 늦습니다. 마무리 업무를 끝내고 나면 조금 늦은 시간이 되는 터라… 최근 들어서는 간편하게 끝내는 편입니다. 아마 카일리 님이 오시지 않았더라면 적당히 끼니를 때웠을 겁니다.” “식사는 꼭 하셔야죠… 혼자 일을 하시는 것도 아닌데… 명예 추기경님도 계시잖아요.” “기영 씨는….” “그러고 보니 보이지 않으시네요. 혹시 일찍 잠드신 건가요?” “아닙니다. 아마 지금쯤 다른 분들과 계실 겁니다. 최근 다른 지역 분들과 친목을 도모하는 일이 잦아져서….” “아…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소문 말입니까?” “혹시 듣지 못하셨나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마력으로 새어나가는 음성을 차단하고. 조용히 이야기 꺼내면 되겠네.’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명예 추기경님께서 질이 안 좋으신 분들과 어울리고 다니는 것 같아서요.” “네?” 소문은 뻥튀기되면 뻥튀기될수록 좋고. “이 합동 훈련에 파란 길드 마스터처럼 좋은 분들만 참여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희 도시에서 함께 온 분들인데… 게르한 님이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어요.”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지역에서도 골칫덩어리로 속을 썩이고 계시는 분이거든요. 실력은 좋지만… 인성이 조금… 그래서… 최근에 이기영 님께서 그분들과 어울리는 것 같아서… 훈련에도 제대로 참여하지 않으시고… 이건 정말로 근거 없는 소문이지만, 심지어 숙소에 여자들까지 끌어들인다는 소문도… 물론 이기영 명예 추기경님께서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혹시 최근에 길드 숙소에 들어오지 않으신 적은 있으신가요?” “…….” 샌님한테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으로 들릴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표정이 조금 어두워지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낀 것은 당연지사. 순간적으로 몸이 떨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귓가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 앞에 있는 김현성의 목소리가 아니다. 마치 뇌를 울리는 듯한 목소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 소, 소, 소문… 누구한테…. 들었어요? # 473 회귀자 사용설명서 473화 이간질(4) ‘뭐야.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이런 게 가능한 거였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 것은 당연지사.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김현성도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고, 무엇보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뭐야.’ 마치 지금까지 있었던 대화를 듣고 있었다는 듯한 질문. -소, 소, 소문 어디에서 들었냐고 물었잖아요. 아… 지, 지금은 대답할 수 없겠네. 시, 실수했구나. 만나서 물어보는 게 빠르겠다. ‘어떻게 들을 수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 이거… 마법이기는 한 건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어떤 종류의 마법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단순한 텔레파시라기보다는 마치 의념을 쏘아 보낸 느낌. 그 어떤 마력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음성을 차단해 주기 위한 마력의 벽이 유지되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차단 마법에 누군가 개입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고 실제로도 마력의 벽은 아무 이상 없이 작동되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이 안에서 나오는 말을 듣지 못한다는 게 당연하다는 거다. 고유 능력이나 다른 종류의 능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종류의 능력이 있다는 걸 들어 봤을 리가 만무하다. 기분이 찜찜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기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조금 이상하다 못해 소름이 끼쳐올 지경이었으니까. ‘누구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누가 자신에게 생각을 전달하고 있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아직 파란의 파티원 몇몇과 김현성이 전부였다. “카일리 님, 뭔가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파란 길드마스터… 그보다 방금….”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길. 뭐야, 진짜?’ “그보다 아까 하셨던 말씀에 대해서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지옥불의 게르한이라는 사람과 기영 씨가 어울린다는 게….” “말씀드렸다시피 상당히 질이 안 좋은 사람이라서요. 저도 단순한 오해라고 생각했지만 파란 길드마스터의 표정을 보니 그렇지도 않을 것 같네요. 염려하시는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딱히 걱정되는 부분도 없고요. 물론 다른 쪽으로는 조금 걱정이 됩니다만… 최근 취해서 들어오는 일이 잦아지기는 했습니다. 평소보다 무리하는 느낌도 들었고요. 그래도 모의전이나 합동 훈련 때는 꼭 얼굴을 비췄는데….” “그렇다면 소문이….” “아뇨. 그건 아닐 겁니다. 기영 씨가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기관리에 대해서는 철저한 터라, 아마 카일리 님이 생각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네. 당연히 저도 그저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혹시나 명예추기경님이 안 좋은 추문에 휩싸일까 걱정이 돼서…. 그래도 교국의 기둥 같은 분인데, 이런 소문이 들린다는 것만으로도 이미지가 깎이실 수도 있잖아요? 누군가 악의적으로 흘린 소문일 수도 있고요. 물론 단순 소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없지는 않지만….” “…….” “당장은 좀 더 지켜보시고 걱정되시면 말씀이라도 꺼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런 문제는 대화로 풀어나가는 게 중요하니까요.” -화, 화, 화장실로 와요. 안 오면 큰일 나니까. 꼬, 꼭 와야 돼요? 안 오면 내가 찾아갈 거니까. 빨리 와요. ‘도대체 뭐야.’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다시 한번 들려온 목소리. 여전히 주인을 찾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사실상 무시해도 별 상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불길해.’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이성은 당연히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말을 무시해야 한다고 그래야 네가 안전할 거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목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다. 굳이 스스로 위험을 향해 들어가는 싸구려 B급 공포 영화의 엑스트라 조연이라도 된 듯한 심정이었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으리라. ‘이 샌님은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기는 싫다. -그, 그, 그냥 궁금한 것 몇 가지 물어보려는 것뿐이에요. 적의 함정일 수도 있고, 이쪽의 계획을 알아챈 파란이 뭔가 수를 쓰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타 길드의 세력일지도 모른다. 당장 이 장소가 맨하튼 길드의 길드 하우스가 아닌 만큼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지만, 파란이 길드 하우스 내에서 나를 정리하겠다고 생각하는 건 터무니없는 상상이요, 비약이다. 이 목소리가 적이라고 해도 자신의 몸에 해가 생기지는 않을 거라 확신 할 수 있었다. -빨, 빨리 아, 안, 안 움직이면 싫은데…. “…….” ‘감에 따르자.’ 결국에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원하는 건 대화인 듯싶었으니까. “잠시….” “아. 예.” 괜스레 침을 삼키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식사 도중에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인상을 남기기는 싫지만 이미 김현성과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리라. 뭔가 커다란 성과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기본은 했으니까.’ 이런 건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해결하면 된다. 아직 시간은 많고 기회도 많다. 그것보다는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우선이다.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자 이윽고 목적지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문을 열기 무섭게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사실 익숙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제대로 얼굴을 마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정하얀.’ 파란의 촉망받는 대마법사. 상대적으로 이기영과 김현성에게 가려져 있기는 했지만 그녀 역시 온 길드가 주목하고 있는 인물들 중 하나. 교국 8좌급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대륙의 정상을 다투는 마법사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 이었다. 슬쩍 눈치를 보며 세면대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바로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와, 와줬구나. 다행이다.” “당신이었군요.” “아… 네. 가, 갑작스럽게 죄, 죄송해요. 그러니까. 너무 궁금해서….” “어떻게 마력으로 차단된 방벽을 뚫고 음성을 들을 수 있었나요? 그리고 제 머릿속으로 목소리를 전달한건 사념인 건가요? 아니면 고유 능력이나 특성 같은 종류의 마법인 건가요? 아니면 따로 주문을…. 아니, 그것보다 대체….” “설명하자면… 어, 어려운데…. 나,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일… 단은 내 질문이 머, 먼저니까. 그렇죠? 내가 먼저 지, 질문했잖아. 그렇지? 맞죠?” “아… 네. 그러니까 질문이….” “그… 소문 어디에서 들었냐고 물었어요.” “어떤….” “우리 오빠가 나쁜 사람들이랑 어울리고 있다는 소문이요.” “…….” “밤마다 나, 나쁜 여자들이랑 어울린다고요. 마, 막 술에 취해서 그렇다고 해, 했잖아요?” “글쎄요. 어디서 들었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얘 조금 이상한데? 병신인가?’ 정확히 뭐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약간 모자른 것 같다. ‘천재라고 하더니….’ 그 반대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일 지경이었다. 독감이라도 걸린 것처럼 몸은 파르르 떨고 있었고 눈은 충혈되어 있다. 피부는 이상할 정도로 새하얗게 질려있었고 입꼬리는 삐죽 튀어나와 있다. 계속해서 말을 더듬는 모습은 일종의 조현병이라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 가장 처음에 봤을 때부터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보니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게 확 전해져 온다. “거짓말일 수도 이, 있겠네요. 헛소문 같은 게 분명해.” ‘바보는 써먹기 쉬운데…. 이용할 수도 있으려나.’ “글쎄요. 길드 숙소에서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보면 영 설득력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까 하얀 씨는 명예추기경님과 무슨 관계….” “서, 서로 사, 사, 사, 사랑하는 사인데….” “용병여왕님이랑 사귀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 그 여자 이야기는 하지 말고요. 차… 차희라 진짜 싫어. 그보다 그… 소문 정확히 어디서 들었냐고요. 누가 봤어요? 누, 누가 들었대요?” “저도 들은 이야기라 자세히는 몰라요. 그래도 거의 확실하다고 봐요. 명예추기경님이 최근 어울리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질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서….” “거짓말하는 거… 아, 아니죠?”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어떤 여자들인지는 아, 알아요? 어디서 온 여자예요? 저, 전부 더러운 여자인가요? 그, 그렇겠지? 전부 다 더러운 여자일 거야.” “아뇨. 정확히는….” “뭘, 뭘, 뭘, 그렇게 모르는 게 많아요? 정, 정, 정말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나 거짓말하는 거 진짜 싫어하는데. 특히 이런 거짓말은 너무 싫은데….” “거짓말이 아닐….” 이라고 말을 내뱉었던 바로 그때였다. ‘어?’ 눈앞에 있는 정하얀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순간적으로 화장실 안이 어두컴컴해진 것은 물론 팔이 한쪽으로 날아간 듯한 느낌이다. 비명을 내지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배가 열리며 내장이 쏟아지고 사방에서 날아오는 바람의 칼날들이 온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한다. 그 어떤 전조도 없었다. ‘아, 아아아아아악!’ 근육이 찢어지고 피부가 뜯긴다. 몸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다져진 기분이 드는 것은 물론, 점점 더 고깃덩어리가 되어가는 것만 같다. ‘주… 죽여줘. 죽여.’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상상도 할 수 없는 만큼, 말로 제대로 표현할 수도 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움직여 봤지만 당연히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미친 여자는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단검으로 사방팔방을 찍어 내리기 시작했다. ‘제발 그만해…. 제발. 내가. 잘 못… 내가….’ 꿈에서 깨어나듯 토악질을 한 것은 그로부터 약 1분 정도가 지난 이후. “우웨에에에에에에에엑!” 검정색 풍경 대신 자리한 곳은 화장실 안. 피로 범벅이 되어 있던 아까와는 다르게 확실히 타일 바닥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살았어…. 사, 살았어.’ 몸을 매만져 보고, 팔을 만져본다. 방금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든 게 정상인지, 계속해서 넘어오려고 하는 토악질을 참아내며 필사적으로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뭘 본 거야. 방금 도대체 뭘 본 거지.’ 아까 전부터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의 연속. 방금 여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리가 덜덜덜 풀려온다. 저도 모르게 토악질을 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마치 실성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 덜덜 떨려 무어라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당연히 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지만 누가 이런 현상을 야기 시켰는지는 이해가 간다. “지금 확실히 말해요. 거, 거짓말은 아닌 거죠?”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것은 이미 오래. 이기영이나 김현성, 린델의 3대 길드나 파란이 가지고 있는 이권. 머릿속에 들어가 있던 계획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살기 위해서라면 생각하지 않아야 했다. 더 이상 다른 게 눈에 들어올 리 만무. 다소 농담처럼 흘린 거짓 소문, 그 거짓 소문이 진실이 되게 만드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래야 방금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네… 아, 아마도.” 빠져나갈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듯한 기분. 청렴결백의 상징인 교국의 명예추기경이 스스로 타락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 474 회귀자 사용설명서 474화 이간질(5) “최근 들어서 조금 노골적인 것 같지 않아요?” “누구?” “누구긴 누구예요. 그쪽 라인이죠, 뭐.” “아아. 걔네들. 뭐, 그쪽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괜찮겠어요?” “요즘 하는 짓 보면 귀엽기도 하고 그리고 그쪽에서도 굳이 극단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없거든. 우리보다 더 조심스러우면 조심스럽겠지. 꼬리 밟히면 망가지는 건 저쪽이니까.” “그럼 뭐, 무난하게 가고 있다고 봐도 되네요? 김현성, 이 사람만 빼면요.” “혀, 현성이도 나름 무난하기는 해.” “무난하기는요. 솔직히 오빠도 비슷한 생각 하고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떡고물을 던져봤자 별로 달라지지 않을 거. 아무리 파란 길드가 돈이 썩어 난다지만 무상으로 쉼터를 건설해 준다는 건 제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거든요. 연주 언니가 돕고 싶다고 말했을 때 얼마나 뜯어 말렸는지 아마 상상도 못 할 걸요. 검은 백조가 파란처럼 낭낭한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최근에 벌려놓은 사업도 많은데….” “…….” “대외적인 이미지를 노리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솔직히 파란 길드 같은 경우에는 더 이상 쌓아올릴 이미지도 없잖아요. 정말로 이런 복지가 훈련의 질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경기도 오산이라고 말해주고 싶다니까요. 몇몇 집단은 호구 잡았다고 좋아할 게 뻔하니까. 뭐, 다른 말 할 필요도 없지.” “그래도, 실제로 꽤 잘해주고 있는 얘들도 있잖아. 효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 물론 미비하지만.” “실드 쳐주는 거 진짜 웃긴 거 알아요? 아무리 그래도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간 시간이 벌써 며칠 째인데… 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 ‘아니….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지혜야.’ 애써 김현성을 두둔하기는 했지만 이지혜와 비슷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남아서 이런 식으로 고쳐나가려는 건지는 몰라도 답답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그동안 김현성이 고군분투하기는 했다. 침체되어 있는 합동 훈련의 분위기를 끌어올리고자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것이다. 균열랜드에서 쓰고 남은 양산형 자제들로 숙소를 세워주는 것은 물론 부식이나 보급품들 역시 길드의 이름으로 지원한 상황. 훈련 외의 것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 효과가 미비할 거라는 건 안 봐도 뻔한 이야기다. 애초에 할 의지가 있는 인간들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나태해질 대로 나태해진 인원들은 김현성의 솔루션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본인이 열심히 하면 뭐가 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김현성의 하루 일과는 더욱 바빠졌다. 훈련과 업무로 빠듯한 일정에 타 길드와 클랜에게 검을 가르쳐 주는 시간이 추가됐고, 그것은 새벽 늦게까지 이어졌다. 내 눈으로 확인한 녀석의 눈은 조금 짠해 보였을 정도. 하지만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규모 인원으로 시작했던 김현성의 검술 수업은 점점 더 인원을 늘려나가기 시작했고 열의 역시 넘쳐 보였으니까. 애초에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인물들을 데리고 하는 훈련이다 보니 성과가 없는 것이 이상하리라. 김현성의 가르침이 입소문을 타기도 했고…. 물론 그것 이상의 결과는 얻을 수 없었다. 몇몇의 권력자는 김현성이 재능 있는 모험가를 빼내려는 건 아닌지 의심했고 그 결과 의도적으로 연무장에 인원들을 내보내지 않는 길드가 늘어난 것이다. 자유 훈련마저 길드 단위로 막고 있으니 코미디 같은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정말로 열의가 있는 소수의 인원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가르침을 청하는 몇몇 개념 찬 길드뿐. 연무장에서 부는 작은 훈풍이 대륙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런 소년 만화 같은 일이 생길 리 만무하지 않은가. 시간이 흐를수록 전체적으로 나태해지기 시작했고 몇몇 집단은 예비군 훈련에 온 것 같은 행태마저 보이고 있다. 김현성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 입장에서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쯧….’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인원은 소수였지만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인원은 절대다수. 열혈과 근성, 노력으로 새로운 바람을 불어오는 이상향은 절대로 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 본인 역시 조금씩 이건 아니라는 걸 깨달아 가고 있을 터. ‘답답하겠지.’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려고 하는데도 움직이지 않은 이들이 있다. 심지어 린델 연합이나 파란과의 모의전이 시작되는 날이면 파티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빼기 일쑤. 파티원들이 다칠 것을 고려한 보이콧 아닌 보이콧이었다. 김빠지는 상황에 차희라 역시 ‘나도 안 할래. 우리 애들도 마찬가지고. 재미없네’라는 소리와 함께 텐션을 내렸고 엘레나와 이종족들도 형식적으로만 훈련에 참가하는 듯한 느낌으로 노선을 전향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갑자기 푹 가라앉았다는 건 굳이 훈련에 참가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는 거다. “그 와중에 적폐 놈들은 아직도 이간질이나 하고 있고요. 오빠에 비하면 적폐 같지도 않은 놈들인데. 귀엽게 보이겠어요?” ‘말이 너무 심하다, 지혜야.’ “아직도 적당히 받아주고 있어요?” “뭔가 써먹을 수 있는 구석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일단은 간보고 있는 거지. 뭐, 아직 그쪽에 합류한 인원이 몇 명인지도 정확하게 파악 못 했고. 현성이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다는 건 나를 그만큼 믿는다는 거겠지.” “믿음 하나는 대단하네요. 거의 매일 그러고 있는데도… 솔직히 요즘 오빠 생활 거의… 쓰레기 같잖아요.” “쓰레기 같은 짓을 했을지언정 쓸데없는 일은 없었으니까. 뭔가 또 열심히 머리 굴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할 거야.” “흐음…. 오빠.” “응?” “이거, 제가 한번 해결해 봐도 돼요?” “어떻게?” “글쎄요. 아직은 비밀. 솔직히 확신하지는 못 하겠는데 영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오빠는 그냥 평소대로만 지내면 돼요. 아니, 오히려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놈들이랑 놀아나면 될걸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긴 한데….’ 이지혜라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저렇게 본인이 나서는 경우에는 말이다.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조질 건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몇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를 찾아온 박덕구를 보고서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얘 진짜 귀신같네.’ “형님, 거… 파란 길드를 탈퇴할지도 모른다는 게 참이요?” ‘이거였구나.’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참인지 아닌지, 그것부터 말해주쇼.” “헛소문이야. 누가 그래?” “뭐, 어디에서부터 흘러들어온 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뭐, 그런 소리가 들려옵디다.” 어째서 이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나 자신이 조금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다. 당겨서 안 되면 밀어내 보면 된다. 생각보다 너무 쉬운 해결책이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 나는 김현성과 이 건에 관련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김현성이 지쳐 떨어지기를 바랐고 일단 기다려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효과야 있었겠지만 다소 답답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에 대한 이지혜의 솔루션은 무척 간단했다. ‘적폐 축제 여러분이 그리는 그림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면 된다는 거네.’ 간단히 말해 이간계에 걸려드는 척 하는 것으로 끝. 실제로 이기영이 파란과 김현성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흘린 것이다. 물론 김현성은 아직까지 파란을 찢어놓으려는 제3세력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내 쪽에서 뭔가 액션을 보여준다면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 볼 수도 있고,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조금 작위적이라는 생각도 해볼 가능성이 높다. 지금껏 이쪽이 만나고 있던 적폐 여러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는 거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조금 불안한 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시도는 해볼 만한 이야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몇몇 분위기를 흐리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 현성이가 환멸을 느껴야만 했고, 그 결과 뭔가 다른 해결책이 있어야 한다고 느껴야 했다. 물심양면으로 퍼주고 있는 집단에서 알고 보니 나와 자신을 찢어놓으려고 하고 있단다. 실제로 이쪽은 그 이간계에 영향을 받고 있고. 부처님도 폭발할 만한 상황이라는 거다. ‘아무리 현성이가 무골호인이라고 해도 이 꼴 보고도 가만히 있으면 호구지 호구.’ 최소한 이 시점에서 이것보다 더 설득력 있는 수단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몇 발 멀어지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김현성은 그 누구보다 이쪽을 아끼고 또 아끼고 있고….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파란에 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커다란 만큼 어떤 액션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게 참이요?” 하지만 대답은 애매하게. “아직까지 계약기간도 남아 있고 지금 당장 파란을 떠난다고 해도 갈 곳도 없는데, 뭐.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괜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덕구야.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훈련에 집중해야지.” “끄응….” “정확히 뭐라고 들었는데?” “뭐, 별건 아니요. 형님이 요즘 안 좋은 사람들이랑 어울리고 있다는 소문이랑… 그것 때문에 린델을 떠날 수도 있다고…. 현재 파란에 환멸을 느껴서 연방 쪽으로 이주할 수도 있다는 건데. 형님, 혹시 우리 형씨랑 싸우기라도 한 거 아니요?” “나이가 몇인데 싸우겠어.”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 뭔가 의견충돌이라든지 그런 게 있는 건 아닌지 묻는 거요.” “딱히 그런 건 없었는데.”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많이도 흘렸네.’ 박덕구에게 정체불명의 소문에 대해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지혜가 흘린 소문을 생각해 보면 정황상 그녀가 나와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뭔가 찜찜했던 것은 박덕구 이자식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는 것. ‘이게 정상적인 건가. 이 새낀 뭐야, 도대체.’ 보통 이런 종류의 소문을 흘릴 때는 조금씩, 조금씩 정보를 풀게 마련이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풀면 근원지가 들킬 염려도 있을뿐더러,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 당연하지만 이지혜가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했을 리 만무하다. 사방에서 천천히, 아주 느리게 퍼져나가도록 의도했을 거고 최소 며칠은 지나야 이 소문이 제대로 자리 잡도록 설계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 새끼는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거야? 직접 들은 거처럼.’ 가십에 민감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무슨 특성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혹시나 해서 슬그머니 마음의 눈을 발동시켜봤지만 역시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지혜가 바깥으로 나간 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혹시나 따로 정보 길드를 두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정보 전문 산하 길드라도 두고 있는 거 아니냐, 진짜?’ 우스갯소리에 불과했지만 지난 행적을 보면 그럴 듯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새끼도 가끔 회귀한 건 아닌지 의심 돼.’ # 475 회귀자 사용설명서 475화 이간질(6) 허공에 떠도는 소문을 스펀지처럼 흡수해 버린 박덕구와는 다르게 이지혜가 흘린 소문이 자리 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의도대로 느리지만 전체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박덕구의 입을 막아버린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다른 불순물이 끼어든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위에서 아래로 퍼지는 형태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형태. 발신지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소문은 훈련장이나 숙소에서 입으로 입으로 전해졌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간부급 모험가들의 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단순한 찌라시로 치부했던 사람들도 진상 조사에 들어간 것은 당연지사. 정보나 찌라시에 민감하지 않은 김현성의 귀에 들어가기까지는 며칠 걸리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박덕구 이 새끼는 진짜 뭐지.’ 이렇듯 이 찌라시가 자리 잡히는 걸 눈으로 목도한 이후에는 다시금 박덕구의 능력에 대해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 걸려야 취합할 수 있는 정보들을 몇 시간 만에 취합해 답을 내놓은 것이다. 파란의 정보부에서 일하게 하는 걸 심각하게 고심해 볼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 만무. 쓸데없는 소문만 수집할 것 같아 불안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상하게 감도 좋고….’ 2인분 이상은 충분히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간에 모든 상황이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 나에게도 그렇지만 합동 훈련장의 적폐 집단이 축배를 들었다는 것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루에도 손님이 수십 명씩 내 집무실을 들락날락거렸으니까. 물론 이유야 뻔했다. “이번 훈련이 끝나면 한번 와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마도왕국과 교국 사이에 조금 일이 있었지만 이제는 다 과거 아닙니까. 마법에 기초한 직군에게는 축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원 체계가 잘 잡혀 있습니다. 직접 보신다면 분명 놀라실 겁니다.” 라거나. “공화국의 총통께서 직접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명예추기경님. 자세한 내용은 밀봉되어 있기 때문에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원하는 걸 말씀해 주신다면 최대한 적극적으로 수용하시겠다는 뜻을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선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랫동안 공화국에 내려져 오는 보물로써….” 라거나. “북부는 조금 춥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나름 운치 있는 곳입니다. 단도진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나 이적을 생각하신다면 꼭 북부를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계약 조건은 원하시는 대로 작성하셔도 됩니다.” 따위의 말을 해오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생각보다 파급 효과가 큰데….’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이쪽이 직접적으로 이적 문제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발표하지도 않았음에도 수많은 권력자가 눈에 불을 켜고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이름만 들어본 대형 길드는 물론 아예 나라 단위로 제안을 해오다 보니 함께 오는 제안도 눈이 다 돌아갈 정도. 아직은 생각이 없다고 은근슬쩍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인사들은 믿지 않는 것 같은 눈치였다. 이미 이적은 확정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물론 내 몸값이 괜찮고 인기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공화국 총통, 연방 지도자 연합, 심지어 왕국 연합의 왕족은 혼인 카드를 내밀며 부마가 되어 달라 종용하고 있었다. ‘빛기영 위상이 크기는 커.’ 그동안 대륙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한 과거를 떠올려 보면 납득이 가기는 했지만 기분이 좋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소문이 잘 자리 잡혔다는 거겠지, 뭐.’ 그만큼 정보도 확실했으니까. 내 행동거지 자체도 정보의 힘을 실어줬을 것이다. 최근에는 아예 간이 길드 하우스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있었으니까. 정하얀을 보러 가거나 훈련준비를 제외하면 굳이 김현성과 마주치지도 않았다. 파란의 길드마스터 김현성과 교국의 명예추기경 이기영의 불화설이 날개를 단 것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갔다는 것 역시 설명할 필요 없는 이야기였다. 일이 이쯤 되니 녀석도 뭔가 이상함을 깨달은 모양. 대부분의 길드원들은 쉬쉬하고 있었지만 최근 길드의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김예리와 김창렬 같은 암살자 직군들은 아예 길드 하우스에서 보이지도 않았는데 아마…. ‘정보 캐고 있겠지 뭐.’ 이제야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느려….’ 애초에 파란 길드의 정보부 관리는 거의 내가 도맡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반박자도 아니라 한 박자 느린 움직임이 너무 아쉬웠다는 건 여담으로 남겨둘 이야기. 아무튼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김현성이 눈에 띄게 초조해한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는데 하루 일과를 끝낸 뒤 녀석에 대한 소식을 듣는 게 소소한 낙이었다. 그동안 내가 마음고생 했던 만큼 녀석도 마음고생을 했으면 하는 1차원적인 생각이었지만 괜스레 만끽하고 싶은 느낌이기는 했다. 오랜만에 녀석과의 관계에서 갑의 위치를 선점할 수 있는 기회. 물론 녀석이 나를 찾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이쪽에서 조금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기영 씨.” “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들어오셔도 됩니다, 현성 씨.” “그럼…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네.” ‘확실히 효과가 있기는 있네.’ 이렇게 헐레벌떡 뛰어오는 거 보면 왠지 모르겠지만 반성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그나마 최근에는 마음의 여유를 얻어 괜찮아지기는 했지만 그 전까지는 정체불명의 PTSD를 앓으며 스스로 나와 거리를 두었으니까. 자기 자신이 문제였다는 걸 비치렐라에게 고백했지만 녀석은 내게 이것과 관련해서 직접 상담한 적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기영의 입장에서는 왜 갑자기 김현성이 묘하게 거리를 뒀던 걸까, 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었다는 거다. 물론 지금은 여러 선물 공세를 하며 미안함을 표현하고 있었지만 아주 친근했던 예전을 떠올려 보면 아직도 몇 발 떨어진 느낌. 충분히 친근하기는 했지만 녀석 스스로가 기묘한 거리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있을 때 잘해야 한다고 했던가. ‘그 말이 딱 맞지.’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은 없었지만 아마 김현성은 그 누구보다 그 감정을 잘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균열 박물관 전까지는 이쪽이 똥줄이 타는 상황이었다면 현재는 김현성이 그때의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이제 막 밀린 업무를 끝낸 참입니다. 조금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군요. 서로 바쁘다 보니까요.” “네. 아무래도 서로 바쁘다 보니…. 오늘도 나가시는 겁니까?” “네.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아직 만나보지 못한 분들이 계셔서요. 연방의 게르한 님께서 다른 분들을 소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조금 피곤하기는 하지만… 괜찮은 인맥을 만들 수 있는 기회니까요. 게르한 님 말입니다만….” “네….” “아무래도 연방에서는 꽤나 큰 손이신 것 같더군요. 인맥도 상당히 넓고, 관련 사업도 걸치고 있는 게 많아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왠지 모르게 침울한 표정. ‘어디까지 닿았나.’ 조금은 궁금했다. ‘찌라시가 돌고 있는 건 이미 눈치챘고.’ 이건 너무 쉬우니까. 당장 전 대륙의 유력자들이 이쪽의 집무실을 들락날락거리는 상황에서 이것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김현성에게 실망할 것이다. ‘제3세력이 있다는 것도 눈치챘어?’ 김예리나 김창렬이라면 지금쯤 물어왔을 것이다. 아마 그것 때문에 김현성이 여기에 왔을 가능성도 있고… 심증은 있지만 제대로 된 증거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자료만 쌓인 타이밍이겠지. 대충 일을 처리하는 속도를 생각해 보면 딱 그 정도 시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없으니 조금은 더 느렸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지만, 예리와 창렬이가 그렇게 무능하지는 않다. 천천히 김현성을 바라보자 무언가 똥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 것이 시야에 비친다. 대화에 서툰 녀석인 만큼 어떻게 먼저 말을 거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리라. 파란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인지. 게르한이라는 자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최근에 어째서 그렇게 자신을 피한 건지, 파란과 자신에게 섭섭한 점이 있는지, 혹시 파란을 찢으려는 제3세력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말이다. “기영 씨.” “네.” “그….” “네.” “최근에….” “네.” “그러니까.” “네….” ‘시바. 답답하네.’ 너무 답답하다. 차라리 내가 먼저 운을 띄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막 말을 내뱉으려고 한 찰나 김현성이 입을 열어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최근에 이상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서… 말입니다만.” “아… 예. 무슨 소문인지.” “혹시… 그 파란이나 저에게 섭섭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이것부터 물어오는구나.’ 굉장히 어렵게 입을 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케일리 예일, 게르한이나 자밀라에 대한 건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심증은 있는데 확실한 물증은 없는 거겠지, 뭐.’ 만약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더라면 조금 더 급진적으로 달려들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인성 참 좋기도 하다. 옆에서 이간질을 하고 있는 놈들이 있다고 한들, 1차적인 문제를 자신에게 찾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버림받기 직전의 강아지 같은 표정에 괜스레 가슴이 찡해진 것은 당연한 일.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딱히 크게 문제되는 건 없습니다. 파란과 현성 씨에게는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전부 현성 씨 덕택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날, 튜토리얼 던전에서 현성 씨가 저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멘트 지렸고요.’ 왠지 모르게 마지막 인사를 꽂는 듯한 플래그. 녀석의 얼굴에 불안감이 휩싸였다. “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기영 씨에게는 감사할 일뿐이라… 그렇게 말씀하시면 오히려 제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으니까요. 연금술사를 추천해 주신 것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재능이 없는 저를 거둬주시고 끝까지 믿어주신 것에 너무 감사드립니다.” ‘표정 봐라. 현성아….’ 아직 뭐라고 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이적 플래그를 쌓고 있는 상황. 이미 슬픈 예감을 직감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무척이나 다급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이, 이적 준비를 하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 여러 길드마스터와 왕래가 잦으신 것도 알고 있고요.” “아….” “…….” “…….” “네.” “크게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만.” “아….” “역시 헛소문이었군요. 조금….” “아뇨. 사실….” “네?” “사실 완전히 헛소문이라고 하기에는 힘이 드는 부분도 있습니다. 물론 아직 이렇다 저렇다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만 최근에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 사실이라….” “네?”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있는 단계에 있습니다.” “네?” ‘이 새끼 얼굴 왜 이래.’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 476 회귀자 사용설명서 476화 니가 한 거 아니지?(1) ‘이런 얼굴은 처음 보는데.’ 평소 녀석을 생각해 보면 파격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순간적이지만 자신의 감정을 다 숨기지 못했던 모양. 저도 모르게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는 모습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가장 어울리는 말은 하늘이 무너졌다는 표현. 나라라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얼굴은 복잡해 보이다 못해 충격 받은 느낌을 들게 할 정도였다. 깜짝 놀란 것 같기도 했고, 슬퍼 보이기도 한다. 온갖 감정이 들어선 얼굴은 금방 본래대로 돌아왔지만 아직 당황했음이 남아 있다. 설마 일이 이렇게 돌아가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리라.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소문을 듣기는 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만큼 녀석과 나 사이에 유대감이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실제로 내가 린델과 파란에 가지고 있는 애착을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당연하다. 갑작스레 이적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들, 그다지 실감나지 않았을 거라는 거다. 주변 환경이 바뀌고 있는 와중에도 찌라시로 치부했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걸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헛소문이겠지.’ 혹은. ‘그럴 리가 없어.’ 정도로. 한데 그 소문이 사실이 되어버렸다. 열심히 일만 하던 바깥양반이 지치고 외로웠던 안사람에게 갑작스러운 이혼 통보를 받은 얼굴이라 할 만했다. ‘그러니까 수신제가치국평천하 했어야지, 현성아.’ 애써 침착한 척 하며 나를 바라보는 김현성이 다시금 입을 열어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단계에 있으시다는 건 무슨 뜻인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알려드리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아직 제대로 결정한 것도 아니니까요. 조금 더 명확해지면 넌지시 말을 꺼내려 했습니다만 이렇게 먼저 물어 오시니… 저도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먼저 말씀드리는 게 조금 더 좋을 것 같군요. 후임자도 정해야 하고 인수인계 과정도 거쳐야 하니… 오히려 조금 적절한 타이밍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 “…….” “그, 그건….” “너무 갑작스럽게 말씀드려서 죄송할 뿐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사실은 몇 달 전부터 해왔던 생각입니다.” ‘정확히는 네가 나를 피하기 시작했던 날부터야, 현성아.’ “…….” “다른 환경에서 새롭게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이런 말씀 드리기 조금 민망합니다만 지금의 파란 길드는 제가 없어도 충분히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터라, 기왕이면 조금 더 제가 필요한 곳에서 움직이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파란 길드는 성장 중이고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현성이 많이 당황했구나. 머릿속이 복잡한 게 눈에 보인다. 말리고 싶기는 한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판단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원래 화술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하던 녀석이다 보니 매즈기라도 쳐 맞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본인이 자각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하얀처럼 말을 더듬는 것은 물론 손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눈동자도 요리조리 굴리고 있었고… 하도 적응이 안 되는 모습이다 보니 녀석의 얼굴이 낯설다. “아직. 아직은 시기상조가 아닌 듯싶습니다. 물론 기영 씨의 생각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 “호, 혹시라도 제게 뭔가 섭섭한 게 있으시다면….” 그래도 눈치가 없지는 않다. 갑작스레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 내부적인 파악에 들어가고 있는 모양인 것 같았다. ‘찔리는 게 좀 있기는 있겠지.’ 대표적으로는 슬슬 나를 피해왔던 지난날의 잘못된 과거가 떠오르고 있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내가 그런 이유에 대해 이것저것 입을 열 리 만무했다. 애초에 조금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딱히 그런 건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현성 씨에게는 감사함뿐이라….” “그래도… 혹시라도 캥기시는 게 있으시다면 곧바로 말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불편해하시는 게 어떤 일이든 간에 최대한, 아니, 무조건 수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아직 뭐 하나 확실하게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말씀을 드렸지만 다시금 파란에 남을 가능성도 높고요.” ‘그래도 마음이 떠났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겠지, 뭐.’ 이미 그렇게 행동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으시다면… 최대한 조건을 맞춰 드리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하시는 일에 비해 연봉도 많이 부족하신 것 같고… 그동안 휴가다운 휴가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필요한 것은 전부 길드에서, 아니, 제가 따로 준비해 드릴 테니 안정을 취하신 이후에 다시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뇨. 딱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직 파란은 기영 씨를 필요로 합니다. 아니, 사실 파란보다도 제가 기영 씨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오해의 소지가 넘치는 발언은 자제해라, 현성아.’ “일단은 제가 길드마스터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저 혼자 이 길드를 성장시켰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영 씨 역시 파란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이런 말씀을 하시니 솔직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파란에서 운영하고 있는 포션 사업과 균열 박물관 사업은 계속해서 이어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릴 테니까요. 아마 수입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없을 겁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제가 남겨놓은 것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최대한 맞춰 드리겠습니다. 제가 없어도 문제될 여지가 없게요. 파란 멤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득이 조금 어렵겠지만 하얀이나 엘레나도 계속 파란에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조치를….” “아니, 겨우 그런 걸 걱정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이거 재밌네. 진작 좀 할 걸 그랬다, 야.’ “정말 그런 걸 걱정해서 그런 게 아니라… 사실 파란에서 벌이고 있는 사업은 유지해도 없어져도 그만입니다. 제가 걱정하고 있는 건 고작 그런 게 아닙니다.” ‘왜 진작 안 했을까. 시바….’ “아! 호, 혹시 만약 이적하신다면 어느 쪽을 생각하시고 계신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럽지만 연방 쪽을….” ‘이건 답이 너무 뻔하지.’ “연방이라면.” “네. 게르한 님과 자밀라 님이 계신 연방 쪽으로 이적하는 걸 고려해 보고 있습니다. 정확히 어느 길드나 클랜으로 들어갈지는 아직 협의 중에 있습니다만 지역은 확실히 연방 쪽이 될 겁니다.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 아주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더군요.” 표정이 애매해진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은 가관. 이제야 머릿속으로 퍼즐이 맞춰지고 있는 것이리라. 본래 심증은 가지고 있었으니 이제야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거겠지. 어째서 린델과 교국을 사랑하는 이기영이 연방으로의 이적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 답을 찾은 것이다. 자신에게 문제를 찾으려고 했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외부에서 문제를 찾기 시작한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연방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지옥불의 게르한과 자밀라를 생각했을 게 틀림없었을 테고…. 지금쯤이라면 거의 확신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갑작스럽게 이적의사를 밝히고 있는 파란의 기둥. 중간에서 분탕치는 놈들. 간단히 생각해도 답이 나온다. 왠지 모르게 표정이 조금 서늘해진 느낌. 어떤 식으로 나올지 조금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세간의 소문과는 다르게 좋은 분들이더군요. 생각도 깊은 것 같고… 솔직히 수준 자체는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나 길드 운영에 많은 난항을 겪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은근슬쩍 도움을 요청하시는 걸 들어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렇군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 현성 씨와 함께하시는 카일리 예일 님께서도 연방 소속이 아닙니까?” ‘이거 참 우연이다, 현성아. 그렇지?’ “네. 아마도 그럴 겁니다.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최근에는 길드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만….”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으니 찾아오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연방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셨겠군요. 사실 교국 입장에서도 가장 덜 알려진 곳이 연방이라… 여러 가지로 신기한 것도 많고 얻을 수 있는 것도 많은 것 같았습니다. 특히나 아직 공략되지 않은 던전이 많다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물론 전설 등급과 영웅 등급의 던전은 현재 막혔습니다만…. 아무튼 이렇게 오랜만에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현성 씨. 실례지만 슬슬 밖으로 나갈 때가 돼서….” “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시간을….”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즐거운 시간이기도 해서. 아!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조금 더 확실해 질 때까지는 길드원이나 외부에는 비밀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중요한 훈련을 앞두고 있기도 하고 이런 상황에 괜한 혼란을 드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현성 씨도 잘 아시다시피 은근히 정신적으로 약한 애들이니까요.” “…….” “특히나 덕구나 하얀이에게는 말씀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네.” “그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네. 그럼.” ‘현성아. 조금 가슴 아프긴 하지만 이게 다 널 위해서 그런 거야.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본다.’ 슬그머니 시원섭섭하다는 표정을 보이면서 마무리. 고민하고 있는 속내를 전부 고백했다는 뜻을 내비친다. 표정 연기까지 완벽하다고 할 만했다. 마치 작별인사를 고하는 것처럼 김현성을 슬쩍 스쳐 지나갔지만 녀석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마 내가 바깥으로 나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일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 분명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로 절박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미 하고 있는 연방 쪽에 대한 조사를 계속해서 진행하는 것은 물론, 이쪽을 잡아두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고민해 볼 것이 분명했다. 제3세력이 이간계를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정 지었을 때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서도 궁금하고. 혹시나 미련 없이 떠나라고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절박해 보이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그런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김현성은 절대로 이쪽을 떠나보낼 생각이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으려고 할 것 같은 느낌. 연봉 협상 카드와 휴가 카드 이후에 나올 카드가 뭔지 궁금했고, 전체적으로 조금 즐거워졌다. 밑밥을 전부 던져 놓은 것은 물론, 미끼까지 잘 던져 놓은 상황, 조용히 앉아서 즐겁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전과 달랐던 것은 그 기다림이 결코 길지 않을 거라는 것. 빠르면 오늘, 느리면 내일 중에 답을 들고 나타나게 되리라. 김현성 발등에 불똥이 떨어질 상황이었으니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닌가. 확률은 낮지만 자신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어필하며 남아 있을 것을 종용할 가능성도 크다. 무리수 같겠지만 가지고 있는 카드로는 확실하기도 하고 그럴듯한 명분도 생길 테니까. 상황은 나쁘지 않다. 정확히 28시간이 지난 이후에 들려온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부길드마스터….” “네.” “연방, 연방이….” “네?” “연방이 무너졌습니다. 정확한 정황이 어떻게 된 건지는 현재 파악 중에 있으며 들리는 소문으로는… 북서쪽 지역의 1/5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현재도 계속해서 피해가 누적되고 있다고… 국가로서의 기능은 회복할 수 없다고 하, 합니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참신한 개소리. ‘현성아… 시바… 이거 니가 한 거 아니지?’ 당장 찾아가 묻고 싶을 정도였다. # 477 회귀자 사용설명서 477화 니가 한 거 아니지?(2) 한밤중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속으로 내심 기분이 좋았다. 괜스레 감성이 풍부해지는 새벽 3시. 김현성이 고해성사를 위해 찾아온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계속되는 밀당에 김현성은 이미 한계를 맞이한 지 오래. 제대로 된 업무도 보지 못할 정도로 피폐해졌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더욱더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진행하고 있던 김현성 교실도 문을 닫았고 모의전에도 불참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어젯밤에는 술에 잔뜩 취해 잠에 들었단다. 결국에는 참지 못해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딱히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거다. ‘하아. 술 취해서 찾아온 거면 불편한데….’ 그러나 생각과는 반대로 입꼬리가 올라간 것은 당연지사. 반가운 마음에 굳게 닫힌 문을 열었지만 김현성 대신 보인 것은 조노보노. 진심 어린 고백 대신 황당한 소식을 들을 거라곤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부길드마스터….” “네.” “연방, 연방이….” “네?” “연방이 무너졌습니다. 정확한 정황은 현재 파악 중에 있으며 들리는 소문으로는 북서쪽 지역의 1/5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계속해서 피해가 누적되었다고…. 국가로서의 기능 회복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합니다.” ‘무슨 개소리야.’ 갑자기 왜. 가장 먼저 생각이 났던 사람은 당연 김현성. 슬며시 소름이 돋았지만 녀석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곤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지.’ 타이밍이 조금 묘하지만 김현성을 이번 일의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떻게 봐도 무리가 있다. 슬슬 이쪽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던 시기. 확실히 달라지기는 달라졌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내 얼굴에서 불신이라도 봤는지 조노보노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일단 모시겠습니다.” ‘이거 몰카 아냐?’ 혹시나 김현성이 나를 붙잡기 위한 회심의 파티를 준비한 것은 아닌지의심해 볼 정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몰카일 거라고 행복회로를 돌렸지만 무거운 표정을 하고 있는 몇몇 얼굴을 본 이후에는 행복회로가 모두 불타버린 상황. 회의실에 들어서고 똥이라도 씹어 먹은 것 같은 지도부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각한데….’ 병사들과 비서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닌다.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들의 얼굴에 당혹감과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위협을 대비하기 위한 훈련이었지만 실제상황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 특히나 연방의 지도자들은 다른 지역에 있는 이들보다 더 극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명예추기경님.” “아… 게르한 님.”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혹시 뭔가 알고 계신 게 있으십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니네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이 새끼야.’ “저도 막 소식을 듣고 온 참입니다. 연방에서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습니까?” “정확하진 않지만 약 2시 즈음에 연락이 끊긴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 저도 보좌관에게 들은 이야기라.” “따로 브리핑은 없었습니까?” “네. 아직까지 공식적인 브리핑은…. 아마 곧 시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일단은….” 녀석이 막 입을 벌린 차.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 기영 씨.” “파란 길드마스터. 이거 오랜만이로군요.” 게르한이 은근슬쩍 반가운 척을 해봤지만 김현성은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조금 감정적이 됐다고 한들, 김현성답지 않은 행동이라 느낀 것은 당연지사. 눈인사라도 할 거라 알았건만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얘 왜 이래.’ 그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했던 녀석이었다. 조금 의아했지만 그 이유를 알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술 냄새.’ 지독한 술 냄새가 올라온 것이다. ‘얼마나 마신 거야?’ 김현성 정도의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저렇게 취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고 보니 겉모습 역시 엉망. 항상 말끔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녀석이었건만 지나치게 초췌해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와 정돈되지 않은 모습조차 잘생겨 보이는 게 조금 불공평하지만 일단은 녀석을 자리에 앉혔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순간 미쳐서 검을 날리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의 상태였으니까. ‘힘들기는 하겠네.’ 안 그래도 정신적으로 힘든 타이밍에 갑작스레 이런 커다란 사건까지 일어났으니 복장이 터질 것이다. 균열 박물관 때와 이번 훈련까지 본인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렸을 가능성도 높다. 그나마 중간중간 충분한 휴식시간을 가졌기에 망정이지 그것마저 없었더라면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금 기분이 나빠 보이는 게르한의 등을 슬그머니 두드린 이후에 김현성과 함께 자리에 앉자 곧바로 연방의 관계자가 브리핑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김현성이나 베니고어가 말한 위협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겠지.’ 지금까지의 일을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뭔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이번 일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이지만…. 김현성이 이번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도 될 것 같다. 지금 당장은 브리핑을 들어보는 게 먼저니까. “일단 이른 새벽에 모여주신 분들께 감사와 사과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따위의 말로 시동을 거는 건 어느 나라에서나 똑같은 모양. 본격적인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일단 최초 보고를 받은 시각은 12시 34분이었습니다. 연방의 수석마법사가 11시경 거대한 마력의 유동을 감지했고 대지가 크게 떨린 뒤 완전한 암전 상태가 되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사고가 일어난 지역은 대도시 아메라이며 해당 지역의 연방 시민들은 11시 43분 즈음 대피를 시작해 2시 32분쯤, 일부 시민과 모험가를 제외하고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 “해당 지역을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은 지하의 마련된 대피소에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며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조사 중에 있습니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는 보고와 지속적으로 거대한 소리가 들린다는 게 현재 파악된 정황입니다.” ‘단서가 시발 너무 적잖아.’ 대도시 아메라. 연방의 중심. 미국인들이 소환되는 튜토리얼 던전이 있는 장소였고 연방 경제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규모 있는 도시다. 웬만한 소국만 하다 보니 생산시설을 비롯한 여러 중요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 연방 내에서 아메라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그런 것치고는 대응이 너무 느린데.’ 그나마 신속하게 시민들을 대피시켰다는 건 잘했지만. 11시경에 터진 걸 12시 34분에 보고 받았다는 건 조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려 1시간 34분이 지체된 상황. 카일리 예일과 게르한 같은 놈들은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한 것이 당연하다. 그 마법사 여자가 뭘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게르한은 아마 헛짓거리를 하고 있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현재 아메라로 진입한 조사단은 귀환하지 못하는 상태에 처했으며 그리폰이나 다른 수단으로도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대지가 떨리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주변 타 도시에서도 피난 작전이 진행 중이나 숲에 있는 몬스터들이 흥분한 상황이라 그마저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흐음.” “연방의 수석 마법사가 계속해서 단서를 파악하고 있지만 아메라 근처에 있는 마력의 파장이 흩어진 터라…. 수준이 높은 마법사들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는 여기까지며 유기적으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적당히 잘 버무렸네요.’ 뭔가 추론을 하고 싶어도 단서가 너무 적다. 연방 측에서 공개를 꺼리고 있을 가능성도 전혀 배재할 수 없는 만큼 일단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나와 김현성 사이를 찢으려고 한 장본인들이 아닌가. 뭔가 다른 뜻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갑자기 폭발이 일어났고 도시가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고 해도 기실 안쪽의 상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이 대륙 연합. 특히나 교국의 통수를 치기 위한 설계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앙큼한 거 보소…. 그래, 누가 뒤를 봐주고 있는 거야?’ 카일리 예일의 머리카락이 하얀색으로 변한 게 내 눈에 보이고 있었으니까. ‘마력 탈진 현상.’ 괜찮은 척 하고 있지만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 수준이 높은 마법으로 머리카락 색깔을 가려봤지만 마음의 눈에는 그녀의 하얀색 머리카락이 너무나도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된 연결점은 찾을 수 없었지만 갑작스레 고립된 아메라와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은 너무나도 수상했다. ‘생쇼를 한다. 생쇼를 해.’ “곧바로 병력을 마련해 고립되어 있는 시민들을 구출하는 게….” “아니죠. 일단은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입니다.” “너무 시간을 허비했다가는…. 일단 타 도시에 있는 연방민이라도 구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합니다. 아직은 적이 누구인지, 의도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지 않습니까.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어떨지….” “이럴 때를 대비해 모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일단 무슨 일이든 바로 대응할 수 있게 준비하는 것부터 시작하지요. 언제든지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 ‘이거는 일단 생색은 내자는 거고….’ 돌아가는 상황이 우습다. 연방소속이 아닌 이들은 슬금슬금 발을 빼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피해자인 연방은 어서 빨리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외치는 상황. 모인 의미가 무색해질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장 내 일이 아니라고 안심하는 쓰레기들도 이해할 수 있지만 지금 연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자기들이 관리하고 있는 지역에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지금 당장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말할 타이밍이었지만 그렇게 할 리가 만무하다. 카일리 예일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이상, 조금 더 천천히 상황을 지켜보며 시간을 끌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고립되어 있는 시민들이 있다고 한 들, 솔직히 내 알 바는 아니다. 아예 그것 역시 거짓일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고. ‘한 3일이면 되려나.’ 카일리 예일의 뒤를 캐 유리한 상황을 설계하기까지의 시간. 변수가 있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는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정하얀과 심지어 한소라의 머리카락까지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니네 시바 뭔 짓 한 거야….’ 분명히 마력 탈진 현상이었다. # 478 회귀자 사용설명서 478화 충실한 종(1) 갑작스러운 소집령에 모인 파란 길드원은 전부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 애들 역시 이 상황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금 다르지만 나 역시 혼란스러운 것은 마찬가지. 정하얀과 한소라의 모습을 확인한 이후에는 현 사태를 조금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먼 나라 이야기인 듯 바라보고 있었던 사건이 이제는 내 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옆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이 들려와 급하게 뛰어가 봤더니 알고 보니 우리 집 불이었단다. ‘뭔 짓을 한 거야. 도대체.’ 하나같이 하얀색 머리를 한 채 쪼르르 앉아 있는 모습은 가관.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얼굴이 좀 나았지만 한소라는 식중독이라도 걸린 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가 봐도 마력 탈진 현상이다. 백발이 된 것으로 모자라 피부까지 벗겨지고 있는 걸 보면 마력을 한계까지 뽑아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생명력까지 퍼부어 버린 모양. 아마 다른 이들도 저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틀림없이 휴식을 권했을 것이다. 아니, 저렇게 나오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당장에라도 피를 토하며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으니까. 정하얀도 안 좋아 보이긴 하지만 마력 회복 속도가 비상식적으로 빠르다 보니 별다른 타격이 없는 것 같은 느낌. 전설 등급의 특성 대마법사의 심장의 효과였다. ‘단순히 마법을 떨어뜨린 게 아닌 거구나.’ 브리핑을 받았을 때부터 마법 한 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한소라까지 마력 탈진 현상을 겪는 것을 보면… 저 파티가 연방에 뿌린 건 단순한 운석이 아니다. ‘언데드?’ 심할 경우 악마를 소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아메라가 완전히 박살 나버린 만큼 72악마 군주가 소환되었을 확률이 높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90대 마력을 가지고 있는 카일리 예일도 함께였고 무엇보다 그녀가 정하얀 파티에 합류했다면 아마 여러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벨리알인지 뭔지 알 수 없지만 연방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기세로 일을 벌인 느낌이었다. ‘너 왜 그런 거야, 진짜….’ 생각보다 캥기는 게 많다. 이전에 ‘너무 평화로운데’라고 중얼거린 걸 정하얀이 들어버린 것도 의심이 가고…. 매일 밤 회식을 핑계로 자밀라와 놀아났던 것도 마음에 걸린다. 필요 이상의 스킨십을 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쓰레기 짓이라면 쓰레기 짓이라 분류할 수도 있다. 물론 대국적인 이유가 있긴 하다. 하지만 약혼자를 내팽개치고 놀러 다닌 놈이라는 쓰레기 타이틀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아니면 어제 한 이야기를 훔쳐 들었나?’ 지난 밤 김현성과 나눴던 대화 역시 의심이 가기는 마찬가지. 수단은 알 수 없지만 정하얀이 내가 연방으로 이적한다는 이야기를 훔쳐 들었고, 정신이 출타해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게 그나마 개연성에 맞는다. 어째서 카일리 예일과 연대했는지, 어째서 그렇게 빠르게 극대노 상태로 진입했는지는 아직 애매한 부분이 많았지만…. 오밀조밀한 퍼즐은 이후에 찾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이상하다고는 했지, 시바.’ 카일리 예일에게 걸린 마법이 심상치 않았다는 걸 확인할 때부터 뭔가 싸한 느낌이 있었다. 배후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배후가 정하얀일 거라고는 정말 꿈에도 몰랐다. 물론 아직까지 정하얀이 이번 일의 범인이라고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봤을 때는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 적어도 김현성이 빡쳐서 일을 벌였다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얘는 진짜 이번 기회에 단단히 잡아야겠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더 큰 일을 치루기 전에 무조건 잡아 놔야 했다. 지금은 그나마 상황이 좋았지만 위협이 터진 이후 정하얀까지 추가된다면 솔직히 수습할 자신이 없다. 아무튼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파악하는 것. 그리고. 우리 길드 측의 세 명이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 ‘차라리 잘됐어. 시바…. 차라리 잘된 거야.’ 애써 행복회로를 돌려보자면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뜻 보면 막장으로 보이지만 현 사건은 느슨해진 대륙 연합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어차피 연방 놈들은 일이 끝난 뒤에 팽할 생각이었고.’ ‘설마 뭔가 일이 터지겠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대륙을 통치하는 지도자들의 생각. 무언가 실제로 터졌으니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리라. 정하얀 무리가 아니었다면 나라도 뭔가 터트리려고 했었던 타이밍. 백번 양보해서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내가 할 일을 대신 처리해 준 셈이라는 거다. 문제는 이 버튼이 내가 누른 버튼이 아니라는 것. 일처리가 얼마나 깔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 조합이 작은 단서 하나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일을 해결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정하얀이 주도한 일이라면 더욱더. 연방의 카일리 예일이 저 정체불명의 파티에 합류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나마 촘촘히 일을 처리했을 거라는 작은 기대가 들지만 아주 만에 하나 이쪽에서 일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나오기라도 한다면 줄줄이 소시지 엮이듯 순식간에 올라오고 말 것이다. 라이오스에 마법을 떨어뜨렸다는 게 정하얀이었다는 것부터 한소라가 흑마법사였다는 것도. 나아가 그걸 은폐한 게 교국의 명예추기경이었다는 것까지. 똥줄이 타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리라. 적어도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일을 벌였는지, 증거는 없는지, 다른 사람보다 한발 앞서가야만 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카일리 예일에게 전부 뒤집어 씌워 버리는 그림도 아름답지 않을까 싶지만. 그것도 내가 이 모든 사건을 알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증거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뒤처리도 직접 해야 돼.’ 조금 어수선한 가운데 이제 막 김현성이 브리핑을 끝낸 상황. 다시 한번 조혜진이 파티원들에게 추가사항을 전달하고 있었을 때, 은근슬쩍 녀석에게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현성 씨.” “네, 기영 씨.” “…혹시나 파란에서는 어떻게 대응 하실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사실 아직 확실히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고립되어 있는 연방민을 생각해 보면 당장 구조대를 보내야겠지만 일단은 정찰대를 보내야 한다는 게 지휘부의 판단이었으니까요. 무턱대고 들어가기에는 정보가 너무 적고… 쓸데없는 희생자를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네.” “조금 잔인한 생각이지만… 솔직히 저도 현 지휘부와 같은 생각입니다. 연방의 상황이 안 좋아지기는 했지만 애써 저희 쪽에서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제대로 된 정보를 모으고 완벽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볼 생각입니다.” 합리적인 판단이기는 하네.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정보가 모이기를 기다리는 것과 아직 외곽에 걸쳐 있는 타 도시의 연방민들의 피난을 돕는 일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 회의 내용도 그렇게 흘러갈 확률이 높고요.” 나였어도 녀석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연방에 정확히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는 만큼 일단은 정보를 모으는 게 최우선. 최소한의 인도적 조치로 연방민을 도울 수는 있겠지만 사건의 중심지로 들어가는 것은 무리다. 어떻게 봐도 합리적인 판단인데…. ‘이 새끼 이거 그냥 가기 싫은 건 아니겠지.’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이대로 확 연방이 망해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애초에 연방은 파란을 공중분해시키려고 했던 적대세력이고… 김현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손 안대고 코 푼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정적도 알아서 정리되고 있고… 이걸로 내 연방행이 완전히 무산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얘도 뭐 한 손 보탠 거 아니야?’ 동기 자체는 충분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 왠지 모르게 수상하지만 일단은 한숨을 내쉴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현 사태에 대한 녀석의 입장을 확실하게 파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현성은 이번 일에 소극적이다. 갑작스럽게 터진 상황. 지켜보자는 스탠드를 취하고 있다. 이러다 연방이 완전히 망할 때까지 지켜보지는 않을지 걱정되지만 괜한 영웅 심리에 휩싸여 궤멸적인 피해를 입는 것보다는 단단하게 뭉친 채로 돌진하는 게 백 배, 천 배는 나았으니 어떻게 봐도 옳은 판단. ‘나도 딱히 나쁜 건 아니네.’ 정하얀과 한소라가 일을 벌였다는 걸 굳이 알리고 싶을 리 없다. “피난민 지원 병력 편성이 최우선 이겠군요.” “연방의 몇몇 길드나 클랜은 이미 떠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원 요청도 받아들였고요. 일단 파란은 이쪽에서 대기할 생각인데 기영 씨는….” “저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아무래도 조금 걸리는 게 있는 터라.” “아… 그렇다면 같이.”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정말로 딱 주변만 둘러보고 올 생각이니까요. 하얀이와 함께 동행할 테니 크게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 “…….” ‘따라온다고 하지 마.’ 먼저 선수 치는 게 좋을 것 같다. “굳이 같이 오실 필요 없습니다. 파란에도 현장 지휘자가 꼭 필요하니까요.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처리해야 될 문제가 많습니다. 현성 씨가 가장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훈련에 손을 놓고 있었던 저보단 현성 씨가 현장에 남아 있는 게 좋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로 금방 다녀올 테니까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네. 알겠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풀이 죽은 느낌이다. 한사코 말리는 나를 보며 정말로 이기영이 파란에 마음이 떠난 건 아닌지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고. 뭐, 지금 당장은 녀석이 뭘 생각하든 상관없다. 잡생각을 떨치며 정하얀을 바라보는 것은 당연지사. 어마어마한 사고를 친 주범이자 현재 대륙 연합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버린 영웅은 그저 내 관심이 좋은 모양이다. 잠깐 움찔했지만 이윽고 얼굴이 환해지는 게 시야에 비쳤다. 이쪽이 뭔가 의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느낌. 단순히 나들이 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그래…. 슬슬 약발 떨어질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지금까지 잘 버텨줬다는 것에 감사한 심정이다. “가자, 하얀아.” “네, 네!” “잠깐 그리폰 타고 주변만 둘러보고 올 거야. 마력 홀로그램으로 볼 수 있게 전체적으로 담아올 건데. 괜찮지?” “무, 물, 물론이죠. 오빠. 헤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현성 씨.” “네. 알겠습니다.” 대놓고 물어보고 압박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는 게 좋을까. 고민했지만 아직 딱히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물론 방향은 있다. 정하얀의 문제는 물론, 김현성의 문제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다.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몇 가지 조건만 맞으면 너무나도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전제조건은 딱 두 개. 한소라와 정하얀이 연방에 뿌린 게 악마여야 했고. “…….” 그 악마가 거짓과 선동의 군주 벨리알이어야만 했다. # 479 회귀자 사용설명서 479화 충실한 종(2) “거, 나도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소?” “괜찮다. 멀리까지 가는 것도 아니고. 대충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오는 것뿐이니까. 말했잖아. 조금 이상한 점이 있는 것 같다고.” “끄응. 난 도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다녀오쇼.” “조심히 다녀오세요, 명예추기경님. 엘룬의 가호가 함께하길….”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레나 님.” 선희영, 박덕구, 엘레나를 비롯한 길드원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꽤나 지체되었다. ‘별거 아니야. 뭔가 조금 이상한 게 있어서 알아볼 것만 알아보고 바로 돌아올 거야.’ 라고 주장했지만 정보가 너무 부족한 탓인지 다들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물론 다 함께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다가올 빅 이벤트를 위해서라면 정하얀과 둘만 가는 게 나았다. 사실 꼭 벨리알이 소환됐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정하얀과 한소라가 악마 소환을 했다는 것도 아직 모르는 일이고 설사 72군주 소환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벨리알일 확률은 낮다. 하지만. ‘묘하게 익숙하단 말이야….’ 북서쪽에서 친근한 마력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는 내 생각이 맞다고 가정해도 될 것 같았다. 이래 봬도 벨리알과 한 번 가계약을 맺은 계약자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이런 종류의 감은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심지어는 귓가가 계속해서 울린다. 이쪽으로 계속해서 교신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무언가 방해전파가 계속 들어오는 느낌. 아마 무능력한 파산자 베니고어와 비정한 쓰레기 엘룬이 중간에서 훼방을 놓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보는 화이트폴을 툭툭 두드리며 등에 올라서자 정하얀이 배를 꽉 껴안았다. ‘시바. 숨 막혀. 하임리히 요법이야, 뭐야?’ 순간적으로 콜록거렸지만 손을 풀 생각은 없는 모양. 절대로 놓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집착증세가 도졌다고 느끼기도 했다. 물론 평소에도 달라붙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보통 이럴 때 그녀가 힘 조절을 잘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주변인들의 표정과는 상당히 대조적. 내가 다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물론 정하얀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연방이 지금 이 순간에도 박살 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기분이 나쁠 리가 없다. 만약에 정하얀이 나와 김현성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고 가정 한다면…. ‘더 그렇겠지, 뭐.’ 잠깐이었지만 머릿속에 있던 정보들을 정리하는 것은 당연지사. 연방의 카일리 예일이 그동안 김현성과 주구장창 붙어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니 어느 정도 이야깃거리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1차원적으로 풀어본다면 이렇다. 카일리 예일이 김현성, 혹은 정하얀 본인에게 최근 내 행실에 대한 이야기를 중얼거린 것이 1단계. 아마 여자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무조건 입에 담았을 거고 우리 하얀이는 그 말을 듣고 무언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거기서 카일리 예일이 엮였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네.’ 그동안 계속된 교육이 효과가 있었을 테니 여기까지는 무척 잘 참았을 터. 실제로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연방 놈들이 작업을 치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의 인내심이라고 할 만했다. 혼자 불안해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극노 상태를 유지했던 가운데 나와 김현성이 한 이야기를 들었을 테고 그 결과 버림받는다는 각이 날카롭게 섰다고 판단. 우소라 좌예일을 이끌고 연방 부수기를 실행했다는 게 사건의 전말이다. 물론 여러 가지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다. 일단 이 훈련장에서 연방까지의 거리가 꽤 멀다는 것. 28시간 안에 처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빠듯한 시간이다. 더군다나 여러 가지 술식과 마법진을 그려야 하는 시간까지 계산해 보면 시간은 더욱 필요하다. ‘이거 시바…. 그 전에 박덕구가 미리 입 털어 놓은 건 아니겠지?’ 가능성 자체를 배재하기에는 그동안 녀석이 해온 보트설계가 너무나도 명확하다. 또 형님이 무슨 여자한테 빠져서 연방으로 간다는 소식 어쩌고, 어떤 꽃뱀인지는 모르겠지만 형님을 유혹 어쩌고 지껄인다고 가정해 보면 너무나도 상황이 잘 들어맞는다. 급하게 연방을 부수고, 그 정체불명의 꽃뱀을 잡아 죽인다는 하얀스러운 계획이 완성되기까지 녀석의 지속적인 서포트가 있었을 것 같았다는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듯한데….’ 항상 그녀와 함께 행동하다 보니 이제는 정하얀의 행동 패턴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고 가정해 보니 조금이지만 오한이 느껴졌다. 확실히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이라고 느껴진 탓이다. 연방으로 이적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연방 부수기에 돌입하는 건 확실히 정상인의 사고방식은 아니다. 가지 말라고 설득을 할지언정 이적할 장소를 망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는 가정에 불과했지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내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 그, 그 소식 들으셨어요?” “뭘?” “아, 아, 아, 아메라에서 보이는 해, 해안가가… 와, 완전히 부서졌대요. 이, 이제는 거기서 무, 물놀이 같은 것도 못할 거래요.” ‘나도 못 들은 소식을 너는 어디서 들었어.’ 바다가 예쁘다 어쩌고저쩌고. 김현성에게 입을 털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아름답다고 소, 소문난 곳이어서… 꼭 오, 오빠랑 같이 가고 싶었는데 그, 그래도 바다는 교국에서도 많으니까. 가까운 라이오스도 있으니까요. 구, 굳이 연방에 갈 필요는 없죠오…. 그렇죠?” “그래….” “그, 그리고 소문보다 질도 안 좋은 곳이라고 그러더라고요. 모험가들도 다… 다 나쁜 사람들이고 연, 연방 여자들도 다 나쁘대요. 외부에서 온 사, 사람은 어떻게든 해보려고 막, 막 그런다는 거예요.” “그래….” “그래서 저, 절대로 연방 사람들은 믿으면 안 된다고 들었어요. 더, 더러운 여자도 많아서 나쁜 사람들이래요.” “누가 그래?” “아? 어? 어, 어디에서 주워들었어요.” 박덕구한테 들은 건 아니길 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상상하기 무서우니까. 아무튼 간에 정하얀은 밑도 끝도 없이 뒤에서 중얼거리는 중. 계속해서 시작하는 연방에 대한 비방은 내가 다 낯부끄러울 정도였다. ‘밥이 맛없다’부터 시작해서 몇 시간동안 끊임없이 떠드는 모습은 어딘가 필사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미 끝장난 연방에 대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안 좋은 인식까지 심어주는 것이리라. ‘나름대로 계획적이네.’ 다음 계획은 뭘지 궁금할 정도였다. 아마 정하얀이 계획하고 있는 연방 부수기의 끝은 완전한 연방의 침몰.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황폐화되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수도 있다. 정말로 아메라에 72군주가 들어서 있다고 가정해 보면 많이 잡아야 7일이나 10일 이내에 연방을 지도에서 지워 버릴 수도 있다. 물론 지난 번보다 계약 상태가 더 좋다고 가정한다면…. 더 빨리질 수도 있고. “이제 여, 연방은 가고 싶어도 못 가겠다. 그죠?” “그러네.” 마음 같아서는 다시는 안 본다고 으름장을 놓고 싶지만 그 효과가 오래 유지되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일을 벌인 데에 일말의 고마움이 있기는 하지만. ‘교훈은 받아야지.’ 이쪽의 판단 없이 자신 혼자 일을 벌인다면 그 결과가 비극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했다. 정하얀이 한 번 회귀 사건을 겪은 이후 절대로 나를 건드리지 않는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그런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거다. 일단 친절하게 대해주는 게 더 효과적인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나름대로 친절함을 담아 응대하다 보니 본인도 신이 났는지 목소리 톤이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폰 위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벌써 수 시간째. 한참이나 정하얀과 함께 친절하고 즐거운 수다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가까워졌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전체적인 광경을 보기 위해 마음의 눈에 마력을 한계까지 집어넣은 것은 순식간. 이후 어째서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었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안 보이네.’ 정확히 말하면 깜깜한 밤이다. 아메라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마음의 눈으로 확인했는데도 이 꼴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대낮처럼 느껴졌던 하늘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악마가 아니라 흑마법의 종류가 아닌지 의심될 정도. 심지어 그걸 보고 탄성을 내지르는 정하얀의 목소리는 가관이다. “크, 큰, 큰일이네요. 저, 정말로 재, 재기 불가능할 정도로… 보, 보이네요. 어떡하죠?” ‘입꼬리 좀 내리고 말해도 되는데. 그리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무슨 재기불능이야….’ “어,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될지 모, 모르겠다. 일단 마력 홀로그램에 담아갈까요?”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그래도… 하, 한 번쯤은 들려보고 싶었는데…. 저, 저기 불빛도 보여요. 작지만….” 외곽 도시 쪽에서는 아직도 일부 피난민들이 대피하고 있는 상황. 물론 저 지역도 어둡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사제들이 내뿜는 빛은 효과가 있는지 희미하게 보이기는 했다. 나 역시 슬쩍 신성력을 일으키자 대략적이지만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조금 그리폰이 안심한 것 같은 느낌. 아래로는 기존 연방 병사들이 잔뜩 흥분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아직까지 대륙 연합의 지원군은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열세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참지 못했는지 정찰을 위해 내려온 몇몇 인원이 몬스터를 몰아내고 있는 모습. 그럼에도 전체적으로는 제법 힘들어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개판이네. 개판이야.’ 슬그머니 주민들을 피난시키는 곳으로 내려가 곧바로 신성력을 사방으로 뻗자 주변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교국의 명예추기경이 왔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인지 내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솔직히 내 관심사는 저들의 구출이 아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가설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계속해서 머릿속을 울리는 진동은 틀림없이 총명하신 벨리알 님이 보내시는 신호일 터. “오, 오빠. 여, 여기 계속 계시다가는 조금 위험할 것 가, 같아요….” “사람들을 구해야지.” “그, 그래도요…. 잠깐 확인만 하고 돌아가신다고 했으니까. 이, 이만 다시 올라가요.” “못 본 척할 수는 없어. 일단은 조금만 더 둘러보자.” “그, 그렇지만.” 못 본 척으로는 달인급 텐션을 보여줄 수 있지만 일단은 계속해서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게 중요하다. 아까보다 회복했는지 검은색 머리카락이 몇 가닥 보이지만 아직는 마력 탈진 현상을 전부 회복하지 못하여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기껏해야 일반 등급, 희귀 등급, 높아봐야 영웅 등급의 몬스터들이다. 굳이 정하얀이 불안해할 이유가 없다. 마력의 폭발도 없고, 흑마법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맞네.’ 연방 쪽에 악마를 풀어놓았다고 생각해도 된 것이다. 그것도 계약자가 컨트롤할 수 없는 수준의 악마. 기실 확인할 필요도 없다. 이곳에 익숙해질수록 웅웅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었으니까. 완벽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끝까지 긴가민가했지만 역시나 이 익숙한 기운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의 것이 맞다.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이야! 역겨운 인간. 푸하하핫. 그 구역질나는 영혼은 여전하구나!] 거짓과 선동의 군주 벨리알이 다시 한번 현세에 소환된 것이다. ‘충실한 종이 진정한 만악의 지배자를 뵙습니다요! 벨리알 님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 480 회귀자 사용설명서 480화 벌은 받아야지(1) 비정한 엘룬 쓰레기와 무능력한 베니고어의 방해 전파를 뚫고 만난 벨리알의 목소리에 심신이 정화되는 느낌이 든 것은 당연지사. 사실 반신반의하기는 했다. 정하얀과 카일리 예일, 한소라 그리고 수많은 도움을 주신 것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도우미 여러분들이 아메라에 악마를 떨구어 놓았다고 한들, 그게 벨리알일 가능성은 희박했으니까. 애초에 벨리알이 소환된 이유가 이쪽 마력의 영향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가정이었지만 그때와 똑같은 환경을 구성하기 위해 정하얀이 무언가 손을 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게 유효했다. 이쪽의 마력을 빌려 가거나,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촉매를 가지고 가거나. 나야 그게 뭔지 알 수 없지만, 현재 중요한 것은 만악의 대군주이신 벨리알 님이 현세로 강림하셨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아직은 그 준엄하신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쪽이 현재 어디에 위치한지에 대해서는 파악하신 것 같았다. 말하자면 완전히 암흑 속에 휩싸여 있는 이 범위 자체가 지고한 벨리알 님의 영역이라는 것. ‘대단하긴 대단하네.’ 신화급 존재가 가진 힘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었지만, 확실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연방의 절반을 완전히 암흑으로 뒤덮은 모습은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게 될 정도. 심지어 현세에 완전히 강림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다. 베니고어가 강림했을 때 보여줬던 언데드 청소 역시 충분히 박수를 보낼 만했지만…. ‘역시 벨리알 님의 힘은 이 우매한 필멸자의 상정 범위를 완벽히 넘어서시고 계십니다. 만악의 지배자의 힘에 감복, 또 감복했습니다.’ [아부는 되었다고 항상 말하지 않았나. 정말로 오랜만이군… 오랜만이야.] ‘그동안 정말 너무나도 그리웠습니다. 벨리알 님.’ [나 역시 마찬가지다. 역겨운 인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게 우리 같은 이들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만, 네 구역질 나는 영혼은 내게 오랫동안 잊었던 감정을 되새기게 하더군. 무어라 예를 들어야 할지는 모르겠다만….] ‘은혜로우신 벨리알 님께서 부족한 종을 그리워 해주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광, 또 영광이옵니다.’ [그러니까 아부는….] ‘어디 계시는 겁니까. 벨리알 님. 온 천지를 뒤덮은 이 어둠의 기운은 이 필멸자가 얼마나 무기력하고 초라한 존재인지, 또 벨리알 님께서 얼마나 지고지순한 존재인지 깨닫게 만들지만, 벨리알 님의 위대한 모습을 볼 수가 없어 너무나도 가슴 아플 뿐이옵니다.’ [아부는….] ‘심해처럼 깊은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이 필멸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합니다요. 벨리알 님 목소리에 살살 녹는다. 살살 녹아!’ […… 항상 생각하기는 하지만 정말로 역겨운 인간이로구나. 네 목소리에서 한 치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아 더욱더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다. 다시 말하지만, 아부는 되었다. 너와 나 사이에 그런 불필요한 말들은 필요하지 않겠지. 무언가 필요한 게 있는 것 아닌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물론 필요한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 진심을 알아주시지 못하는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내 일찍이 지옥에서도 너같이 역겨운 아부를 들어본 적이 없다. 머릿속으로는 어떻게든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하면서도….] ‘오해이십니다. 벨리알님. 제가 어찌….’ [되었다. 어차피 너와 함께 일하면 내게도 득이 크니… 특히 저번 일에 대해서는 나 역시 내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지.] ‘도움 말씀입니까?’ [자세한 건 알 필요 없다.] 고 말했지만 어째서인지 대충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대륙인들에게 공포나 불안함 따위의 마이너스 감정을 뽑아낸 것이 도움된 것이 틀림없으리라. 마치 반대편의 신들이 신앙심을 먹고 사는 것처럼 악마 군주들 역시 마찬가지. 계약서로 실적을 올리기도 했으니 어쩌면 가지고 있는 순위나 권능 따위가 업그레이드됐을 수도 있었다. 지고지순한 만마의 지배자 벨리알 님께서 지난번보다 조금 더 커다란 힘을 낼 수 있게 된 것은 조금 더 치밀하게 소환을 준비한 소환자들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본신의 힘 자체가 상승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느껴졌다. [정답이다. 눈치 빠른 인간. 그럼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알 수 있겠군.] ‘아마 계약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수적인 것들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침 제가 원하는 게 벨리알 님꼐서 원하시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벨리알 님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나저나 계약은….’ [계약은 하지 않았다. 그 흑마법사 인간의 재능이 제법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네가 없이는 가계약을 하는 게 힘이 들기도 하고… 대충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아 고개만 끄덕였다고 보는 게 맞겠지. 덕분에 현세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짧아졌다만… 뭐 아쉬울 것은 없다.] ‘현세에 오랫동안 머무르는 게 좋지 않으시는 겁니까.’ [물론 즐겁기는 하다만, 이곳은 내게 일터와 같은 곳이다. 너무 오랫동안 있는 게 달가울 리가 없지. 쓸데없는 대화는 이제 되었다. 네가 원하는 것을 고해보라.] ‘큼…큼… 제 입으로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죄송스럽습니다만, 그 하해와 같은 목소리로 직접 원하는 것을 말하라 하시니 염치불구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재미있는 일이었으면 좋겠군.] ‘사실은 저번과 같습니다.’ [음?] ‘명확히 말씀드리옵건대 이번에 속여야 할 것은 개인이 아니라 대륙 전체입니다. 벨리알 님께서 만족하실 수 있으실지는 제가 확언을 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지난번 같은 즐거움을 느끼시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아직 모든 내용을 말씀드리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만….’ [또 어떤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군. 정말로 궁금해.] ‘아마 원하시는 실적 역시 충분히 얻어 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계약은 저번처럼 흑마법사를 통해야 하는 건지….’ [필요하지 않다. 직접 계약은 불가능하지만, 가계약 정도는 가능할 것 같으니. 멍청한 베니고어를 비롯한 신들이 대륙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양이더군. 만약 강경파들이 대륙에 현신했다면 아마 너희 인간들의 입장 역시 무척 난처했을 것이다.] ‘강경파라고 한다면….’ [이미 베니고어를 통해 대충 전해 들었겠지만, 이 대륙은 우리 같은 이들에게는 영업장이나 다름없다.] ‘영업장….’ [어디까지나 인간의 표현에서 적당한 예를 찾아온 것이다. 우리도, 그들도 이곳을 영업장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아. 하지만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신앙심을 통해 신성을 얻으며, 대륙을 관리하고, 우리는 여러 가지 감정과 계약을 통해 에너지를 얻지. 말하자면 영업장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강경파라고 부르는 악마들은 이 영업장이 멸망의 길을 걷게 하는 게 숙원인 자들이고.] ‘그, 그렇군요.’ [참으로 멍청한 생각이 아닐 수가 없다. 알아듣기 쉽게 표현하자면 이 대륙은 황금알을 낳는 닭이야. 강경파들은 그 닭의 배를 가르려고 하는 이들이고….] ‘우, 우매한 자들이로군요….’ 조금 불경한 생각이지만, 이들도 인간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 물론 조금 더 고차원적인 문제를 떠안고 있기는 할 것이다. 영업장이니, 황금알을 낳는 닭이니, 이쪽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결국 뜻은 같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얘네 입장에서도 조금은 스트레스 받겠네.’ 동업자가 영업장에 똥을 투척한 상황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악마 중에서 강경파와 온건파가 지향하는 바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1차원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금방 답이 나온다. 대륙의 관리. 마음속으로는 대륙을 아끼는 마음이든, 인간들을 아끼는 마음이든, 뭔가 있겠지만, 벨리알을 비롯한 일부 온건파 악마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속해서 실적을 올리는 것. 대륙이 망하는 꼴 따위를 보고 싶을 리 만무했다. 그 말씀대로 이곳은 신과 악마들의 일터였으니까. ‘대륙 파산 사건이 꼭 악마들에게 반가운 상황은 아니라는 거네.’ 강경파들에게는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하며 이것저것을 떠올리는 와중에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벨리알의 목소리가 아니다. 들려오는 것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하는 정하얀의 목소리. 왠지 모를 불안감을 감지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꼴은 가관이라 할 만했다. 가정하고 있던 것이 더 명확해지는 순간. 하계에 소환된 벨리알을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인제 그만 도, 돌아가요, 오빠.” ‘내가 왜 돌아가. 돌아가려면 너 혼자 돌아가. 하얀아.’ “뭐, 뭔가 느낌이 안 좋은 것 같아요… 빠, 빨리요오….” 약간 긴장한 채로 옷을 잡아 끌어당기고 모습.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게 보일 정도였다. 당연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정하얀은 그 누구보다 이곳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슬쩍 주변만 둘러보고 나갈 생각이었겠지만, 영문도 모르는 내 님은 계속해서 호랑이굴 속으로 들어가고 싶단다. 실제로 계속해서 위험한 장소를 제 발로 걸어가고 있으니, 답답한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슬그머니 정하얀을 바라보자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래… 고백 안 한다 이거지.’ “다, 다른 사람들도 걱정할 거예요. 그,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요. 안, 안 그래도 이제 곧 구조대가 오, 올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빠, 빨리 가자니까요.” ‘이게 어디서 눈을 부라려.’ “잠깐만….” “빨리 가야 돼요!!” ‘언니, 저 맘에 안 들죠.’ [마음에 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벨, 벨리알 님을 향해 생각한 것이 아니옵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단순한 장난일 뿐이니 그리 긴장할 필요도 없다. 그럼 이쯤에서 조금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은데….] ‘저 역시 마찬가지옵니다. 벨리알 님.’ [대충 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다만 정말 그렇게 진행해도 괜찮은 건가. 나야 상관없지만 멍청한 베니고어의 힘이 무뎌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는군.] ‘위대하신 분들의 영업장이 무너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확답은 드리기 어렵지만, 운이 좋다면 이번 기회에 대륙이 본래의 상태를 되찾을 수도 있습니다. 본래 인간들이라는 건 절박하면 절박해질수록 신을 찾게 마련입니다. 벨리알 님은 그 지고지순한 힘을 우매한 인간들에게 보여주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베니고어의 재림과 상징인 저를 이용하시는 게 아마… 편한 방법이 될 겁니다….’ [그 말은….] ‘부족한 종이 만마의 지배자에게 드리는 첫 번째 부탁이옵니다. 일단 이 자리에서 저를 납치해 주시지요.’ [푸… 푸흐흐… 정말로 구역질 나는 인간이군. 내가 의심스럽지 않은가? 너를 해할 수도 있다만….] ‘저와 벨리알 님의 사이가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너와 나 사이니까. 가능한 부탁이겠지. 푸… 흐흐… 그래. 한 번 더 네 장단에 어울려 주마.] ‘압도적 감사를 올리겠습니다. 감사. 또 압도적 감사! 너무나도 감사드리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준비하지.] 딱 거기까지였다. 숨도 쉬기 힘들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지기 시작. ‘뭐야. 시바….’ 당연하지만 나보다 더 당황한 것은 정하얀 쪽이다. 얼굴이 푸르죽죽해진 것은 물론, 땀으로 온몸이 축축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 “도, 도, 도망쳐요.” “뭐?” “빨… 빨리요.” “그게 도대체… 무슨….” “도… 도망치라고요!!! 빨리!!! 빨리 도망치라고!!!” 상황이 긴박해지기 시작했다. 정하얀에게는 조금 잔인한 시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단언컨대 필요한 시간이었다. # 481 회귀자 사용설명서 481화 벌은 받아야지(2) ‘도망치긴 뭘 도망쳐. 내 발로 기어들어 가도 모자랄 판에.’ 은근슬쩍 입꼬리가 올라가는 나와는 반대로 정하얀의 표정은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다. 현재 상황이 그 어떤 상황보다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이 분명. 당장 나만 해도 피부가 찌릿찌릿 울릴 정도였으니 그녀가 느낄 불안감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래저래 막장 짓을 일삼기는 해도 이쪽의 안위가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은 모양. 순간적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이게 공명의 함정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 기영아….’ 이번만큼은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정하얀이 뭔가 극적으로 변하는 것을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종류의 대형 사고를 계속해서 수습해 줄 수 있을 리 만무. 자그마한 것 정도야 웃으며 넘어갈 수 있었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이번 일은 그 수준을 넘어섰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쪽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내 손을 거쳤느냐, 거치지 않았느냐의 차이는 크다. 더 커다란 사고를 치기 전에 다시 한번 잡아줄 시점이 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하얀은 불안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중. “이, 이미 늦었어.” 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로 내리꽂혔다. “그게 무슨….” “떨, 떨어지지 마요. 절대로 떨어지면 안 돼요. 절대로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 나, 나중에 설명해 드, 드릴게요. 그러니까. 떨어지지 마요. 떨어지지 마세요.” 눈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은 당연지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사이로 흉측한 악마들이 모습은 드러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더 이상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는 게 도움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정하얀 역시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며 중얼거리는 중. 마침내 상상할 수 없는 적의가 온몸을 뒤엎었을 때 흉측한 악마들 사이로 한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급의 악마들이 홍해 갈라지듯 좌우로 갈라진 상황. 벨리알이 등장할 거로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절로 입이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체. 생김새가 일반적인 여성과 다르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라 할 수 있겠지만, 외모 자체는 아름답다고 말할 만했다. -흐음…. 천천히 좌우를 바라본 후, 거대한 지옥 사냥개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 무언가 다른 액션을 취한 것은 아니었지만, 존재 그 자체로도 압박감이 느껴진다. 새하얀 피부와 보라색의 눈. 몸을 가려주는 옷 대신 자리한 것은 꿈틀거리는 촉수. 심지어는 머리카락마저 뱀 같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얼굴 자체는 지고의 미인이라 할 만했지만 괴기스럽게 느껴지는 촉수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어우, 징그러워.’ 물론 그녀의 외관보다 더욱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쪽에 보내고 있는 적의 그 자체. ‘개 씨발…. 벨리알 관계자 맞으시죠?’ [준 신화 등급의 네임드 몬스터 리무르아의 상태창을 확인합니다.] [이름-리무르아] [칭호-27군단의 만인장, 서열 1,692위 악마 군주, 벨리알의 충성스러운 사도] [나이-666] [성향-충성스러운 이기주의자] [분류-악마] [능력치] [제한이 걸려 있어 능력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현세에 소환된 페널티로 능력치가 소폭 하락한 상태입니다.] 스텟과 특성 따위의 것들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사실 정확한 능력치를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느껴진다. 준 신화 등급으로 분류할 수 있는 네임드 몬스터. 그것만으로도 저 여자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가늠할 수 있었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27군단의 만인장 ‘리무르아’라고 합니다. “…….” -어디에선가…. 어디에선가 추악하고, 구역질 나는 빛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로군요. 베니고어에게 선택받은 인간을 보게 될 줄이야. 현세로 강림한 이후에 곧바로 이런 기분 좋은 상황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슬그머니 이쪽을 바라보며 눈빛을 보내는 모습은 가관.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정체불명의 호의적인 눈빛을 확인한 이후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키야…. 연기력 지리네.’ 벨리알이 거느리고 있는 악마답게 수준급이라고 할 만했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즐거워 보이기도 했고. 물론 그것보다 놀라웠던 건 저 정도의 악마가 현세에 강림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지만… 아마 저건…. ‘정하얀과 한소라가 소환한 건 아니겠지.’ 현세로 강림한 벨리알이 불러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악마들이 현세로 소환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생각해 보면, 사실 벨리알이라고 해도 저 정도나 되는 악마를 불러들이기 쉽지는 않았을 터. 시스템 자체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스템에 균열이 생겼으니까… 가능하다고 봐도 되는 건가?’ 말하자면 시스템에 작은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을 통해 계속해서 유입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이거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온건파 악마로 분류할 수 있는 벨리알이 그 구멍을 관리하고 있다는 건 안심할 수 있는 부분. 만약 소환된 것이 강경파였다면…. 아니 애초에 그런 가정 자체가 의미가 없기는 하다. 악마 대군주와 파장을 맞출 수 있는 인간은 없었을 테니까.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정하얀은 계속해서 리무르아라는 악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걸 보면 대화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벨리알과 속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정하얀과 리무르아 역시 비슷한 대화를 하고 있을 것이 분명. 현재 이 사단을 만든 것이 정하얀 이었으니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계약은 진행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엄연히 소환자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성장하긴 했네. 우리 하얀이.’ 다짜고짜 마법을 날리지 않은 것 하나는 칭찬해 주고 싶다. 하지만 그 협상이 잘 풀릴 리 만무. 애초에 저 악마의 목적이 이쪽의 납치라는 걸 생각해 보면 지금 하고 있는 대화 자체가 의미 없다. 아마 리무르아 입장에서는 적당히 상대해 주고 있는 거겠지. 내 예상이 맞았는지 정하얀의 얼굴은 점점 더 구겨진다. 크게 흥분했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눈에는 점점 더 핏발이 서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서히 이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당신 말에 동의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저 남자가 가지고 싶거든. 미안해, 마법사 아가씨. 그것 말고 협상의 여지는 없어. “하얀아? 너….” 결국, 협상은 결렬. 심지어 그걸 리무르아가 입 밖으로 내뱉는다. 내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표정을 지은 건 너무나도 당연한 거고. 정하얀의 얼굴은 다시 한번 불안감으로 일그러진다. 현재 상황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듯했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시야에서 사라진 악마가 정하얀과 내 어깨를 붙잡고 있는 게 느껴졌으니까. “어….” ‘빨라.’ 소름이 돋는 것은 순식간. 깜짝 놀란 정하얀이 무언가 주문을 내뱉었지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정하얀이 구석으로 처박힌다. 데미지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꽤 요란한 소리가 들린 걸 보면 뼈 한 군데는 부러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살살해요.” -죽이진 않을 겁니다. 안전하게 돌려보낼 생각이기도 하고요. 애초에 저 여자가 없으면 당신이 우리를 이곳에 불러들일 수단이 사라지는데…. 그런 멍청한 짓을 왜 하겠어요. 벨리알 님에게도 당부받은 사항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리무르아 님.” -들었던 것처럼 달달한 입을 가지고 계시네요. 저야말로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현세로 나온 게 얼마만 인지… 요즘 당신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을 찾기가 쉽지가 않더군요. “칭… 찬, 고맙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짧은 스몰 톡을 나누고 다시 한번 전방을 바라본다. 콜록, 콜록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정하얀이 보고 있는 모습은 내 어깨를 부여잡은 리무르아일 터.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돌아가세요. 멍청한 인간. 당신에게 빚진 게 있는 만큼 목숨만은 빼앗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도 감사의 인사는 따로 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인간을 발견한 게 얼마만 인지…. ‘아아… 그런 대화 나누셨구나.’ 어째서 정하얀이 화내고 있는지 이해가 간다. “그… 그 손 놔. 콜록….”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흥미가 생겼다고…. 개인적으로 이런 사람을 이렇게 타락시키는 게 취향이라….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세요. “그, 그 손 놓으라고….” -죽기 싫으면 왔던 길로 돌아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랍니다. “그 손… 노, 놓으라고 마, 말했잖아.” -싫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왜 도발하고 그래.’ 기왕 하는 거 조금 더 극적인 순간을 연출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조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내 몸을 촉수가 감싸 안기 시작한다. 즐거워 보이는 리무르아의 얼굴은 가관. 팔다리 할 것 없이 나를 싸매어 오는 정체불명의 촉수는 심지어 옷의 안쪽까지 들어와 여기저기를 헤집고 있었다. ‘시… 시바 이거 뭐야. 이러지 마. 야, 너 왜 이래.’ -생각보다 귀여운 사람이네. ‘야… 이러지 마. 응… 응기… 잇.’ 절로 몸이 굽혀질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가 만무했다. 물론 정하얀의 경우에는 더 하다. 눈앞에서 내 남자를 빼앗기고 있는 그녀가 어떤 심정일지는 솔직히 상상하기도 어렵다. ‘나이는 29살… 취미는….’ 같은 정체불명의 상황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거다. “하, 하얀아. 도망… 도망쳐.” “그. 손. 놔.” -싫은데…. “주, 죽, 죽…. 죽여버리기 전에… 빠, 빨리 놔…. 놓으라고 이야기했… 흐으윽…. 놓으라구우…. 놓으라구우!!!” 얼마나 억울했는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지만, 저 눈물 이후에 시작될 일을 대충 예상하고 있는 이쪽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인제 그만…. 적당히 해주셔도 됩니다. 리무르아 님.” -버릇 고쳐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계신 거 아니었나요? “그래도 대충 하고 돌려보내요.” ‘괜히 불안하니까.’ -흐음…. 조금은 기분 좋을 거로 생각했었는데,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나 봐요? “다른 의미로 기분이 좋기는 한데… 솔직히 불안해서 그래요.” ‘위험한데.’ 리무르아가 위험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눈앞에 보이는 정하얀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 계속해서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 중얼거리고 있는 꼴은 그 불안감을 더욱더 증폭시킨다. 중노와 극노의 상태는 이미 옛날 옛적에 지났다. 굳이 자세히 행동을 살펴보지 않아도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극대노와 비슷한 상태를 본 것은 저주받은 신단과 라이오스 사태 이래로 처음. 심지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하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시바….’ 불안한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리던 정하얀이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흔들며 입을 여는 꼴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공포스럽다. 극대로 진입했을 때에도 항상 이쪽의 앞에서는 이미지 관리하던 모습과 상반되는 모습. “주, 죽일 거야…. 죽, 죽일 거야.” -재미있네. “그… 손 놔…. 이… 이 더러운 싸, 싸구려… 가, 같은 년…. 그 손 놓으라고!!! 그 더러운 손으로 오빠를 만지지 마. 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콜록! 죽여 버릴 거야!!! 찢어서 죽여 버릴 거야!! 콜록! 콜록!!! 죽여 버릴 거야아!!!” -……. “…….” “죽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누가 악마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 482 회귀자 사용설명서 482화 벌은 받아야지(3) 수인을 맺는 것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몸에서 터져 나온 기운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종류의 마법. 이쪽의 몸을 감싸고 있는 정체불명의 촉수에 힘이 꽉 들어갈 정도였으니 마력의 양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27군단의 만인장이자, 악마 서열 1,000위권에 빛나는 리무르아 역시 긴장한 거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하자 시야에 비친 것은 광대까지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모습. ‘이거 막을 수 있는 거지?’ 어째서 웃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쪽의 감정은 저쪽이 느끼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본의는 아니지만, 갑작스레 시작되려고 하는 괴수 대격돌에 불안감을 느끼게 된 것은 당연지사. 수백 개의 빛의 구체가 하늘을 수놓은 모습을 본 순간 괜스레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제각기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고 있는 마력의 집결체. ‘이, 이거 씨바… 나까지 죽이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 분위기만 보면 그랬다. 일단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는지조차 의문.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휘말리며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모습은 마치 이전의 율리에나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어떻게 봐도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죽어어어어어어어!!!” 떠오른 마력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 것은 순식간. 콰드드드드득!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콰아아아아아앙!!! 일부는 리무르아를 둘러싸고 있는 악마들에게, 또 일부는 그녀에게로 날아갔다. 갑작스레 몸을 구속하고 있는 촉수들이 헐거워진 것이 느껴진다. 아마 이쪽에 몇십 가닥을 붙여놓은 채로 전투에 임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생각일 터. 지금의 마법이 그녀에게도 위협적으로 다가온 것이 틀림없으리라. 순식간에 몸을 내빼자 곧바로 거대한 촉수들이 앞을 막아섰고, 겹겹이 쌓인 채로 마법을 막아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재밌네. 라고 말하기에는 이를 악물었다는 게 느껴진다. 실제로 그녀의 촉수는 마력의 집결체에 의해 계속해서 그 힘을 잃어가는 중이었으니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마법이 계속해서 촉수를 삼키며 전진하고 있다. 마치 분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개 씨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이쪽도 좀 생각해 주라!’ “그웨에에에엑!” 콰드드드드드드득! “크워어어어어!!!” 콰와아아아아아아앙! 실제로 여기저기에서는 폭음과 함께 악마 군단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리무르아의 멋진 등장을 위해 함께해 줬던 악마 제군들이 마력에 녹아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장면은 확실히 비현실적이라 평할 만했다. ‘이게 뭐야….’ “죽어!!! 죽어!!! 죽어어어어어!!!” 일부의 구체에서 뻗어 나온 마력의 가시들이 수십 악마들의 머리를 꿰뚫는다. 그걸로도 모자라 그 자리에서 폭발하듯이 터지는 녀석들의 모습은 가관. 정확한 마법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되지는 않지만, 내부에서부터 마력을 움직여 터뜨리는 종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마치 기적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그녀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내 몸에 강림한 베니고어의 모습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고 느껴졌을 정도. 대군이 쓸려가는 모습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이게… 뭐야… 시바….’ “그웨에에에에엑!!!” 콰지지지지지지지직! 퍼어어어어엉!!! ‘이거 실화냐고….’ 사실 정하얀을 여기까지 끌고 오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함께한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등에 지는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었다. ‘시이바…’ 하지만 이 정도라면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다. 지고 있는 리스크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치가 훨씬 더 크다. 다가올 전쟁에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퍼즐 중 하나.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마법적 한계를 뛰어넘는 그 모습은 경이롭다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였다. 공간을 꽉 채우고 있던 악마들의 대다수가 전멸. 단순한 들러리라고는 하지만 이 악마들 개개인은 결코 약한 개체라고 볼 수 없다. 대륙을 기준으로 분류하자면 적어도 영웅 등급에 랭크되는 쪽. 그런 악마들이 마법 한 방에 넝마가 된다. 1회차 전쟁 영웅. 어째서 김현성이 정하얀을 그렇게 감싸고 돌았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이게 성장치 맥스를 찍은 게 아니라고?’ “죽여 버릴 거야. 갈기갈기 찢어서… 주, 죽일 거야.” -아끼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조금 슬프네. “그, 그 입 다물어!! 다물어어어!!!”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한번 커다란 마법이 터져 나온다. ‘진짜… 이게 무슨….’ 그 와중에도 괴수 대격돌은 한번 벌어진 입을 다물 틈이 없을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었다. 첫 번째 공격을 막은 이후에는 리무르아의 턴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정하얀의 턴은 끝나지 않은 모양. 마력으로 이루어진 화살이 정확히 그녀만을 노리고 쏟아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와중에 피아 구분은 하고 있는 것이다. “이이이이익!!!” 바닥에서 생성되기 시작한 사슬. 그 어떤 것이라도 태워 버릴 것 같은 불꽃. 너무나도 명확하게 실체화돼 눈으로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정제된 바람. 라이오스 때 보였던 공간을 좀먹는 아네모네의 검붉은 구체. 그 외에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어처구니없는 마법들과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폭음까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지형이 뒤바뀌고 있다는 것 정도는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십 가닥의 촉수가 그녀를 향해 쏟아졌고, 정하얀은 제 자리에 서서 쏟아지는 촉수들을 마력으로 붙잡는다. 아까와 같은 속도로 접근해 보려고 했지만, 맛탱이가 가버린 마법사가 그런 공간을 허용해 줄 리 만무. 본인이 쏘아 보낸 마법으로 방향을 바꾸거나 움직임 자체를 상쇄시킬 수 있는 덫을 사방에 깔아놓는다. 거리를 좁히려고 하는 자와 떨어지려고 하는 자의 싸움. 쉽게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던 리무르아 역시 점점 더 얼굴을 굳히고 있다. 본인의 생각대로 전투가 흘러가지 않고 있다는 걸 느끼는 게 틀림없으리라.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는 페널티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만약 그 페널티가 없더라도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됐을 거라는 것 정도는 인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페널티를 떠안고 있는 건 하얀이도 마찬가지고.’ -겨우 이 정도로? “이이이이이익! 죽어!!! 죽어!!! 제발 죽어!!!” -넌 못 지킬 걸… 오늘 빼앗기게 될 텐데…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다, 닥, 닥쳐!! 닥치라고오!!!” -저 남자를 어떻게 다뤄야 제대로 즐겼다는 생각이 들까. 내가 없이는 살 수도 없는 몸으로 만들어줄 자신 있는데… 일주일만 지나도 너 같은 인간 계집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될걸. 넌 질 거야. 바닥에 처박혀서 질질 짜게 될걸. “히끅… 닥, 닥쳐….” -일이 끝난 다음에는 머릿속을 백치로 만들어 버리는 게 좋겠네. 온종일 다른 건 생각지도 못할 만큼 바보로 만들고 천천히 저 구역질 나는 인간을 탐닉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 하으…. “그… 그 입 다물라구우… 다물어…. 다물어!!! 흐어어어어엉… 죽으란 말야!! 죽어어어!!! 거의 동수라고 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정황이 뒤바뀐다. ‘확실히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는 다르네.’ 경험이 괜히 중요한 게 아니다. 가벼운 도발에 넘어가 무리한 마법을 펑펑 쏴 재끼는 정하얀의 모습은 가관. 악마 군주 역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입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광기에 물들었던 얼굴에는 어느새 짜증과 불안감이라는 감정이 들어선다. 본인이 한계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애초에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정하얀은 이미 여기에 오기 전부터 마력 탈진 현상을 겪고 있었고, 실제로 체내에 남아 있는 마력도 많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대마법사의 심장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마력을 회복했다고 한들, 이전과 같은 컨디션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는 거다. 조심, 또 조심하며 마력을 소비해도 승리를 점칠 수 없는 상대에게 흥분한 채로 마력을 펑펑 써대고 있으니 금방 한계가 찾아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법은 속 빈 강정이 되어가고 있었고, 리무르아에게 조금 더 많은 공간을 허용하고 있었다. 이 이상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히끅… 허으어어어엉… 나가!! 나가라구우!! 나가!!!”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 이상 마법이 발현되지 않게 된 것. -이거 슬퍼서 어떡하나… 텅텅 바닥나 버렸네요. “이이이이익!! 이이이이이이익!!!”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는지 단검까지 빼 들고 광년처럼 달려들었지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진다. 정하얀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린 채로 있는 힘껏 뺨을 후려치자 다시 한번 몸이 형편없이 바닥에 처박히는 게 시야에 비쳤다. ‘애 잡겠다. 씨바… 그만해라.’ 슬그머니 눈치를 주자 본인도 심했다는 걸 인지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 단 두 방으로 정하얀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바닥난 마력으로 방어막을 펼칠 수도 없는 상황. 리무르아에게 저항하기에는 정하얀의 신체는 너무나도 유약했다. “흐어어어엉… 콜록… 콜록…. 오빠아… 오빠아….” ‘아우야… 가슴 아파….’ “오빠아… 히끅… 우웨에에에엑… 오, 오, 오빠아….” 이제는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상태. 다시금 촉수에 구속된 채로 메소드 연기에 들어가자 정하얀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계속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틀비틀 일어서며 달려오고는 있었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풀썩 쓰러져 버린다. “오빠아… 가지 마요오… 가지 마… 히끅… 흐어어어어엉….” ‘그러지 마… 마음 약해지게….’ “데려가지 마… 데, 데… 려가지 콜록… 콜록… 데려가지 마.” -싫은데? “히끅… 흐어어어어엉… 히끅.” “하얀아.” “오빠아… 오빠아아….” 다시 한번 일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지만 이번에도 역시 몇 걸음 가지 못하고 풀썩 쓰러져 버린다. 입에서는 계속해서 혈액이 울컥울컥 튀어나오고 이미 온몸은 넝마가 되어버린 상태. 가슴이 찢어지기는 했지만, 이 신파는 제대로 마무리 지어야 했다. 정하얀의 버릇을 고친다는 목적뿐이었다면 적당히 끝을 맺었겠지만, 조금 더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제…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그녀는 돌려보내 주세요.” ‘멘트 지렸고요.’ “흐어어어어어어어엉… 그러지 마… 그러지 마요… 히끅….” -이런 모습을 보이면 조금 더 괴롭히고 싶어지는데… 하지만 어차피 저 여자는 살려둘 생각이기도 했고, 그 대가가 당신이라면 나는 환영이야. “감… 사합니다.” “오빠아… 히끅… 오빠아아아!! 콜록!! 콜록!!! 흐어어어엉… 오빠아….” 내 몸이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천천히 하늘로 떠오른다. 깜짝 놀란 정하얀이 다시금 우다다 달려오기는 했지만,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닿지도 않는 손을 뻗는 것은 물론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이쪽을 붙잡으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잘못했어요. 히끅… 잘,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히끅. 히끅.” “…….” “흐어어어어엉… 잘못했어요. 잘못… 내가 잘못했어요.” “…….” “제발… 제발… 제발… 히끅… 히끅.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신님. 제발… 제발… 한 번만….” “…….” “히끅… 히끅… 오빠아….” “…….” “…….” “잘 지내야 돼.” 아름다운 엔딩을 위한 씁쓸한 미소 한 방. 목 놓아 오빠를 외쳐대는 정하얀을 보고서는 가슴 한편이 씁쓸하기는 했지만. ‘이게 신파지. 이게 신파야.’ 만들어진 결과물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483 회귀자 사용설명서 483화 슈퍼스타L(1) 휙휙 바뀌는 풍경이 보이기는 했다.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것 같지만, 속도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안락한 승차감이다. 악마들 역시 마차 비스름하게 생긴 걸 운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혹시나 이쪽을 위해 마련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그렇다기에는 옆에 앉아 있는 촉수녀의 행동이 꽤 자연스럽다. 아무튼, 이렇게 편하게 이동하니 괜스레 정하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제대로 들어갔으려나 몰라.’ 조금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버릇 고치기의 일환이라고 한들, 마지막에 본 정하얀의 모습이 제법 비참해 보였기 때문이다. 일곱 살 먹은 어린아이가 마트에서 과자를 사달라며 떼를 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가지 말라고 울부짖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나조차 숙연해지게 만들 정도였다. ‘죄책감은 더 할 것 같은데….’ 애초에 반성과 자책하라는 의미로 이런 상황을 던진 것은 맞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건 어쩔 수 없다. 마지막에 잘못했다고 말한 것도 어떤 심정일지 이해 가고…. 본인이 던진 작은 불씨가 이렇게 크게 되돌아올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혹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이 사실. 물론 아직 내가 살아 있는 만큼 1회 차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커다란 자책감에 휩싸이게 될 거라는 것 정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지만…. ‘반성할 때도 됐지.’ 본인이 제대로 느낄 때도 됐다. 물론 이걸로 완전히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혹시나 다른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고…. 하지만 카르마를 깨닫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손뼉을 쳐줄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간단한 이치. 나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이걸 깨닫게 되는 것만으로도 조금 더 행동반경을 줄일 수 있게 되리라. 슬그머니 옆쪽을 바라보자 시야에 비치는 것은 예의 그 촉수녀. 정하얀과 함께 있을 때와는 다르게 제법 정중한 모습을 보였는데, 아무래도 벨리알에게 무언가 언질을 받은 듯했다. 정체불명의 촉수로 이쪽을 희롱하던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 마치 VIP를 대접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니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정체불명의 음료를 조심스레 넘기며 말을 걸어왔다. ‘어우 씨바. 맛없어. 이거 뭐야.’ -뭔가 불편한 점이라도…. “아닙니다. 뭐가 불편하겠습니까? 다만 하얀이가 잘 돌아갔는지 궁금한데….” -흐음. “…….”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확인하고 있으니까요. 현재는… 인간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도착한 거로 확인됩니다. 정신을 잃은 상태이기는 하지만요. 저희 쪽이 보내는 메시지 역시 같이 동봉했으니 다른 인간들은 무언가 대책을 강구하고 있겠군요. ‘무사히 돌아가기는 했나 보네.’ 혹시나 나를 찾는다고 난리 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마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겠지.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현재 합동 훈련장의 상태였다. ‘난리 났겠네. 난리 났겠어.’ 딱 이쪽이 그리던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소식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돌아가야 유리하게 작용할지에 대해서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모양. 과연 벨리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그리고 그 미친 여성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 여자는 벨리알 님께서도 특히 신경 쓰시는 인간이라…. 조금 거칠어 보였겠지만 조금 지나고 나면 멀쩡히 일어날 겁니다. 애초에 제가 준 대미지보다는 허용치 이상의 마력을 사용한 게 원인이기도 했고요. 이런 따분한 이야기보다는…. 음…. 어떻습니까? 마침 도착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텐데.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방금 전에 어떠셨는지…. 미친 여자와 마찰이 있었을 때 나누었던 말처럼 할 수는 없겠지만 원하신다면 인간 여성체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 드릴 수….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왠지 모르게 그 말이 현실이 될까 봐 무섭다. 얼굴 자체는 미형이기는 했지만, 뭔가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다.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 저것들에 의해 ‘기잇’ 당할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개를 젓게 된다는 거다. 당연하지만 눈앞에 있는 리무르아는 무척이나 시무룩한 표정.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아쉽네요. 혹시나 제 겉모습이 성에 차지 않으시는 거라면 일부 조정해 드릴 의향도 있습니다만. “아니요. 아니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래 봬도 다른 악마들 사이에서는 제법 인기가 많은데…. 조금 어리거나 나이 든 모습으로도 충분히. “아니요. 정말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무척 감사한 말씀이기는 하지만 이 우매한 필멸자가 아름다운 리무르아 님에게 진심으로 빠지게 될까 걱정이 돼서….” -입에 발린 거짓말이라고는 해도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굳이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당신이 말을 높일 정도로 대단한 악마가 아니에요. 그리고 벨리알 님이 아니더라도 저는 당신에게 충분히 우호적이랍니다. 굳이 말하자면 취향이라고 하는 게 좋겠네요. 저뿐만이 아니라 아마 악마 중에서 당신을 싫어하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일 겁니다. 다른 인간과 차이를 두는 것이 당연한 거고요. ‘욕이야, 칭찬이야.’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이토록 구역질 나는 영혼을 가진 걸 본 것은 제 생을 통틀어 처음입니다. 분명히 신성의 기운이 느껴지는데도 영혼은 이토록 더럽다니…. “불… 편하시지는 않습니까? 악마들에게 신성력은 치명적으로 작용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딱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조금 불편하다는 느낌은 있지만, 당신 같은 경우에는 안에 들어 있는 빛보다는 그 구역질 나는 영혼의 크기가 더욱더 커서…. 어떻게 예를 들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굳이 들어보자면 발효식품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이를테면 치즈 같은 것들 말입니다. 고약한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맛은 아주 좋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 네에….” -당신은 그런 치즈 중에서도 몇 만 년이나 묵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썩은 내가 진동하는 특수한 치즈인데, 그런 걸 싫어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너도나도 한 번쯤은 입에 넣고 싶은 게 당연한 거랍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이건 진짜 욕 아니야?’ 혹시나 이쪽을 먹이려고 지껄이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지경. 하지만 리무르아의 눈빛은 진심에 가까웠다. 악마들의 언어 표현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도 걸렸고 무엇보다 실제로 먹음직스럽다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은 가관. 어떻게 생각해도 부담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러지 마….’ -언제든지 생각이 바뀌신다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언제라도 준비되어 있답니다. “크… 흠흠. 말씀을 정말로 감사합니다만 아무래도… 큼. 사과의 의미라고 하기에는 뭣 하겠지만 가능하다면 작은 내용으로나마 계약 한 건을 진행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 것은 바로 그때. 무표정한 얼굴이 밝아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보험 팔이에 성공한 보험 판매원 같은 얼굴로 변하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게 확실히 실적이 되긴 되는 모양이네.’ 조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악마가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로 구미가 당기게 할 수단이 있다는 건 내게는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야기였으니까. 애초 예상하기는 했지만, 막상 확인하게 되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입니까? “네. 아무래도 같은 길을 걷지는 않은 만큼 직접계약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가계약 정도라면 얼마든지 진행해 드릴 수 있습니다. 혹시나 했지만 이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제가 더 감사할 지경이군요. 하핫. 리무르아 님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인간들과 계약을 맺으실 수 있으실 텐데….” -대충 저희 쪽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알고 계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 거지만 단순히 계약한다고 해서 실적이 크게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와 계약을 맺는지, 또 계약 내용이 무엇인지, 그 계약으로 얼마만큼의 성과를 내는지도 중요 요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번 계약으로 인해 벨리알 님의 순위가 무려 41계단이나 상승했다는 걸 보면 대충은 감을 잡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네?” -본래 벨리알 님께서는 72 악마 군주 중에서도 서열 68위로 비교적 낮은 서열에 있으셨습니다. 사실 10위권 밖에 있는 악마는 그 힘이나 권능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41계단이나 상승했다는 건 충분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직접계약도 아니고 가계약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당신의 그 썩은 영혼 그리고 대륙 전체에 벨리알 님의 위엄을 심어줬다는 게 유효했던 것이겠지요. 이 정도 스케일로 계약을 진행한 것은 저희 사이에서도 충분히 이례적이라는 평이 많았습니다. “아….” -간단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베니고어의 재림이라고 불리는 당신과 계약을 맺었는데 어떻게 실적이 쌓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네.’ -만약 정말로 이기영 님께서 저와 가계약을 맺어 주신다고 가정한다면 아마 한 번에 1,000위권 내에 진입할 가능성도 열릴 것 같습니다. 무려 600계단이 넘게…. ‘이거 진짜 대박이네.’ 솔직히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다. 벨리알이 지나치게 친절한 것도 그렇고, 가지고 있는 힘 자체도 크게 성장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막상 상자를 까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 저번 라이오스 사태. 그거 한 방으로 무려 41계단이나 상승했단다. 심지어 촉수녀 리무르아는 가계약 한 방에 600계단 상승의 경지를 꿈꾸고 있고…. 벨리알의 휘하에 있는 악마들과도 간단한 가계약을 진행한다면 내가 모르는 지옥 내 세력의 판도가 변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가능할 때의 이야기겠지만. -저, 정말 해주시는 겁니까? ‘괜히 해준다고 했는지 몰라.’ “네. 물론입니다. 앞서 충분히 도움을 주시기도 했으니까요. 계약 내용은 추후에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 여러 가지로 할 일이 많을 테니까요.” -네. 대충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알고 있어요. 이번에도 대륙의 모든 인간을 속이신다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충 계획하고 있는 바는 그렇습니다.” -저, 이기영 님. “네?” -직접 이런 말씀 드리기는 무척 죄송합니다만…. “네.” -혹시나 추후에 가계약을 진행해 주실 때. “네.” -기왕이면 조금 비중 있는 역할로 배정해 주신다면… 너무나도 감사할 것 같습니다. 보답은 꼭 해드릴 테니까요. ‘뭐야…. 이거 언제 이렇게 소문이 퍼진 거지.’ 벨리알의 사도가 아니랄까 봐 잔뜩 기대하고 있는 모습은 가관. 현재 이쪽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이렇다. 저들은 배역을 원하는 배우고. 이쪽은 이 무대의 책임을 맡은 총책임자이자. 캐스팅 디렉터이자. 감독.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물론,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팔자 폈다, 기영아. 빛 길만 걷자!’ # 484 회귀자 사용설명서 484화       슈퍼스타L(2)     -이제 곧 도착입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군요. 벨리알 님께서 처음 소환되신 장소가 이 장소가 맞습니까?” “네”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예.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저희와는 다르게 더 높은 격을 가지고 계신 벨리알 님께서는 현세의 활동에 제약이 따르니까요. 아마 저 성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이건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아직 이 대륙을 둘러싸고 있는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준 신화 등급과 신화 등급의 차이라는 거네. 억제력 같은 건가 봐.’ 자세히 어떤 사정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충분히 답을 유추할 수 있을 같았다. 한 차원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 신화급 존재가 대륙을 동네 마실 다니듯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게 더 이상하다. 이 정도 억제력은 있어야 한다. 특히나 소환된 경우에는 그 억제력이 더욱더 빛을 발할 거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의미로 능력치가 소폭 상향 조정되는 것 역시 억제력의 한 종류일 터. 물론, 벨리알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에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지, 없는지는 크게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게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제대로 설계되어 있기는 하네.’ 당연한 소리겠지만, 이 대륙이 허투루 설계되지는 않았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아마 그게 아니었다면 이 대륙을 관리하는 트롤러 놈들이 몇 천 년 전에 대륙을 말아먹었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당장 베니고어와 엘룬 쓰레기만 봐도 답이 나오는 상황이다. “현세에 소환된 것은 리무르아 님과 벨리알 님이 끝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만인장이 전부 소환되지는 못했지만 1,000위권에 랭크된 다른 동료들 역시 벨리알 님의 부름에 답한 상태입니다. 아마 곧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일단 벨리알 님을 알현하는 게 먼저겠지만요. “오랜만이라 조금 긴장되는군요.”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 27군단은 언제나 이기영 님께 우호적이니까요. 그리고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만, 아까 나누었던 약속은…. “아, 네. 약속했던 가계약은 꼭 해드릴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기영 님. “하지만 배역 건은 확답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아시다시피 이게 워낙 중요한 부분이라. 하지만 실망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미 리무르아 님께서 워낙 중요한 일을 해주시기도 했고, 그만큼 강한 인상도 남겼을 테니까요. 리무르아 님을 저에게로 보낸 것이 벨리알 님이 아니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아마 벨리알 님께서 라무르아 님을 많이 아끼시나 봅니다. 베니고어의 재림이라고 불리는 대륙의 영웅을 납치하는 막중한 임무를 내리신 것이니까요. 다음 이야기를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퀄리티가 있는 배역을 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사실 아직 각본이 전부 나온 상황도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배역을 준다는 확답을 드릴 수 있다면 저로서도 마음이 편했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 때문에 약속드리기가 어렵다는 점,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오히려 환영입니다. 이기영 님.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니 벨리알 님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이후에 따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여배우의 표정은 가관. 준 신화급 존재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라 조금 긴장했다. 하지만 리무르아의 얼굴을 확인한 이후에는 다시금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장담하건대 다른 악마들 역시 그녀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리무르아가 배역 건에 대해 먼저 선수를 쳐온 것 역시 혹시나 다른 악마를 보고 생각이 바뀔까 불안해서 그런 거겠지. -자꾸만 쓸데없는 말을 드리는 것 같군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리무르아 님께서 저를 위해 해주신 일은 절대 잊지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조금은 안심할 수 있겠네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아무튼, 어서 들어가시죠. 벨리알 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네, 리무르아 님.” 성에 도착한 이후 짧은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자니 어느새 커다란 알현실의 앞이었다.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적의는 아니다. 아마도 신화급의 존재가 내뿜는 존재감이 그 원인일 터다. 약간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건만 내 마음을 모르는 리무르아는 벌컥 문을 열어버렸다. 숨도 쉬기 힘들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한 느낌. 조심스레 고개를 드니 인간의 양식과는 거리가 먼 내부가 눈에 띈다. ‘취향 한번 참 고약하구먼.’ 정체불명의 살덩이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은 물론 뭔지 모를 마수의 두개골도 여기저기에 걸려 있었다. 정돈되지 않았지만, 정돈된 느낌. 중간중간에 엔틱한 양식의 장식품들이 어우러져 묘하게 소름 끼치는 분위기를 만든다. -오랜만이군. 구역질 나는 인간. 하지만 저 모습보다 더 기괴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만마의 지배자께 하찮은 필멸자가 인사, 또 인사드리겠습니다요.” 다소 인간형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리무르아. 그와는 반대로 차마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외관을 가지고 있는 벨리알의 외관은 본능적으로 어떤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둘 중 어느 쪽의 모습이 일반적인 모습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누가 더 악마에 어울리냐고 묻는다면 당연 벨리알 쪽이다. 72악마 군주 중에 27위권에 랭크된 악마다운 외관이었다. ‘변신 비슷한 것도 가능할 것 같던데….’ 실제로 리무르아가 외형을 변경시킬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72대군주 중 하나가 자신의 겉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 외관을 바꾼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을 읽힐 수도 있으니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다.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흐흐… 그렇게 아부 떨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아부가 아닙니다요. 전부 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정말로 보고 싶었습니다. 벨리알 님. 지난번에 그렇게 벨리알 님을 보내고 나니 조금 더 제대로 대접해 드리지 못한 게 어찌나 후회되던지….” -그렇게 저자세로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나. 결국,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다. 그리고 대접 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네가 나를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대접하는 것이 옳지. 리무르아에게 들었을 것 아닌가. 너도 나름대로 득을 보기야 했겠지만, 저번 계약으로 인해 제대로 득을 본 것은 바로 나다.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고. “저야 항상 벨리알 님을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되었다. 허례허식 따위는 집어치우고 자리에 앉지. 너를 위해서 준비한 것이 많다. ‘이래서 사람이 능력이 있어야 돼.’ 이쪽을 대접해 주고 싶다는 건 허언이 아닌 것 같다. 실제로 한쪽에 비치된 정체불명의 식탁에는 여러 가지 음식과 술이 나열되어 있다. 지옥에서 먹는 음식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음식들도 있었다. 그것을 보니 얘네도 식사하기는 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도 있겠지만, 맛은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들로 준비했다.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네가 나에게 해준 것에 비하면 부족하겠지만 말이다. “감사할 뿐입니다요.” -마음 같아서는 내 권능의 일부라도 내리고 싶다만 현재로서는 쉽지 않을 테니 나중을 위한 즐거움으로 남기도록 하지. “나중을 위한 즐거움이라 하신다면….” -나중에 우리 쪽으로 올 것이 아닌가. 인지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네 격이라면 충분히 현세의 육신을 집어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시기상조로 보이기도 하고 네 재능과 육체가 너무나도 형편없어 준비할 게 많겠지만…. 길게 본다면 2,000년 정도면 충분하겠군. ‘이미 악마 취급인데 이거….’ 스카웃을 당했다는 게 찝찝한 적은 또 처음이다. 그제야 그 리무르아가 나에게 묘하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마 벨리알이나 배역 건의 언급이 없었더라도 나에게 정중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미래의 직장 동료, 심지어 72군단의 군단장에게 신임받는 인물과 미리 인맥을 쌓는 건 그녀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 새끼들은 왜 이렇게 확신하고 있는 거야.’ 현세의 육신을 집어 던지고 상위로 갈 가능성이 있다는 건 내가 베니고어나 엘룬에게 스카웃받을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어째서 악마 쪽으로 진영을 옮길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심지어 신성력도 가지고 있는데. 벨리알이 이 정도라면 아마 베니고어와 엘룬도 이쪽을 신계로 불러들이고 싶어 애가 타고 있을 거다. -신성력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문제없겠지. 루시퍼 같은 사례도 있고. 뭐, 아직은 멀고 먼 이야기다. 나중을 대비하기보다는 현재 현재 눈앞에 있는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게 더 중요하겠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슬쩍 벨리알을 바라보자 갈라진 바위의 틈 같은 입으로 와인을 들이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그러고 보니 리무르아 그 아이를 만났지. 어떻던가. 그 아이는? “기품이 넘치는 여성분이셨습니다. 또 벨리알 님께서 신임하고 계신다는 걸 알 수도 있었고요. 굳이 이번 일의 시작으로 리무르아 님을 선택하신 것을 보니 딱 하고 느낌이 오지 뭡니까. 군단 내에서 밀고 있는 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연기력도 상당하신 것 같고,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더군요.” ‘그 촉수도.’ -리무르아에게는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았지만, 그동안 챙겨주지 못했지. 이번 기회에 조금은 챙겨주고 싶어서 보냈는데 혹시나 기분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군. “기분 나쁠 일이 뭐 있겠습니까. 오히려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런 일은 본래 첫 번째 임팩트가 중요한 법 아니겠습니까. 리무르아 님은 충분히 자신의 역할을 다해주셨으니 다음에도 중요한 일을 맡으실 겁니다. 아암. 그렇고 말고요.” -아냐, 아냐. 그래도 이 건은 따로 사례하도록 하지. 본래라면 내가 직접 그녀를 챙기는 것이 맞겠지만, 알다시피 이 자리에 있다 보면 여러 가지로 신경 쓸 게 많아. 특히나 우리 27군단은 갑작스럽게 성장한 상태라 내부적인 문제도 많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랫것들의 눈치도 보지 않고 어떻게 집단을 이끌 수 있겠나.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아랫것이 있어도 함부로 편애하기 힘들고,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놈이 있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제거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이 새끼….’ -정말 문제야. 그렇지 않나. ‘햐. 이 악마 같은 새끼. 진짜 악마 새끼네 이거. 이번 일을 통해 벨리알이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은 쳐내고, 신임하는 놈들은 위로 올린다. 단순한 계약이나 마이너스 감정을 뽑아내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27군단의 재정비. 일부 악마 놈들의 숙청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애들도 레벨업 좀 할 수 있겠네.’ 어떻게 보면 윈윈이라고 할 만했다. ‘준비 잘해라, 얘들아. 운 좋으면 경험치 챙길 수도 있겠다.’ # 485 회귀자 사용설명서 485화       파란의 사정(1)     “김미영 팀장님.” “아, 박중기 팀장님…. 죄송합니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미처 못 드렸군요. 물품은 전부 도착했나요?” “예. 말씀하신 보급품은 전부 처리해서 창고에 넣어놨습니다. 일부는 곧바로 현장으로 갈 수 있게 마차에 실었고요. 확인 이후에 길드마스터께 결재 받으러 갈 예정입니다. 바쁘시다면 제가 김미영 팀장님의 몫까지 처리하겠습니다.” “아니요. 정신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가 할 일은 끝까지 하는 게 맞겠죠. 이것 역시 중요한 일인데. 지원군도 함께 도착했나요?” “지원군은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워낙 일이 갑작스러웠던 터라…. 교국에서는 템플러들을 포함한 신성기사단과 대주교급의 인사를 전원 차출한다더군요.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교황청에서 운영하는 모든 무력 단체를 움직일 것 같습니다. 다른 대도시들도 마찬가지고요. 바젤 교황님께서는 합동 훈련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연방으로 향하신다고 하셔서 내부적으로 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건….” “저도 옆에서 최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했지만, 성정이 워낙 불같으신 분이라…. 오스칼 님과 다른 의원분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곧바로 연방으로 진격하셨을 겁니다.” “린델의 분위기도 뒤숭숭하겠네요.” “어디 린델뿐이겠습니까. 교국 전체가 다들 불안에 빠진 느낌입니다. 이쪽으로 오면서 다른 중소도시들도 전부 확인했지만, 전체적으로 주민들의 얼굴이 어두웠습니다. 대부분 기도만 드리고 있고…. 조금 과장해서 말씀드리자면 국가 자체가 마비된 것 같습니다. 여기는 어떻습니까?” “상갓집 같은 분위기예요. 물론 그럴 만도 하지만…. 박덕구 님이 특히 안 좋으시고. 엘레나 님은 소식을 듣자마자 혼절하시고. 선희영 님이나 조혜진 님도 표정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고요.” “정하얀 님께서는….” “매일 식사를 가져다 드리고는 있는데 안 드시고 계세요. 계속해서 목 놓아 우는 소리만 들려오고 있는데 얼마나 상심이 크실지 가늠이 안 되네요. 바로 눈앞에서 부길드마스터를 잃은 거나 다름없는데…. 전부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더 가슴 아파요. 실제로 도착한 직후에는 횡설수설하며 자기 잘못이라 중얼거리기도 했고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일단은 휴식을 권했지만….” “…….” “박덕구 님은 물론이고 길드마스터나 다른 분들까지 제대로 만나지 않으시고, 상처도 회복하지 않으신 채로 가만히 놔두고 있는데 사제들이 들어가도 치료를 거부하고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길드마스터께서는 혹시나 자해할 염려가 있으니 주시하라고 하셨고요.” “끄응. 참…. 사람이 좋은 것도 문제가 되나 봅니다. 듣기로는 대피하는 연방민들을 구하시다 일에 휘말렸다고 들었는데…. 디아루기아 님에게 듣기로는 아직 생존하신 게 확실하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저희 같은 길드 직원들이 더 정신을 차려야죠. 파티원 분들은 다른 부분까지 신경 쓰기 어려울 겁니다.” “네. 그렇게, 그렇게 해야죠.” 김미영 팀장의 어두운 낯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그동안 같은 파란의 길드 직원으로서 동고동락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현재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왜 안 힘들겠어.’ 오랜 시간 부길드마스터의 손발이 되어 행동했던 게 바로 김미영 팀장이었다. 자신을 지옥 같은 삶에서 구해준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악마에게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다른 분들과 같은 반응을 보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눈물 흘리고 싶고, 주저앉고 싶을 것이다. 그럼에도 평소처럼 업무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부길드마스터의 신임을 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저런 모습을 처음부터 봤기에 보잘것없던 사람을 파란 행정의 중심으로 기용했던 거겠지. 슬퍼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서둘러 일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리라. “타국과의 협의는 잘 되어가고 있는 게 확실합니까?” “일단 연방 탈환 작전은 정식으로 승인을 받은 상태예요. 정확히 일주일 후에 작전이 시행될 예정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네.” “제가 군사 전문가가 아니라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여러모로 준비가 미흡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몇몇 국가와 대형 길드에서 소극적인 것도 영향을 끼치고 있고, 아직도 각 지역에 들어가는 병력의 구성에 대해 옥신각신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같은 연방의 멤버인 지옥불의 게르한이나 자밀라 같은 이들도 의지가 없어 보이더라고요. 연방 내에 있는 시설들을 전부 버리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씁쓸한 일이죠. 부길드마스터와 그토록 친하게 지내던 이들이었는데…. 소식이 끊기자마자 발길을 끊어버리더라고요.” “거참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로군요. 뭐, 그런 인간들이….” “연방 다음에는 다른 왕국들 차례일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건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건지. 길드마스터께서는 최악의 경우 사국동맹과 공화국만으로 탈환 작전을 진행하는 경우도 생각하시고 계신 것 같더라고요.” “공화국 같은 경우에는 적극적이겠군요.” “예. 불행 중 다행이죠. 지난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이미지를 어떻게든 회복하려는 것 같습니다. 현 공화국 총통이 악마에게 반감을 품은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거예요. 악마 소환사 진청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지만요.” “하지만 여러 가지로….” “불안요소가 많죠. 그 불안요소를 최대한 줄이는 게 저희 일이고요. 부길드마스터의 부재로 아마 다른 업무까지 전부 맡게 될 것 같은데 박중기 팀장님도 준비 단단히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혹시나 일이 잘못될까 봐 걱정입니다.” “…….” “…….” 잠깐의 침묵이 장내에 가라앉았다. 아마 김미영 팀장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파란의 행정팀은 타 길드의 행정팀에 비해 훨씬 유능하다는 평이 많다. 하지만 거기에 부길드마스터,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세밀한 디테일을 잡아주는 관리자 없이 어디까지 해줄 수 있을지 걱정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특히나 이렇게 큰일을 말이다. 아마 이 침묵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정말로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잠깐의 침묵 속에서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이윽고 시야에 길드마스터의 집무실이 비친다. 잠깐 심호흡을 한 이후에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셔도 됩니다.’ 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미영 팀장이 혼자 고개를 끄덕인 이후 천천히 집무실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충격이 크실 텐데.’ 길드마스터와 부길드마스터의 사이가 워낙 각별하다 보니 이번 일에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조금은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는 것 같지만 조금 수척해진 모습을 보니 확실히 영향을 받는 듯했다. 수염을 정리할 여력이 없었는지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다. 핏발이 서 눈이 붉어진 것은 물론, 전체적으로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라고 평할 만했다. “인사는 생략하셔도 됩니다. 곧바로 결재할 서류만 보여주시고 바로 나가…. 아니, 잠깐만 대기해 주세요.” “네.” “네.”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데. 마치 얼음장 같은 느낌. 사방이 무척 차가워 나도 모르게 살짝 몸을 떨게 될 정도.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정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부길드마스터의 부재 시 길드마스터에게 결재를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평소의 길드마스터는 지금과 많이 달랐던 거로 기억한다. 무표정이었지만 가식적으로나마 미묘하게 웃음기를 띄고 있었고 항상 친절했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지금 보고 있는 게 정말 그 김현성이 맞는지 의심이 갈 지경. “보급품은 이게 끝입니까?” “네. 이, 일단은 최대한 구할 수 있는 만큼은…. 전쟁이 얼마 끝나지 않은 터라 전체적으로 물량이 부족합니다. 여유가 있는 물품들도 있기는 하지만….” “3일 이내에 똑같은 물량을 한 번 더 준비해 주세요.” “네?” “준비하세요. 무슨 수단을 써도 상관없으니 준비만 하시면 됩니다.” “상, 상관없다고 하시면….” “제가 일일이 설명해 드려야 합니까?” “아, 아닙니다.” “알아서 물량만 맞춰오세요.” “알겠습니다.” ‘제기랄….’ “아시다시피 기영 씨가 부재중입니다. 전술지원팀과 전략보급지원팀, 그 외에 말씀드리지 않은 여러 가지 행정팀의 일은 앞으로 김미영 팀장님과 박중기 팀장님 두 분이 처리해주시게 될 겁니다. 기영 씨를 대신해 혜진 씨와 함께 합동 회의는 물론 파란의 공식 회의에도 참여하게 될 테니, 그렇게 알고 준비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역시나.’ “현 상황에 대해서 대충은 알고 계실 거로 생각합니다.” “네…. 네.” “김미영 팀장님은….” “네. 길드마스터.” “연방 탈환작전에 걸림돌이 되거나 위험요소라고 판단되는 인물들의 명단을 작성해 저에게 가져와 주세요. 당연하지만 명단의 내용은 기밀입니다.” “…….” “이틀 드리겠습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검은 백조 이지혜 씨의 도움을 받으셔도 무방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능력 있는 두 분이니 잘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 왠지 모르게 이럴 것 같더라니.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안 그래도 무거운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이 아니리라.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는 간다. 하지만 평소와 무척이나 다른 모습은 어색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명단을 만들어오라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살생부를 만들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보급품을 가져오는 것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란다. ‘소도시나 화전민이라도 털라는 거야, 뭐야.’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3일 안에 같은 물량을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보급품을 준비하더라도 파란의 이미지에 타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마음에 걸리는 게 많은 상황이라는 거다. 그만큼 여유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꼭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지에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괜스레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길드마스터를 뵙….”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 “용건만.”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 “아직 마법사들이 확인 과정을 거치고 있는 중이지만, 연방 측에서 온 메시지는 마, 마력 홀로그램으로 보이며…. 부길드마스터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다른 트랩이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전령이 말을 내뱉었던 바로 그 직후.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옆에 있는 김미영 팀장의 몸 역시 오들오들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숨을 못, 못 쉬겠어….’ # 486 회귀자 사용설명서 486화       파란의 사정(2)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치 내 다리가 아닌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 저도 모르게 후들후들 떨려오는 몸을 꽉 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희귀 등급에서 멈추기는 했지만 나 역시 한때 칼 밥을 먹었던 모험가였다. 바로 옆에서 창백하게 질린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김미영 팀장 역시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먼저 쓰러질 수는 없다. 억지로 입술을 깨물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제길….’ 천천히 앞을 바라보니 무표정으로 전령을 응시하고 있는 길드마스터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최대한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듯한 모습은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방금 전에 봤던 모습도 이질적이었지만 지금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더욱더 이질적이다. 최대한 화를 억누르고 있는데도 몸을 비집고 나오는 살기 때문에 숨을 쉬기가 어려울 지경. 몇 초 동안의 침묵이었지만 체감상으로는 몇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막 거친 숨을 토해내려고 했을 때 길드마스터의 입이 천천히 열리는 것이 보였다. “곧바로 회의실로 가져와 주세요.” “아…. 하, 하지만 아직 트랩이 전부 확인되지 않고….” “두 번 말하지 않겠습니다. 가져오세요. 그리고….” “네. 넷.” “다른 파티원들에게는…. 아니, 파티원들 역시 소집하도록 하겠습니다. 단 하얀 씨는 제외합니다. 정확하게 3분 뒤에 모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길드마스터.” “…….” “…….”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가는 모습에 지금껏 참아왔던 숨이 토해졌다. “허억, 허억….” “끄윽….” 옆에 있는 김미영 팀장 허리를 숙이며 헛구역질을 하는 중. 하지만 곧바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김미영 팀장님. 이거 저, 저희도 가야 하는 겁니까? 따로 말씀이 없으셨는데.” “아마 참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정신이 없어 미처 말씀하시지 못한 것 같은데…. 방금 전에 파란 공식 회의에도 참여하라고 분명히 언질 주셨으니까요. 무엇보다 현재 부길드마스터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는 게 앞으로 계획을 정리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그 외에도 다른 단서나 힌트가 나올지 모릅니다. 아마 다른 파티원들을 모두 불러 모으신 것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일 것 같습니다. 정하얀 님은 충격받으실 걸 고려해 부르지 않으신 것 같지만. 후우….” “그럼 일단 가시죠.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게 더….” “네.”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다리를 주먹으로 쳐가며 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간이 회의실 앞이다. 안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 다른 모든 파티원이 도착하지는 않은 모양. 아마 지금쯤 전달받았을 테니 슬슬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쫓겨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길드마스터의 얼굴을 확인하자 김미영 팀장의 말이 맞았다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대장장이 유아영과 암살자 직군의 김창렬이 눈에 보였다. 고개를 숙이자 천천히 눈인사를 건네오는 게 시야에 비친다. 굳이 목소리를 내서 인사를 나눌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파악한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본인들이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비교적 파란에 온 지 얼마 안 된 이들이었지만 심란해 보이는 표정은 길드마스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유아영 같은 경우에는 영입부터 파란에 적응하기까지 부길드마스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함께 들어온 동기 중에서는 가장 충격이 클 것이다. 그 옆에 앉아 있는 길드의 비서실장을 조혜진 님 역시 마찬가지고. 그나마 조금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평소의 표정과 다르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자리에 앉자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며 몇 개의 인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벌게진 눈을 한 박덕구 님과 마도학자 황정연 님, 창백해 보이는 표정의 한소라. 마찬가지로 반쯤은 넋이 나간 선희영 님과 기절한 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엘레나 님까지. 김예리 님과 안기모 님 역시 잠시 후에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분위기가 어두웠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잠깐의 침묵. 평소답지 않게 먼저 입을 연 것은 선희영 님이었다. 상당히 날이 선 것 같은 느낌은 항상 웃고 있던 평소의 표정과 대조적이다. ‘같은 사람이 맞는 건가?’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라고 불리는 것이 이질적으로 보일 정도로 얼굴이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멍청한 여자만 빼고 전부 모였네요. 아직도 질질 짜고 있는 건가요? 무능력한 쓰레기.” “거, 인제 그만 좀 하쇼, 희영 누님. 심란한 건 이해하는데 그 누구보다 하얀이 누님이 더 슬플 거요.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살아 돌아온 사람한테 폭언을 퍼부은 것도 조금 너무 하다 싶었다니까. 누님다운 행동은 아니었소.” “제가 흥분하지 않게 생겼나요? 차라리 그 여자가 잡혀갔어야 했는데…. 회의에도 불참하고 팔자도 좋네요. 누구는 그 여자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사고 아니요. 나도 슬픈 건 마찬가지지만 하얀이 누님이 비난을 받을 정도로 잘못한 건 아니요.” “글쎄.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명예추기경님이 괜히 그 멍청한 여자를 데려갔을까. 조금만 더 자기 임무를 자각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분명히 함께 나간다는 생각에 들떠서 본인의 임무가 뭔지 까맣게 잊은 거예요. 다들 어느 정도는 동의하실 거로 생각해요. 이기영 님은 조금 더 제대로 된 호위가 필요했어요. 그런 덜떨어진 여자가 아니라.” “그건….” “하얀 씨는 일부러 부르지 않았습니다/.(,)/ 희영 씨. 아무래도 아직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것 같아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니,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희영 씨가 뭘 말하고 싶은지는 확실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된다면 추후에 반드시 조치할 테니 조금은 흥분을 가라앉히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태도는 앞으로의 작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 “…….” “후우….” “…….”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길드마스터 말대로 제가 조금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분위기를 흐리기도 했고요.” “거. 사과할 정도는 아니요. 어째서 그렇게 날이 섰는지도 잘 이해하고 있고. 그보다 이렇게 모인 건 원정이 앞당겨지기라도 한 거요?” “그건 아닙니다. 연방 탈환은 예정대로 일주일 이후에나 시작될 겁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금 더 늦게 시작될 수도 있고요.” “뭘 그렇게 꾸물거리고 있는 거요?” “그래도 본래 예정된 시간보다는 많이 줄어들긴 했군요. 사전 조사에만 9일을 소비한다는 말에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만약 정말로 그렇게 일이 진행됐다면 나 혼자라도 연방으로 향했을 거요, 기모 형님.” “최대한 당길 수 있는 만큼 당겨보도록 타국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있을 전투와 작전에만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여러분을 모이게 한 이유는 연방 쪽에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마력 홀로그램으로 보이며 기영 씨의 모습이 담겨 있다고…. 본래는 보여드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최소한 여러분에게는 공유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했고, 혹시라도 기영 씨가 뭔가 메시지를 숨겨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게 정말이요?” “네, 그렇습니다.” “아. 형, 형님이라면 분명히 뭔가 숨겨놨을 거요.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으니까. 우리 형님이야 항상 정신 차리고 있는 사람 아니요. 분명히 무슨 수를 강구했을 거라니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럼 마법 홀로그램을 재생하는 게…. 그나저나 그거 악마들이 보낸 건 확실한 거요? 혹시 형님이 이쪽에 보내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니까. 탈출에 성공해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장소에서 이쪽에 도와 달라는 종류의 메시지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빠, 빨리 틀어보쇼.”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대충 알고 있다. 하지만 그나마 희망찬 생각에 조금은 분위기가 풀어지기 시작한다. 정말로 저 말대로라면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마력 홀로그램이 켜지자 곧바로 침묵이 장내에 가라앉는다. “아…. 아아….” 비틀거리던 엘레나 님이 다시 한번 혼절했을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 모두 말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마력 홀로그램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으로 끝. “뭐, 뭐야. 저게.” “…….” 딱히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모두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 머릿속으로는 다들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가슴이 묘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으로 유추해 아직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살아 있다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외관이었다.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뭐, 뭔,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 “아무나 뭐라 말 좀 해보쇼. 지금 저기에 앉아 있는 사람이 형님이 맞는 거요?” “…….” “저, 저게 우리 형님이라고? 정, 정말로 저게 우리 형님이라는 거요?” “…….” “형님일 리가 없다니까. 분명히…. 뭐, 분명히 형님은 아닐 거요. 더러운 악마 놈들이 조작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니까.” […….] [반갑습니다. 여러분. 27군단의 만인장 중 하나이자 벨리알 님의 충실한 사도. 로노베라고 합니다.] “…….” [깜작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형태로 인사를 드리게 될 줄은 저 역시 상상하지 못했으니…. 사실 제가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된 까닭은 위대한 만마의 지배자 벨리알 님께서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전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 [쓰레기 같은 베니고어에게 선택받은 이 인간이 어떤 꼴을 당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어 하시기도 하고요. 당신들이 믿는 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능력한지에 대해 알려드리고 싶어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편하실 겁니다. 신과 가까워지는 게 얼마나 우매한 행동이며 위대한 벨리알 님의 앞을 가로막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여주고 싶어 하신다는 겁니다.] [으, 으윽….] [이 멍청한 인간이 어떤 꼴을 당하고 있는지 보일 거로 생각합니다. 이게 그 결과예요. 베니고어의 재림이라고 평가받는 이 멍청한 인간이 벨리알 님이 내민 손을 거절한 결과입니다.] [아아악, 아, 기… 잇.] [끝까지 신을 놓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는 이자를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얼마만큼의 쾌락에 허덕이고 있는지, 끝까지 타락을 거부하는 이 모습을 그 더러운 눈으로 직접 확인하셔야 합니다. 하핫.] [아, 으… 아….] [발버둥 치시고, 괴로워하고, 죽어 가라. 우매하고 더럽고 무능력한 인간들아.] “…….” [이 대륙의 빛이 꺼지는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라.] [너희가 얼마나 무기력한지 몸으로 직접 깨닫거라.] [대륙 위에 살아가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여. 우리는 너희의 공포이며.] [적이며.] [악몽이니라.] “…….” “…….” “…….” [이상입니다.] # 487 회귀자 사용설명서 487화 클리셰(1) “고생하셨습니다. 로노베 님. 기가 막힌 연기였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희의 공포이며 적이며 악몽이니라.’ 키야. 100점 만점에 110점을 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부, 부끄럽네요. 제가 뭘 고생했나요. 모두 이기영 님 덕분인데요. 만들어주신 그림에 숟가락만 살짝 얹었을 뿐이에요. 대본도 전부 다 작성해 주셨고. “대본이야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걸 잘 소화해내신 게 로노베 님의 능력입니다. 함께 일할 수 있어 얼마나 영광인지 제 가슴을 열어 보여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니요. 오히려 저 같은 악마에게 이렇게 커다란 배역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후훗. 그보다 한 잔 더 드세요. 안주도 같이 드시고요. 아~ 하시죠. “하핫. 그렇게 챙겨주시지 않더라도 제가 알아서 잘 먹고 있습니다. 로노베 님.” -호, 혹시 부담스러우신가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자꾸 제게 감사하다고 하시니 여러모로 민망합니다. 물론 제가 배역을 드린 것은 맞지만 로노베 님께서 가장 어울리실 거로 생각했을 뿐,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쓰레기 같은 베니고어라고 발언하셨을 때는 어찌나 제 속이 통쾌하던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지 뭡니까.” -후후훗. 저에게 대륙인들 앞에서 베니고어를 모욕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뿐인걸요. 아시다시피 제 생김새가 악마답지 않아서 현 차원에는 인지도가 거의 없다시피 했었는데 이걸로 조금이나마 이름이 알려질 것 같아 기쁘답니다. 베니고어의 재림이라고 불리는 이기영 님을 고문하는 척하는 것도 짜릿했고요. 대륙의 버러지 같은 인간들의 머릿속에 틀림없이 제 이름이 각인됐을 거예요. “하하하.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로노베 님은 언젠가 대륙에 공포심을 심어주는 훌륭한 악마가 되셨을 겁니다. 그동안 기회가 적었을 뿐입니다. 최근에 악마들을 소환할 구역질 나는 인재들이 줄기도 했고요. 이번 일만 잘 끝난다면 제가 전문적으로 흑마법사들을 양성하는 기관을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으세요. 물론 저희한테 감사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이기영 님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 무리한 부탁을 드릴 수는 없죠. 후훗. 다시 생각해도 너무 기분 좋네요. “저 역시 기분 좋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림이 완벽한 것 같습니다.” -저보다는 뒤에서 괴로워하시는 이기영 님의 연기력이 발군이신걸요. 역시나 벨리알 님도 감탄할 만큼 구역질 나는 영혼을 가지고 계신 분다워요. 그, 그보다 이기영 님께서는 언제쯤 언제쯤 올라오시나요? “아, 아직 계획은 없습니다. 벨리알 님께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주신다고 하셨지만, 아무리 빨라도 약 2,000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로노베가 명예추기경님께 관심 있는 모양입니다. “발리토스 님. 농이 지나치십니다. 하찮은 필멸자에 불과한 인간에게 27군단의 만인장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니. 저야 감사한 일이지만 로노베 님께서 불편해하시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하하핫. 어찌 이기영 님을 하찮은 필멸자라고 칭하겠습니까. 지금이야 그 보잘것없는 육신을 걸치고 계시지만 어차피 이후에는 함께 움직일 동료가 아닙니까. 어쩌면 제가 이기영 님을 모시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륙에서 쌓아온 이기영 님의 업적이라면 분명히 얼마 지나지 않아 500위권에도 진입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조금 더 업을 쌓으신다면 100위권에 진입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왜 자꾸 동료 취급하고 그래. 니네….’ “크흠.” -혹시라도 나중에 잘 올라오시면 저 발리토스의 이름을 절대로…. “아이고 제가 어찌 발리토스 님의 이름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건 약소합니다만 선물입니다. 마음이라고 생각하시고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뭐 이런 걸 또….” -취향에 맞으실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천천히 확인해 보시지요. 아마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저도 약소합니다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아 리무르아 님. 리무르아 님까지 이러시면 제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부디 받아주세요. 제가 너무 감사해서 드리는 선물이니까요. “자꾸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저도 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조금 좋으련만. 아쉽게도 생활 기반이 전부 다른 곳에 가 있어서….”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기영 님이 저희 27군단과 함께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저희에게는 커다란 선물이니까요. -리무르아의 말이 맞습니다. 하하핫. “이렇게 저를 치켜세워 주시니 정말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하.” ‘여기가 천국이네. 여기가 천국이야.’ 한창 정신없을 파란의 멤버들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확실히 천국이라고 할 만했다. 눈앞에 있는 온갖 산해진미와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술이 마치 산처럼 쌓인 모습을 보니 이곳이 주지육림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겉모습은 조금 흉측하지만 앉아 있는 의자 역시 무척 푹신푹신했고,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주는 시녀들의 솜씨는 전문 마사지 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대접받는 것은 이미 예상했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크게 대접받고 있는 상황. 괜찮은 배역을 받아 기분이 좋았는지 로노베가 연신 음식을 떠먹여 주는 호사까지 누리고 있었다. 뒤쪽에서 대기 중인 선물은 또 어떠한가. 대륙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진귀한 보물의 가치는 값을 따질 수도 없다. ‘이건 나중에 성과라고 구라 치고 가져가면 되는 거고….’ 나중에 정말로 지옥에 올라가도 크게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베니고어와 엘룬 쪽에서 뭘 제시할지는 모르겠지만, 심심하게 금욕적인 생활을 즐기는 것보다는 스펙타클한 악마의 생을 즐기는 게 훨씬 낫지 않겠는가. 베니고어는 내게 책임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지만, 벨리알 님께서는 달콤한 술과 금은보화를 내려주신다. 뭐가 더 끌리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위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아직은 설레발이기는 하다. 하지만 베니고어가 이쪽을 서방님으로 모시며 평생을 종처럼 살아가겠다 다짐하지 않는다면. 아니,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벨리알의 진영으로 가는 게 더욱더 이득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중 일을 고민해 봤자 뭐 하겠어.’ 일단은 눈앞에 닥친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옳다. 첫 번째 인트로 영상을 아름답게 마무리한 회식 자리에서 조금 신경 쓰였던 것은 아무래도 리무르아의 표정이다.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로노베를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로노베가 괜찮은 배역을 맡은 것을 약간 질투하는 것처럼 보였다. 혹여나 이대로 자신이 팽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직 배역이 전부 나오지는 않았으니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 ‘너는 벨리알 픽이니까 믿고 가도 된다, 리무르아야. 말을 해도 믿지를 못해.’ 기본적으로 불신과 의심이 장착된 훈훈한 모습. 마치 여배우들이 기 싸움하는 걸 실시간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옆에서 로노베가 먹을 걸 떠먹여 주면 바로 반대쪽에서 리무르아가 비워진 잔에 술을 채운다. 그녀들 뿐만이 아니다. 남자 놈들의 상황도 그다지 다르지는 않다. 얘네 둘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기는 했지만, 선물을 빙자한 뇌물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이 이번 기회를 얼마나 황금 같은 기회로 여기는지 알 것 같았다. ‘사실 이미 대충 정하기는 정했는데.’ 살 놈과 죽을 놈. 팽할 놈과 위로 올라갈 놈을 대충 분류해 놨다. 벨리알의 입김이 살짝 들어갔지만, 나로서도 굳이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나마 온건파라고 분류할 수 있는 27군단의 썩은 달걀을 제거하는 작업이었으니까. ‘벨리알이 확실히 합리적이기는 해.’ 황금알을 낳는 닭을 키우는 쪽과 배를 가르는 쪽. 둘 중 어느 쪽의 이득이 더 클지는 불 보듯 뻔하다. 어떻게 생각해도 강경파는 한탕 치고 빠지자는 한탕주의다. 대륙을 관리해야 하는 나로서도 후자보다는 전자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은 거지, 뭐.’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다짐했던 게 불과 몇 분전이기는 했지만, 정말로 2,000년 후에 벨리알과 함께 활동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미리미리 잘 보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슬쩍 반대편 끝쪽을 바라보자 현재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홀로 술을 홀짝이고 있는 녀석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27군단에 어울리는 녀석은 아니다.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여 있는 녀석. 머리 위로는 여섯 개의 커다란 뿔이 자라 있었고 눈동자는 네 개. 커다란 도끼를 애인처럼 옆자리에 두고 있는 모습은 문신보다는 무신으로 보인다. 살랑거리는 얇은 꼬리와 작은 날개를 머리 위에 달고 있는 음마 로노베. 얼굴만큼은 여신처럼 아름다운 촉수녀 리무르아. 후덕해 보이는 발리토스 같은 악마들과는 분위기부터 다르다. 나는 너희들과는 다르다고 온몸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악마 서열 1,256위 도노반.’ 소중한 파란 파티원들의 경험치 공급원. ‘준 신화급의 강자이기는 해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리무르아나 로노베 같은 이들이 조금 더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힘으로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것보다 머리를 쓰는 쪽이 더 까다롭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정하얀과 김현성, 차희라와 엘레나가 동시에 등판한다면 어렵기는 해도 이겨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역시 너네들 생각해 주는 건 나밖에 없다, 야.’ 간혹가다가 가슴 아프게 만들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 모든 게 길드를 위한 커다란 그림이 아닌가. 너무나 커다란 그림에 도화지가 찢어질까 걱정이 되지만, 일단은 모든 게 생각대로 진행 중이다. ‘연방 탈환작전까지는 한 일주일 걸릴 거고.’ 아마 마력홀로그램을 보고 애가 탔을 테니 이틀 정도 단축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방 놈들 하는 걸 생각해 보면 일주일이 더 걸릴 수도 있고. 극단적인 수단이라도 선택하지 않는 이상, 아니,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해도 이 정도 기간을 단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며 헛기침을 한 번 하자 여기저기서 시선이 날아 들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이 나올 거라는 걸 눈치챈 것이리라. “큼, 큼….”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딱히 할 말이라기보다는 전달해 드려야 할 사항이 있어서…. 아마 내일부터는 간단한 개별 인터뷰가 진행될 것 같습니다.” -아…. “본격적으로 배역 배정에 들어가야 할 시기라…. 사실은 조금 더 빨리 진행되어야 하는 게 맞지만 벨리알 님께서는 모든 분께 공평한 기회를 제공해 주고 싶으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된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벨리알은 나한테 밥 한 번 사야 한다. 진짜.’ “역할마다 비중은 다르지만 그래도 모든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죠. 중요하지 않은 역할이 어디 있나요. 그, 그래서 지원할 수 있는 배역은 뭐가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여기에서 전부 다 말씀드리기에는 조금 복잡해질 것 같습니다. 가장 비중 있는 자리만 먼저 공개하자면 아마 사천왕이 될 것 같습니다. 악마 4대 장군으로서 가장 가까이에서 벨리알 님을 보필하는 무게감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실 겁니다.” -사천왕…. -사, 사천왕…. ‘얘네들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조금 클래식하지만 마왕 강림에 사천왕이 빠져서야 되겠는가. 클리셰가 잘 먹히는 건 이유가 있다. “아, 그전에 로노베 님 오늘도 영상 하나만 더 찍고 가시죠. 이번에는 조금 더 지독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핫!” -저야 영광이죠! 물론 마왕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하는 클리셰 역시 정석 중의 정석이다. # 488 회귀자 사용설명서 488화 클리셰(2) ‘왕도는 무너지는 일이 없다.’ 여러 가지 시나리오 후보 중에서도 굳이 이번 클리셰를 선택한 이유였다. 왕도는 무너지는 일이 없다. 괜스레 상황을 꼬이게 하느니 이미 검증된 시나리오를 밀어붙이는 편이 더 안전하다. 27군단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번 일은 나에게도 무척이나 중요한 일. 걸린 게 커다란 만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대충 정리해도 이번 프로젝트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많다. 현 상황에서 가장 급한 일 중 하나인 베니고어의 파산 문제만 봐도 그렇다. ‘이건 벌써 효과를 보고 있으니까. 내 생각이 틀리지는 않은 거지, 뭐.’ 대륙에 악마 군단의 일부분이 소환된 전대미문의 상황이다. 몇 차례 보냈던 영상은 어느새 대륙 전체에 뻗어나갔고 그에 호응하듯 이미 여러 기사가 대륙 전역에 나돌기 시작했다. [명예추기경 납치사건의 전말. 바젤 교황, 그 어느 때보다도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한 때.-린델 일보 김성경 기자.] [광장에서 열리는 기도회. 바젤 교황의 눈물.-교황청 소식] [교국의 지도자 오스칼, 대륙의 악마가 사라지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교국일보]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골든타임은 길어야 10일로 추정. 파란의 김현성 길드마스터, 절대로 구해내겠다는 뜨거운 다짐.-대륙신문]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지난 생애 재조명. 연방민들을 돕기 위해 내려갔다가 봉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실리아 주간일보] [악마 숭배자 이토 소우타, 악마 소환사 진청. 두 명의 대륙 공적이 원하던 결과.-교국신문] [대주교 제이나, 베니고어 님이 도움을 주실 거라 믿어. 현 시간부터 작전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대륙 전역에서 기도회를 열 예정.-교국신문] 두말할 필요도 없이 훈훈한 소식이었다. 사실 교국에서 기도회야 매일 열리기는 하지만, 침공 전과 침공 후의 퀄리티가 같을 리 만무하다. 일반 교국민들부터 사제들까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릴 거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베니고어가 그 영향을 받게 될 거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거고. 자그마치 대륙 전체에서 한꺼번에 시작되는 기도회란다. 효과가 없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라는 거다. 파산상태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얼마만큼의 신성이 필요할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회복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상황. 겨우 이것뿐만이 아니다. 정하얀의 목줄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소소하게 느껴질 지경. 김현성의 의심을 완벽하게 벗겨내는 것은 물론 일이 끝난 이후에는 회귀자라는 고백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모르긴 몰라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혹시나 내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밝혔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따위의 뜨거운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번에야말로 서로 밀려 있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이 된 것은 당연하다. ‘얘들 레벨업 시키는 건 덤이고….’ 적폐 청산도 하고 군단 내 강경파들을 모조기 제거해 안정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도 있다. 이번 일에 사활을 걸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와는 조금 다른 이유이기는 하지만 27군단 내에 있는 만인장들도 필사적이다 보니 서로가 시너지 효과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천왕이 그리 좋더냐….’ 목숨 걸고 이쪽에 달라붙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 얼굴에 알 수 없는 비장미까지 서린 만인장들과 함께한 어젯밤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올 정도였다. 갈 땐 가더라도 사천왕 한 번은 하고 가고 싶다는 열망들이 가득했던 얼굴들. 물론 멍청한 도노반 새끼는 빼고. 사실 욕심이 아예 없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인간 놈의 장단에 맞춰주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강했다. ‘멍청해 가지고….’ 시대에 흐름에 탑승하지 못한 꼰대의 마지막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으니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녀석은 사천왕으로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현재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머리에 근육만 찬 멍청한 새끼 꼬드기는 건 일도 아니지.’ 벨리알이 도움을 준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일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녀석의 프로필을 바라보며 괜스레 입꼬리를 올리던 그때였다. 천천히 문이 열리며 익숙한 인형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 바야흐로 배역 결정전이 시작된 것이다.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중요한 프로젝트의 첫 번째 단추인 만큼 진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참가번호 1번.” -네. 참가번호 1번 리무르아입니다. 조금은 불안한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예의 그 촉수녀였다. 너무 긴장한 것 같은 모습에 제 실력을 보이지 못할까 걱정됐다. 적절한 말을 건네자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리무르아 님. 말씀드렸다시피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니까요.” -하지만…. “정말로 형식적인 절차일 뿐입니다. 편하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아. 그 전에 여기 설문지도 좀 작성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애초에 성향 따위는 전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확인과정은 거쳐야 한다. 잘 만들어진 설문지에 올바른 답을 적는 리무르아를 보니 괜스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어디 보자. 역시나 사천왕에 지원해 주셨군요. 그것도….” -제가 소화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첫 등장의 임팩트를 생각해 보면 다른 배역들은 충분히 소화하실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다만 이 역할은 다른 역할들보다 조금 더 연기력이 있어야 하는 편입니다. 이런 역할을 맡기에는 리무르아 님이 너무 아름다우시기도 하고….” -칭찬 감사드립니다. 이기영 님. 너무 기쁘네요. “끄응. 차라리 다른 쪽으로 지원해 주셨다면 오히려 쉽게 통과하실 수 있으실 텐데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자, 그럼 한번 봅시다.” 벨리알 픽으로 분류할 수 있는 내정자, 리무르아. 거짓과 선동의 군주인 녀석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믿음이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중요 배역에 박을 수는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게 가장 중요했으니까. ‘정 안 되면 비중 없는 사천왕에라도 박아놔야지 어쩌겠어.’ 특혜 논란이 일기야 있겠지만 그래도 벨리알 픽이 아닌가. 모 방송국에서 방영된 아이돌 데뷔 프로그램처럼 어느 정도의 억지는 부릴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커다란 기대감은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뒤바뀐 분위기에는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흡입력 하나는 이제 프로 배우로 발돋움하고 있는 안기모와 김예리에 감히 비견될 만했다. 진짜 연기자가 연기를 시작할 때는 공기 자체가 뒤바뀐다고 하던가. 딱 그 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흡입력 있네. 리 배우. 아주 훌륭해. 훌륭해. 키야. 이런 보물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거야.’ 마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마력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아우라다. -내, 내가, 내가… 이렇게 무너지다니. 내가 이렇게 무너지다니!!! ‘호흡 좋고, 발성 좋고.’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벌레 같은 인간 놈들! 우리 27군단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언젠가 이 대륙에 다시 돌아와 너희 미개한 인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고통에 허우적거리게 할 것이다. 너희들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 평생 영겁의 불구덩이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 내 말을 잊지 마라. 벌레 같은 인간들아. 우리는. ‘어우, 눈빛 봐. 왜 이렇게 섬뜩해?’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목소리도 듣기 꺼림칙하고.’ -벌레 같은 인간 놈들을 모두 밟아 죽일 때까지 27군단의 리무르아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야!!! 네놈들을 전부 다 찢어 죽일 것이야!!!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겠어어어어!!! 마치 가시를 한껏 세운 고슴도치처럼 촉수를 세우고 있는 모습. 눈에서는 핏물이 흘러나오고 분노로 인해 온몸이 파르르 떨린다. 입술을 꽉 깨물었는지 입가에서도 피가 나온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모습이다. 이거 조금…. ‘정하얀 같은데.’ 극대노를 맞이했을 때의 정하얀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전에 그녀와 부딪쳤던 게 확실히 도움이 된 모양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하얀의 모습을 벤치마킹한 것처럼 느껴졌다. 원정대에게 질릴 정도의 공포를 전해야 하는 배역이니만큼 리무르아의 외관으로는 무리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쪽의 예상을 완벽하게 뒤엎어 버렸다.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킨 것은 물론 곧바로 손뼉을 치기 위해 손을 움직인다. “완, 완벽했습니다. 와…. 살기와 마력을 뿌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라니. 솔직히 리무르아 님의 외관으로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뭐라고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정말로요.” -그… 게 정말입니까? “네.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어째서 벨리알 님께서 리무르아 님을 그렇게 신임하시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인제 보니 이거 27군단의 보물이셨군요.” -부, 부끄럽습니다. 이기영 님. 사실 그때 봤던 미친 여자에게 조금 힌트를 얻었을 뿐이라.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건 그걸 소화해낸 리무르아 님의 연기력 아니겠습니까. 이건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군요. 딱히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네? “하하하. 조금 이른 것 같은 타이밍이지만, 이 배역은 리무르아 님을 위해 준비된 배역인 것 같습니다. 사실은 다른 분들과도 면담을 진행해야 하지만, 더 이상 두고 볼 필요도 없어 보여서…. 네. 캐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갑시다.” -꺄악! 감사합니다! 평소답지 않게 짧게 비명을 질리는 모습에는 괜스레 내가 더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조금씩 조금씩 기틀을 잡아가기 시작하는 프로젝트에 괜스레 훈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깐에 불과했다. ‘하….’ -뭐, 뭐, 뭐, 뭐라고? 정하얀처럼 말을 더듬기 시작하는 녀석부터. -녀석은 사천왕 중에 최약체였을 뿐이다. 겨우 녀석을 처리하고서 너무나도 기고만장한 것이 아닌가? 딱딱한 발음으로 국어책을 읽는 녀석까지. 주연급 배우들의 연기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조연이 없으면 주연도 살 수 없는 법이다. 안기모와 김예리, 박덕구라도 데려오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현재의 심정이 어떨지 다른 표현이 필요 없었다. “참가번호 34번.” ‘지뢰!’ “참가번호 49번.” ‘넌 안 되겠다.’ 결국에는 나머지 사천왕의 비율을 줄이는 것까지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사천왕 내정자 중 하나인 도노반이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하지만 기분 나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묵직하기로 소문난 녀석이 이런 어린애 장난 같은 일을 반길 리 없었으니까. ‘어디 보자….’ “참가번호 56번. 아… 이거 도노반 님이셨군요. 어서 들어오시죠. 도노반 님. 이렇게 참가해 주셔서 무한한 영광, 또 영광입니다요. 오늘도 역시나.” -그만. 그 더러운 입을 찢어버리기 전에 그만 놀리는 게 좋을 거다. 벌레 같은 인간. “…….” -나는 네놈의 그런 어린애 같은 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다. 벨리알 님께서 네놈과 개인 면담을 진행해 보라고 말씀하셨기에 들어왔을 뿐이다. 면담이나 오디션 같이 웃기지도 않는 짓거리를 할 생각도 없고, 네놈의 생각대로 움직여 줄 생각도 없다. ‘이… 개 같은 새끼.’ 예상은 했지만, 그보다 더 비협조적인 모습. 주먹이 꽉 쥐어졌지만, 일단은 기분 좋은 척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 489 회귀자 사용설명서 489화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1) -구역질 나는 놈. 27군단의 암 덩어리 도노반. 전형적인 무신이며 타협을 모르는 전사. 현재는 27군단이라고 불리는 벨리알 군단의 초기 멤버. 개인적으로는 가장 내가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리무르아나 로노베, 발리토스 같은 이들과는 달리 성향 자체가 벨리알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이. 아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녀석을 봤다면 녀석이 27군단의 멤버라는 것 자체에 의문을 느꼈을 것이다. 이 도노반이라는 희생양은 그만큼 이 군단과 동떨어진 녀석이었다. 하지만. ‘다 과거의 업이지. 과거의 업이야.’ 이건 모두 과거의 업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27군단이 떡상하기 전에 벨리알이 68군단의 수장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72군단의 끝자락, 강등권에 걸쳐져 있는 프로축구팀마냥 필사적일 필요가 있었을 거다. 72군단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마 더 했을 거고. 아마 물불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성향에 맞지 않은 이들을 영입하며 덩치를 키웠을 것이 분명했다. 군단이 아직 어수선한 것은 분명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얘가 이래서 쓰레기야….’ 벨리알의 인성이 분리수거 안 되는 폐기물 수준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 당연했다. ‘이제 덩치는 커질 만큼 커졌다, 이거지.’ 강등권에서 벗어나 27군단으로 날아올랐으니 덩치보다는 퀄리티에 집중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것이다. 이제 좀 자기 색깔을 군단에 물들이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도 지금껏 고생해 준 부하들을 팽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쓰레기 같지 않은가. 뭔가 나름의 이유가 있기야 하겠지만, 지 손으로 팽하는 그림은 조금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이쪽을 이용하려고 하는 심보마저 완벽한 쓰레기 그 자체. 아직 나는 멀었다는 생각에 힘껏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넓고 쓰레기는 많다. 빛기영이 아직 완벽하게 어둠에 휩싸이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나야 뭐, 꿩도 먹고 알도 먹고 개이득이기는 한데. 솔직히 조금 불쌍했는데 이제는 불쌍하지도 않다, 야.’ 챙길 것도 다 챙겼으니 아쉬울 것도 없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형식적인 자리를 빠르게 해결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슬그머니 입을 털 준비를 마치자 여전히 짜증 난다는 듯한 도노반의 얼굴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쉬울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천천히 가봐야지, 뭐.’ 이 적폐 오디션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주연급 배우, 도노반. -적당히 시간만 때우고 갈 생각이니 내 앞에서 그 더러운 입을 놀리는 일이 없도록 해라. 인간. “…….” -솔직히 너 같은 쓰레기가 벨리알 님의 옆에 있는 것도 편치 않아. 지금 당장에라도 그 여리디여린 목을 비틀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 최대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응대를 하려고 했지만, 이쪽의 미소가 무색해질 정도로 적의를 보내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녀석의 몸에서 삐져나오기 시작한 살기에 솔직히 방을 박차고 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미 예상했던 바다. 솔루션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나가자 조금은 의외라는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설문지는 작성해 주셔야 합니다, 도노반 님. 벨리알 님께 도노반 님이 이곳에 왔다는 증거를 만들어놔야 하니. 애초에 도노반 님께서 이번 프로젝트를 반기지 않을 거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습니다요.” -네가 나를 우습게 본 모양이군. 내가 분명히 그 더러운 입을 놀리지 말라고! “합격입니다.” -뭐? “합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도노반 님.” -아무래도 네가 정말 주제 파악을 못 하는 모양이군. 벨리알 님을 믿고 있는 거라면 오산이다, 인간. “아니요. 아닙니다. 도노반 님. 저는 항상 위대하신 만인장분들의 말씀을 가슴속에 새기고 또 새기고 있습니다요. 제 주제 역시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가 방금 도노반 님께 합격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제 뜻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벨리알 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부디 노여워하지 말아주시옵소서.” -그게… 무슨 소리지? “도노반 님께서는 현재의 27군단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멍청한 새끼 하나 구슬리는 건 일도 아니죠.’ -그러니까 지금 무슨 개 같은 소리를 하는 건지 묻지 않았나. “제가 드린 질문에 답이 들어 있습니다. 도노반 님 흥분하지 마시고 잠깐만 이 필멸자와의 대화에 호응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도노반 만인장님께서는 현재의 27군단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 “아마 정답을 알고 계실 겁니다. 현재의 27군단은….” -……. “유약하지요.” -유약하지 않다. 감히 네가! 27군단의 강함을 네 잣대로 평가해? “무력을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정신적인 부분입니다. 아주 예전, 벨리알 님께서 이제 막 72군단의 좌에 오르실 때의 27군단은 분명히 이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투지 넘치고 용기 있는 전사들과 함께 싸우고 피와 살육이 끊이지 않던 과거의 27군단은 지금보다 덩치가 작을지언정 강하며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가 무얼 안다고 지껄이는 것이냐. 쓰레기 같은 인간이…. “하지만 요즘 젊은 악마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광스럽고 피와 내장이 난무하는 전쟁보다 계약과 실적에만 집중하는 영업사원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항상 트랜드라는 건 변하는 법이니까요. 무엇이 더 쉽고 안전한 방법인지 깨달은 것뿐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과거 영광의 살아 있는 주역이신 도노반 님 같은 진짜 전사분들의 성에는 차지 않으시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벨리알 님은 중도의 길을 걷자고 하십니다.” -뭐? “강경파와 온건파의 조화.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걸으려고 하신다는 겁니다.” -……!! “벨리알 님 역시 그때 그 시절을 잊지 못하고 계신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도노반 님.” 슬그머니 녀석의 얼굴을 확인한 것은 당연했다. 악마답지 않게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진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자세히 뭘 느끼는 건지는 내 알 바가 아니지만 무언가 감정이 북받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악마도 눈물이 나오는구나.’ ‘울어서 네 순수를 증명해 봐!’라는 어딘가의 명대사를 써먹을 수 없어 약간 가슴 아프기는 했지만,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대화에는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27군단은 어떻게 봐도 온건파가 우세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벨리알 님께서는 육체적 능력이 미약한 악마들을 가엾게 여겨 그들을 들이시고 키워주셨지만 그다지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젊은 악마들이 현재의 27군단을 이끄는 주축세력이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그들로 인해 영광과 명예를 잃어가는 군단에 대해 고민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물론 최근 도노반 님의 심정도 이해합니다.” -……. “불만이 많으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정점에 올라서면 여러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27군단이 현재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분을 너무 원망하지 마십시오.” -나는 단 한 번도 벨리알 님을 원망한 적이 없다. “벨리알 님이 도노반 님을 이번 계획의 핵심으로 삼으신 것과 비밀리에 이걸 전하라고 하신 것은 모두 이러한 연유입니다.” -……. “도노반 님을 비롯한 군단 내 강경파들에게 힘을 실어 리무르아나 로노베, 발리토스 같은 악마들과의 균형을 맞추고 싶으신 겁니다. 벨리알님께서는 이후 자신을 보좌할 사천왕에 도노반 님을 들이고 싶어 하고 계시며 이번 계획이 바로 중도의 길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제 말이 거짓 같으시다면 직접 벨리알 님께 확인과정을 거치셔도 됩니다. 도노반 님.”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그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벨리알 님의 모습이었으니. 중도의 길…. 중도의 길이라. “이번 발걸음은 개인에게는 아주 작은 발걸음이지만 27군단이 한 계단 올라가게 될 의미 있는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도노반 님. 부디, 제 제의를 받아들이신 이후, 27군단에는 도노반이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시지요. 도노반 님이야말로 이번 작전의 핵심이며 모든 것입니다.” -……. “벨리알 님의 뜻입니다. 도노반 님.”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녀석이 시야에 비친다. ‘걸렸나.’ 라는 생각을 아주 잠시 해봤지만 상황이 그렇게 흘러갈 리 만무하다. 무려 벨리알을 팔아먹었으니 의심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너. “예.” -생각했던 것보다 썩은 인간은 아니로군. “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대 역시 같은 생각인가. “어딜 제가 뜻이 있겠습니까. 벨리알 님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필멸자에….” -나는 너 역시 같은 생각이냐고 물었다, 인간. “물론입니다.” -……. “벨리알 님이 걸으려고 하시는 중도의 길은 절대 쉽지 않겠지만, 만약 27군단이 중도를 걷는 군단으로서 자리매김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하는 것은 물론, 정체된 지옥에 새로운 활력과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강경파와 온건파 그리고 중도. 지금껏 둘로 분류되어 있던 지옥의 세력 구도를 단숨에 세 개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하삼분지계입니다.” -천하… 삼분… 지계…. “27군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옥의 중심이 돌 것입니다. 도노반 님의 그 검.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기영 코인 떡상하나요!’ 흘러가는 상황을 보니 내부 평가가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것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한다. 우물쭈물 무언가를 말하는 모습은 귀엽기보다는 무섭다. 녀석이 갑작스레 주먹을 뻗어온 것은 바로 그때. ‘이 개새끼 미쳤나.’ 순간적으로 무척이나 놀랐다. 하지만 그 주먹이 무척이나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는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게다가 식은땀까지 흘리며 힘 조절을 하는 모습.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손으로 개미를 눌러 죽이지 않고 터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몰라 조심스레 팔을 드니 아주 약간의 충격이 느껴졌다. ‘뭐 하자는 거야. 이 미친놈이.’ 쑥스러운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주먹을 나누면 친우다. ‘아…. 아직도 이런 쌍팔년도 감성을 못 버리니까 팽 당하지요.’ “영광입니다.” -2,000년이라. 생각보다 길군, 함께 싸울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인간, 아니, 내 친우여. 미안한 소리지만 그 날은 평생 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새끼는 이번 전쟁에서 불행한 사고로 죽을 테니까. ‘못난 친구를 둔 도노반에게 미안하네.’ 사과의 의미로 가장 멋지게 산화하는 모습을 그려주리라. 그렇게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 490 회귀자 사용설명서 490화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2) 사천왕은 리무르아, 도노반, 발리토스, 마지막으로 카르페디악으로 결정됐다. 로노베가 사천왕에 들지 못한 것을 섭섭해하기는 했지만 이게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얘는 그동안 많이 나와서… 이미지 소비가 너무 심했으니까.’ 익숙한 것도 좋지만 역시나 신선한 인물을 내세우는 게 좋다는 판단이었다. 이 음마는 그동안 어그로를 너무 많이 끌어 분노가 집중될까 걱정되기도 했으니 어떻게 봐도 적절한 판단이라고 할 만했다. 여러모로 평범해 보이기는 했지만 카르페디악이라는 악마가 보여준 연기가 임팩트 있었다는 게 유효했다. 아무튼,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배역을 정하는 데 제법 힘을 썼다. 현세에 소환된 악마 군단은 크게 4개로 나누어 운용하려고 하기는 했지만, 구석구석을 쑤셔주는 조연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박진감 넘치는 전투를 위해 전투력 측정기들부터 보급관이나 기동타격대, 심지어 지원중대까지 모두 배역으로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세세한 역할 배정이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이런 디테일이 완성도를 높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장센 역시 허투루 볼 수는 없었다. 어떻게 보면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27군단을 이끄는 벨리알의 사천왕이 꽃밭에서 싸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네들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에 어울리는 배경을 설정해 줘야 한다는 걸 모르는 이들은 없으리라. 대륙 전역으로 뻗어나갈 영상을 찍는다고 가정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인간들과 처음 만나게 되는 장소부터 클라이막스가 일어나는 장소까지. 각 사천왕마다 가지고 있는 이야기와 공략법이 다르다 보니 여러 가지고 신경이 쓰였다. 오죽했으면 제법 신경이 곤두섰을 정도. 커다란 이벤트를 앞두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조금 신경질적으로 변한 이쪽의 태도에 만인장들이 당황스러워할 정도였다.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 “아, 여기는 조금 더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몇 번이나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발리토스 님이 전투를 펼칠 곳인데.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아…. 정말로…. 아….” -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십니까. “발리토스 님. 발리토스 님과 벌레같은 인간들이 격전을 벌여야 하는 장소가 어딥니까?” -식, 식량 창고입니다만…. “제가 허투루 식량 창고를 배정해 드린 것 같습니까? 분위기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이 장소를 이런 식으로 마감할 수 없는데.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는 뭣 하지만 발리토스 님은 사람 고기를 즐기는 쓰레기 같은 악마란 말입니다.” -이, 인간 고기는 맛이 없…. “실제로 드시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저도 기본은 인간이라 그런 꺼림칙한 주문을 드리지는 않습니다. 그냥 정체불명의 고깃덩어리 몇 개 걸어주세요. 가져온 마수 고기 많지 않습니까. 어차피 여기 온 놈들도 대충 보면 사람 고기구나 하고 생각할 겁니다. 여러 가지 조리도구나 가마솥 같은 곳에 뭣 좀 채우시고요.” -네, 넷. “체력이 딸린다 싶으시면 이곳에 있는 고기들을 삼키시고 체력을 회복하시고, 그게 발리토스 님께서 부여받은 기믹입니다. 벌써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드실 게 있어야 조금 더 오래 인간들에게 공포를 심어줄 수 있지 않습니까.” -죄… 송합니다. 이기영 님. “제가 괜히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벌레 같은 인간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도 기분 나쁘시겠지만 전부 다 발리토스 님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진심으로요.” -어떻게 이기영 님의 뜻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 누구보다 27군단을 위해 힘써주시는 것 정도는 저 발리토스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그만큼 저를 위해주시는 것 역시. “후우. 아직 안심하실 때가 아닙니다. 발리토스 님. 아마 알고 계실 거로 생각합니다만, 최근 울카록스 님이….” -그, 그건…. “배역을 땄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라는 거. 전부 아시지 않습니까. 후우.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세 시간 이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만약 그때까지도 제대로 마무리가 안 돼 있으면 벨리알 님께서 무척 유감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네. “그리고 여기 오기 전에 들어오는 입구도 너무 깔끔하던데 조금은 더럽혀 주세요. 있던 긴장감도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깔끔한 걸 좋아하시는 성격은 이해가 가지만 역할에 조금만 더 충실해 주세요. 청소 좋아하는 악마를 무서워할 인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대충 이런 상황이다. ‘하, 우리 얘들 들어오기까지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얘는 진짜 너무 준비가 안 돼 있다.’ 약 10일 정도 걸릴 거로 생각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무슨 약을 빤 거야….’ 안쪽의 사정을 아주 자세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겉으로만 봐도 보이는 게 있는 법이다. 병력들이 결집하는 속도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고 보급 물량 같은 건 옛날 옛적에 맞춰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연방 놈들이 중간에 훼방을 놓을 거라고 계산했건만 지옥불의 게르한이나 자밀라 이놈, 년들도 대세에 편승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기존 병력과 잘 조화된 것처럼 느껴졌다. 공화국이 눈에 불을 켜고 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실제로 최근에는 꽤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는 정찰대도 연방 내 주요지역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 군단 측에서 일부 정보를 흘리기는 했지만, 흘리는 족족 주워 먹는 정찰대는 이게 내가 아는 대륙 연합이 맞는지 의심하게 할 정도. 유기적으로, 또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유능하다고 말할 만했다. 물론 예상보다 인류가 하나가 되는 시기가 빠르다는 건 반가운 이야기였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뭐든 급하면 부작용을 떠안기 마련이었으니까 지금이야 함께 싸우자고 협의해 힘을 모으기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잡음이 나오지 않을 리 없다 이 전투가 끝난 이후에 불편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조금 찝찝함이 남았다. 물론 그 찝찝함보다 더 찝찝한 것은 현재의 내 상황. ‘그래도 아직 시간이 남아 있기는 해.’ 기본적으로 벨리알이 영역으로 삼은 연방의 대도시들이 모두 암흑 상태가 되어 있다 보니 신성력으로 불을 켜고 올 수밖에 없다. 중간중간 거점이라고 생각되는 곳들을 모두 공략해야 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아직 아메라에 도착하기에는 이르다. 굳이 중간 관리자와 보스들을 넣은 이유라 할 수 있으리라. 연방탈환 공략의 기본 골조는 차근차근 한 계단씩 공략해 들어가 맵을 밝히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벨리알의 영역이 아닌 장소에서는 27군단의 기본 능력치가 하락한다는 기믹도 사전에 깔아놨다. 대륙 연합의 전략팀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차근차근 공략을 진행할 것이다. ‘완벽하게 준비해야 돼. 완벽하게.’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상황이다. 나답지는 않지만 걸려 있는 게 많다 보니 그만큼 압박받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리무르아, 얘를 보면 조금 안심이 됐다. 아메라 지역을 관리하게 될 사천왕. 촉수라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버리지 않고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까지 완벽. 모든 게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게 표현된 모습이었다. -조금 어떠신지…. “리무르아 님은 딱히 뭐라고 설명해 드릴 게 없군요. 대단하십니다. 맵 자체를 전부 촉수로 덮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는데… 적당히 그로테스크한 느낌도 있고 적당히 잔인한 느낌도 있는 게… 아마 심장이 약한 인간이라면 이 장소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자지러질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아직 많은 게 부족합니다. 디테일적인 부분을 제대로 손보지 못해서… 혹시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조금 촉박하게 생각해 보면 대략 4일 정도가 남았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빠르면 이틀 정도일 수도 있고요. 전체 리허설은 하루 전날에 시작되겠죠. 음.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리무르아 님의 역할이 뭔지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당연히 숙지하고 있습니다. 이기영 님. 설정상으로는 제가 군단에서 소환된 모든 악마를 유지할 수 있는 마력을 아메라에 있는 인간들과 이기영 님의 몸에서 뽑아내고 있는 게 맞습니까? “아, 정답입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걱정하시는 게 당연하 건데요. 뭐. 무엇보다 이기영 님께서 짜주신 캐릭터 설정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요. 제 사랑스러운 촉수들과도 어울리는 기믹이기도 하니 정말 좋아할 수밖에 없네요. 이런 기회를 통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렇게 따로 새로운 설정을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기영 님. “능력 있는 배우에게 좋은 역할을 드리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까지 감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하, 항상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번 계획에서는 리무르아 님의 역할이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인간들을 모아놓은 창고가 털리면 소환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니. 사실상 이번 계획에 시작이자 끝이나 다름없습니다.” -배역에 대한 그 막중한 책임감은 항상 느끼고 있어요. 정말로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릴 뿐입니다. 만약 이번 일이 잘 풀리게 되면 정말로 촉수로 마력을 흡수하는 권능을 한번 만들어 보려고요. 그만큼이나 실적을 쌓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하하. 상상만 해도 잘 어울리는 권능이십니다.” -아, 그보다 이기영 님. 그러고 보니 도노반 님은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신 것 같은데, 혹시 비협조적이거나 그러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게 맞다면…. “아.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 도노반 님께는 딱히 지역을 배정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네? 어째서…. “도노반 님의 역할은 수비가 아니니 딱히 이곳에서 따로 준비하고 계실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음, 리무르아 님에게만 먼저 말씀드리는 건데 사실 도노반 님께서는 합동훈련소에 모여 있는 인간들의 본대를 직접 타격할 예정입니다.” -아….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시고 첫 전투에 임팩트를 잡아주시기에는 도노반 님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확실히 어울리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걱정됩니다. 나쁜 분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성향 자체가 많이 다르다 보니. 솔직히 이번 일에 합류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지셨거든요. 본래 이런 일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라. “하하하. 저도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벨리알 님께서도 도노반 님을 한 번쯤 믿어봐도 괜찮을 거라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동안 군단을 위해 힘써주신 분이니까요.” -역시 그럼 다른 지역은 준비가 다 된 겁니까? “아직 부족하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전부 끝내놓은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그림은 모두 완성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아직 손을 봐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혹시라도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아니요. 리무르아 님은 맡은 역할에만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굳이 다른 일까지 신경 쓰실 필요가 없죠. 이 프로젝트의 주역이신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끄럽습니다. “리무르아 님이 직접 쟁취한 자리입니다. 조금은 당당히 어깨를 펴셔도 됩니다.” 관리자들이 깔아놓은 판 위에서 열심히 하면 당연히 인정받게 되어 있다. 리무르아는 딱 그 경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조금 불안했던 마음에 조금씩 행복 회로가 들어간 것은 당연했다. 그 행복 회로가 타격을 입게 된 것은 정확히 3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이기영 님. “네.” -저… 인간들의 군대가 벨리알 님의 영역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어, 어떻게 할까요? “네?” ‘뭐가 이렇게 빨라? 씨발.’ 상정하고 있던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였다. ‘얘네 갑자기 왜 이렇게 빠릿해졌어?’ # 491 회귀자 사용설명서 491화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3)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급해졌다. ‘진짜 약이라도 빨았어?’ 대륙 연합이 한 계단 성장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즐거운 상황이기는 했지만 현재로서는 즐겁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이사 후 집 정리가 끝나지도 않았음에도 집들이 손님들이 들이닥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아무리 그래도 아메라까지 당도하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만, 솔직히 똥줄이 탈 수밖에 없었다. 본래 던전 공략에 필요한 절차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 돌진해 오는 것이다. ‘미친 것도 아니고 진짜….’ 아무리 이쪽에서 정보를 퍼줬다고 한들, 현재 대륙 연합이 가지고 있는 정보로 공략 작전 자체를 실행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에 가깝다. 현재 녀석들이 모은 정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각 거점의 위치나 사천왕의 존재일 터다. 심지어 도노반과 카르페디악의 소재는 조금 조심하라는 의미로 흘리지도 않았다. 식량 창고에 자리 잡은 식인악마 발리토스와 아메라의 중심에서 소환 유지에 필요한 마력을 뽑아내고 있는 리무르아의 소재. 그리고 그 외 자잘한 몇 가지 공략 팁. 딱 이 정도가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 전부였다는 거다. ‘외곽 공략부터 진행하면서 정보를 모으겠다는 심산인 건가? 아무리 준비가 빨라도 한계가 있을 텐데. 제대로 준비한 건 맞아?’ 적 지휘부가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적어도 김현성의 스타일이라고는 볼 수 없는 병력 운용이었다. 이런 종류의 공략에서 녀석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첫 번째도 안전, 두 번째도 안전이었으니까. 차희라가 있는 붉은 용병의 주도로 움직이고 있을 거로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불 같은 성미의 바젤 추기경이 사고를 쳤을 가능성도 있지만 조금 더 점수를 주고 싶은 쪽은 역시나 붉은 용병 주도설. 물론 단순히 압박하고 반응을 보려는 계획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에는 잠깐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43거점이 무너졌습니다. “네?” ‘방금 집결하고 있었다며 갑자기 43거점은 왜 무너지는데.’ -41거점에서는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아직은 별다른 피해가 없어 보이며 일부 사제들의 내뿜는 빛에 벨리알 님의 영역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역겨운 베니고어의 신성력 때문인지 중급 악마들로 막아내기에는 속수무책입니다. ‘얘네, 진짜 약 빨았나 봐.’ -42거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벌레 같은 인간 놈들이 아주 약이 바짝 오른 모양이더군요. 일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도 재미없어, 이 새끼야.’ 조금 당황스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주변 악마들은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기 시작. 이제야 지루한 시간이 끝났다는 듯이 즐거워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현재 일이 꼬이고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똥줄이 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완벽하게 일이 진행될 거로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초장부터 상황이 계속 꼬이고 있었으니까. ‘아, 이거 괜히 나선 거 아닌가. 괜히 한다고 했나….’ 본래 감독이니, 총책임자니, 프로젝트 매니저니 하는 자리가 이렇다. 잘되면 모두에게 칭송을 받고 존경받는 인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실패하는 순간 모든 책임을 지게 되기도 한다. 지금이야 벨리알이 우리 기영이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를 시전해 주고 있지만 일이 망해가는데도 호의적인 시선을 보낼 리 만무하다. 수천 년 동안 자신을 보좌하던 충신을 제거하는 쓰레기 같은 악마 놈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커다란 걱정이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현재까지는 위험할 정도로 일이 틀어진 것은 아니다. -슬슬 시작이로군요. 하하핫. 이거 정말로 기대됩니다. 이기영 님. “하, 하하.” -이것도 머릿속에서 계획 중인 시나리오 중 하나이신 겁니까? 병력을 모두 채워넣기 전에 인간들이 공격해 들어오는 걸 예상하시다니. 과연…. “뭐, 그렇다고 보셔도 무방할 겁니다.” -하지만 너무 쉽게 무너진 것은 아닌지. 거점에 조금 더 병력을 투자해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지원군을 보내기에도 이미 늦기도 했고, 이대로라면 아무런 실적도 없이 3거점을 준다는 게 조금…. -하하하하. 뭘 그렇게 걱정하고 계십니까. 이기영 님이라면 필시 다른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생각 없어. 이 새끼들아.’ 하지만 입은 멋대로 열리기 시작. 거의 본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핫. 본래 적당한 희망이 있어야 이후 맞이할 절망이 더욱더 큰 법입니다. 오늘의 승전보에 취해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취한 인간 놈들에게 고통을 줄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역시 그렇군요. 하하하하. 그럼 41부터 43거점은 본래부터 버리는 패였던 겁니까. 이거 깜빡 속았습니다. 이기영 님. 과연 대단하십니다! 정말로 대단하세요! 당연히 버리는 패는 아니었다. 이렇게 쉽게 날치기로 통과될 거점도 아니었고. 솔직히 아쉽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대륙 연합 측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눈에 보이기는 한다. 41거점, 42거점, 43거점, 전략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세 개의 거점을 우선 빠르게 공략한다. 이후 이 세 개의 거점을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의도가 너무 명확하다. 안정적인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이 전진기지의 필요성은 충분하고도 넘친다. 정보 수집이 탄력을 받게 될 거라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다. 교국과 공화국을 예로 들어본다면 캐슬락 같은 곳이라 봐도 무방하다. 적당히 해 처먹고 지옥으로 돌아가야 하는 악마들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내어줘야 할 거점이기는 하다. 하지만 치열한 접전을 통해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아까운 것이 사실이다. 1차원적으로 봤을 때는 이기영 경질설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이었다. ‘이기영 호 침몰, 포백 수비 고질적 문제.’ ‘정답은 세트피스. 아쉬운 첫 경기.’ 이름 모를 나라의 축구 감독을 비판하는 기사가 갑작스레 생각나기 시작한다. “아마 마법으로 커다란 성벽을 쌓고 공략한 거점을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생각일 겁니다. 연방 쪽으로 뻗어나가기 유리한 지형에 있으니까요. 아직 정보가 부족하기도 하니 정보 수집은 덤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도노반 님을 투입해야지요.” -아…. “똘똘 뭉쳤던 인간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건 순식간일 겁니다.” -역시나 그렇군요. ‘대충은 둘러댈 수 있겠는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에 있던 악마들이 갑작스레 무릎을 꿇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이게 뭔 일이야’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몸이 반응하기 시작. 높은 분이 등장했다는 생각에 잦은 사회생활로 단련된 무릎은 너무나도 쉽게 바닥을 마중 나갔다. 같은 자세로 부복한 이후 들려온 것은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 -잘들 되어가고 있나. ‘벨리알. 시바….’ 왠지 모르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27군단의 지배자. ‘얘는 갑자기 또 여기 왜 온 거야.’ -벨리알 님을 뵙습니다. -만마의 지배자이신 벨리알 님을 뵙습니다. “지고의 존재이시며 세상 모든 필멸자들의 존경을 받아 지옥의 대군주 벨리알 님을 뵙습니다요. 오늘도 참 존엄하신 모습이옵니다.” -아부는 되었다. 그런 소리를 듣기 위해 이곳을 찾은 건은 아니니. 소식은 들었다. 역겨운 인간. “네?” -41거점과 42거점, 43거점을 성과 없이 잃었다지. ‘시바….’ “어차피 잃어야 할 거점이었습니다. 일은 잘 풀려가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벨리알 님.” -탓하기 위해 말을 꺼낸 것이 아니니 긴장할 필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겠지. 어차피 이것 역시 모두 네 역겨운 머릿속에 들어가 있었던 시나리오가 아닌가. 이 정도 일로 허둥지둥할 정도로 나는 멍청하지 않아. 그동안 고생하지 않았나. 단지 그걸 치하해 주고 싶을 뿐이다. 생각보다 조금 이르다만 어찌 됐건 27군단으로서의 첫걸음이 아닌가. ‘그러니까 왜 이렇게 동료 취급을 하고 그래.’ “그렇기는 합니다만….” -장차 27군단의 미래를 짊어질 네가 출사표 없이 나간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도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했고. “그 말씀은….” -아무 말 하지 말고 따라오라. ‘제기랄. 이제 스케일은 그만 좀 키웠으면 좋겠는데. 그만 좀 키워.’ 스케일이 커지면 커질수록 혹여나 실패했을 때의 상황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담담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역시나 가슴은 좌불안석. 갑작스레 높아진 부담감에 괜스레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어진다. 벨리알은 평소답지 않게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었고, 심지어는 조금 기분이 업된 것 같은 표정이다. 저 감정이 분노가 됐을 때의 상황을 생각하니 괜스레 입술이 바짝 말라오기 시작했다. -축하드립니다. 이기영 님. -벨리알님께서 정말로 이기영 님을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있는 떨거지 악마들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이쪽에 환호를 보냈다. 대답하기 싫어 시선을 고정한 채 벨리알의 뒤를 따라가자 시야에 비친 것은 도열해 있는 27군단이었다. -우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왠지 이럴 것 같더라니. 씨바….’ 심지어 만인장들도 위치한 모습은 가관. 장관이고 절경이라 부를 만했지만 내게는 가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경건히 앞에 서서 박수를 보내고 있는 모습은 진심으로 이번 프로젝트의 시작을 축하하는 것 같은 얼굴들. 리무르아와 로노베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도노반마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낸다. ‘그만해! 이 새끼들아. 적당히 좀 띄워도 된다.’ 이미 전투 준비를 마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평소의 예복과는 다르게 모두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갑옷으로 온몸을 가리고 있는 도노반이나 기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로노베. 다른 악마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내지르는 함성은 귀와 심정을 저릿하게 울리게 할 정도. 이 광경을 보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벨리알의 얼굴에는 어딜 봐도 흐뭇함이 가득했다. 단상 위에 올라가 한 곡조 뽑아보라는 듯 나를 이끄는 손길이 두려워지기는 처음이다. 이런 무대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 상황에서 말을 잇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벨리알 님. 27군단의 출정입니다. 벨리알 님께서 직접 한마디 내려주시는 게 이들에게도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역겨운 인간. 아니, 이제는 이기영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군.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 네가 준비한 것이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굳이 숟가락을 얹을 정도로 철판이 두껍지는 않아. ‘좀 얹어도 된다니까.’ -보이나? 지금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27군단을 지배하는 군단장이 바라보는 풍경이다. ‘어쩌라고 시바….’ -지금 네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은 아주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아… 네.” -언젠가 네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기도 하지. 어떤가. 마음에 드나?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조, 조금 부담됩니다. 벨리알 님께서 저를 신경 써주시는 것만으로도 이 우매한 필멸자는 영광 또 영광입니다.” -진심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진심이다. 진심이야.’ -올라가 보아라. 그리고 군단에게 네 목소리와 네가 누구인지를 알리거라. ‘제기랄.’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마치 협의문을 작성하기 전 사진이라도 찍는 정치인처럼 어깨를 붙잡고 있는 벨리알의 모습에 다시 한번 커다란 함성이 튀어나온다. 눈치 없는 자식이 엄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이쪽의 등을 떠미니 자연스럽게 몸이 단상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장내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눈을 질끈 감고 무슨 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에는 천천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너무나도 영광입니다. 친애하는 동료 여러부운!!! 마치 저당이라도 잡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 492 회귀자 사용설명서 492화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4) 솔직히 몇 마디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당연했다. 오늘따라 가면쓰레기 진청의 마지막 대사가 뇌리에 강하게 틀어박혔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여기까지 온 이상 칼이라도 뽑아야 한다. 자그마치 벨리알이 이쪽을 배려해서 만들어준 자리다. 영광스럽다는 얼굴로 열정적인 표정을 선보여야 옳다. 거짓과 선동의 악마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쪽을 단상에 세웠을 리 없다. 분명히…. ‘원하는 게 있기야 있겠지.’ 악마 군단에게 인사를 하고 사기를 일으키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벨리알이 가장 가려워할 곳을 긁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다시 한번 조심스레 입을 열자 커다란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 총책임자를 맞게 된 여러분의 영원한 우방, 여러분의 영원한 친구,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27군단의 외부고문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외부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이렇게 자리를 꽉 채워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먼저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우워어어어어어어어어!!! 다행히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우리는 커다란 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네. 커다랗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앞으로 27군단이 더욱더 성장하게 될 분기점이며 한 단계 더 도약할 커다란 기회입니다. 아마 의문을 느끼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어째서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하면서까지 이번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가. 어떻게 보면 장난처럼 느껴질 수 있는 이번 일에 어째서 이렇게까지 심력을 쏟는가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우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아무 생각 없이 함성을 지르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긍정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녀석도 있다. 벨리알이 이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고개를 끄덕여 이쪽의 말에 호응했을 것이다. 당장 도노반만 하더라도 박수를 보내고 있을 뿐 표정 자체는 무표정. 녀석이 보기엔 이 모든 게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테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맞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법입니다. 어째서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이 있어야 조금 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임할 수 있는 법입니다. 물론 우매하고 또 우매한 이 필멸자가 지옥을 드높이시는 악마분들께 이런 설명을 드린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는 하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시각도 분명히 존재할 거로 생각합니다. 때로는 저 아래에서 보는 관점 역시 가치가 있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옳다! 옳소! -최근 27군단은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무려 41계단이나 상승해 72군단 중에서도 27의 좌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인지하고 계시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기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앞으로 27군단이 어떤 행보를 걷느냐에 따라 27군단이 더 발전할 수도, 더 퇴화할 수도 있습니다. 만마의 지배자이신 지고의 벨리알 님 역시 어쩌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우매한 필멸자에게 이번 일을 맡기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에! 이 자리에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 하나입니다.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 -네. 그렇습니다.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입니다. 여러분들은 악마답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무엇이 악마다운 것인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간들을 학살하며 개돼지처럼 도살하는 것이 악마다운 것이 아닙니다. 커다란 천재지변을 뿌리고 마냥 고통을 주는 것만이 악마다운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파괴와 폭력을 일삼는 것이 악마라면 악마와 몬스터의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 -방금 말씀드린 행동은! 지능이 없는 몬스터들도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단순한 파괴와 폭력과 학살은 무능한 인간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그들에게 공포심을 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짐승들의 방법이지, 우리 영광스러운 악마들이 지향해야 할 방법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성숙한 악마로서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는 덜 진화된 것들과의 차별점을 둘 수 있겠습니까. 대답하는 녀석은 없었다. 입술을 달짝이고 있기는 했지만 아마 입을 열 수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으니까. -답은 뻔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관리해야 합니다. 개체 수가 줄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지켜봐야 합니다. 그들을 진심으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 -대륙에는 이런 격언이 있었습니다. 부랑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 금화를 주는 방법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금화를 벌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번 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이 우매한 필멸자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공포를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포심을 느끼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 -격변하는 인간 사회에서 27군단 여러분이 한 단계 더 발돋움할 방법은 오롯이 그것뿐입니다. 무리하게 공포를 새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27군단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인간들을 몰살시키는 것보다 여러분들의 신화와 이야기를 그들의 자손의 자손이, 그 자손의 자손이 대를 이어 입으로, 입으로 전해질 수 있도록 하셔야 합니다. -……. -죽음으로 얻는 공포는 한순간이지만, 이야기로써 전해지는 공포는 몇 세대를 걸쳐 유지됩니다. 대륙에서 부당한 일에 휘말려 개인적인 복수를 염원하는 몇몇 이들은 여러분들의 신화를 기억하며 여러분들을 소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여러분들이 두려워 제대로 잠이 들지 못할 것입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평생 악몽에서 살게 될 것이고 인간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여러분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 -그들의 공포를 관리하십시오. 스스로 격을 낮추지 말고 진정으로 그들의 위에 서야만 합니다. 균형을 맞추며 그들의 발전에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만들어낼 인간 군상을 위에서 바라보며 비웃어줘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걸 자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우워어어어어어어어!!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여러분은 대륙의 상처이며 영원한 악몽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 대륙이, 이곳에서 살고 있는 모든 지적 생명체들이, 심지어 멍청한 베니고어와 비정한 엘룬 쓰레기마저, 여러분을 기억할 것입니다.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 여러분은 몬스터가 아닙니다. 지옥에 있는 일부 멍청한 강경파 악마들과도 다릅니다. 거짓과 선동으로 인간들을 속이고 기만하며 그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그들을 관리하는 악마입니다!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입니다!!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 -악마는 악마다워야 악마다!! ‘어우야. 이거 분위기가 왜 이렇게 좋아.’ 온건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조금 질릴 정도였다. 처음처럼 형식적인 분위기가 아니다. 일부 뒈질 악마들을 제외한 모두가 목이 터지라 환호성을 보내고 있었다. ‘히야….’ 교국의 강단에 서서 베니고어의 이름을 외칠 때와 비슷한 열기에는 어안이 벙벙할 정도. 심지어 속으로 강경파라고 분류하던 몇몇 녀석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벨리알 역시 마찬가지.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박수를 보내고 있는 모습에는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히야. 이거 실수 한 번 정도는 눈감아주겠네.’ 27군단을 하나로 묶는 위대한 과업. 아주 조금이지만 그 과업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이쯤 되니 이쪽도 점점 더 힘이 나기 시작한다. -이기영은 27군단을 불어온 변혁의 바람이다! -이기영 님을 위하여! -저 역겨운 영혼을 보라!! 어찌 저것이 인간의 영혼이란 말인가!!! -지옥에 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외부고문! 이런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데 힘이 나지 않을 리 없다.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자 마치 쥐 죽은 것처럼 보이는 장내가 시야에 들어온다. -다들 아시고 계실 겁니다. 불과 몇 시간 전 멍청한 인간 놈들이 스스로 벨리알 님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41, 42, 43거점을 차지한 벌레 같은 인간들은 벨리알 님의 영역이었던 곳에 장벽을 세우며 그곳을 전진기지로 삼아 이곳을, 아메라를 공략하려 합니다. 더러운 베니고어의 빛을 뿌리며 다가오고 있습니다. 네. 이제 시작입니다.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 -이번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현재까지 저는 여러분들이 쉬거나 다른 일을 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 -바람 소리와 스산한 빗소리가 항상 제가 자리해 있던 집무실을 때렸었지요. 폭풍전야. 지옥에서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일부 악마들은 쓸데없는 일이라 이번 프로젝트를 비웃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 -우리가 옳은지 저들이 옳은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입니다. -……. -우리가 허접한지, 그들이 허접한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입니다! -……. -보여줍시다. 지난 시간이 쓸데없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걸 우리가 직접 증명합시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우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출진. 출진입니다!! 귀를 찢을 것 같이 들리는 거대한 함성. 무어라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군단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도노반 역시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 있는 모습.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리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는 법이다. 슬쩍 벨리알을 바라보자 녀석이 군단을 향해 입을 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사천왕 도노반은 지금 당장 병력을 이끌고 공포가 무엇인지 그들의 뼈에 새기고 오라. -명령을 받듭니다.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녀석의 모습은 가관이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니 벨리알 역시 기분 좋다는 듯 어깨를 두드려왔다. ‘나쁘지 않아. 상황은 진짜 괜찮아.’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어떻게든 수습한 것 같은 느낌. 도노반 녀석이 적당히 어그로를 끌어주며 실적을 올려주다 적당한 시점에 리타이어하면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상황이다. 워낙 거친 녀석이니 사상자야 조금 생길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쓸모없는 연방 놈들이 이번 작전의 표적인 만큼….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지친 녀석을 상대로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막타를 먹으면 끝. 적당히 시간도 벌고, 벨리알도 좋고, 나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게 되는 아름다운 상황에 기분 좋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일이 조금 꼬였다는 생각이 든 것은 정확히 8시간 후였다. ‘현성이랑 니네가 왜 거기 있어? 도노반 안 잡고 뭐 해?’ 도노반이 27군단과 함께 대륙 연합의 거점을 타격한 이후, 파란을 포함한 4국 연합이 거점을 빠져나온 게 보였던 것.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도노반 패싱. ‘김현성 너 이 새끼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정확하게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눈에 보이는 정황은 이랬다. 김현성이 연방을 버렸다. ‘너 원래 안 이러잖아….’ 지옥불의 게르한과 자밀라를 미끼로 내던진 이후 곧바로 아메라로 진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 493 회귀자 사용설명서 493화 반전의 반전의 반전(1)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아직도 내 눈을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벨리알이 준비해 준 상황실, 돌아가는 전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음에도 불구하고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다시 한번 마력홀로그램을 돌려 봤지만, 여전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광견병에 걸린 미친개마냥 돌진하는 도노반. 그가 커다란 노호성을 내지르며 커다란 성벽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패널티를 받고 있다고 한들 준 신화급은 준 신화급. 성벽 안에 있는 인간들은 공포에 질려 마법과 화살을 퍼부었고 그렇게 공성전이 시작됐다. 전 인류가 힘을 합쳐 도노반을 밀어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연방 병사들의 피해가 누적되기 전에 4국 동맹과 공화국의 지원이 적절하게 도착할 거로 생각했다. 거대한 병력을 상대하느라 지친 도노반이 김현성에 의해 목이 잘리는 것이 그리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었고, 잠시 후에는 이 그림이 완성될 거라 100%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직후 흘러나오는 마력홀로그램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김현성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눈에 띄는 것은 거점을 버리고 더욱더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는 교국의 본대. 도노반이 41거점에서 날뛰고 있는 사이 43거점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간 것이다. 처음엔 병력을 뒤로 물린 것은 아닌지 고민했었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말로 김현성은 연방을 버렸다.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래.’ 몇십 가지의 경우의 수를 생각하기는 했지만, 김현성이 연방을 희생양으로 사용하는 그림은 상상하지 않았던 것이 당연하다. 녀석의 성격상 죽어가는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더욱더 그렇다. 녀석이 아무리 정치에 관심이 없다지만 이번 행동이 국제적으로 얼마나 손가락질을 받을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한 갈등도 당연히 예상이 가능했던 거고. 인류를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과업을 달성한 회귀자가 스스로 갈등을 유발할 거라고는 정말로 생각하지 못했다. ‘퇴로도 생각하지 않은 건가? 지금 이렇게 들어왔다가 도노반한테 샌드위치 당하면 어쩌려고.’ 그야말로 후진이 없는 전진이라 할 만했다. 다른 요소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시간 내에 도착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병력 구성과 진영 자체도 완벽한 창. 단지 뚫어내는 것만을 목적으로 구성된 병력은 어떻게 보면 기형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건 진짜 빠꾸 없는 건데….’ 이쪽이 상상하고 있던 계획표가 휴지 조각이 됐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대륙 연합, 아니, 적어도 김현성은 거점을 차지한 이후 땅따먹기를 할 생각이 없다. 거점에 틀어박혀 정보를 모을 생각도, 전진기지를 앞세워 게릴라전을 펼칠 생각도 없었다. 애초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것은 직진 또 직진. 보급품을 최소화시키고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한 이후 아메라를 최단 시간에 도착하는 것. 전략이라고 볼 수도 없다. 모 아니면 도의 심정으로 앞으로, 더 앞으로 병력을 밀고 들어갈 뿐이었으니까. 보급품이 떨어진 이후, 포위당해 발이 묶이는 그림은 그리지도 않은 모양이다. 이지혜가 이 미친 전략에 어떻게 손을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미쳐 날뛰는 이유가 혹시나 고통받고 있는 동료 때문은 아닐지에 대해 떠올리자 잠깐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르기는 했다. 하지만 괜스레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걸 어떻게 상대해야 하지.’ 나 잡아먹어 줍쇼 하고 달려들고 있는 이들을 정말로 잡아먹을 수 있을 리 없다. 실제 전쟁이었다면 사방에 퍼져 있는 이들을 불러 모아 저 창을 막아낼 방패를 만든 이후 고립시켜 말려 죽였겠지만 내 소중한 파티원들은 죽어서는 안 되는 이들이다. 사전 설명에서도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되는 이들에 대해 브리핑하기도 했고 악마들 역시 저 창을 막아내는 데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거 실적은 올릴 수 있는 건가.’ 여기저기에 선물 상자가 널려 있는데도 불타는 버스를 타고 청와대까지 돌진하는 모습. 아예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지 공화국을 비롯한 타국의 영웅들이 주요 거점의 길을 막으며 이쪽이 준비한 이벤트에 참석해 주고 있었지만 겨우 저 정도가 성에 찰리가 없다. ‘도노반 얘는 또 어떻게 해….’ -더러운 벌레 같은 인간들. -아아아아악! 도, 도망쳐… 도망쳐어어어! -교국이 배신했다. 대륙 연합이 우리를 버렸어. 제기랄…. 제기랄! -공화국의 개새끼들아! 하늘이 네놈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지 마! 올라오지 못하게 해라! 올라오지 못하게 해!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끝까지 저항해!! 수성전이다 아직 우리에게 유리해!! -네놈들은 신에게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쏴라! 쏴라!!! -퇴, 퇴로는…. 벌써 날뛰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고 절경이라고 할 만했다. 자신의 역할이 제대로 알고는 있는지 연방의 병력들을 닥치고 때려죽이고 있는 모습은 가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때마침 녀석이 지옥불의 게르한을 잡아 찢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따위 불꽃으로 지옥불이라고? -으아아아아아악!!! 사, 살려줘… 살려…. -지옥불을 맛본 적도 없는 구더기 같은 인간 놈이 스스로 지옥불이라 칭하다니. 정말로 구역질이 나는구나. 한쪽에서는 또 자밀라가 영 좋지 못한 꼴로 고통 받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제발…. 원래부터 죽을 놈들이었지만 그래도 한때 친하게 지낸 만큼 뜨거운 안녕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갈 땐 가더라도 상처 정도는 만들어줬으면 싶었지만, 그 정도도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영웅 등급의 윗자락과 전설 등급의 끝자락에서 놀던 놈들치고는 너무나도 형편없게 느껴질 정도였다. ‘연방은 진짜로 회생 불가능하겠네. 회생 불가능하겠어.’ 이미 대륙에 커다란 상처 하나가 생긴다는 건 그나마 고개를 끄덕일 만했지만. ‘이걸로 끝나면 안 돼.’ 이 정도면 실패한 거나 다름없다. 도노반이 메인으로 실적을 뽑아내고 있기야 했지만 저건 연기가 아니라 강경파의 그것이나 다름없다. 공포를 느낄 새도 없이 뚝배기를 깨버리는데 무슨 실적이 쌓이겠는가. 대륙인들에게 임팩트를 준다는 관점에서 보면 나쁘게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닥치는 대로 뚝배기를 깨버리는 모습은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이…. 그래서 적당히 하라고 했는데. 제기랄.’ 다행히 본인의 임무를 까먹지는 않은 건지 일부로 틈을 내보여 벨리알 랜드 안쪽으로 인간들을 몰아넣고는 있었지만 예상하던 것에 비하면 형편없을 정도로 소수. 청룡열차에 준비된 좌석은 50석이건만 20명 정도만 입장한 것과 진배없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진짜.’ 적당히 하다 하늘나라로 떠나야 할 놈은 전방에서 트롤짓을 하고 있었고 믿고 있었던 김현성마저 이쪽과 호응해 주지 않는 상황. ‘도노반은 어떻게 죽이고, 얘네 들은 또 어떻게 막아야 돼.’ 아무리 생각해도 몇 분 안에 답이 나오는 상황이 아니다. ‘이거 태세전환 해야 하나.’ 지금이라도 인류의 편에 서서 더러운 악마 놈들의 뚝배기를 깨야 하나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다. 베니고어라면 모르겠지만 벨리알의 뒤통수를 칠 정도로 담이 크지는 않다. 얘네들이 2,000년 후에 보험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당연하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바로 손절 각을 바라보기에는 여러모로 걸리는 점이 많다. ‘얘랑은 끝까지 가야 돼.’ 어떻게 보면 운명공동체나 다름이 없다. 똥 씹었다는 표정을 너무 오랫동안 유지한 탓인지 상황실에서 함께 마력홀로그램을 바라보던 악마 한 놈이 말을 걸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이기영 님.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아. 괜찮습니다. 어제 먹었던 것 때문에 조금 속이 안 좋았을 뿐이라. 전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군요. 나쁘지 않은 상황입니다.” -역시나…. “지금처럼만 흘러가면 프로젝트가 제법 괜찮게 마무리될 겁니다. 아, 혹시나 특이사항이 있으면 곧바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아. 특이사항 있습니다. “네?” -43거점에서 빠져나온 적 본대가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습니다. 아까 전부터 계속 저러고 있었는데…. ‘이 새끼는 그걸 왜 지금 이야기해.’ “화, 화면 돌려보세요.” -네. 미친 야생마처럼 달리고 있었던 교국의 본대가 어느 시점에서 멈춰 선 것이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가까이 못 보냅니까?” -감각이 예민한 인간이 있는 터라…. 더 이상 사역마를 앞으로 보냈다가는 아마 눈치챌 겁니다. 이 거리가 한계입니다. “조금 확대라도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캐스팅을 외우고 있는 것은 당연히 정하얀. 무슨 종류의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요동치는 마력이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혹시나 대형 마법이라도 때려 박고 시작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럴 리는 없는데.’ 내가 아메라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메테오 같은 걸 떨어트릴 리가 없다. 애초 그런 대형 마법으로 승부를 본다고 한들, 그렇게 쉽게 통할 리가 없다. 정하얀이 시전하는 준 신화급의 마법에 대해서는 이미 방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없다. 어쩌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법을 쏴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다른 이들의 반응이 조금은 심상치 않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소중한 파티원들의 얼굴. 사역마가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자세히는 확인할 수 없지만, 반쪽이 된 얼굴들이 시야에 비쳤다. 선희영은 왠지 모르게 1회차 같이 표독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고, 박덕구는 눈이 퉁퉁 부어 있다. 차희라와 카스가노 유노, 엘레나의 모습도 보인다. 저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차희라의 얼굴이 많이 망가져 있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쟤가 저렇게 망가져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눈에 띄는 것은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 ‘아이고, 얼굴이 반쪽이 됐네.’ 마치 폐인이라도 된 것만 같은 얼굴은 가관. 솔직히 뭐라고 다른 수식어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괴로워 보이고 후회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현재 마법을 외우고 있는 정하얀과 비슷할 정도로 충격받은 것처럼 보였다. 일만 제대로 마무리된다면 일생일대의 고백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물론 얼굴에 깃들어 있는 감정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얘네… 뭐하려고 하는 거야. 너네, 왜 그래. 단체로.’ 하나 같이 목숨이라도 건 것 같은 비장한 얼굴. 본래 자살 특공대나 다름없는 병력을 운용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런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이건 그런 종류의 비장함이라고 볼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죽을 사람들처럼 인사를 나누거나 비장한 표정을 선보이고 있었다. 지금 시전하려는 마법이 그 이유라는 걸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현재 정하얀이 외우고 있는 마법이 도대체 뭐길래 저런 얼굴들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심지어 정하얀 역시 무척 긴장한 것 같은 표정. 평소답지 않은 얼굴이었다. ‘저거 막아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병력을 보내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다. 긴장감이 가득했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진다. 엘라나와 선희영 같은 사제들은 손을 모으고 있었고 박덕구 마저 손을 모으고 있는 상황. 김현성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마침내 완성된 주문이 정하얀의 입에서 튀어나왔고 떨어질 운석에 주의하라는 전언을 날리려고 했을 때였다. -사라졌습니다. ‘나도 눈이 있어서 보고 있어. 이 새끼야.’ 마력홀로그램으로 보고 있던 병력이 눈 앞에서 사라진 것. 똘똘 뭉쳐 있던 병력이 자리한 곳에 남아 있는 건 그들의 발밑에 있던 마법진이 전부였다. ‘이게 씨발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니네, 왜 이래. 진짜로.’ 잠깐 동안 패닉 상태에 빠지기는 했지만, 바깥에서부터 문을 열고 들어온 목소리에 정하얀이 정확히 무슨 주문을 외웠는지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이기영 님. 주요 공략 포인트인 리, 리무르아 님의 둥지에 적의 본대가 들어왔어요. ‘공간이동 마법.’ 이론적으로만 알려져 있었던 마법이었다.  # 494 회귀자 사용설명서 494화 반전의 반전의 반전(2) ‘제기랄….’ 표정이 구겨지는 게 당연했다. 너무 예상 밖의 상황이었으니까.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하지만 속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척해야 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고는 있었지만 이미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하얀이 새로운 마법을 선보였고 그게 유효타로 박혔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로 설명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 새로운 마법에 대해 떠올리자 어처구니가 없어 자꾸만 실소가 튀어나왔다. ‘공간이동?’ 이 대륙에서 별별 마법을 다 봐왔지만 저런 종류의 마법은 본 적이 없다. 애초에 공간을 도약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온갖 과학기술로 별 짓거리를 다 할 수 있는 현대에서조차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였고 이 대륙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아직은 닿지 못하는 꿈의 영역이라는 소리다. 이쪽 역시 마법사 관련 직업을 가지고 있는 만큼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굳이 이쪽의 직업으로 예를 들자면 현자의 돌을 완성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천재, 천재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레벨이 다른 천재. 천천히 떡락하고 있었던 정하얀 코인이 다시 한번 용솟음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존버하길 잘했지….’ 물론 이 정체불명의 마법에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금으로서는 완벽하다고 볼 수 없다. 정황은 무려 두 가지. 저런 마법이 있음에도 굳이 아메라 근처까지 와서 마법을 발동시켰다는 것이 첫 번째. ‘아직은 거리 제한이 있는 모양인 것 같고.’ 부대 전체가 목숨을 건 듯한 표정을 지은 것도 신경 쓰인다. 이게 두 번째다. ‘실패했을 때에 차원의 미아가 되거나 몸이 찢어지는 그런 페널티가 있었던 건가? 이론으로만 가능했던 걸 테스트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용한 거라고 보면 되겠는데….’ 잘못했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 물론 김현성이야 정하얀에 대해 알고 있었던 만큼 그녀가 이런 종류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머지 파티원들의 입장에서는 실험용 쥐마냥 실험에 자원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마법을 발동하는 데 사용한 마력량을 생각하면 연습 삼아 몇 번이고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마법이 아니다. 내가 이쪽에 잡혀 있던 시간 동안 모으고 모은 마력으로 딱 한 번 발동하는 것이 한계. 물론…. ‘돌아가는 데 사용할 마력도 없을 거고.’ 그제야 전체적인 전황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리무르아의 둥지에 침입해 있는 본대를 제외한 병력 중 일부 병력은 미끼. 또 일부 병력은…. ‘퇴로 확보네.’ 도노반에게 털리고 있는 41, 42, 43거점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들이 공략하고 있는 거점들은 유사시 퇴로가 되어줄 것이다. 심지어 이후 복귀할 도노반 병력의 견제까지 가능한 포인트라는 걸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다. 마구잡이로 들이대는 것 같지만, 거미줄처럼 치밀하게 짜인 전술은 감탄을 불러일으킬 지경이다. 대담하고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확실히 뒤까지 생각하고 있는 병력의 운용은…. ‘지혜 누나 작품이겠고.’ 사실 이지혜였다면 더욱더 안전한 방법을 생각했겠지만 차희라의 입김이 많이 들어갔을 확률이 높다. 사방팔방에서 포텐을 터뜨리고 있는 이들을 떠올리자 놀랍기보다는 무섭다. 물론 이쪽을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데 감사한 마음이 들기야 했다. 그러나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그다지 반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상황실에서도 싸늘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는 악마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참을 수가 없다. -이건…. “완벽하지는 않지만 모두 계산 안에 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여러분. 동요하면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지만, 계산 안에 있던 변수입니다. 충분히 대처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해결 방법 역시 가지고 있고요.” -그렇군요. 역시나 이기영 외부고문이십니다. 정말 인간이라는 종족은 언제나 저희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것 같습니다. 벨리알 님을 이곳에 소환한 인간이니만큼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동 마법이라니…. 타 차원에서 사용하는 인간이 몇몇 있다고 들은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제 눈으로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들도 저들이지만 외부고문께서도 정말로 대단하시군요. 이런 변수까지 이미 계산해 두고 계셨다는 겁니까? ‘계산 안에 두긴 뭘 계산 안에 둬, 이 새끼들아.’ 아무리 세기의 천재로 지략가라도 이딴 상황을 예상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슨 전조나 복선이 있어야 예상하고 말고 할 것 아닌가. 비교적 평범한 측에 속하는 내가 이런 미친 상황을 예상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김현성이 이런 식으로 무대포로 달려들어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연방을 버릴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정하얀이 시험용 이동 마법을 들고 와 성공시킬 거라는 건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좌표에 오류가 있어 다른 곳에 떨구어놓은 게 아닌가 하는 행복 회로를 돌리기도 했지만, 녀석들이 자리한 것은 완벽히 둥지의 안이었다. 목표 설정을 위해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린 게 뼈아프게 느껴졌다.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나한테 묻지 마. 이 새끼야. 나도 몰라.’ -뭔가 현묘한 수가 있겠지요. 외부고문이 아니십니까. 하하. ‘그딴 거 없어. 없다고. 씨발.’ 지금으로써는 기본적인 대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일단 병력을 불러 최대한 진군을 늦추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리무르아 님에게 닿기 전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으니, 일단 가까운 곳에 있는 병력부터 불러 모아주세요. 또.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게….” ‘발리토스.’ “발리토스 님도 둥지로 오라고 전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식량 저장고는 이후에 따로 활용한다고 꼭 말씀해 주시고요.”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 그리고 사역마들 숫자들 조금 늘릴 수는 없습니까?” -네. 아마 가능할 겁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원정대는 이제 막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한 상황이다 정석대로 레인저들을 보내고 간단한 정비를 하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당연하지만 모두 비장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 모습이었다. 조금 눈에 띄고 있는 것은 모두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여기저기서 아직도 구역질하는 이들도 보인다. 아직 완벽하지 않았던 마법이었던 만큼 어느 정도는 후유증이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하얀. 얘는 다시 한번 머리가 하얗게 변해 있었는데,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 보이는 지경이었다. ‘아이고오….’ 폐인이 된 것 같은 겉모습에 가슴이 조금은 아파진다. 특히나 박덕구가 정하얀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있는 모습을 보니 더욱더 그랬다. 성공했다는 듯 주먹을 꽉 쥐고 잠깐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가 이렇게 짠해 보이기는 또 처음. 다들 그녀에게 다가가 잠깐 격려의 인사를 하고 있었지만, 유독 선희영만은 정하얀에게 다가가지 않는 모습이 신경 쓰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벌써 원정대는 진입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정비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놀랍지도 않아.’ -곧바로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말입니까? -네. 도착했다고는 하지만 여유 있게 캠프를 차리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저희가 이쪽으로 왔다는 걸 적들이 알아차렸을 확률이 큽니다. 소환 유지에 사용되고 있는 이들과 어딘가에 있을 이기영 파란 부 길드 마스터님을 구출한 이후 바로 이곳을 빠져나갈 겁니다. -정확한 위치는 파악 불가능한 겁니까? 아니, 그 이전에 이기영 님께서 정말 이곳에 계실지…. -현재 레인저들이 물어온 정보로는 물론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후… 이 둥지의 주인이 더 잘 알고 있겠지요. 리무르아라는 악마가 머무르는 방의 뒤쪽이나 아래쪽에 있을 거로 생각하지만, 전혀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도 있는 만큼 일부 병력으로 수색대를 꾸려 근처부터 조사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사이에 본대는 둥지의 공략에 집중합니다. 전에 브리핑 드렸던 대로 움직이면 될 겁니다. -네. -브리핑대로입니다. -네. 짧은 대화를 마친 후 병력이 안으로 돌진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시바. 이거 진짜 어떻게 해야 돼. 리무르아가 버틸 수는 있나? 이거 진짜 가능한 건가?’ 솔직히 뭐라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본대가 지쳐 있는 상황이었고 리무르아의 둥지에 있는 것은 리무르아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객관적인 전력을 분석해 보면 당연히 둥지 쪽의 전력이 더 위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하얀이도 리타이어 상태니까.’ 그런 방향에서 생각해 보면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본래의 계획과는 거리가 멀지만, 어차피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인류의 처절한 승리로 기억되어야 할 리무르아 둥지 전투. 온갖 고생과 시련을 겪으며 천천히 성장한 대륙 연합이 수많은 상처를 안으며 격전 끝에 도착해야 했던 장소가 바로 이 장소였다. 본래 그리고 있던 건 대륙 연합이 이 둥지를 가까스로 공략하는 그림이었지만, 그런 방식을 강행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만약 본래의 계획대로 둥지가 공략되어 마무리되는 그림으로 이번 이벤트가 끝나게 된다면…. ‘완전 망한 거나 다름없는 거지.’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해 손익분기점이 1,000만인 영화를 50만도 채우지 못한 것과 같은 꼴이 된다. 대륙연합이 느껴야 할 커다란 절망감과 악마에 대한 공포심 같은 마이너스 감정들은 기대 물량의 반의 반의 반도 채우지 못하게 된다는 거다. 지금으로서는 둥지 공략을 방해한 이후 본대가 작전에 실패해 탈출하는 그림이 가장 이상적이다. 이후 일어날 세세한 변수는 급한 불을 끈 이후에 천천히 진화하면 되니까. ‘절대로 이대로 끝나면 안 되지.’ 그 50만 관객 수도 도노반이 채우고 있는 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이번 프로젝트가 망하면 최악의 경우 27군단에 강경파 여론이 힘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벨리알의 입장에서도 이기영 책임론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오게 될 거고. 대륙의 입장에서 그것보다 악몽인 상황은 쉽게 찾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일단은 믿는 거야.’ 어느 정도는 생각이 정리됐다. 확실히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고 볼 수 있지만, 회생은 가능하다. 그렇게 행복 회로를 돌리며, 리무르아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전달한 이후에는 턱을 쓰다듬으며 상황을 바라봤지만. -제기랄! 제길. 네놈이 감히! 내게 상처를 입혀? 그분이 칭찬해 주신 내 머리카락을! -어디에 있지. -아아아아악! 죽어!!! 죽어어어어!!! 퍼스트 블러드, 더블 킬, 펜타 킬, 전장의 지배자가 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완전 각성한 김현성이 리무르아를 관광시키고 있는 걸 바라본 이후에는 상황실을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니네 뭔 도핑이라도 했어? 걔 죽으면 나도 죽어, 이 새끼들아.’ 그 말 그대로.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달아가는 상황에 발버둥이라도 쳐봐야 했으니까. ‘제기랄. 어떻게 해, 이거. 씨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걸 느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해결책을 떠올린다. 현재로서는 저 본대를 후퇴시키는 게 유일한 답이다. 내가 가서 뭘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발리토스를 비롯한 타 병력이 올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질극이라도 벌여? 이걸로 될까?’ 꽤 적절한 방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바로 그때. “어?” 정신없이 달리던 몸을 잠깐 멈출 정도로 쓸 만한 생각이 뇌 속에 번개처럼 떨어진다. “푸흐헤헤흐하하핫.” 조금 억지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복선은 이미 뿌릴 만큼 뿌렸다. “이야. 왜 이걸 생각 못 했을까. 처음부터 이걸로 갈걸.” 어째서 피해자가 되려고만 생각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너무 흔한 클리셰인 것 같아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왕도는 왕도. 영화의 스토리를 대폭 수정하기야 하겠지만, 소년 만화에서 이것보다 잘 먹히는 클리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바로 요거지….’ 조금 갑작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본래 주인공의 라이벌이나 친구 놈들은. ……. …. …. “한 번씩 타락하거나 흑화하기 마련이지, 뭐.” 그 말 그대로였다. # 495 회귀자 사용설명서 495화 흐콰한다!(1) 조금 가슴 아프기도 했다. 정신없이 뛰어가는 와중에도 정말로 이게 맞을지 고민했을 정도. 나야 대충 연기 몇 번 뿌려주면 되지만 지인들이 느낄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닐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골든타임 내에 들어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의 심장부로 진입한 상황. 둥지에 들어온 이후 시작된 리무르아 레이드가 어쩌면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절박해 보이던 애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혹시나 이번 일로 인해 충격을 받고 재기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그 정도는 아니겠지, 뭐.’ 특히나 정하얀이 조금 걱정됐지만, 김현성이 옆에서 멘탈을 잘 잡아 줄 거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박덕구 이 새끼도 마찬가지일 거고….’ 여러모로 괜찮을 거라 자기 최면을 걸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잠깐 보였던 희망이 순식간에 사라질 때의 절망감이 어떨지 알기에 흑화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해야만 했다. ‘그래도 어쩌겠어. 방법이 이것밖에 없는데.’ 애초 이 계획이 잘 풀릴 거라는 보장도 없다. 지금 당장 내가 간다고 해서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발리토스가 올 때까지 버틴다는 위대한 과업은 성난 김현성을 상대로는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저기에 김현성만 있는 것도 아니고….’ 붉은 용병의 차희라와 실리아의 카스가노 유노. 다행히 박연주의 경우에는 주변 수색을 위해 잠깐 빠진 것 같았지만, 그 외에도 강자들이 즐비해 있다. 교황청에 이름난 사제들은 물론이거니와 성녀급의 신성력을 뿌려대는 선희영과 엘레나도 있다. 조금이라도 교국에서 이름을 날렸다고 하는 놈들이 널리고 널렸다. 27군단의 주축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리무르아와 그녀의 하수인들을 상대로 대등하다 못해 압도하는 싸움을 보여줬으니 이렇게 똥줄이 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당연하지만 리무르아가 죽는다면 그 시점에서 상황은 아웃. 도노반은 몰라도 벨리알의 고정 1픽이 여기서 리타이어 한다는 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잠깐 행복 회로를 돌리기는 했지만, 이 와중에도 리무르아가 털리고 있다는 걸 떠올리자 다시금 발걸음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만마의 지배자이신 벨리알 님의 소중한 1픽이 죽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렇지.] 씨바. [일이 꼬인 것 같더군.] 제기랄. ‘그렇지 않습니다요. 벨리알 님. 이것도 전부 계획의 일부이니 안심하시고 지켜보고 계시면 됩니다.’ [역겹고 구역질 나는 거짓말은 되었다. 이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대충 파악하고 있으니.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요. 그래서 이렇게 발바닥에 땀이 나게 뛰는 게 아니겠습니까. 굳이 벨리알 님이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전부 다 제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생각은 나쁘지 않을 것 같다만, 이 건 역시 망칠까 두고 볼 수가 있나. 본래 신뢰를 잃은 이라는 건 그런 법이다.] ‘그 말씀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번 같은 돌발 행동을 하지는 않을 테니. 구역질 나는 역겨운 인간. 네가 현세에서 이뤄놓은 것들을 망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네가 아끼는 인간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도 없고. 너에게 해를 끼칠 생각도 없다. 이전에 말했다시피 나는 너를 아끼고 있고 네가 나와 함께 일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다만 어느 정도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렇지 않은가?] ‘그럼… 어떤 도움을 주신다는 것인지….’ [계약.] ‘네?’ [계약이다.] ‘어떤 계약을 말씀하시는 건지 이 우둔한 필멸자는 도저히… 애초에 저는 계약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방법을 찾아보니 꼭 그렇지도 않아. 현재 베니고어를 비롯한 대륙의 신들이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있을 것 같더군. 지난번처럼 가계약이 아닌 직접 계약이다.] ‘그건….’ [네가 베니고어에게 받은 것들을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네?’ [공유하자는 거지.] ‘…….’ [물론 베니고어를 비롯한 대륙의 주신들이 너를 공유하는 걸 두고 볼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만, 계약 과정에는 문제는 없다.] 얘 봐라. 들려오는 목소리에 잠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왠지 모르게 벨리알도 이런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원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볼 정도. 그동안 조용했던 게 이 타이밍을 기다린 건지 아니면 정말로 이쪽과 직접 계약을 할 방법을 알아본 건지는 모르겠다. 아마 둘 다겠지. 그게 아니고서는 이런 타이밍에 이런 말을 건넬 필요가 없을 테니까. 베니고어한테 빛의 연금술사라는 직업을 부여받은 것도 종류는 다르지만, 계약의 일부다. 그녀는 나에게 직업을 내리는 대신 빛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을 종용했고 이쪽은 그걸 받아들인 상황이었다. 벨리알과 이중 계약을 맺을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 흑마법과 신성력이 상충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좋게 말하면 공유하고 깔끔하게 이중 계약을 하자는 소리이기는 했지만, 베니고어가 어떤 액션을 취할지 모르는 만큼 녀석들과 계약 파기까지 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수도 있다고 느껴졌다. 어쩌면 파산에서 복귀한 베니고어가 스스로 내게 준 힘을 거둘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선 것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의심스러웠던 건 왜 이중 계약이냐는 것. 벨리알의 입장에서는…. ‘그냥 베니고어를 쳐내고 계약하는 게 더 유리한 거 아닌가?’ [불가능하다.] ‘…….’ [네가 생각한 방법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어째서 이렇게 좋게 이야기하는지 의심스럽기도 하겠지. 현재, 네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협박하거나 강제하는 계약은 우리 측에서도 불공정한 계약으로 추후 문제에 휘말릴 확률이 높아. 마음 같아선 이번 일을 빌미로 네게 불리한 계약을 체결하고 싶지만 애초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다.] 이게 사실이라면 지옥에서의 계약 절차가 현세보다 훨씬 더 좋다는 소리가 된다. [믿을지 말지는 네 자유다. 하지만 현세로 소환된 악마들이 어째서 금화나 제물과 같이 쓸데없는 소원을 말하는 인간들의 계약까지 들어주는지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계약은 어디까지나 협상이지 강제가 아니야. 물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속임수를 쓰는 것은 존재하다만 적어도 이번 계약은 그런 종류의 계약은 아니다. 말하지 않았나.] ‘그럼.’ [더불어, 애초에 그녀가 네게 걸어놓은 금제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소리다. 먼저 침을 발라놨더군. 무능력한 년이 남자 무는 솜씨 하나는 기가 막혀. 그런다고 내가 손대지 않을 거로 생각한 것도 우습고.] ‘…….’ [아무튼, 내 조건은 이렇다. 본래 양보하는 성격은 아니다만 나로서도 크게 양보해 줬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네가 떠올린 구역질 나는 계획의 성공은 내게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주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한 명의 악마로서 보고 싶은 모습이 아니겠나. 뭐, 다른 설명이 필요한가? 의심스럽다면….] ‘아닙니다. 아닙니다. 벨리알 님. 이 미천한 종이 잠시나마 벨리알 님의 크나큰 뜻을 의심했었습니다요.’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인 바로 그때였다. [벨리알의 개입으로 새로운 특전 직업을 생성합니다.] [외부의 개입으로 인해 빛의 연금술사 직업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준 신화 등급의 직업, 어둠의 역병군주를 서브 클래스로 얻으셨습니다.] [외부의 개입으로 인해 준 신화 등급의 직업 어둠의 역병군주가 삭제….] [벨리알의 개입으로 인해 준 신화 등급의 직업 역병군주가 삭제되지 않습니다.] [두 가지 직업을 동시에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벨리알의 개입으로 인해 준 신화 등급의 특성 직업 전환이 생성됩니다.] [빛의 연금술사를 서브 클래스로 전환합니다.] [어둠의 역병군주를 메인 클래스로 전환합니다.] ‘어? 어어어?’ [만족스러운가?] ‘빛은 날 배신했다!’ [만족스러운가 보군.] ‘아이고… 벨리알 님께 무한한 영광을 드리겠습니다요. 벨리알 님 만만세!’ [나도 투자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두 번 언급할 필요도 없다. 벨리알이 모아놓은 실적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외부 시스템에 개입해 일을 치를 정도라면 꽤나 많은 걸 투자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잠깐이나마 녀석을 의심한 내가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위대한 만마의 지배자이신 벨리알 님께서는 베니고어나 엘룬 같은 저속한 술수는 부리지 않는다.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함께 달리는 든든한 동료. 괜스레 훈훈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목숨을 걸고 성공시키겠습니다.’ 무조건 성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떠올릴 수가 없다. 곧바로 빛날배를 시전하며 뛰쳐나가는 내 모습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정체불명의 비정함마저 감돈다. 벨리알 님의 성소를 침입한 교국의 본대를 막아야 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 빛의 연금술사로 저들을 막아야 했다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벨리알 님의 성은을 입어 다시 태어난 둠기영은 다르다. 마력이 부족한 게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대충 파악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 포텐셜. 온몸에 힘이 넘치는 듯한 느낌은 팔굽혀 펴기 100회를 쉬지 않고 할 수 있다고 느껴질 정도. 어떤 특수 능력이 있는지는 조금 더 알아봐야겠지만 적어도 부족함이 없다. 리무르아가 격전을 치르고 있는 장소에 다다르자 몸을 다시 한번 가다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깥에서부터 벌써 거대한 굉음과 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슬쩍 거울을 꺼내 모습을 바라보자 확실히 나쁘지 않은 것 같은 모양새. ‘와, 이거 진짜 타락한 것 같이 생겼다.’ 역병군주의 특수 효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치 시체라도 된 듯한 창백한 얼굴이 눈에 띈다. 눈동자 색깔도 소름 돋을 정도로 투명한 푸른색으로 바뀌어 있었고. 마력탈진 현상이라도 겪은 것처럼 새하얀 색의 머리카락도 시야에 비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얀색이라고 볼 수 없다. 눈동자 색처럼 약간의 푸른 기가 감돌고 있었으니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부족한 중2 감성을 충족시켜주는 완벽한 모습이다. 누가 봐도 한눈에 타락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반쪽짜리 가면만 있으면 딱일 것 같은데.’ [전설 등급의 아이템 ‘타락한 왕자의 반쪽 가면’을 획득합니다.] ‘아이고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아!’ 얼굴의 반쪽만 가려주는 가면은 상징성이다. 김현성에게는 가면쓰레기를 떠올리게 만들 수도 있는 장치이기도 했고.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줬는데도 실패할 정도로 이쪽은 베니고어스럽지 않다.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괜스레 헛기침을 한 번 한 이후 안쪽으로 진입한 순간 눈에 보인 것은 리무르아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김현성. ‘오랜만이다. 현성아… 어휴, 반가운 것아….’ 하지만 촉수 몇 가닥이 잘린 채로 분한 얼굴을 하고 있는 리무르아를 바라보니 다시금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시바… 너무 여유 부렸나.’ 김현성이 마격을 날리기 전에 개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을 들어 올렸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천천히 전방을 바라보기 시작한 녀석과 눈이 마주친 것. 처음 반가웠던 얼굴이 천천히 구겨지는 것은 물론, 이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표정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손에 들고 있는 검을 힘없이 떨어뜨리는 모습은 가관. 눈에는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고 내 눈으로 보기에도 빈틈투성이로 보일 정도로 무방비한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전투 중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 ‘뭐야, 이거… 뭐야. 그 정도로 충격받을 일이야?’ 어느 정도 충격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시야에 비치는 것은 전투 의지를 상실한 것 같이 보이는 김현성의 얼굴. 천천히 입을 열고 있었지만 뭐라고 말하는지는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어… 어째서….” ‘뭐야. 왜 이래…. 뭐가 이렇게 쉬워?’ “어째서어어어어!!!” 그와 동시에 리무르아가 휘두른 촉수에 형편없이 나가떨어지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 496 회귀자 사용설명서 496화 흐콰한다!(2) 효과는 굉장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이 표현보다 현재 상황을 더 잘 표현해 주는 말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혹시나 다른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 때문에 단단히 마음을 먹고 진입했건만 그 마음의 준비가 무색해질 정도로 기대했던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리무르아 역시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만큼 곧바로 얼굴이 환해지는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어째서 내가 이런 모습으로 이 장소에 자리해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미리 언질을 받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한참이나 둥지 안에서 치고받던 양측의 병력 역시 잠깐 소강 상태를 맞이한 상황이다. 멀뚱멀뚱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가장 먼저 시야에 비쳤다. “형님인거요?” “오, 오, 오빠. 흐어어어어엉. 오빠아….” “자기?” “이기영 님….” 순서대로 박덕구, 정하얀, 차희라, 엘레나.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현재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들이 대다수였다.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한 것 같은 엘레나와 차희라, 카스가노 유노 같은 이들은 방금의 김현성처럼 하늘이 무너지진 것마냥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 파악이 느린 박덕구는 커다랗게 입을 열며 이쪽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기쁘다는 얼굴이다. “사, 살아 있었구만. 형님이 살아 있었다니까.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형님. 어서 빨리 이쪽으로 달려오쇼. 아니 지금 거기서 기다리쇼. 내가 직접 갈 테니까. 내가 직접 간다니까!” “…….” “내가 우리 형님한테는 아무 일 없을 줄 알았지. 우리 형님이 누구요. 끈질기게 버티고 버틸 줄 알았다니까. 거기서 조금만 기다리면 금, 금방 구해주겠다니까.” ‘박덕구, 이 새끼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현실을 부정하는 건지 정말로 눈치가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한바탕 눈물을 뽑아내며 목이 터지라고 외치고 있다. “형님, 동생이 왔소. 형님이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 왔단 말이요! 들리는 거요? 아이고. 우리 형님, 안색 창백한 것 좀 보라니까. 머리카락은 또 왜….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요? 빨리 이 악마 새끼들을 몰아내고 형님을 구해야 하는데. 아니,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요! 진짜!” “…….”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거요? 무기를 들어야지! 뭐 하고 있는지 묻잖아! 현성이 형씨는 괜찮은 거요? 마법사들은 빨리 주문 외우고 전사들은 방패 들어! 방패 들으라니까! 형님이 바로 눈앞에 있잖아!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저렇게 있는데!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요!” ‘아, 이 새끼 짠해지게 하네. 진짜. 그리고 이 새끼야. 이 거리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는 아니지.’ “늦었어.” “늦긴 뭐가 늦었다고! 개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전투 준비하라고 이 개새끼들아!” “…….” “전투 준비해! 전투 준비하라고 이 머저리 같은 새끼들!” 침묵 마법이라도 맞은 것 마냥 조용해진 장내에 들려오는 소리는 박덕구의 커다란 목소리가 전부. 주변을 둘러보며 어서 빨리 구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호응해 주는 목소리는 없었다. 녀석을 제외한 전부가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심지어 흐느끼는 소리마저 들려오는 상태. 누구인지는 뻔했다. “흐어어어엉. 오빠아…. 흐어어어어어어엉….”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굳이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섞인 정하얀의 목소리는 서럽다 못해 눈물이 찔끔 튀어나올 정도. 여기서 어떤 리액션을 취해야 할지 잠깐 고민해 봤지만, 계획의 수정은 없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시선이 집중된 것은 당연했다. 촉수로 가득 찬 이 역겨운 공간이 너무나도 상쾌하다는 듯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시는 와중에도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지지 않는다. 천천히 내 몸을 바라보는 액션 역시 나쁘지 않다. 새로운 힘을 얻었다는 듯이 몸 전체를 둘러보고 괜스레 천장을 바라보며 정체 모를 충족감을 느끼는 연기는 1,000만 관객을 이끌 조연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최상의 애드립 이었다. 벌써 울먹거리고 있는 이들부터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는 이들까지. 물론 아직도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있는 이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리무르아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형님! 피하쇼! 제기랄! 뭐 하고 있는 거야!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진정하세요!” “그냥 저렇게 두고 볼 거요? 저 몬스터가 형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니까! 빨리 이거 놓으라고!!!” “그러니까 진정하라고요!” “형님! 내 목소리 들리긴 들리는 거요? 빨리 피해! 피하라고! 제기랄! 피해!! 피하라고 이 멍청한 새끼야!” 진심으로 이쪽을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는 그녀가 점점 내게 다가올수록 커져만 갔다. 하지만 리무르아가 내게 별다른 적의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녀석 역시 입을 다물고 있는 녀석들과 같은 얼굴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이쪽에 살짝 안기기까지 하는 모습을 본 이후에는 무서울 정도로 표정을 구기기 시작. 항상 웃고 있었던 박덕구의 얼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입술을 살짝 움직인 것은 당연하다.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한 것은 모두가 똑같았는지 침을 삼켜 넘기는 소리까지 들려온다. 아직도 이기영 흑화설을 믿지 않는 관객들에게 보내는 묵직한 목소리. 마치 얼음장처럼 싸늘한 목소리였다. “시끄럽군.” “어?” “…….”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시끄러워. 무척이나 상쾌한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그리 편하지가 않아.” “정신이 든 거요? 형님! 정신이 든다면 여기 좀 봐보쇼. 박덕구요. 형님 동생 박덕구요.” “오빠…. 오빠아!!” “명예추기경님. 들리세요? 들, 들리시나요?” “저들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리무르아?” -신경 쓰실 필요 없으십니다. 부군이시여. ‘누가 네 부군이야.’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설정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지만 정말로 죽을 뻔했던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 이 정도는 받아들여 줘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머릿속으로 잠정 채택하고 있는 시나리오는 리무르아에게 조종당하는 것이었지만 27군단의 일원이 된 듯한 모습이 더 극적으로 비칠 수도 있을 거로 생각했다. 기껏 흑화했는데 남 밑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그래도 카리스마가 없지 않은가. 끈적끈적하게 얽혀오는 촉수녀의 촉수가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기야 했지만 보이는 그림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이 판의 최종 보스라고 잠정 확정된 캐릭터와 얽히고 있는 장면은 아직도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솔직히 조금 중2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원래 타락이니 흑화니 뭐니 하는 것들은 중2 감성이 중요한 법 아닌가. ‘요런 게 먹힌다니까 그러네.’ “오빠…. 흐어어엉어엉. 오빠아….” “…….” “오빠아…. 히끅. 히끅.” “…….” “오빠아….”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정하얀은 계속해서 울부짖으며 이쪽을 부르고 있다. 아직 바뀐 직업이 익숙하지가 않았지만…. “시끄럽다고 말하지 않았나.” 손에서 뭉치기 시작한 칙칙한 기운이 정하얀에게 쏘아지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 ‘뭐야.’ 겁만 줄 요량이었지만, 벨리알의 특전 때문인지 꽤 위협적인 기운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앞을 막은 건 조혜진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정하얀. 그 앞을 막아선 조혜진 역시 침통해 보이기는 마찬가지. “물러서세요. 하얀 씨. 위험합니다.” “…….” “거짓말이야. 히끅.” “…….” “흐어어어어엉. 히끅. 오빠아….” “그 입 다물어라, 멍청한 인간.” “…….” ‘말 잘 듣네, 하얀이.’ -노여워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나의 부군이시여. 부군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저 하등한 것들은 곧 깡그리 없어질 테니. “부길드마스터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이고, 혜진이도 열 내줘서 고맙다.’ -설명이 필요합니까? 보이는 그대로인데 말입니다. 저희와 함께하시기로 했을 뿐이랍니다. 당신들이 알 던 그 투명한 인간은 지금은 이 자리에 없어요. 지금 당신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추악한 베니고어의 개가 아닌 벨리알 님에게 성은을 얻으신 27군단의 부단장님이십니다. 또 매일 밤 저를 즐겁게 해주시는 제 부군이기도 하시지요. 후훗. ‘쓸데없는 설정을 굳이 넣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한데. 얘는 진짜 벨리알 1픽이라고 할 만하네’ 확실히 순발력 하나는 기가 막혀. -이미 한참이나 늦었다는 겁니다. 푸핫. 그런 줄도 모르고 이리도 급하게 뛰어오는 꼴이라니 너무나 우스워 배가 아플 지경이랍니다. 잠깐 동안 즐거우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떻습니까? 그동안 즐거우셨습니까?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아직은 늦지 않았을 거라고 발버둥 치는 모습들이 정말 볼만했는데 지금은 조금 상황이 달라졌군요. “…….” -그래요. 바로 그런 표정입니다. 하등한 인간들, 당신 같은 인간들에게 딱 어울리는 표정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야 당신들다워요. 오선생이라도 만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건 연기인지 진짜인지 알 수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말로 표정이 좋아 보였다는 것. ‘지금 실적 쌓이고 있는 건가 몰라.’ 아마 꽤 쌓이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대다수의 인간이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듯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으니까. 느끼고 있는 절망감이 어마어마하다는 건 3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아이고, 현성아아.’ 아직도 바닥에 처박힌 채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내가 다 속이 쓰릴 지경이다. 딱 멘탈이 나갔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설마 전투 의지를 상실할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 본래 김현성의 멘탈이 약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마치 산송장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살아 있는 거 맞아?’ 리무르아의 일격에 눈을 뜬 채로 기절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정도. 계속되는 중얼거림을 통해 살아 있다는 것만 유추할 수 있었다. 누구와 계약을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했으니 누구에게 마이너스 감정을 뽑아내는지도 중요할 것이다. 현재 김현성과 교국의 본대가 쌓아주고 있는 실적은 지금까지 벨리알이 투자한 손익분기점을 이미 넘어섰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관심이 없다는 듯 천천히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자 딱히 저항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인간들이 보이질 않는다. 정말로 여기서 다 죽을 것처럼 포기하고 있는 인간들이 대다수. 엘레나와 카스가노 유노 역시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비틀거리고 있었고 정하얀은 뭐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파란 길드원들이나 교국의 사제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베니고어의 이름만 부르고 있다. ‘얘네 탈출해야 하는데…. 이거 어쩌냐.’ 지금 상태로는 탈출이고 뭐고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나마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건 의외로…. 차희라. 성격상 당장 미쳐 날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경력 빵빵한 모험가답게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전열을 정비하고 있는 모습은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입술을 꽉 깨물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퇴각한다.” ‘옳은 판단.’ 대부분이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팀의 메인 딜러라고 할 수 있는 김현성이 저 모양 저 꼴인 만큼 다시금 총력전을 벌인다는 것부터가 무리수라 할 수 있으리라. 이쪽은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기만 하면 끝. 싸늘한 눈빛으로 입을 열자 멈춰 있던 장내에서 커다란 소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부 죽여.” -뜻대로 하겠습니다. ‘X나 카리스마 있었어. 씨바.’ # 497 회귀자 사용설명서 497화 흐콰한다!(3) ‘싸움이 쉬워질 것 같아서 다행이네.’ 혹시나 다른 변수가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한 것이 사실이다. 아직 새로 얻은 직업의 정보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준 신화 등급에 벨리알이 특전으로 내려준 직업인 만큼 빛의 연금술사를 상회할 힘이 있는 거로 파악했지만 숙련도가 낮으니 무언가를 하기는 어렵다. 솔직히 어떤 종류의 주문을 외울 수 있는지도 전부 확인하지 못했다. 이런 상태로 교국의 본대와 붙기에는 확실히 리스크가 크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조금은 불안했었지만, 생각보다 크게 호응해 주는 관객들 덕분에 조금 더 일이 쉽게 돌아갈 것 같았다. 정하얀은 전의 이동마법으로 전투능력을 상실한 상황이었고, 전투 의지를 상실한 김현성은 조혜진에게 부축을 받으며 끌려가듯 이동하고 있었으니까. ‘정말로 쓸어버릴 수도 있겠는데….’ 만약 이게 실제 상황이었다면 둥지 안에 있는 병력 전체가 전멸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가 없다. ‘차희라까지 정신 안 차리고 있었으면 정말로 큰일 날 뻔했네.’ 격전을 펼쳐야 조금 더 리얼리티가 살지 않겠는가. 어설프게 풀어주는 그림을 보여주는 건 아무래도 긴장감이 살지 않는다. 전방을 바라보자 본대의 전위들이 방패를 들고 길을 막는 게 시야에 비쳤다. ‘매뉴얼대로.’ 후방에 있는 사제와 마법사들부터 대피하는 퇴각 매뉴얼의 정석이다. 단단한 전위에 집중적으로 사제들과 마법사들의 버프가 떨어지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자신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보여주는 전위들은 군단의 폭격도 버틸 정도였다. 박덕구 역시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전열을 정비하며 다른 이들이 빠져나갈 자리를 만든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입과 다리가 덜덜덜 떨리는 중이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악마들을 방패로 쳐내며 어떻게든 근접 딜러들을 본대의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하고 있지만 그게 생각처럼 잘 풀릴 리가 없었다. “버, 버텨! 빨리 안쪽으로, 안쪽으로 들어간다. 매뉴얼대로 진행해! 매뉴얼대로!” -크르르르륵! “신성력! 신성력!” -크워어어어어어어!! “병력에 파묻히지 않게 조심. 휩쓸리지 않게 조심해! 검은 백조의 레인저들을 따라간다! 네임드 몬스터들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견제하고 후방부터 빠르게 빠져나간다! 사제들을 최우선으로 지켜!” 당연히 모두가 퇴각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시기를 놓친 근접 딜러들과 전위의 일부, 또 조심성 없는 후방 부대 몇몇은 악마들에게 휩쓸리는 것으로 이미 계획되어 있다. 연방 놈들이면 뚝배기를 부셔 버렸겠지만, 상대가 교국의 본대이니만큼 함부로 죽일 수는 없다. 이곳에서 마력을 공급해 주는 과업에 동참하게 되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어차피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는 멀쩡히 살아 돌아가게 될 거다. 이형의 괴물들에게 빨려 들어가는 병력들을 바라보며 공포에 질린 병사들. 친우와 동료를 버리고 퇴각할 수밖에 없는 처절함. ‘실적 쌓이는 소리 들린다요.’ “예진아! 예진아!!!”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아아아아악! 오빠아! 살려줘! 꺄아아아악!” ‘니네 안 죽는다니까 그러네. 마력 좀 뽑아내고 끝이라니까. 의도치 않게 다칠 수 있기는 한데 절대로 죽지는 않을 거야, 애들아.’ “길드 마스터.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꼭 안부 전해주십시오.” “제기랄! 현우야…. 현우야!” ‘그러니까 니네 안 죽는다고.’ “이 개새끼들아!! 이 악마 새끼들! 흐윽.”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제이슨…. 이렇게….” “카트리나….” 떠나는 자가 있다면 남는 자도 있기 마련이다. 여기저기에서 이산가족이 헤어지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저런 종류의 신파가 아니다. 물론 쌓일 실적을 생각하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는 게 맞지만, 이번 한 번만 빨아먹고 끝을 볼 수는 없지 않은가. 퇴각한 이후 다시금 나를 찾아올 수 있게 어느 정도의 설계를 하는 게 맞다. 무엇보다. ‘오해하면 안 되니까.’ 완전히 타락한 거로 생각해 공적으로라도 몰리면 큰일 중의 큰일. 겉모습 자체는 완전히 악마들의 손에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무의식 속 깊은 곳에는 빛기영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는 복선 정도는 뿌려줘야 아군의 망치에 뚝배기가 깨지는 상황이 펼쳐지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인 후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보잘것없는 마력이기는 하지만 최대한 마력을 모으자 제법 그럴듯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도 너무 부족한데….’ 시선을 집중시키기에는 부족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겨우 이 정도로는 영 체면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때마침 들려온 목소리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부분은 도와주도록 하지.] ‘아이고, 감사드립니다. 벨리알 님.’ [그렇게 저자세로 나올 필요가 없다. 이런 도움을 주기 위해 너에게 특전을 내린 것 아닌가.]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무궁한 영광이옵니다. 감사. 또 압도적 감사를 드리겠습니다요.’ [하핫. 매번 하는 말이지만 네가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내가 네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함이 옳다. 믿을 수 있겠나. 지옥에서 상황을 지켜본 몇몇 군단장들이 기립 박수를 하고 있더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쳐대는 그 72군단장 들이 말이야. 심지어 사탄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고 있었고. 양심이 찔리지도 않는 건가. 정말로 구역질 나는 인간이 아닌가.] ‘…….’ [욕이 아니라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함이 옳다. 내가 지금까지 많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봐 왔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을 본 적은 처음이야. 과연 나의 계약자답다. 아암, 내 계약자라면 이래야지.] ‘조금 흥분한 것 같은데….’ 평소답지 않게 약간 하이톤이 된 것 같은 목소리다. 실적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하게 현 상황이 즐겁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후자라고 생각했다. 악마 중에서도 탑을 찍어 먹는 악마다운 모습이다. 그래도 구겨진 파티원들의 표정의 아주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이쪽과 달리 아주 신명 나게 즐기시고 계시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내 인간성을 성찰했지만, 아직은 그 정도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무튼, 흥분한 벨리알 덕에 점점 더 주변에는 꺼림칙한 마력이 휘몰아치는 중이었다. 잠깐 이쪽을 벗어났던 시선이 다시금 쏠리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 마치 정하얀이 대단위 공격 마법을 외웠을 때와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의 마력량이다. 물론 대부분이 블러핑이고 내가 컨트롤하기에는 너무 많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걸로 주문을 완성할 생각은 없다. 적당히 겁만 주는 것으로 끝이라는 거다. “방어 마법 외워. 방어 마법!” “아티펙트 전부 발동시켜 떨어질 마법에 대응한다.” “어, 어떤 종류인지 확인되지 않습니다. 처음 보는 흑 마법이라고 판단되며… 명, 명예추기경님께서 주문을 외우고 계신 것으로…. 화, 확인됩니다.” “대응 주문 외워! 대응 주문을….” 예상대로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 하지만 활로를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신이시여….” “말도 안 돼.” “신이시여어…. 제발….” 기분 나쁘고 칙칙한 마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몇몇 이들의 얼굴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친다. 처음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몇몇 이들은 아예 포기한 듯 이쪽으로 마력이 모이는 것을 바라보는 중이다. 기본적으로 기분 나쁜 마력이 넘실거리는 만큼 뻥튀기 효과를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아마 소수의 네임드들을 제외한 모두가 이렇게 느끼고 있지 않을까 싶다.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떨어지면 죽는다.’ 떨어지게 해서는 안 돼.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이쪽을 견제하는 마법을 쏘아 보내려고 하는 이들까지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을 본 정하얀이 지랄 발광을 하며 단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언뜻 시야에 비치기는 했지만…. ‘어이구, 막장이네, 막장이야. 하얀아. 왜 그러니, 하얀아아…. 떽! 단검 휘두르면 안 되지! 아이고오…. 기어코 한 놈 찔렀네.’ 견제를 위해 쏘아 보낸 마법이 이쪽까지 닿을 리가 없었다. “버러지 같은 인간 놈들.” 마무리 대사 한 번 날리며 손을 위로 뻗자 여기저기에서 들려온 목소리들. “끝났어…. 끝났다고, 모든 게.” “제기랄.” “베니고어시여, 베니고어시여. 기적을. 기적을….” 모두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고 그 절망에 보답하듯 손을 내리려던 찰나,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죽어라. 벌레 같은…. 큭….” “어?” “뭐, 뭐야. 어째서….” 의문을 느끼는 이들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모습도 빠져서는 안 된다. “크….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영혼이 몸을 거부하고 있는 처절한 연기에는 혼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장면보다 중요한 장면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도… 망…. 쿨럭. 쳐…. 빨리….” “…….” “빠… 빨리…. 더 이상 시간이….” 눈에 한껏 눈물을 머금고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라는 듯한 눈빛으로 전방을 바라본다.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았던 커다란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진 상황에 둥지 안에 있던 이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내면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빛기영과 둠기영의 처절한 싸움에 일말의 희망을 품기 시작한 이들이 눈에 띈다. “제길… 제기일!! 아아아아아아악! 기이이잇….” 전선에서 마력 빵빵하고 토실토실한 인간을 납치하던 리무르아도 시작된 발광에 복귀하여 내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마 인간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질 것이다. 갑작스럽게 다시 한번 장내가 소강상태에 들어가고 있으니까. 주요 악마 간부들은 전부 다 이쪽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모이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빠진 구멍을 메워줄 스쿼드는 없다. -리무르아입니다. 정신을 차리셔야지요. “내… 눈앞에서… 사라… 나는….” -부군이시여. 리무르아입니다. 기억이 안 나시는 겁니까? “큭….” -조금 피곤하신 것 같은데 들어가서 쉬시지요. “…….” -그렇게 얌전히 있으시면 고통이 사라질 겁니다. 편안히 받아들이세요. 더 이상 괴롭지 않을 겁니다.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예요. 머릿속에 있는 복잡한 기억들을 그렇게 날려 버리시는 겁니다. 천천히…. 천천히….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을 겁니다. 네, 그렇게 제 품에 안기시면 됩니다. ‘어우야. 얘는 진짜 영입하고 싶네.’ 따로 설명을 해주지 않았는데도 곧바로 애드립을 치는 능력이 발군이다. 심지어 스토리까지 부여해 주는 모습. 천천히 이쪽을 촉수로 감싸고 있는 연출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본대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까지 생각이 닿자 괜스레 온몸이 찌릿찌릿거린다. 이제야 막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빛기영이 다시금 기분 나쁜 촉수에 휘감기는 장면. 희미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이 흉물들에 휩싸여 빛을 잃어가는 것이다. ‘과연 벨리알 고정픽답다. 고정픽다워.’ 얘는 감독에게 사랑받는 여배우 일 수밖에 없다. 촉수가 징그러운 것도 마음에 들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힐끔 본대 쪽을 바라보자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재빠르게 몸을 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물론 내가 잠깐 정신을 차린 영향 때문인지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박덕구 같은 놈들도 보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데리러 올 거요.” “…….” “내 눈 똑똑히 바라보쇼. 형님. 내가 반드시 데리러 올 거니까 그때까지만 버티쇼. 반드시 형님을 구해낼 거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래대로 정신을 차리게… 만들 거요. 끄윽….” 녀석 역시 병력의 안으로 끌려 들어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반드시 구해낼 거요! 조금만 더 버티쇼. 반드시, 꼭 기다려…. 꼭 기다리라니까!!” 처절함이 담긴 목소리는 점점 더 멀어졌고, 동공의 문은 닫힌다. 쾅. 이윽고 시야에서 모든 이들이 벗어났다고 느껴지는 상황. 손뼉을 치고 있는 악마들 사이에서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1,000만 달성이야, 시바!’ # 498 회귀자 사용설명서 498화 주저앉기는 했지만 이내 성장하게 되는 클리셰(1) 잠깐이었지만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순간, 물론 모든 상황이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퇴각작전으로 인해 둥지의 안을 벗어나는 것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정하얀의 마력이 아직 회복되기 전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동 마법 같은 걸 사용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박연주가 사전에 확보해놓은 퇴로를 통해 이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어차피 그것 역시 곧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벨리알의 지배하에 놓인 지역에는 사방에 사역마들이 깔려 있었으니까. 그나마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장소는 공화국에서 공략을 시도하고 있는 17거점. 이곳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일단은 그쪽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추후 방향을 결정할 것 같았다. 계속해서 공략을 진행할지, 아니면 다른 병력과 합류해 전체적인 상황을 다시 한번 조율할지, 그것도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하고 걸어 잠글지. 사실 어느 쪽이 되든 별로 상관없기는 하다. 현재 흘러가는 정황은 거의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조금 급한 감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은 꼬였던 상황을 바로 잡았다는 게 무척 중요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악마들이 현재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증거나 다름없다. 우렁찬 함성과 박수 소리. 드라마 마지막 화 촬영을 끝낸 배우들에게 손뼉을 쳐주는 스태프들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했지만, 그것과 이건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룩할 수 있었던 결과 아니겠어.’ 무척 능수능란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르륵 하는 소리로 일관했던 악마 호베르트. 작은 배역이었음에도 최선을 다해준 만인장 마루앙. 그 외 이 판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움직여 줬던 위기대책반과 상황실 스탭들까지. 현 상황에서 뿌듯함을 느끼는 건 너무나도 쓰레기 같다는 걸 인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미소가 지어진다. 교국의 사제들을 상회하는 환호를 보내는 이들. 심지어는 정체불명의 꽃목걸이까지 내 목에 걸어주는 녀석들까지 있었다. ‘이 맛에 감독 합니다.’ 나야 정확히 어느 정도의 실적이 쌓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리해 있는 모두의 입이 귀까지 찢어진 것을 보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일 것 같았다. -대단한 연기였습니다. 외부고문! -이야!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정말로요!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지? 전부 성공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이, 이기영 외부고문을 지옥으로!! -이기영 님을 지옥으로!! -이기영 님을 지옥으로오!!! “하하하하. 모두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하하하.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샴폐인까지 터뜨리실 필요는 없다니까요.”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중간까지는 조금 걱정했었는데. 이것도 전부 머릿속에 있으셨던 건가요? 미리 좀 말씀해 주셨다면 더 완벽하게 준비할 수 있었을 텐데…. “잘 해주셨으면서 뭘 아쉬워하고 그러십니까. 리무르아 님. 갑작스러운 부군 설정에는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패닉에 빠지지 않고 따라와 주신 것만으로도 대단합니다. 미리 말씀을 드리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합을 맞춰주실 줄이야. 정말 깜짝 놀랐지 뭡니까.” -설정 건은… 개인적인 사심이 살짝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꾸 어필하지 마. 부담스러워.’ -저도 깜짝 놀랐어요. 이기영 님.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했었는데 곧바로 달려와 주시다니. 조금 뜬금없지만 이렇게 뵈니 더 매력적으로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 그 모습은 벨리알 님과…. “네. 직접 계약을 맺었습니다. 본래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만 현재의 대륙 상태가 조금 불안정한 탓에 이렇게 성은을 입을 수 있었지요. 하하하. 그보다 어떻게. 실적은 많이 쌓으셨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더요. 대륙의 주요 도시에 방금의 장면이 나가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 이 자리에 있던 것만으로도 그동안의 손해를 전부 메우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올라 가봐야 알겠지만, 이 상태가 지속되면 1,000위권 안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1,000위권 안이라니. 이거 조금만 더 하시면 따로 산하 군단을 맡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꼭 이기영 님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물론 아직은 먼 나라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리무르아 님께서 그런 감사한 제안을 해주신다면 오히려 제가 더 고맙지요.” -이거 외부고문님께서는 리무르아 님 말고 다른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나 봅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디 이게 리무르아 님과 저 둘이서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밥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에 숟가락이라도 들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 있는 악마분들은 모두 한 분도 빠짐없이 나중에라도 꼭 보답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지금 그 말 절대로 잊으시면 안 됩니다. “물론이지요. 자, 이럴 게 아니라 모두 정리합시다.” -네. “일이 괜찮게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바로잡은 것에 불과합니다. 저도 깜짝 놀랄 정도의 변수가 있기도 했고요. 지금 일이 잘 풀렸다고 해서 마지막까지 잘 풀린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첫 번째 승리에 축배를 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일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것입니다. 많은 걸 해냈다고 생각하시는 것도 이해하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과연…. “일단 포로로 사로잡은 인간들은 동력실로 데리고 가 마력을 뽑아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동력실이 총….” -다섯 개 있습니다. “그렇군요. 주기적으로 인간들이 머무르는 장소를 교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단순히 방을 옮길 뿐이지만 혹시나 식량 창고나 위험한 장소로 가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지속해서 심어주는 것만으로도 실적이 크게 쌓일 겁니다. 마력을 다 뽑아낸 인간들은 회복실로 옮기되 절대로 치료 과정이라는 걸 티를 내시면 안 되고요.” -아마 모인 인간들끼리 꽤 공포에 떨겠군요. 혹시나 폐기 처분 당하는 것은 아닐지 따위의 생각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과연… 외부고문이십니다. 역시나 악마보다 더 악마 같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것 같습니다. ‘그건 아니지, 이 새끼들아.’ “큼, 아무튼 간에 그렇게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크게 반항할 경우는 제외하면 될 수 있는 대로 몸에 손을 대는 건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제가….” -물론입니다. 물론이고 말고요. “이해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본격적인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각 대륙의 상황이 어떤지 보고 싶은데….” -곧바로 준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상황실에 부탁드립니다.” -네. 방금의 상황을 본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했다. 또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는 감독도 좋지만, 정확히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다음 계획을 짤 수 있을 것 아닌가. 무슨 일이든 간에 시장 조사는 언제나 중요한 법이다. 다시 한번 안쪽에 있는 상황실로 복귀한 이후에는 승리자처럼 자리에 앉았다. 책상에 다리를 걸치고 즐겨 마시던 와인병을 집어 드니 마치 천국에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다. 손가락을 튕기자 전체적인 상황이 한눈에 들어온다. 역시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교국이다. ‘여기는 너무 뻔하지, 뭐.’ 예상했던 대로 광장에 모여 기도를 드리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다. 한 나라의 왕이라도 죽은 것처럼 울부짖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비친다. 얼굴에는 다들 불안감과 공포심이 물들어 있다. 이미 자신들의 눈으로 모든 정황을 확인했음에도 현실을 부정하는 이들도 몇몇 보이기는 한다.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방금 눈앞에 보인 것은 여신의 거울이 아닙니다. 악마가 우리를 현혹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께서 정말로 타락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명예추기경님께서 정말로 악마에게 마음을 빼앗기실 리가 없습니다. -고개를 드십시오, 교국민 여러분. 베니고어 여신님께서는 반드시 이번 시련을 이겨낼 힘을 줄 것입니다. 여신님께서 명예추기경님을 돌보실 겁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라고 외치는 녀석의 얼굴이 가장 두려워 보이니 다른 표현이 필요하지 않다. 절대로 명예추기경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외치고는 있었지만, 녀석 역시 그 말에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충 봐도 눈에 보이는 게 있는 법이다. 끊임없이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고, 전투 물자들을 챙기는 이들이 눈에 보인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병사들과 사제들의 표정만 봐도 일이 꼬였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파산 복귀는 더 빨라지겠네.’ 안 그래도 열성적이었던 기도가 더욱더 열성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열성적이라는 표현을 현재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건 발버둥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사고 직전 저도 모르게 신의 이름을 외치게 되는 처절한 기도나 다름없다. ‘힘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이쪽에서 절박함을 주면 저쪽에서 찰떡같이 받아먹는다. 애초에 왜 베니고어 측과 벨리알 측이 서로 연합하지 않았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처음부터 서로 힘을 합치고 영차영차 했더라면 가만히 있어도 실적이 90년대 은행 이자처럼 불어나지 않겠는가. 대충 판만 깔아줘도 끊임없이 돌아가는 물레방아나 다름없다. ‘상부상조를 몰라요. 상부상조를 몰라.’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 시야에 비친 것은 피난을 떠나고 있는 이들이다. “연방 근처인가 보네.” 연방 주변의 왕국에서 더 이상 버티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왕국민들을 대피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집 안에 있는 재산들을 다 챙기지도 못했는지 무척 가벼운 짐을 지고 먼 길을 떠나는 이들의 모습에 조금은 가슴이 짠해진다. 한 손에는 아들의 손을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딸을 안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여성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먼 길을 떠나다 지친 노인이 걷다 쓰러지는 장면은 그중에서도 백미중의 백미. 때마침 달려온 사제 한 명과 화려한 복장을 한 여자 한 명이 노인에게 포션을 먹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간단한 활력 주문을 외울 신성력도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 같아 괜스레 찜찜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도시까지는 얼마나 남았나요. 베릴 대신관. -아마 한참은 더 걸어야 할 겁니다. 여왕님. 주변에 다른 몬스터들이 없는 건 다행이지만 먼 행군길을 왕국민들이 버틸 수 있을지…. -버텨줄 겁니다. 저희 왕국민들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선대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그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왕국은…. -아버님을 뵐 면목이 없기는 합니다만, 아마 아버님께서도 같은 선택을 하셨을 겁니다. 그보다 그건 정말일까요? 교국의 명예추기경님이…. -아직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한 신성력을 가지신 분이 타락했다는 건 지금까지 전례가 없던 이야기라. 하지만 저희가 본 것이 진실이라면 현재의 대륙은 유례없는 위기를 맞았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일 겁니다. -그건….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여왕님. 이쪽뿐만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가는 이들이 셀 수가 없을 정도다. 도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마을은 마적 떼라도 만난 것처럼 엉망이 되어 있었고 소도시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돌아다니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더 벨리알의 영역에서 멀어지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기나긴 길을 떠나는 난민들의 모습은 마치 현재 상황을 간접적으로 대변해 주는 듯했다. 먼 곳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일부 지역은 정체불명의 폭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생산 시설의 마비로 인해 기능을 정지한 국가들도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전통 시장으로 유명한 대도시의 시장에서는 강아지 새끼 한 마리 찾을 수 없었고, 이곳저곳에서 절망에 가득 찬 울음소리와 비명이 끊이질 않는다. 대륙 전체가 절망과 공포에 휩싸여 있다. 내 입장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쓰러진 대륙이 도통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뭐야, 얘들 왜 이래….’ 시나리오상 인류의 반격이 시작될 타이밍이었음에도 녹다운당한 놈들은 도무지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두드려 맞은 복싱 선수처럼 완전히 뻗어 있는 모습은 가관이다. ‘일어서야지. 이 새끼들아.’ 심지어 일부 국가에서는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항복하자는 여론이 들끓고 있단다. 대륙에 커다란 상처가 날 것이라는 건 이미 예상했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커다란 상처를 쑤셔 박아준 모양이다. 둥지를 빠져나간 본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대로 그로기 상태에 빠지면 안 되지, 얘들아. 시바, 희망을 품고 일어서야지. 일어서, 이 새끼들아. 희망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구. 씨바….’ 인류의 마지막 희망들을 주의 깊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499 회귀자 사용설명서 499화 주저앉기는 했지만 이내 성장하게 되는 클리셰(2) 전쟁에서 진 군대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비참한 법이다. 당연하지만 둥지 탐험을 강행했던 대륙연합의 본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부상한 이들은 셀 수도 없다. 위치가 발각될까 봐 신성력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 포션으로 응급처치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극도로 민감해진 감각들 때문인지 모두가 예민해진 것 같이 보였다. 목소리를 크게 낼 수도 없는 상황이라 목 놓아 울부짖을 수도 없는 상태. 여기저기에서는 간헐적으로 끅끅거리는 목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딱히 그걸 지적하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애초에…. ‘통제한다고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뻔한 표현이지만 몸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클 것이다. 가족 같았던 이들을 리무르아의 둥지 안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떠올리자 괜스레 고개가 숙어진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와 도망치라고 외치는 커다란 목소리들. 사방에서 들려오던 악마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그들의 속으로 파묻히듯 끌려간 이들의 숫자는 일일이 셀 수도 없다. 그 지옥에서 빠져나갔으니 병력 전체가 의기소침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교국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부길드마스터가 악마들에게 세뇌당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공격대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구성된 일부 공화국 병사들이나 왕국 연합의 네임드들, 드워프들과 다른 이종족들은 그 충격이 크지 않은 것 같았지만 교국의 병사들과 엘프들의 표정은 지금 그들이 얼마나 절망감에 빠져 있는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베니고어와 엘룬의 상징. 그들의 자식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가 바로 부길드마스터가 아닌가. 인류의 편에 앞장서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을 보여준 인물. 분열되어 찢어진 대륙의 상처를 치유한 것을 물론 인류를 하나로 모은 평화의 상징. 그리고 파란 길드원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어머니 같은 사람. 상황은 상상 이상으로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정연 언니.” “예리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자리해 있는 것은 길드의 막내, 김예리였다. 아까 있었던 전투로 인해 다리와 팔에 붕대를 감은 모습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천천히 입을 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곧바로 대답해 오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다리랑 팔은 어때. 조금 괜찮아졌어?” “응. 움직이는 데 문제없을 것 같아.” “겉으로 치료가 된다고 해도 안에 있는 피로도까지 회복시켜 주는 건 아니니까.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게 조심해. 더군다나 신성력으로 치료한 것도 아니니까 더 불편할 수도 있을 거야. 오늘 하루는 최대한 조심하고, 17거점에만 도착하면 엘레나 님이나 희영 씨한테 말씀드려서 다시 한번 잘 살펴보자.” “응. 만약 악마들이 다시 오면….” “착란 마법이 통한 것 같아서… 지금 당장은 문제없을 거야. 그런 생각하지 말고 일단 지금은 푹 쉬어. 쉴 수 있을 때 체력을 보충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다음을 생각해야지.” “응.” 눈치채기 힘들 정도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매번 부길드마스터와 티격티격대긴 해도 기본적으로 사이가 좋았던 만큼 마음이 편하지는 않은 모양. 주변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기는 해도 은근히 정이 많았으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안 좋은 과거가 있는 만큼 이런 상황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다. 그나마 김예리는 상태가 나은 편.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다른 이들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오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엘레나 님이나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희영 씨. 마음이 약한 아영이나 안기모 씨, 창렬 씨 역시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길드원 중에서 가장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은 초창기 멤버라고 할 수 있는 3인이리라. 특히나 하얀 씨는 깨어 있는 시간보다 기절해 있는 시간이 더 많았을 정도다. 정신을 차린 후에도 혼잣말을 하거나 손톱과 머리카락을 쥐어뜯은 뒤, 비명을 지르며 다시 혼절했고 심지어는 자해를 시도할 정도였다. 소라 씨가 옆에 있어주지 않았더라면 커다란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물론 그이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았지만…. 그나마 가장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무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계속해서 전해져 온다. 자신을 자책하거나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이거나 애써 눈물을 참는 모습을 보였으니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 당연하리라. 그리고…. “길드마스터는 조금 어때?” “오빠는….” “응.”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까 그 악마와의 싸움에서 마력을 많이 사용하기도 했고, 특히나 마지막에는 머리를 다친 것 같아서…. 엘레나가 정신적인 충격이 큰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전부 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 꼭 그렇지는 않은데….” “많이 힘드실 거야. 두 분 사이를 생각해 보면….” “그래도 외상은 크지 않대. 마력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부분이 문제인 것 같아서…. 도통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도 않고. 일단은 혼자 놔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그래도… 괘,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길드마스터는.” “아니. 오빠 말고, 기영이 아저씨.” “아… 물론, 괜찮을 거야. 기억하지? 마지막에 부길드마스터가 캐스팅했던 마법.” “응.” “그이가 말하기로는 잠깐 정신이 돌아오셨던 것 같아. 덕구 씨 말고 다른 사람들도 봤었던 것 같고. 아마 그것 때문에 주문이 취소됐었던 것 같기도 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내면에서 싸우고 계실 가능성이 커.” “그럴까?” “악마들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부길드마스터를 그렇게 만들 수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평범한 세뇌 마법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히 의아한 점이 많지. 그전에 지속적인 고문으로 부길드마스터를 압박했던 것과 그 촉수 아, 악마와… 촉수 악… 초, 촉수… 촉수… 아니, 이건 말하면 안 되겠구나. 미, 미안.” “나도 알 건 다 알아.” “아, 아무튼 그런 일련의 과정들도 모두 부길드마스터의 정신을 망가뜨리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던 거겠지. 평범한 세뇌 마법이 통했더라면 그런 방법은 굳이 사용하지 않았겠지만, 그들도 여유가 없었던 거로 생각해.” “그렇구나.” “물론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니, 아마 당신의 말이 맞을 거예요.” 왠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눈에 보인 것은 머리 위에 커다란 뿔을 달고 있는 여자. 조금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현재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건 17거점의 공략이 완료되었다는 뜻과 다름없었으니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 있는 공격대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가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엄지를 치켜올릴 만했다. “디아루기아 님.” “아직 연결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네. 당신의 그 추측이 맞아요. 점점 더 엷어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 인간은 벨리알의 힘에 저항하고 있을 겁니다.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신력 하나는 지독한 인간이니 아마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예요.” “다행이군요.” “그보다 17거점으로 향하는 병력은 이게 전부인 겁니까?” “네.” “조금 이동 속도를 높이는 게 좋겠다고 전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희미하게나마 적 군대가 근처에 있는 것 같아서. 저는 조금 더 상황을 살펴봐야겠습니다. 적 병력이 더 접근하지 못하도록 견제도 해야 하니….” “감사합니다.” “제게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 역시 그… 그 인간이 죽으면 안 되는 입장인 건 마찬가지이고…. 파란 길드 여러분들께는 신세진 것도 많으니까요. 루리아의 일로….”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네.” “나도 같이 갈까?” “아냐. 예리는 여기에서 쉬고 있어. 어차피 금방이니까.” “응….” “후우.” 디아루기아 님이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난 이후 조금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앞서 있던 붉은 용병의 차희라를 따라잡는 것은 금방이다.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얼굴들. 오래간만에 기쁜 소식을 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 조금 더 빠르게 발을 놀렸을 때, 누군가가 어깨를 팍 하고 밀치는 것이 느껴졌다. “희영 씨?” 어깨를 밀치고 간 인물은 길드의 원년 멤버라고 할 수 있는 선희영. 스쳐 지나간 얼굴이 구겨져 있는 것을 보고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고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당장 병력 돌려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당장 병력 돌리라고 했잖아요!” “이러시면 안 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일단은 상황을 조금….” “이거 놔. 이거 놔! 내 몸에 손대지 마요.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병력 돌리라고 말했잖아. 이 개 같은 년. 내 말 안 들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이 상황에!” “병력 돌려. 병력 돌리라고!”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해!” “이거… 놔!” “더 이상 소란을 일으킨다면 명령 불복종으로 징계하겠습니다. 선희영 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힘든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부디 진정하시고….” “징계? 정말로 죽어야 하는 게 누군데… 누가 누굴 징계해? 차희라 그 씨발년이 그래요? 반항하는 연놈들은 전부 쳐넣으라고?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는 여우가 왕이지 그래. 우리 부길드마스터를 그렇게 이용하고 좋을 대로 써먹었으면서 정작 중요한 상황이 닥치니까 살겠다고 내빼겠다 이거네.” “상황이 상황이었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는….” “최소한 구하려는 시도는 해봐야겠다고 생각 안 해? 쓰레기 같은 인간들. 너희들은 전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야. 한 놈도 빠짐없이 전부. 명예추기경, 명예추기경, 앵무새처럼 중얼거리면서 간이고 쓸개고 전부 빼줄 것처럼 행동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내치시겠다. 영악한 년들, 무능하고 영악한 연놈들.” “차희라 님도 많이 힘들어하고 계십니다. 자꾸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일단 진영으로 돌아가 계시면 추후 내용을 전달….” “진짜 힘든 게 누군지 알아요?” “…….” “진짜 힘든 게 누군지 아냐고 물었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힘들지 상상해 봤어요? 한 평생을 타인을 위해서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의 안전은 내팽개치고 연방민들의 피난을 돕다가 잡혀간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요. 여기 있는 인간들 전부 구해보겠다고 자기 몸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도 않고…. 끄윽, 후유증에 매일 시달렸던 사람이라고요. 신성 주문과 약을 달고 살 정도로 몸을 망가뜨리면서 자기 몸을 희생했는데. 그 대가가 겨우 이거야? 끄윽.” “…….” “이게 그 결과냐고! 얼마나 슬펐을지 상상이라도 해봤어? 자기를 구출하러 온 줄 알았던 아군 병력이 몸을 돌려 도망치는 걸 눈으로 봤을 때, 자기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다고 생각했을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 “전부 쓸모없는 인간들이야. 당신들은 전부, 전부 쓸모없는 인간들입니다. 대륙에 불필요한 인간들이라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희영 님. 하지만….” “이해하고 있으면 병력 돌리라고! 병력 돌리라고 말했잖아!!”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었다. # 500 회귀자 사용설명서 500화 주저앉기는 했지만 이내 성장하게 되는 클리셰(3) ‘어우야. 고맙기는 하다, 희영아.’ 저도 모르게 울컥할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다. 처절해 보이는 얼굴로 눈물을 쏟으며 열변을 토하는 모습은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선희영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 쟤도 조금 이상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평소에 보여주는 모습은 조신 그 자체였던 만큼 아무래도 이런 모습이 적응되지 않는다. ‘1회차 성격이 어디 가는 건 아니네. 그래도 그렇게 섭섭하지는 않으니까 이제 그만해도 돼. 희라 누나 폭발하겠다, 야.’ 사실 이성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차희라가 옳아도 백번 옳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감정에 휩쓸려 병력을 밀어버렸더라면 전멸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테니까. 일단을 몸을 뒤로 빼더라도 후일을 도모하는 게 가장 가능성 있는 방법이었다는 거다. 내가 원하는 방법이기도 했고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그래서 차희라는 실행 버튼을 눌렀을 뿐이다. 딱히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거다. 감정이 이성을 앞서는 종류의 인간으로는 손가락에 꼽힐 수도 있을 정도의 성격을 가진 차희라다. 그런 차희라가 저런 이성적인 방법을 선택했으니 어떻게 생각하면 그녀 역시 필사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음 한구석에 있는 죄책감을 이겨내는 건 또 다른 문제겠지만. 아무튼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사건 현장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내가 다 쫄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선희영이 막말을 퍼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증스러운 년들! 가증스러운 년! 퉷!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선희영 덕분에 사태는 점점 점입가경으로 흘러가고 있는 중. 붉은 용병의 길드원들에게 포박당한 채로 버둥거리고 있는 모습은 가관이라 할 수 있으리라. ‘막장이네, 막장이야.’ 결국에는 차희라까지 등판하고 나서야 정리된 장내. 무척이나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는 붉은머리의 여자는 지금껏 본 적 없이 침울한 얼굴로 선희영 앞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얘들 다 상태가 왜 이래….’ 단 한 명도 멀쩡한 꼴을 한 애들이 없다. 잠깐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무섭게 선희영은 곧바로 손을 들어 차희라의 뺨을 냅다 후려버렸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차희라의 뺨이 돌아갔고 다시 한번 주변이 조용해지는 게 느껴졌다. 홧김에 그녀가 그대로 주먹을 휘두른다면 그 자리에서 선희영은 즉사. 혹시나 화를 주체하지 못해 폭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했지만 붉은머리 여자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담담하게 그녀를 마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은 한 대 맞은 짐승 같지가 않다. 애초에 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 걸 그대로 받아준 걸 보면 딱히 해코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가 폭발하지 않았다는 건 여러 가지로 신기하기는 했다. 며칠 동안 밤이라도 샌 것 같은 몰골을 한 차희라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역마가 일정 거리를 두고 치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만족해? -……. -이제 만족하냐고. -끄윽. -지금 당장 병력을 돌려서 돌아간다고 해서 뭘 어쩔 건데? -당신, 당시인…. -마력이 떨어져 기본 주문도 외우기 벅차하는 마법사들과 병신이 된 그쪽 길드마스터 데리고 방금 장소로 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야. 난 그렇게 어처구니없게 뒈질 생각도 없고 우리 자기 그딴 식으로 포기할 생각도 없어. 화풀이할 거면 딴 데 가서 알아봐. 아니면 혼자 가서 뒈지던가. 그것도 아니면 닥치고 명령에 따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지금 당장 병력을 돌리면 그 새끼가 좋아할 것 같아? 원래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걸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현 상황에서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게 그런 판단이야. 까놓고 말해서 지금 당장 병력을 꼬라박는 것보다 병력을 재정비해서 들어가는 게 더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야. 내 말 이해할 수 있겠어? -누, 누가, 누가 그걸 몰라서….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것 같아! 흐윽,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것 같아아아!!! 다시 한번 손을 번쩍 들고 뺨을 후려치는 선희영. 차희라는 또 그걸 가만히 맞아주고 있다. 어딘가에서 난입한 황정연 역시 즙을 뽑아내며 최대한 선희영을 말리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신체 능력이 좋지 않으니 전부 막아낼 수 있을 리 없다. 당연하지만 먼저 지쳐 나간 것은 선희영 쪽이다. 실제로 피투성이가 된 것은 그녀의 손바닥이지 차희라의 뺨이 아니다. -화풀이 끝났으면 돌아가서 본인 몸이나 회복시켜. 이런 식으로 떼를 쓰는 것보다는 그쪽이 더 도움될 테니까. 그리고 당신은…. -파란 길드 황정연입니다. 17거점의 공략이 완료된 것 같다는 디아루기아 님의 전언이 있어서…. 최대한 빨리 이동하시라고…. 그, 그걸 말씀드리려고 왔는데 정말로 죄송합니다. -확인했어. 그리고 죄송할 것도 없고. -아니요.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 -아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까. -당신…. 후우, 후우, 만약에 이기영 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정말로 죽여 버릴 거야. 정말로 정말로 죽여 버릴 거야. -희영 씨. 이제, 이제 그만 해요.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원래 이런 분이 아닌데…. -네 마음대로 해. 그 꼴 나면 어차피 나도 오래 살 생각 없어. 그리고 방금 말 들었지? 행군 방해하지 말고 내 눈앞에서 사라져 징계 건은 없던 걸로 할 테니까. -빠, 빨리 가요. 희영 씨. 이러지 말고. -정말로 죽여 버릴 거라고 내 말 알아들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 버릴 테니까. 찢어 죽여 버릴 테니까. 내 말 똑똑히 기억해. 이기영 님이 살아 계시는 걸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 기도하는 게 좋을 거라고! -……. 김창렬까지 와서야 힘으로 선희영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사역마를 다시 파란 쪽으로 돌려볼까 하고 생각했었지만 붉은 용병의 단원들 사이에 휩싸여 땅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차희라를 보고서는 화면을 돌릴 수가 없었다.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지만, 간헐적으로 어깨가 떨려오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서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 전 소란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변을 가려줬던 용병의 단원들은 더욱더 외부와 그녀를 차단해 주고 있다. 현재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의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등을 돌리고 있는 그들 역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리라. -역시 방금은 따로 징계하거나 처벌을…. -성녀급 사제를 징계 처벌해서 득이 될게 뭐가 있겠어. 이후에 전투에 가장 필요한 사람 중 한 명이야. 소문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만 신경 써. 분위기 흐려지니까. -네, 알겠습니다. -……. -무사하실 겁니다. -고맙다. 잠깐 멈춰 있던 차희라가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굴에 들어선 감정은 역시나 불안과 수심. 솔직히 많이 힘들 거로 생각했다. 현 상황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그 부담감과 싸워야 한다는 것도 그렇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상상을 다 하고 있을 것이고 정말로 자신의 선택이 맞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솔직히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게 의아하게 느껴진다. 적어도 그녀의 부담을 덜어줄 사람이 있으면 조금 좋으련만 다들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여러모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까 길드를 한 번 둘러 봤을 때도 느꼈던 감정. 정하얀은 자해하고 기절하고 소리를 지르고의 반복. 청승맞은 여주인공이 된 엘레나는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된 업무도 보지 못하고 있는 중. 같은 길드원은 아니지만 카스가노 유노 얘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멘탈을 챙기고 있는 건 박덕구와 차희라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것마저도 불안하게 느껴질 정도였고. 무엇보다 가장 걱정됐던 것은 역시나 김현성의 상태였다. ‘얘도 진짜 봐야 하는데….’ 지금 당장 달려가 내 님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건만 주변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 황정연과 김예리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 보면 녀석이 아직 정신을 놓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확인하는 건 당연한 절차가 아닌가. ‘지금 이 상태대로면 진짜 꿈도, 희망도 없는 거다. 야, 너라도 정신 차려야 한다. 현성아, 진짜.’ 계획이 성공해도 너무 성공해서 문제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야 여파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무너질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병력은 죽어가기 일보 직전이었고 분위기도 개판. 멀리 볼 필요도 없이 방금의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는 수준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건 방금 한 번 이었지만, 몇 발자국 뒤에서 바라보면 걸리는 것이 꽤 많다. 벌써 후유증을 보이는 애들도 있었고…. ‘조금 무리해서라도 보는 게 좋을까.’ 괜스레 정하얀이 사용할 수 있는 아네모네의 눈이 그리워지는 시점. 아쉬운 대로 상황실의 동료에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기….” -네. “저기 17거점 있잖습니까.” -아… 네. 외부고문님. “혹시 거기도 사역마가 배치되어 있습니까? 조금 더 은밀한 놈들로….” -물론 배치시켜 놓았습니다. “다행이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외부고문님이야말로 모니터링 하느라 아주 고생 많으십니다. 곧바로 이렇게 일에 집중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아직 일이 끝난 게 아니니까 그렇지, 이 새끼야. 지금부터가 중요한 건데….’ 중요한 게 시작하기도 전에 무너져 내리게 생겼다. 그래도 본대가 17거점에 들어간다면 조금 더 상황을 면밀히, 아니, 김현성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디아루기아의 활약 때문인지, 본대가 17거점에 들어선 것은 이후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사역마들이 보내고 있는 마력 홀로그램이 무더기로 시야에 비쳐온다. 17거점을 미리 점령하고 있었던 공화국의 군대가 차희라와 손을 맞잡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전체적인 전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등의 새로운 이슈들이 생기기는 했지만 적어도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상태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 역전의 발판. ‘메인 스토리의 핵심 인물’ 무엇 하나 빠질 것 없는 완벽한 배우. ‘이 게임의 주인공이자 이번 시나리오의 마무리를 책임질 종결자.’ 여러 가지로 기대를 하며 17거점의 김현성을 찾아다녔건만 녀석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작은 방 안. 조혜진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는 녀석의 얼굴을 본 순간 괜스레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야….’ “그럼 길드마스터,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쟤, 얼굴 왜 저래.’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은 처음 봤을 때와 별 차이가 없다. 리무르아의 촉수질에 뇌에 강한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닌지 떠올렸을 정도. 그만큼 녀석은 혼이 빠진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 인, 인류의 마지막 희망….’ 그 마지막 희망은 작은 방 안에 있는 사역마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채 초점이 나간 눈으로 허공을 응시 하고 있다.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온 순간 어쩌면 이쪽이 너무 심했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됐어.” ‘되긴 뭐가 돼, 이 새끼야. 너 왜 그래, 현성아. 진짜.’ “이제는… 지쳤어….” ‘지… 지치지 마, 이 새끼야. 지치면 끝이야.’ 예상하던 것보다 더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치지 말라고… 씨바….’ 모든 걸 포기하고 놓아버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 501 회귀자 사용설명서 501화 주저앉기는 했지만 이내 성장하게 되는 클리셰(4) 멘탈이 나갔다는 건 대충 예상했다. 이전에 리무르아에 의해 벽에 처박혔을 때부터 제정신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으니까. 병력을 뒤로 빼 퇴각할 때도 녀석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상태였고 17거점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내내 이상한 상태였다. 혹시나 정말로 머리를 다치지는 않았을지 걱정했을 정도니 다른 말이 필요할 리 없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없다. ‘씨바.’ 그래서 더욱더 똥줄이 탈 수밖에 없었다. 이번 계획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이득 중 하나가 바로 사랑스러운 회귀자와 함께 걷는 꽃길이다. 둘이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행복한 미래를 그리고 있었건만 화면에 보인 건 완벽하게 폐인이 된 김현성의 모습. 여러 가지로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살아 있는 건 맞는지 의심스러운 몰골은 가관이다. 마음이 꺾였다거나 죽은 눈빛을 하고 있다는 지루한 표현이 이토록 잘 들어맞는 모습도 흔치 않을 거다. “이젠… 지쳤어….” 누가 뭐라고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물어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꼴은 실성한 환자를 보는 듯한 느낌. 잘 보면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혼이 완전히 빠져 버린 것 같았으니까. 무의식중에 저도 모르고 중얼거리고 있다는 표현이 가장 옳으리라.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인간이 실어증에 걸리거나 자폐증 비슷한 걸 겪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충격받을 일인가?’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물론 이해가 되기는 한다. 김현성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명백한 것은 이미 호감도 맥스를 찍었다는 것 하나. 김현성이 표현이 서투르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김예리, 조혜진, 박연주 같은 김현성 사단에 포함된 이들보다 이쪽을 더 신경을 쓴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들고 있는 샤넬리아 에르메스 같은 명품 가방은 물론이거니와 온갖 재화를 가져다 바치는 것은 이미 린델 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오죽했으면 파란 길드마스터 연봉의 절반 이상이 부길드마스터의 선물로 사용된다는 헛소리까지 나오겠는가. 어디서 구했는지 전설 등급의 피부 미용 슬라임 젤을 보내온 적도 있었고, 건강에 좋은 영약부터 남자에게 좋다는 정체불명의 산삼 뿌리 같은 것까지 구해온 적도 있었다. 아이템이나 촉매로 사용할 수 있는 물품들 역시 블랙마켓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특등급의 상품이라 봐도 무방했다. 김현성의 얼굴보다 김현성이 보낸 선물을 더 많이 봐왔을 정도다. 물론 처음에는 인재를 붙잡고 싶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변해가는 녀석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이후에는 녀석의 마음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친형제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을 수도 있으리라. ‘좋은 말이지. 형제.’ 이 관계가 허투루 만들어진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고 여러 가지 일을 함께 겪었다. 녀석을 위기에서 구해주기도 했고 녀석이 나를 구해주기도 했다. 함께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는 항상 쓰고 있던 무뚝뚝한 가면을 벗은 상태였고, 그만큼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더욱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꾸 지쳤다고 하는 걸 듣다 보니 떠오르는 게 있기는 하다. 1회 차에서 몇십 년, 그리고 2회 차에서 몇 년, 그동안 그 무거운 짐을 홀로 감당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정신적으로 망가지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녀석이라고 왜 무섭고 외롭고 힘들지 않았겠는가. 당연히 도망도 치고 싶었을 것이다. 대륙을 구해야 한다는 의무는 개인에게 부과되기에는 너무나도 무겁고 무거운 짐이었으니까. 녀석으로선 그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주는 동료가 바로 빛기영으로 비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현성의 방식과는 다르긴 하지만 나는 틀림없이 녀석에게 부과된 짐을 함께해 주고 있었다. 외부적으로 보기에는 여신에게 선택을 받은 사자였고, 녀석에게는 본인밖에 모르는 미래의 위협에 대해 알고 그것을 대비하려고 하는 인물로 비치기도 했을 것이다. 이유와 결과가 어쨌든 간에 빛기영은 틀림없이 김현성의 짐을 함께 들어주던 친우였다. 그런 친우, 형제, 동료, 이건 내 희망 사항이지만 목숨까지 던지며 지켜주고 싶은 소중한 사람, 아무튼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이가 어느 날 갑자기 가면을 쓰고 타락해 등판했다. 심지어 그게 전부 자기 탓인 것처럼 보이는 상황. 김현성으로서는 멘탈이 나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저 가면이 1회차 가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충격받았을 수도 있고…. 주어진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무서운 거일 수도 있고.’ 가면쓰레기에게 여러 번 뒤통수를 처맞고 아끼는 사람들을 전부 잃어야 했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보니 어쩌면 이번 싸움에서 이기영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1회 차에서도 녀석이 소중하게 여기는 건 전부 무너지고 없어졌으니 이번에도 똑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게 많았지만 사실 이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이기영이 가면쓰레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멘탈이 나간 건지. 본인에게 부과된 무거운 짐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허물어져 버린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이쪽을 잃는 게 무서운 건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세계보다는 이쪽을 더 우선시하지는 않을 테니, 단순히 이쪽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게 무서워져 겁쟁이처럼 숨어버렸다는 건, 영 설득력이 없다. 솔직히 뭐가 정답인지는 이쪽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3가지 전부일 수도 있기도 하고. 중요한 건 이번 일로 인해 녀석의 정신이 거북이 등딱지 속으로 숨었다는 것 하나였다. 심지어 내가 잠시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조차 보지 못했던 것 같았으니까. ‘시바. 이유도 이유지만 이 새끼를 일으켜 세우는 것도 중요한데.’ 시나리오상으로도 그리고 향후 관계를 위해서도 이렇게 쓰러지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시바. 이걸 어떻게 해야 돼.’ 어떻게 녀석을 제외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해도 정황상 떠오르는 게 없다. 본인 혼자 알을 깨고 튀어나와 ‘각성해쪄염, 뿌우.’ 하고 나와줬으면 좋겠지만, 현재 상황에서 그런 걸 기대하기도 힘든 상황. 무언가 외부에서부터 자극이 와야 한다는 거다. ‘굳이 내가 해결할 필요는 없긴 한데….’ 일단은 김현성 주변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으니까. 보통 클리셰에서 이런 종류의 알을 깨고 나올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아무래도 히로인이 아닌가. ‘박연주, 조혜진, 김예리.’ 김예리는 히로인으로 보기 좀 거시기하긴 하지만 녀석이 믿고 아끼는 동생이다. 박연주와 조혜진은 대놓고 녀석의 조언자 겸 안방마님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조혜진은 한 번 차이기야 했다만 그래도 가까운 사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오늘 하루는 그냥 쉬게 해주는 게 낫다고 생각하겠지만 17거점에서 하루 정도를 보내고 나면 무언가 액션이 있을 수도 있으리라. 뭔가 감동적이고 마음속에 콕콕 틀어박힐 만한 명대사가 귓가에 내리꽂히다 보면 갑자기 ‘마! 검 들고 확 마! 우리 기영이 구해야 돼! 마!’라고 외칠 게 분명하다. 그런 각성 클리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한 대로 다음 날 아침부터 슬그머니 움직이는 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정신을 차리게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방 안에 들어와 천천히 말을 건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길드마스터. -……. -식사는…. -……. -일단 놓고 가겠습니다. 조혜진 1패. -오빠…. -……. -괜찮아? 괜찮은 거 맞지? -……. 김예리 2패. -파란 길드마스터. 오늘은 조금 괜찮으세요? -……. -상황이 조금 안 좋게 돌아가고 있다는 건… 이해하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힘을 내주세요. 쉽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구해낼 수 있을 겁니다. -……. -현성 씨 탓이 아니에요. 이번에 일어난 일에 너무 자책하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박연주 3패. -부길드마스터는 무사할 겁니다. 마지막에도 분명히…. -……. -길드마스터의 탓이 아닙니다. 네, 길드마스터의 탓이 아니에요. 아마 이, 이러시는 걸 부길드마스터도 원치 않을 겁니다. 적어도…. -……. -……. -……. -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조혜진 4패. -복수해야지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야? 오빠? 정말로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냐고! -……. -정신 차려. 제발…. 제발 정신 차려…. 나, 너무 무서워. 흐윽, 정말로 히끅, 너무 무섭단 말야. -이젠… 지쳤어. -흐으으윽, 제발, 정신 차려…, 제발…. -이젠… 됐어. 김예리 5패. 다시 조혜진 6패, 박연주 7패. ‘시바, 이거 진짜 큰일 났는데.’ 하루, 이틀, 사흘. 조혜진 11패, 박연주 12패, 김예리 17패. 다시 조혜진 22패. 내가 듣기에도 가슴을 찡 울릴 만한 대사가 몇몇 있기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김현성은 미동도 없다. 식사도 거르고 있었고 작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았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 이쯤 되면 본인이 본인을 무의식 속에 가둬 버렸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나야 정신과에 조예가 없어 이게 뭔 상황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어쩌겠는가. 옛날 소년 만화에서 튀어나오던 주인공들처럼 무의식 속에서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애초에 노리고 있었던 건 맞지만, 이 정도까지를 바란 것은 아니다. 적당한 시점에서 스스로 일어날 거로 생각했지만 이건 그 정도 수준을 넘어섰다. 녀석은 벽장 속에 완전히 숨어버렸다. ‘망했다, 진짜. 씨바, 망했다고….’ 김현성의 시계는 멈춰 있었지만, 당연히 현 상황을 둘러싸고 있는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벨리알의 군세는 더욱더 사방으로 힘을 뻗치고 있었고 버티고, 버티고, 버티던 41, 42, 43거점이 무너져 연방 놈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지에서 고통을 생중계하는 중이다. 대륙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고 그야말로 풍전등화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심지어. -저… 이기영 외부고문님. -네? -도노반 님께서 41거점을 정리한 이후에 17거점으로 향하고 계시고 있다고 하십니다. 친우가 만족스러워할 만한 성과를 꼭 가져갈 거라면서…. ‘이 새끼는 또 왜 여기서 난리야.’ 미친 도노반이 강경파 악마들을 이끌고 그로기 상태의 본대를 막타 치러 달려가고 있단다. 혹시 몰라 몇 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안 그래도 개판이 된 상황에서 이 개자식이 한 번 더 개판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것이 사실. 파란 길드원들 역시 모두 김현성에게 다가가 케어 아닌 케어를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반응이 없다. 정하얀은 계속된 마력 탈진 현상으로 인해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그나마 튜토리얼 4인 조 중 가장 정신을 차리고 있는 박덕구는…. -덕구 씨. 괜찮으시겠어요? 정말로…. -형님도 없고… 형씨도… 힘들어하고 있는데…. 누, 누님도 누워 있다니까. -……. -내가 해야 하는 거요. 이번에는… 내가…, 내가 할 거요. 형님도, 형씨도, 더 이상 힘들게 할 수는 없다니까. 이번에는 내가 할 거요. 내 차례요. 김현성의 각성을 독려하기는커녕 녀석을 내버려 둔 채로 모든 상황을 혼자 짊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 502 회귀자 사용설명서 502화 주저앉기는 했지만 이내 성장하게 되는 클리셰(5) ‘뭐,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이 새끼야.’ 마음은 가상하다만 박덕구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조금 슬픈 말이기는 하지만 뜬금없이 박덕구가 각성한다고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전설 등급 중에서도 하위 혹은 중위권에 머물러 있는 녀석이 준 신화급의 몬스터를 상대로 무언가 할 수 있을 리 없다. 백번 양보해 특화된 고기 방패 역할을 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 이상으로 무언가 해주기에는 녀석의 한계가 너무나도 명확했다. ‘괜히 나서지 마라, 덕구야. 원래 이런 건 안 나서는 게 답이야.’ 기실 박덕구뿐만이 아니다. 사실 현 상황을 생각해 보자면 17거점에 있는 이들이 도노반의 군대와 부딪치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준 신화 등급의 악마가 도노반 하나뿐이라면 차희라를 비롯한 몇몇 이들이 녀석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 외에도 수준 높은 강경파 악마들이 버티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온건파 녀석들 몇몇을 심어놓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로서 가장 확실한 답은…. 17거점을 버리고 다시 한번 병력을 뒤로 물리는 것. 하지만 현재 17거점에 들어선 이들은 후퇴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이미 사천왕 도노반이 들이닥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거점은 수성전을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럴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더 이상 밀릴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하리라. 17거점은 선이다. 전략적 요충지로서 그 이점이 엄청나다는 것 이전에 이 거점은 마지노선이나 다름없다. 만약 17거점을 버린다면 머나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2차 연방 탈환 작전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아마 이지혜도 같은 판단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전쟁을 길게 보고 설계한다면 버려도 되는 거점이지만, 전쟁을 짧게 보고 있다면 당연히 버릴 수 없는 거점. 그녀의 본래 성격이라면 조금 더 느긋한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은 현시점에서 병력을 더 뒤로 빼는 건 차희라도 원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막아내기만 하면 되는데….’ 성공한다면 여러모로 많은 이득을 가져올 수 있기는 하다. 바닥까지 가라앉고 있는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게 가장 커다란 부분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생각처럼 되리라고 보기에는 힘들다고 생각되었다. 정하얀도 제정신이 아니었고 김현성도 저 모양 저 꼴. 병력의 분위기는 최악 중에서도 가장 최악이다. 대륙 연합이 41, 42, 43 거점에서 녀석을 맞이했을 때와는 상황이 확연히 달라졌다. 심지어 주변에 있는 다른 악마들까지 긁어모아 거점으로 진격하고 있었으니 괜스레 손톱을 깨물게 되는 상황이라 봐도 무방했다. ‘왜 상황이 꼬이기만 하는 거야, 시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달콤한 과실을 쉽게 따먹을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걸린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걸 떠올려 보면 이 정도 위기가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지만, 본래 인간이라는 것들은 몸이 편한 걸 가장 선호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일단은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17거점 쪽으로 향해야겠습니다.” -직접 병력을 이끌고 가실 겁니까? “아니요. 그렇게까지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해 직접 대비하고 싶은 것뿐이라. 도노반 님에게는 진군 속도를 늦추라 전해주세요. 아니, 기왕이면 군대를 돌려서 다시 이쪽으로….” -이미 시나리오에 없는 행동에 대해 주의를 시켰지만, 막무가내로 들어가셨습니다. 통신 채널도 완전히 꺼놓으신 거로 보이고 꼭 성과를 가져가겠다는 말만 전해달라고…. ‘이 트롤러 새끼, 진짜.’ 여기서 17거점으로 향하는 것보다 도노반의 군대가 거점으로 향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 차이는 길게 잡아도 몇 시간 정도겠지만 그 몇 시간 동안 돼지 새끼나 김현성, 정하얀이 다칠지 누가 알겠는가.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되는 인물에 대해 브리핑을 하기는 했지만 그걸 그 멍청한 자식이 머릿속에 박아놨을지는 미지수였다. ‘김현성, 이 새끼 진짜 뭐 하고 있는 거야. 이 멍청한 놈. 진짜….’ 그래도 녀석이 다시 일어서 준다면, 녀석이 다시 한번 검을 들어준다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상황이다. 혹여나 비치기연으로 잠입해 녀석에게 수정 펀치를 날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요정을 구할 방법도 없고 거점으로 잠입할 방법은 더더욱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다시금 서둘러 입을 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이 꼬였다는 걸 인지한 것인지 상황실에 악마 하나가 긴장한 듯 말을 이어왔다. “지금 당장 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차 하나 준비해 주시고 마차 안에는 여기 있는 상황실을 그대로 옮겨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사역마 조종에 능한 분도 한 분 따라와 주시면….” -제가 직접 가도록 하겠습니다. 외부고문님. 추가로 호위는…. “필요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로노베 님과 함께 가시면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네. 맡겨만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상황실 스태프가 로노베를 언급한 걸 보면 그녀에게 뭔가 언질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후에 꼭 보답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은 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얘가 로노베 소속이었나.’ 로노베가 관리하는 군단 소속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현재 상황과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17거점으로 달려가는 일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이윽고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 주문한 것과 같은 마차가 시야에 비쳤다. 로노베는 여행이라도 떠나는 줄 알았는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의 얼굴을 보고서는 내심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이기영 님! “아! 로노베 님. 이렇게 응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인사는 안에서 드리고 일단 올라타시죠.” -그보다 괘, 괜찮으신 건가요?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그동안 상황실에 계속 틀어박혀 있으셨다는 건 들었지만, 얼굴이 반쪽이 되신 것 같네요. “조금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런 것뿐이니 다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17거점으로 향하는 것도 이번 일과 연관이 있으신 건가요? “네. 혹시 들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도….” -도노반 님. 언제 한번 사고를 칠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할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벨리알 님도 참, 그런 무식한 사람을 언제까지 데리고 있으실 건지. “하… 하하. 남들보다 조금 의욕적인 성격을 가지고 계신 게 화근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포장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걸요. 저한테는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그렇게 무식하게 들이대면 벨리알 님이 자기 공을 치하라도 해주시는 줄 알고 있을 거예요. 시대가 변한 줄도 모르고. 악마가 악마다워야 악마지. 이기영 님 말씀이 딱 맞다니까요. ‘니 말이 맞다. 그래, 니 말이 옳아.’ 마음 같아서는 손뼉을 치면서 호응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마차 안에 들어서자 금방 마차가 출발하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보다는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몇 시간 후면 도노반이 17거점에 들어선다는 걸 아는 만큼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거점 앞에 캠프라도 만들고 정비라도 한 이후 들어갔으면 싶었지만, 그 무식한 놈이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하루라도 빨리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곧바로 돌진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걱정을 하는 와중에도 김현성의 상태를 살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녀석의 상태는 여전했다. ‘제기랄.’ 김예리, 박연주, 조혜진, 심지어는 엘레나를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까지 녀석을 찾아가 심금을 울리는 대사를 쏟아냈지만, 여전히 알 속에 틀어박혀 있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짜증이 몰려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결국에는 내부적으로 김현성이라는 전력을 배재한 채로 수성전에 임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전투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는 녀석을 찾지도 않고 있었다. 당장은 내버려 두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이 선 것이 분명하리라. 나만큼 답답해 보이는 길드원들의 표정에는 알 수 없는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거지 같은 분위기는 본대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차희라가 군대를 모아 멋들어진 연설을 하는 것이 보이기야 했지만 침체된 분위기를 살짝 고양하는 것이 전부. 싸울 준비를 마무리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몇몇 녀석들은 이미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시바.’ 그 와중에도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에 틀어박힌 것은 당연했다. 17거점에 코앞까지 다가온 도노반의 군대를 눈으로 확인한 이후에는 이 전투를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서 도대체 뭘 할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상황을 뒤집을지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해 봤지만, 머릿속에 콱 틀어박히는 게 없다. 도노반을 말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연약한 몸으로 어떻게 그 무식한 새끼들 막는단 말인가. 백번 양보해 녀석을 막을 수 있다고 쳐도 본대가 느끼기에는 무지막지하게 개연성 없는 장면으로 비칠 것이다. 타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교국의 명예추기경이 갑작스레 한편이 돼서 싸우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관객들이 황당해하기 이전에, 직접 설계한 둠기영이 아까워 그런 방법을 선택할 수는 없다. ‘베니고어, 이 새끼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데. 아직도 회복 못 한 거야?’ 이쯤에 김현성에게 개입해 퀘스트를 내려주거나 기적 같은 걸 보여주면 좀 좋겠는가. 이미 충분히 신성이 쌓였을 거로 생각했지만, 아직도 도망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쌍욕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차라리 내가 대륙을 맡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하지 않다. 이번 일이 끝나거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이후에는 틀림없이 회복될 거로 생각했지만, 대륙에 똥을 뿌린 이후에 회복해 봐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나 다름없다. ‘진짜, 시바. 얘는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진짜로 벨리알 쪽에 붙어버릴까.’ 일이 전부 다 끝난 뒤에 일어날 협상 테이블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필요도 없는 신성 따위 쓰레기통에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빛의 연금술사가 아쉬웠던 것도 어둠의 역병군주를 얻기 전의 일이다. 그렇게 똥 씹은 표정으로 홀로그램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로노베가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괘,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로노베 님.” -아무래도 표정이 너무 안 좋으셔서… 그보다 조금 지치신 것 같은데 잠깐 잠이라도 주무시는 게 어떠세요? “끄응. 잠을 잘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또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아서 말입니다.” -에이. 그렇게 스트레스 받으신 상태에서 임하시면 잘 풀릴 일도 잘 풀리지 않는다니까요. 그러지 말고 한숨 주무세요. 아마 눈만 감으시면 금방 잠에 빠져드실 걸요? 제가 어떤 종족인지 벌써 잊으셨어요? “그야, 악… 아!!!” -그냥 악마가 아니라. 음마 로노베 랍니다. 서큐버스라고도 불리기도 하니까요. 어떤 꿈을 꾸고 싶으세요? 이기영 님이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기분 좋은 꿈을 꾸게 해드릴 자신이 있는데. 현세에서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다 깨어나시면 사흘 내내 주무신 것처럼 몸이 개운하실 거예요. 당연하지만 정기를 빼앗기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되고요! 무, 물론 주신다면 감사히 받아가겠지만…. “로노베 님!” -아? 아! 네? 그, 그렇게 갑자기 붙잡으시면…. 혹시 다른 쪽으로 휴식을 취하고 싶으신 거라면 잠깐 준비를….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마력 홀로그램을 통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차희라의 대찬 연설이 들리기는 했다. -우리는 오늘 승리할 것이다. 눈앞에 있는 악마 놈들을 전부 처죽이고 대륙의 상징을 되찾아 올 것이다. 이번 전투는 기억될 것이다. 아직 우리가 빛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전투가 될 것이다. -벌레 같은 인간 놈들이 말은 많구나. 벨리알 님의 충성스러운 사도, 이 사천왕 도노반을 상대로 말이야. 네놈들은 전부 찢어 죽여주마.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찢어 죽여. 내 친우에게 보내는 선물로 사용할 것이다. -무서울 것이고, 두려울 것이다. 이 위협에 겁먹고 숨고 싶은 자들을 비난하고 싶을 생각은 없다. 절대로 겁먹은 자들을 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무엇이 옳은 것인지 천천히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라. 평생을 숨으며 살 것인지, 아니면 영광스럽게 죽을 것인지를 떠올려 보라. 어떤 것이 그대들에게 더 명예롭게 다가올 것인지 다시 한번 떠올려 보라! 인류는… 인류는 오늘 이곳에서 승리할 것이다. -크르르르륵! 크워어어어어어어어!!!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로노베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게 더욱더 중요했다. “혹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꿈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까? 혹은 무의식이라든지. 로노베 님이 아니라 제가 말입니다.” 그러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로노베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기쁜 마음에 그녀를 와락 껴안았고, 이윽고 흠칫흠칫 몸을 떠는 그녀를 뒤로하고 몇 가지 절차 끝에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현성아, 씨바 형 간다!’ 많은 이들이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베를린 장벽을 부수는 건 역시나 히로인보다는 진심을 나눈 친우. 현재 내가 들어와 있는 장소가 녀석의 무의식이 맞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은 이후에 시야에 비친 것은 몸을 웅크리고 있는 녀석의 모습. 천천히 다가가자 이내 고개를 치켜드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기영… 씨?”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왈칵 눈물을 쏟는 녀석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네, 접니다. 하… 하….” ‘그래, 씨바… 형 왔다. 이 새끼야.’ # 503 회귀자 사용설명서 503화 녀석이 원하는 것(1) ‘사실 될지 안 될지는 저도 확신할 수가 없어요. 평범한 인간이라면 들어가는 게 쉬웠겠지만, 이기영 님께서 들어가시고자 하는 인간 같은 경우에는 저와 같은 격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 무의식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지만 들어간다고 해도 금방 튕겨 나갈 가능성이 클 거예요. 어쩌면 위험해질 수도 있고. 시, 시간은 현세로는 1시간, 꿈속 시간으로는 하루가 걸리지 않는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현세에서의 1시간이 꿈속에서의 하루라는 겁니까?’ ‘그건 조정하기 나름이지만… 일단 최대로 잡을 수 있는 시간은 3일 정도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따로 주의 사항은 없지만, 확신을 드릴 수가 없어서 자신 있게 말씀드리기가 민망하네요. 물론 저 인간의 상태를 보면 가능할 것 같기는 하다만, 보통 격이 올라간 인간의 정신력이라는 걸 그렇게 쉽게 뚫을 수 없어서….’ ‘시도는 한번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생각하던 것보다 조금 더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것 같은 터라.’ ‘힘들 것 같은데….’ ‘한번 시도해 봅시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될 것 같지 않다고 혼자 중얼거리던 로노베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노베, 그녀가 판단하는 것보다 김현성이 망가져 있을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진입할 거라고는 나도 생각지 못했다. 마치 자동문처럼 열린 녀석의 무의식은 외부의 침입을 거부하기는커녕 ‘어서 오세요.’를 외치며 들어오라 재촉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과정이 스무스했다는 거다. 음마 로노베조차 의아함을 표현할 정도였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좋다고 봐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일단 들어온 것은 좋지만, 그만큼 김현성의 정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설명해 주는 것 같아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녀석의 무의식을 설명해 주는 주변 풍경을 둘러보니 더욱더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폐허가 된 공간을 메우고 있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 벨리알의 그것보다 더욱더 칠흑 같은 어둠이다. 그 안에서 웅크리며 앉아 있던 녀석을 본 순간 이상할 정도로 짠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평소의 김현성답지 않게 눈물을 흘리며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은 가관이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잘생김을 잊지 않는 모습에는 괜스레 짜증이 일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반가운 마음이 먼저였다. 녀석 역시 그건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어가 있는 건 당연했고. ‘정신을 차리긴 한 거야?’ 무의식 속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정신을 차린 모습이었다. 연패를 반복했던 히로인들처럼 나 역시 패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가 나타나자 조금이지만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이 한층 더 쉬워질 거로 생각되었다. 저쪽에서 1시간, 이쪽에서의 3일.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멘탈을 케어하기에는 나름대로 충분한 시간으로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직도 두 눈을 비비고 있는 녀석에게 다시금 입을 열자 뭐라 말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뻐끔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 “제법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아으…. 어…. 흐윽….” ‘이 새끼 실어증 걸렸나. 왜 이래, 진짜.’ “하, 하하.” “아…. 윽…. 끄윽….”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자꾸만 목이 메는지 속 안에 있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있다. 끄윽, 끄윽 흐느끼는 소리를 애써 속으로 삼키는 소리가 들려와 내가 다 민망할 정도. “…….” 슬퍼 보이기도 하지만 기뻐 보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박덕구처럼 꽉 껴안아 오는 감동적인 연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눈물을 보이는 것이 민망해 고개를 돌릴 만도 하건만 혹시라도 도망칠까 봐 시선이 고정된 모습도 확실히 녀석다웠다. “괜찮으신 겁니까?” “…….” ‘그냥 진정할 때까지 놔둬야겠네.’ 감정에 북받쳐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고맙긴 고마워…. 언제 또 형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고 있었니. 새끼야. 표현 좀 하지 그랬어.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진짜.’ “이제 조금 괜찮아지셨습니까?” “…….” 아직 완전히 진정됐다고 하기에는 힘들긴 했지만 아까 전보다는 상태가 좋다. 다시 한 발자국 앞으로 더 다가가 슬쩍 손을 뻗자 다시금 눈에서 눈물이 차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내 숨을 가다듬으며 뻗어온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죄송… 죄송합니다.” ‘아 씨, 또 울지 마.’ “죄, 죄… 죄송합니다.” ‘너 이렇게 눈물 많은 캐릭터 아니잖아.’ “그렇게 죄송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성 씨 잘못이 아니니까요.” “그, 그렇지만, 그렇지만.” “일단 일어납시다. 계속 여기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까요.”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우리 빨리 나가자. 이제 알을 깨고 나와야지.’ 라고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녀석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 아주 잠깐이었지만 몇 가지 고민을 해볼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다그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살살 달래는 것이 좋을지, 그것도 아니라면 구해달라고 소리치는 것이 좋을지 도무지 감을 찾을 수가 없다. 녀석의 멘탈이 바닥을 향해 사정없이 꼬꾸라졌다고 판단되는 만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말로 싸우는 게 무서워서 회피하고 있는 거라면 다그치는 것은 역효과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되는 게 무서운 거라면 구해 달라고 소리치는 것 역시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혹시나 자신의 실수로 인해 이쪽을 죽이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면 더욱더 그렇다. 잠깐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로운 상태였다. 강경하게 수정펀치를 날리기에는 열심히 일하는 녀석의 눈물샘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많이 남기는 했으니까.’ 일단 몇 시간 정도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복잡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현성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다. 자신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의아해하는 얼굴이었다. “여긴…. 그렇군요. 그렇게 된 거군요.” ‘그렇게 되긴 뭘 그렇게 돼.’ 잠시 의문을 품기는 했지만, 함께 길을 걷자 녀석이 무슨 말을 해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새끼, 구분 못 하고 있구나.’ 지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무의식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전부 끝났군요. 전부….” 본인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모든 상황이 마무리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의아하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본 이후에는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완전히 폐허가 되어 무너져 내린 도시, 확실하지는 않지만, 현재 나와 김현성이 함께 있는 곳은…. “린델….” “네, 린델인 것 같습니다. 결국… 이번에도…. 그, 그보다 기영 씨는 어떻게 된 겁니까? 어째서… 정신이 돌아오신 겁니까? 악마들, 아니…, 그들이 결국….” “…….” “그렇죠. 전부 끝났는데, 이런 질문 같은 건….” “…….” ‘이건 시바, 뭐라고 말해줘야 하나.’ 일단은 닥치고 있는 게 답. 뭐라고 호응해 주고 싶기는 했지만,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린델을 본 이후에는 나 역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건 1회 차의 풍경이다. 멸망한 이후의 대륙이다. 김현성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1회 차의 기억이다.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서도 보기는 했지만, 시간이 전부 지난 이후를 보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녀석이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이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이 모양 이 꼴이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녀석이 측은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에서조차 이런 풍경을 봐왔다는 건 녀석이 아직 1회 차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였으니까. 완전히 무너져 내린 상황에서조차 여기에 매달려 있다. ‘이 새끼 괜히 사람 심각해지게 만드네.’ 더 씁쓸하게 느껴졌던 것은 녀석이 조금은 편해 보였다는 것. 기뻐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 무척 편해 보였다. “제대로 된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가시죠.” “…….” ‘파란 길드 하우스.’ 내가 모르는 풍경이다. 전부 다 무너져 내려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모르는 사람의 액자와 내가 본 적 없는 물건들이 나뒹굴고 있는 게 눈에 띈다. 김현성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말이다. 조금 흥분한 표정으로 주방에 들어간 녀석은 이것저것 뭔가를 챙겨오기 시작했다. “깨지지 않은 게 남아 있었군요. 운이 좋았습니다.” “그건….” “입맛에 맞으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아마 붉은 용병 쪽이나 검은 백조 쪽으로 가면 나오는 게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시간이 조금 늦었으니 여기서 주무시고 내일부터 천천히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누울 곳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영 씨.” ‘현성에몽, 오랜만이네.’ 뭐라 말을 시작하자마자 어딘가로 들어가 침대를 가져오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무의식 안에서도 힘이 센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매트리스를 손으로 팡팡 내리치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한순간에 커다란 먼지가 훅 들어오자 콜록거리는 모습은 꽤 귀엽게 보인다. 얼굴에 흙먼지가 묻을 거라는 건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이윽고 폐허였던 장소가 한순간에 그럴듯한 공간으로 변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법이 없어 클린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기민한 움직임으로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녔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살림살이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 같은 느낌에 정말로 여기에서 며칠 지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시간이 지나도 먹을 수 있는 통조림과 아직 깨지지 않은 싸구려 와인. 조금은 어린애 같은 얼굴로 내 옆에 자리 잡은 이후에 와인을 따라주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즐거웠기 때문이 아니다. 녀석의 행동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슨 즐거운 생각이라도 하십니까?” “아뇨,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상황이 조금 재미있게 느껴져서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너무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 같아서….” “생존자는 없을 겁니다. 아마도요.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고 한들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눈치 못 챌 리가 없지.’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씨발. 김현성이 눈치 못 챌 리가 없다. 1회 차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파란 길드의 흔적을 녀석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모르는 이들의 사진. 미묘하게 달라진 인테리어. 누구의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은 여러 가지 물건. 나는 모르고 녀석은 알고 있는 1회 차의 흔적. 아무리 폐허가 됐다고 한들 김현성이 이걸 놓치고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알고 있는 거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이 새끼는 벌써 눈치채고 있었다. ‘너, 여기서 나갈 생각이 없구나.’ “그래서 부정하고 있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 504 회귀자 사용설명서 504화 녀석이 원하는 것(2) “그래서 부정하고 있는 거야.” “부정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아직 모르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만…. 정말로 살아 있는 인간은 없을 겁니다. 내일 함께 나가보시면 아마 직접 눈으로 확신하실 수 있을 겁니다. 린델은 물론이거니와 실리아 그리고 공화국과 왕국연합 역시…. 심지어는 이종족들도 아마 찾아보실 수 없을 겁니다.” “그런 걸 말하고 있는 게….” “기영 씨 역시 막 정신을 차린 상태라 여러 가지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으시다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제가 전부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은 한참 전에 설명해 드려야 했던 이야기였지만…. 일단은… 네, 차근차근 전부 다 이야기해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요. 일단은 조금 쉬도록 합시다.” “그러니까.” “힘드시겠지만 일단은 마음을 편하게….” ‘마음을 편하게 먹긴 뭘 편하게 먹어, 이 현실도피 장인 새끼야.’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을 거라고 깨달은 건 순식간이었다. 현재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은 느낌.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아무것도 없이 딸랑 둘만 떨어진 멸망한 대륙에서 진심으로 살아갈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당황스럽다. 현세의 상황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지금 이 폐허가 돌아간 이후에 자신이 마주할 상황보다 더 나을 거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 이 새끼는….’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기 자신을 속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 공간이 자신이 만든 무의식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다면, 지금의 내 모습 역시 자신이 만들었다는 걸 자각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생쇼를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혹시라도 이쪽이 침투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만, 로노베피셜에 의하면 눈치채기 힘들다는 것이 정설이다. 만약 이 장소에 있는 내가 본인이 만든 환상이 아니라 진짜 이기영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런 형태로, 이렇게 진실을 외면하는 방법으로 나를 가두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겠냐, 현성아.’ 충분한 휴식 시간을 줬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직도 더 쉬고 싶은 모양이다. 아니, 이제는 쉬는 걸 넘어서 모든 걸 내려놓으려고 하고 있었다. 심각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심각하게 느껴진다. 지금 당장 주먹이라도 휘두르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아직 불안정해 보이는 정신 상태 때문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보이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녀석에게 자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녀석이 그걸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한 번 더, 타인의 입으로 그걸 전해야만 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이곳에서의 사흘은 저곳에서의 한 시간이다. 당연히 사흘을 다 채울 생각은 없다. 흥분한 박덕구가 무슨 개짓거리를 할지 불안했으니까. 일단은 장단을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맛이 느껴질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무 말 없이 술을 한잔 들이켜자, 김현성답지 않게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대부분이 쓸데없고 영양가 없는 이야기였다. 딱, 그저 그런 추억 이야기. 하지만 즐거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고 계십니까?” “네. 사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현성 씨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조금 더 차갑고 냉정한 성격인 줄 알고 있었는데…. 솔직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웃는 모습을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조금 부끄럽군요.” “…….” “저도 제가 이만큼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그렇게 느끼시는 것도 아마 무리가 아닐 겁니다. 기영 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변하지 않았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의사소통에 조금 서툴렀으니….”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정말입니까?” ‘아니, 너 의사소통 엄청 서툴렀어, 이 새끼야.’ “네. 하지만 정말 현성 씨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면 영향을 끼친 것은 저뿐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파란 길드원 모두가….” “네, 그렇죠. 네, 기영 씨 말이 맞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나. “그리폰을 선물로 받았을 때는 깜짝 놀랐지 뭡니까.” “아, 막 수도에서 돌아왔을 때였죠. 저도 좋아할지 걱정했었는데. 그때는 현성 씨가 그렇게 그리폰을 좋아할 줄은 몰랐습니다. 관련 용품이나 축제 같은 걸 즐기실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요. 솔직히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당시에는 혜진 씨 때문에 조금….” “하하하. 그게 정말입니까?” “갑자기 비서실장으로 임명한다고 했을 때는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를 겁니다.” “그, 그건 죄송합니다.” 그리폰을 선물한 이야기, 조혜진에 관한 이야기, 원정 이후의 회식이나, 굵직한 사건들 전부. 주제는 많았다. 녀석도 나도 웃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함께한 시간이 길었으니까. 의외로 공감대가 많았다. 대략적인 상태를 파악하려 대화하다 보니 어느덧 아침이 찾아왔고, 기껏 정리한 침대에는 눕지도 않은 채 하루가 시작됐다. 아마 이때 즈음부터는 나 역시 반포기 상태로 녀석을 지켜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대충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맞춰줬다는 표현이 알맞으리라. ‘그래, 어디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봐라, 이 새끼야.’ 물고기 같은 게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함께 낚시하러 가기도 했고, 생존자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폐허가 된 린델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생존자가 있을 리가 없다. 여긴 녀석이 만든 무의식 세계였으니까. 나 역시 천천히 최후를 맞은 린델을 바라볼 수 있었는데, 확실히 처참하게 무너진 곳들이 눈에 들어왔다. 1회 차의 세계다. 정하얀이 스스로 목매달고, 카스가노 유노가 죽고, 선희영과 차희라는 물론 대륙 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생명체가 없어져 버린 세계. 궁금증이 일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한참이나 걷다 보니 린델 이 전부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올라왔다. 조금 숨을 헉헉거리기가 무섭게 김현성이 말을 걸어왔다. “몸은 조금 괜찮으십니까?” “조금…. 허억…. 힘이 드는 거 같은데….” 무의식 속에서도 체력이 발목을 잡는다. 슈바. “아, 그럼 여기서 조금 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니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종료해도 되고요.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어쩌면 숲 쪽에 야생동물 몇 마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그리폰을 발견할 수도 있고요. 내일은 그쪽으로 한번 가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야생동물은 개뿔.’ “글쎄요. 그보다는 이곳을 더 둘러보고 싶은데…. 아니면 라이오스 쪽은….” “아마 그쪽은 여기보다 더 심각할 겁니다. 여기 물 좀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숨은 조금 괜찮아지셨습니까?” “네, 덕분에. 그나저나 정말 아무것도 없군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네, 고요하기도 하고요.” “…….” “기영 씨.” “네?” “인간이라는 건 참 이상한 것 같습니다.” ‘뜬금없이 왜.’ “모든 게 다 무너진 폐허인데 조금은 예쁘게 보이기도 합니다. 신비롭게 보이기도 하고요. 붉은 노을이….” “확실히 운치는 있네요. 완전히 어두워진 줄 알았는데 그래도 해가 있기는 있는 겁니까?” “한 번도 뜨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빛이라고 할 수 있는 걸 본 적도 없는 것 같고요. 하지만 시간이 되면 이렇게 붉은 노을빛이 보이는 것 같더군요. 아, 그리고 일정 지역을 벗어나면 별이 보이기도 합니다. 어제는 보지 못했으니 오늘 한번 보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한 3일은 걸어야 하는데, 지금 당장은 힘드실 테니 피곤하시면 다음에 보러 가셔도 됩니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요.” “생각보다 많이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이곳에서 혼자 얼마나 지내신 겁니까?” “글쎄요. 그렇게 오래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구라 치고 있네.’ 마음의 눈으로 보면 보이는 게 있는 법이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흔적들이 곳곳에 비친다. 아마 이 흔적 역시 녀석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일 테다. 어째서 저런 흔적이 만들어졌는지도 뻔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김현성이 이 세계에 혼자 남겨진 적이 있었다는 것 하나. 회귀하기 직전인지, 아니면 한참이나 이곳에 남겨져 있었던 건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김현성은 이곳에 있었다. 며칠인지 몇십 년인지도 알 수 없지만, 녀석은 틀림없이 이 장소에서 이 붉은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계속. 매일같이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어두운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의 변화는 이 현상이 전부였을 테니까. 거의 모든 인류가 사라진 상황이었다는 건가? 현성이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가능성이 큰 가설은 알타누스가 녀석을 보호했다는 것. 지금 보이는 게 정말로 김현성이 회귀하기 전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능성은 큼. 너무 여러 가지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와 머리가 지끈거린다. 솔직히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당장 눈앞에 있는 일만 해도 산더미였고, 지금 중요한 것은 1회 차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당시 느꼈던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로노베가 말했던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게….’ 확실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눈에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뚝뚝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한참이나 붉은 노을을 바라보던 녀석은 이내 내 모습을 보고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기, 기영 씨.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갑자기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제기랄! 아무것도 아니라고!” “…….” “…….”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로요.” “…….” “…….” “기영 씨.” “네.” “제가 어제 해드릴 말씀이 있다고…. 그러니까 사과드리고 싶은 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그게 무슨….” “이렇게 말하려고 한 거 아니었잖아, 제기랄.”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뭘 말하려고 하는지 당연히 알 것 같다. 본인이 회귀했다는 소리를 지껄이려고 하는 게 틀림없다. 그렇게 엔딩을 마무리하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걸로 2회 차에 짊어진 마지막 짐을 버리고 홀가분해지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까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게 맞다. 김현성이 원하는 건 피하는 것이다. 책임을 피하는 것, 실패로부터 도망치는 것,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것, 동료를 잃고 친우를 잃고 연인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으로부터 회피하는 것. 더 이상은 감당할 자신이 없어 놓아버렸고, 내 등장으로 인해 마지막으로 지고 있던 짐까지 놓아버리려고 하고 있다. 머리가 지끈거려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저 어처구니없는 사과를 받아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 새끼가 키워놨더니 어딜 도망치려고 그래. 캐리는 하고 가야지.’ 세계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걸 눈으로 확인했는데, 그렇게 쉽게 도망치게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안 나갈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알고 있잖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여기서 계속 이렇게 있을 거야? 정말로 이렇게 끝낼 거야? 이 머저리 새끼.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데. 사실은 알고 있잖아.” “…….” “지금 눈에 보이는 풍경이 전부 가짜라는 거.” “…….” “정신 차리자마자 눈치챘잖아, 이 새끼야.” 그때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벽으로 밀려난 것. 충격으로 잠깐 비틀거렸을 때 시야에 비친 것은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이었다. ‘이 새끼가….’ # 505 회귀자 사용설명서 505화 녀석이 원하는 것(3) 무섭지는 않았다. 표정을 구기고는 있었지만, 위협하거나 해코지를 하려는 얼굴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조금 슬퍼 보이기까지 한 얼굴에 나 역시 녀석을 똑바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벽에 밀어 붙여진 상황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던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숙인 것은 바로 그때. 간헐적으로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 모습은 김현성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이쪽의 말에 부정하지도 않았고 긍정하지도 않고 있었지만, 분위기만 보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고통스럽다는 듯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천천히 물러나고 있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 자체는 여전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긴 개뿔….” “오늘은 그만하시고….” “그만하긴 뭘 그만해, 이 새끼야. 내 눈 똑바로 쳐다봐. 정말 여기서 전부 끝낼 거야?” “아직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맛탱이가 간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묵묵히 등을 돌린 채로 차분하게 자신의 짐을 챙기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뭔가 조금이지만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이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말 돌리지 마.” “…….” “…….” “어째서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김현성.” “이제는 지쳤습니다.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아요. 이 건에 관해서도 이야기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그만해 주세요.” “너는 지친 게 아니라 도망치고 있는 거야. 정말로 여기에서 평생 썩고 싶어?”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너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려고.” “이제… 그만해요.” “죽게 내버려 둘 거야?” “그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보고 싶지 않아요.” “네가 보지 않는 곳에서 뒈질 거다.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거야, 패배자 새끼.” “네, 저는 이미 한 번 실패한 인간입니다. 제가 이곳을 벗어난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결국에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찾아올 겁니다. 그곳에서는 기영 씨도 없을 거예요. 다시 모두가 죽는 걸 보게 될 겁니다. 비난하셔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해 주세요.” “이미 많은 게 달라졌어.” “그건… 기영 씨 때문입니다.” “네가 날 살렸기 때문에 달라진 거야. 병신 새끼, 그 누구도 너한테 무거운 짐을 혼자 들고 있으라고 한 적 없고 뒈지는 걸 지켜봐 달라고 말한 사람도 없다. 한 번 미끄러졌다고 전부 다 끝난 것처럼 이야기하지 마. 나는 이렇게 마무리할 생각 죽어도 없으니까.” “인제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만하긴 뭘 그만해! 이 미친 새끼가, 진짜.” “제기랄!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아느냐고!” “…….” “제길, 제길! 흉내 내지 마. 흉내 내지 말라고. 제기랄!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나에게 책임을 강요하지 마. 이렇게까지 나타나서 나한테 책임을 강요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 한 적 없어. 다시 한번 하고 싶다고 부탁한 적도 없다고! 그러니까 그만 내버려 둬. 제발 그만! 그만 내버려 둬! 더 이상 나한테 책임을 강요하지 마! 이 개새끼들아! 나한테 씨발, 책임을 강요하지 말라고, 씨발….” “…….” “제발 생각하지 마…. 제발…. 제발 생각하지 마. 떠올리지 말라고… 이제 지긋지긋하잖아. 제발 떠올리지 마. 아무것도 떠올리지 마.” “…….” “제발 그만해…. 제발…. 제발 그 모습으로 나한테 책임을 강요하지 마요.” 얼굴이 구겨진 것은 물론 완전히 멘탈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은 뭐라 형용하기 힘들 정도였다. 갑자기 소리를 지른 녀석에게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아마 녀석이 소리를 지른 게 나를 향한 건 아닐 거로 생각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진짜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테니, 자신 안에 있는 무의식에 화내는 거로 판단하는 게 맞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무의식이 자신이 만든 이기영을 통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 책임을 강요하지 말라는 말과 이제 그만하라는 말은 기실 자기 자신에게 외치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 책임에 대해 떠올리지 않으면…. ‘내가 다른 말이라도 꺼낼 거로 생각하는 건가.’ 몇 가지 가설이 있기는 했지만 이게 가장 가능성이 큰 가설. 잠깐 조용해진 녀석이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걸 보고서는 내 생각이 반쯤 맞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개자식의 행동에 맞장구쳐 줄 수 있을 리 만무. 판단하는 건 녀석의 몫이지만 나는 다시 한번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책임 같은 거 강요한 적 없어.” “…….” “그래도 네가 엎지른 물은 네가 주워 담아야지. 안 그래?” “…….” “왜. 나도 네가 만든 사람인 줄 알았어?” 녀석의 표정이 달라진 것은 바로 그때.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다시 한번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아….” “…….” “아아… 아….” ‘먹힌 건지 모르겠네, 씨발.’ 사실 도박이기도 했다. 조금 더 저 장단에 어울려주고 싶었지만, 어느 기점에서 끝맺음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질질 끌려다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성화를 낸 것도 머릿속에 들어오는 오만가지 감정이 원인이었다. 무엇보다 마침표를 찍기에 지금보다 나은 타이밍이 없을 거로 생각했다. 조금은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떻게 내가 녀석에게 닿을 수 있었는지 설명하는 것 역시 신경 쓰이기도 했고 나도 모르게 쏟아낸 발언들이 다시금 생각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었잖아’라든가, ‘이곳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잖아’라든가. 김현성의 입장에서 조목조목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함을 느낄 수 있는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러한 것들까지 생각이 닿지 않은 모양이다. “아… 흐… 윽….” ‘아, 이 새끼 또 우네.’ 의심하기보다는 안도 하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이쪽이 무사하다는 것과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 모두에 대해 확실히 안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게 시바…. 정신 놓지 말지 그랬어.’ 혹시나 했지만 잠깐 제정신을 찾았다는 것 역시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김현성 히로인 3인조의 노력이 무시당한 게 아니라 정말로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한번 조혜진에게 애도를 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슬그머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와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김현성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 자신이 있을 곳이 이곳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남, 남… 아 있으셨군요. 아직… 남아 있으셨군요.” “…….” “찾아와 주신 겁니까.” “이러고 있을 것 같아서.” “어지간히… 믿음직스럽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굳이 그런 건 아니야.” “지금 기영 씨는 괜찮으신 겁니까.” “사실은 조금 위험한 상황이라고 보는 게 맞겠네. 여기에 오는 것도 도박에 가까웠고.” “추태를 보였군요.” “이해할 수 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도 없고.” “…….” “아무도 네게 책임지라고 말한 적 없다. 그 누구도 그렇게 말 한 사람은 없어.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압박으로 느껴진다는 것도, 많은 걸 감당해야 한다는 것도,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굳이 혼자 스트레스받을 필요 없어. 짐은 같이 들면 돼.” ‘키야… 멘트 오졌다.’ 점점 더 감정이 고양되기 시작한다. 잠시 손발이 오그라들기는 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본인에게만 잘 먹히면 됐지, 뭐. 김현성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이쪽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굳이 이유를 찾으라면 이런 부분이었을 것이다.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나는 녀석에게 책임을 강요하지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는. 김현성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게 눈에 보인다. 나는 손을 잡았고 녀석은 다시 한번 내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로노베야, 지금이다. 지금이 타이밍인 것 같어! 지금 해야 돼. 지금이라고! 씨바!’ 김현성과 나를 비추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붉은 노을이 아니다.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응.” “저는 지금까지 제가 바라보던 풍경이 해가 지고 있는 광경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물론 이곳에 해 같은 건 없었지만 말입니다. 계속…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우리 현성이 감상적이네. 감상적이야.’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노을은 해가 질 때도, 해가 뜰 때도 생겨난다. 생겨나는 방향이 다르긴 하지만…. 이미 망한 세상에 그런 법칙이 통용될 리 만무하고…. 아무튼 1회 차의 김현성은 저 현상이 해가 뜰 때 생겨난다는 걸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해야 간다. 누가 저걸 보고 해가 뜨고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저주의 붉은 빛이라면 모를까. ‘사실 이 지경이 된 1회 차 에서는 애초에 태양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 감상적인 얼굴로 빛이 비치고 있는 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만족스럽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 미안해지기 시작한다. 저 현상이 로노베가 만든 주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실이 뭐가 중요하겠어.’ 진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녀석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대한 것. 터져 나온 빛에 눈을 찡그리자 폐허가 됐던 건물들이 하나씩 허물어지기 시작. 마치 김현성의 마음의 짐을 완전히 무너뜨릴 기세로 퍼져나간 빛은 녀석에게 남아 있던 1회차의 흔적들을 완전히 지워버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도 연출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장관이라면 장관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김현성이 마음의 짐을 털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그 가운데 녀석이 천천히 걷기 시작하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점점 더 밝아지는 곳으로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 빛의 영향이 닿지 않은 곳에서 녀석을 붙잡는 손길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김현성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며, 내 손을 잡은 채로 가짜 빛 속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슬슬 마무리할 상황이라고 생각해 슬그머니 녀석의 손을 뿌리치자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여기로는 못 나가.” “아….” “나 말고도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잖아.” ‘뭐야, 이 새끼. 왜 주춤거리고 난리야. 빨리 꺼져.’ “하, 하지만….” ‘이 개새끼. 시바, 안 나가게? 빨리 나가라고.’ “하지만….” ‘빨리 나가, 이 새끼야.’ 씁쓸한 척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온갖 똥줄이 다 타기 시작. 로노베 역시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급조한 인물들을 생성해 연출을 펼치는 것이 보였다. 만들어진 박덕구와 정하얀을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이 녀석에게 손을 내미는 연출은 가관. ‘이건 아니지, 로노베 감독…. 아… 이건 너무 유치하지. 쌍팔년도 클리셰라고, 이건.’ “안 오고 뭐 하고 있는 거요, 형씨. 같이 싸워야지.” 씩씩하게 외치는 박덕구. 손발이 없어질 뻔했다. “현성이 오, 오, 오빠… 빨리 오세요.” 튜토리얼 멤버 정하얀, 급조됐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이 부자연스럽다. 녀석들뿐만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얼굴을 아는 놈들이 전부 녀석을 기다리고 있다. “길드마스터.” “오빠.” “현성 씨.” 38패를 적립한 패배한 히로인 3인방. 안기모와 선희영과 황정연과 병아리들. 이런저런 모습으로 인연을 쌓아온 모든 인물. 교국의 인물들부터 공화국의 인물들까지. 심지어…. ‘쟤는 또 왜 여기 있어.’ 얼굴 본지 오래된 이기연마저 녀석을 향해 미소 짓는 중이다. 로노베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라 나조차 살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딴 게 먹히겠냐고.’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상황. 혹시라도 뭔가 이상함을 직감한 김현성이 눈치를 까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리라. “현, 현성 씨는 혼자… 혼자가… 아닙니다.” 결국, 이 싸구려 연출에 동참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조차도 대사가 꼬여버렸다. 하지만 감상적으로 변한 김현성은 이 모든 상황이 주작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 모습. 사건의 당사자인 만큼 녀석의 손발은 무사해 보였다. 심지어 주인공 같은 대사를 외치는 모습에는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예.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죠.” ‘시바… 기적이다.’ 지금 보이는 광경이 기적이 아니다. 저 싸구려 연출을 보고 넘어간 김현성의 감성 자체가 기적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채로 녀석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린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예.” “믿겠습니다.” “네, 반드시, 반드시.” 제법 환한 얼굴로 빛 속으로 몸을 던지는 녀석의 모습은 지금까지 봐왔던 녀석의 모습 중에서도 가장 편해 보이는 모습. 홀로 남은 채로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약간의 하자가 있기는 했지만, 완벽에 가까운 각성 클리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푸… 흐… 푸흐헤헤헤하핫!”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즐거운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즈아!! 황금의 땅, 엘도라도로!!!” # 506 회귀자 사용설명서 506화 김현성 각성(1) -외부고문님. ‘…….’ -외부고문님. “가즈아…. 황금의 땅…, 엘도라도로….” -외부고문님! “가… 가즈아!!” -외부고문님!! “아….” 이쪽을 부르는 목소리에 감겨 있던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꿀 같은 단잠을 잔 것 같은 느낌에 몸을 일으키는 게 불쾌해졌다. 하지만 이내 안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성공한 건가?’ 확실히 아까와 다른 것 같은 느낌. 무의식 속에 있었던 것도 꽤 현실감 넘치기는 했지만, 현실이 주는 느낌과는 확연히 다르다. 괜스레 주먹을 한 번 꽉 쥐자,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잠들던 마차 안이 맞다. ‘성공한 거 맞네.’ 뒷일이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이만하면 무난하게 성공했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조금 더 이 느낌에 취하고 싶기는 했지만, 여운을 느낄 시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 만큼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서둘러 바깥을 둘러보는 게 정답이라 생각했다. 마력홀로그램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고개를 밖으로 내민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이미 난장판이 된 거점. 전투를 벌인 지 시간이 좀 지나 보이는 상태의 전장이었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어!!! “버텨!!! 버텨어어!!!!” “발사! 발사! 마법사들은 마법 준비해라. 탈진할 때까지 마법을 퍼부어. 절대로 물러서지 마라. 절대로 물러서지 마! 제기랄!” “지지 마!!! 물러서지 마라! 베니고어 여신님이 아직 함께하신다는 걸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몸이 부서지라 싸워!!! 더러운 악마들에게 대륙의 빛을 빼앗길 수 없다!!” 콰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앙!!! “올라오지 못하게 해!! 절대로 성벽을 넘어서게 하지 마!!! 절대로!!!” -커어어어어억!!! 더러운 인간 놈들이!! 감히!!! ‘오우야….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네.’ 그제야 불안한 마음을 조금 쓸어내릴 수 있었다. 아직도 여기가 꿈인지 현실인지 몽롱한 느낌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광경을 확인하니 정신이 화들짝 깨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옆을 바라보니 시야에 비친 것은 코를 막고 있는 로노베. “로노베 님?” -아, 그, 죄, 죄송해요. 외부고문님. 너무 자극적인 걸 봐버린 것 같아서. ‘뭔 소리 하는 거야, 얘는.’ 다시 한번 힐끔 로노베를 바라보자 어째서 코를 막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줄줄 새어 나오는 코피를 최대한 막고 있는 모습은 가관. 심지어는 얼굴이 무척이나 상기되어 있었는데, 자꾸만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은 얘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이러니까 연출을 강아지처럼 했지.’ 당장 탓할 생각은 없다. 어찌 됐건 일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그 연출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조금 전 끔찍했던 연출을 상기하며 고개를 흔들자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가 다시금 말을 이어왔다. -역시… 아쉬우세요? ‘무슨 개소리야. 뭐가 아쉬워? 그래, 씨바, 연출이 아쉬웠지.’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현재 상황에 대해서 짧게 브리핑 부탁드립니다.” -아… 네, 네, 그게…. 그러니까, 네, 전투가 시작된 지는 약 40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에요. 보시는 바와 같이 크게 밀리고 있는 상황은 아니고요. 생각보다 인간들이 잘 저항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현성이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겁니까?” -네, 아마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거라고 보시면 될 것 같네요. “어느 정도요?” -크게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외부고문님과는 다르게 그… 그 인간 같은 경우에는 아주 오랫동안 무의식에 체류하고 있었던 터라.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늦어도 한 시간 정도면 정신을 차릴 확률이 높아요. 더 빠를 수도 있고요. 본래대로라면 하루 정도가 걸릴 수도 있겠지만, 격이 높은 인간이니…. ‘한 시간….’ 버틸 수 있나. 지금의 분위기라면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여겨진다. 물론 확실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수성전에 기초해 병력을 꾸역꾸역 밀어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류의 의지가 느껴졌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싸우고 있기는 했지만, 확실히 눈에 띄는 것은 박덕구. ‘돼지 새끼. 제법이네.’ -최대한 버티는 거요! 최대한! 조금만 있으면 근처 거점에서 지원이 올 거요! 정확히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분위기가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실제로도 달라진 것이 맞다. 병력 전체를 뒤덮은 정체불명의 버프가 녀석의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인다. 커다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소소한 성장을 이룩한 모양이다. 전투력 자체가 크게 성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병력의 중심에 서서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며, 악마들을 막아내는 모습은 마치 성전의 한 장면처럼 보일 정도였다. 실제로도 성전이 맞다. 현재의 전투는 대륙과 그 대륙을 좀 먹으려고 하는 악마들의 싸움이었으니까. 차희라는 강경파 만인장 하나를 상대로 대등한 싸움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 외 다른 이들 역시 다르지는 않다. 똘똘 뭉친 파란 길드가 전선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는 괜스레 뿌듯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1시간 전까지만 해도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던 몇몇 길드원들이 새로운 활력을 받은 듯 몸을 일으켜 싸우고 있었으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오히려 걱정된 것은 상황이 너무 무난하게만 흘러가고 있다는 것. ‘위기가 있어야.’ “조금 더 극적일 텐데….” 극단적으로 말해 이 상태라면 굳이 김현성이 등장하지 않아도 잘 막아낼 수 있을 거라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이쪽의 착각에 불과했던 모양.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밀리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도노반이 합류한 시점이라 볼 수 있으리라. 27군단 쪽에서도 네임드라고 불릴 만큼 거침없이 전쟁터를 헤집고 다니는 녀석의 모습은 솔직히 말해 조금 질린다. 주먹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십 명이 튕겨 나가고 몸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전장의 판도에 영향을 준다. 거점을 수비하는 입장에선 녀석이 눈엣가시일 터. 아마 곧 특임대가 꾸려질 거로 생각했지만, 병력을 뺄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박덕구가 녀석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녀석은 버티기 위해서 자리해 있다. 커다란 방패를 든 채로 녀석을 막아선 모습은 마치 골리앗 앞에 선 다윗. 저 박덕구의 몸이 작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녀석의 압박감이 어느 정도일지는 감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 도노반은 주먹을 휘둘렀고 박덕구는 그 주먹을 막아낸다. 검조차 버린 채로 방어에 집중하고 있음에도 조금 아슬아슬해 보였기 때문에 괜스레 몸을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확실히 잘 버텨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있구나! 인간! 재미있어! 쓰레기 같은 인간 놈! -후우…. 후우…. 물론 몸이 멀쩡할 리가 없다. 엘레나와 선희영의 신성력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다고 한들, 온갖 버프가 녀석의 몸에 들어오고 있다고 한들, 힘의 차이는 너무나도 명확했으니까. 온몸이 으스러지고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도노반을 마크하는 박덕구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신성력이 들어오지 않는 타임은 꾸역꾸역 포션을 마시면서 버티고,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공격은 몸을 구르면서까지 회피한다. 절대로 쓰러지지 않고 끈질기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질척하게 달라붙는다. -쿨럭! 쿨럭! 압력을 버티지 못해 내장이 상했는지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리지만, 녀석은 그 피를 닦지도 않고 오롯이 막아서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박덕구로 도노반을 고립시킨 이후에 다른 지점에서 이득을 볼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녀석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 녀석은 고통을 삼키며 일어나고, 일어나고 또 일어나야 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녀석이 자원했을 확률이 높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도노반, 저 새끼 빨리 치워 버려야 하는데.’ 김현성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상황. 혹시라도 다시 한번 무의식에 들어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로노베를 바라봤지만, 옆에 있는 음마는 고개를 저을 뿐 다른 말을 해오지는 않았다. 심지어 다른 곳에서도 점점 더 전황이 기울기 시작한다. 차희라는 만인장 한 명과 수준을 맞추기 위해 점점 더 지력을 내리고 있었고, 병력 전체를 휘감고 있었던 엘레나의 신성력도 점점 더 바닥나고 있다. 점점 더 전선이 밀리고 있는 상황에도 박덕구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있었지만, 타임 아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개 씨발, 여기서 등장하면 안 되는데.’ 아까와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눈앞에 보이던 수많은 마력홀로그램 중 하나가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 ‘어….’ 김현성의 방 안을 지켜보기 위해 넣어뒀던 사역마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볼 수밖에 없다. 상황실에 있던 악마는 당황했지만, 당연히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녀석을 바라보고 있던 사역마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건 녀석이 깨어났다는 것과 일맥상통했으니까. ‘왔다아! 왔다아아아!!!’ “전체적인 시야 한 번 부탁드립니다.” -네. 극적이어도 이것보다 더 극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정확하게 김현성이 있던 방 안에서 커다란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광기에 몸을 맡기던 양측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본다. ‘키야아….’ -이거 돌아왔구만….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에 엎어져 있던 박덕구는 조용히 중얼거렸고, 도노반 역시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듯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길드마스터…. 조혜진 역시 마찬가지. 김예리는 여느 히로인처럼 고개를 숙이며 질질 짜기 시작했고, 박연주마저 온몸에 피를 묻힌 채로 미소 짓고 있다. 방금까지만 해도 희망을 잃어가던 파란 길드원들은 커다란 소리를 지르며 다시 한번 전열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현재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다른 병력까지 한 발자국 나아갈 힘을 얻는다.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클리셰대로라면 이쯤에서 희망찬 음악이 들려오는 것이 맞다. ‘엘도라도오!!!’ -뭐야…. 뭐가 일어나고 있는 거냐. ‘전형적이고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아주 좋습니다. 저런 대사 아주 어울려요. 도 배우.’ 전형적인 악당 대사를 내뱉는 도노반은 당황한 모습으로 박덕구를 향해 커다란 손을 뻗었지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뻗었던 팔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내 팔이이!!!!! 당하는 대사마저 전형적이다. 그 모습을 본 박덕구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고. -너무 늦은 거 아니요. 형씨…. 고개를 끄덕인 인형은 차분하게 답했다. -죄송합니다. 도노반의 앞에 자리한 것은 완전히 각성을 끝낸 회귀자. 완벽한 왕도의 클리셰 그대로. 전형적인 소년 만화의 주인공 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X나, X나 멋있어…. 씨발….” 2천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 507 회귀자 사용설명서 507화 김현성 각성(2) ‘뿌듯하다, 뿌듯해.’ 본래 아티스트들은 본인의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가장 흥분하는 법이다. 당연하지만 이번 극의 총책임을 맡은 둠 감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온몸에 소름이 쭈뼛쭈뼛 돋은 것은 당연지사.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마치 정의의 아군이 새로운 힘을 얻은 후 빌런 앞에 서는 만화영화처럼 김현성이 보여주는 모습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뭐가 달라진 거지? 새로운 직업이라도 받았나? 뭐, 어떻게 각성한 거야? 진짜 각성한 건 맞나?’ 천천히 확인 작업을 거쳐봐야 했지만, 직업이 준 신화 등급으로 바뀐 것처럼 보인다. 베니고어나 엘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알을 깨고 튀어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심지어 오른손에 쥐어진 검에서 계속해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걸 보면 신화 등급의 능력이 일부 해방된 모양. 박물관에서 쥐여 준 검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각성! 각성! 각성! 김현성 각성!’ 평소와 같이 천천히 검을 든 채로 도노반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은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한 표정. 원래 마음의 짐을 가지고 싸우는 히어로보다 편한 상태로 싸우는 녀석이 더욱더 강한 것이 정설.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주인공은 좀처럼 패배하는 일이 없다. 조용히 숨을 내쉬는 김현성을 모니터링하자 마치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배우 하나는 잘 골랐어.’ 비주얼이 되니 흡입력이 있다. 물론 이 무대의 주연은 녀석뿐만이 아니다. 좋은 영화는 좋은 악역이 등장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법. 당초 계획과는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당하게 될 놈도 아주 제대로 골랐다. 전형적인 악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도 배우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일품. 물론 녀석에게는 연기가 아니겠지만,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는 상황에는 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감히, 감히!!! 인간 따위가! 인간 따위가아아아!!! ‘어우야, 그 대사 왜 안 나오나 했다.’ -감히! 내 팔을!!! ‘이것도 좋고요. 이런 대사 안 나와주면 섭섭합니다, 진짜.’ -후우…. 순식간에 뛰어들어가 커다랗게 휘둘러지는 주먹. 박덕구와의 싸움은 장난이었다는 듯 태산조차 무너뜨릴 것 같은 기운이 들어가 있는 주먹을, 사랑스러운 회귀자는 너무나도 쉽게 피해낸다. 거대한 바람 소리와 함께 풍압만으로 주변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만, 김현성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차분하게 공격을 읽어내고 있었다. -……. ‘예술이네.’ 녀석은 붙으려고 하고 김현성은 거리를 유지한다.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자신의 몸 역시 성치 않을 거로 판단하는 것이 분명했다. 약이 올랐는지 미친개처럼 팔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4천왕 중 최약체의 주먹이 주인공에게 닿을 리 만무. 아직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미 걱정 따위는 달나라로 보내 버린 지 오래다. 김현성은 이 싸움에서 절대로 지지 않는다. 피하는 와중에도 검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은 장관. 숙련된 검사와 전사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언제나 절도 있게 느껴지지만, 검의 극에 다다른 녀석의 움직임은 일반인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다. ‘너무 세진 거 아니야?’ 공격을 허용하면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김현성은 마치 새로 얻은 자신의 힘을 시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도노반이 더욱더 날뛰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고. -감히!!! 나를 기만해! 네가 나를 기만해!? 더러운 인간 따위가 감히!! 27군단의 만인장 도노반 님의 앞에서!! 찢어 죽여주마. 네놈은 반드시 찢어 죽여주마!! -……. -여기 있는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벌레 같은 인간 놈들! 벌레 같은 인간 놈드을!!! 죽어… 아아아아아악!! -……. 한눈을 판 사이 이번에는 다리를 깊게 베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연신 욕을 쏟아내며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도노반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날릴 수밖에 없었다. ‘잘 가라, 노반아. 진짜… 잘 가라.’ -내 친우에게 바치는 산 제물로, 커헉! -……. -제기랄, 내가, 내가! -……. -이… 내가 고작 인간 따위에게… 당할 수는 없어! 당할 수는 없다. 내 친우와의 약속을, 내 친우와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어. ‘아이고, 노반아.’ 눈물이 찡하게 차오르는 상황. 녀석이 역소환 대신 선택한 것은 남아 있는 힘마저 끌어오는 것이었다. 라이오스에서 봤던 벨리알의 모습 정도는 아니었지만 거대하게 몸을 키운 녀석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아마 쌓여 있던 실적을 전부 박아버린 모양.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로노베마저 한심하다는 듯 녀석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멍청한…. 같은 동료라고 하기에도 수치스럽군요. 마치 리미트가 풀린 것 같은 모습으로 보였다. 본디 악마들이 현세로 소환될 때는 일정한 페널티를 안고 들어온다. 모아놨던 실적을 때려 박은 녀석의 현재 모습은 아마 준 신화 등급의 힘을 그대로 낼 수 있을 정도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시스템에 저항해서라도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조금 짠하기는 했지만, 본래 사천왕 중 최약체는 가장 빠르게 퇴장하게 되어 있다. -내 친우여! -그 사람은 네 친우가 아니야. -뭐? -그 사람은 네 친우가 아니라고. ‘그래, 현성아. 시바… 그거야.’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것이냐. 쓸모없는 필멸자에 불과한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개자식들. 대화는 그것으로 끝. 하지만 김현성의 표정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전부 죽여주마! 전부!! 이쪽도 흠칫할 정도로 거대한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커다란 주먹이 다시금 하늘에서 떨어진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마치 라이오스 악몽의 재현. 하지만 김현성은 당황하지 않은 채로 천천히 몸을 날린다. ‘필살기 쓰나요. 필살기 쓰나요!’ 분위기만 보면 알 수 있다. 이번 일격이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마지막 일격일 것이다. 집채만 한 주먹이 떨어져 내리고 김현성의 검에서는 제대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빛이 뿜어져 나온다. 헤어지기 전에 본 붉은 노을 같았던 빛은 어느새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주변의 어둠을 모두 몰아내기 시작했다. 뭐라고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어우야….’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의식 속에서 본 것에 영감을 받았다고 해도 반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유사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본인 안에 있는 모든 마력과 힘을 집중시킨 이후에 약속된 우정의 검을 휘두르는 장면은 마치 그림 같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빛은 어둠을 밝히는 것으로 모자라 도노반의 몸을 완전히 갈라낸다. -하아아!!! -제기이이이이일!!!! 기합 같은 걸 잘 내지르지 않는 녀석이 저항하는 도노반의 마력을 완전히 뚫어낸 이후에 일어난 일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내가, 내가 고작…. 고작 인간 따위에게…. -하아, 하아, 하아…. -미안… 하다. 내 친우…. 죄송… 니다. 벨리알…. -하아, 하아…. 27군단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도노반의 충격적인 최후. 같은 곳에 몸을 담고 있는 만큼 재빠르게 튀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내려꽂히기 시작했다. 1막이 끝났으니, 2막이 시작되어야 한다. 중간 계단을 밟았으니, 최종 장의 끄트머리를 확인해야 한다. “나갑시다. 로노베 님.” -네? 설마 지금…. “아뇨. 잠깐 얼굴 좀 비춰주고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숙제가 뭔지는 알려줘야죠.” -다음 숙제는 뭔가요? “글쎄요. 대륙이 마지막 희망의 등불을 등에 업고, 하나둘 희망을 되찾을 타이밍이니…. 적당히 물러나고 이후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잠깐 쉬는 시간도 주고요. 적당히 회포를 풀 시간도 필요하니까요.” -아…. “17거점을 지켜냈으니, 다시 한번 기회가 있을 거로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이후 들어올 병력과의 최종 결전을 준비하면 된다. 물론 그 싸움은 지금보다는 더 처절할 거라고 잠정 확정되어 있다. 지금 상황에서 왕도라 할 수 있는 클리셰는 타락한 역병군주와 그의 친우인 천재검사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처절한 싸움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김현성을 상대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금 기대하기는 했지만, 방금의 모습을 보니 더더욱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각성할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욱더 괴물이 되어버린 상황. 천재가 괜히 천재겠는가. 악마 만인장 정도는 갈라 버려야 천재지. ‘몸이라도 좀 만들어야 하나….’ “…….” ‘팔굽혀 펴기라도 좀 해야 돼?’ 제대로 한판 뜨기에는 아무래도 스펙이 너무 딸린다. 다른 방법을 천천히 고민해 볼 수도 있겠지만, 만마의 지배자이신 벨리알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몸을 부딪쳐 보는 게 아름답게 비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 검을 나누며 ‘돌아오세요! 기영 씨!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따위의 대사는 타락한 입장에서 한 번쯤 듣고 싶은 대사가 아니던가. ‘뭔 방법이 있겠지, 뭐.’ 일단은 멀리서나마 얼굴을 비치는 게 먼저다. 오랜만의 등장에 로노베가 살짝 긴장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먼 곳에서나마 얼굴을 비치기 시작했다. 물론 둠기영이 쓰고 다니던 가면은 옛날 옛적에 장착한 상태다. 아직 전투 중인 전장을 향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자 악마들이 썰물처럼 거점을 빠져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로노베 역시 언제 긴장했냐는 듯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찰싹 달라붙어 오고 있었고. 아마 모두 안심하고 있을 것이다. 전투는 끝났다. 인류의 첫 번째 승리로 그렇게 전투는 마무리됐다. 하지만 아마 지금 보이는 모습을 보고 환호할 수 있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녀석들이 상대한 것은 겨우 사천왕 중 최약체. 더러운 인간 놈들은 이후 벨리알 님의 선택을 받은 둠기영을 감당해 내야만 한다. ‘그래, 얘들아. 그렇게 강해지는 거야.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무척이나 먼 거리다. 하지만 계속해서 시선이 쏠리는 것이 눈에 보인다. 관심은 없지만 제법 흥미로운 척, 어떻게 한낱 인간 따위가 도노반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척했다. 별거 아닐 거라고, 녀석이 방심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최종 보스의 표정으로 김현성을 바라보자 녀석 역시 똑바로 내 눈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뭔가 다짐했다는 듯이 주먹을 꽉 쥐고서는 손을 가슴 위에 올리는 모습에는 반드시 구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자신의 모든 걸 바쳐서라도 꼭 구해내겠다는 의지의 표현. 무의식 세계에서 두드려준 가슴을 다시 한번 두드리는 것으로 모자랐는지 녀석은 살짝 입을 벌리기까지 한다. 이윽고 무의식 속에 있던 내가 자신에게 전했던 말을 그대로 읊기 시작했다. 거리가 멀어 들리지는 않겠지만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믿고 있겠습니다.” ‘아, 여기서는 머리 한 번 쥐어 잡아주고요.’ 잠깐 내면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는 듯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이후에는 다시 원상 복귀. 아주 잠깐, 혹시나 하는 얼굴로 기대하는 듯한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그 반응에 이쪽은 은발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재미있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보낼 뿐이었다. ‘카리스마 진짜 오졌다.’ “사천왕 중 최약체이긴 하다만, 한낱 인간이 도노반을 처리할 줄이야.” -……. “돌아가지, 로노베. 재미있는 일이 생긴 것 같군.” -네, 이기영 님. ‘마지막까지 몰입 오졌다, 진짜.’ 완벽에 가까운 마무리였다. # 508 회귀자 사용설명서 508화 잠깐의 휴식(1) -돌아가지, 로노베. 재미있는 일이 생긴 것 같군. -네, 이기영 님. ‘키야, 한 번 더 보자.’ -돌아가지, 로노베. 재미있는 일이 생긴 것 같군. -네, 이기영 님. ‘진짜 괜찮네.’ 한 번 지나간 작품에 미련을 두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이건 왠지 모르게 계속 돌려 보고 싶은 장면이었다.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채 각자를 노려보는 모습은 그중에서도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명장면.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나는 둠기영의 뒷모습 역시 마찬가지였다. “키야, 이게 연출이지. 이게 연출이야.” 사실 조금 오그라드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이 정도면 준수하게 역할을 마무리했다고 생각할 만했다. 흘러넘치는 중2 감성이 로노베의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치워 버린 채 와인을 냉큼 목구멍으로 퍼부으니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느낌. 이런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좋다. 소소하게 그날의 성과를 자축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 인간이라면 싫어할 리가 없다. ‘이런 시간이 있으니까, 더 빡세게 일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사실 기왕이면 평생 쉬는 게 가장 좋기는 하다. 조금 더 편하게 있고 싶어 다리를 책상 위로 쭉 뻗은 채로 다시 한번 와인을 들이켰을 때였다. 갑작스레 상황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 낯 뜨거운 동영상을 감상하다 습격당한 청소년처럼 황급히 영상을 끄려고 했건만, 당황한 나머지 되감기를 눌러 버렸다. 듣기 부끄러운 비음이 튀어나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타이밍 좋게 흘러나온 영상은 다름 아닌 도노반의 영상. ‘아이고….’ -내가, 내가 고작…. 고작 인간 따위에게…. -하아, 하아, 하아…. -미안… 하다. 내 친우…. 죄송… 니다. 벨리알…. ‘에이, 씨바. 눈 버렸네.’ 살짝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걸 다 표현할 리 만무. 조심스레 옆을 바라보자 이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리무르아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죄, 죄송합니다. 이기영 외부고문님.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아, 아닙니다.”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 얼굴. -외부고문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네? 아… 네.”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너무 그렇게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절대로 외부고문님이 잘못하신 게 아닙니다. 도노반 그 멍청한 놈이 오히려…. “…….” -이기영 님….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런 사고가 터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도노반 님이 안타깝게 돌아가신 건…. 어디까지나 제 부주의였습니다. 다른 분들이 얼마나 실망하셨을지….”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기영 외부고문님께서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실 일이 아니에요. 예상할 수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어처구니없고 멍청한 사고였습니다. “하지만….” -애초 시나리오를 무시한 채 17거점으로 달려간 것은 그자의 잘못입니다. 심지어 역소환을 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완전 강림을 시도하다니…. 단순히 멍청하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멍청한 놈 때문에 이기영 님께서 마음고생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도 알고 있다. 리무르아야. 내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무슨 잘못이 있겠어. 나는 잘못 없다. 이게 다 전부 다 도노반 잘못이죠. 네, 그렇습죠.’ 사실 내 반응과는 별개로 악마들은 도노반의 죽음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멍청한 놈이라거나 부끄러워하는 쪽. 27군단의 다른 만인장 입장에서는 당연하게 비칠 수도 있는 이야기이리라. 이를테면 연극의 배역에 너무나도 몰입한 나머지 뒈진 거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시나리오도 무시한 채로 단독 행동을 펼치다 인간에게 몸이 반으로 갈라져 돌아가셨단다. 역소환이라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도 실적을 몸에 때려 박은 이후 쓰러진 걸 떠올리면 더욱더 바보 같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숭고한 죽음이나 명예로운 죽음과는 거리가 먼 죽음. 27군단이 72군단에 합류하기 전부터 군단을 지켜온 전사 도노반의 죽음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형편없었다. 오죽했으면 도노반 만인장에 소속된 상급 악마들 역시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정도겠는가. 군단 내 온건파들에게 힘이 더 실렸다는 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다. 마지막까지 친우를 생각하는 녀석의 마음씨 자체는 안타깝기는 했지만, 동정심 따위가 생길 리 만무한 상황이다. 악마 역사상 가장 바보처럼 죽은 녀석을 꼽는다면 단연 1위안에 꽂힐 수도 있을 정도의 위엄. 자신의 소원대로 이름을 날리기는 했으니 어떻게 보면 내가 녀석의 소원을 이루어준 셈이다. 조금 방법이 다르기야 했지만 도노반 녀석도 저승에서 내심 만족하고 있지 않을까?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뿌듯함이 느껴지는 와중에도 얼굴에서는 악어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후우, 좋은 분이셨는데…. 도노반 님은 말입니다.” -네…. “저에게 새로운 지옥을 만들고 싶다고, 모두가 만족할 만한 장소를 만들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7군단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외부고문님…. “죄송합니다, 리무르아님. 잠깐 혼자 있어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고 말고요. “아, 혹시 여기 오신 이유는….” -아뇨, 급한 일은 아니에요. 다만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지 궁금해서,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보다는 너무 심려치 마세요.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번 일에 대해 불만을 품은 이들은 아무도 없어요. 정말입니다. “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후 일정에 대해서는 최대한 빠르게 연락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괜히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합니다.” 촉수르아가 잠깐 고개를 숙여 뺨에 살짝 키스해 준 이후, 슬쩍 고개를 숙인다. 아마 그녀 나름대로 위로의 표현이었을 테지. 뭐가 됐든 상관은 없지만, 이쪽은 다시 한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다행이라 할 만했다.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건 보내는 거고, 이번 일에 대해 개인적으로 정리해 볼 시간도 필요하기는 했으니까. 마침 리무르아가 딱 적당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와 줬다고 봐도 무방했다. ‘사실 내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긴 한데….’ 상황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러고는 있었지만, 선제권을 가진 건 어디까지나 인류 측이다. 이제 막 반격의 불씨를 피워 올리고 있었으니, 조만간 쳐들어올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마 최종 장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계획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하루 정도는… 분위기를 환기할 시간도 필요할 거고. 리무르아가 따라준 와인을 홀짝거리며 화면을 돌리자 확실히 좋은 분위기에 둘러싸인 대륙 연합의 본대의 모습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위하여! 위하여! 승리의 노래를 불러라. 나가자, 내 친우들과 전우들이여. 희생은 있었지만, 그들의 희생은 우리의 가슴속에 평생 기억될 것이라네. 위하여! 위하여! 우리들의 승리를 위하여!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드워프들부터. -잔을 들어라. 승리의 축배를 올리자. 희생자들을 기리고. 작지만 커다란 승리에 감사하자. 경건한 분위기에서 승리의 축배를 드는 인간들까지. 분위기가 너무 풀어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딱 적당한 선에서 승리를 자축하고 있는 모습은 오히려 침체된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어찌 됐건 간에 저런 종류의 시간은 꼭 필요하다. 지금 당장 달려들어 오기에는 인류가 얻은 상처가 너무 크기도 하고…. 체력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병력 전체가 너무나도 지쳐 있다. 아마 지휘부로서도 이번 자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장 나였어도 비슷한 선택을 했을 거고…. 가까이서 볼 수 없는 게 흠이기는 했지만, 조금 멀리서 보기에도 흥분하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김현성을 칭송하는 이들이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래 감사해야지.’ -인류의 새로운 영웅을 위하여. 앞으로 있을 모든 전투를 위하여. ‘분위기 좋네. 진짜.’ -빛의 검을 위하여! 빛의 검을 위하여어!! ‘별명 한번 좋다. 크으, 빛의 검이란다, 빛의 검! 딱 어울리네. 딱 어울려. 현성아, 들리냐.’ -노을빛의 희망을 위해 노래를 불러라! ‘노을빛의 희망. 필살기가 강렬하기는 했지. 아암….’ -노을빛의 검사를 위하여! ‘아이고야. 좋다.’ 완전히 무너졌던 인류의 첫 번째 승리. 모든 희망의 등불이 꺼졌다고 생각했을 때, 사천왕을 단신으로 쓰러뜨린 인류의 영웅이 등장했다. 인류 측에서 저런 반응을 보이며 설레발을 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그래, 이런 게 한 번쯤 등장할 만했다니까.’ 사실 그동안 김현성의 임팩트가 약하기는 했다. 물론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인지도를 올리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강력한 한 방이 없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오죽하면 내가 왜 김현성 밑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소리까지 나왔겠는가. 김현성은 바지사장일 뿐이고, 파란의 실질적인 주인은 이기영이라는 큰일 날 소리를 떠드는 것들까지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현재 상황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세상은 어려울 때일수록 영웅을 바라는 법이지 않겠는가. 김현성은 그 영웅의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했고, 인류를 다시 하나로 뭉치게 하는 매개체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는 중이다. 그동안 인류의 희망으로서 고군분투했던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적당한 타이밍에 김현성이 치고 들어와 줬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지던 짐의 반쪽을 김현성에게 떠넘긴 상황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화면에 비치는 김현성의 표정은 짐을 버린 것처럼 보였다. 물론 거리가 멀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고 있었지만, 더 이상 초조해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한층 더 홀가분해진 얼굴은 녀석의 현재 심리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당장 이쪽이 악마 측에 붙어 있으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겠지만,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이유는 아마…. ‘믿고 있겠습니다.’ 이쪽이 버텨줄 거라고 믿고 있는 거겠지, 뭐. 다른 이들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현성이 뭐라고 말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몰려 있는 이들의 얼굴을 보니 대충 뭐라고 하는지 예상이 간다. 물론 박덕구의 커다란 목소리가 가장 도움이 되고 있었고. -그러니까 혀… 형씨 말은 아직도 우리 형님이 싸우고 있다, 이 말이요? 아마도 내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리라. -형님이 형씨를 찾아왔다는 거요? 심지어 찾아왔을 때의 이야기도 하고 있다. -그러니까 형님이 형씨 가슴을 두드리고, 믿겠다고 말했다는 거 아니요?! 굉장히 쓸데없는 부분까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둘이 같이 노을빛을 봤다, 그 말이요? 무척 디테일한 부분까지. -형씨가 그 악마를 싸울 때 사용한 기술이 형님의 선물이라, 이거요? 본대 전체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커다랗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 새끼, 진짜….’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성 모험가들이 녀석의 주변에 몰려드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심지어 이상할 정도로 사기가 상승한 것 같은 느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영 명예추기경을 구해내고야 말겠다는 열망은 그 집단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509 회귀자 사용설명서 509화 잠깐의 휴식(2) -외부고문님, 4거점 철수 완료했어요. “아이고, 고생하셨습니다.” -7거점도 철수 완료했습니다. 하하하. “그동안 정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희가 무슨 수고를 했겠습니까. 전부 다 이기영 외부고문님 덕분이 아닙니까. 사실 대륙에서는 인지도가 없어 하급 잡마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인간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물론이거니와 괜찮은 실적까지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평생에 걸쳐 모은 실적보다 이번에 한 번 터뜨린 실적이 더 많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니. 이렇게 지옥으로 돌아가기 전에 뭐라도 남길 수 있어 정말로 다행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도와주신 게 외부고문님 이고요. “그렇게까지 띄워주시니 이거 부끄럽습니다.” -약소합니다만, 이건…. “아.” -제 마음이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이러실 필요 없는데….” -아니, 제 마음입니다. 하하. 넣어두세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 이런 걸 받으려고 한 일이….” -에헤이! 외부고문님 넣어두세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큼, 받을 수밖에 없겠지요. 감사합니다.” 입꼬리가 슬슬 올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 쌓여 있는 재화도 재화였지만, 사실 돌아가는 상황 자체가 더 즐겁다고 생각했다. 연이어 들려오는 승전 소식에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 없다. 오늘만 해도 4거점과 7거점이 시나리오대로 철수하는 것에 성공했다. 어제는 13거점과 19거점이 안정적으로 철수했고, 성공적으로 프로젝트가 마무리됐다는 말이 연이어 들려오는 상황이다. 덩실덩실 춤이라고 싶은 심정이었다. ‘확실히.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는 멍청한 아군이라는 옛말이 틀린 게 하나 없어….’ 도노반이 죽고 강경파 놈들의 기가 꺾인 이후, 프로젝트 자체가 굉장히 성공적으로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핸들이 고장 난 8t 트럭처럼 성공적인 돌진을 하고 있는 군단의 기세는 내가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 현 프로젝트는 확실하게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그동안 이 세상의 위기가 몇 번이나 지나갔는지 모른다. 내가 봐도 눈에 띄는 몇몇 악마들은 인간들도 놀랄 만한 연기력을 선보였고, ‘27군단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시그니처 대사 역시 인간들의 기억 속에 점점 더 확실히 틀어박히고 있었다. 인류로서는 성공적인 전투라고 느껴졌겠지만, 도노반 이후 악마 측에서는 묵직한 사망자가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사실상 사망자가 나올 리가 없다. 시나리오대로 퇴장하거나 역소환을 선택하면 죽을 가능성은 무척 희박했으니까. 악마들은 그저 인류를 위협할 만한 커다란 인상을 남긴 채 시나리오를 진행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을 일도 없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인지도도 끌어올릴 수 있다. 인류의 입장에서는 승리가 맞지만 여러 가지로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본인들을 완전히 궁지로 몰아넣은 악마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걸 머릿속에 가지고 살아가게 될 테니까. 마음 약한 놈들은 어쩌면 전쟁 후유증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가장 덩치가 큰 본대뿐만이 아니다. 커다란 연방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수많은 군대. 또 현 상황을 마력 홀로그램으로 지켜보고 있는 인류. 하루에도 절망과 희망을 반복적으로 느끼다 보니 실적이 쌓이는 것은 무척 당연한 순서였다. 27군단 전체의 인지도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하다 보니 지휘부에 있는 악마들까지 웃음꽃을 피우게 된 것이 현재 상황. 다시 한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입을 벌리는 악마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인간들이 기뻐하면서도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제가 어째서 벨리알 님을 따르려고 했는지, 다시 한번 떠올려 보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외부고문님. “하하하, 사실은 만족스럽지 않으실까. 불안했는데 그렇게 느끼고 계시다니 정말로 다행입니다.” -실적이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지옥으로 돌아가 제대로 정산을 받는다면 이제는 27군단이 아니라 20군단, 아니, 19군단이라고 불려도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이기영 님이 일으키신 반향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기 힘드실 겁니다. 지옥에 있는 다른 군단의 악마들까지 이번 일을 온건파의 모범 사례로 홍보하고 있을 정도니….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한 하급 악마와 중급악마들은 2,000년 후에는 꼭 이기영 님의 밑으로 들어가고 싶다 하고 있다더군요. 심지어 10위권 안에 있는 군단장님들 역시 함께 일하고 싶다는 전언을 날려오기도 하고요. “그건….” -벨리알 님께서 이기영 외부고문님을 너무 아끼시니… 아마 직접 전해 듣지는 못하셨을 겁니다. “하하하하. 걱정하실 필요 없다고 전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저야 뭐, 이미 27군단의 사람이 아닙니까. 지옥에 계신 다른 군단장님들의 제의야 감사하지만, 아마 어떤 조건이 나오더라도 27군단 여러분들과 함께 일하는 걸 선택했을 겁니다.” -외부고문님은 역시…. “이렇게 즐겁고 유쾌한 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게 어디 쉬운 일이랍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 3거점은 조금 어떻습니까. “오늘 안으로는 무사히 철수할 것 같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이번 일도 마지막이로군요. “너무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분명히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테니까요.” -외부고문…. 마음 같아서는 계속 여기에 있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도 여러분들께서 계속 남아주시면 너무나도 감사하겠지만, 여러분도 어서 지옥으로 돌아가야지요. 실적이 쌓이는 것도 좋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일터가 아닙니까.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을 처자식과 가족들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다.” -……. “너무 일에만 집중해도 효율이 떨어지는 법입니다. 열심히 일했으니 몇백 년은 푹 쉬어야지요. 다른 차원의 일도 있고요. 2,000년이 다 지나기 전에 다시 한번 소환할 수 있도록 꼭 조치하겠습니다.” -잊지 못할 겁니다, 외부고문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하….” -그리고 그… 혹시 작은 부탁을…. “무엇이든 말씀하셔도 됩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사인을 받고 싶습니다. 혹시 괜찮으시겠습니까? “제 사인이 뭐가 어떻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릴리미리안 님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하하.” -그렇다면 여기 부탁드립니다. 슬쩍 전방을 바라보자 눈앞에 있는 것은 잘 만들어진 것 같은 고풍스러운 소설책. ‘그러고 보니까….’ 일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온 이후에는 간간이 개인 시간을 보내는 녀석들이 보이기는 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들은 저 커다란 책을 읽고 다니는 놈들. 사실 악마들이 독서하는 광경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지만, 그런 상황을 겪은 게 어디 한두 번인가. 기본적으로는 인간들과 크게 다름이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쪽 동네에도 베스트셀러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지옥에서 온 베스트셀러라고 생각하니까… 궁금하기는 하네.’ 슬그머니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책 제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 악마어를 배우기 시작한 게 최근이라 제대로 읽히지는 않았지만, 눈에 보이는 제목은…. [역병군주와 천재검사가 사랑하는 법.]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타이틀이었다. ‘요즘은 뭐 어쩌고 어쩌고가 사랑하는 법이 유행이야?’ 현세나 지옥이나 트랜드는 비슷한 모양이다. 천재검사 같은 경우야 어디에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클래식한 소재고…. 악마들이 사랑하는 법이라는 책을 들고 다니는 게 웃기기야 하지만, 저 사랑은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역병군주라는 이쪽의 직업명이 들어가 있는 것도 의아하기는 했지만, 애초 직업명을 알고 있는 건 로노베, 리무르아를 비롯한 일부 만인장들뿐이고…. 베스트셀러라는 게 단기간에 완성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적당히 우연의 일치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펜을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비슷한 제목의 책을 현세에서도 본 적 있었습니다. 물론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만, 제목이 비슷하니 조금 신기하군요.” -아, 그…. “네? 알고 계십니까?” -천연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천연사요?” -천재검사와 연금술사가 사랑하는 법 말입니다. ‘뭐야, 얘 갑자기 왜 이렇게 진지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은 가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저 안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린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인간들이 쓴 책답게 수준이 낮은 게 눈에 보이더군요. 클리셰를 한 번 꼬는 법도 모르는 정석적인 커플링에는 지루함이 다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필력 자체도 최악이고 쓸데없는 감정 표현에 힘을 들이고 있고요. 전체적으로 너무 심심하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씬은 어째서 그렇게 힘이 없는지. ‘무슨 씬?’ -천재검사가 연금술사를 아낀다는 건 이해합니다만, 폭력성과 가학성이 결여된 작품은 기본적으로 인기를 끌 수가 없어요. 한마디로 말해 자극적이지 않다, 이 말입니다. 그 책은 쓰레기입니다. ‘무슨 평론가야, 이건….’ -떡밥만 뿌린 채, 회수하는 것도 너무 느리고요. 심지어 그 떡밥도 흥미롭지 않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단언하건대 역천사와 인간들이 쓴 천연사를 비교하는 것은 이 글을 집필하신 작가님께 너무나도 큰 실례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저… 정말로 죄송합니다.” -최근 작가님께서 현세에 있는 인간들에게도 이 책을 전파하고 싶어 번역 작업에 힘쓰시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멍청하고 아둔한 인간들에게도 좋은 공부가 될 겁니다. 이 좋은 소재로 얼마나 자신들이 형편없는 글을 써오고 있었는지 분명히 깨닫게 될 겁니다. 그 반응을 보고 싶어서라도 다시 현세로 소환되고 싶…. 아, 제가 너무 말이 길었군요. 조금 흥분하기도 했고요. 죄송합니다. 외부고문님. “아니요. 괜찮습니다. 무엇 하나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닙니까. 그럼 사인은….” -아, 타이틀 바로 밑에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릴리마리안에게라고 써주시면…. “네, 알겠습니다.” -딸아이 선물이라… 너무 감사합니다. 이기영 님. “괜찮습니다. 하하하. 별것도 아닌 부탁이니까요. 그럼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릴리미리안 님.”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외부고문님. 그럼 이만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다시 만날 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야말로. 지옥에서도 꼭 모니터링하겠습니다. 부디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활짝 미소를 지은 채로 천천히 역소환되는 악마 하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평론에 조금 정신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확실하게 마지막 대사는 가슴속에 팍하고 틀어박힌다.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해야지…. 그래.’ 중간 과정이 아무리 좋아도 제대로 된 매듭을 짓지 못한다면 실패한 거나 다름없다. 천연사든 역천사든 둘 다 읽어보지 않아 뭐라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 승리하는 쪽은 마무리 이야기를 잘 매듭지은 쪽이 될 것이다. 물론 그건 내 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실적을 올리고 악마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들, 애매하고 힘없는 마무리가 된다면 많은 이들이 흥미를 잃을 가능성이…. ‘크겠지.’ 대륙과 지옥 모두가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갑작스레 온몸을 짓누른다. 사실 김현성과 몸을 부딪치는 엔딩은 잠정적으로 포기하고 있었던 상태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엔딩은 아무리 생각해도 찾기 어렵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타락한 둠기영과 빛현성이 대립하는 장면은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 ‘제길, 방법을 찾아야겠는데.’ 벨리알의 힘을 빌릴 수 있다고 해도 역병군주는 어디까지나 후방에 랭크되어 있는 직군이다. 전방에서 몸을 써줄 만한 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온전히 내 것으로 싸우는 것과 악마와 함께 2:1로 싸우는 것은 또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다지 멋진 장면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거다. 소환수 설정이라도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잠깐 잊고 있었던 소환수에 대해 생각이 미친 것.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순식간, 지금 당장 연락이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곧바로 통신 채널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기요?’ [어? 어? 정신이 들어온 겁니까? 당신…. 지금 도대체 어디에서 뭘…. 몸은 조금 괜찮은 겁니까?]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디아루기아 님.’ 흑암룡, 아니, 흑역룡 디아루기아가 꼭 필요한 시점이었다. # 510 회귀자 사용설명서 510화 린델에서(1) “당신이라는 인간은 도대체… 도대체! 어디까지 쓰레기인 겁니까!” 처음 만났을 때 반가웠던 얼굴을 했던 것도 잠시.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자 커다란 노호성을 내지르는 디아루기아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웃음기를 쫙 뺀 진지한 표정에 조금 움츠러들기는 했지만 조금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 역시 대륙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결단을 내리는 중이지 않은가. “어허! 이거 아실 만큼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십니까. 어떤 게 정답인지는 디아루기아 님이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일이 저를 위해서 진행되기는 했지만, 대륙을 위해서라는 것 역시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대륙에 악마를 풀어놓는다는 건 정도가 너무 심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을 전면에 나서서 돕다니…. 지금 제정신인 겁니까?” “그렇게 불같이 화내실 사안이 아닙니다. 디아루기아 님.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이게 제가 소환한 악마도 아니고, 여기에 있어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습니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악마들이 쏟아져 나온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은 해보고 저한테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궤변으로 합리화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넌덜머리가 납니다.” “아니, 정말로 합리화 같은 걸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애초에 베니고어와 엘룬을 비롯한 대륙의 신들이 제정신이라면 제가 여기서 이러고 있었겠습니까. 악마들이 이렇게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이유도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 무능력한 신들 때문인데, 어째서 제가 나쁜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 “제가 지금 도망자 신세에 처한 베니고어를 도와주고 있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동안의 사건으로 인해 세이브된 열성적인 기도만으로도 벌써 베니고어가 진 빚의 1/3은 갚았을 겁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지금 악마들이 이렇게 적당히 하는 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고 계시는 겁니까. 진짜….” “…….” “정말로 대륙이 멸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현재 다른 강경파 악마들이 좁은 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는 걸 막고 있는 것도 벨리알 님이고 군단 내 강경파들의 세력을 줄인 것도 벨리알 님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여기 완전히 개판 됐을 수도 있었어요. 인간이라는 인간들은 깡그리 죽고, 무능력한 신들이 자리 비운 틈을 타서 악마들이 완전히 대륙을 먹어버릴 수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건….” “온건파 악마들에게 실적을, 무능력한 신들에게는 신력을, 대륙의 인간들에게는 최소한의 안전과 강해질 기회를 주고 있는 게 누구인지 알고서 저를 쓰레기로 매도하세요, 좀…. 제가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대륙을 위해서라는 걸 확실히 인지하셔야 합니다, 디아루기아 님.” “아무리 그, 그렇다고 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짓입니다. 이런 짓은… 이건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 당장 더러운 악마 놈들에게서 벗어난 다음에 인류와 함께 저항하는 게 옳은 선택이라고 보시는 겁니까? 그럼 지금 당장 같이 나갑시다. 어디 저항다운 저항 한번 해보자고요.” “아니요. 꼭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나 참… 애초에 대륙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존재가 누군데. 오히려 디아루기아 님을 비롯한 드래곤들이 해야 할 일을 제가 대신해 주고 있는 상황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디아루기아 님은 이번 사건이 터지고 나서 뭘 얼마나 해주셨다고 저를 이렇게 압박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이것보다 합리적인 방법은 없다고 봅니다. 뭐, 뾰족한 수가 있으면 디아루기아 님이 직접 말씀해 주세요. 괜찮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수용해 볼 테니까.” “딱히 방법이 있어서 그런 말씀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포괄적인 관점에서 제 의견을 말씀드린 것뿐이라…. 당신이 해 준 일에 대해서는 확실히 가, 감사를 표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본래 세상의 균형을 수호하려고 하다 보면 윤리적인 부분이나 다른 관점에 의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대륙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랍니까. 과정이 조금 깨끗하지 않더라도 결과 자체는 가장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대륙은 평화로울 겁니다. 똘똘이가 살아갈 세상은 정의롭고 평등하며 균등할 거고… 큼, 그러니까 너무 여러 가지 따지면서 촬영장 분위기 흐리지 맙시다.” “…….” “자기 자신과 싸운다는 생각으로 들어갑시다. 네?” “아무리 그래도 여… 역병 드래곤은 조금… 조금 그렇….” “대륙보다 개인적인 체면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겨우 그 정도 드래곤이었어요?” “아니, 아닙니다. 그건… 아니에요.” “그럼 다시 한번 기합 팍 넣고 시작합시다. 우리 똘똘이도 마침 수면기라고 하니 절대로 볼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영상이 남지 않습니까.” “아….” “아, 알겠습니다. 제대로… 제대로 촬영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처절하게 가야되는 겁니다. 처절하게.” “네….” 나라라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디아루기아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잘 구슬릴 수 있겠다, 예상했지만 기존에 생각한 것보다 자연스럽게 넘어온 듯한 느낌. 아마 딱히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모양새가 조금 안 좋기는 했지만, 현재 이쪽이 하는 행동이 가장 효율적으로 대륙을 되돌릴 방법이라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테니까. 그 말 그대로. ‘잘하고 있는데, 뭐.’ 악마들을 컨트롤하고 있는 것도 나고, 대륙을 강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이쪽이다. 심지어 베니고어에게 신력까지 밀어주고 있으니 어떻게 생각해도 가장 아름다운 상황은 현재 상황이라는 거다. 초반에 뒤집을 수 있을 기회가 있기야 했겠지만, 현재로서는 디아루기아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게 정설. 아마 그녀 역시 이걸 알고 있기에 저 힘든 자리에서 고통스러움에 몸을 떨고 있는 것이리라. 조금 말을 더듬기는 했지만, 연기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 느낌. 대륙 전체에 방영되기에 충분했다. -나, 나는… 저항할 것이다. 네놈들이 워, 원하는 대로는 절대로… 절대로…. -볼만하군. 이미 타락한 모습으로 그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꼴이라니. 대륙의 균형을 지켜야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이제는 대륙의 적이 되어 살아가게 될 것이다. 멍청한 용이여.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내게… 서, 선택받은 인간이여. 그들의 꾐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친우들이, 당신을 아끼고 당신이 아끼는 이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디아루리아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들에게 지지 마세요. 아직 당신이 안에서 싸우고 있다는 걸 그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부디…. -시끄러운 소리는 여전하구나. 네가 알고 있던 신의 선택을 받은 인간은 이미 죽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가 아니야. 네가 그를 선택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너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디아루기아여. 오늘부로 너는 나의 권속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믿고 있습니다. -……. -저는 아직도 당신의 영혼에 한 줌 순수함이 남아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습군. -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그 투… 명했던 맑… 은 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싸우고 있는 도중입니다. 분명히요. -그만. 이제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천천히 손을 들자 위에서 거대한 어둠의 기운이 디아루기아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물론 단순한 연출이었다. 하지만 그 효과가 제법 볼만하다. 광택으로 빛나던 검은색 비늘은 칙칙하고 썩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총기가 넘치던 눈동자는 그 빛을 잃는다. 그녀의 상징이라고 불리던 거대한 한 쌍의 뿔은 또 어떠한가. 녹슬어 버린 쇳덩이처럼 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금방이라도 썩어버릴 것 같은 구역질 나는 기운이 담겨져 있다. 심지어 입에서는 검녹색의 체액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 누가 봐도 역병 드래곤처럼 보이는 외관이라 할 만했다. 다른 것보다도 일단 비쥬얼적으로 충격적이라 저도 모르게 박수를 보내게 되는 상황.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 “컷. 키야… 디아루기아 님, 이거 뜻밖에 재능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이 정도로 잘해주실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이… 정도면 된 겁니까? “네. 만약에 더 찍고 싶으시다면 더 찍으셔도 되고요. 사실 저도 충분히 만족스럽기는 했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이다음에 더 좋은 신이 나오게 될지.” -아니요. 마, 만족하신다면 이대로… 마무리,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인간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예의 그 나라 잃은 표정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상황에 불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녀라면 그럴 만했다. 애초에 성격이 이런 일을 하기에 알맞은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모를 동족들이 자신의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거라고 걱정하는 것 같다. 뭔가 소중한 걸 잃은 것처럼 보이는 얼굴에 괜스레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계속 저런 모습이면 어떻게 써먹으라고….’ 사실 역병 드래곤의 모습과 어울리는 모습이기는 했지만, 며칠 후에는 김현성과 부딪쳐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분위기는 좋지 않다. 전위가 튼튼해야 후위도 뭘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럼 이제 슬슬 에베리아 왕국에 있는 벨리알의 기운을 거두라고 해주세요.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간다면 세계수가 다시 한번 위험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당신 말대로 대륙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저로서는 이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어요.” “아… 그 쪽은 좀….” “또 뭐,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겁니까?” “아니요. 뭐, 딱히 그런 이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조금 엎치락뒤치락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아무리 현재의 인류가 희망의 등불을 켜고 달려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최근에 털린 거점만 해도 18개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다는 걸 느끼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쪽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에요.” “그 말씀은….” “악마들이 노리는 장소는 세계수가 있는 엘프의 땅 에베리아. 덕분에 연방 쪽에 있는 병력의 질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라는 설정이 추가로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거점을 빼앗기고 철수한 악마들도 조금은 체면이 서지요.” “정말로 그 이유 때문입니까?” “지분이 높은 이유이기는 합니다. 일차적으로는 긴장감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고요. 당하기만 한다면 누가 악마를 두려워하겠습니까. 갈 땐 가더라도 대륙에 커다란 상처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겠어요?” “그… 래서 정말로 세계수에 해를 끼치겠다는 겁니까?” “아무리 제가 쓰레기라도 그건 좀…. 무슨 사탄 같은 생각을 하는 겁니까? 정말 끔찍한 생각을 하시고 계시네요, 진짜.” “…….” “상처를 입어야 하는 곳은 린델이에요.” “린델….” “네. 아마 이지혜라면 대충은 예상하고 있을 겁니다. 물론 정보가 적어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겠지만 27군단이 아직 철수하지 않은 거점들을 잘 보시면….” “뭐가 어떻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잘 보세요. 지금 대륙의 본대가 유지하고 있는 거점. 그러니까 19 거점과 21 거점, 마지막으로 32 거점을 27군단이 다시 빼앗는다고 가정해 보면….” “린델로 가는 길이 열리는 군요.” “인류 측에서도 현재 거점을 전부 유지하고 있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27군단이 에베리아 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필연적으로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병력을 뒤로 뺄 수밖에 없을 테니… 그사이에….” “거점을 확보하고 곧바로 린델로 들어갈 생각이로군요.” “네. 최종장은 그 쪽에서 마무리 될 겁니다.” “그렇다면 시기는….” “지금부터. 소수의 병력을 제외한 후, 27군단의 전 병력은 린델로 향합니다.” # 511 회귀자 사용설명서 511화 린델에서(2) “이건… 린델이에요. 어떻게 생각해도 그렇게밖에 결론이 나질 않네요.” “그렇지만 이지혜 님. 지금 병력을 뒤로 뺀다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높을 거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에요. 저 역시 지금까지 얻은 포인트를 전부 날리고 싶지는 않지만, 저쪽에서 저렇게 나오니 응할 수밖에 없어요. 정말로 무의식이 남아 있기는 한 모양이네요. 이런 상황에서 굳이 강수를 두는 걸 보면. 확실히 파란 부길드마스터님의 작품이라 할 만해요.” “…….” “전 병력 철수합니다. 죄송하지만 다른 의견은 받지 않겠어요. 각 거점의 지휘관들에게 지금 바로 전파해 주셨으면 합니다. 추가로 현재 린델과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소도시에 완전 피난령을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게 도시를 싹 비우도록 조치해 주세요. 오늘 안으로. 린델 같은 경우에는 다섯 시간.” “하지만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하지 않을지…. 현재 전선에 계신 야전 지휘관들은 조금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에베리아 쪽이….” “지금껏 만들어놓은 분위기를 전부 무위로 돌리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여러분의 생각도 이해는 갑니다만, 여기저기서 탁상공론하며 시간을 보내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박합니다. 에베리아에 주둔한 병력으로서는 지금까지 얻은 거점들을 잃는 게 불안하겠지만, 현재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선을 유지하는 거점이 아닙니다. 린델을 목표로 한 건 저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보는 게 맞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들이 현재 어떤 식으로 소환 유지에 필요한 마력을 얻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올 겁니다.” “아!” “네. 소환 유지에 필요한 인간들이 부족한 시점이라고 판단하시면 될 거예요. 에베리아에 있는 세계수는 아마 린델을 습격한다는 걸 숨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거고…. 악마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현세에 더 오래 체류하는 겁니다. 대륙의 중심에 있는 교국, 그 중심에 있는 린델을 교두보로 삼을 수 있다면 완전히 대륙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그렇다면….” “아마도 마지막 전투가 될 겁니다. 이번 싸움에서 이기느냐, 지느냐가 대륙의 운명을 판가름 지을 갈림길이 될 거예요. 이해하셨다면 정확히 한 시간 뒤에 다시 모이겠습니다. 그전까지 각 거점의 지휘팀 및 전략팀에게 전달 사항 전달해 주시고, 다시 모여서 이후에 시작될 린델 전투에 대해 회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지혜 님.” “긴 회의가 될 거예요. 다들 감사합니다.” “저희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후우….”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전략 본부의 팀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칙칙한 어둠. 저 이상 현상을 보며 온갖 생각을 다 했던 것이 무려 며칠 전이다.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한 이후에는 조금 마음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심지어 지금은 조금 속에서는 알 수 없는 열이 튀어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사건이 터진 초기, 당황스러워 눈물을 터뜨린 걸 생각하면, 그 누구라도 화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쓰레기 같은 인간.’ 사실 설마 설마 하기는 했다.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 연방민의 피난을 돕다가 악마들에게 납치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그 누구보다도 제 몸을 챙기는 바퀴벌레 같은 놈이 제 발로 그쪽 근처를 배회한 것도 신경 쓰인다. 분명 자신은 모르는 사정이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사람이라는 게 어디 이성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이던가. 마음속, 한구석에 있는 불안감이 쿵쾅쿵쾅 울리기 시작했고, 그 불안감을 애써 지우려 잠까지 참아가며 필사적으로 매달려 왔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파란의 길드마스터 김현성이 각성한 직후.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김현성이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한 이후였다. ‘진짜, 이렇게 쓰레기 같은 놈이 또 있을까.’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째서 이기영,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 악마들과 함께 어울리게 됐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둠기영이 노리는 것이 인류의 멸망은 아니라는 것. 당장 이번 일로 얻을 수 있는 게 무척 많지 않은가. 사건이 터지기 전에 가장 핫한 주제였던 인류의 성장부터, 대륙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한 신앙, 심지어는 김현성의 각성까지. 대부분 인간은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하나하나 따지고 들여다보면 그에게 손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했다. ‘오히려 이득을 봤으면 이득을 봤겠지.’ 아마 악마 쪽에 붙어 신나게 와인을 마시고 있지 않을까. 어째서 상황을 조금 더 냉정하게 보지 못했는지… 예전의 자신에게 되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연락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열이 뻗치는 건 자신에게까지 이 모든 일을 비밀로 했다는 것. 심지어 김현성의 꿈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당황스러워 입이 다 벌어질 정도였다. 아마 차희라, 엘레나, 카스가노 유노 같은 이들 역시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으리라. 수많은 여자를 뒤로하고 기껏 처음 만나러 간 사람이 김현성이란다. 황당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는 것 역시 무리가 아니다. 그래도 다른 년들의 꿈에 나타난 것보다는 조금 더 낫다고 자위하기도 했지만, 김현성의 반응을 보자니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마… 지금도 싸우고 있을 겁니다. 믿는다고… 자신도 버티고 있겠다고,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발.” ‘아… 그 기술 말씀이시군요. 정확히 어떻게 깨달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기영 씨가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분명히 기영 씨가 준 선물일 겁니다. 지금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겠죠.’ “이기영 개새끼.” ‘어떻게… 인지는 사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제게 찾아왔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아마 제가 무너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기영 씨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직도 그 무의식 세계를 헤매고 다녔을 겁니다. 분명히… 눈치채셨던 겁니다. 본인 역시 싸우고 있는 도중에도… 말입니다.’ “내가 슬픈 건 눈치 못 챘다 이거네. 이기영, 이 쓰레기 같은 놈.” 물론 문제는 없다. 본부에서는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물었을 뿐이고, 김현성은 그에 대한 답을 했을 뿐이었으니까. 실제로 그가 무척이나 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걸 생각하면 이렇게 열을 낼 필요도 없다. 하지만 본디 인간이란 이런저런 쓸데없는 감정을 느끼게 마련이다.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은 왠지 이쪽을 비웃는 것처럼 보이고, 목소리 역시 살살 약 올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 쓰레기 같은 인간에 대한 원망이었다. 남자 친구가 자신보다 친구를 더 중요시한다는 동성 친구의 연애 고민을 들었을 때만 해도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닥치니 너무나 황당했다. ‘내 꿈에는 안 나타나?’ 아마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본디 질투하는 사람이 추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괜스레 신경질이 난다. 하지만 그 얼굴을 떠올리자 괜스레 고개가 끄덕여진다. ‘취향 참… 중2병이기는 한데.’ “진짜 섹시해….” 은색의 눈동자와 은발의 머리카락. 가면까지는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것마저 섹시하게 느껴진다. 오죽했으면 저 모습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했겠는가. 이곳에 와서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만큼 타지 않은 하얀 피부는 조금 더 창백하게 변했고, 아이덴티티를 잊지 않으려 노력한 악역 연기 또한 일품이었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제 막 희망을 품으려는 인류를 내려다보는 영상은 개인적으로 소장까지 했다. 최근 공개된 디아루기아 타락 영상은 또 어떠한가. 하찮은 동물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과 태도로 멍청한 용을 다루고 있는 장면은 왠지 모르게 온몸을 찌릿찌릿하게 울리는 쾌감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유치한 클리셰라는 건 안다. 언제적 은발이고, 언제적 타락 클리셰인지. 무대 안으로 들어가면 비극적인 장면이 따로 없지만, 무대를 벗어나면 욕을 얻어먹을 수밖에 없는 스토리텔링. 이 모든 걸 알고 있는데도 비주얼로 밀어붙이니 여심이 움직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내 남자로는 딱이지.’ 내면 역시 마음에 들지만, 외관 역시 완전히 취향에 들어맞는다. 가끔 짜증 나는 구석이 있어도 외모를 떠올리면 용서가 된다. ‘이번에도 당해줘야지… 뭐, 어쩌겠어.’ 괜스레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상황을 돌아보고 있을 때였다. 다시 한번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들어오세요’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보인 건 조금 당황한 듯한 전령의 얼굴이었다. “이지혜 님.” “네?” ‘무슨 상황인지 예상이 되기는 하는데….’ “27군단이 점령한 주요 거점들에 자리 잡고 있던 악마들의 수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각 거점에 있는 지휘관들께서 곧바로 공략하실 수 있을 정도라고….” ‘역시나.’ “공략은 불가하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다시 가서 전하세요. 거점 공략은 포기한다고, 혹시 적 본대의 움직임은 포착됐나요?” “정확히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메라를 벗어나고 있는 악마들이 보인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확실하네.’ 예상하던 게 맞았을 때만큼 짜릿한 것은 없다. 조금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역시나 내 남자는 마지막 무대로 린델을 선택했다. 대륙의 중심이며 교국의 중심, 모험가들이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장소이며 상징. 아마 굳이 마지막 장소로 린델을 선택한 이유는 전략적인 목적 외에 다른 부분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결착을 짓기에는 나쁘지 않은 무대다. 연출에 집착하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익숙한 장소만큼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기에 적절한 장소는 없다. 타락한 둠기영과 그런 그에게 제발 정신을 차리라고 외치는 파란 길드원들. 악마의 힘에 취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힘을 선보이는 그와 그에 맞서는 빛의 검사. 구태여 디아루기아를 섭외한 걸 보면 원하는 건 아마 김현성과의 일 대 일 대결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나 참….” “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짜 연출이 어떤 건지 확실히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다.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던 지난 연출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세팅된 무대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열의가 생긴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이벤트에 자신을 끼워주지 않았다는 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거로밖에 해석되지 않았으니까.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해야지, 뭐.’ 본래 능력 있는 여자라는 건 어딜 가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이다. 조금 억지스럽더라도 일단은 둠기영과 김현성을 만나게 하는 장소와 장면 자체가 중요했고, 상황을 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 역시 필요했다. 병력의 편성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둠기영과 빛의 검사를 위한 무대를 떠올리기 시작. 왠지 모르게 약 올리는 것 같이 느껴지던 표정을 떠올리면 이렇게까지 밀어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착을 짓기에 이것보다 더 적절한 그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 에베리아를 압박하고 있던 군세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이윽고. 27군단이 린델로 향하는 것 같다는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찍어놔야겠네.’ 저 버전의 이기영이 끝까지 남아 있을지 모르는 만큼 최대한 많은 자료를 확보해야겠다는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린델에는 전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 512 회귀자 사용설명서 512화 린델에서(3) “결국, 떠나지 않으셨군요. 바젤 교황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오스칼 님 역시 자리를 지키고 계시지 않습니까.” “대륙 연합 역시 두려움을 참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자신만 살겠다, 몸을 내빼는 지도자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죽더라도 교국과 함께 죽겠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과 함께 죽겠어요. 그게 무능력한 지도자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역할입니다.” 조용히 옆을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바젤 교황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온갖 근심이 있는 얼굴이 저러할까. 교황청 내에서도 유명한 불같은 성정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몇 년 사이에 무척이나 늙어버린 것 같은 모습은 지금의 바젤 교황님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아마 단순히 악마들이 쳐들어 왔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 사건이 있었던 이후부터 최근까지 제대로 된 숙면을 하지 못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유는 불 보듯 뻔했으니까.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이 악마에게 붙잡힌 그 순간부터, 대외적인 활동을 제외하고는 기도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셨단다.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여신상에서는 피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그럴수록 바젤 교황은 더욱더 기도에 몰두했다. 몸이 망가질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 늙어 제대로 된 신성 주문 하나를 외우기에도 불안한 몸입니다. 함께 전선에 설 수 없는 것조차 저주스러울 정도인데, 어떻게 살기 위해 교국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분명히 이겨낼 겁니다.” “포기하지 않으셨군요.” “하하, 사실은 며칠 전에….” “네.” “며칠 전에 파란 길드마스터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파란 길드마스터라면….” “네. 빛의 검사 말입니다. 믿어 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말을 꺼내시더군요.” “아….”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아직 악마들과 싸우고 있다고, 자신에게 찾아와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말입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그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기도를 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군요.” “부끄러웠습니다, 오스칼 님.” “네?” “참으로 부끄러웠어요.” “바젤 교황님….” “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 말입니다. 이제는 포기하라고, 이제는 틀렸다고, 무너지는 제 마음을 그 젊은 영웅이 눈치챈 것만 같았습니다. 그를 구하지 못하는 베니고어 여신님에 대한 원망을 그 젊은이에게 들킨 것 같았다, 이 말입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은 분명히, 분명히 이겨내실 겁니다.” “암요. 당연히 그럴 겁니다. 명예추기경은 반드시 이겨낼 겁니다. 베니고어 여신님께서는 절대로 자신의 종을 버리지 않으실 겁니다. 물론 그전에….” “앞에 있는 산부터 넘는 것이 먼저겠지요.” “예. 저는 믿습니다. 여신님도, 미래와 대륙을 위해 싸워줄 전사들도, 그 누구보다도 내면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이기영 명예추기경 역시 믿고 있습니다.” “저도….” “…….” “저도 같은 심정입니다.” 씁쓸한 미소를 애써 삼키고, 조용히 앞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충분히 몸을 피할 수 있는데도 도망치지 않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비친다. 린델이 점점 어둠에 침식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의 광장에 모여 기도를 드리는 이들이 눈에 보였다. “이번 싸움은 대륙의 명운을 결정짓는 싸움이 될 것입니다.” 바젤 교황님의 말 그대로 이 싸움은 대륙의 명운을 결정짓는 싸움이나 다름없다. 전장에 있는 것은 저들이지만, 저들만 싸우는 것은 아니다. 이 자리에서 마지막 결전의 시작을 기다리는 교국민들 역시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들은 이 자리에 서 있다. 아이를 안은 채로 하늘 위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 기도를 드리는 어린 사제님들과 다가오고 있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는 병사들. 손을 잡은 연인과 노부를 모시고 있는 청년.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대륙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것이 분명하리라.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사하셔야 합니다, 명예추기경님.’ 간절히 손을 모르게 된 것은 당연지사.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베니고어 여신이시여.’ 대륙의 무사와 그의 평안을. 그에게 이 시련을 버텨낼 힘을. 언젠가 다시 한번 아리스 시녀님이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그리고. 린델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성스러운 군대가 부디 이 커다란 시련을 이겨낼 수 있기를.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 * * -긴장하지 마라, 제군들이여.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노을빛의 검사 역시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우리는 결단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대륙에 평화를 가져올 그 순간까지, 절대로, 우리가 잃어버린 빛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후우… 후우….” 쿵. 쿵. “후우….” 쿵. 쿵. “괜찮은 건가?” “네, 괘, 괜찮습니다.” “지원병인가 보군.” “네, 그렇습니다.”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데… 아니, 그것보다는… 필드를 떠난 지 오래됐었군.” “네, 은퇴한 지는 조금 됐습니다. 위로 올라가려고 하면 할수록 한계가 느껴지는 터라….” “하, 굳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뭔가? 강제 징용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니, 그것보다 자네의 몸은 이미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그 어깨…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 “…….” “라이오스 출신입니다.” “그렇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병사를 정확히 확인한 이후에야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어색하게 창을 쥐고 있는 이 병사가 어째서 이곳으로 향한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이유는 있겠지만, 아마 이 남자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다른 이들과는 다를 거로 생각했다. 그는 라이오스 출신이었으니까. 예상했던 대로 창을 쥔 남자는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굳이 물어보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자신 역시 긴장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눈앞에 악마의 군세를 두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이 발을 내딛는 소리는 린델에 선 연합군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고, 그들이 몰고 오는 어둠은 본능적인 공포심을 유발하고 있다. 어쩌면 자신은 이 고장 난 병사를 통해 안도감을 느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그가 내뱉으려는 이야기는, 다리가 떨려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자신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줄 테니까.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오는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예상했던 이야기였다. “명예추기경님께서 아내와 딸을 구해주셨습니다.” “…….” “아마 명예추기경님은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아니, 저라는 인간이 존재하는지도 모르실 겁니다. 그분께 저는… 목숨을 빚진 수많은 국민 중에 한 사람에 불과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날 명예추기경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자신의 몸이 완전히 망가질 정도로 신성력을 뽑아내며 72군주가 떨어뜨린 마력에서 저희를 지켜주신 광경은 절대로 잊지 못할 겁니다.” “다시 한번 무기를 들기에 합당한 이유로군. 무섭지는… 않은 건가.”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질문이다. “무섭기는 합니다. 왜 무섭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게 후회되지는 않습니다.” “용기 있군.” “용기라기보다는 죄책감일 겁니다. 아마 그날 명예추기경님께서 라이오스를 지켜주시기 위해 무리하지 않으셨더라면, 어쩌면 지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지나간 일로 자책할 필요는 없네. 그래서 자네가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자네뿐만이 아니야. 아마 모두가 같은 생각이겠지. 이 대륙에 살아가는 인간 중에 어디 그분에게 은혜를 입은 이들이 한둘이겠는가. 자네처럼 커다란 일을 겪은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은 이들은 셀 수조차 없을 것이네.” “예.” “그분과 함께했던 린델의 3대 길드와 주민들, 대륙에 있는 모든 모험가와 베니고어 여신님을 따르는 신도들까지. 모두가 그분을 구하려고 모여 있네. 그분 역시 싸우고 있는 도중이고…. 노을빛 검사의 꿈에 나타나 대륙을 구원할 힘을 선물했다고 하지 않았나. 나 역시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네. 저도 분명히…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 역시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해. 이곳에 모인 이들을 믿으며,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로 생각하며, 이 전쟁을 간접적으로 지켜보고 있을 게 틀림없겠지. 현장에 나와 있는 우리가 질 수가 있나. 여기에 있는 이들을 믿고, 함께 싸울 이들을 믿게나.” 위로의 의미로 어깨를 두드리자 조금은 힘을 받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오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단순히 저 병사를 위로하려는 목적으로 말을 건넨 것은 아니었던 만큼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자네의 마음은 분명히 전해질 것이네.” “분명히 전해질 거요.” “아….” “분명히, 분명히 전해질 거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어디에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비친 것은 무척이나 익숙한 인형이었다. 그 거대한 몸을 전부 가릴 수 있을 것처럼 만들어진 거대한 방패는, 들고 움직이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질 정도.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방패를 들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커다란 손으로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느껴져 얼굴을 들자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 그때는 저, 정,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 있는 지원병이 중얼거리고 있는 모습. “내가 한 게 아니요. 우리 형님이 한 거지. 나는 그 자리에 운 좋게 있었을 뿐이라니까. 아무튼, 와줘서 고맙수다. 분명히 형님이 기뻐할 거요, 분명히. 목소리도 분명히 닿을 거요, 분명히.” 거대한 몸을 가지고 있는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은 성벽의 바깥. 아니나 다를까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굉음을 내지르며 발걸음을 내딛는 이형의 괴물들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표정이 구겨졌다. 조용했던 대지가 울리고 귀를 찌르는 함성이 계속해서 들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현재 벌어지려는 이 싸움이 인류에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잘 알고 있다. 옆에서 창을 쥔 채로 겁먹은 함성을 내지르고 있는 저 지원병처럼 아마 모두가, 아마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 거점을 지킨다는 것은 꺼져가는 대륙의 빛을 지킨다는 것과 진배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길 수 있을까.’ 저 이형의 괴물들을 상대로 인류가 버텨낼 수 있을까. 교국의 수호용으로서 교국과 함께했던 성스러운 용은 역병에 온몸이 뒤덮인 모습으로 어두운 하늘을 배회하고 있었고, 베니고어의 상징은 타락한 가면을 쓴 채로 자기 삶의 터전이었던 곳을 적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륙의 빛이 없는 현 상황에서 우리만으로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적들이 점점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쓸데없는 생각이 점점 머릿속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굳건할 것 같은 신앙과 믿음은 무너지고 그 위치에 자리한 것은 공포심과 불안감. 다리는 점점 떨려오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간다. 종국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고 저도 모르게 악에 박치는 소리를 내질렀을 때.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폭발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폭격을 맞은 것이 아니다. 굉음이 들려온 곳은 바로 근처.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조금은 어색한 표정으로 연신 주먹으로 방패를 두드리며 목이 터지라 외치는 모습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게 될 정도였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이이이!!!” 억지로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목이 터지라 전투 준비를 외치는 모습은 여유가 있다기보다는 필사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무기를 쥔 손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 영웅이 외치는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몸 안에 있는 감정을 고양한다. [전설 등급의 특성 사기의 외침에 영향을 받으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대폭 증가합니다.] “하하하하….” 몸 안에 있는 서린 기운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옆을 바라보자 조용히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길 수 있을 거요.” 그렇게. 인류의 존망을 건 마지막 싸움이 시작됐다. # 513 회귀자 사용설명서 513화 린델에서(4) ‘조금 빨리 온 건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뭐.” 이지혜가 더 빠른 액션을 취하지는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로 맞부딪치는 것 역시 그리 나쁜 그림은 아닐 테니까. 어차피 어느 정도는 이쪽에서 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던가. 단순히 방어만 하며 기회를 노려도 되는 인간들과는 다르게, 군단 측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문제가 많다. 김현성과 나의 일 대 일 구도가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아닌 만큼 전투 초반부터 꾸준히 설계해야 한다. 물론, 인류 측에 너무 커다란 피해가 누적되는 것 역시 최대한 지양해야 했다. 전투 초반, 김현성을 열심히 뛰어다니게 하면서 체력을 소모하게 하고, 이후 만남의 장소에서 감동과 충격의 해후를 나누는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 말은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여러 가지로 불안 요소가 많은 만큼 주의에 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나 역시 이게 될까 싶을 정도로 무리한 요소들이 많았으니,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린델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고개가 끄덕여졌다. 병력의 구성, 병력의 형태, 지원 병력의 위치와 저들이 촘촘하게 짜 놓은 진영까지.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확실히 보이는 것이 많았다. ‘키야, 이래야 우리 지혜 누나지.’ 완벽하게 이쪽을 중심으로 맞춰져 있었던 것. ‘얘, 알고 있었네. 와, 소름이 돋는다, 진짜.’ 과연 1회차 가면쓰레기와 함께 빌런 투톱을 유지했던 쓰레기의 눈치. 지혜 누나야, 이쪽과 굉장히 성향이 비슷하기도 했고, 함께 만든 작품들도 많았으니 눈치채는 게 꼭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생각이 맞아떨어졌다는 건 놀라울 수밖에 없는 부분. 나 역시 그녀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고, 그녀 역시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적당히 죽어야 할 놈들을 죽어야 할 장소에 모아서 배치해 놓은 것은 물론, 아군 피해가 누적되지 않도록 조치한 것도 많다. 이쪽이 조금 더 강하게 병력을 밀어 넣어야 할 곳은 조금 더 단단하게, 뚫어내야 하는 곳은 자동문처럼 열어놓고 있었다. 심지어 이쪽이 죽여야 할 악마를 위한 덫까지 마련되어 있는 모습은 마치 잘 차려놓은 밥상 같은 느낌을 받게 할 정도였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준비해 놨어요.’ 도저히 손을 대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는 식탁을 마련해 놓고 젓가락을 이쪽으로 떠넘기는 상황.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김현성의 위치 역시 그렇다. 아마 녀석 같은 경우는 지원조로 따로 운영될 것이 분명. 이지혜 본인이 직접 전술 김현성을 운용해 볼 생각이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마음의 눈이 없는 만큼 효율은 형편없고, 내려야 할 명령 자체도 굉장히 제한적일 거다. 하지만 내가 있는 쪽으로 녀석을 인도할 수는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쾌재를 지르고 싶은 심정. 복잡하게 생각할 게 단 1도 없다는 걸 인식한 순간이기도 했다. ‘진짜 설계는 이렇게 해야지.’ 나 역시도 놀랄 수밖에 없는 퀄리티. 준비해 놓은 연출도 기대된다. 아팠던 머리가 순식간에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살짝이었지만 미소를 띠는 걸 눈치챘는지, 새로 수행 비서로 선정된 로노베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외부고문님. “네, 로노베 님.”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곳에서 전선을 유지한 채로 한마디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선전전이라면…. “아, 딱히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평소였다면 여러 가지로 협상 카드를 내세울 수도 있겠지만, 대화 자체가 통하지 않은 간악한 존재라는 설정이 조금 더 먹힐 겁니다.” -역시… 빨리 보고 싶으신 거군요. ‘보고 싶기는 하지.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네, 그만큼 고대하고, 고대했던 일이니까요. 준비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제대로 된 마무리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습니다. 로노베 님 같은 악마분들을 실망하게 할 수야 있겠습니까. 어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낸 이후에 악마 여러분들이 안심하고 지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드려야지요.” -저희는 이미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요. 외부고문님. 지금까지 외부고문님이 해주신 일을 생각하면…. “하하하. 그렇다고 하더라고 더 잘 풀리면 더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악마분들께도 전파해 주세요. 도노반 님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소환, 역소환에 꼭 유의하시고 따로 드리는 지령은 꼭 완수해 달라고 말입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외부고문님. ‘어우야, 이거 긴장되기는 하네….’ 여러 가지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새로운 대작 게임의 출시를 앞둔 상황에서 누가 이기는지 보자며 SNS에 뻘 글을 올렸던 게임사의 심정이 이러할까. 점점 더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다. 심지어 김현성과 함께 분량을 뽑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 이유야 조금씩 다르겠지만, 현재 이 지역에 자리 잡은 다른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27군단의 배우 여러분 역시 긴장한 것은 마찬가지. 이미 충분히 실적을 얻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마무리를 하고 싶다는 건 어딜 가나 만국 공통이 아니던가. 중요한 촬영에 진입하기 직전 대기하고 있는 배우들의 표정이라고 할 만했다. ‘그래도 얘네는 조금 사정이 나은 거지, 뭐.’ 27군단과 정면으로 몸을 부딪쳐야 하는 인간들 같은 경우는 공포를 넘어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느낌. 심지어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놈들도 보인다. 알 수 없는 신념을 가지고 검을 들고 있는 이들도 눈에 띄지만, 저들 역시 겁먹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래서 전투가 성립될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여기까지 닿을 듯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어색한 표정으로 연신 주먹으로 방패를 두드리며, 목이 터지라 외치는 이는 다름 아닌 박덕구. “전투 준비!!! 전투 준비이이이!!!” [전설 등급의 특성 사기의 외침의 영향을 받으셨습니다.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소폭 하락합니다.] ‘키야, 박덕구 이 새끼….’ 동생의 성장에 기분 나빠할 형은 없다.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새 성장했네. 그새 성장했어. 돼지 새끼야, 형은 네가 자랑스럽다. 진짜.’ 공포심에 짓눌려 바닥을 칠 뻔한 연합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것은 물론 버프까지 챙겨주고 있단다. 이번 일로 성장한 것은 김현성뿐 만이 아니다. 1인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고기 방패는 어느새 타 모험가들을 이끌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의 눈으로 보기에도 인류 전체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성장했다. 파란 길드는 물론이거니와 이름 없는 중소 규모의 클랜들과 교국에 소속된 병사들 역시 고생한 것이 티가 날 정도의 급성장을 이룩해 냈다. 아마 정신적인 부분 역시 성장했으리라. 연합 안에서 사고를 치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정하얀은 물론이거니와 처음부터 심성이 여린 엘레나도 무척 독해진 모습이었다. 날뛰는 것밖에 하는 게 없을 거라고 여겨졌던 차희라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법을 배웠고, 다분히 의존적이었던 카스가노 유노도 손톱만큼의 자립심을 길렀다. 1회차의 마지막과 비교했을 때는 부족한 점이 많을 수도 있겠지만, 현재 인류는 72악마 군단 전력의 일부를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사기의 외침 영향을 받고 있었던 연합의 장내가 조용해진 것은 바로 그때. 인간들의 함성을 지워 버린 군단은 발걸음을 옮긴다. 군단의 만인장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병력의 사기를 끌어올리며, 점점 더 린델에 다가가고 있다.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온 것은 조금 더 린델에 가까워진 이후. “벌레 같은 놈들.” 땅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전 병력이 성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어!!! -크르르르르륵!! ‘얼마나 버틸 수 있으려나.’ 린델의 성벽은 약하다. 캐슬락처럼 국경에 자리한 것도 아니었고, 몬스터의 숲이 커다랗지도 않았다. 튜토리얼 던전이 대륙에 자리 잡은 이래로, 수많은 모험가와 교국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너비는 넓어졌지만, 방어력은 감소했다고 보는 것이 맞으리라. 연합 측에서도 성벽에 마력을 주입하며 버티기야 하겠지만, 린델은 애초에 수성전을 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성벽에 마력을 더 밀어 넣어! 최대한 오래 버텨야 한다! 뚫려서는 안 돼! -벌레 같은 인간 놈들이 잘도 설치고 있구나. 이 만인장 발리토스의 도끼를 받아낼 영웅은 어디에 있나. 푸핫! 다진 고기로 만들어주지. -서쪽 지역에 최대한 빠르게 지원 부대 보내! 빨리! 지금 뚫려서는 안 된다. -아아아아악! -크워어어어어어어!!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우리와 함께 싸울 것이다. 빛의 검사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초반부터 격렬하네… 어우야….’ 아마 연합 측에서도 전투가 끝날 때까지 성벽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명장이 린델의 수성전을 지휘하더라도 그만한 결과는 이룩해 낼 수 없다. 아마 적당한 시점에서 성벽을 포기하거나 성벽을 무너뜨려 소소한 이들을 취하려고 할 게 분명했다. 서로 그리고 있는 그림은 같을 터. 유례없는 대규모 시가전. 린델 안에서 싸우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거라는 건, 서로 묻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이 수성전은 중요하다. 본격적인 시가전에 돌입하기 전에 얼마만큼의 병력을 줄일 수 있는지가 달린 싸움. 모든 걸 내던질 정도는 아니지만, 그 정도 각오로 싸워야만 하는 전투라고 할 수 있다. 그 각오를 보여주듯 난장판이 된 전쟁터의 모습은 가관. 끊임없이 밀고, 밀어내야 하는 처절한 싸움은 마치 지옥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어우야, 저기는 왜 저렇게… 진짜 소름 돋을 정도로 열심히 싸우네.’ 여성 모험가들과 여성 악마들이 비율이 높아 보이는 장소 한 곳은 그 어떤 지역보다 더욱더 처절해 보였다. -베니고어시여! 저 더러운 리… 악마들을 멸하소서!!! -주제도 모르는 인간들! 주제도 모르는 인간들이!!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만이 세상 전부가 아니다. 이 어리석은 것들!! -죽어라! 이 악마들아! 너희들과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게 수치스럽구나! 절대로 용서하지 마라!! 빛과 정의가 아직 이 자리에 살아 있다는 걸!! 저 악마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엘룬이시여! 부디 저 악마들을 멸하소서!!! -이 땅 위에서 사라져야 할 것은 네년들이다! 절대로 밀리지 마라!! 군단의 어둠들아!! -죽어라! 죽어!! -아아아아아아악!!! -마법 캐스팅해! 빨리!!! 신성 마법은 최대한 적들을 태우는 데 사용한다!! 가벼운 상처는 포션으로 응급 처치해!! ‘그래도 상처는 치료해야지, 애들아….’ -역소환은 포기한다. 군단의 어둠들아!!! 몸이 바스러지더라도 죽을 각오를 다 해 싸워야 한다!! ‘너희 역소환 안 하면 죽어….’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다. 애초에 저렇게 격렬하게 싸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전장이었으니까. 하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니 이 전투에서 메인을 차지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장면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특수 직업을 얻은 사제라도 있는 모양인지 뭘 자꾸 멸하라고만 하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빛이 번쩍이는 중. 정확히 무슨 직업인지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다른 전장이 신경 쓰여 제대로 확인해 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메인은 만인장들이 모여 있는 전장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장면들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발리토스와 리무르아를 비롯한 몇몇 만인장들은 확실히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리무르아의 거대한 촉수를 막아내는 마법사들. 인간 고기를 즐기는 악마 발리토스는 거대한 식칼을 들고 묵직하게 전장에 자리 잡고 있었고, 다른 만인장들 역시 각자의 고유 능력을 통해 연합을 압박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쯤 되면 누가 등장할지는 뻔했다. 검 한 자루를 들고 전장을 헤집는 검사. ‘현성아….’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여야 할 김현성이었다. ‘체력 소모 확실하게 시켜 놔야지.’ 체력과 마력은 무조건 절반 이상 소모하게 해야 했다. 그래야 이 비루한 몸으로 비비는 게 가능해진다. ‘아이고, 열심히 싸운다, 우리 현성이. 힘내라! 힘! 힘! 옳지! 잘한다. 그래!’ # 514 회귀자 사용설명서 514화 역병드래곤이 울부짖었다(1) 위대한 만마의 지배자이신 벨리알 오피셜에 따르면 이 몸으로 벨리알님이 내려주신 힘을 온전히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억지로 커다란 마력을 쑤셔 박아 줄 수는 있지만, 그 마력을 배출해 내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 제한적으로 거대한 힘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도 약 1분 정도가 한계였고. 심지어 용량 자체도 크지 못해 마력도 전부 담을 수가 없단다. 이전보다 강해진다는 건 기정사실이었지만, 김현성과 몸을 부딪칠 정도로 극적으로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거다. ‘제기랄….’ [어둠의 역병군주-준 신화 등급] [악마 72군단의 27군단장 벨리알이 내려준 특수 직업입니다. 기본적으로 역병을 다루는 흑마법사의 파생 직군으로 일반적인 신성력으로는 정화할 수 없는 악마의 역병을 다룰 수 있게 됩니다. 몇 가지의 고유 능력이 있습니다만, 직업 숙련도가 낮아 열람할 수 없습니다. 지력이 +7 올라갑니다. 마력이 +10 올라갑니다. 역병과 독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갑니다. 플레이어 이기영의 고유 능력 직업변환으로 어둠의 역병군주를 활성화할 경우, 준 신화 등급의 직업 빛의 연금술사가 비활성화됩니다.] 전형적인 후위 직군이고 전형적인 디버퍼. 심지어 전투 직군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아닌가 하는 부분도 존재했다. 하지만 몇 가지 조건만 충족시킨다고 가정했을 시, 공격력 자체는 상당한 수준. 개인적으로는 무척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직업명이 역병군주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흑마법 파생 직군인 만큼 기초적인 흑마법을 다룰 수 있는 건 물론이다. 이곳을 기준으로 생화학 무기나 다름없는 역병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메리트는 그 어떤 직업이 가지고 있는 그것보다 더욱더 이쪽에 잘 들어맞는다. 물론 들이마시거나 접촉하는 순간 즉사에 가까운 피해를 주는 종류를 사용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 몇 달의 잠복기를 걸쳐 언데드로 변화하게 만드는 종류나 피부에 접촉하는 순간 해당 부위를 천천히 썩게 하는 것 정도의 레벨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역병의 전부였다. 물론 이마저도 개인이 가지고 있는 마력이나 신성력으로 저항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활용 가치가 낮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벨리알의 마력을 전해 받아 직접 운용한다고 가정하면 상황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녀석들의 저항력을 뚫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조금 더 상위에 랭크된 녀석들도 다룰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모든 게 김현성에게까지 통용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슬그머니 전방을 바라보니 다시금 전방에서 날뛰는 녀석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그저 그런 마법이나 공격은 기본적으로 몸에 두르고 있는 마력조차 뚫어내지 못한다. 항상 온몸을 마력으로 엷게 감싸고 있는 모습에 저게 뭐 하는 짓거리냐고 비웃는 것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저 얇은 마력은 웬만한 탱커의 방어력을 상회한다. 어디까지나 마법 저항력이라는 부분에서. ‘고급 마력 운용 지식.’ 상위의 모험가라면 모두 하나씩 달고 있는 기본 패시브. 김현성의 마력 운용은 이미 인간의 그것을 뛰어넘었다. 웬만한 마법은 몸으로 견뎌낼 수 있게 설계된 개인 보호막은 간접적인 마법이나 디버프에도 저항할 수 있다. 그 활용성이 대단하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녀석은 습관처럼 전투 내내 가벼운 갑옷을 두르고 있었고, 전투 내내 그 갑옷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용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 새끼, 이것도 PTSD 일종인가.’ 만약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1회차에서도 역병쓰레기에게 당한 거라면…. ‘이해가 가기는 하네.’ 그 어떤 방법보다도 더 확실히 저항할 방법으로 보였으니 가장 합리적이라고 할 만했다. 마력의 질이 저 정도라면 벨리알의 힘을 빌린 이후에도 김현성에게 대미지를 주는 것은 불가능. 외부의 충격으로 마력 보호막을 찢는 방법도 있겠지만, 저 보호막이 그렇게 쉽게 찢어지는 것도 아니다. 능력 자체로만 봤을 때는 김현성은 이 직군의 카운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거다. ‘어우, 왜 이렇게 빠른 거야, 저거.’ 하물며 저 속도는 어떠한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처럼 이곳저곳을 빨빨거리는 속도는 녀석의 가장 커다란 장점. 녀석은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피지컬과 균형 잡힌 밸런스를 가지고 있는 검사였지만, 전반적으로 속도 위주의 검사라는 인식이 무척 강하다. ‘그만큼 빠르거든.’ 하위 모험가의 눈에는 김현성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김현성은 그만큼 빠르다. 속도를 써먹을 수 있는 검술이 합쳐지니 여기저기에서 역소환되는 악마들이 속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어떻게든 김현성 공략의 불씨를 살리려 하고 있었지만, 현재 보여주는 모습은 말도 안 되게 인상적이다. 지원이 필요한 곳에 적재적소에 나타나 검을 휘두르는 녀석의 모습은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전선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굵직한 배우 몇몇을 지옥으로 되돌리고 있다. 만약 김현성이 던전의 레이드 보스고, 내가 던전 공략 지원팀에 있었더라면 나는 보스몹 김현성에게 공략불가 판정을 내렸을 거다. 그만큼 지금 보여주는 모습은 눈을 비비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디아루기아 님. 거, 가만히 있지 말고 역병의 숨결이라도 몇 방 날려 봐요.” -여, 역병의 숨결이 아닙니다. “조금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역병의 숨결이라니… 그렇게 말하는 거 그만둬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이쪽의 부탁은 따라줄 요량인지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디아루기아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관통형으로 짧게 숨을 내뱉자, 이윽고 브레스가 빠르게 김현성에게 날아갔지만, 처음부터 잘못 쏜 것처럼 스치지도 못하고 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만인장 하나와 전투를 벌이고서도 이쪽의 반응을 살피고 있는 모습. 저도 모르게 괴물이라는 혼잣말이 나올 정도였다. ‘1회 차 역병쓰레기가 난 놈이네, 난 놈이야.’ 저런 상태의 김현성을 어떻게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보나 마나 뻔하지, 뭐. 그 새끼가 뭐, 다른 방법이 있었겠어?’ 김현성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인질로 잡거나, 간악하고 더러운 술수로 지속해서 멘탈을 흔들었을 거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고서는 저 검사를 상대할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이쪽 역시 그런 방향으로 노선을 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엔딩에 필요한 장면은 아니다. ‘사실 빛기영 자체가 인질이기도 하고….’ 사실상 이런 종류의 꼼수가 아니면 김현성과 제대로 붙기에는 영 무리가 따른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그렇에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전투가 중요했다. 다시금 김현성의 모습을 바라보니 여전히 전장을 활개 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조금씩, 조금씩 틀어지는 부분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 저건 김현성 문제가 아니다. ‘아이고, 지혜 누나 고생하네.’ 아마 이지혜의 문제일 가능성이 컸다. ‘전술 김현성은 저렇게 쓰는 게 아닌데….’ 전술 김현성을 사용하는 데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이 분명한 상황. ‘그래, 이해는 된다.’ 세세한 부분을 캐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 정보 전달 속도가 느린 것이 눈에 띈다. 이지혜의 사고력이 김현성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느껴질 정도. 중간중간 멈칫거리거나 방향을 급선회하는 것은 물론 전체적으로 동선이 구리다는 느낌이 강했다. 아마 그녀로서도 답답할 것이 분명하리라. 자신의 생각대로 전술 김현성이 움직여 주지 않으니까. 사실 내가 전술 김현성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건 가장 큰 이유는 머리가 아닌 눈이다. 눈으로 본 정보를 연산하는 뇌 역시 한계가 느껴졌지만, 기본적으로 전장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가장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지혜는 나보다 좋은 감각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여러 가지 정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느 정도는 커버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운용한 것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 성과를 내면서도 표정을 살짝 구기는 김현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지금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게 아닌데….’ 라거나. ‘기영 씨가 필요해.’ 라거나. 스펙이 아무리 좋은 자동차도 누가 모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라는 거다. 물론 저걸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녀가 전술 김현성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는 건 이쪽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으니까. 시시각각 바뀌는 전장의 정보를 제대로 습득할 수 없다 보니 기본적으로 멀티태스킹에 시간이 걸린다. 처리해야 할 대상의 좌표를 보내놨지만, 이미 도착하기 전에 전황이 바뀌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다 보니 김현성은 본의 아니게 똥개 훈련을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주요 거점에서 만인장급 활약을 보이는 악마 하나를 처리하라는 지령을 전달받았건만, 막상 장소에 도착해 보니 녀석이 역소환되어 있단다. 후위를 위협하는 적 특수 부대를 막으라는 지령을 듣고 뛰어나가 봤지만, 이미 다른 탱커들이 그들의 안전을 확보한 상황이란다. 모든 행동이 똥개 훈련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엇갈린 지령들이 많다 보니 녀석의 체력이 빨리 떨어질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 8시간은 움직이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무색해질 정도로 녀석은 지쳐 보인다. 겨우 3시간도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쯧….’ 전술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파워가 너무 막강하다 보니 적절히 사용할 수 없음에도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아마 김현성이 없었더라면 린델의 성벽은 옛날 옛적에 무너지지 않았을까. 조금 과장해서 말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녀석이 전쟁터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녀석의 머리카락과 목에는 벌써 땀방울이 맺힌다. 덕지덕지 피가 묻어 있는 얼굴을 닦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끊임없이 뛰어다니며 균형을 맞추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숨은 거칠어진다. -하아… 하아….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마력을 아끼기 위해 마력 갑옷을 벗어버렸고 어쩔 수 없는 상처들이 계속해서 몸에 쌓인다. 물론 걱정할 정도로 크게 다친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움직이기에 거슬리게 느껴지는 찰과상. 신성력으로 곧바로 회복하고 있었지만 저런 상처들을 녀석의 체력을 좀 먹게 될 것이다. “역병의 숨결 부탁드립니다. 방사형 말고 관통형으로.” -그러니까 역병의 숨결이 아니라고, 후…. 콰아아아아아아앙!!! “아니, 진짜로 맞추면 어떻게 합니까!” -쏘, 쏘라고 한 건 당신이지 않았습니까. “아니, 애 다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체력 좀 더 소비시키려는 게 목적이었는데… 그걸 정타로 박아버리면….” -저도 쏘고 싶지 않았습니다. 쏘라고 한 건 당신이에요. 역병의 숨결 같은 거… 절대로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고요. 아… 다행히 다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몸을 비틀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검으로 베어낸 것 같고요. 몸에는 부담이 있겠지만 움직이는 데 커다란 무리는 없을 겁니다. “살짝살짝 빗나가게 쏴주세요. 디아루기아 님.” -저도 최대한 신경 쓰고 있습니다. 체력이 떨어지면 집중력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슬슬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한 것이다. ‘저 상태면 회수해야겠는데.’ 호흡이 거칠어 보인다. 몸도 무리하고 있는 것 같고. 본래대로라면 잠시라도 쉴 여유를 주는 것이 맞다. 회수, 출격, 회수, 출격 하는 게 확실히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현재의 전장에서 김현성이 시간을 비운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 심지어 버티고, 버티다 못한 성벽의 한쪽이 무너지려고 하는 상황에 슬슬 복장과 가면을 가다듬었다. ‘이건 들어오라는 거네.’ 성벽이 무너지는 쪽으로 들어오라는 것이 아니다. 아마 저 장소는 연합 내 병력을 묶어놓기 위한 수단일 터. 애초에 역병드래곤을 보유하고 있는 이쪽에게 성벽이라는 건 무의미하다. 정확한 장소는 무너진 성벽의 반대쪽.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대공 방어 전용 병력과 시스템이 완전히 무력화된 북서쪽 지역이었다. “진짜 역병에 걸린 것처럼 연기해 주셔야 하는 거 잊지 마세요. 떨어진 다음에는 역병드래곤이 울부짖었다. 크롸롸롸롸!! 같은 것도 한 번 해주시고요.” -제발…. “그럼 크롸롸롸는 뺍시다. 아쉽지만 평소보다는 더 강한 하울링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무대는 나쁘지 않다. 전투가 시작된 이후에 약 4시간 정도가 흐른 상황이다.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모두가 지쳐 있는 상황이었고, 정신적으로도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차희라나 파란 길드원들 같은 연합의 에이스는 우리 측 만인장에게 붙들려 있는 상태. 북서쪽 지역에 대공 병력이 빠져 있는 지금이 완벽한 기회라고 할 수 있으리라. 상황실에서 빠져나온 이후에는 곧바로 가면을 장착. 대중들에게 디아루기아의 위로 기어 올라가는 추한 꼴을 보일 수 없는 노릇이다. 디아루기아는 연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고, 이쪽은 천천히 그녀의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 크롸롸롸는 정말 하기 싫었던 모양인지 확실히 평소보다 힘찬 하울링. 자연스럽게 시선이 집중됐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 몸을 날린 디아루기아가 역병의 힘찬 날갯짓을 퍼뜨리며 린델의 상공을 가로질렀다. 절망에 물든 이들의 얼굴이 괜스레 시야에 비친다. 자신들이 눈으로 확인한 걸 정말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은 가관. 물론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현재의 모습을 실제로 처음 접한 이들도 있기는 있었으니까. 콰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수년간 외부의 침략을 허락하지 않았던 광장에 그 어느 때보다도 위협적인 적이 들이닥친다. 역병에 오염된 용은 파란의 상징이었던 길드 하우스를 그 커다란 발톱으로 짓밟았고, 거대한 꼬리로 모험가들이 모였던 광장을 폐허로 만들어 버린다. 거대한 발톱으로 드높은 시계탑의 위로 올라간 녀석은, 인류의 작은 불씨를 향해 그렇게 울부짖었다. -크롸롸롸롸롸롸롸!!!! ‘너, 그건 안 한다고 했잖아.’ # 515 회귀자 사용설명서 515화 조우(1) 조금 황당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혹여나 디아루기아도 김예리와 같은 과가 아닌지 고민해 봤지만, 얼굴에 드리운 감정은 명백한 부끄러움. 의식하고 있던 게 본인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리라. 선생님을 엄마라고 불러 버린 것 같은 사고에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였다면 한마디, 한마디로 이죽거렸겠지만, 그녀가 앞으로 힘써줘야 하기에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상황. 지금은 아무 말 없이 지지를 보내주는 게 더 중요하리라. ‘…….’ -그러니까 이건…. ‘아니, 별말 안 할 테니까. 준비하세요.’ -네? ‘아마 곧바로 올 거니까 준비하라고요.’ -그 말씀은…. ‘주변 정리해요.’ -아, 네. 말보다는 행동. 어느 정도 이쪽의 생각을 알고 있는 디아루기아는 곧바로 주변에 역병의 숨결을 살포하기 시작. 높고 높았던 커다란 건물들, 지금까지의 린델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건물들이 허무하게 쓸려나간다. 콰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아이고, 저 레스토랑 맛집이었는데….’ 소중한 추억이 깃들었던 장소들이 모조리 허물어진다. ‘저 카페랑 바도 괜찮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아이고, 아까워라….’ 린델의 상징 역시. ‘저 동상은 좀 마음에 안 들었었고.’ 연도가 꽤 오래된 건물 역시 바스러지고 있다. ‘저건… 복원 작업 하는 데 시간 좀 걸리겠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린델의 1/6이 허물어진 셈이다.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버린 린델의 모습에 많은 이가 이쪽을 바라본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일부 나라 잃은 표정을 짓는 녀석들의 얼굴도 대충 이해가 가기는 한다. 광장부터 길드 하우스를 가리지 않고, 전부 쓸려나가고 있는 모습은 몇몇, 특히나 린델 출신의 이들에게는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보일 테니까. 내가 살던 삶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어버린 상황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이들이 누가 있을까. 분통하고 비통할 거라는 건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다. 몇몇 감수성이 풍부한 분들께서는 입술을 깨문 채로 전투에 임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조금 미안한 일이기는 했지만, 나에게도, 이쪽에게도 이번 작업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린델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김현성이 주변 지형을 활용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다. 다람쥐 같은 녀석에게 숨을 곳마저 생기면 싸움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는다. 마음의 눈이 있다면 적어도 녀석이 어디에서 어떻게 튀어나올지는 캐치할 수 있게 되리라. ‘좋아요. 아주 좋고요.’ 촉매를 이용해 연금 마법을 펼친다면 내가 몸을 피할 곳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마침 악마들에게 받은 촉매도 널리고 널려 있었으니까. 충분히 좌절할 수 있는 상황에도 아직 인류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이유를 잘 알고 있는 만큼 조금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지혜 누나가 이쪽과 합을 맞춘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남아 있기도 했고…. 아무튼, 외부 병력은 전부 몰려드는 악마들을 방어하기 위해 묶여 있다. 지원 병력도 전부 발이 묶여 있었던 만큼 내부에 들어온 이쪽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 보급대나 여유 병력이 역병드래곤 디아루기아와 타락한 둠기영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애초에 그런 여유 병력이 있었다면 디아루기아 특제 역병의 숨결이 도시를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겠지. 내부에 들어온 적을 거의 프리 롤로 내버려 두고 있다는 건 연합 측에서도 믿고 있는 게 있다는 뜻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그 믿고 있는 구석이 무엇인지는 너무나도 뻔할 뻔 자. ‘준비.’ -어딜 말씀하시는 겁니까. ‘성벽 쪽, 정확히는 동남쪽으로. 들이마시기만 하고 내뱉지는 마요.’ -저 인간들을 향해 발사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뒈져도 상관없는 놈들만 모아놓은 곳이에요. 언제부터 인간들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그러십니까, 진짜. 그리고 제 말 못 들었습니까? 진짜로 쏘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냥 숨만 들이마시고 있으라는 거지.’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6시 방향 아래, 방사형으로 내뱉!’ -제길, 이런 거라면 빨리 말을! ‘앞으로 아무 대답 하지 마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판단하라고 할 때까지 판단하지 말고 제 말에만 따릅니다.’ 콰드드드드드득!!! 긍정의 뜻인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숨결을 내뱉는 디아루기아의 표정에는 아주 약간의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아마 어째서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무리 용이라고 한들 사각이라는 게 있게 마련이다. 심지어 저 정도로 빠른 물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다가 온다면 눈치챌 수 없었다. 아마 이쪽의 눈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캐치할 수도 없었을 것이 분명. 예상했던 대로 폭음과 연기를 뚫고 오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반갑다, 씨바. 현성아!’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모습. 당연하지만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비장함이 감돈다. 아쉽게도 아까의 지친 기색은 없다. 오롯이 구해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너무나 굳은 결심을 한 듯한 얼굴에 내가 다 미안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 미안함도 잠시. 거의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것처럼 달려오기 시작한 녀석의 모습에 나 역시 괜스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며 앞으로 일어날 상황과 현재의 정황을 머릿속에 그린다. 힘을 밀집시키는 관통형이 아닌 만큼 김현성의 마력 갑옷을 벗겨낼 수 없었던 것 같았지만, 체력을 소진시키기에는 충분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큰 의미는 없었어.’ -어떻게…. ‘질문하지도 마요. 그럴 여유 없으니까. 지금 곧바로 몸 날려요. 거주 지역에 있는 가장 큰 건물로 이동하면서 제가 찍는 좌표에서 좌표로 선 그어버리시고요.’ -네. ‘할 만한 싸움이야. 충분히 할 만해.’ 회귀자 사용설명서도 적을 수 있는 마당에 디아루기아 사용설명서를 적지 못할 이유는 없다. 날다람쥐가 나무에서 나무 사이로 몸을 날리는 것처럼 디아루기아 역시 이곳에서 저곳으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가 몸을 옮기는 건 날다람쥐처럼 귀엽게 보이지는 않았다. 후드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시계탑이 허물어진 것은 물론 풍압에 의해 폐허가 된 건물의 잔해들이 사방팔방으로 튀기 시작했으니까. 거기에 김현성의 움직임에 제한을 두기 위해 역병 브레스까지 뿜어댄다. -크워어어어어어!! 김현성이 어디로 움직일지는 무척이나 뻔했다. 곧바로 손을 튕기자 내가 디아루기아와 함께 이동하며 흩뿌려 놓은 촉매들이 부풀어 오른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용의 뼈와 악마의 뼈로 이루어진 합성물. 김현성의 진로를 방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녀석을 한 자리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콰드드드드드드득! ‘비주얼 좋고.’ 제한적인 범위에만 힘의 사용이 가능했던 이전과는 보이는 모습 자체가 다르다. 폐허가 된 곳을 가득 채운 뼈의 모습은 내가 생각해 봐도 장관. 악마의 팔인지, 용의 팔인지 제대로 알 수조차 없는 거대한 뼈의 팔이 김현성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물론, 녀석을 붙잡으려 에워싸고 있다. 심지어 저 지역에 하급 스켈레톤까지 박아놨다는 걸 생각하면 몇 초 안에 수준 낮은 던전 하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콰드드드득! 콰지지지지지직! 퍼어어어엉!! 하지만. 뼈의 손바닥은 폐허가 된 린델의 바닥을 두드리거나 허공에 휘둘러진다. 어설프게 검을 휘두르는 하급 스켈레톤 역시 너무나 쉽게 부셔져 버린다. ‘개… 씨바….’ 이것 역시 장관이라고 하면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건물 크기의 뼈 팔에 둘러싸인 인간 하나가 그 장소를 빠져나가는 모습은 솔직히 뭐라 감격하기도 힘든 장면이다. 심지어 저런 팔 수백 개가 녀석을 에워싸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마치 재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뼈의 파도를 두 다리로 서핑하는 것처럼 헤치고 나아간다. 입이 떡 벌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피할 수 없는 것은 막고, 막을 수 없는 것은 부순다. 애초 김현성의 힘에는 부서질 수밖에 없지만, 너무 쉽게 부서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 조금 더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한 수가 너무나도 쉽게 파훼 당하는 상황에 나 역시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캐스팅을 외우자 희미한 연기 같은 것이 이쪽의 손에 감돈다. 유령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형태의 역병은 천천히 이쪽의 손을 떠나기 시작. 빠르지는 않지만, 은밀하고 눈치채기 힘들 게 느껴지는 기운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이건 이제 의미도 없는데….’ 본래대로였다면 이 역병을 뼈의 파도 안에서 고생하고 있을 김현성에게 넣는 것이 맞다. 녀석을 옭아매는 게 확실하게 대미지를 줄 수 있는 선택일 테니까. 하지만 너무나도 쉽게 1차 관문이 뚫리는 바람에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거 큰일 났는데….’ “브레스든 뭐든 상관없으니까 곧바로 여기까지 오지 못하게 해요. 최소 거리 100m를 유지한다고 생각합시다. 손톱 같은 거 휘두르지 말고 박치기 같은 것도 금지예요. 무조건 원거리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는 꼬리를 휘두르는 거로 합시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근데… 저걸 상대하는 게 가능한 겁니까? 당신도 격이 올라갔다고 생각했었지만, 저 인간은…. “지금 생각 중이에요. 첫 번째부터 망했으니까. 어떻게 생각해도 다리가 문제네요. 다리가… 저 다리만 조금 막을 수 있어도….” ‘조금 더 아름답고 처절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텐데.’ 애초에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거니와 카메라라도 붙잡기 힘든 싸움이 무슨 감동이 있겠는가. 이대로라면 관객들이 볼 엔딩은 김현성이 갑자기 튀어나와 이쪽의 뚝배기를 쳐버리는 장면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감동은커녕 허무함만이 남을 거라는 건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잠깐 머리를 감싸 쥔, 그때였다. “기영 씨!” 녀석이 허겁지겁 소리를 내질러온 것. ‘아… 이거….’ 태세 전환에 능한 정신 상태는 지금 이 순간 내가 보여야 할 반응이 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크아아아아아악!!” 괴롭다는 듯이 머리를 붙잡는 모습에 디아루기아는 이 새끼가 또 무슨 정신병이 돋았는지 의심하는 것 같았지만, 김현성의 반응은 다르다. “저… 저 현성입니다. 제 목소리가!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아이고, 너무 처절하다, 목소리가… 어구야.’ “기영 씨! 기영 씨!! 거기에 아직 계신 겁니까! 기영 씨! 눈을 뜨세요. 제발! 제발!” ‘어우.’ 최근 들어본 목소리 중 제일 처절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꼭 자신의 말을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는지 목에 마력까지 넣어가며 목이 터지라 외쳐대고 있었다. “지금… 지금 구하러 가겠습니다!” 심지어 시선까지 이쪽에 고정하고 있는 모습은 가관. ‘이 새끼… 또 정신 못 차리네. 이러니까 털렸지, 인마.’ “조금만 거기서 기다리세요. 조금만… 제가 곧 가겠습니다.” 하지만 방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더욱 커다란 괴성을 내지르자 더욱더 초조해진 녀석이 조금 더 텐션을 높인다. 안 그래도 지쳐 있는 상태. 주변을 둘러보고 있지 않은 두 눈. 사고가 일어난다는 건 어찌 보면 예정된 일이었다. 천부적인 감각으로 뼈의 파도를 헤쳐 나가고 있었지만, 아까 보낸 유령 하나를 캐치하지는 못한 모양. 이윽고. 묘하게 걸음걸이가 불편해진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유령 하나가 마력 갑옷을 뚫고 침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 진짜 강해진 것 같은데…. 진짜 왜 이렇게 세졌냐.’ 튜토리얼 몬스터 하나도 감당하지 못했던 애송이가 어느새 각성한 회귀자의 다리에 상처를 남기게 된 상황.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기는 했지만 뿌듯함은 별개였다. # 516 회귀자 사용설명서 516화 제발 나를 죽여줘(1) ‘괜찮겠지.’ 입술을 꽉 깨물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본인 역시 실수했다는 걸 인지한 모양인지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계속해서 입을 놀리는 건 여전했다. 아마 녀석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 자기 딴에는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쪽에서 계속해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아직도 처절한 외침으로 나를 부르짖는 모습은 가슴이 찡해올 정도. “기영 씨, 접니다.” ‘나도 알아. 이 새끼야….’ “제발 눈을 뜨세요.” ‘눈 뜨고 있다.’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아주 잘 들린다. 아주 잘 들려.’ 검을 한 번 날리는 것보다 내면에 있는 빛기영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로 보인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한 것인지 그 처절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그렇게 울부짖는 중이다. 간혹 처절한 외침을 선보였을 때 머리를 부여잡은 효과가 있었던 게 분명하리라.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을 거로 생각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먹힌 것 같았다. ‘그러니까 1회 차가 그 모양 그 꼴이 됐지, 이 양반아.’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격언은 아니었지만, 녀석을 보니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본인 몸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 어떻게든 이쪽을 제정신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다시 한번 회귀자의 1회 차가 어땠는지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본인의 몸을 먼저 챙기지 않는 걸 보면 딱 봐도 답이 나온다. 본인 다리보다 내가 부여잡은 머리가 더 걱정되는지, 디아루기아와 거대한 뼈들의 공격을 피하고, 막아내면서도 계속해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두통이 있는 것처럼 살짝 머리를 부여잡기가 무섭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쪽 손을 뻗으며 한쪽 머리를 움켜쥐는 기믹은 또 기가 막히게 잘 들어맞는다. 가면을 쓴 쪽의 얼굴이 고통스럽다는 듯 머리를 움켜쥐면서도 김현성이 이쪽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최대한 컨트롤한다. 김현성은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고 있었지만, 디아루기아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견제를 잘해주고 있었다. ‘얘, 꽤 세네.’ 전설 등급 중에서도 상위권에 랭크되는 생명체라는 걸 깜빡 잊고 있었던 게 바보같이 느껴진다. 물론 녀석이 아직도 뼈 감옥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적재적소에 들어오는 디아루기아의 역병의 숨결도 결코 무시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다. ‘거기에….’ 김현성으로서는 저 뼈의 파도 사이에 유령들이 숨어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을 테니 움직임이 제한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 아마 여기저기에 뿌려놓은 것들이 무척 귀찮고 짜증 나게 느껴질 것이리라. ‘갉아먹어야 돼.’ 김현성과의 전투는 그렇게 진행해야 한다. 만약 녀석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벌써 거리를 내줬을 수도 있겠지만, 현재 녀석은 결코 베스트 컨디션이라고 볼 수 없다. 이지혜의 잘못된 운용에 체력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고, 자잘 자잘한 상처도 쌓인 상태였다. 몇 시간 동안이나 전쟁터에서 격전을 치렀으니 지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게다가 지금은…. ‘다리, 저거 괜찮겠지?’ 다리까지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단다. 유령에 영향을 받아 천천히 굳어가기 시작하는 다리는 더 이상 김현성의 말을 듣지 않는다. 마력으로 최대한 억누르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제 기능을 못 할 것은 이미 예정된 이야기였다. 실제로 녀석의 움직임은 그 범위가 점점 제한되고 있는 중. 마력을 아끼며 몸을 피해내는 것보다 검을 직접 휘둘러 오는 빈도가 높아졌다. 제대로 피해낼 수 있는 공격보다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는 공격의 비율이 높아진 것이다. 김현성에 이러한 태세 전환이 전투에 변화를 준 것은 당연지사.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콰지지지지지직!!!! 녀석이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뼈의 파도가 갈라지고 디아루기아의 브레스가 빗겨 나간다. 그 영향에 이미 폐허가 된 도시는 사막이 지형을 바꾸는 것처럼 다시 한번 휩쓸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이쪽 역시 입술을 조금 더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뼈의 산이 다시 한번 공중으로 치솟는다. 괴물의 거대한 팔 수십 개가 동시에 가로로 두 동강 난다. 소비된 만큼 채워주는 것 역시 일. 벨리알의 마력이 아니었다면 이미 10번은 넘게 리타이어했을 정도로 힘에 부친다. 하지만 그만큼 비현실적인 광경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지금 이 싸움 아닌 싸움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심정이 어떨지는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부분. 한쪽 눈으로 사방을 살피자 전투 중인 것도 잊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몇몇 이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말도… 안 돼….” “이게 인간의 싸움인가…. 정말로 인간이… 맞는 건가….” “저건 대체….” 나 역시 공감할 수 있다. 애초 개인과 개인의 격돌로 도시 하나가 쑥대밭이 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니까. 타락한 용을 탄 채로 도시의 반절 이상을 오염된 뼈의 파도로 뒤덮은 남자 그리고 그 모든 공격을 전부 베거나 튕겨내는 검사. 희미한 빛에 둘러싸인 녀석의 모습 때문인지 둘의 모습이 더욱더 대비되고 있으리라. ‘어이구야, 좋다. 얼씨구야, 잘한다!’ 관객들의 시선이 점점 집중되는 것이 당연하다. 아직도 저항하고 있다는 듯이 가면을 쓴 쪽에 계속해서 손을 가져다 댄다. 내 안에 저항하고 있는 녀석만 아니었다면 김현성 따위는 한입에 삼킬 수 있다는 듯한 표정을 내보이는 것도 포인트다.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리무르아의 촉매를 이용한 촉수들이 녀석에게 뻗어 나간다. 1페이즈는 워밍업이었다는 듯한 얼굴로 그렇게 녀석을 압박하는 중. “재미있군. 재미있어. 푸하하하핫!” 오그라드는 대사지만 이런 대사 정도는 한 번 쳐줘야 관객들이 즐거워하지 않겠는가. 사랑스러운 회귀자 역시 리무르아의 촉수를 직접 겪어본 적이 있는 만큼 얼굴에는 약간의 신중함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저 촉수들은 리무르아의 것의 열화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숫자만 엄청 많을 뿐이지. 하지만 겉보기에는 그럴듯하다. 일단…. ‘스케일이 죽여주잖아.’ 집채만 한 촉수가 휘둘러진다고 상상해 보라. 커다란 마력은 들어가 있지 않지만, 질량 그 자체가 무기다. 갤러리들이 바라보기에도 위협적인 장면이라는 것은 굳이 고려할 필요도 없다. 또 그걸 멋지게 잘라내는 사랑스러운 회귀자 역시 비현실적으로 보일 것이다. 애초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대륙인들의 기준으로 보기에도 현재 보이는 장면은 충분히 비현실적이다. 콰드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미친….”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콰지지지지직!! “푸하하하핫!” “저건 도대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신이시여….” “베니고어시여….” 콰아아아아아앙!!! 그에 화답하듯 김현성은 더욱더 움직임에 박차를 가한다. 물론 그 와중에도 절대로 입은 쉬지 않는다. 녀석으로서는 아마 가장 중요한 이야기일 테니까. “제 목소리가 들리시는 겁니까. 기영 씨. 제발… 들린다면 제발… 대답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물론 목소리는 들린다만 이쪽은 대답하지 않는다. “기영 씨, 제발… 대답해 주세요.” ‘하, 이 새끼, 이거….’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발 눈을 떠주세요. 이겨내실 수 있을 거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지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계실 거라고 그렇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기다리신다고 믿는다고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이렇게 앞에 왔습니다. 다시 한번 눈을 떠 저를 제대로 바라봐 주세요. 부디. 부탁드립니다.” “…….” “기영 씨가 저를 믿었던 만큼 저 역시 기영 씨를 믿고 있습니다. 지지 않을 거라고 지금도 싸우고 계시는 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기영 씨가 계실 곳은 그쪽이 아닙니다.” ‘이 새끼가 괜히 사람 감성 자극하네.’ “제발… 제발… 포기하지 마세요.” “…….” “저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기영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기영 씨를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형님, 형니임! 눈을 뜨쇼. 제발 눈을 뜨쇼!” ‘박덕구, 이 새끼….’ “형님이 할 수 있다면 나는 더 잘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게 진, 진짜 그렇기 때문에 말해준 거라는 거… 잘 알고 있다니까. 형님이… 끄윽… 형님이 먼저 앞서갈 수 있었기 때문에 나도 뒤따라갈 수 있었던 거요. 튜토리얼 던전 때처럼 형님이 먼저 방향을 잡아줬기 때문에 내가 걸어갈 수 있었다, 이 말이요.” “…….” “나는 알고 있다니까. 형님이 이 악마들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걸, 이 동생은 분명히 알고 있소. 지금까지 싸우고 있다는 것도. 이제 곧 이겨낼 거라는 것도 전부 다 알고 있다니까.” “…….” “이기영 개새끼. 이 개새끼. 정신 못 차려? 이 개자식. 정말로 이곳이 사라지는 꼴 보고 싶어?” ‘희라 누나까지 왜 그래….’ “잘 먹고, 잘 살자고 말한 건 너야. 남자 새끼가 맞으면 떨쳐내고 일어나. 개자식.” ‘어우야, 간질간질하긴 한데… 나쁘지는 않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본다. 재미있다는 얼굴로, 마음껏 개소리를 해보라는 표정으로 악마들과 싸우는 이들을 바라본다. 이미 녹초가 된 엘레나와 선희영을 비롯한 파란의 길드원들 역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고, 이쪽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이들은 모두 울부짖으며 목소리를 내뱉고 있다. 여기서는 팬서비스 차원으로 크게 고통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여주자. “제길! 제기일!” 기회라 생각했는지 김현성 역시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어요.” 언제 왔는지 이쪽과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짓고 있다. 도시를 좀 먹고 있었던 이형의 뼈와 촉수들 역시 움직임을 멈추고 온갖 소음이 끊이지 않았던 장내가 순식간에 침묵으로 가라앉는다. “제 손을 잡아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에는 제 차례입니다. 부디… 눈을 떠… 주세요.” “…….” “아직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하고 싶은 일들도 많습니다. 길드원들과 함께 가기로 한 피크닉도… 항상 하얀 씨가 가고 싶어 했던 거울 호수도… 이번에는 꼭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천천히 손을 뻗는 녀석,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나를 보며 웃음 짓고 있다. 자신의 목소리라 들릴 거라고 분명 들어줄 거라고 확신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내 이쪽의 얼굴을 확인한 후에는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가면을 쓰지 않은 쪽에서 흐르고 있는 눈물. ‘좋다.’ 그리고 꼭 해보고 싶었던 대사. “제발… 나를… 죽여줘.”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진짜 지렸다아아아!’ # 517 회귀자 사용설명서 517화 제발 나를 죽여줘(2) “제발… 나를… 죽여줘.” 고통스러워하는 연기는 덤. 닭똥같이 떨어지고 있는 악어의 눈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눈물을 한가득 머금은 채로,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고, 더 이상은 힘들다는 얼굴로 전방을 바라보자 당혹스러워하는 김현성의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의 완벽한 기믹에 환호성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기쁜 티를 내서는 안 된다. 최대한 처절하고, 최대한 슬프게. 억지로 감정선을 조절하며 모두 포기한 것처럼 자신을 내려놓는다. 손발이 없어질 것 같은 부끄러운 감정이 딸려 들어오기는 했지만 지금 이 장면보다 중요한 장면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게 바로 자기희생의 끝이지. 아암, 그렇고말고.’ 대륙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포기할 수 있다는 의지. 이 모습을 이 땅 위에 선 모든 인간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자 등 뒤로 쭈뼛쭈뼛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자신을 죽여 달라고 말하는 타락한 빛기영의 목소리를 들은 이들의 심정이 어떨지는 뻔했다. 김현성뿐만이 아니다. 박덕구와 차희라는 물론, 방금까지만 해도 이쪽의 응원을 보내던 관계자들 역시 침통한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뭔가 할 말을 찾고 있는 녀석을 향해 입을 열자 다시 한번 주먹을 꽉 쥐는 김현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 늦기 전에….” “기, 기영 씨.” “현성 씨가… 해주셔야 합니다. 더 이상은….” “정신이 드신 겁니까.” “크으윽!!” “기영 씨.” “아아아아아악!” “빨리 저를…. 아아아아악!” “기영 씨!!!”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깨달았는지 앞뒤 안 가리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꼴이 눈에 보인다. 하지만 녀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빛기영의 따뜻한 품이 아닌 디아루기아의 거대한 손톱.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처박히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 정타로 들어간 것 같은데….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생각보다 더 시선이 집중된 것 같아서… 둘 다 상처투성이인 모습이 더 아름답게 비치지 않겠습니까.’ -어쩌다… 내가 이런 인간과… 아니, 방금은… 어떻게 자기 입으로… 그, 그따위 대사를… 수치심이라는 것도 없는 겁니까? 수치심이 밥 먹여주는 거 아니잖아. “구역질 나는 인… 제발… 아아아악! 네가 아직! 크흑!” “…….” “현성 씨… 현성 씨, 제발! 그… 으읏… 하아, 하아, 하아.” “…….” “아아아아아아악! 하아, 하아, 부탁….” “…….” 이기영 전 생을 통틀어 가장 어렵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연기. 안기모나 김예리도 이 정도 연기를 선보일 수 없으리라. 내면에서 빛기영과 둠기영이 정신적인 충돌을 일으키는 광경은 그 어떤 싸움보다 처절하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온몸이 뒤틀린 채로 헛구역질을 내뱉거나 가슴을 부여잡는다. 비릿한 미소를 흘리면서도 슬픔에 가득 찬 눈은 계속해서 악어의 눈물을 쏟아낸다. 악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듯이, 더 이상은 한계라는 듯이 계속해서 거친 숨을 몰아쉰다. 아마 현재가 시청률이 꼭대기에 자리해 있는 타이밍이 아닐까. 단언컨대 전 대륙의 인간들이 지금 이 모습을 바라보며 기도를 드리고 있으리라. 제발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이 저 타락한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기를. 제발 베니고어의 화신이 벨리알의 힘에 저항할 수 있기를. 제발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빛과 함께 싸워주기를.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본래 관객들의 기대는 배신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빛기영이 마지막 말을 내뱉기 위해 튀어나왔던 것도 잠시,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둠기영이 몸의 지배권을 가져온다. “하아, 하아, 하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다시 한번 가면을 매만진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비열한 미소를 내보내며 다시 한번 육체의 지배권을 획득했음을 알리는 알리는 신호탄을 전 대륙에 쏘아 올린다. “푸하하하하핫!”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중2력이 충만한 웃음소리였지만, 누군가에는 절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충격적인 명장면. 연기가 걷히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은 뭐라고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굳어 있었다. 뭔가 결심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에 괜한 걱정이 들어와 꽂히기는 했지만…. ‘이 새끼가 미쳐 가지고 진짜로 죽이지는 않겠지.’ 그럴 리가 없다. 조금 전에도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직접 입을 열지 않았던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한 번 내뱉은 말은 웬만해서는 지키는 스타일인 만큼 녀석이 이쪽을 포기할 리는 없다. 아마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 정신을 차리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금 전방을 바라봤지만, 김현성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 ‘아니지? 현성아. 우리 아직 친구 맞지?’ ‘기영 씨 죄송합니다. 그게, 기영 씨의 뜻이라면….’이라는 말을 해오지는 않을까 불안했지만, 다행히 그런 대사를 쳐오지는 않았다. 대신이라 하기에는 뭐하지만, 녀석은 살기가 돋는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을 돌려줘. 네 몸이 아니야, 개자식.” “그가 나고 내가 곧 그다. 주제도 모르는 인간.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멍청한 인간 놈이.” “너는 그 사람이 아니야.” “네가 어떻게 생각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본질을 변하지 않는 법이니.” “돌려줘. 이 개자식.” “말하지 않았나.” “돌려줘….” “앵무새 같군.” “돌려줘, 돌려달라고!!! 이 씨발!! 개새끼야아!!!” ‘아니, 왜 욕을 하고 그래… 현성아….’ “멍청한….” “개자시익!!!!” 녀석이 몸을 튕기듯이 다가오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 ‘이 새끼 왜 이래. 시발, 정신 나갔어. 씨발! 너, 왜 그래!’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눈이었다. 검을 꽉 잡은 손에서는 핏물이 튀어나오고 있었고 방어나 생각 따위는 손에서 놓아버린 것 같은 느낌. 마치 자신을 놓아버렸을 때의 차희라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온몸이 분노로 불타는 것 같은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 숨도 쉴 수 없는 압박감이 저 멀리서부터 느껴진다. 고양이 앞에 생쥐, 아니, 호랑이 앞의 생쥐가 된 듯한 느낌에 몸이 절로 움츠러든다. 첫 대사를 칠 때와는 다른 의미로 지릴 것 같다. 빛기영의 생존 레이더는 계속해서 경종을 울리기 시작,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푸하하하하핫! 재밌구나! 재밌어! 무척이나 재밌어!!” 역할극에 빠진 입은 멋대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시발, 어떻게 해! 디아루기아 님…. 시바!!’ -저도 몰라요. 일단 막을 수 있는 데까지는 막아…. “이 개자식!!!!” ‘브레스! 시바! 브레스으!!’ -알고 있습니다! ‘빨리이이이!’ -보채지 마세요!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저건 또 뭐야….” 양손으로 검을 잡은 녀석이 검을 휘두르자 쏘아져 나간 브레스가 너무나도 쉽게 갈라진다. 디아루기아도 당황했는지 다소 거리를 좁힌 녀석에게 앞발을 휘두른다. 제대로 작정했는지 마력까지 퍼부은 것 같기는 했지만 올바른 판단이라고는 볼 수 없다. 지금은 몸을 뒤쪽으로 빼는 것이 우선이다. 디아루기아 역시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인지한 모양인지 서둘러 날개를 펼쳤지만, 녀석에게 벗어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휘둘러진 검에 의해 땅바닥에 구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팔이 하늘로 치솟지는 않았지만,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콰아아아앙! 하는 이해하기 힘든 소리와 함께 디아루기아의 몸이 꼴사납게 자빠지는 꼴은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쪽 역시 다급하게 중심을 잡았지만, 그녀가 넘어지는 방향으로 함께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언제 들어왔는지 코앞으로 들이닥친 김현성이 손을 뻗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입술을 꽉 깨물고 주먹을 꽉 쥔 모습. ‘왜 그렇게 이를 악물어.’ 눈동자에서 갈등이 느껴진 것도 잠시, 결심한 듯 팔을 얼굴 쪽으로 뻗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다급하게 벨리알 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벨리알 님! 나 죽어… 나 죽어요!’ 동시에 몸에서 내 몸으로는 컨트롤 자체가 불가능한 마력이 뿜어져 나온다. 그 마력은 어느새 거대한 이형의 악마 형태로 이쪽을 감싸는 중이다. 마치 벨리알의 모습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차이점은 눈에 보이는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정말로 마력이 이런 방식으로 실체화된 것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새끼 진짜 때릴라고!’ 이 정도 마력이 있다면 일단은 한 대 맞아도 안심이라고 생각했던 순간. ‘어어어?!’ 콰아아아아아앙! 몸을 통째로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이 온몸을 덮쳤다. ‘아아아아아아악!!!!’ 본능적으로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내 몸이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다. 어디로 튕겨 나가고 있는 건지,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할 수 없었다. 심지어 죽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대한 충격에 숨이 턱 막혀왔다. 기차를 타고 달리는 것처럼 풍경이 바뀐 이후에야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처박힌 몸. 콰드드드드득!!! “콜록! 콜록!” 자꾸만 나오는 헛기침. ‘시바, 살아 있는 거 맞지.’ 대부분의 충격을 마력이 막아줬는데도 이 모양 이 꼴이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일단은 열심히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재미없어. 집에 가고 싶어… 이제 안 할래… 시바….’ 하지만 내 뜻과는 별개로 내 몸을 감싼 벨리알의 마력은 몸을 일으키기 시작, 곧이어 검을 들고 덮쳐온 김현성에게 그 커다란 주먹을 휘둘렀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김현성은 땅바닥을 나뒹굴었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벌써 눈앞으로 다가와 검을 휘두른다. ‘지금 살려달라고 하면 너무 없어 보이지, 그렇지?’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몸이 흔들린다. 벨리알의 마력은 녀석의 검을 완벽히 막아냈지만, 몸을 강타한 충격은 진짜. 벨리알로서도 이 내부의 충격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한쪽 괴물이 사정을 봐주고 있는 것 같았지만, 괴물과 괴물의 격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은 나 역시 침을 삼키게 만든다. 서로 계속해서 공격을 주고받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처절해 보이기까지 하다.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는 녀석을 보니 괜스레 찡한 감정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아이고, 현성아아아아….’ “제기랄!!” “…….” “제기라알!!!” “푸… 푸하하하핫!” “으아아아아아아아!!!” 녀석답지 않게 억지로 힘을 짜내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두드리며 억지로 격전지로 몸을 옮기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벨리알의 마력은 사그라들고, 녀석의 몸에는 상처가 쌓인다. 이미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로 서로가 한계를 맞이하고 있다. 몇 시간 동안 그렇게 치고받고 있었으니까. 전장은 이미 소강상태. 한계에 내몰린 모두가 이제는 이 처절한 싸움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하아, 쓰레기… 치고는 제법이군.” “구할 수 있어.” “무슨 말을….” “구할 수 있어. 구할 수 있다고….” “…….” “이번에는 구할 수 있어. 이번에는 분명히… 구할 수 있을 거야.” 누가 봐도 울먹이고 있는 표정은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내몰려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껏 즐겁게만 상황을 관망해 왔던 나조차 양심에 작은 상처를 입었을 정도였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으리라. “구할 수 있습니다, 기영 씨. 분명히… 반드시… 그러니까 믿고 버텨주세요. 저를 믿고 버텨주세요.” 폐허가 된 린델 위에서 애써 울음을 꾹 참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 518 회귀자 사용설명서 518화 떠오르는 빛(1) 빛의 검사와 타락한 성자의 싸움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구해내겠습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분명히 버텨 내실 수 있을 겁니다. 만약 후대의 인물이 이 싸움에 대해서 묻는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싸움은 신화 속에 나오는 장면 같았지만 처절한 두 사람의 싸움이기도 했다고.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그 어떤 싸움보다 공감할 수 있는 싸움이었다고. 그들이 겪는 고통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들이 느끼는 아픔은 이해할 수 있었다고. 어떻게 생각해도 부족한 표현이었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저 장소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이야기에 나 역시 멍하니 하늘 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아니야….” 아니, 저들은 인간이다. 우리와 같은 보잘것없는 신의 피조물이 맞다. “괴물….” 아니, 그들은 괴물이 아니다. 그들이 가진 힘은 신에 필적할 정도지만 그들은 절대로 괴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 어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다. 그래, 분명, 그 어떤 인간보다 인간적일 것이다.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장면에, 베니고어의 이름을 읊조리며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아직 견습에 불과해 무대에 서지 못한 사제였지만, 신과 함께하는 사제인 만큼, 후대를 위해서라도 저 싸움을 눈에 담아둬야 했으니까. 타락한 성자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마력이 그 팔을 휘두르자 폐허가 된 도시가 다시금 뒤집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의 검사의 몸이 튕겨 나가지만, 그는 다시 한번 몸을 일으킨다. 전투에 관해 제대로 모르고 있는 일반인이더라도 아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저 검사의 몸은 한계라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있는 몸이 아니라고, 이 이상 몸을 썼다가는 정말로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더 이상 몸을 일으키지 말라고. -이번에는 반드시…. 하지만 검사는 몸을 일으킨다.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이미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렇게 몸을 일으킨다. 울컥울컥 피를 내뱉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금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그 모습은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처절해 보였다. 그 어떤 이의 모습보다 슬퍼 보였으며 많은 짐을 가지고 있는 이처럼 보였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으면서도 검사는 그렇게 검을 들어 올렸다. 안 그래도 조용했던 장내에 다시 한번 침묵이 감돈다. 기도를 드리던 이도,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이제 대륙은 끝났다고 울부짖던 이도, 악마들을 저주하던 이들도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다. 단순히 하늘을 올려다볼 뿐, 다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있다. 당장 전투를 벌이고 있는 병사들도 그렇다. 서로를 견제하던 적과 아군도 거리를 벌린 채 일어나고 있는 처절한 싸움을 바라보고 있다. 모두가 자신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빛의 검사는 검을 휘두른다. 타락한 성자의 몸은 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은 거리를 튕겨 나갔고, 검사는 다시 한번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이끌고 성자에게 따라붙는다. 마력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들려오는 굉음과 사방으로 튀는 파편들, 두 사람의 싸움에 지형이 바뀌고 있다는 것은 결코 와닿지 않는다. 제대로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싸움을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들이 한계를 맞으면 맞을수록, 그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담을수록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몇십 분, 아니 몇 시간이 흘렀는지도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쓰러지고 또 쓰러져도 일어나는 검사의 온몸이 넝마가 될수록 타락한 성자를 감싸고 있는 이형의 마력 또한 점점 더 힘을 잃는다. -구할 수 있어. -그만! -기다려 주세요. -더 이상 지껄이지 마라! 쓰레기 같은 인간! -믿고 있겠습니다. -……. -믿고 계신 만큼 믿고 있습니다. 타락한 성자의 한쪽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검사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에 다시금 마력을 집어넣는다. 검을 쥔 손에서는 계속해서 핏물이 떨어진다. 너덜너덜해진 팔로 다시금, 계속해서, 검을 휘두른다. 그 어떤 성전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 어떤 영웅이 저런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더 이상은 이런 모습으로 있기 싫다고 절규한 타락한 성자는 다시 한번 끝을 내달라고 부르짖고 있다. 옆쪽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제님.” “…….” “명예추기경님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승리하실 겁니다. 분명히요.” 최대한 긍정적으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었으니까. “분명히 빛의 검사께서 길을 인도해 주실 겁니다. 명예추기경님이 계셔야 할 곳이 어디인지, 어디가 명예추기경님이 가야 할 곳인지, 인도해 주실 겁니다. 그렇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겁니다.” “…….” “명예추기경님이 있어야 할 장소는 저곳이 아닙니다. 악몽과 악의가, 어둠과 고통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항상, 항상 명예추기경님은 저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 대륙에 인간들이 나아가야 할 곳은 어디인지, 진정으로 대륙인들이 걸어야 할 길은 어느 곳인지 항상 아둔한 저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 “잠깐 길을 잃으신 거로 생각합시다.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이상을, 더 멀리 있는 가치를 쫓다가 잠깐 길을 잃으셨을 뿐입니다.” “돌아올 수 있으실까요.” “네, 분명히, 분명히 그럴 겁니다. 왜냐하면….” “노을….” 그래. 분명히 가능할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기 시작하는 붉은 노을빛이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네. 빛께서 그분을 다시 이끌어주실 테니까요.” * * * “어째서 악마들이….” “글쎄요. 낸들 알겠습니까. 아마 저들도 지켜보고 싶나 봅니다. 인간을 시험하고 조롱하는 것은 그들이 가장 즐기는 일이니까요.” “그 말씀은….” “아마 저 싸움을 지켜보고 싶은 거겠죠. 우리가 믿고 있는 빛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 더 강대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을 테니….” “악취미로군요.” 저도 모르게 성벽 위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자 저도 모르게 찹찹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진 전투가 잠깐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미 이번 전투는 이쪽의 손을 떠났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섣부르게 도우려 손을 뻗는다면 분명히 다시 한번 전투가 벌어지게 되리라. 아니, 사실 그것보다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게 가장 크지.’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여력이 없다. 자신뿐만이 아니다. 다른 이들도 모두 마찬가지리라.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는 붉은 용병의 단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성벽에 몸을 기대고 있다. 검은 백조의 길드 마스터인 박연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잘려나간 한쪽 다리를 치료받으며 저 멀리 있는 장소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명성 높은 파란 길드원들 역시 한 곳에 모여 쓰러지듯 앉아 있었다. 대륙 내에서 손에 꼽는 강자들이 저러할진대 일반 병사들이 어떤 상태일지는 뻔할 뻔 자. 지독했던 전투에 탈진한 병력이 반이 넘는 상황이란다. 잠깐이라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오히려 기회로 삼는 게 옳다. 지휘부에서도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분명 이 같은 판단이 섰기 때문이리라. 이미 성벽의 반 이상을 악마들에게 빼앗긴 상황이다. 저 전투에 희망을 걸어볼 수밖에 없다는 게 우습게 느껴졌다. ‘웃기는군.’ 마치 투기장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린델을 감싼 성벽의 위에서 빛의 검사와 타락한 성자의 싸움을 구경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자신 역시 잔뼈가 굵은 모험가다. 저들의 상태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의 몸 상태보다 더욱더 최악으로 보이는 모습에는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한 녀석이 있었던 모양인지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왠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같은 사람이 맞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군. 고작 둘이서 도시를 저렇게 폐허로 만들어 버린 거로 모자라서… 지금까지 저렇게 치고받고 있으니….” “왜 힘들지 않겠나. 아마 당장에라도 쓰러지고 싶은 게 분명하겠지.” “그야 그렇기는 하지만….” “장담컨대 내가 저 몸 상태였다면 제대로 설 수도 없을 거야. 마력을 전부 사용하고 체력을 조금 소진한 것만으로 이 모양 이 꼴인데… 아마 자네도 다르지 않을 거야.” “…….” “격을 벗어난 인간이라고 해서 힘들지 않은 게 아니야. 버티고 있는 거지.” “…….” “쓰러질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니겠나? 나 같이 자기 목숨만 중요한 멍청한 놈보다는 뭔가 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아. 함께 싸우고 있는 베니고어의 상징 역시 마찬가지고.” “…….”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이타적인 행동은 상상하는 것만큼 쉬운 게 아니야. 그런 의미에서 어떤가. 우리 내기라도 하지 않겠는가.” “왜 그 소리가 안 나오나 했다. 멍청한 도박꾼 자식.”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살아 있었구나.’ 펍에 함께 다니던 동료들이다. 한 녀석은 린델의 난봉꾼 캐넌, 나머지 한 녀석은 삼류 도박사 조지. 반가움에 슬쩍 손을 들었지만, 이쪽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마지막까지 꼭 그래야겠어?” “마지막이라면 더욱더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내 인생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도박인데. 그렇다고 해서 패하는 쪽에 거는 건 아니라네, 캐넌. 나는 저 빛의 검사 쪽에 걸지.” “이유가 따로 있나.” “삼류 도박쟁이가 무슨 이유가 있겠나. 그냥 감이 팍 하고 온 거지, 뭐.”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조지. 네 감이 구리다는 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글쎄. 한번 두고 보자고. 이번에는 왠지 맞을 것 같단 말이야. 그리고….” “뭐?” “이건 어디에 걸어도 이기는 도박이 아닌가. 명예추기경이 이긴다는 쪽에 걸어도 빛의 검사 쪽에 걸어도 어느 쪽이든 이기는 게임인데 내가 질 리가 있나. 콜록.” ‘개소리를….’ 하지만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기본적으로 멍청한 놈이기는 했지만 가끔씩 저런 소리를 지껄여 줄 때가 있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것 같은 기분, 만약 정말로 모든 게 녀석의 말대로 끝나게 된다면 펍으로 데려가 질릴 때까지 술을 먹여주리라.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일단은 전방을 응시했다. 녀석의 도박이 이번에는 맞아떨어졌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감이 안 좋은 녀석이기는 했지만…. “하하.” 왠지 모르게 이번에는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참, 타이밍도 귀신 같구만. 누군가가 마련해 준 무대처럼 보이지 않은가.” 눈이 부실 정도로 떠오르고 있는 붉은색의 빛.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담을 수밖에 없었다. # 519 회귀자 사용설명서 519화 떠오르는 빛(2) 굉음이 귀를 때리고, 땅이 제멋대로 갈라진다. 도시의 잔해들이 사방팔방 튀고 몸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튕겨 나간다. 마력의 압박감에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다. 정확히 말하면 숨 돌릴 여유도 없다고 하는 표현이 맞으리라. 전방에 있는 대상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으니까. 힐끔 시선을 돌리기가 무섭게 마력을 가득 담은 참격이 사방에서 날아오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콰득! 콰지지직! 하는 소리도 이제는 지겨울 지경이다. 도시는 완전히 폐허가 된 지 오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1회차의 린델의 모습보다 더욱더 망가져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단 두 사람이 만들어낸 싸움이라고 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스케일. 붉은 용병의 길드하우스였던 곳도, 린델에 자리 잡은 모험가들이 사랑했던 광장도, 폐허가 된 장소는 이제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조차 힘들다. 병력들이 마력으로 보호하고 있는 성벽만이 남아 있는 전부, 지켜야 할 곳은 이미 없다. 그런데도 성벽 위에서 이 전투 아닌 전투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많다. 확실히 이 전투가 이번 싸움을 결정지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리라. 무척이나 어수선했던 장내도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다. 응원을 보내던 이들도 이제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이 거대한 무대 위에서 들리는 소음을 여기 있는 두 명이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신경 쓰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솔직히 자세하게 계산해 보지는 않았다. 아니, 계산해 볼 여유가 없었다. 이쪽 역시 정신이 없었으니까. 본격적으로 마지막 페이즈에 진입한 이후에는 뭐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도 인지하기 힘들었다. 아마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쪽을 먼저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이 선 이후에 이성을 잃은 것 같은 녀석 역시 몸 안에 있는 마력 대부분을 쏟아부었다. 솔직히 말해 겉모습은 조금 짠하게 느껴진다. 그만큼 필사적이었다. 물론 지금도 필사적이고. 나 역시 상태가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김현성보다 더하지는 않았다. ‘이 새끼, 진짜….’ 넝마가 된 몸. 항상 말끔하던 녀석의 모습과는 무척 대비되는 모습이다. 적당한 시점에 끝내려고 했건만 괜찮은 타이밍이 나오지 않아 질질 끈 게 여기까지 와버렸다. 한 가지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은 녀석의 두 눈이 아직 확고한 믿음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 사실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하건만, 녀석의 눈빛에는 변함이 없다. ‘아이고, 너무 미안해진다.’ 이쯤 되면 목석같은 양심도 반응하게 마련이다. 녀석은 계속해서 구해야겠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확신이 깃든 눈으로 다시 한번 몸을 일으키고 있다. 또다시 몸을 날려 오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여전히 빨랐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그 날카로움이 부족하다. 녀석이 검을 휘두르고 유형화된 벨리알의 마력은 또 한 번 녀석의 검을 쳐낸다. 울컥 피가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을 참는 상황. 나 역시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싸우고 있는 것은 벨리알이었지만,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으니까. 이미 몇 시간 전부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리를 떨던 김현성과 비교하자면 미안한 수준이지만 김현성이 힘들다고 내가 덜 힘들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애초에 5시간만 걸어도 다리가 아파져 오는 나다. 전력을 다해 몸을 부딪쳤다는 걸 생각하면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콰아아아앙!! 김현성이 몸을 날려오고 이쪽은 다시금 녀석을 쳐낸다. 이 지겨운 패턴만 벌써 몇 시간째인지 모르겠다. 서로 노리는 바가 너무나도 확실하니 전투 자체가 단순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거기에 움직임까지 천천히 느려지고 있으니 외부에서 보기에는 더 처절하게 느껴지리라.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이쪽의 마력과 저쪽의 검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충격이 느껴지기 무섭게 몸이 뒤쪽으로 튕겨 나간다. 곧바로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김현성 역시 반대쪽으로 튕겨 나갔으니까. ‘일어나기 싫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여유에 힐끔 성벽을 살피자 이미 리타이어한 이들이 성벽 위에 있는 것이 보였다. 파란 길드원들 역시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상태인 듯하다. 네임드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 역시 몸에 난 상처들을 치료받으며 싸움을 지켜보고 있다. 특히나 검사 직군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김현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신기할 정도였으니, 저들은 아마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싶다. 기도를 드리는 이들도 있고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녀석들도 있다. 모두의 공통점은 이 싸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처절한 싸움은, 무척 힘들기는 했지만, 저들에게 뭔가 간질간질한 감정을 전달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그 와중에 신경 쓰였던 것 하나는…. ‘하얀이는 어디에 있지.’ 전장에 참여하지 않았던 정하얀의 존재였다. 멘탈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는 건 알았지만, 조금은 불안해진다. 아무리 패닉 상태에 있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조용하니,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 얘는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맞아.’ 이번에는 그게 맞다. 기왕이면 일이 끝날 때까지 반쯤은 이런 상태를 유지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본인의 잘못을 더 실감할 수 있고 마무리다운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테니까. 뭐가 어찌 됐든 눈앞에 있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김현성 역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계속해서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허억, 허억.” 다시 검을 들어 올리는 모습. 여유가 사라지고 있다는 표정을 얼굴에 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계속해서 가면 쪽에 손을 가져다 댄다. 이대로는 너무 힘들다.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에 녀석을 향해 슬쩍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밀어붙일 줄이야… 인정하지.” “허억, 허억.” “넌 내가 본 인간 중에 가장 강해. 이 재미없는 전투를 이렇게까지 끌고 올 수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콜록! 콜록!” “…….” “하지만 이미 한계가 아닌가. 명백히 네 몸은 한계가 맞아. 아마 서 있는 게 한계일 테지.” “…….” ‘뭐라 말 좀 해줘라. 현성아. 숨 좀 돌리자.’ “혼자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니까.” ‘취소, 시발, 취소. 그런 대사 치지 마, 현성아. 제발… 너무 부끄럽다. 진짜….’ 내 얼굴이 다 붉어질 정도로 부끄러운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모습. ‘제발 날 죽여줘’ 역시 레벨이 높기는 했지만, 이 대사 역시 얼굴이 붉어지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녀석의 입장은 나와는 다르다. 방금의 대사는 녀석이 얼마나 이 무대에 몰입하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는 지표다. 습관적으로 머리를 매만지며 고통스러워하는 기믹을 내부에서 아직 빛기영이 저항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부끄러웠지만 이건 그림이 된다. 역할에 충실하다는 건 이 모든 상황을 보고 있을 관객들에게 공감을 주고 있다는 이야기와 진배없으니까. “그래서 서 있을 수 있는 겁니다.” ‘…….’ “기영 씨가 아직도 싸우고 있으니까. 저도 싸울 수 있는 겁니다.” “큭….”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진 게 들킬까. 황급히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숙인다. “저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기영 씨 역시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감정선은 좋다, 야.’ 하지만 감당하는 것은 오로지 내 몫. 대화는 끝났다. 휴식도 끝났고 녀석은 다시금 이쪽으로 몸을 옮겼다. 나 역시 천천히 서서 팔을 들어 올린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몸이 바깥으로 튕겨 나가고, 또다시 몸을 일으킨다. 명백히 한계다. 몇 시간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다. 이미 사용할 마력도 없고 팔다리는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체력은 2페이즈에 돌입하기 전부터 바닥난 상황이었고 몸에 쌓인 대미지는 이미 몇 번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허억, 허억.” “하아….” 녀석이 검에 두른 마력의 불꽃이 점점 더 사그라진다. 심지어 이쪽 역시 마찬가지다. 벨리알의 마력은 조금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의 출력을 견디는 것은 내 쪽에서 무리. 아마 벨리알도 너무 많은 마력을 사용한 상황이리라. 현세에 넘어오며 몇 번의 너프를 겪기도 했고 다른 악마들을 불러오기까지 했으니, 쌓인 실적이라도 사용하지 않는 한…. ‘무리겠지.’ 아마 이번이 마지막, 더 이상은 김현성의 몸이 버텨내지 못한다. 온몸을 감싸고 있던 마력의 갑옷은 이미 벗겨져 있었고, 검에 맺힌 마력도 얼마 되지 않는다. 내 몸을 보호하고 있는 벨리알의 마력 역시 더 이상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꺼지기 직전의 촛불 같은 상태. “후우….” 숨을 헐떡이던 녀석이 다시금 자세를 고쳐 잡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래. 이쯤에서 이렇게 하는 게 맞지.’ 이쪽 역시 가면을 움켜쥐며 율리에나를 검집에서 뽑아낸다. 김현성의 꿈에서 본 적이 있는 붉은빛이 천천히 떠오른 순간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기서 끝내야 돼.’ 이번 챕터의 마무리로 이것보다 더 어울리는 배경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저 바라보기에도 아름다운 광경,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마치 이쪽을 향해 응원이라도 보내는 것처럼 저 노을은 평소의 노을보다 아름답다. 형형색색의 하늘에 자리한 희미한 빛이 폐허를 비추며 물들인다. ‘그림 좋네.’ 김현성은 검에 쥔 손에 힘을 몰아넣는다. 친형제 같은 친우에게 받은 선물로 타락한 성자를 구원하기 위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린다. 전형적인 빌런이라면 이 타이밍쯤에 한마디 하는 것이 맞다. “멍청한 도노반과 같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벌레 같은 놈.” 당연하지만 김현성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검을 들며 이쪽을 노려볼 뿐이었다. 천천히 검을 든 손을 움직이자 나조차도 깜짝 놀랄 마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곱씹으며 죽어라.” “후우.” 준비하는 기간은 길었지만 검을 휘두른 것은 찰나. 폐허를 비춘 빛이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김현성의 검도 함께 빛을 뿜었다. 은은한 붉은색의 빛은 어느새 제대로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의 맹렬한 빛을 내뿜으며 세상을 환하게 비췄다. ‘키야!!!’ 이쪽 역시 최대한 저항하며 어울려 주는 것이 맞으리라. “죽어라! 벌레 같은 놈!” 강대한 두 기운이 맞부딪친 그 순간, 린델이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상극에 가까운 두 기운이 부딪쳤으니 뭔가 거대한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광경. 물론 단순히 아름답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 다른 갤러리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처음에는 검과 검이 부딪쳤지만, 이후에는 점점 더 멀어진다. 각자가 내뿜는 마력에 영향을 받아 자리를 잡은 땅이 파인다. 녀석과 나를 중심으로 거대한 원이 생겨나고 그 원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린델의 잔해들을 성벽의 바깥으로 밀어 넣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이번에도 어울리지 않는 함성을 내지른다. 악에 받치는 함성이다. 아마 의식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보이는 모습 자체는 완벽한 영웅의 풍모. 빛에 휩싸인 채로 악마의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녀석의 모습을 그 누가 폄하할 수 있을까. 뻔한 표현이지만 신성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녀석을 바라보자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듯이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입술을 꽉 깨물며 또 한 번 몸 안에 있는 모든 기운을 쏟아붓는다. ‘그래, 수고했다. 인제 그만 끝내자, 현성아….’ 그게 맞다. 더 이상 녀석을 고생시키는 건 너무나도 미안한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속에서는 자꾸만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만족스러운 엔딩으로 생각하겠지만 본래 창작자라는 건 항상 자신의 작품이 만족스럽지 못한 법이다. 우직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마력에 의해 가면이 점점 깨져 갈수록 점점 더 초조해진다. 바로 그때였다. ‘저… 저 미친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정하얀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것은 당연지사. ‘제기랄!’ 혹시나 김현성에게 마법이라도 퍼붓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리무르아의 둥지에서도 내게 마법을 내리꽂는 마법사의 배를 단검으로 찌른 전적이 있었으니까. 황급히 다시금 김현성을 바라봤지만, 녀석은 지금 이 힘을 유지하는 것으로 한계, 정하얀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황급하게 기운을 회수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뻗어 나간 기운을 회수할 방법이 있을 리 만무. ‘죽을지도 몰라.’ 안 그래도 김현성은 한계다. 만약 정하얀에게 방해를 받는다면… 뻗어 나간 마력에 의해 온몸이 산산조각…. “어?” 그렇게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자그마한 불꽃 덩어리가 머리를 강타한 것. “어?! 니가….”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팔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 “죄, 죄,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으으으윽….” ‘시… 시바.’ “끄으으으윽… 죄송해요… 끄으윽….” ‘장하다. 하얀아, 진짜 장하다. 그래! 씨바, 이거였어! 이 장면이 필요했던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커다란 노호성을 내지른다. “벌레 같은 년이!!! 감히!!!” “정신… 차려주세요… 끄윽… 정신을 차려주세요오… 끄윽….” ‘현성아! 지금이야! 지금이라구우우우!!! 이때다!! 이때라구우우우!!!’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김현성도 ‘지금이야!’ 클리셰를 알고 있는 모양인지 마지막 힘을 검에 몰아넣고 있다. 결국에는.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가면이 부서진다. 빛이 온몸을 뒤덮는 느낌에 황급히 직업을 전환하자 겉모습이 변하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는 정말로 한계,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설마 이대로 죽는 건 아닌지 하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내리쬐는 빛이 그친 뒤. 떠오르는 태양을 등친 채. 나에게 손을 뻗는 녀석의 모습을 본 이후에는. 힘없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 고생하셨습니다. 흐윽,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 520 회귀자 사용설명서 520화 떠오르는 빛(3)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애매하다. 15살 먹은 중학생처럼 감정이 극도로 올라온 김현성을 바라보니 내가 다 민망해진다. 깨어난 이후의 첫 대사로 뭐가 제일 적절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기억이 난다고 이야기해야 하나, 아니면 아예 모르겠다고 이야기해야 하나. 만약 기억이 난다는 설정을 잡는다면 죄책감에 얼룩진 눈물 파티를 해야 하는 상황. 물론 어쩔 수 없는 관심종자인 만큼 죄책감의 눈물 파티도 필요했지만, 굳이 이 순간 오열하며 산통을 깰 필요는 없다. ‘3일 뒤에 석고대죄 각이지, 뭐.’ 일단은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가장 적절하리라. ‘이게 맞지. 아암, 그렇고말고.’ 본격적으로 즙을 뽑아내기 전에 승리의 여운 정도는 느끼는 게 맞지 않겠는가.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자 어둠이 걷히고 있다. 이미 김현성이 빛을 등지는 모습을 봤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눈에 띈다. 아마 녀석의 마력과 벨리알의 마력이 부딪친 영향일 터. 더없이 기분 좋은 풍경이었다는 것은 두 번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늘 위에서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빛의 가루는 또 어떠한가. 마치 승리를 축복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 가운데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당장에라도 왈칵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눈동자에 오만 감정이 들어가 있다. 할 말을 찾기 이전에 양심이 콕콕 찔려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이제는 모든 게 전부 끝났다는 듯, 더 이상 어둠 속에서 길을 헤맬 필요가 없다는 듯, 천천히 손을 뻗는 모습은 괜스레 심금이 울린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미소 짓는 걸 보면 자신이 현재 어떻게 비치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녀석의 잘생김도 이번만큼은 부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추한 몰골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얼굴 반쪽은 상처가 터져 붓고, 피에 젖은 상태였고 남은 한쪽 눈은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녀석의 무장 역시 마찬가지다. 온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들어맞는 외관. 가까이서 다시 한번 확인해 보니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쪽도 정상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벨리알의 마력에 보호를 받아 겉모습 자체는 멀쩡한 편에 속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이쪽을 먼저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뿌듯해진다. 금이야 옥이야 보좌해 준 보람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는 거다. ‘이 새끼 이거 빨리 치료해야겠는데….’ “몸은,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제가… 지금….”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지금… 이건….” “혹시나 다치신 곳이 없는지 확인을….” ‘니 몸이나 챙겨, 이 새끼야.’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내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다. 천천히 이쪽이 무사한지 스캔을 끝낸 이후에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기 시작. 우정의 허그가 필요한 시점인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김현성은 자신의 몸에 묻은 것들이 영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쪽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맞잡은 손에서는 녀석의 감정이 자연스레 전해져 왔다. ‘진짜 너무 자랑스럽다. 시바, 그래야지.’ 뿌듯한 게 당연했다. 녀석이 오늘 보여준 신위를 생각하면 더욱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 집어넣은 코인은 명백하게 떡상한 코인. 줄 하나는 제대로 잡았다고 느껴졌다. “오, 오빠, 오빠아….” ‘그래, 우리 하얀이. 너도 수고 많았다. 아이고 오늘따라 얘가 왜 이렇게 이뻐 보여….’ 볼이라도 꼬집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굴에 화염구를 맞고 좋아하는 게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겠지만, 정하얀이 결정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는 게 더 중요했다. 갑자기 튀어나왔을 때만 해도 김현성을 단검으로 찌르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사실. 하지만 정하얀은 김현성을 믿는다는 선택지에 발을 들여놓았다. 얼굴에 화염구를 박아 넣은 건 아주 작은 발걸음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커다란 발걸음이었다. 아직 손이 덜덜덜 떨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여파가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이내 나를 눈에 담은 정하얀이 김현성을 슬그머니 밀어내고 품에 안겨왔다. “죄… 끄윽… 죄송해요. 잘못 했어요… 끄윽… 끄윽….” “하얀아, 일단….” “잘못했어요. 끄윽….” “아….” 정하얀을 잠깐 때놓기 위해 머리를 부여잡자 걱정스러워 하는 김현성과 정하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제는 함부로 머리를 잡을 수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즐거운 것이 당연하다. 모든 게 다 끝난다. 하지만 김현성의 눈에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비치 모양인지, 다시금 입을 열어온다. “지금 곧바로 성벽 쪽으로 데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얀 씨는 곧바로 기영 씨를 옮겨주세요.” “…….” “어째서….” “아마 저들이 다시금 공격해 들어올 겁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 ‘그 몸으로 어딜 싸우려고 그래, 이 양반아. 바깥에 싸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안에 처박혀 있으라고.’ 비틀비틀 몸을 움직이면서도 검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는 조금은 질려온다. ‘마음은 이해한다. 진짜 애가 너무 기특하다, 진짜.’ “아, 지금, 큭….” “갑자기 많은 걸 떠올리려고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기영 씨. 일단은 대피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 몸 상태로는….” “아니, 저보다는….” “저는 괜찮습니다.” ‘이 새끼, 이거 이미 마음먹었네.’ 마치 죽음을 각오한 것처럼 의연한 얼굴이었지만, 아쉽게도 이후에 전투는 벌어지지 않는다. 이쪽의 계산이 대충 들어맞는다면 아마…. 화아아아아아아아악!!! 존버하고 있던 베니고어 측에서도 뭔가 액션이 있을 테니까. 빛의 검사가 승리한 덕에 신에 대한 인류의 믿음이 더욱더 확고해진 타이밍. 지금 나타나는 건 포인트를 버리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녀 역시 이해하고 있으리라. 내가 딱히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커다란 빛이 이쪽을 감싸기 시작했다. 하늘이 열리고 그 안에서는 다시금 빛이 쏟아진다. “베니고어.” 파산한 주제에 신성한 척 등장한 베니고어의 모습은 가관. 이쪽이 아니었다면 저렇게 등장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확실히 석상과 비슷한 외관이 눈에 띈다. 온몸이 빛에 휩싸여 있지만 특이하게도 그녀의 모습은 무척 눈에 잘 들어온다. 거대한 신성력으로 뒤덮인 모습도 마찬가지. 그 멍청하고 어리석었던 베니고어에게 정체불명의 경외심을 느끼게 될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하지 않다. -벨리알과 27군단의 악마들에게 고하겠습니다. 목소리에서도 기품이 느껴진다.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것이리라. 준비해도 제대로 준비한 것 같은 모습에 나 역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대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세요. 이 장소는 그대들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닙니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인가 보군.] ‘아이고 벨리알 님. 너무 감사했습니다요.’ [조금 더 머물며 현세를 즐기고는 싶지만 더 이상 머무를 수는 없을 것 같다. 저 멍청한 년도 신이라고 어떻게 수습하긴 한 모양이야.] ‘이것 참, 너무 아쉽습니다요. 혹여나 시스템이….’ [아마 외부고문이 생각하는 게 맞겠지. 사실은 너도 예상하던 것이 아닌가.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현세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와 마력이 필요하고, 모든 게 끝나면 나는 물론이거니와 27군단의 소환을 유지하지 못할 거라는 판단이 선 것이겠지. 혹시라도 내가 뒤통수를 칠까 염려했던 것이 아니었나.] ‘아이고오, 아이고오! 벨리알 님.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벨리알 님께서 이 아둔한 인간을 꿰뚫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요. 그런 구역질 나는 생각 따위는 감히 한 적도 없습니다.’ [푸하하하핫! 걱정할 필요 없다, 구역질 나는 역겨운 인간. 그게 네 매력이 아닌가.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이후가 기대되는군. 너 같이 구역질 나는 인간과 함께하는 게 기대돼 참을 수가 없어. 오늘만 해도 군단장들이 이 모습을 바라보며 기립박수를 치더군. 정말로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며 감탄을….] [더, 더러운 소리 집어치워! 벨리알!] [오랜만이야. 하지만 너무 늦지 않았나. 무능력한 베니고어. 벌레 같은 인간들 앞에 서서 체면을 유지하느라 수고가 많아.] [이,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절대로 악마들과 함께하지 않을 거야.] [이미 그에게는 나의 씨앗을 심어놓았다. 너도 알고 있지 않나. 저 인간은 네가 있는 곳보다는 내가 있는 곳이 더 어울리는데.] [더러운 악마 주제에! 가, 감히 나의 충실하고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에게….] 얘네 왜 이러냐. 벨리알은 이해가 가지만 갑작스레 등판한 베니고어의 반응은 꽤나 의외다. 분명히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충실한 종이니, 사랑스러운 종이니, 온갖 미사여구를 섞어가며 이쪽을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거 뺏길까 봐 그러는 거 맞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이쪽이 벨리알에게 넘어가는 게 신경이 쓰이기는 모양이다. 저쪽으로 가는 걸 두고 보느니 차라리 품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현세로 몸을 드러낸 와중에도 이쪽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뭔가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뭐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현재 상황이 내게 무척이나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 몸은 하난데 양쪽에서 나를 데려가고 싶단다. ‘인기인은 괴롭네.’ 같은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흥미롭기는 했지만, 이것 역시 이후에 대화를 나누며 생각해 봐야 할 이야기. 모든 시스템이 정상화된 지금, 벨리알과 마찬가지로 베니고어가 현세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잠깐이다. 예상했던 대로 그 둘은 나라는 통로를 이용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지는 게 당연하겠지.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지 않나, 베니고어.] [뭐? 네가 감히!] [지금은 네 사랑스러운 신도이자 내가 점찍어놓은 역겨운 인간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다른 것을 논해야 할 시간이라는 거다, 무능력한 베니고어여.] [그건….] [무엇을 해줄 수 있지?] [무슨 소리야. 어차피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것은 너 역시 마찬가지야. 꼭 물러나 주겠다는 것처럼 말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데….] [평화로운 수단으로 물러나 주겠다고 이야기하는 거다. 더 이상의 현세에 피해를 주기 싫어서 직접 개입한 것이 아니던가. 알타누스의 의지를 지키고 싶어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대륙이 정상으로 들어왔다고 한들, 아직 내가 자리해 있는 곳이 이 장소라는 건 변하지 않아. 내가 마음을 먹는다면 대륙에 다시 한번 피해를 주는 것은 일도 아니야.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일터가 망가지기 싫은 건 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해 먹었으면 돌아갈 때도 됐잖아?] [72군단장의 일인으로서 체면이 있는 법이다. 네가 강림했는데도 아무것도 얻어가는 게 없다면 내 자식들에게도 체면이 서지 않지. 너도 한 몫 챙길 수 있도록 확실하게 서비스해 줄 테니. 이만 마무리하는 것으로 하지. 시간이 없다는 건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터. 생각할 시간은 10초다.] [우리는 절대로 악마 따위와 협상하지 않아, 벨리알.]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만 제가 중재안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 […….] [들어 보도록 하지, 외부고문] [사랑스럽고 소중한 나의 이, 이기영 신도! 그대의 청이라면 당연히!] # 521 회귀자 사용설명서 521화 떠오르는 빛(4) ‘이제 막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온 타이밍이지 않습니까, 베니고어 님. 벨리알 님과 협상하기 싫다는 그 고결한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때로는 이상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 […….] ‘만약 벨리알 님이 다시 대륙의 구멍을 비집고 들어가 벌려놓는다면 그 틈새로 나타날 악마는 벨리알 님 같지 않으실 겁니다. 베니고어 님께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아주 잘 알고 있고요. 이제 막 신성을 회복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강림하는데 많은 신력을 사용하셨는데, 이후의 일까지 수습하려고 한다면 틀림없이 이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겁니다. 그때도 강경파 악마들이 소환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나, 나의 사랑스러운 신도… 하지만….] ‘벨리알 님도 자신의 군단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사실은 제가 잘 마무리하려고 했습니다만, 사실은 베니고어 님이 현 타이밍에 강림해 주신 것이 조금….’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소중한 이기영 명예추기경?]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베니고어 님이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 주셨으니 벨리알 님의 입장이 묘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이대로 빛에 밀려 악마들이 사라지는 결과가 나온다면 군단 앞에서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 ‘베니고어에게 꼬리를 내리고 도망갔다’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구역질 나는 인간의 말이 맞다. 멍청한 베니고어. 군단의 자식들뿐만이 아니야. 얼마나 많은 악마가 실적을 소모하면서 이 대륙을 지켜보고 있는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군. 몇몇을 제외한 72군단장 전원이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이대로 물러가는 그림을 보여주기에는 내 체면이 서지 않아.] 괜찮은 연계. 오지는 티키타카. ‘미천한 필멸자에 불과한 제가 위쪽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다른 분들 역시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지 않겠습니까.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일의 크기를 키운다면 이 모습을 보고 있을 다른 분들이 베니고어 님을 질타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 그럼 원하는 게 뭐야.] [내가 원하는 것은 이후 이 대륙에 다시 한번 발을 들이는 것이다.] [뭐? 그딴 걸 내가 허락할 것 같아? 그건 불가한 이야기야!]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 무능력한 베니고어.] [역시 악마들 따위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는 것부터가 불가능한 일이었어. 그 더러운 속내를 누가 모를 줄 알아?!] ‘베니고어 님. 이건 나쁜 조건이 아닙니다.’ [뭐? 이기영 신도!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어차피 27군단은 현재의 대륙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틀어막는다고 해도 악마는 소환되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만약 벨리알 님이 한 번 더 이 장소에 발을 들이게 된다면 베니고어 님께서 컨트롤하실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움직이게 하는 게 편하실 겁니다.’ [그건….] ‘네. 현세에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올지, 대략적인 시기와 피해 규모는 어떻게 되는지, 군단은 함께 오는 것이 맞는지 같은 세부적인 계약 사항을 베니고어 님께서 조정해 주시면 됩니다. 미리 알고 대비하는 것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현 상황과는 다릅니다. 아마 벨리알 님께서도 무리한 계획은 세우지 않으실 겁니다. 혹시나 이번 패배로 인해 대륙의 인간들이 27군단을 잊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조치라고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이번이 기회입니다. 베니고어 님. 이제야 막 일어서신 타이밍이라는 걸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도망자 생활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채워 넣어야지요.’ […….] ‘지금 이 장소에서 위대한 신의 기적을 선보여 벨리알 님을 몰아내는 그림을 신도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강림으로 소모한 신력의 회복은 물론이거니와 하늘을 치솟을 만큼 그 위상이 높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안 그래도 지금 조금 불안한 상태이지 않습니까. 혹여나 실수라도 한 번 하면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순식간입니다. 이번 기회에 재기하십시오.’ [구역질 나는 인간의 말이 맞다. 그 많은 신력을 소모하면서까지 내려온 만큼 너 역시 무언가 얻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이러니 한 말이기는 하지만, 나 역시 대륙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이상의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이곳에서 물러난다면 강경파 악마들과 척질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설 자리가 축소된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터. 만약 내 입지가 좁아진다면….] ‘이 대륙으로 강경파 악마들이 몰려들지도 모릅니다. 그 이후로는 저 역시 감내해 낼 자신이 없습니다, 베니고어 님.’ [너도 알고 있지 않나, 베니고어. 그나마 군단장 중에서는 내가 가장 합리적인 이라는 걸 말이야. 리리스 같은 미친년이나 맘몬 같은 쓰레기 같은 놈들이 이곳에 오는 걸 바라고 있지 않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벨리알 님처럼 합리적인 악마는 또 드물 겁니다. 아암, 그렇습니다. 그렇고말고요.’ [하지만… 하, 하지만….] ‘제가 공증인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계약서를 작성하시지요.’ [뭐… 뭣?!] ‘그게 맞습니다. 베니고어 님.’ [흐음,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굳이 계약서를 작성할 필요는 없다만, 확실한 쪽이 네게도 더 안심되지 않겠는가.] ‘물론 계약 내용 자체에서는 벨리알 님께서 많이 양보해 주셔야 할 겁니다.’ 신과 직접 계약한 악마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 아마 벨리알은 계약서만 쓸 수 있다면 계약 내용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소소한 이득을 챙기고야 싶겠지만, 너무 본인의 욕심대로 밀고 나가다간 계약 자체가 파기될 수도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베니고어는 여전히 모든 게 의뭉스러운 모양. 사실… 베니고어에게도 이 조건은 나쁜 게 아니다. 벨리알이야 고객에게는 항상 최선을 다하는 악마였으니 베니고어가 앞으로 일으킬 기적에 최선을 다해 호응해 줄 것이다. 막대한 신력을 소모하며 녀석과 치고받으며 다시금 파산상태로 진입하는 것보다는 현실감 넘치는 연기를 선보여 인류에게 신앙을 받는 것이 더욱더 효과적이다. [계약서까지 작성한다면 추가 조건을 넣어야겠어. 나 자신의 안전을 위해기도 하지만 그게 곧 네 실적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만큼 사은품이라고 생각해, 벨리알.] [적당한 것이라면 넣어주도록 하지.] [그, 그렇다면 더 이상 내 사랑스러운 신도를 건드리지 않는….] [불가. 사은품으로 내 모든 것을 내놓으라는 소리와 진배없는 말이다. 생각보다 더 영악하군.] [만약 더 이상 내 신도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내용을 계약서에 적는다면 앞으로 2,000년 동안 5번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조치해 주겠어. 추가로 네가 넘긴 역병군주 직업도 다시 회수해. 이 정도라면 벨리알, 너도 만족스럽지 않겠어?] [터무니없는 개소리다. 영악한 년! 무능력한 줄로만 알고 있었건만 생각보다 속이 더 검군.] [그렇다면 계약은 없어.] [바라던 바다, 무능력한 베니고어. 다시 한번 도망자 신세로 만들어주지.] [내 사랑스러운 신도 역시 내 곁에서 함께 싸울 거야.] [그 역겨운 인간은 네가 아니라 나와 함께할 것이다.] [나의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 나와 함께할 거지? 응? 그럴 거지? 내가 앞으로 잘할게… 진짜 잘해줄게… 그러니까 이리 와서 함께 저 악마들을 처단하자.] [구역질 나는 인간이여. 네 정체성이 어디 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위에 있는 더러운 년들에게 대화를 거부한 자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함께 보여주도록 하지.] 니네 왜 이래. 제발 이러지 마. 갑자기 이 자리에서 신마대전이 일어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갑작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에 조금은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모든 게 끝나고 쉴 수 있다고 생각한 타이밍이다. 다시 한번 이 전쟁터에 몸을 담그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양해야 했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더 타격을 입는다면 인류도 회복 불능, 현성이도 회복 불능. 모든 게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두 분께서 제 생 이후의 거취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만….’ [나는 앞으로 2,000년 후를 기다리고 있다. 저쪽은 어떨지 모르겠다만, 아마 돌아가는 꼴을 보니 역겨운 인간 너를 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네 구역질 나는 영혼을 교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웃기지도 않는 짓거리지.] 그것보다는 왠지 뺏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있는 것 같았다. 하늘 위에서 나를 노리고 있다는 건 어떻게 봐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니까. 다른 곳으로 이적시키느니 차라리 품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베니고어 역시 누군가로부터 언질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쟁점은 아니다. 이 마찰을 원활하게 풀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둘 모두가 만족스러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베니고어 님 측에 우선 영입 기회를 드리면 어떨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 […….] [그 정도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우, 우선 영입?] ‘네. 우선 영입 기회입니다.’ [혹, 혹시 이쪽으로 오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지? 나의 사랑스러운….] ‘당연히 베니고어 님과 함께하고 싶지만, 앞으로 평생 몸담을 곳인 만큼 조금은 신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건이 어느 정도인지도 따져 봐야 하고… 여러 가지로 고려해 볼 사항들이 많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베니고어 님. 조건만 맞는다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재안으로 우선 영입권을 제시한 겁니다. 베니고어 님뿐만이 아니라 베니고어 님과 함께 일하시는 윗분들과도 이야기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이기영 신도는 역시 눈치가 빠르네.] ‘언질을 받으셨을 줄 알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계약은 진행되는 겁니까?’ [나쁘지는 않은 것 같지만….] ‘네.’ [역시나 잠깐은 더 생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빛에 몸을 담은 자로서 악마와 계약한다는 선택지에 쉽게 발을 들일 수 있을 리가 없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야 할 것도 많고 또 자기 자신의 신념도 일부 던져야 했으니까.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별것 아닌 일이지만 아마 그녀에게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고민. 순식간에 무의식 세계가 만들어지고 계약서를 들고 있는 벨리알이 시야에 비친다. 베니고어 역시 책상 위에 앉아 울먹이는 모습. 여기에 정말로 자신이 도장을 찍는 게 맞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얘네가 초월적인 존재라는 걸 인지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공간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베니고어의 울먹이는 얼굴은 초월적인 존재도 뭣도 아니다. 마치 노예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처럼 힐끔힐끔 이쪽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다. ‘믿으세요, 베니고어 님. 파산 위기도 같이 잘 헤쳐 나가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얻는 게 더 클 겁니다.’ [시간이 없다. 빠르게 결정하라.] [이기영 신도오…. 히끅.] ‘도장 찍으시지요.’ [싫다면 회수하도록 하지.] ‘오늘이 아니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입니다.’ [구역질 나는 인간의 말이 맞다.] ‘도장 찍으세요.’ [히끅… 히끅….] 바들바들 떨리는 손. 초월적인 존재에게는 무례한 짓일 수도 있겠지만, 슬그머니 손을 잡자 떨림이 멎는 것이 느껴진다. ‘저를 믿고 도장 찍으세요.’ [계약을 진행하기 싫은 모양이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뿐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히끅….] ‘자. 어서 빨리!’ [계약을….] ‘도장 찍어요! 베니고어 님!’ [나… 나 역시… 이건 안 될 것 같….] ‘약한 소리 하지 마세요. 빨리 도장 찍으라고요!’ [끄으윽….] ‘하나, 둘, 셋 하면 찍는 겁니다. 하나.’ [둘.] ‘셋!’ 다시금 손을 바들바들 떨며 손을 가져다 대는 베니고어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 순간, 눈앞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 522 회귀자 사용설명서 522화 떠오르는 빛(5) “정신이 드십니까?” “끄응….” “기영 씨, 제 말 들리십니까?” “아….” 천천히 눈을 뜨자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 세계로 빨려 들어간 이후, 현실에서도 잠깐 정신을 잃고 있었나 보다.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혼자 악마들을 막는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은 접어둔 것 같았다. 말인즉슨…. ‘계약이 제대로 마무리됐나 보네.’ 그게 아니라면 녀석이 길드원들과 함께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다시 한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오랜만에 보는 듯한 반가운 얼굴들이 곳곳에 보이기 시작했다. 위치는 격전이 펼쳐졌었던 성벽의 위. 아니나 다를까 박덕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형님, 괜찮은 거요? 정말로 괜찮은 거 맞는 거요?” “…….” “형님, 내 말 들리쇼? 형씨 말에 답 좀 해보라니까! 내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는 거요?” “그래, 괜찮다, 덕구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거,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쇼. 저, 정신적으로 안정이 필요하다고 합디다. 거, 엘레나 님! 형님이 깨어났다니까. 형님이! 빨리 이리로 와서 상태 좀 봐주쇼! 빨리이!” “이기영 님!” 틀림없이 박덕구가 엘레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건만 이쪽으로 몸을 날린 것은 뜻밖의 선희영. ‘뭐야. 얘는 또 왜 이래. 원래 이런 포지션 아니었잖아.’ 은근히 티를 내기는 했지만, 표면적으로는 이렇게까지 달라붙어 오지 않았다. 항상 한 발자국 뒤에서 지켜보는 포지션에 있던 그녀가 다른 길드원들을 밀치면서까지 안겨 오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상황. 아마 그만큼 이쪽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겠지만,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의 평소 행동과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었으니까. 상이라도 치른 것처럼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모습은 무척 초라하게 보인다. 얼마나 서러워 보였는지 내가 다 민망할 정도. 얼굴이 엉망이 된 것은 물론 눈물 콧물을 다 흘리는 모습은 세상 모든 걱정과 불안감을 가진 이의 얼굴처럼 보였다. “허어어어어엉….” “…….” “흐어어어어어엉….” 물론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유아영과 김창렬, 안기모, 김예리. 내 친구 조혜진과 박덕구의 그녀 황정연, 카스가노 유노와 엘레나까지 자리한 모습에 약간의 뿌듯함이 밀려 들어왔다. 물론 김현성과 정하얀, 박덕구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아직 눈치를 보는 정하얀의 표정은 아직도 불안해 보였고, 박덕구는 또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부어 올라있었다. 이전과의 차이점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담고 있었다는 것. 아직 모든 일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자신들이 아끼는 부길드마스터를 되찾았다는 안도감은 이들에게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행이다, 다행…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 “어떻게, 형님은 괜찮은 거요? 희영 누님. 형님은….” “몸, 몸은… 크게 이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머리에도 크게 이상이 없으신 것 같고. 단기적인 기억상실이 있으신 것 같기는 한데, 이대로 휴식을 잘 취하신다면 본래의 상태로 금방 회복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엘레나 님이 보기에는 조금….” “다행히 그들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아요. 하지만 조금 더 경과를 지켜봐야…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기억상실이라니. 그리고 지금 여기가….” “…….” “…….” 이쪽의 한마디에 서로를 쳐다보는 파란 길드원들의 표정은 가관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아마 나였어도 저런 반응을 보였으리라. ‘아… 그러니까 부길드마스터가 악마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타락해 린델이 이 모양 이 꼴이 됐습니다. 악마도 이런 악마도 없었다니까. 길드마스터 상처 보이십니까? 그거 전부 부길드마스터 작품이니 자랑스러워 하셔도 됩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짧은 시간이었지만 길드원들의 얼굴에는 수만 가지 표정이 떠오른다. 서로 눈을 마주치기도 하고 이쪽의 시선을 피하기도 한다. 심지어 박덕구는 김현성과 함께 한 발자국 물러난 위치에서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시다. “어떻게 할 거요? 아무래도 말하는 게….” “아직은 받아들이기 힘드실 겁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알게 될 일 아니요. 먼저 맞는 매가 그래도 덜 아프다고 차라리 지금 상황을 설명하는 게 나을 거요. 형님 성격에 본인이 먼저 깨닫는 날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니까.” “하지만….” ‘다 들린다, 덕구야.’ 정신이 몽롱한 척,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척하는 것도 일이다. “그리고 이후의 일도 생각해 봐야 하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교국이나 다른 길드에서 우리 형님을 걸고넘어질 수도 있을 거요. 그런 상황은….” “제가 두고 보지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만약 상상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할 거요?” “교국을 벗어나야겠죠.” 아마 그런 일을 벌어지지 않을 확률이 높다. 바젤 교황이 이쪽을 적대한다는 것은 김예리가 연기를 싫어한다는 것보다 더 설득력이 없는 발언이다. 베니고어까지 지지를 보내고 있을 테니 영웅이면 영웅으로 추대받았지 대륙 공적으로 몰리지는 않으리라. 거참 여러 가지 상상을 하는 게 귀엽게 느껴진다. 저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머지 길드원들은 영양가 없는 이야기로 최대한 시간을 끌고 있는 게 보였다. 혹시라도 내가 진실을 알아차릴까 무서워하는 얼굴을 보니 제대로 해냈다는 생각도 든다. 김현성과 박덕구의 작은 회의가 마무리된 것도 딱 그즈음. 일단은 김현성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로 결정을 내렸는지 모두가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눈에 보였다. 괜스레 긴장된 장내,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성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혼란스러워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영 씨. 하지만 지금 당장은 몸을 회복시키는 게 먼저입니다. 이후에 천천히 전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말에 따라주세요.” “아, 네.” 내 멘탈을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녀석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쪽의 멘탈은 약하지 않다. 일단 회피하기로 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지만, 숨기면 숨길수록 마음고생하는 것은 녀석 쪽.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기억을 되찾는 게 좋겠다고 여겨졌다. 알겠다는 듯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이 파티원들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저들의 뒤쪽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베니고어 님께서….” “이것 역시 이후에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괴수 대격돌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싶다. -빛이 너를 태울 것이다. -해볼 테면 해보라. 더러운 빛의 탕녀여! 거대하게 모습을 드러낸 벨리알과 그런 벨리알을 막아내고 있는 베니고어. 형형색색의 빛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어둠의 기운이 계속해서 부딪치고 있다. 그 와중에도 우리의 베니고어 님께서는 상처받은 인간들을 보호하기 위해 본인의 힘을 분배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베니고어에 대한 기도와 감사를 담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상처받은 대륙의 피조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고군분투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성스럽고, 고귀하게 느껴졌다. 벨리알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라이오스 때보다 더욱더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는 압도적인 공포심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와… 쟤들,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본다면 정말로 벨리알과 베니고어가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리라. ‘이거 모르고 보면 진짜인 줄 알겠네, 진짜. 와… 이놈이나 저놈이나 쓰레기 같기는 마찬가지네, 진짜.’ 당장에라도 대륙을 파괴할 것처럼 떠들어댔던 벨리알은 자신의 고객님께 충실한 상황. 눈물을 훔치며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던 베니고어도 나름대로 열연을 펼치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어 입이 벌어졌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기도 그리고 몇몇 인간들이 느끼는 공포심으로 인해 두 초월적 존재에게는 계속해서 실적이 쌓이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벨리알은 지옥으로 돌아가야 했고, 베니고어도 더 이상 현세에 머무를 수가 없었으니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베니고어가 성스러운 창을 벨리알의 심장에 꽂아 넣었고 -이, 이 내가… 당하다니…. -돌아가세요, 벨리알. 더 이상 이 대륙을 당신들의 뜻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기억해라, 더러운 빛의 탕녀와 그녀를 따르는 필멸자들이여. 이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오늘의 승리가 너희들의 승리가 아님을 기억하라. -이 대륙은 제가 지켜 나갈 것입니다. -기억하라! 벌레 같은 인간 놈들! 나는 어둠이며, 공포이자 너희들의 악몽… 이니라…. ‘벨리알 연기는 역시나 수준이 다르다, 진짜. 키야… 어떻게 저런 대사를 치는 데도 몰입이 될 수가 있냐.’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군.] ‘아이고, 벨리알 님.’ [아까도 작별 인사를 했다만, 이만 헤어질 시간이다.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아. 언젠가 다른 방법으로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하지.] ‘부디 뜻대로 하시옵소서.’ [즐거웠다, 구역질 나는 인간, 아니, 우리 27군단의 외부고문. 또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으마.] ‘저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요.’ [빨리 사라져, 벨리알.] [너무 말이 거친 것이 아닌가, 베니고어. 이제는 파트너가 아닌가.] [누가 너 따위랑!] [어떻게 생각하든 네 마음이지만 방금 일어난 일은 변하지 않아. 즐거웠다, 베니고어.] [다시는 오지 마.] 어둠이 걷히고 이형의 괴물들은 본래 본인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 빛이 다시 한번 밝게 터지고 베니고어 역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지 그 자취를 감췄다. -그대들은 강합니다. 포기하지도 쓰러지지도 마세요. 지금의 아픔은 언젠가 그대들에게 커다란 힘과 재산이 될 것이며 그대들을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 것입니다. 라는 말을 남기며 말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 모두가 껴안거나 환호성을 지르며 빛의 승리에 취한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비비는 녀석도 있었고, 풀썩 주저앉으며 허탈한 미소를 보이는 녀석도 눈에 비친다. 나 역시 미소를 보내고 싶었지만,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설정을 유지하기 위해 어안이 벙벙하다는 얼굴을 대중들에게 내비친다. 지금부터 어떤 포지션을 취하는 게 좋을지 고민되기는 마찬가지. 일단은 진실을 깨닫고 대국민 사과와 함께 즙을 뽑아내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여기가… 린델… 이걸… 제가?’ 따위의 쓰레기 같은 대사를 날리며 울부짖는 연기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계획은 많지만 지금 당장은 잠이나 자도록 하자. 안 그래도 밤새도록 깨어 있느라 힘들었으니까. “형님, 형님! 정신… 정신 차리쇼!” “기영 씨… 괜찮으신 겁….” “오빠아… 끄윽… 오빠아!!” “…….” “…….” “…….” 점점 희미해지는 목소리. 이후 눈을 떴을 때. 창문 하나 없는 방이 가장 먼저 나를 반겼다. # 523 회귀자 사용설명서 523화 반 감금(1) ‘…….’ ‘…….’ ‘여기가 어디야?’ 눈을 뜨자 익숙하지 않은 방이 가장 먼저 나를 반겼다. 고급스러운 실내는 마치 이전의 내 방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지만 왠지 모르게 달갑지가 않다. 정확히 말하면 거의 동일한 느낌이었다. 항상 사용하던 간이 연금 키트도 한쪽에 자리해 있었고, 올드 머니들이 조상에게 물려받은 것처럼 보이는 클래식하고 고풍스러운 가구들도 여전했다. 한쪽에 진열된 명품 컬렉션도 그렇다. 본래 가지고 있었던 샤넬리아 에르메스를 시작으로 꽤 재미있는 기능을 가진 명품들이 눈에 띈다. 저런 건 또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겠다. 느낌상 김현성이 가지고 왔을 확률이 높다. 아니, 분명히 그 새끼가 가져온 것이 맞다. 철저하게 가방 위주로 세팅되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아무래도 무한의 가방을 받았을 때 너무 기뻐했었던 게 아직도 녀석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물론 새롭게 들어온 녀석들이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전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커진 방 안이 시선을 사로잡았으니까. ‘뭐야….’ 마치 작은 방 안이 답답할까 억지로 방을 늘린 것처럼 보인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뛰어다닐 수도 있을 정도의 크기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경이 되어 있는 화분들은 자그마한 정원을 연상케 할 정도였으니 다른 말이 필요할까. 커다란 책상 위에는 장인이 손으로 깎아낸 것 같은 체스판이 놓여 있었고, 벽에 붙어 있는 책장에는 읽을 만한 책들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심심하지 말라고 가져다 놓은 것만 같았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불안한 심정을 뒤로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다리가 풀려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도 내 육체는 아직 걷는 방법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 같았다. 차분히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본 것은 물론,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겨 문에 손을 뻗는다. 철컥. 철컥. “뭐야, 뭐야.” 철컥. 철컥. 철컥. 아무리 힘을 줘도 열리지 않는 문. 뭐라고 설명이 안 되는 위화감. ‘창문은 또 어디 있어.’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싶건만, 이 커다란 방에 창문 하나도 없다. 아마 작은 방이었다면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으리라. 아무리 그래도 몇십 평이 넘어 보이는 방이다. 설계자가 정신이 나가거나, 극도의 도전 정신을 가진 게 아니라면 이딴 식으로 방을 설계할 리가 없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심스럽게 유추할 수 있는 결과는 하나. ‘이거 시바, 감금당한 거 아니야?’ 가장 먼저 정하얀과 저주받은 신단 때가 생각났다. 납치, 감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이라 할 만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빛과 함께했던 정하얀의 모습을 떠올리자 금방 고개가 저어졌다. 그 사고를 터뜨리고도 정하얀이 이쪽을 납치해 여기로 옮길 리 없다. 물론 감금당했다는 것 역시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 일단은 누가 와서 무슨 이야기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사건의 진행과 결과보다 모든 게 끝난 이후의 마무리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아는 만큼 여기저기 손대야 하는 부분들이 많았으니까. 대국민 사과도 올리며 즙도 뽑아내야 했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녀야 했다. 완전히 폐허가 된 연방의 처리 작업과 복구 작업은 더욱더 문제다. 땅의 주인이 사라진 만큼 어디에 편입될 건지도 결정해야 한다. 전체적인 여론이나 이제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정된 합동 훈련에 대한 문제도 빠르게…. ‘재정비해야 하고.’ 이지혜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지만, 그 모든 문제를 그녀 혼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모든 인류가 아픔을 딛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하나가 되어야겠지만, 그 가운데에는 린델의 3대 길드가 자리해 있어야 했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머리가 아팠으니 그냥 마음 편하게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당장은 쉴 타이밍이라고 볼 수 없다.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침대를 툭툭 건드렸을 때였다. 천천히 방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 슬그머니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 앞에 서 있던 것은 뜻밖에도 선희영이었다. 깜짝 놀랐는지 손에 들고 있는 화분을 떨어뜨리는 게 시야에 비쳤다. 툭. 방 한구석에 자리해 있는 저 작은 정원을 관리해 주는 사람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게 정답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일단은 살짝 미소를 짓는 것이 맞으리라. “이… 이기영 님.” 깜짝 놀란 얼굴을 한 그녀가 허겁지겁 뛰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이미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은 볼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린다. 이윽고 그녀가 돌진하듯 나를 껴안았다. 마치 식물인간 상태에 있었던 연인을 안는 사람과 같은 반응.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그동안 나를 간호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기영 님. 이기영 님.” “아… 네. 저 여기에 있습니다.” “흐윽… 이기영 님.” “네, 희영 씨. 그보다… 조금 숨이 막….” “이기영 님. 이기영 님….” 아직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 기분이 딱히 나쁜 상황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숨을 쉬기가 힘들다. 어깨를 탁탁 두드리자, 그제야 자신이 한 짓을 깨달았는지 천천히 얼굴을 붉혔다. “아! 아! 죄송합니다.” “아니요, 딱히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희영 씨. 그보다 지금 여기는….” “궁금하신 게 많으시겠죠.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길드 마스터께 연락하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모두 이기영 님이 깨어나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정말로 다행이에요. 흑….” “…….” “일단 몸의 상태를 먼저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방금 깨어나신 것 같아서….” “네, 물론입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여전히 울먹이는 얼굴로 이쪽저쪽을 살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될 곳까지 손이 들어오는 것 같았지만, 무척 진지한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제대로 된 검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몸에 이상 따위는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를 보니 조금 더 안심되었다. ‘건강 검진 끝났네.’ 이것보다 더 자세하게 몸을 살펴볼 수가 없다. 풀어 헤쳐진 앞섬을 잠깐 여민 이후에 다시금 그녀를 바라보자 커다랗게 한숨을 쉬는 모습이 보였다. “딱히 이상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건강 상태도 무척 좋고요. 본래 항상 체크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깨어난 이후에도 같은 변함없으신 걸 보니 마음이 좀 놓이네요.” “네. 저 희영 씨, 그보다.” “그보다 혹시 공복이 있으시거나 그렇지는 않으십니까? 일단은 물부터 드시고 천천히 죽 같은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드시는 만큼 위장에 부담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아니면 바로 포션을 드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 ‘얘, 말 돌리려는 것 같은데.’ 이번뿐만이 아니다. 이쪽이 뭔가 질문을 날리려고 할 때마다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고 있다. 어떤 질문이 날아올지 알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대답을 억지로 회피하는 듯한 태도는 누가 봐도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녀의 연기력이 어설펐기 때문에 더욱더 그런 모습들이 도드라진다. ‘말하기 싫다, 이거지. 이거였나 보네.’ 나를 이 방에 데려다 놓은 건 선희영도 아니고 정하얀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둘도 포함이 되어 있겠지만, 녀석을 위시한 파란 길드 전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김현성, 이 새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바로 오랜만에 보는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디서 뭘 하다가 연락을 받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무장을 하고 있었다. 정하얀도 그렇고 박덕구도 그렇다. 모두가 눈물 훔치고 있는 건 당연했고, 이쪽에 몸을 던지듯 날리는 것도 여전했다. 특히나 정하얀은 무척이나 감격했는지 눈물, 콧물을 질질 짜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더 어른스러워진 모습이었다. “일어나셨군요.” “오랜만입니다. 혜진 씨.” “정말로 오랜만입니다. 부길드마스터.” “반갑습니다. 안기모 씨.” “부길드마스터….” ‘유아영, 김창렬, 우리 병아리들도….’ 한소라도 눈에 띈다. 엘레나는 자리에 없는 것을 보니 엘프들의 문제로 잠깐 출장이라도 나가 있는 것 같았다. 한쪽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한 정하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준 후 다시금 고개를 돌리자, 뜻밖에도 처음 보는 얼굴들이 자리해 있었다. ‘뭐야, 쟤네는….’ 심지어 가슴에 파란 길드의 휘장까지 박고 있다. ‘쟤네 뭐야. 길드 직원 새로 뽑았어?’ 무장 상태와 스텟을 보니 길드 직원들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파티원, 새로 뽑은 거야?’ 의아한 표정으로 멀찍이 떨어져 눈치를 보는 무리를 바라보자, 김현성이 힘없는 이쪽의 손을 꽉 잡는 것이 느껴진다. 어지간히 감격한 표정. 며칠 전에 봤던 것 같은데 마치 10개월 이상을 보지 못한 사람 같은 반응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다. ‘그만 좀 울어라, 진짜.’ “일어나셨군요.” “네, 혹시 여기는… 아니, 현성 씨.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크게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이제는 전부 마무리된 일이기도 하고요.” “네….” “악마들이 나타났고, 대륙 연합이 그들과 전투를 벌인 것이 전부입니다. 그 과정에서 기영 씨를 구할 수 있었고요. 마지막에 베니고어 님의….” ‘부딪친 게 전부긴 개뿔….’ “…그렇게 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기영 씨를 구출하는 데도 성공했, 했고요.” 어째서 나를 여기에 박아 넣었는지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모두가 한마음, 한통속이다. 김현성의 말도 안 되게 생략된 스토리텔링에 고개를 끄덕이기에 여념이 없다. 단체로 사람 하나를 바보로 만드는 몰래 카메라라도 기획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와, 단체로 거짓말하는 거 봐라… 진짜.’ 원하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부분은 너무나도 뻔하다. 이쪽이 혼란스러워하지 않게 천천히 기억을 되찾아 주는 것. 언젠가는 공개할지도 모르겠다만 지금으로써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냥 전부 기억났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까.’ 그게 질질 끄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다. 조심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 생각보다 더욱더 조심하고 있는 것 같다. 김현성의 말에 호응하는 파티원들의 모습은 가히 가관이었다. 그나마 김예리와 안기모 그리고 황정연은 나쁘지 않은 연기를 펼치고 있었지만, 이 무대에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김현성의 거짓말은 마치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어색하고 개연성 없다. “시간이 조금 흘렀지만, 바깥에는 아직도 칠흑 같은 마력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이 새끼야. 무슨 어두운 마력이 떠돌아다니긴….’ “전문가들이 말하길 이 마력이 기영 씨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더군요.” ‘너무 설정이 안 좋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꾸역꾸역 이쪽을 이곳에 처박아 두기 위한 빌드업을 쌓고, 결국에는 본인이 대사를 마무리. 약간의 불안감은 있었지만, 며칠 걸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설마 진짜로 여기에 계속 가둬두겠어?’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깔려 있었으니까. ‘바람 좀 쐬고 싶다고 하면 바로 나가게 해주겠지, 뭐. 지가 뭐 별수 있어?’ 그렇게 시발, 2주가 흘렀다. # 524 회귀자 사용설명서 524화 반 감금(2) 솔직히 이 2주가 그리 고통스러운 시간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이 잘려져 있거나 삼시 세끼 모두 군만두가 나오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식사는 두말할 것도 없이 퀄리티가 높았고, 방 안 생활 역시 쾌적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대접받는 쪽.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이었다. 이런 편의가 기분 좋았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으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아무것도 할 필요도, 심지어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다. 배가 고프면 밥을 시키면 되고, 필요한 게 있으면 사람을 부르면 된다. 시도는 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먹여달라고 하면 먹여줄 가능성도 크다. 최근까지 선희영과 엘레나, 정하얀이 번갈아 가며 죽을 먹여줬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답답하기는 하지만, 적당히 즐거운 면도 있었다. 침대에 누워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누워서 책이나 읽는 시간이… 사실 딱히 싫지만은 않았다. 물론 채울 수 없는 답답함은 분명히 존재했다. 방이 넓다고는 한들, 행동 반경이 제한되어 있다는 건 굉장히 불편했으니까. 내 의지대로 이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과 나갈 수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다. 처음 1주일 정도는 순순히 말에 따라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잠자코 있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이 방에만 갇혀 있는 게 조금씩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조혜진과 체스도 하고! 마! 밥도 묵고! 사우나도 하고! 마! 수영도 하고! 마! 틈틈이 놀기는 했지만, 한 장소에 2주 동안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버틸 만큼 버텨보려고 했지만, 이 반 감금 생활이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사실 몇 주 노는 것 정도야 나도 상관없었지만, 흘러가는 상황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시바….’ 혼자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다 악마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던 게 트라우마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변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일 정도.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외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불안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이기영 친위대. 그래, 그 친위대가 맞다. 이기영 친위대란다. 이제는 하다 하다 못해 이기영 친위대까지 만들어주셨단다. ‘말이 친위대지, 시바.’ 현재도 저 바깥에서 묵묵히 문을 지키고 있는 놈들. 파란 길드의 인장을 달고 있는 그 새끼들이 자칭, 타칭 이기영 친위대라고 불리는 녀석들이다. 물론 나는 이 새끼들을 뽑은 적도 없고 내 친위대로 임명한 적도 없다. 어디까지나 김현성을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의 작품이다. 남자 2명과 여자 2명의 상위 모험가들이 각각 조장들을 자처하고 있었고, 이들 밑에는 각각 15명의 조원이 있다고 들었다. 모든 인원을 본 적은 없었지만, 구성원 모두가 상위 모험가에 랭크될 정도로 능력이 있는 이들. 김현성은 또 이런 애들을 언제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르겠다. 정리하자면 이기영 친위대는 4명의 조장과 60명의 조원으로 구성된 셈. 심지어 그들을 지원하는 길드 직원들의 숫자를 고려하면 이기영 개인 친위대는 그 덩치가 파란 내에서도 가장 커다랗다고 할 수 있었다. 당장 던전 뺑뺑이를 돌리면 상상할 수도 없는 금전적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상위 모험가들에게 고액 연봉을 주며 쓸데없는 경비에 시간을 쏟고 있으니 답답해 속이 터질 지경. 김현성은 뿌듯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게는 인력 낭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거 너무 심했던 건가.’ 이쯤 되니 일을 너무 크게 벌인 것은 아닌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할 만했다. 감금 보호 조치 카드를 꺼내 든 것으로 모자라 친위대까지 창설했을 줄은 누가 알았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철컥 철컥 하는 소리 외에는 들려오는 게 없다. 반대편에서 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얘는 잠도 안 자고 뭐 해?’ 시야에 비친 것은 친위대의 2번대 조장. 김예리와 동갑내기로 쌍검을 사용하는 검사. 김현성만큼은 아니지만, 높은 민첩을 가지고 있는 밸런스 형으로… 이름은…. ‘박리안.’ 얼굴의 한쪽에 긴 흉터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외관이었다. 전체적으로 차가운 인상을 보이는 게 문제이기는 했지만 스텟 자체는 꼬맹이 김예리와 비견될 정도. 어린 나이답지 않게 이상하게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아우라 같은 게 있다. 심지어 흘러나온 목소리는 괜스레 몸을 작아지게 만든다. 뭔가 관상 자체가 왕이 될 관상이라고 해야 하나. 모르긴 몰라도 1회 차 때 한 자리 해먹던 녀석이라는 건 확실할 것이다. 그러니까 김현성이 불러온 거겠지. “무슨 일이십니까? 부길드마스터.” “그러니까… 리안 씨.” “말 편하게 해주셔도 됩니다. 부길드마스터. 항상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희들은 부길드마스터의 손과 발입니다. 그 어떤 것을 명령하셔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나가게 해주라, 좀.’ “뭔가 필요하신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게 아니라… 조금 답답해서 말입니다. 바깥에 좀 나가고 싶은데….” “…….” “…….” “이 근방만 잠깐 돌아다녀 보고 싶습니다. 리안 씨도 함께 계시니 아마 별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 “…….” “현재는 길드마스터가 부재 중입니다, 부길드마스터. 곧 길드마스터께 연락을 취해 곧바로 야간 산책 스케줄을 잡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살다 살다 야간 산책 스케줄이란다. 이미 몇 번 들어본 말이었지만 다시 한번 저 말을 들으니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산책 스케줄 말고… 린델은….” “아직 린델은 일반인들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고 있는 지역입니다. 정하얀 님을 비롯한 일부 마법사들만이 연방 복구 작업에 투입되고 있는 상황이고, 현재 부길드마스터의 상태로는 바깥의 마력을 견디기 힘드실 겁니다. 라고 길드마스터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해진 것 같은데….” “엘레나 님과 선희영 님께서도 이기영 님의 바깥 출입을 추천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재 경과가 무척 좋으니 아마 조금만 더 요양하시면 자유롭게 활동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몸의 회복에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부길드마스터. 다른 부탁은 전부 들어드릴 수 있지만….” “…….” “길드마스터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부길드마스터의 명령이라면 길드마스터를 공격하라는 명령이라도 수행하라고 하셨지만, 혹시나 건강에 피해가 갈 수 있는 행동은 무조건 배제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건강하다니까.’ “아, 위로될지는 모르겠지만, 곧 길드마스터께서 오신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곧 산책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셨으면….” ‘무슨 산책 스케줄이야, 싀바….’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다는 것 역시 통하지 않는다. ‘내가 떼쓰면 네가 뭐, 나를 이길 수 있겠어?’ 라는 마음으로 임했던 게 바보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힘드신 것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길드마스터. 하지만 이 모든 게 부길드마스터를 보호하기 위한 길드마스터의 뜻이라는 걸 잘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보호하려고 해서 문제지.’ 상황 자체는 고개를 끄덕일 만하지만 모든 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일단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다. 정보와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굳은 의지도 알 수 있었고, 내가 상처받을까 봐 무서워 하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대 ‘제발 날 죽여줘’ 가 제대로 먹혀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김현성의 표정은 한결 편해졌다. 녀석이 정말로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무척 마음이 가벼워 보였다는 것. 본인에게 책임을 강요하지 말라고 절규했던 상황과 대조하면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극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모든 치료에는 부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게 그 부작용인 거고….’ 본인이 자각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에 대한 녀석의 신뢰는 더욱더 강해졌다. 아마 김현성에게 나는 자신의 책임을 대신 들어줄 수 있는 형제이자 친우가 아닐까. 그래서 더욱더 이쪽의 보호에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만약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사라지거나 다친다면. 자신은 다시 한번 책임을 강요받아야 할 테니까. 김현성은 그게 무서운 게 틀림없으리라. ‘그렇긴 해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지, 시바.’ 녀석에 대해 떠올리기가 무섭게 방문이 열리며 김현성이 들이닥쳤다. 옆에 정하얀이 함께 따라온 것을 보니 오늘도 산책 스케줄은 그곳으로 잡혀 있는 게 틀림없다. 문을 연 것은 김현성이었지만 몸을 던져온 것은 정하얀 쪽. ‘얘는 요즘 신났지.’ “오빠.” “왔어?” “네. 오, 오빠가 산, 산책가고 싶다고 해서요….” “아, 응. 아무래도 여기만 있기 너무 불편해서.” “불편해도 어, 어쩔 수 없어요. 아직 바깥이 어수선하니까요. 지금은 바깥에 안 나가는 게 좋아요. 건강을 위해서요….” ‘얘는 진짜 대리만족하는 것 같다, 진짜.’ “하얀 씨 말이 맞습니다. 기영 씨.” ‘너도 만족하고 있는 것 같고….’ “네….” “마음 같아선 저도 활동하실 수 있게 돕고 싶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많이 고생한 만큼 이번 기회에 푹 쉬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혹시나 뭔가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그러고 보니 최근 경매장에 샤넬리아 에르메스 시리즈가 등장했다더군요. 기뻐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길드 예산으로 사전 입찰을 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가방 그렇게 안 좋아한다니까.’ 물론 있으면 좋기는 하다. “장식장에 빈 공간이 조금 신경 쓰였었는데 채울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렇게 흐뭇하게 바라보지 마, 이 새끼야.’ 모든 근심, 걱정을 날려 버린 싱글벙글한 표정. 이 방에 틀어박혀서 안전하게 있는 게 어지간히 기쁜 것 같았다. “이거 제가 말이 조금 길었군요. 기다리고 계셨을 텐데…. 하얀 씨, 마법 준비해 주시겠습니까?” “네.” 이윽고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는 정하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익숙하게 위치 추적 마법이 내재된 목걸이를 목에 걸자 다시 한번 김현성이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야간 산책 시간에는 목걸이를 목에 거는 게 룰 이었으니까. 정하얀이 주문을 완성한 이후, 마력이 터져 나왔고 곧이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순식간에 변해 버렸다. 커다란 방에서 이동된 곳은 길이 잘 닦여 있는 울창한 숲, 길드에서 마련한 산책로다. 반경 50㎞ 안으로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장소. 김현성 오피셜로는 엘프의 숲에서 가장 깊은 이곳만이 악마들의 마력이 침입하지 못하는 장소란다. 그래서 산책로는 이곳밖에 활용하지 못한다는 설정이었지만, 애초에 어둠에 침식된 마력 따위가 대기를 돌아다니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꼭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냐….’ 산책로를 관리하는 것은 이기영 친위대 4번대. 혹시나 불편할까 봐 모습을 드러내진 않고 있었지만, 아마 김현성과는 유기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으리라. 나와 함께 외부에 나올 때면 녀석은 상시 전투 태세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겉으로는 그걸 표현하지 않고 있었지만, 항상 허리춤에 손이 가 있는 걸 보면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둘만의 데이트인 것처럼 정하얀은 찰싹 옆쪽에 달라붙어 왔고 김현성 역시 반대편에 자리를 잡는다.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속은 여전히 답답하다. 그동안 ‘너 좋을 대로 해봐라, 어디.’ 하고 지켜보고 있었지만, 이 새끼가 뭘 깨닫긴 깨달아야 했다. 일단은 위풍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현성 씨.” “네?” 잠깐 침을 삼킨 이후에는 당당하게 담아뒀던 말을 내뱉는다. “저 박리안 씨에게 전해 들으셨겠지만, 슬슬 활동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2주 동안이나 쉬었으니까요. 파손된 린델의 복구도 궁금하고,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가 제일 궁금합니다. 마력에 대해서 걱정하는 건 이해합니다만, 아마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을 겁니다. 급한 상황이라면 더욱더요.” “안 됩니다.” “네?” “어떻게… 지금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어쩌다가 그들에게 그런 꼴을 당하게 된 건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아니….” “기영 씨도 조금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타인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번거롭고 복잡한 일은 제게 맡기시고 최대한 푹 쉬어주세요. 제가 전부 알아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그래도….” “불가합니다.” ‘이 새끼, 진짜….’ “지금은 절대로 불가합니다.” # 525 회귀자 사용설명서 525화 반 감금(3) ‘그럼 도대체 언제 되는 건데….’ 단호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단호했던 표정과 말투가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더 이상의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딱 끊어 말하는 건 내가 알고 있던 김현성답지 않았다. 내 안전에 집착해 주는 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정도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냥 기억났다고 말하는 게 좋을까.’ 적당한 타이밍에 입을 여는 게 오히려 더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말해도 문제야.’ 충격받고 실신하며, 눈물을 흩뿌리는 연기에 들어갔을 때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는 리액션을 보여줬을 때, 이 새끼가 진실에 마주하도록 내 등을 떠밀 수 있을까. 오히려 더욱더 꽁꽁 싸고돌 확률이 높지 않을까? 더욱더 강력한 보호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시 모를 날파리들이 있다면 더욱더 그렇다. 이기영 명예추기경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하고 심문해야 한다고 외치는 녀석들 말이다. 물론 많지는 않겠지만, 아예 없다고도 단정 지을 수 없다. 베니고어의 상징이었다고는 한들 한 번 악마에게 넘어가 타락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최소한 교국 내에서는 그런 개소리를 지껄이지 않겠지만, 외부에서는 충분히 나올 법한 소리다. 김현성으로 인해 그 가치가 천정부지로 떠오르고 있는 현재의 린델이라면 아마 조금 더 많은 견제를 받고 있지 않을까. 같은 당내에서도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싸우는 게 현대의 정치판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 연방이라는 파이를 나눠 먹어야 하는 권력자들의 입장상, 아무리 파란이라도 정치적인 견제을 안 받을 수는 없다. 인류가 한뜻으로 힘을 모으자고 단결했어도 국가와 집단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거다. ‘그게 인간이니까.’ 조금만 고민해도 파란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가장 적합한 것이 이기영 명예추기경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김현성이 이쪽을 싸고도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외부의 잡음이 들려오는 상황에 나를 밀어 넣는 건 내게 좋지 않을 거라고 느끼는 것이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나?’ 그럴 리가 없다.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 적극적이고 원색적인 비난은 하지 못할 테니까. 갈등이 존재한다고 한들, 아주 스케일이 작은 갈등일 것이 분명하다. ‘궁금해서 미치겠네, 진짜.’ 현재 바깥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피해 복구 작업은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지, 대륙 합동 훈련은 유지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돌아버릴 지경이다. 베니고어가 등판했으니 모든 대륙의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될 거라는 건 당연한 거고…. 닫혀 있었던 던전과 네임드 몬스터들이 활성화되는 것은 물론 소소한 변화가 펼쳐질지도 모른다. 신력을 꽤 벌었을 테니 대륙에 새로운 던전과 콘텐츠들을 등록했을 수도 있다. 베니고어 2.0 패치가 시작됐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여기 앉아 손가락만 빨고 있기에는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다. 매일 매일 정보의 바다에서 헤엄치던 내게 오는 정보들이 모조리 차단되어 버렸으니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현 상황에서 단 하나뿐인 아군인 이지혜와 만남을 오매불망 기다렸던 것 역시 그런 연유 때문이었다. “적당히 좀 하지 그랬어요. 뿌린 대로 거둔다는 옛말, 틀린 게 하나도 없다니까. 그거 조금 적당히만 했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갔을 텐데… 괜히 연출에 힘주고, 상황에 힘주고, 연기에 힘주고… 그러니까 한 방에 훅 가는 거 아니에요. 조강지처 버린 것도 그래. 참나, 어떻게 그 지경이 되도록 연락 한 통도 없었어요?” “…….” “내 꿈에도 나타나 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미안해, 누나. 충분히 반성하고 있어.” “사과 듣고 싶어서 칭얼거린 것 아니에요, 오빠. 질투한 것도 아니고.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 마음고생 조오금 했었거든요.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고 난 이후에는 즐거워졌지만. 큼큼, 그래서 궁금한 게 뭐예요?” “바깥 상황이 조금 어떤지, 기왕이면 자세하게 정보 좀….” “…….” “…….” “그거 아쉽게 됐네요. 지금은 말씀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예요. 금제가 걸려 있거든요.” “…….” “…….” “제 혓바닥 좀 보세요. 기본적으로 오빠 면회 오려면 외부인들은 이걸 박아야 한대요. 예외는 없어요. 그나마 오빠랑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이 돼서 이 정도지, 조금 애매한 사람은 심사가 더 까다로울 걸요. 아, 추가로 말씀드리면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빠가 질문하고 제가 답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어요.” “뭐 그런 것까지 해?” “혹시 모를 상황을 방지하고 싶다는 것 아니겠어요. 사람이 이야기하다 보면 말실수도 할 수 있으니까. 미리 예방하자는 차원인 거겠죠. 물론 조금 빡세기는 했어요.” “…….” “서류로 미리 정리해서 가져오려고 했었는데 몸수색까지 한다고 하지 뭐예요? 쌍검의 박리안인가 하는 계집애가 아주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이곳저곳 수색하는데 조금 불쾌했다니까.” “정확히 무슨 금제가 걸려 있는데?” “특정 단어를 사용하는 건 금지, 글로 쓰는 것도 금지. 위험하거나 트리거가 될 수 있는 물품을 가지고 가는 것도 금지. 지금 당장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천재검사와 연금술사가 사랑하는 법’ 신간이 나왔고,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것 정도밖에 없어요. 근데 있잖아요.” “응?” “솔직히 이해는 돼요.” “뭘….” “생각해 봐요. 반 시체가 돼서 죽을 뻔한 사람이 깨어난 지 2주 만에 활동하고 싶다고 하는데 누가 납득할 수 있겠어요. 의사의 고견으로도 반년 정도는 푹 쉬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걸요. 물론 이런 방식은 아니겠지만. 이 건은 멘탈적인 부분도 걱정돼서 주의를 기울이는 거로 보여요.” “아무리 그래도.” “더군다나 트라우마까지 더해지면 이렇게 감금보호 조치하려는 것도…. 고깃덩이 영상이랑 촉수 영상 그리고 타락까지. 눈에 안 띄면 불안하고 무섭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이 느끼는 건 인간이라면 당연할 걸요. 오빠를 그렇게 아끼는 파란 길드마스터인데… 어련하겠어요.” “…….” “누가, 누구 멘탈 걱정을 하는 건지. 이렇게 쓰레기 같은 사람도 드문데….” ‘네가 할 말은 아니야.’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오빠 때문에 매번 안심해요. 그래도 나는 아직 덜 썩었구나… 같은 생각하면서 자위도 하고 그런다니까요. 이번에는 특히 더 많이 했고… 아무튼 간에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것 하나예요.” “뭐?” “오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아마 거의 다 들어맞을 거예요. 대처도 나름 잘하고 있고요. 자세한 이야기를 드리고 싶기는 한데 이 부분은 금제가 걸린 게 많아서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네요. 그것보다 우리 오랜만에 섹! 아, 정하얀 얘는 쓸데없는 것까지 걸어놨네….” “뭐?” “19금 단어는 모조리 금제가 걸려 있네요. 이런 건 서약서에 없었는데, 얘 변한 거 맞기는 해요?” “확실히 달라지기는 했지. 예전과 비교하면, 뭐. 그래도 사소한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봐.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게 아니니까.” “아무튼, 파란 길드 마스터보다 얘가 더 문제라니까. 지가 제일 즐기고 있을걸, 아마.” 그건 동의할 수 있다. 사실 다른 이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근에 한 번 들른 차희라도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고, 길드 관계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갇힌 것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일단은 린델이 복구되거나 날파리들이 사라질 때까지 이곳에 있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애초에 나갈 방법 자체가 없었으니까. 필살기라고 생각했던 ‘너는 내가 왜 화 난지 모르겠어?’조차 통하지 않을 정도로 현재의 김현성은 단단했다. 이미 본인 나름대로 정신 무장을 마친 것이다. ‘시벌….’ 믿을 만한 소식통이라고 생각했던 이지혜조차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 물론 내가 예상하는 게 대부분 맞을 거라는 말은 들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현장과 실무의 분위기는 다른 법이 아닌가. 영혼의 동반자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지혜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다시 한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왔다. “그래도 오빠 새장 속에 갇힌 새 같네요. 왠지 조금 섹… 아… 정말? 이것도 금지라고?” “…….”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네. 제길, 그냥 식사나 하죠, 우리. 슬슬 배고픈데.” “오늘은 안 먹을 거야.” “네?” “단식투쟁. 입맛이 없다고 버티는 중이거든. 아마 며칠 내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 “고전적이네요. 지금 이렇게 된 지 며칠이나 지났죠?” “한 20일?” “꽤 기네요. 그래도 할 건 다 하잖아요. 산책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저기 장식장에 있는 명품들 좀 봐요. 예전에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놀이 생각나지 않아요? 방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1년 동안 갇혀 있는 대신 1억 받기, 이런 거 있잖아요. 뭐, 그런 거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적당히 즐길 것도 많고… 조금은 여유를 즐길 줄도 알아야죠.” “여유는 개뿔….” “나는 오빠가 이렇게 나를 가둬줬으면 좋겠는데. 기왕이면 다른 모습으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누나.” “정말이라니까요, 오빠. 어, 이거 금제 안 걸려 있네요. 얘는 정작 중요한 건 안 걸고, 이상한 걸 걸어놨네. 하긴 저도 오빠랑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 중 하나니까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낼 리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네요. 잘됐다.” “…….” “지금도 그 다른 모습 할 수 있어요?” “가능해.” “정말요? 한번 보여줄 수 있어요?” 눈에 띄게 흥분한 것 같은 모습, 평소의 이지혜와는 조금 거리가 멀어 보였다. 지금까지 가까이서 그녀를 봐왔지만, 내가 본 이지혜의 모습 중 가장 흥분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해 봤지만 보여줘도 별로 상관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안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있는 만큼 순순히 직업 전환을 시전하자 몸에 변화가 오는 것이 느껴졌다. “미쳤다, 진짜. 미쳤어. 가면은 없어요? 저번에 깨졌나?” “다시 복구되긴 했어. 별다른 기능은 없지만, 자체복구가 되고… 소환 역소환도 가능한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라. 추가로 다른 사람이 벗기려고 하면 벗겨지지도 않아.” “아이템 설명은 됐고. 가면도 빨리, 빨리요.” “갑자기 왜….” “진짜. 와, 분위기가 다르네요. 진짜로… 확실히 달라… 진짜. 너무 섹…. 하다, 진짜. 카메라를 가져왔어야 됐는데. 그것도 못 가져오게 되어 있어서… 이건 파란 길드원들도 알아요?” “당연히 모르지. 이걸 어떻게 이야기하겠어, 누나.” “전투 능력은 써먹을 수 있어요?” “물론, 하지만 저번처럼은 불가능해. 벨리알이 직접 현세로 내려와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압도적일 정도는 아니지만, 마력을 전해 받을 수는 있거든. 사실 지난 2주 동안 심심해서 실험해 본 게 몇 가지 있었어. 유령들도 만들어낼 수 있고, 간단한 흑 마법 같은 것들도 가능하다고 보면 되겠네. 이제 써먹을 일은 없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이걸 왜 안 써먹어요? 무조건 써먹어야지. 대충 설정들 때려 박고 비공식적으로라도 사용해요. 기왕이면 나랑 있을 때는 그 모습으로 있는 게 더 괜찮을 것 같고… 이건 그냥 개인적인 욕심이지만요. 아무튼, 오빠 지금 밖으로 나가고 싶죠.” “물론.” “이거 저한테 맡겨볼래요?” “응?” 그녀가 해결해 줄 수 있다면 당연히 그녀에게 맡기는 것이 맞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갑작스레 이지혜가 허벅지를 꽉 꼬집은 것. 심지어 마력 보호막까지 풀어버린다. “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저도 모르게 비명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김현성이 내부로 들어온 것 역시 바로 그때였다. ‘이… 미친….’ 순간적으로 황급히 녀석을 바라본다. 설마 이 미친년이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이쪽을 보내려고 한 건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벌써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지혜의 표정을 본 순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얘는 진짜 쓰레기다, 진짜. 회복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한테….’ 일단은 합을 맞추는 것이 급선무. 의문이 가득한 김현성을 향해 입을 열자 다시금 녀석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현성 씨. 제… 제가 조금 이상해진 것 같습니다.” # 526 회귀자 사용설명서 526화 둠기화(1) ‘사실 이렇게 빨리 튀어나올 줄은 생각 못 했는데….’ 얼마나 빨리 달려왔는지 친위대보다 더 빠르게 도착했다. ‘이럴 거면 친위대는 왜 임명한 거야. 쟤네 그냥 던전 돌리라니까.’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걸 보면 거의 최대 속도로 달려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악 소리가 전부 튀어나오기도 전에 방으로 도착한 모습. 육체적으로 충격이 왔을 때 신호가 간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시야에 비친 김현성의 표정은 갑작스레 흉작을 맞이한 농부의 표정이다. 인정사정없이 구겨진 얼굴은 솔직히 내가 보기에도 무섭다. 나에게로 곧바로 뛰어올 것 같아 빠르게 입을 열자,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아마 목소리가 나오기 전에도 대충 눈치채지 않았을까. 가면을 쓰고 겉모습이 변화하기는 했지만, 표정은 확연히 다르게 비칠 테니까. 둠기영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비릿한 미소와 광기에 물든 눈 대신 내 얼굴에 자리한 것은 혼란스러운 표정과 두려움에 떨리고 있는 입. 추가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토끼 같은 눈이다. 얼굴이 여우 혹은 뱀 상이라는 말을 자주 듣기는 하지만, 나라고 해서 토끼 같은 눈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나조차도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얼굴을 일발 장전한다. 건드리면 쓰러져 기절해 버릴 준비가 된 개복치처럼 최대한 연약하고 약해 보이는 모습으로 나 자신을 포장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기영 씨? 기영 씨가 맞습니까?” “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한 시름 놨다는 얼굴이었지만, 복잡해 보이기도 했다. “정말로, 정말로 기영 씨가 맞는 겁니까?” “네, 제가 맞습니다.” “머리는 조금 어떠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무척 혼란스럽고, 조금 무섭다고 해야 할지.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건지. 저, 저는 잘 모르겠어서….” “일단은 마력을 운용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그 자리에 가만히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가면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시야가 검어지면서 갑자기… 벗으려고 해봤지만, 벗겨지지 않습니다.” ‘황당하겠지.’ 갑자기 들려온 비명에 깜짝 놀라 튀어 와봤더니 눈앞에 둠기영이 자리해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란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당연하다. 어째서 갑작스레 모습이 변한 건지, 어떻게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건지, 머리가 아파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황급히 이쪽으로 다가온 녀석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나를 바라본다. 한쪽 얼굴을 덮고 있는 가면을 벗기려고 손을 뻗지만 고통스럽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심각한 얼굴로 안절부절 당황하는 게 시야에 비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지혜를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녀석 역시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그러하듯 피시방에서 남 탓이라는 패시브 스킬을 배워온 모양이다. “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대화하는 도중에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더니….” “지혜 씨는 잘못 없습니다. 현성 씨. 저도 갑자기 제가 왜 이러는지….” “제길….” 입술을 꽉 깨문 것은 물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이 주변 통제하고 이 방으로 아무도 들이지 마세요. 희영 씨와 엘레나 님 바로 호출해 주시고요. 그리고 지혜 씨는 저 좀 봅시다.” “네?” “여기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지금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무슨 이야기가 있었고, 무슨 말을 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하세요.” “아, 네, 알겠어요. 마침 저도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제길, 제기랄….” “지혜 씨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아마 지혜 씨도 깜짝 놀랐을 겁니다. 제가 갑자기….”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제발… 침대에 누워 계세요. 제발, 제발요.” ‘아, 진짜 이거 하기 싫었는데.’ 역시나 똥줄이 타는 얼굴로 방방 뛰는 듯한 모습이다. 실제로 방방 뛰고 있지 않았지만, 극도로 초조해하는 게 눈에 띄었다. 손톱을 깨문다거나 한쪽 손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하는 종류이기는 했지만, 녀석의 속이 타들어 가고 있다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이윽고 선희영과 엘레나, 심지어는 정하얀까지 방 안으로 들어온 후, 다시금 방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김현성은 나를 엘레나와 선희영에게 맡기고 잠깐 이지혜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는데,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제법 신경 쓰였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아마 대략 유추하자면 이 정도 이야기일 것이다. ‘기영 씨가 많이 괴로워하고 있다. 많이 답답해했고, 실제로 뭔가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길드원들 전부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 같다는 불안감을 이야기했을 때 갑작스럽게 머리를 부여잡았다.’ 추가로. ‘얼굴 쪽에서 가면이 스스로 생성되고, 머리카락 색깔이 바뀌는 걸 봤다. 처음에는 둠기영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확실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어서 당황하고 있었던 찰나였다. 그 순간 현성 씨가 방 안으로 들이닥친 것이 이번 사태의 전말이다.’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 외에도 뭐 개인적인 사견을 붙일 수도 있는 거고. 이를테면 마이너스 감정이 폭발해서 변화한 것 같다든지, 처음부터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겉모습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게 없을 수도 있겠다든지. 아마 이지혜가 알아서 잘 처리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사이 엘레나와 선희영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에 분석하기 여념이 없다. 정하얀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힘든 와중에서 정하얀에게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는 것은 썩 나쁘지 않은 제스처였다. 너무나 어수선하고 혼란에 빠져든 장내. 천천히 입을 열자 무척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엘레나 님. 혹시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알고 계십니까?” “괜찮아요. 너무 당황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기영 님 탓이 아닌 걸요. 일단은 몸을 좀 살펴봐도 될까요? 몸에 혹시라도 신성력이 남아 있는지….” 신성력은 개뿔. 조금도 남아 있지도 않다. 아마 엘레나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둡고 칙칙한 마력이 전부일 터. 선희영도 함께 무언가 방도를 찾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무슨 방법 같은 게 나올 리 만무했다. “일, 일단 침착하세요. 초조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게 말하는 엘레나 본인이 가장 초조해하고 있다. “흐윽, 갑, 갑자기 왜….” 심지어는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모습. 어떻게 해보겠다고 계속해서 신성력을 밀어 넣고 있었지만, 변화가 생길 리가 있겠는가. 다시 한번 직업 전환 버튼을 누르지 않는 이상, 빛의 연금술사로서 가지고 있었던 신성력이 회복될 리가 없다. 오히려 고통스럽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자 깜짝 놀라며 손을 놓아버린다. 또 하나의 주치의인 선희영은 내 몸 자체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진단하고 있었는데,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표정이 어둡기는 마찬가지다. 그사이에 김현성과 이지혜가 다시금 방 안으로 복귀했다. 김현성의 표정이 한결 어두워진 것을 보니 이지혜가 이야기를 잘 풀어낸 것 같았다. 무슨 이빨을 털었는지 사색이 된 얼굴은 내가 다 미안해질 정도였다. “어떻게 됐습니까? 엘레나 님.” “저… 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신성력에 거부반응을 보이시고는 있지만, 본래의 정신을 유지하고 계신 것 같고…. 일단은 경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현성 씨, 뭔가 잘못된 겁니까?” “아닙니다, 기영 씨. 잘못된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고개 드세요.” ‘당신, 아직 둠기영 아닙니다.’ “혼란스러워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가 해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호언장담하는 모습은 자랑스러웠지만, 김현성이 어떻게 이 사태를 해결하겠는가. 지금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이쯤에서 슬그머니 끝을 내는 게 어떨까 생각해 이지혜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교황청으로 함께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아마 그곳이라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이 상태로 말입니까?”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이대로 계속 영문도 모른 채 탁상공론을 하기보다는 움직이는 게 더 도움이 되겠죠. 바젤 교황님께서도 기영 씨에게 충분히 우호적이고, 베니고어 여신님의 사랑을 받고 계신다는 걸 생각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상정하시는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는….” “…….” “저희 검은 백조도 힘을 보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그럼 당장 하얀 씨가….” “불가합니다, 길드마스터. 그건 위험한 선택이에요. 아무래도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충격을 받을 수 있는 마법을 몸으로 감내하신다는 건 개인적으로 추천해 드리고 싶은 방법이 아닙니다. 마차로 천천히 이동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이지혜가 해줘야 하는 말을 대신 해준 선희영에게는 엄지를. 이곳에 모인 이들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교황청으로 가 좀 더 명확히 상태를 살피는 것에 모두가 동의한 것이다. 방에서 탈출하는 것치고는 스케일이 조금 큰 것 같아서 정말로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결과만 좋다면 이쪽이야 아무 상관 없다. 둠기영이 아직 내면에 남아 있고, 빛기영이 그걸 다룰 수 있다는 설정 자체는 충분히 매력적이었으니까. 이윽고 김현성은 친위대를 향해 명령을 전달한 후 곧바로 이쪽을 부축했다. 혼자 걸을 수 있었지만, 그냥 몸을 맡기기로 했다. 조금 더 편하게 가면 좋지 않은가. 이미 준비를 마치고 있었는지 커다란 마차는 마치 경호 차량에 둘러싸인 대통령 차량처럼 친위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내 모습을 보지 말라고 전달받은 모양인지 박리안을 포함한 조장 2명 만이 사태를 온전히 볼 수 있었는데, 놈 중 하나가 김현성에게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정하얀이 서둘러 나를 넘겨받고 마차로 이끌고 가려는 찰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다시는 그딴 소리 하지 마세요.” 슬쩍 뒤를 돌아보니 김현성이 인상을 구기며 입을 여는 것이 보인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치 없는 조장 한 놈이 움직이지 못하게 한 채로 이송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다. 합리적인 판단이기는 하다. 여기서 갑자기 내가 정신이 나가 버린다면 커다란 피해가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김현성은 이쪽을 포박시킨 채 수도로 향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가면을 쓰고 있지만, 정신은 온전히 이기영의 그것이었으니까. ‘지는 방안에 가둬 놓고선….’ 포박은 불가하고 감금은 가능한 내로남불의 정석. “괘, 괜찮으세요? 오, 오빠.” “응, 괜찮은 것 같아.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하얀아. 신성력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몸이 이상하지는 않아.” 무척 정신없었던 상황인 만큼 이쪽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 역시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눈치다. 보이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지 김현성이 혼자 머리를 꽉 부여잡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모든 정리를 끝내고 마차 안으로 들어온 김현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써 밝은 척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별일 아닐 겁니다.” 누가 봐도 나를 안심 시키려는 것 같은 어색한 웃음이었다. # 527 회귀자 사용설명서 527화 둠기화(2) ‘다른 애들도 다 오고 있는 것 맞나?’ 함께 마차에 타지는 않았지만 아마 뒤따라오고 있을 확률이 높다. 너무 갑작스럽게 결정된 수도행이었으니까. 파란의 파티원들이 임무 수행 도중이었다면 조금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든 수도에서 만나도록 조치했을 것이다. 이지혜가 말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을 테니 일단 모든 전력을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물론 그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확률은 제로에 수렴하겠지만, 지금의 김현성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고 싶어 하기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굳이 이 마차에 함께 타고 있지 않은 건…. ‘이 일이 무척 커다란 일이라는 걸 내게 알리기 싫다는 의도인 거겠지 뭐.’ 방금까지 그 생난리를 쳐놓고 애써 의연한 척하는 게 솔직히 조금 우습다. 아무것도 아닌 척, 그냥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깐 마실 나가는 척, 걱정할 필요 하나도 없다는 척하고 있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를 붙잡아두지 못한다. 다 알면서도 속는 척해주는 것도 힘들었다. 마음 약한 엘레나는 즙이 튀어나오려고 할 때마다 나가서는 눈물을 훔친 후 돌아왔고, 정하얀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극도로 불안해 보였다. 그녀가 항상 그러하듯 머리를 벅벅 긁거나, 입술을 오물거리는 신호를 계속 보내는 중이다. 김현성에게 언질을 받았는지, 최대한 옆에 붙어 밝은 이야기를 재잘재잘 쏟아내고는 있었지만, 누가 봐도 대화에 집중하고 있지 않다. 너무 말을 더듬어서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함께 마차에 올라탄 이 넷 중에서는 그나마 선희영이 가장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기는 편이었다. 묵묵하게 자신의 포지션을 유지하며 할 일을 하는 걸 보니 확실히 그녀가 다른 이들에 비해 성숙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원래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하늘이 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럽게 온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한 것도 마차가 막 출발할 때 즈음. ‘와, 진짜 사람 몸이 신기하기는 하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나는 힘들다. 힘들다. 힘들다. 계속해서 자기 세뇌를 하니 정말로 몸이 아픈 것 같았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거나 숨을 헐떡거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미약한 두통 때문인지 안색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신성력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두통이건만, 현재의 두통이 혹시 엘레나가 쏟은 신성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 이들이 다시금 주문을 외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저 안쓰럽게 쳐다보는 것이 이들이 할 수 있는 전부다. 커다란 마차에서 엘레나, 이지혜와 함께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던 김현성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내가 잠깐 눈을 붙일 때를 제외하고는 온종일 붙어 있는 수고를 해주시고 계시니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얘 입장에서는 그럴 만해….’ 혹시라도 둠기영의 인격이 다시 한번 세상으로 튀어나왔을 때, 그걸 수습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는 책임감이 자리 잡은 게 분명하리라. 어색한 침묵만이 감도는 장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최대한 연약한 척하는 것. 그래, 비극에 처한 히로인의 포지션이 가장 적절하다. “몸은 조금 어떠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조금 어지러운 것밖에 없어서… 혹시나 잘못된다면….” “아니요,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닙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청에 도착할 테니 그때까지만 참아주시면 됩니다. 걱정하실 필요도, 당황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별것 아닌 일이니까요. 아마 간단한 저주일 겁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는….”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겨우 그것뿐이니 한숨 더 주무세요. 고작 10분밖에….” ‘이 새끼 그렇게 슬플 표정으로 바라보지 마라. 형 슬퍼진다, 진짜.’ 저도 모르게 눈가에 맺히고 있는 크로커다일의 눈물. 녀석은 조금만 버텨 달라는 듯이 그저 손을 꽉 잡아 올 뿐이었다. “아무 일도 아닐 겁니다. 네, 분명히 아무 일도 아닐 거예요. 기영 씨가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본인한테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씁쓸하게 웃으면 안 되지. 기본이 안 돼 있다. 진짜, 기본이….’ 어색했는지 선희영이 이미 수차례나 정리해 준 이불을 괜스레 한 번 더 정리하고 있다. 확실히 녀석은 거짓말에 재능이 없다. 아무리 밝은 척해도 패시브처럼 슬픔이 묻어나오는 얼굴과 표정. 근심 걱정을 도저히 숨길 수 없는 버림받은 강아지의 표정은 초조함과 불안함,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뒤엉킨 느낌이다. 현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전부 다 보인다. 그 와중에도 마차 안에서 바깥을 볼 수 없게 암막을 쳐놓은 모습은 가관이었다. 본래부터 밖의 상황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현재 상태에서는 모든 걸 고백하는 게 더욱더 위험하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머리 아프겠네, 진짜….’ 이지혜를 통해 원인에 대해서 들었다는 건 일단 분명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이너스 감정에 의해 둠기화가 진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에게 일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 상황에서 모든 걸 오픈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현재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혼란스러워만 하고 있는 겁먹은 어린 양에게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시와 주변 환경을 보여주며 ‘사실… 이거 당신 작품입니다.’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 싸이코패스는 악마 소환사 진청이나 악마 숭배자 이토 소우타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김현성은 잠깐이나마 과거를 숨기는 방법을 택했다는 게 정설. 저번과는 다른 방식으로 멘탈이 바스러지고 있는 게 아닐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요망한 입은 다시금 말을 내뱉기 시작. 일단은 불안하고,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어보자. 그게 더 맞을 테니까. 결정타를 날리려면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이다. 애초에 암막이 쳐 있는 상태에서 이미 결과는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최대한 슬픈 얼굴로 검은색 커튼이 쳐져 있는 창문 쪽을 애써 바라보자 불안한 듯 말을 돌리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불편한 점이 생기시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기영 씨.” “저기….” “네.” “커튼 좀 치워주실 수 있으십니까? 빛을 조금 쐬고 싶은데….” “…….” “…….”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더 있을까. 고개를 푹 숙이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현재 밖의 상황을 보여줄 수도, 보여주지 않을 수도 없는 최악의 상황. 심리적으로 힘들어하는 얼굴은 조금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거짓말 같은 거 하면 안 되지, 이 새끼야.’ 작은 거짓말은 큰 거짓말을 부르고, 큰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부른다. 어떻게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고, 진실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시간상으로는 몇 초일 뿐이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은 녀석의 심경이 얼마나 복잡한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귓가에 들려온 것은 체념한 듯한 이쪽의 목소리. “역시… 뭔가 숨기는 게 있으시군요.” “…….” “감추고 계신 게….”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단지 지금은… 조금 보여드리기가 곤란할 뿐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씁쓸한 웃음. “그렇게 변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성 씨. 혹시나 현재의 제 모습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굳게 닫힌 입. 녀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제가… 뭔가 잘못한 겁니까?” “아니요. 절대… 절대로 아닙니다. 기영 씨는 잘못한 게 없어요.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지 조금…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커다란 일이 생긴 것뿐 입니다. 그것뿐이에요….” “잘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흐릿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어요. 꿈에서 본 것처럼 잡히지 않을 것 같은 기억이… 무너진 건물들과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악마들, 폐허가 된 잔해. 그리고 디아루기아. 울부짖는 악마들의 목소리와….” “악몽을 꾸신 겁니다. 지금 당장은 떠올리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제발.” “저를 가둬둔 것은… 제가 위험하기 때문이었군요.”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까….” “아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어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린 겁니다. 절대로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기영 씨, 혼란스러운 건 이해합니다만, 일단… 그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마시고….” “어떻게 생각을 안 할 수가 있어요.” “…….” “어떻게….” “…….” “어떻게 생각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조차도 놀라울 정도의 울먹이는 목소리. 녀석은 이미 모든 게 끝났다는 듯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무 쉽게 끝날 것 같은데, 이거.’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는 것보다 담담하게 슬픔을 표현하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전략이 잘 들어맞았다. 곧바로 바깥을 볼 수 있다는 상황 자체도 괜찮았고, 스타트를 박아 넣는 게 어려웠지만, 확실히 한번 들어가고 나니 손쉽게 뚫리는 느낌이었다. 여기서는 다시 한번 힘 있게 목소리를 내뱉는 것이 맞다. “창문 열어주세요.” “하지만….” “창문 열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이쯤 되면 김현성도 진실을 감추기 힘들다. 입술을 꽉 깨문 녀석의 눈에 오만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윽고 천천히 커튼을 걷어 올렸다. “아….” 도시는 당연히 황폐했다. 어찌나 피폐했는지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폭발했을 정도였다. 복구 작업이 거의 다 끝났을 거로 예상했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쉽게 복구가 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마법으로 건물을 빠르게 올릴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김현성의 말대로 대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마력이 보인다. 벨리알의 마력과 김현성의 마력이 부딪친 여파 때문에 복구 작업에 시간이 걸리고 있는 것이리라.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우뚝 솟은 시계탑도, 사람들이 몰려들던 광장도 그곳에는 없다. 린델의 모험가들 역시 보이지 않는다. 마치 버림받은 도시처럼…. 자연환경도 예외는 아니다. 울창하고, 아름다웠던 숲은 칙칙하고 끈적한 물질로 뒤덮여 썩어가고 있었고, 푸른빛을 자랑하던 호수 역시 그 빛을 잃었다. 항상 맑은 하늘 역시 어딘가 평소와는 달랐다. 린델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물질적 피해를 입었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김현성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이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나는 조용히, 계속해서 창문을 바라봤다. 마차 안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단 한 차례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렇게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영 씨… 잘못이 아닙니다.” “…….” 투명하고 순수한 죄책감의 눈물이 흘러내린 것은 당연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감정선을 지켜야 했으니까.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린다. 소리 없는 울림이 마차 안을 가득 채우기까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 528 회귀자 사용설명서 528화 둠기화(3) “저… 기영 씨. 괜찮으시면 식사를 조금 하시는 게….” “아뇨, 지금은 입맛이 없습니다.” “그래요, 이기영 님. 어제도 조금밖에 안 드셨잖아요.” “오, 오빠. 시, 식사 같이하세요.” “괜찮아.” “그, 그, 그래도….” “놔두면 알아서 먹을게. 문 앞에 놔줘.” “네….”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됐다. 이지혜의 쓰레기 같은 생각이 확실히 들어맞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이 마음고생 하고 있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 숨기고, 또 숨기고 싶었던 진실이 본인이 가장 원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밝혀진 셈이니 그럴 만했다. 모르긴 몰라도 별별 생각을 다 하고 있으리라. 자기가 실수했다고 생각한 건 당연한 거고, 아마 이쪽의 멘탈을 가장 걱정하지 않을까 싶다. 평생을 이타적으로 살았던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륙에 커다란 피해를 끼친 빌런이 되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상황이다. 혹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 성품을 생각해 보면 자해를 하거나 정신적으로 무너지더라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다. 잠깐만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지만, 거의 3분 간격으로 이쪽의 기척을 살피러 오는 김현성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가슴 아프기도 했다. 어지간히도 깨지기 쉬운 유리로 비친 모양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거짓말을 하려면 들키면 안 되는 거야, 현성아.’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쪽을 속였다는 것 역시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지 않을까. 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걱정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당장은 정신적인 부분과 변화한 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겠지만, 사태가 아무리 다른 국면으로 흘러가더라도 날 속인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혹여나 파란 길드와 자신에게 깊은 실망감을 느끼고 있으면 어떡하지.’ 따위의 생각도 뇌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을 거고, 녀석에게는 꼭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처럼 느껴질 것이다. 마음고생 하고 있을 길드원들에게는 미안하기는 했지만, 일단 원하던 바는 이뤄냈다. 엄지를 추켜올릴 만한 탈출. 지금은 거기로 돌아가고 싶다고 해도 돌아가자고 말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현성 씨.” “네? 네, 기영 씨. 지금 가겠습니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부탁드립니다. 마차를 돌려주세요.” “…….” ‘뭐야, 이 새끼. 표정 왜 그래. 진짜로 마차 돌리려고?’ “제발….” 악어의 눈물을 장착하자 그제야 원하는 반응이 나온다.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기영 씨.” ‘그래, 이래야지 시바.’ “하지만 기영 씨가 우려하시는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아니, 만에 하나 일어나더라도 제가 막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기영 씨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제가 느끼기에는 그래요.” “하지만.” “믿어주세요. 저를 믿으시는 만큼 자신도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충 이런 상황이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믿지 못해, 스스로 방 안에 틀어박히고 싶어 하는 사람을 다시 감금할 미친놈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정말로 그런 방식으로 이번 일을 마무리 짓는다면 정신적으로 망가진 이기영을 보게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으리라. 마이너스 감정을 집어먹으면 둠기화가 진행된다는 것 정도도 알고 있을 테니 아마 홀로 굴속에 들어가는 행동은 최대한 막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이제 팍하고 튀어나와 줘야지.’ 단순한 추측이기는 하지만, 고백 타임도 얼마 남지 않았을 거다. 앞의 20일은 정신적 충격을 받지 않을까, 나를 배려하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고, 지금은 또 사정이 달라졌다. 실의에 빠진 캐릭터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거나 살아가야 할 이유를 전해주는 건 주인공의 역할이 아니었던가. ‘대륙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든가.’ 기영 씨의 힘이 필요하다던가. 녀석의 무의식 세계에서도 이 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으니, 김현성이 입을 열어오는 것 자체는 이미 확정된 이야기. ‘시간이 어느 정도가 걸릴지가 문제지.’ 물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후 일이 어떻게 벌어져도 어떤 식으로든 이쪽에서 회귀 고백 이벤트를 진행하도록 만들 테니까. ‘둠기영의 공론화도 그렇고….’ 마음속에 있는 어둠을 컨트롤하는 그 흔한 클리셰를 어째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는지,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교황청에 들어간 후에 현 사태를 대충 해결하고 나면 이 힘을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걸 소수에게 내비쳐야 했다. 베니고어의 공증이 있다면 더욱더 좋고. 물론 주변에서는 둠기영의 힘을 사용하는 걸 만류하겠지만, 본래 이런 위치에 서 있는 캐릭터들의 필살기는 치명적인 페널티를 떠안게 마련이다. 한 번만 더 사용하면 영원히 오른팔을 사용할 수 없다든가, 계속해서 사용한다면 결국, 어둠에 영원히 잠식될 수도 있다든가. 이런 떡밥 정도는 몇 개 가지고 있어야 조금 입체감이 살아나는 법이지 않겠는가. 주변 사람들의 걱정하는 마음도 조금 더 늘어날 거고…. 뭐, 이지혜 개인적인 욕심이 들어간 것 같기는 했지만, 결과만 좋으면 문제는 없다. 오히려 환영하고 싶을 지경이지. 혼자서 행복 회로를 돌리는 와중에 김현성이 다시금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곧 교황청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어째서 본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방금과 같은 말을 쉽게 입에 담지 말아 주세요.” “…….” “그리고 제멋대로… 쓸데없는 판단을 한 걸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아니요, 현성 씨가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제가 현성 씨였어도 충분히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게 맞습니다.” “정말로 그런 게 아니라….” “나무라는 것이 아니니 그런 표정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아까의 표정이 괜스레 신경 쓰였기 때문에 마음속에 작은 짐 하나를 떠미는 것으로 가볍게 마무리. 그 와중에 마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교국의 수도에 진입하는 것이다. 다시금 슬픈 표정을 일발 장전하며 교국을 바라봤지만, 역시나 이 지역은 별다른 피해가 없다. 아니, 애초에 교국 자체가 피해가 없다시피 했다. 엄밀히 따지면 개박살 난 건 연방과 린델이 전부. 수도 같은 경우에는 악마의 침입도 없었을뿐더러, 개미 새끼 한 마리와도 싸우지도 않았다. 린델이 복구 중인 현재, 이 장소는 교국 내에서도 가장 괜찮은 거주지로 손꼽히고 있지 않을까. 내 예상이 맞은 듯 검은 머리를 한 모험가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린델의 활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광장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대부분의 모험가는 갑작스레 나타난 파란 길드의 휘장에 멍하니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굳이 커튼을 치지는 않았다. 애초에 창문에 선팅이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김현성은 어지간히 신경 쓰였는지 허락을 구한 이후 커튼을 치기 시작했다. ‘교황청 앞까지 마차를 끌고 가려나? 아니, 아예 그 앞에서 내려줄 확률이 높겠네.’ 지금 당장 대중에게 둠기화를 공개하는 건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대부분의 모험가는 물론 수도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좀 당황스러운 등장으로 비칠 것이다. 현재 린델 복구 작업에 매진하고 있어야 할 파란 길드가 거의 모든 전력을 이끌고 교국의 수도로 입성했다. 의아하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리라. 저 마차 안에 누가 탔는지, 아예 수도로 길드 하우스를 이전하는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 가설들이 오가는 것은 물론, 어쩌면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마차에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궁금하긴 궁금해.’ 교국에서는 아직도 먹힐 거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로 먹힐지 궁금한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환호를 받을지, 아니면 추앙을 받을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마차는 계속해서 이동했다. 이윽고 마차가 멈췄을 때, 나를 제외한 모두가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교황청에 도착한 것은 물론 바젤 교황에게 이것저것 설명하고 있는 게 분명하리라. 살짝 창문을 여니 소수의 인원과 바젤 교황 그리고 그 심복들만 자리한 상태였다. 벌써 수심이 드리워지는 교황님의 얼굴은 30년은 더 늙어 보인다. 김현성은 최악의 상황을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 예상대로 교황 성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앞으로 다가왔다. 소수의 경호 인원들이 허겁지겁 그를 만류했지만, 오히려 커다란 노호를 내지르고는 그들의 팔을 뿌리쳤다. ‘성격 어디 안 가네, 우리 교황님.’ 마침내 마차의 문도 열어버렸는지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것 놔라! 이 아둔한 것들!” “빛의 검사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위험한 것은 네놈들의 그 썩어빠진 생각이니라. 죽일 놈들! 이것 놓으라고 말하지 않았나!” “교황님!”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못해! 당장 사라지거라! 이 쓸모없는 것들!” “최소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경비 하나가 나 자빠진 모양이다. 그 높은 스텟을 가지고 있는 교단의 성기사가 노친네 하나 감당 못 하는 게 우스웠지만, 그만큼 바젤 교황이 흥분했다는 걸 보여주는 지표이리라. 이윽고 내가 있는 곳까지 달려들어 온 바젤 교황의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에 무리 오면 안 되는데, 진짜.’ 너무 놀라 가슴이라도 부여잡지 않을까 싶었지만,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괜찮을 거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었다. “바젤 교황님.” “고생 많았네. 정말… 고생 많았어.” “죄송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찾아뵙게 돼서….” “하하하. 아무리 그런 모습이라 한들, 우리 이기영 명예추기경 내면의 빛이 바래게 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내 눈에는 명예추기경이 빛을 잃고 있지 않은 모습이 보인다네.” “교황님….”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게나. 여신님께서 명예추기경을 살피실 게야. 아암, 그렇고말고. 자, 일어날 수 있겠나?” 심지어는 황급히 부축하려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뒤늦게 따라온 성기사들이 베니고어의 이름을 읊조리며 바젤 교황을 막으려고 했지만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이쪽에서 은근슬쩍 교황을 피하는 액션을 보여준다. 더럽고 저주받은 몸이라는 듯, 혹시나 교황님 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듯, 어색하게 몸을 뒤로 빼자 오히려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와 이쪽을 일으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저, 명예추기경… 님의 부축은 저희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교황 성하.” “아마 명예추기경님께서도 그게… 더 편하실 겁니다.” 성기사들의 뒤늦은 만류에도 바젤 교황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되었다. 내가 직접 명예추기경을 여신께 모시고 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모습으로는… 혹여나 여신님께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교황 성하.” “명예추기경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일단은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 보심이….” “네이노옴들!!! 입조심 하거라!! 이 썩어빠진 것들아!! 저주받을 악마의 생각이 머릿속까지 꽉 차 있구나! 악마가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이 멍청한 것들!! 정녕 네놈들의 눈에는 명예추기경 안에 있는 빛이 보이지도 않는 것이냐!! 어째서 명예추기경이 이런 모습으로 변한 건지… 어째서 악마들이 이런 힘을 명예추기경에게 심어놓은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말이냐! 이 아둔한 것들!!!” “그, 그렇지만….” “아무래도 너희 멍청한 것들의 머릿속이 악마로 꽉 찬 모양이구나!! 당장 내 둔기를 가져와라! 이 멍청한 놈들에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마구니를 내가 직접 으깨 버릴 테니!!” # 529 회귀자 사용설명서 529화 너의 죄를 사하노라(1) “당장 가져오라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어우….’ “이 죽일 놈들! 이 악마에 홀린 놈들이! 감히! 누구에게!! 그딴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감히 누구에게!!” ‘얘, 왜 이래, 진짜.’ “아니다! 차라리! 이단 심문관 헬레나를 불러와라!! 이것들의 머릿속을 조사해 봐야겠으니!! 든 것 없는 저 머리통 속에 정말로 악마가 들어 있는지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교황님. 이제 슬슬 그만해도 될 것 같아요.’ “괜찮습니다, 교황님. 그렇게까지 성내실 필요 없습니다. 저들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명예추기경….” “여신님과 교황님을 아끼는 마음에 올린 충언이 아니겠습니까. 저 역시 이대로 여신님의 성소로 들어가는 건… 역시나….”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명예추기경.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명예추기경을 버릴 리 없지 않은가.” 확실히 버릴 일은 없다. 내가 베니고어를 버렸으면 버렸지. “그러지 말고 어서 가게나. 저 아둔한 성기사들의 말에 흔들릴 필요도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네. 겉만 볼 줄 아는 멍청한 놈들….” “그들을 너무 나무라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름의 사정이 있을 테니… 콜록.” “오… 오빠.” “성기사들은 단지 본인들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부디… 흥분을 가라앉히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제 부축은 그들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저를 믿어 주시는 건 너무 감사합니다만….” “…….” “혹시나 해가 될까 무섭습니다.” 이때라는 듯 슬쩍 성기사들을 바라보자 녀석들이 묵묵히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무척이나 감동한 듯한 표정이 얼굴에 드러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본인들이 잘못 생각했다는 듯 반성하는 반응은 덤이다. 마음 약한 한 여자 성기사는 입술을 꽉 깨문 채로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아내고 있었다. 그들이라고 왜 슬프지 않겠는가. 대륙을 밝게 비추던 빛이 악마의 저주에 의한 부작용에 숨을 헐떡거리고 있다. 입장상 어쩔 수 없는 태도를 취했을 뿐, 그들의 마음 역시 바젤 교황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교황 성하. 저희에게 맡겨주시면 최선을 다해 명예추기경님을 보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 할 것이야. 혹시라도 명예 추기경에 신변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내가 절대 네놈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이윽고 내 옆으로 다가와서는 조용히 중얼거린다. “정말… 정말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죄송하실 필요도, 감사해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로라 성기사님.” 깜짝 놀라는 얼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물론 실제로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상태창에 떠오른 이름을 그대로 읽었을 뿐이었지만, 눈을 보니 감동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죄송… 합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주 잠깐이나마 명예추기경을 의심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바젤 교황을 보필하던 성기사들 사이로 퍼져 나간다. 그들의 얼굴에는 정체 모를 책임감이 감돌고 다시 한번 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자리 잡히는 게 눈에 보인다. 가슴 아파도 이것보다 더 가슴 아픈 장면이 또 있을까. 선희영과 엘레나는 무척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부여잡고 커다란 한숨을 쉬고 있었고, 김현성은 계속해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이쪽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겐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교황님.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솔직히 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빛의 검사에게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아닐세. 그런 말 하지 말게, 명예추기경. 이게 전부 다 내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인데, 누가 누굴 탓하겠는가. 미안함을 표시해야 할 사람은 나야. 실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게. 여신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명예추기경을 아끼고 있으니….” “아뇨, 그뿐만이 아니라… 제가… 이 이전에 했던 일들을….” “…….” “…….” “들었나 보군.” “자세히 전해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 어둠은 명예추기경이 아닐세. 내가 아는 명예추기경은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자신을 희생할 줄 알며 신을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사람이야. 그게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자네라는 사람이야. 어둠에 굴하지 말게. 말하지 않았는가.” “…….” “내 눈에는 아직도 명예 추기경의 가슴속에 있는 빛이 보여.”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바젤 교황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여신의 석상까지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본래는 이것저것 여러 가지로 몸을 조사한 이후에 들어갈 것 같았지만, 역시나 성미가 급한 바젤 교황다웠다. 일단 여신님께 데려간다면 뭐든 해결이 될 거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빛이 사그라들었다고 생각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 솔직히 바젤 교황으로서도 위험이 따르는 행동이었다. 만약 내가 이 모든 상황을 연기한 것이고, 둠기영으로서 여신의 심장부를 노리기 위해 교황청에 침입한 것이라면 현재의 바젤 교황의 행동은 이후 문제의 소지가 될 확률이 높다. 교황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추기경들에게 물어뜯길 가능성 역시 농후하다. 그러니 어찌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겠는가. “이 모습으로 여신님을….” “여신님은 명예추기경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품어주실 것이네.”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함께 들어가게나.” ‘물론 같이 들어가야지.’ 김현성도 굳은 얼굴로 함께 발걸음을 옮긴다. 정하얀이나 엘레나 역시 마찬가지. ‘얘들아….’ 눈에 띄었던 것은 분위기. ‘이건 진짜 감동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무거운 얼굴로 성소에 진입하는 걸 보면 답이 나온다. 어쩌면 베니고어가 정말로 나를 적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베니고어가 이 사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면 쾌재를 질러야 함이 맞지만, 혹시나 현재의 모습에 크게 분노한다면 어쩔 수 없이 칼을 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키야, 우리 현성이가 베니고어까지 적으로 돌리려고 하네. 대단하다, 증말.’ ‘그래, 하얀아. 너는 그럴 것 같았어. 그래도 고맙다, 진짜.’ ‘엘룬은 아니니까 엘레나도 그럴 만하지. 암, 그렇고말고.’ ‘희영이도 넘나 고마운 것. 우리 같이 가즈아.’ 교국의 그 어떤 장소보다 성스러운 장소였지만, 함께 들어온 파란 길드원들에게는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는 던전 같은 장소로 비치고 있으리라. 아직 모습을 보지 못한 다른 길드원들 역시 그렇다. 포인트마다 대기하며 혹시라도 일이 터졌을 때를 대비해 퇴로를 확보하고 있으리라. 붉은 용병의 일부와 검은 백조까지 교황청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황. 애초에 베니고어는 나를 적으로 돌릴 수도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 적으로 돌린다면 커다란 손실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얘는 반응이 없네. 지금 바쁜가.’ 바쁜 시기가 맞다. 위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베니고어 2.0 패치를 준비하고, 계약에 관련된 부분을 정리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현세를 돌볼 여유가 없는 것도 이해된다. 만약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면, 내가 직업 전환을 보여준 시점에서 퀘스트를 날리지 않았을까. ‘아무리 바빠도 여기서 울리는 목소리는 들을 수 있겠지, 뭐.’ 한 번 본 적 있는 베니고어의 석상이 나를 내려다본다. 바젤 교황도 어느 순간 기도를 드리고 있었고, 성기사들 역시 본인들의 신앙과 믿음을 노래한다. 따뜻한 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향해 들어오고 있었고, 대충 눈으로 보이기만 해도 압도적이라는 생각이 들 만한 신성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베니고어 님. 충실한 종, 이기영 신도가 찾아왔습니다.’ 속마음으로 힘껏 외쳤지만, 들리지 않는 목소리. 아니나 다를까 바젤 교황 역시 커다란 목소리로 베니고어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위대하고 자애로운 여신이시여, 보잘것없는 종들이 찾아왔사옵나이다.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대한 답을 부디 내려주시옵소서.”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 불쌍한 종들을 바로잡아 주시옵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는 대답이 없다. ‘와, 이거 업무 태만 아닌가?’ 여기서 베니고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상황이 조금 심각해진다. 빛 하나 내뿜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석상을 홍두깨로 내려쳐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여신님, 시바… 여신님!’ 대륙을 위기에서 구해줬건만, 이렇게 사람을 무시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부터 신력이 목적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괜스레 인상을 구기던 찰나. [나의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 나… 나, 왔어! 나, 왔어!] 석상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젤 교황과 성기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석상을 바라봤지만, 이쪽은 그녀와 대화하기에 여념이 없다. ‘아니,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여신님.’ [요… 즘 일이 조금 바빠서… 여러 가지로 정리해야 할 것도 많고 원래 여기든, 거기든 뒤처리가 제일 귀찮고 힘들잖아. 절대로 이기영 신도를 무시하거나 괄시한 건 아니야…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는… 그, 그리고 그 모습은 웬만하면….] ‘저도 다 사정이 있습니다, 베니고어 님.’ [미안해, 내가 그만 모자라서… 이기영 신도를 섭섭하게 만들었네. 기분 풀어줬으면 좋겠는데… 내 사과 받아줄 거지?] ‘됐습니다. 그렇다고 이미 상처받은 마음이 어디 가지는 않아요. 사실 깨어났을 때부터 찾았었는데.’ [미, 미안해 나의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 정말로 바빠서 그랬어. 너무 바빠서 잠깐 자리를 비우기도 했고, 알다시피 계약 문제 때문에….]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미안, 그, 그래도 여기 찾아온 이유는 있는 거지? 최선을 다해서 한번 힘써볼게. 추가로 이번 사태에 고마움도 조금 표현하고… 필요한 게 뭐야? 들어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사실 딱히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응.] ‘용서받고 싶어서요.’ [뭐?]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기는 하지만, 제가 연방과 린델에 조금 커다란 상처를 입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 가면도 쓰고 있고요. 그걸 용서받고 싶습니다.’ [어….] ‘용서해 줘요.’ [너… 너의 죄를 사…  하노라.] ‘아니, 그렇게 말고요. 기적 팍팍 넣어서.’ [뭐? 저 미친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언니! 언니, 정말 이대로 참고 있을 거야? 연방이 박살 난 걸 왜 언니가 용서해 주는 건데! 내 땅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로렌! 너 조용히 있지 못해? 지금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기나 해?! 미… 미안해, 이기영 신도. 깜짝 놀랐지? 이건 다름이 아니라….] ‘연방 수호신, 로렌 님도 함께 계십니까?’ [어?] ‘기왕이면 로렌 님께도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 […….] [저… 저 미친노옴!!] 더욱더 환한 빛이 장내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 530 회귀자 사용설명서 530화 너의 죄를 사하노라(2) 머리를 뒤흔드는 커다란 목소리에 잠시 움찔했지만, 굳이 반응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로렌인가, 가렌인가 하는 신의 돌발 행동을 베니고어가 막아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국의 마지막 희망, 빛의 등불이라고 불리는 명예추기경의 뚝배기를 깨버린다면 대륙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하다. 김현성을 포함한 대륙 영웅들의 원망과 불신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더 나아가 우리네 영웅분들께서 윗동네를 적대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김현성이 저 눈부신 빛을 견제하는 걸 보면 답이 나온다. 그 무엇보다 대륙의 존망에 힘써야 하는 저들의 입장상 내게 해를 끼치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깝다. 이쪽의 영입을 생각하고 있다면 더욱더 그렇다. 베니고어를 비롯한 무능력한 신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내가 벨리알의 손을 잡고 룰루랄라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베니고어가 언급한 적이 있었던 윗분이 나를 열렬히 원하고 있다는데, 베니고어보다 아래에 랭크된 여신 로렌이 어떻게 이쪽에 해를 끼칠 수 있단 말인가. 정신이상자가 아닌 이상 나를 건드리지는 않을 거로 생각하던 그때였다. [네 이노옴! 역겨운 영혼을 지닌 인간 놈이!! 감히!! 여신을 우롱해?! 신벌이 두렵지도 않은 것이냐!] 거대한 빛과 함께 머릿속을 울리는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그 충격이 어찌나 컸는지 잠깐 몸을 거북이처럼 웅크리게 될 정도였다. 슬그머니 김현성을 바라보자 녀석이 입술을 깨문 채로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조금만 더 충격을 받으면 검을 뽑아 매개체인 석상을 부수려고 하리라. ‘그건 안 되는데…. 조금만 더 참아야 돼, 현성아….’ 여신보다 이 교황청과 척을 지게 되는 게 신경 쓰인다. 여신이 타락했습니다, 어쩌고를 시전하기에는 지금 뿜어져 나오는 빛이 너무 강렬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현재의 내 모습을 여신이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는 만큼 척을 지는 건 최대한 지양해야 했다. 그렇다고 저 멍청한 신이 원하는 대로 얌전히 납작 엎드려 줄 수는 없는 일. 항상 그러했지만, 이쪽은 절대로 양보할 생각이 없다. 양보하는 건 내 반대쪽에 있는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입술을 꽉 깨무는 순간에도 로렌은 계속해서 개소리를 지껄여 대고 있었고 그럴수록 빛은 점점 더 거세게 나를 몰아붙이는 중이다. 신이 났는지 아무 소리나 지껄여 대는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이었다. [지옥으로 보내주마! 이 더러운….] ‘그래, 시바… 지옥 가자.’ [어?] ‘그래! 내가 더러워서 지옥 간다. 내가 진짜 더러워서 지옥 간다고.’ [어어….] ‘용서 안 받아도 되니까. 그냥 지옥 가겠습니다, 진짜. 벨리알 님! 어디 계십니까. 벨리알 님!’ [어…어?] ‘어디 한번 그래, 갈 때까지 가봅시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랑 더 이상 할 말 없으니까. 뭐, 혼자 알아서 잘해봐. 대륙 생명체에게 직접 해를 끼치는 건 금기라고 들었는데, 무슨 배짱으로 이러고 있는 건지 몰라. 페널티를 먹으면 회복할 신력은 있으시고? 다시 파산하시려고 그러시나 본데, 이쪽에서 지원 끊으면 어떻게 되는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아?’ [이기영 신도, 로렌의 뜻은 그게 아니라… 다른 의도가.] ‘베니고어 님도 그래요. 사랑하는 신도, 사랑하는 신도라고 말해주면서도 은근히 가만히 있었던 거 누가 모를 줄 압니까. 진짜, 어떻게든 대륙을 살리기 위해 이 한 몸 희생한 신도가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죄를 회개하러 왔다는데 그것도 못 받아줍니까? 회개하면 뭐, 모든 죄를 용서하고, 천국 어쩌고 하더니 그런 거 다 거짓부렁이었네요.’ […….] ‘이거 무서워서 위로 올라갈 때 그쪽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죄가 깨끗이 씻기지도 않았는데, 거기서 누가 트집이라도 잡으면 어떻게 합니까. 진짜 역겨운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 죄를 씻지도 못한답니까. 진짜 너무 편협하시다. 이럴 거면 악마가 차라리 낫겠네. 그쪽에서 마음 편히 지내는 게 훨씬 낫겠어요, 로렌 님.’ [이놈이 끄… 끝까지!] ‘지금 당신이 여기서 나랑 떠들고 있는 게 누구 덕분인지 잊으면 안 돼요, 이 사람아. 기껏 물에 빠진 거 건져 올려줬더니 여신 우롱 어쩌고저쩌고. 나랑 척지면 누가 더 손해인지 잘 생각해 봐. 연방 복구 작업에서 신전 축소, 아니, 아예 신전은 복구 작업에서 제외해 버릴 테니까.’ [내 신도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쩔 건데. 기적이라도 일으키시게? 한번 잘해봐요. 누가 이기는지 한번 봅시다. 안 그래도 그쪽 애들한테 영 평판이 좋지 않던데, 누가 누가 더 쉽게 여론을 움직이는지 한번 시험해 봅시다. 한 달 안에 로렌 여신이 연방을 악마들에게 팔아넘겼다는 진실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기대해도 됩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둔한 놈!] ‘정말로 안 믿을까? 이거 자기 신도들을 너무 믿고 계시네요.’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우리 잠깐만 이야기를… 원하는 용서라면 수백 번도 더 해줄 수 있으니까. 으응, 사실 용서받을 일도 아니잖아. 전부 다 우리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 로렌이 하는 말의 뜻은 그거야… 애초에 용서받을 필요도 없는 일을 용서받으려고 해서 잠깐 당황한 것뿐이야.] ‘아, 베니고어 님 됐어요. 됐으니까. 용서 안 받고 지옥 갈랍니다.’ [이기영 신도! 이기영 신도오!] [구질구질하게 그러지 마세요, 언니! 언니가 그렇게 저자세로 나오니까, 저 바퀴벌레 같은 쓰레기가 자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거야. 한 번쯤은 버릇을 고쳐줄 때도 됐어.] [로렌, 가만히 안 있어!! 당장 여기서….] [이 역겨운 인간한테 언제까지 끌려다닐 작정이야! 이게 다 언니를 위해서라고! 이렇게 된 이상!!] [로레에에에에엔!!!!] 뭔가 쾅!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베니고어가 그녀를 제압한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는 연결이 끊겼는지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 하지만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당연히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우리 무능력한 베니고어가 로렌보다는 더 능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만약 정말로 척을 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고, 황급히 말릴 수밖에 없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 앞서 말한 모든 내용을 진심으로 지껄인 건 아니었지만, 아예 일어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조금 힘들기야 하겠지만, 로렌을 타락한 악신으로 만드는 것 정도는 무난하게 완성될 확률이 높다. 애초 연방 종교는 한풀 꺾이기도 했고…. 그 신전 역시 지지기반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악마 천지가 되었던 곳에 무슨 신전과 석상이 남아 있겠는가. 매개체가 없으니 기적을 일으키거나 대륙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에 더욱더 포인트가 많이 들어갈 거고, 실제로 지금 로렌이 가지고 있는 포인트로 무언가를 해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베니고어 2.0 패치가 방금 끝났다고 가정해 보면 더욱더. 일이 터질 당시에 로렌을 부르짖던 많은 신도가 눈물을 훔치며 삶의 터전을 떠났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 어떤 연방민이 그녀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말 몇 마디에 뒷공작 하나면 그녀를 벨리알과 놀아난 탕녀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헛소문을 만들기는 쉽지만, 그 헛소문을 해명하긴 위해서는 수십 장의 증거와 문서가 필요한 법 아니겠는가. 심지어 얘는 증거와 문서를 내밀 수도 없는 상황이란다. 할 수 있는 거라고 해봐야 빛이나 조금 뿜어대거나 몇몇 이에게 퀘스트를 내리는 게 전부다. 애초에 시작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베니고어는 사회생활을 제대로 배운 티가 났다. ‘내가 진짜 여신 하나는 잘 키웠다, 진짜.’ 이쪽과 오랫동안 함께한 짬밥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상황 파악을 잘하고 있다. 혹시 큰일이라도 터질까 봐 그녀를 말린 것을 보면 대충 봐도 답이 나온다. 아무것도 몰랐던 순진한 신입사원이 점점 회사에 적응하는 걸 바라보는 기분이 이러할까. 잠시 후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베니고어가 혹독한 야생에 적응하는 법을 깨달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언니, 끄으으윽.] [뭘 잘했다고 끄윽거려. 나,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어. 지금 당장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한테 사과해.] [끄으으윽….] ‘그렇지.’ [빨리 안 해?!] [언니이….] [이기영 신도, 미안해… 깜짝 놀랐지? 얘가 아직 뭘 몰라서… 이기영 신도가 그 넓은 마음으로 사과를 받아줬으면 좋겠어. 이기영 신도가 원하는 건 최대한 들어줄 테니까. 자, 어서.] [미, 미안하구나. 내가 그만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어. 끄윽… 부디 나를 용서해 줬으면 좋겠구나.] [기분 좀 풀렸어? 이기영 신도?] ‘…….’ [나를 봐서라도 한 번쯤 눈감아주면 안 될까? 우리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여기서 흐트러지는 건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로 원하지 않을 거고, 나중에는 얼굴 마주치면서 일할지도 모르는데 서로 얼굴 붉히는 건 조금 그렇지.] ‘네, 뭐… 그렇기는 합니다. 솔직히 내키지는 않지만, 베니고어 님의 얼굴을 봐서 그 사과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제 죄도 용서해 주셔야죠.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로렌 님께서도 직접 죄를 사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로렌은 신성이 많이 부족해서… 나도 현신하는 건 여유가 없어. 직접은 아니지만, 빛으로 모양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도 괜찮을까?] ‘베니고어 님이나 로렌 님의 모습을 대충 확인할 수 있을 정도면 됩니다. 준비되면 빨리 해주세요. 다른 사람들 기다리니까’ [물론, 지금 당장 해줘야지! 누구 부탁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기영 신도의 죄를 용서하는 건 반드시 하는 게 맞지. 으응! 그, 그렇지. 근데….] ‘이후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사용하신 만큼 확실히 벌어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이기영 신도라니까. 항상 고마워서 어떡하지….] ‘괜찮습니다. 저 혼자만을 위해서 하는 일도 아니고, 모두 대륙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베니고어 님께서도 대륙을 위해 벨리알….’ [자! 그, 그럼 빨리 시작하자!] 베니고어의 입장에서 벨리알과의 계약은 다시 언급하기도 싫은 모양이다. 황급히 말을 돌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장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빛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성기사들과 표정이 어두워지는 바젤 교황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김현성을 포함한 파란 길드원 역시 입술을 꽉 깨물기는 마찬가지. 안 좋은 상상을 하는 것 같았지만, 다시금 환하게 장내를 비추는 빛을 목도한 이후에는 한결 표정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모자라 빛의 형상을 한 베니고어의 모습이 시야에 비치는데 어떻게 표정을 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형형색색의 화려한 빛의 베니고어는 벨리알과의 격전을 치렀던 때의 완벽한 모습보다는 생동감이 떨어지지만, 조금 더 신비롭게 느껴진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여기저기서 환희에 찬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베니고어시여….”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바젤 교황, “로렌 님까지….” 연방의 수호신 로렌의 등장에 깜짝 놀라는 성기사들까지. 화아아아아악!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할 정도. 툭하면 터질 것처럼 연약한 표정은 그대로 유지. 베니고어와 로렌은 그 자리에 서서 휘황찬란한 빛을 뿌리며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을 이었다. [그대의 죄를 사하노라.] [그… 끄윽… 너의 죄를 사하노라.]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빛이 몸을 감싸 안는 모습, 천천히 직업 전환을 선택하자 다시금 겉모습이 변하는 것이 느껴진다. ‘누가 나를 비난할 수 있겠어, 진짜.’ 죄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확실하게 공증을 받으니 그동안 저질렀던 작은 죄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어째서 많은 종교가 회개를 강조하는지 확실하게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죄를 포기함으로써 거룩한 신과 함께하는 축복받은 단어, 이것보다 더 완벽한 면죄부가 어디 있겠는가. [이기영 신도의 죄를 사하노라.] 몸은 물론 마음까지 충만해졌다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 531 회귀자 사용설명서 531화 거울 호수(1)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베니고어시여….” [저와 로렌이 잠깐 그 안에 있는 어둠을 집어넣기는 했지만, 이는 단기적인 대책에 불과합니다. 아직도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는 어둠이 남아 있습니다. 대륙의 빛이 가장 신뢰하고 있는 그대들이 그를 잘 돌봐주셨으면 합니다. 작은 부탁이지만, 이는 장차 이 대륙의 존망을 가를지도 모르는 커다란 일입니다. 항상 그를 지지해 주고 그의 등 뒤와 앞에서, 그를 떠밀어주고 끌어주세요.]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바젤 교황, 이렇게 부족한 여신을 의심하지 않고 항상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어찌 베니고어 님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믿음은 곧 저에 대한 믿음이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 가려져 있는 빛을 확인한 그대야말로 저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수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허으으으윽….” [빛의 검사여, 그대에게 거는 기대 또한 큽니다.] “…….”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셨군요.] “…….” [부탁드리옵건대, 그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게 방향을 잘 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길잡이 역할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지는 이해합니다만….]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 “…….”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 베니고어는 환한 빛을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윽고 빛의 가루가 조금씩 조금씩 떨어져 내리며 상황은 마무리.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마지막까지 빛에 휩싸인 채로 모든 죄가 씻겨 내려간 내 모습을 보니 더욱더 미소가 지어진다. 오류나 눈에 거슬리는 장면이 있을까 싶어, 이지혜가 찍어놓은 마력 홀로그램을 돌려봤지만, 두세 번 점검해도 눈에 밟히는 장면은 없다. 오히려 기적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은 박수를 보내기에 충분했다. 전 교국과 대륙에 이 영상이 뻗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감금 상황을 해결한 것으로 모자라 둠기화에 개연성까지 부여했으니, 어떻게 봐도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미 사흘 전부터 교국은 밤낮 가리지 않으며 기도 체제에 들어갔다. 베니고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받은 바젤 교황을 필두로 한 교황청은 기적에 대해 떠들어대느라 정신이 없다. 이쪽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듣고 며칠 동안 교황청에 머물러 달라고 청했다는 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 당장 린델로 돌아가 복구 작업을 계속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곧바로 돌아가기엔 신경 쓰이는 게 많다. ‘분위기는 대충 읽어봐야지.’ 아무것도 없는 황폐한 도시에 돌아간다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정보에 목말랐던 만큼 악마들이 떠나간 이후에 도시의 여론이 어떤 식으로 변화했는지, 또 지금은 어떻게 자리 잡히고 있는지, 실제 교국민과 모험가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동안 읽을 수 없었던 반가운 기사들과 뉴스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요소들. 나름 정보화 시대에서 살아왔던 만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재미있다. ‘전투가 끝난 직후에 나온 기사부터….’ [베니고어 님께서 일으키신 기적, 악몽은 걷히고 대륙을 노을빛에 물들다. -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음… 음….” [기적에 가까운 대승,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망자가 거의 없는 것으로 확인돼…. -교국신문 마이클 특파원.] ‘기적에 가까운 대승이기는 했지.’ [연방에 있는 포로들, 기적적 구출. 나라는 사라졌지만, 사람은 남았다. -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교국의 수호룡, 디아루기아. 임시 거처인 실리아로 거취를 옮겨 회복 중 -실리아일보 쿄스케 기자.] [깨어나지 않는 명예추기경, 벌써 20일째. 교국의 수도에서 매일 같이 열리는 기도회에 모습을 드러낸 바젤 교황. “이럴 때일수록 모든 신도가 힘을 모아야 할 때.” -교국신문 마이클 특파원.] [린델 복구 작업에 난항. 약 3개월이 지난 후에야 본격적인 복구 작업에 착수할 것이라고 예상. 임시 거처 확보와 모험가 복지 문제로 오늘 저녁 붉은 용병의 길드 마스터 차희라의 입장 발표가 예정되어 있어…. -교국칼럼 김성경 칼럼니스트.] [34일째 들려오지 않는 명예추기경의 소식에 뿔난 교국민. “혹시나 교국에서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돼….” -교국신문 콤파니 특파원] [파란 길드 대변인 김미영 팀장의 입장 발표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소득이 없어. 혹시나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죽음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대두. -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교국민들의 촛불 시위. 진실을 밝히는 외침 통할까. -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금일 새벽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눈을 떴다는 소식에 교국 전체가 축제 분위기. 하지만 일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어…. -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확실히 내가 누워 있던 동안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디아루기아는 휴식 중이고, 린델의 복구를 제외하면 뒷수습 역시 제법 훌륭하게 마무리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파란에서 내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발표하지 않았다는 것. ‘그냥 계속 누워 있다고만 발표한 거네. 키야… 얘네 좀 봐….’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날짜상으로는 분명히 일어나 있었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아마 촛불 시위니, 뭐니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끝까지 숨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소름이 돋기도 한다. 멀쩡하게 깨어 있는 사람을 천연덕스럽게 감금해 놓고 기절해 있다고 발표한 꼴이었으니까. ‘이제는 다 끝난 일이지, 뭐.’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뭉쳐 있는 기사들이 다시금 시야에 들어온다. 기본적인 내용 말고도 재미있는 기사들이 꽤 많다. [빛의 검사는 무의식 속에서 무엇을 봤던 것일까. 언론에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파란의 길드마스터가 직접 전한 생생한 이야기. 노을빛 검은 명예추기경의 선물.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스토리에 교국 전역이 화제. -린델일보 박성경 기자.] ‘우리 현성이, 자랑하고 싶었구나. 이런 미담 좋지, 좋아. 미담은 마음껏 퍼트려도 돼.’ [천재검사와 연금술사가 사랑하는 법 신간 출간.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신원 미상의 작가 인터뷰 수록. “제 글이 많은 분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린델 문화부 정유미 기자.] “이런 것도 좋지. 무조건 도움된다니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치고 힘든 상황에 문화생활만큼 힘을 주는 게 또 어디 있겠는가.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여신이 악마들을 물리쳤다고 해서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코너에 몰린 모험가들이 많을 거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저런 건 충분히 도움이 된다. 길드 차원이나 나라 차원에서 지원해 주는 게 마땅하다. [천재검사와 연금술사가 사랑하는 법, 영화화 확정. 많은 투자자가 앞다투어 경쟁할 것으로 추측. 환호성을 내지르는 팬들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원작을 훼손하지 않을까 하는 팬들의 입장도….] 이러고 보니 이번 기회에 파란에서 정식으로 투자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창작자가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에 입장인 만큼 굳이 앞으로 나서서 뭘 제작하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투자 정도는 쉬운 일이니까. 앞으로 이쪽 사업 역시 커질 테니 미리 선점해 놓는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다른 사업에 비해 수입이 그리 크지 않을 것 같기는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기왕 하는 김에 연극 같은 걸 만들어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어떻게 조금 더 사업을 커다랗게 키울 수 있을지 생각하기만 해도 계속해서 입꼬리가 올라간다. 오랜만에 찾은 자유가 괜스레 소중하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다. 여기저기에 읽을거리, 볼 것 천지다. 여신의 거울에서는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교황청에서 여신을 만나 몸을 회복하고 있다는 소리가 연일 보도되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모여서 기도를 드리는 교국민들의 모습 또한 이쪽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정보에 바다에서 헤엄치는 모습이 역시 나답다.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 주니, 이것보다 더 편한 게 어디 있겠는가. 현 배경도 그렇다. 슬슬 바깥으로 나가 선전 활동을 벌여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 시점. 누가 봐도 지친 몸으로 복구 작업을 맨손으로 돕는다거나, 교국민들의 손을 한 명, 한 명 잡아주며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거나. 할 수 있는 건 많다. 그렇게 아주 잠깐 생각에 빠져 있던 때였다. 바깥에서 국화차를 가지고 온 오스칼, 아니, 아리스 시녀가 시야에 비친 것. “오스칼 님….” “아리스 시녀라고 불러주세요. 명예추기경님. 아까도 그러시더니… 자꾸 그렇게 부르시면 섭섭해요.” “아무래도 잘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몸은 괜찮은 거 맞으시죠?” “네, 보시다시피 이제는 건강합니다. 무리 없이 돌아다닐 수도 있고요.” “그래도 너무 무리하시면 안 돼요. 다른 분들도 걱정이 많으시고… 명예추기경님의 몸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까요.” 마지막 대사가 왠지 모르게 무섭게 들려오는 건 착각일 거다. “지금 당장 린델로 뛰어가고 싶으신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조금만 더 참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미 명예추기경님은 커다란 짐을 짊어지기도 했고, 잠깐이기는 하지만 여유를 즐겨주셨으면 해요.” “그렇기는 하지만….” “일단 차 한 잔 드시겠어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렇게 오랜만에 같이 있으니 정말 좋네요. 아, 어제는 어떠셨어요?” “어제라면….” “카트린 의원과 엘리제 의원, 마를린 의원이 들렀다고 들었었는데.” “아, 물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너무 많이 걱정해 주셔서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모두 뵌 지 오래된 분들이니까요.” “그래도 피곤하지는 않으셨나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괜찮았습니다, 아리스 시녀님.” ‘이것도 중요한 일이고….’ 인맥 관리는 지속해서 해주는 것이 좋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왔다고 한들, 초심을 잃지 않는 건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 아니겠는가. ‘안 그래도 한 번 관리해 줄 때가 됐었으니까.’ 캐슬락 의원이나 마를린 의원 같은 의회의 수뇌부들과 제이나 대주교와 헬레나 이단심문관 같은 알짜배기 인맥. 그 외에 유력 상인이나 시민 대표 그리고 다완과 실리아의 교국 8좌 등등. 이미 대부분이 병문안하러 다녀간 지 오래다. 아주 약간 귀찮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왕년에 귀족 부인들과 함께 수다 떠는 시간을 즐길 수 있어서 좋았고, 여러 가지 정보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나의 사건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건 흔한 기회가 아니었으니까. 이놈의 생각도 다르고, 저놈의 생각도 다르다는 걸 생각해 보면 한 번쯤은 정리해야 할 이야기였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병문안 때문에 정작 김현성을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과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게 단점 아닌 단점이었지만, 얘네 얼굴은 감금당할 당시에 질리도록 봐왔다. 조금은 주변 사람들에게 시간을 할애해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건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게 분명하다. 최근 조금 조용해진 건 아마 그 때문일 거로 생각했다. 그렇게 아리스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사는 이야기 등등 별별 이야기를 다 꺼내고 있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인형이 시야에 비쳤다.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헐레벌떡 허겁지겁 뛰어오는 소리, 쿵쾅쿵쾅 땅이 울릴 것 같은 소리는 확실히 녀석이 맞다. “형님! 어? 오스칼 님도 있었구만!” “아, 안녕하세요.” “항상 수고가 많수다. 아니, 그럴 게 아니라 형님.” “어?” “거울 호수로 보트 타러 갈 시간이요!” “뭐?” “형님이 맨날 맨날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거울 호수로 다 같이 가기로 했다, 이 말이요!” ‘내가 언제… 가고 싶다고 했어, 이 돼지 새끼야.’ # 532 회귀자 사용설명서 532화 거울 호수(2) “갑자기 거긴 왜 가. 복구 작업은? 다른 할 일은 또 없고? 대륙 합동 훈련도 다시 진행해야지.” “복구 작업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도중이고, 대륙 합동 훈련도 시간이 조금 남았다니까. 아무래도 커다란 전투가 끝난 직후인데 다른 사람들도 여러 가지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거 아니요. 짧은 휴가라고 생각하면 될 거요. 다시 시작한다면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을 텐데… 조금 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래도 던전이나….” “형님 자고 있었을 때 이미 한번 다녀왔다니까! 회복된 지 얼마 안 된 그 몸으로 던전에 들어간다는 소리는 제발 하지 마쇼. 안 그래도 현성이 형씨가 형님이 정신을 차리면 곧바로 린델로 향할 거라고 걱정하던데.” “그건 그렇지만….” “대륙인들이 원하는 건 형님이 몸과 정신을 혹사시키고 있다는 소식이 아니요. 좋은 곳에서 좋은 것 먹으면서 편하게 쉬고 있다는 소식이지. 안 그래도 그 부작용 때문에 근처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고 있는데, 탱자 탱자 놀면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는 알려야지. 형님도 이제 형님이 대륙에서 어떤 의미인지… 대충 알 필요가 있다니까.” “아니.” “나도 몇 번 가 본 적 있었는데, 확실히 기대해도 된다니까. 아마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그곳보다 아름다운 곳은 찾기 힘들 거요.” “네가 거길 언제 가봤어?” “거, 옛날에 몇 번… 뭐, 사전 답사한다고 생각하고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나저나 어떻게, 오스칼 님도 같이 갈 거요? 아마 간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도 다 좋아할 거요.” “아니요, 아무래도 저는… 교국을 지킬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여러 가지로 바쁘기도 하고….” “제가 뭔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뇨, 명예추기경님은 다녀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안 그래도 계속 달려오셨는데, 조금은 숨을 돌릴 시간도 필요하잖아요? 아주 예전에 길드원분들과 다 함께 피크닉을 간다고 하셨던 게 엊그제 같은데… 모두 함께 가는 건 처음 아닌가요?” “네,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다른 걱정은 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부족하지만 명예추기경님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서 나라를 돌보고 있겠습니다.” “거, 그렇다면 문제는 없겠구만! 현성이 형씨도 많이 기뻐할 거요! 사실 현성이 형씨가 수줍음이 많아서 제대로 말을 못 꺼내고 있는 것 같더라고. 조금 고민하는 것 같은 찰나에 내가 딱 말하니까 엄청 기뻐한 것 아니요. 하얀이 누님은 말할 것도 없고! 슬슬 형님도 하얀이 누님이랑 더 높은 계단을 향해 한 발자국 몸을 옮겨야 할 시기인 만큼 이번 여행은 중요하다니까. 이 박덕구가 팍팍 밀어줄 테니까 걱정 따위는 날려버리쇼.” “그런 게 아니라….” “형님이 하얀이 누님을 아낀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제 누님도 다 큰 성인이요. 지켜준다느니 뭐, 아껴주고 싶다느니 그런 건 너무 구시대적 발상이라니까. 좋으면 좋아한다고 마음으로도 표현하고, 몸으로도 표현하는 게 제일이지. 그게 연애 박사 박덕구의 솔루션이요.” ‘걔가 날 안 지켜줄 것 같은데….’ “그, 그래도 너무 갑자기 가까워지면 조금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요? 명예추기경님, 정하얀 님께서 당황스러워 하실 수도 있는 만큼 천천히 다가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래도 여자 마음은 여자가 더 잘 안다고….” “아니라니까. 연애 박사로서의 촉이 말해주고 있는데, 하얀이 누님도 형님이 다가와 주기를 바라고 있을 거요. 이미 머릿속으로는 이런 짓, 저런 짓, 다 했을지도 모른다니까. 분명하다니까. 음음!” ‘이 새끼는 왜 이렇게 확신하고 있는 거야.’ 박덕구가 이번 전투로 얻은 특성, 사기의 외침이 그 사기의 외침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들림 없는 올곧은 표정은 자신의 말이 맞을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새. 모든 걸 뚫어볼 것 같은 눈에 괜스레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이번에는 피크닉이야?’ 김현성은 마음속으로 생각만 했을 확률이 높다. 아무리 무의식 세계에서 함께 거울 호수로 여행을 가자고 약속했다고 한들, 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였으니까.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현재의 배경을 생각하면 한가롭게 여행을 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아마 녀석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고민했을 것이다. 그 시점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건 아마 눈앞에 있는 돼지일 터. 분명히 평소처럼 이해는 안 되지만, 왠지 수긍이 가는 외침으로 파란 길드의 거울 호수행을 지지했을 것이 분명했다. 김현성도 거절할 만했겠지만, 아마…. ‘내 기분을 생각해 주는 거겠지.’ 여신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한들 마음속에 있는 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동안 여러 사람을 만나기는 했지만, 간혹 씁쓸한 표정을 짓거나 멍한 눈으로 바깥을 바라보기도 했다. 아직도 죄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떡밥을 던진 것뿐이었지만,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종류의 휴가가 도움을 줄 거로 생각한 것 같았다. 둠기화를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현 김현성에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해도 이쪽의 멘탈을 케어하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다. 확실히 현시점에서 잠깐 이나마 숨을 돌리는 건 도움이 된다. 나뿐만이 아니라 길드원들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얘네도 심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을 테니까. 이쪽을 감금하면서 본인들 나름대로 만족감을 채우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다 함께 웃고 떠들며 하하 호호하는 것보다 효과가 좋지는 않을 거다.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한데….’ 박덕구 이 돼지의 목소리가 불길하게 느껴진다는 것만 아니면 당장 수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여러 가지를 떠올려 봤지만,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정답처럼 느껴졌다. ‘별일이야 있겠어.’ 김현성과 둘만 있는 시간도 만들기는 해야 했으니까. 아마 밖으로 나가면 그런 분위기가 좀 더 쉽게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가는 거요? 마는 거요? 아니, 솔직히 꼭 갔으면 좋겠다니까. 아니, 이건 형님이 안 간다고 해도 내가 꼭 끌고 갈 거요! 거절은 없으니까 그렇게 아쇼.”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 덕구야. 확실히… 매번 간다고 간다고만 말했지 실제로 간 적은 없었으니까. 이번에 한 번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정말이요?” “그래.” “예쓰! 예에쓰!” ‘이 새끼 지나치게 좋아하는데.’ 꼭 거기에 서프라이즈 파티라도 숨겨놓은 것 같은 반응이다. 우당탕탕 달려들어 와 이쪽을 번쩍 들어 올리기까지. 이제는 몸이 완전히 회복됐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비행기 태워주기에 정신이 없다. “정말로 가는 거요?!” “그래, 간다니까.” “이번에도 안 간다고 하는 줄 알고 엄청 긴장했다는 거 아니요. 내가 이번에는 갈 줄 알았다니까.” “그렇게 가기 싫다고 했었나.” “한 일곱 번인가, 여덟 번인가 물어봤을 거요. 매번 물어볼 때마다 형님은 바쁘거나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고… 오스칼 님은 정말로 안 갈 거요?” “네, 저는 괜찮아요. 정말로요.” “하긴… 지금 상황에 가기는 역시 조금 그렇긴 하지. 이거 괜스레 미안해지는구만….”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후에도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거, 그렇게 생각해 주면 다행이고….” “그럼 출발은 언제 하는데? 아무래도 준비하려면….” “지금 당장!” “어?” “지금 당장 가도 된다니까. 이미 준비는 끝냈다니까.” ‘이 새끼, 추진력이 무슨….’ 확실히 추진력 하나는 어마어마하다. 이번에도 가기 싫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환호성을 지른 이유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거, 이미 옷도 입고 있는데 그대로 나가면 될 거요. 큼지막한 마차 한 대도 준비해 놨고, 거기에 있을 건 다 있으니까. 이번에는 마음 편하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나만 따라오라니까.” “…….” “거, 빨리 밖으로 갑시다.” “길드원들만 가는 거 맞지?” “용병 여왕님이랑 무녀님한테도 물어보기는 했는데 바빠서 못 올 것 같다고 합디다. 아무래도 길드원들끼리 움직이는 자리니까 조금 끼어들기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고… 사실 용병 여왕님까지 린델을 비우면 도시가 돌아가지 않으니까. 무녀님도 마찬가지고.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거요. 아무튼, 여기에서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나갑시다. 돌아오는 길에 선물 사 올 테니까, 오스칼 님도 잘 지내쇼.” 확실히 콘셉트 자체를 길드 소풍으로 잡은 것 같았다. 애초에 차희라와 카스가노 유노가 현시점에서 도시를 비울 수 있을 리 만무. 파란 길드가 린델을 비운 상태에서 붉은 용병까지 빠져 버린다면 아마 혼란이 더욱더 가속화되리라. 아리스 시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녀석과 함께 교황청의 안을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잘 다녀오라는 관계자들의 인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적당히 응수해 주며 바깥으로 나간 순간 이쪽의 눈에 비치는 것은 정하얀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차희라. “어….” 다시 한번 눈을 비비고 바라봐도 정하얀과 차희라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맞다. 물론 둘의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말을 주고받고 있기는 하다. 어떻게 지냈는지 대충 안부를 물어보고 있는 모양. 괜스레 한 번 더 눈을 비벼봤지만, 여전히 두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광경이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데면데면하기는 해도 사이가 나쁜 것보다는 좋은 게 좋지 않겠는가. 아마 이것도…. ‘이번에 일어난 일 때문이라도 생각해도 되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을 듯했다. 아주 잠깐이기는 했지만, 정하얀이 차희라에게 우호적이었던 시기도 분명히 있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적폐 늙은이가 사람을 시켜 도시에 테러를 일으켰던 당시, 차희라가 나를 구해준 것을 보고 그녀의 존재를 용인하기로 한 것이다. 아마 이번에도 비슷한 심정이 작용했을 게 분명하다. 본인이 혼자 감당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모든 일을 망쳐 버리고 만 상황에서 차희라는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김현성과 정하얀의 멘탈이 나간 시기에도 최전방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고 실제로 악마 군주 하나를 밀어붙이는 위용을 선보였다. 어시스트한 것은 정하얀, 마무리한 것은 김현성이었지만, 이번 전투의 승리를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차희라의 결단과 희생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었다. ‘팀의 주역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 사실상 마지막 화염구 빼고 한 게 없는 정하얀의 입장에서, 다시금 주변을 돌아보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대륙에서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는 이 여자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선 것이 아닐까. 영악하게 다 보이는 잔머리를 굴리는 쪽이니 아마 내 추측이 맞을 것이다.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자 어느덧 정문을 지나 길드원들이 나를 볼 수 있는 지점까지 도착했다. 박덕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고 차희라는 곧장 다가와 평소와 같이 입을 열었다. 아마도 잘 다녀오라는 말이겠지, 뭐. “몸은 좀 괜찮지, 자기?” “응, 거의 괜찮아지기는 했는데… 정말로 안 가게, 누나?” “마음 같아서는 자기랑 지인하게 놀고 싶기는 한데… 직장 동료와 함께 놀러 가는 데 붙잡을 수가 있나. 얼굴에 철판 깔고 합류할까… 생각은 해봤었는데, 그쪽 길드 마스터가 은근히 눈치 주더라니까. 내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더러워서 안 간다고 이야기했다니까. 아무튼, 잘 다녀오라고 말이나 하려고 왔어.” “그거 아쉽게 됐네. 카스가노 유노도 그래?” “그쪽은 정말로 바쁘고, 왜 이번에 연방 파이 다툼에 그쪽 입김이 조금 세거든. 안 그래도 저번에 만났을 때 편지 한 통 전해달라고 하길래. 그것도 가지고 왔어.” “아. 고마워, 누나.” ‘희라 누나, 파워 인싸네….’ 카스가노 유노와도 친하게 지내고 있는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긴밀한 사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엘레나나 이지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종종 본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심지어 최근에 밖으로 나갔을 때는 선희영이랑 카페에서 있는 모습도 본 것 같다. 잘은 모르겠지만, 길드원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나쁘게 보일 리가 있겠는가. 서비스 삼아 살짝 팔을 벌리니 내 예상보다 꽈악 나를 껴안아 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귓가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돌아올 때 선물 사 와. 그리고 이번 여행 끝나고 나면 삼일 밤낮 동안 내 시간이야.” ‘희라 누나, 그건 쫌….’ “두말하면 입 아픈 소리지만, 다치지 않게 잘 다녀오고. 그리고….” ‘나도 그러고 싶어, 누나.’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뭔가 일이 터져도 가면은 쓰지 마. 내 말 알아듣지? 최대한 정하얀 쪽에 붙어.” ‘이 말을 여기서 들어보네. 키야….’ “그럴 일 없어. 다른 사람들 다 있는데 위험해질 리도 없고….” “그냥 노파심에서 하는 소리야. 자기도 알고 있잖아. 자기랑 종류는 다르지만 나도 비슷한 거 하나 가지고 있는 거. 애초에 위험성 측면에서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그런 종류로 얻은 힘은 어떻게든 대가를 받아내게 마련이야.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런 장소에서 갑작스럽게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괜히 잔소리가 길어졌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돌아온 뒤에 삼일 밤낮으로 나눠보자고. 사랑해, 자기.” “어….” “사랑한다고.” “나… 도 사랑해, 누나.” 조금은 반강제적으로 대답한 느낌이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둠기화 떡밥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533 회귀자 사용설명서 533화 거울 호수(3) 이쪽의 요청대로 베니고어가 어둠 어쩌고를 성소에서 내뱉은 것은 파티원들뿐만이 아니라 교국민들의 머릿속에도 확실히 자리 잡았다. 물론 교국민들은 빛기영이 본인의 의지로 둠기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파티원들을 비롯한 가까운 지인들은 대충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쪽에서 정보를 흘렸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리라. 대놓고 ‘둠기화가 가능합니다. 지금부터 둠기화 갑니다’라고 밝히며 가면을 소환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어쩌면 제정신을 유지한 채 변화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라고 어렵게 말을 떼며 가능성을 드러낸 것이 전부. 김현성을 포함한 길드원들의 얼굴이 구겨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후로는 딱히 내가 작업을 하지 않아도 착착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나조차도 확신하는 말을 건네지 못한 만큼 여러 가지 추측이 나돌았고 끝에 이르러서는 자신들끼리 의견을 모으고 결론을 내기 시작했다. 그 의견들을 대충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1. 이기영은 준신화 등급의 직업 ‘빛의 연금술사’에서 같은 준신화 등급의 직업 ‘어둠의 역병군주’로의 전직이 가능하다. 2. 변화의 조건은 정신에 무리가 갈 정도의 마이너스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3. ‘빛의 연금술사’에서 ‘어둠의 역병군주’로의 직업 전환은 가능하지만, 그 반대는 여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4. 힘을 사용하거나 오랫동안 역병군주로 지낼 경우, 이전처럼 정신이 먹힐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5. 지금으로서는 이 저주에 대한 마땅한 해주 방법이 없다. 지속해서 멘탈을 케어해 주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딱 이 정도. 노린 그대로였고, 클리셰 그대로였다. 힘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정신이 좀먹힌다는 설정은 놀라울 정도로 캐릭터에 입체감을 부여하고 있었고, 정하얀을 비롯한 일부 사고뭉치들이 함부로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억제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었다. 마이너스 감정을 느끼면 점점 더 본신의 정신을 잃어 간단다. 이쪽의 멘탈을 케어하기 위해 별의별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앞서 말한 대로 이 피크닉 이벤트 역시 어떻게든 플러스 감정을 느끼게 해주기 위한 이벤트일 터. 길드원들에게 휴식을 부여하고 싶다는 김현성의 의도까지 완벽하게 들어맞은 이벤트였지만, 왜인지 모르게 이쪽은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할 것처럼 느껴졌다. 슬그머니 뒤쪽을 바라보니 커다란 배가 시야에 비친다. 배다. 보트도 아니고 배다. 마차 뒤에 저런 걸 달아서 끌고 온다는 게 황당하게 느껴질 지경. 시간이 조금 지나면 적응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몇 시간째 마차 여행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는지 옆에 있던 박덕구가 자랑스럽게 입을 열었다. 벌써 수십 번은 더 귀에 담은 이야기였다. “틈틈이 만든 거요. 거, 왜 튜토리얼 던전 근처에서 보트 만들었던 때, 기억 안 나는 거요?” “기억은 나는데… 그때는 작지 않았어? 저건 보트라고 부를 수도 없잖아.” “거, 취미 생활로 계속해서 만지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니까. 린델에 있는 커다란 지하 작업장 하나 빌려서 만들고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자꾸만 손이 커진 거 아니요. 때마침 우리 아영이도 들어와서 큰 도움을 줬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저 보트 한 척에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부었는지 형님은 모를 거요.” ‘당연히 모르지, 이 새끼야.’ “정연 씨가 여러 가지로 도움도 많이 주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확실하게 가다듬었다니까. 아마 저기에 무슨 기능들이 숨어 있는지 알면 형님도 놀랄 거요.” ‘그래, 시바. 확실히 그럴 만하다.’ 교국 최고의 대장장이 기술자 유아영과 마법 지식 부문에서는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마도학자 황정연. 거기에 보트장인 박덕구가 눈에 불을 켜고 만들었으니 회심의 역작이 만들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전설 등급의 아이템 나이스 보트의 정보를 확인합니다.] [나이스 보트-전설 등급] [강철의 대장장이와 마도학자, 신념의 방패가 만들어낸 세기의 역작입니다. 용골과 마수의 뼈, 마수의 가죽과 빛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이 커다란 배는 단순한 운송수단으로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특별한 예술 작품입니다. 소재 하나하나가 마력을 머금고 있는 것은 물론, 그 강도는 어떠한 파도와 바람에도 부서지지 않습니다. 드래곤의 브레스를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내구력을 겸비하고 있으며 승선한 승무원들에게 지속적인 버프와 활력을 유지해 줍니다. 일정 시간 동안 바다 안을 잠수할 수 있는 기능이 있으며, 그밖에도….] 끝까지 다 읽어볼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박덕구 이 새끼가 무시무시한 걸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 하나였으니까. 소재로 마수 살라트와 디아루기아,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고급 촉매와 아이템들이 들어간 게 눈에 보인다. 이쯤 되면 아이템 판정을 받아도 이상할 것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템 판정도 받아버렸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입이 떡 하니 벌어질 정도. 어떻게 이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결과가 퍽이나 만족스러웠는지 이 작품의 창작자들은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중이다. “린델이 부서지고 나서, 솔직히 이 작품도 망가졌을 거로 생각했는데, 무사해서 다행이었죠.” ‘아영아, 시바. 드래곤의 브레스까지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하잖냐. 마수의 가죽으로 마감했고, 지하에 보관되고 있었는데, 당연히 무사했겠지.’ “그때는 아직 완성 전이어서 아이템 판정도 받기 전이었으니까요. 부 길드 마스터가 깨어난 이후에 덕구 씨가 틈틈이 마무리했어요. 거울 호수로 갈 때까지는 꼭 완성하고 싶다면서요.” “사실 나는 뭐 크게 한 것도 없다니까. 어떻게 봐도 정연 씨 때문에 이렇게 완성된 것 아니요. 애초에 마법으로 기틀을 잡아놓지 않았으면 저렇게 크게 만드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라니까.” “그래도 마무리는 끝까지 덕구 씨가 했잖아요. 땀까지 뻘뻘 흘리면서 한땀 한땀. 망치질 한 번도 얼마나 공들여서 한지 몰라요. 부길드마스터.” ‘알겠으니까, 남친 자랑은 인제 그만.’ “그거… 대단하군요.” “이놈만 있으면 이제 어떤 바다든 호수든 안심이요. 애초에….” ‘애초에 저건 호수에 띄우는 물건이 아니지.’ “취미생활치고는 너무 커진 것 같아서 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조금 하기는 했는데, 다 완성된 걸 보니 그래도 마음에 들기는 합디다. 처음에는 형님이랑 누님만 태우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되어버렸다니까.” 박덕구의 친구이자 파트너 안기모도 한마디 입을 열어온다. “아마 교국 내에서 이런 배를 가지고 있는 길드는 저희밖에 없을 겁니다. 조선이 발달한 왕국연합의 몇몇 국가들도 이 정도로 퀄리티 있는 배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몇몇 조선 관계자들과 잡지사에서 연락을 받은 거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받기는 했지만, 파란 길드의 공공재를 함부로 바깥에 유출할 수가 있나. 디자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예술잡지를 제외하고는 전부 돌려보냈다니까. 조선 관계자도 그렇고, 뭐 팔라고 하는 사람도 있기는 했었는데, 자식 같은 놈이라 팔기는 좀 그렇더오.” “만약에… 팔았으면 부자 됐을 텐데….” “예리 씨 말이 맞습니다. 사실 값으로 가치를 매길 수가 없는 물건이라 팔기도 좀 뭣 하지만….” “큼!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무엇보다 내정된 주인이 있다는 게 그 이유요.” “…….” “…….” “처음부터 하얀 누님이랑 우리 형님 태워주려고 만든 것 아니요. 설계도 그렇게 했고 어떻게 생각해도 이건 선물로 주는 게 맞다니까.” 나무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이쪽에 꼭 달라붙은 정하얀이 반응한 것은 바로 그때. 토끼처럼 눈을 번쩍 뜨더니 입꼬리를 실실 올리는 꼴이 왠지 불길하게 느껴진다. “사실 이렇게… 큼… 말을 꺼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다들 모인 자리니까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소. 여기 마스터키 받으쇼, 형님.” “아, 으응… 고맙다.” “첫 출정을 다 같이 타게 돼서 조금 그렇긴 하지만, 틈이 나면 누님이랑 같이 여기저기 다녀오고 그러쇼.” 나보다는 정하얀이 고개를 더 격하게 끄덕이는 중, 심지어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해오기 시작했다. “이, 이, 이걸로 신혼여행 가, 갈 수도 있겠네요, 멀리멀리.” ‘너 공간이동 할 수 있잖아….’ “자! 다들 박수! 박수!” “축하드립니다, 부길드마스터.” “추, 축하드려요, 정하얀 님.” “축하드립니다, 기영 씨.” 순서대로 암살자 김창렬, 흑마법사 한소라, 심지어 김현성까지 박수를 보내왔다. 다른 이들도 별반 다르지는 않다. 그럴 것으로 예상한 것 같았지만, 박덕구의 통 큰 결단에 놀라워하는 눈치다. 김현성은 왜 저렇게 질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녀석도 기쁘기는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솔직히 이런 분위기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라고 느껴진다. 길드원들끼리 오순도순 모여 웃고 떠든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래도 예전에는 던전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는 항상 이런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커다란 캠프를 만들고 모닥불을 켜놓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나름대로 캠핑 분위기를 내며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취하며 웃고 떠들었었다. 길드가 커지고 본격적으로 바빠지면서 이런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 당연하지만 이 자리에서 얼굴을 구기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엘레나와 선희영은 마차 안에 있는 테이블 위에서 체스를 두고 있었고, 김창렬은 오늘도 어김없이 구석 쪽에서 책을 읽고 있다. 한소라 역시 정하얀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안기모, 김예리와 함께 보드게임을 즐기는 중. 김현성과 조혜진도 간단하게 마련된 미니바에서 와인을 홀짝이며 웃고 떠들고 있다. 오래간만에 찾은 여유라는 느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 역시도 박덕구에게 받은 나이스 보트와는 별개로 실실 웃음 짓게 된다. 마치 동네 주점에서 친구끼리 모여 각자 할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평화롭네.’ 폭풍 전의 고요함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지만, 즐거웠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도 그렇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것도 그렇다. 마차가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나보트 남작, 아니, 나보트 의원이 관리하는 도시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아마 잠시 후면 도착할 거라는 생각에 모두의 얼굴이 들뜨는 게 눈에 보였다. 거울 호수, 거울 호수 하고 노래를 불렀던 건 정하얀과 박덕구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나름대로 소녀 감성을 유지하고 있는 조혜진도 평소답지 않게 들떠 있는 표정이다. 도착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옛날이야기나 여행 이야기 같은 여러 가지 주제를 돌고 돌아 다시금 돌아온 것은 뒤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나이스 보트. 누가 보기에도 오늘 가장 핫한 토픽감이었으니 다시금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제작자 3인방 이외에도 꽂힌 사람이 있기는 있는 것 같았다. 천연덕스럽게 입을 연 것은 원래 말이 좀 많은 안기모다. “으음, 기회가 된다면 바다로 한번 나가고 싶군요.” “나도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거울 호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요. 면적이 워낙 커서 얼핏 보면 바다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디다.” “그래도 바닷바람에 맞서 싸운다는 이미지 같은 게 있지 않습니까. 뱃멀미가 있지만 거친 바다와 싸우는 선원이나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해적선 같은 게 어릴 때부터 로망이었습니다. 이곳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곳이나 섬나라도 드무니까 모험항해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 만무하지만….” “음….” “마음 같아서는 이 배를 사용할 수 있는 던전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거, 그게 가능한 거요?” “보통 등급이 높은 일부 던전들은 맵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파란 일지에 기록된 공포의 정원 역시 그런 던전이었고요. 실제로 몇 년 전에 발견됐던 한 던전은 시작 지점이 물 위였다고 합니다.” “환장할 상황이었겠구만.” “많은 희생을 치른 것은 물론 그 던전을 공략하는 데 반년 정도가 더 걸렸다고 들었지만, 아마 저 물건만 있다면 그런 종류의 던전을 공략하는 것도 꿈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거울 호수에서 비슷한 던전을 발견할지도 모르고요.” “거, 그런 것도 좋지만, 이번은 원정이 아니라 여행이 목적 아니요. 그리고 거울 호수에는 매년 많은 관광객과 모험가들이 돌아다니는데 거기서 던전이 발견된다는 건 대관절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요? 거,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형님이 알아서 바다로 데리고 나가 줄 거요, 기모 형씨.” “하하하, 제가 실없는 소리를 했군요. 그럼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부길드마스터.” ‘오랜만에 정신 똑바로 박힌 소리 했네, 저 돼지는.’ 어쩜 저렇게 정상적인 발언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평소답지 않게 정색 빤 진지한 표정이라 어울리지도 않는다. ‘안기모, 저 사람도 참… 로망 같은 걸 너무 밝혀서 문제야.’ 언제적 해적이고 언제적 항해 모험인지…. 김예리는 제법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다 큰 어른들은 대부분 안기모의 로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울 호수에 던전이 숨겨져 있단다. 생긴 것답지 않은 깜찍한 생각에 코웃음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 바뀌기까지는 몇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형님, 아무래도 던전에 들어오게 된 것 같은데….” “…….” “…….” 김현성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 534 회귀자 사용설명서 534화 히든 피스(1) 사건의 시작은 몇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거울 호수에 도착한 직후에는 여러 가지로 정신이 없었다. 오랜만의 단체 휴가에 길드원들의 텐션이 평소보다 더 올라갔고, 당연히 분위기 역시 조금 더 떠들썩해졌다. 도시로 도착한 이후에는 곧바로 짐을 푼 이후 마차 여행으로 지친 심신을 풀기 위해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특산물인 거울 연어를 먹으며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평소에 입이 짧았던 나 역시 두 접시를 해치웠을 정도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박덕구와 안기모는 아예 접시를 쌓아두고 식사를 했고, 엘레나 역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내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뭐, 그만큼 맛있기는 했으니까.’ 딱히 무슨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휴가를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거울 호수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정말로 기대되네요. 그, 그렇죠?” “응, 도시에 도착하면 곧바로 호수가 보일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네.” “기대감을 조금 높이려고 일부러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식당을 잡았다는 거 아니요. 아마 만족스러울 거요, 그렇지 않나?” “정말 마음에 드실 거예요. 부길드마스터. 제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게 조금 그렇긴 하지만 무척 로맨틱하거든요.” “……?” “형님은 또 뭘 그렇게 의아하다는 표정하고 있는 거요. 여기 정연 씨랑 한 번 사전 답사하러 왔었다니까. 아무튼, 다 먹었으면 빨리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소. 지금 이 시간대가 가장 예쁠 시간이니까.” “원래는 따로 출입구가 있기는 한데 덕구 씨가 가지고 온 배가 너무 커서 그쪽 입구로는 못 들어갈 것 같아요. 아마 마차는 이미 그쪽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걸어가시면 될 거예요. 얼른 일어나요. 길드마스터도 어서.” “아… 네, 알겠습니다.” 쭈삣 쭈삣 몸을 일으키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패키지 여행을 다니는 청년 같은 모습에 괜스레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이제야 뭔가 저 나이 때의 사람이 하는 행동을 하는 것 같은 느낌. 옆에 있는 내 친구 조혜진도 무척 들뜬 것 같았다. “즐거운가 봅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부길드마스터.” 라고 말하니 툭 하고 목소리를 내뱉는 것은 덤이다. 아무튼, 김현성을 포함한 길드원들은 무척 즐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현재까지는 박덕구 패키지가 무척이나 만족스럽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본래 여행이라는 게 배부르고 나면 모든 게 전부 예뻐 보이는 법 아니겠는가. 대표적인 관광지답게 트래킹 코스를 잘 꾸며놓은 것도,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요소 중 하나였지만, 아마 원초적인 만족감은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기를 몇 분째, 두 눈 앞에 들어선 광경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조금 실망스러운 모습이면 어떡하지’라는 내 생각을 부정하듯 거울 호수는 교국의 대표적 관광지다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마치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진 호수, 아니, 저건 호수라고 부르기에 미안한 풍경이다. 거울 호수라는 이름처럼 하늘을 비추고 있는 것은 물론, 커다란 빛이 여기저기에 흩뿌려지고 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보석을 박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광경에 너도나도 입을 떡 벌리며 각자의 감상평을 내놓는다. “예쁘다.” 감정표현이 서툰 김예리. “정화되는 것 같아요…. 온몸 뼛속 깊은 곳에 있었던 죄와 공포가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던 한소라. 그래, 넌 여기서 힐링 좀 해야지. “이곳에 떨어진 뒤로 별별 광경을 다 봐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제가 본 풍경이 가장 판타지스러운 풍경이네요.” 놀라움을 표현하는 유아영. “어떻게 저렇게 반짝일 수 있는 겁니까?” 뭔가 이상한 쪽으로 질문하는 김창렬까지. “그건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창렬 씨.” 대답한 것은 박덕구의 그녀 황정연이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그 말 그대로예요. 어째서 저렇게 거울처럼 하늘을 비추고 있는 건지, 또 빛무리는 뭔지, 아직도 밝혀진 게 없다고 하네요. 관련 학자들도 계속해서 이유를 찾고는 있지만, 글쎄요. 솔직히 저는 원인 같은 걸 찾는 건 최대한 지양하고 싶어요. 모르고 보는 편이 조금 더 로맨틱하잖아요?” “근처에는 연어 양식장도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호수에 연어가 살 수 있는 지도 궁금합니다.” “뭐, 그런 걸 따지고 그러나. 거, 내 눈에 보이기에 예쁘기만 하면 된 거지. 그렇지 않소, 누님?” “아… 네, 네, 정말로 예쁘네요.”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정하얀을 보니 확실히 얘도 이런 감성을 아직 잃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품에 쏙 안겨오는 모습은 가관. 엘레나는 괜스레 힐끔힐끔 이쪽을 바라본다. 뭔가 로맨틱한 상황을 기대했던 것 같지만, 아무래도 모두가 보고 있는 자리에서 이런저런 액션을 보여주는 건 부담스러웠다.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니까. 안쪽에 들어가서 보면 더욱더 가관이요.” “장관이겠지.” “뭐, 그거나 이거나 비슷한 뜻이니까. 형님은 왜 이렇게 분위기 좋은데 초를 치고… 아무튼 빠르게 올라탑시다. 거, 다들 빨리 오쇼. 어차피 앞으로 실컷 볼 테니까. 기왕이면 나이스 보트 위에서 보는 게 훨씬 더 낫지. 형씨도 빨리 올라오쇼.” “네, 알겠습니다.” 힐끔힐끔 이쪽을 바라보는 김현성을 필두로 관광버스에 승차하는 관광객의 마음가짐으로 배 위에 올라탄다. 그제야 전체적인 내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 다소 투박했지만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겉모습뿐만이 아니다. 안에서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요소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커다란 배가 천천히 호수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고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온 김예리가 소리를 내질렀다. 왠지 모르게 만족스러워하는 안기모의 표정은 덤이다. 확실히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의 차이가 확연히 다가오는 듯한 느낌. 배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 이러할까. 신비감 같은 거로 따지자면 엘프 왕국에 있는 세계수와 맞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실제로도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 커다란 배가 천천히 움직인 파동으로 물결이 흔들리고 살랑살랑거리는 빛무리와 함께 하늘이 흔들린다. 어디서 본 건 있었는지 정하얀은 가장 앞에 서서 팔을 쫙 펴고 호수를 바라보는 중. “오, 오빠… 저, 저 좀 뒤에서 잡아주세요.” ‘그런 거 하지 마… 하얀아.’ 물론 이런 분위기에서 장단을 맞춰주지 않을 정도로 모질지는 않다. 결국에는 정하얀의 허리를 뒤에서 살짝 잡아주자 앞쪽에서 실실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선희영과 엘레나 그리고 왠지 모르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김현성까지. 조혜진의 얼굴을 보니 얘도 어지간히 이걸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치 없는 내 님은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으니 오늘도 1패를 적립할 것만 같다.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들려오고, 감탄 소리와 함께 이 풍경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박덕구는 더욱더 만족스러운 미소를 내보내고 있었다. 배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고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냐는 듯 박덕구를 바라보자,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윽고 배가 완전히 물속으로 들어간 이후에 보이는 모습은 또 새롭다. ‘잠수도 할 수 있다더니, 시바….’ 길드원들의 반응을 보자면 하급 악마 정도는 이 풍경에 가볍게 정화 당하지 않을까. 솔직히 호수의 안쪽도 이렇게 휘황찬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단순히 물의 표면에 빛이 반사되어 거울처럼 비치는 게 아니었던 듯하다. 지구의 상식을 기준으로는 절대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라고 하는 게 맞으리라. 반짝이는 빛이 바로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조혜진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신성력인지 마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소재로 써먹을 수도 있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건 또 어떻게 만든 거야?” “거, 마법사들 좀 불렀소. 시험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잘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니까.” “확실히… 여기서 보는 게 장관이긴 하네.” “조금 마음이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기는 드오?” ‘그 정도는 아니고….’ “마음속에 있는 어둠 같은 게 파바바박 사라지거나 그러지는 않느냔 말이오.” “고맙다, 덕구야.” “큼, 그 말을 듣고 싶기는 했는데, 막상 이렇게 들어보니 조금 더 기쁘구만. 저기 연어 떼가 이동하는 것 좀 보쇼.” “예쁘네.” “역시나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눈이 보인다니까. 거, 누님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고.” “파란색, 하얀색 우주 속에 들어온 것 같아요.” “표현이 또 크으… 시적이라니까. 거, 연어들이 어딜 그렇게 가는지 한번 쫓아가 봅시다.” “문제는 없는 거지?” “문제가 생길 거였으면 진작에 생겼겠지. 뭐가 그렇게 걱정이요. 여기 하얀이 누님도 있는데. 거, 형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여기서 관광이나 즐기면 되오! 내일도, 내일 모래도 기대해도 된다니까. 가즈아!” ‘이 새끼, 너무 신났는데.’ 약간이지만 불안함 마음이 생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박덕구가 이런 포지션을 취할 때는 사고를 쳤던 경우가 많았던 만큼 괜스레 똥줄이 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풍경은 그런 사소한 걱정 같은 건 전부 잊게 한다. 오죽했으면 한소라가 눈물을 흘리고 있겠는가. 겨우 자연경관을 본 것 가지고 눈물을 흘리는 감성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마치 구원받은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긴, 쟤도 악마 소환하는 데 힘 좀 보탰지.’ 정하얀과는 다르게 죄책감의 바닷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나 보다. 언제 한번 면죄부라도 사서 붙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시선을 돌린다. 관객들의 반응이 좋으면 좋을수록 흥이 난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박덕구. 더욱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이스 보트를 모는 모양새에 웃음이 튀어나온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이 여유를 즐기고 있지만, 아마 현시점에서 가장 기분이 좋은 것은 김현성이 아닐까. 내가 즐거워하면 할수록 점점 더 표정이 풀어지고 있다. 사실 약 20분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는 거기가 거기인 것 같은 풍경에 슬슬 질리기 시작했지만, 그동안 마음고생 했을 김현성을 위해 이런저런 리액션을 선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립 서비스는 확실하게 갈겨줘야지.’ 애초 목적이 이기영 멘탈 회복과 즐거움이었던 만큼, 기왕이면 확실하게 목적을 달성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게 좋다는 거다. 거짓 탄성에 마치 자신이 이쪽을 만족시켜 준 것처럼 좋아하는 모습. 모든 일이 끝난 이후에 얼마나 좋았냐고, 확실하게 만족한 게 맞냐고 물어올 것만 같다. “와아!” ‘좋아 죽네, 이 새끼.’ “아앗!” ‘이것도 진짜 피곤한 일이다, 현성아.’ “너무 대단하네.” ‘누가 보면 거울 호수 네가 만든 줄 알겠다, 야.’ “너무 크고 넓어서… 더 좋은 것 같아.” ‘그래. 네가 좋으면 됐다, 현성아.’ “자, 그럼 이만하고 올라갈 테니까, 어디 붙잡을 수 있는 곳 있으면 꽉 붙잡으쇼!” 드디어 끝났다. 다시 호수 위에 올라갔을 때의 리액션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싶어 머릿속으로 고민했었지만. ‘뭐야… 이거.’ 배가 떠오른 장소는 거울 호수가 아닌 생전 처음 보는 장소. “씨바… 뭐야, 이거.”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파도의 웜홀을 목도한 순간 커다랗게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돛 펴! 돛 펴! 돛 펴어어어!!!” # 535 회귀자 사용설명서 535화 히든 피스(2)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는 건 나중이었다. 마치 거울에 뒤집히듯 뒤바뀐 풍경에 의문을 제시할 만도 했지만, 일단은 현재 상황부터 어떻게 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눈앞에 보이는 비상식적인 풍경을 목도한 순간, 어떻게든 살아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우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순식간에 어느 한 곳으로 특정되지 않은 거대한 파도가 사방에서 덮쳐왔다. “마법! 마법!” 내 목소리에 정하얀이 급하게 주문을 외웠지만, 이미 들이닥치고 있는 파도를 완전히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커다란 배가 충격으로 튕겨 나가는 순간 배 위에 서 있던 길드원들 역시 튕겨 나가려고 한다. 몇몇은 난간이나 커다란 기둥을 붙잡아 파도에 휩쓸리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지만, 연약한 내 몸이 이 정도의 충격에 버틸 리 없지 않은가. 난간을 꽉 붙잡았던 손이 저절로 풀린 이후에는 시야가 빠르게 돌아간다. 눈 깜빡할 사이에 공중으로 붕 떠버린 몸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서둘러 손가락을 튕겨 연금 소환 마법을 시전하고 싶지만, 냉정한 머리와는 다르게 몸은 공중에서 발버둥 치며 허우적거리기에 여념이 없다.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파도가 팔을 때렸고, 그 결과 몸의 중심을 제대로 유지하기 힘들었다. “오빠!” 정하얀의 비명과 함께 내 손을 붙잡는 감각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 힘들게 시선을 돌리니 김현성이 이쪽의 손을 꽉 붙잡고 있는 게 시야에 비쳤다. “괜찮으십니까?” “현성 씨?” 회귀자의 따뜻한 품속에 있으니 이제 난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안전하다. 아주 약간이었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상상했던 것처럼 나쁜 상황은 아니다. 한소라와 엘레나는 운이 좋게 벽에 튕겨 나간 이후 김창렬에게 잡혀 있었고, 황정연은 박덕구가 붙들고 있다. 유아영, 김예리나 조혜진 같은 전위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은 무사한 것을 보니 능력치가 높은 이들은 버텨낼 수 있는 충격이었던 모양. 하지만 신체 능력치가 낮은 후위들은 그렇지 않다. 길드에 마지막으로 남은 후위 한 명을 찾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선희영이 공중으로 치솟고 있었다. 떨어지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 남아서 구해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옆쪽에서 거대한 파도가 다시금 들이닥치며 그녀를 집어삼킨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들려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황급히 마음의 눈을 발동시켜 안쪽을 바라보자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선희영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김현성에게 반쯤 안긴 채로 손가락을 튕기자 거대한 용의 꼬리가 마법진과 함께 연성되었다. 혹여나 파도에 흐트러질까 걱정했는지 황정연과 엘레나가 연성된 꼬리에 강화 주문을 불어넣는다. 그 순간에도 선희영은 계속해서 보트에서 멀어지는 중. ‘닿아라. 시바, 닿아!’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모습에 김예리가 이를 질끈 문 채로 소환된 꼬리를 타고 달려나가고 있지만 길드의 꼬맹이가 달리는 것보다 선희영이 멀어지는 게 더 빠르다. 심지어 들이닥친 파도로 인해 꼬리에 단검을 박은 채 버틸 수밖에 없는 상황, 김예리도 위태로워 보인다. 최악의 전개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을 때 그녀의 목숨을 구한 것은 뜻밖의 천운이었다. 반대쪽에서 덮쳐온 파도가 선희영을 이쪽으로 밀어낸 것이다. ‘나이스! 나이스!’ 작게 주먹을 꽉 쥔 순간 용의 꼬리가 선희영을 붙잡은 것이 눈에 보인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또다시 거대한 파도가 배를 덮쳐왔다. “막아! 막아!” “이이이이익!” 주문을 완성한 것은 우리 존재 정하얀. 시연한 것은 라이오스에서 한 번 쓴 적이 있었던 압축 마법. 콰아아아아!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죽일 듯이 이쪽을 덮쳐왔던 파도가 한순간에 압축되어 사라져 버렸다. “나이스 정하얀! 나이스으!” 놀라움을 표현한 것도 잠시, 한소라가 주문을 외우는 소리와 함께 이쪽의 몸들을 감싸는 검은색 사슬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포박하기 위해 주문을 외운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튕겨 나가지 않게 조치한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몸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진다. 자석처럼 배에 딱 달라붙은 신체를 보니 역시 마법의 위대함에는 엄지를 치켜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정신을 잃은 선희영이 배 안쪽으로 무사히 도착. 물을 먹었는지 몸이 점점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조치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엘레나가 달려오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심지어 이건 신성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종류도 아니다. “예리야, 희영 씨 좀 꽉 붙잡아. 현성씨 는 덮쳐올 파도에 대비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빨리요.” “…….” “네, 알겠습니다.” 사랑스러운 회귀자라면 뭐가 됐든 알아서 조치해 주겠지. 아마 예상하건대 이 배로 저 웜홀을 통과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계속해서 이곳에 머무르거나 배를 뒤로 돌리는 건 암만 생각해도 난파 엔딩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마 시바, 이 배가 있어서 다행이지.’ 단언컨대 초기에 만들어져 있던 박덕구 마크1이었다면 지금쯤 길드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뒈질 시간만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머릿속으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상대방의 동의가 없어 미안하기는 하지만 앞섬을 풀어헤치고 가슴 정중앙 부분을 계속해서 짓눌렀다.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내 기억대로라면 분명 맞을 거다. 간헐적으로 몸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튕겨 나갈 정도는 아니다. 기도를 확보한 이후에는 입을 가져다 대고 계속해서 숨을 불어 넣기 시작했다. 초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김예리가 선희영의 손을 꽉 붙들고 있는 게 보인다. 조금씩 꿈틀꿈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울컥 하는 소리와 함께 선희영의 입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지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는 못하고 있다. 다시 한번 반복. 입술을 가져다 대고 수십 번 정도 같은 행위를 반복하자, 다시금 울컥 하는 소리와 물이 역류하는 것이 보였다. 이다음은 미약한 신성력을 쏟는 것으로 마무리. 정신이 깨어나면 선희영 본인이 자신의 몸을 치료할 수 있을 테니, 이 정도 응급처치가 딱 적당할 거로 생각했다. 이 광경을 본 정하얀이 파도로 몸을 내던지지는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보지도 못한 듯했다. 신이 도운 건지, 조금 전까지는 파도가 덮쳐오지 않았지만, 다시 한번 본격적으로 배가 흔들리고 있었으니, 여기에 한눈을 팔 수가 없다. ‘자연이 씨바… 위대하기는 위대하다.’ 괜히 마법이 자연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아니다. 파란 길드가 처한 현 상황을 생각하니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 신화급 마법의 안에 갇혀 있다고 표현해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막말로 현재 이 공간을 메우고 있는 파도가 대륙에 들이닥친다면 멸망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처참한 모습을 연출하게 되리라. 온 도시가 파도에 휩쓸리고 사람 동물 할 것 없이 쓸려나가는 것은 물론 복구할 수조차 없을 게 분명했다. 전지전능한 신이 대륙에 심판을 내리는 모습이 이러할까. 방주를 타고 세계를 표류했던 노아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불안감만큼은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과 일맥상통하리라. 여기를 봐도 파도, 저기를 봐도 파도. 배를 완전히 삼킬 것처럼 덮쳐오는 파도는 후위들이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었지만, 대충 보기에도 역부족이었다. 파도가 갈라지는 진풍경을 김현성이 보여주고 있지만, 녀석 개인의 힘으로는 계속해서 밀려들어 오는 파도를 감당할 수가 없다. “박덕구, 핸들 잡아!” “어? 어?!” “조타 핸들 잡으라고! 핸들!” “아… 아! 알겠다니까!” 그제야 박덕구가 허겁지겁 뛰어가 핸들을 잡았다. 앞쪽에서 오는 거대한 파도는 피하고, 뒤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는 게 맞다. 어찌 됐든, 이 웜홀을 통과하는 게 먼저다. “안기모 씨, 돛! 돛 펴요! 돛!” “우웨에에에엑!” ‘시바… 해적은 무슨.’ “돛! 돛!” “우웨에엑! 네… 알겠! 웨에에에엑! 잠시만… 웨엑!” ‘바다 모험은 개뿔!’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 창렬아. 시바, 네가 해라.’ 답답하면 니들이 직접 뛰어보든지를 실현하듯 김창렬이 돛을 활짝 펴자, 커다란 배는 본격적으로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갈 준비를 마친다. 도대체 뭐에 영향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커다란 배가 순식간에 앞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허겁지겁 배를 움직인 박덕구가 덮쳐오는 거대한 파도를 피하려고 이리저리 핸들을 움직인다. 사실 지금 배가 어떻게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몸이 반쯤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보면 거의 직각으로 파도를 타고 있는 모양이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한 시름을 놓으니 조금 더 정확하게 주변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앞, 뒤, 옆, 심지어는 위까지 파도로 꽉 차 있는 공간은 어떻게 생각해도 비현실적이었다. 어째서 천장에 있는 파도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배는 파도를 피해 옆으로 위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우습게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현실 세계의 법칙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공간이 바로 이곳이다. 옛날에 봤던 인뭐셥이라는 영화를 저도 모르게 떠올렸을 정도로 현재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혹여나 차원의 미아나 균열 같은 곳을 떠돌아다니고 있는지 걱정된 것이 당연하리라. “꽉 잡으쇼! 꽉 잡으쇼!!” 쾅!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몸이 흔들린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박덕구, 저 돼지도 지금 자신이 어떻게 배를 움직이고 있는지 모를 게 분명하다. 어떻게든 커다란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이 웜홀을 돌파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 게 보인다. 어디선가 연습이라도 해왔는지 제법 훌륭한 컨트롤을 보여주고 있지만, 아주 조금 여유를 되찾은 것에 불과하다.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왔다고 한들 방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정하얀과 김현성, 조혜진은 옆쪽에서 오는 파도를 최대한 마크하고 있었고, 마법사들은 계속해서 마법을, 엘레나는 계속해서 신성력을 뿜어대고 있다. 조금 더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 -구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쏴아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소리와 함께 거대한 고래 같은 자식이 파도를 뚫고 튀어나온 것. “저건 또 뭐야….” “미친….” 마음의 눈으로도 확인이 되지 않는다. 너무 순식간이라 제대로 확인할 수조차 없다. 적어도 디아루기아의 몸보다 열 배는 더 커다란 것 같은 이형의 생명체는 이쪽은 관심도 없다는 듯이 작은 배를 지나치고 있었다. 마치 폭포수같이 물과 함께 튀어 오른 생명체가 바로 위쪽에 있는 파도 속으로 몸을 내던진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 여파로 엄청난 양의 물이 배 위로 떨어져 내리는 중이다. 거대한 보호막이 배를 감싸 안았지만, 무게 때문에 배가 아래로 가라앉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물속으로 들어간 배는 다행히 곧바로 위로 올라왔지만, 모두 할 말을 잃고 서로를 바라봤다. “…….” “…….” 배가 물속에 들어간 순간, 내가 본 것과 똑같은 걸 봤을 테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아저씨, 봤어?” “어… 봤어.” 뭔가 이상한 곳으로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김예리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박덕구가 준비한 회심의 나이스 보트는 파도의 웜홀을 뚫고 나갔고 그와 동시에 귓가로 시스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화 등급의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악이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씨이바….’ # 536 회귀자 사용설명서 536화 히든 피스(3) 파도의 웜홀을 빠져나온 그 직후, 배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제는 잠잠한 파도만큼이나 조용한 장내가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방금 있었던 일이 꿈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도시도 집어삼킬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거대한 파도의 길을 빠져나온 이후 시야에 비친 것은 구름 한 점 없는 망망대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뭘 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조심스레 박덕구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형님, 아무래도 던전에 들어오게 된 것 같은데….” “…….” “…….”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이 새끼야.’ 문제는 여기가 정확히 어디냐는 거지. 김현성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회귀자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건 애초 성립되지 않은 이야기지만, 무려 신화 등급의 던전이다. 떡밥이 워낙 커다란 만큼 알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알고 있지는 않아도 굵직굵직한 사건은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표정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이 있었던 1회 차에서 이 던전은 발견된 적이 없다. 아마 김현성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발견된 적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숨기려고 노력한다고 한들 이런 던전을 숨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만약 발견됐다고 해도….’ 죽었을 확률이 90%가 넘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박덕구가 만들어온 나이스 보트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기가 막히게 잘 때려 맞추네. 이 새끼는….’ 던전에 들어온 것은 박덕구 때문이었지만, 이곳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도 녀석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너무나도 딱 들어맞는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어 녀석을 흘겨봤지만, 박덕구는 죄책감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얼굴은 자신이 바라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눈물도 훌쩍이고 있다. 덩치에 맞지 않게 턱을 덜덜 떨며 쏟아지는 눈물을 꽉 참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건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당연히 여러 가지로 미안할 것이다. 즐거운 휴가가 갑작스럽게 생존게임으로 바뀐 셈이었으니까. 사실 녀석의 탓은 아니었지만, 저 돼지 성격상 제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확률도 높고…. 괜스레 상태창을 확인하자 눈에 띄는 것은 일반 이하로 랭크된 낮은 박덕구의 행운 능력치. ‘시바,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어떻게 보면 아주 우연히 던전 하나를 찾은 거라고 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 정도면 필연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베니고어나 엘룬이나 로렌은 알지 못하는 뭔가에 간섭으로 인해 여기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더 편하게 느껴진다. 당장 이 무능력한 신들에게 다른 연락도 되지 않는 상황. 더 이상 폭거에 견디다 못해 나를 날려 버린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김현성까지 이쪽으로 보낼 리는 없지 않은가. 다시 한번 박덕구가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미, 미….” “됐다, 덕구야. 네 잘못 아니니까.” 괜히 더 기죽기 전에 이쯤에서 말문을 트는 게 맞다. “하지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네 잘못 아니니까. 애초에 지금 잘잘못 가린다고 달라질 상황도 아니고, 지금은 상황 파악부터 하는 게 먼저야.” “그래도….” “식량 있어?” “배 안에 있을 거요.” “물은.” “그것도… 배 안에 있을 거고… 기본적인 건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될 거요.” ‘준비 하나는 철저하게 해놨네, 이 새끼. 무슨 거울 호수에서 몇 개월을 놀려고 작정을 하고 왔나.’ “뭐라도 알아낸 게 있거나 의심이 가는 길드원이 있으면 일단 말부터 꺼내봅시다.” 한마디 내뱉자 더 조용해진다. 슬그머니 황정연을 바라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얘가 가진 지식이랑 초기억력이 도움되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네.” “아마 지금 저희가 거울의 뒷면에 와 있는 건 아닌가 싶어요.” “…….” “단순한 가설일 뿐이니까 그렇게 귀담아 듣지는 마세요. 애초에 거울 호수가 비추고 있는 세계의 뒷면이라고 생각하니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는 면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아마 게임에서 자주 등장하는 히든 피스 같은 개념일 거로 생각해요.” “히든 피스?” “말 그대로 숨겨진 조각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누군가 이 대륙을 설계할 때, 의도적으로 이런 장소를 만들어놨다는 거죠.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게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생각건대 누군가 저희를 이끌었다는 게 타당하다고 봐요. 단순히 우연으로 생각하기에는 저희가 지금 처한 상황과 타이밍이 너무 맞아 떨어지니까요.” “누가?” “그건 저도 모르죠. 어쩌면 베니고어 님일지도 모르고 이 대륙을 관리하는 신일 수도 혹은 악마일 수도 있고, 그것보다 더 위에 있는 상위의 존재일 가능성도 있어요.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야기지만 연어가 호수에 살고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가네요. 어쩌면 거울 호수는 호수가 아니라 강일 수도 있겠어요. 지금 저희가 있는 곳과 저희가 왔던 세계를 잇는 강이요.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도중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저희 눈에는 고여 있는 호수로 보였지만… 걔들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맛있었구나… 싶었다니까요.” “우스갯소리라기보다는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네요. 세계를 잇는 강이라니….” “그 파도의 웜홀도 그렇고요. 모두 보셨죠?”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게 시야에 비친다. 뭔가 복잡하다는 표정들이다.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은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리액션이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이 대륙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파악하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여기 있는 대부분은 일반인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세계의 진실이야 아무 상관하지 않는 것 같은 정하얀은 이쪽의 얼굴만 보고 헤실헤실대고 있었지만, 서민 오브 서민에 빛나는 한소라나 안기모의 표정은 아직도 멘탈이 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파도의 웜홀을 통해 우리가 목격한 것은. “우주.” 말 그대로 커다란 우주였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행성들과 그 안에 사는 이들, 떠다니는 빛무리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생명체. 어떻게 그걸 다 내려다볼 수 있었는지는 설명이 되지는 않았지만, 파란 길드원들은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 많은 행성과 차원 중에 지구도 있지 않을까. 있을 게 확실하다. 황정연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인지 계속해서 개인적인 사견을 덧붙이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는데 꽤 공감되는 이야기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학자의 관점에서 해석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후로 입을 연 것은 김현성이다. 녀석다웠고, 녀석이 궁금해할 만한 이야기였다.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까지 보셨을 겁니다. 혹은 우주를 표류하는 생명체들, 아마 서 있는 위치가 달랐던 만큼 다들 눈으로 본 게 다를 겁니다. 괜찮으시다면 한 명씩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장 처음에 입을 뗀 것은 김예리. “하얀이 언니랑 닮은 사람.” “뭐?” “하얀이 언니랑 닮은 사람 봤어. 자세히는 기억 안 나는데. 그냥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어. 머리는 조금 더 길었던 것 같았고, 나이도… 기억하려고 하니까 머리 아파.” 그다음은 박덕구였다. “나, 나는 그… 균열 박물관에서 봤던 검을 들고 있는 몬스터를 본 것 같다니까.” “고대 신?” “아니, 고대 신 말고 그거랑 같이있던 괴물 말이요. 머리에 뿔 달리고 무기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그 녹색 괴물. 그때처럼 죽은 것 같이 보이는 더미 모습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습이었고… 조금 소름이 돋는 건….” “뭔데.” “착각이었으면 좋겠는데,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니까.” ‘이 새끼, 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네.’ “정말이요. 나랑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아주 잠깐이었지만, 현성이 형씨랑 형님 쪽으로 시선을 돌렸었던 것 같고, 재미있을 것 같다는 듯이 웃고 있어서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는 거 아니요, 내가 진짜.” 그다음이 안기모다. “그냥 평범합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가족들을 봤습니다.” 이어서 계속해서 말을 내뱉는 이들이 보였지만, 특별한 걸 본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저는… 지구처럼 보이는 장소에 있는… 부길드마스터랑 닮은 사람을 본 것 같습니다. 어려 보였고 여자였는데… 조금 이상한 여자 같아서….” “동생이 한 명 있기는 있습니다. 만약 혜진 씨가 봤던 게 제 동생이 맞으면 재미있겠네요. 뭘 하고 있던가요.” “…….” “…….” ‘왜 시바… 뭐 하고 있길래.’ “아니, 그냥 말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뺨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네?” “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돈뭉치 같은 거로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의 뺨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구두로 머리를 질끈질끈 밟기도 했고요. 남자는 바닥에 엎드려 빌 듯이 구걸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여자는 미친 것처럼 웃으면서….” “그만 말해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인가 봅니다.” 이율하가 맞다. ‘또라이 같은 년, 이거….’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거의 맞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은 일단 최대한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금 중요한 건 걔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가 아니었으니까.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는 걸 알았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길드원들은 이율하에 대한 관심을 떨쳐낸 모양이다. 조혜진은 실제 여동생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다른 이들은 나와는 너무 다른 모습에 실제 가족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기영의 가족보다는 다른 곳에 더 집중하고 있는 느낌. 아니나 다를까 우물쭈물 눈치를 보고 있던 한소라가 입을 열었다. “지구… 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라… 지구와 닮은 행성은 많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만약에… 만약 정말로 조혜진 님이 보신 게 지구가 맞다면… 저희… 그…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정연 언니가 말했던 것처럼 아까 봤던 파도의 웜홀이 정말로 차원을 잇는 강이라면 저희가 지구에 돌아갈 방법이 있는 것 아닐까요?” 아니, 베니고어는 분명히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여기로 소환된 이들은 지구에서 버림받은 이들이니까. 아마 평범한 방법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닐지 싶다. 한소라의 필사적인 질문에 대답한 것은 김현성이었다. “불가능할 겁니다.” “네?” “저희가 믿을 수 없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맞지만 그게 거기까지 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애초에 차원의 바다를 뚫고 갈 수 있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어불성설이고요. 배는 물론이거니와 저희의 몸이 버틸 수 없을 겁니다.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실제로 닿을 수는 있는지, 만약 실제로 닿는다고 하더라도 들어갈 수는 있는지, 모든 게 불확실합니다. 완전히 아니라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접으라는 이야기지.’ 희망을 너무 무참히 박살 낸 게 아닌가 싶었지만 쓸데없는 꿈은 버려두는 게 맞다. 괜히 헛물 켜다가 개고생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끊는 게 정답이라는 거다. 그렇게 한 사람씩 모두 이야기를 끝내고 있었던 시점에서 정신을 차린 선희영이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당연했다. 그녀가 뭘 보고 왔는지 궁금한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녀는 직접 파도의 웜홀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었으니까. “…….” “…….” “신.” “네?” “대륙의 신과는 조금 다른 신을 본 것 같습… 니다. 네, 조금 다른….”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우터 갓.” # 537 회귀자 사용설명서 537화 히든 피스(4) “아우터 갓.” “네?” “아마도 바깥의 신들일 겁니다. 선희영 씨가 본 신들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주 오래된 고서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저도 정확히 어떤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자연스럽게 그 단어가 떠오르더군요. 모습은 확인해 보셨습니까?” “아니요. 그렇게 자세히는… 형태도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제가 뭘 본 건지도 제대로 알 수가 없고요. 확신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제가 본 그것이 감히 가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라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 “…….” ‘바깥의 신은 또 뭔데, 시바.’ 괜스레 허벅지를 툭툭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아우터 갓이고, 바깥 신이고, 너무 허무맹랑한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뭐야? 그래서 그게 뭔데?’라는 생각을 연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파도의 웜홀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이미 놀라운 이야기다. 한데 그것도 모자라 아우터 갓이 튀어나왔단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가장 말 많은 길드의 돼지도, 궁금한 게 많았는지 곧바로 입을 열어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신이라는 건 대륙을 관장하는 뭐, 그런 거 아니요? 대관절 바깥의 신은 무슨 소리인지… 베니고어 여신님이나 엘룬 여신 같은 신들과 다른 신이면 도대체 희영 누님이 본 건 뭐란 말이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자세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너무 한꺼번에 정신없이 몰아치는 것 같아서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그럼 아우터 갓이라는 건 우리가 생각하는 신의 범주에 있는 신이 아니라는 거요?” “아마 그럴 가능성이 클 겁니다. 제가 읽어본 고서에서는 바깥의 신을 어디에도 포함되지 못한 신이라고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단 말이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결코 우리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겁니다.” “네, 길드마스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호의적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관심이 없는 쪽인 것 같았지만… 사실 그것마저도 제대로 느낄 수 없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아마 김현성도 정말로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알타누스와 베니고어가 김현성한테 주는 정보를 최대한 제한해 왔으니 정확히 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을 턱이 없다. 만약 바깥 신이 뭔지 알고 있다고 해도…. ‘이런 분위기에서 지 입으로 설명하지는 않을 거고.’ 하지만 대충 이 대륙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내 입장에서는 몇 가지 의심 가는 정황이 있기는 하다. 김현성이 표현한 것처럼 아마 외부 신들이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신들이라면 가장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마…. ‘이쪽 세계관으로 차원이나 행성을 배정받지 못한 신이라고 보면 되는 건가?’ 할 만한 추측이기는 하다. 애초 차원과 대륙을 관리해야 할 신이 파도의 웜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게 설명이 되지 않았으니까. 이 차원은 절대 허투루 만들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게 생겨났는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위쪽이나 아래쪽이나 명백하게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 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마치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처럼 한 부서를 만들어 대륙을 감당하고 그 차원을 발전시키거나 부흥시키는 것으로 실적을 얻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규칙 역시 존재한다. 1. 대륙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할 경우 신성을 소비한다. 기적이나 퀘스트, 신탁 역시 대량의 신성을 소비하게 된다. 2. 대륙의 신들이 인간의 일에 관여하면 막대한 페널티를 얻는다. 혹은 관여할 수 없다. 직접 해를 끼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3. 신성은 특별한 경우가 아닐 경우 사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정도의 이야기. 대륙의 신들이 인간들을 관리하는 신성한 존재이기는 하나, 그들 역시 우리와 더불어 사는 처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이 없으면 그들도 존재할 수 없고, 대륙과 차원이 없으면 그들도 살아갈 수 없다. 아마 바깥의 신이 그 단어 그대로 차원과 대륙 밖에 있는 신이라면 김현성이 괜스레 심각한 얼굴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그들은 이 몇 가지 제약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이 되는 거니까. 그들은 인간에게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확실하게 가능할 것이다. 시스템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건 그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소리와 다름없다. “그럼 악마 같은 거라 이 말이요?” ‘악마랑도 다르겠지.’ 신들과는 경우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악마 역시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자리해 있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악마조차 현세로 내려오면 시스템에 의해 페널티를 받게 되고,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은 일들을 하려면 커다란 페널티를 감수해야 한다. 인간에게 직접 해를 끼치는 것이 가능하지만, 계약이 아니라면 그것마저도 제한적이다. 예상하건대 김현성이 말한 이 바깥쪽의 신은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 시스템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난 신, 여기에서 의문점이 하나 더 생긴다. ‘신성은 어떤 식으로 긁어모으는 거지? 애초에 신성이 없는데 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정은 두 개 정도. 굳이 신성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은 포인트를 쌓아놓고 있던가. ‘다른 신들이 관리하고 있는 대륙에 직접 나타나 개판을 친다던가.’ 대충 흘러가는 정황을 본다면, 후자일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을 것이다. ‘이 새끼들이였구나.’ 김현성이 회귀한 이유. ‘이 새끼들이 맞는 것 같은데.’ 베니고어가 자신들도 완벽하지 않다고 말한 이유. ‘맞아, 완벽하지 않지. 그걸 잘 기억해, 나의 자랑스러운 이기영 명예추기경. 우리도 완벽하지 않아. 불안전하지. 대륙 위에 있는 이들과 서 있는 위치가 다를 뿐,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아. 너는 그걸 잘 기억해야 해. 우리도 완벽하지 않다는 걸.’ 그녀가 파산 이후에 내게 내뱉은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돈다. 어째서 자신들도 완벽하지 않다, 이렇게까지 강조해 말한 건지,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당시에는 자기 자신이 저지른 트롤 짓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내뱉은 변명처럼 들렸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 김현성과 인류가 마주쳐야 할 적이 신화적 존재라는 사실을 에둘러 표현한 걸지도 모른다. 단순한 망상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뭔가 하나씩 하나씩 들어맞는 것 같은 느낌. 초조해 보이는 김현성의 얼굴은 이쪽의 쓸데없는 가설에 더욱더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그럼 가면 쓰레기는?’ 만약 정말로 1회 차가 이처럼 진행됐었다면 가면쓰레기의 행보 역시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바깥 신 밑에서도 일했던 거였나?’ 여단에 들어간 이후, 악마와 계약하고 대륙을 분탕 친 것까지나 내가 알고 있는 가면쓰레기의 행보다. 이 이후부터 바깥의 신과 함께 일했다고 가정한다면 많은 게 맞아 떨어지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1회차 가면 쓰레기, 그러니까 악마 소환사 진청과 계약한 악마가 벨리알일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타 악마들은 몰라도 벨리알은 온건파로 분류할 수 있는 대표적인 악마 중 하나다. 그런 벨리알과 바깥의 신이 손을 잡았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가 힘들다. 물론 둘이 손잡고 또이또이 하자고 계약을 맺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냐, 꼭 없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지. 바깥쪽의 신과 합의하에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어.’ 본래 이런 관계는 서로의 이해득실을 따라 움직이는 법이니까. 벨리알이라면 이 이해득실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계약한 악마가 벨리알이 아닐 수도 있고.’ 머릿속 한편에 남은 찝찝함은 건재했지만, 일단 몇 가지 마음의 걸리는 일은 해결을 본 것 같았다. 아직 확인 작업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몇 가지 오류를 제외하고는 확정을 지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놀라웠던 건 나 말고 현 상황을 눈치챈 새끼가 있었다는 것.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소린데 말이요. 조금 터무니없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왠지 감이 그렇다니까.” “뭔데?” “웃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면 이야기해 본다니까.” “안 웃을 거니까. 한번 이야기해봐.” “거, 혹시… 공화국과의 전쟁이 끝나고 베니고어 여신님이 말했던 위협이라는 게 어쩌면 이걸 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 “…….” “…….” ‘감 한번 더럽게 좋네, 이 새끼.’ 박덕구의 얼굴이 조금 당황스러워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모두가 웃음을 터뜨릴 줄 알았을 테지만, 장내의 분위기는 무척 진지하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특히 김현성이 깜짝 놀랐다는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왠지 속으로는 킹리적 갓심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새끼는 도대체 뭘까?’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건….” “그냥 단순한 감이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거, 우리 형님도 말하지 않았나,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말이요. 어쩌면 우리가 여기 온 것도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지 한 번 생각해 봤다니까.” ‘너 때문이잖아, 이 새끼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요? 어떻게 우리 길드가 딱 배까지 끌고 도착한 이 타이밍에 우리가 이런 던전에 들어오게 된 건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니까. 정연 씨가 아까 그런 말도 하지 않았소.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걸지도 모른다고.” “…….” “어쩌면 우리가 앞으로 싸워야 할 적을 보여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니까. 이 던전에 들어온 것도 그거요. 지금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시련을 극복하고 보상을 받아 한 계단 더 올라서라! 뭐, 이런 것 아니겠냐니까….” “…….”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소. 진짜.” 실제로 소름이 돋는다. 어느 순간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 녀석이 자신을 박덕십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종류의 소름이었다. 쥐가 뒷걸음질을 치다 때려 맞춘 것과 진배없는 상황이었지만, 녀석의 추측은 들어맞는 면이 있다. 베니고어와 엘룬이 연락이 안 된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베니고어가 말한 ‘윗분’이 어쩌면 영향력을 행사한 걸지도 모른다. 박덕구의 말처럼. 1회 차부터 지금까지 모든 걸 기억하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개입했을 수도 있다는 거다. “터무니없는 추측처럼 들리지는 않습니다. 물론 확실하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덕구 씨의 말을 염두에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요?” “뭐가 됐든 이 던전을 공략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딱히 다른 방법이 보이는 것도 아니니까요. 순간이동도….” “네, 네… 불, 불가능해요.” “네, 불가능한 상황일 겁니다. 저 역시 많은 던전을 조사했었지만, 신화 등급의 던전이 있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분명히 지금까지 클리어해 왔던 던전의 난이도와는 레벨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꼭 인지하시고 공략에 임해주셨으면 합니다.” ‘상상하기도 싫다, 시바….’ “기영 씨는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꼭….” “아… 네. 알겠습니다.” “던전 공략은 항상 위험을 동반합니다만, 다른 길드원분들도 이번에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네. 각오하고 있습니다. 길드마스터.” “항상 어려웠지만, 그 험한 일들을 헤쳐서 여기까지 온 게 파란 길드 아니요. 이번에도 분명히 아무렇지도 않게 공략에 성공할 거요. 우리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형씨 몸이나 잘 챙기쇼.” “덕구 아저씨 말이 맞아. 우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들. 각오하고 있으니까.” “…….” ‘당연히 쉽지는 않겠지.’ 무려 신화 등급의 난이도다. 대륙에 있지도 않고 앞으로도 없을 난이도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지금까지의 던전행은 김현성이 그나마 컨트롤할 수 있는 종류였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어쩌면 정말로 몇 명이 크게 다치거나 죽어 나갈 수도 있다. 길드원 전체가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마 가장 불안한 것은 김현성이 아닐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수록 녀석의 눈이 조금 흔들리는 게 보인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모두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던 그때였다. [신화 등급의 던전 버려진 차원의 바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차원의 바다에서 랜덤의 아이템을 마음껏 낚아주세요. 가지고 돌아갈 수 있는 아이템은 단 한 정으로 등급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낚시 후 귀환하기 (0/1)] “어?” 나에게만 들려온 것이 아니다.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이거….’ “대박….” “허….” “말도 안 돼….” 시련은 개뿔, 거저먹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 538 회귀자 사용설명서 538화 히든 피스(5) ‘이게 뭐야.’ 너무 어이없어, 할 말을 잃어버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와의 전투나 해결 불가능한 퍼즐을 푸는 것 따위의 퀘스트를 예상했건만, 너무나 쉬운 미션에 김이 빠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하지만 길드원들의 표정은 대체로 기뻐 보인다. 특히나 위험에 민감한 한소라는 다행이라는 듯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소소한 웃음을 내보이고 있었다. 세상에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보상에 걸맞은 노동을 한 뒤에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쾌감이 있다고들 하지만, 본래 가장 꿀 떨어지는 상황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채로 원하는 걸 쟁취하는 상황이다. ‘달달 합니다.’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상황이다. “다… 다행이로군요.” 사랑스러운 회귀자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김현성의 얼굴은 당혹감 반, 의심 반으로 물들어 있다. 물론 이해야 간다. 아무런 조건 없이 아이템을 하나 가지고 나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고 한들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어딘가에 함정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 던전에 입장한 순간 시스템이 보상을 가지고 나가라고 했다면 가지고 나가면 그만, 더 이상 사족을 붙일 필요도, 이유도 없다. ‘정말로 히든 피스라고 봐도 되는 거네.’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이 대륙을 위해 몇 가지 안배해 놨고 파란 길드가 그 안배에 다다랐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1회차 회귀자조차 찾지 못했던 거울 호수의 히든 피스, 따위의 생각을 하자 머릿속에 있는 한 줌의 의심조차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럼, 지, 지금 바로 낚시를 시작하면 되는 거요? 정말 그걸로 끝인 거요?” “네, 일단 다른 변화가 생길 때까지는 퀘스트를 계속해서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교대로 보초를 서거나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는 전부 해둔 채로… 네. 그렇게 하면….”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 아니요.”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뭔가….” “정말로 이곳에서 한가하게 낚시나 하고 있기에는 불안한 점도 많으니까. 현성 씨 말도 일리가 있지. 아무튼, 움직입시다. 제한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많은 아이템을 보는 게 유리할 겁니다.” “네, 부길드마스터.” “덕구 말처럼 희영 씨가 방금 봤던 바깥의 신이 대륙의 위협이 맞다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물론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만, 미리 대비한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습니다.” “왠지 모르게 감이 파바박 하고 왔다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이곳에 들어왔다고 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게 많으니까.” ‘니가 제일 수상해, 이 새끼야.’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확실한 것은 없지만, 해야 할 일은 알고 있다. ‘가장 값어치 나가는 물건으로 챙겨야 맞지.’ 그 말 그대로, 기왕 온 이상 가장 효율적인 물건으로 가져가는 게 옳다. 준신화 등급이나 전설 등급의 아이템들은 애초에 아웃이라는 느낌으로,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최대한 많이 낚은 이후에 그 아이템 중 가장 실용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물건을 가져가면 된다. 성장형 아이템도 제외, 쓰기 애매한 아이템들도 모조리 제외, 애초에 사용자를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조금 가슴 아픈 말이기는 하지만 박덕구를 위해 신화 등급 갑옷이나 방패를 선택하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 중 가장 멍청한 선택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되지 않게 아이템 효율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인원을 위한 아이템으로 선정하는 것이 맞다. 그나마 준신화 정도의 출력을 갖춘 이들은 정하얀과 김현성 정도.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차희라도 고려해 볼 만하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페널티를 무효화해 주는 것으로 모자라 강화할 수 있는 종류의 갑옷이라도 있다면 당장에라도 가지고 가는 것이 옳다. 아, 다방면으로 활용도가 높은 엘레나를 위한 아이템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전투가 지속되는 내내 병력 전체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는 사람으로는 그녀만 한 사람이 없을 테니까. ‘버프형 아이템도 괜찮으려나….’ 조금 아쉬웠던 것은 이곳에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보였다는 것. 어둠의 역병군주나 빛의 연금술사 같은 직업이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은 무척 제한되어 있다. 만약 현자의 돌이 낚인다고 해도 맘 편하게 그것을 가져갈 수는 없을 것이다. 전투가 발생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정해져 있었으니까.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행복 회로를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자 이미 할 마음이 낭낭한 이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배에 낚싯대가 구비되어 있었는지 한 사람당 하나의 낚싯대를 가지고 있는 모습은 가관. “거, 연어 낚시나 하려고 가져온 낚싯대였는데… 이렇게 또 도움이 되는구만! 내가 이래 봬도 강원도 낚시왕 강덕구라고 불렸다는 거 아니요. 도대체 뭐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나만 믿으라니까.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아이템을 낚을 거라니까.” ‘저 새끼는 이제 미안해하지도 않네.’ 오히려 의기양양하다. “이런 건 처음인데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이템이 바늘을 물기라도 하는 겁니까?” ‘알아서 잘 해주겠지. 조혜진, 쟤는 뭐 저런 걸 궁금해하고 그래.’ “저, 저는 식사준비라도 할까요? 그러고 보니 아까 먹었던 거울 연어 이후로는 아무것도 안 먹은 것 같은데….” 엘레나와 한소라는 심지어 식사준비를 하고 있고. “저는 보초를 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부길드마스터.” 역시 믿을 놈은 창렬이밖에 없다. 조금은 우울하고 조용했던 분위기가 뒤바뀌는 것은 순식간, 이쯤 되면 휴가의 일환이라고 봐도 문제가 없었다. 박덕구 녀석이 이쪽에게도 커다란 낚싯대들을 내밀었고, 나 역시 건네받은 낚싯대를 다시금 김현성에게 내밀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장비를 받아드는 김현성의 표정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얼굴 그 자체. 한마디 건네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정도의 얼굴이었다. “낚시는 해보셨습니까?” “아니요, 처음입니다. 사실 어떻게 하는지도 잘… 차라리 저도 보초를 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위에서 보고 있는 건 창렬 씨 하나면 충분하니까요. 뭐, 이런 낚시에 경험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냥 던지면 낚이는 거지.” “그런 겁니까?” “아마 이 버려진 차원의 바다라는 곳 밑에서는 여러 종류의 아이템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우연히 바늘에 걸리길 기도하면 되는 상황이니 미끼를 갈거나 챔질할 필요도 없고요. 그렇게 부담스러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놀러 나왔다고 생각하시고 즐겨보세요.” “그럼….” 휘익 하는 소리가 들리고 퐁당 소리가 들려온다. 진지한 표정으로 낚싯대를 휘두르는 김현성의 모습이 그렇게 어색해 보일 수가 없다. 검을 들고 있는 모습과는 천지 차이다. 낚시왕 강덕구를 힐끔힐끔 바라보는 것을 보니 녀석의 자세를 참고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도움이 될 리가 없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안기모는 뱃멀미가 나는지 우욱거리는 중이다. 정하얀은 옆에 찰싹 달라붙어 행복해하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즐겁다고 할 수 있는 분위기에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을 때였다. “왔드아!” 뒤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온 것. “왔다니까! 이거 만만치 않은 놈 같은데! 대물이요! 대물! 대물이 확실하다니까!” 온갖 오바 생쇼를 하며 아이템과 힘겨루기를 하는 박덕구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네 떠나가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은 정말로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여서, 아직도 상기된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다. 단순히 아이템을 낚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정말로 물고기와 싸우는 것처럼 힘겨루기하는 모습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저쪽에서 힘을 쓰고 있는 것 같은데! 거, 만만치 않은 놈인 것 같소.” “아, 아, 아이템이 올라오기 싫은가 봐요.” 정하얀의 재미없는 농담에 가볍게 입꼬리를 올린 순간 갑작스레 몸이 앞으로 꺾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극적으로 꺾였는지 물에 빠질 뻔한 걸 김현성이 막아줬을 정도였다. ‘이거 뭐야, 시바.’ 박덕구의 오바가 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낚싯대를 꼿꼿이 든 채로 허리를 최대한 꺾자 진동이라도 온 것처럼 부르르 떨리는 손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이거 뭐야.’ “형님도 왔나 보구만! 크으….” ‘말 걸지 마, 이 새끼야. 말할 여유 없어.’ 몸에 있는 마력까지 집어넣어 가며 계속해서 녀석을 당기고 있었지만 정말로 저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발버둥 치는 것처럼 느껴져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어찌 됐건 재미있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뭐가 올라올지 기대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손에 느껴지는 감각은 적어도 자신이 준신화 등급 이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왜 낚시하는지 알겠다, 야.’ 그 말 그대로였다. 손잡이를 계속해서 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는 녀석. 박덕구는 그사이에 묵직한 녀석을 끌어올렸는지 연신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준신화 등급이요! 형님! 이거 준 신화 등급이라니까아!!!” 보고 싶지만 갈 수가 없다. 지금 녀석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약 15분이 지날 동안 사방에서 간헐적으로 ‘왔다!’ 따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집중할 여력이 없다. 엘레나와 선희영이 번갈아 버프를 걸어주고 정하얀도 가벼운 근력 강화 마법을 걸어줬을 정도였다. 그만 포기하고 낚싯대를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바로 그때였다. 미친 듯이 진동하던 손잡이가 잠잠해진 것은 물론, 녀석의 저항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느껴졌다. 서둘러 허리를 뒤로 눕힌 후, 계속해서 손잡이를 돌리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길한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는 거대한 창. [롱기누스의 창-신화 등급] [신의 옆구리를 찌른 창이라 불리 우는 신화 등급의 무구입니다. 정확히 어디에서부터 흘러들어 왔는지는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이 무구 속에 저장된 흐릿한 흔적만이 이 창이 어떠한 무기였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창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 외 다른 기능은 없습니다.] ‘시이바….’ “오빠아! 오빠아!! 오빠아!!!! 신화! 신화!!” “기영 씨! 기영 씨!” 양옆에 있던 김현성과 정하얀이 흥분한 듯 방방 뛰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야! 이거 뭐요! 형님. 뭐, 이런 걸!!” ‘이게 나야.’ 뿌듯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괜스레 더 콧대가 높아진다. 고생 끝에 나온 녀석이 창이라는 게 가장 마음에 든다. 어떻게 봐도 거대해 보이는 모습은 내가 이걸 정말로 낚은 게 맞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 인증 샷이라도 찍고 싶은 기분이었다. “거, 이럴 게 아니라. 인증 샷 같은 거 한 번 찍읍시다. 크으… 나는 겨우 준신화 등급의 방패가 끝이었는데, 이거 형님이 한 번 딱 던지니까 신화 등급이 팡팡 하고 튀어나오는 거 아니요. 크으! 역시 형님은 형님이요!” 얼떨떨했지만 아이템의 설명을 읽고서는 더욱더 미소를 크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창은 막을 수 없습니다.’ 담백하다. 다른 기능과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설명이다. 방패는 물론, 특수한 방어막이나 마법적인 무언가도 저 창을 막을 수가 없단다. 만약 바깥 신에게 이쪽의 공격을 자체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수단을 억제할 수 있는 한 방이 될 수도 있다. ‘그래, 시바! 이래야지!’ 이런 종류의 무구에 어떤 기능이 더 필요하겠는가. “와… 무슨 아이템이… 그냥 이걸로 가져가도 되는 거 아니요? 어떤 공격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설명되어 있는데.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니요? 그냥 이걸로 해도….” “그래도 이제 시작인데. 조금 더 힘써 봐야지.” ‘그리고 이걸 어떻게 가져가. 여기에서 창 쓰는 사람은 조혜진 하나밖에 없는데.’ 물론 조혜진이 신화 등급의 창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아무래도 메인을 맡기기에는 무리가 있는 스펙이다. 한 가지 아이템을 더 가져갈 수 있다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기는 했지만, 딱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현시점에서는 필수적인 옵션은 아니다. ‘정 안 나오면 이거라도 가져가야겠지만….’ 시작이 좋으니 끝이 좋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려오기 시작. 눈에 띄는 신화 등급 아이템의 출현은 이것 외에 하나뿐이었지만, 준 신화나 전설 등급의 아이템은 기계적으로 낚아 올리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전설 등급의 아이템은 다시 바다에 던져 버렸을 정도. 마치 피라미를 놓아주듯이 전설 아이템을 휙휙 던지고 있는 풍경은 아무리 생각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또 전설. 나도. 대물. 낚고 싶어.” 첫 입질에 흥분해 소리를 질렀던 김예리도 익숙한 듯 아이템을 회수해 바다로 집어 던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고조된 분위기가 펼쳐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키야… 손맛 진짜 죽였다니까! 막 부들부들 떨리는데!” “재미있는 것 같아요. 오히려 물고기 낚시보다 더 낫네요.” “왔어요! 저! 저! 왔어요! 오빠!” 모두가 시끌벅적했다. 아직 단 한 번의 입질도 받지 못해 침울해져 있는 김현성을 제외하면 모두가 행복한 한때였다. 본격적인 퀘스트가 시작된 지 약 6시간이 지난 시점,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낚싯대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아이고야….’ 평온해 보였던 김현성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현성아….’ # 539 회귀자 사용설명서 539화 김현성 대 박덕구(1) 얼핏 보면 조금 억울해 보이는 표정이기도 했다. 마치 ‘왜 나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야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밥을 먹고 뒤처리까지 끝낸 엘레나와 한소라도 이미 몇 차례 손맛을 본 상황이다. 잠깐 휴식을 취할 겸 돛 위에서 내려온 김창렬마저 10분 만에 손맛을 느끼고 다시금 위로 올라갔다.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홀연히 모습을 감춘 김창렬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김현성의 동공이 흔들리는 걸 분명히 봤다. 어째서 자신에게만 아무런 입질이 오지 않는지 의아해하고 있는 거겠지. 박덕구를 포함한 주변 분위기 역시 녀석의 씁쓸함에 일조했을 거다. “크으, 손맛 한번 죽인다니까! 나도 낚시 꽤나 해봤지만, 이렇게 손맛 좋은 낚시는 이번이 처음이요. 진짜로 물고기가 걸린 것도 아닌데, 거, 무는 맛이 짭쪼름하다니까!” 특히나 박덕구의 설레발이 녀석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다들 느껴봐서 알겠지만, 거짓말이 아니라니까!” 가슴 아프게도 김현성은 아직 느껴보지 못했다. “어이쿠! 이거 한 번 더 온 것 같은데! 왔드아! 히트다! 히트!” 그 와중에도 한 놈 더 미끼를 물으셨단다. “이 맛에 낚시 하는 거 아니겠냐니까!” “생각보다 재미있네요.” “희영 누님도 온 것 같은데! 한번 들어보쇼!” “앗!” “저도 왔어요!” “달달하구만, 이번에도 대물인 것 같다니까!” ‘그만해, 이 새끼야….’ 즐거운 건 이해할 수 있었지만,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매번 완벽한 모습을 보여줬던 김현성이 침묵하고 있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귀엽게 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가 행복 회로를 돌리는 와중에 녀석만 조용한 게 역시나 마음에 걸린다. 그나마 김현성의 심정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지, 조혜진이 다가가 이것저것 챙겨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성과는 없는 상태다. 몇 시간째 지속된 침묵은 김현성의 정신력마저 갉아먹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에는 슬그머니 포인트를 이동시키는 모습, 본인에게만 아직 입질이 없는 게 자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시금 경건한 마음으로 낚싯대를 던져봤지만, 상황은 달라지는 게 없다. “현성이 형씨만 아직 못 낚아 본 거구만.” “…….” “거, 너무 조급해하지 마쇼. 원래 선천적으로 어복이 없는 사람들도 있답디다. 아마도 그런 경우 일 거요.”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지. 엄청난 대어를 낚을 수도 있을지도… 그래도 오늘의 우승자는 낚시왕 강덕구가 될 거라니까. 신화 등급의 아이템 한 정 더 낚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옳지! 또 왔다!” “…….” 이제는 억울하다 못해 분하다는 얼굴, 김현성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싶었다. 투어 가이드 박덕구의 지시에 따라 얌전하게 여행을 다니던 녀석도 의외이기는 했지만, 지금 보여주는 모습 역시 의외였다. 계속해서 아이템들을 낚아 올리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고민하기도 한다. 고집과 자존심은 있는지 강덕구에게 다가가 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아직도 무슨 성격인지 잘 모르겠다.’ 승부욕이 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이런 걸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인 것 같았다. 김현성의 눈이 커다랗게 변한 것은 그로부터 약 1시간이 지난 시점, 긴가민가하던 녀석이 다급하게 사방을 둘러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기영 씨!” 왜 나를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다급한 목소리로 어떻게든 해달라는 듯한 필사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일단 들어 올려요!” 무척이나 기뻐 보이는 모습은 가관. 낚싯대는 부러질 것처럼 휘었건만,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녀석을 붙들고 있다. ‘하하’ 하고 어린애처럼 웃는 것을 보면 박덕구가 이전에 말한 손맛을 느끼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다른 사람들의 실적에 관심 없는 척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힐끔힐끔 쳐다본 짬밥이 있었는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익숙하게 낚싯대를 요리조리 놀린다. 애초 몸을 사용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다지 힘들어하지도 않은 것 같다. 무척 오랜 시간을 아이템과 씨름했던 나와는 다르게 단기간 안에 녀석을 들어 올릴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쉽게 올리는 것 같은데….’ 혹여나 전설 등급이나 영웅 등급 같은 피라미가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된 것은 당연했다. 때마침 할 일이 없어진 길드원들의 시선도 집중된 만큼 기왕이면 괜찮은 걸 건져 올려줬으면 좋겠다. 마침내 사냥감을 들어 올린 김현성의 얼굴은 다소 구겨진 표정. “힘쓴 것치고는 너무 작은 거 아니요?” 박덕구의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능력치를 확인한 이후에는 입이 찢어지라 귀에 걸리는 게 눈에 보였다. 낚싯바늘에 걸려 있었던 것은 작은 반지. 거대했던 롱기누스의 창이나 다른 이들이 끌어 올린 무구와 비교해 너무 볼품없는 것이 아닌지 걱정했겠지만, 신화 등급의 반지라는 사실을 확인한 이후에는 세상이라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는 얼굴이다. 심지어 주먹을 꽉 쥐는 것을 보니 본인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아이템을 뽑은 모양. 나 역시 괜스레 설레기 시작했다. ‘쓸 만한 아이템인가 보네.’ 1회 차를 겪은 김현성이 쓸 만하다고 생각하는 아이템이라면 공략에 확실하게 도움이 되는 종류의 기능을 갖추고 있을 확률이 높다. “결정된 것 같군요. 이걸로 가져가면 될 겁니다. 주인도 정해진 것 같고요.” 심지어 확언을 해오기까지. 사실상 이번 이벤트는 끝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며 반지를 바라보자 자세한 기능이 눈에 들어왔다. [브리이취의 정화 반지.] [오래된 여신 브리이취가 자신의 연인을 위해 자신의 심장을 꺼내 만든 반지입니다. 신화 등급 디버프와 신화 등급 저주를 착용 즉시 해제합니다. 반지를 착용하고 있는 도중에는 신화 등급 디버프와 신화 등급 저주에 면역 상태가 됩니다. 처음 착용하는 상대에게 귀속됩니다.] “아….” ‘좋기는 좋은데….’ 뭐라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아무래도 저런 종류의 아이템보다는 크고 아름다운 롱기누스의 창이 더 끌리는 법 아니겠는가. 하지만 김현성의 판단이 그렇다면 겸허히 받아들일 수도 있다. ‘바깥 신인가 뭔가 하는 놈이 저주나 디버프 같은 거라도 뿌리나 본데….’ 만약 그렇다면 확실히 엄지를 추켜올릴 만한 픽, 공격력은 보장되어 있으니 이런 종류의 아이템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반지를 들고 천천히 다가오는 녀석을 보자 이 새끼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와… 이 미친 새끼….’ “아마 기영 씨 몸에 있는 저주 역시 곧바로 해주할 수 있을 겁니다.” ‘김현성, 이 새끼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 진짜, 시바… 이 새끼 진짜 제정신 아니다.’ 녀석이 아무리 신화 등급의 무구, 듀렌달의 소유자라고는 하지만, 신화 등급 아이템을 한 정 더 얻는 건 두 번 다시 없을 이벤트요, 커다란 메리트다. 혹시나 바깥 신이 디버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딴 게 아니다. 심지어 귀속 아이템이란다. 애초 후위로 분류되는 내가 이런 아이템이 필요할 리 만무하다. 정말로 순수하게, 이거라면 벨리알의 저주를 해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으리라. ‘김현성, 너 이 새끼….’ 베니고어 여신의 등장으로 이미 한물간 떡밥이 되어버린 벨리알의 저주에 아직도 집착하는 모습에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민망하다. ‘이걸 진짜 뭐라고 해야 하냐, 진짜.’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건 확실히 기뻤지만, 1회차를 개판으로 만든 새끼를 막아내지 못하면 대륙에 있는 모든 애새끼가 뒈질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렇게 자신 있어?’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물어볼 수도 없다. 김현성이 강한 것도 사실이었고, 아직 성장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것도 부정할 순 없었지만, 위협이 최소 현신 벨리알이라고 가정하면 아무래도 부족하다. 지금은 특수 상황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저딴 반지보다는 즉시 전력이 될 수 있는 아이템을 픽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미 녀석의 발언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해진 상황, 주치의나 다름없는 선희영이나 엘레나는 당연히 크게 기뻐했고, 정하얀조차 방방 뛰고 있다. 주박이나 다름없었던 벨리알의 저주를 해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점이 있는 아이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냐, 시바. 그거 개쓰레기 아이템이야. 착용한 사람만 쓸 수 있는 아이템이래. 나 역병군주로 전직하면 애초에 디버프랑 저주 같은 건 잘 안 들어와, 애들아. 앞에서 싸울 일도 없고.’ 라거나. ‘김현성, 너 이 새끼. 진짜로 자신 있어서 이러는 거 맞지? 확실한 거지? 너 지금 이길 자신이랑 플랜은 있고, 생각해서 이러고 있는 거지? 이 새끼야?’ 라고 말하고 싶다. “거, 걱, 걱정거리가 하나 사라지겠네요.” “확실히… 물론 지금은 잠잠해졌다고는 하지만 언제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만큼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군요.” ‘응, 그거 아니야.’ 당연하지만, 입을 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딱 한 가지 아이템을 가져가야 한다면 차라리 다른 아이템이 더 나을 겁니다. 애초에 저주는 이제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요.” “하지만.” “베니고어 님이 계신 만큼 여러모로 괜찮을 겁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어쩌면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일 수도….” “아니요. 그 힘을 컨트롤하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기영 씨. 당장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런 종류의 힘은 스스로를 갉아먹을 뿐입니다. 오히려 몸을 더 위험하게 할 뿐이에요. 그러니 아이템을 받으세요.” ‘지랄하지 마, 이 새끼야….’ 여기서 어떤 아이템을 가져가느냐에 따라 공략 난이도가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독 안에 든 쥐가 된 느낌에 필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모두가 저 아이템을 받기를 원하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박덕구와 눈이 마주쳐 황급히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가 미쳐서 선동이라도 한다면 이 자리에서, 저 아이템을 착용한 이후 귀환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슬금슬금 입을 움직이려 턱을 푸는 녀석을 보니 불안감이 목 끝까지 차고 올라왔다. 녀석의 입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거, 형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니까.” ‘뭐야.’ “물론 모두가 형님을 걱정하는 건 알고 있다니까. 나 역시 형님이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요. 기왕이면 반지를 받아줬으면 좋겠고, 현성이 형씨나 누님처럼 안심하고 싶은 건 같은 마음이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것 같소. 형님 말처럼 지금 당장은 베니고어 님이 있어서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형님이 괜찮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이 새끼….’ “형님이 할 수 있다고 하면 할 수 있는 거요. 버틸 수 있다면 버틸 수 있는 거고. 그 누구보다 그 상태로 변환했을 때의 위험성을 제일 잘 아는 게 바로 형님이요. 만약 정말로 자신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면 형님, 본인이 먼저 정화의 반지를 요구했겠지.” ‘덕구야, 씨바… 덕구야아….’ 서당개 3년이면 풍년을 읊는다고. 잠깐 마주친 그 순간 내 눈을 보고 시그널을 받은 것이 분명하리라. ‘이야아아아!!! 덕구야….’ 오늘만큼 이 새끼가 믿음직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이 정도면 됐냐는 듯이 슬쩍 윙크를 해오는 모습에는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반지보다는 형님이 낚은 저 둠기노스인지, 뭔지 하는 창을 가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니까!” ‘아냐, 시바. 그것도 아니야.’ “창이요! 무조건 창이요!!!” 미간이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제발 닥쳐, 이 새끼야….’ # 540 회귀자 사용설명서 540화 김현성 대 박덕구(2) 옛날 버릇 못 버린 돼지가 슬슬 시동을 거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헛웃음이 나온다. 간혹 저렇게 뭐에 꽂히면 자기주장을 확실히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자주 등장하지 않아 방심하고 있었다. 은밀하게 치고 들어오는 모습은 암살자 직군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이 새끼….’ 물론 내가 저 정체불명의 선동에 낚여 창을 선택할 리는 만무하다. 공격력은 충분하다. 애초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듀렌달은 그 자체만으로도 룽기누스를 상회할 만한 아이템이다. 즉시 전력감이 될 수 있는 보물 중의 보물. 김현성, 본인피셜로도 이 검의 힘을 전부 끌어낼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을 보면 성장의 여지도 남아 있다. 굳이 사용할 사람도 없는 저 창을 가져갈 필요는 없다는 거다. ‘저걸 누가 쓸 건데?’ 대륙 전체를 뒤지면 이 창의 주인이 나오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이쪽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조혜진을 믿고 픽하기에는 조혜진의 스펙이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김현성이 창을 다룰 수 있다면 또 나쁘지 않은 선택지가 되겠지만, 애초에 듀렌달을 가진 녀석이 뭐가 아쉬워서 저 창을 선택하겠는가. “아닙니다. 일단은 정화의 반지가 더….” “아니요! 무조건 저 창이라니까! 왠지 모르게 필이 딱 꽂혔다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지만,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기영 씨에게 가해지는 부담을 줄이는 게 맞습니다. 이 브리이취의 정화의 반지는!” “그렇게 형님을 못 믿는 거요! 무조건 창이요! 애초에 방어가 불가능한 공격을 가능하게 하는 창을 여기에 버려두고 가는 게 대관절 말이나 되는 소리요?” “조건만 맞으면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 정도는 가능합니다. 물론 저 창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역시 정화의 반지가 더 낫습니다.” “나는 형님을 믿는다니까.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요. 창이요!” “저라고 기영 씨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런 문제는 조금 더 확실하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지입니다.” “창이요!” “반지입니다!” “창!” “반지!” “차으아아아아앙!!” “반지!!” “차으아아아아아아아앙!!!” “반!” “차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박덕구 이 새끼.’ 튜토리얼 던전에서 본 것만 같은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다. 그때 당시 흑마법사를 해야 한다며 소리를 지르던 녀석의 모습을 떠올리자 점점 더 창 쪽에서 마음이 멀어진다. 흑마법사를 선택했어도 나름 좋은 결과를 얻었겠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좋은 최상의 결과를 얻지 않았던가. 김현성의 추천에 따라 연금술사를 선택한 것은 말 그대로 신의 한수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베스트 초이스였다. ‘초반이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대륙 전체 병력의 질을 높이는 데는 확실하게 성공했으니까. 물론 빛기영 개인의 성공 역시 말이다. ‘아니, 김현성 이 새끼는 초반에 궁수 하라고 했었잖아.’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조금 헷갈린다. 감이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이 시점에서 최선의 선택은 저 둘의 싸움을 무시하고, 조금 더 이 이벤트에 집중하는 것.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교적 여유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만큼 천천히 여유를 두고 생각하는 것이 옳으리라. [1시간 후에 던전의 퀘스트가 종료됩니다. 원하시는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시바.’ 방금 생각은 취소, 최대한 빠르게 가져가야 할 아이템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만 이 메시지를 본 것이 아닌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토론에 참여한 이들은 서로 반반씩 편을 갈라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창을 선택하는 게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겠지만, 최악을 피하고자 차악을 선택하는 행동이나 다름이 없다. 바닥에 깔린 아이템들을 빠르게 훑어봤지만, 여전히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신화 등급의 이름을 붙이고 있기는 했지만 활용하기 힘들어 보이는 것이 전부, 즉시 전력으로 사용될 수 있는 신화 등급의 아이템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기왕이면 정하얀이 사용할 지팡이나 김현성이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단이 됐으면 좋겠다. 이를테면 갑옷이라든가, 혹은 회피 기능이 붙어 있거나 속도가 빨리지는 장화라든가, 항마력이 높은 멋들어진 망토라든가. 뭐,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차라리 준신화를 가져가는 게 속 편할까 같은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조금 모자라기는 하지만, 준신화 등급의 아이템들도 제법 쓸 만하기는 하니까. ‘제길.’ 그래도 너무 아깝다. 일단은 급하게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단호하게 쳐내는 느낌이었지만, 이런 거에 괜히 실랑이할 시간은 없다. 우리 현성이가 상처받을 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지금 김현성은 우리 현성이 아니라 느그 현성으로 변태하려고 하고 있다. 무조건 단호해지는 게 옳다.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자 역시나 당황스러워하는 놈의 얼굴이 보였다. “브리이취의 반지는 받지 않을 겁니다.” “아니요, 무조건 받으셔야 합니다.” ‘김현성, 시바.’ “지금 저에게는 필요가 없는 아이템입니다. 당장 저 아이템을 받는다고 길드와 대륙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진짜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구나 싶다. 결국에는 최후의 무기를 소환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경멸을 가득 담은 눈빛을 일발 장전했다. 이런 눈빛을 쏘아 보내기는 싫지만, 말했다시피 지금은 단호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는 걸 인지했는지 슬그머니 눈치를 보는 표정을 본 순간, 도박에 가까운 방법이 확실히 먹혀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섭섭합니다.” “네?” “그렇게 저에 대한 신뢰가 없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하….” 실망했다는 처연한 표정으로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똥꼬 쇼를 시작. “제가 분명히 제 입으로 괜찮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덕구 말이 맞아요. 정말로 제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면 브리이취의 반지를 받아들였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분명 몇 번이나 말씀드린 걸로 기억합니다, 현성 씨.” “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절대로 반지는 받지 않을 겁니다, 김현성 씨.” “어어….” “어째서 가둬놓은 건지 알겠네….”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키야, 먹혔네. 확실히 들어갔네.’ 성까지 붙이며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은 게 마음에 걸렸지만,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려면 이 정도 액션은 보여줘야 했다. 그래도 살짝 비틀거리는 건 너무 오바스러운 반응이 아닌가 싶었지만 케어해 줄 시간이 없다. “역시 형님이라면 나랑 마음이 맞을 거로 생각했다니까. 그럼 이 창을!” “아니, 그것도 아니야. 지금은 최대한 빠르게 다시 한번 다른 아이템을 건져 올리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롱기누스의 창 빼고는 좋다고 할 수 있는 아이템이 없으니까요. 다들 메시지를 들으셔서 알고 있겠지만,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니 빨리 자기 위치로 돌아가서 최대한 많은 선택지 중에 고를 수 있도록 합시다. 최소한 신화 등급 아이템을 3종 정도는 더 뽑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부길드마스터.” “그, 그렇지만! 형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덕구야. 말 들어.” ‘X나 카리스마 있었어, 시바.’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자 확실히 기가 죽은 게 보였다. 눈치 빠른 다른 길드원들이 순식간에 각자의 자리로 뿔뿔이 흩어진 건 당연한 거고. 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선희영과 엘레나는 자꾸만 반지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축 처진 어깨로 조혜진과 발걸음을 옮기는 김현성을 보고서는 재빠르게 다른 이들과 같은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슬쩍 다가온 정하얀은 은근슬쩍 말을 건네기까지 한다. “저, 저, 저는 오빠 믿어요. 응….” ‘거짓말하지 마. 너도 반지 받으라 그랬잖아.’ 확실히 얘가 참 영약한 면이 있다. 대놓고 여우처럼 행동하는 느낌이라 오히려 귀여워 보이기도 했지만, 현 상황에서 정하얀이 얼마나 귀여운지 생각할 시간은 없다. 최대 3개의 신화 등급 아이템은 더 건져 올려야 한다. 박덕구의 말에 낚여 창을 선택하는 건 지양하고 싶다. 시간이 점점 흐르면 흐를수록 괜스레 침이 바짝 말라오는 상황, 잘 오던 입질이 왜 이리 안 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최소한 퀘스트 종료 전 5분 정도는 시간을 남겨둬야 하건만, 그것마저 쉽지가 않다고 느껴졌다. 미동도 없는 낚싯대가 원망스러워지는 것은 또 처음. 그나마 간헐적으로 다른 길드원들이 아이템을 건져 올리고 있었지만 전설 등급의 피라미들이 대부분 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썩은 복어같이 하나같이 쓸모없다는 게 문제였지. “오, 오빠 이것 봐요. 괜찮은 아이템 같아요. 한 쌍의 귀걸이인데 두 사람이 귀걸이를 양쪽에 하나씩 끼면 합, 합체할 수 있게 된대요. 능력치도 상승하고요. 대, 대단한 아이템 같아요. 등급도 신화 등급이고… 근데 한번 합체하면 다시는 두 사람의 몸으로 못 돌아가는 모양이네요….” ‘현기트 만들 일 있나… 뭐, 하나가 되자, 이거야? 이상한 생각하지 마라, 하얀아. 트윈 헤드 하얀기영 될 생각은 진짜 없다.’ 부터. “부길드마스터. 사랑의 묘약입니다. 무려. 신화 등급이요. 일회성이지만 절대적인 효과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효과 역시 반영구적입니다.” 별 쓸모도 없어 보이는 신화 등급의 물약. 이곳 기준으로 하위에 불과한 아이템들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 [30분 뒤에 던전의 퀘스트가 종료됩니다. 원하시는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안 돼….’ 씨바,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제길….’ 다른 아이템이 등장하지 않으면 롱기누스의 창을 가져갈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지 박덕구는 초조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아이템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크게 안도하는 모습.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저 창보다는 가치가 떨어져 보이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틀림없으리라. “시간도 슬슬 끝나가는데… 결정해야 하는 타이밍인 것 같소.” ‘아직 아니야, 이 새끼야.’ [15분 뒤에 던전의 퀘스트가 종료됩니다. 원하시는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형님.” “5분 전까지 계속해라, 덕구야. 마지막 입질까지 마무리하고 생각해 봅시다.” “네.” “네, 부길드마스터.” ‘김현성, 너 이 새끼 너도 낚시해야지. 왜 이렇게 멍 때려, 이 새끼야.’ 입질이 오는지도 모르고 있다. [10분 뒤에 던전의 퀘스트가 종료됩니다. 원하시는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없다. 초조한 마음에 사방을 둘러봤지만, 아이템과 힘을 겨루고 있는 길드원들은 소수. 이쯤 해도 나오는 게 없자 박덕구가 주장한 룽기누스의 창으로 거의 확정되는 분위기였다. 입술을 꽉 깨물어 봤지만 역시나 달라지는 게 없다. 갑작스레 몸이 앞으로 끌려간 것은 바로 그때. ‘마지막이야. 시바, 마지막이라고….’ 끄트머리에 찾아온 기적.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 히트나 다름없다. 손에 힘을 꽉 쥐고 최대한 빨리 끌어 올리려 발버둥 치자 바닷속에 숨어 있던 녀석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5분 뒤에 던전의 퀘스트가 종료됩니다. 원하시는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재빠르게 올라온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하고, 룽기누스의 창과 객관적인 비교를 하기 시작,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로 간의 특징이 명확했으니까. [1분 뒤에 던전의 퀘스트가 종료됩니다. 원하시는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재빠르게 널브러져 있는 아이템 하나를 붙잡은 순간, 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처럼 거대한 배가 파도의 웜홀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돛 펴요! 돛!! 돛!” 애매한 미소를 지은 채로 거울 호수에 다시 돌아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왔드아!!!” # 541 회귀자 사용설명서 541화 진심 어린 사과(1) 콰아아아아아앙!!! 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배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마치 폭발 소리 같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어느 쪽이냐고 묻냐면 당연히 안심되는 쪽. 배와 함께 위로 튀어 오른 물이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고, 난간을 꽉 붙잡은 길드원들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공간에 몇 시간 동안이나 있었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뭔가 상황을 정리하기도 전에 들려오는 것은 길드 유일의 해적 꿈나무, 안기모의 구역질 소리. “우웨에에에에엑!” ‘저 양반도 진짜 못 써먹겠네….’ “우웨에에에에에에엑!” 정말로 리얼한 사운드였다. 한 건 터뜨릴 것 같더니, 결국 이 깨끗한 호수에 분비물을 투척해 버린다. 무척 괴로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런 녀석조차 무사귀환 한 것에 대한 기쁨은 숨길 수 없었나 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뭐.’ 사실 선희영 사건을 제외하면 크게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두가 무사귀환 한 것을 나름대로 자축하고 싶다. 무려 신화 등급의 던전을 클리어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생각해 보면 거기까지 닿은 것 자체가 신화 등급의 퀘스트였지.’ 박덕구가 우연히 가져온 배를 타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파도의 웜홀에 빨려 들어간 그 순간 전멸, 순식간에 차원의 바다 밑바닥에 처박혀 영영 떠돌아다니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공간을 헤치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신화 등급의 업적을 달성했다고 하기에 충분하다는 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몇 시간 전에 봤던 그 아름다운 광경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무사히 돌아온 것 같군요.” 입을 열어온 것은 길드 내 권력 순위 삼인자로 분류할 수 있는 유니콘 조혜진.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유지한 채로 이쪽을 바라봤다. “혹시 몸에 조금 이상은 없으십니까? 부길드마스터?” “네, 뭐. 괜찮습니다. 다른 길드원들도 상태를 한 번씩 체크해 주셨으면 합니다. 혹여라도 이상이 있는 길드원 같은 경우에는 꼭 따로 이야기해 주시고요. 특히 희영 씨 같은 경우에는 꼭 따로 휴식을 취하라 말씀해 주시고 따로 사람을 붙여주시고… 다른 이상이 없나 확인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아마도….” “뭔가 부작용이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그 이후로는 계속 멍한 상태이기도 했고….” “조치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부길드마스터.” “…….” “…….” ‘얘, 뭐 할 말이라도 있나 보네.’ 사라지지 않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걸 보면 딱 사이즈가 나온다. 그러고 보니 둘이 한잔한 지도 시간이 제법 지난 것 같다. 그래도 친구라고 제법 많은 시간을 보낸 만큼 이제는 얘가 무슨 말을 해올지 대충 예상이 간다. “왜요, 술이라도 사려고?”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뭔데요?” “길드마스터한테 이야기 좀 잘 해줬으면 좋겠어서… 생각보다 많이 충격받으신 것 같습니다.” ‘응, 아니야. 걔는 조금 더 충격받아도 돼.’ 슬쩍 눈알을 돌려 김현성을 바라보자 확실히 충격받은 듯한 모습이 눈에 띄기는 한다. 어깨가 축 내려간 모습, 이쪽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길드원들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본인이 뿌린 씨앗은 본인이 거둬야 하는 법이고, 자신의 실수는 자신이 수습해야 하는 법이다. ‘신뢰가 깨진 상황으로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겠네.’ 던전에서는 툭 하고 던진 말이었지만, 아마 가슴속에 비수가 꽂힌 것처럼 받아들이지 않을까. 사랑스러운 회귀자와 이쪽 사이는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끈끈한 신뢰로 묶인 상태였으니까. 물론 우리가 서로 신뢰하는 사이라고 공인증서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왜 서로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느끼는 게 있지 않은가. 김현성도 나를 신뢰하기 때문에 굳이 내 다른 행동에 터치하지 않았던 거였고, 나 역시 김현성을 믿는다는 모션을 취해줬기 때문에 녀석의 행동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았던 거였다. 심지어 무의식 꿈 사건으로 인해 그 감정은 더욱더 배가 된 상황이었고…. 왜 진작 이 카드를 써먹지 않았을까 싶다. ‘너는 왜 나를 못 믿어?’ 마법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완벽한 카드. ‘너는 내가 왜 화났는지 모르겠어?’와 종류는 다르지만, 추구하는 것은 같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녀석의 내면이 꽤 흔들리고 있지 않을까. ‘정말로 내가 이기영을 신뢰하고 있지 못한 걸까.’ 라거나. ‘왜 믿음을 보여주지 못했던 걸까. 기영 씨는 나를 이토록 믿어줬는데.’ 라거나. ‘어떻게든 수습하고 사과해야 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심지어 ‘어째서 가뒀는지 알겠네.’라는 혼잣말에 크리티컬 대미지를 입은 만큼 이 모든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마 오늘이나 내일 안에 말을 걸어오거나 따로 자리를 만들기 위해 빌드업을 해올 것이다. 조혜진의 말처럼 굳이 내가 녀석을 풀어줄 필요는 없다. 원래 이런 종류의 싸움에서는 먼저 다가가는 놈이 패배자가 되게 마련. 이미 김현성은 패배한 것 같은 냄새를 풍겼지만, 조금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삐진 척하는 게 맞다. ‘가방 컬렉션 하나 더 늘어나겠네.’ 김현성의 말처럼, 왠지 모르게 비어 있던 장식장 한 곳이 신경 쓰였는데, 드디어 채울 때가 온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사람이 말하는데.” “아뇨. 뭐, 그냥 여러 가지로… 현성 씨와의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그렇게 심란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굳이 제가 할 말은 없지만… 큼, 아무튼 간에 가져오신 아이템은 마음에 드시는 겁니까.” “아 네.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사실 그렇게 만족스러운 건 아니지만, 최악도 아니고 차악도 아닌 그 정도… 그러고 보니까 너한테는 조금 미안하기는 하다.” “갑자기 왜 반말을 하십니까. 뭐, 저는 굳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롱기누스의 창을 가져온다고 한들, 제가 제대로 다루지도 못했을 텐데요. 솔직히 말은 안 했지만 저도 조금 섭섭하기는 했습니다. 대놓고 쓸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고민하던 걸 보니까 심사가 뒤틀리기도 했고…. 그래도 제법 높이 올라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만족스럽지 못하신 것 같더군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정도가 아니긴 무슨… 어차피 제가 사용해 봤자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빤히 보였단 이 말입니다. 물론 마음에 담아두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어차피 가져와 봤자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드렸을 테니까요.” “혹시 삐졌어요?” “삐지긴 누가 삐졌….” “삐진 거 맞는데, 뭐.” “안 삐졌습니다. 그런 거로 삐질 사람도 아니고… 길드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그 정도는.” “에이… 삐진 것 같은데.” “안 삐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삐진 것 맞잖아요. 너 삐졌잖아.” “아니! 안 삐졌다니까! 이 사람이 지금!” “삐졌….” “아니, 진짜 안 삐졌다니까!” 억울했는지 조혜진이 정말로 커다란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순식간에 시선이 집중된다. 웃으면서 조혜진을 놀리는 나와 내게 말을 놓으며 서슴없이 대하는 그녀의 모습이 제법 의외였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까…. ‘다른 애들은 나랑 얘랑 친한 거 잘 모르나?’ 길드 내에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그녀를 반쯤 경계하고 있는 정하얀 정도다. 그래도 제법 붙어 다녔는데, 업무적으로만 만났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밥도 묵고! 마! 술도 묵고! 마! 게임도 하고! 마! 사우나도 가고! 하며 간혹 싸돌아다니기는 했지만…. ‘확실히 안 어울리기는 하지.’ 내가 파란 길드원이었어도 업무적인 일이 있어서 함께 나가는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나 나나 길드의 바깥 일과 안 일을 겸행하는 케이스였으니까. 심지어 특별한 경우나 기분 날 때가 아니면 서로 존대를 하다 보니 더 눈치채기 힘들었던 것 같았다. 조혜진도 자기의 목소리가 살짝 컸다는 걸 인지했는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바라보는 중. 안기모나 유아영은 입까지 벌린 채로 눈을 커다랗게 치켜뜨고 있다. 다른 애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고. 김현성은…. 깜짝 놀란 표정 반, 심기가 불편하다는 표정 반이 섞인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현성이가 시바… 질투도 하네. 혜진아, 너 가능성 있겠다.’ 본인이 본인 감정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혜진과 내가 가까워 보이니 잠깐이나마 불편한 감정을 느낀 것 같았다. 눈치 없는 조혜진은 괜스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이 나왔다. “혜진아. 내가 웬만하면 헛물 안 켜는데 너 가능성 있겠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최근까지만 해도 정말로 가능성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니 넘어오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최근에 뭐 심경의 변화를 팍팍 줄 만한….” “그런 거 없었습니다.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고, 그때 이후로는 따로 말을 건 적도 없었어요.” “혹시 모르니까 버렸던 그 꿈. 잠깐이나마 다시 생각해 봅시다.” “됐어요.” “왠지 모르게 질투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누가….” “현성 씨요.” “정말입니까?” “확실합니다.” “뭐… 이제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은근히 설레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아니, 조금 솔직해져 봅시다, 우리. 솔직히 설레잖아요.” “아니라니까요.” “설레잖아요.” “아니, 진짜. 아니라니까!” 장난스럽게 어깨를 툭툭 치자 부들부들 떨어댄다. 분을 참는 모습이 확실히 재미있다. “뭐 설레든, 안 설레든 간에 한 발자국 전진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니까요. 내가 또 사람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본다는 거 아닙니까. 아, 그때 질투심 유발 작전 이런 것도 좀 해볼 걸 그랬네.” “그런 말 좀….” “뭐 애초에 놓은 것 같지도 않았지만… 지금 당장은 할 일에 집중하더라도 희망의 끈 하나 정도는 붙잡아 놓는 게 좋지 않습니까.” “…….” 아니나 다를까 은근슬쩍 희망을 품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이윽고 찾아온 김예리로 인해 조혜진의 얼굴이 환해진다. “혜진 언니.” “응?” “현성이 오빠가. 말할 게 좀 있다고 빨리 와보래.” “어… 정말?” ‘내가 뭐라고 말했니, 혜진아. 허겁지겁 뛰어가는 꼴 좀 봐라…. 키야, 관심이 없기는 개뿔.’ “그리고 아저씨.” “왜?” “내일 오빠가 시간 좀 내줄 수 있냐고 물어보고 오라는데. 여러 가지로 할 이야기가 있다고.” “무슨 이야기?” “중요한 이야기.” “무슨 중요한 이야기?” “나도 잘 몰라. 업무 볼 게 있는 것 같아서… 음, 그래서 부른 것 같아.” “음….” “그럼 난 전했으니까 바로 뒷정리하러 갈게.” “어, 수고해라.” “응, 아저씨도.” 관심 없다는 듯이 슬쩍 전방을 바라보자 김현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조혜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왜 갑자기 보자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뻔하지 않은가. 던전에서 있었던 일도 사과하고 싶고, 본인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슬슬 알려야 할 테니 빌드업에 들어가는 중일 것이다. 사실은 조금 오래전부터 각을 재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내가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준 게 유효했었나 보다. 던전에서 바깥 세계의 신을 봤으니 더 끌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했을 거고…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조혜진만큼이나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혜진아, 시바. 드디어 둘 다 행복해질 수 있겠다.’ # 542 회귀자 사용설명서 542화 진심 어린 사과(2) “오, 오, 오빠. 오늘 어디 나가세요?” “아, 현성 씨랑 같이 볼 업무가 좀 있을 것 같아서… 왜?” “아니요. 그냥….” “조금 급한 일인 것 같더라고… 나도 웬만하면 하얀이랑 같이 시간 좀 보내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았네.” “정, 정말요?” “그럼. 모처럼 거울 호수에 왔는데 덕구 말처럼 간만에 데이트 좀 하려고 했지. 이야기할 것도 많고… 둘이 시간 보낸 지 오래됐으니까. 아쉽게 됐네. 미안해. 대신 돌아오면 꼭 같이 돌아다니자.” “아, 아니요. 오늘은 저도… 시간이 없어서… 현성이 오빠가 시킨 일이 조금 많거든요. 다른 길드원들이랑 같이 거울 호수에 대한 보고서 작성하고 근처 던전이 있는지 수색 나가게 됐어요. 오빠만 명단에 빠, 빠진 것 같아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근처 던전?” “네. 추가 던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혹시 유입된 몬스터가 있는지도 확인해 봐야 하고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후처리할 일이 많은 것 같아서….” ‘김현성 이 새끼. 마음을 먹어도 단단히 먹었네….’ 굳이 다른 길드원에게 쓸데없는 업무를 맡긴 것을 보니 오늘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인 것 같았다. 길드 내에 있는 공략 후 조사팀에게 일을 맡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드원 전원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건 어떻게 봐도 노골적이었다. 물론 던전의 등급이 등급이니만큼, 길드 직원들에게 맡기기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길드원 전체를 임무에 투입하는 것은 여러모로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휴가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다. 덕분에 데이트가 예정되어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정하얀은 뜻밖의 방해를 받아버린 상황. 극대노까지는 아니지만, 충분히 중노로 분류할 수 있을 만한 사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긴 것을 보자, 확실히 납치 사건이 효과가 있기는 있었던 것 같았다. ‘얘가 기가 많이 죽기는 했어.’ 원래도 조금 소심한 성향이었지만 조금 더 소심해졌다.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고…. 더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이전과 변함이 없는지 마법에 미친 듯이 몰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때의 죄책감이 어디로 가겠는가. 어젯밤만 해도 악몽을 꿨다고 훌쩍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온 걸 보면 아직도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게 분명하리라. ‘덕분에 잠도 제대로 못 잤네, 시바.’ 중간에 깨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일어났을 때 상쾌한 느낌이 없다. 덕분에 얼굴도 엉망이고…. 슬그머니 거울을 바라보자 적당히 수척해진 것 같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괜찮기는 하다.’ 왠지 모르게 마음고생을 한 것 같은 효과를 불러오고 있었으니까. ‘적당적당히 하고 가자.’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을 애써 무시한 채로, 천천히 씻고 옷을 갈아입자 어느새 제법 시간이 지난 듯한 느낌. 길드원들은 나와 김현성이 이곳을 떠난 뒤에야 움직일 것 같았다. 다시 한번 거울을 본 이후에 항상 들고 다니던 무한의 가방을 바라봤지만, 오늘은 굳이 들고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녀석이 함께 있을 테니 안에 있는 포션을 사용할 일도 없을 거고, 무엇보다 네가 선물해 준 것 따위는 들고 가지 않을 거라는 액션을 선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방 안 들고 가세요?” “응, 전투가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아서… 어차피 안에 들어 있는 건 전부 연금 용품들이고.” “언, 언제쯤 돌아오세요?” “아마 오늘 안에는 돌아오지 않을까 싶은데…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어. 돌아오는 즉시 곧바로 데이트 나가면 되니까, 힘들더라도 조금 참아.” “나,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안 돼, 하얀아. 오늘은 중요한 날이야.’ 인류가 한 발자국 나아가느냐 마느냐가 달려 있거든. “다음에 가면 되지. 하얀이는 언제 나가려고?” “조,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가 갈래요.” “그럼 그렇게 해.” 마지막에는 꽈악 안기기까지. 인제 그만 떨어질 때가 됐다는 표현으로 살포시 밀어냈지만, 계속해서 힘을 주고 있는지 밀려나지 않는다. 오히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킁킁거리고 있는 모습은 이쪽을 당황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결국, 몇 분이 더 지난 이후에야 해방될 수 있었다. 혹여나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는 말이 나올까 싶어 황급히 로비로 나가자, 어색한 몸짓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현성의 얼굴이 가장 먼저 시야에 비쳤다. 평소와 다르게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 허리춤에 검이 달려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편한 복장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후줄근한 복장은 또 아니었는데 왠지 모르게 살짝 신경 쓴 것 같은 느낌이 낭낭했다. 전체적으로 딱딱한 느낌이라고 하는 게 맞으리라. ‘얘가 진짜 왜 이래….’ 이쪽에서 원인 제공을 하기야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굳어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경직된 돌덩이마냥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을 정도. 살살 풀어줄까 싶기도 했지만 양보할 생각은 없다. 후에 가서는 서서히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지만, 조금은 긴장감 있는 분위기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먼저 인사를 건네지 않는 것도 중요. 어색하게 손을 든 김현성의 얼굴이 보이기는 했지만, 살짝 허리를 굽힐 뿐 다른 리액션을 취하지는 않았다. “기영 씨.” “제가 좀 늦었나 보군요.” “아닙니다. 딱 시간에 맡게 나오셨습니다.” “오늘 뭐 할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로 상담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또… 사과드리고 싶은 부분도 있어서….” “아….” “혹시 바쁘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렇지는 않지만….” “…….” “…….” ‘아… 이 새끼 답답하고 불쌍해 보이네.’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물쭈물하는 모습은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보일 지경. 동공이 흔들리고 있는 얼굴은 누가 봐도 불안감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계속해서 차가운 모습을 보이고 싶었지만 이쯤 되면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럼 일단 나가시죠.” “아… 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폰을 데려왔는데….” “어디로 가는데 그리폰까지….” “그리 먼 곳은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마차로 가는 것보다는 더 빠를 테니까요.” “잘됐군요.” ‘그래, 이 새끼야. 어디로 가는지 한번 보자.’ 현재 육아를 하고 있는 화이트 폴 대신에 나와 있는 것은 이쪽이 선물로 준 검은색 그리폰이다. 앞뒤가 아니라 양옆에 탈 수 있는 안장을 올려놨었는데 마치 운전석과 조수석 같은 느낌이라 드라이브를 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녀석이 김현성을 발견하고는 총총걸음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 김현성은 녀석을 잠깐 쓰다듬은 이후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는데 확실히 그리폰을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녀석의 유일무이한 취미라고 할 만하다. 마치 질 좋은 소파에 앉은 것처럼 안장도 푹신하고 심지어는 벨트까지 달려 있지 않은가. 그리폰을 운전하는 모습 역시 수준 급. 갈기를 툭툭 치자 곧바로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녀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커 보였던 나무와 건물과 호수가 순식간에 작아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린델과 교국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 둘 중 한 곳으로 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도착한 곳은 대도시가 아닌 작은 소도시, 린델과 교국의 사이를 잇는 작은 소도시다. ‘소도시, 헤르엔?’ 딱 린델과 교국의 중간에 위치한 도시. 김현성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리 자주 들린 적이 없다. 위치가 좋다 보니 수도와 린델을 잇는 중간 지점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아니, 정확히 말하면…. ‘딱 중간 지점이라고 볼 수도 없지.’ 헤르엔을 들리기 위해서는 중간으로 살짝 빠져야 했으니까. 마차를 타도 귀찮아서 들리지 않는 마당에 그리폰을 가지고 있는 이쪽이 굳이 헤르엔에 머무를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나마 휴식이 필요한 중소 규모의 파티나, 수도로 대량의 보급품을 수출 수입하는 대형 길드들이 자주 애용하는 도시. 나름 작은 규모의 경매장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한 번 돌아가야 한다는 단점 때문인지 그마저도 잘 이용되지 않는 도시였다. 린델의 삼대 길드 중에서도 여성 길드원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검은 백조 말고는 내팽개치듯이 방관만 하고 있는 지역이라는 거다. ‘박연주한테 연락 좀 넣었나 보네.’ 김현성과 긴밀한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는 그분. 아무래도 수도는 너무 사람들이 많아 부담스러울 테니 그나마 소도시라고 분류할 수 있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그래, 나도 수도는 조금 그렇다.’ “헤르엔이로군요.” “네.” “…….” “그… 린델 복구 작업이 조금씩 늦어지기 시작하면서 헤르엔의 규모를 조금 더 늘리기로 했습니다. 기영 씨가 그… 방에서 쉬고 계실 때 추진하고 있던 작업이었고요. 길드원들이 모두 바빠서… 제가 조금 손을 보기는 했지만, 역시 도시 사업은 조금 불안한 감이 있어서 조언을 얻고자… 그러니까….” “아. 그런 일이라면 맡겨주셔도 됩니다. 김미영 팀장님에게 도움 좀 받으셨습니까?”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팀장님은 다른 쪽에서 일을 해주시고 계셔서 사실상….”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잘 알겠습니다. 괜찮겠네요. 빨리 보고 싶어요.” ‘좋은 핑계였어. 응.’ 본인이 생각해도 좋은 핑계라고 여겨졌는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이건 말 그대로 빌드업의 일환이다. 애초에 도시 사업을 내팽개치고 휴가를 갈 리가 없지 않은가. 이미 준비된 것은 물론, 시행 직전에 있는 상황이라고 하는 게 맞다. 딱 봐도 도시 자체가 어수선해 보였으니까…. 아마 도시 사업을 핑계 삼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려는 게 아닐까. 미리 가져온 서류를 살짝 이쪽으로 건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헤르엔의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한 장 한 장 문서를 읽어봤지만, 거슬리는 부분은 단 1㎜도 없다. “일단은 주거지가 문제라는 거네요.” “네. 수도에서 린델의 인구를 수용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포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한 상태니까요. 딱히 원성이 터져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수도 인구가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선택하신 지역에 거주지를 두는 게 괜찮을 것 같기는 하네요. 광장을 지금보다 더 넓힌다는 아이디어도 마음에 들고요. 하지만 역시….” “네, 아무래도 모험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사냥터까지는 제법 멀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어서 길드 자체에서 마차를 운용하기로 했습니다. 안 그래도 휴식을 위해 마차들이 자주 드나드는 장소이니만큼 시설을 굳이 새로 지을 필요도 없고요. 휴게소 같은 느낌으로 사용하기도 괜찮고… 파란 길드에서는 따로 보급품 상점을 유치할 것 같습니다. 포션도….” ‘그래, 형이 돈 좋아하는 거 아주 잘 아네. 속물이라 미안해. 그래도 기특하다, 이 새끼야.’ “포션 상점 역시 균열랜드 이후에 최대 규모가 될 것 같습니다. 조건만 주어진다면 실리아까지 이어질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이미 타 길드와 몇몇 투자자와도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괜찮네요.” 빈말로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괜찮다.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말이다. 소도시 하나를 거대한 휴게소로 사용한다는 발상도 괜찮고… 헤르엔 만의 아이덴티티를 살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돌아가는 게 귀찮아서 오고 싶지 않은 곳이라면 와서 머무르고 싶은 장소로 만들면 되지 않은가. 이 도시 사업은 그 조건에 완벽하게 들어맞고 있었다. 내가 제법 괜찮은 반응을 보이니 김현성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주 약간은 점수를 땄다는 걸 본인도 인지하고 있는 모습, 심지어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곧바로 말을 잇는 모습이다. “어떻습니까. 슬슬 시간인데 식사라도 하시면서….” “아, 네. 그러는 게 좋겠군요.” “예약한 곳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가시죠.” “네.” 시선을 계속 고정하고 있던 서류에서 천천히 눈을 뗀 것도 그즈음. 조금은 본격적으로 도시를 살펴보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뭐야… 왜들 이래.’ 말 그대로 사방에서.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 543 회귀자 사용설명서 543화 진심 어린 사과(3) 확실히 시선을 모을 상황이기는 했다. 파란의 길드마스터와 부길드마스터가 둘이서 헤르엔을 방문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교국 내에서의 녀석과 나의 인지도를 생각해 본다면 더욱더 그렇다. 혼자 왔어도 여기저기서 시선이 쏟아졌을 텐데 둘이 함께 모습을 드러내니 어떻겠는가. 동물원 원숭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보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힐끔거리게 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제는 익숙하기도 하고….’ 아니나 다를까 헤르엔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도 조금은 배려를 해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파란 길드가 현재 휴가 중이라는 소식은 매스컴을 통해서 들었을 테니 이곳에 들린 것 역시 휴가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평소라면 악수 한 번 해달라고 달라붙어 왔겠지만, 오늘만큼은 멀리서 바라볼 뿐 굳이 다가오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건 참 좋네. 이 동네 사람들도 마음에 들고….’ “휴가 중이라고 하지 않았어? 헤르엔에는 갑자기 왜 들르셨지?” “다른 길드원들은 어디간 거지? 두 분이서 오신 건가 봐. 이런 건 처음 아닌가?” “쉿.” 그 와중에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금방 잠잠해진다. 김현성 이 새끼는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감을 되찾은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중. 식당에 도착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 어! 어… 어? 어서오세요.” “김현성으로 예약했습니다.” “아! 아! 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두, 두 분 맞으시죠?” “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여기 가장 괜찮은 게….” “저희 레스토랑에서 추천드릴 수 있는 메뉴는….” ‘아, 이 새끼. 이거 자리도 테라스로 잡았네.’ 레스토랑 종업원은 예약한 김현성이 그 김현성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잔뜩 상기된 얼굴로 격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대충 알아서 시켜달라고 말하자, 김현성이 메뉴 초이스를 위해 종업원과 함께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뭐가 괜찮은지, 어떤 게 가장 맛있는 음식인지, 토론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몇 분 동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마치 중대한 계약을 앞둔 사업가의 표정이었다. 물론 이쪽은 바깥을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다. “싸우신 걸까?” “분위기가 조금 냉랭한 것 같지 않아? 아까부터 조금 그랬어. 분명히 뭔가 있는 거야.” ‘있긴 뭐가 있어, 이 여편네들아. 아, 이거 여기 앉으니까 컨셉질도 못하겠다.’ 내일 메스컴에서 파란 길드마스터와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불화설이 1면에 실리는 걸 보고 싶지는 않다. 김현성 이 새끼가 이걸 노린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까보다 한층 더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언론이야 차단할 수 있지만, 입소문도 조심해야 했으니까. “저는 이걸로… 기영 씨는….” “저도 같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 네. 그럼 그렇게 가져다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와인은….” “미리 준비해 달라고 요청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전달되지 않은 겁니까?” “아! 아뇨. 지금 확인… 아, 네. 준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확인한 이후에 가져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두 분 좋, 좋은 시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와인은 미리 준비하신 겁니까?” “네. 혹시 그레이브 그레이프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처음 들어보는 거 같은데….” “여기 헤르엔 지방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은 동굴이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곳에서만 수확되는 포도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 레스토랑에서만 판매한다고 하더군요. 그 동굴이 발견된 게 딱 150년 전인데 그 당시 처음 발효시킨 와인을 구할 수 있다고 해서 미리 부탁드렸습니다.” “흥미롭네요. 혹시나 안에 던전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미 몇 차례 조사팀을 보냈지만, 그런 정황은 발견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거울 호수와는 조금 다른 케이스겠죠.” “으음….” “저… 그보다 기영 씨.” “네?” “일단은 감사의 인사를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네?” “차원의 바다에서 구한 아이템….” “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현성 씨가 아니면 쓸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정확히 말하면 제가 드린 것도 아니니….” “그래도 넘겨주신 팬던트는 잘 보관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저한테 감사할 필요 없다니까요.” “그… 리고 그… 바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사과를… 기영 씨는 너무 불편하시고 갑작스러우셨겠지만, 제가 그 반지를 기영 씨에게 드리려고 한 건 어디까지나….” ‘이 새끼는 시바, 뭐 갑자기 여기서 진지하게 분위기 잡고 난리야.’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 무척 긴장했는지 마력으로 소리를 차단하는 것도 깜빡 하신 것 같다. 서둘러 마력으로 덮기는 했지만… 훔쳐 듣는 귀가 있었다면 아마 좀금 전 말을 듣지 않았을까.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귓속말을 하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와, 진짜. 이기연 때도 느끼기는 했지만 얘는 진짜….’ 타이밍도 잡을지 모르고 분위기도 파악할 줄 모른다. 1회차에 어떻게 대인 관계를 유지했을지 의심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파란 길드원들이 우연히 발견한 던전에서 아이템 분배 문제 때문에 갈등이 있었다는 헛소문은 이미 퍼지기 일보 직전, 아니, 벌써 퍼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쪽의 목소리가 바깥까지 들리지 않겠지만, 아마 갤러리들은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부풀리며 재생산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 이 분위기도 그래.’ 소리를 차단한다고 해서 분위기까지 차단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곳 레스토랑에 있는 다른 이들이나 주변에서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이 거지 같은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 나 역시 사과를 받고, 슬슬 좋은 분위로 향하는 걸 원하고 있었지만, 일단은 재빠르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하고 싶지 않네요.” “아… 네.” 김현성 1차 시도 실패. 하지만 재빠르게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시에는 저도 조금 말이 심했던 것 같았고요. 굳이 이런 자리에서 언급하실 필요 없어요. 마침 주문한 것도 오고 있고요.” “하지만… 네, 그렇죠. 네, 제가 조금 성급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풀 죽은 표정 하지 마. 사람들 수군거려, 이 새끼야.’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확실히 와인 맛이 괜찮을 것 같아서 정말로 기대되네요. 좋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렇게 계속 밝은 표정 유지해라.’ “네, 최근에 마신 것 중에서는 가장 괜찮은 것 같습니다. 사실 몸이 안 좋아서 그렇게 많이도 마시지도 못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훌륭한 것 같네요. 맛있어요, 정말로.”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식사한 뒤에는 조금 더 둘러보고 돌아가는 겁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아직 들러야 할 곳이 남아 있어서… 경매장도 들러야 하고….” “뭐 들어온 거라도… 제가 알기로 이곳 경매장은… 아!” “네. 현재 교국 사정 때문에 그나마 이곳에 있는 경매장이 가장 규모가 크고 물건도 가장 많이 들어올 겁니다. 제 입으로 먼저 이야기 드려도 되지만, 아이템의 답례를 드리고 싶어서… 기대하셔도 될 겁니다.” ‘샤넬리아 에르메스 시리즈, 또 발견됐나 보네.’ 잔뜩 기대하라는 표정이었지만, 그다지 기대가 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최근에 발견된 놈들은 별다른 기능이 없는, 그놈이 그놈인 녀석들이었고, 디자인 자체도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까. 김현성이 가장 처음에 선물한 무한의 가방 같은 종류도 이미 전시장에 넘치고 넘친다. 그나마 의의가 있는 건 빈 장식장에 들어갈 수 있는 놈을 찾을 수 있다는 것 하나. 그래도 일단 기대된다는 표정 정도는 보여주자. 주변 갤러리들의 분위기도 조금 환기해야 했으니까. 계속 애매한 분위기를 잡고 있을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해 최대한 밝은 모습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굳이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피어나기는 한다. 레스토랑 안에 있는 셰프가 혼을 갈아 넣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메인도 완벽하고 와인도 완벽하다. 저 종업원도 서비스가 확실하고…. 마치 린델이나 교국에 있는 최고급 레스토랑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좋아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어느새 평소와 같이 대화를 나누게 된다. 뭐, 사업 이야기부터 길드 내 이야기. 평소 김현성과 하던 잡담으로 1시간 정도를 보내자, 식사가 끝난 이후 경매장 안으로 들어와 있었고, 별 기대 하지 않았던 것과 다르게 괜찮은 기능의 컬렉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상승의 가방-전설 등급] [전설적인 사냥꾼이자 가죽 세공의 장인, 샤넬리아 에르메스가 수 세기 전에 만들어놓은 가방 시리즈 중에서도 역작으로 불리는 작품입니다. 정체불명의 가죽을 장인이 직접 마감한 이 가방은 모험가를 위해 만들어진 만큼 편한 것은 물론, 방어구와도 같은 내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보관 확장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가방 안에 보관하고 있는 물품은 일정 시간이 지난 이후, 페널티 없이 등급이 상승합니다. 등급을 상승시킬 수 없는 경우 아이템 효과를 올려줍니다. 마력 스텟을 3 올려주는 부가 기능이 있습니다.] ‘개 씨바….’ 무한의 가방처럼 공간이 넓지는 않지만, 가방 안에 보관하고 있는 물품의 등급을 상승시켜 주는 가방이란다. ‘씨바, 이거 못 봤으면 어쩔 뻔했어.’ 물론 준신화 등급의 빛 폭탄 물약을 상승시켜 신화 등급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겠지만 그게 어딘가. 전설 등급의 용 숨결 물약의 효과를 아주 조금만 더 올릴 수 있다고 가정해도 그 가치가 차고 넘친다. 촉매나 다른 영웅 등급의 물약들 역시 마찬가지. 용도에 따라서 그 쓰임새가 무궁무진하다. ‘전설 등급 중에서도….’ 최상위라고 분류할 수 있는 아이템. 어느 정도 아이템 욕심에 초탈해 있었지만, 저 정도라면 눈이 돌아갈 만하지 않은가. ‘다른 직군도 충분히 쓸 만한 가방이야.’ 이를테면 화살을 보관하는 궁수, 독을 보관하고 싶은 암살자, 나처럼 생산에 몸을 담고 있는 모든 직군. 굳이 김현성이 아니더라도 내가 내 돈을 털어서 구입할 기분이 들 만한 퀄리티였다. ‘시바… 가방, 괜히 안 들고 왔네.’ 현금은 모조리 그쪽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제발 김현성이 저걸 구입할 만한 현금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초조한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곧바로 사회자는 본격적으로 경매를 진행하기 시작. 확실히 초장부터 붙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지금 보니 같은 교국 8좌에 자리한 궁수도 눈에 보였고, 어디서 돈깨나 있다고 하는 놈들은 죄다 집결해 있는 상태. 김현성과 내가 있는 걸 보고는 제법 초조한 표정을 보내오고 있었는데, 열정적으로 팻말을 들어 올리며 가격 경쟁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점점 더 불어나는 가격에 김현성의 얼굴에도 초조함이 서린다. 아마 본인이 예상했던 금액을 훨씬 웃돌거나 가져온 현금이 아슬아슬 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경매장에서는 가져온 금액으로만 경매에 참가할 수 있으니까. 김현성도 계속해서 팻말을 들어 올리고 미친 듯이 튀어나가기 시작하는 가방의 가격은 이미 한화 50억을 돌파하고 있었다. ‘바람잡이 새끼들, 시바.’ 작전 경매의 일환인지 일부로 가격을 계속 높이는 놈들도 눈에 보인다. “5만 골드입니다. 더 이상 없으십니까?” “…….” “네. 23번 참가자분께서 6만 골드.” ‘현성아, 너 시바 큰 거 몇십 장 정도는 들고 다니지?’ “11번 참가자분께서 30만 골드….” ‘너무 올랐는데… 하….’ 점점 더 초조해지는 내 얼굴을 봤는지, 김현성은 단호하게 팻말을 들어 올렸고 “아… 네, 28번 참가자분께서 100만… 골드… 100만 골드로… 더 이상 없으시면 낙찰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내는 조용해졌다. 아무리 괜찮은 아이템이라고는 하나 현실적이지는 않은 가격. ‘김현성… 너 이 새끼….’ 마음속에 남아 있었던 작은 앙금이 사르르 녹는 듯한 기분, 역시나 진심을 담은 사과는 언제나 통하는 법이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 544 회귀자 사용설명서 544화 고백(1) ‘크으으으.’ “괜찮습니다. 이건 너무….” “꼭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과의 의미도 있고 여러 가지로 기영 씨에게 필요한 물건일 테니까요.” ‘아니, 이 사람이 내가 이런 거로 흔들릴 사람인 줄 아는가! 다시 넣어두게. 허허, 거 참….’ “하지만….” “꼭 필요하실 겁니다. 펜던트의 답례이기도 하니 너무 마음에 두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어쩔 수가 없구만, 크흠.’ 내가 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선물이라는 건 언제 받아도 기분 좋은 법이다. 별 쓸모없는 물건을 받아도 그러할진대 가치 있는 물건을 받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흥얼흥얼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 맨 처음 무한의 가방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인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차원의 바다에서 봤던 귀걸이나 묘약보다 훨씬 내게 적합한 아이템. 적어도 나에게는 현기트나 트윈 헤드 하얀기영이 되는 것보다는 이 상승의 가방이 가치가 더 높다. ‘마이 프레셔스….’ 마치 나를 위해서 만들어진 아이템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김현성 역시 내 몸이 달아올라 있다는 걸 눈치채지 않았을까. 경매장에서 구입한 아이템을 그 자리에서 받은 것만 해도 녀석이 얼마나 저걸 주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경매장 관리인들도 많이 당황했겠네.’ 낙찰 이후에 배달해 주는 서비스를 받는 게 보통이었지만 기다릴 여유가 없다고 느낀 모양이다. ‘이래서 오자고 했고만.’ 제발 받아줬으면 좋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 한국인의 미덕으로 삼 세 번 정도의 거절을 한 이후에는 결국 슬그머니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감사합니다.” ‘네가 왜 감사하냐. 내가 더 감사하지….’ 선물을 받은 놈보다 선물을 준 놈이 더 감사해하는 초유의 상황. 오늘 무한의 가방을 메고 오지 않아 조금은 어색했던 손과 허리가 비로소 완전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샤넬리아 에르메스, 이 양반이 무한의 가방을 내놓은 이후에 완성한 작품이라 추정되는 물건이었기 때문인지 심지어 디자인 자체도 더 고풍스럽다. 괜스레 툭툭 새로운 신상을 두드려보자 그제야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 같은 기분. 무한의 가방에 비해 수납 공간이 무척 좁을 거로 생각했지만, 간이 연금 키트 정도는 들어갈 정도로 넓다. ‘연금 키트도 업그레이드할 수 있겠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숨기고 싶었지만 숨길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계속해서 튀어나오려는 웃음소리에 김현성 이 새끼는 성공했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분명히 사람 마음을 돈과 선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타입은 아니었던 거로 기억했는데…. 녀석도 거친 세상을 살아가다 보니 느낀 게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탐욕스러운 모습은 빛기영과 어울리지 않은 것 같기는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후, 선물의 가격보다는 마음이 전해져서 기분이 좋았다는 말로 버무리면 고개를 사정없이 끄덕일 게 분명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라도 어떤 놈이 가방에 손을 댈까 품에 안은 채로 길을 걷는 중. 이미 날이 어두컴컴해졌지만, 김현성은 아직도 돌아갈 생각이 없다.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이번에는 반드시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나 역시 조금은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해, 시바. 마음 단단히 먹은 거야.’ 생각해 보면 그동안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이쪽이 먼저 슬쩍 떠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느낄 정도로 김현성의 고백 타이밍은 계속해서 늦어져만 왔다. 녀석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후, 뭐라도 깎는 노인처럼 조심스럽게 접근했었던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일일 연속극 드라마처럼 서로가 엇갈리기가 수십 번. 박덕구의 등장과 계속해서 터지는 사건 그리고 PTSD를 앓고 있는 김현성 본인의 문제로 인해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원래 이런 데서는 계속 참는 놈이 이기는 거야.’ 먼저 애가 타서 섣부르게 달려들었다가는 나가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게 정설.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를 취하고 있는 김현성이 얼마나 떨리고 있을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술에 취하지도 않은 녀석이지만 술기운을 빌어서라도 말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 회귀자가 호텔 바로 장소를 옮긴 거고…. 앞서 일어났던 이벤트는 모두가 빌드업이었고 지금부터 일어날 일이 진짜라는 걸 아는지 긴장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다른 대화를 나누면서도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동공, 떨리는 입술. 뭘 상상하는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마 내가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더 힘든 상황이지 않을까. ‘만약에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한 거고, 만약 믿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을까 무서워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김현성이 다른 마음을 먹고 이기영에게 접근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내 마음속에 피어나는 상황을 가정하면 아마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으리라. 다른 것도 아니라 무려 회귀다. 지금의 인생이 2회 차란다. 별별 거지 같은 일이 모두 벌어지는 이 대륙에서도 믿기 힘든 이야기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누가 저딴 소리를 해온다면 미친놈이라 매도하며 돌을 던지지 않을까. 물론 나는 이미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김현성은 숨도 못 쉴 정도의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살짝 도와줘야겠네.’ 마력으로 모든 소리가 차단된 장소에서 슬그머니 입을 열자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네? 아뇨. 아니… 그러니까.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말입니다. 제가 오해했다면 죄송하지만.”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고 싶은 말이 있기는 있지만. 네. 일단은 아까 식당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먼저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거 말고, 이 새끼야.’ 빠른 민첩만큼 회피력도 높다.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저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부분이었고요. 그러한 제 태도가 기영 씨에게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질 거라고는 정말로 상상하지 못했었습니다.” “…….” “기영 씨를 믿지 못하는 건 결단코 아닙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믿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현재 기영 씨의 상태가 너무 걱정돼서 제가 그만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 “기영 씨를 믿지 못해서 가둬둔 것도 아니었고요. 오해할 만하신 상황이지만 제 모든 걸 걸고 말씀드리건대 기영 씨가 상상하시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외부로부터 기영 씨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지, 기영 씨로부터 외부를 보호하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말은 좀 와닿는다. 형 감동했다, 현성아.’ “저를 이렇게 믿어주셨는데 같은 믿음을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이렇게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꼭 제 사과를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곧바로 말을 꺼내오지는 못하고 슬쩍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별개로 이번 사과의 내용은 나쁘지 않다. 상승의 가방으로 인해 풀렸던 마음이 한 번 더 김현성에게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전해졌을까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듯한 모습. 마치 형벌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김현성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은 해줘야죠.’ “아니요. 저도 죄송합니다.” “아.”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으시다는 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오히려 제가 조금 더 죄송해지네요.” “아니요. 무조건 제 잘못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조금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 “이전에도 한 번 그런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아서…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공화국과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 거리를 조금 두고 있었던 적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너 이 새끼야. 너 그랬었잖아. 그래서 내가 시바, 연방으로 갈까 말까, 생쇼 했던 거였고.’ “그건….” 물론 김현성의 잘못이라고는 볼 수 없다. 굳이 콕 짚으라면 놈의 잘못이 맞기는 하지만 PTSD 발작으로 인해 생긴 문제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마음속에서 켕기는 게 없을 리 만무.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이 제법 재미있었다. “잠, 잠깐 그랬던 적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네. 물론 지금의 현성 씨에게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에는 조금 섭섭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연방으로 이적하는 걸 고려해 봤을 정도로요.” ‘현성아, 표정 풀어라.’ “아마 그것 때문에 차원의 바다에서도 조금 더 민감하게 반응했었던 것 같습니다. 저야말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순한 화풀이였던 것 같습니다.” “아뇨. 이건 제 잘못….” “죄송합니다.” 미안하다는 놈 앞에서 더 미안하다고 사과하기. 이것보다 더 민망한 상황도 찾아보기 힘들다. 안절부절못하는 김현성의 모습이 조금 가슴 아프기야 하지만 일이 전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이 포지션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렇게 사과하시면 제가 너무 난처합니다. 당시에 분명히… 거리를 뒀었던 건… 네, 그… 사실… 이지만… 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은 그 누구보다 신뢰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입 열자.’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옛날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 같아서 저도 조금 민망….” “아니요! 아니. 옛날이야기를 꺼내자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어째서 전에 그런 생각을 했을까 후회가… 네, 실제로 후회하기도 했고요. 얼마나 제가 멍청한 생각을 했었는지, 얼마나 제가 어리석었는지 기영 씨가 없는 동안 많이 생각하고 후회했습니다.” “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당신을 믿고 신뢰하고 있어요. 당신이 저를 신뢰하고 믿어주시는 만큼 저도 기영 씨를 믿고 있습니다. 저도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제가 기영 씨를 그 누구보다 믿고 있다는 겁니다.” 너무 훌륭한 자세에 기립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 대화가 얼마 시작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이렇게까지 빨리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감정이 격해져 있는 모습이다. 정확히 뭐라고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아마 무의식 세계에서 나와 만났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때의 빛기영이 보여줬던 모습은 말 그대로 믿음의 정석이었으니까. ‘믿기영이었지. 아암, 그렇고말고.’ 어떤 말을 꺼내야 이 기나긴 줄다리기를 끝낼 수 있을지 대충이지만 예상이 가기 시작했다. 그때와 같다. 김현성이 무의식 세계에 갇혔을 때를 떠올리고 있다면 당시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주면 되겠지, 뭐. 마지막에 헤어질 때 보여줬던 미소를 그대로 선보이도록 하자. 대사도 똑같은 거로 준비하고. “어째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혼자서 너무 많은 걸 짊어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 너무 초조해 보여.’ “그리고.” “…….” “저도 믿고 있습니다.” # 545 회귀자 사용설명서 545화 고백(2) ‘이건 됐다. 이건 무조건 됐어.’ 조금 불안해 보였던 녀석의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순간 속으로는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이 무척 감동한 것 같은 얼굴을 내보인 것은 당연지사, 다른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긴가민가하던 얼굴에 어느새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지금 김현성이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된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와인을 홀짝였다. 무의식 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김현성뿐이다. 아쉽게도 우리 빛기영 님께서는 후유증을 겪은 나머지, 그 아름답고 따뜻했던 장면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 당시에 김현성의 감정을 흔들어 버린 대사를 이곳에서 한 번 더 내뱉는 드라마틱한 전개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마치 처음 내뱉는 듯한 얼굴과 표정으로. 감동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옳다. 비록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마음만은 똑같은 거라고, 이 사람은 확실하게 나를 믿고 있다고, 이 새끼뿐이라고,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죄책감이 한 번 더 녀석의 멘탈을 뒤흔들 거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말해야 돼. 고백해야 돼.’ 라거나. ‘더 이상 숨기는 건 기영 씨를 배신하는 짓이야. 오늘, 지금 당장 고백해야 돼.’ 라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는 것 같은 얼굴을 보는 것은 즐겁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악취미 같았지만 모든 걸 바쳐 키워온 열매를 수확하게 됐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단언컨대 현재 김현성의 상태는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이요, 존버 없는 비트 코인러. 더 이상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건 남아 있지 않다. 아마 그 누구보다 본인이 말하고 싶은 걸 참기 힘들어하지 않을까. ‘무장 해제. 무장 해제.’ “네… 그랬었죠. 기영 씨는… 네. 항상… 네.” “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래, 현성아. 시바, 그렇게 가는 거야.’ “잠시… 잠깐만 함께 가줬으면 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왔다. 왔드아!’ “어디를….” “조금 갑작스러우시겠지만, 꼭 함께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도 있고요.” “…….” 뒤돌아가기는 없지만, 긴장한 것 같은 모양새. 말끝이 조금 떨리는 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일어서자 녀석도 계산 후 슬쩍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니 어느새 어두워진 헤르엔을 눈앞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곳곳에 야명주가 길을 밝히고는 있었지만 린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거리. 덕분에 하늘 위에 무심하게 떠 있는 별이 더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왔다. 분위기도 좋으니 잔잔한 음악이나 좀 깔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디로 향하는 겁니까?”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 ‘얘, 옛날에도 이쪽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나.’ 도시 바깥으로 몸을 옮기고는 있지만 린델로 향하는 것 같지는 않다. 가장 많은 추억이 담겨 있는 장소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 말고도 준비된 장소가 있는 모양. ‘이 새끼 시간 끄는 건 아니지?’ 그렇지는 않다. 걸음걸이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는 걸 보면 아직도 무서워하는 것 같았지만, 김현성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천천히 빌드업을 하는 모습,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여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모… 르고 계셨겠지만, 사실 기영 씨에게 사과드려야 할 일이 하나가 더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 이외에 다른 이유로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잘…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믿지 못하실 겁니다. 깜짝 놀라실 수도 있고요. 어쩌면 저에게 실망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 모든 걸 걸고 말씀드리건대, 제가 이 사실을 숨긴 것은 절대로 기영 씨에게 다른 뜻이 있거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래. 다 이해해 줄 수 있다, 현성아. 내가 너를 이해하지 누가 너를 이해하겠어. 그리고 형은 다 믿을 수 있다, 인마. 다 믿어줄게.’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너무… 그리고 숨기신 일이라니… 굳이 그런 걸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게 모든 걸 공유할 필요도 없고요. 현성 씨가 개인의 문제를 숨긴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 역시 말씀드리기 곤란한 일들 몇 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습….”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네,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다면… 기영 씨가 말하기 곤란한 일과는… 종류가 조금 다를 겁니다.” ‘내가 숨기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넌 아마 기절할 거다….’ “부디 당황하지 마시고 차분히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빨리 이야기해. 빨리.’ 이윽고 녀석과 함께 도착한 곳은 작은 집, 한 가족이 겨우 살 수 있을 것 같은 집이었다. 헤르엔 근교에 있는 작은 마을, 그곳에서도 조금 떨어져 있는 집을 보니 어째서 김현성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 있었네.’ 시기가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은 이 장소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숨어 살기라도 했었나?’ 어차피 곧 듣게 될 테니 추측할 필요도 없다. 김현성은 제법 굳은 얼굴로 오래된 집의 문을 열었다. 오랜 시간 사람이 살지 않은 것치고는 말끔하게 정리된 것 같은 장내. 녀석은 아무 말 없이 집 안으로 먼저 들어가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떨리는 손과 얼굴 그리고 입. 그러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간단하게 마실 수 있는 차를 준비한다. 그 모습이 생소하다. 벽난로의 불을 때우고 야명주가 없는 집 안을 밝힐 초를 켠다. 전체적으로 산만하게 움직이는 게 눈에 밟힌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와서 포기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도움을 줄까 싶었지만, 별다른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괜찮은 집이네요, 여기는….” “예전에 잠깐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네?” “몇 개월. 잘은 기억이 안 납니다만, 딱 그 정도 살았던 거로… 기억합니다.” “…….” 의문스러운 표정을 띄우는 것은 당연했다. 이곳에 들어온 이래로 김현성과 나는 단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서로 해결해야 할 업무를 위해 떨어져 있던 적은 있지만, 그렇게까지 긴 시간을 떨어져 지낸 기억은 없다. 놀란 표정을 보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는 찰나,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달라는 김현성의 표정은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계속 듣는 게 맞지.’ 이제야 풀기 시작한 이야기보따리를 다시 묶을 정도로 나는 어리석지 않다. 그런 내 반응을 본 김현성 역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는 마찬가지,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에 다시금 말을 이었다. 다짜고짜 회귀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김현성을 생각해 보면 조금 의외라고 할 수 있는 튜토리얼 던전 때의 이야기였다. “저는 조금 못난 사람이었습니다.” “…….” “튜… 튜토리얼 던전에서도….” “…….” “싸우지 않았고… 그저 몬스터들을 피해 다니기 바빴습니다. 당시에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봤고 도와달라고 말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도망쳤습니다.” “무슨 말씀을….” “제가 버리고 온 이들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할 수도 없… 없습니다. 그저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서 고의로 다른 이들의 죽음을 바라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적도 있었습니다. 벽 하나를 두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을 들으며, 나는 살았다고, 살아남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게 몇 번인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의외네.’ 무척 의외다. ‘그게 마음속에 남았던 건가?’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김현성이 사람 좋은 것은 맞지만, 무골호인은 아니다. 무조건 퍼주는 성격은 더욱더 아니었고…. 지옥 같았던 1회 차에서 살아남고 본의 아니게 다시 시작해야 했던 녀석의 인간성이나 감정이 마모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실제로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감정은 빛기영의 빛을 쐬기 전까지는 상당히 마모된 상태였었다. 필요하다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개의치 않았고, 도덕적 잣대보다는 개인과 파티의 이득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성격이었다. ‘이해가 안 되기는 했지.’ 아직 빛을 쐬기 전이었던 2회 차 초반의 김현성이 어째서 쓸모없는 놈들을 모아놓고 생존캠프 놀이를 했는지. 왜 굳이 생존자들을 구하러 다녔던 건지. 정하얀이나 살인마 정진호를 찾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1회 차의 영향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사람들을 이끌고 던전을 공략한 게 아니라.’ 계속해서 도망치고, 도망치고 또 도망쳤었다. 어째서 이곳에 떨어졌는지 이유도 모른 채로 살아남아야 했던 평범한 20대가 보여줄 수 있는 반응이다. 검을 든 순간 몬스터들을 도륙 내며 ‘어이, 이게 내 숨겨진 힘이다’라고 지껄이는 것보다는 설득력 있다. ‘이거 재미있네.’ 무척 재미있다. 김현성이 1회 차의 튜토리얼 던전에서 본의 아니게 죽음으로 내몬 사람 중에 나와 박덕구가 포함되어 있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운이 좋아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무척 힘들었던 거로 기억합니다.” “현성 씨. 죄송합니다만… 어떤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분명히 현성 씨는….” “네, 파티원들과 함께 튜토리얼 던전에서 공략조로 참여했었죠. 하지만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 “혹시 시, 실, 실망하셨습니까.” “아니요. 잘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게 일반적인 반응일 테니까요.” ‘내가 피해자였으면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행이군요.” 조금은 안심한 듯한 얼굴, 김현성이 고민한 것 중에는 이런 부분도 포함되어 있었나 보다. ‘형 앞에서는 착하게 보이고 싶었어? 우쭈쭈.’ “그보다… 이전이라고 하면 도대체 언제… 인지. 혹시 튜토리얼 던전을 두 번 경험하신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두 번 경험한 것이 맞지만, 기영 씨가 생각하는 형태가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는….” “…….” “저는 기영 씨를 만나기 전에 이 세상을 한 번 더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다.” “…….” “…….” “…….” “저는 회귀자입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진다. 하지만 섬세한 표정 연기를 잊을 리가 없다.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김현성을 바라본다. 회귀자의 눈은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말을 믿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은 표정, 무슨 표정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김현성은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일반인의 관점에서 녀석이 미래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황을 되짚어보고 있었으니까. 이다음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 그다음은 김현성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반응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내 표정을 바라보며. 우리 회귀자는. 덜덜덜 손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저는… 저는 회귀자입니다.” # 546 회귀자 사용설명서 546화 고백(3) “저는… 저는 회귀자입니다.” “…….” ‘얘는 왜 이렇게 손을 떨고 그래. 수전증 같은 건 없었는데.’ 계속해서 느끼고 있었지만,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의 표정이 이러할까. 지금 자신이 제대로 된 선택을 한 건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 않을까. 녀석의 말을 들은 직후 나는 약 10여 분이 넘는 시간 동안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행동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그만큼 김현성은 더욱더 초조해했다. 어차피 녀석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건 확정된 이야기였지만, 기왕이면 조금 더 뜸을 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저는 회귀자입니다.’ 크으. ‘저는 회귀자입니다.’ 어우야. 다시 들어도 듣기 좋은 달달한 목소리. 저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에게 보내는 소심한 복수였다. 물론 곧바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이런 형태로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는 게 더 극적이라고 판단한 이유가 가장 컸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심한 복수가 달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무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거나 매도하는 생소한 취미를 가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다 될 정도. 점점 더 안 좋아지는 표정을 볼수록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아, 그러셨군요. 회귀자셨군요. 어쩐지 여러모로 이상한 점이 많았습니다, 하하하. 그럼 지금부터 모든 일이 잘 풀리겠군요. 대단합니다. 역시 현성 씨예요’라는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겠지만, 녀석에게도 지금 내가 보여주는 반응은 상상하던 반응 중 최악의 반응이었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가까이에 다가오려고 하는 모습이 보인다. 너무 놀란 것 같다고 생각해 어떻게든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한 거겠지. ‘사실은 농담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고민하지 않았을까. 계속해서 곰곰이 녀석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와중에 이쪽으로 다가온 김현성이 살짝 내 어깨를 붙잡기 시작. 한 번 골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어깨에 올려진 손을 탁 하고 쳐내자 짧은 탄식이 들려왔다. 김현성의 반응을 지켜보기 위해 눈알을 돌려 얼굴을 확인하자 시야에 비친 것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표정. ‘시발… 이거 더 이상 놀리면 진짜 안 되겠다.’ 모든 걸 잃은 것 같은 얼굴, 무의식 세계에서 녀석의 얼굴보다 더욱더 푸르죽죽하다. 분명히 한순간 동공이 죽은 걸 목격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목이라도 매달 것 같은 얼굴이라 말하는 게 맞으리라. ‘무슨 장난도 못 치겠네.’ 다시금 무의식 세계로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저 뒷문을 향해 도망치기 전에 급하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 죄송합니다. 조금 깜짝 놀라서.” “아니요. 저… 저야말로… 저야… 네… 저야… 말로….” 잠깐 정하얀으로 변한 것 같은 말투,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와 겁먹은 듯한 얼굴. 지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를 거다. 반사적으로 입을 열고는 있지만 이미 혼이 나가 있다. 물론 녀석이 다시금 정신을 차린 것은 순식간, 멘탈 측면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성장한 김현성은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듯 급하게 말을 이었다. “믿으실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당황스럽고 많이 놀라셨을 겁니다. 하지만 제 모든 걸 걸고 말씀드리건대 결코 처음부터 기영 씨를 속일 의도는 없었습니다. 매번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힘드실 거로 생각했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니다, 현성아. 내가 왜 불쾌하겠어. 기분 좋아. 표정 풀어라.’ “…….” “정말… 정말입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네, 네. 전부 대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전부요.” “만약 정말로 현성 씨가 이 전에 이 세상을 겪어본 게 맞다면….” “네.” “혹시 이 전에도 저와 현성 씨가 함께 행동했던 겁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영 씨는 1회 차에서….” “그렇다면… 혹시 튜토리얼 던전에서… 제게 접근하신 이유가 따로….” “아니요!!!”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 단언컨대 김현성 인생 최대의 목소리라고 말할 수 있다. 김현성 본인도 자기 목소리에 놀란 얼굴이었지만 일단은 변명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내가 걱정하는 부분이 뭔지 눈치챘을 테니 급하게 말을 잇는 게 당연하겠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 접근한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우연히.” ‘그래, 그렇지. 너 그때 하얀이 찾으러 왔었잖아.’ “정말로 우연히 만났습니다. 이전 회차에서는 기영 씨와 접점이라고 할 게 없었습니다. 기영 씨와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절대로, 절대로 제 목숨을 걸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다수의 문장을 말하는 데 2초도 걸리지 않았다는 것에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일단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의도적으로 김현성에게 접근했다는 걸 숨기고 하고 싶어 하는 만큼, 녀석도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바라지 않을 거다. 1회 차에 어떤 접점이 있어 2회 차에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건 아무리 이유가 있다고 한들, 그렇게 반길 상황은 아니다. 서로 신뢰하고 있다면 더욱더. 굉장히 어려운 질문을 마치고 의문이 풀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김현성은 긴장해 있다. “믿겠습니다.” “네?” “믿을 수 있습니다.” “정말로….” “네, 허투루 이런 말씀을 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숨기고 계셨다면 나름의 이유가 있으셨던 거로 생각하겠습니다. 물론 조금 놀라고 섭섭하기는 했습니다만, 아니, 조금이라고 하기에는 제가 너무 못난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하지만 진심입니다. 저는 현성 씨를 신뢰하고 있어요.” ‘아이고, 우리 현성이 감동했네. 현성아, 왜 이렇게 감동했어.’ “어째서 기영 씨는… 그렇게 쉽게… 수긍하실 수 있으신 겁니까.” ‘쉽지는 않았지. 현성아. 쿨타임 조금 길었잖아.’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시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믿는다고 항상 말씀드리기도 했고요. 아무튼, 이제야 조금 의문이 풀리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처음 봤을 때는 특히 신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전부 다 이유가 있었군요. 설명이 되지 않은 몇 가지 행동들도요. 갑자기 예리를 데리고 오거나 혜진 씨를 영입하려고 했던 것 역시.” “네, 혜진 씨와는 이전에 함께 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리도 마찬가지고요.” “튜토리얼 던전에서 만난 건 정말로 우연이었군요.” “네, 사실은 하얀 씨를 찾으려고 했습니다만… 기영 씨와 덕구 씨가 거기에 계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 더욱더요.” “저희는….” “정확히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이전에는 튜토리얼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했거나 아예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셨을 겁니다. 어쩌면 던전에서 죽었을 수도 있고요. 어, 어쩌면 제가 버렸던 사람 중에 하, 하나였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네?” “튜토리얼 던전에서 맨 처음 몬스터들이 들이닥쳤을 때.” “네.” “제 목숨을 현성 씨가 구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아마 그때 현성 씨가 아니었다면 덕구와 저 모두 그곳에서 죽었을 확률이 높을 겁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현성 씨가 튜토리얼 던전에서 도망 다녔다면 제 목숨을 구해주시지 못하셨겠죠. 항상 감사하고 있었지만, 조금 더 감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목숨은….” “네.” “현성 씨가 구해주신 목숨이로군요.” “아….” ‘이 새끼 제대로 감동했다. 이거 조금만 더 하면 울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닌 대사였지만, 이 몇십 분 동안 생과 사를 오갔던 녀석에게는 다른 의미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기는 하지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할 일이 더 많을 겁니다. 그,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전에….” “죄책감 느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약 1회차에서 현성 씨가 저를 내버려 두고 도망갔다고 한들, 그건 현성 씨 잘못이 아니에요. 저 역시 튜토리얼 던전에서 많은 이들의 죽음을 바라본 건 똑같습니다. 몬스터에게 잡아먹히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했었고,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절대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에요.” “…….” “만약 그게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신다면….” “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도 우습지만… 당시에 현성 씨가 저를 버리고 가신 걸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 “기영 씨….” ‘얘, 진짜 울겠다.’ 누가 이놈을 처음 만났을 때의 얼음덩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어떻게 봐도 흐물흐물 녹아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감동의 바다에 빠져 더 이상 헤어나오지 못하기 전에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 봐야겠다. “그래서. 어째서 이걸 말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계속… 계속 마음에 걸렸던 일이었으니까요. 물론 이유가 없는 건 아니지만 들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커다란 짐이기도 했고요. 지금은 짐을 조금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 “조금은 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밤새도록 깨어 있겠군요.” “하루 안에 끝날 이야기가 아니니…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천천히 말씀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는 시간이 많으니까요. 종종 이런 시간을 보낼 때마다 궁금하시거나 제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자그마치 몇십 년인데… 그걸 어떻게 하루 만에 다 끝내겠니.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돼.’ “일단은 아까 못 드린 이야기부터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요.” “…….” 그렇게 녀석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내 시점으로 본 1회 차의 이야기가 아닌 김현성의 시점으로 본 1회 차의 이야기였다. 녀석은 담담한 표정을 짓기도 했고,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기도 했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겪은 모양, 요점만 전부 이야기하면 좋겠다 싶었지만, 그렇지도 않다. 마치 말문이 트인 것처럼 기억하고 있는 모든 걸 쏟아내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에게 있어서 치부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들까지 전부. 전부 말이다. 나는 담담하게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질문할 타이밍도 아니었고 말을 끊지도 않았다. 녀석은 말을 잇는 도중 턱을 덜덜 떨기도 했고,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내뱉지 못하기도 했다. 기본 골조는 아까와 다르지 않았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부분과도 크게 다른 부분은 없었다. 전체적인 흐름에 이상은 없다는 걸 알고서는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녀석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튜토리얼 던전에서 사람들을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모험가로 활동하게 된 이야기, 파란에 들어가게 된 이야기. 모든 게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 547 회귀자 사용설명서 547화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1)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어… 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어? 여기가 어디야…. 뭐야?” 전혀 생소한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어두컴컴한 건축물에 안이다. 괴기스러운 문양과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로 꽉 차 있는 내부,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함께 끌려온 이들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그 말 그대로 비현실적인 공간이라고 표현하는 게 알맞으리라. 어째서 내가 이곳에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학교 과제를 하던 중, 이상한 메시지를 받았고 거기에 응했다. 기억나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여, 여기가 어디죠?” “저한테 묻지 마세요. 저, 저도 잘 몰라요.” “거, 거기 다른 사람들도 있나요? 이곳은 도대체… 그리고 검이랑 무기들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그걸 알면 우리가 이러고 있겠어요? 다들 똑같은 상황인 것 같은데 뭐 기억나는 거 없나요?” “저기요! 거기 누구 있나요? 저기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다. 장내를 꽉 채운 사람들 역시 자신들이 자리하고 있는 이 생소한 장소에 대해 알 수 없는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어디에선가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것. 마치 머릿속을 울리는 느낌에 머리를 꽉 부여잡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납치당한 건지, 아니면 어떤 실험에 참여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장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이해할 수 없는 목소리는 이곳에서 생존해야 한다고, 튜토리얼 던전을 이겨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식수와 식량,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할 물품, 무기의 등급이나 특성, 직업과 몬스터 그리고 상태창까지. 마치 온라인 게임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설명. 혹시 어쩌면…. ‘꿈이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어쩌면 정말로 조금 생생한 꿈을 꾸고 있을 수도 있다. “살려주세요!” “제, 제발 꺼내주세요. 제발….” “장난치지 말고 빨리 문 안 열어? 당신들 전부 고소할 거야! 고소할 거라고! 빨리 문 열어!” “엉… 엉…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무기 들어! 밖에서 나오는 소리 안 들려? 무기 들라고!” “당신이 들어요! 빨리 방패라도 들어요, 빨리요!” “뭐 하는 거야! 지금! 이상한 분위기 조장하지 말고 빨리 이 거지 같은 장난 안 끝내?” “장난이긴 뭐가 장난이야! 다들 눈앞에 떠 있는 상태창 못 봤어? 빨리 무기 들라고! 어이 거기 아재! 이게 장난으로 보이쇼?” “…….” “…….” “…….” “여러분, 지금 이 상황을 부정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단은 앞서 닥친 일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밖에서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이게 현실이든 몰래카메라든 아니면 꿈이든 간에 뭔가 해야 합니다. 모두 무기를 드세요. 일단은 저항해야 합니다.” “이딴 장난질 그만하라고!” “장난이 아닙니다. 저도 이런 장난 하고 싶지도 않고, 차라리 장난이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모두 일단 무기를 들어주세요. 만약에 장난이라면 그때 다시 대처해도 됩니다.” 하지만 꿈이라기에는 너무 현실적이었다. 등에 닿은 벽의 감촉이나 사람들의 목소리, 아니, 이미 꿈이든 현실이든 상관없다. 냉정하게 다른 이들을 다독이고 있는 남자의 말이 맞다. 현재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이든 간에 일단을 무기를 들어야 한다. 뭐가 됐든 간에 자신을 보호할 수단을 챙겨가야 한다. 쭈뼛쭈뼛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을 때 어디에선가 날아 들어온 물건이 보였다. 커다란 원형 나무 방패. 이윽고 목소리 역시 귓가로 내리꽂혔다. “아, 거기 잘생기신 분. 이거 받으세요. 방패가 도움이 될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 그러니까, 형.” “뭐,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제 것도 아닌데. 거기 여성분도 이리로 와서 방패 가져가세요. 장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싸울 준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친절한 사람이야.’ 기다란 창을 들고, 덩치가 큰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 아까 전 다른 이들을 다독였던 사람은 어느덧 무리의 중심이 돼 여러 가지를 지시하고 있었다.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밖에서 계속 불길한 짐승 소리가 들려왔지만, 병장기를 든 성인 남녀가 함께 맞서려고 하고 있다. 모두가 힘을 모은다면 어쩌면 정말로 짐승들에게 대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방패 든 사람들은 앞에서요. 창 쥐고 있는 사람들이 뒤를 봐줄 테니까. 덮쳐올 짐승 몇 마리 정도는 쉽게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네, 네!” “다른 건 생각하지 마시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만 생각합시다. 자 앞에 가서 서세요. 거기 당신 빨리 앞으로 나가요. 아니면 방패 다른 사람한테 넘기시던가.” “아니, 방패는….” “쓰지도 않을 물건을 뭐하러 가지고 있습니까. 앞에 가서 서세요. 자자, 당신도. 거기 빨리 앞에 가서 몸 대.” 방패를 든 모든 이들이 앞으로 나가길 꺼리고 있다. 물론 당연한 반응이리라.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을 얻었다고 한들, 누가 다른 사람들을 대신에 앞에 서고 싶겠는가. 자신 역시 마찬가지. 뒤에서 누군가가 툭 하고 밀지만 않았다면 인파의 가운데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 후 스타트 포인트가 개방됩니다. 5, 4, 3, 2, 1.] [스타트 포인트를 개방합니다. 여러분의 무운을 빕니다.] 석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꺄아아아아악!” 뭐라고 정체를 설명할 수 없는 괴물들이 기괴한 몰골을 한 채로 인간들에게 달려들고 있다. “어? 어… 어?”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에 피가 튄다. 사고가 정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도 없고 생각을 할 수도 없다. 다리가 풀리며 몸이 철푸덕 바닥에 널브러졌고, 입에서는 꺽 꺽 하는 소리가 튀어나온다. 아비규환이며 지옥도. 이름 모를 괴물에게 붙잡혀 산채로 먹히고 있는 이들을 보고 있는 상황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장내, 아까까지만 해도 싸우자고 서로를 다독이던 사람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거나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죽을 거야…. 전부, 전부 죽을 거야. 엄마… 엄마….’ “살려줘! 여기 좀 도와주세요! 여기 좀!!” “뛰어!” “어? 어? 어?” “망할 돼지 새끼야! 뛰라고! 내 말 안 들려?!” “꺄아아아아악!” “살려줘, 살려줘!!” “도망쳐! 제기랄… 도망치라고!!” ‘여기서 빠져나가야 돼.’ 그래야 살 수 있다. 정신없이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는 와중에 눈에 띈 것은 식수와 식량이 들어 있는 가방. “형, 형씨! 어디로!” “물 챙겨!” 저 멀리서 들려온 것 같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가방을 움켜쥐는 순간, 반대쪽에서도 가방을 움켜쥔 손이 보인다. 울먹이는 여자의 얼굴이 보여서 순간적으로 갈등했지만, 서로 힘을 주는 와중에 여자가 땅바닥으로 엎어지기 시작. “죄, 죄송합니….” 사과를 끝마치기도 전에 몇 마리의 괴물이 그녀의 목을 물어뜯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아… 아아….” “살… 살려….” “아아아아악!!! 아… 죄… 죄송, 죄송해요. 죄송해요.” 순간적으로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몸은 저도 모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커다란 출구를 통해 도망치는 사람들이 보여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발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입술을 꽉 깨물고 방패를 마구잡이로 흔들며 인파들을 밀어내자 공간이 보이는 것 같다. ‘빠져… 빠져나가야 돼. 여기 있으면 죽을 거야.’ 괴물 한 마리에 덮쳐지고 있던 남자가 자신이 있는 쪽으로 넘어지려는 것이 보여 발악하듯 비명을 지르며 방패를 휘두른다.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제발… 제발 여기로 오지 마!!’ 퍼억 하는 소리와 한 몸처럼 붙어 있던 남자와 괴물이 분리되며, 넘어지는 것이 언뜻 보였지만, 옆을 돌아볼 여유는 없다. 들려오는 목소리로 남자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다. “워… 뒈질 뻔했네, 시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있을 리 만무. 최대한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출구는 저 멀리 있다. 쓰러진 누군가가 도와달라며 발목을 부여잡는 것이 느껴졌지만. “도와….” “이거 놔! 이… 이거 놔!!” “제발….” “이거 놔아!!!” 허겁지겁 발목을 붙잡은 손을 쳐내고 다시금 발걸음을 옮긴다. 사방팔방에서 비명이 들려오고 괴물들의 목소리와 함께 살려달라는 외침이 울려 퍼진다. ‘제발… 제발….’ 출구까지는 바로 앞. 꾸역꾸역 출구를 빠져나가려는 인파들 사이로 방패로 몸을 딱 붙인 채로 몸을 욱여넣는다. 몸에 밀려 넘어지는 이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다.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괴물 한 마리가 방패에 달라붙어 와 손에 든 방패까지 손에 놓고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한 이후, 시야에 비친 것은 앞이 탁 트인 동공. 어둡기는 했지만, 길들이 보인다. 괴물 몇 마리가 달려와서 몸을 잔뜩 움츠렸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는 다시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허겁지겁 뛰어가는 와중에 눈에 보인 것은 제발 버리지 말라고 손을 뻗는 이들. 제발 구해달라고 같이 있어 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구해… 줘.” “죄… 송합니다.” “돌아와! 돌아와! 이 개새끼들아!” “죄… 죄송합니다. 흐윽… 죄송해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눈물이 계속해서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호흡은 가빠지고 머리는 어지럽다. 몸에 묻은 혈액 때문인지 계속해서 피 냄새가 코끝에 남는다. “허억… 허억….”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알 수 없다. 최대한 저곳에서 멀어져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으니까. 이곳이 어딘지,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전한 장소를 찾기 전까지 몸을 쉴 수 있을 리 만무. 폐가 터지라 뜀박질을 하는 와중에도 멀지 않은 곳에서는 비명이 들려온다. ‘멀어져야 돼.’ 이곳에서 멀어져야 한다. ‘괴물들이 없는 곳으로 가야 돼.’ 그래야 살 수 있다. 얼마나 달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야에 비친 것은 작은 틈. 몇 사람이 겨우 몸을 욱여넣을 수 있는 작은 틈이다. 허겁지겁 몸을 눕혀 작은 틈으로 비집고 들어간 이후에 안에 놓여 있던 잡동사니들과 커다란 돌들로 입구를 막는다. 그제야 허물어지듯 자리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야….” 온몸이 긁힌 상처들이 방금 일어난 일이 꿈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살았다는 걸 인지한 이후에야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와 꽂힌다. 가방을 놓치고 넘어진 여자, 발목을 붙잡은 남자, 죽어가든 사람들과 살려달라고 외치는 목소리들. 여러 가지 생각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들어왔을 때,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벽 한쪽 구석에서 구역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웨에에에에엑!” “우욱… 우웨에엑! 흐으윽… 끄윽….” “엄마… 엄마아… 끄윽… 흑….”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미안해요. 흐윽, 엄마, 엄마아…. 제발 누가 도와줘요. 제발 누가 여기서 꺼내주세요….” 당연하지만 아무런 대답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548 회귀자 사용설명서 548화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2) 시계가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사흘 정도가 지난 것 같다. 물론 확실하지 않다. 단순히 체감상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난 것 같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세 번 정도 잠을 청했으니 아마 그 정도가 딱 맞으리라. ‘배고파. 밥 먹을 때가 됐나? 아까 조금 먹은 다음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적어도 여덟 시간 정도는 지난 것 같다. 살짝 가방을 열어보니 안에 든 식량과 식수가 시야에 비쳤다. 운이 좋았다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꽤 많은 양이 남아 있다는 걸 확인한 이후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아껴 먹으면 10일, 어쩌면 그 이상도 먹을 수 있다. 하루에 한 번씩 빵을 아주 조금씩, 조금씩 떼어서 먹는다면 30일을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 티브이나 인터넷에서도 나오지 않았던가. 물 만 먹고 몇십 일을 버틴 사람들 말이다.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있는 상황이었으니 어쩌면 그 사람들보다는 상황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그들 같은 경우에는…. ‘괴물 같은 건 없었겠지.’ 위험한 것은 몬스터뿐만이 아니다. 이 환경은 평범한 인간들 역시 괴물로 만든다. 식량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거나, 인간성을 잃고 궁지에 몰려 살인 같은 범죄를 일삼는 괴물들 역시 던전 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어제저녁에만 해도 사람들끼리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자신 역시 괴물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외면하고 등을 돌려 지옥에서 달아난 자신 역시 평범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으리라. 머리끝까지 차오른 자괴감을 애써 외면하듯 배에서는 계속해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바깥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거, 거, 거기… 누, 누, 누구 있나요?” “…….” “저, 저도… 좀 들여보내 주세요. 너무 배고프고 힘들어요. 제발….” “…….” “제발요. 부탁드려요. 제발….” 애써 귀를 막는다. “주, 주변에 그… 괴물들이 있는 것 같아요. 부탁드려요. 도와주세요.” “…….” 도와줘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도와줘야 한다고, 외면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생존 앞에서는 냉정해진다. ‘두 사람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야. 식량도 얼마 없고, 나쁜 사람일지도 몰라. 뺏으려고 할지도 몰라… 분명히 그럴 거야.’ “…….” “…….”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했던 여성의 목소리는 그렇게 사라졌다. 아마도 포기한 게 분명하겠지. 아니면 처음부터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했거나. 어쩌면 혼잣말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은 것이리라. 조금씩, 조금씩 빵을 떼어 먹으며 허공을 올려다봤지만 보이는 것은 까만 벽.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버텨야 이 지옥이 끝날지 확신할 수 없는 만큼 최대한 여기 있는 것들로 버텨내야 한다. 냉정해지고 냉혹해져야지 살아남을 수 있다. 그곳에서도 냉정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던가. 도와달라는 목소리를 애써 가슴 속 싶은 곳으로 밀어 넣으며 다시금 숨을 죽였다.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났다.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앉아서 생각할 뿐이었지만, 이 별것 아닌 생각마저 멈춘다면 정신이 망가질 것만 같다고 느껴졌다. 괜스레 상태창을 열어보기도 했고 귓가로 들려오던 목소리가 뭔지 추측해 보기도 했다. 물론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이곳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더 실감했을 뿐이었지. 목소리는 이곳을 분명히 튜토리얼 던전이라고 불렀다. 이곳 이후에는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집으로 돌아갈 확률은 낮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소위 말하는 레벨업이라는 걸 해야 하는 게 아닌지 생각해 봤지만, 어떻게 이전의 그 지옥으로 되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바깥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핏물 구덩이에서 나뒹굴던 시체들과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미 뇌리에 박혔다. 싸움조차 해본 적 없는 자신이 바깥에 나가서 괴물들과 싸울 수 있을 리 만무. 무기라도 있으면 조금 용기가 생겼을지도 모르겠지만, 병장기 같은 건 이곳에 없다. 그나마 가지고 있는 방패도 내던져 버렸다. 맨몸으로 싸운다는 발상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또 제자리.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빵 한 조각을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다시 깨어나면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하루가 더 흐른 것 같았다. 어제저녁에 괴물들에게 쫓기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좁은 입구를 막아놨다고 한들, 괴물들이 이곳에 들어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자기 합리화.” 스스로가 합리화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깨닫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묘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여기 사람 있는 것 같은데.” “지금 그게 무슨 소리요?” “잠깐만 조용히 있어 봐.” “알, 알겠….” “…….” “…….” 순간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희미한 숨소리마저 들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 탓이다. 왠지 모르게 목소리가 호의적이지 않다. 어쩌면 저번에 들었던 정진호라는 남자의 동료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여기 있고 식량을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면 분명히 해코지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십 분 정도가 지났을까.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아마 착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분명히 그렇겠지. 저번에 그 여자처럼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뱉었을 때였다. “거봐. 안에 있잖아.” “…….” “여기 밑 쪽으로 있는 구멍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 운도 좋네. 막혀 있는 걸 봐서는 안에서 막아놓은 것 같은데, 계속해서 여기서 버티고 있었던 것 보니까 식량도 가지고 있을 것 같고… 어느 포인트에서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연히 탈출해서 여기에 계속 처박혀 있으셨나 봐.” “…….” “거기 있는 거 다 아니까 쥐새끼처럼 숨어 있을 필요 없고….” “…….” “내가 안에 있는 거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끝까지 버티시겠다. 옳지,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보자고, 언제부터 숨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있는 괴물들을 우리는 아귀라고 부르는데. 이놈들이 시체 썩은 내 하나는 제대로 맡는단 말이야. 근처에 널려 있는 게 사람 시첸데. 네 쥐구멍 근처로 밀어 넣어도 네가 버티나 보자. 아마 거리가 가까워지면 그쪽에서 느껴지는 네 채취도 눈치채지 않을까 싶은데… 비명이 들리면 사람이 있는 거고, 안 들리면 사람이 없는 거겠지, 뭐.” “…….” “사람 시체 뜯어먹으려고 왔다가 진짜 사람도 발견하고 포식하게 생겼네. 어떻게든 막아보겠다고 조악하게 막아놓은 것 같기는 한데 그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아귀 새끼들 몇 마리만 달려들어도 금방 뚫려 버릴걸. 아귀들이 밑에 있는 그 틈으로 못 들어갈 거라고 생각 하지 마.” “…….” “보니까 다른 출구도 없는 것 같은데. 그 안에서 아귀들이랑 오붓한 시간 보내시라고. 그럼 우리는 이만 자리 피해 드리겠습니다.” “…….” “후회하지 마라. 네가 선택한 거니까.” “…….” “자, 들어갑니다요.” “잠, 잠깐… 잠깐만요. 안에 있어요. 안에… 안에 있어요.” “옳지.”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 해코지하지 마세요. 저는 그냥 계속 여기에….” “아무도 네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안 물어봤어. 솔직히 나도 별 관심도 없고… 그것보다는 조금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식량 가지고 있는 거 있지?” “아… 아니요.” “거짓말 못 하는 타입이네. 자, 그럼 이렇게 하자. 우리.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네 말 믿을 게. 형은 마음이 넓거든. 하지만 그 쥐구멍 안에서 이쪽으로 뭐라도 밀어 넣어야 할 거야. 식량이든 식수든 네가 가진 게 있으면 무조건 이쪽으로 밀어 넣는 거야. 내 말 알아들어?” “정, 정말로 없어요. 정말로요… 아무것도 없어요. 무기도 없고. 방, 방패도 잃어버렸고… 정말로 아무것도 없어요. 저도 배고파요. 정말이에요.” “밀어 넣지 않으면 그쪽으로 아귀 새끼들이 들어갈 거다. 배짱 튕기겠다고 버티고 있지 마, 동생. 나도 말 많이 하기 입 아프고. 딱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해 줄게, 동생. 나는 양보 안 해.” “하지만….” “정확히 오 초 준다. 오.” ‘어떻게 하지? 어떻게?’ “사.” ‘줘야 하는 거야? 정말로?’ “삼.” ‘이게 없으면 어떻게… 해.’ “이.” 선택의 여지가 없다. 2/3가량의 식량을 가방에서 빼낸 이후 가방을 급하게 밀어 넣자 만족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했어. 올바른 선택을 한 거야.” “흐윽….” “그런데 말이야….” “네?” “양이 너무 적은 것 같은데….” ‘이… 이 양아치 새끼…’ “주섬주섬 뭔가 꺼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모를 거로 생각했나 봐.” “저, 저도 정말로 얼마 없어요. 지금 가지고 있는 게 끝이에요. 이거 가지고는 3일도 못 버텨요.” “그건 네 사정이고 3일 치 식량이면 아껴먹으면 10일은 거뜬히 버틸 수 있어. 너는 어차피 거기에 처박혀 있을 거잖아? 우리야 움직이면서 아귀 새끼들 때려잡다 보니 열량이 필요하단 말이야. 네게는 필요 없는 것들이잖아, 안 그래? 조금만 더 밀어 넣어봐. 형도 양심이 없는 건 아니니까. 네가 남은 식량을 주면 거기로 무기 하나 정도는 넣어줄게. 검 한 자루, 어때?” “필, 필요 없어요.” “있어서 손해 보지는 않을 거다. 아무튼, 가진 거 있으면 다시 한번 더 밀어 넣어. 이번에도 만족스럽지 않으면 거래는 끝이야. 누가 손해일지 생각해 봐. 장담하건대 굶어 죽는 게 그 새끼들한테 뜯어 먹혀서 죽는 것보다 덜 고통스러울걸.” “…….” 다시 1/3, 아니, 마지막에 들려온 말에 괜스레 겁이 나 빵 반 덩이를 추가로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으음….” ‘제발…’ “뭐, 이 정도면 커트라인에 합격했다고 해도 되겠네. 어차피 배고프면 밖으로 기어 나오게 될 테니까. 무기는 던져줄게, 동생. 이런 말 하면 조금 그렇지만 정 힘들면 그걸로 자살해도 돼. 그런 사람도 꽤 되니까.” 이윽고 남자가 내민 무기는 단검보다 조금 더 긴 검. 사실상 단검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정도의 크기. 그래도 조금은 기대했건만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이 나쁜 새끼.’ “만족스러운 거래였습니다, 고객님.” “그, 그럼 그냥 가주시는 건가요?” “그럼. 설마 받을 거 다 받고 널 죽이기야 하겠어? 잘 있어라.” “…….” “…….” “…….” “뭐? 여기서 나이가 뭔 상관이야. 입 닥쳐. 살인자 새끼랑 같이 다니던 놈 중에는 어린애도 있었어. 이따가 게네 앞에서도 나이 타령할래?” “…….” “…….”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행과 의견 충돌이 있는 모양인 것 같았다. 이윽고 신경질적인 소리와 함께 작은 구멍으로 그럴듯한 검 한 자루와 빵 반 덩이가 굴러들어 왔다. “운이 좋았네.” “네?” “내 동료가 네가 여기에 처박혀 있는 게 가슴 아프단다. 적당히 있다가 바깥으로 튀어나와. 웬만하면 북쪽으로는 움직이지 말고, 몇 마리 잡다 보면 직업도 얻고 적응도 할 수 있을 거다. 이 주변에는 아귀들도 거의 정리됐으니까. 기왕이면 데리고 가고 싶다는데… 지금 우리도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거든. 네가 너무 어리기도 하고….” “어린애… 아니에요.” “몇 살인데.” “스물둘.” “이름.” “김… 김현성이요.” # 549 회귀자 사용설명서 549화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3) “좋은 이름이네.” “…….” “…….” “아무튼, 기왕이면 서쪽으로 이동하는 게 좋을 거다. 그쪽에 생존자들 몇 명이 모여 있다고 들었으니까. 여기 분위기가 조금 뒤숭숭해서 걔네가 너를 받아줄지, 받아주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거기 가만히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어차피 곧 식량도 떨어질 테니까.” “…….” “안 돼. 안 데려갈 거라니까. 우리 둘이 먹기에도 빠듯해. 그리고 난, 너 말고 다른 새끼까지 챙길 여력 없다.” “…….” “어차피 쓸모없는 놈이야. 지금까지 도망만 친 놈을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받아들여?” “…….” “후우….” “…….” “현성아.” “네?” “우리랑 같이 가고 싶어?” “…….” 일단은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의외의 제안이 뒤따라왔던 탓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벽 너머에 있는 저들을 믿을 수 있겠냐는 것. 기본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여겨졌지만, 커다란 악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나가려면 지금이 기회야.’ 용기를 낸다면, 딱 한 발자국만 앞으로 더 걷는다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다. 당장 자신의 식량을 가지고 갔던 사람이 아니던가. 어쩌면 바깥으로 끌어낸 이후에 가지고 있는 걸 전부 뺏을 생각일지도 모른다. 빵 한 덩이를 주고 검 한 자루를 준 것도 모두 안심시켜서 나오게 하기 위한 작전일 것이다. 저 사람들은 아직 자신이 식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몬스터들과 싸우던 사람이라고 했다. 분명히 검을 휘두르거나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좋은 사람들이면 어떡하지?’ 식량을 빼앗아 가기는 했지만 검을 쥐여주지 않았던가. 심지어 식량을 다 빼앗지도 않았다. 나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특이한 사람이라고 하는 게 어울린다. 옆에 있는 동료 역시 왠지 모르게 자신에게 호의적인 것 같았고…. ‘몇 가지만 물어보는 거야.’ 몇 가지만 물어보자. 그리고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되면 그때 밖으로 나가자. “여기에… 도착해서, 사람… 죽여 봤어요?” “갑자기 그건 왜 물어?” “그, 그냥요.” “그래서, 죽여 봤으면 거기에서 안 튀어나오고 계속 박혀 있기라도 하게? 애초에 내가 너를 해코지할 생각이었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죽여봤다고 말했을 것 같아. 아니면 그런 적 없다고 이야기할 것 같아?” “그, 그래도… 이건 중요한 문제니까요.” “본의는 아니었지만, 서넛 정도는 죽인 것 같은데…. 어제 처음 죽였지 아마…. 우리 동생은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리셨나 봐.” “…….” “너도 똑같은 새끼야, 현성아.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라는 거, 들어는 봤어? 여기 오는 길에 최근에 생긴 것 같은 시체들을 몇몇 봤는데. 그놈들 비명, 못 들었다고 이야기해 보지그래. 변명의 여지가 있어?” “그건….” “분명히 들렸을 거라고 생각되는 데…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애써 외면하고 있었겠지, 뭐.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을 무시하고 도와달라는 사람들의 외침도 조용히 외면하고, 너는 그렇게 살아남은 거야. 너라고 여기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랑 다를 것 같아?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네가 더 쓰레기 같은 놈이야. 그렇게 자기 합리화하는 새끼들. 도망치고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놈들. 네가 제일 비겁하고 못난 놈이라고…. 내 말 알아들어?”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게…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그런 뜻이 아니라….” “괜히 기분만 잡쳤네. 제기랄. 우린 간다, 새끼야. 거기서 백 년 만년 처박혀 있어봐라. 그리고 몇 가지만 충고할게, 동생.” “…….” “정말로 뒈지기 싫으면 바깥으로 튀어나와서 몬스터들이나 때려잡아. 튜토리얼 던전이 끝난 이후에는 뭐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그다음 던전, 그다음 장소에서 지금과 같은 쉼터가 있을 거로 생각하지 마. 살아남으려면 뭐라도 휘둘러야 돼. 그게 여기 법칙이야. 초보자 사냥터가 열려 있을 때 사냥을 하라는 소리다. 뭐, 그럼…. 다음에 볼 수 있으면 보자. 아마 그럴 일 없을 테지만. 준 건 잘 먹는다, 새끼야.” “아… 아! 저… 저기 형! 형!” 뒤늦게 이름을 불러봤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다. 괜스레 손바닥으로 바닥을 쾅 하고 내려칠 수밖에 없었다. ‘제길, 제기일…’ 이곳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물론 저들이 안전한 사람인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기회였다. 아니,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 밖으로 나간다면 그 사람들을 따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둘러 몸을 일으켜 좁은 공간으로 몸을 집어넣으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섭다.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자신조차 믿을 수가 없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조금 전 쓸데없는 질문을 던진 것 역시 그렇다. 어쩌면 그저 이유가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밖으로 나가지 않을 이유가 필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상한 질문을 한 게 아닐까. 그 사람의 말이 맞다. 자신 역시 똑같기는 마찬가지다. 직접 손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을 뿐, 나 역시 괴물에 가까웠다.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외면하고 무시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소리를 숨어서 들었고 쓸데없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도움을 요청한 여성의 부탁을 거절했다. 어쩌면 지금 식량이 이것밖에 남지 않은 것 역시 벌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만 생각했기 때문에 신이 벌을 내린 걸지도 모른다.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식량이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걸 그랬다. “흑… 흐윽… 엄마….”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어쩌다가 이렇게 이 장소에 계속 처박혀 있게 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발목을 붙잡았던 남자를 도와줬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아니, 처음에 가방을 함께 집은 여자에게 가방을 양보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 자리에 남아 다른 사람들과 마지막까지 끝까지 싸웠다면 많은 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도움을 요청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뛰쳐나갔었다면 이렇게까지 자괴감을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끄윽….” ‘무기는 던져줄게, 동생. 이런 말 하면 조금 그렇지만 정 힘들면 그걸로 자살해도 돼. 그런 사람도 꽤 되니까.’ 아까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리고 무심코 옆쪽을 바라보자 시야에 비친 것은 작은 단검. 어두운 공간에 얼굴이 비칠 리가 없었지만, 단검에 비친 얼굴은 기괴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사람의 말처럼 어쩌면 죽는 게 마음이 편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죄책감을 지니고 살지 않아도 될 테니까. 허겁지겁 단검을 집어 들고 천천히 목을 향해 겨눈다. 찌르면 모든 게 끝난다. 조금만 힘을 주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다. 날카로운 단검의 끝을 목 끝에 가져다 대자 따끔한 느낌과 함께 핏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손은 덜덜덜 떨리고 숨은 점점 가빠진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단검을 끝까지 밀어 넣는 게 쉽지 않다. 오히려…. “끄윽, 엄마아….” 무섭다. 이대로 죽는 게 무섭다. 이런 장소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것이 무섭다. 결국에는 단검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이후에 고개를 숙여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죽지도 못하는 병신 같은 새끼. 구질구질하게 살아보겠다고 끝까지 버티는 새끼, 쓰레기 새끼. 병신 새끼, 구더기 같은 놈, 인간 쓰레기 새끼. “꺼윽… 흐윽….” 반대편에서 다시금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 “형? 형이에요? 형 맞죠?” “에엑….” “형! 저, 저 나갈게요. 나갈래요. 형이랑 같이 갈 거예요. 지금 나갈게요. 제가 아까 잘못했어요. 저도 데리고 나가주세요.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키에에에에에에엑!” “아… 아아아아….”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아아아아악! 살, 살려줘요. 살려주세요. 누, 누가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 “키에엑!” “살려줘요. 꺼윽… 살려주세요. 누가 제발….” 밑을 막아둔 돌덩어리들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어째서 갑자기 녀석이 이쪽을 찾을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아까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 그럼…. 다음에 볼 수 있으면 보자. 아마 그럴 일 없을 테지만.’ 어쩌면 그 사람이 집어넣은 걸지도 모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이 지금 이 상황을 초래한 걸지도 모른다. 최대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좁은 입구를 잡동사니들로 막아보고 있었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육체는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살려… 형,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살려주세요. 식량도 전부 다 드릴게요. 어엉… 형! 혀엉!” 누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한단 말인가. 이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다. 자신조차 타인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는데 누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단 말인가. 결국에는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방벽이 뚫리고, 좁은 틈을 기어들어 오는 몬스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황급히 시선을 돌린 곳에 자리한 것은 식량 대신에 받은 검. ‘죽여야 해.’ “키에에에에에엑!” “죽어! 죽, 죽어!”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좁은 틈을 통과하는 아귀의 머리통을 단순히 칼로 짓이길 뿐이었으니까. 푸욱 푸욱 하는 기분 나쁜 감촉이 계속해서 들려온다. 하지만 검을 내려찍는 것을 멈출 수 있을 리가 없다. 죽어 있는지,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벅차다. “꺼윽… 흐윽… 죽어! 죽어어!! 괴물 새끼. 괴물 새끼!!” “에에엑….” “허억… 하아… 하아….” 머리가 완전히 부서진 이후에야 커다랗게 쉬어보는 숨. 선택의 여지는 없다. 지금은 무조건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한 놈이 이 보금자리를 발견했다면 다음 놈 역시 이곳을 발견한 걸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로 아까 그 사람이 이 아귀를 이곳으로 밀어 넣은 것이라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 있는 건 약이 아니라 독이다. 생명체를 처음 죽였다는 이질적인 감상에 빠지기도 전에 다시 한번 몸을 눕혀 좁은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완전히 움직임을 멈춘 몬스터의 채취와 혈향이 계속해서 코끝에 감돈다. 혹시라도 움직이지 않을까 싶어 단검을 꽉 쥔 채로 계속해서 몸을 옮긴다. “혼자 힘으로 살아남아야 돼.”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 “내가 이기적인 게 아니야.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야.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서 있을 수 있는 거야. 형, 아니, 그 사람도 그래서… 남아 있었던 거야.” 도움을 요청해도 도와줄 사람은 없다. 자신 역시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아무런 조건 없는 호의는 없다. 만약에 방금 그 사람을 따라 나갔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일부러 몬스터를 여기로 밀어 넣을 정도라면 그러고도 남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이 바보처럼 속아 넘어갔을 뿐이었으니까. “허억… 허억….” 그 말이 맞다. 하지만 좁은 틈을 빠져나간 이후, 눈앞에 보인 화살표를 본 순간 괜스레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살아서 보자. 같이할 마음 있으면 찾아오고. 라고 쓰인 글씨와 화살표. 벽면에 쓰여 있는 그 글씨 밑에는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빵 반 덩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잠깐 멍하니 그곳에 시선을 고정하게 된다. 괜스레 손안에 잡힌 검을 꽉 움켜쥐고서 말이다. “살아남자.” # 550 회귀자 사용설명서 550화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4) “상태창” [이름-김현성]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2] [성향-겁 많은 몽상가] [직업-전사–일반 등급] [능력치] [근력-11] [민첩-25] [체력-13] [지력-10] [내구-19] [행운-15] [마력-03] [장비] [공짜로 줘도 안 쓸 싸구려 철검-일반 등급] [공짜로 줘도 안 쓸 싸구려 단검-일반 등급] “전직했구나. 정말이었어.” 단검을 허리춤에 동여매고 검 한 자루를 어깨에 기댄 채로 털썩 주저앉자 그동안의 피곤함이 전부 가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여전히 몸은 힘들다. 마치 칼날 위에 선 것 같은 감각. 땀과 피로 젖은 축축한 옷은 괜스레 짜증을 불러올 정도였다. 스리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괴물 한 마리를 처리하기는 했지만, 주변에 다른 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이후 목을 축이자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한 번 더 전직하려면 몇 마리나 잡아야 하는 거지?’ 확실히는 모른다. 주어진 정보가 무척 적었으니까. 하지만 몇 마리 사냥하는 정도는 무리가 없을 거다. 지금까지도 그렇지 않았던가. 이미 누군가가 닦아놓은 길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형과 동료들이 지나간 길이다. 있는 몬스터들이라고 해봐야 무리에서 떨어진 몇 마리 정도가 끝이었다. 안정적으로 사냥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게 당연했다. 물론 정면으로 녀석들과 부딪치는 건 쉽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강한 몬스터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속에 있는 공포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몇 번의 전투를 치러왔지만, 아직도 검을 휘두르고 그들과 마주하는 것은 무섭다. 이빨과 손톱은 날카로웠고 무엇보다 숫자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면 감당하기 힘들다. 기습을 당하거나 먼저 공격당하면 그 자리에서 아웃. 욱신거리는 왼팔을 붙잡아봤지만 이미 생긴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단검이 아니었으면 당했을 거야.’ 갑자기 덮쳐온 녀석과 뒤엉켜 넘어지고 심지어 검까지 놓쳐버렸었다. 허리춤에 있던 단검이 아니었다면 이미 목을 물어 뜯겼으리라. 상태창에서는 쓰레기 같은 무기라고 평가했지만, 가진 게 없는 지금으로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었다. 형과 동료들이 무기를 얼마나 가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시 한번 스타트 지점으로 돌아갈 수 없는 지금은 빵 몇 덩이, 식수와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처음에는 식량을 빼앗겼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충분히 할 만한 거래였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그쪽에서 나를 배려해 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배가 고픈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지금 이 시점에서 굶어 죽는 사람은 없다. 반면에 몬스터에게 습격당해 죽은 사람들은 수십 수백이 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겠는가. 배고픔은 견딜 수 있지만, 무기가 없다면 살아남을 수도 없고 미래를 준비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형이 한 말처럼 만약 이 던전 이후에 무언가가 더 있다면 최대한 레벨을 높여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 헝겊으로 철검에 묻어 있는 피를 살살 닦아내다 보니 어느덧 20분 정도가 지난 듯했다. 이제는 다시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금 몸을 일으켰지만, 정확히 어디로 향해야 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벽에 그어져 있는 화살표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게 딱 이쯤. 지금까지 계속 그려져 있던 화살표가 없는 것을 보면 여기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리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투가 일어난 것 같은 흔적이 보였으니까. 몬스터와 싸운 건지 아니면 다른 집단과 싸움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방향을 표시할 여유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잊어버렸을 수도 있고. ‘다시 한번 천천히 살펴보는 게 좋을까?’ 하지만 그 선택지는 곧바로 아웃, 여기서 더 시간을 잡아먹는다면 형과 동료들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차라리 그냥 사냥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 그렇게 막 발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키에에에엑….” 하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저도 모르게 호흡이 거칠어진다. 싸울 수 있는 지식이 있다고 한들, 몸을 움직이는 건 나 자신. 갑작스럽게 뻣뻣해지는 몸이 원망스러웠지만 살아남으려면 검을 휘둘러야 한다. 형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여기에서는 무기를 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거라고. 숫자가 몇인지는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들리는 소리를 딱 하나.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가자 네다리로 기어 다니는 놈의 모습을 금방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키고 천천히 검을 집어 든다. 달려들어야 할지, 아니면 여기까지 오는 걸 기다려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지만, 기왕이면 안전하게 잡고 싶다. 정면으로 녀석을 마주하는 건 아직 무리다. 벽에 딱 달라붙어 녀석이 오기를 기다린다. 숨을 죽이고 길을 지나치려고 할 때, 머리에 칼을 꽂아 넣으면 된다. 머릿속으로 수백 번 상상해 보지만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다를 거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장면을 시뮬레이션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옆쪽에서 둔탁한 충격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 “아악!” “키에에에에에엑!” 하는 비명과 함께 몸이 땅바닥으로 나 뒹군다. “제길!” 기다리고 있던 놈이 아니라 새로운 놈. 땅바닥을 두어 번 구른 이후에는 다시 한번 자세를 고쳐 잡았지만, 기다리고 있던 한 놈이 침을 흘리며 게걸스럽게 달려들어 왔다. ‘운이 좋았어.’ 운이 좋았다. 목을 노리고 들어온 게 아니라 대뜸 몸통박치기부터 해왔으니까. 다리를 절뚝거리는 모습을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뒤에서 달려들어 오고 있는 놈은 현재 정상이 아니다. ‘생각하면 돼. 생각하자, 생각해.’ 머릿속으로 상상한다. 첫 번째 놈은 몸을 비틀어 흘려보낸 뒤에 다리를 다친 놈을 먼저 처리하자. 앞서 보낸 괴물이 자세를 고쳐 잡는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뒤에서 온 놈을 처리하면 된다.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니 미간에 검을 찔러 넣으면 그걸로 끝. 몇 초 되지 않는 찰나에 수만 가지 생각이 들어와 꽂히고 몸은 또 그걸 실행하기 위해 움직인다. 녀석이 점프를 해오는 타이밍에 몸을 비틀어 피하고. “키에에에에에엑!” 뒤이어 달려들어 오던 놈에게 검을 찔러 넣는다. 푸욱. 정확히 머리를 관통한 칼날, 속으로 ‘좋았어’ 같은 소리를 되뇐 이후에 뒤를 돌아보자, 미끄러진 중심을 잡고 다시금 달려들어 오는 몬스터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검으로 내려쳐야 돼.’ 황급히 검을 빼내려고 했을 때였다. “어?!”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뭔가에 걸린 듯 빠지지 않았던 것. “어… 어!” 힘을 조금 줘봤지만 마찬가지. 그 와중에도 녀석은 계속해서 이쪽을 향해 달려들어 오는 있었다. 당황한 찰나에 몬스터는 왼쪽 다리를 향해 달려들었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끔찍한 고통이 엄습했다. “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른 채로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녀석의 머리통을 향해 쑤셔 넣으려고 했지만, 목을 비틀어대는 녀석 때문인지 조준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가까스로 단검을 어깨에 박아넣기는 했지만 겨우 그걸로 녀석을 멈출 수 있을 리 없다. 오히려 더 성이 난 것처럼 머리를 흔들어대는 바람에 다리가 떨어질 것처럼 아프다. 눈물이 왈칵 튀어나오고 머릿속으로는 별별 생각이 들었지만, 필사적으로 다시금 손을 뻗는다. 결국, 정확하게 머리통을 향해 단검을 휘두른 이후에야 녀석은 침묵했다. “허억… 허억… 허억….” ‘죽을 뻔했다.’ 매 전투가 위험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죽을 뻔했다. 만약 계속해서 당황했더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렸으리라. 잠깐 동안 올라왔던 자신감이 급속도로 무너지는 게 느껴진다. 호흡은 계속해서 거칠어지고 점점 더 숨이 가빠진다. “으… 으으으으윽….” 단검에 머리가 꽂힌 채로 죽은 몬스터의 입을 천천히 벌리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진득한 타액과 함께 피가 흘러나왔다. 완전히 뜯겨 나갔을 거라고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다리는 그나마 괜찮아 보인다. 어깻죽지에 단검을 꽂아 넣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랜 시간 인간들을 씹어 먹다 보니 이빨이 상했을 수도 있고. 천으로 다리를 꽉 동여맨 후 다시금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비명소리를 누군가 들었을 테니 어쩌면 이곳으로 누군가 올지도 모른다. 그게 몬스터건 사람이건 간에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냉정하자, 냉정하자.’ 속으로는 계속해서 같은 소리를 되뇌었지만, 몸은 자꾸만 덜덜 떨려온다. 무섭지 않을 리가 없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서 잘 헤쳐왔던 거다. 의외의 상황은 언제든지 펼쳐질 수 있고, 모든 게 상상이나 생각했던 것처럼 되지는 않는다. ‘정말로 죽을 뻔했어. 진짜로… 이번에는 진짜로 죽을 뻔한 거야.’ 턱 끝까지 올라온 죽음의 공포. 정신없었던 상황을 떠올리자 다시 한번 몸이 떨려왔다. ‘내… 검. 내 검….’ 다리를 다쳐 중심을 잡을 수 없었던 괴물에게 다가갔다. 낑낑대며 팍팍 머리를 후려치자 그제야 검이 뽑혀 나왔다. ‘어디서 나온 거지?’ 이런 놈이 어디서 튀어나왔을까. ‘다리는 어쩌다가 다친 거지?’ 몬스터끼리는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 높은 확률로 인간에게 당했을 것이다. 중간에 도망치거나 몸을 뒤로 빼지 않는 녀석일 테니, 사냥을 끝마쳤거나 쫓던 인간을 놓쳤을 가능성도 크다. ‘어느 쪽에서 온 거야?’ 지나온 길은 거의 다 정리가 되어 있었다. 녀석이 튀어나왔던 장소에 누군가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놈의 다리에 난 상처는 확실하게 검이나 창에 맞은 상처. 어쩌면…. “형이랑 동료들일지도 몰라.” 이 괴물 역시 무리에서 떨어진 녀석일 것이다. “근처에서 전투를 벌인 흔적이 있었어.” 분명히 있었다. 무리와 떨어진 이 괴물과 싸웠다고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화살표도 끊겼고.’ 이 괴물은 다리를 다쳐 끝까지 추격하지 못한 녀석일 게 분명했다. 형과 동료들을 따라간 다른 괴물들과는 다르게 제대로 걷지 못해 뒤처졌고, 결국에는 이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도와줘야 돼.’ 도움을 받았으니 갚는다. 다리를 질끈 천으로 묶은 이후에는 엉기적엉기적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뛰기는 힘들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형과 동료들이 괴물들에게 쫓기는 상황이라면 작은 손이라도 필요할 것이 분명했다. 아마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테니 처음에는 경계하겠지만, 김현성이라고 설명하면 안심할 것이다.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던 것도 잠시, 형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괜스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위기에서 형을 구해내는 게 먼저이겠지만 말이다. 흔적을 밟는 방법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벽에 난 상처나 발자국 같은 것 따위로 괴물들이 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조금 널찍한 동공에서 한 번 더 전투가 있었는지 괴물의 시체들이 시야에 비쳤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죽은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 걷기 힘들지만 조금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어느새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뛰고 있다.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덕분에 나올 수 있었다고 단검이랑 철검을 나누어 줘서 고마웠다고 그렇게 이야기 하고 싶다. 이름도 듣지 못했다. 함께 움직이는 동료도 보지 못했고. 나쁜 사람이라고 한 것도 사과하고 싶다. “형… 형!” 하지만 이윽고 시야에 비친 장면에는. 튀어나오려던 목소리를 손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 551 회귀자 사용설명서 551화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5) “버텨! 버텨! 버티다 보면 전부 처리할 수 있어. 모두 정신 차려요. 버티면 됩니다. 유리해요. 유리합니다.” “키에에에에에엑!” “제기랄! 뒈져! 뒈져라! 이 개새끼들!” “아아아아악!” “물러서지 마. 등 보이면 끝이야. 진형 붕괴시키지 마! 겁먹지 말라고, 이 개새끼야! 찔러! 찔러! 충분히 할 수 있어! 쉬워! 쉽다고!” “키에에에에엑!” “방패 들어! 돼지 새끼! 방패 들어!” 푸욱! “내 팔! 내 팔! 아아아아아악! 살려줘! 살려… 아아아아아아악!” “구하러 들어가지 마! 대열 이탈하지 말라고! 시바! 대열 이탈하지 말라고 했잖아, 멍청한 새끼들! 이 답답한 개새끼들아! 이 씨바 무능한 놈들! 대열 이탈하지 마!!! 흩어지려고 하면 전부 뒈진다!” 좁은 장내를 가득 메운 몬스터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인 파티,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다른 이들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만큼 많은 숫자의 몬스터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에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저항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숫자가 부족하다. 몬스터들이 나가떨어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만, 아귀라고 불리는 괴물들의 숫자는 도통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개… 답답한 개새끼들아! 내 말 들어! 이 개새끼들! 어우, 답답한 새끼들!” 검을 들어야 한다고. 지금 당장 이곳에서 뛰쳐나가 뒤를 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어… 아….” 하는 소리만 입에서 튀어나올 뿐, 조금만 더 버티라고 지금 도와주러 가겠다는 목소리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알고 있었던 탓이다. “어… 어….” ‘죽을 거야.’ 지금 모습을 드러내면 죽는다. ‘분명히 죽을 거야.’ 소리를 내지르거나, 내가 이 장소에 있다는 걸 저 괴물들이 눈치챈다면 틀림없이 죽는다. 겨우 두 마리를 상대할 때도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그나마 저 안은 대열을 유지하고 있어서 버틸 수 있었지만, 자신은 지금 혼자다.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패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몸도 정상이 아니다. 다리 한쪽은 상처 때문에 절뚝이고 있었고, 왼팔도 말을 듣지 않는다. 체력도 없다. 이런 상태로 싸우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뒤쪽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 중 일부만 내게 달려들어도 분명히 살 수 없을 것이다. 순식간에 온몸이 뜯겨 나가 도움도 줄 수 없으리라.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팔이 덜덜 떨려온다. 지금 당장 뛰쳐나가고 싶다. 도와주고 구해줘야 한다.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맞다. ‘구해줘야 돼.’ 도움을 받았다. 형 때문에 살 수 있었으니까. 도와줘야 한다. 형 때문에 그 굴을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나도 구해줘야 한다. 하지만. ‘형, 형이 아닐 수도 있잖아.’ 목소리가 조금 다른 것 같다. 아니, 제대로 된 목소리가 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애초에 목이 많이 쉬어 있는 상태였으니 구별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나마 말투는 비슷한 것 같았지만, 지금 저곳에서 싸우고 있는 파티는 형과 동료들이 아닐 수도 있다. 괴물들의 울부짖는 소리 때문에 목소리도 잘 들려오지 않는다. 점점 더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한다. 합리화하지 말라고, 자기변명일 뿐이라고, 만약 형이 아니더라도 도와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계속해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몬스터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들 사이로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은 바로 그때,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눈을 마주친 것 같다. 안심하고 있는 눈이다. 이제 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눈이다. ‘도와줘야 돼.’ “도… 도와….” ‘같이 싸울 수 있어.’ “내, 내가….” ‘그게 맞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누구 때문이야.’ “나도… 싸울 수….” ‘같이 싸우라고, 이 멍청한 새끼야!’ “같이… 가.” 생각과는 다르게 몸은 그 기대를 배신한다. 상처 때문에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다리는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아수라장이 된 장내를 빠져나간다. 지쳐서 싸울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계속해서 그 지옥에서 멀어진다. “허억, 허억, 끄윽… 병신 새끼….” 호흡은 점점 거칠어지고 다리에서 감은 천에서는 핏물이 튀어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는다. “김현성, 병신 새끼! 겁쟁이, 겁쟁이 새끼야… 꺼윽, 이 죽어도 시원치 않을 새끼. 죽어야 되는 새끼.”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괴감 때문인지, 아니면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눈물은 계속해서 튀어나온다. 병신 새끼가 맞다. 겁쟁이 새끼다. 살아남을 가치도 없다. 어차피 지금 살아남는다고 해도 이 앞으로는 더 나아가지 못할 거다. 자신을 도와준 유일한 사람을 외면했다. 굴속에 숨어 있었을 때처럼, 그때처럼 또 한 번 타인과 자신의 기대를 배신했다. 또 다른 자신은 이제 괜찮다고, 비로소 안전한 곳으로 왔다고 말하고 있다. 조금 더 멀리 벗어나라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너는 다시 한번 더 살아남아서 이 게임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달리던 발걸음을 멈춘다. 이미 충분히 멀어졌다. 하지만 계속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딘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가만히 있는 걸 견딜 수 없어서 일 거로 생각했다. 벽면에 그어진 희미한 화살표가 시야에 비친 것은 그때, 바로 그때였다. “아….” 미처 발견할 수 없었던 화살표. “아….” 굴에서 빠져나왔을 당시에 봤었던 화살표였다. ‘잊지 않은 거야.’ 자신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빠져나올 것은 물론, 자신을 따라오고 있을 거로 생각한 게 분명했다. 다시 한번 눈물이 차오른다. 입술을 꽉 깨물고 검을 쥔 손을 다시금 움켜쥔다.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몸은 어느새 그 지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허억… 허억….” ‘제발 살아 있어야 돼.’ “허억… 하아… 하아….” ‘아직 버티고 있을 거야. 분명히 살아 있을 거야.’ “형… 형!” ‘분명히 안 죽었을 거야, 분명히. 제발… 제발 살아 있어.’ “제발 살아 있어.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제발 살아 있어요.” ‘제발 살아 있을 거야. 제발, 전직도 했다고. 이제는 싸울 수 있다고 같이 싸울 거라고 이야기하는 거야.’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이… 이 개새끼들! 이 개새끼들아!!!!” 무작정 검을 휘두른다. ‘생각해.’ 찌르지 말자. 힘을 주고 한 번에 목을 베어내자. ‘생각해야 돼.’ “으아아아아아악!” “키에에에에엑!” 검을 멈추면 안 돼. 한 번에 베어내야 돼. 검이 막히거나 걸릴 수도 있으니까. 다른 건 신경 쓰지 말자. 피하고 베어내면 돼. 쉬운 일이야. 전부 다 볼 수 있어. “이 개새끼들! 개새끼들아!! 형! 형!!! 저 왔어요! 조금만… 조금만 버텨요!!” “키에에에엑!” 사방에서 덮쳐 들어오는 괴물, 몇 번 움직이는 거로 피할 수 있어. ‘그렇게 할 수 있어.’ 내가 더 민첩하고 강해. ‘머릿속에 있잖아.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검을 휘두르는 지식을 얻었잖아.’ 전부 다 머릿속에 들어 있다. 쉬운 일이다. 생각해 보면 쉬운 일이다. 이미 지식은 주입되어 있다. 그걸 행동으로 옮길 뿐이다.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스킬을 누르는 거로 생각하면 된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대신 몸을 움직일 뿐이다. 왼쪽으로 달려들어 오는 괴물의 목을 검으로 베어낸다. 땅바닥을 기어서 달려들어 와 다리를 노리는 녀석은 한 발자국 몸을 뒤로 빼는 것으로 피할 수 있다. 뒤를 잡히지 않게 계속해서 움직인다. 조금씩 조금씩 외곽을 죽이면서 깎아 먹는 것처럼 몸을 움직인다. 어렵지 않았다. 리치는 내가 훨씬 더 길었으니까.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그 일정 거리 안에 들어온 녀석은 단검으로 찌른다. 얼굴에 핏물이 튄다. 하지만 닦을 시간은 없다. 호흡이 거칠어지지만 계속해서 몸을 움직여야 한다. 힘들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하지만 억지로 괴성을 내지르며 고통을 참아낸다. “으아아악! 개새끼들! 덤벼! 덤벼! 개새끼들! 개새끼들!!! 형!! 형!!! 저 왔어요! 김현성이요! 김현성! 김현성 왔어요! 김현성! 22살 김현성 왔어요!!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 제가 도와줄게요!” 생각처럼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검을 쥔 손아귀의 힘이 부족해 목을 벤 검이 중간에 멈추고 당연히 공간을 허용하게 된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녀석을 밀어내고 다시 한번 검으로 커다란 원을 그린다. ‘가만히 서 있으면 안 돼.’ “내가 더 빨라.” ‘내가 더 빠르다.’ “내가 더 빨라!!”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더 빠르게! 내가 더 빨라!” ‘그럼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는데.’ “상관없어.”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빠르게 빠르게 검을 휘두르자. 보지 않아도 된다. [민첩이 1 올라갑니다.] 베어야 할 곳, 베어내지 말아야 할 곳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 팔이든 발이든 검에 걸리는 건 무조건 베어내면 된다. 어차피 내가 더 빠르니까. [민첩이 1 올라갑니다.] 굳이 순서를 정하지 말자. 피하고, 검을 아래로 움직이고, 이런 건 생각하지 말자. 어떻게 휘두를지 생각하지 말자. 이미 머릿속에 다 있잖아. 생각하면 더 늦어지니까. 누군가가 어디로 검을 휘두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공격은 닿지 않을 거니까. [민첩이 1 올라갑니다.] “이 개새끼들!! 이 개새끼들!!!” [새로운 직업을 획득합니다.] “형! 형! 혀엉!!!” [일반 등급의 검사로 전직을 완료합니다.] “내가 더 빨라! 내가 더 빨라!” 새로운 지식이 머릿속에 가득 채워진다. 그만큼 검은 더 예리해지고 움직임은 더 정교해진다. 팔도 무겁고 발도 무섭다.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하는 게 맞으리라. 하지만 몸을 다시 한번 움직인다. 몬스터들의 숫자가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재충전되는 것 같다. 아마 안에서 싸우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같은 기분이겠지. 계속해서 줄어드는 몬스터들을 보며 희망을 느끼고 있을 게 분명하다. 남은 것은 중앙에 몰려 있는 열 몇 마리가 전부. 중앙에서 시선을 분산시켜 준 덕분에 더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폐가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검을 휘두른다. 이윽고 남아 있던 몇 마리의 머리까지 완전히 베어낸 이후, 황급하게 중앙으로 다가간다. “형! 형!!! 저예요. 구하러 왔어요.” 괴물들의 시체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괴물들을 하나하나 떼어내는 것도 일. “형!” 하지만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형… 형!” 몬스터 시체에 파묻혀 있었던, 모습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버린 몇 구의 시체가 눈에 보인다. “아… 아아아악… 아아아….” 어째서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갔냐는 듯이, 왜 이렇게 늦게 왔냐는 듯이 처참한 모습으로 덩그러니 내던져져 있었다. “꺼윽….” 어째서 도망쳤을까. “죄송해요… 흐윽… 죄송해요… 미안해요….” 왜 조금 더 용기를 내지 못한 걸까. “꺼으으윽… 꺼윽….” 어째서 피하려고 했을까. 계속해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누가 누구인지조차 알아차릴 수 없다. 누구를 위해 애도를 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모두가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모습. 어쩌면 이게 다른 사람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봤지만…. “아아아….” 자신이 던져준 가방을 메고 있는 남자의 시체를 확인한 이후, 그 시체를 품에 안으며 그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흐으으윽… 꺼윽….” -살아서 보자. “흐어어엉… 죄송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같이할 마음 있으면 찾아오고 “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흐어어어어어엉….”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552 회귀자 사용설명서 552화 복수의 동기(1) “그래서…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된 겁니까?” “글쎄요. 사실 잘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워낙 오래전에 있었던 이야기라… 말을 하는 도중에 기억이 나기도 하더군요. 그 이후라면… 아마 한참이나 그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파란 길드원들에게 발견되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공략조… 그러니까.” “그때 당시에도 공략조가 있었던 겁니까?” “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정진호라고….” “아, 그 미치광이 살인범 말씀이시군요.” “네, 이기철 그리고 정진호를 포함한 몇몇 이들이 공략조를 만들어 튜토리얼 던전의 공략을 완료했던 것 같았습니다. 물론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었지만요. 이후에 밝혀진 이야기로는 숨어 있던 인간을 몇몇 데리고 가 희생양으로 내몰았다고 하더군요.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사실 정진호 그 사람은 이후에 어떤 길드에도 들어가지 않고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습니다. 대륙에 큰 악영향을 끼친 살인여단의 단장으로서 악명을 떨쳤지만 조금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거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튜토리얼 던전의 지하로 내려갔을 당시에도 그자를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내려가는 걸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거고요. 결과적으로는 기영 씨가 유석우…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만약에 정진호를 던전 안에서 처리하지 못했더라면 더 큰 피해가 일어났을 겁니다. 태생이 싸이코패스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죽게 됐는지 조금은 궁금하군요. 그러니까 현성 씨가 말하는 1회차에서는 결국 어떻게 된 겁니까?” “배신당했습니다.” “네?” “같은 동료들에게 배신당해 함정으로 내몰리고 비참하게 숨을 거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자를 죽인 것은 린델 측의 길드였습니다만 아마 그 상황을 만든 건 가면을 쓴 남녀였을 겁니다. 그러니까… 악마소환사 진청… 그자 역시 살인여단에 멤버였으니까요. 정확히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여단 내부에 권력 다툼 때문일 겁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범죄자 역시 악마 소환사 진청, 그자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거겠죠.” “너무 한꺼번에 많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진청, 그자는….” “네, 그자 역시 인류 최악의… 아니, 이건 조금 더 이후에 설명을 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진청, 그자가 표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정진호가 비참하게 죽은 이후였으니… 아무튼 살인마 정진호는 수백 개의 화살을 맞고 숨을 거뒀습니다. 괴성을 내지르고,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다, 하늘을 바라보고 웃으며, 그렇게 죽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이지 못해 아쉽다는 말을 남기면서요. 조금은 공포스러운 광경이었습니다.” ‘이 새끼는 갑자기 자기 이야기 하다가 진청 이야기로 빠지고 그래. 그건 한참 뒤에나 일어나는 일이라며.’ “말주변이 없어서 너무 난잡하게 이야기를 푼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악마소환사 진청과 미치광이 싸이코패스 정진호가 일종의 유착관계가 있다는 것은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진청 녀석이 결국 뒤통수를 때렸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과연 1회 차에 인류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빌런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믿지 않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동료들까지 사지로 내모는 냉혈한, 이런 쓰레기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진작 처리해 놓기를 잘했어.’ 대륙에 공포를 불러올 두 명의 빌런을 빠르게 처리했다고 생각하니 확실히 편안해진다. 지금 이 시점에서 녀석들이 살아 있었다면 이런 여유도 부리지 못했겠지. ‘얘네 생각은 이쯤 하지, 뭐.’ 어차피 계속해서 듣게 될 테니까. 지금 녀석들의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김현성의 1회차 이야기였다. ‘확실히 재능이 있기는 있어.’ 자랑하는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1차 전직, 2차 전직을 한 상태로 아귀들 수십 마리를 베어버렸다는 건 재능으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머릿속 지식이 들어왔다고 한들, 그 누가 그렇게 싸울 수 있겠는가. 아마 그 형이라는 사람의 위기와 죽음이 김현성을 깨우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곳에서 장렬하게 사망해 줘서 오히려 다행이다. 김현성의 경험치가 되어 사라진 그분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될 것이 분명했다. 조금 의문이 남는 것은 김현성이 그 사람을 찾지 않았다는 것. 아니…. ‘찾아보기는 했지만….’ 발견할 수는 없었겠지. 애초에 정보가 너무 없었으니까. 실제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알고 있는 거라고 해봐야 목소리 하나. 심지어 그 목소리도 온전치 않았을 확률이 높다. 김현성으로서는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었으리라. 어쩌면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미처 생각이 닿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그 사람은… 형이라는 사람은 지금….” “튜토리얼을 진행하며 한번 찾아보려고 했지만, 역시 쉽지 않더군요. 너무 정신없이 달려가서 그 굴에 처박혀 있었던 터라 기억도 나지 않았고요.” ‘찾기는 했었네.’ “아마 살아 있을 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말입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 1회 차에 비해 몬스터의 숫자를 많이 줄여놨었으니까요.” “가끔 혼자 바깥에 돌아다닌 이유가 있었군요.” “네, 매번 그 이유로 던전을 돌아다닌 건 아니었습니다만… 아무튼 그렇게 던전을 빠져나온 이후에는 파란 길드에 들어갔습니다. 공략조에 들어가지 못해 상대적으로 주목은 덜 받았습니다만….” ‘낭중지추라고 했으니까.’ 아마 훈련소에서 훈련하다 보면 녀석이 숨은 원석이라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차희라 님이나 박연주 님에게 오퍼를 받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파란 길드를 선택했었습니다. 이것저것 잴 여유가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요. 지금 길드 고문으로 계시는 이상희 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당시에 파란 길드가 사정이 좋지 못해서 고생을 조금 했었습니다. 점입가경으로 이설호 그 사람이 악마숭배자 이토 소우타를 끌어들이며 상황이 더 안 좋아졌고요. 그게 첫 번째 전쟁이었습니다.” “네?” ‘진짜 개판이었구만.’ “실리아와 린델의 도시 간 전투가 제가 겪은 첫 번째 전쟁이었습니다. 물론 그 전쟁이 끝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교국에서 어느 정도 중재를 해올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더군요.” ‘그럴 만하지.’ 당시에 교국은 악마숭배자 이토 소우타 녀석이 꽉 잡고 있었으니까. 정계는 물론 교황청에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교국의 개입을 최소화하려고 했을 것이다. 교국, 그러니까 구 제국의 입장에서는 강한 무력을 갖춘 두 도시의 싸움을 관망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모험가들의 입지를 줄인다는 과업을 손 안 대고 풀 수 있다고 생각해 보면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니다. 당시 제국의 대가리였던 황제와 샤를리아, 그 머저리가 그런 상황을 계산하고 관망한 건지는 의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선택이 공화국과의 전쟁을 촉진하는 역할에 조미료를 뿌렸을 것이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안 그래도 호시탐탐 교국을 노리고 있었던 진청쓰레기와 공화국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었겠는가. 전체적인 흐름을 고려하면 1회 차는 지옥 아닌 지옥, 전쟁과 전투가 끊이지 않는 개판 오 분 전의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실리아와의 도시 간 전쟁, 살인여단의 등판, 공화국과의 전쟁, 가면 쓰레기 진청이 표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도 딱 이즈음일 거다. 그다음이 아마 김현성이 회귀를 하게 된 시점의 이야기겠지. 내가 알고 있는 흐름은 딱 이게 끝. 중간중간 던전에 들르거나 여유를 즐길 시간은 있었겠지만, 사건은 끊이지 않았을 거다. 조금 궁금했던 것은 박덕구가 죽은 시점이었지만, 흐름으로 보면 실리아와의 도시 간 전쟁과 살인여단의 등판 사이일지도 모른다. 세세한 이야기 하나도 놓치기 싫은 내 입장에서는 조금 더 김현성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작은 단락을 끝내자 아침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웠네.’ 정말로 밤새도록 녀석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기영 씨가 파란 길드에 함께 들어오면서부터 많은 게 달라졌다는 겁니다.” “아….” “네, 실리아와의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고 교황청과 제국의 힘겨루기로 일어나지 않았죠. 악마숭배자 이토 소우타를 빠르게 퇴장시킬 수 있었고 아까 말했던 진청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대륙의 모든 국가가 더 빠르게 힘을 모을 수 있기도 했고요. 1회 차였다면 지금 한참 대륙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을 겁니다.” “알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군요.” “제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모를 겁니다.” “그럼 실리아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제가 파란 길드를 이어받았습니다.” ‘딱 그때부터 시작이었구만.’ 거기서부터 김현성 정권이 시작됐다. “실리아와 린델의 전쟁에 대해서는 이후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해드리겠지만, 그 이후에 제가 파란 길드의 길드 마스터로서 활동했습니다. 많은 길드원이 죽었고 린델과 실리아 양 측에서도 많은 사망자가 생겨났습니다. 제국 쪽에서도 부랴부랴 중재하는 모션을 취했지만, 이미 너무 큰 피해가 생겨난 이후였죠. 아마 이토 소우타가 죽지 않았더라면 전쟁이 더 길게 이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려야 했겠죠.” “이토 소우타는.” “제가 직접 죽였습니다. 제가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운이 좋았었습니다.” ‘이거 좀 자세히 듣고 싶은데.’ 악마숭배자의 최후가 정확히 어땠는지 듣고 싶다. ‘이 새끼도 참 대단하긴 해.’ 전쟁으로 인해 급속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겠지만 그게 이토 소우타 보다 강해진다는 뜻은 되지 않는다. 당시 이토 소우타의 민첩 수치는 99. 김현성이 아무리 빠르게 성장했다고 해봐야 80을 넘지 않았을 거라는 걸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다. 특히 재판장에서 녀석의 신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적이 있는 만큼 더욱더 놀라웠다. 운이 좋았다는 건 과장이 섞인 표현은 아니다. 물론 그 운이 따를 수 있었던 것에는 김현성의 기본기가 바탕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궁금해진다. 그때의 상황과 그때의 전투, 김현성이 어떻게 파란 길드에서 자리를 잡고 파란 길드를 지금과 같은 삼대 길드로 만들었을지도 궁금하다. 전쟁이 끝난 직후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김현성이었으니 많은 이들의 지원과 투자가 있었겠지만, 길드 운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김현성은 무능력의 아이콘에 가깝다. 당시 부길드마스터로 있었던 이상희도 무능력하기는 마찬가지고…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얼마나 길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시기가 맞는다면…. ‘조혜진이 들어왔겠구나.’ 캐슬락 내부고발 사건으로 인해 길드와 클랜을 구하지 못한 조혜진이 파란에 가입했다고 가정하면 대충 아귀가 들어맞는다. 김미영 팀장 같은 유능한 행정자원이 없었을 테니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겠지만, 조혜진과 김현성은 천천히 길드를 삼대 길드와 비슷한 자리로 끌어 올렸을 것이다. ‘영웅 던전 공략 한 번만 성공해도, 뭐.’ 쉽게 주목받을 수 있었을 테니까. 내 예상대로 김현성은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물론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때마침 혜진 씨가 파란 길드로 들어와 준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맨 처음 혜진 씨를 데리고 왔을 때 비서실장으로 곧바로 임명한 것도….” “그때 일은 죄,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기영 씨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럼 예리나 하얀이도 당시 파란 길드원이었던 겁니까?” “하얀 씨는 파란 길드 소속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마도 길드 소속으로… 이후 전쟁 도중 악마 소환사 진청에게 속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 말을 잇다가 내 반응을 살피는 김현성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아마 충격받은 듯한 내 표정을 본 것이 확실하리라. “쓰레기 같은 자식.” 안절부절못하는 김현성의 모습이 다시 한번 시야에 비쳤다. # 553 회귀자 사용설명서 553화 복수의 동기(2)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튜토리얼 스토리 이후로 이것저것 두서없이 정보를 쏟아내고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왔다고 판단하는 게 맞다. 어쩌면 배려가 부족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표면적으로 정하얀과 나는 연인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면전에 대고 ‘아, 당신 여자친구가 1회차에는 웬 쓰레기 같은 녀석에게 속아서 말이야. 자살했었어. 얼마나 처참했었는지 말이야… 막 학대당한 흔적 같은 것도 보이더라고’라고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1회 차 때의 일은 지금과는 다르지만, 진청쓰레기가 정하얀을 농락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긴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 “…….” “그래서였군요. 그래서….” “네?” “진청과 처음 만났을 당시에 그가 하얀이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따로 쪽지까지 전해줬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시에는 그저 마법적인 재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네, 기영 씨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다시 한번 더 그자에게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홀리는 것은 그자의 특기였으니까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자… 자신의 방에서 약을 마시고 죽어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다른 외상은 없었고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라 암, 암살당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만….” ‘아이고… 현성아. 그렇게 형을 배려해 주고 싶었어?’ “발견된 편지에서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정하얀은 스스로 목을 매달고 죽었다. 녀석이 저렇게 이야기를 각색한 것을 보니 나를 배려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말을 내뱉으면서도 최대한 조심하고 있는 듯한 모습, 학대당한 흔적에 대해서는 입 밖으로 내뱉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오해는 풀렸다고 봐도 되는 거지?’ 1회차의 이기영은 튜토리얼 던전에서 죽었다. 혹시나 이기영이 가면쓰레기가 아닐까 하는 김현성의 의심은 완전히 걷히다 못해, 사라져 버렸다. 아마 내가 악마들에게 납치당했던 시점부터 의심이 풀렸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쾌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진청, 그자는….”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인류 최대의 적이기도 했고요.” “혹시 희라 누나 역시.” “용병 여왕님은 전쟁 중에 행방불명 됐습니다. 물론 붉은 용병에서 그렇게 발표했을 뿐이지 아마 전쟁 도중에 죽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진청 그자의 손에… 말입니다. 혜진 씨도… 다른 많은 동료도 전부… 죽었습니다. 전부 그자 때문에….” “후우… 기분이 이상하군요. 분명히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분위기를 무섭게 만들었군요.” “아니요. 오히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초에 무거운 이야기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이 정도는 견뎌낼 수 있습니다. 물론 찝찝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 회차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이야기니까요. 하얀이도 희라 누나도 지금은 모두… 네, 돌아가면 한 번 꼭 안아주고 싶군요. 한데. 그 악마소환사는 도대체….” “목적은 아마도 인류에 대한 복수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복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는 인류의 적이었고 1회차에 위험을 가져온 인물이었다는 겁니다. 도시 하나를 전염병으로 물들이기도 했고, 전쟁에서 아군을 감염시킨 채로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아….” “살인마 정진호를 버린 것처럼 그자는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이용하고 버리고 또 이용하고 버리며 대륙 전체를 기만했습니다. 동기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찾을 수 없더군요.” ‘찾아보려고 했었어? 그걸 또? 그래서… 그랬던 거야?’ 괜스레 똥줄이 타 허겁지겁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동기 따위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저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아마 그런 이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겠죠. 현성 씨 같은 사람이라면 특히요.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 “선천적으로 어딘가 망가진 인간일 겁니다. 싸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 같은 부류로요. 아니, 그보다 더 지독하고 악독한 인간이었겠죠. 그자는 그저 조금 더 악독하고 타인의 고통과 공포를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자들은 이해할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이 아닙니다. 아마 모든 게 연기였을 겁니다. 타인의 가면을 쓰고 자신이 원하는 캐릭터를 연기한 겁니다. 인류에 대한 증오와 복수, 그런 캐릭터를 연기했을 뿐입니다. 저 역시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진청의 공화국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어째서 라이오스에 악마를 소환했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더군요. 저도 처음에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인간이 단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단지 자신의 쾌락과 유희를 위해 평화롭게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던 이들을 전쟁터로 내몰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쓰레기 같은 놈이지, 정말.’ “하지만 아니더군요. 동기 따위는… 이유 따위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 “그자는 그런 인간입니다. 네, 그냥 그런 인간이었을 뿐이에요.” “겨우…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이 눈에 보인다. 입술과 팔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당했던, 자신이 겪어왔던 그 모든 게 한 쓰레기의 악의와도 같은 취미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다. 얼마나 황당할지, 또 얼마만큼의 분노를 느끼고 있을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많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또 많은 전투가 있었고,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녀석과 녀석의 동료들, 또 많은 인류가 겪어야 했던 그 모든 고통이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것 때문에….” 희생당해야 했고 고통스럽게 죽어가야 했다. 동기에 대해 의문을 느끼고 있었던 김현성은 허탈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김현성의 감정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김현성의 입장이었다면 저런 얼굴을 하고도 남았으리라. 한 가지 의문점은 김현성에게 정말로 걸리는 게 없냐는 것. 김현성과 파란 길드가 내가 본 박덕구의 죽음에 정말로 관여하지 않았느냐는 점이었다. 당시 박덕구는 가면쓰레기를 지키기 위해 죽었다. 그게 가면쓰레기가 대륙에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된 시발점이었고…. 파란 길드와 김현성 역시 가면 쓰레기의 목표에 있었을 것이리라. ‘오해가 있었던 건가.’ 확실한 것은 이야기를 전부 다 듣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차차 들을 수 있겠지, 뭐.’ 지금은 배도 고프고… 무엇보다 졸린다. 포션으로 버티려고 해봤지만, 어느새 솔솔 잠이 쏟아질 것 같은 느낌. 일단 분노에 점점 빠지고 있는 김현성부터 깨우도록 하자. 가장 궁금했던 것 하나만 더 듣고 말이다. 내가 먼저 최종 빌런에 대한 걸 물어볼 수가 없으니 슬금슬금 빌드업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큰 가닥만 잡자. 그 안에 수록된 다른 이야기들은 다시 들을 기회가 있겠지, 뭐. 아직도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현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자 예상대로 녀석은 조용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입니다. 진정하셔도 됩니다.” “네, 그렇죠, 네.” “그자는 이미 죽었고 자신의 죗값을 치렀습니다. 물론 저는 현성 씨처럼 1회 차를 겪지 못해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현성 씨가 걱정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전부 끝난 겁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던 녀석은 어느새 조금은 진지한 얼굴로 이쪽에 말을 건넨다. “아니요. 사실… 사실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닙니다. 살인마 정진호도, 이설호와 이토 소우타도, 진청도, 지금은 모두 없지만, 모든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기영 씨에게 제가 회귀했다고 고백한 것은 제 마음속에 있는 짐을 던져 버리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앞으로 다가올 위협에 함께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그래, 그걸 기다렸다, 현성아. 그걸 기다렸어. 전부 끝내고 행복해져야지, 우리.’ “그러고 보니 베니고어 님께서.” “네, 위협은 실존합니다.” “…….” “…….” “바깥 신의 파편.” “바깥 신의 파편?” “조금 갑작스러울 수도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은 거짓 하나 없는 진실입니다. 파도의 웜홀에서 선희영 씨가 목격한 아우터 갓의 일부로 어째서 대륙에 오게 된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 목적도 자세히 알 수는 없었고요.” “…….” “그자는 인간을 증오했지만, 대륙을 자신의 관리하에 두려고 했었습니다. 개체 수를 유지하려고 했다는 게 올바른 표현일 겁니다. 이건 1회 차의 제가 진청, 그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였습니다만….” ‘어?’ 김현성의 말을 듣던 중에 생각난 의문 한 가지. 인류는…. ‘전멸하지 않았나?’ 무의식 세계에서 김현성은 회귀 직전 혼자 남아 만신창이가 된 대륙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생존자는 존재하지 않았고, 녀석 역시 그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류의 개체 수를 유지하고 싶다는 바깥 신의 뜻과는 대조적인 이야기에 약간의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뭐지?’ 당장 떠오른 가능성은 두 가지 정도, 첫 번째는 바깥 신의 진짜 목적이 대륙에 멸망이었던 경우다. ‘얘도 완벽하지 않은 거야.’ 신도 완벽하지는 않다. 베니고어는 그 사실을 항상 내게 강조했다. 바깥의 신 역시 완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도들을 모아야 했고 더 큰 신성을 가져야 했다. 파편이라고 했으니 본인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는 대륙의 생명체들을 삼킬 수 없을 거라는 판단이 섰을 것이고, 자기편을 만들어 인류를 이간질해 싸우게 했을 것이다. 신성이 모이고 인류의 개체 수가 안정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곧바로 먹튀. 꿀꺽 대륙을 삼킨 이후, 자신을 믿었던 지지자들을 배신하고 다른 대륙으로 가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바깥 신의 진짜 목적이 관리에 있었던 경우다. ‘이것도 그럴듯하지.’ 만약 내가 바깥 세계의 신이라면 대륙을 관리하는 것에 어떤 동경을 품지 않았을까 싶다. 인간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다면 더욱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녀석일 테니 대륙 하나 붙잡고 신 놀이라도 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여기서 문제는 어째서 대륙이 그 지경이 됐느냐에 대한 것. 가능성은 작지만… 어쩌면…. ‘가면쓰레기가 바깥 신 통수까지 날려 버린 건 아니겠지?’ 애초에 인류를 증오하고 복수하려고 했던 가면 쓰레기가 외부 신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며 충성심을 보일 거라는 건 상상하기가 힘들다. 실제로 가면쓰레기는 여단에 가입했을 당시, 썩어빠진 모든 인간에 대한 복수라는 주제를 타이틀로 내걸고 입단했었고…. 행보나 분위기를 보면 복수심을 완전히 버린 것 같지도 않았다. 바깥의 신은 관리와 유지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가면 쓰레기가 생각했던 것은 인류의 파멸. 어쩌면 뒤를 핥아주는 척하다가 소중한 바깥 신의 대륙에 똥을 투척하는 방법으로 뒤통수를 때렸을지도 모른다. 일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도록 유도했을 가능성도 존재하고. 만약 두 번째 가설이 들어맞는다면…. ‘이 새끼, 진짜 난 놈이네.’ 이쯤 되면 뒤통수 후려치기의 장인이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다. # 554 회귀자 사용설명서 554화 준비(1) “물론 바깥 신의 파편이 인간의 개체수를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 역시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드리는 게 민망하지만, 당시 제가 접할 수 있는 정보가 많이 제한되어 있었던 터라… 무엇보다 마지막 순간에 남은 것이 저 혼자라는 걸 생각해 보면 진청, 그자가 거짓말을 했을 확률도 고려해야 할 겁니다. 아니면 바깥 신이 단순히 대륙을 관리하는 것에 염증을 느꼈을 수도 있고요.” “마지막 순간이라면….” “아무것도 없는 대륙 위에 홀로 남겨진 적이 있었습니다.” “네?” “…….” “…….” “역시… 기억 못 하시는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살짝 아쉽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무의식 세계에서의 일을 기억해 줬으면… 하는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숨기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자. 어차피 내가 기억하느냐, 못하느냐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기왕이면 혼자만의 추억으로 남겨놓는 편이 더 좋다. 기억한다고 하면 이것저것 설명해야 할 부분이 늘어날 수밖에 없으니까.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상황을 정리하는 중에도 중간중간 의문점들이나 새로 알게 된 흥미로운 부분들이 밟힌다. 대표적으로 대륙에 김현성이 홀로 남은 일이나 바깥 신의 파편과 가면 쓰레기의 관계 같은 것들 말이다. 김현성조차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일도 꽤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의문이 남았다. “일단은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밤새 이야기를 들어주시느라 많이 힘드셨을 텐데, 너무 피곤하시면 오늘은 주무시고 가셔도….” “아뇨, 다른 길드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천천히 이동하면서 바깥 신의 파편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내로 나가 식사라도 하면서요.” “아! 네,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요.” ‘정보.’ “사소한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꼭 이야기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입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확실히 김현성은 속이 확 뚫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녀석도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해 내게 상담을 요청해 온 것이겠지만, 무의식 세계에서처럼 짐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지만, 이걸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을 테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 아마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 같은 경우에는 ‘무력을 키워야 한다. 모두를 지킬 수 있도록 더 강해져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 정도가 한계였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 위협에 관해 설명해야 하는지, 정확히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그림이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겠지만, 그건 녀석의 전문 분야가 아니지 않은가. 정말로 속이 후련하다는 표정에 내가 다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일단 생김새를 설명하자면 이질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이질적이요?” “네,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입니다. 엘프들이나 다른 이종족들처럼 종족이 다르다는 느낌보다는 설명하지 못할 경외감을 느끼게 합니다. 마치 현세로 내려온 신들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와도 다른 느낌입니다. 베니고어 님이나 다른 신들이 그나마 인간에 가깝다고 한다면, 그는 조금 더 고차원적인 느낌의 생물이라고 부르는 게 알맞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진청, 그자 말고도 그를 추종하는….” “있었습니다. 인류를 저버리고 그자를 추종하고 신봉하는 이들 말입니다. 그들 자신을 신의 사도라고 부르며 바깥 신의 뜻에 따라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했었습니다. 물론 그 정점에 선 것이 바로 진청이었고요. 지금의 기영 씨가 베니고어 교단을 대표하듯이 그자 역시 바깥 신의 교단을 대표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신성을 모아준 거라고 봐야 되나?’ 그렇게 생각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이 새끼는 완전히 카멜레온이네.’ 여단 다음에는 교단, 사막 한가운데 떨어뜨려 놓아도 살아남을 새끼라는 건 확실하다. 아무튼, 여기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녀석 역시 신성이 필요하다는 것. 애초에 신들에게 있어서 신성은 힘이자 돈이며 모든 것이다. 녀석의 진짜 목적이 대륙의 관리든 대륙의 파괴든 간에, 신성을 필요로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으음….’ 예상하건대 추종자들을 통해 신성을 모으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으리라. 김현성이 앞서 묘사한 대로 녀석은 신성을 뿌리고 다니는 신이었으니까. 그 베니고어조차 실제로 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김현성이 그렇게 느낄 정도이니 바깥 신의 파편인지 뭐시기인지도 어련할까. 단순히 겉모습만으로도 대부분 인간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품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거다. 이를테면 사이비 종교에 특화된 외관, 신성을 뿌리며 ‘믿습니까.’를 외친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은 쉽게 걸려들 확률이 높다. 거기에 진청 쓰레기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선동과 날조가 조미료처럼 뿌려지면 인간 몇 속이는 건 일도 아니다. 그에 상응하는 무력을 갖추고 있다면 더욱더. ‘너무 쉬웠겠는데.’ 인류의 일부만 추종자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혼자 내려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이들 역시 있었고, 외관은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심지어 신의 군대까지 보유하고 계셨단다. 입을 털기에 최적의 상황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김현성은 그 외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쏟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정보를 대략 정리해 보자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으리라. 1. 녀석의 정확한 목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목적은 인류의 개체수 감소를 통한 관리이며, 외부 신이 대륙을 배정받지 않거나 못했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그럴듯한 이야기다. 2. 녀석의 생김새는 기본적으로 신성을 가진 신이나 다름이 없다. 베니고어를 비롯한 다른 신들보다 더 이질적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3. 녀석의 정확한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김현성조차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짐작하기로는 현세로 소환된 벨리알 이상이라 예상하며, 준신화 등급 아래로 분류된 공격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말하자면 녀석의 공략에 참여할 수 있는 인원수가 한정적이라는 뜻이다. 4. 녀석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있고 인류는 그들을 천사라고 불렀다. 녀석을 보좌하는 존재들이며, 무력은 최소 도노반이나 리무르아 같은 악마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추정된다. 5. 최초로 소환된 장소는 북쪽일 확률이 높다. 최초의 빛이 북쪽에서 일어났고, 그 이후에 그들이 활동을 시작했으니까.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큼지막하게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전부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파고들 여지가 남아 있었지만, 이건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들을 수 있는 이야기고, 대응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일단 이 그림에 상응하는 그림을 그려줘야 이야기가 된다. 가장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역시 최북단에 전진기지를 만드는 것. ‘정확하지는 않다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최초 소환된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이점이다. ‘회귀가 좋기는 좋네.’ 물론 모든 상황이 1회 차처럼 돌아가지 않기에 제한적일 수도 있다. 아주 작은 일에도 영향을 받고 행동 방향을 바꾸는 인간군상의 경우에는 그 나비효과가 커다란 것이 사실이니까. 그것 때문에 김현성조차 이번 회차를 겪으면서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일어나는 것이 확정된 이번 이야기는 다르다. 녀석은 대륙의 적이었고 대륙에 소환될 존재다. 여기에는 그 어떤 나비효과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아주 먼 나라에서 나비 수백만 마리가 날갯짓한다고 한들, 바깥 신의 파편이 대륙의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미 확정된 이야기다. ‘이건 쉬울 수도 있어.’ 미리 알고, 미리 대비할 수 있다. 녀석과 싸울 수 있는 병력을 양성하고 녀석을 맞이할 성벽을 쌓는다. 녀석을 카운터칠 수 있는 여러 가지 무기를 준비하고, 대륙을 계속해서 담금질한다. 최대의 난적인 진청 쓰레기마저 이미 극에서 퇴장한 상황, 1회 차보다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하다고는 볼 수 없는 형국이다. 잘 돌아가지도 않는 대가리를 계속해서 굴리자, 김현성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기영 씨.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아, 네, 조금은 피곤합니다만 버틸 만합니다. 계속 깨어 있다 보니 배가 고프기도 하고요. 주문은….” “식당에 들어오면서 이미 마쳤습니다. 간단하게 빵과 스튜로 했는데 괜찮으실지.” “아, 괜찮네요.” “아침에는 종종 드시고는 하셨으니까요. 생각에 너무 빠져 계신 것 같아 따로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같은 걸 시켰을 것 같아서….” “다행이군요. 일단 생각은 잠시 넣어두시고 식사부터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몸도 성치 않으신데 너무 무리하신 것 같아서… 제가 너무 붙잡아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 피곤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반인보다는 체력 수치가 높다. 하루 정도는 밤을 새워도 문제의 여지는 없지 않을까. 피로 회복 포션을 슬쩍 들이키기도 했고…. 하지만 그동안 많은 걸 눈으로 봐온 녀석으로서는 혹시라도 내가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모양. 본인이 밤새도록 이야기를 쏟아낸 건 기억나지 않는지 지금에 와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우습기는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어차피 레스토랑에 들어온 이후로 저번처럼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무리가 있다. 김현성이 마력의 장벽을 겹겹이 쌓아 놓았다고 한들, 쏟아지는 시선을 감당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지 않겠는가. ‘여기는 아침부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녀. 우리나라 사람들 진짜 부지런하다, 부지런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어나 일터로 몸을 옮기는 와중에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법으로 규정된 근무 시간을 어기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걱정이 다 될 정도. 분명한 것은 이곳 헤르엔은 아침부터 활기가 넘친다는 것. 파티를 구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모습도 보였고, 식당에 앉아 하루를 시작하기 위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모험가들도 눈에 많이 띈다.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다 보니 마침내 간단한 스튜와 빵이 나왔고 기계적으로 녀석들을 떠먹기 시작했다. 김현성이 뭐라 말을 걸어왔지만, 대부분이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 잠깐은 생각을 멈추라고 부탁받았지만, 머릿속은 1회차 생각에 여념이 없다. ‘핵심이 뭘까.’ 어떻게 해야 꿀 덩어리에 퐁당 빠져 행복을 영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그거네.’ 이것 역시 확실하지는 않지만, 보험상 투척해 놓으면 좋을 이야기이기는 할 것이다. ‘신성.’ 이번 회차에 가면쓰레기 진청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외심에 속아 녀석을 모시는 이들이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베니고어에 대한 믿음이 워낙에 확고한 교국민들이야 녀석에게 낚이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건 준비를 하는 게 맞아.’ 아우터 뭐시기가 신성이 충분하든 충분하지 않든 간에 일단은 대비해야 한다. 힘을 깎을지언정 보태줄 수는 없었으니까. 대륙인들에게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녀석이 올 거라는 것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충분한 교육과 설명이 없다면 집단 중 몇몇은 녀석에게 속아 소중한 신성을 헌납할지도 모른다. 해야 할 일이 많지만, 가장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해결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자, 내가 뭣 때문에 웃는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김현성도 얼떨결에 미소를 보내온다. 그렇게 정확히 3일 뒤, 교국일보, 아니 대륙 전역의 언론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헤드라인의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의 육신에 베니고어 님이 다시금 강림. “신과 천사의 탈을 쓴 고대의 악마가 대륙의 전역을 불태우고 모든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울부짖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교국일보 김성경 기자.] # 555 회귀자 사용설명서 555화 준비(2) -그럼 금일의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이 회견장에 찾아와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일단은 알고 계신 일정대로 간단한 브리핑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24일 저녁 12시에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파란 길드의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의 몸에 다시금 베니고어 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아무런 전조도 없었던 강림이었기 때문에 저희 역시 많은 준비를 하지 못했지만 파란 길드에서 베니고어 님의 강림, 아니, 베니고어 님의 예언에 관한 내용을 전문으로 보내주셨기 때문에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발표하고자 합니다. -……. -신과 천사의 탈을 쓴 고대의 악마가 대륙의 전역을 불태우고,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울부짖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터전을 위협하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 역시 많은 것을 말씀드릴 수 없는 입장입니다만, 이번 위협은 인류와 대륙에 커다란 재앙이 될 것이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이 땅에 자리 잡은 모든 이들이 마음과 뜻을 하나로 모아야만 합니다. 지금껏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많은 위험을 겪고 많은 갈등을 겪어왔습니다. -…….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간 동안 여러분들이 이 대륙에서 살아가는 것을 지켜봐 왔습니다. 많은 생명이 죽었고 또 많은 생명이 태어났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입히기도 했고 악의에 가득 찬 이들 역시 있었습니다. 하나 저는 믿습니다. 제가 잠깐 몸을 빌린 이기영 명예 추기경처럼 본래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고, 결국에는 옳은 행동을 하리라는 걸 믿고 있습니다. -……. -이는 커다란 시련입니다. 이 대륙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거대하고 크나큰 시련입니다. 하나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제게 보여주신 것처럼 결국에는 다시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으실 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겨내십시오. 여러분들은 해낼 수 있습니다. 부디 이 커다란 시련을 이겨내십시오. 이 신성한 땅에 발을 들이려는 어둠에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빛이 얼마나 강한지 깨닫게 해주십시오. -……. -이상입니다. 이에 따라 베니고어 교단을 비롯하여 대륙 전역에 있는 다른 교단들과 연합하여 고대의 어둠에 대항할 조직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많은 교단에서도 현재 신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에 있으며 엘룬 님께서도 엘레나 님을 통해 자신의 뜻을 전했다는 것을 확인한 상태입니다. 이전에 겪어본 적이 없는 커다란 어둠이 표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에 전 교단뿐만이 아니라 교국과 공화국, 왕국 연합과 중립국은 이번 사태를 국가 위기 사태라고 판단.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를 조직, 대륙 전체를 위원회의 아래에 두고 관리, 보호 하고자 합니다. 이상입니다. -뭐? -정말입니까?!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오스칼 님. -네. 머지않은 시일 내에 전 대륙은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가 관리하게 되며 그 인선에 대해서는 정해지는 대로 말씀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모든 국가와 교단들은 군부와 거대길드에 포함된 모든 후보와 인선에 대해 논의하며 청문하는 입장에 있으며 대륙인들이 만족하실 수 있는 인선을 뽑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정부가 대륙을 하나로 묶어 관리하게 되며 위원회가 구성되는 즉시 언론과 출판, 집회와 결사 역시 정부의 권한 아래 움직이게 됩니다.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해 여러 단체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권한만을 행사하겠다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겠지만, 이 자리에서 발표를 드려야 할 사항이라 생각해 먼저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희 중앙 정부에서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이후 인선이나 구조에 관한 결정이나 자잘한 사항들에 모든 결정이 생기는 즉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질문받겠습니다. -교국일보의 김성경 기자입니다, 오스칼 님. -네, 김성경 기자님. -많은 혼란이 우려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오스칼 님 역시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륙에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든 대륙인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지만, 국가 기관에서 이를 표면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끼칠 영향에 대해서 고려해 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해 대륙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발표를 에둘러 표현하신 것처럼 보이십니다만… 커다란 우려와 혼란을 예상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를 만들어 발표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저희 역시 이것을 발표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김성경 기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시민 대부분이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 자리의 이야기가 여신의 거울을 통해 흘러나가게 되면 대륙 전역에서 커다란 혼란이 야기될 것도 당연히 예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 우리는 강합니다. 많은 일을 겪었고 많은 위험을 헤치고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께서는 이번 일을 정부의 일뿐만이 아닌 이 대륙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직면해야 할 문제라고 느끼고 계십니다. 이에 저희 역시 그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대륙은 혼란과 공포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베니고어 님의 뜻처럼 저 역시 인간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이상입니다. -라이오스의 제이콥이라고 합니다. -네. -베니고어 님께서는 신과 천사의 탈을 쓴 고대의 악마가 대륙의 전역을 불태우고 모든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울부짖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네, 맞습니다. -신과 천사의 탈을 썼다는 표현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만, 정확히 어떤 일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는지요. -네, 명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현재 여러 교단 측에서 베니고어 님의 예언을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정확하게 발표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신과 천사의 탈을 썼다는 말은 단순히 겉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력을 사용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한 것 역시 해석이 완료되는 즉시 발표해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화국칼럼의 세르게이스키입니다. -네. -굳이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를 두어 대륙 전체를 그 아래 두신 다 선포하신 의도가 궁금합니다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대륙에 드리워진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교국의 악마숭배자 이토 소우타와 공화국의 악마소환사 역시 대륙 안에 숨어 있던 어둠 중 하나였다는 걸 떠올려 본다면… 네, 신과 천사의 탈을 쓰고 있는 만큼 대륙 안에 있는 숨어 있는 어둠이 빛의 뒤에 숨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 비상사태이며 대륙 위기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국가 지도자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걸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금 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입니다. -베니고어 님의 강림을 여신의 거울로 공개하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사실상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가 시민들의 자유 권리를 제한한다는 것은 계엄 사령부가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자리에 이기영 명예 추기경을 올리기 위한 자작극이 아닌지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만…. -뭐? -뭐야, 지금 저 새끼가 무슨 말 하는 거야! 당장 끌어내! -실제로 베니고어 님께서 강림하신 것이 맞는지 의심이 있습니다. 공화국과의 마지막 전쟁에서도 진청 님에게 언데드 소환 혐의를 덧씌웠다는 의혹이 있는 만큼 이번 계엄령 선포와 여신 강림에 대해서도 투명한 공개가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당장 입 막아! 이 악마소환사의 끄나풀 새끼! 어디에다 대고 계엄령이라는 거야! -진청 님께서는 악마소환사가 아닙니다. 이 정보들과 정황들을 보면! 진청 님께서도 피해자…. -저 새끼 누가 출입시켰어! 당장 끌어내지 못해! -진청 님은 악마소환사가 아니다! 으읍! 악… 으읍! -이 악마의 졸개야! 여기가 어디라고! -으읍! 아니야! 아니야아!!! 끄윽…. -당장 이단 심문관을 데려오세요! -아니야아!!! 이기영, 네가 사람이야! 네놈이 사람이냐고! 군사님께서 그랬을 리가 없어! 군사님께서 그러셨을 리가 없다! -입 막아! -신의 탈을 쓴 악마는 바로 너다! 이기영! 바로 네놈이다!!! -제기랄! 끌어내!! -……. -……. -……. -이것이 이유입니다. 보셨던 것처럼 아직도 대륙 내에는 저런 자들이 활보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불편할 것이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는 권력자들의 사사로운 이득이 아닌, 대륙을 위해서입니다. 추가로 이기영 명예추기경님께서는 저희 위원회의 자리에 앉는 것을 거듭 거절하시고 계시는 상황입니다만…. -교국일보의 김성경 기자입니다! 혹시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의 건강 때문이 아닌지…. -아니요. -일전에도 베니고어 님께서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의 몸을 빌리셨을 때, 많은 고통을 겪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새로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게 확실한 겁니까? 저희 교국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꼭 대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 -……. “건강하긴 건강하지.” “누워서 과자 먹는 거 진짜 꼴불견이네요. 아마 저기 있는 사람들이 지금 오빠 모습 보면 뒤집힐 걸요.” “그럼 어쩌겠어. 베니고어 같은 건 몸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기왕이면 다른 사람들이 전부 보고 있을 때 진짜로 보여주는 게 효과적일 텐데… 이번에는 따로 영상 공개 안 할 거예요?” “이번에는 공개 못 한다니까. 영상이야 못 찍었다고 하면 되는 거고, 사실 여러 가지 의혹이 생겨나고 있는 상황도 아니잖아?” 솔직히 공개하고 싶기도 했지만, 공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현시점에 갑자기 베니고어 님의 신탁을 받았다고 이빨을 털기엔 김현성의 시선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야기를 들은 직후 몸이 황금색으로 돌변하며 개연성에 상처를 주는 것보다는 조금 억지스럽더라도 녀석을 이해시키는 편이 낫다. 우리 회귀자도 이런 종류의 발표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동의해 왔으니 문제 될 게 어디 있겠는가. 투명해야 할 언론을 어쩔 수 없이 이용하는 건 가슴이 아팠지만, 전부가 이 대륙을 위해서였다. 지금 이 시점에 단합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었으니까. 사실은 곧바로 전시상태를 선포해 버리고 싶었지만…. ‘그것보다는 이게 낫지.’ 여러모로 불만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불만이야 단칼에 쳐내면 그만이지만, 현시점에서는 대륙 전체에 행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게 더 이득이다. 전 대륙을 관리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을 때 옆에 있던 이지혜가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방금 못 봤어요?” “그거야 특수한 경우고. 내 귀에 도청 장치에 달려 있다고 방송국 급습한 놈이나 다를 바 없다니까. 저런 거 신경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 주변에 있는 다른 기자들한테도 제지당하고 있는데… 악마의 졸개나 편집증을 앓고 있는 미친놈처럼 보이는 사람들한테 일일이 신경 쓸 정도로 여유롭지 않다고.” “아무튼, 그건 정말인 거예요? 그런 정보는 어디서 전해들었고 어느 정도인 거예요?” “나도 확실히는 몰라. 다만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건 아니야.” “난 또.” “왜?” “오빠가 본격적으로 대륙을 먹을 생각이겠구나 싶었거든요. 이렇게 언론 흔들고 이빨 털어서 계엄령 선포하고 자리에 턱 하니 주저앉은 다음에 권력 휘두르면서 100년 이상 독재 정치 해 먹으려던 거 아니었어요? 계속해서 ‘위험은 실존한다. 실존한다.’ 말하고 이빨 털면서 오래오래 해 먹으려는 줄 알았죠.”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야… 애초에 우리나라 사람들이야 역사 때문에 계엄에 대해서 인식이 좋지 않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이빨이 아니라 진짜로 국가 비상사태라니까. 거짓말이 아니야. 누나. 한 번 삐끗하면 정말로 다 뒈질 수도 있어. 나라고 뭐 이런 거 선포하고 조이고 싶겠어. 전부 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진지하네요.” “진지하지 그럼.” “그럼 정말로 저거 안 할 거예요? 사령부에 안 들어간다고요?” “아니, 들어가야지. 거길 왜 안 들어가.” “…….” “내 발로 안 들어간다고. 부를 때까지 기다릴 거야.” 슬쩍 뭉쳐진 신문을 확인해 보자 여러 가지 타이틀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지도자의 자격이 있는가. 여러 후보가 물망에 올랐지만, 아직도 난항.-교국일보 김성경 기자.] [이기영 명예 추기경이 커다란 결단을 내려야…. -교황청 소식] [천재검사와 연금술사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신간 출간. 역대 최단 시간 신간 출간에 모든 팬이 한마음 한뜻으로 환호를 보내. -린델 문화부 강유미 기자.] [공화국의 리엔샤오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지도자들과 대륙인들의 지지를 이끌 수 있을까. -공화국 소식통]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한 판단이 이루어져야 할 때.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교국일보 김성경 기자.] 약속된 승리의 흐름이라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지하지 못할 것이다. # 556 회귀자 사용설명서 556화 준비(3) 린델로 돌아온 지 시간이 약간 흘렀다. 파란 길드의 휴가 아닌 휴가는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끝났다. 헤르엔에서 다시 거울호수로 넘어온 이후에는 주변 탐사를 끝마친 길드원들과 함께 다시금 휴가다운 휴가를 즐겼다. 물론 나와 김현성은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드문드문 여러 가지 계획을 의논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리 무겁지만은 않았다. 김현성 입장에서는 지고 있던 짐을 함께 들 사람이 나타나 줬으니 얼마나 신이 날까. 물론 무의식 세계에서 이미 커다란 짐을 벗어 던지기는 했지만, 그것과 이건 엄연히 다른 이야기였다. 혼자만 미래를 알고 있는 것은 물론, 홀로 그 일을 맞이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상당해 보였으니까.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 일을 함께 계획할 수 있다는 게 기분이 좋았는지, 표정이 여실히 드러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물론 얼굴을 굳힐 때가 대부분 이었지만, 적어도 휴식 시간이나 다른 일정들을 지낼 때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욱더 좋았고 재미없는 농담을 던져올 정도였다. 정말로 재미없는 농담 말이다. ‘만날 때마다 술을 사라고 하는 고유 직업군이 새로 발견됐다고 하더군요. 뭔지 아십니까?’ ‘네?’ ‘마술사입니다.’ ‘아….’ 녀석의 농담에 웃어주는 것은 기껏해야 조혜진이 고작. 진심으로 웃는 것 같아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김예리마저 억지웃음을 지어주는 정도였으니 어련할까. 진심으로 이 새끼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품게 된다. 어쩌다가 이런 유머 감각을 가지게 됐는지 1회 차를 다시 한번 열어보고 싶다. 가슴 아프게 재미없는 농담이 녀석의 황폐한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녀석이 나서서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했다는 것은 분명 커다란 진전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아무튼 간에 파란 길드는 린델로 돌아와 다시금 일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정하얀과 엘레나는 물론 선희영과도 함께 뱃놀이를 즐겼고 예정됐던 차희라와도 꽤나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누군가에게는 재충전의 시간이기는 했지만, 누군가에게는 힘겨운 상황이기도 했다. 때마침 베니고어 강림 자작극을 벌인 터라 그 힘겨움이 표면적으로 드러났다는 소소한 이득도 봤지만, 온종일 잠들어 있는 경험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평소처럼 일어난 이후가 더 피곤하기도 했고…. 이런 상황에서 베니고어의 예언이 전 대륙적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잠깐 긴장이 풀렸었던 대륙의 국가와 길드들은 다시금 초긴장 상태로 들어갔고, 그만큼 많은 우려의 목소리와 계산 외의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혼란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내 상정 범위를 뛰어넘을 정도로 패닉에 빠진 이들이 나타난 것이다. 다소 자극적인 예언에 대륙 종말론을 설파하는 이들이 나타났고,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지만, 범죄율이 소폭 상승했다. 교국과 공화국, 라이오스나 대륙 연합은 스스로를 제어할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72군단과 벨리알에 의해 쑥대밭이 된 연방 쪽과 그 외 빈곤 지역, 중앙 권력 기관과 멀어진 소외 국가들의 경우에는 누가 봐도 심각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종말의 때는 언제인가.] [무책임한 베니고어와 대륙의 신들, 그들은 우리를 버렸다.] [어째서 이 모든 고통을 우리가 감내해야만 하나.] 자극적인 찌라시가 쏟아져 나왔다. 대륙에 종말이 올 거라며 광장에서 외치는 미친 자식들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언짢았던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악마 맛을 제대로 본 연방민들이야 이해가 갔지만, 소외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한숨이 다 튀어나올 정도. 교국 내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과 대륙 전체를 환기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사과 박스에 썩은 사과 하나가 들어가면 전체가 썩는다는 건 알고 있는 거죠, 오빠?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면 밀어버리는 게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어요. 일이 터져도 ‘다 죽을 거야!’라고 외치며 방방 뛰어다닐 놈들인데 저게 도움이 되겠어요? 장담하는 데 가만히 놔두면 다른 곳들도 전부 다 썩게 만들 걸요.’ 1회차의 가면녀답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섬뜩하고 쓰레기 같은 한마디를 내뱉은 이지혜.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혼란을 겪고 있는 녀석들 역시 품고 가야 총알받이 하나라도 더 건질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우터 갓이 들어오면 녀석에게 기대는 것은 아닐지 의심이 될 정도로 나약한 이들이었지만, 그 전까지는 나름대로 할 일이 있는 이들이었다. 베니고어를 비롯한 대륙에는 신성을, 벨리알 군단에는 실적을 주고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쪽이 둠기영 모드를 유지할 수 있는 만큼 27군단의 힘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박수를 칠 만한 상황이었고 결정적으로 혼란을 느끼는 이들 역시 머지않은 시간 내에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시간을 내서라도 한 번 방문해야지 어쩌겠어.’ 어차피 북부로 이동해 전진기지를 만들 예정이니 소외 국가들을 중심으로 순회 공연을 다니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물론 이 모든 일정은 원하는 자리에 취임하고 난 이후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예상했던 대로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인선이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 끊임없이 후보들이 자리에 오르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자격이 있는가를 논한다면 애매한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차희라조차 후보에 올랐다가 경질되지 않았던가. 다소 날이 선 일침이었지만, 전투가 일어났을 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게 바로 그 이유였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차희라 본인은 조금 상처받지 않았을까. 언론에서는 매번 누가 보호 관리 위원회에 자리 잡을 인물로 적합한지 떠들어댔고, 자연히 대륙인들과 모험가들 사이에서의 갈등 역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라 대륙 전체를 관리하는 자리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당연하다. 소국의 국가 지도자들은 한 발자국 물러난 상태로 관망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지만, 그들이라고 관심이 없을까. 대륙 전체를 주무를 수 있는 막대한 권한을 갖는 자리다. 누가 오르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는 만큼 그들 역시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가에 이득을 먼저 생각하는 이가 꼭대기 위에 앉는 것은 충분히 경계할 만하다는 거다. 이런 배경이 깔려 있으니 소외 국가나 상대적으로 약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물론, 교국이나 공화국을 포함한 강대국에게도 이 공석에 들어갈 인선이 가장 뜨거운 감자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같은 적을 위해 힘을 모은다는 뜻이 있기는 했지만, 이들은 제각기 다른 생각을 품은 인간들이다. 어떤 이는 이번 기회를 통해 국력 증대를 도모하고자 했고, 어떤 이는 길드를 키우려고 했다. 어떤 이는 종말론을 설파하는 이들을 활용해 정치적 이점을 얻으려고 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정말로 종말이 찾아올지 의심했다. 모두의 생각은 달랐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균형.’ 바로 균형이었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차이를 더 벌어지지 않게 만드는 균형, 다시 말해 이 균형을 유지해 줄 수 있는 투명한 인간이다. 이 위협을 통해 타국이 이득을 챙기는 것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인물. 욕심이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휘둘리지 않고, 오직 대륙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움직여 줄 인물. 투명하고 깨끗하고,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을 인물. 지성과 무력을 겸비하며, 이런 종류의 경험을 가진 인물이었다. 균형을 유지하는데 가장 적합한 이가 누구일지는 뻔하지 않은가. 시대는 빛기영을 원하고 있었다. ‘시대가 나를 원하고 있쟈나….’ 물론 이런 배경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는 했다. 무엇보다 얼마 전까지 악마들에 의해 타락했던 이를 중역으로 올리는 것에 대한 찬반여론이 있었으니까.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정말로 적합한가 묻는다면 나는 소신 있게 ‘NO’라고 외칠 것이다. -공화국 신문 / 저는 절대로 자살할 마음이 없습니다.] 라는 칼럼이 나올 정도. 물론 녀석은 소신 있게 독이 든 홍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건강 상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이제는 더 이상 명예추기경을 혹사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으니까. 정말로 이기영 명예추기경에게 이런 직책을 맡겨도 되는지 의심하는 이들이 있기도 했고…. 그간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보여준 아웃풋은 결코 나쁘지 않았지만, 대륙을 관리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지 않은가. 하지만 여론은 점차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쪽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중앙 정부를 비롯해 군부와 길드 지도자, 그 누구에게도 이런 자리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 권력자들의 입장.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지도자가 아닌 ‘중재자’였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으니 가장 공정하고, 깨끗해 보이는 놈을 찾을 수밖에 없었겠지. 그 무엇보다 일반 시민들의 지지기반이 대단했다. -당연히 이기영 명예추기경입니다. 다른 국가 지도자들은 믿을 수가 없어요. 오직 이기영 명예추기경님만이 대륙의 균형을 유지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중앙 정부의 그 썩어빠진 새끼들이 뭘 알어! 도대체 뭘 아느냐고! -너무 불쌍해. 명예추기경님이 한 번이라도 해봤으면 좋겠어…. 5년 만이라도. 너무 불쌍하잖아…. -우리 어머니가 이기영 님은 안 된다고 했는데 그래도 저는 강력하게 지지할 겁니다. 시대는 명예추기경님을 원하고 계십니다. 린델로 중앙 정부의 인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일이 이제는 당연한 일과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아직도 생각이 없으십니까.” “글쎄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더 어울릴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혹여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저는 그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누가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의 자질을 의심하겠습니까. 오스칼 님께서 만류하시기는 했지만, 다른 국가 지도자들 대부분이 명예추기경님을 원하고 계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지지와 대형 길드의 길드 마스터들도 같은 심정이고요. 대륙인들과 모험가들, 종교 지도자와 국가 지도자들, 소외 계층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명예추기경님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맡을 수 없는 자리일 겁니다.” “하지만….” “부디 다시금 재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분이 명예추기경님을 바라고 계십니다. 이 대륙을 이끌어 나갈 인사로 명예추기경님보다 적합한 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드려야지요. 당연히 드려야지요.” 삼고초려가 아니라 칠고초려라고도 할 만했다. 물론 개인적인 심정으로는 ‘옳지!’ 하고 들어가고는 싶었지만, 본인이 원해서 들어간 그림과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그림은 다르지 않은가. 보여주기용 쇼였지만 본래 대중은 이런 보여주기용 액션에 반응한다. 사람들의 애가 탈수록 이쪽의 주가는 점점 더 올라갈 수밖에 없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계획했던 일이 착착 잘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관리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발탁, 이후 대륙 전체를 관리하며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마련하고 북부에 전진기지를 건설한다.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계획이었지만…. “나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영 씨는 직책을 맡지 않을 거라고 제가 말씀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배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동이 걸리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 새끼야….’ 길드 내에서 반대 여론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한 것. 심지어 김현성 이 새끼가 가장 앞장서 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이유야 뻔했다. ‘파란 길드를 나가야 하니까.’ 표면적으로 모든 지위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는 게 바로 그 이유였다. 명예추기경이라는 직책이야 넘어갈 수 있겠지만 어떤 한 집단에 편의를 봐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 당연히 집단의 보호를 받을 수도 없게 되고 이기영 친위대 역시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아마 따로 경호 부대가 생겨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본인이 픽하지 않은 경호 부대에 나의 안전을 맡기는 것을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 새끼도 이게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는 상황. 단순히 땡깡을 부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내부적인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 “…….” ‘전혀… 성장하지 않았어.’ 정하얀의 성장이 완전히 정체되고 있었다. # 557 회귀자 사용설명서 557화 우리 하얀이가 달라졌어요(1) “하얀아.” “네? 네?” “요즘 좀 어때?” “열, 열심히 하고 있어요. 네…. 마도 길드에 확실히 서적 같은 게 많더라고요. 재미있는 것도 조금 많았고… 네.” “뭐, 문제가 되는 건 없고?” “네, 따, 딱히 문제가 될 건 없는 것 같은데… 매일 매일 똑같아요. 사람들도 전부 잘해주시고… 무엇보다 그 린델이 쑥대밭이 된 이후에도 마법 서적들을 제대로 보관하고 있더라고요….” “으음….” “왜, 왜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은 같이 가볼까?” “네? 네? 정말요?” “응, 최근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네. 바쁘기도 해서 얼굴 볼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니까. 휴가 다녀온 이후에는 계속, 잘하고 있는 거 맞지?” “네, 자, 잘, 잘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잘하고 있어요.” ‘이건 한번 확인해 봐야 될 것 같은데.’ 김현성을 비롯한 일부 길드원들이 떼쓰는 것은 어차피 가라앉게 될 문제라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우리 회귀자는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고, 결국에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여 있었으니까. 대륙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자리에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이를 집어넣을 필요가 있다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잠깐은 반대하더라도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다. 아마 한 달 이내로 조금씩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 하지만 정하얀의 문제는 조금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얘 왜 성장이 멈췄지?’ 지금껏 정하얀의 성장에 제동이 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계속해서 괴물 같은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로 같은 사람이 맡는 건지에 대해 의심해 볼 정도.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정하얀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 보이는 상태창은 항상 같았다. 똑같은 스탯, 똑같은 마법, 똑같은 고유능력. 재능 없기로 유명한 박덕구 마저 쓸모없는 스텟이 1씩 올라가고 있는 상황, 성장이 정체되고 있는 것은 정하얀이 유일했다. ‘마도 길드는 뭘 하는 거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건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건가.’ 마도 길드로 훈련을 보낸 것이 실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다른 말이 필요할까. ‘이러면 안 되는 데.’ 물론 성급할 필요는 없었다. 시간은 남아 있었고 정하얀은 지금으로써도 충분히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이들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더 성장할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동이 걸린다는 건 나로서는 두고 보기 힘든 이야기였다. 김현성에게 1회차 정하얀이 가지고 있는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설명을 들은 이후에는 더욱더 말이다. ‘그녀는 마법 그 자체라고 불려도 될 정도의 마법사였습니다. 아마 그녀가 아니었다면 긴 전쟁을 이렇게까지 끌고 올 수도 없었겠죠. 차라리 그녀가 회귀자였으면 일을 조금 더 쉽게 풀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이었습니다.’ 말이 필요 없는 평가였다. 더 이상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다. 정하얀은, 김현성이 회귀해서 정신없는 와중에도 가장 먼저 찾았던 인물이었고,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묵묵히 성장하고 있는 인선 중 하나였다. 공간 이동이 가능한 유일한 마법사이자 준신화 등급 이상의 항마력을 뚫을 수 있는 인물. ‘물론 지금보다도 훨씬 강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직도 성장 중일 테니 차라리 마도 길드로 훈련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같이 나가는 게 그리 좋은지 계속해서 웃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뱃놀이 이후로 정하얀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처음. 물론 업무의 일환이었고 다른 스케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즐거워 보인다. 임시 길드 하우스를 나서자 복구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린델의 모습이 보였다. 몇몇 사람밖에 없었던 전과는 다르게 아침부터 활기가 넘치는 듯하다. 김현성과 함께 갔었던 헤르엔 사업이 초대박을 치는 것으로 모자라 갑작스레 대표 관광지로 변모해, 많은 이들이 그쪽에 몰려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모험가들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린델의 아성을 무너뜨리지는 못한 것 같았다. 아직 폐허가 된 곳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눈에 띈다. 일부 건축 기술을 가지고 있는 모험가들은 일상생활을 뒤로 한 채로 복구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 어느 한쪽에서는 대륙 종말론이 퍼지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러한 분위기 온도 차는 이질적이었다. ‘확실히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이 정도에 흔들릴 거였다면 교국은 이미 옛날 옛적에 망하지 않았을까. 확실히 27군단이 남긴 상처는 가슴 속에 남아 있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강해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멘탈은 더 강해졌고, 결국 우리의 땅을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드러나는 것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사냥 나가실 분들 구합니다.” “천연 길드가 헤르엔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급매로 내놓은 물건들이 많으니 한 번씩 보고 가세요.” “거울호수, 헤르엔으로 이어지는 패키지 여행 참가자 신청 마감합니다. 갑작스러운 일 때문에 예약 취소가 생겨서 생긴 자리입니다. 빠른 신청 부탁드립니다.” “희귀 등급의 던전으로 같이 가실 파티원들 구합니다. 캐리해 주실 분들이면 좋겠어요.” “영웅 등급 식재료 팔아요. 일반 식재료도 있으니 구경이라도 하고 가세요.” “파란 길드에서 제작된 포션 처분해요.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싸게 처분합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가격보다 훨씬 싸게 판매하고 있습니다.” “천재 검사와 연금술사가 사랑하는 법, 개정판 전권 있습… 악! 밀지 마요! 밀지 마세요. 딱 세 분에게만 판매합니다.” 아직 광장과 시장이 완벽하게 복구된 것은 아니다. 천막을 세워 프리마켓처럼 운용하고 있었지만,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조금 예전 느낌이 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저 자리에 있는 구성원들이 즐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정하얀과 길거리를 거닐자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이들이 보인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와 관련해 응원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고, 힘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마치 연예인이 된 듯한 느낌. 아무래도 내가 가지고 있는 친근한 이미지가 도움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보이는 것처럼 대륙은 평화로웠다. 교국민들과 모험가들은 일상을 보내면서도, 예언에 대해 토의하거나 위원회의 인선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면 아직 위기의식이 부족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들 모두가 내일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라는 걸 고려하니 지금 보여주는 분위기가 아주 좋다고 느껴졌다. 인간은 지키기 위해 싸운다.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과 영위해야 할 것을 위해서 말이다. 주점과 광장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주제는 역시나 위원회에 대한 것. 저들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은 내일을 살아가기 위함이었다. ‘전반적으로 수준이 높아지기도 했어….’ 평균 스텟 자체가 27군단이 나타나기 전이랑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올라간 것이 눈에 띈다. 물론 그래 봤자 전쟁, 전쟁, 전쟁을 하고 있었던 1회차와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비치기연 때 본 그런 막장 길드 같은 놈들은 이제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잘 기억나지도 않는 우정 클랜의 이철호와 김태건 역시 엄청난 성장을 이룩하지 않았던가. 눈에 독기가 서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지옥 같은 훈련을 견디고 스스로를 담금질한 모험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가장 가까운 이의 성장에 제동이 걸린 게 안타깝다. 선희영, 엘레나, 김예리, 조혜진, 김창렬, 유아영, 안기모, 모든 길드원이 휴가에서 돌아온 이후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심지어 한소라도 서서히 예전의 멘탈을 되찾아가며 길드 내 가장 큰 성장을 이룩해 냈다. 그만큼 얼굴이 활짝 펴지기도 했고… 마치 정하얀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벗어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 유일하게 제자리에 멈춰 있는 사람이 있으니 어떻게 걱정이 안 될 수가 있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니라 정하얀인데. “아. 저, 저기에요. 최근에 저기에서 점심을 먹거든요. 마도 길드 사람들이랑 같이요.” “아아아….” “정, 정, 정말로 맛있더라고요. 오빠랑 같이 오고 싶었어요. 오늘은 가, 갈 수 있겠다.” “그렇게 맛있었어?” “네. 아… 마탑도 많이 변했었어요. 복구 작업도 엄청 빨랐다는 것 같았는데 신기한 물품들도 많아요.” “평소에 훈련이랑 공부는 어떻게 해?” “길드에서 가장 꼭대기 층을 주셨거든요. 저는 괜찮다고 했는데… 끝까지 배려해 주셨거든요. 드, 듣기로는 거기가 가장 마력이 풍부하대요. 보통 거기에 틀어박혀서 마법 서적을 읽었어요. 오, 오빠가 책들은 꼭 읽으라고 해서….” “잘했네. 많이 읽기는 했어?” “거기 있는 책들… 으음… 절, 절반 정도요.” “이해는 했고?” “네, 기초적인 내용도 있었고 조금 난해한 부분도 있었지만….” “음….” “무,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야, 아무것도.” 조금 불안해하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띈다. 자꾸만 어떻게 수련하고 있는지 물어보니 본인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줄 아는 모양. 하지만 ‘너 요즘에 제자리걸음인 것 같아서, 그래서 무슨 일인가 해서 물어보는 거야.’라고 물어보기에는 조금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혹시라도 본인이 슬럼프를 겪고 있으면, 이런 말들이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으니까. ‘얘 혹시 그냥 땡땡이 치고 노는 건 아닌지 몰라.’ 어쩌면 가장 가능성이 크다. 이른바 태업. 슬슬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겠다. 마땅히 비교할 대상도 없으니 조금씩 나태해지는 것이다. ‘가장 가능성이 크기는 해.’ 하지만 마탑에 들어간 직후 여러 늙은이들과 함께 대화를 나눈 이후에는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하얀 님 말씀이십니까.” “네.” “식사시간을 제외하시면 탑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식사하러 나오실 때도 고대 마법 서적을 끼고 계시고요. 어떨 때는 거르시는 경우도 많아서 이것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제가 다 걱정이 될 지경입니다. 허허허.” “그야말로 대륙의 복입니다. 마도 길드의 마탑에 상주하는 마법사들이야 천재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정하얀 님께서는 그중에서도 수준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지요.” “그 유명한 텔레포트 마법에 대한 공식이 너무나도 난해한 나머지 힌트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연구에 진전이 없는 상황이니… 그런 마법을 창조하신 것을 보면 그야말로 마법의 화신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지경입니다.” 정하얀 빠돌이가 되어버린 마도 길드의 늙은이 군단은 마치 하나뿐인 손녀를 바라보는 듯한 상황. 혹시나 해서 계속해서 정하얀을 지켜봤지만 정하얀은 방 안에 틀어박혀 계속해서 책을 읽을 뿐이었다. 참관수업에 부모님이 오신 학생의 자세로 보여주기식 공부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어느 정도야 그런 느낌이 있었지만,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커다란 방 안의 모습은 그녀가 지금껏 얼마나 열심히 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따로 사람을 불러 방 안을 정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는 했지만, 그냥 두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어지럽혀 있는 것 같지만 정하얀 님의 나름대로 체계가 잡혀 있다고 할까요. 저희 길드의 신입 길드원이 뭣 모르고 방을 정리하려고 했다가 호되게 혼이 난 적도 있었습니다. 허허허,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는지 물건들을 집어 던지면서 나가라고 소리치는 모습이 어찌나 순수해 보이던지. 재능뿐만이 아니라 마법에 대한 열정도 따봉입니다. 따봉! 요즘 애들 말로 짱입니다! 짱!” 젊은이들의 유행어를 탑재해 정하얀과 가까워지고 싶은 할아버지의 마음은 이해됐지만, 이제는 아무도 쓰지 않는 이상한 유행어일 뿐이다. 침대에 눕기도 하고 소파에 앉으며 계속해서 책을 탐독하거나 마법 연산을 써내려 가는 모습은 확실히 천재처럼 보이기는 한다.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가 방 안을 둘러보자 왠지 모르게 굉장히 익숙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1회차에서도 이런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는 거네.’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말이다. 힐끔 나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정하얀은 계속해서 집중하는 모양새. 공부하는 시간이니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점수를 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할아버지들의 말대로 확실히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책들이 눈에 띈다. [기초 마법의 이해.] [고급 마법이란 무엇인가.] [마력에 대한 심화 과정] [실전으로는 이해하지만, 이론으로는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들] [대륙의 마법 법칙에 대한 1,023가지] [대마법사조차 모르고 있던 마법의 비밀] 대륙에 기본적으로 출판되고 있는 서적부터, 던전 안에서 발견된 고대 서적까지. 내가 전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쓰여 있는 책들이다. 그 와중에 몇몇 개의 물건들도 눈에 띄기는 한다. [오빠1. avi] [오빠2. avi]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저건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해주자. 본인도 숨기고 싶은지 구석에 위치해 있었으니까. ‘저것 때문은 아니겠지?’ 자식의 교육을 신경 쓰고 있는 부모의 심정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 558 회귀자 사용설명서 558화 우리 하얀이가 달라졌어요(2) ‘애먼 데 신경 쓰고 있는 거 아니야?’ 딱히 지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공부하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고, 머리를 환기시킬 때도 필요하지 않은가. 그 방법이 조금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니 굳이 난리를 칠 필요도 없다. 물론 과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방 안을 둘러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공부 잘하고 있나 계속 지켜보고 있을 수도 없고….’ 이미 몇 번 확인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정확히 확인하고 싶어진다. 정하얀의 방이 성역인 것처럼 들어오지 못하고 문을 서성거리고 있는 할아버지 군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자 헐레벌떡 질문에 대답해 오는 이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평소에도 이 정도로 하는 겁니까?” “네, 평소에도 오랜 시간을 수련에 쏟고 계십니다. 심할 때는 잠을 자지 않은 경우도 많으시고요. 허허.” “으음….” “마법에 대한 열정이 아주 대단하십니다. 혹시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잘하고 있는지 걱정이 돼서… 아시다시피 마탑 같은 곳에 수련을 보낸 게 처음이라 그렇습니다. 물론 이 정도로 방대한 지식을 보유하고 또 관리하는 장소라는 걸 생각하면 여기로 보낸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혹시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도….” “아주 잘 적응하고 계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조만간 커다란 성과를 안고 돌아가실 게 분명합니다. 파란 길드에서 마도 길드에 투자한 것과는 별개로 마도 길드 자체적으로도 프로그램을 통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조금은 저희를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믿음이야 가지, 믿음은 가. 어떻게 믿음이 안 갈 수가 있겠어.’ 비록 대형길드라고 불리지는 않지만, 마도 길드는 명실상부 마법의 천재들이 모인 집단이다. 특히 마도 길드의 마법사 육성 인프라와 커리큘럼에 수많은 마법사가 엄지를 추켜올릴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검은 백조는 물론, 붉은 용병 역시 마법사 육성에 관해서는 마탑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상황. 어디 두 곳뿐이랴. 많은 국가와 연대하기 시작하면서 타국에서도 이곳, 마탑과의 파트너십을 요청하고 있었다. 우리 파란 길드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마도 길드가 최고의 마법사를 보유한 집단은 아니다. 하지만 대륙 최고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으리라.’ 대륙의 격언 그대로였다. 물론 그 누가 정하얀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겠느냐마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훌륭한 지도자가 아닌 훌륭한 시설과 안정적인 지원이다. 사실 이렇게까지 멀리 볼 필요도 없다. 마탑은 1회 차의 정하얀을 육성해 낸 기관이었으니까. “제가 조금 실례되는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코 마탑을 신뢰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누가 이곳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 아닙니다. 오히려 걱정이 들지 않는 게 이상하지요. 저희로서는 지금까지 잘 적응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만… 음, 파란 부길드마스터께서 그렇게 느끼고 계시다면 아마 새로운 환경에 녹아들 시간이 조금은 부족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해볼 직할 것 같습니다. 그보다 이렇게 이기영 님께서 저희 마탑을 찾아와 주신 것도 인연인데, 어떻습니까? 연금술에 관한 이야기를 오늘은 조금 들을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차라도 한잔하시면서….” ‘그래, 이런 사람들이니까.’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돈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물론 더 큰 돈이면 다룰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현재 마탑의 인프라가 자리 잡은 데에는 이런 열정적인 학자와 마법사들이 바탕이 되었으리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확히 4시간 후에 이 결정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 기준으로 차 한잔을 마시자는 소리가 어떤 의미였는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굳이 공식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이론 역시 중요한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학계가….” “여기 가장 강력한 증거가 있지 않습니까. 정하얀 님께서는 공식에 구애받지 않으십니다. 이건 지금껏 없었던 형태로 마법을 연구하고 계신 것 역시, 틀에 박히지 않은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탑뿐만이 아닙니다. 현재 모든 마법사는 시스템이 주는 편안한 지식에 매몰되고 있어요. 이대로 간다면 더 커다란 길로 향하기는 무리가 있을 겁니다. 발전하지 못하고 도태될 게 뻔하다, 이 말입니다.” “마법의 바탕이 되는 지식 외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정하얀 님을 평범한 사람들의 카테고리 안에 묶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제 말뜻은 지금까지의 방식을 버리자는 게 아닙니다. 고수하되, 조금 더 다른 방향으로의 발전을 모색하는 게 필요하지 않나… 하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인데….” 할아버지들의 끝나지 않은 토론이 시작된 것이다. 연금술과 연금 마법에 대한 이해가 어쩌다가 이런 자리로 변모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서서히 열을 올리기 시작한 마법 영감들은 결국 처음의 주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마력의 원천, 원소 마법 출력의 증진 방향에 이어 비전투 마법에 필요성에 대해 논쟁을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여기까지 와버렸다. 이야기의 주제는 지금까지 정립된 공식이 과연 의미가 있느냐는 것. 아마 정하얀 때문에 새로 생긴 떡밥이 아닐까. 타 마법사들과 다르게 얘는 마법을 발현시킨 이후에 공식과 주문을 만드는 타입이었으니까. 굳이 예를 들자면 수학 문제의 답을 먼저 떠올린다는 식이다. 술식을 정립하는 것은 그 이후였고…. 이해할 수 없는 규격 외의 존재 때문에 마법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으니, 이런 종류의 논쟁이 생기지 않는 게 이상하다. 본인들끼리 침을 튀기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모습에 당장에라도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입을 여는 정하얀의 모습을 보고는 계속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대단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 같아요.” 라거나. “그건 아니에요.” 정도가 전부였고 회의실에 마련된 커다란 보드에 마력으로 공식과 주문을 던지는 것이 고작. 겨우 그 정도에 할머니와 할아버지 들은 하나라도 놓칠세라 필기까지 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서로 갑론을박을 벌이는 것은 물론 정하얀과도 논쟁 아닌 논쟁을 벌이는 모습이 눈에 띈다. 하나같은 공통점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마법 영감이 그녀를 친손녀처럼 바라보고 있다는 것. 마법 아저씨와 마법 아줌마들 역시 딸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정하얀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하얀도 익숙해 보이네.’ 별것 아닌 것 같았지만 흥미롭기도 했다. 정하얀의 1회 차가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지금 보이는 분위기로 그녀의 1회 차를 대충 유추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딜 가나 미꾸라지처럼 물을 흐리는 놈들이 있었겠지만 아마 마도 길드의 마탑은 이런 분위기였으리라. 매일매일 이런 종류의 대화를 나누고 자신을 아껴주던 사람들 사이에서 지냈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본래 가지고 있는 소심함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겠지만, 마탑 안에서만 틀어박혀서 지냈던 시간이 그리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네.’ 애초 마법 말고 다른 데는 관심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아직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아니었지만, 정하얀의 정체된 성장이 배경 때문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끄응… 그렇구만.” “일단 식사부터 하는 게 좋겠습니다. 손님도 계시고 하니… 어떻습니까. 이기영 님, 괜찮으시면 저녁까지 함께하시고 돌아가시는 건….” ‘싫어, 이 새끼들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안은 감사드리지만, 저녁 식사는 위에서 하얀이와 함께 조촐하게 했으면 합니다.” “허허허, 이거 제가 눈치가 없었군요.” ‘아까부터 없었지.’ “하하….” “그럼 따로 식사를 올려보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다시금 탑의 꼭대기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어, 어떠셨어요?” “글쎄….” “하, 할아버지들이 말이 조금 많았죠. 박 할아버지랑 장 할아버지가 오, 오빠가 와서 조금 기분이 좋았나 봐요. 평소보다 더 말씀을 많이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전부 다 좋은 사람들 같더라.” “그, 그렇죠?” “분위기도 좋고… 수련할 수 있는 여건도 솔직히 파란 길드보다 더 괜찮은 것 같네. 일단 분위기 자체가 공부하는 분위기라서 마음에 들고.” 그래서 더욱더 모르겠다. 어째서 갑작스레 성장이 정체된 건지. 본인 역시 열심히 하려는 것 같고, 분위기도 좋다. 이전과 비교해도 고개를 끄덕일 환경이었고, 마력도 더 풍부하다.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면 했지, 멈출 수 상황은 아니었다. ‘떡밥을 한번 걸어볼까.’ 뭔가 목적성이 결여된 것은 아닐까. ‘성과를 내면 보상을 받는다’라는 둘 사이에 있던 무언의 약속이 이제는 조금 흐릿해지기도 했었으니까. 매번 간만 보던 이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익숙하게 스킨쉽을 해오기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본인도 왼손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납치 사건 이후에는 기가 많이 죽어 위로차 응원을 보낸다는 게 신체적으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지금도 팔짱을 끼고 몸을 붙여오고 있지 않은가. 마탑에 설치된 마력 엘리베이터를 타고 탑의 꼭대기까지 오르는 것은 순식간. 방 안에 들어가 탑의 직원이 건네준 음식을 먹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조금 더 두고 봐야 하나. 그래도 보상을 내거는 게 좋지 않을까.’ 현재 배경을 보면 소소하게나마 성장할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안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빤히 그녀를 바라보자 살짝 웃음을 내비치는 모습. 갑작스레 형성된 묘한 분위기에 긴장하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책상에 얹어져 있는 손에 괜스레 손을 포개자 움찔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별 쓸모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선이 목에 고정된 느낌. 정확히는 외투를 전부 벗어서 드러난 쇄골 같았지만,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얼굴은 조금 무섭다.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다 기분이 좋네.” “네, 열, 열심히 했어요. 진짜로 열심히 했어요. 와, 완전 열심히요.” “나는 하얀이 이런 모습이 좋더라.” “아? 아! 아!” “매력적으로 느껴져.” “아! 아!” “조금은 섹시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아… 으!” ‘얘, 왜 이렇게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어.’ 정하얀의 손등 위에 올려진 내 손을 살짝 들어 올려 손가락으로 손등을 간질이자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이 보인다. 뭔가 눈이 점점 무서워지는 것 같은 느낌. 살짝 열려 있었던 방문이 자연스럽게 철컥하고 닫힌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은 곳이니 누군가 문을 컨트롤한 것이 분명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너무 뻔한 거고. 혹시나 차희라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정하얀은 다직 경거망동하지 않고 있다. 원래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차희라와는 다르다. 유니콘에게도 인증받은 자신의 반쪽짜리 순수함을 지키고 싶을 테니 먼저 움직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리라. 손등에서 머물던 손은 어느새 팔뚝과 그녀의 목선을 타고 얼굴에 머무른다. 잔뜩 상기된 붉은 볼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자 먼 곳에서도 들릴 만한 숨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무심코 내 손을 덥석 잡을 정도. 고통 때문에 잠깐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래도 표정은 계속 유지한다. ‘난 지금 너에게 굉장한 성적 매력을 느끼고 있다.’ 정도로 해석해도 될 것 같았다. 정하얀도 처음 보여주는 내 표정에 오늘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눈치였고. 하지만 그 기대가 산산조각이 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네? 네! 네!” “지금은 공부에 전념해야 할 때니까.” “아… 아… 아앗….” “괜히 하얀이한테 영향을 주고 싶지는 않네.” “아… 그, 그, 그렇지 않, 않, 않, 않, 않은… 데… 그렇지 않은데… 영향 같은 거 없, 없는데….” “지금 같은 모습만 보여줬으면 좋겠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고 있지?” 입술을 꽉 깨문 표정이 시야에 비쳐왔다. # 559 회귀자 사용설명서 559화 우리 하얀이가 달라졌어요(3) 확실히 나쁜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하얀이 다시 한번 미친 듯이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에 함께 길드로 돌아가자는 걸 거절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열심히 마법을 공부하는 모습이나 학자 같은 이미지가 내게 먹힌다는 걸 인지했는지, 본인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야릇한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는 모션을 보여주려고 했다는 것 역시 그 날 일어난 소소한 이야기 중에 하나. 물론 그게 정말로 섹시한 표정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본인 나름대로는 무척이나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아주 조금이지만 자신감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본인 나름대로 가지고 있던 콤플렉스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냈다고 느끼는 것이리라. 사실 최대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야릇한 표정으로 책을 탐독하고 있는 모습은 성적 매력이 느껴진다기보다는 귀엽게 느껴졌다. 하지만 괜스레 한 번 더 다가가는 걸로 정하얀의 생각이 맞다고 확인시켜 줄 수밖에 없었다. ‘쑥쑥 커야지. 쑥쑥쑥.’ 정하얀의 정체된 성장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이쪽에서 할 수 있는 수단은 전부 다 사용해 보는 게 맞다. 그 바쁜 와중에도 일주일에 한 번을 시간을 내 정하얀과 함께 외출 약속했다는 것도 그렇다. 계속해서 처박혀 있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지속해서 머릿속을 환기시키는 것도 중요했으니까. 흔들릴 것 같으면 잡아주기도 하고, 조금 의욕이 떨어진다 싶으면 다시 한번 의욕을 넣어 줄 수도 있다. 그렇게 약속을 한 이후에 기뻐하던 정하얀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 의기양양한 표정도 말이다. 자신의 지적인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고 느낀 것인지 그 날 이후로도 본격적으로 책을 끼고 살기 시작했고….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는 아무것도 없지만, 평소에 그럴듯한 계단을 뛰어넘고 오리라는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두고 보자.’ 지금의 정하얀에게는 소소한 성장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정하얀의 성장에만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다. “훈련은 어때?” “잘 모르겠소.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스텟이 올라가는 게 더뎌서. 그래도 현성이 형씨가 잘 봐주고 있다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소.” “넌 더 잘할 수 있을 거다, 덕구야.” “아암, 누구 동생인데. 당연히 잘해야지.” 박덕구를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대륙 합동 훈련까지. 그중에서도 대륙 합동 훈련은 생각한 것 이상의 성과를 내주었는데, 확실히 충격 요법이 효과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련을 구성하고 있는 선임 멤버들 대부분이 27군단과의 전쟁에서 싸운 역전의 용사들이다 보니 김현성이 원했던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딱히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무척 잘 돌아가고 있는 훈련소를 보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장 신난 게 김현성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본인의 수련 시간도 줄여가며 타 국의 모험가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가능성이 보이는 이들은 따로 챙겨 관리하기도 했다.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기는 해.’ 물론 이 역시 커뮤니케이션의 성과라 할 수 있으리라. 김현성과 내가 정말로 솔직한 의견을 나누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는 게 중요했다. 솔직히 예전에도 삐걱거리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불편했던 것이 사실. 바깥양반이 뭘 하면서 싸돌아다니는지 알지 못한 채로 집안을 관리해야 했으니 효율이 나오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내조하고 싶어도 어떤 부분에서 도움을 주고, 관리해야 하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해야만 했고, 막상 실행할 때도 이게 맞는지 고려했어야 했다. 심지어 그게 정답이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숨겨야 했던 상황, 이제는 그런 일이 없다. 김현성은 자신이 필요한 게 뭔지 표현했고, 이쪽은 그걸 정리해서 보내주는 것으로 끝. 물론 김현성이 이런저런 부탁을 해올 때마다 미안해하는 것 같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일이 훨씬 편해지고 안정감 있다고 느껴졌다. 무엇보다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병행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커다란 장점이었다. 김현성을 위해서 쏟았던 시간을 다른 곳으로 분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문제가 생겨서… 전반적인 훈련 상황을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바쁘시다면 ‘괜찮다.’ 아니면, ‘조금 아쉽다’ 정도로 표현해 주셔도 되고요. 그리고 이전에 말씀해 주셨던 정신 교육에 관해서도 코멘트를… 마지막으로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경우에는 한 번만 더 생각을 해보시는 게 어떨지… 아무래도 굳이 기영 씨가 책임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점이 크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만큼 얽매이는 게 많을….] “그래도 해야 하는데 어쩌겠어.” ‘교육은 내가 직접 가봐야 할 것 같고… 뭐, 잘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별문제는 없겠네.’ 다 읽은 편지를 다시금 책상 안으로 집어넣는 것은 순식간이다. 이제는 편지 말고 다른 통신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걸 애용하는 걸 보면, 2회 차에 발달된 기술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지만, 뭐 크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들어오세요”라고 말을 내뱉으니 최근 정하얀이나 김현성보다도 더 얼굴을 자주 보는 이가 시야에 비쳤다. “김미영 팀장님.” “죄송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제가 조금 더 일찍 나왔어야 했는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항상 정상적인 시간에 출근해 주고 계신데요. 어쩌다 보니 오늘 조금 일찍 눈이 떠져서 먼저 나오게 된 것뿐이니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제도 늦은 시간까지 업무를 봐주셨으니까요.” ‘얘가 있어서 내가 참 편해.’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는 아니었지만….” “새벽 두 시가 늦은 시간이 아니면 언제가 늦은 시간이라는 겁니까. 수당은 당연하고… 성과금이랑 보너스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제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부길드마스터가 저에게 해주신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한 걸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지만, 그렇게 일일이 챙겨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게 부길드마스터는 은인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제가 뭐 한 게 있겠습니까. 능력 있으신 분을 데려다가 스카웃한 게 전부인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네. 최근에 둘 다 모험가가 되고 싶다고 해서….” “…….” “…….” “확실히… 걱정이기는 하겠군요.” “물론 자신을 지킬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좋은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어머니 입장에서는 조금 걱정이….” “조금 냉정한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이런 대륙에서는 칼을 든 사람이 펜을 든 사람보다 안전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만약 아이들의 뜻이 확고하다면 파란 길드에서 진행하는 유소년 프로그램에 참여시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아무것도 없이 일반 던전부터 시작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요. 제가 담당자에게 미리 말해놓을 테니 결정을 내리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매번 감사하고 미안해하실 필요 없다니까요. 그럼 일단….” “네. 오늘은 정하얀 님과 외출하시는 날이라 따로 다른 스케줄을 잡지는 않았습니다. 그 외에 확인해 주실 부분이, 여기 있는 북부 전진기지 시공 계획서와….” “아, 일단 봅시다.” “네.” “…….” “…….” “완공 시기가 4년 이후….” “최대한 빠르게 잡아보려고 했지만, 부길드마스터가 원하시는 규모와 퀄리티를 고려하면 이 정도가 딱 적정 기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간을 더 단축시킨다면 여러 가지로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크고… 무엇보다 북부 전진기지에 들어갈 마력석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채굴하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쉽게 물량을 늘릴 수 있는 자재가 아니기에 현재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고됩니다. 일반적인 성벽의 완공은 시기를 조금 더 앞당길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곳곳에 설치된 탑 같은 경우에는….” “네, 물론 빠르게 짓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건 저도 알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속도를 냈으면 합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이 마력석 자제 확보라면 북부 쪽에 있는 국가의 노동력을 빌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채굴에 들어가는 도구도 개선이 필요할 것 같고요. 아영 씨한테 부탁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북부 국가들과는 이미 노동력에 대해 협의 중이지만, 그들 대부분 곤란을 겪고 있는 상태입니다.” “으음….” “해결할 방안을 마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같이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힘들겠지만 3년 정도로 잡고 싶은 마음이 커서… 아무튼 간에 고생하셨습니다. 계획서는 내일 내로 전부 점검한 이후에 조금 더 자세하게 코멘트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다음은 뭡니까?” “관리 위원회와 미팅을 잡을 예정입니다만….” “아, 괜찮네요. 안 그래도 슬슬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타이밍이었는데. 팀장님이 알아서 잘 처리해 주세요. 언론 쪽 특히 신경 써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네, 꼭 확인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물어오거나 보고를 올리는 김미영 팀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일 처리 하나는 기막히게 해낸다. 본인의 전공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 성과를 내는 걸 보면 확실히 사람 하나는 제대로 뽑았다. 물론 민감하지 않은 업무는 그녀가 데리고 있는 팀과 하겠지만, 현재 길드 내 행정처리 부분에서 그녀보다 더 열정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 심지어 실력까지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가진 능력이 치트키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버렸다. “이상으로 보고를 마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정하얀 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집무실로 오라고 전달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함께 바깥으로 나가죠. 그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아. 그리고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손가락으로 살짝 안경을 올리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괜스레 정하얀이 현재 원하는 이미지는 김미영 팀장 같은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적인 커리어 우먼. 이거 괜히 같이 나갔다가 또 폭발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군단 이후 정하얀은 그 행동에 신중 또 신중을 기하는 상태, 또다시 사고를 치진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 한소라는 또 어떻게 만났는지 둘이 함께 대화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뭔가 이상한 광경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연스럽다. 특히나 한소라가 살짝 미소를 띄고 있는 부분이 더욱더 말이다. 정하얀이 얌전해진 것으로 가장 커다란 이득을 보고 있는 인물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표정. 파란 길드에 온 이래로 저런 미소를 처음 본 것 같다. 이쪽을 발견했는지 손을 들어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오른쪽 손에는 오래된 서적 한 권이 들려 있었고 오늘은 빨간색 안경까지 쓰고 오셨다. 은근히 귀여워 보이는 모습에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기분 나쁠 수도 있으니 평소대로의 모습으로 인사를 건네자. 난데없이 김미영 팀장이 앞으로 꼬꾸라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단순히 발을 헛디딘 것뿐이지. 1초 후에 몸이 철푸덕 넘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팔이 나갔다. “감사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역시나 조금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은 김미영 팀장님도 다른 것 하지 마시고 푹 쉴 수 있도록 하세요.” “네.” “말로만 그렇게 하지 말고요.” “네, 반드시 부길드마스터의 말씀대로….” 그녀와 내가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 어정쩡하게 이쪽에 안겨 있는 김미영 팀장을 보고서는 화들짝 놀라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정하얀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원하고 있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여자와 내가 밀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을까. 아무리 얌전해졌다고는 해도 정하얀은 정하얀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걱정할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팀장님, 괘, 괜, 괜찮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게 뭐야.’ “다, 다행이다.” ‘너 왜 그래, 시바. 무섭게.’ “조심하셔야죠….” ‘진짜 왜 그래… 하얀아. 너 시바… 왜 그래. 이러지 마, 무서워.’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걱정하는 듯한 얼굴, 그 얼굴로 건네는 친절한 한마디.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이내 조용한 미소를 짓는 한소라. 여전히 정하얀의 성장은 멈춰 있었다. # 560 회귀자 사용설명서 560화 우리 하얀이가 달라졌어요(4) “정하얀 님 말씀이신가요.” “네.” “요즘 매우 조용히 지내시고 계시죠. 친절해지기도 하셨고요. 매번 챙겨주시기도 하시고… 그래도 예전 일 때문에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그런 조짐은 없으셨어요. 그… 이상하게 눈빛이 변하시거나 그러지 않으세요. 참을성이 높아지신 건지 아니면 뭔가 깨달으신 건지 모르겠지만요.” “확실히 조용해진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아! 네.” “이랬다 저랬다 해서 죄송하지만… 굳이 전출 보내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저도 여기에 있는 게 편하기도 하고…. 지금은 린델에서 지내는 게 좋거든요.”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소라 씨.” ‘애초에 전출 보낼 생각은 없었지만….’ 본인의 입으로 이렇게 이야기해 주면 오히려 더 반갑다. 물론 이 대화의 목적은 그녀의 전출 문제가 아니다. ‘얘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달라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최근 정하얀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함인 게 당연했다. 여러 가지 대외적인 활동을 진행하는 와중에 생긴 문제였지만, 이걸 가만히 두고 볼 수 있을 리 없다. 북부에 전진기지를 배치하는 것과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를 두어 전반적인 전쟁 준비를 하는 것. 둘 다 중요한 문제였지만, 인류가 보유한 비밀병기의 성장 역시 중요했다. 한소라는 정하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정하얀은 한소라를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로 여기고 있다. 무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옆에 두고 기용했으니 인간관계가 한정적인 정하얀은 그녀에게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리라. 아마 정하얀에게 있어 한소라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이로 꼽히지 않을까. 물론 당한 게 있는 한소라야, 정하얀을 두려워했지만 지금 보여주는 액션이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거울 호수로 떠났을 때까지만 해도 낌새가 있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것마저 전부 사라져 버렸다. ‘이건 확실히 변한 게 맞네.’ 그만큼 정하얀이 변했다는 방증이리라. ‘생각해 보면 이상하기는 해.’ 납치 사건 이후로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던 건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모르는 척했던 건지는 나도 판단할 수 없었지만, 정하얀이 이전과는 180도 달라졌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마탑 문제도 그래.’ 내가 조금 강하게 권유하기는 했지만, 평소의 정하얀이었다면 절대로 순순히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 멀지는 않지만, 온종일 떨어져 있어야 하는 마탑에 처박힌다는 것은 그녀에게 견딜 수 없는 이야기였을 테니까. 일주일에 한 번 함께 외출을 나간다지만, 겨우 그걸로 만족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참고 있다는 액션을 보여줄 때도 잦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정하얀이 가장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는 희라 누나와 만날 때 역시 생떼를 부리지 않는다. 입술을 꽉 깨물고 손을 부들부들 떨며 바라보기는 하지만, 다른 헛짓거리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했다. 일하러 나가거나 홀로 외출할 때도 예전처럼 따라온다고 억지를 부리지 않았고, 다른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역시 바라만 볼 뿐 접근하지 않는다. 심지어 대륙 관리 위원회의 문제 역시 그렇다. 길드를 임시 탈퇴하고 북부로 향하다니. 정하얀의 입장에서 이것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어디 있을까. 단순히 참을성이 늘어났다고 하기에는 폭발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제 폭발하면 안 된다고 느끼는 거일 수도….’ 본인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 결과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굳이 원인을 찾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납치 자작극이 그녀의 행동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 하나였으니까. 애초에 이런 상황을 노리기는 했다. 돌발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정하얀이라니, 이것보다 매력적인 옵션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전의 자작극이 정하얀의 행동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다시 한번 머리를 꽉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부길드마스터?”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요즘은 뭐 특이사항이랄 게….” “네, 그런 건 없으세요. 생각처럼 공부가 잘되지 않는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으시기는 한데… 다른 문제는 전혀 없으세요. 잠깐 부르셔서 뵈러 갈 때도 책을 끼고 있으신 것만 빼면요.” “으음….” “그리고….” “네.”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네.” “조금 힘들어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 “아니, 힘들어하신다기보다는 재미없어 하시는 것 같다는 게 올바른 표현일 것 같아요.” “재미없어해요? 마탑이 수준이 그만큼 낮은가?”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마법 자체에 커다란 흥미를 느끼시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냥 어쩔 수 없이 공부하신다는 느낌이라… 사실 정말로 마법을 공부하고 즐기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지만… 최근 들어서는 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요. 아무리 봐도 억지로 의자에 앉아 계시는 것 같아서….”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 얘가 공부하는 걸 싫어한다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네.” “그렇군요. 일단 감사합니다.” “…….” “…….” ‘정하얀이 마법을 재미없다고 느끼고 있다고?’ “저… 부길드마스터.” “네.” “바쁘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 정하얀 님을 자주 찾아주셨으면….” “네, 무슨 말씀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네, 며칠 뒤에 다시 한번 부를 테니 멀리 나가는 임무는 최대한 지양해 주세요.” “네.” ‘걔가 왜 마법을 재미없다고 느껴? 우리 얘가 얼마나 공부를 좋아하는데….’ 한소라가 밖으로 나가고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책상에서 몸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지는 않을 텐데? 정말로 그런 건가?’ 1회 차 정하얀의 모습을 계속 지켜본 건 아니었지만, 정하얀이 마법을 재미없다고 느끼는 건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마법은 그녀에게 삶의 목적이자 돌파구였고 치료제였다. 받은 스트레스를 마법 서적을 탐독하는 것으로 풀었고, 심심하거나 외로움을 느낄 때도 마법에 의지했다. 그녀가 힘들 때 말을 걸어주고 위로해 주며 함께 웃어주는 친구.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마력과 마법은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친구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그녀가…. “아….” ‘이거….’ 머리를 굴리다 문뜩 무언가 깨달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1회 차가 아니지.’ 정하얀은 외롭지도 않고, 마법을 유일한 친구라고 느끼지도 않는다. ‘오히려.’ 수단으로 느끼고 있지 않을까. 1회 차의 정하얀은 튜토리얼이 끝난 후부터 계속 마탑에 틀어박혀 있었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탑의 꼭대기 위에서만 시간을 보냈다는 거다. 마법의 영감들이 부둥부둥 옹야옹야 했을 테지만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마 그런 정하얀에게 마법과 마력은 친구 같은 걸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본래 가지고 있는 재능이 시너지를 일으킨 것은 물론, 본인도 그만큼 열정적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달라졌지.’ 내 존재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다. 1회 차 정하얀의 목적이 마법이었다면 2회 차 정하얀의 목적은 이기영이다. 1회 차 정하얀은 마법을 목적으로 생각했지만, 2회 차 정하얀은 마법을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1회 차 정하얀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마법을 찾았고 2회 차 정하얀은 나를 찾는다. 1회 차와는 다르게 그녀가 마법을 재미없고, 지루하게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수단과 목적이 너무 확실하게 달라져 버렸으니까. ‘그럼 필연적으로 1회 차보다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건가?’ 그렇지는 않다. 지금 정하얀이 이룩한 걸 생각해 보면 여전히 그녀는 마법과 마력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쪽에서만 사랑을 보내고 있다는 게 문제지만….’ 괜스레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방법으로는 정하얀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없다. 계속해서 성장하라고 외친다고 한들,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각성 키워드를 제시해야 했고, 이전처럼 행동해야 했다. 물론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하얀의 성장 분기점에서 일어난 일들만 떠올려 봐도 그녀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현재, 2회 차의 정하얀을 성장시킨 키워드는 수련이 아니라 분노였고, 질투였으며, 마이너스한 감정이었다. 차희라에 대한 분노, 가면쓰레기 진청을 향한 분노, 연방을 향한 분노, 악마들을 향한 분노, 분기점이 있을 때마다 그녀는 성장했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간단히 말해 사고를 칠 때마다 몇 계단을 한 번에 껑충 뛰어넘었다는 거다. 당연히 그녀가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납치 사건으로 기가 죽은 정하얀 스스로가 자신이 가진 마이너스한 감정을 절제하고 있으니 원활한 성장이 진행될 리 없지 않은가. ‘왜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래요.’ 그동안 정하얀의 목줄을 채우려고 안간힘을 썼고, 결국 그 목줄을 채우는 데 성공했지만, 목줄을 찬 순간 정하얀은 사냥개가 아닌 애완견이 되어버렸다. 분노하고 발전해 연적들과 불안 요소를 쓸어버리려는 생각은, 타협하고 참고 견디는 생각으로 전환됐다. ‘이걸 시바… 어떻게 해야 돼.’ “제기랄….” ‘목줄을 다시 푸는 게 맞나?’ “얼마나 고생했는데….” ‘정하얀을 완전히 배제하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나?’ “김현성 공인 오피셜이 떴는데… 가능할 리가 없지, 시바.”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거지.’ “나도 잘 모르겠다, 진짜.” ‘하얀이한테도 이게 더 좋을 수도 있을 텐데….’ 단순히 개인적은 욕심의 문제가 아니다. 정하얀은 명백히 온순해지고 있었다. 한소라 와도 항상 붙어 다니며 사회성을 기르고 있었고, 조금씩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당장은 무리겠지만, 이곳으로 소환된 이후 마모된 인간성을 조금씩 되찾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도 딱 그런 거였고…. 애초에 정하얀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에 대한 죄책감도 조금은 느끼고 있었으니까. 정말로 조금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지금에 와서 다시 한번 폭탄을 투하하기에는 여러모로 걸리는 게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 조금 약해도 안정적인 정하얀이냐, 아니면 약 빤 것처럼 강해도 통제가 어려운 정하얀이냐. 안경 쓴 오빠와 어둠의 힘을 다루는 오빠,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던 정하얀의 심정이 이해된다. 이 경우에는 답이 정해져 있는 게 문제였지만…. 정확히 한 달 후, 결국에는 조심스럽게 한마디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떨어져서 지내자.” “네? 네?” “조금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서….” 정하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목소리였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물론 한소라에게도 말이다. # 561 회귀자 사용설명서 561화 씨앗 뿌리기(1) “갑, 갑자기 왜, 왜, 왜, 왜요.” “이런 말 꺼내기는 힘들지만, 이제 슬슬 집중해야 할 시기인 것 같아… 하얀이도 공부에 조금 더 전념해야 할 때고….” “…….” “왜 그런지는 알고 있지?” “네, 네. 당, 당연히… 당연히 알고 있죠, 알고 있어요.” “지금까지도 바빴지만, 앞으로는 더욱더 바빠질 거야. 27군단 때 같은 일이 다시 벌어져서는 안 되니까.” “네… 그, 그렇죠… 그러면 안 되니까요.” “하얀이랑 매일 붙어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힐 때까지는 서로 보지 않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거든. 미리 대비하고 미리 움직여야 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후에 더 힘들어질 거야. 서로 힘들기는 하겠지만… 이해해 줄 수 있지?” “…….” “…….”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 아주 오랜만에 중노 상태로 진입하려는 것 같았기에 나 역시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정하얀에 대한 진단을 내리기는 했지만, 언제 어떤 식으로 돌발행동을 해올지는 예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정하얀 이라면 아마…. “이, 이, 이해할 수 있어요… 네. 이해할 수… 있어요.” 라고 대답해 올 것이다. 다시금 정하얀에게 시선을 고정하자 시야에 비친 것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고 있는 듯한 얼굴. 어떻게든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안면에 힘을 주고 있는 상태였다. 자그마한 주먹을 꽉 쥔 채로 몸이 핸드폰 진동이라도 온 것처럼 부르르 떨리고 있다. 정신력이 몸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었지만, 자꾸만 움찔거리는 것을 보니 조금 더 불안해진다. ‘권태기가 왔다고 둘러대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초장부터 너무 크게 대미지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앞으로 보기 힘들어질 수도 있어.’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 발언일 것이다. 정하얀이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감정이기는 했지만, 이별 같은 커다란 대미지를 주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게 만든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탑 위에 틀어박혀 1회 차 같은 선택을 할까 걱정되기도 했고…. 이 정도만 해도 정하얀을 폭발시키기에 충분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래도 얼굴은 볼 수 있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얼굴을 볼 수 없는 나날들이 기약 없이 길게 느껴질 테니까. 달고 있는 목줄을 한꺼번에 풀어 재끼는 것보다 천천히 푸는 게 더 안전하다는 이야기다. 괜히 권태기 드립이라도 쳤다가는…. ‘진짜 망할 수도 있으니까.’ 다른 무엇보다 원인이 녀석들이라는 것에 의의가 있다. 어떤 식으로든 정하얀의 분노를 그쪽에 향하게 해야 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게 옳은 선택이었다. “그, 그, 그래도….” “아마 빠르면 이번 주 내로 북부로 향할 것 같아.” “네? 이번 주요?” “응,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너무 갑자기 결정되기도 했고 나도 경황이 없어서… 전진기지 시공이 내일부터 들어가거든. 계획도 계획이지만, 그쪽 국가를 중심으로 한 번 돌아봐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나라도 가서 잡아줘야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저도 그쪽에서 공부할 수 있는데… 이동도 할 수 있으니까. 더, 더, 더 편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얀이는 여기서 할 일이 있으니까.” “할, 할 일, 할 일 있죠. 그래도… 가, 가끔 보러 가도 되, 되나요. 잠깐이라도….” “일단 내가 따로 연락하기 전까지는 계속 린델에 있으면 좋겠는데.” “그… 건 너무….” ‘가혹하지.’ 내가 생각해도 충분히 가혹하다고 느껴진다. 물론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지구에서부터 정하얀에게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면 굉장히 미안한 이야기다. 물론 정하얀은 더 이상 내게 버림받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머릿속에 떠도는 불안감을 치워 버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아니나 다를까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런 그녀가 애잔하게 보였던 것은 당연한 거고. 슬쩍 팔을 벌리자 허겁지겁 달려들어 와 꽉 껴안아 오는 정하얀이 눈에 보였다. 그녀가 힘을 준 곳에서 우득거리는 소리가 난 것 같았지만,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마무리. 끄윽끄윽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기 때문에 마치 군대 가는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해외유학을 떠난다든가. 드라마 속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신파의 서글픔이 있었지만, 사실 일이 바빠진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마침 타이밍이 좋았어.’ 어차피 슬슬 북부로 움직이려고 했었던 타이밍, 정하얀까지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물론, 정하얀을 데려가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이동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는 불편한 점이 더 많을 것이다. 대충 씨앗을 뿌려놓고, 코인에 재산을 박아두고 존버하는 게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도움이 된다. 약해지려고 꿈틀거리는 마음을 애써 집어넣은 이후 살짝 정하얀을 밀어내려고 해봤지만, 역시나 밀려나지 않는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하얀이도 힘내야지.” ‘그래도 너는 일주일에 한 번은 봤었잖아.’ “끄윽… 네.”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김미영 팀장님한테 꼭 문의하고 편지나 영상 정도는 보낼 테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마.” “끄으윽… 끄윽… 히끅… 네.” “나도 헤어지기 싫어, 하얀아. 그래도 어쩔 수 없어.” “히끅… 네에… 그, 그럼 언제 볼 수 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대충 마무리되고….” “네.” “네 수련이 끝났을 때.” “수, 수련이 언제 끝나는데요.” “그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거야. 너도 알고 있지?” “네… 네… 히끅.” “배웅은 안 해줘도 되니까. 빨리 탑으로 들어가도 돼.” “그래도….” “괜찮아. 내가 데려다줄게.” “끄으으윽….” ‘그래도 잘 참아주고 있네. 진짜 놀랍다. 놀라워.’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본인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싶다. 초조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성장이 정체되어 있다는 걸 깨닫고 있을 게 분명하다.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환경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기왕이면 이 모든 게 그 바깥 신인가 뭔가 때문이라고 느끼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정하얀의 성장에 불이 붙을 테니까. ‘아마….’ 내가 만족할 정도가 될 때까지 성장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게 첫 번째. 곧바로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하는 게 두 번째. 이걸로 정하얀의 성장에 불이 붙는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겠지만….’ 반쯤 유혹했음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없었던 성장이 겨우 그 정도로 활기를 되찾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커다란 벽에 막힌 것처럼 본인이 가장 답답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해온 게 있으니 일주일이 지난 후에는 조금만 더 하면 공부를 끝낼 수 있다고, 금방 만날 수 있다고 다짐하고 있겠지만…. 그렇게 아무 차도 없이 한 달, 두 달,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낸다면 본인이 더 초조해하지 않을까. 참고 있었던 짜증이 스물스물 올라올 것이고 결국에는 외부에서 원인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그 와중에 오빠와 만날 수 없다는 초조함과 이 상황을 만들어낸 이들에게 분노를 보내는 것은 물론 어쩌면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매번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 정도로 마무리하기에는 조금 불안한데….’ 기왕이면 가까이서 정하얀의 차도를 체크하고 신경 써주고 싶지만 나 역시 그녀에게만 신경을 쓸 수는 없다는 게 문제였다. “여, 연, 연락할게요.” “응, 그래. 바로 들어가, 하얀아.” “네… 네.” “주기적으로 영상은 꼭 보내고.” “네, 꼭 보낼게요. 꼭, 꼭, 꼭이요. 끄윽… 꼭이요.”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한 것은 정하얀뿐만이 아니다. 끝까지 헤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정하얀을 반 정도는 억지로 마탑에 넣은 이후에 나 역시 짐을 챙기기 위해 길드로 향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끄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발걸음을 돌리기가 힘들었지만, 이건 필요한 일이었다. 길드로 돌아오자 괜스레 조용한 파란 길드가 나를 반겼다. 뭔가 횅한 것 같은 느낌, 아니, 실제로도 횅하다. 김현성과 조혜진이 대륙 합동 훈련 때문에 파견을 나가 있는 상태였으니까. 애초에 인원이 그리 많지 않다 보니 몇 명이 빠진 것만으로도 확 티가 난다. 그렇게 막 입구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바깥으로 나오는 박덕구와 안기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원정이라도 가는지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짐을 들고 나오는 모습에 궁금증이 생긴 것은 당연지사. 슬쩍 물어보려고 했지만, 박덕구 쪽에서 먼저 입을 열어왔다. “어, 형님. 이제 북부로 가는 거요?” “너도 따라가려고?” “아니, 그런 게 아니요.” “그럼 뭐야?” “그냥, 뭔가 정체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말이요.” “원정이라도 가게? 보고된 던전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기모 씨랑 겨우 둘이 나가? 삼대 길드에 파견 인원 신청한 건 맞고? 인선은 어떻게 돼? 붉은 용병이랑 검은 백조가 여유가 된데?”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원정 같은 게 아니요. 그냥 겸사겸사 세상 좀 둘러보려고 가는 거지.” “그게 뭔 개소리야. 지금이 얼마나.”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알고 있는데 놀러 가려고 그러는 게 아니니까 걱정 좀 넣어두쇼. 그냥 점점 한계치가 보이니까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니까. 너무 여기서 안전하게만 큰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요. 아까 형님이 말했던 것처럼… 형님이랑 길드마스터 형씨 그리고 우리 누님 품 안에서만 자라왔다는 게 팍 하고 느껴져서….” “…….” “형님 입장에서는 우습겠지만, 거창하게 말하면 한 계단 더 올라가기 위해 수행을 떠나는 거라니까. 마침 형씨도 계속 합동 훈련에 신경 쓰고 있는 상태고, 누님도 마탑에 있고, 형님도 곧 북부로 떠나니까… 심지어 파란 길드도 탈퇴해야 하는 거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 같아서….” “…….” “옛날에 그 못난 동생은 아니요,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쇼.” “…….” “…….” “걱정은 안 한다. 뭐, 네 문제에 대해 내가 뭐라고 코멘트하기도 애매하고… 일단은… 응. 그래. 뭐, 잘 다녀와. 잊지 말고, 내가 하면.”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아니요. 오래전부터 가슴 속에 팍 하고 새겨 놨으니까. 그만 말해도 된다니까.” “기모 씨도 잘 다녀오세요.” “하하하, 네, 부길드마스터.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다고 느껴지면 바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가시죠, 덕구 씨.” ‘다들 생각이 없는 건 아니네.’ 이제 숟가락을 떠 밥을 먹여줘야 할 정도로 병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본인이 어떻게 해야 성장할 수 있는지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뭔가 걱정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아.’ 존버해 놓기 좋은 코인이기는 하다. 애초에 박덕구 같은 경우에는 내가 뭘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입장에 있었으니까. 본인 스스로 답을 찾는 게 더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겨졌다. 너무 뿔뿔이 흩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조금 찝찝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 562 회귀자 사용설명서 562화 씨앗 뿌리기(2) ‘이거 혹시 내가 파란 길드 탈퇴하는 거랑 관계있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금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박덕구에 이어 엘레나까지 잠깐 파란 길드를 떠나 있겠다는 말을 꺼내왔기 때문이다. 사실 중소 규모 길드나 파티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딱히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해체 수순을 밟게 되는 것 말이다. 길드의 핵심 멤버가 탈퇴한다거나, 각자의 원정길이 달라 잠깐 찢어졌을 경우, 끈적거리던 관계가 천천히 멀어지고, 서로 연락도 뜸해지다가 해체되는 경우도 간혹 있다. 물론 통신 체계가 발달한 지금은 그런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파란 길드도 그런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파란 길드에서 이기영이라는 사람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오지 않는가. 엄밀히 따지면 김현성의 지분보다 내 지분이 더 높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하얀, 박덕구는 물론 선희영과 엘레나, 대장장이 유아영과 연기 잘하는 안기모 역시 김현성이 아닌 내가 영입한 이들이다. 유아영와 안기모는 모르겠지만, 특히 앞서 말한 넷은 내가 파란 길드를 나간다면 따라 나갈 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렇기 때문에 엘레나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물론 이유를 전해 들은 이후에 고개를 끄덕이기야 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합리적인 이야기였으니까. “잠깐 왕국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 “세계수와 병력 차출 문제로 아버님께 말씀드릴 내용이 있어서요. 무엇보다 그쪽에 있는 게 제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아, 그랬죠. 확실히 세계수 근처에 있는 것과 없는 건 차이가 제법 크니….” “심지어 엘룬 님께서도 이대로라면 커다란 위협을 극복할 수 없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내비쳐 오셨습니다. 이기영 님께서 파란 길드에 계속 계셨다면 무리해서라도 남아 있고 싶지만, 길드를 탈퇴하시고 대륙 관리에 더 집중하신다고 하니, 저 역시 힘을 키우기 위해 세계수 근처에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거기에 있는 게 왕국의 지원을 끌어내기에도 더 유리할 거고….” “네, 엘레나 님 생각이 맞을 겁니다.” “길드를 탈퇴하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언젠가는 돌아오실 테니까요. 하지만 막상 가려고 하니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네요. 지금 당장 떠나는 것도 아니고… 평생 안 보고 살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오는지도 모르겠어요.” “…….” “고맙습니다, 이기영 님. 품이 따뜻하네요.” “정확히 언제 떠나시는 겁니까?” “곧바로 떠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아영 씨도 같이요.” “아….” “네, 드워프 공방에 가는 게 도움이 되실 것 같다고… 가는 방향이 같으니….” ‘나쁜 선택은 아니네.’ “본래는 이렇게까지 빠르게 움직일 필요는 없지만, 기영 님이 없는 파란 길드에 남아 있는 게 너무 슬플 것 같아서… 일이 전부 끝나면 꼭 위로 올라가도록 할게요.”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안 그래도 유아영은 드워프들한테 보내려고 했지만. 영향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닌가?’ 그녀들로서도 고심하고 고심했던 이야기, 그중 가장 베스트라고 여겨진 결정이었으리라. 세계수와 친숙한 엘프의 특성상 여기에 있는 것과 거기에 있는 것 중 뭐가 더 효율이 뛰어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버림받기는 했지만, 엘레나는 엘룬의 딸이기도 하니 신전이 위치한 그곳에서 신성력을 늘리는 게 더 효과적이다. 광물을 다루는 유아영이야 드워프들과 함께 망치질하는 게 당연한 거고. 대륙 전체에 질 좋은 무기들을 보급해야 하는 만큼 지금보다 더 큰 규모의 대형 공방이 필요했다. 아무리 파란 길드에서 유아영의 공방에 돈을 쏟아부었다고 한들,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대장 기술 인프라를 쌓아온 드워프들과 같을까. 본인이 더 성장하고 날개를 펴기 위해서라도 유아영은 하루라도 빨리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박덕구와 안기모가 길드를 떠난 직후에 나온 이야기라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엘레나와 유아영이 이종족 연합 쪽으로 내려가는 건 백번 옳은 선택이었다. ‘확실히….’ “조금 길드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지겠군요. 덕구와 기모 씨도 방금 길드를 나섰는데….” “아, 이거 죄송하네요. 저라도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내부적인 일은 김미영 팀장님이 전부 처리해 주고 계시니까요. 합동 훈련 같은 경우에는 혜진 씨가 많이 힘써주시는 상황이고, 엘레나 님은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섭섭하게 느껴지겠지만…. 네, 엘레나 님을 위해서요.” “말씀이라도 같이 북부로 가자고 했으면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을 텐데… 아쉽네요.” “중요한 일이니까요.” “후훗. 네, 중요한 일이죠.” 엘레나가 살짝 까치발을 들어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입술에 잠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 후 배시시 웃고 있는 엘레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끝까지 울고불고하던 정하얀과는 다분히 대조적인 모습. 하지만 그녀도 눈물을 참을 수는 없는지 급하게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이 보였다. “그,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배웅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기왕이면 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모습까지 보면 정말로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아서….” “네, 알겠습니다. 엘레나 님, 가끔 연락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네, 연락드릴 수 있도록 할게요.” 그렇게 엘레나와 유아영 역시 잠깐 파란 길드에 자리를 비우게 됐다. ‘이거 조금 찝찝하네. 아니… 정말로 싱숭생숭해.’ 김현성과 조혜진이 대륙 합동 훈련으로 파란 길드를 비웠을 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사실 그렇게 큰 빈자리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김현성이야 매일 같이 편지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물론 최근에는 본인 역시 수련의 필요성을 느낀 모양인지 본격적으로 틀어박혔지만, 그래도 조혜진이 종종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던가. 어쩌면…. ‘어쩌면 그동안은 눈치채지 못한 거일 수도 있고….’ 나 역시 이런저런 일로 바빠지면서 주변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으니까.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잠깐 앉아 멈춰서 있게 되니 빈자리가 확 하고 다가온 듯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길드가 조용했구나.’ 싶고…. ‘그동안 잘 만나지도 못했네.’ 라는 생각을 괜스레 떠올리게 된다. 물론 길드가 조용해진 것에는 박덕구가 떠난 게 가장 크게 작용했겠지만…. ‘정하얀도 마탑에 가 있고….’ 외부인이지만 길드를 제집처럼 드나들던 차희라 역시 폐관 수련인지 뭔지를 해야 한다면서 사전 고지도 없이 동굴에 틀어박혔다. 그녀답기는 했지만 뒤늦게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그럼 지금 길드에 남아 있는 게 누구야?’ 김예리와 김창렬은 뭘 하는지 매번 밖으로 나가 있으니 딱 하고 꼬집을 수 있는 사람은 선희영이 끝이었다. 심지어…. ‘얘도 자기 일 하느라 바쁘니까.’ 솔직히 내가 이런 부분까지 걱정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본래 어디를 가더라도 소속감이라는 것에 크게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내가 파란 길드에 꽤 소속감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내리꽂혔다. 단순히 길드의 전력 저하를 걱정하기 이전에 길드에 소속된 구성원들이 떨어질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희한해.’ 함께 목숨을 걸고 사선을 헤쳐 나왔다는 사실 때문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마 이곳 사람들에게 제법 정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오랫동안 떠들썩하게 지냈다는 사실도 결정적이었을 수도 있고…. 조금 더 감성적으로 판단했다면, 파란 길드원들이 흩어지는 걸 최대한 배제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건 필요한 일이었다. 서로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다른 상황이었으니까. 앞서 떠올렸던 것처럼 길드원들도 바보는 아니다. 박덕구는 파란 길드의 품 안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고, 안기모는 그런 박덕구를 따라나서는 게 본인에게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녀석은 성직자였지만, 전위에 서는 타입이니 박덕구에게 배울 게 있겠지. 엘레나는 세계수의 보호 아래서 힘을 키우자 했고, 유아영도 드워프들과 함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하얀도 그렇다. 지금은 본인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예전의 정하얀이라면 스스로 마탑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모두 바보가 아닌 만큼 인지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내리기에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든 거고. 대륙 합동 훈련이나 북부 전진기지 시공,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등 현재 대륙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별도움을 줄 수 없으니까.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어와 꽂혔을 것이다. 굳이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엘레나가 왕국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그런 정치적인 도움을 주기 위함이리라. ‘기뻐해야 하는 게 맞네.’ 기분 좋아야 하는 게 맞다. 이것 역시 씨앗 뿌리기의 일환이었으니까. 그렇게 엘레나를 보내고 난 후, 나 역시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전에 일에 더 집중하는 게 옳다. 떠나기 전에 선희영, 황정연과 조금 시간을 보내고, 곧바로 길드를 나서기 시작했다. 이쪽과 함께 북부로 떠나는 인원은 이기영 친위대의 박리안과 수행원 몇 명이 끝. 물론 북부로 함께 가는 인원은 전원이 파란 길드 탈퇴를 마친 상태였다. 아예 혼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그걸 길드에서 허락해 줄 리 없다. 김현성은 쌍검의 박리안을 비롯한 몇몇을 뽑아내게 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언제 어디서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보험차 괜찮을 것 같기도 했고, 실제로 사건이 터질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막 밖을 나가자 의외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북부로 가는 거예요?” “응, 준비는 미리미리 해야지. 그나저나 바쁘다면서, 누나. 찾아가도 모른 척할 때는 언제고… 위원회 발족 때문에 밥 먹을 시간도 없는 거 아니었어?” “그래도 내 님이 멀리 떠난다는데 얼굴은 한 번 봐야 하지 않겠어요?” “못 보는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북부로 올 거 아니야?” “3개월은 걸릴 거예요. 어쩌면 더 걸릴 수도 있고… 이쪽에도 책임자는 있어야 하니까. 김미영 팀장님이 있기는 하지만, 그분도 요즘 다른 일들로 바쁘시잖아요.” “뭐, 그렇지.” “생각보다 빨리 가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하얀 씨 때문이에요?” “아냐, 아냐. 그런 것도 있기는 한데, 왠지 감이 안 좋거든.” “시간 많이 남아 있다고 한 거 아니었어요?” “일단은 그렇게 보고 있기는 해.” “준비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뭐. 그나저나 외롭겠네요. 그래도 인원이 많은 검은 백조야 몇 명 빠져도 간에 기별도 안 가는 데, 파란 길드는 몇 명 빠지니까 완전히 텅텅 빈 것 같기도 하고….” “뭐,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 뿐이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으니까.” “실제로 보는 거랑 편지나 영상으로 보는 거랑 같나요.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나 봐. 인제 그만 가봐요.” “…….” “…….” “이건 선물이고요. 어차피 보온 마법을 달고 살 테지만 북부는 춥다더라. 그럼 나중에 또 보자고요, 파트너.” “고마워, 파트너.” ‘조금 기분이 이상하네.’ 딱 그런 기분이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이거 진짜 기분 이상하네.’ 확실히. 정이 들기는 들었나 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하얀이는 괜찮으려나.’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 563 회귀자 사용설명서 563화 1년 이후의 대륙(1)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는 북부 전진기지 시공, 파란 길드의 김미영 팀장 “최대한 속도를 내기 위해 노력할 것.” -교국일보 김성경 기자.]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정말로 대륙을 외면하는 것인가.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는 발족했지만, 아직도 위원장 자리는 공석.-교국일보 김성경 기자.] [북부에서 계속되는 혼란, 치솟는 범죄율. 해답은 신앙?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작은 기적. “베니고어 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셔.” -교황청 소식.] [뿔뿔이 흩어진 파란 길드. 이대로 해체 수순을 밟는 것인지 궁금하다. 만약 파란 길드가 해체한다면 길드원들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로? ‘대마법사’ 정하얀은 마탑으로, ‘신념의 방패’ 박덕구는 안기모와 함께 붉은 용병으로…. 다른 길드원들 역시 벌써부터 여러 길드에 오퍼를 받는 중. -길드 칼럼.] [파란 길드에서 작은 여신의 거울을 선보여 모든 이들이 환호. 이 세계에 스마트폰이 들어온다? 정식 명칭은 여신의 손거울. 얼마 지나지 않아 대륙 전역에 출시할 예정. 이기영 명예추기경. “조금 더 직접적인 연락 수단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교국일보 김성경 기자.] [파란 길드마스터 김현성. “파란 길드는 아직 돈독해. 상황상 멀리 떨어져 있을 뿐.” 불화설 일축, 계속되는 찌라시에는 법적 대응까지 고려.-교국일보 김성경 기자.] [린델 근처의 숲에서 거대한 마력이 감지. 몬스터 떼죽음 사태에 신규 사냥터 확보가 절실. 마탑에서 조사에 임하고 있지만, 아직도 원인은 오리무중. 갈기갈기 찢겨 처참하게 죽어 있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정상으로 보이지 않아…. -길드 칼럼.] [이기영 명예추기경 파란 길드 탈퇴. 파란 길드마스터 김현성과 부길드마스터 이기영의 불화설 재점화. 헤르엔에서 둘이 목소리를 높이며 언쟁을 벌였다는 증언도 나와…. -강유미 기자.] [“현성 씨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파란 길드를 탈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교국일보 김성경 기자.] [공석이었던 자리가 결국 주인을 맞이해.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이기영 명예추기경 추대. “최대한 겸손하고 낮은 마음으로 시작할 것.” 대륙인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받아들이게 됐다는 이기영 위원장의 속내는? -교국일보 김성경 기자.] * * * “…….” “…….” “언제 이렇게나 됐나 몰라… 그런데도 이건 아직까지 완성될 기미가 안 보이니, 참… 날씨라도 문제가 안 되면 조금 더 속력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하하, 어쩔 수 없으니까요. 마법에 도움을 받으면 조금 더 나았겠지만, 마력석을 가공할 수 있는 마법사들이 흔치 않으니…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봅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진척이 있지 않습니까?” “내 눈에는 전부 다 똑같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나저나 어떻게 생각하나?” “무슨….” “요즘 떠들썩한 파란 길드 불화설 소식 말이야. 사실 그 길드가 불화설에 휩싸이든 말든 우리 같은 잡부들이 신경 쓸 건 아니지만, 한 때 칼밥 먹던 모험가로서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더라고. 매번 똑같은 작업을 하다 보니까 괜히 여기저기 쓸데없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뭐, 좋은 술안주가 아닌가.” “파란 길드는 괜찮을 겁니다. 네, 아마도요.” “길드마스터와 부길드마스터가 다툼이 있었다는 것도….” “아마 단순한 추측성 기사일 겁니다. 언론에 나온 것처럼 가끔 두 분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건 그냥 언론에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한 작업이라 봐도 될 것 같은데….” “하하하하.” “아무튼, 이상하긴 해. 대륙에 뭐 위기가 들이닥친다, 닥치지 않는다 해도. 권력자라는 놈들은 지들 잇속 챙기려고 서로 반목하고 있으니. 사실 이런 공사를 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나야 일거리가 생겨서 좋지만….” “불안해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위원장님께서 뭔가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나는 그 사람 안 믿는다고 말하지 않았나, 안 씨. 똑똑한 사람인 것 같아서 지켜보고는 있는데… 관상 자체가 음흉한 관상이야. 나라 팔아먹을 관상이라니까.” ‘저 아저씨는 진짜 짜증 나네.’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최 씨 아저씨와 안 씨 아저씨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파란 길드가 해체한다고 떠들썩했던 것도 이미 반쯤은 떡밥이 지난 기사가 아니던가.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마음 한쪽이 불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이런 조건이 어딨어?’ 단순 노동자들을 위해 보온 마법을 상시 유지시켜 준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 아닌가. 이런 추위 속에서도 따뜻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마법사를 구하는 건 당연히 쉽지 않다. 그런 자원이 고작 여기서 공사 감독관을 하고 있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고…. 어떻게 봐도 노동자들을 배려해 주고 있다는 것으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한번 사냥 나가서 몬스터들한테 뜯어 먹혀봐야 정신을 차리지.’ 지금보다 더 가혹한 환경에서 지내다 보면 이곳의 생활이 얼마나 편한지 깨달을 것이 분명했다. 슬그머니 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거울을 확인하자, 익숙한 화면과 함께 시간과 날짜가 시야에 비쳤다. ‘그나저나 벌써 1년이나 지났네.’ 개공 소식을 듣고 북부로 올라온 지도 벌써 1년. 예정되어 있었던 희귀 던전 탐사를 그만두고 왔지만, 후회되지는 않는다. 스탯이 많이 오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임금이 세다. 최근에 여신의 손거울을 구입하는 바람에 출혈이 제법 있었지만, 후회는 없다. ‘내가 이거,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니까.’ 튜토리얼 던전에서 빠져나온 직후, 대륙에 적응하기 무섭게 가장 생각났던 것이 이 스마트폰 아니었던가. 커다란 여신의 거울을 처음 봤을 때부터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상용화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아직 모든 대륙인에게 보급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마 1년 안에는 전 대륙인이 여신의 손거울을 하나씩 가지고 있지 않을까. 익숙하게 화면을 켠 이후에는 베니고어 넷에 접속해서 적당히 글을 쓰자, 곧바로 리플들이 달렸다. [제목: 우리 작업장에 조금 이상한 아저씨 하나 있는데, 정말 짜증 남.] [매일 매일 불평, 불만만 쏟아내고 어쩌다가 위원장님 이야기라도 나올라치면 목에 핏대 세우면서 이상한 소리 한다니까. 오늘도 파란 길드 불화 어쩌고저쩌고 떠들고, 위원장이 나라 팔아먹을 관상이라고 욕까지 함.] [흙수저: 엌ㅋㅋㅋ 이단 심문관한테 신고하면 포상받는 부분?] [아이디미정: 틀린 말은 아님. 나라 팔아먹을 관상까지는 아닌데… 조금 비열하게 생기기는 했음.] [천연사러버: 뭐가 비열하게 생김? 어떻게 봐도 섹시하게 잘생기셨구만. 그리고 파란 길드 불화설은 언제 떡밥인데, 아직 지껄이고 다니는 사람이 있음? 여신의 손거울도 길드원들이랑 원활히 연락하기 위한 거라는 소문도 있지 않나?] [아미디미정: 그건 팩트가 아니라 망상이죠. 나 파란 길드 관계자인데… 손거울 출시는 그런 거랑 하등 상관없음. 공사하다 보니 자금 딸리니까 세금 확보 차 푼 거고… 예전만 못하다 하지만 파란 길드는 아직도 거대 길드임. 그런 길드에서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이런 걸 만들 것 같음? 이기영이 할 일 없는 사람도 아니고… 그리고 파란 길드 불화설은 이 업계 사람이면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닌가?] [천연사러버: 개소리. 내가 파란 길드 직원인데? 너 누구임?] [아이디미정: 그걸 여기서 왜 인증하겠음. 구라도 작작 치세요. 파란 길드 관계자인데 불화설을 모른다고? 예전부터 김현성이랑 이기영이랑 권력 싸움 개심했음. 표면적으로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이기영이 참다 참다가 파란 길드 나간 건데… 엘레나는 왜 왕국에 있고? 정하얀은 왜 마탑에 있겠음? 박덕구랑 안기모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이 사람들이 전부 이기영이 데려온 인선이라는 거 모르시나?] [천연사러버: 어이가 없네ㅋㅋㅋㅋㅋ 너무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답변해 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이디미정: 팩트로 발리니까 그냥 웃는 클라쓰 보소. 너 파란 아니지?] [천연사러버: 내가 너 같은 패배자 찐따 충인 줄 아나 보네. 지금 업무 중이라 1시간 뒤에 인증할 테니까 잘 봐. ^^] [아이디미정: 빤스런 하는 거 보소. 인증 안 한다에 모든 걸 겁니다.] [린델마을주민: 거기 어디 작업장임? 지금 여기 몬스터들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 같은데. 중간쯤 있는 작업장이면 조심해. 린델 근처 몬스터들이 씨가 마르다 못해, 이제는 대피까지 하는데. 세상이 진짜로 망하기는 망하려나 봄.] [흙수저: 뭔데 그럼?] [린델마을주민: 나도 잘은 몰라. 근데 진짜 몬스터들 찢겨 죽은 거 보면 구역질 나옴. 마탑에서도 아직 원인은 밝히지 못했다고 했는데… 진짜 몬스터가 다 불쌍해 보일 지경임. 생태계에 영향 끼칠 정도니까. 뭐. 아무튼, 조심해라. 중간 작업장들은 아직 성벽 올리기 전일 테니까.] ‘아이디미정, 얘는 도대체 뭐야?’ 심심풀이 삼아 올린 게시물이 갑자기 핫플이 될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서둘러 손거울을 다시 품에 집어넣자 멀리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김 양! 식사하러 갈 건데 같이 안 갈 거야? 오늘도 한잔해야지!” “지금 가요.” “오늘은 별로 안 힘들었나 보네?” “제 근력 수치랑 체력 수치가 몇인 줄 아세요? 아저씨보다 높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요.” “큼, 큼…. 그리고 그 여신의 손거울인가 뭔가에 너무 빠지면 안 돼.” “지구에 있는 부모님들같이 말씀하시네요.” “거기에 이상한 글 쓰고 그런 건 아니지?” 조금 뜨끔했지만, 일단은 입을 다물자. “아니에요.” “절대로 거기에 무슨 이상한 글 쓰고 그러면 안 돼.” “아저씨랑은 상관없잖아요.” “그게 보기에는 편리하고 재미있어도 말이야. 위에서 거기에 쓴 게시물이나 댓글 같은 거 전부 감찰하고, 지켜보고 있다니까. 옆 동네에 있는 어떤 젊은이도 이상한 글 올리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거 몰라? 보호 관리 위원회에 붙들려 가기 전에 알아서 조심하라는 소리야.” “그런 거 다 음모론이에요. 누가 그런 걸 믿겠어요. 여기에 있는 사람들 감찰하겠다고 손거울을 내놓는다니… 차라리 세금 확보하려고 했다는 게 더 설득력 있겠다. 여기에 올라오는 그 많은 기사랑 글을 어떻게 다 확인해요? 그리고 그런 글 올린다고 잡혀가는 거면 아저씨도 잡혀갈 걸요.” “큼, 큼….” “그렇지 않아요? 안 씨 아저씨?” “하… 하하, 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박 씨 아저씨는 어디에 있어요?” “아마 곧 올 겁니다. 배정된 조에서 작업이 늦게 끝나고 있는 것 같아서….” “음… 그럼 여기서 기다려요. 먼저 들어가면 조금 섭섭할 테니까. 그나저나 아저씨.” “네?” “아저씨들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조금 말하기 부끄럽습니다만….” “그러지 말고 이야기해 줘요. 시간이라도 때울 겸. 여행 도중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네, 비슷합니다. 최북단까지 이동하는 도중에 갑자기 자금이 떨어져서 여기에 잠깐 체류하게 된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저씨들 근력이랑 체력 보면 평범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특히 박 씨 아저씨는 무슨 괴물 같잖아요. 몬스터라도 하나 잡아서 팔면 여행 경비는 마련할 수 있지 않아요? 아, 여기 근처에 몬스터 같은 게 없지….” “네.” “어디서 돈 빌릴 사람도 없나 봐요.” “그건 아니지만… 부끄럽다고 하더군요.” “네?” “돈 좀 보내달라고 하는 게 말입니다. 한사코 부끄럽다고… 공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궁금하니 저도 딱히 급하게 이동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저기 오는군요. 슬슬 일어납시다.” “거,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던 거요?” 평소와 같이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니 시야에 비친 것은 커다란 몸을 한 남자다. 복슬복슬한 턱수염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 전형인 산적형 얼굴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호감이 가는 인상, 아마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웃통은 또 왜 까고 있는 거야.’ 터질 것 같은 근육으로 꽉 찬 몸이 눈에 들어오자, 얼굴이 괜스레 붉어진다. 자신이 이런 상태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등을 팡팡 때려오는 모습은 가관. “오늘 작업은 힘들지는 않았고?” “조, 조금요.” “거, 몸 좀 사리면서 하라니까. 아무튼 들어갑시다, 형씨들.” 조금 이상한 사람들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564 회귀자 사용설명서 564화 1년 이후의 대륙(2) “크으, 역시 이거 덕분에 살맛이 난다니까. 술맛이 기가 막히는구만.” “알겠으니까 옷 좀 입어요. 왜 계속 웃통을 까고 계세요?” “아, 이걸 아직도 벗고 있었나. 미리 좀 말해주지.” “들어올 때도 말씀드렸거든요.” “뭐, 그게 뭐 중요한가. 자, 한잔들 더 받으쇼. 아, 너무 맛있다니까. 이 술 때문에 여기 더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거 아니요.” “이 지역에서는 유명하다는 것 같습니다. 저도 가지고 가고 싶군요.” “떠날 때 한 병 사가세요. 아니면 여기 근처에 감독관들한테 달라고 해도 되고요. 아저씨들은 실적 좋아서 보급품으로 나온 거라도 드리려고 할 걸요.” “어? 그래도 되나.” “네, 당연하죠. 하루에 작업을 얼마나 하는데. 아무튼, 짠 한 번만 더 하고 마무리해요. 더 있다가는 내일 작업에 지장 생기겠다.” 나머지 한 잔을 빠르게 털어낸 이후에는 곧바로 숙소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다른 아저씨들은 전부 더 있고 싶어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자기들이 아직도 20대인 줄 아나 봐.’ 일에 영향이 갈 게 분명했다. 한 발자국 앞에서 둘이 어깨동무하는 모습은 가관. 조용히 걷기도 심심해 다시금 여신의 손거울을 꺼내 확인하자, 아까 올린 게시물이 눈에 보였다. 한 시간 이후에 다시 돌아온다던 사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헐, 천연사러버… 진짜 파란 길드 직원이었어.” 확실하게 파란 길드 휘장과 사원증이 인증되어 있었다. 아이디미정인지 뭐인지가 쓴 댓글은 전부 삭제되어 있었고, 눈팅하던 사람들이 댓글을 달며, 성지라고 떠들어대는 것도 보였다. [흙수저: 헐ㅋㅋㅋ 진짜였네. 기 받아갑니다.] [힐못하는제리엠: 파란 길드에 어떻게 취직했는지 좀 알려주세요. 최근에 공채가 안 올라오던데….] [트레샤: 아이디미정, 입 털더니 결국 빤스런 했네ㅋㅋㅋ 통한의 1비추 누구인지 빤히 보이죠. 비추 실명제 개이득.] [린델마을주민: 작성자 무사한 거 맞음? 별일 없으면 다행인데… 댓글이 안 올라오니까 불안해진다.] [흙수저: 중간에 빠졌나 봄. ㅋㅋㅋㅋ 몬스터들이 어떻게 그쪽까지 올라가겠음. 안 그래도 중간 지역은 몬스터들 없기로 유명한데… 아마 근처 숲에 자리 잡았을 테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듯. 그보다 천연사러버님 휘장 보니까 일반 길드 직원처럼 보이지는 않은데… 최소 팀장급일 듯.] 괜스레 실실 웃게 만드는 댓글들, 조금 멀리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게 뭔 소리지?’ 어두컴컴한 밤이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인상을 찡그리며 앞을 바라보자, 저 멀리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형태의 형상들이 시야에 비쳐왔다. ‘저게 뭐야?’ 근 1년 동안 볼 수 없었던 풍경에 조금은 당황한 것은 당연지사. “최 씨 아저씨, 저게 뭐예요? 저거 몬스터 아니에요?” “무슨 이 지역에 몬스터가… 있겠어. 그동안 코빼기도 보이지도 않던 놈들이 여기 있을까. 많이 취했나 보네.” “아뇨, 취한 건 아닌데….” ‘거기 어디 작업장임? 지금 여기 몬스터들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 같은데. 중간쯤 있는 작업장이면 조심해. 린델 근처 몬스터들이 씨가 마르다 못해, 이제는 대피까지 하는데, 세상이 진짜로 망하기는 망하려나 봄.’ 오늘 베니고어 넷에서 본 리플이 떠올랐다. 커다란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몬스터 웨이브다. 몬스터 웨이브!” “뭐야… 이거 뭐야. 최 씨 아저씨, 이거 괜찮은 거 맞죠?” “나, 나도 잘….” “아직 성벽도 안 올라갔는데… 이거 그냥 확 밀려 버리는 거 아니에요? 여기는 병력도 얼마 없잖아요. 마법사 숫자도 적고… 무슨 몬스터들이 저렇게 와요.” “이거 아무래도… 싸울 줄 아는 사람은 싸워야 할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사방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곧 지원이 온다. 지원이 올 때까지만 버티자. 병사들이여, 싸울 수 있는 인원은 무기를 보급받고 성벽에 자리를 잡는다!” “지원이 올 때까지만 버티자. 성벽 위에 자리를 잡아라. 모두 위치로! 모두 위치로!” ‘무슨 성벽이야, 그냥 담장 수준인데… 이런 걸로 쟤들을 어떻게 막아?’ 마력석으로 만들어졌으니 무너지지야 않겠지만, 소형 몬스터들도 점프하면 닿을 높이의 성벽이다. 그냥 담장 높이이니, 수성전이라고 해도 무리가 있지 않은가. 싸우기는 싫다. 하지만…. ‘어차피 도망쳐도 죽을 거야.’ 지금에 와서 몸을 돌려 도망치는 것도 의미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한때 모험가를 지망했던 만큼 희귀 등급의 몬스터 몇몇은 잡을 수 있을 터. 한쪽에서 무기를 보급하고 있는 병사에게 달려가 입을 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활이요.” “네.” “여기 오기 전에 모험가였어요. 단검도 하나 주세요.” ‘다른 아저씨들은 어딨지?’ 안 씨 아저씨와 박 씨 아저씨, 최 씨 아저씨는 왠지 도망쳤을 것 같았지만, 너무나 복잡해진 성벽 위에서 그들을 모두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박 씨 아저씨랑 안 씨 아저씨는 도망가지 않았을 텐데.’ 대충 봐도 한 가닥 할 것 같이 생긴 사람들이었으니까. ‘최 씨 아저씨는 무슨 왕년에 모험가였다더니….’ 벌써 몸을 뒤로 빼지 않았을까. ‘지원군은 빨리 올 거야. 분명히 여기 도착하기 전부터 연락이 닿았을 테니까. 그리고 마법사도 있으니까. 너무 오래 버티지 않아도 돼.’ 위급 상황 시 매뉴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재빠르게 사격 위치로 올라가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아직까지는 몬스터의 사정거리 밖이라 조용히 조준만 하고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이런 대규모 전투는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연습이라도 해놨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활시위를 놓자, 피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 하나가 몬스터의 살가죽을 뚫고 들어갔다. “발사! 발사!” 어두 캄캄했던 장내가 커다란 화염 마법에 의해 다시금 밝아진다. 콰앙!!!!!! 체류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마법을 쏟아부은 것이다. 보온 마법을 유지할 수가 없는지 입에서는 입김이 서리고 온몸이 춥다고 비명을 질러댔지만, 손가락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일반적이었다면 저 커다란 마법이 떨어진 시점에서 녀석들의 움직임에 제동이 걸렸겠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게거품을 물며 앞으로 달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법사들의 마법에 다시 한번 몬스터 한 뭉텅이가 쓸려나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은 결국 성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방패를 든 병사들이 앞으로 나가고, 제법 힘을 쓸 것 같이 생긴 격수들이 단단하게 전방을 지켜주는 모습에 숨을 다시 내쉴 수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이 넓은 성벽을 전체를 사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에는 거대한 몬스터 한 녀석이 그 거대한 입을 벌리며 담장으로 돌진해 왔고. ‘피해야 돼.’ 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잠시 후에 닥쳐올 끔찍한 격통에 불안해했지만, 몇 초가 지나도 몸에서는 그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떠보니 시야에 비치는 건 몬스터의 이빨을 양팔로 잡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 “어, 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대한 몬스터가 형편없이 나가떨어지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박 씨 아저씨?”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공격! 공격! 어서 빨리 따라오라니까!” [전설 등급의 특성 사기의 외침 영향을 받으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대폭 증가합니다.] ‘이게 뭐야.’ 최상급 버프라도 받은 것처럼 온몸에 힘이 넘쳐흐른다. 박 씨 아저씨가 담장 아래에 내려가 본격적으로 몬스터를 잡아내는 모습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옆에 있었던 안 씨 아저시 역시 마찬가지다. 둔기와 방패를 들고 신성력을 뿌리며 몬스터들을 후려치는 모습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성기사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커다란 신성력, 상위 사제가 둔기와 방패를 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전투에 임하고 있는 모습은 틀림없이 전사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황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박 씨 아저씨. ‘저 사람, 누구야.’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금 보여주는 모습은 그런 범주를 완전히 벗어났다. 방패를 팔에 딱 붙이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몬스터들이 나가떨어지는 광경은 믿기지가 않는다. 저 둘이 지나간 곳마다 커다란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다. 자연스레 병력들이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어느덧 거대한 몬스터들과 회전을 벌이는 이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지원군을 불러올 필요도 없다. ‘저게… 도대체 뭐야.’ 인간이 저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 것은 당연지사. 강한 모험가 중에서는 간혹 단신으로 전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간들이 있다고 들었지만, 그게 사실 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투 중이라는 것도 잊고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게 된다. 아니, 이미 전투 중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다. 전열이 완전히 기울어졌으니까. 괜스레 여신의 손거울을 꺼내 두 남자를 비추기 시작했다. 북부 전진기지 수성 전 실황이라는 제목을 붙이자, 계속해서 방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눈에 보였다. [린델마을주민님이 접속하셨습니다.] [흙수저님이 접속하셨습니다.] [천연사러버님이 접속하셨습니다.] [……님이 접속하셨습니다.] […….] […….] [린델마을주민: 내가 뭐라고 했음. 몬스터들 저쪽으로 갈 거라고 했잖아. 와, 근데 걱정할 정도는 아니네. 생각보다 너무 잘 밀어내고 있는 것 같은데… 그쪽에는 뭐, 아무것도 없어서 차출된 병력도 없지 않나? 사람들 왜 저렇게 잘 싸움? 여기 성벽 아님?] [진지충: 그나저나 방송 켠 놈은 뭐 하고 있음? 사람들 다 죽자고 싸우고 있는데… 진짜 개노답이다.] [린델마을주민: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방송하셈. 지금 전열 뒤집힌 것도 안 보이나. 딱 보니까 후위인 것 같은데… 그리고 병사로 지원한 것도 아니고 노동자로 지원한 건데, 굳이 싸울 필요는 없음. 보호받았으면 보호받았지. 그나저나 저기 앞에 남자 두 명 개잘 싸우네. 대충 봐도 교국 8좌급은 될 듯.] [아이디미정: 뭐 조금만 세다고 하면 교국 8좌급이라고 하는 놈들 극혐. 그 이름이 애들 장난인 줄 아나 봄 ㅋㅋㅋ] [흙수저: 저 사람 또 왔네.] [린델마을주민: ㄴ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대충 봐도 교국 8좌급은 되어 보임. 저거 영웅 등급 레이드 몬스터들도 섞여 있는데 방패 휘두르는 거 봐. 스치는 공격은 그냥 전부 몸으로 맞는 것 같은데, 내구 수치가 100은 넘어갈 듯. 어쩌면 장비 빨일 수도 있고.] [아이디미정: 내구 수치가 100이 넘어가는 사람이 퍽이나 저기서 저러고 있겠다. ㅋㅋㅋ] [린델마을주민: 가만히 있으면 망신이나 안 당하지. 누구든지 간에 둘 다 전설 등급 정도라고 생각하는 게 맞는 듯. 한국인인 것 같은데… 저런 성기사랑 저런 전사는 들어본 적도 없고… 상위 모험가들은 거의 다 알고 지내는데, 저런 사람들은 본 적 없음. 저거 누구임?] [아이디미정: 한국인 종특 나왔죠. 조금만 세 보이는 모험가 나오면 전부 다 한국인이래. 그리고 상위 모험가들이랑 다 알고 지내는 것도 허언증. 니가 상위 모험가랑 다 알고 다니면 나는 이기영 친구다. ㅋㅋㅋㅋㅋ] [흙수저: 관심을 주지 맙시다.] [린델마을주민: 원래부터 무시하고 있었음. 아무튼, 저거 누구인지 아는 사람 있음?] [천연사러버: 박덕구, 안기모.] [린델마을주민: 어?] [천연사러버: 찾았다.] [천연사러버 님이 퇴장하셨습니다.] “뭐…?” # 565 회귀자 사용설명서 565화 1년 이후의 대륙(3) “찾았다는 게 정말입니까?” -네, 박덕구 님과 안기모 님께서는 현재 제53 건설 현장에서 몬스터 웨이브에 맞서고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물론 정확한 사실 여부는 파악해 봐야겠지만, 베니고어 넷에서 해당 지역에 있는 작업원 한 명이 수성전 실황을 방송해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필요하시면 곧바로 영상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네. 지금 곧바로 보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맞는지 아닌지도 확인해 봐야 하니… 그보다 어째서 거기에 있는 겁니까?”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확인된 것이 없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쪽 건설 현장 책임자는….” -왕국 연합 쪽으로 확인됩니다. 책임자는… 웨스턴시티 길드에 마이클 웨인으로 자세한 사항은…. “아아, 이제야 기억이 나네요. 그 사람… 곧바로 건설 현장 책임자한테 전언 날려주시고요. 제가 찾는다고… 아니, 차라리 여신의 손거울 하나 전해주세요. 아무래도 또 어디로 튈지 모르니… 직접 연락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네, 그렇게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발견한 직원한테는 꼭 인센티브 전해주시고요. 누가 발견했다고요?” -저… 그게 익명입니다. “음, 어쩔 수 없겠네요.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더니 여기로 올라오고 있기는 한 모양이군요.” -네, 부길… 아니, 위원장님. “부길드마스터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김미영 팀장님. 그보다… 요즘 그쪽은 조금 어떻습니까?” -딱히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선희영 님과 황정연 님께서 워낙 길드를 잘 이끌어주고 계셔서… 익숙하지 않은 업무일 텐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아! 이상희 님께서도 업무를 함께 부담해 주고 계십니다. 슬슬 일선으로 나오시는 것도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아, 이상희 님… 조금 의외이기는 하네요.” -파란에 대한 지분이나 소유권을 따로 주장하지는 않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아무래도 본인이 다시 일선에 나서는 게 두 분께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파란 길드의 소유권과 운영권은 어디까지나 길드마스터와 부길드마스터가 함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계시다고, 계속해서 거듭 언급하셨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 -만약 부길드마스터가 불편하시다면 따로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작은 도움도 필요한 시점인데, 굳이 견제할 이유가 없죠. 그 사람이 그렇게 욕심부릴 사람도 아니고. 제법 오랫동안 길드 운영했으니, 생각보다 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또 물어보려고 했던 게… 아, 현성 씨한테는 연락이 없는 겁니까?” -아직 그곳에 계신 것 같습니다. 따로 연락해 오지도 않으셨고요. 아마 기존에 생각하셨던 것보다 성장이 더디신 것 같아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나오실 것 같다고 조혜진 님께서 전해주셨습니다. 추가로 엘레나 님과 유아영 님께서도 예정대로 왕국에서 올라오시는 중입니다만…. “오랜만이겠군요.” -네, 디아루기아 님께서도 슬슬 레어에 들러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디아루리아 님께서 깨어날 때가 되었다고…. “직접 연락하면 되는데….” -기기를 사용하기 어렵다고 하시더군요. 영 손에 맞지 않는다고…. “…….” -아무튼, 이전에 말씀해 주신 것들을 포함해 전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김미영 팀장님. 그리고 영상 말고 채널을 직접 보내주세요. 직접 시청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지금 바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아니, 이 새끼는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의자에 앉아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김미영 팀장이 연결한 영상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자, 책상 한구석에 자리 잡은 거울이 시야에 비쳤다. 눈에 보인 것은 항상 봐오던 얼굴, 1년 전이나 별다를 것 없는 얼굴이었다. 파란 길드 휘장 대신 보호 관리 위원회의 배지가 달려 있는 걸 제외하면 말이다. 아니, 사실 조금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하다. 1년 동안 식사를 거른 횟수가 꽤 많았으니까. 그래도 살이 조금 붙어 있던 이전이 더 나았던 것 같다. 다크서클이 괜히 눈에 띈다. 1년이다. 딱 1년이 흘렀다. 개인이 극적으로 변하기에는 조금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상이 이만큼 변한 걸 보면 그렇게 짧은 시간도 아닌 듯 느껴진다. 불과 1년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있지 않았던가. 이 세계 스마트폰으로 불리는 여신의 손거울이 제대로 자리 잡았고, 지구에서 넘어온 모험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기술에 적응했다. 대륙인들이야 조금 혼란스러워했지만, 그들 역시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녹아들었다. 여신의 손거울이 막 출시됐던 당시 예의 바른 말투와 서로를 존중하던 글을 쓰고, 댓글을 달던 대륙인들이, 어느새 급식체와 패드립을 장착한 상황. [캐슬락의 금지옥엽: 아이디미정 님.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시죠. 이곳은 신성한 공간입니다.] 라고 말했던 유저가 정확히 1년 뒤. [캐슬락의 금지옥엽: 그딴 글 싸지르면 지가 뭐라도 된 줄 알고요? 어머니는 안녕하시지?] 라는 글을 싸지르게 됐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조금 과장된 예시이기는 했지만, 이 예시가 무색할 정도로 대륙인들은 익명성의 공간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건전한 베니고어 넷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지만, 굳이 이쪽에서 제어할 필요는 없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이니, 무슨 말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이쪽에서 환영하고 싶어진다. 수많은 데이터를 분류하는 게 힘들지만, 반동분자를 색출할 방법으로 이것만 한 방법이 없지 않은가. 물론, 변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는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고, 고대하고 고대했던 북부 전진기지의 공사 역시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가장 전방에 위치한 성벽과 탑은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고, 그 외 지역도 작업 속도가 나쁘지 않았다. 외곽일수록 속도가 느렸지만, 그 역시 평소보다는 빠르다는 내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파란 길드를 탈퇴하면서까지 일에 집중한 보람이 생겼을 정도, 이렇게까지 세상이 변하다 보니 궁금증이 이는 것은 당연했다. ‘얘들은 얼마나 변했지?’ 그래도 지속해서 연락하던 몇몇과 다르게 박덕구, 안기모는 연락할 수 없었던 인원 중 하나였다. 연락 좀 하라고 출시한 여신의 손거울을 개무시한 채 지들끼리 여기저기 싸돌아다녔고, 변장까지 했는지 수소문에도 걸려들지 않았다. 사람이 별로 없는 장소에서 던전 탐험을 했는지, 아니면 귀인을 만나 기연을 얻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뒈졌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거다. 둘이 함께 갔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5개월이 지나고, 9개월이 지나니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 어떻게든 찾으려던 놈들이 전진기지 공사판에서 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니, 지들이 거기서 왜 일을 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보. 원래 이상한 놈들이었지만, 더욱더 이상하게 비쳤다. ‘최북단까지 올라오는 도중에 여행 경비가 떨어져서 오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려서 돈을 벌고 있었던 건 아닐 테고….’ 그건 아닐 거다. ‘주변에 그럴듯한 몬스터도 안 보이고, 그렇다고 연락하기 쪽팔려서 거기서 임금 받아먹으면서 일한 건 아닐 거 아니야.’ 이 돼지가 아무리 멍청해도 그렇게 바보 같을 리는 없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본인이 직접 체험하고 싶어서 거기에 틀어박히지 않았을까 싶다. 원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녀석이었으니,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일하고 있었다,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김미영 팀장이 말한 방송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아이디미정: 저게 어떻게 박덕구랑 안기모임? ㅋㅋㅋㅋㅋ] [흙수저: 나도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이 타이밍에 저 둘이 저기에 왜 있겠음.] [아이디미정: 천연사러버, 걔도 대충 떡밥 하나 던져보고 아니다 싶으니까 나간 거겠지, 뭐. 인증은 개뿔… 지금 보니까 인증 글도 삭제됐던데 ㅋㅋㅋㅋㅋ 천연사러버 뭔가 찔리는 게 있나 봄 ㅋㅋㅋㅋ] [린델마을주민: ㄴㄴㄴ 휘장은 진짜였음. 내부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겼나 봄. 원래 파란 길드, 그런 거에 민감하니까. 그리고 저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박덕구랑 안기모임. 지금 보니까 알겠음. 멀찍이서 한 번 본 적 있는데, 딱 저런 모습이었던 거 같음.] [아이디미정: 뇌피셜 또 나오죠. ㅋㅋㅋㅋㅋ] [린델마을주민: 넌 도대체 뭐가 문제임.] ‘역시 훈훈하네.’ 오늘도 활기찬 베니고어 넷의 모습이 다소 재미있게 느껴졌다. 누군가 떡밥을 뿌리고 사라졌는데, 채팅창은 기다 아니다로 논쟁 아닌 논쟁을 벌이고 있는 상태. 이게 도대체 뭐고, 왜 이런 것으로 논쟁을 벌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토론에 임하는 이들은 굉장히 진지하다. 저들이 박덕구와 안기모가 아닌 이유에 관한 몇 가지 증거를 내놓는 이들부터, 단순히 분탕을 치기 위해서 논쟁에 참전한 분탕러까지. 심지어 현 상황에 방송을 켠 BJ를 욕하는 글도 많이 보인다. 그리고 그에 반박하는 이들의 개싸움. 오랜만에 보는 베니고어 넷의 발가벗겨진 모습은 여전히 다양한 인간군상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그들의 토론 결과는 상관없다. 전장에서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는 남자 둘을 판단하는 건 오로지 내 몫이었으니까. 사실 확인하려고 까치 눈을 뜰 필요도 없다. ‘맞네.’ 멀찍이서 봐도 저 둘이 박덕구와 안기모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 보거나 얼마 보지 않은 이들은 눈치채기 힘들겠지만, 함께한 시간이 긴 만큼 사소한 동작에서도 녀석들의 모습이 보인다. 덩치도 그렇고, 키도 그렇고 누가 봐도 박덕구와 안기모다. ‘박덕구, 이 새끼는 무슨 성장촉진제를 먹었나. 키가 더 큰 것 같은데.’ 위로도 살짝 올라가고 옆으로도 살짝 늘어났다. 심지어 얼굴에는 턱수염을 잔뜩 기른 모습, 안기모는 예전과 그리 다르지 않다. 게다가 근접전에 굉장히 여유가 생겼다는 게 느껴졌다. 본래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이전과는 비교하는 게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세련된 느낌, 딱 그런 표현이 어울리는 움직임이었다. ‘정말로 최상급 전사라고 해도 믿겠는데….’ 박덕구는 또 어떠한가. ‘진짜로 성장했네, 진짜로.’ 정확한 스텟 상승 수치는 직접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지만, 부족했던 스텟들도 조금씩 올라간 것 같았다. 본인의 단단함을 잘 이용해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모습. 둘 다 힘들이지 않고 적당히 싸우고 있는데도 이 정도라면, 정말로 힘을 냈을 때는 꽤 위협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교국 8좌 정도는 되겠네.’ 김현성과 정하얀, 차희라 같은 규격 외의 괴물이 넘쳐나서 그렇지, 교국 8좌가 그렇게 약한 카드는 아니다. 여럿이 뭉치면 준신화 정도까지는 뚫어낼 수 있으니까. 안기모는 물론이거니와 박덕구까지 그 정도 수준에 올랏다는 것에는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박덕구, 얘는 어떻게 성장한 거지?’ 신체 능력이 얼마나 올라갔는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는다. 극적으로 스탯이 성장한 것 같은 느낌보다는, 조금 더 영악해진 듯한 느낌이다. 고급 마력 운용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섬세하게 마력을 다루는 것은 물론, 본인의 몸을 컨트롤하는 법을 배웠으리라. 불필요한 동작이 없어지고, 동작이 한층 더 간결해졌다. 힘을 주는 방법을 알고, 막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겨우 1년 만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얼굴을 뒤덮고 있는 수염도 그렇고…. [린델마을주민: 진짜로 박덕구 맞는 것 같음. 저 정도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진짜 장난 아니네. 안기모야 원래 붉은 용병에서 날리던 사람이어서 어느 정도는 예상했는데… 박덕구는 진짜 놀라움.] [아이디미정: 원래부터 파란 길드는 전부 재능 많은 사람만 모여 있었음. 김현성이 애초에 그런 사람들만 모으기도 했고… 파티원으로 가입하기가 얼마나 빡센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지. 만약에 저게 박덕구면 그동안은 본인이 그렇게 노력하지 않았던 게 분명함.] [린델마을주민: 무슨 소리. 박덕구는 훈련 벌레로 린델 내에서도 유명함. 새벽부터 일어나서 검 휘두르고 훈련받는 게 일과인데 본인이 노력을 안 한다니. 이상한 소리 할 거면 그냥 입 다물고 있으셈. 김양 님. 저 사람 차단 안 돼요?] 압도적인 활약을 보이면 보일수록 몬스터의 숫자는 점점 더 줄어가고 채팅창은 더욱더 활발해진다. 내가 보기에도 제법 멋있게 느껴졌으니 이걸 보고 있는 다른 이들은 얼마나 흥분하겠는가. 다소 과격한 표현이 나오기도 했고, 몬스터한테 당하는 걸 기다리고 있는 놈들도 있었지만, 결국에 제53구역 건설 현장의 병력은 많은 숫자의 몬스터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사실 저 몬스터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는 대충 예상이 되었지만, 일단 그건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하자. 주변 병력이 박덕구와 안기모에게 인사하며 예의를 표하는 장면까지 보고 있던 순간이었다. 손거울이 잠깐 떨리기 시작한 것. “아.” 정하얀이었다. # 566 회귀자 사용설명서 566화 1년 이후의 대륙(4) ‘받지 말까.’ 받으면 꼼짝없이 전화기에 붙들려 있게 될 것 같아 슬쩍 고민하던 찰나, 이윽고 잠잠해진 여신의 손거울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그동안의 경험상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예상대로 연속해서 새로운 메시지 들이 올라온다. 어떻게 보면 조금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하얀: 전화 안 받으시네요.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시죠?] [정하얀: 지금 한창 바쁠 시간인데 괜히 연락드렸나 보다. 이거 안 보고 계신 것 같은데….] [정하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오랜만에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요.] [정하얀: 지금 다른 여자랑 같이 있는 건 아니죠?] [정하얀: 위에 문자는 잘못 보낸 거예요. 다른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정하얀: 왜 연락 안 받아요?] [정하얀: 보고 싶어요. 너무 보고 싶어요.] [정하얀: 전화 좀 주세요.] [정하얀: 이제 끝난 거 맞죠? 그쪽으로 가도 되는 거죠? 지금 가도 되나요?] [정하얀: 아니에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정하얀: 너무 힘들어요. 잠깐만 전화하면 안 될까요?] [정하얀: 지금 뭐 하고 계세요? 뭐 하세요? 일하고 있나 보다.] [정하얀: 여보세요.] [정하얀: 보고 싶어요… 너무 보고 싶다.] 수십 개의 메시지가 끊임없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솔직히 답을 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또 병이 도진 것 같았으니까. 심지어 한소라까지 메시지를 보내온다. 얘는 정하얀보다 더 필사적인 것 같다. 둘이 한 자리에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한소라: 제발 전화 좀 받아주세요. 부탁드려요. 부길드마스터님, 제발… 정하얀 님 전화 좀 받아주세요. 제발, 제발요. 아니면 답장이라도 해주세요. 이거 읽고 계시죠? 읽고 계신 거 맞죠?] [한소라: 딱 한 번만 받아주세요. 너무 무서워요.] ‘얘는 진짜 힘들기는 할 거야.’ 포상금이라도 많이 때려주는 게 이쪽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례였다. 실제로 지난 1년간 한소라에게 위로금 차원으로 보낸 생명 수당의 액수도 상당하지 않았던가. 로또에 당첨됐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골드가 한소라의 생명 수당으로 빠져나갔다. 물론 본인은 필요 없다고, 이런 것 필요 없으니까 제발 어떻게든 해달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대노 상태에 접어든 정하얀 옆에 한소라가 없는 건 이제는 상상하기 힘들어졌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몇 번이나 사고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으리라. 누가 보기에도 아슬아슬 해 보였던 적이 많았으니까. 한소라가 중간에서 적절히 조율자 역할을 해준 것이 유효했다. “얘가 야밤에 전화해서 제발 와달라고 울부짖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제발 와주세요. 제발, 제, 제발요. 지금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끄윽, 제발요…. 지금 안 오시면 안 돼요. 큰일 날 것 같아요. 빨리 오셔야 돼요.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제발, 제발, 제발 부길드마스터. 딱 한 번만…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한 번만 살려… 흐윽…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좀 살려달라고… 제발… 이 씨발 쓰레기 새끼야아아아…’ 라는 영통을 받았을 때는 얼마나 당황했던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제발 와달라고 외치는 한소라의 얼굴에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한소라의 전화 한 통에 나보트 위원의 거울 호수는 물론이거니와 린델과 대륙이 무사할 수 있었으니 그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극대노 상태에 접어들기 전에 그녀가 전화를 걸어준 것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만약 타이밍이 조금 늦었더라면 제2의 27군단 사태가 벌어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1년 동안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계획은 실패한 상태. 하지만 정하얀의 성장이 물꼬를 텄다는 부분에서는 충분히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성장이 예전에 있었던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계단 하나를 밟고 올라섰다는 거에 커다란 의의를 둘 수밖에 없었다. ‘성장하는 게 당연한 거겠지, 뭐.’ 계획이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1년 동안 저런 식으로 정하얀을 마주한 건 딱 2번이다. 1개월을 참아내도 대단하다, 엄지를 추켜올릴 정도인데 6개월 이상을 참아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아예 얼굴도 보지 않고, 연락도 하지 않은 상황을 만들고 싶었지만, 이 줄다리기를 그딴 식으로 나 몰라라 운영했다가는 순식간에 극한 상황에 처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녀가 정확히 어떤 상태에 처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요청했던 영상 편지 역시 커다란 역할을 해줬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괜스레 이전에 보내왔던 영상을 터치하자 상대적으로 밝은 1년 전 정하얀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빠. 잘 지, 지내시죠? 저도 잘 지내요. 갑자기 이렇게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오늘은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거든요. 탑 안에 있는 책들도 엄청 많이 읽었어요. 새로운 마법들도 많이 만들었고요.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참을 수 있어요. 네, 참아야죠. 전, 전, 전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 -마탑 할아버지들도 전부 깜짝 놀, 놀, 놀랐어요. 이런 마법은 처음 본다면서요. 잘 지내고 계신 거 맞죠? 정말 너, 너무 보고 싶어요. 정말로요. 이만 줄일게요. 오빠도 바, 바쁘실 테니까요. 그래도 이때까지는 잘 버텨주나 싶었지. -잘 지내시죠? 가, 갑자기 또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잠깐 보여드릴 게 있어서요. 제가 사흘 전에 말씀드린 거 기억하시나요? 지금부터 보여드릴게요. 시연회 중인데… 다른 길드에서도 전부 보, 보고 싶다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요. 사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할, 할아버지들이 많이 성장한 것 같다고 막 그러셨거든요. 일주일 전이랑 비교하면 정말로 놀라울 정도로 실력이 는 것 같다고 막 칭찬해 줬어요. 사실 여기에서 공부하는 게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니깐요. 거짓말이 아니라 정, 정말로 그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그, 그렇죠? -네, 정하얀 님 말씀이 맞습니다. 허허허, 사실 이전까지 만드신 마법과 비교하면 다소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충분히 획기적인 방식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그,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그렇게…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냐구!!! -아… 죄, 죄송…. -아무튼, 지금부터 보여드릴게요. 깜, 깜짝 놀라실 거예요. -……. -……. -……. -보셨나요? 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편, 편지 말고 꼭 영상으로 보내주세요, 꼭이요. 정말로 보고 싶어요. 매일 매일 보다가 안 보니까 더 그, 그런 것 같아요.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그럼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사실 이때까지도 괜찮았다. 조금 날이 선 것 같은 모습에 마탑의 할아버지들이 당황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문제가 되는 건 이 이후부터. 자신의 성장을 어필하는 저런 종류의 영상을 약 수십 개 정도 보낸 이후에도 성과가 없자. 조금씩 조금씩 피폐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영상 편지 속 정하얀은 아주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 너머로 보이는 방 뒤쪽의 모습은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 내가 알고 있던 정하얀의 방이 아니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책들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벽에는 손톱자국이 난무해 있다.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구석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한소라가 아니었을까. 당시 머리가 산발이 되어 있는 정하얀보다 고양이 앞의 쥐 신세가 된 그녀의 얼굴이 더욱더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다. -오, 오, 오늘도… 네, 오늘도 영상… 보, 보, 보내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 정말 너무요. 너무, 너무, 너무 보고 싶어요. 너무… 끄윽… 그,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이제 한 번 정도는 만났으면 좋겠다. 진짜… 진짜 싫어. 진짜 너무 싫어요. 오빠랑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 소, 소라 씨도 그렇데요. 그렇죠? -네, 네, 맞아요. 정하얀 님… 정하얀 님 말씀이 맞아요, 부길드마스터. 이, 이제는 슬슬 와주셔도 될 것 같아요. 정하얀 님께서도 많이 성장하셨고요. 바쁘신 건 알고 계시지만 그래도 길… 길드에 한 번은 들려주셔야. -소, 소라 씨도 같은 마음이래요. 빨, 빨, 빨, 빨리 와주세요. -네, 네! 부길드마스터. 제발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제발… 그, 그리고 제가 저번에 따로 드렸던 말씀 말인데요… 그… 그것도 좀 어떻게… 다시…. -따, 따로 뭘 말했어요? -아니요. 정하얀 님… 이건 그러니까. -뭐, 뭐라고 했, 했는데? -업무적인 일, 업무적인 일… 흐윽… 업무적인 일이었어요. 어어어엉… 엉… 정말이에요. -뚝. 이후에 보내온 영상에서도 정하얀의 상태가 점점 가관으로 치닫고 있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었을까. 그나마 저건 양반이다. 오랜만에 보내온 정하얀의 영상 편지는 다른 내용을 찾아볼 수조차 없다. 그냥…. -죽…. -……. -너… 보고… 그, 그러… 면 안 돼. 아, 그게… 응. 그게 좋겠… 아… 죽….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해오는 것을 보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는가. 한 번은 터져야 하는 게 맞지만, 지금은 터지면 안 되는 타이밍이라고 판단, 곧바로 짐을 싸고 마탑으로 들어가 정하얀과의 해후를 즐길 수 있었다. 울고불고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달라붙어 와 다시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 3일. 그다음에 얼굴을 본 게 그로부터 4개월 뒤였다. 그러니까 한소라의 전화를 받고 출동했을 때가 약 2개월 전이라는 거다. ‘점점 더 짧아지네… 슬슬 여기로 부르는 게 맞나?’ 폭발하는 주기가 점점 더 짧아지고 있는 상황, 그만큼 성장하고 있어 기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나라고 걱정되지 않을 수 있을까. 거대한 폭탄이 터지는 시기를 계속해서 늦추고 늦춰,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던지는 게 좋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매일 같이 수백 개씩 오는 문자 폭탄도 그랬고 한소라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도 신경이 쓰인다. 이런 시기를 한 번 겪을 때마다 정하얀이 소소한 성장을 보인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지만…. ‘속이 타들어 갈 것 같아.’ 오늘은 또 어떤 사고를 칠지에 대한 불안감은 분명히 있었다. 오늘만 해도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지 않았던가. 물론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얘를 이대로 놔두는 것도 문제긴 문제다. 마침 박덕구도 발견한 타이밍이기도 하니 슬슬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 안 그래도 대륙 합동 훈련소에 있는 인원 일부가 넘어와 자리를 잡고 있는 실정이니….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연속으로 재생되고 있었던 정하얀의 동영상이 꺼지고 영통이 연결되는 것은 순식간. 1초도 지나지 않아 반대편에서 수락을 눌렀는지, 곧바로 정하얀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오… 오빠. 오빠!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이긴… 네가 불렀잖아.’ -문, 문자 보셨구나. 제… 제가 조금 많이 보냈나요? 일, 일하시는 데 방해됐을 것 같은데…. ‘방해가 되기야 했지. 방해가 안 될 수가 있겠어.’ “아니야. 마침 쉬고 있는 상태였고. 어때 공부는 잘돼가?” -네, 조, 조금 전까지 계속 연습하고 있, 있, 있었어요. 소라 씨랑 같이요. ‘조금 전까지 문자 보내고 있었잖아.’ “내가 괜히 전화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갑자기 미안해지는데….” -아,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네. 저도 딱 쉬려고 했었던 타이밍이라. 네… 그, 그, 그런 타이밍이라…. ‘하얀이는… 진짜 변한 게 없네.’ 행동이 아니라 생김새도 그렇다. 어깨까지 오던 머리카락이 조금 더 길어졌다는 걸 제외하면 말이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정상인 것 같은 외관이다. 메시지 폭탄을 날렸을 때는 항상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핏발이 선 눈으로 이상한 소리를 해대며 말을 더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척이나 깔끔한 모습으로 통화에 임하는 것을 보니 조금은 더 시간을 줘도 괜찮을 거라고 여겨졌다. -소라 씨도 같이 쉬고 있었어요. 여, 여, 여기요. 하지만 정하얀이 비춘 한소라의 상태를 본 이후에는, 저 모습이 급하게 셋팅된 모습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핏기가 사라진 듯한 얼굴, 저도 모르게 오돌오돌 떨리는 몸과 이 세상 두려움을 모두 담은 것 같은 눈. 연쇄 살인마 혹은 영화 속에 나오는 귀신과 밀폐된 공간에 갇힌 피해자의 모습 그 자체. 아마 전화가 오기 전까지 저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으리라. -안… 녕… 안녕하세요. 네, 정하얀 님 말씀대로 계속 마법 공부 중이었어요. 부길드마스터. 언제 볼… 수 있을까요? 지난번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최대한 조심하는 듯한 모습. 하지만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은 계속해서 SOS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저건 분명히 도와달라는 사람의 얼굴이다. -그, 그, 그 그렇죠? 이윽고 다시금 화면에 비친 정하얀의 눈동자는 솔직히 말해 무섭다. 결국, 생각해 뒀던 말을 입에 담자, 곧바로 반응해 오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한 달 후에 이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이제 슬슬 나도 여유가 생길 것 같아서. 물론 하얀이가 괜찮으면 거기서 조금 저 지내도 되지만.”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런 거 아, 아, 아니에요. 갈게요. 빨, 빨, 빨리 갈게요. 빨리…. “응, 그 대신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집중해서 공부해야 돼. 지난번이랑 비교했을 때 제대로 달라진 게 없으면 내가 하얀이 공부를 방해한 것처럼 느껴지니까.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이해할 수 있지?” ‘마지막까지… 열심히 하자. 우리….’ -네, 네, 이, 이해할 수 있어요. 끄윽… 이해할 수 있어요. 히끅, 끄윽, 살았다. 히끅, 드디어 끝났어. 흐어어엉… 히끅, 드디어… 끄윽, 살았어. 열, 열심히 하고 바로 갈, 갈게요. 뛰어갈게요. 끄윽.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동안 서러웠는지 눈물을 터뜨리는 정하얀. 그리고 그 옆에서 함께 눈물을 터뜨리고 있는 사람이 또 한 명. -신이시여… 흐윽,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한소라 역시 폭풍 같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돈 많이 줄게, 소라야. 진짜….’ 조금이지만 죄책감이 느껴진다. # 567 회귀자 사용설명서 567화 1년 이후의 대륙 (5) 죄책감이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뭔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는 했다. 한소라와 정하얀이 생각보다 더 가까워지기도 했고, 정하얀을 컨트롤 하는 데 그녀가 도움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정하얀이 극대노 상태로 진입한 순간 터지는 폭탄을 어느 정도 제어해 줄 수 인물, 애초 극대노까지 흘러가지 않게 잘 조절해 줄 수 있는 인물이 바로 그녀다. 대륙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안전을 위해서 외줄 타기를 하는 모습은 마치 예전에 내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 필사적으로 정하얀의 화를 가라앉히려 설득하거나, 어떻게든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노력하는 모습에 얼마나 큰 감명을 받았던가. 술만 퍼마시면 개가 되는 친구를 다독여 주고 챙겨주는 소중한 사람, 그게 바로 현재의 한소라의 포지션이었다. 나, 박덕구, 김현성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은 정하얀이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할 수준까지 왔으니…. 사실 한소라의 안전이 위협받는 일은 없다고 판단해도 될 것이다. 물론 항상 그렇듯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길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목숨을 위협받는 일까지는…. ‘일어나지는 않겠지, 뭐. 사실 생명 수당도 위로금 차원이니까.’ 수당까지 합치면 길드 내에서 받아가는 연봉 순위도 최상위에 가깝다. 나를 제외하면 린델 내에서 가장 연봉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지 않을까. 이것저것 전부 따지고 들어가자,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던 죄책감이 어느새 등껍질에 숨은 거북이처럼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한 달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할 테니 한차례 살아갈 힘을 얻어갈 것이 분명, 물론 그녀보다 더 자극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 달 동안 많이 성장하려나?’ 혹시나 다시 이전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마지막 스퍼트를 올릴 게 분명했다. 이런 단기간 내에 얼마나 성장할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를 지켜보면…. ‘한 계단 정도는 더 오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 대상이 정하얀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생각이기도 했지만, 포괄적으로 봤을 때는 배부른 생각이다. 겨우 한 계단이지만 그 계단을 오르기 위해 수십 년을 허비하는 마법사들이 대다수라는 걸 떠올려 보면 지금의 성장세도 비정상에 가깝다. 그래도 기왕이면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팍팍 올라가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이야 있었지만, 흘러넘쳐 터지는 것보다는 차근차근 코스를 밟아 올라가는 것이 맞다. 아무튼 간에 정하얀 생각은 여기에서 끝. 정확히 한 달 후에는 부르지 않아도 이쪽으로 달려올 테니, 그때 즈음 박덕구와 함께 해후를 즐기면 될 것 같았다. ‘다들 잘 지내려나 몰라.’ 엘레나와 유아영은 한 번 연락했었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김창렬과도 연락을 주고받았었다. 선희영과 황정연 그리고 앞서 통화를 마친 김미영 팀장은 업무차 얼굴을 본 적도 있었고, 길드에 남은 인원들과도 거의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하얀과 한소라는 앞서 말한 것처럼 두 차례 만났고, 김현성 대신 대륙 합동 훈련소의 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조혜진 역시 업무차 미팅한 적이 있었다. 연락이 끊긴 것은 박덕구와 김현성, 길드원은 아니지만, 차희라가 전부. 특히 김현성과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이 딱 9개월 전이다. 훈련소의 기틀을 잡아놓은 이후에 본인의 수련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얘가 참 독하기는 해.’ 굳이 연락을 끊으면서까지 처박힐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집중하기가 힘들어 연락드리기 힘들 것 같다는 말을 해올 당시에 얼마나 황당했던가. 막 관리 위원회에 위원장으로 추대됐을 시점이었기에 더욱더 당황스러웠다. 간혹 조혜진을 통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전해오기는 했지만…. 정말로 9개월 동안 검만 휘두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짐을 내려놓으라고 말하기도 했고, 실제로 내려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전혀 새로운 짐이 녀석 위에 올라가 있는 느낌이었다. 이전처럼 그 짐을 버거워하지는 않아 다행이었지만, 의외로 멘탈이 약한 녀석이니 잘 견디고 있을지 걱정이 생기기는 한다. 성장이 침체되거나 본인의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점점 자기 생각에 매몰될 수도 있다. 대충 생각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연락을 넣었다. 박덕구와 안기모가 있는 53구역이었다. “아, 저 이 위원장입니다. 그러니까….” -네, 여, 영광입니다. 53건설 구역의 마이클 웨인이라고 합니다. 이기영 위원장님. 이렇게 따로 연락을 주실 줄은… 영,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개발 계획 발표가 있었을 때 자리에서 한 번 뵀었죠. 언제 한번 연락하려고 생각은 했었는데… 공교롭게도 너무 바빠져서 제대로 찾아뵙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쪽은 조금 어떻습니까?” -갑작스레 몬스터들이 나타나서 조금 당황했습니다만, 다행히 박덕구 님과 안기모 님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몬스터들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성벽 상황은 물론이거니와 인명 피해도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작업에는 차질이 좀 생길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시간 내에 끝낼 수 있도록… 노력을…. “괜찮다니 다행이군요. 그보다 김미영 팀장에게 연락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지금 자리에 있습니까?” -네, 그, 그런데 지금은…. “…….” -사냥하신 몬스터 대금을 치르신 후에 곧바로 길을 떠나셨습니다. 김미영 팀장님에게 언질을 받은 대로 여신의 손거울을 드리고 저희 쪽에서도 모시려고 했지만, 그…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고는…. “아….” -죄송합니다. 이, 이걸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정말로 죄송합니다. “하….” -죄송합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떠난다고 하셔서… 저로서도 어떻게 막을 수가…. “아니요, 후우, 괜찮습니다. 뭐, 웨인 님 입장도 이해합니다. 크게 신경 쓰지 마시고 후처리에 집중해 주세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혹시 어느 쪽으로 간다는 말은 있었습니까?” -최북단으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위원장님이 계신 장소가 아닐지…. “음, 뭐, 그렇겠군요. 아무튼, 고생하셨습니다. 위원회 측에서도 따로 지원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감사… 또 감사합니다. 위원장님. 영광이었습니다. “네.” 뚝 “아, 왠지 불안하더라니. 이 돼지 새끼 진짜….” 최북단까지 올라오기는 할 것이다. 그 와중에 어느 곳으로 샐까 불안한 것이 문제. 바로 떠났다고 하니 유랑을 즐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오지랖이 넓은 녀석이니 이 마을, 저 마을에 들를 때마다 마을 촌장과 상점 주인 아주머니의 퀘스트를 도맡아 할지도 모른다. 곰이 나타났는데 해결 좀 해달라거나, 마을에 땔감이 부족한데 좀 구해주면 좋겠다는 쓸모없는 퀘스트 말이다. “얼굴 한 번 보기 힘드네.” ‘업무도 해야 되는데.’ 아쉬운 마음에 중얼거리며 바깥으로 나섰다.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일도 잡히지 않는데 쓸데없이 안에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 코트.’ 방한 기능이 달린 두꺼운 코트를 입고 본격적으로 밖을 나서자,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직원들이 인사를 해왔다. 뒤쪽에서는 곧바로 박리안을 비롯한 경호대가 따라오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밖으로 나서자 눈에 보인 것은 거대한 성벽 그리고 그 위에 달라붙어 마무리 작업에 한창인 기술자들이었다. 정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성벽이 높다. 성벽 중간중간에 세워진 마탑은 더욱더 높았고. 아직 완공된 것은 아니었지만, 마력석으로 쌓아 올린 성벽은 대충 보기에도 높고 굳건해 보인다. 이 모든 걸 1년 안에 올렸다고 생각하니 절로 박수가 나왔다. 물론 이 장소는 이 정도의 모습은 보여줘야만 한다. ‘여기가 1차 방어선이니까.’ 사실상 가장 중요한 장소라 봐도 될 것이다. ‘박덕구 이 새끼는 성벽을 쌓고 싶으면 여기나 조금 도와주지.’ 아직도 작업이 한창인 장내가 눈에 들어온다. 솔직히 나조차 이 정도로까지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차 방어선 이외의 지역들은 작업이 느렸지만, 물량을 이쪽에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 중 하나였을 뿐이다. 물론 공사가 원활하게 진행된 가장 큰 이유가 복지 때문이라는 것에는 그 누구도 반대 의견이 없을 것이다. 일당도 세고 보험도 된다. 추운 환경을 고려해 온도 마법도 유지해 주고, 무엇보다 진심으로 기술자와 노동자들을 대우해 주고 있으니 속도가 나지 않을 리가 없다. 착취하고 채찍질하는 것보다 효과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더욱더 잘해주고 있는 상황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앞으로 한 6개월 정도면 되려나.’ 그 정도 시점이 지나면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상하게 너무 무난한 게 조금 불안하기는 한데….’ 딱히 사건이 일어날 건더기가 없었지만, 그래도 너무 원활하게 잘 풀리고 있다는 게 왠지 불안했다.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왜 이렇게 근심 걱정이 많은 얼굴이에요?” “그냥저냥. 뭐, 오늘은 따로 할 일 없지? 준비는 다 됐어?” “합동 훈련소에서 인원들 들여오는 걸 말씀하시는 거라면 거의 다 됐어요. 주거 시설이랑 편의 시설도 마련해 놨고. 병력도 순조롭게 출발한 것 같던데요. 곧 병력이 들어오지 않을까 싶어요.” “음….” “훈련소 인원들까지 들어오면 더 도시처럼 보이겠네요. 여기는….” “노동자랑 기술자 숫자도 많고, 얘네들한테 전부 관리하는데 들어가는 인력도 만만치 않으니까. 뭐, 이미 도시화 됐다고 생각하는 게 맞아. 근처 구역까지 합치면 웬만한 왕국 정도는 될걸. 이미 시장도 형성됐고, 치안도 신경 써야 되는 수준까지 왔으니까.” “아직까지는 잘 버텨주고 있는 것 같은데, 조금 혼란스럽기는 하겠네요.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걱정될 게 있어?” “여러 가지 있죠. 당장 노동자 파업 문제만 봐도 그렇지 않아요?” “파업 문제야 매번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일이야. 실제로 크게 일어난 적도 없었으니까.” “아뇨, 아뇨. 너무 쉽게 간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니까요. 일부 기술자들은 웬만한 모험가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거 알고 계시죠? 그런데도 파업 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 정신 상태가 썩어 문드러진 거예요. 이미 지들끼리는 노조를 만들어야 하네, 어쩌네, 이런 소리를 하고 있을 정도니까. 이 대규모 공사가 꽤 비전이 좋은 것 같으니 귀족노조 한번 해보고 싶다는 심산인가… 6구역 작업 속도가 다른 지역보다 느린 게 대놓고 태업하고 있어서래요.” “거기 어디서 관리하고 있지? 파업 노조 어쩌고 하는 애들, 베니고어 넷 채팅 로그 확인해 봤어?” “깨끗해요. 저도 처음에는 누가 의도적으로 흔든 게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고…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봐요. 표면적으로 드러난 세력 중에서는 위원회와 반목하고 있는 애들이 없지만, 가장 꼭대기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게 마련이거든요.” “흠….” “오빠가 보고서와 문서들도 보고받은 것과 현장의 상황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 “무슨 말 하는지 알겠네.” “각 구역 건설 책임자들 입장에서도 태업 문제나 파업 문제 혹은 조금 커다란 사건이 터져도 필사적으로 덮고 싶어 할 걸요. 이기영 위원장에게 잘못 보이면 인생 꼬일 수도 있으니까. 본인들이 맡은 구역은 안전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척. 옛날 우리나라 군 고위 간부들 생각하면 딱 설명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무슨 일이 터져도 부대 안에서만 해결하려고 하잖아요. 딱 그 짝 아니에요?” 이지혜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구두로 보고받은 53구역의 웨인 역시 건설 현장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게 정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몬스터 웨이브를 맞고도 공사 중이던 현장에 이상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박덕구와 안기모가 있었으니 크게 망가지진 않았겠지만, 책임자 입장에서는 그 작은 흠도 자신의 커리어에 흠집이 될까 두려울 게 뻔하다. ‘예전에 왕들이 바보가 되는 이유가 있어.’ 이지혜가 아니었다면, 눈과 귀가 닫힌 것처럼 느껴졌으리라. ‘파업이라, 파업….’ # 568 회귀자 사용설명서 568화 1년 이후의 대륙(6) 최초의 파업은 이집트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나라의 왕이자 신으로 군림하고 있던 파라오를 대상으로 한 파업이었으며 시위였다. 제대로 된 임금이 지급되지 않자, 당시 피라미드를 만들었던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것이다. 심지어 피라미드 안을 점거하는 등, 현재 시위의 형태를 띤 움직임까지 벌어졌다고 하니 무척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인간에 대한 기본권들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상태에서 벌어진 시위가 아니었던가. 불과 몇십 년, 아니, 몇 년 전만 해도 최루탄과 꼬부기 물대포를 뿌리는 행태의 과격 진압이 있었으니 그때 그 시절에는 오죽할까. 스킬, 분노한 파라오의 일격이 피라미드 노동자 시위대의 뚝배기 위로 꽂힐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로 노동자들의 승리.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꼭 피라미드를 완성해야 된다는 과업이 파라오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물론 다른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중간 관리자들과 윗대가리들 역시 공사가 지체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임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으면 파라오의 무덤을 도굴하겠다.’ 같은 신성 모독성 발언을 하고서도 처벌을 받지 않고 임금을 받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대단하긴 해.’ 당시 이집트에서 노동자들을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아니면 기술자들이 부족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임이 분명했다. ‘이걸 여기에 대입시키는 건 조금 무리가 있지만….’ 현재의 내 상황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무조건 전진기지를 완성해야 한다는 과업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조건 완성해야 한다. 만약 내가 임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은 관리자의 입장이었다면, 억지로 쥐여줘서라도 공사판으로 떠밀었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거다. ‘그런데 씨바, 이 새끼들은 왜 이러는 거야?’ 아무리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한들, 처우 개선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태업을 하기에는 각 구역의 대우가 너무 좋지 않은가. 보온 마법도 유지해 줘, 모험가급의 임금도 넣어줘, 보험도 돼, 다른 편의 사항을 모두 언급하기에는 입이 아플 정도다. 심지어 휴가도 쓸 수 있었고, 야근을 하는 경우에는 야근 수당도 넉넉히 넣어주고 있었다. 꿈의 직장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노동자들 대부분이 이런 환경에 만족한 것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심지어 사제들도 대기하고 있지 않던가. 만약 여신의 손거울이 아니었다면, 이 사업의 임금을 감당하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정신이 나간 건가.’ “아니면 내가 너무 편하게 해준 건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 같아서 괜히 씁쓸해지네.” “아니요. 확실하게 효율이 나오기는 했어요. 성과금도 있으니까 안 나오는 게 이상한 상황이기는 하지만요. 애초에 이런 환경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아무리 채찍질해도 지금처럼 효율이 나오지는 않았을 걸요. 실제로도 겨우 1년 만에 여기까지 왔잖아요. 생각해 봐요. 겨우 1년이에요.” “누나 말은….” “네. 겨우 1년 만에 여기까지 왔는데 부작용이 없는 게 이상한 상황이라는 거죠. 애초 3년 계획이 발표됐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부작용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이런 형태로 나타나는 거고요. 일단 공사 초반에 오빠가 관리자들을 너무 쪼았던 게 첫 번째. 심지어 한 사람은 아예 쳐 내기까지 했으니 지레 겁을 먹는 게 당연한 거겠죠.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1년이면 사람 하나 고이는 데 충분한 시간이잖아요? 보고 체계에 허점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고 봐요.” “흠….” “애초에 오빠 사람들로만 구성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지만….”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었으니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인선을 전부 내 쪽으로 채우기에는 무리가 있거든. 관리 위원회가 전반적으로 통제하고 있다고는 해도, 눈에 보이기에는 동등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니까. 내가 괜히 파란 길드를 탈퇴했겠어?” “이해해요.” “교국과 린델에서 가져가고 있는 지분이 가장 많은 건, 투자한 걸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거지만 전 대륙이 하나가 되는 그림을 그려주기 위해서라도… 같은 과업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줘야 돼. 공화국이나 연방, 이종족, 연합, 그것뿐이야? 각 교단도 조금씩 지분을 나눠줘야 하는데… 최대한 내 사람들로만 구성하려고 해도 여기저기에 구멍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니까. 솔직히 너무 급하기는 했어.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네.” “뭐에 홀린 것 마냥 엄청나게 급했죠. 저도 열심히 해본다고 했는데… 단기간 내에 이 넓은 지역의 현장을 완벽하게 관리하는 건 무리였네요. 위원회의 구성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아쉽지만 어쩌겠어요. 급격한 성장 이후에는 항상 부작용이 따르는 법인데.” 전혀 다르지만, 왠지 모르게 정하얀을 생각나게 하는 마지막 대사였다. ‘그 대사는 왠지 불길하니까. 그만하자.’ 씁쓸한 마음에 괜스레 이지혜를 바라봤다. 항상 보던 얼굴이었지만, 오늘따라 제법 뾰로통한 얼굴이 눈에 보였다. 단발머리에 작은 키, 얘는 첫 3개월 이후로 계속 붙어 있었기 때문에 뭐가 달라졌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예전 그대로 같았지만, 최근 스트레스를 받는지 조금은 초췌한 모습, 실제로 수면 시간도 나보다 적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전반적인 부분에 모두 다 그녀의 손이 들어가 있으니 오죽할까. 조금 쉬게 해주고 싶었지만, 이지혜가 휴식이라도 취하면 업무 전반이 마비되는 것같이 느껴졌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눈과 귀는 물론 손과 발의 역할까지 해주고 있으니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후에 대응 방향은 있어?” “고민 중이에요. 그냥 확 다 잘라 버리고 밀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지금은 사태 파악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상태니까요. 5현장 쪽으로 감찰단을 보내기는 하겠지만, 글쎄요…. 효과가 그리 클지는 잘 모르겠고, 일단 그쪽의 진전이 느린 것은 확실하니 뭔가 있기는 할 걸요. 아마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될 거예요. 5구역은 우리 계획에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니까.” “다른 쪽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거지?” “네, 그만큼 천천히 한번 둘러봐야죠.” “둘러보는 건 둘러보는 거지만…. 아무리 우리가 놓친 부분이 있었다고 해도 여기서 어떻게 더 처우 개선을 해달라는 건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네, 진짜.” “저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같은 조건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온다는 건 경영자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죠. 애초에 임금도 주지 말걸 그랬어. 강제 징집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래도 이야기가 나오고, 저래도 이야기가 나왔다면 그냥 돈이라도 아끼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요? 개똥밭을 굴러봐야 지금 있는 곳이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지. 보온 마법부터 확 빼버릴까요?” “아냐. 작업 속도에 차질 생기는 건 최대한 지양하고 싶거든… 그리고 강제로 징집했다면 반발이 너무 심했을 거야. 대외적인 이미지에도 문제가 생길 테고….” “차라리 윗대가리 쪽에 문제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니까요. 아직은 인간을 믿고 싶다고요, 진짜.” ‘네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것 같다만….’ 나 역시 이지혜의 생각에는 어느 정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가능성은 세 개네요.” “응.” “첫 번째는 책임자 쪽에서 뭔가 문제가 있을 경우… 아니, 애초에 문제가 있기는 있네요. 보고를 안 하는 것 역시 문제라고 할 수 있으니까.” “누나 말은 중간에서 해 처먹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잖아.” “네, 정말로 노동자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을 경우요.” “다른 건 몰라도 방산비리 하는 놈들은 전부 다 쓸어버려야 되는데.” “그건 동의해요. 두 번째 가능성은 정말로 우리 노동자들이 배가 불렀을 경우고요. 제발 이건 아니었으면 좋겠다, 제에발.” “…….” “그것도 아니라면… 어딘가에 작전 세력이 있다던가.” “작전 세력 쪽은 가능성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로그도 안 남았다며.” “아직 찾지 못한 것뿐이지 가능성을 아주 버린 건 아니에요. 베니고어 넷에 로그가 남지 않았더라도, 서로 연락을 취할 방법은 극단적으로 적지만 없는 건 아니니까요. 우리가 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 작전 세력의 존재 가능성을 버리기에는 조금 이르죠.” “대안은?” “일단 감찰단부터 기다려야죠. 조금 더 포괄적으로 바라볼 생각이에요. 계속해서 하는 말이지만… 거기에 있는 노동자들이 문제라고 생각하기는 정말 싫거든요. 인간혐오 걸릴 지경이라고요.” ‘누나가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오빠 보고 정말 나는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주변만 둘러봐도 상상 이상인 놈들이 많다니까요. 솔직히 첫 번째일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봐도 되니까….” “5구역 책임자가 누구였지.” “미하일이요.” “아.” ‘미하일.’ 연합 쪽 인선이 필요해 영입한 인물 중 하나였다. 연합 내에서도 유명한 온건파이기도 했고, 청렴결백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으며 이상론자이며 유명한 학자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쪽에서도 미하일의 영입에 꽤 많은 공을 들였다. 1번부터 10번 기지까지는 1선에서 바깥 놈들을 맞이해야 하는 만큼 특히나 더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1, 2, 3, 6, 7, 9, 10은 이기영이 픽한 인선. 10번 시드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 덜한 4번 현장과 5번 현장, 9번 현장은 외부인을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공화국에도 한 자리 넣어줬어야 했고, 연합에도 한 자리를 넣어줘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일을 해줄 인물이 필요했다. 미하일은 그 조건에 딱 들어맞는 이들 중 하나였다. 마지못해 받아들인다고 했을 때는 얼마나 안심했던가. ‘그 사람은 아닐 텐데….’ 실제로 중간에 돈을 가로채 자기 욕심을 위해 사용할 사람은 아니다. 마음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성향과 고유 기벽도 무난함 그 자체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연합 내에서도 청렴하기로 유명한 사람이고, 뒷조사도 이미 다 해보지 않았어요?”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이기는 해.” “어떻게 해볼까요? 조금 더 심층적으로 털어볼까요?” “너무 힘쓰지는 마. 은근슬쩍 찔러주려고 해도 모두 다 거절한 사람인데. 일단은 작전 세력이 있는지부터 털어보자. 아, 그럴 게 아니라 한번 만나보는 게 좋겠네.” “누구요, 미하일이요?” “응, 이쪽으로 불러. 그 사이에 현장으로 사람들 좀 보내고.” “괜찮겠네요.” ‘길드원들보다 이 사람을 먼저 만나게 생겼네.’ “지금 바로 그리폰 보내는 게 좋을까요?” “응,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따로 추궁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는 말자고. 여러 가지로 준비해 올 가능성도 있으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만나서 차나 한잔 마시자고 하죠. 뭐.” “응, 그럼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야?” “네.” “그럼 저녁이나 같이 먹자, 누나.” “바빠서 간단히 때우려고 했는데… 이러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죠. 이거 데이트 신청 맞죠? 오빠?” “마음대로 생각해.” 이지혜의 말대로 그냥 밀어버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작업에 차질이 생기는 일은 최대한 지양해야 했다. 도대체 어떻게 관리하고 있길래 태업 이야기가 나오고, 심지어는 제대로 보고조차 되지 않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5구역이라….” “신경 쓰여요?” “당연하지.” “너무 스트레스받지는 마요, 오빠.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범주 내에 있는 일이니까. 생각보다 별일 아닐 거예요.” 나 역시 기도하고 싶은 부분이다. 제발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다. # 569 회귀자 사용설명서 569화 미하일(1)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미하일 님.” “차나 한잔 마시자는 군요. 정말로 한가하게 차나 마시자고 부르지는 않았을 거고, 당신들의 생각이 들어맞은 모양입니다.”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결단이라고까지 말할 필요 있겠습니까. 연합, 공화국 그리고 정말로 대륙을 위하는 길이 뭔지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깨달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미하일 님의 명성에 금이 갈까 두렵습니다. 아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 자체가 죄스럽군요.” “죽고 나면 모두 소용없는 것이지요. 명예나 명성 같은 것에는 집착하지 않은 지 제법 오래된 것 같습니다. 그 친구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당신들 역시 같군요.” “…….” “그 친구는 자신이 지켜야 할 명예에 모든 걸 걸었었죠. 목숨조차 명예와 이름을 위해 던질 수 있었던 친구였습니다. 저는 그가 살아가는 방식에는 끝까지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하하, 아마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바보 같다고 비웃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 “지금껏 쌓아올린 명성을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할 정도로 이 일이 중요한 일이냐고, 그렇게 말하며 비웃을 게 분명합니다.” “…….” “저는 아주 오랫동안 이 대륙에서 살아왔습니다. 모험가라 불리는 당신들이 오기 전부터 이 대륙에 자리 잡아왔죠. 이 넓은 땅 곳곳에 제 고향이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아끼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신들이 처음 대륙에 진입했을 때 말입니다만, 저는 당신들이 대륙을 발전시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신들은 이곳을 급속도로 발전시켰죠. 그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영향을 주기도 했고,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도 했죠.” “…….” “그 친구처럼… 저는 이기영 위원장이 대륙의 약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말씀은….” “하지만 그자는 양보할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 “이기영 그자가 내게 이곳을 맡아줄 수 있냐고 물어왔을 때, 그자의 눈을 보고 반쯤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잘 쓰면 약이 되고, 못 쓰면 독이 되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대륙의 약이 되기에 그자는 욕심이 너무 많아요. 이 멍청하고 작은 손거울을 보세요. 당신들 세상에는 이런 게 실제로 존재했다고 했었죠. 하지만 믿어지십니까?” “…….” “이 작은 물건이 이 대륙 전체를 컨트롤하고 있다는 게… 믿기십니까? 처음에는 먼발치에서 신기해하며 무서워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이 작은 손거울을 들고 있습니다. 이 작은 것이 없다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까지 왔어요. 사람들 대부분은 알지 못하고 있을 게 분명하겠죠. 작지만 무한대로 넓은 이 공간에 수많은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고, 이기영 그자는 이걸 열어볼 수 있다는 것. 전 대륙이 감시당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것도 단 한 사람에게 말입니다.” “…….” “이런 건 자유라고 할 수 없어요.” “네.” “이런 삶은 살아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대륙 전체가 한 사람한테 통제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 “예전에 그 친구가 흥미로운 소설을 설명해 준 적이 있었죠. 조지 오웰이라는 저명한 작가가 썼던 소설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그 소설 속에 나오는 공간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개인이 전체를 통제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그자를 비판하는 언론까지도 그의 검수를 받고 미디어를 내보냅니다. 그자를 칭송하는 언론 역시 마찬가지고요.” “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이기영 그자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움직이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이 전체의 자유를 통제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최소한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 “아니요. 어차피 당신들은 공감하지 못하겠죠. 그 친구도 공감하지 못할 겁니다. 서로 가치 있는 게 다를 테니. 그 친구는 명예 때문에 죽고 저는 제 고집 때문에 죽겠군요.” “미하일 님은 죽지 않을 겁니다. 죽는 것은 저희의 역할이지, 미하일 님의 역할이 아니에요.”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더라도 저는 죽을 겁니다. 교국에서 저를 내버려 둘 리가 없으니… 내일 아침에는 곧바로 출발해야 하니 일단 밖으로 나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소식을 들고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 “…….” “뜻대로 하겠습니다.” 한 발자국을 뒤로 물리자 조용히 책을 읽는 미하일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필요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괜스레 입안이 쓰다. 저 사람을 끌어들이는 게 정말로 맞는 일인지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할 거였으면 애초부터 제안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자신들 역시 최악의 경우 그를 죽일 각오를 하고 그와 접선하지 않았던가. 그가 이번 일에 함께하지 않겠다고 고개를 저었더라면 저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리라. 그런 주제에 갑자기 그의 처지에 대해 공감하고, 걱정하고 있다니…. ‘사람 일이라는 건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아마 그가 너무나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은 아닐까. 정답이 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는 것이 고작이리라. ‘복잡해.’ 머릿속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는 것도 좋지 않아.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되는 거니까.” “흔들리고 있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더욱더 확신을 얻었다고 말씀 드리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 외에도 맞서 싸워야 할 이유를 알게 됐으니까요. 미하일 님 덕분에요. 물론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네 말이 맞아.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지.” “그렇죠? 지금 이 상태라면 대륙에 미래는 없을 거예요. 하나부터 열까지 그자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죠. 이제는 뭐가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말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에요. 이기영 명예추기경, 아니, 이제는 위원장. 그자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이들이 대륙에 얼마나 될까요. 아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일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아. 대외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면 그자가 여러 가지 일을 벌였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테니까. 언론과 미디어에서 만들어낸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자가 대륙의 해악을 끼치고 있는 바퀴벌레 같은 자라는 걸 누가 눈치챌 수 있겠어? 대륙에 악마를 소환하고, 신을 사칭하고 속이며 대륙인 전체를 기만하는 자라는 걸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겠어.” “어째서 그런 자를 믿고 따르는 건지….” “민중들의 우매함을 꾸짖기보다는 그자의 비열함을 곱씹는 게 맞아.” “네, 그렇네요.” “정확히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가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닐까요. 어쩌면 이 공사 자체가 의미 없는 행동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위기를 조장하고, 가상의 외부의 적을 끌어들여 대륙을 조금 더 컨트롤하기 쉽게 만드는 거죠. 손거울의 출시가 제법 교묘하다는 걸 보면 충분히 생각해 봄 직한 이야기라고 봐요. 구태여 파란 길드를 탈퇴하고 위원회로 자리를 옮긴 것 역시 그런 의미라고 생각해 봐도 되고요. 보세요. 말 몇 마디 하면서 기사를 내보냈을 뿐인데 그자는 대륙의 중심이, 지도자가 되어 있어요. 내로라하는 권력자들 역시 그자의 눈치를 보고 있고, 그자의 뜻에 반하는 이들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죠.” “…….” “대중들의 목소리와 자유의지도 모두 그에게 컨트롤되고 있어요. 온갖 미디어 매체들이 모두 그자의 손에 있고, 그자는 본인에게 유리한 정보를 꺼낼 수 있고, 숨길 수 있어요. 대륙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정보들 역시 열어볼 수 있죠. 이기영 그자가 능력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자는 잘못된 지도자예요. 저 역시 한때는 그에게 지지를 보내는 이들 중 하나였지만 당신들 그리고 미하일 님과의 만남이 제 눈을 뜨여준 것 같아요. 아마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저 역시….” “나는 그렇게 그럴듯한 가치로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야, 라파엘. 내 동료들은 몰라도 최소한 나는 그렇지 않아. 나를 움직이는 건 복수심이지 보기 좋게 만들어낸 가치가 아니야.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달라.”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며, 대륙의 진실에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달라지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목적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마음에 든 것이 다르다. 이전까지는 이들을 움직인 게 단순한 복수심이었다면, 지금은 책임감과 숭고함이라고 생각할 정도. 아마 그 누구보다 이들이 더 그 차이점을 깨닫고 있지 않을까.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단장님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다른 분들 모두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단순한 복수심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으니까. 이유가 어찌 됐건 저희는 옳은 일을 하고 있어요. 우리 결사단이 하려고 하는 일은 분명히 오랫동안 대륙에 기억될 거예요.” “아니, 우리가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테러범 그 이상, 그 이하도 되지 못할 거야.” “듣기 안 좋은 말이네요. 테러범이라니. 그래도 나름대로의 정의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인데….” “하핫.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라파엘.”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만약에 일이 실패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달라지는 건 없어. 기회를 기다리고 계속해서 움직일 뿐이야.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 “내가 아는 그자라면 분명히 우리 생각대로 움직여 줄 거야.” “…….” “군사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자는 책사가 아니야. 연기자고 사기꾼이지. 그자의 무대는 전장이나 집무실이 아니야. 무대지. 그게 바로 이기영이라는 놈의 본성이야. 가만히 앉아 있을 리가 없지. 이번 일 역시 그자에게는 홍보의 수단이 될 거야.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게 많을 거라고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럼 그 이후에는….”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것밖에는 없어. 사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파란 길드를 탈퇴했다고 한들, 그자가 길드에 끼치는 영향력은 그대로니까. 하나둘 이쪽으로 모이고, 합동 훈련소에 있는 병력까지 자리를 잡는다면 우리 결사단의 계획은 수포가 될 거야. 어쩌면 꼬리를 잡힐지도 모르지. 최대한 이번 기회를 잡을 수밖에 없어. 남아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으니까.” “…….” “…….”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요?” “다른 방법은 없어. 그자의 수명이 다하기 전까지는 상황이 뒤바뀌지 않겠지.” “그래도 뭔가 다른 일이 있을지도 몰라요. 잡지를 만들어 배포한다든가… 뜻이 맞는 이들을 모은다든가 하는 방향으로요.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에 대해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인다면 언젠가는 대륙인들 역시… 알아줄 거예요. 분명히 알아줄 거예요. 결사단에 모인 사람들을 보세요. 꼭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일을 해결할 필요는….” “아니, 이 이상은 위험해. 이 1년 동안 너무 몸집이 커졌어. 지금까지 그자의 눈에 띄지 않은 게 기적이라는 것 정도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우리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야. 조금이라도 몸을 일으켰다간 곧바로 군대가 이곳으로 들이닥칠 게 분명해. 지금은 다른 방향을 생각하는 것보다 이미 계획되어 있는 걸 실행에 옮기는 게 맞아. 아마 미하일 님이 그자와 만남을 가지는 동안 이곳에 감찰대가 올 거다. 다른 이야기보다 이 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라파엘.”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어. 이미 미하일 님도 한 배를 타셨으니까. 이제 와서 몸을 뒤로 돌렸다가는 모든 계획이… 크윽….” “단, 단장. 괜찮으신거죠?” “하아… 하아… 응, 괜찮아. 걱정할 필요 없어. 걱정할 필요 없다, 라파엘.”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단장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 것은 당연지사.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원통하게 느껴진다. 결사단. 궁극적인 목표는 이기영 위원장으로부터 대륙을 완전 해방 시키는 것. 옳은 일을 위해 싸우는 이들 이었지만 아직은 반정부 세력에 불과했다. ‘언젠가는 알아줄 거야.’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분명히 이들의 희생과 투쟁을 기억해줄 것이다. 흔들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 570 회귀자 사용설명서 570화 미하일(2)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오랜만입니다. 미하일 님. 도통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도 일이 제법 바빴던 터라….” “제가 먼저 찾았어야 했는데… 정말로 죄송합니다.” “일단 앉으시죠.” “네.” “차는 뭐로 드시겠습니까. 없는 종류는 없으니, 드시고 싶으신 것 아무거나 선택해 주시면 됩니다.” “전부 다 괜찮습니다. 기왕이면 위원장님이 추천해 주시는 차를 들고 싶군요.” “그렇다면… 아, 이게 좋겠군요. 북부 지방에서만 자라는 딸기로 만든 차입니다. 조금 달기는 하다만 기분이 나쁠 정도는 아니고요. 이미 드셔보셨을 수도 있을 테지만… 굳이 하나를 추천해 준다고 하면 이걸 선택하고 싶습니다. 요즘 제가 빠져 있는 터라… 분명히 마음에 드실 겁니다.” “감사히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감사하시니 제가 더 민망하네요. 그래서 어떻습니까? 요즘에는 어떻게 지내고 계셨습니까.” “매일 같습니다. 아마 위원장님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 차나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남는 시간에는 신문이나 책을 읽고는 합니다. 물론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딱 그 시간까지입니다. 아무래도 현장의 규모가 상당히 크니… 마치 도시를 운영하는 느낌이더군요. 노동자들의 숫자만 해도 웬만한 소도시를 뛰어넘을 정도니까요…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고 삶의 터전이 되어가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현장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미하일 님. 특히나 1번 대부터 3번대까지는 거의 대도시라고 불려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니까요.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의 즐길 거리, 먹을거리, 놀 거리, 감히 말씀 드리건대 웬만한 소도시보다도 나을 겁니다. 애초에 도시 계획을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 같아 기분이 좋더군요.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을 꽁꽁 남겨두고 있었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 힘들었을 겁니다. 돈을 벌고, 소비하고, 세금을 내고, 또 그 세금으로 다른 일에도 임할 수 있고 그게 경제가 돌아가는 생리가 아니겠습니까.” “네, 위원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사실 저는 경제에 무지합니다.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시장이 형성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돈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발상이 아닙니까. 그렇기에 정말로 믿을 수 있는 분들에게 현장을 맡긴 겁니다.” “예.” “단순히 건설 책임자를 원했다면 미하일 님에게 연락을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종족 차별적 발언으로 들리시겠지만 저어기 드워프들에게나 맡겼겠죠. 현장 책임의 구성을 건설자가 아니라 행정가들에게 드린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네, 무슨 말씀을 하시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건설의 진행 상황에 대해서만 보고를 받고 싶은 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얼마가 들어오고 얼마나 빠져나갔는지 모든 걸 알고 싶다는 뜻이었어요. 아주 사소한 문제까지 전부요. 그래서 미하일 님을 부른 겁니다.” “예.” “혹시나 미하일 님이 오해하시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 때문에 말입니다.” “…….” “저는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요. 만약 제가 당신의 능력을 의심했다면 그 중요한 자리에 당신을 앉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 자리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해주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하일 님께 맡긴 거예요.” “면목 없습니다.” “아니요. 미하일 님을 꾸짖거나 압박하기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흘려 들으셔도 되고요. 쓸데없이 흥분한 것 같아서 민망하군요. 뭐, 그래서 혹시 이와 관련해서 다른 할 말은 없으십니까?” “죄송합니다만, 정확히 무슨 말씀을 듣고 싶으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현장의 작업이 늦어지고 있는 건 사실이기는 하나, 충분히 빠른 속도입니다. 물론 내부적인 문제가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만, 이는 충분히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고를 드리지 않은 것뿐입니다.” “음….” “…….” “…….” 천천히 얼굴을 살펴보자 평소와 같은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걸 솔직하게 말했다고 해야 되나?’ 현장에서 일어나는 파업, 태업과 같은 작은 문제들을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고 어필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해결할 수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 당연하게도 미하일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저 말이 맞기는 해.’ 권력 구도에서 밀려날까 말하지 않았다는 것보다는 다른 추측이 더 설득력 있다. 대륙에 내놓으라고 하는 행정가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사람이었다. 작은 문제가 생겼다고 한들,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황스러운 상황이라는 거다. 실제로 시위가 일어나 개판을 치는 종류의 사건이 터졌다면 당연히 보고하는 게 맞겠지만 이제 막 문제가 생긴 시점이 아닌가. 모양새가 조금 우스워져 괜히 말을 꺼낸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될 정도. 부하 직원을 믿지 못해 하나부터 열까지 보고하고, 또 보고하라는 상사와 다를 바 없이 비칠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얼굴이 붉어진다. 내 사람이 아니지만, 이쪽이 픽한 사람이기도 했고… 믿고 맡긴 만큼 그만큼의 신뢰도 보여줬어야 했다. ‘고작 파업이니까.’ 물론 가능성을 완전히 떠나보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차례 정도는 물러서도 상관없는 상황처럼 비쳤다. 어차피 일이 어찌 됐건 간에 결과는 이지혜가 들고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 자리에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봤자, 그림만 더 이상해질 것이다. 미하일이 원인이 아니라면 더욱더. ‘지혜 누나가 싫어하겠는데.’ 정말로 노동자들에게 문제가 있는 거라면 오히려 미하일을 보듬어주는 게 옳다. 괜스레 한차례 얼굴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의 얼굴,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과 흔들림 없는 올곧은 눈, 다소 딱딱한 것처럼 보이는 것 같은 외관, 누가 봐도 지식인 같아 보이는 외관은 괜스레 신뢰감이 느껴진다. ‘그래, 여기까지만 하자.’ 보고에 누락된 내용에 대해서는 이후에 시간이 날 때 언질을 주는 것이 나으리라. “아무래도 제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군요.” “…….” “순서가 바뀐 것 같지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식사라도 하시고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바쁘신데 붙잡아 두는 건 아닌지 죄송합니다만… 제가 꼭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일은? 이제 1년이 지났는데, 조금은 적응이 되셨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아직 적응하는 중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조금 민망합니다만, 확실히 쉽지만은 않더군요. 아무래도 일반적인 도시의 형태를 띠지 않다 보니 여러 가지로 당황스러운 상황에 많이 마주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훌륭히 이끌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음, 혼자서 해결할 수 있다고 하시니 자세하게는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사람들을 다루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두가 같은 목표를 가지고 달리는 와중에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미하일 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현장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부분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네? 어떤….”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그렇… 군요.” “본래 인간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인간은 다수에 포함되어 있고 싶어 해요. 자신이 비주류라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경우도 다르지 않은 것 같더군요. 다수에 포함되어 있어야 인간은 안정감을 느낍니다. 특히나 자신이 직접 직면한 문제나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더욱더요. 이를테면 지금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 소수에 포함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겁니다.” “…….” “저는 그게 인간의 습성이라고 봅니다. 만약 내부적인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제 말을 참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마음속에 새겨듣겠습니다.” “뭐, 알아서 잘 해주실 테니… 참고만 해주셔도 됩니다. 자꾸만 말씀드리는 것 같아서 저도 민망합니다만, 절대로 미하일 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 않으면 조금…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라. 고쳐야지, 고쳐야지 하는데 제대로 고쳐지지 않더군요.” “…….”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일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도 좀 하면서 말입니다.” “예.” 그렇게 자리에 앉은 이후에는 곧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만약 혼자였다면 금방 끝날 식사였겠지만, 내가 녀석을 대접하고 싶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식사였던 만큼 조금은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는 오해를 했다는 거에 대한 사과이기도 했지만, 아마 녀석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테니까. “아내분은 잘 지내십니까?”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혹여나 이곳 생활에 불편함을 겪지는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잘 지내고 계신 모양이군요.” “…….” ‘얘는 왜 호응을 안 해?’ 뭔가 살짝 불편한 얼굴, 최근에 가정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킹리적 갓심이 들기는 한다. 싫은 주제를 계속해서 언급하는 것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 나갔지만, 생각보다 그 내용이 금방 소진된다는 게 문제. 확실히 머리에 든 게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 매사에 진지하고 재미가 없다. 무슨 농담을 해도 피식 웃는 걸로 끝이고….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이야.’ 하지만 탐이 나는 타입이기도 하다. “합동 훈련소에 있는 인원들은 언제 여기로 들어오는 겁니까?” “아마 한 달 뒤 정도면 병력이 배치되기 시작할 겁니다.” “그렇군요….” “미친놈처럼 보이실 거라는 거 압니다. 갑자기 대륙의 북쪽으로 가 막대한 자금을 들여 전진기지를 만든다는 게 정상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지 않습니까. 분명히 뭔가 다른 뜻이 있겠거니 생각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위원장님.” “하하, 괜찮습니다. 베니고어 님의 예언이라고는 하나, 아직 대륙에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은 이야기일 테니까요. 미하일 님께서도 그렇게 느끼실 거라는 거 압니다.” “아니요, 저는….” “굳이 부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말로는 이해해도 마음속 한구석으로는 의구심이 남아 있을 겁니다. 제가 미하일 님이었어도 같은 걸 느꼈을 거예요. 지금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노동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직은 먼 곳에 있을 위협일 테니… 대부분이 그럴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은 걸 적으로 삼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 “위협은 실존합니다. 제 목을 걸고 말씀드리건대… 이건 진실입니다.” “…….” “지금 하고 있는 행동들은 전부 헛짓거리가 아니게 될 겁니다. 그러니 조금 더 힘내주세요. 정말로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단언컨대 좋은 대우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이것저것 별별 이야기를 다 했지만, 아직까지 뭔가 어색함이 남아 있는 상황. 기왕 여기까지 부른 만큼 뭔가 같이 할 수 있는 일과 대화할 거리를 찾으려고 했지만, 확실히 어색하기는 하다. 아무 계획 없이 너무 막무가내로 부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밥 먹었으니까, 이제 그만 가’라고 내치기도 애매한 상황… 식사도 끝나고 대화도 끝났건만 시간은 별로 지나지 않고 있었다. 미하일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왠지 모를 숨 막히는 어색함. 녀석도 이 어색함이 싫은 모양인지. 천천히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괜찮으시다면 체스라도 두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떻습니까.” ‘나랑 게임 한 사람은 꼭 그 끝이 별로 좋지 않던데….’ 하지만 괜찮은 제안처럼 느껴지기는 했다. # 571 회귀자 사용설명서 571화 미하일(3) 서로 어색함을 푸는 데에는 간단한 게임만 한 게 없지 않은가. 체스 친구였던 조혜진이 합동 훈련장으로 휘릭 떠나간 이후에는, 집무실에 있는 비싼 체스판이 좀처럼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화도 나눌 수 있고, 적당히 시간을 때울 수도 있으니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겨졌다. 괜스레 대륙의 공적이 되어 떠나가신 그분이 아릿하게나마 떠오르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 어디까지나 친목 다지기의 일환이었고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처럼 필사적일 필요도 없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후 적당한 테이블에 앉아 반대편에 조용히 몸을 앉힌 미하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김현성이 훈련소에 틀어박히고 난 이후에 선물로 보내온 체스판 위에는 드워프들이 직접 세공한 체스말들이 즐비해 있다. 일반적인 말과는 조금 다른 형태이기는 했지만, 게임을 하기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 고풍스럽고 약간의 판타지성이 가미된 저 모습을 보라. 판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가. “선물로 받은 겁니다.” 안 물어봤다는 얼굴. 민망한 마음에 재빠르게 입을 열자 고개를 끄덕여 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저부터 두겠습니다.” “예.” ‘확실히 이게 좋기는 좋아.’ 숨 막힐 것 같은 어색함이 조금은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원래 이 나이대 남자들은 같이 게임 하면서 친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척 신중한 듯한 녀석의 표정. 조혜진과의 특훈으로 조금은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해 초반부터 맹공을 퍼부었지만…. ‘아, 이 새끼 왜 이렇게 세?’ 녀석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게 문제 아닌 문제였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점차 전황이 뒤집히기 시작. 어떻게든 말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봤지만 공격 포인트를 쌓고 있는 것도 판을 이끌어 나가는 것도 저 쪽이다. 뭐라고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딱 정석으로 강하다. 딱 본인 같은 이미지의 경기를 펼친다고 하는 게 맞으리라. 뭔가 멋들어지게 한 수를 두고 싶기는 했지만, 기왕 시작한 게임이니 이기고 싶다. 결국에는 개싸움으로 끌고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본격적으로 폰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판에 변화가 오기는 한다. 어떻게든 공격 포인트를 올리고 막아내야 흐름을 끊어낼 수 있을 테니까. 폰들을 앞으로 내몰아 주요 지점에 있는 말들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폰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먹든 먹지 않든 간에 먹이로 던져보기도 하고 유혹해 보기도 한다. 상대 쪽에서 아무 희생 없이 포인트를 따내는 것을 최대한 지양하는 것이다. “폰을 잘 쓰시는 군요.” ‘꽤 강해졌다고 생각하는데도… 수준 차이가 보이기는 하네.’ 그동안 저명한 인사들을 상대로 많이 싸워서 승점을 따내 자신감이 상승했었는데, 이 새끼들이 접대 게임을 해준 모양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지만 폰은 체스에서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하는 일이 없이 단순히 앞을 지키고 있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초반보다는 경기 후반에 더 활약하는 말일 겁니다. 위원장님은 너무 쉽게 폰을 던지시는 것 같습니다.” “음….” 확실히 미하일은 폰을 함부로 내던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밀집시켜 방벽을 만들어 경기를 고착시키고 있었고, 어떨 때는 주요 말들을 포기하면서까지 밀집된 폰들을 그대로 끌고 가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포인트로 따지면 내가 유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조혜진과의 차이점은 여기서, 딱 이 시점부터라고 할 수 있으리라. 조혜진은 쉽게 흔들린다. 본인이 원하는 진영을 만들기는 했지만, 개싸움으로 끌고 가기 시작하면 당황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입을 열며 도발하기 시작하면 쉽게 흥분하기도 하고…. 그렇게 방벽을 흔들고 왕의 목까지 내려치는 게 나와 그녀의 경기에 정형화된 패턴이었다. 하지만 미하일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무리하지 않고 방패를 들어 계속해서 경기를 지연시키고 자신의 흐름으로 끌고 온다. 무척 상대하기 까다로운 타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따낸 말의 숫자는 비슷하지만, 저 쪽이 구성한 방패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가 후반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왼쪽에 있는 방패가 부담스러워 지기 시작. 천천히 진군하고 있는 군단을 어떻게 막을 방도가 없다. 최대한 비비려고 햇지만 비벼지지 않는 것이 문제. 가짜 체크메이트를 넣어도 폰들은 전진했고, 희생을 감수하며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폰 하나가 끝까지 닿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 경기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승급이었다. “퀸으로 승급하겠습니다.” “네.” 사실상 경기는 여기에서 끝. “체크메이트입니다.” “졌군요.” 아슬아슬한 패배처럼 보였지만, 경기 내용으로만 보면 졸전이다. “잘 두시는군요, 미하일 님.” “그렇지 않습니다.” ‘니가 잘 두는 게 아니면 뭔데?’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항상 이렇게 운이 좋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매 경기 이렇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매 경기 양상이 다를 테고 애초에 폰이 승급하는 그림은 좀처럼 나오기 힘든 장면이었으니까. 하지만 미하일이 강하다는 것 하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이거 부끄럽습니다. 조금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기영 님께서도 충분히 강하십니다. 실제로 게임의 흐름상 제가 밀리는 그림이 많이 나왔으니까요.” “문제점이 뭐라고 느끼셨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사실 문제점이라고 보기에도 힘들 수 있겠습니다만… 네,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게 가장 올바른 표현인 것 같습니다. 위원장님께서는 좋은 거래에 집착하시는 것 같습니다.” “좋은 거래요?” “예, 말들의 우선 순위를 매겨놓고 경기에 임하시는 느낌이라고 하면….” “아.” “물론 그게 옳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거래를 한다는 건 곧 내가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 서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기반을 너무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폰은 기반이고 중심입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내던져도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시는 것처럼 구심점 역할을 해내기도 합니다. 아마 2할 정도만 더 신경을 써주셔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쉽게 경기를 풀어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도움이 되는 말이로군요. 확실히… 네, 뭐가 문제인지 잘 알겠습니다. 결과적으로 경기를 끝낸 건 퀸이기는 했지만, 중반까지는… 네, 아쉽군요. 그럼… 어떻습니까? 한 번 더 하시는 게. 아, 시간이 너무 늦었나요?” “아마 몇 번을 더 하면 그대로 날을 새버릴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위원장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알고 계신 대로 내부적인 문제 때문에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인지라….” ‘아, 이 새끼 이기고 튀네.’ ‘내가 이길 때까지는 여기서 못나가!’라고 졸렬하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다음 날을 생각하면 여기서 판을 접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한 판, 한 판이 굉장히 오래 걸리는 싸움이었기 때문에 녀석의 말대로 몇 번 더 하다 보면 그대로 날을 새버릴 것이다. 나도 업무가 밀린 상황이었고, 미하일 역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테니…. ‘그래, 접자.’ “그 내부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한 번 더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미하일 님.” “예,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식솔분들께 꼭 안부 전해주시고… 이럴 게 아니라 다음에는 아내분도 함께 초대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하하.” “네, 감사히… 응하겠습니다.” “따로 배웅은 드리지 않을 테니 잘 들어가세요. 그리고 이건 선물입니다.” “이런 건….” “제 마음이니 꼭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 “별것 아닙니다. 그저 선물이에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네,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오늘만큼 즐거운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그럼 안녕히….” “아, 그리고 그리폰 기수는 저희 쪽에서 준비해 놨으니 편안하게 가시면 됩니다. 편안하게 말입니다.” “…네.” 너무 부담을 준 건지 살짝은 불안한 얼굴로 문을 나서는 미하일의 모습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몇 가지만 빼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체스가 재미있었지.’ 사람 역시 내가 생각한 이미지 그대로였고….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있어 보였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괜스레 체스판을 만지작거렸을 때였다. ‘간만이네.’ 조혜진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곧바로 전화를 받은 것은 당연지사.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얼굴이 곧바로 시야에 비쳤다. 평소대로 머리를 묶어 내버려 둔 모습, 날카로운 인상에 깔끔한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게도 조금 피곤해 보이기도 했는데 갑작스레 전화를 건 연유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또 김현성에게 전언이라고 온 걸까 하는 생각에 입을 열자 화면 안에서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연락 좀 종종 합시다. 전달 사항 있을 때면 연락하지 말고요.” -바빠서 그렇습니다. 부길드마스터.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현성 씨가 또….” -아뇨, 길드 마스터는 관계없이 그냥 안부 차 전화드린 겁니다. 또… 병력 인솔 건으로 보고드릴 내용도 있고요. 사실 통화할 필요도 없는 간단한 내용이기는 합니다만… 음… 체스 두셨습니까? “오랜만에 손님이 와서요.” -처참하게 깨지셨군요. “내가 졌다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야 부길드마스터 실력을 생각하면 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대충 어떤 흐름으로 패배했는지 대충 눈에 보입니다. 흔들려고 했는데 흔들리지 않았군요. “혜진 씨는 그런 말 할 자격 없죠.” -네? “가장 마지막에 뒀던 체스가 기억 안 나시나 봅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와르르 무너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248승 246패. 전적으로 따지면 단연코 제가…. “뭐 그런 걸 다 기억하고 그러십니까. 최근 전적만 기억하고 있으면 되지. 내리 세 판을 깨지고 그대로 침몰한 게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그 뒤로 하자고 했지만, 꽁지 빠지게 도망친 게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시나 보군요. “수준이 너무 낮은 사람과 하려고 하니 구미가 당길 턱이 있나요. 조금 더 발전하고 오라는 의미에서 쳐 낸 거지 도망친 게 아닙니다. 초보자랑 두기 싫은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푸… 푸흐흣.” -……. “푸흐흐흐흣.” -이… 이이이익…. “푸흐흐하핫. 우쭈쭈, 우리 혜진이 그동안 실력 많이 늘었나?” -그, 그렇게 그만 웃어요. 한 대 치고 싶습니다. “치려면 체스로 쳐야지 폭력을 쓰려고 하면 쓰나. 이러니까 실력이 안 느는 겁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실력이 늘 턱이 있나. -다시 한번 둬요. 그래, 다시 한번 두자. 무슨 사람이 1년 전 일을…. “푸흐하헤하허핳헷.” -이번 인솔 때 같이 갈 겁니다. 두고 봅시다. “응, 초보자랑 안 둬요.” -이, 씨… 새끼… 너 이 새끼 진짜 죽었어…. “뭐라고요?” -두고 봐, 진짜… 두고 보자고 찍 소리도 못하게 밟아줄 테니까. “네, 다음 초보자.” -뚝 기왕이면 이 패배의 아픔을 조혜진을 통해 잊고 싶었건만, 자신의 멘탈을 위해 곧바로 전화를 끊은 모양. 하지만 이미 흥분한 상태니 손쉽게 요리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겨졌다. ‘그나저나 보고할 거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마 그건 이지혜를 통해서 오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572 회귀자 사용설명서 572화 미하일(4)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도대체 나를 이곳까지 부른 목적이 뭐지.’ 안 좋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악마 같은 자, 아니, 악마의 화신이라는 표현도 부족하지 않은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눈, 전부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 그리고 의미심장한 대사들. 다시 한번 방금 있었던 일들을 곱씹어 보자 자연스럽게 몸이 떨려왔다. 결사단이라고 불리는 이들 덕분에 그자가 어떤 심성을 가지고 있는지, 대륙에 어떤 일들을 일으켜 왔는지는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결사단과 만나기 전부터 진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들이 내게 접촉해 올 리 없었을 테니까. 현재 대륙에서 악마소환사라고 불리는 그자와 작은 인연을 맺었었지만, 겨우 그것만으로 그들이 움직였을 리가 없다. 결사단이 목숨을 걸었던 만큼 나 역시 목숨을 걸었다. 이번 일에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 생각했고, 그자에게 대항하면 곧 처참한 말로만이 기다릴 뿐이라는 사실 역시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후우….” 모든 게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식솔분들께 꼭 안부 전해주시고… 이럴 게 아니라 다음에는 아내분도 함께 초대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하하.’ 협박이었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연코 협박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저는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요. 만약 제가 당신의 능력을 의심했다면 그 중요한 자리에 당신을 앉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 자리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해주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하일 님께 맡긴 거예요.’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는 표현도 너무나도 의미심장하다. 결사단은 파란 길드가 떨어진 이후에는 꼬리를 밟힌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 대륙에 그들의 영향력이 전부 뻗치고 있다는 걸 떠올려보면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니야, 아직 결사단의 존재가 드러났을 리가 없어.’ 그들만큼 자신도 현재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지만, 그런 종류의 정황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이유로 그런 말들을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약 이기영 위원장이 결사단과 그들의 목적을 모르고 있다면 저 의미심장한 대사들은 온전히 자신을 향해 쏟아진 악의일지도 모른다. 현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경고였고, 지금의 상황을 빠르게 처리하라는 위협이었다. 기회를 한 번 더 준다는 것 아닐까.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아니, 애초에…. ‘기회를 주기는 한 건가?’ 그에게 대항하다 점차 사라져 간 이들을 생각하면 어쩌면 자신에게도 그런 말로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돌려보낸 것 역시 기만이며, 자신만의 즐거움을 위한 작은 의식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손으로 죽이게 될 이를 한 번 더 보고 싶어진 것이 분명하리라.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이기영 위원장이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보면 전부 알 수 있었으니까. 전 파란 길드의 중역들, 교국의 황제와 황녀, 악마숭배자라고 불리는 교국의 검사와 공화국의 군사, 라이오스에서 일어났던 악마소환 사태와 공화국의 언데드들, 27군단 소환 사태, 그 외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죽음. 양보하지 않는 것은 물론, 자신의 적에게는 절대로 자비를 내리지 않는다. ‘목숨을 잃는 게 두려운 게 아니야.’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절대로 죽는 것이 두려운 건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내 아내는?’ 자신만 믿고 따라와 준 사랑스러운 아내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 따위는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지금 자신이 가려고 길이 정말로 옳은 길인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 넓지 않은 집무실에 앉아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린 것도 벌써 수 시간째. 머리를 부여잡아 봤지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신념을 저버리는 것이 맞는 건지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결사단을 저버린다면….’ 운이 좋으면 다시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 역시 옳은 선택일까. 대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행동하는 이들을 배신하는 것 행동을 어떻게 합리화할 수 있단 말인가. “신이시여… 신이시여….” 라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을 때였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것. 순간 암살자에 대한 가능성을 떠올려 서랍 속에 든 단검을 집어 들었지만, 시야에 비친 것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여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랑스러운 아내, 나탈리.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오래 계신 것 같아서….” “…….” “일에 방해가 될 거라는 건 알지만, 걱정이 돼서 찾아와 봤어요. 괜찮으신 건가요? 오늘 이기영 위원장님을 뵙고 오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아니야,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니까.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돼. 오늘 이야기한 문제를 처리하느라… 그래서… 걱정 많았지? 먼저 들어가 있어. 곧 들어갈게….” “하지만… 요즘….” “정말이야, 여보. 별일 아니니까. 정말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런 얼굴이 아니세요. 최근에 너무 무리하고 계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정말로 말씀해 주시지 않을 건가요?” “…….” “정말로….” “…….” “후우, 아무래도 휴식이 필요한 것 같아요, 당신.” “아니야, 이건….” “긴장도 풀 겸… 와인이나 한잔하는 게 어떠신가요? 예전처럼….” “지금은 그럴 기분이….” “마침 이기영 위원장님께서 보내오신 선물 중에 특별한 와인이 있더라고요.” “그건… 건드리지 마, 나탈리. 건드리지….” “왠지 이러고 계실 것 같아서 제가 직접….” “제길!” 툭. 쨍그랑!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제기랄! 혹시나 마신 건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줘. 제발… 신이시여. 신이시여. 제길, 거기에 놔두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제길, 제길, 신이시여….” “…….” “빨리 뭐라고 대답 좀 해… 정말로 마시진 않은 거지?” “역시….” “뭐?” “제가… 제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뭐… 지금….” “저는 바보가 아니에요. 당신이 뭘 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지 또 어째서 망설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항상 같이 있을 수는 없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니까….” “…….”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 “신념을 굽히지 않고 항상 올곧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당신을 사랑해요.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계신 건지, 무엇이 당신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건지 잘 알고 있어요. 그 이유가 제가 생각한 것과 같다면, 부디 돌아보지 마시고 나아가셨으면 해요.” “…….” “저는 짐이 되기 위해서 당신 곁에 있는 게 아니에요. 함께 걷기 위해서 곁에 있는 거랍니다. 다른 곳으로 저를 보내거나 숨기려고 하지 않으셔도 돼요. 당신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제 안전을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함께 걸으셨으면 해요. 만약 제가 당신과 같은 상황에 있다고 한다면 당신 역시 저를 도우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평생 함께 걷자고 약속했잖아요?” “나탈….” “이만 들어가 볼게요. 제가 한 말은 진심이에요, 여보. 고민하지 마시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향해 나아가세요. 그게 내가 아는 미하일이라는 사람이니까.” 철컥. 물끄러미 고개를 내려 바라본 바닥에는 잔이 깨진 흔적과 함께 와인이 맺히고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어봤지만, 여전히 보이는 것은 없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도 어떤 것이 옳은 행동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후회할지 후회하지 않을지는 모르겠다. 그건 끝에 다다른 이후에나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신념.” 그래, 신념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자. * * * “신념이 밥을 먹여줘? 아니면 뭐 돈을 벌어다 줘. 나는 그런 거에 매달리는 사람들 딱 질색이더라고. 짜증 나네, 진짜.” 괜스레 불평불만을 쏟아내자 이지혜가 툭 하고 말을 던져왔다. 사실 별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다시금 불발이라는 소식이 기분 좋을 리 없다. 그녀도 왠지 모르게 예상했다는 얼굴을 하는 걸 보니 결과는 큰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김현성도 그런 스타일 아닌가?” “현성이 빼고. 그리고 걔는 은근슬쩍 타협할 줄도 알아, 타협장인이라고. 그래서… 누나 말은 결국 그 늙은 영감들이 고집부리고 있다 이거네? 하여튼 드워프 영감들 고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아니, 무슨 마법의 도움을 안 받는다고 난리야? 시간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는데.” “퀄리티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계속 저희 뜻을 밀어붙이기도 조금 그래요. 애초에 마력석이라서… 드워프 영감님들의 주장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제대로 시간 안에는 맞출 수 있다고도 하니…….” “아….” “드워프 건설 역사상 마법으로 건물을 올린 적이 없다고 하는데 어쩌겠어요? 그럴 바에는 엘프들과 함께 작업해 달라고 하네요. 이건 저희 쪽에서 살짝 양보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속도만 맞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그리고 실제로 작업도 빠르고… 무엇보다 장인 정신을 가지고 임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어서요. 저도 더 이상 그쪽 영감님들 상대하기 지쳐요. 오빠가 한번 가봐요.” “나는 드워프들하고는 안 맞아.” “그쪽에서는 오빠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럼 할 수 없죠, 뭐.” “그건 일단 나중에 생각해 보자. 나중에 덕구라도 한번 보내봐야지.” “아, 왠지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이기는 하네요. 아무튼, 다음 보고 들으셔야죠, 이제 메인인데.” ‘그래, 이게 메인이지.’ “오빠는 조금 어땠어요?”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괜찮았다고 대답하고 싶다. 생각보다 크게 켕기는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부적인 문제는 본인이 해결한다고 호언장담했고, 선물도 받고 서로 하하 호호 웃으며 이야기를 잘 마무리 지었다. ‘체스도 뒀으니까.’ 이전보다는 훨씬 더 가까워졌다고 하는 게 옳다. 나중에 한번 보자고 했으니 아마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뭐,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는데… 내 의견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좀 어땠어?” “글쎄요?” “응?” “딱히 뭔가가 발견되지는 않았어요.” “왠지 그럴 것 같기는 했는데….” “근데 한 번 더 찾아보려고요.” “……?” “털어서 먼지가 안 나오니까 조금 이상하더라고요. 분명히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니까 조금 답답해서요. 정확하게 콕 찝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쪽 현장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예요. 실제로… 파업까지는 아니지만, 태업이 진행 중이기도 했고….” “응.” “노동자 대우 자체가 다른 지역이랑 차이가 있더라고요.” “…….” “한 가지만 확실하게 말할게요. 미하일 그 사람한테 문제가 있기는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은 확실해요.” “…….” ‘사랑했다, 미하일. 시바….’ 잠깐이나마 우정을 나눴던 체스판이 괜스레 눈에 밟혀왔다. 그리고 우리가 나눴던 따뜻하고 깊이 있던 대화들도. ‘이 개새끼.’ “뒤져보면 분명히 구린 구석이 나올 거예요. 아니, 저희보다 그쪽 내부에서 먼저 터져 나올걸요.” # 573 회귀자 사용설명서 573화 시위(1) “내부에서?”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렇게까지 커다란 문제가 될까 싶지만, 노동자들이 받아야 할 복지를 받지 못하고 있거든요. 태업은 점점 더 심해질 거고, 어쩌면 극적인 시위로 치달을 수도 있겠네요.” “아직 조금 더 찾아봐야 한다고 한 거 아니었어? 그렇게 확정 지을 수 있는 단계에 있는 게 맞아?” “네, 확정 지을 수 있어요. 어찌 됐건 관리를 개판으로 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정황상 미하일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도 확정된 사안이거든요. 문제는 증거예요.” “증거….” “정황은 있는데, 증거는 없다는 거죠.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먹어야 할 파이가 갑자기 사라졌다면 어딘가로 파이가 빠져나갔다는 증거들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다는 거예요. 누가 그 파이를 꿀꺽했는지는 너무 뻔한데… 나타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돼요? 너무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어 있어서 저도 놓칠 뻔했다니까요.” “누나가 그렇게 느꼈다면 확실히 능력은 있다는 거네.” “다른 건 몰라도 비자금 숨기는 능력만은 기가 막힌다고 봐야죠. 자금 흐름을 최대한 추적하고 있는데… 세탁을 얼마나 잘했는지 제대로 잡히지도 않네요. 이 정도면 세탁소 차려도 되겠다, 싶더라고요.” “욕심이 많은 사람처럼은 안 보였었는데, 의외야.” 고유 기벽과 성향 자체가 완벽하게 정상적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당황스러웠다. 상태창에 나오는 성향을 신봉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도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상황만 만들어지면 인간은 언제든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아마 녀석에게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마련된 거겠지, 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나… 급하게 돈이 필요한 상황이 닥쳤을 수도 있다. ‘능력이 좋다고 해야 되는 건지, 멍청하다고 해야 되는 건지.’ 조금씩 빼돌렸다면 티도 나지 않고 좋지 않은가. 그 커다란 현장에 직접적인 타격이 올 만한 자금을 빼돌린 주제에 증거까지 완벽하게 은폐했단다. 시간이 짧기야 했지만, 지혜 누나가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거의 허점이 없다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람 하나는 잘 봤네.’ 그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아본 셈이었으니 한편으로는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그 능력을 쓸데없는 곳에 사용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내가 신경을 너무 안 썼나 보네. 쥐새끼들은 전부 다 처리한 줄 알았는데.” “오빠가 뭐 신도 아니고 이 넓은 대륙을 어떻게 다 관리해요? 이건 오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의 문제라고 봐요. 급하게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를 구성한 것으로 모자라 돈 뿌려가며 급하게 건물 올린 부작용이요. 미하일은 그 허점을 잘 파고든 거고요. 사실 저도 이런 상황이 터질지는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오빠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봐야죠.” “아무리 그래도….”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저희 눈을 벗어났는데 누가 이 일에 대해서 알고 있었겠어요?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네요. 이유도 너무 궁금하고, 그 돈이 어디로 새어나갔는지는 더 궁금해. 지금까지의 이력을 봐도 그런 것들은 찾아볼 수 없어서 더 의외인 것 같다니까요. 물론 아직 제대로 파고든 건 아니지만….” “결과가 나올 것 같기는 해?” “안 나오면 만들어서라도 나오게 해야죠. 최선은 직접 흐름을 파악하는 거지만 차선도 나쁘지는 않다고 봐요. 굳이 머리 아프게 이것저것 잴 필요 없으니까. 달려가서 뚝배기만 깨면 만사 해결이라고요. 물론 이 정도로 치밀한 경우라면 검찰소환이나 대륙 국정 감사에도 대비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요. 뒷말이 안 나오게 하려면 정식으로 처리하는 게 베스트이기는 한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시간을 들여서라도 대응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확 터뜨려 버릴까요?” “일단 조금 더 뒤져봐. 작정하고 쥐 잡듯이 잡으면 뭐 하나 나오겠지. 돈세탁을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새끼가 예전에 활동하던 지역까지 범위를 넓히고… 가족들은 조사해 봤어?” “대충 수박 겉핥기식으로요. 어디 보자…. 자식은 없고. 와이프 이름이 나탈리…. 나탈리랑은 예전부터 한 고향에서 자란 친구 사이였네요. 이 사람들 연애 사정은 별로 궁금하지는 않지만, 와이프가 불임증이라는 게 흥미롭기는 해요. 그런데도 아직 두 번째 부인을 들이지 않은 그 사람도 신기하고요. 이런 사회 환경이라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어디 사는 누구랑은 딴판이네요.” “…….” “이 여자는 그저 그런 여자예요. 뒤에서 내조나 하고 다니면서 집안에서 남편만 기다리는 그런 스타일이요. 전형적인 옛날 스타일 있잖아요? 뭐가 나올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번 뒤져보기는 할게요.” “그렇게 해봐. 보통 윗대가리에 문제가 없을 경우에는 그 주변 사람들이 개판 치는 경우가 더 많거든. 어쩌면 그런 경우일 수도 있어.” “만약 그런 거면 어떻게 하게요?”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굳이 말할 필요 있어? 조금 더 보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은데?” “글쎄요, 확실하게 언제라고 말씀드리기가 조금 그래서요. 최대한 빠르게 캐볼게요.” “아니, 이거는 내가 직접 한번 보는 게 좋을까? 순찰하는 것처럼 한 바퀴 돌고 오는 건 어때?”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을 거예요. 괜히 왔다 갔다 하는 그림보다는 중요할 때 한 번 등판해서 해결해 주는 그림이 더 어울리잖아요? 어차피 갈등은 심화될 가능성이 커요.” “글세, 그쪽에서도 냄새를 맡았다고 생각하면… 이쪽 눈치를 보지 않을까 싶은데… 무엇보다 일이 커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하고….” “으음, 조용히 처리하고 싶다는 뜻이에요?” “현장에 지장을 줄 수 있는 행동은 최대한 지양하고 싶어. 사실 터져도 상관은 없지만….” “차선보다는 최선이라는 뜻이죠? 그렇게 한번 움직여 볼게요. 증거 모으고 기소하는 방향으로….” “응, 그렇게 한번 해봐.” 사실 억지로 터뜨리는 방법도 나쁘지 않은 선택으로 느껴졌다. 대륙에 조금 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었고, 다른 이들에게도 경고 차원의 메시지가 보내질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현시점에서 대규모 파업이니 시위니 하는 그림이 그려지는 건….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는 하나, 현재로서는 그 1보 후퇴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알맞은 시기에 경고가 들어갔으니 미하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이 문제를 수습하려 할 터. 녀석이 현장의 문제를 수습하는 동안 이쪽은 증거를 모으고 녀석을 기소할 준비를 마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는 없을 테니, 그쪽에서도 대응하기 어려워질 거고…. 반대로 이지혜는 움직이기 쉬워질 테니 기소할 증거를 모으기 더 원활해지지 않을까? ‘조금 자존심 상한 것 같기도 하니까….’ 나에게는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시스템의 문제라고 말했지만, 지혜 누나의 성격이 그렇게 웃으면서 넘어갈 성격은 아니지 않은가. 마음먹고 뒤를 캐봤는데도 나오는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제법 자존심이 상한 듯한 표정이었다. “당분간 다른 일은 빼줘요. 여기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 “응, 우리 지혜 하고 싶은 거 다 해.” “뭐예요? 갑자기.” “아니야, 아무것도.” “그럼 지금부터 바로 시동 걸게요. 혼자 처리하고 싶으니까. 구태여 도움 주려고 하지 않으셔도 돼요.” “응, 나도 그쪽만 신경 쓸 수는 없으니까. 이런 거 보면 사람 좀 더 뽑아야겠다 싶어.” “김미영 팀장님 데려오는 건 어때요?” “그 사람은 파란 행정 관리하기도 바빠.” “아깝네요. 훨씬 편해질 텐데.” 그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안 그래도 이곳의 업무를 조금씩 떠맡기고 있다. 이상희와 선희영, 황정연이 고군분투해 주고는 있었지만, 김미영 팀장이 없는 파란 길드의 행정팀은 역시나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내 욕심에 그녀를 이쪽으로 끌어들였다가는 아마 외부적이든 내부적이든 무조건 잡음이 나오지 않을까. 탐이 나기는 했지만,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렇게 이지혜는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가기 시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었지만 확실하게 가슴 한구석에 상처를 받긴 받은 모양인 것 같았다. 입도 안 맞추고 그대로 나가 버리는 것 보니까…. 아마 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얘가 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진다면 출처 정도야 나오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요.” 하루가 지나고. “씨발. 씨발 새끼, 짜증 나 죽겠네. 이 새끼….” 사흘이 지나…. “와, 진짜 어디다 숨긴 거지? 돌았나? 없을 리가 없는데? 분명히 어디서 새고 있는 게 맞는데….” 며칠이 지나도 성과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이지혜의 말로는 발견했다고 생각하면 꼬리를 자르는 식으로 탈출한다고 하니 짜증이 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분명히 보물 지도를 발견해 흥분된 마음으로 파볼 때마다 계속해서 허탕을 치니 멘탈이 남아날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짜증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물론 혼자서 욕을 하는 빈도도 계속해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미하일은 계속해서 현장을 안정시키는 중이다. 이대로 안정권에 들어온다면 이지혜의 움직임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그녀 역시 눈에 불을 켜고 세탁물을 뒤지기 시작했고, 정확히 2주가 지나서야 만족스럽게 웃음 짓는 그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식으로 기소 조치 밟고 소환 작업 가시죠.” “찾았어?” “조금 늦었지만 찾긴 찾았어요.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뒤져보니까. 놓친 부분이 있더라고요. 나탈리예요.” “뭐?” “얌전한 것 같아서 바보로 알고 있었는데… 미하일도 미하일이지만 그 여자도 제법이란 말이야.” “돈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빠져나간 거야?” “자세한 건 문서에 확인하면 다 나와 있어요. 너무 복잡하게 처리해 놔서 일일이 설명하기도 지친다니까요. 나탈리가 연합 쪽 고인물들이랑 인연이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미하일의 지시 아래 움직인 건지 아니면 독자적인 행동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니, 어쩌면 미하일이 장난을 쳐놓은 거일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증거라고 부르기에는 확실한 정황이에요. 지금까지 해 먹은 자금을 전부 환산하니까 양이 꽤 나오겠던데요? 생각보다 담이 큰 성격이었나 봐. 사실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시간을 더 들이고 싶기는 한데… 일단은 소환하시고 구속 수사하시는 게 빠를 것 같네요. 그쯤 되면 자금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뒤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꿀이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뭔데?” “고생한 거에 비해 무난하게 흐름을 따라갔다고 해야 해냐? 혹시나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걱정이에요.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 더 덩치를 키워봐야 저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흠….” “아무튼, 이제 고생은, 끝. 저도 오늘은 쉴게요. 지금 바로 언론 움직여서 기사 내보내고 정식으로…….”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조금은 의아한 표정을 이지혜와 주고받은 것은 당연지사. 정말로 급한 일이 아니면 둘이 있을 때는 출입하지 말라고 못을 박아뒀기 때문이다. 이지혜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문을 두드린 거라면 현재 뭔가 상황이 터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들어와서 보고해요.” “회의하시는 도중에 죄송합니다.” “…….” “저… 5구역에서 파업 시위가 터졌습니다.” ‘뭐야, 그거 안정화되고 있었잖아.’ “현재 5현장의 책임자들은 강제진압의 형태로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있으며….” ‘뭐야, 왜 그렇게 갑자기 일이 터져?’ “노동자와 기술자들 역시 물러서지 않고 맞서고 있는 상태입니다.” ‘아니, 시바, 이게….’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도 잠시. 이윽고 전령이 가지고 온 영상을 본 이후에는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구겨졌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찾을 거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거요! 미하일은 각성하라! 각성하라! 민주 투사, 아니, 이제는 노동 운동의 중심이 돼버린 바쿠더쿠가 시야에 비쳤기 때문이다. ‘이 새끼는 시바 지가 무슨 운동권이야, 뭐야….’ # 574 회귀자 사용설명서 574화 시위(2) ‘이 새끼 무슨….’ 분명히 어디선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오지랖이 넓은 녀석의 성격상 내가 있는 곳으로 조용히 올라오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으니까. ‘시바….’ 하지만 고작해야 동네 이장이 내려주는 심부름 같은 퀘스트를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던 것이 사실. 어느새 메인스트림에 해당되는 큼지막한 곳의 중심이 되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머리에 붉은 띠를 감은 채 군중들을 사로잡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아니, 마법사는 또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다. 민주투사 바쿠더쿠인지 아니면 물리 마법의 바크 세르게이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덥수룩한 수염이 녀석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 터질 듯한 근육으로 덮인 상체는 누가 봐도 고된 일로 만들어진 것만 같은 노동 실전 근육이다. 저 새끼는 300m 떨어진 곳에서 확인해도 5현장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토박이로 보일 것이다. 그 옆에 함께 있는 아르기르모는 또 어떠한가. 녀석 역시 굳은 얼굴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부패한 권력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김예리 쟤는 또 왜 저기에 있어? 아니, 시바. 다들 저기서 왜 정모를 하고 있는 건데? 한 날, 한 시에 저기서 모이자고 약속이라도 했어?’ 매혹의 춤, 예트니코바. 조혜진, 김현성과 함께 합동 훈련소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어느새 노동자들을 아끼는 투쟁의 여신이 되어 있었다. ‘쟤네들은 그냥 못 뭉쳐 다니게 해야 돼. 아주 신났네.’ 하지만 이미 똘똘 뭉쳐 있는 그림이 보인다. 아직 확실치는 않았지만, 태업의 형태를 띠던 게 어째서 갑자기 이런 시위로 전환되었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던 5현장이, 뭉칠 수 있는 구심점을 만나, 들고 일어선 게 분명하리라. 미하일 이 새끼도 얼마나 당황했을까. 지가 살기 위해 어떻게든 이번 일을 수습하려고 했건만, 어처구니없게 일이 커져 버렸으니 지금쯤 불안함에 덜덜 떨고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사태에 기분이 나쁜 것은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하, 이거 시바….’ 기왕이면 조용히 처리하는 게 베스트라고 생각한 그림이 망가져 버렸다. 나는 그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준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했던 이지혜의 표정이 구겨진 것은 당연지사. 물론 그녀가 한 일이 전부 쓸모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일을 해결할 거였다면 굳이 여러 가지 내용을 수집하고 파고들어 기소, 재판, 소환 준비를 하지 않았어도…. ‘별로 상관없었겠지.’ 지난날의 고생이 생각났는지 볼살이 파르르 떨린다. 최대한 조용히 일을 처리하기 위해 뛰어다녔던 이지혜의 지난날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이지혜가 무섭게 느껴진 적은 없었지만, 지금의 이지혜는 조금 무섭다. 소식을 전하려고 찾아온 전령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조용히 집무실을 나가 버렸고. “씨발!! 씨발!!!”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이지혜가 유리컵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보여줘선 안 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했는지, 잠깐 내 눈치를 살피기는 했지만, 이미 전부 목격한 이후다. 안 그래도 평상시 이미지 관리에 신경 쓰던 그녀였다. 지금 모습이 얼마나 의외였는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손이 미끄러졌네요.” “아, 응.” ‘성질이 있기는 있네.’ 깜빡 잊고 있었지만, 확실히 1회 차 가면녀 짬밥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아마 혼자 있었다면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전부 박살 내지 않았을까. “크흠….” “진짜로 손이 미끄러졌을 뿐이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방금 본 건 잊는 게 좋겠네요, 오빠.” “아, 응….”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영상 보고 계세요.” “알겠어.” 자신의 나이가 더 많다는 것조차 숨기려고, 이쪽을 꼬박꼬박 오빠라고 부르는 이지혜였으니, 자신도 모르게 벌인 작은 사건에 당황할 만도 하다. 머리를 식히려고 화장실에 간 건지, 미처 풀지 못한 분을 풀러 간 건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일단 흘러나오는 영상에 집중해야 될 것 같아 시선을 고정시켰다. 대치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현장 경비대원들. 커다란 구호를 외치는 이들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한 얼굴로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요!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정당한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니까! 미하일은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임금 및 복지 지원금이 다른 곳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정황이 있었다니까. 다른 지역에서는 다 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복지들을 어째서 우리 현장에서만 찾아볼 수 없단 말이요! 현장 관리자는 지금 당장 자금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니까! -공개하라! 공개하라! -미하일은 처벌되어야 한다니까! -처벌하라! 처벌하라! -지금 당장 우리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니까! -각성하라! 각성하라! -우리는 노예가 아니요!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시바, 이거 생각보다 센 거 같은데….’ 이미 분위기가 달아올라도 단단히 달아올랐다. 시위 초기라고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단합력 역시 눈에 띈다. 분노한 노동자들이 계속해서 소리치고 있었고 당연히 작업은 중단되어 있다. 어서 빨리 자기 위치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현장 경비대원들도 무척이나 당황한 모습이다. 하지만 태업하던 노동자들이 잠자코 돌아갈 리가 없지 않은가. 저 자리에 서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던 만큼 시위대 역시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금 당장 불법 시위를 해산하고 정해진 위치로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돌아가지 않을 거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시위에 참여하신 노동자 여러분들은 지금 당장 불법 시위를 해산하고 정해진 위치로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의 시위는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반하고 있다고 판단, 강제 해산 조치하겠습니다. ‘무슨 시바…. 새끼야, 이거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긴데…. 위원회 핑계 대지 마라, 이 새끼야.’ -빨리 해산시켜! -절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니까! 우리의 권리는 우리 스스로가 쟁취해야 하는 거요! -지금 당장 해산시켜! 해산시켜! -현장 책임자는 당장 나타나서 내역에 대한 투명한 공개를 해야 한다니까! -여러분이 지금 하고 계신 시위는 신고 되지 않은 불법 시위입니다. 대륙 보호법에 따라 지금부터 불법 시위를 강제 해산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경고합니다. 현 시간부로 일어나고 있는 모임을 불법 시위라고 판단 강제해산 조치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애초에 신고를 막고 있는데, 무슨 불법 시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책임자 불러오라니까! -뭉쳐! 뭉쳐!!! -마법사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 시작해! -절대로 물러서지 맙시다! 우리의 뜻을 보여줍시다! 이 장면을 여기서 또 볼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마법사들이 쏘아낸 물대포가 시위대를 정면으로 강타하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에서 많이 봤던 그 장면. 순식간에 물대포에 휘말리는 시위대의 모습, 경비대는 커다란 마차들로 시위대를 가로막고 있다. 시위대는 물대포에 맞으면서도 커다란 마차를 뒤흔들기 시작했고, 방패를 든 경비대원들이 이게 무슨 난리냐는 듯이 전방을 바라본다. -쏴! 쏴! 이곳에 와서 수많은 공성전을 겪어봤지만, 지금 이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성전도 만만찮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더 박진감이 넘친다. 마냥 구경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면 남 일 바라보듯 바라봤겠지만, 작금의 사태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저딴 식으로 진압하면 어쩌자고.’ 애초에 명분이 저쪽에 있는 만큼 저런 방식의 진압이 달가워 보일 리가 없었다. 혹시나 사망자라도 나오는 순간 헬게이트가 열릴 거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자꾸만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혹은 대륙 보호법을 운운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꼴은 가관이다. 저 멍청한 사태가 나 때문에 일어난 것 같은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물론 시위대는 미하일을 겨냥하고는 있었지만, 간접적으로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물론 저 멍청한 돼지가 이런 것까지 염두에 두고 일을 벌였을 리는 없다. 아마 본인이 보기에도 문제가 있으니, 직접 해결해서 도움을 주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 ‘이거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닌데.’ 이런 식의 행태가 방송된다면 베니고어 넷의 여론도 좋지 않아질 것이다. 주위 노동자들이 영향을 받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고…. “어떻게 할 거예요?” 때마침 다시 돌아온 이지혜가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수습해야지. 뭐, 어쩌겠어. 사실 이런 그림도 크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누나가 조금 짜증 나겠네.” “아니요. 별로… 뭐. 준비한 게 다 물거품이 됐지만, 아예 망친 건 아니니까요. 곧바로 쓸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고, 별로 상관없어요. 제가 뭐, 이런 데 열 내는 사람인가요.” ‘아까 열 냈잖아.’ “오히려 잘됐어요. 이번 기회에 오빠 쪽으로 힘을 더 쏠리게 할 수도 있고… 전면적으로 나서서 수습하는 그림을 보여줄 수도 있으니까요. 작업에 제동이 걸린 게 아쉽지만,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생각해요. 사건 수습하는 즉시 그 연놈들 감방에 처넣고, 노동자들에게 배상해 준 이후에 적당한 관리자 하나 집어넣으면 되겠죠. 다른 현장에 경고도 될 테고… 오랜만에 얼굴마담 할 수 있으니까, 지지율도 올라가겠네. 좋아요. 잘된 것 같네요. 네, 잘된 것 같아.” ‘아직 화난 것 같은데….’ “곧바로 나갈 준비 해요. 피드백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응, 뭐… 그렇게 하자. 잠깐 복장 좀 갖추고….” “네, 일단 즉시 현재 같은 시위 진압 행태를 멈추라고 전달할게요. 그쪽에서 얼마나 내 말을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미하일 사단에서도 냄새 맡지 않았을까요? 곧 위원장님이 행차하실 텐데, 이거를 그냥 두고 봐야 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카운트다운이 몇 시간 안 남았는데 도망치지나 않았으면 좋겠네요.” “도망쳐 봤자 갈 곳이 어디 있겠어?” “병력도 준비할게요. 혹시 모르니까.” “응, 여론 반응은 확인해 봤어?” “좋을 리가 있나요. 아직은 미하일에 대한 부분이 상당한데… 이건 책임을 아예 안 질 수는 없겠는데요. 그래도 쉴드 쳐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괜찮을 것 같아요. 일단 빨리 가죠. 4번이랑 5번에서도 병력 지원 요청해 놓고… 그리폰 타고 열심히 가다 보면 비슷하게 도착할 거예요.” 실제로 먼 거리지만, 그리폰을 타고 가면 금방 닿을 거리이다. 병력 전체가 그리폰을 타고 갈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주요 친위대 정도는 전부 움직일 수 있으니 안전상에도 별문제는 없다. 몸이 달아오른 이지혜 역시 그리폰 위에 안착, 이륙장을 떠난 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난장판이 된 5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위대는 누나가 정리해 줘. 최대한 안정시키고 말 좀 잘해줘.” “그렇게 할게요. 안쪽은 오빠가 정리하게요?” “그렇게 해야지.” 현장 경비대원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리폰 부대를 경계하던 것도 잠시, 깃발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착륙장으로 안내했다. 한참이나 시위를 이어나가던 시위대 측에서도 환호성이 튀어나온다. 현재 일어나는 상황이 정리될 거라고 느끼는 것이다. “우와아아아아아!!!” “위원장님이 오셨다!” “위원장님께서 우리 목소리를 들어주시려고 오셨어!” 조금 오그라들기는 했지만. 당연한 반응이었다. # 575 회귀자 사용설명서 575화 반동분자(1) “죄송, 죄송합니다. 여기까지… 행차하게 하다니….” “굳이 경비대장님께서 죄송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시위대는 저희 쪽에서 수습할 테니 강제진압 명령 멈추세요. 최소 병력만 남기고 나머지 인원들 역시 전부 대기 조치합니다.” “명,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추가로 사제들 곧바로 투입해서 부상자 치료 부탁드리겠습니다. 벽처럼 쌓인 마차들도 치워주시고요. 후우….” “죄송합니다.” “아니요. 계속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경비대장님은 명령만 잘 듣고 매뉴얼대로 처리한 게 전부일 테니, 뭐…. 정말로 죄송할 일이 없는지 있는지는 이후에 확인해 보면 될 테고… 그보다 미하일 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위원장님께서 들어오셨을 때 전갈을 넣었습니다. 아마 곧 나오실 겁니다.” ‘이 개새끼, 진짜.’ 환호성 소리를 뒤로하고,. 청사의 착륙장으로 내려오자 경비대장이 곧바로 이쪽을 반겼다. 무척이나 떠는 모습은 가관, 갑작스럽게 일이 커졌으니 저렇게 떠는 것도 이해는 간다. 불법 시위가 일어났고, 책임자 입장에서 진압을 하기는 해야겠고…. 위에서도 진압 명령이 내려오니 여러 가지로 정신이 없지 않았을까. 나였어도 멘탈이 반쯤 나갔을 게 분명했다. 혹시라도 처벌을 받거나 꾸지람을 받을까 싶어 눈치를 보는 모습은 꽤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모양새. 정말로 이 일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조사해 봐야겠지만,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대 저 자식과 커다란 연결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최근에 이곳에 많은 일이 일어났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시위도 그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고요.” “저, 저는 그런 일은 자세히는…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정말로 그렇길 빌겠습니다. 일단 제가 말씀드린 것 처리하세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위원장님.” 사실 메인은 눈앞에 있는 경비대장이 아니라 배신자 미하일이 아닌가. ‘이 개새끼가 마중도 안 나와?’ 분명히 보고를 받았을 텐데도 나오지 않은 걸 뭐라고 생각해야 될지 모르겠다. 괜스레 먼 곳을 바라보자 시위대가 한 곳에 모여 통제에 따르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아마 높으신 분들의 대화가 시작될 테니 잠자코 기다려 보자는 여론이 형성된 모양이다. 물론 바크 세르게이와 아르기르모, 예트니코바가 내 모습을 봤을 테니 그들의 입김이 들어간 결과겠지.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박덕구 이 새끼를 만나 뒤통수라도 한 대 치고 싶었지만, 시위대의 중심에 있는 녀석에게 친한 척 다가가기도 쉽지가 않았다. 아마 일이 대충 수습되면 먼저 찾아오지 않을까. 그렇게 약 3분 정도를 기다리자 한 인형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젊어 보이는 여성, 본 적은 없었지만 이름이 뭔지는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나탈리….’ “처음 뵙겠습니다, 위원장 님. 그리고…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미하일 님의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뭐, 이것저것 자기소개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 미하일 님은 어디 가시고….” “미하일 님께서는 지금 위원장님을 맞을 준비 중이십니다. 이렇게까지 급하게 찾으실 줄은 몰랐다고….” “…….” “…….” “뭐라고 변명할지 기대되네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굳이 여러 가지 준비할 필요 없을 텐데, 아무튼 들어나 봅시다. 저도 궁금하기도 하니… 이렇게까지 개판이 됐는데 변명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제가 섭섭했을 겁니다. 앞장서세요.”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멈추십시오.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시면 베겠습니다.” 직접 모시겠다는 말에 베겠다고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니다. 곧바로 옆쪽으로 붙는 믿음직한 우리 존재, 쌍검의 박리안. ‘열일 하네… 열일 해.’ 미하일과 나탈리에게는 전투 능력이 없다. 이 청사 안의 다른 이들이 박리안 이상의 전투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목적이 목적인 만큼 최소한의 경호 조치는 필요하다고 여긴 모양이다. 이런 것 필요 없다고 외치고 싶기도 했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이런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전하다고 외친 이후에 뒈질 위기에 처하는 것은 너무나도 흔한 클리셰가 아닌가. 당연히 이쪽은 그런 종류의 클리셰의 희생양이 될 생각은 없다. ‘안전이 최고여….’ 박리안 역시 그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모양. 몇 미터 이상은 붙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 후에야 마음을 놓은 듯한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덕분에 제법 요상한 그림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데는 커다란 지장이 없다. 친위대 중 한 명은 나탈리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고 있는 형국이었는데… 아마…. ‘위협이겠지, 뭐.’ 혹시라도 다른 짓거리를 할 시에는 곧바로 조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닌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나와는 반대로 괜스레 딱딱하게 굳은 나탈리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앞장서셔도 됩니다.” “네, 그, 그럼 편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언제 한번 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뵙게 되는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좋은 일로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지금 알고 계시고, 예상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전부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미하일 님께서? 아니면 당신이? 참… 재미있더군요. 며칠 사이에 여기서 일어난 일들이 당황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요. 제가 분명히 따로 불러 말씀드렸는데도 불구하고 일이 이 지경까지… 오게 한 건지…. 물론 어쩔 수 없는 변수가 있었다고는 하나, 일만 제대로 수습하셨어도 여기까지 오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 “지원 자금을 뒤로 빼돌린 것도 용서할 수 없지만, 그것보다 더 용서가 안 되는 건 당신네들의 무능이에요, 무능.” “그건….” “북부 전체에 퍼져 있는 전진기지들이 털면 먼지 하나 안 나올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털면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다. 중앙에서도 그건 전부 알고 있어요. 어떻게 모든 인간이 깨끗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아무리 관리한다고 한들, 권력을 얻은 이들이 부패하는 걸 전부 막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다만 당신네들은 정도가 너무 심했고, 수습하는 과정도 형편없었어요. 가지고 있는 걸 숨기느라 은폐하는 데 바빴지. 그 힘을 다른 곳에 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쯤 되면 일부러 저를 여기로 부르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했다는 거 아닙니까.” “무언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기영 위원장님.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제가 언제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이야기 정도는 들어주려고 여기까지 온 건데… 박리안 씨.” “네, 부길드마… 아니, 위원장님.” “4구역과 6구역에서 온 병력 동원해서 청사 안에 있는 인원들 전부 제압하라고 전달해 주세요. 너무 소란스러워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제가 지나간 이후에 작업해 주시면 됩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아, 그리고… 두 명 정도 먼저 뽑아서 미하일 님 좀 회의실로 데리고 오세요. 도통 나오실 생각을 하지 않으니 제가 직접 모셔야 할 것 같아서….” “뜻에 따르겠습니다.” “고마워요.” “일일이 표현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위원장님.” ‘뭐라고 하려나… 진짜로 궁금하네.’ 창백하게 굳은 얼굴을 보니 내가 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이래서 사람은 죄를 짓고 살면 안 돼….’ 마음속에 켕기는 게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저런 표정을 짓게 마련이다. 이제야 조금 상황 파악이 됐는지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도 보인다. ‘이 여자도 참 성향이랑 기벽은 좋은데 말이야.’ 어쩌다가 이런 일에 연루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간에 그렇게 계속해서 청사를 나아갔다. 가는 길에 여신의 손거울이 울려 이지혜인지 확인해 봤지만, 조혜진이라는 이름 석 자가 떡하니 박혀 있어서 가볍게 무시했다. 마지막 통화가 도발 아닌 도발로 끝났으니 보나 마나 쓸데없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그렇게 나탈리와 함께 자리한 곳은 커다란 회의실. 무척 긴장한 표정의 미하일이 눈에 띄어왔다.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 우리가 먼저 도착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건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누가 봐도 창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을 보니 괜스레 우리가 함께 나눈 추억들이 떠오른다. ‘시바… 우리 즐거웠잖아.’ 간만에 마음이 맞는 친구가 결국 나를 배신하고 말았다는 생각이 갑자기 훅하고 치고 올라온다. “오랜만입니다, 위원장님.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중앙 정부에 너무 오랫동안 틀어박혀 있었던 모양입니다. 거참…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미하일 님. 신뢰의 대가가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니 속이 쓰립니다, 속이 쓰려.” “저… 잠, 잠깐 차를 준비하러….” “움직이지 마십시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막지 않으셔도 돼요, 박리안 님. 안 그래도 입이 심심했는데… 잘됐네요.” 불안한 얼굴로 회의실로 빠져나가는 나탈리를 힐끗 바라보자 친위대 중 한 명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불안한 얼굴로 바라보는 미하일의 얼굴 역시 눈에 띈다. 시선을 돌리다 잠깐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조사해 봤습니다. 물론 당신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습니다만, 절차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무척 재미있더군요. 흥미롭기도 했고요. 지원 자금이 연합 쪽으로 계속 새어나가고 있던데… 뭐 빚이라도 지셨는지, 아니면 처해 먹을 수 있을 때 해 먹자는 심정이었는지, 제 알 바 아니지만 속된 말로 X나게 해 드셨더라고요.” “…….” “덕분에 제법 고생했었습니다. 이 정도 자금을 뒤로 빼돌리고, 세탁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역시 시발,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라니까. 부패의 상징인 사람한테 청렴결백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게 말이 되나 몰라.” “…….” “할 말이 없으신 것도 이해는 됩니다. 그래도 준비한 게 있다고 하니 한번 들어나 봅시다. 결과야 달라지지 않겠지만, 어떻게 발버둥 치는지는 보고 싶은데….” “오해이십니다.” “그런 말 말고 뭔가 체계적인 변명 없어요? 없으면 제가 질문 좀 합시다. 그 돈 다 어디로 갔어요?” “…….” “연합 쪽으로 흘러갔다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이상한 점이 많더라고….” “…….” 미하일이 막 뜸을 들이고 있을 때였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려온 것. 찻잔과 다과상을 들고 온 미하일의 와이프가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건네왔다. 친위대 한 명이 계속 붙어 있었기에 무슨 장난을 칠 시간이 있었을까 생각했지만, 습관적으로 마음의 눈을 켜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다. ‘하… 씨바.’ “아,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가네요.” [무색무취의 독이든 차-전설 등급] [일반적은 방법으로는 구별할 수 없는 엘더 아라크네의 독이든 차.] “이 반동분자 새끼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옆쪽 벽면이 터져 나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 576 회귀자 사용설명서 576화 반동분자(2)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옆쪽 벽면이 터져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쪽을 급습하기 위한 암살자. 내가 입을 열자마자 곧바로 들이닥친 것을 보니 이쪽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골 때리네, 이 새끼들 이거….’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튀어나왔다. 완벽하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조금 이상하기는 했어.’ 빠져나간 자금 사용 출처가 정확하지 않았으니까. 일이 터진 뒤에야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잘 맞춰지지 않았던 퍼즐이 완벽하게 짜 맞춰진 느낌. 이지혜가 말한, 조금 더 파보면 뭐가 나올 것 같다는 건 아마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게 아닌가 싶다. 아마 현재 상황을 보면 분을 터뜨리면서도, 이거였다고 말하지 않을까. 성향과 기벽에 반대되는 행동, 조금은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미하일의 대사. 애초 시위를 수습할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이 반동분자들이 원하는 그림은 나를 이곳까지 끌어들이는 것이었을 테니까. ‘성공은 했네.’ 아주 오래전부터 기를 모아온 빌드업이이었다. 이지혜가 말한 그대로 우리가 만든 시스템의 허점을 노린 계획. 주변에 신경을 쓸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눈치챌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와서 하는 반성은 의미가 없다. 통수가 얼얼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나는 지금 녀석들이 원하는 식탁에 제 발로 찾아온 손님이었으니까.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기는 하다. ‘미하일, 이 개새끼… 무능한 줄 알았는데 X나 유능한 새끼였네.’ 박덕구가 아니었으면, 여기 올 일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아니야, 차라리 잘됐어.’ 일이 터진 타이밍이 지금이라는 게 상당한 의의가 있지 않은가. 사특한 무리를 지금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건 충분히 메리트가 있는 일이다. 바깥 신 양반이 들어온 이후에 이 반동분자들이 날뛰었다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위협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마침 박, 기, 리 3자매가 밖에서 멀뚱멀뚱 기다리는 상황, 일이 터졌다는 것을 인지하면 곧바로 달려 들어오겠지만, 사실 얘들까지도 필요 없다. “모시겠습니다.” “네, 갑시다.” 폭음이 터짐과 동시에 질 좋은 보호 마법이 내 주변을 뒤덮는다. 곧바로 밀집 대형으로 뭉친 우리 귀여운 친위대는 곧바로 전투 준비를 하며 이후에 덮쳐올 적들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예상한 것처럼 무기를 든 무리가 폭발이 일어난 곳에서 뛰쳐나왔고 친위대와 각자 무기를 부딪쳤다. 사방에서 목소리들이 튀어나와 누가 어떤 말을 하는지도 구분하기 힘들다. “죽여라!” “죽여!” “나탈리 님과 미하일 님의 보호를 우선시해.” “두 분의 안전은 확보했습니다.” ‘그래. 이 연놈들아. 너희 반동분자 새끼들이 숨기고 있는 게 이놈들이었구나.’ 깜짝 선물 하나가 더 튀어나올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익숙한 얼굴을 눈으로 확인하니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와중에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놈들의 얼굴이 눈에 보인다.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너무 냉정한 것 같았지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27군단 납치 사건 이후로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가장 신경 쓴 것이 바로 내 안전이 아니었던가. 쌍검의 박리안을 비롯한 친위대가 괜히 내 주변을 둘둘 싸고 있는 것이 아니다. 평균 연령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한 명, 한 명이 대륙에 나간다면 곧바로 이름을 날릴 수 있을 만한 실력자. 특히나 박리안은 파란 길드에서도 상위권을 노려볼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지녔다. 호랑이들의 사이에 있는데 강아지 새끼 몇 마리가 달려들었다고 눈 하나 깜짝할까. 아직도 내 주변을 덮은 보호 마법이 유지되고 있지 않은가. 그냥 몸을 일으켜서 발걸음을 옮기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친위대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쌍검의 박리안은 거대한 검을 두 개로 나눠 김현성에게 배운 검술을 선보이고 있었고…. 그 외 다른 이들도 각자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강은혜가 좀 눈에 띄네.’ 반동 놈의 새끼들의 뚝배기가 갈라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는 것은 조금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피 한 방울도 보호막에 닿지 못한다. ‘알고는 있었지만….’ “괜찮네요.” 확실히 직접 체험해 보니 승차감이 다르다. 완벽하게 물 흐르듯이 움직이는 모습은 지난 시간 동안 이들이 얼마만큼의 훈련을 견뎌냈는지를 절로 깨닫게 만들었다. 물론 이쪽 역시 적재적소에 도움을 준 것은 당연지사.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거대한 용의 팔이 솟아올라 녀석들을 짓누르거나 길을 열고 있다. “놓치지 마!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죽여! 대륙의 미래를 위한 싸움이다. 절대로 놓쳐서는 안 돼.” “막아라! 막아!” ‘대륙을 위한 싸움이기는 개뿔… 이 많은 놈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죄송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사전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확실하게는… 최대한 빠르게 길을 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더러운 개자식! 이 대륙의 암 덩어리야! 이곳이 너의 무덤이다. 절대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개소리한다, 또….’ 마음 같아서는 쌍욕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이미지를 챙기는 게 옳다. 이것도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어느 정도 이죽거리는 화풀이는 하도록 하자. 나도 사람이 아닌가. “누가 보면 제가 악인 줄 알겠습니다.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게 누구인지는 뻔히 보이는 데 말입니다. 이상을 위해 싸우는 척, 숭고한 척은 그만하셔도 됩니다. 존경하는 공화국의 잔당 여러분. 옛날에 한 번 베픈 자비와 용서가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지만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지 말라는 표현이 이래서 생긴 모양입니다.” “닥… 닥쳐라! 네 이놈!” “저도 참 마음이 약해서 탈입니다… 그래도 당신들의 그 끈끈한 모습은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네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다시 돌아오셨습니까. 대충 예상은 갑니다만 그의 죽음은 저로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썩은 입으로 군사님을 입에 담지 마라! 더러운 개자식!!” “제가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드린 것은 여러분이 악마소환사에게 세뇌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짜 악이… 진짜 악마가 누군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은 아직 가능성이 있습니다. 진청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네놈이!!!” 대화의 대상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 목소리에 대답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귀로 내리꽂힌다. 별것 아닌 도발에 흥분하는 것을 보면 짧은 대화가 성공한 것 같기는 했지만 그만큼 공세가 거세지는 게 느껴졌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네.’ “군사님을 위하여! 대륙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저 독재자 놈의 목을 쳐라.” “피하셔야 합….” 콰아아아아아아앙!! 박리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귀를 울리는 굉음. ‘하… 이 미친 새끼들.’ 폭발 마법을 건채로 달려들고 있는 자살 특공대. “보호 마법 외워! 부길드마스터의 몸에 상처 하나라도 생겨서는 안 돼!” ‘그 말이 맞다.’ 아픈 게 싫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내 몸에 다른 상처가 나서는 안 된다. ‘큰일 나, 이 새끼들아….’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초조함이 갑작스레 솟아났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주변에 있는 다른 동료들의 안전까지 내팽개치고 마력 폭발을 일으키며 다가올지는 누가 알았겠는가. ‘아, 이거 시바 진짜 위험한 거 아니야?’ 절로 입술을 꽉 깨물게 되고, 괜스레 식은땀이 흘러나온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뒤를 부탁합니다, 결사단의 동지들이여.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뒤를 부탁한다. 나를 기억해 줘!” 계속해서 굉음이 터져 나오는 만큼 우리를 감싸고 있었던 보호 마법에도 대미지가 누적되기 시작한다. 심지어 폭발음과 연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시야를 확보하기가 어려운 상황. 내게는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친위대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아직은 닿지 못할 겁니다. 계속해서 움직여요. 위쪽으로 올라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명대로 하겠습니다. 부길드마스터를 모시고 위쪽으로 간다.” 용 숨결 물약을 던지고 계속해서 연금 소환 마법을 쏟아붓는 와중에도 터지는 굉음. 보호 마법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 보여 용의 팔이나 꼬리를 소환해 친위대들이 있는 쪽까지 가로막는다. 이래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박기리 삼 자매가 이곳으로 도착하는 시간까지는 벌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외부에서 도움을 기다리면 안 돼.’ 안은 이렇게 개판이 되어 있지만, 외부에서는 이곳의 상황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눈치가 있다면 와줄 수도 있겠지만, 원군이 이곳으로 오지 못할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한다. ‘이렇게까지 해야 돼? 이 개새끼들은… 아니, 그보다 왜 병력이 줄어드는 것 같지가 않은 거지?’ 계속해서 꾸역꾸역 밀어붙이고는 있지만, 병력이 줄어드는 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쌍검의 박리안 역시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 연기에 휘말려 한 치 앞밖에 볼 수 없는 장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상급 언데드입니다.” ‘…….’ 확실히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전부 들고 온 것 같다. 이미 죽은 병력까지 사용해 끝까지 목적을 완수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소름이 돋을 정도. 폭음에 휘말려 조각 조각이 난 이들마저 끝까지 기어들어 와 손을 뻗고 있다. 적이지만 칭찬해 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 오죽할까. 아직 숨기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아 더욱더 놀랍다고 느껴진다. ‘이거 하루 이틀 준비한 게 아닌데….’ 이쯤 되면 명분 따위도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쪽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악의가 눈에 보인다. 곧바로 입을 연 것은 당연했다. “더러운 흑마법사 놈들까지… 공화국 쪽의 흑마법사들은 씨를 말렸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특한 무리가 아직도 숨어 있었을 줄이야. 이것이 당신들의 방식인 겁니까? 정녕 당신들까지 악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입니까?” “…….” “꼭 타락한 군사와 같지 않습니까.” “군사님은 악마소환사가 아니다! 이 더러운 놈!” “적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 흥분하지 말고 차근차근 작전대로 진행한다.” “자신의 수하들까지 언데드로 만들어 고기 방패로 내모는 자가 악마소환사가 아니라면 무엇이 악마소환사란 말입니까. 그대들의 모습을 보세요.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길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그 무자비하고 잔인한 사람처럼… 변하시면 안 됩니다. 눈을 뜨세요!” 대사를 치는 와중에도 표정은 최대한 띠껍게. 곧바로 반응이 온다. “그… 그 더러운 입으로 군사님을 입에 담지 마!!!!!!” “평정심을 유지해! 함정이다! 함정!! 도발에 걸려들지… 메이퀸!! 제기랄! 제자리를 지켜! 움직이지 마!” ‘한 놈밖에 안 걸렸나 보네.’ 폭발로 뒤덮인 공간을 뚫고 쇄도하는 녀석이 한 명, 붉어진 눈을 하고 장검을 든 인형 하나가 곧바로 내 쪽으로 달려왔지만, 박리안이 녀석의 앞을 가로막는다. 검을 휘둘러 왔지만 박리안은 왼쪽 검의 손잡이 끝으로 검을 막아낸 이후에 그대로 그녀의 목에 검을 밀어 넣었다. 푸확! 하는 소리와 함께 혈액이 튀어나온다. 전투력이 꽤 높아 보였던 인원 한 명이 여기서 리타이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데….’ 소소한 이득을 봤다고 생각하며 입꼬리를 올렸을 때, 목에 검이 꽂힌 녀석이 스스로 꽂힌 검을 빼내 돌진해 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시발, 저거 뭐야.’ 언데드가 아니다. 붉은 눈과 이질적인 피부, 뭔가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녀의 정확한 상태를 본 후 곧바로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 더러운 악마 계약자 놈들이….’ “기어코 영혼까지 팔아넘기셨군요….” # 577 회귀자 사용설명서 577화 악마 계약자(1) ‘계약한 게 맞아.’ 거의 확실하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답변을 바라고 던진 대사가 아니었지만, 곧바로 대답해 오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력의 방어막을 붙잡으며 이를 가는 녀석의 얼굴이 괜스레 더 무섭게 다가온다. “그래, 네놈을 죽이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넘겼지.” “…….” “우리의 목숨. 그리고 영혼과 자존심까지 모두 다 팔아넘겼다. 네놈 하나는 죽이기 위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분노에 찬 숨소리도. “왜 아직도 빛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걸 모르십니까. 지금 당신들의 행동이 진청 군사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할 거라는 건 알고 계시는 겁니까? 그의 명예를 되찾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군사님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야. 그 더러운 입으로 군사님의 이름을 부르지 마….” “진청 군사는 악마소환사이기도 했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자신의 프라이드를 소중히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군사님의 이름을 그 더러운 입에 담지 마!!” “제가 누구 이름을 부르던 그게 무슨 상관이랍니까.” “이 쓰레기 같은 독재자 놈이!” ‘안 그래도 이후에 뒤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었는데, 이렇게 알아서 판을 깔아주니 너무나도 감사할 지경이네.’ “죽어어어!” 친위대 몇이 입을 여는 녀석의 온몸에 칼을 쑤셔 넣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보호막을 두드리는 모습, 어느 악마랑 어떤 계약을 한 건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메이저 군단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 당연히 벨리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27군단에게서 느껴졌던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죽음까지 초월한 상태의 힘을 내려주는 걸 보면 아마…. ‘더 상위는 아니겠지?’ 어떤 악마와 어떻게 계약했는지는 지금 당장 알 수 없었지만, 사실 얘네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기는 하다. 아무것도 없이 들이박아 봤자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이쪽과 자신들의 전력 차를 메우기 위해서는 무언가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결국에는 저기까지 닿은 것 같았다. 그 선택이 조금 의외이기는 했지만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순간적으로 커다란 힘을 받아들이기에는 저것보다 나은 게 없었으니까. 어차피 청사 건물 내에서 이기영의 죽음을 도모하자는 계획이었을 게 분명하다. 굳이 밖에 있는 대륙인들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알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알게 되든, 아니든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계획이 성공으로 끝나든 실패로 끝나든 간에 이 자식들이 죽는 건 확정된 이야기였으니까. 이후 본인들의 평판이 어떻게 될 거라는 건 신경 쓰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목숨과 영혼까지 걸었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다. 계약에는 대가가 따른다. 심지어 소환에도 마찬가지다. 나야 조금 특수한 경우라고는 하지만 다른 이들까지 그런 종류의 특혜를 받는 것은 아니다. 애초 정하얀의 마력이 아니면 메이저 군단급의 소환이 불가능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소환 의식에서도 뭔가를 희생했을 것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실적 하나는 확실히 채워서 갔겠네.’ 대가로 건 것은 영혼과 목숨, 얻은 것은 일반적으로 죽지 않는 신체와 상위 모험가를 상회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힘. ‘결사단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전부 다 계약한 건 아니고….’ 아마 간부급에 해당하는 놈들과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녀석들만이 저런 종류의 힘을 받았을 것이다. ‘이거 머리 아파지는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은근슬쩍 불안감이 치솟기 시작한다. 강아지 새끼들인 줄 알았던 녀석들이 알고 보니 늑대, 아니, 어쩌면 호랑이일지도 모른다. 지금 가진 전력만으로 이곳을 안전하게 나갈 수 있을지, 나조차도 확신이 서지 않은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박리안과 친위대가 유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로서도 본인들 능력 이상의 일은 해줄 수가 없다. 언제나 무표정이었던 쌍검의 박리안 역시 조금은 불안한 얼굴, 혹시라도 본인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초조함이 그녀의 얼굴에 깃든다. 계속해서 맞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계속해서 친위대와 나를 이끌고 이동하고는 있었지만, 상처가 쌓이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한참 동안 유지될 것 같았던 보호막 역시 자살 폭탄 테러에 그 수명이 다하고 있었고, 우리가 몸을 피한다기보다는 상대방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몰이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느끼고 있기는 합니다만… 딱히 방도가 없어 보이는군요.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저… 부길드마스터.” “네?” “이렇게 된 이상 부길드마스터만이라도….”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건 이곳에서 덫에 걸려 죽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최소한 여기서는 아무도 죽지 않을 겁니다. 위험한 보험이기는 하지만, 보험이 있으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고 전하지도 마세요. 말씀드렸던 대로 최대한 이동하는 시간을 늦춰봅시다. 상처나 체력은 조금 괜찮습니까?” “그렇게 좋은 상황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솔직해서 좋네요.” 곧바로 빛 폭탄 물약을 손 위에 띄우자 화아아아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빛이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폭음이 걷히는 것은 물론, 앞을 가로막았던 언데드들이 곧바로 빛이 되어 사라진다. ‘눈 부시다, 눈이 부셔.’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범위가 넓은 만큼 통로를 따라 끊임없이 뻗어가는 거대한 빛. 잠깐 제동이 걸렸던 친위대들의 상처와 체력이 일순간에 모두 회복되는 것을 보니 확실히 등급이 아깝지 않은 임팩트가 있지 않은가. 악마 계약자 놈들까지 싸그리 쓸어버릴 수 있을 거라는 작은 기대를 해봤지만, 칠흑과도 같은 어둠의 기운이 녀석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저항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영향이 없다. ‘상위 악마가 맞나 보네.’ 온건파가 나를 적대할 리 없을 테니, 아마 급진적인 성향을 가진 놈이 분명하리라. 잠깐 여유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건만,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다른 이들이 그 자리를 메운다. 조금 움츠리게 될 거라는 계산 역시 미스, 빛 폭탄 물약에 사용 제한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애새끼들의 눈빛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을 보니 생각보다 빠르게 물약을 뺏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무 빠르게 쓴 건가.’ 하지만 아끼다 똥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이거 안 좋은데.’ 이 새끼들이 그리고 있는 그림 그대로 판이 만들어지는 듯한 느낌. 간부급에 해당되는 악마 계약자 놈들은 확실히 빛 폭탄을 경계하고 있다. 지금 이곳에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 역시 빛 폭탄 물약을 전부 빼낸 이후에 들어오기 위함일지도 모르고…. 아니, 어떻게 생각해도 목적이 그거라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녀석들이 마지막 무대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물약을 전부 빼놓겠다, 이거네.” “방금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 외부에 연락은 되고 있습니까?” “아니요, 닿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공화국과의 전투에서 악마소환사가 사용했던 방해 전파가 있는 모양이군요.” “네, 정확히 전파가 퍼져나오는 위치를 찾으려고 하고 있지만….” ‘지금 와서 동선을 바꾸는 건 말도 안 되지. 아, 이거 짜증 나는데….’ “…….” “계속 밀어! 최대한 체력을 소진 시켜라! 최대한!” “지원 부대! 지원 부대!” “전방 막아… 전, 아아아아악!” “이 더러운 놈! 쓰레기 같은 놈! 대륙의 암!” “절대로 물러서지 마라. 겁먹지 마라! 군사님을 생각해.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죽어간 군사님을 생각해라.” “결사단은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하지만 결코 혼자 죽지 않을 것이다. 저 독재자와 함께 눈을 감을 것이다. 움직여라!” “악마랑 계약한 반역자 놈들이 못하는 소리가 없네요. 누가 정의고 누가 악인지, 어느 쪽이 빛이고 어느 쪽이 어둠인지… 분간조차 못 하고 있군요. 자각하셔야 합니다. 당신들은 지금 제정신이라고 볼 수 없어요, 악마 계약자 여러분들.” ‘반응이 별로 없네.’ 수뇌부들은 조금 더 냉정해졌다. ‘안 좋은데….’ 다시 한번 꽉 막혀 버린 상황,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다시 한번 빛 폭탄 물약을 사용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까 괜히 썼나. 하….’ 화아아아아아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뻗어 나가는 빛.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지만 다시 한번 빈자리를 메우는 인간과 상급 언데드들이 보인다. 계속해서 몰이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저항할 방도가 없지 않은가. 아직 둠기화라는 패와 빛 폭탄 물약이 한 발 더 남아 있었지만, 수적 열세에다가 분위기를 타고 있는 적 병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밀어붙여라! 조금만 더!” 정신없이 뛰어다니고는 있지만, 이 개자식들이 이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단 이 청사의 구조가 익숙하지 않다는 게 첫 번째 패착. 물량을 견딜 수 없다는 게 두 번째 패착. 몰이당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에는 범의 아가리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녀석들이 원하는 장소에 도착한 시점. ‘시바….’ 누가 봐도 악마랑 계약한 모습인 악마 계약자 놈들이 커다란 동공에서 나를 둘러싸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중2병이라도 걸렸는지 커다란 망토를 입고 있는 모습은 가관, 이 사달을 만든 개자식들이 전부 이 자리에 있다. ‘미하일, 나탈리만 빼고.’ “드디어….” 친위대는 점점 더 내게 가까이 붙기 시작했지만, 딱히 방도를 찾을 수가 없는 모양인지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 이 묘한 대치를 끝내는 것은 저쪽. 곧바로 공격해 올 거라고 예상한 내 생각과는 다르게 이 순간을 즐기고 싶은지 입을 열어왔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더러운 사기꾼 자식.” “방금까지 터져 나왔던 빛을 보지 못했나 봅니다. 사기꾼 자식이라는 말은 조금 가슴 아픈데… 저는 신에게 선택받은 신의 사자입니다. 눈으로 직접 거대한 빛을 마주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사기꾼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은 당신들이지, 제가 아니에요.” “네가 어째서 빛의 힘을 사용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이곳에 있는 전부가 네가 쓰레기 같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악마랑 계약까지 하셨나 봅니다.” “대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그에게 힘을 빌린 건 너를 죽이기 위해서지, 다른 어떠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범죄자와 악인도 원래 그럴듯한 사연 하나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아무리 눈물 빼는 사연이 있어도 범죄자는 결국 범죄자라는 거. 당신들이 믿고 따르는 진청 군사 역시 마찬가지예요. 이유야 어찌 됐건 그는 전범이고, 본인이 저지른 정당한 죗값을 치른 겁니다.” “더러운 사기꾼 자식! 네놈이 정말로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고….” “보이는 게 너무나도 명확하지 않습니까. 빛과 어둠, 정의와 악. 1㎞ 떨어진 곳에서 봐도 당신들은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여요. 눈은 붉어져 있고, 신체는 뒤틀려서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는데, 누가 당신네들을 대륙을 위해 결사한 단원들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지금이라도 회개하세요. 어차피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해도 저는 죽지 않을 테니까.” “웃기지 마라! 네놈의 그 검은 속을 모를 것 같으냐. 진짜 악마는 네놈이다. 그 사이하고 더러운 입으로 민중들을 속이고 기만한 네놈의 그 혓바닥이야말로 진짜 악마야. 빛의 탈을 쓰고는 있지만 네 그 더러운 계획을 우리가 정녕 모를 줄 알았더냐. 다른 대륙인들은 모를 수 있어도, 우리는… 우리만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다. 이 대륙은 네놈의 무대가 아니야. 이 대륙에 살아가는 이들 역시 네놈의 장기말이 아니란 말이다.” “뭘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대륙을 지배하려고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닙니다. 지키기 위해 있는 거라는 걸 왜 몰라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인간 쓰레기 같은 자식. 그 더러운 혓바닥을 더 이상 놀리지 못하게 뽑아버리겠다.” “대륙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악마와 계약한 사특한 무리들이 날뛰는 것을 더 이상 바라볼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아… 위대한 베니고어시여. 부디 제 선택을 용서해 주시길.” ‘선택의 여지가 없겠는네….’ 천천히 전방을 바라보자 이쪽을 둘러싼 이들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입술을 꽉 깨문 채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 자신들의 생각이 맞았다는 듯이 옳은 건 자신들이라는 듯이 느끼고 있는 모습들도 눈에 띈다. “부길드마스터… 그건….” “알고 있습니다. 세 시간.” [준신화 등급의 특성 직업 전환이 발동됩니다.] [빛의 연금술사를 서브 클래스로 전환합니다.] [어둠의 역병군주를 메인 클래스로 전환합니다.]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다. “뼈의 무덤” 주문을 외우자 거대한 뼈의 가시가 사방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 578 회귀자 사용설명서 578화 악마 계약자(2) “피… 피해!” 콰드드다드다다닥! 콰지지지지지지지직! 동공을 꽉 채운 뼈의 가시는 다른 형식이나 패턴이 없이 무작정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여러 굉음이 동공의 벽을 긁어 나가고, 보이는 모든 것들을 꿰뚫기 위해 전방으로 나아간다. 누가 봐도 제법 커다란 스케일이 아닐까. 얼굴을 구긴 악마계약자 놈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피했지만, 한 명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휩쓸렸다. “쿨럭… 쿨럭….” 하는 소리와 함께 계속해서 피를 내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살아 있는 모습에 괜스레 인상을 찌푸린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드럼통 같은 구멍이 팔과 다리는 물론 몸까지 꽤 뚫었는데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지독하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았다. ‘일반적인 역병은 사용이 불가능할 것 같고… 쟤네들을 인간으로 분류할 수 있나?’ 몸이 녹아내리는 종류로 준비하는 게 더 좋을 듯싶어 급하게 주문을 외우자 희미한 유령들이 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설정상 하루에 세 시간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는 둠기화였지만, 전투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니… 현시점에서 사용하는 게 맞다. 물론 페널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직접적으로 죽일 수 있는 건 순도 높은 신성력 정도가 끝인가?’ 빛 폭탄 물약을 무척 경계했던 것이 바로 그 이유,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녀석들을 죽일 수 없다. 분위기로 보건대 목이 달아나도 몸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확실히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어.’ 애매한 상처를 주는 건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인원은 약 40명… 좀 많은 것 같은데….’ 빛 폭탄을 소모시키기 위해 사지로 밀어 넣은 떨거지 들은 제외. 이 동공에 들어오지 못한 떨거지들도 제외. 악마와 계약한 즉시 전력감이라고 판단한 인원이 약 40명? 아니, 50명 정도… 그 50명 모두가 일시적으로 전설 등급의 힘을 손에 넣은 상위 클래스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3명 정도는 그 이상.’ 아마 리더격으로 분류할 수 있으리라. ‘전력은 불리해.’ 남아 있는 빛 폭탄 물약은 한 발, 친위대 역시 대륙에서 상위 클래스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이라고는 하지만, 상대는 죽지 않는 괴물들이다. 전투 경험으로 압도할 수 있다고는 해도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수적 열세. 바깥에 있는 병력, 심지어 자신들의 몸까지 상급 언데드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먼저 체력적 부담을 느끼는 건 이쪽이 될 것이다. ‘여기는 진흙탕이야.’ 어떻게든 포위되고 있는 이 형국을 빠져나가는 게 옳다. 뼈의 무덤으로 잠깐 동안 소강 상태가 된 장내에서 녀석들 역시 나처럼 전력을 분석하던 중, 얼굴 위에 천천히 가면이 덥히는 모습을 보고서는 괜스레 입술을 깨무는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이 더러운 사기꾼 자식!” “닥쳐라! 이 악마의 계약자 놈들. 부길드마스터께서는 스스로 악마와의 계약을 선택한 네놈들과는 다르다!” “저희가 부족해… 죄송합니다. 부길드마스터.” ‘너무 열정적으로 변호해 주는 것 같은데….’ 박리안은 물론 친위대 역시 둠기화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가 가져올 페널티 역시도 알고 있다. 분위기를 살펴보면…. ‘자기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네.’ 현재 내가 직업을 전환한 이유가 본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조금 의아했지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실제로 위기에 몰린 상황이었고, 일반적인 방법으로 시간을 끈다면 친위대 내에서도 사상자가 나올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딱히 노리고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적당한 액션 정도는 취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자동으로 얼굴 위에 덥히는 가면을 살짝 부여잡은 채로 비틀거리자. 이쪽을 걱정하는 듯한 박리안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 부길드마스터!” “괜찮습니다. 잠깐 두통이 생긴 것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만 생각합시다. 다른 것은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이 곳을 빠져나가는 겁니다.”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하지만 저 의욕은 마음에 든다. 눈에 살짝 맺혀 있는 눈물도 말이다.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법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내면에 품고 있는 감수성이 풍부한 것 같았다. 겨우 이 정도로 저런 반응이었다면 제1차 둠기영 사태 때는…, ‘오열이라도 했겠는데….’ 딱 봐도 오열 각이 나온다. 심지어 다른 친위대원들 역시 상당히 동요하고 있는 모습. ‘평소에 이미지 챙기길 잘했네.’ 쓸데없는 말을 하는 녀석도 보인다. 원래 다른 말을 잘 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례적인 일. ‘강은혜?’ 김예리와 같이 대륙에서 태어난 케이스,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부모님을 여의고 친위대로 발탁된 케이스다. 지금의 파란 유소년 프로그램을 있게 한 인재였고 성과. 이를테면 김현성과 나를 부모처럼 생각하고 따르는 아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으리라. 파란 길드가 아니었다면 어디 노예 시장으로 팔려가지 않았을까. 본인 역시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충성심이 대단했고, 그런 마음에 반해 친위대를 축소시키는 과정에서도 제외하지 않은 1인이었다. 그런 그녀 역시 친위대에 들어온 이후에는 말을 아끼는 편. 솔직히 얘가 앞서서 커다란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 본다. “너희들 역시 속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저자의 모습을 똑똑히 봐라. 저 모습이 정말로 너희들이 지키려고 하는 자의 모습이 맞는지 두 눈을 뜨고 똑똑히 보란 말이다.” “그 입 다물어라. 더러운 반동분자 새끼들….” “너희들은 세뇌된 것이다. 길들이기 쉬운 말이라고 생각해 곁에 둔 것에 불과해.” “네놈들이야말로 악마소환사에게 세뇌된 것이다, 반역자 놈들아. 이기영 님은 대륙의 구원자이시며, 새 시대를 이끌어갈 위인이시다. 갈 곳 없는 우리들을 받아주시고 키워주신 은인이시다. 결코 네놈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으실 분이 아니야. 지금도 대륙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고문하고 계신 모습을 봐라. 정녕 이 모습을 보고서도 어떻게 그런 말을 쏟아낼 수 있단 말이냐. 눈을 떠야 할 것은 너희 반동 놈들이야! 이 반동분자 새끼들… 전부 다 죽여 버리겠어. 전부 다 죽여 버리겠다.” “…….” “저희가, 저희가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부길드마스터….” 평균 나이가 어린 만큼 이런 상황에 잘 동요하게 되는 모양. 괜스레 양심이 찔려와 가면을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경고다. 불쌍한 놈들… 지금 당장 무기를 버리고 밖으로 나간다면 네놈들만은 살려주도록 하겠다.” “닥쳐라! 구더기 같은 놈들! 우리는 부길드마스터와 이 곳에서 함께 죽을 것이다.” ‘죽을 마음 없어요. 죽을 마음 진짜 없어.’ “죽여라!! 저 더러운 사기꾼의 목을 가져와! 대륙의 안전과 군사님의 복수를, 우리 결사단의 숙원을 풀 때가 왔다.” “부길드마스터!”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동요할 필요도 없어요. 방진을 탄탄히 유지하며 이 장소를 빠져나가는 것부터 생각하시면 됩니다.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무리하게 밖으로 나가지 마시고 기회가 와도 방진을 계속해서 유지하세요. 적들이 악마와 계약해 저주받은 힘을 얻었다고 한들, 아직 저들은 저 힘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네.” “여러분을 믿습니다.” “…….” “…….” “네.” “위원장님을 지켜!” “적들의 손가락 하나도 닿게 만들지 마라! 우리들의 일이 무엇인지 기억해!” “와라! 악마의 계약자 놈들!” “죽어라! 개자식들!” “보호해! 보호!” “보호막을 부숴! 화력을 퍼부어라! 거추장스러운 뼈들도 전부 부숴 버려!” 콰드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앙! ‘이거 생각보다 빡센데.’ 사방에서 솟구치는 불길한 마력, 뼈와 보호막으로 가로막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 와중에 출동한 역병 유령 하나가 진청의 잔당을 껴안기 시작. “아아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몸이 녹아내리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효과가 꽤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 와중에도 꿋꿋히 화살을 날리고 있는 모습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녀석들도 보이지 않는 유령에 대해서 알아차렸는지 조금 더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다지 달라지는 것은 없다. 거대한 촉수를 소환해 한 녀석을 감싸봤지만, 순식간에 지원이 들어와 촉수가 별다른 힘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 안에 숨겨둔 역병이 놈의 호흡기로 침투했지만…. ‘저것도 리타이어되기 전까지 시간은 좀 걸리겠고… 시바, 확실히 벨리알이 현세에 있을 때랑은 화력 차이가 있네.’ 지난 시간 동안 그 갭을 많이 줄였다고 생각했지만, 아직까지는 부족한 모양이다. 수가 밀리니 친위대 역시 점차 움츠러들기 시작했고, 그 반동으로 나 역시 이들에게 점점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손을 들어 올려 뼈와 촉수로 지원을 보내는 것도 한두 번, 내가 전체적인 방진의 밸런스를 잘 맡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무너지지는 않고 있었지만…. ‘아, 위험한데.’ 정말로 위험해 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는 건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으리라. 보통 영화에 나오는 클리셰처럼 이쯤에서 딱 하고 일 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박기리 삼 자매가 튀어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날리 만무, 저도 모르게 출구 쪽을 바라보자 웬 인형이 튀어나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어?” ‘그리고 그 상상이 현실이 되고 말았….’ 시야에 비치는 것은 창 한 자루를 들고 있는 조혜진.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뭐라 제대로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동작으로 창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은 잠깐 동안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 같지 않은가. 적들한테 둘러싸인 형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을 휘두르며 공간을 확보하고 정확히 찔러 넣는다. 화살이나 검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커다란 막대기 하나로 흘려보내는 모습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뒤에서 창을 휘둘러 오는 적의 공격은 창을 지렛대 삼아 피하고, 순간적으로 위로 쏟아지는 공격은 몸을 비틀어 벗어난다. ‘박기리 얘네는 노동 운동이랑 혁명만 할 줄 알았지….’ 김현성처럼 속도가 빠르다거나 차희라처럼 근력이 강한 것도 아니다. 천재가 되지 못한 범재가 보여줄 수 있는 절정의 기술, 스텟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재능. 그 와중에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저 표정까지 마치 한 편의 무협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발을 한 번 튕긴 이후에는 곧바로 이쪽의 앞에 떨어진다. 이후, 열어온 입에서는 평소와 다른 분위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으신 겁니까?” “혜진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 “제가 먼저 묻지 않았습니까. 부길드마스터.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그래… 걱정해 줘서 고맙다. 혜진아, 진짜 너밖에 없다.’ “후우… 네… 괜, 괜찮습니다.” “별로 괜찮아 보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최대한 빠르게… 빠르게 빠져나가겠습니다. 박리안 씨.” “네, 실장님.” “부길드마스터의 안전만 신경 쓰세요. 길은 제가 열겠습니다.” “네.” 그 와중에 날아들어 온 화살을 한 손으로 잡는 잡기까지. ‘누나, 진짜… 왜 이렇게 멋있어.’ 이 자리에 없는 김현성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심장 쿵쾅거리잖아, 혜진아.’ # 579 회귀자 사용설명서 579화 악마 계약자(3) “따라오세요.” ‘아암요, 그래야죠. 당연히 따라가 드려야죠.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조혜진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했다. 살면서 이렇게 따뜻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바라본 적이 있을까. ‘진짜 말로 다 표현 못 하겠다, 야.’ 뭔가 마음이 통한 것 같은 느낌. 어째서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친우의 위기를 눈치챈 것이 분명하리라. 티격태격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나를 챙기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래저래 혼란스러운 장내에 갑작스레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느낌. ‘이거 감사의 인사라도 건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무리 친하다고 한들,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생각에 말을 잇던 찰나였다. “저기….” 조혜진이 먼저 선수를 쳐온 것. 충분히 내 감정이 전달됐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상당히 의외, 솔직히 한 대 후려치고 싶은 대사였다. “괜찮으신 게 맞습니까? 무척 기분 나쁜 표정을… 혹여나… 두통이 심해지신다면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기분 나쁜 표정이라뇨….” “아니요… 잠깐 악마… 같은… 아니, 죄송합니다. 뭔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소름이 등 뒤를 타고 올라와서… 제 착각일 겁니다. 하지만 이상이 생길 것 같으시면 곧바로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얘는 못하는 말이 없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그 모습부터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한 시간이 있다고는 하나… 그 힘은 틀림없이 부길드마스터의 정신을 갉아먹을 겁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어요. 혜진 씨가 와서 조금 안심이 되기는 하지만, 저는 이곳에 있는 모두와 함께 빠져나가고 싶습니다.” “위원… 위원장님.” “저희는 걱정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위원장님.” “부길드마스터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저희의 안전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을 자신이 있습니다. 저희의 본래 역할을 생각하시고 부디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겨주세요.” “저희가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러니까 너네 목숨 안 던져도 된다고… 얘들 도대체 왜 이래. 너희가 얼마나 중요한 자원인데….’ “…….” “…….” “…….” “후우… 제한 시간은 두 시간 반으로. 약속하는 겁니다. 만약 그래도 그 상태가 유지된다면 제가 직접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네, 오히려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김현성이라면 말도 안 된다며 성화를 내지 않았을까. 쓸모없는 설정까지 만들어 길드원들을 안심시켰지만, 그래도 둠기화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것이 바로 김현성이었으니까. 오히려 원인 제공자였던 정하얀은 은근슬쩍 이 모습을 원하는 것 같았지만,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는 트라우마를 넘어 기벽까지 생성됐을 정도로 이 모습에 민감해졌다. 아니, 애초에 김현성이 있었다면 이런 모습을 유지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조혜진이 강하기는 하다만 어디까지나 인간계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던가. 지금도 계속해서 화력을 퍼붓고 있는 저 반동 놈 쉐끼들은, 김현성의 등장과 함께 사지가 분할되고 땅바닥을 뒹굴게 될 확률이 높다. 객관적으로 말하건대 조혜진 홀로 저 악마 계약자 놈들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둠기영과 함께하겠다고 잠정적으로 합의한 것이 아닐까. 나 혼자였다면 그녀 혼자 구출에 성공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딸린 입이 한둘이 아닌 상황이지 않은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린가.’ 지금 길을 열고 있는 것을 보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명실상부 파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 명실상부 무력 순위 1, 2위, 이미 인간으로 분류하기 힘든 김현성과 정하얀을 제외하고서는 파란에서 가장 강하다 해도 무리가 없는 인물. 대륙을 전부 뒤져봐도 이 정도로 창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없다. 우리 현성이가 괜히 그녀를 불러와 캐스팅한 게 아니다. ‘와, 쟤 진짜 잘 싸운다. 진짜 잘 싸워.’ 항상 간결하게 일을 처리하는 김현성에 비해서 동작이 크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만큼 화려해 보이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마법을 어떻게 흘릴 수 있을까. 아까도 이해가 되지 않은 장면이 많았지만, 지금은 더욱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처음 조혜진에게 화력을 집중했었던 반동분자들 역시 이대로라면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마법을 범위형으로 전환한 지 오래. 한 곳에 힘을 집중하지 못한 방사형 마법은 아군에게 커다란 대미지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커버할 수 있지.’ 이미 인간을 벗어난 놈들을 상대하는 만큼, 집중형은 뼈나 촉수로 막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한 곳에 집중하지 않는 저런 종류의 마법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콰아아아아아앙! 콰드드드드득!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아군 진영 전체를 감싸 안은 뼈의 갑옷은 쉽사리 부서지지 않았다. 빠져나가기 힘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건만, 의외로 무척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그 와중에도 역병 유령들이 스멀스멀 날아다니며 적들에게 대미지를 주고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힘내라, 얘들아. 어이쿠! 그래 잘하고 있다. 잘하고 있어.’ 같이 죽자고 달려들었던 녀석들에게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장기전을 바라보겠다, 이거네.’ 급하게 병력을 운용하여 틈을 보이느니 끝까지 발목을 물어뜯는 것을 선택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급하게 달려들지 마. 이점을 우리 쪽에 있다. 약한 부분부터 공략하면서 최대한 갉아먹는다. 창잡이는 무시해.” “창잡이는 무시하고 후방을 노린다. 전위들은 창잡이를 막아내는 데 집중하고 직접 공격은 자제한다. 최대한 움직임을 제한시키는 것만 생각해! 저주나 디버프 중첩시켜. 묶어놓고 후방을 노린다. 후방을 노려!” ‘그래, 그렇게 더럽게 나올 수밖에 없겠지 뭐.’ “정화 주문으로 혜진 씨에게 쏟아지는 저주만 해제해 주세요. 제가 말씀드린 저주만 해제해 주시면 됩니다. 신성력은 최대한 아끼는 게 좋으니….” “죄, 죄송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아니요. 여러분들이 죄송할 일이 아닙니다.” ‘마음의 눈이 이래서 좋아.’ 조혜진에게 어떤 종류의 저주들이 쏟아지는지 눈에 보인다. ‘이동 속도 감소는 해제. 근력 감소는 조금 더 두고 봐도 될 것 같고… 무력화 저주 저것도 해제. 정신계열도 모조리 해제. 아니, 쟤는 정신력 단단하니까… 신성력을 조금 더 아끼는 게 좋으려나.’ 이런 종류의 수 싸움에서 잘 버틸 수 있게 되니까. ‘후방 향해서 암흑 계열 주문 다수. 이건 내가 막으면 되겠고, 왼쪽으로 치고 들어오는 병력은 박리안이 마크, 구석에서 큰 주문 외우고 있는 놈은 화살이랑 원거리 공격으로 견제, 이것도 내가 할 수 있겠는데.’ 명령에 잘 따르게 훈련된 병력 역시 현재 상황을 잘 풀어나갈 수 있게 해주는 요소 중에 하나. 내 말에 그 어떤 의문도 품지 않고 믿음으로 움직이고 있다. 어째서 저쪽에 원거리 견제를 해야 하는지, 어째서 왼쪽에 더 힘을 줘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 완전히 이쪽에 자신들의 운명을 맡긴 것이다. ‘이게 맞아.’ 어떻게 생각해도 이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지 않은가. 이런 정신없는 상황에서 전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눈이 쏟아내는 정보는 그걸 가능하게 만든다. 보라.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가 올라오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은가. ‘상대 병력 리타이어 13명 정도….’ 약 50명 정도에서 13명이 줄었다. 이쪽은 친위대 한 명도 죽지 않았고 말이다. 저들이 힘에 익숙해지지 않은 까닭이기도 했지만, 전력적으로 우리가 열세라는 걸 고려해 본다면 족히 대승이라고 불러야 함이 옳다. 딱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누가 승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지는 뻔했다. ‘이렇게만 가자, 이렇게만….’ “포기하지 마라! 결사단 동지들아, 절대로 포기하지 마. 우리가 어떤 한을 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 더러운 사기꾼에게 깨닫게 해야 한다.” “움직여! 움직이자! 마법을 시전하다가 죽어도 좋으니 계속해서 퍼부어! 멈추지 마라! 손을 쉬지 마. 계속 움직이면서 압박해!” “제기랄, 어째서… 어째서 닿지 않는 거냐. 어째서… 어째서!” “우리가 여기서 전부 죽더라도 기필코 네놈만은 데려가고 말겠다. 기필코 네놈만은 데려가고 말 것이다.” 여기서 한마디 정도는 박아주자. “대륙의 빛은 꺼지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빛을 꺼트리려고 한들, 절대로 꺼지지 않아요.” “그… 모습으로 잘도 지껄이는… 크억.” ‘촉수 형, 개이득.’ 점점 더 초조해지는지 상대적으로 얇아진 방벽, 조금씩 이성을 잃어가는 악마 계약자들. 적 진영 내부에서도 뭔가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시점이다. 예상대로 아껴왔던 상급 언데드를 투입시키는 게 눈에 보인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나 보네.’ 물론 저건 눈속임. 지금 와서 언데드들을 투입시킨다는 건 시간을 끄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있어서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예상했던 대로 더 이상 전투를 진행할 수 없다고 생각한 계약자들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건… 화력이… 아까랑 다르겠는데.’ 하지만 굳이 정면으로 받아낼 필요는 없다. 폭발 시점까지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충분히 해볼 만한 도박. 리타이어한 13인의 결사단이 의미 없는 폭탄 테러를 준비하는 동안 남은 인원들도 이곳은 빠져나가고 있지 않은가. 필연적으로 생긴 공간을 가리키자 이미 길을 뚫어내고 있는 조혜진이 눈에 보였다. “빠져나갑니다. 지금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네.” “박리안 씨도 지원해서 길을 여세요. 마법사들은 폭발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방어 마법에 집중해 주시고요.” “빠져나가! 지금이야! 위원장님께서 지금이라고 말씀하셨다. 발을 쉬지 마! 달려!” “밀어! 밀어어어!” “크아으아아아악!” ‘븅신들.’ “제기랄! 저거 막아! 저거 당장 막아!” “저희까지 폭발에 휘말릴 겁니다. 이미 늦었….” “제기랄! 빠져나간다! 더러운 사기꾼 무리가 빠져나간다! 지금 당장 막아!!” 후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달려요! 달려! 달립니다! 달려! 혜진 누나 달려! 달려! 누나아아! 달려!” 콰지지지직! 콰아아아아아앙! ‘중첩, 중첩, 중첩.’ 콰드드드득! 퍼어어어엉! 퍼어어어어엉! 달리면서도 계속해서 주문을 외운다. 당연히 이동 속도가 느린 이쪽은 조혜진이 반쯤 업고 뛰는 중. 모양새는 제법 추하지만, 효율은 나온다. 출구 쪽으로 터져 나오는 폭발의 영향을 막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뼈의 방패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박살이 났지만, 새로운 방패가 빈자리를 계속해서 메운다. 폭발 속에서 간발의 차로 빠져나가는 주인공 일행. 이 황당한 클리셰를 담은 헐리웃 영화들을 지금까지 얼마나 비웃었던가. 막상 내가 그 자리에 있으니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폭음과 연기로 뒤덮인 곳을 간신히 빠져나가자, 굉장히 오랜만에 맡는 듯한 바깥 공기 냄새가 코를 찌른다. 미처 주변을 둘러보기도 전에 들려온 목소리는 가관. 이 청사 안에서 마무리를 짓고 싶었던 녀석들의 계획에는 없었던 외침이었겠지만, 저들로서는 최선이기도 한 절규였다. “보… 보… 보라! 이 모습을 봐라! 대륙인들이여! 이것이 바로 네놈들의 빛의 헌신이라고, 베니고어 여신의 재림이라고 말했던 명예 추기경의 진정한 정체다. 그는 악마와 계약해 대륙을 기만하고 있으며, 이에 우리 결사단은 우리가 살아갈 이 땅을 위해, 당신들이 살아갈 삶의 터전을 위해. 진정으로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평등한 사회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 있다.” ‘…….’ “믿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은 절대로 대륙에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며, 어둠이다. 이기영 위원장은 대륙의 독재자이며 모두를 속이는 사기꾼이자, 기만자다. 그래, 그는 기만자다! 두 눈을 들고 똑바로 직시해라. 이 가면을 쓴 모습이 이 자의 진짜 모습이다!” ‘여기 설득력 없는 설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할에 너무 취하신 것 같네. 아저씨 정신 차려요, 진짜. 청사를 빠져나온 순간부터 이 자식들은 악마계약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실 굳이 내가 나서서 변명할 필요도 없다. 직업 전환을 미리 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그래도 나는 우리 사랑하는 대륙인 여러분들을 믿고 있으니까. ‘어느 쪽이 진짜 악인지는 우리 국민 여러분이 판단해 주실 겁니다.’ 꼴에 어두운 기운을 모두 숨긴 결사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모르니 각혈 정도는 해주도록 하자. # 580 회귀자 사용설명서 580화 악마 계약자(4) “쿨럭” “위원장님.” “부길드마스터, 괜찮으신 겁니까?” “네, 괜… 괜찮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주변을 살펴보자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위쪽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들이 시야에 비쳤다. 아래에 있는 군중들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혼란스러워하는 눈치. 어째서 갑작스레 청사에서 폭음이 들려왔는지, 커다란 망토로 몸을 휘감고 있는 결사대는 도대체 무엇인지, 어째서 이기영 위원장의 모습이 저렇게 변해 있는지, 스스로 답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미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청사의 밖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수많은 노동자가 아까까지만 해도 내게 환호를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지금 당장 둠기화를 풀면 모든 게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굳이 급하게 일을 진행시킬 필요는 없다. 어떤 방향으로든 이후에 뒷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만큼, 조금 다른 노선을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지금의 대륙인들이 현재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솔직히 이기영이라는 인물이 어느 정도까지 대륙인들의 가슴 속에 박혀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나저나 안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건 정말로 모르고 있었던 건가.’ 그만큼 청사 내에서 벌어지는 소음과 마력을 완벽하게 차단했다는 이야기가 되니, 미하일 자식이 일 하나는 제대로 처리한 셈이다. 심지어 그 사달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저 청사의 반쪽은 여전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최소 전설 등급, 혹은 그 이상으로 추정되는 13인의 자살 특공대가 만든 거대한 폭발이었다. 일반적인 소재로 지어진 건물이었다면 부지 자체를 날리고도 남았으리라. ‘기뻐해야 되는 건지, 짜증 내야 하는 건지.’ 재빨리 시선을 돌려보니 혁명 삼 남매는 창백하게 얼굴이 질려 있다. 황급하게 뒤쪽으로 빠지는 걸 보니 본인들의 정체를 드러낸 이후에 합류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건 끝났네.’ 현재의 전력으로도 녀석들과 어떻게든 비볐다는 걸 떠올려 보면 상황은 이미 정리된 거나 다름없다. 파란의 1군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합류한 이후에는 전투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 아니, 그 이전에 녀석들은…. ‘완전히 망해 버렸네.’ 최대한 조용하게 일을 도모하고 싶었겠지만, 이미 대륙의 모든 사람이 현재 상황을 보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녀석들은 일의 실패를 가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죽을 때까지 싸워 대륙의 빛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곳곳에서 보인 것만 봐도 그 사실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싸움에서, 내용이 밝혀지지 않을 싸움에서, 쌍팔년도 영웅물의 주인공처럼 모든 것을 떠안고 가라앉아야 할 싸움이… 결국에는 모두가 바라보는 희극이 되어버렸다. 일이 점차 불리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는지 몇몇 이들은 벌써부터 똥 씹을 표정을 한 지 오래. 군사님께서 이해해 주실 거라고 말은 했지만, 저들이 진청을 신경 쓰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저 외침은 그저 발악이라고 생각했다. ‘발악이네요, 발악이에요.’ 절벽 끝에 서 있는 일행들이 제발 자신들을 알아달라고, 제발 우리의 싸움에 정당성이 있음을 알아달라는 절규. 대의가 우리에게 있음을, 우리는 당신네들을 위해 싸우고 있음을 바라봐 달라는 외침. 저렇게까지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것을 보면 감성까지 악마에게 팔아넘기지 않은 모양이다. 이미 모든 걸 버릴 준비를 했다고 다짐했겠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저들이 자신들의 편이 되어주길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다 가지려고 그래. 하나를 선택했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법인데, 안 그래?’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선택받은 소수뿐이라는 걸 왜 모를까. “악마에게 쓰인 독재자 이기영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은 속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만들어진 배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저자의 진짜 목적은 대륙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 것이며… 겨우 그것을 위해 보이지 않는… 알려지지 않는 수많은 피를 만들었습니다.” ‘그래, 어디 마음대로 지껄여 보세요.’ “라이오스의 악몽이라고 불리는 마법과 악마소환에 관련된 자 역시 공화국의 인물이 아닌 이기영 위원장입니다. 당시에 있었던 모든 현장을 은폐한 것도 이기영이며, 그 죄를 공화국의 진청에게 뒤집어씌운 것 또한 이기영입니다.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언데드를 이용해 아군 적군을 가리며 공격하지 않은 악마 또한 그자이며 손바닥만 한 물건으로 대륙 전체를 통제하고자 하는 이도 그자입니다.” ‘더 지껄여 봐.’ “눈을 뜨십시오. 같이 검을 들자고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적어도 거짓과 날조로 만들어진 저 더러운 협잡꾼의 모습을 한 분이라도 너 많은 사람이 자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자는 악마입니다. 진짜 악마는 바로 이기영입니다. 저자야말로 여신이 말하는 대륙의 적이며 대륙의 위협입니다. 우리는 정의를…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백번 외쳐봐라. 그게 먹히나.’ 애초에 노선을 잘못 선택하지 않았는가. 말로만 백번 떠들어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저렇게 설명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일 텐데 뭐…. 할 말은 많았지만, 밸런스가 붕괴되는 것 같아 굳이 다른 말은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대신 한 가지 노선으로 밀고 나가도록 하자. “도망… 쿨럭… 도망치세요! 모두 이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어?” “위험… 위험합니다. 콜록… 위험… 합니다.” “뭐… 무슨 개짓거리를!” “악마와 계약한…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무리입니다. 지금 당장 도망치세요. 어서 이 자리를 피해서… 멀리 달아나세요… 현재 5구역에 있는 모든 인원은 지금 당장… 지금 당장 빠져나가세요!” “너… 너!” “쿨럭! 쿨럭!” “부길드… 부길드마스터. 괜찮으신 겁니까!” “위원장님! 위원장님!” “지금 당장 모습을 바꾸세요. 부길드마스터. 더 이상은 위험할 겁니다. 아무리 봐도… 정상으로 보이지가 않….” “더 이상은 괜찮습니다, 위원장님…. 저희는 괜찮으니 제발 그 저주받은 힘을 거둬주세요.” “부길드마스터… 이제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아니요. 최소한 저분들이 이곳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아직 시간은 조금 더 남아 있습니다.” 그 조혜진마저 불안한 표정으로 만들 정도의 명연기. 적군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한다는 어딘가의 격언은 언제나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이렇게 감성이 살아 움직이는 장면이 더욱더 명장면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지금 당장 위원장님을 보호해! 지금 당장!” 때마침 이지혜의 앙칼진 목소리 마저 들려온다. 상황판단을 못 하고 있었던 경비병들 역시 모조리 창을 들고 이쪽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위원장님! 위원장님!” “제기랄… 빌어먹을 악마 놈들… 기다리십시오, 위원장님. 제가 곧 달려가겠습니다.” “올라오지 마! 올라오지 말고 등을 돌려 현장을 피하세요. 위험합니다. 저들은… 콜록… 이미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일반인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힘을….” “이기영, 이 더러운 사기꾼놈이! 그런 모습을 하고 그따위 말을 내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자격이 있지, 왜 없어요.’ “베니고어 여신님께… 용서를 구해야 되는 일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몸보다는…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 한 분, 한 분이 더 소중합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당신같이… 영혼을 팔아넘긴 이들은 절대로 이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당신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대륙의 악마는 우리가 아니라 저놈이다. 이기영이야말로… 그야말로 진짜 위협이란 말이다!” 목이 터지라 외치고 있지만, 이미 대세가 된 흐름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저주받은 악마의 힘을 온몸으로 견디면서도, 끝까지 시민 집단들과 우리를 분리시키려는 빛은 그 어떤 색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다. 가빠지는 호흡을 계속해서 몰아쉬며, 주기적으로 손을 뻗는 모습은 노벨평화상 수상자들도 이마를 탁 칠 정도로 숭고한 모습. 메소드 연기에 들어갔기 때문인지 눈에서는 자꾸만 왈칵 눈물이 튀어나온다. ‘지켜야 해.’ 지켜야 한다. ‘대륙을 저 악마 계약자들의 손에서 지켜내야 돼.’ 속으로는 이미 나름대로 결심을 한 지 오래였지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허억, 허억.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저들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무리수가 아닐까 생각했었던 대사. 하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와 눈빛은 다르다. 단순히 말로만 지껄일 때보다 가끔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더 임팩트가 있지 않은가.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상처가 난 것만 같은 외관, 그 무엇보다 정신적, 체력적으로 한계를 맞이한 것 같다는 표정,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놀림. 오죽했으면 적 진영에서도 저런 목소리가 튀어나올까.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다, 가브엔. 군중들이 믿든, 믿지 않든 간에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되는 거야.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던 일이다. 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우리는 오늘 우리가 할 일을 완수해야만 해. 그게 군사님이, 그리고 우리를 위해 희생된 동지들이 원하는 바일 거다.” “하지만… 하지만… 단장!” “여기서 우리는 악인이다. 누군가가 이해해 줄 거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도 않았어. 모두 다시 전투 준비한다. 이기영이 지쳐 있다. 당장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상태로 보이니까….” ‘저는 전혀 지치지 않았습니다, 단장님.’ “잘 들어라. 내 형제, 자매, 동지들이여. 적의 말에 동요하지 마라! 군중들의 반응에 동요하지 마라! 우리가 악인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건 예상했던 바가 아닌가. 우리가 역사에 악인으로 기억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지금 당장 환영받지 못한다고 해서 무너질 정도로 우리의 의지는 약하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단장….” “개인적인 복수심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저 신의 탈을 쓴 악마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단 한 사람… 단 한 사람이라도 우리의 희생과 결사를 기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검을 들어 올릴 이유는 충분하다. 대륙을 위해서 싸우자. 결사단 동지들아! 오랫동안 숨겨왔던 우리의 숙원을, 우리의 분노와 우리의 화를, 우리가 믿는 정의를 후회 없이 쏟아내자.” “네, 단장.” “네… 단장님.” “한 명 정도는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단장.” “처음에 제의해 왔을 때는 단장이 미친 사람인 줄 알았지만, 솔직히 지금은 여기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단장.” “어차피 아무 데도 갈 데가 없는 범죄자였던 게 바로 나요. 한번 정의를 위해 싸워보자는 말에 속아 얼떨결에 결사단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악인으로 기억될 팔자인가 봅니다. 하지만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곳에서 함께했던 결사단 동지들을… 절대로…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겁니다.” “그럼 한번 악인이 되어 봅시다, 단장. 우리한테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결국에는 여기가 내 무덤이네요. 남자 잘못 만나서 이게 무슨 꼴이람.” “단장… 저희는 언제나 단장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오늘의 선택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될 겁니다, 단장. 분명히….” ‘너네가 어떻게 천국을 가냐, 이 악마 계약자 새끼들아.’ “모두… 모두… 고맙다.” ‘아… 얘네 진짜 감성팔이 너무 심한데….’ 순간적으로 나도 속을 뻔하지 않았던가.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는 정의의 용사들처럼 기를 모으고 있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보기 거북하다. 정의가 정말로 자신들에게 있을 거라고 믿는 것 역시 꼴 보기 싫다. 하지만 점점 본색을 드러내는 악마 계약자 무리의 모습에는 고개를 끄덕이기에 충분. 여기저기에서 경악에 찬 비명과 함께 군중들의 뜨거운 응원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위원장님을 지켜! 대륙의 희망을 절대로 놓아서는 안 돼!” “대륙의 빛을 지켜라!” “위원장님! 이겨내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원기옥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모두의 힘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을까. 이미 한계에 다다른 비틀거리는 몸. 하지만 군중들의 응원은 나를 자리에서 기어코 일어나게 만든다. 대륙의 빛은 어떤 상황에서도 꺼지는 법이 없으니까. # 581 회귀자 사용설명서 581화 숭고한 희생(1) ‘너만은 살아남아라. 라파엘.’ 단장…. ‘너를 무시하는 게 아니야. 절대로 너를 탓하는 것도 아니다, 라파엘. 엄밀히 말하면 너 때문이라기보다는 내 개인적인 생각 때문이다. 나는… 나는 무서워. 나는 무섭다, 라파엘.’ 단장님. ‘우리의 진짜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어질까… 그게 무섭다. 그저 악마에게 영혼을 판 더러운 계약자들이라고 생각할까… 그게 무섭다. 단 한 사람, 단 한 명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까… 그게 너무 두려워. 그렇기에 네가 살았으면 한다. 너라도 살아남아 우리의 마지막을 지켜봐 줬으면 해. 힘든 일이겠지만, 네가 그 역할을 맡아줬으면 한다.’ 그렇지 않아요, 단장님. 그런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모두는 아니겠지만, 분명 어딘가 에서는 분명히 저희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이 일을 기억하고 기리는 이들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결사단원들의 숭고한 뜻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분명 나타날 거예요. ‘아니, 우리는 악으로 기억될 거다. 일이 성공, 실패 여부와는 상관없이 세상은 우리를 악으로 치부하며 저주할 거야. 그건 절대로 변하지 않는 일이야. 하지만 라파엘, 단 한 사람이라도 좋다. 단 한 사람이라도 우리를 기억해 준다면… 그래, 이 의미 없는 위안이 분명 결사단원들에게 커다란 의미가 되어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네가 우리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봐 줬으면 좋겠다. 끝까지 눈에 담고, 가슴 속에 담아 우리 이야기를 전해줬으면 좋겠어. 시작은 단순히 복수심으로 벌인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우리가 살아갈 터전을 위해서 싸운 이들이 있었다는 걸, 대륙의 정의를 위해서 싸운 이들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기록해 줬으면 좋겠구나. 부탁한다.’ 저도 같이 싸울 거예요, 단장님. 많은 동지의 죽음을… 단장님의 죽음을… 그저 지켜만 볼 수는 없어요. ‘마지막 부탁이다. 내 마지막 부탁이야.’ “…….” “단장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조용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 숭고한 이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출발점은 서로 다르고 시작도 좋지는 않았지만, 결국에는 옳은 목표를 향해 나아갔던 저 결사단의 모습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 그 어떠한 표현도 저들의 모습을 대변할 수 없으리라. 그 어떤 미사여구도 저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지 못하리라. 무기력하게 상황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이 저주스러울 지경. 손은 떨려오고 식은땀이 흘러나온다. 감정이 흔들려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저도 모르게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폭발이 터질 때마다 절로 고개를 돌리고 싶다. 끝까지 저 격전을 바라볼 자신이 없다. 하지만…. 눈을 똑바로 뜨고 모두의 마지막을 바라보자. 그게 결사단원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임무였으니까. “물러서지 마! 물러서지 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손을 뻗는다면 분명히 닿을 수 있다. 지난날을 생각해라. 몸을 움직여!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지 생각하자.” ‘나도 저곳에 있었어야 했어요….’ 다혈질의 성격이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건 전사 가브엔. 뒤늦게 합류했지만 결사단의 마법사로서 항상 중심이 되어 주었던 루시엘라. 빵을 훔쳐 범죄자로 낙인이 찍히기는 했지만, 사실은 힘든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공화국의 장발잔. 묵묵히 뒤에서 우리들을 서포트했었던 사제 시르비올라. 모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저들의 육체는 이미 옛날 옛적에 붕괴하기 시작했다. 몸으로 낼 수 있는 출력 따위는 한참 전에 넘어섰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모두 말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괴로울 것이다. 다리를 움직이는 게, 검을 휘두르는 게, 수인을 맺는 게, 심지어 커다란 목소리를 외치는 것까지 고통스러울 것이다. 대충 보기에도 눈에 보인다. 한껏 찡그린 표정으로 지옥불 같이 타는 감각을 느끼면서도,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게 시야에 비친다.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악마와 계약한 이들이라며 욕할 수 있을까.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절대 악에 대항하려는 저들의 모습을 감히 누가 더럽다고 꾸짖을 수 있을까. 아마 그 누구도 저들의 숭고함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분명히 알아줄 것이다. 저 격전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모두가 종국에는 결사단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런 쳐죽일 놈들!” “저 더러운 악마 계약자들 때문에 위원장님께서… 이기영 위원장님께서… 흐윽….” “위원장님, 힘내세요. 제발 힘내세요!” “힘내라, 이기영 명예추기경. 힘내라!” “기도하겠습니다. 명예추기경님께서 이 시련을 벗을 수 있도록 기도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기도드립시다. 보잘것없는 저희를 위해 저항하고 계시는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을 위해 기도드립시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알 수 없는 적의가 느껴진 탓이다. “저런 쳐죽일 악마 계약자 놈들! 대륙은 네놈들의 것이 아니다! 절대로 빛은 지지 않는다, 절대로!” ‘그게 아니야. 당신들이 응원해야 할 사람은 저 사기꾼이 아니야….’ “스스로 영혼을 팔아넘긴 저 역겨운 모습을 보게나.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야. 저런 연놈들이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말세야, 말세. 아직도 악마 놈들이 이렇게 판을 치고 있으니 우리 위원장님께서 이 공사에 공을 들이는 것도 당연해. 이 모든 게 위원장님의 혜안이 아닌가. 저 더러운 악마 놈들이 우리가 만든 청사 일부를 무너뜨렸어!” ‘대륙을 위하는 것은 그가 아니야. 진정으로 대륙을 위하는 건… 우리… 우리 결사단이야.’ “힘내라, 조혜진! 머리통을 부숴 버려!” “기도드립니다. 기도할게요. 꼭 명예추기경님을 지켜주세요, 조혜진 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싸울 수 있는 분은 직접 무기를 듭시다. 더 이상 위원장님께서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네,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어요. 언제까지 위원장님의 뒤에서만 숨어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도… 미약한 힘이라도 보탠다면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이 자리에서 증명합시다, 여러분.” ‘당신들의 검이 향해야 하는 곳은 결사단원들이 아니야. 저 쳐죽일 사기꾼 자식이라고.’ “옳습니다. 미약한 힘이지만 우리도 싸울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꼭 대륙과 명예추기경님을 위해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싸우겠습니다. 나아갑시다. 바라보지 말고 행동합시다.” ‘그게 아니야. 그게… 그게 아니라고.’ “저희가 가겠습니다, 위원장님!” “올라가는 게 오히려 방해야. 지금 저 모습을 보게….” “…….” “혹여나 우리가 다칠까…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계시지 않은가. 이 먼 곳에서 지켜보며 기도를 드리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야. 어설픈 힘이라도 보태려고 했다가는… 오히려 악마 계약자 놈들에게 기회가 될 걸세. 어째서… 어째서 명예추기경님이 저 타락한 힘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계시는지 한번 생각해 보게.” ‘단장님은 악마 계약자가 아니야.’ “저,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기도드리게나. 언제가 그렇듯 여신님께서는 명예추기경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기도드리세.” 울컥울컥 피를 토하면서도 끝까지 발과 손을 쉬지 않고 있는 단원동지들이 시야에 비친다. 이질적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 풍경과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풍경이 무척이나 이질적이다. 무엇이 정말로 정의인지 자신조차 헷갈릴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결사단원들을 빌어먹을 악마 놈들이라고, 저주받을 자식들이라고 매도하며 악의에 찬 욕설을 내뱉는 이들은 어떤 방향으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장님과 결사단원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다. 명예추기경이 가지고 있는 비밀과 진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이들이다. ‘당신들이 뭘 알아.’ 정말로 이런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나. 이런 대륙을 지키기 위해서… 이런 자들을 위해서…. “어째서 싸워온 거야….” 한 명, 한 명 쓰러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쓰러질 때마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튀어나온다. “어째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 그 많은 노고를 겪어온 거냐고….” “잘한다!” “믿고 있었습니다!” “저 더러운 악마 계약자들을 전부 쓸어버리라니까!” “조심하세요!” 지금 단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 목소리들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힘내요, 단장.’ 목소리가 닿을까. 닿을 수 있을까. ‘그런 더러운 사기꾼한테 지지 마세요. 절대로 지지 마요.’ “힘… 힘내요.” ‘쓰러지지 마세요.’ “힘내세요! 쓰러지지 마! 힘내세요! 응원하고 있습니다. 힘내세요!” 군중 사이에 서서 커다란 목소리를 보내봤지만, 닿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저 쳐죽일 놈들이 다시 일어선다. 비열한 악마 계약자 놈들이 다시 일어서고 있어.” “더러운 놈들… 어떻게 심장이 뚫려 있는데도 움직일 수 있는 건지… 진짜 괴물들이구만….” “검붉은 타액을 뱉어내는 꼬라지를 보게나. 혹여나 명예추기경님이 저 기운에 노출될까 두렵네.” “저… 저 악마 놈들이 다시 일어서는 걸 보세요. 쓰려졌던 놈들도 전부 다 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닿았을까. 정말로 목소리가 닿은 건가. 단원들을 다시 움직이고 있는 게 자신의 목소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아마 착각일 것이다. 수많은 군중 사이에 섞인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단원들이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목이 터지라 외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닿을 거라고 믿고 지지를 보내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다. ‘기적을….’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저 불쌍한 이들에게 기적을. 상처받고 버림받고 세상에 버림받은 저들에게 단 한 톨의 작은 기적을. ‘닿을 수 있기를.’ 어려운 게 아니잖아요. ‘닿을 수 있기를.’ 저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닿을 수 있기를!’ 대륙의 절대 악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을. “힘내… 힘내세요. 힘내세요!” “힘내라! 이기영 명예추기경!” “힘내세요. 끄윽… 힘… 힘내세요. 끄윽… 힘내세요!” “잘한다! 조혜진! 잘한다!” “허어어엉… 힘내세요. 힘… 내세요.” “기도드립시다. 명예추기경님을 위해, 위원장님을 위해 다 같이 목소리를 보냅시다.” “허어어어어엉… 일어서세요. 끄윽… 신이시여… 제발… 제발 그들에게 작은 기적을….” “위원장님께서 다시 일어서십니다. 조금만 더 응원합시다!” “힘내세요!!!!!” 그 직후. 천천히 고개를 돌려 군중 속에 섞인 자신을 발견한 단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물에 가려진 시야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미소를 보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응원을 보내줘 고맙다고 네 목소리를 틀림없이 들었다고 그러니 이제 괜찮다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 확실하게 눈에 보인다. ‘닿았어.’ “감사합니다.” ‘닿은 거야.’ “흐으윽… 감사합니다….” 다시금 몸을 일으켜 똑바로 검을 붙잡는 단장의 모습이, 서로 손을 붙잡으며 마지막 남은 힘을 전해주는 단원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기세요, 꼭… 이기세요.” 이 길었던 여정의 마지막이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끝까지 지켜보자. 고개를 돌리지 말고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자. “꼭… 이기셔야 해요.” # 582 회귀자 사용설명서 582화 숭고한 희생(2) 정확한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왠지 악당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새끼들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정말로 자신들이 정의라고 믿고 있는 놈들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꺼림칙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판단해 보건대…. 지금 저들이 보여주는 모습 자체가 클리셰의 왕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외면받았지만 본인들이 정의라고 믿는 행동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끈끈한 동료애와 더불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모습은 내가 봐도 박수를 쳐줄 만하다. 종국에는 본인들의 정의를 관철시키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짓는 그림을 보여주고 싶은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나는 클리셰의 희생양이 될 생각은 없   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언제든지 몸을 뒤로 뺄 준비도 되어 있고… 무엇보다…. ‘질 리가 없지.’ 대륙의 빛이 꺼질 리가 없다. ‘나도 노력 좀 해야겠네. 저게 메소드 연기지. 나도 아직 멀었다니까.’ 정말로 본인들이 정의라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우스운 모습이다. 누가 봐도 더럽고 혐오스러운 악마의 모습을 한 이들이 저런 뜨거운 눈빛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자기 얼굴에 침 뱉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저런 모습으로 자신들을 알아달라고 외친다고 한들 대중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 은발을 휘날리는 둠기영의 모습과는 다분히 비주얼적 차이가 존재한다. 입에서 흉물스러운 타액을 흘리고, 붉은 안광을 뿌리며 달려오는 모습은 정의의 용사라기보다는 악마의 후예.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는 인간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는 와중에 하나둘 처절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보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거친 숨을 내뱉으며 이 밸런스를 이어나간다. “힘내… 힘내세요. 힘내세요!” “힘내라! 이기영 명예추기경!” “힘내세요. 끄윽… 힘… 힘내세요. 끄윽… 힘내세요!” “잘한다! 조혜진! 잘한다!” “허어어엉… 힘내세요. 힘…내세요.” “기도드립시다. 명예추기경님을 위해, 위원장님을 위해 다 같이 목소리를 보냅시다.” “허어어어어엉… 일어서세요. 끄윽… 신이시여… 제발… 제발 그들에게 작은 한 톨의 기적을….” “위원장님께서 다시 일어서십니다. 조금만 더 응원합시다!” “힘내세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응원 소리에 기분이 무척 좋아진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다. 뭔가 분위기가 뒤바뀐 적 진영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들 들었나.” “네, 단장.” “힘내자.” “네.” “분명히 성공할 수 있다. 우리가 오직 이날만을 위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가슴속에 새기도록 하자.” “하하, 단장… 저는 이미 틀린 것 같습니다. 단장님, 부디… 천천히 올라오시길.” “그동안 고마웠다, 시르비올라.” “미약한 힘이지만, 단장이 사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짊어지마.” “제 힘도 받아주세요.” “짊어지마.” “단장… 제 삶은… 의미가 있었던 걸까요.” “당연히.” “감사… 합니다.” 한 놈, 한 놈 쓰러질 때마다 딜레이가 제법 길다. 게다가 각성 비스무리한 것도 하는 것 같은 느낌. 점차 마력이 증폭되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마음의 눈으로 확인해 보기에도 결사단의 단장은 제법 물이 올라왔다. 육신은 이미 한계를 맞은 것 같았지만, 기운 자체는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팽창하고 있다. 아마 본인이 가장 잘 느끼고 있지 않을까.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임무에 성공할 수 있다고, 조금 더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모두가 동료들 덕분이고 모두 자신들을 응원한 이들 덕분이라고. 믿음과 신뢰, 동료애와 정의가 만들어낸 작은 기적이라고,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분명히 저런 종류의 각성 케이스는 존재한다. 박덕구 같은 경우도 있었으니까. 깨달음 같은 내적 성장에 의한 스텟 상승도 있었고, 심지어 위기 상황이라고 느껴지면 폭발적으로 스텟이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각성에 대한 체계적 논문이 매 분기 튀어나오고 있을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하지만 저 악마 계약자들이 경우는 전혀 다른 경우. 저런 놈들이 동료애 몇 번 보여줬다고 각성하는 것처럼 각성이 쉬웠다면, 원정길에 올라갔다 죽는 녀석들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관련 논문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각성에도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 나 역시 이전부터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논문 작성자를 파란으로 스카웃했던 기억이 있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정신적인 성장이 기반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각성에 의해 갑작스럽게 성장해야 할 육체에 알맞은 정신이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다. 당연히 놈들에게 그런 정신력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애초에 놈들에게 정신적인 성장을 비롯한 정상적인 성장 따위는 없다. 이미 악마와 계약해 옛날 옛적에 자신들의 한계를 넘어버린 이들, 놈들이 보통의 방법으로 성장한다고 가정해도 지금과 같은 힘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더 성장한다고? 개 같은 소리지. 개 같은 소리야.’ “부길드마스터… 저건….” ‘혜진아, 동요하면 안 된다.’ “콜록, 아마도… 악마의 힘을 증폭시키고 있는 모양입니다.” “네?” “악마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실적으로 사용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이너스 감정이 곧 그들의 힘이자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세상에 대한 분노… 그리고 복수심과 열등감과 같은 감정이… 아마 저 단장이라는 녀석의 힘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너희 들으라고 하는 말 맞아. 이 새끼들아, 정말로 대륙을 지키고 싶은 숭고한 감정을 가지고 이 자리에 임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지?’ “그들 역시 불쌍한 자들일지도 모릅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혜진아, 왜 그래. 나 알고 보면 따듯한 사람이야.’ “저도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들 역시 불쌍한 자들이에요. 악마소환사 진청에게… 세뇌된 이들이 아닙니까. 여러 가지로 뒤섞인 저 추악한 감정 덩어리들을 보세요. 그리고 저 감정 덩어리로 인해 뒤바뀐 녀석들의 모습도….” “위원장님, 저런 이들에게 동정심을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동정심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콜록… 리안 씨. 그저 후회가 될 뿐입니다. 저들은 조금 더 빨리 만났더라면… 어쩌면 저들을 옳은 길로 인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렇게 복수심과 열등감, 분노도 가득 찬 추악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위원장님….” ‘이 반동분자 놈들아. 그렇게 노려볼 필요 없다. 전부 다 맞는 말이거든. 정말로 너희가 동료애 때문에 각성이라도 한 것 같아? 그런 일을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일이야. 이미 악마랑 계약한 새끼들이 사명감 때문에 새로운 힘을 얻어?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니까. 똑똑히 귓구멍 열고 듣자. 다 너희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들이니까.’ “위원장님, 괜찮으신 겁니까.” “네. 괜찮습니다, 리안 씨. 저는… 괜찮습니다.”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장소에 서 있는 빛. 저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게 당연했다. 조혜진이 악어의 눈물을 눈치챌까 걱정됐지만, 살짝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마무리. 아마 그녀 역시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을 것이다. 최근 어느 정도 호감도가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나에 대한 오해가 풀리기도 했으니, 아마 제정신으로 눈물을 봐도 그럴듯하다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아마 내가 그들에게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악어의 눈물에 반응한 것은 악마 계약의 반동분자. “저… 때려죽일… 때려죽일 가증스러운 놈이….” ‘가증스러운 건 너희지. 내가 흘리는 것만 악어의 눈물이 아니잖아, 이 악마 계약자 새끼들아.’ “자기 동료들의 힘까지 먹어 치우는 저 모습을 보세요. 함께 뜻을 해온 동지들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겁니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저렇게까지 되어버렸는지.” 평소였다면 눈물 즙까지 뽑아낼 수 있는 장면까지 폄하해 버리는 쓰레기 같은 발언. 바들바들 떨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안광은 점점 붉어지고, 입에서 흐르고 있는 타액들도 더욱더 진득해지고 있다. ‘어우. 찐득찐득하겠다, 저거.’ “이 가증스러운 놈… 죽여 버리겠다. 기필코… 기필코 네놈만은 죽여 버리고 말겠어. 반드시 찢어 죽여. 군사님과 눈을 감은 동료들의 원혼을 위로하겠다.” “정말로 위로하고 싶은 게 그들의 원혼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분노인지를 잘 생각해 보세요… 콜록… 당신은 지금 악마에게 휘둘리고 있는 겁니다. 진청과 악마들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세상에 커다란 증오를 느끼고 있다는 것은 압니다. 그 때문에 어두운 길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눈동자에서 조금이지만… 억눌려 있는 순수함이 보입니다.” “…….” “눈을 감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정말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정말로 네가 원하는 게 대륙을 위하는 게 맞아? 그래서 악마랑 계약까지 하셨어요?’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있지는 않은지 잘 들여다보세요. 콜록….” ‘그거 아닐 텐데… 내가 보기에 너는 그렇게 숭고한 사람은 아니야.’ “진실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다시 한번… 떠올려 보세요.” ‘단순한 복수심이잖아, 개자식아. 아니면 열등감일 수도 있고… 나야 솔직히 뭐 알 바 아니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 “…….” ‘너는 정의의 아군도 아니고, 대륙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클리셰의 희생양도 아니야.’ “…….” ‘그냥… 추악한 괴물이지.’ 아침 이슬처럼 맑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녀석이 볼 수 있게 비릿한 미소를 입에 담는다. 군중들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녀석에게는 확실하게 보일 것이다. 그래, 나는 지금 놈을 도발하고 있다. 이게 정의를 표방하는 너희의 진짜 모습이라고,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는 놈들이라고 비웃고 있다. 이지혜가 살아 움직이는 도발 토템으로 불렀던, 내 표정이 효과가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녀석이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놈이… 네놈에게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우리가 그렇게 타락하지는 않았다. 우리 결사단 동지들을 모욕하는 언사는 절대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때려죽일 놈.” “…….” “네놈만은 죽인다. 기필코 죽이고, 또 죽이고, 죽여 버리겠다. 기필코 내 모든 걸 버려서라도 네놈만은 죽일 것이다, 더러운 사기꾼 자식….” ‘그래, 맞아. 이게 네놈들 포지션이라고.’ “아니, 절대로 편하게 죽게 만들지 않겠다. 네놈의 팔다리를 자르고 돼지우리로 던져, 가축들과 함께 살아가게 할 것이다. 그 간사한 혓바닥을 뽑고 군사님을 비웃었던 눈 역시 억겁의 불로 태울 것이다, 이 역겨운 기만자야. 대륙을 속이고 있는 악마 자식!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 반드시이!!” ‘반응 좋네요.’ 문제가 있다면 내 생각보다 반응이 더 좋았다는 것. 동료의 마력까지 빨아들이기 시작한 녀석은 어느새 인간의 껍질까지 벗고 있다. 피부가 벗겨지고 그 안에 있는 살점이 드러난다. 보라색의 울긋불긋한 살점들은 점점 팽창하면서 녀석의 살가죽까지 뚫고 나오기 시작한다. 덩치는 점점 커다래지고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괴물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외관, 더러운 점액질이 뚝뚝 떨어지는 녀석의 몸을 보니 입맛이 다 떨어진다. 단언컨대 놈은 지금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악마에게 잡아먹힌 것은 물론,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아마 본능만으로 행동하는 괴물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죽여… 죽일 테다. 반드시… 죽여 버릴… 복수를…. ‘뭐 저렇게 변해. 아니, 저렇게 변하는 건 상관없는데, 왜 이렇게 강해진 거야.’ 이 자식과 계약한 악마가 도대체 누굴까. 어떤 놈이길래. 소환 문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이 정도나 되는 힘을 전해줄 수 있는 걸까. ‘생각해 봄직 한데….’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신 녀석. 커다란 기운이 녀석의 입에 모이고, 곧 거대한 기운이 전방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습관적으로 손을 들어 올려 뼈의 방패를 만들었지만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진다. 아차 싶었지만 이내 전방을 가로막는 존재의 등장에 굳이 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두려워하지 마쇼. 내가 형님의 방패가 될 테니까.” 어딘가에서 많이 들어본 대사. “그럼 저는 뭐라고 하면 되는 겁니까?” 익숙한 목소리. 박덕구와 안기모. 요란한 소리와 함께 쏟아졌던 공격을 커다란 방패로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는 모습은…. ‘성장했구나. 진짜로 성장했네. 너 어떻게 성장한 거야, 진짜.’ 정말로 거대한 방패를 떠올리게 했다. “정말로 오랜만이요, 형님. 보고 싶었다니까.” “그래, 오랜만이다.” ‘이 돼지 새끼야.’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 583 회귀자 사용설명서 583화 숭고한 희생(3) 만나면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 얼굴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어서기 시작한다. 얼굴을 그다지 변한 게 없다. 예전에 봤던 덩치 큰 돼지의 모습 그대로. 오히려 달라진 것은 녀석의 몸이다. 이미 화면을 통해 한차례 모습을 확인했지만, 이전보다 더 덩치가 커진 것 같은 느낌. 실제로 내 앞에 선 모습을 보니 확연히 차이가 느껴질 정도였다. ‘몸이 더 커진 것… 같은데. 옆으로만 늘어난 게 아니라 키도 조금 컸나?’ 입으로는 내뱉지 않은 말이었지만 눈치가 빠른 건 여전한 모양이다. 조용히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최근에 키가 크고 있는 것 같다니까. 아, 밀린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지금은 일이 더 바쁜 상황이니까… 뻔한 질문이지만… 몸은 좀 괜찮은 거요?” “그래, 괜찮다. 아직은… 괜찮아.” “거, 괜한 질문을 한 모양이요. 괜찮을 리가 없는데…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고 빨리 신전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다니까. 아무튼, 이런 방식의 재회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조금 드라마틱한 것 같아 나름 만족스럽구만… 오랜만에 형님 얼굴 보니까 솔직히 별별 생각이 다 들기도 하고… 사실은 만나자마자 거하게 한 번 껴안아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쉽기는 하지만 이렇게 곧바로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요.” ‘나도 같은 생각이다, 새끼야.’ “조금 더 뒤로 물러서는 게 좋을 거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사실 버티기가 꽤 빠듯하니까.” 계속해서 쏟아지는 공격을 거대한 방패로 막아내고 있는 모습은 솔직히 멋있다. ‘아, 이제는 이 새끼가 다 멋있어 보이네.’ 전방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그만큼 악마 놈이 뿜어내고 있는 기운이 폭발적인 탓이다. ‘전설 등급이랑 준신화 등급의 사이? 아니… 그건 너무 짜네. 준신화 등급 그 끝자락 정도는 되려나.’ 대륙을 기준으로 생각해도 결코,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빌런. 박덕구가 무언가를 막아내는 것의 스폐셜 리스트라고는 하지만, 결코 쉬울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의외로 여유가 있는 것 같기는 하고….’ 27군단 침공 당시에도 도노반을 상대로 혼자 시간을 끈 적이 있으니 이 정도는 막아내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놀랍기는 하다. 사실 사랑스러운 회귀자에 의해 그 생을 마감한 군단 반역자 도노반은 저 돼지를 진심으로 상대한 적이 없다. 정말로 죽이겠다는 의지를 담아 공격했다기보다는 가지고 놀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 아니었던가. 노반이 형과 저 빌런은 품고 있는 생각 자체가 다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쪽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담은 공격, 저걸 받아내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 돼지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완성이 됐다고 하는 게 맞으리라. ‘겨우 1년 만에 이 정도까지 올 수 있는 건가.’ 전설 등급 근처에서 허덕이던 녀석이었다. 1년 동안 어딘가에서 기연이라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아니, 기연이 그렇게 쉽게 발견될 리가 있나.’ 이쯤 되면 지 혼자 먹으려고 슬쩍 해놓은 기연을 달려가 먹으려고 했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사실…. ‘강해지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뭐.’ 그 말이 맞다. 옆에 있는 안기모가 이대로 가다간 병풍이 될 거라는 걸 직감했는지 박덕구에게 버프를 쏟아내고 있는 중. 그와 동시에 상처 입을 이들을 향해 신성력을 뿜어내는 모습을 보니 수련의 성과가 있었던 것 같았다. 특히나 버퍼로서 몇 단계는 더 성장했다. 애초에 순수한 신성력으로는 엘레나와 선희영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 성장 방향을 바꾼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안기모의 진짜 강점은 버퍼로서의 능력이 아니다. 탑 티어 전위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수준의 방어력과 공격력. 자신 역시 달라졌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는 듯이 조혜진과 함께 앞으로 뛰어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한차례 원거리 공격이 들어와 꽂힌 이후에는 다시금 커다란 괴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죽인… 다… 죽인…. 박덕구는 방패를 몸에 딱 붙이며 이후 쏟아질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박덕구와 안기모의 등장에 친위대는 조금 포지션이 애매해지기는 했지만, 이윽고 할 일을 던져주는 반동분자의 모습을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놈만은… 죽이고… 말겠다. 네놈만은… 죽이겠…. 흉물의 몸에서 흉물들이 분리되어 떨어지기 시작한 것. 점액질에 둘러싸인 채로 기괴하게 움직이는 놈들은 가까스로 인간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지만 딱 그것뿐이었다. 두 발로 걷는 모습을 유지할 뿐, 스스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존재라고 볼 수가 없다. 허리를 구부리고 팔을 늘어뜨린 모습이었고, 기괴한 촉수나 이해할 수 없는 신체기관을 달고 있는 녀석들까지 있다. 거대해진 악마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잔챙이들은 헐떡거리는 소리를 내며 친위대를 향해 쏟아졌고 다시금 전열을 재정비한 빛의 전사들은 놈들을 맞을 준비를 한다. -네놈만은… 네놈만은 죽이…. “지켜!” -용서… 못… 군사님의…. “대열을 재정비한다. 위원장님에게는 손끝 하나도 대지 못하게 해!” -절대로… 복수를…. 콰아아아아앙! 콰드드드득! 콰직! 푸화아아악! 이미 처절한 격전이 되어버린 현장, 하지만 긴장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마무리할지 고민이 될 정도로 상황이 여유롭다. 성장하기 전 전이었다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협적인 적이었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렇게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박덕구 메인탱, 조혜진 메인딜러, 안기모는 힐러 겸 보조탱커. 후위는 역병군주 이기영. 완벽한 구성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손발을 맞추어본 지 오래됐음에도 불구하고 물 흐르듯 동작이 연계된다. 박덕구가 시선을 돌린 반대편에는 항상 조혜진이 위치해 있고 안기모는 항상 내 위치를 염두에 두고 전장으로 뛰어든다. 부족한 화력과 전체적인 상황을 컨트롤하는 것은 내 역할.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아군의 공격 패턴이 뒤바뀐다. 파티 사냥을 할 때 가장 필요한 덕목, 파란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부분이 아니었던가. 패턴이 고착화되면 털리는 것은 몬스터뿐만이 아니다. 파티나 공격대 역시 마찬가지. 심지어 인간과 인간의 전투에서도 고착화된 패턴을 버려주는 게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다. 끊임없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을 보니 얘네가 지난 시간 동안 배운 걸 까먹지는 않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나 박덕구가 잊어버린 것 같지 않아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스위치, 스위치.” “알고 있다니까.” “그다음 갑니다.” “형님도 준비하쇼.” “알겠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혼자가 되어버린 흉물을 몰아붙이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반드시… 죽이…겠…. 몸을 키운 거대한 덩치로 팔을 휘두르며 불길한 마력을 뿜어대고는 있었지만, 그게 녀석이 할 수 있는 전부. -피의 복수를…. 김현성이나 정하얀 같은 결정적인 한 방이 없어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다. 물론 생각할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이거 이대로 마무리하는 게 맞나.’ 에 대한 고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뭔가 장면을 만들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뒤를 한번 캐봐야 할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 정도까지 대륙의 실적을 전해줄 수 있는 악마가 있을까. 가능성은 낮지만, 이계신이 개입한 것은 아닐까. 미하일과 나탈리가 결사단의 내부 속사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까. 만약 그 치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눈앞에 있는 새끼가 마지막인데?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점점 커져 나가기 시작했다. 조금 어려울 것 같기는 했지만, 생포하자면 생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이성은 완전히 먹힌 건가?’ 겉모습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기는 했지만, 자세히는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계속해서 주춤거리는 내 모습을 확인했는지 박덕구가 조그맣게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형님.” “…….” “형님의 케이스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요. 저들은 스스로 타락하는 것을 선택한 이들이요. 흔들릴 필요 없소. 형님도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니요?” ‘아니, 그래서 그런 건 아닌데….’ “형님의 탓이 아니요….” ‘정말 그래서 그런 건 아니야, 이 새끼야.’ “그렇게 마음 쓸 필요는….” ‘그러니까 그거 아니라고, 이 새끼야.’ 어떻게 생각해 봐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기로에 서 있다. 시간이라도 끌어볼까 싶어 괜스레 힘든 척하며 머리를 부여잡은 것은 당연지사. 잠깐 동요하는 이들의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아직은 여유가 있다. ‘살리는 게 맞겠는데.’ 선택의 여지가 죽이는 것밖에 없다면 달라졌겠지만, 일단 제압한 이후에 대화 정도는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선다. 그 와중에 녀석이 흥분했는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지만, 역시나 파란의 전위들을 뚫릴 수 있을 리 만무. 내 쪽으로 튄 것은 기껏해야 녀석의 피와 끈적한 점액질이 고작. 곧바로 닦아내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런 모습을 유지하는 게 더 처절한 그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저런 건 달려가 맞는 게 맞다. 기분은 나쁘지만, 딱히 육체에 이상이 생기는 종류는 아니었으니까. ‘그래. 기왕 하는 김에 조금만 더 해줘라, 인마. 그게 사람들이 보기 좋잖아. 안 그래도 최근에 이런 장면이 너무 없다 싶어서 걱정했었다고.’ 기대에 부응하듯 열심히 일해주고 있는 듯한 녀석. ‘조금 더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줘. 새끼야.’ 흥분했는지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모습이 보여진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뭔가 장내에 분위기가 급변했다는 생각이 든 것. 아니, 확실하게 변했다.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던 이들이 뭔가에 영향을 받은 듯 제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으니까. 박덕구와 안기모가 뭔가 불안한 표정으로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다. 조혜진 역시 마찬가지. 뒤에서 느껴지는 것은 거대한 마력의 유동, 저절로 몸이 덜덜덜 떨려온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알 수 없는 공포심이 치솟아 올라 머리털이 쭈뼛쭈뼛 선다. 심지어 개소리를 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 괴물 새끼 역시 조용한 목소리로 눈앞에 있는 존재에 대해 중얼거리기 시작. -악… 악마…. ‘아니야. 걔 악마 아니야.’ -악마… 악마다. ‘걔 악마 아니라고, 새끼야… 시바… 악마 같다고 생각하는 건 이해하는데… 악마는 아니야.’ 도대체 무슨 얼굴을 하고 있길래 악마라는 말이 튀어나올까. 뒤를 돌아보기가 무섭다. 망설이고 있던 사이 터져 나온 목소리. “죽어.” 거대한 마법이 놈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584 회귀자 사용설명서 584화 오랜만의 해후 그리고…(1) 순수한 에너지 그 자체로 이루어진 마력의 응집체. ‘어… 어….’ 콰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앙!!! 녀석의 생사에는 이미 관심이 없다. 애초에 저런 걸 맞은 뒤 살아남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으니까. 대기가 떨린다. 후드득 후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성벽이 진동하고 있다. 풍압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고 있기가 힘들다. 멀찍이 떨어져 환호성을 보내고 있었던 갤러리들은 자연재해라도 목격한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최대한 외곽으로 도망친다. 정하얀이 쏘아 보낸 마법에 휘말리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었지만, 지진이 일어나기 전 몸을 피하는 야생동물들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빌런이 각성했을 때보다 더욱더 격정적인 반응. 정하얀이 빌런인 것처럼 느껴지는 반응이었다. ‘안 돼에… 씨바… 무너지지 마… 무너지지 마. 버틸 수 있잖아. 버틸 수 있지?’ 현재 상황에 최대 관심사는 그래도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던 제5구역의 성벽, 아니, 전진기지 그 자체.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악마 놈이 마력의 응집체를 막아냈지만, 마치 인간이 지구를 들어 올린 것 같은 모양새다. 으직으직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을 지지하고 있었던 바닥이 움푹 파인다. ‘그만해, 씨바, 하얀아… 그만… 우리 성벽 날아간다. 전진기지 날아간다. 이거 아니야, 이건 아니야. 씨바….’ 서둘러 뒤를 바라보자 눈에 보이는 것은 반쯤 공중에 떠 있는 정하얀, 어느새 내 몸도 공중에 떠 있다. 입술을 꽉 깨문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상기된 얼굴과 핏발이 선 눈으로 자신의 공격에 겨우 버티고 있는 개자식을 노려보고 있는 얼굴. 어째서 결사단의 단장이 정하얀의 모습을 보고 악마라 중얼거렸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악귀처럼 보이는 모습이지 않은가. “죽어… 죽어…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같은 혼잣말 때문에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당연. 그래도 내 말이라면 듣겠지 싶어 입을 열어봤지만, 순간적으로 정신이 흐려진다. ‘어?’ 체력이 다했기 때문이 아니다. 정하얀이 이쪽에 뭔가 마법을 걸었다. ‘뭐야, 너… 왜 갑자기….’ 그제야 내 겉모습이 어떤 상태인지 깨닫는다. 아마 계속해서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건 내 정신에 영향이 갈 수 도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렇기 때문에 수면 마법 같은 종류의 마법을 때려 박은 것이리라. 제발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발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눈을 뜨니 미친 마법사의 저주받은 신단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흐릿한 정신을 최대한 잡아보려고 노력해 봤지만 다른 방도가 있을 리 만무. 그 와중에 버티고 있는 우리 결사단 단장이 자랑스럽다. ‘그래, 새끼야. 이겨낼 수 있어… 악마한테… 영혼도 팔아넘긴 놈이… 이 정도 공격은… 버텨야지. 씨바, 그렇잖아. 저건 밀어내고 죽어야지.’ 우지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점점 땅 속으로 꺼지고 있는 녀석. 자연스럽게 마력의 응집체는 성벽에 닿는다. 콰드드드드드득드드득드드득! ‘안 돼!!!’ 정신을 잃기 직전. 자연재해 같은 마법이 성벽 한 쪽을 완전히 부숴 버리는 모습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하얀이… 성장했구나. 씨바….’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 “…….” * * * “씨발!” 벌떡 일어난 순간 눈에 보이는 것은 평소와 같은 병실. 며칠이나 잔 건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제법 뻐근했다. “일, 일어나셨군요. 이기영 님.”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비치는 것은 붉어진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엘레나. 깜짝 놀랐는지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호흡이 거칠어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본인의 앞섬은 왜 잡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무척 당황한 듯한 모습. 심지어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은 묘하게 고혹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평소 엘레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정말로 그녀를 보는 게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신의 손거울을 통해 이미 사전에 연락을 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모습을 보니 반갑기야 하다. 겨우 1년 인데 뭐가 그리 변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전보다 더욱더 성숙해지지 않았는가. “아… 오랜만입니다, 엘레나 님. 언제 도착하신 겁니까?” 혼자 있었다면 쌍욕이라도 퍼부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정신을 잃기 전에 본 장면이 생생했으니까. 하지만 엘레나를 통해 사정을 전해 듣자 정하얀에 대한 분노가 절로 사그라든다. “정하얀 님께서… 마중 나와주셨어요. 이기영님께서 쓰러져 계신다고… 같이 가자고 급하게 말해주셔서 예정보다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어요. 희영 씨, 그리고 길드에 있는 정연 씨도 함께 왔고요. 또 소라 씨도….” “…….” “…….” ‘그래, 하얀아…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당시에 가장 놀랐던 것이 바로 정하얀 본인이였으리라. 안 그래도 돌발 상황에 대한 판단능력이 떨어지는 그녀였으니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적을 죽이고 나를 구해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걸 떠올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정확한 피해 규모를 아직 듣지 못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찝찝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 그랬군요.” “네, 처음에는 굉장히 횡설수설 말씀하셔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제 시간에 맞출 수 있었어요.” ‘많이 울기도 울었겠네.’ 나야 기절해서 모르고 있었겠지만, 대충 어떤 상태였는지는 예상이 간다. “그보다 이기영 님, 잠깐 따로 이상이 없는지 검사를 해봐도 되나요? 그 은발의 상태를 3일이나 유지하고 계셔서… 물론 눈에 보이기에는 다른 이상이 없으신 것 같지만, 내부는 조금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네?” “다행히 베니고어 교단의 사제님들이 오신 이후에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시기는 했지만….” ‘아… 시바. 직업 전환 안 풀고 기절했구나.’ “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딱히 몸이나 정신에는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네요. 혹시…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습니까?” “딱 나흘이에요.” ‘한번 누웠다 하면 3일 이상은 누워 있는 것 같네. 이렇게 오래 기절할 이유가 없었던 것 같은데… 둠기화가 생각보다 체력을 많이 잡아먹나?’ 아니면 정하얀의 마법이 워낙 강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워낙 체력이 유약하다 보니 후자보다는 전자에 더 가능성을 높이 주고 싶기도 하다. 벨리알이 아무리 내 편의를 봐주고, 지원을 해주고 있다고 한들, 한낱 인간의 몸으로 악마의 힘을 받아들이는 게 쉬운 건 아니지 않은가. 결사단인지 뭔사단인지 하는 놈들의 모습이 악마의 취한 놈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지표다. ‘너무 밥 먹듯이 쓰지는 않는 게 좋겠네.’ 여러 가지를 떠올리는 도중에도 엘레나는 심각한 얼굴로 내 몸을 이곳저곳 살펴보고 있다. 하지만 베니고어에 의해 이미 직업전환이 됐으니, 다른 부작용이 발견될 리 만무. 몇 분이 지난 이후에는 안심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히 몸에 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체력이 많이 떨어지신 것 같으니 당분간은 따로 영양제를 섭취하시는 게 좋겠네요. 당연하지만 끼니도 거르시지 말고요. 밤을 새시거나 하는 일도 자제하셨으면 좋겠어요.”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번 일만 제대로 마무리 짓고요.” “이번 일이라고 하시면….” “5구역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리고 미하일이나 나탈리의 신원의 확보나… 다른 뒤처리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한데. 혹시 알고 계시는 게 있으면 전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후우… 그건 저한테 듣는 것보다 다른 분들한테 들으시는 게 좋겠네요. 지금 모두 밖에 나가 있는 상태이기는 한데, 아마 연락을 드리면 금방 모일 거예요. 잠깐 밖에 좀….” “네.” “그리고 방금 전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미처 말씀을 드리지 못했지만… 이, 이렇게 오랜만에 뵙게 돼서 정말 기쁘네요.” “네, 오랜만에 보니 저도 참 좋습니다.” 잠깐 동안 꽈악 나를 안아오는 게 느껴진다. 본인도 부끄러웠는지 붉어진 얼굴로 후다닥 밖을 나가는 뒷모습. 확실히 1년 전에 순수했던 사람은 1년 후에도 순수한 모양이다. 아무튼 간에 엘레나가 나간 이후의 병실에는 적막함이 감돈다. ‘다들 와 있겠네.’ 아마 엘레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선희영이랑 황정연도 와 있겠고….’ 엘레나와 함께 떠났었던 유아영도 같이 들어왔으리라. 박기리 혁명 삼남매와 조혜진, 정하얀도 마지막에 함께 있었으니, 어딜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김창렬에게도 소식이 닿지 않았을까. 정하얀 절친 한소라도 분명히 함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김현성, 이 새끼도 왔겠지?’ 아마 틀림없이 와 있을 것이다. 그동안 연락까지 씹고 폐관수련에 들어갔다고 한들 내가 병실에 누워 있었는데 달려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내가 해준 게 얼만데… 안 오면 진짜 쓰레기지. 안 오면 개 쓰레기다, 진짜.’ 연락을 받았다면 한걸음에 달려오지 않았을까. 괜스레 옆에 있는 면회자 명단을 뒤적거리자 그동안 이곳을 들렸던 면회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번처럼 밥 먹듯이 들락날락거린 이들이 가장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나 정하얀. 의외로 이지혜의 이름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뒤처리 일이 생각보다 바빴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 희라 누나도 왔다 갔네.’ 카스가노 유노의 이름도 적혀 있다. 길드원들도 단체로 들르기도 했고… 교국 쪽의 인사들 역시 들린 것이 눈에 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김현성의 이름이 없는 것이 문제. 살짝 섭섭한 마음이 퍼지려던 찰나였다. 정확히 둠기화가 풀린 지 사흘째 되던 날 녀석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면회자 명단] [10/24] [김현성] AM 08:43-PM 05:50 베니고어 교단에서 둠기화의 해결을 위해 사제단을 보내기 전까지 온종일 붙어 있었던 것 같았다. 몇 시간을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온종일 있었던 것을 보면 어지간히 걱정된 모양이다. 심지어 이때는 둠기화가 아직 풀리기 전이 아니었던가. ‘괜찮았을려나?’ 이렇게 한 사람이 면회를 오래 한 것도 주목해야 할 부분. 어떻게 봐도 월권이 분명했지만, 내부에서 어느 정도는 용인해 준 것 같았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지는 게 당연했다. 그동안 불철주야 내조를 했던 게 효과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온 이후에 했던 노력이 허사가 되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으로 가슴 속에 훈훈한 마음이 피어난다.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던 찰나, 갑작스레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 이거 또 귀찮아지겠는데.’ 지난 감금 사건 때처럼 움직임에 제한이 생기는 것이 문제. 본래 일을 하는 것보다 끝난 뒤의 뒤처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나다. 특히나 이번 일은 여러 가지로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았던 만큼 개인적인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결사단과 계약한 악마가 누구인지 알아야 했고, 어떻게 제5구역에 똬리를 틀 수 있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무엇보다 결사단과 미하일이 나와 관련된 날조된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만큼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그 증거들에 접근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했다. ‘차라리 오지를 말지.’ 귀신같은 태세 전환이었지만 나로써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어느 정도 안전에 신경 쓰는 것은 나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기는 했지만, 본인이 직접 밀착 마크하겠다고 달라붙는다면 여러 가지로 귀찮아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괜스레 한숨을 쉬며 면회자 명단을 본래의 자리로 집어넣었을 때였다. “기영 씨! 기영 씨!” 하는 목소리와 함께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문을 박차고 튀어나온 것. ‘현성아, 시바… 형 기절했었다.’ 9개월 만에 만나는 녀석이었다. # 585 회귀자 사용설명서 585화 오랜만의 해후 그리고…(2)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땀으로 젖은 얼굴. 정하얀보다 더 빨리 도착한 것을 보면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왔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9개월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항상 같은 길이를 유지했던 머리카락이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것을 보면 확실히 동굴에 처박혀 수련에 용을 쓰기는 한 모양. 마음의 눈으로 확인한 정보창에서도 스탯 자체가 성장해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다급해 보이는 눈빛, 들어오자마자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영 씨,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럼 알아볼 수 있지, 새끼야. 무슨 그런 걸 물어봐. 그럼 잊었을까 봐. 둠기영의 모습을 너무 오랜 상태로 유지하다 보니 쓸데없는 게 다 걱정됐던 모양이다. 일단 보여지는 모습 자체는 평소대로의 김현성 그대로였다. ‘잘생기기는 오지게 잘생겼네.’ 배우 뺨치게 생긴 얼굴도 여전했고 무엇보다 죄책감에 가득 얼룩진 얼굴이 무엇보다 눈에 띈다. 당연하지만 저 죄책감이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는지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죄책감이 없으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 진짜.’ 조혜진을 통해 소식을 전해오기도 했고, 선물을 보내오기도 했지만, 무려 9개월 동안 잠수를 탄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상황이지 않았던가. 그 기간 동안 사건이 터졌고, 결국 빛기영이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더러운 악마 계약자 놈들에게 능욕당한 것은 물론, 둠기화까지 터뜨리며 고생이랑 개고생은 전부 다 한 상황. 그 결과로 이렇게 나흘이나 기절했으니 오죽할까. 애초에 김현성만 있었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 아니었던가. 나보다 녀석이 그걸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분간 더 이상의 위협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마음을 굳게 먹고 폐관수련에 들어간 녀석의 심정은 이해했지만, 이미 사건은 터졌고, 버스는 떠났다. 빛기영은 상처 받았고 가슴이 많이 아프다. 반가운 마음이 저도 모르게 솟아나기는 했지만 이 마음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노선을 취해야 이 새끼가 스스로 거리를 벌릴지 고민됐기 때문이다. 잘 타일러 다시 폐관 수련으로 보내 버리는 게 좋을까 싶기도 했지만…. 나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끌려다니는 것보다는 끌고 다녀야 돼.’ 괜히 또 훈훈한 분위기를 이끌어가기보다는 지금 딱 선을 긋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느낌. 미안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뒤처리를 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숨을 크게 들이마신 이후에 한마디 내뱉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요.” “네?” “너무 오랜만에 봐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 “농담입니다.” 하지만 가시가 있는 농담이기도 했다. 조금은 충격 받은 것 같은 얼굴, 침울해지는 표정, 나라라도 잃은 것 같은 탄식. 이제 와서 신경 쓰는 척하지 말라는 눈빛을 쏘아 보내자 동공이 흔들리는 게 시야에 비쳤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아니요. 전혀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바쁘시다는 건 이미 알고 있기도 했고… 그 무엇보다 수련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굳이 여기서 이러고 계실 필요 없습니다. 연락할 시간도 없었는데… 다시 수련하셔야 할 시간이 아닙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들어가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현성 씨.” “그게 아니라… 제가.” “예정됐던 시간까지 삼 개월 정도가 더 남았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요. 그… 어느 정도는 성과를 봐서… 이제는 괜찮… 괜찮…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괜찮으니 어서 빨리 수련하러 가세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진심을 담은 목소리였다. 평소답지 않게 이죽거리는 듯한 목소리 이기도 했고… 단언컨대 김현성이 충격 받을 거라는 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현성아. 미안하기는 한데… 괜히 여기 뒷정리 같이 하겠다고 비비지 말고, 빨리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그게 맞아. 나도 나대로 스케줄이 있고 해결해야 할 일도 있는데 네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너무 불편해진다고.’ “수… 련은 전부 끝났습니다.” ‘수련에 끝이 어디 있어, 이 새끼야.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 “아니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몸 상태도 이제는 정상이고… 사건도 전부 해결됐으니까요.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더 강해지셔야죠. 자, 어서 수련하러 가세요.” ‘무슨 지금 와서 걱정을 하고 그래. 그만 걱정하고 어서 가서 네 할 일 하자.’ “아니요. 정말로 수련은 끝났습니다. 지금부터는… 네, 합동 훈련소에 있던 병력도 전부 기지로 옮겨야 하니 이제는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몸은 이제 전부 회복되신 겁니까?” “네, 아무 문제없이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사실 상처가 큰 게 아니라…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도… 체력 저하가 원인 이었으니까요. 걱정하시는 만큼 크게 다치거나 정신적인 데미지를 입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 혜진 씨와 같이 계신 게 아니었습니까?” “아… 네, 아마 오고 있을 겁니다.” 둘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혜진을 버리고 한걸음에 달려온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도착한 조혜진이 들어오는 게 눈에 보인다. 조심스레 열려 있었던 문을 닫고 들어오는 모습. 깨어난 내 모습을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게 눈에 띈다. “일어나셨군요.” “아! 여기 앉으세요, 혜진 씨!” “아… 네.” ‘이게 누구야. 우리 파란 길드의 자랑, 파란 길드의 희망, 우리 혜진이 왔어?’ 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지만 그녀의 얼굴은 ‘뭐야, 당신. 갑자기 왜 이래’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이리로 오세요.” 순간적으로 영업용 미소를 장착하고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봤지만, 반응이 그다지 시원치 않다. 하지만 이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키야… 우리 영웅이 오셨어요. 영웅이 오셨어. 대륙의 빛을 구한 1등 공신이 오셨어요.’ 혁명 삼남매가 바깥에서 혁명에 가담하고 있을 때 단신의 몸으로 이쪽을 구하러 온 영웅. 회귀자가 본인의 수련에 열중하고 있을 때 위협을 미리 깨닫고 있었던 용사. 상산의 조자룡을 떠올릴 정도로 아름답고 멋있었던 그 모습을 잊을 리가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은 대접해 주는 것이 옳다.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등을 탁탁 두드리자 소름이 돋는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백번이라도 더 칭찬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 차도 조금 드세요, 혜진 씨.” “별로… 괜찮습니다.” 독이라도 탄 건 아닌가 의심하는 눈치. 하지만 슬그머니 김현성 쪽을 바라보자 순순히 차를 받아드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혜진이가 많이 영악해졌네.’ 눈치 없는 조혜진도 이제는 깨닫고 있다. 자신이 다른 남자들과 친하게 지낼 때면 김현성이 은근슬쩍 질투를 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할 정도로 친절한 이쪽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기분 나쁜 표정은 그만해 주세요’라고 따져오지 않았을까. 냉큼 자리에 앉는 것은 물론, 홀짝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까지 완벽히 내가 바라고 있었던 포지션이었다. ‘이쯤 되면 코치도 필요 없겠다, 야.’ 아무것도 몰랐던 바보가 어느새 이 정도나 성장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동안 체스를 두며 했던 조언들이 모두 뼈가 되고 살이 된 것이 분명하리라. 김현성은 살짝 불편한 얼굴. 뭔가 초조해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딱히 다른 코멘트를 해줄 필요는 없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본인이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저기 그러니까….” 며칠 내로 집안에 가방이 하나 더 생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이는 모습에 조금 챙겨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던 찰나 차례대로 길드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단은 허겁지겁 뛰어오는 정하얀부터. “오, 오빠… 끄윽… 오빠아….” 약속의 한 달보다는 조금 더 빠르기는 했지만, 지금 와서 돌아가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잠깐 동안 박살이 난 5구역이 눈에 밟히기는 했지만, 일단 꽉 안아주는 게 옳다. “흐어어어어어엉…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어요.” ‘그래. 잘 참았다, 하얀아. 네가 여기까지 한 게 어디야. 성벽은 박살 났어도 화력 하나는 기가 막히더라. 그거 평범한 소재 아니었는데.’ 그 누구보다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또 한 명. ‘소라야… 그래. 너도 고생했지.’ 순수한 마음으로 한 번 안아주고 싶어 가까이 오라 손짓 했지만, 뭔가의 위협을 느낀 모양인지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선희영이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보고 싶었어요.” 라고 말해왔기 때문에 조용히 등을 두드려 주는 것으로 마무리. 안기모와도 포옹을 한 번 해야 했고 어느새 껴 있는 김창렬 역시 슬쩍 등을 두드려 줬다. 아무래도 길드원들의 숫자가 많다 보니 인사를 나누는 게 일이다. 엘레나는 아까 한 번 했으니 건너뛰고 이다음은 유아영. “부길드마스터.” “많이 얻어왔습니까?” “네, 덕분에요.”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확실히 직업이 뒤바뀐 게 보인다. ‘그래, 그래, 우리 소중한 대장장이. 그동안 드워프들 사이에서 부대끼면서 열심히 했네.’ 박덕구의 그녀 황정연까지. “길드에서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보너스 주시는 거예요?” “물론이죠.” 별로 포옹하고 싶지 않다는 김예리의 얼굴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안아주는 모습. 이후에 커다란 덩치를 한 돼지가 내 몸을 꽉 껴안는 것이 느껴진다. 뼈가 부러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힘 조절은 하고 있는 모양. 훌쩍 거리는 것을 보니 눈물이 찔끔 튀어나온 것 같았다. 원체 정이 많은 녀석이니 이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막상 이런 모습을 보이니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도 고생 많았다.” “형님이 제일 고생 많았지.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지금부터 일은 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형님은 그냥 침대에만 누워 있으쇼.” ‘그런 소리는 웬만하면 하지 말자.’ 길드원들과 다 한 번씩 인사를 주고 받은 이후에 남은 사람이 한 명, 어정쩡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김현성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른 척 넘어가고는 싶기는 했지만, 다른 길드원들이 보기에 그리 좋은 장면은 아니다. 슬그머니 눈빛을 보내자 천천히 다가오는 녀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침대에 앉아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로 등을 두드려 주는 걸로 짧은 인사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저…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죄송합니다.” ‘그런 말은 얘들 없을 때 좀 해. 쟤네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그대로요.” “네….” ‘그러니까 우리 조금만 시간 두자. 얼마 안 걸릴 거야. 이번 일이 다 처리하고 술 한잔 같이해 줄게.’ 내 속마음을 제대로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김현성의 얼굴이 후회로 얼룩져 있었다는 것. 잠깐 거리를 두자는 뉘앙스로 계속 입을 열었으니, 아마 본인이 직접 밀착 마크하는 경우는 없을 것 같았다. 보여주기 식 호위로는 조혜진이나 정하얀, 시간이 난다면 희라 누나한테 부탁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괜스레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아… 오랜만에 만나서 분위기가 좀 훈훈해지는데… 여기서 바로 일 이야기하면 너무 정 없어 보이나.’ 미하일, 나탈리, 혹은 그 밖에 남아 있는 잔당들이 있었는지, 만약 있다면 제대로 생포는 한 건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지혜 누나를 불러오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 586 회귀자 사용설명서 586화 오랜만의 해후 그리고…(3) 무려 1년 만의 해후. 모두가 하하 호호 웃으며 대화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기절해 있었던 나흘 동안은 이렇게 다 같이 모일 기회가 없었던 것인지 말이 끊이지 않는다. ‘아니, 잘 보니까 그런 것 같지도 않네.’ 모두가 모이지는 않았지만, 이미 몇몇은 만나 식사라도 한 것 같았다. ‘그래도 매번 만나지는 못했을 거야.’ 당연한 것이 아닌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이들이 1년 만에 모였다고 한들, 각자가 가지고 있었던 임무나 책임까지 놓고 온 것은 아니다. 황정연과 선희영은 여전히 파란의 업무를 맡고 있는 상태였고, 김현성과 조혜진 역시 합동 훈련소를 마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김창렬이나 김예리 같은 경우도 여유롭지는 않다. 직업적 특성이 있었던 만큼 여러 가지 임무를 맡을 수밖에 없는 상황. 심지어 엘레나도 이종족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여유로운 건 정하얀과 박덕구 정도가 전부다. 사실 이 트롤러들에게 다른 걸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배가 아파온다. 첩보 임무를 맡길 수 없는 것은 당연했고… 그렇다고 행정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정하얀, 얘는 딱 보니까 여기로 온 이후에는 훈련을 따로 한 것 같지도 않다. 진작에 다른 일을 가르쳤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얘네한테는 뭘 마음 놓고 맡길 수가 없다. 아마 다른 길드원들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두 명을 프리로 내버려 두지 않았을까. ‘하얀이한테는 길드 일을 조금 가르쳐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한데….’ 여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면 사고를 칠 때 한 번 정도는 더 이쪽의 생각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역시나 기각…. 아마 내가 불안해서 가만히 있지 못할 것이다. 정하얀에 대해서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그녀로 인해 붕괴된 제5구역이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이후의 상황이 다시금 궁금해진 것은 당연지사. 빨리 이지혜를 만나 뒤처리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고 싶다. 다들 다른 할 일이 있지 않을까. 밀린 일이 남아 있지는 않을까. 라는 희망을 품어봤지만, 밀려 있는 업무는 무리해서라도 스탑하고 싶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래, 오늘 하루는 어울리자.’ 아픈 척 길드원들을 물리고 싶기도 했지만,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가능성이 크다. 차라리 벌떡 일어나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걸 어필하는 게 더 이롭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니 곧바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부축하기 위해 김현성을 포함한 몇몇이 달려오기는 했지만,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은 정하얀이었다. 허겁지겁 달려와 옆자리를 차지한 모습은 알 수 없는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 그 모습을 본 돼지가 만족스러운 듯 입을 열어왔다. “역시 우리 형님 챙겨주는 사람은 누님밖에 없다니까. 그나저나 움직여도 괜찮은 거요?” “물론, 체력이 조금 떨어진 것만 빼면 별문제 없다고… 그렇지 않습니까, 엘레나 님?” “네…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만….” ‘여기서 더 무슨 사족을 붙이려고 그래. 그냥 거기까지만 해. 괜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우리 밥이나 먹자.’ “조금 출출한 것 같군요.” 라고 말하면서 김현성을 빤히 쳐다보기. 사실 내가 식사를 권해도 별로 상관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파란의 길드마스터는 김현성이 아닌가. 무엇보다 현재는 파란 길드 소속이 아니기도 하니 작은 부분이라도 녀석이 권하고 제안하고 통제하는 것이 맞다. 예상했던 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여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렇게 모인 것도 오랜만인데 모두 함께 간단한 식사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말이라니까. 그럼 오늘 다 같이 술 한잔하는 거요?” “내일 업무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침 저녁때니까요.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슬슬 움직이도록 하죠.” “알겠다니까. 형님, 몸이 괜찮은 거면… 형님도 한잔할 수 있는 거요?” “아니요, 기영 씨는….”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 “…….” 순간 모두의 시선이 엘레나에게 고정된다. 내키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엘프 공주. 괜스레 미안해지기는 했지만 이런 날 같이 어울리지 못한다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다. 박덕구는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중. 얘는 왜 신난 건지 모르겠지만 정하얀 역시 텐션이 올라간 것 같았다. ‘나도 좋기는 하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나 역시 길드원들이 반갑다. 나무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붙어 있는 정하얀도 반갑고, 매번 시끄럽다고 느껴졌던 박덕구의 목소리도 반갑다. 안기모의 실없는 농담이나 적절히 분위기에 호응하는 유아영의 리액션도 마찬가지. 마음속으로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길드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싫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오랜만에 뭉친 길드원들은 곧바로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냥 평상복으로 나가기로 했다. 깔끔하게 그냥 하얀색 티에 청바지. 식당도 멀지 않아 금방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혜진 씨만 들어올 수 있었던 겁니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 “사실… 체스 두려고 갔었습니다.” “아….” ‘마음이 통한 건 아니었구나.’ “맨 처음은 여기로 먼저 왔었지만, 다른 현장으로 떠났다더군요. 곧바로 그리폰을 타고 청사로 곧바로 찾아간 겁니다. 당연하지만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혜진 누님 말이 맞다니까. 나는 그때 아래에 있었는데. 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거 아니요. 그냥 뭐 협상이나 다른 이야기를 진행 중인 줄로만 알았지. 갑자기 청사가 와르르 무너졌을 때는 정말로 간 떨어질 뻔했다는 거 아니요. 그때 본 형님 모습을 보고는 한 번 더 심장이 떨어질 뻔했고. 그렇지 않소. 기모 형씨?” “운이 좋았었던 것 같습니다. 마침 예리 씨와 덕구 씨와 함께 자리해 있어서….” “이런 게 다 운명인 거 아니요.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는 걸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가 아니요. 베니고어 여신님이 우리를 그쪽으로 인도한 거요.” ‘기도도 안 하는 놈이 무슨….’ “예리는 뭐 하고 있었는데?” 김현성과 함께 뒤따라오고 있는 김예리를 바라보자 조용히 입을 열어오는 게 눈에 보였다. “덕구 아저씨가, 잡아야 한다고 했어.” “누굴?” “혹시 도망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고… 청사 주변을 잘 봐달라고 해서.” ‘키야…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박덕구의 성장에는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다. “그래서 잡았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손으로 작게 브이 자를 그린 모습을 보니 성과가 있기는 있는 모양. 속으로 작게나마 ‘김예리 나이스.’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미하일과 나탈리가 현장을 빠져나갈 수 있을 리 만무. 두 반동분자들은 물론 남아 있는 결사단원들도 잡아 넣어놨을지도 모른다. “미하일이랑 나탈리는….” 이번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브이자를 한 번 더 그리는 김예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고, 장한 것아… 덕구야 너도 잘했다. 진짜, 잘했어.’ “그나저나 형님은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요?” “매일 똑같았지 뭐. 업무 보고… 가끔 혼자서 와인 한잔하고… 또 업무 하고… 너는 뭐했는데?” “나야, 여기저기 돌아다닌 거 아니요. 떠나기 전에는 1년이 무척 짧은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무척 길었다니까. 나랑 기모 형씨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다 설명하지도 못할 거요. 달랑 둘이서 던전에 들어가서 죽을 뻔했던 적도 있었다니까.” “그것도 있었지만, 식량도 부족해서 큰일이었습니다. 여행 중간에 자금이 떨어지기도 했고요. 길드에 도움을 받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조금 부끄러워서… 중간중간 들려 일을 하기도 했었는데 생각보다 대우가 괜찮더군요.” “베니고어 넷에서 봤어요. 리플도 많이 달렸던데.” 대화에 갑작스레 끼어든 것은 황정연이었다. ‘그래, 너는 그거 많이 할 것 같았어.’ 베니고어 넷에서 사는 것처럼 상주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린델에서 조치했어야 하는 거였는데… 근처 숲에 자리를 잡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대로 북부 쪽으로 밀고 들어갈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 뭐예요. 덕구 씨랑 기모 씨 덕분에 피해도 별로 없었고, 엄청 안심했어요. 아 린델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그 이야기를 드리려면 정확히 8개월 전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요. 사실은….” 왠지 모르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황정연이 저런 상태로 변할 때면 최대한 멀어지는 것이 좋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박덕구와 안기모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리자 이야기를 주고받는 유아영과 김창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조금 방법이 거칠기는 했지만, 확실히 많은 걸 가르쳐 주셨어요. 기초부터 배우는 게 처음에는 불만이었는데… 시스템이 알려주는 지식 외의 것을 얻은 것 같아서….” “그렇군.” “한번 보실래요?” “…….” 저기서는 드워프들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유아영의 이야기가 한창. 아까까지만 해도 멀지 않은 거리에서 걷고 있었던 조혜진은 어느새 슬쩍 떨어져 선희영과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업무적인 이야기인 것 같았다. ‘쟤네 둘은 여기 와서도 일, 못 버리네.’ 아주 훈훈한 모습. 이것저것 다양한 주제로 상대를 바꿔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밀린 회포를 푼다. 나 역시 간만에 진심으로 웃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음식이 나온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거울 연어 아니에요?” ‘아 저거 진짜 개 맛있었는데.’ 입이 짧은 내 혀와 위장을 위로해 주는 음식. 그동안 식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만나니 반가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게 왜 여기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기분은 좋다. 화이트 와인 한 잔도 분위기를 띄우는 데 딱이었고… 오랜만에 회식다운 회식을 하는 것 같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목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더 커지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그때 내가 이렇게 말했다는 거 아니요! 어이! 그 손 놓으라니까!” 자기 모험담을 풀어내는 녀석도 있었고, 침을 튀기며 토론하고 있는 이들도 보인다. “딱 한 잔만 더 드세요. 오, 오, 오빠.” “아… 뭐. 상관없을 것 같기는 한데.” “조금만 더요. 제, 제가 따라드릴게요.” “아니야. 아직 조금 남아 있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짠 할까?” “네, 네, 네.” “그동안 힘들지는 않았지?” “네… 조금은… 힘들었기는 했는데….” 한소라의 얼굴만 봐도 정하얀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눈에 보인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저 얼굴에는 지난 1년 사이에 일어났던 온갖 고난과 시련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즐거웠던 한때. 그 와중에도 쉽사리 말을 건네지 못하는 김현성을 보니 이쪽의 작은 계획이 성공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당분간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맴돌지 않을까.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1년 만에 만난 길드원들이 회포를 푸는 것은 새벽 2시 정도로 마무리. 실없는 이야기들이 많기도 했지만, 뜻깊었던 자리였다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으리라. 그렇게 다음 날 아침. 타이밍 좋게 나를 찾아온 이지혜가 입을 열어왔다. “어젯밤은 재미있었어요?” “뭐. 응, 그럭저럭.” “방문 앞에 가방이랑 편지 있던데… 누가 보낸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거 안에 넣어뒀어요. 오빠가 기절하듯 잠자고 있었을 때 처리한 목록 정리한 문서는 여기 있고… 베니고어 넷 반응은 여기에 있고… 피해 규모랑 현재 상황 정리한 건, 그 뒷장이네요. 아쉽지만 미하일 입에서 나온 정보는 따로 없었어요. 곧 죽어도 오빠랑 이야기하고 싶다지 뭐예요?” “끄응….” “뭐 해요. 일할 시간이라고요, 일. 이 양반이 술은 얼마나 퍼마신 거야. 빨리 일어나요. 그동안 푹 쉬었잖아요.” ‘그래, 지금 일어난다, 지혜야.’ 나 역시 기다렸던 시간이었다. # 587 회귀자 사용설명서 587화 오랜만의 해후 그리고…(4) 피곤함이 계속해서 누적되는 것 같은 느낌에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나보다 조금 더 망가져 있는 이지혜의 얼굴을 확인한 직후에는 천천히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부재중이었을 때 고군분투하며 현장을 정리한 것이 분명했다. 평범한 말에도 괜한 짜증이 묻어나 있는 것 같은 느낌. 평소의 말투와 다른 것을 보면 막중한 업무량에 스트레스가 쌓인 모양인 것 같았다. “사고 치는 사람 있고 수습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니까. 정하얀, 걔 진짜 짜증 나 죽겠어요. 혼자만 신나서 룰루랄라. 물론 걔 덕분에 그 악마 계약자 놈을 지옥으로 보내 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거라고요.” “피해 규모가 생각보다 큰가 봐.” “장담하는 데 5구역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거라고 봐요. 단순히 금이 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무너졌어요. 남은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전부 다 보수해야 될 거라고 봐요. 아마 실제로 보면 오빠도 기절할걸요.” “기절하기 전에 어느 정도 폭발이 있었는지는 확인했어.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지만… 복구 작업은 시작하고 있지?” “아니요. 시작할 수 있을 리가 있겠어요? 안쪽은 완전히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해 놨어요. 저도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이게 웬걸, 발견되면 안 되는 것들이 발견되지 뭐예요? 이거 전부 다 처리 못 하면 복구 작업이고, 나발이고 손댈 수 없을 것 같아서요. 혹시 모르잖아요? 저쪽에서 날조한 정보들이기는 하지만, 노동자들 손에 들어가면 쓸데없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일 처리 하나는 좋다니까.’ “베니고어 넷을 아무리 통제한다고 한들 입소문까지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미연에 방지해야죠.” “이거 정리하는 데 들어가는 인원들은 어떤데?” “전부 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일단 보세요. 얼마나 체계적으로 일을 진행했는지는 몰라도 날조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니까.” “1년, 아니, 어쩌면 계속해서 그 짓거리만 준비했을 텐데. 당연하지 않겠어?” 실실 웃으며 문서를 건네는 이지혜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얘도 진짜 철면피야.’ 분위기상 대충 호응해 주기는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꺼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괜스레 피식 웃으며 이지혜가 준 문서들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어 천천히 넘기자, 확실히 반동분자 놈들이 고군분투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노력했네, 노력했어.’ 어떻게 이렇게 내 뒷조사를 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자세하게 쓰여 있는 정보들이 보인다. 중간중간 유실됐는지 보이지 않거나 아예 단락이 빠진 것들도 보였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지장은 없다.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튜토리얼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분석해 놓은 문서들은, 어떤 의미로는 무섭게 느껴질 정도. 악의와 적의를 넘어선 정체불명의 집념과 분노까지 느껴졌다. 녀석들이 이런 정보들을 모으고 있었다는 걸,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게 가장 무섭다. ‘나도 많이 물렁해졌나 보네.’ 나름대로 조심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부족했던 모양이다. 이토 소우타 때 풀었던 환상 물약, 라이오스 악마소환 사태, 공화국과의 전쟁 당시 터졌던 언데드 소환, 27군단 습격 사태, 굵직했던 사건들은 물론이거니와 작은 사건들까지 촘촘하게 나열되어 있지 않은가. “각 파트마다 하위 문서가 수백 장이 넘어요. 중요한 건 그것보다 더 되고요. 뇌피셜이 대부분이고, 그 상황을 뒷받침할 증거도 부족, 심지어 어거지로 끼워 맞춘 부분도 보이지만, 이런저런 걸 전부 따져도 반동분자들이 철저했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네요.” “그런 것 같네.” “여신의 거울부터 손거울, 언론조작과 선동, 균열박물관 그리고 물약유통에 관련된 불공정거래나 시세조작. 심지어 블랙마켓까지. 여기서는 조금 놀랐다니까요. 인물 관계도까지 책 몇 권 분량으로 만들어놨고… 저에 대한 평가도 인상적이었어요. 아주 오빠보다 더한 쓰레기로 만들어놨더라고요.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물론 마음에 걸리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평가는 심했죠. 멍청한 놈들인 만큼 사람 보는 눈도 없더라고요.” ‘얘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이 5일째인데, 아직도 계속 발견되고 있을걸요. 청사가 무너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따로 고생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뭐 어쩔 수가 있나….” “그래서, 이건 어때요? 감상을 조금 듣고 싶은데.” “확실히 누나 말대로 날조 실력이 보통이 아니네. 그래도 딱 그것뿐이야. 이런 걸 누가 믿겠어.” 그렇기 때문에 녀석들 역시 이 날조된 정보들을 활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니고어 넷에 활용하면 중간에 걸릴 게 분명했고…. 언론사를 이용한다고 해도, 이런 문서들을 세상 밖으로 내보낼 정도로 간 큰 자식들은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발로 뛰는 것과 아군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교육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전부였을 터. 반동분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 무리가 어째서 그렇게 완벽하게 세뇌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제한된 장소에서 이런 걸 보고 있으니, 세뇌가 되지 않고 배기겠는가. ‘5구역 주변은 조금은 신경을 써야겠는데.’ 다른 게 역병이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런 것이 역병이다. 녀석들의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 역병이 그리 멀리까지 퍼져 나가지는 못했겠지만, 어딘가에 침투해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100에 99명은 흔들리지 않겠지만, 남은 1명이 흔들릴 수도 있는 만큼 완전히 박멸하는 게 옳다. “미하일은 어디 있는데.” “여기 바로 아래에 있어요. 지금 바로 내려가게요?” “응,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잠깐 준비 좀 하고… 그래도 복장은 제대로 갖추고 가야지. 혹시 따로 건드리지는 않았지?” “화풀이만 조금 했어요. 사실 제대로 된 작업은 아직 못 들어갔고요. 파란 길드에서는 본인들이 직접 심문하겠다는데, 오빠 핑계 대니까 조용해지더라고요. 아무튼, 빨리 준비해요. 지금 바로 내려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혹시 모르니까 혜진이랑 박리안한테 연락 좀 해주고.” “호위가 필요해요?” “보여주기식으로라도 필요해서 그래. 아, 그리고… 혹시 5구역에서 악마소환에 쓰인 마법진이나 증거들 발견된 거 있어?” “아직은요. 이제 슬슬 나올 것 같기는 해요. 쥐새끼들처럼 지하 동공에서 지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바로 어제까지는 그 장소도 완전히 매몰된 상황이었어서… 무슨 말 하는지 알겠죠?” “응, 대충 알겠네.” 말하자면 작업할 수 있는 인원이 부족하다는 것 같았다. 단순히 철거 정도로 끝날 일이었다면 5일 안에 정리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현재 5구역은 하나의 커다란 증거품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조심스럽게 처리해야 했고, 그만큼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악마의 마력이 대기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개소리를 하면서까지 위원회가 현장을 꽉 잡고 있는 이유였다. ‘조금 걱정했었는데, 통제가 잘됐나 보네.’ 내가 자리를 비웠던 만큼 모든 게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아무튼 간에 간단하게 세면을 마친 이후에, 복장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오니 이지혜가 이쪽을 재촉하는 게 눈에 보였다. 미리 연락을 넣어놨는지 밖에서는 조혜진과 함께 이쪽을 기다리는 중. 아침부터 불려온 것으로 모자라 할 일도 많았던 조혜진은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호위의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길드마스터가 호위는 자신이 직접 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왜 굳이 저를 데려가는 겁니까. 안 그래도 기다리고 계신 것 같던데.” “뭐 이유가 중요합니까. 나랑 같이 움직이면 혜진 씨도 좋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끝나고 체스나 둬요. 오늘 업무는 미뤄두고….” “부길드마스터만 바쁜 게 아닙니다.” “두 분 사이 좋은 건 알겠으니까. 빨리 움직여요. 오늘 할 일 많으니까요.” “누가 누구랑 사이가 좋다는 겁니까.” ‘아니, 그렇게 부정하면 내가 뭐가 돼… 살짝 섭섭해진다, 야.’ 농담인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혜를 향해 조용히 말을 내뱉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지혜와 조혜진이 함께 있는 모습은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캐슬락의 고집불통이라는 칭호마저 달고 있었던 조혜진이 그녀를 어떻게 대할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저 둘은 절대로 친해질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한 자리에 있는데도 느껴지는 어색한 공기에 괜스레 숨이 막혀올 지경, 서로를 바라보는 두 눈빛이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다. ‘친해지길 바래’라도 찍고 싶기는 했지만, 어차피 매번 부딪칠 사이도 아닌데 구태여 내가 앞장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길드 마스터가 부 길드 마스터의 안전에 신경 쓰고 또 신경 쓰라고 말씀하셨는데… 하얀 씨라도 불러오는 게….” “진심입니까?” “실언이었습니다.” 급격히 조용해지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현재 내가 가는 곳이 정말로 위험한 곳이었다면 정하얀을 데리고 갔겠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악마 계약자들을 만나는 것도 아니다.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미하일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온몸이 결박되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놈을 어째서 조심해야 되는 건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 마음 같아서는 조혜진도 떼어놓고 가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시야가 점점 어두워졌다.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직접 관리 감독하고 있는 형무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나 역시 이 장소를 찾은 것은 오랜만. 비교적 깔끔하게 보였던 환경은 안으로 진입하면 진입할수록 달라지기 시작한다. 간헐적으로 비명도 들려왔고 냄새도 점점 역해진다. 조혜진이 살짝 표정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별다른 말을 해오지는 않았다. 이윽고 커다란 문을 다섯 개 정도 지나고 나니, 비로소 보고 싶었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 배신자 새끼.’ 통칭 ‘조력자’ 미하일. 악마 계약자들의 뒤를 봐주고 대륙의 빛을 독살하려고 했던 전범. 대륙인들의 혈세로 대륙의 적을 지원하고 있었던 희대의 사기꾼. 온갖 불법적인 행위를 자행하며 노동자들 벼랑 끝으로 내몬 장본인. 앞에 널린 수식어만으로도 인간쓰레기 타이틀을 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 누가 녀석이 범죄자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으랴. ‘얼굴 좋네, 이 새끼는.’ 의자에 묶인 채로 꾸벅꾸벅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을 보고 졸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지만,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체념한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곧 죽어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표정은 아니다. 아직도 본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참… 오랜만입니다.” “오랜… 만이로군요, 위원장님.”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는데… 상황이 이렇게 돼서 참 아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째서 제가 여기에 있는지는 잘 알고 있을 테니… 뭐,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거 한 번만 물어봅시다.” “…….” “왜 배신한 겁니까.” “…….” “왜 대륙을 등에 지셨습니까. 왜 본인의 손으로 호가호위하면서 살 기회를 던져 버렸나, 이 말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민망하지만, 저는 나름대로 당신을 신임했어요. 그렇기에 당신을 중역에 앉힌 거고, 기회를 준 겁니다. 근데 당신은 내 기대를 배신했어.” “…….” “이래 봬도 제가 마음이 매우 여립니다. 나 참, 독이 든 차가 눈앞으로 떠억 왔을 때 얼마나 상처받았나 몰라. 그러니 말해봐요, 이 양반아. 뭣 때문에 배신했어요?” “신념.” “뭐?” “신념입니다.” “…….” “…….” “혹시 이런 말 들어봤어요?” “…….”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신념을 가지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는 말, 들어봤어요?” # 588 회귀자 사용설명서 588화 모르는 미래(1) “멍청한 사람들이 신념을 가지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어요. 지금 보니, 딱 당신 같은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이 대륙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여기에 뭐가 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있으니 오죽할까. 차라리 다른 사람들처럼 가만히 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신념은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악마 계약자들이 만든 그 광경을 보고서도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온답니까.” “방금 위원장님께서… 제게 한 말씀이야말로…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지적 생명체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며 살아갈 자격이 있습니다. 스스로의 신념을 가지고 스스로의 의지로 자유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허억… 그게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 “위원장님께서… 민중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우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말을 이어나가기가 힘든지, 간헐적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개 소리 하네,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지 않은가. ‘지적 생명체? 스스로 판단?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아?’ 대륙에 없는 애니메이션을 너무 많이 봤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와 꽂힌다. “만화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나 봅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는데… 저만큼 민중을 사랑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멍청하지도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히 일어설 수 있는 이들입니다. 저는… 위원장님의 방식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대륙의 약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대륙의 암입니다. 민중들을 속이고 그들의 생각을 획일화하는 독재자에 불과합니다. 그들을 우매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당신이에요. 그들을 바보로 만드는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 “대륙은 썩어가고 있습니다. 위원장님의 욕심이 대륙 전체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말 잘하시네. 우리 미하일 님. 내가 이런 모습을 좋아했었던 건데… 그래서 말 다했어요?” “비록 이번 일은 실패로 끝났지만, 저는 절대로 위원장님께 반기를 든 것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을….”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모르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고 한들, 제가 한 일들은 모두 대륙을 위해서였어요. 미하일 님께서 제가 그들의 권리를 박탈했다고 느끼실지언정, 제가 대륙을 위해 기여했다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고개를 돌려서 대륙이 얼마나 발전됐는지를 보세요. 교국 먼저 짚고 넘어가 봅시다. 신성교국이 예전에는 제국이라고 불렸던 사실을 잊고 계셨나 봅니다.”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황제와 황녀에서 오스칼과 위원장님으로, 귀족에서 의회로 바뀌었을 뿐이지 않습니까. 혁명은 민중의 승리가 아니라 위원장님의 승리였습니다. 신성한 민주주의라는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현재 교국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 신의 이름을 팔아 권력을 확고히 하려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의회의 절반 이상이 당신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언론기관과 행정기관을 당신이 주무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같은 게 아닙니다. 단순히 권력이 이동됐을 뿐이에요. 오히려 더 악질적인 방법으로 말입니다.” “하하, 제국의 혁명에 가담한 민주투사들이 이 말을 들으면 무척 섭섭하게 생각할 겁니다. 과거의 교국에서 신분제도를 뜯어낸 건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평민과 귀족을 구분하지는 않지만, 계급이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교국은 여전히 신분제도에 속해 있습니다. 그 계급을 만든 것 역시 당신이었고요.” “결과적으로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빈부 격차는 줄어들지 않았지요.” “그렇게 민중들을 생각하시는 분이 노동자의 아픔은 무시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그들에게는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대를 위한 희생이었군요. 키야… 거, 대단하십니다. 재미있기도 하고요. 코에 붙이면 코걸이고, 귀에 붙이면 귀걸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십니다. 나 참… 본인이 저질렀던 죄는 대를 위한 희생인데… 왜 제가 하는 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 잠시 입을 다물고 있는 미하일의 모습이 보였다. 당황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해도 궤변처럼 들리기는 했으니까. “뭐, 미하일 님의 말씀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 “하지만 이거 하나는 짚고 넘어갑시다. 저는 인간을 존중합니다. 당신 생각처럼 인간을 부정하거나 바보로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개인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절대로 인간들을 바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몽을 통제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이 새끼들이 너무 똑똑해서 문제라니까요.” “…….” “한 놈만 똑똑하면 문제가 없는데, 이 똑똑한 놈들끼리 서로 싸우고 뭉치는 게 또 문제예요.” “당신은….” “평소였다면 뭐, 저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겁니다. 어디서 뭐가 일어나던 누가 누구랑 치고받고 싸우던, 또 어디서 내가 모르는 개짓거리를 하든지 간에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랍니까.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건데….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그런 개짓거리를 그저 바라만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미하일 님. 인간을 믿어야 된다고 민중들을 믿어야 된다고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그건….” “그 결과를 보세요.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럴까. 기억을 더듬어서 대중들에게 선택을 맡긴 결과가 어땠는지 한번 보세요.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가까이에서 있었던 일부터 차례대로 더듬어 보세요. 아니, 제가 들어오기 전, 몇 년 전 대륙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얼마나 평화로웠으면 우리 미하일 님께서 옛날을 그리워하실까. 얼마나 행복했으면 민중 자유를 외치며 그들을 널리 이롭게 하려고 하실까 몰라.” “…….” “출산률이나 경제성장률도 천장을 뚫을 것처럼 치솟아 올랐나 봅니다. 평화로웠겠네. 다툼도 일어나지 않았고,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나 보네. 내가 씨발, 대륙에 들어온 게 잘못인가 봐. 내가 알고 있던 사실과는 많이 다른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 “당신도 알다시피 그런 거 아니잖아.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기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았습죠. 여기저기에서는 분란이 끊이지 않았고, 서로 으르렁거리며 모두 다 함께 똥통 속으로 잠수하자고 독려하는 분위기 아니었나.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참 이상하네. 내 기억력이 안 좋은 편이 아닌데 말이야.” “위원장님이 옳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장 공화국의 경우만 봐도 그래요. 결사단 그놈들도 참 멍청한 놈들이에요. 추억팔이도 정도껏 해야지. 진청, 그 사람도 애초에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전범이에요. 전쟁을 먼저 일으킨 것은 공화국이고, 피해자의 입장에 있었던 것은 교국과 파란 길드였습니다. 공화국이 일으킨 사고가 어디 그것뿐입니까. 접견 지역에서는 매번 소규모 전투가 일어났었고, 하루에도 수십 명이 죽었습니다. 이종족들은 또 어떻습니까. 수만의 이종족 노예들이 고통받았고 미하일,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인간들에게 고통받고 차별받았습니다. 이종족과의 전투 역시 끊이지 않았고,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약자는 상대적 약자들을 짓밟았어요. 별것 아닌 이유로 다투고 서로를 향해 검을 들이밀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미하일 님. 제 자랑을 하는 건 아닙니다만, 제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인류가 하나로 뭉쳐 영차영차 하면서 새 미래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뻗어 나갔을 것 같습니까?” “…….” “대륙 역사 몇 천 년, 몇 만 년 동안 왜 인류는 새 미래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뻗지 못했을까… 미하일 님이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간들이 통제 없는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들은 행복한 미래를 향해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나는 모르겠는데… 답을 알고 있다면 조금 알려주세요, 미하일 님.” “자기합리화일 뿐입니다. 당신은 독재를 합리화하고 있어요.” “누가 관심이나 있답니까.” “무슨 말을….” “내가 들고 있는 짐 때문에 여기서 이 지랄병을 하고 있는 거지. 당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원대한 계획이나 목표 같은 건 없습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 사람들 챙기려고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있다 이거예요. 저 스스로의 얼굴에 기름칠하는 건 아니지만, 결과만 봅시다. 새끼야, 지금 대륙의 전쟁이 멈춘 게 누구 덕분인 것 같아?” “…….” “수만 년 동안이나 아무 의미 없이 치고받던 놈들이 일순간 아가리를 다물고, 하나 된 과업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게 누구 덕분일 것 같아? 지금부터 제가 개인에게 판단을 맡기고, 모든 통제를 풀어놓는다고 가정해 보자.” “위원장님의 방식은….” “계속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미하일 님의 의견에는 무척 부정적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결사단, 그 반동분자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자고. 어쩌면 당신 말처럼 행복하고 모두가 하하 호호하는 날이 올 수도 있어요. 일순간 모든 인간이 인류애를 깨닫고, 개탄의 눈물을 흘리며, 손을 맞잡을 수도 있다고 봐. 근데 나는 의심이 많은 성격이거든. 혹시 모를 상황까지 가정하면서, 나 개인이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까지 그런 선택을 할 이유가 없다, 이거야.” “방식은 틀렸습니다.” “어디서 개짓거리 하는 새끼들이 나타나서 물이 흐리고 개판을 쳐놓으면, 지금까지 그리고 있던 그림이 전부 개박살이 나는데 당신이라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겠어? 그 커다란 리스크를 지고서, 자유니 통제를 벗어나야 한다느니 떠들 수 있겠냐고. 나는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 쪽에 패를 던진 거야. 이상주의자들의 뜬구름 잡는 개소리보다는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역사를 보고 배운 거라고요, 미하일 님.” “…….” “X 같은 인류애 타령은 소년 만화 책에서나 떠들어 새끼야. 나는 리스크를 내버려 두면서까지 대륙 구하기 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알겠어? 오히려 이번 사건으로 한 번 더 확신할 수 있었다고, 새끼야. 나처럼 이해타산 따지는 인간이 정말로 아무 의미 없이 이 성벽에 수백만 금화를 쏟아붓는 줄 알았어?” “그, 그건….” “지혜 누나.” “왜요?” “카스가노 유노 좀 데리고 와줘.” “네, 그렇게 하죠.” “고마워.” “사실 보여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쟤가 안다고 해서 뭐 달라지는 것도 아닐 텐데… 뭐, 아무튼 전할게요.” 이지혜가 방을 나가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미하일, 이 새끼는 계속해서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표정. 방음 마법이 쳐 있어, 조혜진이나 박리안은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지만, 흘러가는 분위기로 대충 예상하는 것 같았다. 조금 오래 기다려야 될 것 같다는 내 걱정과는 다르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카스가노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아니다. 이 자리에 앉은 후에 카스가노와는 간혹 만나기도 했으니까. 조용히 인사를 건네오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상황상 긴 말은 필요 없다. 카스가노 유노를 향해 살짝 손짓하자, 천천히 미하일 쪽으로 다가가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뭘 하려고 하는 겁니까… 지금….” “입 닥치고 눈이나 똑바로 쳐다봐요.” “당신들의 뜻대로는….” “거지 같은 망상하지 말고 그 여자 눈이나 쳐다보라고.” 그렇게 그녀와 녀석의 눈이 마주친 순간, 정신을 잃은 듯 잠잠해지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 역시 마찬가지. 곧바로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 589 회귀자 사용설명서 589화 모르는 미래(2) 카스가노 유노와 항상 봐왔던 검은색 세계가 아니다. 시야에 비치는 것은 머지않은 미래에 일어날 일. 비둘기 같은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인간 병력. 창을 내뻗자 저항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병력. 파괴된 도시, 계속해서 들려오는 비명, 피로 만들어진 강, 쌓여 있는 시체 더미, 검붉어진 하늘 아래에서 보여지는 시산혈해. ‘살려… 살려줘.’ ‘아아아아아아악!’ ‘신이시여… 진정으로 저희를 버리나이까.’ 싸우고 있는 이들 역시 눈에 보인다. 성벽 위로 쏟아지고 있는 천사 병력과 그걸 막아서고 있는 인류 연합의 싸움은 눈대중으로 봐도 처절해 보인다.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뒤섞인 전장은 뭐라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의 처참함이 감돈다. 팔 하나를 잃은 전사가 악에 받친 비명을 지르며 검을 계속해서 휘두르는 장면도 보였고, 두 다리가 잘린 병사가 고통을 참아내며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도 시야에 비쳤다. 그동안 많은 전쟁을 겪어봤지만, 이 정도로 눈살 찌푸려지는 싸움이 있었을까. ‘어머니… 어머니.’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대륙을 위한 싸움이다. 우리 뒤에 가족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대륙의 빛들아.’ ‘절대로 천사의 탈을 쓴 괴물들에게 대륙을 넘겨서는 안 된다.’ 마력석으로 만들어진 성벽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바깥 신의 군대로 보이는 이들이 왕국 연합을 뒤덮는다. 공포에 휩싸인 대륙인들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고,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비는 이들의 얼굴이 두 눈에 톡톡히 들어온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천사를 가로막았던 어미는 천사의 창에 심장이 찔리고, 그 모습에 분노해 달려든 아비는 목이 잘린다. 지옥을 그대로 현세로 옮겨 놓은 듯한 풍경이 아닌가. 여러모로 입술을 깨물게 되는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민간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가슴 아픈 그림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문제가 된 장소는 최근 사건 사고가 많았던 5구역. 무너진 성벽을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을 때의 미래라고도 볼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이제는 이런 것도 볼 수 있나 보네.’ 카스가노 유노의 능력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히 저번에는 보이지 않았던 장면이다. 아니, 시기는 같지만, 그 결과가 다르다. 분명히 조금 더 팽팽한 국면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반해, 전진기지가 무너지며 형편없이 밀리고 있는 모습들이지 않은가.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는 와중에도 눈 앞을 흘러가는 미래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파란 길드원들과 김현성,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디아루기아와 빛 폭탄 물약을 던지는 나, 교국 8좌의 모습과 연신 마법을 터뜨리며 병력을 줄이는 정하얀. 피를 뒤집어쓴 상태로 천사들의 날개를 잡아 뜯고 있는 차희라. 순식간에 난전이 되어버린 전장의 상황은 내가 그리고 있었던 그림과는 많이 다르다. 미하일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장면이기는 했지만, 내게도 도움이 되는 장면들이 많다. ‘이건… 베드 엔딩이네.’ 아직 끝까지 본 것은 아니었지만, 전황 자체는 뒤집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이대로 무난하게 흘러가기만 해도 비둘기들에게 하나둘 뒈져 나가는 건 시간 문제나 다름없을 터. 박덕구를 위시한 파란 길드의 진영 역시 안전하지는 않다. 혹시나 다른 정보가 있을 수도 있는 만큼 조금 더 집중하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외관을 가진 천사가 가까이에 있는 대상을 향해 창을 뻗는 것으로 카스가노 유노의 능력은 마무리됐다. ‘…….’ 푸욱. 너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딱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매번 여기가 끝이네?’ 조금은 아쉬웠던 것이 사실. 혹시나 조금 더 쓸만한 정보가 있지 않을까… 했지만, 만약 카스가노가 새로운 무언가를 봤다면 부르지 않아도 찾아왔을 테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으리라. 잠시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정신을 다잡은 것은 당연지사. 근처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우웨에에에에엑….” ‘…….’ “우웨에에에에에에에엑….” 눈앞에 의연하게 서 있었던 녀석이 시원하게 토악질을 시작한 것. “허억… 허억… 허억… 우웨에에엑… 우웨에에에엑! 우웨에에엑….” “봤습니까?” ‘말할 수 있는 상태처럼 보이지가 않는데.’ 그 말 그대로였다. 얼굴은 이미 일그러진 지 오래. 안에 있는 것을 게워내는 게 고통스러워 흘리는 눈물인지, 아니면 방금 본 것에 대한 충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모습은 가관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시간이 조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구역질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추해 보이지 않은가. “우웨엑… 웨에에엑… 허억… 허억… 허억….”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충격받으신 모양입니다. 잠깐 이나마 미래를 엿본 감상이 궁금한데. 어떻습니까?” “웨엑… 허억… 허억….” “조금 어떠셨어요?” “허억… 허억….” “내가 어땠는지 묻잖아.” “…….” “…….” “지… 지금 제가 우웁… 제가… 우웁… 제가 본….” “구차하게 믿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미하일 님. 믿든, 믿지 않든 간에 그건 당신 자유고… 내가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지겹잖아요. 이걸 본 사람은 당신이 네 번째예요. 조금 더 기뻐하셔도 됩니다. 울상 지으실 필요 하나 없어요.” “지금… 제가 본 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만, 머지않은 시기에 벌어질 미래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시간이 조금 더 남았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몰라요.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아니면 5년이 걸릴지, 복장이나 외관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최대 10년이라고 봅니다. 최소가 1년이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믿든, 안 믿든 간에 그건 당신 자유라고. 저는 제가 보여줄 수 있는 걸 전부 보여줬어요, 미하일 님. 대륙에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고 발표했었고, 지속해서 그 건에 대해 대륙 전체에 경각심을 심어줬습니다. 음모론에 취한 병신들한테는 대륙을 지배하기 위한 악의에 가득 찬 계획으로 비치겠지만, 이런 새끼들을 어떻게 하나하나 신경 쓸 수가 있었겠어요. 저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베니고어 님께서 강림하셔서 직접 언급한 건 기억에서 지워지셨나 봅니다. 믿지 못하는 것 같아서 더 정확한 증거를 보여드렸는데, 아직도 믿지 못하시는 모양이네요.” “…….” “미하일 양반. 제가 진짜로 할 짓이 없어서 그 골드를 처박아서 성벽을 올리고 전진기지를 만드는 줄 알았습니까? 독재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 위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대륙 합동 훈련소에 그만한 돈을 투자한 줄 알았어요? 그런 미친 새끼가 세상에 어디 있답니까.” “그건… 우웁.”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게 이거예요, 미하일 님. 말을 해도 들어 처먹지를 못하는… 그러니까 당신 같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데, 제가 어떻게 모든 선택을 민중에게 맡기는 소년만화 주인공 같은 행동할 수 있겠어요. 이게 아니면 전부 다 뒈지겠거니 싶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세요? 이 일 외에 다른 쪽으로는 도박하고 싶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셨습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저도 윤리적으로는 잘못됐다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가끔 세상과 타협해야 하는 법도 있는데. 트롤리 실험이라고 들어봤습니까. 저는 한 명보다는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레버를 당기는 쪽입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경우에는 그 한 명을 희생할 필요 없어요.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서 선택해야 하는 게 한 명의 희생이 아니라… 당신이 그렇게 울부짖었던 작은 자유라 이 말입니다.” “…….” “개똥밭을 굴러도 살아 있는 게 더 좋잖아요. 전부 다 같이 뒈지는 것보다는 아주 조금 비윤리적인 게 더 좋잖아, 그렇지 않나?” “다른 방법이…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겁니다. 위원장님은… 영특하신 분입….” “저 안 영특합니다. 제가 진짜로 똑똑했으면 미하일 님이 그렇게 외친 다른 방법을 찾아냈을 겁니다. 참고로 대륙인들을 한 번 더 믿어보자는 개소리는 목구멍에 다시 넣어두세요. 이미 시도해 봤고, 방금 봤던 것보다 더 지옥 같았던 걸 보고 왔으니까.” “…….” “…….” “어째서, 어째서 제게 이런 걸 보여준 겁니까.” “어째서 보여줬다고 생각하십니까, 미하일 님은.” “잘,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잘 생각해 봅시다. 어째서 제가 이런 걸 보여줬다고 생각하세요?” “…….” “…….” “이미 답을 알고 있을걸.” “제 도움이 필요하신 거군요.” “…….” “아마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위원장님께서는… 제가 그들을 막는 데 도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제게 이런 장면들을 보여주신 게 아닙니까? 저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이 부족한 사람에게 맡기실 일이 있기 때문… 때문에….” “기다렸던 대답입니다.” “어떤 일을 맡기시려고 하시는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는 아직도… 아직도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위원장님께서 이렇게 직접 오셔서 저를 납득시키려고 하시는 건지, 저런 상황에서 제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건지, 무엇이 진짜 옳은 건지… 또 제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슴 속에서는 여전히 위원장님을 부정하고 있습니다만, 이성은… 위원장님을 따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대륙을 지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만약 제가 본 게 정말로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면….” “하지만 정답은 아니네요.” “…….” “기다린 대답이기는 했지만, 정답은 아니었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푸흣… 푸하핫.” “어째서 웃으시는 겁니까.” “푸흐하허헤헤핫. 그야 웃겨서 웃지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신 거예요? 내가 당신한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이걸 다 보여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아쉽지만 오답입니다, 미하일 님. 이유야 뭐 별 게 있겠습니까.” “지금… 무슨….” “진짜로 아무것도 아닌 이유예요. 그냥 당신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거든.” “뭐… 뭐?” “네가 틀렸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고, 푸…푸하흐하핫. 그래서 보여준 거야. 뭐 거창한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어요? 그냥 화풀이였다고… 푸흐흐흣, 신념, 신념 하고 울부짖는 꿈 많은 이상주의자한테 조금이라도 현실이 어떤 건지 알려주고 싶어서 보여준 거라 이 말입니다, 푸흐하하핫. 그래야 내가 덜 억울하잖아. 네 눈빛이 얼마나 기분 나빴었는지 알아?” “와… 알고는 있었지만… 오빠… 진짜 악취미에… 쓰레기 같아요.” ‘응, 지혜야. 그거 아니야.’ “제가 왜 당신을 한 번 더 기용하겠어요? 당신이 꿈꾸는 세상이었다면 ‘한 번 싸웠으니 동료다’라는 흐름으로 가겠지만… 여기서 그딴 일이 생길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한번 배신한 사람은 절대로 안 믿어요. 한번 통수를 친 새끼는 반드시 한 번 더 통수를 치게 돼 있거든. 푸흐하하핫, 뭐? 일을 맡겨? 뭐 이제 와서 대륙 구하기에 합류라도 하고 싶어진 겁니까? 이제 와서 빛과 함께 싸우고 싶다고요? 그럴 수는 없지, 이 악마 조력자 새끼야.” “미… 미친놈….” “엿이나 까 드시고 정보나 뱉으세요, 이 양반아. 그게 그나마 네가 대륙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 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590화 키 플레이어(1) “생각보다 알고 있는 게 별로 없네요.” “그래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사실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어. 딱 내가 예상했던 범위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 같네.” “조금 더 털어볼까요?” “굳이 누나가 할 필요가 있어?” “차라리 교황청 쪽에 넘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탈리 그 여자도 같이 이단 심문관들한테 넘기는 게 속 편하잖아요. 이단 심문관장이 안 그래도 최근에 연락이 왔었거든요. 본인들이 직접 심문하고 싶다고. 오빠가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일단 대답하지는 않았는데… 사안이 사안인 만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글쎄… 어떻게 할까. 귀찮은데 그냥 넘겨 버려?” “알고 있는 건 전부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나 참. 아까까지만 해도 자존심 지키던 사람이 불과 몇 시간 사이에 많이도 망가졌네요. 이래서 지킬 게 있는 사람들은 이딴 헛짓거리를 하면 안 된다니까. 우리 오빠가 조금 무른 면이 있어서 그렇지, 나였으면 이렇게 물렁하게 안 끝내. 장담하는데 너희 두 연놈 전부 대가리만 남은 채로 뻐끔뻐끔 입 벌리고 있었을 거야. 살아 있는 게,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줄 수도 있었다고. 자비에 감사하는 게 맞겠네, 그렇지?” “…….” “…….” “그냥 넘겨 버려요.” “사실 이제는 어떻게 되든 별로 관심도 없는데… 기왕이면 살아 있으면 좋겠는데. 공개 처형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그런 거 보여줄 때도 한 번 됐잖아. 아니야, 그래도 숨이 붙어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면 처우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여기에 박아 놓을게요. 이단 심문관장이 계속 연락 올 것 같으니까. 이건 오빠가 좀 막아줘요.” “응, 더 이상 여기에 뭐 볼 일도 없을 것 같고… 그만 나가자.” “네, 그런데 오빠.” “응?” “왜 마지막에 그런 식으로 말한 거예요?” “내가 뭐라고 했었어?” “조금만 더 분위기 잡고 들어갔으면 대륙을 위해서. 저엉말로 어쩔 수 없이 윤리와 비윤리 사이에서 고민한 정의로운 흑막 정도는 될 수 있었던 거 아니에요? 그것 하나 놀리고 싶어서 푸흐하핫 웃으면서 이미지 버린 게 너무 아깝다.” “어차피 오늘 이후로 안 볼 사람인데, 그런 이미지가 뭐가 중요하겠어. 그냥 기분이 더럽더라고. 끽해야 범죄자 새끼들이 본인들이 끝까지 옳다고 생각하는 게 우습잖아. 지금까지 대륙에 뭣 하나 한 것 없는 놈들이 이제 와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훈수 두는 꼴이 어이없었기도 했고… 흠… 저기요, 미하일 님. 만약 당신이 제 입장이었다면 뭘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 “아마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걸. 이미 중간에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해서 뒈졌을 거라고… 뭐, 더 이상 말하는 것도 입 아프고… 아무튼 잘 지내세요, 미하일 님. 가끔 특식 넣어드릴 테니까, 용기를 잃지 마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공부 열심히 하시고요. 우리 미하일 파이팅! 푸… 흐흐흡.” “통쾌한 건 알겠는데 그만 좀 놀려요. 무게 좀 잡아보라고요.” 괜한 폼 잡는 것보다는 가뭄으로 허덕이는 내 가슴에 단비를 내려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약하게 한숨을 쉬는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본인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이다를 들이켠 표정이지 않은가. 희미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을 보면 얻은 정보 역시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리라. ‘뭐, 단서 정도는 얻었으니까.’ 하지만 부족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일단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악마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도 적다. 엄밀히 따지면 미하일은 결사단의 일원이 아니니, 알 리가 없었을 테지만…. 개미 코딱지만 한 정보 정도는 머릿속에 처박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악마 계약자 새끼들.’ 하지만 예상한 것보다는 주력 메뉴의 개수가 부족한 상황, 다른 건 몰라도 계약한 악마의 이름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했건만, 그것조차 베일에 감추어져 있다는 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베니고어가 알고 있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5구역에 무언가 단서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지하에 은닉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뭐가 됐든 간에 그곳으로 가는 게 최우선 사항이라 여겨졌다. ‘카스가노도 같이 가는 게 좋겠네.’ 악마 계약자 놈들의 은닉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엿볼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어떻게 악마를 소환한 건지, 또 누구와 계약한 건지, 계약 조건이 무엇인지 들어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이득이 아닌가. 정말로 벨리알보다 상위의 악마가 맞다면…. ‘콩고물이 떨어질 수도 있고….’ 뭔가 얻을 게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악마 소굴을 탐험할 인선을 머릿속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일단 김현성은 아웃. 아무리 우리가 서로의 속내를 까고 진솔한 이야기를 했다고 한들, 악마에 대해 반감을 품은 녀석에게 같이 가자고 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단순 잔당의 소탕이었다면, 기쁜 마음으로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었겠지만…. ‘원정의 목적 자체가 다르니까.’ 이걸 위해 쓸데없는 연기까지 하며 밀어내지 않았던가. ‘한소라는 데려가야겠네.’ 조금 불안하지만, 정하얀도 데려가는 게 맞다. 흑마법에 조예가 깊은 두 명이니 지식수준이 상당할 게 분명했다. 특히 그 누구보다 한소라에게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악의에 찬 결사단이 본인들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 존버하며 모아놓은 연구 성과가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인상적이있던 자살 폭탄 테러부터 사지가 절단돼도 죽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의 비밀, 그리고 힘의 원천. 제삼자에게는 끔찍한 현장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보물창고나 다름없는 장소처럼 느껴질 것이다. 심지어 어둠의 역병군주로서 사용할 수 있는 촉매나 실험결과들이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 둘 모두에게 윈 윈. 특히 흑마법에 대한 정보가 압도적으로 부족한 그녀에게 그 장소는 별천지나 다름없다. ‘이 새끼들이 대륙을 위하기는 했네. 이런 것도 인계해 주려고 하고… 알고 보니 빌런이 아니라 히어로였네. 소름이 돋는다, 소름이.’ 카스가노, 나, 정하얀, 한소라. 이 정도로 후위 인선은 마무리. 굳이 전위가 필요할까 싶기도 했지만, 혹시 모를 잔당이 헛짓거리를 해올 수도 있는 만큼 데려가는 게 옳다. 박덕구와 조혜진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었지만, 길드 내 전위 중에서는 데려갈 수 있는 인원이 이 둘밖에 없다. ‘친위대라도 조금 데려가면 되겠지, 뭐.’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자,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카스가노 유노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그러고 보니 너무 아무 말이 없어 깜빡 잊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주… 원장님.” ‘주원장은 또 누구야?’ “5구역으로 가서 방금 들었던 곳을 조금 둘러볼 생각인데. 함께 가셔도 괜찮겠습니까?” “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이옵니다.” “그리고… 혹시 그 이후의 이야기는….” “죄송합니다. 아, 아직까지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검은색 세계의 이야기도, 미래의 이야기도… 저번에 함께 바라보신 이후에는… 송구합니다.” “아니요, 카스가노 님이 죄송할 일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으니까요. 앞으로는 작은 변화라도 좋으니 뭔가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으면 곧바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고 계셨겠지만, 눈에 보일 정도의 커다란 변화는 미래에 곧바로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서….” “…….” “방금 본 것처럼 말입니다. 분명히 처음 그 시점에 대한 걸 봤을 땐 이렇게까지 무너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방금 봤던 장면에 있었던 변수는… 역시 5구역이 무너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까?” “네, 아마 위원장님의 생각이 맞을 거라고 사료됩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다른 요인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려하셔야 합니다. 아직 5구역에 대한 복구 작업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주인님께서는 5구역 보수 작업은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맞지.’ “행동하지 않고, 결정하시고 계신 것만으로도 미래가 바뀔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5구역에 복구 작업이 들어갈 거라는 것은 이미 확정된 미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님의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았다면, 무언가 다른 변수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사료되옵니다.” “갑작스러운 변수….” ‘머리 아파지네.’ 카스가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은 이해할 수 있었다. ‘쟤 말이 맞아.’ 현재 5구역에 복구 작업이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들, 계속해서 5구역이 저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은가. 이미 나와 이지혜는 최대한 빠르게, 모든 인력을 풀어 이곳을 보수하자 마음을 먹었고 계획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이 전진기지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면 내부보다는 외부에서 문제를 찾아보는 것이 옳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복구 작업이 진행되기 전에 외부 신이 들어오기라도 하나? 가능성은 적다. 그렇게까지 빨리 도착할 리가 없었으니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바깥 신의 추종자들이 생겨난 건가? 복구 작업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건가. 아니면 지금 일어난 이 사건 자체에서 뭔가 나비효과가 터지는 건가.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점점 땅바닥으로 기어들어 가는 상황.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카스가노의 미래를 심각하게 바라본 만큼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비둘기들조차 막지 못하는데 어떻게 바깥 신과의 격전을 준비한단 말인가. 계속해서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차라리 파란 길드와 지인들을 이끌고 녀석들과 호형호제하는 그림이 더 나쁘지 않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너무 고민하지 마시옵소서. 미래는 아주 작은 것으로도 뒤바뀌게 마련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드리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겠지만, 눈에 보이는 미래에 연연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주인님께서는 주인님이 원하시는 걸 반드시 얻어 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음… 고맙습니다.” “건방졌다면 죄송….” “아니요. 정말로 고마워서 드리는 말입니다. 진심으로요. 여러 가지로 신경 써드리지 못해 죄송하기도 하고….” “그리 말씀하시면….” “추후에 한 번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정말, 정말! 그리해 주시는 겁니까!” “네.” 무척 기뻐 보이는 모습이었다. 최근 받은 스트레스가 전부 날아간 것 같은 얼굴이었으니, 조금이지만 뿌듯함이라는 감정이 가슴 한편에 자리 잡았다. 매번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해 초조해하고는 있었지만, 미래나 검은색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한번 봤던 장면을 타인과 함께 시청할 수 있는 편리한 다시 보기 기능이 생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미래가 보이는 주기가 불확실했다. 쾌재를 부를 만한 것은 그녀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본인이 이쪽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만큼 조만간 그 노력이 성과를 볼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얘가 참 불쌍해… 오직 빛만을 위해서 살잖아.’ 그녀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알고 있었던 만큼, 괜스레 시선을 돌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간에 지하감옥에서의 대략적인 용무를 마치고 위로 다시금 향했다. 정확히 안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궁금할 텐데도 이것저것 물어오지 않은 조혜진에게는 엄지를 추켜올려 주고 싶다. 그녀가 오늘 할 일이 호위 하나뿐이라고 생각해, 이쪽의 영역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부분도 좋다. 위로 올라온 직후에는 이지혜에게 전달 사항을 전한 직후에는 곧바로 원정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규모가 꽤 크다고 했으니까 챙길 것도 많겠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1박 2일, 아니면 2박 3일? 조금 더 길어진다면 3박 4일 정도는 돼야 자세히 뒤져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가방에 짐을 쑤셔 넣고 있을 때였다.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조심스럽게 이쪽을 바라보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 591 회귀자 사용설명서 591화 키 플레이어(2) “어디 가시는 겁니까?” “…….”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혹시나 현장으로 간다고 하면 따라나선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묵묵히 짐을 챙기는 모양새가 내가 생각해도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일단은 눈치를 보며 가방에 짐을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수납 가방에 갈아입을 옷들과 개인 보급품, 그곳에서 혹시나 연구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간이 연금 키트도 챙기는 게 좋겠지. 쉬는 시간이 있을 수도 있으니 체스판도 챙겨가야지. 이것저것 많이 챙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김현성이 선물해 준 무한의 가방의 수납 공간은 넓다. 그 와중에도 김현성은 조금은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중. 인간관계에 서투른 만큼 지금 자신이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이 자리를 뜨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맞는지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뭐라고 말을 건넬 리 만무. 이미 원정 준비를 끝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이 미묘한 대치 상황은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이거 그냥 말하는 게 좋겠는데….’ 계속해서 저기에 저렇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입술을 오물거리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 그러니까… 어디 나가시는 겁니까.” ‘그냥 말하자, 그래.’ 당당하게 말하고, 따라올 것 같으면 당당하게 쳐 내자. “잠깐 현장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5현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무너진 현장 복구 작업의 진척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피해가 큰 것 같아서… 덕구와 하얀이도 데리고 갈 테니, 걱정하실 필요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조금 더 휴식을 취하는 게 좋지 않….” “건강합니다. 머리에도 이상 없고, 건강에도 이상이 없어요.” ‘이 새끼가 언제부터 내 건강에 신경 썼다고 그래. 가서 수련이나 해.’ “그래도….” “해야 할 일이니까요. 현성 씨가 조금 더 성장하기 위해 9개월 동안이나 수련에 힘쓴 것처럼요.” “그건… 죄…송합니다.” ‘아니, 왜 사과를 하고 그래. 사과할 일이 아닌데.’ “아니요, 사과할 일은 아닙니다. 저도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중요한 일이지 않습니까.” ‘네 일만큼 내 일도 중요한 거 알고 있지? 그러니까, 이번 것만 마무리 하자.’ “그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상황에서 현장을 복구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어요. 제 실수고, 제 일이었으니, 제가 끝까지 책임을 지고 싶습니다.” “…….” “…….” “네, 이해… 이해했습니다. 그럼. 언제 돌아오시는 겁니까?” “글쎄요, 정확히 얼마나 걸릴지는 예상할 수 없지만…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닐 것 같네요.” ‘따라온다고 하지는 않네.’ 초반에 쌓은 빌드업이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굉장히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목구멍에 담아두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확실히 내가 생각해도 괜찮은 대처였다. 이미 사건이 다 터진 이후에 안전, 안전, 건강, 건강, 떠들 면목이 있을 리가 없다. 박덕구와 정하얀을 데리고 간다고 했으니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된 셈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쪽 역시 같은 프레임으로 밀어붙였다는 것에 그 의의가 있지 않은가. 녀석 역시 필요한 일을 위해 잠수를 탔으니 이쪽 역시 그럴 수 있는 게 당연했다. 최대한 방해하지 말라는 티를 팍팍 내며 입을 열자, 못 이기는 척 수긍하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다니까요.” “…….” “그런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시답지 않은 이유로 온 건 아닐 텐데….’ 딱 녀석의 얼굴이 그랬다. 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표정이었으니까. 그제야 용무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예상해 보건대 좋은 소식은 아닐 것 같은 느낌. 맨 처음에 보였던 불안한 모습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또 뭐가 터진 건가? 현재 상황에서 터질 만한 게 뭐가 있지?’ 별것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평소 같지 않은 김현성의 진지한 표정은 괜스레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들어와서 앉으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으로 한 발 내딛는 김현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 * “차는 뭘로 드실 겁니까? 아니면 커피는 괜찮으십니까?”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그보다… 조금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별로 상관없습니다. 출발 시간은 조금 늦어지겠지만… 천천히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중요한 이야기니까요.” ‘그러니까 빨리 입 털어봐. 궁금해 죽겠다, 새끼야.’ “그러니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예전에 했던 이야기, 기억하십니까? 그러니까 키 플레이어들에 대해서….” ‘기억하다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1회 차의 위협만큼이나 중요한 이야기였으니까. 물론 두 회차의 흐름이 확연히 다르기는 했지만, 재능이나 특별한 힘을 가진 인간들마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정하얀이 여전히 마법에 대한 압도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다른 이들 역시 이전 회 차와 같은 재능을 보유하고 있었고, 구태여 이쪽이 접근하지 않아도 스스로 주머니를 뚫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들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대다수의 네임드들은 전장에서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강하거나 자신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전황을 뒤바꿀 힘이 있었고, 위기에 몰린 아군을 이끌고 나갈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 병력이 단순한 폰들이라면 이런 네임드들은 적 병력에 혼란을 줄 수 있는 나이트와 비숍들. 쓸 만한 패가 더 늘어난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렇기 때문에 나와 김현성은 1회 차의 네임드들에게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구태여 파란 길드로 들이지는 않았지만, 1회 차의 영웅들과 내가 가능성이 있다고 한 이들은 따로 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했다. 성장에 제동이 걸릴 때 즈음에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면서까지 이놈들의 성장에 집중했다. 합동 훈련소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린델에서, 노동현장에서, 혹은 던전에서,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도움을 주고 있었고,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후원까지 해주고 있었다. 성장하는 것을 기다린 것이다. 그중에서는 과거 김현성과 부딪쳤던 놈들도 있었고, 동료로 활동했던 녀석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눠야만 했던 정적들도 있었으며, 아무런 연관은 없지만 소문으로 들었던 강자도 있었고,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어 빛을 보지 못한 천재 역시 존재했다. ‘그런데 걔네가 왜.’ “…….” ‘걔네들 문제없지 않았나?’ 내 기억에는 없다. 오히려 아주 만족스럽게 쑥쑥 자라나고 있었고 사상검증 역시 마친 상태. 빛에 대한 충성심이 교단의 사제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조금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문제요?”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 생각해 보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네.” ‘그래, 이 새끼도 내가 기다리고 있었던 놈이었지.’ 키 플레이어 중에서도 중요도를 SSS급으로 관리한 진짜배기 영웅 중에 하나. 김현성, 정하얀, 차희라와 같은 레벨이라고 평가받았던 강자. 성검의 선택을 받고 경천동지할 무력을 선보였던, 또 하나의 치트 캐릭터였다. 비록 이전 회차에서는 가면쓰레기 진청의 못된 술수에 의해 성검이 그 빛을 잃고 미치광이가 되어 죽었지만, 김현성이 묘사한 선택받은 용사는 우리 계획에 꼭 필요한 패라고 생각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무려 북서부 지역을 통째로 맡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김현성의 추천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잠깐 머릿속에서 잊고 있었지만…. “튜토리얼 던전이 벌써 열린 겁니까?” 다시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잘됐군요. 안 그래도 얼굴 한번 보고 싶었는데. 현성 씨가 그렇게 말할 정도의 강자라면 어느 정도일지 항상 궁금했었습니다. 성검이라는 게 어떤 무기일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아마 저희가 세웠던 튜토리얼 최단시간 클리어 기록은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네요. 현성 씨 말대로라면 성검을 가지고 튜토리얼 던전을 빠져나왔을 테니…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접촉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이들처럼 멀리서 관리하는 것도 괜찮겠지만, 중요한 인물인 만큼 저희가….” “없었습니다.” “네?” “제가 이미 찾아봤지만 튜토리얼 던전의 생환 목록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네?” ‘뭐야, 시바. 이건 또 무슨 경우야, 시발.’ “혹시 착각하신 게 아닌지… 다음 회차에….” “아닐 겁니다.” ‘그래, 그럴 리가 없겠지.’ 1회차의 김현성 역시 녀석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그걸 잊어버릴 리가 없다.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테니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을 것이고, 종국에는 김현성의 귀까지 들어갔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회귀한 직후 떠올린 사람이 선택받은 용사와 정하얀이라고 하니, 김현성이 병신이 아닌 이상에야 놈에 대해 착각할 리가 없다. ‘그런데 시발, 왜 없는 건데?’ 아마 김현성이 내게 묻고 싶을 것이다. ‘이거 개시바 머리 아파지겠는데.’ 카스가노 유노와 함께 봤던 그 난장판의 이유가 이것 때문은 아닌가 싶다. 안 그래도 5구역 복구 사업이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 예고도 없이 날아 들어온 거지 같은 소식. 지금까지 세웠던 계획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심각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하얀이 없는 전투처럼, 녀석이 없는 전투 역시 상상할 수 없다. 튜토리얼 던전에 나온 직후에 혼자 신나서 던전으로 달려들어 가 뒈졌다는 게 오히려 더 설득력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애초에 튜토리얼 던전은 외부의 나비효과가 전혀 개입할 수 없는 장소가 아니었던가.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당황스러워진다. “정말로 착각이 아닌 겁니까?” “네, 분명합니다.” “후우… 이건 뭐라고 코멘트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은 계획을 수정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나 이후에 나타날 수도 있으니, 사람 시켜서 꼭 근처를 확인해 주시고.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됐는지도 개인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아마 베니고어가 알고 있을 것이다. 신과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라니. 어떤 방향으로든 베니고어의 영향력이 들어갔을 게 분명했다. ‘아, 왠지 이거 불길해지는데.’ 그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하리라. 이 무능력한 여신은 단 한 번이라도 대륙에 이로운 영향을 끼친 적이 없었으니까.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애초에 네가 성검 내리는 게 맞기는 한 거지? 근데 왜 용사가 시바, 안 튀어나오고 난리야.’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미안해, 나의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 (0/1)] ‘뭐가 미안한데, 시발….’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성검의 선택을 받은 용사 육성 계획은 예산 부족으로… 전면 취소된 계, 계획이야. (0/1)] ‘…….’ 베니고어 파산 사태의 나비효과였다. # 592 회귀자 사용설명서 592화 키 플레이어(3) ‘그게 무슨 개소리야. 무슨 시발, 계획을 전면 취소해. 이 미친 연놈들. 개 시바, 그게 무슨 소리냐고.’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미안해, 이기영 신… 신도. 하지만 우리도 어쩔 수가 없었어. 새로 던전을 업데이트하고 여기저기 들어갈 신성들이 많아서… 알다시피… 파산에서 복구한 지 얼마 안 된 상태로 신성을 당겨쓰기도 했고… 여러 가지로 여유가 없었어. 대륙에 영향을 끼치는 데 들어가는 신성이 얼마나 큰지는 알고 있지? (0/1)] ‘그래, 그걸 모르고 있는 건 아닌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애초에 그럴 계획이 있었으면 나한테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빤히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이 지랄을 해놓으셨어?’ [아니야. 그, 그런 건 아니야, 나의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고. 나도 말, 말해야겠다고 계속 생각은 했었는데, 자꾸 타이밍이 나오지 않아서… 여러 가지로 문제가 된 부분을 수습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왜 알고 있잖아. 아직 27군단 소환사건으로 뚫린 구멍이 완전히 메워지지는 않아서… 지금 모든 신력이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거든…. (0/1)] ‘변명은 그게 끝이세요? 베니고어 여신님? 용사 육성에 필요한 신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취소하는 건 아니지. 애초에 그 위쪽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길래. 일을 이따위로 처리해. 투자금이 있으면 어느 쪽에 투자해야 하는지. 여유 자금은 얼마가 남는지. 장기적인 플랜은 어떻게 되는지. 이후 변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매뉴얼이 정해져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그 이전에 어디에 정확히 투자해야 할지부터 따지는 게 먼저 아니야? 후다닥 업데이트하고 나 몰라라 하면 그만이야?’ [그건…. (0/1)] ‘회의라는 걸 하기는 하는 거예요? 동네 애새끼들 데려다가 관리를 해도 그것보다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시발, 시발, 시발. 제대로 투자할 곳에 투자하라고. 모르면 시발 물어보라고. 제기랄… 제기랄, 너도 진짜 질린다.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잖아. 신력도 꽤 벌어준 걸로 기억하는데. 어디 좋은 곳 가서 법인 카드로 시원하게 긁지 않고서는 이따위 결과가 나올 수가 없는 거 아닌가? 베니고어 님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여기서 벌고 엄한 데다가 쓰고 있는 건 아니시죠?’ [큰일 날 소리를! 절대로 그런 건 아니야, 이기영 신도. 절대로 그런 건 아닌데… 그, 그리고 질린다느니 그런 무, 무서운 소리는 하지 마… 불, 불안해지잖아. 내가 이기영 신도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알고 있지? 이기영 신도도 알고 있잖아. 나한테는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밖에 없다는 거…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고… 우리 차분하게…. (0/1)] ‘지금 베니고어 님이 제 상황이면 여유롭게 앉아 있을 수 있겠어요? 차라리 벨리알을 다시 불러오는 게 낫지.’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하지만 우리 쪽에서도 정말로 어쩔 수 없었어… 이, 이기영 신도가 생각하는 것보다 현세에 영향력을 끼치는 건 정, 정말로 어마어마한 신력을 소모하거든… 우리라고 왜 장기적인 플랜을 세우지 않았겠어. 이기영 신도를 탓하는 건 아니지만, 이기영 신도를 빛의 연금술사로 전직시킨… 일이나… 그… 그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일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었던 거야… 변수가 너무 많아서 장기적인 계획이 전부 무너지고… 우리 신력도 전부 무너지고…. (0/1)] ‘이제는 내 탓이다? 준신화 등급의 직업을 선물해 준 건 벨리알도 똑같아요, 베니고어 님.’ [벨리알과 나는 서로 서 있는 위치가 많이… 다르잖아. 대륙에 생긴 구멍 때문에… (0/1)] ‘그래, 어디 더 말해보세요. 이딴 식이면 당신이랑 일 안 해요, 진짜.’ [……. (0/1)] ‘…….’ [사, 사실… 이런 말까지 하기는 조금 그렇기는 한데… (0/1)] ‘…….’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엘, 엘룬이 조금 큰 실수를 해서. 그 영향도 없지 않아 있어. 정말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후우…. (0/1)]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베니고… 그게 도대체… 무슨? (0/1)] [알 수 없는 이유로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취소됩니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이기영 신도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우리도 완벽하지 않다는 거… 이기영 신도도 잘 알고 있잖아. 엘룬은 그중에서도 사고를 많이 일으키는 편이라 문제가 조금 많아. 사실 이번에 용사 육성 계획이 전면 취소된 것도… 엘룬이 개인적으로 맡고 있던 프로젝트가 잘 안 되면서… 그걸 수습하는 바람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어. (0/1)] ‘…….’ [우리도 당연히 알고 있지, 육성 계획이 중요하다는 거… 나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장 엘룬이 저지른 걸 수습하지 않으면 대륙의 균형이 붕괴될 위기였었다니까.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흘러가는 걸… 책임자 입장에서는 바라볼 수가 없잖아. 이기영 신도도 위에서 인간들을 다스려 본 경험이 있으니 내 말… 이해할 수 있을 거야. (0/1)] ‘…….’ [엘룬한테는 합당한 징계를 내리기로 이미 내부적으로 이야기를 끝낸 상태지만… 사랑하는 이기영 신도의 마음이 풀리지 않겠지… 알고 있잖아, 이기영 신도. 엘룬이 좀… (0/1)] ‘엘룬 쓰레기….’ [으응… 엘룬 쓰레기잖아. 나라고 힘들지 않았겠어? 그래도 내 후배라고… 신경을 아예 안 쓸 수도 없고… 사실 과해서 그렇지 공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잖아. 덕분에 엘프들 쪽이 안정되기도 했고…. (0/1)] ‘그래서….’ [아예 쳐 내고 싶기도 하지만… 그건 너무한 처사이기도 하고… 실제로 쳐 낼 수도 없어서… 물론 나의 사랑하는 이기영 신도가 원한다면 최고 징계를 내릴 수도 있지만, 아마 혼란이 더 커질 거라고 생각해. 개인적으로 아끼는 후배이기도 하고…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0/1)] ‘후우….’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네. 끄윽…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기영 신도. (0/1)] 머리를 꽉 부여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언젠가 엘룬 쓰레기가 사고를 칠 거라고는 생각하기는 했다. 인간이 다섯이나 모이면 꼭 하나는 쓰레기가 있게 마련이라는 현자의 말씀은 위에서도 통용되는 모양, 위쪽에서는 엘룬이 바로 그 쓰레기다. ‘그래, 그렇게 막장으로 운용할 리가 없겠지.’ 아무리 베니고어가 무능력하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무능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위에서는 제법 선임에 입장에 있는 신이며 후배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여신이었다. 비록 내 부름이 있기는 했지만,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앞장서 수습하던 것 역시 베니고어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번 사건이 단순한 무능력으로 일어났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동안 벌어준 걸 생각 없이 던지다 전부 태웠을 리가 없다. 그래도 내가 나름대로 신뢰를 보내고 있는 베니고어가… 시발, 그렇게까지 무능력할 리가 없다. ‘그래, 그럴 리가 없어.’ 아마 그녀의 입장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일 것이다. 내가 정하얀이나 혁명 삼남매의 사고를 수습했던 것처럼 베니고어 역시 엘룬이 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고군분투 뛰어다녔을지도 모른다. 왠지 모르게 기묘한 동질감이 생성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저는 상황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래도 너무 흔들리면 안 됩니다. 안 된다고요, 베니고어 님.’ [이해해… 주는 거야?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 (0/1)] ‘정에 이끌리지 말고 조금 더 단호해지세요. 그런 페널티를 안고 가려면 적어도 그 페널티에 상응하는 이점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볼 때 엘룬 쓰레기는 그런 이점이 없어요. 현재의 엘프들에게 고정적으로 신력을 받는다는 것 하나. 딱 그것밖에 없다고요.’ [으응… 무슨 말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어, 이기영 신도. 마음속으로 새겨들을게. (0/1)] ‘단호해지셔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웬만하면 모든 업무에서 엘룬 쓰레기는 제외하세요. 다른 건 상관이 없는데… 아시다시피 현 상황이 아주 작은 변수 하나 때문에 망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에요. 혹시나 엘룬 쓰레기가 뭐 해보려고 달려들었다가 개판 나는 꼴 보기 싫으니까. 절대로 걔한테 뭐 맡기지 마세요. 제 말 이해하셨습니까?’ [으응… 지금부터라도 꼭 그렇게 할게. 이기영 신도의 조언이라면 당연히 따르는 게 맞지. 전부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인데. (0/1)] ‘현상 유지에 가장 집중해 달라, 이 말입니다. 아… 엘룬, 이 개… 진짜.’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엘룬도 가슴 깊이 반성하고 있대… 으응…. (0/1)] ‘지금부터예요. 완전히 업무에 배제하라는 이야기라고요.’ [그, 그래도 그것까지는… (0/1)] ‘원래 일 못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면 뭐라도 하고 싶어지는 법입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씀드려야겠어요? 엘룬 책상은 완전히 빼요. 혹시라도 그 쓰레기가 헛짓거리라 하는 거 내 눈에 띄면 신도고 뭐고, 대륙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하고 얘들 데리고 지옥으로 갈 겁니다.’ [그… 렇게 할게. (0/1)] ‘추가로 이후 대책에 대해 어떻게 할 건지 그쪽에서도 한 번 생각해 봐요.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다른 방법이 있는지 알아볼 테니까.’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으응… 안 그래도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에 대한 회의가 밤낮 가리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어.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들려줄 수 있도록… 우리 쪽에서도 노력할게. 믿, 믿어줘서 고마워, 나의 사랑스러운 빛, 대륙의 유일한 희망, 이기영 신도. (0/1)] ‘후우… 시바.’ 조금은 길었던 침묵. 계속해서 머리를 부여잡게 된다. 좋은 소식을 들려주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사실 가장 좋은 소식은 튜토리얼 던전에서 용사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아닌가. 이미 행복 회로 따위는 전부 다 타버린 지 오래.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녀석의 빈자리를 채워 넣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제기랄.’ 방법이 있을 리가 없다. 정하얀이나 김현성의 대체자가 없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럼 용사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튜토리얼 던전에서 뒈지지 않았을까. ‘이 새끼도 너무 불쌍한데.’ 미래가 보장된 인재가 엘룬 쓰레기의 실수로 받아야 할 성검도 받지 못하고 튜토리얼 던전에서 죽어버렸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실 궁금하지도 않다. 살인자 새끼들과 마주쳤든, 무리하게 원정을 진행하다 아귀들에 둘러싸여 죽었든 간에 이미 뒈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기영 씨.” “…….” “기영 씨.” “…….” “기영 씨.” “네.” “괜찮으신 겁니까? 갑… 갑자기.” “아, 괜찮습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따로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신다는 것까지….” “…….”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아, 네, 그랬었죠. 네, 죄송합니다.” “…….” “…….” “저 기영 씨.” “네?” “혹시… 저… 혹시….”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입술을 꽉 깨문 얼굴, 간헐적으로 떨리는 팔, 무엇보다 분노가 느껴지는 얼굴. ‘그래, 시바, 현성아. 너라고 화가 안 나겠니. 형도 이해한다.’ 저 착한 김현성조차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분노를 보내고 있었다. # 593 회귀자 사용설명서 593화 키 플레이어(4) 찰나이기는 했지만,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만큼 얼굴에 곧바로 표가 난다.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자 본인이 더 깜짝 놀랐다는 듯 애써 웃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뭔가 이쪽을 안심시키려는 것 같은 힘겨운 미소. 확실히 조금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실수인 것 같기도 했지만, 딱히 내 잘못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상황에 어떻게 의연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엘룬 쓰레기가 그리고 있던 작품에 똥칠해 놓은 상황인데. ‘이걸 어떻게 해야 되냐, 진짜.’ 딱히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김현성에게 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린다면 그나마 선택지가 늘어나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일단은 상황을 제대로 지켜보고 생각할 시간을 버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급한 일이기는 했지만, 코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는 게 맞다. 용사가 맡기로 한 북서지역도 문제지만, 5구역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분명히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이곳저곳에서 갑작스레 분뇨를 싸지르는 상황. 머리를 붙잡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일단 현성 씨는 튜토리얼 던전 쪽으로 향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남은 일만 처리하고 곧바로 합류할 테니 직접 한 번 더 확인해 주세요. 이번 교육생들도 한 번씩 확인해 주시고요.” “기영 씨,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같이 움직이는 게 좋을 것….” ‘아니, 너 또 왜 그래.’ “저도 그러고는 싶지만, 시간이 부족해요. 현성 씨는 현성 씨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걱정하시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이미 결정했습니다. 다른 일이라면 그 말에 따르겠지만, 이번에는 제 말에 따라주세요.” “하지만….”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죠. 여기에 계속 있다고 해서 다른 해결책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이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 따로 논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쉽게 쉽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니… 정말로 용사가 나오지 않은 게 확실하다면, 북서쪽 지역의 방위를 강화하는 게 지금 저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인 것 같네요. 북서지역 보강 건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 “…….” “그건 제가 맡겠습니다.” “네?” “튜토리얼 던전을 제대로 알아보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요.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 ‘음… 이거 괜찮으려나. 잘할 수 있으려나?’ “기왕이면 함께 가고 싶지만… 원치 않으시니… 볼일 보고 오시기 전까지 전부 다 처리할 테니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편하게 다녀오시면 좋겠습니다.” “아….” ‘형이 널 못 믿는 건 아닌데… 정말로 할 수 있는 거 맞지?’ 일을 맡기고, 편하게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집안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양반이 가정은 자기한테 맡기고 밖에 나가 놀다 오라 권유하는 듯한 느낌. 안심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오히려 개판 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 마음이 가상해서 뭐라 솔직하게 말을 못하겠다. 도와준다고 하는 사람한테 대놓고 하지 말라는 것도 조금 그렇고…. 무엇보다 이것까지 거절하면 그림이 조금…. ‘아니, 너무 이상해지겠지.’ 이걸로 김현성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그래. 이게 네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준다면….’ 이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다.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 쪽에 대해서는 김미영 팀장이 잘 알고 있으니 따로 연락해 보시고 함께 처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러면 그나마 안심이기도 하고.’ 김미영 팀장이 김현성 옆에 딱 달라붙어 일을 처리해 줄 테니까. “이렇게 일을 도와주신다고 하니 제가 괜히 죄송해지네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보다… 저… 기영 씨, 몇 번이나 물어봐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네?” “정말 몸에 이상이 없는 게 확실하십니까?” “…….” “…….” “네, 계속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주 건강합니다. 그러니 정말로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일단은 일어서겠습니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꼬리를 올려봤지만, 여전히 씁쓸한 얼굴. ‘뭐야, 너. 왜 그래? 뭔 일 있어?’ 왠지 모르게 더 슬퍼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라는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새끼가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과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조혜진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현성아, 너 시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단언컨대 조혜진이 저런 눈으로 나를 바라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의 조혜진은 저렇게 따뜻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한 적이 없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었군요.” ‘너, 현성이 호출받고 다녀온 거잖아.’ 안 봐도 비디오. 출발 직전에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말했지만 환해진 얼굴은 누가 봐도 김현성의 호출을 받은 표정이었다. 이런 걸 속아 넘어주기도 쉽지 않다. 가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표정으로 장비를 점검하던 아까 전과는 완전히 딴판. 누가 봐도 이쪽을 걱정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만 좀 쳐다보세요. 남들이 오해하겠네.” “그런 게 아닙니다. 아무튼… 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나. 급할 때도 있는 거지. 나도 원정 전에는 화장실을 안 가면 왠지 찝찝한 타입이라니까. 혜진이 누님이랑은 공통점이 많지 않을 거라고 지레짐작했었는데 이런 공통점이 있었네. 그나저나 오랜만에 형님이랑 같이 움직이는 것 같은데… 조금 설레는 거 아니요. 그렇지 않소, 누님?” “네, 네. 저도 좋, 좋아요.” “뭐, 좋은 일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나게 위험한 일은 아니지만… 거 이상하게 옛날 생각이라도 나는 것 같다니까.”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마냥 편하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저희 역할은 부길드마스터와 후위의 호위입니다. 들뜬 마음도 이해는 하지만 혹시 모를 사고가 생길 수도 있으니….” “거, 알고 있다니까. 그런 건 당연한 거 아니요. 거, 내가 죽더라도 형님은 지킬 테니 다들 안심해도 된다니까. 그러니 형님도 걱정 마쇼. 이제 다시는 그럴 일 없을 테니까.” “사실 별일 없을 거야.” “그런 거요?” “물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높지. 덕구, 너랑 혜진 씨를 굳이 인선에 넣은 건 정말로 혹시 모를 상황 때문인 거지. 딱히 다른 일이 있을 것 같아서가 아니니까. 잔당이 남았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뭐, 사실 하얀이나 소라 씨, 또 카스가노 유노 님 정도만 있어도 충분하고… 아무튼 출발하는 게 좋겠네. 하얀아, 주문.” “아… 네. 네. 지금 외, 외울 테니까 마법진 위로 올라서 주세요.” ‘편하기는 하네.’ 예전처럼 마차 안에서 수다 떨면서 원정길을 이동하는 로망은 없지만, 이동이 빠르니 확실히 편하게 느껴졌다. 정하얀의 말에 원정길에 함께 가게 된 인선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박덕구와 조혜진, 정하얀과 한소라, 카스가노 유노와 친위대 몇몇으로 구성된 작은 파티이기는 했지만, 결코 약한 파티가 아니다. 이미 끝장난 곳에 뒤처리하러 갈 수준의 인선은 더욱더 아니기도 했지만, 이번 원정의 중요성이야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거긴 별천지니까.’ 본인에게 커다란 선물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소라는 누군가와 함께 지하로 기어들어 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저 무서운 모양이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 정하얀을 보고서는 더욱더 불안해졌는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는데, 확실히 정하얀 전문가라고 할 만했다. “……!” 잠깐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몸이 환한 빛에 둘러싸이며 시야가 반전되기 시작. 후우욱! 하는 느낌과 함께 몸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신기하네, 진짜.’ 정하얀이 보인 마법에 감탄한 시간은 짧았다. 아무래도 완전히 폐허가 된 5현장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예상은 했고… 보고도 받았지만, 생각하던 것보다 많이 망가진 듯한 모습. 특히나 완전히 무너져 내린 부분이 있다는 게 뼈 아프다. 이 정도면 처음부터 성벽을 쌓는 게 빠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 정도로 형편없어진 현장의 모습은 괜스레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후우….” ‘1년 이상 걸리겠네.’ 본래 5구역 자체도 공사가 마무리된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완공을 눈앞에 두기는 했지만 이후, 가공이나 보수로 신경 쓸 게 많다는 걸 떠올리면, 적어도 3개월, 길면 6개월 이상 걸릴 수도 있었다는 게 관리 위원회의 판단이었다.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 지경까지 왔으니 오죽할까. 최대한 빨리 완공한 이후 병력을 배치하고 싶었던 나로서는 여러모로 아쉬워질 수밖에 없다.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하얀은 그저 실실 미소를 보내기에 여념이 없다. 얘를 원망하면 안 된다는 걸 이미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팔이라도 한 번 뿌리치고 싶다. “오신다는 연락은 받았습니다, 위원장님.” “당신은….” ‘지혜 누나 사람이네.’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입구를 찾은 뒤에 도착하셨군요. 곧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미리 말씀해 주셨던 대로 청사의 안쪽에서 지하로 통하는 입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마법이 걸려 있다고 하셔서 시간이 조금 걸릴 거라고 예상했지만, 청사가 무너지면서 유지됐던 마법도 사라진 것 같더군요.” “음… 그렇습니까?” “예, 길을 찾기가 쉽지가 않더군요. 마법이외에도 트릭이 많아서… 저희 역시 조금 고생했습니다. 간단하게는 벽장 뒤의 문 같은 트릭이었지만, 구조 자체가 본인들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암호화되어 있었습니다. 설계자가 무척 머리를 썼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마치 던전 같더군요. 그것도 아주 잘 설계된 던전 말입니다.” “거, 어떻게 생각해 보면 맞는 말 아니요. 그 악마 계약자 놈들이 사용했던 장소이니 실상 던전이나 다를 바가 없지.” ‘확실히….’ 던전이라고 부를 만도 하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건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굳이 공략할 필요가 없다는 것. 이를테면 이미 공략된 던전에 보상을 받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분이 나아지기는 하네.’ 뭘 얼마나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잃은 것보다 얻는 게 더 컸으면 좋겠다. 아니, 무조건 뭐라도 얻어 가야 했다. 베니고어 오피셜로 선택받은 용사 프로젝트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현시점에서 기댈 수 있는 장소가 이곳밖에 없다. 그렇게 안내인과 몇 가지 말을 주고받으며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발걸음을 옮기자, 이윽고 한눈에 보기에도 넓은 동공처럼 보이는 곳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저희도 들어가 보지 않았습니다. 먼저 가서 안전한지에 대한 여부를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이지혜 님께서….”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일단은… 고생하셨습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당연한 일이라뇨. 여러분의 노고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추가로 지혜 씨한테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고개를 꾸벅 숙이며 떠나는 녀석. ‘지혜 누나도 참 지혜 누나네.’ 대충 보기에도 충성스러워 보인다. 할 일이 더럽게 많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자기 사람을 만들어놨는지 모르겠다. 마음의 눈으로 보기에도 수준이 결코 낮아 보이지 않았으니, 다른 말이 굳이 필요할까.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괜히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시선을 옮기자, 조금은 긴장한 파티원들의 얼굴이 보였다. 특히나 박덕구와 조혜진은 조금 더 민감해진 느낌. 한소라가 나에게 슬쩍 눈빛을 보내오는 것도 시야에 비친다. ‘느껴지기는 하나 보네.’ 역병군주였다면 나 역시 그녀가 느끼는 것과 똑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눈치 빠른 정하얀이 한소라가 보낸 신호를 보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는 했지만, 한소라 본인 빼고는 문제가 없다. “진입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선 박덕구. 이윽고 눈에 보인 풍경에는 입을 커다랗게 벌릴 수밖에 없었다. # 594 회귀자 사용설명서 594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1) 조금은 어두운 분위기였지만, 깔끔하게 잘 정리된 장내. 던전이라기보다는 연구소라는 표현이 어울리리라. 살짝 시선을 돌려 주변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생각보다 건질 게 많겠는데.’ 찐빵 안에 들어 있는 단팥이 전부 빠진 상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규모 역시 예상하던 것보다 더 크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기에도 쓸 만한 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촉매로 쓸 수 있는 것들이라던가. 널려져 있는 연구 일지라던가. 흑마법을 기반으로 한 아티팩트들도 보였고, 심지어는 몬스터 생체 실험의 흔적들도 보인다. 등급 역시 천차만별, 영웅 등급으로 표기된 것들이 흔하게 돌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무척 고무적이다. ‘뭐, 당연한 건가.’ 평범한 재능으로 군단장급의 악마를 소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벨리알을 소환한 것 역시 이례적인 일이라는 걸 떠올리면, 별다른 재능이 없었던 녀석들이 군단장급의 악마들을 소환할 수 있을 리 만무. 녀석들이 군단장급의 악마를 소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종류의 연구가 바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광기에 가까운 집착과 사회적 패배자들의 열등감과 분노 같은 마이너스 감정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런 감정만으로 군단장급 악마를 소환할 수 있었다면 이미 대륙은 악마 천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에는 재능이 있었다는 소리가 되는 건가?’ 방법이 어떻든 간에 본인들이 목표로 한 걸 이룬 셈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해도 별 무리가 없으리라. 예상보다 더 커다란 부지에 함께 원정에 온 이들 역시 놀랐다는 반응이 대다수. 결국, 참지 못했는지 박덕구가 입을 열어왔다. “어떤 의미로는 놀랍구만.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내가 예상하던 것보다 더 스케일이 큰 것 같다니까. 1년이면 강산도 변할 세월이라지만, 입이 떡 하고 벌어지는 거 아니요.” “10년이겠지.” “1년이나 10년이나 뭐, 시간은 쓰기 나름인 거 아니요.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지, 형님도 참… 솔직히 나는 아무것도 몰라서 뭐라고 말하기가 애매한데… 그냥 척 보기에도 이 악마 계약자 놈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이 계획을 구상했는지 눈에 딱 보일 정도요. 형님 눈에는 어떻게 보이쇼?” “내가 보기에도 비슷해.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1년 만에 이 정도라니… 솔직히 믿기지 않을 정도네.” “아마 그 이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을 겁니다. 연구는 계속해서 진행 중이었고, 어느 때를 기점으로 본거지를 옮겼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거, 무녀님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역시 내 눈이 틀린 게 아니었구만. 분위기를 보니까 뭐, 엄청 난 게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할 거요? 계속 진입할 거요?” “응, 혹시 모르니까 경계를 너무 풀지는 말고. 방 하나씩 둘러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무튼 움직입시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물건은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제가 직접 전부 확인할 테니까요. 다른 특이사항 있으면 곧바로 보고해 주시면 되고… 레인저 두 분은 멀지 않은 곳부터 정찰해 주세요. 위험요소가 발견되면 대응하지 않고 곧바로 보고합니다.” “네.” “네.” “뭐 해요. 계속 움직입시다. 정오 전까지는 요 앞 정도는 전부 둘러보고 싶네요. 오른쪽 방부터 시작하죠. 덕구야.” 고개를 끄덕인 녀석이 방패를 몸에 붙인 채로 방 안으로 먼저 진입하는 것이 보였다. 계속해서 빛무리가 쏟아지는 것을 보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것 같았지만, 문제는 없다. 오히려 전위들이 너무 할 일이 없는 게 문제라고 할 수 있으리라. “거,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들어와서 곧바로 작업 시작해도 될 것 같다니까. 빨리 좀 들어와 보쇼. 신기한 물건들이 많으니까. 흑마법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없으니, 뭐가 어디에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대충 봐도 귀해 보이는 것들투성이요.” “소라 씨.” “네, 부길드마스터.” “쓸 만한 게 있는지 확인해 봐요.” “네.” “카스가노 유노 님도 떠오르는 게 있으면 곧바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네.” 둘에게 짤막하게 입을 연 후, 나 역시 보물찾기에 본격적으로 합류. 조혜진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딱히 일에 크게 관심을 갖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소라는 커다란 눈을 뜨고 이곳저곳을 바라보는 중. 정말로 괜찮겠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정하얀은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27군단 사태 때의 일로 악마들에게 반감을 품게 된 것이 분명하리라. ‘이건 또 깜빡했네.’ 본인의 손으로 악마를 현세에 2번이나 소환시킨 주제에, 뭐가 그리 불만인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아마 성질 같아서는 여기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싶지 않을까. 리무르아나 로노베만 생각하면 여전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가니, 무슨 표현이 더 필요할까 싶다. “조사하다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곧바로.” “네, 네. 보, 보고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괜히 폐기 하지마. 이게 다 보물인데….’ 물론 당장 쓸 수는 없는 게 대부분이다. 조금 레어해 보이는 서적도 있는 반면에 별 가치 없는 것들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중급 악마 계약 이행의 원리-희귀 등급] [고급 악마 계약 주의사항-희귀 등급] ‘이런 건 별로 쓸모없는 거고.’ [역병군주와 천재검사가 사랑하는 법-전설 등급] ‘아니, 이건 여기 또 왜 있는 거야? 뭐야, 도대체 이건.’ [흑마법학 개론-영웅 등급] ‘이건 조금 챙겨갈 만하네.’ [72군단 설명서-전설 등급] ‘이건 아까 거보다 더 괜찮고.’ “아무래도 여기 있는 건 서적이 대부분이, 인, 인 것 같아요. 자료실로 쓰던 도서관 같은 느낌이었나 봐요.” “내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기는 하네.” “자, 자료가 굉장히 많기는 하네요. 전부 다 별반 쓸모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흑마법사를 육성하기에는 나쁘지 않지.’ 한번 제대로 육성해 봐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괜찮겠는데?’ 비둘기들에게 유효타가 될 가능성도 있고, 초반에 빠른 성장이 가능하다는 흑마법의 이점이 부족한 화력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 전출을 그렇게나 원해왔던 한소라에게 맡긴다고 운을 띄운다면 전력으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성과를 내기 위해서 노력할지도 모른다. 슬쩍 한소라를 바라보자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 정하얀이 내 옆에 찰싹 붙어 있는 걸 의식한 행동처럼 보여 마음에 걸렸지만, 말 그대로 마음에만 걸릴 뿐이었다. 아무튼 간에 원정대는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기 시작. 생체 실험실에서 키메라가 튀어나와 작은 전투가 벌어진 것을 빼면 안전상의 특이사항은 없었다. 근처를 돌아보고 온 레인저들이 다른 위험요소가 없다는 걸 보고한 이후에는 원정대의 경계 레벨이 2단계 정도가 내려갔고, 자연스레 조사에는 탄력이 붙었다. 마법진에 대한 자료가 있는 마법진 실험실도 있었고, 약물이나 흑마법에 의한 신체 강화 실험실도 있었다. 여러 가지 쓸 만한 것들이 많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역시나 생체 실험실이 아니었을까. ‘키메라.’ 흑마법으로 만들 수 있는 인공생명체. 심지어 연금술사도 아닌 것들이 호문클루스에 대한 연구까지 해놓으셨단다. ‘습격 당시에는….’ 써먹지 못했던 것을 보니 연구에 성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건 악마소환이랑은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처음에는 가능성이 보여 제법 파본 것처럼 보였지만, 인공적인 생명체를 만든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나조차도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리는 호문클루스는 물론이거니와, 키메라조차 다루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어느 시점에 노선을 변경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분명하다. 반동분자 놈들의 예산이 한정적이었던 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는 연구는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 돈이 어디로 들어갔나 했더니, 다 여기에 들어가 있었네. 시바, 이 고마운 새끼들.’ 나 역시 녀석들과 다르지 않다. 여러 가지 연구를 병행했지만, 사실상 호문클루스는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고, 키메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행정과 주력 분야의 연구만으로도 벅찼으니, 어떻게 이걸 다 연구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녀석들이 연구해 놓은 성과는 고개를 끄덕이기에 충분했다. “이건 써먹을 수 있겠네.” “바, 방금 뭐라고….” “아니야, 하얀아. 혼잣말이었어.” “아… 네.”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훈훈한 소식. 성과를 내지 못한 연구라고는 하지만, 녀석들이 그동안 쌓아왔던 데이터와 인프라가 어디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곧바로 실험에 들어갈 수 있는 설비와 연구 자료들이 즐비해 있다. 관련 직업을 준신화로 가지고 있는 이쪽이라면 가닥이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거 개꿀인데. 아니, 득템이라고 봐도 무방한 거 아닌가.’ 심각한 척 표정을 짓고 있지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기가 힘에 부친다. 이 방 자체만으로도 내게 있어서는 커다란 성과. 여건만 된다면 6개월 이상 처박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새어나간 자금에 가슴이 아프기는 했지만, 녀석들의 세월을 산 거라 생각하면 개이득을 봤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거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은데….’ 아예 이곳에 살림이라도 차리고 싶은 심정. 평소와는 다르게 조혜진이 이쪽을 바라보지만 않았다면 간단한 실험이라도 해보지 않았을까. ‘아니, 얘는 자기 할 일이나 하지, 왜 자꾸 나를 쳐다봐.’ “이쪽도 대충 정리된 것 같은데 슬슬 나가죠.” “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어.’ 하고 싶으니까 하자. 적당한 핑계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그렇게 다음 방으로 진입하기 진전에 곧바로 입을 열었다. 생각하고 있는 방법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아, 잠깐 생체 실험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깜빡하고 정리하지 못한 부분이 기억이 나서요. 물건을 두고 오기도 했고, 뒤처리 정도만 하고 따라붙겠습니다.” “같이 가쇼.” ‘따라오지 마, 이 새끼야.’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근처고… 혜진 씨랑 덕구는 나머지 인원들과 함께 계속해서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 친위대가 복도에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대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 직접 확인했잖아. 이렇게 실랑이할 시간에 이미 다녀왔겠다. 빠르게 다녀올 테니 혜진 씨가 파티원 인솔해 주세요.” 대답은 듣지 않는 게 좋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곧바로 발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가, 눈치가 보여 확인하지 못했던 자료들을 뒤적거리자 괜스레 즐거워진다. 연구 자체를 즐기지는 않았고, 스스로도 이런 부분에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지만, 이렇게 가슴이 콩닥거리는 거 보면 아무래도 내 정체성이 여기에 있기는 한 것 같았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금단의 연구 성과를 펼쳤을 때였다. “언제부터였습니까.” 뒤에서 조금 씁쓸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 순간적으로 몸이 굳는 느낌. ‘조혜진? 따라오고 있었나?’ 혹시나 우리 혜진이가 이쪽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불안해하던 찰나 들려온 목소리는 가관. “언제부터 그렇게 기억을 잃기 시작한 겁니까?” “…….” “…….” ‘얘는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도대체 일이 어떤 방향으로 어디까지 진행된 건지, 내가 다 묻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 595 회귀자 사용설명서 595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2)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 그냥 둘러대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뜬금없이 나타나서 언제부터 기억을 잃기 시작했냐는 말을 중얼거리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저도 모르게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주 잠깐이기는 했지만, 온갖 당황스러움이 뒤섞인 감정을 담아 조혜진을 바라보자, 한층 더 진지해지는 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가 이렇게 진지해?’ 혹시 내가 모르는 게임을 진행 중인 건가. 아니면 몰래카메라라도 찍고 있나. 하는 의구심이 생겨났다. 하지만 싸구려 농담에 정색하는 저 성격에 그런 종류의 장난에 발을 담글 리가 만무했다. 무엇보다 진심을 담은 표정이 굉장히 신경 쓰인다. 연기하거나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이 담긴 표정이라는 걸 어떻게 눈치채지 못할 수가 있을까.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 황당함에 잠깐 말을 잇지 못하자,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확신했는지 기세등등해진 것이 눈에 띄었다.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부길드마스터.” “아니….” ‘시바, 진짜로 모르겠는데.’ “정확히 언제부터 증상이 시작된 겁니까.” “정말로 뭔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를 못하겠는데… 혜진 씨가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별일 아니니 그냥 넘어갑시다. 뭐, 몇 번 깜빡 한 거 가지고 기억을 잃느니, 정신을 잃느니 하는 게… 우습지 않습니까. 여기서 이러지 말고 파티원들이랑 합류해서 볼일이나 보세요. 갑자기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부길드마스터. 그 연구일지, 조금 전에도 부길드마스터가 읽고 계셨던 겁니다. 알고 계신 겁니까?” ‘아니, 알고 있는데… 그러니까 그게 뭔 소리냐고.’ “아니… 다시 한번 보려는 건데.” 손을 휙휙 저으며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조혜진은 묵묵부답. 오히려 진실을 이야기해 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곳을 나가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시바… 도대체 뭐야. 아니, 이거 둠기화 때문에 그런 건 맞지?’ 둠기화를 오래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정신적 부담이 심해진다는 것 정도가 길드원들이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다. 단기 기억 상실증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예상하던 사안이었고…. 애초에 처음 둠기화에 대해 컨셉을 잡을 때 그런 기믹을 넣어두지 않았던가. 무의식 세계의 일이나 둠기화되었을 당시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기믹의 한 종류였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후에 티를 낸 적은 없다. 여신의 축복을 받아 페널티를 최대한 줄일 수 있다는 컨셉을 잡고, 둠기화가 결국에는 득이 될 것이라는 걸 어필했다. 파티원들도 베니고어의 찬란한 빛에 커다란 의심은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약속의 1년간 별다른 사고가 없었으니 안심한 것이 당연. 최근에 둠기화가 한 번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취조당하는 느낌으로 압박받을 정도의 일을 만든 기억은 없다. 물론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고 머리를 부여잡거나, 둘러대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둘러대기는 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많이 써먹기는 했지만, 갑자기 머릿속에 지우개를 가지고 다니는 놈이 되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길드마스터에게 대충 전해 들었습니다.” ‘현성아, 너 왜 그래. 뭐야, 왜 이렇게 혼자 심각해. 아니, 도대체 무슨 망상을 하는 거야, 얘는.’ 조혜진이 김현성에게 다녀온 직후 보였던 슬픈 표정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슬쩍 조혜진을 바라보자 여전히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바라보는 중이다. 김현성은 또 어쩌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나마 마음에 걸렸던 것은 가장 최근에 나눴던 대화. ‘기영 씨.’ ‘네.’ ‘괜찮으신 겁니까? 갑… 갑자기.’ ‘아, 괜찮습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따로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신다는 것까지….’ ‘…….’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아, 네. 그랬었죠. 네, 죄송합니다.’ 분명히 이런 느낌의 대화가 있었던 것 같기는 했다. 어쩌면 중간중간 베니고어와 대화하느라 멍 때리는 시간이 길어진 것도 원인 중 하나일지 모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김현성의 머릿속에서는 무의식 세계의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크게 다가온 것이 아닐까. 기억을 떠올려 보니, 자신을 기억하냐는 말에 ‘아니요’라고 대충 말했던 것도 한쪽에서 맴돈다. 전부 다 내 망상에 불과하다는 건 알지만,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추론이다. 이미 추억 하나를 잊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벽과 맞물려 셰익스피어 뺨치는 소설을 만들어낸 건 아닐까. 조심하지 않은 내 잘못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김현성이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생각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을지 내가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을까. 녀석도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혜진에게 한번 떠봐 달라고 주문을 넣은 것일 수도 있다. 조혜진 나름대로도 찝찝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신을 자주 잃는다거나, 기억력이 감퇴했다거나, 최근 들어 자주 깜빡깜빡한다는 걸 떠올리고서는 더욱더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두 명의 대화를 직접 들어보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와, 진짜 소설을 쓰네, 소설을 써. 너네가 작가 해라, 작가 해.’ 아무래도 두 사람이 비극적인 클리셰의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충격적인 사건이 많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정말로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계속 이상이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뭐, 이제 와서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십니까. 정말로 별일 없으니까. 할 일이나 해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내가 무슨 이상한 짓을 했는데그래. 그리고 알긴 또 뭘 알아.’ 이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이미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며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가 아닌가. 확 마,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될 정도였다. ‘이점이 뭐가 있지?’ 무작정 보호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이너스 감정이 둠기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고 있는 만큼 육체의 안전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도 신경 써줄 테니까. 아예 일을 시키지 않으려 감싸 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것 역시 별문제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해결 방안도 있었고, 두 번째 둠기화가 감금의 영향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다. ‘그냥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다고 해버려?’ 조금 무리수 같기는 했지만, 효과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일이 꼬일지 모르는 만큼 조금 더 고민해 볼 여지가 있다. ‘아니, 그렇다고 무작정 아니라고 해서 믿어줄 분위기가 아닌데.’ 그냥 시원하게 인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최선은 아니기에 뭐라고 판단을 내릴 수가 없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수 있다. 계속해서 문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조혜진을 힐끔 바라보기 시작. 여전히 의심 따위는 하지 않는 것 같은 얼굴, 완벽히 내 머릿속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부길드마스터.” “…….” “…….” 이미 분위기는 잡혀 있다. 침묵과 불안한 공기가 장내를 감싸고 처연한 표정의 조혜진이 괜스레 침을 삼켜 넘기고 있다. “믿어주세요. 최소한 저희 파란 길드원은 부길드마스터의 머리에 무슨 이상이 생기고 있는지 알 자격이 있습니다.” “…….” “제 책임입니다.” “아니요.” “네?” “혜진 씨 책임이 아닙니다. 최근에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서 달라진 건 없어요.” “정말로….” “…….” “…….” “혜진 씨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 역시 뭔가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현성 씨, 하얀이, 덕구, 파란 길드원들이나 제 지인들에게도 이야기하지 말아주세요. 아직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중요한 시기인 만큼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저 역시 할 일이 아직… 남아 있고요. 네.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 입니까.”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예상하시는 그대로일 겁니다.” “…….” “정확히 언제부터 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조금씩 머릿속이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방금처럼 단기적인 기억상실을 겪을 때도 있었고요. 이유는 아마… 네. 그 일 때문일 겁니다. 저도 제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누가….” “베니고어.” “그게 사실입니까?” “네, 신력을 사용해도 복구가 불가능한 종류의 저주라고 언질 받았습니다.” “그… 그게 뭐예요. 그게….” “뭐 별건 아닙니다. 죽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기억을 잃어갈 뿐입니다. 짧으면 3년 길면 5년 정도.” “그게 뭐야.” “아직 아무것도 잊지 않았으니 그런 표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잘 버텨주고 있어요. 지력 수치가 높은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는 모양입니다. 자주 멍 때리게 되거나 정신을 잃기는 하지만, 예전의 일들까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 그 정도까지 차도가 진행되지 않았어요.” “…….”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마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언제 어떻게 사태가 악화될지 모르는 만큼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다 끝내놓고 싶어요. 이 5현장의 일은 물론이거니와 파란, 더 나아가서는 우리 삶의 터전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 많아요. 뭐 귀찮기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나더러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라는데. 저도 원래 뭘 위해 희생하는 성격은 아니기는 하지만, 일단은 대륙이 안전해져야 저도 살아남지 않겠습니까.” “…….” “제가 하기에는 조금 낯간지러운 말이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저는 저와 관계된 사람들이 전부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기에 괜한 걱정 끼치기 싫다는 겁니다. 이래 봬도 제법 능력이 있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상상하는 것보다 이 주어진 시간 내에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겁니다. 쓸데없는 거로 걱정 받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 정말….” “당분간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그냥 별일 없다고. 건강하다고. 그렇게 계속 보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마지막 부탁이에요.” ‘하는 김에 내 편의도 좀 봐주고. 응? 좋잖아. 괜찮게 된 것 같네. 이거.’ 조혜진이라면 아마 내 뜻에 따르지 않을까 싶다. 당분간 이곳에 틀어박혀야 할 테니 편의를 봐주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걱정을 덜어주는 역할을 해주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일이 끝난 다음에 ‘짜잔! 그런데 절대라는 건 없더군요. 저주가 전부 다 나았습니다!’라고 둘러대면 되는 거고, 파란 길드의 입장에서도 조혜진이 내게 붙어주면 안심 또 안심이니 다른 호위를 달고 다닐 필요도 없다. 이곳 연구소에 탄력이 붙는다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한 2년 정도만 이 기믹을 유지해도 내게 있어서는 아쉬울 게 없는 장사라는 거다. 괜스레 입꼬리를 올린 것은 당연지사. 조금 심상치 않은 조혜진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 ‘뭐야. 얘 왜 울어?’ “…….” ‘아니, 너 왜 울어. 갑자기 왜 울고 난리야. 미안해지게 왜 그래, 진짜. 울지 마.’ # 596 회귀자 사용설명서 596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3) 눈치를 보는 게 당연했다. ‘얘가 미안해지게 왜 그래, 진짜….’ 슬쩍 고개를 들어 훔쳐본 조혜진의 얼굴은 엉망이다. 얘가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건 김현성에게 빛의 속도로 차인 이후로 처음이다. 엉엉 소리를 내며 우는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떨리는 입술과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본인도 민망했는지 황급히 얼굴을 가렸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를 통해 조혜진의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왜 울고 그래. 왜 이렇게 다큐멘터리로 받아. 너 그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대충 지어내 말이었다. 조혜진이 심각하게 받아들일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다. 얼마 없는 양심이 찔려오는 게 당연하리라. 이쪽에서는 별생각 없이 개연성만 맞춰 집어 던진 거짓부렁에 눈물을 터뜨릴지 누가 알았을까. “…….”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민망해진다. 안 그래도 조용한 곳이 더 숙연해지니 이 자리가 불편해졌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겠지만, 눈앞에 있는 상대가 조혜진이다 보니 점점 더 머쓱해지기 시작.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자 역시나 곧바로 반응해 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울어요?” “…….” “진짜 울어?” “누가 울었다고 그러십니까.” “아니, 울었잖아요. 지금도 울고 있잖아요.” “안 울었습니다. 지금도 안 울고 있고요.” “아니, 우는 것 같은데.” “안 울었다는데 자꾸 왜 그래요! 진짜 안 울었습니다. 안 울었다고! 안 울었다고요. 안 울었다고!” “아… 네.” “그리고… 그리고 정말 지금 이 상황에 그런 게 중요합니까? 그런 농담이 나와요? 꼭 그렇게 물어봐야겠습니까?” “아니….”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건 원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 그런 쓸데없는 장난을 하고 싶습니까? 어떻게 웃을 수 있는 겁니까. 지금 입꼬리가 올라갑니까? 기억을 잃는다고요? 정신이 침식을 당해? 그걸 알고 있었는데도 어떻게 아무 말도 안 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도… 그래도 친구라고… 흐윽….” “…….” “어떻게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렇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냔 말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그걸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어요. 어째서… 왜.” ‘분위기 진지하게 만들지 마, 진짜. 어색해지게 왜 그래. 사람 미안해지게.’ 어깨라도 한 번 두들겨 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한 번 안아줘야 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잠깐 고민해 봤지만, 두 가지 선택지 모두 피하도록 하자. 본인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일단은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용히 두는 게 최선 아닐까. 괜히 이죽거리거나 수습하려다가는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질 것 같았다. 예상대로 시간이 조금 지난 직후에 기어코 눈물을 틀어막는 데 성공한 조혜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코와 눈이 붉어져 있는 모습,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조금씩 몸이 떨렸지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데는 지장이 없다. 본인이 부끄러운 반응을 보였다는 건 알고 있는지 조금 전의 나보다 더 민망해하는 모습. 평소의 조혜진을 생각하면 아마 오늘 일을 두고두고 떠올리며 이불을 발로 차지 않을까. 그만큼 내가 보기에도 익숙하지 않은 장면이었다. 뭐, 사실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키야, 우리 혜진이가 나를 이만큼이나 생각하고 있었네.’ 저도 모르게 엄지를 치켜세우고 싶어진다. ‘그게 그렇게 슬펐어요? 아구구. 그래서 눈물이 나왔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 나쁜 표정으로 기분 나쁜 생각을 하는 건 자제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부길드마스터.” “뭘 또 그렇게까지 표현하십니까. 친구가 아프다는 사실에 이런 반응을 보여주는 게 고마워서 그러는 거죠, 뭐.” “…….” “…….” “후우….” “…….” “얼마나 된 겁니까.” 예상보다 심각해 보이는 반응에 ‘사실은 농담이었습니다’라고 아까 했던 말을 전부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말이 쉽게 나올 리가 없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런 말을 꺼낼 수 있을 정도로 내 낯짝이 두껍지는 않다. ‘이건 그냥 안 들키는 게 낫겠네.’ 들키지만 않으면 진실이 아니던가. 모든 곳에서 통용되는 불변의 법칙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려던 찰나에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답 안 해주실 겁니까?” “뭐, 딱히 할 말이 없어서요. 아까 들으신 그대로예요. 치료를 위해 베니고어 님을 뵈러 갔을 때 알았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요. 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사라지기는 했지만… 별일 아니라고,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게 생각처럼 훈훈하게 진행되지는 않더군요.” “…….”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이지만 증상이 나타나긴 했습니다. 사실 별건 없습니다. 방금 있었던 일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든지, 집무실의 위치가 어딘지 기억이 안 나거나… 잠깐 멍해질 때가 있습니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길 정도는 아닙니다, 아직까지는요.” “그걸 말이라고….”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막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한들, 현시점에서 치료를 받을 수도 없고요.” “분명히 뭔가 방법이 있을 겁니다. 베니고어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희망을 버린 게 아니에요. 정말로 내가 전부 포기한 거로 보였어요? 성격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실까. 현재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솔직히 나도 아예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머릿속에 있는 지식까지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건대, 현재 시점에서 제 머리보다 중요한 게 바로 이곳이에요. 못 막으면 다 뒈지는 건 똑같은데… 지금 와서 몸 사리고 편히 누워서 쉴 수 있겠습니까. 방법은 알아서 잘 생각할 테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가 걱정했다고….”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현성 씨나 다른 길드원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그건….” “부탁입니다. 현성 씨한테 언질을 받으신 것 같은데… 혹시 정확히 뭐라고….” “의심이 가는 정황이 몇 가지 있다고 하셨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상태가 최근 들어서 더 안 좋아지신 것 같다고… 어쩌면 기억을 잃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저 역시 마음에 걸리는 게 몇 가지 있었던 터라….” “돌아가면 별일 아닌 것 같다고 오해하신 것 같다고 말씀 좀 전해주세요.” “어째서 숨기시려고 하는 겁니까.” “뭐 좋은 일이라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닌답니까. 저 혼자만 알고 있어도 되는 일인데. 제 뒤처리는 제가 알아서 해요. 쓸데없이 걱정 끼치고 동정받고 싶지 않다, 이 말입니다.” “그래도 모두가 아는 게 더 좋을 겁니다. 전부 알아야 해요. 그래야만 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아니야, 몰라도 돼. 너 혼자 알고 있어. 그게 맞아.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 거면 내가 이 말을 꺼낸 이유가 사라지잖아.’ “괜히 제가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서 그런 겁니다. 어차피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인데… 지금은 일 외적인 걸로 스트레스 받기 싫으니까. 혼자만 알고 계세요. 정말로 부탁합니다.” “…….” “…….” ‘아니, 또 왜 울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얘가 이렇게 감수성이 풍부할지 누가 알았을까. ‘그래, 마음껏 울어라, 혜진아. 울어서 네 순수를 마음껏 증명해.’ “일… 단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일단은요. 하지만 부길드마스터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꼭 알리셔야 합니다. 그런 종류의 관심이 달갑지 않으실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언제까지 속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전까지는 제가… 제가 도와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로요.” “감사합니다.” “별로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네… 감사할 필요 없는 일이죠…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혜진 씨가 죄송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세요. 아 그리고 이쪽 지역 조사 다 끝난 이후에 조금 틀어박힐 테니 그렇게 알고 계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알겠….” “네.” 다시 한번 둑이 터진 것처럼 눈물을 흘리는 조혜진이 눈에 보였다. 왼손으로 눈물을 최대한 훔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기가 무서웠지만, 원활한 연구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작업이 아니었나 하는 훈훈한 생각이 들어 꽂힌다. 가슴이 찔리는 것과는 별개로 이성은 앞으로 편해지겠다며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아, 그래도 진짜 오랜만에 미안해지네.’ 하지만 미안하다고 해서 저 의혹에 계속해서 침묵할 수는 없지 않은가. 뭐라도 선택해야 했고,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 가장 좋은 선택지를 골랐어야만 했다. ‘아,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저 좀 내버려 두세요’라고 말한 들 믿어줄 것 같지가 않다. 조혜진은 물론이거니와 김현성은 더욱더 그럴 것이다. 차라리 조혜진이 김현성에게 직접 전하는 쪽이 더 공신력 있다. 계속해서 변명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안정적으로 시간을 버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지 않은가. “이제 좀 그만 우세요.” ‘조금 더 프라이빗한 공간을 만들어야 돼.’ 자꾸만 거리를 벌리는 것 같아 미안하기는 하지만, 김현성이 이 장소를 눈치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다. 이미 얻어갈 것이 한둘이 아닐 거라는 오피셜이 붙은 만큼 이전보다 더 전문적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무능력한 베니고어와 엘룬 쓰레기에게 아무리 비벼봐야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기댈 곳이 이곳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 아닌가. 벨리알이라도 불러오고 싶었지만, 베니고어와 계약한 벨리알이 현세로 소환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채워야 할 조건이 많다. 기껏 베니고어가 틀어막고 있는 구멍이 벨리알로 인해 다시 늘어날 수 있으니, 그것 역시 경계해야 할 일이고…. 저 위쪽이 복잡하다 보니 아래쪽은 더 복잡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졌다.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아까 전부 확인하지 못했던 것들을 둘러보자 확실히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거 지금부터 파도 나쁘지는 않겠는데.’ 물론 호문클루스나 키메라들이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나 키메라들은 고작 영웅, 높으면 전설 등급 판정을 받아내는 게 고작 아닐까. 물론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특성상 적극적으로 활용하기에는 문제가 많기도 했고, 퀄리티 자체에도 차이가 있다. ‘인식에도 문제가 있고….’ 애초에 뿌리가 흑마법에 있을뿐더러, 겉모습 자체가 빛과 함께 싸우는 이들이라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기본적으로 몬스터의 외관을 베이스로 하다 보니 조금 켕기는 것도 있고…. ‘아니지, 외관은 바꾸면 되는 거 아닌가.’ 써먹을 수 있다면 전부 써먹는 게 맞다. 현재는 똥오줌 가릴 처지가 아니지 않은가. 성검이 없다면 마검이라도 가져와 써먹어도 모자라…. “어?” 벼락처럼 뭔가가 머릿속에 꽂힌 듯한 기분. 기다렸던 것처럼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필요한 게 그것뿐입니까?] # 597 회귀자 사용설명서 597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4) ‘…….’ [필요한 게 그것뿐이냐고 물었습니다.] ‘…….’ [보았던 그대로였고, 들었던 그대로고, 읽었던 그대로였군요. 딱히 악인이라고 할 수 없다만, 당신처럼 역겨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자는 처음입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니 정말로 즐겁군요.]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것 역시 잠시뿐이었다. 이미 몸에 새겨진 권력자를 향한 아첨 본능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이고…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걸어주시니 영광 또 영광 압도적 영광입니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목소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요. 무슨 볼일이 있으셔서 이 하등하고 또 하등한 필멸자를 찾아주셨습니까.’ [하등하다니요. 그대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닙니다. 이미 그 격이 평범한 벌레들과는 다른데, 어떻게 그대를 다른 인간들과 같은 하등한 존재로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벨리알, 그 아이와는 이야기가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 말이 틀렸습니까?] ‘벨리알 님께서 이 하등한 사람을 좋게 봐주신 것뿐입니다. 어찌 제가 지고의 악마분들과 같은 선상에 설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굳이 벨리알이 아니더라도 당신과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파이몬, 바신, 몰렉, 72군단 중 저와 뜻을 함께하는 악마들 모두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광 또 영광이옵니다.’ 도대체. 누구지? 라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내게 말을 건 악마가 평범한 악마가 아니라는 것. 악마 계약자 놈들에게 커다란 힘을 줬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부길드마스터! 부길드마스터!” ‘시바… 이거 어떻게 해.’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 와중에 조혜진은 입술을 꽉 깨문 채로 내 동태를 살피는 중, 말하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안 그래도 베니고어와 대화를 하는 것 때문에 이런 종류의 의혹이 생기지 않았던가. 방금까지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조혜진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제대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 위대하고 고결하신 악마분은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친히 납시어 대화를 걸어주셨는지 모르겠다. 내가 곤란해 하는 상황을 즐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악마들은 누구나가 다 짓궂은 면이 있으니까. “잠, 잠깐만 나가 계세요. 급하게 할 일이… 아무 일도 아니니까 잠깐만 혼자 있게 해주세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통증이 있으신 겁니까? 지금 무슨… 어떻게… 이걸 어떻게… 사제를 불러오겠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아니, 괜찮으니까 가만히 좀 내버려 둬, 시바. 지금 중요하단 말이야, 혜진아. 진짜 중요해.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잠깐만… 혼자… 잠깐만 제 몸에 손대지 마시고… 혼자 있게 해주세요. 신성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픈 게 아니라 그냥 잠깐 머리가 멍할 뿐이니… 걱정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상황은 점점 점입가경으로 흐르는 중. 절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조혜진의 얼굴이 계속해서 시야에 들어오니 어떻게 이 대화에 집중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던 것보다 오해가 더 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지금 와서 일을 놓을 수는 없다. 얼마 만에 찾아주신 중역이던가. 거래처의 부장도 아니라 대기업 회장님으로 추정되시는 분이 직접 귀하신 몸을 이끌고 행차해 주셨다. 72악마 중에 27군단장이었던 벨리알, 아니, 이제는 10위권 안에 진입했을지도 모르는 벨리알 님을 아이라고 표현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심지어 파이몬, 바신, 몰렉 같은 다른 군주들의 이름들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고 있다. 대충 머리를 굴려봐도 무조건 5위 안에 랭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부길드마스터!” ‘제발 그만해, 시바. 혜진아, 지금 바빠.’ [혹시 제가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이고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방해라니요. 전혀 아니 옵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남아도는 게 시간입니다요. 그러니 내 집이다. 생각하시고 편안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확실히 당신은 재미있군요. 그 아이들이 관심을 가질 만합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아주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렇게 다소 무례한 방법을 사용한 것에 대해 먼저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의 경우에는 대륙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칠 방법이 한정적인 터라… 다른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저 같은 경우에는 정도가 조금 더 심한 편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밖에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점, 다시 한번 정중히 사과드리겠습니다.] ‘정확히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을 이 장소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벌레들 몇몇에게 힘을 내려준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이고오… 뭐 그런 걸 다 걱정하고 그러십니까.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라도 하등한 필멸자와 만나기를 원하셨다고 하시니, 제가 더 성은이 망극할 지경입니다요. 감사, 또 감사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낮추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나저나 역겨운 영혼이라는 건 참으로 신기하군요. 이런 종류의 아부에 대해서는 별 자극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기묘한 우월감이라니…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즐겁군요. 네, 즐겁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엘레나 님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엘레… 엘레나 님을….” 아니, 제발 그러지 마, 조 대리. 회장님 즐겁다고 하시잖아. “괜찮으니까… 괜찮으니까… 잠깐만 혼자 내버려 두세요. 그런 걸로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냥… 잠깐만 혼자 내버려 둬요.” “…….” “…….”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안 괜찮아도 괜찮은 상황일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오히려 제가 다 사과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기왕이면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조금 어려워 보이는군요.] ‘아닙니다요. 그렇지 않습니다. 곧바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찰나이지만 현세에서는 정신을 잃게 될 겁니다.] ‘아이고오… 또 뭐 그런 걸 걱정하고 그러십니까. 저언혀 상관없습니다요.’ [순결한 영혼을 가진 이와 짧게 대화할 시간 정도는 드릴 수 있습니다. 혹여나 정신을 잃은 시간 동안 이 장소를 빠져나가면 저 역시 곤란해지니….] “일단 모, 모시겠습니다, 부길드마스터.” “아니요.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도 말고 누구한테 알리지도 마세요. 절대로, 절대로… 부탁드립니다. 혜진 씨. 절대로… 제 말 명심하세요. 이 장소를 벗어나면 안 됩니다. 잠깐입니다, 아주 잠깐 동안만….” [지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풍경이 곧바로 뒤바뀐 것은 찰나였다. 벨리알 베니고어와 함께 협상 테이블에 함께 올라갔던 것처럼 정신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식간에 자리하게 된 곳은 고전적인 양식의 가구들이 즐비해 있는 방 안, 커다란 테이블에는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호화로운 만찬들이 놓여 있었다. ‘조혜진이 말을 들어야 하는데.’ 현세의 일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동안, 이윽고 집사 몇몇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있는 전형적인 미중년들은 내게 그 어떠한 말도 건네지 않고 비어 있는 잔에 조용히 와인을 따른다.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여기가 정말로 무의식 세계가 맞는지 아니면 내 몸이 실제로 이동됐는지 헷갈리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눈을 잠깐 깜빡인 순간 내 몸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두 손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있다. ‘시바, 이게 도대체 뭐야.’ 라는 불경한 생각을 잠깐 머릿속에 담기는 했지만, 고개를 흔들어 곧바로 떨쳐 버렸다. 눈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길게 늘어뜨린 흑발, 검은색의 눈동자.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검은색이라고는 볼 수 없다. 정말로 칠흑 같은 어둠을 가지고 있는 눈동자와 머리카락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색과는 거리가 멀다. 별 한 점도 없는 우주를 색으로 옮기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벨리알을 처음 봤을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저도 모르게 덜덜 떨려오던 위압감은 없다. 오히려 사람을 무척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은 느낌. 싱긋 웃고 있는 모습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아름다웠다. 도저히 악마라고 부를 수 없는 외관. 하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는 악마가 맞다. 그것도 상당히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악마. 본인의 입으로 본인이 직접 계약자들에게 힘을 내려줬다고 말하기도 했고, 나를 자신이 있는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을 이용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악마 계약자 놈들의 불타는 의지와 노력에 박수를 쳐줬었던 이전의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저 아름다우신 악마분의 말씀이 전부 맞다면 아마 그들이 원해서 소환된 것이 아닐 것이다. 정확히는 저 악마가 소환되기를 원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물론 위 방법 역시 평범한 악마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72군단에 랭크되어 있다고 한들, 본인이 튀어나오고 싶다고 해서, 튀어나왔다는 악마는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이런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지위와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을까. 정확히 지옥의 구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 5위, 아니, 3위 안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저 여자가 정말로 서열 3위 이상의 랭크되어 있는 악마가 대륙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가정해 보자. 베니고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 혼자서 수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모르긴 몰라도 베니고어 윗선에 있는 이들이 대륙으로 파견되지 않을까. 대륙이 금방 개판이 될 거라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거고…. 그건 온건파로 분류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저 악마가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재미있는 추론이군요. 거의 다 정답입니다. 제가 이렇게밖에 당신을 만날 수 없었던 이유도 맞고, 온건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정답입니다. ‘건방졌다면 죄송합니다.’ -처음 보는 이를 제대로 직시하고, 파악하는 건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어떤 악마라는 건 제대로 파악하신 건가요? ‘솔직히… 말씀드리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시면 더욱더 쉬울 겁니다. 당신 생각처럼 스스로 소환되기를 원해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악마는 흔치 않으니… 한번 맞춰보시겠습니까? 좋은 유흥이 될 것 같은데…. 서열 1위 바알 아니면 서열 2위 아가레스? 아니면 서열 3위 바싸고? 그다음 가미긴 혹은 마르바스 일 확률도 없지 않지만, 단언컨대 4위와 5위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바알, 아니면 아가레스라고 생각하는 편이 맞지 않을까. 8위권 안에 랭크된 악마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절대로 평범한 악마라고는 볼 수 없다. 뭐라도 대충 선택해야 하는 타이밍. 일단은 질러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리라. 눈앞에 있는 아름다우시고 고귀하시며 고결해 보이기까지 하는 지고의 대악마님께서는 상당히 너그러워 보였으니까. -재미있네요. ‘실례지만 혹시 바알 님이 아니신지….’ -하지만 오답이예요. 아가레스는 더욱더 아니고요.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싱긋 웃고 있는 모습. -더불어 72군단장에도 제 이름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자, 등 뒤에서 칠흑의 날개 12장이 활짝 펴지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 모습이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 맞는지 틀린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일단은 목구멍에 걸려 있었던 그 이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으니까. ‘타천사.’ -……. ‘…….’ -네. 몇몇 차원의 필멸자들이 7대 악마라고 부르는 이들 중 하나입니다. ‘…….’ -이럴 게 아니라 다시 한번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기영 님. 루시퍼라고 합니다. # 598 회귀자 사용설명서 598화 루시퍼(1) 찰나의 시간이기는 했지만,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7대 악마?’ 72군주, 그 위에 군림하고 있는 악마가 있다는 사실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벨리알은 물론이거니와 베니고어 역시 언급한 적이 없다. 리무르아나 로노베 역시 마찬가지였고…. 정황상 베니고어가 말하는 윗분들과 비슷한 선상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발을 걸쳤다는 것을 숨기고 싶어 하는지, 어째서 스스로 소환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는지 그 개연성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여기서 문제는 어째서 이분께서 나를 보러왔느냐에 대한 것. 대기업 회장님께서 굳이 여기까지 행차해 주신 이유가 궁금해졌다. 물론 이유야 만들 수 있다. 이쪽은 면접을 기다리고 있는 신입 사원이 아니다. 오히려 임원이나 경영자로의 취업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새로운 회사를 경영하게 될 경영자,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혁신 인재, 정체되고 있는 기업에 창조성을 불러일으켜 줄 새로운 바람 둠기영. 만약 지옥으로 행선지를 정한다면 72군단장을 역임할 가능성이 큰 만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작위를 받게 된다면 계열사를 하나 맡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룹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루시퍼의 입장에서도 한 번쯤은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게 당연하지 않을까. 심지어 경쟁사에서까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충분히 자리를 만들어볼 만했다. 물론 딱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지분이 있다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하리라. 어쩌면. 조만간 베니고어 윗선에서도 접선을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가지 생각과 추측이 난무하는 도중,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루시퍼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궁금하신 것 같은 표정입니다.] ‘네,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 ‘물론 저 같이 하등한 필멸자를 이런 노고를 겪으시며 찾아주신 것은 감사하고 또 감사드려도 모자랄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만나러 와주신 이유가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평범할 리가 없겠지.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작은 호기심이라고, 그 정도로만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벨리알에게 많은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그 아이의 성과를 높이는 데 일조했으니… 뿐만이 아니라 로노베, 그 아이 역시 군단장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더군요.] 로노베가 군단장이 됐어? 내가 무슨 도움을 줬는데. [무관심하게 바라보고 싶어도 흥미가 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직접 현세로 발을 들인 것은 오랜만입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굳이 이곳에 오지도 않았겠죠.] ‘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딱딱하게 계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당신의 팬이니까요.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앞에 놓인 것 좀 함께 드시죠.] ‘네.’ 최대한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주려고 하는 것이 보인다. 차라리 이런 만찬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조금 더 좋았을 것 같은 느낌. 세상에 공짜는 없다. 타천사가 이쪽에 호의를 보내는 것도, 테이블을 가득 채운 만찬도, 그리고 저 웃음도, 모두 원하는 게 있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받으면 돌려줘야 한다는 기본적인 법칙을 모를 리가 있을까. ‘나는 너를 이만큼 대접하고, 심지어 너에게 내릴 것도 있으니, 너 역시 내게 보답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전적이지만 훌륭한 방법이다. 물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생각해 본다면 그녀가 이쪽의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쾌재를 부를 수 있는 상황이기는 하다. 하지만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큰 거래는 최대한 지양하는 게 옳다. [식사가 입맛에 맞으시면 좋겠네요. 물론 실제로 먹는 것은 아니지만… 입이 짧은 우리 이기영 군단장을 만족시킬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맛있습니다. 제가 먹었던 그 어떤 것보다 더욱더요. 와인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대접해 주시니 이 미천한 사람은 도저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당신의 팬이라고요. 유행하고 있는 소설에 약간 빠지기도 했고… 아니, 솔직히 조금 많이 빠졌습니다. 최근 당신의 모습을 남모르게 바라보며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만… 뭐 이건 부수적인 이야기이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제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그다지 관심이 없을 테니. 그렇지 않습니까?] 도대체 저 타천사가 소설에 빠지는 게, 내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커다란 관심이 없는 것은 맞다. [무엇을 얻어갈 수 있는지, 또 그 대가는 무엇인지가 가장 궁금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답. [드릴 수 있는 건 한정적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대신 해결해 드리고 싶지만, 그건 제 영역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아예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을 수는 없지만, 이런 자리에 앉아 있다 보면 움직이는 데 제약이 생기는 터라… 이기영 님도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당연히 이해해 드려야지요. 굳이 그런 사족은 붙이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딱히 계약서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당신이 제 부탁을 들어주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게 뭔데. 여러 가지 가설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일단은 침묵.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괜스레 목이 타, 잔을 들어 올리자. 반대쪽에서도 잔을 들어 올리며 싱긋 웃는 타천사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저도 모르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혔지만,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라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말하기가 어렵다. 조금은 긴장한 내 표정을 읽은 모양. 이윽고 조심스레 움직인 그녀의 입술을 통해 받아들일 수 없는 개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당신과 함께 다니는 이들 중에 또 하나, 격이 높은 인간.] 뭐야, 그건 안 되지. 무슨 개소리야, 미친 까마귀 년이. 뭘 기분 좋다는 듯이 실실 쪼개고 있어. ‘…….’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에게 해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득이 되면 득이 될 수도 있는 제안입니다.] ‘…….’ [네, 김현성이라는 인간 말입니다. 제가 원하는 건 그자예요.] ‘정확히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적의를 드러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니까요. 당신의 사람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도 저희와 함께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물론 악마들과 뜻을 함께하기에는 성향이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당신이 함께한다면 충분히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더군요.] 그런 이야기였나. 혹시나 말도 안 되는 개 같은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던 것이 사실. 막상 뚜껑을 까보니 조금은 의외라고 할 수 있는 제안이 튀어나왔다. 아마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잠깐 생각해 봤지만 확실히 무리가 있는 주문이다.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악마에 대한 적의는 상상을 초월한다. 녀석들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한때 빛에 속해 있었다고 전해지는 타천사 루시퍼가 김현성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딱히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건 얘가 우리 현성이를 모르고 하는 소리지. 만약 김현성을 이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한들, 협조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데 내 모든 걸 걸 수 있다. 아마 악마들은 김현성이 상대 진영 쪽으로 가는 걸 경계하는 것이 아닐까. 굳이 원하고 있지는 않지만 라이벌 회사에 인재를 빼앗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대충 느끼기에도 김현성과 빛 쪽 진영의 시너지는 꽤 괜찮았으니까.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위쪽이 조금 더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 인재에 열을 올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진행되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역시는 역시네. 김현성은 아직 따로 컨택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여 의아해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두 진영이 서로 간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설득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뭔가 수를 써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당신이 확실하게 군단장의 자리를 맡아주신다고 한다면 그 역시 따라나설 것이 분명할 테니… 그저 때가 다가왔을 때 그가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을 건네주기만 하시면 됩니다.] ‘글쎄요. 그게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겁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세요.] 그렇기는 하다. 만약 정말로 어느 한쪽 진영을 선택해야 한다면 무조건 김현성과 함께 움직이는 게 이득이지 않은가. 아무리 양쪽 진영에 벨리알과 베니고어가 있다고 한들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이와 함께 움직이는 것보다 좋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 정치 감각이 부족한 김현성 역시 나를 원하게 되지 않을까. 만약 함께 위로 올라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이쪽을 빛 쪽으로 잡아당길 것이 분명하리라. ‘원하시는 게 정말로 그것뿐이라면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겠습니다. 하지만… 벨리알 님과 베니고어 님의 계약 내용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교섭권은 베니고어 님이 가지고 계시고 저쪽에서 조금 더 좋은 제안이 나온다면 저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는… 편법이기는 하지만, 계약 위반에 해당하고 있는 사안이고요. 기분이 나쁘시겠지만, 저는 지금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루시퍼 님. 듣기 좋으시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보다는 아마 이쪽이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있고요. 제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주시는 것 같아 기쁘네요.] ‘뭔가 다른 쪽으로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일단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확신할 수 없다는 뉘앙스가 정답. 반응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아마 조금 더 떠보지 않을까? 아니면 다른 조건을 제시하지 않을까. 계약이 파기되면 안 되는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애써 눈앞에 있는 타천사를 바라본다. 여전히 속을 모르고 싱긋 웃고 있는 얼굴, 올곧은 자세로 서 있는 콧수염 집사들은 아무 말 없이 비어 있는 잔에 와인을 따를 뿐이었다. [너무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것 같아 아쉽기는 하지만… 뭐 사실 별로 상관은 없을 것 같군요. 어차피 당신은 그쪽보다는 이쪽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니…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 지옥으로 갈 확률이 높다는 건 인정합니다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변할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구두로도 그렇다고 대충 대답해 드리지 않은 것은 제가 그만큼 지고의 대악마 루시퍼 님을 존중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부디 불편해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뒷일이 걱정된다는 얼굴인데….]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분위기가 망가진 것 같지는 않으니 넉살 좋게 넘겨보자. [뭐, 오히려 이게 좋겠네요. 이기영 군단장의 말처럼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면 조금 기분이 찜찜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당신 이야기를 같이 해보도록 하죠. 최근 많이 고생하시고 계신 것 같던데…. ‘…….’ [이기영 님께서 처한 상황이 어떤지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힘을 필요로 하고 있으시다는 것 역시 말입니다. 제 힘이라도 직접 내리고 싶지만, 아쉽게도 이기영 군단장의 파장은 벨리알과 더 맞는 것 같더군요. 무리하면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결과가 그리 좋지 못해 추천해 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당연히 받을 생각이 없다. [10장의 날개라도 선물로 드리고 싶지만….] 부작용 있으면 사절입니다. [그 구더기 같은 신체로는 불가능할 것 같군요. 아, 욕하는 것은 아닙니다.] ‘꼭 그게 아니어도… 제가 지금 무언가를 청할 입장이 아니니, 만약 내려주신다면 감사히, 압도적으로 감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버릇없는 바깥 신과 더러운 비둘기들의 목을 쳐, 이 대륙이 루시퍼 님의 발아래에 움직인다는 것을 천명할 수 있도록 분골쇄신 노력하겠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진심은 느껴지진 않았지만… 마음 같아서는 제가 직접 내리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이럴 게 아니라 몇 가지를 보여드리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은데… 직접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됐다. 정확히 뭐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됐다. 일평생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얼굴로 루시퍼를 바라보자 짧게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599 회귀자 사용설명서 599화 루시퍼(2)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에는 상당한 힘이 소모됩니다. 빛 쪽에 몸을 담그고 있는 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저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담을 드리기 위한 말은 아니지만, 언젠가 이번 일에 대한 보답이 있을 거라 믿고 있겠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루시퍼 님.’ [몇 가지 물건이 있으니 살펴보시지요.]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콧수염 집사들이 몇 가지 물건을 가져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도 악마 측에서 마검이라고 부르는 물건임이 분명하리라. 본래부터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준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저 물건들이 신화급 물건들이라는 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가지 문제가 있다면…. ‘너무 마검스럽잖아.’ 징그러운 디자인이 문제였다. 살아 있는 것처럼 손잡이에 달린 수백 개의 눈알을 굴리며 여기저기를 바라보는 녀석도 있었고, 검신이 짐승에 입처럼 디자인된 녀석도 있었다. 이쪽을 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짐승의 입에서 게걸스럽게 튀어나온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게 된다. 왜 자꾸 저 거대한 혀가 나를 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저 아이가 이기영 군단장이 마음에 든 모양이군요.] 별로 마음에 들고 싶지 않다. [위쪽에 있는 무구 중에서는 조금 특별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위한 무구도 있습니다. 저 아이 같은 경우에는 6개의 혀를 가지고 있는데. 아마 군단장님과 취향만 맞는다면 재미있는 놀이 상대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떠신지요. 개인적으로는 이기영 님이 저 아이를 가지고 노는 장면을 보고 싶은데.] ‘하하… 괜찮습니다만… 일신의 무력이 미천해 제가 직접 마검을 다루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검의 형태를 하고는 있지만, 마력을 증폭시켜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마검도 존재합니다. 사용자의 혈액을 매개체로 한다는 것이 사소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응, 아니야. 그것도 안 돼. [영혼을 천천히 먹힌다는 단점이 존재하지만, 사용자를 최상위의 검사로 만들어주는 마검 역시 존재합니다.] 보석 안에 있는 유령 할아버지가 곡성을 내지르고 있는 저거? 절대로 안 집을 거야. 집어 드는 순간 저주받을 것 같아. 보기만 해도 지옥으로 떨어질 것만 같이 생긴 검들은 모조리 아웃이다. 저런 종류의 검을 들고 성검이라 선동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가 아닌가. 적어도 겉모습은 신성해 보여야 하는 게 맞다.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를 대체할 수 있는 건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뿐이다. 누가 봐도 저주받은 것처럼 보이는 검을 가지고 성검이라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루시퍼가 가지고 온 마검들은 전부 논외. 정말 이런 것밖에 없는지 탓하고 싶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물론 정 없다면 뭐라도 써야 하는 게 맞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빛의 군대의 아이덴티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저런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마음에 드는 게 없는 모양이군요. 제법 괜찮은 것들로 선별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을 간절히 원하는 저 아이라도 가지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건 조오금…. ‘지고의 대악마이시며,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관장하고 계시는 루시퍼 님. 이런 말씀을 드리기 정말로 죄송스럽습니다만, 조금 더 투박한 모양의 검은 없는지…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대륙에서의 제 위치상….’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무구는 대부분 이런 면이 있는 터라….] ‘…….’ 제길 아쉬운 대로 저거 중에 하나라도 가져가야 하나? 보석에 갇혀서 곡성을 내지르는 할배검이 그나마 괜찮을 것 같은데…. 수 세기 전에 세상을 구한 용사가 후대를 위해 스스로를 봉인하고 있다는 설정으로 밀어붙이면 되잖아. -저… 저주할 테다… 빌어먹을… 이이이인가아아안… 놈들… 죽이고 또… 주욱이고오오… 죽여주마아아아… 나르으으을… 가아아암히이…. 알았어요. 안 가져갈게요. 할아버지. 다시 보니까 저 눈깔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조금 징그럽기는 하지만…. -끼릭! 끼릭! 끼릭! 끼리리리리리익! 저것도 패스. -울어라, 지옥참마도. 저건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저 녀석 역시 패스다. 도대체 정상적인 검이 있기는 한 건지 궁금할 지경. 그렇다고 해서 혓바닥을 가져갈 수는 없다. 기능은 확실할 것 같지만 매일 매일 마력충전 당할 것 같은 느낌이고… 무엇보다 6개의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겉모습 자체가 그로테스크하다. 저건 베니고어의 혓바닥이라고 밀어붙일 수도 없다. 그렇게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참이나 괴로운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던 루시퍼가 그나마 정상처럼 보이는 검을 내밀었던 것. 아무래도 이 전까지의 검은 그저 내 반응을 보고 즐기기 위한 연막이었나 보다. 머릿속으로는 너무 악취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금방 고개를 흔들고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타락한 천사의 666번째 성마검-신화 등급] 저도 모르게 커다랗게 입을 벌리게 되는 영롱한 자태. 회색빛의 검신이 인상적이다. 아주 고전적인 형태의 신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 장식은 왠지 모를 신성함까지 느끼게 한다. 물론 풍겨오는 기운 자체는 인상을 찌푸릴 만했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억눌려져 있다. 어떻게 생각해도 조건에 딱 부합하게 만들어진 녀석이었다. 루시퍼라서 건넬 수 있는 무구. 자꾸만 올라가려고 하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는 것도 일처럼 느껴졌다. 물론 마검이니만큼 부작용이나 페널티가 존재하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내가 쓸 검도 아니니 별로 상관없지 않은가. 기쁨을 감출 수 없는 내 반응을 봤는지 싱긋 웃어오는 루시퍼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정말로… 제가 이런 물건을 받아도 괜찮은 건지….’ [네, 이후에 돌아올 게 있다는 걸 믿고 있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떤 형태로든 이 무구에 상응하는 보답을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이기영 군단장.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이만 헤어질 시간이로군요. 제가 너무 시간을 뺏은 것은 아닌지….] ‘아이고오! 당치도 않습니다요. 어떻게 제가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도 유익하며 천금과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이대로 헤어지기가 너무 아쉬울 정도로 말입니다. 만약 시간이 조금 더 남으신다면 함께 와인 한 잔 더 하시는 게 어떠실지….’ [저 역시 그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더 이상 주어진 시간이 없습니다. 주변의 눈도 신경 쓰이기 시작하는 타이밍이고… 저도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니까요. 아무튼, 작별인사는 해야겠군요. 지루하고 무기력한 일상에 힘을 불어넣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시퍼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 천한 것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요.’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부끄럽지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사인을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물론이고 말고요.’ 둠기영이 지옥에서 핫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루시퍼 역시 이런 부탁을 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난생처음 보는, 이제껏 본 적도 없는 악마어로 쓰인 서적들. 역병 어쩌고가 쓰여 있는 걸 보니 강연 내용이라도 적혀 있는 것이 아닐까. 수십 권이 넘는 서적들이 다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콧수염을 달고 있는 집사들은 정체불명의 서적을 이쪽으로 옮겨오느라 정신이 없다. 슬슬 팔이 아파오는 시점. 하지만 이 정도라면 기쁜 마음으로 응해줄 수 있다. 겨우 이런 걸로 환심을 살 수 있다니 얼마나 남는 장사인지 모르겠다. 확실히 그때 강연이 온건파들의 가슴속에 제대로 틀어박힌 모양이다. ‘책이 제법 많군요. 평소에 독서를 즐기시는지요.’ [지옥에서 열린 행사… 아니, 전시회에서 나온 서적들입니다. 자세한 건….] ‘아, 제가 건방졌군요.’ 말없이 싱긋 웃고 있는 모습. 급하다고 말했던 건 잊어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여유 있게 할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무의식 세계와 현세의 시간 축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 정도면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느낌.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팔을 움직이자 현세에서 조혜진이 어떻게 반응할까에 대한 것 역시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은 초조해지는 것 같은 느낌. 곧 끝날까 싶었지만, 도저히 끝이 안 보이는 서적의 행렬. 결국 몇 시간이 더 지난 이후에야 그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었습니다요.’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한 것 같아 걱정되는군요.] ‘하하하, 괜찮습니다.’ 사실 괜찮지 않다. 현재 이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걸 보면 5현장을 빠져나간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신을 잃은 상태가 오래 지속되고 있다는 건 반가운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받을 것도 받았고, 할 일도 다 마쳤겠다. 슬슬 보내줬으면 싶었지만, 계속되는 작별인사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다. 다행히 루시퍼 역시 슬슬 마무리를 지을 시간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는 모양. [즐거웠습니다, 이기영 군단장.] 그녀가 살짝 손을 흔드는 순간 심연으로 몸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며 시야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뭐야.’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장면은 조혜진의 얼굴. ‘왜 이렇게 가까워.’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걸 본인이 자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내 얼굴로 그녀의 눈물이 떨어져 내리는 중이다.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다행히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았다. 길어봐야 30분도 안 되는 시간이 아닐까. 피곤함이 몰려와 한숨 때리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는 했지만…. “흐으윽….” 계속되는 목소리에 인기척을 낼 수밖에 없었다. “아….” 당연히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괜, 괜찮… 괜찮으십니까? 괜찮으신 거 맞아요?” “여기가….” “기억나시는 겁니까? 저는 조… 조혜진이고… 이곳은 5현장입니다. 당, 당신은 파란 길드의 이기영이고… 저, 저와는 친구 사이였습니다.” “그걸 물어본 게 아닙니다, 혜진 씨. 별거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 “전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일일이 설명해 주실 필요 없어요.” “…….” “치매 걸린 노인 취급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겁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니까. 전부 다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아까도 펑펑 울고 있더니 지금도 펑펑 울고 있네요.” “누가… 흐윽… 누가 울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0분만 더 늦게 일어났어도 길드로 데려갔을 겁니다. 아니…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데려가고 싶어요.” “그래 봤자 달라지는 게 없을 거라는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뭐… 아무튼 감사합니다.” “…….” “정확히 얼마나 지났습니까?” “15분 정도….” “조금 오래 누워 있었군요.” “정말로,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정말로….” “네, 가끔 있는 일이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몇 번이나 말씀드리는 거지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힘드시면… 힘들다고 말하셔도 됩니다.” ‘힘들긴… 혜진아, 하나도 안 힘들아. 우리 대박 났어. 떡상 각 날카롭게 섰다니까.’ 마음 같아서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너무 숙연한데, 이거.’ 사태의 심각성을 직접 눈으로 목도한 조혜진의 얼굴이 괜스레 눈에 밟혔다. # 600 회귀자 사용설명서 600화 극복하는 방법(1) 분위기가 어두워도 너무 어두운 상황, 누가 보면 내가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의 반응이었다. 그녀답지 않게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얘가 너무 오버하는 건 아닌가 하는 못된 생각을 해봤지만… 생각해 보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래, 얘 입장에서는 얼마나 놀랐겠어.’ 기억을 잃는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지 불과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이지 않았던가. 안 그래도 몸도 허약한 양반이 멍 때리는 걸 지속적으로 반복하다 기절해 버렸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기절해 있었던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뭐라고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패닉 상태에 빠졌어도 이상하지 않다. 모르긴 몰라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으리라. 그녀의 몰골을 보자 괜스레 고개가 수그러든다. 정신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은 저쪽과는 다르게 이쪽은 아직도 루시퍼에게 대접받았던 호화로운 만찬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진짜 맛있었는데….’ 가히 거울 연어급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식사였다. 신화 등급의 검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저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샘솟아 올라왔다. “괜찮습니다.” “자꾸만 괜찮다고만 말씀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발… 몸 좀 챙기세요.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내색하셔도 됩니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많은데 어째서… 이럴 게 아니라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길드마스터에게도….” “네?” “모두 말씀드리고 다 같이 방법을 찾아야 됩니다. 그것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아요. 정말로… 정말로 전부 다 잊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정말로… 다 잊어버리면 어떻게 해요. 이러다가… 흐윽….” “이러니까 제가 말씀을 안 드린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 혜진 씨만 해도 이러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어요. 말씀드렸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게 마련이에요. 저는 제 기억보다 제 목숨을 우선순위로 놨으니 괜히 알릴 생각하지 마세요. 다들 해야 될 일이 있고 준비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이상한 일에 휘말려 거기에 시간 허비할 시간 없어요.” “이게 어떻게 이상한 일입니까.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그게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니면 뭐가 시간을 허비하는 걸 것 같아요? 현시점에서 치료방법을 알아내겠다고 발버둥 치는 건 손으로 연기를 잡는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도….” “그러니까 아픈 게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정말로 괴로웠다면 제가 먼저 나서서 아프다고 생난리를 쳤을 겁니다. 내 성격 아는 분이 왜 이러실까. 그러니 괜히 상황 심각하게 만드시지 마시고… 일단 다른 파티원들이랑 합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도 좋지 않으니….” “…….” “평소처럼 행동해 주세요. 얼굴도 좀 닦으시고 진정 좀 하세요. 이러다가 뭔 일 터진 거 아닌지 의심받겠습니다.” “…….” “빨리 나가요. 빨리.” “…….” “…….” “멍청한 새끼….” 작게 중얼거리는 모습에는 오만 걱정이 묻어나왔다. 순식간에 욕을 얻었지만,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없다. 일단 무한의 가방에 보관되어 있는 신화 등급의 마검만으로도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보다 더 좋은 걸 얻어왔는데…. 조혜진이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는 것 역시 충분히 엄지를 치켜세울 만한 소식이다. 얘가 융통성이 없어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그게 호재로 작용한 모양이다. 지금은 살짝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었지만 결국에는 내 뜻에 따르지 않을까. 남의 숨기고 싶은 비밀을 떠벌리고 다닐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장담하건대 꼭 비밀로 해달라는 말을 지금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아이고… 사려까지 깊네. 우리 혜진이가….’ 약간의 걱정거리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현시점에서 중요해진 것은 루시퍼 님이 내리신 성검의 주인을 결정하는 일. 정 쓸 사람이 없다면 내가 써도 상관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이런 종류의 검은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사용하는 게 낫다. 애초 선택받은 용사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가 아니었던가. 도착지만 같다면 어디로 가든, 뭘 타고 가든 별 상관없다. 간단히 말해 베니고어 측에서 용사를 선택하든, 내가 용사를 선택하든 결과에는 문제가 없으니 그다지 켕길 게 없다는 거다. 오히려 문제는 과연 선택받은 용사를 찾을 수 있느냐에 대한 것 그리고 그 선택받은 용사가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검에 적합할지에 대한 것, 마지막으로 이 성검의 성스러운 힘을 감당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들어온 성검이니만큼 부작용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이걸 파란 길드의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런 연유고…. 그 이전에 파란 길드원들 같은 경우에는 이 성검에게 선택받을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끝이 아닐까. “저 부길드마스터.” “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름대로 진지한 고민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조혜진이 입을 여는 모습, 아마 다시 한번 멍 때리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말하는 거지만, 뭐 알려야 된다는 말은 듣지 않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말을 건 게 아닙니다. 그냥… 다른 파티원들한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또 길드마스터한테는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평소처럼 대하세요.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할 때만 한 번쯤 나서서 도와주시고 그전에는 그냥 평범하게 행동하시면 됩니다. 방금 같은 일이 또 생기면 같이 수습하는 걸 도와주셔도 되고요. 갑자기 또 정신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네.” “현성 씨한테는 최근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신 것 같다. 정도로만 말씀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믿지 않으실 겁니다.” “아니요, 믿을 걸요. 장담컨대 제가 직접 말하는 것보다 혜진 씨가 직접 말하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네?” “현성 씨가 혜진 씨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알면 아마 놀랄 거예요. 혜진 씨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믿고 있거든요. 그냥 그런 것 같다고 보고만 해도 크게 뭐라고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내 말이 맞다, 혜진아. 왜 네가 김현성 1픽이겠어.’ “그게 정말입니까.” “네.” ‘그러니까 괜히 나중에라도 말해야겠다 싶어서 입 열면 안 돼.’ 그 와중에 기쁜지 슬그머니 미소 짓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니까 그 신뢰, 저버리기 싫으면 잘 숨기고 계세요. 사실 별말 안 할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조심하는 게 맞잖아요. 현성 씨한테는 사태가 조금 더 심각해진다 싶으면 제가 직접 말씀드릴 테니까요. 운이 좋으면 그 이전에 상태가 호전될 수도 있고요. 베니고어 님은 힘들다고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혹시 압니까. 기적이 일어날지. 대륙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부길드마스터답지 않게 생각하시는 게 희망차시네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잖아요. 딱 말 그대로의 이야기예요. 어떤 방식으로는 분명히 방법이 생길 거라는 겁니다. 이런 장소에서 돌파구를 찾아낼 수도 있고… 뭐…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아무튼 간에 평소대로 대해주시는 겁니다.” “돌파구라… 돌파구….”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기기가 무섭게 박덕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거, 뭐 하다가 그렇게 늦은 거요?” “이것 것 보고 챙길 게 있어서. 많이 늦었나 보네. 조금 어때?” “나야 뭐 알 리가 있나. 그런 건 무녀님이랑 누님이랑 소라 후배한테 물어보쇼. 그나저나 혜진이 누님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은데….” “…….” “…….” “무슨 일 있었소?” ‘이 새끼 눈치 빠른 거 봐.’ 안심하고는 있지만 불안하기는 하다. 혹시나 ‘얘, 기억상실일지도 모른대요! 치매 왔다니까?’라고 중얼거리지는 않을까 걱정한 찰나 그녀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설마요. 그런 게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생각보다 생체실험실의 데이터를 정리하는 게 오래 걸려서 도움을 드렸을 뿐입니다. 네, 그렇죠? 부길드마스터? 맞다고 하지 않습니까. 도움을 드렸을 뿐입니다. 덕구 씨가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음….” “그러지 말고 어서 들어가시죠.” 다행히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 문제는 형편없는 연기력에 있었다. 열심히 해주는 것 같은 사실 자체는 고마웠지만, 누가 봐도 평소 같은 모습은 아니다. 무척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고 억지로 되지도 않는 걸 수습하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괜스레 먼 곳을 바라보게 된다. 아니, 이 정도면 뭔 일이 있다고 광고하는 거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아… 얘 이거 위험한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형편없는 연기에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 절대로 몰래카메라 같은 걸 하지 못하는 타입일 거라고 느끼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구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차라리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박덕구 역시 독촉하는 듯한 조혜진의 말에 상당히 당황하는 것 같은 눈치, 괜스레 이쪽을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아니, 그냥 한 번 던졌는데 뭐 그렇게까지…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거요?”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뭐 형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혜진이 누님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인지 뭔지 모르겠네.” “최근에 스트레스받는 일이 많았던 것 같더라고… 기분 탓 맞아. 그리고 계속 거기 있을 거야?” “같이 가쇼. 지금 갈라니까. 안 그래도 배고파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밥 언제 먹냐고 물어보러 갔을 거요.” “먼저 먹지 그랬어?” “당연히 같이 먹어야 하는 거 아니요? 아암… 그렇고말고… 한 식구인데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 형님도 배고플 때 아니요?” “글쎄… 나는 아까….”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다 저도 모르게 입을 닫은 것은 당연지사. 한 발자국 앞서갔던 조혜진이 등을 돌려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까 배고프다고 하셔서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간식을 드렸습니다.” “아, 그런 거요?” “네. 그래도 제대로 된 영양분은 섭취하는 게 맞으니 식사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암, 그래야지. 원래 열심히 일하려면 열심히 먹어야 되는 거 아니요. 형님도 너무 불량식품 같은 것 좀 먹지 말고 골고루 팍팍 좀 먹어야 건강해진다니까.” 아까의 트롤 짓을 무마시킨 뜻밖의 1도움. 사실 그냥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저런 도움이 달갑지 않을 리가 없다. 슬쩍 조혜진의 얼굴을 바라보자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가지로 도와주겠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케어해 주는 걸 보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최소한 먼저 나서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겠네.’ 뭔가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배가 많이 고프기는 했는지 박덕구가 허겁지겁 더 안쪽으로 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 조사에 몰두하고 있는 정하얀, 한소라, 카스가노 유노 역시 천천히 바깥쪽으로 나오고 있는 모습. 역시나 정하얀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달라붙어 왔고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한소라가 희미하게 미소 지어왔다. 굳이 식사준비라는 걸 할 필요도 없이 미리 가져온 전투 식량을 대충 늘어놓으니 어느새 파티원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숟가락을 든다. 그 와중에도 조혜진은 뭔가 조심스러운 표정이다. 머릿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을 전부 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단순히 기억을 잃는 증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판단한 게 분명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신적 착란을 일으키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떠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단순히 실수로 치부할 수 있는 말이기는 했지만, 듣고 본 게 있으니 간단하게 넘길 수 없는 모양인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하지.’ 1도움이 고맙기는 했지만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이 건은 해명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집어넣은 기믹은 기억을 잃는 것뿐이지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종류는 아니다. “가, 가서 본 일은 어떠셨어요? 오빠?” “아, 조금 있다가 다시 한번 가보려고. 자료가 워낙 방대해서 순식간에 정리가 되지는 않네. 여기는 조금 어땠어? 성과라고 볼 수 있는 게 있었나?” “아, 아, 아니요. 막… 엄청 신기하고 이런 건 별로 없었던 것 같았어요. 조금 흥미가 가는 건 있었지만… 거의 다 연구가 중단된 것뿐이었고….” “소라 씨도 그래요?” “네… 육체 강화에 대한 연구 자료가 있기는 했지만, 치명적인 부작용을 안고 있던 것뿐이라… 가지고 있는 부작용에 비해 능력치에 상승 폭이 크지도 않았고요. 악마계약자들이 사용한 수단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래도 소환 자체에 대한 자료들은 많이 입수할 수 있었어요.” “으음… 그렇군요.” “카스가노 님도….” “네, 송구하지만 저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게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종류의 자료들이 많, 많, 많은 것 같아요. 깊이 있었던 연구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연구의 범위 자체는 무척 넓으니까요. 물론 쓸모없는 게 대부분이지만…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요….” ‘그거야 네 기준이지. 네가 보기에만 그런 거야.’ “그래도 조사해 볼 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본래 바이러스를 알아야 백신을 개발할 수 있는 거니까. 잠깐 둘러보니까 흑마법에만 한정해서 연구한 것 같지도 않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것들도 분명히 있지 않을까.” 조혜진이 다소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를테면 후유증이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 역시 치료할 수 있다는 겁니까?”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던 대사였다. ‘혜진아, 그러지 마… 통수 치지 마.’ # 601 회귀자 사용설명서 601화 극복하는 방법(2) “그게 무슨 뜻이요? 혹시 형님 말하는 거요?” 타이밍 좋게 날아 들어온 덩치 큰 돼지의 어시스트. 본인은 전부 다 알고 있으니 어서 썰을 풀어보라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건강하다니까. 이제는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 녀석의 말에 괜스레 조혜진의 반응을 살피게 된다. “거,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형님 생각 아니요. 이번에도 4일 동안 기절해 있었으니까, 말 다 한 거지 뭐… 분명히 후유증이 남아 있을 거라니까.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형님 몸은 솔직한 거 아니요. 계속해서 기절해 있던 게 바로 그 증거가 아니면 뭐가 증거겠소. 그동안 말할 기회가 없어서 말을 못 했는데… 형님은 조금 더 자기 건강에 신경 쓸 필요가 있다니까.” “기절이라면 예전부터도 했었고… 계속 말하지만, 그 힘과는 별로 관련이 없어. 오히려 최근에는 조금 더 건강해진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조금 지치고 힘든 느낌이 있어서 그렇지. 다른 종류의 부작용 같은 신호를 느낀 지는 제법 오래됐는데….” “그러니까 형님 머리는 그렇게 느낄지 몰라도 몸은 그렇지 않다는 거요. 원래 사람 몸이라는 게 그럽디다. 옛날에 우리 옆집에 살던 어떤 아재 한 명도 그렇게 건강했었는데 갑자기 무슨 병에 걸렸다고 하더니 3개월 만에 요단강 건넜다는 거 아니요.” “…….”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한테도 모두 들으라고 하는 소리요. 미리미리 건강에 신경들 좀 쓰는 게 좋을 거요.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살아야 하지 않나. 안 그래도 허약한 우리 형님은 더더욱 걱정이고…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린데… 정말로 괜찮기는 괜찮은 거요?” “엘레나 님이랑 희영 씨가 몸에 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왜 자꾸….” “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하는 소리지 뭐. 다른 뜻이 있나. 이렇게 과민반응하는 것도 이상한데… 정말로 뭐 숨기는 게 있는 건 아니요?” ‘아니, 그런 거 없다고 이 새끼야.’ 별다른 증거도 없는 억지 주장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꼴은 가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반박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모두 박덕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하얀은 안 좋은 생각을 하는 건지 이미 눈물을 일발 장전하고 있는 중. 카스가노 유노도 혹시나 하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고 한소라는 입술을 꽉 깨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내 몸이 잘못됐을 때의 여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만약 뭔가 이상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가장 피해를 보는 건 다름 아닌 그녀일 테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 와중에 조혜진의 흔들리는 동공이 시야에 들어왔다. ‘쟤, 고민하고 있네.’ 처음부터 말을 꺼낼지 고민하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순간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박덕구로 인해 형성된 분위기에 탑승하려는 모습에는 저절로 식은땀이 나올 지경이다. 사실 카스가노 유노나 박덕구, 혹은 한소라가 아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정하얀이 이 말을 들었을 때 보여줄 반응이 무섭다. 병아리 흑마법사는 벌써 두 손을 모으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고, 정하얀은 이해할 수 없는 악력으로 내 팔을 쥐어뜯을 것처럼 부여잡고 있다. ‘혜진아… 그러지 마.’ 그 옛날 내게 운명을 맡겼던 이토 소우타와 진청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슬픔을 가득 담은 눈으로 조혜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말하지 말라는 듯이, 파란 길드원들에게 폐를 끼치고 않다는 듯이, 나 혼자 견뎌 낼 수 있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내 시선을 피하는 게 눈에 띄었다. 설마 이대로 짧은 단꿈이 끝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을 때, 조혜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려오기 시작했다. “…….” “…….” “아니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 ‘그래, 혜진아. 나는 너를 믿었다. 믿음 하면 조혜진이고 조혜진 하면 믿음이지. 우리 믿음으로 가자, 진짜.’ “물론 부길드마스터의 건강이 걱정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급한 불은 껐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엘레나 님에게 말씀을 들은 것처럼 차도가 좋아지고 계시고 있고 또 계속해서 좋아지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27군단 사태 이후에 생긴 일로 후유증을 겪고 있는 다른 이들을 말씀드린 겁니다.” “후유증을 아직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구만….” “신전 측에서 지원하고는 있지만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니까. 정신계통을 담당하는 사제들은 사제 중에서도 희귀한 편이고….” “아, 그런 거요?” “적게는 오백 명, 많게는 천 명 정도가 사제 하나가 감당해야 하는 환자의 숫자라면 이해가 돼? 일반적인 치료처럼 신성력 한 번 외워주고 끝이 아니야. 나 같은 경우는 그나마 엘레나 님 때문에 빠르게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좋은 환경에 있는 건 아니니까.”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부터, 악마의 기운에 노출된 이들이나 저주에 걸린 이들까지… 이제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이라는 걸 잊지 마.” “겉으로는 말끔히 복구된 것처럼 보여도… 아직 상처가 아문 건 아니었구만. 무녀님 실리아도 비슷한 상황이요?” “실리아는 그나마 다른 지역보다는 상황이 나을 겁니다.” “…….” 박덕구에게 해준 말은 대충 지어낸 말은 아니다. 실제로 최근에는 이런 문제들이 더욱더 커다랗게 대두되고 있었다. 물론 마이너스 감정을 먹고 사는 군단이야 소리를 지를 만하다. 애초에 그 악마 녀석들이 노리고 있었던 것이 바로 대륙에 깊이 있는 상처를 남기는 것이 아니었던가. 벨리알의 ‘벨’ 자만 나와도 자다가도 벌떡 몸을 일으키는 이들이 즐비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27군단의 대륙 내 인지도는 다른 모든 군단의 인지도를 합쳐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해졌다. 그만큼 군단 쓰레기 녀석들이 인류의 영혼 깊숙한 곳에 대미지를 건넨 상황. 정신 계통의 사제를 데려와도 확실하게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결국에는 세월이 해결해 주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부길드마스터의 말이 맞습니다. 어쩌면 이 장소에 있는 것들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인 거요?” 가능성이 있다마다. 심지어 너무 원하고 있었던 전개였다. 애초 이렇게 조혜진이 먼저 다리를 놔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글쎄… 솔직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직 이곳도 전부 다 둘러보지 못한 상황이니 뭐라고 속단을 내리기는 어렵지. 정신적인 부분 같은 경우에는 특히나 너 다루기 힘들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마기에 노출된 피해자들은 치료할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뭐긴 몰라도 이득이라고 볼 수 있다는 거구만.” “아마도.” 살짝 주변을 바라보자 한소라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운이 좋으면 여기로 전출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정하얀도 이곳에 함께 지내게 되지 않을까. ‘나도 여기서 지낼 테니까.’ “음… 뭐 좋은 일이라니 다행이기는 한데… 그나저나 형님은 안 드시는 거요?” “다 먹었어.” “무슨 개미 똥구멍만큼 먹어놓고서 다 먹었다고 그러는 거요. 건강에 안 좋으니까 빨리 좀 드쇼.” “아니, 잘 안 들어가서 하는 소리야.” “그게 다 건강 버리는 거요.” “어서 드시죠.” “혜진이 누님도 빨리 먹으라고 하지 않소.” “어서 드세요.” “아니, 진짜.” “어서 전부 드세요.” “아… 네.” 대충 넘기려고 했건만 이쪽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하는 목소리가 신경 쓰였다. 정말로 아무것도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았지만, 그래도 몸은 꾸역꾸역 음식물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짧은 식사가 마무리됐고 다시 한번 정체되어 있던 작업에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조혜진이 만들어준 그럴듯한 목표와 변명거리가 있다 보니 굳이 뭘 숨길 필요도 없이 차근차근 악마 계약자들이 남긴 흔적을 조사할 수 있었고,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더 커다란 것들을 성과로 얻을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조혜진이 이쪽을 따로 불러 충고 아닌 충고를 하기는 했지만, 이미 조혜진에 대한 신뢰로 꽉 차 있는 머릿속은 고개를 끄덕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대신 그녀가 제시한 조건은 기간에 대한 것. 만약 일정 기간이 지나도 차도가 없거나, 증상이 심화될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정말로 이 장소가 돌파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조혜진의 희망 사항에는 웃음이 나왔지만, 나로서는 전혀 나쁠 게 없는 이야기였다. ‘일단 연구에 전념할 수 있으니까.’ 나 자신을 치료한다는 걸 핑계로 이곳에 눌러앉을 수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추가로 시간이 남아 호문클루스나 키메라를 연구하고 좌소라 우하얀과 함께 흑마법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를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시 전력으로 써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연구의 차도를 지켜봐야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인프라를 돌리는 인력 자체의 퀄리티가 다르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륙 최고의 흑마법 권위자 한소라와 마법 그 자체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정하얀이 아닌가. 내가 실패하더라도 얘네들이 뭔가 방법을 찾아줄 거라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아이고, 좋아요. 우리 혜진이 칭찬해, 진짜.’ 계속해서 글썽거리던 눈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녀의 아픔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잘해줄게, 혜진아. 아바타 한 번 더 해준다. 이번에는 진짜로 성공하자, 진짜.’ 정확히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이곳에서 지낸 시점, 대략적인 조사를 마치고 복귀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조혜진이 입을 열어왔다. “그럼 지금부터 계속 여기에 계실 겁니까?” “아니요. 사실 이 건 말고도 할 일이 많아서요. 일단 이곳은 소라 씨한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음….” “잘해줄 겁니다. 혜진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능하거든요. 특히나 이번 분야에서는요. 전 주인들이 사용하던 연구 인프라가 복구되는 즉시 저도 합류할 거고…. 물론 중간중간에 다른 일도 하러 나가기도 할 테니… 다리 역할을 해주시면 됩니다. 주변 사람들이 안심할 수 있게 최대한 조치해 주세요.” ‘특히 김현성.’ “그건 문제없을 겁니다… 그러니 부길드마스터야말로 제가 한 말 똑똑히 기억하세요.” ‘암요, 잊을 리가 없지요.’ 연구가 어느 정도 성과를 낸 시점에서 차도가 좋아지고 있다는 걸 표현하면 그만이다. 전부 다 나았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고…. “그럼 지금부터는….” “아, 일단 저도 신전에 먼저 들러야 할 것 같습니다.” “신전이요?” “네, 베니고어 님께서 저를 강하게 부르시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좋은 소식이면 좋겠군요. 부디… 좋은 소식이면 좋겠습니다.” 혹시나 이쪽에 이로운 이야기가 나올까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뉘앙스였지만, 아쉽게도 더 중요한 이야기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결단을 내리신 게 분명하지 않을까. 결과는 예상했던 그대로. 정확히 다음 날 아침, 하늘에서 내려온 커다란 빛과 함께 마검, 아니, 성검이 신성한 대지에 꽂혀 그 주인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마치 전설 속에 엑스칼리버 같은 고고한 자태를 내뿜으며 말이다. # 602 회귀자 사용설명서 602화 베니고어 넷(3) -대륙의 선택받은 용사가 성스러운 검을 그 손에 쥐고 거짓된 천사를 연기하는 악마들의 어둠에 대항할 것입니다. 노을빛의 검을 휘두르는 영웅의 왼편에 서, 인류를 어둠에서 구하는 것에 이바지할 것입니다.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연금술사의 적을 해치우는 검이 될 것입니다. 타락한 어둠에 대항하는 한 줄기 거대한 빛이 될 것입니다. -……. -이는 빛의 선물이요, 거짓된 이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여러분들의 희망입니다. 이 검은 오랫동안 대륙에 남아 대륙을 지키고 수호하는 검으로써, 수 세기 이후에도 대륙을 보호하며 대륙과 운명을 함께할 것입니다. -……. -베니고어의 이름 아래 싸우는 빛의 아들딸들이여. 이 부족한 여신은 그대들이 회색빛의 검이 주는 시험을 이겨낼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거대한 시련과 어둠에도 굴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베니고어시여. -그대에게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젤 교황. -어찌 이 아둔한 필멸자에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부디 이 순수한 영혼을…. -아아아아…. -……. -……. -아, 네. 지금까지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을 다시 보고 오셨습니다. 아직까지 교황청에서는 공식적인 성명이 발표되지 않고 있는데요. 뭔가 새로 들어온 소식이 있습니까? 김성경 기자? -네, 현재 현장에 나와 있는 채널 베니고어에 김성경 기자입니다. 아쉽게도 아직 공식 성명이 발표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많은 대륙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소문들이 확산되고 있는데요. 이에 일부 교황청 관계자들은 이기영 명예추기경님께서 강림 후유증에 벗어나는 즉시 성명이 있을 것이라 전해왔습니다. -예언과 성검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라고 봐도 되는 겁니까. -네, 추가로 이 성검의 주인을 어떤 식으로 선택할지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성검이 주는 시련이 어느 정도인지, 또 다른 조건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격렬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다면 언제 즈음에 논의가 끝날 것인지에 대해서도…. -네, 아직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현재 회색빛의 성검이 떨어진 위치에도 교황청의 신성기사단이 엄밀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아… 이거 도대체 몇 번이나 똑같은 장면을 보여 주는 거야.’ 하지만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지구에서도 비슷하지 않았던가. 방송사에서 보여줄 것이 없어, 보여준 부분을 또 보여주고 또 보여주는 일은 으레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교황청에서 새로운 소식이 들리면 이제 그걸로 또 한두 시간을 우려먹을 게 너무나도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거대한 빛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회색빛의 검. 살면서 이렇게까지 장엄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던가. 모든 사제가 동시에 신성력을 뿜어대고 있다. 마침내 회색빛의 검이 대지에 자리 잡았을 때의 모습은 더욱더 장관이라 할 수 있으리라. 교황청의 인사들이 모두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지 않은가. 누가 보면 정지화면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 한가운데서 정신을 잃은 채로 바젤 교황에게 부축받고 있는 명예추기경의 모습은 마치 신화 속의 한 장면이 아닐까 의심하게 될 정도였다. 베니고어 넷만 해도 폭발적이라는 반응이라는 표현이 무색해질 정도로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이 경우에는 더하겠지.’ 본인이 선택받은 용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습관적으로 여신의 손거울을 꺼내 들자 역시나 이미 불타고 있는 게시판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 명예추기경님은 괜찮으실지 모르겠네. (댓글: 23)] [작성자: 천연사러버] [제목: 교황청 실황 방송 불판 (댓글: 5,023)] [작성자: 린델마을주민] [제목: 베니고어 예언, 해석해 봅니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도 대략 유추해 볼 수 있음 (댓글: 443)] [작성자: 꽃님이] [제목: 친구가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알리지 말라고 하는데… 저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댓글: 122)] [작성자: ㅍr랑색이 좋아] 거의 모든 게시판이 오늘 일어난 사건으로 도배된 상황이다. 그 와중에도 베스트 게시물에 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억상실증 썰이 괜스레 신경 쓰여 기계처럼 손가락을 놀렸다. [제목: 친구가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알리지 말라고 하는데… 저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댓글: 122)] [작성자: ㅍr랑색이 좋아] [친구가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초창기 때부터 같은 파티에 들어가 동고동락하던 동료였는데, 며칠 전에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27군단이 대륙에 침공했을 때 생긴 후유증이라고 하는데,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는 온종일 눈물만 나오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네요. 마음 같아서는 파티원들한테 알려서, 다 함께 해결할 방법이 없는지 알아보고 싶은데… 이 친구가 폐가 되기 싫다고 알리지 말라고 합니다. 본인이 혼자 감당해 낼 수 있다고 하면서요… 답답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알겠다고는 했는데 계속해서 정신을 잃는 일이 잦아져 신경이 쓰입니다.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후략] [아이디미정: 뭘 어떻게 함? 자기 혼자 치매 걸려서 뒈지고 싶다는데, 그럴 때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답임.] [천연사러버: 위에 분탕종자 또 왔네. 저런 놈 댓글은 무시하시는 게 속 편하실 듯요, 작성자님. 일단 힘내시라는 말을 먼저 드리고 싶네요. 안 그래도 침공 후유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분 중에 한 분이라고 하니 무척 가슴 아파지네요. 제가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애매한 입장이지만… 일단은 친구분의 의견을 존중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장 힘드신 분이 친구분이실 거예요 …… 후략] [아이디미정: 어쩌면 주작일 수도 있음. 요즘에 자기 정신적으로 아프다고 말하면서 대륙연금 받는 놈들이 좀 많음? 그리고 천연사러버는 매일 반말하더니 꼭 이런 글에서만 위로하는 척, 가식 오짐.] [린델마을주민: 대륙연금 받고 싶으면 공개적으로 알리지 왜 혼자서 숨기고 끙끙 앓고 있겠음. 내 주변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는데… 솔직히 있을 법한 일임.] [흙수저: 이야기 자체가 주작인 것 같은데… 군단침공 후유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는 한데. 내가 알기로 기억상실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은 없음. 그냥 추천받고 싶어서 관심병 걸린 환자가 주작으로 쓴 것 같은데.] [ㅍr랑색이 좋아: 저도 차라리 주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디미정: 비추나 드셈.] [ㅍr랑색이 좋아: 정말 주작 아닙니다. 진지합니다.] ‘아이디미정, 얘는 여기서도 어그로 끌고 있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곧바로 뒤로 가기에 손을 가져다 댄다. 지금 중요한 건 이름 모를 모험가의 가슴 아픈 사연이 아니었으니까. [제목: 아무래도 내가 선택받은 용사인 것 같음… (댓글: 423)] [작성자: 엮은이김경식] [그 말 그대로임. 어젯밤에 꿈에 베니고어 님이 나왔는데… 꿈이 조금 특이했음. 직접 다가오셔서 천천히 검을 내려주셨는데, 온몸이 신성해지는 기운이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어디에 사는 누구라고는 정확히 말은 못 하는데 아무튼 내가 신성계열이거든… 그렇게 꿈에서 깨어나서 보니까 신성력 스탯이 무려 5포인트나 올라가 있더라. 이 정도면 선택받은 용사 각 인정? 오늘 곧바로 짐 챙겨서 검 뽑으러 간다. 3일 후에 성지순례 하는 게시물이 될 예정.] [흙수저: 이거 진짜 되면 대박이겠다… 미리 성지순례 합니다.] [붉은용병취준생: 무슨 말도 안 되는 똥 글에 왜 이렇게 리플이 많이 달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들어가서 취업준비나 하세요.] [아이디미정: 정말로 회색빛의 성검을 일반인들한테 공개할 것 같음? 그거야말로 더 말도 안 되는 소리임. 아마 이기영 명예추기경이랑 교황청의 높으신 분들, 또 대륙 보호관리 위원회에 높으신 분들끼리 후보들 물색하고 있을걸. 말로만 선택받았다 하는 거임. 분명히 회의 끝나면 ‘용사가 뽑혔습니다.’ 하면서 언론플레이 할 게 뻔함.] [천연사러버: 뭐 알지도 못하는 놈이 여기서 뇌피셜로만 떠드는 거 보니까 웃겨서 어이가 없네. 아마 일반부터 공개할 거임. 물론 자격심사 정도는 하겠지만, 전 대륙인 대상이라고 들었음.] [린델마을주민: 파란 길드 직원님… 정말이에요?] [천연사러버: 자세한 건 못 말해줌. 그리고 파란 길드 직원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걸립니다.] [아이디미정: 자격심사가 뭔데? 결국, 지들끼리 해 처먹겠다는 거 아님?] [천연사러버: 베니고어 님이 하는 말씀은 똥으로 듣나. 회색빛의 검이 내려준 시련이라는 말 기억 안 나는 건 아니지? 일반인들 같은 경우에는 검에 손대는 순간 마력탈진 되면서 영혼 나감.] [아이디미정: 또 지가 그걸 봤단다. ㅋㅋㅋㅋㅋ 이번에도 인증하는 척하고 글삭튀하려고?] [역천사홍보위원회장: 천연사러버 님 말이 맞아요. 교단 내 성기사가 자기도 모르게 손 뻗었다가 신성력 다 빨리고 기절했다고 하더군요. 용사를 어떤 식으로 발견해야 하는지 그것 때문에 지금도 말 많아요. 뭣 모르고 일반인이 잡으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데… 이걸 자유롭게 공개하기는 아무래도 조금 힘들겠죠….] [아이디미정: 그걸 네가 어떻게 앎. 이 방에는 능력자 아닌 사람들이 없나 봐. 뭐, 다 지들이 보고 지들 말이 맞다고 하는데, 어이없네.] [천연사러버 님이 역천사홍보위원회장 님을 차단하셨습니다.] [역천사홍보위원회장: ??] [흙수저: 차단 잘못 누르신 것 같은데… 아이디미정 님 차단하시려다가 손 미끄러지신 듯하네요.] [천연사러버: ^^;;] ‘이 사람들은 평범하게 댓글이 끝난 적이 없네. 맨날 저렇게 서로 으르렁거리고….’ 어디 사는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쯤은 실제로 얼굴을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주의 깊게 읽었던 것은 역시나 천연사러버의 댓글. 곧바로 글이 삭제되기는 했지만, 분명히 파란 길드의 휘장과 사원증을 인증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게 진짜라는 확증은 없지만, 적어도 아이디미정이 한 말보다는 확률이 높다고 느껴졌다. ‘확실히….’ 베니고어 님께서 실제로 시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니, 일반적인 각오로는 집어 드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실제로 성기사가 검을 집어 들다 혼절할 정도라면 평범한 시험이 아닐 확률이 높다. 역시나 댓글 창에서는 이 건에 대해 양쪽으로 나뉘어 갑론을박을 벌이는 중이다. 한순간에 물타기가 완료되어 주제가 변질되는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당초에 글을 올린 엮은이김경식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토론의 현장이라 할 수 있으리라. 심지어 아직까지 댓글이 올라오는 도중이다. [아이디미정: 애초에 성검을 집었다고 혼절하는 게 말이 되나? 님들 논리대로면 저건 성검이 아니라 마검이라고 불러야 하는 물건임. 치명적인 부작용을 떠안고 있다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베니고어 님이 미쳤다고 저런 걸 내림? 안 그럼?] [린델마을주민: 말이 안 되지는 않지. 애초에 베니고어 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게 자격 아니었나. 그럼 저 검을 그냥 동네마을주민한테 줘야 됌?? 악마에 대항하려는 검에게 선택받는 사람이니 적어도 이 정도 기운은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 게 맞지 않음?] [아이디미정: 또 뇌피셜이죠? 말에 반박하려면 좀 제대로 된 증거 좀 들고 와주세요.] [린델마을주민: 만약에 정말로 선택받은 용사가 나온다면 검을 집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거임. 분명히. 나는 무서워서 시험 못 해볼 듯. 궁금하면 아이디미정이 직접 인증해 보면 되겠네.] ‘나도 한번 가볼까?’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혹시 아는가. 정말로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일지. ‘가긴 어딜 가…. 당장 5현장 작업하느라 바쁜데.’ 박 씨 아저씨, 아니, 박덕구 아저씨한테 연락하면 자세하게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역시나 무서움이 더 크다. 괜스레 침을 삼키며 다시 한번 여신의 손거울을 바라봤을 때였다. -네, 김성경 기자입니다. 몰려드는 인파로 주변이 점점 혼잡스러워 지고 있는 가운데, 교황청 대변인이 공식발표를 위해 몸을 움직이고 있는데요. 아… 네. 제이나 대주교님께서 직접, 직접 나와주셨습니다. 드디어 윗분들의 입장이 정리된 것이다. # 603 회귀자 사용설명서 603화 일생일대의 고민(1) -이러한 의견들을 종합해서 저희 교황청에서는 대륙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회색빛의 성검이 있는 지역을 전면통제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 말씀은 교황청과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일반인들이 시험에 도전할 권리를 빼앗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아, 기자님들 죄송합니다만… 질문은 모든 발표가 끝난 이후에… 따로 질의응답 시간을 마련하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글랑 주교님. 이후 드릴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으니 곧바로 답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거짓 없이 말씀드리건대 저희 교황청과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는 대륙민 여러분들이 시험에 참가할 권리를 빼앗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자격의 심사를 원하시는 분들께서는 전 대륙에 있는 주요 길드나 베니고어 넷을 통해 정식으로 시험을 요청할 수 있으며, 요청하신 모든 분을 대상으로 교황청에서 제시한 간단한 사전 시험을 통해 인원을 선별할 것입니다. -만약에…. -시험은 투명하게 공개될 것이며 모든 분이 참관할 수 있도록 조치할 것입니다. 회색빛 검의 시험에 도전하는 모든 이들 역시 여신의 거울을 통해 공개적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추가로 일정 기간을 두고도 적합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작위로 인원을 선발하도록 하겠습니다. -……. -회색빛의 검의 주인을 선별하는 데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교황청에서 지불할 것입니다. 나이도 출신도 묻지 않겠습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든, 어떤 일을 하시고 계셨든 간에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모험가 타이틀이나 기존에 있었던 명성으로 적합자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진정으로 대륙을 위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어떠한 자격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와 교황청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이용해 선택받은 용사를 선별하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걸, 이 자리에서 다시금 여러분께 약속드리겠습니다. 이상입니다. -……. -네, 지금까지 제이나 대변인의 입장 발표가 있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짧게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기자님들께서는…. -방준우 기자입니다! 현재 이기영 위원장님의 상태가 궁금합니다. 여신님을 직접 몸에 받으신 후유증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어떤 증상을 가지고 계신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께서는 현재 적절한 휴식을 취하고 계신 상태입니다. 체력적으로 조금 힘들어하시기는 하지만 몸에는 별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베니고어 님의 말씀을 교황청을 비롯한 타 교단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이기영 위원장님께서는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사안이 아닙니다. 비교적 가까운 시일 내에 언론에 공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회색빛의 용사에 대한 대륙인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만약 적합자가 나타난다면 정확히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또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교황청의 소속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소속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답변 부탁드립니다. -아직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현재 교황청에서는 회색빛의 검을 뽑을 수 있는 용사를 찾는 데 모든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후의 일에 대한 논의 역시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소속에 대해서는 최대한 용사님의 의견을 존중할 생각입니다. 답변이 되었다면 좋겠군요. -회색빛의 검의 정확한 명칭이 무엇입니까. -현재로서는 검의 정보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검의 기능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성검의 정보에 대해서는 발표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관련 질문은 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모든 대륙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짧게나마 부탁드립니다! -시간관계상 질의응답 시간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한 말씀만 더 부탁드립니다! -조금만 더 부탁드립니다! 혹시 이번에 5현장에서 나타난 악마계약자들과 관계가 있는 일입니까! -악마계약자 사태에 대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교황청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이기영 위원장님의 현재 상태가!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글랑 주교님! 제이나 대주교님! 한 말씀만 더! ‘무슨 좀비 떼거리 같네.’ 동의한다는 듯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자들이 무섭네요.” “어쩔 수 없지 뭐.” 그만큼 관심이 쏠려 있는 사안이었으니까. “저거 요즘 너무 날뛰는 것 같은데… 한 번 잡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 예상했던 반응인데 뭐. 오히려 저 정도 반응이 없으면 이쪽에서 섭섭했을걸.” “하긴… 그렇기는 하네요.” 전 대륙의 이목이 쏠리고 있는 걸 생각해 보면, 반응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 무려 인생을 바꿀 찬스가 아니던가. 교황청에서는 용사 지원 계획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아마 모두 비슷한 걸 상상하고 있지 않을까. ‘인생역전! 로또! 성검코인!’ 선택받는 순간 쏟아질 관심과 명예, 힘과 권력. 상급 모험가들의 튜터링, 영웅 등급 이상의 아이템들. 장담하건대 전장의 최전선에서 싸워야 한다는 건 잊고 있을 것이다. 책임보다는 얻을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는 일반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그들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이런 자리에 앉아 맛좋은 커피를 마시고 있지 않았다면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아마 신청자들의 대부분이 그런 뜬구름 잡는 생각을 하며 도전할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오빠. 이거… 그쪽에서 받아온 거 맞아요?” “응, 그쪽에서 받아온 성검 맞아.” “너무 절차가 귀찮을 것 같은데… 이거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 나타나는 게 확실하죠?”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대답이 너무 자신감이 없는 거 아니에요?” “아니, 나도 진짜 모르겠으니까 하는 소리야. 그래도 대륙에 한두 명 정도는 적합자가 있지 않겠어? 왠지 누나한테도 반응할 것 같은데… 한번 선택받은 용사 해볼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니야. 진짜 가능성 있다니까. 최소한 거부 반응은 안 보일 것 같은데… 살짝 손댔다가 정신을 놔버리는 성기사보다는 오래 버틸 수 있을 거야.” “쓸 수 있는 사람이 써야죠. 전력 하나가 아쉬운 상황인데. 그리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니까요. 이거 너무 범위가 넓다고요. 사막에서 바늘 찾기고 대륙에서 김 서방 찾는 것 같은 느낌인데… 만약에 정말로 선택받은 사람이 안 나타나면 어떻게 해요?” “누나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을 심하게 가리지는 않을걸.” 신화 등급의 무엇 무엇들은 대개 입맛이 무척 까다롭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기는 했지만, 요 녀석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1회 차의 성검처럼 심혈을 기울여 주인을 결정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거다. 아마 입맛에만 맞으면 곧바로 달려들지 않을까. 문제는 적합자가 필요한 게 녀석뿐만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선택받은 용사가 중요한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 단순히 1회용이 아니라 여러 번 사용할 인재다. 기왕이면 이쪽과 맞는 인원을 선별하는 게 편하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다. 성향 자체는 어떻든 별 상관없지만… 이를테면….. ‘나이가 어리고 쉽게 휘둘리는 성격.’ 쓸데없는 책임감에 똘똘 뭉쳐 있으면서도 사고의 전환이 자유로운 인재. ‘권력이나 물욕에 관심이 없고….’ 순수하기까지 하다면 더할 나위 없다. 이 회색빛의 성검은 타락한 천사가 사용했었다는 설화가 붙어 있기도 하니, 순수한 인간을 타락시키는 종류의 기믹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그게 아니라고 해도 이쪽에서도 어느 정도 합의해 줄 용의가 있다. 결국, 이번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녀석이 원하는 적합자와 내가 원하는 적합자의 교집합이었다. 물론 쉽다고는 볼 수 없다. 내 조건에 맞는 이들을 찾았다고 해서 녀석이 쉽게 응해준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적당한 합의점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필요한 것이 대국민 시험이었다. 최대한 내 조건에 맞는 인원을 선별한 이후에 물량으로 때려 박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사전 시험으로 비적합자를 골라내고, 쉴 새 없이 인원들을 밀어붙이다 보면 한 명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싶어 내놓은 특단의 조치이기도 했다. ‘그럴듯해.’ “일단 홍보 효과가 기막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요.” 이지혜의 말처럼 홍보 차원에서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또 새로운 일로 갈릴 걸 생각하면 치가 떨리기는 하지만요.” “웬만하면 나도 계속 부여잡고 싶기는 한데… 사실 나도 그럴 여유가 없거든… 정말로 여러 가지로 준비해야 할 게 많아서 당분간은 5현장에 틀어박혀 있을 거야. 자주 들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누나. 연락도 매일 할 거고. 거의 반반 비율로 왔다 갔다 할 거야.” “그 약속 지켜야 해요. 진지해요. 요즘 정말로 너무 힘들다고요. 내일이면 합동 훈련소에서 병력 들어오는데… 각 전진기지에 병력 배치하는 것도 일이에요. 그 와중에 이번 일까지 터지니까,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고요.” “이번 일만 지나면 푹 쉬고 어디 가서 바캉스나 즐기고 오자.” “기다리고 기다렸던 말이네요.” “아니면 한 일주일 정도 쉴래? 그동안은 김미영 팀장한테….” “그건 좀…. 사실 일을 안 하면 불안하거든요. 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지금까지 쌓아놓은 게 전부 망가지게 생겼는데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아무것도 없는 입장이었으면 콱 망해 버려라 하는 심정으로 침이라도 뱉었겠지만… 지금은 잃을 게 너무 많아요.” ‘얘는 진짜….’ “내 권력, 내 남자, 내 돈, 이걸 어떻게 얻었는데… 전부 포기할 수 있겠어요?” 리스펙 할 수밖에 없는 사고방식. 괜스레 엄지를 추켜세우고 싶어졌다. “뭐, 이야기 끝났으면 저는 다시 일하러 돌아갈게요. 오빠도 일어날 거죠?” “응, 나도 시작해야지.” “문제없는 거 확실하죠?” “아마도.” ‘사실 아예 없지는 않지만.’ 이지혜한테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다. 조혜진이 통수를 친 것도 아니고 정하얀이 사고를 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한소라와 정하얀은 그쪽 연구에 힘써주고 있었으니, 가장 베스트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카스가노 유노 역시 혹시 모를 변수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미래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김현성 역시 조혜진이 전해준 소식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시점이었다. 정말로 완전히 의심을 거둔 것인지는 애매하지만, 일단 경과를 두고 보자고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어쩌면 성검 쪽으로 시선이 쏠린 걸지도 모르겠다. 김창렬, 김예리에게는 따로 임무를 내렸고 엘레나, 선희영, 황정연은 길드 업무에 집중하는 중이다.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상황이었다. 희라 누나도, 디아루기아도, 교황청과 전 대륙에 퍼져 있는 네임드들도 알아서 잘 성장하며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주고 있었으니 다른 말이 필요할까. 문제는 대륙이 아니라 하늘 위에 있었다. ‘베니고어, 얘는 또 왜 연락이 안 돼?’ 성검 주작 이후로 베니고어에게 그 어떠한 피드백도 오지 않은 것이 문제. 슬쩍 뒤통수가 싸해졌지만…. ‘얘는 믿을 만하지.’ 빛 폭탄 물약 좀 먹고 예언을 대신 말해줬다고 해서 베니고어가 내게 등을 돌릴 리가 없지 않은가. 애초에 벨리알과의 계약 문제 때문이라도 베니고어와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강신도 나 혼자 해결했겠다. 신성을 내려 달라고 청한 것도 아니니 신력이 딸려 피드백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영 설득력이 없다. 여러 가지 추측들이 머릿속에 맴돌기는 했지만, 괜스레 대뇌 전두엽을 스친 생각이 하나. ‘얘, 혹시 상급자한테 털리고 있는 거 아니야?’ 근거는 없다. 하지만 영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뭐, 구금되고 이런 건 아니지? 내 말 맞지?’ # 604 회귀자 사용설명서 604화 일생일대의 고민(2) 애초에 베니고어에게는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루시퍼의 검을 내린다고 말하면 반대할 것 같기도 했고, 이미 확정된 일로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공화국과의 마지막 전쟁 때처럼 빛 폭탄 물약 2개를 들이켠 후에 예언을 지껄인 것이 전부. 위쪽의 의견을 완전히 배제한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곧 피드백이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시간이 꽤 지난 현시점에서도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따로 퀘스트가 내려오지도 않았고 조각상 쪽에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제는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모든 걸 이쪽에 맡기려고 한 것은 아닌가 하기도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무려 루시퍼의 검이 성검으로 둔갑한 상황이 아니던가. 긍정의 표현이든 부정의 표현이든 간에 말이 나오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입장 정리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본인들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상층부에 연락을 넣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있다. 엘룬 쓰레기가 전체적인 판을 망치기는 했지만 결국 베니고어 사단의 책임이 아니던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현 상황에 대해 따질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추측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가는 선택지는 상급자에게 깨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선택지였다. ‘제일 그럴듯하지….’ 대기업 회장이나 임원이라 한들, 모든 걸 알고, 모든 걸 볼 수는 없다. 윗분이 베니고어가 맡은 이 차원뿐만 아니라 다른 차원들도 함께 관리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내 추측이 조금 더 맞아떨어진다는 거다. 열정적인 회장님이라고 한들 수많은 계열사에 일일이 신경을 다 쓸 수가 있겠는가. ‘당장 루시퍼만 해도 최근에야 이 대륙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 루시퍼 쪽보다 상대적으로 할 일이 더 많은 빛 진영은 취미 생활도 제대로 즐길 수 없을 정도로 바쁠 것이 당연했다. 어쩌면 베니고어를 믿고 대륙을 맡긴 사이 루시퍼의 검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아닐까. 내부 고발? 그것도 아니면 우연히 감찰하러 온 사이에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한 것일 수도 있다. 베니고어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할 시간이 없었을 테고 결국에는 지금까지 쌓아온 업보들이 모두 드러나며…. ‘궁지에 몰리게 된 건가….’ 일이 도대체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 전말을 듣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일단은 베니고어를 믿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조각상 쪽에 한 번 더 가보는 게 좋으려나….” 그래도 같이 일을 오래 한 정이 있는 만큼 한 번 정도는 더 안부를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떠나기 전에 한 번 정도는 들리는 것도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위쪽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통수를 맞을 가능성도 있으니 미리미리 대비하는 것이 옳기도 했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자 나를 맞이한 것은 역시나 바젤 교황이다. 멀리서부터 이쪽을 발견한 직후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에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기영 명예추기경!” “바젤 교황님! 여기 계셨군요. 안 그래도 인사를 드리려고 했었습니다.” “명예추기경이 직접 올 필요가 있는가. 미리 연락을 넣어줬다면 내가 직접 찾아갔을 텐데…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이리 오게. 내가 부축해 주겠네.” “하하하. 괜찮습니다, 바젤 교황님. 걱정해 주신 덕분에 아주 건강합니다.” “으음…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요즘 명예추기경이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내 마음이 편치가 않아.” “이 모든 게 대륙을 위한 일이고, 베니고어 님을 위한 일이 아닙니까. 지금은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제 노력을 알아주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베니고어 님이 명예추기경의 노력을 모른다면 그 누가 명예추기경의 노력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차 한잔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아… 아쉽지만 바쁜 일이 있어서 5현장으로 돌아가 봐야 될 것 같습니다.” “며칠 더 있다가 가는 것….” “저도 베니고어 님과 바젤 교황님이 계시는 이곳에 있고 싶기는 하지만… 아시다시피 주어진 책임이 막중하다 보니….” “베니고어 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었구만….” ‘아니, 바젤 교황님이 섭섭해하시면 어떻게 해요.’ “안 그래도 자주 들리게 될 테니… 그리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황님.” “아, 그랬지… 그럴 수밖에 없겠구만.” “예, 온전히 일에 집중할 수가 없어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너무 미안해하지 말게, 명예추기경. 위원장으로써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정확히 일주일 뒤에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바젤 교황님.” “아암, 그래야지. 이거 내가 너무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어서 들어가게. 베니고어 님께서도 명예추기경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네.” 아까보다는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확실히 얼굴에 아쉬움이 감도는 모습이 보였다. 차 한잔 같이 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바젤 교황과의 차 한잔은 그날 하루의 절반을 날리는 일이나 다름없기에 이런 방법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관리해 준 지도 오래됐으니… 자리를 한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기왕이면 제이나 대주교와 헬레나 이단심문관도 함께 말이다. ‘내 일이 아무리 바쁘다고는 해도….’ 이런 건 시간을 내서 해줘야지. 서서히 멀어질 인맥이라고 판단했다면 애초에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각상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향하는 도중에 바젤교황과 나눈 스몰톡에 내 마음도 편해졌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일단 빛 측에서 아직 이쪽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에 가장 안심이 된다. ‘아니지, 그건 아니지.’ 다른 사제들은 몰라도 바젤 교황과 빛기영은 믿음으로 똘똘 뭉쳐 있다. 만약 바젤 교황이 하늘 위에서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거짓된 자라는 목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오히려 그 목소리를 악마의 속삭임 취급하지 않을까. 어쩌면 베니고어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미 베니고어 교단을 비롯한 대륙의 종교체계 자체가 이기영이라는 인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내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다. 스카웃 건을 제외하고서라도 대륙의 운명이 빛의 손에 달려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번에는 제가 조금 심했습니다. 그러니까 잠깐 이야기 좀 해요.” 삐져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경우는 아니겠지만 저지른 게 있는 만큼 밑밥은 깔고 들어가자. ‘우리 사이 문제없는 거 맞지? 아니 그전에 지금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부터 설명 좀 합시다. 피드백이 없으니까 답답하잖아.’ 조용히 조각상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만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이거 뭔가 문제가 터진 게 확실하네.’ 모르긴 몰라도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는 내 가설에 한층 더 힘을 실어주는 정황이었다. 결국에는 입맛을 다시며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조각상에서부터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야?’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점차 형태를 갖추고 있는 모습이 내가 아는 베니고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한쪽으로 머리를 땋아 어깨 위에 걸친 여신의 모습은 대륙에 있는 그 어떤 신의 모습과도 일치하는 면이 없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에는 어안이 다 벙벙해질 지경이었다. ‘너무 초면인데.’ [처음 뵙겠습니다, 이기영 님.] ‘아… 네.’ 조금은 뻘쭘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머쓱한 마음보다는 궁금한 마음이 더 크다. 도대체 베니고어나 로렌, 바리안 같은 놈들은 전부 어디로 가고 생전 처음 보는 여신이 여기 있는지, 어째서 저렇게 호의적인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지, 궁금한 게 당연했다. ‘적어도 뒤통수는 아니고… 이건 상급자인 건가? 윗분이야?’ [이기영 님께서 생각하시는 종류의 상급자는 아닙니다. 아, 제가 실례했군요. 인사가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먼저 찾아주시리라는 예상을 하지 못해서… 자기소개부터 먼저 드리겠습니다. 저는 베니고어를 대신해 앞으로 이 대륙을 담당하게 될 여신 넬리아라고 합니다.] ‘네?’ [베니고어를 비롯한 로렌, 바리안을 비롯한 기존 신들은 현재 여러 가지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어 조사 중에 있습니다. 위에서는 그동안 대륙을 관리할 여신이 있다고 판단하게 되어 제가 베니고어의 업무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우시겠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뭐라고요?’ [그동안 답답하신 면이 많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답답하기는 답답했는데… 그래서 당신이 왔다고요?’ [능력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랑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제 실적은 위쪽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준으로….] ‘아니, 그건 알겠는데… 당연히 능력 있는 분이 와주셨겠죠. 그런데 제가 궁금한 건 넬리아 님의 실적이나 월말 평가 때 얼마나 우수했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도 아니고요. 베니고어 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조사를 받고 계신 겁니까? 그리고 왜 당신이 튀어나온 거예요? 나는 분명히 베니고어를 찾았는데….’ [복합적으로 연관된 일이 많아 전부 다 자세히 말씀드리기 힘든 사항입니다만… 아마 이기영 님께서 예상하시는 문제에 대해 조사받고 계실 겁니다. 무엇을 걱정하고 계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기영 님. 하지만 당장 대륙의 국교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당분간 베니고어를 비롯한 대륙의 신들이 받아들이는 신성은 모두 강제 몰수되어 제가 대륙을 위해서 직접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다음은? 종교개혁 해야겠네. 베니고어 교단을 비롯한 대륙 위의 모든 교단이 싹 물갈이되는 겁니까? 중간에 종교 물갈이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건 하나 터뜨려 주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베니고어 교단이라는 이름이 사라질 때 즈음에 넬리아 교단이 출범해서 기존 신도들 전부 흡수한다는 거 아닙니까.’ [이해가 빠르시군요. 역시나 윗분들에게 들었던 대로입니다. 만약 이기영 님께서 원하신다면 2000년 후에는 이기영 교단을 직접 만들어 이 대륙을 운영하는 방향도…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옵션으로 붙어 있으며 가장 대표적인 조건은 김현성 님의 합류가….] 예상하던 게 현실이 됐다. ‘와….’ 그러지 않을까 싶었지만 실제로 현실이 되니 무척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신나서 떠들고 있는 넬리아의 목소리가 잘 들려오지 않을 지경이다. 위쪽으로 올라오면 받을 수 있는 메리트와 혜택 그리고 조건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게 현실이 되었다는 게 조금 더 명확해지는 것만 같았다. [저희 쪽에서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루시퍼 쪽에서 어떤 조건을 제시했든 간에….] 당연하지만 루시퍼를 만나고 있었던 것 역시 파악하고 있다. ‘우등생이 맞기는 맞나 봐.’ 무능력의 아이콘이었던 베니고어와는 레벨이 다른 합리적인 제안. 명확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발표를 선보이고 있는 모습은 마치 계약을 따내기 위한 대기업 직원의 프레젠테이션처럼 느껴진다. 이 자리의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책임감이 깃든 눈빛은 가관이다. 사실 저 여신의 제안도 나쁘지는 않다.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잘 풀린 이후에 베니고어 교단을 자연스럽게 쇠퇴시키고 넬리아 교단을 박아 넣는다는 것도 실제로 가능하다. 시간이 조금 걸리고 귀찮아지기야 하겠지만, 극단적인 경우에는 종교전쟁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해도 되고…. 어쨌든 수단이야 많다. 문제는 베니고어 대신 넬리아를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것. 뭐가 옳은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물론 베니고어가 무능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이쪽의 비위를 맞춰주며 열심히 해오지 않았던가. 눈앞에 있는 여신은 능력이 있는 것 같지만, 여러모로 말이 안 통할 것 같은 느낌. 마음의 눈으로도 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겉모습만 봐도 느껴지는 게 있는 법이다. 지금 저렇게 떠들고 있는 모습만 봐도 곧 죽어도 원리원칙을 따질 것 같지 않은가. 사실 고민할 건더기도 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눈앞으로 선택지 두 가지가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A. 베니고어를 버린다.] [B. 베니고어를 안고 간다.] 괜스레 허벅지를 두드리게 될 정도였다. ‘아… 이거 생각보다 더 고민되네.’ # 605 회귀자 사용설명서 605화 일생일대의 고민(3) 솔직히 이게 고민할 거리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물론 하나하나를 자세히 다 따지고 들어가면 베니고어가 여러모로 유리한 면이 많다. 일단 나와 함께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메리트가 아니었던가. 대륙의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공감해 주고 있었고, 필요한 상황에서는 적당히 휘둘려지기도 한다. 가끔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주기도 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지금까지 다사다난한 일들을 함께 겪어오기는 했지만, 지금에 와서 떠올려보면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정리되지 않았던가. 친분 쪽에 중점을 둬 생각해 보면 무조건 베니고어 측에 손을 들어야 함이 옳다. 하지만 조금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베니고어랑 같이 일하는 게 정말 맞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친하다고 해서 무작정 편을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이 업계는 만만하지 않다. 아직 넬리아라는 신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대충 보기에도 유능한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일정량 이상의 신성을 사용해 대륙에 영향력을 끼칠 경우에는 최소한 사전에 통보해 드리려고 합니다. 추가로 저희가 할 수 있거나 도울 수 있는 일이 생긴다면 최선을 다해 지지해 드릴 것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이는….] 베니고어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나 역시 가슴이 아팠지만, 모두가 본인의 잘못이지 않은가. 악마와의 계약에 도장을 찍은 것도 결국에는 베니고어였고, 루시퍼가 대륙 안에 들어온 것은 캐치해 내지 못한 것 역시 베니고어의 잘못이었다. ‘도대체… 어떤 신이 악마랑 계약을 해?… 이건 베니고어 잘못이 맞지.’ 어디 그것뿐이랴.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베니고어가 규율을 깬 것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는다. 그중에서도 파산 사건은 나조차도 쉴드를 쳐줄 수가 없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차원에서 신성을 빌려 쓰다 파산한 것은 무조건 그녀의 잘못이다. 비교적 사고가 유연하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넬리아가 가지고 있는 유능함이라는 이점을 어찌 이겨낼 수 있을까. ‘베니고어가 결국 어둠에 물들어 버렸나….’ 저도 모르게 나온 혼잣말에 곧바로 대답해 오는 넬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현재 확인 중에 있습니다.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상층부에서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후우….’ [상심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이기영 님.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오셨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잊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아니, 제가 잊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종교개혁 하려면 또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나.’ 작업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다. 아쉽지만 어둠에 물든 베니고어와의 작별인사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베니고어를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게 옳은 선택처럼 여겨졌다. ‘이기영 신도… 이기영 신도…’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기분. [등급 이하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꼭… 꼭 보답할게, 이기영 신도. 내가… 이기영 신도 사랑하는 거 알지? 사, 사랑하는 거 알지? 우리 좋았잖아. 나 버리는 거 아니지? 그렇지? (0/1)] 실제로도 들려오고 있었다. ‘뭐야.’ [네?]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저도 모르게 눈앞에 있는 넬리아를 바라보게 된다. 아무래도 베니고어가 내게 따로 연락을 넣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 얘는 또 어떻게 연락한 건지 모르겠다. 구치소 비슷한 곳에서 몰래 전화하고 있는 것 아닐까. 정확히 뭘 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둠에 빠진 베니고어를 내 힘으로 구하기에는 역부족…. [등급 이하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전, 전부 줄게… 원하는 건 전부. 그러니까 나 버리면 안 돼. 히끅… 이기영 신도, 버리면 안 돼. 원하는 건 전부 다 준비해 줄게. (0/1)] 역부족…. [등급 이하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그, 그리고 이대로 가면 이기영 신도에게도 좋지 않을 거야. 선, 선례가 생기면 이기영 신도가 이후에 올라올 때도 문제가 생길 수도 있… (0/1)] …이겠지만 최소한의 노력은 해보는 것이 옳다. 그동안 함께 쌓아온 추억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베니고어에게 등을 질 수가 있을까. 베니고어와 나는 단순히 신도와 신의 관계에 있는 게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아껴주는 이해자였다. 넬리아의 뒤에서 보이고 있는 베니고어의 조각상, 그 조각상에서 떨어지고 있는 눈물 한 방울. 편안했던 넬리아의 미소가 가증스러워 보이기는 게 당연하리라.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다른 분으로 교체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기영 님. 하지만 제 이름을 걸고 말씀드리건대 저는 절대로 이기영 님을 실망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믿어주시고 일을 맡겨주신다면 몸이 바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제게 필요한 건 베니고어 님뿐입니다.’ [네…?] ‘가만히 보고 있자고 하니 지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 애초에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베니고어 님이랑밖에 일 안 하렵니다.’ [아….] ‘백번 양보해 조사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게 꼭 지금 같은 시기여야 하는 겁니까? 베니고어 님께서 과한 면이 있다는 건 저도 익히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베니고어 님께서도 대륙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신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까지 대륙을 위해 희생하셨던 분이 아닙니까. 어둠에 오염됐다는 판단이 되면 그 어둠을 정화하는 게 먼저인 게 당연한 수순인데… 어떻게 곧바로 쳐 낼 생각을 하시는지… 이게 그쪽의 방식인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일단은 조사를….]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얼굴, 본인이 기대했던 반응과는 다르다는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당황하기보다는 어떻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같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리라. 아마 ‘이쪽의 방식인 겁니까?’라는 대사가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영입을 고려하는 만큼 고민할 여지가 생길 수밖에 없을 테니까. ‘지금 대륙의 상황이 어떤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습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 위기를 벗어나도 모자랄 시기가 아닙니까. 정확히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파벌 내 힘 싸움이 아예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베니고어 돌려줘. ‘베니고어 님께서는 대륙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신 분이십니다. 자신의 자존심과 신념과 믿음, 그녀가 저지른 모든 일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기영 님. 힘싸움이나 파벌 때문이 아니라… 그리고 베니고어의 신성 사용 내역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현 대륙의 상황과는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사용 내역….] ‘듣고 싶지 않습니다. 베니고어 님을 불러주세요.’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시고….] ‘더 이상 생각할 게 있습니까? 베니고어 님과 이야기 하겠습니다.’ [지금은 조사 중이라 베니고어를 불러오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아직 정확히 죄가 있다고 밝혀지지도 않은 상황입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도 따지지 않고 무작정 죄인으로 몰고 가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베니고어 님은 정식으로 변호사를 선임하신 게 맞습니까? 혹여나 압박 수사를 받고 있지는 않을지, 한 명의 신도로서 걱정이… 후우….’ [조사가 끝난 이후에 정식으로 다시 복귀하시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 조사가 억류된 상태에서의 조사가 아닙니까. 그녀는 아직 죄인이 아니에요. 조사를 받을 것이 있다면 대륙의 일을 병행하면서 받으셔야 할 겁니다. 물론 변호인을 선임하실 수도 있고요. 아무리 혐의가 있다고 한들 이런 처우와 대우라니… 제 눈에는 인간들의 방식이 더 이성적으로 보입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기영 님.] ‘지금 당장 베니고어 님의 억류를 풀어주지 않으면 단언컨대 제 협조를 얻기 힘드실 거라고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협박하는 게 아니에요, 넬리아 님. 신성하신 분들이 품고 계신 생각이 저희 인간들의 방식과 다를 거라고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말들을 이해할 수 없으시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하지만 이 방법은 옳지 않습니다. 미천한 제 눈에도 지금의 방식은 옳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진심으로 환멸이 난다는 표정을 담아보자. 고생하고 있을 베니고어 님의 모습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순수한 눈물방울이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어느새 눈 안을 가득 채운 눈물이 마치 폭포수처럼 흐르던 중, 한숨을 쉬던 넬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악 하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베니고어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 것. [이기영 신도… 이기영 신도오….] 달려오자마자 안기는 모습, 무척이나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정확히 윗분들이 어떤 선택을 내리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한고비는 넘겼다. [이기영 신도오… 어허어어엉… 이기영 신도오… 믿었어… 믿고 있었어. 이기영 신도가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구우….] ‘제가… 어떻게 베니고어 님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자기세뇌를 하도 박아대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베니고어의 얼굴이 아름다워 보인다. 서둘러 이성을 되찾으니 씁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넬리아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모두 해결된 겁니까?’ [아닙니다. 이기영 님의 주장에 의거해 일단은 베니고어를 비롯한 이 대륙 신들의 억류를 무효화했을 뿐입니다. 아직도 베니고어에게는 여러 가지 혐의들이 붙어 있으며 이 이후의 조사와 처우는… 조금 더 깊이 깊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결정될 것 같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넬리아 님.’ [아니요. 저는 그저 윗분들의 말씀을 전해드린 것뿐입니다. 조만간 이번 일과 관련해 다시 한번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베니고어 역시 함께 말입니다.] […….] [그럼 안녕히. 꼭 다시 뵙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이기영 님.] ‘저 역시 좋은 모습으로 다시 뵙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끝으로 넬리아는 자취를 감췄다. 베니고어는 그저 눈물을 짓고 있는 표정, 뭐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뭘 먼저 물어봐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해하는 얼굴을 보니 내가 다 불안해질 지경이었다. 일생일대의 교차로에서 옳은 선택을 한 건지 궁금해진 것은 당연지사. 물론… 선례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베니고어의 주장은 옳다. 나 역시 켕기는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세상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루시퍼 쪽으로 가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혹시나 일이 꼬여 빛 쪽으로 합류하게 될지도 모른다. 김현성과 함께 간다고 가정한다면 이쪽이 더욱더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만약 그때가 왔을 때 다른 파벌 쪽에서 이것저것 걸고넘어진다면 내게는 상당히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으리라. ‘지금 상황에서도 조심하는 게 맞기도 하고….’ 만약 베니고어가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시바… 점점 머리 아파지는데.’ 5현장을 연구해야 하는 판국에 성검의 주인까지 찾아줘야 하고, 심지어는 베니고어의 뒤까지 봐줘야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와는 다르게 세 번째는 시간과 공간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상실증 기믹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시도 때도 없이 픽픽 쓰러진다면 조노보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대륙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와중에 들어온 한 방. 내 기분이 구리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눈치를 보고 있는 빛 덩어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해… 미안해, 이기영 신도.] 시바. “고개 드세요, 베니고어 님. 당신 아직 죄인 아닙니다.” # 606 회귀자 사용설명서 606화 일생일대의 고민(4) [정말?] “아직은. 아직은 죄인 아니라고요… 일단 저는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이쪽 일은 대충 수습이 된 것 같으니….” [가, 가지 마. 이기영 신도… 가지 마. 여기 같이 있어야지. 도대체 어딜 가려고 그래. 나 또 조사받으러 가면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요. 변호사가 오기 전까지는 대답할 수 없다고 잡아떼세요. 그리고 이렇게 금방 다시 올 일 없습니다. 이미 상급자한테 보고 들어간 사항이고, 위쪽에서 입장 정리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릴 테니 안심하시고 할 일 보세요. 이제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러실까. 이토 소우타 때도 보고 있었잖아요.” [버리려는 거 아니지? 그런 거지?] “이제 와서 버리긴 뭘 버립니까. 이미 한 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인데. 어차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할 수 있는 수단이 있잖아요. 여기서 시간을 생각보다 많이 끌어서 빨리 일하러 가야 해요.” 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저 불안한 표정이 신경 쓰인다. 이런 말 하기는 조금 뭣 하기는 했지만, 전형적인 범죄자의 얼굴과 어울리는 듯한 얼굴이다. 본인이 뭔가 켕기는 게 없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표정. 빛무리에 휩싸인 채로 저런 모습을 하는 게 우습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마냥 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잠깐 장내에 찾아온 침묵이 불안했을까. 베니고어가 다시 한번 말을 이어왔다. [그, 그래도 조금만 같이 있으면 안 될까? 대책을 강구하기도 해야 되고… 여러 가지로 논의해야 될 일이 많으니까.] “그러면 한 번 물어나 봅시다. 아니 도대체 뭣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겁니까?” 라는 말을 막상 내뱉으니 가슴 한쪽이 쿡쿡 찔려오기는 한다. 이미 루시퍼의 성검 자체가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넬리아가 성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걸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분명히 문제가 된 게 있다면 한마디 정도는 언급했을 게 분명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악마 계약 건이 가장 크게 잡히지 않았을까. ‘그러게. 덜컥 악마랑 계약하면 어떻게 해.’ 내 질문에 베니고어는 살짝 긴장하는 듯한 모양새. 어서 빨리 썰을 풀어보라는 듯 재촉하자 조심스레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사, 사실 마검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야.] “그래요?” [으응… 이기영 신도는 아직 우리쪽 소속이 아니고 대륙에서 활동하는 인간의 입장에 있으니까. 우리 같은 경우에는 이기영 신도에 대한 물리력을 행사할 수는 없거든. 상부 측에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고… 이기영 신도의 잘못은 아니라는 거야. 이기영 신도가 벨리알이나 루시퍼와 친하게 지낸다는 것도 문제가 되지는 않고… 물론 정도가 심해진다면 이기영 신도를 마왕으로 판단해 성검이나 용사를 내보내기는 하지만….] “뭐?” [당연히! 우리가 그럴 리가 없지! 누가 감히 이기영 신도를 마왕으로 보겠어?! 결국, 이기영 신도는 우리와 함께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 [이번 경우에도 루시퍼의 꼬임에 넘어 간 거니까… 그러니까 문제가 뭐냐면.] “네, 말씀해 보세요.” [내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1차적으로는 그게 문제가 돼서….] “네? 겨우 그거예요?” 물론 그 뒤에 연쇄적으로 터진 2차적 문제가 컸겠지만, 발단 자체가 고작 그거라는 것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와, 이 새끼들도 진짜 너무하네.’ 1차적으로 문제가 된 게 겨우 루시퍼의 침입을 눈치채지 못한 것 때문이란다. 물론 대륙을 관리하는 관리자로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사안이 아니지. 지들도 눈치 못 챘을 거면서… 애초에 상급자 아니면 그 정도나 되는 위인을 감지할 수나 있나?’ 만약 넬리아가 관리했더라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100% 장담할 수 있다. 일반적인 악마라면 추적이 가능했겠지만, 무려 그 루시퍼가 아니었던가. 루시퍼 본인도 큰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 작정하고 몰래 들어왔다고 표현했으니, 베니고어의 능력으로는 그녀를 캐치하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어떻게 생각해도 그녀의 무능력을 탓할 사안이 아니라는 거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뒤가 엄청나게 구린 듯한 느낌. 상투적인 표현이었지만 구린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겨우 저 정도로 감찰단이 들어와서 베니고어 사단을 뒤집어? ‘파벌 내 알력 다툼이나 타 파벌의 견제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지.’ 하늘 위도 인간들이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기이한 형태의 권력 구도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베니고어가 어떤 적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감찰단을 움직여 대륙을 들쑤셔 놓을 정도라면 상당한 거물을 적으로 만들었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당초에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욱더 복잡해지고 있는 느낌에 괜스레 한숨이 튀어나온다. 어쩌면 일이 더 커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대륙의 똥을 투척한 이후 베니고어를 데리고 루시퍼 쪽으로 이적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가 없다. “누구를 적으로 만든 겁니까?” [적… 적 같은 건 없어… 나는 모두와 사이가 좋은 편이니까.] ‘그건 네 생각이고, 이 사람아.’ 내가 하늘 위에 직접 올라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바리안이나 로렌 같은 얘들이랑 대화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정말로 적이 있다면 그쪽에서도 이야기가 나오고 있을 테니까. 사안이 보통 사안이 아니다 보니 입술을 깨물며 오만 가지 생각을 전부 하게 된다. “정말 그 새끼들도 너무하는데….” [역시… 이기영 신도라면 그렇게 이야기할 줄 알았어. 일하다 보면 조금 쉴 수도 있는 거잖아… 그렇지?] “…….” 왠지 모르게 안심했다는 얼굴이 괜스레 신경 쓰인다. [내가 휴식을 취하고 있어서 보고가 조금 늦었거든… 사실 그것 때문에 여기에… 조금 문제가 생긴 거야.] ‘그건 아닐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연락이 없었지.’ 루시퍼의 성검을 획득한 그 순간부터, 하늘 위에서 성검이 내려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베니고어에게 따로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다.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는 순간에도 불안함이 가시지를 않는다. 대륙 전체가 완전히 뒤집힐 만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피드백이 없었던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27군단 소환 당시에는 파산 상태였기 때문에 개입하지 못했었지만 벨리알 때는 곧바로 개입해 오지 않았던가. 박물관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화적 존재와의 마찰이나 접전이 있었을 때 베니고어는 항상 이쪽에 먼저 말을 걸어왔다. 왜 이번에는 먼저 피드백을 해오지 않았을까. ‘시바… 몰랐던 거야.’ 애초에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미친. 거의 48시간 이상이지 않았었나. 어떻게 시바, 모르고 있을 수가 있지?’ 베니고어는 시바 도대체 그 긴 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나. 베니고어는 도대체 40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성검이 대륙에 나타나고 하늘을 날아 땅에 꽂히고, 심지어 입장 발표까지 끝냈을 동안 이 여신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나. 문제가 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다. “그래서 얼마나 쉬고 있었어요?” 목소리가 떨려온다. 베니고어 역시 목소리가 떨린다는 걸 인지했는지 계속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잘 모르겠는데… 이번에는 조금 오래… 인간의 시간을 기, 기준으로 하면 40시간… 언저리 정도일 것 같은데….] ‘파벌은 개뿔… 시바.’ 단두대처럼 힘 있게 내려온 통렬한 한 방.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둠기영 상태 일 때 김현성에게 맞았던 한 방보다 더 묵직했다. ‘개 미친….’ 순간적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갔지만, 불안해하는 저 얼굴을 보니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넬리아와 함께 일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들어와 꽂힌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루시퍼가 들어온 것은 눈치채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는 해도…. ‘너 진짜, 시바….’ [물론 그냥 쉬기만 한 건 아니야. 여러 가지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나도 조금 바, 바빴어. 저번에도 말했듯이 조금 할 일이 많아서… 물론 잠깐 내가 시선을 돌린 건 맞지만, 이기영 신도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은 절대로 아니야. 단지… 단지 최근에 나도 많이 힘들었었잖아. 여러 가지 일도 많았고… 엘룬의 일도 있어서… 걱정이 조금 많아지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었거든… 그래서 잠깐 일에 집중하지 못했나 봐.] “아무리 그래도….” [아무튼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어. 이기영 신도가 예상하는 것처럼 그 이후에는 내가 떠안고 있는 문제들이 공론화됐고… 물론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 억울한 면도….] “아니야, 너 억울해하면 안 돼. 너 잘못한 거 맞아.” [그래도… 버리지 않을 거지?]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팔아넘기고 싶어진다. [악, 악마 계약 건이 제일 문제가 됐단… 말이야.] ‘나는 모르는 일이야.’ [정말 이대로 가는 건 아니지? 네, 네, 네가 계약하라고 꼬드겼잖아.] ‘내가 언제.’ [이기영 신도가 공증인이 되어 준다고 했잖아. 정말 이렇게 끝내려고 하는 건 아니지. 살살 꼬드길 때는 언제고.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는 건 아닌 거지? 나 진짜 의지할 곳이 이기영 신도밖에 없어. 버리면 안 돼. 우리는 운명공동체, 운명공동체잖아.] 정말로 마음 같아서는 운명공동체고 나발이고 튀어버리고 싶은 상황이다. 하지만 베니고어의 말대로…. ‘운명공동체가 맞아.’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베니고어의 주장으로 인해 억지로 계약의 공증인이 되기도 했고, 여러 가지로 얽힌 게 많다. 베니고어가 모든 걸 안고 몇 만 년만 옥살이를 하고 나온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지만, 얘 성격에 그렇게 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본인이 총대를 메고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중간에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다. ‘어쩌겠어, 이게 내 업본데.’ 결과야 어떻게 됐든 간에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기자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하는 베니고어의 모습은 가관. ‘얘는 도대체 어디까지 추해지려고 그러는 거야.’ 속으로는 투덜거렸지만 자연스럽게 입은 벌어졌다. [흐어어어엉… 가지 마! 버리지 마! 이기영 신도….] “버리는 거 아니니까 진정 좀 합시다. 진짜 바빠서 일 좀 하려고 가는 거예요. 베니고어 님은 제가 가는 즉시 조사받았던 내용 전달해 주세요. 정확히 어떤 혐의가 있는지 전부 다요. 그리고 최근 신성사용 내역도 전부 다 전해주시고요. 일단은 정확히 무슨 죄가 적용됐는지 좀 봐야겠습니다. 그래야 뭐라도 해볼 수 있죠.” [이기영 신도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장난칠 생각하지 말아요. 숨기는 거 없이 정확하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엘룬 쓰레기의 신성 사용 내역도 정리해서 가져와야 합니다, 꼭.” [알겠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 최선을 다해서 해볼게. 정말로… 정말로 고마워… 내 평생 이기영 신도를 만난 게 얼마나 행운인지… 알타누스의 안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니까… 이기영 신도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내가 많이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는 거 알고 있지?] “…….” [너무 고마워. 너무… 그러니까 제발 버리면 안 돼. 우리 계속 같이 가는 거야. 여기 올라온 다음에도… 알겠지?] “신성이나 잘 모아놓으세요. 분명히 어떤 부탁이든 들어준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어?] “분명히 약속한 거예요.” [아… 으응… 그, 그렇지. 그래… 그래야지. 그, 그럼 나는 열심히 할 일 하고 있을게.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 파이팅!]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응원에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일단은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손해를 봤으니 다른 곳에서 이득을 꼭 보고 싶다는 투자자의 마음에 불이 붙은 것이다. 성검이든, 5현장이든 둘 중 하나는 꼭 괜찮은 결과가 나와 줘야 하는 상황. 개인적으로는 전자에 가능성을 걸고 있었지만, 뜻밖에도 먼저 터진 쪽은 후자였다.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간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 두 번째 직업으로 결정한 생체 연금 소환사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키메라 연구가 이상할 정도로 빠른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호문클루스라도 만드는 거 아니야?’ 설레발 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 607 회귀자 사용설명서 607화 천사 만들기(1) 성검의 주인을 찾는 일이 무척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예상하던 것만큼 빠르지는 않았지만 베니고어 넷이 마비될 정도로 열렬한 호응이 있었으니 오죽할까. 처리 과정에서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웃어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교황청에서 내놓은 시련을 통과한 이들이 성검이 꽂힌 장소로 시험대를 옮기기 위해 전 각지에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더 빨리 선택받은 용사를 찾아내기 위해 대륙 전체에 퍼져 있는 그리폰들이 매일 같이 하늘을 날아다녔다. 물론 대륙인들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이 모든 과정은 여신의 거울을 통해 전 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집계된 시청률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역대급. 내가 봐도 재미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대륙 전체에 관심이 쏠리는 것을 증명하듯 밤낮 가리지 않고 시행되는 시험이 수도에 명물로 자리 잡을 정도였다. 여신의 거울이나 손거울로는 만족하지 못한 것인지 여러 도시에서 갤러리들이 모여들어 기묘한 집단을 형성했다. 그 갤러리들은 여신의 손거울을 통해 다시 한번 실황중계를 시작했다. 각각의 방송에 모여든 인원들이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며 의견을 주고받는 것은 으레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주목해야 할 루키들이 누구다.’, ‘어떤 지방에 괜찮은 녀석이 있더라.’, ‘북에서 내려온 검사 한 녀석의 기세가 요즘 심상치 않더라.’, ‘어떤 놈이 강하다더라.’, ‘사전시험부터 지켜보던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성검의 주인이 될 자격이 충분하더라…….’ 등등 여러 여론이 형성됐고 급기야는 작은 팬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신의 거울로는 이 여세를 몰아 특집 방송을 편성, ‘선택받은 용사는 누구?’ 따위의 말을 지껄이며 루키에 대한 인터뷰와 정보들을 쏟아냈다. 가슴 아픈 과거를 드러낸 전직 소작농 현직 검사 지망생 소년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인터뷰. 모두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었고 확고한 목표와 신념을 가진 녀석들 역시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당연히 나 역시 1픽으로 낙점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고, 이들은 특혜 아닌 특혜 받아 더 많은 미디어에 노출되고 있는 상태였다. 이 기묘한 상황에서 가장 득을 봤던 것은 역시나 이쪽. 물론 경제적인 이득이 아니다. 대륙 각지에 숨어 있었던 원석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내가 대륙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석들을 찾을 수는 없지 않은가. 솔직히 내가 예상했던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 커다란 이벤트는 전혀 다른 쪽으로 내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테이밍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산골 마을 양치기 소녀도 있었고, 마검사 정진호처럼 마법과 검 둘 모두에 재능을 드러낸 소년 역시 존재했다. 당연하지만 김현성 역시 이런 원석들의 등장에 기꺼워하는 반응이었다. 1회 차 에서도 발굴할 수 없었던 인재들이 간혹 튀어나니, 즐겁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몇몇은 본인이 직접 영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할 정도였다. 이런 인재들은 아쉽게도 최종 시험에서 떨어지기는 했지만, 눈이 옹이구멍일 리가 없는 대형 길드나 국가들이 인재들에게 접선을 시도했고, 루키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죽하면 분기마다 전 대륙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시행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까. ‘지구에 있는 콘텐츠가 괜히 먹히는 게 아니야.’ 이유가 있으니까 먹히는 거다. 딱 그 짝이라고 생각했다. 루키들은 계약을 받아들이고 길드는 인재들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써먹을 수 있는 전투원을 공짜로 키우고 있는 상황. 그 와중에 합동 훈련소에서 도착한 병력이 각 현장에 배치됐고 곧바로 수성 훈련을 시작했다. 김현성과 조혜진이 일을 똑바로 처리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훈련이 잘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때 최근 유지했던 컨셉을 버리고, 아주 오랜만에 김현성에게 포근한 미소를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 이후에는 다시금 떨어져 서로의 업무에 집중하는 나날. 베니고어의 일이 여전히 불안했지만, 조혜진의 조율에 힘입어 5현장의 복구 작업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체류하는 우리 3인의 연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써먹을 수 있겠는데…….” 시험관 안에서 눈을 감고 있는 전혀 새로운 생명체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한소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단하시네요, 확실히…….” ‘사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한소라가 보기에는 확실히 놀랄 만하겠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래, 내가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지.’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 개론–영웅 등급 -연금술사 전용] [대 연금술사 라무스 터커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연금술사 중 한 명입니다. 공화국의 군부 연금술사로 소속되어 생체 연성과 물약 연성 분야의 1인자로 그 명성을 날렸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숙청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애초에 이걸로 연금술 입문을 시작했는데…… 이 정도도 못하면 안 돼…….’ 기본기를 생체 연성으로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당시에는 물약 연성 분야에 조금 더 집중해 시간을 투자하기는 했지만, 이기영이라는 캐릭터가 조금 더 균형적으로 성장했다면 이쪽 분야의 권위자가 되어 있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생체연금 소환이라는 독자적인 직업까지 만들지 않았던가. 그동안 키메라를 건드릴 수 없는 이유였던 흑마법 지식의 부재 역시 벨리알의 선물로 완벽하게 해결이 끝난 상황이다. 마치 퍼즐을 맞추거나 레고를 만드는 것처럼 뚝딱 성공해 버렸을 때는 나 자신도 입을 벌리며 내 손을 바라보게 될 정도였다. 대륙에서의 키메라는 마수의 합성, 혹은 재배열과 창조를 기본으로 한다. 넓게는 몬스터의 팔다리 같은 신체 일부분을 떼어내고 다시 합체시키는 작업, 세밀하게는 세포를 이식하거나 마수의 장기, 혹은 코어가 되는 촉매들을 이식시키는 작업이다. 기본적인 작업은 크게 어렵지 않다. 사자의 머리를 떼어내 염소의 머리 옆에 가져다 붙이는 장난감 만들기와 다름이 없다는 거다. 물론 이후에 녀석이 살아 있을까에 대한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 혹시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부작용을 가지게 되어 있다. 일부는 포악해지기도 하고, 일부는 기력을 잃기도 한다. 비틀비틀거리다 며칠 만에 급사하거나 컨트롤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연금술만으로는 이런 현상을 겪고 있는 키메라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 이게 생체 연금술이 실패한 이유이기도 하고……. “흑마법으로 컨트롤하신 건가요?” “네, 비슷합니다.” “몸에 좋지 않으실 텐데…….” “소라 씨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가능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네, 물론 아예 불가능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키메라는 통제하는 것보다 만드는 게 더 힘이 드니까요. 등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통제하기 힘들고…….” “그거야 흑마법사의 입장에서나 그렇죠. 저 같은 경우는 반대가 더 쉽게 느껴집니다.” “첫 시도에 바로 이 정도의 키메라를 조합해 내시고 곧바로 컨트롤하시다니 재능이 부럽네요.” “사실 전설 등급 정도는 나와줘야 돼요.” “…….” “당연히 전설 등급 정도는 나와줘야 합니다. 들어간 촉매가 어느 정도인지 아마 상상도 하실 수 없을걸요. 물론 베이스가 되는 몬스터의 질이 저질이기는 했지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급 촉매가 들어갔다고요. 전설 등급의 촉매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게 들어갔습니다. 물론 너무 생각 없이 조합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연결점이 있는 몬스터들을 조합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배열이 망가지면 그만큼 확률이 줄어들니 효과는 있을 것 같아요.” “흐음…….” “그럼 이건 얼마나 만드시려고요?” “글쎄요. 꾸준히 쉬지 않고 만들려고요. 일단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건 지금부터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거 정말 괜찮은 건가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그게 부길드마스터의 위치상 키메라를 사용하는 건…… 조금…… 눈에 띄지 않을까 싶어서…….” “이게 어딜 봐서 그런 종류의 키메라처럼 보이세요.” 눈을 씻고 쳐다봐도 흉악한 모습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기본적인 형태는 우리가 이야기로만 전해져 들어왔던 천사의 모습. 살라트의 가죽과 피부를 이식했고 그 위에 다시 한번 피부를 덮었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조류형 몬스터들의 날개를 8장이나 달았으니 이론적이라면 날 수도 있다. 심지어 날개 근육까지 손을 따로 보고 하얀색으로 변환까지 끝냈으니 어떻게 봐도 천사로 보이지 않는가. 외모 자체는 제법 이질적이기는 했지만 바질리스크의 시신경을 집어넣었고, 최대한 신성하게 보이게 커스터마이징 했다. 천사가 인간과 같아서야 되겠는가. 오히려 이질적이지 않다면 더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저 초안을 짜는 데 들어간 비용 자체는 가히 천문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한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마비, 석화 속성을 갖춘 눈을 가지고 있고, 비둘기들에게 직접 대항할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있어 공중전이 가능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빛까지 뿜을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빛까지 뿜을 수 있다니까요. 이거 보세요.” “…….” “저거 진짜로 찾기 힘들었다니까요.” 실제로도 무척 찾기 힘들었다. 몸을 스스로 밝힐 수 있는 몬스터는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뒤져보니까 나오기는 나오더라. “남쪽으로 쭈욱 내려가다 보면 바다에 사는 어류 몬스터가 몇 종 있는데 그중 한 놈이 빛으로 인간이나 다른 몬스터들을 유인한다고 하더라고요. 아귀가 가지고 있는 등불처럼요. 그 기관을 촉매화시켜서 이식에 성공했다는 것 아닙니까.” ‘저게 가장 시간이 오래 걸렸지.’ “커다란 효과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은근슬쩍 매혹 효과도 붙어 있었고요. 마력에 저항이 없는 이들은 아마 빛을 바라보는 순간 홀리지 않을까 싶은데…… 물론 전체적으로 살짝 인위적인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뭐 이 부분도 보완할 테니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냥 다시 한번 물어보는 건데…… 저거 정말로 키메라 같은 거로 보여요?” “아…… 물론…… 물론 그렇지는 않죠. 네, 천사…… 누가 봐도 천사네요.” “천사처럼 보이죠?” “네.” “한 6기 정도는 조금 더 힘을 줘서 만들 생각입니다. 특징도 살릴 수 있을 만큼 살리면 좋고요. 제가 모두를 컨트롤하는 것보다는 대장기가 컨트롤하는 게 더 효율적일 겁니다.” “아…….” “666이라는 숫자가 요즘 눈에 밟히던데…… 그 정도까지는 무리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숫자는 맞춰보고 싶네요. 일단 바로 한 기 더 제작할 생각인데 열심히 봐두세요. 같이 만들면 좋을 것 같으니까.” “네? 같이요?” “네, 한소라 교육생은 우등생이지 않았습니까. 연금술도 성적 우수자였으니까 금방 이해할 수 있으실 겁니다, 분명히요.” 무조건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정하얀에게 눌려 살며 기를 펴지 못하고 있지만 엄연히 탑 티어 마법사 중 하나다. 일반적인 마법사였다면 한계가 있었겠지만, 흑마법사라는 직업이 그녀와 상승 작용을 일으킨 케이스였다. 연금술을 미리 알려줘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이 연구실을 빠져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작은 취미 생활도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본인은 곧바로 불안한 표정이 되기는 했지만……. “뭐 별일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정하얀 님은 괜찮으실까요?” “별문제 없을 거예요. 이제 하얀이랑 친한 것 아니었어요? 뭐 그렇게 걱정하고 그러십니까.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일이나 하세요. 아 그리고 인원들 추려서 보내 드릴 테니 후학 양성도 부탁드립니다.” “…….” “흑마법이니 뭐니 그런 말 하지 말고 조금 다크 히어로 같은 느낌 팍팍 뿌려서 대충 이빨 털면 될 겁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상투적인 대사 있잖아요. 우리는 교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어둠의 사제들입니다, 이런 거. 어둠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자들만이 어둠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름을 버린 이들입니다. 이해되죠?” “그건 그런데…….” “네?” “키메라 만들기는 정하얀 님이랑…… 세 명이 같이 하면 안 될까요?” 절박한 표정에 두려워하는 것 같은 얼굴,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얘가 뭘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걔는 따로 할 일 있는데…….’ 고급 인력을 3명이나 같은 곳에 투입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특히나 우리 대마법사 같은 경우에는 더욱더 말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쾅쾅 문들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한소라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내게서 거리를 벌리는 것은 순식간이었지만, 그녀의 용건은 한소라가 아니다.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생각하시는 그런 게…….” “…….” “오, 오, 오빠. 오늘 테이머, 알프스 시험 치는 날이에요. 지금 시작할 것 같아요!” 정하얀 역시 최근에 하고 있는 방송에 빠져 있었다. # 608 회귀자 사용설명서 608화 천사 만들기(2) “그래?” “정말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그런 생각은 절대로 안 했어요. 믿어주세요. 제발….” ‘아니, 넌 그만 좀 해….’ “지, 지, 지금 시작 10분 전이래요. 빨리 보러 가요, 빨리.” “그럼 조금만 쉴까. 소라 씨도 같이 보러 가시죠.” “아? 아… 네, 네….” 매일 매일 공방에 처박혀 있는 3인의 연구원들의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다 함께 모여 팝콘을 뜯으며 방송을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사실 정하얀이 이 프로그램에 빠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니 좋아하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이 휴식 시간에 비교적 오래 붙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흥미 있어 하는 것 같다. 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소라 역시 마찬가지. 우울하고 칙칙한 장소에서 온종일 바깥 공기도 마시지 못하고 작업만 하고 있으니, 이런 종류의 휴식 시간이 달가운 것이 당연하리라. 잠깐 쉬어도 된다는 주문이 들어온 이후에는 곧바로 손을 탁탁 쳐 내고 대충 뒷정리하기 시작했다. 정하얀 역시 준비하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휴게실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쪽 역시 돌아왔을 때 곧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 있게 세팅해 놓고 나서야 비로소 나갈 준비가 끝났다. 전에 있었던 작은 해프닝 때문인지 한소라는 아직까지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별다른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하얀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데, 이제 그만 좀 걱정해.’ 만약 정하얀이 한소라를 적대했었다면 그녀는 한참 전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을 것이다. 정하얀의 입장에서 한소라는 2명이 함께 지내는 보금자리에 끼어든 불청객이었을 테니까. 확실히 친구라는 인식이 박혀 있으니 나조차도 놀라울 정도의 변화였다. 물론 한소라가 나와 함께 대화하거나 같은 공간으로 들어갈 때는 아네모네의 눈 같은 수단을 쓰며 경계했지만 비교적 너그러워졌다. 지난 시간 동안 동고동락한 효과였고, 한소라가 보여준 처세술의 성과였다. 본인은 아직도 외줄 타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저한테… 너무 가까이 오시면 안 돼요… 부길드마스터.” “네?” “며칠 전에 정하얀 님이 아픈 곳이 없냐고 물어보셨… 제발… 제발….” “…….” “같이 연구하실 때도 위험한 일만 시키고 계세요. 제가 다치는 걸 바라는 사람처럼….” “…….” ‘…….’ 아직도 외줄 타기를 하고 있기는 한가 보다. 하지만 적어도 생명을 위협하지는 않으니 커다란 변화라고 할 만했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는 않는 상황.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다는 듯 침묵을 유지하며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자, 정하얀의 옆자리가 비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탁탁 자리를 치는 모습을 보고는 자연스럽게 착석했고, 거기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 팝콘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매일 앉던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지만, 오늘따라 이 포지션이 기묘해 보이는 것은 한소라의 발언 때문일까. 멀리 떨어져 팝콘을 먹고 있는 한소라의 모양새가 애완동물과 같은 포지션 같지 않은가. “…….” ‘에이, 이건 너무 갔다.’ 너무 지나친 생각이다. 정하얀은 확실히 한소라를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하면 머리 아파질 것 같은 느낌에 일단은 고개를 흔들며 여신의 거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방송에나 집중하자. 기다리고 기다려 왔던 시간이었으니까. ‘테이머, 알프스.’ 이기영 베스트 픽 TOP 100위 안에 랭크되어 있는 인재. 무려 14위에 랭크되어 있었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순위가 깎여 나간 이유는 역시나 직업적인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술에도 남부럽지 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게 단점이 되지도 않는다. 아마 메인 클래스를 검사로 한다면 순위가 10계단 정도는 상승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산골에서 양치기 소녀로 살던 본인은 자신의 재능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는 것이 가산점이다. 사전시험 역시 양치기 개와 함께 등장하며 세간의 시선을 사로잡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뿐하게 어두운 기운을 뿌리쳤고, 그 이후에 시작된 팀별 과제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테이머로서의 재능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강아지 한 마리가 무대를 박살내 버렸지.’ 그녀의 모자란 검술을 보조해 주는 것은 그녀가 데려온 강아지였다. 물론 고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초가 아예 잡히지 않다 보니 사전 시험에서 여러 가지 논란이 될 모습을 자주 보여줬고, 실제로 용사가 될 수 있겠느냐는 여론의 뭇매를 많이 맞았다. 개인적으로 응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실드를 쳐주려고 했지만, 본인도 심적 부담이 컸는지 점점 더 자신을 내려놓은 상태. 특별 심사 위원, 우리 꼬맹이 김예리가 내질렀던 한마디는 이후에 그녀를 완전히 바꿔놓게 된다. -알프스야, 용사가 하고 싶어? -네. -열심히 좀 해 봐. 힘줘서 해봐. -네… 흐윽… 네. 때마침 여신의 거울에서는 모두를 울렸던 명장면을 다시 보여주고 있는 중. 꼬맹이 주제에 빡센 화장을 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김예리의 모습에는 빵 터질 뻔했다. 하지만 그 옆에 자리한 박덕구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박수를 치고 싶어 몸이 움찔거렸다. 이미 한 번 봤던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가슴을 간질거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혁명 삼 남매 쟤들 진짜 저런 쪽으로 너무 재능 있는 것 같은데….’ 미디어에 자주 노출시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너무… 죄송하고… 너무 민망했어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왔는데… 흐윽… 너무 실망하셨을 것 같아요. 이후에 따로 따낸 인터뷰마저 감동적이다. 슬쩍 옆을 보니 한소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정하얀은 소소하세 웃고 있었다. 과거의 활약상과 인터뷰를 계속 보여주며 점점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편집이 인상적이었지만, 이미 지나간 걸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이윽고 양치기 개와 함께 등장해 조용히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기영 씨, 지금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살짝 울려 여신의 손거울을 꺼내보자 역시나 김현성이 보낸 메시지. “누, 누구예요?” “현성 씨, 지금 시작한다고 메시지가 왔네.” [저도 지금 보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보세요. ^^] 정말로 김현성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정하얀이 고개를 거북이처럼 쭉 뺐지만, 위에 나열된 로그를 보여주기는 힘들다. 1회 차에 대한 이야기가 나열되어 있었으니까. 실제로 잠금까지 걸어놓은 상태였으니 오죽할까. 티 안 나게 슬쩍 손거울의 각도를 뒤집으며 바지춤에 집어넣으니 정하얀의 눈빛에 조금 짜증이 묻어나왔지만, 딱히 되물어 오지는 않았다.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길드마스터도 재미있게 보고 있으신 것 같더라고요.” 처세술의 극에 달한 한소라가 자연스럽게 물타기를 시도한 것이다. 분위기가 안 좋아질 것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베니고어 톡의 상대를 김현성으로 확정 짓는 뉘앙스의 대사였다. ‘와… 얘, 진짜 기가 막힌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물타기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을 정도. 간단한 한마디였지만 타이밍이 절묘했다. 내게 이후의 말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도 완벽하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해명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완벽하게 들어온 킬 패스에는 저도 모르게 발을 뻗게 된다. 미리미리 예방해서 좋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네. 본래는 바빠서 볼 시간이 없었는데… 다들 보고 있다고 하니 조금씩 보는 것 같더군요.” “아….” 아마 김현성은 이런 프로그램이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았을까. 뒤늦게 안 이후에는 녀석 역시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나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나야 전장으로 밀어 넣으면 그만이었지만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함께 합을 맞춰야 하는 상대였으니까. 대륙의 문물을 잘 다루지 못하는 녀석이 이렇게 찾아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실제로 김현성답지 않게 ‘누가 됐으면 좋겠다’, ‘누구였으면 좋겠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올 정도였다. 구체적인 이유와 함께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녀석의 이런 모습이 제법 재미있게 느껴지기는 했다. 실제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치 반 친구들 모두가 함께 시청하는 방송을 무리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파란 단체 연락망으로도 종종 이야기를 나눌 때 갑툭튀 하며 등장해 한마디 하는 모습은 초반의 김현성과는 완전히 다르다. 본인이 이걸 인지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작은 부분부터 천천히 변하고 있었다. ‘좋은 변화지, 좋은 변화야.’ 동료를 잃었을 때의 충격이 무서워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뒀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 아니었던가. 이제는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려고 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그래, 동료는 소중히 해야지. 현성아. 그중에서도 형을 제일 소중히 해야 하고.’ 본래 우리 현성이 같은 종류의 인간은 지킬 게 있어야 더 강해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혼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화면을 바라보자 테이머 알프스가 길고 길었던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를 믿어준 모든 분의 성원에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겉으로는 차가우셨지만, 끝까지 저를 지지해주셨던 김예리 선생님 그리고 남몰래 할 수 있다며 응원해 주셨던 박덕구 선생님. 마지막으로 이런 기회를 주신 베니고어 님과 저를 응원해 주신 대륙민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래, 가라. 슬슬 저것도 뽑힐 때 됐다.’ -제가 성검에게 선택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노력하는 거로 끝나면 안 돼.’ 말은 ‘노력하겠습니다.’였지만 눈빛은 무조건 뽑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고조되는 분위기와 응원을 보내는 갤러리들의 목소리가 여신의 거울을 통해 들려온다. -힘내라! 알프스! -선택받은 용사는 너밖에 없다. -언니, 너무 예뻐요! 입술을 꽉 깨물고 손을 움켜쥐며 당당히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오늘 일을 치러도 제대로 치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때마침 태양빛이 반사되어 그녀를 비추는 모습. 함께하는 강아지 역시 왕왕 짖으며 용사 후보에게 힘을 보내준다. ‘가라, 시바… 가즈아!’ “될, 될, 될 것 같아요. 이번에는 진짜로….” “나도 왠지… 느낌이 좋은데.” “나오는 건가요.” 마침내 성검에 앞에 선 알프스가 무겁게 발걸음을 옮긴다. 웬만한 녀석들은 저 시점에서 아웃이다. 베니고어가 시험을 위해 준비한 마기의 반발력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놈들이 대다수. 하지만 알프스는 그것마저 버텨낸다. 힘들기는 하지만 분명히 한 걸음, 한 걸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왕! 왕! 멈추려고 하는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당연하지만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하라고 외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응원을 보내고 있다. 마침내 그녀가 성검에 손을 뻗었을 때, 조용한 침묵이 장내에 감돌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되겠는데… 진짜 될 것 같은데!’ 곧바로 튕겨 나가지 않는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틀림없이 버텨내고 있다. 팔과 손이 회색으로 변하고 있는 상황, 그 반발력을 견디고 성검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가자! 가즈아!!’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우웨에에에엑! 하는 소리와 함께 헛구역질하며 괴로워하는 알프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이 세상 모든 더러운 것들을 한꺼번에 경험한 것과 같은 얼굴. 그녀 역시 성검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아….’ 응원을 보내고 있었던 한소라와 정하얀이 동시에 조용해졌다. “…….” “…….” ‘시바.’ “천사나 만들러 갑시다.” “네.” “희영 씨한테 저거 영입 준비해 달라고 전해주시고요.” “아… 네, 부길드마스터.” “하얀이도 할 일 해야지.” “네, 오, 오빠.” 아쉬움이 없다면 당연히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아직 괜찮다. 그녀는 고작 랭크 14위에 불과했으니까. 이쪽에게는 아직 13위의 베스트 픽이 남아 있다. ‘조금만 더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 돼. 어차피 금방 끝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잖아, 그렇지?’ 이후에 연달아 13위와 12위, 믿고 있었던 5위와 8위까지. 모두가 광탈했을 때에도 그다지 초조하지는 않았다. 아직 도전할 도전자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조해하면 지는 거다. ‘시바… 될 거야. 성검코인… 존버하다 보면 무조건 떡상할 거야. 무조건 떡상할 거라고….’ # 609 회귀자 사용설명서 609화 천사 만들기(3) 보통은 주식 좀 하신다는 분들은 한 곳에 투자금을 몰빵하지 않는다. 굳이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여러 곳에 분산 투자를 하는 것이 그나마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행동이라는 건 기본적인 상식이다. 이 경우에 내가 투자한 것은 시간과 돈이었다. 사실 재화가 떨어져 나가는 건 아깝지 않다. 아니, 솔직히 조금은 아까웠지만, 시간만큼 아까운 것은 아니다. 이미 가만히 있어도 돈이 굴러 들어오는 시스템을 마련해 놓기도 했고, 어느 시점부터는 길드나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돈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은 다르다. 내 몸은 딱 하나였고 밀린 일은 많았다. 오죽했으면 옛날 파란 길드가 성장했을 때보다 최근이 더 바쁘다는 생각을 했을까. 김현성이 모든 일감을 이쪽에 몰아줬을 때보다 정신이 없다. 그때와는 다르게 맡은 일은 딱 3개뿐이었지만, 그 중요성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쪽이 투자한 세 개의 일 중 적어도 하나는 잘 풀리고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성검코인은 존버 중이고 베니고어 코인 역시 휴지 조각이 되기 일보 직전이기는 했지만, 그나마 키메라는 잘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이 키메라 코인 하나가 성검코인과 베니고어 코인에서 일어난 손실을 메워줄 수 있느냐는 것.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일이 잘 풀릴 리가 없지 않은가. 애초에 키메라 코인은 리스크가 적은 종목이었다. 떡상했을 때의 이득 역시 두 종목에 비해 적다. 한 가지 종목이 잘 풀리고 있다는 사실에는 그나마 고개를 끄덕여 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라는 거다. ‘두 종목이 떡락하면…….’ 게임은 거기서 끝이다. 두 종목에서 일어난 손실을 이 키메라 하나로 메우려면 적어도 천사 6,000기에 호문클루스 3기 정도는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당연하지만 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없다. 당장 666기를 만드는 데 들어간 시간과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으니까. 심지어 호문클루스는 아직 단서조차도 찾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역시나 믿음으로 버텨내는 것. ‘떡상할 거야. 떡상할 거라고…….’ 존버밖에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가끔 교황청을 들르기는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고 성검은 여전히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두 달도 안 지났으니까…… 이런 기세면 무조건 떡상 각이지.’ 수작업으로 천사를 찍어내는 데 집중해야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다른 일 쪽에도 시선을 돌리게 된다. ‘시바, 더 이상 생각해서 뭘 하겠어. 작업이나 집중하자.’ 애써 고개를 저으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려고 했던 바로 그때였다. “저…….” 한소라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굳이 따로 작업실을 쓰게 해달라고 말하기까지 했으면서 언제 또 여기에 들어와 있었는지 모르겠다. 궁금한 듯이 이쪽을 힐끔 힐끔 바라보는 얼굴은 가관. 물론 어째서 이쪽을 찾아온 것인지는 대충 예상이 간다. ‘지가 안 궁금하고 배기겠어?’ 한소라는 교육생 때부터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한 학생이 아니었던가. 오늘은 네임드 개체를 만들 거라고 미리 말해놓은 상황이다. 작업을 하다 보니 배움에 대한 열정이 스멀스멀 올라온 것이 분명하리라. ‘스타일이 유사하니까 배울 게 더 많겠지.’ 파란 길드 안에서 나와 가장 스타일이 비슷한 파티원.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베이스를 연금술사로 잡았고, 그녀는 베이스를 흑마법사로 잡았다는 것뿐이다. 연금술에 대한 이해도도 웬만한 연금술사 뺨치는 수준이었고, 심지어 흑마법까지 가미된 작업이었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수강료라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뭐가 궁금한가요, 한소라 교육생?” “아뇨…… 그냥 도와드릴 일이 없나 해서요…… 오늘 그…… 네임드 개체를 만드신다고 하셔서…….” “진행 중이기는 한데…… 소라 씨는 잘되고 있어요?” “일단은 최선을 다하고는 있어요. 한번 봐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같이 가보시겠어요?” “아니요. 그럴 것까지도 없어요. 제가 지시한 대로만 해주시면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일단은 작업 진행 계속해 주세요. 그리고 오신 김에 조금 있다가 저 좀 거들어주시고요. 아무래도 이건 손이 많이 가서…….” “네, 물론이죠.” 민망해하고 있는 것 같으니 슬쩍 운을 띄워주자. 딱히 숨길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아무래도 개성을 부여하려다 보니 조금은 힘든 부분이 많은 것 같더군요.” “네?” “네임드 개체 말입니다.” “아…… 네.” “…….” “…….” “정확히 어떤 부분이…… 어렵고 힘드신 건가요?” “베이스가 되는 신체에 조미료를 뿌려주는 과정 말입니다. 저희 모험가들의 방식으로 생각하면…… 특성이나 고유 능력을 만들어주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네요.” “아…….” “사실 기본적인 개체에도 특성이 들어가 있기는 해요. 아직 정확한 네이밍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단단한 피부라든지, 매혹의 빛이라든지, 마비의 눈이라든지…… 굳이 등급으로 표현하자면 영웅 등급 근처의 특성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개체마다 차이점은 있지만, 특성효율이 낮아서…… 질이 좋은 개체는 전설 등급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별 효과가 없는 게 사실이고요. 기본 개체는 그냥 신체 능력과 마력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편할 것 같습니다.” “이해했어요, 부길드마스터.” “네임드로 만들어질 6개체는 기본 개체가 가지고 있는 것 외에 다른 특성을 부여해 주는 게 관건이라고…… 아! 조금 더 가까이 와서 봐도 됩니다.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아예 지금부터 같이 만들어봅시다. 저도 막 준비가 끝났으니…….” “네, 그전에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혹시 어떤 종류의 개성을 부여해 주시려고 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 물어보고 싶어요.” 당연히 대답해 줄 수 있다. “일단은 직접 공략한 던전들이나 직접 겪어본 레이드 몬스터를 베이스로 잡아보려고 생각했습니다.” “…….” “여러 가지 측면에서 봐도 가장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쪽 촉매를 다루는 게 익숙하니까요.” “공략한 던전이라고 말씀하시면 희귀 등급의 던전들 같은 경우도 포함되는 건가요?” “네.” “촉매의 질 같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시는지 궁금한데…… 대안이 있나요?” 확실하게 배워가겠다는 느낌. 질문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요. 조금 더 귀찮은 부분이야 있겠지만 감수하고 있는 부분이고…… 고급 촉매와 저급 촉매를 섞어 쓰는 건 흔하게 있는 일이니까요. 이를테면 이런 재료 아이템은 단독으로 사용하기 쉽지 않거든요.” 슬쩍 준비된 연금 재료를 꺼내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세계수의 잎?” “네, 세계수의 잎입니다. 사실 이 재료는 고급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사용하는 용도가 정해져 있는 물건입니다. 다루기도 쉽지가 않아서 키메라를 만드는 곳에 단독으로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고요. 말인즉슨 사용하기 위해서라면 어차피…….” “성질 변환을 시켜야 하는 물건이라는 말씀이시네요.” “정답. 성질 변환은 연금술의 기본이니까요. 물론 이 정도 되는 물건이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기는 하지만…… 직업 보정이라는 게 좋은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무려 준신화 등급의 직업, 빛의 연금술사가 가지고 있는 기본 직업 보정이다. 정확한 수치가 나와 있지는 않지만, 대성공 확률 200% 따위의 부가 효과가 붙어 있지 않을까. 계속해서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게 좋을까 싶어 곧바로 정제기에 자제를 넣은 후 마법진을 활성화하자 맹렬히 움직이는 연금 키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한소라도 조금은 놀랐다는 듯이 바라보는 중이고……. 아마 알아도 본인은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전설 등급의 연금술사 보정을 받아도 불가능하다. 직업 자체가 다른 그녀가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래도 쓸모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보네.’ 좋은 자세가 아닌가. 아마 본인 역시 나름대로 접목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세계수의 잎을 베이스로 하는 네임드 개체를…….” “아뇨.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베이스가 되는 촉매는 이거예요.” “아…….” “세계수의 잎과 이걸 합칠 거고…… 이후에는 완성된 촉매를 키워 코어 핵에 맞출 겁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제가 처음 대륙에 넘어와서 공략한 던전의 몬스터들이 식물의 모습을 베이스로 하고 있었거든요. 네, 식물형이요. 세계수의 잎과는 그나마 궁합이 좋을 겁니다.” “아…… 던전 일지에서 읽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분명히…….” 푸쉬시시시식……. ‘아, 시바…… 폼 안 나게 실패했네.’ 정제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나 보다. 하지만 그다지 당황하지는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이었으니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슬쩍 몸을 돌려 다시 한번 비율을 맞추고 키트를 돌리자 환한 빛을 뿜어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물과 기름처럼 융합하지 않을 것 같았던 두 가지 촉매가 서로 뒤엉키는 모습은 대충 봐도 아름다워 보인다. 마법진에서는 계속해서 불이 들어오고 있는 상황. 조금은 집중해야 한다는 걸 한소라도 알고 있는지 조용히 이쪽을 바라봤다. 이윽고 액체처럼 공중을 유영하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와드려도…….” “네, 도와주세요. 혼자 하기 빡세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다음 단계는 짧은 시간 안에 액체를 큐브 조각 모양으로 굳히는 과정. 곧바로 액체를 틀에 넣고 온갖 연금 시약들을 투여하자, 치이이이익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완전히 굳어버리기 전에는 준비된 마법진을 큐브조각 겉면에 새기고 다시 한번 마력을 집어넣는다. ‘괜찮은데.’ 진행 상황이 나쁘지 않다. 품질도 좋게 나온 것 같았고 어디 흠잡을 때가 없다. “부길드마스터…….” “코어가 되는 핵에 조각을 끼워 맞추면 됩니다. 계산하기로는 아마 될 것 같기는 한데……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주의해야죠.” 코어가 되는 핵 역시 조각 조각이 모여 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가운데 티가 날 정도로 비어 있는 공간은 지금 내가 집게로 붙잡고 있는 조각이 들어갈 공간, 조금은 긴장되는 것이 당연하리라. 기껏 완성했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오류로 실험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건 싫었으니까. “준비된 마법진에 마력 좀 넣어줘요.” “네, 부길드마스터.” 마법진으로 이루어진 시험관으로 천천히 다가가 조각을 집어넣자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딱 맞게 하나가 된 핵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잠깐 녹색 빛이 서린 것 같은 느낌. 입꼬리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코어에 맞는 신체도 준비해야 하고 다른 오류가 확실히 없는지 살펴봐야 했으니까. 심지어 생각만큼의 출력을 보여줄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기분이 좋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와아아아아…….” 한소라도 넋 놓고 녀석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첫 번째 네임드 개체. 내가 대륙에 들어온 이후, 처음 공략한 던전. 아직도 그곳에서 동료들과 함께 우정을 나누며 공략에 임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생각나기 시작했다. 빛의 연금술사가 직접 만든 첫 번째, 네임드 천사. 1호기. 버전, 공포의 정원이 완성을 눈앞에 둔 순간이었다. ‘이 기세를 몰아서 성검 코인도 떡상 가나.’ 일단 다음 모델 하나를 더 만들 때까지 지켜보도록 하자. 조금 더 존버해도 성검코인은 떡락하지 않는다. ‘일단 이것부터 마무리해야지.’ # 610 회귀자 사용설명서 610화 성검 코인(1) 버전 공포의 정원의 마력 코어는 식물 타입이었다. 거대한 꽃과 줄기를 다룰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고, 그 밖에도 분진을 활용한 공격이나 세계수의 영향을 받은 거대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내부가 아닌 외부에도 공을 들인 것은 당연지사. 핵뿐만이 아니라 신체 대부분을 같은 촉매로 버무렸고, 액체화시킨 촉매를 다시 한번 정제해 탄력 있는 피부를 만들었다. 덕분에 살라트의 피부와 가죽을 이식하지 못해, 단단한 피부 특성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어차피 후위 타입으로 개발한 녀석이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핵을 만드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섬세하게 신체를 디자인했고 공포의 정원 촉매뿐만이 아니라 서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드라이어드의 촉매 역시 접목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약간 더 지나기 시작한 이후에는 정하얀까지 합류, 사실 정하얀은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지만 만들다 보니 욕심이나 조금 더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정하얀 본인이 하루에 부여된 할당량을 끝마치지 못했다면 이런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하얀의 역할은 코어가 되는 내부 기관과 핵에 마법진을 그려 넣는 것. 강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핵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선택이었다. 이런 종류의 영역은 정하얀이 나보다 몇십 배는 더 유능했으니 다른 말이 더 필요할까. 어마어마하게 세밀함을 필요로 하는 작업에 나조차도 손이 떨리기는 했지만, 정하얀은 묵묵하게 본인의 할 일을 해내고 있었다. 키메라 코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상한가를 치고 있었고, 이에 조금 더 시간을 투자해도 괜찮을 거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계속되는 용사 후보생들의 어처구니없는 탈락도 이쪽에 집중할 만한 요소 중 하나였다. 그 와중에 베니고어가 신성 사용 내역과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가끔씩 전해오는 상황. 행복한 소식이었으면 싶은 마음이었지만 당연히 기분 좋은 소식들은 아니었다. ‘시바… 아니, 무슨 다른 차원으로 새어나간 게 왜 이렇게 많아? 미친… 조금이라도 더 아껴야 하는 상황 아니었어?’ 정확한 신성 사용 내역이 공개된 것이다. 이마저도 전부 정리가 안 돼 일부만 보내온 거란다. 파산 상태에서 복귀한 시점부터 사용한 씀씀이에는 입이 다 벌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조, 조금 도움이 필요한 곳들이 많아서… 미안해, 이기영 신도… (0/1)] ‘와… 시바. 진짜 시바… 네가 시바, 불우이웃인데 불우이웃 돕기는 왜 하고 다녀? 그래서 이율을 얼마나 받은 건데. 이건 언제 다 회수할 수 있는 건데.’ [빌려준 게 아니라 기부한… 거야. 직접 찾아와서 너무 힘들다고 조금만 도움을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내가 거절할 수 있었겠어. 그때 당시에는 신성도 넉넉한 상황이니까. 또 후… 후배가 그렇게 다가오는데 내 체면도 있고 해서… 또 상황이 나아지면 꼭 갚는다고 말했거든 믿을 만한 후배들이니까. 믿을 수 있어. 분명히 다들 돌려주러 올 거야. 으응… 분명히 다시 돌려주러 와줄 거야. 분명히… (0/1)] ‘시바… 진짜 시바.’ [나 버리지 않을 거지? 그렇지? 위쪽 분위기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단 말야… 어제도 검사관들이 조사하러 왔었고… 언제 다시 그쪽으로 끌려갈지 몰라… (0/1)]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베니고어 버리지 않기. 제발… (0/1)] [보상: 여신의 사랑]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약속된 떡락의 흐름이었다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하리라. 그 밖에 문제가 된 부분들 역시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는 사안들이 대부분이었다. 정말로 진지하게 재판을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이 들 정도였다. 베니고어의 재판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꿋꿋이 천사 만들기에 목숨을 걸었던 것은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믿고 비빌 구석이 이쪽밖에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해야 해. 도움받을 생각하지 말자, 기영아. 시바, 믿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어.’ 버전 공포의 정원은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일에 몰두한 결과였다. 물론 녀석이 끝났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 있을 리는 없다. 네임드 개체 하나를 마무리  이후에 들어간 것은 네임드 개체 2호기. 버전 균열 박물관이었다. 쉽지 않을 거라고, 많은 난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는 진도가 빨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일단 던전 자체의 퀄리티가 높다 보니 불필요한 과정을 겪을 일이 없었다는 게 가속도가 붙은 이유라 할 수 있으리라. 균열 박물관을 유지하고 있는 거대한 던전 코어의 불필요한 부분을 떼어와 촉매화시켰고, 박물관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을 이용해 신체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막 아들의 도움이 있었고 그만큼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계수의 입과는 다르게 균열 박물관의 던전 코어는 한정되어 있었고, 현재 균열 박물관을 유지하고 있는 동력을 더 이상 줄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 실패하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작업에 들어가니, 무척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믿을 건 이것뿐이야.’ 그렇게 완전히 깜깜했던 버전 균열 박물관 역시 조금씩 조금씩 모양새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후위를 담당하는 버전 공포의 정원과는 다르게 버전 균열 박물관은 올라운더형 천사.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든 것이 무작위라고 할 수 있으리라. ‘처음부터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균열 박물관의 던전 코어의 일부를 그대로 가져오다 보니 그런 종류의 기믹이 붙어버린 것이다. 전투 프로그램을 입력하면 관람객이 들어온 것처럼 던전 코어의 핵이 맹렬히 돌아간다. -돌림판이 돌아가는 것 같네요. 아… 아버지.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그래, 막 아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아예 아빠라고 불러 아빠라고….” -네… 넵. 말씀하신 것처럼 몬스터를 제외하고 한 번의 전투 시 전설 급의 아이템들을 1정 소환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바꿔놨어요. 우리 박물관의 골렘들도 이런 식으로 바꾸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역시 아버지는 대단하시네요. 이런 생각을 하시다니. 이 생체 골렘은 작은 균열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예요. 이동형 균열 박물관 같은 느낌인 것 같아요. “이게 다 막 아들 덕분이지. 나 혼자였으면 어디 이런 걸 만들 수나 있었겠어. 메텔도 널 자랑스러워하실 거다.” -네. 절대로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스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메텔의 이름을 불러주자 동기 부여가 됐는지 더욱더 열심히 한다. 애초에 무난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흐름이었다. 막스도 막스였지만 내 자신이 박물관 4급 관리자가 아니었던가. 던전 코어의 시스템을 일부 바꾸는 것은 일도 아니다. 키메라를 베이스로 하는 물건이라 프로그램을 짜는 데 조금 골머리를 썩였지만, 아직까지는 훌륭하게 만들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전투 프로그램도 입력해 놓는 게 좋을까요? “물론. 많은 무기를 다룰 수 있어야 하니까. 최대한 많이 때려 놓는 게 좋겠네. 그것 외에도 기본적인 기능은 살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한번 같이 해보자.” -네. 커다란 던전 코어를 아주 작은 것으로 미니멀화하는 데는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던전 관리인 두 명이 작정하고 달려드니 코어 기관의 시스템을 구성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은 개체는 4기. 사실 이 두 네임드 개체도 완성한 것은 아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세하게 작업할 부분이 남아 있었고, 테스터도 제대로 거치지 못했다. 물론 공포의 정원 같은 경우에는 상황이 더 좋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남은 개체 중 하나는 버전 튜토리얼 던전. 또 나머지 하나는 저주받은 신단. 컨셉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 건 이 두 가지가 끝이다. 사실 시간이 안 되면 딱 4호기까지만 만들 생각이기도 했지만…. ‘아니야. 시바 그렇게 물렁해지면 안 돼. 무조건 만들어놔야 해. 일이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 모르니까. 적어도 성검 코인이 떡상할 때까지만이라도 만들어놔야 해.’ 현재 일이 돌아가는 걸 봤을 때는 무조건 2개체를 더 뽑아내야 했다. 후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버전 리무르아의 둥지. 나머지 하나도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는 도중이었다. 튜토리얼 던전은 아귀와 마수 살라트를 조금 더 쓰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저주받은 신단은 조금 더 개성 있는 모습으로 디자인 해보자. 잠깐 쉬는 시간 이외에는 정말로 일만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힘들어? 막 아들?” -아니요. 괜… 찮아요, 아버지. “그러지 말고 조금 쉬면서 해. 아니 쉬면서 하는 게 좋겠다. 안 쉰 지도 제법 오래됐으니까. 여신의 거울이나 볼까. 오늘도 확인해야지.” 아니, 심지어 쉬는 시간에도 일만 하고 있다. 믿음으로 존버하고 있는 코인들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으니 솔직히 저 방송을 마음 편하게 즐길 수가 없다. 막스와 정하얀, 한소라는 무척 즐거워하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내가 이걸 생각 없이 바라볼 수 있겠는가. 잠깐 쉬었다고 하는 소리에 화색을 띠는 얼굴을 보니 녀석도 쉬고 싶기는 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누가 메인이에요? “북부에서 소년병으로 활동하던 가레스. 아직 나이도 17살밖에 안 됐고….” 심성도 곱다. 얼굴도 귀엽게 생긴 편이었고 무엇보다 베니고어를 향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검술 실력 역시 수준급, 우리 현성이도 녀석에 대해 이런 코멘트를 남기지 않았던가. ‘제대로 검을 배웠다면 지금보다 더 무서워졌을 겁니다.’ 본인이 한번 키워보고 싶다고 말을 내뱉기도 했다. 재능으로는 남 부럽지 않은 능력을 갖춘 김예리 역시 기립박수를 쳤을 정도였고…. 마음의 눈으로 보기에도 신체적 재능은 최상위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다지 설레지 않는다. 애초 실망하는 게 싫어 기대 자체를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매번 구역질을 내뱉으며 광탈 하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나처럼 무감각해지지 않을까. “그래도 어차피 떨어질 텐데 뭐….” -……. “프로그램 자체는 재미있으니까. 계속 보자.” -오늘은 왠지 평소보다 분위기가 더 무겁네요. 그야 갤러리들도 긴장하고 있고… 무엇보다 가레스에게 거는 기대가 클 테니까. 이기영 개인 픽 3위에도 랭크되어 있는 녀석이었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이윽고 녀석의 활약상을 담은 형식의 편집과 함께 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처참한 소년병의 현실, 그 속에서 쌓아왔던 우정과 사랑, 대륙에 풍파에 여기저기 휩쓸리면서도 결코 신앙심을 버리지 않은 참된 신도가 아닌가. ‘시바… 방송이라는 게 신기하기는 신기해.’ 별 관심이 없다가도 웅장한 음악과 함께 등장해 주니 가슴이 쿵쾅거린다. ‘이번에는 진짜 되는 거 아니야?’ 라는 헛된 설렘이 잠시나마 몸에 깃든다. 막스는 흥분했는지 다리를 떨면서까지 화면에 집중하고 있다. 녀석의 작은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자식이 얼마나 고조감을 느끼고 있는지 전해져 온다. 그 설렘은 전염되고, 이윽고 업무를 마치고 거실로 튀어나온 정하얀과 한소라도 손을 모으고 화면을 바라본다. 개인적으로 팬이었는지 한소라는 조금 더 기대하는 게 눈에 보인다. 그렇게 녀석이 베니고어에게 짧은 기도를 드리고 천천히 팔을 옮겼을 때였다. 콰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을 잡은 녀석이 반발력에 튕겨 나간 것이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성검에서 나온 충격으로 일대가 아수라장이 된다. ‘뭐야. 뭐야… 이거 뭔데. 성검 코인 떡상하는 거 아니었어? 떡상하는 거 아니었냐고….’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야… 너 왜 이렇게 빡쳤어.’ 고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성검이 웅웅 떨리며 분노를 표시하고 있었다는 것. 기분 탓이겠지만, 왠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611 회귀자 사용설명서 611화 성검 코인(3) [베니고어님의 시험, 일시적 중단. 성검의 주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교국일보 김성경 기자.] [예언의 해석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깊어지고 있어. -딴지 일보 박단지 기자.] [제이나 대주교 대변인, 시험은 계속될 것, 성검의 상태에 대해서는 현재 파악 중에 있어… 최대한 빠르게 시험을 속행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과 노력을 …후략 -교황청 일보] [북부, 소년병 가레스, 몸에는 커다란 이상이 없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파악. 시험을 거친 용사 지망생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고 있는 증상은 무엇일까. 어째서 그들은 이러한 증상들을 호소하고 있나. -딴지 일보 박단지 기자.] [바젤 교황, 깨끗하지 못한 자들이 성검에 손을 댄 것이 문제임이 분명, 오늘 내로 소년병 가레스를 소환, 이단심문관들에게 심문을 맡길 예정. -교국일보 김성경 기자.] [소년병 가레스, 전쟁 중 저질렀던 잔악한 행동이 밝혀져 파문. 순진한 모습으로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소년병 가레스의 두 얼굴 이란? -용병 길드] [성검이 소년병 가레스를 부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용사지망생들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필요로 할 때. -교국일보 김성경 기자.] 책상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신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스레 입안이 쓰다. ‘시바….’ “…….” ‘떡상 각 잡히고 있는 거 아니었냐고….’ “후우….” 사고가 터져도 이렇게 터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5현장에서 시행되는 모든 작업을 중단하고 올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물론 한소라가 남아 일반 개체를 만들고 있지만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가던 작업에 제동이 걸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차라리 성검 코인을 손절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닌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해 볼 정도였다. ‘그렇게 쉽게 손절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시바.’ 물론 그저 한번 해본 상상에 불과했다. 성검을 아예 써먹지 않는다는 건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시험 자체가 일시중지 됐다는 것. 녀석이 뿜어내고 있는 반발력 덕분에 시험 자체를 진행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언론과 교황청을 비롯한 갤러리들도 갑작스러운 성검의 이상 신호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으니 충분히 당황할 만했다. 내 입장에서도 똥줄이 탈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이 새끼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뭐가 문제야. 주인 찾아 준다는 데… 어우….’ 용사 후보자들의 대부분은 순진한 놈들을 잡기는 했지만, 성격이 조금 꼬인 녀석들을 아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녀석의 입맛이 까다롭지 않을 거라는 내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타입별로 종류별로 네가 원하는 음식을 먹으라고 뷔페를 차려줬지만, 아예 손을 대지를 안고 강짜를 부리니 속이 편할 리가 있겠는가. 갑작스러운 떡락에 욕설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씨바, 진짜….”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역시 언론 통제 들어가는 게 좋겠죠?” 고요한 목소리에 대답한 것은 현장을 관리하고 있던 이지혜였다. “아니,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어. 흘러가는 분위기도 나쁘지 않고 나름대로 자정 작용이 되는 것 같으니까. 베니고어 넷 반응도 크게 나쁘지는 않고….” “갑자기 사고가 터져서 깜짝 놀랐네요, 진짜. 그냥 가레스 얘도 희생양으로 몰아세우고 치우는 게 좋으려나.” “아냐, 누나. 걔도 잘 키우면 쓸 만할 것 같은데… 버리기 조금 그렇지. 전력 하나가 아까운 상황인데… 전쟁터에서 저질렀던 잘못 회개했다고 방송 한 번 때려주고 눈물 한 번 흘리게 해줘. 당분간 자숙하겠다고 입장 발표한 다음에 복귀하는 것도 도와주고… 댓글 좀 관리해 주면 식는 거 금방이라는 거 알잖아.” “뭐… 그렇기는 하지만… 그나저나 얘도 참 운 없네요. 당시에 전쟁터에서 잔악하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었다고… 엉뚱한 거로 몰리네요. 오히려 어쩔 수 없이 전쟁터로 몰린 불쌍한 애 같은데… 순식간에 이단으로 몰리게 생긴 거 아니에요?” “누나 말이 맞아. 저래 보여도 독실한 신자니까 케어할 수 있을 때 케어하는 게 좋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이기영 명예추기경으로 해놨다며. 나중에 한 번 만나서 사진 한 번 찍고 언론에 뿌려서 여론 진정시키는 게 좋겠네. 상황은 조금 괜찮지?” “나름 잘 정리되고 있기도 해요. 솔직히 오빠가 이렇게 곧바로 달려올 정도의 사건은 아닌 것 같은데… 저 검에 문제 생긴 거 맞죠?” “응, 아무래도 한번 봐야 할 것 같은데….”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누나 정말 선택받은 용사 해볼 생각 없어?” “생각 없습니다. 저는 뒤에서 꿀이나 빨려고요. 부작용에 있을지 모르는 물건에 뭣 하러 손을 대요? 오빠도 그냥 하는 소리잖아요? 진짜로 제가 저 검 들고 나가면 좋겠어요?” 미안하지만 그냥 하는 소리가 맞다. 저 검은 쓸 수 있는 사람을 위해 가져온 검이지 손에 들고 있는 장식품이 아니다. “거 봐요. 표정 보니까 딱 답이 나오는구만… 아 그리고 바젤 교황님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으니까. 일 끝나면 같이 차나 한잔 마셔요. 바쁘다는 건 알지만, 슬슬 관리할 때 됐잖아요. 지난번에 왔을 때 오빠가 그냥 와서 이쪽 분위기 완전 개판이었다고요. 그 영감이 오빠 좋아하는 거 알면서….” “안 그래도 그러려고 하기는 했는데….” “그러니까 실천 좀 하라고요. 누구는 안 바빠서 인맥 관리에 집중하는 줄 아나. 조금 귀찮겠지만 이게 전부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행동 아니겠어요?” 이지혜의 말이 백번은 옳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을 정도면 바쁘다는 건 알지만… 뭐 더 이상 잔소리해 봤자 뭐가 달라지겠어요. 그쪽 작업은 잘되고 있는 것 맞죠?” “뭐 크게 나쁘지는 않아. 어느 정도냐를 묻는다면 제법 순조로운 편이고… 최소한 여기보다는 상황이 훨씬 좋은 편이지. 일단 가봐야겠네. 오늘 안에 바젤 교황이랑 수다까지 떨려면 시간이 좀 빠듯할 것 같은데….”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놨답니다.” “고마워, 누나.” 얘 없었으면 진짜 어쩔 뻔했냐. 저도 모르게 그런 종류의 생각을 하게 된다. 디테일한 것 하나하나까지 챙겨주는 섬세함과 세심함. 괜히 아무 능력도 없는 몸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이쪽에서 먼저 부탁하지 않아도 미리미리 필요한 것들이 준비되어 있으니 오죽할까. 심지어 본인이 맡은 일을 하는 와중에도 이쪽에 신경을 쓸 정도였으니… 그 수완이 엄청나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확실하게 통제된 주변 풍경의 모습은 가관, 성검이 뿜어내는 반발력에 여기저기가 부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인명 피해가 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만약 더 커다란 사건이 터진 상황이었다면, 정말로 가레스라도 희생양으로 삼아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 버릴 뻔했다.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피해 규모가 조금 크죠?” “응,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네.” “왠지 모르게 이런 사고가 한 번쯤은 터질 것 같았어요. 방어 마법을 설치해 놓은 게 이거예요. 소년병이 안 죽은 게 신기할 지경 아니에요? 등을 부딪쳐서 다행이지 머리부터 박혔으면 그 시점에서 즉사했을 걸요. 우리 입장에서는 운이 좋았다는 데 맞아요. 아무리 저라고 해도 억지로 끌려온 소년병 하나 쓰레기 만들어서 매장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너, 아까는 뭐… 몰아세우고 치워버리자며.’ “방어 마법이 있는 것치고는 정말로….” “네, 완전히 박살 났죠.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주기적으로 발광한다니까요.” ‘…….’ “정말로 정상인 거 맞나 몰라. 불량 같은 걸 받아온 건 아닐 테고….” ‘나도 그런 거 아닌가 싶다. 시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부터 한번 알아봐야지. 그래서… 지금은 잠잠해졌다는 거지?” “네, 일단은 잠잠해졌어요. 정확히 오빠가 온 이후로요. 그 전까지는 지속해서 성질부리기에 여념이 없었고요.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혹시 모르니까 사제들이라도 준비해 줄까….” “괜찮을 것 같은데….” “오빠가 괜찮다면 뭐 상관없지만… 혹시 잘못 튕겨 나가서 뒤통수 깨져도 저는 책임 못 져요.” 불안한 면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커다란 문제는 생기지 않으리라. ‘이 새끼, 시위하는 것 같은데.’ 딱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그랬으니까.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현재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대놓고 엿 먹어보라고 행동한 것만 같은 느낌.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이 맨 처음에 일어났을 때 왠지 모르게 이쪽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도 있었고…. 무엇보다 이지혜가 말한 지랄발광이 내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멈춘 것을 보면 분명히 뭔가 있을 거라고 여겨졌다. ‘그래, 시바, 원하는 게 뭐야. 내가 다 들어줄게. 아예 풋내기는 별로야? 조금 기본기는 갖추고 있는 사람이 좋은 거야? 그동안 너무 뉴비들만 밀어 넣어서 그게 불만인 거야?’ 숙련된 모험가는 다루기 힘들지만, 녀석이 호응해 준다면 충분히 합의해 줄 마음이 있다. ‘아니면 인성이 썩은 친구를 더 좋아하는 건가? 그건 아니지?’ 평범한 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을 더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착각에 불과했던 것일까. 다루기 조금 힘들기는 하겠지만 어느 정도라면 용인해 줄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 정신 차리자. 이대로 떡락하면 너한테도 안 좋고 나한테도 안 좋아. 루시퍼한테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닐 거 아니야. 아니, 돌아갈 때는 돌아가더라도 활약은 한 번 하고 가야 하잖아.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까다로워….’ 우웅. “저거 검 떨린 거 맞죠?” 이지혜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우우웅. 아니, 미세하게 떨린 것은 아니다. 무척 힘차게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칠 정도였다. ‘뭐야, 너 왜 그래. 시바, 표현을 좀 해봐.’ 조금씩 조금씩 발걸음을 가까이할수록 진동이 심해지는 듯한 느낌. 일단은 고개가 끄덕여졌다. 적어도 내게 반응하고 있다는 건 아직까지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걸 말해주는 지표였으니까. ‘그래, 그래, 그동안 힘들었지?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형한테 전부 말해봐. 전부 들어줄 테니까.’ 우우우우웅. ‘자격 조건이 뭔지 운이라도 한번 띄워봐 힌트를 제대로 주던가. 가레스는 좀 그랬어?’ 우웅. ‘아니면 그냥 이런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야?’ 우우우우웅. ‘좋은 주인 구해주겠다고 이러는 건데, 왜 그래? 너무 예민해지지 말자, 친구야.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 너무 그렇게 사람 가리는 것도 안 좋아요. 고기만 먹으면서 살 수 있어? 가끔은 채소도 먹고 응? 물도 먹고 하는 거지. 정말로 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적당히 합의해도 상관없는 거 아니야. 합의하자. 현실이랑 타협 좀 하고 살자고, 우리.’ 라고 속으로 지껄이던 바로 그때였다. “뭐야… 씨바. 너 왜 그래.” 심지어 손도 대지 않은 상황. 스스로 드륵 드륵 거리는 소리를 내며 뽑히고 있는 성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 “…….” ‘나오지 마, 이 새끼야. 나오지 말라고. 왜 갑자기 네가 뽑히고 그래.’ “뭐예요. 저거… 지금 혼자 뽑히고 있는 것 같은데….” 멀찍이서 들려오는 이지혜의 목소리에는 대답해 줄 여유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 했으니까. 곧바로 몸을 움직인 것은 당연지사. 튀어나오려는 녀석을 다시 집어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들어가. 다시 들어가, 이 새끼야. 다시 들어가라고, 씨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 612 회귀자 사용설명서 612화 떡락(1) 급하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너, 이 새끼. 시바….’ 회색빛을 뿜어내는 겉모습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열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를 주인으로 결정한 것이 아닐까. 적어도 이쪽을 찌르기 위해 스스로 뽑히고 있다는 것보다는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벨리알이나 루시퍼 같은 악마들이 친근감을 느낄 정도의 역겨운 영혼이라고 하니, 놈 역시 이쪽의 영혼에 끌린 것일 수도 있다. ‘순수한 영혼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면 자신이 아무리 타락시킨다고 한들, 그 결과물이 이쪽의 영혼에게 닿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뭐가 어찌 됐든 놈이 내게 군침을 흘리고 있다는 것 하나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뽑히려는 자와 뽑히지 않게 하려는 자의 싸움. ‘제기랄.’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저주받은 신단의 율리에나 때가 생각나는 것은 기분 탓일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멀찍이 떨어진 이지혜가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오빠는 진짜네요. 와… 얼마나 영혼이 깨끗하면 성검이 저렇게 반응을 해요?” ‘누나, 그거 반어법이지?’ “나한테 주인 될 생각 없냐고 이죽거리더니… 역시 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니까. 아무래도 성검의 선택을 받기에는 제 인성이 조금 모자랐던 모양이네요. 역시 성검의 용사가 될 사람은 속내가 투명한 사람이 어울린다니까.” ‘누나도 도긴개긴이야. 내가 없었으면 누나한테 갔을 거라고.’ “이거 촬영해도 되요? 선택받은 용사가 여기서 탄생. 내일 언론이 떠들썩해지겠네요. 힘내요. 대륙의 전설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니 이보다 더 영광일 수가 있을까요.” “그만해… 누나. 지금 농담할 상황이 아니니까. 내가 진짜로 용사 되면 성검코인은 떡락이라고, 떡락… 써먹을 줄도 모르는 검의 주인이 돼서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왜요. 좋아 보일 것 같은데….” 자신의 인성에 대해 감탄했던 나에게 통쾌해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평소라면 이지혜와 설전 아닌 설전을 벌였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제발 나오지 마, 새끼야. 난 너랑 안 된다고. 다른 검사들도 많은데 왜 연금술사한테 반응하고 그래?’ 우우웅. ‘상관없다고?’ 우우우웅. ‘나는 상관있어. 그러니까 이러지 말자, 우리…. 네가 원하는 사람으로 잘 구해줄게. 지금 상황이 조금 급해서 그러니까 우리 만남은 나중으로 미루자. 어차피 너나 나나 시간 많잖아. 루시퍼 님한테 들었잖아. 2000년만 기다리면 나도 필멸자 벗어날 수도 있다니까? 그럼 영원히 함께라고….’ 우우우우웅. ‘못 기다리겠어? 더 이상 못 참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게 맞아?’ 우우우우우웅. 이제는 사념이 전해져오기까지 한다. 말로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놈이 현재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대략 느껴진다. 벌써 영혼이 연결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지경,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강제로 도장이라도 찍게 생겼다. 물론 나도 이런 종류의 아이템의 주인이 되면 좋다. 제물을, 좋은 아이템을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이 써먹어야 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이 검의 효율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같은 신화 등급이기는 하지만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듀렌달보다 더욱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녀석이지 않은가. 검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초짜가 녀석을 휘둘러 봤자 얼마나 효율이 나올까. 나 자신을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지만, 돼지 목에 진주를 걸은 것이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비둘기들은 물론이거니와 바깥 세계의 신을 상대할 때에도 김현성의 옆에 설 수 있는 강자가 필요했다. 차희라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팀 플레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패였고, 조혜진이 아무리 성장했다고 한들, 김현성의 옆에 서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패였다. 검은 백조의 박연주 역시 마찬가지, 애초 그녀는 등 뒤에 숨은 단도가 아니었던가. 암살자 타입을 김현성과 함께 보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예리도 아웃. 미안하기는 하지만… 우리 거북이 돼지 새끼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김현성에게 따라붙으라고 앞서 나열한 모든 이에게 지시한다면 저들의 가랑이가 찢어질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현재 김현성과 발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비둘기 침공 때는 북서부 지역을 틀어 막아주고, 바깥 신과의 결전 때는 회귀자와 호흡을 맞춰줘야 한다. 혹시 모를 변수에 대응해 줘야 했고, 필요할 때는 희생도 해줄 인재가 필요했다. 김현성이 이야기한 외부 세력의 전력을 대략 수치화해 보면 용사의 존재는 무조건 필요한 상황이라 할 만했다. 괜히 성검 코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검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양반이 폼 잡으려고 무턱대고 집기에는 그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리고. ‘부작용, 시발러마… 부작용!’ 내 몸을 갉아먹는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디 잠깐 아픈 거야 치료하면 나을 수 있지만 이런 종류의 검들이 뿌려주는 부작용은 그런 종류의 고통이 아니지 않은가. 우우우우우우웅! ‘그렇게 나쁘지 않을 거라고? 웃기지 마, 새끼야. 나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야. 괜히 엄한 데 군침 흘리지 말고 괜찮은 놈 아무나 하나 잡으라니까….’ 우우웅! ‘아니, 오래 살아도 아프면 오래 살아 있는 게 아니지. 건강하게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라고….’ 우우우우우웅! ‘이런 식으로 나오면 너한테도 안 좋아.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율리에나도 창고에서 썩고 있잖아… 어차피 너는 내 밑으로 들어와 봤자, 창고로 가거나 가방 안에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우우우우우우우웅!!! 거리는 진동에 내 몸이 저절로 떨려온다. 당연하지만 근력이 낮은 내 몸으로는 녀석이 튀어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손가락을 튕기자 아래쪽에서 작은 촉수들이 나와 녀석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뽑혀 나오려고 하는 성검을 잡아당겼지만 뚜둑뚜둑 거리는 소리가 나며 촉수들이 끊어지는 상황에 절로 입술을 꽉 깨물게 된다. 그만큼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우우우우우웅! 겉모습만 멀쩡할 뿐이지. 루시퍼가 전에 보여줬던 베니고어의 6 혓바닥과 비슷한 놈이지 않은가. 차라리 이럴 거면 그 자식을 데려오는 게 나을 뻔했다. 걔는 시바…. ‘걔는 시바, 혓바닥이라도 꺼낼 수 있지. 너는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요즘 같은 스마트 시대에 누가 검을 휘두른다고 그래… 율리에나도 자동 공격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서 그나마 데리고 있는 건데… 네 검신이 날카로우면 뭐 해. 기껏해야 지팡이로 쓸 텐데.’ 우우우우우우우웅! ‘아니야, 욕하는 게 아니잖아. 화나라고 한 말이 아니라고… 조금 더 합리적으로 생각하자는 거지. 딱 10년 정도만 참아봐. 나도 일 좀 끝나고 검술 좀 익혀볼게. 그러면 너도 좋고 나도 좋잖아.’ 뚜둑. 뚜둑. 거의 봉인하다시피 녀석을 묶어놓고 있는 촉수들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계속해서 위에 덮어놓기는 했지만 막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아니, 왜 이렇게 질척거려. 싫다는 사람한테… 내가 나중에 챙겨준다니까. 루시퍼 님한테도 잘 말해줄게. 그러니까 그만… 들어가자, 우리. 좋은 주인 찾아줄게. 정말로 좋은 주인 찾아줄 테니까… 이제 그만하자.’ 더 이상을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검신이 뽑히며 회색빛이 주변을 비추는 모습,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을 때였다. ‘나중에 보자고! 나중에!’ 우뚝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몸을 멈춘 것이다. “하아… 하아… 하아….” 짧은 시간에 많은 마력과 체력을 소모했기 때문인지 계속해서 숨이 차오르고, 땀이 턱선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이거 잠잠해진 거 맞지? 하아….” “오빠가 직접 보고 있잖아요. 제대로 설득한 거 맞아요? 뭐 어떻게 하겠대요? 서로 좋게좋게 잘 합의한 건 맞는 거죠?” 대화가 제대로 마무리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 아마도 그런 것 같은데….” 우우웅. 짧은 진동, 하지만 사념이 전해져 오지는 않았다. 긍정의 표현도 아니고 부정의 표현도 아닌 것 같았지만 정황상 녀석의 양보를 받아낸 것이 맞다. 괜스레 검의 끝머리에 달린 장식을 쓰다듬자 간헐적으로 떨리는 녀석이 느껴졌다. 화가 났다는 것을 표현하고는 싶지만 이런 식으로 쓰다듬어 주는 게 기분이 좋기는 한 모양이다. ‘그래… 잘 생각했어. 굳이 너도 이런 주인도 만나보고, 저런 주인도 만나보고, 이 사람 저 사람이랑 다 해 본 다음에 정착하는 게 좋잖아. 경험이 좋다는 게 뭐야. 한번 다 돌아보고 이제 조금 괜찮겠다. 싶었을 때 천 년 가약 맺고 그러는 거야, 원래.’ 우웅. ‘나도 마찬가지지, 그럼. 너도 내가 다른 검이랑 같이 널 사용하면 기분이 좋겠어?’ 우우웅. ‘나도 이런 검도 만나보고, 저런 지팡이도 만나보고, 저런 무기도 만나보고 하다가 정착하는 게 맞지. 너무 일찍부터 서로 눈 맞고 그러면 오히려 나중에 바람난다니까. 젊었을 때 화끈하게 놀아봐야 나중에 그런 생각도 안 들어요.’ 우우우웅. ‘나중에 막상 직접 계약했다가 후회할 수도 있는 거잖아… 아무튼 잘 생각했어. 진짜… 큰 결정 한 거야.’ 더 이상의 진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납득해 줬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더 이상 오래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녀석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뭐예요? 이대로 가는 거예요?” “일단은… 아마 조만간 잠잠해질 것 같아. 오늘은 일단 저 상태로 놔두고…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로 하자. 이번에는 타입들도 조금 더 다양하게 해서 올려 보내고, 마지막에 아쉽게 떨어져서 여기 못 밟아 본 애들도 몇 명 올리자.” “어차피 겁먹어서 중도 포기한 얘들도 몇 명 있었으니까… 나쁘지는 않겠네요. 그 대신 교황청 입장 정리는 오빠가 직접 전달해 주시고요… 어차피 바젤 교황님이랑 만날 거니까. 아, 그리고 혹시 해서 물어보는 건데. 이 이상 사고 안 터지는 건 확실한 거죠?” “…….” 솔직히 확신할 수는 없다. 지금은 잠깐 참아준다는 느낌이었지만 언제 또 폭발할지 누가 알겠는가. 사실 걱정되기는 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만했다. 완전히 떡락하는 흐름으로 가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하지만 정확히 35시간 이후에는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 아. 선택받은 용사의 탄생을 전 대륙민들에게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실 겁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일단… 이런 기회를 주신 명예추기경님과 바젤 교황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지금 이 상황이 조금은 갑… 작스럽고 당황스럽지만… 여러분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 -제 이름은… 제 이름은 라파엘입니다. # 613 회귀자 사용설명서 613화 떡락(2) 바젤 교황과 티 타임을 가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뺄 수가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검에 대해서는 대충 아무 변명이나 지껄였고, 현재 이단심문관들에게 조사받고 있는 소년 용병 가레스 역시 혐의를 벗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이후에는 짧게 눈을 붙인 이후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버전 공포의 정원 마무리 작업을 진행했고, 아귀의 촉매와 마수 살라트의 코어 핵을 합성해 버전 튜토리얼 던전의 작업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몸이 조금 피곤했지만 그렇다고 탱자탱자 놀 수 있을 리 만무. 수도에서 너무 오랜 시간 성과 없이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얻은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검이 다시 한번 자리 잡았고 교황청의 인사들과도 더욱더 끈끈해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건만 안 터졌어도….’ 하는 마음이 솟아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리라. 조금만 더 눈을 붙이는 게 어떻겠냐는 정하얀의 제안을 애써 거절한 이후에는 쉬는 시간 없이 달렸고, 그사이에 제이나 교황청 대변인이 방송에서 적당한 변명으로 입장 발표를 진행했다.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시스템이 활성화됐고, 그 결과 성검의 시험은 다시금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서 재개될 수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스무스한 흐름이었다. 하지만 다른 갤러리들과는 다르게 정작 이쪽은 벌어지고 있는 시험에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이 꼽은 인물들이 시험을 받을 때는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쉴 틈 없이 진행되는 시험을 온종일 쳐다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당장 용사가 선택받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성검이 그렇게 쉽게 주인을 선택하지 않을 거라는 건 이전에 나눴던 대화와 정황들로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하얀이 커다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을 당시에는 약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 오빠! 나왔어요! 나, 나왔어요! 용사가 나타났나 봐요. 지, 지, 지금 검을 뽑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뽑히고 있어요.” “어?” “빨, 빨리 나와요. 용사 나타났어요. 용사!” 버전 튜토리얼 던전을 내팽개치고 무작정 여신의 거울로 달려든 것은 당연지사. 화면 안에 있는 녀석이 정말로 검을 뽑고 있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탈락한 놈들과는 이펙트부터 다르지 않은가. 그 가운데 서 있는 녀석의 모습은 여느 서사에 나오는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손색이 없다. 나이는 이제 막 20살이 되었을까. 아직은 소년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오는 앳된 얼굴을 한 용사는 회색의 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힘겨워하고 있다.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수많은 갤러리가 보고 있는 가운데 검 한 자루를 뽑아 들고 있는 용사. 찬란한 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자신에게 전해질 책임의 무게와 권리를 깨닫는 듯한 얼굴, 그 모습을 보고 기도를 드리는 사제단과 연신 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교국민들. 모두 내가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던 장면이었다. -성검이… 성검이 뽑히고 있다. 성검이 뽑히고 있어. -베니고어 님께 선택받은 용사다. 지금….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누구야, 저거… 누구야? 쟤, 도대체 누구야? -용사님이다. 용사님…. 여신의 거울 너머로 들려오고 있는 갤러리들의 목소리까지 완벽했다. ‘이건 진짜 무조건 떡상이다. 떡락의 여지가 없어. 무조건 떡상이라고!’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어떻게 기분이 나쁠 수가 있을까. 염원하고 또 염원하던 상황이었는데… 앳되고 순진해 보이는 녀석의 얼굴도 마음에 들었고, 아직 때가 타지 않은 듯한 외관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든 것은 힘든 상황에 걱정거리를 해결해 줬다는 것. 몇 년 묵은 체증이 쑥 하고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키야… 얘가 마음을 고쳐먹었네, 기냥. 거기 간 게 신의 한 수였네, 신의 한 수였어. 역시 사람은 대화를 해야 한다니까. 말이 잘 통해, 우리 성검 씨가… 이러니까 내가 얘네들을 안 좋아할 리가 있나.’ 어째서 성검이 자신의 마음을 바꿨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득이 통했다는 사실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습관처럼 마음의 눈으로 녀석의 스텟창을 확인한 이후에는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라파엘의 상태창을 확인합니다.] [이름-라파엘] [칭호-결사단의 마지막 생존자.] ‘하… 씨바….’ 두말할 필요 없는 함정카드였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일어난…. 성검 코인의 떡락이었다. 단순한 떡락이 아니라, 아예 수직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그래프가 눈에 아른거릴 정도였다. “진짜… 진짜 시바… 나한테 왜 이래.” ‘결사단의 마지막 생존자?’ 너는 또 왜 튀어나와….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5현장을 무너뜨린 더러운 악마계약자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빈틈없이 일을 처리했다고 믿었건만 더러운 반동분자 놈들의 끄나풀이 아직 남아 있는 상황. 그냥 남아 있는 것도 아니라 아예 선택받은 용사가 되셨단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기침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아직도 거울에 빠져 있는 정하얀, 막스, 한소라를 뒤로한 채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이 더러운 마검 새끼가… 일부러 그런 거 맞지? 그런 거지?’ 추악하고 역겨운 마력을 내 뿜는 칠흑의 어둠의 산물이 기어코 사고를 친 것이다. 잠잠히 이쪽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쪽에 엿을 먹이려는 게 분명했다. 더러운 마검이 어떻게 저놈이 어떤 놈인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무조건 알고 선택했다고 보는 게 맞다. 단순히 나를 적대하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격적으로 시위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상황이 내게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 아. 선택받은 용사의 탄생을 전 대륙민들에게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실 겁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일단… 이런 기회를 주신 명예추기경님과 바젤 교황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지금 이 상황이 조금은 갑… 작스럽고 당황스럽지만… 여러분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 -제 이름은… 제 이름은 라파엘입니다. 검술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이번 시험을 치르면서 익숙해졌고… 또… 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 와중에 인터뷰가 시작됐고 모두의 관심 속에 악마계약자 놈이 교황청의 심장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순식간에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상황을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 실성한 것처럼 웃자, 이쪽을 바라보는 정하얀과 한소라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 “…….” “저… 부길드마스터. 교황청으로는 안 가시나요? 지금 빨리 와달라고 메시지가 오고 있는데….” “…….” “…….” “후우… 곧바로 출발한다고 연락 좀 전해주세요. 조금 늦을 수도 있다고 전해주시고요. 하얀이는 같이 갈 준비하는 게 좋겠네.” “네, 네… 네.” “아, 그리고 현성 씨한테도 연락 꼭 넣어주세요. 꼭, 아니… 그럴 게 아니라 길드원들을 전원 소집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어이가 없네, 정말로… 어이가 없어.’ 상황이 어느 정도 파악된 이후에는 머릿속에 화가 쌓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속에서 열불이 나오는 듯한 느낌. 지금까지 개고생했던 추억들이 스쳐 지나간 탓인지 모르겠지만 전부 다 뒤집어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걸 어떻게 하는 게 좋으려나.’ 라는 고민을 하는 것도 당연지사.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무엇 하나 정확히 정해진 것이 없지 않은가. 일단 저 악마계약자 놈이 이쪽으로 직접 찾아온 이유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물론 동기가 무엇일지는 뻔하다. 회개한 이후, 새 인생을 찾기 위해 이쪽으로 온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확률은 낮다. 정말로 새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이 미쳤다고 이쪽으로 찾아와 시험을 받고 있겠는가. 어떻게 생각해도 확고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자리했을 거라 판단하는 게 맞다. 그 확고한 목표는…. ‘복수겠지, 뭐.’ 복수일 것이다. 동료들의 복수, 동료들이 미처 행하지 못한 임무의 완성, 동료들이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 녀석은 저 자리에 서 있다. 빛을 위협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위험하려나?’ 당장은 위험하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다. 마검의 선택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현재 녀석은 준비된 상태가 아니다. 아마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 목을 노리기 위해 노력할 테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공작이나 작업을 치려고 해올지도 모른다. 날조된 자료를 알릴 계획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세상이 진실을 알아야 한다며 떠들어댈 수도 있다. 만약 마음에 눈으로 녀석이 반동분자였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끔찍했겠는데….’ 모르기는 몰라도 뒤통수에 커다란 상처 몇 개는 생기지 않았을까. 어쩌면 죽었을 수도 있다. 녀석의 현재 위치는 반동분자가 아니라 선택받은 용사였으니까.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물론 해결책이야 간단하다. ‘죽이면 돼.’ 없던 일로 만들면 된다. 체면이야 조금 구겨지고 뒷말이야 나오겠지만, 살인 멸구보다 좋은 해결책은 없다. 미래의 위협을 가만히 놔두는 것보다는 죽이는 게 백번 낫지 않은가. 솔직히 제법 끌리는 선택지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한 큐에 문제를 해결해 버릴 수 있으니까. 추가 선택지 역시 존재한다. ‘아니면 마검을 내가 받아들이는 게 좋을까?’ 이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니지만, 이쪽은 결정권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니 논외. 마지막 선택지가 바로 이거다. ‘키워보는 건….’ 오히려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 반동분자들이 만든 정보들 모두가 날조된 정보라는 사실을 은근슬쩍 알리면 된다. 모든 건 오해였을 뿐이고, 너 또한 그들에게 세뇌당한 피해자라는 프레임에 가둬 버리면 된다. 직접적으로 알릴 수야 없겠지만 간접적으로 알릴 방법은 충분하다. 모두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명예추기경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다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이후에는 최전선에 세우고 토사구팽 해버리면 끝이다. 조금 고민해 보기는 했지만 셋 모두 나쁘지 않은 선택지처럼 느껴졌다. 가장 마음이 끌리는 것은 세 번째 이기는 했지만…. 이 자리에서 당장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녀석이 어떤 인간인지 정확히 판단하는 것.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도 준비를 재빠르게 마치자 눈치 빠른 정하얀이 곧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내 기분이 안 좋아졌다는 걸 눈치챘는지, 괜스레 힐끔힐끔 이쪽을 바라봤지만 그래도 주문을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막스와 한소라 역시 불안한 듯한 표정이다. 분명히 입꼬리를 올린 것처럼 보였는데 녀석들에게는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시 한번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평소대로의 영업용 미소를 얼굴에 담는다. 정하얀이 주문을 외운 직후, 시야가 변했고 내 앞에 서 있는 인물의 모습에, 나는 아까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라… 라파엘이라고 합니다.” # 614 회귀자 사용설명서 614화 떡락(3) 조금은 긴장한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많이 긴장한 것 같은 얼굴이다. 내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지 않았지만 조금 불편해하는 것 같은 느낌. 정확히 말로 표현하기 애매하지만 나를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녀석과 함께 자리해 있는 교황청의 인사들은 저런 반응이 당연하다는 모습. 내가 봐도 어색하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일반인이 이기영 명예추기경을 실제로 목도했을 때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으니까. 하지만…. ‘미묘하게 다르네.’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은 걸 느끼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녀석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다는 게 강하게 전해져 온다. 저 긴장한 표정 뒤에 숨은 감정이 분노인지, 아니면 경외인지, 의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쪽에게 긍정적인 감정은 아니라는 것. 녀석의 정확한 속내를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그래도…. ‘쟤보다는 낫지.’ 그 말 그대로였다. 녀석이 나보다 더 답답해하고 있을 거라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나는 갑이고 녀석은 을이다. 녀석이 선택받은 용사라고 한들, 스위치는 내가 쥐고 있다. 아마 여러 가지로 불안하지 않을까. 정체를 들키면 어떻게 할지. 지금부터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지. 생각이 많아져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라파엘 쪽이라는 거다. ‘참 배짱도 좋아.’ 우연히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하는 게 정황상 맞다. 물론 성검에게 선택받을 거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로또를 맞게 된 건가. 떡상 하셨네요… 운도 좋은 새끼. 누구는 완전히 떡락해서 존버밖에는 답이 없는데 말이야.’ 일단은 웃으며 다가간 것은 당연지사. 평소와 같은 것처럼 행동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본격적인 탐색전에 들어가기 전에 간을 보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제가 조금 늦은 것 같습니다만…. 이렇게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아니요. 저야말로 영광이에요, 명예추기경님. 여신의 거울을 통해서만 뵐 수 있는 분을 이렇게 실제로 만나게 되니 너무나도 감, 감격스럽습니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 그리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제가 감격이고 제가 더 영광이지요. 대륙을 구원해 주실 선택받은 용사님이 아니십니까. 물론 여러 가지로 더 지켜봐야겠지만 성검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대륙에 복이라는 생각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아마 베니고어 님도 기뻐하시고 계실 겁니다.” “제가 베니고어 님의 기대를 충족시켜 드릴 수 있을지… 걱정이 먼저 앞섭니다. 저는… 그저….” “…….” “모든 게 갑작스럽기만 해서….”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교황청과 대륙 보호 관리위원회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도와줄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 저 역시 라파엘 용사님께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노력하겠습니다.” 한 발자국 앞에 나서며 어깨를 두드리자 이쪽을 경계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마치 궁지에 몰린 쥐 같은 얼굴. 성검을 더더욱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들이는 꼴은 가관이라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표정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얼마나 대륙을 위해 희생하는 인간인지 알아야 했으니까. 오히려 세상 따뜻한 미소를 장착한다. 최대한의 호의를 내보이고 과거 권력자들에게 내보내던 친절함을 얼굴에 박아 넣는다. 김현성을 포함한 소수에게밖에 보여주지 않은 표정이었다. 표정은 성공적으로 먹혀들어갔다. 약간은 당황스러워하는 녀석의 얼굴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당황했네. 새끼.’ 녀석이 생각했던 내 이미지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을 터. 물론 연기를 한다는 사실은 머릿속으로 되뇌고 있었겠지만 대놓고 이런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건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대외적으로 보는 명예추기경의 모습이 아닌, 진짜 사람 같은 명예추기경의 모습. 순수하고 친절하고 따뜻하기까지 한 사람,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건네며 손을 뻗고 싶게 만들어지는 사람, 휴먼 중의 휴먼 빛기영의 모습이다. 때마침 창문으로 햇빛까지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감… 사합니다.”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익숙하지 않으실 테니 제가 직접 주변을 안내해드리고 싶은데…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제이나 대주교님.” “네. 물론입니다. 다만….” “아, 따로 스케쥴이 있었던가요?” “네. 언론보도용으로 짧게나마 인터뷰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혹시나 불편하시다면 따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필요한 일이니까요. 아마 대륙민 여러분들도 새로 선택되신 용사님께 궁금하신 점이 많으실 겁니다. 앞으로 용사님께서 어떤 행보를 걸으실지, 어떻게 활동을 하실지에 대해서요. 아! 그러고 보니 쟤가 전에 말씀드린 건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아… 네. 소외 계층 지원 문제 말씀이시군요.” ‘그래. 저번에 말했었잖아. 그렇지?’ “명예추기경님께서 부탁하신 대로 처리 중에 있습니다.” ‘그래 잘 말해줬어요. 제이나 대주교님.’ “먼 미래에 위협보다는 당장 오늘 내일을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부족하겠지만 최대한 빨리 진행을….” 뜬금없이 꺼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대외홍보용으로 나왔던 이야기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들이 튀어나오기 시작. 정말로 시행할 생각이 없었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이야기에 녀석이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했다. 쓸데없는 정보라도 주워 담아야 하는 게 지금 녀석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일 테니까. 꽤 여러 가지를 계획하고 이쪽에 접근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거 제가 너무 말이 많아졌군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명예추기경님.” “예정된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조금 있으니 이 근처라도 한 번 돌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교황청에는 한 번쯤 와보셨을 것 같지만… 아무래도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공간 같은 경우도 있으니까요.” “네.” “이를테면 저기 정원 같은 경우도 그렇고요. 교황청의 사제들이 직접 사용하고 있는 공간은 아무래도 볼 기회가 없지 않습니까. 라파엘 님께서도 교단의 신도이신 만큼 궁금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이쪽으로 조금만 더 가다 보면 수습사제들이 신학에 대해 공부하는 대학교가 나옵니다. 반대쪽으로는 고위사제들에게만 입장이 허락된 신전도 존재하고요. 사실 하루 만에 다 볼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렇군요.”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가까운 곳 밖에 소개를 시켜드릴 수 없지만 내일, 혹은 그 이후에라도 천천히 안내해 드리고 싶습니다.” “꼭 그렇게 하실 필요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라파엘 님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하고요.” 다시 한번 웃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지금 네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한 것이다. 녀석 역시 이쪽이 방심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지 표정이 한결 풀린 것 같은 느낌, 점점 말이 길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사실상 이후로는 쓸데없는 이야기의 연속이라 할 수 있으리라. “체스는 좋아하십니까?” 취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오신 건지….” 녀석에 대한 간단한 호구조사를 하기도 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시고… 뭘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을 때 좋으신 분들이 저를 거둬주셨어요.” 아마 악마 계약자 새끼들의 이야기였을 거다. “항상 대륙을 위한 길이 뭔지, 어떤 게 정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을 위한 것인지 알려주는 분들이셨지요. 그분들께 영향을 받아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의외로 대화가 잘 통하는 느낌에는 나조차도 놀랄 지경. 약 20분 정도를 더 걸었다고 생각했을 때 작은 호수공원이 시야에 비친다. 빛무리가 쏟아지는 공원의 모습은 내 눈으로 봐도 아름답게 보인다. ‘이걸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호수공원의 밑바닥에 쳐넣는 건 어떨지 고민이 될 정도였다. ‘이건 진짜 어떻게 해야 되지….’ 쓸데없는 자신감일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장기 말로 써먹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대뜸 검을 날려 오지 않는 것만 봐도 그래.’ 이성적인 타입이라 봐도 될 것 같았다. 당장 너 죽고 나 죽자의 느낌으로 개 거품을 물고 달려들 수도 있지 않은가. 아마 내 배를 성검으로 쑤시고 호수 밑바닥에 쳐넣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실제로 그럴 만한 거리에 있었으니까. 정하얀과 박리안이 일정 거리를 둔 채로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보면 녀석이 지금 이 자리에서 암살 시도를 한다고 한들 성공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런 상황을 신경 쓰고 있는 상황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원하는 게 내가 그냥 뒈지는 건 아니라 이거네.’ 라파엘이 원하는 건 내 죽음뿐만이 아니다. 진실을 밝혀내는 것, 결사단원에게 쓰인 억울한 누명을 벗겨내는 것.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사회적인 죽음과 정당한 처벌을 받는 것. 뭐 아마 그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녀석도 시간이 필요했고 나도 시간이 필요한 상황, 지금 당장 뭐라고 판단을 내리기 힘든 상황이라는 거다. ‘조금 더 두고 보지 뭐.’ 이미 성검 코인이 밑바닥 끝까지 떡락하지 않았던가. 누군가 존버는 과학이라고 했었다. 내 손으로 이 종목을 휴짓조각으로 만들 수는 없다. 존버하다 보면 언젠가 날아오를 거다. 그런 생각들이 점점 머릿속에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괜스레 분위기를 한번 잡아보자 녀석도 뭔가 심상치 않은 말이 나올 거라는 걸 직감했는지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커다란 짐을 지게 한 것 같아… 사실 그리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짐….” “평범한 사람들이 어쭙잖은 각오로 마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라파엘 용사님께서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은 그런 일입니다. 여신님께서 검을 내리신 이유는 대륙을 위협하는 적을 마주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 “싸우기 위해서예요. 라파엘 님께서 회색빛의 검에 선택받은 것 역시 그러한 이유겠지요. 힘에는 영광만이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나 이번 같은 경우는 더욱 더요. 책임과 고통이 분명히 따라올 겁니다. 커다란 짐, 말입니다.” “그렇… 군요.” “여러 가지 형태로 지치거나 다치실 수도 있을 겁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도 많을 거고… 모든 것들을 위해 희생하셔야 될 지도 모릅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들을 위해서요.” “…….” “검을 놓고 싶어질 때가 분명 생길 겁니다. 역경와 고난이 있을 거라고 저는 확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네….” “부디 검을 놓지 말아주세요. 대륙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해 끝까지, 끝까지… 함께해 주십시오. 이렇게…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고개까지 숙여주는 게 좋을 것 같은 타이밍. 진심을 담은 얼굴을 대놓고 보라고 보여준다.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비련의 남 주인공 행세를 하며 눈물 한 번 쏟아주고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자존심 따위는 내팽개친 듯한 모습, 대륙의 빛이라고 불리는 이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예상했던 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놈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누가 봐도 성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습이었다. # 615 회귀자 사용설명서 615화 부정적인 여론(1) “고개 들어주세요. 명예추기경님. 제게 이러실 필요는….”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자 더욱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필요하다면 무릎을 꿇거나 납작 엎드릴 수도 있다. 심지어 가랑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일도 아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지금 보여주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당황하고 있지 않은가.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시작부터 자신이 생각하고 상상하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니 약간은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느낌. 물론 겨우 이런 거로 놈의 생각이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예상했던 범주 내에 들어가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이건 빌드업의 일환이라 봐도 될 것 같았다. 커다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시도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으리라. 명예나 권력욕, 금전욕에 초탈한 빛기영의 모습, 오직 대륙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작업의 일환, 지금 라파엘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꽂혀 들어왔다. 당장 성검을 높게 들어 길게 뻗은 내 목을 치고 싶어 하지는 않을까. 어떻게 보면 위험한 행동이기도 했지만 내가 녀석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라 볼 수 있으리라. 이런 상황에서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뻔할 뻔 자. 예상대로 슬그머니 내 어깨를 잡아 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스고요.’ “…….” “…….”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명예추기경님. 고개를 들어주세요.” “…….” “제게 고개 숙이실 필요 없습니다. 여러 가지로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저 역시 충분히 각오한 일입니다. 어째서 제가 여신님께 선택받은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제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고개 들어주세요.” “…….” “오히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으니까요. 도움이 필요한 것은 명예추기경님이 아니라….” ‘그래, 너지.’ 성검의 주인이라고 하기에는 스펙이 너무 비루했으니까. 살짝 고개를 들고 안심했다는 얼굴을 보여주자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식적이라고 느끼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사실 지금 이쪽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크게 상관없다. 어차피 조금씩 생각이 변하게 될 테니까. ‘카스가노가 등판해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겠어?’ 카스가노와 함께 미래를 보게 된다면 뭔가 느끼는 게 있을 것이다.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베니고어가 여유만 있다면 조각상으로 들어와 현재 대륙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뜻을 전할 수도 있다. 결사단의 인원들의 대부분이 베니고어의 기적을 거짓된 힘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녀석 역시 정말로 기적을 목도한다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방법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선택지 자체는 무궁무진하다는 거다. 그 무엇보다 회색빛의 성검이 녀석을 선택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아무리 이쪽을 엿 먹이기 위해서라지만 정말로 자기 성에 차지 않는 사람에게 몸을 넘길 리는 없다. 아마 라파엘의 성향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껴서이지 않을까. ‘회색분자.’ 노선과 목표나 성향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 본인만의 뚜렷한 가치관이 없이 주변에 영향을 많이 받는 종류의 인간. [라파엘의 고유기벽을 확인합니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회색.] 조금은 함정처럼 느껴지는 고유기벽이기는 했지만…. ‘흔들리기는 흔들린다는 거잖아?’ 그 말 그대로였다. 경멸의 의미를 담은 회색분자라는 네이밍과는 다르게 녀석은 박쥐 같은 기회주의자 타입이 아니다. 오히려 중립론자나 신중론자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 흑과 백 중, 하나를 선택할 때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타입이고 어느 한쪽에게 손을 뻗을 때 그만큼 신중해지는 타입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파엘이 녀석들과 같은 뜻을 가졌다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 있지.’ 날조된 이야기가 대부분이기는 했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꾸며낸 이야기는 충분히 고개를 끄덕여 줄 만했으니까. 이렇게까지 자세하고 치밀하게 날조된 자료로 선동을 하다 보면 녀석 같은 신중론자들도 휩쓸릴 여지가 있다. 아직 나이도 어리지 않은가. 물론 겨우 몇 살 더 먹었냐가 생각에 신중함을 더해준다고 판단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여러 가지 가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다. 인간이 주변 배경의 영향을 얼마나 받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악마 계약자 놈들이 얼마나 사탕발림으로 입을 털었으면… 그렇게 됐겠어… 딱하기도 하지… 진짜.’ 녀석 역시 제대로 된 환경이 마련되지 않았을 뿐이다. ‘형이 잘 챙겨줄게. 의심하지 말고 알겠지?’ “그럼… 돌아갈까요? 괜히… 무거운 이야기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아서….” “오늘 말씀은 충분히 도움이 됐습니다. 마냥 기뻐하고 당황스러워하고, 쓸데없는 기분에 취해 좋아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으니까요. 만약 이런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다면 단꿈에 젖어 정말로 중요한 것을 바라보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지.’ “명예 추기경님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지 모를 겁니다. 이곳은 전혀 새로운 환경이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또….” “라파엘 님께서 저를 의지해 주고 계시다니 기분 좋은 소식이군요.” “아… 그런 뜻이 아니라… 건방졌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너무 딱딱하게 대해주시지 마시고 조금은 편하게 대해주셨으면 합니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얼굴을 볼 기회가 많을 테니까요.” “…….” “…….” “그럼… 실례가 안 된다면 말을 조금 편하게 해도 괜찮을까요?” ‘이 새끼 봐라.’ “아니,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명예추기경님. 제가 너무… 기뻐서 쓸데없는 소리를….” 여기서는 한 번 푸근한 미소를 지어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녀석이 먼저 이쪽과 친해지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 시점이었으니까.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깜짝 놀라는 듯한 모습도 좋겠지. “괜찮습니다. 오히려 편하게 말씀해주시는 게 제게도 더 편할 것 같으니까요. 먼저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적극적이네. 그래… 너도 가까워지고 싶다 이거지?’ “그럼 형이라고….” ‘붙임성 좋네… 새끼.’ 밀어붙이는 게 빠르다. 그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훈훈한 대화를 이어나가기는 했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당황스러운 타이밍이기는 했다. 당연하지만 녀석의 본래 성격은 이렇지 않을 확률이 높다. 아마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가는 이미지를 구축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게 녀석이 활동하기 더 편한 환경을 만들어줄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일차적으로는 내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을 거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자기 성격이 열려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을 수도 있다. 당연하지만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다. 저쪽과 가까워져야 하는 건 이쪽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다시 한번 입가에 미소를 장착하자, 본인이 행동이 옳았다고 판단했는지 주먹을 꽉 쥐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네. 마음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명예추기경님도… 아니, 형도 말 편하게 하세요.” “사실 반말을 하는 게 그리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차차 놓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이군요.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를 찾기도 했고 믿음직한 동생이 생긴 것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절반 정도는 성공.’ 천천히 편하게 대하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거절의 뜻은 아니다. 내 앞에 서 있는 녀석이 가장 잘 느끼고 있지 않을까. “저… 형.” “네?” “그럼 지금부터 저는 어떻게… 어디서 뭘 하면 되는 건가요?” ‘그래, 그게 가장 궁금하겠지.’ 아직 본인이 먼저 나서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입장이었으니까. 파도가 치는 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아마 현시점에서 녀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조금이라도 주도권을 얻어내는 것이 아닐까. 성검의 선택을 받았다고 한들, 아무런 기반도 없는 이가 혼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어디에 갈 것인지, 어디에 소속이 될 것인지가 아마 가장 궁금할 것이다. “글쎄… 아마… 기본적인 절차가 끝난 이후에는 어디서 지낼 건지를 결정하게 될 것 같습니다. 교황청이 될 수도 있고, 파란 길드가 될 수도 있고,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가 될 수도 있겠죠. 붉은용병이나 검은백조,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다른 국가 집단이나 길드를 살펴보시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물론 네가 그렇게 할 리는 없겠지.’ “파란 길드 마스터를 비롯한 대륙의 강자들에게 튜터링을 받는 게 일단은 최우선이고… 이외의 시간은 제가 여러 가지에 대해서 가르쳐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교양 과목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편하실 겁니다. 기본적인 일은 배워두는 게 좋으니까요. 혹시 생각하시고 계신 곳이 있으십니까?” “…….” 아마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보면 린델이나 수도를 베이스로 한 길드나 집단, 대표적으로는 파란 길드, 혹은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품 안에서 행동하는 게 더 최선의 선택지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파란 길드가 조금 더 나으려나.’ 아무래도 이쪽과 딱 붙어서 행동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운 상황을 많이 겪을 테니까. 이 전에 내가 활동했던 곳에서 천천히 기반을 다지는 게 가장 나은 선택지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교황청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접근할 수 있는 정보들이 제한적일 테니 군침을 흘리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내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지는 가장 가까운 곳에 두는 것. 물론 신체적인 위협이 존재하기야 하겠지만, 놈의 진짜 목적을 생각해 보면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예전의 그 약한 이기영이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녀석이 그런 무리수를 투척할 리가 없다. “조심스럽게 추천해 드리건대… 아마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하는 게 가장 좋을 겁니다.” “…….” “튜터링 같은 경우는 시간을 따로 내면 되는 문제니까요.” ‘키메라 작업은 얘가 훈련하고 있을 때 하면 그만이고….’ “그리고… 사실 소속이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파란 길드 소속으로 움직인다고 한들… 린델에 체류하는 기간보다 현장 쪽에서 체류하는 기간이 더 길 겁니다. 튜터링도 린델이나 수도에서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할 거고요. 조금 부담스러우시겠지만 아마도 스케쥴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 같습니다. 불편하실지는 몰라도 이게 가장 효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일 겁니다.” “아….” “대륙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더욱 더요. 당장은 힘에 부칠 수도 있지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운 이후에는 라파엘 님의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께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되겠죠. 일단 커다란 숲을 먼저 바라볼 수 있으니… 무엇보다 제가 여러 가지로 챙겨드릴 수 있다는 게… 가장….” ‘그게 내가 널 관찰하기 더 편하잖아. 너도 마찬가지고. 그렇지?’ 확실히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아마 무난하게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로 들어오는 흐름을 타지 않을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항상 그렇듯 일이 무난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김현성을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여론이 흘러나온 것이다. # 616 회귀자 사용설명서 616화 부정적인 여론(2) ‘이게 반대할 껀덕지가 있는 건가.’ 뭐만 하려고 하면 반대하고 나서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가 아니던가. 베니고어 공인 ‘우리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인선이다. 지금까지 일어난 여러 가지 일을 떠올려보면 그러려니 싶기도 했지만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론에 나갈 인터뷰를 마친 것은 물론 이미 바젤교황과의 삼자대면까지 마친 시점. 공식적인 발표 역시 여신의 거울을 통해 방영됐다. 파란 길드원들이 전부 다 모인 것이 딱 이때였을 것이다. 길드 일에 파묻혀 있었던 선희영과 황정연도 오랜만에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김현성과 김창렬도 마찬가지. 방송이 끝나 할 일이 없어진 박덕구와 김예리, 안기모 혁명 삼 남매도 교황청 안에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엘레나와 유아영도 정신이 없는 와중에 시간을 냈고 덕분에 잠깐이나마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었다. 딱 라파엘을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들여 내 옆에 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기 전까지 만 말이다. ‘…….’ 괜스레 무거워지는 분위기에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 특히나 눈치 빠른 돼지가 이상할 정도로 이쪽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나는 반대요. 형님이 뭐라고 말하든 나는 무조건 반대요.” “…….” “무조건 반대라니까. 물론 형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는 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이라는 게 있는 거 아니요. 베니고어 님의 선택을 받은 용사라고 한들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거요. 저번에 현장에서 터진 일도 있고 하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나쁘지 않은 시점이라니까.” “…….” “물론 그 라파엘인가 나바엘인가 뭔가 하는 놈이 나쁘다는 건 아니요. 함께 싸워야 할 사람인 것도 맞고 도움을 줘야 한다는 거에 대해서 반목하는 것도 아니지만…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해서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뭐가 있다고… 형님 옆에 들일 때는 들이더라도 조금 시간을 두는 게 좋은 선택일 것 같다니까.” “…….” “이게 다 형님을 위해서요.” “덕구 씨 말이 맞습니다. 그렇게 급하게 일을 진행시킬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항상 이상한 주제로 대립해왔던 김현성과 박덕구가 힘을 합쳐올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김현성 얘는 왜 이래? 도대체.’ 그 누구보다도 선택받은 용사를 간절히 바라왔던 것 치고는 상당히 경계하는 것 같았다. 무슨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성검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굳이 다른 이유를 꼽자면…. ‘연방 때를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고.’ 외부인의 이간질로 인해 시작돼 길드를 탈퇴하니 마니 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던가. 모르긴 몰라도 그 사건 같은 상황을 경계하고 있을 수도 있다. 성검을 빼고 생각해 보면 라파엘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이방인에 불과하니 말이다. ‘사실 얘네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라는 것을 제외하면 라파엘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기본적인 호구조사를 하기야 했지만 심층적으로 파고들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녀석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에 대해 판단하는 시간이 무척 짧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을 가장 가까운 곳에 두겠다고 말했으니,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불안해할 만했다. 물론 이런 이유들을 전부 종합해 봐도 녀석들이 오버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특히나 우리 못된 회귀자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다. 본인도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조혜진을 비서실장에 임명한다고 발언하지 않았던가. 예전에 내 입장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야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기는 했지만… 당시에 조혜진은 갑작스럽게 굴러들어온 이방인이었고… 어떻게든 그녀가 실권을 잡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당시 내 기분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너는 그런 말 할 자격 없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최근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은 것도 있고… 여러 가지로 중요한 시기니까요. 덕구 씨의 말대로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걱정하시는 건 이해가 가지만 괜찮을 겁니다. 결정적으로 시간을 별로 지체하고 싶지도 않고요.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 아닙니까. 육성계획은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는 게 맞아요. 제가 옆에서 도울 수 있다면 여러 가지로 시너지 효과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싸우는 방법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육체적인 성장 못지않게 정신적인 성장도 분명히 중요할 겁니다.” “그러니까 그 옆에서 돕는다는 게 문제라는 거요. 이렇게까지 말하기는 싫지만 그 치가 악마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면 어떻게 하려고…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성검을 지배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쇼.” ‘기상천외라는 단어는 진짜 오랜만에 들어본다. 덕구야.’ “당분간 교황청에 맡기든 교국에 맡기든 상관없지만 뭐 데리고 다닌다는 건 조금 아니지 않나. 그냥 뭔가 구린 냄새가 난다니까. 이럴 때 내 감은 틀린 적이 없는 거 잘 알면서….” ‘그래. 네가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지. 나도 깜짝 놀랐다. 시바. 맡아야 할 상황에서나 그렇게 좀 맡아줘.’ 최근 여러 가지 일로 위축되어 있는 김현성은 발언권을 박덕구에게 넘긴 것 같은 느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돼지가 대신해주고 있으니 굳이 앞 선에 나가 미움받고 원망받는 포지션에 자리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하지만 간간이 한 번씩 찔러 들어오는 공격은 확실히 날카롭다. “튜터링을 진행한다고 했으니 파란 길드에 가입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기영 씨가 길드로 가끔 들러주시면 해결될 문제고요.” 여기서나 저기서나 박덕구는 탱커로 활용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김현성은 녀석을 활용하며 차곡차곡 딜을 쌓고 있었고…. “저도 반대 의견입니다.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는 이해가 가지만 조금 더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파란 길드에 들이는 것도 사실 그다지 내키지는….”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파란의 보수 논객, 선희영 역시 입을 열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발언권이 없다시피 한 병아리 세 명은 그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황정연과 안기모도 한 발자국 뒤에서 지켜보자는 입장, 조혜진은 반대 입장에 서 있다. 내 생각보다 더 열을 올리는 모습이었지만 얘가 왜 이러는지는 당연히 이해가 간다. 빛기영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아닌가. 약점을 잡히거나, 새로운 사람이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거 파란 길드도 고이기는 고였네.’ 심지어 엘레나도 외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 물론 나쁜 의미로 고인 것은 아니다. 우리들끼리 너무 똘똘 뭉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부인을 배척하게 된 것 같은 느낌. 앞서 말했지만 이런 분위기를 만든 데는 연방 이간질 사태가 한몫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테이머는 잘도 길드로 가입시켰네.’ 가장 구석에 처박혀 강아지를 껴안은 채로 눈치를 보고 있는 테이머 알프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본인이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자리라는 표정이 괜스레 눈에 띈다. ‘생각해 보면 쟤도 얼마 만에 들어온 길드원이야?’ 아무리 소수정예를 지양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파란 길드 같은 경우에는 그 정도가 조금 심하다. 붉은 용병이나 검은 백조를 보라. 매년 마다 길드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확실히 파란과 차이가 있다. ‘희라 누나도 한번 보기는 봐야 되는데.’ 잠깐 동안 다른 곳으로 생각이 넘어가기는 했지만 내 입장은 변함이 없다. “다들 조금 날이 선 것 같은데… 별일 없을 겁니다. 라파엘은 경계해야 될 적이 아니라 동료예요. 현성 씨 같은 경우에는 튜터링도 맡게 될 텐데… 그런 식으로 경계하는 건 별로 이로울 게 없을 겁니다.” “하지만….” “물론 여러분들 말씀처럼 완전히 경계를 푸는 건 지양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대 이 정도의 거리감은 문제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밀어내기보다는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라는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기 새로 인연을 맺게 된 알프스 님이나 라파엘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이 말입니다.” “…….” “혜진 씨가 이틀에 한 번꼴로 제가 있는 곳으로 들러주시고 있고 박리안 님을 비롯한 분들도 매번 고생해 주시고 있습니다. 저도 약한 사람이 아니고…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건 조금….” “아니, 뭔가 구린 냄새가 난다는 거 아니요….” “그런 거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지.” “뭔가 구리다니까… 정말로 뭔가 구리다 이 말이요. 내가 원래 사람을 잘 의심하는 성격은 아닌데…. 나바엘 그 양반은 얼굴을 보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쎄… 했다니까.” 그 누구보다도 박덕구의 무논리에 대항하려고 했단 김현성도 고개를 끄덕여 오는 모습. 하지만 협상에 여지는 없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일이고 언제나 그렇듯 이기영은 양보하지 않는다. 만약 녀석이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면 여러 가지로 상황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저는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회의를 하자는 게 아니라 결정된 사안을 말씀드리는 거고요.” “…….” “그렇게까지 말하면 뭐라고 할 말이 없기는 한데… 거 괜히 불안해서 그런 건데….” “……” “무엇보다 라파엘 님께서 직접 보호 관리 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애초에 용사의 선택을 고려해 주는 것도 선택받은 이를 위한 혜택이었고요.” “그건 그렇기는 하지만….” “…….”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가 해체된 이후, 제가 파란 길드로 복귀할 때 즈음에는 함께 이곳에서 활동할 수도 있으니….” ‘물론 그때까지 라파엘이 살아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좋은 환경에서 지낸 것 같지도 않은데…. 그 누구보다 혼란스럽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조금은 마음을 열어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경계를 푼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인사부터 나누세요. 이럴 게 아니라 저녁 식사에도 초대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오늘은 길드 모임. 외부인… 싫어.” ‘그렇게 따지면 나도 외부인이야. 김예리 너는 또 뭐가 문제야?’ 이런 분위기를 환기시켜 주는 것은 역시나 안기모.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넉살 좋게 입을 열어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자자. 다들 진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부 길드 마스터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갑자기 선택받은 용사가 됐다고 하는데… 제가 만약 그 사람 입장에 있었다면….” ‘그래. 잘한다. 시바. 안기모.’ “정말로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 확인하면 되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이유야 어찌 됐든 라파엘 님이 저희와 함께할 것이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 일단 안면을 익혀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히 부 길드 마스터가 저희를 이곳으로 부르셨겠습니까.” “기모 씨 말이 맞아요.” ‘너도 잘하고 있다. 정연아.’ “만약 파란 길드로 들어오지 않더라도 얼굴을 맞대고 지내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길드 마스터?” 여론이 이렇다 보니 김현성의 입장에서도 뭐라 막을 수가 없는 모양.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김예리가 짧게나마 혀를 찼다. ‘얘가 진짜 왜 이렇게 삐뚤어졌어?’ 이제야 사춘기가 찾아온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정도였다. 아무튼 김현성의 긍정으로 녀석이 파란 길드 모임에 합류하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된 것 같은 분위기. 이쪽 역시 사람을 시켜 라파엘을 불러들였고 결국 녀석은 어색한 표정으로 이 자리에 함께 서 있을 수 있었다. “라파엘이라고 합니다. 파란 길드 여러분들. 항상 만나 뵙고 싶었어요…. 그리고… 또… 그리고… 그리고….” 문제는 아직까지도 그렇게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는 것. “기영이 형… 덕분에 이렇게 좋은 분들과 함께 자리하게 돼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이쪽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모습에는 분위기가 한 번 더 안 좋아진다. “형… 저 실수한 건 아니죠?”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해왔지만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저 목소리를 캐치해 낼 수 없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특히나 표정이 안 좋았던 것은 우리 꼬맹이 김예리.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막스를 처음 봤을 때의 똘똘이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길드 초창기 멤버들의 표정도 그렇게 다르지는 않다. ‘얘네 진짜….’ 그럴 리야 없겠지만…. ‘뭐 혹시 우리 부 길드 마스터를 뺏겼다. 이런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파티의 어머니를 빼앗긴 것 같은 분위기. 할 일이 있다며 집을 나간 어머니가 갑작스레 찾아와 ‘너희 동생이다. 인사해야지?’ 따위의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다. 물론 그것보다 더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테지만 한 5% 정도는 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이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가는 추측이었다. 그중에서도 대놓고 녀석을 경계하는 것은 역시나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 ‘아… 우리 현성이… 눈치깐 것 같은데….’ 그것 외에 다른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은 얼굴이었다. # 617 회귀자 사용설명서 617화 부정적인 여론(3) ‘라파엘이 꼬리를 잡히지는 않았을 테고….’ 뭔가 꼬리를 잡힐 만한 행동을 한 것 같지도 않다. 애초에 등장 시기를 생각해 보면 벌써부터 꼬리를 잡혔을 리가 없다. 과거도 훌륭하게 정리한 것처럼 보였고… 5현장 안에서도 녀석이 활동했다는 증거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 정도로 멍청하게 행동했다면 이렇게 대담한 짓을 벌여올 수 있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신분 세탁은 완전히 끝나놨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단언컨대 나 역시 마음의 눈이 아니었다면 녀석의 정체를 곧바로 캐치해 내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의 얼굴은 뭔가 복잡한 표정, 확실하게 경계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뭐라고 딱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저건…. ‘감이라는 건가?’ 여러 가지 경험을 가진 회귀자의 촉이 발동된 것은 아닐까. 경지에 올라본 적이 없는 내가 알 수는 없지만, 박덕구처럼 위험한 냄새를 맡았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마음의 눈? 아니면 위험감지 센서처럼 불이 들어온 건가? 어떤 종류의 촉을 받았다고 예상하지만 내가 김현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김현성 같은 종류의 인간이 되어본 적이 없는데….’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느껴지는 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이걸 어쩌면 좋지….’ 하는 고민이 잠깐 스쳐 지나가기는 했지만 딱히 나쁠 게 없다고 여겨진다. 물론 지나치게 밀어내고 배척하는 행동은 자제해야겠지만 저런 식의 견제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다. 라파엘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의 정리를 마치기는 했지만, 아직 녀석이 내 사람이 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뒤에서 성검으로 뚫리고 싶은 상황이 있을 수도 있는 만큼 녀석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인선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내가 직접 녀석을 견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니까.’ 김현성이 그 역할을 대신해 준다면 환영하는 게 당연했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정하얀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자기 자신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확정되어 있으니, 이상한 놈이 합류해도 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완벽한 무관심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렇듯 누구는 적의를, 누구는 무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보니, 라파엘은 굉장히 당황한 듯한 반응. 격한 환영을 받는 상황을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런 종류의 반응은 더욱더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지금쯤 행선지를 위원회로 잡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지 않을까. ‘얘는 뭔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표정에 당황스러움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일단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파란 길드 마스터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크흠… 박덕구요. 인물이 훤하구만.” “안녕하십니까, 안기모라고 합니다.” “김예리.” “파란 길드에 몸을 담고 있는 엘레나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영광이에요.” “선희영입니다. 그렇게만 알아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만나서 반, 반, 반가워요. 정하얀이라고 합니다.” 천천히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항상 여신의 거울을 통해서만 보던 분들을 실제로 보니,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네요. 기영이 형을 처음 봤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지만 이렇게 파란 길드원분들이 전부 다 모인 모습을 보니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스러워요.” “붙임성이 좋으신 것 같군요.” “네?” “붙임성이 좋으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가만히 있는 얘한테 무안을 주고 그래….’ “혹시나 대접이 미흡하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라파엘 님. 길드 정기모임에 외부인이 들어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다른 걸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왜 길드 모임에 네가 끼게 됐냐고 추궁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 도… 너무 갑작스레 찾아뵙는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실례를 범한 것 같아서… 괜히 민망하네요.” “죄송하실 필요 없습니다, 기영 씨의 손님이라면 대접해 드리는 게 당연하니까요.” 이기영의 손님이기는 하지만 내 손님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식사밖에 준비된 것이 없어서 죄송할 뿐입니다.” 밥만 먹고 가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닐까. 정말로 오랜만에 김현성이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아직도 타인을 대할 때는 저런 표정을 장착하긴 하지만, 오늘따라 말에 가시가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곧바로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다. 라파엘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본인이 환영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처세술로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지 기대가 되는 것은 당연, 안기모가 쓸데없는 농담을 집어던지며 싸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이미 주워 담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김현성도 김현성이다, 진짜. 너는 나 없었으면 진짜 어떻게 할 뻔했어?’ 만약 내가 김현성이었다면 저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으리라. 조금 의심되는 점이 있다고 해서 대놓고 경계하는 꼴을 보이면…. ‘득보다는 실이 많지.’ 대놓고 라파엘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이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괜히 녀석의 경계심만 심어주는 꼴이 된다는 거다. 내 입장에서는 라파엘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으니, 환영할 만한 행동이지만 우리 회귀자가 원하는 건 얻기 힘들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예상한 것처럼 라파엘이 당황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파란 길드원들에게 호의를 얻고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 시작부터 박살 나버린 셈. 비빌 곳이 이쪽밖에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으리라. 예상했던 대로 나에게 많이 의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 딱히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대화에 진입하거나 한마디 보탤 때 이쪽을 언급한다든지, 내 의견을 물어본다는 식의 화술을 펼치고 있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네 부길드마스터, 기영이 형과 제가 이렇게 친하잖아요. 이것 봐요.’ 라며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는 듯한 느낌.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았지만, 효과가 크지는 않았다. 오히려 테이머 알프스에게 더 시선이 쏠린다. 선생님으로 있었던 김예리와 박덕구가 많이 챙겨주기도 했고, 아주 오랜만에 새로 들어온 길드원인 만큼 나 역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거, 양치기 양은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구만. 어떻소?” “왈! 왈!” “네? 어떤….” “파란 길드로 들어온 감상.” “그저… 모든 게 신기하죠. 정말로 제가 파란 길드에 들어오게 될 줄은 정말로 몰라서… 명예추기경님을 직접 뵙게 될지도 몰랐고… 무엇보다 김예리 선생님이나 박덕구 선생님과 같은 길드에 들어와 있는 것도 신기하고요….” “이제는 자주 볼 얼굴이지! 그렇게 신기해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아, 그러고 보니 알프스도 성검의 시험을 받았었나? 아쉽게 떨어지기는 했지만… 나는 정말로 그때 우리 알프스가 용사로 선택되는지 알았다니까.” “나도.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지금에서야 물어보는 건데… 정확히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글쎄요. 정확히 무슨 느낌이라고 표현하지 못하겠어서… 조금 말하기 부끄러운 내용이기는 하지만 구역질을 참아내기가 정말로 힘들었어요. 악의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고… 그냥 더러운 쓰레기나 징그러운… 그… 구더기… 같은 것들을 맨손으로 잡는 것 같아서요. 잡는 순간 알았어요. 아, 나는 이 검의 주인이 아니구나… 오기로 버티기는 했지만 알고 계신 것처럼 결과가 그리 좋지는 않았죠.” “…….” “고향 어르신들에게 죄송하기도 했고… 믿어주신 대륙민 여러분들, 무엇보다 선생님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 같아 가슴이 아프기는 했지만… 다행이죠. 이렇게 선택받은 용사님이 나타나 줬으니까요. 용사님은 조금 어떠셨나요?” ‘얘가 착하기도 착해 부러.’ 저 병아리의 눈에도 점점 소외되고 있는 라파엘이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저 같은 경우는 그런 느낌을 받아보지 못한 것 같아서… 워낙 정신이 없고 긴장했던 상태라 뭐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도 기억이 나지가 않네요. 그냥 거대한 충격이 들이닥친 것 같은 기분이었고, 정신을 차리니 검이 손에 들려 있었어요.” “정말로 주인이 정해져 있었던 검이었군요….” 알프스 역시 성검을 목표로 열심히 해왔던 만큼 아쉬움이 남는 것 같았다. 아무튼 라파엘의 발언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게 눈에 보였다. 아무도 뽑지 못한 성검을 뽑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되새기게 된 것이리라. ‘충분히 용사라고 할 만한 상황이기는 하지.’ 연출 자체가 그럴듯했으니까. 김현성이 갑작스레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글쎄요.” “…….” “본래 이런 종류의 검은 빛을 잃기도 하고 주인을 다시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용자가 본인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점점 힘을 잃어가기도 하고요. 성검에게 선택을 받았다고 해서 시험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1회 차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던 것 같았다. 가면쓰레기 진청이 성검의 빛을 잃게 만들었다지, 아마. 지독하고 고약하고 비겁한 방법을 써서 용사를 궁지로 몰아붙인 악독함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 “그건… 저 역시 실감하고 있어요, 파란 길드마스터님.” “성검의 이름이나 정보가 전부 읽히십니까?” “…….” 아마 한세월이 지나도 읽히지 않을 것이다. 이미 루시퍼가 손을 써놓은 아이템이었으니까. 하지만 김현성의 갑작스러운 발언이 라파엘에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보통 높은 등급에 있는 아이템들은 자격이 부족하거나 주인 의식을 끝내지 않으면 상태창으로 읽어볼 수 없다. 제한이 빡세게 걸린 경우는 마음의 눈으로도 읽히지 않는다. 오직 주인만이 모든 정보를 확인할 수 있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다.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듀렌달 역시 마찬가지다. 1회 차의 성검 역시 비슷했었던 것 같고…. “본인을 허락했다는 것에는 의의가 있지만 정말로 검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상태라면… 완전히 인정받았다고 하기에는 힘든 상태일 겁니다.” “제가 여러 가지로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라파엘의 표정이 달라진 게 눈에 보인다. 물론 겉보기에는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지만 무척 커다란 고민에 빠진 것 같다. 성검이 자신에게 진명과 기능을 알려주지 않는 사실을 떠올리는 모습. 아직 자격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는 주제이리라. 거기에 김현성이 날카롭게 들어온 것이다. “뭐 그렇게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라파엘 님. 물론 현성 씨 말도 일리가 있지만 이제 막 성검에게 선택받은 참이 아닙니까. 부족한 게 많은 게 당연한 겁니다. 성에 차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 “여러 가지 부분에서 공부하고 차근차근히 배우며 단련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회색빛의 성검의 진짜 이름을 볼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 물론 볼 수 있는 날은 평생이 지나도록 오지 않을 거다. ‘아니… 그건 아닌가?’ 만약 라파엘이 진심으로 빛과 함께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다면 어쩌면 회색빛의 성검이 답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흉악한 마구니가 껴 있는데 성검이 정말로 힘을 빌려주겠어? 진정으로 빛을 따르면 뭔가 달라지는 게 있을지도 몰라. 모든 게 신의 뜻이라고.’ 녀석이 성검을 활용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참된 빛에 대해서 깨닫는 것. 라파엘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마구니를 하루라도 빨리 들어내야 했다. 그렇게 오늘의 식사가 유야무야 끝나가는 시점. “오늘 즐거웠습니다. 조만간 다시 시간을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짧은 만남의 끝을 알린 것은 역시 김현성이었다. # 618 회귀자 사용설명서 618화 부정적인 여론(4) “오늘 즐거웠습니다. 조만간 다시 시간을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평상시와 같은 인사였지만 빨리 집에 가라는 소리처럼 들려오는 것은 기분 탓일까. 라파엘도 현시점에서 이곳에 자리하는 게 손해라고 생각했는지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오늘 하루 완전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겠는데… 저거.’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파란 길드원들과 친분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슴에 품고 진입했을 게 분명했다. 오늘 하루로는 시간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그 시간 동안 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본인의 생각만 많아진 시간이었다니, 무익하다 못해 쓸데없는 시간이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느낌이 좋지 않다며 억지 주장을 했던 박덕구와 영 좋지 않은 촉을 느꼈던 김현성, 애초에 타인에게 배타적인 선희영, 사춘기가 와버린 김예리, 아예 관심 자체가 없었던 정하얀…. 몇몇 이들이 녀석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오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길드마스터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김현성이 싫은 티를 내는 상황에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나댈 수 있는 길드원은 파란 길드에 없다.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 마라, 새끼야. 원래 사람 일이라는 게 자기 뜻 대로만 되는 건 아니잖아.’ 평점 2.0 정도를 받을 만한 자리, 축객령 아닌 축객령까지 전해 들었으니 표정이 더 어두워지는 게 당연하리라. “숙소까지 가는 길은….” “다 기억하고 있어요, 형.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시지 않아도 돼요.” “제가 사람을 붙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파란 길드마스터님.” “괜찮다고 하시니 다행이군요. 그럼 문 앞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녀석을 내보내려는 듯한 모습에는 내가 다 뻘쭘해진다. 김현성이 라파엘을 빠르게 내보내고 싶어 하는 이유야 뻔했다. 아마 이쪽에 무언가 전달할 말이 있어서겠지, 뭐. ‘…….’ 결국 라파엘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야 김현성이 입을 열어왔다. “잠깐 말씀드릴 게 있는데,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네. 뭐….” “희영 씨가 길드원들 인솔해서 다음 자리로 이동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잠시 후에 따라가겠습니다.” “네.” 걱정되는 게 있는지 조혜진이 슬그머니 나를 바라봤지만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중간에 쓰러지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 당연하지만 김현성은 제법 진지한 얼굴, 아마 본인이 느낀 것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을까. 뭐라고 입을 열어올지도 대충 예상이 간다. 선택받은 용사가 아닐 가능성이나 의심이 가는 정황들을 열거하며 내 선택이 옳지 않음을 주장할 것이 분명하리라. 하도 오래 붙어 지내다 보니 이제는 대충 레퍼토리가 머릿속으로 그려진다. 물론 이쪽이 녀석의 말을 들을 리 없다. 김현성이 불안하다고 해서 녀석이 변방으로 가버리면 똥줄이 타는 것은 이쪽이다. 차라리 가까이에 두고 확실하게 빛으로 인도함이 옳다. 녀석의 입에서 여러 가지 말들이 튀어나오기 전에 사전 차단을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아주 약간 가슴이 아파오기는 했지만, 곧바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방귀 뀐 놈이 성을 내는 것이 맞다. 반 박자 빠른 공세. 원래 이런 관계에서의 승자는 먼저 화낸 놈이다. “도대체 왜 그런 태도를 취하신 겁니까.” “네?” “라파엘에게 보이신 태도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가 아닙니까. 기다리고 기다려 왔던 사람이었고요. 이렇게 밀어내는 태도를 취하는 건 파란 길드에도, 저에게도 좋지 않아요. 최대한 협조를 받아내야 하는 건데….”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이유가 있었다고 한들 잘못된 태도를 취했다는 건 명백합니다. 제가 직접 데리고 온 손님인데 그렇게 대하면 제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 제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오늘 일에 대해서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막막하네요.” “그러니까….” “만약 선택받은 용사가 파란 길드나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이라도 가진다면 여러 가지로 상황이 복잡해질 겁니다.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단언컨대 이후에는 문제가 생길 겁니다.” “그게….” “제 손님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대접해서는 안 됐어요. 덕구나 다른 길드원들은 그나마 이해가 가지만 현성 씨까지 같이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면 안 됐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오늘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로… 정말로 실망스럽습니다.” “…….” ‘이거 너무 세게 말한 거 아닌가.’ 속으로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면서도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들에는 내가 다 놀라울 지경. “물론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아, 이 새끼. 너무 위축된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작아지는 김현성의 모습이 신경 쓰인다. ‘최근에 너무 심하기는 심했나?’ 악마계약자 습격 사태 때부터 계속해서 작아지기만 하는 김현성을 보니 확실히 떠오르는 게 많다. 너무 내 생각만 하며 밀어붙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회귀자의 사회성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걸 잠깐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혔다. ‘너무 섭섭하게 한 거야?’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네 잘못이 맞는데. ‘근데 조금 신경이 쓰이기는 해….’ 김현성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는 만큼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마음을 나눈 친우, 혹은 친형제 같은 사람, 함께 짐을 드는 소중한 동료. 그게 바로 현재 이기영의 포지션이 아니었던가. 1회 차와 2회 차를 통틀어서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해 주는 친구와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여기도 친구, 저기도 친구, 저쪽에도 친구가 있어서 매일 매일 신나게 놀아젖히는 슈퍼 인싸들에게는 별로 시답잖은 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김현성이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유치하지만 인간관계라는 게 그렇다는 거다. 80살 먹은 최 영감도 오 영감과 박 영감이 나만 빼놓고 술 퍼마시면 기분이 언짢아지는 게 사람의 심리다. 친한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가 지속해서 씹히거나, 어느 날부터 나를 피하기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면 기분이 찝찝해지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으리라. 평범한 사회생활을 하던 주류들도 저러할 진데… 그동안 친구 하나 없었던 김현성이 느낄 불안감은 오죽했을까. 녀석의 경우에는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사귀게 된 친구가 바로 이기영이다. 누구에게나 다 인연은 소중하지만 아마 녀석에게는 그만큼 이쪽이 크게 다가오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회귀 고백 이후에 한 발자국 진전이 있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 급속도로 멀어지며 서먹해지고 있는 시점. 차라리 검을 휘둘러 해결하는 게 더 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녀석은 이런 종류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에는 젬병이었으니까. 일단은 먼저 화내는 게 이기는 거라고 생각해 신경질 아닌 신경질을 부려봤지만, 김현성의 정신 건강을 위해 한 발자국 정도는 물러나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괜스레 이지혜가 해준 이야기도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으니까. “후우….”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니에요.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요즘 조금 예민해져서 순간적으로 욱한 것 같네요.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는데….” “…….” “최근에 일이 너무 바쁘고… 여러 가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다 보니까 마음에 여유가 조금 없었던 것 같습니다. 괜히 궁지에 몰린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요.” “괜찮습니다. 제가 잘못한 것도 사실이고… 네, 사실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현성 씨가 그럴 반응을 보일 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겁니까?” “네, 아직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 “라파엘이 선택받은 용사가 아닐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검의 정보를 읽을 수 없다는 것도 그렇지만….”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겠죠. 하지만 라파엘이 회색빛을 다룰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에요. 아까 했던 말들 역시 전부 귀담아듣고 있습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으면 안 된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고요. 하지만 조심스럽게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 “그건….” “육성 계획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저희가 가지고 있는 카드 외에 다른 카드가 한 장 더 필요해요. 북서쪽 지역을 틀어막는 것 외에도 현성 씨를 따라가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공화국과의 전쟁에서는 어떠셨어요?” “무슨….” ‘뭐긴 뭐야, 전술 김현성이지.’ “라파엘도 현성 씨 같은 일을 해 줄 수 있다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더 많아질 겁니다. 현성 씨의 안전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아직은 김칫국을 마시는 행동이나 다름없지만, 만약 전술 라파엘을 사용할 수 있다면 전황 자체를 완전히 뒤집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김현성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부담도 줄이는 것은 물론 효율적인 장기 말로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 제대로만 키운다면 말이다. 물론 라파엘에게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김현성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지만…. ‘이건 네 안전에도 직결된 일이야, 현성아.’ 김현성의 체력은 무한하지 않다. 괜스레 손을 들어 올려 녀석의 어깨를 툭툭 치자,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 게 눈에 들어왔다. 뭔가 억지 미소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일단은…. ‘수긍한 거 맞지?’ 슬슬 쐐기를 박을 때가 됐나 보다. “제 안전에 대해서 많이 걱정하시고 계시는 건 알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박리안 씨나 하얀이가 계속 붙어 있을 거고요. 무엇보다 지금 라파엘의 수준으로는 저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는 거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네.” “용사 육성 계획은 최대한 빠르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일단은 시작한 이후에 판단을 내려도 늦지 않을 겁니다. 정말로 문제가 생긴다면 그 이후에 수습하면….” ‘되는 문제고.’ “만약 현성 씨 생각처럼 라파엘이 뭔가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분명히요.” “…….” “그러니까 이만 들어갑시다. 다른 사람들 전부 기다리고 있겠네요. 2차부터는 정말로 파란 정기 모임이 되겠네요.” “네, 그렇군요.” 갈등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우리 우정은 변치 않을 거라는 듯이 활짝 웃어주자 조금은 안심하는 녀석의 얼굴이 들어왔다.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짧은 대화가 끝난 셈이었지만 아마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것은 전부 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물론 나도 우리 회귀자가 어떤 부분을 염려하는지 알고 있다. 요지는 자기 자신이 느끼는 불안감이 혹시나 내 안전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 자체. 내가 염려하는 부분과 같다. ‘카스가노 유노랑 베니고어 한번 만나러 가자.’ 너무 급하게 몰아붙이는 것보다는 텀을 주고 보여주는 게 좋겠네. 그동안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모두 거짓이라는 걸 알았을 때, 라파엘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부정할까, 아니면 받아들일까.’ # 619 회귀자 사용설명서 619화 거짓 없는 진실(1) 실제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지만, 체감상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듯한 기분이었다. 단시간에 엄청난 일을 몰아서 하다 보니 짧은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진 것이다. 라파엘과 파란 길드원들이 모여 식사를 가진 이후 불과 2개월이 지난 시점. 6개월 정도가 지난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물론 그만큼 성과를 얻었다는 것 역시 환호성을 지를 만한 부분이었다. 손안에 쥐고 있는 코인 3개가 전부 날아오를 기미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예전처럼 단순히 행복 회로를 돌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날아오를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첫 번째로 열매를 맺은 것은 역시나 순항하던 키메라 코인. 떡락 따위는 예정에 없던 안정적인 종목이었다. 주변 상황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지만 이런 확실한 종목을 버릴 리 없다.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밤잠을 줄이며 5현장을 들락날락했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결과물을 가질 수 있었다. ‘버전 튜토리얼.’ 완성. ‘버전 균열박물관.’ 완성. ‘버전 공포의 정원.’ 완성. 무려 3기의 네임드 천사들을 완성한 것. 예정되어 있던 기간보다 몇 달을 단축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나머지 3기는 아직 기틀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지만 한소라의 활약에 힘입어 전체적인 제작상황이 탄력을 받고 있었다. 정말로 666기를 전부 완성 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지금의 속도라면 666기 이상도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빛과 함께 싸우는 666명의 천사.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장면이지 않은가. ‘이대로만 가면 되는 거야, 이대로만….’ 가장 걱정거리였던 베니고어의 일 역시 나름대로 잘 해결되고 있다. 사실 이 경우는 정체됐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베니고어의 처우와 대륙의 관련 문제에 대해 아직 다른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이래서 얘네가 안 된다니까.’ 확실히 악마 쪽와 성향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베니고어가 만약 루시퍼 소속의 악마였다면 벌써 떨어져 나가서 콩밥을 먹고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통 크게 용서했을 수도 있고….’ 벌을 받던, 흐지부지 넘어갔든 간에 결론이 나왔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뭐가 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 윗분들의 썰전이 끝이 나지 않는 것이 저들이 겪고 있는 문제. 당연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호재였다. 안 그래도 여러 가지 일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상황에서 존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베니고어 오피셜로는 가장 최근에 있었던 논쟁을 해결하는 데 무려 천 년이 걸렸다고 했으니 일단은 잠정적으로 일이 마무리됐다고 판단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억류되어 있었던 베니고어의 신성도 되돌아온 상황이었고 심지어 이야기 자체가 긍정적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전해오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내게 고통만 안겨주던 코인이 잠시나마 안정감을 선사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밤잠을 설치지 않게 됐다.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지고 보면 그저 떨어지지 않고 있을 뿐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물론 언제 또 일이 터질지 모르는 만큼 베니고어에 재판 준비는 착실히 진행하고 있었지만, 한결 여유가 생겼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개좋아.’ 나머지 코인 하나 역시…. ‘나쁜 상황은 아니지.’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점점 상한가를 치고 있는 시점이다. 완전히 떡락한 줄 알았던 성검코인이었기 때문에 작은 떡상에도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라파엘이 나를 완전히 따르게 된 것은 아니다. ‘아직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머릿속에 들어차 있는 마구니를 완전히 벗겨내기에는 짧은 시간이었으니, 사실 그리 아쉽지도 않다. 오히려 급하게 진행했다면, 괜스레 더 초조해지지 않았을까. 천천히 유대감을 쌓아야 했고 빛기영이라는 사람에 익숙해지게 만들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성과를 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으리라. 습관처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익숙해졌으니까. 과거와 비교해도 대조적일 게 분명하다. 빛 한 점 보이지 않은 골방에 처박혀 악마 관계자와 개짓거리를 하던 과거 대신 자리 잡은 것은 빛과 함께하는 포근한 일상. 균형 잡힌 식사와 배부르고 등 따뜻한 생활, 잠들 것만 같은 빛을 쬐며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는 하루하루. 웃기도, 떠들기도 하면서 가치 있는 땀을 흘리는 매일 매일. 인간은 환경에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녀석의 속 안을 불태우고 있는 복수심이 옅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최소한 현재의 생활을 즐기게 할 수는 있다는 거다. 지금만 봐도 굉장히 기분 좋은 것 같은 얼굴이지 않은가. “그럼… 이쯤에서 베니고어 님께 대한 기도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말로 짧은 기도를 끝마치자 조용히 여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제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가장 앞에 자리 잡은 라파엘의 얼굴도 보인 것은 당연지사. 때마침 따뜻한 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이쪽을 비추는 모습에는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대륙을 좌지우지하려는 악마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지 않은가. ‘환한 미소도 한 스푼 정도는 넣어줘야지.’ 경건한 분위기에서 시작된 예배가 마무리되는 순간, 가장 먼저 말을 걸어온 사람은 역시나 바젤 교황이었다. “훌륭했네, 명예추기경.” “부족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에 부끄러울 뿐입니다.” “하하하, 그 누가 명예추기경의 기도를 부족하다고 생각하겠는가. 베니고어 님께서도 크게 기뻐해 주셨을 것이네. 우리 회색빛 용사의 얼굴을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인 것 같은데….” “네, 저 역시 바젤 교황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신성해 보였던지라… 왠지 저 자신을 부끄러워지게 만드는 기도였던 것 같습니다.” ‘이 새끼. 말 잘하네, 이거.’ “그렇다고 하는군….” “…….” “어떤가, 명예추기경? 이왕 이렇게 된 거 저 자리에 한번 앉아보는 것은… 많은 신도가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주도하에 올리는 예배를 기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신도들을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 “교황님이 계신데 제가 어떻게 이렇게 신성한 자리를 주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네. 이런 말을 하기에는 민망하지만 이제 내 건강도 예전 같지가 않아. 베니고어 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이 영감님은 화도 버럭버럭 내면서 건강하게 잘 지내는 데, 왜 그래. 저 교황 될 생각 없어요.’ “그런 말씀은….” “본격적인 이야기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이후에 하세나. 이런저런 일도 엮여 있으니… 이런 자리에서 나올 이야기도 아니고… 하지만 그전에… 회색빛 용사의 임명식만이라도 명예추기경이 직접 주관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야.” ‘그건 땡큐죠.’ “바젤 교황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잘 생각했네, 명예추기경. 그러고 보니 오늘은 갈 곳이 있다고 했었나?” “네.” “끄응… 그거 아쉽게 됐구만.”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니 그리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황님.” “그때는 꼭 차 한잔하고 가게나.” “물론입니다.” “고생하셨어요, 형.” “고생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럼 나갈까요?” “네.” 살짝 웃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정말로 웃음이 나와 웃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연기라고 판단하는 것이 맞을 듯했다. ‘뭐, 연기여도 별 상관없지만….’ 그 말 그대로였다. 이쪽은 급할 게 없다. 오히려 급한 것은 저쪽이었지. 모든 일이 착착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이쪽과는 달리 저쪽은 제법 애가 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성과가 없지. 성과가 없어.’ 성과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아예 없다는 게 커다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물론 신체적으로 강해지기는 했지만, 녀석의 목표와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캐내야 할지, 무엇부터 하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교황청의 사제단이나 보호 관리 위원회의 몇몇과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것 같았지만, 녀석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애초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수상하다고… 뭔가 이상한 정황과 증거가 있으면 그것 좀 보여달라고 말할 수 있겠어?’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딴 걸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이단이다. 호기롭게 적의 심장으로 들어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양팔이 묶이고 두 눈이 묶인 상황. 어떻게든 이기영이라는 인간에 대해 캐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녀석이 볼 수 있는 건 이런 장면밖에 없다. “더러운 몸입니다. 혹시나 명예추기경님께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요….” “세상에 더러운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순히 병에 걸린 것뿐이니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니 어서….” “이러면 안 되는데… 이… 이건 전염….” ‘전염은 개뿔. 내가 역병군주인데, 누가 누굴 전염시켜, 이 양반아. 내가 당신을 전염시키면 전염시켰지.’ 누가 봐도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지 않은가.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라파엘이 표정을 굳히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녀석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 나와 녀석 그리고 일부 사제들이 자리하고 있는 자리는 인간이라면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굳힐 수밖에 없는 자리였으니까. 코를 찌르는 구역질 나는 냄새, 절로 혐오감이 생기는 진물과 고름으로 얼룩진 바닥, 살이 썩어가는 병자들로 가득 찬 장소. 세상에 버림받은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작은 촌락이었다. 이런 장소에서 땀 흘리며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누가 이쪽을 흑막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저… 저도 도울게요, 형.” “아니요, 괜찮습니다. 라파엘 님은 다른 사제님들을 도와주시는 게나을 겁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자리한 환자들의 종기라도 직접 처리해 주고 싶을 지경이다. 그런 장면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천추의 한처럼 느껴졌다. ‘신성력이랑 연금술이 원망스럽기는 처음이다, 야.’ 물론 그 정도로 따뜻한 장면을 만들 수는 없지만 지금 보이는 장면 역시 충분히 아름답게 느껴진다. 직접 치유 연고를 발라주고 한 명, 한 명의 몸을 차근차근히 살펴주는 것도 보통 멘탈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봉사는 좋지, 좋아.’ 라파엘의 얼굴만 봐도 대충 반응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악마와 계약한 희대의 인간쓰레기, 대륙을 자신의 입맛대로 휘두르며 모든 것을 자신의 발아래 두려고 하는 흑막,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악독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빌런이 가장 낮은 위치에서 환자들을 치료해 주고 있다. 일반적인 신성력으로는 치료되지 않은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놓으며 그들에게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악마 계약자 새끼들은 이런 거 시바… 하지도 않았잖아. 그렇지 않아?’ 정치인들이 홍보 차원에서 사진이나 영상을 남기는 행동과는 엄연히 다르다. 녀석은 지금 인간 이기영의 일상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매체를 통해서 접한 장면들이 죄다 홍보용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 분명하다. 물론 홍보용으로 사용된 것이 맞다. 하지만 아무리 홍보용이라고 한들 주기적으로 봉사를 나가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최근에야 조금 소홀해졌지만 이런 자리를 주기적으로 만들어오지 않았던가. 함께하는 사제단의 모습 또한 굉장히 익숙하다. ‘아… 이 양반 또 자기 이미지 챙기려고 등장했네.’ 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다. 한두 번 호흡을 맞추어본 게 아닌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봉사단의 모습을 보고 누가 이쪽을 비난할 수 있을까. 목적이야 어떻든 간에 인간 이기영이 약자들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반동분자 새끼들이 만들어진 모습이라며 개거품을 물었지, 아마.’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기는 했지만. 너희는 해본 적이라도 있냐고 물어보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다. ‘이거 좀 보세요. 나 나쁜 사람 아니라니까. 이거 보이지?’ 풋내기 용사의 표정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녀석의 얼굴에 자리한 것은 의심이다. 당연하지만 나를 향한 의심이 아닐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에 대한 의심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 620 회귀자 사용설명서 620화 거짓 없는 진실(2) 정말로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내가 생각하는 인간이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 정말로 명예추기경이 대륙을 자신의 손에 넣으려는 악마일까? 라는 것에 대한 의구심. 아주 작은 의심이라도 좋다. 현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건 아주 작은 의심이었다. 작은 생각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법이다. 물론 악마 계약자들의 세뇌에 의해 속이 꽉 막힌 우리 회색빛의 용사를 겨우 이걸로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작업의 첫걸음은 작은 씨앗의 발아였다. 무턱대고 진실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것보다 저 작은 의구심을 키워 나가는 게 더 중요했다. ‘저 씨앗을 심는 데 쓴 기간이 2개월.’ 느리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갈 지경. 갑작스레 현자 타임을 맞이한 녀석의 얼굴이 구겨진 것이 시야에 비쳤기 때문이다. “괜찮으십니까?” 라파엘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 눈 앞의 환자를 향한 질문이었다. “괜… 괜찮습니다. 이제는 정말 괜찮습니다, 명예추기경님. 이… 이걸 어떻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인사받자고 한 일이 아니니 고개를 드세요. 제 앞에서 그렇게 자신을 낮추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신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니까. 그게 베니고어 교단의 교리잖아.’ “저희 같은 놈들을 위해서… 정말로… 정말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 역시 베니고어 님께서 사랑하는 자식들이 아닙니까. 계속해서 자신들을 낮추신다면 베니고어 님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맡은 역할은 다르지만, 저와 여러분 모두 같은 자식들입니다. 그러니… 모두 다 함께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명예추기경님….” 눈물을 쏟고 있는 환자들, 그리고 그 가운데 자리해 있는 명예추기경. 구태여 다시 한번 라파엘의 상태를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무척 뻔했으니까.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모습이라고, 연기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진실 된 모습이라 할 만했다. 대략적인 치료를 전부 끝낸 이후에는 스스럼없이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 와중에 말리는 사제들의 손을 뿌리치는 장면도 압권이었죠.’ 사제단은 혹시나 소중한 명예추기경님께서 전염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고 있겠지만 정말로 전염병에 걸릴 확률이 있었다면 내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도망쳤으리라. “대충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명예추기경님.” “후우… 다행이군요. 잠깐 쉬고 다음 마을로 이동하겠습니다.” “네, 그럼 평소처럼….” “예, 기본적인 복지 지원을 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교황청의 사제단이 지속적으로 방문할 수 있도록 일정을 짜주시고 관리도 부탁드립니다. 추가로 좋은 상태를 보이는 분들에게는 일자리를 지원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명예추기경님이야말로 오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무슨 고생을… 오히려 여러분들이 더 수고 많으셨습니다. 갑작스럽게… 연락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함께해 주셔서….” “이런 자리에서 명예추기경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이니 언제든지 불러주셔도 됩니다.” 존경이 가득 들어가 있는 사제들의 얼굴을 보니 내가 다 뿌듯해진다. 인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비친 것은 역시나 라파엘. 뭔가 쭈삣쭈삣거리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평소였다면 ‘저 새끼 왜 저래?’ 따위의 생각을 했겠지만 이게 다 녀석의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다시 한번 영업용 미소를 장착하자 이쪽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기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요, 형… 저는 뭐… 한 게 없어서….” “아니요. 충분히 도움이 되셨습니다. 회색빛의 용사님이 직접 자신들을 보러 와준다는 것만으로도 저분들에게는 커다란 힘이 될 테니까요.” “이건… 그러니까.” “훈련하느라 바쁜 와중에… 제가 방해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배워야 하고 열중해야 할 시기였는데….” “…….” “하지만 라파엘 님이 한 번쯤은 이런 곳에 와보기를 원했어요.” 옆에 앉으라는 듯 슬쩍 자리를 비키자 의자에 조심스레 앉는 놈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보이고 있는 풍경은 여전했다. 처참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촌락이었고,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살아가는 터전이었다. 아까와 다른 곳이라고 한다면 저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는 것. 타이밍 좋게 꼬맹이 한 명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주변에서 다른 이들이 말리고 있었지만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당연지사. 이윽고 도착한 꼬마는 꼼지락 거리는 손으로 사탕 하나를 내민다. ‘아… 얘, 이거 진짜 심어놓은 거 아니야? 이거 진짜 심어놓은 거 아닌데…’ 공익광고 협회에서나 튀어나올 것 같은 연출이었지만 작은 도우미가 패스한 볼을 받아 내야 했다. 싱긋 웃으며 사탕을 받은 이후에는 입안으로 곧바로 털어 넣는다. “고맙구나.” 살살 머리를 쓰다듬자 부끄러운지 곧바로 도망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살짝 옆을 보자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는 풋내기 용사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요게 먹히네.’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너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나이가 어리다 보니 요런 감성이 먹히는 것 같다. 라파엘이 좋다니 다음번에는 심어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 보면 보이지 않는 게 있게 마련이거든요.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 “좋은 것들에 둘러싸여 좋은 것들만 바라보다 보니 제 영역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무지해지고… 항상 커다란 숲만을 보고 있자니 작은 나무들이 보이지 않게 되더군요. 아무리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상기한다고 한들…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자리한 환경에 익숙해져 가는 것만 같습니다. 최소한 저는 그랬어요.” “그건….” “라파엘 님은 더 큰 일을 위해 더 커다란 가치를 위해 노력하고 나아가시게 될 겁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위협을 겪고, 가치관이 변하고, 여러 가지 생각들을 머릿속에 품게 되겠죠. 그걸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라파엘 님에게 주어진 책무를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니까요.” “…….” “제가 여기에 라파엘 님과 함께 오자고 한 이유는 이런 풍경들을 잊지 않았으면 해서예요.” “무슨….”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 우리가 어떤 가치를 위해서 싸우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지켜야 할 것이 많습니다. 이곳에는….” 무척이나 숙연해진 장내. 이 정도로 숙연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진실인 거야.’ 라고 생각할 만하리라. 지난 2개월 동안 몇 차례나 나를 만나지 않았던가. 짧다면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이기영이라는 인간에 본질에 마주했으니, 저런 종류의 생각이 깔릴 만도 했다. 비열한 미소를 흘리던 얼굴로 가슴 따뜻해지는 미소를 보내고 있었고, 소외 계층을 짓밟는 줄로 알았던 두 손으로는 그들을 돕고 있다. 취미는 체스 정도가 유일, 베니고어 님에게 항상 기도를 올리며 오직 타인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네가 쉴 때 뭐 했는지 잘 알고 있지.’ 기록관으로 가서 이전에 있었던 일들과 명예추기경이 나오는 영상들을 정주행하지 않았던가. 그것 역시 거짓이라고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특히나 라이오스 악마소환 사태 때 찍힌 영상은 린델 토마토 지수 100%를 채우고도 남는다. 화면을 빨아들이는 박덕구의 절박함이 영상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무언가 이상한 점을 찾고 싶었겠지만, 개미 손톱만큼의 이상한 점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서적이나, 타인의 평판,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대중들에게 이상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는 거다.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평소와는 다른 생각이 싹을 틔우기에는 충분한 시간. 세뇌되었던 기억들을 부정하기에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기 때문에 딱 완벽하게 밑밥을 깔아놨다고 보면 무방할 것 같았다. 흔들리는 눈, 고민하는 얼굴, 심지어 혼란스럽다는 표정도 눈에 보인다.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초조해하고 있고 자꾸만 뭔가를 곱씹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정도면 준비된 것 같지?’ 마침 딱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야간의 빌드업 기간을 가져도 상관없을 것 같았지만, 계속해서 늦추는 것보다는 한번 질러보는 게 맞다. “…….” “…….” “함께 가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어디로….”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 “어째서 지금의 대륙이 선택받은 용사를 필요로 하는지, 어째서 대륙이 위기에 처해 있는지, 정말로 위협이 실존하는지에 대해서 궁금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라파엘 님께서는 성검의 선택을 받으셨지만 정말로 실감하고 계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실제로 느껴보지 않는다면 와닿지 않을 겁니다.” “…….” “베니고어 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 “알고 계시는 것처럼 대륙은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어요. 72군단의 악마들보다 더욱더 강한 악마들과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탈을 뒤집어쓴 이들과 바깥에서 온 악마가… 머지않은 시일 내에 대륙에 들이닥칠 겁니다.” “…….” “많은 희생자가 생기고 많은 이들이 죽을 거예요. 모험가들은 목숨을 걸고 적들과 마주할 거고, 모든 대륙민이 힘을 합쳐 그들에게 대항할 겁니다.” “그거….” ‘새빨간 거짓말 아니었냐고?’ “그건….” ‘민중들을 선동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냐고?’ “그러니까.” ‘이기영 위원장이 대륙을 집어삼키기 위한 자작극이 아니었냐고?’ 응, 아니야. 진짜 악마새끼들이 쳐들어오는 거 맞어. 지금부터 넌 그걸 보게 될 테니까. 두 눈 똑바로 뜨고 똑똑히 봐.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다. 직접 보는 것보다 더 좋은 수단은 없을 테니까. 뭔가 큰 게 올 것이라는 걸 예상했는지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는 라파엘의 모습이 보인다. 나 역시 딱히 말을 이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한들 들리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증거가 있다는 어투로 당당하게 말을 잇지 않았던가. 놈의 입장에서는 선동과 날조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진실이 되는 기적. 카스가노 유노 한 방이면 충분하다. 물론 이 반동분자 집단이 카스가노 유노와 이쪽의 유착 관계에 대해 굉장히 많이 파고들었겠지만 마치 현실처럼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떨쳐내는 것은 어려울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딱 지금같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녀석은 다소 긴장한 듯한 모습으로 카스가노 유노의 앞에 자리 잡은 이후, 나는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녀석을 유노 앞으로 내몰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시점. 미하일과 마찬가지로 구역질부터 하고 보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우웨에에에에에엑….” “…….” “하아… 하아… 우웨에에엑. 제가… 지금… 본 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그것도 잠시. 허겁지겁 문을 연 채로 무작정 바깥으로 향하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얘, 이거 멘탈 털린 건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진실로부터 멀어지려는 발버둥 같은 느낌. 생각보다 악마 계약자 놈들의 세뇌가 강하게 자리 잡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 이거. 멘탈 털린 거 맞네.’ # 621 회귀자 사용설명서 621화 거짓 없는 진실(3) 콰아아아아아앙!!! “…….” “콜록… 콜록….” “자기. 얘 정말로 용사 맞아? 더럽게 약해서 어디 쓸 데도 없을 것 같은데.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하면 안 돼?” “…….”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는 조금 괜찮지 않나 싶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영 맹탕이었네. 성검은 뭘 믿고 얘를 선택했는지 몰라. 아니, 정말로 선택받은 게 맞기는 한 건가? 그 검이 사람을 착각한 건 아닌가. 이딴 게 용사라니 베니고어 님도 참….” “…….” “저기요, 용사님. 그래, 너. 너 말하고 있는 거예요, 너. 왜? 대답할 기운도 없어? 도대체 얼마나 더 추해지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빨리 좀 일어나는 게 너한테도 좋을걸.” “하아… 하아….” “내가 얼마나 바쁜지는 알고 있는 거야? 붉은 용병의 길드마스터가 본인 시간까지 빼면서 여기에 나와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돼? 내 입으로 말하기도 웃기는 이야기지만 평생이 가도 오지 않을 기회….” “…….” “됐다… 더 이상 말해도 내 입만 아프지. 기초훈련 25세트 반복하고 끝내는 거로 할게. 할 마음도 없는 학생한테 시간 쓰는 것보다 더 멍청한 일이 어디 있겠어. 끝나면 알아서 네 발로 돌아가. 괜히 서성거리면서 내 신경 긁지 말고.” 강도가 높은 훈련으로 인해 넝마가 된 라파엘의 몸이 눈에 보였다. 물론 그것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근심과 걱정을 숨기지 못하는 듯한 얼굴, 예상했던 그대로 멘탈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 쟤 진짜 멘탈 심하게 나간 것 같은데….’ 오랜만에 만난 차희라가 저렇게 짜증 내는 것도 이해가 간다.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가운데 특별히 시간을 내준 것이 아니던가. 어디까지나 호의로 내어주고 있었던 시간이었고 녀석만을 위해 준비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자세로 수업에 임하고 있으니…. ‘뚝배기가 안 깨진 게 용하지.’ 차희라가 이쪽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면 아마 곧바로 손을 놓지 않았을까. 아무리 녀석이 중요하다고 말해놓은들, 그녀는 자기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아니, 이 경우에는…. ‘혼란스러워한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며칠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저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저런 상태의 녀석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고민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여러 가지 가설이 있지만 가장 가능성이 큰 추측은 놈이 아직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빛과 어둠, 둘 중 하나를 선택했다면 저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쪽에 복수하기를 원하든, 대륙을 지키기 위해 각성을 하든 간에 뭔가를 선택하기는 했을 거라는 거다. 이 두 가지의 선택지 모두 공통으로 필요로 하는 수단이 바로 무력이 아니었던가. 저렇게 훈련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현재 녀석이 갈팡질팡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그 꼴을 보고도 못 믿으시겠다.’ 물론 내 예상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아직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내게는 썩 달가운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뭘 선택하든 간에 훈련은 해야지.’ 오늘 하루 현장의 일을 내팽개치고 오지 않았던가. ‘시간 아까워 죽겠네, 시바.’ 내 마음 역시 차희라와 별반 다르지 않다.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시야에 보인 것은 붉은 용병의 길드 마스터, 용병여왕 차희라. 트레이드 마크가 돼버린 붉은 머리,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것 같은 머리카락도 여전했고 거친 용병 같은 느낌도 여전했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숨을 몰아쉬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살짝 미소를 짓자 수건으로 대충 땀을 닦고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 와중에 빨리 옆에 앉아 앵겨보라는 듯 쓰윽 자리를 만드는 모양새는 권력자가 전형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습 중 하나였다. 저도 모르게 옆으로 다가가 엉덩이를 앉히자 자연스럽게 어깨 위로 손이 올라오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얘, 손버릇 봐.’ “고생했어, 누나.” “뭐, 한 것도 없는데 고생은 개뿔. 짜증 나 죽겠다니까. 어디서 저런 놈을 주워 와서는… 계속 지금 같은 상태라면 그냥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자기 부탁 아니었으면 벌써 때려치웠을 거야. 벌써 며칠째 이런 상태인데… 저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너무 화가 나서 중간에 머리통을 뽑아버릴 뻔했다니까.” ‘그러면 안 돼….’ “우리 애들 훈련시간까지 빼면서 만든 자리야. 자기가 저 핏덩이를 어떻게 쓸려고 그러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이런 쓸데없는 시간 허비하는 것보다 우리 애들 한 놈이라도 더 훈련시키는 게 낫다고. 최소한 전쟁터에서 지들 목숨은 알아서 챙기게 만들어 줘야 하지 않겠어? 물론 저치가 제대로 활약해 주면 그건 그거대로 이득이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네.” “뭔가 걱정거리나 고민거리가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극복한다면 지금보다 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누나가 보기에는 조금 어떤데? 그러니까….” “뭘? 지금 저 꼴을 보고도 그런 게 궁금해?” “아니, 저런 부분이 아니라 육체적인 능력이나 가지고 있는 재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고 물은 거야. 이해도, 이론 같은 것들, 몸을 움직이는 방법 같은 건 난 잘 모르니까.” “…….” “…….” “솔직히 말해서….” “응.” “재능 자체는 우수한 편이야. 아니, 그것보다는 조금 더 위에 있다고 봐도 되나. 만약 성검이나 다른 지원이 없었어도 교국 8좌 정도까지는 무난하게 올라갈 수 있을 정도…?” “흐음….” ‘현성이 말이랑은 다르네.’ 전에 김현성에게 학부모 상담을 받았을 때와 나온 말과는 달랐기 때문에 조금은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이 표현하는 라파엘의 이해도는 둔재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 ‘제대로 키울 수 있을지… 확실히 말씀드리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많이 봐줘도 평범한 정도인 것 같아서… 물론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현재로서는… 성검의 힘을 빌린다고 하더라도 기영 씨가 생각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는 없을 겁니다.’ ‘네? 정말이에요?’ ‘네, 현재로서는 그다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라고 말을 줄이지 않았던가. ‘희라 누나한테도 물어보기를 잘했네.’ 나도 우리 얘가 재능 있다는 소리에 기뻐하는 부모 같은 성향이 있기는 있었나 보다. 김현성의 거침없는 코멘트가 약간은 의아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아마 그건 녀석이라서 할 수 있는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자타공인 천재 중의 천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녀석의 눈에, 그 누가 성에 차겠는가. 라파엘의 검술 역시 한심하게 보일 것이라는 건 너도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차희라의 경우는 다르다. ‘희라 누나는 천재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니까.’ 물론 천재의 종류라고 볼 수 있지만 차희라의 그것은 본능에 더 가까웠다. 경험과 본능, 그리고 순수한 힘으로 만들어진 강함. 정교하고 약속되어 있는 검술 자체가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김현성과 의견이 대립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최소한 나쁘지는 않다는 거네.’ 차희라의 보증이 있으니 성장하기는 할 것이다. 저 위기만 제대로 극복해 준다면 말이다. “그렇게 말해주니 괜찮게 느껴지기는 하는데? 안심이 되기도 하고….” “글세, 아무리 재능이 괜찮으면 뭐 해. 저 모양 저 꼴인데.” “아마 곧 일어날 거야. 라파엘이 겪고 있는 개인적인 문제는 내가 해결해 줄 거고. 그때까지는 너무 빡세게 굴리지는 마, 누나.” “자기, 말을 웃기게 한다. 그나마 나는 여유는 주는 편이야. 다른 쪽에서 안 그래서 문제지. 내가 나쁜 경찰인 것처럼 보였어? 진짜 나쁜 경찰은 따로 있는데… 자기, 쟤가 다른 훈련장에서 어떻게 깨지는지 본 적 없지?” “훈련 참관하는 건 처음인데….” “나중에 한 바퀴 돌아봐.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라파엘만 개인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겪고 있는 문제는 언제 해결해 줄 건데?” “길드에 문제라도 있어?” “아니, 나 개인이 겪고 있는 문제.” “아… 그….” “제어해 보려고 했지만, 제어가 안 되는 것 같아… 최근에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도 웃기게도 자기 생각은 나더라. 무슨 말 하는지 대충 알겠지?” “뭐….” “나 스스로가 판단하건대 내가 이성을 잃을 때마다 짐승 새끼처럼 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건 평소에 쌓아둔 게 많아서 그래. 여러 가지 욕구는 쌓여가는 데 제대로 배출하지 않으니 결정적일 때 문제가 된다는 거야. 무슨 말 하는지 대충 알겠지?” “…….” “무슨 말 하는지 대충 알겠지?” ‘아니…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알고 있잖아, 자기.” “대충은… 그런데… 안 그래도 내가 누나 몸을 한번 살펴보려고 하기는 했는데….” “그거 신호야?” “아니, 신호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이야기야. 정확히 돌아버리는 원인이 뭔지 파악해 보려고 했었다고.” “파악할 필요 없어. 이미 답은 나왔으니까. 그동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지 뭐야.” “무슨 뜻이야?” “내가 진짜로 강해질 방법이 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거야. 샌님처럼 훈련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고.” “그게 뭔 소리야?” “자기는 맹수가 훈련하는 걸 본 적 있어? 앞발 휘두르기나 물어뜯는 방법을 연습하는 걸 본 적이 있냐고.” “…….” “머릿속에 꽉 들어가 있는 욕구를 해소해 주는 식으로 방법을 바꿨다고. 잘 처먹고 잘 싸고. 짐승처럼 사는 거로 방법을 바꿨다, 이거야.” “…….” “피가 생각날 때도 굳이 억제하지 않아도 되겠더라고. 사방에 깔린 게 사냥감인데 가까운 던전이나 숲에 들어가서 한바탕 하고 들어오면 머릿속이 꽤 상쾌해지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말한 거야. 무슨 말 하는지 대충 알겠지?” 저 ‘무슨 말 하는지 대충 알겠지?’라는 말을 이 짧은 순간에 몇 번이나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살짝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왠지 모르게 끄덕여야 할 것 같았으니까. ‘이 누나 바쁘다는 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느라 바쁜 거였어?’ 물론 그건 아닐 것이다. 그녀는 한 집단을 이끌어가는 수장이 아니던가. 아마 그 와중에도 본인의 욕구를 해소하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솔직히 차희라의 말이 진실인지 의구심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마음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니 곧바로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 한 차례, 아니, 두 차례 더 성장한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본인 욕구에 충실한 것만으로 이렇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게 어처구니없이 느껴진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따위의 말을 달고 사는 놈들이 이 꼴을 본다면 절망에 빠질 거라고 생각했다. ‘이딴 게 어디 있어.’ 이게 뭐야. 시바.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알아둬. 아, 거기 물 좀.” “아… 응.” 스리슬쩍 물컵을 건네자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형편없이 부서지는 물컵이 눈에 띈다. “미안 아직 힘 조절이 안 돼서. 곧 익숙해질 테니까 신경 쓰지 마.” 솔직히 신경을 아예 안 쓸 수가 없다. “쟤는 내버려 두고 와인이나 마시러 가자. 자기 온다고 해서 좋은 거로 준비해 놨는데. 아마 마음에 들걸. 포션으로 만들어진 와인이라는 데. 놀랍게도 자기가 만든 게 아니야. 원래부터 쭈욱 있었던 아이템인데 나쁘지 않아 보이더라.” ‘…….’ “일단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근데 오늘은 조금….” “뭐, 그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 일주일 안에 한 번은 들리면 되니까. 용건은 저쪽?” “물론.” 다른 이유는 전부 제외하더라도… 차희라의 개인적인 문제보다는 가라앉을 조짐을 보이는 종목 쪽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 622 회귀자 사용설명서 622화 거짓 없는 진실(4) 뒤에서 느껴지는 차희라의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왠지 모르게 뒤를 돌아보기가 꺼려지는 시점. 일단은 라파엘 녀석에게 다가가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녀석이 바깥으로 뛰쳐나간 이후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 한동안 가만히 내버려 둬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상태가 길어지는 게 달가울 리가 없었다. 물론 그동안 다가가지 못했던 개연성도 충분하다 할 만했다. 라파엘이 악마 계약자의 끄나풀이라는 걸 모르는 척하다 보니, 나 역시 현재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캐릭터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대외적으로 이기영은 라파엘을 걱정하는 포지션에 있다.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함께 본 미래에 녀석이 겁을 집어먹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클리셰네.’ 성장형 모험물의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 앞에 겁을 집어먹고 나아가지 못하는 장면은 여기저기서 많이 봐왔다. 사실 현재의 라파엘이 이런저런 부분까지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디테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먼발치에서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영웅이 스스로 극복해 내기를 바라는 조연의 포지션에서 말이다. 물론 실상은 다르기는 하지만…. ‘라파엘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뭐 나야 상관없지.’ 어째서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지 깨닫는 게 중요했다. 걱정을 가득 담은 얼굴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자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차희라가 지시한 기초 체력 훈련도 하지 않고,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가관. 둠기영 사태 때의 김현성만큼은 아니었지만, 고민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그때랑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인가.’ 직접 머릿속에 들어가야 해결이 가능했던 그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저….” 살짝 인기척을 내봤지만, 이쪽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라파엘 님.” 다시 한번 불러보니 슬쩍 나를 돌아본다. ‘이거 뭐라고 운을 떼야 하나.’ 그나마 괜찮았던 것은 나를 바라보는 눈에 커다란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약간의 의심이 자리 잡은 것 같기도 했다. “조금 괜찮으십니까.” “아… 형.” “몸이 좋지 않으시면 조금 쉬셔도 괜찮습니다.” “아니요. 그런 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희라와의 훈련으로 인해 넝마가 된 몸에 신성력을 쏟아내자, 뭔가 꺼림칙해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쪽이 신성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겠지만, 직접 몸이 회복되는 느낌이 들 테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느껴지는 것은 평범한 신성력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 맑고 투명하고 깨끗한 것으로 모자라, 순도까지 높은 100% 베니고어산이었으니까. 물론 그 양이 미약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 상처를 치료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슬슬 표정관리에 들어간 것은 당연지사.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 역시 순식간이다. 여기서는 복잡한 표정을 짓는 것이 맞다. 이를테면,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는 듯한 표정.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청년을 전쟁터로 내몰고 싶지 않다는 얼굴. 하지만 그 책임을 떠안길 수밖에 없다는 듯한 태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드러나 있는 얼굴이 필요했다. 물론 이런 여러 가지 감정이 실린 표정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는 나 역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녀석의 처지에 진심으로 마주한 순간 자연스럽게 비스무리한 표정이 지어지는 것 같았다. 이 땅 위를 살아가는 모든 이를 위해, 싸움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청년마저 전쟁터로 내몰 수밖에 없는 현실. 성검에게 선택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짐을 끌어안고 공포와 싸워 이겨내야 하는 라파엘을 향한 순수한 동정이었다. ‘제기랄….’ 이 얼마나 비정한 현실이란 말인가. 저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다. 억지로 입술을 꽉 깨물어 봤지만,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게 막는 것 정도가 한계. “괜찮을 거라고…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형….” “두려우실 거라는 거 압니다.” “…….” “얼마 전까지는 평범하게 살아오셨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 “라파엘 님께서 검을 겨누어야 할 이들은 그런 자들입니다. 잔인하고, 독선적이며 인류를 자신들의 발아래에 두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인류의 위협으로 다가올 이들은 이런 이들이에요. 라파엘 님이 보셨던 그대로입니다.” “…….” “누군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면 많은 이들이 죽을 겁니다. 마지막 전쟁에서 싸우고 있었던 수많은 영웅과 병사가 죽은 이후에는, 대륙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이들이 다음이 될 거예요. 평범한 노인과 미래를 꿈꾸는 가족, 어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어린아이들과 날개를 펼치지 못하는 청년, 모두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악마들이 내지른 창에 목숨을 잃을 겁니다.” 잠깐 말을 끊고 녀석을 바라보자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게 시야에 비친다. 잠깐 걷자는 듯 먼발치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라파엘. 당신이 걱정하고 있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뭘 그렇게 고민하고 그래. 보이는 그대로인데. 그냥 고민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알아서 해결해 준다니까 그러네.’ 정말로 당신은 어떤 인간이냐고 묻는 것만 같다. 대답하고 싶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어쭙잖은 자료로 만들어진 선동과 날조보다는….’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팩트를 더 신뢰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래서 선동이 무서운 거라고, 시바.’ 왜 그런 명언도 있지 않았던가. 선동은 한마디 말로 충분하지만,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까지에는 수백 가지가 넘는 증거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딱 그 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수차례나 나는 그런 나쁜 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초조해하지 말자.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진실은 승리하는 법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책임감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 “우리 앞에 서달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에요.” “…….” “처음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하고 계십니까?” “네… 형.” “…….” “기억하고 있어요. 끝까지… 함께 싸워달라고… 검을 놓지 말아달라고.” “무섭고 두려운 게 당연할 겁니다. 전쟁이, 싸움이, 갈등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갈등이 무섭고 그로 인해 상처받을 이들이 무섭습니다. 제 손으로 누군가를 해하게 될까 무섭고, 혹시나 목숨을 잃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 “저뿐만이 아닐 거예요. 모든 이가 두려워할 겁니다. 수많은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적을 바라보고 있는 영웅들도, 아직 훈련소에서 훈련하고 있는 이들도 무서울 겁니다. 맡은 책임은 다를 수 있지만, 그들 역시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네….” “그 두려움에 빠져 실수하는 이들도 있지만….” ‘예를 들면 악마 관계자 같은 놈들 있잖아.’ “병사들 대부분이 이 두려움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을 겁니다. 형체가 없는 적을 정확히 마주 보고 검을 들어 올릴 준비를 하고 있을 거예요. 그들은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요.” “…….” “네, 아주 오래 전부터요. 제가 이 대륙이 오기 전부터 그들은 그렇게 싸워왔을 겁니다. 욕심에 눈이 먼 권력자들의 전쟁에 휩쓸리기도 하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몰리는 경우도 많았겠지만, 개개인은 분명히… 분명히 자신들이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을 위해 검을 들어 올렸을 겁니다.” “…….” “사랑하는 가족, 내 조국, 내 사람들을 위해서요. 각자 다른 이념과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지금 이 장소에 있는 이들은 그런 이들이에요.” “…….” “힘든 과정을 겪게 되겠지만, 종국에는 일어나게 될 겁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일어서 승리의 함성을 내지를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렵지 않은 거예요. 저와 함께 싸우게 될 이들을 믿고 있기 때문에 무섭지 않은 겁니다.” 지껄일 수 있는 대로 입을 털었지만, 전쟁터에서 싸우는 게 두렵지 않은 이유가 신념을 가지고 싸우는 병사들 때문일 리가 없다. 김현성이나 정하얀, 희라 누나 같은 뒷배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전쟁터에 설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믿음이 있어야지.’ “라파엘 님도….” “…….” “제가 드린 말을 이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 “분명히 이겨내실 거라고, 회색빛의 성검과 함께 일어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베니고어 님께서 내리신 검이… 라파엘 님을 선택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 잠시 내려앉은 침묵. 너는 이겨낼 수 있다고 열심히 독려하기는 했지만 이런 말이 제대로 들어올 리가 없다. 애초 녀석의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없을뿐더러… 겉은 번지르르했지만 결국 알맹이는 전쟁터로 나가 싸우라는 말이나 진배없었으니 말이다. 당연하지만 이렇게 말을 끝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빛기영이라는 캐릭터는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사람이 아니다. 눈앞에 이득이나 실리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도 아니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대의를 위해서라면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감정에 흔들리고야 마는… 그런 여린 사람이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 “하지만 라파엘 님이 정말로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 “일상으로….” “형.” “일상으로 돌아가셔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라파엘 님은 라파엘 님을 위한 삶을 살아갈 자격이 있으니까요.” ‘싸우기 싫으면 그냥 가도 돼. 당연히 너 없으면 우리 다 뒈질 것 같기는 한데… 내가 너 같이 유망한 애가 고통받는 걸 견딜 수가 없네. 무슨 말 하는지 알겠지? 여기서 그냥 가면 갑자기 분위기 싸해지는 거 알지?’ 당연하지만 놈 역시 떠날 생각은 없을 것이다. 이대로 떠난다는 것은 풀어야 할 숙원에서 등을 돌린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지금 내가 지껄인 말이 꽤나 마음속에 틀어박히지 않았을까. ‘결정타치고는 약하기는 한데.’ 개연성을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은 발언이었다고 본다. 당연하지만 씁쓸한 미소까지 함께 전달하는 서비스 정신도 잊지 않는다. 마치 동상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에 천천히 어깨에 손을 올리고 녀석의 눈을 바라보자. ‘…….’ 이쪽의 눈을 슬그머니 피하는 녀석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 어깨에 올려진 팔이 불편하다는 듯 어깨를 움찔거리는 모습은 뭘 뜻하는 건지 모르겠다. ‘너, 이 새끼….’ “…….” ‘너, 이 새끼가 나를 거부해?’ 왠지 모르게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긁힌 것 같은 느낌. ‘감히 빛을 거부해?’ 그동안 내가 너무 물렁하게 이 게임에 임한 건가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아낸다. 그냥 다 필요 없으니 목을 날려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마저 생겨난다. 티가 나지 않게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지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들어온 생각은 이것 하나였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그래, 이 악마계약자 새끼들.’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 623 회귀자 사용설명서 623화 거짓말이야(1) ‘친절에 익숙해지지 말자.’ “의심해야 돼.” ‘그는 독이야.’ “끝까지 의심하는 게 맞아.” ‘절대로 믿으면 안 돼. 그렇게 배웠잖아.’ “모든 게 연기고 전부 계산된 행동이야.” ‘괜히 동요할 필요 없어. 동요하지 말자. 동요하지 마.’ 천천히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중얼거려 봤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던 탓이다.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기영이라는 사람과 마주할수록 진실이 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 거짓이라고 생각했던 베니고어의 예언. 그저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었던 그 예언을 눈으로 직접 목도한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이 본 것이 진실이 아닐 가능성은 차고도 넘친다. 실리아의 무녀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지만 자신이 본 것이 확정된 미래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피부로 느껴지는 현실감 때문에 진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뿐이다. 이것 역시 조작된 것이며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를 컨트롤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사용하기 좋은 장기 말로 이용하기 위해 조작된 내용일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다른 정황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정말 사실이 맞는 건가?’ 그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대륙을 손안에 쥐려는 악마의 일상은, 권력자들과 함께 잔을 기울이고 온갖 만찬에 둘러싸여 방탕한 생활을 하는 나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신의 거울에서 보여지는 홍보용 영상이 끝난 이후에는 자신이 구축해 놓은 권력과 명예, 부를 누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많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자신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기영은 권력과 명예 그리고 그 자신이 쌓아 올린 부를 누리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누리지 않는 거지?” 그 모든 걸 누리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던가. 인간이 이런 종류의 욕구를 원하는 것은 누리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의 생활은 정 반대다. 그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가장 낮은 위치에서 일하고 있다. 소외된 자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열과 성을 다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 만약 정말로 이기영 명예추기경이라는 인간이 권력에 미친 독재자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지 않은가. ‘보여주기식일 거야.’ 그렇게 생각해 봤지만 그 어떤 인간이 단순히 보여주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까.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일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그는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그저 희생할 뿐이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오롯이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을 막기 위해서만 사용한다. 그가 이 자리에서 올라오기 전에 벌어들인 수많은 재화가 성벽의 공사와 병사들의 보급을 위해서 사용된다. 그의 권력은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는 데 사용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쓰인다. 그의 명예는 자기 자신을 드높이는 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낮은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쓰인다. 그 어떤 병사나 대륙인들의 일상보다 그의 일상이 더 가혹하다. 최소한 눈으로 보이는 게 그러했다. 하루에 소화해 내는 스케줄 자체가 일반인의 시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마치 정말로… 정말로 대륙의 멸망을 막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은가. ‘그럴 리가 없어.’ 라파엘이라는 개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작위적인 장면이 아닐까. ‘어째서 내게 이런 걸 보여주려는 거지?’ 아니… 주변인들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살인적인 스케줄을 감당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마치 바보가 된 기분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현재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가 완전히 상반되어 있다. ‘거짓말이었다고? 단장님들과 단원들이 믿고 있었던 게 정말로 거짓말이었다고?’ 인정할 수 없는 부분.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였다. ‘살아남아라, 라파엘. 너만은 살아남는 거야.’ “거짓말이 아닐 거야.” ‘단 한 명이라도 우리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단장님이 거짓말을 했을 리 없어.” ‘우리의 목적은 대륙의 해방이야. 그가 지배하고 있는 대륙의 해방.’ “그게 전부 다 연기였다고? 말도 안 돼.” ‘너는 검을 들 필요가 없다, 라파엘. 싸우는 건 우리만으로 충분해.’ “연기일 리가 없어. 분명히 연기가 아니었을 거야. 단원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전부….” ‘너도 우리를 믿지 않는 거냐. 네가 알고 있는 세상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이다, 꼬마야.’ “나를 속일 이유가 없잖아. 단장님이 나를 구해주실 이유도 없었어.” ‘위험한 시기지만… 이놈은 데려가는 게 맞는 것 같다. 저대로 두고 볼 수는 없어.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도의마저 저버릴 수는 없어.’ “내 말이 맞아.” ‘이름은 이후에 차차 알려주도록 하마. 만나서 반갑다, 꼬마야.’ “그 만남이 전부 다 거짓말… 거짓말일 리가 없어!”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 지금은 말이다.’ “거짓말일 리가… 없다고!!!” 콰직!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거울이 산산조각이 나서 떨어졌다. 갈라진 거울 틈 사이로 비치는 자신의 여러 모습이 우스웠다. 그동안 단련된 신체 때문인지 거울을 내려친 손에서 고통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프다. 아파서 참을 수가 없다. “흐으으윽… 뭐가… 뭐가 진실인 거야. 말해줘요, 단장님. 보고 있으면 제발 말해주세요. 제가 미친 건가요? 저도 단장님 말씀처럼 세뇌당하고 있는 건가요? 이기영이 정말로 단장님이 말한 그런 사람이 맞는 거예요? 제발… 제발 말해주세요.” 대답을 바라고 지껄인 말이 아니다. “제가 뭘 믿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단장님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고 말해주세요.” 대답이 들려올 리가 없다. “맞죠? 단장님이 해준 말이 맞는 거죠? 그렇게…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거죠?” 흘러나오는 눈물을 쓱쓱 닦고 거울을 바라보자 다시 한번 자신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도 판단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눈물을 닦아낼 수밖에 없었다. 곧 그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소속으로서 전반적인 업무에 대해 알아보고 배우는 시간, 현재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방을 나서니 시야에 비치는 것은 눈웃음을 보내고 있는 그자였다. 평소대로의 모습. 언제나 환한 웃음을 보이며 여유를 잃지 않으려고 하는, 친절함과 따뜻함, 걱정스러움으로 둘러싸인 얼굴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얼굴이지 않은가. 가식적으로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 그는 현재 자신을 걱정스러워하고 있다. 훈련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게 된 그때부터. 나에게 동정을 보내고 있었다. 성검에게 선택받아 일상을 잃은 이에 대한 동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그리 말하고 싶은 심정.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일이 어찌 됐든 현재 상황이 내게 유리하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가 정말로 나를 동정하고 아끼고 있다면 쾌재를 불러야 함이 옳다. 나 자신이 고민하는 모습을 감출 수 있을뿐더러… 이기영 위원장의 신뢰를 얻는 것은 대의를 도모하는 데 필요한 가장 큰 일 중 하나였으니까. “오늘은 조금 괜찮으십니까?” 평소와 같이 안부를 물어오는 모습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하신 것 같아서 일정을 조금 축소시켰습니다. 아마 다음 주 즈음부터는 위문차 병사들을 방문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와 함께 직접 전진기지들을 둘러보기도 할 거고요.” “네….” “전진기지에 있는 병력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어떤 게 가장 도움이 될지도 한번 알아봐야 하는 부분이니… 물론 책임자들이 보내오는 건의사항들은 전부 알고 있지만, 현장에서 체감되는 느낌은 조금 다를 겁니다. 병력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느낄 수 있을뿐더러.” “네, 형.” “아마 라파엘 님께서 방문하신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커다란 힘이 될 겁니다. 합동 훈련소에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 “…….” “이제는 조금 괜찮아지신 겁니까?” “네, 조금은… 극복해 낸 것 같아요. 조금은요.”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찮아요, 형. 저보다는… 형이 더 무리하고 계신 것 같은데….” 대충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피곤에 찌들어 있는 얼굴이었다. 괜찮은 척했지만 가혹한 일정을 겨우 견뎌내고 있는 이의 얼굴이 저러할까. 아마 나에게 신경 쓰고 있는 것 또한 그의 건강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이전에 차희라와 함께하는 훈련장에 그가 방문했을 때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는 것 같았으니까. ‘신경 쓰지 말자.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에 내몰려 있다면 오히려 고개를 끄덕여야 함이 옳다. “다행이군요.” “네?” “조금이나마 평소 같은 모습을 찾으신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제대로 식사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걱정 많이 했는데….” “형이… 계속… 신경 써주셨으니까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이후, 이기영 위원장은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서 나와 함께했다. 뭔가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짧은 휴식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서였다. 함께 차를 마시거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거나 하는 나날.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기운을 차리게 됐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거짓이건 진실이건 간에 그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만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가에 미소를 띠게 된다. 이 사람에게는 그런 종류의 힘이 있다.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고, 이건 독이라고 끊임없이 생각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독약일 거라고 마음을 먹지만 그 달콤함을 받아 마시게 된다. 괜스레 표정을 굳히며 다시 한번 이기영을 바라봤을 때였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어떤지 그의 상태가 이상해 보인 것. ‘지금 뭘 하는 거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표정이다. 어딘가에 혼을 빼앗긴 듯한 모습. 정확히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잠깐 정신을 잃은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표정을 찡그리며 머리를 부여잡는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당신 뭐야… 어디 아픈 거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624 회귀자 사용설명서 624화 거짓말이야(2) 이따금 이기영이 비슷한 행동을 보일 때가 있었다. 멀리 있는 곳을 바라본다든지, 혼이 나간 듯한 얼굴을 하는 등의 일이었다. 당연하지만 단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생각에 깊이 빠졌을 때의 습관 같은 것으로 판단했고, 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보이는 행동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뭔가 있어.’ 그동안 별것 아니라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는 습관과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모습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뭐지? 도대체 뭐야?’ 여전히 고통이 가시지 않는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모습은 뭐라 형용하기 힘들 정도.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혼이 나간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말을 걸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저 상태를 유지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형….” “…….” “형, 괜찮으세요?” “…….” “형!” “아! …네?” “아까….” “네… 아… 제가… 뭔가….” “…….” “네… 괜찮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정말로 괜찮습니다. 최근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조금 어지러워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 쉬다 보면 나아질 겁니다. 일이 바쁘다 보면 이따금 생기는 현상이기도 하고… 습관, 습관 같은 거라고 보면 됩니다. 이거… 제가 깜짝 놀라게 한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라파엘 님. 하… 하하하.” ‘거짓말이야.’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눈앞의 대상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은 전해져 온다. 이기영이라는 인간은 방금 일어난 사건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항상 완벽했던 모습과는 조금 다른 흐트러진 모습이지 않은가. 부자연스러운 표정과 부자연스러운 행동, 무엇을 경계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굉장히 조심하는 느낌이다. 그와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지금의 이기영은 가면을 벗고 있다. 항상 자신을 완벽함으로만 포장하던 가면을 집어 던지고, 진짜 약점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습이야말로 이기영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명예추기경이나 위원장, 파란 부길드마스터, 대륙을 구한 영웅, 용에게 선택받은 자, 베니고어의 현신이라는 가면 속에 가려진 그의 진짜 모습 말이다. ‘이건 기회야.’ 충분히 기회라고 할 만했다. 빈틈이라고는 없을 것 같았던 명예추기경이 자신의 유일한 약점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이날만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 이런 기회가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녀석에게 접근한 것이다. 하지만 입안이 쓰다. 이유는 자신조차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씁쓸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감돌기 시작했다. “정말로 괜찮으신 거 맞아요? 방금 분명히….” “네, 괜찮습니다.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형.”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로요. 그것보다… 네, 다른 이야기를….” ‘말을 돌리고 있어.’ “아까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초조해하고 있다.’ “…….” “아… 네, 거기까지 말씀드렸었죠. 그러니까… 네, 오늘은 피곤하신 것 같아서 일정을 조금 줄였습니다. 그리고… 네, 또, 아마 다음 주 즈음부터는 위문차 병사들을 방문하게 될 것 같고요… 그러니까 저와 함께 직접 전진기지들을 둘러보기도 할 것 같으니 준비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뭐?’ “전진기지에 있는 병력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어떤 게 가장 도움이 될지도 한번 알아봐야 하는 부분이니… 책임자들이 보고해 오는 건의사항과 현장에서 체감되는 것의 느낌은 많이 다를 겁니다. 병력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느낄 수 있을뿐더러….” ‘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장… 담하건대… 라파엘 님께서 방문하시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커다란 힘이 될 겁니다.” ‘뭐라는 거냐고….’ 저절로 침묵하게 되는 게 당연했다. 불과 몇 분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아니, 비슷한 이야기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잠시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다시 한번 미소를 띄웠지만… 자신의 표정을 확인했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다행이군요.” “…….” “조금은 기운을 차리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본 것도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그 누가 이 기묘하고 이상한 상황을 정상적이라고 판단할까. “그럼 오늘은 예정대로… 네… 그렇게, 하면 괜찮을까요? 일이 전부 끝나고 체스를 두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요. 사실상… 네, 휴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 “그동안 심적으로 지치셨을 테니 오늘만이라도 마음 편히 쉬셨으면 합니다. 혹시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내일 훈련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라면… 훈련에… 지장이… 네,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 “…….” “저… 잠깐.” “형?” “잠깐… 잠깐만….” “형.” “오늘… 일정은 모두… 네, 잠깐… 급한 일이 생각….” 아까 일어났던 일보다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 잠시 비틀거리던 이기영이 급하게 몸을 뒤로 돌린 것이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려가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혹시나 무슨 사건이 터지지 않을까 초조해진 마음은, 저도 모르게 복수의 대상의 뒤를 쫓게 했다.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벽을 짚고 아슬아슬하게 걷는 모습은 불안해 보이기까지 하다.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헛구역질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힘들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디고 있다. 종국에는 코너를 돌아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조금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위태로운 뒷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은 건가? 몸이… 몸이 아픈 건 아닌가?’ 분명히 뭔가 있다. 이 코너를 돌면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 ‘문제가 있는 거야?’ 그토록 찾고 싶었던 그의 약점. 이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는 패. 복수를 완성할 퍼즐 조각.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떠올릴 수가 없다. 속도를 올려 코너를 돌자 눈에 들어온 장면은 기다란 복도에 홀로 쓰러져 있는 이기영의 모습. ‘어?’ “형?” ‘뭐야.’ “형… 괜찮아요?” 허겁지겁 뛰어가 상태를 확인하려고 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한 인영의 모습에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앞을 가로막아 선 것은 작은 키의 여자.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처음부터 이 장소에 있었던 것처럼 자리해 있었다. 누구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이기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존재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쌍검을 들고 있는 여자는 더 이상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앞을 막아섰다. “가까이 다가오지 마십시오.” “박리안 님?” “필요에 따라서는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네?” “조용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세요. 오늘 일정은 잠시 후에 따로 전달 드리겠습니다.” “지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기영이 형이… 일단… 일단은….” “두 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조용히 돌아가세요.” “비켜요. 사제를 불러야 해요. 지금 당장 불러야 한다고요.” “당신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걱정하시는 사안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이 일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라파엘 님께서는 할 일을 하시면 됩니다.” “비켜요….” “돌아가세요. 두 번 말씀드리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비… 키라고!” 콰드드득! 자신도 모르게 뛰어들어 가봤지만 느껴지는 것은 차가운 바닥. 목 위로 서늘한 감촉이 느껴진다. 자신은 바닥에 형편없이 꼬꾸라졌고, 박리안이라는 여자가 자신을 위에서 짓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순식간에 몸이 공중에서 한 바퀴 나돌았고, 결과는 보이는 그대로. 처박힌 얼굴과 맞닿은 차가운 바닥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고 해봤지만 이미 구속된 육체가 움직일 리가 없다. 허리춤에 매달린 검은 마치 장식인 것처럼 자신의 말에 응답하지 않는다. 최대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자, 조용히 쓰러져 있는 이기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봐도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이지 않은가. 그 이기영이… 그 이기영이 정신을 잃고 형편없이 쓰러져 있다. ‘당신,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어째서 그렇게 쓰러져 있는 거야. ‘당신 악당이잖아.’ 왜 그렇게 괴로운 듯이 몸을 웅크리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건데. ‘대륙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독재자잖아.’ 그런 모습 보이지 마. 내 앞에서 그런 모습 보이지 말라고…. ‘일어서. 당장 일어나라고.’ 약한 척하고 있는 거 다 알아. 지금도 연기하고 있는 거 전부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일어나.’ 작다. 무척이나 작아 보인다. 그렇게 무섭고 두려워했던 이가, 악마의 화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가, 이상하게 너무나도 작아 보인다. 힘을 주면 부서질 것만 같은 모습 아닌가. 마치 병든 새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왜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을까. 왜 지금까지는 저런 모습을 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비켜….” “돌아가신다고 확언해 주시면 구속을 풀어드리겠습니다.” “비키라고….” “실례를 용서해 주십….” “비키라고 말했잖아!!” 콰아아아아앙!! 터져 나온 것은 회색의 빛.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던 이가 튕겨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곧바로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언제 자세를 바로잡았는지 두 자루의 검이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빨라.’ 지금의 자신은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쾌검. 본의 아니게 머릿속으로는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 “그만하세요.” 그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익숙한 목소리. 정신을 완전히 잃은 이기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기다란 창을 등 뒤에 멘 여자였다. “수습은 제가 하겠습니다. 박리안 님께서는 주변의 통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라파엘 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조용히 방에 들어가세요. 그리고….” “…….” “당신은 오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겁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 절대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진실. 이기영, 그자가 그렇게 숨기고 싶어 하던 비밀의 일부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순간이었다. “거짓말이야….” “…….” “거짓말… 이라고….” # 625 회귀자 사용설명서 625화 대륙의 진짜 어둠(1) ‘거짓말….’ 괜스레 머리를 부여잡게 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전신에 감돈다. 이상하게도 손은 점점 떨려왔고 호흡이 거칠어지는 게 느껴진다. 모든 이들이 신의 현신이라고 부르는 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신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 하지 않았던가.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베니고어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아파?’ 이렇게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 아닌가. 갑작스레 찾아온 현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다. 앞에 놓인 책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맞은 편에서 재촉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짜증을 담은 목소리가 아니다. 눈앞에 있는 대상 역시 무척 초조해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평소와는 다르게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조혜진. 명실상부 파란 길드의 3인자. 길드 비서실장의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이었고 파란에서 가장 신뢰받고 있는 파티원이기도 했다.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이었고 원리원칙을 그 누구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는 성격이라고 판단했던 그녀 역시, 걱정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상태였습니까. 부길드마스터가 쓰러지게 된 경위에 대해서….” “…….” “라파엘 님?” “…….” “라파엘 님.” “멍하니… 멍하게 다른 곳을 바라보시다가 머리를 부여잡으셨어요. 평소처럼 대화하시다… 오늘 일정은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겠다고 하시고는… 반대쪽으로 계속해서 뛰어가셔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아서…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대로… 쓰러져 버릴 것 같아서….” “그다음에는 어떻게….” “잘 모르겠어요. 그냥… 뒤를 따라 가보니 형이 쓰러져 있어서… 그다음은 알고 계신 그대로예요. 박리안 님이… 제 앞을 가로막았고… 저는 형이 잘못되는 줄 알고… 형은 괜찮으신 건가요?” “…….” “말해주세요. 괜찮으신 거 맞죠?” “네, 현재 안정을 취하는 중입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는 못하셨지만, 곧 일어나실 겁니다.” “어째서 사제를 부르지 않은 건가요?” “라파엘 님께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 일입니다.” “어째서 사제를 부르지 않은 거냐고 물었잖아요! 뭔가 조치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제들을 불러 해결될 일이었다면 이미 훨씬 전에 해결됐을 겁니다. 다른 건 묻지 말아주세요. 그저 이것만 기억하고 계시면 됩니다. 라파엘 님께서는 오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겁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겁니다. 오늘 일어난 일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해주세요. 꼭 부탁드립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부길드마스터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 “형을 직접 봐야겠어요.” “…….” “비밀을 지키는 걸 원하시는 거라면 저도 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협박하거나 거래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형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겠어요. 제 눈으로….” “…….” “비밀은 지킬 겁니다. 제 검에 맹세코, 반드시.” “후우….” “저도… 대충은 알고 있어요. 그저… 확신이 필요할 뿐이에요.” 결심했다는 표정, 어쩔 수 없겠다는 눈빛,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조혜진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등을 돌릴 뿐이었지만 저 행동이 긍정의 표현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라나서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문. 이윽고 문이 열렸고 침대 위에 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이다. 왠지 모르게… 왠지 모르게 비현실적이다. 아까 본 모습과 다르지 않다. 표정이 한결 편해 보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가느다란 손목과 초췌해 보이는 얼굴, 정말로 죽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모습이었다. 손이 떨려온다. 괜스레 입술을 꽉 깨물게 된다. ‘그럴 리가 없어….’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다. 저런 사람이… 저런 사람이 세상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악마일 리가 없다. 저렇게 약하고 여린 사람이 모두를 속이고 있는 사기꾼일 리가 없다. 마치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지 않은가. 저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잘못 생각한 거야. 뭔가…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거야.’ 단장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단장님이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 자신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 결정적으로 놓치고 있는 한 개의 퍼즐 조각이… 분명히 놓여 있다. “부길드마스터는….” “네.” “기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게… 그게 무슨….”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 “물론… 하하하, 물론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닙니다. 점차 나아지고 있고, 생각하시는 것처럼… 네, 생각하고 계시는 것처럼 위험한 상황도 아닙니다. 그렇게 위험한 상황은 아닐 거예요. 지금은…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시는 정도니까. 그러니까, 큰일은 아닙니다. 예전에 있었던 일들은 전부… 기억하고, 기억하고 계시니까요. 아직… 아무것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울음을 참고 억지로 말을 잇는 듯한 목소리. ‘거짓말이 아니야.’ 저 조혜진이라는 여자가 슬퍼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처연하게 들려와, 나 자신도 슬퍼지게 만들 정도였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는, 형의 손을 꽉 잡고 그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댄 이후, 말을 이었다. “머리를 붙잡고 두통을 호소하거나 혼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증상을 보이신 이후에는 대개 이렇게 잠에 빠져들고는 하십니다. 심한 경우에는… 사흘이 넘게 잠에 빠져 계실 때도 있고요….” “어쩌다가… 이렇게 되신 겁니까.” “27군단 소환사태.” “…….” “아마 라파엘 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니까 부길드마스터께서… 악마에 의해… 네, 그 이후에 얻은 후유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 “자세한 것은 저도 모릅니다.” 안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른다. “어째서….” “…….” “어째서… 이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형을… 형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건가요.” ‘내 잘못이야.’ “이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이 사람을 전쟁터로 내몰 수가 있어.” ‘나 때문이야….’ “어떻게… 이 사람한테 이 모든 책임을 강요할 수가 있냐고!” 악마의 기운에 노출되어 부작용을 얻은 것이라면, 결사단과의 마찰 역시 그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어쩌면 그날 일어났던 사건이 그에게 치명적인 독이 됐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이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은 거냐고!” 오히려 내버려 두지 않은 것은 자신들이다. 대륙을 위해 희생하고 빛을 위해 살아가는 이를 멋대로 오해한 것은 자신들 쪽이다. 그에게 다시 한번 고통을 안기고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내 잘 못이다. 안 그래도 한계에 다다른 사람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선사한 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당신들… 생각만 할 수가 있냐고… 제기랄!” 나 자신에게 외치는 목소리였다. 끝까지 그를 믿지 않은 내게 외치는… 처절한 절규였다. “그게 당신들의 방식이야! 그게… 그게 당신들의 방식이냐고… 자기들 멋대로 한 사람을 내몰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게… 그게… 흐윽… 당신들의….” ‘내 잘못이야.’ “흐으으윽….” ‘내가… 내가 형을 이렇게 만든 거야.’ 내가… 내가 형을 이렇게 만든 거라고…. “어리광부리지 마세요.” “뭐?” “어리광부리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당신 멋대로 그를 판단하지 마세요. 부길드마스터 스스로가 결정한 일입니다. 대륙에 남길 것이 있다고… 기억이 전부 사라지기 전에… 저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시겠다고 결정하신 일입니다. 모든 게 그의 선택이에요.”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너.” 마치 목을 조이는 것만 같은 느낌. “…….” “내 친구를 병신 취급하지 마.” “그런 게….” “그가 스스로 결정한 일이야.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떠들어. 함께 지낸 지 고작 몇 달도 되지 않은 네가 뭘 안다고 내 앞에서… 그렇게 모든 걸 안다는 듯이… 지껄여. 네 어쭙잖은 소견으로….” “…….” “그의 긍지를 더럽히지 마.” “흐윽… 흐으으윽… 끄으윽….” “…….” “형… 흐으윽… 혀엉….” “나가주세요.” “흐으으윽…….” “나가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안정이 필요해요. 논쟁이 필요하다면… 이후에 시간을 만들겠습니다. 약속은 지키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그게… 그에게 보탬이 되는 일입니다.” 눈앞이 흐려진다. 어마어마한 책임감이 전신을 짓누른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당장에라도 쓰러지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누구보다 울고 싶은 것은 저 여자일 것이다. 펑펑 울고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은 저 여자일 것이다. 조혜진의 말이 맞다. 자신은 이기영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떠들 권리가 없다. 오히려 용서를 구함이 옳다. 미안하다고 잘못 했다고…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한다. 힘겹게 발걸음을 옮긴다. 도저히 가슴에 품을 수 없는 감정을 품고 그렇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발걸음을 옮긴다. 감정은 계속해서 요동치고 있다. 하지만 꿋꿋이 자리에 버티고 있는 조혜진의 모습을 바라본 이성은 필사적으로 그녀의 말을 되새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돼.’ 잘못을 바로잡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이 수수께끼 같은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끼워 맞추는 일. 아직도 형을 의심하고 있냐고? 그게 아니다. 이건 바로잡음, 그래, 바로잡음에 관한 이야기다. ‘이제… 알겠어요, 형….’ “…….” ‘이제 알 것 같아요, 단장님. 저희가… 저희가 놓치고 있었던 게 뭔지…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단장이 조사한 모든 게 잘못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그 자료들은 모두 타당해 보였고, 실제 증거로도 효력이 있을 만큼 치밀했으니까. 결사단이 조사한 자료들에 거짓은 없다. 과장과 악의가 있을지언정, 결사단은 진실을 향해 달려가고자 했다. 단장과 단원들이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이기영이라는 인물 외에 다른 이들을 상정하지 못했다는 것. 언론통제와 독재를 주도하는, 권력을 지닌 인물은 따로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을 만들고 그를 고통스럽게 한 이는 분명히 그와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그의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속이며 그를 병들게 하고 그를 결사단의 앞으로 내몬 벌레 같은 인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누구야.’ 그와 가장 가까운 이. ‘누구지?’ 그와 비슷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 ‘생각해.’ 이 대륙 내에서 유일하게 이기영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가능성을 떠올리던 중, 가장 먼저 진실에 도달한 것은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김….” 그가 바로 대륙을, 형을 컨트롤하고 있는 진짜 악마였다. “김현성….” 퍼즐이 완성됐다. # 626 회귀자 사용설명서 626화 대륙의 진짜 어둠(2) “부길드마스터? 정신이 드십니까? 부길드… 마스터?” “왜… 징그럽게 손을 잡고 있습니까?” “누가… 누가 당신 손을….” “저 안 죽었습니다… 진정 좀 해요.” “…….” “가만 보자… 혜진 씨, 지금 울어요?” “장난치지… 장난치지 마세요. 지금 그런 장난을 치고 싶습니까?” “아니, 누가 장난치고 있다고 그러세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데.” “저번에도… 그런 식으로 놀리지 않았습니까… 저 안 울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진짜 장난치려고 마음먹었으면 이 정도로 안 끝내지.’ 아마 방금 나왔던 대사를 지껄이지 않았을까.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키이야….’ 그의 긍지를 더럽히지 마. ‘키야… 혜진아, 시바… 혜진아아아아… 진짜 네가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야.’ 저도 모르게 웃음을, 아니, 눈물이 튀어나올 뻔한 명장면이었다. 가만히 누워 있던 내 얼굴이 다 붉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단언컨대 이번 기획에서 가장 킬링 포인트가 되는 장면이리라. 물론 가장 커다란 위기를 안겨준 장면이기도 했고…. 조혜진과 아름다운 우정을 쌓고 있다는 생각은 훨씬 오래전부터 해왔지만, 우리 우정이 완벽하게 완성됐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혜진을 무대로 끌어들인 건 조금 미안하다. 하지만 예상하던 그대로의 결과에 절로 포근한 미소가 지어진다. 이런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리얼함. 사실상 조혜진이 살린 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러게 지가 어쩔 건데? 라파엘 별것도 아닌 게… 어디서 철벽을 깔아?’ 함락시키기 어려운 성벽이라고 생각해 만발의 준비를 해놨건만 준비한 것의 반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함락. 울음을 터뜨리며 형이라고 부르는 놈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너무 많은 것을 준비한 내가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빛기연 카드는 괜히 준비해 달라고 했네.’ 이지혜에게 새 취미가 생긴 거냐고, 만약 그런 거라면 자기 요정도 준비하겠다고 한 소리 들었는데…. ‘뭐 아무렴 어때. 결과만 좋으면 된 거지.’ 그야말로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괴로워하고 있지 않을까. 마지막에 보여줬던 반응을 보면 가까운 시일 내에 석고대죄해 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물론 자신이 악마계약자 라인이었다는 사실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비벼올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기왕이면 안 밝히는 게 좋지.’ 본래 마음의 짐이 많이 남아 있는 사람일수록 컨트롤하기 쉬워지는 법이니까. 나를 반병신으로 만드는 데 한 손을 거들었다는 사실이 평생 녀석을 찌르는 죄책감으로 남아 있게 되지 않을까. 내 입장에서는 굳이 그 감정을 해소시켜 줄 필요가 없다. 혹시나 놈이 고백할 낌새가 보이면 곧바로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와는 경우가 달랐으니까. 좋은 결과에 실실 미소가 지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푸흣… 푸흐허하하하헤헷.’ 이제야 정리가 끝난 것 같은 느낌. 마음 같아서는 축배라도 들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내 소중한 친구가 그걸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얘 얼굴 보니까 참 좋네, 훈훈하니. 고맙다, 혜진아. 진짜, 네 공이 컸어. 바쁜 일만 마무리되면… 진짜 조혜진 아바타 한 번 더 해줄게. 너도 이제 보상받을 때 됐잖아.’ “뭘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고 계시는 겁니까.” “그냥 아무것도 아닙니다.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을 뿐이에요. 저도 사람인데… 그런 거에 기뻐할 수도 있죠.” “기억은… 괜찮으신 겁니까?” “네, 깜깜한 느낌은 없어요.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제가 쓰러지기 전의 장면도요. 제가 깨어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닙니다. 3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부길드마스터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은 오지 않았어요.” “라파엘은….” “죄송합니다.” ‘아니야,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우리 혜진이 책임감 하나는 기가 막혀 가지고…. 약속을 어기게 된 게 그렇게 미안했어? 근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그렇지?’ “알아버렸군요.” “입 밖으로 내뱉지 않겠다는 확언은 받아 냈습니다. 성검에 맹세할 정도였으니 부길드마스터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네?” “언제까지 숨기실 겁니까?” “그거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니었어요?” “이야기를 자기 마음대로 끝내지 마세요.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부길드마스터에게 심각한 일이 생기면 곧바로 길드마스터께 보고 드리겠다고요.” “아, 그랬었나요. 기억이 잘….”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드는 쓰레기 같은 장난치지 마세요. 저 지금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혜진아….’ “심각한 일이 생기지는 않았으니까… 알리지 않으시겠군요.” “아니요, 이번 건 충분히 심각한 일입니다.” “아니에요. 심각한 일은 아니에요. 조금 머리가 아팠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곧바로 몸을 털고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몸에도 이상 없고 머리통에도 이상이 없어요. 최근에 너무 체력적으로 힘든 일이 있어서 조금 기력이 쇠약해진 것뿐입니다. 오히려 차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죠. 증상을 겪고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이상이 없지 않습니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 ‘거짓말은 아니지.’ “피로 회복 포션 한 병이면 전부 해결될 거라니까요?” “그 피로 회복 포션을 달고 사시는 분이 말은 참 많으시네요. 아무튼, 저는 진지하게 말씀드린 겁니다. 딱 이번까지입니다.” “네?” “딱 이번에만 눈 감아드리는 겁니다.” ‘그래야지.’ “단언하건대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곧바로 길드에 알릴 겁니다. 저도… 저도 더 이상은 부길드마스터를 지켜볼 자신이 없어요. 제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제가 없는 곳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셨습니까? 만약에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졌으면 어쩔 뻔했어요? 만약에… 만약에….” 그럴 일은 없다. 조혜진이 이곳으로 도착할 시간 정도는 완벽하게 계산하고 있었고, 혹시 생길 수 있는 변수도 전부 계산해 놓은 상태였다. 별일 없을 거라고 반박하고 싶기는 했지만, 일단은 조혜진의 말을 들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는 문제니까. 혹시라도 정말로 위쪽에서 나를 호출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베니고어 쪽도 아무 이상 없으니 이 순간을 즐기는 게 가장 옳은 행동이다. “아무리 리안 씨가 붙어 있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위험해요. 지구에서도 이런 상황이면 위험하다 활동하는 것을 만류했을 겁니다. 하물며 대륙은 두말할 것도 없어요. 그리폰을 타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연금실험을 하는 중이었다면… 잘못하면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블랙아웃 되는 걸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부길드마스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큼, 잔소리는 이쯤 합시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누구보다 자기 몸 잘 챙기는 게 바로 접니다.” “후우… 그건 알지만… 어떻게… 5현장 연구에 차도는 있는 겁니까? 당신 머리에 도움이 되는 게 맞아요? 계속 지켜봐도 되는 겁니까?”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걱정 좀 하지 마세요. 저 같은 사람 걱정해 봤자, 다 혜진 씨 손해예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누군 좋아서 걱정하는 줄 압니까. 아무튼… 오늘 하루는 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데이트 신청 아니죠?” “미친 새끼.” “욕하지는 마요.” “욕 나올 만한 말을 하지 마세요. 그리고 오늘 스케줄도 전부 취소했으니 그렇게 알아두시고요. 그럼 저는 길드마스터에게 연락 좀 하고 오겠습니다.” “…….”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오늘 복귀하기 힘들 것 같다고 말씀드리는 것뿐이니까.” “네, 혹시 쓸데없는 걱정 하고 있으면 조만간 뵈러 간다고 말씀 좀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조혜진이 방 밖으로 나간 이후에는 주먹을 꽉 쥐며 다시 한번 작은 승리를 자축했다. 오늘 스케줄이 전부 취소됐다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나도 쉴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특히나 오늘같이 성과를 얻은 날에는 조금 더 쉬고 싶기도 하고…. 조혜진과 파티라도 즐기면서 적당히 하루를 보내는 게 가장 베스트이지 않을까. ‘라파엘한테도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다른 의미로 멘탈이 조금 망가진 것 같기는 했지만, 초조해할 필요가 없다. 이미 요리가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조금 다독이고. 마, 나는 괜찮다고 한 번 해주고. 마,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면서 용기 내라고 한마디 하면 일상으로 복귀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조혜진에게 녀석이 뭘 하고 있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이불이라도 뒤집어쓰고 있으려나.’ 그럴 확률이 가장 높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여신의 손거울을 집어 들었지만… 거울에는 녀석이 비치지 않는다. ‘개인 연무장? 벌써 극복한 거야? 우리 용사님? 악마 놈들 처단하기로 한 거지? 역시 우리 회색빛의 용사는 다르다니까.’ 내 생각보다 멘탈이 강한 아이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손가락을 놀렸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는다. 도서관이나 개인정원, 식당, 그 어디에서도 녀석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문제.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은근슬쩍 불안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야 여기서 낄낄거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녀석에게는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온 모든 것이 부정된 사건이 아니었던가.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오바야.’ 자신의 죗값도 치르지 않을 정도로 무책임한 녀석으로 키운 기억은 없다. 혹시나 조혜진이 나 대신 스케줄을 지시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었을 때, 타이밍 좋게 그녀가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허락은 받았습니다. 부길드마스터 말처럼 뭔가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으셔서 조만간 뵙겠다는 말씀도 전해 드렸고요. 편하실 때 들러달라고… 그리고 건강 꼭 챙기시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잘됐네요. 그나저나 혜진 씨.” “네?” “라파엘 어디 있어요?” “제가 말씀 못 드렸군요. 본인이 직접 훈련을 하고 싶다고 요청해 와서… 아마 지금쯤 린델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린델이라면….” “네, 길드마스터께서 시간을 내주기로 하셨습니다.” “현성 씨가 스케줄이 되요?” ‘뭐야… 너, 이 새끼 김현성한테 말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초조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성검에 맹세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쪽의 비밀을 까발리러 돌진했다기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그 이유야 너도나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인 거고. ‘아프니까 청춘이다.’ 무언가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 627 회귀자 사용설명서 627화 대륙의 진짜 어둠(3) 아마 조혜진의 마지막 말이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그게 그에게 보탬이 되는 일입니다. 본인 나름대로 결론을 찾은 것이다. 바쁜 벌꿀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고 예전 높으신 분께서 발언하지 않았던가. 딱 그 짝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자신의 몸이 부셔져라 훈련하고 성장하는 것만이 나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 -……. -제길… 제길…. -……. -으아아아아! ‘어우, 너무 살벌하게 싸우는 것 같은데.’ 어느 정도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쪽의 생각보다 더 많은 걸 깨달았나 보다. 저 모습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과거의 선택에 대한 후회였고, 속죄였다.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러 대는 꼴은 가관이다. 배운다기보다는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만 같다. 거의 사흘간 저런 상태였다는 걸 생각하면 다른 말이 필요 없다. 그래서 이렇게 린델까지 직접 찾아오지 않았던가. ‘저래서 수업이 되려나 몰라.’ 검에 대해 무지한 내가 이렇게 느끼는데 녀석과 마주한 김현성은 오죽할까. 예상했던 것처럼 표정을 찡그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어떻게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 하지만…. ‘생각 외로 잘 봐주고 있는데?’ 성실하게 녀석과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최대한 라파엘과 비슷한 수준의 신체 능력으로 상대해 준다는 느낌이기도 했고…. 애초에 김현성이 조금이라도 힘을 내보자고 생각했다면 이미 녀석은 어디 한 군데가 부러져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지 않았을까. 심지어 회색빛을 있는 그대로 끌어다 쓰고 있는 라파엘과는 다르게 김현성은 마력조차 사용하고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순수한 검술. 기본기에 바탕을 둔 동작으로만 녀석을 상대하고 있다. ‘대단하기는 하네.’ 여기서 보면 뭘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작은 생채기라도 내보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녀석에게 김현성은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부딪쳐 줄 뿐이었다. 심지어 움직임이 제한된 작은 원 안에서 말이다. 결국에는 제풀에 지쳐 녹초가 되어버린 라파엘의 모습. 누가 봐도 탈진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마음 다잡은 게 맞네.’ 그렇지 않다면 저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하아… 하아…. -굳이 코멘트를 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습니다. 그동안 배운 건 잃어버리고 오신 겁니까? -……. -그렇게…. -으아아아아아!! -……. 김현성이 막말을 잇는 도중에 라파엘이 몸을 날려왔지만, 곧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맞은 곳을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라파엘이 시야에 비친다. -근성이 좋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수업은 여기서 끝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더 이상 진행한다고 해도 별다른 진전이 없을 것 같으니… 마무리 훈련은 개인적으로 진행하시고 식사할 준비나 하세요. -하아… 하아…. ‘역시 우리 현성이 세다.’ 심지어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그 대상이 라파엘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조건으로 임했음에도 저런 결과가 나온 것을 보면, 역시 김현성은 김현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 훈련을 끝내고 빠른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녀석의 모습이 여신의 손거울에 비쳤다.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오지 않을까 싶어 거울을 품에 넣자 타이밍 좋게 똑똑똑 소리가 들려왔다. “기영 씨.” “네, 들어오셔도 됩니다.” 김현성이 천천히 방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눈에 보인다. “와 계신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길드에는 오랜만이군요.” ‘너도 여기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야.’ “아무래도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으니까요. 대륙 보호 관리 위원장으로서 특정 길드를 너무 편애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 물론 제가 파란 길드를 완전히 놓아버리지 못했다는 건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세간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는 합니다.” “네… 그건 알고 있지만.” “그나저나 아직 방이 그대로라서 깜짝 놀랐습니다.” “희영 씨가 그대로 관리해 주신 것 같더군요. 떠나기 전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기영 씨가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김미영 팀장님께서 정리하시기도 했고요.” 주변을 둘러보자 확실히 이전에 있던 내 방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가방 진열대도 그대로였고,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내부도 그대로다. 심지어 창문이 없는 것까지 그대로이지 않은가. 괜스레 벽 쪽을 바라보자 아직도 그날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딱 한 가지 달라진 것은 진열대 안에 새로운 녀석들이 들어서 있었다는 것. 이쪽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모르는지, 김현성은 차분한 미소를 보내기에 여념이 없다. 방금 라파엘에게 보여줬던 표정과 온도 차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이런 모습이 평소의 김현성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내가 길드를 찾아와 기쁜 모양이었다. ‘나쁘지는 않네.’ 나 역시 한번 다시 오고 싶었다. 린델은 그나마 내가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으니 말이다. 도시 복구 계획에 한 손 걸치고 있었던 만큼 린델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확실히 실제로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자리 잡은 모습은 생기가 흘러넘친다고 할 만했고, 멋지게 발전한 모습은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걸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다. 폐허가 된 그 옛날과 비교하면 두 눈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폰을 타고 위에서 바라본 린델의 모습에 얼마나 깜짝 놀랐던가. ‘와보길 잘했네.’ 라파엘의 때문에 들렀을 뿐이었지만, 확실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김현성이 괜찮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으니,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기분이었다. “와보길 잘한 것 같습니다. 이번이 아니면 당분간 오기 힘들었을 텐데….” “네, 워낙 바쁘시니… 혜진 씨한테 최근에 피곤해하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조금 편하게 쉬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조혜진, 얘는 뭐 이렇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 “하하… 괜찮습니다. 체력관리는 하고 있으니까요. 어제도 일을 쉬기도 했고… 지금도 쉬는 거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조금 어떻습니까?” “네?” “라파엘 말입니다.” “…….” “…….” “글쎄요.” “…….”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재능이 크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 보통 이런 이들은 성장기대치가 높습니다. 물론 한계가 정해져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만….” “…….”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라파엘은 강해질 겁니다. 하지만… 기영 씨가 원하시는 수준까지 성장할지는 회의적입니다.” “아….” “당연히 아쉬우시겠지만….” ‘전술 라파엘은 접을 수밖에 없는 건가.’ 물론 이건 김현성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하지만 나 역시 지금의 녀석을 전술로 사용하는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빠르고 강한 것 이전에 녀석이 내가 요구하는 미션을 완벽하게 수행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경험이 부족해.” “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커다란 틀을 잡아주는 것은 이쪽이지만, 세세한 미션을 수행하는 건 김현성이다. 내가 A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라는 지령을 내렸다면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온전히 녀석의 책임이라는 거다. 물론 최대한 세부적인 전장의 상황을 전달해 주기도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때려박아 주기는 하지만, 언제 어디서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상황. 신체 능력이나 스텟 이전의 이야기라는 거다. 1회 차라는 지옥에서 구르고 구른 김현성 정도가 아니라면, 아마 이쪽의 미션을 수행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너무 빨리 희망을 버리는 건 안 좋기는 한데….’ “일단은 어떤 방향으로, 어느 정도 성장하는지를 보고 결정을 내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벌써 판단을 내리기에는 시간이 조금 촉박했으니. 일단 식사라도 하시죠, 오래 기다리셨을 텐데. 좋은 음식들을 준비해 놨습니다.” “아, 네. 오랜만에 길드 내에서 식사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군요. 옛날 생각도 나고요. 물론 새로 지어진 길드 하우스에서는 그리 오래 지내지는 못했지만, 뭔가 그리운 느낌입니다.” “그럼 조금 머물다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오늘 하루라도 괜찮다면….” “글쎄요. 저도 정확히는… 스케줄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변한 린델에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지만, 또 현장에서 어떤 사고가 날지도 모르니….” “네, 그랬었죠….” ‘현성이 기분 다운됐네.’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랜만에 김미영 팀장이나 선희영을 만나 할 이야기도 있었고…. 특히나 김현성이 저런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김현성 때문이 아니라 라파엘 때문에 생긴 일정이었다. 얼굴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고통을 잊기 위해 노력하는 녀석을 위해서 말이다. ‘내 얼굴을 보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 이건데… 죄책감 한 스푼 더 드셔야죠.’ 아무리 그래도 3일 동안 미친놈처럼 훈련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똑똑똑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라파엘 왔나 보네.’ 혹시나 얼굴을 보는 걸 피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직접 찾아온 것을 보면 그건 아니었나 보다. 우물쭈물하는 목소리가 밖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들어오세요.” 그렇게 말하니 천천히 문을 열린다. 기절 사태 이후로 처음 본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어색해지려고 한다. ‘별거 아니지, 뭐….’ 당연하지만 라파엘이 느끼고 있을 감정에 비하면 별 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애초에 이쪽으로 도망치듯 달려온 이유 역시, 내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어떤 얼굴로 나를 마주 봐야 할지, 처음 만났을 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또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음이 분명하리라. 하지만 실제로 본 표정은 이쪽의 예상과는 다르다. 굉장히 다급해 보였고 무엇보다 이쪽을 걱정하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뭐, 이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지 때문에 내가 이곳으로 온 줄은 알고 있는 모양이다. 오랜만에 본 내 모습이 생각보다 멀쩡하다고 느꼈는지, 커다랗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나 역시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을지 조금 고민하기는 했지만, 이럴 때 가장 알맞은 답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활짝 웃는 게 좋지.’ 평소대로. 평소대로 행동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단언컨대 이 미소는 녀석의 양심을 사정없이 찌르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저… 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지 않은가. “저, 저… 그러니까,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라파엘 님.” “네… 네, 형.” “전부 다… 괜찮습니다.” “흐윽, 흐으으윽….” 울음을 꽉 참는 듯한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여는 녀석. 말없이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자 고개를 땅에 떨군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모습은 가관.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아침 드라마 같은 상황에 김현성이 다소 의아해했지만…. ‘나중에 적당히 변명해 주면 되겠지, 뭐.’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나자, 녀석은 겨우 감정을 추스른 것 같았다. 조금 이상했던 것은 자꾸만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 좀 더 주변을 바라볼 여유가 생긴 이후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방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가구들이 비싼 거라서 그래? 방이 조금 넓지? 괜찮아, 형이 다 설명해 줄 수 있어.’ 평소였다면 움찔했겠지만 이미 함락된 녀석이지 않은가. 불안한 듯 손으로 내 소매를 꼭 잡아당기는 녀석의 손짓만 봐도 하나하나 일일이 반응할 필요가 없다. “형, 여, 여긴….” 당당하게 이야기하자. 진열대가 신경 쓰이기는 하는데… 당당해서 나쁠 건 없다. “제 방이었던 곳입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모습.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놈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 628 회귀자 사용설명서 628화 대륙의 진짜 어둠(4) 그곳은 창문 하나 없는 방이었다. ‘말도 안 돼….’ 말 그대로, 그곳은 창문 하나 없는 방 안이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방이 아닌가. 노을빛의 검사라는 녀석의 이명처럼 인공적인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은 이상하리만큼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기분 나쁜 분위기, 그래, 기분 나쁜 분위기다. 음습하고 답답하여 온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구역질이 나는 실내는 머리를 핑하고 어지럽게 만들었다. 지금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게 현실이 맞는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끊임없이 늘어져 있는 사치품들… 대륙의 모든 값비싼 것들을 모아놓은 것만 같아 보인다. ‘사용한 흔적이 없어.’ 하지만 사용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인위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화려한 가운데 자리 잡은 형의 모습은 마치 화려한 새장 속에 갇힌 새 같아 보였다. ‘어째서… 어째서 잠금장치가 바깥에 있는 거지?’ 바깥에서 방을 잠글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어째서… 창문이 없는 거야.’ 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은가.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다. 형은 이런 취급을 받고 있었다. ‘저 목걸이는 또 뭐야.’ 위치 추적 기능이 있는 아티팩트? 저런 게 어째서 필요한 건데. ‘이런 곳에서… 이런 곳에서 살아왔던 거라고? 이런 곳에서 지냈다고?’ 정확히 얼마나 이곳에서 지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장소에서 2주 이상을 지내면 정신에 이상이 생기고 말 것이다. 수많은 금은보화와 사치품에 둘러싸인다고 한들, 저 사람은 기뻐할 사람이 아니다. 참아야 한다고, 더 이상 이상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눈을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정상이 아니다. 이 장소는 비정상적인 곳이고 사라져야 할 곳이다. 당장에라도 검을 휘둘러 모든 걸 때려 부수고 싶은 심정에 저도 모르게 손이 덜덜덜 떨려오고 있었다. ‘파란 길드원들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조혜진. 그 여자는 이걸 알고 있었던 건가? 다른 길드원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정황상 감금당하고 있었다는 게 확실하지 않은가. 감시당하고, 억압당하고 있었다. 지난 시간 동안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이런 생활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 ‘형을 그렇게 믿고 따르던 길드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라는 의심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형과 사귀는 사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정하얀은 이 방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게 맞나? 어쩌면 그의 협력자일 수도 있다. 조혜진, 그 여자를 믿고 싶었지만, 저 새장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믿지 말라고 말해오는 것만 같았다. 제일 가관인 것은 형의 반응이다. “길드에서 마련해 준 거처였습니다.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아서… 오래 지내지는 못했지만요.” “…….” “제가 사용하기에는 너무 넓어서… 아무튼 여기서 이러지 말고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하하….” ‘자각하지 못하고 있어.’ 무엇이 잘못된 건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야.’ 이런 걸 깨닫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하고… 무조건 희생하는 모습은 바보라고 부르기에 충분했지만… 결단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이미 한참 전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했어야 함이 옳다.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깨달았어야 함이 옳다. 어쩌면… 어쩌면 어떤 마법적인 방법으로 인해 세뇌된 것이 아닐까.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것 또한 그 부작용일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을 떠올려 봤지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완벽한 세뇌 마법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 가능성이 작을뿐더러 김현성에게도 좋은 방법이 아닐 게 분명했다. 녀석은 형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원하고 있다. 단순한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게 아니다.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기영이라는 순백색 도화지를 더러운 색으로 물들이려 하고 있다. ‘가증스러운 개새끼.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개 같은 자식.’ “괜찮으신 겁니까? 라파엘 님? 지금….” “괜찮아요, 형.” “안색이 좋지 않은데, 무리하지 마시고 들어가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에요. 같이, 같이 있을 거예요.” “불편하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전혀요.” ‘둘만 있게 하면 안 돼.’ “…….” “…….” “그럼 슬슬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영 씨.” “네.” 언제나 싸늘했던 눈빛은 어느새 친절함으로 무장되어 환한 웃음을 보내고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김현성의 가식적인 모습은 가면을 썼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평소와 달랐다. 만약 저 악마가 형을 세뇌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마법이나 약물과도 같은 인위적인 방법의 세뇌가 아니라면, 아마 저런 방법들을 통해 이기영이라는 사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 것이 아닐까. 형의 자아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흔들고… 스스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닐까. 종국에는 형을 파국으로 이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이쪽은 알 수 없는 음습하고 비열한 행위들이 있었을 것이다. 튜토리얼 던전의 공략 때부터 함께 했다는 걸 떠올려 보면 더욱더 그럴듯해진다. 극적인 상황에서는 강한 무력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충분하다. 계속해서 형이 자신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도했고, 결과적으로 완벽한 신임을 얻었다. 모든 게 녀석이 의도한 그대로 인 게 분명하리라. 어째서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는지 당황스러울 정도, 정황은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아.’ 김현성의 지난 행적을 돌이켜 보면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지 않은가. 교국 혁명 때도… 라이오스 사태 때도… 심지어 악마 숭배자 이토 소우타 사건이 터졌을 때도…. ‘녀석은 없었어.’ 녀석은 뒤늦게 자리에 도착했다. 그 시간에 녀석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은폐되어 있다. 녀석이 정말 대륙을 손에 넣고 뒤흔들고 있는 악마가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가장 확실한 정황을 보고 어떻게 이 일을 부정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해야…. ‘형을 구할 수 있지?’ 어떻게 해야 이 자의 손에서 형을 구해낼 수 있지? 지금 저 목을 치면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 저자를 이길 수 있을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봤지만 어떻게 판단해도 불가능한 것투성이. 현재로서는 저 괴물을 이길 방법이 없다. 운이 좋아 녀석이 방심했다고 한들, 검을 휘두르기 전에 자신의 목이 먼저 달아날 것이다. 김현성은 지독하리만큼 강했으니까. ‘형을 설득하는 방법은….’ “이렇게까지 준비할 필요는 없었는데…. 감사합니다, 현성 씨.” ‘무리야.’ 무척이나 환하게 웃고 있는 형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두 번째 방법 역시 무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무리라고….’ 의심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눈빛이었고… 자신에게조차 보여주지 않은 웃음이었다. 김현성이라는 인간의 진실에 대해 말해주려고 한들 듣지 않을 확률이 높다. 네가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김현성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형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길드 직원분들께서 힘을 좀 써주신 것 같더군요.” 저 거짓된 모습으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속여왔을까. “일단은 감사히 먹겠습니다. 라파엘 님도 드세요.” “네, 형.” 커다란 테이블이 부족하게 보이는 호화로운 만찬. ‘더러운 자식.’ 전 대륙에서 벌어들이는 수많은 재화로 호화로운 생활을 일삼고 있는 것은 형이 아니라 녀석이었다. 권력과 명예를 이용해 주변 사람들을 컨트롤하는 것은 형이 아니라 녀석이었다. ‘힘이 있었다면….’ 싸울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그런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들어와 꽂힌다. ‘힘을… 힘을 키워야 돼. 기다리다 보면 분명히 기회가 올 거야. 분명히 잡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인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상황은 안 좋아질 것이다. 형은 점점 어둠 속으로 굴러떨어질 것이고 놈의 영향력은 점점 커질 것이다. ‘도망쳐야 해. 이곳을 벗어나야 해.’ 현재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가 한계였지만,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어떻게… 입맛에는 조금 맞으십니까, 라파엘 님?” “네… 네, 형.” 저 사람이 나를 따라와 줄까. 아니, 내가 저 사람을 구할 자격이 있는 건가. 따지고 보면 자신이 가장 커다란 죄인이다. “오늘도 훈련받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많이 힘드셨을 텐데… 잘 견뎌 주시는 것 같아 제가 다 기쁘더군요. 현성 씨도 마찬가지였고요. 괜히 하는 말입니다만, 두 분이서 조금은 사이좋게 지내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시간을 종종 가져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기왕이면 파란 길드원들도 전부 부르면 좋을 것 같고요.” “…….” “…….” “무엇보다 라파엘 님께서 직접 길드로 와주시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일이 전부 끝난 이후에 길드로 돌아갈 때 함께 와주셨으면 했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현성 씨?” 김현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깥에서 쿵쿵 소리가 들려온 것은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그때. “실례하겠습니다, 길드 마스터.” “들어오세요.” “검은 백조의 박연주 님께서 잠깐 논의할 사안이 있다고, 급하게 연락을 주셨습니다.” “제가 오늘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급한 일이라고 하셔서….” “잠시 후에 연락을 드리겠다고 전해주세요.” “괜찮습니다, 현성 씨. 처리하고 오셔도 됩니다.” “후우….”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고 하시는 거 보니 업무 확인차 연락을 주신 것 같은데, 그 정도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다녀오셔도 됩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 ‘기회인가?’ 이윽고 형과 둘만 남게 된 상황에 저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형이 녀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형….” “네?” “파란 길드마스터는 어떤 사람인가요?” “네? 갑자기….” “그냥 궁금해서요. 형이 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는 저 사람을 잘 모르겠어서….” “음, 글쎄요.” “…….”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고, 겉모습과 속이 많이 다른 사람입니다.” “…….” “아마 라파엘 님도 가까이 지내시다 보면, 그냥 보이는 게 다가 아닌 사람이라는 걸 금방 깨달으실 겁니다. 강해 보이지만 의외로 약한 면도 있고요. 책임에 짓눌려 있는 사람이기도 해요. 시답지 않은 농담을 의외로 좋아하기도 합니다. 만나서 정말, 정말, 정말 다행이라고, 이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 “소중한 친구고요.” “…….” 말로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다시 알려주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 629 회귀자 사용설명서 629화 대륙의 진짜 어둠(5) 여러 가지로 할 말이 많았지만, 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김현성이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 자체가 익숙하지 않다. 파란 길드가 개발도상국 상태에 있을 때, 여러 권력자에게 녀석을 소개한 적이야 있었지만, 그것과는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적당히 술자리 좀 가져주고 비위 맞춰주며 한번 만나보라고 이야기했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 조금 더 함축적인 느낌의 질문이었다. 라파엘이 지금 묻는 것은 인간 김현성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것이다. 잠깐 고민했지만 나쁘게 대답한 것 같지는 않았다. 1회 차의 영향이 없는 건 아닌지, 간혹 차가운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이 많고 따뜻함이 내재해 있다. 김현성에게 들었던 1회 차 스토리만 들어봐도 녀석이 어떤 성격인지 금방 답이 나온다. 22살 김현성이 진짜 녀석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나이를 먹고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며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진짜 본질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강해졌음에도 여전히 겁이 많고,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멍청할 정도로 요령이 없고, 자신이 믿는 걸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만나서 다행이라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 역시 두말할 필요도 없는 진심, 내가 말하면서도 훈훈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고, 우리 현성이. 너 없었으면 진짜 어떻게 할 뻔했니….’ 튜토리얼 던전 때 녀석을 만나지 못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진다. 장담하건대, 절대로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들지는 못했으리라. 대륙에 온 이래로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김현성을 발견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앞에 놓인 호화로운 만찬을 보자, 그동안 옥이야 금이야 생각하며 키워온 관계에 대한 보답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라파엘에게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꾸만 피식피식 미소가 튀어나오는 상황, 솔직히 표정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너는 모를 거다, 진짜….’ 온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뒤통수를 맞은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얼어붙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 별별 짓까지 다 했던 과거. 의심을 사라지게 하고 고백 한 번을 받기 위해 쏟았던 그 노력과 세월, 열과 성을 다했던 내조가 드디어 보답받은 것이다. 만약 중간에 한 번 삐끗하기라도 했다면, 지금 같은 관계를 구축하지 못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라파엘 님께서도 이해할 수 있으실 겁니다. 네, 분명히요.” ‘쟤가 좀 낯을 가려. 그래도 네가 좀 사근사근히 다가가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거야. 솔직히 나 정도로 가까워지는 건 무리기는 한데. 아니, 아예 불가능하기는 한데, 그래도 기왕이면 친하게 지내야지. 그게 너한테도 더 도움이 될 거라니까. 얘가 원래 막 그렇게 먼저 다가오는 타입은 아니에요. 조금만 적극적으로 달라붙으면 그래도 달라지기는 달라져. 본전은 찾을 수 있을걸.’ “저는….” “네?” “저는 잘 모르겠어요. 파란 길드 마스터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제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맞는지.” ‘네가 많이 시달리기는 시달렸나 보네.’ “훈련할 때는 조금 예민해지기도 해서, 종종 너무 차가운 사람으로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물론 제게도 그런 적이 있었고요. 하지만 전부 라파엘 님을 위해서 그런 거랍니다. 아마 그 누구보다도 현성 씨가 라파엘 님이 강해지는 걸 원하고 있을 거예요.” 네가 강해지면 강해질 질수록 1회차의 숙원을 푸는 데 도움이 되거든.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해. 나도 처음에는 그랬지. 오죽했으면 김현성한테 목이 댕강 잘려 나갈까 걱정까지 했겠어. “어쩌면….” “네?” “어쩌면 김현성은 혀, 형이… 생각하는 그런….” “…….”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이제 몸은, 괜찮으신 거죠?” “네, 물론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잠깐 피곤해서 쓰러졌을 뿐입니다.” “피곤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조혜진 님에게 이미 들었어요.” “하하….” “정말 괜찮으신 거겠죠?” “종종 일어나는 일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뭔가 엄청난 일에 휘말린 것도 아니고, 생각하시는 것만큼 상태가 심각한 것도 아닙니다. 가끔 깜빡깜빡할 뿐이니, 그 정도로만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저는 정말로 형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줄은 꿈에도 몰라서….” ‘이 이야기는 지금 하기 싫은데….’ 아무리 김현성이 바깥에 있다고 한들, 말이 어떻게 새어 나갈지 누가 알겠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질 때부터 마력을 사용해 음성이 빠져나가는 걸 막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심할 수 있다. “증상이 조금 더 심해진다면 걱정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심각하게 생각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너무 죄송하더군요. 너무 깜짝 놀라게 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정말로 당황하셨다는 이야기를 박리안 님에게 전해 들어서….” “아니요, 그건….” “덕분에 예약되어 있던 일정도 전부 취소됐고, 약속도 엉망이 된 것 같아서 계속 마음이 쓰였었습니다. 괜한 심려를 끼쳐드리기도 했고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정말로 별일 아닙니다. 저는 건강해요. 저보다는 라파엘 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어떻게… 걱정하시던 일은 전부 극복하셨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 집중을 못하시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더군요. 지나치듯 본 것뿐이었지만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물어본 것이다. 녀석이 더 이상 두려워하는 것은 없다. 빛기영이 지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운명에 맞서리라 결심하고 다짐했다. 당연히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에 나온 대사는 가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몸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지만….” “…….” “도망치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조금 뜬금없지만,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이 위기가 지나가는 걸 기다리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건 어떠신가요?” ‘너, 이 새끼. 뭔 소리 하는 거야. 내가 이걸 버리고 왜 도망쳐.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건 아니지?’ 딱 잘라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선택지는 없습니다.” 당연히 그런 선택지는 없다. 물론 전황이 밀리고 대륙 전체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라면 내 사람들 모두 챙겨 빤스런을 하겠지만, 저항할 수 있는 만큼은 저항하는 것이 옳다. 혹시 뭐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는 했지만, 조혜진처럼 내 기억상실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혹시나 더 무리하다가 상태가 심각해지지는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얼굴은 겁먹은 얼굴이 아니다. 오히려 저항하고자 하는 사람의 얼굴이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게 당연하고, 두려운 게 당연합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무서웠고, 두려웠습니다. 평범하게 지내고 계셨던 라파엘 님께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을지, 또 얼마나 고민했을지 전부 알 수 있습니다. 여러 문제로 혼란스러워 하시는 것까지요.” “…….”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파엘 님께서 생각하시는 일은 죽어도 벌어지지 않을 거고, 대륙은 이 위기를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분명히요.” “그럼 형은요? 형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저 역시 마찬가지겠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이곳으로 돌아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겁니다.” “…….” “불안하실 겁니다. 정말로 자신이 잘할 수 있을지, 주어진 사명을 다 할 수 있을지, 예상치 못한 사고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좀 더 자신을 믿으셔도 돼요.” “…….” “라파엘 님은 강한 사람입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회색빛의 성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해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 성검이 라파엘 님을 선택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성검이 나를… 선택한 이유….” “네, 베니고어 님께서 라파엘 님을 바라보고 계시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분명히요.” 혹시 근심이나 걱정을 안고 있다면 전부 털어버리고 일어나라는 의도로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이 눈에 보였다. “고마워요, 형.” “천만입니다.” “제가 너무 어린애 같이 굴었죠.” “아니요. 누구나 한 번쯤은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이제 다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벌써 그 정도야?’ “제가 반드시….” “…….” “반드시, 형을 지킬 거예요, 반드시.” ‘정신 제대로 차렸네.’ 지켜야 할 대상이 대륙이 아니라 이쪽이 된 게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없다. 나를 지키는 것이 곧 대륙을 지키는 게 아니었던가. 최소한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다. 심지어 이상할 정도로 기이한 열망이 들어가 있다. 약발이 좋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효과가 극적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게 사실이다. 자신도 모르게 포근한 미소가 발사되는 게 당연했다. “네, 믿고 있겠습니다, 라파엘 님.” ‘이 새끼는 끝났어.’ 확실히 끝났다고 장담할 수 있다. 이제는 조금 더 천사 쪽에 전념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물론 아예 끝을 놓는 건 지양해야겠지만, 예전처럼 보물 다루듯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며칠에 한 번 정도만 들러서 컨디션 조절을 해주거나 무너지지 않게 멘탈을 잡아주는 정도로 끝내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물론 플레이어로서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 역시 가장 필요한 부분 중에 하나다. ‘전술 라파엘….’ 차마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그 이름, 전술 라파엘. 솔직히 회의적이었지만, 단 몇 시간이라도 운용할 수 있다면 커다란 이득을 가져올 수 있다. 김현성에게 주어지는 부담도 줄이고, 김현성이 쉴 수 있는 시간까지 벌어다 줄 수 있다. 어쨌든 녀석이 강해질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지금까지의 성장 속도는 아쉬웠지만, 이 사흘간의 성장 속도를 생각해 보면 비정상적으로 빠르다는 말로도 부족하지 않은가. 이미 일반적인 모험가의 영역을 벗어났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부족한 것은 경험. 바로 경험이다. ‘이 경험치라는 게 꼭 전술 라파엘을 위해서 필요한 게 아니기도 하고….’ 하지만 녀석에게 필요한 게 경험치라는 건 어떻게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후 녀석을 어떻게 사용하든 간에 실전 경험은 반드시 채워줘야 할 부분이었다. 적당히 판단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인 것은 순식간. “이럴 게 아니라, 슬슬 던전에 가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던전 말이에요?” “네, 던전. 지금까지도 잘하고 계시지만 아무래도 경험적인 측면에서 부족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어서… 물론 라파엘 님께서는 잘해주고 계시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분명히 라파엘 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형도 함께 가시는 건가요?” “글쎄요, 시간이 없기는 하지만….” ‘몇 번 다녀오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사실 내가 함께 가는 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전술적인 부분에서 지시해 주면 경험치가 더 빨리 쌓일 테니까. 녀석의 표정이 조금 좋아지는 것을 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글쎄요. 매번 따라가지는 못하겠지만….” “그럼 갈게요, 가고 싶어요.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해보고 싶어요.”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지금보다 조금 더 강해진 이후에요.” # 630 회귀자 사용설명서 630화 대륙의 진짜 어둠(6) 라파엘은 확실히 달라졌다. 혹시라도 녀석의 다짐이 작심삼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미친 듯이 훈련에 열중하는 모습은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 성장 속도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얘, 이거 너무 빠르게 강해지고 있는 거 아니야?’ 예상한 것보다 성장하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물론 라파엘이 한창 강해질 시기였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믿을 수 없는 성장 속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차희라마저 혀를 찼을까. 눈이 높은 김현성에게는 아직도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녀석의 스타일이 순수한 검사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라파엘은 김현성처럼 검술의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 물론 다른 삼류 검사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스스로 혀를 깨물고 거울호수로 뛰어들었겠지만, 어떻게 봐도 탑 클래스로 보기에는 아쉬운 것이 현실이었다. 회색빛의 성검에게서 받은 거대한 마력을 바탕으로 근거리, 중장거리 가리지 않는 하이브리드, 굳이 표현하자면 마검사나, 성기사 같은 포지션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물론 녀석이 운용하는 것은 회색빛의 검에게 부여받은 마력이었으니, 마검사라 부르기에는 애매했지만 활용 범위가 넓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최근 고급 마력 운용 지식을 깨달은 이후에는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강해져야 하는지에 대해 결론을 내린 상황. 장점을 극대화하기로, 고급 마력 운용 지식에 조금 더 투자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밸런스 있게 성장하는 것도 중요한 게 아닌가 걱정이 들었지만, 일단은 속성으로 강해진 후, 부족한 부분을 챙기겠다는 심산으로 보였다. 그 결과 내구 스탯은 전위라기에는 민망한 수준이었지만…. ‘회색빛으로 내구력을 올리면 돼. 부족한 체력도 채워줄 수 있고,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선택이 틀린 것 같지는 않아. 지금은 곧바로 사용할 전력이 필요한 거니까.’ 차희라의 코멘트는 나쁘지 않았다. 박연주 역시 마찬가지였고. ‘제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스타일이 될 것 같네요.’ 암살자인 그녀가 가장 까다로워하는 상대가 전사나, 성기사 같은 타입이기는 했으나, 저 정도로 평가하는 것은 라파엘이 강해질 거라고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만약 라파엘이 평범한 전위로 성장하는 정도였다면 굳이 저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어가니 갑작스럽게 떡상하는 라파엘 코인에 미소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성장 속도가 전성기의 정하얀보다 더 빠르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녀석을 조금 놓아버리고 다른 일에 집중하려고 했건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 문제. 자기 자식이 전교 1등을 하는 것으로 모자라, 천재라고 치켜세워지는 상황에서 어떤 부모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잘 다니고 있던 직장을 그만두면서 자식 뒷바라지를 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생각해 보면 스스로의 행동이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당분간은 여기 집중 좀 하고 싶다고요? 천사들은 어쩌려고요?” “완전히 손 놓지는 않을 거야. 지금도 한소라랑 하얀이가… 잘해주고 있고, 남은 네임드 천사도 제작에 들어간 지 오래됐어. 물량을 전부 다 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비슷하게 맞출 수는 있을걸.”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뭐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거 보니까. 정말 확신하는가 보네요. 요정도 필요 없는 거 맞죠, 오빠?” “지금 당장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아쉽게 됐네요.” “…….” “…….” “뭐가.” “그냥 아쉽게 됐다고요. 조금 색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 거 있죠. 요즘 피차 스트레스도 많이 쌓인 상황이잖아요. 너무 바쁘기도 하고, 서로 역할을 바꿔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요? 원래 이런 색다른 시도들이 긴 연애 생활을 버텨내게 하는 조미료가 되는 거잖아요. 아, 오빠한테 벌써 질렸다는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요. 그냥 내가 해보고 싶어서 그래, 내가 해보고 싶다고….” ‘누나, 왜 그래… 눈이 무서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한 번 바뀌면 최소 사흘이고, 지금은 그럴 시간도 없어. 걸리는 것도 많고….” “그럼 일단은 킵 해놓을게요. 언젠가는 쓸 일이 있겠죠, 뭐.” “…….” “아! 그러고 보니 전술 라파엘은 어땠어요? 시험 삼아 한번 해본다고 하지 않았어요?” “글쎄….” 애초에 테스트서버 돌리듯, 훈련 상황에서 시도해 본 것뿐이었지만, 사실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정작 라파엘은 무척 놀란 표정을 보이며 흥분한 모습이었지만, 자꾸 전술 김현성과 비교하게 되는 것이 문제였다. ‘형은 좀 어떠셨나요? 저는 완벽한 것 같았는데, 괜찮으셨나요?’ ‘네, 저도…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대단해요. 형은 진짜… 대단해요.’ ‘라파엘 님도, 네….’ 그렇게 이야기는 했지만, 만족스러울 리가 없지 않은가. 전술 김현성과의 차이점은 일일이 열거하는 게 입 아플 정도였다. 스텟이 내려간 걸 감안하고서라도 단점이 무척 많다.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부족한 경험을 메울 수가 없는 것이다. 엔진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 외 모든 것에 문제가 있었다. 핸들은 뻑뻑했고 연비도 좋지 않다. 과속방지턱을 밟을 때마다 덜컹덜컹거리는 느낌이었고, 기어변환 속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앞으로 쭉 밀고 나가는 힘 정도만이 칭찬해 줄 만한 요소이리라. ‘힘으로만 밀어붙이려고 하니 효율이 나올 리가 있나.’ 만약 라파엘을 공화국 전쟁 때의 김현성 포지션으로 꽂아 넣는다면 10분도 안 돼서 탈진해 풀썩 쓰러지지 않을까. 오히려 이쪽을 휘두르려고 했던 김현성과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더 많은 경험시켜 줘야 했고 부족한 부분을 아이템으로 챙겨줘야 했다. 내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이지혜가 조용히 입을 여는 게 시야에 비쳤다.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표정이네요.” “응, 사실 현시점에서 걔를 평가한다는 게 조금 그렇기는 한데. 지령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너무 늦어. 다른 문제들은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고. 잘 성장하고 있기는 한데,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써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니까. 현성이한테도 말하기는 했는데, 뚜렷한 해결책은 없는 것 같더라고. 훈련 강도를 높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나 봐.” “뭐, 벌써부터 초조해할 필요 있나요? 이제 막 탄력이 붙은 애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것도 안 좋아요. 그래서 괜찮은 던전 구해달라고 한 거 아니에요?” “꼭 그런 방향으로 써먹지 않더라도 경험은 필요하니까. 준비는 됐어?” “되고 말고요. 매물로 나와 있는 던전 몇 개는 추려봤어요. 아마 충분히 만족하지 않을까 싶은데….” “고생했어, 누나. 라파엘한테도 목록 추려서 보내놨지?” “오빠 말대로 며칠 전에 보내놓기는 했는데… 혹시 전부 다 맡기는 거예요?” “그래야 공부가 되겠지. 걔를 평범한 루키들이랑 똑같이 취급해 주는 건 무리가 있으니까….” “흐음….” “다른 루키들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걔네가 부사관 과정을 밟고 있다면 얘는 장교 과정을 밟고 있는 거라고. 그냥 장교도 아니라 사관학교 출신의 장교. 북서 지역을 책임져야 한다니까. 내가 괜히 얘를 데리고 있는 줄 알아? 던전 인선부터 공략까지 전부 다 맡겨야 해. 실패할 때 실패하더라도 부딪치기는 해봐야지.”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자기중심의 파티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자기가 직접 깨달아야 해. 지금까지 배운 걸 머릿속에 잘 집어넣고 있으면 실패하는 경우는 없을걸.” “뭐, 그건 맞는 말이네요. 저야 이런 종류의 현장을 뛰어본 적이 없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실무도 본인이 직접 부딪쳐 봐야 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언제까지 보모 짓을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첫 던전부터 영웅 던전으로 들어가는 건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지만….” “아마 무난할 거야.” 장담하건대 무난하게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녀석의 스펙이라면 영웅 등급 던전 정도는 클리어해 줘야 한다. 여신의 손거울이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약 200여 개 정도가 쌓인 정하얀의 메시지를 애써 무시한 채 시선을 돌리자 눈에 보인 것은 라파엘이 보낸 메시지. [형, 인선 뽑아봤어요. 준비도 끝났고요. 빠르게 다녀올게요. 공략 영상이나 일지는 다녀온 이후에 보내 드릴게요. 아래 파일에 대충 정리해 놨으니 확인 한번 해주세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몸조심하셔야 해요, 꼭이요. 최대한 빨리 올게요.] 짧고 굵다. 심지어 행동력도 빠르다. ‘애, 이거 괜찮으려나.’ 영웅 등급의 던전은 혼자 보내는 게 좋은 것 같아 전부 다 알아서 해보라고 하기는 했지만… 막상 보호자가 없다고 생각하자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인선도 나쁘지 않고 스펙만 봐도 영웅 등급 정도는 금방 클리어할 거라는 판단이 서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게 던전 공략이 아니었던가. 운이 없으면 파티가 전멸하고 옥이야 금이야 키운 내 자식이 던전 미아가 될 수도 있다. 이지혜가 옆에서 별일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투자한 게 많은 만큼 괜스레 불안해졌다. 그 불안감이 가신 것은 정확히 사흘 뒤. 내 쓸데없는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듯 녀석은 훌륭히 던전 하나를 클리어하는 데 성공했다. “무난했네요. 확실히 선택받은 용사는 선택받은 용사인가 봐요.” “그러게.” 확인한 공략 영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정도. 처음 합을 맞춰본 파티원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던전 보스를 처리하는 과정까지 완벽했다. 물론 위기가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착실히 대처하는 모습을 보니 메뉴얼을 숙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이주일, 한 달, 두 달. 내 일과는 간단했고, 라파엘의 일과도 간단했다. 성장 속도에 탄력이라도 붙었다는 듯이 끊임없이 던전을 클리어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나름의 인맥도 구축하는 것처럼 보였다. 좋은 파트너가 필요할 때라고 생각해, 나와 김현성이 비밀리에 지원하고 있었던 1회 차의 전쟁 영웅 몇몇을 라파엘과 만나도록 유도했고, 그렇게 성검 용사 파티가 완성됐다. 완전히 애송이 티를 벗고 한 사람의 모험가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녀석이 던전이나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전선으로 갈 때마다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내게는 훈훈한 이야기. 그즈음에 라파엘이 인선에 내가 필요하다는 말을 전해왔고 나는 당연히 녀석의 제안에 응했다. 물론 김현성의 반대가 있기는 했지만, 조혜진과 박리안까지 대동한다는 조건으로 무난히 던전행 티켓을 따올 수 있었다. ‘왠지 불안합니다. 느낌이 좋지 않아요. 저도 함께 가야겠습니다.’ 그렇게 말했던 김현성의 불안감과는 다르게 아주 무난하게 던전행이 마무리 지어졌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을 더 다녀온 이후에는 별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김현성은 뭔가 찝찝한 게 있는 모양. 김현성이 캐치한 걸 내가 캐치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라파엘을 조금 더 바라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눈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호의가 가득했고, 말도 착실하게 잘 듣는 우등생의 이미지였다. 애초에 형형 거리며 눈물을 터뜨리던 녀석을 의심할 필요가 무어 있겠는가. 시험 삼아 머리를 한 번 부여잡았을 때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내 손을 잡고 베니고어에게 진심 어린 기도를 드렸을 정도다. 더러운 악마 계약자들은 모두 떨쳐 낸 것처럼 보였으니, 다른 사고가 생길 리 만무했다. “준비는 조금 어떻습니까?” “다 됐어요, 형. 인선도 전부 다 짜놨고요. 오늘도 조혜진 님, 박리안 님이 같이 가시는 건가요?” “아마 함께 갈 것 같네요. 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번처럼 지켜보는 게 대부분일 겁니다. 공략 자체에는 참가하지 않으니까요. 물론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일 수는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파란 길드마스터가 허락해 주지 않으셨겠죠.” “하하….” “그래도 형과 같이 가는 던전행이 제게 더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요.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요. 그럼 출발해도 될까요?” “네.” ‘이 새끼 오늘따라 기합 들어가 있네.’ 평소답지 않게 잔뜩 긴장한 얼굴, 최근 던전행의 평가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생각해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 631 회귀자 사용설명서 631화 여왕의 무덤(1) ‘확실히 조금 어긋나 있는 것 같은 느낌이기는 했지.’ 던전 공략에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공략 자체는 성공적으로 끝내기는 했지만, 그 과정이 형편없었던 것이 문제. 그동안 라파엘의 공략 영상에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전까지는 적어도 평점 5점 만점에 3.8점 정도는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전교 1등 성적표를 가지고 온 아들내미를 보는 심정으로 녀석을 응원해 왔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녀석이 살짝 미끄러졌던 게 바로 앞선 던전이었다. 사실 그 이전에도 문제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뭔가 아슬아슬해 보이는 부분이 있었지만, 결과가 좋으니 딱히 다른 말할 필요가 없었다. 스스로 극복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수라면 실수라일 것이다. 계속 눈에 거슬렸던 부분이 터지고 만 것이다. 형편없는 내용에, 우리 애 멘탈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지 고민해 볼 정도였다. 항상 전교 1등 성적표를 받아오던 놈이 휘청거리는 상황이었으니,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당연하다. 물론 난이도가 있는 던전이기는 했다. 전설 등급의 던전, 검은 심장의 난파선. 공략하기 까다로운 스타일이라고 하는 게 맞으리라. 거대한 배가 주 무대라는 것도 그랬고, 머메이드 같은 생소한 몬스터와 보스 몬스터였던 해적 선장 같은 놈도 상대하기 까다로워 보였으니까. 던전의 일부 지형은 물속에 잠기거나 산소가 희박하다는 기믹을 가지고 있었고, 철퍽거리는 바닥은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라파엘을 필두로 한 파티원들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 공략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보스전에서 대부분의 파티원이 리타이어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낙제점에 가까웠다. 평균 스펙 자체가 뛰어났기 때문에 공략에 성공한 것뿐이라는 거다. ‘엉망진창이었지.’ 파티원 개개인이 특색이나 특성, 개성이 뛰어나다 보니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있는 것, 무엇보다 라파엘, 그 자신이 구심점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너무 떨어지기도 하고….’ 여러모로 다듬을 곳이 많이 있었다. 별것 아니기는 했지만, 오늘 이기영이 함께 던전으로 나선 이유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오셨군요.”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려요, 위원장님.”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슬쩍 고개를 돌리자 라파엘의 파티원들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사실 생소한 얼굴들은 아니다. 지난번에도 이 멤버와 함께 간단한 던전에 들어갔다 오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비밀리에 지원해 주고 있었던 인물들이 아니었던가. 전 대륙에 퍼져 있었던 1회 차의 영웅 중에서도 쓸 만한 녀석들을 추려 라파엘과 연결해 주었다. 의도적으로 엮어준 녀석도 있었고, 자연스럽게 엮어준 녀석도 있었다. 영웅 등급의 레이드 몬스터 사냥을 나갈 때, 우연히 만나게 된 사제와의 만남은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완성도 있다고 평가하는 이야기 중에 하나. 슬쩍 옆을 바라보니 라파엘을 바라보고 있는 여성 한 명이 시야에 비친다. 대륙 1차 전쟁이 끝난 직후 기적의 사제라고 불리게 되는 마리엔. 유럽 쪽에서 소환된 모험가였고, 일반인으로서 위험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던 이들 중 하나였다. 사람들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작은 마을에 자리 잡은 이후, 아이들을 돌보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적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 이후에는 전투 사제로 지원해 전쟁터를 전전하게 되지만 그건 1회 차의 이야기다. 아, 참고로 그녀는 가면쓰레기에게 비참하게 죽었다. 2회 차에서 그녀는 자신이 자리 잡은 마을을 잃지 않았다. 대신 아주 우연히,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우연히… 정말로 우연히 언데드들이 그녀의 마을을 들이닥쳤고, 그녀의 각성이 조금 더 앞당겨졌다. 마을이 완전히 휩쓸려 나갈 뻔하기는 했지만, 우연히 각성에 성공한 그녀는 언데드들을 완벽하게 막아냈고, 이후 자신의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하다 라파엘을 만나게 된다. 이제 막 모험을 떠나는 용사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동료로서는 제격이 아닌가. ‘쟤도 좀 괜찮았지.’ 두 번째 녀석도 마음에 든다. 사냥개 이주혁. 이름에서 보이다시피 한국인. 굳이 분류하자면 우리 팀의 김창렬과 비슷한 포지션을 맡은 녀석이었다. 1회 차의 김현성도 인정할 만한 독기를 가지고 있었고, 천사와의 전쟁 때 녀석들의 날개를 입으로 물어뜯은 일화는 무척 유명했다. 이후 전쟁터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연합군 수뇌부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지만, 이것 역시 1회차의 이야기. 2회차에서는 용병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라파엘의 동료로서 시작하게 됐다. 거친 용병 생활로 얻은 경험치가 사라지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내 걱정을 날려 버리듯 가장 괜찮은 포텐셜을 보여주고 있는 녀석.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성격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만들어진 성격이었던 것이다. 라파엘에게 묘한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점마저 무척 훌륭하지 않은가. 참고로 녀석 또한 가면쓰레기의 손에 죽었다. 녀석의 별명답게 짐승들에게 뜯어 먹히는 최후를 맞이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연하지만 이 둘 말고도 괜찮은 놈들이 몰려 있다. 유망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로서 전쟁의 한 축을 담당하던 녀석이었지만, 가면쓰레기 진청의 꾐에 넘어가, 배신자로 낙인 찍혀 목숨을 잃게 되는 비극의 마도사. 마찬가지로 이름을 떨치던 모험가 중 하나였지만 가면쓰레기가 자행한 단체 생매장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궁수. 녀석의 옆에 자리해 있는 암살자 역시 같은 날 생매장 당해 수많은 포로와 최후를 함께했다. 또 마찬가지로 가면쓰레기와의 전쟁에서 패해 꼭두각시가 되어 전쟁터를 돌아다니게 되었다고 전해지는 공화국의 기사. ‘얘는 진짜 가슴 아프더라.’ 동료들까지 본인의 손으로 죽였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아무래도 세기말 세계관이었던 만큼 모두의 끝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한때 모두가 이름을 날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가면쓰레기 진청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자랑스러운 용사 파티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뿔뿔이 흩어지거나 녀석의 더러운 술수에 당했을 게 분명하겠지. ‘확실히 그 새끼가 난 놈이기는 했어.’ 김현성에게 들은 것만 떠올려 봐도 괜스레 내 손이 떨려올 정도였다.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조혜진 역시 가면쓰레기의 손에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이미 끝난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이런 일을 잊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무튼 자신의 파티와 함께 있는 라파엘의 모습은 괜스레 훈훈하게 보일 정도. 만난 지 그리 오래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우정을 나누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붙임성이 좋은 녀석인 만큼 자연스럽게 중심에 자리 잡은 모습이 눈에 띄었다. 보호자 겸 파티원의 위치에 있는 나 역시 자리를 옮기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대놓고 주도하기보다는 일단 지켜보는 게 나은 선택이리라. ‘사실 보호자라는 말도 민망하기는 해.’ 단언하건대 나는 라파엘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둠기화를 한 상태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현재의 폼으로는 보호받는 포지션에 있다고 하는 것이 옳다. 파티 내의 위치도 전력분석관이나 감독 같은 포지션, 필드에서 직접 뛰는 감독의 지휘를 받으면 어떤 느낌일지 알려주는 것이 목표였다. 이를테면…. ‘경험을 시켜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파란의 파티에 녹아들어 있는 경험치를 가장 재빠르게 전해줄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내 머릿속에 다 들어가 있다니까.’ 가지고 있는 것에 일부만이라도 파티원들의 몸에 집어넣어야 했고, 라파엘의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했다. 김현성이 오더를 하지 못해서 하지 않는 게 아니다. 실제로 파란 파티 초기에는 김현성이 직접 파티를 이끌었지 않았던가. 물론 나를 신뢰하고, 내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여 지휘권을 넘기기는 했지만, 김현성은 전술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심지어 차희라 역시 마찬가지다. 미치기 직전까지는 본인이 직접 붉은 용병을 이끌었고 카스가노 유노도 직접 병력을 이끈다. 어떻게 보면 필수 덕목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다. 알고 있는 만큼 움직일 수 있고 경험한 만큼 움직일 수 있다. 대륙에서 칼밥 먹는 사람이라면 내 말에 반박할 수 없으리라. 라파엘 파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 그리고 경험. ‘형이 이쪽으로는 좀 알아주잖아.’ 새로운 세계를 경험시켜 줄 준비가 되어 있다. 일선에서 벗어난 지 시간이 좀 흐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의 눈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시작해도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입을 여는 라파엘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 “오늘 공략할 던전은 전설 등급의 던전, 여왕의 무덤입니다.” ‘그래, 그래.’ “전설 등급의 던전이 그렇듯 자세한 정보가 공개되어 있지는 않지만, 시작 지점이 여왕의 무덤 안일 것이라고 추측되고, 지하 내부에서 소규모, 혹은 대규모 전투까지 진행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진형은… 던전 내부로 진입하고 첫 전투 이후에 한 번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럼 지금 곧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따라 조금 더 진지하네요.” “이유야 뻔하지, 뭐.” “쓸데없는 잡담은… 자제해 주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용사님.” ‘얘네 진짜 분위기 나쁘지 않네.’ 놀리기 위한 게 아니라 긴장을 풀어주려고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라파엘이 리더 포지션이기는 하지만….’ 경험은 제일 적으니까. 이쪽의 개인 호위로 함께 자리한 조혜진 역시 나와 비슷한 반응.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좋은 파티라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파티 그 자체의 벨런스도 나쁘지 않다. 후위가 조오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건 라파엘이 보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던가. 확실히…. ‘잘 짜기는 했어.’ 자신이 가장 활약할 수 있는 파티를 구성했다는 게 느껴졌다. 단언컨대 녀석이 없다면 이 파티는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부족한 후위의 화력을 메워주면서도 전위와 후위를 잇는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파란의 파티와는 또 다른 매력. 완성도로 따지면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잠깐 놀기는 괜찮은 파티 같아 보인다. 파티원들의 세부적인 스텟과 능력, 개인 성향, 아이템을 마음의 눈으로 한 번 훑어본 이후에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물론 최대한 힘든 표정으로 조혜진을 바라보는 것 역시 동시에 이루어졌다. 무거운 짐을 너무 오랜 시간 들고 있었는지 벌써부터 다리가 아파온다.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힘들다는 듯이 헉헉거리자, ‘저 새끼 또 저 지랄’이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 쏟아져 왔다. 나도 모르게 머리가 아프다는 듯 표정을 찡긋거리자, 그제야 다가오는 조혜진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들고 있는 것 주세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혜진 씨. 혼자 들고 갈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넘기세요. 이 정도는 들어줄 수 있으니까. 어차피 공략에도 참가 안 하는데, 가방 하나 들고 있는 것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괜찮다니까요.” “들어달라고 저 쳐다본 거 맞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꼭 그런 건 아니었는데….” “빨리 넘겨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이제야 조금 홀가분해지는 어깨. 타이밍 좋게 던전에 도착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곧바로 진입하겠습니다.” [전설 등급 던전 여왕의 무덤에 입장하셨습니다. 인원 [9 / 10]을 확인했습니다.] 제법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 632 회귀자 사용설명서 632화 여왕의 무덤(2) ‘던전에 들어오기는 했나 봐.’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변하는 모습을 보니 던전에 들어오기는 했다는 느낌이 든다. 시야에 비치는 것은 무덤의 내부. 아마 이곳이 시작점일 거라고 생각했다. 몬스터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입구부터 몬스터가 들이닥치는 종류의 던전은 아닌 모양. 여왕의 무덤이라는 이름에서 보이듯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무덤을 지키는 가디언이나 몬스터들을 마주할 것 같았다. 이래 봬도 균열박물관 4등급 관리자의 직위를 가지고 있는 만큼, 이 던전의 타입이 대충 눈에 보인다. 물론 아직 판단을 내리기는 이르지만, 대충 평가해 보기로는…. ‘나쁘지 않은 것 같네.’ 딱 그 정도의 느낌이었다. 성검 용사 파티가 개고생했던 지난번의 난파선과는 다르게, 이번 던전은 대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성인 것 같다. 이쪽에서 환영할 만한 부분이었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던전의 특징이 되는 특유의 기믹은 몬스터와의 전투보다 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영웅 등급의 던전 저주받은 신단을 생각해 보면 한층 더 이해하기 쉬워진다. 몬스터의 레이도 난이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던전의 기믹 하나만큼은 전설 등급의 평가를 받아도 될 정도였었던 던전. 라파엘 파티가 저주받은 신단에 도전한다고 해도 쉽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물론 이쪽의 경우에는 정하얀 때문에 난이도가 더 어려워진 것 같은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렵지는 어려울 거야.’ 경험이 많지 않은 파티일수록 던전 특유의 기믹에 흔들리게 마련이다. 잠깐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기는 했지만, 보통 이렇게 기본적인 종류의 던전은 몬스터들이 조금 더 상향되어 나오는 편이다. 아무리 기본형 던전이라고 한들, 전설 등급 판정을 받은 던전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진행 방향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궁금증이 일 수밖에 없었다. 던전에 들어온 이후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도적과 궁수로 구성된 생매장 듀오. 파란 파티였다면 김예리와 김창렬이 저런 포지션에 있지 않았을까. “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아요, 용사님. 주변에 몬스터들도 보이지 않고, 다른 함정들도 없는 것 같네요. 어떻게 조금 더 앞을 둘러보는 게 좋을까요?” “아니요. 함께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메인 파티와 너무 멀어지는 것도 그리 좋지 않으니, 몬스터도 함정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이곳은 위험 지역이 아니라도 판단해도 되겠군요.” 그 와중에 신경 쓰였던 것은 슬쩍 이쪽의 눈치를 보는 라파엘.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얘, 또 이러네.’ 대놓고 이쪽의 눈치를 보는 게 눈에 보인다.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게 맞냐는 듯 물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 문제에 대해 전에 말한 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예 무시하기는 힘든 모양이다. 너무 빤히 바라보면 방해만 될 것 같아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는 조혜진을 바라보자, 그녀가 곧바로 입을 열어왔다. “…….” “왜 그러십니까?” “아니요, 그냥.” “걷기 힘이라도 드시는 겁니까? 업어드려야 돼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직까지 버틸 만하니 나중에 녹초가 되면 부축이라도 해주세요. 아 물론 지금보다 더 시간이 지난 이후에는 업어주셔도 되고요.” “…….” “제가 괜히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아니에요. 아무래도 던전의 규모가 제법 큰 것 같아서….” “그런 게 보이는 겁니까?” “그냥 딱 봐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천장도 높고, 길도 넓고 크고, 여왕의 무덤이 아니라 여왕이 살았던 도시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 규모잖아요. 물론 뚜껑은 열어봐야 되겠지만. 뭐, 균열박물관보다는 작네요. 박물관 같은 경우에는 많이 걸을 일이 없어서… 혜진 씨도 오랜만에 던전에 들어온 거 아닙니까?” “사실 거울 호수 때 이후로 처음이기는 한데, 그곳은 던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곳이었지만요. 그보다 저랑 이렇게 잡담해도 되는 겁니까?” “…….” “…….” “어차피 전반적인 진행은 라파엘에게 맡기는 게 좋으니까요. 지금은 걷는 것 외에는 딱히 할 것도 없고 저쪽에 있으면 눈치만 보여요. 평가하려고 같이 온 게 아닌데 평가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이 정도 거리감이 딱 좋을 겁니다. 중요한 브리핑 같은 경우에는 이미 전해 들었으니 첫 번째 전투가 시작되면 조금 잡아주는 게 좋겠네요. 혜진 씨 눈에는….” “나쁘지 않은 파티입니다. 시간이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팀원들 간에 유대감도 좋아 보이고… 뭔가 한 가지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보통 저런 파티는 위로 올라가게 마련이죠.” “평가가 후하네요.” “보이는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저들은 강해요. 애송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고, 특히나 라파엘은….” “네?” “조금만 더 성장한다면 대륙 8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물론 처음 대륙 8좌가 나왔던 때를 기준으로 말입니다. 아직 다듬어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흐음….” “이번 원정 이후로 더 강해질 수도 있겠군요.” “네, 뭐.”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부길드마스터.” “무리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저거나 좀 봐요. 웅장하니 예쁘지 않습니까? 건축물 한번 기가 막히네.” “던전 안입니다.” “그래도 감상 정도는 느낄 수 있는 거잖아요. 사람이 왜 이렇게 딱딱해.” “지금은 일하는 도중입니다. 사실 이렇게 잡담하는 것도 최대한 지양하는 게 맞습니다. 심심해 보여서 맞춰 드리고 있는 것뿐이에요.” “조금은 풀어질 수도 있는 거죠. 그렇게 매번 힘주고 살면 피곤하다니까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럴 때 꿀 좀 빨고 그러는 겁니다. 현성이도 없는데 누가 조금 쉰다고 뭐라고 한답니까. 어차피 혜진 씨는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는데….” “최소한 한 명은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죠.” “네, 네.” 안 그래도 슬슬 집중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잡담을 나누며 계속해서 걸어오는 동안 주변 풍경이 달라지는 것이 시야에 비쳤기 때문이다. ‘멋있네.’ 안 그래도 넓었던 길은 더욱더 넓어지고 있었고, 천장은 더욱더 높아진다. 여왕의 도시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보니 거인족들이 사는 도시 같지 않은가. 그야말로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광경에 입이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륙에 들어온 이래로 별별 풍경을 다 봤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이는 풍경은 또 새로운 풍경이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걷는 게 너무 힘들었다는 것. 박덕구가 있었다면 편하게 업혀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따위의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와 꽂혔다. 전투도 없이 4시간 동안 행군만 하는 상황이지 않은가. 여러 가지 불만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바, 준비가 너무 미흡했어.’ 마차라도 챙겼어야 했다. 라파엘도 이쪽이 신경 쓰이기는 했는지 쉬었다 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하지만 첫 전투도 끝내지 못하고 벌써 쉰다면 이곳에 있는 시간만 더 늘어나는 꼴이지 않은가. 거대한 문이 시야에 비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문 양쪽에 서 있는 거대한 석상을 보니 일이 대충 어떻게 될지 예상이 간다. -이곳은. -여왕의 무덤. -허락되지 않은 자는.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거대한 석상들이 눈을 빛내며 우리 라파엘 파티를 맞이한 것이다. ‘진짜 이거 던전 디자인 누가 한 거야. 진짜, 너무 구린데.’ 전설 등급의 던전이니만큼 확률은 낮지만, 만약 베니고어 패치 2.0의 결과물이 이거라면 상당히 슬플 것 같았다. -돌아가라. -부정한 자들아. -자격이 없는 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전투 준비하겠습니다.” “네.” “하나는 메즈, 그사이에 남은 하나를 빠르게 처리합니다.” “알겠어요.” “네, 대장.” -죽음을. “시작.” -죽음을! 눈 깜짝할 사이에 시작된 전투,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가 손을 뻗자 순식간에 얼음 기둥이 나타나 가디언 하나의 길을 가로막는다. 곧 녀석의 주변이 모두 얼음 기둥으로 채워진다. 나쁘지 않은 출발이라 할 수 있으리라. 보통의 파티들도 많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방법이었다. 눈앞의 석상 가디언들은 일반 몬스터라기보다는 보스 몬스터에 더 가깝다. 여왕의 무덤으로 향하는 문을 지키고 있는 녀석들이 평범한 녀석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괜찮기는 한데….’ 보고 있는 내가 답답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굳이… 저렇게 할 필요가 있어?’ 라파엘의 파티는 강하다. 대륙을 싸 돌아다니고 있는 파티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녀석들은 이런 식으로 진행할 필요가 없다. 파티가 가디언 하나를 상대하고 있는 사이에 얼음 감옥에 갇혀 있던 녀석이 기어코 얼음을 부수고 바깥으로 튀어나온다. 파티가 잠깐 우왕좌왕 거리는 사이에 마법사가 다시금 주문을 외워 녀석을 가둔다. 그리고 남아 있는 한 녀석에게 화력을 집중하는 모습. ‘비효율적인데.’ 내 눈에는 비효율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법사의 마력은 무한하지 않다. 가디언 하나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데 들어가는 마력이 땅 파서 나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저기에 들어갈 마력을 화력으로 돌리는 게 내 눈에는 더 이상적으로 보인다. 저 파티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차고 넘친다. 동시에 두 녀석을 상대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는 거다. ‘너희 1회 차 영웅 파티잖아, 시바. 게다가 성검 용사까지 같이 있는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돼?’ “다음 마법 준비해 주세요. 다시 빠져나오기 전에 부탁드립니다.” “네.” “내구가 생각보다 높습니다. 최대한 주의해 주세요, 이주혁 님.” “걱정은 필요 없다.” “사제님은 버프 마법 끊이지 않게 해주시고. 나머지 두 분은 최대한 교란하는 쪽으로….” 꼰대가 되기는 싫지만, 저 스탯, 저 능력을 가지고 저렇게 움직이는 게 답답하게 느껴진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상황. “마법 취소해요.” 작게 이야기했지만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당황하는 마법사 놈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유지하고 있는 마법 취소해요. 두 놈 한꺼번에 상대해도 상관없을 겁니다.” “위원장님?” “제 말 들어요. 전혀 무리 없습니다. 위험하지도 않고요.” “마법 취소하세요.” 내 말에는 잠깐 멈칫하던 마법사가 라파엘의 목소리에 곧바로 마법을 취소했다. 별건 아니었지만, 파티의 리더가 라파엘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만 같지 않은가. ‘충성도가 높네.’ “지금부터 제가 지시하겠습니다.” “지금부터 형이 지시하겠습니다. 집중해 주세요.” “조심할 필요 없습니다. 몸 사지리 마세요. 근접 직군들은 한두 방 맞을 각오하는 게 맞아요. 내구 스텟을 괜히 올리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사제님은 보호 주문 외워주시고 마법사는 화력이 높은 마법으로 준비하시면 됩니다. 궁수랑 도적이 가디언 두 마리 한꺼번에 모아주시고, 마법사님은 최대한 가디언 겨냥해서 주문. 앞쪽이 아니라 쟤들 뒤쪽으로 겨냥해 주셔야 됩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전위들한테 닿을 것 같으면 사제님이 보호 마법으로 걷어내요. 마법사 다시 주문.”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전위들은 범위 파악하셨으면 일정 거리 벌리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틀어막아요. 다시 주문.”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후드득후드득 소리와 함께 가디언들의 신체 일부가 터져 나간다. 파티원들의 반응을 보니 이렇게 쉽게 끝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 저들끼리도 당황스러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얼굴은 가관이다. 조용히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무리 안 할 겁니까? 전위들 들어가세요.”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는 녀석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 633 회귀자 사용설명서 633화 여왕의 무덤(3) “조금 어떠셨습니까?”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이렇게 쉽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1회 차 가면쓰레기에 의해 언데드가 되어 대륙을 떠돌아다녔던 기사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무척 놀랐다는 얼굴이다. 솔직히 내 능력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했지만, 콧대가 올라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뭘 그렇게 간을 보고 있었어?’ 성검 용사 파티는 강하다. 아마 일반적인 파티였다면 아까처럼 상황이 잘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마법사는 가디언들의 내구와 마법방어력을 벗길 만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사제는 그런 마법사의 화력 일부를 버텨줄 수 있는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 전위들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고급 마력 운용 지식을 가졌고, 마법사들이 만들어놓은 틈을 벌릴 수 있는 예리함을 갖추고 있었다. 이 정도 스펙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 모였다면 중간보스 정도는 빠른 속도로 처리해야 한다. “역시, 역시 형은… 대단해요. 아까도 그렇고, 이번에도… 만약 형이 없었다면 어쩌면 위험해졌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아니요, 라파엘 님처럼 제 눈에도 충분히 대단해 보이십니다. 난전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게 쉽지 않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여왕의 기사들까지 나왔을 때는 정말로 위험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사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냥개의 모습이 보였다. ‘확실히… 문지기들보다는 방금 놈들이 더 어렵기는 했지.’ 기본적인 오더만으로 쉽게 문제를 해결했었던 문지기와는 다르게 방금 전에 일어난 전투는 제법 복잡한 구성을 하고 있었다. 무덤 안으로 진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닥쳐오는 여왕의 병사들과 그런 병사들을 진두지휘하는 8인의 기사. 거대한 도시 안에서 벌어졌던 시가전은 솔직히 이 파티로도 위험하다고 할 수 있었다. ‘병사들 구성도 제법이었고.’ 검과 방패를 들고 와 무작정 달려드는 녀석들이 아니라 마법병단과 궁수부대를 보유하고 있는 진짜 군대. 조혜진마저 한 손 거드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봤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다른 의미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성검 용사 파티의 경험치를 단숨에 끌어올릴 기회였으니까. 전쟁과 비슷할 정도로 규모가 커다란 전투는 평화의 시대를 맞은 지금은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대체훈련을 한다고는 하지만 훈련으로 어떻게 실전을 대처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방금의 전투는 제법 박진감 넘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었으리라. 뭔가 지시가 나올 거라고 나를 바라보던 녀석들의 모습은 가관, 내가 알아서 해보라는 듯이 입을 잠그자 그제야 부랴부랴 파티를 정비하던 라파엘의 모습도 재미있었다. 물론 8인의 기사들을 마무리 지은 것은 전술 라파엘을 비롯한 진두지휘였지만, 그전까지 고군분투하던 성검 용사 파티의 모습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싸우던 녀석들의 모습에서 놈들이 얼마나 마음을 굳게 먹었는지 알 수 있었고, 1회 차의 영웅들답게 전투 중에도 계속 성장하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이 코인은 된다! 이 코인은 돼! 너희는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시바.’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진형이나 방식을 바꿔주는 것만으로도 스펀지가 물을 먹듯이 쑥쑥 흡수하는 놈들의 모습에는 절로 미소가 피어나온다. 8기의 기사 중 마지막 3기는 따로 지시를 내릴 필요도 없었다. 짧은 경험이기는 했지만, 본인들이 어떤 포지션에서 어떻게 뛰어야 하는지 깨달은 것이다. “특히나 라파엘 님을 집중적으로 케어해 주셨을 때는…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더군요. 상투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느낌이라… 파티 전체가 라파엘 님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복잡한 곳에서….” “경험이 쌓이다 보면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하, 자꾸 그렇게 치켜세워 주시니 부끄럽군요. 별것 아닌 일입니다.” ‘물론 마음의 눈이 있다면.’ “아니요, 그 누구도 형처럼 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 누구도….” “실례되는 말이지만 제게도 가능한 일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사냥개 이주혁?’ 갑작스럽게 질문해 온 녀석은 라파엘에게 미묘한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는 녀석. 갑작스러운 발언에 이쪽으로 시선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주혁이 가능하다면 자신도 가능한 것은 아닌지, 여기사 역시 기대감이 넘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라파엘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이제는 개나 소나 전부….’ “글쎄요….” “…….” “…….” “가능하기야 하겠지만 아마 효율이 썩 좋지는 않을 겁니다.” 얘도 재능이 나쁘지 않은 모험가이기는 했지만….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죄송하기는 하지만, 애초에 개인이 가진 무력 그 자체를 전술로 사용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만큼… 아, 물론 주혁 씨를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팀 내에서의 역할이 다르니까요.” 내가 만약 저 사냥개를 써야 할 순간이 온다면 커다란 무력을 가진는 개인을 붙잡아두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을까. 끈질기고 독한 놈인 데다가 실제 전투 역시 그런 식으로 벌이는 녀석이었으니까. 이걸 어떻게 말해줘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우리 기적의 사제, 마리엔 님께서 다시금 입을 열어오셨다. “그럼 조혜진 님은 어떤가요?” “글쎄요, 반 반 정도….” 유니콘을 탄 조혜진이라면 한정적이지만 써볼 여지가 있다. 물론 이런 난전 상황에서는 힘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쩌다 전술 김현성이 이렇게 핫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다가 동네 시정잡배들도 자기 한번 봐달라고 할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확실히 대단하기는 했어요. 저희 파티장님이 강하다는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지만… 어림잡아서 3배, 아니, 그 이상은 더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솔직히… 별로였는데. 이걸 말할 수도 없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어느 정도까지 강해질 수 있는 건가요?” “강해지는 게 아닙니다. 원래부터 강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아무래도 개인이 볼 수 있는 시야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저는 그걸 보완해 주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위원장님은 먼 곳뿐만이 아니라 지척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전부….” ‘캐치하지 않냐고?’ “제가 조금 관찰력이 뛰어납니다.” “단순히 관찰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거다, 마리엔. 저건 재능의 영역이야. 그것도… 압도적인 재능.” ‘주혁아, 고맙다. 시바, 내가 살다 보니까 이런 소리도 들어보네. 형이 나중에 시간 내서 너도 함 봐줄게.’ “천재… 명예추기경님은… 천재로군요. 일반인들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우리 비극의 여기사님. 얘 이름이 뭐였더라… 너도 한번 꼭 봐줄게.’ 그런 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젓기는 했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발언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다. 왠지 내 속마음을 알고 있을 것 같은 조혜진만이 혀를 차며 나를 바라봤지만. 굳이 다른 발언을 하지는 않았다. 힘든 상황에 처해 있으니 저런 칭찬을 받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계산이 선 모양이다. “하하하, 천재라고 불릴 정도는 아닙니다. 여기 있는 라파엘 님 같은 사람을 천재라고 부르는 게 맞겠죠.” “그렇다면 어떤가요? 파란 길드마스터와 비교하면….” ‘누가 더 천재에 더 가깝냐고?’ 말을 전부 잇지 못하는 마리엔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질문처럼 보였지만, 휴식시간에 농담 따먹기 같은 느낌으로 나올 만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대륙에서 잘나가는 모험가 취급은 으레 연예인이나 정치인 같은 느낌이 아니었던가. 매일같이 가십에 휩싸이기도 했으니… 개인적으로 이런 이야기가 민감하게 들려오지는 않았다. 술자리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이를테면 내가 들어도 재미있는 주제들처럼 말이다. 지능을 0까지 깎은 차희라와 김현성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로렌과 엘룬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장애물이 없다고 가정하면 유니콘과 그리폰 중에 누가 더 빠를까. 진청과 이토소우타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악마숭배자와 악마소환사 중에 누가 더 강할까. 그런 주제들. 마치 예수님과 부처님을 싸움 붙이거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묻는 원초적 질문에 쓸데없이 열을 올리는 평론가들이나 백수들이 생각보다 많다. 당장 베니고어 넷을 들어가도 저런 주제들이 많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것은 진청과 이토 소우타, 악마숭배자와 악마소환사의 싸움. 당시 베니고어 넷의 여론은 압도적으로 진청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지만, 뭐 이건 쓸데없는 이야기다. 잠깐 정신이 다른 곳으로 가출하기는 했지만…. ‘흐음….’ 갑작스러운 질문을 괜스레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진지하게 받는 게 무의미하기는 하다. ‘라파엘?’ 녀석이 재능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여지가 없지만, 천재 중에 천재. 휴먼 중에 휴먼 김현성에게 비교하는 건…. ‘그건 아니지….’ 어떻게 상처받지 않게 대답해 줘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였다. 일단은 하하하, 하면서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것이 전부. 대충 분위기를 읽었는지 마리엔이 괜스레 민망해했다. ‘그래, 네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근데 네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 네가 아직 현성이를 못 봐서 그래. 진짜 걔 하는 거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고. 슉슉 슉슉 날아다닌다니까. 시바, 비교가 안 돼요, 비교가. 걔 재능은 진짜 대체 불가야. 노력하는 천재 알지? 시바, 그거라니까. 근데 회귀까지 했데요. 그러니 어떻게 비빌 수 있겠어? 절대로 안 비벼진다니까.’ “하하하, 그건 조금… 대답해 드리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역시 조금 어려운… 질문이었나 보네요. 그럼 명예추기경님의 지시를 받는 상태의 라파엘 님이라면 어떨까요? 파란 길드마스터와 비교해 보면… 역시 가능성이….” “아뇨, 당연히 못 이깁니다.” 무슨 의도로 던진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딱 잘라 이야기할 수 있다. “네?” “장담하건대 못 이길 겁니다. 가능성을 크게 잡아봤자 1%예요. 절대로 못 이깁니다, 절대로요. 지금 이곳에 계신 분 중에 저희 길드마스터가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본 분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마 제대로 한 번 본다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바로 이해할 겁니다. 절대로 못 이겨요, 절대로요….” “…….” “라파엘뿐만이 아닙니다. 여기 계신 파티원분들에게 제가 따로 오더를 내린다고 해도 가능성은 5% 정도라고 볼 수 있겠네요. 지금 상태보다 3단계 정도 더 올라간다고 가정하면 그제야 조금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던 기사가 입을 열어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나 차이가 나는 겁니까?” “네, 그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여러분이 단기간 내 강해졌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어요. 자신감도 있고 실력도… 대륙의 상위 파티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예요. 라파엘 님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다른 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예전의 파란 파티보다도 성장이 더 빠르다는 것 역시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정말로 빠르게 여기까지 올라왔다고 봅니다. 정말로 빠르게요.” “…….” “경험 부족을 논하는 게 아니에요. 스펙 자체가 다릅니다.” “…….” “아마 승부는 10초 안에 날 겁니다. 마리엔 님이 첫 일격에 당한 이후에 그대로 리타이어. 그 이후에 싸움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조금 강하게 말하면… 이 파티로 부딪치는 건 자살 행위에 가깝습니다.” “…….” 과장 하나 보태지 않은 발언. 시대가 변하기는 변했나 보다, 진짜. ‘너네가 진짜 우리 현성이가 얼마나 센 줄 모르는구나, 시바.’ 김현성이 진심으로 싸우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었다면, 이런 쓸데없는 질문이 나오지도 않았으리라. # 634 회귀자 사용설명서 634화 너희 김현성 레이드팟 아니지?(1) 과장해서 아무렇게나 던지는 말이 아니다. 단언하건대 이 파티로 김현성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어디 급이 높은 악마와 계약하지 않는 한,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아니지. 겨우 계약한다고 되겠어?’ 계약할 악마가 대륙에 자리 잡고 있지 않은 한은 효율이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리라. 용사 파티를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현재의 김현성은 강하다. 1년 전만 해도 사천왕 최약체 도노반을 반으로 갈라 버리지 않았던가. 이쪽에 연락 한 통도 없이, 정말 연락 한 통도 없이 수련에 매진한 녀석이 지금은 얼마나 강해져 있을지 제대로 상상하기 힘들었다. 솔직히 나 역시 최근 진심이 된 김현성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보이는 스텟으로만 대충 예상할 뿐이었지만 김현성의 무력을 단순한 스텟창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 아닌가. 아마 내가 상정하는 범위보다 더 무력이 오르지 않았을까. 정말로 마음을 독하게 먹고 바깥 신과 녀석을 따르는 비둘기들과의 결전을 준비했다고 생각해 보면, 적어도 신화 등급에 가까운 화력을 낸다고 하는 것이 옳다. 일단 파티원 대부분이 김현성의 움직임을 눈으로 제대로 좇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 후위 같은 경우에는 그림자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사제인 마리엔의 경우에는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 채 숨을 거둘 가능성이 컸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목이, 서 있는 자신의 몸을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본인이 죽었다는 걸 인지할 수 있지 않을까. 궁수나 암살자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민첩을 주 무기로 싸울 수 있는 놈들이 아니었던가. 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않고, 파티의 탱커 라인을 맡은 기사 역시 김현성에게서 파티원들을 지켜줄 수 있을 만한 민첩함과 시야가 없다. 그나마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는 게 라파엘과 사냥개. 어디까지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있고 검을 맞대는 것 정도가 가능하다는 거지, 싸움을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희망이 있다고,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고 싶었지만, 이 경우에는 팩트를 선물해 주는 것이 옳다. 하지만 녀석들에게는 충격이 꽤나 컸던 모양. ‘분위기가 별로 안 좋네.’ 한참 의기양양했던 시기였던 만큼, 현실을 마주하자 기가 죽은 것 같았다. ‘그래도 어쩌겠어. 그게 현실인데….’ 꿀 같은 휴식시간이 끝난 이후에 원정에서도 이 분위기가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약간 걱정되었지만, 공략을 진행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오히려 독기가 오른 듯 더욱더 열심히 하는 모습에 약간은 감동했을 정도였다. 내가 감동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 옛날 열심히 노력하던 박덕구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 얘들아. 열심히 해줘야지. 내가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데… 겨우 그 정도로 멘탈이 나가고 그래. 너네는 아직 더 클 가능성이 있어요. 한 10년 정도 엄청 열심히 하다 보면 그래도 가능할 거야. 그러니까 힘내세요, 힘.’ 나 역시 본격적으로 녀석들을 케어하는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미 한 번 교정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스텟의 성장 가능성에 따라 효율이 좋은 스텟에 투자하라고 조언해 준다든지, 가능성이 보이는 능력에 대해 조언해 준다든지, 아니면 보완해야 할 아이템에 대해 서술해 주는 종류의 지원이었다. 계속해서 던전 내부에 있는 상황이었지만, 공략이 끝난 이후에 아이템을 교체하는 녀석들도 있었고, 또 휴식시간 중간중간, 수련에 힘을 쏟고 있는 녀석들도 있었다. 던전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가능한 일이었다. 행군 시간은 길었고 전투 후에 쉬는 일도 잦았다. 오죽했으면 식량이 떨어지는 상황을 걱정했을까. 하지만 무덤의 내부로 진입하면 진입할수록 점점 더 보스 몬스터가 보이는 곳에 닿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실제로 앞서 정찰을 나갔었던 궁수가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왔고, 그 결과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었다. “형.” “네?” “…….” “…….” “아무것도 아니에요.”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라파엘이 자꾸 괜스레 말을 걸며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 던전행으로 한 계단 더 성큼 성장한 모습이었다.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지나고 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아질수록 둘만의 자리를 만들려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결정적인 말을 해오지는 않았다. 그사이에 던전 보스를 마주칠 수 있었고 그 이름에서 보이듯 녀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상했었던 것처럼 여왕 타입. -감히 나의 영역에 침범하다니! 상투적인 대사를 날리며 원정대를 위협해 오는 모습에 오금이 저리기는 했지만, 그동안의 원정으로 경험치를 쌓아 올린 녀석들은, 굳이 내 오더가 없이도 제법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누군가 완벽하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젓겠지만, 적어도 얘네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 중에서는 최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호흡도 잘 맞았고, 개인적으로도 작은 성장을 이루어 냈다. 상정하던 결과 중 최선의 결과가 아닐까. 콰아아아아앙! “후위, 후위 완벽하게 보호해 주세요. 후위를 보호해야 합니다.” “…….” “기사님은 전위를 봐주지 않으셔도 돼요. 어떻게든 마리엔 님에게 꽉 달라 붙어주세요, 꼭.” “…….” “모습을 놓쳤다고 당황하실 필요 없습니다. 최대한 뭉쳐서 막으면 됩니다. 최대한 뭉쳐서. 마법사님은 보호 마법 상시 대기해 주시고… 시야에서 놓쳤다고 생각하는 즉시 보호 마법 외워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할 겁니다.” -허락받지 못한 인간들아. 나를 잠에서 깨운 죄를 톡톡히 물을 것이니. 거대한 검을 든 여왕이 빠르게 몸을 옮기자, 즉시 보호 마법을 외우는 마법사. 콰드드드득!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커다란 충격이 있을 리 만무했다. 사냥개 이주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왕을 뒤를 쫓으며 계속해서 견제하고 있었고 궁수와 암살자는 그런 사냥개를 돕고 있다. 기사는 사제와 마법사에게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고, 라파엘은 이런 이들을 잇는 다리가 되어 전체적인 상황을 조율하고 있는 상황. 너무 지지부진하게 움직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현재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포지션을 잡고 있다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하리라. 조혜진도 유기적인 팀플레이에 조금은 놀랍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있지 않은가. 아직 패턴을 다 파악하지도 못했으니, 두고 보자는 심산이 아니다. 이 파티는 이런 종류의 진형이 가장 알맞다고 판단을 내렸다. 이 던전을 공략하고 경험하고, 새로운 아이템을 얻고, 훈련하는 동안, 이 게 맞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완벽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라파엘의 결정이었으니 뭐라고 하기에도 조금 애매했다. 무엇보다 지금보다 더 발전할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틀림없이 나쁜 선택은 아니다. 라파엘 자신이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위치를 본인이 직접 찾은 셈이었으니까. 세세한 부분을 조정해 주는 것 같아 간단히 지시사항을 열거하자. 확실히 점점 더 모양새를 갖추어가는 것이 보인다. ‘이 코인 된다! 무조건 된다고!’ 1회 차의 영웅들과 성검 용사의 만남. 하나의 파티로 점점 자리 잡고 있는 녀석들을 보는 건 정말로 기쁜 일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던 것은 바로 그때. ‘설마….’ 검을 들고 설치는 여왕의 모습에서 언뜻언뜻 김현성의 모습이 비쳤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니지, 이 새끼들아?’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저 파티의 모습이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김현성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검을 든 여왕을 상대로 연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김현성과의 전투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새끼들이 며칠 전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부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들이 김현성을 상대하는 모습이 머릿속으로 천천히 그려진다. 사제에게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기사, 모습이 사라진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반드시 보호 마법을 외우고 있는 마법사, 끈질기게 뒤를 따라붙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어떻게든 방해하려는 사냥개, 생매장 듀오의 독이나 허를 찌르는 화살, 그리고 파티를 조율하며 어떻게든 결정타를 먹이려 전황을 살피고 있는 라파엘까지. ‘설마… 아니겠지? 너희 시바, 김현성 레이드 팟 아니지?’ 생각해 보면 아까 전 발언 역시 무척이나 신경 쓰이지 않는가. 당연히 장난삼아 물어본 것에 불과하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의미심장한 부분이 많다. ‘아니야, 시바. 그럴 리가 없어. 소중하게 키운 내 자식들이 그럴 리가 없다고.’ 무척 가라앉은 파티의 분위기도 다시금 재조명된다. 그리고 목숨을 건 결사단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던 녀석들의 얼굴도, 심지어 이쪽과 시간을 만들려고 했던 라파엘 역시 신경 쓰인다. ‘우리 애들이 그럴 리가 없다니까.’ 이미 의심이 점점 차오르고 있었지만 애써 이 의심을 누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확실한 정황과 증거가 없기도 했지만 계속해서 나를 다독이는 이유는 이 코인이 떡락할 리가 없다는 자기세뇌였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우리 라파엘 장군님이….’ 시바, 진짜 이거 망하는 거 아니야? 얘네들 싹 다 치워 버려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우리 애들을 치우려고 하고 그래요?’ 점점 어지러워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이대로 이 코인을 놓아버리기에는 투자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던 탓이다. ‘그래,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닌데. 뭐… 내가 너무 과민반응한 거겠지. 너희 김현성 레이드 팟 아니니까. 아닐 거야.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응, 아니야.’ 김현성의 고백을 받았던 그 순간부터 자식 키우는 마음가짐으로 지원을 쏟아낸 우리 1회차의 영웅들. 물론 녀석들은 일부였지만 쓸 만한 놈들이 많은 만큼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파엘이….’ 성검 코인을 끝가지 붙들고 있었던 이유. 제대로 키워보자고 다짐했고, 실제로도 그래왔던 만큼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고액 과외도 붙여주지 않았던가. 녀석의 교육을 위해 희라 누나에게 로비하며 아양을 떨었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간다. ‘아니야.’ 라파엘이 내게 보내는 미소와 눈물은 거짓을 읽은 적이 없다. 애초에 이쪽을 적대시할 거였다면 기회는 많았을 것이다. ‘우리 현성이가 뭘 잘못했다고 얘네가 이러겠어.’ 때마침 라파엘이 던전 보스에게 일격을 날리는 모습이 전해져 온다. 내가 이 정도로 성장했다고, 이제부터 효도하겠다고, 이제는 고생 끝이라고, 우리 힘든 시절 전부 끝났다고 외치는 것만 같은 효자의 눈빛. 녀석의 눈빛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쓸데없는 오해는 이 시점에서 끝. “형.” 나를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기분 좋게 뛰어오는 녀석을 맞으려 함박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걸어 나가자 입술을 꽉 깨문 라파엘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박리안이 쌍칼을 휘둘러 놈의 목을 노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송해요, 형.” ‘죽이면 안 돼, 시바.’ 뭔가 좋지 않은 기운을 감지한 것은 박수를 보낼 만했지만, 이야기도 듣지 않고 곧바로 죽일 것처럼 검을 날리는 모습은 가관. 그만큼 라파엘이 만만치 않게 성장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박리안의 표정에는 여유가 없고, 라파엘의 표정은 여유롭다. 목이 달아날 것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놈의 표정은 무척이나 여유롭다. 저번 박리안과 부딪쳤을 때 분명히 땅바닥에 처박혔던 것은 라파엘이었지만, 이번에 바닥에 처박혀 있는 것은 박리안. 콰드드득! ‘내가 쌍검 찍지 말라고 했지.’ 심지어 놈의 옆에서 창을 날려오는 조혜진의 공격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창이 녀석의 목에 닿기 직전, 움직임을 멈춘 채 나를 바라보는 조혜진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내 목에 성검을 겨누고 있는 라파엘. 녀석은 8장의 회색 날개를 활짝 편 채로. 멍한 표정의 조혜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두 분 다 죽이지 않겠습니다.” “당신….” “김현성을 불러오세요. 정확히 일주일 후에. ‘혼자 이곳으로 오지 않는다면 이 사람을 죽일 겁니다’라고 전해주시면 됩니다.” “…….” “일주일 후에, 혼자, 이곳으로 와야 합니다. 제 말 똑똑히 전해주세요. 조혜진 님.”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은 장내. ‘너, 왜 시바… 자살하려고 그래, 이 새끼야….’ 성검 코인 떡락이 확정된 순간이었다. # 635 회귀자 사용설명서 635화 너희 김현성 레이드팟 아니지?(2) 자식에게 배신당한 부모의 심정이 이러할까. 올라갈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종목이 상장폐지가 됐다는 소식을 접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장내가 무척 혼란스러웠지만 내 속만큼 혼란스러울까. 여러 가지로 똥줄이 탈 수밖에 없었다. ‘이거 수습 가능한 거지?’ 완전히 떡락해 버린 코인을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 없다. 언제까지 존버해야 하는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사실 나 자신이 위험한 상황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목에 날붙이가 맞닿아 있기는 했지만, 라파엘이 내 몸에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라는 건 대충 알 수 있었으니까. 나에게 죄송하다고 말한 것도 그랬고, 묘하게 이쪽을 배려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혹여 다리가 풀려서 쓰러지지 않을까 몸으로 나를 지탱하는 게 느껴진다. 납치범이 인질을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웃기기는 했지만, 애초 녀석이 노리는 것은 이쪽이 아니다. 최소한 라파엘은 나를 적대시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함께했던 그 시간들, 그 추억들, 그 따뜻했던 나날들. ‘시바….’ 최소한 그건 거짓이 아니었다. 녀석이 적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김현성. 어째서 녀석이 김현성을 적대시하는지는 조금 더 알아봐야겠지만, 묘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이 오해를 풀 수 있다면 녀석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한번 우리의 소중했던 추억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 주식… 소중한 내 추억.’ 곧바로 터질 것만 같은 폭탄이 되어버린 장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혜진. 그녀 역시 나와 별다를 바 없어 보였다. 현재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얘랑 제법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저런 얼굴은 처음 본다.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 그녀가 천인공노할 가면쓰레기에게 죽었을 때도 저런 표정을 지었으니까. 김현성을 대신해 희생했을 때에도 저런 얼굴을 하지 않았던가.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는 것은 같다. 말이 잘 나오지 않는지 입을 뻐끔거리는 모습. 이내 천천히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계속해서 들고 있던 창을 땅바닥에 천천히 내리고 두 팔을 위쪽으로 든 채로 말이다. “부길드마스터를 놓아주세요. 인질이 필요하신 거라면 저로도 충분할 겁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무기를 버리면 어떻게 해.’ 심지어 창을 발로 툭 밀어 자신과 떨어뜨리는 모습. 전투 의지가 없다는 걸 표현하는 것 같았지만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라파엘이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 따로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것을 확인받은 상황이었지만 그 말이 구라일지 누가 알겠는가. ‘얘가 너랑 나 둘 다 죽일지 어떻게 알고. 왜 이렇게 사람이 의심이 없어.’ “아니요, 제게 필요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이 사람입니다. 조혜진, 당신은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어요. 두 번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서 돌아가서 제 말을 전하세요.” “원하는 게 있으시다면….” “원하는 건 이미 한참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더 이상 제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세요.” “하지만….” “제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목 근처에 서늘한 게 닿는 감각은 반갑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떻게든 이 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것. “이러실 필요….” 하지만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는다. ‘개 시바….’ 조혜진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날붙이가 연약한 피부를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 진짜 왜 그래. 형 목에 상처 남기려고?’ 박리안은 아직까지 바닥에 얼굴을 맞닿은 채 제압당해 있었고, 어느새 다가온 사냥개 이주혁이 그녀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댔다. 얼굴에는 분하다는 표정이 한껏 드러나 있었지만, 그녀 역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무엇보다 8개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라파엘은…. ‘강해.’ 아마 완전히 성검의 선택을 받았다고 말해도 상관없으리라. 단순히 스펙상으로는 조혜진보다 강하다. 물론 경험의 차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차이가 녀석의 발목을 잡겠지만, 준신화 등급에 근접할 정도의 힘을 이어받은 녀석은 강했다. 파티원들과 함께 박리안, 조혜진을 상대한다고 가정했을 시, 승산은 저쪽에 있다는 거다. 조혜진도 그걸 알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수도 있겠지. ‘정말로 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 무언가 원하는 게 있는 거야.’ 라고. 조혜진의 머리가 팽팽히 돌아가는 것이 보였지만, 마음 급한 라파엘이 이 사태를 가만히 지켜볼 리 만무하다. 뭐라도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살짝 표정을 찡그리자, 곧바로 반응하는 녀석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혀, 형.” 무척 당황하는 모습, 납치범이 보여줄 수 있는 얼굴이 아니다. 잠깐 긴가민가했지만 역시나 라파엘은 나를 걱정하고 있다. ‘그래, 우리 추억 아직 잊지 않았잖아, 그렇지?’ “형! 괜찮아요? 형! 어, 어!” 온몸에 힘을 다 빼고 연기에 몸을 싣는다. 혼을 담아 최대한 머리가 아프다는 모션을 취하자, 곧바로 조혜진이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어, 어… 아….” “부길드마스터를 내려놓으세요. 스트레스를 받으시면 발작을….” “어? 어, 아….” “어서 빨리 내려….” “가, 가까이 오지 마! 제길! 가까이 오지 말라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터져 깜짝 놀랐는지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중. 이 타이밍에 발작을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조혜진의 말에 나를 바닥에 내려놓아야 할지, 아니면 계속해서 꽉 붙들고 있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빼앗기기 싫은 것처럼 이쪽을 꽉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눈에는 얼핏 광기마저 느껴져 실수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는 상황. “빨리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초조해 보이기는 박리안과 조혜진 역시 마찬가지. 이런 극한 상황에 터진 갑작스러운 발작이 연기라는 걸 알 법도 하건만, 그녀에게 그 정도의 눈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 라파엘의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에 반응한 그녀도 참 그녀답지 않은가. “빨리 내려놓으세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게….” “가까이, 가까이 오지 말라고! 내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고.” “당신….” “지금 빨리 가세요. 지금 빨리 가라고. 빨리 가서, 김현성한테 전해. 아까 내가 말한 대로… 똑바로 전하라고. 당신이 할 일은 그거야. 그게 형을 위한 길이니까. 내가 한 말 만 전해. 형은 내가 지킬 거야. 내가 지킬 거라고.” “…….” “빨리… 빨리!” ‘역효과, 시바, 역효과.’ 더 이상 라파엘을 자극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조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스러워하는 내 얼굴을 두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입술을 꽉 깨문 모습은 가관. “약속은 지킬 거라고 믿겠습니다.” 그 뒤로 조혜진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곧바로 달려 나가는 모습을 확인했는지, 라파엘이 나를 든 채로 몸을 돌렸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시야가 변하는 게 느껴졌지만 뭐라고 반응할 수 있을 리 없다. 일단은 계속해서 고통스럽다는 모션을 취하자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 것이 들려왔다. “형… 형….” “…….” “형… 괜찮으시죠? 괜찮으신 거 맞죠? 그렇죠?”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문을 여는 소리가 몇 번이나 들린 후 등 뒤로 푹신푹신한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마 침대 비슷한 곳에 나를 내려놓은 것이 아닐까. “괜찮으신 거죠? 괜찮으실 거예요. 제가… 제가 치료해 드릴 수 있어요.” “아, 하아, 하아….”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어요.”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괴롭다는 듯이, 아파 뒈지겠다는 듯이 눈을 치켜뜨자 황급히 외투를 벗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최대한 숨을 편하게 쉴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조혜진의 말을 기억하는 것이 분명하리라. 그제야 힐끔거리며 이 방을 둘러 볼 수 있었다. 무척이나 넓은 방 안, 이 던전에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금 있는 위치가 어떤 곳인지는 대충 감이 잡힌다. 여왕의 무덤이라는 던전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여왕이 사용하던 방은 아닐까. 계속해서 잠만 자고 있었던 이 던전의 던전 보스가 이 방을 사용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넓고 고급지다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 계속해서 숨을 헐떡이자 라파엘이 발을 동동 굴렀다. 당연하지만 창백해진 안색이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급해 보인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모습. 때마침 기적의 사제가 등장한 게 놈에게는 다행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형은, 형은 괜찮은 건가요? 형은….” “잠깐 살펴볼게요, 잠깐만.” “어떻게 하지.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지? 빨리 봐주세요. 빨리….” “일, 일단 진정하세요. 저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일시적인 발작이라고 했으니 아마 가라앉으실 거예요. 분명히….” “하아, 하아, 허억….” 당연하지만 제대로 된 원인을 찾지 못하자, 그녀 역시 당황하고 있다. 계속해서 신성력을 밀어 넣고는 있었지만, 차도가 있을 리 있겠는가. 수면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 아니면 수면제 비슷한 뭐라도 먹여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는 가운데 이쪽 역시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이후 일어날 상황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바, 이거 어떻게 하지. 이거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진짜 어떻게 하지.’ 기왕이면 이대로 린델로 데려다줬으면 좋겠다. 형이 너무 괴로워하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지 않다는 게 문제.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것처럼 보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라파엘은 현재 양보할 생각이 없다. 아까 전 조혜진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했던 시점에 이미 답은 나왔다. 도대체 어째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해를 끼치려 한다기보다는 보호하려는 것 같지 않은가. 물론 누구에게서 나를 보호하려고 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전까지 있었던 행동으로 유추해 보면…. ‘도대체 왜….’ 김현성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일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였는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해를 풀 시간은 있어.’ 김현성이 이곳에 도착하는 것은 정확히 일주일 후니까. 성검 용사 파티에게는 재정비하고 지금까지 소모한 체력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녀석들을 말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리라.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녀석들을 살릴 기회. 때마침 마법사마저 이쪽에 들어왔다. 계속해서 진정되지 않자 마지막 수단인 수면 마법이라도 걸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 머리를 쥐어뜯는 내 양팔을 꽉 잡은 라파엘과 계속해서 신성력을 쏟아내고 있는 기적의 사제 마리엔, 그리고 허겁지겁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는 마법사까지. 정말로 잠에 빠지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숨을 천천히 고르자, 곧바로 주문을 캔슬하는 것이 느껴졌다. 인위적으로 재우는 것보다는 편하게 쉴 수 있게 해주는 게 좋을 거라고 판단한 거겠지. 연신 ‘엿 됐다’라는 생각을 곱씹으면서도 걱정된 것은 역시나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 ‘얘, 어떻게 하지?’ 당연하지만 하얀이 역시 신경 쓰인다. 물론 조혜진의 성격상 길드원들이 모르게 일을 처리할 것 같기는 했지만, 일주일 후에 혼자 이곳으로 도착할 김현성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가 없다. ‘아니야.’ 라파엘이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건 조혜진이 대충 알고 있을 테니까… 그것까지 전한다고 가정하면…. ‘그렇게 화나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지? 내 생각이 맞지?’ 최대한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풀어나가려 할 것이다. 분명히… 분명히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636 회귀자 사용설명서 636화 일주일(1) ‘이거 일부러 늦게 오고 있는 건 아니겠지.’ “미치겠네, 정말. 안 그래도 바쁜데, 자기만 꿀 빨고 있겠다? 하, 참….”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와 피로 회복제들이 시야에 비쳤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상황은 아니다. 아무리 유능한 행정 요원들이 즐비해 있다고 해도, 보안을 유지해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은 만큼, 그 인간의 공백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5현장 쪽으로 출발해야 하는 촉매들과 재료들을 보내는 것부터가 문제, 보안유지를 위해 유통과정을 숨기다 보니 처리할 사안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디 그것뿐이랴. 기존에 이기영이 맡고 있던 업무를 처리하는 것까지,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일이 두 배로 늘어난 것만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2.5배 정도 늘어난 것 같다. ‘오늘도 밤새야 되겠네.’ “제기랄, 두고 봐. 이건 보상받을 거야. 무조건 보상받을 거라고.” 뭘 요구해야 적절할지 리스트를 적고 싶은 심정.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조차 없다. 이번에는 길어질 거라고 듣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길어지고 있었으니까. 여신의 손거울이 갑작스럽게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언니, 잠깐 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최대한 빨리요. 급한 일이에요.] “뭐야, 연수?” [정말로 급한 일이에요. 좌표 보내놨으니까. 그리폰 타고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빨리,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고요. 장난치는 게 아니에요. 아마 오시면 저한테 감사하게 될 걸요.] [뭔데?] [직접 와서 보셔야 할 것 같아요.] 검은 백조에서 일하던 시절부터 무척 가깝게 지냈던 동생, 하연수. 요즘도 매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기에 메시지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점점 찝찝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 비상연락망이 울렸다는 것이 바로 그 원인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 연락망이 울렸다는 건 사건이 터졌다는 것과 진배없다. 안 그래도 바쁜 상황에 또 하나의 일이 터진 것이다. 손거울에 찍힌 좌표는 린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숲. [지금 바로 오셔야 해요. 정말로 급한 일이니까.] “알았다고, 알았어. 제기랄.” [린델에서 만나면 되겠네.] [아니요. 린델로는 못 들어가요. 메시지로 연락드리기도 조금 찝찝한 사안이고요.] “…….” ‘얘가 혹시 나 담그려고 설계 치고 있는 거 아니야?’ 의심이 생기기는 한다. 이미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본래 인간관계라는 게 별것 아닌 이익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는 법 아니겠는가. ‘아니야,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지.’ 조금 고민하기는 했지만 가능성 자체는 완전히 아웃, 자신이 가지는 파급력을 알 텐데 그런 무모할 짓거리를 할 리가 없다. 성격상 의심이 많다 보니 호위는 평소보다 많이 데려가겠지만…. ‘언니는 너를 믿어, 연수야. 그렇지? 우리 사이 여기서 끝낼 정도는 아니었잖아.’ 곧바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문을 박차고 나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에 비쳤다. “언니, 나가시려고요?” “응, 그리폰 대기시켜 놔. 지금 나갈 테니까.” “어디로 가세요? 혹시 위원장님 마중 나가시는 거면, 평소대로 준비할까요?” “아냐, 그런 거 아니니까. 걸칠 것 하나만 마련해 주면 돼. 따로 준비 안 해도 되고. 애들 지금 쉬는 중이지?” “네.” “쓸 만한 애들 3명, 입 무거운 얘들로.” “네.” “아, 그리고 비밀리에 나가는 거니까. 투명 마법 사용 가능한 마법사도 하나.” “네, 준비해 놓을게요.” 이륙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중에도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복잡한 생각이 일었다. 물론 대단한 생각은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터진 건지, 오늘은 밤새는 게 완전히 확정됐구나.’ 하는 수준의 생각. 하지만 하연수가 찍은 좌표에 실제로 도달한 순간, 저도 모르게 쌍욕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시야에 비친 것은 최근에 자주 마주쳤던 얼굴이었다. 자신과 잘 맞지 않은 것 같아 크게 왕래가 없었지만, 최근에 어쩔 수 없이 자주 마주쳤던 인물. 그 인간쓰레기가 기억상실 기믹을 밀어붙이면서 얼굴을 익혔던 여자였다. 명실상부 파란의 삼인자이자, 길드마스터 김현성의 신임을 받고 있는 실력자.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평소에 단정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머리는 풀어 헤쳐져 있었고, 길바닥에서 한바탕 뒹군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띈다. 마력은 완전히 바닥나 있는 상태였고, 체력마저 바닥나 있다. 정신을 잃은 모습을 보니 문제가 생기긴 한 모양, 괜스레 이마를 턱하고 짚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한 것 중 하나가 현실이 됐다. 던전에서 무언가 일이 터진 것이다. 입술을 꽉 깨물어 봤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는 변함이 없다. 약하게 한숨을 내뱉었을 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말이 맞죠? 저한테 감사할 거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언제 발견한 거야. 흔적 읽어봤어?” “네, 안 그래도 물어보실 것 같아서, 대충… 아직 정확하지는 않지만 던전에서부터 계속해서 뛰어온 거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여왕의 무덤이지? 거리가 꽤 될 텐데, 뛰어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 정도 되는 모험가가 체력이고 나발이고 싹 다 털렸죠. 연락책도 없고, 창도, 가방도 가지고 있지 않았네요. 도망친 것 같지는 않고. 목적지가 린델인 걸 보면 뭔가 알리려고 했을 가능성이 커요. 던전 공략 실패는 아닌 것 같고, 안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추측돼요. 아, 참고로 이렇게 정신을 잃은 원인은 체력과 마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저기 보이는 곳에서 굴러떨어진 거고요. 차라리 그게 이 여자한테는 잘된 일일 수도 있겠네요.” “왜.” “왜긴 왜겠어요. 이 상태로 린델까지 뛰어갔으면 죽었을지도 몰라요. 심지어 기어가려다가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행운이었죠, 뭐.” “너희가 최초 목격자야?” “아니요.” “최초 목격자들은… 그냥 린델로 들어가게 내버려 뒀어?” “일단 입은 막아뒀어요.” “걔네 확실하게 처리하고, 얘 좀 깨워봐.” “언니는… 수고했다는 말도 안 해줘요?” “그럴 리가 있나. 이리 와봐, 연수야. 꽉 껴안아 줄 테니까. 정말로 큰일 한 거야. 네가 린델을 구한 거라고.” “저한테 빚 하나 진 거예요. 잊지 마세요.” “이자까지 쳐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피로 회복 포션 먹이고, 나머지는 전부 나가 있어. 연수, 너… 아니다. 너는 남아 있어도 되겠네.” “네, 아, 슬슬 일어날 거예요.” 천천히 다가가 봤지만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생각보다 고운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뺨을 툭툭 건드린 순간, 번쩍 눈을 뜨는 모습이 보였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몸의 균형이 무너진 뒤, 왼손으로는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오른손으로는 나뭇가지를 쥐고 있다. 당연하지만 몸은 반응하지 못한다. 자신의 목을 향해 내리 꽂혀오는 날카로운 나뭇가지를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옆에 있던 하연수가 그녀의 팔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 죽을 뻔했네.” “위험했네요, 언니.” “뭐야, 아직 깨어난 거 아니야?” “슬슬 일어날 거예요. 방금 전은 몸이 기억하고 있는 반사적인 행동 같아 보이는데, 소문 그대로네요. 나중에 식사나 같이하자고 해봐야지.” “아, 으….” “저기요, 저 기억나요?” “누구… 여기는….” “저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이지혜예요. 당신에 부길드마스터랑 그렇고 그런 사이. 우리 얼굴 본 적 있죠? 같이 일도 몇 번 했었고. 연수야, 물 좀 뿌려봐.” “…….” “저 알아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그만 좀 잡아당겨요. 소매 다 뜯어지겠네.” “부… 길드마스터… 납치, 라파엘….” ‘엿 됐네.’ 3가지의 키워드가 귓가에 들어온 순간 일이 어떻게 됐는지 곧바로 이해된다. 대충 비슷한 상황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왜 걔가 오빠를 납치해?’ 의문이 생겨났다. “일주일… 후에… 길드마스터… 던전으로… 혼자… 전해 드려야….” “네?” “전해 드려야….” ‘아니, 미친…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인질극이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혹시 하는 생각에 잠깐이나마 심장이 덜컹거렸지만, 이상하게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 그 둠기영 사태 역시 거짓부렁이었으니 오죽할까. 잠시 찝찝한 생각이 머릿속에 감돌았지만, 적어도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정말로 그런 상황이었다면 대륙을 버리는 선택을 해서라도 그 상황에서 빠져나갔으리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평온한 대륙이 이기영이 안전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문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냐는 것이다. ‘라파엘… 라파엘.’ “언니, 이거 난리 나는 거 아니에요?” “호들갑 떨 필요 없어. 최대한 조용하게 해결할 거야. 조용하게.” “왜요, 혼, 혼란스러워질까 봐 그런 거예요? 확실히 위원장님이 납치됐다는 소리가 나오면….” ‘아냐, 그것 때문이 아니야.’ 물론 그것 역시 걱정되기는 한다. 언론에서는 앞다투어 위원장의 납치 소식을 전할 것이고 또 한 번 대륙은 통탄에 빠져 기도회를 드리지 않을까. 바젤 추기경은 당장 신성 기사단을 파견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교국의 지도자 오스칼 역시 국가적 위기를 선포할 것이 분명하리라. 역병 드래곤은 또 한 번 크롸롸롸 하며 울부짖겠지. 원활하게 잘 돌아가던 시스템이 정전이 난 것처럼 일순간 멈추는 것도 이미 정해진 이야기. 굳이 보지 않아도 예상이 간다.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 하지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역시나 파란 길드의 반응이다. 그중에서도 항상 미친 짓을 해왔던 미친년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정하얀… 걔가 알면 안 돼, 절대로.’ 만약 오빠가 납치됐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미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 누구보다 이기영이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으리라. 지금까지 해온 화려한 전적만 둘러봐도 대충 각이 나오지 않는가. “지금 곧바로 파란 길드로 향할 거야. 이 여자한테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물어보고, 문자 보내놔.” “어, 어떻게 하시게요.” “뭘 어떻게 해. 김현성한테 알려야지.” “괜찮을까요?” “아마도. 무조건 설득해야지. 생각보다 이성적인 사람이야. 일단 그놈들이 원하는 건 김현성이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파란 길드마스터에게 알리기는 해야 돼. 이후의 대응책은 같이 생각해 보면 돼. 필요할 경우 협상할 수도 있고.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인데… 이야기를 한번 해줘야지.” 오늘 참 많이도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 길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에 연수가 보낸 문자를 통해 정확히 어떤 일이 터진 건지 자세히 확인하고, 마치 프레젠테이션에 들어가기 직전처럼 김현성을 구슬릴 말들을 생각해 놓는다. 조금 불안한 감도 있었지만, 자신감은 있다. 정하얀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얘는 말이 통하기는 하니까. 문을 두드리고 곧바로 안쪽으로 들어가자 여전히 차가워 보이는 얼굴이 눈에 비친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조금은 저기압인 것 같은 느낌. 마침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찾아왔다며 한숨을 내쉬고, 대뜸 본론부터 입을 열었을 때였다. “오랜만이네요, 파란 길드마스터.” “용건이 뭡니까.”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본론부터 말씀드릴게요. 아무래도 기영 씨가 납치당한 것 같아요.” “…….” “검은 백조에서, 던전에서 나와 린델로 향하던 조혜진 씨를 확보했어요. 던전 안에서 기영 씨가 라파엘 파티에게 납치… 를 그리고… 원하는 건 아마… 일주일 후에….” “…….” “오지 않는다면… 오, 오빠를… 죽이겠다고… 그러니까, 일주일 후에… 파란 길드마스터가… 던전으로….” “…….” ‘뭐야….’ 자신이 멍청해진 것이 아니다. 저도 모르게 턱이 덜덜 떨려오고, 다리가 풀려온다. 풀썩 주저앉고 싶은 심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는 상황. 정신은 멀쩡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온몸에서는 소름이 돋아나고 숨을 쉬기가 쉽지가 않다. ‘미친, 시발… 미친, 뭐야. 이게 뭐야.’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데도 저 모양, 일반인에 가까운 자신이 바라보기에도 살의가 몸을 삐져나오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 “…….” ‘아, 이거 큰일 났다. 망했다, 망했네.’ 애초에 협상에 여지는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것으로 모자라 김현성의 얼굴을 목도한 순간 그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방문을 나가는 모습은 뭐라고 형용하기 힘들 정도다. 팔이라도 붙잡고 대책을 논의해야 하지 않겠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건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다. “일이나 하러 가자… 지들 일이니 지들끼리 알아서 해결하겠지.” 하루에 두 번이나 죽을 뻔한 것도 흔치 않은 일 아니던가. 일진이 좋지 않으니, 방으로 들어가 끝마치지 못한 일이나 하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지금쯤 이기영도…. ‘고기나 뜯고 있겠지, 뭐.’ 100% 확신할 수 있었다. * * * “입에서 살살 녹네….” # 637 회귀자 사용설명서 637화 일주일(2) ‘누가 요리한 거지.’ “왜 이렇게 살살 녹는 거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그 말 그대로였다. 한입 더 먹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 애초에 이걸 다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코끝을 찌르는 향긋한 냄새에 낚여 손대기는 했다만, 이걸 전부 해치운다는 건 현재 이 상황을 괜찮다고 받아들이는 것과 진배없다. 물론 배가 고프기는 하다. 아무리 내 입이 짧다고는 하지만 던전에 들어온 뒤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으니까. 심지어 예상했던 것보다 던전의 넓었기 때문에 공략 마지막에 와서는 풀죽 같은 것밖에 먹지 못했다. ‘이런 건 또 어디 숨겨놓은 거야?’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다고 해야 설명이 된다. 예상은 했지만, 호화로운 만찬을 보자 더욱더 내 생각에 확신하게 된다. ‘가방 적재 용량에 한계가 있을 텐데, 지들 먹을 건 있나 몰라.’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될 정도의 만찬, 물론 만찬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소박했지만 던전 안에서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초창기 파란 길드가 던전을 다닐 때보다 퀄리티가 좋지 않은가. 안타까운 것은 이 모든 음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 이기영은 최대한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걸 표현해야만 했다. 그래야 이 새끼를 설득할 여지가 있을 테니까. 처음부터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열변을 토하는 것보다 일단은 입을 꾹 닫고 있는 게 효과가 더 좋게 느껴질 것이다. 상대방을 먼저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협상에서 꼭 필요한 자세가 아니었던가. 때마침 인기척이 느껴졌다. 커다란 방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들어갈게요, 형.” “…….” “식사는 좀 하셨나요.” “…….”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 팔을 휘두르자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먹기 좋은 음식들이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녀석이 입술을 꽉 깨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네가 준 음식은 절대로 입에 대지 않을 거라는 눈빛을 한 번 쏘아 보내는 적대적인 반응을 보여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굳은 라파엘의 얼굴을 보니, 이 정도로 냉담한 반응을 보일지는 몰랐던 모양. 시간이 지나면 조금 풀어질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상처받은 이기영의 마음을 풀기 힘들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입에 잘 맞지 않으셨던 모양이네요.” ‘아냐, 입에는 잘 맞았어. 정말로 잘 맞았다고. 솔직히 전부 다 먹고 싶었는데… 자존심 때문에 못 먹은 거야.’ “다, 다시 가져올게요. 아니면 따로 먹고 싶은 게 있으세요?” ‘거울연어.’ “거울연어도 가지고 왔는데. 그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그건 또 언제 챙겨왔어? 아니야, 그런데 지금은 필요 없어.’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이 와인잔을 집어 던지자 가만히 서서 그걸 또 맞고 있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좋아하는 와인이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저건 조금 아깝다. 역시 던지지 말걸. 졸지에 와인을 뒤집어쓴 라파엘은 다소 당황한 표정, 하지만 딱히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쓴웃음을 지으며 직접 땅바닥에 떨어진 접시들을 줍는 모습은 가관. “밟으면 다쳐요.”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뒷모습이 굉장히 씁쓸해 보였지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형이 절 어떻게 생각하시든 상관없어요.” “…….” “몸은 조금 어떠세요, 괜찮으신 거죠?” “…….” “많이 놀라셨겠지만….” “나가.” “…….”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다. 한숨을 크게 쉰 녀석의 쓸쓸한 뒷모습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왔지만 역시나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일단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옳다고 느껴진다. 내일이나 내일 모래 즈음에 슬그머니 이야기를 꺼내보는 게 좋지 않을까. 물론 말이 통할지는 미지수이지만 그걸 위한 빌드업이 아니던가. 나는 여기에 비록 갇혀 있지만, 주도권은 내가 쥐고 있다는 걸 상기시켜 줘야만 했다. 깽판 부리는 거 말고는 하는 게 없어 보이겠지만, 이 빌드업은 중요하다. ‘설득할 수 있어.’ ‘사랑했다, 라파엘’을 시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현재 상황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내 손으로 키운 이들을 쉽게 떠나보낼 수 있을까. 평범한 녀석들이었다면 어서 김현성이 달려 들어와 뚝배기를 깨주기를 기다렸겠지만, 용사 파티는 가능성이 보이는 녀석들뿐이다. 1회 차 영웅들도 그랬고, 라파엘은 더욱더 그렇다. 8장의 날개를 개화한 녀석을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기에는… 투자한 시간이 너무나도 아깝다. ‘시간은 충분해.’ 충분하고도 넘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자살 희망자들이 불구덩이로 투신하는 걸 막아야만 했다. 모두가 손에 손을 잡고 걸어 나가는 게 새 시대의 트랜드가 아니었던가. 물론 녀석을 설득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바로 바깥 상황이다. 김현성을 비롯한 이들이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일단 최선은…. ‘현성이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제일 좋지.’ 대륙 전체가 이 사건을 아는 것만큼 최악의 상황은 없지 않을까. 기도회니 뭐니, 구출이니 뭐니, 지금까지 잘 진행해 오던 과업을 올 스탑 하고 싶지는 않다. 정하얀이나 차희라가 걱정되는 건 당연한 거고…. 언론이야 눈치 빠른 이지혜가 잘 통제해 주겠지만,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 봐도…. ‘일을 크게 벌이면 안 돼.’ 이번만큼은 소소하게 처리하는 게 좋다. ‘그런 일이 있었어?’ 싶을 정도로 소소하게 말이다. 바깥을 살펴보고 싶지만, 여신의 손거울이 손에 없다. 심지어 연금 키트나 촉매도 없어서 뭘 만들 수도 없는 상황이다. 물론 해결 방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게 될까 싶기도 했지만,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베니고어 님, 바깥 상황 좀 보고 싶은데… 조금만 보여주실 수 있죠?’ “…….” ‘베니고어 님?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가 직접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뭐 하시길래 이렇게 답장이 늦으십니까.’ “…….” ‘베니고어 님.’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이… 이기영 신도! 나의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 나, 나 불렀어? (0/1)] ‘바깥 상황을 조금 살펴보고 싶은데… 베니고어 님의 손거울이 없어서 말입니다.’ [아, 으응… 무슨 말 하는지 알 것 같네. 그… 지금 다른 인간들이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한 거지? (0/1)] ‘이해가 빨라서 좋네요.’ [그런데 이기영 신도… 있잖아, 나도 이기영 신도가 원하는 걸 꼭 들어주고 싶은데… 지금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아서… 이기영 신도도 잘 알고 있잖아. 나 지금 위에서 찍혀서 보호 감찰 중인 거…. (0/1)] ‘…….’ [내 소중한 이기영 신도를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있잖아, 여신이 필멸자들의 세상에 너무 심하게 관여하면 위쪽에서 안 좋게 볼 확률이 높거든… 몇몇 아예 금지된 것들도 있고…. (0/1)] ‘애초에 소원을 빌고,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 않을 건 알고 있습니다. 최대한 관찰자의 포지션을 취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작은 부탁을 드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그래도…. (0/1)] ‘막말로 제가 여기서 꺼내달라고 한 건 아니잖아요. 지금 제가 안고 있는 이 문제를 수습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작은 부탁입니다, 아주 작은 부탁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이기영 신도. 악마들을 믿으면… 이게 전부 루시퍼 때문…. (0/1)] ‘그래서 지금 이게 제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애초에 일이 누구 때문에 이 지경이 됐는데….’ [……. (0/1)] ‘아, 빨리 보여줘요. 시간 없으니까.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봐야 한다고요.’ [내, 내가 보여줄 수가 없어서 그래. 이기영 신도가 원하는 걸 들어주려면 망원경을 내리는 수밖에 없는데… 인, 인간에게 위쪽의 물건을 내리는 건 불법이라고. 차라리 내가 이야기해 주는 게 좋지 않을까? (0/1)] 어? [역시 그건 조금… 그, 그렇지. 그래도 망원경을… 인간에게 내리는 건 안 되는데…. 물론 이기영 신도는 평범한 인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필멸자의 육신을 유지하고 있는 만큼 같은 법을 적용하고 있단 말이야. (0/1)] ‘내리는 게 아니죠. 빌려주는 겁니다.’ [……. (0/1)] ‘망원경이라고 하는구나…. 하하하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베니고어 님. 내리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빌리는 거예요. 일이 끝난 이후에는 전부 돌려 드릴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도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니까… 아니면 설마 그게 아까운 거예요? 혹시나 베니고어 님 상황이 안 좋아질까 매일같이 재판을 준비하던 소중한 신도를 이대로 버리는 건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내가 이기영 신도를 버릴 리가 있었어? 으응, 절대로 안 버리지. 하지만…, (0/1)] ‘아니, 좀 빌려줘요. 이것도 못 들어주면서 무슨…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거잖아.’ [조금만 기다려 주면… 아주 작은 트집 잡히는 것도 조심하고 있는 상황이라…. (0/1)] ‘…….’ [……. (0/1)] ‘아니, 그럼 빌려주지 마세요. 진짜, 여신이 쩨쩨하게, 진짜….’ [어? (0/1)] ‘진짜 내가 또 서로 깔끔하게 제 갈 길 가자는 이야기를 꺼내야겠어요?’ [어? 어? (0/1)] ‘나도 나대로 열심히 살아볼 테니까. 베니고어 님도 베니고어 님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라고… 이렇게까지 이야기해야겠느냐고요. ‘재판이고 나발이고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증인석에서도 안 설 거예요’라고 말해야 돼요? 아! 그럼 나도 곤란해지는 거 아니냐고? 내가 왜 곤란해집니까. 저 원하는 분들 많아요. 많으니까, 나도 내일 내가 알아서 하면 되겠네. 와, 내가 너무 큰 실수를 했네.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드렸어. 이 미천한 필멸자가 주제도 모르고 베니고어 님을 불편하게 했나 보네.’ [그…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0/1)] ‘살짝 빌려주고 돌려주면 되는 건데…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누구는 누가 싼 똥 청소하고 치우느라 힘들어 뒈지게 생겼는데. 그것도 안 빌려줘? 자기는 그렇게 버리지 말라고 퀘스트까지 내려놓고서는 막상 신도가 곤란한 상황에 빠지니 이런 식으로 손절하는 거예요? 제가 그 망원경인지 뭔지가 정말로 탐나서 이러는 줄 알아요? 나도 베니고어 님이 원하는 거 전부 다 들어줬잖아요. 하기 싫은 거 전부 다 했잖아요. 인정해요, 안 해요? 인정해요, 안 해요? 인정해요, 안 해요?’ [아, 아니…. (0/1)] ‘대륙도 구하지 마! 대륙도 구하지 말라고! 내가 정말 망원경이 가지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진, 진정해… 이기영 신도… 진정…. (0/1)] ‘대륙이 위험하잖아!!’ 눈앞에 놓인 테이블을 뒤집어 버리며 혼신의 외침을 내뱉자 무척 당황한 것처럼 보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전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미천한 필멸자인 이기영 역시 대충은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안다.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행동은 완전히 금지되어 있지만, 단순히 상황을 살펴보는 것 정도는 가능하리라. 망원경을 잠깐 빌리는 것 정도는 당연히 가능하다. 물론 감찰 중인 만큼 여러모로 논란이 될 여지가 있지만 눈과 귀가 막힌 상태로 계속해서 지낼 자신이 없다. 당연하지만 베니고어의 입장에서는 이쪽을 그저 내칠 수가 없다. 분명히 답은 정해져 있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장내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미소를 띄우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그럼 잠깐만… 꼭 돌려줘야 돼? 만약에 불시에 검문이 들어오고 그러면… 정말로 큰일 나. 조사 들어오고 망원경 빼돌린 거 알면 정말로 뒤집힐 거라구…. 나, 나는 이기영 신도 믿어. 이기영 신도도 나 믿지? (0/1)] ‘우리는 운명 공동체잖아요. 제가 베니고어 님을 믿지 않으면 누가 베니고어 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으응, 그렇지, 우리는 운명공동체니까. 나… 나 안 버릴 거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나중에 버림받는 건 아닌 거지? (0/1)] ‘절대로 안 버립니다. 요즘도 시간 날 때마다 재판 준비하고 있으니까. 베니고어 님도 잘 견뎌내세요. 버티고 잡아떼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거 항상 기억하시고요.’ [나… 나 힘낼게, 이기영 신도. 이기영 신도를 위해서라도 버틸 거야. 그러니까 이기영 신도도 힘내야 돼. 우리 같이 여기서도 저기서도 힘내자. 우리는… 우리는 운명공동체니까. (0/1)] ‘물론입니다.’ [마음의 눈에 엘룬의 망원경이 깃듭니다.] [마음의 눈의 등급을 신화 등급으로 상향 조정합니다.] 어째서 엘룬의 망원경을 가지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베니고어… 와, 얘도 진짜 만만치 않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감돌기 시작했다. # 638 회귀자 사용설명서 638화 일주일(3) 현 시각 가장 당황한 사람은 나도 아니고 김현성도 아니고 조혜진도 아닌 엘룬일 것이다. 잠깐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제는 이쪽과 상관없는 이야기. 저쪽의 문제는 저쪽이 알아서, 이쪽의 문제는 이쪽이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옳다. 망원경이 유출됐다는 게 밝혀져 밑으로 꺼지는 상황이 오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엘룬 쓰레기를 희생양으로 내몬다면 원금 정도는 회수할 수 있지 않을까. 베니고어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제는 같은 배를 탄 것 같은 느낌. 무능함의 끝을 달리고 있었던 베니고어 역시 ‘올바른 판단’이라는 걸 하게 됐다는 생각에 괜스레 뿌듯해지기 시작했다. ‘아니지. 이럴 게 아니라 상황부터 살펴보자.’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으니까. 급하게 특성을 발동시키자 시야가 확 변한 것 같은 느낌이다. 제법 생소한 감각이었다. ‘효과 한번 좋네.’ 마치 한 모니터에 2가지의 영상을 동시에 켜놓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리라. 왼쪽 눈에 보이는 것과 오른쪽 눈에 보이는 게 다르다. 잠깐 두통이 와서 핑 도는 머리를 붙잡기는 했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하지만 눈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은 그대로. 본래부터 마음의 눈을 가지고 있던 내가 이 정도라면… 일반인들이 사용하라고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인간은 이 능력의 출력을 감당할 수 없다. 카메라를 이동시키는 것 같은 느낌으로 머리를 굴리자, 시야에 펼쳐진 것은 평소와 다름없는 린델. 가장 걱정하던 최악의 상황은 넘겼다는 생각에 속을 쓸어 넘길 수밖에 없었다. 린델은 평화롭다. 조혜진이 여기저기 떠벌리지 않은 것이다. 여전히 활기가 넘쳤고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린델 주민들의 모습은 괜스레 웃음이 나오게 할 정도였다. ‘내가 믿었다, 혜진아. 조용히 처리해 줄 거라고 믿었다구.’ 앞서 말했던 그대로 가장 최악은 넘겼다. 수도 쪽도 마찬가지고, 현장 쪽도 마찬가지. 그저 ‘이번 던전행은 꽤 오래 걸리는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근데 얘는 어딨어. 얘, 무사한 거 맞지? 혹시 아직 도착 못 한 건 아닐 거고….’ 던전에서 린델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아직 도착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것이 옳다. 조혜진이 아무리 괴물의 반열에 오른 강자라지만, 이 엄청난 거리를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간에 한 번 정도는 마력과 체력을 보충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잠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조혜진이 신경 쓰여 이곳저곳을 살펴봤지만, 아직도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린델 주변을 살펴봤지만, 여전히 그녀의 종적을 찾을 수 없는 상황. 파란 길드 내에도 보이지 않는다. 엘레나와 유아영은 잠깐 외출 중인 것 같았고, 선희영 역시 평소와 다르지 않게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행정업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린 박기리 삼남매 정도밖에 없다. 한가하게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모습은 너무나도 평화롭게 느껴진다. -느낌이 이상한데… 아무래도 형님한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왜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형님이 도움을 청하는 것 같은, 그런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가끔 이렇게 있을 때면 불쑥불쑥 형님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니까. -멍청한 소리. -멍청한 소리라니, 형님이랑 나는 몸이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고 몇 번이나…. -말도 안 돼. -하하하하, 덕구 씨가 조금 피곤하신가 봅니다. -거, 정말이라니까. 갑자기 이런 느낌이 드는 걸 보니 형님이 뭔가 위험에 빠진 게 확실하다니까. 던전에서 너무 오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도 구해달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요. ‘이 새끼 뭐야, 그러지 마.’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저 돼지를 쳐다보고 있다가는 본전도 건지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애초 녀석이 이 사건에 대해 듣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커다란 성과다. 물론 조혜진이 어디 있는지 제대로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적어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본격적으로 조혜진을 찾아봤지만, 고개를 돌린 곳은 정하얀과 한소라가 거주하고 있는 5현장이다. 온 김에 한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곧바로 지하로 들어가자,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하나의 인영이 시야에 비쳤다.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놀리고 있는 것은 당연히 한소라. 당연하지만 어째서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안다. 근처에서 여신의 손거울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이 비쳤으니까. -늦, 늦, 늦네…. -특… 정 던전은… 특정 던전은 마력 전파가… 닿지 않는 곳도 있으니까요. 분명히… 분명히 부길드마스터도 정하얀 님을 신경 쓰고 계실 거예요, 분명히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연락을 주시지 못하고 있을 뿐이겠죠…. -역시… 그, 그, 그럴까…. -네…. -같이, 같이 간… 사제, 라파엘 파티의… 예쁘던데…. -아아, 그 기적의 사제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요? 예쁘기는요. 그냥 평범하던데요? 그리고 절대로 부길드마스터 취향은 아니에요, 절대로. 저번에도 작업 중에… 자기 이상형은 정하얀 님이라고 말씀하셨는걸요. 부끄럽다고 말씀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정, 정말? 당연하지만 저런 말을 한 기억은 없다. 말 그대로 생과 사를 오가는 것 같은 처세술. 어떻게든 정하얀을 진정시키려는 한소라의 모습이 짠하기는 했지만, 그 모습을 보니 그녀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분노 측정기가 아닌가. 심지어 정하얀의 분노까지 컨트롤해 주고 있다. 평소였다면 대노로 돌입할 상황이었지만 현재의 정하얀은 많이 쳐줘야 중노로 진입한 상태.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것 말고는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기분 좋은 소식에 살포시 미소를 머금고 있지 않은가. 평화로운 린델만큼 이곳 역시 평화롭다. 갑작스럽게 내 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지만, 굳이 뭘 하러 들어갔는지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한소라도 최대한 못 본 척하는 표정이었고. 일단 정하얀이 아직 터지지 않았다는 걸 알았으니, 안심할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 납치극을 아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혜진이 얘, 오기는 한 건가?’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도착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지?’ 요란하게 떠들 생각이 아니라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눈에 띄지 않는 게 더 편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 아닐까. 파란 길드에도 알리지 않을 생각이라면 길드와 연관된 장소에 없는 게 당연하다. 아마 김현성이 조혜진을 따로 챙기지 않았을까. 여기까지 뛰어왔다고 가정한다면 체력이고 마력이고 전부 다 바닥났을 테니까. “그렇게까지 나쁜 상황은 아니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잘 수습된 상태다. 김현성이 정하얀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 정말로 흥분한 상황이었다면 텔레포트를 이용해 던전 앞까지 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하얀과 한소라는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 둠기영 사태처럼 무작정 리무르아의 둥지로 텔레포트 하는 선택지를 고르지는 않은 것이다. 어딘가에서 이번 협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야만 했다. ‘뭐, 어디 비밀장소에서 김미영 팀장이랑 같이 회의라도 하고 있는 거야?’ 애써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었지만 김현성 역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 있을 곳을 전부 다 뒤져봤지만, 녀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야외 훈련장이나 개인 훈련실에도 없고, 식당이나 집무실, 침실에도 식당에도 없다. ‘혜진이랑 같이 있어? 회의라도 하고 있는 거야? 뭐야 너희, 나 몰래 비밀 회의실 같은 거 만든 건 아니지? 그렇지?’ 점점 더 초조해지는 게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이런 마음을 대변하듯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하기 싫은 상상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진짜로 화난 거야? 이성 잃고 그런 건… 아니겠지.’ 정하얀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못 한 거면 어떻게 해?’ 텔레포트조차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나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떨까. 아예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할 정도로 화가 나 있다고 가정한다면…. 던전 앞으로 쉽게 이동할 방법마저 생각지 못할 정도로 이성을 잃었다면 어떨까. ‘시발….’ 솔직히 기쁘기는 하다. 그만큼 나를 걱정한다는 말이었으니까. 마치 마왕성에 갇힌 공주를 구하러 오는 싸구려 클리셰 같지 않은가. 하지만 녀석이 상대해야 하는 게 마왕이 아닌 용사라는 걸 생각해 보면 썩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잠시 여유를 찾은 시점이었지만 점점 똥줄이 탄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야를 위로 올리자 린델과 던전을 잇는 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달리고 있는 인영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 ‘개씨발….’ 긴가민가했지만 시야에 비치는 인물은 틀림없이 김현성이다. 최소한 그리폰을 타고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겨를마저 없었던 것 같다. 태풍이나 자연재해라도 오는 것처럼 주변에 있는 야생동물들과 몬스터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죄 없는 새들은 자신의 보금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대피한다.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신화 등급의 레이드 몬스터라도 나타난 것 같은 모양새. 보고 있을 뿐인 나조차도 몸이 덜덜덜 떨려올 정도의 살기를 뿌리며 달리고 있으니, 직접 영향을 받고 있는 녀석들이야 오죽할까. 저런 표정은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단언컨대 둠기영 사태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가 필사적으로 구해내겠다는 의지를 담은 얼굴이었다면, 지금 보이는 표정에는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들어차 있다.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얼굴이 생소해 보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 이거. 시발, 망했다. 망했다.’ 성검 용사 파티를 살릴 수 없겠다는 걸 깨달은 것은 순식간, 애초에 협상과 대화 따위는 없다. 이번 챕터의 엔딩에는 파국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기댈 곳을 찾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현시점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 이런 사고가 터졌을 시 상처를 봉합해 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물. ‘지혜 누나, 지혜 누나밖에 없어.’ 지혜 누나, 눈치 빠르잖아. 김현성이 던전으로 향했다는 거, 누나 정보망에는 걸렸을 거 아니야. ‘누나도 그리던 그림이 망가지는 건 싫잖아. 우리 성검 용사 파티 떡상시키기로 하면서 와인, 짠 했던 거 기억하지? 현성이 나간 거 보고 상황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챘지? 뭐 준비된 거 있지? 지금 수습하려고 머리 굴리고 있는 거 맞지?’ 역시나 기댈 곳은 영혼의 파트너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니, 시발, 아니….’ 하지만, 이쪽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아니….’ 내 생각보다 그녀의 눈치가 훨씬 더 빨랐다는 것. ‘뭐야, 조혜진이 왜 여기에 있어?’ 쥐 죽은 듯이 이지혜의 침대에 누워 있는 조혜진. ‘하연수? 쟤, 하연수 맞지?’ 이지혜와 가까운 사이로 알고 있던 하연수가 이지혜와 함께 다리를 쭉 뻗고 팩을 바르고 있다. 심지어 기절한 듯 잠든 조혜진의 얼굴에 팩을 올려주는 모습은 가관, 일과를 끝내고 얻은 꿀 같은 휴식 시간이겠지만…. -얘는 피부 관리도 안 하는 것 같던데, 참 피부가 좋다니까. -원래 이런 타입이 그래요, 언니. 마력 자체도 정순하고…. 그게 다 외관으로 드러나는 거죠. 언니도 마력 좀 올리면 지금보다 더 좋아질 걸요. 아, 물론 지금도 좋지만요. -그거야 당연한 거지. 이게 얼마짜린데. 타이밍이 좋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책상에 붙어 있는 메시지 때문이리라. [혹시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메시지 남겨요. 지금도 보고 있을 수 있겠네. 보고 있는 거 맞죠? 아, 일단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겠네.] ‘안 돼. 죄송하면 안 되지…. 죄송하면 안 된다고….’ [저도 최대한 수습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능력 밖의 일이 터진 것 같아서 그냥 손 놓기로 했어요. 오늘 하루에만 두 번 죽을 뻔했다고요. 파란 길드마스터는 말릴 수도 없었고요. 너무 섭섭해하지 마요. 변명거리가 있다니까. 이야기 듣자마자 미친 듯이 뛰어가는 양반을 제가 무슨 수로 막아요? 아마 대책 마련 어쩌고 지껄였으면 제 목도 날아갔을걸요? 진짜 도와주고 싶은데, 이번 거는 어쩔 수 없었네요. 저는 이 주식 팔았어요. 완전히 손 털었으니까. 뒷일은 오빠한테 맡길게요. p.s 오빠도 빨리 털어요. 아, 그리고 외부로 알려지면 안 되니까. 조혜진은 당분간 여기 둘게요. 저도 최소한의 도리는 한 거예요. 너무 원망하지 마요.] ‘누나, 시바… 혼자만 팔면 어떻게 해….’ 상장 폐지하기 직전 칼같이 손절한 투자자의 현명함이 돋보이기는 했지만…. ‘남겨진 사람은 어떻게 하냐고….’ 아직까지 이걸 붙들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청천벽력처럼 들려올 수밖에 없었다. # 639 회귀자 사용설명서 639화 지지 마(1) ‘이지혜… 이지혜, 시바.’ 한날한시에 함께 매도하고, 함께 매수 하자던 우리의 맹세가 나가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야말로 놀라 자지러질 정도의 손절 타이밍이었다. 개미들 등골 빼먹는 작전 세력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지구에 있을 때 관련 업종에 종사했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귀신 같은 타이밍. 쪽지가 고맙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혜진이… 혜진이, 너는 왜 쓰러져 있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얘 자기 몸 생각 안 하고 무작정 뛰어가다가 퍼진 거 아니지? 그걸 검은 백조에서 발견한 거야? 그래서 셋이 같이 있는 거야?’ 몸이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뛰어준 조혜진에게는 감사한 마음과 걱정스러운 마음이 교차했지만, 일단은 이 감정을 저 멀리 던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일이 어떻게 진행된 건지를 파악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지혜가 남긴 쪽지에 대충이나마 상황이 정리되어 있었지만 아무래도 생략된 부분이 많다. 몇 가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 중 하나는 그녀가 직접 김현성에게 보고했다는 것. 정말로 이지혜가 직접 김현성에게 보고했다면 내가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그림이 확실할 것 같았다. 조혜진이 이지혜에게 바통을 넘겼고 이지혜가 직접 김현성에게 상황을 전달한 것이다. 혼란을 최소화시켜야겠다고 판단한 것 역시 그녀의 선택일 터다. 훌륭한 판단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지만, 속 안에서 올라오는 씁쓸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미 손절한 사람만 보여줄 수 있는 내면의 평화, 그 내면의 평화를 즐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시야에 들어왔던 탓이다. -손은 울퉁불퉁하네. -얼마나 단련했겠어요? 그 조혜진이라고요. 이 사람은 안 그래도 훈련광으로 유명해요. -흐음, 할 것도 없는데 네일이나 좀 해줄까? -그래도 돼요? -어차피 자고 있는데, 뭐. 당분간은 못 일어날 거라며? 파란색으로 칠해주는 게 좋겠네. 초조함으로 가득 차 있는 이쪽과는 거리가 먼 모습에 질투가 난다. 지금이라도 빠르게 손절하고 평화를 얻고 싶었지만, 이지혜보다 넣어놓은 원금이 많은 이쪽은 쉽사리 몸을 뺄 수가 없다. 기절한 상태로 관리받고 있는 조혜진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이지혜가 최소한의 도리를 해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서 삐져나오는 초조함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다시 한번 시선을 김현성으로 돌려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녀석은 여전히 입술을 꽉 깨물고 광란의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심지어 방해되는 나무며 몬스터를 가리지 않고 베면서 나아가고 있다. ‘아, 엿 됐다. 이거 진짜 엿 됐다.’ 몇 시간 후 여왕의 무덤 안에서 펼쳐질 살육 파티가 걱정되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2회 차의 김현성이 아니다. 독기로 가득 차 있었던 1회 차 시절의 김현성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성검 용사 파티가 녀석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것이리라. ‘곧바로 올 것 같지? 그렇지?’ 일주일 후고 나발이고 기다리지 않을 것 같다. 곧장 던전으로 직행할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 죽음의 사신이 스멀스멀 손을 뻗고 있다는 걸 아는지, 성검 용사 파티는 아직도 내부 정리에 한창이다. ‘몇 시간 남았지? 여기에 오기까지 몇 시간 남은 거지?’ 정확히는 계산할 수는 없다. 하지만 3시간이 채 남지 않았으리라. 무조건 3시간 이내로 김현성이 여왕의 무덤으로 들이닥친다. 아니, 어쩌면 1시간 안에 들이닥칠 수도 있다.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짧아져 버린 상황에 입술을 깨물어 봤지만, 여전히 다른 선택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아직 ‘사랑했다, 라파엘’을 시전하지 않은 내게 이미 다른 선택지는 의미가 없다. ‘설득해야 돼.’ 지금 당장. 하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해 서둘러 몸을 일으킨 순간, 머리가 핑 돌더니 몸이 균형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뭐야, 뭐야. 나 왜 이래? 나 왜 이래, 시바.’ “아… 이, 시바.” 물론 의심되는 것은 있다. 아마 엘룬의 망원경을 너무 오랫동안 사용한 부작용일 것이다. 잠시 두통이 밀려들어 와 머리를 꽉 부여잡자,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형, 형! 형!!” 화들짝 놀란 라파엘이 다시 내 몸을 침대 위로 올려놓기는 했지만, 그런다고 두통이 멈출 리 만무했다. 차라리 아픈 척이었으면 좋겠지만 진짜로 아프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정말로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느낌을 경험했다. 계속해서 지끈거리는 고통이 전두엽을 강타한다. 진짜로 아프다고, 나 좀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허억, 허억….” “괜찮으세요? 괜찮….” ‘아니, 안 괜찮아. 진짜로 아파서 뒈지는 줄 알았어. 나 진짜 아파. 나 진짜 아프다고, 시바.’ 혹시나 엘룬의 저주가 깃든 것은 아닌지, 합리적 의심을 해볼 만한 고통이었다. 당장에라도 김현성이 들이닥칠 가능성이 큰 만큼 일단은 바깥의 상황을 전하는 게 급하다고 생각해 입을 열려고 했지만, 내 마음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도망… 쳐.” ‘도망쳐, 이 새끼야. 김현성이 오고 있어. 일단은 시바, 목숨이라도 건져야지. 수습은 나중에 하더라도 살아야지. 살아야 돼.’ “네? 그게 무슨… 무슨 말씀이세요.” “도망, 도망… 쳐야 돼.” ‘지금 빨리 튀어. 일단은 그래야 해. 무조건 그렇게 해야 해.’ “형…? 형? 제 모습 보이세요?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김현성이… 오고 있….” “형?” “나는… 내버려 두고… 그냥… 도망….” ‘내가 현성이한테 잘 말해줄게. 그러니까 그냥 시바, 도망치라고. 시바, 시간 없어. 시간 없다구.’ 이 새끼가 내 말을 알아들었으면 좋겠다. 조금 다르게 들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됐지만, 일단 내가 하고 싶은 말 자체는 완벽히 전했다. ‘김현성이 오고 있으니까, 도망쳐.’ “죽을….” ‘너 죽을 거야. 분명히 죽어.’ “자식….” ‘뭐?’ “김현성 개자식…, 개자식!” “뭐…?” 분통을 터뜨리며 땅바닥을 내려치는 녀석의 모습은 가관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 이 새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인다. ‘아니야. 나 세뇌당한 거 아니야. 지금 제2의 인격이랑 싸우고 있는 그런 상황 아니야.’ 입술을 꽉 깨문 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모습은 어떻게 봐도 답이 없어 보인다. 단언컨대 현재 이 새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직전에 있다. ‘님아, 제발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곧 편해질 수 있을 거예요. 곧, 곧 형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그 개자식을… 형은 제가 지킬 거예요, 제가.” “지키….” ‘지키지 마, 지키지 마, 시바.’ 한 손으로 눈물을 쓱쓱 닦으며 발길을 돌리는 녀석의 뒷모습은 멋있다기보다는 불 속으로 전력질주하는 불나방처럼 보인다. 가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애처롭게 손을 뻗었지만, 녀석의 시선은 나를 보고 있지 않다. 누가 봐도 전쟁터로 나가기 직전의 병사처럼 보인다. ‘아, 머리 아파, 시바. 이 개새끼가, 형이 아파 뒤지겠는데 어디를 가려고 그래. 가지 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마.’ 하지만 녀석은 뒤를 한 번 돌아본 후 커다란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철컥 하는 소리가 들린 것을 보니 바깥쪽에서 문을 잠근 듯했다. 허억 허억 거리는 와중에 주변을 둘러보자, 라파엘이 떨어뜨린 것 같은 여신의 손거울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손거울을 들어 올렸지만, 주어진 게 너무 적다. 둠기화를 해서라도 이 방을 벗어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김현성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칠지 누가 알겠는가. ‘아이, 시바. 이거 큰일 났다. 진짜 큰일 났다. ‘사랑했다, 라파엘. 사랑했다, 라파엘’ 해야 하나?’ 이쯤 되면 1회 차 영웅 파티를 소개해 준 것도 후회가 된다. 마음의 눈을 발동시켜 바깥 상황을 살펴봤지만, 눈에 보이는 건 똘똘 뭉쳐서 현 상황에 대비하고 있는 성검 용사 파티뿐이었다. 조용히 전투를 준비하는 사냥개 이주혁. 기도를 드리고 있는 기적의 사제 마리엔,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는 생매장 듀오를 비롯한 파티원들은 라파엘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어쩌면 김현성이 녀석들을 살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파엘은 모르겠지만, 1회 차의 영웅들은 아깝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 아깝다는 생각 이전에 이 인물들은 모두 김현성과 접점이 있던 인물들이 아니었던가. 나처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녀석들은 분명히 김현성의 동료였었다. ‘일단 얘네들이라도 건지자. 라파엘은 이미 내 손을 떠났어. 얘네들이라도 살려야 해.’ 다시 한번 눈을 돌려 김현성을 바라보자, 언제 들어왔는지 벌써 던전 안을 달리고 있었다. ‘뭐야, 이 새끼…. 이거 왜 그렇게 빨리 왔어. 왜 벌써 던전에 들어오고 그래.’ 앞뒤 가리지 않고 달리는 모습에 녀석의 체력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녀석은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아 보인다. 살의 이외에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얼굴이 불안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사냥개 이주혁을 괜찮은 녀석이라고 말하며 미소를 보이던 녀석을 믿을 수밖에 없다. 김현성이 1회 차의 소중한 동료들을 저버릴 리가 없다. 김현성이 던전 내부로 침입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기는 했는지, 성검 용사 파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본 무대로 향하는 중.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일이 끝난 후에는 맥주라도 한잔하지. -아, 저는 선약이 있어서…. -……. -돌아간 후에 곧바로 여자친구에게 청혼할 생각입니다. ‘무슨 청혼이야…. 이상한 사망 플래그 꽂지 마, 시바.’ -다들 죄송합니다. -죄송해할 필요 없어요. 저희 모두 동의한 일이니까요. 확률이 낮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저기, 만약 제가 죽는다면… 제 친구들에게…. ‘그런 소리도 하지 마. 너희 왜 그래, 자꾸….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분명히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런 말을 내뱉는 놈한테 꼭 무슨 일이 생기더라니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자신들이 사망 플래그를 내뱉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전형적인 대사를 툭툭 내뱉으며 길을 걷는 놈들의 모습은 어딘가 불안해 보이기까지 한다. -곧 올 거다. 전투 준비. 작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김현성은 입술을 꽉 깨물며 발에 마력을 가득 담기 시작했다.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들어왔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고 있는 가운데 김현성이 응시하고 있는 것은 가장 앞쪽에 자리 잡은 사냥개 이주혁. ‘죽일 생각인데…. 저거 죽일 생각인 것 같은데. 진짜로 죽일 생각일 것 같은데….’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이곳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죽일 거라고, 그렇게 다짐했다는 걸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거울을 들고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주혁은 페이크. 마리엔… 마리엔 조심, 마리엔 조심해. 조심하라고, 시바! 고개 숙여! 고개 숙여요. 고개 숙여!” ‘사제부터 노릴 거라고 했잖아, 이 새끼들아.’ 목소리가 닿았는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마리엔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 640 회귀자 사용설명서 640화 지지 마(2) 꽤 멀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지척에 다가왔다는 표현이 이렇게까지 잘 어울리는 상황이 어디 있을까. 이 자리에 있는 녀석 중 김현성의 모습을 캐치한 녀석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놈들의 눈에는 김현성이 일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터.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달리던 레이싱카가 일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상상해 보라, 그 누구도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했겠지만, 계획이 틀어지는 것은 이미 예정된 이야기, 김현성이 노린 것은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진정해, 시바…. 현성아, 우리 현성아.’ 발에 마력을 머금고 땅을 박찬 녀석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기적의 사제 뒤. 다수를 상대할 때는 사제를 노려야 한다는 것은 칼밥을 오래 먹고 지낸 이들에게는 기본적인 상식이었지만, 김현성이 그런 생각을 하고 그녀를 노렸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마 이성적으로 생각했다기보다는 몸에 새겨진 기억이나 습관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완벽한 대형을 유지하고 있던 파티의 균형이 무너진 것은 당연하다. 당황한 마법사는 주문을 외우지 못했고,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에 사제를 전담 마크하고 있던 기사 역시 반응하지 못했다. 아마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마리엔의 머리는 땅바닥에 굴러떨어져 있었으리라. 기적의 사제, 쟤는 본인이 방금 전에 죽을 뻔했다는 걸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김현성을 바라보는 사냥개 이주혁의 얼굴이 괜스레 클로즈업된다. 그 앞으로 보이는 것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분노를 드러내는 라파엘의 표정. 식은땀을 흘리는 생매장 듀오, 일순간 파티가 정지한 듯한 느낌이었지만, 김현성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처음에 고개를 숙인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 두 번째부터 우연은 없다. “보호 마법, 보호 마법!” 아까부터 외워두었던 마법사의 보호막이 일순간 파티를 뒤덮는다. 기적의 사제에게 내리꽂히던 검이 멈칫한 순간, 성검 용사 파티가 안심하는 것이 보인다. ‘지랄하지 마, 이 새끼들아. 겨우 저 보호막이 니네 목숨을 지켜줄 것 같아?’ “곧바로 대응해! 대응! 대응!” 채 0.5초도 버티지 못하는 보호막. 저건 공격을 막아주는 용도가 아니다. 공격을 늦춰주는 용도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기사가 넋 놓고 있던 사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 방법이 잘못됐다는 것. “막지 마! 막지 마! 피해!” 방패째로 갈라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소원인지, 마리엔의 앞을 막아서려고 했다. 내 말을 듣고는 한 손으로 사제복을 붙잡고 뒤로 집어 던졌다. 생매장 듀오가 뒤로 밀려나는 사제를 붙잡는 사이, 기사가 옆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어떻게든 김현성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이미 앞을 막아서려고 했던 역동작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해도 김현성의 공격 범위 안. “마법!” 파티가 위기에 빠졌을 때 녀석들을 구해준 것은 찰나의 시간을 벌어주는 보호막. 쾅!  폭음과 함께 보호막이 박살 난 이후에도 검은 멈추지 않는다. 곧 기사의 목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을 때, 그녀의 목숨을 구한 것은 파티의 사냥개였다. 기사에게 몸통 박치기를 해, 그녀를 범위에서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꼴사납게 땅바닥을 구르며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기사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그 자리에 김현성은 없다. 그녀가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장면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있는 사냥개일 터. “커헉….” “신성력으로 밀어! 신성력으로 밀라고!!” 숨이 끊어지고 있다. 어깨부터 가슴까지 완전히 베였다. 그제야 정신 차린 사제가 서둘러 기도를 올렸지만, HP가 회복되는 속도보다 떨어지는 속도가 더 빠르다. 입술을 꽉 깨문 그녀가 하늘 위에 손을 뻗자, 일순간 천사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제야 사냥개는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기적.’ 일주일에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마리엔의 각성기가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털려 버렸다. 사냥개가 다시 일어설 거라고 직감했는지 김현성이 다시 검을 휘둘러 왔지만, 녀석의 검을 라파엘의 성검이 가로막았다. “으아아아아아아!” 괴성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러 오는 모습에서는 그 옛날 어리숙했던 놈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대신 자리한 것은 독기를 품은 얼굴, 김현성 역시 입술을 꽉 깨물고 검을 휘두른다. ‘죽을 거야.’ 라파엘은 저 검에 반응하지 못한다. 절대로 반응할 수 없다. 처음 내지르는 검은 페인트, 이후에 휘두르는 검이 진짜. “첫 번째는 페인트.” 그렇게 경고했지만 내 말보다 김현성의 손이 더 빠르다. 다시 한번 0.5초 보호막이 라파엘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날개 하나가 잘려 나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제길!” 어떻게든 시간을 끌기 위해 궁수가 화살을 날렸지만,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한쪽 손으로 화살을 잡아낸다. 심지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시바, 저건… 진짜 멋있네.’ “괴, 괴물.” 궁수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김현성이 라파엘의 목을 향해 검을 뻗었다. 남은 7개의 날개 중 하나가 다시 라파엘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김현성은 귀찮다는 듯이 날개를 손으로 잡아 찢으며 검을 밀어 넣으려고 했다. “아아악!” 애처로운 비명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기사와 김현성의 뒤를 노리는 도적은, 김현성의 목소리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어디 있지?” “…….” “말해, 어디 있어.” ‘진짜 X 됐다. 진짜로 X 됐다. 이 새끼들아, 니네 망했어. 난 몰라.’ 이미 승부는 낫다. 아니, 처음부터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녀석들에게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면, 대부분이 뒈졌을 거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제도 그렇고, 사냥개도 그렇다. 그나마 녀석들이 발끝이라도 비빌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내가 녀석들의 눈을 대신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현성 레이드 팟은 개뿔.’ 녀석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자신들을 응시하는 김현성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아마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이게 인간인가?’ 혹은…. ‘악마.’ 지금 내 눈에도 김현성의 모습은 정의의 용사라기보다는 어둠의 군주처럼 보인다. 어둠의 군주 둠현성도 제법 멋있어 보였지만 현시점에서는 반갑지 않다. 미묘하게 어두운 조명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라파엘의 날개 한 짝을 손으로 잡아 뜯어 피가 튄 모습은 왠지 모르게 오싹하다. 우리 현성이의 별별 모습을 다 봐왔던 나도 이렇게 느끼는데 다른 녀석들이야 오죽할까. 라파엘 파티 역시 칼밥을 먹고사는 처지인 이상 저 눈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대충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전부 다 죽을 거야.’ 그 말 그대로. 김현성은 이곳에 있는 이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다. 1회 차에서 함께했던 영웅들과의 추억이고 나발이고, 내가 쏟은 주식이고 나발이고 신경 쓰지 않을 심산이다. 물론 김현성이 저들과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래도 동료였다며, 현성아. 쟤들 말도 들어는 봐야지.’ “시발….” ‘기적의 사제한테는 도움받은 적 있었다며, 생매장 듀오랑은 같이 술 마신 적도 있었고…. 여기사랑도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 쟤들 잘못한 거 없어. 라파엘이 쟤네 다 꼬드긴 걸 수도 있잖아. 라파엘도 잠깐 마음이 아파서 그런 거일 수도 있고…. 원래 마음이 아픈 애들이 간혹 이상한 실수 저지르고는 하잖아. 그렇게 사람 쉽게 내치고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된다고….” ‘쟤네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도 사실 죽이기 싫잖아.’ 김현성도 녀석들을 그리워했었다. 내게 1회 차 영웅들에 대한 썰을 풀 때 조금은 즐거워 보이기도 했고, 추억에 젖은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굳이 2회 차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 생각이 없다고는 했지만, 그치들을 지원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명백한 증거가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의 모습에서 그런 그리움은 보이지 않는다. 증오와 분노 외에 다른 감정은 없다. ‘진짜 죽이려나 보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법이다. 내가 나가서 말리지 않는 한, 라파엘을 비롯한 용사 파티는 처참한 모습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널 것이다. 비틀거리며 문을 열려고 해봤지만, 도저히 열리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김현성은 녀석들에게 검을 겨누고 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살려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적어도 이 문을 열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시간을 끌어야 했다. 다이렉트로 김현성에게 연락하는 방법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메시지를 넣어봤지만, 본인의 집무실에 놓고 온 모양인지 받지를 않는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 것은 바로 그때. ‘누구야.’ “부길드마스터?” ‘아이고, 우리 리안이! 우리 리안이가 해냈구나.’ 성검 용사 파티의 시선이 본인에게서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쾌재를 불러야 함이 옳다. “문을 열 방도를… 찾는 중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아, 네.” 이제 곧 이곳을 빠져나가 피 터지게 싸우는 쟤네를 말릴 수 있을 테니까. 초조한 마음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려 봤지만, 아직도 문이 열릴 기미는 없다. 그 와중에도 김현성과 성검 용사 파티는 미묘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고. ‘일단은 살리자. 살려보자.’ 쉬울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가능성 역시 낮지만, 시간을 끄는 거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마리엔 각성기는 끝났고….’ 한 번 외울 때마다 세 번씩 차징 되는 마법사의 보호 마법 역시 끝. 물론 이쪽은 계속 충전이 가능하지만, 지금 당장은 주문을 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일단은 주문부터 외워야 해.’ 형편없이 깨져 나가는 보호 마법이지만, 저 보호 마법 한 발이 성검 용사 파티의 목숨 하나라고 생각하는 게 옳다. 쉽게 말해 총 3개의 라이프 포인트를 세이브 하게 되는 셈이다. 찰나의 순간만을 버티게 해주는 수단에 불과하지만, 저 찰나의 순간이 없다면 파티의 전위들은 김현성의 검에 반응할 수 없다. 시간만 있으면 계속 충전할 수도 있으니, 그렇게 나쁜 상황도 아니다. 기적의 사제가 살짝 퍼지기는 했지만, 사냥개도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고, 다른 파티원들의 몸도 비교적 멀쩡한 상태다. 맨 처음 기적의 사제가 물리고 시작했다면 아예 가능성조차 없었겠지만 사제가 유지하고 있는 파티는 그렇게 쉽게 리타이어 하지 않는다. 반쯤은 성기사로 분류할 수 있는 라파엘 역시 아직까지 싸울 수 있는 상황이니 이 곳에 나갈 때까지는 버틸 수 있다. 성검 용사 파티를 전술 김현성 다루듯 컨트롤한다면…. ‘할 수 있어.’ 30분? 30분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10분? 10분 안에 나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는 중에도 입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상황, 최대한 빠르게 브리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 목소리에 집중하세요.” “…….” 아무리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른다지만. “지금부터 제가 지시하겠습니다.” 김현성 레이드 팟을 지휘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641 회귀자 사용설명서 641화 지지 마(3)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CF에서나 나올 것 같은 명대사를 저도 모르게 지껄이게 된다. 그만큼 이게 무모한 도전이라는 걸 알기에 나온 자기세뇌의 주문이었지만, 영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라파엘 파티를 믿는 것이 아니다. 물론 녀석들의 능력을 아예 배제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게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김현성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전투 중 보이는 사소한 습관, 성향과 공격 루트, 27군단 소환 사태 때의 경험, 그리고 전술 김현성을 통해 축적된 데이터. 녀석이 어느 정도의 출력을 낼 수 있는지, 마력과 체력이 어느 정도 인지, 전쟁터에서 뭘 할 수 있는지, 난전에서, 대인전에서, 또 이런 상황에서 뭘 할 수 있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아마 녀석보다 내가 녀석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아무리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훈련광이라고 한들, 자신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한 적은 없었을 테니까. 서서히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할 수 있어.’ 기본적으로 라파엘 파티는 강하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내가 완성시킬 수 있어.’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버티는 거라면 가능하다. “제 목소리 들리는 거 티 내지 마세요. 모른 척하고, 당연하지만 대답하지도 않습니다.” ‘…….’ “단기전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장기전으로 끌고 가야 해요. 기본적으로 보호 마법 3개를 캐스팅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이걸 파티의 목숨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쓸데없이 사용해서도 안 되고, 제 허락 없이 남발해서도 안 됩니다. 검이 지척에 다가와도 지시가 없으면 사용하지 않습니다.” -……. “마법사는 보호 마법 외에 다른 주문은 외우지 않습니다. 마법의 쿨타임에는 라파엘의 회색빛으로 세이브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대충 이해되실 거예요. 기본적인 스킬 사이클은 보호 마법 3번, 회색빛의 보호 1번, 그사이 다시 보호 마법 3번, 다시 회색빛의 보호 1번, 이게 기본적인 사이클입니다. 주문을 외우는 타이밍도 지시해 드릴 테니 그냥 제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디 있어. “전투가 재시작되자마자 한 곳으로 뭉쳐서 사제님 버프 받고 시작하겠습니다. 스펙이 안 된다는 건 파티원분들이 가장 잘 알고 계실 거예요. 끊임없이 버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끊임없이요. 그래야 제 지시에 반응이라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추가로, 보이지 않는다고 당황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보고 있으니까요. 다른 눈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현재 현성 씨가 있는 방향을 12시로 하겠습니다. 말이 조금 빠르지만, 다 알아들으리라 믿겠습니다. 세부 지시는 전투가 시작되면 곧바로 드리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한 가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죽습니다. 실수하지 마세요.” -……. “궁수 화살 준비. 아까처럼 당황해서 날리지 말고 제대로 노려. 라파엘은 날개 하나 버리면서 빠져나오는 거로… 불가능하면 두 장. 지원은 해줄 테니까, 알아서 나와요.” -……. “발사.” 내 말과 동시에 화살을 장전하는 궁수가 시야에 비쳤다. 곧바로 반응한 김현성이 검을 들어 올렸지만. “기사 방패 들고 전진. 사제, 기사 대상으로 회복 주문 외운 후에 버프, 마법사도 주문 외워.” 중무장한 기사가 커다란 방패를 들고 돌진해 오는 중이다. 갑작스럽게 회복 주문을 외우라는 개소리에 의문을 품는 사제의 얼굴이 보였지만, 이내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기사의 모습을 보고는 얼떨떨한 표정이 감돌았다. 대미지가 들어오자마자 회복 주문의 영향을 받은 기사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 얘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나쁘지는 않아.’ 박덕구처럼 방어력에 몰빵한 것이 아니기에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되기는 했지만, 아이템빨과 최소한의 내구로 힘이 들어가지 않은 한 발 정도는 버틸 수 있는 모양이다. 급소를 보호해 즉사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녀석은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그사이 라파엘은 날개를 펴고 김현성의 범위 내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김현성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든다. 그 과정에서 날개 한쪽이 잘려 나가기는 했지만, 첫 번째 위기를 넘겼다는 게 중요했다. “회색빛.” 거대한 회색빛이 파티 전체와 감싸며 김현성을 밀어내지만, 겨우 저걸로 밀어낼 수 있을 리 없다. 4개의 라이프 포인트를 가졌다는 표현이 4번을 버틸 수 있게 해준다는 뜻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안정적으로, 한 턴을 넘길 수 있게 해준다고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녀석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 대열을 재정비하고 사제의 버프를 받은 시점에, 마법사의 주문이 완성됐다. ‘보호 마법 충전했고.’ 진짜 시작은 여기서부터. “라파엘은 중심, 메인은 사냥개.” 라파엘을 직접 조정하는 것보다는 사냥개를 이용하는 것을 선택, 애초에 라파엘은 파티의 밸런스를 잡아주는 역할이 더 잘 어울린다. 물론 개인의 능력은 라파엘이 더 뛰어나지만, 라파엘을 메인으로 내세우면 파티의 밸런스가 무너진다. 본인 역시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는지 검을 땅으로 내리꽂았다. ‘회색 영역.’ 아군에게는 버프를, 적군에게는 디버프를 주는 스킬이었다. 물론 김현성이 저깟 디버프에 영향을 받을 리 없지만, 파티 전체의 방어력과 전반적인 능력치가 오른다는 게 중요했다. 엄연히 파티와 개인은 다르다. 개인이 상대할 수 없는 재앙급 몬스터를 인간이 막아내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유기적인 팀플레이와 밸런스, 약속된 행동과 정확한 판단이 아니었던가. “이주혁 님은 역할은 평소대로, 다만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제 지시대로만 움직여요.” 볼 수 있는 화면이 많지는 않았지만, 망원경에 최대한 마력을 때려 부어 김현성의 신체 곳곳을 살폈다. 어디에 마력이 들어가고 어떤 근육을 사용하는지, 또 어떻게 움직이는지 자세하게 분석한다. 전술 사냥개는 효율이 낮지만…. ‘발목만 붙잡으면 돼.’ 상처 입히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몸 사리지 마요.” 본인이 죽는 걸 각오하고서라고 어떻게든 발목만 물어뜯겠다는 일념으로. 물론 속도는 부족하다. 힘도 부족하고, 마력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김현성이 움직이는 곳, 김현성이 위치를 옮기는 곳에 한 발자국 늦게 녀석이 등장한다. 개인의 입장에서 이것보다 더 거슬리는 일이 어디 있을까. 아마 김현성에게는 녀석이 어그로를 끄는 탱커처럼 느껴질 것이다. “왼쪽.” -허억…. “머리 조심.” -허억, 허억…. “발에 마력 모아요. 사라집니다. 다음 오른쪽.” -하아, 허억…. “끝까지 달라붙어요. 늦으면 다 죽어. 팔에 마력 모을 시간 주지 마. 거리 벌어지면 한꺼번에 다 죽습니다. 검이 빛날 시간을 줘도 다 죽고, 안정적인 자세에서 검을 휘둘러도 다 죽는 거예요. 축이 되는 발만 거슬리게 합니다. 검에 힘이 안 실리면 적어도 피할 시간은 벌 수 있으니까.” -하아, 허억, 허억…. ‘아, 이 새끼 금방 퍼지겠는데.’ 문제는 녀석의 체력으로 김현성을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김현성 역시 그걸 알고 있다. ‘싸울 때는 확실히 똑똑해.’ 사냥개가 어떤 역할을 부여받았는지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녀석을 내버려 두는 것이리라. 일부러 움직임을 더 크게 가져가고, 일부러 동선을 먼 곳으로 잡는다. 스펙상 본인이 월등한 우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냥개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일단은 체력을 빼놓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사냥개에게 어그로를 끌리는 순간, 정황이 더 복잡해진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사용한 마력과 체력이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조혜진을 퍼지게 한 거리도 김현성에게는 별 영향을 준 것 같지 않다. 물론 아예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고작 라파엘 파티를 상대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거라 판단한 것 같았다. ‘체력이 많이 늘었어.’ 아마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 역시 전술 김현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당시 녀석도 체력이 아슬아슬하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더 안정적으로, 더 오래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체력의 상승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게 분명하리라. ‘안 좋은데.’ 파티의 지원을 받고 있는데도 사냥개는 벌써 퍼지기 직전, 독기가 어디로 간 것은 아닌지 헐떡거리며 어떻게 주문에 맞춰주고는 있지만 반응이 늦다. 간혹 자신에게 들어오는 공격 루트를 전달해도 힘에 부치는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다. ‘겨우 1분 40초? 아니, 이제 2분인가.’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여기서 몇 분이 더 추가되면 곧바로 균형이 무너진다. 현시점에서도 파티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보호 마법이 점점 사냥개 개인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균형을 유지해 주는 것은 중요하다. 라파엘을 투입하면 곧바로 누구 하나가 뒈져 나가는 상황이 펼쳐지게 되리라. ‘이거 큰일 난 것 같은데… 진짜.’ 그따위 생각을 하며 커다란 문을 바라봤지만, 박리안은 아직도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 것 같았다. 굳게 잠긴 문을 열기 위해 본인의 쌍검이라도 찾으러 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현성아… 시바, 현성아.’ 그 와중에 조금 이상하게 느껴진 것은 김현성에게서 별다른 액션이 없었다는 것. 내가 균형을 유지시키고 있다기보다는 녀석이 수를 던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내 생각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라파엘 파티를 살펴보는 것만 같은 느낌. ‘현성아, 눈치챈 거 아니지?’ 그런 생각이 갑작스럽게 들어와 꽂힌다. 이런 생각을 해볼 만도 하다. 김현성도 바보는 아니다. 애초에 처음, 마리엔이 자신의 공격을 피했다는 것부터가 의아하게 느껴질 터다. 곧바로 찢어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던 벌레들이 의외의 저항을 하고 있다. 파티의 완성도가 본인이 상정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높게 느껴질 것이다. 어쩌면 생각하기도 싫은 상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이 새끼들이 기영 씨의 지시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합리적 의심 말이다. 움직이는 게 마치 시험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이 파티가 어디까지 자신을 따라올 수 있는지, 본인이 생각하는 게 맞는지 하나하나 짚어보는 듯한 느낌이다. 내가 김현성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녀석 역시 나를 잘 알고 있다. 내가 파티와 개인을 어떤 식으로 굴리는지는 녀석이 먼저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아니나 다를까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는 게 시야에 비친다. 혹시라도 녀석들을 죽이면 안 된다는 내 마음이 전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 ‘아….’ 반대로 라파엘의 얼굴은 더욱더 밝아지는 중. ‘너, 이기고 있는 거 아니야. 언제, 어떻게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고 있어, 시바.’ 아마 형이 드디어 자신을 알아줬다고 판단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당연하지만 저 모든 행동이 김현성에게는 거슬릴 것이다. 만약 이기영이 정말로 눈앞에 있는 파티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면 결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닐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어쩌면 세뇌 같은 종류의 정신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고 추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본인이 하기 싫은 잃을 억지로 하게 하거나, ‘이제는 용사 파티가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어.’ 따위의 대사를 듣게 되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을 수도 있다. 김현성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질수록 내 안색도 괜스레 어두워지고 있는 시점,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제자리에 우뚝 멈춘 것은 바로 그때였다. -죽여 버리겠어. ‘원래 죽이려고 했잖아. -살아 있는 걸 후회하도록… 이 쓰레기 같은 놈들. ‘안 돼, 그런 거 하지 마. 악당 같은 대사 날리면 안 돼. 우리 정의의 편이야, 알지?’ “가까이 가지 마. 가까이 가지 마!! 움직이면 죽어. 움직이면….” 아니, 이미 한 놈 죽을 것 같다. -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생매장 듀오 중 한 놈의 팔이 날아가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난 몰라.’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을 나뒹구는 놈의 모습은 가관. -아악!! 아아아악!!! 고향으로 돌아가 청혼한다는 녀석의 계획은 여기서 끝이 아닐까. 목숨을 건지더라도 무릎은 꿇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방금 다리 한쪽이 날아갔으니까. -아아아악!! ‘사, 사랑했다. 라파엘. 시바.’ 그런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순간. 대륙의 빛을 납치한 악마 놈들의 최후를 직접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내려와 꽂혔다. “힘내라. 힘내, 현성아…. 지지 마.” # 642 회귀자 사용설명서 642화 미친 까마귀(1) 엘룬이 선물한 망원경에 보인 것은 동료를 잃을 위기에 표정을 굳힌 용사와 녀석을 둘러싼 타천의 무리. 루시퍼가 내려준 성검, 아니, 마검을 손에 들고 김현성을 위협하는 녀석들의 모습에는 저도 모르게 고개가 저어졌다. 다수에게 둘러싸인 회귀자가 이 위기를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차갑게 굳은 얼굴은 현재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더러운 루시퍼의 졸개들이….’ 평화로운 대륙을 위협하려는 악마들의 모습에 오금이 저린다.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많다. 개인의 스펙은 김현성이 높다지만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이다. 여기까지 오느라 소모한 마력과 체력을 생각해 본다면 불리한 싸움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나 역시 김현성과 함께 저 악마 무리를 향해 빛의 심판을 내리고 싶은 심정, 이곳에 갇히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게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열려.’ 거대한 문을 쿵쿵 두드려 봤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다. ‘믿는 수밖에 없어, 아니, 나는 현성이를 믿어.’ “할 수 있을 거야.” 그동안 수많은 위기를 헤쳐온 그 김현성이지 않은가. 이번 위기 역시 충분히 감당해 낼 거라고 여겼다. 녀석은 그런 놈이었으니까. 소중한 친우가 세뇌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각성한 용사 때문인지 루시퍼의 졸개들은 스멀스멀 뒷걸음질 치기 시작. 본인들이 인지한 행동이 아닐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마 갑작스럽게 뻗어 나오는 노을빛 기운에 어둠의 마기가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닐까. “힘내라, 힘내. 지지 마라, 현성아.” 내 목소리라도 닿는다면… 닿는다면, 아주 작은 힘이나마 닿을 수 있다면, 녀석에게는 정말로 커다란 힘이 될 텐데…. -다, 다음에는 어떻게 해요, 형? “…….” -다음에는… 어떻게…. “…….” 타천의 힘에 의해 잠시 안에 남아 있던 어둠이 반응하기는 했지만, 언제나 손절은 냉혹한 법. -대답해 주세요, 형. 지시를… 지시를 내려주세요. “…….” -형, 괜찮으신 거 맞죠? 괜찮으신 거… 맞는 거죠? 쓰러지신 건 아니죠? 그 와중에 라파엘이 점점 더 초조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슬슬 머리가 지끈거리는 타이밍, 아까와는 별개로 손가락을 툭툭 허벅지로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의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머리를 굴려야 했던 탓이다. ‘세뇌당했다고 하면 되려나.’ 김현성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테니 딱 적당한 변명이 되지 않을까. 벌써부터 노을빛에 영향을 받은 녀석들을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 도착할 것 같다. 슬쩍 거울을 바라보자 현재의 모습이 그리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두통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제대로 먹지 못해 마른 모습은 누가 봐도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자해한 흔적이라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드라마틱한 전개를 위해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나라고는 해도 쓸데없이 아픈 건 싫었으니까. 굳이 온몸에 멍이 든 흔적을 만들지 않아도 김현성이라면 내가 겪었을 고통을 모두 알아주지 않을까. ‘아니지, 그래도 조금은 있는 게 나으려나.’ 조금 정도는 있어야 개연성이 맞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팔과 다리가 잘린 녀석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는 중이었다. 이미 전투 불능이라고 판단한 것인지는 몰라도 김현성이 녀석을 지나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대로 천천히 죽어가는 걸 지켜보려는 건지, 아니면 살아 있는 게 후회될 만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냉정한 빛의 심판이 녀석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입술을 꽉 깨문 라파엘의 얼굴을 보자 미안한 감정이 살짝 올라오기는 했지만 이미 밸런스는 무너졌다. 아무리 여기서 쌩 발악을 한다고 해도 이 무너진 균형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 무엇보다…. ‘아, 무서워.’ 김현성의 얼굴이 굉장히 무섭다. -형, 형! 형! 녀석의 형 하는 소리가 채 닿기도 전에 콰직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야에 비친 것은 벽에 얼굴이 처박힌 라파엘, 순간 날개를 펼쳐 몸을 뒤로 빼기는 했지만, 대미지가 없을 리가 없다. 사실 육체적인 대미지보다는 정신적인 대미지가 더 커 보인다.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은 이유를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수신기에서 내 목소리를 들었나?’ ‘현성아, 지지 마’라는 대사를 들었다면 멘탈이 나갈 만도 했다. 귀신같은 타이밍에 손절 당한 것은 아닌지 고려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아주 약간의 걱정거리가 대뇌의 전두엽을 스치고 지나가기는 했지만, 이내 들려온 목소리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녀석의 외침은 가관. -무슨 짓을 한 거야! 형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형한테…. -……. -그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진짜 미안해, 진짜로. 나도 이러기는 싫었는데, 상황이 좀 그래. 다들 손절하는 타이밍이기도 하고… 나만 붙들고 있기는 조금 그렇잖아.’ -나를… 버릴 리가 없는데… 나를… 분명히 뭔가가 잘못된 거야. 그래, 분명히 네가…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니야,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믿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는데….’ -형이 나를 버릴 리가… 아아아악!! 콰앙!! 파티의 중심을 자처하던 라파엘이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상황, 안 그래도 김현성에게 대응하기 힘들던 파티가 무너지는 것 역시 시간문제였다. 그나마 눈빛이 살아 있는 것은 사냥개뿐. 입술을 꽉 깨문 녀석이 김현성을 향해 돌진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곧바로 목이 잘려 나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놈은 의외로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다. 남은 파티원들과 함께 최후의 힘을 짜내듯, 아까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직접적인 지시는 없었지만, 본인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는 기억하고 있는 모양.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생각이냐.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를 치는 사냥개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다. 말 그대로 온몸이 너덜너덜해지고 있다. -겨우 이 정도로 주저앉고 끝낼 생각이었던 거냐. ‘그만해, 얘들아….’ -일어서. 일어서라, 라파엘.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너를 믿고 여기까지 따라와 준 나를, 우리를 실망시키지 마. 그들의 감성이 이해가 되기는 했지만, 한 발자국 뒤에서 저 말을 듣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다. -네 손으로 시작한 일이다. 끝까지 매듭을 지어. 지키고 싶은 사람을 위해, 대륙을 위해, 자신이 저지른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싸우고 싶었던 게 아니었었나. 나는 기억하고 있다, 라파엘. 네 눈을 보고 난 따라온 거야. -……. -흔들리지 마라. 너는 분명히 해낼 수 있다. 분명히….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싸이월드 감성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사냥개의 의외의 모습에 엉덩이가 들썩였지만, 누군가는 착실히 반응하고 있다. 가슴에 검이 튀어나온 채 저런 말을 지껄였으니, 오히려 반응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사실 김현성이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아무리 상황이 꼬였다고는 하더라도 1회차의 동료들을 본인의 손으로 보내는 것은 조금 너무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 동료가 라파엘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지도 의문이 남는 부분이고…. -너 자신을 위해서 싸워. 지지 마라, 라파엘…. 지지… 마…. 녀석은 결국 입에서 피를 흘리며 툭 하고 쓰러져 내렸다. 미약하게 숨을 쉬는 걸 보면 살아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 안 돼, 안 돼! 중얼거리는 라파엘의 모습을 보며, 기적의 사제 마리엔이 신성력을 내뿜는다. -지지 마요. 지지 마세요. 주저앉지 마세요. -아, 아아…. -기억하세요?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셨잖아요. 처음 만났을 때 분명히 그렇게 말씀해 주셨잖아요. 할 수 있을 거예요, 라파엘 님은 분명히…. -마리엔, 마리엔! 믿었던 기적의 사제마저 신성력을 전부 사용한 이후에 탈진. 사방을 둘러보는 라파엘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 눈에 보이는 광경은 거짓말이라는 듯이 두리번거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함께 싸우는 동료들은 이제 없다. -힘을… 힘을 줘. -……. -당신이 날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힘을 줘! -넌 애초에 선택된 적도 없었어. -형이 말해줬어. 분명히 날 선택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힘을, 힘을 주란 말이야. 동료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줘. 형을 지킬 수 있는 힘을, 힘을 줘! 이 머저리 같은 고철 덩어리! 제발… 부탁해. 제발… 원하는 건 뭐든 할 테니, 내게. 뭔가 스멀스멀 느낌이 오는 타이밍이기는 하다. 정의의 용사가 성검으로부터 인정받아 힘을 얻는 클리셰이기는 하지만, 녀석은 용사가 아니지 않은가. 괜스레 혀를 차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 굉음과 함께 회색빛이 녀석의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 ‘뭐야, 이러면 안 되는데.’ “뭐야, 이러면 안 돼. 왜 이러는 건데….” 제대로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빛나는 회색빛은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찬란하게 느껴진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던 라파엘의 몸이 천천히 회복된다. 아니, 회복이라기보다는 재생이라는 표현이 떠 어울리는 상황, 그동안의 대미지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회복되고 있다. 당연하지만 회색빛은 쓰러진 녀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약한 숨을 헐떡거리고 있던 사냥개의 숨이 점차 안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탈진한 마리엔의 창백한 안색 역시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뭐야….’ 손절했는데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아직 추가 매수할 수 있는 상황인 거 맞지?’ 김현성의 표정 역시 한층 더 굳기 시작한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보이는 출력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 그 말 그대로이지 않은가. 아무리 마검, 아니, 성검에게 선택받았다고 한들, 평범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내뿜고 있는 회색빛의 양이 이미 김현성을 상회하는 상황. 물론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녀석에게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지금 라파엘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지극히 비상식적이었다. 물론 라파엘이 어디서 저런 힘을 받고 있는지는 대충 이해가 간다. “루시퍼.”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최소한 가계약 정도는…. ‘하.’ 괜스레 입술을 꽉 깨물며, 여러 가지 고민을 해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도대체 왜.” ‘왜 산 거야?’ 모두가 이 주식을 손절한 상황에 어째서 그녀가 여기에 투자했는지, 도대체 뭐 볼 게 있다고 다시 이 주식에 발을 들였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 643 회귀자 사용설명서 643화 미친 까마귀(2) ‘목적이 뭐야.’ “…….” ‘듣고 있어? 목적이 뭐야?’ 당연하지만 루시퍼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애초에 이쪽에 알릴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을 진행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생각해 보면…. ‘갑작스러운 게 아닐 수도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설계일 가능성을 떠올려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현시점에서 그녀가 뭘 노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계획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떠올려 보면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성검이 라파엘을 선택했다는 것부터, 현재 상황에 이르기까지 의심이 되는 정황은 많다. 물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지만, 루시퍼가 이런 멍청한 곳에, 아무런 목적 없이 투자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 망해가는 주식에 투자해?’ 베니고어 사단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겠지만, 루시퍼는 다르다. 조금이라도 살아날 기미가 보인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심지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소규모 투자로 간을 보고 있는 상황도 아니다. 누가 봐도 규격 외의 회색빛을 퍼주고 있는 모습에는 내 입이 다 벌어질 정도였으니까. 혼자 힘으로 싸우고 있는 김현성이 걱정될 정도였으니, 무슨 표현이 더 필요할까. ‘어이없네, 진짜.’ 그런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상황. 곧바로 몸을 날린 김현성이 라파엘에게 쇄도해 들어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아까처럼 검을 휘두르기는 했지만 검에 깃든 마력이 다르다. 정말로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휘두른 검을 라파엘은 회색빛으로 받아낸다. 그 와중에 피슉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한쪽 날개가 잘려 나가기는 했지만…. ‘곧바로 회복.’ 회색빛에 휩싸여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날개 역시 루시퍼가 자신의 힘을 밀어 넣었다는 거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아무리 신화 등급의 검이라고 한들, 저런 규격 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누가 봐도 누군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싸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 힘이라면… 지킬 수 있어. ‘그거 네 힘 아니야.’ 어떻게 보면 벨리알이 내게 마력을 쏟아부었을 때와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단언해서 말하건대 그때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 하진 않았다. 당시 나는 정말로 마력만 받았을 뿐이었고, 녀석은 성검이라는 신화 등급의 아이템에, 벨리알보다 서열이 높은 악마에게 힘을 빌리고 있다. 그 출력을 나보다 더 잘 활용할 수 있다는 것도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 애초에 내 비루한 신체는 벨리알이 넣어준 마력을 전부 소화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녀석은 다르다. 라파엘은 틀림없이 재능이 있는 편에 속하는 인재다. 아니, 어떤 부분에서는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가능성이 있었고, 실제로 본인의 힘으로 이 위치에 올라왔다. 루시퍼와 궁합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부작용이 있는지 없는지, 자기 몸을 갉아먹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보이는 모습만큼은 완벽에 가깝다. 그 라파엘이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콰아아아앙!’ 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사방이 부서져 나간다. 애초 고급 마력 운용 지식에 올인해 마력 컨트롤 부분에 많은 투자를 했던 것이 이렇게 돌아온 것이다. 비교적 약한 내구도, 체력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녀석은 완전히 회색빛에 둘러싸여 있는 상태였으니까. 이쯤 되면 루시퍼가 원하는 게 김현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그건 아니지… 그건 아닐 거야.’ 김현성을 열렬히 원했던 게 바로 그녀가 아니었던가. 아직 김현성은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어떤 진영을 선택할지도 정해진 바가 없다. 운이 좋으면 김현성이라는 인재를 영입할 수 있는 루시퍼의 입장에서는 그런 무리수를 던질 이유는 하나도 없다. 결정적으로…. ‘나 역시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만약 김현성을 치우고 그 자리에 라파엘을 세울 생각이라면 그 생각이 틀렸다고 딱 꼬집어 말해줄 수 있다. 루시퍼의 지원과 성검을 등에 업은 녀석이라고 한들, 절대로 녀석은 김현성을 대체할 수 없다. 괜스레 쫄리기 시작해 문을 쾅쾅 두드려 봤지만, 박리안에게서 다른 피드백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김현성과 라파엘은 전투에 여념이 없다. 꽤나 넓은 동공이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버리는 데는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거대한 회색빛은 계속해서 김현성을 노리고, 김현성은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놈을 응시하며 검을 휘두른다. 날개가 잘려 나가고 상처가 쌓이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회복하며 김현성과 맞서는 놈의 모습은 정말로 타락한 천사의 모양새. “이 지랄이 났는데, 위쪽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다고? 저게 루시퍼가 직접 힘을 준 게 아니라고?” 저런 출력이라면 루시퍼가 이 대륙에 발을 들여놨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이기영 신도… 이, 이기영 신도! (0/1)] ‘역시 루시퍼일 줄 알았어. 그래, 시바… 이걸 눈치 못 챌 정도로 무능하지는 않겠지.’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지, 지금 감찰단… 감찰단이 오는 중이래. 어떻게 해? 어, 어떡해? 아직 재판 준비 다 끝난 거 아니지? 일단 망원경부터… 망원경. (0/1)] ‘…….’ [큰일 났어, 이기영 신도… 망원경 빨리… (0/1)] ‘너한테 기대를 한 내가 병신이지, 시바. 걔네가 지금 재판이랑 감찰 때문에 오는 것 같아? 지금 상황 안 보여?’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아, 아! 뭐, 뭐야! 뭐야! (0/1)] ‘눈치 못 챘어? 시바?’ [잠, 잠깐 기다려. 지금 수, 수습을… 수습해 볼 테니까. 잠깐만… (0/1)] [알 수 없는 이유로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취소됩니다.] “제대로 각을 잡으셨네요, 아주. 시바.” 베니고어 쪽을 차단한 것 역시 루시퍼. 위쪽이 멍청하다고 비난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바라는 게 없기도 했거니와 그만큼 루시퍼의 계획이 은밀했다는 거니까. 베니고어 위쪽에서도 대응이 한 발자국 늦었을 정도라면 그녀가 그 정도로 철저하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설계하고 있었다, 이 말이지. 시바….’ 의자에 앉아 이 상황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루시퍼의 얼굴이 괜스레 스쳐 지나간다. ‘위에서 설계하고 있었다… 하.’ 이죽거리고,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닐지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녀의 노림수가 뭔지는 모르겠다만, 잘못하면 악마 진영에 적대감을 가지게 될 수 있다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그것까지 전부 다 포용할 정도로 이번 투자에 자신이 있었던가.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백만 년 동안 나를 위쪽과 격리할 수는 없을 터, 베니고어 사단뿐이라면 더 오래 개입할 여지가 있었겠지만, 곧 베니고어 측에서도 윗분이 등장하는 게 예정된 상황이다. 이번이 루시퍼의 2번째 방문인 만큼, 위쪽에서도 철저히 준비하고 달려올 것이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퀘스트의 생성을 막고 있는 알 수 없는 이유가 사라질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이야기.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냐는 것과 골든타임에 맞출 수 있냐는 것이었다. 나라도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와 꽂혔다. ‘초조해지게… 박리안 얘는 진짜 뭐 하고 있어?’ 그런 생각을 머리에 담는 순간, 거대한 문이 쾅 하는 소리를 내며 열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바깥에 보인 것은 땀으로 흠뻑 젖은 박리안의 얼굴,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조차 없다. 김현성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게 계속해서 시야에 들어왔으니까. “하아… 하아… 늦어서… 늦어서 죄송합니다. 부, 부길드마스터… 몸은,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안색이,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저 좀 부축해 주세요.” “지금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갈 곳이 있습니다. 그 전에… 아….” ‘내 눈… 시발, 내 머리.’ “부길드마스터, 일단은 휴식을 취하시는 게….” “아니, 좀 가요. 급하니까.” “하지만….” “빨리 갑시다, 좀!” “네.” 한 발자국 내딛자마자 아까와 같은 통증이 덮친다. 솔직히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힘에 부쳤지만, 옆에서 내 몸의 균형을 맞춰주고 있는 박리안 때문에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전방을 바라보자 여전히 전투 중인 장내가 보인다. 본래부터 차갑게 느껴졌던 김현성의 얼굴이 점점 더 차가워진다. 꽉 깨문 입술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오고, 검을 잡은 손아귀에서도 핏물이 흘러내린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라파엘의 몸에 상처가 생기며 신체 일부분이 잘려 나가기는 하지만 회색빛과 함께 금세 회복된다. 아직은 무리가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정말로 김현성의 체력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너만은 절대로 용서 못 해, 절대로! ‘개소리 좀 그만해, 이 미친놈아.’ -……. -절대로!! 싸움은 길고, 거칠다. 김현성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확실히 어떤 종류의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얼굴에는 초조함과 분노가 드리우고 있었고, 조금씩 호흡도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지금 김현성이 싸우고 있는 대상은 라파엘이 아니라 루시퍼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루시퍼의 퍼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한계가 있기는 한 건가? 끝은 있어?’ 그녀가 한 재력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퍼줘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 라파엘은 상처 입고, 회복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내기 위해 회색빛을 쏟는다. 김현성은 여전히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검을 휘두르기에 여념이 없다. 자원이 계속해서 충전되는 라파엘과는 다르게 김현성은 충전되지 않을 자원을 계속해서 소모하는 쪽. 뭐라고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솔직히 내가 가서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전술 김현성을 가동해도 의미가 없다. 애초에 형국 자체는 현성이가 밀어붙이고 있는 형국이었으니까. 일단은 싸움을 말리는 게 먼저가 아닐까. 곧바로 손거울에 대고 입을 여는 게 올바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해요, 라파엘 님. 지금 조종당하고 있는 겁니다. 싸움을 멈추세요. 뭔가 서로 오해가….” 하지만 그게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니요, 형이 조종당하고 있는 거예요. 보고 계세요. 제가 이 새끼 해치우고 형을 정상으로 만들 거예요. 더 이상 형을 힘들게 하지 않을 거예요. 더 이상… 머리 아픈 일도…. ‘어?’ -기억을…. ‘하지 마, 미친놈아. 말 안 한다며.’ -기억을…. ‘야, 이 시바… 하지 마! 하지 마!’ -잃는 일도 없을 거라고요. ‘개….’ -뭐? ‘…….’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느낌.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었는지, 일순간 정지된 전투 현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다는 듯, 지금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인상을 구기고 있는 김현성의 표정은 가관. -방금 뭐라고 했지. -기억을 잃는 일도 없을 거라고. 몰랐다고 말하지는 마, 김현성, 이 쓰레기 같은 개자식. -뭐라고… 방금, 뭐라고…. -네가 그렇게 만든 거야. 네가 그렇게 만든 거라고!!!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얼굴. 루시퍼가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어째서 라파엘에게 투자한 건지, 김현성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타락.’ “…….” “…….” “루시퍼….” 미친 까마귀가 노린 것은 둠현성일지도 모른다. # 644 회귀자 사용설명서 644화 미친 까마귀(3)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김현성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우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전히 검을 맞대고는 있었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진 게 눈에 보일 정도, 누가 봐도 정신을 다른 곳에 놓고 온 것 같은 표정이지 않은가. 당연하지만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예상이 간다. 방금 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되새김질하고 있지 않을까. 집중해야 한다고,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지만 멍한 얼굴은 여전했다. 단언컨대 이전에 봤던 이상한 행동들을 천천히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머리를 부여잡는다든지, 잠깐 다른 세상에라도 다녀온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짓는다든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진다든지 하는 종류의 사건들 말이다. 애초에 조혜진에게 내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 한 것도, 내 머리에 이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모두 김현성의 머리에서 나온 추측이 아니었던가. 그 누구보다 녀석이 먼저 의심했었고, 녀석이 먼저 눈치챘었다. ‘시바… 시바….’ 어쩌면 그런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조혜진이 자신에게 거짓 보고를 했거나, 내가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이 일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다. 녀석의 얼굴이 구겨지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절망, 말 그대로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절망이었다. ‘이 새끼, 왜 이렇게 눈이 죽었어.’ -……. ‘현성아, 정신 차려. 형 멀쩡해. 정신 차려야지. ‘이제 됐어, 이제는 지쳤어.’ 한 번 더 시전하려는 거 아니지? 지치면 안 되는 거 알지?’ -형을 구할 거야. 네 더러운 손아귀에서 그 사람을 구해낼 거야. ‘넌 좀 닥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주제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주제에! ‘좀 닥치라고.’  무너진 멘탈이 전투에 영향을 주는 것은 역시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애초 김현성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듯 보인다. 어찌어찌 몸을 움직이고 있지만, 평소처럼 공격에 대응하지는 못하고 있다. 좀 과하게 충격 먹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조혜진 조차 울고불고 난리를 쳤었던 기억상실 기믹이 아니었던가. 김현성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중한 친우, 짐을 함께 들어주는 동료, 1회 차와 2회 차, 본인의 인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형제. 안락하고 따뜻한 회귀자의 품에서 온갖 꿀을 받아먹기 위해 내가 저지른 사소한 사건들만큼이나 김현성은 나를 의지하고, 따르고 있다. 무의식 세계에서의 만남 이후에는 특히나 말이다. 여러모로 걱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맞아, 그럴 리가 없어. 그 생각이 맞아, 현성아.’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걔, 순전히 거짓말쟁이야. 상태도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무슨 그런 쓸데없는 말을 믿고 그래.’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 ‘그래, 일어날 리가 없지. 잘 알면서 왜 그래. 그리고 쟤 지금 루시퍼한테 조종당하고 있는 것 같다니까. 그런 애가 하는 소리에 무슨 귀를 기울여 주고 그래? 저거 전부 다 거짓말인 거 알지?’ -거짓말… 이야. ‘그래, 거짓말이야.’ 하지만 정말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쾅! 아니나 다를까 큰 소리를 내면서 벽에 부딪히는 등 밀리는 형국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떻게든 승리를 가져가고야 말겠다는 라파엘의 의지에 괜스레 우리 회귀자가 다칠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아마 김현성의 몸 자체에는 커다란 이상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루시퍼가 노린 것이 둠현성이 맞다면 녀석이 상처 입는 걸 바라보고만 있지 않을 테니까. 신체보다 더욱더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멘탈. 자꾸만 현실을 부정하는 모습에 어쩌면 다시 한번 무의식 세계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만약 정말로 루시퍼가 김현성을 노린 게 맞다면 지금 이 장면이 루시퍼가 머릿속에 그렸던 장면이 아니었을까. 완전히 난장판이 된 장내, 계속해서 입을 열며 몰아붙이는 라파엘과 마치 혼이 나간 것만 같은 김현성. 김현성의 표정이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더욱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비열한 까마귀 년…. 제기랄, 제기랄.’ 현시점에서 내 말을 뒷받침해 줄 만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당장은 정신력 자체를 마모시키는 것이 첫 번째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 그리고 그 계획은 충분히 들어맞고 있다. 애초에 김현성이라는 인간의 성향은 빛에 더 가깝다. 정확히 말하면 본인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지만, 진영 자체는 왼편에 있다는 거다. 선의의 중재자라는 녀석의 성향이 설명해 주듯, 지금까지 김현성의 정신은 악마들이 침투할 수 있는 빈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타락 플래그를 세울 수 있게 그 단단한 정신의 벽을 허무는 첫 번째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 깨끗했던 영혼에 때를 묻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혼란스러워하는 김현성의 표정과 녀석의 몸 주변에서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오오라가 내 말이 맞았다는 것을 아주 잘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 이후가 바로 유혹, 새로운 힘을 받아들이라는 유혹이다. 더러운 악마 놈들이 순진한 인간을 꾀어낼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방법. 아마 지금쯤 김현성의 머릿속에 루시퍼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네가 원하는 걸 전부 다 해줄 수 있다고, 힘이 필요하면 힘을 주고, 누군가의 기억을 되찾고 싶다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정확히 뭐라고 말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목소리가 일방적으로 전해지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어쩌면 빛을 부정하는 목소리를 내뱉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이기영 개인이 겪고 있는 부조리한 운명에 대해서, 혹은 신에게 헌신한 그에게 찾아온 불행에 대해서. 자신들은 다를 거라고, 타천사 루시퍼는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루시퍼였다면 베니고어를 부정하는 방법을 써먹었을 거다. ‘하, 시바.’ 정말로 어둠의 군주 둠현성이 태어나는 건 어떨까 생각해 봤지만 역시나 논외. ‘불순물이야.’ 김현성은 루시퍼의 힘 없어도 더 강해질 수 있다. ‘까마귀는 불순물이라고.’ 단기적으로는 좋은 선택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전혀 도움이 되는 선택지가 아니다. 애지중지 소중히 닦아온 보석에 거추장스러운 장식은 필요 없다. 김현성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빌려온 힘은,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는 것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이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내 말 맞지? 계약 같은 거 안 할 거지? 너, 악마 싫어하잖아.’ 루시퍼가 대놓고 악마처럼 등장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김현성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구원자에 손을 아무 의심 없이 잡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계약 같은 거 안 할 거지? 기벽이 바뀌기는 했는데… 그래도 너 선의의 중재자잖아. 뭐, 세상이 무너진 것도 아닌데 정체도 모르는 구원자의 손을 잡으려고 그래.’ 김현성이 입술을 꽉 깨문 것은 바로 그때. ‘현성아.’ 흔들리는 눈빛에 신념은 없다. ‘미친 까마귀 년, 지금 당장 안 멈추면 계약이고 나발이고.’ [아니, 이건 당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이기영 군단장.] ‘뭐?’ [물론 개인적인 욕심을 아예 배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게 당신들을 위한 길이에요.] ‘그딴 건 필요 없어.’ [아니요, 필요할 겁니다. 이기영 군단장은 제게 감사하게 될 겁니다, 분명히. 그리고 결국에는 함께 오시게 되겠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후에 다른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거나, 이쪽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겠다는 의도가 엿보지만, 이런 일방적인 소통이 반가울 리 없다. 여러 제한이 걸려 있다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녀가 정말로 숨기고 있는 게 뭔지, 알고 있는 게 뭔지, 알 턱이 없는 이쪽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읽지 못한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이 머리 꼭대기 위에서 이쪽을 조종하고 있는데 기분 나쁘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내가 하기에는 좀 그런 생각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나는 끌고 다니는 쪽이지 끌려다니는 쪽이 아니다. 루시퍼가 원하는 게 정말로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한들, 나는 그녀가 우리를 휘두르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래, 한번 네 마음대로 해봐.’ 박리안에게 반쯤 업힌 느낌으로 커다란 던전을 이동한 지 어느덧 몇십 분이 지나가고 있는 상황. 그녀 역시 지쳐 보이기는 했지만, 천천히 가달라고 말하지를 못하겠다. ‘조금 더 빨리.’ “힘들 거라는 건 알지만….” “허억, 네. 허억….” “감사합니다.” “…….” ‘이번 일 끝나면 내가 사례할게, 진짜로.’ 점점 더 심각해지는 안쪽의 상황 때문에 그녀를 재촉할 수밖에 없다. ‘베니고어는 아직이야?’ 당연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다. 솔직히 벌써 수습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시바, 진짜.’ 다시금 눈을 돌려 시선을 김현성에게 돌리자 점점 더 막장으로 치닫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갑작스럽게 뻗어 나오기 시작한 이해할 수 없는 기운에 당황하는 라파엘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기 때문이다. 침을 꿀꺽 삼키는 녀석의 목이 괜스레 클로즈업된다. 열심히 입을 털던 녀석이 일순간 벙어리가 될 정도로 현재 김현성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심상치 않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느니, 어쨌느니 지껄이고 있었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으아아아악! 소리를 내며 검을 휘둘렀지만 보이지 않은 장막에 회색빛이 모조리 비껴 나가는 모습, 아니, 마치 회색빛이 스스로 김현성에게 닿는 걸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 김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것이 딱 이즈음,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얼굴이 눈에 띈다. 자기 혐오에 가까운 두 눈은 다른 무엇보다도 녀석의 심정을 잘 설명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휘몰아치는 칠흑의 어둠이 놈의 몸을 감싸 안았고, 그 마력의 파동이 내가 있는 곳까지 닿는다. 손발이 부르르 떨려오는 것은 물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은 느낌. ‘시바,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시발!” 김현성의 등 뒤에서 거대한 칠흑색의 날개 한 쌍이 뻗어 나오는 게 눈에 비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다시 또 한 쌍. “…….” 다시 또 한 쌍. “개시바….” 다시 또 한 쌍. 10장의 날개 비쥬얼은 괜찮기는 했지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듯한 느낌, 김현성이 고개를 돌리는 게 눈에 보인다. 아마 내가 달려오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는 게 분명하겠지만 얼굴에 반가움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처참할 정도로 망가진 이쪽의 모습에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 얼굴에 맴돌았지만, 이내 본인이 어떤 상태인지를 깨닫고는 입술을 꽉 깨무는 모양새. 악마와 계약한 자신을 내가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는 모습이라 할 만했다. ‘이거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있는 거지? 희망은 있지?’ 하지만 마음의 눈이 보여주는 정보는, 그 일말의 희망조차 부숴 버리고 있다. [김현성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역겨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노을] ‘조심해야 했어.’ 나 스스로도 반성할 수밖에 없는 부분. 괜찮을 거라고,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저 역겨운 어둠이 루시퍼를 뜻하는 것일지 그 누가 알았을까. ‘제길.’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 645 회귀자 사용설명서 645화 둠현성(1) 먼 거리에서 김현성이 보이고 있다. 이대로 들어가야 할지, 아니면 시간을 조금 들인 후 들어가야 할지,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혹시나 녀석에게 더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 걱정된 탓이다.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듯 자신의 몸을 천천히 둘러보는 녀석의 모습은 확실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루시퍼가 음흉한 미소를 띠며 박수 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심사가 뒤틀렸지만. ‘넌 진짜 내가 크게 한 방 먹인다. 시바, 두고 봐, 시발’ 일단은 이 문제를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정신에 이상은 없는 건가? 합리적인 판단은 할 수 있는 건가?’ 그 와중에 가장 신경 쓰였던 것은 현재 김현성의 정신 상태. 나 같은 경우에는 벨리알과 계약했더라도 그다지 다른 점을 느끼지는 못했다. 투명한 빛의 영혼은 마치 철벽과도 같아서 그 어떤 어둠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빛과 함께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다른 이들은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당장 더러운 까마귀와 계약한 악마 계약자들만 봐도 영혼이 오염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페널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악마 소환사 그리고 악마 숭배자들 역시 마찬가지. 악하기에 악마와 계약한 것이 아니라 악마와 계약했기 때문에 악해진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김현성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지 어떠한 것도 확신할 수 없다. 부정적인 감정이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상황이니,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지만 회귀자의 정신력과 영혼이 그렇게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보면 딱 잡아 말할 수는 없지만… 겉보기에는 이상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아아아아!” 고함과 함께 날개를 활짝 펴며 마지막 발악처럼 회색빛의 검을 휘두르는 라파엘. 그저 본인의 몸을 내려다볼 뿐, 라파엘 자신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김현성을 향해 도약하듯 뛰어드는 모습이었다. 공격이 먹힐 거라고 확신하는 얼굴, 나 역시 나쁘지 않은 움직임이라고 생각했다. 라파엘이 지척에 다가온 순간까지, 김현성은 반응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반대쪽 벽에 처박혀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른 것은 라파엘이었다. 콰아아앙! 심지어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몸에 손등을 가져다 댄 것만으로도 라파엘의 몸이 저 반대편 벽에 달라붙었다. ‘뭐야, 왜 이렇게 세졌어. 왜 이렇게 세진 거야? 시바, 방금 뭔데? 와, 시바 방금.’ 김현성 역시 본인의 힘이 의아한지 자꾸만 몸을 내려다본다. 눈으로 보기에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상승한 스텟들이 보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심지어 일부는 보이지도 않는다. 마음의 눈으로도 전부 읽을 수 없을 정도의 상태창이 만들어진 것이다. 신화 등급의 직업 타락한 검. 직업명만이 선명하게 비쳐왔다. “하하하….”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뭘 뜻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긍정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 하하.” “제길!” 쿨럭 하는 소리와 함께 피를 토하는 라파엘이 다시 한번 몸을 날려봤지만 상대가 될 리 없다. 콰드드득!! 바닥에 쓸리는 소리와 함께 온몸으로 바닥을 청소해 주고 있다. 그걸로는 모자랐는지 라파엘의 등을 밟고 날개를 잡은 채로 힘을 주는 김현성. 기괴한 소리와 함께 날개가 그 자리에서 찢겨 나간다. 붉은 혈액이 공중으로 흩뿌려지는 가운데 서 있는 김현성의 모습이 멋있기는 했지만, 상황 자체는 굉장히 그로테스크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아아아아악!” 비명 소리가 들려왔지만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왼쪽에 있는 날개를 잡은 채 발에 힘을 주자 라파엘의 몸이 땅바닥으로 처박혔다. 물론 잡고 있었던 날개가 뜯어졌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아악!” 콰아아아아앙!!! “아아… 악!”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아아….” ‘시바, 얘 조금 정신 이상해진 것 같은데. 정신 나간 거 아니지?’ 빛을 등진 둠현성의 경천동지할 힘에 잠시나마 뽕이 차오르기는 했지만,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잔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최대한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것을 우선시하거나 비교적 깔끔히 죽이려고 하는 김현성의 모습은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우려했던 그대로의 모습에 괜스레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게 된다. ‘미친 건 아닐거야, 미친 건….’ 날개를 움직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자기 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날개는 괜스레 온몸의 털이 삐죽 서게 한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피로 흠뻑 젖어버렸다. 솔직 담백하게 말해서 정하얀의 전성기 때보다도 더 소름 끼치는 얼굴이다. 날개가 반쯤 뜯겨 나간 라파엘의 목을 잡고 위로 들어 올리는 모습은 어떻게 죽일까가 아니라 어떻게 더 고통스럽게 할지를 고민하는 듯한 모양새이지 않은가. ‘세긴 진짜 졸라 세다.’ 아직도 라파엘의 몸에 많은 양의 회색빛이 남아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거의 신에 가까워졌다고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벨리알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위압감이 지금의 김현성에게도 느껴진다. ‘시바, 진짜 벨리알보다 센 거 아니야?’ 과장된 표현이었지만, 서열 하위권의 군단장들은 무난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계속해서 이동하는 와중에 나를 부축하고 있는 박리안의 몸이 덜덜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그녀의 눈에도 현재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치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는 게 당연하다. 칠흑색의 날개를 단 이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있는 모습을 보고 그 누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게 본인이 소속되어 있는 길드의 길드마스터라면 더욱더 의아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윽고 김현성이 이쪽을 천천히 바라봤다. 라파엘을 잡은 손을 그대로 늘어뜨리고,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고 싶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역효과로 비친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아니, 애초에 저 모습에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부정해야 하나? 그게 맞는 건가.’ “기영 씨….” “…….” “기영, 기영 씨.” ‘아이, 시바.’ “기영 씨….” 김현성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살짝 펼친 채 땅을 박차고 느릿하게 날아오는 것 같은 모습을 취했지만, 녀석이 내게 닿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박리안이 덜덜 떨리는 얼굴과 눈으로 나를 지키기 위해 검을 빼 들었다는 것, 그녀는 지금의 김현성을 적으로 규정했다. 솔직히 비난하지도 못하겠다. 내가 그녀의 입장이었어도 비슷한 판단을 내렸을 테니까. “도, 도망치세요, 부길드마스터. 도망치셔야 됩니다. 저건… 길드마스터가 아니에요, 괴물입니다.” ‘너가 보기에도 그렇게 느껴져? 우리 도망쳐야 되는 거야?’ “여기는 제가 맡, 맡겠습니다.” ‘아니야, 우리 도망칠 필요 없어. 그건 아닐 것 같은데… 근데 나도 조금 무섭기는 해. 그리고 애초에….’ 도망칠 수도 없을걸. 방금 봤잖아.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다리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박리안과 꽤나 오랜 시간을 함께했지만 저런 모습을 보는 건 나 역시 처음이다. ‘겁 먹었어.’ 임무완수를 위해서라면 죽음조차 불사하는 그 박리안이 겁을 집어먹었다. 이외에 다른 말이 필요할까. 공포에 젖은 것으로도 모자라 숨을 쉬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리안 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떨어져. 부길드마스터에게 떨어… 떨어져, 이 더러운 악마….” “훌륭합니다. 네, 그게 제가 당신에게 바라던 모습이에요. 지금의 판단은 조금 아쉽습니다만… 아무튼 고생하셨습니다.” “가까이 다가오지 마…. 가까이….” ‘박리안한테도 손대는 건 아니지?’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아 검을 내려놓게 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하지만 박리안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이미 몸이 완전히 굳어버린 것이 분명하리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얼굴은 진짜 악마를 목도한 것 같다. 녀석이 나를 배려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 몸은 그렇게 떨려오지 않았다. 김현성은 내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 걱정과 근심 외에 다른 표정이 드러나 있지 않지 않은가. 오히려 본인이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다. 도망치고 싶은 감정을 억누르고 싶어 한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시바, 다행이다. 이건 진짜 다행이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못하는 미친놈으로 각성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곧바로 허그라도 할 줄 알았건만 본인의 몸에 묻은 피가 신경 쓰이는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이전의 김현성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거지?’ 처음 보는 김현성의 모습에 어떤 액션을 취하는 것이 정답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괴로운 척해야 하나?’ 그건 논외. ‘아니면… 평소대로 맞이하는 게 좋을까.’ 그것 역시 이상하지 않은가. 무려 악마와 계약한 김현성인데, 평소와 같은 상태로 맞이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얼굴에는 것은 걱정과 후회, 불안함과 정체 모를 공포밖에 보이지 않는다. ‘엿 같네, 진짜.’ 모든 상황이 엿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하, 진짜 짜증 나는데.’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자꾸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원인이 눈앞에 있는 김현성 때문이 아니다. ‘리바운드.’ 망원경을 오랫동안 사용한 후유증이 이쪽을 덮치려고 하고 있다.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고, 녀석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일단은 평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색하게 일그러진 표정밖에 보여줄 수가 없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얼굴을 구기게 된다. 당장에라도 땅바닥을 구르고 싶은 고통을 참는 것이 어디 예삿일인가. ‘아이, 씨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어떻게. 루시퍼, 시바. 루시퍼, 시발.’ 계속해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을 때 들려온 녀석의 목소리. “괜찮습니다, 이제. 전부 괜찮을 겁니다.” ‘뭐가 괜찮은데.’ 녀석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어왔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더 이상 힘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제가 잘못 생각했었습니다.” “아, 윽….” “더 이상 제 책임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시바. 이 새끼 손절하려는 거 아니야?’ 왠지 모르게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김현성이 대륙을 배재할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닐 거라고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랬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들 필요가 없는 짐이었습니다.” ‘아냐, 들어야 해, 미친놈아. 들어야 한다고….’ “전부, 전부 끝났어요.” ‘아니야. 아직 안 끝났어, 미친놈아….’ 김현성의 대륙 손절 선언이 귓가에 들려온 순간, 적대적인 얼굴로 놈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난 못 버려, 시바. 버릴 거면 너 혼자 버려.’ # 646 회귀자 사용설명서 646화 둠현성(2) 곧바로 녀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 표정을 완곡한 거절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조금 충격받은 표정을 보니 내 생각이 맞는 모양이다. 곧이어 연타를 날리는 게 조금 미안했지만, 머리를 붙잡으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당신 누구야.” “…….” 순간 눈동자가 죽어버린 것 같은 느낌, 순간적이지만 소름이 돋아 급하게 입을 열게 된다. 어떻게 생각해도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발언이었으니까. “아니, 저는 지금 당신이 누군지 묻고 있는 겁니다.” 급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여전히 어두운 얼굴이 눈에 띈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정말로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닌지 고민한 것이 아닐까.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내뱉었는지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로 입에 담지 않을 대사를 내뱉었으니, 이기영이 오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그냥 기억상실 기믹을 쭉 밀고 나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은 써먹을 수가 없다는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아니, 더 이상 기억상실 기믹은 써먹을 수조차 없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 “저는….” “…….” “저는 기영 씨가 알고 있는 김현성 그대로입니다. 조금… 네, 당황하시는 것도 이해는 합니다. 제 모습이… 네, 익숙하지 않으시겠죠. 보기 불편하신 모습이라는 것도… 혐오스러운 모습이라는 것도 이해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진짜 싸이코처럼 보여. 근데 혐오스러운 모습은 아니고….’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있잖아. 눈도 벌겋고. 그리고 무엇보다 때가 좀 많이 묻었어. “하지만 제 말을 듣는다면 분명히… 애초에 짐을 들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그들은 적입니다.” ‘그들이 누군데.’ “저를 회귀시킨 이들, 그리고 기영 씨가 따르고 있는 이들은 불필요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습니다. 그저 책임을 강요하고, 달콤한 말로 사람을 속일 뿐이에요. 물론 기영 씨의 신앙에 반하는 말이기는 합니다만, 굳이 저희가 그들을 위해서 싸울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입니다.” ‘내가 아는 김현성은 그런 말을 내뱉지 않을 거야.’ 그런 싸구려 대사를 내뱉고 싶었지만 뭔가 약한 듯한 느낌이다. ‘악마에게 너 자신을 팔아먹었어?’ 직접 묻는 것 역시 좋은 선택지처럼 보이지 않았다. 애매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 다시 한번 녀석의 날개를 밀쳐내 봤지만, 여전히 밀리지 않는 강경한 모습이었다. ‘왜 그래, 너. 시바.’ “그들은 기영 씨를 좀먹고 있습니다. 자신들 멋대로 평범한 사람들을 대륙으로 끌어들여 시험하고,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저 라파엘 역시 기영 씨를 꼬드기려는 수단에 불과해요.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감언이설로 사람을 꼬드기고 쓸데없는 책임감을 주고 짓누릅니다.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지만, 그들은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요. 기영 씨는 대륙을 위해 일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 자신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애초에 나누는 게 아니었는데. 애초부터 짐을… 나누는 게 아니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기대는 게 아니었어.” ‘그건 아니지.’ “무리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고, 기억을… 기억을 잃어가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어떻게….” “자신들이 선택한 이조차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저 끝없이 벼랑 끝으로 내몰기만 하는 이들을 기영 씨가 도울 필요는 없어요. 빛이 우리를 배신한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그들은 우리 편조차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선택한 게….” ‘그 꼴이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 ‘미친 까마귀 년, 넌 진짜 언제 한 번 뒤통수 크게 맞을 준비해라.’ 솔직히 김현성의 말에 반박하기가 힘들다. ‘게네, 미친놈들 맞긴 해. 솔직히 어이없는 놈들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아.’ 우리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게 자신들의 의지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김현성을 벼랑 끝으로 내던졌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들기 싫은 짐을 떠넘기고, 본인들은 간섭할 수 없다는 변명거리 하나로 모든 책임을 인간들에게 맡긴다. 물론 이해는 할 수 있다. 애초에 이곳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고 우리가 앞으로 책임져야 할 땅이었으니까. 하지만…. ‘바깥 신 정도가 메인 빌런이면 이야기가 다르지.’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일이 아닌가. 위협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개인에게 멋대로 힘을 내리고, 선택하며, 그들이 싸우기를 강요하는 일. 대륙을 위해 헌신하다 기억까지 잃어가고 있는 나를 김현성이 어떤 심정으로 바라봤을지는 예상하지 않아도 뻔했다. 불합리하다고, 이건 저주며 주박이라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번 납치 사건을 저지른 것 역시 신들이 내린 성검이 원인이지 않은가. 아마 지금 말한 것 모두가 김현성이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책임을 강요하지 말라고 울부짖던 놈의 모습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동안은….’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윤리관, 선의의 중재자라는 성향이 녀석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둠현성화로 인해 사고가 틀에 박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환영할 만했지만, 이건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루시퍼 밑으로 들어가라고?’ 기분 나쁜 선택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지, 루시퍼한테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겠지.’ 막말로 루시퍼가 관리하는 대륙이 몇 개인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 조그만 대륙은 그녀가 관리하는 수십 개의 대륙 중 겨우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 대륙보다 나와 김현성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해 줬다는 것 자체는 고마웠지만, 여기서 이룰 게 있는 내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아마 벨리알에게도 그리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지 않을까. 뒤에서 루시퍼에게 받을 게 있다고 한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 확신할 수 있다. 벨리알 역시 이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거다. ‘내가 이뤄놓은 게 얼만데… 이걸 두고 전부 떠나자고?’ “…….” ‘개 똥 싸는 소리 하지 마, 시바. 절대로 못 줘. 내가 내 걸 뺏길 것 같아?’ 수정 펀치라도 한 번 날리면 정신을 차릴까 싶기도 했지만, 내구에 의해 내 주먹이 부서질까 그렇게는 못 하겠다.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입술을 깨물어봤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 베니고어는 언제까지 구석에 처박혀 있을지 모르겠지만, 본인들이 맡긴 회귀자가 이런 상태에 처해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입니다.” “나를 믿고 있는 이들은.” “그것 역시 그들의 인생입니다. 기영 씨가 책임질 필요 없는 이들입니다.” ‘우리 현성이, 시바… 삐뚤어졌잖아.’ “파란 길드는.” “그들까지는 구원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마음에 드네.’ 괜찮다고 느껴지는 게 한 가지 있었다면 이 모든 게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었다. 김현성이 둠현성으로 변한다고 하더라도….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어.’ 겉모습이나 눈빛에는 변화가 컸지만, 최소한 이기영을 아끼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완전히 흑화한 줄 알고 긴장했던 것도 잠시, 사춘기 소년처럼 삐뚤어진 모양새에 약간은 안심할 수 있었다. 물론 타인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테지만…. 내 눈에 둠현성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혼란을 겪고 있는 청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충분히 흔들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은 당연했다. 김현성이 내게 해를 끼칠 리가 없다.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새끼를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충분하고도 차고 넘친다. 평소와 다르게 강경한 태도이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김현성은 김현성이지 않은가. “비켜.” “…….” “비켜요.” “이러실 거라고 생각….” “비키라고 말했습니다.” 입술을 꽉 깨물기는 했지만, 어두운 눈으로 일단은 몸을 슬쩍 비켜준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안쪽으로 뛰어갔지만, 나를 바라보는 김현성의 모습이 괜스레 신경 쓰인다. 비켜주기 싫었겠지. 본인이 저지른 일들이, 피범벅이 된 장내를 보여주기 싫을 테니까. 하지만 굳이 막지 않는 것을 보니 본인이 이렇게 강경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서둘러 안쪽으로 들어온 후에는 곧바로 라파엘의 상태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손절했지만, 다시 써먹을 수 있다면 써먹는 게 맞았으니까. ‘살아 있어.’ 솔직히 재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숨은 붙어 있다. 신성력을 넣어봤지만, 반응이 있을 리 없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져 반 시체 같아 보였으니, 솔직히 숨이 붙어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라파엘뿐만이 아니라 다른 파티원들 역시 미약하게 숨은 쉬고 있다. 그 상태가 문제라면 문제라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목숨은 붙어 있다. ‘써먹을 수 있을지는 진짜 모르겠다.’ “동료였잖아요.” “적입니다. 그리고 기영 씨에게 해를 끼치려고 한 이들이기도 했고요. 1회 차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에요.” “사소한 오해로 시작된 일이었어요. 이들에게 죄는 없습니다.” “…….” 슬쩍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비친 김현성의 눈에는 살의가 담겨 있었다. 아마 내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당장에라도 놈들의 숨을 끊어놓지 않았을까.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이놈들을 죽이려고 생각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어디까지나 녀석이 움직일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세요. 함께 가는 겁니다.” “가지 않겠습니다.”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일단은 땡깡을 부려보는 게 맞다. 지금 같은 기분으로 루시퍼의 곁으로 가는 건 싫었으니까. “강제로라도 데려가겠습니다.” ‘네가 시바, 강제로 뭘 어쩔 건데.’ 주도권을 빼앗기면 안 된다. 쫄아도 안 되고 오히려 당당한 반응을 보여줘야 한다. 어둠에 자신을 팔아먹은 둠현성이라고 한들, 김현성은 김현성. 친구 한 번 못 사귀어본 놈이 영혼의 베프라고 믿고 있는 나를 쳐 낼 리 없다. 인간관계다운 인간관계를 가져보지 못한 녀석이 유일한 끈인 내게 손댈 리 없지 않은가. 애초에 타락한 이유가 이쪽에 있었다면 이 관계의 갑은 나다. ‘네가 어쩔 거야, 시바. 김현성, 네가 어쩔 거냐고.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고 뭐 어쩌려고. 너, 그거 시바 연기하는 거 다 알아.’ “강제로….” ‘때릴 거야? 시바, 그럼 때려봐. 아주 기절시키세요. 기절시켜서 아주 반쯤 패 죽여서 데려가 봐, 시바. 누가 손해인가. 때려! 아주 죽이라고! 대신 이거 하나만 알아둬, 시바. 나한테 손대면 거기서 우리 절교야, 절교. 거기서 우리 관계 리셋이라고.’ “조치를….” ‘기절시켜. 쉽잖아, 시바. 때리라고! 오늘 깽값 좀 받자. 빨리 때리라니까.’ “제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강압적으로… 두 번은 경고하지 않겠습니다.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진지합니다.” ‘어? 시바, 너 지금 손 올렸어? 진짜로 손 올린 거야? 진짜로? 나 진짜 때리게? 때려?’ “아무리 기영 씨라고는 해도….” ‘그래, 시바. 여태껏 밥 해주고 돈 벌어주고 다해줬더니 돌아오는 게 이거라, 이거지? 지금 타락해서 뭐 눈에 보이는 거 아무것도 없다, 이거지? 그래, 시바. 때려! 아주 죽여봐! 어디 한 군데 부러뜨려 봐! 둠기영 때도 그렇게 쥐어 패더니만 왜 지금은 못 패?!’ “제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세요.” ‘시험 안 하니까 아주 반 죽여서 데려가시라고요. 지금 손에 마력 넣은 거 아니지? 그렇지?’ “정말로….” ‘그래, 정말로 때리라니까. 반 죽여주세요, 아주. 네?’ “차라리 죽여.” ‘빛은 절대로 어둠에 굴복하지 않으니까.’ 시바 멋있었어. “죽일 리가….” ‘그렇지?’ “죽여요.” ‘나 순교할 거야, 시바. 죽이라고! 순교시켜 달라고.’ 김현성이 손을 커다랗게 휘두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혹시나 이 새끼가 진짜로 때릴까 싶어 몸을 움츠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녀석이 두드린 것은 애꿎은 벽.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벽 한쪽이 무너져 내린다. “죽일 리가… 없잖아요.” 그럼 그렇지. “죽일 리가 없잖습니까.” 충분히 되돌릴 수 있어. 그런 생각이 절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 647 회귀자 사용설명서 647화 둠현성(3) 그 말 그대로였다. 흑화한 척하지만, 김현성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혼란스러워하는 눈에 눈물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놈은 지금 답답해하고 있고, 무서워하고 있다. 심지어 본인의 모습을 혐오하고 있기까지 하지 않은가. 이런 분위기로 흘러가면 안 된다는 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다른 조치를 못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맞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아 준 이후에 함께 지옥으로 손을 잡고 룰루랄라 하고 싶을 터. 하지만 김현성이 내 몸에 손을 댄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새끼가… 어디서 센 척이야?’ 녀석이 내게 의지한다는 것은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이 정도였을 은 누가 알았을까. 그렇기에 되돌릴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도 둠현성은 아까웠지만…. ‘아, 시바. 진짜 너무 아까운데.’ 사춘기에 접어든 김현성을 빠르게 끌고 와야만 했다. 얘, 정신 건강도 정신 건강이고 전투에서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곤란했으니까. “죽이지 못할 거라면 제게서 떨어지세요.” ‘이 더러운 악마야! 이렇게 소리치면 너무 상처받겠지. 조금 돌려서 까야 하나? 그래도 너무 상처받지는 마, 현성아. 형도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아무 데서나 흑화하래.’ “…….” “실망… 실망했습니다.” 일단은 이 정도로 괜찮지 않을까. “실망했어요.” 이 정도라도 충격받을 게 분명하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이 간다. 슬쩍 녀석을 바라보자 확실히 눈이 흔들리는 게 시야에 비쳤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기도 했고, 정신 공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 곧바로 고개를 돌리며 3연벙을 시도해 보는 게 확실할 것 같았다. “정말로… 현성 씨한테 실망했어요.” ‘그 힘이 뭔지 알아? 그거 네 힘도 아니잖아. 아무리 절박해도 그렇지 어떻게 악마랑 계약해? 네가 악마랑 계약하면 내 입장이 뭐가 돼? 그리고 시바, 루시퍼? 루시이퍼어?’ “……위해서였습니다.” “비겁한 변명이에요.” “변명이 아닙니다. 이 방법밖에는 없어요.” “분명히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쉽게 찾아지는 게 아니에요. 기영 씨는 겪어보지 않아서 몰라요. 아니, 만약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일이 잘 풀린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분명히 기영 씨는….” ‘기억을 잃을 거라고? 아니면 후유증을 앓게 되거나 망가질 거라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그 단어’를 고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은 당연했다. 사실 김현성에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1회 차를 직접 겪어본 김현성만이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지금까지 착실히 준비하고는 있었지만, 카스가노 유노와 함께 봤던 미래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가능성도 크지 않은가. 다시 한번 대륙 멸망 축제가 벌어지거나 김현성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들이 깡그리 죽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물론 무의식 세계에서 일어났던 뜨거운 대화를 통해, 책임지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 것 같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완전히 주박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짐을 함께 들고 있는 포지션이 되어버렸을 뿐이었으니까. 그것만 해도 녀석에게는 충분히 환영할 만한 상황이겠지만 덕분에 김현성은 새로운 난제를 하나 더 떠안게 됐다. ‘만약.’ “…….” ‘만약 대륙의 승리로 모든 일이 끝난다면… 이기영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의문.’ 수많은 전투와 수많은 죽음, 수많은 고통을 이겨내 결국에 승리를 쟁취한다고 해도, 자신의 친우는 고통받을 것이라는 확신 아닌 확신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쇠약해지는 것은 물론 커다란 상처를 떠안게 될 것이다. 혹시 모를 동료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워하며 자기 자신을 자책할 것이다. 점점 어둠 속으로 들어가 자괴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가슴 아파하고 종국에는 망가져 버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김현성은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이 아니었던가. 그 누구보다 녀석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닌, 온갖 가시밭길로 만들어진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연약한 이기영은 본인처럼 강하지도 않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신체는 이미 죽어가고 있고, 정신도 이미 죽어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기억을 잃어가는 상황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예전부터 한계를 느끼고 있었고, 더 이상 짐을 공유하는 게 이로운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 버렸다. 애써 부정하고 있던 걸 라파엘을 통해 깨달아 버린 것이다. 이기든 지든 간에 이 싸움을 계속하는 건 자신한테 유리하지 않다고. 그렇게 판단해 버렸다. 저주받은 빛의 주박에 묶인 이 남자는 그 긴 싸움을 견뎌낼 수 없고, 만약에 견뎌낸다고 해도 헌신짝처럼 버려질 거라는 걸 김현성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새끼, 참 겁 많네. 형 상처 안 받아, 시바. 기억도 안 잃는다고. 몸은 조금 쇠약해질 수 있겠지. 근데 그것뿐이야. 형 수명 6,000년이라고. 안 뒈져. 절대로 안 죽어.’ 그렇게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에 와서 ‘아… 그거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은근히 잘 먹히고… 아프다고 하면 사람들이 챙겨주고 응원해주고 그렇더라고 그래서 뻥카 친 거야. 그래도 이해해 줄 수 있지? 우리 여전히 친구지?’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만약 말하더라도 녀석이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일단은 말은 꺼내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괜찮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저는 괜찮습니다. 제 걱정을 하실 필요 없어요.” “…….” “기억을 잃는 것 역시 생각하시는 것처럼 큰일이 아니에요. 그냥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현성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위험한 상황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너, 왜 그래. 눈 왜 그래. 한 대 치겠다, 야.’ “정말로….” “거짓말하지 말라고! 매일 그런 식이었어. 매번 자기는 괜찮다고, 멀쩡하다고. 믿을 것 같아?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당신이 희생할 필요 없어.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을 희생할 필요 없다고!” ‘야, 무서워. 시바, 신경질 내지 마.’ “그렇게 숨기지 마! 제길,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둠현성, 시바. 다혈질, 시바.’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이럴 때는 정공법으로 움직이는 것이 옳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 “정말로 괜찮아요. 저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 눈을 똑바로 뜨고 말해야 한다. 나는 견뎌낼 수 있다고, 이겨낼 수 있다고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옳은 선택이지 않겠는가. 정의를 향하고 있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느꼈는지 녀석 역시 입술을 꽉 깨물기 시작했다. 끝이 보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조그만 변수가 생긴 것은 바로 그때.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0/1)] [이기영 신도! 해, 해결했어! 해결했다고!] ‘그래, 시바, 해결해서 참 좋겠네. 이미 일은 다 끝났는데. 여기 망한 건 안 보이지? 시바.’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0/1)] [미, 미안해.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그, 그게, 그… 그 루시퍼가 너무 복잡하게 결계를 쳐둬서 윗분들도 무척 고생했단 말이야. 그, 그리고 지금 상황에 대해서 무척 유감을 표현하고 계시기도 하고. (0/1)] ‘김현성 되돌릴 수 있어?’ [글… 쎄. 일단은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아. 알아봐야 할 것도 많고.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이기영 신도. (0/1)] ‘…….’ [위쪽에서 이기영 신도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내리기로 결정햇어. 최, 최대한 빨리하라고 해서. 설명은 나중에 할게. (0/1)] ‘뭐야, 시바. 지금 타이밍 별로 안 좋은데. 아니, 시바, 애초에….’ 라고 말을 잇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에선가 빛이 떨어져 내린다. 콰아아아아아아!! 엄청난 소리와 함께 황금색 광휘가 온몸을 뒤덮는다. ‘와, 이 새끼들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뭐, 시바? 지원을 못 해?’ 어째서 갑작스럽게 거대한 빛이 쏟아져 내렸는지, 그동안의 요청에 대답 한 번 없던 지원이 어째서 갑작스럽게 승인이 떨어졌는지 대해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와, 진짜 이 새끼들도….’ 눈 앞에서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김현성이 그 이유였다. 루시퍼가 둠현성을 채가자 급해져 부랴부랴 이쪽에 비슷한 힘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굳이 보지 않아도 위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에 보인다. 김현성은 이미 완전히 등을 돌린 것 같고… 심지어 루시퍼한테 커다란 힘까지 받았으니 위쪽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었겠는가. 이대로 가면 이기영과 김현성 모두 루시퍼행 급행열차를 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놈들을 휘감았을 터. 당연하지만 위쪽의 신들이 가장 상상하기 싫은 상황이라고 할 만했다. 이미 루시퍼에게 커다란 힘을 받고 방문을 걸어 잠근 김현성 쪽에 무언가 액션을 취할 수 있을 리 만무. 그래서…. ‘부랴부랴 포섭하시겠다.’ 지지부진하게 움직이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보였던 위쪽의 과감한 결단은 당황스러울 정도, 특히나 현재 상황을 살펴보자면 더욱더 그랬다. “제길! 제길!!” 창백해진 김현성의 얼굴이 자꾸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에게는 나쁘지 않다. ‘이야, 공짜다! 공짜 레벨업이다!’ 혹시나 루시퍼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는지 떠올리며 훈훈하게 원 따봉을 날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김현성에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성스러운 현상이 반갑게 보일 리 없다. ‘형 레벨업한다! 나도 신화 등급 코인 탄다!’ 아마 녀석의 눈에는 안 그래도 죽어가고 있는 이기영에게 저주받을 주박을, 무거운 운명을 씌우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최소한 지금 얼굴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제길! 하지 마! 하지 마! 이 개새끼들아! 하지 마! 내버려 둬. 내버려 두라고!” ‘아니야, 해야 돼. 더 해줘! 빛 줘! 빛 줘엇!’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더 이상 짐을 들게 하지 마!! 더 이상!! 기영 씨! 거기서 나와요! 거기서 나오라고요!” ‘아니야, 이게 내 운명인가 봐. 아무래도 빛과 함께하는 게 내 운명인가 봐. 그리고 어떻게 나가, 빛이 나를 가두고 있는데. 못 나가.’ 최대한 검을 휘두르며 손을 뻗고 있었지만, 김현성의 신성한 빛에 가로막혀 전진하지 못했다. 팔에서 치이이익 소리가 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빛 안으로 기어들어 오는 꼴은 조금 감동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 마…. 흐으윽, 하지 말라고. 더 이상 뭘 어쩌려고…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고….” “괜찮습니다, 현성 씨. 제가 선택한 길이에요.”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대륙을 위해 싸우는 희생의 정석, 성자 그 자체의 모습. 종국에는 망가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운명을 받아들이는 광휘의 빛기영. 솔직히 내가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아, 김현성 이 새끼 이거 어떻게 해.’ 이 멋있는 설정을 즐길 수도 없을 정도로 절박한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 648 회귀자 사용설명서 648화 둠현성(4) 온몸이 빛에 휘감긴다. 빛의 연금술사로 전직했을 때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느낌이 든다. 온몸이 성스러운 기운으로 꽉 차는 게 느껴졌다. 반쪽짜리가 아닌 진짜 신성 말이다. 대륙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성자의 얼굴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 와중에도 김현성은 커다란 빛이 나를 감싸지 못하게 막으려고 발악하고 있다. 지금쯤이면 쓸데없는 저항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았을까. 베니고어가 아니라 윗분들이 직접 초이스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강해지기는 했지만 이미 정해진 운명을 거스를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보유한 것은 아니다. 결국에는 발악에 차 검을 휘두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타락의 상징처럼 자리한 10장의 날개로는 현재 상황을 막을 수가 없다. 검으로 베어보려고 하지만 계속해서 떨어져 내리는 빛의 물줄기를 어찌 가를 수 있겠는가. “아아아….” 물론 그 와중에도 내 몸에는 천천히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도 날개 달리는 거야?’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빛의 날개가 뻗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10장은 되겠지? 나도 10장 할래.’ 아프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순백색의 날개는 오히려 신성함을 충만하게 해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김현성의 손이 불쑥 빛을 뚫고 나오는 게 눈에 보인다. ‘뭐야, 시바. 어떻게 닿았어?’ “제길, 제기랄!” 어떻게든 나를 끌어내리려는 모습이 굉장히 눈에 띄었지만, 나갈 때 나가더라도 진화는 한 후에 나가고 싶다. 다행히 광휘의 폭풍이 녀석을 날려버렸지만, 여전히 어떻게든 손을 뻗으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닿아, 닿아!” 심지어 칠흑색의 마력이 쏘아 보내는 모습은 가관이다. ‘아니, 진화 좀 하자고.’ 정말로 필사적인 얼굴이었다. ‘얘, 진짜.’ 마치 박덕구가 나를 지키려는 것 같아 살포시 감동하기는 했지만 반가운 상황은 아니다. 불가능이라는 걸 깨닫고 바라보고 있으면 좋으련만 계속해서 쏟아지는 빛줄기를 막으려는 모습은 무척 당황스럽다. ‘이게 막아져? 이게 막아진다고?’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을 마력으로 틀어막으려는 모습은 어찌 보면 장관이었다. 빛의 안으로 들어가 나를 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칠흑의 파도가 광휘의 폭풍을 덮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폭음이 들려올 정도, 하지만 안은 고요하다. ‘현성아아… 시바, 그러면 안 돼. 남 레벨업하는 거 막 방해하고 그러면 안 돼.’ 아마 위쪽에서도 굉장히 당황하고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빛을 전해줘야 하는 시점, 김현성은 늦었으니 이기영이라도 포섭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방해꾼이 떨어지는 빛을 틀어막으려고 하니 얼마나…. ‘황당하겠어?’ 실패의 아이콘인 베니고어가 이번에도 실패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이기영 신도, 이기영 신도!! (0/1)]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통한의 외침이 들려온다. “으아아아아아!” 김현성은 여전히 내게 내려오는 무거운 짐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도대체 일이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시바. ‘아니, 현성아. 이거 받는다고 책임져야 하고, 뭐 그런 거 아니야. 계약서에 도장 찍은 것도 아니고, 그냥 먹튀 해도 상관없다고. 얘네가 지들 불안해서 뿌린 건데, 왜 그렇게 과민 반응해. 심정은 이해하는데….’ [이기영 신도! 쟤 좀 막아봐. 이기영 신도오! (0/1)] ‘나도 막고 싶어, 시바. 일단 출력이나 높여봐, 시바.’ [아, 알겠어. (0/1)] 이쪽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는 했는지, 더욱더 강한 빛이 뿜어졌지만, 김현성 역시 더 커다란 소리를 내지르며 빛에 대항하려고 했다. 솔직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이 힘을 받아들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김현성의 눈에 거대한 분노가 들어차는 것이 보인다. 자신에게 원하지 않은 책임을 부여한 것처럼, 지금 나에게도 그런 책임을 덧씌우는 것처럼 보였던 걸까. 어쩌면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이 개자식들… 이 개새끼들아! 멈춰! 흐윽… 시발, 멈추라고!”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 들려오고 있지 않은가. “하지 마! 이 더러운 새끼들아! 그만… 제발 그만….” ‘우리 현성이 욕 좀 하는구나.’ “멈춰… 멈춰어!!” 녀석의 몸은 이미 넝마가 된 지 오래. [이기영 신도… 이거 어떻게 해. 큰일 나는 거 아니지? (0/1)] 베니고어가 걱정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만큼 지금 김현성이 보여주는 모습은 절박해 보인다. 온갖 저주 섞인 말을 내뱉고 있었고, 이제는 그럴 여유마저 없어졌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독기가 눈빛에 감돈다. [멈추는 게 좋을까? 멈추는 게… 멈추는 게 좋을까? (0/1)] 나 역시 멈추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현성이 진심으로 베니고어 측을 적대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던 탓이다. 대륙을 버리고 도망치는 선택지가, 대륙을 파괴하는 둠현성 완전체로 진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단순히 대륙을 손절하려는 김현성이라면 설득의 여지가 있지만, 후자는 설득의 여지조차 사라진다. 바깥 신보다 둠현성이 먼저 대륙 뽀개기를 끝낸 이후 악마들과 함께 베니고어의 보금자리를 향해 돌진할지도 모른다. “제길, 제길!!! 이 개새끼들! 멈춰!” 일단은 뭐라도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흥분한 김현성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다. 이건 나쁜 일이 아니라고 좋은 일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일단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보자. ‘후우….’ 커다랗게 한숨을 쉰 후 곧바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나도 이게 통할지 모르겠다. 평소라면 말을 들어먹기라도 하겠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먹힐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괜찮습니다.” “…….” “…….” ‘뭐야, 안 들려?’ “괜찮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현성아, 내 말 씹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 “별것 아닙니다. 현성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거운 짐을 드는 것도 아니고, 힘든 일을 겪는 것도 아닐 겁니다. 오히려 즐거운 일입니다. 저에게는 행복한 일이에요.” ‘제발… 제발 들어먹어라.’ “남은 시간 동안 제가 할 수 있다는 일이 있다는 게 즐겁습니다.” “…….”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게 즐거워요. 당연히 힘들 거라는 건 압니다. 그리고 현성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고요. 어째서 제 걱정을 하시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 ‘아, 이 새끼 반응 없네.’ 하지만 듣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아직도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냥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조금 더 민감한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이를테면 김현성이 흑화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라든지 말이다. 갑자기 머리가 깨끗해지고 나았다는 설정보다는 그게 더 설득력 있을 테니까. 녀석이 민감해하는 주제인 만큼 틀림없이 반응할 것이다. 일단은 서로 말이 통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이였다. “그… 일을 숨긴 건 죄송합니다.” “…….” “하지만 정말로 걱정시켜 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별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제가 만약에 기억을 잃는다고 해도….” “…….” “정말로 모든 걸 잊어버린다고 해도… 모두 함께 있어 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 “제게는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닐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아마 다르지 않을 겁니다. 평소와 같을 거예요. 모든 게 끝난 이후의 린델의 일상은 분명히 예전과 변함없을 겁니다.” “…….” “혜진 씨와 함께 체스를 두기도 하고, 함께 와인을 마시기도 할 겁니다. 엘레나 님과 함께 세계수를 보러 다니고, 엘프 분들과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네요. 예리와는 간단한 카드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안기모 씨와는 함께 여신의 거울을 들여다볼 수도 있겠군요.” “…….” “정연 씨, 그리고 소라 씨와 함께 연금술을 처음부터 공부할 수 있을 겁니다. 네, 전부 다 까먹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는 합니다만, 몸이 기억하고 있는 만큼 금방 배울 수 있겠죠. 틀림없이… 말입니다. 아마 1년이나 2년이 지난 이후에는… 아니, 어쩌면 3년 정도가 지난 이후에는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올 수도 있겠네요. 파란 길드의 재정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인프라는 그대로 있을 테니… 하하.” “…….” “희영 씨와는 함께 봉사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될 겁니다. 제가 아직 다녀오지 못한 장소들이 아직 많이 있으니… 물론 디아루기아 님께서 루리아나 막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라고 성화를 부리기도 하겠지만 말입니다.” “…….” “아영 씨, 창렬 씨와는 제가 교습을 나갔을 때의 이야기를 나누고… 재미있었던 일이 많았던 만큼, 저한테도 새로운 경험이었던 만큼, 많이 웃게 될 겁니다. 네. 정말로 많이 웃게 되겠죠. 내가 그런 적도 있었어? 하면서 말이에요. 어쩌면 예전에 찍어놨던 영상들을 전부 보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 “가끔 저를 찾아오는 희라 누나와의 시간도 굉장히 즐거울 겁니다. 일이 끝난 직후에는 바빠 얼굴을 자주 볼 수 없겠지만, 전쟁이 전부 다 끝난 이후에는 매일같이 끌려다니게 될 겁니다. 또, 또 처음부터는 무리겠지만… 오스칼 님께 정치에 대해 다시 배우고… 바젤 교황님과는 다시 한번 신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게 되겠고, 김미영 팀장님에게는 전반적인 길드 운영에 대해서, 지혜 씨에게도 여러 가지로 다시 배울 게 많을 겁니다. 이를테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라든지… 하하.” “하지… 마…세요.” “하얀이와 계속 함께 있게 된다면, 어쩌면 결혼할 수도 있겠네요. 왠지 모르게 상상이 잘 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덕구는 박수를 쳐주겠죠. 자기가 이럴 줄 알았다고 전부 자신 때문이라고 즐거워하며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게 뻔합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흐윽,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제기랄,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현성 씨와도 비슷할 겁니다. 가끔 함께 나가서 식사도 하고, 그리폰을 타러 나가기도 하고, 별것 아닌 일로 웃고, 여느 때처럼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될 거예요.” “제발… 제발 그런 말 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저는 이 일상을 지키고 싶습니다. 제가 결코 이타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어디까지나 제 만족을 위해서 이 일상을 지키고 싶어요. 네, 당연히 힘들 겁니다. 아프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베니고어 님을 원망할 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의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저를 말리지 않았냐고 투정부리는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 “하지만, 하지만 종국에는 웃게 될 겁니다. 다 함께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서 예전에 있었던 추억거리들을 곱씹으며 예전에 아팠던 일들을 웃어넘길 거예요. 지금까지도 그래왔으니까. 지금까지도 이겨내 왔으니까.” “…….” “변하는 건 없어요, 절대로.” “아니요, 많은 게… 많은 게 변할 겁니다. 결코, 예전 같지 않을 거예요. 모두 괴로워할 겁니다. 기영 씨가 자신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괴로워할 거예요. 저도… 저도 괴로울 겁니다. 무서워요. 무섭다고… 흐윽, 무섭다고요… 제기랄.” “다른 선택지도 괴로울 겁니다. 정말로 대륙을 버린다고 해도 괴로울 거예요, 현성 씨. 매일같이 죄책감에 시달리고 멸망한 대륙을 보고 두고두고 오늘의 결정을 후회할 겁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한 걸 죽을 때까지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게 될 겁니다.” ‘솔직히 나는 몰라도, 너는 그럴 거야. 너도 알잖아, 너 아직 완전히 못 버렸잖아.’ “만약 저를 강제로 데려가신다고 해도… 그렇게 구걸하듯 살아남는다면 오히려 현성 씨를 원망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우리 솔직해지자. 막말로 네 생각대로 된다고 해도 내가 널 평생 원망할 텐데, 너 그거 견딜 자신 있어? 우리 절교하는 거라고, 너 나랑 진짜 손절할 수 있어?’ “현성 씨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 “…….” “물론, 불안함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무섭고 싸우는 게 무서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이 상황도 무섭고, 제게 일어나는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나는 변화들이 두렵습니다. 어떻게 무섭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저 역시 사람인데.” “그렇다면….” “하지만 저는 일상을 잃는 게 더 무섭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우리가 그리고 있는 미래를 잃는 게… 더 무섭습니다. 기억을 잃는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워요. 아마… 모든 이들이 그런 마음가짐으로 이번 일에 임하고 있을 겁니다.” “…….” “일상을, 미래를 지키려 제 자리에 서 있을 겁니다.” “분명히 견디지 못하실 겁니다. 장담컨대 후회하실 거예요. 이겨내지 못할 겁니다.” “아니요, 견딜 수 있을 겁니다.” “괴로워하실 게 뻔해요.” “절대로 괴롭지 않을 겁니다.”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죠.” “전부 잊게 되실 겁니다.” “함께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 역시 괜찮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어째서 그렇게까지 생각하실 수… 생각할 수 있는 겁니까. 어떻게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거예요.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는 거냐고요. 제길….” ‘뭐가 어떻게야. 당연히 네가 시바, 전술 김현성으로 파바바박 해줄 걸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이럴 때는 추억의 대사를 날려주는 것이 좋다. 물론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설정이었지만 말이다. “그야 물론.” “…….” “짐을 함께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 “…….” ‘솔직히 이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녀석이 뭔가 깨닫는 게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내가 함께 들어야 돼’라든지, ‘내가 이러면 안 돼’와 같은 깨달음 말이다. 원래 인생이란 게 상부상조가 아니었던가. 김현성은 틀림없이 내가 자신의 짐을 들어줬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먹힐 거야.’ 김현성이라면 틀림없이 내게 주어진 짐을 함께 들어줄 것이다. ‘제발… 제발….’ 나 몰라라 내버려 둘 리가 없다. ‘그렇지? 내 생각이 맞지? 우리 절교 안 해도 되는 거지?’ 타이밍 좋은지 모르겠지만, 하늘에서 내려오던 찬란한 빛이 멈춘다.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는 부분. 김현성이 뿜어낸 칠흑색의 마력은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 예상할 수 없던 탓이다. 천천히 흩어진 빛 사이로 비친 것은 나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김현성.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을 거야.’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4쌍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천천히 손을 내뻗었고…. “흐윽, 흐으윽….” 김현성은 허겁지겁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먹혔어. 시바, 먹혔다고.’ 마무리만 잘하자. 마무리만 하면 되는 거야, 기영아. # 649 회귀자 사용설명서 649화 둠현성(5) 물불 안 가리고 달려오는 모습이 그다지 무섭게 보이지는 않는다. 센 척할 여유가 사라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보쌈해서 루시퍼 동네로 데려가는 것은 포기한 것인지 궁금했지만, 지금 녀석에게 그런 생각을 할 여유는 없어 보였다. 혹시나 몸에 이상은 없는지, 다른 부작용을 떠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 최우선이 아닐까. 나 역시 내 몸에 이상이 있나 싶어 한차례 점검을 마쳤지만, 딱히 다른 부작용이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이 걸린 거겠지.’ 쏟아져 내리던 광휘는 아마 내 몸이 신성을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이었을 거다. 루시퍼가 김현성에게 힘을 내린 것처럼 내게 힘을 내렸다면 몸이 뻥 하고 터져 나가지 않았을까. 아마 베니고어를 비롯한 윗분들 역시 최대한 다른 부작용이 없게끔 조치해 줬음이 분명하다. 만약 부작용을 얻을 시 둠현성이 8톤 트럭을 끌고 청와대로 돌진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지 않았을까. 아니, 중간에 이빨을 털지 않았다면 지옥에서 힘을 키운 전술 김현성이 위쪽으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조금 안타까운 것은 이런 조심스러운 과정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 둠현성도 날개 10장을 받았으니, 내게도 10장을 내리고 싶었겠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슬쩍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뛰어오는 김현성이 눈에 보였던 탓이다. “아, 아아….” ‘아이고, 우리 회귀자 좀 보세요….’ 그 난리를 쳤으니 당연히 몸은 상처투성이, 신성력에 의해 그을린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비쳤다. 뭐라고 말을 내뱉고 싶은 것 같았지만, 목이 메는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모습은 양심의 표면에 스크래치를 남길 정도였다. 언어 기능에 문제가 생겼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 으….” 김현성에게 현재의 내가 어떻게 비칠지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현재의 내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순백색의 날개를 넘어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는, 그 어떤 수식어도 어울리지 않는다. 깃털 한 장, 한 장이 찬란한 광휘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전체적으로 후광이 비치고 있었고, 강림한 베니고어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정도로 신성해 보이기도 했다. 이전에 빛 폭탄 물약을 먹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비치 어두운 장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더러운 것들을 정화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새.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내가 밟은 곳을 중심으로 빛이 짧게 퍼져 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신세계의 신! 빛, 빛, 빛, 그 자체.’ 내 모습이기는 하지만 오금이 저린다. 아마 김현성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모습을 보더라도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이 자는 결코 더럽힐 수 없는 순결한 빛을 지니고 있다고 말이다.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 것은 당연했다. ‘루시퍼 누나, 시바, 보고 있어?’ 아직까지 그녀가 노리는 게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모습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수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누나는 선을 넘은 거야, 알겠어?’ 만약 어둠 쪽으로 넘어가더라도 내가 그녀의 밑에서 일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애초에 설계 자체가 잘못됐다. 나와 김현성의 관계가 사소한 사건으로 인해 깨질 리 있겠는가. 대가리가 깨져도 김현성은 이기영을 선택할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실실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내는 것도 잠시, 일단은 살며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이제 아무 문제 없는 거 맞지? 그렇지?’ 물론 녀석이 완벽하게 되돌아온 것은 아니다. 여전히 땅에 끌리고 있는 칠흑의 날개가 눈에 거슬렸으니까. 하지만 대충은 예상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김현성이라고 한들, 몸 안에 눌러앉아 있는 초월자의 힘을 내보내는 게 쉬울 리가 없다. 힘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거겠지.’ 김현성은 이미 독을 삼켰다. 베니고어조차 해독할 수 없다고 말해오는 것을 보면,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거다. 괜스레 얼굴이 일그러지려고 했지만, 루시퍼가 계획한 것은 무위로 돌아갔다. 루시퍼가 지금 이 장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당장 빛에 취한 김현성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죄… 송, 죄송… 합니다.” ‘일단 사과부터. 좋아, 좋은 흐름이야. 갑자기 막 화내고 그러지 않을 거지? 그렇지?’ 최근 들어 김현성이 우는 장면을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반쯤 엎어져 있는 것 같아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화들짝 놀라며 한 걸음 떨어지려고 했다. 스스로 몸을 일으키지만,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 걸 보니 차마 옆으로는 다가올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본인의 기준으로도 흉측한 날개를 달고 있지 않은가. 신성하다 못해 눈이 멀어질 것만 같은 광휘와 대조된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겠지. 뭐, 시간이 지나면 차차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루시퍼의 힘은 점점 사라질 테니까. “죄송… 합니다.” ‘그래, 죄송해야지. 진짜 망하는 줄 알았자너.’ “죄송… 죄송합니다.” ‘너, 나 때리려고 그랬잖아. 시바, 그건 진짜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모두, 모두 죄송합니다.” ‘다른 건 다 괜찮아. 형이 이해해 줄 수 있어.’ “흐으으윽, 죄송합니다.” ‘아, 이거 시바,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단순히 루시퍼의 힘을 받아들인 걸 사과하는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본인과 연관된 것 자체를 미안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본래대로였다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었던 이기영이 자신과 연관되어 복잡한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럴듯하죠.’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게 했다고, 회귀자였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게 아니었다고, 짐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눈물 젖은 사과. 모든 걸 다 자기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나를 원망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선택이겠지만 너무 자책감에 빠지는 것은 정신건강에 이롭지 않다. 아직까지 조금 불안정해 보이는 만큼 슬슬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지 않을까. 드디어 놈이 이야기할 수 있는 상태에 온 것 같았으니까. ‘마침 시간도 시간이니까.’ 거대한 빛이 떨어진 곳이 보인다. 던전을 뚫고 들어온 빛으로 인해 새로운 출구가 생겼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부분, 살짝 날개를 펼치자 천천히 몸이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신기한 감각, 여왕의 무덤의 꼭대기에 살짝 걸터앉자 이윽고 김현성이 나를 따라 올라왔다. 광활한 대륙이 한눈에 보인다. 어둑어둑하기는 했지만, 꺼지지 않는 불빛들 때문에 반짝거리는 야경이 시야에 비쳤다. “좋은 광경이네요.” “…….” “정말로 좋은 풍경입니다.” ‘감정 잡자, 기영아. 방심하지 마. 모든 일에는 마무리가 중요하잖아. 마무리가 반이야. 정신 차리고 집중해야 돼.’ 이 광경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하지만 불쌍하게 보이는 건 최대한 지양하는 것이 옳다. 시원섭섭한 얼굴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내게 주어진 운명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옳다. ‘슬프지 않아.’ 이기영을 슬프지 않다. 지금 눈에 담은 광경은 언젠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겠지만, 언제든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풍경이니까. 외로워도 슬퍼도 이기영은 무너지지 않는다. 소중한 동료들이 함께 있어 줄 테니까. 이기영은 비극의 히로인이다. 툭하면 부서질 것 같은 몸으로 모든 운명을 그 여린 몸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절대로 대륙을 저버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저도 모르게 눈물에 젖은 눈으로 다시금 야경을 눈에 담았다. 흘러내리는 한 방울의 눈물에는 운명에 대한 괴로움이 아닌, 이 아름다운 광경에 대한 감탄이 들어서 있다. 대륙에 살아가는 이들의 생동감과 자연이 빗어낸 위대한 풍경을 향한 순수한 영혼의 울림이다. ‘와, 시바. 내 눈물 빛난다.’ 신화 등급으로 진화한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떨어진 눈물은 계속해서 반짝였다. 놀라움을 표현한 것도 잠시, 김현성이 조심스럽게 이쪽을 바라봤다. “정말로….” “네.” “정말로 괜찮….” “네.” “정말로 괜찮을까요?” “네, 괜찮을 겁니다.” “…….” “분명히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혹시나 일 꼬이면 네가 애들 데리고 튀어줄 거잖아. 그럼 아무 문제 없는 거지, 뭐. “정말로… 견딜 수 있으시겠습니까.” “네, 혼자라면 불가능하겠지만, 모두가 함께해 준다면.”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까.” “했던 말 또 하게 만들지 마세요.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기억을 잃으면 버리실 거….” “아니요, 절대….” “그럼 홀대하실….” “아니요.” “그럼 아무 문제 없습니다. 물론 아쉽지 않은 건 아니지만….” “…….” “물론 지금까지 쌓아왔던 추억들을 잊어버린다는 건… 조금 가슴 아프기는 합니다.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 “하지만 이전의 시간보다는 함께할 시간이 더 많지 않겠습니까. 하얀이도, 덕구도 그리고 다른 길드원들 모두 말이에요. 어쩌면 이전보다 더 즐거운 일이 많이 생길지도 모르죠. 웃을 일이 더 많을 겁니다. 지금 보이는 풍경처럼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 안 될 거야.’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 풍경을 잊을 날이 올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언제든지 같은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을 거예요. 이 풍경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으니 말입니다.” ‘아직도 이해 안 되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어요.” ‘기다려, 현성아. 곧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니까.’ 슬슬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변함없는 하늘이 괜스레 원망스럽다.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 대기하는 게 괜스레 민망해질 때 즈음 드넓은 하늘에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준비하고 있던 마지막 이벤트는 당연히 이기영과 함께 감상하는 노을 쇼. 나를 바라보던 김현성이 고개를 돌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사실 나와 함께 감상하는 노을 쇼에 김현성이 얼마나 반응할까 싶기도 했지만, 예상한 것보다 더 반응이 좋은 것 같다. 실시간으로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확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는 없었겠지만 아마 이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멋진 풍경이네요.” 대외적으로 나는 노을에 대해 기억하고 있지 못하고, 사실 실제로 일어난 일도 아니었지만, 느끼고 있는 바는 같다. 이전에 있었던 일을 잊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를 새로운 추억이 메울 수 있다. 말로 이것저것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김현성은 충분히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깨가 부르르 떨리고 있는 모습.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솔직히 여기서부터는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부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 이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 “만약에.” “…….” “만약에 제가 지금 보는 광경을 잊는다면….” “네.” “다시 함께 보러 와주세요.” “흐, 으윽… 네.” “그거면 됩니다. 이걸 다시 볼 수 있다는 거.” “…….” “그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해요.” “흐으윽… 흐윽… 네… 네.” 눈물샘이 터진 김현성의 얼굴을 보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잘 돌렸어.’ 잘 받아넘겼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현성이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추억을 지키고 싶다.’ 라거나. ‘이 장소를 지키고 싶다.’ 와 같은 생각 말이다. 김현성이 저 먼 곳을 바라봤다. 한 단락이 종결됐고, 회귀자는 다시 일어서야 하는, 대륙을 위해 싸워야만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가슴속에 새기게 됐다. 그리고. 그 날 오후. 북부의 저편에서. 거대한 빛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인류가 보지 못했던, 이질적인 빛이었다. # 650 회귀자 사용설명서 650화 이질적인 빛(1) [김성경 기자.] [네, 린델 방송의 김성경 기자입니다. 북부의 끝에서 이질적인 빛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지 7시간 47분가량이 지난 시점, 교황청과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는 여전히 공식적인 발표를 하고 있지 않아 많은 이의 불안과 걱정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이나 교황청 대변인이 다방면으로 조사 중이라는 말을 전해왔지만 아직까지 교황청에서도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상태이며, 외부의 전문가들 역시 교황청의 조사단이 성과를 가져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 이기영 위원장님께서 외부와의 모든 연락을 차단했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있는데요.] [네, 현재 이기영 위원장님은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한 상태입니다. 건강상의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혹시나 외부의 빛이 위원장님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지에 대한….] 삑. [이질적인 빛이 터져 나온 지역 전체가 현재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교황청과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합동 조사단이 근처에 임시 캠프를 세워 빠른 조사에 임하고 있지만, 새로운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명예추기경님께서는 현재 안정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삑. [새로운 소식입니다. 신성 교국에서 현 상황에 대해 간단한 브리핑을….] 삑.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에게 대비하기 위해 지어진 전진 기지를 향해 합동훈련소의 병력이 속속히 이동하는 가운데….] 삑. [제목: 방금 뉴스 봄? 이거 어떻게 된 거임?] [작성자: 엮은이김경식] [분위기가 전시상태일 것 같은데… 진짜로 악마들 들어오는 거 맞음?] [린델마을주민: 나도 자세한 건 모름. 근데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는 건 확실한 듯. 린델에 있는 길드들도 지금 무작정 북부로 이동 중, 사실 배치를 거의 다 끝냈다는 표현이 맞으려나. 전체적으로 쉬쉬하는 것 같기는 한데 발표만 나지 않았을 뿐이지. 아마 천연사러버 님이 대충 알지 않을까 싶은데. 보통 이런 일 터지면 파란 길드에서 가장 먼저 반응이 오니까. 사실 지금 이거 볼 시간이 있는 지나 모르겠다. 파란 길드도 지금 비상인 것처럼 보여서….] [천연사러버: 조금만 기다리면 아마 공식발표 날 거임.] [린델마을주민: 말 좀 해줘.] [천연사러버: 나도 뭘 알면 말해주고 싶은데. 지금은 언론에서 떠드는 것 외에는 들려오는 게 없음. 병력 이동하는 거야 혹시 모르는 상황 때문에 이동하는 거고,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게 맞지. 아무거나 대충 발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아미디미정: 이게 나라냐? 일 터진 지 7시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공식 발표가 안 나오는 게 실화? 평소에 이런 말 잘 안 하는 데 진짜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기영 위원장은 또 뭐 쓰러진 거? 뭐라고 발표는 해야지 어떻게 할지 노선을 정하지. 윗대가리들 대피할 준비하느라 공식발표 늦는다는 게 팩트. ㅇㅈ? ‘여러분 대륙은 안전합니다!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일상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발표 나오면 내 말이 맞는 거임. 우리 버리고 도망치는 엔딩 그리고 있을 듯.] [흙수저: 아이디미정이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은 그러실 분이 아님. 소외계층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하시는 거로 유명하신 분인데… 나도 여러 가지로 도움 많이 받았고….] [천연사러버: 저 새끼 아이디미정 아니에요. 흙수저 님 아미디미정이에요. 말투도 다르고 어그로도 하급 어그로. 곧 기무대한테 끌려가겠네. 각도기 잘 잡으셨어야죠.] [아이디미정: 예리하네.] [트레샤: 그… 그치만….] [린델마을주민: 아, 그만 좀 하셈, 진짜.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흙수저: 근데 왠지 두 분 잘 어울리심. 티격태격하시면서.] [린델마을주민: 그건 인정.] [천연사러버: 닥쳐.] [역천사홍보위원장: 두 분 행복하세요.] 삑. [제목: 좋아하는 사람을 실망시켰습니다. (댓글: 128)] [작성자: ㅍr랑색이 좋아] [제목: 대륙멸망실황. 이대로 위원장님 못 일어나시고 대륙 멸망 시나리오 가나요? (댓글: 123)] [작성자: 아미디미정] [제목: 만약에 전쟁 일어나도 손이랑 눈은 무사했으면 좋겠음. 그래야 천연사 볼 수 있쟈나… (댓글: 1221)] [작성자: 천연사는빨간불에서도멈추지않아.] ‘시바, 다행이다. 별일 없었구나, 시바.’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한숨 때리고 일어난 뒤의 풍경이 익숙한 방안이라는 것에 1차로 안심, 아직까지 세상이 개판 나지 않았다는 것에 2차로 안심할 수 있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이후, 난데없이 빛기둥이 떨어졌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망원경의 리바운드를 견디지 못하고 기절했을 때까지만 해도 일어난 뒤에 세상이 망해 있을 줄 알았다. 내 입장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혼자 거울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던 바로 그때. “일어나자마자 뭘 그렇게 웃어요? 웃을 상황도 아닌데.” 고개를 돌리자 재미있는 구경한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냥 뭐 이것저것. 내가 딱 빛기둥 떨어지는 것까지만 보고 기절했다니까. 혹시 눈 뜨고 일어나면 아포칼립스 세계관 되는 거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생각보다… 별일 없는 것 같아서. 기분 좋잖아, 누나.” “진짜 놀랐겠네요.” “뭐 다 망하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런 건 아닌 것 같네. 아니, 그건 그렇고. 누나, 우리 한날한시에 함께 매수하고 매도하자는….” “저도 웬만하면 지키는 데 진짜 어쩔 수 없었다고요. 안 그래도 그 말 할 줄 알았는데, 진짜 할 줄은 몰랐네요. 뭐 그렇게 마음속에 담아둬요? 일 잘 풀렸으면 됐지. 아니, 그리고 파란 길드마스터는 무슨 여기에 전세라도 냈데요?” “…….” “무슨.” “…….” “아무튼 간에 진짜… 아니, 됐다. 이걸 따져서 뭐 하겠어요. 그나저나 이번에는 일찍 일어났네요.” “그러게. 한번 누웠다 하면 기본 삼 일이었는데….” 뭐 좋은 거라도 처먹은 건 아닌지, 혹시나 모든 게 연기는 아니었는지 의심하는 듯한 눈빛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합리적 의심이라는 데 힘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조금은 놀라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망원경 사용으로 리바운드를 겪은 이후 이렇게 빨리 일어날 거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좋은 거 먹기는 먹었지.’ 온몸에 넘쳐 흐르는 게 신성인데 그깟 리바운드가 문제겠는가. 너무 건강해서 팔굽혀펴기를 100회 이상 할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으리라. ‘여기로 온 걸 보니까 현성이도 정신 차리기는 한 것 같았고.’ 혹시나 눈을 뜨면 루시퍼의 품이 아닐까 싶었지만, 다행히 내가 생각한 게 어느 정도 들어맞은 것처럼 보였다. 아직 영향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김현성은 이쪽을 보쌈할 생각이 없다. 잃었던 길을 다시 찾은 게 분명하겠지 뭐. 심지어 계속해서 이쪽의 곁을 지키고 있었단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대륙이 망하기 직전까지 오면 데리고 튀어준다는 거지. 여러 가지로 정리하자면 터진 일을 잘 수습했다는 것에는 그나마 좋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곧바로 악마 새끼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는 것 역시 좋은 점수를 주고 싶었고…. 사실 문제가 되는 것은 왜 갑작스레 북부에서 이질적인 빛이 쏟아져 내려왔냐는 것. “그런데… 이거 원인이 뭐예요?” ‘시바, 원인이야 뻔하지 뭐.’ 단순한 추측일 뿐이었지만 굉장히 신뢰할 수 있는 한 가지 가설이 머릿속을 맴돈다. ‘대륙의 균열.’ 물론 아직 확정 지을 사안은 아니다. 남 탓하기 좋아하는 내 성격상 한 번쯤은 해볼 만한 생각이었으나 위쪽 분들이 그렇게까지 멍청하지 않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지. 그렇지? 그건 아닐 거야.’ 생각하는 가설은 계속되는 간섭에 대륙의 보안 시스템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 안 그래도 가까스로 틀어막고 있었던 대륙의 균열이, 루시퍼와 윗분들로 인해 더욱더 벌어졌다는 가설이었다. 대충 세운 가설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럴듯하다. 애초 신들이 하계에 관여하는 것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가 균열이 아니었던가. 루시퍼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훌륭하신 위쪽 분들 역시 신성을 억지로 때려 넣다 보니 결국에는 틈이 벌어졌고, 그 사이를 바깥 놈이 찢고 들어오는 중이라는 킹리적 갓심.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멍청한 새끼들 진짜.’ 급하게 수도꼭지를 테이프로 감싸고 있는 형국이겠지만 줄줄 새어 나오는 물줄기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현재 쏟아지는 이질적인 빛무리는 새어 나오는 물줄기라고 판단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아마 김현성 역시 곧바로 외신이 도착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내 옆에 죽치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여유는 있는 거야.’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소식이었다. “조금 더 확실하게 확인해 본 이후에 이야기해 줄게. 나도 아직 확신할 수는 없는 단계라.” “그럼, 얼마나 남은 거예요?” “그것도 몰라. 한번 알아봐야지. 대충 한 달? 그 정도도 안 남았을 것 같기는 한데, 운이 좋으면 그 정도 남았겠지. 근데 현성이는 어디 갔어?” “대책 회의 하러 갔죠, 뭐. 아마 그게 아니었으면 계속 여기에 있었을 걸요.” “누나는 안 갔네?” “오빠가 없는 회의가 의미가 있나요. 어차피 탁상공론만 하다가 끝날 것 같고 시간만 버리는 일이라 참가할 생각도 안 했어요. 별로 영양가 없는 인간들만 모여 있기도 하고….” “조혜진은? 일어났고? 라파엘은?” “라파엘 파티는 지금 쥐죽은 듯이 누워서 회복 중이고 혜진 씨도….” “현성이랑 같이 갔겠네.” “아니요. 제 방이 있어요.” “아직도?” “현성 씨가 혼자 가겠다고 했거든요. 아,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둘이 뭐 싸웠었어요? 세상 참 그렇게 차가운 눈빛은 살다 살다 처음 봤다니까. 내가 웬만하면 이런 말 안 하는데 파란 길드마스터가 우리 혜진 씨 보는 표정이 무슨 인간쓰레기라도 보는 표정이었다니까요.” ‘언제부터 니네 혜진 씨야.’ “그 자리에서 칼부림 나는 줄 알았잖아요. 제법 예쁘게 꾸며놨었는데… 뭐라고 했더라? 혜진 씨는 혜진 씨 할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했던가. 더 이상 자기한테 이것저것 보고할 필요 없다고,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던가. 심지어 마지막에 가서는 손절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길도 안 주는 거 있죠? 아! 하면서 조혜진이 저도 모르게 손도 뻗었는데, 그 손을 확 쳐버리지 뭐예요. 사람이 진짜 화나면 왜, 성내지도 않는다고 하잖아요. 단순히 싫어한다는 것 정도가 아니야. 완전히 혐오하는 것 같았어. 아으, 내가 다 소름이 끼쳤다니까요.” ‘아….’ “사람이 달라진 것 같은데. 안쪽에서 뭐 문제 있었던 거 맞죠.” ‘문제가 있기야 했지.’ 하지만 조혜진에게 그런 소리를 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이유야 예상이 가기는 하지만…. ‘와, 진짜 배신감 느꼈나 보다.’ 조혜진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게 확실하지 않을까.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조혜진이 계속해서 거짓 보고를 올린 셈이니 확실히 화를 낼 만도 했다. 손을 쳐 내거나 다소 거친 말을 쏟아낸 것은 당연히 둠현성의 영향. 아직까지 완전히 칠흑의 날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만큼 본래 표현하려는 것보다 더 과장해서 표현한 것 같았다. 조혜진이 김현성에게 거짓 보고를 올린 것은 사실이니 어쩔 수 없지만 일말의 책임감이 가슴 속을 흔들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물론 나는 제3자의 입장이었지만, 친구의 위기에 어떻게 일반적인 반응을 보낼 수 있을까. 나 역시 도움을 많이 받았던 만큼…. ‘이건 조금 도와주기는 해야겠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회의 중이라고 하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한 느낌, 아니, 무조건 가 봐야만 했다. 어차피 전체적인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들어야 했으니까. “우리도 움직일 준비 하자, 누나. 혜진 씨도 준비하라고 해. 나도 대책 회의 들어갈 거니까.” “지금 가게요?” “응, 지금 갈 거야.” 정말로 괜찮겠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 651 회귀자 사용설명서 651화 이질적인 빛(2) “일어나자마자 움직인다는 걸 알면 또 난리 날 것 같기는 한데… 뭐 막을 수 있나요. 오빠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거지. 그럼 저는 혜진 씨나 불러올게요.” “근데 왜 혜진이가….” ‘누나 방에 있어?’ “조금 위로해 주느라 그렇게 됐네요. 여기서 혜진 씨가 오빠네 길드마스터 좋아하는 거 모르는 사람 있어요? 그 꼴 보고 어떻게 그냥 보내요. 술이라도 좀 먹여야지. 걔 은근 잘 취하더라. 아, 오빠는 정하얀한테 도착했다고 메시지라도 보내요. 이쪽으로 온다는 걸 말리느라 여기서도 진땀 뺐으니까. 잘 있다고 안심은 시켜줘야 하잖아요? 언론에서 여러 가지로 떠들어대고 있다 보니 점점 불안해하는 것 같았는데….” “아, 그래야겠네. 누나가 잘 수습했나 봐.” “당연히 수습해야죠. 사실 정말로 고생한 건 다른 쪽인 같지만… 파란 길드에는 언론 플레이의 일환이라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못 박아뒀어요. 오빠는 처리할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니까 수긍하더라고요. 혜진 씨나 김현성, 그리고 박리안 씨를 포함해서… 딱 몇몇 정도가 이번 사건을 아는 전부일 걸요.” “아, 덕구는? 덕구는 뭐 해?” “당연히 한발 빠르게 북부로 향했죠. 엘레나, 선희영, 황정연, 파란 길드는 죄다 북부에 자리 잡고 있고… 붉은 용병, 그러니까 차희라, 그 여자랑 우리 연주 언니. 일단은 기존 매뉴얼에 적힌 대로 병력 배치 완료시켰어요. 근데 이건 수정할 거죠?” “물론, 그건 전부 준비가 됐다는 가정하에 만든 거고, 지금은 또 다르지.” “그럴 줄 알고 대충 제가 손봤네요.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는 걸 가정해서 만들어봤어요. 아직 기본적인 가이드라인만 잡아놓은 상태니까 확인해 보세요. 위험 부담 높은 지역에 우리 정적들 밸런스 좋게 밀어 넣었는데… 어느 정도로 넣어야 적당히 버티면서 같이 뒈져줄 수 있을지 나는 모르겠더라. 그런 건 오빠 전문이잖아, 그치?” “…….” “…….” ‘진짜… 누나 너무 유능하다. 진짜 왜 이렇게 멋있어.’ 뭐라고 말이 필요 없다. 그사이에 그건 또 언제 해놨을까. 이지혜가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건 당연히 예상한 부분이었으니까, 언론을 진정시키고 여론을 잠재우는 과정에서도 이런 가이드라인을 잡아줬다는 건…. “누나….” “왜요?” “진짜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특히나 지금처럼 야비하게 웃을 때 더. 항상 보는 표정이지만 너무 섹시한 거 같더라니까.” “…….” “큼, 아무튼, 린델 내에 남아 있는 길드가 얼마 없다니까요. 그러고 보니 카스가노 유노가 오빠한테 꼭 말할 게 있다고 했으니까, 이번 회의 끝나면 곧바로 연락해 보시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정하얀한테는 지금 메시지 보내고.” “응.” “갈아입을 옷이랑 가방은 준비해 놨으니까. 알아서 입고 나오시면 될 것 같고. 저는 혜진 씨 데리고 그리폰 이륙장에 가 있을 테니… 아니면 준비하는 것 좀 도와줄까요?” “뭐 어린애도 아닌데. 먼저 가 있어, 누나. 누나 말대로 하얀이한테 먼저 연락해야 할 것 같아. 천천히 준비해.” “네, 아! 그리고 한소라, 그 여자 연봉 좀 올려줘야겠더라.”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들고 문밖으로 나가는 이지혜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 걔는 솔직히 연봉 좀 올려줄 만해.’ 정하얀이 그동안 버틸 수 있는 이유가 한소라 억제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이지혜가 대충 말했다고 들을 리가 없지.’ 아마 한소라의 피나는 노력이 정하얀을 진정시키지 않았을까.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자 계속해서 진동하는 손거울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몇천 개가 넘는 메시지가 쌓여 있지 않을까. [아직도 바쁘신가 봐요? 보고 싶어요. 진짜 보고 싶다.] [일은 언제 끝나요? 그래도 잠깐은 연락 주셨으면 좋겠는데.] [보고 싶어요.] [보고 싶다.] [지금 혹시 다른 사람 만나고 있는 건 아니죠?] [오빠가 그럴 리가 없으니까. 정말로 보고 싶어요. 답장 좀 보내주세요.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왜 계속 한 자리에 누워서 안 움직여요?] [누구랑 같이 있는 거 아니죠? 일하고 계신 거죠?]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연락 좀 해주세요.] 아니나 다를까 무척이나 많이 쌓인 메시지들이 눈에 띈다. 약 2,500개 정도…. ‘생각보다 안 되네.’ 예상한 것보다는 적다. 확실히 한소라가 필사적으로 막았다는 걸 실감한 순간이기도 했다. 조만간 들를 거라는 말을 최대한 성의 있게 작성한 후, 전송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튀어나온 정하얀의 답장이 메시지를 위로 밀어버렸다. [미안해, 하얀아. 갑자기 일 여러 개가 터져서 정신이 너무 없네.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곧바로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네, 네.] [빨리 오세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진짜.] [진짜 너무 보고 싶어요, 진짜. 잠깐 통화 괜찮죠? 얼굴 좀 보고 싶은데.] [바쁘신가요?] ‘얘, 온종일 이거 쳐다보고 있었나 보네.’ 시킨 일은 제대로 하고 있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한소라야 최대한 작업실에 붙어 있었겠지만 정하얀은 하염없이 손거울이나 창문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을까. 망원경을 시험할 겸, 정하얀이 잘 지내고 있었나 하는 마음 때문에 작업실 쪽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침대에 누워 손거울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작은 문제가 있다면 그녀가 위치한 곳이 그녀의 방이 아닌 내 방이었다는 것. ‘뭐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내가 오지 않을 동안 저 방에서 계속 지낸 흔적들이 자꾸만 눈에 띈다.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강아지가 주인을 기다리기에 지쳐 방을 개판으로 만들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장내. ‘칫솔은 왜 저기에 있어?’ 차이점이 있다면 내가 방에 도착하기 전에 원상복귀가 되어 있다는 것이겠지만 오히려 그 부분이 더 무섭다. 약속의 1년 때문인지, 기다림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잘 참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는 조금 놀랍다. 물론 여기저기 찢긴 마법 서적들이나 다른 물건들은 이 건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쌓였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지만, 본래였다면 폭발한 직후 곧바로 이곳에 달려올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가. ‘소라야, 고맙다, 진짜.’ 생각하기가 무섭게 한소라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하얀 님, 식사 드실 시간이에요. -아!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나는 정하얀. 한소라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등은 이미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 연락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생사를 오가는 모험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소라가 조금 안쓰럽기는 했지만 축축하게 젖은 그녀의 등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그녀가 가져온 식사. ‘뭐야, 저거 뭔데, 저거 뭐야.’ 내 얼굴을 베이스로 만든 것만 같은 캐릭터가 한소라가 가지고 온 접시에 자리해 있었다. 차마 숟가락으로 뜨기 아까울 정도의 작품, 천사를 조립하다 새로운 재능에 눈을 뜬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정하얀 역시 입을 벌리고 그 결과물을 바라보는 중이다. 그러다 손거울을 바라보며 자랑하듯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빠한테 방금 연락 왔었는데. -그, 그렇구나.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네요, 정말로 다행이다. 하, 하하, 흐하, 정말로 다행이네요.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어요. 곧 연락을 주실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이, 이것 보세요. 아직도 외부와의 연락을 전부 차단하고 있는 상태라고 하시는데… 이렇게 정하얀 님한테 먼저 연락을 주셨잖아요? 두 분 진짜 참사랑이다. 하, 하하. 너무 참사랑이에요. -사, 사랑. 그렇지? -네, 사랑이요, 사랑. 아직 조금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실 테니 여기까지 오시기 전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수도 있겠네요.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바쁠 수밖에 없으니까. 이 와중에도 정하얀 님을 잊지 않았다는 거겠죠? 진짜 참사랑이다. 진짜 참사랑이야. 으응, 이게 참사랑이지. -헤헤, 그런가? -물론이죠. 이제 슬슬 방도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금방 오시지는 않으실 테니까. 며칠 뒤에 제가 원 상태로 싹 정리해 드릴게요. 아 이럴 게 아니라 답장 보내셔야죠. 그리고 오늘은 주무시기 전에 제가 준비한 영상 보시면서… 아! 그전에 어제 만든 스크랩북부터 보여 드려야 하는 구나? 베니고어 넷에서 떠도는 자료들이 있어서요. 전부 긁어서 스크랩해 왔거든요. 오늘은 이것 보시면서 기분전환 좀 하시는 게 어떨까요? -보, 보, 보고 싶어. -식사하고 계세요. 지금 가져오는 게 좋겠네요. -그것도 같이. -아! 저번에 보여드렸던 웨딩 잡지 말씀하시는 거구나. 덕구 님이 모아놓은 거 말씀하시는 거 맞죠? 그것도 같이 가져올게요. 그럼 식사하고 계세요. 그 말과 다급히 방을 나가는 한소라의 모습은 솔직히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기립박수라도 보내고 싶을 심정. 그러고 보니 방 안 곳곳에서 정체불명의 굿즈가 눈에 띈다. 이 방 안에서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던 것 같아 마음이 놓이기는 했지만…. ‘예정된 훈련 스케줄은 따라가고 있는 건가?’ 마법 서적이 몇 권 보이기는 했지만, 적당히 읽다가 던져 버린 것 같지 않은가. 솔직히 저럴 때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약속의 1년이 지난 이후 엄청난 성장을 이룩하기는 했지만…. ‘아직 조금 모자라는 거 아닌가.’ 예정보다 일정이 빨라지면서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이 더 부족해졌다. 전체적인 흐름에 정하얀 완전체가 꼭 필요한 만큼 그녀가 현재 어디까지 치고 올라왔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훈련은 열심히 하고 있었지?] 손거울을 꾹꾹 누르자 벌떡 일어나서 찢어진 책을 집어 드는 모양새는 가관. [네, 하고 있었어요!] 답장은 더욱더 가관이다. 어처구니가 없어 기가 찬다. 아마 본인은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메시지를 보낼 때 책을 읽고 있었다는 건 사실이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혹시나 했지만 스텟의 변화도 빈약하기 그지없다. ‘정하얀, 이대로 괜찮은가.’ 그런 타이틀이 머리를 꽉 채운다. 저 빛무리에서 언제, 어느 타이밍에 천사의 탈을 쓴 악마 놈들이 튀어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아무래도 훈련을 부추기기에는 한소라 역시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아마 본인의 생존을 최우선 순위로 둬 최대한 정하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한계가 아니었을까. 현상 유지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괜스레 입안이 쓰다. 새어 나오는 빛의 물줄기가 계속해서 눈을 거슬리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 현재 유일하게 나를 만족시켜 주는 것은 김현성뿐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루시퍼에게 힘을 받아 격이 올라간 만큼 1회 차 김현성 이상의 힘을 손에 넣지 않았을까. 당연하지만 김현성 외에 다른 이들은 1회 차 최종 스펙에 미치지 못한다. 엄청나게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된 대전쟁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모든 지원을 때려 박고 개난리를 친다고 해도 진짜 사선을 넘어서 만들어진 전사들에 비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심지어 1회 차의 전사들은 가면쓰레기에 의해 이미 담금질이 되어 있던 상태였다. 대륙의 전체적인 수준이 더 높아지기를 기대하며 여러 가지 이벤트를 꽂아 넣어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위기를 경험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당연하지만 정하얀 역시 그 카테고리 안에 포함되어 있다. 2회 차의 정하얀은 아직 1회 차의 정하얀에 미치지 못한다. 김현성 오피셜이었으니 의심할 것도 없이 확실했다. 사실 본래 계획대로였다면 크게 문제가 없었겠지만, 현재 시국에서는 충분히…. ‘문제지.’ 아직 준비가 미흡하고 또 미흡한 상황, 쏟아져 내리고 있는 빛줄기가 1년 후에 뻥 하고 터져주면 고맙겠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다. 어쩌면 카스가노 유노의 미래가 이 상황을 예견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다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오래 쉬었지.’ 슬슬 조일 타이밍,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다.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으니까. [미진아, 훈련 열심히 하고 있지? 내가 이번 일에서 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 알아줬으면 좋겠다. 너에게도 많이 의지하고 있고, 특히나 네 마법에 무척 기대하고 있어. 네가 계획의 중심이야. 이번 일이 끝난 뒤에 우리….] […….] [네?] [오빠?] [미진이는 누구예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얀아. 신경 쓰지 마. 메시지를 잘못 보낸 거 같네.] […….] [해킹당했나 보다.] 정하얀도 정하얀이지만… 특히 한소라에게 미안해질 것 같았다. [해킹이야.] # 652 회귀자 사용설명서 652화 대륙을 구하고 있는 영웅(1) 사실 뭐 엄청난 메시지를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의문의 여인, 미진이라는 마법사가 있고, 이기영이 그녀를 무척이나 신뢰한다는 뉘앙스의 메시지를 보낸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효과는 굉장할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여신의 손거울을 빤히 바라보는 정하얀의 얼굴에 호기심이 들어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잠시 멍한 표정을 유지한 채 한 참이나 눈을 비비며 여신의 손거울을 바라보는 모습은 가관, 아직 어떤 상황인지 파악 못 한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이 어떤 메시지를 본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김현성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노을과 우정이라면 정하얀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질투와 분노. 물론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착실히 성장하고는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게 착실한 성장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 아니었던가. 나태한 정하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스팀팩을 투여해야만 했다. 그 스팀팩이 정체불명의 천재 마법사 미진이. ‘이건 먹힐 거야.’ 먹힐 수밖에 없다. 물론 정하얀이 너무 갑작스럽게 터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기는 했지만, 이번에야말로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려 1년을 버티지 않았던가. 그녀의 곁에 한소라가 있다면, 이전처럼 순수를 증명하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확률이 크다. 일단 질러놓기는 했지만 마른침이 넘어간 것은 당연지사. 정하연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짧은 목소리와 함께 천천히 표정이 굳어간다. -어? 어? 해킹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변명이 거짓말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해도 황당한 발언이었으니까. -누, 누, 누구야? 미진이가 누구지? 미진이가 누구야? 누군데… 누구냐고. 의문을 표하는 것이 첫 번째. 이윽고 손톱을 뜯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아마도 저게 두 번째 단계일 것이다. 참기 힘들었는지 다급하게 여신의 손거울을 두드리며 내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지만, 이쪽의 손거울은 이미 통화중이 걸린 지 오래. 현재 고객님께서 통화 중이오니 어쩌고 하는 목소리를 들은 정하얀이 뿌드득 뿌드득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이 망원경에 비쳤다. 이런 모습이 무척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기대에 부응하듯 정하얀은 천천히 이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평화로웠던 얼굴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변화하는 분위기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까지 와 버린 것 같았다. -누군데… 누구야? 누구냐고. 누구, 누구지? 미진이가 뭐야? 뭐지? 미진이? 미, 미, 미진이? 너무 당연한 소리겠지만 정하얀에게 프라이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게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 당장 마탑에 살았던 1년 동안만 해도 마탑 할배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본인의 위대함을 그 누구보다도 잘 깨닫지 않았던가. 대륙 제1의 마법사는 정하얀이고, 오직 자신만이 텔레포트 마법을,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화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차희라와 본인의 경계선을 정확히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차희라가 강하기는 하지만…. 전위로서 차희라보다 강한 김현성이 있으니까. 어쩌면 김현성과 내가 붙어 있을수록 정하얀은 미소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동물의 세계 같은 시선으로 바로 본다면 김현성이 차희라의 포지션을 갉아먹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을 테니까. 본인의 포지션은 굉장히 공고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뻔하다. 마법사는 오직 정하얀뿐. 나는 이미 내 영역을 구축해 놨어. 반지도 받았고, 거칠 게 없지. 1년이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이제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야. 요즘은 오빠가 바쁘니까 다른 얘들이랑도 어울리지 않네. 이제는 정하얀 세상이야.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난다 긴다 하는 마법사들의 수준이라고 해도 어차피 본인이 보기에는 원시적인 마법을 사용하는 원시인들로 보일 테고, 마법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이기영이 자신을 의지하고 있으니 절대로 버려지는 일은 없다고 안심하고 있었겠지. 오빠는 유능한 사람을 좋아하니까. 물론 이 모든 게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 나눌 수 있는 감정들을 전부 배제한 이후에 나온 판단이겠지만. 나름대로 영악한 정하얀은 이런 것까지 가정하고 있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방금 받은 메시지는 그녀의 프라이드에 상처를 남기게 한 발언이 아닐까. 머리를 벅벅 긁은 이후에는 어디론가 곧바로 연락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아이고, 이거 우리 정하얀 님 아니십니까.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연락을… 영광입니다, 하하하. -미진이가 누, 누, 누, 누구야… 미진이, 거기 있어요? -네? 그게… 무슨…. -미진이가 누구냐고요. 미진이가… 누, 누구냐고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일, 일단 진정하시고…. -거기 있어요? 거, 거, 거기 있는 거야? 마탑에 있는 거냐고, 마탑이냐구!! -아, 네. 일단 저, 그… 미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가 마탑 커뮤니티에 등록되어 있는지 한번 확인을…. -미진이, 미, 미진이 데려와. 미진이 당장 데려!!! 씨익, 씨익. 마탑 직원에게 화내는 모습을 보면 이미 중노 상태에 들어간 것 같았다. 심지어 대노로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라고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린델 내에서 미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법사가 차례대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때, 그녀의 대노를 막은 것은 생명수당이 포함된 연봉을 받고 있는 우리 한소라. -무슨 일이세요? 정하얀 님? 무슨…. -끄으윽, 미진이가 누군데에… 미, 미, 미진이가…. 당연하지만 정하얀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이 눈에 띈다. 두 눈에는 필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초식동물의 생존본능이 깃든다. 아까까지만 해도 환하게 미소 짓고 있던 정하얀이 갑작스레 울상을 짓고 있으니, 어찌 일반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자신이 모르는 사건이 터졌고 지금 그 일이 터지기 직전이라는 걸 이해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공포에 물든 눈동자에서 재빠르게 회전하는 머리가 눈에 보인다. 꾹꾹 손거울을 누르자 허겁지겁 뒤로 돌아 메시지를 확인하는 한소라가 시야에 비쳤다. [미진이 같은 사람 없음, 하얀이가 훈련이 필요한 듯해서 등장시킨 가상의 라이벌.] -이, 이, 개새끼. 이 쓰레기 같은 새끼.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 전부 듣고 있어, 소라야.’ 아마 듣고 있어도 반응이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이, 이, 흐윽, 이 개새끼가… 진짜, 흐으윽, 이 새끼 진짜… 이 나쁜 새끼, 흐으윽…. 아마 본인에게 뭘 기대하고 있는지 곧바로 깨닫지 않았을까. 한소라야말로 영특함과 학습의 아이콘이 아니었던가. -더 이상 뭘 어쩌라고… 더 이상… 나보고 뭘 어쩌라고… 왜 자꾸 나한테… 이런 짐을…. 왠지 김현성의 입으로 들었던 것만 같은 대사가 들려온다. 이상하게도 위쪽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었지만 신세계의 빛 이기영은 아무런 보상 없이 이런 위험한 임무를 덜컥 맡기지 않는다. [이번 일 좋게 끝나면 정말로 100% 전출.] 한소라가 입을 꽉 깨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상황보고 이적도 가능. 사실 이적은 힘들 것 같은데, 전출은 진짜 확정하는 거로 하자. 그동안 고생 많았고, 소라 씨도 이제 빛 볼 때 됐잖아. 딱 이번 일만 하는 거로. 이번까지만 하고 깨끗하게 손 털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게 시야에 비친다. 침을 꿀꺽 삼키는 얼굴에는 오만 가지 감정이 전부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속으로는 엄청난 내적갈등을 하고 있지 않을까. -무… 슨 일이신데요? 끄윽 끄윽 거리며 손을 내미는 정하얀의 메시지를 본 이후에는 더욱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가장 쉽게 이 사태를 해결할 방안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조금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정말로 해킹당한 것 같다고 잡아떼는 것이 분노한 정하얀을 가장 쉽게 다스릴 방법이다. ‘아, 이거 정말로 해킹당하신 거 같은데요?’ 개소리를 필사적으로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면 당장에는 정하얀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다. 의구심이 가기는 하지만 한소라가 어떻게 입을 터느냐에 따라 정하얀도 수긍할 수 있고. 아마 이런 패턴이 지금까지 한소라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한소라의 눈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했다. 눈앞에 있는 달콤한 과실을 보고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계속해서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벼랑 끝에서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인다. 나 역시 조금은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점. -미, 미, 미진이가… 미진이가 누군지 알아? 수차례 침을 삼킨 한소라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그… 그러니까… 저…. -끄으윽, 누군지 알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한소라를 조용히 바라보는 정하얀의 모습에는 솔직히 오금이 저린다. 한 발자국 떨어진 입장에서도 이 정도일진대 현재 한소라가 받고 있을 압박감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기 힘들다. 힘겹게 힘겹게 입을 떼는 모습에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주고 싶다. ‘할 수 있다, 소라야. 네가 세상을 구하는 거야.’ -그러니까…. ‘할 수 있어. 공포심을 극복해야 해. 너 이제 하얀이랑 친하잖아. 그렇지? -네, 들어본 것 같아요. 그… 박미진이라고. -정, 정, 정말? -네, 아, 그… 정확히 지역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최근에… 네, 폭발적인 성장을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유명해진 마법사가… 네, 있다고 들었거든요. 아마 그 사람이 아닐까 싶은데… 어느 순간부터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관련 자료도 모두 삭제되는 바람에… 어디서 뭐 하고 있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건 아마도… 네, 그거겠네요. -…….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따로 관리하는 인재풀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기밀로 관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아마 그거 비슷한 것 같아요. 부길드마스터를 비롯해서 몇 명밖에 알지 못하는… 네, 비밀리에 키워지고 있는 무력 집단이요. 물론 그런 건 없지만 한소라가 기가 막히게 입을 열어주는 걸 보니 괜스레 뿌듯해진다. 생각해 보면 쟤도 나나 지혜과가 아니었던가. 중간에 좀 호된 꼴을 당해서 많이 무너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혓바닥을 보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끄윽, 끄으으윽…. -안… 심하셔도 돼요. 그러니까 옛날에 한번 본 적 있는 것 같았는데… 부길드마스터가 좋아할 스타일은 아니니까. 이, 이것 보세요. 문자 내용도 그냥 응원하는 것뿐이잖아요. 정하얀 님한테 보낸 따뜻한 메시지와는 차이가 있죠. 그냥 마법사로서… 인간적으로 기대고 있다는 표현을 하신 것 같네요. 혹시나 정하얀 님께서 상처받으실까 무서워서 그냥 둘러대신 것 같고… 별거 아니니까, 크게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니에요. -끄으윽…. -그렇지만 이, 이렇게 신뢰하실 정도면 확실히 대단하기는 하네요. 소문이 사라지기 전에도 엄청 수준 높은 마법을 구사하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정하얀… 정하얀… 정하…. ‘할 수 있어, 소라야. 지지 마. 공포와 싸워야 돼.’ -정하얀… 님…. ‘할 수 있어! 시바!’ -그러니까…. ‘힘내라, 소라야!’ -정하얀 님이랑 비교하는 말이 세간에서… 자주 들려올… 정도로요. 아마 그래서 이기영 님께서도…그렇게 박미진이라는 사람을 신뢰하시는 거겠죠? 하… 하하….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 ‘시바, 진짜 말했어. 진짜 말했다고.’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653 회귀자 사용설명서 653화 대륙을 구하고 있는 영웅(2) 그만큼 장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한소라가 최대한 별것 아니라고, 빌드업을 하며 입을 털어놨지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겠는가. 만약 내가 정하얀과 같은 입장에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불편할 만한 상황이었다. 이를테면 김현성이 비밀리에 군사나 행정원들, 혹은 연금술사를 키우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심지어 그 연금술사가 이기영에 비견될 정도로 천재라고 불리고 있단다. 어느 날부터 김현성이 나를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시점에 갑작스럽게 도착한 문자 하나가 같은 내용이었다면 어땠을까? [진청 씨, 이번 연구… 무척 기대하고 있습니다. 진청 씨가 대륙 연금술 발전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거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네?] [아, 죄송합니다, 기영 씨. 손거울이 해킹당한 것 같… 담아두지 마세요. 정말로 해킹당한 것 같습니다.] [뭐야? 시바, 뭐예요? 너, 지금 나랑 장난쳐?] 단언컨대 나였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새끼를 악마소환사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을까. 나에게 목매는 정하얀이라면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박미진이라는 가상의 마법사에게 분노를 보내는 것은 기본이고, 제거하지 않고서는 성이 안 풀릴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어쩌면 대륙 내에 있는 모든 미진이들이 목숨이 위협받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쪽이 관리하고 있는 인재풀을 그녀가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나였다면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 않은 정하얀에게는 한 가지 선택지가 더 있다. ‘실력.’ 실력으로 찍어 누르고 누가 위인지 직접 증명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만약 본인의 실력에 자신이 없다면 전자의 선택지로 기울만도 하지만, 정하얀은 나와는 다르다. 조금 나태해지기는 했지만, 그녀의 본질은 천재 마법사였고 대륙 세계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성장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압도적으로 1순위지.’ 이를테면 대규모 범위 마법이라든가…. 김현성으로서는 불가능한 부분을 정하얀은 맡아줄 수 있다. 마무리는 김현성의 역할이지만 성장한 정하얀이 없다면 그곳까지 닿을 수 없다는 게 학계의 정설. 아마 한소라도 내가 지금 생각한 것들을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기왕이면 정확한 미션을 전해주고 싶지만, 현재 그녀가 메시지를 볼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 입술을 꽉 깨물며 정하얀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기다리고 있었다. -……. -물… 론 헛소리 일 거예요. 정하얀 님에게 비교할 수 있을 리가…. -……. -없지만요…. -끄으윽, 싫어. 진짜 싫어… 박미진, 진짜, 진짜 짜증 나. 그, 그, 그렇지? 박미진, 짜증 나지? -네, 저도… 네, 짜증 나죠….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일단은 저질렀지만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의 한소라를 보고 떠오른 것은…. ‘아, 나 이제 가능할지도 모르네.’ 내게도 베니고어가 했던 것과 비슷한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것. ‘나 이제 날개 달렸잖아. 신성도 얻었고.’ 사념을 전달하거나 퀘스트를 내리는 게 가능해지지 않았을까. 안에 있는 신성을 조금 떼어낸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운용하며 한소라에게 보내자 확실히 뭔가 전달되는 느낌이 든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담자 꽤나 그럴듯해진 듯한 느낌이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북서쪽을 박미진이 담당하게 됐다고 이야기해 주기. (0/1)] [한소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뭐야, 진짜 되잖아.’ 정말로 이게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진짜 됐어, 시바.’ 신화급의 격을 받은 거나 다름없으니 반신이라고 칭해도 괜찮지 않을까. 망원경으로 보이는 한소라 역시 무척 깜짝 놀라는 모양새, 하지만 내가 무슨 수를 썼다는 걸 깨달았는지 공포를 딛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아, 아마도 박미진 그… 사람이 북서쪽 지역을 담당하게 될 것 같아요. 그…. -원래는…. -네, 그… 정하얀 님이 모두… 그러니까 담당하시기로 했지만… 여러모로 신경 쓸 사안이 많으니까요. 아마 부길드마스터가 정하얀 님의 건강을 신경 쓰고 계신 거 아닐까요? 마력의 소모가 많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죠. 아무래도 혼자 모든 곳을 케어하기에는 체력적으로 힘들 수 있으니까요. ‘잘하고 있어. 엄청 잘하고 있다고.’ 폭발할 듯싶을 때 곧바로 약을 처방하는 현묘한 솜씨는 내가 보기에도 놀랍다. 정하얀이라는 폭주 기관차를 능수능란하게 운용하고 있는 걸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심지어 무대가 절벽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감히 신들린 드리블이라고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으리라. 일종의 존에 들어간 것만 같은 무아지경의 경지. 저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생존 회로가 저절로 내뱉고 있는 대사들이었다. -그런… 가? -네, 그렇지만…. -으응, 끄윽…. -조금은 주의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물론… 부길드마스터에게 다른 의미는 없겠지만… 미진이라는 분이 부길드마스터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지 모르니까요. 평범한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고… 그리고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니까, 아무래도 부길드마스터도 신경이 많이 쓰이진 않을까 싶기도 해요. 부길드마스터는 인재들을 많이 아끼잖아요? 그 박미진이라는 마법사가 우연히 눈에 띈 걸지도 모르죠. -죽, 죽, 죽, 죽이는 게 좋을까? 찾아내서… 찾아내서 죽이면, 아, 아직 나보다는 약할 거야. 그렇지? 충분히 제거할 수 있어. ‘안 돼, 죽이면 안 돼.’ 있지도 않은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저건 말려야 돼. (0/1)] [한소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죽, 죽이자. 그래, 죽이는 거야. 그럼 깔끔하겠지? 그런 거지? -죽… 이면 안 돼요. 죽이면… 그… 부길드마스터가 분명히 알아채실 테니까… 그러니까, 네, 제발 죽이면 안 돼요. 죽이면… 제발, 그런 생각은 하시면 안 돼요. ‘힘내, 소라야. 굳세어라, 한소라.’ -그냥… 그냥 알려주면 되는 거예요, 부길드마스터에게. 네, 알려주면 되겠죠. 직접 증명하는 거예요. -예, 예전에 순수를 증명했던 것처럼? -아니요! 순수 증명 말고요! 순수 증명은 안 돼요! 순수 증명 아니라…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다른 마법사는 필요 없다는 걸 증명하는 거죠. 더 이상의 인재는 필요 없다고 확실하게 목을… 아니, 못을 박아두는 거예요. -아…. -박미진도 필요없고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정하얀 님이 강해졌다는 걸 증명한다면 아마 다시 돌아와 주지 않으실까요? 물론 지금 상태로는 조금 힘들 수도 있겠지만… 네, 정하얀 님이라면 여기서 더 강해지실 수 있으시잖아요. 그렇죠? 그렇겠죠? -으… 응. -자존감을 조금 더 높이셔도 돼요. 정하얀 님은 충분히 귀엽고, 아름다우시고 능력 있으시니까. 부길드마스터도 푹 빠져 계시잖아요. 이렇게 따로 메시지를 여러 개 보내주실 정도니까. 으응, 그렇죠. 바쁜 와중에도 항상 정하얀 님을 생각해 주고 계시니까. -그, 그래도 미진이도… 강해지면 어떻게 하지? -지, 지가 강해져 봤자… 뭐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겠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걸요. 정하얀 님은 천재니까. 특별하니까요. -그, 그, 그런가? -네, 네, 그래요. 그런 거예요. 크게 숨을 몰아쉬는 한소라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몇 번이나 정통으로 살기를 맞았으니 저런 표정을 지을 만도 했다. 나 역시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의 승부, 폭발하려는 자와 도화선을 끊으려는 자의 대결은 저절로 입을 벌리게 했다. 일단은 한소라의 판정승이 선언된 것 같았지만 이대로 방심할 수 없다는 건 그녀가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겨우 첫 번째 위기를 넘긴 것뿐이다. 이후 공부하며 폭발할 정하얀을 말리는 것이 진짜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 나 역시 불안하기는 했지만 저렇게 단호한 얼굴을 보니, 그녀를 믿어도 될 것처럼 느껴졌다. 숨쉬기 힘들어하는 와중에도 정하얀을 챙기는 모습은 그야말로 진정한 영웅의 모습. 한소라가 대륙을 구하는 중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로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나면 그녀에게 공로상을 챙겨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그 정도로 지금 보이는 모습은 마치 자기희생적인 영웅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 ‘네가 영웅이야. 조금만 더 힘내. 네가 영웅이라고.’ -오늘부터… 공부 시작하는 게 좋겠네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만큼 잘 도와드리고… 부길드마스터에게도 여러 가지로… 네, 좋은 말씀 많이 전해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끄윽, 고마워. 고마워, 소라야. -고맙긴요. 저야말로 항상 감사하죠…. 남과 신체접촉을 잘 하지 않는 정하얀이 한소라를 살짝 껴안는 것으로 마무리된 훈훈한 장내. 물론 깜짝 놀란 한소라는 뱀에게 묶인 개구리 꼴이 되기는 했지만, 무척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고 있는 듯한 모양새, 본인이 무사하다는 것에 기도를 드리고 있지 않을까. 나 역시 박수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아직 조금 불안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 정하얀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무척이나 안정적으로. 일어난 이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일 중 하나를 대충이나마 정리한 것 같은 기분에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할 게 많으니까. 최대한 빨리, 효율적으로 해결해야지.’ 내부도 정리해야 하고, 외부도 정리해야 한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했으니, 파란 길드를 케어하면서 대륙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알아보는 게 맞겠지, 뭐. 이대로 계속 하얀이를 예의주시하면서 정확히 며칠이 남았는지 알아보는 게 먼저.’ 대충이나마 정리를 마친 이후에 방문을 열었던 순간이었다.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이, 이기영 신도! 아니, 이기영 후배님! 일어났구나! (0/1)] ‘…….’ [갑자기 퀘스트가 생성돼서 깜짝 놀랐네. 역시 우리 이기영 후배님은 적응이 빠르다니까. 아, 그러니까… 내가 우리 이기영 신도 사랑하는 거 알지? (0/1)] ‘…….’ [이기영 후배가 적응이 너무 빨라서 진짜 놀랍더라고… 곧바로 이렇게 퀘스트를 생성해서 자기 신성을 사용할 줄은 누가 알았겠어. 아마 이기영 신도의 바람에 시스템이 응답한 것 같네. 이렇게 곧바로 시스템과 파장을 맞추기가 쉽지는 않은데… 이기영 신도가 대륙을 위하는 마음 때문에 현재의 시스템도 이기영 신도를 환영하는 게 아닐까 싶어… 지금 당장은 퀘스트를 내리는 것 정도가 전부지만 아마 여기 오면 더 많은 걸 할 수 있을걸. (0/1)] ‘…….’ [속마음을 읽을 수도 있고…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 윗분들이 이번 결과에 대해 아주 만족하고 있어…. 우리 계속 가는 거 맞지? 이기영 신도? 함께 가는 거지? 같은 주식 탄 거 맞지? 한날한시에… 함께 매도하고 매수하는 거… 그거… 나도 하고 싶, 싶은데. (0/1)] ‘각설하고…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만 말해. 시바, 이거 진짜로 너네 때문 맞아?’ […… (0/1)] ‘진짜로 너네 때문 아니지?’ […… (0/1)] ‘진짜로 너네 때문 아닌지 묻고 있잖아요, 베니고어 님.’ [그러니까, 완전히… 그때의 사건이 영향이 없지는 않은데… 일, 일단은… 그 균열이 열려서, 잠깐만… 아직 이쪽에서도 조사 중이라… 그러니까 위쪽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나도 최대한 여기저기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해서 여러 가지로 뛰어다니고 있거든. 아, 아무튼 위가 원인은 아니야. 어쨌든 일어나야 하는 일이었고… 그, 아무리 우리라고 하더라도 이미 정해진 일에는 저항할 수 없는 법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원망하지 말고… (0/1)] ‘며칠 남았어, 이거?’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36일…. (0/1)] ‘시바….’ [희귀 등급의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이기영 신도… 할 수 있지? 힘도 받았으니까. 할 수 있는 거지? 나 버리는 거 아니지? 버리는 거 아니잖아. (0/1)] [전설 등급의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36일 후에 베니고어와 함께 대륙을 지켜주세요. 제발… 함께 지켜주세요. (0/1)] [보상-여신의 사랑] ‘자꾸 신성 소비하지 마, 시바… 전설 등급 퀘스트 같은 거 뿌리지 말라고.’ # 654 회귀자 사용설명서 654화 화해하길 바라(1) [희귀 등급의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36일 뒤에 대륙을 지키고, 베니고어의 사과 받아주기. (0/1)] [보상-여신이 만든 사랑의 디너] ‘안 먹어, 시바.’ 얘가 어째서 파산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일반 등급으로 전해도 되는 퀘스트를 어째서 희귀 등급으로 보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 얼마가 들어왔으면 얼마를 써야 하는 개념이 잡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베니고어의 씀씀이에 대해 잠시 고민해 봤지만, 그녀의 낭비벽보다는 그녀의 말이 더욱더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36일… 36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아니, 절대로 긴 시간이 아니다. 단언하건대 촉박하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정하얀 각성 프로젝트를 무사히 떠넘기기는 했지만 한소라가 너무 몸을 사리면서 해결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겨우 36일, 겨우 36일 동안 2회차 정하얀이 1회차 정하얀을 앞지를 수 있을까? 조금 더 빡세게… 차라리 한소라라까지 떼어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 ‘아니야. 미친 생각이야.’ 그거야말로 정하얀을 폭발시키는 방법이라 단언할 수 있다. 지금까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미친 짓을 벌여온 만큼 억제기까지 사라진 정하얀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하기가 너무 어렵다. ‘한소라는 무조건 있어야 돼.’ 정하얀 억제기는 무조건 현재의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봤지만 역시나 5일에서 10일 정도는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만약 터뜨릴 거라면 하루나 이틀 전에 터뜨리는 게 효과적이다. 그래야 그 울분을 비둘기들에게 풀 수 있을 테니까. 섣부르게 터뜨렸다간 비둘기들보다 정하얀을 먼저 상대하게 될 수도 있다. [이기영 신도… 나 버리지 않을 거지? 그렇지? (0/1)] ‘시바, 말 좀 그만 걸어주세요, 베니고어 님. 머리 굴리고 있잖아요.’ 그것 말고도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병력의 배치 문제. 이지혜가 가이드라인을 짜주기는 했지만 민감한 주제일 수밖에 없는 만큼, 여러 집단과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이기영은 독재자처럼 보이지만 독재자는 아니다. 각 무력집단의 이해관계를 생각하며 벨런스를 맞추는 편이었고, 간혹 강압적일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나마 여러 가지 의견을 들어주는 편이었다. ‘이렇게 해. 저렇게 해’라고 말하는 독재자의 말로는 죽음뿐이지 않은가. ‘하나하나 의견 조율해 주고 씨름 하는 것만 해도 일주일은 넘게 걸릴 텐데….’ 라파엘이 36일 안에 일어나 주면 좋겠지만, 이 새끼가 제대로 싸워 줄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리 회복력이 빠른 편이라고는 하지만, 반병신이 되어서 깨어나는 게 기적이었으니까. 만약 정말로 정체불명의 천재 마법사 박미진이 있다면 그녀를 데려와 북서 지역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 천사는 지금 몇 기나 만들어졌는지 모르겠다. 네임드기 위주로 신성을 부여해 줄 수 있다는 건 기쁜 소식이기는 했지만, 물량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 퀄리티가 떨어지더라도 개수를 채우는 게 나은지 아니면 집중적으로 퀄리티를 뽑아야 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정 안 되면… 진짜 손절해야겠는데.’ 한 달 정도는 더 시간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정말로 한 달 정도 남았다는 확언을 들으니 똥줄이 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조혜진과 김현성의 문제는 또 어떻게 해결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별것 아닌 갈등처럼 비칠 수 있지만, 조혜진은 김현성을 보좌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전위 중 한 명이 아니었던가. 아주 약간의 변수조차 용납하기 싫은 내 입장에서는 김현성이 조 씨를 밀어내려고 하는 게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우선 순위로 분류하자면 하위권에 분류할 수 있으니…. ‘이건 나중에 시간 날 때 자리 한번 만들어보는 거로 퉁 치는 게 좋지 않을까? 일 다 끝내고… 응,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제3자가 자꾸만 남의 연애사나 관계에 끼는 것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고, 무엇보다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 아닌가. 조혜진에게는 조금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 김현성 조혜진 프로젝트는 후일담으로 미루는 게 현명하게 느껴졌다. 문제가 있다면 저 멀리서부터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는 것. 아까보다 더 빨라진 발걸음으로 몸을 옮기자, 아니나 다를까 측은한 표정을 하고 있는 조혜진과 그런 그녀를 위로하고 있는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빨리도 오셨네요.” ‘누나, 너무 타박하지 마. 일하고 온 거야. 나도 나름대로 힘들다고.’ “부길드마스터.” “아! 혜진 씨.”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혜진 씨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하하, 괜찮아요.” 당연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혀 괜찮은 것 같지 않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나보다도 더 머리 아파 보이는 표정, 마치 세상 근심을 모두 가진 것만 같은 외관이라 할 만했다. 왠지 모르게 양심이 쿡쿡 찔려오는 기분. 나답지 않게 조혜진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 미안해진다. 아마 몸에 가득 들어차 있는 신성이 남아 있는 한 줌의 동정심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솔직히 내 잘못이 아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쌍해 보이기는 했으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전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감정이 아닌가. 최대한 괜찮은 척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흘러나오는 분위기 자체가 너무 어두워 보인다. ‘미안해, 혜진아. 내가 진짜 수습해 주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한 것 같아서… 이해해 줄 수 있지? 우리 친구잖아. 36일밖에 안 남았다고 하는데… 다른 일부터 해결하는 게 먼저잖아… 오늘 회의도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고… 여러 가지로 할 일이 많아.’ “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길드마스터. 튼튼한 몸 정도밖에 자랑할 게 없으니까요. 그 정도가 끝이죠, 하하….”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그래요, 혜진 씨. 키도 크시고, 피부도 이렇게 좋으신데. 행정 일은 처리하는 건 또 얼마나 잘해요? 파란 길드가 혜진 씨 없으면 어디 돌아가나요? 체스도 잘 두고… 어제 저도 엄청 고생했잖아요.” ‘뭐야, 누나 어제 얘랑 체스 뒀어? 혜진아 니가 어떻게 날 두고… 누나랑 체스를 둬.’ “하,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빈 말이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한테 물어보지 마, 누나. 지금 조혜진 얼굴 쳐다보기가 조금 그래. 근데 얘 피부 좋은 건 맞아. 인정해.’ 이지혜의 질문에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눈에 보이는 조혜진의 동공이 신경 쓰인다. ‘죽어 있어….’ 사실 조혜진의 입장에서만 생각해 보면 극한 상황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다. 친구가 기억상실에 걸리는 것으로 모자라 납치극에 휘말리며 죽어가고 있었고, 친구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건만 결과적으로는 그 비밀이 드러나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그 비밀을 지켜주는 댓가로 좋아하는 이의 적대심을 얻었으니 멘탈이 남아날 리 있겠는가. 이렇게 풀어 정리해도 복잡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그녀가 얼마나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아마 김현성이 둠현성으로 변한 줄 모르는 그녀였으니 더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걔, 지금 좀 사춘기 같은 거야. 네가 이해해 줘야 돼’ 그렇게 말을 내뱉고 싶은 심정. 하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조혜진이었다. “죄송합니다, 부길드마스터.” ‘…….’ “결과적으로… 그… 비밀을 지키지 못하게 돼서… 죄송합니다.” ‘아니, 혜진아. 너 진짜… 왜 그래.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자꾸 미안해지게 그러지 마. 네가 말한 것도 아니잖아. 근데 왜 네가 책임을 지려고 그래?’ “아니요, 혜진 씨 잘 못이 아닌데….” “아니요, 제 잘못이 맞습니다. 애초에 라파엘에게 말한 것도… 저였고, 이 모든 일을 만든 것도 저였습니다.” “아니, 뭐 친구끼리 그렇게 사과하고 그래요. 엄밀히 말하면 현성 씨를 포함해서 몇몇밖에 알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이전과 별 차이 없습니다. 그렇게 자책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당시에 혜진 씨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아니, 너 진짜 왜 그래. 사람 미안해지게… 제발 내 양심을 건드리지마. 어차피 움직이지 않으니까.’ “몸은 조금 괜찮으십니까?” ‘괜찮기는 한데… 네가 나를 걱정해 주면 내가 지금 좀 그래.’ “다른 부작용이 없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네가 너무 내 양심을 찔러.’ 이렇게까지 양심이 찔려오는 것은 확실히 오랜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조금은 원망하거나 틱틱거리는 소리를 내뱉어도 상관없으련만, 진심을 다해 이쪽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은 괜스레 심장을 울린다. ‘아, 이거 하루 정도만 빼볼까?’ 어차피 하루 정도는 시간이 있을 것 같기도 했으니까. 개인 시간을 조금 모으고 모은다면 조혜진의 일을 수습할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간 중간 휴식시간을 취하면 되고, 앞서 말한 것처럼 얘가 계속 이런 상태면 곤란한 건 이쪽이지 않은가. ‘아, 자꾸 합리화하면 안 되는데… 정말 시간 없는데.’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그래도 이렇게 건강하게 계신 모습을 보니 확실히 안심됩니다. 정말로 당시에는 너무 놀라서… 다른 생각은 할 여유도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또 사과드릴 일이 있네요.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 숙이지 마, 야….’ “아니, 무슨 고개까지 숙이고 그래요. 뭐 다 좋게좋게 해결됐으니까. 이제 전부 다 잊고 깨끗이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 되지. 그렇게 걱정해주신다고 하니 제가 다 민망합니다. 하하하….” “그래도 꼭 사과드리고 싶어서… 여러 가지 사과드릴 일이 참 많은 것 같아서….” “울어요?” “아닙니다.” ‘혜진아, 울지 마, 진짜.’ ‘얘는 진짜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1회차 가면쓰레기가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 이런 걸 떠올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괜스레 던전 안에서의 조혜진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기를 버린 채 인질은 자신이 될 테니 부길드마스터를 풀어달라는 모습은 압권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이기영의 감성을 한차례 휘저어 버렸다. 박덕구의 모습이 떠오를 정도였으니 무슨 표현이 더 필요하겠는가. 지금 조혜진의 눈에 고인 눈물은 악어의 눈물이 아니라, 정말로 내게 미안함을 표현하는 눈물이다. 업진살이나 뜯으며 편하게 지냈던 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온갖 고초를 겪은 줄 아는 것 같았다. ‘시바, 더 미안해지게.’ 결국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루만 빼자.’ 어차피 언젠가는 처리해야 할 사안이기도 했으니까. “저 혜진 씨… 그보다 현성 씨에게 이번에 조금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고….” “아니요, 부길드마스터가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길드마스터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서….” “그 부분에 관련해서 말씀드리는 데 조금 혜진 씨가 오해하시는 게 있으신 것 같아서… 사실 현성 씨가 조금 날이 서 있는 상태인 것 같더라고요. 여러 가지 일로 성격이 살짝 변했다는 느낌이라… 정확히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말한 건 아닐 겁니다.” ‘걔, 지금 좀 흑화된 상태거든.’ “제가 단언하건대, 혜진 씨에게 했던 말들이 진심이 아닐 거예요.” 사실 이기영 오피셜이라는 게 그리 신뢰가 가는 말은 아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근슬쩍 밝아질 조짐을 보이는 조혜진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이를테면 어두운 방 안에서 촛불 하나가 딱 켜진 정도, 당연하지만 조혜진이 그 촛불을 붙잡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자세한 건 이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분이 화해할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요, 바쁘신데 그렇게까지는… 지금은 시국도 시국이니만큼 괜히 쓸데없는 일에 힘쓰실 필요 없어요, 부길드마스터. 저는 괜찮습니다.” 말은 저렇게 내뱉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혹시나 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 ‘혜진아, 너는 내가 김현성 엔딩 보게 해줄게, 진짜.’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얘만큼은 진지하게 밀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655 회귀자 사용설명서 655화 회의(1) 물론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곧바로 일을 시행할 수는 없겠지만, 빌드업 정도는 쌓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조혜진 아바타를 출동시키고 싶은 심정.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그런 프로젝트를 시행시킬 수는 없다. 당장은 자리를 만들고 이야기를 해보는 것 정도가 최선이지 않을까. “그렇게 계속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리를 만드는 정도는 쉬우니까요. 계속해서 서로 어색해하는 것보다는 한 번 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 현성 씨도 속으로는 많이 미안해하고 있을 겁니다. 분명히 그럴 거예요. 제가 이런 자리를 만드는 걸 속으로 환영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 잘못이 크다는 건….” “혜진 씨 잘못이 아닙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죠. 그냥 오해와 실수가 쌓이고 쌓여서… 그게 터진 거라고만 생각합시다. 마음의 짐을 더셔도 돼요. 미안해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계속 이러시면 제가 더 불편해진다니까요. 제가 뭐 험한 일을 당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멀쩡히 돌아왔잖아요? 상처 하나 없는데… 뭘 사람이 그렇게 딱딱하게….” “…….” ‘조금 아팠으면 원망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건 아니었잖아?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고, 혜진아. 나 날개도 달았어. 시바, 날개도 달았다고. 시바, 날개도 달았다니까! 너도 보면 놀라서 자빠질 텐데….’ “전부 다 잘 풀렸어요.” ‘날개도 달았고요.’ 말을 내뱉으며 살짝 미소를 보내자. 힘들지 않았다는 걸 보여줘야 했으니까.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조혜진이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달라진 것 같다. 이기영이라는 인간에게 진심으로 감동한 것만 같은 얼굴은 괜스레 나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물론 옆에서 나를 쓰레기 보듯 바라보는 이지혜의 눈빛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사실…. ‘고마워해야 맞지. 아암, 그렇고말고.’ 조혜진의 잘못도 일부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지혜 누나 자꾸 사람 그렇게 보지 마.’ “큼, 그나저나 출발 안 할 거예요?” “아, 그럼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회의장 쪽에는 미리 연락 넣어놨어요. 마차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열리니까 회의 내용과 관련된 브리핑은 마차 안에서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뭐, 감사할 게 있나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부길드마스터?” “물론 괜찮습니다. 앉아서 대화 몇 마디 주고받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고, 최대한 빠르게 공식 입장을 발표해야 하는 상황에서, 저 편하자고 시기를 늦출 수는 없으니… 아마 도착할 때 즈음이면 교황청에서도 발표할 거리가 있을 겁니다.” 대충 내뱉기는 했지만, 사실 딱히 괜찮은 상황은 아니다. ‘너무 갑작스러웠어.’ 앞서 한 번 언급했던 것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회의 내용이 문제. 물론 대부분의 인사가 사적으로는 깊은 관계에 얽혀 있지만, 이런 이들이 공적으로도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내는 것이 아니다. 아예 안면이 없는 것보다는 내 말에 잘 따라주겠지만, 정치적 입장이라는 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겠는가. 이를테면 사망률이 높을지도 모르는 7전선에 다완의 주요 길드들을 배치한다고 생각해 보라. 안개 소환사, 궁수와는 그리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만 녀석들이 곧장 7전선으로 향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줄 리 없다. 최소한의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를 만들어 작전권을 가지고 왔지만, 대륙은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여러 무력집단이 모인 곳이다. 중립국 라이오스와 신성교국 그리고 교황청, 엘프들 정도가 무한한 지지를 보내고 있을 뿐이다. 왕국 연합 중에서는 아직도 신성교국과 이기영을 견제하는 놈들도 있었고, 연방의 생존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교국과 으르렁거렸던 공화국도 완전히 신뢰를 주고받고 있는 상태가 아니지 않은가. 물론 각 집단에 이름난 권력자들이야 최대한 포섭하기는 했지만…. ‘이건 어려울 수밖에 없지.’ 심지어 그전에 있던 매뉴얼을 완전히 뒤집어야 하는 회의였으니까. 기존 계획을 자리 잡게 하는데도 조금 스트레스가 느껴질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심지어…. ‘너무 급하게 열려서 로비도 제대로 못 했고….’ 적폐친구들과의 우정을 돈독히 하는 시간도 부족했다. 이지혜가 기존에 준비한 것들이 없었더라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시간의 배 이상을 잡아먹지 않았을까. ‘이 누나 쉴 시간은 있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해볼 정도의 퀄리티. 항상 그랬지만 마차 안에서 이루어진 브리핑은 만족스럽다. ‘뭐, 쉴 시간은 있었겠지. 혜진이랑 체스도 두면서 좋은 시간 보내셨는데.’ 소리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차단벽의 뒤로 보이는 조혜진 역시 이지혜에게 호의적인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제법 유대감을 쌓은 모양이다. “왕국 연합 쪽 귀족들 일부는 포섭해 놨어요. 공화국하고도 이야기하고 있고요. 다만 전쟁 이후에 챙겨줘야 할 게 조금 많네요. 희생한 만큼 챙겨달라 이거죠.” “…….” “몇몇 대형 길드는 보상으로 튜토리얼 던전을 관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걸 요구하더라고요. 이 건은 일단 보류하기로 했죠. 전쟁 이후를 생각하는 집단들이 대부분이에요. 피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으니 끝난 이후에 받아갈 수 있는 걸 받아가고 싶다 이거겠죠. 문제가 있다면 모든 이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고… 오빠가 한번 만나서 이야기해 봐야 할 거예요. 물론 저도 접선할 거고요. 회의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인사들이랑 만나는 스케줄 잡아놨으니까. 확인해 보세요.” “쉬는 시간도 쉬는 게 아니네. 빼곡하기도 하고. 한 사람당 10분이면 너무 시간이 촉박한데….” “오빠 사람 기분 맞춰주고 샤바샤바 하는 거 잘하잖아요. 사람 하나 구워삶아서 바보 만드는 게 주특기니까. 잘해주실 거라고 믿어요. 이번 회의를 어떤 분위기로 끝내느냐는 오빠한테 달려 있다고요.” “…….” “아! 아까 말씀 못 드렸는데 보급로도 바꿀 수밖에 없었어요. 기존에 계획했던 게 전부 무위로 돌아간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아쉽네요. 시간만 조금 더 있었으면 터널을 만들든지, 아니면 다른 수송로를 찾아보든지 해볼 텐데….” “여기 공사 들어간 거 아니었어?” “이미 철수시켰죠. 어차피 완성도 못 할 텐데… 정하얀이 움직인다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보급품 옮기는 거야 쉽잖아요.” “지금은 못 움직여.”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텔레포트 마법이 있으면 뭐 하나… 이런 쪽으로는 도움이 안 되는 데.” “탑들에는 이상 없는지 확인해 봤지?” “시범 운행까지 마쳤고 문제없어요. 곧바로 사용해도 될 정도로 관리하고 있으니까, 그 부분은 안심하셔도 돼요.” ‘누나, 진짜 왜 이렇게 능력 있어.’ 확실히 검은 백조에서도 목을 맬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일하는 중에도 길드 내에 그녀를 따르는 이들은 여전히 많다. 1티어에 가까운 무력을 갖춘 하연수, 심지어 검은 백조의 길드마스터 인 박연주마저 그녀에게 계속해서 러브콜을 보내오고 있다. 일이 끝난 후에는 꼭 이지혜를 돌려달라는 요청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나 역시 그녀를 계속해서 내 옆에 두고 싶다. 기본적으로 유능함이 탑재되어 있기도 했고, 그녀는 자기 자신을 가꾸는 데 끊임없이 노력하는 스타일이었으니까. 외관을 가꾸는 데 집착하는 것 이상으로 능력을 가꾼다. 그게 그녀가 빌런들과 함께 대륙 하나를 말아먹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이번 회차에서는 동료라서 다행이야.’ “그나저나… 이번에는 조금은 세게 나가셔야 할 것 같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반발이 예상되기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평소처럼 여러 가지 사정 봐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애들은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게 가장 합리적이에요. 부작용은 이후에 수습할 수밖에 없어요.” “차라리 독재할 걸 그랬나.” “사실 따지고 들어가 보면 비슷한 것 같기는 한데… 역사가 주는 교훈을 잊지 말자고요. 우리 아직 그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잖아.” “…….” “그나저나 우리 얼마나 남은 거예요? 오빠 표정도 생각보다 안 좋은 것 같은데.” “36일.” “네?” “36일 남았어.” “…….” “…….” 곧바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강연하다. 역시나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을 보인다. 시간이 빠듯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될 것 같아요? 겨우 36일? 너무… 너무 빠른데?” ‘나도 인정해, 누나.’ “아직 병력 배치도 전부 안 끝났어요. 이 넓은 땅덩어리에 병력 전부 자리 잡게 하는 것만 해도 30일은 걸릴 걸요? 정하얀도 못 쓴다면서 다른 방법도 없잖아요? 보급은 또 어떻게 할 거야? 병사들 피로도는 어떻게 하고? 텔레포트 사용 가능한 마법사 또 어디 없데요?” ‘나도 있으면 쓰고 싶지, 누나. 없는데 어떻게 해.’ “되게 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어.” “…….” “…….” “오빠.” “응?” “이거 손절 매뉴얼 있죠? 탈출 루트도 만들어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물론 만들어놨지.” “…….” “…….” “와, 진짜… 진짜….” “…….” “상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하고 더 쓰레기 같다니까. 일 터진다는 이야기 듣고 제일 먼저 만들어놓은 게 그거죠?” “…….” “…….” “안 그래도 누나한테 슬슬 전해주려고 했어. 미리 말해주는 건데 노아의 방주에 탈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안 돼. 태울 인원 10명 정도만 적어놔. 탈출할 때 되면 재빠르게 챙겨서 다른 곳으로 튈 거니까.” “기쁘기는 하지만, 10명은 너무 적은데….” “많이 챙기면 챙길수록 복잡해지니까 어쩔 수가 없네. 망할 것 같다 싶으면 곧바로 손절하고 나를 거니까, 신호 잘 봐.” “어련하겠어요?” “튈 때는 속도가 생명이니까. 회의 끝난 후에는 미리 가방 좀 챙겨놓는 게 좋겠네.” “막상 튀려고 하면 정말 아쉽겠네요. 여기서 이뤄놓은 게 제법 많은데… 먹음직스럽게 키운 과실을 다른 사람이 따먹는 것 같은 기분이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거 안 뺏기게 잘하자는 거잖아. 어쨌든 내릴 준비 하자. 슬슬 도착한 것 같은데.” “첫 단추, 잘 끼워야겠네요.” “응.” 이 첫 단추가 중요하다는 것에는 그녀도 백번 공감하는 모양이다. 중요한 회의나 PT에 들어갈 때 간혹 보여주는 특유의 표정이 눈에 보인다. 그녀에게도 이번 회의가 무척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지금까지 키운 과실을 먹느냐 뺏기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회의였으니까. 제법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자 여기저기서 고개를 숙여왔다. 사령 본부라고 불릴 정도로 권력자들이 많이 있는 곳이다 보니, 전 대륙의 권력자들과 함께 회의실을 찾은 모험가들, 전설 등급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흔하게 보인다. 심지어 내가 그동안 보지 못한 유형의 인재도 많다. 그만큼 이 안에 자리한 이들이 중요한 인물들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말을 많이 하게 될 것 같아 입을 풀고 옷차림을 정리했다. ‘현성이도 안에 있겠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병풍처럼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보통 회의에 들어갈 때의 김현성의 모습이 딱 그랬으니까. 이쪽의 호위 포지션으로 참가한 조혜진은 조금 긴장한 것 같은 눈치, 괜스레 다시 한번 자세를 잡고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을 때였다. “…….” ‘뭐야, 이거… 분위기 왜 이래.’ 고성방가와도 같은 소음이 들려올 거라고 생각헸디.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렇지 않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장내,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살기가 장내를 뒤덮었다는 것만 알겠다. ‘나, 이거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아.’ 어딘가 북쪽에 있는 나라 위원장님께서 국정을 주관하실 때의 분위기가 이랬던 것 같았다. 하나같이 한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은 가관, 저도 모르게 김현성이 있는 방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기영 위원장님 입장하셨습니다.” ‘뭐야, 아니야… 나 그런 위원장 아니야.’ # 656 회귀자 사용설명서 656화 회의(2) 내가 다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숨 쉬는 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 장내. 흘러내리는 땀도 닦지 못하고 있는 놈들이 대다수. ‘이 장소가 이렇게 더운 곳이었나’라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분명히 온도 조절 마법도 유지되고 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이기영 위원장님 입장하셨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려 온 직후. 심지어 이쪽의 등장을 고하는 이의 목소리도 덜덜 떨려오고 있었다. 짝짝짝짝! 박수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 치는 이들이 시야에 비친다. 필사적으로 양 손바닥을 두들기는 모습은 경쟁이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 심지어 기립까지 하고 있으니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모두가 대륙의 주요 권력자들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라.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이 아닌가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얼굴들이 눈에 띈다. 물론 모두가 공포에 질린 것은 아니다. 교국 지도자 자리에 앉아 있는 오스칼이나 교황청의 인사들, 캐슬락 의원, 카트린 의원, 엘리제 의원과도 같은 이들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우리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은 이전부터 응당 저런 대접을 받았어야 했다는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짝짝짝짝짝! 자리에 앉기 전까지는 박수 소리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멈춰, 이 새끼들아. 멈추라고.’ 이지혜 역시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얘는 기분 좋은가 보네.’ 오히려 현재의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름이라도 돋는지 옆에서 흠칫흠칫 몸을 떨고 있다. 이지혜가 머릿속으로 그리던 광경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본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어째서 이런 분위기가 형성됐는지는 궁금하지 않은 모양, 아니, 원인을 찾을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지금은 쏟아지는 박수세례를 즐기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뭐. 아니면 이미 원인이 뭔지 알고 있던가. 나 역시 알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이 상황을 만든 게 누군지 정확히 보인다. ‘시바, 무슨 짓을 했길래 이래.’ 이쪽과 정치적으로 조금이라도 대립한 적이 있던 인원 모두 김현성의 눈치를 보고 있었으니까. “귀빈분들께서는 자리에… 네,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커다란 박수 소리가 그친 것은 바로 그때, 회의실이 다시 한번 침묵에 휩싸였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상황에 당황스러웠지만, 어째서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아마 내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회의에 늦어서….” “콜록, 콜록.” “…….” “…….” “콜록, 죄송… 죄송합니다. 죄송, 콜록, 스읍.” 왠지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느낌이다. ‘누가 감히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내가 마음의 눈으로 보니 네 머릿속에 마구니가 들었구나. 어서 빨리 전술 김현성을 들라 하라!’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내뱉을 분위기가 아니다. 사레라도 들렸는지 몸을 움찔거리는 녀석이 애처롭다. 기침을 멈출 수 없는지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는 모습은 가관. 도대체 뭐라고 말했길래 이런 분위기가 형성됐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쟤, 나름대로 권위 있는 모험가였는데…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와서 나름대로 프라이드도 가지고 있었고… 얼굴이 붉어진 게 불쌍해 보이잖아. 아니나 다를까 김현성이 녀석을 바라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괜스레 헛기침하자 조금 멀리 떨어져 앉아 있던 김현성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흑화한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당연히 나를 바라보는 눈에 적개심이나 나쁜 같은 감정은 없다.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겠지. 김현성이 볼 때는, 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지친 몸을 이끌고 이곳에 온 것처럼 보일 테니까. 다시 한번 대륙을 위해 노력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얼굴에 얼핏 묻어나오는 씁쓸한 감정이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괜찮다는 듯, 별일 없었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안심하는 듯한 모습. 녀석 역시 고개를 끄덕여 왔다. 자기가 전부 알아서 해주겠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아예 없지는 않다. 사실 나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든다. 편하게 회의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 스트레스가 덜했으니까. 하지만 너무 단단한 것은…. ‘부러지게 마련인데….’ 조금 강하게 나가는 것과 아예 강압적으로 쥐어짜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김현성의 이미지 추락도 추락일뿐더러, 이 새끼들이 반발심에 바깥 놈의 편을 들거나 제3의 선택지에 주사위를 던질지 누가 알겠는가. 물론 이런 분위기에서 그런 미친 짓을 할 놈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어느 집단이든 또라이 한 명쯤은 있게 마련이다. ‘현성아, 마음은 고마워. 고마운데….’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얘들 쥐어 패기라도 한 거야? 아니면 숨도 못 쉬게 살기라도 뿌렸어?’ 내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니 아마 그 직후 분위기가 바뀌지 않았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이런 분위기였을 수도 있고…. 이 어색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나마 합리적인 선택은 배드캅과 굿캅을 나누는 것. 녀석이 회초리를 들면 이쪽은 위로를 해주는 포지션으로 가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슬그머니 회의 진행자를 바라보며 손바닥을 내보이자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여는 게 시야에 비쳤다. “대…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이기영 위원장님께서… 네, 그….” ‘쟤는 왜 또 말을 못 해?’ 답답한 마음에 곧바로 단상 위로 튀어 나가자. “그… 발표를, 아니, 설명회, 아니, 의제를… 발표… 시작… 하겠….” 어정쩡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수를 한 번 짝 치며 미소를 띠자 조금은 분위기가 환기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이기영입니다. 제때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오랜 시간 여러분들을 기다리게 한 점 역시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많은 분이 궁금해하시는 현 상황에 관한 브리핑과 이후에 일어날 여러 가지 일 및 작전에 관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만….” “…….” “평소답지 않게 분위기가 조금 딱딱하군요. 물론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여러분이 뭘 걱정하시는지 예상이 갑니다만… 아주 조금은 긴장을 푸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딱딱한 분위기에서는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는 법이니… 아직 일이 터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네, 아직 대륙이 완전히 그들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은 아니니까요.” 이쪽이 분위기를 환기하려 한다는 걸 아는지 몇몇이 안심했다는 듯이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아직도 그 압박감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이 정도의 분위기도 괜찮다. 적어도 아까 같은 분위기보다는 낫지 않은가. 입을 털기에 딱 적당한 분위기, 중간에 태클을 걸거나 질문세례를 하는 이도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아직도 김현성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 그 누가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 “36일.” “…….”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는 예언의 시기가 오기 전까지, 정확히 36일이 남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침묵이 깨진 것 같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웅성거리는 소리는 인사들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려줬다. 그래 봤자 탄성이나 탄식이 들려오는 정도였지만, 쥐죽은 듯이 조용하던 장내를 일깨우는 데는 충분한 발언이었다. ‘겨우 36일.’ 겨우 36일이다.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질적인 빛이 베니고어의 예언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예상하거나,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시간이 촉박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갑작스럽지만 대륙 보호 관리법에 따라 지금 이 시점부터 전 대륙을 전시 상태로 선포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이에 전 대륙의 모든 무력 집단과 국가는 관리 위원회에 임시 편입되며, 제1 작전권 역시 보호 관리 위원회가 주관하게 될 것입니다. 조직 체계 역시 전시 체제로 개편되며 이전에 브리핑을 드렸던 그대로, 전쟁이 끝나고 대륙이 안정을 찾게 될 때까지 위와 같은 형태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여기가 문제인데.’ 반발을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너무 갑작스럽지 않으냐. 겨우 36일 남은 이 시점에서 메인 작전권을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가 가져가는 것은 무리수라고 생각한다. 충분한 훈련과 협의가 있어야 한다. 준비하는 기간이 너무 부족했고,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판단되는 만큼 넙죽 작전권을 넘기기에는 무리가 있다. 작전 본부를 단일화할 필요성은 이해하지만, 본부를 지역별로 잘라 여러 개의 작전 사령부를 두는 게 더 합리적이다. 급하게 새로운 방법을 갑작스럽게 도입하는 것은 병사들의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어오지 않을까. 물론 받아칠 말도 준비되어 있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가 출범할 당시에도 많이 부딪쳤던 왕국연합의 인사 한 명, 보수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녀석’ 바스티안. 사실 나쁜 녀석은 아니다. 간혹 부딪치기는 했지만 그나마 생각이 트인 녀석이었고, 실제로 마지막에 와서는 이쪽에게 힘을 보탠 녀석이기도 했으니까. 무엇보다 문무를 겸비하고 있어 상당히 쓸 만하다고 생각한 녀석 중 하나였다. 물론 제거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녀석이기도 했다. 바스티안의 존재는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가 완전한 독재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증거였고, 폭주하는 이쪽의 브레이크를 걸어줄 억제기이기도 했으니까. 나 역시 녀석 때문에 깨달은 게 많다. 적당한 타협점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더 좋은 결론을 만들어가기도 했고…. 이를테면 필요 억제기로 분류한 녀석 중 하나였다는 거다. 이지혜가 반박 자료를 준비한 것 역시 녀석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당연히 녀석이 뭔가 말을 내뱉을 거라 생각해 이지혜를 바라보자 이지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 화면을 띄울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것이 문제. ‘뭐야.’ 이윽고 쏟아질 목소리들을 기다려 봤지만, 그 누구도 의문을 표하는 이가 없다. 왕국의 정통성이니, 뭐 자주권을 넘길 수는 없다느니 하던 녀석들 역시 마찬가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은 거짓말 같다. 뭐라도 말해보라는 듯 녀석들을 바라보자…. ‘뭐야, 너. 그러면 안 되지. 뭐라도 말해줘야지.’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하는 게 눈에 보인다. ‘자주권이고 뭐고 하더니, 왜 그렇게 시선을 피하고 그래. 우리 자주 부딪치기는 했지만… 내가 당신을 그렇게 싫어하는 건 아니었는데…. 이런 거에 반발했다고 안 건드린다니까. 원래 당신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기도 하고… 당신이 반발해 줘야 이쪽에서 준비한 자료들을 보여주지. 물론 너무 시비 거는 건 좀 거슬리기는 하는데… 우리 좋았잖아, 그렇지 않아?’ 하지만 여전히 이쪽의 시선을 피한다. 할 말이 없다는 듯 눈을 감고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꼴은 가관. 모두가 예스 할 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바스티안 역시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른 질문 없으십니까?” 침묵에 빠진 장내는 당황스러울 정도, 조금 의아해하는 내 얼굴을 확인했는지 사회자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다른 의견이 없으시다면 본 의제를 곧바로 투표하도록….” 투표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생각보다 더 황당한 상황에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각자 고개를 처박은 채로 손거울을 누르고만 있다. 커다란 여신의 거울이 비친 결과는 무려 만장일치. ‘뭐야, 시바. 뭔데….’ “만장일치로 첫 번째 의제가 가결되었음을 선언하겠습니다. 이에 현시점부터 대륙의 모든 무력 집단과 국가를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편입, 전시 상태에 진입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짝짝짝짝짝짝! 박수 소리에 내 귀가 다 아프다. ‘아니, 시바….’ 혹시나 역사가 이기영을 독재자로 기억하지는 않을지…. 쓸데없는 걱정이 드는 것이 당연하리라. # 657 회귀자 사용설명서 657화 회의(3) 편안한 분위기에서 무난하게 회의가 진행됐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이 정도로까지 무난하게 진행될 줄은 몰랐다. 아니, 무난하다는 표현조차 부족하다. ‘앞으로 전 대륙민들은 화장실을 갈 때마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보고하고 가야 한다.’ 이런 의제를 내밀어도 만장일치로 가결되지 않을까. 조금 과장된 표현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모두가 하나가 되어 있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달려간다는 것은 무척 만족스러운 일이지만…. ‘시바….’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이건 너무한 것 같은데.’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누구 하나라도 반대해야 되는 거 아니야?’ “아, 이번 의제는… 기권이 한 표….” ‘그래, 그거야. 기권도 하고 그러라고.’ “제가, 제가, 잘못 눌렀습니다. 죄송… 합니다. 찬성! 찬성입니다! 무조건 찬성합니다.” ‘아니, 그걸 굳이 왜 말하고 그래.’ “아, 네, 그렇다면… 네, 다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하겠습니다.” ‘시비라도 좀 걸어봐. 진짜로 뭐라고 안 할 거라구.’ “네, 이번 의제 역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분위기가 점점 더 기묘해졌다. 초반에 박수 세례를 즐겼던 이지혜 역시 당황한 반응이었다. 다소 강압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그녀였지만, 이렇게까지 순조롭게 풀릴지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마냥 기뻐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안 그래도 여러 가지 부작용을 걱정하는 상황에, 지금 이 문제가 어떤 부작용을 야기할지 걱정될 게 뻔했으니까. 사실 몸이 편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찍어 누르는 게 편하다는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힘으로 눌러 버리고 찍 소리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데 다른 걱정거리가 필요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동안 배우고 봐온 것이 자꾸만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이런 방식은 끝이 안 좋을 수밖에 없다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으리라. ‘내가 너무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건가?’ 이미 세계관 최강자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이가 이쪽과 연줄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배드 엔딩은 피할 수 있다고 느껴졌지만, 녀석과 나만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지 않은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대중의 시선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나 역시 인간이었으니까. 괜히 독재자 이기영이라는 그림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다. 이기영 국방위원장은 빛에 휩싸인 이기영 명예추기경과는 어울리지 않은 단어였고, 무엇보다 다른 변수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당장 공포에 짓눌려 할 말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자꾸만 최악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어떻게 불안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안 그래도 36일밖에 안 남은 시점에서 각 집단의 지도자들이 속으로 삼키는 것이 있다면…. ‘무너지는 게 한순간일지도 모르는데….’ 천사들의 편에 붙어버리는 인간 놈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가진 상식선에서는 인류를 버린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자기 이익을 챙기는 쓰레기 같은 놈들이 있게 마련이다. 실제로 1회 차에서도 녀석들의 편에 붙은 세력이 있다는 걸 떠올려 보라. 절대로 내 견해가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둠현성, 시바.’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을 김현성이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당황스럽다. ‘이 새끼, 왜 이렇게 막 나가는 거야.’ 어째서 조혜진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심지어 나를 때리려고 손도 들어 올리지 않았던가. 결국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당시 녀석의 눈빛은 정말로 나를 때리려 마음을 굳게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직도 조금 차갑던 그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이왕 흑화했으니 이제 자기 멋대로 살기로 결정한 건지, 아니면 세간의 시선이나 정치적인 것들을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이 고삐가 풀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 시바, 그럴 만해. 이제 마음대로 살고 싶을 때도 됐지.’ 몇십 년이 넘는 긴 시간,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기만 했다는 걸 떠올려 보면 더욱더 그렇다. 가면쓰레기만큼이나 녀석을 괴롭게 만들었던 게 이런 정치적인 문제였을 테니까. 이제 좀 내 마음대로 하고 싶고, 막살고 싶고, 굳이 싫어하는 사람들이랑 마주치면서 쓸데없는 이야기도 들어줄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테고, 적폐 친구들 비위 맞춰주며 웃는 것도 짜증 났겠지, 뭐. 이제 슬슬 이렇게 사는 게 멍청한 짓이라는 걸 깨닫고, 기왕 이세계로 온 김에 깽판을 치고 싶은 고등학생의 심정이 됐을지도 모른다. 때마침 흑화의 기운 마저 넘실거리는 상황, 자신의 오른팔에 봉인돼 있던 흑염룡을 마음껏 개방시켜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정도가 너무 심해.’ 그 정도가 과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굳이 이런 식으로 의제들을 가결시킬 필요가 없다. 3표 차이로 가결되더라도 가결은 가결이었으니까. 원래 평소에 얌전하고 공부 열심히 하던 놈들이 한번 맛이 가면, 끝없는 탈선의 길로 빠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생각이 들어와 꽂혔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마치 사기 결혼을 당한 것 같은 느낌, 성실하고 순진한 모습에 끌려 인생을 배팅하기로 마음먹었건만 술에 취하니 나쁜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녀석의 경우에는 어둠의 힘에 취한 것이라고 봐도 되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살펴봤지만 그런 놈이 튀어나올 리 없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여신에게 선택받은 인간에게 자기 생각을 당당히 밝히세요. 그는 현재 당신의 조언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0/1)] [바스티안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바스티안은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 ‘뭐 해, 이 새끼야. 빨리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 하지만 아직도 시선을 돌리고 있다. 퀘스트까지 무시하는 얼굴을 보니 기가 차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베니고어와 함께하는 인간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현명하고 신앙심 깊은 조언자가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그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세요. (0/1)] [베드리아로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리아로는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녀석이 이미 포기했다면 이번에는 사제를 목표로. 본인들이 모시는 신으로부터 직접 목소리가 내려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아마 뭐라고 말이라도 해오지 않을까. 로렌 신의 독실한 신자이자 성자급의 신성력을 보유한 베드리아로. 살짝 기대하는 눈빛으로 녀석을 응시했지만, 녀석 역시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할 뿐이었다. 신에게 자신을 바친다며 말버릇처럼 말하던 것치고는 패기가 없다. 이놈도 마찬가지고, 저놈도 마찬가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몇에게 퀘스트를 뿌려봤지만, 입 뻥끗하는 녀석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혹시나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걱정하는 녀석이 전부, 27군단 사태 때에도 용맹하게 검을 들었던 양반들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바닥에 보이는 붉은색 얼룩도 왠지 모르게 신경 쓰인다. ‘아니야. 그 정도로 막장일 리는 없지. 그냥 뭐 얼룩이겠지, 얼룩일 거야.’ “이번 의제 역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짝짝짝짝짝짝. 김현성이 없는 곳에서는 조금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해오지 않을까.  마침 딱 쉬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타이밍. 잠시 휴식하겠다고 공지한 후 재빠르게 접선 장소로 향했다. 처음과 목적이 조금 달라진 상황에 괜스레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본래는 회의가 잘 풀리지 않을 상황을 예상해 만든 비밀 접선이 이런 식으로 사용될 줄 누가 알았을까. 발걸음을 옮기자 곧바로 이쪽의 옆으로 따라붙는 이지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만나기로 한 인사들이 있는 모양이다. “진짜로 당황스럽네요.” “내 말이.” “별별 상황을 다 예상하고 들어왔는데… 솔직히 이렇게 될 줄은 예상 못 했어요.” “나도 그래, 누나. 이거 괜찮을지 모르겠네.” “뭐, 일단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는 있으니까 나쁜 상황은 아니죠. 그렇게 좋은 상황도 아니지만… 굳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묻는다면 좋은 쪽이라고 봐요. 제1 작전권 가져왔잖아요? 여러 가지로 머리 아픈 문제들도 싹 해결됐고. 뒈질 놈들 제대로 뒈질 곳에 집어넣었고, 주요지역 관리도 전담하게 됐으니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요.” “나도 같은 생각이기는 한데… 일이 너무 어이없이 풀리니까 마음이 편치가 않네, 시바.” “오빠는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항상 최악을 먼저 생각하는 건 좋지만… 이번에는 별문제 없을 거예요. 자기가 예상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꼭 이러더라. 오빠, 진짜 컨트롤 프릭인 거 알죠? 오빠네 길드마스터도 마음 독하게 먹은 것 같으니까. 일단 상처 난 부위를 대충 꿰맨 거라고 생각해요. 제대로 못 꿰맨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터진 부위는 다시 메우면 되죠.” “그러다 썩는다니까.” “그래서 지금 소독약 치러 가고 있는 거잖아요.” “…….” “…….” “그건 누나 말이 맞네. 조금 이따 봐, 누나.” “오빠도요.” 옆길로 새는 걸 보니 공화국 쪽 인사들을 만나러 가는 모양인 듯했다. 이쪽도 괜스레 겉옷을 정리하게 된다.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발걸음을 옮기자 작은 테라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도착 안 했네.’ 먼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이내 조용히 안으로 들어오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진한 눈썹에 뺨부터 턱까지 이어지는 얇은 수염을 기른 모습, 얼굴과 어울리는 열정적인 눈빛이 기억에 남아 있었던 녀석이었지. “오랜만이로군요, 다니엘 님.” “네, 오랜만… 입니다. 이기영 위원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자주 연락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진작에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이런 일로밖에 만나지 않는 것 같아 죄송하군요.” “아니요, 저야말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안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그러지 못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피차 바쁜 상황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서로 미안하다는 말만 주고받을 게 아니라… 조금 더 건설적인 이야기로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으니… 갑작스럽지만, 본론부터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회의 말입니다만….” “…….” “혹시 제가 너무….” “아닙니다. 아무 일도 모르고,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네?” “저는 위원장님의 말씀… 말씀이 맞다고 생각해서… 네, 찬성표를 던졌을 뿐입니다. 다른 의도는 절대로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대륙의 위기가 아닙니까? 모두가 함께 모여 힘을 모아야 하는 이런 시기에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최대한 지양해야 합니다. 모두가 뜻을 하나로 모은 겁니다. 지금까지 응당 그래야 했죠. 네, 그렇습니다.” “…….” “제가… 그러니까 제가 지금까지 위원장님의 의견에 반하는 주장을 내세웠던 것은 어디까지나 위원장님께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절대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잘못된 길로 새지는 않으실까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뿐이라는 걸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위원장님과 반목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 ‘이 양반 왜 이래, 진짜.’ “조금 흥분하신 것 같은데… 안색이 좋지 않고….”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멀쩡합니다, 위원장님. 하하, 하하하하. 저는 멀쩡해요. 존경하는 위원장님과 마주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긴장했나 봅니다.” “…….” “파란 길드마스터에게 제가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걸 꼭 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꼭이요.” “…….” “자, 그럼 어서 회의하러 가시죠. 제 동지들 모두 저와 뜻을 함께하고 있으니, 남은 의제의 문제 역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하, 대륙을… 대륙을 지켜야지요.”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다. 3일 이상이 걸릴 거라고 생각한 회의가 반나절도 안 돼서 끝나기 직전에 있다. 심지어 반나절도 걸리지 않은 상황은 나를 더욱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단상에 서서 허겁지겁 회의실을 빠져나가려는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괜스레 헛웃음이 나온다. 마치 화생방을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치는 훈련병들의 모습 같지 않은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김현성이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기영 씨. 식사는 하셨습니까?” “…….” “회의가 잘 끝나서 다행입니다.” ‘얘, 이거 시바, 그냥 잡아떼려고 그러는 거구나.’ # 658 회귀자 사용설명서 658화 회의(4)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듯한 느낌이다. 물어보고 싶기는 했지만…. ‘무리해서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도 든다. 이지혜의 말처럼 좋은 쪽이냐, 나쁜 쪽이냐를 묻는다면 좋은 쪽으로 분류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어차피 회의에 3일 정도 쏟을 생각이었으니, 이 3일을 권력자들을 달래는 시간으로 사용하면 된다. 제대로 꿰매지지 않은 부분을 다시 한번 봉합하고 소독약까지 뿌리면 대충은 수습한 것 같은 모양이 될 것 같았다. ‘맞아….’ 날치기든 뭐든 일단은 의제를 통과시킨 것이 아닌가. 조금 불안정한 토지기는 했지만, 일단은 뼈대를 세웠다. 이제 단단히 고정하고 시멘트도 뿌려주고 벽돌도 쌓고 해야지, 뭐. “식사….” “네!” “아, 네, 안 그래도 식사하려고 했었습니다. 혜진 씨와 지혜 씨도 함께 왔으니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잠시 교국 진영 분들에게 잠시 인사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혜진 씨도 말입니까.” “네, 제 호위로 함께 와주셨습니다.” “…….” “…….” “그렇군요.” ‘현성아, 표정 안 좋아. 표정 좀 풀어.’ “아, 그리고 제가 들은 게 있어서 그러는데….” “네?” “혜진 씨에게는 따로 사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형 말 들어야 돼.’ 녀석은 조금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내가 이걸 알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 아니, 그것보다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훅 들어올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혹시나 조혜진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말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 역시 돌려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잘못한 것은 곧바로 잘못했다고 말해주는 것이 맞다. ‘혜진이랑 너랑 어디 보통 사이야? 사소한 실수 하나 했다고 밀어내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혜진 씨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기도 했고, 말하지 말라고 부탁드린 것도 저예요. 제가 라파엘에게 붙잡혔을 때는….” “…….” “저 대신 자신을 인질로 삼아달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뭐 기억나는 거 없어? 뭐 기억나는 거 있잖아.’ 당연히 기억나는 게 있을 것이라 믿는다. 1회 차의 조혜진이 자신을 대신해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을 테니… 아니, 어쩌면 잠깐은 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보이다시피 둠현성의 영향이 있기도 했고, 1회 차를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괴로웠던 기억을 굳이 하나하나 떠올리기 싫었던 것은 아닐까. 그 와중에 감정이 크게 흔들렸고 자신도 모르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소리를 내뱉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괜스레…. ‘와, 이거 혹시 내가 둠현성 억제기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그 정도로 방금의 말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느낌. 단순한 가설일 뿐이지만 왠지 내가 있을 때만 이성적으로 생각할 여유를 가지는 것 같았다. 멍멍이에 비교하는 게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현재의 김현성을 맹견과 비교해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집 안도 개판으로 만들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은 물론 동네 주민들을 위협하고 물기까지 하는 맹견. 오직 주인 앞에서만 마음의 안정과 심적 여유를 찾는 댕댕이.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들을 하고 다녔던 것과는 다르게 현재 김현성의 눈빛은 그 누구보다도 이성적이다. 솔직히 둠현성이 되기 전과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리트리버 종류로 분류할 수 있었던 녀석이 어쩌다 이렇게 포악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 연기로 보이지는 않았다. ‘확실해.’ 김현성은 연기 못 하니까. 장담하건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게 확실했다. “누구나 실수하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누구나 완벽하지 않잖아요. 적어도 제 기준에서는 혜진 씨는 자신이 맡은 일을 완수하려고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여요. 몸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뛰어서 린델로 향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네….” “현성 씨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혜진 씨도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절대로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아니에요.” “네….” ‘이거 생각보다 쉬울 것 같은데….’ 얘네 둘 화해시키려고 또 말도 안 되는 개수작을 부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확실히 반성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딱 봐도 ‘내가 실수했구나, 내가 경솔했어.’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표정이 아닌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실수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김현성을 쳐다보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실수한 것 같군요.” ‘그래, 실수한 거 맞아.’ “사과해야겠습니다.” ‘그럼, 그럼. 착하네, 착해, 우리 현성이. 오이구, 착해라.’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현성 씨. 오스칼 님에게 인사드리고 곧바로 합류하겠습니다.” “네.”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괜스레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잠깐 자리를 옮기자, 오랜만에 보는 오스칼과 교국 의원들이 눈에 띄었다. 이 외에도 인사를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지만 아무래도 메인은 이쪽. 나를 발견하고는 환한 웃음을 띠며 다가오는 얼굴들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위원장님.” “오스칼 님, 오랜만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이기영 님.” “하하하, 네, 이게 몇 개월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주 연락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카트린 의원님.” “저희야말로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아무래도 위원장님이 너무 바쁘실까 메시지를 보내기가 죄송스러워서….” “엘리제 의원의 메시지라면 언제든지 괜찮습니다. 아직도 마를린 영애와는 간혹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으니,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시고 연락 주셔도 됩니다. 아! 그러고 보니 마를린 영애가 최근에 의원직에 출마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걔도 메시지를 너무 많이 보내서 문제야.’ “아쉽지만, 아마 다음이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에서는 총선을 진행하기에 무리가 있어서….” “그렇겠군요.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위원장님만큼은 아닙니다. 불철주야 대륙을 위해 노력하시니… 자기 건강까지 제대로 챙기지 못하실 정도로… 후우….” “언제나 그렇죠, 이기영 님은…. 다른 분들도 이기영 님께서 이렇게 대륙을 위해 희생하는 걸 알고 있어야 할 텐데… 오늘 보니까 꼭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네?” “쓰러진 게 확실한 거냐는 말부터 시작해서 어째서 이기영 님께서 회의실에 나타나지 않는지, 제대로 할 생각은 있는 건지, 대륙 보호 관리 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사태가 터진 지 7시간이 지난 시점에 뭘 하고 있는 건지,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많은 말이 나왔었거든요.” “엘리제 의원!” 오스칼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것 같은 엘리제가 눈에 띈다. 대충 봐도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얼굴, 대충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상이 간다. “너무 상처받지 마세요, 위원장님.” “걱정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스칼 님.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니까요. 이 모든 게 제가 부족한 탓 아니겠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이 가진 생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게 아니라 틀렸어요. 네, 몇몇 이들이 가진 생각은 확실하게 틀렸습니다.” “조금 마찰이 있었던 모양이로군요.” “마찰이라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목소리가 조금 나오기는 했지만 다들 납득해 주셔서…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조금 더 오래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아….” “저희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위원장님. 그리고….” “네.” “머지않은 시일 내에 꼭 차 한잔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오스칼 님.” 잠깐이지만 아리스 시녀의 얼굴로 활짝 웃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조금 더 대화를 나누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엘리제 의원의 수다 때문에 급하게 자리를 피하게 됐으니 아마 속으로는 살짝 그녀를 원망하고 있지 않을까. 당연하지만 이쪽은 그녀에게 감사하고 싶은 심정이다. 덕분에 내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게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이기영을 아니꼽게 보는 이들이 여러 차례 시비를 걸었을 것이 분명했다. 일이 터지고 7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좋은 먹잇감이 등장했다고 생각했겠지. 딱 엘리제 의원이 말한 그대로였을 것이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장이라는 자가… 허… 참! 일이 터지고도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다니… 정말로 이기영 위원장 그자가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거나. ‘정말로 건강이 안 좋은 건지 의심이 되기도 하거니와 만약 건강에 이상이 있다면, 그런 위원장이 이런 큰일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걱정돼요.’ 요 정도로. 어쩌면 조금 더 심한 말을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를 신설한 것부터가 실수였어요. 픽하면 쓰러지는 사람이 무슨… 차라리 기도라도 드리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 어쩌면 이것보다 더 심하게. ‘악마에게 한번 영혼을 판 전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저 이질적인 빛에 뭔가에 쓰여서 다시 한번 예전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그 모습을 종종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만, 물론 이기영 위원장이 잘못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심할 건 조심해야지요.’ 당연하지만 교국 측에서도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말 다 했습니까! 지금 그게 대륙을 구원한 영웅에게 하신 말씀이 맞아요? 당신 제정신이야?’ ‘대륙을 위협한 악마이기도 하지요.’ ‘이 미친놈이.’ ‘여긴 신성한 회의장입니다! 사과하세요! 그 말 사과하세요!’ 작정하고 이기영 위원장을 깎아내릴 생각으로 회의장에 왔었다면 정말로 저런 말들이 오갔을 가능성이 있다. 분위기는 금방 개판이 되었을 테고 결국에는 서로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을까. 아마 상대측에서는 가장 원하던 상황이었을 거다. 논점을 흐리고 회의 시간을 길게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게 뻔했고, 실제로도 효과적이었을 게 분명했다. 계속해서 물타기를 하고 결국에는 지지부진하게 마무리. 아마 놈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김현성의 존재였겠지. 안 그래도 막 나가자고 마음먹은 김현성이 이런 개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리 만무, 아마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걸어갔을 테고…. ‘파란 길드마스터, 지금 뭐하는 겁니까, 지금 뭐하는 거예요.’ 적폐 세력을 지키는 몇몇이 녀석의 앞을 가로막았을 것이다. 뭐, 전설 등급에 이른 놈들이었겠지만 살기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결국에 가장 열심히 입을 털고 있던 녀석의 앞에 선 이후 싸늘한 표정으로 놈을 바라보며 손을 올리고…. 콰직. ‘시바, 깜짝이야.’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눈에 들어온 것은 누군가가 떨어뜨리고 간 물건을 발로 밟고 있는 김현성. ‘시바,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자신이 나를 놀라게 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본인 역시 민망해 모습이었다. “제가 놀라게 했군요. 죄송합니다, 기영 씨.” “아니…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 기영 씨 말대로 혜진 씨에게는 정식으로 사과를 드렸습니다. 제가 잘못하기도 했고… 네, 당시에는 감정적으로 조금 격해져 있는 상황이어서… 실수한 것 같더군요. 이렇게 따로 지적해 주시고, 좋은 조언 해주셔서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니요… 감사할 필요까지는….” 녀석은 순둥순둥한 얼굴로 사과했다고 말했다. ‘콰직은 아니겠지?’ “그럼, 어서 밖으로 나가시죠.” ‘에이, 아무리 그래도 콰직까지는 아닐 거야.’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콰직 사건을 벌인 것치고는 무척 밝은 얼굴이었으니까. # 659 회귀자 사용설명서 659화 승리할 확률(1) 얼룩진 바닥을 보니, 둠현성화가 생각보다 심각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콰직이면 좀 그래….’ 물론 쓸데없는 선동과 날조로 대륙의 빛을 깎아내린 천인공노할 녀석들을 혼내줬다는 사실은 기뻤지만, 최소한 안 보이는 곳에서 처리하거나 남들 모르게 제거하는 게 더 나은 행동이다. 만약 정말로 주변의 상황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흑화한 상태라면…. 다른 것 다 제쳐놓고 김현성부터 원래대로 되돌려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해 볼 만했다. 물론 내 입장에서 그런 무리수를 던질 수 있을 리 없다. 김현성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게 가능할지도 문제였고, 만약 가능하더라도, 절대로 단기간 내에 성공시킬 수 있는 과업이 아니라는 것 또한 문제였다. 박덕구 각성 사태나 둠기영 뺨치는 연출과 스토리가 필요했고, 아쉽게도 현재 나는 그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심지어 대륙 전체가 여러 가지로 하향 평준화된 상황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선택지가 많지 않다. 시대는 김현성이 아닌 둠현성을 원하고 있었다. 김현성 자신이 가진 힘이 아니라는 게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무력 자체가 훨씬 상승했다. 양날의 검이기는 하지만 군침이 도는 카드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안고 가야 돼.’ 정하얀 마저 너프를 맞은 이 시점에 기대를 걸어볼 만한 인재는 버프된 둠현성뿐이다. 조금 기분이 찝찝해지기는 했지만, 일단은 웃는 얼굴로 녀석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으니까. “기대되네요. 그러고 보니 혜진 씨랑 지혜 씨는….” “아마 곧 이쪽으로 올 겁니다. 아. 저기 오고 있군요.” 둠현성이 제대로 사과한 건 맞는지 궁금해진 것이 당연했다. ‘그것까지 안 했으면 얘 진짜 심각해진 건데….’ 슬쩍 시선을 돌리니 천천히 걸어오는 이지혜와 조혜진이 시야에 보였다. 멀리서 봐도 웃음기가 보이는 조혜진의 표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했구나… 아직 그 정도로 막장은 아니구나.’ 자꾸만 올라가려고 하는 입꼬리를 최대한 막아서는 표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참을 수가 없는지 피식피식 웃음소리가 새어 나올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한바탕 가슴을 쓸어내리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조금은 황당해지기도 했다. ‘쟤도 진짜, 쟤다.’ “…….” ‘조혜진, 너 진짜 한심하다, 진짜 한심해.’ “그렇네요, 오고 있군요.” ‘진짜….’ “혜진 씨가 기분이 많이 풀어진 것 같아 정말로 다행입니다.” “아, 네. 다행이네요.” “혹시나 제 사과가 부족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아니, 혜진아. 현성이한테 마음의 짐을 남겨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니었어?’ “용서해 주신 것 같아서….” ‘뚱한 표정 한 번이라도 지었으면 현성이가 나중에 자리 한번 만들었겠지. 무조건 만들었을 거라고.’ 이런 생각을 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 절호의 기회를 두 발로 뻥 차버리는 모습에 내가 다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날 정도였다. ‘좀 찝찝하다 싶을 정도로 반응해야지. 그래야, 시바, 김현성이 ‘아… 내가 진짜 잘못했구나.’ 싶어서 더 관심 가져주고 더 잘해주고 그러는 건데… 나였으면 10년은 더 우려먹었겠다.’ 김현성의 입에서 사과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마자 고개를 사정없이 끄덕였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앞에 해준 말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김현성도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있을 거라고, 분명히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금방 사과할 거라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걸 직접 확인한 직후일 테니… 마음의 짐도 조금 덜었을 테고…. 쟤 성격이라면 저런 표정을 지을 만했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김현성이 어떻게 사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표정을 선보이고 있었다는 것 하나. ‘얘는 왜 이런 거로….’ 누가 보면 사과받은 것이 아니라 고백이라도 받은 줄 오해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진짜….’ 언제 한번 이기연을 재등판시켜 김현성 공략 과외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두 분 식사하시는 데 끼어드는 것 같아 괜히 죄송하네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지혜 씨도 여러 가지로 수고해 주시고 계시니까요. 이번 일도 그렇고, 도움을 많이 받는 것 같아서… 언제 한번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싶었는데. 그게 오늘인 것 같습니다.” “영광이네요. 현성 씨 식사에 초대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진작 초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튜토리얼 던전에서 나온 이후로는 사실 접점이랄 것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저는 제 할 일을 한 것뿐이잖아요? 기영 오빠를 옆에서 돕는 게 제 일이니 굳이 이러실 필요는 없어요. 저도 지금 제 일에 만족하고 있고… 하지만 굳이 초대해 주시니 감사하게 얻어먹을 수밖에 없겠네요.” “…….” “잘 먹을게요, 현성 씨.” ‘누나, 넉살 좋네.’ “그나저나 오늘 회의 좀 이상했죠?” “…….” “이렇게까지 쉽게 풀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누나, 그 말 괜히 꺼내지 마. 얘, 숨기기로 마음먹은 것 같아.’ 나도 그냥 생각 안 하기로 마음먹었어. 살짝 눈빛을 보내자 이지혜가 입 다물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캐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으니, 아마 다른 말을 해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뭐, 원인이 상관이 있나요. 좋은 게 좋은 거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이동하는 게 좋겠네요. 예약했다지만 너무 늦게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네, 지혜 씨 말대로 바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니 천천히 이동하시죠. 혜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길드마스터.” 어쩌다 보니 둘씩 짝지어서 앉게 됐다. 생각해 보니 조금 요상한 조합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조혜진과 김현성, 나와 이지혜가 함께 무언가를 한 적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훈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물론 이 훈훈한 분위기를 이끌고 있는 것은 이지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김현성이 이지혜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내부 평가가 올라갔나 보네.’ 이번 납치 사건에서 중요한 정보를 전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내 부관으로 함께 일해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누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는 마찬가지, 막말로 이지혜가 함께 있어 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정말로 골병이 들어 침대 위에 누워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와중에 안타까웠던 것은 조혜진이 아까의 따뜻함에 취해 있었다는 것. 솔직히 얘랑 김현성을 어떻게 이어줄지 답이 나올 것 같지가 않아서 머리가 아프다. 그렇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영양가 없는 대화가 대부분이었지만 이전에 있던 사건들 때문에 복잡했던 머릿속을 날려 버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현 상황에서 소소한 일상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을 리 없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때 즈음에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 이지혜가 눈에 보였다. 기왕이면 이대로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나 역시 이지혜가 던진 질문에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큰일이네요, 시간이 이렇게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 현성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현성에게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질문. 하지만 대답이 들려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글쎄요. 일단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우선 내부 정리부터 하고 충분한 준비를 해야겠죠.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정도 시간밖에 남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흠, 그건 조금… 놀랍네요.” “저 안에 있는 게 무엇인지…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것 역시 놀랍고요. 그래서 뭐가 있나요.” “적.” “…….” “…….” “얼마나 강한가요?” “강합니다.” “상대할 수는 있는 건가요?” “완벽하게 준비가 됐다고 하기에는 힘들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요. 물러설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뭔가 비책이라도 가지고 계세요?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치고는 무척 담담해 보이시는 것 같은데….” “저는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노력해 왔으니까요.” “가능성은 얼마나 잡고 있는지 물어도 될까요.” “글쎄요,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 “10%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 “네?” “운이 좋으면 15% 정도… 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김현성이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툭 던진 말이었지만 이지혜는 조금은 충격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아마 김현성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테니, 저 말을 확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현재의 전력으로 비둘기와 바깥 놈을 상대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이야기해 보지 않은 나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 ‘정말로?’ “최대한 희망적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닐 거야. 열심히 노력해 왔잖아.’ 스리슬쩍 이지혜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이미 생각에 빠진 지 오래다. 이미 마음은 노아의 방주에 타고 있는 상태가 아닐까. ‘오빠, 우리 그냥 손절하자.’ 그렇게 말해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 충격인데….’ 적어도 30%는 될 줄 알았으니까. 눈에 띄게 차가워진 표정으로 냅킨으로 입술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지혜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 “같이 가죠, 혜진 씨.” “네?” “같이 가요.” “저는 괜찮… 습니다.” “같이 가요.” “굳이….” “같이 가요.” “아, 네.” 이상할 정도의 기세에 밀린 조혜진이 당황스러운지 어버버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하지만 굳이 조혜진과 함께 화장실을 가고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당장 저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라는 뜻이지 않을까. 구태여 지금 당장 듣고 싶어 하는 걸 보니 정말로 가능성이 저것밖에 안 되는지 궁금했던 것 같았다. 이지혜와 조혜진이 잠깐 자리를 뜬 이후에는 곧바로 마력의 장벽을 쳤다. 살짝 입을 여니, 김현성이 곧바로 대답해 왔다. “정말입니까?” “네, 현재 대륙의 전력으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확률이 너무 낮은….”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아, 이거 진짜, 시바, 노아의 방주 타야 하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게 당연했다. 지금이라도 전부 다 던져 버리고 방주 계획이나 조금 더 가다듬는 게 좋지 않을까. 대륙이고 베니고어고 집어던져 버리고 박덕구가 만들어놓은 배를 타고 하늘로 날아가는 게 최선일지도 모른다. 벙찐 얼굴로 우리를 바라볼 대륙민들을 향해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라고 한 번 외쳐주는 것도 좋겠지. 역사 속의 개새끼로 이름을 남기는 게 죽는 것보다는 좋은 인생이지 않은가. 아니, 생각해 보니까 이름을 남기지는 못하겠네. ‘대륙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는 데, 역사는 무슨 개뿔의 역사야.’ 너무 왔다 갔다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자꾸만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엔딩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10%는 너무하다. 저도 모르게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는지 김현성이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 “…….” “걱정하지 마세요. 기영 씨의 바람대로 대륙을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잠깐, 그 노력, 며칠만 주머니 속에 넣어둬. 넣어둬야 할 것 같아.’ 녀석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 보였다. # 660 회귀자 사용설명서 660화 승리할 확률 (2) ‘이거 시바, 안 좋은데….’ 김현성에게 그럴 마음이 들었다는 건 주먹을 쥘 만한 상황이었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괜스레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게 된다. 정말로 다른 해결책은 없는지 머릿속에 계속 생각이 맴돌았지만, 그런다고 김현성이 자체 판단한 확률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었다. 항상 말했다시피 이쪽은 도박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다. 확률이 7할 이상일 때만 주사위를 던지는 타입이었고, 그마저도 모든 준비를 마친 이후에야 배팅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런 의미에서 김현성의 10% 발언은 대륙을 지켜야겠다는 내 판단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물론 어디까지가 사실일지를 먼저 확인해 봐야겠지만…. ‘아니야. 처음부터 꼬리 내릴 필요는 없어. 어차피 탈출 매뉴얼은 마련되어 있고, 언제든지 손절할 수 있으니까.’ 36일 안에 확률을 얼마나 올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투가 하루 만에 끝나는 것도 아니고, 전쟁 중에도 확률을 올릴 수단이 나올지도 모른다. ‘아, 이지혜 얘는 벌써 튈 생각 하는 것 같은데….’ 이지혜 또한 주사위를 던지는 걸 싫어하는 타입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벌써 진지하게 10명 명단을 채우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화장실 안에서 명단을 작성하고 있다는 것에 내 모든 걸 걸 수 있다. “1회 차와 비교했을 때는 어떻습니까?” “전체적인 성장을 논하기 이전에, 진도가 지나치게 빠릅니다. 이맘때 1회 차에서는 아직 그들의 존재조차 파악하지 못했으니까요.” “굳이 전력을 비교하자면 어떻습니까?” “터무니없이 모자랍니다. 물론 수준 자체는 상향 평준화 되고 있기는 합니다. 이를테면 더 건강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테이머 알프스 같은 새로운 인재들을 발견한 것도 맞습니다. 보급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고, 기영 씨가 만든 포션 덕분에 응급처치나 생존 부분에서 혜택을 받고 있는 것도 맞고요. 인류가 반으로 갈라서 서로 대립하지 않아 전력을 보존하고 있다는 메리트는 역시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 이상으로 부족한 면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게 적절할 것 같습니다.” ‘추억 보정은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너무 낮아. 확률이 10%라는 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수치야. 너, 김현성 아니고 둠현성이잖아.’ 어쩌면 김현성이 잘못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필사적으로 싸우던 전사들과 비교하면 부족한 게 사실이겠지만 이렇게까지 저평가 받을 정도로 대륙을 관리하지는 않았다. 1회 차에는 녀석들의 협력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아닐까. 악랄한 수법과 잔인한 행동으로 인류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가면쓰레기. 지금까지 진청이 왔던 길을 돌이켜 보면 비둘기 측에 여러 가지 선물을 던져줬을 가능성이 크다. 칭호는 전장 위의 현자, 직업은 군단 마도사. 애초 가면쓰레기는 개인의 능력으로 상대방을 찍어 누른다기보다는, 주변의 인재들을 블러핑하며 전장을 놀이터처럼 뛰어다니는 녀석이었다. 가면쓰레기가 없다고 해서 비둘기의 무력이 내려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그들의 전술적인 선택지가 줄어들 거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건 클 거야.’ 무엇보다 2회 차에서는 이기영이라는 인재가 살아남지 않았던가. 이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을 블러핑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면쓰레기 진청을 책략으로 밀어낸 전술 천재 빛기영의 존재는 인류의 승리 가능성을 1할 이상 더 끌어올릴 수 있다. “2회 차에는….” “네, 그자가 없습니다만… 저는 지금 전술과 전략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순수한 무력.” “…….” “무엇보다….” “네.” “네임드들의 성장치가 많이 떨어집니다.” “네임드 말입니까?” “예, 정확히 말하면 인류 측의 네임드 중에, 4대 천사를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게 가장 커다란 문제겠군요.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깥 놈 밑에 있는 비둘기 중에서도 특출난 무력을 가지고 있던 4마리의 비둘기들, 이를테면 원조 사천왕 같은 느낌의 녀석들이었다. 한 놈, 한 놈을 전술로 분류해도 무방할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가진 녀석들…. 나름 고군분투했던 1회 차에서도 엄청나게 막대한 피해와 손해를 감수하고도 놈들을 2명 잡아내는 것이 전부였을 정도로 난이도가 있는 놈들이었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어째서 김현성이 확률을 10% 정도라고 생각했는지…. ‘이제야 감이 잡히네.’ 전략과 전술, 보급과 컨디션 이전의 문제다. 놈들이 전술 김현성을 4기나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전쟁이 시작되는 즉시 4개의 구역에 전술 김현성이 차례대로 떨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구역 하나는 김현성이 틀어막을 수 있다고 해도, 나머지 3개의 구역에는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 만약 내가 지휘관이라고 하더라도 멍하니 전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전술 김현성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막을 수 없는 이레귤러이자 크랙이다. 내가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박덕구와 싸운다고 가정해 보자. 박덕구가 괴성을 지르며 초등학생들 사이를 돌파하는데 전략이고 작전이고 먹힐 수나 있을까. 과한 비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해 봤지만 양 떼 사이에 던져놓은 늑대 꼴이 될 거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전부 다 쓸데없는 개소리지.’ 최소한 부딪칠 수 있는 체급이 만들어져야 뭐라도 해볼 수 있다. 녀석들이 전술핵을 4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이쪽 역시 전술핵 4기, 아니, 최소한 전술핵을 억제할 수단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1회 차에서는….” “제가 한 명,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가 한 명을 마크했었습니다.” ‘그래서 두 명 잡아 죽일 수 있었던 거네.’ 괜스레 베니고어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오른다. 본래 용사가 되어야 했던 놈은 튜토리얼 던전에서 성검을 받지 못해 아귀들에게 몸이 뜯겼고, 녀석의 대용품으로 만들어진 회색빛의 용사는 반병신이 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다. 라파엘이 부활할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 새끼 상태를 보면 싸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성검 용사 파티 역시 마찬가지. 사천왕 아래에 있는 2선들을 상대해 줘야 할 사냥개 이주혁이나 기적의 사제 역시 생명 연장 유지 장치로 겨우 끊어지려는 생명줄을 유지하고 있었다. 1회 차의 영웅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주혁만 한 놈을 찾기는 힘들다. ‘대륙은 끝났어. 시바, 끝났다고….’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베니고어와 함께 희망의 새싹을 키워 나가기. (0/1)] [보상: 여신이 직접 내린 희망의 네잎클로버 씨앗.] ‘넌 좀 사라져 제발….’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거야, 이기영 신도. 지금까지도 잘해왔잖아. 지금 와서 포기하는 것보다는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 왜 우리가 이기영 신도한테 내린 힘도 있잖아. 물, 물론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0/1)] ‘알았으니까 제발 좀 가만히 있어, 시바. 아직 안 버렸으니까.’ “그럼 확률이 10%라고 말씀하신 건….” “네, 제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해냈다고 가정했을 때, 그 정도로 확률일 거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올릴 수 있겠네요.” ‘알지? 형이 너보다 너에 대해서 잘 아는 거. 전술 김현성 파바박 파바박 하면 두 배 이상은 더 끌어올릴 수 있을걸.’ “…….”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너 이제 시바, 전술 김현성 안 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 왠지 모르게 그런 분위기다. ‘와, 시바… 김현성, 이 새끼….’ 딱히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애매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이쪽에 부담을 주기 싫은 모양이다. 승률을 필요 이상으로 낮게 잡은 것 역시 나를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기쁘기도 했지만 뭔가 찝찝했다. 이기영을 최대한 무리시키지 않는 선에서 전쟁을 이끌어가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정작 결정적일 때 버림받은 느낌이 든 것은 당연하다. 물론 이쪽을 생각해서 내린 결심이라는 건 알았지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 시바. 수신기도 빼고 전장에 나간다, 이거지? 마음껏 나가봐라, 현성아. 형 이제 망원경도 있고 퀘스트도 내릴 수 있어서 네가 수신기 들고 나가든 안 들고 나가든 상관이 없어요. 내가 하자는데 네가 시바, 전술 김현성 안 하는지 한번 보자고.’ 억지로라도 메시지를 보낸다면 단언컨대 녀석은 받아들일 것이다. 눈앞에 달콤한 과실과 성과가 먹음직스럽게 자신을 유혹하는데 놈이 그걸 거절하고 배기겠는가. 아마 입술을 깨물면서도 몸을 움직일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효율이 적어도 두 배 이상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확률이 10% 더 상승해서 20%. 여기에 빛기영의 힘을 5% 정도라고 가정하면 25% 정도. ‘그래도 낮아.’ 하지만 김현성이 말한 것보다는 더 희망적이다. 문제든 놈들의 전술핵을 이쪽이 막을 수 있냐는 것이 아닐까. “만약 네임드 4명을 전부 막을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아질 겁니다. 확률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거고요. 하지만.” ‘나도 알아. 그 정도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 “하얀 씨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정하얀은 못 써.’ “따로 할 일이 있으실 테니까요.” 그 말 그대로다. 사천왕 중 하나를 상대할 카드로 정하얀을 소비시킬 수는 없다. 그녀의 역할은 조금 떨어지는 밸런스를 유지시켜 주는 것, 전투 초반에 할 일이 있다는 걸 고려해 보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만약 하얀 씨에게 여유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들 중 하나를 막아내는 게 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확실히 하얀이는 후위로 분류할 수 있으니까요.” “아니요. 전위니 후위니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얀 씨 역시 1회 차 와는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시간이 몇 년 더 있었더라면 이전의 폼으로 성장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하얀 씨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그 정도로 부족한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김현성의 입을 통해 다시 들으니 새삼스럽다. “물론 살상 마법 자체는 1회 차의 하얀 씨에게 근접해 있을지 모릅니다. 애초에 1회 차의 정하얀은 대규모 살상 마법을 잘 사용하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마법사로서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격차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마력도 그렇고, 응용력도 그렇고, 특성이나 창의력, 모든 부분에서 뒤떨어질 겁니다. 제가 가능성을 다소 낮게 잡은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고요.”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1회 차의 하얀 씨는 교국 전체를 옮겼습니다.” “네?” “대륙의 지도를 바꾼 거라고 말씀드리면 이해하기 편하겠군요.” ‘뭐야….’ “적들의 원거리 포격 마법의 대부분을 차단했고, 간혹 어쩔 수 없을 때는 전황 자체를 뒤바꾸기도 했습니다. 바다를 그대로 대륙으로 옮겨와 지상전을 해상전으로 만들기도 했고요.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얀 씨가 없었다면 부딪치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겁니다. 확실히 말씀드리건대 그녀는 이전의 저보다 강했었습니다.” ‘뭐?’ 대륙의 지도를 바꿔? ‘지상전을 해상전으로 바꿔?’ 그 정도면 신이라고 볼 수 있는 거 아니야?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그런 부분에서 우리는 개입할 수 없거든, 여러 가지 허가를 받아야 사항도 많고, 억제력도… 뚫어야 하고 신성도 많이 들고, 무엇보다 득이 되는 것보다는 실이 되는 일이 많아서… 옛날에 어떤 선배로 바다 가르기 했다가 파산할 뻔했다니까? (0/1)] ‘넌 제발 좀 가만히 있어.’ 아무래도 내가 1회 차 정하얀을 과소평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661 회귀자 사용설명서 661화 승리할 확률(3) 나 역시 마법사를 베이스로 시작한 만큼 마법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어제 식사시간에 김현성이 말한 게 어느 정도로 어려운 일인지도 알고 있고…. 단언컨대 정하얀이 이룩한 업적은 이미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있다. 1회 차 정하얀은 이미 신의 영역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만큼 1회차 그녀의 위용은 내 입을 벌리게 했다. 2회차 정하얀이 대량 살상 마법에 더 조예가 깊다는 점에서 그나마 희망을 품을 수 있었으나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어째서 김현성이 회귀 시작부터 정하얀에게 목을 맸는지, 비틀비틀거리며 쓰러질 것만 같았던 1회 차 인류가 어떻게 가면쓰레기의 손에서 버틸 수 있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진청이 그 귀찮은 짓을 해가면서까지 정하얀을 제거한 이유 역시 뻔할 뻔 자.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 것 외에는 정하얀을 제어할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아마 인류가 급격하게 밀리기 시작한 것 역시 정하얀의 죽음 이후일 거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이해도 간다. 마법을 수단으로 생각하면서도 대륙 제1의 마법사가 된 사람이 아니었던가. 모든 마법사가 그녀를 경외했고 학자들과 마도사, 연금술사 가릴 것 없이 그녀의 마법 매커니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취미와 좋아하는 것, 유일한 친구가 마법이었을 때의 정하얀이 어느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애초에 한계를 두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행동이었라고 단언할 수 있다. 가면쓰레기라는 불순물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정하얀은 조금 더 높게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취미가 이기영이기 때문에 만든 스토킹 마법들은 마음의 눈이 아니면 확인할 수 없을 정도. 다른 마법사는 물론이거니와 김현성조차 그녀의 마법을 감지하지 못했다. 솔직히 내가 정하얀의 마법들을 전부 다 파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아네모네의 눈은 없지만 정하얀이 자체 망원경 마법이라도 개발해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무섭기는 하네.’ 불안한 마음에 정하얀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좁은 방 안에 처박혀 몰두하는 모습이 보였다. 제대로 씻지도 않은 몰골, 클린 마법으로 몸을 한 번 훑으면 끝나는 그 일련의 과정조차 내팽개친 모습은 어찌 보면 정하얀답다.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죽, 죽, 죽일 거야. ‘…….’ -박, 박, 박미진. 꼭 죽여야지, 꼭, 꼭, 꼭, 죽여야지. 얘는 죽여야 돼, 응. 쉴 새 없이 펜을 휘갈기는 모습은 영화 속에서나 보던 천재 수학자의 모과 흡사하다. 무슨 마법을 연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녀가 성장하는 건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마력도 올랐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마력 스탯이 상향됐다는 건 놀라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제 막 출발선에 선 거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복잡한 심경에 한숨을 내쉬었을 때 나를 빤히 바라보던 이지혜가 말을 이어왔다. “역시 튀는 게 정답이겠죠?” “아냐, 누나, 25% 정도는 된다고 말했잖아.” “저는 그 정도 확률 가지고는 배팅 안 해요. 물론 최선을 다하는 척은 하겠지만 언제든지 탈출 작전에 손을 올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요. 저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한 명만 더 데려갈게요. 아무리 생각해도 10명은 너무 적어.” “그럼 그렇게 해. 솔직히 여유가 없기는 한데… 한 명 정도야 뭐 괜찮겠지.”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그래서 시뮬레이션은 해봤어?” “아, 네, 우리 막 아들이랑 같이 해봤어요. 정하얀이 서부 솔지르 구릉지를 바닷물로 가득 채우려면 스탯이 얼마나 더 상승해야 하는가. 현재 마력 스탯으로는 어느 정도까지 채워 넣을 수 있는가. 이거 맞죠?” “결과 나왔어?” 이지혜가 들고 있던 여신의 거울을 슬쩍 비췄다. [34.3%] “이런 작전은 없던 거로 아는데… 구릉지에서 해적 놀이라도 하려는 건 아닐 테고… 혹시 나 모르게 노아의 방주 2호기 만들려는 건 아니죠?” “그냥 하얀이가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 판단하려는 척도야.” “여기에 100% 꽉 채워야 이야기가 되는 거면 너무 모자란데요? 스탯을 두 배 이상 키우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거 아니에요?” “두 배 이상은 아니야. 기본적으로 10대가 넘어가는 스탯은 하나하나 올라갈 때마다 가산점이 붙으니까. 그래도 저걸 전부 다 채우려면 최소 20 이상은 올려야 하네. 지력 스탯까지 같이 상승한다는 걸 감안해도… 만약 최소 스탯을 전부 채운다고 하더라도 가능할지 모르겠고….” “가능한 거 맞아요?” “글쎄.” ‘솔직히 불가능할 것 같아.’ “차라리 1차전을 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성장을 기다릴 거라면 더 멀리 봐야 한다는 거죠. 오빠 악마들한테 붙잡혀 갔을 때 생각나죠? 그때도 폭발적으로 성장했었잖아요? 순간 이동 마법도 그때 나온 거고. 인류의 반 정도는 1차전 때 희생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넘겨주고 안쪽에 최대한 틀어박혀서 힘을 키우는 건 어때요? 36일, 아니, 이제 35일이죠? 35일 안에는 불가능할 테니까. 최대한 버티고 버티면 그래도 몇 달은 끌 수 있지 않으려나. 중간에 오빠가 한 번 납치당해 주면, 혹시 알아요? 행성이라도 소환해서 비둘기들 대가리에 꽂아줄지.” “그것도 생각은 해보고 있는데… 단순히 하얀이만 문제가 아니라서 그렇지.” “모든 고통과 고뇌 속에서 벗어나는 건 어때요? 그냥 노아의 방주 타자.” “누나가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나도 생각하고 있어. 다만 이 35일을 어떻게 써먹을 수 있는지만 보려고 그래. 공식 발표는….” “최대한 늦추고 있어요. 36일 이후에 대륙에 위기가 닥쳐온다고 하면 혼란스러울 게 뻔하니까. 언론도 오랜만에 입 닫게 하고 있고… 어제 회의실에 있었던 다른 애들 역시 마찬가지예요.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입 꾹 닫고 있더라고요. 참 좋은 일이죠.” “스케줄은 잡았지?” “아니요. 그쪽에서 전부 거절했어요. 굳이 오실 필요 없고 부르면 본인들이 직접 찾아오겠다고 하네요. 저도 어느 정도 수습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부 지역의 지도자들 생각은 다른 것 같더라고요. 그래도 불안한 애들 목록은 만들어놨으니까 정 필요하다 싶으면 오빠가 달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끄응….” “어제 또 나온 이야기 없어요?” “누나한테 말해준 게 전부야. 누나가 혜진이랑 따로 쇼핑한다고 나간 이후에는 와인 한잔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서 처박혀서 작업하고 매뉴얼 가다듬고… 일밖에 안 했어. 솔직히 좀 충격 먹은 상태라 뭐 다른 거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누가 보면 제가 좋아서 나간 줄 알겠네요. 두 분이서 중요한 이야기 좀 나누라고 억지로 자리 피해 드린 거예요. 혜진 씨도 많이 아쉬워하더라고요. 본인 딴에는 기회 한 번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기회? 기회는… 무슨….” “그래도 귀엽잖아요. 희망이 없는 줄도 모르고… 제가 이야기했었나요? 사과받는 사람이 오히려 더 고개 숙이면서 죄송하다고 하는데 얼마나 속이 터지던지… 저는 그거 보고 느꼈어요. 아, 조혜진, 이 언니는 진짜 안 되겠구나. 그래서 말인데… 어떻게 진짜로 하긴 할 거예요?” “일 전부 수습되면 한번 해볼라고… 김현성, 걔 꼬시기 쉬워. 지금은 좀 사연이 있어서 애가 까칠해진 거고, 일 끝나고 정상으로 돌아오면 별거 아닐 거야. 조혜진 아바타 등판시키고 진심으로 달리면 하룻밤이면 끝나.” “장담하는데 안 끝나요. 내가 튜토리얼 던전에서 걔 꼬시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었는데… 그 새끼 고자라고요.” “내기할까?” “조혜진이랑 김현성이랑 맺어주는 거로? 해요, 해보면 되겠네. 대신 나는 내가 이기면 요정놀이 하는 거로 할래. 오빠가 이기연 해요. 제가 이지후 할 테니까. 오빠가 뭘 걸든 나는 상관없음.” “후회하지 마.” “오빠나 후회하지 마요.” ‘뭐야, 얘는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해?’ “…….” 이지혜치고는 너무나도 과감하게 배팅을 하는 모습에 신경 쓰인 것이 당연했다. 물론 이쪽이 패배할 거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저 쓸데없는 자신감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린다. 이미 내던져 놓은 말을 이미 물릴 수는 없는 시점, 여기서 꼬리를 내린다면 이지혜가 이쪽을 비웃을 게 틀림없다. ‘아, 이거 왜 이렇게 한 발자국 물러나고 싶지.’ 조혜진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대로 물러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일단은 미적지근하게 넘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 말을 돌리는 게 좋을까 하며 괜스레 창밖을 바라보자 다행히 이지혜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아마 얘도 질러놓고 후회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데요?” “뻔하지, 뭐.” 전부 알고 있으면서 물어본 것이다. “하얀이 말고도 문제가 있으니까.” “아, 그렇네요. 그게 있었네요.” 정하얀 말고도 이쪽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지 않았던가. “벨런스 맞추러 가는 거네요.” “맞아.” 솔직히 될지, 안 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비벼볼 구석이 한 곳밖에 없다. 그나마 후보를 꼽는다면 김현성 역시 그녀를 상정하고 있지 않을까. 저쪽의 전술핵을 막아줄 억제제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인재 중 하나, 라파엘이 움직이지 못하는 현시점에 공식적으로 세계관 2인자를 차지하는 인물. 1회 차에 행방불명되어 행방이 묘연해진 인물이었다. 1회 차에서 어째서 그녀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녀가 가진 개인적인 문제가 원인이 됐거나, 가면쓰레기의 함정에 걸려들었겠지 싶었다. 꽤 오랜만에 오는 느낌, 이지혜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전진기지에 임시로 세워진 커다란 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나도 참 누나야.’ 전진기지에 임시 길드 하우스를 세운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로 규모가 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누가 저걸 보고 임시 막사라고 생각할까. 임시로 지어진 붉은 용병의 거처는 마치 작은 왕국의 왕성처럼 보였다. “붉은 용병에 오신 것을 환영입니다. 오랜만이로군요, 위원장님.” “아, 그러니까… 네, 최영기 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많이 달라지셨군요.” “그때 이후로 시간이 조금 많이 지났으니까요. 이지혜 님도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에요, 영기 씨. 승진하셨다는 소리 들었는데 이렇게 마중 나오게 해서 죄송하네요.” “차희라 님이 직접 모시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원장님께서 오랜만에 찾아주신다고 하시니 기뻐하시는 것 같더군요.” “저는 별로 반가워하지 않으시나 봐요.”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붉은 용병은 언제나 손님들을 환영합니다. 그게 이지혜 님 같은 분들이라면 더더욱이요.” “스카웃 제의인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검은 백조 길드마스터에게 미움받기는 싫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시죠, 위원장님.” “마중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제가 더 영광입니다. 이기영 님을 모실 수 있다는 건 붉은 용병 내에서도 몇 안 되는 이들에게만 내려지는 영광스러운 책무이니까요.” ‘뭐야, 그건….’ “머무시는 동안 시킬 일이나 불편하신 점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를 통해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아… 네.” ‘확실히 붉은 용병은 붉은 용병이네.’ 오랜만에 들어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눈으로 보이는 광경들이 새삼스레 새롭게 느껴진다. 파란이 아무리 떡상했다고 하더라고 역시 린델 전통의 강호는 붉은 용병이라는 느낌이다. 단위로 다르고 규모 자체도 다르다. 잘 훈련된 전위들이 도열한 모습이나, 남녀 가릴 것 없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싸우는 광경은 거친 용병들의 집합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우리 누나. 집무실이 아닌 자기 방으로 안내하는 걸 보니 왠지 모르게 두 번째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앞을 지키고 있는 용병 두 명이 꾸벅 인사한 이후에 열리는 커다란 방문. 사자 같은 붉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인류의 두 번째 억제기 후보는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너 잘해?” 재미있는 장난을 치는 것을 보니 차희라 역시 그때 그 날을 떠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 662 회귀자 사용설명서 662화 승리할 확률(4) “무슨 일이라도 있나 봐?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걸 보면.” “보고 싶어서 왔어.” “듣기 좋은 소리 하는 데는 선수라니까. 거기 앉아. 너도 거기 앉으면 되고, 그러니까….” “이지혜라고 합니다. 용병 여왕님.” “알고 있었어. 밖에 차 좀 내와. 아니, 술이 더 좋을까? 너도 술 좋아하지?” 차희라의 목소리에, 문이 벌컥 열리며 몇몇 이가 주섬주섬 뭔가를 가져왔다. 박덕구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한 떡대 하는 놈들이 조신하게 주안상을 세팅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한 놈은 귀가 없고, 한 놈은 얼굴이 칼자국으로 도배되어 있다. 저런 얼굴로 영광이라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무슨 표현이 더 필요하겠는가. 본인들이 영광이라고 생각하니 별 상관은 없었지만, 대륙에서도 보기 쉬운 장면은 아니었다. 오직 붉은 용병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지 않을까. 평소답지 않게 이지혜도 그녀의 눈치를 보는 편, 본래 그녀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결코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다. 겉으로야 눈치 보는 듯한 얼굴을 자주 보여줬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걸 본 적은 별로 없었으니까. 본인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지혜의 심정도 얼추 이해가 가고…. 왠지 모르게 차희라는…. ‘괜히 눈치 보게 만드는 사람이었지.’ 그 말 그대로였다. 대륙에서의 경험과 그녀의 강함이 그녀를 그렇게 만드는 것일 수도, 아니면 본래 차희라가 그런 성격일 수도 있지만, 단언하컨대 후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타고나길 왕으로 태어났고, 본래부터 위에 있어야 마땅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지만 그 누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차희라가 무릎을 꿇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고, 그녀가 누군가에게 손바닥을 비비는 모습은 더욱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패배한다는 모습 역시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곳에 온 것이다. ‘할 수 있을 거야.’ 강자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김현성도 정하얀도 아니었으니까. ‘누나, 할 수 있는 거 맞지? 그렇지?’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봐, 자기.” “그러니까… 으음….” “꽤 뜸을 들이네.” 작은 문제가 있다면 그녀의 정확한 무력을 측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종종 마음의 눈으로 봤던 그녀의 상태창만 봐도 답이 나온다. 많은 무기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꼽는 용병 클래스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든 모습을 본 적이 손에 꼽는다. 아니, 거의 없다. 고급 쌍수 무기 지식 습득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선호하는 것은 맨손뿐이었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대륙의 정점에 서 있다. ‘광전사 세트가 있기는 했었지.’ 차희라가 그걸 입고 전선에 나섰을 때는 공화국과의 분쟁 지역 전체를 마비 상태로 만들었을 정도였다. 27군단 소환 사태 때는 지휘관의 입장이었기에 제대로 된 무장을 착용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강했던 것은 마찬가지다. 솔직히 있는 그대로 물어보는 게 맞지 않을까. 조금은 조심스러운 질문. 하지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누나, 얼마나 강해?” “흐음….” “…….” “…….” ‘아이, 시바. 괜히 물어봤나?’ “…….” “…….” 옆에 있는 이지혜가 너무 빌드업 없이 들어간 게 아닌가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뭐하러 그런 질문을 대놓고 하냐고 추궁하는 듯한 표정, 너는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괜히 나만 불편한 분위기에 휘말리는 것은 아니냐고 말하는 것 같다. 계속해서 침묵이 흐른 것은 당연했다. 차희라가 웃으며 입을 연 것은 약 2분여가 지난 이후였다. “글쎄, 아마 꽤 강하지 않을까.” “어느 정도.” “누구와 싸워도 딱히 질 것 같지는 않은데… 저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기억하다마다. ‘내가 진짜로 강해질 방법이 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거야. 샌님처럼 훈련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고.’ 그렇게 말했었나. ‘자기는 맹수가 훈련하는 걸 본 적 있어? 앞발 휘두르기나 물어뜯는 방법을 연습하는 걸 본 적이 있냐고. 머릿속에 꽉 들어가 있는 욕구를 해소해 주는 식으로 방법을 바꿨다고. 잘 처먹고 잘 싸고. 짐승처럼 사는 거로 방법을 바꿨다, 이거야.’ 그렇게 말하기도 했지. “기억해. 성과가 있었나 보네.” 훈련법이라고 할 수 없는 훈련법이었지만 효과가 있기는 있었는지 상승한 스텟들이 눈에 띄었다. 근력 스텟이야 원래부터 규격 외였고 다소 낮다고 할 수 있었던 민첩이나 마력 스텟 역시 성장한 모습. “사실 그렇게 큰 성과가 있는 건 아니야. 자기 덕분에 쌓인 욕구는 시원하게 풀고 있고, 간혹 부족할 때는 숲으로 들어가서 다 때려 부수고 나오기도 하거든. 자기가 뭣 때문에 사람 존심 긁는 질문을 던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나는 강해.” “…….” “그리고.” “응.” “더 강해질 수 있고.” “…….” 뭐라 할 말이 없다. ‘누나, 시바, X나 왜 이렇게 멋있어.’ 이런 말밖에는. 어떻게 보면 내가 기다렸던 말을 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애초 그녀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아주 약간이나마 들어차 있던 모든 의심이 한순간 날아가 버린 듯한 느낌. 어째서 린델의 내놓으라고 하는 전위들이 전부 붉은 용병에 들어가 있는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이유가 뭔데?” “누나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슬쩍 이지혜를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크게 별건 아니다. 저 빛 안쪽에 있는 바깥 놈의 존재부터, 강한 무력을 가진 사천왕을 상대해 달라는 이야기, 붉은 용병과 같이 움직일 수는 없으니, 따로 대기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조금 길어진 이야기에 차희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맞는 말이니 일단은 듣고 있는다는 의지의 표현이지 않을까 싶다. 그녀에게도 이 전쟁은 중요했으니까. “파란 길드마스터가 한 명, 그리고 용병 여왕님께서 한 명을 상대하게 될 것 같아요. 무대는 저희가 만들어 드릴 테니 다른 부분은 걱정하실 필요 없고요. 불편하시겠지만 남은 35일 시간 동안은…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하시는 걸 추천해 드리고 싶네요. 컨디션 체크부터 그림을 그리기까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조금 많을 것 같아서 이 부분은 양해 부탁드릴게요. 용병 여왕님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당연히 부정할 마음도 없지만 정확한 데이터를 얻어야 하거든요.” “흐음….” “지휘부에서는 약 23.4%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현재 대륙이 가지고 있는 전략과 적들이 가지고 있는 전력의 데이터를 분석해 시뮬레이션해 나오고 있는 결과고요. 용병 여왕님이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계획을 따라주신다고 가정했을 때는 확률은 조금 더 높일 수 있을 것 같아요. 현재 보이시는 자료를 참고하시고 판단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잘하고 있어.’ “35일여간의 정확한 훈련 스케줄이에요. 개인적인 훈련이라기보다는 전술 훈련이 주가 될 것 같아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분석했고 아마 충분히 만족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이 밖에도….” “뭐 하나 빠뜨린 게 있는 것 같은데.” “네?” ‘아니야, 지혜 누나. 방금 말 취소. 우리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씩, 조금씩이지만 분위기가 바뀌는 게 느껴진다. 정확히 말하면 이 커다란 방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무거워진 것 같다. ‘우리가 뭐 하나 빼먹은 것 같아. 어떻게 해?’ 생각해 보면 최근에는 본 적이 없는 표정이다. 얼굴 속에 서서히 짜증이 들어서는 것만 같다. 도대체 뭘 놓쳤는지 떠올려 봤다. 솔직히 조금 안일하게 생각하고 온 것이 맞다. 차희라라면 당연히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별생각 없이 OK를 외치고 이쪽에 합류해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차희라는 그럴지 몰라도 린델의 제1 길드로 불리는 붉은 용병의 용병 여왕은 그렇지 않다. 갑작스럽게 찾아와 강하냐고 물어본 직후 자기들 하고 싶은 말만 떠들어대는 이들을 저 용병 여왕이 뭐라고 생각할까.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지 않더라도, 이지혜에게는 다소 불편한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바보 같았네.’ 이지혜 역시 서서히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 걸 느끼는지 나를 바라봤다. ‘지금 분위기 왜 이래, 오빠. 이거 아니었잖아.’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계속 말해봐. 어디까지 말할 수 있나 한번 보게.” “보상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라면.” “내가 그런 게 필요한 사람으로 보여? 보상? 네가 뭘 해줄 수 있는데.” “그럼….” “네가 뭘 빠뜨린 것 같아? 그리고 자기, 자기는 또 뭘 잊어버린 것 같고?” “저… 용병 여왕님,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그건 네가 생각해야 할 거야. 지금 내가 그걸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할 정도로 기분이 좋지 못하거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이지혜. 네가 제안한 건데, 왜 꾸지람은 내가 들어야 하는지, 그 원망이 나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럴 때는 나는 상관없다는 듯이 슬쩍 눈을 피해주는 것이 맞다. 나중에 이지혜를 보낸 이후, 희라 누나랑 같이 얘 욕해주면 기분은 풀 수 있지 않을까. 손절의 기운을 느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혜는 더욱더 절박한 표정으로 나를 압박하는 중이다. 방 한쪽에 걸린 붉은 용병의 길드 패가 시야에 비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거였구나.’ 그런 생각이 곧바로 들어와 꽂힌다. 너무 쉬워서 굳이 캐치하지 못했던 부분, 마침 용병 여왕의 짜증이 슬슬 한계점을 맞이하고 있는 시점. 사람 하나 구하는 셈 치고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용병 여왕을 내보내고 차희라를 불러오는 것이 먼저다. 마치 권력자에게 아양을 떠는 모양새로 전환하며 가까이 다가붙자 갑자기 왜 이러냐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굳이 거부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렇게까지 화난 상황은 아닌 모양이다. 오히려 조금은 만족하는 것 같은 모습, 애교와 교태에 용병 여왕이 떠나가고 차희라가 등판했다. “누나, 기분 풀어. 우리가 그걸 놓쳤겠어?” 평소와 같지만, 최대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를 내뱉도록 하자. 이지혜가 구역질 나온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뭐 어떻게 하겠는가. 이쪽이 잘못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우리 희라 누나 빡치면 기분 풀어주기 힘들단 말야. “내가 따로 이야기해 주려고 한 거니까 화 풀어, 누나. 붉은 용병은 괜찮을 거야. 누나가 허락만 해준다면 붉은 용병은 따로 배려하려고. 길드마스터가 자리를 비운 길드라니 그런 걸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 “제1 작전권을 관리 위원회가 가지고 오는 의제가 통과되기도 했으니까. 사실 말 안 해도 붉은 용병은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하에 작전에 참가하는 거잖아. 그래서 우리가 깜빡 말을 못 한 거야. 너무 당연한 거라서 그랬지. 위원회가 붉은 용병을 내버려 두는 게 말이나 돼? 누나, 정말 우리가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그렇지? 응? 그렇잖아, 그지이?” “뭐, 그렇지.” 은근슬쩍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게 느껴진다. “누나가 없는 붉은 용병이 걱정되는 거 맞지? 당연히 우리가 그런 걸 생각 안 했겠어. 붉은 용병은 따로 배려해야지. 그렇고말고.” “흠, 어떻게?” 확실히 아까보다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용병 여왕이 가진 궁금증을 입 밖으로 내뱉기도 했고, 점점 나를 품에 끌어들이는 걸 보니 꿀 떨어지는 목소리가 먹히기는 하는 모양이다. 이지혜도 ‘그거였구나.’ 하는 듯한 얼굴, 정답이 너무 눈에 보이다 보니 그녀도 놓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제 조혜진이랑 쇼핑만 하지 않았어도 이 건에 대해 준비할 시간이 있지 않았을까. ‘저 쓰레기가 어떻게든 수습하고 있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쪽이 마지막 말을 내뱉은 직후, 이지혜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누나, 눈앞에 있는 지혜 씨가 직접 맡게 될 거야. 붉은 용병 지휘 본부에서 상정하는 피해 규모에서 정확히 15% 더 줄이도록 할게.” 그게 말이 되냐는 이지혜의 얼굴, 그런 그녀를 위아래를 훑어보는 차희라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할 수 있지? 지혜 누나? 그렇지? 할 수 있는 거지?’ # 663 회귀자 사용설명서 663화 승리할 확률(5) ‘누나, 그런 거 자신 있잖아, 그렇잖아.’ 얼굴 속에 배신감이 드러나 있었지만,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라파엘 때를 생각해 보면 이지혜는 저런 표정을 지을 자격도 없다. 이렇게 빠르게 되돌려 줄 기회가 생길 줄은 예상 못 했지만, 그녀가 당황하는 걸 보니 입가에 미소가 피어난다. 이지혜 역시 떠오르는 게 있는지 덜 억울해하는 것 같았지만, 쫌생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은 여전했다. 일단은 침착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중, 본인이 원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이왕 터진 일이니, 열심히 수습해 보려고 하지 않을까. 일단은 너무 높은 커트라인을 줄이는 것부터 말이다. “15%는 무리예요, 10%.” “15%.” “여러 가지를 상정해 봐도 최대 10% 정도가 한계예요, 여왕님. 사실 10%라는 수치도 단언할 수 없고요. 딱 10%로 합의를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의미 없는 블러핑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수치가 마음에 드실 테니까요.” “15야.” “12%까지.” “15%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어. 자기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기가 막히지, 아마? 우리 자기가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할 수 있는 거야. 그게 안 된다면 네 노력이 부족했던 거겠지, 뭐.”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을 수도 있고, 아직 정확한 데이터도 적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확언을 드린다는 건….” “15%. 나는 그걸로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까.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알아들어? 대충할 생각하지 말라, 이거야. 굳이 우리 자기의 보증이 아니더라도, 검은 백조의 이지혜가 유능한 인재라는 건 린델에서 칼밥 좀 먹은 사람이라면 전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나도 네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거라고 보는데. 너는 어때? 내가 너를 너무 높게 평가하고 있는 건가?” “…….” “만약 그렇다면 지금 돌아가도 돼. 그대로 나가도 된다고, 쥐새끼처럼.” 다소 공격적인 말까지 내뱉으며 도발하는 것을 보니, 차희라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조금 높게 던진 감이 없지 않았지만 나 역시 이지혜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이지혜는 유능했고, 손실을 내더라도 최소한의 손실만을 내는 걸 선호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데이터를 신봉했고 그만큼 꼼꼼했다. 커다란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좋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세밀한 그림을 그리는 것에 강하다. 아마 이것저것 쳐내고 집중한다면 가까스로 15%에 맞춰지지 않을까. 문제는 그녀가 미친 듯이 갈려 나가야 한다는 점이겠지. 그리고 별것 아닌 변수 한 번에 모든 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도 걱정될 테고…. 이지혜의 표정이 구겨지는 게 당연하다. 안 그래도 그녀는 갈려 나가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저렇게 자존심 건드리는 발언을 하면…. ‘누나도 빡치니까.’ “일단 받아들이면 인적 피해든 물질적 피해든 거기서 1%라도 오차가 생길 경우, 네가 대가를 치르는 거야. 내 말 알아듣지?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이해할 수 있지?” “…….” “대답.” “네, 이해했어요.” “좋네, 계약 성립됐다는 느낌이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잖아, 그렇지? 뭐, 따로 정리할 것도 없고 이제야 제대로 된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한 느낌이네. 아주 좋아. 마음에 들어. 이래야지.” ‘기분 좋아 보이네.’ “거기 밖에 있는 간부들 전원 들어오라고 전해.” 차희라가 만족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윽고 커다란 덩치의 놈들이 차례대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남녀 가릴 것 없이 거대한 몸은 조금은 비현실적이다. 매번 보던 얼굴이었지만 이렇게 한곳에 모아 보니 더욱더 압권이었다. 심지어 지휘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녀석들도 마찬가지, 체력단련이 필수 훈련 항목에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뽑아준 마법사들 몇몇도 눈에 보였지만 이전의 모습들은 찾아볼 수 없다. 나름 장래가 유망한 마법사들이었는데, 다른 쪽으로 장래가 유망해지고 말았다. 물리 마법사 바크 세르게이의 동료가 분명해 보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안으로 들어온 녀석들은 숨소리 하나도 내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차희라가 하는 말을 기다리고 있다. 최영기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 용병 여왕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희는 당분간 내가 아니라 여기 있는 이 여자를 모신다. 이름은 들어봤지? 얼굴도 알고 있을 거고. 자기소개.” “이지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누나, 많이 당황했나 보네.’ “너희도 자기소개 해야지?” 확실히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방금 결정된 이야기를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하는 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 다시 한번 봐도 차희라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였다. ‘그럴 만도 해.’ 그녀가 문무를 겸비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아무래도 더 유능한 자원이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본인이 직접 묶어두고 있는 쇠사슬을 끊어야 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붉은 용병을 지휘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짐처럼 느껴질 것이다. 필연적으로 특성을 발동시켜야 하는 상황이 올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은근히 지금 같은 상황을 바랐을 수도 있다. 싸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고, 근육으로 꽉 차 있는 녀석들에게 머리를 심어주는 것. 앞으로 다가올 전투에서는 그런 머리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이해하고 있다. 솔직히 붉은 용병과 이지혜가 잘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최적의 머리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길드마스터 대리. 최영기라고 합니다.” “박종철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길드마스터 대리.” “양하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길드마스터 대리.” 여기저기에서 덩치들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검은 백조에서 나름 대접받는 이지혜 역시 이런 과한 리액션을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굳히고 천천히 차희라를 바라봤다. ‘아, 쟤 빡쳤다.’ “말씀은 잘 새겨들었어요, 용병 여왕님.”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대신 한 가지 확실하게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 “약속드렸던 것처럼 딱 15%에 맞출 수 있도록 할게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을 거예요. 대신 당분간 붉은 용병에 지휘권은 제가 가져갑니다.” “이미 말한 거로 아는데.” “완전한 지휘권을 가져간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현시점부터 붉은 용병은 차희라 개인의 말보다 길드마스터 대리인 이지혜의 말을 우선으로 합니다.” “…….” “…….” “말 들었지? 이 여자 말대로 한다. 현시점부터는 내 말보다 이 여자의 말을 우선으로 하는 거야.” “시험해 봐도 되나요? 확실하게 하려는 거니,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물론.” “영기 씨?” “…….” “차희라를 공격해요.” ‘지혜 누나, 시바, 왜 그래. 정신 나갔어?’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가 무섭게 차희라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최영기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솔직히 최영기가 진짜로 검을 휘두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차피 본인이 휘두른 검에 차희라가 다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겠지만 붉은 용병에게 차희라는 감히 똑바로 볼 수도 없는 신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얘네 왜 이래. 왜 이런 데서 이상한 영화 찍어. 우리 그런 장르 아니야. 무슨 느와르 판 아니라고.’ 물론 차희라는 반응하지 않는다. 슬쩍 손을 올려 본인에게 날아오는 검을 잡고, 휙 던지는 것으로 끝. 콰앙! 검을 놓지 않은 최영기는 곧바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벽으로 처박혔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른 건 다 몰라도 최영기가 억지로 검을 놓지 않은 건 알겠다. 차라리 기절하는 걸 선택한 게 확실했다. 갑작스럽게 급변하는 분위기에 당황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할지 잠깐 고민했지만, 그냥 조용히 희라누나 품에 안겨 술이나 따르도록 하자. 지금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포지션이었으니까. 차희라도 그다지 흥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반응이다. 마치 나를 처음 봤을 때의 얼굴 같다. 저 모습을 보니 어째서 이지혜가 저렇게 행동했는지는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자기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였겠지.’ 나 역시 비슷한 이유로 흥분한 적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 판을 그녀가 의도하고 있다는 것에 짜증을 느낀 건지도 모르겠다. 나를 컨트롤 프릭 취급하기는 했지만, 이지혜 그녀 역시 만만치 않은 컨트롤 프릭이었고, 누군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걸 극도로 싫어했으니 말이다. 거기에 차희라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은 모습을 시종일관 보이니 한 방 먹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물론 저런 무리수를 던진 가장 큰 이유는…. “재미있었어.” 차희라가 크게 흥분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했기 때문이겠지. 오히려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본래 차희라가 그렇다. 누군가가 본인에게 진심으로 기어오른다면 피똥을 쌀 때까지 찍어 누르지만 적절한 선을 지킨다면 저렇게 즐거워한다. “즐거우셨다니 다행이네요, 용병 여왕님.” “하지만 조금 기분 나쁘기도 했고. 네가 지금 멀쩡히 서 있는 이유는 네가 손님이라서야.” “물론이에요. 제가 잘못했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고요. 말씀드렸던 대로 확신이 필요했을 뿐이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말씀 중에 죄송한데 이만 나가봐도 될까요? 간부들과 함께 의논할 이야기가 있는데… 아시다시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우리 오빠랑 천천히 이야기 나누세요.” “…….” “그럼 안녕히.” “야.” “네?” “박연주 밑에서 얼마 받고 일하기로 했어?” “스카웃 제의는 싫네요.” “…….” “그리고 오빠, 김미영 팀장은 제가 빌려 갈게요.” “안….”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시바… 김미영 팀장 데려가지 마.’ 목소리를 내뱉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다.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작은 복수라고 판단해도 되지 않을까. 자신만 갈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이지혜가 이번 일에 진심으로 부딪쳐 보겠다고 결심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본래 본인에게 주어진 다른 일까지 전부 처리하면서 붉은 용병을 지휘하는 데는 부관의 존재가 필수적이라 생각했겠지. ‘그래도 김미영 팀장은 안 되는데… 걔 없으면 내가 얼마나 힘들어지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미영 팀장은 사수해야겠다고 생각한 타이밍, 조금은 아쉽다는 차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하던 것보다 더 탐나네. 자기나 박연주가 괜히 데리고 있는 게 아니었어. 이 정도일 줄 알았으면 진작에 데려오는 거였는데….” “지혜 누나?” “자기가 왜 그렇게 저 여자를 신뢰하는지 알겠어. 솔직히 들려오는 소문이 과장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렇게 보이지는 않네. 무엇보다 자기랑 놀라울 정도로 닮은 것 같은데….” “별로 닮지는 않았어.” “뭐, 나 싫다는 사람한테 굳이 관심 가지는 것도 우습고, 그럼… 우리는 조금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뭐, 따로 하고 싶은 일 있었어?” “물론,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소속으로 뛰기로 했으니 슬슬 이쪽 이야기도 좀 해봐야지, 어찌 됐든 운명공동체니까. 뭐, 별건 아니야. 사람 하나 추천하려는 거지.” “누구?” “상대해야 할 네임드는 4마리, 이쪽에서 준비된 건 나랑 파란 길드마스터가 전부라고 하지 않았어?” “누나 말이 맞아.” “빈 곳 두 자리 아직 정해지지도 않았지?” “누나랑 김현성 외에는 없어. 정할 수도 없고, 적임자 같은 것도 없어.” “아니야. 있을 텐데, 자기 가까이에.” “하얀이는 따로….” “아니, 걔 말고. 한 명 더 있잖아, 쓸 만한 놈.” 도대체 차희라가 누굴 말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지만 반 시체처럼 누워 있는 라파엘밖에는 생각나는 녀석이 없다. 그녀 역시 라파엘의 상태를 아는 만큼 녀석을 겨냥하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아주 잠깐의 침묵 이후 들려온 목소리. 조금은 기대했지만 차희라의 목소리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 * * “…….” “…….” “왜 그러십니까?” “거, 기모 형씨. 갑자기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밥 좀 먹고 합시다. 웬만하면 참겠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 # 664 회귀자 사용설명서 664화 승리할 확률(6) ‘생각보다 쓸 만할걸.’ 이틀 정도 생각해 봤지만, 여전히 차희라의 의견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혼자서도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해. 파란 길드는 뒀다 뭐 할 거야? 김현성, 조혜진, 정하얀 그리고 자기가 빠진다고 해서 파티가 무너지는 게 아니야. 자기 눈에는 걔가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기가 데리고 다니는 그놈을 제법 괜찮다고 평가하거든… 탱커라는 타이틀 달고 내 주먹 몇 방 버티지 못하는 놈들이 대다수야. 붉은 용병에서도 찾기 힘들다니까. 그놈은 최소한 한 방에 뒈지지는 않잖아?’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진작에 성장이 멈춘 줄 알았던 박덕구의 내구 수치는 이미 대륙 탑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27군단 사태 때도 도노반을 상대로 시간을 끈 것을 보면, 맞으면서 버티는 것에는 도가 텄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껏해야 최약체 도노반을 상대했다고 해서 사대 천사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애초에 도노반이 처음부터 진심 펀치를 휘둘렀다면 박덕구는 옛날 옛적에 피떡이 됐을 것이다. 그놈의 입장에서 박덕구와의 결전은 잠깐의 여흥에 불과했을 테니까. 막말로 전력의 반의반도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른 스탯이 받쳐주지 않은 돼지는 두드려 맞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처맞다가 뒈지라고 녀석을 무대 위에 세울 수는 없다는 거다. ‘그럼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건데? 어디에 쓰면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싸고도는 것도 안 좋아. 걔가 조금 모자란 것처럼 행동하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파티의 중심은 탱커야. 그놈은 충분히 중심을 잡아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약속의 1년이 지나고 난 이후에도 성장한 것은 스탯뿐이다. 사기의 외침 같은 특성을 이끌어낸 것을 보면 녀석에게도 그런 기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 냉정하게 판단해서 5년 이후라면 써먹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지 않은가. 차희라는 파란 파티를 과대평가하고 있지만 사실 파란 파티가 가진 위상은 앞의 김현성과 정하얀, 조혜진에게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히 무력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정하얀 같은 경우는 조금 달랐지만, 김현성과 조혜진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력과 별개로 파티를 이끌 능력을 갖추고 있다. 무력이 달리기는 하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 뭔가 하나씩 나사가 빠진 듯한 파란 파티의 능력을 수십 계단이나 끌어 올릴 수 있었던 건 간부급들의 개인 능력 덕분이다. 그나마 선희영이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위 3명이 없을 때의 대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의 장점은 지휘가 아닌 다른 곳에 있고, 본인 역시 그 사실을 아주 잘 자각하고 있다. ‘혹시 그치들에게 따로 미션을 하달해 줄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불안해하는 건 아니지? 자기가 따로 봐주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누나가 걔를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그래. 상식적으로 누나가 나보다 더 잘 알겠어? 돼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만약 박덕구를 정말로 사대 천사를 잡는 패로 사용한다고 가정한다면 최소한 조혜진이라도 집어넣어야 한다. 어디 그것뿐이랴. 처맞기만 할 줄 아는 돼지를 메인으로 내세웠으니 이 돼지에게 신성력을 뿌려주는 사제의 존재로 필수적이겠지. 한 구역 전체를 커버할 수 있는 엘레나와 선희영 둘 중 하나를 녀석에게 고정으로 박아 넣어야 한다. 제대로 검도 휘두를지도 모르니 김예리도 꽂아 넣어야 하고, 보조 탱커와 예비 사제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안기모도 넣어야 하고…. 이렇게 셋팅 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승리를 점칠 수가 없으니 이득보다는 손해가 많다고 느껴졌다. ‘자기가 과보호하고 있는 거야.’ “과보호는 개뿔. 누구 말이 맞는지 보자고.” 의자에 앉아 데이터를 천천히 입력해 보자. 리무르아나 도노반이 가진 스탯을 상향 조정하고 박덕구, 김예리, 안기모, 엘레나, 김창렬을 포함한 5인 파티와 시뮬레이션을 돌려봐야 한다. 전술 능력은 최하로 고정하고 위기대응 능력도 최하로 고정해야지. 신성력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도노반과 리무르아와는 다르게 이 천사는 그런 약점도 없으니, 엘레나의 기본 능력치는 상대적으로 하향시키는 게 맞다. “전쟁은 혼자 해? 주변에 다른 변수들도 고려해 봐야지.” 여신의 거울에서 전투가 재생된다. 도노반이 곧바로 도끼를 휘두르자 역시나 박덕구는 버티지 못하…. “어. 버티네.” 버티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버프빨이자너, 시바.” 가상 엘레나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 버프를 밀어 넣었다. 애초에 첫 일격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가정했다. 문제는 지구력, 박덕구의 체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형편없는 마력 수치가 고갈된다면 곧바로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아마 이제 곧…. ‘나쁘지는 않네.’ 나쁘지는 않다. 심지어 박덕구가 외치는 사기의 외침이 주변의 변수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데이터로 보이는 아군 병력은 틀림없이 적군 병력을 밀어내고 있었다. 여신의 거울이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살펴본 것이 당연했다. 아니면 내가 데이터를 잘못 입력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잘못 입력한 것도 아닌가.’ 전투가 시작되고 약 두 시간이 지난 시점, 아직은 균형을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결국에는 가상 도노반이 가상 박덕구의 뚝배기를 깨버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시바.” ‘아니, 그래도 두 시간이면 꽤 잘 버틴 거 아닌가?’ “겨우 두 시간 버틴 거지, 뭘 잘 버텨?” 딱 기본형과 상대하게 했으니 이 정도로 무난하게 버틴 거지, 조금 귀찮은 타입이랑 상대하게 했으면 10분도 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상대 비둘기가 어떤 능력과 특성을 갖췄을지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 않은가. 김현성과 1회 차 성검 용사가 상대했던 녀석들의 경우는 논외, 박덕구가 상대할 수 있는 타입이 아니다. 한쪽 손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며 녀석의 스펙과 특징을 입력하자 역시나 1시간을 채 버티지 못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전술 능력 최하와 위기대응 능력 최하가 박덕구 파티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바꾸면 어떻게 되지?’ 호기심에 전술 능력과 위기 대응 능력 수치를 최상으로 상향 조정하자 다시 한번 시뮬레이션되어 돌아가는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별 차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팽팽함을 보여주고 있다. 시간이 조금 더 오래 걸리지 않을까 싶어 속도를 높여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8시간, 9시간, 13시간이 지나도록 치고받는다. 심지어…. ‘뭐야, 시바. 어떻게 이겼어….’ 이해할 수 없는 혈투 끝에 녀석을 잡아냈다. 당연하지만 곧바로 같은 전투를 계속 반복시켰다. 어쩌다 한 번 우연으로 잡아낸 결과가 우연히 눈 앞에 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높은 수치가 나오는 것이 문제, 내가 예상한 수치는 3% 미만이었지만 이 시스템은 23% 이상을 점치고 있었다. ‘합리적인 수치이기는 해.’ 가장 부족한 수치 두 가지를 최상으로 올렸으니, 사실상 전술 박덕구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당연하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박덕구 파티를 따로 봐줄 시간이 없다. 전 지역을 컨트롤해야 했기 때문이다. ‘훈련이라도 한번 시켜볼까.’ 남은 33일 동안 속성으로 파티를 가다듬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다면 김현성이 도와주러 가기 전까지는 버텨줄 수도 있다. 현재의 김현성은 1회 차의 김현성보다 강한 상태일 테니, 놈을 처리하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수도 있고…. ‘나도 모르겠는데, 진짜. 시바.’ 그 무엇 하나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왠지 모르게 박덕구 1회 차가 생각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자꾸만 이 돼지가 뒈지는 루트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현실을 부정하고 자기세뇌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봤을 정도였다. 괜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배가 정박해 있는 장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몇 시간 전부터 온다고 말해놓고 왜 지금에야 오는 거요?” 익숙한 목소리 역시 들려온다. “좀 바빴지, 뭐. 오히려 내가 늦게 와서 다행 아닌가. 시킨 거, 제대로 끝내놨지?” “…….” ‘이 새끼….’ 설마 했는데 진짜인 모양, 아마 시간 내에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말은 당당하게 하고 있었지만, 내가 오기 전에 맞춰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박덕구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옛날에 튜토리얼 던전에서 형님 뒤치다꺼리나 하는 박덕구인 줄 아는 모양이요. 형님이 키운 박덕구 아니요. 형님이 시키지 않은 것까지 착실하게 착착 진행하고 있다니까.” “자신 있어? 체크해도 괜찮을 것 같아?” “거, 두고 보쇼. 안 그래도 형님이 늦게 오는 바람에 내가 몇 번이나 더 체크했으니까. 그나저나 누님이랑은 요즘 잘 만나고 있는 거요?” “말 돌리지 말고 앞장서라, 덕구야.” “말 돌리는 게 아니요. 진짜로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형님도 요즘 너무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현성이 형씨도 마찬가지고… 누님은 아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데… 소라 후배는 누님이랑 같이 가 있고 혜진 누님도 요즘 따로 일하고 있는 거 아니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건 알고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한번 뭉쳐야지. 진짜로 전쟁이 터지기 전에 자리 한번 가졌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이런 말 하는 건 싫지만, 누구 하나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그럴 일 없다. 아무도 안 죽으니까.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너는 네 할 일이나 똑바로 하면 되는 거야. 봐라, 돼지 새끼야. 뭐, 하나 빼먹은 거 있는 것 같은데.” “어?” 녀석이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내 얼굴을 바라봤다. 허겁지겁 몸을 움직이며 짐을 뒤져보는 녀석의 모습이 괜스레 꼴사납게 보인다. 노아의 방주 안에 보급품 채워 넣으라는 말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모습에, 이 새끼는 아니라고 한 번 더 확신하게 된다. “아, 거, 아… 내가 조금 착각이 있었던 모양이요. 한 페이지를 깜빡 한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게….” “안기모는 어디서 뭐 하고.” “잠깐 따로 할 일을….” “네가 또 혼자 해보겠다고 나댄 건 아니고?” “그런 건 아니요. 기모 형씨도… 따로 할 일이….” “너한테는 뭘 못 맡기겠다, 진짜.” “그런 게… 아닌데. 진짜로 깜빡 한 건데….” “내가 이거 중요한 이야기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 “내가 왜 너한테 이걸 맡겼는지도 모르지?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하는 거 맞지?” “거,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니까.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누구 말인데. 거, 이 배 타고 상륙작전 하는 거 아니요. 전선이 밀리면 곧바로 적의 심장부로 들어가서!” “그런데. 배 안에 필요한 물건들이 없으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 “아니다, 시바. 하지 마라, 덕구야. 그냥 너는 다른 거 해. 길드 직원들한테 시켜도 되는 일을 왜 너한테 맡겼는지는 아는 거 맞지? 상륙작전 돌격대장이고 나발이고, 선봉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으니까. 너는 후방 지키는 게 낫겠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미, 미안….”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적당한 곳에서….” “…….” “…….” ‘아, 이 새끼 표정….’ “이번이 시바, 마지막 기회야. 네 임무가 뭐라고?” “메인 기지 수성전 참가.” “그리고.” “나이스 보트 지키기.” “그리고?” “상륙 작전.” “그래, 그거야.” ‘그래, 시바. 얘한테 뭘 맡기겠어. 개오바지. 무조건 오바야.’ 백번을 생각해도 박덕구에게 딱 맞는 과업은 노아의 방주 지키기다. # 665 회귀자 사용설명서 665화 벽 넘기(1) ‘이것만큼 중요한 과업이 또 있겠냐고.’ 적당히 몸이나 사리라고 만들어준 자리가 아니다. 대륙 손절 계획이 발동됐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라고 생각하면 설명하기 편하다. 혹시나 격렬한 전투 끝에 배가 파손되기라도 하면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으니 처음부터 대비해 놓는 게 옳다. 물론 녀석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리는 없다. 애초에 도망치겠다고 말하기도 조금 그럴뿐더러, 박덕구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대충 상륙 작전의 일환이라고 준비해 놓으라고 말해놓는 게 가장 적절한 판단이다. ‘그렇지.’ 전황이 전부 흐트러지고 모든 것이 무너지는 상황, 정말 노아의 방주를 발동시킬 수밖에 없는 시점이 온다면, 이 돼지가 전선으로 뛰쳐나갈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한 명이라도 더 구해보겠다고 헛짓거리를 할 수도 있고, 어영부영 미적지근하게 움직이면서 상황을 전부 꼬아놓지 않을까. 내 몸 하나도 챙기기 힘들 텐데, 녀석이 돌발행동을 하는 것만큼 짜증 나는 상황은 없다. ‘그러니까, 이게 더 안정적이지.’ 위험한 상황이 찾아오면 곧바로 몸을 돌려, 다른 신호가 오기 전까지 나이스 보트를 지키는 것.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임무를 수행하려고 할 테니, 녀석에게 딱 맞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괜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을 올려다보자 여전히 풀이 죽은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본인은 잘해보겠다고 했는데, 꾸지람을 들은 게 마음에 남는 모양이다. “불쌍한 척하지 마, 덕구야.” “거, 불쌍한 척하는 게 아니요. 그냥 기분이 조금 그래서 그런 거지.” “…….” “…….” “너무 풀 죽지 말고.” “딱히 풀 죽은 게 아니라니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조금 예민해진 것 같네. 그래서 한 소리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정말로 널 못 믿어서 화낸 게 아니라 조금만 더 경각심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그러니까 노파심에 지껄인 거니까 표정 좀 펴.” “그래도….” “그래도가 아니라 딱 있는 그대로만 이야기 한 거니까. 정말로 마음에 담아두지 마. 내 목소리가 아니라, 일이 터지면 네가 해야 할 일이 뭔지를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으라고. 다른 게 아니라 그게 더 중요한 거야.” “형님이 무슨 이야기하는지는 알 것 같다니까.” “난 항상 널 믿는다, 덕구야.” “정말이요?” ‘그래, 반의반쯤은 믿지.’ “항상 기억하고 있으라는 거야. 매번 말했잖아. 내가 할 수 있으면 너는 더 잘할 수 있다고.” “그렇지.” “그래, 그거. 초조해하지 말고 천천히 준비하면 되는 거라고. 내가 괜히 이걸 너한테 맡겼겠어?” “그, 그건 좀 의외였다니까.” 슬슬 기분이 좋아지고 있는 게 보였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한 모습은 괜스레 웃음을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다. 솔직히 이게 그렇게 좋아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자신에게 할당된 임무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형님이 나한테 뭘 따로 하라고 지시한 건 이번이 처음 아니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니요. 내 기억으로는 분명히 처음인 것 같다니까. 물론 여러 가지 많이 시키기는 했지만, 이번 일처럼 막중한 임무는 아니었지.” ‘그렇기는 해.’ “기껏해야 심부름 같은 게 전부였고, 이렇게 말하는 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위험요소가 아예 없는 일이 대부분 아니었나. 당연히 내가 사고도 많이 치고, 형님 눈에는 영 성에 차지 않는 것도 알고 있어서 그렇게 섭섭하지는 않았지만, 뭐 나라고 맨날 저런 일만 맡고 싶었겠소.” “…….” “하얀이 누님이나 혜진이 누님, 엘레나 님이나 희영이 누님, 또 우리 형씨 같은 일을 하고 싶었고, 그만큼 신뢰받고 싶었지. 그래서 혼자 한번 지내보겠다고 결심하기도 한 거고….” ‘갑자기 진지하게 만들지 마. 속마음도 괜히 털어놓지 말고….’ “그래?” “이제야” “…….” “이제야 조금 인정받았다는 느낌이요.” ‘그런 말 하지 마, 돼지새끼야.’ 이 새끼 혹시 전부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정도, 돼지의 뿌듯한 얼굴은 이쪽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뭔가 그랬다니까. 나한테는 따로 이런 일을 맡겨준 적이 없으니까.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자괴감도 느끼고 조금 분하기도 하고 그랬지. 형님이 날 못 믿는 거 같았으니까. 솔직히 방금 전에 조금 그랬던 것도 그거요. 모처럼 맡긴 일인데 또 실수나 하고 자빠졌으니까. 나 자신한테 화가 난 거지, 절대로 형님한테 섭섭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요. 거의 처음으로 맡긴 막중한 임무인데 시작부터 내가 망쳐 버린 것 같아서….” ‘아니야. 너 망친 적 없어. 잘하고 있다고.’ “이번에도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적당히 수성전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지.” ‘적당히 수성전 하게 될 거야….’ “형님이 보내준 매뉴얼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형님은 모를 거요.” ‘시바….’ “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는 거 아니요!” “양념 치지 마.” “아니, 진짜라니까. 내 모든 걸 걸고 맹세하는데 진짜요. 거기 기모 씨도 있었으니까 안 믿기면 한번 물어보던가. 조금 꼴불견이기는 하지만 기쁘니까 눈물이 막 나온 거지. 이렇게 위험한 일을 맡길 정도로 나를 신뢰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 말이요.” “으응….” “몸이 부서지더라도 이번 일은 완수할 거요.” “그렇게 책임감 느끼지 않아도 돼. 어디까지나 일이 틀어졌을 때 계획이 실행되는 거니까. 그때까지는 이전 그대로지. 사실 나는 네가 이걸 타고 전선으로 향할 일이 없으면 좋겠다. 상황이 정말로 거기까지 간 거면 꼬일 대로 꼬였다는 뜻이 되거든.” “이해할 수 있소.” “네가 나서는 건 어디까지나 신호가 갔을 때야. 전략적으로 네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다른 것보다 그걸 잊으면 안 돼. 저걸 쓸 일이 없는 게 가장 좋은 거야.” “매번 했던 이야기 아니요. 가슴속에 새기고 있으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무튼 밥은 먹었어?” “아직 안 먹었는데.” “오랜만에 밥이나 같이 먹자.” “정말이요?” “나도 시간이 남으니까. 예리랑 안기모도 주변에 있지? 다 같이 먹는 게 좋겠네.” ‘상륙 작전 같은 건 없어, 덕구야. 그런 건 없다고… 네가 활약할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일단은 다급히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인정을 받았다는 녀석의 당당한 얼굴을 보니 더 이상 이 대화를 지속시키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꾸만 콧김을 뿜으며 상륙 작전의 돌격대장 얼굴을 하고 있다. 평소보다 힘이 들어간 눈, 위풍당당한 걸음걸이, 모든 행동이 양심을 찌른다. 솔직히 박덕구의 마음도 이해는 한다. 어째서 내가 녀석의 마음을 모를까. 파란 길드가 자리 잡은 이래로 박덕구에게는 별다른 임무를 주지 않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애초 이런 종류의 작전에서 녀석을 메인으로 기용한 적이 없다. 박덕구의 역할은 민주투사 아니면 고기방패였고, 솔직히 녀석을 중심으로 어떤 일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녀석의 안전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걱정하는 게 맞기는 하지만 승률이 조금 더 좋은 쪽에 건다는 건 내 입장에서는 무척 당연한 일이다. 파란에는 굳이 박덕구가 아니더라도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이들이 있었고, 지금까지는 파티가 쪼개질 일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이거 진짜 맡겨볼까?’ “솔직히 이 배를 이런 식으로 쓸 줄은 몰랐는데 말이요.” “나도 그래.”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잖아. 조금만 더 가다듬고 두 시간 정도만… 쓰면….’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지.” ‘애초에 나머지 두 마리를 무슨 수로 막을 거야? 전선 한쪽은 완전히 쓸려 버릴 텐데. 일단 박덕구로 틀어막으면….’ “어, 저기 예리랑 기모 형씨 오네.” “오랜만입니다, 부길드마스터. 이렇게 보니 정말 반갑군요.” “오랜만.” “오랜만이네. 기모 씨도 오랜만입니다.” ‘아니야. 시간이 너무 부족해.’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녀석을 집어넣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 “…….” “이것 보라니까! 이렇게 하면 적어도 세 배는 더 강해질 수 있는 거 아니요? 내 어깨를 기모 형씨가 밟고 올라가고 기모 형씨 위에 예리가 목마를 타는 거지. 삼단 합체요. 삼단 합체. 충분히 상대방을 당황시킬 수 있겠지.” “바보 같아.” ‘즐거운 듯이 웃지 마, 예리야. 너까지 어울려 주니까 얘네가 더 이러는 거 아니야.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은 건 좋은데 그래도 체통은 지켜야지.’ “적어도 몬스터들한테 위압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부분에서는 그 누구도 반박의 여지가 없을 거요. 기모 형씨가 곧바로 위아래로 신성력을 밀어줄 수도 있고, 여차하면 예리가 분리하는 거지.” “멋있네.” “역시 형님은 그렇게 이야기해 줄지 알았다니까.” “진지하게 실전에서는 쓰지 마라. 앉아서 밥이나 먹어.” “여기에 형님만 내 등 뒤에 매달리면 완벽해지는 거요.” ‘아니야, 별로 완벽한 것 같지는 않아.’ 어쩌다 대화가 이쪽으로 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식사 도중에 일어나 삼단 합체를 선보이는 녀석들의 모습은 뭐라 설명할 수가 없다. 안기모는 적당히 어울려 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김예리는 정말로 즐거워 보인다. 한창 저러고 놀 나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보지 못한 사이에 박덕구와 안기모에게 물들어 버린 것 같은 느낌. 공중제비를 돌면서 착하고 착지에 신경 쓰는 모습은 매혹의 춤을 마스터한 예트니코바의 모습 그 자체였다. 이딴 걸 보고도 얘한테 전선 한쪽을 맡길 수는 없다. 이 33일간 박덕구한테만 집중할 수 있다면 아주 약간의 가능성이라고 있었겠지만 차희라나 정하얀의 일도 전부 다 해결되지 않았다. 큰 소리로 고래고래 떠들며 재미있게 놀고 있는 박기리 삼남매를 뒤로 하고 재빠르게 연락을 넣기 시작했다. [누나, 누나, 누나.] [왜요? 쓸데없는 거로 메시지 보내지 마요. 누구 때문에 바쁘니까.] [하연수 좀 빌려도 돼?] [됐네요. 걔도 1티어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무리예요. 괜히 시체 하나 치우게 하지 말고 제가 이야기했던 대로 대륙의 절반 날려요. 아, 차희라 건만 잘 해결되면 1/3 정도만 날리면 되겠네. 어떻게 됐어요? 차희라랑 정하얀 전투 훈련시킨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아무리 바빠도 그건 꼭 볼래.] [진행 중.]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요. 회복할 시간도 있어야 하잖아요. 용병 여왕이 먼저 하고 싶다고 한 거 맞죠?] [비슷해. 안전 장치를 먼저 마련해야지. 크게 다치면 그것도 일이니까.] [자기가 아직 부족한 건 아는 모양이네요. 박덕구 쪽은 어떻게 할 건데요?] [가능성이 보일 것 같지는 않은데.] [오빠가 그렇게 판단한 거면 어쩔 수 없는데, 저는 나쁘지 않을 거라고 봐요.] 바로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밥 먹다 말고 무슨 연락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요?” # 666 회귀자 사용설명서 666화 벽 넘기(2) “그다지,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뭐,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거 아니요?” ‘중요한 일은 중요한 일이지.’ “훈련 문제 때문에 잠깐 이야기할 게 있어서 희라 누나한테서 요청이 왔었거든” “그렇구만, 그럼 현성이 형씨도 훈련 때문에 바쁜 거요?” 박덕구의 말에 대답한 것은 김예리였다. 이때다 싶어 냉큼 대답하는 모습, 그나마 이 중에서는 김현성을 제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 “응, 엄청 바빠. 사람들 별로 만나지도 않고, 뭘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 연락해도 잘 안 받는 중.” ‘그래? 잘 받던데.’ 아무래도 김예리의 연락만 잘 받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구만….” 박덕구가 뭔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상한 데서 눈치가 빠른 만큼, 상륙 작전이 전부 다 개구라였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말을 이어오는 모습에 내 걱정은 기우였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거, 형님.” “응?” “나는 훈련 같은 거 안 해도 괜찮은 거요?” “따로 훈련하고 있잖아.” “아니, 그런 거 말고 뭐 특별 훈련 이런 거 말이요. 대충 분위기를 보니까 대륙에서 내놓으라는 사람들은 전부 다 맡은 역할이 있고, 거기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 같은데… 나도 형님 참관하에 특별훈련…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글쎄….” “차희라, 그 사람도 그렇고, 하얀이 누님도 그렇고, 현성이 형씨도… 심지어 혜진 누님도 뭔가 벽을 깨부수는 훈련을 하는 거 아니요. 다들 무슨 임무를 할당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거, 형님이 내게 준 임무도 사실 보통 일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에 비해 중요하면 중요했지, 부족하지는 않은 거 아니요.” “…….” “나도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하는 것 같은데….” ‘입에 묻은 음식부터 좀 닦고 이야기해.’ “굳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덕구야. 벽을 부순다는 게 단기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소수의 인간이나 그런 방법으로 강해질 수 있는 거지. 내가 보기에 너는 잘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주변에 휘둘리지 말고 주어진 일이나 열심히 준비하는 게 맞아. 남들이 뛰어간다고 해도 뛸 생각하지 말라는 거야.” “형님 말도 맞지만… 그래도 형님이 봐주면 나도 더 강해질 수 있을 것 같다니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효율이 낮지.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오르는 폭이 크지는 않을 거고…. 박덕구한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이미 녀석은 성장 한계치 맥스를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별별 방법으로 녀석을 강화해 겨우 이 정도로 올려놓기는 했지만 녀석은 어쩔 수 없는 일반인이었다. 조금 관리해 줬다고 벽을 뚫을 정도였다면 애초에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33일밖에 안 남은 거니까.’ 굳이 시간을 쓴다면 차희라와 정하얀 쪽에 들이붓는 게 더 옳다. 얘네 같은 경우에는 벽을 한 번 뚫으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할 수 있으니까. “너는 지금도 충분히 강해.” “부길드마스터의 말씀이 맞습니다. 예리 씨와 대련해도 요즘에는….” “헛소리. 내가 더 세. 덕구 아저씨 공격은 스치지도 않아.” “그렇다고 해도 쉽게 공격 포인트를 올리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들어간다고 해도 두꺼운 내구를 뚫기 힘들고… 1년 전에 비교한다면 무척 많이 성장했습니다.” “거, 기모 형씨한테 많이 배웠으니까 그렇지.” “저야말로 덕구 씨한테 많이 배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안기모, 쟤는 원래 붉은 용병 소속이었지.’ 확실히 둘이 함께 다닌 경험이 녀석을 성장시킨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나도 노력할 수 있는 데까지는 노력해 보고 싶다니까.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이야기해 주쇼. 아니면 상륙 작전이나 연습하는 게 좋을까.” 아무래도 이쪽에서 액션을 취하기 전까지는 쉽게 물러설 것 같지가 않다. 녀석을 슬쩍 바라보자 본인도 무언가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결국에는 슬쩍 무한의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육체의 성장보다는 그나마 이쪽을 집어넣는 게 녀석에게 이로울 것이다. “그냥 빈말로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는 괜찮아. 육체의 성장 말고 이쪽을 공부하는 쪽이 더 괜찮을 거다.” “아, 저도 읽어본 적 있는 책이로군요.” [파티플레이의 기본] [전투이론 초급편] [전투이론 중급편] [기초전술의 이해] ‘이해도를 높이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거야.’ 전술 능력 최하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지 않은가. 이유야 어찌 됐든 녀석이 현장지휘를 할 순간이 올 거라는 건 거의 확실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녀석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낭비하는 동선이 조금이라도 사라지고 판단 능력이 더 빨라지는 것만으로도 녀석은 반 발자국 정도 더 올라갈 수 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이해도도 올라갈 테니 전술적인 선택지로 길어질 테고…. 유일한 문제는 녀석이 이걸 받아들일까에 대한 것. 아마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곧바로 책을 덮어버리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박덕구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마 이 선물도 껄끄럽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왠지 예상되는 반응에 슬쩍 녀석의 얼굴을 바라봤지만…. ‘어, 생각보다 좋아하네.’ 의외로 기분이 좋아 보인다. 안기모가 슬쩍 손을 뻗으려고 하자 허겁지겁 내가 넘긴 책들을 품에 꼭 안는다. “그렇지, 공부해야지, 아암.” “…….” “안 그래도 이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니까. 만약 상황이 터지면 모두가 정신이 없을 테니까. 음, 음.” ‘너무 좋아하니까 또 미안해지네.’ 대충 툭 던져준 거에 저런 반응을 보여줄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쯤 되면 반응하지 않고 있던 양심 세포에 조금씩 통증이 온다. 마치 대륙의 미래가 자신에게 걸렸다는 얼굴이지 않은가. “물론 기초 훈련도 빼먹지 말고. 열심히 해야 한다. 한 달 안에 네 권을 꼭 다 읽는 거야. 내가 한 번 읽었던 거니까.” “아, 형님이 읽었던 거였구만! 거, 밑줄 같은 것도 쳐져 있고 그런 거 아니요?” “아마 쳐져 있을걸. 그건 네가 알아서 확인해 보고… 나는 이만 일어나야겠다.” “왜? 조금 더 있다 가지.” “할 일이 있으니까.” “…….” “왜?” “거, 30일 안에 볼 수는 있는 거요? 아무리 그래도 다 같이 한 번 모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시간이 나면 자리 한번 마련해 볼게.” “자리를 마련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무조건 한 번 뭉쳐야 한다니까. 거, 추진은 내가 해볼 테니까 잠깐이라도 시간 비워놓으쇼. 떨어진 지 너무 오래돼서 몇몇 사람들 얼굴은 까먹을 지경이요. 길드도 전부 정비 문제로 바꾸고… 이렇게 이상한 곳에 떨어져서 여러 가지 일을 같이 헤쳐 나가고 인연을 만든 것도 기적 같은 일인데, 최소한 얼굴은 봐야지. 형님 말대로라면 대륙 최대의 위기가 아니요.” “알겠다. 내가 한번 만들어볼게.” “정말이요? 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다 같이 한 번 봤으면 좋겠다니까.” “물론. 네 말이 맞아. 필요한 일이지.” 망원경으로 전부 볼 수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직접 만나는 것과는 차이가 있기도 했으니까. 큰 전투를 앞에 둔 만큼 길드원들을 한 번씩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쌓여 있는 일들을 대충 정리하고 나면 모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길 테고, 다 같이 자리를 만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뭔가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박덕구의 표정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예전처럼 떠들썩하게 웃으면서 시답지 않은 이야기하고, 술 마시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이 새끼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니까. 아마 파란 길드 내에서도 정이 제일 많은 사람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내가 녀석을 기용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누구 하나라도 다친다면 본인 탓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고, 만약 죽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멘탈이 바닥 끝까지 떨어져 버릴 것이다. 그게 전투의 영향을 끼친다는 건 너무 자명한 일이고, 결국에는 본인까지 갉아먹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파란 파티뿐만이 아니더라도, 녀석이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외면할 수 있을까. 사대 천사 중 하나가 다른 모험가들에게 총구를 내밀었을 때 그걸 무시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단언컨대 박덕구는 무시하지 못할 거다. 저도 모르게 뛰쳐나가 전열을 흐트러지게 하는 장면이 예상이 간다. ‘맞아, 스펙이나 확률 이전의 문제야.’ 중심에 서는 사람은 냉정해야 했고 박덕구는 냉정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 새끼는 이런 일에 어울리지 않는다. 괜스레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한 번 두드린 후에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출근하는 아빠를 배웅하는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헤어지기 싫다는 게 팍팍 느껴졌지만, 이쪽도 이곳에 시간을 더 투자할 수는 없다. 아까 이지혜의 말처럼 차희라와 정하얀의 일도 급했으니 말이다. 결국에 남은 시간은 조금 더 두 명에게 초점을 맞추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두 명 모두 좀처럼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으니 무언가 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물론 조금씩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게 성장하는 건 마음의 눈으로 대충 확인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현 상황에 마음에 드는 스펙을 얻었냐고 묻는다면 단번에 고개를 저을 수 있다. 그만큼 시간이 부족했으니, 널뛰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보자는 것이 이번 일의 취지라 할 수 있으리라. 먼저 제안한 것은 내가 아닌 차희라 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손거울이 울리는 게 느껴진다. [자기, 최대한 빨리 안 돼?] [왜 지금 해야 할 것 같아?] [글세, 그건 해봐야 알 것 같은데… 시원하게 치고받고 싸우면 머리가 조금 열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근처에 있는 숲에 들어가 봤지만 영 아니올시다고… 말했잖아. 그나마 수준이 비슷한 사람이랑 붙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런데 자기는 어때. 걔는 결국 빼기로 마음먹은 거야?] [일단은… 뭐. 그래도 완전히 쳐낸 건 아니야. 두고 보다가,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 던지기는 해봐야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다, 또. 그래서 시간은 언제야?] [얼마 안 걸릴 거야. 준비할 시간은 있어야 하니까.] [조금 더 빨리하면 안 되나? 몸이 조금 찌뿌둥한데… 가만히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조금 더 오래 날뛰게 되는 듯한 느낌이라 조금 짜증 나. 최근 들어서는 제어하는 연습을 하고 있기는 한데… 그래도 짜증 나기는 마찬가지네. 그런데 왜 김현성이 아니라 정하얀이야?] [현성이는 따로 할 일이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하얀이가 문제를 조금 겪고 있거든….] [좀처럼 성장하지 못하는 모양이네.] [응.]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 조금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뭐,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야. 솔직히 지금도 꾸준히 성장해 주고 있고, 굳이 이런 과정이 필요한지 나도 의문이지만… 아무래도 확실한 게 좋으니까. 스펙상으로는 위에 있을걸? 누나보다 강할지도 몰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아니, 누나가 꼭 이겨줘야 돼.] [그걸로 될지 모르겠네. 우리 세컨드가 나한테 깨진다고 분해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물론 충격을 먹기는 하겠지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아니야. 누나한테 지는 게 아니지.] [무슨 소리야?] [하얀이는 박미진이라는 마법사에게 지게 될 거야. 모의 전투 훈련에서 누나가 신예 마법사 박미진에게 깨졌다는 소문을 들었거든. 아마 누나보다 하얀이가 더 기다리고 있을걸.] […….] 대충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는 느낌의 메시지였다. [재미있겠네.] ‘아니, 누나…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괴수 대격돌을 내 손으로 직접 실행시키게 될지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667 회귀자 사용설명서 667화 벽 넘기(3) 사실 떡밥을 뿌린 것은 차희라와의 대담이 끝난 이후였다. 차희라가 아무나 하고 한번 싸워봐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던진 직후였다. 반쯤은 도박하는 심정으로 정하얀을 슬쩍 내밀 수밖에 없었다. 벽을 넘어야 할 것 같다고 한 차희라처럼 정하얀 역시 벽에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간단했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모의전은 그렇게 결정됐다. 이것저것 따지면서 생길 변수 하나하나를 고려했다면 조금 더 좋았겠지만, 솔직히 그 정도로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박덕구의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한 것도 결국 시간 때문이지 않은가. ‘아쉽기는 하네.’ 평소였다면 무조건 반대했을 테지만, 한소라에게 한 번 더 대륙을 구해달라고, 부탁 아닌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차희라 역시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마지막 전투에서의 배역의 중요도로 따진다면 정하얀에게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하얀이가 어느 정도까지 성장하느냐에 따라서 확률이 극단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솔직히 한소라가 없었으면 시도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처음부터 한소라를 통해 쌓아 올린 빌드업. 차희라가 정체불명의 천재 마법사 박미진에게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채 깨졌다는 걸 알린 것도 한소라였고, 계속해서 정하얀의 상태를 체크하고 있는 것 역시 한소라였다. 본인 역시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전출의 꿈을 버리지는 못했는지 조금은 적극적으로 상황을 리드하는 중이다. 물론 몸에 기억된 공포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전보다는 상황이 더 나아졌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고 했던가. 이미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한소라에게 눈앞의 위험은 보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참, 담도 커….’ 슬슬 체크해 봐야 할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려 망원경을 발동시키자, 정하얀과 한소라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오늘 같이 식사하면서 조금 더 정보를 흘리라고 말했으니 아마 이 건과 관련된 대화를 하고 있지 않을까. 분위기를 보아하니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낸 지 시간이 조금 지난 모양, 정하얀의 모습은 여전했다. 망원경으로 수시로 체크했던 그 모습 그대로다. 며칠 동안 머리는 감지 않은 것으로 보였고, 방 안에 처박혀 나오지 않은 적나라한 모습이 눈에 띈다. 제대로 뭘 먹지도 못했는지 피부가 푸석푸석해진 모습, 정하얀을 방 안에서 빼내 와서 식사시간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영웅 등급의 퀘스트가 아니었을까. 정하얀의 모습은,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필사적으로 공부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조금 기분이 찝찝하기는 했지만, 조금이라도 1회 차 정하얀에게 닿게 하기 위해서는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당연하지만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척 떨리는 목소리였고, 적어도 중노 상태로 접어든 듯한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봤어야 했는데….’ -어, 어, 어, 어떻게… 어떻게 이겼다는데? 그건…. -저도…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요. 비밀리에 이루어진 모의전이라 외부에 알려지지도 않았고요. 저도 김미영 팀장님한테 살짝 전해 들어서… 그렇게 알고만 있거든요.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들리는 이야기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여자의 페이스였다고 하더라고요. -박미진. -네, 생각보다 재능이 있는 것 같았어요. 모의전이라고 해도… 그 붉은 머리 여자가 쉽게 질 리가 없는데… 숨기고 있는 한 수가 있는 게 아닐까요. 아무리 강하다고는 해도 마법사가 전위를 제압한다는 건 힘든 일이죠. 캐스팅할 시간도 없을 테고, 어쩌면 대인전이 특기일 수도 있겠네요. 그런 종류의 마법사들도 나오기는 하니까. 정하얀 님도 가능하시잖아요. 100%… 확실해요. -그, 그, 그래도…. -별거 아니에요. 아무리 천재라고는 해도 정하얀 님만 하겠어요? 여러 가지로 부풀려진 내용도 많을 거고… 또 조금 과장해서 말하는 게 일반적이니까. 괜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서 나, 나, 나도 차, 차희라랑 모의전 하는 거지? 언, 언제 할까? 언제…. -글쎄요. 아마 곧 하지 않을까요. 연락 주신다고 했으니까, 지금부터 준비하면 될 것 같아요. -나, 나, 나도 이길 수 있겠지? -물론이죠. 박… 미진이 하는 걸 정하얀 님이 못 하실 리가 없죠. 분명히 이길 수 있으실 거예요. 그리고… 중요한 모의전이니까요.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해요. 준비도 단단히 해야 하고요. 여러 가지로 제가 도와드릴게요. ‘도가 텄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확실히 외줄 타기 달인의 모습이라고 할 만했다. 1년 동안 고층 건물에서 외줄 타기를 홀로 해왔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치고 빠지기는 어떻게 보면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솔직히 쟤를 정말로 전출시키는 게 옳은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 전출 간다고 하더라도 정하얀 분노 대응팀에서 대마법사 분노 조절 위원회로 전출 가지 않을까. 높은 연봉에 본인도 행복한 비명을 지를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솔직히 내가 신경을 써서 다른 지역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하얀이가 놔둘 것 같지는 않은데.’ 정하얀에게 이동 거리는 의미가 없었으니까. 이미 그녀를 둘도 없는 친구로 여기는 만큼, 만약 전출을 가더라도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소라도… 한 번이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넘 불쌍하잖아.’ -마음… 단단히… 응, 마음 단단히 먹어야지. -네, 대외적으로 밝혀진 것도 아니고,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이번 일은 정말 중요한 거라서… 차희라와 박미진의 모의전을 진행시킨 이후에, 곧바로 정하얀 님과 모의전을 추진한 이유가…. -이, 이, 이유가 뭔데? -그러니까. -이, 이유가 뭐야? -말, 말씀드릴게요. 지금 말씀드릴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 특별한 임무를… 네, 끕, 특별한 임무를 맡기려고 한다고… 부길드마스터와 함께 중요한 일을… 히끅. -그, 그런 거야? -확실한 건 아니에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수준이 높은 전위를 마법사가 상대해야 할 만한 미션이 있으니까. 그 미션에 부합하는 인선을 뽑으려고… 네, 물론 부길드마스터가 정하얀 님을 사랑하신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이건 일이니까요. 조금 더 강한 마법사 쪽을 고려해 보는 게 당연할 테니까, 히끅. 자꾸만 딸꾹질하는 모습, 하지만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긴장했다는 걸 말해주는 것만 같지 않은가. 솔직히 한소라의 용기도 놀랍다. 전출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공포와 두려움과 마주하는 모습은, 마왕과 마주한 용사의 모습과도 같은 처절함과 신념이 있다. -이, 이, 이길 수 있을까. 차희라… 진짜 싫은데… 진짜 싫은데… 세단 말야. -아마 무난하게 이기실 수 있으실 거예요. 박미진도 해낸 일이잖아요? 뭔가… 약점이 있지 않을까요. -차희라 진짜 싫은데… 차희라보다 박미진이 더, 더, 더 싫어. 박미진, 진짜 싫어. -저도 박미진… 별로 안 좋아해요. 부길드마스터한테 접, 저업… 근한다는 소문도 싫고,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아서…. -그, 그, 그렇지? -네,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왔다는 것도 너무 웃기잖아요… 어쩌면 그, 저번에 악마 계약자들 같은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조금 더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부길드마스터는 사람을 너무 잘 믿으시니까요. -그, 그런 거였으면 좋겠는데… 만약에 나쁜 사람이면…. -……. -죽일 수 있잖아. -죽이면 안 돼요. 네, 죽이면…. -그때는 같이해 줄 거지? -……. -그렇지? -일… 단은 차희라와의 모의전이 먼저니까요. -같이해 줄 거지? -그 일부터 집중하는 게 더 좋지…. -같, 같, 같이해 줘. -네, 물론이죠…. 갑작스럽게 박미진 살인 계획으로 탈바꿈한 현장에 왠지 모르게 내가 다 눈치가 보인다. 머리를 손톱으로 쥐어뜯고 있는 정하얀은 내 생각보다 조금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자신 없나 본데….’ 조금 의외라고 할 수 있는 부분, 그만큼 차희라를 찍어 누른다는 과업이 쉽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아마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과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거의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표정은 아까보다 더 어두워졌고, 이야기가 시작됐을 때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 이전에 한 번 들고 일어섰다가 찍어 눌린 기억이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차희라가 쉽지 않은 상대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맹수가 자신보다 더 사나운 맹수를 만났을 때처럼, 정하얀은 그때 이후로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차희라의 영역을 존중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그녀가 영역에 발을 들이는 걸 못 본 척하기로 스스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물론 차희라가 중요한 인물이고 오빠가 아끼고 좋아하는 인물이라는 것이 결정적이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하얀의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차희라가 강자였기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정하얀의 안에서 차희라는 큰 사람이다. 본인조차도 이기기 쉽지 않다고 판단하는 인물일 테니 저런 불안감을 보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어떻게 이긴 거지?’ 라거나. ‘무슨 수를 쓴 거지? 박미진은 대체 뭐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라거나. ‘내가 이길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 저번에도 졌었는데… 이번에도 질 것 같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벅벅 긁고 있는 모습을 보기가 무서웠는지 한소라가 정하얀의 양팔을 꽉 붙잡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맞아, 하얀아. 스탯상으로는 네가 더 유리해.’ -진정하세요, 정하얀 님. 분명히 성공하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안, 안 되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설사 안 된다고 하더라도 다른 방법이 있고… 또 결과적으로 부길드마스터가 정하얀 님을 내버려 둘 리가 없으니까요. ‘맞아. 그건 그래.’ -끄으윽, 끄으윽, 끄윽…. -너무 부담 가지지 마세요. ‘아니야, 부담 가져야 돼. 진짜 미안하기는 한데… 지금은 부담 가지는 게 맞아. 원래 아프면서 성장하는 거잖아. 하얀이가 또 언제 이런 시련을 겪어보겠어.’ -끄윽, 끄으으윽, 흐윽…. ‘근데 너무 서럽게 울어서 내가 다 미안하다. 더 울어야 할지도 몰라서 그게 더 미안하고….’ -두 분이 오붓하게 같이 사실 날도 얼마 안 남았잖아요?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되니까. 네, 그러면 되니까. 조금만 더 힘내요, 우리…. -끄으윽, 소라도 옆집에서 같, 같이… 살, 살, 살 거지? ‘그건 소라한테 너무 가혹한 일이야, 하얀아.’ -……. -그럴 거지? -……. -그럴 거잖아. -네…. 순간이었지만 한소라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뭔가가 잘못됐다는 얼굴이다. 이건 아니라는 듯한 눈빛,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한소라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힘, 힘, 힘낼게, 소라야. 차희라… 차희라 이길 수 있어. 박미진도 죽, 죽일 수 있어. -그렇죠…? -절대로… 안, 안, 안 뻇겨. -……. -절대로, 절대로… 안 뺏겨. 절대로 안 뺏길 거야. 절대로… 절, 절, 절대로…. 한소라의 몸이 덜덜덜 떨리는 게 시야에 비친다. 나 역시 저 자리에 있었다면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정말로 오랜만인 것 같다. 옛날 같은 정하얀의 모습을 보는 건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인 것 같았다. 괜스레 불안감이 차오른다. [누나, 제대로 준비하고 와. 진짜 옛날에 하얀이 상대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김현성이랑 싸운다고 생각하고 준비해야 돼.] 그런 메시지를 보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다. * * * “난 언제나 제대로 준비하고 있어, 자기.” # 668 회귀자 사용설명서 668화 벽 넘기(4) “하얀이 왔어? 정말 오랜만이네.” “오, 오, 오빠.” “어떻게, 그동안은 잘 지냈고?” “네, 네… 잘, 잘 지냈어요. 네, 조금 힘들기는 했는데… 그래도 잘 지냈어요. 오빠도 잘 지내셨죠? 네….” “응, 좀처럼 연락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워낙에 바빠서… 미안해, 하얀아.”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오빠가 미안할 일이 아니잖아요. 오빠가 미안할 일이 아니니까. 네… 그렇죠.” “소라 씨도 오랜만이네요.” “네, 부길드마스터, 네….”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네, 크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사실 물량을 전부 다 맞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괜찮으니 안심하셔도 돼요.” “소라가 열심히 만, 만, 만들고 있어요.” “그래?” ‘눈을 제대로 못 쳐다보겠네.’ 정하얀에게 미안해서 눈을 쳐다보지 못하겠다는 것보다는 얘 눈이 맛이 간 것 같아 제대로 마주하기가 무섭다. ‘계속 이런 건 아니야.’ 그 날 이후로 계속 망원경으로 상태를 지켜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저런 눈을 하고 있는 상태다. 그래도 이쪽을 보러 와야 했기 때문인지 깔끔한 모습을 하고 오기는 했지만,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건 여전했다. 다른 건 모두 둘째 치더라고 눈, 눈이 문제다. ‘아, 이거 괜한 짓 하는 거 아닌가. 이거 벌집 건드리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가 죽은 것같이 보이는 모습이다.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하얀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분명히 열등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 나름대로 많이 준비하고 또 마음을 다잡기는 했지만, 천재 마법사 박미진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못한 모양이다. 정하얀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쏟아부었지만 다시 처음으로 회귀한 것 같은 느낌. 어울리는 예는 아니었지만 김현성이 느낀 절망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일이 끝난 이후에 다시 한번 정하얀을 이전과 같은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괜스레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하얀을 안심시켜야 했고, 완전히 내려간 자존감도 처음부터 올려줘야 했다. 물론 모든 일이 전부 다 끝난 이후에. ‘지금 상태로는 이게 가장 최선이야.’ 정하얀의 질투와 분노는 기본적으로 낮은 자존감을 베이스로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내 해석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정하얀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인간쓰레기 같은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상황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모든 게 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언제든지 버림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정하얀은 끊임없이 불안해했고, 그 불안감은 2회 차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단순히 맛이 간 상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필사적으로 마법의 손을 붙잡았기 때문에 성장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이후에는 허겁지겁 이쪽으로 달려와 옆쪽을 차지하는 모습, 그제야 한소라의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들고 있는 폭탄을 남에게 떠안긴 것과도 같은 모양새. 최근 봤던 표정 중에 가장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너 그렇게 행복해해도 돼? 너무 티 내지 마.’ 지금 이 상황이 그녀에게는 천국이 아닐까. “준비는 조금 했고?” “네, 조, 조, 조금요.” ‘필사적이었잖아. 그동안 많이 봤어.’ “너무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돼, 하얀아. 이미 말했다시피 그냥 모의전이고 별다른 의미는 없으니까. 여러 가지 데이터가 필요해서, 그냥 딱 그 정도야. 괜히 무리하다가 다치니까. 그냥 연습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지?” “네, 알, 알, 알고 있어요, 네.” 아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지금 같은 상태에서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으니까. 이쪽의 왼쪽 팔을 어찌나 세게 잡고 있는지 내 팔이 다 얼얼해질 지경이다. 마법사치고 은근 근력 수치가 높은 정하얀의 악력에 팔이 부러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모의전은 이쪽 숲에서 진행될 거고 따로 룰을 두지는 않을 거야. 어떻게 하든 하얀이 마음이니까 마음 편하게 하면 돼.” “네, 편, 편하게 할게요. 그렇게 해야죠. 차… 희라는 언제 와요?” “아마 곧 오지 않을까 싶은데.” “왔어, 자기, 오랜만이네, 세컨드도. 이게 얼마 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지?” “…….” “급하게 오느라 밥을 안 먹고 왔는데 뭐 간단히 요기 좀 한 뒤에 해도 상관없지?” “누나 마음대로 해.” “너희도 같이 먹고 시작하지. 거기 그러니까… 파란의 한소라. 너도 같이.” “아니요, 저는….” “빼지 말고.” “네.” 차희라도 양반은 되지 못하나 보다. 그리폰에서 내린 이후, 털털하게 입을 열어왔다. 평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모습, 조금 긴장하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과는 반대로 차희라에게는 여유가 느껴졌다. 본인이 정말로 깨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만 같다. 솔직히 정하얀을 봤을 때 혹시나 그녀가 차희라를 찍어 누르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차희라의 모습을 보니 또 그렇지 않다. 조심하고 있는 건 정하얀 쪽이었고 차희라는 평소처럼 강자의 입장에 서 있다. “뭐, 대충 앉아서 먹자.” 굳이 함께 식사하는 게 필요한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나쁠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감정이 상하는 걸 도와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죽여야 하는 적이 아니라 일단은 동료라는 걸 도와주는 작업이지 않은가. 그 와중에 조금 눈에 띄었던 것은 그녀가 가져온 거대한 포댓자루였다. 자기 몸보다도 더 커다란 것 같은 포댓자루를 어째서 가져왔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마음의 눈으로 한차례 확인한 이후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무기와 방어구.’ 마실 나온 분위기였지만 확실히 준비는 한 모양, 그녀로서도 지금의 정하얀이 만만치 않다고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하긴 맨몸으로는 못 받지.’ 이전처럼 맨손으로 마법을 튕겨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차희라 역시 이해하고 있다. ‘이길 수 있겠지.’ 단순하게 생각하면 정하얀이 우위에 있지만, 경험치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용병여왕은 수없이 많은 전선을 넘나들며 경험을 쌓은 고인 물이었고 그 경험은 모두 그녀의 육체 속에 내재되어 있다. 잠깐 이성을 잃는다고 한들 쌓아왔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윽고 갑작스럽게 시작된 식사시간, 신나게 고기를 뜯고 있는 차희라와는 다르게 정하얀은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고 있다. 자꾸만 이어지고 있는 침묵에 괜스레 불편한 느낌이 든 것은 당연했다. 불안해하고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위험 전문가 한소라 역시 아까의 표정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급하게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서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하는 게 좋을 것 같고….” “그 정도야 알고 있어.”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만약에 사고가 터지면 수습해 줄 인원도 대기 중이고 몇 가지 안전장치도 마련되어 있으니까. 너무 소극적으로는 하지 않아도 돼.” “지켜야 할 게 많네. 무리해서도 안 되고, 소극적으로 해도 안 되면….” “…….” “뭐, 대충은 먹었으니까 슬슬 무장이나 입어야지.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자기는 최대한 떨어져. 여기서 대기하지 말고, 조금 더 떨어지라는 거야. 괜히 야한 냄새 풍기지 말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누나. 내가 언제 그런 냄새를 풍겼다고 그래.’ “항상 입을 때마다 귀찮단 말이야. 그리고 이 포댓자루도 들고 다니기 귀찮아 죽겠는데, 무한의 가방은 매물이 없어요. 매물이 없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진작에 좀 사놓을 걸 그랬다니까.” ‘나는 많이 가지고 있는데.’ 하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멋들어진 검정색 갑옷을 부위별로 착용하느라 바빠 보이지 않은가. 당연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다. 차희라가 평소에 입고 다니는 옷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그녀의 말 그대로 착용하는 것부터가 일처럼 느껴질 것 같은 중량감이 전해진다. 물론 저게 차희라한테 얼마나 무겁겠냐만은 애매한 전위에게는 무척 무거운 무게로 느껴질 것이다. 세트는커녕 한 부위도 들지 못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심지어 양손에 커다란 대검과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은 신화에서나 나오는 전사 같은 외형이다. ‘위압감….’ 정하얀 역시 느끼고 있지 않을까. 별다른 말을 해오지 않고 있었지만 긴장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긴장돼?” “별, 별, 별로요.” “긴장 풀어. 어차피 모의전인데 뭐 어때? 뭐 너한테는 걸린 게 조금 많으려나. 강하긴 강하더라, 박미진.” ‘누나, 왜 그래.’ “정말로 강하더라고. 나도 오랜만에 자존심이 좀 뭉개졌지 뭐야. 적당히 해도 돼, 세컨드. 내가 볼 때는 결과도 뻔할 것 같은데. 솔직히 자기 부탁 아니었으면 여기 와 있지도 않았을 거야.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것 같은 느낌이니까. 뭐, 최선을 다해봐.” ‘누나, 그만해.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아.’ [이거 진짜 꿀잼이네요. 빨리 시작 안 해요?] ‘누나도 그만해, 시바 좀.’ “…….” 터질 것 같은 장내가 괜스레 불안하게 보인다. 아마 쓸데없는 차희라의 발언은 그만큼 진심으로 싸우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미적지근하게 토닥토닥거리다 훈련 끝이라고 말하는 건 그녀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 물고를 박미진으로 틀었으니 마무리도 한 번 박미진으로 해보겠다는 심산이겠지. “내가 살기 지우는 방법 좀 배우라고 하지 않았었나.” “짜, 짜, 짜증 나… 짜증 나는데… 진짜….”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정하얀의 모습도 시야에 비친다. 같은 자리에 없어도 된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만족스러워지는 시점이다. 이 괴수 대격돌에 휩쓸리면 누구라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빨, 빨리 가요, 부길드마스터. 빨리요, 빨리.” “알겠….” “지금 가야 해요. 지금… 지금 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여기 빠져나가야 한다고요. 지금….” “아니, 잠깐만… 기다….” “지금 빠져나가야 한다고….” “아니, 뭐가 그리 급해.” “지금 가야 한다고! 이 시발놈아!” 한소라의 목소리가 튀어나온 직후 갑작스레 숲에 있는 새들이 하늘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시바, 깜짝이야.’ 자연재해가 일어나기 전의 숲 같은 느낌, 조금 놀라운 것은 한소라가 저 야생 동물들보다 자연재해를 먼저 감지했다는 것. ‘얘는 정체가 뭐야’ 잠깐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바로 눈앞에 있는 나한테도 느껴진다. 차희라는 여전히 히죽히죽거리고 있었고, 정하얀은 점점 고개를 숙이며 들리지 않은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준비 시작이라고 말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울리는 상황이 아니다. 핏발이 선 눈으로 입술을 꽉 깨무는 정하얀, 당연히 입에서는 붉은색 피가 흘러내렸지만,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너, 그러다 뺏기겠더라.”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드드드드드드득! 폭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차희라의 몸이 몇백 미터가량 떠서 반대쪽으로 처박히는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튀자.” 이미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붉은색 괴물이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고,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 그리폰 안장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튀어!!” “두고 가지 마요. 두고 가지 마… 나, 두고 가지 마!” “…….” “제발, 제발!” “빨리 튀어!!” “야, 야 이 개새끼야! 나 두고 가지 말라고! 흐어어엉… 두고 가지 마! 흐으윽… 두고 가지 말라고오!!” # 669 회귀자 사용설명서 669화 벽 넘기(5) 절뚝이면서도 힘차게 달려오는 한소라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불쌍해 보인다. 최선을 다해 달리다 돌부리에 걸려 철퍼덕 쓰러지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가슴 아픈 장면이었다. 사실 버리고 갈 생각은 없었지만, 저도 모르게 그리폰의 등을 두드린 것이 문제,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하늘의 맹세코 말하건대 절대로 버리려고 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다. 아니, 솔직히 내가 등을 두드리기 전에 화이트 폴, 이 새끼가 한소라를 버리고 튀려고 했다. 심지어 나까지 버리고 튀려고 했었던 것 같았다. “버리지 마! 버리지 마!!” ‘미안해, 소라야. 늦은 것 같아. 살아남을 수 있지? 그렇지?’ 서서히 그리폰이 떠오르고 있는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일까. 한소라는 더욱더 커다란 목소리로 힘차게 자신의 생존권을 주장하고 있다. 어떻게든 한소라를 함께 데려가야 한다고, 그녀를 이대로 저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겁먹은 화이트 폴은 이미 공중으로 도망갈 준비를 마쳤다. 야생동물들이 괜히 숲 밖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지 않은가. 화이트 폴은 훈련을 받았지만 엄연히 동물이었으니 녀석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튀는 타이밍을 놓친다면 모든 일을 그르치는 것은 물론 정체불명의 야 한 냄새를 맡은 희라 누나가 이쪽으로 향할지도 모른다. 순수했던 모의전이 개싸움으로 변모하며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일어날 것이다. 당연하지만 처음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거라 장담할 수 있다. 한소라가 아예 무능력자도 아니고 아마 몇 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아… 하아… 버리지 말라고! 이 개새끼야!! 흐어어엉….” 그녀가 손을 뻗으며 주문을 외운 것은 바로 그때. ‘아, 시바.’ 금방이라도 창공으로 날아갈 것만 같았던 화이트 폴이 허우적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저주 걸었자너. 와, 진짜 인성… 괜히 흑마법사가 아니다, 한소라는 진짜.’ “빨리 오세요! 소라 씨.” “허억, 허억, 허억, 기다려… 기다려… 흐어엉….” 일단은 손을 최대한 뻗는 모션을 취해주자. 이왕 이렇게 된 거 애초부터 버릴 생각은 없었다는 걸 어필해야지. 필사적으로 손을 뻗으며 달려오는 한소라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잡힌 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화이트 폴에게 걸려 있던 디버프들이 일순간 해제되며 순식간에 하늘로 날갯짓하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정체불명의 충격파가 화이트 폴을 덮친 것은 바로 그때. “꺄아아아아아악!” “으기윽!” 정신은 없지만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다. 공중에서 충격파를 처맞고 튕겨 나간 화이트 폴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중이지 않을까. 도대체 뭘 하고 있길래 벌써부터 저런 충격파가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이 새끼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와 꽂힌다. 힘없이 떨어지던 녀석이 갑작스레 중심을 잡은 것은 지면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뭐야, 이 새끼. 어떻게 했어?’ 꿀 빠는 걸 좋아해서 힘든 일은 김현성의 그리폰에게 맡겨 버리고, 훈련을 게을리하는 화이트 폴의 개인 능력이 아니다. 시야에 비친 것은 녀석의 안장에 장식된 여러 가지 아티팩트였다. 그리폰이 중심을 잃어버렸을 때 도움을 주고 안정적인 라이딩을 즐길 수 있게 마련된 각종 안전장치. 애초 이 파동에 휩쓸린 이후에 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은 것도 안전벨트의 힘이다. 그리폰 마니아가 셋팅해 놓은 것들이 정말로 효과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래서 안전벨트, 안전벨트 하는 구나.’ 뭐 그리 비싼 돈 들여서 마력벨트 아티팩트나 여러 가지 보조도구를 설치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이제야 좀 이해가 간다. 나도 이런 거 달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봤을 정도, 날개를 꺼낸다고 한들 아직 날개를 펼치는 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우리 소중한 길드원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지는 않았을까 진심 어린 걱정의 마음이 가슴속에서 우러나왔다. “좀 괜찮으십니까, 소라 씨?” “흐윽… 괜, 괜찮….” “다행이군요.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리고….” “…….” “오늘 돌아가시면 특별 수당으로 인센티브 넉넉하게….” “…….” “아무튼 빨리 시작하죠.” “흐으으윽….”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먼저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이길 수 있을까가 아니라 이겨야 한다. 만약 차희라가 져버린다면 정하얀이 다른 의미로 폭주할 가능성도 충분했으니 말이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이후에는 천천히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망원경을 곧바로 발동시키자 정하얀과 대치하고 있는 차희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까의 충격파는 단순한 워밍업 이었던 모양, 대화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입술을 꽉 깨문 채 극노 상태로 접어든 정하얀과 미치기 일보 직전의 얼굴을 한 차희라만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아직 제대로 시작한 건 아니네요. 소라 씨, 데이터 확실하게 확보해 놓으셔야 합니다.” “네.” “오늘 얻은 데이터로 계속해서 시뮬레이션 돌려볼 거니까요.” “…….” ‘진짜 버리려고 한 거 아니야, 소라야. 진짜라고. 그런 눈으로 보지마.’ “크흠… 저, 아까는 죄송합니다. 화이트 폴이 그만 놀란 것 같아서….” “…….”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닌데, 진짜.’ “어찌 됐든 간에 일합시다, 일. 소라 씨, 전출 가셔야죠. 전출 안 가실 거예요?” “갈, 갈게요.” “그럼 빨리 여신의 거울 켜주세요. 아, 그러고 보니 소라 씨는 누가 이길 것 같아요?” “글… 쎄요… 솔직히 저는 잘… 보고서로도 제대로 측정하기 어렵다고 이미 말씀드렸고….” “그냥 시덥지 않은 질문이니까 대충 대답하셔도 됩니다.” “솔직히 정하얀 님이 지시는 건 상상하기 힘들지만… 왠지 모르게… 지실 것 같네요.” “근거는 있어요?” “멘탈의 차이로 생각해요. 조금 겁먹으신 것 같기도 했고, 항상 지는 상황을 염두에 두셨던 것 같아서.” ‘일리 있네.’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한마디였다. 애초 패배를 생각하는 사람과 자신이 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확실하다.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상관없지만, 차희라와 정하얀은 겁을 집어먹은 쪽과 전혀 겁먹지 않은 쪽의 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차희라는 웃고 있지만 정하얀은 울상을 짓고 있다. 다른 말은 필요가 없다. 딱 저 차이, 저 차이가 승패를 결정지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물론 항상 초월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정하얀이 개인 능력으로 이걸 극복할 수 있을지가 관전 포인트. 정하얀이 주문을 외운 것은 바로 그때였다. -……!! 쏟아져 나간 마법의 개수는 정확히…. ‘8개?’ “뭐야, 어떻게 저래. 뭐야? 어떻게 주문을 한꺼번에 8개를 외워.” 큰 마법이 아닌, 기초 마법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8개의 마법을 동시에 외울 수 있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웠다. ‘뭐야, 이거. 생각보다 어려운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리라. 본래 마법사가 전사를 상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한꺼번에 몇 개의 마법을 캐스팅할 수 있는지였으니까. 2개의 마법을 메모라이징해 놓으면 목숨이 2개이고, 한 번에 3개의 마법을 외울 수 있다면 3개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상장 폐지 직전에 있는 라파엘 파티의 마법사가 그랬다. 녀석은 한꺼번에 3개를 외울 수 있었고, 김현성을 상대로 각각 1초씩, 총 3초를 버는 것에 성공했다. 녀석과 정하얀의 차이가 있다면, 녀석은 한 가지 마법을 3번 충전할 수 있었다는 것. 정하얀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각기 다른 마법으로 8개 마법을 캐스팅할 수 있었고. 또. “마법을 발동시키면서도… 캐스팅할 수 있네.” 수준이 높은 마법사는 상대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주 잘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정하얀에게는 틈이 없다. ‘1회 차가 이것보다 더 세다고? 정말이야?’ 1번 마법을 사용하고, 2번째 마법을 사용할 때까지의 쿨타임이 없다. 당장 아무 온라인 게임을 예로 들어 상상해 보라. 마법사가 쿨타임 없이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다른 직업들이 난리가 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지금 정하얀이 보여주는 모습은 누가 봐도 밸런스 파괴처럼 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장황한 설명이 사실이라는 것을 말해주듯이 차희라가 수세에 밀리고 있었다. 콰드드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죽, 죽, 죽어어어!!! ‘안 돼, 죽이지 마.’ 콰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앙!!! -쓰, 쓰러져! 쓰러져! 쓰러져!! 쓰러져어어!! 빨리 쓰러지라구!! 콰지지지지지지지직! 말 그대로 자연재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무력, 솔직히 여신의 거울로는 차희라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곧바로 망원경을 발동시키자 차희라의 모습이 더 가까이 잡히기 시작했다. 폭발과 굉음, 불과 얼음, 폭풍과 뇌전의 가운데에서 버티는 모습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 정하얀도 저 모습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 아무것도 안 보이지 않을까. 장기전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네모네의 눈 역시 발동하지 않은 듯했다. 정하얀의 시점에서 본다면 아마 거대한 숲이 마법으로 가득 차 있는 것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정면으로 쏟아지는 마법은 도끼와 대검으로 쳐 내고 피할 수 있는 것들은 피한다. 내구도로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미끼용 범위 마법은 갑옷의 마법 저항력으로 받아낸다. 그 가운데에서 쏟아지는 질 좋은 마력을 담은 것들은 모조리 쳐 내고 있다. 이전에 정하얀이 사용했던 마법을 손으로 튕겨내는 모습을 봤지만, 지금 보여주는 것과는 괴리감이 있다. 그녀를 집어삼킬 것처럼 다가오는 거대한 얼음덩이를 도끼로 깨부수고, 지름이 몇십 미터나 되는 싱크홀을 만들 수 있는 불덩이를 대검으로 쳐서 튕겨낸다. 쏟아지는 바람의 칼날은 어깨로 튕겨내고, 심지어 건틀릿을 낀 손으로 마력의 구체를 부숴 버린다. 김현성이 싸우는 장면을 보고 항상 멋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사람의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차희라가 보여주는 모습은 순수한 강함 그 자체. 검술이나 기술 따위에 의지하지 않는 힘. ‘압도적인 무력.’ 콰드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폭음이 끊임없이 들려오는 가운데, 다시 한번 터져 나온 것은 정하얀의 주문. “뭐야, 뭔데. 저거 뭔데.” 하늘의 색깔이 바뀌고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에 드리운다. 구름이 열리고 거대한 풍압과 함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운석이 떨어져 내린다. 앞에 사용한 마법들 모두가 이번 마법을 위한 연막,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공화국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운석 마법보다 규모가 크다. 아니, 라이오스를 불바다로 만들 뻔한 벨리알의 한 방보다 지금의 것이 더 크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걸 바라봤다. ‘죽는 거 아니야?’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저 정도의 마법을 맞고 버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으니까. 뭔가 조치하는 게 맞을까? 내가 너무 정하얀을 과소평가하고 희라 누나를 과대평가한 것이 아닐까? 여러 불안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재미있다고 웃고 있는 차희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하하하핫! ‘뭐야, 미쳤어. 뭐야.’ -하… 하하하하하하핫! ‘누나, 실성한 거 아니지? 그렇지?’ -X나 재미있네, 시발. ‘뭐가 재밌어.’ -하하하하하하하하핫!!! # 670 회귀자 사용설명서 670화 벽 넘기(6) ‘저게 정말 재미있는 상황이야?’ 아마 내가 차희라의 입장이었더라면 곧바로 무릎을 꿇고 살고 싶다고 외치지 않았을까. 누구나 그렇게 행동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김현성조차 저 운석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언정 즐거운 듯이 웃지는 못할 것이다. 애초에 그런 성격도 아니었지만 그만큼 정하얀이 떨어뜨린 운석은 좌절감을 느끼게 했다. ‘저건 막지 못할 거야. 살아남을 수 없어.’ 따위의 말을 내뱉게 되는 절망적인 상황. 대마왕이 용사 파티를 향해 떨어뜨린 필살기처럼 보이는 수준이다. 이미 정형화된 마법이라고 볼 수 없는 무언가는 대륙의 다른 마법사들이 보여줄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더 끌어당기는 쪽이 붉은 머리의 괴물 쪽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하하하하하하하핫!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차희라의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즐거울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 못한 채로 시간을 보낸 지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던가. 머릿속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준다고 몬스터의 숲을 들락날락하긴 했지만, 녀석들이 그녀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을 리 없다. 그녀는 정신이 날아갈 정도로 치고받는 걸 원하고, 또 원했고 실제로 그걸 실현했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어떤 성취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 감각이라고, 이걸 원했던 거라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취한 듯한 기분이 아닐까. 그녀는 싸움에 중독된 것처럼 보였다. 천천히 붉어지는 눈, 지성을 깎아내리는 대가로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근력이 일시적으로 그녀의 몸에 깃들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 운석에 저항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양팔을 크게 벌리며, 오히려 떨어지는 마법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짐승이 그륵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차희라의 도끼가 운석에 닿았고.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차희라가 운석을 향해 대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우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발이 땅바닥에 박힐 정도의 압도적인 질량을 견디는 것은 그녀의 육체, 맨몸이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거 푹 찍 하겠는데? 푹 찍 할 것 같은데? 압사하는 거 아니지? 누나?’ 차희라가 다시 한번 도끼를 휘둘렀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떨어지던 운석이 흔들리고, 정하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 어떻게든 저걸 땅바닥에 내리꽂으려는 이와 튕겨내려는 이의 싸움은 입이 다 말라올 정도였다. ‘구하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차희라 죽으면 다 망하는데… 곧바로 노아의 방주 타야 돼.’ 콰지지지지지지직! 발목이 땅에 박혔을 즈음에 한 번 더 휘둘러지는 도끼.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부수려는 건가?’ 솔직히 가능할지 모르겠다. 현시점에서는 나 역시 그녀가 버틸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쓰러져!!! 이 괴, 괴, 괴물!! 괴물!!! 제발 쓰러져! 이 괴물!! 자기도 괴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외침이 들려온 직후에는 다시 한번 더.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운석을 지탱하고 있는 한쪽 팔은 완전히 만신창이. 압력에 의해 갑옷이 터져 나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 역시 침을 삼키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정강이가 바닥에 박힐 즈음, 다시 한번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이 보인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안 부서질 것 같은데? 저거 안 부서지겠는데? 차희라 죽는다, 시바. 안 돼, 희라 누나 죽으면 안 돼.’ 힘이 달리는지 도끼를 휘두르던 손마저 운석을 떠받친다. 사실상 끝난 싸움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저걸 쪼갤 수 있을지언정 되돌리거나 튕겨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연하지만 받아내는 것 또한 불가능할 것이다. 계획은 흐트러졌지만, 일단은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뭐야.” 또다시 폭음이 들려온 것.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소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여신의 거울에 보이는 장면은 운석에 머리를 박고 있는 차희라의 모습. ‘갑자기 무슨 박치기야.’ 더 황당한 것은 거대한 운석에서 후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떨어져 내리던 운석이 부서지는 것이 보인다. 내부에 충격이 쌓인 건지 계속해서 터져 나간다. 비현실적인 광경을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은 허탈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결국에는 귀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운석이 폭발하든 사방으로 터져 나간다. 내 표정보다 더 볼 만했던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한 정하얀. -제발, 제발 쓰러지라구!! 차희라는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파편의 비를 맞이하는 중이다. 다양한 효과음을 가진 굉음을 내며 파편들을 쳐 내거나 때려 부수고 있다. 아까와 차이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공중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파편들을 밟고 정하얀이 떠 있는 하늘을 향해 몸을 움직이고 있다. 김현성처럼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다리의 근력이 선물해 준 속도는 방향을 바꿀 수는 없지만, 직선적인 움직임에는 강하다. 무작정 위를 향해 나아가다 보니 떨어지는 운석의 파편에 맞아 나가떨어지거나 자잘한 것들이 몸에 부딪혔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정하얀의 몸이 사라진 것은 차희라가 중간쯤 올라왔을 때였다. ‘텔레포트.’ “거리를 벌린 건가?” 순간이동을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 이미 거리 따위는 무의미하다. 전사와 마법사가 전투를 벌일 때 2번째로 중요한 요소인 거리는 정하얀이 컨트롤하고 있다. 운석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차희라는 잃은 게 많다. 정하얀 역시 마력을 많이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라면 차희라의 체력이 먼저 떨어질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순간이동의 목적지가 차희라의 뒤라는 걸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 근거리에서 마법을 쏘아낼 작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굉음과 함께 차희라의 몸이 튕겨 나간다. 그녀 역시 정하얀이 접근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망원경으로 제대로 잡히지 않을 정도로 몸을 이동시키며 온갖 마법을 차희라의 몸에 때려 박는 정하얀의 모습은 옛날 만화책에서나 보던 초인을 떠올리게 했다. 잠깐이나마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자 마력의 빛이 번쩍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붉은 짐승이 야심 차게 공중으로 올라갔지만 처맞는 것밖에는 하는 게 없다. 아직도 떨어지고 있는 파편을 잡아 던지거나 정하얀을 쫓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순간이동을 사용하고 있는 마법사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희라는 초조해하지 않는다. 조금 짜증이 난다는 모습을 보이는 게 전부다. 텔레포트를 하며 외운 짧은 주문으로는 결정적인 대미지를 줄 수 없다. 정하얀 역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진 그리고 있는 거네.’ 하늘에서 마법진을 그리고 있다. 마법진이 완성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직후, 운석의 파편들이 일순간 멈춰서 차희라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간이 아니야….”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한소라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러니까 인류의 최종병기라는 소리가 나오는 거지.’ 규격 외라는 표현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저들이 같은 인간인지도 의심이 간다. “정하얀 님이… 이기실 것 같아요. 정하얀 님이… 이기네요. 이기고 있어요!” “글쎄요.” “정하얀 님은… 어떻게… 인간이… 물론 차희라 역시 강하기는 하지만 정하얀 님을 보세요. 저런 상황에서 계속해서 주문을 외운다는 것 자체가 설명이 되지 않아요. 단순히 마법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도 아시는 것 같아요. 응용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천부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네요. 정말로….” “대단하기는 하네요. 솔직히 이 정도로 싸워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제가 너무 정하얀 님을 과소평가했었네요.” “…….” “부길드마스터, 이대로 정하얀 님이 이기시면 어떻게 해요?” “하얀이가 질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요. 하얀이가 질 겁니다.” “…….” “…….” “개입하시려는 건 아니죠?” ‘얘가 사람을 뭘로 보고.’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개입할 수 있겠어요? 개입이고 나발이고 둘 다 죽어요. 그냥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말씀드리는 건데….” 일방적으로 정하얀이 밀어붙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인데, 도대체 저 옹이구멍은 뭘 보고 저딴 말을 지껄이냐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고, 내 눈만 보이는 것이 있지 않은가. 정하얀은 마력을 급속도로 소비하고 있었고, 아직까지 치명타다운 치명타를 먹이지 못하고 있다. 물론 차희라의 체력이 먼저 떨어진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희라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성.’ 그녀의 특성에 서서히 변화가 생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성-피에 미친 광녀-?????] [???] ‘벽을 넘을 거야.’ 그렇게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벽이 있다느니, 조금만 더 하면 넘을 수 있을 것 같다느니 하는 말들은 실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진짜로 넘네. 진짜로 넘는 거야?’ 그녀는 이 싸움을 성장하기 위한 발판으로 만들었고, 실제로도 내디뎠다. 어떻게 보면 멘탈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강해, 나는 더 강해질 수 있어.’ 라는 생각과. ‘제발 쓰러져.’ 라는 생각이 나눈 결과물. 차희라는 계속해서 웃고 있다. 본인이 벽을 뛰어넘는 중이라는 걸 실감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하얀과의 싸움이 점점 재미있어지는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광소를 터뜨리고 있다. 돌덩이에 파묻히고 불에 데이고 몸이 튕겨 나가면서도 계속해서 무기를 휘두르며 웃고 있다. 왜 저렇게 웃으며 무기를 쉴 새 없이 휘두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도끼가 지면이 닿자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대기가 떨리고, 검이 휘둘러 지면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모든 상황이 놀이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반면에 정하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모습이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온갖 마법을 던지고 있었지만,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분명히 마법의 폭풍에 휘말린 것은 피에 미친 광녀였지만, 정하얀 자신이 폭풍에 휘말린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정하얀 님이 이길 거예요. 제발….” ‘하얀이가 져야 이야기가 돼.’ 같이 지낸 시간이 많다 보니 저런 필사적인 모습에 감정이입하는 것 같다. 하지만 마력의 폭풍 속에서 한 발자국을 내딛는 용병여왕의 모습은 한소라의 기도를 비웃듯 부정하고 있었다. 두 눈으로 똑바로 정하얀을 응시하는 표정은 덤이고 말이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계속해서 히죽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는 차희라의 몸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그 결과물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특성-피에 미친 광녀-준 신화 등급] [지력 스텟을 하락시켜 지력 스텟과 행운 스텟을 제외한 모든 스텟을 상향시킵니다.] 단순히 벽을 뛰어넘은 것이 아니라, 본인 앞에 세워진 장벽을 남김없이 부숴 버렸다. 떡상 중에 떡상. 하늘로 솟아오른 주식. “상한가 쳤다….” 나 자신도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차희라는 스스로의 힘으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문을 부수고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 # 671 회귀자 사용설명서 671화 한소라 데뷔(1) 가면쓰레기는…. ‘도대체 진청은 희라 누나를 어떻게 감당한 거지?’ 그따위 생각이 가장 먼저 들어와 꽂혔다. 최강의 인간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지 않은가. ‘아니지.’ 우리 현성이도 차희라가 강하다는 걸 인정했지만, 이 정도까지 강하다고 묘사한 적은 없다. 계속해서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녀가 각성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1회 차에서는 이번과 같은 이벤트가 없었다. 차희라가 모든 걸 쏟아붓고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간이 없었다는 거다. ‘아니야, 그것도 아니지. 사대 천사라는 놈들이랑 붙어봤을 거 아냐.’ 조금 고민하기는 했지만, 김현성은 모르고 있었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실종됐는지는 모르지만 조금만 생각해도 차희라를 붙잡아둘 만한 요소는 많았다. 그녀는 붉은 용병을 자신의 자식처럼 여기고 있었고, 실제로 아끼는 것들을 위해 나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굳이 차희라에게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 역시, 그녀가 거절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쪽은 차희라를 데려갈 생각이지만 그녀가 원하는 건 길드와 함께 죽는 거라는 걸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그녀가 아끼는 이들을 이용해 차희라를 꾀어내고 함정을 만들어 그녀를 고립시키지 않았을까. 김현성을 상대했을 때처럼 온갖 더러운 짓을 하며 천천히 그녀를 수면 아래로 끌어내렸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정확히 어떤 수단을 썼는지,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든 게 의문에 싸여 있지만, 명확한 팩트는 인간쓰레기 진청이 그녀를 실종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 ‘대단한 새끼, 빨리 퇴장시켜서 다행이야.’ 녀석이 공화국의 세력과 바깥 신에게 손을 뻗었다면 나는 대륙이 승리할 확률을 40% 이상 내렸을지도 모른다. 잠깐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차희라의 모습은 믿기지 않았다. 거칠 것 없다는 듯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당연하지만 정하얀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승부는 이미 끝났다. 굳이 더 이상은 싸워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누구보다 정하얀이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다. 하얀이 역시 경지에 오른 강자인 만큼 그녀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내구 스텟으로 만들어진 마법 저항력에 정하얀이 쏘아대는 마법이 먹히지도 않는다. -끄윽… 오, 오지 마! 오지 마! 필사적으로 마법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이미 앙꼬 없는 찐빵. 계속해서 지속된 전투에 바다 같았던 정하얀의 마력도 바닥을 내보이고 있었고 다른 것보다 멘탈이 많이 망가졌다. 모르긴 몰라도 ‘졌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순간 이동 주문도 외워지지 않는지, 차희라의 진군을 늦추는 데만 급급한데, 어떻게 그녀를 막을 수 있을까. 결국에는 밀도가 높은 보호 마법으로 몸을 둘둘 마는 모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 ‘무승부.’ 차희라의 특성은 시간이 지나면 끝나니까. 그때까지만 버티고 무승부 판정을 받으려는 게 아닐까. 지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은 이해되지만 저럴수록 본인이 더 비참해 보인다는 걸 왜 모를까. “내려가요.” “지, 지금 내려가도 되나요?” “공화국 전쟁 때 썼던 포션 떨어뜨릴 겁니다. 조금 놔두면 잠잠해지겠죠.” -끄으윽, 흐으윽…. 콰아아아아아아앙!! 무기로 보호막을 두드릴 때마다 마력이 크게 흔들리는 거로 봐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거다. -흐어어어엉, 흐으윽, 흐어어어어엉…. ‘왜 이렇게 서럽게 울어, 하얀아.’ -흐어어어어어어어엉… 싫어, 끄윽, 히끅, 흐어어어엉…. 이미 전투를 포기했다. 싸울 의지도 없고,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 차희라가 잠잠히 그녀를 내려다본 것은 바로 그때. ‘정신이 돌아왔나?’ 아니, 이전과 같다. 어째서 차희라가 얌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하얀에게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 아닐까.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희라는 정하얀에게 완전히 무관심해졌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이쪽을 올려다보는 것 같다. 조금 더 하늘 높이 날아가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지만, 천천히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차희라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온·오프도 가능한 거야, 누나?’ -흐어어어어엉… 끄으윽, 어어어어엉… 히끅. -후우…. -끄윽, 끄으으윽…. -수고했어, 세컨드. 곧바로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는 차희라. “소라 씨는 하얀이한테 먼저 가봐요.” “네? 아… 네.” “저도 잠깐 희라 누나랑 이야기 좀 하고 곧바로 합류할 테니까.” “빨리… 오셔야 해요.” “네.” 대답한 후 곧바로 몸을 옮겼다. 이미 정하얀과 멀찍이 떨어진 차희라에게 다가서자, 그녀가 이쪽을 빤히 바라봤다. ‘아직 완전히 정상으로 되돌아온 건 아닌가?’ 괜히 눈치가 보였지만, 이상은 없다. 뭔가 입맛을 다시는 얼굴 같았지만, 전투가 끝난 후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것과 비슷한 상태이리라. 일대가 완전히 개박살이 났기 때문에 제대로 발 디딜 곳을 찾기 힘든 상황이다. 저도 모르게 발을 헛디디자 한걸음 성큼 뛰어와 내 팔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대충은 계획대로 된 건가?” “기분 어때, 누나?” “참기 힘든데, 막 전투가 끝난 직후라.” “아니, 그런 느낌이 아니라 감상을 묻는 거야.” “당연한 결과라 커다란 감흥은 없지만,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를 묻는 거냐면 기분은 좋네. 지금 좀 힘든 상태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제어도 할 수 있게 된 것 같고… 예상했다니까.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난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지금보다도 더 강해질 수 있을까?”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이빨을 보이며 웃는 표정은 긍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보다 빨리 세컨드한테나 가봐. 즐거웠다고 꼭 전해주고.” “누나는 안 가?” “원인 제공자가 가서 뭐 하겠어? 오히려 속만 뒤집어 놓겠지, 뭐. 나는 내 나름대로 정리할 부분도 있고… 생각보다 더 많은 걸 얻어서 이 감각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거든….” “몸 상태는 점검하고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당장 할 필요는 없고… 오늘 안에만 하면 되겠지, 뭐. 저녁에 길드로 찾아와, 자기.” “…….” “승자는 전리품을 갖는 게 상식이지, 그렇지 않아?” ‘아니야, 누나. 그런 상식 없어.’ 마치 사자가 먹잇감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안 가면 안 되겠지?’ 당연히 그런 선택지는 없다. “준비 잘해서 오고. 아, 그리고 나한테 쓰려고 했던 향수? 아니, 야 한 냄새 포션 있지? 그거 전부 다 챙겨와.” ‘그건 왜.’ “먼저 갈게.” “응, 축하해, 누나.” “당연한 걸 가지고.” 주먹을 꽉 쥐고 자신을 내려다본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발걸음을 옮기는 모양새가 더 당당해진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원하는 것을 얻었고, 아직 본인의 앞에 놓인 벽이 더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테니까. 벽을 깨고 난 뒤에 늘어져 있는 또 다른 벽을 바라보며 차희라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마 일반인들이라면 절망하지 않았을까. 또 저 벽을 어떻게 넘어야 하는지, 언제쯤 눈 앞에 있는 걸 모두 치워 버리고 멋진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을지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차희라에게는 눈 앞에 놓인 벽이 그 어떤 풍경보다도 멋진 풍경이다.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네.’ 아마 1회차 정하얀도 차희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눈 앞에 놓인 벽들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고, 아직 본인이 더 파고들 여지가 있다는 것에 기뻐했을 것이다. 물론 현재는 그렇지 않다. 정하얀에게 앞에 놓인 벽은 스트레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계속해서 우는 모습, 열심히 지은 집이 허물어져 버린 수달의 모습처럼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오열하고 있었다. -흐어어어엉… 끄윽, 싫어어…. -정하얀 님… 그… 잘…. -어어어어어어엉… 히끅, 히끅. 정하얀 억제기, 한소라도 어떤 포지션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어서 빨리 내가 돌아와 줬으면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그녀도 패닉에 빠진 모양이다. ‘너무 상심한 것 같은데.’ 아예 모든 걸 다 놔버린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의 반응이다. 심지어 위로하려는 한소라의 손을 쳐 내고 있다. ‘안 돼, 하얀아. 그러지 마.’ -이, 이, 이길 수 있을 거라며… 끄으윽… 흐윽…. -죄송….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말했었잖아…. 흐윽, 흐으윽, 소라가 그렇게 말했었잖아. -죄송해요, 정하얀 님. 제가… 잘 몰라서… 죄송해요. -끄윽, 끄으윽,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했으면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했으면서!! 한소라에게 화내고 있었지만, 아마도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아닐까. 땅바닥에 있는 자갈들을 한 움큼 쥐어 한소라에게 던지는 모습은 마치 떼를 쓰는 것만 같다. 남 탓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 같았지만, 여전히 한소라는 소중한 모양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다진 고기가 되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마 정하얀으로서도 저게 최선이겠지.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너무… 네, 전술에 문제가 있어서… 제 잘 못인 것 같은데… 부길드마스터한테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너무, 너무, 실망하지는 마세요. 제 잘못이라고 말씀드릴 테니까. -소라 잘못이야. 네, 네, 네 잘못이야!! 흐윽… 흐어어엉…. -……. -한소라, 싫어. 한소라, 진짜 싫어. 끄윽… 끄윽…. -…해요. -보, 보, 보기 싫어! 얼굴 보기 싫어! 끄윽…. 이제는 육성으로 목소리가 들어올 정도의 거리. 내가 오는 모습을 확인했는지, 정하얀이 한소라를 밀치며 곧바로 내 품에 안겨들었다. “소, 소라 때문이에요.” 절박한 표정. 흔들리는 눈. “수고했어, 하얀아. 결과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데이터 수집 차원에서 했던 모의전이었으니까. 하얀이가 지든, 이기든 별로 상관없어. 내가 하얀이가 싫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많이 힘들 테니까. 집에 일찍 들어가서 쉬자.” 무한한 절망감을 느낀 것 같은 얼굴이다. ‘실망하지 마, 하얀아. 너도 충분히 넘을 수 있어. 분명히 넘을 수 있을 거야.’ 그녀 역시 차희라처럼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한소라만 잘해준다면 말이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소라 씨 연기해 본 적 있어요? (0/1)] [한소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제발 이러지 말라는 한소라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너도 이제 연습생 생활 청산하고 데뷔해야지.’ 한소라의 데뷔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 672 회귀자 사용설명서 672화 한소라 데뷔(2) “이기영 님, 이렇게 오랜만에 찾아주셔서 기쁘기 그지없네요.” “저도 오랜만에 희영 씨를 보니,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습니다. 항상 그랬지만 편안한 느낌도 들고요. 다들 길드에 보이지 않던데,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요즘에는 일이 끝난 후에 곧바로 덕구 씨, 예리 씨, 기모 씨 그리고 정연 씨와 창렬 씨까지 함께 훈련하고 있습니다. 엘레나 씨도 마찬가지고요. 전술훈련을 한다고 들었는데, 덕구 씨에게 제안받았다더군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이 돼지 새끼… 또 쓸데없는 짓 하네.’ “아영 씨는 이기영 님께서 주문하신 방패와 방어구를 만들고 계신 것 같고… 좀처럼 작업장에서 나오지 않아서… 저도 얼굴을 본 지 오래됐네요. 기영 님은 잘 지내셨나요? 평소보다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몸은 조금 괜찮아지셨나요?” “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 체력적으로 조금 힘든 일이 있어서… 건강에 다른 이상이 있는 건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모두가 힘든 상황이니까요. 이제 16일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열심히 준비해야죠. 슬슬 대륙에 발표해야 할 시기도 다가오고 있고, 전술도 가다듬고, 준비하는 일 대부분이 마무리 단계에 있으니…. 사실 저보다는 희영 씨가 더 걱정됩니다. 개인 훈련 스케줄을 소화하시면서 길드를 관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현성씨 도 길드 일을 완전히 놓아버렸고, 김미영 팀장님도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고요. 이상희 님께서 도와주신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길드 업무가 집중되고 있는 상황 아닌가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고, 현재 저에게 주어진 일이니, 제 대답도 이기영 님과 같네요. 시간이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 “무엇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기영 님이 더욱더 힘들어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마지막에 와서는 조금 작아지는 목소리, 이유는 모르겠지만, 끝말을 얼버무리는 게 느껴졌다. 긴 머리에 차분한 사제복을 입고 있은 여전했다.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지만 확실히 분위기 있는 모습이었다. 얼마 만에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다. 특히나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건 무척 오랜만이다. 그나마 예전에는 함께 봉사활동을 다니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으니까.’ 그럴 시간조차 없다. 그녀는 길드 일 때문에 바빴고, 나 역시 위원회의 일 때문에 바빴다. 공적인 일로 통화나 메시지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따로 차를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조혜진은 그나마 호위 명목으로 함께 놀기도 했지만, 선희영과 나는…. ‘포지션이 꽤 겹치지.’ 한 곳에 때려 넣으면 효율이 나오지 않는다. 정하얀만큼은 아니지만 내게 꽤 의지하는 선희영에게 미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얘가 사고라도 치고 생떼라도 부렸으면,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얼굴을 비쳤겠지만, 선희영은 혼자서도 잘하는 타입이었다.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믿고 내버려 둘 수 있는 인재였다. 본인 일을 기가 막히게 잘 찾기도 했고, 심지어 그 일을 모나지 않는 선에서 완벽하게 처리하기도 했다. 김현성, 조혜진, 심지어는 김미영 팀장까지 실무에서 벗어난 지금 파란 길드는 선희영을 통해 유지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들어 행정지휘 쪽은 조혜진보다 나은 느낌. 김현성과는 굳이 비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아예 신경을 안 쓰는 것도 조금 그래.’ 어느 정도는 고마움을 표현하는 게 맞다. “차는 어떤 거로 드시겠어요?” “제가 하겠습니다, 이기영 님.” “아니요. 오늘은 제가 타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별건 아닙니다만, 항상 제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서요.” “그… 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내가 서비스해 줄게. 그냥 앉아 있어, 누나. 내가 다 알아서 할게.’ “편안히 앉아 계시면 됩니다.” “아닙니다.” “아니요. 편하게 앉아 계세요. 제가 예전에 정원에서 가꾼 식물형 촉매 중에 피로 회복에 좋은 촉매가 있어서 차로 만들어봤었거든요. 피로 회복 마법보다는 효과가 좋다고 할 수 없겠지만 아마 조금은 피로가 풀릴 겁니다.” “…….” “…….” “향이 좋네요….” 향을 맡은 뒤에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것을 보니, 확실히 기분이 좋기는 한 모양이다. 극도의 친절함으로 무장한 내 행동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건 선희영이 잠깐이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당연하지만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모습에는 호감이 들어서 있다. 본래부터 그랬던 것 같았지만, 오늘따라 조금 더 기분이 좋아 보인다. 대화가 진행되는 내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나긋나긋한 얼굴로 친절하게 웃으며 접대 아닌 접대를 해주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만도 했다. “알프스는 조금 어떻습니까?” “훈련에 잘 따라와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인선에 투입해야 하는지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본인이 열의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덕구 씨가 주최하는 훈련에도 꼬박꼬박 참여하고 있고요.” “희영 씨를 많이 따른다고 들었었는데, 아마 희영 씨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한 게 아닐까 싶네요. 누구에게나 다 동경의 대상이 될 만하시니….” “아니요. 그렇지는….” 이런 대화도 조금씩 해주고. 당연하지만 신학이나 읽은 책에 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그녀 역시 사제였고, 나와는 은근히 취미도 비슷했으니까. 물론 와인을 좋아하거나 체스를 잘 두는 건 아니지만, 그걸 제외한 다른 쪽으로 가장 대화가 잘 통하는 게 누군지 묻는다면 단연 선희영 쪽이었다. 지혜 누나도 있지만 이 누나는 일 중독이라 만나면 필연적으로 일 이야기가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바젤 교황님께서 집필하신….” “네, 저도 읽어봤습니다. 아!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오신다고 하셔서… 몇 달 전에 던전에서 발견된 고서라고… 이기영 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서 챙겨왔습니다.” “우연이네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물론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무한의 가방에 있는 서적을 꺼내자, 선희영의 얼굴이 금방 풀어진다.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 대화가 오갔다. 솔직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괜찮은 시간이었다. 아마 그녀도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지 않을까. 선희영이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뭔가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 듯한 모양새, 왠지 모르게 누군가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마치 김현성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기 직전과 같은 얼굴. 선희영 얘도 갑자기 회귀자라고 고백하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저…….” “네?” “…….” “…….” ‘분위기 왜 이래.’ 조금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장내가 침묵에 잠겼지만 이내 선희영이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 “나중에… 일이 끝난 다음에 말씀드리고 싶은 게….”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니요. 지금은 그럴 말씀을 드릴 시기가 아닌 것 같아서… 안 그래도 머리 아프실 것 같고….” “그럼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게 좋겠군요.” “자, 자리는 제가 마련하겠습니다.” “…….” “…….” “그… 나저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바쁘신데 제가 너무 시간을 뺏은 건 아닌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본래는 길드의 상태가 어떤지 보러 왔습니다만, 이미 희영 씨에게 여러 가지로 전부 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저도 마침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시점이었습니다. 희영 씨 덕분에 푹 쉴 수 있었어요. 마음 놓고 차를 마시고 떠든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인데… 일이 끝난 뒤에는… 정말로 이런 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네요.” ‘그래, 시바. 노후는 이렇게 보내야지.’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희영 씨.” “그, 그러고 보니 따로 부탁하실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제가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이제 본론이네.’ “혹시 라파엘의 상태 때문인가요?” ‘솔직히 걔는 생명 유지 장치 뗄 때도 됐어. 못 일어나, 못 일어날 거라고.’ 선희영을 비롯해 길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사실 여기까지 온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침 자리도 슬슬 마무리되는 시점, 중요한 일이라고 이야기했던 내 메시지가 기억에 남는지 그녀 역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왔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 때문에 찾아오신 건지 물어도 될까요?” “별건 아닙니다만….” “네.” “디버프 좀 걸어주셨으면 해서요….” “네?” “저랑.” “…….” “소라 씨에게 각각 하나씩 부탁드립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크게 심각하게 고민하실 필요 없습니다. 디버프가 찝찝하시다면 버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실험해 볼 게 있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실 테지만 희영 씨는 한번 들어갔다가 나온 적이 있으시잖아요.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편하실 것 같은데….” “아.” “아직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시는데, 아니, 완벽히 자리 잡은 건가요?” “네, 보고드린 대로 아직 몸속에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신성력과는 조금 다른 이질적인 힘이기는 하지만 뭔가 이상이 있는지.”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희영 씨의 상태에 이상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고, 다른 부작용이 없다는 것도 맞아요. 정말로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연구할 수 있으면 연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큰 뜻이 있는 게 아니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 여기 포션 병에다가도 부탁드립니다. 제가 꺼내놓은 물품에 전부 부탁드려요.” “물론입니다. 제가 도움된다면 당연히.” “연구 결과가 나오면 곧바로 말씀드릴게요.” “네, 그런데 소라 씨는 어디… 하얀 씨랑 같이 살고 있지 않았나요?” “아니요. 최근에는 다른 곳에서 지내고 있어서… 아마 곧 올 겁니다.” 괜스레 침묵이 길다. “그거… 괜찮은 건가요?” ‘아니, 별로 안 괜찮아 보여.’ 선희영마저 정하얀이 괜찮은 건지 묻는 걸 보면, 한소라가 정하얀의 억제기라는 사실을 깨달은 게 나뿐만이 아닌 모양인 것 같았다. ‘하긴 그럴 만하지.’ 정하얀과 한소라는 마탑에서, 선희영은 길드에서 지내기는 했지만 린델이라는 한 도시 안에서 함께 지내지 않았던가. 정하얀이 많은 부분을 한소라에게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채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왔나 보군요.” 선희영이 문을 열자, 한소라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불안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감돈 것은 당연지사. 꿈에도 그리던 전출을 얻은 사람치고는 편안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랜만이에요, 선희영 님.” “네, 오랜만이네요, 소라 씨. 일단… 앉으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네, 조금… 네, 잘 지냈어요.” “하얀 씨도 잘 지내나요?” 당연하지만 한소라 본인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곳에 위치한 장소는 정하얀이 지내고 있는 거처. -…….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 순간 한소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내시겠죠? 네, 잘 지내실 거예요.” -흐으윽, 끄으으윽, 끄윽…. ‘아니, 잘 못 지내는 것 같아.’ # 673 회귀자 사용설명서 673화 한소라 데뷔(3) ‘잘 지낼 리가 없잖아.’ 내가 다 불안해질 정도의 모습이었다. 그만큼 정하얀의 상태는 불안정해 보였다. 그나마 극대노 상태에 진입하지는 않았지만, 한소라 전출의 영향을 받은 것만은 확실했다.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가관, 가만히 있다가도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지 꾸역꾸역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저… 정하얀 님, 그러니까….’ ‘보, 보, 보기 싫어. 한소라 얼굴 보기 싫어! 진짜… 싫다구… 사라져, 사라지라구.’ ‘그… 럼 가볼게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래요. 잠깐… 그 관리 위원회 쪽에서 할 일이 있어서.’ ‘소라 때문이야. 소라 때문이라구!!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최대한 빨리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세요.’ 그런 대화를 나눴던 게 불과 며칠 전이다. 정하얀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이미 한소라는 정하얀 속에 꽤나 많이 틀어박혔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1년 동안 함께 살았으니, 그렇지 않은 게 이상하리라. 정하얀이 가장 무서워하는 감정은 상실감이다.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지냈던 때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고, 또 그 상실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 당장 한소라가 사라졌다고 극대노 상태로 진입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하얀은 한소라의 빈자리를 조금씩 조금씩 자각하고 있었다. 1일 차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거로 기억한다. 오히려 한소라 싫다는 소리를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도 했고, 다시는 한소라를 보지 않을 것 같은 태도를 보이며 마법 공부에 열중했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그 1일 차에도 약간의 성취를 얻었다. 2일 차 역시 마찬가지, 차희라와의 모의전에서 진 게 분했는지 함께 전술을 짜준 한소라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며 그녀에게 욕을 퍼부었다. 물론 욕이라고 하기에는 귀여운 단어의 나열이었지만, 그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한소라가 지내던 방으로 들어가 앙증맞은 손으로 화풀이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3일 차에도 계속 즐겁게 지냈다. 온종일 나와 시간을 보낸 게 효과가 있었던지, 5일 차까지는 즐거워하며 3일째의 추억을 곱씹기도 했다. 문제는 내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한 6일 차부터, 소리 없이 다가온 후폭풍이 정하얀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여전히 평범한 일상을 지내고 있기는 했다. 마법 공부나, 작업 같은 경우에는 본래 정하얀의 개인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외의 시간이 문제. 항상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주던 한소라가 없다는 사실을 갑작스레 깨달은 이후가 문제였다. ‘어….’ 하는 소리를 내고는 식탁을 멍하니 바라보던 정하얀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문제가 되는 건 식사시간뿐만이 아니었다. 한소라 자체가 정하얀의 개인비서, 아니, 보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니 생활과 관계된 모든 것에서 한소라를 떠올리기 시작한 듯했다. 최고의 셰프가 요리한 음식을 한소라가 만들어준 이기영 캐릭터 도시락보다 맛없다는 이유로 바닥에 던져 버릴 정도였다. ‘근데 그건 집어 던질 만했어. 캐릭터의 퀄리티가 달랐지.’ 정하얀은 다시 만들어달라고 요리사들에게 요청을 넣었고, 그들은 그날 55개의 캐릭터 도시락을 선보였지만 모든 작품이 한소라의 작품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확실히 한소라가 재능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웨딩 잡지를 읽거나 계획을 세울 때 역시 마찬가지, 압권은 역시 7일째였다. ‘오빠랑 결혼하면 신혼여행은 여기로 갈 거야. 저번에 거기보다 여기가 더 좋은 것 같아. 여기 진짜 예, 예쁘대. 오빠도 좋아할걸. 그, 그렇지? 여, 여, 여기 어때, 소라야?’ 그렇게 혼잣말을 해버린 것이다. 습관처럼 중얼거린 이후에 주변을 둘러보던 정하얀의 눈빛은 솔직히 조금 초조해 보였다. 사라진 한소라를 찾거나 훔쳐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결국에는 은근슬쩍 여신의 손거울을 드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멍하니 벽을 바라보다가 [소라야, 미안해]라는 메시지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모습에는 내 가슴이 다 아팠다. 그나마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접근하는 빈도를 높여준 덕분이었다. 연락할 때만큼은 한소라를 완전히 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만큼 이쪽에 메시지를 더 많이 보내게 됐다. 억제기가 사라지자 슬슬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에는 의도적으로 정하얀의 연락에 답장하지도 않았다. 할 일이 있다고 둘러댔고, 결과적으로는 정하얀은 쌍방향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빠도 없는데, 한소라도 없다. 체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소라야, 언제 돌아와?]라는 메시지의 전송 버튼까지 눌러 버렸다.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정하얀 나름의 자존심이었지만 한소라가 답장을 보낼 리 없다. 정하얀은 그날 여신의 손거울을 집어 던지며 한소라에게 욕을 퍼부었다. 정하얀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ㄱr끔 눈물을 흘리고는 했다. 정신적으로 힘들어했다는 것 역시 당연한 이야기, 애초에 힘들지 않을 리가 없다. 하루에도 감정이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고, 즐겁다가 슬퍼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미 정신적으로 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전보다도 더 불안해지는 모습. 재미있는 것은 정하얀 혼자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웃긴 일이지만 현재 상태만 보면 정하얀보다 한소라의 표정이 더욱더 불안해 보인다. 물론 준신화 등급의 던전, 외톨이 대마법사의 거처에 홀로 향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하면 저런 표정을 지을 만도 했다. 하지만 표정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한소라 역시 며칠 전부터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뭐, 크게 변한 것은 아니다. 그냥 정하얀이 뭘 하고 있는지, 현재 상태가 어떤지, 조용히 잘 지내는지 물어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한소라는 갑작스럽게 손에 들어온 자유를 전혀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커다란 폭탄을 들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기폭 장치가 눈앞에 있는 것과 눈앞에 없는 것 중 어떤 게 더 불안한지 묻는다면 누구나 다 후자를 고를 거다. 현재 한소라가 처한 상황이 그런 상황이었다. 정하얀의 품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도 그녀는 폭탄을 들고 있다. 그나마 이전에는 본인이 억제할 수 있었지만, 몸이 멀어진 지금에서는 그것조차 불가능하다. 당장 나 역시도 망원경이 없다면 그녀처럼 초조해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기폭 장치에 손을 대고 있는 건지 아니면 떼고 있는 건지 누구보다 궁금해할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하얀의 상태에 대해 묻는 것이 한소라의 일상. 본인도 자신의 역할을 잘 알기에 보여줄 수 있는 반응이리라. 괜스레 침을 삼키며 한소라가 말을 이었다. -선희영 님은 항상 차분하신 것 같네요.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도 하고… 네, 좋았어요.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요. (0/1)] [한소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마음이 편… 해지더라고요.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셔서…. 힘들지는 않아 하시던가요? 아, 모두 함께 다 모이기로 했었는데… 그건 언제가 좋을까요? 역시 정하얀 님의 일이 해결되고 나면 모이는 걸까요? ‘진짜 긴장했나 보네.’ 쓸데없는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온몸이 조금씩 땀으로 젖어가는 게 보일 정도였다. -정하얀 님은… 오늘 식사는 하신 건가요? [오늘은 안 한 것 같은데… 평소에는 잘 먹고 있는 것 같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 불안정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생활은 하고 있으니까요. (0/1)] -제대로 씻고 계신지도 궁금한데…. [하얀이, 어린애 아닙니다. 그 정도는 혼자서도 해요. (0/1)]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간혹 한 번 집중하시면 주위에 아무런 신경 쓰지 않으시잖아요. 얼마 전까지는 계속 공부만 하셨다고… 부길드마스터가 말씀해 주셨잖아요.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0/1)] -그래도…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요.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 어차피 지금부터 보러 갈 건데, 뭘 그렇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오시면 되잖아요. (0/1)] -……. -……. -괜, 괜찮겠죠? [아마 괜찮을 겁니다. 제가 지시한 대로 잘 움직여 주시면 돼요. (0/1)] 정말로 괜찮냐고,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냐고 묻는 것 같은 한소라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지만. 당당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너, 안 다칠 거야. 기껏해야 자갈 세례가 전부라고.’ 정하얀은 한소라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물론 정말 상황이 막장으로 치달으면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정하얀은 이미 한소라를 자기 사람이라는 카테고리 안으로 집어넣지 않았는가. 한차례 설명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한소라는 여전히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리폰에서 내린 한소라가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연하지만 얼굴에는 긴장감과 걱정이 감돈다. 한참이나 문에 서성거리고 있는 모습은 가관, 뭐라고 한마디 더 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을 때, 한소라가 문을 두드렸다. -정… 하얀 님… 저 왔어요. -……. -정하얀 님? 저 왔어요. -……. -정하얀 님! -소, 소라 왔어? -네, 저 왔어요. -왜, 왜, 왜 왔어? -잠깐… 정리할 게… 있어서요. -들어와. 끼이이익. 문소리가 왠지 모르게 불길하게 들려오는 것은 기분 탓일까. 한소라가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뎠다. 아마 정하얀의 상태가 어떨지 걱정되지 않을까. 나 역시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서웠지만, 다행히 최악의 반응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정하얀의 반응이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굉장히 안심한 듯한 느낌이었다. 곧바로 표정이 밝아지는 것이 시야에 비쳤으니까. 굳이 튀어나가 마중 나가지 않은 것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으리라. ‘쟤, 대외적으로는 화난 상태였지.’ 이미 한번 한소라를 탓하기로 마음먹었고, 그 무엇보다 한소라가 자신의 메시지를 무시했다는 것에 화내고 있는 상태였다. 한소라는 응당 정식으로 사과해야 했고, 정하얀의 소중함에 대해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나를 대할 때의 태도와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싶었지만 아마 비슷한 양상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둘의 관계에서는 정하얀이 갑이었으니까.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지만, 엄마나 누나 같은 느낌. 항상 옆에서 자신을 챙겨주고 도와주고,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그 자리에 있어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소라는 정하얀의 거처로 들어오자마자 습관처럼 이것저것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정하얀이 어지럽혀놓은 것들이었다. -식, 식사하셨어요? -아… 아니. 그런 대화를 나눈 후, 한소라는 곧바로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슬그머니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 밖을 서성거리고 있는 정하얀은 무척 안심한 듯한 느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인다. ‘이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구나.’ 라거나. ‘드디어 끝났네. 소라도 돌아왔나 봐. 사과하면 꼭 받아줘야지.’ 혹은. ‘문자 무시한 건 용서해 줘야겠다. 오늘부터 여기 있는 거네.’ 같은 생각 말이다. -식, 식사 드셔야죠. -……. 아무 말 없이 턱 하니 자리에 앉는 모습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들어서 있었다. 아직은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슬쩍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요리가 나온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테이블을 꽉 채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 마치 파티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는 어머니의 맛을 맛본 사람처럼 아주 기분 좋은 표정이다. 어쩌면 이걸로 사과하려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것 같다. 정하얀은 이미 한소라를 용서했다. 물론 한소라가 중죄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이제 충분히 용서해 줄 시간이 됐다. 정하얀의 표정이 구겨진 것은 한소라가 입을 연 직후였다. -정하얀 님, 그러니까…. -……. -마지막… 인사 드리러 왔어요. 항상 그렇듯, 나 역시 정하얀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 674 회귀자 사용설명서 674화 한소라 데뷔(4) 급격하게 어두워진 얼굴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마지막이라는 단어 선택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건지 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정하얀에게 다른 말이 들릴 리 없었다. -제가 말을 좀… 그렇게 했네요. 마지막은 아니라 정확히 말씀드리면… 네, 그… 저도 준비할 게 조금 있어서요. 지금 다른 팀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데 그쪽에 조금 더 집중해야 할 것 같아서요.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당분간은 그곳에서 지내야…. -……. -네, 그래서 이렇게 인사드리러 왔… 어요. 짐도 챙길 겸해서요. -…….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 침묵이 분위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괜스레 내가 정하얀의 눈치를 보게 된다. 잠깐 사고가 정지한 건지, 아니면 전혀 예상치 못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하얀은 퓨즈가 나간 로봇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지 않을까.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난 후, 당연하지만 좋은 쪽은 아니었다. 입술을 꽉 깨문 것은 물론, 부들부들 떨고 있다. -싫어. 끄윽…. -……. -진짜 싫어.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한소라, 진짜 싫어! -……. -진짜 싫어! 진짜 싫다구!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얼굴 보기 싫, 싫, 싫다고 했잖아. 얼굴 보기 싫다고 했는데 왜, 왜 왔어! 나가! 나… 나가! 나가! 나가라구! -죄송…. -나가아아!! 그렇게 외치면서 자갈을 집어 던지듯 음식을 집어 던졌다. 그 와중에도 캐릭터는 모양은 건들지 않았지만, 솔직히 본능에 가까워 보인다. 한번 자갈을 던져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솜씨가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포물선을 그리는 닭 다리의 곡선이 아름답다. -죄송해요. -박미진이지. 박, 박, 박미진이잖아! 배,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야! 소라는 배신자야! 끄윽… 끄으윽….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왜 왔어! 왜 왔냐구! 왜 왔어! 진짜 싫어. 진짜… 바보, 멍청이! 다 네 탓이잖아! 전부! 진 것도 소라 때문이야. 끄윽… 메시지도 무시했잖아. 오지도 않고! 나도 필요 없어. 절, 절교할 거야. 절교할 거라고. 나도 소라 필요 없어. 필요 없다고!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왔어! 왜 왔어! 이 멍청이! 멍청이! ‘어우야….’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며 몰아붙이는 것을 보면 배신감이 이만 저만이 아닌 모양이다. 박미진 밑에서 일하기로 했다고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눈치는 챈 모양이다. 다행히 어째서 일이 이렇게 돌아가게 됐는지는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 적어도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황은 아니다. 조금은 더 들어가도 되지 않을까? 약간은 더 갈등을 조장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와 꽂힌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물론 조심스럽게 들어가야겠지만,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곧바로 퀘스트를 생성해 한소라에게 보내자 그녀가 정말로 되겠냐는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조금 더 밀어붙여요. 조금만 더. (0/1)] [한소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정말 그런 게 아니라… 이해해 주세요. -……. -……. -오, 오빠. -……. -오빠가 그렇게 하라고 한 거지? 끄윽, 내가 오빠한테 잘 말해줄게. 소라도 가기 싫잖아. 박, 박미진 싫잖아. 이상하다고 끄윽… 이야기했잖아. 박미진 수상하다고 했었잖아. 박미진이랑 공부하면 재, 재미없잖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다른 걸 다 떠나서 정말로 제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고 조금만 더 가봅시다, 우리. 한 발자국만 더 움직여 봐요. (0/1)] [한소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불안해 보이는 눈동자. 하지만 한소라도 필요한 일이라는 걸 실감했는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제… 제 입장도 이해해 주셔야죠. -어…. -제 입장도 이해해 주셔야 하잖아요. 저도 나름대로 노력하… 려고 하는 건데… 정하얀 님도 이해해 주세요. 너무… 너무 제 탓이라고만 하시면…. ‘할 수 있다, 소라야. 할 수 있어.’ -저도… 섭섭한 게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이렇게까지 하실 정도로 잘못한 일은 아니잖아요. 필요한 일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정하얀… 정하얀 님은 왜 자기 입장만 생각하세요?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이미 한차례 탄력을 받았다. 눈을 꽉 감고 결국에는 자신의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했다. 본인의 몸에 뭔가 다른 이상이 생길까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다른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뭔가 자신감을 얻은 것일까. 아니면 첫 데뷔를 잘 마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일까.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소라가 갑작스럽게 눈을 뜨고 정하얀을 바라봤다. ‘시바, 와… 연기 쩐다.’ 안기모를 찍어 누를 수준의 메소드 연기를 선보이는 한소라의 모습은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처음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힘들었지만, 막상 발걸음을 옮기니 생각보다 더 움직이기 쉬웠던 모양이다. 입술을 꽉 깨물고 지난날의 설움을 이야기한다. 한소라 본인도 약간 열이 올라온 느낌이었다. 시선 처리와 발성 모든 게 완벽하다. 주연 배우로도 손색이 없다. -제가 이거 만… 드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모르시면서… 고맙다는 말도 안 하시고… 그, 그리고 항상 그렇게 제 탓만 하시면 저도 섭섭해요. 저도 사람이라고요. 사람. 사람이에요. 사람이라고요. -어… 어…. -그렇게 싫다고만 하시면… 그렇게 싫다고만 하시면 저도 네, 저도 싫어요. 저도 싫다고요. -어? -정하얀 님이 사과하셔야 돼요. 물론 제 잘못도 있었지만 정하얀 님이 사과하셔야 한다고요. 저도 열심히 노력했는데… 저도 정말로 개인 시간까지 빼면서 같이 준비해 드렸는데… 어떻게 그게 제 탓이라고만 하실 수가 있어요? 부길드마스터한테 제 탓이라고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가 돼요? 제 입장은 항상 생각도 안 해주시죠? 그런데 이제 그만해야 될 것 같다. -정하얀 님은 정말 안하무인이에요. 제가 밥해주는 사람이에요? 밥해주는 사람이냐고! 내가 밥해주는 사람이야! 캐릭터 도시락에는 손도 못 대게 하면서! 저도 감정 있어요. 나도 감정 있다고! 맛없다고 할 때마다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알아! -어…. -매일 상담해 주는 것도 자기 좋은 것만 들으면서! 내가 부길드마스터가 심했다고 말하면 우리 오빠 욕하지 말라고 하잖아! 네가 우리 오빠에 대해서 뭘 아느냐고 말하면서!! 스크랩북 만들어도 칭찬도 안 해주잖아! 원하는 것만 많고! 내가 만화도 그려주고, 인형도 만들어줬는데! 원하는 것만 많잖아! 항상 그랬잖아! 항상 그랬잖아요! 하아… 하아… 하아…. ‘거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 어… 내가, 내가… 자, 잘…. ‘아닌가, 이거 사과하려는 건가?’ 깜짝 놀란 정하얀이 뭔가 미안함을 표시하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본인도 이야기를 듣다 보니 느끼는 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한소라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걸 인지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후자이리라.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도 인식하고 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라기보다는 쏘아대는 한소라의 기백에 눌렸다는 것이 맞다. 당연하지만 지금 여기서 사과를 받아서는 안 된다. [박미진! 박미진! (0/1)] -그래요. 박미진 님한테 가니까 좋더라고요! 매일 칭찬만 해주시고 공부하는 것도 박미진 님이랑 하는 게 더 재미있어요. 알아듣기 쉽게 잘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네! 정하얀 님보다 박미진 님이 더 좋아요. -잘, 잘못이야. 소라 잘못이야…. -박미진 님이랑! -다 소라 잘못이야! 이익… 소라 잘못이라고!!! -그러니까…. -이이익… 필요 없어. 흐윽, 필요 없다고!! 끄윽, 필요 없으니까 나가라고! 배신자! 소라는 배신자야. 이이익, 끄윽, 이이익, 나가! 나가아아! 너 같은 사람 필요 없어.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이 멍청아! 우당탕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하얀이 한소라를 밀어붙였다. 앙증맞은 두 손으로 파악 하고 한소라를 밀치는 모습은 또 가관이다. 한소라가 균형을 잃으며 풀썩 땅바닥에 쓰러졌지만 정하얀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마법을 발동시켜 한소라와 그녀의 짐을 밖으로 밀어붙이자 자연스럽게 한소라의 몸이 바깥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콰앙!! 바깥으로 강제 추방된 한소라. 정하얀은 씩씩거렸지만,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지 닫힌 문을 향해 음식들을 집어 던지고 있다. 하지만 이내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흐어어어어어엉…. 만신창이가 된 식탁을 부여잡고 눈물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니 내 가슴이 다 아프다.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아 오열하는 것만 같다. 물론 이런 종류의 갈등이 한 번은 터져줘야 했다. 정하얀의 인간관계와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서 당연히 있어야 하는 일이다. 지금 당장은 서럽고 눈물이 나오겠지만 이런 사건들이 정하얀을 더욱더 성숙하게 만들지 아니겠는가. 물론 이걸로 벽을 넘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물론 나름 만족스럽기는 했다. 원래 비극적인 상황이 오기 전에는 항상 이런 사건이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진짜 싫어. 너무 싫다고. 배신자. 배신자랑은 이제 말도 안 할 거야. 흐윽…. ‘그래, 미워해. 너무 미워하지는 말고 적당히 미워해야 돼.’ -박미진… 박미진 진짜 싫어. 진짜… 흐윽, 한소라도 싫고 박미진도 싫고 다 싫어. 끄윽…. ‘그래.’ -죽여 버릴 거야. 박미진… 박, 박미진 죽여야 돼. 죽일 거야. 끄윽…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안 돼.’ -죽여야지. 죽이자. 그래, 죽이는 거야. 어디 있지… 어딘가에 있겠지. 두고 봐, 한소라. 두고 봐. 그, 그때 와서 돌아와도 용서 안 할 거야. 박미진 죽인 다음에 소라와도 용서 안 해줄 거라고. 끄윽, 끄윽…. 뭔가 슬슬 열이 오르는 느낌이다. 조금 위험한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아직은 안전하다. 혼잣말을 주고받지 않으니, 이 정도라면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곧바로 여신의 손거울을 들자, 곧바로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 벨이 울리는 곳으로 허겁지겁 달려가 전화를 받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하얀아.” -끄윽…. “하얀아, 왜 그래.” -끄으윽… 흐어어어엉…. 목소리를 들으니 서러워졌는지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여러 가지로 궁지에 몰린 것은 확실했다. -소라가… 소라가 끄윽… 흐어어어엉… 소라가 끄윽…. “일단 지금 갈게, 하얀아.” -흐어어어어어엉… 오빠… 그이그으윽…. 친구랑 싸운 연인의 서러움을 들어주는 포지션으로 변모한 것은 당연지사. 전화가 연결되어 있지만 정하얀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는다. 소라가 어쩌고, 배신했니 어쩌고, 상처받았네 어쩌고, 자기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었지만, 울음소리와 뒤섞인 목소리는 구분하기 힘들다. 아마 망원경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흐어어어어어엉…. ‘장하네, 장해.’ 정하얀이 다른 사람 때문에 이렇게 울면서 전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대견하게 느껴진다. 혹시나 이걸 빌미로 계속 붙어 있으려고 하지는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잠깐이라면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정하얀이 눈치채 줬으면 하는 게 있었으니까. 외톨이 대마법사의 거처로 발을 들이자마자 꽉 하고 이쪽을 껴안아온다. 눈물 콧물로 얼굴이 범벅되어 있었고 실제 눈으로 확인한 장내는 망원경으로 봤을 때보다 더욱더 참혹했다. “끄어어엉,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라고 위로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한마디 내뱉어보자. “소라가 나빴네.” 여기서는 한소라가 죄인이다. # 675 회귀자 사용설명서 675화 한소라 데뷔(5) 한소라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무조건 한소라가 죄인이다. 일단은 분한 감정에 공감해 주는 게 옳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정하얀을 꾸짖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한소라의 편을 들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다. 어찌 됐건 간에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공식적으로 정하얀의 약혼자가 아니었던가. 어떤 상황이 들이닥치더라도 서로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 참된 배우자의 자세라는 걸 생각해 보면 무작정 정하얀을 다그칠 수가 없다. 정하얀이 다소 잘못하고 있더라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어야 한다. 물론, 백번 생각해도 정하얀의 잘못이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하얀이의 편을 들어주는 게 옳은 선택이라고 여겨졌다. “소라 씨가 잘못한 것 같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정하얀이 곧바로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는 것.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달콤한 말을 거부할 리 없었다. 은근슬쩍 몸을 붙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방지턱이 있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한소라를 다그치자, 확실히 한소라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결국에는 한 번 더 울음을 터뜨리며 그간의 섭섭했던 것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소라 때문에 진, 진, 진 거라구요. 끄윽…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차희라에게 패배의 빌미를 마련한 것부터……. “말도 없이 갑, 갑자기….” 그 이후는 말없이 집을 나간 것, “흐어엉… 끄윽….” 그 이후에는 메시지를 무시한 것, 또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낸 것, 특히나 자신을 배신하고 박미진에게 향한 것까지 말했을 때는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했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는 모습을 보니 억울하기는 했던 모양. 약 9번 정도를 반복한 이후에야 겨우 진정한 모습이었다. “소라가… 끄윽… 진짜 싫어요. 다, 다시는 안 볼 거야.” ‘어차피 다시 보게 될 거야.’ “소라도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사과하러 올 거야.” “끄윽… 끄윽….” “본인이 실수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물론 하얀이도 사과해야지. 소라 씨도 섭섭한 게 많았던 것 같은데. 만약 하얀이가 먼저 사과한다면 소라 씨도 사과하지 않을까.” “…….” ‘사과해’가 아니라 ‘사과하지 않을까’라고 은근슬쩍 제안했지만 정하얀의 마음은 이미 얼어붙었다. “먼저 사과하기 전까지는 절, 절대로 용서 안 해줄 거예요. 흐윽, 절대로 용서 안 할 거라고.” ‘그래, 그런 자세 좋다, 하얀아.’ 혹시나 사과해야겠다고 달려가면 어쩌지 싶었지만 역시나 고집을 부리고 있다. 마지막에 박미진과 정하얀을 비교한 발언이 비수가 되어 꽂힌 것이 분명하리라. ‘한소라도 참 그래. 어떻게 그렇게까지 말해?’ 정하얀이 박미진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발언이다. 물론 정하얀이 빌미를 제공해 주기는 했지만, 한소라의 한마디는 정하얀의 여린 마음을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섭섭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너무 심하긴 했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쉴드의 빌미를 마련해 주는 게 좋다고 여겨졌다. 중재자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 이기영은 갈등을 조장하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마 소라 씨도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던 걸 거야.” 정도로만. “분명히 먼저 사과하러 와줄걸. 그때는 꼭 하얀이도 사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물론 한소라가 사과하러 먼저 찾아올 확률은 제로였지만 정하얀은 한소라가 사과하러 온다는 걸 확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새다. “오늘은 밖에 나가서 기분 전환 좀 하는 게 좋겠네.” “정, 정말… 요? 공부는….” “이런 상태로 공부도 손에 안 잡히지 않을까.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될 거야. 쉴 때도 있어야지.” “다, 다행이다.” “쉬는 시간이 있어야 내일도 열심히 할 수 있을 테니까.” “네, 네. 맞아요, 맞아요.”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금방 히죽거린다. 정말로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잠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오늘 하루 훈련에 집중해도 큰 성장하지는 못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물론 박미진을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책을 붙잡는다면 소소한 성장이야 있겠지만 현재 정하얀에게 필요한 것은 소소한 성장이 아니다. ‘벽만 뛰어넘으면 돼, 벽만.’ 커다란 벽 앞에 서 있는 것이 현재 정하얀의 상태, 반 발자국 전진해 봤자 옆으로 움직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계기만 생긴다면 단시간 안에 몇 배나 더 성장할 수 있다. 그게 가능하다는 걸 차희라가 이미 한차례 보여주지 않았는가. 현재 정하얀에게 필요한 건 공부가 아니라 계기다.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계기. ‘초조해할 필요 없어. 16일이면 충분해. 오히려 길게 보는 게 좋아. 우당탕탕 처리하는 것보다는 조금씩 조금씩 빌드업 하는 게 훨씬 좋을 거야.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갈등이 더욱더 커지면 그만큼 후회와 자책도 커질 테니까. 정하얀 쪽으로 살짝 손을 넘기자, 오랜만에 데이트를 나가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정하얀은 한소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것 같다. 오히려 더 당당해진 느낌이다. ‘그래, 없어도 돼. 소라는 필요 없어.’ 라거나. ‘먼저 사과할 때까지는 다시는 연락도 안 할 거야. 누가 더 손해인지 한번 보자고.’ 혹은. ‘박미진이랑 잘살아봐. 어차피 필요 없어. 이제 신경도 안 쓸 거야.’ 라고 생각하는 듯한 얼굴. 진심으로 한소라 없이도 잘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만약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한없이 구멍으로 들어갔겠지만, 현재의 정하얀은 한소라를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만큼 행복한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의 표정이 달라진 것은 내 손을 잡고 떠들어대고 있던 때였다. 일단 한소라 때문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몸에 벌어진 소소한 변화 때문이 아닐까. ‘어?’ 의문을 가진 것이 첫 번째. 다시 한번 손을 잡아보는 것이 두 번째.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한 모습. ‘눈치 깠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 분명하리라. 평소와 몸 상태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지금까지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눈치챌 수 없었겠지만, 조금 여유가 생기자 곧바로 캐치해 내는 모습. 자꾸만 손을 꼼지락거리며 맥박을 재듯 몸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 안에 있는 생소한 기운에 의문을 품는다. ‘능력은 능력이야.’ 정하얀에게 마음의 눈이 있는 건은 아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이걸 찾아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하얀이 눈치채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을 정도로 희미한 기운이었다. 만약 선희영에게 버프나 디버프를 받은 채로 곧바로 이동했다면 가능성이라도 있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연금술을 이용해 몇 번이나 성질을 바꿨고, 가장 희미하다고 생각하는 기운의 일부만 몸 안에 집어넣었다. 아마 그녀라면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자각한 것과도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머리 스타일이 미묘하게 달라졌다거나 평소보다 조금 더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거나. 평상시였다면 곧바로 캐치해 낼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한소라의 일 때문에 경황이 없었겠지. “오, 오, 오빠.” “응?” “요즘 몸… 은 조금 괜찮으세요?” “응, 괜찮은데. 오히려 조금씩 건강해지고 있는 것 같아. 왜?” “아니요. 조금 이, 이상… 이상한 것 같아서.” “뭐?”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뭐가?” “뭐, 뭐라고 딱 표현하지는 못하겠는데… 뭔가 이상… 이상해요. 조금 이상한데….” “…….” “잠깐만 확, 확인 좀… 해봐도 될까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하얀이 천천히 이쪽을 들여다봤다. 혹시나 선희영이 발신지라는 걸 눈치채지는 않을까 불안했지만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 몸속에 있는 희미하게 흐르고 있는 에너지는 어떤 효과도 없는 에너지, 그 자체다. 버프도 아니고 디버프도 아닌, 마력처럼 몸에 맴돌고 있는 자원이었다. 물론 정하얀이 단순한 자원이라고 생각할 리 없다. 평소였다면 그냥 두고 넘기며 자신의 진단에 확신을 내렸겠지만, 이제는 그런 게 아니지 않은가. 정하얀의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이제는 존재한다. 천재 마법사 정하얀조차 이해할 수 없는 천재가 이제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그 천재가 나와 가까이 붙어 있지 않은가. 중요한 건 정하얀이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지 다른 게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마법사 박미진의 마법에 이기영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 확신. 정체불명의 마법사 박미진이 어디에서부터 왔고,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 정체불명의 마법사 박미진이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의심. 정하얀에게 필요한 건 그것들이다. 당연하지만 정하얀은 박미진에 대해 파헤치지 못할 것이다. 정체불명의 마법사 박미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번 파트는 정하얀의 추리극과 후회극이라고 하는 게 가장 올바른 표현이 아닐까. “무슨 일인데….” “확, 확실하지는 않아서 뭐라고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겠는데요, 네.” “말해도 괜찮아.” “오, 오, 오빠 몸 안에 생소한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요. 혹, 혹시 언제 마법… 같은 거.” “피로 회복 마법 정도라면 받은 적이 있긴 한데.” “…….” 대답을 듣자마자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 이게 정말로 피로 회복 마법이 맞는지 의심하는 것 같다. 무척 간단한 마법이지만 이런 종류의 마법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을 거다. 애초에 피로 회복 마법이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일었는지 입술을 꽉 깨무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다른 사람의 마력이 몸 안에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곧바로 마력을 보내왔다. ‘뭐야, 시바. 근데 아무 느낌도 안 들어.’ 김현성이 예전에 마력 마사지를 해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마음의 눈이 없었다면 정하얀의 마력이 이쪽으로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마치 몸 안에 있는 몸 안으로 투입된 백신이 바이러스들을 잡아먹듯 바깥의 힘을 공격하고 있었고, 이내 몸 안에 서린 기운은 금방 소멸되어 버렸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말이다. “아, 아니에요. 제가 착각했네요. 착, 착각했어요.” 하지만 표정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었다. ‘생각하고 있구나.’ 어쩌면 한소라가 해준 말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박미진이 뭔가 수상하다는 대화를 나눴던 때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무런 증거 없는 의심이다. 몸 안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생소한 잔향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박미진의 것이라고 확정지을 수는 없다. 심지어 그게 정말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도 확신할 수 없겠지. 지금 당장 뭘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판단이 서지 않을 거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괜히 말을 꺼낸다면 오히려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뭔가 속으로는 의심이 가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황, 단서조차 없으니 어떻게 판단을 내릴 수도 없다. 현시점에서 할 수 있는 건 이상한 기운을 제거하는 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위험요소를 제거한 것으로도 일단은 기분이 좋아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이내 깨닫지 않았을까. 소라한테서도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었던 것 같다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소라의 몸속에도 뭔가 이상한 게 있었던 것 같다고…. 정말로 피로 회복 마법일 확률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도 있다고…. 정하얀의 눈이 흔들린다. 입술을 꽉 깨무는 것이 뭔가 결심한 것 같다.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한소라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결심한 것 같다. 내 생각이 틀렸는지, 맞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비슷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들려오는 목소리. “이, 이, 이제 신경 안 쓸 거야. 정말로… 신경 안 쓸 거라구….” 자신에게 한소라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직 모르니, 내뱉을 수 있는 대사였다. 당연하지만 정하얀이 지금의 결정을 후회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 676 회귀자 사용설명서 676화 드래곤(1) “됐어.” ‘일단은 된 거야.’ 갈등구조도 만들었고 복선도 마련했다. 후회할 만한 요소들도 집어넣었으니, 거의 모든 게 준비됐다고 해도 무방하다. 정성스럽게 밥상을 만들어 정하얀의 앞으로 대령한 상황, 그녀가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올린다면 일이 알아서 진행될 것이다. 사실 조금 무리하면 억지로 들어 올려 입안으로 옮겨줄 수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퀄리티를 높이고 싶은 이쪽의 입장에서는 한 걸음 정도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는 정하얀 본인이 움직여 주는 게 가장 좋다. 정확히 3일이 지난 지금까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 초조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거지, 뭐.’ 미끼를 물 시간을 주지 않았으니까. 요 3일간은 나와 계속 함께 있었다. 온종일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한소라를 떠올릴 만한 시간에는 나와 함께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일부로 여유를 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표현이지 않을까. 정하얀이 조금이라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한 할애하고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여신의 손거울이 울렸다. [오빠, 오늘도 오시나요?] [꼭 오셔야 해요. 공부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언제 오세요?] [지금 오시나요?] 조금 문제가 있다면 한소라와 나눠 받았던 집착이 더욱더 심해졌다는 것이지만, 이 정도를 받아주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손거울을 집어 들자, 그 외에 읽지 않은 메시지들도 시야에 비쳤다. [자기, 무한의 가방 남는 것 좀 있어? 있으면 하나만 가져다줘. 사례는 할 테니까.] 이건 희라 누나. ‘선물 받은 건데, 괜찮을까.’ 어차피 내 물건이니 상관없을 것 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찝찝하다. 진열대에서 가방 하나가 사라진 걸 알면 둠현성이 뭔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아니면 김현성한테 내가 입찰한 가방 상회 입찰하지 말라고 전해. 짜증 나 죽겠네, 진짜. 시발, 그 정신 나간 새끼.] ‘뭐야, 이건.’ 잠시 차희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베니고어 넷 공식 경매장에 접속하자, 차희라의 말이 뭘 뜻하는 건지 눈치챌 수 있었다. [붉은 용병 님이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장비 수납 가방(전설 등급)을 33만 골드에 입찰하셨습니다.] [김현성 님이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장비 수납 가방(전설 등급)을 35만 골드에 상회 입찰하셨습니다.] [붉은 용병 님이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장비 수납 가방(전설 등급)을 43만 골드에 상회 입찰하셨습니다.] [김현성 님이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장비 수납 가방(전설 등급)을 55만 골드에 상회 입찰하셨습니다.] [붉은 용병 님이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장비 수납 가방(전설 등급)을 60만 골드에 상회 입찰하셨습니다.] [김현성 님이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장비 수납 가방(전설 등급)을 80만 골드에 상회 입찰하셨습니다.] ‘아니, 뭐 하는 거야, 얘는…. 훈련 안 해? 베니고어 넷 경매장 이용하는 건 또 언제 배웠어. 아니, 그리고 얘는 왜 아이디에 본명을 적어놨어.’ 조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망원경으로 봤을 때는 분명 미친 듯이 훈련에 임하고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경매장을 체크하고 있었던 모양, 이 새끼 정말로 괜찮은 건가 싶기도 했지만…. ‘취미생활이니까 나쁘지는 않은데.’ 머리를 식힐 시간이 있는 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안 그래도 여유가 없을 테니, 이런 거로라도 스트레스를 풀어야지. 문제는 차희라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나중에 적당한 가방을 따로 빌려주면 되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한참 전에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기영 씨, 바쁘신 와중에 갑자기 죄송합니다.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요즘 너무 무리하고 계신 건 아닌지 걱정이 생깁니다. 물론 대륙을 위하는 기영 씨의 마음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정작 일이 시작될 때 지치실까 염려됩니다. 조금은 자신의 몸을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경매장에 새로운 시리즈가 올라왔더군요. 힘든 와중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뭐라고 답장해야 할지 모르겠다. 솔직히 장비 수납의 가방은 희라 누나한테 갔으면 싶었지만, 회삿돈까지 투입하는 김현성과는 다르게 차희라는 순수하게 자신의 연봉으로만 대결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승부는 김현성의 승리로 결정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오빠, 지금 베니고어 넷 경매장 가 봐요. 차희라 개 털리는 중 ㅋㅋㅋㅋ] 이지혜는 현재 상황이 즐거운가 보다. [이기영 님, 저번 일은 잘 마무리되셨습니까?] 이건 선희영. [머리는 조금 괜찮은 겁니까? 바쁜 시기라는 건 알지만, 건강 좀 챙기세요. 괜히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아 그리고 전에 제가 보내준 동영상 봤습니까? ㅎㅎ] 이건 조혜진이다. 그 밖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온 메시지들이 보였지만 대충 답장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조금 특이했던 것은 박덕구에게서 온 메시지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전술 훈련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그 와중에 프로필 사진을 바꾸고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같은 명대사를 적어놨지만, 솔직히 기대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돌격할 일이 없을 테니, 상관없지만 녀석을 쓸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오랜만에 손거울에 쌓인 메시지들을 확인하자, 나도 모르는 사이 시간이 꽤 흘렀다. ‘이 여편네는 왜 이렇게 안 와.’ 조금 더 시간을 때워야 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정하얀 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형이 시야에 비쳤다. “또 무슨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는 겁니까?”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오랜만에 보는 디아루기아. 긴 여행을 마치고 곧장 온 것인지,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뭐, 디아루기아 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 가지로 준비할 일이 많아서요. 세상에 종말이 들이닥치는 상황인데, 대륙의 구원자인 제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보다 어때요?” “…….” “성과는 조금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 “다른 드래곤들은 찾아봤어요?” 내가 내뱉은 말이었지만, 목소리에 기대감이 묻어나온다. ‘몇 명은 응답했을 거야, 그렇지?’ 아직 약간은 부족한 전력을 보충해 줄 수 있는 종족, 과거 대륙의 수호자이며 균형을 유지하던 이들, 천사들 666마리를 전부 채우지 못한 현시점에서 그나마 기댈 수 있는 이들이었다. 1회 차에서는 드래곤들이 직접 움직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2회 차에서는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디아루기아라는 연결고리가 있었으니까. ‘스무 명쯤은 되겠지? 그렇잖아.’ 바쁘게 전 대륙을 돌아다닌 만큼 당연히 성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디아루기아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이 문제. 아니나 다를까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은둔해 있거나 수면기에 들어간 이들이 대부분이라….” “그래서요.” “솔직히 많은 분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이거 터지고 나서 계속 돌아다닌 거 아니에요?” “네, 계속 찾아다니기는 했습니다만….” “얼마나 응답한 겁니까?” “세, 셋… 입니다.” “…….” “…….” “그게 말이 돼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워낙 폐쇄적이고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다 보니, 솔직히 셋이나 응답해 준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13일 남았는데, 겨우 셋이라고요?” “…….” “뭐, 중간계를 수호하니, 어쩌니 하지 않았어요?” “그것 역시 과거의 일입니다. 지금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에요. 인간계에 숨어 살고 있는 이들도 있으니, 최소 셋 정도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셋이 응답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인간계에 숨어 살고 있는 이들까지 합하면 셋은 넘어야죠.” “그 셋 중에 함께하겠다고 확답을 받은 드래곤은 한 명….” “…….” “…….” “와, 이거 너무하네. 정말 너무 하네요. 모두가 함께 사는 대륙이 아닙니까. 어떻게 자기들만 살자고 이렇게… 중간계의 수호니, 뭐니 전부 거짓 설정 아니에요? 그냥 있어 보이려고 막 둘러댄 거 아닙니까? 대륙의 위기가 들어왔는데, 무슨 이딴 식으로… 뭐, 그렇게 이기적인 놈들이 다 있어? 자기들만 살면 그만이랍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건 과거의 일입니다. 애초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것은 인간입니다. 오히려 반감을 품은 이들이 더 많다는 걸 생각하면, 이 정도도 감지덕지예요. 오히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좋게 받아들이는 이도 있었습니다. 긴긴 역사 동안 인간이 대륙과 드래곤들에게 남긴 상처들을 생각해 보세요. 이미 고통받을 만큼 고통받은 이들입니다. 그들의 마음도 헤아려야 해요. 오히려 셋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무척 희망적인 상황이라, 이 말입니다.” “겨우 셋밖에 안 도와준다는데 무슨 희망적인 상황이에요?” “적어도 그들은 진심으로 함께 싸워줄 겁니다.” “그 셋의 진심, 인류에 아주 큰 보탬이 되겠네요. 아주 대단하십니다, 진짜. 아주 대단한 종족이야. 이렇게 이기적인 종족이 또 있을까.” “…….” “애초에 전선이 밀리면 드래곤들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전하긴 한 겁니까?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 그놈들은 인간이고, 드래곤이고 가리지 않는 놈들입니다. 뭐, 처음에는 호의적으로 다가올지 몰라도 엔딩은 파국뿐이라고요. 우리 똘똘이가 살아갈 세상이 삭막한 폐허였으면 좋겠어요?” “디아루리아는….” “뭔가 수를 써봐야죠. 이대로라면 죽도 밥도 안 돼요. 종족 전체가 나서서 도와달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들어오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거, 아무리 종족이 다르다고는 해도,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지켜달라고 말한 건데… 겨우 세 명? 이건 농락이에요. 오히려 놀리는 거라고요.” ‘시바, 틀린 말도 아니지.’ 도와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한 것이 아니었던가. 괜찮은 특사까지 파견했건만 달랑 셋만 온다는 소리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 셋도 확실하지가 않단다. 말 그대로 놀리는 거나 다름없다. 동맹국이라고 생각했던 나라에 파병을 요청했건만 겨우 삼백 명의 인원을 보내온 것이나 진배없다. 이게 농락이 아니면 뭐가 농락이겠는가. ‘이 새끼들이 아직 전술 김현성을 안 맞아봐서 모르지?’ 당장 전술 김현성을 끌고 가 드래곤 레어를 불바다로 만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챘는지 디아루기아 역시 불안해하는 분위기다. 본인도 면목이 없겠지. 자칭 대륙을 수호하는 이들이, 적폐세력이 되어서는 나 몰라라 하고 있는데…. 항상 이쪽을 야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더욱더 고개를 들 수 없을 것이다. ‘시바, 약간은 믿고 있는 구석이었는데….’ 정하얀 각성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흘러가고는 있었지만, 아쉬운 부분이었다. 아니, 단순히 아쉬운 정도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여야 하는 현재 상황에서 드래곤들의 합류는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면서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종족 커뮤니티는 거의 없는 거예요?” “네,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예전에는 회의 같은 것도 열렸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디아루기아 님은….” “저도 어렸을 때 기억을 토대로 찾아가 본 것에 불과합니다. 한둘 정도는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지만, 그것마저 몇백 년에 한 번씩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예 안 일어나는 것 또한 부기지수구요.” “뭐, 종족 간의 정이나 그런 것도 없어요? 보편적인 인류애 같은 것도 없냐고요. 힘든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고, 위험에 빠진 이가 있으면 손길을 내밀어주는 게 보통 아니에요? 인간은 그렇다 칩시다. 디아루기아 님은 드래곤 아닙니까. 같은 드래곤이 도움을 청했는데도 이렇게 개무시해요? 이거 안 될 종족이네, 안 될 종족이야.”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희 드래곤들 역시,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 성향이 강한 종족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만, 성체가 되지 못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네?” “…….” “다시.” “그러니까… 성체가 되지 못한 이들에게는 도움을 주거나….” “한 번만 더요.” “성체가….” 그 말을 하던 디아루기아 얼굴이 창백해졌다. 말실수했다는 얼굴. 솔직히 디아루기아의 얼굴을 보고서는 조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 내가 우리 딸을 위험에 빠뜨리기라도 할까 봐? 아무리 이기영이 썩었어도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다. # 677 회귀자 사용설명서 677화 드래곤(2) “뭐, 그렇게 걱정하는 표정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설마 우리 디아루리아를 전쟁터로 내몰기라도 하겠습니까.” “…….” “아니, 오해하지 말라니까요. 정말로 그런 생각은 한 적도 없으니까. 그런 표정 좀 짓지 마세요. 한 대 치겠습니다, 진짜. 한 대 치겠어요.” “만약… 혹시라도 우리 루리아에게 손댄다면 당신 죽고, 나 죽는 겁니다.” “…….” “…….” ‘와, 얘 봐라.’ “…….”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없나?’ 그런 생각을 잠깐 해볼 정도로 디아루기아의 표정은 적대적으로 변해 있었다. 신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표정에 약간이지만 섭섭함을 느꼈다. 솔직히 이런 대우를 받을 만한 짓을 저지른 기억은 없다. “아니, 이번 일에서 루리아는 완전히 배제하셔야 합니다. 그 아이는 아직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왜 벌써 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누가 디아루리아를 전쟁터로 내몬답니까. 그런 쓰레기 같은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으니까. 마음 놓으세요. 할 일이 있기는 한데, 다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무슨 일을 시키시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거절하겠습니다.” “아이 건강에는 영향 없는 일입니다. 과민반응하지 말라니까요. 솔직히 저도 내키지는 않지만 필요한 일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드래곤들이 아이들에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최대한 써먹어야죠. 다른 용들 만나서 설득은 어떻게 했어요? 디아루리아 이야기라도 하면서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 맞아요?” “…….” “제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이번 일 잘못되면 다 죽는 거라고.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이기적인 용들을 전선에 세워서 고기방패로 써야 합니다. 저도 우리 똘똘이한테 해 끼치기 싫어요. 이번 일로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도 않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시면….” “근데 어떡해요. 뭐 하나 삐끗하면 전부 다 깡그리 날아가는 건데. 저도 가정을 지켜야죠. 노아의 방주 타고 도망간들, 그게 잘 풀릴 거라는 보장이 있어요?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최선은 애초에 방주를 탈 일이 없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정말로 아무 이상 없으니까, 그냥 지금 가서 디아루리아 좀 데려오세요.” “…….” “빨리요.” “뭘… 뭘 하려는 겁니까.” “뭘 하겠어요. 공익광고 찍으려는 거지.” “공익광고?” “뭐, 그런 게 있습니다. 공익광고 말고도 찍을 게 있으니까. 빨리 데려와요. 시간 없으니까.” “그런 걸… 왜….” “맨 처음, 캐슬락 몬스터 웨이브. 비겁하고 더러운 인간들이 디아루리아를 인질로 잡았을 때는 왜 다른 드래곤들이 잠자코 있었겠습니까. 몰라서 그런 거 아니에요? 괜찮은 광고 하나 찍고 전 대륙에 방송해야 합니다. 여신의 거울을 하늘에 꽉 깔아두면 드래곤 여러분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 계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인간 사이에 숨어 사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데려와요. 아, 데려오는 김에 막스도 같이요. 다른 이종족 꼬마들도 섭외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계시면 됩니다.” “네… 이, 일단은 알겠습니다만….” 애초에 공익광고가 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이자, 디아루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얼굴에 미심쩍은 표정이 서려 있었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공익광고라는 게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 의심하는 게 아닐까. 나 역시 이게 잘될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아예 효과가 없지는 않을 거야.’ 무조건 효과가 있을 거다. 드래곤들이라면 더욱더 그렇지 않을까. 지구에서 각종 매체를 통해 방송되는 공익광고들만 봐도 그렇다. 물론 일부의 인간, 이를테면 이율하 같은 애들은, 또 감성팔이 시전한다면서 비웃고 넘기겠지만, 모든 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에 있는 수많은 비영리단체와 봉사단체, 기부단체가 괜히 돈을 들여 광고를 내보내는 게 아니다. 한번 전파를 타는 것이 그만한 자본을 투자하는 것 이상의 영향력을 끼친다는 걸 의미한다. 아직 매체에 오염되지 않은 대륙민들이나 이종족, 특히나 아예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던 드래곤들이라면 더욱더 영향을 많이 받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 이거 오늘은 조금 늦거나 아예 못 가겠는데.’ 갑작스럽게 스케줄이 잡혀, 정하얀에게 향할 수 없다는 사소한 문제가 생기기는 했지만…. 오늘 하루 정도 혼자 있는다고 해서 한소라의 빈자리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손거울을 열자, 그새 또 메시지들이 쌓여 있었다. [시발, 진짜. 김현성 미친 새끼. 진짜, 이 정신 나간 새끼. 이 새끼, 길드 공금 횡령죄로 조사 한번 들어가야 해. 김현성 연봉이 얼만데 걔가 골드가 그렇게 많아?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한번 해줄 거지? 자기 길드라고 눈감아주지 말고, 일 끝나면 제대로 한번 조사 때려. 무조건 길드 자금이야, 무조건.] ‘희라 누나… 졌구나.’ 아니나 다를까 김현성의 메시지도 눈에 들어왔다. [아까 말씀드린 신상, 매입에 성공했습니다. 지금 직접 수령하러 가는 중입니다. 바쁘실 것 같아 전화는 드리지 않지만, 힘든 와중에 힘이 되실까 해서 한 번 더 메시지를 남깁니다.] 본인이 내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본인의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심지어 사진까지 찍어 보내놓았다. 그다음 사진은 진열대에 주차된 장비 수납 가방의 모습,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각도까지 딱 맞게 전시된 자태를 보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거 희라 누나 가져다주세요’라고 할 수도 없고, ‘돈 얼마 썼어요?’라고 물어보기도 조금 그렇지 않은가. 굳이 가격 이야기하지 않은 걸 보니, 저번에 상승의 가방을 샀을 때보다도 돈이 더 들어간 모양이다. 읽고 답장하지 않는 건 좀 아니다 싶어 일단은 여신의 거울을 두드렸다. [큰 힘이 됐습니다. 훈련하느라 바쁘실 텐데 감사해요.] [별로 바쁘지는 않았습니다.] ‘손거울 붙잡고 있었나 보네.’ 곧바로 답장이 온 것을 보니 마침 쉬고 있었던 것 같다. [큰 힘이 되셨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혹시 언제 시간 되십니까?] [아, 네. 안 그래도 길드원들을 한번 모아서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생각했었습니다. 스케줄을 맞춰볼 테니, 그때 다 함께 보면 좋겠네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현성 씨.] [아니요. 너무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 [네, 그럼 저는 할 일이 있어서… ^^] [다시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하시면 좋겠습니다.] [네.] [네, 내일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장비 수납 가방은 진짜로 쓸 일 없는데.’ “나중에는 쓸 일이 있으려나.” 쓸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포댓자루를 들고 다니는 차희라가 잠깐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전투력 상승에 도움이 되는 가방은 아니니 굳이 넘겨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하얀에게도 간단히 오늘은 조금 늦거나 내일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망원경으로 그녀를 살펴봤지만 조금 풀이 죽은 것 외에는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안심할 수 있었다. [정하얀 님은… 조금 괜찮으신 건가요? 아무래도 사과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오히려 한소라 쪽이 불안해하고 있지 않은가. 얘네 문제는 잠깐 뒤로 넘기고 일단은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엘레나 님, 잠깐 시간 되십니까?] [네, 뭔가 도움 드릴 일이 있을까요?] 여기도 칼답. 대충 상황을 설명하자, 곧바로 알겠다는 문자가 날아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똑똑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이기영 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엘레나 님도.” “네.” 확실히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그녀가 들어온 뒤부터 계속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처음에는 잠깐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들려온 목소리에 어째서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갑작스럽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도 황당하시겠지만….” “네.” “이기영 님의 눈에서 엘룬 님이 느껴지시네요.” “아… 그렇습니까?” “네.” “최근에 엘룬 님이 느껴지지 않아 무척 걱정했었는데….” “…….” “아무래도 이기영 님의 눈으로 저를 바라봐 주고 계셨던 모양이네요.” 엘룬의 메인 신도답게 무척 애뜻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아직도 자신이 엘룬에게 버림받았다는 걸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얼굴. 보는 내가 다 안타깝게 느껴졌지만 지금 당장 그런 걸 설명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가요… 저는 잘….” “네,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엘룬 님이 지켜봐 주고 계신다는 느낌이 드네요. 아, 이럴 게 아니라…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너무 바쁘실 것 같아 연락드리기도 힘들었네요.” “아무래도 주어진 책임이 막중하다 보니 조금은 바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엘레나 님께 제대로 신경 써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네요. 덕구와 함께 훈련하고 있다고는 전해 들었습니다.” “아, 이미 전해 들으셨군요!” “훈련은 조금 어떻습니까?” “생각보다 더 괜찮은 것 같아요. 사실 시작하기 전에는 조금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었는데, 덕구 씨가 생각보다 더 잘 이끌어주시는 것 같더라고요. 파티원분들이나….” “네.” “다른 곳에서 모집한 분들도 전적으로 덕구 씨를 신뢰하시고 계세요.” “네?” “듣지 못하셨나요? 덕구 씨가 선원들과 용병들을 모집해서 지금은 부대 단위로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뭐?’ “물론 부대라고 하기에는 조금 초라하지만 모두 훈련에 잘 임해주고 있어요. 모여주신 분들도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했지만, 지금은 모두 만족하고 계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주어진 임무가 막중하다 보니 모두 책임감을 느끼는 거겠죠.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솔직히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저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기분이 좋더라고요.” “…….” “물론 나이스 보트를 사용할 상황이 오지 않는 게 가장 좋다는 건 알지만 말이에요.” ‘뭐야, 이 새끼. 무슨 훈련을 이렇게 스케일 크게 해?’ 당연하지만 따로 부대를 구성하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녀석의 추진력에는 잠깐 혀를 찼을 정도, 뭔가 불안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박덕구를 중심으로 뭉치는 세력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다. 수성전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아군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아, 그리고….” “네.” “말씀하신 대로 이종족 아이들을 데리고 왔어요. 응접실에서 쉬고 있고요. 아까 말씀하신 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정확히 어떤 광고를 내보내실 건가요?” “대륙에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도움이 되는 영상입니다. 이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덕구와 함께 훈련하시는 분들처럼 책임감을 느끼고 열심히 움직여 주시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으니….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종족의 화합과 우리 아이들이 아름다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대륙 위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제 뜻을, 작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아….” ‘봐봐… 감동하자너.’ 이종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용들까지 영향받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콰직! 커다란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런 훈훈한 공기가 장내에 감돌고 있을 때였다. “헥헥! 헥헥헥!” “어?” “헥… 헥헥! 키에에엑! 키에에에에엑!” “똘똘이?” 눈에 보이는 것은 방 안을 꽉 채운 용. ‘왜 이렇게 커졌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 678 회귀자 사용설명서 678화 드래곤(3) “키엑! 키에에에엑! 헥헥헥!” 꼬리를 한 번 흔들 때마다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진동이 느껴졌다. 이전에 한번 봤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로 기억한다. 항상 인간형으로 지내다 보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똘똘이의 모습은 딱 호랑이 정도의 크기. 코끼리보다 더 커다란 듯한 모습을 보니 당황스럽다. 커다랗고 똘망똘망한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있는 걸 보니, 어지간히 반가웠던 모양이다. 계속 안기려고 발버둥 치고 있지만, 본인의 커다란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애초에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안아줄 수 있을까. “너무 흥분해서 본 모습이 튀어나온 것 같습니다. 디아루리아, 집중해야지.” “헥헥! 헥! 키에에에엑! 헥헥!” 내 몸보다 커다란 혓바닥이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모습에 너무 신경 쓰지 않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만나지 못한 시간 대부분은 수면기였으니까.’ “디아루리아, 디아루리아?” 깜짝 놀라 어버버거리는 엘레나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지만, 시선을 빼앗는 쪽은 인간형으로 변하고 있는 디아루리아. 곧바로 꽈악 안기는 게 느껴졌다. “아빠! 아빠!” “오이구! 우리 디아루리아. 그동안 잘 지냈지?” “응, 응, 응!” 매미가 나무에 달라붙어 있듯 매달려 있는 모습. 그 뒤로 디아루기아가 막스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오는 게 눈에 보였다. “수면기에서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보러 가지 못해서 미안해, 루리아.” “아니야, 이해할 수 있어요. 엄마도 아빠가 매일 바쁘다고 했으니까.” “동생이랑은 잘 지냈지?” “응!” 막스와 처음 만났을 때 몸통박치기를 꽂았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전처럼 몸통박치기를 꽂는다면 아마 갈비뼈가 부서지지 않을까. 아직도 디아루기아의 손을 잡고 있는 막스의 표정이 정상인 것을 보니, 이제 몸통박치기는 완전히 끊은 모양이다. 기벽은 그대로 인 것 같았지만 정신적으로 성숙한 것 같다. 디아루기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예전과는 다르게, 그녀의 포지션을 인정하는 느낌. “아빠 무거우시잖니.” “…….”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 건 여전했다. ‘아니야, 괜찮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매달려 있으니, 서서히 숨이 차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디아루기아가 손을 뻗어 그녀를 떼어냈다. “많이 컸네, 우리 루리아.” “응, 그래도 엄마만큼 커지려면 한참이나 걸린대요. 나도 빨리 컸으면 좋겠다.” “금방 클 수 있지 않을까. 학교는 잘 다니고 있고? 이제 막 다시 다니기 시작했지?” 그녀의 질문에 답한 건 디아루기아 였다. “1년이나 자고 있었는데, 다시 재입학하자마자 진도도 금방 따라잡았지 뭡니까? 특히 체육 쪽이나 기본전투 같은 과목은 곧바로….” ‘쟤, 드래곤인데… 그게 당연한 거 아니야?’ 최상위 모험가 정도라고는 볼 수 없지만, 전투 능력으로만 따지면 상위에 발을 들였을 거다. 똘똘이와 수업하는 꼬맹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들보다 우리 똘똘이가 더 강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디아루기아의 모습이 참 재미있다. “게다가 얼마나 똑똑한지 모릅니다.” ‘당연하겠지, 용인데.’ “물론 똑똑하기는 막스가 더 똑똑하지만.” ‘그래도 차별 대우하지는 않은 모양이네.’ 기본적으로 디아루기아가 막스를 바라보는 눈에 애정이 담겨 있다. 막스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어쩌면 이미 예견된 결과가 아니었을까. 아무리 자기 혈육이라고는 하지만 말 안 듣고 자신만의 길을 거침없이 걸어가는 똘똘이와는 다르게 막스는 말 잘 듣는 자식의 정석이다. 디아루기아의 속을 썩인 일이 한 번도 없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오히려 고통받는 디아루기아를 위로해 주고, 지지해 주지 않았을까. “이제 뭐 하면 돼요, 아빠?” ‘아니, 그렇게 말하면 괜히 미안하잖아. 필요할 때만 부르는 것 같자너….’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대충은 알고 있으니까. 대륙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리고 아빠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도 알아요.” ‘많이 컸구나, 똘똘아, 진짜.’ 나뿐만이 아니라 디아루기아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우리 애가 언제 이렇게 생각이 깊어졌을까 하는 듯한 표정. 솔직히 대본 쓰고 적당히 연기하려고 했지만, 약간은 생각을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우리 디아루리아가 어떻게 잘 지내는지 보려고 불렀지. 일단 밖으로 나갈까? 막스도 같이 나가자.” 살짝 엘레나에게 눈짓하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뭘 어떻게 해요. 애들 뛰노는 거나 찍으려는 건데.” “…….” “그럼 뭐, 역병드래곤이라도 하자는 줄 알았어요?” 정말로 역병드래곤이라도 시킬 줄 알았던 모양이다. 경험자의 연기 팁을 전수해 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디아루기아가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오랜만에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이종족 꼬마들 몇 명이 추가되기는 했지만, 오히려 똘똘이한테는 더욱더 잘된 일이다. 그녀가 드래곤이라고 해서 지나치게 성숙한 것도 아니다. 정신적인 성장이 빠르기는 하지만 아직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디아루기아와 함께 앉아 있자, 엘레나가 디아루기아에게 아이들을 소개해 주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하지만 엘프, 드워프는 사뭇 긴장한 얼굴, 특히나 드워프 꼬마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다른 소수종족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두려움과 어색함이 공존하는 얼굴이었고, 심지어 디아루리아는 심드렁했다. 눈앞에 있는 또래보다는 나와 함께 있고 싶은지, 자꾸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래도 멀리서 손을 흔들어주자 안심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나쁘지 않네. 솔직히 보기 좋아 보여.’ 대충 봐도 그림이 되지 않는가. 이종족 아이들이 처음 만나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고,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는 모습은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어색함이 가시고 있다. 물론 본능적으로 디아루리아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순수한 꼬맹이들은 이내 하나가 되어, 재미있게 뛰어놀기 시작했다. 똘똘이는 ‘유치하다, 하등한 놈들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막상 뛰어노니 신나는지 잔뜩 흥분한 얼굴이었다. 막스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디아루리아도 디아루리아였지만, 매번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던 막스의 새로운 모습에, 나도 저 꼬맹이들을 바라보는 게 즐거워졌다. “디아루리아랑 막스가 처음 만난 친구들이랑도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네요.” 디아루기아의 한줄 평도 나쁘지 않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꽤나 감격한 듯했다. “이게….” “네?” “이게 명예추기경님이 바라시는 세상이었군요.” 엘레나의 평 역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기영 님께서 바라시는 세상이었어요.” “…….”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아직도 저희 엘프 중에서는 인간들을 믿지 못하는 이가 많아요. 대륙을 위해 함께 나아가자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과거의 상처들과 서로 대립했던 시간, 그 기억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당연히 그럴 겁니다. 네, 그럴 수밖에 없겠죠.” “정말로 인간과 이종족들이 화합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여전히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 이들도 있고요.” “그것 역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 역시 그래요. 물론 이기영 님이나 파란 길드 분들이 좋으신 분들이라는 건 알고… 인간 중에서도 바른 생각을 품은 이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여전히 더럽혀진 영혼을 가진 이들 역시 적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 모든 안 좋은 생각들도 지금 이 모습을 보면 날아가는 것 같네요.” “…….” “이기영 님이 정말로 원했던 가치가 어떤 것인지, 이기영 님이 뭘 지키고 싶었던 건지, 이기영 님께서 그리는 미래가 어떤 미래인지, 아마 모두가 이해할 겁니다.” “…….” 심지어 디아루기아마저 새삼 다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확고하게 나를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디아루기아의 썩어버린 마음마저 정화할 정도의 광경. 다른 게 정화가 아니다. 이 아이들이 뛰어노는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오른다. 그 어떤 쓰레기라도 예전의 그 순수했던 모습을 되찾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심지어 우리 똘똘이는 용 폼까지 선보이고 있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솔직히 저 폼으로 놀아 주기를 더욱더 바라고 있기는 했다. ‘친구들한테는 진실된 모습을 보여줘야지.’ 당연히 깜짝 놀란 꼬맹이들이 다시금 경계하거나 울음을 터뜨렸지만, 다시 한번 적응 기간을 거친 이후에는 디아루기아의 등이나 꼬리에 타서 함께 노는 모습이 보인다. 특히나 꼬리를 이용해 미끄럼틀을 타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인다. 드워프 꼬마는 미끄럼틀 타기는 무서운지 발에 꼭 달라붙어 있었지만, 저것만으로도 경계심이 허물어졌다는 걸 증명하는 것 같다. “아이들 배고프겠네요. 식사준비라도 해야겠습니다.” “저도 같이 갈게요, 디아루기아 님.” “저도 같이 갑시다.” “아니요. 아이들을 볼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요.” 솔직히 움직이기 싫었는데,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왜 이렇게 표정이 따뜻해, 디아루기아.’ 인연을 맺은 이래로 가장 따뜻한 얼굴이 적응되지 않는다. 아마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엘레나가 이빨을 잘 털어준 덕분이다. 즐거워하는 똘똘이를 보며 이게 똘똘이가 자랄 환경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솔직히 나 역시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는 한다. 굳이 아이들이 자라게 한다면 이런 환경이 좋다. 아마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드래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애초 대륙에 퍼져 있는 용들 역시 엘프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대륙을 수호하고 인간들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였으나 인간들에게 배신당했다. 용 사냥도 용 사냥이지만 다른 무엇보다 그들을 실망하게 한 것은 인간 그 자체였을 거다. 지구의 암은 인간이라는 누군가의 표현처럼, 그들의 눈에도 대륙의 인간들이 암처럼 비치지 않았을까. 인간은 바뀌지 않을 거라고, 화합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든 드래곤들이 이 장면을 봤으면 좋겠다. 거짓 하나 없는 투명한 진심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흙투성이가 된 꼬맹이들의 모습, 막 아들이 가장 재미있게 논 것 같다. 디아루리아까지 인간 형태로 되돌아와서는 이쪽으로 뛰어온다. 아마도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친구를 소개해 준다거나 뭐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다 달라고 하려는 거겠지. 내 안에 있는 순수한 마음이 자극됐기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빛이 몸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한다. 아이들의 눈 때문인지 자꾸만 참으려고 해도 날개가 튀어나오려고 한다. 진짜 하늘에 맹세컨대 좋은 그림을 노린 것은 아니다. 아니, 솔직히 조금은 노렸지만, 여기서 대놓고 노렸다고 하면 너무 쓰레기 같으니까…. 10장의 찬란한 날개가 나오는 것은 내 따뜻한 마음 때문이라는 걸로 하자. “우와아아아아아!” “우와….” “아빠! 아빠… 너무 예쁘다. 너무 예뻐… 아빠.”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대륙의 미래를 향해 날개를 뻗었다. 본인들이 흙투성이라는 걸 깨달았을까. 너무나 깨끗한 빛의 날개에 손을 대기 힘들어 보였지만, 나는 이종족 아이들을 꽉 감싸 안았다. ‘대륙의 미래,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내 기대에 부응하듯. 광고를 본 드래곤 고기방패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 679 회귀자 사용설명서 679화 드래곤(4) 넓은 들판 위를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종족의 구분 없이 자연을 벗 삼아 즐겁게 노는 꼬마들의 모습이 어떤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정말로 즐겁다는 듯 꺄르르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밥을 먹는 모습에도 순수한 동심이 들어가 있었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야 할 대륙은 이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 아이들은 응당 이런 미래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이런 미래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하는 것만 같다. 실제로 비슷한 나레이션도 나오고 있지 않은가. -우리 아이들이 마음 놓고 지낼 수 있는 대륙, 우리의 손으로만 지킬 수 있습니다. 괜스레 클로즈업되는 디아루리아의 얼굴에 카메라로도 담을 수 없는 순수함이 자리한 것은 당연하다. 사실 깔끔한 모습도 아니다. 작정하고 메이크업을 하고 찍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예전의 잃어버린 동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꼬마의 웃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마땅히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 그게 옳다.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 -대륙의 모든 이가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지킬 수 있습니다. 작은 촛불들이 모여 어둠을 밝히는 커다란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역시 압권은 이종족 아이들을 따뜻한 빛의 날개로 품어주는 빛기영. 내가 보기에도 성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품에 안기는 디아루리아와 막스, 그리고 이제는 이름도 까먹은 여러 꼬맹이까지 함께 빛의 날개에 안겨 있는 장면은 그 어떤 연출보다 더 효과가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화합, 사랑 그리고 평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가치입니다. 이 땅 위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는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부디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당신의 힘을 빌려주세요. 새로운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손을 뻗어주세요. “그리고.”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로고가 나오면서 광고는 마무리. 다소 급하게 만들어, 효과가 있을까 염려되기는 했지만, 오히려 이런 엉성함이 좋다. 대놓고 노렸다기보다는 정말로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아낸 것이었으니 말이다. 옆에서 함께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던 디아루기아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왔다. “정말로… 효과가 있군요.” “효과가 없을 리 있겠습니까. 우리 드래곤님들 사이에서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드래곤은 지켜야 한다는 기본적인 가치가 남아 있다는데. 먹히고 말고요. 무조건 먹히는 게 맞습니다.” “그것 역시 예전의 일이라고 들어서… 솔직히 확답을 드리기에는 조금… 불안했습니다만….” “종족 불문 만국 공통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순수한 어린아이를 싫어하는 이가 어디 있겠어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아이도 가지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움직이는 건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 디아루리아 얼굴 좀 보세요. 얼마나 순수합니까. 용들이 이걸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 “아마 세상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종족과 드래곤이 어울리는 광경 자체가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림은 아니니까요. 일부 우월주의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기본주적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겠죠. 세상이 달라졌구나. 정말로 화합의 때가 다가왔구나. 아마 확인하러 온 드래곤들도 있을 겁니다. 그만큼 믿을 수 없는 광경이잖아요.” “네.” “세상에 은둔한 드래곤이 표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거로 모자라 세상에 녹아들고 있다니, 아마 우리를 찾아와 주신 드래곤 분들에게는 무척 감동적으로 비쳤을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거고요.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건 우리 똘똘이의 순수한 모습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네?” “뭔가… 잘된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만…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왠지 모르게 아이들의 순수함을 이용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 “…….” “그런 마음가짐으로 대륙을 지킬 수 있겠어요? 우리 똘똘이 얼굴을 보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건 모두 똘똘이를 위하는 길입니다.” “그건 알고 있지만….” “디아루리아는 방에 있죠?” “네.” “슬슬 일어나죠. 손님들 계속 기다리게 하기도 조금 그런데…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준비해 놓을 걸 그랬네요. 다섯이나 모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게다가 그… 뭐라고요?” “네, 제 기준으로도 고룡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 한 분 와 계십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 한 번 스쳐 지나며 뵌 게 전부고요. 당연히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강하기도 하겠네요.” “…….”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정도로 나이를 먹은 고룡이라면 가진바 무력도 상당하지 않을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겠지만 커다란 지역 하나를 단신으로 메워줄 수 있을 정도 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대천사 중 하나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할지도 모르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안 그래도 전력이 달린다고 생각하는 상황이었는데, 든든한 아군이 합류하기 직전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절로 미소가 번졌지만 아직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광고 자체에 의구심을 느끼거나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본 것을 확인하려고 온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만남을 잘 마무리 지어야 했다. 물론 디아루기아와 사이좋은 모습을 연출하는 것도 당연한 거고…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인상을 남겨야 한다. 저들은 인간에게 미비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제 모두 끝났다고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아, 네, 먼저 들어가시죠.” 살짝 고개를 숙인 디아루기아가 곧장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곧바로 뒤를 따라가자 의자에 앉아 있는 다섯 명의 인형이 시야에 들어왔다. 노인이 한 명 그리고 디아루기아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연배가 있어 보이는 이가 대다수. 기본적으로 인간형이 실제 수명의 영향을 받는다는 걸 생각하면 아마 흰머리를 한 저 할머니가 디아루기아가 말한 고룡이 아닐까. 어떤 종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황금색 눈동자를 보니 어떤 색깔인지 대충 예상이 간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존경하는 대륙의 수호자들이시여.” “…….” “…….” 아주 잠깐의 침묵 이후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더 이상 대륙의 수호자가 아닐세. 그런 이야기를 듣기에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더 이상 우리를 그렇게 칭하지 말게.” “…….” “…….”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인간에 불과하지만, 그동안 여러분들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대륙을 위해 헌신하신 걸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땅을 밟고 있을 수 있는 건 드래곤들의 노고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찌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입니까.” “…….” “잊혀지고 있는 표현이라 한들, 여러분은 마땅히 대륙의 수호자로 불릴 자격이 있으십니다.” “부끄럽군.” “…….” “부끄러워.” 혀를 차는 소리는 뭘 뜻하는 건지 모르겠다. “대륙의 신들에게 선택받은 인간아, 네가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제노지르아 님.” “마르세린, 눈앞에 있는 이 신성한 인간에게 거짓은 없네. 빛을 향한 마음에 아주 조금의 거짓조차 느껴지지 않아.” ‘뭐야, 거짓말 탐지기 가지고 있었어?’ 마음의 눈을 발동시켜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굳이 트집잡힐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제노지르아라는 드래곤을 바라보자, 미안하다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다소 안 좋은 반응을 보인 용은 마르세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다란 소리를 내는 게 들려왔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대륙의 신에게 선택받은 인간이라고 한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노지르아 님. 수 세기 동안 나타났었던, 용사라고 불리는 이들도 결국에는 자신의 탐욕과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지 않습니까. 그런 인간이 있을 리가 없….” 푸른 머리를 한 드래곤이 말을 멈춘 것은 내 눈을 바라본 직후였다. ‘저는 대륙을 위해서라면, 이 땅과 이곳에 살아가는 모든 이를 위해서라면 내 모든 걸 내던질 수도 있어요.’ “그런 인간이… 있을 리가… 없…습….” ‘제가 원하는 것은 권력이나 명예 그리고 물욕 따위가 아니에요. 제 안위를 지키고 싶어서도 아니고요. 애초에 그런 게 뭔지도 잘 모르죠. 다른 건 필요하지 않아요. 그냥 지키고 싶을 뿐이에요. 순수하게 이 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냥 지키고 싶을 뿐이에요. 저는 빛이랍니다.’ “없습니….” ‘사랑과 평화, 화합 그리고 미래. 그게 제가 원하는 전부인 걸요? 다른 건 잘 몰라요. 정말이라니까요? 기영이는 아무것도 몰라요.’ “있을 리가… 없는데.” “내 눈이 틀린 게 아닌 모양이구나, 마르세린. 그렇지 않으냐. 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겉으로만 보이는 게 있는 법이다. 그걸 느낀 게로구나. 어떻더냐.” “송구합니다.” “이 인간은 달라. 진심으로 대륙을 위하고 있으며 숨어버린 우리보다 더 수호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이다. 네가 인간을 남편으로 뒀다고 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만… 네 선택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디아루기아.” “감사합니다, 제노지르아 님.” “이 인간이 너를 무척 사랑하고 있다는 것 역시 느껴지는구나. 좋은 짝을 얻었어. 아주… 아주 좋은 짝을.” “…….” “일단 사과부터 하고 싶네. 자네를 믿지 않았던 것과, 쓸데없는 시험을 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네….” 무슨 시험을 한 건지 도통 모르겠지만, 역시나 마음속에 있는 빛은 그 어떤 시험도 프리패스 하게 해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행동이었다는 걸 이해해 주게나. 너무 오랜 시간을 상처받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해 줬으면….” “무슨 상황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렇지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노지르아 님.”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일단 땡큐죠.’ “…….” “…….” 그리고 찾아온 잠깐의 침묵, 정말로 미안했던 모양이다. 오히려 본인이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입꼬리를 올릴 수 있는 상황이 찾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상대방에게 빚을 지우고 시작할 수 있다는 건,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과 진배없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제노지르아가 곧바로 말을 이어왔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잠깐 긴장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의외의 발언이었다. “괜찮다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도 되겠는가.” “정확히 어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 어떻게 디아루기아가 이 인간을 짝으로 선택했는지, 듣고 싶네.” ‘뜬금없네.’ 부드러운 미소, 확실히 종족 어른의 얼굴이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주 어릴 때 디아루기아를 한 번 본 게 기억에 있는지 그녀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 마치 할머니가 손녀의 연애 스토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만 같다. 이건 조금 부끄럽지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기왕이면 잘 보이는 게 좋으니 말이다. “실은….” “음.” “실은 캐슬락이라는 도시의 인간들이 디아루기아의 딸을 납치한 적이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장내가 얼어붙은 것만 같다. 하지만 천천히 내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이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작은 바위 길드가 디아루리아를 볼모로 디아루기아를 협박하고 결국 디아루기아가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던 이야기였다. 그런 그녀를 내가 돌보며 결국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별것 아닌 이야기. 이전의 일을 떠올리자 괜스레 얼굴이 붉어진다. 당시에는 디아루리아의 아빠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 말이다. 말을 이으며 디아루기아를 바라보자 그녀 역시 조금 어색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사실 제가 디아루리아의 아버지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덜컥… 그렇게 되어버려서.” “코가 꿰어버린 모양이구나, 하하하. 어지간히 이 남자가 욕심이 났던 게야. 내 말이 틀린 게냐, 디아루기아.” “부… 끄럽습니다.” “목숨을 구해준 이후에 덜컥 배우자로 선택당했으니 대륙 신들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 조금은 억울할 만도… 할 것 같습니다, 제노지르아 님.”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냐, 마르세린.” “네, 순수한 인간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디아루기아가 부럽기도 하군요.” 맨 처음에는 불안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장내의 분위기는 밝은 미래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 680 회귀자 사용설명서 680화 드래곤(5)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구나, 마르세린. 디아루기아의 표정이 안 좋아 지고 있으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디아루기아 님. 저 역시 배우자를 선택해야 할 날이 온다면 이런 이를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니까요.” “아, 아닙니다, 마르세린 님.” “…….” “…….” “마르세린이 네 짝을 탐한 것이 아니니,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아도 된단다, 디아루기아.” 왠지 모르게 계속해서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디아루기아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그런 것 때문이 아닌데.’ 마르세린의 대사 때문이 아니다. 다른 용들은 디아루기아의 상태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아마 예전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과거에 있었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모양이다.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로 괴로운 기억이 아니었던가. 손을 잡아주자 떨리는 몸이 천천히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본 제노지르아가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 역시 대충 어떤 상황인지 눈치챈 것이 아닐까. 디아루기아가 곧바로 말을 돌리며 입을 여는 것을 보니,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이 아닌가 하는 생각해 봤지만 그다지 위화감은 없다. 어떻게 보면 여기 자리한 이들이 제일 기대하던 이벤트였으니까. “디아루리아도 함께 인사드려야 했는데… 지금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제노지르아 님.” “그렇지. 여기에 온 목적도 깜빡 잊을 뻔했구나. 아직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용이라니….” “조금 떨리네요.” “나도 그렇다.” “기대되는군요.” 장내가 곧바로 복작복작해진다. 두 명 정도는 디아루리아를 보기 위해서 찾아온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정말로 본 목적이 디아루리아인 것 같은 이들이 눈에 비쳤다. ‘진짜 특이한 종족이네.’ 인간의 기준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아이를 가지기 싫어해 개체 수도 얼마 남지 않은 종족이 이토록 아이를 좋아할 줄 누가 알았을까. 이들의 유전자에 새겨진 행동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용들의 문화와 사고방식이 완전히 이쪽과 달라서일지도 모른다. 크게 상관은 없지만 이후 용들의 생태에 관해 논문이라도 쓰면 잘 팔리지 않을까. 드래곤들은 기대되는지 모두 디아루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종족의 미래….”라거나 “이게 얼마 만인 줄 모르겠습니다.” 같은 대사들을 내뱉고 있는 이들의 얼굴에는 기본적으로 설렘이 장착되어 있었다. 똘똘이가 응접실로 발을 들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디아루리아입니다.” 꾸벅 인사하는 모습은 평소의 디아루리아의 모습과는 무척 다르다. ‘뭐야, 왜 이렇게 얌전해.’ 물론 평소에도 얌전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작정하고 얌전한 태도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따로 코멘트나 코칭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포지션을 잘 이해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오오.” “제노지르아라고 한단다. 만나서 반갑구나, 디아루리아.” “마르세린 이모라고 부르면 된단다.” “만나서 반갑다, 디아루리아.” “정말 작네요. 아직 10살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런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니 굉장히 영특한 아이로군요.” “너무 귀엽구나.” 곧바로 달려들어 껴안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모양새. 여러 가지 칭찬들이 곧바로 들이닥치자 디아루기아의 입가는 벌써부터 흐뭇해지는 중이었다. 매일 자신의 입으로 똘똘이 자랑을 하던 그녀였으니, 저런 칭찬들이 얼마나 듣기 좋을까. 대충 봐도 수다쟁이처럼 입을 열고 싶어 하는 것이 느껴진다.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심성도 곱고 또 새로운 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반에서도 매번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고… 짧은 수면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진도를 따라갈 정도로 똑똑합니다.” “반이라니….” “아, 네, 디아루리아는 인간들 그리고 이종족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노지르아 님.” “여신의 거울이라고 불리는 물건으로 본 것이 정말이었구나.” “네, 사실은 제 배우자의 추천으로….”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물어도 되겠나.”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지내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정상적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타인과 원만하게 능력이나 다양한 사람과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들을 배웠으면 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것이야말로 용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재미있군. 아무리 여신의 선택을 받고 용의 짝이라고 한들, 그대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말할 줄이야.” 공격적인 어투로 말을 이어온 것은 아까부터 입술을 내밀고 있던 은색 머리였다. ‘쟤는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니. 저 새끼, 저럴 줄 알았어.’ 굳이 표현하자면 건수 하나 잡았다는 느낌이다. 한낱 인간이 자신들에 대해 정의 내리려고 하는 것을 아니꼬워하는 모양새. ‘하….’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종족 우월주의가 깃들어 있는 모습인 것 같았다. 전술 김현성에게 날개와 꼬리가 잘리지 않았기 때문에 저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거겠지만, 굳이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해줄 필요는 없다. 일단 지금은 비위를 맞춰주는 게 먼저였으니 말이다. “물론 기분 나쁘실 수도 있습니다… 대륙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여러분에게 인간이나 이종족들은 함께 걸어가야 하는 대상이 아닌 보호해야 할 이들로 느껴지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니까요. 여러분은 긴 세월을 살아가고 또, 그에 걸맞은 커다란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 역시 용의 배우자가 되지 않았다면 여러분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 “대륙 위에 있는 신들처럼 드래곤 여러분 역시 우상화되어야 마땅한 종족이라 그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럼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죄송스럽지만 그렇습니다.” 덜컹하면서 곧바로 몸을 일으키는 성질 급한 놈. “드래곤들이 맡은 책무와 그 능력과는 별개로 용들은 조화롭게 살아야 하는 종족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른 이들과 부대끼며 소통하고 화합하며 살아가야 하는 종족이라고요. 누군가의 위에 서지 않고 같은 선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종족이라고 느꼈습니다.” “네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인간.” ‘난 책임 안 져도 돼. 나 때리면 전술 김현성 달려온다.’ “그렇기 때문에 여신님께서 여러분들을 그렇게 만드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가.” “들을 가치가 없는 궤변입니다, 제노지르아 님.” “제가 여신님의 뜻을 왜곡하는 것은 아닐지 무섭지만, 평생의 배우자를 선택하고, 그 배우자와 영혼과 마음을 공유하며, 그 배우자와 함께 눈을 감는 여러분의 능력은 그것을 위해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어째서 종족의 구분 없이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본 적 있으십니까.” “…….” “어째서 여러분이 하등하다고 생각하는 이와 평생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떠올려 본 적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여신님이 진정으로 여러분들에게 원한 것은… 어쩌면 타 종족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하기에 디아루리아에게 그런 것들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여러 문화와 여러 유형의 생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륙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든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기가 차는군.” “카셀리아나!” “제노지르아 님… 이 인간은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카셀리아나.” “무슨….” “이 인간의 말이 맞다. 이 인간의 말이 맞아.” 솔직히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되는대로 지껄인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빛에 취해 버린 제노지르아에게 다른 목소리가 들어올 리 없다. 내가 한 말이었지만 그럴듯하기는 하다. 솔직히 이 대륙에 드래곤들을 설계한 양반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용에게 그런 능력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아니겠는가. 경우에 따라서는 충분히 생각해 봄직한 이야기였다. “여신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던가, 디아루기아의 배우자여.”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째서 우리 종족이 실패한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노지르아 님.” “우리 종족은 항상 외부에서 원인을 찾아왔어. 그게 문제였던 게야. 디아루기아의 짝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제야 이해가 돼. 어째서 여신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내린 것인지, 이 인간처럼 깊게 생각해 본 이가 있나? 어째서 종족의 구분 없이 짝을 선택할 수 있는지 그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해 적이 없었을 게야. 쇠퇴하는 것도 당연해. 자신이 그 누구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며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으니, 잊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 “인간의 욕심과 탐욕이 모든 것을 망친 것이 아니네. 우리가 잘못된 방법으로 살아왔던 게야. 그들의 위에 서려고 했고, 그들과 반목하려고 했지. 그들이 힘을 키우면 경계하고 인간들이 손을 뻗으면 손을 쳐 내면서 살아왔네. 다른 종족들에게도 비슷했지 않은가. 우리는 수많은 이종족의 삶의 방식을 바라볼 수 있는 긴 세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어.” “…….” “일이 이렇게까지 된 모든 원인은 하등한 이들에게 있다고 떠넘기며 각자의 공간에서 숨어 사는 게 고작이었지. 우리의 책무를 내팽개쳐 버린 채 그 어떤 것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말일세.” “…….” “우리가 가장 귀찮아하고, 거추장스러워하며, 쓸모없는 능력이라고 여겼던 이 능력이야말로, 우리 종족이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는 등불이라네. 함께 어울리며 부대끼며 살아가야 해. 그게 진실로 여신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삶의 방식이야.” “…….” “수호하는 것을 바라신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원한 것이야.” “하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 은발 머리 드래곤이 입술을 꽉 깨무는 것을 보니, 어떻게 봐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게 느껴진다. 다소 싸늘해진 분위기에서 애매한 포지션이 되어버린 디아루리아가 신경 쓰인다. 갑작스레 이상한 말들이 튀어나오고 있으니 많이 당황하지 않았을까. 역시나 슬쩍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 하지만 곧바로 입을 여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저도 친구들이 좋아요.” “디아루리아.” “함께 있는 게 좋고, 재미있어요. 물론 생각의 차이 같은 것들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제 친구들이 좋아요.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도, 엘프 언니들이나 제 동생과 이야기를 하는 것도, 지금 제가 살아가고 있는 대륙이 좋아요.” 어린아이의 순수한 말이 괜스레 콕콕 들어와 박힌다. “저는 이렇게 살아가고 싶어요. 아빠가 말씀한 것처럼 다른 이들과 함께 자라고 싶어요.” “모든 이가 너보다 먼저 죽게 될 것이다, 디아루리아. 너의 친구들은 너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 거야.” ‘이 새끼는 못하는 말이 없네.’ 하지만 디아루리아는 거침이 없다. “그건 제가 가지고 있는 힘, 제가 가지게 될 힘에 따라오는 책임이에요, 카셀리아나 님. 우리 종족은 슬픔을 감당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어요.” ‘키야아! 한 방 먹였죠. 우리 딸, 누구 딸인지 말 한번 잘한다.’ “염치없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앞으로 다가올 종말에,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해 주시기를….” 심지어 슬쩍 고개를 숙여온다. 안 그래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걱정스했는데, 그 문제가 해결된 셈. 디아루리아의 짧은 발언에 장내에는 침묵에 휩싸인다. 그 누구도 쉽사리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있었지만 제노지르아는 조용히 디아루리아를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연출에 잠깐 할 말을 잃었지만, 나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윽고 공터로 나온 제노지르아의 몸이 찬란하게 빛나며 용의 형상으로 뒤바뀌기 시작한다. 디아루기아의 2배 정도는 될 것 같은 크기의 용, 고풍스럽다는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제노지르아의 외형은 마치 잘 만들어진 조각상처럼 느껴졌다. 목을 길게 뺀 이후에는. “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엄청난 포효를 내뱉었다. 그 직후. 대륙 곳곳에서 비슷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긍정적인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봐도 야비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똘똘이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기 때문이다. ‘우리 딸… 장하긴 한데….’ 고기방패들이 생겼다고 좋아하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아빠는 우리 딸 믿어. # 681 회귀자 사용설명서 681화 준비하십시오(1)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그림자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제노지르아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또 그 외침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드래곤들이 이쪽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은색 머리 빌런의 표정과 제노지르아의 대사로 미루어보면 아마 내 생각이 맞지 않을까. ‘긴 회의가 될 것 같네만… 긍정적인 답을 가지고 올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네. 로드가 돌아가신 이후 이게 얼마 만인지…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 줘서 고마울 뿐이네.’ 그녀의 말 그대로일 것이다. ‘좋은 대답을 가져오겠지? 무조건 그렇게 돼야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떠올리며 툭툭 허벅지를 두드리자, 눈을 가늘게 뜬 이지혜가 말을 걸어왔다. 손거울로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얼굴을 보는 건 무척 오랜만이다. 평소보다 더욱더 피로에 찌든 얼굴이 눈에 띄었다. “벌써 1주일이네요.” “그러게.” “그래서….” “…….” “튼튼하고 맛 좋은 용 고기방패들이 투입된다는 건 확실한 거죠? 승률이 조금을 올라갈 것 같은데….” “아직 확정된 사안은 아니니까. 디아루기아의 말을 들어보면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만 분탕질을 칠 것 같은 놈이 눈에 밟혀서.” “작업 칠 거예요?” “그럴 시간 없어. 디아루기아가 잘해주기를 빌어야지.” “손 놓고 구경하고 있겠다는 거 아니죠? 그 은발, 이번 기회에 악마에게 영혼을 판 용으로 만들어 버리고 쓱싹 해버려요. 나쁘지 않잖아요. 드래곤 중에서 악마와 내통하던 녀석이 있었다는 거, 아예 말이 안 되는 소리도 아니고… 조금 귀찮기야 하겠지만 확실하게 하는 게 낫죠. 장비 같은 것도 드래곤 본이나 심장으로 만들 수 있을 테고 일석이조 아니에요?” “그게 하루아침에 되면 그렇게 하겠는데. 그런 게 아니니까. 이제 7일밖에 안 남았는데 거기까지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어? 다른 드래곤들이 이쪽 말에 귀를 기울여야 가능한 일이야. 드래곤 로드 대리가 나를 철석같이 믿어주고 있기는 한데, 여론을 잡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엄연히 종족의 법도나 문화 같은 게 있으니까. 그걸 파악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데, 괜히 발 들였다가 소강상태로 들어가면 아깝게 얻은 고기방패들 묶이는 거라고.” “일리는 있네요.” “만약 작업을 치려면 전쟁 중에 치는 게 가장 좋을걸. 건수가 잡히면 그대로 밀어붙이면 되는 거고, 그게 안 되면 캐슬락의 작은 바위 길드처럼 처리해야지, 뭐. 나중에 동상 세워주면 돼. 이른바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거지.” “진짜 악랄하네요.” ‘누나한테는 그런 소리 듣기 싫어.’ “그래서 확률은 어느 정도인데요.” 정확히 데이터로 측정된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감이 잡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전보다는 높아질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정하얀은 아직 존버 중이지만 일단 차희라가 벽을 뛰어넘었다는 것에서 플러스 점수, 드래곤들이 합류한다고 가정하면 10% 정도는 더 높일 수 있지 않을까. 그 외에도 자잘한 문제들이 많이 해결된 상황이었다. 이미 인류는 싸울 준비를 마쳤다는 거다. 전 병력을 전부 원하는 곳으로 집어넣었고, 터져 나올 것만 같았던 불만들도 금세 가라앉았다. 다소 강압적으로 밀어붙인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적폐 측 대형 길드의 길드마스터가 의문사를 당하면서 그런 불안감도 확실히 사라졌다. 로비를 위해 찾아가기로 했던 바로 전날이라 다소 황당하기도 했고, 혹시나 김현성이 저지른 짓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지만, 뜻밖에도 범인은 부길드마스터. 악마들 쪽에 붙으려고 했기 때문에 직접 배신자를 처단했다는 비보가 날아들어 왔다. 아마 진짜 원인은 길드 내의 알력다툼이었을 거다. 불 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일단은 눈을 감아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이쪽에는 호재라고 부를 만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잠깐 조금 뒤숭숭한 분위기가 유지되기는 했지만 이런 사소한 사건들을 제외하면 무척 스무스하게 진행되고 있는 편이다. ‘예언의 날이 다가올 것이다’라는 분위기가 퍼져 있는 것 역시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공식적인 발표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위기 자체가 그랬다. 병력은 전부 전선과 전진기지에 자리 잡았고, 근처 도시의 민간인들은 전부 후방으로 이송 조치되는 상황. 커다란 빛이 계속해서 북부를 가득 메우고 있으니, 뭔가 벌어질 것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 며칠 안에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와중에 대륙의 용들까지 울부짖었단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아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혹시 부정적인 여론이나 패배주의, ‘의문의 적을 향한 공포가 고개를 내밀면 어떡하지.’ 같은 고민을 하기는 했지만 의외로 병사들은 침착했다. 의문을 느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들에게 침착함을 심어준 계기가 뭔지 아주 잘 알 수 있었으니까. ‘우리 아이들의 미래.’ 드래곤을 위해 만들어놓은 공익광고가 인간과 이종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순수한 어린아이의 미소를 지키고 싶었던 것은 드래곤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감성팔이라는 여론도 슬그머니 대두되기는 했지만 본래 이런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인간들은 이상적인 그림을 그리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공포를 이겨낼 방법으로 희망찬 미래를 그리는 것을 선택했고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는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미래를 완벽하게 그려 넣었다. 대륙 전반에서 우리의 것은 우리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는 거다. 굳이 강제징집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매일 같이 군에 지원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결과적으로 군의 사기가 올라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희생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우리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손으로 불을 지펴야 한다고’, ‘작은 힘이라도 모인다면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다고’, ‘자신에게도 쥐어진 역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각지에서 모여들어 저마다의 각오와 신념을 걸고 대륙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굳이 데이터로 환산하자면…. ‘3%? 아니, 5% 정도는 올라갔다고 판단해도 되려나.’ 어쩌면 조금 더 평가를 좋게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분위기와 사기라는 건, 수치화하기에는 애매하고 민감한 문제이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상정하고 있는 것보다 더 커다란 힘을 내기도 하니 말이다. “…….” “…….” “그렇게 안 좋아요? 빨리 좀 대답해 줘요.” “글쎄, 수치화하기 애매한 부분이 많아서 개인적인 견해로는 45% 정도까지는 왔다고 생각해.” “거기에 정하얀까지 벽을 넘으면… 어때요?” “50% 훌쩍 넘겠지, 아마.” “걔 하나로 확실히 많이 달라지기는 하네요. 그래서 그렇게 버티고 있는 거예요?” “기왕이면 극적일 때 터뜨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최소 사흘 전, 아니면 하루 전.” “너무 오래 버티는 게 아닌가 싶은데, 나만 불안한 게 아닌가 봐. 혹시나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동안 걔가 저지른 일이 몇 개인지 생각해 보면, 이번에도 상황 다 꼬아버리고 개판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솔직히 나도 정하얀이 벽을 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불안요소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그걸 생각해야 돼요.” “어차피 정하얀이 벽을 못 넘으면 다 뒈져. 바로 드래곤들 앞세운 다음에 노아의 방주 계획 실행이라고. 그래서 그렇게 보고 있는 거야, 누나. 벽을 못 두드리느니, 상황을 꼬아버리는 게 나아. 도망칠 수 있는 시간도 벌 수 있고 좋지, 뭐.” “걔가 그 정도예요?” 정하얀의 가치가 엄청나다는 건 이미 이지혜 역시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질문은 조금 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누나가 상상하는 거 이상일 거야. 장담할 수 있어.” ‘상황이 그렇게 안 좋은 건 아니니까.’ “뭐,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아. 라파엘 쪽은….” “일단 유지장치는 계속 꽂고는 있는데… 혹시나 일어나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정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누나는 좀 어때?” “힘들죠. 이렇게 수다 떨 시간이 있나 싶을 정도로요. 그래도 나쁘게 진행되고 있는 건 아니에요. 붉은 용병도 꽤 괜찮은 길드고, 차희라가 요구한 선까지는 가까스로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다듬을 부분이 아직 많기는 하지만… 너무 거기에만 매달릴 수는 없잖아요. 특히 오늘 같은 날에는.” 이지혜가 슬쩍 고갯짓하는 것이 보인다. 시선이 따라간 곳에 위치한 것은 여신의 거울, 화면에 비치는 인물은 교국의 지도자 오스칼이었다. 강단에 서서 기자들에게 발표하는 건 그녀에게 익숙한 일이었지만 오늘따라 다소 긴장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 긴장감도 서서히 사라진다. “의외이긴 해요. 솔직히 발표는 오빠가 할 줄 알았는데.” “나는 전투 직전에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무엇보다 오스칼도….” “네, 뭐… 인정해요. 고유능력으로 스피치 능력이라도 달고 있는 건 아닌가 했다니까요. 말도 잘하고 전달력도 좋아요. 이런 일을 전하는 것도 어울리고요.” 이지혜의 말이 맞다. 솔직히 오스칼에게 달변가라는 말은 어울리지는 않는다. 조리 있게 말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어투나 행동에서 신뢰감을 주는 타입이라 할 수 있으리라.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녀가 입을 열면 조금 더 신뢰감이 생기는 느낌이랄까. 신성제국을 혁명으로 바꾼 그녀야말로 이번 일에 대해 발표하는 데 적절한 인물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이어나가는 모습. 시작할 때는 조금 뜸을 들였지만, 이내 거침없이 입을 열고 있었다. 별다른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단순한 발언들, 모두 예상하고 쉬쉬하고 있었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에 불과했다. -북부에서…. 북부에서 쏟아지는 빛의 원인. -베니고어를 비롯한 대륙의 신들께서는…. 예언에 대한 발언,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와 교황청을 비롯한 여러 대형 길드들과 단체들의 조사 과정, 또 그 과정으로 얻어낸 결론까지.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 동안, 그녀는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한 이후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 -이에 예언의 날이 정확히 일주일이 남았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말했네요.” “응.” -……. “생각보다 더 조용한 반응이기도 하고요.” “예상은 하고 있었겠지만, 씁쓸하겠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거야.” -마지막으로, 대륙에 살아가는 모든 분께 감히 말씀 올리겠습니다. “…….” -준비하십시오. “…….” -여신이 세우고 여신의 아들이 가꾼 이 땅을 지킬 준비를 하십시오. “여신의 아들은 오빠 말하는 거죠?” “글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힘을 하나로 모은 인류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커다란 희생이 따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그 누구의 희생 없이는 쟁취할 수 없는 과업입니다.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희생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준비하라고 말한 것은 희생이 아닌 승리입니다. “…….” -제가 먼저 희생하겠습니다. 우리가 승리를 쟁취할 수 있도록 제가 희생하겠습니다. 그 누구보다 앞장서 여신의 아들이 가꾼 이 땅을 지킬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먼저 희생해 앞장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의 후대에 온전한 미래와 꿈을 전하기 위해 검과 방패를 들 것입니다. “…….” -준비하십시오 “…….” -싸움을 준비하십시오. 승리할 준비를 하십시오. 우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인류는 항상 위기를 맞아왔고 그렇게 이겨내 왔습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대는 이미 수많은 싸움을 통해 이 땅을 지켜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념의 싸움, 자연과의 싸움, 갈등과 종족 간의 싸움, 권력과의 싸움,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 이미 우리들의 몸에 새겨진 것들입니다. 우리의 선대들이 우리에게 전한 것은 패배하는 법이 아니라 승리하는 법입니다. “…….”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 모든 싸움에서 승리했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역사가 증명하듯 우리는 승리를 손안에 넣을 것입니다. “…….” -준비하십시오. “…….” -대륙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 -승리를. “기사 헤드라인이 기대되네.” 이지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682 회귀자 사용설명서 682화 준비하십시오(2) [신성교국의 지도자 오스칼, ‘승리를 준비하십시오.’ 단호한 연설에 뜨거운 반응. - 교국신문 김성경 기자.] [7일이 남은 시점에서 갑작스러운 발표, 대륙의 운명은 어디를 향해 흘러가는가. 카스가노 유노 공식입장표명 거부. - 실리아 주간일보 요네즈 켄지.] [바젤교황, 결국은 베니고어 님의 예언대로… 모두가 성전에 참가해 마땅한 승리를 누릴 것. 하지만 노을빛의 검사 옆에서 함께 싸운다는 용사에 대해서는 묵묵부답. - 린스패치 강유미 기자.] [대륙의 명운이 달린 이때, 파란 길드마스터는 가방 쇼핑 중? 한가로운 모습은 자신감의 표현인가 아니면 단순한 사치인가. 길드 자금을 횡령했다는 익명의 제보도……. - 린스패치 강유미 기자.] [개인 안전 대책 공지 -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대륙 곳곳에 이상 징후. 멸망의 정황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어.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이란 무엇인가. 그들의 전력과 대륙의 전력을 비교한다면 어떤가. - 칼럼니스트 박성경.] [천재검사와 연금술사 오랜 흥행 끝에 드디어 막바지로…… 외전 연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 - 린델 문화부 기자 강유미.] [아직도 공식 석상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이기영 위원장,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내놓은 영상 말고는 다른 대외활동이 전혀 없어… 건강 적신호 우려. - 교국일보 김성경 기자.] “진짜 난리 났네.” “…….” “난리 났잖아.” “어이! 김 양!” “…….” “김 양!” “네, 아저씨. 저 여기 있어요.” “훈련은 다 끝났고? 오늘도 손거울 보고 있네… 그거 너무 보면 눈 안 좋아진다니까 그러네.” “시력 나빠져도 마력 넣으면 멀리 있는 곳까지 볼 수 있어요, 아저씨. 애초에 나빠질 일도 없고요.” “거기 분위기 좀 어때.” “그냥… 좋지는 않아요. 그렇게 나쁘지도 않고요. 자극적인 기사에 비해서 댓글도 클린하고 그래요. 최 씨 아저씨는 오늘 일 끝났어요?” “뭐 그렇지. 사실 내가 할 일은 잔업 같은 것밖에 없어서. 다른 쪽도 분위기는 거진 마찬가지여.” “매일 보지만 진짜 의외네요. 아저씨가 자진해서 남을 줄은 몰랐는데.” “어차피 지원중대인데… 나보다는 김 양이 더 의외지. 내일 중앙으로 차출된다고 하지 않았었나? 우리 김 양도 진짜 성공했다니까.” “저 원래 스텟 높다고 했잖아요.” “그게 아니라 안 씨나 박 씨한테 불려가는 거 아니야? 나는 몰라도 김 양 정도면 파란에….” “쉿!” “큼….” “몰라요, 그럴 수도 있고요.” “정말로?” “아니요. 솔직히 파란에 가입하는 건 오바인데… 그래도 박 씨 아저씨가 있으니까 인맥으로 어떻게 비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는 있어요. 아저씨한테도 틈틈이 연락한다면서요. 저도 그렇거든요. 중앙 지원중대로 불려 가는지 아니면 수성전 병력으로 편입되는지도 몰라요. 제 수준이면 수성전 병력 편입은 불가능한데… 혹시 아나요. 뒤에서 화살이라도 나를지.” “병과도 안 쓰여 있고?” “중앙으로 차출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안 적혀 있었단 말이에요. 아마 알릴 수 없는 거겠죠. 궁금해서 메시지 남겼는데.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네요. 뭐, 별것 아닐 수도 있고… 아무튼 잘 지내세요. 최 씨 아저씨랑 저 사이에 이런 말 하는 게 낯부끄럽기는 하지만… 뭐 살아남으시고요.” “나야 무슨 걱정이 있겠어? 위험하면 뒤로 빼면 되는 거고… 쯧. 나보다는 김 양이랑 박 씨, 안 씨가 걱정이지. 따로 배웅은 안 할 테니까 잘 다녀와. 열심히 싸워주고….” “가는 건 내일이에요.” “그럼 내일 다시….” “굳이 나오실 필요 없어요. 일 끝나고 다시 만나게 되겠죠. 뭐, 박 씨 아저씨가 일 끝나면 맥주나 한잔하자고 했어요.” “나야 좋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빨을 보이는 최 씨 아저씨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여기서 또 만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생각보다 인연이 더 질긴 모양이다. 처음에는 꼴도 보기 싫었지만 계속 보다 보니 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저 아저씨는 잘 살아남으려나.’ 사실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다. 최 씨 아저씨의 말대로, 자신이 가장 치열한 격전지로 차출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박 씨 아저씨나 안 씨 아저씨 외에도 수많은 강자가 즐비한 본부가 가장 위험한 지역이 될 거라는 건 조금만 추리해 봐도 알 수 있다. 위치상으로도 커다란 빛을 바로 마주 보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기영 명예추기경, 아니, 이기영 위원장과 파란 길드마스터가 주둔하고 있다고 알려진 지역이지 않은가. 북부에 자리 잡은 모든 전진기지를 잇는 만큼 가장 강한 전력이 상시 대기하고 있는 지역이다. 기득권으로 분류할 수 있는 강자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자신들이 앞장서겠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당연하지만 댓글 여론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물론 파란 길드마스터의 갑작스러운 기행이 논란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예언의 날이 6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상황에 누가 그런 걸 신경 쓰겠는가. 80억에서 100억을 사용했다거나, 길드 자금까지 횡령했다거나 하는 익명의 제보자 이야기도 금방 사그라들었다. 살아남은 떡밥은 천연사가 끝나간다는 것 정도가 전부, 물론 아직 책을 읽어보지 않은 자신이 신경 쓸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마 천연사러버 님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소식이 아닐까. 최 씨 아저씨가 떠난 자리에서 시선을 다시 손거울로 올리자, 역시나 활성화된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목: 예언의 날, 이제 6일밖에 안 남음.] [린델마을주민: 생각보다 더 고요하고, 사람들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내가 다 당황스러운데… 옛날에 친구들이랑 농담 삼아 대륙이 망하기 일주일 전에 뭐 할 거냐. 나는 뭐 한다. 이런 생각 많이 했었는데 막상 터지니까 담담함. 뭣 때문에 이러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일상적인 생활 계속하게 되네. 동네도 걍 조용함. 뭐, 범죄 저지르는 사람도 없고, 미친 척하고 버킷리스트에 밑줄 긋는 인간들도 없음. 다들 괜찮은 거임?] [훍수저: 대륙이 안 망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인가 봄. 오스칼 님 말대로 질 거라는 가정 자체를 안 하는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대륙 망할 뻔한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잖아.] [흙수저: 공화국이랑 교국이랑 전쟁 났을 때도 그랬고, 라이오스나 악마소환 사건 때도 전부 다 그런 식이었잖음. 맨 처음에 튜토리얼 던전 열렸을 때도 대륙 주민들끼리는 말 많았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도 어떻게 잘 풀릴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나도 잘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고.] [린델마을주민: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것 같아서….] [아이디미정: 그럼 뭐 이리저리 불났다고 뛰어다니고, 종말론자들이나 미친놈들이 날뛰는 걸 바란 거임? 범죄자들이 신전에 불이라도 지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린델마을주민: 그런 건 아닌데….] [아이디미정: 오스칼이랑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가 정말로 일주일 전에 이 사실을 알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면 너무 멍청한 거임 ㅋㅋㅋㅋ 진짜.] [흙수저: ?] [아이디미정: 적어도 몇 달 전에는 이 사태를 파악하고 있을 거라고 봄. 민간인들이 최대한 받아들이기 편한 분위기를 조성해 놓고 터뜨린 거지. 공식발표만 어제 났을 뿐이지. 이미 모두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였잖음.] [흙수저: 그렇기는 한데.] [아이디미정: 여론은 물론이거니와 치안상태를 신경 안 썼을까. 종말이라고 떠들면서 미친 짓 하려는 놈들은 쥐도 새로 모르게 콰직 당했을걸? ㅋㅋㅋㅋㅋㅋㅋ 옆 동네 길드마스터 죽은 거 보면 모름? 부길드마스터가 직접 처리했다는 말을 누가 믿어? 지금 당장 전진기지나 주요전선만 봐. 바쁘게 뛰어다니는 놈들 하나 없음.] [린델마을주민: 그러면 지금 분위기가 좀 어떤데?] [아이디미정: 나는 전선에 없어서 모르지. 근데 그렇게 바쁘게 뛰어다니지 않는 이유가 뭐겠음? 벼락치기 하는 놈들이 아니라 이거야. 이미 준비는 옛날 옛적에 다 끝내놓고 시험 며칠 전에 컨디션 조절한다고 침대에 누워서 책장이나 넘기고 있는 수준이라니까. 병력배치도 이미 옛날 옛적에 끝냈고 보급은 물론이거니와 훈련도 끝남.] [린델마을주민: 뇌피셜은 좀….] [아이디미정: 킹리적 갓심이라고 불러주셈. 니들 입장에서 기분 좋을 만한 이야기는 이거임. 이미 대륙은 적이랑 싸울 준비를 마쳤음. 못 믿겠으면 천연사러버 불러보든가. 파란 직원이라며. 걔가 제일 잘 알고 있을걸.] ‘얘는 도대체 뭐야.’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야기였다. 조금 편안하다는 생각이야 하고 있었지만 이제야 아귀가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 억지스러운 부분이야 있지만 아이디미정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분위기가 깔려 있는 것 역시 사실, 그 무엇보다 현장이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크게 나쁜 느낌은…. ‘아니지.’ 준비를 다 끝내놓고 있었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박수를 칠 만한 상황이지 않은가. 문제가 되는 부분은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가 시기를 숨겼다는 것밖에 없다. 테이블에 걸터앉아 손가락을 올리자 곧바로 새로운 글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천연사러버: 그럼 준비를 하지, 안 하겠음? 예언이야 이미 몇 년 전부터 있었던 이야기인데. 괜한 음모론 퍼뜨리지 마.] [아이디미정: 내가 뭐 이상한 이야기 했나. 준비 잘했다고 한 것뿐인데 뭐… 그렇게까지 반응해? 타이밍이 공교롭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 봄? ㅋㅋㅋㅋㅋ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모르는 척하지 말지.] [천연사러버: 현장에 가본 적도 없고 손거울이나 두드리고 있는 사람이 뭘 알겠어요?] [아이디미정: 뜨끔하니까 존댓말 쓰면서 선 긋기 나오시죠?] [아이디미정: 교국 지도자 오스칼은 준비하라고 말했지만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다니까. 그러니까 남은 기간은 그냥 개인적인 준비 하라는 걸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유언장을 쓰거나 가족들이랑 통화 한번 하라거나. 뭐 그런 거지.] [아이디미정: 지금쯤 파란 길드도 업진살이나 뜯으면서 하하호호 마지막 회식이라도 하고 있을걸. 천연사러버만 봐도 손거울 두드릴 시간 있잖음. 지금 파란 상태도 그래. 거기도 이미 고일 대로 고여 가지고….] [린델마을주민: 천연사러버 님, 진짜예요? 준비 다 끝난 거 맞아요?] [천연사러버: 아니에요. 세세하게 잡을 부분이 얼마나 많은데. 자세한 건 기밀이라서 말씀 못 드리는데 아이디미정 말 믿지 마세요. 안 그래도 심정 복잡해 죽겠는데… 뭐 아는 척이야?] [역천사홍보위원장: 아이디미정 님 말이 맞을 걸요? 제가 보증할게요.] [천연사러버: 님이 뭐라고 보증을 해요?] [역천사홍보위원장: 확실히 맞을 거예요.] [천연사러버: 어….] [흙수저: 천연사러버 님 차단 풀었음?] [천연사러버: 아니요. 안 풀었는데… 제가 왜 차단을 풀어요?] [역천사홍보위원장: 아직 퍼즐이 몇 조각 남아 있기는 하지만 준비는 끝났다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요.] [천연사러버 님이 역천사홍보위원장 님을 차단하셨습니다.] [역천사홍보위원장은 존재하지 않는 아이디입니다.] “어….” [천연사러버 님이 역천사홍보위원장 님을 차단하셨습니다.] [역천사홍보위원장은 존재하지 않는 아이디입니다.] “뭐야?” 순식간에 위로 올라가는 채팅방이 눈에 보인다. 다들 물음표만 찍어내고 있을 뿐 다른 말이 없는 상황, 계속해서 손거울을 바라보고 있던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는 오류 난 적 없었는데.’ 베니고어 넷은 지구의 인터넷과는 그 원리부터가 다르다. 애초에 서버 오류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알려진 거 아니었어?” [역천사홍보위원장: 물론 해결되지 않은 문제야 있죠. 벽을 넘어야 하는 사람이 넘지 못하고 있고… 뭐, 이건 해결될 게 뻔한데….] [천연사러버: 지금 서버 이상해요? 베니고어 넷 왜 이래?] [역천사홍보위원장: 우리 불쌍한 회색 아이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걸리네요.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대륙의 수호자들을 포섭했다는 건 박수를 드릴 만하니… 아마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우리 이기영 님이 그리고 있는 그림에 문제는 없을 거라고 보는데… 변수야 많지만… 이겨내시지 않을까요.] [린델마을주민: ㅎㄷㄷ 전쟁 터지면 서버 닫힌다고 누가 그랬어요? 뭐예요? 지금 뭐예요?] [천연사러버: 차단 안 돼요. 존재하지 않는 아이디라고 떠요.] [아이디미정: 너 누구임?] [역천사홍보위원장: 그래도 가장 궁금한 건 김현성이 어떤 선택을 할지에요. 뭐가 어찌 됐든 나한테는 나쁘지 않은 내기지만 이기영 님이 주사위를 던진 것 역시 상당히 의외고… 역시 인간은 재미있다는 생각을 해버렸지 뭐예요.] [천연사러버: 너, 누구야. 당신 누구인지 지금 당장 이야기 안 하면.] [역천사홍보위원장: 뭐가 어찌 됐든 간에 당신들한테는 좋은 이야기일 겁니다. 외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준비가 끝났으니까요.] [아이디미정: 지금 역천사홍보위원장 아이디 검색해 보고 있는데 아무것도 안뜸;;; X나 무서워. 쟤 뭐야. 누구야.] [린델마을주민: 역천사홍보위원장 님이 썼던 글들도 사라지고 있는데요? 회원정보는 아예 없는 것 같고 가입은 어떻게 함? 추적 안 돼요. 아무것도 안 떠요, 진짜.] [흙수저: 저 그냥 나갈게요. 무서워요.] [역천사홍보위원장: 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간에… 저는 흥미롭게 지켜볼 수밖에 없겠네요.] “…….” [역천사홍보위원장: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여러분] “저건 누구야….” [역천사홍보위원장 님이 퇴장하셨습니다.] “누구냐고….” # 683 회귀자 사용설명서 683화 준비하십시오(3) “덕구 늦는다고?” “훈, 훈련 끝나고 오신다는 것 같은데요? 듣, 듣기로는 모자란 인원을 보충한다고… 방금 도착했데요.” ‘이 새끼는 지가 먼저 다 같이 모이자고 했으면서.’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네. 하얀이는 어때? 괜찮겠어?” “네? 아… 네, 괜찮아요, 네.” 정하얀이 자신은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다. 정하얀의 상태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정신상태 자체는 조금은 불안정하다고 진단했지만 그나마 이쪽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 때문인지 궁지에 몰린 반응을 보여주지는 않고 있었다. 물론 그것 역시 내가 함께 있을 때의 이야기다. 온종일 함께 있던 한소라의 빈자리가 사라질 리가 없지 않은가. 본인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별로 상관없는 척, 이제 한소라는 절교했으니 안중에도 없는 척을 하기는 했지만 지금도 굉장히 마음을 굳게 먹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내가 다 불편할 것 같은데.’ 솔직히 조금 불편하기는 하다. 길드원들이 모두 모이는 건 좋았지만 알다시피 정하얀과 한소라는 절교한 상태였으니까. 저번에 있었던 큰 싸움 이후로 둘은 완전히 갈라선 상태였다. 물론 한소라가 간혹 정하얀의 상태를 묻는 메시지를 보내온다든가, 정하얀이 한소라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한다든가 하는 일은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냉전 상태라는 거다. 사이좋은 그룹이 함께 자리를 가지는 장소에서 두 명이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내가 다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하얀도 꽤나 긴장한 듯한 모양새. “소, 소라도 온대요?” “당연히 오겠지. 소라도 같은 길드원인데. 이럴 게 아니라 이번 기회에 제대로 대화라도 해보는 게 어때?” “안, 안, 안 할 거예요.” “…….” “하, 하나도 신경 안 쓰여요. 아무렇지도 않고… 어차피 이제는 모, 모르는 사람이니까. 정말로 신경 안 쓰여요.” ‘아니야. 너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 최소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보인다. 박미진과 얼마나 친해졌는지도 정하얀의 주요 관심사 중에 하나겠지. 이런 상태라면 오늘 길드 모임이 끝난 이후에 터뜨려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정하얀과 함께 들어가려고 하던 찰나였다. “부길드마스터.”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온 것. 곧바로 고개를 돌리자 조금 애매한 표정의 인형이 시야에 비쳤다. 정하얀 역시 함께 뒤를 돌아보자, 슬쩍 고개를 꾸벅인다. “김미영 팀장님. 오랜만이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네, 덕분에… 그보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 “아… 바쁘지 않으시면 자리가 끝난 이후에 괜찮을까요?” “중요한 이야기라서… 이런 말씀 드리기도 굉장히 죄송하지만 아주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면….” “네, 뭐, 그렇다면….” 슬쩍 정하얀을 바라봤다. 본인은 괜찮다는 듯, 어른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가 괜찮지 않다. 혹시나 내가 없는데, 정하얀과 한소라가 마주치는 상황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약속 시각보다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저 안에 한소라가 혼자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지 신경 쓰였다. “안에는….” “길드마스터가 일찍부터 기다리고 계셨어요.” “아, 네. 그럼 뭐, 잠깐 가시죠. 하얀이는 먼저 들어가 있어. 얼마 안 걸릴 거야.” “네… 네.” “그래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생각하시는 것처럼 큰 문제는 아니지만, 꼭 알고 있으셔야 할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오랜만에 가지시는 휴가인데….” “아니요. 급한 일인데 어쩔 수 없죠.”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저… 잠깐.” 조금 긴장한 것 같은 모습이다. 정말로 무슨 일이라도 터진 건 아닌지 걱정됐지만… 뜻밖에도 눈에 보인 것은 베니고어 넷의 채팅 로그였다. 혹시나 얘가 일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나 싶은 생각으로 로그를 읽어 내려가자, 그녀가 어째서 나를 따로 불렀는지 이해가 됐다. ‘뭐야, 이거.’ 오히려 보고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아마 직접 이 방에 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다 깜짝 놀라지 않았을까. 기겁하고 조사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물론 이런 걸 보고서로 올리는 입장에서는 베니고어 넷 똥글에 낚여 반응하는 멍청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할 만도 하지만…. ‘그래서 긴장한 거구나.’ 세세한 변수 하나라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불안함을 무릅쓰고 보고를 올린 것 이리라. 아마 그녀의 이목을 첫 번째로 잡아끈 것은 회색 아이라는 단어일 터. 라파엘이 생명 유지 장치로 간신히 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대륙의 수호자를 운운한 것도 그렇지.’ “단순한 오류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요. 혹시나 싶어 베니고어 넷에 직접 문의해 봤지만, 서버 내에 없는 아이디라고 뜨는 것은 물론 추적망에 잡히지도 않고, 정황상 외부에서 서버를 뚫고 들어온 게 확실한데, 어디에도 흔적 같은 건 없었어요.” “막스를 통해서 확인해 본 거예요?” “네.” “이건 누가 발견한 겁니까?” “익명으로 제보가 들어와서… 찾아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원하신다면….” “아니요. 뭐,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니… 팀장님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 문제 같네요. 현 시간부로 이 보고서는 폐기해 주시고, 베니고어 넷에 있는 기록도 전부 치워 버리세요. 같은 방에 있던 인원들이랑 이거 보고서 올린 직원분도 입단속 시켜주시고요.” “네.” “그 정도로만 처리해 주시면 됩니다. 내일 안으로만 처리하면 되니, 팀장님도 오늘은 조금 쉬시는 게 좋겠네요.” “아니요. 명령하신 일은 처리한 이후에 합류할게요.” “네, 그게 편하시다면 그렇게 해주시면 되고요. 그럼 저는 잠깐.” “네.” “…….” “…….” 별것 아니라는 소식에 안심됐는지 김미영 팀장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괜찮다는 듯 미소를 보내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보고받은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거….’ “…….” ‘이거 루시퍼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가장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거의 확실해….’ 물론 다른 이들일 확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게 인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베니고어 넷을 뚫고 들어오는 게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막스가 모르게 일을 처리했다면 더욱더 그렇다. 일단 인간은 논외, 위쪽 두 진영 중에 한쪽 진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빛 쪽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용의 선상에 선 것은 악마 놈들 쪽, 그중에서도 빛 쪽의 눈을 피해 이런 장난칠 수 있는 악마를 꼽아보라면 당연히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어디에서 뭐 하고 있나 했는데.’ 이런 곳에서 놀고 있었어? 본인 취미생활 열심히 즐기기도 하고, 사고 쳐놓고 지켜보기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하니, 위화감이 들지는 않지만…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한 번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단순한 유희일 수도 있다. 솔직히 그게 확률이 높다.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고, 본인 나름대로 베니고어 넷에 떡밥을 투척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주인공이 루시퍼라고 생각하니, 괜스레 기분이 묘해지기 시작했다. 가면쓰레기 진청이 나와 보드게임을 했을 당시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딴 거에 의미부여 안 해도 되는데, 시바. 그냥 지 놀고 싶어서 논 거라고.’ 심지어 평가도 아주 좋지 않은가. 정하얀이 벽을 뛰어넘는 건 이미 예정된 이야기고, 이기영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에는 이상이 없단다. ‘신경 쓰지 말자. 그래.’ “아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시바, 그렇게 뒤통수를 맞았는데.” 지난 로그에서 이상이 없었다는 걸 보면 이번에는 대놓고 본인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다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잘되던 차단이 풀려 버리기도 했고, 심지어 아이디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대놓고 ‘이것 좀 봐줘’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모르긴 몰라도 이 역천사홍보위원장은 내가 이걸 봐주기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지만, 특히나 내 시선을 잡아끄는 부분은 여기. [그래도 가장 궁금한 건 김현성이 어떤 선택을 할지예요. 뭐가 어찌 됐든 나한테는 나쁘지 않은 내기지만 이기영 님이 주사위를 던진 것 역시 상당히 의외고….]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김현성이 어떤 선택을 할지?’ 빛 아니면 어둠, 대륙 아니면 빛기영인가. ‘루시퍼 본인한테는 나쁘지 않은 내기?’ 그냥 상투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그녀와 나는 내기를 한 적이 없다. 결과적으로 나는 주사위를 던진 적도 없다. “대륙에 올인하고 있다는 걸 주사위를 던졌다고 표현한 거야? 아니면 현성이를 유지시키는 걸 선택했다는 걸 도박했다고 표현한 거야?” 꼭 그녀와 내기가 있었고 내가 주사위를 던졌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정하얀과 한소라의 관계처럼 나와 루시퍼의 우정도 냉전 상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상황이다. 둠현성 사건 이후로 나는 따로 루시퍼와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그녀가 먼저 내게 접근한 적도 없고, 내가 그녀에게 먼저 다가선 적도 없다. 이 미친 까마귀가 어째서 갑작스레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 시바. 이거 그냥 별것 아닌 거에 크게 낚인 거 아니야?’ 수없이 가면쓰레기에게 뒤통수를 맞아온 김현성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한번 뒤통수를 맞았더니 모든 게 의심이 간다. ‘PTSD 생길 만하네.’ 이제야 김현성의 의심병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간에….] ‘무슨 결과를 이야기하는 거지?’ 뭘 이야기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 생각해 보면 대륙의 명운이겠지만, 그녀가 전에 던진 김현성과 내기라는 단어가 신경 쓰여서 참을 수가 없다. “시바.” ‘위화감이 있어.’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나 자신에게 위화감이 있다. 이렇게 예를 드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마치 안개가 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일반적인 단어를,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PTSD가 생겼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원인은 분명히 나에게 있다. 분명히 나와 루시퍼가 내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지금까지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걸 보니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조금 더 파볼까? 무슨 일인지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 하지 마.’ 뭐? ‘하지 마.’ 잠깐 머리를 붙잡고 있었을 때였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아직 기억 상실 떡밥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것은 순식간. 이제는 질리는 떡밥이 될 것 같아 머리를 손에서 떼어냈을 때, 조혜진이 슬픈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거….” “뭐… 뭐예요? 지금 아픈 거 아닙니다.” “이거 받으세요.” “혜진 씨? 뭡니까, 이건.” ‘뭐야 너, 표정이 왜 그렇게 슬퍼. 눈에 눈물 고이고 있어, 시바.’ “저도 모릅니다.” “근데 이걸 왜.” “저도 몰라요. 부길드마스터 본인이 직접 전해준 물건입니다.” “제가 언제요.”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었습니다.” “뭔 소리예요? 약 먹었어, 혜진아?”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부길드마스터가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었습니다.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말고 가지고 있으라고요. 머리를 붙잡는 모습을 보거나 초조해 보이면 꼭 전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조혜진이 내민 것은 편지 한 장. 반신반의하며 편지를 뜯어내자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익숙한 필체. 모를 리가 없다. 누가 봐도 나 자신의 필체이지 않은가. -기억하려고 하지 마. 그대로만 가면 이기는 내기니까. 여전히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개시바….” 나는 루시퍼와 다시 한번 만났고. “하….” 스스로 그 기억을 지웠다. # 684 회귀자 사용설명서 684화 기억을 지웠다(1) ‘뭐 이딴 거지 같은 상황이 다 있어.’ 일단 내가 가만히 있어야 유리한 상황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이 메시지를 판단하기 이전에, 루시퍼가 힌트를 줬다는 점에서 수상한 냄새가 나고 있었으니까. 내기를 건 당사자가 뭔가 눈치채 주기를 바라고 있었고, 나 자신은 가만히 있으면 네가 이기는 게임이라 못을 박았으니, 어느 쪽에 손을 들어야 할지는 명백한 이야기다. 그 미친 까마귀는 우리 현성이를 둠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모든 상황에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의 한가운데로 들어오게 된 사람의 기분이 이러할까.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장 며칠 후에 들이닥칠 놈들의 문제로만 머리가 꽉 차 있었던 시점이다. 다른 문제를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고, 사실 길드원들이나 주변을 챙기는 게 고작이었다. ‘이딴 짓을 할 시간이 어디에 있었다는 건데.’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내 머리에 이상은 없다. 하루하루가 완벽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구멍이 뚫린 듯한 느낌이 있을 리는 없다. 기억을 지운 시점을 둠현성 사태부터 지금 사이로 봐야 하는 건지 의심이 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정황상 나와 루시퍼가 내기한 것은 북쪽에서 빛이 떨어진 시점이라고 판단되기는 했지만…. ‘그 전일 수도 있어.’ 어쩌면 훨씬 전일 수도 있다. 기억에 없으니, 일단은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보는 게 옳다. 이런 상상은 하기 싫지만, 루시퍼와 내가 처음 만난 게 훨씬 더 앞이었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뭘 어떻게 해. 그 까마귀 연기력이 보통이 아닌 거지.’ 가능성은 적었지만 여러 가지 변수를 생각해 봄이 옳지 않은가. 까마귀도 까마귀지만 지력 90을 넘은 시점에 얻은 특성도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다시 기억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강한 암시를 줬다는 것 자체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아마 다시 떠올리기 위해서는 계기나 조건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 아무리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붙잡고 있게 된다. 속 편하게 잘될 거라고 생각하며 룰루랄라 조용히 버티고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휩쓸리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불안감이 증폭된다. 이지혜가 컨트롤 프릭이라고 말했던 게 틀리지는 않는 모양, 아니, 솔직히 누나 말이 맞다. ‘시바… 그래, 나 컨트롤 프릭 맞는 것 같아.’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다, 시바. 내가 스스로 기억을 지우고 조혜진에게 안배 아닌 안배를 해놓은 것 역시 그런 연유겠지. 분명히 나는 내가 기억을 찾으려고 발버둥 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테니까.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했을 게 뻔했다. 그렇기에 충고의 의미로 이 쪽지를 남긴 것이 분명하리라. ‘아니지, 시바.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안 되지. 이게 함정일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아?’ 내가 비밀을 캐낼 것을 예상했다면 분명히 다른 안배를 준비해 놨을 게 뻔하지 않은가. 분명히 이기영 이 개 같은 놈이 중간중간에 개수작을 부려놨을 게 당연하다는 거다. 장담하건대 함정들도 몇 가지 뿌려 놨을 거란 사실에 모든 걸 걸 수 있다. 정말로 중요한 보물을 숨겨놨다는 것처럼 보물지도를 이쪽으로 슬쩍 넘긴 후에 내가 그 보물지도에 집착하기를 기다릴 수도 있고, 이걸 미끼로 다른 곳으로 꿰어낼 생각일지도 모른다. 정리하면 조혜진에게 쪽지를 주라고 말한 것 자체가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 이건 무조건 함정이다, 무조건. ‘조혜진부터 시작하기를 바라고 있는 거지. 그렇지? 여기서부터 시작하기를 바라고 있는 거잖아. 내 말 맞잖아.’ “진짜 씨발 놈이네… 이거.” 확실히 함정을 파놓는 것보다 파헤치는 게 더 어렵다. 조금 다른 예지만 선동하는 것보다 해명하는 게 더 어려운 거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괜스럽게 입술을 꽉 깨물자, 조혜진이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이미 눈에는 눈물이 한가득했다. 가끔 기억을 잃는 것으로 모자라 정말 모든 걸 잊어버리는 이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얼굴에는 초조함이 감돌고 있었고, 당연하지만 말을 잘 잇지도 못하는 게 보인다. “부길드마스터….” “이거 언제 받았어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거지만….” “네.” “부길드마스터께서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빨리 말… 아니, 아니다. 말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시기는 의미가 없을 것 같으니까.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네요. 어차피 뻔한데….” 기억상실 떡밥이 등장한 시점부터 지금까지라고만 생각하면 된다. 어차피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언질해 놨을 테니까. 내가 미친놈처럼 닦달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계속해서 초조한 모습을 보이면서 조혜진을 압박한다는 건, 이미 유통기한이 끝난 기억상실 떡밥의 재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혜진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조혜진이 둠현성에게 알린다면 분위기 갑자기 둠 될 수도 있고…. 최대한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옳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니고, 별것 아닌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여기서부터 파고든다는 것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이 깔아놓은 판 안에서 움직이는 것과 진배없다. 클리어할 수 없는 미궁을 굳이 입구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다. 나 스스로 기억을 지웠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답은 분명히 숨겨져 있을 것이다. 길을 잃을 수 있는 숲에 들어가는 건, 주변을 전부 뒤지고 난 이후여도 늦지 않는다. “…….” “…….” “아직 전부 다 잊어버린 건 아니네요. 혜진 씨랑 만났던 기억에만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다른 건 전부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때 제가 조금 피곤했던 모양이네요. 쓸데없이 찾아가 이런 쪽지까지 전해줄 정도면, 정신적으로 몰렸었나 봅니다. 스트레스도 심했기 때문에 딱 그 날 기억에만 문제가 있었던 것 같고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쪽지 안에 있는 내용은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 “머리를 붙잡고 있었던 것도 다른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 그런 거고요.” “…….” ‘제기랄, 시바, 시바….’ 당연하지만 크게 믿어주지는 않는 것 같은 눈치다. 오히려 의심의 눈초리가 매섭게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김현성에게 알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이 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단 들어갑시다.” “피곤하신 거라면 오늘은 그냥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길드마스터에게는 잘 말씀드려 볼 테니….” “저번에 그 사달이 났는데 뭘 말을 해요? 그리고 현성 씨도 대충은 알고 있어요. 혹시 불안해하실까 봐 하는 소린데… 이미 노을로 당사자랑 합의 봤으니까. 현성 씨는 신경 쓰지 마요. 아, 그리고 길드원들이랑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게 저한테는 쉬는 시간입니다. 스트레스 풀어주는 느낌으로요. 정 걱정이면 하루 정도 같이 어울려 주세요. 그게 스트레스 푸는 데 도움될 것 같은데… 이틀 후에 시간 돼요?” 이틀이면 작은 단서 하나 정도는 건질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건지지 못한다면 미궁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되는 거고. “내일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야. 내일은 나도 알아볼 게 많은데.’ “왜요. 이틀 후에는 뭐 약속이라도 있어요?” “약속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조금 더 확실히 현재 상태가 어떤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뭐야, 너 근데 왜 찔리는 표정이야. 약속 있어?’ “약속 있어요?” “약속이 있기는 합니다. 지혜 씨랑….” “…….” “…….” ‘뭐야, 시바. 너네 왜 자꾸 어울려.’ “놀러 가는 게 아닙니다. 현장 근처의 지하 경매장으로 사용하던 곳을 대피소 겸 벙커로 사용한다는 말이 있어서 점검차 잠깐 들리는 거니까요. 전해 듣기로는 확인할 사항이 생각보다 많아서….” ‘그거 거짓말이야. 지하 대피소 필요 없어.’ “또 듣기로는 지하 경매장에 거래되던 몬스터 하나가 탈출했다고 하더군요. 등급이 높지 않은 터라 위험한 상황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신세 진 것도 많으니 이번에 갚는다는 느낌으로….” ‘불법거래 몬스터는 개뿔….’ 어차피 방주가 있는데 지하 대피소가 뭐가 필요하겠는가. “시간이 얼마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조금 길어질 수도 있지만….” ‘그리고 시바… 지하 경매장… 그거 우리 추억인데….’ “저는 이틀 후가 좋을 것 같은데… 이틀 후로 해요… 어떻게….” “…….”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 이지혜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우리 혜진이가 아픈 사람을 두고 갈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다. 예상했던 대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오랜만에 체스나 두면서 밀린 이야기 좀 나눠요. 지혜 씨한테는 제가 말 잘해놓을 테니까요. 시간이 나면 벙커도 저랑 같이 둘러보러 가면 되겠네요. 괜찮죠?” “아니요. 부길드마스터는 거기까지 갈 필요 없습니다. 다음 날 가면 되는 거고요. 큰일을 앞두고 머리를 식히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게 가장 좋지 않겠습니까. 지혜 씨에게는 제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뭐,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지혜 씨랑 친하게 지내는 건 좋은데 너무 가까이는 지내지 마요.” “네?” “이런 말까지는 안 드리려고 했는데, 그 사람 조금 계산적인 사람입니다.” “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드릴 테니까. 그렇게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그럼 뭐 다른 일이 있으면 이틀 후에 만나는 거로 하죠. 체스나 두면서 와인이나 마셔요.” “아… 네.” “조금 늦었네요. 빨리 가시죠.” “네.” 그렇게 조혜진과 천천히 모임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 꺼림칙한 얼굴이 보이기는 한다. 내가 쪽지나 다른 문제에 관해 물어오지 않는 게 의아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 이틀 후에 제대로 물어보지 않을까 같은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설명하기에는 내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받아들이고 있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받아들일 리가 없지.’ 당장 패닉이 오지 않아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이 건 말고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일단은 자리를 옮기고 있었지만, 솔직히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기대하던 자리였건만 오히려 혼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처음부터 천천히 되짚어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였다. “거, 아직도 안 들어가고 뭐 하고 있었던 거요?” 뒤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 익숙한 말투고 익숙한 목소리다.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자 시야에 비친 것은 커다란 몸을 한 돼지. 오랜만에 만나자고 주장했던 본인의 말이 받아들여진 게 기쁜지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그런 주제에 지금에서야 나타났다는 것에 괜스럽게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 새끼 진짜.’ 물론 나도 늦기는 했지만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돼지와 자신 과 싸우고 있는 나는 분명히 입장차이가 존재한다. 여전한 모습, 장담하건대 저 새끼는 시간이 지나도 나를 빡치게 하는 포지션에 자리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너… 이….” “…….” “너….” “거, 내가 좀 많이 늦은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구만. 이제 시작한 거요?” “너 이 새끼….” “…….” “…….” “어…?” “…….” “뭐야… 시바… 뭐야, 시발… 시바 뭔데….” “부길드마스터?” “잠깐… 잠깐만… 잠깐만….” “…….” “…….” “…….” “형님… 우는 거요?” # 685 회귀자 사용설명서 685화 기억을 지웠다(2) “갑자기 왜….” ‘나도 몰라, 시바. 모르겠다고, 시바.’ “괜찮으십니까? 혹시 두통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박덕구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옆에서는 조혜진이 난리 법석 호들갑을 떨고 있다. 나조차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으니, 박덕구와 조혜진이야 오죽할까.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저도 모르게 꾸역꾸역 튀어나오는 눈물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감정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는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는 것은 물론, 서서히 목소리도 제대로 들려오지 않는다. 내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상황은 당황을 넘어 무섭기까지 하다. “뭐, 뭐 어디 아픈 거요? 어디 아픈 데 있는 거요? 두통은 또 무슨 소리요? 뭐, 병이라도 걸린 거요?” “지금 희영 씨나 엘레나 님을 불러오겠… 아니, 안에 있을 테니.” ‘아냐, 시바. 그러지 마. 그런 것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다. 끄윽 끄윽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갈까 억지로 입술을 깨물고 있지만 여전히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박덕구가 허겁지겁 뛰어와 어깨를 잡고 얼굴을 확인하는 중에도 쏟아지는 눈물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잠깐, 눈에 뭐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는 건 알지만 이런 개소리를 지껄일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들어가기는 뭐가 들어갔다는 거요? 아니, 왜 이러는지 이야기를 해야지.” ‘형님이… 하면….’ “…….” “…….”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누님, 우리 형님 괜찮은 거요? 갑자기 왜….” ‘허풍이 아니라… 진짜라니까.’ “머리, 머리가 아픈 거요? 아니, 왜 또 나만 모르고 있는 거냐니까.” ‘형님은 내가 살릴 거요. 거, 기억은 나는 거요?’ “우리 형님,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냐, 이 말이오. 멀쩡하던 양반이 갑자기 왜 이래?” ‘형님이 내 목숨을 얼마나 많이 구해줬는지, 기억하냔 말이오.’ “아, 아니면 뭐 무슨 일 있었소? 힘든 일이라도 있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소. 형님이 뭐라든 간에 형님이 나를 구한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육체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요. 못난 동생 때문에 몇 번이나 칼을 대신 맞아줘서 고마웠소.’ “거… 우, 울지 마쇼. 왜 자꾸 눈물… 형님이 우니까, 나도….” ‘던전에 갔을 때도 변호해 줘서 고마웠고,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마웠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나는 형님한테 구해지기만 한 것 같다니까. 정말로 그런 기억밖에는 없소. 신세진 것밖에 없다, 이 말이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 차례요.’ “아니… 아니, 좀 울지 말라니까. 왜 그렇게 자꾸… 거, 무슨 말이라도 해보쇼.” ‘내가 형님은 살릴 거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소. 잊지 마쇼, 형님.’ “진정 좀 하라니까.” ‘형님이 할 수 있으면… 나는 더 잘할 수 있소.’ “진정, 진정 좀… 괜찮을 거요.” ‘형님이 할 수 있는 건 나는 더… 잘할 수 있소.’ “다 잘될 거라니까. 그러니까… 뭐, 뭣 때문에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형님이… 할 수 있으면… 나는 더….’ “…….” ‘더… 잘할 수 있소….’ “…….” ‘형님이… 할 수 있으면….’ “…….” ‘할 수… 있… 소….’ “…….” ‘있… 소….’ “이….” ‘…….’ “이 미친 돼지 새끼. 이 개 같은 놈. 쓸모도 없는 새끼.” “…….” “갑자기 그러면 좀… 좀 상처받는데….” “떨어져, 돼지 새끼야.” “…….” “땀 냄새나니까 떨어지라고, 빨리.” “시, 시간이 없어서 급하게 오느라… 그리고…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갑자기 왜 그런 거요? 아니, 무슨….”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 “…….” “…….” “정말로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리고 빨리 떨어지라고.” 그제야 슬쩍 눈치를 보면서 녀석이 한 발자국 멀어졌다. 계속해서 목소리가 떨려왔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안정되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1회 차 죽어가던 박덕구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당연하지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역시 들려오지 않았다. ‘뭐 이딴 게 다 있어.’ 저도 모르게 1회 차의 그 장면을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시 한번 눈물이 일발장전 되는 느낌에 황급히 머리를 털자, 아직도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박덕구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돼지 새끼.’ 이 새끼까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에 눈물이 고인 모습이 당혹스럽다. 나보다 본인이 더 패닉이 온 모양새, 조혜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했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게 보였다. 잠깐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숨을 내쉬자, 방금의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게 느껴졌다. 조금 아슬아슬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커다란 문제는 없다. 아마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또 다른 문제가 머릿속을 꽉 채웠기 때문이 아닐까. ‘뭐지? 시바, 뭐지? 갑자기 그건 왜 보였고, 애초에 왜 눈물이 난 거지?’ 상상하기는 싫었지만 1차원적으로 생각하자,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가정이다. 확률이 희박하기도 하고,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가정이었다. 당연하지만 증거도 없다. 내 가설을 뒷받침해 주는 이해관계가 있을 뿐이다. 1회 차의 기억. 검은색 세계의 기억을 되찾은 것이 아닐까. 기억이라기보다는 당시의 감정들이 모조리 이쪽에 쏟아진 게 아닐까. ‘뭐 이런 개 같은 상황이 다 있냐고.’ 어떻게 되찾았는지는 오리무중이었지만, 루시퍼가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면 영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1회 차의 기억을 되찾은 것과 루시퍼와 내가 한 내기가 연관이 있고,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스스로 기억을 삭제했다고 가정한다면 나름대로 들어맞는다. 완벽하게 퍼즐이 맞춰진 것은 아니지만, 퍼즐 위에 그려진 그림은 이어진다고 볼 수 있으리라. 시기상으로도 맞아떨어진다. 이전에 박덕구를 봤을 때는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박덕구를 만나 상륙작전에 대해 이빨을 털었을 때와 오늘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질 만도 하다. 물론 이쪽이 단서를 찾았기 때문에 억눌러 왔던 게 터졌다고 가정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가정은 전자다. 솔직히 1회 차의 기억을 깨달았다고 해서 내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기가 김현성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면…. ‘변수가 존재하겠지.’ 김현성을 사랑스러운 회귀자라고 부르는 나와는 다르게, 1회 차의 이기영은 김현성을 증오한 것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만약 내가 1회 차의 기억을 받아들인 게 맞다면 내가 어떤 식으로든 김현성에게 악영향을 끼칠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 악영향은 곧 루시퍼와의 내기에서 진다는 걸 의미할 것이고, 결국 이기영은 애써 받아들인 1회 차의 기억을 지웠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애초에 1회 차를 받아들이는 게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고…. ‘안에 남아 있기는 하다는 건가?’ 개인적으로는 이 가설이 들어맞았으면 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내 안에 있던 1회 차 이기영의 자아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는 것보다는 훨씬 더 희망적이었으니까. 한 몸을 두고 두 개의 자아가 서로 싸우며, ‘내 몸에서 나가! 이 가면쓰레기 새끼야!’라고 외치는 클리셰는 주작으로는 즐겁지만 실제로는 전혀 즐겁지 않다. 1기영과 2기영이 같은 사람인지에 대한 개똥철학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싶지는 않다는 거다. ‘언젠가는 네 거짓에 대한 대가를 꼭 치를 거다, 역겨운 쓰레기 자식. 내 말을 잘 기억해. 너는 분명히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그렇게 말했던 가면쓰레기 진청의 명대사가 괜스레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문제 될 여지는 있겠는데….’ 이 건을 계속해서 조사해야 한다는 확신은 있었지만, 그 결과를 책임질 준비는 되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내 가설이 맞다면… 모든 일이 틀어지는 것은 이미 확정된 이야기다.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이 갑자기 천하의 개쌍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같이 망하자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어서 근질근질해지지 않을까. 내 몸에 깃든 가면쓰레기의 영혼이 김현성의 뒤통수를 쌔려 버리라고 외칠 거라 단언할 수 있다. “또, 또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 거요? 정말 문제 있는 거 아니요?” 솔직히 지금도 불안하다. 커다란 감정이 나를 뒤흔들고 있지 않은가. 박덕구를 봤을 때 일어났던 일이, 김현성을 봤을 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지금 이 모임 장소 안으로 들어가는 게 정답인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다. “역시 오늘은 그냥 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진료부터 받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 진료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확인해 보는 게 맞습니다. 오늘 정말 이상하다는 거 알고는 계십니까?” “…….”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부길드마스터… 지금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 이 말입니다.” “거, 진료는 무슨 이야기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아니, 왜 이렇게 나만 모르는 일이 많아? 제대로 말을 해줘야 내가 뭐라도 하지.” ‘넌 시바,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야.’ “그럴 필요 없습니다, 혜진 씨. 그리고 덕구 너는 좀 조용히 좀 있어. 별일 아니니까. 잠깐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 그런 거지…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들어갑시다. 사람들 기다리겠네.” “진짜 별일 아닌 거요?” “베니고어 님의 이름을 걸고 말하건대 정말로 별거 아니야. 빨리 들어가기나 해. 혹시나 해서 말하는 데 방금 문제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혜진 씨도 마찬가집니다. 분위기 개판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알리더라도 오늘 이후에 알려요. 그냥 묻어두는 게 가장 베스트고요. 뭐 해요, 안 들어갑니까?” “…….” “…….” “들어가라고요.” 그제야 둘은 서로 눈빛을 교환한 후에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당연하지만 곧바로 내부가 보였다. 전쟁을 앞둔 시점에서의 모임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다. 한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시작하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직접 확인하는 게 맞다는 생각에 호기롭게 문을 열기는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게 된다. 정말로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하나도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정하얀. “여, 여기예요, 오빠.” 과장된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자신이 있는 쪽으로 날 부른다. 정하얀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폭발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다. 그냥 한소라 때문에 과장되게 행동하는 것 같다는 것과 평소처럼 귀엽게 느껴지는 것 정도가 전부다. ‘이건 좋아해야 하는 거지?’ 박덕구 때처럼 삐죽 튀어나오지는 않았다는 거니까. 그다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선희영을 봤을 때 역시 마찬가지. 얘와도 함께 활동한 적이 있었던 만큼 뭔가 다른 걸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런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김예리, 안기모, 김창렬, 유아영, 황정연까지는 애초에 1회 차에서 접점이 없던 인물이었을 테니 별로 상관이 없었고, 엘레나도 마찬가지였다. 신입 길드원 알프스도 당연한 거고, 다시 한번 뒤를 돌아봤지만, 조혜진을 봐도 박덕구 때 같은 반응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문제는 김현성. 내가 모습을 드러낸 직후, 곧바로 문 앞으로 나와 인사를 건네는 녀석. “기영 씨.”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열어왔지만, 일단은 이 새끼를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오랜만입니다, 창렬 씨. 이게 얼마만입니까?” “기영 씨… 그러니까.” “볼 때마다 성장하시는 것 같습니다, 창렬 씨는요.” “…….” “…….” ‘이거 어떻게 하지. 눈을 못 쳐다보겠는데.’ “저….” 눈을 마주친 순간 뒤통수를 치고 싶을 것 같았다. ‘괜히 왔나? 아, 시바 왠지 뒤통수 치고 싶어질 것 같은데.’ # 686 회귀자 사용설명서 686화 기억을 지웠다(3) 이 자리에서 가장 당황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창렬. 갑작스레 본인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익숙하지 않은지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게 실례라는 걸 깨달았는지 급하게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아니야. 지금 비꼬는 거 아니야. 창렬아. 왜 그래.’ 나를 더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컨셉은 아직도 버리지 못했는지 여전히 복면을 쓰고 있는 외관. 이런 자리에서까지 저런 모습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본인이 저게 편하게 느껴진다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눈으로밖에 표정을 읽을 수 없어 상대하기 조금 까다롭기도 하고…. 이렇게 간혹 분위기를 싸해지게 만들기는 하지만 김창렬이 길드에 가지고 있는 충성심까지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뒤쪽에서 녀석이 처리해 주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걸 떠올려 본다면 오히려 녀석을 치켜세워주는 게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결코 김현성을 무시한 내 행동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김창렬에게 많이 신경 써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었으니까. “뒤늦게 이런 이야기를 드린다는 게 조금 죄송하고 또 민망하기는 하지만 그동안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는 일에 비해 제대로 된 대접을 해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따로 여러 가지로 챙겨 드릴 기회도 있었는데… 그런 것도 제대로 만들어 드리지 못했네요.”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개인적으로 창렬 씨에게 거는 기대로 큽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좋은 말씀 감사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녀석.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사교성이 없다는 생각을 했을 때, 김창렬의 얼굴에서 뭔가 걱정스러운 감정이 묻어나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뭐야. 왜 그래?’ 김창렬뿐만이 아니다. 힘차게 인사를 건네 오던 정하얀이나 다른 길드원들 역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아까 같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됐지만 눈물이 나오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 시바. 이거….’ 어떻게든 수습한다고 수습했지만 폭포수 같이 떨어지던 눈물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 아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눈은 분명히 붉어져 있을 것이고 호흡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평소와 다르다든가, 조금 진정되지 않은 것 같다든가, 하는 걸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여기에 모여 있는 강자들이 그런 것 하나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김현성의 뒤통수를 계속해서 후리게 될까 애써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로 놈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다. “조금… 감정이 북받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을….” “커다란 위기를 앞둔 시점이기는 하지만… 그냥 오랜만에 이런 자리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사람을 조금 감성적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생각도 나고요.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모이고 단체를 만들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렇게 가까워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되돌아보니… 뭔가….” “…….” “뭔가 기분이 좋군요. 정확히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여러분들과 함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는 게 좋아요.” 수습용으로 살짝 웃어주자 악어의 눈물이 눈가에 맺히기 시작, 당연하지만 뭔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길드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는 뒤늦게 합류한 입장입니다만 부길드마스터의 말씀에는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싱숭생숭한 감정이 며칠 전부터 계속됐었는데… 오늘 이렇게 모임을 가지니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은 기분이군요.” ‘그래, 기모야. 너는 항상 이럴 때 잘 끼어들어서 토스 잘 날려주더라.’ “나도. 비슷해.” 김예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고 있지 않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부길드마스터님의 말씀처럼… 시간으로 따지면,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왠지 가족 같은 느낌이라서….” 가만히 있던 유아영도 한마디 거들고 있다. 다음에 바통을 넘겨받은 것은 박덕구의 옆에 앉아 있던 황정연. “부끄러운 표현이 아니죠. 실상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렇지 않나요?” “네. 그렇죠.” 눈물은 흘러내리지 않았지만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있는 상태다. 그다지 나쁜 것 같지도 않다. 별것 아닌 가벼운 연출이었지만 마음 약한 엘레나의 눈에는 이미 한가득 눈물이 고여 있는 상황. 왜 갑자기 부길드마스터 분위기 잡으면서 들어오자마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의아해하는 인간은 이 자리에 없다. 김현성과 조혜진 정도가 내가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내뱉었는지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이기영은 언젠가 여기에 있는 이들을 모두 잊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눈에 담아두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슬퍼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와… 이거 시바 내가 생각해도 슬프네.’ 물론 이미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일이고…. 여전히 모두가 함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현재의 이기영의 기억 속에서는 언젠가 사라질 이들이다.  께 부대끼며 웃고 정말로 가족처럼 지냈던 이들을 결국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엔딩을 떠올리자. 악어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겨내자, 기영아. 이겨낼 수 있어. 비극의 히로인 엔딩,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기영 씨….” ‘힘든 일이지만 지금까지도 잘 이겨내 왔잖아? 길드원들에게 슬픈 표정을 보이면 안 되지. 꿋꿋하게 이겨내는 거야. 이기영. 원래 비극의 히로인은 꿋꿋해야 돼. 울지 않을 거야. 눈물을 보이지 말자.’ 나도 모르게 분위기에 취해 제대로 된 즙을 한번 뽑아내려고 했었지만…. ‘아니야. 시바. 이거 이러다가 진짜 비극의 히로인 되겠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머릿속에 감돈다. 당장 1회 차 가면쓰레기가 내 안에 침투했다는 가설을 세웠을 정도였으니까. 이 정도 분위기를 만들고 어찌어찌 잘 수습했다는 것에 만족해도 될 것 같았다. ‘괜히 오버할 필요 없어.’ 지금도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기영 씨.” “…….” 이유는 모르겠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뒤통수가 치고 싶어진다. 하지만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리 만무. 일이 터지고 난 이후에 김현성을 사지로 보내버리느니 현재의 내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옳다. 정말로 김현성을 증오하는 감정이 내면에 남아 있다면 어떻게든 빠르게 해결하는 게 해답에 가깝다. 그렇게 한숨을 쉰 이후에 고개를 돌리자 눈에 띄게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이 새끼.’ “…….” “…….” 잘생겼네. “…….” ‘시바, 다행이다. 와. 그래 시바… 거기까지는 안 갔구나. 이건 수습을 한 건가? 여기까지는 수습을 한 거 맞지?’ 내 안에 있는 감정 역시 김현성을 적대하면 일이 꼬인다는 걸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아직 표면 위로 올라오지 않아서 그런 건가?’ 어찌 됐든 상관은 없지만 김현성이 미워 보이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안심할 수 있는 부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김현성은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근데 뒤통수는 치고 싶네.’ 이건 가볍게 짚고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 아마 ‘파블로프의 개’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무난할 것 같았다. 십몇 년을 넘게 김현성의 뒤통수를 쉴새 없이 꾸준히 때려왔을 테니 얼굴을 보면 손바닥이 근질근질하는 정도야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다. 조금 의아했던 것은 내가 예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 솔직히 박덕구를 봤을 때처럼 격정적인 반응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뭔가 액션이 있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가면쓰레기에게 가장 영향을 준 두 인물을 꼽으라면 당연히 박덕구와 김현성. ‘수습을 했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아무렇지도 않다고?’ 오히려 약간의 미안한 감정을 비롯해 호감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니, 그것과는 다르다. 조금 다른 감정이 느껴진다. 딱히 한 단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마…. ‘동질감.’ 동질감일 것이다.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네?” “아까부터, 조금 불안해 보이셔서 뭔가 걱정하시고 계신 게 있나 싶었습니다. 아니면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다든가….” “현성 씨가 잘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 제가 사과를 드리는 게 맞죠. 즐거운 시간이 될 예정이었는데… 제가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든 것 같아서….” “아니요. 기영 씨가 죄송할 일은 아닙니다. 충분히… 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 기영 씨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감당하고 계신지 전부 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머릿속이 복잡한 상황이실 텐데… 괜히 이런 자리를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뭔가 이상한데….’ “현성 씨가 만들지 않는다고 해도 제가 만들었을 겁니다. 이렇게 시간을 가지자고 한 것도 덕구 아이디어였으니, 현성 씨가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저는… 아! 일단 앉으시죠. 식사부터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현성에 대한 건 현상 유지를 하기로 마음을 먹은 건가? 애초에 그런 게 가능하면 박덕구를 봤을 때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개연성이 맞지 않아?’ 아무 일도 없다는 건 좋지만…. ‘너무 구린데.’ “오, 오빠 여기에….” “부길드마스터 여기에 앉으세요.” “…….” “…….” ‘너무 구려. 너무 구리다고.’ 이러다 정신병이 생기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낚인 건 아니겠지?’ 이기영 이 개새끼한테 낚인 건 아닌 거지? “잠깐 화장실 좀….” “…….” 이기영 이 개 미친 사기꾼 새끼한테 낚인 건 아니지? 애초에 박덕구고 1회 차 기억이고 뭐고 전부 다 블러핑이고 개구라 아니야? 가면쓰레기한테 블러핑했던 것처럼 그냥 아무 의미 없었던 것 아니냐고. 진짜 삭제해 버린 기억이랑 내기했던 내용을 들키기 싫어서 스케일 크게 사기 친 거 일 수도 있지 않아? 1회 차 기억이 내면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떡밥으로 내던진 이후에 내가 스스로 조심하면서 움직이는 걸 바라고 있던 거 일 수도 있잖아. 나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거야. 어느 정도까지 자기암시를 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조혜진에게 편지를 받은 이후에 ‘박덕구와 마주친다면 눈물이 난다’라는 자기암시를 함정으로 파놓을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완벽한 함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조혜진이 준 편지가 트리거라고 생각하면 얼추 들어맞지 않아? “이 미친 쓰레기 같은 새끼가….” 어쩌면 제대로 된 빅 엿을 처먹었을지도 모른다. 가면쓰레기 진청이 빅 엿을 먹었던 것처럼 나 역시 똑같이 엿을 처먹었을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가설 말고 사실만 가지고 생각해 보자. 딱 사실만 가지고 생각해 보자고. 내가 놓친 게 뭐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고.” 거울 속에 있는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제대로 통수를 맞은 것 같은 얼굴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생각해 보자. 한번 생각해 보자. 일단 이 30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자. 내가 놓친 게 뭐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고. 지루하고 짜증 나고 힘들었던 시간 동안 누구를 만났지? 누구랑 만났었지? 뭘 했었지? 황정연처럼 초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파고들 여지가 있다. 이기영 이 쓰레기 새끼 역시 완벽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안했던 것이다. 본인 작업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있었고, 깔끔하게 처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함정을 파놓은 것이 분명했다. 항상 나는 일을 이렇게 처리해 왔었으니까. 이번에도 분명히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뭘 했는데. 마지막을 준비했다. 뭘 자꾸 자신에게 물을 이유가 있나. 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챙기고 다녔지. 차희라가 벽을 넘는 걸 도와주고, 정하얀과 한소라와의 갈등을 지켜봤고, 지혜 누나랑 마지막을 점검했잖아. 박덕구와 안기모, 김예리랑 식사도 했고, 모든 이들을 한 번씩 둘러봤잖아. 대륙 회의에서는 오스칼과 이야기를 나눴고, 그 이후에도 연락을 주고받았지. 디아루기아와 디아루리아, 엘레나와 함께 새로운 세력을 포섭하는 시간이기도 했어.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지, 내 사람들의 현재 상태가 어떤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개인적으로 점검하는 시간이었잖아. 이 30일은…. 그렇지. 그렇지 않아? 머리를 붙잡고 거울을 봤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렇게 쓸데없는 자문자답을 계속해서 속으로 지껄이고 있었을 때였다. 갑작스레. 머릿속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어와 꽂힌 것. 둠현성 이벤트가 끝나고 일어난 시점이었을 거다. 이지혜가… 분명히 나에게 이런 말을 내뱉은 적이 있다. [린델 내에… 남아 있는 길드가 얼마 없다니까요. 그러고 보니 카스가노 유노가… 오빠한테 꼭 말씀드릴 게 있다고 했으니까. 이번 회의 끝나면 곧바로 연락해 보시고….] 라고 했었나. 콰직 사건이 있었던 대책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이지혜가 스케줄을 정리해 주며 내게 중얼거렸던 목소리였다. “시발….” 조금 더 기억을 더듬어 가보자. 만났었나? 빛이 떨어진 이후에 카스가노 유노를 만난 적이 있었나? “이 미친 이기영 이 새끼.” 내 예상이 맞다는 듯. ‘그래… 맞아.’ 어처구니없게도. 카스가노 유노와 만났던 기억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그래… 맞다고… 이게 맞아… 이게 맞는 것 같아. 이게… 맞을 거야.’ 거울에 비친 얼굴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시야에 비쳐왔다. # 687 회귀자 사용설명서 687화 이기영 이 개 쓰레기 같은 사기꾼아 (1) 물론 속단하기는 이르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내가 이 블러핑이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 역시 내가 여기까지 도달한다는 것을 가정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 번 더 꼬았을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볼 수 없다는 거다. 물론 현재로서 가장 가능성이 큰 추측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파고들어야 할 노선을 분명히 해야 했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변수에도 대응해야 했다. ‘흔들리지 마. 흔들리면 안 돼.’ 중간에 뭘 보게 되고, 뭘 깨닫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흔들리지 않는 게 중요한 시점. 이것 외에도 다른 굴을 파놓았을 것 역시 명백할 테니 첫 번째로는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 장소를 조사해 보는 것이 옳다. ‘카스가노 유노.’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은 카스가노 유노부터 확인하는 것이 맞다. 최소 하나, 아니면 두 개 정도의 굴을 확인해 볼 수 있을 정도의 시간. 만약 카스가노 유노 역시 이기영 이 개자식이 파놓은 함정이라면 나로서도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정말로 바깥 녀석이 코앞까지 들이닥친 시점이 아니었던가.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여러 가지 힌트들을 전부 추적하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모든 던전에 들어가 보물이 숨어 있을지 확인하기에는 압도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이것 말고도 할 일이 있었으니까. 지금 당장 카스가노 유노에게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런 연유였다.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과 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당장 코앞에 닥친 종말을 막아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종말이고 길드 모임이고 나발이고 때려치운 이후 곧바로 카스가노 유노에게 뛰어가고 싶은 심정. 하지만 여기서도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길드원들의 멘탈을 잡아준다든가, 목적성을 심어준다든가. 최종병기 김현성도 다시 한번 잡아줘야 했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정하얀과 한소라도 신경을 써줘야 했다. 아직 정하얀은 벽을 넘지 못했으니까. ‘진짜 이 쓰레기 새끼.’ 본인은 신나게 주사위를 던졌으면서 뒷감당은 이쪽에 넘기는 듯한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당연지사. 내일의 나! 부탁해! 같은 느낌으로 똥을 투척했다고 생각하니 심사가 뒤틀린다. 전부 뒤집어버리고 싶었지만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거울을 보고 나 자신의 뺨을 연달아 날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이 개새끼.’ 욕을 해도 결국 나 자신에게 침 뱉기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허무했다.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지옥의 가불기…. 이 모든 게 대륙을 지키고 루시퍼를 이기기 위한 퍼즐이라는 것 정도가 그나마 나를 안심하게 할 수 있는 부분…. 물론 이것 역시 함부로 도장을 찍을 수 없었으니 불안해 미칠 것만 같았다. “…….” “…….” “형님, 이제 조금 괜찮은 거요?” “처음부터 괜찮았어. 조금씩 진정되는 것 같은 느낌이니까. 하는 일은 잘되고 있는 거지?” “거, 내가 누구요. 형님 동생 아니요.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 “그 말씀이 맞아요. 이기영 님. 덕구 씨도 정말로 열심히 해주시고 계셔서….” “거, 엘레나 님도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뭐 여기서까지 이런 이야기 하기는 조금 그런데…. 큼, 아무튼 기대하쇼. 전술 공부도 하다 보니까 재미 붙어 가지고…. 최근에는 내가 천재가 아닌지 생각하고 있다니까. 형님이 준 거로도 모자라서 다음 진도까지 예습했다는 거 아니요. 형님이 할 수 있으면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이 말이 참이었다니까.” 당연하지만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조금 취했는지 옆에서 좋다고 떠들어대고 있는 모습, 안기모가 귀신같이 호응해 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도 처음에는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첫 느낌부터 나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신뢰할 수 있을 정도고요. 팀의 사기 자체도 한참 올라온 상태여서….” “기모. 아저씨. 말이 맞아.” “매번 말하지만 첫 번째는 수성전이야.” “그건 그렇지만….” “애초 일이 잘 풀리는 상황이면 쓸 일이 없으니까.” “말씀이 맞습니다. 변수는 줄이면 줄어들수록 좋으니 말입니다.” 선희영이 불쑥 말을 이어왔다. “거, 나도 알고 있다니까. 명절에 모인 어른들도 아니고…. 큼, 무슨 말을 꺼내지를 못하겠다니까. 형님이 믿는다고 해줬으니 잘해낼 거요.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아영 후배가 만들고 있다는 건….” 이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 자체가 본인에게 손해라는 걸 알고 있는지 슬쩍 유아영에게 바통을 넘기는 모습이다. “아마 내일 즈음에 완성될 것 같아요. 계획대로라면 오늘 드릴 수 있었겠지만 마무리 과정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아직 어떤 등급을 받게 될지도 감이 안 잡혀서…. 소재를 제대로 살렸을지가 가장 관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덕구 선배한테 드릴 방패랑 창렬 오빠한테 드릴 단검, 그리고 소라가 사용할 지팡이도….” “지팡이 같은 것도 만들 수 있는 겁니까?” “네. 길드에는 조금 죄송한 말이지만 사용할 수 있는 소재 대부분이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니까요.” “…….” “만약 저의 성장치가 더 높았더라면 충분히 준 신화 등급의 무구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거예요. 파란길드에서 현재 보유하고 있는 소재들을 생각해 보면 그게 맞아요. 몇 년만 더 지나면 재료들을 잘 살릴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죄송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로 죄송할 일은 아니에요. 전설 등급의 아이템 역시 대륙을 기준으로 흔한 아이템들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 보세요. 상위 모험가 중에서도 전설 등급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는 이들이 흔치 않습니다. 굳이 소재들을 아까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영 씨는 지금 누구보다도 잘 해주시고 계시니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길드 재산을 까먹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김현성이 불쑥 말을 이어왔다. “기영 씨 말이 맞습니다.” “…….”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는 다른 것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아영 씨는 충분히 길드에 도움이 되고 있고, 분명히 여러 가지로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자재의 가치나 길드의 재산 같은 것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길드 마스터….”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무엇을 지켜야 할지 깨닫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주세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우리 현성이 오랜만에 말 한번 잘했네.’ “아영 씨뿐만이 아닙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저 여러분들이 한 번 더 생각해 주셨으면 했습니다. 오늘 이후로는 이런 기회가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우리가 뭘 지켜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만약 최악의 상황이 다가오더라도 말입니다.” ‘길드마스터 같다. 현성아. 비장한 모습 좋아.’ “무엇을… 지켜야 할지….” “네. 덕구 씨. 지금은 그 생각만 하시면 됩니다.” “형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 것 같다니까.” “…….” “거, 이럴 게 아니라 다 같이 한 번 더 짠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켜야 할 것을 위하여’로!” “…….” “지켜야 할 것을.” “위하여!” “위, 위하여.” “위하여.” 잔을 살짝 들어 올리는 길드원들의 모습을 보니 나름대로 안심이 되기도 한다. ‘멘탈 자체는 괜찮네.’ 저마다 약간은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겠지만 모두 훌훌 털어버린 것 같은 모습들이 눈에 띈다. ‘현성이도 생각보다 괜찮은데?’ 둠 되기는 했지만 대륙을 지키려고 발버둥 쳤던 1회차의 본성이 어디로 도망가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어째서 녀석이 커다란 짐을 짊어지고 회귀를 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 그의 눈빛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륙을 지켜야겠다는 열망이 담겨 있는 영웅의 눈빛이 아닌가. 아마 길드원들의 불안감을 날려 버린 것은 흔들림 없는 녀석의 눈빛이리라. ‘하얀이 상태도 나쁜 것 같지는 않고….’ 누가 봐도 한소라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너 없이도 나는 잘살 수 있다는 걸 과시하는 것만 같다. 한소라도 그런 정하얀을 신경 쓰지 않는 역할을 잘 수행해 주고 있었고…. 식사가 시작되고 쓸데없는 잡담을 계속해서 나누고 있었지만 단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는 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힐끔힐끔 눈이 마주쳐도 고개를 홱 돌려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이것도 계획대로 진행하면 되겠네.’ 마지막 점검 차 주위를 둘러봤지만 딱히 모난 곳은 없다. 나 개인의 문제만 빼면 말이다. 그렇게 길드원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 대화 주제는 다양했다. “일이 끝나면 뭘 하실 생각인가요?” “무조건 여행이지. 저번 거울 호수로 놀러 갔을 때는 이상한 사건에 휘말렸으니까. 이번에는 거, 제대로 한번 다 같이 놀러 가야 되는 거 아니요.” “뒤처리 때문에 바쁘겠지만 여행은 찬성이에요. 로맨틱한 곳으로요.” 일이 끝난 이후에 뭘 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든가. “최근 봉사활동을 쉰 지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서….” “같이 가요. 희영 씨.” “네. 그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엘레나 님. 그러고 보니 엘리오스 님은 잘 지내십니까?” “아… 네. 오라버님도 여러 가지로 준비할 게 많아서 바쁘시기는 하지만….” 잠깐 잊혀졌던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든가. “그때 예리 씨가 외쳤습니다. 매혹의 춤… 이라고 말입니다.” “기모, 아저씨는 뭐라 그랬는지 알아? 뽑으면. 죽는다.” 서로의 흑역사를 꺼내 배틀을 벌인다든가. “예, 예전에 오빠 기억나세요? 그러니까 우, 우리 튜토리얼 던전에서….” “물론.” “그, 그랬었죠? 헤헤.” 함께 한 추억을 꺼낸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대화의 주제는 많았다. 다들 취하면 그렇듯 했던 이야기를 또 하기도 했고, 쓸데없는 이야기로 입이 아플 정도로 웃기도 했다. 정하얀도 조금 취했는지 계속해서 입을 열고 있었고 선희영도 이쪽에게 입을 열어오고 있었다. 엘레나는 유아영과 함께 이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박덕구와 황정연은 여행 이야기에 한참이다. 튜토리얼 동기였던 한소라와 김창렬은 당시 다른 파티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가 주요 화두인 모양. 정하얀이 갑작스레 튜토리얼 이야기를 꺼내온 게 이해가 간다. 뒤늦게 합류한 박중기 팀장과 김미영 팀장을 비롯한 길드 간부 직원들도 합세하니 분위기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그 와중에 박리안 역시 잠깐이나마 긴장을 놓고 신입 길드원 알프스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조혜진 쟤는 누구랑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신의 손거울을 들고 피식피식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너 그거 이지혜 아니지? 어울리지는 않지만 나 역시 잠깐 이나마 복잡한 머릿속을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 솔직히 즐겁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김현성이 슬쩍 말을 걸어온 것은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어 갈 때 즈음이었다. “기영 씨 잠깐… 바람 좀 쐬고 오시죠.”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함께 거대한 운명에 맞서기로 한 소울 메이트와의 담소가 필요한 모양. 솔직히 바깥이 추워 별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 “…….” ‘그래. 형이 서비스해 준다.’ 애초에 당장 카스가노에게 달려가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발코니로 슬쩍 나오자 찬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어둠을 비추고 있는 거대한 빛 때문에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 ‘으. 시바 춥네.’ “…….”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 “네. 오랜만에 다들 모이니까 오히려 피곤함이 가시는 느낌이네요.” “상태는 조금….” “괜찮습니다. 예상하고 있었던 것보다는 더디네요.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전부 다 나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슬픈 웃음을 짓는 모습. 무리하지 말라는 얼굴이었기 때문에 양심이 찔려오기는 했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서 힘내라고 용기도 주고, 우린 할 수 있다고, 이겨낼 수 있다고 이빨을 털면 이 새끼 멘탈도 더 안정되겠지. 그렇게 슬슬 빌드업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이건 또 뭐야.’ 어떤 전조도 없이 내 눈에 비치고 있던 대륙의 모습이 순식간에 전환 된 것. 이게 뭔데. ‘이것도… 암시야?’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내 뇌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동전을 뒤집듯 세상이 반전되어 버렸다. 시야에 비친 대륙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다. 노을이 비칠 리가 없는 시간에 검붉은 색의 하늘. 당연히 기억에 있다. 김현성의 무의식 세계에서 봤었던 대륙.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려 개미 새끼 한 마리 남지 않은 대륙의 모습이었다. 그 안에 익숙한 인형이 보인다. 김현성이 아니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 내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김현성이 매일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조작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본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1회 차의 내가 최후에는 어떻게 됐는지 본 적이 없었으니, 지금 보이는 모습이 생소한 것이 당연하리라. 해가 뜨지도 않고, 지지도 않는 하늘을 바라보며 손을 뻗는 모습. 김현성 혼자만 남은 게 아니었나.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아니, 시바, 이것도 그냥 개구라 아니야?’ 한참 동안 폐허의 가운데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녀석이 담담하게 손을 꽉 쥐는 순간, 또다시 동전을 뒤집듯, 다시 한번 세상이 전환되는 것이 느껴졌다. “기영 씨, 기영 씨! 기영… 기영 씨!” “…….” “기영 씨… 기영….” 이것도 블러핑이야? “…….” “…….” -고맙다. 이것도 블러핑이냐고 시바. -알타누스. 이기영 이 쓰레기 같은 사기꾼 새끼야. 진짜 구라 좀 작작 쳐. # 688 회귀자 사용설명서 688화 이기영 이 개 쓰레기 같은 사기꾼아 (2) 정신병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말로 내가 미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옆에서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그게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괜찮다는 듯이 손으로 살짝 녀석을 밀치자 반 발자국 정도 떨어지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 조금 취한 것 같네요.” “기영….” “방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진짜 정신병 생길 것 같은데. 진짜로… 개 시바….’ “하… 하지만… 지금… 방금….” “잠깐 어지러워서 말입니다. 죄송합니다만 먼저 들어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남은 시간 재미있게 즐기시고 자리는 현성 씨가 마무리해 주세요. 길드원들한테도 잘 말씀해 주시고요.” “…….”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요.” 뭐가 진짜고 뭐가 거짓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악마 소환사 진청이나 악마 숭배자 이토소우타,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악마 계약자 여러분들과 이설호 같은 놈들이 어째서 그렇게 이성을 잃었는지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사람 하나를 완전히 보내버리는 구덩이에 빠뜨린 이후, 흙을 들이부으며 놀리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이기영 이 개 같은 사기꾼 새끼! 이 개자식! 라고 흥분하며 외쳤던 그간의 빌런들을 비웃었던 과거의 나를 조금 되돌아본 것은 당연지사. 종국에는 이성을 잃고 짐승마냥 달려들었던 그 빌런들을 인간이기를 저버린 미개한 금수라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악마와 계약한 대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혀를 쯧쯧 차지 않았던가. 처음에 저 빌런들이 보여줬던 침착하고 카리스마 있었던 모습들이 모두 가면이었다는 생각에 인간의 본성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해볼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이놈들 모두가 흥분할 이유가 있었다.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니라 화를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악마의 하수인들 역시 지금의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낀 게 분명했다. 이게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허우적거리며 주변을 바라봤을 테고, 도대체 뭐가 진실인지에 대해 파헤치고 싶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겠지만 종국에는 모든 게 선동되고 날조된 정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분노. 본인도 원치 않은 사이에 주변의 모든 환경이 달라져 있었고 정신병이 생긴 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달라진 환경을 바라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김현성을 떨쳐낸 이후 방으로 빠르게 들어가는 순간,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보니 이지혜가 말한 도발 토템 이야기도 이해가 간다. ‘이, 더러운 사기꾼 새끼 진짜.’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더욱더 비열한 표정을 보내는 것만 같은 느낌. 영화처럼 손을 뻗어 창문을 깨버리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지만 손가락에 유리가 박히는 상상을 하자 분노가 천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이 새끼는 믿으면 안 돼. 절대로 믿지 마. 시바. 진짜. 이 사기꾼 새끼.’ 남의 뒤통수를 치고 다니는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자기 자신의 뒤통수까지 치고 다니고 있지 않은가. 손가락에 유리가 박히는 상상이 효과가 있기는 있었나 보다. 이제야 조금씩 호흡 안정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방금 그건 뭐였는지 천천히 다시 한번 생각이나 해보자. ‘블러핑이겠지?’ 대충 던진 거라고 판단하는 게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알타누스한테 고맙다는 건 뭘 의미하는 거지?’ 그렇지만 계속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이 맴돌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이건 사약이었다. 마시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벌컥벌컥 들이킬 수밖에 없는 떡밥이다. 1회 차 이기영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는 건 솔직히 내 알 바 아니지만, 만약 녀석과 알타누스가 모종에 관계에 있었던 게 맞다면 어떤 식으로든 김현성의 회귀에 영향력을 끼쳤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김현성의 선택이 무엇을 뜻하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곳에 관심이 쏠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하지만. ‘함정이야. 이기영 이 새끼가 사기 치는 거라고.’ 당연히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 루시퍼와의 내기에 점점 가까워지자 이기영 이 새끼가 함정 카드를 발동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당장 내가 이렇게 흔들리고 있다는 게 가장 커다란 증거가 아니겠는가. 만약에 나와 알타누스가 유착관계에 있었다는 게 진실이라면 녀석이 이걸 이런 식으로 내게 보여줄 리가 없다. 내 무의식이 보여준 풍경이라고 가정한다면 상황이 조금 더 복잡해지겠지만 지금은 그런 변수들까지 고려할 시간이 없다. ‘루시퍼와 나누었던 내기 자체가 함정일 가능성도 있나.’ 만약 이기영이 정말로 숨기고 싶었던 게 루시퍼와의 내기가 아니라 1회 차의 기억이었다면? ‘아니지. 이건 너무 갔어.’ 진실을 거짓인 것처럼 포장해 내게 드러내고 있는 거라면. ‘너무 갔어. 이렇게 빠져들면 안 돼. 이게 그 사기꾼 새끼가 원하는 거라고.’ 중심을 잡는 게 옳다. 본격적으로 모임이 시작하기 전에 했던 생각처럼 흔들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 이곳저곳 둘러보다가는 모든 게 망가질 수도 있으니까. 더군다나 나는 보물 상자를 억지로 꺼내놓는 타입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간혹 꺼내놓기는 하지만, 이기영은 본인의 것을 잃어버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굳이 이걸 먼저 꺼내놓을 이유가 없다는 거다. 이 새끼는 절대로 드러내는 타입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깨닫고 있다고 하더라도 녀석은 보물 상자를 내 손에 직접 쥐여주지 못한다. 물론 가능성을 완전히 저버리는 것도 멍청한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가능성에 대해 다시 한번 파고드는 것은 카스가노 유노와의 사라진 기억을 확인해 본 이후여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정하얀을 함께 데려가고 싶기는 했지만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갈지 모르는 만큼 일단은 카스가노 유노가 있는 곳으로 향할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단서를 가지고 있는 게 그녀다. 답은 그녀가 가지고 있다. ‘뭐지?’ 이렇게 개지랄을 떨면서까지 녀석이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이 뭘까. 당연하지만 평범한 게 아닐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스케일을 너무 크게 벌렸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기에는 의아한 점들이 너무나도 많지 않은가. 서둘러 그리폰의 고삐를 쥔 이후에 하늘로 향하는 와중에도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 꽂혀 들어오기 시작, 하지만 별 의미 없는 가정이라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으리라. ‘시바. 시바. 시바.’ 솔직히 지금 내가 카스가노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게 정답인 건지도 확신할 수가 없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싹트고 있다. 다시 돌아가는 게 더 나은 선택은 아닌지에 대해 몇 번이나 고민을 해볼 정도. 하지만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의 카스가노 유노를 목도한 이후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녀는 내가 이곳으로 향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 “…….” 무척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는 게 당황스럽다. 분명히 최근에 나와 그녀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본 적이 있다. 그만큼 완벽하게 기억이 삭제되어 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도대체 뭐야.’ 감고 있는 눈으로 조용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얼굴에는 불안감이 담겨 있다. 반갑지 않아 보이는 얼굴에 괜스레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온 게 정답이 아닌 건가?’ 정말로 기억을 되찾으면 내기에서 지는 게 맞는 건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의문이 꼬리표를 물기는 했지만 양보하는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타인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 절대로 타협은 없다. 막 입을 떼려고 한 찰나에 카스가노 유노가 먼저 입을 열어왔다. “오셨습니까.” “…….” “…….” “기다리고….” “네.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건 좋네.’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내가 여기 무엇 때문에 왔는지도 알고 있겠군요.” “네.” ‘이것도 좋아.’ “하지만.” “…….” “하지만 저는 두 분이 나눈 내기나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옵니다. 주인님께서 알고자 하시는 답은 저를 통해서는 찾을 수 없을 거라는 걸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고, 내가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면 됩니다.” “주인님께서는… 제가 이후에 찾아올 주인님에게 이것에 대해 말씀드리는 걸 원치 않으셨지만.” ‘그래. 그랬겠지.’ “제가 그 뜻에 거스를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도 맞아.’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은 정답이 아니옵니다.” ‘판단은 내가 하게 될 거야.’ “또한 이것을 본 이후에도 절대 흔들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왜 흔들려.’ “그리 전해 달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뭔데.’ 자꾸만 뜸만 들이고 있으니 괜스레 걱정이 앞선다. ‘애초에 시바. 정답도 아닌데 도대체 왜 이렇게 뜸을 들이고.’ 괜스레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을 때였다. 카스가노 유노의 눈이 천천히 떠지기 시작한 것. 당연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미 몇 번이나 그녀와 함께 검은색 세계나 미래를 바라보지 않았던가. 텅 빈 것만 같은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나는 그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고 내가 내게 숨기고 싶어 하던 것들이 단편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전쟁터. ‘라파엘?’ 눈에 보이는 것은 라파엘이었다. ‘뭐야 이 새끼 어떻게 움직이고 있어?’ 생명 유지 장치를 떼어내지 않은 보람이 있는 모양.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게 내가 숨기고 싶어 하던 비밀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라파엘은 김현성이 아닌 천사 중 한 명과 검을 맞대고 있었으니까. 이후에는 다시 한번 장소가 뒤바뀐다. ‘차희라?’ 차희라의 모습 역시 보이기 시작한다. 온몸이 넝마가 된 채로 끊임없이 대검과 도끼를 휘두르고 있는 모습, 몸에 대여섯 개의 창을 꽂은 채로 싸우고 있는 모습은 걱정된다기보다는 무섭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외관이라기보다는 싸움 자체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며 천사들을 짓이기는 모습은 내가 차희라에게 기대하고 있던 것 그대로였다. ‘제노지르아.’ 아군이 되기로 한 금빛의 용 역시 신화 속에 한 장면 같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중. 회의가 좋게 진행됐다는 것과 진배없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이 장면 역시 만족스럽다. 마치 기둥과도 같은 거대한 황금빛의 숨결이 한 지역 전체를 뒤엎고 있지 않은가. ‘정하얀.’ 이 정도까지 생각한 대로 정황이 흘러가고 있는 걸 보니 정하얀 역시 벽을 뛰어넘는 데 성공한 모양. 예상했던 그대로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눈에 가득 들어 있는 독기가 그녀가 얼마나 커다란 결심을 했는지 알려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른 길드원들이나 지혜 누나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어디에선가 제 역할을 해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가능성을 10%로 잡았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대륙은 비둘기들에게 전력으로 저항하고 있었고, 또 일부는 몰아붙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가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지경. 숨길 게 뭐가 있는지,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되는지 전력으로 찾아보려고 했지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다. 기대하고 있던 그대로의 모습이라 기쁘기까지 하다. 혹시 카스가노 유노가 실수로 다른 장면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뭐야….’ 저거 뭔데. 믿기지 않는 광경이 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 전장의 한가운데. 천천히 내 모습이 정확히 보이기 시작한다. ‘저게 도대체 뭔데.’ 문제가 있다면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 성치 않아 보이는 것 정도가 아니다. 완전히 넝마가 되어버린 모습이지 않은가. 심지어…. 심지어 숨을 쉬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그 뒤, 검은색 날개를 꺼낸 채. 나를 내려다보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뭐야… 시바. 나… 나 죽어?” “…….” “현성이가… 나 죽여?” “…….” “현성이가… 나… 왜 죽여?” # 689 회귀자 사용설명서 689화 이기영 이 개 쓰레기 같은 사기꾼아 (3) ‘시바… 시바….’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현성이가… 나 왜 죽이는데….” 저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어 봤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장면에 카스가노 유노의 마력이 바닥 날 때까지 되감기를 해봤지만 그렇다고 미래가 달라지겠는가. 직접적으로 김현성이 내 몸을 난도질 하는 장면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틀림없이 김현성은 현행범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야 카스가노가 보여주고 있는 어두운 표정과 긴급히 전해온 메시지가 이해가 간다. “시바….” 모르긴 몰라도 무척 다급한 상황이라 판단하지 않았을까. 5현장이 무너지는 미래를 막았다는 건 그동안 열심히 한 보상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그 대가가 내 죽음이라면 생각할 가치도 없다. 빛기영을 믿어주고 있는 대륙 위의 수많은 신도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게네들을 대신해 희생할 생각이 없다. 혹시나 카스가노 유노가 이전의 이기영에게 언질을 받고 주작된 내용을 선보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가기는 했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 만무. 장담하건대 그녀를 통해 본 내용은 여가 없이 진실이다. 그 이전에 그녀는 내게 거짓을 말할 수 없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자 눈을 감은 무녀가 천천히 입을 열어왔다. “주인님께서는….” “…….” “방금 보신 미래대로 흘러가야 모든 게 완벽해진다고 말씀하셨사옵니다.” ‘그건 아까 들은 건데 다시 들어도 새롭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죽는데 뭐가 완벽해.’ “그리해야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데. 시바.’ “보셨던 미래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나보고, 시바, 죽으라는 소리야?’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미래를 알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사옵니다. 혹여나 변수가 생기지는 않을까 무척 우려하셨사옵니다.” “그게… 정….” “저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주인님께서는 틀림없이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정말로 주인님이 찾아오신다면 필히 여러 번 당부하라 이르셨습니다.” ‘무슨 개똥 튀겨먹는 소리야. 이건 도대체.’ 의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기야 있다. ‘너무 잘 흘러가고 있었지.’ 전장의 전황 자체가 좋아 보였다는 게 그렇다. 식물인간인 채로 눈을 감고 있을 것 같았던 라파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전장의 한 축을 감당해 주고 있었고, 제노지르아 역시 본인의 모든 걸 내 던진 채로 적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정하얀은 벽을 부숴 버린 상태였고, 차희라는 뭐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당연히 이런 네임드들 뿐만이 아니다. 전황이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밀어붙였던 쪽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조금 오버해서 반올림하자면 55 대 45로 쳐줄 수 있을 정도.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비슷비슷하게 비벼 나가고 있는 구도가 아니었던가. 현재 인류가 가지고 있는 전력으로는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나 다름이 없다. 딱 내가 죽는 장면만 제외하면 이쪽에서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었던 미래였다는 거다. 나비가 작은 날갯짓을 하면 지구 반대편에서는 태풍이 일어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비효과에 대해 생각해 보면 나를 제외한 대륙인들이 승리를 거머쥐기 전까지의 과정 중에는 내가 스스로의 죽음을 자초하는 행동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성이한테 너무 신경을 안 써줬나? 그래서 그런 거야? 현성아?’ 너무 다른 이들을 신경 쓰느라 김현성을 도외시한 것은 아닐까. 전력을 다지고 벽을 뛰어넘게 해주는 데 집중했지만, 상대적으로 김현성을 내팽개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니 요즘 영 접전이 없었던 것 같은 느낌. 베니고어 톡도 대부분 읽고 씹기를 반복했고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 전화도 받지 않았다. 대놓고 무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김현성을 다 잡은 물고기 취급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혹시나 이 새끼가 루시퍼의 손길에 미쳐 포근하고 따뜻한 이기영 어장을 뛰쳐나간 것이 아닐지 걱정도 된다. 그럼 내기 내용은 뭐였던 거지? ‘루시퍼와의 내기 내용이 이거였던 건가?’ 김현성이 나를 죽일지, 죽이지 않을지에 대해서 내기를 했을 확률도 결코 낮지는 않다. 나는 카스가노 유노에게 단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녀가 보여준 결과물이 있었으니까. 여기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스스로 죽는 엔딩을 보고 승리라고 표현했다는 것. 혹시나 이기영 이 미친놈이 갑작스레 터져 나온 희생정신으로 ‘나는 죽었지만 이 전쟁은 인류의 승리다!’라고 외치는 장면을 떠올려봤지만 영 가능성이 없다. 이기영이 모종의 깨달음을 얻고 천사처럼 착해진 사이 일을 벌였을 가능성도 제로 퍼센트에 수렴한다고 장담할 수 있다. 오히려 김현성이 나를 죽인다는 내기에 주사위를 던졌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쉽게 정리할 수 있는 이야기다. 1. 루시퍼와 이기영이 모종의 내기를 했다. 2. 미래에 이기영은 김현성에게 죽었다. 3. 이기영은 김현성에게 죽는 엔딩을 승리하는 엔딩이라고 발언했다. 4. 이기영은 김현성이 자신을 죽인다는 결과에 주사위를 던졌다. 5. 김현성은 이기영을 죽여야 한다. 만약 내 가설이 들어맞는다면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두 가지. 6-1. 이기영 이 새끼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 6-2. 하도 빛, 빛 하다 보니 이 새끼가 정말로 빛이 되어버렸다. 정말로 대륙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모든 가설과 예상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겠지만, 현재까지 나온 정황들을 살펴보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들이다. 만약 6-1이 들어맞는다면 이기영이 정말로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겠지만… 여전히 의문점은 존재한다. 일단 김현성에게 메시지를 보내보자.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정말로 어항을 빠져나갔는지 확인 정도는 해봐야 하니까. 잠깐 의심하기야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곧바로 여신의 손거울이 울리는 게 느껴진다. 보라! 회귀자와 빛기영의 끊어지지 않는 끈끈한 유대감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만약 3번 가정이 사실이라면 김현성은 이기영을 찔러야 내기가 성립할 수 있다.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정말로 빛기영의 새하얀 배때지에 칼을 쑤셔 박을 수 있을까. 나는 김현성을 그렇게 못난 놈으로 키운 적이 없다. 저 혼자 할복을 했으면 할복을 했지, 지금껏 자신의 짐을 들어준 친우를 배신할 못난 놈은 아니다. 이는 분명히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주사위를 던지고 말고 이전에 내기가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보이는 결과가 내기가 성립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지만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은 1기영이 붉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알타누스에게 감사를 표현한 모습. ‘이건가?’ 전혀 쓸데없는 블러핑이라고 알려줬던 장면이 어쩌면 힌트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만약 김현성이 나를 찌르도록 스스로 유도해야 한다면 이것만큼 적절한 장면이 없다. ‘이건 찌를 만해.’ 솔직히 이건 찌를 만하다. ‘이건 진짜 찌를 만한데.’ 배신감이 느껴지기야 할 것이다. 본인의 짐을 함께 들어주던 형제가 알고 보니 짐을 떠맡긴 당사자였단다. ‘이건 조금 그렇지.’ 본인을 위로하고 수면 위로 끌어 올렸던 사람이 알고 보니 지옥 밑바닥 끝까지 처박아 놓은 놈이라고 생각해 보라. 온갖 악독한 짓으로 동료들을 죽이고 세상을 풍비박산 낸 가면쓰레기가 친형제 같은 사람이란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좀….’ 거대한 마이너스 감정이 닥쳐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김현성이 이 지옥 같은 시간을 다시 반복한다는 것에 매몰되어 있다는 걸 떠올려 보면 거짓된 진실을 알았을 때 흥분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온갖 배신감과 역겨운 감정이 소용돌이치다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게 이기영을 넝마로 만들고, 스스로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는 배드엔딩. 만약 이게 배드엔딩이 아니라 해피엔딩이라면 나는 입에 내가 가면쓰레기였다는 거짓말을 입에 담아야 한다. 사실은 내가 너의 회귀에 관여했고, 너는 나에게 속은 것이라 입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 내기에서 승리하게 되고…. “루시퍼에게 도움을 받거나, 루시퍼가 개입할 여건을 만들어줄 수 있다. 이건가.” “그건….” “…….” “…….” “뭔가… 떠오르는 게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이에요.” “하지만.” “여전히 가능성은 낮지만… 어째서 제가 이걸 말하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어째서인지 여쭈어봐도 되… 되겠습니까.” “당연히 이런 걸 본다면 의심할 테니까요. 정말로 제가 죽음을 맞이하는 게 해피엔딩으로 향하게 되는 지름길인지, 정말로 주사위를 던지는 게 맞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겠죠. 지금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김현성에게 칼빵을 맞는다고, 내기에서 이길지 누가 알겠어? 이게 정말로 내기 내용일지 누가 알겠냐고.’ 만약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기 내용이 진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면 이런 개죽음이 없을 것이다. 내기에 승리해 그놈의 ‘믿는 구석’을 기다리고 있다가 싸늘하고 싸늘한 시체로 쓸쓸히 죽어가는 것이다. “결코, 주인님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제… 제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생에도 저는 주인님을 위해 스스로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일어날 미래에 오차 따위가 있으면 안 된다며.’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도망치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다. 보이는 미래를 피한다는 것은 루시퍼와의 내기에 패배한다는 것이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다. 애초에 김현성이 나를 찌르는 상황 자체가 오지 않게 하면 된다. 노아의 방주 계획을 조금 더 일찍부터 터뜨려서 싸움 자체를 회피하는 방법도 있고, 가능성이 낮다는 생각이 든다면 김현성을 도발하지 않으면 된다. 김현성은 나를 찌르지 않을 것이고 이기영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살아남을 것이다. ‘내기가 성립하지 않거나 패배했을 경우의 페널티야 있겠지만.’ 일단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 잠잠히 머리를 굴리며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자. 카스가노 유노는 다시 한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 아무래도 본인이 봤던 장면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것 같았다. “피할 수 있는 미래이기도 하니 그렇게 슬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륙의 승리와는 멀어지겠지만….” “하지만….” “그래도 던져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나는 도박을 싫어하지만 이기는 게임에 주사위를 던지지 않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만약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이 믿는 구석이 있다면…. “던지는 게 옳을 것 같아요.” “정말로….” “이기는 게임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길 확률이 높은 게임이기는 할 것 같습니다.” 몇 번의 확인 과정을 거친 이후에는 확실하게 던지는 게 옳다. “그런 의미에서, 힘드시겠지만 한 번 만 더 봅시다.” “…….”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제 가설이 맞는지 한 번 더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도망치지 않고 이 내기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해도 미래가 변하지 않는지 한 번 확인해 봅시다.” 카스가노 유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미래에는 변함이 없다.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은 내가 여기까지 파고들 거라는 걸 예상했었고, 실제로 피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예상했다. 답은 나왔다. 이기영의 죽음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이기영은 거짓말을 해야 한다. 진청의 죄를 스스로 뒤집어쓰고, 내가 가면쓰레기였고 너의 회귀에 관여했다는 거짓말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김현성에게 고백하고 스스로를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비극의 히로인이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쌍팔년도 클리셰지만 어쩌겠는가. 김현성이 이런 클리셰가 취향이라는데. ‘내 죽음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이 보잘것없는 육신 따위, 대륙을 위해 내던지겠어.’ 뜨거운 빛의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690 회귀자 사용설명서 690화 이기영 이 개 쓰레기 같은 사기꾼아 (4) ‘가능한 겁니까. 불가능한 겁니까?’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현재의 대륙 상황으로는 불, 불가능할 거야. 인간의 생과 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 만약 허가가 난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페널티가 부과돼. 특히 우리 같은 경우에는 더욱더. 아주 작은 개입에도 신성 소요가 상당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0/1)]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네요.’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이… 이기영 후배. 역시 우리 이기영 후배는 말이 통한다니까. (0/1)] ‘대충 위쪽도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으응. 다른 대륙에서도 예산을 많이 가져와서 솔직히 더 이상 이 곳에 투자할 여력이 없으신 것 같거든. 그때 이기영 후배를 빛으로 가득 채웠던 게 사실상 마지막 지원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그래도 날개 달았잖아! 그, 그렇지? (0/1)] ‘근데 정말로 불가능한 건 맞아요? 엘룬 같은 얘들 몇 명 모아서 희생하고 이러면 어떻게….’ [엘룬을 희생시킨다고 해도 불가능하다니까. 옛 분들이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모아온 신성들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평범한 인간이라면 어떻게든 편법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알다시피 이기영 후배는 격이 높아졌잖아. (0/1)] ‘그렇긴 하지….’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이기영 후배를 살린다고 가정하면 그건 죽은 신을 살리는 거와 다름이 없는 행동이야. 알타누스를 되살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해 봐. 만약 그 정도의 신성을 소비할 여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죽음을 맞이하지 않게 만들었겠지. 항상 말하는 거지만 저번 지원도 엄청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윗분 중에 한 분이 이기영 후배님과 김현성을 열렬히 스카우트하고 싶어 하셔서 통과됐던 거지. 아니었으면 그렇게 하지도 못했을 거야. (0/1)] ‘음….’ [사랑스러운 이기영 후배에게 이런 말 하기는 조금 미안하지만 알다시피 이기영 후배가 조금 모난 구석…아니, 조금 독특한 구석이 있잖아. 이곳에는 보수적인 분들도 많아서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도 했거든. 김현성도 마찬가지고…. 한 번 타락한 인간을 믿을 수 있겠냐고…. (0/1)] ‘뭐?’ [그… 그래도 아까 내가 언급한 그분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스카웃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든, 루시퍼의 힘을 받아들였다는 것 보다는 받아들인 이유에 대해 집중하셨던 거지. 꼭 이기영 후배님을 보고 싶어 하셨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너무 바쁘시네. (0/1)] ‘걸리는 게 많기는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하기는 가능하다는 거네요?’ [아, 아니. 불가능하다니까. 대륙의 법칙에 위배되는…. (0/1)] ‘그 페널티를 맞을 각오하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모아놓은 신성을 소비한다고 가정하면 가능하다고 이야기한 거 아니었어?’ [그건 이기영 후배님 말이 맞지만… 실제로 그 정도의 신성을 움직이기는 힘들어. 윗분들이 맡은 차원들도 문제가 많고, 만약 그 정도의 신성이 소비된다면 차원의 균형 자체가 깨질 가능성이…. (0/1)] ‘아니, 그러니까 가능하기는 가능하다는 거잖아.’ [가, 가능하기는 하지. (0/1)] ‘그럼 됐네.’ 일단은 계속 빛의 눈물을 흘려도 될 것 같았다. 물론 빛을 위해 이 모든 걸 희생하기로 마음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확인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점검 아닌 점검을 할수록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루시퍼라면 가능하겠네. 만약 정말로 빛기영이 빛으로 화한다고 해도 루시퍼라면 이기영을 살리는 것이 가능하다. 어마어마한 페널티를 부과받고 모아놓은 그녀의 실적이 일부 날아가기야 하겠지만 그녀라면 확실하게 이쪽을 되살려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베니고어의 말을 들으니 애초에 죽는 상황까지도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중간에 개입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까. 어째서 이런 귀찮은 내기까지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계약의 내용이라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악마는 계약을 해야 현세에 개입할 수 있다. 루시퍼 정도의 악마라면 계약을 하지 않은 상태로도 개입이 가능하겠지만,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상태가 페널티를 덜 받는 방법이라는 걸 모르고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어느 쪽이 됐든 간에 그녀가 패배했을 때의 손해가 막심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잠깐이었지만 혹시 내가 패배했을 경우에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루시퍼의 개입을 끌어내기 위해 이기영이 내건 것은 뭘까. 평생 김현성과 함께 그녀의 밑에서 노역하겠다는 노예 계약서에 사인한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함이 밀고 들어올 정도. 물론 굳이 파헤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기에서 승리하는 건 루시퍼가 아닌 나라고 생각했으니까.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이제 딱 이틀 남았네. 이, 이기영 후배. 우리 할 수 있는 거지? (0/1)] ‘할 수 있겠죠.’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혹시 이기영 후배가 우리 대륙을 버리면 어떻게 하나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역, 역시 이기영 후배는 이기영 후배라니까. 나는 믿었어. 엘룬이 그렇게 아니라고 해도 이기영 후배를 항상 믿고 있었다구. 우, 우리 끝까지 함께 가는 거다! 그렇지? (0/1)] ‘아니….’ [함께 매수하고 함께 매도하는 그거. 나, 나도 같이하는 거다! (0/1)] ‘…….’ [우리는 영혼의 동반자니까. 으응. 나, 나는 항상 믿었어. (0/1)] ‘…….’ [주위에서 이기영 후배를 욕하고 손가락질해도 나만은 끝까지 이기영 후배를 믿었다구. (0/1)] ‘…….’ [아! 이, 이제 회의 시간이네. 이기영 신도도 힘내. 나도 최, 최대한 내 나름대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우리는 하나. 우리는 하나다! (0/1)] “얘도 참….” 약간의 불안감이 담겨 있기는 했지만 무척 희망적인 느낌이기도 했다. ‘36일 이후에 혹시나 대륙을 손절하지 않을까 덜덜 떨고 있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결국에는 이기영이 받아들이기로 했구나 하고 반쯤 확신하는 것 같은 분위기.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뒤통수를 조심하는 게 현명한 행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베니고어의 희망적인 분위기가 뭘 뜻하는 건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딱 3일이 남은 타이밍, 그녀가 보기에도 준비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베니고어의 보증 따위는 하등 쓸모가 없지만, 그녀가 느끼기에 대륙이 밝은 분위기를 향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얘도 먹을 게 많으니까.’ 기본적으로 본인의 일터를 지킬 수 있다는 게 가장 행복한 소식일 것이다.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이득에 대해서도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지 않을까. 승진이야 당연한 거고, 바깥 놈을 밀어내거나 처치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인센티브까지 받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빛 쪽으로 움직이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그녀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동아줄이 내려오는 셈. 분위기상 나와 김현성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의견이 갈리는 것 같기는 했지만, 녀석과 내가 태풍의 핵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지 않은가. 윗분 한 분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이미 한 자리를 차지하는 거야 확정된 이야기. 베니고어도 은근슬쩍 그 줄에 합류하려는 거겠지 뭐. 얘가 사실은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괜스레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자 앞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얘랑 놀고 있었지. “부길드마스터 차례입니다.” “…….” “…….” “아. 네. 제가 조금 넋을 놓았네요.” “여유 있게 하셔도 됩니다. 뭐 딱히 우열을 가리자고 하는 게임도 아니니까요.” 눈앞에서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인형은 조혜진이다. “누가 우열을 가리는 게임이 아니라고 했어요? 우열을 가리는 게임 맞아요.” “네. 그럼 그런 거로 해요.” “…….” “…….” “안 둔 사이에 혜진 씨는 실력이 많이 줄었네요.” “그렇다기보다는 부길드마스터가 실력이 는 것 같습니다. 잘 두시네요. 확실히.” ‘얘 이거….’ “아. 그보다 이 차 한번 마셔보세요.” ‘…….’ “건강에 좋은 차라고 합니다. 특히 머리를 맑게 해주는 차라고…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이런 건 어디서….” “베니고어 넷에 있는 사람들이 추천해 줬습니다. 아마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와….’ 얼굴을 보니 세상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내가 정신이 없기는 없었나 보다.’ 조혜진이 접대 게임을 해주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어쩐지 별로 초조해하는 기색이 없다고 느껴지기는 했다. 게임이 이렇게 기울었는데 보여주는 표정이 아니다. 체크메이트를 맞기 직전의 상황에도 푸근한 미소를 올리고 있지 않은가. 남이 나를 걱정해 주고 있다는 건 짜릿하기는 했지만 이건 조금 자존심 상한다. 가볍게 입을 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슬그머니 말을 집어둔 이후에 이죽거리면 반응이 오지 않을까. “차는 맛있기는 한데… 게임이 영… 제가 실력이 는 게 아니라 혜진 씨가 줄어든 게 맞습니다.” “…….” “너무 쉬운데… 혹시 머리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 아니죠? 아까 거기서 그렇게 뒀으면 안 됐죠. 나 참 수준이 맞아야 게임을 하지….” “…….” “조금 더 연습하고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결전의 날까지 이틀 남았다고 싱숭생숭한 건 이해하는데 진짜 경기력 썩었네요. 어이구! 맛있게 먹겠습니다. 폰으로 나이트를 다 먹어보네. 끝내줍니다. 끝내줘요. 키야.” “…….” “체크메이트가 눈앞에 보이는데… 이걸 먹을까 말까. 한 번 살려드릴게요. 그 대신 비숍은 가져갑니다. 아이고… 아이고오. 맛있어라. 뇌가 굳은 거 아니에요?” “…….” “아, 너무 쉽네요. 현성이랑 게임하는 것 같은 느낌이네. 진짜.” “말씀이 너무 심하신 것 같습니다. 길드마스터 정도는 아닙니다.” “현성이랑 게임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뭐. 요것도. 잘 먹겠습니다. 후르르짭짭.” “…….” 은근슬쩍 눈빛이 변하는 게 보인다. 입술을 꽉 깨무는 듯한 표정, 조금 단호한 얼굴로 말을 옮기기는 했지만 뭔가 변화가 올 리는 만무했다. 이미 전황은 기울어 질대로 기울어진 상황, 현재 조혜진이 할 수 있는 일은 얻어맞는 것밖에는 없다. “손이 미끄러져서 요걸 또 먹어버렸네.” “…….” “내 정신 좀 봐. 푸흐헤헤헤하핫.” “…….” “췍쿠뭬이트! 다시는 체스 두자고 하지 마세요. 진짜.” “한, 한 판 더하죠.” “뭘 한 판 더해요. 시간도 늦었는데.” “한 판 더해요. 한 판만.” “해봤자 결과는 뻔합니다. 재미도 없고요. 지혜, 아니, 김미영 팀장부터 이기고 와요. 그럼 상대해 줄 테니까.” “딱 한 판만 더해요. 딱 한 판만.” “비굴하다. 진짜. 일없습니다.” “아니, 딱….” “너무 쉬워서 안 해요. 진짜.” “아니… 아니, 딱 한 판만 더 하자고! 진짜 딱 막판 하자고!!” “…….” “…….” “소, 소리쳐서 죄송합니다.”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러십니까. 오늘 온종일 지느라고 수고했는데 소리 좀 칠 수 있지.” “그러니까 딱.” “아니. 진짜 안 한다니까요. 슬슬 정리하고 와인이나 때립시다. 할 이야기도 조금 있고….” “뭡, 뭡니까?” “현성이는 어때요? 잘 지내고 있어요?” “네. 뭐 딱히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나오기 전에 기분이 조금 안 좋으신 것 같긴 했는데… 평소 그대로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길드마스터한테 무슨 이상이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도통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 함께 오고 싶어 하시기도 하셨는데….” “현성 씨는 바쁘시지 않습니까. 제가 방해하면 안 되죠.” “아… 네. 그렇기는 하지만….” “길드 분위기는 조금 괜찮고요?” “네. 괜찮습니다. 하얀 씨에게 조금 문제가 생긴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것도 잘되고 있는 거네.’ 이제 정말로 마지막 퍼즐 하나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정말로….” “네. 얼마 안 남았죠.” “괜찮을 것 같습니까?” “괜찮을 겁니다.” “계속 초조하셨던 것 같은데….” “일단 그 문제는 해결됐어요.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고 제 생각대로만 잘 풀리면 좋겠네요. 기왕이면 아무도 다치는 사람 없이 끝내는 게 가장 베스트라고 생각하는데. 쉽게 됐으면 좋겠네요.”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겁니다.” “글쎄요…. 네,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군요.” 불안함을 감지한 듯 뭔가 입술을 깨무는 조혜진의 표정이 눈에 비쳤다. 데스플래그를 투척당한 것만 같은 표정. 무슨 일 있냐고 묻고 싶다는 얼굴이다. 뭔가 구린 분위기를 감지한 것이다.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돌리는 것처럼 슬그머니 입을 열어온다. “그, 그러고 보니 할 말이라는 게 뭡니까?” “본론은 잊을 뻔했네요.” “…….” “노는 날 딱딱한 말씀을 드리기는 싫은데…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별건 아닙니다. 혜진 씨 임무가 변경됐다는 소식이네요.” “그게 무슨 말….” “전투 초반에는 매뉴얼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그럼 이후에는….” “이건 아주 만약입니다.” “네.”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 “만약에 제가….” “네.” “만약에 제가 잘못된다면 그 이후의 매뉴얼입니다.” 슬쩍 준비해 놨던 문서를 넘기자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조혜진의 얼굴이 시야에 비쳐왔다. “이건… 이… 이건….” 빛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고자 하는 성자의 퀘스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으로 모자라 머리가 어지럽다는 듯이 비틀거리는 모습이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두 손을 벌벌 떨고 있다. 눈에는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고 입술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마치 공황발작이라도 온 것만 같은 모양새이지 않은가. 숨이 넘어갈 것처럼 거칠어지는 숨소리는 내가 다 당황스럽다. 괜히 조혜진을 불러 퀘스트를 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 이거 잘못 골랐나.’ “이기영… 이기영… 이기영… 너.” “…….” “너….” 일단은 처연한 얼굴로 입을 열어보자. 기왕 하는 거 제대로 준비하는 게 맞으니까. “어디까지나 만약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게 마지막이 왔을 경우에요.” # 691 회귀자 사용설명서 691화 이기영 이 개 쓰레기 같은 사기꾼아 (5)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어디까지나 만약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여튼 맨날 이런다니까. 쓸데없이 과민반응 보이지 마세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 그게…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왜… 왜 이런 걸….” “누군가는 수습해 줄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어린아이들끼리 노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대륙은 지금 위기에 놓여 있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커다란 전투가 시작될 겁니다. 이제 이틀 남았어요.” “…….” “누구 하나 죽어 나간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없습니다. 혜진 씨가 죽을 수도 있고, 길드원 중 한 명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다른 이들이 죽었을 경우의 매뉴얼도 가지고 있으니 과민반응할 건 없어요. 대륙에서 이기영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요. 제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마 커다란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대륙뿐만이 아니라 파란 길드원들도 그래요. 누군가는 수습해 줘야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째서 이런 걸 만들어 놓은 거냐고 묻잖아!” ‘아니, 시바 혜진아. 왜 그렇게 흥분을 하고 그래. 둠혜진이 하고 싶어?’ “왜 자꾸 두 번 말하게 만들어요? 말했잖아요. 만약의 상황이라고.” “이게 만약의 상황을 위해 만들어 놓은 지령서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 치워. 이… 이….” “…….” “죽을 작정이야? 죽… 죽을 작정이냐고.” ‘아이, 시바. 너무 디테일하게 만들었나.’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더 흥분하고 있는 조혜진의 모습이 눈에 띈다. 얘가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했었나 싶어 기분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당황스러운 감정이 더욱더 크다. “제 성격 아시는 분이 왜 이러세요? 내가 죽을 사람으로 보여요?” “그럼 설명을… 설명을 하라고.” “설명해 드릴 게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냥 그대로니까 그렇게 알아두시면 돼요. 아니, 진짜 왜 그래요?” 조혜진을 선택한 게 잘못된 선택은 아닌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볼 정도였다. ‘그의 긍지를 더럽히지 말라며. 혜진아.’ AKA.그긍더 조혜진은 도대체 어디로 갔어. 네가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게 빛기영의 긍지를 더럽히는 일이라는 걸 왜 모르니. ‘시바… 좀 그긍더 하라고 진짜.’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얼굴에 내가 다 초조해진다. 빛과 함께 모든 걸 희생하기로 한 내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생각해 보라.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 역시 많은 결심을 한 이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겠다고 막 마음먹은 타이밍이었다. 조혜진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쌍방으로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얘 이거 김현성한테 말해버리는 건 아니야?’ 하는 불안감이 치솟을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 없다. 1회차 때보다 나를 더 적대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아직까지 눈물은 흘러내리지 않고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황상태에 빠진 것 같은 모습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사고 칠 것 같은 얼굴. 어떤 식으로라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개소리하지 마. 개… 개소리하지 말라고. 이… 이건 못 본 거로 하겠습니다. 못 본 거로 할 테니 다시 집어넣으세요.” ‘이거 시바 하극상이야. 명령 불복종이라고.’ 상급자로서 따끔하게 한마디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불길한 생각이 끊이지 않는지 조혜진의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다시는 이런 생각하지 마. 이기영 너는 안 죽어. 절대로 안 죽는다고.” ‘아니야. 나 죽어야 돼. 죽어야 되는데 진짜 왜 그래.’ “괜한 짓 하지 말고 제대로 읽어요.” “싫다고 말했습니다.” “혜진 씨밖에 없습니다. 혜진 씨밖에 없다고요.” “…….” “만약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아. 얘 감정 올라왔다.’ “내가 네 말을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믿으라고. 입만 열면 거짓말… 거짓말하는… 하는 주제에.” 목이 메는지 점점 더 울음기가 번지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끄윽, 흐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조혜진은 결코 멍청하지 않다. 만약을 위해 준비된 서류를 읽고 감정 과잉이 돼 눈물을 흘리는 건 조혜진답지 않다는 거다. 아마 그녀 역시 대충은 예상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마주해야 할 커다란 시련과 두려움, 그 모든 걸 짊어질 희생에 대해서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혜진은 이기영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다. 절대로 자신을 함부로 던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고,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캐릭터가 아니라는 것 또한 이해하고 있다. 저절로 답이 도출되는 것도 당연했다. 내가 의도한 바와는 조금 달랐지만 아마도 조혜진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기억상실뿐만이 아니었다고. 죽어가고 있는 것은 모두와 함께했던 추억뿐만이 아니었다고. 죽어가고 있는 것은 이기영 그 자체였다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거라고. “입만… 열면… 흐윽… 거짓말… 하잖아.” 이제는 의식했는지 두 손으로 눈물을 연신 닦아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가져가요. 다시 가져가라고… 그런 거짓말… 절대로 안 믿으니까. 괜찮다고 하는 말… 안 믿으니까.” “…….” “가져가. 가져가! 이 쓰레기 새끼야. 가져가라고!” “…….” “이런 걸 받으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 이… 이 기만자 새끼. 오늘 보자고 한 게 이것 때문이었어? 이런 말이나 하려고 초대해서 체스나 두자고 한 거야? 한가하게? 한가하게 체스나 두자고… 흐윽… 체스나 두자고 한 거냐고… 이딴 걸 보여주려고 불렀어?” “너는….” “이 나쁜 새끼야. 이 더러운 쓰레기 새끼… 이제야… 이제야 속이 시원해?!” “혜진….” “이제야 속이 시원하냐고! 그렇게 혼자 다 짊어지는 척하면… 네가 뭐라도 될 것 같아? 흐윽… 남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그렇게 사람을 놀려 먹으니까. 이제 조금 기분이 좋아졌어? 내가 웃고 떠들고 있는 걸 보니까. 속이 후련했어?” “…….” “겨우 이것밖에 안 돼? 너…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야? 포기할 거야? 안 죽는다며.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며. 자기 목숨 챙기는 것 하나는 자신 있다며…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라며! 살 거라며!!! 이… 이 개새끼… 흐윽… 이 개새끼야. 그렇게 살 거라며.” “…….” “말해줄 수 있었잖아. 말해줬으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수도 있었잖아. 현성 씨랑 잘 되게 해준다고 말했었잖아. 그것도… 그것도 전부 거짓말이었지. 전부 다… 전부 다 거짓말이었어.” “…….” “일이 다 끝나면 한가하게 놀러 나가자는 것도, 일이 끝나면 밤새도록 체스나 두면서 밀린 이야기나 하자는 것도, 같이 쇼핑 나가자고 했다는 것도… 전부… 전부 거짓말이었어… 전부 흐윽… 전부 거짓말이었어.” “미….” “사과하지 마. 사과하지 마!” “안….” “사과하지 말라고! 흐윽… 사과하지 마아!!!! 이 거짓말쟁이 새끼!!! 이 개새끼!!!! 흐윽… 흐윽… 사과하지 말라고….” “해….” “사과하지 마!!!!!” “일단 진정….” “진정 같은 소리 집어치워. 이 개새끼. 이 개새끼야. 거짓말쟁이 새끼야….” “…….” “말해….” “무슨 말을….” “언제부터였는지. 전부 다 말해. 도대체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건지, 정확히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건지. 말해. 나는 들을 자격 있어. 나는… 나는 들을 자격 있다고. 정확히 얼마나 남은 건지… 이야기해.” “…….” “말하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거짓말하면 그 입 부숴 버릴 테니까.” “정확히는 저도 잘….” “…….” “후우….” “…….” “…….”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정확히 언제라는 건 나도 알 수 없지만 긴 시간은 아니고요. 증상을 깨달은 것도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고… 일부러 숨긴 것도 아니에요. 저도 알아차린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면 조금 이해가 돼요?” “…….”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저도 알 수 없지만… 이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만약 방법이 있었다면 제가 먼저 찾았을 겁니다.” “그걸 네가… 네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 건데.” “…….” 다른 말이 필요할 리가 없다. 천천히 빛의 날개를 펼쳐보자. 순식간에 온몸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하고 커다란 신성이 몸 안에 깃든다. 어두웠던 방 안을 비추는 빛은 웅장해 보이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인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 그 정도로… 서글프게 느껴졌다. “이… 이것 때문….” 고개를 젓자 다시 한번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보였다.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미 이기영의 몸은 예전에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내가 자신의 몸을 얼마나 혹사시켰는지 알고 있다면 당연히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약한 신체로 몇 번이나 거대한 사선을 넘었다. 분에 넘치는 동료들과 함께, 평생을 노력해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을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정말로 많은 일을 겪었다. 힘들기도 했고 가끔은 눈물을 흘릴 일도 있었지만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과정이 즐거웠으며, 이 역경과 고통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래 그런 설정이다. 그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몸은 그 시간들을 견디지 못했다. 한때 악마들에게 붙잡혀 살아 있는 게 기적일 정도로 몸이 넝마가 된 적도 있었고, 부작용에 약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틴 적도 있었다. 나 역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기영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죽어가는 신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신성. 베니고어 여신이 한 인간을 가엽게 여겨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버틸 수 있는 신성을, 스스로 매듭지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 “흐윽…. 흐윽… 거짓말하지 말라고… 제발…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줘.” 거짓말이 아니다. “제발… 부탁이니까. 거짓말이라고… 말해줘, 제발….” “거짓말이 아닙니다.” 빛기영의 대륙을, 아니, 내 사람들을 지키고 싶은 두 눈에 거짓 따위는 없다. “흐윽… 어떻게… 어떻게….” 솔직히 희생이라는 말은 이기영과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다. “어울리는 말은 아닙니다만….” 하지만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이미 끝이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면 이런 엔딩도 나쁜 엔딩은 아니다. “뭐, 받은 만큼 돌려주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저도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기왕 벌인 일은 잘 마무리 지어야죠.” “…….” “혹시 압니까. 일이 잘 매듭지어지면 포상의 의미로 베니고어 님이 저를 살려주실지 누가 알겠어요? 솔직히 전부 다 내던지고 도망치고 싶지만, 그런 선택을 하면 몸을 유지하고 있는 신성까지 뺏어가지 않을까 무섭더군요. 그렇지 않아요? 기껏 대륙을 구하기 위해 내려준 신성을 도망치는 데 사용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제가 신이라면 괘씸해서라도 천벌을 내렸을 겁니다.” “흐윽….” “전부 다 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신경 쓰지 마요. 저도 조금은 변했습니다.” “흐윽… 흐으윽….” “아마 예전이었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너 죽고 나 죽자 심정으로 개판 돼도 나 몰라라 했겠지만… 그냥 갑자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임이라는 거, 그걸 심어준 게 혜진 씨인 것 같습니다. 제가 속해 있고 제 안에 들어와 있는 이들에 대한 책임이요. 익숙하지 않아서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흐윽… 흐… 으으윽… 끄윽.” “나랑 어울리지도 않고, 이런 말 하기도 부끄럽지만 저는 제 행동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긍지라는 거. 그걸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흐윽… 흐으윽….” “그러니.” “흐으윽….” “제 긍지를 더럽히지 마세요.” “…….” “…….” “이기영… 이 쓰레기 같은 새끼….” “…….” “이기영… 이기영 이… 개 쓰레기 같은 사기꾼 새끼… 흐윽….” 빛처럼 새하얀 장내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흐느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기… 히끅… 사기꾼… 흐윽… 새끼….” # 692 회귀자 사용설명서 692화 마지막을 준비하자 (1) [진짜 인간 쓰레기다. 진짜로.] [왜 그래. 누나.] [꼭 그렇게 훼방을 놔야겠어요? 나랑 혜진이랑 노는 게 그렇게 아니꼬웠나?] [무슨 말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 근데 어제 혜진이 새벽 3시까지 놀다 갔음.] [내 약속까지 깨면서 그러는 건 아니지 진짜. 오래전부터 잡아놓은 약속이었는데. 전쟁 들어가기 직전에 휴일 한번 만들어보려고 얼마나 무리한 줄 알아요? 어제가 딱 하루 비는 시간이었다고요. 근데 그걸 파투 내? 솔직히 오늘 만났어도 상관없었던 것 아니었나? 일부러 나 엿 먹으라고 저격한 건 아니죠?] [같이 사진도 찍었음ㅋㅋㅋ] [얘가 심란해서 베톡도 안 읽잖아요. 진짜.] -이기영 님이 사진을 전송하셨습니다. [사진 잘 나왔지ㅋㅋㅋ] [누구는 시한부랑 기억상실 같은 거 못 써서 안 쓰는 줄 아나 봐? 두고 봐. 나도 기가 막힌 거 하나 만들 테니까. 한번 보자고요. 진짜.] ‘안 그래도 얘 심란해 죽으려고 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절로 혀를 쯧쯧 차게 되는 문자였다. 어제 조혜진이 어떤 표정을 보였는지 이지혜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저런 대사를 날릴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얘 인성이면 알아도 강행하지 않을까. [마취 물약 하나만 팔아요.] [내가 쓸 것밖에 없어.] [많이 만들어 놓는다고 했잖아요. 티끌만큼의 고통도 느끼기 싫다고 계속 개량했잖아요. 그중에 하나만 팔라고.] [나는 진짜로 필요해서 쓰는 거고 누나는 주작하려고 쓰는 거잖아.] [너도 주작이잖아.] [아니, 나는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니까. 진짜로 필요해서 쓰는 거라고, 누나.] [아무튼 주작이잖아. 이 사기꾼아.] ‘주작 아니야. 누나.’ 인류를 위해 희생하는 빛의 뜻을 어떻게 몰라줄 수 있는지 착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연수랑 얘들 몇 명 불러서 같이 놀았다며.] [다 같이 모이는 자리였다고요. 조혜진도 있어야 하는 자리였다고….] [일이잖아. 나도 누나 생각했으면 그런 말 안 했지. 그리고 오늘 할 일이 왜 없어? 조금 이따가 연설 준비도 해야 하고, 하얀이 건도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지금 내가 괜히 교국에 있는 줄 알아? 그게 제일 중요하잖아. 그리고 진짜 이게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 감정 잡아야 돼. 진짜. 이번 일은 감정선이 중요하다고.] [일 끝나면 스케줄 잡아놨으니까. 아직 답장은 안 왔지만, 그것도 훼방 놓지 마요.] [아니, 진짜 누가 들으면 내가 누나랑 혜진이랑 친하게 지내는 거 보기 싫어하는 줄 알겠네.] [맞잖아.] ‘아니, 진짜 아니라니까.’ [감정 좀 잡자. 누나. 진짜 중요한 일이라고.] 손거울 너머로 이지혜가 화가 난 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쪽에게 컨트롤 프릭이니 뭐니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이지혜 역시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 이죽거리기는 했지만 본인이 원하는 시간을 즐기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무척 억울해하는 모양새이지 않은가. 마취 물약까지 챙기는 걸 보면 극단적인 방법까지 쓰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스스로를 희생하는 이기영을 이길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떠나 대륙을 위해 이 한 몸 불살라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빛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 이 감정은 진짜였다. ‘지켜야 돼.’ 아름다운 이 땅, 그리고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이들을 지켜야 한다. 솔직히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막상 이기영의 삶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이야기라는 거다. 여러 가지로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이를테면 마취 물약 같은 거… 그것도 센 놈으로…. 스스로 정리해야 할 일도 있었다. 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지 알 것 같은 느낌.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조용히 여신상에 기도를 올리는 자신의 모습에 조금 취할 것 같기는 했지만 복잡한 심정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준비해야지.’ 마음의 준비를, 떠날 준비를 하자. “명예추기경.” “바젤 교황님….” “베니고어 님과 함께하는 시간에 내가 눈치 없이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그렇지 않습니다.” “명예추기경의 뒷모습이 너무 슬퍼 보여서 말이야. 입에도 담기 힘들고 담아서도 안 되는 말이지만… 마치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처럼 느껴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조금 더 조심해야지. 티를 내면 안 돼.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받을지도 모르니까. “그래. 그럴 리가 있겠는가. 베니고어 님께서 명예추기경을 얼마나 아끼시는데….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이거 내가 괜한 말을 했군….” “그만큼 저를 염려해 주신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바젤 교황님.” “하하. 여전히 명예추기경은 내가 듣기 좋은 소리를 골라서 하는구만. 하지만 다른 이들이 입에 담는 말처럼 거짓이 느껴지지 않아. 애초에… 애초에 명예추기경은 거짓말이라는 걸 해본 적은 있는 겐가.” “저도 사람입니다. 교황님.” 바젤 교황의 말에 쓴 웃음을 짓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어쩌면 정곡을 찔렸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렇게 모두를 속이는 게 정말로 괜찮은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나는 괜찮을 거라고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웃으며 넘기는 것이 과연 정말로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일까. 모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매듭을 지어야 하는 게 건강한 엔딩 아닐까. 하지만 그들이 감당할 슬픔을 생각하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용기가 생기지 않았던 탓이다. ‘이기영… 이 겁쟁이 새끼.’ 다른 이들이 조혜진처럼 슬퍼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알 수 없는 감정 때문에 몸이 떨려온다. 슬픔을 감당하는 것은 이기영 하나로도 족하다.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길드원들의 멘탈에 문제가 생긴다면 대륙의 안위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 땅 위에 살아갈 모든 이들을 위해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두려워하지 말자. 기영아. 무서워하지 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니까.’ “표정이 좋지 않군.” “아무래도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당장 내일이 아닌가. 나 역시 여신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많은 신도들을 독려하고 있지만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라네.” “…….” “무섭지.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항상 바젤 교황님을 살피실 것입니다.” “죽을 때가 다 된 내가 여신님의 가호를 받아 무엇 하겠는가. 나는 데려가더라도 명예추기경만은 데려가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이야. 이번 전쟁에서도 교황청을 떠나지 못한다니…. 이 늙은 몸뚱이가 이렇게 원망스러운 적은 처음이네.” “너무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황청 안에 모여 있는 저들을 보십시오. 모두가 바젤 교황님만 믿고 있는 이들 아닙니까. 저 역시 바젤 교황님이 아니었다면 이번 일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을 겁니다. 다시 한번 저들을 보십시오, 교황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이들 말입니다. 이곳은 최후의 성지입니다. 만약 북부에 있는 거점들이 모두 적들의 손에 넘어간다면 저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교황님뿐일 겁니다. 주제넘은 소리처럼 들리신다면 죄송하지만 조금 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그래야지. 그래야겠지…. 내가 약한 소리를 했구만…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어.” “…….” “함께 내려가세. 명예추기경.” “네.” “이후에는 무엇을 할 생각인가.” “제 연인과 함께 시간을 보낼 계획입니다.” “그렇구만… 그렇겠지. 명예추기경 역시.” “부끄럽습니다.” “전혀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세. 그동안 오직 대륙만을 위해 뛰어오지 않았나. 명예추기경이 아끼는 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정도야 당연하겠지. 내가 괜한 부탁을 한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진작에 찾아뵀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교국은 제 고향이며 제 영혼이 숨 쉬고 있는 곳입니다. 전쟁피난민들을 격려하는 것은 교국의 명예추기경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명예추기경은 그런 사람이었지.” 슬그머니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자 작은 소리가 모여 만드는 커다란 소리가 들려온다. 교황청으로 임시 피난을 온 피난민들의 모습, 아무리 교황청의 지원이 있다고는 하더라도… 인원이 인원인 만큼 열악한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 모습들이다. 모두가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괜스레 입술을 꽉 깨물게 되고 다시 한번 커다란 다짐을 하게 되는 광경이었다. “명예추기경님.” “부디 대륙을 구원해 주십시오.” “명예추기경님….” “베니고어 여신님. 부디 명예추기경님을….” “부디 교국을….” “교국을 지켜주십시오.” “명예추기경님.” “베니고어의 현신이시여.” “신의 아들이시여. 부디 우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무섭다. 이 책임감이, 나를 짓누르는 중압감이 나를 두렵게 한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몰려드는 군중들 때문에 신성기사단 역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상황. 왠지 모르게 이런 상황에서는 말도 안 되는 기동력과 우연의 겹침으로 신성기사단을 뚫고 들어오는 작은 어린아이가 튀어나와 주게 마련. 저번에도 이런 상황에서 한 번 튀어나와 줬던 것 같은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는 튀어나와 주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웠다. ‘아, 시바. 연출 담당자 누구야. 지혜 누나 삐졌어? 진짜?’ 잠깐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붙잡아!” 누군가를 붙잡으라는 커다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반가운 마음에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자 당황하는 신성기사단과 그 신성기사단의 손을 빠져나오는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다. 이제 막 16살 정도는 되었을지 모르겠다.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면 수도의 뒷골목에서 꽤 날렸을 것만 같다. 꼬질꼬질한 모습,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베니고어 교국의 로자리오. 이것 역시 꼬질꼬질하다. ‘아이고. 이 귀여운 새끼.’ 타이밍 좋게 등장한 녀석에 저도 모르게 포근한 미소가 지어졌다. “괜찮습니다.” 암살자 같은 게 아니다. 이름 모를 소년은 단순히 자신의 손에 쥔 로자리오를 전해주기 위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명예추기경님. 지금 당장….” “아니요.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쪽으로 올 수 있게 도와주세요.” 신성기사단 신참의 이런 무능력한 모습은 오히려 고맙기까지 하다. 다시 한번 앞을 바라보자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소년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녀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꼭… 꼭 전해드리고 싶어서.” “고맙구나.” “꼭… 전해드리고 싶… 싶어서….” “고맙다.” “꼭… 어….” 감사는 제대로 표현해야지. 더러운 손을 꽉 붙잡은 것은 당연지사.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는 듯 깜짝 놀라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불경죄라도 저지르는 것마냥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은 초식동물처럼 애처롭다. 찬란한 빛이 퍼져 나간다. 녀석의 몸 상태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신성으로 가득 차고 있는 자신의 몸 상태를 깨닫고 있지 않을까 싶다. “어… 어….”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광경이다. 녀석이 손에 들고 있는 로자리오를 슬그머니 빼낸 이후 이쪽의 목에 거는 것 역시 마땅히 해야 할 행동. 아니, 그것보다는 걸어달라고 하는 게 더 효과가 좋을 것 같다. “걸어주겠니?” 아직은 키가 작은 녀석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마주치자 잔뜩 긴장한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보였다. 두려움, 기쁨, 당황스러움, 믿음, 수많은 감정이 들어서 있는 눈은 뭐라고 표현하기도 모호했다. 앞으로 대륙을 이끌어 나갈 아이, 교국의 희망, 인류의 미래, 이기영은 이들을 위해 죽는다. 의미 없는 죽음은 아닐 것이다. 후회 없는 죽음도 아닐 것이다. 아니…. ‘후회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후회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아이의 미래를, 이 소년이 살아갈 세상을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정말로… 고맙다. 큰 힘이 됐어.” “어… 어….” 내가 녀석의 눈에서 감정을 읽었던 것처럼 녀석도 내 눈에 들어 있는 감정을 읽었던 것일까. “어… 죄송… 합니다. 흐윽… 죄송….”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하는 성자의 책임감을… 결국에는… 결국에는… 읽고야 만 것일까. “죄송합니다… 흐윽… 죄송… 죄송합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만 있는 녀석을 나는 살짝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 얘한테는 진짜 고마웠다. “힘내세요. 힘… 힘내세요. 꼭… 이기세요.” # 693 회귀자 사용설명서 693화 마지막을 준비하자 (2) “힘내세요… 힘내세요. 명예추기경님.” ‘힘을 내기는 해야지. 아, 근데 시바, 진짜 무섭기는 무서워.’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섭기는 무섭다. ‘뒈질 때 아플까?’ 솔직히 별로 생각하고 싶은 부분은 아니다. 일이 대충 어떻게 돌아갈지는 예상하고 있었고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기는 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는가. 정말로 뒈지는 순간을 피하지 못하고 엔딩을 맞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내던진 주사위를 다시 주워오고 싶은 심정이다. 이지혜는 어차피 진짜 죽는 것도 아닌데 감정 잡는다고 코웃음을 보내오기도 했지만, 지가 당사자였다면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못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니, 이거 시바 진짜 죽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간헐적으로 찾아올 정도. 굳이 예를 들어보자면 이렇다. 마시면 죽을지도 모르는 독약을 마신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쓰러진 이후에 해독제를 넣어줄 사람이 있고, 마시기 직전에 말려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한들, 정말로 독약을 들이켤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 ‘와, 진짜 생각해 보니까 진짜 그러네.’ 이기영은 희생하기로 결정했고 독약을 삼켜 넘기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누구보다도 대륙을 위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동요하면 안 돼. 기영아. 이번 것만 마무리하면 돼. 그렇잖아.’ 이쯤 되면 대륙의 진짜 영웅이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다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아무튼 모든 준비는 마쳤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하얀의 벽 넘기만 제외하면 말이다. 오늘 하루 동안 소화해야 할 스케줄도 많다 보니 이 시간을 잘 마무리한 건 맞는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쁘지는 않았다. 중간에 튀어나온 녀석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고 전쟁피난민들의 동요를 조금은 낮출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모든 것을 내던지려는 책임감 있는 성자의 얼굴도 확실히 여신의 거울에 옮겼고, 내 안에 있는 빛 역시 한 번 더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따로 배웅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황님.” “하하, 괜찮네. 명예추기경. 이제 올라가는 겐가.” “예. 아마 슬슬 도착할 겁니다.” “오, 오, 오빠.” 아니나 다를까 마력의 유동과 함께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꽤 힘차게 나를 부른 것 같았지만 옆에 바젤 교황이 있다는 사실에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였다. “저, 저, 저 왔어요.” “그럼 나는 이만 비켜줘야겠군.” “…….” “그럼… 무운을 비네. 명예추기경.” “예. 바젤 교황님 역시….” 뭔가 희망적인 분위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바젤 교황 역시 내 눈에 깃든 정체불명의 책임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데리러 온 정하얀 역시 마찬가지. 무슨 일이 터질 것처럼 불안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괜스레 씁쓸한 얼굴을 하게 만들었다. “그럼 갈까?” “네. 이, 이제….” “응. 곧이지. 하얀이는 조금 어때?” “저는 괜찮아요. 컨, 컨디션도 괜찮고요. 잘…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하얀이한테는 참 기대하는 부분이 많거든.” “정, 정말인가요?” “물론, 당연하지. 다른 누구보다도 하얀이에게 거는 기대가 커. 매뉴얼은 잘 숙지하고 있는 거지?” “네. 물… 물론이죠. 네. 그, 그런데 조금… 뭐, 뭐가 잘못된 것 같아서요. 바뀐 것 같아서… 매뉴얼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 같아서요.” “응?” “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그럼 이동할게요.” “항상 고마워.” 잠깐 동안 몸이 이동되는 느낌이 든 이후에는 다시 한번 시야가 뒤바뀐다.  익숙한 공간, 중앙에 도착한 것이다. 잠깐 몸을 점검하고 있는 와중에도 자꾸만 뭔가 하고 싶다는 말이 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얘도 슬슬 말해오겠는데.’ 계속해서 빛 모드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저 얼굴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든 것은 당연지사. 자꾸만 찝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보였기 때문이다. 내 눈에 깃든 희생의 기운을 느낀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 눈빛은 정하얀과 만난 시점부터 안쪽으로 집어넣고 있었으니까. 정하얀이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내가 아닌 한소라의 상태이지 않을까. ‘아… 이거 불안하네.’ 스위치를 누르기가 슬쩍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진짜 필요하기는 필요한데.’ 이번에도 내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튀어나갈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대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죽어.’ 항상 생각하듯 정하얀이 벽을 넘지 못하는 전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사고가 날 것까지 예상하고 하루 전날까지 정하얀을 피해 다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니 모든 준비를 끝마친 이후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정하얀이 지금 당장 일을 터뜨린다고 해도 인류는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꾸만 물어오고 싶은 걸 물어오지 못하고 있는 얼굴. 기왕이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버티고 싶은 만큼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고 했을 때였다. 용기를 낸 정하얀이 천천히 입을 열어온 것. “저… 저, 오빠.” 최근에 자신에게 일어난 이상한 일에 대해 물을 심산인 것 같았다. 당연히 현재 그녀가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한소라.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소라 씨. 준비해요. (0/1)] [한소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아니, 그냥… 조금만 더 시간 끌까? 지금 터지면 연설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오빠….” ‘아 시바.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끝난 것 같은데… 지금 시작해도 될까?’ “그러니까요.” ‘아… 시바. 나 진짜 죽어야 될지도 모르는데… 조금 더 생각해 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당연하리라. 정하얀에게 입을 여는 시점부터가 예언의 날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만약 감춰진 진실이 드러난다면 분명히 액션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정하얀은 항상 그래왔으니까. 내 일은 아니었지만 현재 한소라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과격한 반응을 보여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 그러니까. 소라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응.” “저, 저번에 그… 모, 모임에서 봤을 때 이,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져서….”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질적인 기운?” “뭐라고… 설, 설명드릴 수 없는 기운이어서… 그러니까… 사, 사실 소, 소라랑 싸웠을 때도 비, 비슷한 게 느껴지기는 했었거… 거든요.” “…….” “그…그때는 진짜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작아서… 확, 확신도 할 수 없었는데… 사… 사실 오빠 몸에서도 느… 느껴져서 제가 지… 지운 적도 있었어요.” “그게…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딱히 몸에 이상은 없는 것 같았는데….”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정말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듯 분위기를 잡자. 본인의 불안감이 현실화가 됐다는 걸 인지했는지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정하얀의 얼굴이 시야에 비쳐왔다. 단순히 웃어넘기고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중이지 않을까. 조금만 조심스럽게 일을 되짚어 보면 이게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하얀 역시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한소라에게 찾아온 이질적인 기운, 그리고 하루하루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이질적인 마력이 커지는 걸 바라보고 있는 상황. 이제는 절대로 자신을 배신한 친구는 신경 써주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는 했겠지만, 어떻게 정하얀이 한소라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적과의 전투를 준비 중이라면 한 번쯤은 이번 일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맞다. 원래대로였다면 한참 전에 물어봐야 정상이었을 테지만, 이런 말을 한소라가 아니라 나한테 해온다는 것부터가 정하얀의 부족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가 아니겠는가. 정하얀은 현재 의심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애써 눈을 감고 있었지만…. ‘오늘도 훔쳐본 건가?’ 한소라가 현재 달고 있는 커다란 암 덩어리가 무엇인지, 도대체 저게 뭔데 자꾸만 커지고 있는 건지, 정하얀은 궁금해하고 있다. “몸…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데… 그냥 이, 이상해서요. 그냥… 이상해서… 그… 박미진이 준 버프… 버프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속… 계속 이상해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점점 더 정하얀의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상상하기 싫은 것을 상상하는 사람의 얼굴, 둠기영을 처음 봤을 때의 얼굴과 유사했다. 눈은 계속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손톱을 까득까득 깨물기 시작한다. 내 표정이 그만큼 심각해 보였던 걸까. 어느덧 눈에서는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나 역시 한번 숨을 가다듬는다. 정하얀이 패닉 상태에 빠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건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소, 소라한테… 문제가… 박미진이… 버프를… 박미진이… 소, 소, 소라한테 뭔가….” 그리고, 정하얀의 눈물이 눈에 가득 찬 순간, 나는 호흡을 멈추고 천천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박미진이… 누구야?” “…….” “…….” “네?” “박미진이… 누구야… 소라 씨는… 계속 하얀이랑… 같이 있었던 거 아니었어?” “어…? 네? 박, 박, 박미진… 마… 마법사… 그…러니까 오빠가… 분명히 박미진… 어?” “박미진이… 도대체… 누군데….” “차, 차희라… 도 이긴… 이겨서… 저… 저 대신 임무에 들어가는….” “희라 누나는 또 왜… 하얀아. 매뉴얼 못 받았어? 너 대신 임무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어. 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소라는… 소라는 괜찮은 거야?” “박미진… 어? 어? 박… 박미진… 분명히 있었는데… 박미진이라는 애 분명히… 분명히 있었는데? 어? 분명히… 분명히 있었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정하얀이 혼란스러워하는 게 눈에 보인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하는 것 같은 얼굴. 자꾸만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게 보인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눈에 보인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고 어째서 박미진이라는 이가 사라진 것인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서는 것처럼 느껴진다. 박미진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분명히 박미진은 존재했었다. 소수였지만 오빠를 비롯한 몇몇 이들이 분명히 박미진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았고, 그녀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했었다. 박미진 덕분에 1순위 마법사에서 2순위로 내려오지 않았던가. 정하얀은 확실히 박미진을 기억하고 있다. 1차원적으로 생각하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는 이야기. 내가 기억상실 증상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 정하얀이 닿을 수 있는 결론은 한 가지였다. ‘박미진이… 오빠 기억을 지웠어.’ 목적은? ‘오빠에게 해를 끼치는 것.’ 하지만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정하얀은 이기영을 지켜냈으니까. 오빠의 몸에 심어져 있던 이상한 기운은 눈에 보였을 때 곧바로 처리했으니까. 그 이질적인 기운에 대해서도 설명이 가능하지 않은가. ‘외신의 끄나풀.’ 정하얀의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천천히 모이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본인 역시 자기 자신이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지 몸이 덜덜 떨리고 있다. 이미 결론은 지어졌다. 정하얀은 이기영의 몸에 붙어 있는 암 덩어리를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 한소라의 몸에 붙어 있는 암 덩어리들은 제거하지 못했다. “아… 아아… 아아아… 끄윽… 으아아아….” 몸을 부들부들 떨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 “아으… 아으… 오, …오빠. 오, 오빠… 오빠….” “무슨 일이야.” “소, 소, 소라… 소라….” “소라가….” “아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하얀이에게 정이 많이 들기는 들었나 보다.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정하얀에게 평소답지 않은 죄스러움이 밀려들어 왔지만 이쯤 되면 이기영 역시 깨달았다는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전쟁은 훨씬 더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인류가 준비하며 방심하고 있었던 사이, 외신의 끄나풀들은 이미 일찍이 인류를 갉아먹을 준비를 마쳤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어야 했어.’ 이기영은 운 좋게 화를 피할 수 있었지만 한소라는…. 한소라는 화를 피하지 못했다. ‘이… 더러운 외신쓰레기… 이 더러운 개자식들.’ 일찍부터 전쟁이 시작됐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두 손을 쓸 새도 없이 완벽하게 농락당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이기영의 완패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허물어지는 정하얀의 두 손을 꽉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 694 회귀자 사용설명서 694화 마지막을 준비하자 (3)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진다. 눈은 칙칙한 후회로 물들어가고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점점 더 일그러지는 표정이 보였다. 허물어지며 비명을 내지르는 게 정하얀이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정하얀은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한소라는… 한소라는 괜찮은 건가?’ 나 역시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일단은 정하얀을 안정시키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든 상황. 둘 중 하나라도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쪽마저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들어간다면…. ‘그거야말로 놈들이 바라는 바야.’ 내부가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놈들은 행복한 비명을 내지를 것이다. 본래부터 이게 목적이었으니까. 하나가 되려는 인류의 전투 의지를 상실하게 하고 안에서부터 공략하는 것이 놈들의 진짜 목적이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이런 방법을 쓰면서까지 대륙을 위협하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째서 한소라에게 이런 불운한 위협이 닥쳐왔는지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금방 떠올려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아마 놈들이 노린 건. ‘나야.’ 박미진을 통해 진짜로 얻으려고 한 것은 이기영이다. 녀석들의 진짜 목적은 한소라가 아니라 이기영이다. 어떻게 보면, 아니, 너무나도 명확하게 그녀는 휩쓸린 것에 불과하다. 이기영의 무능 때문에 말이다. ‘성장하지 못한 건가.’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일을 겪으며 조금은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제자리걸음이 아닌가. 악마 숭배자 이토소우타, 악마 소환사 진청, 그 외 수많은 악마 관계자들, 녀석들에게 당했던 수법 그대로…. 이기영은 아직도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었다. 대륙을 지킬 거라고, 모두를 지킬 거라고 다짐했지만 자기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하는 멍청이에 불과했다. 커다란 죄책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금방이라도 풀썩 쓰러지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더 이상 동료를 잃을 수는 없다는 결의, 그 작은 결의 하나가 현재의 이기영을 이 자리에 서 있게 했다. 그래. 이 정도가 좋겠다. 이 정도 감정선이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하얀아… 시바.’ 문제는 내가 아니라 정하얀 쪽. 비명을 지르다 못해 실어증이라도 걸린 것 마냥 꺼윽꺼윽 말하지 못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눈에서 눈물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제대로 앞은 볼 수 있을지가 걱정될 지경. 지금 빨리 한소라에게 가 봐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주문을 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아… 이거 시바, 한소라를 보여주는 게 맞나?’ 한 발자국을 넘어야 하는 정하얀이 오히려 다섯 발자국 정도 물러선 모양새이지 않은가. 어쩌면 정하얀은 한소라를 보러 갈 용기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는 모습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만 같다. 본인의 친우를 외면하고 밀어낸 결과물이 어떤 것인지, 자신의 실수로 일어난 최악의 상황이 무엇인지 정하얀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똑바로 정하얀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무너지면 안 돼.’ 당연하지만 여기서 무너지면 모든 일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린다. 뭐라도 말을 해야 했다. “아직 안 늦었어.” “…….” “하얀아.” “…….” “네 잘못이 아니야.” “…….” “괜찮을 거야. 분명히.” “…….”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야?” “어… 어….” “정신 차려. 소라 씨에게 가 봐야 돼.” “소라… 소, 소, 소라… 소라….” “아직 살아 있어.” “아… 소, 소라….” “분명히… 분명히 살아 있을 거야.” 일단 살아 있기는 하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눈물을 쓱쓱 닦고 일어나는 모습, 주문을 외워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좀처럼 외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 전혀 정하얀다운 모습이 아니다. 떡락 아니면 떡상 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지금 갑니다. 지금 가요. 주문 외우고 있으니까 준비해요. (0/1)] [한소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이거 시바 망하면 그냥 튀어야겠다.’ 노아의 방주에 시동이나 걸어놓으라고 막스한테도 이야기해놔야지.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아, 안 돼… 안 돼… 이기영 후배. 진심 아니지… 진심 아니지? (0/1)] 아쉽게도 진심이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내가 뭐 할 수 있는 일 없을까? 내, 내가… (0/1)] 이미 베니고어의 손을 떠났다. ‘아. 이거 시바. 괜히 한소라한테 맡겼나.’ 제대로 준비한 게 맞는지도 의심이 될 지경, 그 와중에도 정하얀은 주문을 외우기에 한 참이다. 평소였다면 얼마 걸리지 않을 캐스팅이 계속해서 캔슬되는 것을 보니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조금 더 세세하게 역할이나 대사에 코칭을 해줬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하는 자기반성을 해봤지만 여기서는 한소라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쉬운 일이다. 그냥 죽어가는 척만 해주면 이쪽에서 전부 알아서 해주는 거니까. ‘소라야. 날 실망시키지 마.’ 하지만 정하얀의 주문이 외워진 이후, 한소라의 모습을 눈앞에 목도한 순간, 잠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 “…….” ‘뭐야. 시바. 얘 취향 왜 이래.’ 퀄리티가 중요하니 미쟝센에 조금 더 신경 쓰라고 말은 해놨지만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모습. ‘아니… 뭐야. 시바. 이거 이래도 되는 거야?’ 도대체 이런 건 누구한테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괜히 흑마법사를 선택한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중2 감성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현재의 한소라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 정도 수준을 넘어섰다. ‘미친 거 아니야? 아니, 시바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아니, 이거 시바 이 정도면 하얀이도 눈치채는 거 아니야?’ 한소라의 방안은 이질적인 빛으로 뒤덮여 있다. 딱 여기까지가 내가 설계한 대로. 이질적인 빛의 나무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마냥 매달려 있으라 주문한 적은 없다. 퀄리티가 나쁘지 않다는 게 그나마 위안을 삼을 만한 부분이기는 했다. 온몸이 이질적인 기운으로 빛나고 있으니 언뜻 보면 나무에 점점 집어 먹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무의 가지가 한소라의 몸 안을 파고들었는지 얼굴과 손 등 보이는 부위들이 울룩불룩한 게 눈에 띈다. 아니, 애초에 한소라의 안에서 이질적인 나무가 발아한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더러운 외신이 한소라의 안에 역겨운 씨앗을 심어놓은 것으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해석하니 뭔가 개연성이 맞는 것 같기는 하다. ‘아… 이거 보다 보니까….’ 멋있기는 하네. 한소라가 그린 그림이 뭔지는 알겠어. ‘그래도….’ 너무 과하다. 아무리 봐도 너무 과한 설정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나라고 어째서 둠소라 같은 걸 등장시키고 싶지 않았겠는가. 여건만 된다면 둠소라 기획으로 눈물 콧물 다 빼는 연출을 해보고 싶었지만 그런 커다란 이벤트에는 필연적으로 안정적인 연기가 따라올 수밖에 없다. 한소라에게 커다란 걸 바라지 않은 것 역시 그러한 이유. 괜히 판을 크게 벌이는 것보다 작지만 알찬 내용을 선보이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데 문제가 커져 버렸다. ‘아… 뭐야. 시바. 이거 스케일 왜 이렇게 커.’ 순간적으로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게 당연하다는 거다. 나는 제작비로 다섯 장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얘가 갑자기 정신이 나갔는지 도입부에서만 열 장을 갈겨 버렸다. 등장 연출은 박수를 보낼 만했지만 그 연기를 소화할 배우가 믿음직스럽지 않았고, 이후에 남은 스토리들은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애초에 이거…. ‘아니, 이건 어떻게 한 거지?’ 한소라의 흑마법도 아니고, 선희영 안에 있는 것으로 만들어낸 기운도 아니지 않은가. 혹시나 정말로 외신의 끄나풀이 튀어나온 건가 싶어 긴장하기는 했지만 의외로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이기영 후배! 이 정도면 될까? (0/1)] 무언가 꼬인 곳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 신이 문제였다. ‘시바. 되긴 뭘 돼. 시바.’ 어쩐지 한소라의 얼굴이 뭔가 부자연스럽다 했다. 본인의 몸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당황을 금치 못하는 모양새.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쟤 입장에서는 얼마나 무섭겠는가. 본인 몸에서 갑자기 빛의 나무가 자라나고 심지어 본인은 거기에 매달려 있게 됐는데…. 베니고어의 목소리도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을 테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혹시 자기도 모르게 팽당하는 건 아닌지 무서운 게 당연하지 않을까. 아니, 저런 데다 쓸 신성이 있으면.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블러핑이야! 블러핑! 이기영 신도! 신, 신성도 별로 안 들어갔는데… (0/1)] 난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다. 안 그래도 박덕구 몰카에 참여해 본 경력이 있는 정하얀이 저걸 보고 의심을 할지 하지 않을지 알 수가 없다. 긴장되는 표정으로 정하얀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그런 그녀가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흩뿌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소… 소라… 소라 맞아?” 도저히 본인이 본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눈. “소라… 소라 맞아?” 양팔을 벌리고 간신히 숨을 내뱉고 있는 저 인형이, 이미 이질적인 나무에 먹혀 버리고 있는 저 인형이 정말로 한소라가 맞는지에 대한 의문. “오, 오빠… 소라 아니죠? 저거… 소라… 끄윽… 소라 아니죠. 소라 아니죠? 소라… 흐윽…흐으윽….” “…….” “정…. 하… 얀 님.” “…….” “…….” “어….” “정… 하얀….” “살아 있어. 살, 살아 있어요! 살아 있어요.” “님….” “내, 내가 구해줄 수 있어.” “…….” “내, 내, 내가 구해줄게… 구할 수 있어. 구해줄게. 기, 기다려. 기다려. 그, 그러니까… 흐윽… 내가… 지금 거기서 빼… 빼줄게. 그, 그럼 전부 다 해결돼. 그러면 되는 거니까. 다행이다. 오, 오빠 아직 살아 있어요. 흐윽… 끄으윽… 다행이다. 히끅… 너무 다행이다… 흐윽…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님.” “…….” “흐어엉… 어어어어엉… 소라야. 기다려. 기, 기다려….” ‘이게 된다고?’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내…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0/1)] ‘이게 된다고? 진짜?’ 어떻게 봐도 초심자의 행운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다. “흐엉… 흐으으엉… 지금… 지금 구해줄게. 히끅….” 조금은 상기된 정하얀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일단 숨은 붙어 있으니 이제 저 나무에서만 떼어낸다면 행복한 삶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자신이 한 발 더 빨랐다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인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도 느껴진다. 극한의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가 순간적으로 안심하니 힘이 빠져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겁지겁 한소라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 정하얀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는 슬슬 입가에 미소까지 띠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일이 그렇게 행복하게 해결될 리 만무. 정하얀의 행동이 굳은 것은 한소라가 다시금 입을 연 직후였다. “도망….” “…….” “도망치세요. 여기 있으면… 위험… 해요.” 그녀의 말이 맞다. 한소라의 몸에서 자라난 폭탄이 터져 나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회차 정하얀의 육신을 폭탄의 재료로 사용한 녀석들의 수법 그대로…. 나도 이쯤에서 한마디 거드는 게 좋지 않을까. “이미 늦었어.” 라고. # 695 회귀자 사용설명서 695화 마지막을 준비하자 (4) 씁쓸한 미소를 짓는 한소라의 표정,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묻는 듯한 정하얀의 눈빛. 나 역시 참담한 심정이기는 했지만 누군가는 입을 열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늦었어.” “늦, 늦지 않았어요.” “…….” “아직 안 늦, 늦었는데. 아, 아직 살아 있어요. 소라… 소라 아직 살아 있어요. 오빠.” “…….” “아직 안 늦은 거 맞죠? 그, 그렇죠? 네?” “…….” 다시 한번 더 말하려고 했지만 나 역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절로 입술을 깨물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한소라의 모습이 점점 더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떤 각오를 하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결심했다는 듯, 힘겹게 입술을 달싹이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저는… 괜찮아요.” “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무슨… 흐윽…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구….” “최대한… 멀리… 떨어…지셔야 해요. 더 이상 억누르기… 힘… 힘들어요.” “이,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소라가 항상 나… 나 믿는다고 했었지? 내, 내가 구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조, 조금만 기다려. 소라야. 소, 소라가 나 천… 천재라고 했었잖아. 그,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간단하게 해결될 거야. 으응.” “네. 정하얀 님은… 천재시니까요. 선택받으셨으니까요.” “으응. 그러니까 구, 구할 수 있어. 소라야. 거기서 나올 수 있어. 조금만 더 버티면… 조금만 참으면 내가 꺼내줄 수 있어. 천, 천재니까. 천재니까.” “정하얀 님은 해내실 수 있을 거예요. 분명히… 분명히 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으응…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허겁지겁 한소라를 분석하고 있는 두 눈이 보였다. 정하얀의 머리에 모터가 달려 있었다면 아마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들려오지 않을까. 이곳에서 곧바로 연구를 시작하려고 판을 깔고, 본격적으로 한소라 구출 작전을 시행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짧으면 10분, 길어야 20분이다. 단순히 이 방만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대륙의 몇 분의 일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초인적인 힘으로 애써 폭발을 막고 있는 한소라가 새삼스레 대견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할 수 있어. 응… 할 수 있어. 쉬운 일이야. 응. 나는 할 수 있어.” “막아… 막아주셔야 돼요.” “어?” “막아주실 수 있으실 거예요. 정하얀 님은 천재시니까.” “아니….” “막으셔야 돼요.” “오… 빠?” 전하기는 어렵지만 전해야 한다. “일대가 완전히 날아갈 거야.” “거짓말….” “…….” “거짓말이야. 흐윽… 거짓말… 거짓말이라구… 흐으윽… 끄윽….” 사실 정하얀도 조금은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마력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기운이라고 한들, 팽창하고 있는 저게 보이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베니고어는 단순한 블러핑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묘한 빛이 계속해서 눈에 띈다. 폭탄의 심지가 타들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 녀석이 그냥 한소라를 죽일 작정이었다면 절대로 이런 귀찮은 방법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초유의 사태가 외신쓰레기가 한소라의 안에 씨앗을 심어 둔 이유다. “할 수 있어요. 정하얀 님.” “못, 못해.” “하셔야 해요.” “못, 못해. 흐윽…흐어엉… 끄윽… 오빠. 오, 오빠 어떻게 좀 해주세요. 소, 소라 좀 살려주세요. 소라 좀 살려줘요. 흐어어엉….” 분하지만 나 역시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물론 전혀 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과연 정하얀이 이걸 해낼 수 있을지가 문제. “살려주세요. 끄윽… 제발요. 제발….” 하지만 아무것도 못 해보고 이렇게 한소라를 잃는 것보다는 낫다. “봉인.” “네?” “봉인이라면 가능해.” “봉… 봉인이요?” “봉인할 수 있다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 방 안에 있는 시간을 완전히 동결시키는 종류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소라를 지켜내는 것도 가능할 거야. 술자를 처리한다면 소라의 몸에 내재되어 있는 이질적인 기운 역시 사라질 확률이 높아.” “…….” “물론 확실하지도 않고, 도박에 가깝기는 하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을 거야. 지금 이렇게 터지는 걸 바라만 보고 있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나아. 최소한… 최소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테니까.” “네?” 정하얀이 아니라 한소라가 낸 목소리였다. ‘아. 이거 말 안 해줬었나 보다.’ 엔딩에 대해 설명해 주는 걸 까먹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전쟁 끝나면 봉인 찢고 나옵시다. 소라 씨는 특별히 종말의 날 열외★ (0/1)] [한소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게 뭔 소리냐고, 미친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눈이 보이기는 했지만 한소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 누가 보기에도 봉인되기 싫다는 얼굴이다. 차라리 자신이 희생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겠지. 만약 봉인이 실패할 경우에 일어날 대형사고에 대해서 걱정하는 듯한 모습, 한소라도 변했다는 걸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대륙과 정하얀을 위해 구태여 주사위를 던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지 않은가. 그 와중에도 정하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 이건 어쩔 수 없는 수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계속해서 고여 있는 눈물을 주르륵 흐르게 내버려 두며 정하얀은 떨리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겠어?” “해, 해야 돼요.” 한소라를 살리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쉽지 않을 거야.” “그래도… 그래도 해야 돼요.” 그것만이 한소라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다. “흐윽… 흐으으윽….” “정…하얀 님?” “힘낼게. 소라야. 나… 힘… 힘내볼게. 끄윽….” “네?” “꼭… 꼭 소라를 그렇게 만든 애. 죽, 죽여줄게. 내가… 죽여줄 수 있어. 소라도… 터지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유지될 수 있게. 봉인해 볼게… 끄윽….” “지, 지금….” “미… 미안해. 소라야.” “네?” “미안해… 끄윽… 정말 미안해.” “아….” “모르는 척해서 미안해… 멋대로… 멋대로 그렇게 마음대로 행동해서 미, 미안해… 고, 고, 고맙다고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손으로 밀치고… 마법으로 내쫓아서… 그렇게 막…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해서 미안해. 소라 잘못이 아니었는데도 소라가 잘못했다고 떼써서 미안해. 먼저 사과 안 해서 너무 미안해. 모르는 척해서 미안해. 계속 무시하고 있어서 미안해…흐으으어어엉… 히끅… 내, 내, 내 잘못이야. 소라가 그렇게… 그렇게 된 건 내 잘못이야. 흐으윽… 내, 내 잘못이야. 미안해. 미안해… 너무너무 미안해.” “어… 어? 어… 어… 흐윽… 아니에요. 흐으윽… 정하얀 님 잘못이… 아닌데….” “미안해. 정, 정, 정말 미안해. 소라야. 흐어엉… 흐어어어어엉….” “저도 죄송해요. 저도… 저도 흐윽… 너무 죄송해요. 별것도 아닌 일인데 화내서 너무 죄송해요. 제대로 연락도 못 드리고 잘 해드리지 못해서 너무 죄송해요. 너무 죄송해요.” “흐어어어어엉… 소라야. 소라야.” “죄송해요. 너무… 죄송해요.” “소라는 잘못한 거 없는데… 끄윽… 잘못한 거 없는데.” “죄송해요….” “너무 미안해… 용서해 줘… 흐윽… 용서해 줄 거지?” “사과하실 일도 아닌걸요. 네… 그리고… 오해였으니까요. 이렇게라도 오해가 풀려서 너무 다행이죠… 네. 이제는 미안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미 충분히 사과하셨어요. 그러니까. 고개 드세요. 고개 들고 웃는 모습을 보여주세요. 웃어주세요.” “헤… 헤헤… 끄윽… 헤헤헤….” “네. 그렇게요.” “헤헤… 흐윽… 헤헤헤헤… 끄윽….” “웃어주세요.” “으응… 웃고 있어. 웃, 웃고 있어… 계속 웃고 있을게. 계속… 웃고 있을 거야.” “저… 저 사실은 무서워요. 정하얀 님. 무서….” “아프지 않을 거야. 아, 아, 아무렇지도 않게 해줄게.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제, 제,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나… 나 믿지? 믿어줄 수 있지?” “…….” “난 천재니까.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그… 그렇게… 그, 그, 그렇게에에에!!!”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정하얀을 중심으로 마력이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마력의 크기 때문인지 정하얀의 몸이 저절로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몸을 비집고 튀어나오고 있는 마력이 정하얀의 몸을 띄우고 있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 모습이다. 무슨 주문을 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정하얀은 흔들림이 없는 눈으로 한소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서워요. 무서워요. 흐윽… 정하얀 님. 무서워요.” “무섭지 않을 거야. 내, 내가 해결할 수 있어.” “흐윽… 흑…. 아아아아아아악!!! 정하얀 님… 정하얀 님!” 한소라의 몸에서 이질적인 빛이 쏟아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 한소라 본인도 많이 당황하기는 했는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정하얀은 입술을 꽈악 깨물고 있다.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터져 나오려는 빛을 마력으로 계속해서 막으려고 하지만 그게 생각대로 될 리 만무. 마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블러핑된 신의 빛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사방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어어엉… 정하얀 님! 정하얀 님!! 터질 건가 봐요. 진, 진짜로 터지나 봐요. 흐어어엉….” ‘한소라 연기 진짜 죽여준다. 아, 시바 둠소라 했어도 됐겠는데?’ “이익… 이이이이익! 할 수 있어.” ‘그래.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어!!” ‘당연하지. 시바.’ 저 빛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공간을 통째로 봉인하는 것뿐이다. “아악! 아아아아악!” “할 수 있어어어어어어!!!!” ‘시바. 진짜 한다. 우리 하얀이 진짜 한다.’ 건드릴 수 없는 신의 힘을 마력으로 잡아 본래대로 되돌리는 모습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신?’ 공간 자체가 얼어붙고 있는 것이 보인다. 커다란 빛 때문에 터져 나오고 있는 파편은 물론이고 심지어 뻗어 나오고 있는 빛까지 무색으로 변화하고 있다. 단순한 봉인인지, 정말로 시간을 멈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전자이지 않을까. “이이이이익! 이익!” 하지만 천천히 마력이 사그라들고 있는 것이 문제. 커다란 다짐은 했지만 정하얀으로서도 쉬운 일이 아닌지 자꾸만 무색으로 얼어붙은 공간이 본래의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본인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지 눈물을 머금고 있는 얼굴, 초조한 표정, 어쩌면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여기까지였다고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고 그렇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혀 계획되지 않은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는 한소라를 바라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막지 못하면 이기영까지 죽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넘을 수 있나.’ 눈에 깃든 것은 책임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혹시나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번 위기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정하얀의 몫이다. 액션으로라도 도움을 주는 척을 해보자. 구경만 하기에는 뻘쭘한 상황이지 않은가. 시간과 공간을 얼린다는 불가능한 미션에 합류한 척 커다란 신성을 꺼내 들고 손을 뻗는다. “으아아아아악!” 한소라를 지키기 위해. 대륙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번 모든 걸 쏟아낸다. “오… 오빠.” “할 수 있을 거야. 하얀아.” ‘넌 천재니까. 무조건 뛰어넘을 거야.’ “나는 너를 믿어.” “…….” “…….” “네.” “정하얀 님… 정하얀 님!! 저… 저!” “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거대한 마력이 한바탕 실내를 휩쓴 직후. “해냈어… 헤… 헤헤. 끄윽… 소라야… 소라야 해냈어.” 완전히 굳어버린 채 입을 벌리고 있는 한소라를 바라보며… 울음 섞인 미소를 보내고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꼭… 꼭 구해줄게. 금방… 다시 꺼내줄게.” 외신과의 결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길드 유일의 흑마법사이자 끊임없이 노력하던 소중한 친구가 리타이어 된 순간이었다. # 696 회귀자 사용설명서 696화 마지막을 준비하자 (5) 시작도 하기 전에 동료를 잃었다는 충격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굳어 있는 한소라의 얼굴에 맺힌 눈물은 그녀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마주하기가 힘이 들 정도였다. 의외였던 것은 정하얀이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나조차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아픔을 똑바로 마주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벽 넘었나? 이거 벽 넘은 것 맞지?’ 굳이 자신한테 질문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벽을 넘어섰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정하얀이 신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마법사로서의 성장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성장까지 손아귀에 쥔 것 같은 모습은 저절로 주먹을 꽉 쥐게 했다. 울고불고 난리를 칠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단단히 다짐한 듯 나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다. 눈에 눈물이 가득 담겨 있는 모습은 여전했지만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단 하나를 밟고 올라선 이의 모습이었다. 한계치까지 마력을 사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잠시, 저절로 마력이 회복되기 시작하는 모습에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소처럼 정하얀은 잃은 마력을 실시간으로 회복하고 있다. ‘이게 가능한 건가?’ 어떤 매커니즘으로 이게 가능한 건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같은 인간이 맞는지 의구심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다. ‘이 정도면….’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의 정하얀은 1회 차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현성이보다 센 거 아니야?’ 종목이 달라 뭐라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정하얀이 김현성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것이라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정하얀은 마법사였으니까. 갑작스레 덜컥 겁을 집어먹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현재 상태에 정하얀이 만약 폭주라도 한다면 그런 그녀를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제대로 개판 한 번 쳐보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김현성조차 그녀를 막는 데 애를 먹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물론 상황 자체는 안심할 만했다. 정하얀은 달라졌으니까. 눈물이 날 정도의 감동스러운 연출을 통해 정신적인 벽까지 뛰어넘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위를 바라보는 저 뒷모습이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다. 결국에는 슬그머니 옆자리로 이동해 정하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애써 웃음 짓고 있는 모습, 하지만 공허한 감정을 숨길 수는 없는 모양이다.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를 잃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아직까지 한소라가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정하얀에게는 굳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 죽어 있는 것과 비슷할 정도의 충격을 주고 있지 않을까. 나도 멘탈을 가다듬기가 힘들다. 매일을 함께했던 동료가 봉인되 굳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정말로 힘든 일이다. “괜, 괜찮을 거예요. 오빠.” 오히려 손을 꽉 잡아주며 나를 위로해 주는 모습. “…….” “그러니까. 울지 않, 않으셔도 돼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나 보다. “오, 오, 오빠 잘못이 아니에요.” 손을 들어 내 눈을 닦아주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얘가 진짜 기특해졌어.’ 달라져도 이렇게 달라질 수가 없다. 당장 난리를 피울 거라고 생각해 고려한 여러 가지 계획들을 곧바로 쓰레기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라, 누가 이 모습을 보고 예전에 그 정하얀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한소라를 아끼고 있었다고 한들, 정하얀보다 그녀를 아끼지는 않았다. 실상 내가 그녀를 위로해 줌이 옳다. 그 자그마한 손으로 발꿈치를 들어 올려 내 눈물을 닦아주는 모습은 다시 한번 투명한 눈물을 흘러내리게 했다. 우리 하얀이가 달라졌어요. ‘달라져도 진짜 제대로 달라졌어요.’ “제가 전, 전부 해결할 수 있어요.” ‘그래. 우리 하얀이가 전부 다 해결해야지. 외신 물리치고… 소라 되찾아야지.’ “제가 전부 해결할 거예요. 소, 소라를 꼭 되찾을 거예요.” ‘아암… 그렇고말고. 하얀이는 할 수 있을 거야. 분명히.’ “아직 죽은 게 아니니까요. 소라는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요.” ‘아이고,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어? 장하네. 우리 하얀이.’ “소라도 힘들겠지만… 참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 우리 하얀이도 참을 수 있지?’ “그러니까… 울, 울지 마세요. 제… 제가 전부… 제가 전부…” ‘으응. 그래. 그래.’ “죽, 죽, 죽, 죽일 테니까.” ‘어… 죽여야지. 그러엄.’ “이렇게 만든 놈들을 전부… 전부 죽이고…. 네. 전, 전부 죽여야죠. 상상할 수도 없는 끔, 끔찍한 고통을… 죽을 때까지 안겨주고… 죽이고 또 죽이는 거예요.” ‘그래. 죽이는 게… 죽이는 게 좋기는 좋은 건데…’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게 후회스러울 정도의 고, 고, 고통을 안겨줄 거예요. 그, 그것 밖에는 속, 속죄할 길이 없어요. 저. 결, 결심했어요.” ‘무슨 결심?’ “이제는 더, 더, 더 이상… 뺏기지 않, 않을 거라고… 멍,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지 않을 거라고. 안심하세요. 오, 오빠. 제가 지킬 테니까요. 제가 지킬 수 있어요. 소라가 준 이 힘으로… 우리 앞을 가로막는 더, 더러운 놈들을 전부 죽일 테니까.” ‘어?’ “우리 보금자리에 침범하려고 하는 멍, 멍청이들 히힛… 전부 죽여야지 머리통을 부숴 버리는 거예요. 우, 우리를 건드리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 그렇지? 소라야.” ‘뭐야.’ “소, 소라도 그렇게 하고 싶데요.” ‘아니, 시바. 뭐야. 한소라 뭐야. 너 진짜 정하얀 안에 있는 거 아니지? 시바. 있으면 빨리 나가. 시바.’ “소, 소라도 그렇게 할 거래요. 저. 저를 도와줄 거래요.” ‘그러니까. 소라가 어디에 있는데.’ “그, 그, 그리고 소라가요. 소라가…” ‘…….’ “꼭… 꼭 복수 해달라고 했어요. 자기를 이렇게 만든 놈… 놈들을 전부 찾아서… 죽, 죽여 달래요. 으응. 알, 알겠어. 소라야. 나… 나만 믿어. 다, 다 할 수 있어. 소라가, 소라가 나 천재라고 해줬잖아. 응. 할, 할 수 있을 거야.” ‘시바. 하얀이 몸에서 나가라. 이 악귀야. 악귀는 물러가라아!’ 혹시나 억울하게 봉인 당한 한소라의 영혼이 정하얀 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지 심각하게 고민해볼 정도였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타락한 베니고어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로 한소라와 대화를 하는 것 같은 정하얀의 모습은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게 정하얀의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전, 전부 끝나고? 어? 어? 우, 우리 집에서 같, 같이 살고 싶다고? 안, 안 돼… 오, 오빠랑 내 보금자리인데… 소, 소라는 옆집에 살기로 했잖아. 옆, 옆방에 살면 안 되냐고? 옆집이랑… 별 차이도 없을 거라고? 그, 그럼 오, 오빠한테 끝나고 물, 물어볼게. 아마… 오빠도 허락해주지 않을까? 오, 오빠도… 소라 싫, 싫어하지는 않으니까. 으응… 대, 대신 나중에 다른 말 하면… 안, 안 돼? 나도 힘들게… 물어보는 거니까.” “…….” 졸지에 신혼집에 한소라가 들어오게 생겼다. 정말로 한소라가 저걸 원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호하게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나, 나중에 이야기해야지. 그… 그건… 지금 당장 어떻게 이야기해. 소, 소라도 빨리 몸을 되찾아야 하잖아. 그러니까… 으응… 그러니까 일단은 나중에 생각하자. 헤, 헤헤… 그지? 무섭지 않았지? 하나도 안… 안 아팠지?” “…….” 점점 눈빛이 바뀌는 게 눈에 보인다. 이성을 잃으면 혼잣말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한소라의 영혼이 업데이트 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소라 봉인계획이 무리수였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게 당연했다. ‘아냐. 시바. 원하는 건 얻었잖아. 하, 하얀이 각성했잖아.’ 하지만 무섭다. “나, 나 웃고 있어. 소라야. 헤헤… 웃, 웃고 있어. 소라가 웃으라고 해서… 소라도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금방… 금방 되돌아갈 수 있을 거야. 으응…” 한소라의 타락한 원념이 끊임없이 저주의 목소리를 내뱉고 있는 것일까. “전부 죽, 죽여야지. 소, 소라는 눈 감고 있어도 돼. 복, 복수는 내가 해, 해줄게. 히힛… 헤헤헤…” 이거 시바 어떻게 하지? ‘그냥… 이대로 놔두는 게 더 좋은 건가?’ 매뉴얼은 기억하고 있는 건가? 일단 외신 쓰레기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는 것은 박수를 보낼 만한 부분이기는 했지만 전투 중에 돌발행동을 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돈다. 차라리 한소라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정하얀을 안정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 ‘이렇게 바로?’ 당연하지만 무리수에 가깝다. 차라리 이 텐션을 그대로 끌고 가는 게 더 유리하다. 뭣 때문에 이 이벤트를 계속해서 미뤄왔는지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정하얀이 돌발행동을 해올 거라는 건 애초부터 상정하고 있던 바였다. 슬그머니 앞을 바라보자 연신 중얼 거리는 정하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지금까지의 행동패턴으로 본다면 아마 곧바로 일을 터뜨릴 준비를 하지 않을까. 지팡이를 꼭 쥔 모습. 자꾸만 흔들리고 있는 동공, 분노로 인해 파들 파들 떨리는 입가,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알 수 없는 곳을 응시하는 눈빛. ‘터질 거야.’ 이건 터진다. 말린다면 말릴 수는 있겠지만 구태여 말리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신호탄은 쏘아졌으니까. 녀석들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우리가 방아쇠를 당기는 게 더 유리하다. “그래. 하얀아. 소라를… 되찾는 거야.” “네…. 소, 소, 소라를 되찾는 거예요. 소, 소라도 빨리 몸으로 되돌아가고 싶데요. 네. 꼭 자기를 이렇게 만든 나, 나쁜 놈을 찾아서… 지옥의 겁화로… 태, 태워 달래요. 평생동안… 평생동안…” “…….” “…….” “잠깐… 잠깐 기다리고 있을래?” “네, 네. 소라랑… 같이… 있을게요. 준, 준비도 하면서… 나, 나쁜 놈들을 죽일 준비를 해야죠.” “매뉴얼은?” “아… 아… 뭐, 뭐였지… 아! 소, 소, 소라가… 기억하고 있대요. 다… 다녀오세요. 오빠. 다녀오셔도 돼요. 저, 저도 여기서 따로… 준비해야 하니까.” “…….”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가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몇몇 이들이 시야에 비쳤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김미영 팀장. 내 눈에 맺혀 있는 눈물을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인지 잠깐 동요하는 모습이었지만 이내 침착한 모습으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 길드 마스터.” “준비하세요. 팀장님.” “어떤….”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상황실로 가서 대륙에 영상 송출할 준비 해주세요. 몇 시간 안으로 들어올 겁니다.” “네. 혹시 안쪽에서는…” “소라 씨가… 소라 씨가 당했습니다.” “네?” “지금부터 주변에 사람 출입시키지 말고 통제시키세요. 잠시 후에 하얀이가 밖으로 나올 겁니다. 굳이 말리실 필요 없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시면 됩니다.” “네.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지금 곧바로 이동하겠습니다.” “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계속해서 정하얀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한소라를 바라보며 계속 중얼거리는 모습, 굳어 있는 한소라와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은 살짝 소름이 끼치기는 했다. 자신의 몸을 살짝 공중으로 띄워, 뻗어 있는 한소라의 손을 꽉 잡으며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이겨낼 수 있어. 내, 내가 같이 있잖아. 비정상적으로 목이 꺾여 있는 정하얀의 비주얼에 스멀스멀 공포가 올라오기는 했지만 저 장면은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옳다. 봉인이 되어서까지 정하얀의 곁을 맴도는 한소라와 그런 한소라를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대마법사로 해석해야 감정 잡기가 수월해진다.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확실히 감동적인 장면이라 할 만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조금만 참, 참, 참아… 헤… 끄윽… 히…히힛. 참을 수 있지? 한소라의 마지막 말이 기억에 남는지 자꾸만 눈물을 흩뿌리며 웃고 있는 모습은 틀림없이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장면일 것이다. -히힛… 히히히힛… 조금 더 빠르게 이동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몇 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 다짜고짜 단상에 선 이후에는 곧바로 정면을 바라본다. 완벽하게 준비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천천히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한소라의 손을 아직까지 붙잡고 있는 정하얀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숙인다. 소중한 동료를 지키지 못하는 책임감을 가슴에 얹으며, 눈물을 꾹 참으며 뒤죽박죽으로 흔들리는 감정을 정리한다. 두려움과 압박감, 죄책감과 공포, 나 자신에 대한 무능, 외신을 향한 분노, 그 모든 감정을 속으로 억누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중한… 소중한 동료를 잃었습니다.” # 697 회귀자 사용설명서 697화 마지막을 준비하자 (6) “소중한 동료를 잃었습니다.” 곧바로 대륙 전체로 목소리가 퍼져 나간다. 아마 각 전역에 있는 거대한 여신의 거울을 모두 다 올려다보고 있지 않을까. 굳이 망원경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은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 타이밍, 본래 예정되어 있던 시간보다 훨씬 앞당겨 연설을 시작하고 있으니 많은 이가 의아해하고 있을 것이다. 당장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스텝들 역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성스럽다는 표현조차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의 빛을 머금고 있는 빛기영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온다. 조금 추레한 모습은 아닐까 걱정했던 것도 잠시,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진 것 같은 빛은, 굳이 다른 준비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장소에 어울리는 비주얼을 자랑하고 있었다. ‘병약 메이크업 안 하는 게 더 괜찮은데. 자연스러워요.’ 굳은 결의를 다짐하고 있는 입과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두 눈. 예언의 날, 종말의 날이 곧 시작되려고 한다는 걸 모르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망원경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군중들이 모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모두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며 다가올 예언의 날을 준비하는 것이 두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나는 약간 뜸을 들인 이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우리는 소중한 이들을 잃었습니다.” “…….” “아마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을 것입니다. 이 대륙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소중한 이를 잃어버린 경험을 가지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악마 숭배자에게, 악마 소환사에게, 악마군단장들과 그들의 수족들에게, 전쟁에게, 고통과 증오와 분노에게, 소중한 이들을 잃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우리의 동료, 우리의 친우, 우리의 연인들이 지켜낸 생명의 대륙의 위에, 그들이 흩뿌린 피와 희생 덕분에, 그들이 뿌리내린 나무의 밑에서, 그들이 지켜낸 하늘의 아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 “네, 그렇습니다. 현재의 대륙을 일군 것은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웠던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던 영웅들과 모험가 길드에서 입으로 입으로 전해지는 전사들, 하루하루 힘겨운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과 이 대륙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자 하는 수많은 이들이 현재의 대륙을 일군 영웅입니다.” “…….”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은 우리의 역사이며 고향입니다. 대륙민이나 이방인이나 이종족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이들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피를 흘렸고 우리를 이 자리까지 닿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습니다. 웃으며 안녕을 고했습니다.” “…….” “그들의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은 모두 그들이 함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서로를 향해 칼을 들이밀고 있는 공화국과 교국, 왕국연합과 연방, 중립국과 이종족들, 서로를 적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하나로 만든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이들입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눈에 보였다. 공화국과 교국의 병사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서로를 적이라고 불렀던 이들은 조금은 어색한 얼굴로 서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은 현상이다. “그들의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강대한 적과의 전투를, 예언의 날을 위해 싸움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들의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죽음과 희생에 우리는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동료를 잃어본 적이 있는 이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회색밖에 보이지 않는 전쟁터에서 그들은 예전의 동료들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파티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제, 던전에서 동료들이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적들과 맞선 전사, 전우의 등 뒤를 지키기 위해 화살을 대신 맞은 검사. 이야기들은 많다. 내가 저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사연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대륙에서는 흔하게 벌어지는 사연이었다. 녀석들은 서로의 방패나 검들을 간단하게 부딪치거나 가슴에 손을 얹으며 현재 자신들을 이 땅 위에 서 있게 해준 동료들을 애도한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작은 바위 길드의 송정욱.’ 캐슬락 몬스터 웨이브 당시, 가장 전위에서 전우들을 위해 죽은 녀석이 갑작스레 생각난다. 그렇게 친한 동료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캐슬락을 지키고 싶다는 녀석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연방의 영웅들.’ 벨리알 소환 사태 당시 그 누구보다 앞장서 스스로를 희생한 녀석들, 김현성이 끌고 있는 본대를 리무르아의 둥지로 보내기 위해 그 약한 몸으로 도노반을 막아섰던 영웅들이 있었다. ‘한소라.’ 대륙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봉인하는 것을 선택한 그녀 역시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그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있었던 수많은 전투에서, 죽을 확률이 높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향하는 전사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대륙이 있을 수 있었다. “그들의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올바른 가치를,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준 것도 그들이었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것인지 그들은 행동함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었고 그렇기에 저는 올바른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전해준 교훈과 이야기는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해 주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잘못된 선택을 한 이들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도 배웠습니다. 왼편과 오른편, 어디에 서는 것이 좋은지, 빛과 어둠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 그들조차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 대륙의 역사가 우리들을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이곳 위에 서 있습니다. 작은 적에게도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던 우리는 지금 이렇게 성장해 이 자리에 있습니다.” “…….” “수많은 악마의 유혹과 욕망에 흔들렸던 우리들은 이제는 굳건히 각자 가지고 있는 신념과 가치를 되새기며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던 우리들은 그들이 전해준 용기와 불굴의 의지를 품에 안고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 …… " 내 말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들은 여전히 두렵고 무서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싸우려는 이들은 마음을 한 번 더 다잡아야 했고 두려워하는 이들은 두려움을 떨쳐 내야 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떨고 있는 병사들의 떨림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 수 있다는, 이겨 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포가 쉽게 전염되는 것처럼 희망과 용기 역시 쉽게 전염된다. “자유와 희망이 무엇인지 몰랐던 우리들은 이제는 희망을 품고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있습니다.” 물론 저마다의 생각은 다르다. 분명히 다를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를 이 자리까지 있게 한 우리의 동료, 연인, 가족들에게 우리가 이토록 성장했다는 걸 보여주어야 합니다. 당신들 덕분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고, 당신들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다고 자신 있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희생, 그들의 유산을 헛된 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일어서십시오. 전투를 준비하십시오.” 전진기지에 배치된 병력이 천천히 움직이는 게 시야에 비쳐왔다. 본인들의 무기를 고쳐 잡고 올라가 있는 투구를 내린다. 다른 곳들도 다르지 않다. 화살을 매만지는 이들도 있었고 함께 싸울 전우의 등을 두드리는 전사들이 보인다. 지휘관들은 중대원들을 격려하고 있었고 사제들은 기도를 드리고 있다. 신념이 가득 찬 두 눈으로 대륙을 위해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 각자의 생각은 다르다. 하지만 대륙을 위해 싸우겠다는 마음은 모두가 같지 않을까. 다른 이들 역시 준비가 되어 있는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재밌네. 차희라는 웃고 있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는 갑옷을 장비하며 무기를 꽉 쥐고 있다. 이미 한 번 벽을 뛰어넘은 그녀는 여느 때처럼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커다란 문을 열었다. 그녀가 싸울 드넓은 전장이 펼쳐진다. 온전히 그녀만을 위해 마련된 무대를 위에서 바라보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나는 더 강해질 수 있어. 차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이지혜가 눈에 들어왔다. -말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오빠? 스케줄은 좀 맞추고 변동 사항이 있으면 조금 말해주기라도 하지. 뭐, 사실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니까 감회가 새롭네. 정말로 멀리 온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아. 그렇죠? 이지혜는 잔을 들고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표정이다. 드디어 끝났구나, 혹은 이제 시작인가. 어떤 표정인지 종잡을 수 없지만 기대하는 것 같기는 했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노아의 방주 터지면 저 두고 가지 마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예요. 진짜. 멀지 않은 곳에는 오스칼이 있다. 그녀는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고,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병사들을 바라보며 굳은 결의를 보내오고 있었다. -나는 오스칼이야. 나는… 오스칼이다. 항상 사고만 치던 박덕구 역시 조금은 긴장한 듯한 표정이다. 안기모는 조용히 전장을 응시하고 있었고 김예리는 박덕구의 등을 두들겨 주고 있다. -해낼 수 있을…. -할 수 있어. 지금까지. 아저씨. 잘 해왔으니까. -네. 당연히 잘 해낼 수 있을 겁니다. 항상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도 알아. 맨날. 중얼거리는 그거. 형님이 하면. -나는…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그래. 그거. 박덕구는 웃었다. 본인의 안에 남아 있는 약간의 의심이 해결 된 듯 누군가가 전해준 말을 되새기며 가슴을 두드렸다. 선희영은 긴장한 것 같지 않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는 표정으로, 여느 사제와 다름없이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부디… 이겨낼 수 있기를. 겁이 많았던 엘레나 역시 이번만큼은 마음을 굳게 먹은 모양이다. -엘룬이시여… 엘룬이시여. 저희들을 굽어살피소서. 종족의 미래, 아니 이 대륙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전해주시옵소서. 유아영은 무구들을 정리하며 김창렬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녀석은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신입 길드원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겨내지 못한 이들도 보인다. 라파엘은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손가락도 까닥하지 못한 채 여전히 무의식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조혜진은 조용히 눈물을 닦고 있다. 자꾸만 거울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 내리고 있었다. 싸울 수 있는 상태가 맞는지 의심이 되기는 했지만 그녀는 방 한쪽에 놓여 있는 창을 들고 밖을 나선다. -지킬 수 있어. 그녀가 정말로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카스가노 유노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뭔가를 바라보고 있다. 아마 미래가 바뀌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아닐까.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을 보니 그녀가 본 미래에 다른 변수는 생기지 않는 모양, 오스칼은 희생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고 했지만 누군가는 희생해야 했다. -제발… 제발…. 정하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한소라의 손을 꽉 잡은 이후에 웃는 얼굴로 몸을 일으켜 어두워진 장소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같이 가자. 소라야.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거대한 빛을 바라보며 천천히 마력을 일으키는 것이 보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천천히 열리고 있는 저 문을 잡아당기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당연하지만 굳이 막을 이유가 없다. 인류는 싸울 준비를 끝냈으니까.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저 악마들이 아니라 빛의 군대가 해야 할 일이다. 다시 한번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자. 지금 이 시점에 가장 마음이 복잡한 이를 바라보자. 어두운 방 안에서 밖으로 비치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검붉은 눈을 한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기가 힘들다. -책임. 뒤늦게 책임감이 돌아온 것인지 아니면 버리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녀석은 검은 날개를 활짝 펼쳤고 자신의 검을 허리춤에 매달았다. 김현성이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전투준비! 전투준비!! 전 병력은 전투를 준비한다. 마지막 싸움을 준비한다! 누군가가 내지른 목소리에 김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헛된 죽음은 없다. 우리는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 것인지 기억하라. 지휘관 중 한 명이 내지른 목소리에 김현성은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 -대륙을 위한 싸움이다. 우리를 굽어 살펴주시는 여신을 위한 싸움이야! 터져 나갈 것 같이 솟아오른 빛의 기둥을 응시하며 녀석은 자신의 시작과 끝을 매듭지으려 하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 여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사제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영웅들과 겁을 먹은 소년병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전사들까지. 계속해서 커져 나가는 목소리, 점차적으로 뒤섞이기 시작한 인간들을 바라보며… 김현성은 작게 속삭였다. -엿이나…. ‘어?’ -엿이나 먹으라지. ‘아니야… 그러지 마. 너 이 새끼… 왜 그래. 왜 갑자기 또 둠 하려고 그래?’ # 698 회귀자 사용설명서 698화 대륙을 지키자 성스러운 빛의 군대여(1) ‘시바, 나 지금 잘못 들은 거 맞지?’ 순간적이었지만 감정이 흔들릴 뻔했다. 계속해서 슬픈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방송 사고를 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다른 이유 따위는 언급할 필요 없이 이 새끼가 둠 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뭐야. 그런 분위기 아니었는데. 시바 감동적인 분위기였는데 또 왜 그래. 또 뭐가 문제야. 시바. 뭐가 문제인 건데.’ 그동안 너무 김현성을 체크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하… 이거 시바… 근데 신경을 어떻게 써? 바빠 죽겠는데.’ 내면의 이기영과 싸우느라 제대로 신경 쓸 수 없었고 녀석 말고도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물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는 했다. 지금 와서 살갑게 대하고 여러 가지로 케어해 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행동이지 않은가. 어차피 김현성은 이기영의 배때지에 칼을 쑤셔 넣어야 되는데… 굳이 현 상태에서 더 가까워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의거한 행동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너무 신경을 안 쓴 것은 아닐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부분, 혹시나 내가 김현성이 필사적으로 보낸 신호를 무시한 것이 아닐까. 뭔가 돌발 행동을 일으키기 전에 녀석이 보내온 구조 신호를 모른 척한 것이 아닐까. 쌓여 있는 메시지를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것 외에는 다른 말들을 아무것도 해오지 않았지만 김현성의 붉은색 눈빛이 서늘해 보인다. ‘안 돼. 현성아. 타락하고 막 둠 하고 그러면 안 돼.’ 기영쌤과 함께하는 멘탈 클리닉에 녀석을 초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밀착 수업을 진행하는 게 좋지 않을까. 전부 다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도 당연했다. 몇 시간만 더 늦추는 것이 좋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해 보게 될 정도로 김현성은 불안해 보였다. 자조적인 미소를 띄우며 검을 들고는 있었지만 뭔가 사고를 칠 것처럼 느껴지지 않은가. ‘멘탈클리닉 들어가야겠다.’ 라고 생각했지만 이걸 멈출 수 없는 게 문제. -소, 소라야… 기, 기다려. 히히… 히힛. 내, 내가 전부 죽, 죽여줄게. 전부 죽여줄게. ‘하얀아. 시바. 잠깐만 기다려. 지금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조금 있으면 열릴 거야. 열어야지. 저기… 저기 문 안에 숨어 있을 거야. 소라를 그, 그렇게 만든 멍, 멍청이가… 숨어 있을 거라고… 열린다. 보, 보이지? 보이지, 소라야? 열… 열리고 있어! 열리고 있다고! 이미 마력을 내뿜으며 외신을 불러들이려고 하는 정하얀을 말릴 방법은 없다. ‘지혜 누나. 누나가 뭔가 해줘야 될 것 같아. 누나.’ -그럼… 슬슬 짐을 싸볼까? 연수야. 짐 챙겨놓은 것 중에 빠진 거 있나 확인 잘 했어? -네, 언니! 근데 정말 도망치는 거 맞아요? -그럼 가짜로 도망치겠어? 잘 봐. 노아의 방주 뜨는 거 잘 캐치하라고. 말은 저렇게 했지만 상황 꼬이면 우리 두고 갈 수도 있으니까. ‘시바. 누나. 벌써부터 튈 준비를 하면 어떻게 해.’ 어차피 누나한테는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차희라뿐이다. 그녀가 이 사태를 수습해 줘야 한다. “…….” “…….” -하하하하하하하핫. 틀렸어. 시바 벌써 맛탱이가 갔어.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믿을 만한 패가 남아 있지. 조혜진, 내 친구, 우리 혜진이. 너만 믿는다.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되게 하지는 않을거야.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막겠어. 막아내고야 말겠어. 아니, 시바 막지 말라고 좀. 이상하다. 시바. 방금 전까지는 분명히 희망 편이었던 것 같았는데 갑자기 절망 편으로 장르가 전환된 것처럼 느껴진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하다 하다 박덕구 이 새끼는 나이스보트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저 돼지 새끼는 그냥 저 배를 사용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삐. 삐. 삐. 삐이이이이이이이이- ‘뭐야. 시바. 야. 라파엘 갑자기 왜 그래. 라파엘 왜 그래. 야. 라파엘 죽는다. 시바. 라파엘 죽는다고.’ 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오는 거 아니었어? 뒤늦게 뛰어온 사제들이 라파엘의 위에 올라타 녀석의 심장에 충격을 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때요? -틀, 틀렸어요. 심장이… 정지했…. ‘포기하지 마. 포기하지 말라구.’ -계속 신성력 집어넣어! -이미 심장이 정지했어요. 이제는…. -상관없으니까! 못 살리면 우리도 죽는 거야. 언, 언데드로라도 만들어. 어떻게든 생명 장치만 유지해! 숨만 쉬게 만들란 말이야! ‘제발 포기하지 마 시발… 언데드로 만들지 마! 시바, 나 다 듣고 있다. 다 듣고 있다고.’ 시작하기 전에 너네 갑자기 왜 이러는데. 이제 곧 싸워야 되는데 얘네 진짜 왜 그래. 대중들 앞에서 똥 씹은 표정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저도 모르게 자꾸만 표정이 구겨지려고 한다. 차라리 지금부터 튀는 게 좋지 않을까. 시바, 혹시 여기서 대륙 구하고 싶은 사람 나밖에 없나? 그런 건가? 뭐야. 시바 나는 지금 내기 때문에 그냥 튀지도 못하는데. 이런 게 어디 있어. 시바. 심지어 디아루기아 쪽도 상황이 안 좋아 보이잖아. 슬쩍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니 온갖 고성이 왔다 갔다 하는 도중, 설마 진짜로 전부 다 망한 것은 아닌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천천히 김현성을 다시 한번 응시해 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녀석은 천천히 성벽 위에서 여신의 거울을 바라볼 뿐이었다. 계속해서 내 얼굴이 하늘에 비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당연지사. 희생자들에 대한 묵념은 여기까지 이제는 싸워야 할 시간이라고 정치인들처럼 목소리 깔고 외쳐야 했지만 갑작스레 머리가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이 새끼… 진짜로 싸울 생각은 있는 건가?’ 이렇게 의욕이 없어 보이는 표정은 처음이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런 느낌이지 않은가. ‘뭐… 대륙이야…. 뭐… 구하면 구해지고 안 구해지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어차피 내 관할도 아닌데.’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던 부분은 검을 들어 올리기는 들어 올리고 있다는 것. 적어도 피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억지로 전쟁터에 끌려온 것 같지 않은가. 뭐라도 말을 해야 했다. 녀석의 감정을 고취할 수 있는 말을 뭐라도 지껄여야 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것들을 겪어왔는지,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십시오. 마지막이 다가왔습니다. 결실을 맺어야 할 때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아픔을 극복하고 승리의 종을 울릴 때가 찾아왔습니다.” ‘현성아. 시바, 너 고생했잖아. 이제 마침표 찍어야지. 기나긴 여정이었잖아. 다시 생각해 봐.’ “또 다른 아픔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겨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견디는 방법을 지난날들을 통해 배웠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처가 아문 자리는 더욱더 단단해지고 강해질 것입니다.” ‘생각해 봐.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어? 그래도 우리 잘 견뎌왔잖아. 현성이도 상처 많이 아물고 강해졌잖아. 그렇지?’ “우리의 하늘을 되찾아야 합니다.” ‘노을로 합의한 건 기억하지?’ “우리가 살아야 할 장소를 지켜내고 우리의 것을 쟁취해야 합니다.” ‘형이랑 같이 노을 보는 거 맞지?’ 녀석의 얼굴을 제대로 살필 겨를도 없다. -히히히히힛! 히히힛! 히히히힛! 다 죽이는 거야! 전, 전부 다!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으니까. 기어코 정하얀이 하늘을 열어버린 것이다. 차라리 외신이고 천사고 전부 다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사실 안 튀어나오는 거면 이번에도 내가 만든 천사랑 벨리알 도움으로 주작 한 번 멋지게 할 수 있는 거잖아. 정말로 안 들어오는 건 아닐까? 행복 회로를 힘겹게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연하지만 주변이 떠들썩해진다.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해 어떻게든 전투 의지를 끌어올리고 있었지만 정말로 하늘이 열리자 굳은 표정의 이들이 눈에 보인다. 천사의 모습을 한 악마들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견딜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 바깥에서 보이는 강대한 기운에 정말로 맞서는 게 맞는지에 대한 공포,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냥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느껴진다. 거대한 무언가가 손을 뻗고 있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심지어 우리 비밀병기는 싸울 의지도 없는 상황이란다. “…….” “…….” ‘튀자.’ 내기에서는 지겠지만 언제나 손절은 냉혹하게. 그만둘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면 곧바로 그만두는 것이 맞다. 노아의 방주를 준비하라는 듯 김미영 팀장에게 신호를 보내자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제가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나는 간다.’ “모두 안심하시고 전투에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눈에는 승리 이외의 다른 글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고통과 굴레를 벗어 던져 버리고.’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인류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보여줘야 합니다.”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불가능한 싸움은 없습니다.” ‘이건 불가능한 싸움인 것 같기는 해.’ “저를 믿고 무기를 들어주세요. 제가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여러분보다 쓰러지겠습니다.” ‘아, 진짜 미안하다. 진짜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지. 아… 시바 진짜 비둘기들 진짜 튀어나오잖아… 지금 빨리 튀어야겠잖아. 아 근데 이거 루시퍼는 어떻게 하지? 내기 내용이 뭐지?’ 여러 가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애들 챙겨서 여기 뜰 수 있으니 빨리빨리 준비하는 게 옳지 않은가. 슬쩍 망원경으로 바라보자 정말로 비둘기 떼들이 눈에 보였다. 확실히 이질적인 모습, 무언가 무기를 들고 날아오고 있었지만 지금 와서 관심을 가지는 것도 우습다. ‘진짜 오기는 왔네.’ 딱 이 정도 느낌이라 할 만했다. 역시 사람은 욕심을 버려야 한다. 왜 이걸 이제야 깨달았을까. 절대로 손해 보기 싫어 꽉 붙들고 있는 걸 놓아버리자 개비스콘을 먹은 것처럼 속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거늘….’ 무엇이 그렇게 욕심이나 지금까지 자신의 몸을 희생시키며 살아왔던가. 더 이상 바라보고 있으면 미련만 생길 것 같아 완전히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콰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땅 바닥 전체가 울리기 시작한 것.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얀이? 벌써 시작했나?’ 가까스로 매뉴얼은 잊지 않았던 모양, 전투 시작 직후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 말 그대로 김현성이 없으면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지만 정하얀이 없으면 전투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건 과장 하나 보태지 않은 발언이었고 그만큼 정하얀이 부여받은 롤은 대륙연합에게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열심히 해주고 있다는 건 자랑스러웠지만 이만 소라를 챙기고 떠나야 할 타이밍. 어차피 금방 회복될 마력이겠지만 이제는 그만 쓰고 아끼라고 하고 싶다. 혹시나 노아의 방주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전부… 전부 죽어!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소, 소라야… 보, 보이지? 보고 있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어….” 북쪽 너머로 떨어지는 것은 거대한 중력. 어마어마한 밀도로 만들어진 중력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전투준비! 전투준비이!!!!!!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군 병력들의 함성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들려온다. 부여했던 롤 그대로. 애초에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놈들과 공성전을 벌인다는 것부터가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 정하얀은 자신의 룰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범위와 위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정확히 전진기지를 기점으로 북쪽 전체가 가라앉고 있는 것이 보인다. 기가 차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늘을 날아 향하던 비둘기들은 땅바닥에 처박히며 발에 밟힌 개미가 되고 있지 않은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한 번 더 봐도 당황스러운 광경이다. 일부 중요지역만이 아니다. 대륙의 끝에서 대륙의 끝까지 마치 건반이 내려앉는 것처럼 내려앉고 있다. 차이점은 다시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담은 마력은 비둘기의 날개를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정하얀, 정하얀, 정하얀, 정하얀,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실제로도 보기도 했지만 말로 필요 없을 정도의 위용은 절로 내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정말로 인간이 맞는 건가.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어떻게 사람이 대륙 전체에… 대륙 전체에…. ‘말 도… 안 돼.’ 정하얀이 보여준 위용, 저도 모르게 커다랗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대륙을 지키자! 성스러운 빛의 군대여!” 거대한 함성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699 회귀자 사용설명서 699화 대륙을 지키자 성스러운 빛의 군대여(2) ‘할 수 있을까.’ “후우… 후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전투 준비. 전투 준비한다!” ‘지킬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건가. 이거 정말로 이길 수 있는 건가.’ 안 좋은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이길 수 있다고, 별일 없을 거라고, 인류는 틀림없이 승리할 거라고 믿어야 했다. 하지만 천천히 열리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종말의 날, 예언의 날,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오래전부터 마음의 준비도 마친 상태였지만 굳건히 쌓아온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게 느껴진다. 삼류모험가에 불과하지만 자신은 바보가 아니다. 저 이질적인 빛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오고 있는 건지, 아마 알 만한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과 천사의 탈을 쓴 고대의 악마가 대륙의 전역을 불태우고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울부짖게 하리라….”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친우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린델의 난봉꾼 캐넌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것은 통칭 삼류도박사 조지. 악마군단 소환사태 당시에도 함께 싸운 전우들이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캐넌.” “그냥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을 뿐이야. 지금부터 우리가 어떤 것과 싸워야 하는지, 인류의 적이 뭔지…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것 같았거든. 어때, 우리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 “…….” “살아남을 수가 있을까가 아니야. 지켜야 하는 거야. 우리 뒤에 가족, 형제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 그리고… 그리고 어떻게든… 이번에도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을 거다. 명예추기경님이 함께하시니까.” “빛의 성자. 베니고어의 아들. 신에게 선택받은 인류의 빛.” “그래.” “하지만….” “…….” “하지만 그도 인간이야. 알렉스.” “캐넌.” “나답지 않은 말이기는 하지만 최근의 그를 보면서 느끼는 게 많아. 우리 같은 놈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신의 선택을 받았다느니, 대륙의 위기를 구해야 한다느니… 그런 중압감을 견뎌낼 수 있겠냐고. 일반인이었다면 진작에 정신이 망가져 버렸을 거다. 아니… 이미 망가져 있을 수도 있지. 단지 버티고 있는 것뿐이야. 책임감 때문에… 그래. 놓을 수 없기 때문에 견디고 있는 것뿐이라고….”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자 명예추기경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인류의 기둥.’ 인류가 유일하게 믿고 있는 인간. ‘신의 아들.’ 베니고어를 비롯한 많은 신이 선택한 인간. 그 난봉꾼 캐넌이 저런 말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이 맞다. 그 역시 인간이었다. 지금 자신 역시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지경인데 그는 오죽할까.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다르다. 무게감이 다르다.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은 뒤에 있는 가족뿐이었지만 그는 전 대륙과 전쟁터에 나가 있는 병사들을 책임져야 한다. 만약 나였다면 어땠을까. “정신이 나가버렸겠지.” 절대 일어날 리가 없는 가정을 하면서도 몸이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그는 그런 중압감을 등에 지고 싸우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것들을 겪어왔는지,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십시오. 마지막이 다가왔습니다. 결실을 맺어야 할 때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아픔을 극복하고 승리의 종을 울릴 때가 찾아왔습니다. 기분 탓일까.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 보인다. -또 다른 아픔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겨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견디는 방법을 지난날들을 통해 배웠습니다. 인류는 상처를 치유하고 견디는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는 어떨까. 그의 상처를 치료되어 있을까. 가혹한 삶을 살아가는 빛의 몸에 새겨진 아픔의 기억들은 완전히 아물었을까.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처가 아문 자리는 더욱더 단단해지고 강해질 것입니다. 그의 연설에는 무게감이 있다. 마음을 좀먹고 있는 두려움이 천천히 사라지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는 어떨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그가 해결해 주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해결해 줄 이는 어디에 있나. “제기랄….” 감상적인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자꾸만 입에서는 험한 말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제기랄….”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제가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책임을 지고 앞장선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모두 안심하시고 전투에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눈에는 승리 이외에는 다른 글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는 무엇을 걸고 있을까.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인류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보여줘야 합니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지 않은가. 스스로 위로받고 싶어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는 지금 자기최면을 걸고 있는 도중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느껴진다. 강해져야 한다고, 지켜야 한다고, 끊임없이 세뇌하며 되새김질하는 것만 같다. -불가능한 싸움은 없습니다. 저를 믿고 무기를 들어주세요. 제가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여러분들보다 쓰러지겠습니다. 그라면 정말로 그럴 것이다. 그가 아끼는 인간들과 함께 쓰러지고 먼저 희생할 것이다. 저 눈빛은 죽기를 각오한 이의 눈빛이다. 거짓 한 점 없이 투명한… 투명한 눈빛이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다. 감정 과잉이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그가 가지고 있는 무게감이, 중압감이, 슬픔이, 두려움이 전해진다. 애써 괜찮다고 말하는 저 단호한 얼굴의 이면에는 너무나도 작디작은, 너무나도 여린 너무나도 안쓰러운 나약한 인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먼 곳을 응시한다. 마침내 하늘이 열리고 대륙의 종말을 울리는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렵다. 저 멀리서도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주변에서는 탄성이 들려온다. 아마 무의식적인 행동일 것이다. 저 멀리 있는 적들의 강함을 측정할 수 있는 이들의 얼굴은 이미 구겨져 있다. 무기를 쥔 손은 떨려오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강해 보이는군. 악마군단 소환사태. 그때보다 더…. 어때 조지. 네 감이 구리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될 것 같아?” “저번에 균열랜드에서 왕창 잃은 다음에는 내게 이런 건 묻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빛의 성좌가 걸린 일이라면 조금 다르니까. 네가 삼류도박사라고 불린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여기에 없어, 조지. 하지만 저번에는 잘 때려 맞추지 않았어? 왜? 노을빛의 검사와 타락한 성자의 싸움에서….” “글쎄… 뭘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네.”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이 천천히 가까워지는 것이 보인다. 조각으로 빚어낸 것 같은 외관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점점 더 빠르게 날아오고 있다. 이질적이다. 어울리는 표현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몸에 깃들어 있는 힘.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힘이다. 마력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개체 한 개체가 상위에 오른 모험가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당장 네임드라고 부를 수 있는 놈들이 하나도 아니라 하늘을 빼곡 메울 정도이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농담 따먹기라니.’ 원래 실없는 녀석들이니 이해할 수 있다. 애써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냥 몇 마디 주고받는 것이 전부겠지. 하지만 놈들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자신도 모르게 삼류도박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캐넌의 말이 맞다. 그는 저번에도 한 번 맞춘 적이 있었으니까. 빛의 검사와 타락한 성자의 싸움. 어쩌면 녀석의 인생에서 최초로 승리한 배팅인지도 모르겠다. 제발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해주길 바라며 녀석을 바라보자. 조금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만….” “…….” “이번에는 감이 좋지 않아.” “…….” “…….” “전투 준비! 전투 준비! 궁수들은 신호를 기다리고 마법사들은 주문을 외운다. 전군 대기. 전군은 대기! 긴장할 필요 없다. 빛의 성자와 베니고어 여신이 우리 곁에 있음을 항상 기억해라.” “이길 수 있다!” “이길 수 있어. 이길 수 있을 거다. 전우들아. 살아서 보자.” “죽지 마라. 이 새끼들아! 죽지 마!” “명예추기경님이 우리의 넋을 위로해 주실 거다. 빛의 성자의 품 안에서 죽을 수 있다는 걸 영광으로 알고 싸우자.” “베니고어시여!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내려 주시옵소서.” “빛의 성자를 위하여! 대륙을 위하여!”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콰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지면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 뭐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비둘기들이 지면으로 처박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우와… 우와….”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 하늘 위에서 떨어진 정체불명의 중력은 전진기지 앞에 있는 물체들을 땅으로 꺼지게 하고 있다. “우와… 우와아아아아아아아!!!” 환호성이 들려온다. “베니고어 님이다! 베니고어 님이야!” 아니, 이건 신성력이 아니다. 거대한 마력의 유동이 느껴지는 곳은 그렇게 멀지 않다. 아마 술자는…. ‘대마법사 정하얀?’ 시야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이 지면 아래로 처박히는 것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캐넌이 삼류 도박사 조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집어치워, 조지. 너한테 물어본 내가 병신이지… 하… 하하. 저걸 봐. 저걸… 저걸 보라고! 하하하하하하!!” “뭐. 그렇지.” “공격… 공격하라! 마법을 퍼부어!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인류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줘라.” “정하얀 님이다! 정하얀 님의 마법이야! 하하하하하핫! 정하얀 님이다!” “마법을 퍼부어! 단 한 놈도 살려 두지 마!” “죽어라! 이 더러운 악마 놈들.” “손을 쉬지 마! 계속 화살을 날려! 계속!” 콰아아아앙!! 콰드드드드드드득!!! 콰직!! 콰아아아아아앙!! 전방이 순식간에 화려한 색채로 물든다. 그 누구라도 소리를 지르지 못하고서는 참을 수 없는 광경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맞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 -대륙을 지키자! 성스러운 빛의 군대여! 뇌를 뒤흔드는 것같이 들려오는 그분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온몸이 빛에 휩싸이는 기분, 인류는 승리한다. 이곳에서 분명히 인류는 승리할 것이다. 분명히 승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빛의 군대다! 저 어둠에게 빛의 성자의 대륙을 침범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줘라!”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해라! 더러운 악마 놈들을 정화하자!” “적들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마! 이길 수 있다! 빛의 성자께서 대륙을 지키자고 말씀하고 계신다! 물러서지 말고 절대로 성벽 위로 올라오게 하지 마! 계속해서 땅바닥을 기게 만들어라!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하는 놈들을 최우선적으로 노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빛의 심판을!!” “더러운 악마들에게 뜨거운 빛을!” “빛의 성자를 위하여!” 화려한 마법들이 쏘아져 나간 이후에는 곧바로 땅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아마 계속해서 북쪽을 짓누르고 있는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파괴력이 배가 된 것 같은 느낌. 단점은 저 멀리 있는 적에게는 마법이 닿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성벽 아래에 적에게는 틀림없이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니, 심지어는…. ‘어떻게 닿고 있는 거지?’ 일부 네임드들이 보내고 있는 마법과 화살은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멀리까지 날아가고 있었다. 이건…. ‘길을 열어준 건가? 저 공간에만 길을 열도록 의도한 건가?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지?’ 지금 와서 의문을 느끼는 것도 이상하다. 아군의 대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법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주변을 둘러본다. 아마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우리는 악마가 아니다. 필멸자들이여.” ‘어?’ “오히려 너희들을 구원해 주러 온 존재라고 하는 것이 옳다.” ‘언제….’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에게 적개심을 가지지 말라. 우리는 어둠이 아니라 빛이며 진짜 어둠은 그대들의 안에 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도대체 뭐야… 언제 온 거지?’ 성벽 위에, 병사들의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인형. 푸른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남자. 커다란 날개를 수장 가지고 있는 천사. 아무 감정도 들어가 있지 않은 것 같은 눈과 표정. 그리고 이곳에 자리한 모든 이들을 피식자로 만들어버리는 위압감. “하지만 그대들이 저항할 생각이라면.” ‘죽는다… 죽을 거야. 이곳에 있는 병사들 전원 죽을 거야.’ “나 역시 손을 쓸 수밖에.” ‘죽는다… 전부. 전부….’ 녀석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다. 이질적인 푸른 빛이 손에 모이기 시작한다. 곧 그것은 거대한 낫의 형태를 만든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다. 여전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내 이름은 케루빔. 나를 원망하거라. 필멸자들이여.” ‘끝인가?’ 낫이 천천히 휘둘러진다. 곧 목이 달아날 거라는 생각에 공포에 질린다. 어디에선가 거대한 마력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 마치 화면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푸른색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 천사의 얼굴이 땅바닥으로 처박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정체불명의 형태가 눈 앞을 가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붉은색. 마치 붉은색 갈기를 가지고 있는 것만 같은 전사의 등. “너구나.” “…….” “너였어! 하하하하하핫! 내 상대가 너였다고!! 하하하하하하하핫!” 붉은색 갑주를 입은 용병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그녀의 별칭을 중얼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용병여왕.” 아니. 전쟁터 위에 강림한 것은 여왕이 아닌 전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