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 ──────────────────────────────────── 프롤로그 정신차리자, 멈추지 말자. 화살의 비가 다시 쏟아진다. 칼을 휘둘러 몇몇은 막았고 몇몇은 맞았다. 앞으로 달려나가 칼을 내질렀다. 두 명을 꿰뚫은 칼을 돌려잡아 또 하나를 벤다. 쓰러지면 안 된다. 오늘이 세크리티아의 마지막이어선, 안 된다! 누군가 앞으로 달려왔다. 습관처럼 칼을 휘두른다. 놈이 실드로 막았다. 그리고 묻는다. “기억하마. 이름이 무엇이냐?” “잊었다.” 나는 그저, 오롯이 왕을 섬기는 칼이다. 하나 남은 팔을 다시 움직였다. 놈의 손짓에 나의 칼이 부서진다. “그 검······ 그래. 체이스의 아우로구나. 만나보고 싶었다.” 대답 대신 손잡이만 남은 칼을 휘둘렀다. 놈은 피하지 않았다. 놈이 얼음의 창을 보냈다. 나는, 막지 못했다. - 콰직! 생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숨을 이어나가기가 힘들어진다. “나는 카이리스 마법사단 발칸의 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다. 세크리티아의 왕제, 베른. 기억하겠다. 그대는 충분히 싸웠다.” 눈을 들어 먼 곳을 좇았다. 나의 형님, 전하께서 계신 곳을 찾으려 했다. 허나 눈 앞이 흐려져 볼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 쉬어라.” 빛이, 사그라든다. * * * 그것이 내가 가진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후 다시 눈을 뜬 것은 그 날로부터 10년 전. 하필이면 내 조국 세크리티아를 멸망시킨 카이리스에서, 하필이면 3왕자인 칼리안의 몸을 가진 채였다. 칼리안. 용의 후손이라는 핏줄이 아까웠던 나약한 왕자. 놈은 겁이 많았고, 배경 세력도 없었으며, 스스로를 지킬 능력조차 없어 일생을 숨죽여 살다, 15세가 되기도 전에 암살당했다. 그것이 나에게 닥쳐 올 미래였다. 그러니 이제 어찌 할 셈이냐고, 거울 속의 칼리안이 묻는다. 나는 답했다. “당연히.” 살아야지. ──────────────────────────────────── 제1장. 이거 정말 멍청하게 살았군. (1) 시녀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두꺼운 커튼이 열리고, 아스라이 밝아오는 새벽 하늘이 침실을 비췄다. 곧 왕자의 전속 시종이 들어와 아직 앳된 얼굴의 소년이 잠든 침대의 옆에 섰다. 왕족을 깨울 때 손을 대선 안 된다. 큰 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때문에, 시종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항상 문 열리는 소리에 경기를 일으키듯 일어나 앉던 소년이었다. 헌데 오늘은 어떻게 된 일인지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피곤하셨나?’ 시종은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뒤에 서 있던 시녀의 손에 들린 은쟁반에서 작은 종을 집어들었다. 곧 이른 아침을 알리는 은은한 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딸랑, 딸랑-. 그제야 소년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소년은 잠시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는 듯 하더니 와락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라던 시종이, 곧 허리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왕자님. 오늘은 수업이 많은 날이니, 조금 이르더라도 이만 일어나셔야 합니다.” 그리고는 준비한 모닝 티를 소년에게 내밀었다. 소년은 언제나 차의 강한 향기로 정신을 먼저 깨운 뒤 세수를 해왔기 때문이다. 소년, 아니 베른은 여전히 잠에 취한 상태로 생각했다. ‘내가 언제 아침 차를 마셨다고?’ 그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찻잔을 집어들려 하던 베른의 눈이, 손의 생김새가 낯설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득했던 상처와 굳은살은 온데간데 없고, 새하얀 손과 가늘고 긴 손가락이 보였다. 베른은 고개를 돌려 이불 위에 올려진 왼팔을 쳐다봤다. 깡마른 팔뚝에는 작은 흉터조차 없었다. 그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입을 열었다. “분명, 팔이 잘렸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베른이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 앳된 목소리가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종 역시 화들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팔이 잘리다니요!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까? 혹시 악몽을 꾸셨습니까?” 악몽! 악몽이라면 그보다 더한 것이 또 있을까! ‘세크리티아가 공격당했다!’ 잠에서 깨기 전 일어났던 일이 떠오른 베른에게는 시종의 말에 대꾸 할 틈이 없었다. 베른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형님께서는! 어디 계시지?” 시종이 조금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네. 두 분 모두 아직 방에 계십니다.” 이번에는 베른의 얼굴에 시종과 같은 표정이 생겼다. 그의 형은 단 한명, 체이스 뿐이었으니까. “둘?” “란델 왕자님께서는 이미 의복을 갖추셨을 겁니다. 플란츠 왕자님께서도 마찬가지시고요.” 낯선 이름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이름이 아니었다. 특히 그 중 한 명의 이름은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카이리스의······?” “네, 맞습니다. 위대한 카이리스의, 왕자님들이시지요. 기억하신다니 다행입니다, 칼리안 왕자님.” 시종은 그가 아직도 꿈에서 깨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음이 틀림 없었다. 그렇게 장난처럼 대꾸하고 넘긴 시종이 뒤에서 세숫물을 들고 있던 시녀를 불렀다. 그 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던 베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시종이 고개를 돌려 베른을 쳐다봤다. “네, 왕자님.” 베른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오늘 저 시종을 처음 보았다. 주신 세렌티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대,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알았다. 그 뿐인가? 그 뒤에 있는 시녀들의 이름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어찌 저들을 알고 있단 말인가!’ 베른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곧 얀이라는 이름의 시종이 내려놓은, 반짝이는 은 대야에 얼굴을 가져갔다. 아무래도 아직 꿈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아무리 끔찍한 현실이었다 하더라도, 이런 식의 엉뚱한 상상 속으로 도망치다니. 그 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물에 비친 모습을 본 베른은 다시 한번 경악한 소리를 냈다. “이것이 대체······?” 물에 비친 붉은 눈! 아니었다. 그의 얼굴이 아니었다. 베른이 급히 외쳤다. “거울을 가져오게. 당장!” “거, 거울을 말씀이십니까?” 저도 모르게 명령을 되묻는 실수를 저지른 얀이 빠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등 뒤로 손을 넘겨 시녀들을 향해 손짓을 보냈다. 거울을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얀의 뒤에 서 있던 시녀 중 한 명이 서둘러 밖으로 달려나가 거울 하나를 가져왔다. 얀이 그것을 전해 받은 뒤 베른에게 정중히 건넸다. 베른이 재빨리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 거울 속에는 흑발의 소년이 있었다. 긴 앞머리 사이로 루비 빛의 두 눈이 반짝였다. 베른이 고개를 들었다. 시종의 옷자락에 새겨진 문장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카이리스의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시종은 자신을 왕제가 아닌 왕자라 부르고 있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무슨 일이냐! 나는 왕제 베른이다. 세크리티아의 왕, 체이스 전하의 동생이다!’ 베른은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듯 마음 속으로 외쳤다. 그러자 그에 반발하는 것처럼, 마치 누군가 속삭이는 것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야. 내 이름은,’ 그리고 외워놓지 않았던 긴 이름이 자연스럽게 입으로 흘러나왔다. “칼리안······.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카이리스의 3왕자. 칼리안이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베른이 다시 한번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들어 얀에게 물었다. “내 이름이, 무엇이라고 했지?” 이제 얀은 베른이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살짝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방금 말씀하셨으면서 퀴즈를 내시는 겁니까? 위대한 카이리스의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이십니다. 참고로 저는, 왕자님을 지금 당장 조찬 자리로 모셔야 하는 왕자님의 시종 얀이고요.” 그 대답을 기다린 것처럼, 머릿속으로 또 다른 몇몇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카이리스의 왕궁, 예법, 날씨, 일정, 기마, 화원, 마법, 왕비, 국왕. 그리고 두 명의 형! 그래. 얀의 말이 맞다. 조찬에 늦으면 안 된다. 그의 기억은 그리 외치고 있었다. 당장 일어나라고. 다른 두 왕자보다 늦으면 안된다고. 이제는 칼리안이라는 이름이 되어버린 그가 조용히 물었다. “오늘 날짜는?” “522년 4월 28일이지요.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왕자님.” 칼리안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카이리스력 522년이라면 세크리티아력 525년이다. 그가 눈을 감았던 그 날이 아니었다. ‘10년 전이다.’ 생각이 빠르게 돌아갔다. ‘10년 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허나 적국의 3왕자라니! 이런 당혹스러운 경우가 있나. 정말 꿈이 아니라는 말인가?’ 칼리안이 움직이지 않자, 더 기다리지 못한 얀이 팔을 뻗었다. - 타악! 그러자, 칼리안이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쳐내었다. 얇은 손바닥에 맞은 팔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평소 이런 식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칼리안의 팔도 아릿하게 아파왔다. 얀이 상처받은 얼굴로 말했다. “왕자니임. 무엇 때문에 이러십니까.” “미안, 미안하네. 나도 모르게 실수하였네.” 칼리안의 사과에 얀이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왕자님. 그보다 어서 일어나셔야 합니다. 안 그러시면 제가······!” 칼리안은 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고개를 휘휘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억속에 공포로 얼룩진 그 ‘형들’이 기다리면 안된다 하니, 우선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물에 머리를 박다시피 하며 세수를 마쳤다. 정신을 차리려 양 볼까지 탁탁 때린 칼리안이 말했다. “준비하겠네.” - 말투가 이상해.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또 한번 기억이 밀려들어왔다. 때문에 칼리안은 잠시 숨을 들이키듯 기억을 되새기며 다시 말했다. “아니. 준비할게. 미안해.” “왕자님, 오늘 따라 안하시던 사과까지 계속 하시고······. 아무튼 의복부터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얀이 또 다른 두 명의 시녀를 보며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양 손 가득 옷가지를 든 시녀들이 와서 칼리안에게 옷을 입혔다. 그 후에는 또 다른 시녀가 다가와 머리를 빗겨주기 시작했다. 새까만 머리가 두 눈을 치렁치렁 가리는 것이 보였다. 본래 그는 청은색의 긴 머리를 하나로 묶길 좋아했기에, 눈을 가린 검은 머리가 답답했다. 머리카락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자, 기억 속에서 그 이유가 떠올랐다. - 플란츠 형님께서 싫어하시니까. 그의 형인 두 명의 왕자, 특히 플란츠는 이 붉은 눈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이렇게 머리카락을 내려 눈을 가렸다. ‘적당히 들은 적 있었지만, 이거 정말 멍청하게 살았군.’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내 눈을 싫어한다라. 플란츠 따위가?’ 원수 중의 원수. 미친 왕, 플란츠! 그는 향후 카이리스의 왕이 되는 놈이었다. 그리고 세크리티아를 멸망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플란츠! 나는 네가 숨을 쉰다는 사실이 끔찍하다!’ 칼리안이 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 놓을 수는 없는 말이었다. 이 곳은 카이리스의 왕궁이었고 칼리안은 이 카이리스의 3왕자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마음 속으로 같은 말을 몇 십 번이고 곱씹었다. ‘놈을 보더라도 지금은 죽이면 안 돼. 참아야 한다.’ 만약 꿈이 아니라면, 정말 과거로 돌아온 것이라면. 섣부르게 움직이다가 칼리안의 목이 떨어지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니까. 칼리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을 시녀들이 옷매무새를 다듬고 마지막 정리를 해주고 있었다. 과연 아침을 먹으러 가는 사람의 준비가 맞을까 싶을 만큼 철저한 손길이었다. 옷차림으로 인해 얼마나 시달렸으면 이렇게까지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곧 모든 준비가 끝났다. 칼리안이 문 앞에서 살짝 심호흡을 한 뒤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낯설게 익숙한 중앙 계단을 내려가 오른쪽 끝에 위치한 식당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아무리 나이를 떠올리려 해도 기억이 상기되지 않았다. 나이조차 세지 않고 살았던 것일까. 결국 칼리안은 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얀.” “네, 왕자님!” “내가 몇 살이었지?” 얀으로서는 뜬금 없는 질문이었다. 아침부터 참 별스러운 문제들을 낸다는 생각을 한 얀이 답했다. “14세 이시지요. 성인이 되시려면 아직 네 달이 남았습니다.” “그래. 그랬군.” 어쩐지 어린 것 같더라니.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왕자님. 아무래도 두 분 왕자님 앞에서 그리 말씀하시면 한 말씀 들으실 것 같습니다.” 얀이 평소와 달라진 말투를 걱정하며 말했다. “혹시 지난 밤에 기사가 나오는 소설이라도 보셨습니까?” 칼리안은 말에 오르는 것을 무서워했다. 그런데 내일 말을 타야 하는 기마 수업이 있었다. 때문에 그것을 걱정하는 마음에 기사가 나오는 글이라도 보고 따라하는 것인지 생각하는 얀이었다. “아니야. 내가 신경쓰지. 아니, 신경쓸게.” 그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식당에 들어섰다. 예상 외로, 조찬 자리에는 시종들만 있었지 왕자로 보이는 인물들은 없었다. ‘둘이 당장 출발할 것처럼 그렇게 호들갑을 떨더니.’ 아마 칼리안이 조찬에 늦지 않도록 지레 닥달했음이 틀림없었다. 커다란 창가에 놓인 동그랗고 큰 식탁이 보였다. 국왕 르메인의 권유로 매일 세 명의 왕자들이 아침 식사를 함께하는 곳이었다. 옛 칼리안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장소이기도 했다. 식당의 시종 중 한 명이 한쪽 자리의 의자를 빼주는 것이 보였다. 그 곳이 자신의 자리임이 기억난 칼리안이 그 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는 창 밖의 낯선 풍경을 바라봤다. ‘눈으로 보니 정말 대단한 규모구나.’ 대륙의 4개국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닌 카이리스의 왕궁은 그 거대한 크기로도 유명했다. 하나의 큰 건물과 두 개의 별관으로 이루어진 세크리티아 왕궁과 달리, 카이리스의 왕궁은 왕족이 거주하여 ‘궁’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건물의 수만 무려 6개였다. 그 외의 용도로 사용되는 건물들과 수많은 정원, 인공호수 등이 모두 카이리스 왕궁 안에 있었다. 왕자들이 머무는 체르밀 궁은 왕궁에서도 그리 크지 않은 편에 속하는 건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 앞의 인공호수와 그 뒤로 이어진 정원이 상당히 넓었다. 물에 비친 햇살이 창문을 넘어 칼리안의 얼굴을 비췄다.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상념에 빠진 채로 10여분을 기다리니 1왕자 란델이 왔고, 30여분이 지나자 2왕자 플란츠가 도착했다. 말 없이 뚜벅뚜벅 걸어와 자리에 풀썩 앉은 플란츠를 쳐다본 칼리안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곧 칼리안이 마음 속으로 고함쳤다. ‘아니! 대체 저것이 무슨 꼬락서니란 말인가!’ ──────────────────────────────────── 제1장. 이거 정말 멍청하게 살았군. (2) 플란츠는 의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풀어헤쳐진 상의 안으로 맨살이 그대로 보였다. 왕족은 결코 저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었다. 그것은 세크리티아 뿐 아니라 이 곳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인 것은, 이런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실에 놀라는 바람에 플란츠의 목에 나이프를 꽂아넣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칼리안은 티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적응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을 것 같았다. 물론, 바꿔나가야 할 것은 훨씬 더 많을 터였다. 플란츠의 행색에 란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 것도 못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칼리안은 그런 란델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서열 정리 끝났군.’ 그리고 칼리안도 놈을 보지 못한 것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원래 미친놈과는 눈을 마주치면 안되는 법이니까. ‘플란츠. 어릴 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더니, 1왕자 조차 놈을 건드리지 못했던 모양이야.’ 곧 그들의 앞에 잘 만들어진 음식이 차례로 놓이기 시작했다. 향 좋은 스프와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구운 빵, 아침에 먹기 적절한 스크램블드 에그와 얇게 저민 햄. 거기에 신선한 채소만 가득한 샐러드와 갖가지 종류의 과일까지. 갑작스런 전쟁에 시달리던 칼리안에게 있어 그야말로 군침이 절로 도는 식단이었다. 만약 칼리안이 혼자 있었다면, 모두 남김 없이 먹어치웠으리라. 하지만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차라리 병사들 사이에 끼어 앉아 누린내 나는 양 젖에 바싹 마른 호밀 빵을 찍어 먹은 것이 백배는 나았던 것 같았다. ‘도대체 이런 분위기로 어떻게 밥을 먹는지.’ 카이리스의 세 왕자는 분명 형제였으나 그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아무리 이복 형제라 하나, 그것 만으로는 이 침묵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체이스와 베른 역시 이복 형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웃고 떠드느라 요리사가 음식을 다시 데워다주기 일쑤였던 둘이었다. 언제나 베른을 챙기던 체이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 기사가 되서 나를 지킨다고? 하하! 말만 들어도 듬직하구나. - 베른, 내 동생아. 너는 걱정하지 말거라. 아무 걱정 말아. 세크리티아의 왕이자, 목숨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을 형이 절실하게 생각났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그에 대한 소식을 물을 수 없을 터였다. 때문에 더 걱정이 되고, 또 그리웠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만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눈물이 날 것 같아, 칼리안은 애꿎은 물잔을 들어 한번에 다 비워냈다. “경박하기는.” 플란츠의 목소리였다. 옷을 입다 만 것인지 벗다 만 것인지도 구분되지 않는 차림을 한 놈의 얼굴이 보였다. 플란츠가 한쪽 입술을 끌어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제 어미를 닮아서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지.” 평민 출신인 칼리안의 모친을 두고 비아냥거리는 소리였다. 진짜 어머니가 모욕을 당한 것 같은 기분에, 참지 못한 칼리안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결국 가려진 머리카락 사이로 매섭게 빛나는 붉은 눈을 플란츠가 보았다. 플란츠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드러난 것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으나, 란델은 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방관자였다. 칼리안은 같은 눈빛으로 란델을 쳐다보았다. 그때, 플란츠의 입에서 위협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칼리안이 다시 플란츠를 보았다. 둘의 시선이 맞닿았고 누구도 먼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 지경이 되어서야, 란델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만하거라.” 그 말에,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고정한 시선을 여전히 치우지 않은 채로 말했다. “재수 없는 피눈깔 때문에 입맛이 떨어져서. 먼저 갑니다.” - 타악! 테이블을 세게 짚고 일어난 플란츠가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일별한 란델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칼리안에게 시선도 두지 않은 채였다. “몸가짐에 주의하거라. 전하의 탄신 기념일 행사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이 나란 말인가? 방금 나간 놈의 꼬락서니는?’ 칼리안이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란델을 쳐다봤다. 그러나 란델은, 칼리안의 대답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두 왕자가 사라지자 커다란 테이블에는 결국 칼리안만 덩그러니 남았다. 뒤에 서 있던 얀이 혼잣말을 하는 것이 들렸다. “하루도 그냥 넘어가질 않으시니······.” 카이리스의 삼형제. 어떤 분위기인지 완벽하게 파악이 되었다. 칼리안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긴 숨을 나누어 내쉬며 화를 가라앉혔다. 그것이 구박 받는 막내의 서러운 숨소리로 들렸던지, 뒤에서 얀이 안타까워 하는 것이 느껴졌다. 곧 칼리안이 소리 없이 일어났다. 얀이 곧장 다가와 의자를 빼주고 흐트러진 의복을 꼼꼼히 정리해주었다. 이렇게 무시 받는 꼴을 매일 볼 텐데도 그 손길이 참으로 조심스럽고 정중했다. 다른 두 왕자의 시종도 이 정도로 정성을 들이지 않았던 것을, 칼리안은 분명히 보았다. 얀의 손바닥에 깊이 남은 손톱 자국이 보였다. 오히려 얀의 눈이 칼리안보다 더 일그러져 있었다. 그 모습에, 끓어 올랐던 화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칼리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그 말에 놀라 칼리안을 쳐다본 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칼리안이 울고 있지도, 침중한 표정을 짓지도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작은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 그런 얼굴을 쳐다보던 얀이 칼리안으로부터 생전 처음 받게 된 감사 인사에 어찌 대답할지를 골라내기도 전에, 칼리안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다음 일정은?” “한 시간 뒤에, 양신전쟁에 대한 수업이 있습니다.” “그럼 그 때까지 혼자 있을게.” 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리 하시라 답했고, 그 길로 칼리안은 밖으로 나왔다. 머릿속에 남아있던 진짜 칼리안의 기억은 착실하게 제 할 일을 했다. 덕분에 칼리안은, 헤매지 않고 곧장 걸어 나와 인공호수 옆의 산책길로 올 수 있었다. 저 멀리 얀이 따라와 거리를 두고 멈추는 것이 보였다. 그 외의 다른 사람은 없었다. 호숫가로 걸어간 칼리안은 발 아래의 물을 보며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하!” 호수 한 가운데 작은 조각상이 있었다. 검은 용이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펴는 모습이었는데, 용의 두 눈에 붉은 색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시스파니안인가.’ 그것은 카이리스의 초대 왕비이기도 했다는 고룡 시스파니안의 조각상이었다. 그녀가 고요한 밤과 같은 검은 머리와 신성한 불을 담은 붉은 눈을 가졌다던 말이 생각났다. 검은 머리, 붉은 눈. 그것은 칼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는 신성한 눈이라고 하고. 누구는······.” ‘재수 없는 피눈깔.’ 플란츠가 이죽거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이, 몸이 어려지니 정신까지 여려지는 것 같았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잘린 팔을 대충 지혈한 뒤 온 몸에 무수한 화살을 꽂은 채로 적군에게 돌진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스물도 되지 않은 소년의 도발을 참지 못하고 이렇게까지 화를 내다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당장 급한 것은 눈 앞의 플란츠를 죽이느냐 살리느냐가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났는지, 그것부터 따져보아야 할 일이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며 곰곰히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가까스로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번쩍 처들었다. ‘시간의 축!’ 어느 날 갑자기 세크리티아 왕궁에 나타났던 그것. 딱 한 번, 시간을 되돌린다 되어 있던 그것. 모래시계같이 생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물건이 지금 이 상황을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래. 전쟁도, 지금 이 일도 모두 그것과 관련이 있다.’ 카이리스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시간의 축을 내놓으라 요구했고, 세크리티아에서 거절했다. 위험한 물건임이 분명했기 때문에, 체이스가 강경하게 맞섰다. 정신 나간 놈이 그 물건을 어디에 쓸 줄 알고 내어 주겠는가? 거절의 의사를 밝히니, 기다렸다는 듯 대군이 쳐들어왔다. 협상은 고사하고 선전포고조차 건너뛰었다. 플란츠는 개념의 크기까지 남다른 놈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에서 세크리티아는 결국 패배했다. 그 결과가 지금 이 모습이다. 체이스는 살아있던 마지막 기사인 베른이 결국 죽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았을 것이고, 시간을 되돌린 것이 분명했다. 그 결과가 이리 나타날 줄은 몰랐겠지만, 체이스라면 베른을 살려내고자 분명 그리 했을 터였다. 칼리안이 한탄하듯 작게 말했다. “원인이 시간의 축이라면······. 돌아가는 방법이 없다는 것인데.” 또 한번 시름에 잠기던 칼리안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어찌됐건 두 번째로 주어진 생이다. 체이스가 준 기회를 허투루 보낼 수는 없었으니,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닌 살기 위한 것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었다. ‘칼리안이 플란츠의 친모인 실리케 왕비를 독살하려다 실패했고, 처벌이 두려워 목을 매 자살했다고 했었지.’ 물론 그것을 사실이라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자살’로 퍼져나온 이야기를 모두 ‘암살’로 걸러 들었다. 실리케라면 충분히 칼리안을 죽이고도 남을 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칼리안을 낳은 후궁 프레이야는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했지만, 그 신분이 미천했다. 르메인의 총애를 입고 왕자까지 낳은 그녀가 이런 나라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프레이야는 칼리안을 낳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출산의 후유증으로 죽었다. ‘부글거리는 검은 피를 토하고 죽는 출산 후유증이라.’ 이렇게 모친을 잃은 칼리안에게 든든한 배경이란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독초조차 구하기 어려웠을 왕자가, 르메인보다 큰 권력을 가졌던 실리케를 죽이려 했다는 것부터 말이 안된다. 게다가 칼리안은 아주 오랫동안.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그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자랐다. 아무리 맹수라 해도, 새끼 때부터 우유를 먹여 키워내면 주인의 발을 핥고 배를 보이는 법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옛 칼리안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만큼 나약하게 자랐으리라. 칼리안이 나이에 맞지 않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냥 보기 싫어서 치워버린 것이지.” 칼리안은 머리 색을 빼고는 프레이야를 그대로 닮았다고 들었다. 실리케는 칼리안의 얼굴에서 죽은 프레이야를 떠올리기 싫었을 것이다. 때문에 칼리안을 살해하고 이야기를 지어냈을 테고, 르메인은 묵과했으리라. 왕실 친위대 중 국왕 직속의 1개 기사단을 뺀 나머지 3개를 모두 실리케가 틀어쥐고 있었으니까. ‘내 기억에, 칼리안은 15세가 되기 두세 달 전에 죽었다. 나의 생일이 앞으로 네 달 뒤이니, 죽기까지 한 달에서 두 달. 그렇다는 것은.’ “누구든, 곧 나를 죽이러 오겠군.” 물론 곱게 죽어 줄 생각 따윈 없었다. 칼리안의 붉은 눈이 빛났다. ──────────────────────────────────── ──────────────────────────────────── 제1장. 이거 정말 멍청하게 살았군. (3) 참으로 낯설고도 기이한 하루가 지났다. 혹시라도 눈을 뜨면 다시 세크리티아에 와 있거나, 혹은 저승에 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기대를 저버리는 얀의 종 소리가 칼리안을 깨워낼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왕자님.” 칼리안은 자리에 앉아 얀이 내미는 모닝 티를 즐긴 뒤, 빈 잔을 얀에게 돌려주었다. 그 후 멀끔하게 세수와 양치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머리 자를 거야.” 그 말을 들은 얀이 큰 눈을 꿈뻑였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속이 빤히 보였기 때문에, 칼리안이 다시 한번 말했다. “내 머리, 자를 거라고.” 칼리안의 두 손가락이 앞머리를 반으로 자르는 시늉을 했다. 얀이 칼리안의 말을 잘못 들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소리였다. 얀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마음을 곧바로 치워내며 대답했다. “네, 왕자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오래지 않아 왕족 전담 미용사가 칼리안의 방을 찾아왔다. 가위를 조심스레 손에 든 그가 칼리안에게 물었다. “정말로, 잘라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칼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부분의 기사가 그렇듯이, 그는 두 번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지금 머리를 자르라는 말만 연거푸 세 번을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이것이 뭐라고 그리 벌벌 떤다는 말인가? 칼리안이 가위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내가 잘라야 해?” “아닙니다, 왕자님. 죄송합니다.” 그제야 가위질이 시작됐다. 사각사각 소리가 몇 번 들린 뒤, 답답하게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검은 머리를 떨쳐낼 수 있었다. 칼리안이 눈을 들어 거울 속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보게 된 것이다. ‘호오.’ 칼리안의 입이 미소를 만들어냈다. 여신의 환생이라던 프레이야를 그대로 닮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까닭이다. ‘이 얼굴, 프레이야가 남긴 매우 훌륭한 유산이 아닌가?’ 칼리안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얀 역시 좋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만 얀은 한편으로 드는 불안함 때문에 점점 수그러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왕자님. 헌데 혹시라도······.” 플란츠의 반응을 걱정하는 것이다.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그렇게 성질을 부려대는 놈이었으니, 오늘 아침 식사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얀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를 눈치챈 칼리안이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멍청할 수는 없잖아.” 그것이 얀의 눈에는 생글거리는 것으로 보였다. 칼리안 답지 않은 표정과 말에, 얀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 때 칼리안의 얼굴에 드러난 것은 지금껏 단 한번도 보여진 적 없던 자신감이었다. 얀은 칼리안의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불안했다. 물론 너무나 반가운 일이었으나, 그러다 혹시라도 더 큰 화를 입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걱정이 되었다. 때문에,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안절부절 못하는 얀의 불안을 느낀 칼리안이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렇게 도착한 식당으로 가 앉아있으니, 오래지 않아 플란츠가 들어왔다. 특유의 흐린 눈으로 식당 안을 쳐다 본 플란츠의 시선이 란델의 빈 의자를 향했고, 그 뒤로 칼리안의 얼굴을 봤다. 가늘게 떠진 연두색 눈이 칼리안의 붉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칼리안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더 이상 가리는 것이 없어진 얼굴로, 플란츠를 똑바로 쳐다봤다. 플란츠의 얼굴에 확연한 조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플란츠는 곧 칼리안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얀이 깜짝 놀란 표정을 급히 지웠다. ‘끝이야? 비웃으시고 끝난 거야?’ 정말 믿을 수 없게도, 플란츠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제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는 더 이상 칼리안을 쳐다보지 않았다. 칼리안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칼리안 역시 얀과 똑같은 생각이었다. 이 미친 왕자가 얌전히 자리에 앉은 것이다. 도무지 변덕을 알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사달이 나야 할 것 같은 적막함 속에 란델이 들어왔다. 언제나 그렇듯, 란델은 칼리안의 얼굴을 본 체 만 체 자리에 앉았다. 식사가 나왔고, 셋은 어김 없이 각자의 음식에 집중했다. 잘 하면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조찬이 끝날 것 같다는 생각에 얀이 안도 할 때 쯤. “······ 야.”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플란츠가 그렇게 입을 열어 부를 만한 상대는 이 곳에 단 한 명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 명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완벽한 예법으로 식사를 계속했다. 물론 이 조용한 식당에서 정말로 그 목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었다. 칼리안이 자신을 쳐다보지 않자, 플란츠의 입술이 씰룩였다. 그 성질머리가 폭발하기 직전에 항상 보여지던 모습이었다. 얀의 심장이 이번에는 배꼽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당사자인 칼리안의 표정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야, 피눈깔.” 플란츠가 다시 한번 씹어 뱉듯 말했다. 한번 더 무시해볼까 고민하던 칼리안이 조금 늦게 플란츠를 쳐다봤다. 플란츠가 그런 칼리안을 향해 무어라 말하려 할 때, 칼리안의 입이 먼저 열렸다. “칼리안.”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말해 준 칼리안은, 썰어 둔 빵 조각을 포크로 찍은 뒤 좀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입니다.” 이 말에 대한 반응은 란델에게서 나왔다. 고요하게 움직이던 양 손이 딱 멈춘 것이다. 란델이 고개를 들어 하루 아침에 태도를 바꾼 칼리안을 쳐다봤다. 허나 그 뿐이었다. 딱히 무어라 끼어들 생각을 할 성격이 아니었던 탓이다. 란델은 곧 다시 손을 움직이며 식사를 이어갔다. “아아.” 플란츠의 입이 비틀려 올라갔다. 그가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지금 자신이 들은 소리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는 오른손에 들린 나이프를 쳐다보며, 왼손으로 식탁을 톡톡톡 두드렸다. “그래. 불러야지. 이름으로.” “네.” 칼리안의 대답이 곧바로 흘러나왔다. 곧 칼리안이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톡톡. 조금 더 큰 소리로 플란츠의 손가락이 식탁을 두드렸다. 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까, 왕자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알아서’ 인데요?’ 플란츠가 다시 한번 웃었다. 어린 아이 같은, 그래서 더 섬뜩한 웃음이 그린 것처럼 떠올랐다. 그 뒤 플란츠는, 오른손에 들려있던 나이프를 그대로 얀을 향해 집어던졌다. - 쌔액! 칼리안에 대한 화풀이를, 칼리안의 시종에게 하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 얀의 팔이 얼굴로 올라오다 멈추었다. 막는다면, 다음은 칼리안에게 그 화가 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얀은 얼굴을 가리는 대신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의 팔이 움직였다. - 탁! 손에 들린 물잔을 내려놓고 다시 팔을 뻗어, 날아오는 나이프를 콱 움켜잡은 것이, 얀이 눈을 감는 것보다 빨랐다. 플란츠의 시선이 잠시 식탁 위의 물잔에 머물렀다. 급히 내려놓았음에도, 물이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뚝, 뚝, 뚝. 나이프의 날을 세게 감아쥔 손에서 붉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플란츠가 말했다. “이런.” 얀의 눈이, 칼리안의 뒷모습과, 칼리안의 손과, 그 손에 들린 나이프와, 나이프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와, 플란츠의 웃는 얼굴을, 마치 시계 초침처럼 돌아가며 살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이었다. 칼이 날아왔던 것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까봐서였다. 칼리안이 일어났다. 피묻은 나이프를 들어, 플란츠의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플란츠를 보며 생긋, 마주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 말의 의미가 참으로 묘했다. 다친 손을 걱정하지 말라는 ‘괜찮다’인지, 플란츠의 무례를 용서하겠다는 ‘괜찮다’인지. 혹은 둘 다인지. 몇 방울의 피가 플란츠의 옷에 떨어졌다. 칼리안이 그대로 식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 * * 왕자의 손에 상처가 생겼다며 엉엉 우는 열 일곱의 소년 얀을 달래놓느라 혼이 쏙 빠진 채로 오후가 되었다. 말을 탈 수 있다 하여 플란츠를 다시 보는 것을 참고 기마 수업에 왔더니, 조랑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보는 그 눈이 참으로 순하여, 칼리안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칼리안은 아직 자신의 말이 없었다. 이전의 칼리안이 말을 굉장히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그런 기억이 떠오르자, 칼리안이 부끄러움에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걸 타기엔 자존심이 상하시나, 칼리안 아우님?” 플란츠! 칼리안이 플란츠의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딱 보기에도 좋은 혈통임이 분명한 은백색의 말 위에 앉은 플란츠가 칼리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리안이 표정을 지우며 예를 보였다. 플란츠의 눈이 칼리안의 손에 감긴 붕대를 슬쩍 훑었다. 그리고는 다시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의 미간이 움찔했으나, 그의 도발에 더 넘어가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눈을 사로잡는 말 한마리가 보였다. 플란츠가 끌고 나온 두 번째 말이었다. 칼리안이 자연스럽게 말의 모습을 살폈고, 곧 크게 감탄했다. ‘아주 좋은 말이다.’ 놈은 오른쪽 앞다리의 발목 부분에만 하얀 털이 있는 흑마였다. 잘 관리된 갈기와 꼬리털이 한올 한올 흩날렸다. 제대로 잡힌 근육이며 날렵한 몸집이, 지금 플란츠가 타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말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고집이 지독한 놈이라 선생에게 조련을 맡기려 했는데.” 지금껏 제대로 타고 내린 적 없을 정도의 난폭한 놈이었다. 헌데 칼리안의 눈이 말에게서 떼어지질 않았다. 이를 본 플란츠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그가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탈 수 있다면. 주겠다. 대신, 못한다면. 칼리안 아우님에게 아침의 일에 대한 사과를 받지.” 그러자 얀이 저도 모르게 한 발 나섰다. 자칫 낙마하기라도 할까 걱정한 탓이다. 그 모습에 플란츠의 눈에 다시 불이 튀었다. 거슬렸기 때문이다. 아침에 나이프를 막으려다 만 것도, 지금 자신의 앞에 나서려는 것도. 마치 제가 칼리안의 보호자라도 되는 냥. 시종 주제에. 그것을 눈치챈 칼리안이 슬쩍 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렇게 플란츠의 시선을 다시 가져온 뒤 침착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곧 칼리안이 놈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칼리안이 천천히 놈의 곁으로 걸어갔다. 플란츠의 성격을 보고 배우기라도 한 것인지, 놈의 눈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절대 등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보였다. 그런 놈을 보는 칼리안의 입에는 진한 웃음이 걸렸다. 부드럽던 눈매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살기를 담은 눈빛이었다. 진짜 전장을 겪은, 그리하여 누군가의 생명을 수 없이 끊어내 본 이가 지닐 수 있는 살기였다. 자신을 한마리가 아니라 몇 십 인분으로 보는 듯한 그 소름끼치는 시선은, 좋은 환경에서 곱게 자란 세 살짜리 말이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도하던 말의 눈빛이 매우 흔들렸다. 곧, 놈의 눈빛이 조금 전의 조랑말처럼 동글동글하게 변했다. 그제야 칼리안의 눈도 다시 호선을 그렸다. 결국 놈은 칼리안이 안장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지 못했다. 놈의 성격을 아는 플란츠만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애써 지웠다. 칼리안이 말을 타는 법 따위를 연습한 적이 눈꼽만큼도 없음을 잘 아는 얀은 이렇게 생각하며 감격에 겨워 했다. ‘우리 왕자님, 기마술을 글로 배우셨어!’ 여전히 칼리안이 기사 소설을 봤다고 믿는 얀이었다. 그러니 그냥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칼리안이 얌전해진 말의 목을 툭툭 치며 말했다. “레이븐이다. 네 이름.” 검은색, 그리고 큰 까마귀. 이름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븐이 새 주인의 말에 푸르륵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보며 씩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봤다. “감사합니다.”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과정이야 어찌됐건 이렇게 좋은 말을 얻었으니까. 그 좋은 기분에, 칼리안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플란츠 형님.” 다분히 의도된 말이었다. 플란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제2장. 그리 많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1) 카이리스의 왕족은 용의 후손이다. 카이리스의 건국왕이자 양신전쟁에서 악신을 봉인한 8인의 영웅 중 한 명인 하츠아라는, 시스파니안을 왕비로 맞았다.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 태초를 함께했다 알려진 태고의 용이며 8인의 영웅 중 또 다른 한 명이기도 한 그녀는, ‘유희’의 맥락이 아니라, 천고를 살아온 그 생애의 일부로서 하츠아라와 결혼했다. 즉, 하츠아라가 시스파니안을 왕비로 맞은 것이 아니라 시스파니안이 하츠아라를 용의 반려로 선택했다는 소리였다. 그런 시스파니안은 하츠아라와 자신의 자손이 아주 조금 특별하길 바랐다. 때문에 아들에게, 카이리스의 왕과 그 직계 자녀에 한해 주어지는 핏줄의 힘을 선물했다. 치유의 힘과 마법적인 재능. 그것이 바로 ‘시스파니안의 축복’ 이었다. 그러니 칼리안의 손바닥에 난 상처는 이미 거의 나았어야 했다. 마나를 쓸 때 심장이 아플 일도 없어야 했다. 없어야 할 두 가지를 마주한 칼리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상처가 그대로고.” 플란츠가 집어던진 나이프에 다친 손이 저녁이 다 되도록 조금도 아물지 않았다. 혹시라도 칼리안이 르메인의 친자가 아닌 것인지를 의심하니, 과거에는 정상적으로 상처가 아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니, 갑작스런 문제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베른은 기사였다. 그것도, 대륙을 통틀어 고작 6명 뿐인 소드 마스터 중 한명이었다. 그런데 옛 칼리안은 운동과는 담 쌓았던 몸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이런 몸으로도 오러를 발현할 수 있는가,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마나에 집중해보았고, 심장 부근에 세 개의 마나 서클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마법에 대한 생소하고도 방대한 지식이 물밀듯 흘러들어왔다. “마나를 쓰려니 심장이 아프고.” 칼리안이 마법사였다는 이 중요한 사실을 이틀이 지나서야 깨달은 것에 실소하며 마나를 운용하려는데, 심장의 통증이 느껴졌다. 플란츠의 검을 잡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으나 가슴 통증을 느낀 칼리안이었다. 그때 칼리안은 무의식적으로 몸에 오러를 두르려 했고, 심장이 아팠고, 덕분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어 이렇게 상처가 생긴 터였다. 칼리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마나를 발현했다. 어김 없이 심장이 아팠다. 칼리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 나이에 서클이 세 개나 된다는 건, 마법 수련을 열심히 해왔다는 것인데.’ 답답한 점은 이런 증상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베른이 칼리안의 몸으로 들어온 이후, 혹은 최근에 생긴 문제인 듯 했다. “큰일이네. 이래서는 오러도, 마법도 사용 할 수가 없는데.” 곤란하다. 아니, 매우 위험하다.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칼리안이 깊은 고민을 시작했다. 이 상황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필요했다. 당연하겠지만 카이리스 왕궁 내에 칼리안에게 조언을 해줄 만한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신중하게 기억을 되짚으며 그에게 도움이 될 이가 없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물이 식었는지, 온도 조절을 위한 마법 장치가 웅, 하는 소리를 냈다. 마법사들의 작품이다. 그 소리를 듣던 칼리안의 눈이 반짝 빛났다. “마법사······. 그래, 마법사.”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목욕 물을 한 번 튕겼다. 찰박,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앨런 마나실.” 앨런 마나실. 그는 마법사다. 현재의 앨런은 3인의 7서클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젊고 실력이 뛰어나, 마법사 대부분의 우상이나 다름 없는 자였다. 베른의 기준으로 10년 전, 그러니까 지금. 국왕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 축제에 초대된 앨런이 카이리스를 방문했었다. 무슨 심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앨런은 굉장히 허름한 차림으로 왕궁을 찾았다. 때문에 왕궁 경비병에게 문전박대를 당했고, 앨런은 그 길로 리베른 왕국에 갔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뒤, 앨런은 대륙 유일의 8서클 대마법사가 되었다. 마나에 대한 지식으로는 대륙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다 하였으니, 분명 이 문제에도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칼리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 기회에 내 사람으로 만들어 두면 더 좋고.” 능력 있는 마법사에 대한 마법사들의 지지는 기사의 충성과 맞먹는다. 따라서 앨런이 칼리안과 함께 한다면, 그 순간 카이리스의 모든 마법사가 칼리안의 편에 서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리 없이 개죽음 당할 일도 줄겠네.” 그 누구도 플란츠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지 못하는 것은, 왕비 실리케가 가진 기사 세력의 힘 때문이었다. 란델은 또 어떤가. 병으로 죽은 카이리스의 전 왕비 아이샤는 신성국가 텐실의 1공주였다. 따라서, 텐실의 왕족이기도 한 란델의 목숨 역시 함부로 노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앨런을 끌어들이면, 칼리안에게도 그런 힘이 생기게 될 것이다. 뿐만인가? 앨런이 불러올 가장 큰 변화는 따로 있었다.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왕위 계승 후보에 내 이름이 추가될테고.” 카이리스는 용의 후손이 다스리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사에 대한 처우가 매우 나쁜 곳이었다. 실리케의 영향이다. 때문에 마법사들은 이 상황을 벗어나게 해 줄 왕세자를 원했다. 그런 마법사들이 칼리안을 지지한다면? 지금부터 칼리안이 그 어떤 가문을 등에 업더라도 그만큼 큰 세력을 얻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이제 겨우 서른 일곱에 불과한 르메인이 당장 세자를 정하거나 왕위를 이양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왕위 쟁탈전이 시작되려면 아직 조금 더 있어야 했다. 플란츠가 왕이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8년 뒤였으니까. 칼리안이 다시 한 번 마나를 운용해보았다. 욱씬, 명확한 통증이 심장을 찔렀다. 칼리안이 크게 인상을 찌푸렸다. “일단 앨런 마나실부터 만나야겠군.” 그래야 다음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칼리안이 생각한 다음은, 아이 한 명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앨런이 칼리안을 구해줄 수 있을 이라면, 그 아이는 칼리안이 구해줘야 할 사람이었다. 구해내서 그의 ‘검’으로 만들어야 했다.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까지 한 달. 칼리안의 사망 예정일도, 빠르다면 그 즈음. 시간이 재미있게 겹친다. “잘 버티면서 기다려야겠어.” 찰박. 칼리안이 다시 한번 물을 튕겼다. * * * - 툭! 칼리안을 본 의상 담당자 섀튼 슬레이크의 손에 들린 줄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섀튼이 깜짝 놀라며 떨어뜨린 것을 치우더니, 새로운 줄자를 꺼냈다. 바닥에 닿은 것을 왕족의 몸에 댈 수 없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다시 쳐다본 섀튼이 잠시 먼 곳을 회상하는 눈을 했다. 그러다 칼리안을 향해 시선을 되돌렸다. 어쩐지 얀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섀튼의 입이 열렸다. “왕자님을 뵈니 프레이야님이 생각나서,” “슬레이크.” 불안해하던 얀이 곧바로 섀튼의 말을 막았다. 그제야 뭔가 생각났다는 듯, 섀튼이 화들짝 놀라며 칼리안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칼리안은 당연히 더 놀랐다. 얀을 쳐다보니, 얀도 어느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곧바로 다른 사람을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칼리안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그들이 사과하는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칼리안은 심한 답답함을 느끼며 서둘러 예전 기억을 뒤졌다. ‘칼리안의 기억은 왜 굳이 생각해내야 떠오르는지!’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 이유를 찾아낸 칼리안이 침음을 흘렸다. “아······.” 옛 칼리안은 프레이야를 닮았다는 이야기에 치를 떨었다. 거울로 제 얼굴을 보는 것도 질색했다. 태어나 본 적도 없는 이를 닮았다며 그 오랜 기간 동안 시달려야 했던 까닭이다. 칼리안의 몸에 처음 들어와 거울을 달라 했을 때 시녀가 밖에 나가서 거울을 구해온 이유도, 얀이 그렇게 당황했던 이유도 이제야 이해되었다. 제 얼굴을 보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 난리를 피웠으니. ‘안 들킨 게 신기하네.’ 짧은 한숨을 내쉰 칼리안이 입 속으로 말을 골랐다. 물론 지금이야 프레이야에 대한 감정이 없지만, 그 정도의 트라우마를 하루 아침에 극복했다 하면 의심을 살 수 있었다. 예전보다는 나아졌으나 여전히 꺼리는 정도의 반응을 보여야 했다. 그래서 적당한 답을 찾아 섀튼에게 말했다. “하려던 것 계속 해. 하려던 말은 굳이 안해도 돼. ‘어머니’를 닮은 건, 나도 잘 알아.” 칼리안의 말에 둘 다 놀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의심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네, 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쫓겨날 뻔 했던 섀튼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고는, 조심스럽게 칼리안의 신체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섀튼과 함께 온 하인이 섀튼이 부르는 치수를 바쁘게 받아 적었다. 잠시 후, 치수를 모두 잰 섀튼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더 많이 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왕자님. 너무 왜소하셔서 걱정이 됩니다.” 칼리안이 웃었다.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 왜소하다는 말을 기분 나쁘게 들을 이유가 없었다. 키가 작은 것은 아니었으나, 마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래.” 치수를 재는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기 때문에 이제 조금 쉬었다 저녁을 먹으면 되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인이 두꺼운 책들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섀튼이 그것을 건네 받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펼쳤다. “······?” 한 권은 여러 모양의 예복 그림을 모아둔 것이었고, 또 한 권은 소재와 색이 모두 다른 천의 샘플을 묶은 것이었다. 각종 레이스 묶음, 그리고 온갖 장신구 그림이 그려진 책이 추가로 올라왔다. 전부 비슷하게 생긴 것 같은 수많은 단추가 주렁주렁 매달린 책도, 수백 켤레의 구두가 그려진 책도 눈에 들어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인 쪽을 쳐다보니 또 다른 책 두 권을 들고 오고 있었다. 저게 다 뭐냐는 얼굴로 멀뚱멀뚱 쳐다보니, 섀튼이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듯 말했다. “이제 디자인을 정해야 합니다, 왕자님. 총 네 벌을 정해주시면 됩니다.” “······ 몇 벌?”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기억 속에서 답이 나왔다. 준비 해야 하는 옷은 총 다섯 벌이었다. 또 한 벌은 왕자의 정복이었기 때문에 고를 필요가 없을 뿐이었다. 칼리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것을 다 골라야 한다는 말인가!’ 베른의 생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베른의 어머니였던 왕비가 대신 했던 일이었고, 기사가 된 뒤에는 무조건 기사의 정복만 입었다. 옷을 고를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세크리티아는 한 번에 다섯 벌의 옷을 준비해야 하는 큰 행사도 없었다. 어떤 행사도 이렇게까지 성대하게 치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는 옷을 대신 골라줄 사람도 없고, 제복도 없었다. 때문에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옆에서 얀이 말했다. “요즘 왕자님께서 많이 달라지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번 달은 행사 준비 때문에 귀족들과의 일정도 없습니다. 그러니, 왕자님께서 이렇게 변화된 모습으로 다른 이들의 앞에 처음으로 나서게 되는 자리가 바로 국왕 전하의 탄신일 행사입니다.” 얀의 말은, 옷 잘 고르고 잘 꾸며입고 나가서 바뀐 첫인상을 제대로 심어 주라는 소리였다. ‘그래. 이해는 되는데.’ 칼리안이 테이블을 빼곡하게 채운 책자를 쳐다봤다. 보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나도 못쓰는 몸뚱이를 가지게 될 판에, 옷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난 저걸 뒤적거릴 자신이 없어. 아니면 너희가 골라.” ‘너희’라는 것은 얀과 시녀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포기하라고 한 말이었는데, 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얼마든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소파로 가 앉았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됐다. 그들이 매우 불타올랐다. 이틀 동안 칼리안의 앞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따라다니던 시녀들이었는데, 어떻게든 칼리안을 돋보이게 해주려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게 오고 가는 이야기를 듣게 된 칼리안이 간간히 자신의 의견을 냈다. “왕 리본 안돼. 작은 리본도 안돼.” 잠깐 실망한 분위기가 돌더니 다른 아이디어가 나왔다.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프릴 많이 안돼.”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레이스는 될 것 같아?” 대체 뭘 만들려는 거야? 방울 뭐야? 결국 칼리안도 그들 사이에 들어가 같이 말싸움을 시작했다. ──────────────────────────────────── 제2장. 그리 많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2) 차의 향기로 잠을 깨고, 완벽한 준비 후 아침을 먹고, 각종 수업을 들어가며 정신 없이 일주일을 보냈다. 그 사이, 플란츠와 세 번을 더 붙었다. 검술 수업 중 또 프레이야를 들먹거리기에, 실수인 척 죽여버릴 뻔 한 뒤로는 어느 정도 조용해졌다. 정말 의외였던 것은 플란츠의 검 실력이었다. 물론 칼리안의 근력이 형편없었다고는 하지만, 플란츠 역시 공격을 꽤 훌륭히 막아냈던 것이다. 기사 가문이라는 이름이 괜한 것은 아니었다. 어찌됐건 그 후 플란츠는, 칼리안을 볼 때마다 비웃는 듯한 눈을 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입을 여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칼리안은 일단 만족했다. 조찬에 가기 위해 거울 앞에 앉아 시녀들이 머리를 빗기는 것을 멍하게 보고 있는데, 얀이 다가와서 하루 일정을 얘기해주었다. “······ 마지막으로 왕비 저하, 브리센 자작과 석찬이 있습니다.” “아.” 레넌 브리센. 그는 브리센 후작의 차남이자 실리케 왕비의 오빠인 자였다. 유서 깊은 기사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소질이 없어 일찌감치 검에서 손을 놓은 뒤, 카이리스에서 가장 큰 상단인 브리센 상단을 이끌고 있었다. ‘상단을 운영할 수 있을 재목도 못돼서, 거금 주고 고용한 상단 관리인에게 전권을 맡기다시피 했다고 했지. 하긴, 그럴 돈이 있는 것도 능력은 능력이지.’ “다른 귀족 없이 브리센 자작만 참석하는거야?” “네. 전하의 탄신 기념일 축제 마지막 날의 축하 공연을 준비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생겨 다른 곳에서 대신 진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일로 전하께 사과 드리려 왕궁에 들었다가, 온 김에 왕자님들을 뵙고 가려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플란츠만 가도 될 텐데.” 직접 플란츠의 이름을 언급하는 모습에 얀의 얼굴이 살짝 경직되었다. 얀의 입장에서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으므로, 칼리안이 금방 다시 말했다. “아무튼 알았어.” 그러자 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정 외에 다른 이야기가 남은 것 같았다. “그리고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말 하라는 뜻이었다. 얀이 잠시 주저하는 듯 하다 말했다. “왕자님 금고를 잠시 열어야 하는데, 이번에도 제가 할까요?” ‘금고? 나 그런 것도 있었어?’ 뭣도 없는 왕자인 줄 알았는데 돈은 있었던 모양이다. 칼리안이 재빨리 기억을 뒤졌다. 그리고 침실 구석에 있던 용도 모를 은색의 화려한 가구가 바로 금고였음을 알게 되었다. ‘의자인 줄 알고 가끔 앉았는데. 어쩐지 딱딱하더라.’ “금고는 왜?” “그것이······.” 웬일로 얀이 말을 얼버무렸다. 그럴 때 이유는 딱 하나였다. 프레이야와 관련된 일인 것이다. 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휘트린 영지의 관리인이 수익금을 올려보냈습니다.” ‘이름이 프레이야 휘트린이었지. 그럼 프레이야의 영지인가보네.’ 아마도 프레이야를 후궁에 올린 르메인이 영지를 하사했던 모양이다. 그것이 그녀 사후에 다른 귀족에게로 넘어가지 않고 칼리안의 소유로 상속된 것 같았다. 생각지 못했던 소득에, 칼리안이 말했다. “이따 같이 해. 얼마나 모였는지 궁금하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해 줄 말이 또 있다는 뉘앙스에, 조찬에 갈 준비를 마친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아시겠지만 왕자님께서 15세가 되시면 시종을 두 명 더 들이실 수 있지 않습니까?” 몰랐다. “올해 왕자님의 탄신일이 지나면 15세가 되시기 때문에, 내정 담당관이 시종 두 명을 어떻게 구하실 요량인지 물어왔습니다. 정확히 탄신일이 지나지 않더라도, 두 세 달 정도 앞당겨서 데려오실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만약 염두에 두신 인사가 없다면 담당관이 직접 배정해 줄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에 대해 대답할 내용을 정리하는데, 얀의 말이 이어졌다. “두 분 왕자님처럼 호위를 쓰시는 것은 어떨까요?” 란델과 플란츠의 뒤에 항상 붙어다니던 시종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검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냥 시종인 줄로만 알았던 칼리안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호위였구나. 어쩐지 덩치들이 좋더라니.” 카이리스는, 세자가 아닌 왕자들에게 따로 개인 호위 기사를 붙이지 않았다. 재밌는 사실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혈전은 왕세자가 아닌 왕자들끼리 치르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왕자들은 개인적으로 호위 기사를 고용했는데, 이것이 또 카이리스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일, 즉 불법이었다. 그래서 호위를 시종으로 위장하여 동행하는 것이 관습이 된 상태였다. 물론 검을 지닌 것이 눈에 띄면 안되므로, 암기를 사용하는 이들을 주로 고용하곤 했다. 이 부분은 칼리안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15세가 되어야 시종 셋을 둘 수 있다는 것만 몰랐을 뿐이었다. ‘허면, 본래의 칼리안도 호위를 두었을까?’ 얀이 이렇게 먼저 얘기했다면, 그리고 호위 기사를 고용할 돈도 있었다면, 고용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마법도 쓸 줄 알고. 호위도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살을 당했다는 건데. 허면 적어도 3서클의 마법사를 제압할 실력의 암살자인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심장 부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니지. 자살로 위장했다면 주변이 깨끗했을 것이다. 마법사였다면 공격이든 방어든 흔적이 남았을 터. 그러니 옛 칼리안도 나처럼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당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어쨌든 칼리안은 생일을 맞이하기 두세 달 전에 죽었고, 호위는 생일 두세 달 전부터 구할 수 있었다.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생긴다. 호위가 그 암살자를 막지 못했거나, 막지 않았거나. 혹은 호위가 암살자였거나. 여러 가능성이 떠올랐다. 무엇이 정답이든간에 칼리안에게 득이 될 것이 없었다. “고용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생각해 둔 사람도 있고.” 그 말에, 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리안의 인간관계를 뻔히 알고 있을테니까. 하지만 칼리안은 그에 대해 더 설명하지 않았다. 물론 칼리안이 염두에 둔 이는, 일전에 데려오겠노라 생각했던 그 아이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평민일거야. 괜찮겠어?” 칼리안의 호위라면, 시종인 얀보다는 윗사람이 된다. 그러나 얀도 엄연한 귀족이었다. 그러니 칼리안의 말은 곧, 귀족인 얀이 평민을 윗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얀은 대체 그런걸 왜 묻느냐는 얼굴이 되었다. 항상 느끼지만, 얀은 얼굴에 모든 것이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왕자님의 호위니, 왕자님께서 괜찮으시다면 되는 일이지요. 굳이 귀족만 왕자님의 시종을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지금 중요한 것은 호위로 올 사람의 신분 따위가 아니라, 호위를 해 줄 사람이 있다는 그 자체였다. 당장 달려나가 모셔와도 모자랄 판에, 신분이 대수겠는가? 칼리안이 그런 얀의 생각을 읽고는 씩 웃었다. 참으로 얀 다운 반응이다. “기사로서 필요한 인재라면, 우선 시종의 신분으로 두시고 기회를 보아 기사 작위를 직접 내리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칼리안이 아무리 왕족이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작위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별한 공이 있지 않은 이상, 함부로 신분을 올려줄 수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경우, 시종으로 데리고 다니다 때를 보아 작위를 내리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래. 당장 데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일단 내정 담당에게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전해.” 당장 데려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디 있는지부터 찾아야 했다. 카이리스의 수도인 이곳 카이리시스에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럼 끝?” “아뇨,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칼리안의 고개가 다시 위 아래로 움직였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얘기인 듯, 얀이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운동, 계속 하셔야 합니까?” 일주일 전부터 하고 있는 체력 단련을 말하는 것이었다. 단련이라 해도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궁 앞의 인공호수 주변을 서너 바퀴 달리는 정도였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힘에 벅차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더 하지도 못했다. 그간 지나치게 운동을 하지 않았던 탓인지, 왠지 모르게 운동을 하기 전보다 오히려 더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들고, 살도 더 빠져버리는 바람에 얀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꾸준히 하면 괜찮아 질거야.” 계속 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 얀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요리사에게 얘기해서 특별히 식단에 신경쓰도록 하였습니다. 조찬은 어쩔 수 없어도 점심과 저녁 식사는 남기지 말고 모두 드셔야 합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알았어. 고마워.” 이제 칼리안의 고맙다는 말이 조금 익숙해진 얀이 살짝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한 손을 내밀어 밖으로 나가는 문을 정중히 가리켰다. 조찬에 가자는 제스처였다. 으으. 가기 싫어. * * *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침묵 속의 식사를 마친 칼리안은 14년간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인 영지 수익금의 엄청난 금액에 화들짝 놀란 뒤, 조금 가벼운 차림으로 밖에 나왔다. 오전에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운동을 할 생각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이런 식으로 운동을 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고, 대체로 얀이 함께했다. 다만, 가끔 얀이 시종들간의 회의에 가느라 자리를 비우는 시간과 겹치면 얀을 대신해 시녀 중 한 명이 칼리안을 따라왔다. 메를린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칼리안의 거울을 가져오고, 미용사를 불러왔던 바로 그 시녀였다. 놀랍게도, 그녀는 호수 주변 서너 바퀴 쯤은 숨도 한번 몰아쉬지 않고 달렸다. 그런 메를린이 지금 칼리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프릴 많이’를 주문했던 것이 바로 메를린이었음을 상기한 칼리안이 얼른 자세를 잡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앞으로 달려나가도, 뒤를 돌아보면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달려오는 메를린이 있었다. 칼리안이 울상을 지었다. ‘이 여자, 무섭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메를린은 카이리시스 외성을 수비하는 수도 기사단 단장의 둘째 딸이었다. 검을 배운 적은 없어도 어려서부터 단장과 함께 카이리시스 외곽의 타룬 산을 매일 뛰어다녔다고. 그러니 이 정도 쯤이야. 결국 세 바퀴 반 만에 완전히 지친 칼리안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땀이 비오듯이 흘렀고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메를린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땀 흘리는 모습이 보기 싫다는 이유는 당연히 아니었다. 칼리안이 처음 운동을 시작했을 때에는 네 바퀴 반을 달렸고, 사흘째가 되던 날에는 네 바퀴를 뛰었다. 그리고 이제는 세 바퀴 반.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메를린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 일반적인 시종과 시녀들은 왕자에게 직접 말을 하지 못하고 상급 시종 혹은 상급 시녀를 통해야 했다. 때문에 메를린도 칼리안에게 할 말이 있다면 얀을 거쳐 전하도록 되어 있었다. 다만 칼리안의 시녀들은, 이전에 예복을 맞추는 과정에서 한번씩 칼리안과 얘기를 나눈 이후로 가끔 말을 걸어오곤 했다. 칼리안이야 당연히 그것을 기분 나빠 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고, 오히려 대화할 사람이 많아졌다며 좋아했다. “치유사를 부르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치유사는 칼리안이 손을 다쳤을 때 얀이 부르려다 말았던, 텐실에서 온 신관이었다. 그런 치유사를 왜 부르라는 것인지 칼리안도 물론 알고 있었다.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 문제 때문이리라. 하지만 치유사를 찾을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서클이 바로 들통나겠지.’ 옛 칼리안이 해왔던 온갖 답답하고 멍청한 행동 중, 유일하게 잘 했다고 여기는 것이 있었다. 바로, 마법사임을 숨겼다는 것이다. 그것은 얀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얀에게야 알려도 좋았으리라 생각하지만, 누군가를 믿을 만큼의 여유조차 없던 처지였으니 이해가 되었다. 만약 칼리안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면, 베른이 칼리안의 몸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죽었을 것이다. 함부로 다루지 못할 만큼 힘을 키우기 전에 없애려 했을 테니까. 같은 이유에서, 지금의 칼리안 역시 당장은 서클을 숨겨야 했다. 마나 운용을 못하는 상황이니 더더욱 그리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칼리안이 조금 늦어진 대답을 전했다. “괜찮아.” 메를린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다른 말을 더 하지는 않았다.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기어코 한 바퀴를 더 달린 뒤 방에 돌아갔다. ──────────────────────────────────── 제2장. 그리 많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3) 석찬을 위해서는 다른 건물로 이동해야 했다. 따라서 칼리안은 일찌감치 준비를 마치고 체르밀 궁 앞에 세워져 있던 두 대의 마차 중 한 대에 올랐다. 남은 한 대는 당연히 란델이나 플란츠 중에 아직 출발하지 않은 왕자를 위한 것일 터. 그러니 한 명은 이미 출발을 한 모양이었다. ‘하도 넓어서 다른 건물에 어떻게 가나 했더니, 궁내 이동 용 마차까지 있을 줄이야.’ 이게 다 시스파니안 때문이었다. 좁은 곳에서는 못 산다는 말에, 하츠아라가 이런 말도 안되는 규모의 왕궁을 지었다는 기억을 떠올린 칼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차는 체르밀 궁을 둘러싼 긴 회랑을 지나쳐, 거주 공간과 집무 공간의 경계를 이루는 분수 정원을 통과했다. 그리고는 국왕의 집무를 위해 마련된 아르피아 궁, 왕실과 관련된 일을 하는 귀족들의 업무 공간인 나르실 관을 지나 조금 더 달린 뒤 멈췄다. 귀족들과의 작은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는 세뉴 관 앞이었는데, 금박된 기둥으로 꾸며진 하얀 대리석 건물에 석양이 비춰 상당히 아름다운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왕자님, 도착했습니다.” 마차 입구에 간이 계단을 놓은 얀은 칼리안이 마차에서 내릴 때 옷자락을 밟지 않도록 도왔고, 세뉴 관의 시종이 마중나와 석찬이 진행될 곳으로 안내했다. 석찬은 세뉴 관의 뒤에 만들어진 정원에서 이루어졌다. 날이 어두워질 것을 대비한 마법 등불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간 칼리안이 시종이 빼주는 의자에 앉았다. 란델은 이미 와 있었고, 칼리안이 도착한 이후에 플란츠가 저벅저벅 걸어와 앉았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은 정적이 한동안 흘렀다. 그러다 문득, 짙은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일 년에 단 하루만 피었다 지기 때문에 그 가치가 남다르다는 르니에리 꽃의 향이었다. 실내가 아니었음에도 손 끝이 아릴 정도로 풍겨오는 향기. 칼리안은 실리케를 보거나 르니에리 향을 맡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향기를 느낀 순간 그녀가 도착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실리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레넌 브리센 자작과 함께 걸어오는 왕비 실리케를 쳐다봤다. 실리케의 시선도 칼리안을 향했다. 그리고 곧,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서로에게서 눈을 돌렸다. 란델이 잠시 그 모습을 쳐다보다 시선을 옮겼다. 실리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신의 것으로 마련된 자리에 가 앉았다. 플란츠의 옆 자리였다. 어머니와 숙부가 도착했음에도, 플란츠는 별다른 예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실리케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 곳에 있던 칼리안과 란델을 의식해서인지 별 말을 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세 분 왕자님들.” 레넌이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다소 낯설게 변한 칼리안의 얼굴을 쳐다봤다. 레넌은 아마 이전에도 칼리안을 본 적이 있었던 듯, 놀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칼리안을 향해 입을 열려 할 때, 실리케의 손이 움직였다. - 차르륵! 실리케의 손에 들린, 보라색 실크로 만들어진 부채가 펼쳐지며 다소 큰 소리를 냈다. “흠, 흠!” 그러자 실리케의 불편한 심정을 눈치 챈 레넌이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곧 에피타이저를 시작으로 저녁 식사가 진행되었다. 간간히 레넌이 말을 하고 실리케가 짧게 대답하는 정도의 대화가 오갔다. 그러다 실리케의 시선이 칼리안을 향했다. “많이 자랐구나.” 자신을 향한 질문임을 곧바로 알아차린 칼리안이 실리케를 쳐다봤다. 이런 시점에 정말로 ‘키가 컸다’는 의미로 한 말은 아닐 터. 때문에, 칼리안은 약간의 시간을 흘려보낸 뒤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리 많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더했다. “앞으로 더 많이 자라겠지요.” 실리케의 눈빛이 변했다. 고작 열네 살의 평범한 소년이 지어 보일 수 있는 종류의 표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칼리안은 결코 저런 식으로 웃지 못했다.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때, 눈치 없는 레넌이 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왕자님. 아직 성장기시니 키도 더 크셔야······!” - 촤르륵! 실리케가 오가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레넌의 입을 다시 한번 막았다. ‘그것 참. 너무 소문 대로라 신기할 지경이네.’ 상단을 운영하려면 필요한 수많은 능력이 있다. 그 중 판단력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최소한 눈치 정도는 있어야 한다. 방금 전의 한 마디로, 레넌은 자신에게 그 두가지가 확실히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 셈이었다. ‘상단 관리인이 고생 좀 하겠어.’ 실리케가 매서운 눈초리로 레넌을 보며 말했다. “주방장이 특별히 신경 쓴 송아지 고기 스테이크라 합니다. 충분히 즐기시지요. 오라버니.” 닥치고 먹으라는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이제야 말을 알아 들은 것인지, 눈빛에 겁을 먹은 것인지. 다행히 이번에는 실리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한 레넌이 입을 닫고 스테이크에 열중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플란츠가 숨기지 않고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 소리에, 실리케의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어차피 칼리안과의 대화가 중간에 끊어진 상태였으니, 이번에는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너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란델이 살짝 칼리안을 쳐다봤다. 자신의 말 레이븐을 말하는 것일까 혹은 자신을 말하는 것일까 생각하느라, 칼리안은 란델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하긴. 말 한 마리가 성질이 사나운 걸 신경 쓸 사람이 아니지.’ 그러니 그 말은, 레이븐이 아니라 칼리안일 것이다. 칼리안이 플란츠를 대하는 태도가 바뀐 것을 뜻하는 소리이리라. “미리 알려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플란츠가 고개를 삐딱하게 움직였다. 자신의 것과 똑같은 실리케의 연두색 눈을 쳐다본 플란츠의 비틀어진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무엇을요.” 무엇을 이야기했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숨죽여 살다 제 어미의 뒤를 따라 조용히 사라질 티끌이 극명하게 달라진 것. 그리하여 실리케에게 목 안의 가시처럼 거슬리고 있는 것. 이런 의미임을 플란츠도 이해했다. “이미 다 전했을텐데요.” 다만 플란츠의 시종들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실리케에게 보고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칼리안에 대한 무엇을 ‘더’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물론 실리케도 칼리안이 달라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진 않았다. 머리를 잘랐던 바로 그 날 이미 온 왕궁에 소문이 퍼졌다. 뿐만 아니라, 식당에서의 사고와 기마 수업의 일을 포함한 그간의 상황을 낱낱히 전해들어 알고 있었다. 플란츠의 이런 반응에, 실리케가 실망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완전히 네 손을 벗어났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잖니.” 실리케를 마주하는 붉은 눈에, 더 이상은 두려움이 담겨 있지 않았다. 칼리안이 달라진 것이 비단 외양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더는 플란츠가 붙들어두지 못하리라는 것을 실리케에게 알렸어야 했다. 하지만 플란츠는 그러지 않았다. “네가 어떻게 할 생각인지도.” “그것도 이미.” 플란츠의 입에 조소가 어렸다. “말했을텐데요.” 플란츠가 더 이야기하기 귀찮다는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는 실리케가 조용히 웃었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곧 그녀의 웃음이 조금 다르게 변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맑은 웃음이었다. 그것은 플란츠가 얀에게 나이프를 집어던지기 직전에 보였던 것과 완전히 닮아 있었다. “플란츠. 너는 항상 그래왔지. 허나 너무 심려하지는 마렴. 놓칠 일도, 되찾아올 일도 더는 없을 테니.” ‘하긴. 내가 죽어서 사라지면 도망 갈 일도 없겠지.’ 칼리안이 아무렇지 않은 척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식사를 이어나갔다. 그러자 실리케가 다시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다.” 플란츠는 마음대로 하라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아버렸다. 자연스럽게 나이프를 움직이던 칼리안의 눈빛이 조금씩 서늘하게 변했다. 대체 얼마나 우습게 보았으면, 본인을 앞에 두고 저런 이야기를 태연히 꺼낸다는 말인가! 란델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그리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 뒤, 놀랍게도 칼리안에게 말을 건넸다. “피곤해 보이는구나. 먼저 가서 쉬거라.” 생각지 못한 란델의 말에, 플란츠까지도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란델은 그 외의 말을 더 꺼내놓지는 않았다. 이 끔찍한 식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 그 한마디가 어찌나 반갑던지. 칼리안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실리케의 미간이 좁아졌으나, 란델의 행동에 대해 딱히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식사 즐거웠습니다.” 레넌에게 말한 칼리안이, 고개를 틀어 실리케를 똑바로 쳐다봤다. 칼리안은 실리케에게 죽은 여자를 완전히 닮은 그 눈으로 실리케를 응시하며 생긋 웃었다. 부디 이 모습도 죽은 프레이야를 빼닮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에, 또 뵙지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실리케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와 무어라 답하려 할 때, 칼리안이 몸을 휙 돌려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부채를 쥔 실리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란델은 눈을 내리 깐 채 디저트를 입으로 가져갔다. 실리케가 좋아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르니에리 꽃을 넣은 소르베였다. 르니에리 꽃 향이 란델의 입 안을 맴돌다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 * * 그리고 3주일이 더 지났다. 국왕의 탄신 기념일 축제를 앞두고, 카이리스의 수도인 카이리시스 전체가 들썩였다. 자신의 영지에 머물던 귀족들이 하나 둘 카이리시스의 자택으로 모여들었다. 각국의 사신들이 찾아와, 왕궁의 귀빈을 위해 마련된 빌헬름 관에서 여독을 풀었다. 이틀 전 카이리시스에 입성한 엘프들의 모습을 구경하려는 인파로 한동안 소란이 일기도 했다. 누군가는 손님을 맞이하고, 누군가는 연회를 준비하고, 또 누군가는 안전을 지키기 위해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모두가 성대한 축제를 앞두고 들뜬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얀의 안색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얀 뿐만 아니라 칼리안의 시중을 돕는 여섯 명의 시녀들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1개월 만에 칼리안을 다시 찾아온 의상 담당자 섀틴도, 굳은 얼굴을 했다. “왕자님, 어떻게 더 마르셨습니까?” 칼리안이 걱정 가득한 섀틴의 얼굴을 보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렇게 됐어.” 태평한 얼굴과 말투로 대답했지만, 칼리안 역시 문제를 실감하고 있었다. 마력을 쓰려 할 때마다 심장이 아픈 것과 몸이 계속 나빠지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몸 속의 마나가 심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분명한 듯 했다. 얀은 그런 칼리안을 보며 하루가 멀다하고 치유사를 불러오겠다는 말을 했다. 결국 칼리안은 얀에게만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과 서클을 숨겨야 하는 사정을 설명했고, 국왕의 탄신일 축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이유도 함께 이야기했다. 물론 앨런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 부분은 적당히 감추어 말했다. ‘전하의 탄신일 축제에 분명 저명한 마법사들도 올 거야.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 문제를 확인해볼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마법을 익혔다면 치유사의 신력이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었으므로, 얀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그 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섀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복을 수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옷 이곳 저곳에 핀을 꼽아 가며 줄여야 할 곳과 그대로 두어도 될 곳을 구분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줄자를 다시 꺼내들었다. “치수를 새로 재겠습니다, 왕자님.” 옷을 모두 조각내어 줄인 뒤 다시 이어 올 생각인 것 같았다. 칼리안이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되어 순순히 따랐다. 한참동안 치수를 다시 잰 섀틴이 문제 없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시간이 있어 다행입니다. 내일 오전까지 수선하여 다시 오겠습니다.” 시간이 촉박할 터였다. 칼리안이 섀턴의 부담감을 줄여주려 말했다. “예복 두 벌은 어차피 둘째, 셋째 날에 입을테니 시간이 부족하면 그것들은 조금 늦게 가져와도 괜찮아.” “네, 왕자님. 알겠습니다.” 그리고 칼리안은 마차를 내어 섀틴을 데려다 주도록 일렀다. 그것이 그나마 섀틴을 도와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르메인 국왕의 탄신일이 다가왔다. ──────────────────────────────────── 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1) 카이리스 왕궁의 정문은, 카이리시스를 통과하는 커다란 도로인 왕도와 곧바로 이어졌다. 그리고 왕궁의 앞에는 두 개의 광장이 왕도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며 펼쳐져 있었는데, 동쪽의 하츠아라 광장, 서쪽의 시스파니안 광장이 그것이었다. 두 광장의 중심에는 조각상을 둘러싼 거대한 분수대가 하나씩 있었다. 하츠아라 광장의 분수대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시스파니안이, 반대로 시스파니안 광장의 분수대에는 건국왕 하츠아라가, 멀리 떨어진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본래 두 조각상은 왕궁을 향해 선 형태로 만들어졌으나, 하츠아라 사후 드래곤의 모습으로 찾아온 시스파니안이 두 조각상을 서로 바라보게끔 돌려놓고 떠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 곳이었다. 그러다보니 이 두 개의 광장은 평상시에도 연인이나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카이리스의 대표적인 명소였다. 그런데 새벽부터 광장을 찾은 사람들이 두 유명한 분수대에는 시선조차 두지 않고, 가능한 왕궁과 가까운 곳에 설 수 있도록 자리 경쟁을 벌였다. 오늘이 바로 국왕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이른 새벽, 왕궁 정문을 뒤로한 왕도의 위에 화려한 단상이 세워졌다. 탄신일을 맞이한 국왕이 인사를 건네는 자리였다. 단상과 멀리 서게 되는 이들을 위해, 두 분수대의 앞에 얇고 커다란 수정 판도 세워졌다. 단상에 올라 있는 국왕 일가의 모습을 수정 판에 투영시켜 뒤에서도 잘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마법 장치였다. 그 이후에는 카이리시스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대가 광장 곳곳에 서서 혹시라도 발생할 지 모를 사고에 대비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왕궁에서 시녀들이 나와 단상 위를 청소하고, 광장을 찾은 이들에게 나누어 줄 기념 선물을 쌓아놓는 등 정신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왕궁 밖 분위기만 이렇게 들떠있는 것은 아니었다. 왕궁 안에서도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후우.” 칼리안이 긴장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새삼 실감했기 때문이다. 축제 기간 동안은 조찬도 없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모두 바쁘게 축제를 준비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섀틴이 딱 맞추어 찾아왔다. 아직 칼리안이 외부인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으므로, 얀은 칼리안이 있는 침실 커튼을 내린 후 섀틴을 방 안으로 들였다. 따라서 칼리안 쪽에서만 섀틴을 볼 수 있었는데, 커튼 너머로 보이는 섀틴의 얼굴이 하룻밤 새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은 것을 보니 아마도 옷을 줄이느라 그대로 밤을 새운 눈치였다. 칼리안이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다시 한번 마차를 보내주었다. 섀틴이 나간 뒤 커튼을 걷은 얀이 말했다. 어쩐지 칼리안보다 더 긴장한 듯한 얀의 얼굴이, 굳은 찰흙 같이 딱딱해 보였다. “준비하시는 동안 오늘의 일정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해준 일정이 칼리안의 귀로 또 들어왔다. “오전 9시에 전하께 축하 인사 올리시고, 10시에는 광장에서 치뤄지는 행사에 참석하시게 됩니다. 12시부터 국왕 전하, 왕비 저하와 함께 하는 오찬이 있고,” 거기까지 들은 칼리안이 얀의 말을 가로챘다. “오후 2시 중앙 귀족과 티 타임, 5시 지방 귀족과 티 타임, 8시 연회, 11시 끝. 다 외웠어.” 얀이 웃었다. 그 동안 일정을 얼마나 많이 얘기해줬었는지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맞습니다. 내일은 사절들과 만남도 있으니 오늘 귀족들의 대화를 잘 들어두시면 도움이 되실 거예요.” 칼리안이 기대하는 것은 오로지 연회가 시작된 이후였다. 앨런이 연회가 끝나갈 때가 되어서야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그 시간까지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조급함이 몰려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차라리 좋은 일이다. 그 전에는 빠져 나올 수도 없으니.’ 빼곡한 일정으로 정신없이 불려다녀야 할 하루였으므로, 중간에 앨런이 왔다가 돌아가기라도 하면 큰 낭패일 테니 말이다. 덧붙이자면 칼리안은 각국 사절과의 만남, 정확히는 세크리티아에서 오는 사절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당연하겠지만 사절단에 체이스가 포함된 것도 아니었고, 사절단으로 오는 세크리티아 귀족 중 칼리안이 보고 싶어 할 만한 인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누가 오는지 잘 기억은 안나지만. 혹시나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내가 가서 요즘 체이스 왕자님 잘 지내시냐고 물을 수도 없는 일이니.’ 지금 시점의 베른은 세크리티아 귀족들과의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다. 후궁의 아들인 체이스에게 왕세자 위를 양보하겠다는 베른의 의견에 너나 할 것 없이 반대들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왕비의 아들인 그가 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체이스에게 기사 서임을 받았다. ‘형님한테 충성 서약 할 때 놈들 표정이 볼 만 했지.’ 오랜만에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실소하는 칼리안의 귀에 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주의사항이었다. 물론 이미 지겹도록 들은 것이었다. “귀족들과 인사하실 때에는 제가 뒤에서 이름을 일러드릴 겁니다. 그 외에는 따로 말씀을 나누실 일이 없을 거예요. 그래도 만약 그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걱정 가득한 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느새 과거에서 벗어나와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이 눈에 그려졌다. 칼리안이 또 얀의 말을 자르고 대답했다. “상대방 이름을 잊어버렸으면 얀을 쳐다봅니다. 유능한 상급 시종 얀이 다시 말해줄 겁니다. 그리고, 인사는 먼저 건네도 되지만 내 이름은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왕족이니까요.” 그러자, 얀이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 말씀 낮춰주세요.” 칼리안이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얀의 말을 덮었다. 그리고는 질문 아닌 질문을 했다. “그런데 내 이름 모를 사람이 있나? 다들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 같던데. 아! ‘그’ 칼리안! 이렇게.” 당연히 좋은 의미가 아니었으므로 얀은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쓴 표정을 지으며 칼리안을 쳐다봤다. “아무튼 그것도 오늘이 지나면 달라질테니. 너도 걱정 그만해. 실수 안할거니까.” 왕자 노릇을 너무 오래 했다. 뿐만인가? 왕제 겸 기사 생활까지. 사람들 앞에서 완벽한 왕자로 탈바꿈하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 있는 칼리안이었다. 그러다보니, 축제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암살자는 어차피 올 테니, 이 기회에 실리케 속이나 실컷 뒤집어놔야지.’ 눈에 띄게 행동하나 띄지 않게 행동하나. 실리케는 그런 것과 상관 없이 그냥 칼리안의 존재 자체가 싫은 여자다. 그러니 아예 눈에 띄어 버릴 생각이었다. 눈에 들어간 고양이 털처럼, 완전히 거슬려 버리겠다고 작정을 했다. 그런 생각을 모를 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칼리안을 한참 쳐다봤다.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곧 얀의 진지한 목소리가 칼리안의 장난스런 웃음을 붙들었다. “그리고, 왕자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왕자님의 건강입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오늘 일정을 모두 참석하시기 어려울 것 같다면 참지 마시고 제게 바로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꼭이요.” 칼리안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덧붙이는 말이었다. 얀에게 이야기해야 무엇이 달라지겠나 싶다가도, 얀이라면 정말 어떻게든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리안이 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것 역시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오늘의 첫 의상은 왕자의 정복이었다.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금색 단추가 두 줄로 박힌 검은색의 타이트한 재킷을 입었다. 목을 반쯤 가리는 넥칼라가 달린, 허리 아래까지 오는 길이의 재킷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붉은 색 망토를 둘렀다. 망토를 재킷에 고정한 시녀들이, 두 줄의 금색 끈과 태슬이 달린 망토 이음 장식이 비뚤어지지 않았는지 살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마지막으로 점검한 메를린이, 만족한 표정으로 칼리안에게 말했다.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왕자님.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보인 칼리안이 거울을 쳐다봤다. 너무 마른 것이 조금 흠이기는 했지만, 메를린의 말처럼 왕자의 정복이 잘 어울리는 칼리안의 모습이 비춰졌다. 재킷 상의에 황금색으로 새겨진, 오망성과 드래곤의 모습을 형상화 한 카이리스의 문장이 보였다. 실제로 이 문장이 수놓아진 옷을 입은 것은 처음이었던 탓에, 새삼스러운 눈으로 거울 속 모습에서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 카이리스의 문장이 낯설지 않구나.’ 오히려 세크리티아의 문장이 낯설어질까 걱정이 되었다. 거울을 쳐다보는 칼리안이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자, 얀의 눈에 불안함이 어렸다. 이제는 그러지 않겠지만, 만에 하나 거울을 또 깨뜨릴까봐서였다. 얀이 조심스레 물었다. “왕자님.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부분이 있습니까?” 그제야 칼리안의 눈이 거울에서 떨어졌다. 다행히 칼리안은 얀이 걱정하던 우울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벌써부터 너무 잘생겨서.” 얀의 표정이 재미있게 변했다. 칼리안이 그런 얀을 두고 밖으로 나갔다. 자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칼리안의 태도에 멍청한 표정을 짓던 얀이 재빨리 따라 나섰다. * * * 작은 마차가 체르밀 궁 앞에 세워져 있었다. 마차가 한 대 뿐인 것을 보니 웬일로 란델과 플란츠 둘 모두 이미 출발한 모양이었다. ‘란델은 그렇다 치고, 플란츠까지?’ 의외의 상황이었으나, 그렇다 해도 칼리안이 늦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칼리안과 얀이 탄 것을 확인한 마부가 느린 속도로 마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궁을 찾은 손님들이 많아서인지, 왕궁 내를 오가는 마차들이 굉장히 많았다. 곧 마차가 르메인이 있는 아르피아 궁에 도착했다. 본래는 국왕의 집무 공간인 이 곳이 아니라 국왕이 거주하는 카밀리아 궁에서 진행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일이 너무 많다는 관계로, 형식은 다 없애고 집무실에서 간단히 인사만 전하게 되었다. 칼리안은 매우 좋아했다. 가장 어려울 것 같은 일정이 가장 간단한 것으로 바뀌었으니까. 그리고 잠시 후, 칼리안이 난처한 얼굴로 얀에게 물었다. “다 어디 갔을까?” 분명히 이미 와 있어야 할 란델과 플란츠가 없었기 때문이다. 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모른다는 뜻이었다. 칼리안이 싱긋 웃었다. “그래. 너도 모르는 게 있어야지.” 얀이 당혹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때,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국왕의 시종장이었다. 하얀 머리에 중후한 인상을 한 시종장이 칼리안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칼리안 왕자님.” 그렇게 말해오는 시종장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은 칼리안이 물었다. “형님들께서는 어디에 계시지?” 그러자 칼리안을 지그시 쳐다보던 시종장이 대답했다. “이미 체르밀 궁으로 되돌아 가셨습니다. 오늘 전하께서 급히 진행하셔야 할 업무가 있다 하시어, 잠시 간단한 인사만 올리는 것으로 일정이 변경되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오늘 오찬 역시 취소되었습니다. 미리 언질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가? 칼리안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전하를 따로이 만나 뵈었다는 말인가?” “네, 왕자님.” 뒤에서 얀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 얼굴을 보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했다. ‘왕자님께 전하를 독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일러드리지 못했는데!’ 정도일 것이다. 예절 교육을 따로 받는데도 저렇게 신경을 쓴다. 그나저나 셋을 한꺼번에 만나기에 시간이 부족해서 따로따로 만난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누가 생각해도 한꺼번에 셋을 보는 것이 시간이 더 짧을 테니까. 이유가 무엇이건 국왕이 변덕을 부렸다 하니 따라야 했다. 칼리안은 알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나도 지금 들어가면 되겠나?” 시종장이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네, 왕자님. 바로 드시지요.” 칼리안은, 칼리안의 아버지를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런 첫 만남이 이렇게 어려운 자리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독대라. 정말 처음인데.’ 살다 살다 란델과 플란츠가 보고 싶어질 줄은 몰랐다. 풀어졌던 긴장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집무실을 향해 걸어가던 칼리안이 티나지 않도록 심호흡했다. 이전의 칼리안도 르메인을 독대한 기억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베른일 적에도 아버지인 국왕과 사이가 좋지 않아 단 둘이 만난 적이 없었다. 그가 독대했던 국왕은 체이스가 유일했다. 그리고 체이스와의 독대는 그냥 형제간의 만남이었지, 결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칼리안이 진중한 표정으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마치 호수 위를 헤엄치는 백조가 된 기분이었다. 겉으로는 침착했지만, 마음 속은 체르밀 궁의 호숫가를 다섯 바퀴는 달린 것처럼 숨가빴다. 국왕을 보며 무슨 말을 해야할지 수십 가지의 인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 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2) 르메인은 집무실의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이제와서 알게 되었지만, 르메인 역시 검은 머리였다. 르메인은 국왕의 덕목을 가르치던 책의 표지에서 바로 튀어나왔다고 해도 좋을 만큼 완벽한 국왕의 외형을 갖춘 남자였다. 표정은 신중했고, 눈은 깊었다. 그 모습이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란델을 보는 것 같군.’ 광막한 바다를 생각나게 하는 짙은 푸른 빛의 눈동자와 얼굴 생김새는 물론이고, 눈을 내리깐 표정이며, 말 없이 사람을 짓누르는 분위기까지. 란델의 모든 것이 르메인을 닮아 있었다. ‘방관하길 좋아하는 성향까지 닮았어.’ 프레이야와 칼리안의 죽음을 모르는 척 했던 비정한 왕. 그것이 르메인에 대한 칼리안의 사적인 평가였고, 그 생각은 아직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에게 느끼는 이 본능적인 거북함은 앞으로도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 칼리안은 르메인의 앞으로 걸어가며 든 이러한 생각을 비워내기 위해 애썼다. 만에 하나라도 표정으로, 혹은 입으로 튀어나올까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인사만 하고 나가는 거야. 나와는 관련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리하여 르메인의 곁에 도착했을 즈음 그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간신히 감추는 것에 성공한 칼리안이 흠 없는 몸가짐으로 예를 올렸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명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처음 뵙겠습니다’ 라는 말은 아니었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르메인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옆에 거의 다 마신 홍차 잔과 또 다른 서류 뭉치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줄곧 소파에서 일을 했던 것 같았다. 서류를 내려놓았으니 이제 칼리안을 쳐다볼까 했는데, 르메인은 곧바로 다른 서류를 집어들었다. ‘······ 하아?’ 칼리안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물론 르메인은 그런 칼리안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예 보지도 않았으니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칼리안의 눈이 곧 사납게 변했다. “이리 와 앉거라.” 정말 어울리지 않게도, 그렇게 화가 난 와중에 웃음이 났다. 르메인의 목소리가 플란츠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말투는 당연히 달랐지만 목소리는 나이 든 플란츠를 연상시켰다. 참 골고루 나눠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리안이 이런 잡생각으로 애써 사념을 접어내며 르메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르메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서른 여덟 번 째 탄신일을 맞이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높낮이 없는 음색이 서류 뒤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고맙구나.” 그렇게 감정 없는 말투로 화답한 뒤 찻잔을 들어 한모금 마신 르메인이 손을 올려 미간을 주물렀다. 꽤나 피곤한 것 같았다. “잘 지내고 있는 것이냐.” “네.” 칼리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르메인은 칼리안이 급격히 야위었다는 것을 알아 차리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칼리안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구나.” 하기사. 좀 쳐다봐야 알아 차리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지내는 중에 불편한 것이 있다면 말 하거라.” 칼리안의 한쪽 입꼬리가 미약하게 올라갔다. ‘내가 지금 불편한 게 한 둘이 아니라서.’ 그쪽의 두 아들과 함께하는 침묵 속의 조찬에 아직도 적응을 못했다고 해야 할지, 조만간 그쪽 부인이 보낸 암살자가 찾아올 것 같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병으로 점점 말라가고 있는데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내가 사실 그 쪽의 아들이 아니라고 해야 할지. 그렇게 말하면 쳐다봐 줄런지. “잘, 지내고 있습니다.” 결국 칼리안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답이라기 보단 성의 없는 대꾸였다. 그럼에도 르메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았다. 셋을 한꺼번에 보는 것보다 하나씩 세 번을 보는 것이 빠른 이유. 셋을 앞에 앉혀놓고는 저런 짓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나씩 앞에 두면 일을 하면서 입만 열면 되니, 얼마나 효율적인가? ‘아들에게 단 5분을 할애하는 것도 아깝다는 말이군.’ 르메인은 여전히 미간에 올린 손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칼리안이 냉소했다. 그 뒤로 르메인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기억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정확히 5분만에 르메인을 만나고 아르피아 궁 밖으로 나온 칼리안이 마차에 오르며 말했다. “차라리 ‘처음 뵙겠습니다’ 할 걸 그랬어.” 얀이 조용히 웃었다. 집무실의 일을 전해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르메인이 왕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차가 출발했고, 오래지 않아 체르밀 궁 앞에 세워졌다. 마차에서 내린 칼리안이 숨을 푹 내쉬며 주변을 돌아봤다. 호수에 바람이 들어 잔물결이 일고 있었다. “10시까지 시간이 조금 있습니다. 돌아보고 오시지요.” 답답한 마음을 읽은 얀이 그렇게 말했다. 얀을 두고 혼자 걸어 나온 칼리안은 호수 근처를 천천히 돌아 장미가 심겨진 정원으로 갔다. 그러다 정원 한가운데 검은 색 양산이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칼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이런 날 누가 정원에?” 호기심에 양산 근처로 걸어간 칼리안은 급하게 발을 멈췄다. 양산 밑에서 장미를 돌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란델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의 취미가 장미 정원을 가꾸는 것이라는 사실은 칼리안도 알고 있었다. 참으로 란델 다운 취미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란델의 모습은 취미를 즐기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굳은 표정을 한 란델의 시종이, 칼리안이 두른 것과 똑같이 생긴 빨간 망토를 팔에 걸친 채 양산을 받쳐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정복 차림을 한 란델이 정원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장미의 곁가지를 잘라내고 있었다. 칼리안이 허탈하게 웃었다. 란델이 굳이 장미 손질이 바빠 이런 날 저런 옷으로 정원에 들어선 것은 아닐 테니까. ‘참 대단한 르메인이다. 란델을 저렇게 흔들어놓다니.’ 칼리안이 죽고 몇 년이 지나 본격적인 왕좌 쟁탈전이 시작된 뒤, 세렌티의 신전에 다녀오던 텐실 국왕과 왕세자가 탄 마차의 축이 부러지며 마차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그 바람에 왕과 왕위 계승자가 한꺼번에 명을 달리했다. 그때 남아있는 텐실 왕족은 란델 뿐이었고, 란델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카이리스를 떠나 텐실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르메인까지 저랬으니, 카이리스에 미련이 없지.’ 충분히 이해되는 선택이었다. 만약 칼리안이었다 하더라도 머뭇거리지 않고 똑같이 이 나라를 떠났을 것이다. “칼리안 왕자님.” 퍼뜩 들려온 목소리에, 칼리안이 예언 같은 회상에서 급히 빠져 나왔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란델이 칼리안을 보고 있었다. 난처한 얼굴로 칼리안을 부른 것은 란델의 시종이었다. 그제야 칼리안은 란델에게 인사하지 않고 멍하게 서있던 것을 깨닫고 곧바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칼리안이 란델을 향해 가볍게 고개 숙여 예를 보였다. 손에 낀 장갑을 벗어 시종에게 건넨 란델이 칼리안을 조용히 바라봤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과 완전히 대비되는, 깊이 가라앉은 푸른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란델은 칼리안을 나무라지 않았다. 칼리안이 이 곳에 혼자 와 있던 이유를 그 역시 모르지 않을 테니까. “그래.” 란델은 그저 그 한마디만 내려놓고 체르밀 궁으로 돌아갔다. * * * 르메인은 공평했다. 세 아들을 모두 똑같이 취급했다. 옆에 선 플란츠에게서 풀풀 풍겨오는 술냄새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정신이 아찔해진 칼리안이 플란츠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 정신 나간 어린 놈이, 나도 참고 있는 술을!’ 원래도 흐린 편이었던 플란츠의 눈빛이 더 흐릿해진 것 같았다. 왜 그랬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서 플란츠의 경솔한 행동을 너그럽게 이해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왕실 외부의 사람들 앞에 나서는 자리였다. 물론 국왕의 뒤에 서서 한 마디 하지 않고 손인사를 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되겠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카이리스 왕실의 외부 행사에서 왕자가 난동을 부렸다는 세작의 정보를 받아 본 적은 없었으니 일단 놈에게 이성이 남았으리라 믿어 보기로 했다. 마치 칼리안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것처럼, 플란츠가 고개를 힐끗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의 인상이 찌푸려진 것을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고, 칼리안은 그런 모습을 알아채지 못했다. 왕실 행사 담당자가 국왕 일가를 향해 말했다. “10분 전입니다. 곧 행사가 시작됩니다.” 정문 근처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있던 칼리안이 마음의 준비를 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자리겠지만 칼리안은 아니었다. 때문에 조금쯤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광장에는 더 발디딜 곳이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광장 안에서 사람들의 사이에 섞인 경비대와, 광장 주변을 둘러싼 카페나 레스토랑 건물에 올라 있는 왕실 친위대 제 1기사단 파벨의 기사들이 사람들 사이에 의심스러운 움직임이 없는지를 감시하고 있었다. 곧 두 개의 대형 수정판에 불이 들어오며, 아직 비어있는 단상의 모습을 투영하기 시작했다. 행사 시작이 임박했음을 느낀 사람들의 기대감 어린 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이제 왕궁의 문을 개방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왕궁의 정문이 양쪽으로 서서히 열렸다. 정문 중앙에 크게 새겨진 카이리스의 문장이 반으로 갈라지며 문이 열리자,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는 왕궁 내부 모습을 본 사람들이 벌써부터 환호했다. 오래지 않아, 평상시 굳게 닫혀 있는 왕궁의 문이 활짝 열렸다. 저 문은 이제 사흘간 닫히지 않을 것이다. “5분 전입니다.” 국왕 직속 기사단 카에라의 의장 사열이 시작됐다. 시간은 길지 않았으나, 오로지 국왕 한 명만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이들의 사열식을 본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칼리안을 포함한 국왕 일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얀 역시 빠르게 다가와 칼리안의 정복을 점검해주고는 멀찍이 물러났다. “1분 전입니다.” 왕궁의 정문부터 단상까지 붉은 카펫이 깔렸다. 기사들이 붉은 카펫 위를 비워두고 두 줄로 길게 늘어섰다. 그들의 사이로 국왕 일가가 지나가게 될 예정이었다. 기사들의 검이 하늘을 찌르듯 곧게 뻗어 올라갔다. 날씨가 매우 맑았다. 기사들이 들고 있는 검에 햇빛이 반사되어 날카로운 기세를 보였다. 그리고, 10시. 국왕 일가의 행차를 알리는 카에라 기사단장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르메인의 발이 움직였다. 그 뒤를 이어 실리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란델과 플란츠가 움직였다. 그들의 뒤를 바라보던 칼리안이 잠시동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칼리안을 감싸고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칼리안이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이 있을 곳으로 시선을 내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완벽한 모습을 갖춘 카이리스의 왕자가 된 뒤. 밖으로 향하는 첫 발을 내딛었다. ──────────────────────────────────── 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3) 단상에서 사람들을 향해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왕자의 역할은 그것이 전부였고, 칼리안 역시 그 이상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 곧 르메인이 찾아준 이들에 대한 감사를 전하며 긴 인사말을 했다. 몇몇 평민 병사에 대한 기사 작위를 수여하거나 또 몇몇의 귀족 작위를 승급하고 영지를 하사하는 등의 순서가 진행되었다. 그렇게 광장의 행사가 끝나고, 칼리안은 다시 한번 손을 흔들어 인사한 뒤 왕궁으로 되돌아왔다. 물론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자신을 뚫어져라 보았다는 것은 알았다. 작정하고 나선 길이니 당연히 눈에 띄었으리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칼리안의 완벽한 모습에 감명 받은 사람들이 그의 외모에서 무엇을 찾아내 입에 담고 있는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온 칼리안은 얀이 가져온 점심을 남기지 않고 먹었다. 그렇게 하기로 얀과 약속한 뒤 아직 한번도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연회도 아닌 티 타임을 위해 준비하는 의복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단순한 디자인으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대신 메를린의 의견에 따라 장식핀 하나만 더 하는 것으로 정했다. ‘대신, 제일 작은 것으로.’ 그 말과 함께 칼리안이 고른 것은 셔츠의 양쪽 칼라를 서로 잇는 세 줄의 얇은 체인이 달린 핀이었는데, 가장 짧은 체인의 가운데에 검지 손톱만한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그 외의 다른 장신구들은 칼리안의 기준에서는 지나치게 화려했으므로, 다른 예복을 입을 때도 그 핀만 하는 것으로 결정지었다. 그 핀의 여파가 어떻게 번질지도, 칼리안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에 맞춰 준비를 끝낸 칼리안이 다시 체르밀 궁에서 나와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말했다.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어.” 얀이 평소보다 반쯤 줄어든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칼리안을 보좌하느라 얀도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었다. 그나마 오찬이라도 취소되어 다행이었다. 이제 향하는 곳은 얼마 전 브리센 자작과 석찬을 했던 세뉴 관이었다. 그 곳에서 여러 사람들과 티 타임을 가질 예정이었다. 물론 칼리안이나 왕자들은 인사를 나누고 가만히 앉아있는 역할이었으니 졸지만 않으면 되었다. 이제 곧 만나게 될 귀족들을 생각하던 칼리안이 문득 물었다. “얀의 가족도 카이리시스에 있다고 했지?” 세크리티아의 귀족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영지에서 거주했지만, 카이리스에는 영지 관리인을 두고 1년의 대부분을 수도 카이리시스에서 머무는 귀족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얀의 가족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언젠가 칼리안에게 가족들이 카이리시스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나온 가족 이야기에, 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기억해 주시네요, 왕자님. 여동생과 아버지는 고향에 있고, 나머지 가족은 카이리시스에 살고 있습니다.”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옛 칼리안의 것이었으니 자신이 직접 기억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 왕궁에 오려나?” 이번에는 얀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초대장을 받았다면 오겠지요.” 두루뭉술한 대답이었다. 아무래도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았다. 카이리스의 왕궁에서 일하는 시종은 자신의 성을 밝히지 않았다. 아명이나 가명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 궁에 들어올 때 내정 담당관이 실명을 확인하고 믿어도 좋을 사람인지를 엄밀히 검토하므로, 그 후에는 굳이 실명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시종이나 시녀로 일하는 귀족의 상당수가 귀족의 서자 혹은 서녀이거나, 이름 없는 가문의 자녀였기 때문에 출신을 언급하길 원치 않아 하는 까닭이다. 얀에게도 그러한 사정이 있으리라는 것을 눈치챈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묻지 않았다. 곧 마차가 세뉴 관의 앞에 들어섰다. 칼리안이 얀과 함께 있느라 편안하게 바뀌었던 표정을 가다듬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자세를 다잡고 귀족들이 있을 연회장으로 걸어가, 문 앞에 서 있던 기사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였다. 기사가 칼리안에게 예를 보인 뒤 연회장 문을 열며 고했다. “3왕자,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께서 드십니다!” 국왕을 보기 위해 광장의 인파에 끼어들 필요가 없었던, 그리하여 세뉴 관에서 2시의 티 타임 시간을 기다리던 이들의 눈이 한 곳으로 쏠렸다. 그와 동시에 모두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그들은 중앙 귀족이라 불리는, 하나같이 영향력 있는 고위 귀족들이었다. 그만큼 정보를 습득하는 것도 매우 빨랐다. 그들이 접한 소식은 두 가지였는데, 플란츠가 취중에 행사장으로 왔다는 것과, 모두 약속한 것처럼 한 명을 쳐다보느라 그런 플란츠를 본 이가 몇 없다는 것이었다. - 시스파니안을 닮은 셋째 왕자!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전해졌을 때, 귀족들은 웃었다. 그저 머리를 잘라서 눈의 색이 드러났을 뿐. 단순히 머리 색과 눈 색만 가지고 말을 지어내기 좋아하는 이들이 재미삼아 퍼뜨린 것이라고. 귀족들은 칼리안이 완전히 달라졌으리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사의 외침과 함께 걸어 들어오는 칼리안의 모습에, 하늘이 뒤집힌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는 경악한 눈으로 칼리안의 사소한 움직임까지 상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직 소년의 태를 벗지 않았음에도 시선을 떼기 어려울 정도의 잘 생긴 얼굴과 맑게 빛나는 붉은 눈이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게다가 칼리안은 벌써부터 왕족의 기품이 느껴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걸음 걸음마다 품격이 가득한 몸가짐에 저도 모르게 진심어린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그저 연습을 한다 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그들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허어. 언제 저렇게······.’ 칼리안은 지금 보여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스스로가 카이리스의 왕족임을 완벽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같은 색의 머리와 눈을 지닌 시스파니안을 떠올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입고 있던 옷이 또 묘했다. 칼리안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타이트한 감청색 재킷 안에, 같은 색의 바지와 하얀 셔츠를 입었다. 길게 늘어진 재킷에는 단추 외의 그 어떤 장식도 없었다. 그래서 셔츠의 목을 여민 작은 장신구가 매우 눈에 띄었다. 만약 그 뿐이었다면 귀족들은 이렇게 술렁이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셔츠 핀에 달린 펜던트. 그것은 놀랍게도, 지금껏 칼리안이 가려 온 두 눈과 완전히 똑같은 빛을 내는 루비였다. 본래의 칼리안이었다면 결코 고르지 않았을 색이었다. “마치, 더는 숨어 살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것 같군.” “그러게나 말일세.” 그들은, 칼리안이 플란츠의 ‘피눈깔’ 이라는 표현을 매우 인상 깊게 들었다는 것과, 그래서 자신의 눈과 루비가 같은 색이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단 사실을 몰랐다. 칼리안이 입은 수수한 옷과 루비의 뜻을 제멋대로 파악한 귀족들이 등골이 서늘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는 아직 예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인사를 했다. 적당히 고개만 까닥이던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사정이야 어찌됐건 흠 잡을 곳 하나 없는 완벽한 왕자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나타난 칼리안이, 자신을 향해 예를 보인 귀족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그리고는 살짝 미소지으며 답례했다. “반갑습니다.” 칼리안은 그렇게만 인사를 전한 뒤 곧바로 자리에 앉았다. 대단한 미사여구가 아니었다. 담백하게 흘러나온 짧은 말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그 한마디. 이번에는 그 짧은 말이 문제를 일으켰다. “반갑다니? 마치 처음 보았다는 듯한 표현이 아닌가! 이것은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곧 귀족들은 저들끼리 소리 없는 눈짓으로 칼리안의 인사에 담긴 숨은 뜻을 캐내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아차.’ 칼리안이 남모르게 자책했다. 시선이 몰릴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너무 부담스러운 눈빛에, 자신이 귀족들과 구면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고 인사를 건네버렸다. 뒤에서 얀이 작은 목소리로 칼리안을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왕자님. 별 뜻 없는 인사니까 그러려니 할 거예요!’ 만약 둘 중 한 명이라도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카이리스의 루비 값이 폭등하고 500년동안 비어 있던 시스파니안의 둥지를 찾는 행렬이 미친듯이 증가하는 웃지 못할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칼리안을 지켜보던 누군가의 마음이 조급해질 일도 없었을 터였다. * * * 리베른 왕국의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올리브 렌치가 남긴 연주곡 중, 단연 으뜸으로 손꼽히는 곡이 있었다. ‘지그프리드의 여름 밤’이라는 이름의 그 곡은, 카이리스 왕궁에 초대되었던 렌치가 지그프리드 관을 보고 느낀 감동을 표현한 명곡이었다. 카이리스 왕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 알려진 지그프리드 관은, 백금으로 도금한 기둥과 크리스털 벽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호박 모양의 대 연회장이었다. 때문에 마법 등불이 켜지는 밤이 되면, 건물 전체가 영롱한 보석이 된 것 같은 환상적인 느낌을 주었다. 여름 밤 화려하게 빛나는 지그프리드 관을 마주한 환희와 그 이면에 숨겨진 왕궁의 고독함을 담아내는 바이올린 선율에, 많은 이들이 기쁨과 슬픔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음악을 한다면, 반드시 지그프리드 관에 가봐야 한다!’ 그리하여 음악가들 사이에 이런 말까지 오고 갈 정도였다. 그런데 사실, 지그프리드 관의 이름은 브리센 후작가와 함께 카이리스의 양대 기사가문으로 불리는 지그프리드 공작가에서 유래했다. 이 가문의 초대 가주이자, 양신전쟁 8인의 영웅 중 한 명인 퀴트로스 혼 지그프리드 공작의 성을 따왔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퀴트로스가 한여름의 밤에 전사했기 때문에, 카이리스 왕궁보다 지그프리드 공작가에서 그 곡을 더 남다르게 여긴다는 후일담도 전해졌다. 바로 그 유명한 곡이, 바로 그 아름다운 지그프리드 관에 흐르고 있었다. 연회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말을 줄이고 음악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제 막 지그프리드 관 입구에 도착한 사내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때마침 이 곡이 연주되다니! 이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그 말에, 그를 알아본 여러 귀족이 반가워하며 다가왔다. “지그프리드 공, 이제 오십니까!” 카이리스에 하나 뿐인 공작가, 지그프리드 가문의 가주이며 대륙 5인의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이기도 한 대단한 사내가,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바이올린을 켜는 시늉을 해 보였다. 모여든 사람들이 그만 다 같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 손짓을 하시니 공의 바이올린이 더 궁금해지는군요.” “휴양도 하실 겸 한번 내려오시지요. 내 기꺼이 들려드리리다!” “오오! 알겠습니다. 바이올린 실력을 한껏 기대하고 가겠습니다.” “물론이지요. 검을 못 쓰는 지그프리드는 있어도 바이올린을 못 켜는 지그프리드는 없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까? 그것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하하하!” 입구에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바람에, 레이븐의 등에 오른 채 지그프리드 관으로 향하던 칼리안에게도 그 소리와 모습이 전부 전해졌다. 칼리안이 기분 좋게 웃었다. “참 유쾌한 사람이야. 이름이, 슬레이만······.” 딱 질색하는 표정으로 같은 사람을 쳐다보던 얀이, 기억을 뒤져보는 칼리안에게 대답했다.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가주인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 공작입니다, 왕자님.” 카이리스 남쪽에 시스파니안의 빈 둥지가 있었고, 지그프리드의 영지는 그 둥지를 중심으로 굉장히 넓은 지역을 소유했다. 유일한 공작가이니만큼 지그프리드 가문에서도 충분히 왕위에 관심을 가져볼 법 했으나, 이들은 오로지 시스파니안의 영토를 수호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50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베른일 적에 세작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 우직한 공작가에 대해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래. 그랬지.” 그야말로 칼리안이 딱 좋아하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물론 그들의 행동을 왕에 대한 충성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칼리안의 마음을 끈 것은 그 오랜 기간동안 지켜진 신념이었지, 충성심이 아니었다. “그 바이올린, 나도 듣고 싶어지네.” 칼리안은 호감 가득한 눈으로 공작을 쳐다봤다. ──────────────────────────────────── 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4) 흰 셔츠와 옅은 베이지 색 바지. 금사로 테두리를 그려낸, 종아리를 덮을 만큼 긴 길이의 붉은 재킷. 그리고 금색 태슬과 자수로 장식된 하얀 망토. 왕자의 정복이나 티 타임 때 입었던 수수한 의상과는 확연히 다른 화려한 예복의 칼리안이 들어서자, 일순간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또 루비 펜던트!’ 화려한 의복에 시선을 돌렸던 이들의 눈에, 이전에 착용했던 루비 펜던트가 다시 보였다. “같은 것을 했어. 역시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군.” 마치 오늘을 기다렸다는 듯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칼리안. 그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엄청난 의미를 가진 것처럼 여겨지는 이러한 반응들을 보건대, 과연 이것이 르메인을 위한 연회인지 칼리안을 위한 르메인의 연회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곧 칼리안이 발을 옮겼다. 입구에 서 있던 지그프리드 공작부터, 얼마 전 함께 석찬을 나눈 브리센 자작, 오늘 티 타임 때 만난 귀족들을 거쳐 연회장 가장 안쪽에 위치한 왕족의 자리에 도착하기까지. 가능한 많은 이들과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보였다. 엄숙한 표정을 한 얀이 그런 칼리안의 뒤를 소리 없이 따라 걸어갔다. 아직 르메인이나 다른 왕자들이 도착하기 전이었으므로, 연회가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모두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던 탓이다. 왠지 모르게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힘이 있었다. 칼리안의 앳된 얼굴을 보던 사람들이 속삭였다. “이제 고작 열 넷이라는데. 앞으로를 기대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는군.” “맞아요. 저도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 대다수의 귀족들과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칼리안이 좌중을 압도하고 있는 이유를 짐작한 슬레이만의 청회색 눈에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가 멀리서 얀과 대화중인 칼리안을 보며 생각했다. ‘허! 그 꼬맹이, 기세 한번 훌륭하다! 비리비리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것이 칼 근처도 못 가봤을 상인데, 사방으로 서슬을 뿜어대는 모양새는 영락없는 기사로군!’ 그런 슬레이만의 시선을 먼저 느낀 것은 칼리안이 아니라 얀이었다. 얀이 잠시동안 슬레이만을 쳐다보다, 그 얼굴에 확연히 새겨진 표정을 읽고는 칼리안에게 전했다. “지그프리드 공작이 왕자님께 관심을 가지는 것 같네요.” 그러자 칼리안이 싱긋 웃었다. 슬레이만이 왜 관심을 보이는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드마스터라 했으니.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지.’ 하지만 그것 만으로 다른 의심을 가질 수는 없을 테니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칼리안이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고마운 일이지만, 아직은 일러. 우선은 모르는 척 해.”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얀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곧 칼리안은 슬레이만이 짐작한 것, 바로 좌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 신나게 뿜어대던 기세를 조금씩 누그러뜨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 둘 칼리안에게서 눈을 돌렸고, 그들 중 몇몇이 다시 슬레이만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되니 슬레이만 역시 칼리안에게 보내던 관심을 일단 접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곧 두 왕자들이, 그리고 조금 뒤 국왕 부부가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며 입장했다. 르메인의 감사 인사와 함께 연회가 시작되자, 칼리안은 정확히 30분간 자리를 지킨 뒤 정원에 나가는 척 빠져나왔다. 칼리안을 함께 따라나온 얀이 레이븐의 고삐를 쥐고 다가왔다. 같이 걸어가겠다 했으나 하얗게 바래지는 얼굴을 걱정한 얀 때문에, 칼리안은 결국 레이븐의 등에 올랐다. 얌전히 칼리안을 태우는 레이븐을 보며 얀이 말했다. “신기하네요. 왕자님 앞에서는 순한 양인 것이.” 칼리안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레이븐의 갈기를 헝클어뜨렸다. 그럼에도 레이븐이 가만히 있자, 얀은 마치 내숭 떠는 여동생을 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레이븐. 얼마나 착한데.” “속지 마세요. 왕자님 안 계실 때는······ 어우.” 칼리안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얀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왕궁의 정문이 잘 보이면서도 적당히 떨어진 곳으로 간 칼리안은, 눈을 부릅뜨고 정문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옆에 선 얀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자세한 설명은 원하던 것을 얻은 뒤 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말을 아꼈다. 칼리안이 얻고자 하는 것. 바로, 앨런 마나실이었다. “왕자님, 안녕하십니까.” 눈에 확 띄는 하얀 망토 탓에, 그 주변에서 가장 어두운 곳에 있었음에도 지나가는 왕궁 수비대원들이 칼리안을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얀은 연회에 함께 참석하느라 평소 입던 시종의 제복이 아닌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 덕에 어둠 속에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잠시 후회했다. ‘까만 것을 오늘 입을걸.’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칼리안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아무도 ‘여기서 뭐하시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플란츠 때문이었다. 성질머리가 하도 나빠서, 그런 것을 물었다가는 난리를 쳐댔다. ‘란델은 그런 것을 물어보기엔 너무 무섭게 생겼고.’ 그러므로 저 정문을 나가려고 하거나 실리케가 머무는 헤이시아 궁에 침입하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왕자님, 안녕하십니까.” 또 다른 수비대원이었다. 아마 이 근방 한 바퀴를 돌고 돌아오는 듯 했다. 그렇게 총 여섯 번의 인사를 받고 난 뒤, - 다각, 다각. 멀리서부터 왕궁의 정문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말 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칼리안이 고개를 세우며 눈을 빛냈다. 그 모습을 본 얀도 덩달아 긴장하여 귀를 기울였다. “누굴 기다리셨던 거군요.” 칼리안은 작게 ‘그래’ 라고 대답한 뒤, 검지 손가락을 펼쳐 입술 위에 가져다 댔다. 얀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말 발굽 소리가 조금씩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문 쪽에 서 있던 네 명의 왕궁 수비대원이 재빨리 움직였다. 둘은 정문을 막고, 둘은 다가오는 말을 세웠다. 수비대원의 뒷모습과 말의 머리는 보였으나, 방문객의 모습은 정문의 두꺼운 기둥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정문으로 바로 가볼까 하다가, 우선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만약 앨런이 아니라면 수비대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비대원의 정중한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잠시 말에서 내려주시겠습니까.” 수비대원 특유의 높낮이 없는, 그렇지만 정중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조금 뒤에 ‘탁’ 하고 바닥에 발이 닿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말에서 내리는 소리인 듯 했다. 다시 한번 수비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리고, 드디어 방문객의 목소리가 울렸다. “카이리스 국왕 전하의 탄신일 축제라 하여 왔네만.” 칼리안이 알기로, 앨런 마나실의 나이는 50대 초반이었다. 그런데 들려온 목소리는 그보다 훨씬 더 젊게 느껴졌다. 앨런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 실망하던 찰나. “나는 앨런 마나실이라 하네. 마법사일세.” 맞다! 칼리안이 어깨를 움찔하며 긴장했다. - 다각. 그러자 놀랍게도 레이븐이 한 발을 내딛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그것도 칼리안의 의도까지 이해한 것처럼 매우 느린 속도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칼리안은 앨런이 입궁을 거절당해 기분이 상했을 때 타이밍 좋게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 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근처에서 기다리다 갑자기 나타날 수는 없었다. 앨런은 7서클의 마법사였고, 인근에 누가 움직이는지 정도는 모두 파악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소리는 들리지만 가능한 먼 곳에서부터 빙 둘러 정문을 향해 가고자 했다. ‘마치 우연히 산책하다 상황을 보고 다가온 것처럼.’ - 다각. 레이븐은 이번에도 칼리안의 생각을 눈치채고 알아서 척척 움직였다. 녀석이 독심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어디론가 가고자 하는 칼리안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구분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칼리안이 레이븐의 목덜미를 툭툭 건드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레이븐, 똑똑하네.” 칭찬을 알아들은 레이븐이 목에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정문 쪽에서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렸다. 수비대원의 목소리였는데, 앨런 마나실이라는 이름만으로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 보지 못한 눈치였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사흘간 정문을 열어둔다 하나,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였다. 당연하겠지만 왕궁 안으로 누구나 들어오도록 개방하는 것은 어려웠다. 때문에 카이리스 왕실에서는 반년 전부터 초대장을 만들어 보냈다. 초대장을 찾는 시늉을 하는 것인지, 한동안 소리가 없었다. 그러다 난처해하는 듯한 앨런의 말이 들렸다. “흠. 이를 어쩌나. 초대장을 잃어버린 것 같네.” 칼리안이 알고 있는 내용과 같았다. 앨런은 초대장을 내어 놓지 않았다. 수비대원이 살짝 경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내 이름도 말하였고. 한번 다른 곳에 확인이라도 해 주면 안되겠나? 아주 멀리서 왔다네.” 그 순간, 그들에게 다가가던 칼리안이 낭패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수비대원이 앨런의 차림새를 슬쩍 훑어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마 바로 앞에 서 있던 앨런은 더 정확히 느꼈으리라. “초대장을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곧바로 불쾌해하는 앨런의 목소리가 들렸다. “외양으로 격을 가르는 곳이었구나.” 방금 저 수비대원의 행동은 당신의 옷이 허름해서 들여보내줄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만약 앨런이 제대로 갖춰 입고 왔다면 앨런의 요청대로 다른 사람을 통해 확인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렇게 카이리스는, 앨런의 기준에 맞지 않는 나라로 결정되었다. 괜히 시간을 끌다 일을 더 어렵게 만든 칼리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내, 돌아가지.” 말에 오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레이븐의 것이 아닌 다른 발굽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직 정문까지 조금 더 가야 했는데, 생각보다 앨런의 포기가 너무 빨랐다. 칼리안이 레이븐의 고삐를 다잡으며 말했다. “얀, 무슨 수를 쓰든 수비대원들 막고 있어.” 얀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네?” “꼭! 못 쫓아오게 해줘.” “왕자님, 설마······ 나가시려는 것은 아니죠?” 칼리안이 대답 없이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레이븐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하얀 망토를 두르고 흑마를 탄 채 달려오는 소년이 누구인지를 단박에 알아본 수비대원들이 서둘러 앞을 막아섰다. “왕자님, 말을 멈추어 주십시오! 지금은 외출이 불가합니다!” ‘알아!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레이븐의 배를 박찰 필요도 없었다. 레이븐은 알아서 속도를 높였고, 수비대원들의 사이를 유연하게 피해 가며 왕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수비대원들이 황망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평소 훈련을 시켜둔 것인지, 두 필의 말이 그들의 앞으로 달려나왔다. 그들을 향해 뛰어가는 얀의 눈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수든 쓰라 했지만, 칼리안은 지금의 일에 대해 책임 질 힘이 없었다. 게다가 오늘 간신히 좋은 인상을 만들어놨는데 남은 기간 동안 근신이라도 하게 된다면 모두 허사가 될 것이었다. 그러니 얀이 책임져 줄 수 있을 행동을 해야 했다. 곧 얀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주먹을 한번 쥐었다 폈다. 그리고는 단정히 묶고 있던 블론즈 색 곱슬머리를 푼 뒤 적당히 흐트러뜨렸다. 시종이라는 것을 들키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 시종의 제복도 입지 않아 다행이었다. 얀이 눈에 힘을 주며 수비대원들을 불러세웠다. “멈춰라.” 수비대원들의 눈이 일제히 얀을 향했다. 그리고 얀의 청회색 눈도 수비대원들을 향했다. 같은 색의 눈을 가지고 무도회를 즐기고 있을 이를 잠깐 생각한 얀이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장남 시로이안 지그프리드다.” 지그프리드! 곧바로 수비대원들이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모자를 옆구리에 끼고 오른쪽 주먹을 가슴에 올려 보이는 자세를 취했다. 카이리스 병사들의 인사법이었다. 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인사를 받은 뒤 말했다. “지그프리드 공작께서 칼리안 왕자님의 외출을 보증하셨다.” 칼리안 때문에 잊고 살던 이름을 칼리안 때문에 꺼내든 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광장 쪽을 쳐다봤다. 광장 저 편에서 새하얀 망토가 펄럭이는 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 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5) 연회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 지그프리드 관으로 급히 달려온 시종이 시종장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시종장이 안색을 굳히며 서둘러 르메인의 뒤로 돌아왔다. “전하.” 르메인이 살짝 뒤를 쳐다봤다. 주변에 듣는 이가 많아, 시종장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최대한 작은 소리로 말을 전했다. - 칼리안 왕자님이 조금 전 왕궁 밖으로 나갔다 합니다. 르메인의 고개가 시종장을 향해 조금 더 기울어졌으나,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시종장의 말이 이어졌다. - 헌데 그것이, 지그프리드 공작이 보증을 하였다 합니다. 그 말에, 르메인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알았다.” 지그프리드 공작과 칼리안이 무슨 관계일지를 생각해보아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르메인은 별다른 지시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냥 그대로 두라는 의미였기에, 시종장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지그프리드라. 르메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 * * 한편 그 시간, 정원에 나와있던 슬레이만의 입이 일그러졌다. 그러다 결국 그 입에서 큰 소리가 터져나왔다. “푸하하하! 으하핫! 푸으어하하하!” 웃음을 참으려 애쓰다가도 폭소가 터졌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슬레이만이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다 입이 또 벌어졌다. 말 대신 웃음이 다시 쏟아졌다. 지그프리드의 남자들은 웃음이든 울음이든 한 번 터지면 도무지 멈출 줄을 모르는 것이다. “푸······ 하, 으큽큽큽!” 결국 그의 앞에 서 있던 이가 슬레이만의 입을 틀어막았다. 누가 쳐다볼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참 뒤 슬레이만이 조금 진정 된 것 같자, 그제야 손을 떼고 작게 소리쳤다. “지금 웃을 일이 아니라고요!” 슬레이만이 고불거리는 머리를 여전히 풀어둔 얀에게 말했다. “내 아들이 나를 믿고 일을 벌였다는데, 내 기분이 좋지 않겠냐? 으허허허!” 얀의 얼굴에 속이 터질 것 같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러자 슬레이만이 뭐가 걱정이냐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아마 이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아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둘이 부자 사이임을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둘 다 똑같이 얼굴에 모든 것이 나타났으니까. “네 꼬맹이가 도망가면서 수비대가 쫓아오지 못하게 해달라 했고, 네가 지그프리드를 팔아 먹었더니 수비대원이 안 쫓아갔다. 그럼 된 것 아니냐?” 아들이 사고를 쳤는데 도리어 좋아하던 슬레이만이 얀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알고 했는지는 몰라도 아주 잘 했다! 좋은 해결책이었다.” “해결은 이제부터 해야죠. 전하께서 왕자님과 아버지가 어떻게 아는지 물어 보실 게 아닙니까?” 슬레이만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재미가 있어 짓는 웃음이 아니라, 아직 모두 자라지 않은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웃음이었다. 한 수 앞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일을 벌였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안 물어본다.” “네?” “물어보기엔, 르메인은 생각이 너무 많다. 그러니 못 물어본다. 징계는 고사하고 아예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넘어갈거다. 알겠냐?” 그 말에,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겨있던 얀이 물었다. “지그프리드라서?” 슬레이만이 정답이라는 듯 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네가 머리 하나는 날 안닮아서 다행이다. 네 나이 때 나보다는 네가 낫다. 으하하하!” “뭔들 닮았을까봐요.” 슬레이만은, 자신의 아들이 아직까지도 ‘우리 왕자님은 기마술도 글로 배우신 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몰랐다. 때문에 얀의 말에 ‘맞아, 맞아.’ 하고 중얼거리다 뭔가 생각난 듯 유쾌하게 웃었다. “아니지. 그래도 네가 바이올린 하나는 잘 켜니까. 그것은 확실히 날 닮았다!” 검은 못 쓰지만 바이올린은 켤 줄 아는 지그프리드. 그것이 바로 얀이었다. 그러니 조금 전 왕궁에 막 도착한 슬레이만을 봤을 때 얀이 질색한 표정을 지은 것은, 아들을 팔며 호탕하게 웃던 모습 때문이었다. “네가 화끈하게 팔아 먹은 내가 그래도 이름 값이 좀 나간다.” 얀이 뜨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무게가 싫어 여기까지 도망쳤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르메인이 네 꼬맹이에게 나랑 무슨 관계냐 물으면 그 뒤에 돌아올 대답이 있을 텐데, 대답을 듣고 나서 르메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아무 관계가 없지만 우연한 도움을 받았다는 대답을 하게 되면 지그프리드의 선의를 경계한 꼴이 된다. 관계가 있어 도움을 받았다는 대답을 해도 마찬가지. 그 대답을 듣고 왕자에게 벌을 주면 왕자를 보증했던 지그프리드를 무시한 꼴이 되고, 그 대답을 믿고 벌을 주지 않으면 왕자와 지그프리드의 우호 관계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그 땐 브리센 후작이 탐탁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선택지가 없는 문제였다. “르메인은 아마 내가 보증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아무 것도 안하겠다고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니 꼬맹이도 오늘 미리 예정된 외출이었던 것처럼 뻔뻔하게 행동하면 된다. 그래서 내가 잘 한 일이라고 한 것이다.” 슬레이만이 듬직한 얼굴로 말을 맺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종종 팔아먹어라. 내가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당해주마. 그러라고 있는 아빠 아니냐?” 얀이 감동했다는 듯한 얼굴로 슬레이만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 눈빛에 뿌듯함을 느낀 슬레이만이 허리를 곧게 피더니, 어깨를 쭉 넓혀보이며 말했다. “하하!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가 막 그렇게 비루먹지는 않았다!” 그럼 그렇지. 잠깐 멋있다고 생각한 내가 멍청이지. 얀이 혀를 쯧쯧 찼다. 그 소리를 못들은 척, 슬레이만이 정원에 놓여있던 벤치로 걸어가 앉았다. “그런데, 제가 누군지 모르시는 거 맞죠?” 르메인이나 다른 왕궁 사람들이 정말 얀의 정체를 모르는지를 묻는 말이었다. “나도 생각이라는 걸 하긴 한다. 아니었으면 내정 담당관이 진작에 보고했을거다.” 뭔가 손을 써놨다는 소리였다. 하긴. 만약 누구 한 명이라도 알았다면 실리케가 얀을 칼리안 옆에 두었을 리도 없었다. 그런 얀을 보던 슬레이만이,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긴. 내 아들이 워낙 귀티가 안나서 아무도 의심을 안했다.” 얀이 눈을 찌푸리며 슬레이만을 흘겨봤다. 하지만 슬레이만은 손을 치우지 않았다. 얀의 머리카락이 브론즈 색이다 보니,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푸들 ‘얀’이 생각나서 자꾸 손이 갔다. “그런데,” 그렇게 입을 열었던 얀이 곧 말을 멈췄다. 사실 요즘 칼리안의 증상에 대해 물어보려 했던 것이나, 마법과 관련된 내용이라던 칼리안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차피 슬레이만이 알지 못할 일이면 괜히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꺼낸 말을 집어넣을 순 없어서,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레아는 잘 지내요?” 드미레아, 얀의 여동생이자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소가주였다. 검도 잘 다룰 뿐더러, 무엇보다 영특한 아이였다. “잘 지낸다. 이번에 같이 오겠다는 걸 떼어 놓느라 힘들었다.” 곧 슬레이만이 무릎에 올려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그리고는 굳은살이 빼곡하게 박힌 자신의 손바닥과 얀의 손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다 물었다. “그래서 넌. 여기는 좀 살 만 하냐?” “아버지가 볼 땐 어때 보여요?” “묵은 똥 싼 것 같다.” 말을 해도 꼭. 저러니까 어머니가 집에 안내려가지. 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슬레이만이 고개를 휘적휘적 움직이더니, 잠깐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여기서 꼬맹이 시중 드는 것보단 도련님 소리 들으며 사는 게 낫겠다 싶으면, 언제든지 내려와라. 그렇게 하기 싫다는 소가주 자리도 이제는 레아가 가져가 줬잖냐.” 잠시 동생을 생각하던 얀이 말했다. “레아랑 나이가 같으세요.” 칼리안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기에, 슬레이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아버지랑 궁에 와서 뵈었을 때, 꼭 바짝 마른 나뭇가지 같으셨어요. 레아는, 이제 막 돋아나서 반짝반짝하는 잎이었는데.” 정원 사이사이를 구불구불 흐르는 인공 시냇물에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신기했어요. 제가 누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게. 그래서였는데, 어느 순간 안쓰러워졌고. 그러다 보호하게 됐고. 지금은 그냥, 지켜보고 싶어졌어요. 그렇게 되니 살만 하네요.” 그런 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슬레이만이 묵은 똥 싼 얼굴로 웃었다. “그럼 됐다.” 문득, 편안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던 칼리안과 얀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러다보니 기세 등등하던 칼리안의 첫 걸음도 떠올랐다. “꼬맹이. 지켜보다 보면 재밌는 일이 많을 것 같긴 하다.”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이냐는 얼굴에 슬레이만이 덧붙여 말했다. “그런 게 있다. 모르면 말아. 아무튼 난 내일 내려가니 한동안 못보지 싶다.” “못보기는요. 3개월 후에 볼텐데요.” “으잉? 그만 둘 생각이냐?” 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제 15세 되시니까요.” 그제야 뭔가를 떠올린 듯, 슬레이만이 양 손바닥을 부딪혔다. “아, 그래. 벌써 그렇게 됐지! 기다리고 있으마.” 얀이 머리를 다시 단정히 묶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와 대화를 마쳤으니 정문 근처에서 칼리안을 기다릴 심산이었다. 칼리안의 시종으로 돌아온 얀이 슬레이만을 보며 인사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지그프리드 공.” 슬레이만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빨리 가라는 듯 손을 휘적휘적했다. 얀이 웃으며 돌아나갔다. * * * 아직 왕궁에서는 연회가 한참일 시간이었으나 광장의 행사는 오후 10시에 모두 끝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인근의 술집으로 모여들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여흥을 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수많은 이들로 북적이던 광장에는 어느새 분수대를 비추는 마법 등불만 밝게 빛나고 있었다. - 다그닥, 다그닥. 적막함에 잠겨 있던 광장에 때 아닌 말 발굽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소리의 시작점은 왕궁에서 나온 두 필의 말이었는데, 처음에는 왕도를 따라 내려가는 듯 하더니 어느새 방향을 바꾸어 하츠아라 광장을 가로질렀다. 바로, 앨런 마나실과 칼리안을 태운 말이었다. 레이븐의 등에 올라 앨런을 따르고 있던 칼리안은, 아까부터 계속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중이었다. 앨런을 부르기는 해야 하는데,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 지를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앨런이 자신의 이름을 말했지만 그것은 칼리안을 향해서가 아니라 수비대원들을 향한 말이었고, 칼리안은 그때 멀찍이서 이야기를 훔쳐 듣고 있었으니까. ‘난감한데. 어찌 해야 하나.’ 한편, 앨런은 누군가가 뒤에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문 수비대원과의 일로 마음이 상당히 언짢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디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는 심정으로 묵묵히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따르는 말과 거리가 가까운데도 상대방이 자신을 무어라 불러세우지 않자, 호기심에 슬쩍 뒤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지?’ 언뜻 보인 것은 하얀 색의 망토였다. 수비대원이 아니었음을 그제야 깨달은 앨런이 말의 속도를 줄인 뒤 멈추어 섰다. 그러자 따라오던 말의 발굽 소리도 잦아들었다. 어느새 광장의 중앙까지 오게 된 탓에, 분수대의 불빛이 주변을 환하게 빛내고 있었다. 그 덕에, 뒤로 고개를 돌린 앨런은 상대방의 차림새를 다시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수비대원의 것은 아니었다. 언뜻 보아도 귀족, 혹은 왕족임이 분명했다. 곧 상대방이 말에서 내려와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불빛 아래 선 채 앨런을 바라봤다. 검은 색의 머리, 붉은 눈. 앨런도 오늘 아침에 광장에서 국왕 일가를 보았었다. 딱 지금 이 자리에 세워져 있던 수정판에서 보여주었던 그 얼굴의 셋째 왕자가, 지금 앨런의 앞에 서 있었다. 저 곱상한 왕자님이 무슨 일일까. 앨런의 눈에 짙은 호기심이 떠올랐다. ──────────────────────────────────── 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6) 칼리안이 차분한 눈으로 앨런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었으나 원하는 바는 분명했다. 대화를 하자는 것이겠지. 아무리 타국의 왕자라 하나 말 위에서 상대할 수는 없었으므로, 앨런도 말에서 내렸다. 그러자, 칼리안도 앨런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상당히 놀랐는데, 분명 50대라 알고 있던 앨런의 얼굴 생김새 때문이었다. 아무리 높게 보아도 20대 중반. 다행히 아래로 내려갈수록 붉은 빛이 진해지는 독특한 머리 색이 그가 앨런 마나실이 맞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제야 정문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생각보다 젊었던 것이 이해되었다. 7서클을 완성시키면 나이를 한번 역행한다더니. ‘과연. 제대로 찾았어.’ 칼리안은 감탄한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고 앨런을 마주 보았다. 그 눈빛을 대한 앨런의 눈에도 이채가 돌았다. ‘고작 열 넷인데. 어떻게 저런 눈으로 사람을 살피는가?’ 자신을 훑어본 것은 수비대원 나부랭이와 다르지 않았으나, 그 시선이 달랐다. 어쩐지, 자신의 차림새가 아닌 쓰임새를 살펴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앨런이 칼리안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앨런 마나실입니다.” 간단한 인사. 앨런의 태도가 사뭇 당당했다. 왕족이 아닌 그 누구도, 왕자를 처음 마주하는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인사하지는 못한다. 칼리안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도, 단순한 치기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왕족의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아도 될 만큼의 인재임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드는 자다.’ 르메인의 앞에 서더라도 앨런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리안이 진심어린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얀에게 말한 것처럼 칼리안은 왕족이었으니, 제 입으로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다. 곧 칼리안이 잠시동안 앨런을 쳐다보다 물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어찌 그냥 돌아가십니까.” 찾아간 그를 문전박대한 카이리스에서, 도리어 왜 그냥 돌아가냐 묻는다. 앨런이 짐짓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닫힌 문을 열려니 문턱이 너무 높더군요.” 지금 앨런은 수비대원이 허름한 차림새를 보고 쫓아냈다는 것을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마법사들은 속 뜻을 감추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때문에 마법사들과 대화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상세히 들어야 했다. ‘이러니 기사들이 좋아. 진격은 진격이고 퇴각은 퇴각이지, 그것을 숨기고 달리 말하지는 않으니까.’ 아무튼 마법사를 대하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칼리안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문을 열어두었는데 굳이 닫힌 곳을 찾으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초대장 준 건 어따 두고 꼬투리를 잡느냐는 소리였다. 앨런이 묘한 기분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눈빛도 그렇더니, 열 넷의 소년이 할 법한 대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이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많다보니 문턱에 티가 쌓입니다. 바람을 막는 것에 급급하여 미처 닦아 두질 못했습니다.” 아무나 못 들어오게 막느라 수비대원이 실수를 하는 것까진 신경쓰지 못했다는, 사과도 아닌 그 말이 솔직하다 해야 할지 뻔뻔하다 해야 할지. 앨런의 양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지켜보면 재미가 있을 아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앨런이 칼리안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처음 보았을 땐 보이지 않았던 여러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앨런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웃음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잠깐······?’ 앨런의 시선이 칼리안이 입고 있던 붉은 예복의 끝자락에 닿았다. 그리고는 칼리안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눈을 쳐다봤다. 그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기 때문에, 칼리안은 묵묵히 앨런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앨런이 칼리안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칼리안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어렸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앨런이, 갑자기 팔을 뻗어 칼리안의 손목을 잡아챘다. “······!” 평소와 같았다면 이 정도는 피했을 테지만, 오늘은 유난히 심신이 혹사된 날이었다. 하루 종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리저리 불려다니느라, 말 그대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였다. 그러니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더욱이 왕궁에서는 칼리안의 몸에 이렇게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방심하여 하릴 없이 앨런에게 손목을 붙들리고 말았다. 앨런이 눈을 내리깐 채 칼리안의 손을 붙들고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 했다. 당황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앨런이 칼리안의 몸에 자신의 마나를 흘려넣었다. “이게 무슨······!” 칼리안이 말을 모두 맺지 못한 채 가슴을 움켜쥐었다. 익숙해지기 힘든 날카로운 통증이 심장을 찔러왔기 때문이었다. 그간 느껴온 것의 몇 배는 될 듯한 아픔에 몸이 휘청거렸다. 뒤에 서 있던 레이븐이 한 발 다가와 칼리안에게 제 몸을 가져다 댔다. 주인의 상태를 알아본 것이다. 그런 행동에 놀랄 경황도 없이 레이븐의 몸에 기대어 선 칼리안이 이를 악물었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보기도 전에 들켜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앨런은 이 모습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문을 닫아 두어도 바람을 모두 막아내지는 못하는 법이지요.” 참 잘도 말한다! 칼리안이 사나운 눈으로 앨런을 쳐다보며, 붙들려 있던 손목을 잡아 뺐다. 놓지 않으려 하다가는 앙상하게 마른 손목이 그대로 부러질 것 같아서, 앨런이 손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더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고 화를 가라앉혔다.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해보려 한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아.” 앨런의 마음을 돌려놓기도 전에 아픈 것을 먼저 들켰으니, 더는 할 말도 없었다. 칼리안이 체념했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까지 곱게 나오진 않았다. “네, 막지 못했더군요. 어느 순간부터 마나를 쓸 수 없었습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이 있다는 것을 칼리안도 알고는 있는 것 같았다. 허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마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진짜 문제가 따로 있다는 것은 모르는 눈치였다. ‘이것 참. 생일 잔치 구경을 왔더니만.’ 용의 후손이 이끌어가는 나라에서 정작 마법사들을 홀대한다기에, 대체 얼마나 제대로 된 나라인지 보려고 왔다. 예상한 대로 됨됨이부터 글러먹은 곳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돌아가 온 대륙에 망신을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흐음.” 문득 분수대 가운데 세워진 시스파니안의 조각상에 앨런의 눈길이 닿았다. 오늘 하루 종일 온 거리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 시스파니안을 닮은 왕자! 그것도, 지켜보면 재미가 있을 것 같은. 앨런이 시스파니안의 조각상과 왕궁을 한번씩 쳐다보더니, 다시 칼리안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곧바로 따라오셨습니까?” 칼리안의 손 끝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래도 앨런의 도움이 절실해 보이는 칼리안이 시기 적절하게 쫓아와 이렇게 마주보고 있으니, 이것을 우연이라 하기엔 억지스러운 점이 많았다. 때문에 저 질문이 나올까봐 제대로 마음을 사기 전까지는 아프다는 것을 숨기려 했던 것인데. 칼리안이 잠시 대답할 말을 고민했다. ‘내가 미래에서 왔는데 당신이 왔다 갈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당신의 환심을 사려고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앨런이라면 그 정도는 간파할 것이 뻔했다. “수비대원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을 때, 말을 타고 근처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달려왔지요.” 주신 세렌티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대, 지금 한 말은 조금도 거짓이 아니었다. 말장난에 가까운 속임수였지만 어찌됐건 솔직하게 답을 했다. 잠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칼리안을 응시하던 앨런이 다시 물었다. “왜 달려오셨습니까?” “달려가셨으니까요.” 순간 앨런이 피식 웃었다. 딱 제 나이에 맞을 대답이 비로소 나온데다, 아직 앙금이 남아있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많이 아팠던가 보다, 라고 생각하던 앨런이 다시 물었다. “그럼, 저를 왜 찾으셨습니까?” 마나를 쓸 수 없는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알텐데, 왜 굳이 묻는 것일까. 칼리안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앨런은 채근하지 않고 답을 기다렸다. “왜, 라고 하신다면.” 치유사도 찾지 않고 앨런을 기다린 이유. 돌아가면 난리가 날 것을 알면서도 왕궁 밖으로 나왔던 이유. 분명 있었다. 칼리안은 레이븐에 기대고 있던 몸을 똑바로 했다. “앨런 마나실. 그 이름을 얻고자 함입니다.” 칼리안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다시 한번 흘러나왔고, 그 틈을 탄 대답이 같이 나왔다. 이번에도 거짓말이 아니었다. “조만간 진짜 바람이 불 것 같아서요.” 암살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그것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그냥 적당히 세자위를 사이에 둔 자리 싸움 정도로만 이해해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칼리안은 이렇게만 대답을 했다. 앨런이 검지손가락으로 이마를 살짝 긁적였다. “그럼.” 지금 앞에 있는 왕자가 어떤 처지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카이리스의 왕성 안에서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도 잘 알았다. 때문에, 자신의 이름이 필요하다는 이 셋째 왕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적당히 알 것 같았다. “바람을 막고 싶으신 겁니까, 잠재우고 싶으신 겁니까?” 생각한대로, 앨런은 칼리안의 말을 왕자들의 자리 싸움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칼리안이 말 없이 앨런을 쳐다봤다. 정말로 믿어도 좋을 자인가. 마지막으로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그 눈을 마주한 앨런의 눈에도 같은 빛이 떠올랐다. 잠시 후, 칼리안이 담담한 목소리로 답을 전했다. “당장은 막아야겠지요.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왕좌가 아닙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위해 왕좌가 필요하다면, 잠재울 생각도 있습니다.” 왕좌를 그저 선택사항으로 치부하는 오만한 말. 당장 죽어가는 몸을 가지고,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어린 소년이 저런 말을 한다. 앨런의 양쪽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벌써부터 재미가 있었다. 앞으로는 얼마나 더 재미있으려고. 앨런은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손가락을 들어 카이리스 왕궁을 가리켜보였다. “초대장, 다시 주시지요.” 고작 국왕 탄신 기념일 축하파티에 참석할 사흘 짜리 초대장이 아닌, 내가 널 도울 수 있을 제대로 된 명분을. 칼리안이 웃었다. 그리고 곧 웃음을 지워냈다. 날카롭게 빛나던 붉은 눈이 앨런에게서 멀어져 바닥을 바라보더니, 고개가 숙여지고, 무릎이 굽혀졌다. - 사락······. 하얀 망토가 잠시 부풀어올라 허공에 맴돌다, 곧 깃털처럼 바닥에 내려앉았다. 앨런은 자신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칼리안의 등을 지긋이 내려다봤다.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칼리안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스승님께 인사드립니다.” 나이에 맞지 않는 눈을 가지고 있더니만. 그 등은 또 어찌나 작은지. 일생에 처음으로 만나게 된 제자를 향해 앨런이 대답했다. “초대에, 응하겠나이다.” 그래, 내 너를. 살려주마. ──────────────────────────────────── 제4장. 제대로 된 패가 생길 때까지. (1) 카이리스 수도인 카이리시스에는 세뉴라는 이름의 강이 있었다. 카이리스 왕궁의 건물 이름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이 강은 카이리시스를 대각선으로 나누며 흐른다. 왕궁은 강의 북동쪽 지역 중앙에 있었고, 카이리시스 남서쪽의 외성 정문 밖에서부터 이어져 들어온 왕도가 세뉴 강을 건너 카이리스 왕궁까지 이어졌다. 하츠아라 사후 약 200여년 간 카이리스에 더 머물던 시스파니안이 떠난 뒤 침체되었던 국가를 일으킨 것이 바로 왕도 건설 사업이었다. 주요 도시로 쭉쭉 이어진 이 널찍한 도로 덕분에 카이리스가 다시 부흥을 맞이했다 할 만큼, 카이리스에서 왕도는 상당히 중요한 시설이었다. - 다그닥, 다그닥······! 그 왕도 위에서, 각각 흰 색과 검은 색으로 칠해진 마차 두 대가 왕궁을 향하고 있었다. 나란히 달리던 그 마차들은 모두 더할 나위 없이 호화로운 외관을 자랑했다. 둘 모두 진주 가루를 섞어 바른 반짝이는 외벽에 커다란 유리 창문을 달아 두었던 것이다. 다만 한 대는 흰 색 바탕에 금박으로 장식을 했고, 또 한 대는 검은 색 바탕에 자개로 장식을 했다는 점이 달랐다. 헌데 자개라는 것이 카이리스에서는 상당히 귀했다. 카이리스가 대륙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유일하게 없는 것이 바다였기 때문이다. 진주는 담수에서도 양식이 되었으므로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으나, 자개 재료가 되는 금조개는 그렇지 않았다. 때문에 금 값보다 자개 값이 더 비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카이리스였다. 그런 자개로 거대한 마차를 치장한 것이 고스란히 보였으므로, 이 검은 마차를 향한 시선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다보니 오른쪽에서 나란히 달리던 흰 마차 탑승자의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마차 안에 있던 이가 창 밖에 보이는 검은 마차를 보며 혀를 찼다. “저 꼴을 보게. 그야말로 굴러다니는 돈 덩어리로군. 사치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자 마부석에 앉아있던 집사가 마부석과 연결된 들창 너머로 그 소리를 듣고 생각했다. ‘금박은 싼 줄 알고 저런 소리를 하나. 게다가 지금 남을 보며 사치를 논할 때인가?’ 그 마차에는 텐실에서 공수해 온 최상급 다이아몬드가 박힌 구두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흰 마차의 왼쪽 외벽에 마차가 누구의 것인지 보여주는 문장이 그려져 있었는데, 날카로운 검을 쥐고 있는 그리핀의 모양이었다. 그것은 브리센 후작가의 것이었고, 마차에 타고 있던 이는 브리센 후작의 둘째 아들이자 브리센 상단주인 레넌 브리센이었다. “지그프리드라도 되는가? 아니지. 덩치만 산만한 코끼리들이 저럴 리는 없는데.” 카이리스의 코끼리. 그것은 지그프리드를 일컫는 말이었다. 오랜 기간 단 한번도 왕좌를 탐낸 적 없으나 그 힘은 막강하니, 맹수도 건드리지 못할 초식동물이라 하여 그리 불리는 것이다. 떠오르는 가문이 없자, 답을 찾지 못한 레넌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시 말했다. “대체 어떤 자가 마차에 저렇게까지 돈을 쳐바른 것이야?” 집사가 들창을 통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조금 전 테이난샤 거리 쪽에서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만. 문장이 반대편에 있는지라, 정확히 어느 가문의 마차인지는······.” “테이난샤?” “네.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집사의 말에, 레넌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몰라서 되물어 본 것 같나?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실리케나 칼리안이 들었다면 비웃었을 법한 말로 집사에게 무안을 준 레넌이, 다시 한번 커튼을 걷어 검은 마차를 들여다 보았다. 검은 마차의 창문에도 두꺼운 커튼이 내려져 있어, 누가 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마법사 중에 저런 재력을 가진 사람이 있던가?” “한번 반대편으로 가보라 할까요?” 마차에 새겨진 문장을 확인해보자는 말이었고, 레넌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집사가 마부에게 지시를 내렸다. 마차가 속도를 줄여 검은 마차를 앞으로 보낸 뒤, 다시 속도를 높여 검은 마차의 왼쪽으로 따라잡았다. 그러자 레넌이 재빨리 손을 움직여 창문의 커튼을 열었다. 벽에 새겨진 문장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레넌은 눈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 문장 한번 복잡하네. 저건 뭐야, 꽃인가? 꽃이 하나, 둘······.” 마차가 조금 더 앞으로 움직여 문장을 정확히 볼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것을 본 레넌이 자신의 눈을 세게 비볐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지금 내가 뭘 잘못 본 건가······?” 그러자 집사가 밖에서 문장을 살펴보고는 다시 한번 친절하게 말했다. “붉은 꽃 일곱 송이와 은색 지팡이입니다, 자작님.” “그걸 몰라? 입 닫아!” 붉은 꽃 일곱 송이, 은색 지팡이! 말도 안돼! “허어. 미치겠군. 난리가 났어! 어찌 저 자가 여기에, 카이리스에 있느냔 말이야! 왕궁에는 왜 가는 것이지?” 대체 저 문장이 어느 집의 것인지도 모르겠고, 입도 닫으라고 했으므로, 집사는 그저 눈만 꿈뻑거리며 앞만 쳐다봤다. 한편, 두 대의 마차는 귀족들이 거주하는 에이난샤 거리도 통과했다. 때문에 레넌이 아닌 다른 귀족들도 왕궁으로 향하는 이 값비싼 마차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붉은 꽃들이 핀 덩굴이 은색 지팡이를 이리 저리 휘감은 모양이었다고?” 마차 외벽에 새겨진 문장의 모양을 들은 귀족들은, 저마다의 하인에게 이렇게 되물었고, 분명히 그렇게 생긴 문장이었다는 확신 어린 대답을 듣게 되었다. 그러면 귀족들은 손사래를 치고난 뒤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잘못 봤겠지.” 설마. “앨런 마나실이 여기에 왔을 리 없잖아.” 그리고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각자 하던 일을 집어치우고 왕궁으로 갈 채비를 했다. * * * 축제 셋째날. 오전 9시 30분. 많은 이들의 시선과 관심 속에 왕궁에 도착한 앨런은, 국왕으로부터 받은 초대장을 보여주며 카이리스에서 열어둔 문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닫힌 문의 문턱이 높은지 낮은지는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마차 벽에 새겨진 앨런의 커다란 문장은 멀리서도 아주 잘 보였다. 그리하여 시종장은 아침에 인사를 온 귀족들과 접견한 뒤 집무실로 향하는 르메인에게, 지금 왕궁에 누가 왔는지를 급히 알렸다. - 전하. 앨런 마나실이 찾아왔다 합니다. 르메인이 잠시 발을 멈추었다. 앨런 마나실. 대륙에 세 명 뿐인 7서클 마법사. 하지만 다른 두 명과 달리 어떤 국가에도 정착하지 않은 콧대 높은 능력자. 그의 이름이 가지는 힘이 어떤 것인지는 르메인 역시 잘 알았다. 앨런을 얻게 되면 왕위 계승 후보에 오르리라는 칼리안의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으니.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거대한 나라를 운영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그래서 왕자들에게 단 5분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던 르메인이 곧바로 이렇게 대답했다. “집무실로 바로 안내해오도록.” 덕분에 앨런은 왕궁의 작은 마차로 옮겨 탈 필요 없이, 자신의 그 화려한 마차에 탄 채로 곧장 아르피아 궁까지 올 수 있었다. 마치 의도한 것 같은 9시 30분. 공교롭게도 그 시간에는 아르피아 궁 앞에 나와 있는 귀족들이 참 많았다. 축제 기간동안 늦춰진 일정 덕에 나르실 관으로 여유있게 출근하던 왕실 업무 담당자들, 외무 담당과 오찬을 마치고 빌헬름 관으로 돌아가던 사신들. 그리고 국왕 접견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던 귀족들까지. “저것은 앨런 마나실의 문장이 아닌가!” “허어······ 리베른과 맺었던 계약이 끝났다더니.” 그렇게 모이게 된 귀족들은, 카이리스에 파란을 몰고 올 검은 마차가 소리 없이 멈추어 서는 것을 고스란히 보게 되었다. “헌데 어찌 카이리스에 왔을꼬. 리베른에 계속 있는 것이 몸도 마음도 편안할 터인데.” “그런 일을 겪었는데 편했을 리가 있겠나? 리베른 국왕과의 관계만 아니었어도 아마 진작에 떠났을 걸세.” “음? 아아, 그래. 내 미처 떠올리질 못했군. 그렇다면 정말 카이리스에 올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천하의 마나실이 전하의 탄신일 축하나 하고 가자고 왔을까?” 곧 마차의 문이 열렸다. 뒤에서 앨런의 카이리스 방문 목적에 대해 의견을 나누던 이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그리고 모두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 명의 마법사가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은색에서 시작해 붉은 색으로 끝나는 특유의 머리 색이 햇빛 아래 드러나자, 그가 앨런 마나실이 정말 맞다는 것을 확인한 귀족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마차에서 내린 앨런이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첫날 입었던 누더기를 대신해 보란듯이 걸친 붉은 색의 로브에는 7서클을 상징하는 문양이 금사로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날카로운 눈은 차갑게 빛났고, 가는 입술에는 도도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그런 그에게 중년 남자가 다가가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마나실 경, 어서 오십시오. 저는 시종장 라울 하르트입니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바로 모시겠습니다.” 시종장을 직접 보낸 르메인의 의도가 분명했으므로, 귀족들이 다시 술렁였다. 물론 앨런은 어딜가든 이 정도의 환대는 받았으므로, 익숙한 일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라울을 따라 궁으로 들어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귀족들의 머릿속에 온갖 상념이 들어찼다. 당연한 일이다. 실리케의 기에 눌려 사는 르메인에게 앨런 마나실이 찾아왔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이 쪽으로 오십시오.” 한편, 복도에 들어서 더는 마주치는 사람이 없자, 라울의 뒤통수를 쳐다보던 앨런의 입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해맑은 웃음을 짓던 제자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9시 30분, 정확히 그 때 오세요. 물론 이번에는 꼭 ‘열린 문’으로 오셔야 합니다.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할 머리는 아니었으므로, 앨런은 마법사 연합에서 만들어 주었으나 한번도 입지 못했던 부담스러운 옷을 입고 리베른 국왕이 작별의 선물로 주었던 거대한 마차에 올랐다. 그렇게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왕궁을 찾은 길이었다. 칼리안의 의도대로 수많은 귀족이 아르피아 궁 인근에 모여있던 시간에 도착한 앨런은, 맹랑한 제자의 계획에 헛웃음을 지었다. ‘나를 끌어들였다고 아주 널리 홍보하시겠다, 이거였군.’ 곧 르메인의 집무실 문이 열리고, 앨런이 안으로 들어섰다. 르메인은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집무실에 마련된 응접용 소파에 앉아있었다. 앨런은 칼리안에게 보였던 것과 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르메인에게 인사했다. “앨런 마나실입니다.” 르메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앨런의 인사를 받았다. 앨런이 굉장히 어려보였으나 사실은 르메인 자신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칼리안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르메인은 손을 들어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앨런이 사양 않고 걸어와 르메인의 앞에 마주 앉았다. 르메인이 깊이 있는 눈으로 앨런을 바라보며 잠시 해야 할 말을 정리하는 동안, 앨런은 자신의 것으로 나온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첫날의 이야기는 전해 들었네. 내 대신 사과하지.” 첫날의 이야기라.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어떤 이야기에 대한 사과입니까?” 그 말에 든 뜻까지 부드럽지는 않았기 때문에, 르메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왕궁에서 벌어진 일은 수비대원이 무례를 저질렀던 것 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에 대한 사과로 알아듣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인지를 묻는다. 르메인이 그 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그대가 찾아온 이유를 알지 못하는 정도로만 전해 들었지.” 칼리안은 당연히 르메인에게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르메인은, 수비대원에게 화가 나 돌아가는 앨런을 칼리안이 쫓아갔었다는 것 외에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사과하실 일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대화는 즐거웠고, 정문에서의 일도 설명을 들었으니까요. 뭐. 설명을 들었다고 해야 할지, 괜한 꼬투리 잡지 말라고 혼이 났다 해야 할지.” 르메인의 눈에 의문이 들었다. 칼리안이 앨런을 혼냈다는 말을 들은 것이 맞는지를 생각한 것이나, 그날 앨런을 따라간 것은 칼리안 외에는 없었다. 이에 대해 르메인이 무언가를 묻기도 전에, 앨런의 말이 이어졌다. “카이리스에, 제가 머물 만한 집이 있습니까?” 설명 없이 곧바로 튀어나온 본론에, 르메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 제4장. 제대로 된 패가 생길 때까지. (2) 헤이시아 궁의 정원에는, 칼리안의 방 두 개를 합친 정도는 될 듯한 크기의 온실이 있었다. 벽과 천장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는 그 곳은, 온통 르니에리 잎으로 가득했다. 언제나 짙게 풍겨 나오는 실리케의 향수 냄새와 달리, 온실 안에서는 특별한 향이 나지 않았다. 하얀색의 신비로운 르니에리 꽃은 1년에 단 하루만 피었기 때문이다. 그 온실 안에 하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곳에 그린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의 실리케가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눈매가 사나운 것을 본 레넌이 어깨를 움찔했다. ‘또 기분이 별로인 모양이군. 하긴, 좋을 리가 없지.’ 축제 첫날. 플란츠가 술에 취해 광장 행사에 나왔다. 그것 만으로도 속이 터지는 일인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틀이 지난 지금, 그 누구도 플란츠를 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칼리안으로 인해 플란츠에게 눈길 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실리케를 더 자극했다. 덩달아 레넌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오자마자 카이리스에 앨런 마나실이 왔다는 소식을 전하려 했는데 저래서는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소식이야 굳이 레넌을 통하지 않더라도 전해들을 수 있을 테니까. ‘구두만 전해주고 빨리 돌아가자.’ 레넌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뒤에 서 있던 집사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집사가 손에 들고 있던 선물 상자를 시녀장에게 건넸다. 시녀장은 건네 받은 상자 뚜껑을 열어 실리케의 앞에 들어 보였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실리케가 이렇게 물으며 상자 속을 쳐다봤다. 그것은 실리케의 눈빛과 잘 어울릴 연한 노란 색의 구두였는데, 구두를 장식한 금 조각의 가운데에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구두를 훑어 본 실리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흡족해하는 것이다. “말씀드렸던 텐실의 다이아몬드입니다. 운하를 건설하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했지 않습니까? 그 곳에서 나온 첫 원석들로 만든 상품 중 하나라 합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그러자, 실리케가 눈을 돌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대답했다. “나쁘지 않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그것 때문에 제가 계획한 일이······!” “그건 그렇고.” 레넌의 입이 민망하게 닫혔다. 레넌의 말을 자른 실리케는 고개를 돌려 시녀장을 잠시 쳐다봤다. 구두에 대한 감상은 이 것으로 끝이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감사 인사는 고사하고 정작 하려던 말까지 막히자, 레넌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저것이 얼마짜리 인 줄 알고!’ 그런 레넌의 생각에는 관심이 없을 시녀장은 무덤덤한 얼굴로 예를 보인 후 레넌의 집사를 데리고 온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실리케가 주먹으로 탁자를 탕탕 치며 잇사이로 말했다. “두 달이 지났습니다. 어찌 아직입니까!” 갑작스럽게 변한 실리케의 얼굴에도, 레넌은 놀라지 않았다. 원래 그런 성격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레넌은 가까스로 웃어보이며 실리케를 달랬다. “그것이, 아무래도 ‘축복’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것까지도 신경을 썼다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주 큽니다.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어요!” 레넌이 마른 침을 삼켰다. 부채를 팔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실리케가 말했다. “양을 늘리겠습니다. 그러니 돌아가는대로 물건을 더 보내세요.” 그 말에 레넌이 깜짝 놀라며 만류하는 말을 했다. “위, 위험하지 않을까요? 차라리 다른 수를······!” 실리케가 고개를 돌리며 문 쪽을 향해 손짓했다. 마치 날벌레를 쫓는 듯한 태도였다. 레넌의 입 속에서 작게 이 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 뿐, 결국 레넌은 꺼내려던 말을 시작해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 * * 르메인이 더 깊어진 눈으로 생각에 잠겼다. ‘카이리스에 머물 집이라니.’ 물론 반가운 일이다. 안 그래도 앨런을 카이리스에 두고자 하는 생각으로 그를 불러 앉힌 참이었다. 지금 실리케의 세력을 누르려면 앨런 정도의 인사는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앨런이 먼저 이런 이야기를 꺼내놓으니 오히려 그 의도가 의심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속내로 저런 말을.’ 이런 반응이 나올 것을 익히 예상한 앨런이 말했다. “광장에서 빨간 눈 고양이 한 마리를 봤는데. 꽤나 마음에 들더군요. 이것 저것 가르치고 키워야겠다 했는데. 그러자니 정작 제가 머물 곳이 없지 뭡니까.” 마법사들이란, 뭐 하나라도 더 돌려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인지. 잠시 침묵하던 르메인이 말했다. “칼리안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다는 것인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물은 앨런이 앞에 놓인 탁자에서 쿠키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반 잘라 입에 넣더니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국왕의 질문을 받은 뒤 취하기에는 참으로 무엄한 행동이라 하겠으나, 르메인은 말 없이 기다렸다. 곧 차까지 한 모금 마셔 입을 적신 앨런이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검은 머리, 붉은 눈. 그리고 마법이라.” 르메인이 자못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경이 칼리안에게 마법을 가르치기 위해 카이리스에 머무르겠다는 소리가 맞나?” “뿐만 아니라. 고양이가 좋아할 환경도 만들 생각입니다. 그러려면 집주인을 도와서 집 정리도 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를 키우겠다는 것은 핑계고, 실리케 세력을 정리하여 칼리안을 다음 왕세자로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물론 그것이 르메인에게 해가 될 것은 없었다. 르메인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물었다. “감당이 되겠나? 지금 집안 꼴이 엉망이라.” “뭐. 저도 뭘 키워보는 것이 처음이라. 감당이 되실런지.” 르메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이 걸렸다. “그나저나 명분이 좋군. 스승과 제자라니.” 왕자와의 사제 관계. 그만한 명분은 찾기 어려울 터였다. 물론 실리케를 포함한 브리센 후작가에서 왕자의 마법 교육을 반대하려 하겠지만, 상대가 앨런 마나실이다. 그가 먼저 칼리안을 제자로 지목했는데, 무슨 수로 막겠는가? 더불어, 하루 웬종일 수업만 할 수는 없으므로, 시간이 남는 스승이 르메인을 도와 일을 좀 한다 해도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요. 제법 제대로 된 초대장이었습니다.” 그 말에, 르메인이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마치 이 명분을 칼리안이 만들었다는 듯한 뉘앙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앨런은 그에 대한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곧 생각을 정리한 르메인이 앨런에게 대답했다. “안 그래도 엉망인 집에, 고양이 키우는 이가 들어온다 해서 더 나빠질 것도 없겠지. 머물 곳을 마련해 주겠네.” 칼리안에 대한 마법 교육과 카이리스 체류를 허락하는 말이었다. 앨런이 가볍게 고개 숙여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대화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허락과 별개로 르메인의 질문이 이어졌다. “헌데 어째서인지 궁금하군. 특별할 것이 없다던 아이인데.”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까?” 그렇게 되묻는 앨런의 눈이 의미심장했다. 오히려 앨런은 칼리안에게서 특별하지 않은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건강 상태까지 특별했지.’ 르메인이 그것을 두고 잠시 생각을 해보았으나, 칼리안에게 특별함이 있다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겁이 많다고는 들었지. 말도 무서워한다 하던데, 경을 쫓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것은 고쳤나 보더군.” 앨런은 칼리안이 매우 숙련된 솜씨로 말을 몰던 것과, 그 말에 기대어 서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르메인의 말에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왜 아까부터······.’ “란델은 깊은 물과 같고 플란츠는 성난 파도와 같다 들었지. 칼리안은, 글쎄. 탈 없이 조용한 아이라 하였을 뿐. 재능이 있는 줄 몰랐네.” ‘뭐지? 어째서 전부 전해들었다 말하는거지? 마치······.” 직접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만약 무언가 특출한 것이 있었다면 내게도 전해졌을 테지. 그래서 사실 조금 놀랐네.” 차를 들어 목을 축인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저벅저벅 창가로 걸어가 밖에 펼쳐진 정원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조금 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저도 전하와 마찬가지로 조금 빨리 결혼을 했었지요. 그러다보니 벌써 망아지 같은 손녀도 하나 있습니다.” 순간 르메인의 손가락이 꿈틀했다. 알고 있었으나,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남자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에 익숙해지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물론 앨런이 생각한 ‘더 놀라운 이야기’는 손녀 자랑이 아니었다. 앨런은 손바닥을 아래로 둔 채 팔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머리가 제 허리춤에 왔으니. 한, 이 정도? 지금은 더 컸을 겁니다. 그럼, 이 정도.” 앨런의 팔이 조금 더 올라갔다. 뜬금 없이 왠 키 얘기인가 싶어, 르메인은 조용히 앨런의 말을 들었다. 그런 르메인을 응시하던 앨런이 물었다. “전하께서는 혹시 왕자님들 키를 아십니까? 전하와 함께 섰을 때 어디까지 오는지를요.” 르메인이 대답하지 않았다. 몰랐기 때문이다. 그럴 것이라 예상한 앨런이 시선을 옮겨,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때로는 관심이 독이 되기도, 무관심이 약이 되기도 하는 것을 압니다. 바쁘다는 말은 아무 핑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더욱 잘 알지요. 어제도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까?” 같이 걷고 같이 서 있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르메인의 눈빛이 식었다. 앨런이 지금 국왕의 사적인 영역에까지 간섭하려 한다고 느낀 것이다. “마나실 경, 관심이 지나치군. 자네는 오늘 나를 처음 보았네. 자식을 대하는 나의 방식이 그대의 기준에 맞을 필요는 없지 않나?” 불편하다는 심기를 굳이 가리지 않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런 것을 설명하는 것도 우습지만, 나는 왕자들을 아끼고 있네.” 앨런이 의외라는 얼굴을 하며 물었다. “정말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르메인이 잠시 말을 멈추고 앨런을 응시했다. 그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르메인은 빨리 이 소모적인 대화를 마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경이 만난 칼리안, 그 아이는 특히나 그렇지. 내게 있어 깨물어 보기도 전에 이미 아픈 손가락이니까. 그 아이를 가르치겠다 하니 지금의 태도는 이해해보겠지만 이 이상은 나도 참지 못하네. 그러니,” “하!” 앨런이 짧게 소리내어 웃었다. 국왕의 말을 자르고 튀어나온,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르메인의 얼굴에 노기가 나타났다. 허나 그런 것을 신경 쓸 앨런이 아니었다. 앨런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얼굴로 르메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전해 듣는 것은 그만하시고 좀 들여다 보시지요.” “대체 무엇을 말이지?” 르메인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 고민 없이 물었다. 대체 무엇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르메인의 이런 반응에 앨런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줄이야!’ 화를 삭이는 앨런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깨물어 보기도 전에 이미 아픈 손가락이라 하지 말고 그냥 한번 깨물어 보시라는 말입니다. 예전보다 더 아픈지. 덜 아픈지.” “······.” “관망만 하시다가는, 잃게 되실 겁니다.” 마법사들의 화법이란 정말이지! 르메인이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마나실 경. 나는 마법사가 아니야. 그러니 똑바로 말하게.” 앨런이 다시 걸어와 르메인의 앞에 섰다. 칼리안의 바싹 마른 등이 생각났기 때문에, 이번에는 앨런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마치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이, 앨런이 더 작고 더 빠르게 몰아치듯 말했다. “피부에 푸른 기운이 돌고, 손톱 밑이 보랏빛을 띱니다. 입술은 말라 있고요. 오래 말하지 못하고 숨을 몰아쉽니다. 눈동자 가장자리에는 어두운 빛이 돌기 시작했더군요. 몸을 일으키다 말고 눈을 감고 멈추어 섭니다.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게다가 예복은, 급히 수선한 티가 났습니다. 분명, 크기를 줄였을 겁니다. 예복을 짓는 데에 얼마나 걸립니까? 한 달?” 르메인의 얼굴에 드러났던 노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르메인은 앨런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신 아랫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앨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 챘기 때문이다. “설마, 누가 그 아이에게······.” 앨런이 르메인의 말을 또 잘랐다. “네. 바로 알아들으시는군요. 그렇다면 바로 알아보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다른 이들도 아닌······ 이미 한번 같은 일을 겪으셨던 전하라면. 저도, 그랬으니까요.” 프레이야! 르메인의 머릿속에 간신히 접어두었던 이름이 떠올랐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도. 고작 한 달 만에 옷을 줄였다면, 한 눈에 티가 났을 겁니다. 키를 모르더라도, 손이든 입술이든 보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말라가는 것은 아셨어야죠. 그 아이가 살기 위해 찾은 것이, 일면식도 없는 마법사가 아니라 아버지였어야 마땅하지요!” 르메인은 허리를 구부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 끝이 떨려왔다. 전혀 생각지 못했다. 독이라니······! “정말 아낀다면. 그 손가락, 이제는 좀 깨물어 보시지요.” 앨런은 허리를 숙여 남은 반쪽의 쿠키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씹어 삼키며 르메인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을 감싸쥔 손가락 사이로 참담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아니라면. 지금 같은 그런 얼굴을 하지 마시던가요.” 앨런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칼리안에게 해 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르메인의 심기를 더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번 일 까지는 모르는 것으로 하십시오. 이제 와서는 그것이 낫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여 감히 말씀드렸습니다. 용서하시지요.” 그렇게 말을 맺은 앨런이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예를 보인 뒤, 그대로 나가버렸다. ──────────────────────────────────── 제4장. 제대로 된 패가 생길 때까지. (3) 얀은 그야말로 눈이 튀어나올 듯이 놀랐다. 사실 ‘슉!’ 하는 소리가 나면서 없던 사람이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다면 누구라도 놀랄 것이다.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것은, 다분히 그간 충실하게 쌓아 온 시종으로서의 습관 덕분이었다. 아니었다면 당장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을 테니까. 게다가 홀연히 나타난 이 남자가 누구인지를 곧바로 알아보았으므로, 어제 손목을 삐끗한 시녀를 대신해 손에 들고 있던 세숫물을 쏟아 붓지 않는 침착함까지 발휘했다. 그에 따라 얀은 굉장히 뿌듯한 기분을 느끼며 칼리안이 잠들어 있는 침실의 커튼 앞을 막아설 수 있었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외쳤다. ‘마나실 경,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얀의 앞으로 워프한 것은 당연 앨런이었다. 그런데 앨런의 표정이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와 한바탕 다투고 온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 앨런이 손가락으로 침실 쪽을 가리켜보이며 물었다. ‘왕자님, 아직인가?’ ‘왕자님께서는 지금 컨디션이······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거기까지 말하던 중, 시녀들이 침실 커튼 안쪽에서 밖으로 나오다 멈칫했다. 앨런이 누구인지 몰라 놀란 눈치였다. 얀은 설명할 겨를도 없이 그녀들을 재빨리 내보낸 뒤 문을 잠그고, 침실 반대편의 욕실로 앨런을 끌고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얀은 여전히 세숫물이 든 작은 대야를 손에 든 상태였다. 그것을 내려 놓을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이 쪽으로 오세요.’ 왕자의 방은 침실과 샤워실, 서재와 거실, 그리고 화장실과 욕실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문이었다. 암살자의 침입이나 각종 사고를 대비하여 그리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니 욕실 커튼을 내리는 것만으로는 특별히 방음이 되지 않았다. 난처해하던 얀이 앨런이 누구인지를 떠올리고는 말했다. ‘마나실 경, 조용해지는 것 좀!’ ‘음?’ 멍하게 얀을 쳐다보던 앨런이 한참 뒤에야 뭔가 이해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한번 튕겨 ‘조용해지는 것’을 시전했다. 곧 그들 주변에 사일런트 마법의 막이 생성된 것이 보였다. 얀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예의 없는 행동이십니까?” 앨런이 손가락만 튕겨 마법을 발현한 것에도 얀은 놀라지 않았다. 얀에게 있어 지금의 앨런은 꽃 같은 우리 왕자님의 방에 침입한 무뢰한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앨런이 걸친 옷이 7서클 마법사를 의미하든 말든. 방금 쓴 것이 무영창 마법이든 나발이든. 그런 생각이 빤히 드러났기에, 앨런이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나를 혼내려고 나한테 마법을 써달라 한 것인가?” “왕자님이 깨시면 안되니까요.” 국왕 르메인에게 일침을 하고 온 그를, 왕자의 시종이 예의 없다며 혼내는 상황이라니. 얀의 태도가 가히 좋지 않았으나, 시종으로서 해야 할 일에 충실한 결과라 너그러이 이해한 앨런이 대답했다. “체르밀 궁에는 외부인이 허가 없이 들어올 수 없다고 하더군. 르메인한테 아직 말을 못 들은 모양이라 어쩔 수 없었네.” “허가가 안나서 텔레포트인가 뭔가를 하셨다는 겁니까?” 앨런이 자기 자신을 대견스러워하듯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워프라네. 좀 더 어려운 것이지. 내가 마법을 좀 쓰거든.” 얀이 함께 웃으며 말했다. 워프든 나발이든. “나가세요.” “어차피 깨우려던 것 아닌가? 내 기다리지.” 얀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됩니다. 조금 더 쉬셔야 할 듯 하여 저희들도 되돌아가는 길입니다.” 앨런은 아무 소리 듣지 못했다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금가루가 섞인 검은 타일로 사방이 둘러싸인 그 곳에, 검은색 오닉스 스톤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욕조가 놓여 있었다. 앨런이 진심으로 감탄하더니 말했다. “호화롭기 짝이 없는 곳이구나. 늙은 스승님 9시 30분까지 왕궁에 오라 해놓고 주무시고 계시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 “늙었다뇨. 몹시 팔팔하신데요.” 얀이 볼멘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러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온 그 곳이 칼리안의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임을 깨달은 얀이 화들짝 놀라 무어라 말하려 했다. 그러자, 그 표정을 읽은 앨런이 한발 빠르게 말했다. “여기서 나가면 마법 범위 밖인데. 이제는 시끄러워져도 괜찮은가?” 얀이 마뜩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앨런을 밀어내기는 그만두었다. 대신 다시 한번 강경하게 말했다. “전할 말이 있으시다면 일어나신 뒤에 전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기다리시는 것은 안됩니다.” “난 왕자님 상태를 보러 온 것이네. 그러니 전할 말도 없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렇다고 왕자님 상태를 자네와 얘기할 수도 없지 않나.” 그 말에 얀이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이 앨런과 만났다는 것은 물론 전해들었다. 사제의 연을 맺었다는 것도. 하지만 앨런이 칼리안의 몸 상태를 알고 있는지는 듣지 못했다. 칼리안이 마법사에게 도움을 구하겠노라 했던 적이 있으나, 앨런에게 벌써 그 말을 했는지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우선은 모르는 척 하기로 결정했다. “상태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는 것이 훤했다. 계속 말을 안 듣는 얀을 보던 앨런은, 결국 조금 아껴두려 했던 패를 일찌감치 꺼내들었다. “자네. 나를 알지?” 그러자, 어쩐 일인지 얀이 어딘가 찔려 하는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 못하는 시종을 보며 앨런이 피식 웃었고, 얀이 애써 대답했다. “······ 그야, 당연히 알지요. 왕자님께 들었으니까요.” 앨런이 사납게 웃었다. 그리고는 얀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새끼 코끼리. 까불지 말고. 나를 알지 않느냐고 물었잖나.” “······!” 앨런의 말에 얀의 눈이 홉떠졌다. 사람들이 지그프리드를 두고 코끼리라 부른다는 것을 모를 얀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앨런이 슉 나타난 것을 보았을 때보다 더 놀라는 바람에, 세숫물이 담겨있던 대야를 기어코 떨구고 말았다. - 땡그랑!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동시에, 앨런이 손가락을 두 번 튕겼다. 앨런의 앞에 반투명한 실드가 생성되어 물이 옷에 튀는 것을 막았다. 물론 얀에게까지 실드 범위를 넓혀 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으므로 얀 혼자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다. 어쩐지 세숫물이라 하기에는 너무 많은 물이 쏟아지며 앨런이 웃음을 참듯 입가를 씰룩였음에도, 놀란 얀은 눈치 채지 못했다. “······ 어떻게?” 앨런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몇 년 전에 아빠 코끼리와 리베른에 왔었지 않나? 좀 컸다고 다른 사람인 척 하면 내가 못알아 볼 성 싶던가?” 순간 슬레이만이 했던 말이 얀의 귓가를 스치듯 지나갔다. - 내 아들이 워낙 귀티가 안 나서 아무도 의심을 안했다. 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아닌데요! 들켰는데요! 그 동안 엄청 컸는데도 바로 들켰는데요!’ 그것이 숨길 수 없는 귀티 때문이었을지, 앨런의 귀신 같은 기억력과 촉 때문이었을지, 얀의 브론즈 색 곱슬머리와 청회색 눈 때문이었을지. 혹은 이틀 전 늦은 밤, 마법사 친구를 만나 거나하게 술에 취한 어떤 소드마스터의 주사 때문이었을지는 오직 앨런만 알 수 있을 일이었다. 왜 그것을 숨기는 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찌됐건 얀의 큰 약점을 틀어쥔 앨런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깨우게. 잔다고 낫는 것 아니니 시간 낭비 말고.” 결국 5분여가 지난 뒤, 칼리안이 얀의 종 소리를 듣고 잠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온 몸이 푹 젖어 있는 얀의 꼬락서니를 보며 대경했다. “축제 서프라이즈야?” “······ 죄송합니다, 왕자님.” 칼리안이 그런 얀을 한동안 쳐다보다 물었다. “······ 우는 거 아니지?” “안 울어요.” 칼리안은 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얀이 조금 안심한 듯 말했다. 밖에 앨런이 있다는 말을 전해주는 것도 잊어버린 채였다. “컨디션이 좀 나아지신 것 같아 보입니다, 왕자님.” 축제 첫날, 앨런을 만나고 돌아온 칼리안의 얼굴은 그야말로 죽을 상이었다. 강행군 끝에 앨런의 공격 아닌 공격을 받았던 탓이 컸다. 만약 그런 내용을 얀이 알고 있었다면 앨런을 보자마자 물세례를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야 하루종일 잠만 잤으니까.” 본래 축제 둘째날에 사절들과 만나야 했는데, 플란츠가 술을 먹고 광장에 나선 것을 르메인이 알게 된 모양이었다. 카이리스 귀족들이야 플란츠가 하루 이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엘프까지 끼어 있는 외국 사절들은 그렇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의 앞에서 실수할까 걱정한 르메인은 사절단과의 자리에 왕자들을 부르지 않았다. 덕분에 둘째날 일정이 통으로 비게 된 칼리안은 긴 숙면을 취하며 휴식하는 행운을 누렸다. 의도치 않게 칼리안에게 도움을 준 꼴이 된 플란츠를 생각하던 얀이 소식 하나를 전해주었다. “전하께서 플란츠 왕자님께 금주령을 내리셨다 하더라고요.” “금주령?” 얀이 당혹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플란츠 왕자님께 술 가져다주지 말고, 술 마시는 자리에선 이제 음료수만 주라고 하셨다고······.” 그 르메인이 저런 말까지 했을 정도면, 우려하는 목소리가 아주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칼리안이 실소하며 말했다. “퍽이나 안먹겠다. 축복이 있는데도 취할 정도로 마시는 것을 어떻게 끊어.” “그래서 플란츠 왕자님의 시종들이 걱정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칼리안의 시선이 침실을 막아 둔 커튼으로 향했다. 그제야 앨런을 생각해 낸 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참, 지금 마나실 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칼리안이 깜짝 놀랐다. 어쩐지 커튼을 걷지 않았더라니. “스승님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도, 앨런은 정확히 칼리안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 손을 흔들었다. 칼리안이 서둘러 앨런을 향해 고개 숙여 예를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던 얀이 말했다. “왕자님께 긴히 확인할 것이 있다 하여, 부득이하게 이리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잠시 얀의 몰골과 스승의 방문 사이의 상관 관계를 따져보던 칼리안이 결국 답을 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은 우선 간단한 옷을 입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 행사를 위해 정복으로 갈아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준비가 모두 끝나자 커튼이 걷혔다. “두 분께서 함께 식사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라 전하겠습니다.” “아, 나는 되었네. 바로 가야 하니.” 얀이 매우 좋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얀과 시녀들이 밖으로 나간 뒤, 칼리안은 비로소 앨런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칼리안이 오래 기다려 준 앨런에게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앨런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건 이제 하지 마세요. 되었습니다.” “네, 스승님.” 칼리안이 앨런의 앞에 마주 앉으며 물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아침에 르메인을 만나러 올 적당한 시간을 일러준 것은 맞았지만, 자신까지 보러 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었다. 앨런은 품에서 천 주머니 하나를 꺼내 칼리안에게 건넸다. “잊지 말고 매일 하나씩 챙겨 드세요.” 붉은 색의 장식 없는 주머니였는데, 열어보니 진주빛을 내는 반 투명한 구슬 같은 것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앨런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말해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왕자님이 가지고 계신 문제가 둘 입니다. 하나는 마나 운용이 안 되는 것.”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본능적인 회피였다. 앨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 번 확인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마나를 쏟아넣는 짓은 더 안 할 테니 걱정 마세요.” 덕분에 하루를 꼬박 앓았다는 것을 알기는 할까. 칼리안이 쓰게 웃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지금 왕자님 몸이 바짝바짝 말라 가는 것.” 마나도 그렇고, 몸 상태도 그렇고. 칼리안은 앨런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리 잘 아는 것인지. 칼리안으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 곳의 왕과 왕의 자녀들은 용의 축복을 받는다지요?” “네. 치유력이 생기고 마법에 대한 친화력이 늘어나는 힘입니다.” “다소 이상한 조합이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 없습니까? 치유력과 마법이라니.” 그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 바가 있었다. 비슷한 생각을 했을 때 떠올랐던 옛 칼리안의 기억 덕분이었다. 칼리안이 그것을 되새기며 대답했다. “심장을 강화하는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나와 생명의 근원 모두가 심장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요.” “맞습니다. 시스파니안은 심장의 힘을 강화시키는 축복을 내린 것이지요. 그럼 제 생각에 왕자님의 치유력도 사라졌을 듯 한데. 맞습니까? 그러고 보니 문제가 세 개인 것이군요.” 칼리안의 머릿속에 플란츠가 던진 나이프에 상처를 입었던 날이 생각났다. 결국 상처가 모두 아물기까지 꼬박 2주일이 걸렸다. 그때 혹시라도 이상한 소리가 나올까봐 상처를 숨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다. “네. 그것도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심장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칼리안이 손에 올려진 약 주머니를 쳐다봤다. 심장을 고칠 약인지를 궁금해하는 모습이었으므로, 앨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치료약이 아닙니다.” 칼리안이 다시 앨런을 쳐다보았다. 그럼 무엇인지를 묻는 눈빛이었고, 앨런이 혀를 차며 말했다. “왕자님은 지금 심장이 고장난 것도 아니고, 마나가 막힌 것도 아니니 그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신 뭔가를 집어먹을 땐, 제대로 된 것인지 확인을 좀 해보시지요.”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아니었다. 칼리안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 독입니까.” ──────────────────────────────────── 제4장. 제대로 된 패가 생길 때까지. (4) 그래. 분명 몸에 이상이 있었다. 처음에는 밖에 나서지 않았었기 때문이라 넘겼고, 심장의 통증을 느낀 이후에는 마나 문제일까 생각하다가,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했었다. 그것이 모두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이것은 해독약이겠군요.” “그렇습니다. 급히 만들기는 하였으나 해독이 되는 것은 정확히 확인했으니, 그걸 다 먹을 즈음이면 축적된 독기운도 모두 사라질 겁니다. 그럼 저도 그때부터 왕자님의 마법을 봐드리겠습니다.” 칼리안의 시선이 약 주머니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앨런이 그런 칼리안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칼리안이 아닌 제3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듯 담담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타크리모사라는 맹독이더군요. 몇가지 독초에 크리모사라는 뱀의 피와 독을 섞어 만듭니다. 어제까지 건강했던 아이가 갑자기 죽는다면 이상하게 여길 테니, 서서히 병드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헌데 어지간한 독은 축복의 힘으로 고쳐질테고, 그러니 소량의 맹독을 꾸준히 섭취하게 해온 것이겠지요.” 참으로 잔인하다. 칼리안은 고작 열 넷이었다. 잘못한 일이라고는, 프레이야를 닮았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려면 향도 없고 맛도 없고 은에도 반응하지 않으면서, 병증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고, 또 오랫동안 먹일 정도의 많은 양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을 겁니다. 왕자님의 증상과 그런 조건에 맞는 독이 바로 그것입니다.” 칼리안은 대답 없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앨런이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금 그가 말하고 있는 것들은 전날 하루 종일 마법사 협회 건물에 눌러앉아 테이난샤에 거주 중인 마법사들을 달달 볶아 알아낸 정보였다. “축복의 힘이 없었다면······. 아무리 적게 먹는다 해도, 폐에 병이 난 것처럼 기침을 하다 일주일 안에 피를 토하고 죽었을 겁니다. 그런 독한 것을 치유하다 보니 심장에 무리가 왔을 터. 그리하여 치유력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고 마나를 쓰려 하면 거부 반응을 보인 것이지요. 이미 힘들어 죽겠는데 또 힘을 쓰겠다 하니 아프다고 소리를 지를 밖에요.” 칼리안이 약 주머니를 닫으려다, 그만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알약 몇 개가 무릎 위로 떨어졌다. 칼리안이 서둘러 그것을 집어 다시 넣었다. 집어드는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분노였다. 그가 알고 있는 칼리안은 분명히 암살을 당했다. 처음부터 마나를 쓸 수 없던 것을 보면 베른이 칼리안의 상황을 바꾸어 독에 당한 것도 아니었다. 즉, 그들이 원래의 과거에서도 칼리안에게 독을 썼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사실이 가져오는 또 다른 의문에, 참을 수 없을 분노가 치밀었다. “······ 왜.” ‘이미 죽어가던 아이를, 왜 목을 졸라 죽였는가!’ 주머니를 손에 꼭 쥔 칼리안이 앨런을 쳐다봤다. 앨런의 어깨가 순간 움찔했다. 붉은 눈에 그득한 살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 없이 사라졌으나, 그것은 분명 소년이 가질 수 있을 눈빛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 쪽으로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칼리안의 말에, 앨런은 조금 전 보았던 눈빛을 머릿속에서 떨쳐내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 눈 앞으로 날아오는 칼만 날카로운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예리한 법이니.” 칼리안은 앨런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방법을 막론한 각종 암살 시도가 난무하는 전장도 겪어보았던 그였다. 그런데, 칼리안이 교살됐다는 사실에 얽매여, 명백한 증상들에도 불구하고 중독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칼리안이 저질러서는 안됐을 큰 실수였다. 이제는 해결 방법을 모색할 때였다. “심하게 중독된 상태입니까?” “제가 보기엔 오늘내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칼리안이 풉 웃었다. 그래서 기분이 한결 풀어진 것을 느끼며 물었다. “만약 해독약을 같이 먹는다면, 그래도 더 심해질까요?” 앨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제자가 무슨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추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 하지 마시지요. 속도야 늦춰지겠지만 결국은 위험해질 것이니.” “어느 정도 늦춰지겠습니까?” “저도 치유사가 아니니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열흘이 될 지, 보름이 될 지.” 칼리안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라도 늦춰진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럼 함께 먹겠습니다.” “진심으로 독이랑 약을 같이 처드시겠단 말입니까?” 이것이 욕인지,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앨런의 진심이 잔뜩 묻어 있는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의 단순한 이상이었다면 몰라도 독이라면 신중히 대처해야 했다. “짐작 가는 것이 있습니다. 아침마다 마시는 차입니다. 그것 외에는 매일 같은 것을 먹지 않았습니다. 다만, 항상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셨습니다. 시녀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만에 하나의 경우를 간과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예전의 칼리안은 자신이 서서히 중독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차를 거부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실리케는 포기하지 않았을 터. 병에 걸려 죽지 않는다면, 그 다음으로 의심을 사지 않을 방법은 자결이다. 그래서, 중독되어 죽어가는 아이에게 암살자를 보냈을지 모른다. 아니, 실리케라면 분명히 그리 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차를 물리면 곧바로 다른 방법을 쓸 것이다. 다만 그때와 상황이 다르니, 그들이 무엇으로 죽이려 들지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제가 눈치챈 것을 아직 몰라야 합니다. 먹지 않고 버릴 수가 없으니, 해독약과 함께 먹어야지요.” “범인을 잡을 증거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요 근래 몇달 동안 브리센 상단에서 가죽을 쓴다며 뱀을 잔뜩 들여온 증거까지는 모아두었고, 지금도 협회에서 여러 방면으로 조사하고 있으니.” 브리센. 역시나 실리케가 범인이었다. 고작 하루 사이에 앨런은 참 많은 것을 알아냈다. 뿐만 아니라 증거까지 모았다니 대단할 따름이다. 이 정도를 알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마법사가 동원된 줄은 모르는 칼리안이 그저 씩 웃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카드로 남겨두면 되겠네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잠시 할 말을 정리했다. “모닝 티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얀이 다칩니다. 잘못 없을 시녀들도요. 그렇게 오랫동안 독을 건넸으니 아무 일 없이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새끼 코끼리는 괜찮을텐데.” 앨런의 혼잣말같은 중얼거림에, 칼리안이 되물었다. “네?” “아닙니다. 그런데, 그 시종은 어찌 그리 믿으십니까?” 그 질문에, 칼리안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켜보이며 대답했다. “거짓말 못해요. 여기, 얼굴에 다 티가 나서.” 그리고는 오른 손바닥을 쳐다봤다. 작지만 분명한 흉터가 남아 있었는데, 플란츠와의 일로 다쳤던 자국이었다. 그 손을 붙들고 어린애처럼 울던 얀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냥. 믿습니다.” 앨런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실리케는, 하루 이틀 써야 할 독이 아니니 분명히 들킬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다는 것은 들켰을 때 빠져나갈 방법도 확실하게 마련해 놨다는 말이겠지요. 심지어 제 앞에서 버젓이 저를 죽이겠다는 말까지 했으니까요.” 브리센 자작과의 석찬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것은 분명, 걸릴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니, 자칫하면 실리케는 잡지 못하고 제 사람만 잃습니다. 오히려 누명을 씌웠다며 저까지 몰아세울 테고요. 그리 되면 진짜 칼이 날아오거나 또 다른 독에 노출되더라도 막기가 어려울 겁니다.” 앨런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살려주겠다 생각한 것이 나의 자만이었군.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거기까지 짚어보는지.’ 물론 이것은 칼리안이 미래를 아는 까닭도 있었지만, 그 사실을 모를 앨런은 안타까움과 놀라움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제대로 된 패가 생길 때까지, 최소한 독이라는 수단 만이라도 완전히 포기하게 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만 함께 먹겠습니다. 그 후에 날아들 눈에 보이는 칼들은, 어떻게든 막으면 되니까요.” 앨런이 복잡한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이 생긋 웃으며 해독약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그것을 입에 쑥 넣어 삼켰다. 그것을 본 앨런이 눈썹을 모로 세웠다. “의심을 하고 집어 먹으라 했지 않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진짜 독이면 어찌하려고요?” “그럼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제가 믿는 만큼 스승님이 저를 믿지 않으셨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믿음을 못 드린 제 잘못 아니겠습니까?” 앨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 한번 번지르르 하군요.” 마치 칭찬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칼리안이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앨런 마나실을 꼬셔낸 입에서 나오는 말인데, 오죽하려구요.” 그렇게 말하며 마주 쳐다보는 칼리안의 눈이 맑았다.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던 앨런이 물었다. “그래요. 이제 제가 또 무엇을 해 주면 되겠습니까.” 살 수 있는 방법을 일러 준 것만으로도 과분했으나, 아직 칼리안은 앨런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칼리안이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일 저녁, 저를 한 번만 왕궁 밖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데려가 드리지요.” * * * - 자르륵. 손에 들린 약 주머니를 살짝 위로 던졌다 받으니, 주머니 속에서 해독약들이 구르는 듯한 소리를 냈다. 앨런이 돌아간 뒤, 칼리안은 지금 처음으로 얀과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점심 식사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주머니만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것이다. 칼리안이 앨런과 나눈 이야기가 건강 상태와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을 아는 얀은, 그런 칼리안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아무 말 없이 옆에 서있었다. 자르륵. 칼리안의 손에서 약 주머니가 다시 소리를 냈다. “······ 얀.” “네, 왕자님.” 얀이 곧바로 대답했다. “열흘 안에, 귀족들이 참석하는 일정이 있어?” “축제 전 한달 동안 귀족과의 일정이 중단되었던 탓에 당분간 조금 많이 있습니다.” 다행한 일이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으로 뭐가 있지?” 잠시 칼리안의 일정을 떠올려보는 것인지, 얀은 한 동안 시선을 내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가까운 것부터 나열하기 시작했다. “이번 주 금요일에는 사절단 송별식과 오찬이 진행됩니다. 그런데 플란츠 왕자님 일로 왕자님들은 참석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토요일에는 왕궁 뒤 노튼 숲에서 사냥 대회가 있고, 다음 주 월요일에는 아스트리샤 거리에 완공되는 미술관 개관식이 있는데 아직 왕자님들까지 참석하실지 결정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화요일에 백작 이상이 모이는 회의가 있습니다. 회의에는 참석하시지 않지만 그 이후 만찬에는 함께 자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목요일에는 새로 임명된 변경백을 접견하시게 되고, 금요일에는,” ‘많기도 하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얀의 말을 듣던 칼리안이 손을 살짝 들었다. 얀이 설명을 멈췄다. “됐어. 그 정도면 충분해. 고마워.” “네, 왕자님.” 칼리안은 지금, 실리케가 독을 포기하도록 만들 방법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었다. 앨런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생각난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것이 지금의 칼리안이 열흘 안에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 것 같았다. 그래서 앨런에게 왕궁 밖에 나가겠다 말했고, 때마침 딱 들어맞는 일정도 하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래서 고민이 길어졌던 것인데. - 상대의 패를 가져오려면 나의 것을 먼저 걸어야지. 문득 베른의 아버지, 지금 세크리티아의 국왕이기도 한 데블란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럴 때 생각이 나긴 나네요. 아버지.’ 칼리안은 결국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얀을 쳐다봤다. 밥좀 먹으면 안되냐는 말이 새겨지듯 나타나 있는 그 얼굴에, 칼리안이 웃으면서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손에 들린 주머니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자르륵, 하는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자연히 얀의 시선도 주머니를 따라 움직였다. 매우 걱정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칼리안이 약간의 진실을 덜어내고 설명을 했다. “약이야. 다 먹을 즈음이면 나을테니, 걱정하지 마.” 그러자 얀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 표정의 시작이 ‘못믿겠다’ 였던 것에 칼리안이 움찔했으나, 결국 안도하는 얼굴로 끝났으므로 칼리안도 안심했다. 물론 그것은 약을 주고 간 앨런에 대한 불신이었지만 칼리안은 모르는 일이었다. “대신 이것에 대한 건,” 거기까지 말한 칼리안이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말 뜻을 이미 눈치 챈 얀이 먼저 대답했다. “다른 곳에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걱정마세요.” 눈치가 빠른 것인지 느린 것인지. 칼리안이 씩 웃고는 늦은 식사를 시작했다. ──────────────────────────────────── 제5장.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1) 칼리안이 이제 막 점심 식사를 시작했을 그 시각. 세뉴 관 1층에 마련된 홀에 모인 귀족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분명 축제 마지막 날이었으나, 분위기는 첫 날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어제 앨런 마나실이 마법사 협회에 들어가 하루종일 머물렀다는 소식부터, 마법사들이 갑작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없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발빠르게 퍼져나가던 중이었다. 그러다, 앨런 마나실이 처음으로 제자를 들였으며 그 제자가 다름 아닌 칼리안이라는 사실과, 심지어 이에 대해 르메인과도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귀족들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을 파도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다만 이런 소식을 미처 접하지 못한 곳도 있었다. 소식을 전해 들을 이가 아직까지도 잠에서 깨지 않은 탓이었다. 그가 잠들어 있는 방의 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항상 그를 깨우던 상급 시종의 것이었다. “왕자님, 일어나십시오. 왕자님!” 그의 시종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지도, 종을 울리지도 않았다. 커튼으로 가려둔 침실 밖에 선 채로 소리 높여 그를 불렀다. “왕자님!” 다시 한번 시종이 소리내어 그를 부른 뒤에야, 그의 눈꺼풀이 살짝 열리며 연두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평소 같지 않은 풍경에도, 그는 그저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것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아팠던 듯,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은 그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커튼 밖에 시종이 서 있었다. 그런데 뭐가 그리 불안한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시종이 다시 한번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플란츠 왕자님, 일어나셔야 합니다. 그것이······!” 그 때, 시종의 뒤에 나타난 또 하나의 인영이 시종을 옆으로 밀쳤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커튼을 잡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강한 향기가 온 방 안을 잠식했다. 르니에리 향기. 플란츠가 얼굴 가득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마.” 들어가도 되겠는지를 물은 것이 아니었다. 항상 그리하였다. 먼저 물어보고 배려하는 방법 따위. 모르는 사람이었다. 새하얀 손가락이 커튼을 젖혔다. 그 후에는 민트색 드레스 자락과 그 끝의 연노란색 구두가 플란츠의 침실로 한 발 들어왔다. 실리케였다. 실리케의 뒤로 플란츠의 시종이 함께 들어왔다. 당황하여 어찌 해야 할 지를 몰라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한두번 있던 일이 아니었건만 여전히 적응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플란츠가 시종을 향해 나가라는 듯 손을 한번 휘둘렀고, 시종은 그를 향해 깊숙이 인사하고는 황망히 밖으로 나갔다. -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실리케가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여, 그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실리케가 천천히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르니에리 향에 가려져 술 냄새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플란츠는 그것을 언급하는 대신, 말 없이 침대 옆에 놓인 술잔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마셨으니 냄새가 날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행동이었고, 르메인의 금주령은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실리케의 눈매가 매섭게 변했다. 그리고 그 눈빛과 별개로 여전히 교양있는 목소리가 부채 뒤에서 흘러나왔다. 순간 플란츠는, 서류 뒤에 숨은 르메인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제 고작 열 여섯이란다. 술에 매여 살 나이는 아니잖니. 게다가 곧 나가야 하는데 아직 일어나지도 않고.” 플란츠가 술에 손을 댄 것은 15세의 성인식을 다녀온 직후부터였다. 허나 그것은 500년 전 기준으로 정해진 나이의 성인식이었다. 물론 르메인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였으나, 그것은 병에 걸린 선왕의 안달로 인한 예외적인 경우였다. 지금의 플란츠는 어린 소년일 따름이었으니, 아무리 너그러운 마음을 먹는다 해도 이해해 줄 수 있을 문제가 아니었다. 심지어 저 꼴을 하고 궁 밖에 나서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실망스러운 행동일까.” “그걸 말하려던 것은 아닐거고.” 플란츠가 마시다 남은 술이 담긴 술잔을 들어올렸다. 게슴츠레 뜬 눈은 잠이 덜 깬 것인지, 혹은 술이 덜 깬 것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분명한 것은, 대화를 하겠다는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 뿐이었다. “왜 오셨는데요.” 부채를 쥔 실리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화를 참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플란츠는 그것 역시 보지 않았다. “네가 자꾸 이런 모습을 보이면, 전하께서 어찌 생각하시겠니. 아무리 이 어미가 애를 쓴다 하여도······” “듣기 싫은데. 그런 얘기.” 나른한 목소리. 실리케의 눈가가 떨렸다. 곧 실리케가 다시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갈수록 버릇이 없어지는구나. 전하와 이야기 나눌 때에도 그리 한 것은 아니겠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내가.’ 플란츠가 살짝 눈을 뜨더니 조소를 보였다. 잠시나마 그 눈에 드리워진 것은 깊은 분노였다. “왜 오셨는지. 그것만 말하고 가세요.” 대답 대신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섰다. 풀어 헤쳐진 옷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만 가득했다. “칼리안이 마법사 연합을 등에 업었단다. 앨런 마나실. 그 마법사가 칼리안을 제자로 들였다며, 그 일로 벌써부터 귀족들이 동요하고 있더구나.” 마법사. 실리케를 스치듯이 지나쳐 소파로 향하던 플란츠의 발이 잠시 멈칫했다. 플란츠의 시선이 손에 들린 술잔을 향했다. 잔 속의 술이 출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뿐, 플란츠는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그래서요.” 실리케가 플란츠 쪽으로 돌아섰다. 무슨 의미인지, 어째서 이렇게 달려왔는지 알아듣지 못할 플란츠가 아님을 알았다. 때문에 실리케는 더 설명하는 대신 물었다. “계속 나에게 이렇게 실망을 줄거니?” 플란츠는 실리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동안 수없이 이야기했던 말을 다시 꺼내놓았다. “하지 마세요. 애 쓰는 거.” 실리케가 다시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플란츠가 말을 막았다. “짜증나니까.” 플란츠가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실리케가 그런 플란츠를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플란츠의 손은 내려오지 않았다. “······ 오늘 갈 곳도, 앞으로 가야 할 곳도. 늦지 말고 나오렴.” 부채가 접히고, 실리케가 다시 한번 플란츠의 얼굴을 쳐다봤다. “네 걸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도록 해두마.” 실리케는 그대로 몸을 휙 돌려 밖으로 나갔다. 곧, 쾅! 하는 소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플란츠가 문을 가리켰던 손을 내렸다. 들고 있던 술잔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플란츠가 이를 악물며 그것을 벽으로 집어 던졌다. - 쨍그랑! 산산조각 난 유리잔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플란츠의 손으로 다시 튄 유리 조각에 손등이 베여 피가 흘러내렸다. 잔이 깨지는 소리에, 밖에서 눈치를 보던 시종과 시녀들이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플란츠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손 끝을 타고 떨어지는 핏방울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가.” “왕자님, 손에서 피가 납니다. 치료를······!” “나가! 나가라고! 꺼지라고!” ······ 칼리안! * * * 식사를 마친 칼리안은 왕자의 정복으로 갈아 입었다. 해독약이 벌써부터 효과를 내는 것인지, 숨을 쉬는 것이 조금 편안해졌다. 앨런이 찾아와 급히 준비하게 된 덕분에 모닝 티를 마시지 않은 것도 이유일 것 같았다. 시녀들이 칼리안의 머리를 빗기고 마지막 점검을 해 주는 동안, 옆에 선 얀이 축제의 마지막 일정을 설명했다. “곧 기마 공연을 보러 가실텐데 왕궁 밖에 있는 곳이라 1시간 정도 이동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후 8시부터는 무도회가 있습니다.” 왕자들도 기마 수업을 받고 국왕의 생일에 기마 공연을 보는 것은 르메인이 말을 좋아해서였다. 다른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무튼 레이븐과 함께 있는 것은 칼리안도 좋아하는 일이었으니 달리 불만은 없었다. “브리센 상단에서 취소했던 그 공연인건가?” 국왕이 참석할 정도의 큰 공연은 보통 대형 상단에서 주최했다. 그만큼의 인원이 모여 있는 극단이 없었기도 했고, 대부분의 대형 공연장이 상단 소유였던 까닭도 있었다. “네, 맞습니다. 그 일로 브리센 자작이 직접 찾아와서 왕자님들과 석찬도 했었지요. 그래서 이번 공연은 폴룬 상단에서 주최하기로 했습니다. 브리센이 아닌 다른 곳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처음이네요.” 폴룬? ‘익숙한데. 뭐지?’ 칼리안이 눈썹을 오므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칼리안의 눈이 번쩍 뜨였다. “폴룬 남작?” 얀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해주었다. “네. 멜피르 폴룬이라는 젊은 남작인데 상당히 똑똑하고 수완이 좋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브리센에서 공연을 양보한 셈이 되었네요.” 칼리안이 실소했다. ‘교수형 당하기는 싫을 테니 양보할 수 밖에!’ 칼리안이 입 밖으로 대답하지 못할 그들의 사정이란 것을 떠올리며 눈을 빛냈다. 칼리안이 멜피르 폴룬을 기억하는 것은, 세크리티아에까지 알려진 꽤 유명한 사고 때문이었다. 기마 공연을 마치고 국왕 일가가 나오던 시간에, 공연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구조물이 무너졌다. 그리고 하필 그 때 계단 위에 있었던 란델이 무너진 구조물에 맞아 한 층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텐실에서 한 달쯤 요양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게 지금이었구나. 르메인이 기마 공연을 하도 많이 봐서 그 일이 오늘 공연에서 생겼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거기까지 떠올린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그게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지.’ 구조물을 고정한 밧줄을 날카로운 것으로 잘라두었던 흔적이 나왔다. 그것이 멜피르가 란델을 해치려 했다는 증거가 되기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으나, 하필이면 다친 것이 텐실 국왕의 손자였다. 때문에 텐실에서 불만이 많았고, 결국 르메인은 멜피르를 교수대로 보냈다. 왕족을 노린 것 치고는 허술한 테러였음에도 너무 섣부른 처사가 아니었는지 체이스와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났다. ‘폴룬이 범인이 맞았을 확률은 없다고 보아야겠지.’ 진짜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공연장에서 그렇게 티 나는 증거를 만들어놓고 왕족을 노릴 리가 없지 않은가. 얀이 말한 것처럼 상당히 똑똑하고 수완이 좋다면, 이 공연을 기회로 삼지 교수대 올라갈 발판으로 삼을 생각을 하진 않을 터였다. ‘역시 브리센이 제일 의심스러운데. 란델을 왜 노린걸까. 그것도 적당히 다칠 만큼. 아니면 그냥 폴룬 상단을 노린 것인가?’ 그것을 위해 왕족에 텐실까지 건드릴 만큼, 폴룬이 위협적일 이유가 있었던가. 상단과 관련해서는 베른도, 옛 칼리안도 기억하는 내용이 많지 않았다. 칼리안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왕자님······?” 옆에서 들린 얀의 목소리에 칼리안이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왕자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신지요?” “응?” 칼리안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이미 진작에 준비가 끝나 얀이 계속 그를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거울을 보며 말을 안하니, 눈치를 많이 보았던 모양이었다.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야. 뭣 좀 생각하느라.” 그러고 보니 거울 앞에서 시간을 보내면 얀이 항상 불안해 하는 것 같았다. 옛 칼리안이 대체 거울을 얼마나 깨뜨렸으면.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울,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들킨 얀이 민망한 듯한 얼굴을 했다. “네, 왕자님.” 그리고 칼리안은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것처럼 물었다. “참. 오늘 공연 중에, 폴룬 남작이 인사하러 오나?” “보통 공연 시에는 주최자가 전하의 옆자리에 앉으니까요. 공연 시작 전에 인사를 올릴 겁니다.” 브리센이 개입한 이유가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어딘가 구린내가 진동을 하는 것이다. “흠······. 그렇단 말이지.” 그리하여 칼리안은 일단 멜피르 폴룬부터 살려놓고 뒤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 제5장.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2) 레이븐은 파도처럼 갈라져 있는 사람들의 사이로 고개를 빳빳이 든 채 걷고 있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다각 다각 하는 발굽 소리를 더 크게 내는 것을 보면, 쏟아지는 시선을 즐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간 많은 말을 다뤄보았던 칼리안도 이렇게 독특한 성격을 가진 녀석은 처음이었다. ‘보면 볼 수록 신기한 놈이야.’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리는 레이븐의 갈기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앨런을 만나기 위해 왕궁 밖을 나선 적은 있었으나, 그 때는 밤이었고 또 앨런에 대한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워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확실히 카이리시스는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특히 지금 밟고 서 있는 왕도는 감탄을 금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런 길이 카이리스 전역의 도시로 이어지니, 그 많은 병력이 그렇게 빨리 세크리티아를 공격할 수 있던 것이겠지.’ 강대국 다운 배짱이 아닐 수 없다. 저 길을 타고 적이 올 수도 있다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전쟁을 떠올리니, 칼리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플란츠에게로 갔다. 플란츠는 말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안장의 손잡이를 잡은 손등에 베인 듯한 상처들이 눈에 띄었다. ‘성질 머리 하고는.’ 플란츠의 방은 칼리안의 방 바로 위에 있었다. 날씨가 좋아 창문을 열어두었었고, 의도치 않게 플란츠의 방에서 나오는 고함소리를 듣게 되었다. 아마 실리케가 왔다 갔을 것이라고 얀이 언질을 해주었는데, 예상 외로 플란츠와 실리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칼리안은 상당히 놀랐다. 예전에는 그냥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만 생각했지, 사이가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았으니까. “왕자님,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조그만 얀의 목소리에, 칼리안이 플란츠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변을 쳐다봤다. 귀족들의 거주 공간인 에이난샤 거리의 저택만큼은 아니었으나, 상당히 고급스러운 외관의 건물들이 즐비한 곳에 들어서 있었다. 아스트리샤 라는 이름의 거리였는데, 고급 상점과 문화 시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이 거리의 끝에 있는 폴룬 상단 소유의 공연장이 목적지였다. 멀찍이서 국왕의 행렬을 쳐다보는 아이들이 칼리안의 눈에 들어왔다. 옷의 태를 보니 귀족은 아니었고 평민인 듯 했다. 칼리안이 무리지어 있는 아이들을 향해 살짝 웃어 주자, 화들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아이들이 참 귀엽네.” 눈을 마주친 것 뿐인데 놀라는 모습 때문에 저도 모르게 한 마디가 나왔고, 얀이 묘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정확히는,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왕자님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데요.”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까지도 스스로가 어리다는 것이 당연하게 와닿질 않아서였다. 그런데, 무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행렬을 빤히 바라보는 또 다른 아이가 있었다. 주변의 이들과 확연히 비교될 만큼 남루한 행색의 아이가 바라보는 곳에는, 정복을 갖추고 르메인을 호위 중인 카에라의 기사들이 있었다. 유일하게 다른 곳을 향하고 있던 눈길이 낯설어,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그 아이를 쳐다봤다. 그리고 칼리안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 키리에?” 멀리서도 눈에 띄는 물색의 머리, 조금 까무잡잡한 피부와 벌써부터 큰 키까지. 칼리안이 찾아와 호위로 두고자 했던 아이와 매우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거리가 멀어 정확한 확인이 어려웠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고 싶은 감정이 들끓자, 옆에서 얀이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다. “얘가 갑자기 왜······!” 퍼뜩 놀라 얀을 보니, 레이븐의 고삐를 쥔 얀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칼리안이 원하는 것을 읽어버린 레이븐이 옆으로 방향을 틀려 한 것이다. 칼리안이 서둘러 레이븐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아니야, 레이븐. 지금은 그러면 안돼.” 고집을 부리던 레이븐이 그제야 다시 앞을 보며 걸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던 얀이 안도한 한숨을 쉬며 칼리안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아니, 나 때문이야. 괜찮아.” 그렇게 답한 칼리안이 다시 옆을 쳐다보았으나, 어느새 물색 머리의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칼리안이 그리운 것을 찾는 듯한 눈이 되어 아이가 있던 곳을 살폈다. ‘키리에.’ 카이리스에서 기회를 갖지 못하고 세크리티아를 찾아온 고아, 그리고 천재 검사. 그것이 키리에였다. 키리에의 재능을 알아봤던 베른이 그를 거두어 직접 검을 가르쳤고, 키리에는 그 보답으로 목숨을 바쳤다. 베른의 마지막 날, 베른에게 날아오는 화살비를 몸으로 막아냈던 것이다. ‘기다려라. 내가 어떻게든 찾아낼테니.’ 칼리안은 달음박질 치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키리에와의 만남을 뒤로 미뤄야 했다. “왕자님. 도착했습니다.” 얀의 목소리가 다시 들릴 즈음, 기사들이 바삐 움직이며 주변을 방비했다. 칼리안이 레이븐의 등에서 내렸고, 얀은 공연장에서 마중 나온 이에게 레이븐의 고삐를 맡겼다. “왕자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말이니, 꼭 조심스럽게 다뤄주세요. 꼭이요.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얀은 레이븐의 성깔을 잘 알았으므로, ‘왕자님이 없으면 지랄이 심해요.’ 라는 얼굴로 이와 같이 말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편, 공연장의 외벽은 석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검은 색과 흰 색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모양새가 왠지 나르실 관을 떠올리게 했다. 국왕 일가를 위해 깔아두었을 붉은 융단이 공연장 정문까지 이어진 것도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그리고, 회색 머리를 짧게 자른 동글동글한 인상의 사내. 멜피르 폴룬이 칼리안의 눈에 들어왔다. * * * 브리센 상단의 레넌과 폴룬 상단의 멜피르는 같은 상단주였으나 그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인사를 건네는 그 짧은 순간, 멜피르는 왕의 일가 모두와 눈을 맞추며 미소지었다. 상대를 살피고 자신의 인상을 남기려는 행동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입부터 열던 레넌과는 무게감부터 차이가 났다. 멜피르가 직접 길을 안내했다. 그 동안 칼리안은 사고가 발생한 곳을 가늠하려 주변을 살폈다. 문제가 될 만한 요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저것이군.’ 그것은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할 꽃잎 등을 담아둔 듯한 커다란 바구니였다. 밧줄로 묶인 임시 구조물은 그것 뿐이었다. 공연장은 타원형의 운동장을 가운데 두고 8개 층의 관객석이 주변을 감싸는 형태였다. 관객석 중앙에 특별석이 있었고, 그 곳이 바로 국왕 일가가 앉게 될 자리였다. 그리고 그 한참 위에 바구니가 매달려 있었다. ‘저게 떨어진다는 얘긴데. 기사들이 미리 확인을 안 했다는 말이 되나.’ 분명 이 곳까지 동행한 기사들이 있었다. 카에라는 르메인만 밀착 호위하는 기사들이었고, 나머지 국왕 일가를 호위하거나 주변의 사람들과 일대 기물들을 살피는 것은 파벨의 기사들이 담당했다. 그러니 저 밧줄도 분명 파벨에서 점검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났다면 알고도 모른척 했거나 아예 확인을 하지 않았다는 소리가 된다. 물론, 파벨은 브리센의 손 안에 있는 기사단이었다. 칼리안이 소리 없이 툴툴거렸다. ‘세상에 믿을 놈이 없어.’ 곧 국왕 일가가 특별석이 있는 곳으로 올라서자, 미리 자리를 채우고 있던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환영의 박수를 보냈다. 르메인이 그들을 향해 손을 올려 화답했다. 그 뒤, 멜피르가 팔을 올려 좌석을 가리켜보였다. “이 쪽으로 앉으십시오.” 르메인과 실리케가 각자의 자리에 앉고, 뒤에 마련된 좌석으로 란델과 플란츠가 걸어갔다. 마지막으로 칼리안이 발을 옮겼다. 칼리안은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멜피르의 옆을 스치듯 지나가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 위가 불안하군요. 살펴보세요.” 짧은 순간, 멜피르의 시선이 칼리안에게 닿았다. 하지만 칼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눈을 내리 깐 채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드러내놓고 멜피르를 도울 상황이 되지 않았으므로 더 자세한 설명을 해줄 수 없었으나, 그 정도의 눈치는 있으리라 믿었다. 멜피르 역시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살짝 숙였던 허리를 똑바로 세워 섰다. 칼리안은, 만약 멜피르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사고가 난다면 란델을 끌어당겨 다치지 않도록 지킬 생각이었다. 란델이 표적이었다는 것만 드러나지 않으면 멜피르도 목숨은 건질 테니까. 멜피르의 시선이 르메인의 옆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에 머물렀다.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다른 귀족의 방해 없이 르메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자리였다. 남작인 그는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르메인의 옆에 앉을 기회를 가지기 어려웠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멜피르가 몸을 돌렸다. 세 명의 왕자를 똑같은 눈길로 쳐다보았고, 자신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한 얼굴의 칼리안이 시야에 들어왔다. 멜피르는 입을 한 번 꾹 다물었다가, 르메인을 향해 말했다. “전하.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제가 직접 아래에서 감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똑똑하네.’ 칼리안의 한 마디에 르메인의 옆에서 대화 할 기회를 바로 내버렸다. 당장의 이득보다 만일의 상황을 더 중시할 만큼 신중한 자라는 소리였다. 멜피르가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연 진행자가 운동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 국왕 전하, 왕비 저하. 그리고 세 분 왕자님들. 만나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 말과 함께 한 손을 배꼽 위로 가져다 대며 허리를 숙여보인 진행자가 관객석을 보며 다시 한번 인사했다. - 그리고 이 자리에 모여주신 여러 관객 여러분, 환영합니다! 그러자 관중들이 큰 박수로 화답했다. 진행자가 말을 이었다. - 여러분께서 앉아 계시는 아스트리샤 폴룬 공연장은, 아주 유서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양신 전쟁이 끝나고 이만 돌아가려 하시는 시스파니안 선왕비 저하의 말을 하츠아라 선대왕 전하께서 붙들어 세우신 곳이 바로 제가 서 있는 이 자리입니다! 그 말에 관중들이 일제히 웃었다. 카이리스의 모든 기마 공연장에서 다 똑같은 말을 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관객들의 주의를 끌어낸 진행자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너스레를 떨며 관객들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기마 공연이 시작되었다. 여러 마리의 말을 이끌고 나온 기수들이 말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고, 달리는 말의 다리 밑을 지나는 등 여러가지 묘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대다수는 칼리안도 쉽게 해왔던 것들이기 때문에, 칼리안은 조금 따분한 눈으로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런 능력이 없을 대부분의 관객들은 탄성을 내며 좋아했다. 실리케는 여전히 부채를 들고 있었는데, 아슬아슬한 묘기가 펼쳐질 때마다 그것으로 얼굴을 가리며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겠다는 시늉을 했다. 칼리안의 대각선 앞쪽에 실리케가 앉아있었고 그 방향에서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실리케가 하는 꼴을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했다. ‘들으라는 듯이 나를 죽이겠노라 말하던 그 실리케 맞아?’ 결국 실리케의 가증스러운 모습을 더 참아주기 힘들어진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칼리안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던 플란츠와 눈이 마주쳤다. 안 그래도 오는 길에 키리에의 죽음이 떠올라 플란츠에 대한 감정이 되살아난 상태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증오감 가득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플란츠를 마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때, 달리는 말 위에 올라 있던 기수가 안장에서 뛰어 올라 뒤에서 달려오던 다른 말의 안장에 완벽하게 착지했다. 관객들이 큰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보냈다. 그 시끄러운 틈을 타, 플란츠의 입이 열렸다. 소름끼치도록 기분 나쁘고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칼리안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리였다. “불쾌하고, 음흉하고, 약삭빠르고.” 칼리안에게 하는 말이었다. 또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모르겠으나, 플란츠는 칼리안을 보며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실리케는 독을 보내고 플란츠는 욕을 보내는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칼리안의 눈매가 사납게 변했다. “제 주제도 모르는.” ‘미친놈이, 처돌았나!’ 순간적으로 플란츠에게 달려들 뻔 한 칼리안은 주변의 이목이 많음을 상기했다. 굳이 이 자리에서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칼리안이 눈을 감았다 떴다. 날이 서 있던 눈빛과 표정이 거짓말처럼 지워지며, 본래 플란츠를 대하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것을 본 플란츠의 입이 비틀어졌다. “역겹다. 토악질이 나와.” 플란츠는 아니었다. 주변을 신경 써 화를 추스르는 법 따위는 몰랐다. 플란츠가 씹어 뱉듯 말을 이었다. “······ 네 놈에게 흐르는, 그 천박하고 더러운 피가.” “······!” 순간 란델이 눈을 치켜뜨며 플란츠를 쳐다봤다. 뒤에 서있던 기사들과 시종들의 시선도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한 순간에 플란츠를 보았다. 그리고. 르메인, 그의 가라앉은 눈도 플란츠를 향했다. 어느새 1부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의 소리가 사라진 그 곳에 플란츠의 목소리가 또렷이 울려 퍼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특별석 위의 모든 이들이 플란츠의 말을 듣게 되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적이 흘렀다. 표정을 숨길 자신이 없어진 칼리안이 두 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실리케의 눈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손바닥 안에 가려진 칼리안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 제5장.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3) 칼리안이 손을 치우고 고개를 들었다. 화를 참아내느라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이 곳에서 가장 크게 화를 내야 할 사람이 바로 칼리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주위 시선을 위해 만들어낸 표정이었다. 사실 칼리안의 진심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당장 플란츠의 혀에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가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플란츠!’ 칼리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르메인을 쳐다봤다. 지금 칼리안이 르메인에게 바라는 것은 불같이 화를 내며 플란츠를 벌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 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가장 큰 득을 불러올 테니까. 마치 칼리안의 바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르메인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플란츠를 혼내는 말을 하지도, 추후의 처벌을 예정하지도, 경멸의 시선을 보내지도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다시 앞을 바라보며 2부를 시작해도 좋다는 의미로 시종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것을 본 실리케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지금 르메인은 플란츠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칼리안은 다시 한번 드러나지 않는 웃음을 지었다. ‘실리케. 어디까지 발을 물리겠나.’ 실리케라면 분명 이 상황을 무마시키려 하리라 생각했다. 칼리안은 그것이 어떤 것일지에 대한 기대가 컸다. 실리케의 손에 들린 부채가 아드득 소리를 내며 망가졌다. ‘멍청한 놈!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플란츠가 행실이 좋지 않은 것은 르메인도 잘 알았다. 광장에 술을 먹고 나섰던 일로 플란츠에게 금주령까지 내렸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칼리안을 욕하는 것은 어찌저찌 넘어가 볼 수 있었다. 원래 그런 놈이니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공개적인 자리에서 죽은 후궁 프레이야의 출신을 두고 모욕적인 언사를 한 것, 그것도 프레이야를 끔찍이도 아꼈던 르메인의 눈 앞에서 그런 짓을 벌인 것은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실리케의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를 플란츠가 아니었다.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지금 그 플란츠가 실리케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이나 후회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을 본 실리케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 일부러 하였구나.’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플란츠가 일부러 저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 곳에 오기 전 플란츠를 찾아가 몇마디 말을 한 것에 반발하여 엇나간 행동을 보인 것이 분명했다. 실리케의 소리 없는 외침이 플란츠를 향했다. ‘왜 하필 오늘, 플란츠!’ 오늘, 앨런 마나실이 왕궁으로 찾아왔다. 귀족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왕세자 후보에 칼리안의 이름이 포함됐다. 같은 날, 플란츠가 돌이킬 수 없을 실수를 했다. 브리센의 영역에 적당히 발을 걸치고 있던 귀족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결정을 할지는 굳이 따져 볼 필요도 없었다. 실리케가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려 앞을 쳐다봤다. 2부 공연이 한참 진행중이었으나, 특별석의 그 누구도 그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특히 실리케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칼리안은 이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의 고리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 시간. 무언가를 발견한 멜피르가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안도의 한숨이기도, 놀라움의 한숨이기도 했다. “허어.” 그의 앞에는 반쯤 잘려나간 밧줄이 있었다. “이것이 전하의 머리 위로 떨어졌으면······!” 생각만으로도 목이 죄여오는 것 같았다. 멜피르는 서둘러 밧줄이 더 상하지 않도록 조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방비했다. 한숨을 돌린 멜피르가 문득 고개를 돌려 아래를 쳐다봤다. 이 일을 막도록 알려준, 그래서 멜피르의 목숨을 건져 준 검은 머리의 왕자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칼리안의 말을 믿고 르메인의 옆자리를 포기하는 말을 했을 때, 칼리안이 지어 보였던 표정이 다시 생각났다. 그 막내 왕자는 분명, 문제를 잘 풀어낸 학생을 보는 선생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뒤로는 이 곳에 대해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잘 알아들었는지, 해결해 낼 수 있는지 불안해 하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고가 나지 않고 잘 넘어가더라도, 칼리안은 더 이상 멜피르를 찾지 않을 것 같았다. 대가를 원해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대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거래를 해본 적 없던 멜피르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허어······.” 똑같은 소리를 다시 낸 멜피르가 마른 침을 삼켰다. * * * 공연이 모두 끝났다. 꽃가루는 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칼리안은 이 일도 잘 마무리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 칼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얀에게 말을 걸며 시간을 끌었다. 그렇게 란델과 플란츠가 먼저 내려간 뒤에 그 곳에서 빠져나왔다. 예상한대로 사고는 생기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서니, 멜피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르메인이 그를 보며 말했다. “좋은 시간이었네.” 르메인은 멜피르가 옆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오히려 플란츠의 패악을 다른 귀족이 직접 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르메인의 칭찬에 멜피르가 겸양을 보였다. “만족스러우셨다면 다행입니다, 전하.” 칼리안은 멜피르가 아닌, 멜피르를 보는 실리케를 살폈다. 그런 칼리안의 눈에 작은 의문이 담겨 있었으나 누군가 그것을 눈치챌 만큼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실리케의 반응이 없었다. 그래. 플란츠가 일을 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오늘 일어났어야 할 사고가 없었다면 그것을 지나칠 실리케가 아니었다. 플란츠의 일로 다른 하나를 잊고 지나갈 만큼 멍청한 여자일 리 없었다. 그런데 지금 실리케는 바구니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멜피르의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이 눈에 훤했다. ‘실리케도 모르는 일이라. 레넌이 혼자 저지른 일이라는 말이 되는데.’ 머릿속이 다시 복잡하게 얽혀들어간다. “그럼, 무도회 장소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멜피르가 이렇게 말하며 세 왕자를 쳐다봤다. 분명 칼리안을 향한 말일 터. 칼리안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받고 밖으로 나와 레이븐의 등에 올랐다. ‘란델, 브리센 상단, 폴룬 상단. 상관 관계가 무엇일까. 혹시 텐실도 연관이 있는 것인가.’ 사실 세크리티아의 가장 큰 관심사는 카이리스였다. 때문에 베른은 그 옆에 붙어 있는 신성국가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가지고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 시기 텐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짚어내려 끙끙거렸다. ‘상단과 연관되어 있다면 물건이다. 왕족을 건드려서까지 이득을 취하려 한다면 일반적인 값어치는 아닐······!’ 일반적인 값어치가 아닌 물건! 거기까지 떠올리자 드디어 답이 나왔다. 칼리안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가 드러났다. ‘다이아몬드.’ 숨겨진 단어를 찾으니 모든 퍼즐이 맞았다. ‘다이아몬드 광산이군.’ 베른일 적에 체이스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생각났다. 사고 소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었다. - 테러라 하기에는 너무 어린 아이 장난 같은데요. - 그것이 단순히 왕족에 대한 테러라고 생각하느냐? - 왕자가 다쳤다 하니까요. 다른 것이 있습니까, 형님? - 하하! 어디 한번 생각해보려무나. 너무 노골적이고 단순한 사고. 마치 왕족을 노렸다는 사실을 들키려고 작정한 것 같은 바보 같은 사고. ‘신성국가의 신관들이 다이아몬드를 살 일이 많을 리 없지. 대부분 카이리스로 팔려고 했을 것이다. 텐실 쪽의 상단에서는 란델의 눈치도 보았을 테니 브리센이 아닌 폴룬을 선호했겠지.’ 체이스가 곧바로 떠올렸을 정답을, 칼리안이 되어서야 풀어냈다. ‘브리센이 다이아몬드 상권을 가져오려고 폴룬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었어. 어차피 폴룬이 아니면 그 정도 거래가 가능한 대형 상단도 없으니.’ 왜 란델을 건드렸는지 그 이유도 명확해졌다. 란델이 다치면 텐실 국왕이 개입하게 되고, 의문점을 파악하기 전에 빨리 마무리 되리라는 것을 노렸을 것이다. ‘레넌. 의외로 잔머리를 좀 굴리는구나.’ 정리를 마친 칼리안은 눈을 돌려 멜피르를 쳐다봤다. 멜피르는 칼리안을 당장 만나보고 싶겠지만 뜻대로 해줄 수 없었다. 얼마나 큰 값어치가 있는 문제였는지 알아냈으니, 멜피르의 목숨값도 제대로 받아내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오늘, 무도회에 가지 않겠다고 행사 담당에게 전해.” 칼리안의 작은 목소리에, 얀이 깜짝 놀라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플란츠 때문에 큰 충격을 받은 듯한 칼리안의 슬픈 얼굴을 보며 안타까운 숨을 내쉬었다. 자신보다 더 침울해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얀을 보며, 칼리안이 얼마나 큰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는 모르는 채였다. * * * 공연에서 돌아와 책상에 앉아있던 르메인이 방문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의외로군.” 르메인을 찾은 이는 잠시 말 없이 서 있다 소파로 걸어갔다. 또각 또각 하는 구두 소리가 적막한 집무실에 울렸다. 르메인은 말 없이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르메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집무실을 채워나가는 르니에리 향기를 쫓듯 창문을 열었다. -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차가 담긴 쟁반을 든 시종장이 들어섰다. 그러자 르메인이 손을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 “필요 없다.” 그것을 본 실리케의 눈꼬리가 떨렸다. 완전한 불청객 취급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종장을 도로 내보낸 르메인이 천천히 걸어와 실리케의 앞에 앉았다. 실리케를 쳐다보는 눈에는 아무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실리케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프레이야가 죽은 뒤로 줄곧 그래왔으니까. 르메인이 실리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눈빛에 딱 어울리는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실리케가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 자신이 르메인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생각해본 적 없던 탓이다. “어린 아이니, 실수를 용서하세요. 벌을 받는 것은 브리센이 할테니까요.” 르메인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지금껏 플란츠가 어떤 행동을 해도 이렇게 직접 찾아온 적 없었다. 심지어 저런 말을 꺼내놓은 경우는 더더욱 없었던 실리케였다. 이번 일이 상당히 큰 잘못이긴 했으나, 예전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숙이고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르메인은 실리케의 태도가 바뀐 이유를 알고 있었다. “용서라.” 칼리안. 정확히는 앨런 마나실을 등에 업은 칼리안 때문이리라. 칼리안을 생각하니 앞에 앉은 실리케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가 함께 떠올랐다. 왜 이렇게 선뜻 브리센에서 책임을 지겠다는 이야기를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당장 귀족들이 플란츠에게서 발을 돌리지 않도록 묶어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겠지. 그래야 칼리안이 사라진 뒤 갈 곳 잃은 귀족들이 란델에게로 가지 않을테니.’ 벌이라는 명목으로 무엇을 잃든, 칼리안이 죽은 뒤에 얼마든지 되찾아올 자신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할까. 이 여자를. - 이번 일 까지는 모르는 것으로 하십시오. 앨런의 말을 상기한 르메인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앞에 앉은 실리케의 가느다란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느라, 웃었다. 그 생각을 알지 못할 실리케가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웃었어?’ 그간 르메인은 다른 이들의 앞에서 감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헌데 이런 노골적인 웃음이라니? 실리케가 새로운 부채를 잡은 손에 힘을 쥐었다. “그래. 그 벌은 무엇으로 받을 생각이지.” 당연히 기사단을 물릴 리는 없었다. 그것을 포기할 만큼 절박한 것은 아닐테니까. 놀랐던 마음을 추스른 실리케가 입을 열었다. 르메인이 예상한 바와 같았다. “인상 깊은 공연이었으니, 상을 내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아아.” 실로 인상 깊은 공연이었지. 실리케의 말은 폴룬 상단에 브리센의 상권을 일부 양보하겠다는 뜻이었다. 르메인은 용서의 크기만큼 양보의 범위를 정하면 될 것이고, 브리센 가문은 받아들이리라. “오늘은 플란츠가 나와 함께 들어가는 것이 좋겠군.” 거래를 받아들였다. 칼리안이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 제5장.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4) 칼리안이 볼을 긁적였다.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칼리안의 옆에 놓인 것은 꽤 많이 쌓여 있는 선물 상자였다. 어제의 무도회에서, 르메인이 플란츠에게 벌을 주기는 커녕 무도회장에 함께 등장했기 때문에 칼리안이 느꼈을 상심에 대한 위로의 선물이었다. 물론 명분이 그랬다는 말이다. 칼리안이 들고 있던 포크로 선물인지 뇌물인지 모를 것들을 가리켜보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벌써부터 줄타기 하는 거야?” 플란츠가 프레이야를 모욕하는 말을 했다는 것은 곧바로 소문이 났다. 시종들과 시녀들, 그리고 기사들이 함께 있었으며, 그들에게도 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메인은 플란츠와 함께 무도회장에 들어섬으로써, 플란츠를 너그러이 용서했다는 것을 알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직후에 르메인이 멜피르를 불러 공을 치하했다는 것에 있었다. ‘오늘의 공연이 매우 인상 깊었다. 이에, 상으로 왕궁과 카이리시스의 기사단에 들어오는 말과 마구 일체의 납품권을 폴룬 상단에 부여하겠다.’ 본래 기사들은 자신의 말과 병장기를 스스로 마련한다. 하지만 왕궁과 수도 카이리시스의 기사는 그렇지 않았다. 전력의 상향 평준화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왕실에서 제공했다. 그러니 왕실의 기사단, 카이리시스의 기사단, 외성 경비대, 수도 치안대 등등이 포함된 카이리시스 전력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한 번에 셈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당연히 그 거래 가치도 어마어마했다. 르메인이 그것을 폴룬 상단에 넘겨준 것이다. 그런 엄청난 이권을 빼앗겼음에도, 실리케와 레넌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미리 이야기가 되었다는 소리였다. 그저 멜피르 폴룬만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을 뿐이었다. ‘플란츠 왕자를 두고 거래를 한 것이구나.’ 이 정도를 이해하지 못할 귀족들이 아니었다. 평소 플란츠가 무슨 짓을 해도 나서지 않았던 브리센에서 이런 피해를 감수했다는 것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칼리안이 가진 세력이 실리케가 경계할 만큼이 되었다.’ 눈치를 보던 몇몇 귀족이 플란츠로부터 살짝 발을 뺐다. 물론 플란츠가 용서 받지 못했을 경우를 생각하면 확연히 적은 수겠지만, 완전히 없을 수는 없었다. 바로 그들이, 칼리안을 위로한다며 선물을 보내온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왕자님?” 무도회를 불참한 것과 같은 이유로 오늘의 조찬에까지 참석하지 않은 칼리안은, 카이리스의 왕자 생활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맞이하는 느긋한 아침식사를 즐기며 대답했다. “두 개만 빼고 다 돌려 보내. 돌려보내는 선물들은 누가 보냈는지만 적어놔줘.” 지금 이름이 적힐 이들은 두 번 다시 칼리안의 선택을 받지 못할 것이다. 단 사흘만의 변화에 바로 마음을 바꾸는 자들은, 칼리안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네. 그럼 어떤 것을 둘까요?” “마법사 협회, 멜피르 폴룬.” 칼리안은 아직 누가 선물을 보냈는지 알지 못했음에도 곧바로 대답했다. 두 곳에서도 선물을 보냈으리라는 것을 당연시하는 말투였고, 명단을 보던 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 협회, 그리고 멜피르 폴룬. 모두 있었다. 얀은 어떻게 알았을지 궁금해하는 표정이 되었으나, 칼리안의 말은 모두 끝난 것이 아니었다. “협회 것은 그냥 받고, 폴룬 남작 것은 뭔지 열어봐 줘.” “네, 왕자님.” 마법사 협회의 선물을 받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앨런 마나실을 매개로, 마법사 협회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곧 선물 상자들의 분류가 시작되었다. 되돌려 보낼 것을 뺀 두 개의 상자가 테이블에 남았다. 그 중 넓적하고 높이가 낮은 상자를 집어든 얀이 뚜껑을 열어보였다. 우아한 손길로 햄을 썰던 칼리안의 움직임이 순간 딱 멈추었다. 왜 그러나 싶어 상자 속을 쳐다 본 얀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고, 칼리안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정신 없이 웃던 칼리안이 물을 한 모금 마셔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내가 하라는 것은 아닐거고. 어제 무슨 얘기 했어?” “그게······. 왕자님께서 특별히 아끼신다고는 했어요.” 칼리안이 다시 웃었다. 그것은, 아주 긴 체인을 가진 목걸이였다. 사람이 하기에는 너무 긴,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말의 목에 채우기 딱 좋을 정도의 긴 목걸이였다. 어제 공연장의 사람들이 혹시라도 레이븐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걱정한 얀이, 칼리안이 특별히 아끼는 말이니 조심스럽게 다뤄달라는 말을 덧붙였었다. 그것을 멜피르가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말 목걸이라니. 상상도 못했다. 나도 없는 목걸이를 우리 레이븐이 먼저 받네.” 레이븐의 검은 털에 잘 어울릴 백금의 얇은 체인 한가운데에, 루비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큭큭거리며 남은 웃음을 털어낸 칼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거절하지도 못하겠네. 레이븐한테 너무 잘 어울리게 생겼어.” 그리고 칼리안은 다시 햄을 썰어내며 말했다. “값을 따져서 폴룬 상단으로 보내. 마음에 드는 물건이니 사겠다고 전해주고.” “그냥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요?” “응. 받는 게 아니라 사는 거야.” ‘고작 보석으로 끝낼 수가 있나.’ 물론 멜피르가 제 목숨값으로 말 목걸이 하나만 보낸 것은 아닐 터였다. 무엇을 원해서 살려주었는지, 칼리안의 의중을 떠보려는 심산일 것이다. 칼리안은 만약 자신이 저 선물을 받는다면, 멜피르의 목숨 값에 해당될 가치의 진짜 선물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려고 레이븐의 목걸이를 보냈겠지. 나에게 줄 선물은 따로 있다는 의미로.’ 하지만 칼리안이 원하는 것은 저런 재물이 아니었다. 그것이 저 선물을 그냥 받을 수 없는 이유였다. “당분간 내가 그냥 받는 선물은, 마법사 협회에서 보내주는 것 뿐이야. 폴룬 상단에서 오는 것은 따로 알려줘.” 나머지는 알아서 돌려보내라는 이야기였다. 얀에게는 미안했지만, 멜피르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고 경고했는지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얀은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고 대답했다. “네, 왕자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목걸이를 쳐다본 칼리안이 또 웃었다. 아무리 봐도 너무 웃겼다. * * * 책상 앞에 앉아있던 앨런은 관자놀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곧 누군가 그를 찾아오자, 살짝 눈을 떠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 “이리 놓게.” 그 말에, 눈 밑이 시커멓게 된 여성이 앨런의 앞에 새로운 서류를 내려놓았다. 비척비척 팔을 거둔 그녀가 말했다. “이건 어제 자 정보. 이제 진짜 없어요, 마나실 님. 다 털었대요.” 에우리아 세이렌. 그녀는 카이리스 마법사 협회의 수장이며 마법 공학자를 다수 배출한 마법사 가문인 세이렌 백작가의 장녀였다. 이제 막 5서클의 벽을 넘은 능력 있는 마법사이기도 했다. 평소 그녀가 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말이 딱 하나 있었는데, ‘시스파니안과 앨런 마나실의 이름으로 맹세하겠다!’ 가 바로 그것이었다. 주신 세렌티보다도 둘을 더 믿었다. 하기사, 대부분의 마법사들도 그녀와 같은 입버릇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역시 마법사 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국왕 탄신일 축제 둘째날 아침에 협회 문을 열고 들어온 적은발의 마법사를 본 에우리아가 얼마나 감격에 겨워 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앨런이 처음으로 건넨 말은 이것이었다. “혹시 여기 마법사들은 칼 든 새끼 사자가 왕관을 써도 괜찮다고 생각 중인가?” 그럴리가. 에우리아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틀 간의 지옥이 펼쳐졌다. 앨런 마나실에 대한 광신도 같은 믿음이 살짝 식을 뻔 했을 만큼 험난한 이틀이었다. 온 카이리시스를 뒤져 찾아내는 정보가 실리케의 음모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면, 당장 죽을 것 같은 낯이 된 마법사들이 다시 건물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정보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마법사들이 온갖 마법을 동원해가며 마음 먹고 캐낸 정보들은 실로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마법사들이 가진 의외의 재능에, 에우리아가 정보 길드를 하나 만들어볼까 진지한 고민을 했을 정도였다. 앨런이 굵직한 것들을 꺼내어 추렸다. “실리케가 들어온 뒤 왕궁에서 독살되거나 암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4명, 마찬가지로 독살이 의심되는 마법사가 6명. 독살이나 암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귀족이 13명. 참 대단하군. 이 정도인데 르메인이 그냥 있었다는 것이.” 모두 정황 증거 뿐인 사건들이었다. 하지만 죽었다는 이들 모두가 실리케 혹은 브리센 후작가와 연관이 있었다. 정확한 증거로 모인 것은, 레넌의 집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던 타크리모사를 레넌이 왕궁에 들고 갔다는 마법사의 증언, 그리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크리모사를 대량으로 수입해왔다는 증거 뿐이었다. 진작부터 의문점이 남은 사망 사건들의 증거를 모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그랬다더라’는 수준밖에는 되질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앨런이라는 중심점이 없는 이상은 증거가 있어도 소용 없었을 일이었다는 것도 알았기에, 앨런은 그것에 대해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고생했네. 이제 가서 좀 쉬게.” 그 말에, 에우리아가 당장 세상을 하직할 것 같은 얼굴로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 에우리아보다 스무 살은 어려보이는 앨런이 혀를 쯧쯧 찼다. “젊은 놈 체력이 저래서야.” 그렇게 말한 앨런이 에우리아가 가져온 서류를 손에 들었다. 표지를 제외하면 딱 한 장 짜리의 짧은 보고서였다. [플란츠의 프레이야 모독 사건에 가려진 하나의 미스터리!] 다분히 마법사다운 보고서 제목을 본 앨런이 피식 웃었다. 사실 지금까지 그가 보아온 모든 보고서의 제목들이 다 이런식이었다. 보고서란 일단 흥미롭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마법사들이란. 그런데, 제목은 장난처럼 써 두었으나 중요한 내용이라도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 보고서에 비밀 엄수 마법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내용을 모두 보고 나면 종이가 자동으로 불에 타 사라지므로 주의 깊게 읽으라는 경고가 눈에 띄었다. 그러니 작성자와 앨런만 내용을 알 수 있었고, 에우리아조차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모르는 채 가지고 왔을 것이다. “그래. 얼마나 중요한지 한번 볼까.” 가벼운 마음으로 중얼거린 앨런이 표지를 넘겼다. - 우연한 기회에 국왕과 함께하는 기마 경기에 초대된 본인!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폴룬의 공연장을 찾았으나 이게 웬걸. 8층의 가장 구석진 자리를 배정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경기장도 안보이고 진행자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비운의 상황. 허나 본인은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이글 아이’와 ‘매직 이어’를 시전하였다. “참 쓰잘데기 없는 일에 마나를 낭비하는 친구로군.” 이글 아이는 먼 곳을 확대하여 보여주는 마법이었고, 매직 이어는 먼 곳의 이야기를 들리게 해 주는 것이었다. 고작 경기 하나를 보자고, 아무리 저레벨이라지만 활성화 유지가 필요한 마법 두 개를 동시에 쓰다니. 불과 하루 전에 재미 삼아 얀에게 물벼락을 선물했던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실소했다. - 드디어 국왕 일가가 입장하고, 뜨거운 화제의 대상 칼리안 왕자가 보였다. 칼리안 왕자는 멜피르 폴룬의 인사를 받으며 이렇게 말했다. ‘머리 위가 불안하군요. 살펴보세요.’ 그리고 잠시 후, 본인은 더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큰 기대는 하지 않은 듯한 얼굴로 글을 읽어내려가던 앨런의 얼굴이 조금씩 진지하게 변했다. 보고서는 칼리안이 예정된 사고를 막았으며, 범인은 아마 브리센 상단이 아니겠느냐는 의문을 던지며 끝났다. 작성한 이도 자신이 알아낸 사실의 중요함을 알았던지, 어디에서도 그가 본 것을 발설하지 않겠으니 앨런도 비밀을 꼭 지켜달라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다. 칼리안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이 알려질 경우 칼리안의 입지가 곤란해질까 걱정한 모양이었다. 마법사들은 장난을 좋아할 뿐,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곧 앨런의 손에 들린 보고서의 글씨들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한글자 한글자가 불에 타들어가듯 사라졌다. 이내 그 불이 종이에까지 번졌으나, 열기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앨런은 그 보고서가 완전히 타 사라지도록 손에서 놓지 않았다. “흐음.” 처음 칼리안을 만났을 때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 수비대원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을 때, 말을 타고 근처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앨런은, 칼리안이 ‘앨런 마나실’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들은 직후부터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앨런이 인근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는 범위는, 칼리안의 예상보다 더 넓었으니까. “나도 그렇고, 사고도 그렇고.” 앨런이 다시 한번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우리 왕자님. 어떻게 먼저 아셨을까.” ────────────────────────────────────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1) 그 날 늦은 오후, 칼리안은 금고 상판의 마법 문양을 맞춰 문을 열었다. 옛 칼리안은 그것을 직접 건드린 적이 없어 기억하지 못했고, 일전에 얀이 여는 것을 보아 두었던 대로 조작하느라 몇 번을 틀리다 간신히 열었다. 칼리안 정도는 들어가도 될 만큼의 크기를 가진 금고 안에는,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몇몇 서류와 상당한 돈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수표를 제외한 금 은 동화를 한 움큼 씩 집어 주머니에 담아 품에 넣었다. “미안. 조금만 꺼내 쓸게.” 그것이 어디가 조금만이냐고 물을 얀은 이미 밖에 있었으므로, 칼리안의 말에 다른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체르밀 궁 앞에서 얀과 함께 칼리안을 기다리던 앨런은 검은 색의 로브를 손에 든 채였다. 그리고 그들의 옆에는, 품격 있는 말의 자세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듯한 모습으로 한 다리를 살짝 구부린 채 서 있는 레이븐이 있었다. “레이븐.” 반가운 마음에 레이븐을 부르자, 레이븐이 머리를 들며 푸르륵 소리를 냈다. 그런 레이븐의 고삐를 넘겨주는 얀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왕자님, 저 없이 가셔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함께 가는 것이 세계 최강의 마법사인 것을 또 까먹은 모양이다. 칼리안이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븐에 올랐다. 훌쩍- 하고 전보다 더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 오르는 그 모습에, 앨런의 눈이 조금 가늘게 변했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으나, 곧 상념을 감추며 얀을 향해 말했다. “쓸데 없는 걱정은 하지 말게. 전하께서도 허락하셨고, 또 옆에 내가 있을 테니.” 바로 그것이 걱정이었다. 아무래도 저 불한당 같은 마법사와 칼리안을 단 둘이 보내는 것이 영 마뜩찮았던 것이다. “내일 새벽까지는 올게.” 그 때 칼리안이 기습적으로 말했고, 레이븐이 알아서 출발했다. 얀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로 소리 죽여 외쳤다. “내일이라니요! 자정 전에 오겠다고 하셨잖아요!” 물론 칼리안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상태였다. 힘내라는 듯, 얀의 어깨를 툭툭 쳐 준 앨런이 칼리안을 따라 달려 나갔다. 성공적으로 얀을 따돌리고 앨런의 동행을 보증 삼아 왕궁 밖으로 나온 칼리안은, 앨런에게서 건네 받은 로브를 재빨리 뒤집어 썼다. 깊은 후드가 머리와 눈을 가려주었다. “예전에는 다른 이유로 얼굴을 가렸는데. 기분이 이상하네요, 스승님.”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칼리안의 몸으로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가져 보는 자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 좋으십니까?” “네, 이게······ 얼마나 기다려 졌었는데요.” 하마터면 ‘이게 얼마만의 외출인데요’ 라고 말할 뻔한 것을 간신히 돌렸다. 옛 칼리안은 지금이 첫 외출이었으니까. 앨런이 대답 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븐의 갈기를 흐트러뜨리며 장난치던 칼리안이 물었다. “정말 전하께서 허락을 하신 겁니까?” 그러자 앨런이 의미심장한 대답을 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르메인도 왕자님의 외출을 보고 받았겠지요.” 나몰라라 하는 태평한 말. 르메인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칼리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앨런이 알아서 해줄테니까. 그리고 그 시간, 르메인은 칼리안이 왕궁을 또 나갔다는 보고를 받고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앨런이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스승님.” 그래서 이번 외출을 알아서 책임져야 할 앨런은, 이렇게 튀어나온 칼리안의 말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저까지 두고 다니겠다는 말씀입니까?” 칼리안이 서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왕궁 밖으로 나온 것은 실리케의 독차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준비물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온 김에 키리에도 찾으려 했다. 이 모든 것이 칼리안이 아닌 베른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일이었으니 앨런과의 동행은 어려웠다. 이 시간을 위해서 연기까지 한 칼리안이었다. 독차를 피하기 위해 차를 받아들다 실수인 것처럼 떨구었던 것이다. 혼자 다니다 만에 하나의 상황이 생기더라도 최소한 도망칠 정도의 체력은 되어야 했으니까. 두 번은 쓰지 못할 방법이었으나, 어차피 내일부터는 제대로 차를 마실 생각이니 상관 없었다. “해가 뜨기 전까지는 돌아오겠습니다.” 앨런은 한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곧 허락을 해주었다. 의외로 순순한 허락이라 칼리안이 오히려 놀랐을 정도였다. “테이난샤 거리에 마법사 협회가 있습니다. 거기서 뭉그적거리고 있을 테니 찾아오세요.” 카이리시스의 지도는 이미 세작들을 통해 세크리티아에 잘 전해져 있었다. 옛 칼리안보다 베른이 카이리시스 구조를 더 잘 알 정도였으니까. 따라서 칼리안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스승님. 감사합니다.” 앨런은 더 이상 칼리안이 무엇을 할 것인지 묻지 않았고, 칼리안도 말하지 않았다. 둘은 그대로 광장을 지나자마자 헤어졌다. * * * 첫 목적지는 세뉴 강 건너편 동쪽에 있는, 바넨샤 거리였다. 수도 내에서는 말을 달릴 수 없기 때문에, 칼리안은 빨리 걷는 정도로 레이븐을 움직였다. 다각 다각 하는 발굽 소리를 들으니 괜히 기분이 좋아진 칼리안이 레이븐의 움직임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바넨샤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석양이 지는 시간이었음에도 망치질 소리가 멈추지 않고 울려퍼지는 곳을 찾아가기만 하면 되었던 까닭이다. 거리에 진동하는 쇠 냄새를 맡으니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지긋지긋했던 냄새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바넨샤는 대장장이들의 거리였다. 작은 도로를 가운데 두고 스무 곳이 넘는 상점이 줄지어 있었다.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어떤 상점의 무기가 좋은지까지 보고를 올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칼리안은 레이븐의 등에서 내려 고삐를 쥔 채 천천히 상점들의 물건을 훑어보며 걸어갔다. 마땅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 고민하던 중, 비로소 칼리안의 이목을 끄는 상점이 나왔다. 다른 곳과 달리 방패나 방어구 없이 무기만 진열된 곳이었는데, 언뜻 보아도 상품들의 품질이 상당했다. “호오.” ‘로튼 대장간’ 이라는 이름의 그 상점 앞에서 칼리안이 걸음을 멈춰 서자, 상점에 있던 아이가 쪼르르 달려나와 인사했다. “어서오십시오! 검을 보러 오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칼리안이 레이븐의 고삐를 넘겨 주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동전 한 개를 쥐어주며 당부를 했다. “쓰다듬으면 큰일 나. 얌전히 데려가서 고삐만 묶어 둬.” 아이가 겁을 먹은 듯 침을 꿀떡 삼켰다. 그게 귀여워서 칼리안이 동전 하나를 더 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얌전하니 걱정 말고.” 그렇게 아이를 보낸 뒤 가게로 들어가 내부를 둘러보고 있자니, 상점의 주인인 듯한 중년 남자가 나왔다. 물건도 직접 만드는지, 두꺼운 근육질의 팔이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찾으시는 종류가 있으십니까?” “17세 전후의 아이가 사용하기에 좋은 검이 있겠나? 길이는 성인의 것과 같아도 되지만 무게는 가벼웠으면 하네. 검을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이라서.” 남자가 조금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마치 자신보다 훨씬 어린 아이의 검을 찾는 듯한 말을 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 말을 꺼낸 이의 목소리는 17세 근처도 못 가봤을 만큼 어리게 느껴졌던 탓이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의문을 깊이 가지는 것은 명을 단축하기 딱 좋은 태도임을 알기 때문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남자가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 뒤, 칼리안이 발을 옮기며 무기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뼘 길이의 얇은 나이프에 눈이 갔다. 옷 속에 숨겨 사용하는 경우를 염두에 두었는지 가드가 없었고, 칼집에는 팔뚝에 채울 수 있는 가죽 벨트가 달려 있었다. 칼리안이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들었다. 고작 나이프일 뿐이었으나, 손에 잡히는 느낌만으로도 중심이 잘 잡힌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칼을 뽑아보니, 묵철로 된 예리한 날이 빛을 발했다. 칼리안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내 것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방금 주인에게 요청한 것은 칼리안이 아니라 키리에가 검을 연습할 때 쓰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칼리안이 직접 검을 쓰게 되더라도, 철로 만들어진 것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오러를 오랫동안 견디지 못할 테니까. ‘뭐. 지금은 내 몸도 오러를 못 견디겠지만.’ 문득, 베른이 죽던 날 부서져버린 검의 울음이 생각났다. 지금이야 당연히 부서지지 않고 멀쩡히 있겠지만, 칼리안이 그 검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은 세크리티아 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던 보검이었으니까. 검을 생각하니, 검을 부수고 베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마법사도 떠올랐다. 하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를 떠올린 칼리안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되게 아팠다. 언제 만나기만 해봐라. 뭐 이런 식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여기 있습니다.” 어느새 물건을 찾아온 상점 주인의 목소리가 칼리안을 현실로 불러냈다. 주인이 꺼내 온 것은 세 자루의 장검이었다. 가벼운 편에 속하는 것이었음에도, 칼리안은 그 조차 한 손으로 들어올릴 수 없었다. 때문에 스스로를 비웃으며 양 손으로 검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살짝 휘둘러 보기도 하며 검의 이곳 저곳을 세심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키리에가 처음으로 쓰게 될 검이었으니 대충 고를 수가 없었다. ‘무게 중심이 잘 잡혔다. 유연성이며, 예리함이며. 평범한 상점 같은데,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 그런 모습을 본 주인의 의문은 커져만 갔다. 후드로 얼굴을 가린, 아마도 소년일 것 같은 손님이 검을 살피는 모양새가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중요한 부분들을 정확히 짚어가며 확인하는 태도는 상급 기사보다도 엄정했다. 헌데, 검을 제대로 들어올리지도 못하는 것이다. 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는데, 칼리안이 한 자루의 검을 골라냈다. 주인이 골랐다 해도 같은 것을 선택했을 법한 물건이었다. “이것으로 하겠네. 이 나이프도 함께.” 곧 은화 8개를 꺼내 장검과 나이프 값을 치른 칼리안이 물었다. “이 곳의 무기는 모두 직접 만드는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세 개의 금화가 카운터에 올려졌다. 방금 지불한 것의 네 배 가까이 되는 금액이었기 때문에,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조금 더 튼튼한 장검, 그리고 가드 없는 단검이 필요하네. 무게는 일반적인 것과 같으면 되고.” “이 검을 쓰실 분께서 검에 더 숙련되었을 때 사용하실 것입니까?”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요구사항을 덧붙였다. “맞네. 키가 매우 크고, 검을 묵직하게 다루지만 속도가 느린 것은 아니네. 둘 모두 오랫동안 쓰게 될 것이니 신경 써서 만든 좋은 검이었으면 하는데. 자네가 만들어 줄 수 있겠나?” 사용자에 대한 설명을 기억한 주인은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기간은 얼마나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물어보아야 할 말이지.” 기간은 상관 없이 제대로 만들어 달라는 뜻이리라. 주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가능한 좋은 재료를 구해 마음에 드실 만한 검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한 달 정도 뒤에 다시 한번 들러 주시겠습니까?”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여 돈이 부족하다면 그 때 더 지불하지.”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인사한 주인은, 나이프를 칼리안에게 건넨 뒤 장검을 들고 나가 레이븐의 안장에 실어주려 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레이븐의 눈에서 흰자위를 본 칼리안이 손사래를 치며 검을 받았다. “아니, 아니야. 그러지 말게. 내가 하겠네.” 주인에게만 친절한 이놈의 말 덕분에, 칼리안은 낑낑거리면서 직접 안장에 검을 매었다. 그리고는 나이프 집과 연결된 가죽 벨트를 소매 안쪽에 채운 뒤 레이븐의 등에 올랐다. 이제 가야 할 곳은, 조금 특별한 것을 파는 상점이었다. ────────────────────────────────────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2) 하늘이 조금씩 어둑해지고 있었다. 잠시 품을 살피니 잘그락 하는 소리가 났다. 꽤 많은 지출을 했음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돈이 많았다. 어린 애가 모아 둔 코 묻은 돈을 함부로 빼 쓰는 기분이 다시 들었다. 어차피 이게 다 살자고 하는 것이니, 옛 칼리안도 크게 노여워 하지는 않으리라. 아무튼 제일 우선했던 검을 구했으므로, 다시 강 건너편으로 돌아가야 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온 길을 되짚어 다리를 향해 왔다. 세뉴 강의 다리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그런데 다리 입구에서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멀리서 다가오는 칼리안을 보곤 길을 가로막고 섰다. 그들을 본 레이븐이 속도를 줄여 멈추었다. 레이븐이 워낙에 길을 잘 찾아갔던 탓에, 칼리안은 다음으로 갈 목적지 생각에 잠겨있었다. 때문에 레이븐이 멈춘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그제서야 칼리안 역시 검은 옷의 사람들을 보았다. 칼리안의 얼굴에 경계하는 빛이 어렸다. 다행히, 멀쩡한 수도의 왕도 위를 점령한 간 큰 강도 따위는 아니었다. 따라서 방금 산 무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칼리안이 안심하며 앞을 쳐다봤다. 가장 앞에 서있던 이가 칼리안에게 다가왔다. “함부로 길을 막아 죄송합니다.” 남자가 입고 있던 검은 옷은 바로 상복이었다. 많이 울었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쉬어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굉장히 정중한 태도로 사정을 이야기했다. “지금 망자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여, 급한 일이 아니시라면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을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세뉴 강을 쳐다보니, 작은 촛불이 올라간 붉은 안네루시아 꽃들이 강물을 따라 둥둥 떠내려오고 있었다. 저 멀리 꽃이 내려오기 시작하는 곳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영결식인가.” “네,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칼리안이 선뜻 레이븐의 등에서 내려서며 대답했다. “굳이 망자의 걸음을 방해할 이유가 없지. 죄송할 일이 아니네.” 칼리안이 말한 것과 같이,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카이리스의 장례 의식이었다. 망자를 기리는 이들이 망자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강변에 모여, 생의 마지막 길을 비춰줄 촛불을 띄워 보낸다는 뜻이 있었다. 다만 강물에 꽃잎이 떠내려가는 동안 산 사람이 그 위를 지나가면, 망자가 산자를 따라 나서려다 길을 잃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때문에 이렇게 잠깐 동안 다리를 건너지 말아주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칼리안이 우연히 마주한 이 숙연한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세뉴는 언제나 고요하게 흐르는 강이었다. 그러므로 안네루시아 꽃도 출렁이지 않고 조용히 흘러 내려왔다. 바람도 잠잠하여 촛불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평안히 가시겠군. 명복을 비네.” “감사합니다.”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굳이 걸음을 멈춘 것으로 모자라 말에서 내리더니, 명복까지 빌어주는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남자가 한번 더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형님께서는 내 무덤에 시나스타를 올려주셨으려나. 아니면 그 전에 시간의 축을 돌리셨으려나.’ 달빛에 두 번 피는 시나스타를 무덤에 올리는 세크리티아의 관례를 잠시 생각하던 칼리안에게 남자가 말했다. “이제 다시 길에 오르시지요.” 어느새 안네루시아가 다리 아래를 모두 지나간 모양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이븐의 등에 올랐다. 고마운 마음에 어느 가문의 자제인지를 가늠해보고자 말 위의 칼리안을 올려다보았던 남자가, 어깨를 움찔하더니 서둘러 비켜섰다. 왕도에 설치된 마법 등불이 밝았으므로, 깊은 후드로 숨겨둔 것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는 것을 눈치 챈 칼리안이 조용히 말했다. “기억에 두지 않았으면 하네만.” 남자가 그리하겠다는 듯 고개를 숙여보였고, 칼리안은 천천히 다리 위를 건넜다. 잠시 뒤 고개를 들어올린 남자는 그런 칼리안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자에게 다가온 또 다른 검은 옷의 일행들이 물었다. “아르센. 왜 그러나? 아는 사람인가?” 남자, 아르센 헤르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저, 좋은 사람인 듯 싶어 그러네.” 그 사이 많이 멀어진 촛불이 작게 일렁이고 있었다. * * * 어느새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제부터 갈 곳은 대장간과 달리 시간에 상관 없이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정말 온통 시스파니안이네.” - 수도 카이리시스는 마치 시스파니안의 추종자들이 사는 곳 같습니다. 어느 곳이든 시스파니안이 있습니다. 카이리스로의 파견을 무사히 다녀온, ‘푸른 솔새’라는 별칭의 세작이 전해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제 공연장에서도 하츠아라와 시스파니안을 이야기 했었는데, 칼리안의 눈에 보이는 간판에 적힌 이름이 온통 시스파니안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시스파니안의 단잠’ 이라는 이름의 호텔이나 ‘시스파니안의 여유’라는 이름의 카페, 심지어 ‘시스파니안의 한끼’라는 식당까지. 칼리안이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무 막 갖다붙이는 것 아니야? 용의 한끼가 맛있게 느껴질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다, 구석진 곳에 있던 ‘시스파니안의 깊은 술냄새’라는 술집을 본 뒤에는 대다수의 가게 이름이 참 정상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곤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게 얼마를 더 가니 ‘나에랑샤’ 거리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였다. 바로 두번째 목적지가 있는 곳이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급속도로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나이프를 만지작리며 나에랑샤 거리로 들어섰다. 그 곳에는 카이리시스의 서쪽 시장이 있었다. 밤이 되었으므로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았고 밤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식당과 술집, 카페들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다만 모두 칼리안의 목적한 곳은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은 주저 없이 그 앞을 지나쳤다. “둘, 셋, 넷······ 여기인가.” 서쪽 시장의 골목 세 개를 지나치고 네 번째 골목으로 들어서니, 어두운 거리에 홀로 불을 밝힌 상점이 보였다. 문 앞에 늘어선 여러 가지 크기와 모양의 새장이 눈길을 끄는 곳이었는데, 간판에 적힌 것을 본 칼리안이 목적지를 제대로 찾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나에랑샤 새 판매점 (전서구 대여) 단순히 애완용 새를 파는 곳이라면 이 시간에 문을 연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겠지만, 그 옆의 전서구 대여라는 내용 때문에 이해가 되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소식을 전하려는 사람들이 찾아올 테니 말이다. 그런데 가게 건물이 작아서인지 혹은 시간이 늦어서인지는 몰라도, 따로이 말을 받아 줄 시동이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말을 매어 둘 수 있는 곳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어찌한다.” 레이븐의 등에서 내린 칼리안이 난감한 마음에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차피 레이븐이야 몸 편히 돌봐줄 재력가 주인을 두고 다른 데 갈 리 없는 놈이란 것을 칼리안이 가장 잘 알았으니, 레이븐을 걱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민했던 것은 누가 레이븐을 훔쳐가려 할까봐서였다. 물론 레이븐이 아니라 발광하는 말에 채일 운 나쁜 이에 대한 걱정이었다. 결국 칼리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레이븐의 안장 위에 고삐를 올려놓았다. “기다리고 있어. 사고치지 말고.” 레이븐이 칼리안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푸르륵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가게 옆으로 가만히 걸어가 섰다. 검은 말이 어두운 건물의 그늘 속에 들어가니, 오른쪽 앞 발목의 하얀 털만 유난히 잘 보였다. 칼리안이 레이븐을 그대로 두고 몸을 돌렸다. 그 후에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후드를 잘 눌러쓴 뒤에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 딸랑. 얀이 울리는 것보다 조금 더 큰 종소리가 울리며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알렸다. 그러자, 종소리 때문에 잠을 깬 것인지 가게 안의 새들이 일제히 지저귀기 시작했다. 마치 시장 한 켠이 아닌 숲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겉으로 보기 보다는 넓은 곳이군.’ 엄청 많은 종류의 새장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새들이 보였다. 칼리안의 주먹보다 작을 것 같은 애완조부터, 당장 사냥에 쓰여도 좋을 매까지. 오히려 없는 새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외눈 안경을 끼고 새 모이를 주던 가게 주인이 칼리안을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전서구를 원하시오?” 어둠이 내린 밤, 검은 로브로 얼굴을 가린 채 새 가게에 들어온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대신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칼리안은 대답 없이 유독 조용한 새장 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 안의 하얀 애완조 두 마리가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의심의 여지 없을 한 쌍의 새였으나, 칼리안은 그것이 아주 잘 만들어진 가짜 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살짝 침을 삼킨 칼리안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새들은 잠에서 깨질 않는군.” 목소리가 어린 것은 상관 없었지만 혹시라도 긴장한 것이 드러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가게 안을 울렸다. 주인이 대답했다. “잠이 많소.” 베른이 기억하는 것과 같은 대답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오가야 할 말이 이미 정해져 있는 대화가 이어졌다. “먼 곳에서 날아온 모양이지? 매우 고단해 보이는데.” 주인이 잠시 침묵하며 칼리안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어차피 외관으로는 티가 나는 것이 없었으므로, 칼리안은 오로지 눈 색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니 저렇게 잠을 자는 것이 아니겠소?” 주인의 질문이었고, 칼리안은 능청스러운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사. 그러고 보니 고단한 새가 잠시 쉬기에는 이만 한 곳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군.” “그렇게 보았다면 다행이오.” 주인은 무심하게 말한 뒤 쓰고 있던 외눈 안경을 벗어 소매로 슥슥 닦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다시 끼며 물었다. “무엇을 찾으러 왔소?” 이제부터의 대답이 중요했다. 자칫 잘못된 대답을 하거나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였다가는 그대로 목이 날아갈 터였다. “새 모이가 필요해서.” “그래. 여기서 새 모이도 팔기는 하오.” 두 사람의 대화가 두런두런 이어지는 탓에, 한참을 지저귀던 새들이 다시 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어느새 가게 안은 옷이 스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해져 있었다. “그런데.” 주인이 칼리안의 뒤로 걸어와 섰다.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 주인의 품 속에 서슬 퍼런 칼이 있으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주인은 말 없이 한참동안 칼리안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칼리안의 귀에 스스로의 숨소리가 나지막이 들렸고, 진득해진 것 같은 공기가 폐를 압박했다. 서늘한 느낌이 온 몸을 엄습했다. ‘살기.’ 숨막히는 긴장 속에, 주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근래에 누군가에게 새를 판 기억이 나질 않소만. 아무래도 못 보던 손님인 듯 하여.” 이것은 정해져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알아서 생각하고 대답을 해야 했다. 곧바로 칼리안의 입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나왔다. “이제 막 둥지를 떠나 먹이 찾으러 왔으니, 이 곳에서 팔았을 리 없지.” 칼리안에게 다가오던 주인의 발이 멈추었다. “어디에서 온 새인지는 아시오?” 정해진 질문이 다시 나왔다. 칼리안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남동풍을 타고 왔다 하던데.” “그렇다면, 그 새는 누구의 새요?” 칼리안이 천천히 몸을 돌려 주인을 향해 마주 섰다. 깊이 내려온 후드 아래로 보이는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 입술 사이로 마지막 대답이 나왔다. “네빌라드의 새.” 세크리티아의 국왕 데블란. 네빌라드는 데블란의 이름 철자를 섞어 만든 호칭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칼리안은. 카이리스에 숨어든 세크리티아 세작들의 근거지에서 카이리스 정보를 얻어내려는 최초의 카이리스 왕자가 된 것이다. ────────────────────────────────────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3) 카이리시스는 넓었다. 애초에 왕궁 크기가 그 정도이니, 수도라 해서 좁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 넓은 땅에서 키리에를 찾는 것은 모래 밭에 묻어 둔 바늘을 찾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천만 다행으로 이 시기의 키리에가 무얼 하고 있었는지는 알았으나, 그 위치를 찾는 것이 힘들었다. 게다가 또 하나. 칼리안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팔 만한 곳도 마땅히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이 미친 짓이었다. 세크리티아 세작들에게 카이리스의 정보와 물건을 구하는 것. 이들은 단순한 정보 상인이 아니었다.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를 염탐하기 위해 오랜 준비 끝에 보내온 진짜 칼잡이들이었다. 그만큼 위험한 곳이었다. 게다가 칼리안은 지나가다 만난 사람도 곧바로 알아볼 만큼 눈에 띄는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붉은 눈을 스치듯 보기만 해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일이 커질 터였다. 그러니 미친 짓이라 한 것이다. “모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소.” 세작들의 거점을 지키는 자, ‘하얀 수리’가 그렇게 말했다. 적이 아님을 확인했으므로 더 이상의 적의나 살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아직 죽을 때는 아닌가보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칼리안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가능한 하얀 수리의 검격 범위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며, 그의 뒤를 따라 가게 뒷편으로 갔다. 세작들은 서로의 신상을 몰랐다. 본국에서도 언제 몇명을, 혹은 누구를 세작으로 보낼지 알려주지 않았다. 첩보 활동이 발각될 경우 다른 세작들이 줄줄이 엮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또한, 세작들은 서로에게도 얼굴을 노출하지 않았다. 마찬가지 이유였다. 게다가, 이 시기의 세크리티아 세작들은 나이와 성별에 대한 구분도 없이 양성되었다. 따라서 칼리안과 같은 나이의 세작이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런 상황만 믿고, 칼리안은 하얀 수리로 하여금 자신을 세크리티아에서 새로 파견된 어린 세작으로 인식하게 만든 것이었다. “잠시만 있으시오.” 칼리안이 선 곳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빈 새장, 모이통, 여러 모양의 횃대, 청소 도구 등등. 먼지가 풀풀 풍기는 그 안에서, 하얀 수리는 이리저리 잘도 피해가며 움직였다. 그러더니 잡동사니인 냥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던 나무 막대기를 잡아 반대쪽으로 밀었다. - 드르륵! 체인이 감기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둘이 서 있는 방 전체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우르릉 소리, 끼릭거리는 마찰음이 울리더니, 곧 칼리안이 서있던 곳이 어느 집의 창고와 이어졌다. 하얀 수리가 창고 문을 열자 좁은 마당이 나왔다. 둘은 곧 마당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칼리안은 하얀 수리를 따라 그 집의 거실을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갔고, 또 한번의 비밀 공간을 지나 커다란 서재 같은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에 큰 테이블이 있고 사방으로 책장과 선반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앉으시오.” 그렇게 말한 하얀 수리가 컵에 물을 따라 칼리안에게 건넸다. 최근 마시는 것 때문에 굉장한 피해를 입고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물을 받아 내려놓은 후 마시지 않았다. 그것을 본 하얀 수리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나도 원래는 차를 내어줬소. 근데 아무도 안마시는 것이 아니오? 비싼 찻잎 버리는 게 아까워서 이제는 그냥 물만 주고 있소. 그런데도 안 먹는 것은 여전하니 이젠 아무것도 내주지 말까 생각중이오.” 아마 음료를 거부하는 것이 칼리안만은 아니었는지, 성의가 매번 무시되니 불편했던 것 같았다.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 “아무거나 집어먹지 말라고 누가 그래서.” 앨런이 해주었던 말이었고, 하얀 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사. 맞는 말이긴 하지. 신참인가본데, 앞으로 종종 마주칠테니 이름이나 알아 두시오. 나는 하얀 수리요.” 칼리안은 그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티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곳에 오기 전부터 미리 생각해 두었던, 세크리티아의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별칭이었다. “붉은 고니.” 르메인을 처음 만났을 때 백조가 된 기분을 느꼈던 칼리안이었다. 칼리안의 겉과 속이 다르니, 그에게 이만큼 어울리는 별명도 없을 것이었다. “그래, 반갑소. 허면 무슨 모이를 찾아 오셨소?” 지금 칼리안이 찾은 이 곳에서 맡고 있는 일은, 첩보 활동에 필요한 기본적인 정보와 장비를 세작들에게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모이’였다. 칼리안이 책장과 선반을 한번씩 쳐다봤다. “정보 하나, 물건 하나.” 하얀 수리의 손바닥이 펼쳐졌다. “정보 5플로린, 물건 3플로린. 선불이오.” 무슨 정보, 무슨 물건인지도 묻지 않고 이렇게 가격을 말해주는 것이 이상했다. 이 곳의 운영은 오로지 하얀 수리의 자율이었으며 따로이 세크리티아에까지 알려져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칼리안의 생각을 눈치챈 하얀 수리가 설명을 덧붙였다. “정가제라서.” 금괴를 구해달라 하면 3플로린에 살 수 있는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어 바보 취급을 받을 일을 만들지는 않았다. 칼리안이 품에서 금화 8개를 꺼내 하얀 수리에게 건넸다. 생각보다 값이 비쌌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값을 받은 하얀 수리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말했다. “그래. 얘기하시오.” 칼리안의 설명이 이어졌고, 하얀 수리는 두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곧 그가 지도 하나와 종이에 싸인 작은 물건 하나를 들고 와 칼리안의 앞에 다시 앉았다. 하얀 수리가 먼저 작은 것을 칼리안의 쪽으로 밀었다. “일단, 물건 하나.” 그런 뒤에는 지도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정보.” 받아 보니 카이리시스의 상세한 지도였는데, 그 가운데 한 곳에 점이 찍혀 있었다. 칼리안이 의문을 가지며 물었다. “이 곳은 카이리시스 외에는 없는 것인가?” 그 말에, 하얀 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허공에 주먹을 뻗어보이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싸움꾼들은 사람 많은 곳에 모이기 마련이니까. 붉은 고니 당신이 설명한 시설이 있을 정도의 규모라면 그 곳 뿐이오.” 키리에가 카이리시스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을 확률이 현저히 낮아진다는 말이었다. 공연장 가는 길에 마주쳤던 아이가 키리에가 맞았을 것 같다는 생각은 확신에 가까워졌다. “다행이군.” 그나저나 점 찍은 지도 한장이 5플로린이라니. 괜스레 바가지를 쓴 기분을 느끼며 두 가지를 챙겨 품에 넣자, 하얀 수리가 종이 쪽지 하나를 더 내밀었다. 빼곡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선뜻 받지 않으니, 하얀 수리는 하얀 이가 보이도록 웃으며 말했다. “사용 설명서.” 영 바가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칼리안이 피식 하며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창고를 통해 다시 가게로 돌아가지 않고 그냥 가정집 대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새 판매점의 뒷건물인 것 같았다. 때문에 칼리안은 판매점까지 걷는 대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레이븐.” 오래지 않아 다각 다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두운 가운데 하얀 띠만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으로 레이븐이 걸어나왔다. 칼리안은 빠르게 레이븐의 등에 올라 일단 그 곳에서 멀어졌다. 잠시 뒤 적당히 밝고 외진 카페 앞으로 간 칼리안이 지도와 설명서를 열어 보았다. ‘몸 조심하시오. 험한 곳이니.’ 하얀 수리의 말이 떠올랐다. 칼리안이 실소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렴 당신보다 위험할까.” 지도에 나온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 온 길을 다시 되짚어가야 했다. 설명서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읽고 외운 칼리안이 카페 입구에 켜져 있던 촛불에 지도와 설명서를 태워 없앴다. * * * 칼리안의 눈에 깊은 근심이 들었다. 지도를 태워버려 길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지도는 정확했고 인근에 문을 연 곳은 한 곳 뿐이었다. 지금 칼리안의 머릿속에 갖가지 상념을 들게 한 것은 바로 2층짜리 건물 입구에 적힌 가게 이름 때문이었다. - 시스파니안의 깊은 술냄새 왜 하필? “하아.” 새 판매점으로 향하던 길에 보고 질색했던 바로 그 술집이었다. 다시 고개를 내려 술집 입구를 쳐다보던 칼리안의 마음이 참으로 복잡했다. “아니 대체 누가 가게 이름을 저렇게 짓는단 말인가? 시스파니안도 엄연히 왕족인데, 왕실에서는 왕족 모독죄도 묻지 않는 것인가?” ‘하츠아라 사후의 시스파니안은 왕비로서 활동한 것이 아니므로, 온전한 왕족으로 보기 어려웠다.’ 옛 칼리안이 그렇게 답을 주었다. 칼리안이 참으로 할 말이 많은 표정을 지으며 시동에게 레이븐의 고삐를 맡긴 후 술집에 들어갔다. 술집 내부는 세크리티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묵은 오크통의 퀘퀘한 냄새와, 쌉쓰름하면서도 시큼한 홉 특유의 냄새가 그득했다. “일행이 있으십니까?” 곧 점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칼리안의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오밤중에 후드를 쓰고 있는 손님이 들어선 까닭인지, 약간 경직된 걸음이었다. “혼자 왔네.” 새 판매점에서는 상관이 없었는데, 이 곳에서는 상관이 있었다. 너무 어린 목소리에 점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칼리안은 설명 대신 은화 하나를 꺼내 점원에게 쥐어 주었다. 말 뜻을 잘 알아들은 점원이 곧바로 의심을 풀었다. “빈 자리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용 설명서에 쓰여 있던 대로 말했다. “4층으로 가겠네.” 그 곳은 누가 보아도 너무 명백한 2층 건물이었다. 그리고 점원은 이 건물에 4층이 없다는 말을 하는 대신 이렇게 대답했다. “네. 따라오십시오.” 어쩐지 조금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다시 긴장하며 점원의 뒤를 따랐다. 시간이 늦어 대부분의 손님들이 거나하게 취해 있었기 때문에, 칼리안은 크게 주목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대여섯 개 정도의 테이블을 지나 코너를 돌자 두꺼운 나무 문이 하나 나왔다. 점원은 품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연 뒤 칼리안에게 손짓했다. “이 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여보인 뒤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점원은 방의 불을 켜고 다른 설명 없이 밖에서 문을 닫았다. 그 후 점원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들렸다. 칼리안이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댓 명 정도가 조용히 모여 술을 마실 수 있을 만한 공간으로 꾸며진 곳이었는데, 네모난 테이블과 장식장이 놓여 있었다. 그 외에는 카운터의 종을 울려 점원을 부르는 용도의 손잡이 달린 끈과 의미 모를 그림이 그려진 액자 하나, 그리고 옷을 걸 수 있을 붙박이 행거가 전부였다. 그러니 그 곳은 언뜻 보기에는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만들어진 특실 같을 뿐, 특별히 이상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물론 칼리안에게는 그렇지 않았지만. ‘나비 모양, 세 번째.’ 설명서는 이 상황에 대해서도 친절히 알려주었다. 따라서 칼리안은 당황하지 않고 맞은편 벽으로 걸어갔다. 외투를 걸어둘 수 있도록 만들어진 나비 모양의 주석 행거에 시선을 둔 채였다. 칼리안은 여섯 개의 행거 중 세 번째 것을 잡고 비틀었다. 그러자 행거가 서서히 원을 그리듯 돌아가기 시작했고, 거의 90도 가까이 눕혀졌을 즈음. - 딸깍. 무언가에 걸리는 소리와 함께 멈추었다. 칼리안은 옷걸이에서 손을 뗀 뒤, 방 모서리에 놓여있던 장식장을 붙들고 옆으로 밀었다. 큰 힘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잠금 장치가 풀린 장식장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움직이며 어딘가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심호흡을 한 번 한 칼리안이 언제든 나이프를 뽑아들 준비를 한 뒤 계단 아래로 발을 옮겼다. 딱 발 밑을 구별할 정도의 빛이 계단을 비춰주고 있었으므로 내려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참을 내려가던 칼리안이 잠시 발을 멈추었다. “3층.” 어딘가로 들어가는 입구에 ‘3’이라고 쓰여 있었다. “카드 도박장이겠군.” 입구는 어두운 천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커튼 틈새로 동그란 테이블을 하나씩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몇몇 남자들의 인영이 보였다. 칼리안은 3층 풍경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3층으로 올 때의 거의 두 배 쯤 되는 계단을 내려감에 따라,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4’가 쓰여진 입구가 보이며 계단이 끝났다. “여기군.” 고함소리가 귀를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커져 있었다. 칼리안이 다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의 머뭇거림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칼리안이 들어선 곳은, 바로 격투기 도박장이었다. 검을 포기한 검사 키리에가 있을 곳이기도 했다. ────────────────────────────────────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4) 습한 냄새와 땀 냄새, 피 냄새가 섞여 매우 불쾌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런 냄새에 익숙한 세월을 살았던 칼리안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사내가 칼리안에게 다가와 두 손가락을 내밀었다. "입장료. 2플로린."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에게 금화 2개를 주었고, 사내는 숫자가 새겨진 명패를 하나 건넸다. 칼리안의 이름을 대신할 숫자판이었다. 칼리안은 말 없이 그것을 받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도박장 한 가운데에는 널찍한 철창이 있었고, 그 안에서 두 명의 남자가 이제 막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한 명은 흑색의, 그리고 또 한 명은 백색의 머리띠를 두른 채였다. 쉰 명 남짓의 도박꾼들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제 자리에 선 채로 도박장 풍경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한 사람이 칼리안에게 다가왔다. 가슴이 깊이 파여 있고 길이도 짧은 원피스를 입은 은색 머리의 소녀였다. 어려보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에 칼리안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스스로 원해서 입은 옷이 아니라는 것이 눈에 훤했던 까닭이다. 소녀는 곧 칼리안의 팔을 감싸잡고 손짓을 해 가며 빈 자리로 안내했다. ‘말을 하지 못하나보군.’ 칼리안이 자리에 앉자, 소녀가 잠시 어디론가 다녀오더니 손에 들고 있던 쟁반 같은 것을 칼리안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절반으로 나뉘어 반은 흑색, 반은 백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그 용도를 알아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흑색과 백색 둘 중 한 곳에 돈을 걸어, 이기면 두 배를 얻고 지면 세 배를 내야 한다는 룰과, 싸움 시작 후 3분이 지나면 더 이상 돈을 걸 수 없다는 주의사항이 적혀 있었다. 다만 승부 조작은 하지 않으니 안심하라는, 적당한 서비스 멘트도 보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실소했다. '승부 조작을 못하는 것이겠지. 수도에 기사가 한 둘도 아닌데 누가 와서 볼 줄 알고. 아무튼 이기면 두 배, 지면 세 배라니. 강도가 따로 없군.' 잠시 경기장 안의 싸움꾼들을 쳐다보던 칼리안은 품에서 금화 세 개를 꺼내 백색 편에 놓았다. 하얀 머리띠를 한 남자가 이길 것이라 건 것이다. 소녀는 칼리안에게 지급된 번호와 백색에 3플로린을 걸었다는 것을 적어 돌려주고는 돈을 가지고 돌아갔다. 칼리안이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흰 머리띠의 남자가 검은 머리띠의 남자에게 맞아 휘청이고 있었다. “더 숙이고 들어가야지!” “팔꿈치 조심하라고, 이 머저리야!” 등등의 욕설 섞인 말들이 들려왔다. 칼리안은 싸움의 결과를 볼 것도 없다는 듯한 태도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쿠당탕! 거대한 것이 내동댕이쳐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눈을 떠 보니 흑색 머리띠의 남자가 경기장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곤죽이 된 얼굴은 알아보기조차 어려웠다. 조금 전 칼리안으로부터 돈을 받아갔던 소녀가 다가와 종이 하나를 주고 돌아갔다. 칼리안이 3플로린을 걸었던 남자가 승리했으니 두 배의 금액을 지불한다는 증서였다. “네! 피투성이 제라드가 오늘도 승리했습니다! 그럼 오늘의 세 번째 경기를 시작합니다!” 방금 본 것이 두 번째 경기라 하니, 첫 경기는 칼리안이 오기 전에 끝난 것 같았다. 검은 머리띠의 남자가 질질 끌려 나가고, 하얀 머리띠의 남자가 기진맥진한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지체 없이 다음 경기가 시작됐고, 종전의 소녀가 다시 걸어왔다. 칼리안은 이번엔 검은색 쪽에 걸었다. 대신 새로운 돈을 낸 것은 아니었고, 조금 전에 받은 6플로린 짜리의 증서를 냈다. 소녀는 똑같이 칼리안이 선택한 정보를 적어 주고는 돌아갔다. 한 경기에는 거의 5분에서 10분 가량이 소요되었고, 칼리안은 그 때마다 증서를 내고 결과를 예측했다. 그렇게 열 번째 경기가 종료되었다. “열 번째 경기가 끝났습니다. 승리자는 강철 무릎 판테론입니다!” 경기 진행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곧 소녀가 다시 걸어와 예측 결과에 대한 증서를 건네주었는데, 그것을 주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칼리안에게 있어 싸움의 승리를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3플로린은 어느새 1500플로린이 넘는 엄청난 금액으로 불어나 있었다. 계속하여 경기 결과를 맞추는 의문의 손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지, 경기 진행자가 칼리안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칼리안이 고갯짓을 했다. 빨리 다음 순서를 진행하라는 뜻이었다.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다. ‘도박 따위를 하러 온 것이 아니야.’ 아직까지도 키리에가 나오지 않았다. 잘못 알았던 것일까, 혹은 시기가 맞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칼리안이 놓친 첫 경기에 이미 키리에가 나왔던 것일까. 일단은 다른 손님들을 위해서라도 다음 경기 진행을 해야 했으므로, 진행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이제 마지막 경기입니다. 무려 네 배의 배당금이 걸려있죠! 많은 분들께서 이 특별한 경기를 기다려 주셨을텐데요!” 그러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기대감을 드러냈고, 진행자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우렁찬 소개를 시작했다. “소개합니다! 피망치 숀!” 근육질의 거한이 앞서 나왔다. 하얀 머리띠의 그가 경기장 바닥을 발로 탕탕 구르더니 양 팔을 들어올리며 포효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그리고 오늘도 그에게 도전하는, 포기를 모르는 사나이!” 마지막 경기. 이번에도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정말로 숨이 멈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진행자의 말과 오래된 언젠가의 기억 속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지금까지 아슬아슬한 패배가 벌써 열 번을 넘었는데요! 비록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쥔 적 없었으나, 과연 오늘도 그러할 것인가!” - 그 때 저는 싸움을 팔아 돈을 버는 곳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도전자가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검은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머리띠 위로, 선명한 물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칼리안의 몸이 움찔 떨렸다. “승패를 예단하지 마십시오. 어제보다 더 강해져서 왔습니다!” - 그러다 누이가 죽은 후, 도망쳐서 카이리스를 떠났습니다. 도전자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칼리안이 있는 곳을 향했고, 덕분에 칼리안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소개합니다!” 파란 색과 검은 색의, 오드 아이를. “괴물 눈알!” 키리에. “키리에!” 찾았다. * * * 소녀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이 건 돈이 너무 컸던 탓이다. 칼리안이 내어놓은 것은 조금 전 받은 증서였다. 1500여 플로린을 건 것이다. 예측한 승리자는, 당연히 키리에였다. 옆에 서 있던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어이, 어마어마한 돈인데. 그렇게 날리지 마쇼. 저 새끼 저거 한 번도 못이겼소. 경기는 볼 만 하니 그냥 응원이나 하고 돈은 하얀 쪽으로 거쇼.” 그러자 그 옆 사람이 반박하는 의견을 냈다. 아마도 칼리안과 같은 결과에 돈을 건 모양이었다. “아니지! 오늘이야말로 이길 거야! 어제 딱 일 초만 빨랐어도 이길 수 있었다구.” 그러고 보니 지금껏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는데도 검은 색에 돈을 거는 이들이 꽤 있는 모양이었다. 쟁반을 든 소녀는 더 머뭇거리지 않고 종이에 내용을 써준 뒤 돌아갔다. 이제 막 시작된 싸움에, 사람들이 소리를 죽이고 경기장을 봤다. 키리에 역시 열 일곱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큰 키였으나, 숀의 앞에 서니 어린 애가 따로 없었다. 키가 족히 2미터는 될 듯한 거구의 숀이 팔을 휘둘렀다. 마치 레이븐의 다리를 보는 것 같은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오르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 쉬익! 팔을 휘둘러 나는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소리가 들렸고, 키리에는 살짝 몸을 틀어 피해냈다. 그러자 숀의 왼팔이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왔다. 키리에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두 번째의 공격을 모두 피해내자, 휘둘렀던 팔을 빠르게 회수한 숀이 다리를 뻗었다. 그 속도가 굉장히 빨랐던 탓에, 다시 피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키리에가 양 팔을 들어올려 공격을 받았다. - 퍽! 막아내기 위한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소리와 함께 키리에의 상체가 휘청였다. 그렇게 키리에가 다시 한 발을 물러나자, 숀이 다가오며 다시 한번 발을 올려찼다. 그러자, 키리에가 숀의 다리를 잡아챘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게 하고자 한 행동이었으나, 그러기에는 둘의 체급이 너무 달랐다. 숀은 자신의 다리를 붙든 키리에의 옆구리로 주먹을 뻗었다. 키리에가 다리를 놓은 뒤 빠르게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그리고는 주먹이 지나가기 무섭게 달려들었다.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킨 키리에의 뒷꿈치가 숀의 턱을 강타했다. 턱이 옆으로 획 돌아가며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잠시 머리를 부여잡고 혼미해진 정신을 챙긴 숀이 키리에에게 달려들었고, 키리에의 허리를 붙든 채 철창 벽을 향해 돌진했다. - 쾅! 키리에의 몸이 철창에 부딪히며 큰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숀의 주먹이 키리에의 배를 가격했다. 키리에 역시 주먹을 뻗어 조금 전 발로 찼던 숀의 턱을 쳐올렸다. 그렇게 이십 여 차례의 공방이 이어졌다. 키리에의 무릎에 얻어 맞은 숀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왼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니, 키리에에게 팔을 꺾일 때 다친 모양이었다. 물론 키리에 역시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숀에게 한 발 다가서던 키리에의 몸이 잠시 휘청였다. 조금 전 뒷목을 얻어맞은 여파가 남아있는 듯 했다. 스치듯 맞은 눈은 퉁퉁 부은 채였고, 입술도 터져 있었다. “검이 없으니 아주 물러터졌군.” 칼리안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여유로운 듯한 말이었으나 마음 속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키리에가 맨손으로 싸움을 하는 것을 보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숀이 허공을 가르며 키리에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오른쪽 주먹이 키리에의 얼굴을 향해 뻗어나왔다. 키리에가 순간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는데, 그와 동시에 숀의 왼 주먹이 키리에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커헉!” 숨이 막히는 소리를 낸 키리에가 철창에 몸을 기대고 섰다. 어깨가 흔들리는 것을 보니 급소를 제대로 맞은 모양이었다. 칼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 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숀이 달려왔다. 키리에가 발을 들어올려 숀을 강하게 걷어찼고, 그 힘에 주춤 물러나는 숀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그 직후 주먹으로 숀의 명치를 때렸으나 숀은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 퍽! 숀이 마치 약을 올리듯 똑같이 주먹을 쥐고 키리에의 복부를 가격했다. 조금 전 다쳤던 옆구리 근처였는지, 키리에는 다시 한번 몸을 휘청였다. 숀이 씩 웃으며 주먹을 감아 쥐었다. 키리에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섰다. 숀이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열댓 번의 주먹이 키리에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을 막아내던 키리에가 어느 순간부터 속절 없이 공격을 허용하고 있었다. 간신히 중간 중간 주먹질을 했으나, 숀에게 큰 피해를 주질 못했다. 기어코 키리에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더는 두고 보지 못한 칼리안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키리에! 너는 공격 직전에 어깨를 물리는 버릇이 있다!” 소란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에, 키리에의 어깨가 움찔했다. 키리에가 숀의 주먹을 막던 팔을 내렸다. 그리고는 손 끝부터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팔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손등서부터 팔뚝에 이르는 곳까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키리에가 숀의 배를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뻗어냈다. 단지 한 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이번 공격 때는 어깨가 제대로 움직였다. - 퍼억! 숀의 발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꽤나 충격이 컸던지 저도 모르게 배를 감싸쥔 상태였다. 키리에의 반격이 제대로 먹히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도박장을 뒤흔들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키리에의 공격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팔을 뻗고 턱을 들이받고 돌려 차는 등, 정신을 차릴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쉼 없는 공격이 가해졌다. 그리고 결국, - 쿠웅! 몇 발자국 물러나던 숀이 눈을 까뒤집으며 대자로 쓰러졌다. 진행자가 재빨리 숫자를 세었으나, 정신을 잃은 숀은 일어나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진행자가 말을 더듬더니,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외쳤다. 키리에의 첫 승리에 매우 흥분한 목소리였다. “드디어! 키리에가 승리했습니다!” 좌중이 들썩였다. 키리에의 승리에 돈을 걸었던 이들이 오늘의 큰 행운에 기뻐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오늘의 마지막 경기 승자는! 괴물 눈알 키리에입니다!” 키리에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서였다. 후드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으나, 어쩐지 그 속의 눈을 마주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구지.’ 키리에가 느낀 것 같이, 칼리안도 후드 너머로 키리에를 쳐다보고 있었다. 칼리안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피눈깔에 괴물 눈알이라.” 그리고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올 때가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키리에가 승리함에 따라 금액 지불 증서를 가져와야 할 소녀가 오지 않았다. 소녀를 대신해 찾아온 것은 숀 만큼이나 덩치가 큰 남자였다. 그는 증서를 건네는 대신 말을 전했다. “찾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따라오시죠.” 예상한 대로 일이 흘러가자, 칼리안은 고민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사내의 뒤를 따라갔다. ────────────────────────────────────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5) 칼리안은 아무 말 없이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후드를 벗지는 않았다. 칼리안의 뒤에는 칼을 찬 장정 넷이 문을 막고 서 있었다. 그리고 앞에는 철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있었는데,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 쳐다보는 중이었다. 칼리안이 지금껏 낸 증서들이었다. “3플로린으로 6천 플로린을 넘게 벌다니. 대단하오.”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특별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증서들을 내려놓았다. 남자가 칼리안을 이렇게 불러 온 이유는 뻔했다. 금액이 너무 커져 버린 것이다. 저 돈을 다 꺼내주려면 엄청난 손해를 보아야 하니, 아마도 적당한 협상이나 협박을 해올 것이라 생각했던 칼리안도 스스럼 없이 따라 나선 길이었다. “아무리 도박장을 운영한다지만 우리도 상도의는 있는지라. 돈은 내어 드리겠소.” 그렇게 말한 남자는 가볍게 쥔 주먹으로 테이블을 툭툭 쳤다. 그러자 남자의 뒤에 있던 이가 주머니 하나를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의외로 순순히 돈을 내어놓자 칼리안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남자를 쳐다봤다. 후드에 가려져 그 표정을 볼 수는 없었겠으나, 고개가 움직이는 것을 본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런데 왜 불렀느냐면.” 남자가 칼리안 쪽으로 돈 주머니를 열어 보여주었다. 금화가 들은 것을 확인하라는 듯한 모양새였는데, 칼리안은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어린애한테 이런 큰 돈을 쥐어 주자니 좀 걱정이 되서 말이지.” 어느새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아마도 키리에에게 소리지르는 것을 누군가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들이 하는 말은, ‘돈을 주기는 주겠지만 지금은 못 준다, 다 커서 와라.’ 이런 뜻인 것이다. 마치 누가 짜 둔 순서라도 있는 냥, 방금 돈 주머니를 내려놓은 이가 키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시 그 모습을 쳐다보던 칼리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큰 돈인 것은 아는데.” 후드 아래로 간신히 보이는 것은 입술 뿐이었다. 그 입술이 웃고 있었다. 분명한 소년의 목소리였으나, 그다지 당황하거나 놀란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칼리안이 고개를 약간 움직이며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협상 정도는 걸어올 줄 알았더니.” 남자는 대답 대신 칼리안의 머리를 가리켜보였다. “일단 그 답답한 모자나 좀 벗지, 꼬마야.” 칼리안이 손을 들어 모자 끝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는 오히려 조금 더 깊숙이 눌러 쓰며 짧게 대답했다. “안돼.” “사람이 눈을 보고 얘기해야지. 안 그래?” 꽤 큰 돈을 가지고 있던 것을 보면 평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호위도 없이 온 것을 보면 그리 높은 가문일 리도 없었다. 그런 확신이 있으니 남자도 이렇게 위 아래 없이 굴고 있는 것이다. “이거 벗으면.” 칼리안의 입술 끝이 비틀려 올라갔다. 플란츠에게 배운, 사람 심기를 뒤트는 데 아주 일가견이 있는 웃음이었다. “곤란한 일이 생겨. 진짜로.” 플란츠의 것을 꼭 닮은 웃음은 아주 탁월한 효과를 냈다. 남자가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뒤에 있던 이를 향해 턱짓을 한 것이다. 돈 주머니를 꺼내놓았던 사내가 칼리안에게로 걸어가 손을 뻗어 후드를 잡아챘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도 움직였다. - 쉬익! 칼리안은 왼손을 들어 벗겨지려는 후드 끝을 붙들고, 그 손에 채워진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 뒤로 돌아, 후드를 잡고 있던 이의 손등을 내리그었다. “으아악!” 사내가 제 손을 붙들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을 때, 칼리안은 어느새 다시 자리에 앉은 뒤였다. “뭐, 뭐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칼리안의 컨디션은 최상이었으니, 말라 비틀어진 몸으로도 이 정도는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아주 잠깐, 그리고 한 두 번 뿐이겠지만 상관 없었다. 동료의 비명에, 문을 막고 있던 네 명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칼리안에게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뻗어나왔다. 명백한 살의를 담은 짙은 살기가 사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남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역시 기사들의 살기라는 것을 상대해 봤으나, 확연히 달랐다. 칼리안 주변의 남자들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칼 끝이 떨려왔다. 이런 곳에서 살아온 놈들은 눈치가 빠르다. 제 몸 사리지 않고 끝까지 칼을 맞대는 기사와는 다르다. 때문에 힘의 우위를 깨달으면 웬만해선 더 덤비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이 가지고 얕보는 건 재미 없어. 얼굴은 궁금해하지 말고. 칼 넣고, 시끄러운 애 치우고. 협상 먼저, 협박은 그 뒤에.” 지금 뒤에서 손이 반쯤 잘려나간 이가 비명을 질러대고 있음에도, 앞에 앉은 칼리안의 목소리는 너무나 태연했다. “알아들었으면. 처음부터 다시 해.” 뭉클거리며 피어오르던 살기가 씻은 듯이 가라앉고,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그 웃음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후드 때문에 입만 보이니 더 살벌한 것이다. ‘젠장! 칼 쓰는 미친놈을 불러들였어!’ 밖의 수하들을 부르면 이길 수 있을까, 남자가 재빨리 머리를 굴려 힘의 차이를 가늠했다. ‘아니야. 움직임이 상당히 빠르다. 굼뜬 놈들이 저 속도를 따라갈 리가 없어. 게다가 저런 살기를 뿜어대는데, 반은 제대로 칼도 못 뽑고 뒈질 판이다.’ 계산의 결과는 간단했다. 괜히 싸워서 피도 보고 돈도 뺏기느니, 돈만 뺏기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직접 검을 겨뤄보지도 않고 질 것을 걱정하여 발을 빼는 것이다. 칼리안이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그래도, 돈을 다 줘버리면 나도 죽은 목숨인데. 어쩐다?’ 남자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센 척 한답시고 저 돈을 다 꺼내오긴 했어도 정말로 저 큰 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 곤란했다. 당장의 사업에도 차질이 생길테고 상납금도 모자랐다. 그래도 칼리안이 협상을 얘기했으니, 남자는 그것을 믿고 사정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남자의 말투가 다소 공손해졌다. “하, 한꺼번에 돈을 주는 것은 어렵소. 그러니, 지내는 곳을 알려주면 매주 돈을 나누어 보내겠소.” - 까드득! 칼리안의 나이프 끝이 철 책상을 긁어냈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칼리안이 말했다. “칼, 시끄러운 애.” 그제야 조금 전에 칼리안이 말했던 것을 상기한 남자가 손짓을 했다. 네 명의 손에 들린 검이 다시 검집으로 들어갔고, 그 중 두 명이 비명 지르는 이를 데리고 도망치듯 나갔다.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됐소? 이제, 지내는 곳을 알려주면······.” - 까드득! 그것은 정답이 아니라는 소리다.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 사실 저 돈을 한꺼번에 주는 것은 어렵소. 우리도 매주 상납금을 올려야······!” 조용히 하라는 듯, 칼리안이 나이프를 들어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알아봐야 귀찮을 얘기는 하지 말고.” “아니, 줄 돈이 없는데! 어쩌라는 거요?” 남자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뜨끔한 듯 죽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아니. 내,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원하는 것을 그냥 얘기해달라는 뜻이오.” 칼리안이 나이프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돈은 안 받을게.”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리였다.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칼리안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남자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이어졌다. “대신 사람 하나 줘. 괴물 눈알.” “아니, 그것은······!” - 까드득! “아 씨, 진짜!” 남자가 순간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무리한 요구에 악다구니가 생긴 것이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리안도 남자의 심경 변화를 눈치챘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주면 싸움이 벌어질테고, 그럼 별볼 일 없는 그냥 어린애라는 것을 들키게 된다. 그러니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된다. 칼리안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제 막 돈이 되기 시작한 놈인데다, 마스터께서······!” 그렇게 말하던 남자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의 나이프가, 검도 아닌 그것이 작은 울림 소리를 내는 것을 들은 탓이다. 곧 푸른 기운이 나이프를 감싸며 넘실거리더니, 예리한 날이 되어 쭉 뻗어나갔다. 무엇이든 잘라버릴 것 같은 푸른 오러가 나이프에 맺혔다. 남자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말로만 듣던 것을 눈 앞에서 본 이들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설마’하는 눈으로 칼리안의 손 끝을 쳐다봤다. 그 설마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난 칼리안이 검의 길이만큼의 오러가 맺힌 나이프를 들어 그대로 남자의 코앞에다 내리찍었다. 남자가 움찔 놀라며 어깨를 확 움츠렸다. “······!”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두꺼운 철제 테이블이 무슨 푸딩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리 없이 내리꽂힌 나이프가 테이블을 뚫고 쑥 들어갔다. 푸른 빛의 잔상만 악몽처럼 길게 남았다. 테이블 밑, 양 무릎 사이를 스치듯 지나간 후 사라진 오러의 날에서 시린 한기가 느껴졌다. 남자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바지가 길게 잘려 맨 다리가 훤히 보였다. “히익!” 칼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울컥, 몸 속에서 핏물이 치고 올라왔다. 그리하여 양 손으로 테이블 귀퉁이를 잡아 몸을 지탱하고는 치미는 핏덩이를 가까스로 되삼켰다. 두 번은 못한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칼리안이 간신히 입을 열어 여유로운 척 말했다. “6천 플로린에 네 목숨이면. 괴물 눈알 바꿔주나?” 목소리가 떨렸다. 아픔을 참기 위한 것이었으나, 남자의 귀에는 영락없이 화를 참는 것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미친! 소드마스터다! 나 같은 놈 백 명. 아니, 천 명이 모여도 상대가 안 된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남자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칼리안의 뒤에서 댕그랗게 치켜 뜬 눈으로 오들거리는 두 수하에게 눈짓을 했다. 데려오라는 뜻이었고, 두 명이 앞다퉈 달려나갔다. 칼리안이 손을 뻗어 나이프를 챙겼다. 오러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나이프는 의외로 멀쩡했다. 만든 이의 솜씨도 좋았고, 오러가 워낙 짧은 순간 발현되고 사라졌던 이유도 있으리라. 칼리안이 실소했다. ‘칼보다 내가 약했군.’ 칼리안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픈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내리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5년 같은 5분이 흘렀다. 그럭저럭 견딜만 해 질 정도로 통증이 줄어들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자, 답답해진 칼리안이 나이프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수명이 줄어들 것 같아서, 남자가 허둥지둥거렸다. “그, 금방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그와 동시에, 사무실 문이 열리며 조금 전 나갔던 남자들이 뛰어 들어왔다. 헌데 둘 뿐이었다. 키리에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이다. 남자가 다급하게 물었다. “애는 어디 두고 너희들만 와?” “놈이 하는 말이······. 히나, 그것을 두고 못가겠다고······.” 칼리안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간신히 지킨 후드가 벗겨질 뻔했다. 히나. 들어 본 이름이었다. ‘설마, 아까 그······?’ 칼리안의 고개가 들리자, 남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금 목숨이 경각인데 뭘 따지겠는가! “같이 가겠다 했다는 거지?” “네. 히나라고, 똑같은 반쪽짜리······.” “상관 없으니까 데려와! 둘이든 셋이든 다 데려와, 그냥!” “네, 네!” 다시 달음박질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달칵.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그리고 네 사람이 들어왔다. 남자의 수하들을 뺀 한 명은 키리에, 그리고 또 한 명은 칼리안도 조금 전 보았던 사람이었다. 바로, 증서를 전해주던 은색 머리의 소녀였다. 이들을 본 남자가 반색하면서 말했다. “자, 다 데려가시오. 얼른 가시오.” 드르륵,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남자와 수하들이 몸을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따라와. 둘 다.” 칼리안이 둘에게 이렇게 말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안심한 듯 심장을 쓸어내리는데, 칼리안이 돌연 뒤로 돌아서서는 다시 다가왔다. “왜, 왜 그러시오?” 남자의 앞에 선 칼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본 남자가 까무러칠 듯 놀랐다. ‘마음이 바뀌었나? 돈까지 달라고?’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입장료랑 원금 돌려줘.” 금화 5개. 아껴 써야 해. ────────────────────────────────────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6) 술집을 벗어나 조금 더 걸어가니 한적한 곳이 나왔다. 달이 밝았으나 날이 흐렸다. 게다가 마법 등불도 꺼진 늦은 시간이었다. 때문에 어두웠고,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칼리안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러자 조용히 뒤를 따르던 이들도 멈춰 섰다. 칼리안이 뒤로 돌아서서 한동안 둘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지금껏 모습을 감춰주던 로브 끈을 풀었다. 검은 머리가 흘러내리듯 밖으로 드러났다. - 펄럭! 칼리안의 로브가 히나의 어깨에 둘러졌다. 여전히 눈을 둘 곳 없는 옷을 입은 채였기 때문이다. 담담한 손길로 로브 끈을 매어 준 칼리안이, 이번에는 키리에를 쳐다봤다. 키리에라고 썩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낡은 셔츠 차림이었으니. 칼리안이 쯧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재킷을 벗어 키리에에게 건넸다. 그 뒤에는 히나의 긴 은발 사이로 드러난 귀를 보며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자른 거야, 잘린 거야.” 히나의 귀 끝에는 날카로운 것에 잘린 듯한 흉터가 있었다. 뾰족하게 드러난 것을 감추려는 것처럼. 키리에에게는 없던 것이었다. 둘은 남매였음에도 생김이 달랐다. 키리에가 술에 취해 주절거렸던 말이 떠올랐다. 기억은 없지만 키리에는 아버지를, 누이는 어머니를 닮았다 들었다고. 둘은 하프엘프였다. 칼리안의 말에 히나의 어깨가 흠칫했고, 키리에가 히나와 칼리안의 사이를 막아서듯 다가와 섰다. 보호하려는 것이다. 경계심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와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그 목소리에, 칼리안이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귓가에 아른거리는 그 날의 키리에가, 꺼져가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 보은을······ 고작 이것 뿐이지만······. 반갑고, 안타까웠고, 고맙고, 미안했다. 그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을 더 많은 것들이 눈물이 되어 뚝 떨어졌다. “후우······.” 숨을 내쉬어 마음을 진정시킨 칼리안은, 눈을 슥슥 닦아낸 뒤 고개를 들었다. “남매, 하프엘프. 아까 거기 있던 사람한테 들었어.” 정확히 들은 것은 아니지만, 알고는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적당히 둘러댄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경계하지 마. 나쁜 뜻은 없으니.” 그 말과 함께, 거짓말처럼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결에 구름이 흘러가고, 달빛이 비췄다. 붉은 눈이 키리에를 응시하고 있었다. 칼리안을 제대로 본 키리에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옆에 선 히나는 영문도 모른 채 키리에를 따라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알아뵙지 못하고 감히 의심을 했습니다.” 그 말에 히나가 깜짝 놀라 이미 숙인 허리를 더 깊이 숙였다. “저는 키리에, 제 누이는 히나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은 고아입니다. 그래서 성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키리에는 칼리안에게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다. 칼리안은 그래, 하고 작게 말하며 둘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주었다. “그래서. 귀는 자른 거야, 아니면 잘린 거야? 잘린 거라면 그 정도는 내가 갚아줄테니까.” 히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 손으로 귀를 만지작거렸다. 직접 잘랐다는 뜻이리라.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카이리시스에서는 찾기 어렵지만, 지방 도시에서는 여전히 엘프 노예 밀매가 이루어지고 있을 시기였으니까. “말은, 원래 못했어? 아니면 그것도 갚아줄게.” 히나가 풋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왕자님이라기에 하늘처럼 높은 사람으로만 생각했는데, 마음을 써주는 것이 느껴졌다. “날 때부터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왕자님.” “다른 건. 갚아줄 것 없어?” 히나의 옷을 떠올린 칼리안의 질문이었다. 다행히, 히나의 고개는 이번에도 좌우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키리에를 가리켜 보였다. 키리에 덕에 아직 별 탈은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래.” - 제 누이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습니다. 가진 것 없는 하프엘프 소녀. 그것도 예쁘게 생긴. 자살의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았었다. 자책하는 키리에의 표정에서 전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히나가 자살한 뒤 키리에는 도박장의 사람들을 전부 죽였다. 그 길로 도망쳐 나와 세크리티아로 왔었다. “다행이다.” 그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어제 아스트리샤에서 너를 봤어.” 키리에가 놀란 얼굴을 했다. 사람들은 칼리안을 기억할지 몰라도, 칼리안이 사람들을 기억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기사들을 보고 있던데.” 키리에가 다시 한번 놀랐다. 칼리안의 말대로였기 때문이다. “네, 맞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마스터라는 사람이 키리에를 만나고 싶다 하여 잠시 밖에 나오게 된 차였다. 아주 잠깐 동안만 서 있다 다시 돌아갔었는데, 그 사이에 칼리안이 키리에를 알아봤던 것이다. “혹시 기사가 되고 싶은 건가?” 칼리안은 언젠가의 키리에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었다. - 키리에. 기사가 되고 싶은가? 검을 배울 수 없는 현실에 날개가 꺾이고, 하나 남은 혈육까지 잃은 채 카이리스를 떠나왔던 키리에는, 베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었다. - 검입니다. 저는 검이 될 것입니다. 낯부끄러운 말을 당당하게도 꺼내놓던 눈이 생각났다. 그 눈을 똑같이 가진 열 일곱의 키리에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아닙니다, 왕자님. 저는 기사가 아니라 검이 되고 싶습니다.” 여전한 대답이었다. 칼리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너희. 내 이름은 알아?” “네. 3왕자이신 칼리안 왕자님. 알고 있습니다.”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전에 되받은 금화 다섯 개를 히나에게 건넸다. 큰 돈이었으니 히나가 그것을 받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칼리안이 히나에게 물었다. “청소 할 줄 알아?” 끄덕끄덕, 히나가 말을 대신해 고갯짓으로 대답했다. “좋아. 이제 닷새 동안 좋은 데서 자고, 제대로 된 옷도 사 입고, 잘 먹고, 신나게 놀면서 지내. 키리에는 치료도 좀 받도록 해. 혹시 돈이 모자라면, 마법사 협회의 앨런 마나실이라는 사람 앞으로 달아 놔. 알아서 셈을 치를 테니.” 히나가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도박장에서 자신들을 구해준 사람이 왕자였고, 그 왕자가 돈까지 주는 상황을 맞이한 키리에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칼리안은 이들에게 돈이나 쥐여주러 온 것은 아니었다.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닷새 뒤에 왕궁으로 와. 와서, 나를 찾아. 다른 왕자랑 헷갈리지 마. 왕자들 중에 술 처먹는 나쁜 놈이 있어서, 잘못하면 큰일 나.” 술 처먹는 나쁜 놈의 악명이 왕궁 밖에까지 났는지, 히나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다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칼리안을 쳐다봤다. 왕궁으로 찾아오라는 말을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일단은 왕궁에서 지내. 편하게 있도록 배려해주기는 어려워. 일은 해야 해. 그래도 여기보다는 나을 거야. 아무튼 왕궁으로 오면, 좀 강아지처럼 귀엽게 생긴 얀이라는 애가 있을 거야. 걔가 하라는 대로만 하고 있어. 나는······. 그땐 조금 바빠서 곧바로 너희들을 만나지 못할 지 모르니까.” 말 못하는 히나가 키리에도 없이 혼자서 살 수 있도록, 당장의 도움을 주기가 어려웠다. 앨런의 집으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 키리에가 불안해 할 것 같았다. 어쨌든 앨런도 겉보기로는 매우 팔팔한 남자 사람이 아닌가? 그러느니 차라리 시녀로 두는 것이 나았다. 왕궁 생활을 싫어하면 그 때 가서 내보내도 늦지 않을 테니까. “다 이해 했어?” 끄덕끄덕. “좋아. 내가 몇째 왕자라고?” 손가락 세 개가 펼쳐졌다. “혹시 왕궁에서 일하는 게 싫다거나?” 도리도리. “며칠 뒤에 오라고?” 손가락 다섯 개가 활짝. “그래, 좋아.” 끄덕끄덕. 목이 아프지는 않을까 싶을 만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에,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히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을 뻔 했다. 키는 칼리안보다 더 작았지만, 그래도 히나의 나이가 두 살 더 많은 것을 기억해내서 다행이었다. 히나에게 할 말을 마친 칼리안이 몸을 돌렸다. 레이븐의 안장에 있던, 키리에를 위해 마련한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키리에에게 건넸다. “받아.” 키리에가 얼결에 검을 받아들었다. 휘두르기 딱 좋을 정도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 모습을 본 칼리안이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 검을 들어야 키리에지. “당장 기사가 되지는 못해. 내 방패 노릇 먼저 해야 해. 그렇게 해서라도 검을 배우고 싶다면, 나를 찾아와.” 키리에가 손에 들린 검을, 그리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내가 널, 최고의 검으로 만들어 줄 테니.” 왕자를 따르는 검. 지금의 키리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자리였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왜······ 저희에게 이렇게 큰 것을 주십니까.” 칼리안은 그저 짧게 답했다. “좋은 검이 필요해서.” 키리에가 마음을 먹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무엇을 고민하겠는가? 키리에가 칼리안의 앞에 엎드렸다. 간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겠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왕자님의 검이 되겠습니다.” 그래, 그 검을 구하러 내가 이렇게 왔지. 칼리안이 웃으며 키리에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보은이니. * * * 칼리안은 다행히 해가 뜨기 전에 테이난샤에 들어설 수 있었으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레이븐의 등에 드러눕다시피 한 상태로 이 곳까지 온 것이다. 일찍 일어난 것인지 아직 잠들지 않은 것인지, 마법사 로브를 걸친 몇몇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커먼 말 위에 사람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본 이들이 움찔 놀라며 황급히 물러났다. 그럴 때마다 레이븐의 발굽 소리가 커졌다. 행차를 하며 시선이 집중되던 일을 생각하는 것 같았기에, 그 등에 여전히 엎드린 칼리안이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폼 나는 상황 아니야. 부끄러우니까 좋아하지 마.” 모든 일을 마치니 긴장이 풀렸고, 몸이 또 아팠다. 그나마의 마력을 박박 긁어다 강제로 오러를 발현했으니, 아무리 약을 먹었다지만 한계가 온 것이다. 덕분에 레이븐의 등을 침대로 써야 했다. 그래도 레이븐이 영특해서 천만다행이었다. 왕도까지 알아서 찾아온 놈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제 때 돌아오지도 못할 뻔했다. 오래지 않아 앨런이 얘기해주었던 마법사 협회에 도착했다. 건물 안으로 비척비척 들어가니, 마법사들이 매우 반갑게 칼리안을 맞이해주었다. 에우리아라는 이름의 마법사 협회장이 직접 나오더니 칼리안을 4층의 한 방으로 안내했다. 그 곳은 작은 서재 겸 응접실이었는데, 사방의 벽에 세워진 책장에 온갖 마법 서적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장식용 나이프가 눈에 확 띄었다. 하필 칼리안이 지닌 것과 매우 비슷하게 생긴 나이프였던 탓이다. 앨런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잠을 자지 않고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앨런이 너무 반가워서, 칼리안은 순간 눈물이 핑 돌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스승님.” 앨런은 칼리안의 초췌한 꼴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싸웠습니까? 옷은 다 어디다 팔아먹고?”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싸움 안했습니다. 옷은, 그냥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도박장에서도 겁을 좀 주고 허세를 부린 것이지 싸운 것은 아니었으니까. 도박장의 불쾌한 냄새가 몸에 뱄는지, 살짝 코 끝을 찌푸리던 앨런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청량한 공기가 칼리안의 주변을 감싸안더니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클린 마법임을 깨달은 칼리안이 좋아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앨런의 맞은편에 풀썩 앉았다. 앨런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접으며 물었다. “볼 일은 모두 끝나신 겁니까?” “네, 일단은요. 한 달 뒤에 다시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뒤에도 데려와 주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책을 그대로 허공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책이 마치 새가 된 것처럼 팔랑 팔랑 움직여 책장에 꽂혔다. 칼리안이 그 모습을 홀린듯이 쳐다보자, 앨런이 설명을 해주었다. “이 건물 전체에 걸려 있는 마법이죠. 원하는 물건을 원하는 곳에 가져다 두도록 해 줍니다. 마법사들은 움직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신기하네요.” “뭐, 건물에 마법을 거는 것이 더 귀찮았을 테지만, 원래 그런 것이 마법사 다운 것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칼리안이 웃었다. 그러다, 유독 눈에 띄었던 물건을 보며 물었다. “마법사 답지 않은 물건도 있네요. 나이프라니.” 그 말에 앨런은, 칼리안의 시선에 닿은 것을 한참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묘한 음색이 흘러 나왔다. “그러게 말입니다. 나이프가, 있네요.” 앨런이 쓴웃음을 지었다. 칼리안은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이 되어 앨런을 마주 보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놓여 있었으나, 그것은 협회장 에우리아가 목숨보다 아끼는 보물이었다. 시스파니안이 직접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품에 숨긴 무기를 장식품의 형태로 보여주는, 일종의 경고를 위한 마법 물품이기도 했다. 그러니 책상 위에 장식용 나이프가 있다는 것은 칼리안이 지금 나이프를 가지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있어서는 안 될 것인데.” 앨런의 눈빛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이런 저런 것이 바뀌게 마련인데. 호기심이라는 것은 좀처럼 사라지질 않습니다.” 앨런의 뜬금 없는 말에, 칼리안의 얼굴에 다시 한번 의문이 들었다. 앨런은 그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마나를 운용하며 다른 말을 꺼냈다. “좀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이 방의 물건은 제 의지대로 움직입니다. 의지를 전달하는 방법만 알면 되는 일이니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어려울 것이 없지요.” 이런 말을 꺼낸 이유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아무래도 좀 주무시는 것이 어떻겠느냐 말하려던 칼리안의 입이 다물어졌다. “사람의 속마음이라는 것도. 그렇게 마음대로 움직이고, 들춰볼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책장에 놓여 있던 장식용 나이프가 조용히 떠오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만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으니.” 나이프가 칼리안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장식용이라 하기엔 다소 날카로운 칼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본 칼리안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스승님.” “······ 이렇게라도 열어볼까 하여.” 장난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앨런은 멈추지 않았다. - 쌔애액! 나이프가 칼리안의 목을 향해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날아들었다. 위험을 느낀 칼리안의 손이 본능을 따라 움직였다. - 카앙! 날과 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찢어질 듯이 울렸다. 그리고 완전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앨런은. 어느새 뽑혀 나와 칼리안의 손에 들려있는 나이프와, 그것에 튕겨 벽으로 날아가 꽂힌 또 하나의 나이프. 그리고 검의 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칼리안의 눈을 쳐다봤다. 칼리안은 아무 말 없이 앨런을 바라보고 있었고, 앨런은 그런 칼리안의 눈빛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을 뚫고, 앨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설명. 해주시지요.” ────────────────────────────────────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7) 칼리안은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칼리안의 목 앞에서 나이프가 멈추었다는 것을, 막지 않아도 될 공격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손에 들린 칼이 그리도 원망스러울 줄은 몰랐다. 조금 전 벽에 날아가 박힌 나이프가 저절로 뽑히더니, 앨런의 손 안으로 들어갔다. 칼날에 깊은 검흔이 남아 있었다. “정말 빠르십니다. 그런 몸으로.” 그렇게 입을 연 앨런은 그리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나이프를 막을 것이라는 것을 익히 예상했다는 태도였다. 입을 열지 못하는 칼리안을 보며, 앨런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입을 열고자, 앨런이 대신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뵈었던 날. 왕자님이 한참 전부터 저를 기다리고 서 있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궁금했지만, 우연이겠거니 생각했지요. 그것을 묻기엔 왕자님께서 이미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고, 다른 생각을 하기엔 조금 바빴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들켰다는 말이었다. 칼리안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 않고 칼리안을 도왔던 사람에게 믿음을 운운했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그런데 이상한 것이 점점 늘어나더군요. 르메인은 왕자님이 말을 무서워한다고 하였고, 귀족들은 왕자님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며 신기해하고. 공연장에 갔던 마법사는 왕자님이 사고를 막아냈다 하지를 않나.” 칼리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공연장의 일을 앨런이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까 했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이 또 있었습니다.” 허탈한 웃음이 칼리안의 입가에 맴돌았다. 또 있다니. 이래서는, 얀이 왜 칼리안을 의심하지 않는지를 고민해야 할 판이었다. “중독됐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때 왕자님 눈에 살기가 보였습니다. 헌데 또 금방 지우더군요. 그 눈은, 나비 한 마리 죽여보지 못했을 왕자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손에 어지간히도 많은 피를 묻혀본 자나 그런 것을 뿌리고, 또 멋대로 거둘 줄 아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 하나 뒤얽힌 실타래가 풀리질 않아서, 저는 밤새 그것을 고민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거기까지 말한 앨런이 손에 들린 나이프를 살짝 들어보였다. “시스파니안이 만든 것입니다. 숨긴 무기를 보여준다기에 올려두어 보았는데, 화분이었던 것이 나이프로 바뀌더군요. 왕자님께서 나이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고, 또 왕자님은 살기를 내보일 줄 아는 분이니. 혹시나 하여 건네드려 보았습니다.”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실소하며 대꾸했다. “목젖을 뚫을 기세로 건네주셨는데.” 앨런은 고개 숙여 다시 한번 사과의 뜻을 보인 뒤 말했다. “저는 왕자님을 믿고 제 삶의 한 면을 고스란히 맡겼습니다. 처음으로 만든 제자라는 놈이 꽁꽁 숨겨놓고 풀어놓지 않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의심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설명해주시지요. 듣겠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신이 진짜 칼리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니, 더 숨길 것도 없었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칼리안은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꺼내놓기로 했다. 그리하여 조용히 눈을 감고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베른입니다. 본래의 제 이름입니다. 베른 세크리티아.” 세크리티아. 앨런의 어깨가 움찔했다. 이 시점에 튀어나온 그 이름이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체이스, 그리고······. 칼리안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었으므로 이름을 들은 앨런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탓이다. 때문에 계속되는 칼리안의 말이 앨런에게는, 진실을 원했으니 모두 듣고 함께 감당하라는 듯 느껴졌다. “지금의 왕세자, 제가 있던 시간에서는 왕이셨던. 체이스 듀라한 세크리티아의 동생이었습니다. 기사였고요. 그래서 말도 타고, 살기도 다루고, 칼도 좀 쓸 줄 압니다.” 그렇게,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세크리티아의 왕자였던 베른이 세자위를 받지 않으려 기사가 되고, 체이스가 왕위에 오른 것. 그리고 이어진 카이리스와의 전쟁. 수도 세크레타를 둘러싼, 학살과도 같았던 마지막 일주일. 왕을 수호해야 할 친위대까지 왕을 두고 성 밖으로 나서야만 했던 절망적인 상황. 모두가 죽고 홀로 성문 앞을 지키던 베른마저 결국 죽음을 맞이한 것까지. 칼리안에게 있어 과거가 된 이야기를 모두 풀어놓았다. 그리고 칼리안은 한번 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세크리티아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 달그락. 앨런이 테이블에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다음 말을 들으면, 그것을 떨굴 것 같아서였다. “시간의 축이라는 그것은.” 이번엔 앨런이 눈을 감았다. 나이프를 내려놓으니 대신 심장을 떨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앨런의 얼굴에 그 동안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혼란스러움이 나타났다. “스승님께서는 믿기 어려우셨겠지만,” “······시간을 되돌린다 하였지요.” 칼리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앨런이 말한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런 칼리안을 한참동안 쳐다보던 앨런이 물었다. “언제로, 돌아오셨습니까.” 칼리안의 입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이 아닌가! 당장 설명부터 듣고 싶었다. 하지만 앨런의 얼굴은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손 끝이 떨려오는 것을 간신히 붙든 칼리안이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달······ 한 달 전입니다. 눈을 뜨니, 얀이 저를 깨우고 있었습니다. 10년의 시간을 앞당긴 채였습니다.” 왜 그것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밤새 고민을 해놓고도. 앨런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는 말 없이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므로, 칼리안은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기다렸다. 비로소 앨런의 입이 열린 것은, 어느새 창문 틈 새로 햇살이 들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이미 독에 당한 상태였을 테고. 본래의 칼리안 왕자가 어찌 죽는지도 알고 계셨을 것이니. 제가 올 것을 알았다는 듯 기다리다 나온 것은, 그런 이유였군요.” 칼리안이 침통한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 날의 일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첫날의 패기는 다 어디다 두고, 어미 잃은 고양이 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칼리안을 지긋이 쳐다보던 앨런이 말했다. “어차피 왕자님 앞길에 쓰려고 저를 찾으셨던 것이니, 미리 알고 기다렸든 아니든 상관치 않습니다. 그런 일로 실망하지 않으니 마음 쓰지 마시지요.” 앨런은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시간의 축을 어찌 알았는지 말해주기 전에 칼리안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다만, 왕자님께서 먼저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칼리안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앨런이 꺼내는 말은 모두 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 세크리티아에는 체이스 왕세자 뿐입니다. 체이스는 본래부터 외아들이었고, 왕비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아마도 모르시는 듯 하여.” 칼리안이 말 없이 앨런의 눈을 보았다. 앨런이 우려했던 것 같은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제가 여기 있으니 베른이 또 있을 수는 없으리라고요. 그것이 이른 죽음일지 무엇일지 몰라서, 어찌 사라졌을지가 걱정이었는데. 아예 태어나지 않은 것이군요.” 삶이 지워진 것은 어떤 기분일지, 가늠이 어려웠다. “그리 된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앨런은 어줍잖은 위로 대신 그렇게만 말했고, 칼리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차라리 다행한 일입니다.” 어찌하겠는가. 칼리안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이미 베른도 다른 이의 생을 빼앗지 않았는가. “허면, 본래의 칼리안 왕자는 죽은 것입니까?” 앨런은 마치 칼리안이 누구를 떠올렸는지를 읽은 것처럼 물었다. 지금 이 순간도 옛 칼리안이 살아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칼리안은 자신의 머리를, 그리고 심장을 가리켜 보였다. “아직 있습니다. 예정된 날이 되면 떠날 것 같지만요.” 칼리안의 말에 대답처럼 떠오르는 기억들.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는 것을 문득 알게 되었다. 항상 질문을 해야 기억이 떠올랐던 것은, 그것이 바로 옛 칼리안의 대답이었기 때문이었음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무슨 일을 겪어 제가 이 곳에 들어온 것인지는 알려주질 않습니다. 옛 칼리안도 모르는 상태일 수도 있고요.” 앨런이 고개를 끄덕여 알겠다는 뜻을 전했다.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시간의 축. 어떻게 아십니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앨런이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답했다. “작년에 세크리티아를 방문했습니다. 체이스가 비밀리에 불렀지요. 시간의 축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며, 그것에 대한 자문을 구했습니다. 저는 체이스만 만난 후 돌아왔으니, 이전 시간에 같은 일이 있었다 해도 왕자님은 모르셨을 겁니다.” 칼리안이 바짝 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 따로이 알아보고 계셨던 거군요.” “혹시 기대하실까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죄송하게도 그에 대해 달리 알아낸 것은 없었습니다.” “아니요, 그럴 것이라 생각 했습니다.” 앨런이 알아낸 것이 있었다면 베른도 알고 있었어야 했으니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앨런이 다시 말했다. “다만 그것이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은 아닌 듯 하여, 세렌티의 신물은 아닐까. 그런 의견은 주고 받았습니다만.” “신물은 신관들이 쓰는 것 아닙니까? 신력을 대체하는 수단이지, 신물 자체가 다른 능력을 가졌던 적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양신 전쟁으로 악신이 봉인되고, 주신 세렌티는 잠들었다. 그 이후로 신관들은 신력을 발현하지 못했다. 때문에, 세렌티의 신물에 남은 신력을 소모하여 치유력을 행사했다. “의문만 남았지요. 게다가 이제는 그것에 대해 확인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앨런의 손이 칼리안을 향했다. “한 달 전, 시간의 축이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이렇게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온 모양이군요. 아무튼, 체이스나 왕자님이나 이 일로 저를 찾으신 셈이니. 형제는 형제라고 해야 할지.” 그 말에, 칼리안이 조금 아프게 웃었다. 앨런은 그것을 보지 못한 척 했다. 대신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나이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저를 처음 보셨던 날, 왕자님께서 원하는 것은 왕좌가 아니라 하셨었는데. 그렇다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대답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칼리안이 선뜻 답했다. “전쟁을 막으려 했습니다.” “전쟁의 원인이었던 시간의 축은 이제 사라지고 없지요.” 그렇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닌지를 묻는 말이었다. 칼리안이 답했다. “플란츠가 시간의 축을 가지려고 했던 이유를 모릅니다. 문제가 있었다면 해결을 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체이스를 위해서입니까?” 칼리안이 앨런을 쳐다봤다. 질문의 의도를 알기 어려웠다. 그것을 눈치챈 앨런이 설명을 덧붙였다. “체이스를 만나보고, 제가 아주 감탄했습니다. 인품이며 학식이며 능력이며.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더군요. 카이리스 왕자 셋을 다 합쳐도 체이스 하나만 못 할 겁니다.” 백 번 천 번 맞는 말이었다. 무슨 말로 설명해도 체이스를 온전히 칭찬할 수는 없으리라. “맞습니다. 형님은 더 없이 훌륭한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카이리스의 3왕자는, 그리 훌륭한 세크리티아의 왕세자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과거에 매여 살지 말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곳에 온 첫 날에 베른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은 버렸습니다. 칼리안으로 살테니 걱정마세요. 다만, 카이리스에서 왜 전쟁까지 불사하며 시간을 돌리려 했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것만은 알아내야 합니다. 같은 일은 또 반복될테니.” 앨런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탁자의 나이프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한번 물어볼 만한 이는 있지요. 저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저나 체이스는 만나지 못하지만. 왕자님께서는 머지않아 만나시게 될.” 앨런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린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들어 앨런을 쳐다봤다. 답을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젤리타.”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이름이 떠올랐다. “시스파니안이 있군요.” 로젤리타, 카이리스 왕자의 성인식. 시스파니안의 빈 둥지를 찾아가, 진짜 왕족이 되었음을 알리는 의식이었다. 그리고 로젤리타에 나선 왕자는 시스파니안의 의지와 만난다 하였다. “그러니. 독차, 하루라도 빨리 해결하십시오. 코끼리들의 땅, 지그프리드의 영지는 꽤 멉니다. 준비하셔야지요.”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1) 아침이 되어서야 궁에 돌아와 한 숨을 자고 일어나니, 눈이 시뻘겋게 변한 얀이 바로 옆에 앉아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뜨악한 칼리안이 튀어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뒤로 뺐다. “깜짝아! 왜 그래!” 얀의 눈에 핏줄이 서고 눈 밑이 거무죽죽한 것이, 도무지 잠을 잔 모양새로 보기가 어려웠다. “밤새 기다렸으니 너도 좀 자라고 했잖······?” “왕자님.” 진지한 표정을 지은 얀이 칼리안의 말을 잘랐다. “모닝 티. 왜 드십니까?” 독이 들었는지를 의심하는 것 같아서, 칼리안은 뚱한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네가 줬잖아?” 작은 책망을 담은 말이었다. 물론 몰랐던 것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정작 당사자인 칼리안도 독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단지, 아침마다 저 차를 꼬박꼬박 가져다 준 둔하디 둔한 성실함에 아주 조금 심술이 났을 뿐이었다. 그런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하고자 한 것의 답을 듣지 못한 얀은 침대 옆의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그 곳에는 아직 마시지 않은 모닝 티가 있었다. 얀은 그것을 들어 주저 없이 제 입으로 가져갔다. 칼리안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칼리안이 얀의 입에 닿으려는 찻잔을 뺏어들었다. 그 바람에 찻물이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갈색의 물이 카펫에 스미는 것을 쳐다보던 얀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 꼴을 본 칼리안도 화가 치밀었다. 숨긴 것을 말하라며 죽이려고 들질 않나, 죽으려고 들질 않나. 곱게 물어보질 않고 다들 왜 이렇게 극단적인지! 칼리안이 얀을 향해 무섭게 소리쳤다. “뭐하는 짓이야!” 그리고는 다급히 손을 뻗어 얀의 얼굴을 살폈다. “삼켰어?” 얀이 칼리안의 손을 치웠다. 평소 같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그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말 없는 얀이 답답해진 칼리안은 다시 소리를 높였다. “먹었냐고!” “안 먹었습니다!” 얀이 마주 소리질렀다. 칼리안은 그런 얀을 질책하지 않았다. 잠시 뒤, 얀이 입을 열었다. “제가 제 손으로 왕자님께 독을 드렸군요.” 그리고는 다른 말 없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 표정에 얀이 하고 싶은 말이 모조리 드러났다. 온갖 욕설과, 분노, 그리고 후회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욕설과 분노는, 칼리안이 아닌 얀 스스로를 향해 있었다. “칼도 못 쓰시는 분이 나이프를 구해오셨기에, 왜일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그놈의 나이프. 괜히 샀다! “왕자님의 상태와 연관 짓게 됐습니다. 마나실 경이 준 약을 떠올리니 리베른에서 독살당한 마나실 경의 아드님이 생각났고.” 칼리안이 깜짝 놀라 얀을 쳐다봤다. 앨런의 일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제야 자신을 처음 보았을 때 앨런이 왜 그렇게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는지, 어떻게 자신의 상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는지가 이해되었다. “그러다 보니 독을 염두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이 이어지다가. 모닝 티, 저것이 아닐까 하고.” 찻잔을 뺏었을 때 이미 긍정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 성격에 혹여 또 울고불고 자책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이번의 얀은 생각보다 냉철하게 대응했다. “실리케입니까?” 평소 얀은 실리케를 저리 부르지 않았다. 맞다고 했다가는 당장이라도 헤이시아 궁에 쳐들어갈 태세였다. 칼리안이 그런 얀을 잠시 바라보다가, 가만히 대답했다. “왜. 복수해주려고?” “못할 것도 없지요.” 차갑게 식은 목소리였다. 얀의 주먹에서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코끼리들은 그냥 있어. 전쟁 나.” 뭔가를 말하려던 얀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 칼리안이 한 소리를 머릿속으로 되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얀은 한참동안 말을 잃은 채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러다 결국은 놀란 목소리가 입술 새를 비집고 나왔다. “······헐.” 애초에 슬레이만과 닮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하루 종일 얀과 붙어다니는 칼리안이 몰라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설마설마 하기는 했으나, 앨런을 붙들려 왕궁을 나갔음을 알았을 르메인이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완전히 눈치를 챘다. 물론 그들을 코끼리라 부르는 것은 앨런 덕에 알았다. 아무튼, 독차 하나 물리자고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의 전쟁을 불러올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얀은 개입하면 안된다. 칼리안은 앞에 앉아 눈을 꿈뻑거리는 새끼 코끼리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일이니까 그냥 둬.” 초식동물은 초식동물 답게. 그들의 신념이 상처 입지 않도록. “어차피 화요일에 해결될거야.” 느긋한 목소리로 말한 칼리안이 잔에 남아 있던 차를 마셨다. * * * 칼리안은 마차를 보내 앨런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얀이 예상했던대로, 사절단 송별식과 오찬이 왕자들의 참석 없이 진행되어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앨런은 칼리안을 만나기가 무섭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그간 마법사들이 모아둔 정보들을 추린 것이었다. 칼리안이 반가운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협회에도 고생 많았다고 꼭 전해주세요.” “가져와 달라고 하셔서 드리기는 합니다만, 보시다시피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칼리안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니까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것을 나중에 보기 위해 일단 금고에 넣어두도록 한 칼리안이, 앨런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앨런이 진행해야 할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기 때문이다. “잠시 걸으시죠.” 하늘이 계속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하지만 앨런과의 대화 내용이 새어 나갈 것을 우려한 칼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방을 나섰고, 앨런이 묵묵히 발을 옮겼다.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이 그렇게 운을 뗀 것은, 이 곳에 온 첫날 시스파니안 조각상을 보며 분을 삼켰던 바로 그 자리를 지나칠 즈음이었다. 그리고 칼리안의 목소리가 나옴과 동시에, 둘의 주변에 얇은 막이 생겼다. 사일런트였다. 굳이 나올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안 칼리안이 겸연쩍게 웃었다. 그런데 둘이 걷는 걸음을 따라 막도 함께 움직였다. 그 막을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면 얀이 앨런에게 할 말이 좀 있었을 터였다. “마법사 스승님을 두니 좋네요.” “편히 말씀하시지요.” 그렇게 말하며, 앨런이 칼리안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제가 본격적으로 마법에 손을 대면, 실리케든 브리센 후작이든 견제를 하고 싶어 할 겁니다. 어떻게든 방해할 명분을 만들려고 머리를 굴리겠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심해질테고요. 물론 스승님의 이름이나 협회만으로도 대응할 수는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스승님께서 보다 제대로 된 세력을 가지시는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앨런이 슬쩍 웃었다. 말을 꺼내는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저를 방패로 쓰실 생각입니까?” “아시다시피 쓰임새가 너무 많으시니. 다만, 방패라기보다는.” 칼리안은 지금 생각하는 말을 조금 더 멋있게 꺼내놓고 싶은 마음에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마땅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마법사 다운 비유를 포기하고 간단히 말했다. “무기입니다. 브리센의 기사단을 견제할 정도는 될 테고요.” “그것 참.” 앨런이 살짝 웃었다. 본격적으로 재미있는 일이 생기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기대되는군요.” “네. 마음에 드실 겁니다.” “어떤 무기가 되어 드리면 될런지요?” 칼리안이 생각을 정리하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곧 둘은 장미 정원이 있는 곳에 들어섰고, 칼리안이 대답했다. “마법사단.” 앨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앨런에게는 익숙한 단어가 아니었다. 기사단도 아니고 마법사단이라니. “말 그대로, 마법사로 구성된 군대입니다.” 카이리스의 마법사단, 발칸.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칼리안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냈다. 어찌 잊을까. 베른의 생과 세크리티아를 앗아갔던, 오로지 마법사로만 이루어진 군대의 힘을! - 순백의 악마들. 세크리티아의 사람들은 그들을 이렇게 불렀다. 하얀 갑옷과 하얀 망토, 그리고 하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들이 나타나면, 어김 없이 재앙이 내렸다. 성곽을 파괴하고, 계곡을 메꾸어 길을 내고. 도시를 불태우며 기사들을 얼려버린 집단. 속수무책으로 세크리티아를 잃게 한, 그것은 진정 악마였다. 그리고 지금의 시기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을 만드는 겁니다.” 칼리안이 다시 발을 옮겼다. 의외로 앨런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 뒤를 따랐다. 칼리안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했거나, 혹은 거부감이 든 까닭은 아니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앨런이 짧게 물었다. “가능하겠습니까?”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반응이었다. 모두가 그랬으니까. 르메인이 마법사들을 모아 군대를 만들겠다 했을 때, 비웃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들었다. “마법사라는 족속을 아시지 않습니까. 단체 행동에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기사처럼 함께 훈련받고 성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지금 앨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법사들로 어찌 군대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군대가 제대로 돌아가기는 하겠는가? 라고. “가능했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말보다 확신을 주는 대답이었다. 이미 지난 과거이자 미래에 대한 증언이었으니까. 르메인이 마법사를 홀대하던 입장을 하루 아침에 바꾸어 마법사단을 만든다 했을 때, 브리센에서는 그에 대해 반대할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고. 덕분에 만들어졌다. “그것도, 이 카이리스에서 해냈습니다. 오로지 르메인의 손 안에서 이루어졌던 일이예요. 한 번 가능했으니, 시기를 앞당긴다 하여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앨런이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만들고 운영해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알려주어야 할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앨런의 생각을 잠시 방해했다. “제대로 된 군대가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마법사단이 완전한 모습을 갖춘 직후, 르메인이 죽었습니다.” 의문사였다. 어떻게 죽었는지 그 사인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완성된 마법사단은 고스란히 플란츠에게로 넘어갔다. 그런 이유로 마법사단의 힘은 르메인이 아닌 플란츠가 실감했고, 세크리티아는 통감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위험할테고요. 단순히 스승님의 명성으로 마법사를 모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요.” 앨런이 새로운 일을 맡기는 제자의 담담한 얼굴을 쳐다봤다. 칼리안은 지금 이것이 위험한 일이니 할 수 있겠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위험이 따르니 참고하라는 소리였다. 그리하여 앨런은, 칼리안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전하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제가, 마법을 좀 잘 씁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시작은 쉽지 않겠군요.” 만약 앨런이 나서서 마법사단을 만든다 하면, 브리센 가문은 이전에 르메인이 일을 추진했을 때처럼 무시하고 넘기지만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방해가 있을 터였다. “그래서 지금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잠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쳐다보다, 이번 일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조만간 르메인이 실리케와 선물을 주고 받을 일이 한번 더 생길 테니까요.” 플란츠의 실수를 봐주는 대신 브리센 상단의 이득을 일부 줄인 것과 같은 일이 또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앨런이 매우 반겨하며 말했다. “드디어 독차를 물리시는군요.” 말 뜻을 곧바로 알아 듣자, 칼리안이 혀를 내둘렀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사람을 속이려고 했는지. “눈치 진짜 빠르시네요. 맞습니다. 차, 이제 치우려고요. 다만 이전에도 얘기한 것처럼, 이번 일로 실리케를 처벌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도 조금 다른 방법을 쓸 생각이고요.” 마법사 증언과 크리모사 수입 만으로는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독차를 주었다는 증거가 될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독차를 마신 것이 밝혀지면 칼리안의 주변인들이 줄줄이 피해를 보게 되므로, 칼리안은 그것으로 실리케를 처벌할 생각을 아예 그만 두었던 터였다. “어떤 방법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앨런이 이렇게 묻자, 칼리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실리케가 제게 독을 썼다는 것을 협상의 빌미로 잡을 수 있도록은 해 놓을 테니, 실리케의 죄를 눈 감아 주는 대신 마법사단 창설을 방해하지 말라 요구하시면 됩니다. 얼마 전 플란츠의 말실수에 이어 실리케까지 사고를 친 것이니, 브리센에서도 크게 거부하지 못할 겁니다.”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를 물리는 일에 대해서는 마법사 협회에서 도와주실 것이 있습니다. 정리가 되면 부탁을 좀 드리겠습니다.” “언제든 말씀하시지요.” 흔쾌히 대답한 앨런이 잠시 누군가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독차 문제가 해결되면 르메인도 한시름 놓겠군요.” 독차와 마법사단을 얘기하는데 왜 르메인 이름이 나오나? 칼리안이 이런 눈으로 앨런을 쳐다봤다. 그제야 앨런은 이 곳에 왔던 날 르메인에게 화를 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열심히 편을 들어준 것에 감사를 전한 칼리안이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 덕분에 이번 일로 얻을 것이 늘어나겠네요. 운이 좀 따라야 되겠지만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왕자를 살해하려 한 정도의 큰 실책을 저들이 언제 또 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반드시 이번에 협상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마법사단의 윤곽이라도 계획되어 있어야 하고요. 그러니까 곧바로 시작해주세요. 르메인과도 의견을 나눠봐 주시고요. 분명 르메인이 생각하던 것이 많을 겁니다.” 앨런이 속마음과 다른 말로 엄살을 부렸다. “늙은 스승을 너무 부리시는군요.” “몹시 팔팔하시다고, 얀이 그러던데요. 그래서 가책 없이 부리려고요.” 앨런의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사일런트 막 안을 작게 울렸다. “그리하시지요.” ──────────────────────────────────── 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2) 어제 하루 종일 날이 흐리더니 결국은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물과 바람 소리 때문에 칼리안은 새벽같이 잠에서 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 맞이를 위해 얀이 칼리안의 방을 찾았을 때,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칼리안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좋은 꿈 꿨어?” 그것은 항상 얀이 묻던 아침 인사였으므로, 얀은 어색한 얼굴로 칼리안의 인사를 받았다. “네, 왕자님. 좋은 꿈 꾸셨습니까?”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차를 달라는 것이다. 얀이 영 못마땅한 얼굴로 건네는 차를 받은 칼리안이 그것을 한 입 마셨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찻잔에서 살짝 입을 뗐다. ‘다르다.’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마시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만큼의 작은 차이였으나 분명했다. 이유를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실리케가 독을 늘렸다는 것을. 칼리안이 잔에 다시 입술을 가져다 대며 살짝 웃었다. ‘실리케. 독기가 올랐구나.’ 축제 기간 동안 속만 뒤집어 놓으려고 했더니 이성도 뒤집어버린 모양이었다. 칼리안에 대한 귀족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으니까. 그럼 이번에도 모르는 척 마실 것인가. 혹은 물릴 것인가. 찰나와 같은 고민 끝에, 칼리안은 남은 차를 모두 마신 뒤 얀에게 돌려주었다. 당장 죽을 만큼 양을 늘린 것이 아니라면, 화요일까지는 큰 문제가 없으리라는 결론을 낸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채로 아침 준비를 끝낸 시녀들을 돌려보낸 얀에게, 칼리안이 말했다. “수요일에 두 명이 찾아올거야. 하프엘프니까 놀라지 말고.” 그 말에 얀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 말했다. “호위입니까?” “응. 오빠가 키리에. 동생은 히나. 키리에가 호위야. 그런데 신원 확인이 안돼. 성도 모르는 상태라서. 그것 때문에 너에게 부탁을 좀 하고 싶은데.”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얀이 살짝 웃었다. 왕궁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원 확인이 되어야 하는데 둘은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때문에 얀에게, 이들의 신원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증해달라 부탁하려던 칼리안이었다. 그런데 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경우라면 저희 가문보다는 마나실 경의 보증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예 경이 리베른에서부터 데려온 아이들이라 하면 성이 없어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테니까요. 혹시 타국의 사람이라 안된다 하면, 그땐 저희 가문에서도 보증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다른 말을 하지는 못할 거예요.” 칼리안이, 얀을 다시 봤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지금 좀 능력있는 사람 같아 보였어.” 그 말에 헤벌쭉한 표정이 되었던 얀이 흠흠거리며 얼굴을 다시 고쳐 붙였다. 그리고선 셔츠 핀이 돌아간 것을 똑바로 해주고 물러나며 물었다. “엘프들은 신력이 아닌 다른 것으로 치유의 힘을 쓰기도 한다던데, 그 남매는 그런 능력은 없는 겁니까?” 칼리안이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쳐 보이며 대답했다. “치유력이 있다 해도 나에게 굳이 도움이 될 것도 아니고. 그런 얘기 들은 적 없어.” “하긴. 그렇긴 하네요.” 갑자기 창 밖에서 번개가 번쩍이며 천둥이 쳤다. 게다가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창 밖을 보던 칼리안이 말했다. “오늘 일정, 사냥 뿐이었지?” “네. 조찬 후 사냥 대회가 있습니다······ 만.” 그렇게 말한 얀의 눈도 창 밖을 향했다. “취소되겠네.” 조금 아쉬웠다. 축제 첫 날을 제외하고는 귀족들의 앞에 나서지 않았으니 기간이 더 지나기 전에 한번 더 눈도장을 찍을 요량이었는데, 그것이 무산된 까닭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창문에서 눈을 뗀 칼리안이 말했다. “오늘 잠깐 스승님께 다녀와줘. 언제 가든 상관은 없고.” “네, 왕자님. 무엇을 전할까요?” “전하께서 화요일 회의를 10분 정도만 지연시켜주시도록 부탁해달라고 해줘.” 의도를 알기 어려운 말이었으나, 얀은 달리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왕자님. 조찬 마치시면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칼리안은 그 외의 별다른 말 없이 준비를 마치고 식당으로 갔다. 플란츠는 나오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플란츠도 축제 이후 계속 조찬에 나서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 지금부터 화요일까지는, 플란츠가 이 자리를 망쳐놓으면 안 되니까. 유리창을 타고 어지러이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보는 칼리안의 귀에, 식사를 마친 란델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은 창 밖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그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정상적인 대화가 나온 것도 그렇지만, 칼리안이 란델에게 먼저 말을 붙이는 것도 처음이었다. 때문에 란델이 발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그 깊은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보았다. 그에, 칼리안도 고개를 돌려 란델을 향했다. 어쩐지 처음으로 그 눈을 제대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장미 정원에서 맞닥뜨렸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 드는 것이다. 사람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려 하는, 푸른 눈.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지 알 것 같아서, 칼리안은 편안한 웃음을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산책을 했고, 장미를 봤고. 란델 형님께서 가꾸시던 것이 문득 생각이 나서 말씀드린 겁니다. 다른 뜻 없습니다.” 물론 의도까지 없지는 않았다. 이제 나를 좀 보라는 마음에서 꺼낸 말이었다. 그래야, 화요일의 칼리안에게 란델이 힘을 보태 줄 수 있을 테니까. 란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그래.” 정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짧은 말만 내려두고는 식당을 나갔다. 뒤에서 얀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칼리안이 뒤를 보자, 얀은 달이 두 개로 갈라지는 것을 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곧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가는 칼리안에게 얀이 다가와 작은 소란을 떨었다. “장미라니요, 왕자님!” 칼리안이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장미가 왜?” “오늘 14년만에 처음으로 란델 왕자님께 먼저 말씀하신거예요. 장미가 필 것 같다고, 의미라고는 개똥만큼도 없는 말을요!” “개······똥?” 칼리안의 표정이 굳었다. 제 말에 놀란 얀이 황급히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칼리안이 얀에게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너 요즘 자꾸 버릇이 없어지는데.” “죄송합니다, 왕자님.” 그러니까 너같은 사람이 대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느냐고. 칼리안이 그런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러다 돌연, 기침이 나왔다. - 콜록! 그 소리에, 장난처럼 울상을 짓던 얀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얀이 불안감을 가득 담은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 왕자님.” 칼리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대답했다. “어제 창문을 열고 잤어. 비가 올 줄을 모르고.” 거짓말이었다. 목을 타고 올라오는 비릿한 향에, 칼리안이 눈을 내리깔았다. * * * 도무지 그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내리던 비는 월요일의 오후가 되어서야 쏟아지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마치 언제 비가 왔었느냐는 듯 티 없는 햇빛이 들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반가운 햇살에, 건물 사이사이에 이어진 빨랫줄에는 젖은 옷들이 한가득 널렸다. 겨울이 유난히 혹독한 카이리스에서, 이제 완연한 따뜻함이 느껴지는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타고 여러가지 색의 옷들이 꽃잎처럼 흔들렸다. 보고 있는 마음에 절로 졸음이 밀려올 듯한 그런 봄날이었다.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흔들거리는 옷가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히나는, 옆에 앉아있던 키리에에게 손짓을 보냈다. 수화였다. - 반짝반짝. 테이블에 놓인 검을 애지중지 닦고 있던 키리에는, 히나가 고개를 든 순간부터 이미 히나의 눈과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움직임을 느끼는 감각도 좋았지만, 동생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하다 보니 히나가 조금만 움직여도 쳐다보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히나. 햇빛이 반짝여?” 그렇게 묻자, 히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아니. 사람들. 반짝반짝, 기분 좋아 보여. 사람들이 반짝인다니. 키리에가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그나마도 히나의 앞에서만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 모습을 본 히나의 손이 키리에를 가리켰다. - 오빠도. 그 말에, 키리에는 멀리 보이는 왕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칼리안을 만났을 때 다쳤던 얼굴은 치료를 받아 이미 말끔히 나은 상태였다. 그래서 키리에는 그날보다 훨씬 더 좋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좋아.” - 왕궁, 내일이야. 그렇게 말하는 히나는 굉장히 들뜬 얼굴이었다. 칼리안이 ‘닷새 뒤에 오라’고 말한 것의 의도는 분명 수요일이었다. 이들 남매를 만난 것이 금요일 새벽이었기 때문이다. 키리에도 그렇게 이해를 하였는데 히나는 달랐다. 칼리안을 만난 뒤 금요일 아침이 밝았으므로 금요일도 하루 뒤로 보아야 한다면서, 화요일에 왕궁에 가야된다고 유난히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둘은 결국 중간 시간, 즉 화요일 저녁 때 왕궁에 가는 것으로 협의를 본 상태였다. 그 뒤로 히나는, 이렇듯 왕궁에 가는 날을 손꼽아가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키리에가 다 닦은 검을 검집에 넣으며 물었다. “히나. 가면 다시 일해야 하는데, 괜찮아?” 히나가 위 아래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사흘만에 비추는 햇살보다 더 밝게 웃었다. - 왕자님, 보고싶어. 그 말을 들은 키리에의 표정이 약간 경직되었다. 그러자 히나가 생긋 웃으며 몇 개의 동작을 덧붙였다. - 잘생겼어. 오빠보다. 훨씬, 더. 많이. 눈에 넣어도 안아플 여동생의 손이 만들어내는 단어가 늘어날 때마다, 검을 쥔 키리에의 손에 아주 조금씩 더 힘이 들어갔다. 그 모습에, 히나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했다. 사실 히나는 자신보다 키리에가 왕궁 갈 날을 더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틈만 나면 여관 뒷마당에서 검을 휘두르고, 검이 닳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닦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곧 히나의 손이 키리에의 앞에 있는 검을 가리켜 보였다. - 칼, 어떻게 가지고 가? 당연히 왕궁에는 무기를 소지하고 들어갈 수 없었다. 옛 추억에 빠져 허우적 거리느라, 검을 사줄 생각만 했지 그것을 어떻게 들고 왕궁에 들어올지는 생각 못한 칼리안의 실수였다. 키리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생각해 두셨겠지.” 키리에는 벌써부터 칼리안에 대한 믿음이 차고 넘쳤다. 어쩐지 그것이 조금 과한 것 같았으나, 히나는 굳이 짚고 넘어가진 않았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 아이스크림 또 사줘. 맛있었어. 어제 처음 먹어 본, 봄 딸기가 가득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생각한 히나가 행복한 얼굴을 하며 이렇게 졸랐다. 키리에가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준 돈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가자. 사 줄께.” 히나가 봄꽃처럼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 무엇보다 더 반짝이는 동생을 보는 키리에의 얼굴에도 한번 더 작은 미소가 피어 올랐다. * * * 사흘간 계속된 폭우로 마지막 조경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아, 아스트리샤에 세워진 왕립 미술관 개관식이 일주일 미뤄졌다. 덕분에 그 시간 만큼 여유가 생겨야 했으나, 르메인은 그런 사치를 누리지 못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마법사 때문이었다. “한번 봐주시지요.” 마법사들의 말은 8할이 서론이라는데, 이 작자는 그런 면에 있어서는 유난히 마법사 답질 않았다. 처음 만난 날에는 다짜고짜 집을 내놔라, 자식 좀 잘 챙겨라 하더니 이번에는 곧장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르메인은 앞에 놓인 서류 뭉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족히 한 뼘은 넘을 두께에, 르메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나에게 아직도 불만이 있나.” 날카로운 선을 가진 앨런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한가로운 늙은이가 소일거리를 좀 마련했다 여기시지요.” 애초에 늙었다고 할 나이도 아니었거니와, 저런 말을 해도 될 외양도 아니었건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르메인은 본래부터 들고 있던 서류를 옆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흘깃 쳐다 본 앨런이 입을 열었다. “엘린느는 그런 것까지 보지는 않던데, 열심이시군요.” 자칫 비꼬는 것으로 들릴 법한 말이었으나, 그런 의도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앨런을 처음 만났던 날에 하도 비꼼을 많이 당했더니 비교가 되었다. 잠시 리베른의 국왕을 떠올려보던 르메인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안경을 찾아 썼다. “나는 그 여자 만큼 태평한 성격이 되질 못하네.” 그렇게 말하고는 앨런의 서류 뭉치를 든 채 소파로 걸어갔다. “앉지.” 고개를 끄덕인 앨런이 르메인의 맞은편에 앉았고, 곧 시종장이 들어와 두 잔의 차와 디저트를 내려놓고 나갔다. 르메인이 차 향을 음미하듯 입에 머금다 삼키고는 말했다. “외박을 했던데.” 앨런은 잠시 칼리안과 왕궁을 나갔던 날의 일을 생각했다. “한참 밖에 나가고 싶어 할 나이 아닙니까.” “그리해도 좋을 상태인가?” 독에서 벗어났는지를 묻는 말이었으므로, 앨런이 고개를 저었다. 구체적인 사정을 전해줄 수는 없었으니, 앨런은 그냥 간단하게만 대답했다. “아직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 중입니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독이 든 것을 알면서 마신단 말인가?” 조금 높아진 르메인의 목소리에, 앨런이 진정하라는 듯 말했다. “워낙 신중하신 터라. 다만 약도 함께 들이고 있으니 당장 위험한 상태는 아닙니다. 생각이 있는 듯 하니 두고 보시지요.” “······경을 통해 전해 듣는 칼리안은 나를 항상 당황하게 하는군. 다른 이들이 전해오던 말과 너무 다르니.” 앨런은 가벼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그러다 ‘전해들었다’는 말에 앨런이 또 훈계를 둘까 싶었는지, 르메인이 말을 더 보탰다. “이제 플란츠와 비슷하고, 란델보다는 작고. 내 어깨 아래까지 온다는 것은 알고 있네.” 칼리안의 키 얘기였다. 관심을 가지려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말이었으므로, 앨런은 대답 대신 웃어보였다. 르메인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러니,” 르메인은 한참동안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칵,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 신중함 때문에 내가 또 자책할 일은 없었으면 하네.” 앨런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가방 속에서 또 하나의 서류 뭉치를 꺼내 르메인에게 건넸다. 얇은 가방 속에 무슨 종이가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지. 자꾸 일거리가 늘어나는 것 같자,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굉장히 놀랐겠으나 앨런은 르메인이 얼마나 무표정한 사람인지 알지 못했으므로, 그러려니 하고 입을 열었다. “무료하실 때 한 번 읽어 보시지요.” 새로 꺼낸 것은 실리케에 대해 조사했던 내용들을 추린 서류였다. 칼리안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는데, 몇 장 뒤적이던 르메인은 그것을 도로 옆으로 내려놓았다. 자조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용 없을 짓을 했군.” 예상대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말이었다. 앨런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입에 담았다. 차의 맛 때문인지, 르메인의 목소리 때문인지 몰라도, 쓴 맛이 확 느껴졌다. 달그락, 하고 앨런이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앞으로도 그딴 소리나 계속 하실 요량이라면 모르겠으나.” 앨런이 초콜릿 하나를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입이 썼던 탓에 이번에는 단 맛이 확 올라왔다. 앨런의 손가락이 르메인의 무릎 위에 놓여 있는 서류를 가리켰다. “만약 아니시라면, 이제 뒤집어 보는 것이 어떠실런지.” 그것이 서류든. 이 나라든. 무례한 말투는 이제 그냥 알아서 걸러 듣기로 한 르메인이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곧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변해갔다. 앨런의 입 안에서 초콜릿이 다 녹아 사라졌을 때 쯤, 가늘게 떨리는 르메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법사단.” “마음에 드십니까?” 능구렁이 같은 말이었다. 이미 르메인이 같은 것을 고민중이라는 이야기를 칼리안에게 들어놓고서도 의중을 떠보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게 말한 르메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동안의 침묵 끝에 말을 이었다. “누구의 생각이지?” “저는 아닙니다. 그저 쓰임새 많은 스승일 뿐이니.” 르메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칼리안이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감탄이었다. 르메인은 다시 서류를 넘겨가며 앨런과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게 밤이 깊어지다 다시 밝아오도록, 둘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 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3) 칼리안이 가벼운 기침을 하며 식당으로 나섰다. 그 소리에, 뒤를 따라오던 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둔하다지만, 멈추지 않는 저 기침이 감기 기운 때문에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만큼은 아니었다. “약속대로 오늘까지는 기다렸습니다. 내일도 독차가 도착한다면, 저는 시종 노릇 그만하겠습니다.” 직접 나서서 해결하겠다는 뜻이었다. 그 날로 지그프리드 공작은 바이올린 활이 아닌 검을 들어야 할 테지만, 얀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당해 줄 슬레이만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든든하네.”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식당에 들어섰다. 이미 도착해 먼저 식사중이던 란델의 시선이 한동안 칼리안의 얼굴에 머물렀다. 어제보다 더 창백하게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란델이 쳐다보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칼리안은 별 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샐러드 몇 개만 간단히 주워먹은 칼리안이 포크를 내려놓았을 때 쯤, 란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석찬에서 뵙겠습니다.” 요 근래 칼리안은 란델에게 하루에 한 마디씩 말을 했다. 뜬금없는 장미 얘기를 시작으로, 다음 날에는 비바람이 심해 잠에 들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 그 다음 날에는 새 소리가 그립다고도 했다. 란델은 그런 칼리안에게 매번 ‘그래’ 라는 말 밖에는 해주지 않았었다. 레이븐한테 말을 가르쳐도 란델보다 유창하게 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건강 잘 챙기거라.” 드디어, 마주보는구나. 고개를 숙여 보인 칼리안의 입매가 올라갔다. 식당에 함께 있던 탓에 란델의 말을 함께 듣게 된 다른 이들은 제 귀를 의심했다. 란델의 시종과 얀은 물론이고, 식당의 시종들과 시녀들까지도. 오로지 칼리안만이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멀쩡합니다.” 란델은 더 이상의 말 없이 밖으로 나갔고, 칼리안도 밖으로 나와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오후가 되고, 한층 더 창백해진 칼리안의 얼굴을 쳐다보던 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 시간 뒤에 석찬에 드셔야 합니다. 어찌할까요.” 귀족 회의가 끝난 뒤의 석찬이 진행될 예정이었고, 그 곳에 정말 갈 것인지를 걱정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얀은 이미 칼리안의 대답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화요일에 해결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칼리안이 기다리는 것이 바로 지금 시간임을 알았으니까. “가야지.” 복잡한 눈으로 칼리안을 바라보던 얀이 천천히 말했다. “쉬고 계세요. 시녀들을 불러오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그렇게 얀을 붙든 칼리안이 소매를 걷어 나이프를 풀었다. 그리고 그것을 얀에게 넘겨준 뒤 금고를 가리켜 보였다. “그 나이프랑 해독약, 실리케를 조사한 자료. 전부 챙겨줘.” “챙기다니요?” “내 방을 확인할 일이 생길지 모르니 미리 스승님께 맡겨놔. 들키면 곤란하니까.” 방을 확인한다니? 대체 뭘 할 생각이길래 감히 왕자의 금고까지 뒤져볼 일이 생긴다는 말인가? 얀의 얼굴에 이런 의문이 나타났고, 칼리안은 그 의문을 풀어주는 대신 봉인된 편지 두 장을 얀에게 건네주었다. 얀이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자,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하나는 마법사 협회에, 하나는 스승님께 전해줘. 꼭 협회 먼저 들렀다가 스승님께 가.” 얀을 거쳐 전달될 편지를 굳이 봉했다는 것은, 정확히 얀을 겨냥해 내용을 열어보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불안하다. “무슨 생각이신지, 말씀 안해주실 거죠?” 칼리안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 걱정하지 말고.” 저 태연한 웃음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얀은 말 없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딱 그렇게 웃으면서 알아서 하겠다고 한 날에 플란츠의 칼에 다치셨죠.” “그런 일 아니야.” 칼리안의 웃음이 그때보다 조금 더 짙게 변했다. 도무지 속마음을 알 길이 없었으나, 어찌됐건 더 이상 독차를 마실 일은 없을테고 나이프를 가지고 연회장에 갈 것도 아니라 하니, 얀은 일단 칼리안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금고 문이 닫히는 것을 본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만찬장에는 혼자 갈 수 있어. 그러니 석찬 준비 끝나는대로 다녀 와.”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얀은 칼리안이 말한 물건들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곧 말 없이 밖으로 나가 시녀들을 불러왔다. 석찬 준비를 도운 얀이 칼리안의 심부름을 위해 밖으로 나가고, 칼리안은 금고를 다시 열었다. 그리고 그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새 판매점에서 사온 물건을 꺼냈다. 작은 설탕 조각처럼 생긴 그것을 쳐다보던 칼리안이 손을 올려 심장 부근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것을 주머니에 넣은 뒤 밖으로 나갔다. 그것은, 실리케를 위해 준비한 칼리안의 독이었다. * * * 연회장 입구를 지키던 기사가 칼리안에게 말했다. “회의가 다소 지연되어 아직 연회장에 귀족들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왕자님.” 르메인이 칼리안의 부탁을 들어 준 모양이었다. 칼리안은 알겠다고 짧게 대답했다. 그 뒤 연회장 문이 열리자마자 느껴지는 르니에리 향기에, 칼리안의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넓은 연회장에 실리케가 홀로 앉아 있었다. 회의에 자리하지 않으면서 석찬에 참석하는 이는 칼리안과 실리케 뿐이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석찬이었으니, 회의가 지연된다면 당연히 모두 늦을 것이다. 그렇게 실리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만든 칼리안이었다. 기다려야 하는 칼리안을 위해 시종 한 명이 와서 커피를 내려놓았다. 칼리안이 그를 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 오기 전까지, 자리 좀 비켜 줘.” 시종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이내 모두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주위를 물린 이유를 모르는 실리케가 칼리안을 쳐다보았고, 습관처럼 부채를 손에 들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손을 내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면, 쓰지 말죠. 서로.” 칼리안의 말에, 실리케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부채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자꾸나.” 칼리안은 실리케를, 실리케는 칼리안의 눈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렇게 앉아있었다. 양쪽 모두 겉모습은 여유로웠으나 그 속내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연회장의 시계 초침 소리가 천둥처럼 들리는 고요함이 이어졌다. 결국 실리케의 입이 먼저 열렸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니?” 지난 번에도 그러더니. 칼리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커피잔을 손에 들었다. “가면을 쓰지 말자고 했지,” 잠시 말을 멈춘 칼리안의 붉은 눈동자가 실리케에게서 떨어져 내려와 잔 속의 검은 커피를 향했다. “예의까지 지키지 말라 한 것은 아니었는데.” 순간 실리케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칼리안은 왕의 핏줄이었으니, 아무리 실리케가 왕비라 하더라도 말을 내려서는 안되었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정말, 많이 자랐구나.” 여전히 실리케는 말을 낮추고 있었다. 여유롭게 커피를 마신 칼리안이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은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실리케.” 실리케의 아름다운 얼굴에 독기가 스몄다. 칼리안은, 부채 뒤에 저런 얼굴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의 표정이 되었다. 그것을 본 실리케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역시 천한 핏줄은,” “방금 내가 당신에게 예의를 모른다고 했던 것 같은데.” 실리케의 말을 자른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핏줄 얘기를 꺼내면, 브리센 후작이 뭐가 됩니까.” 실리케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이 자리에서 당장 칼리안을 쳐낼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한 실리케가 입 속으로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아무튼.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실리케.” 또 한번 이름이 불린 실리케는 칼리안과 더이상 함께 있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때문에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몸을 일으켰다. - 탁! 칼리안이 조금 큰 소리로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차.” 칼리안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란델의 눈빛처럼. 실리케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만 좀 보내줬으면 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요. 참고 먹자니, 차 향이 끝을 모르고 짙어지기에.” 마치 르니에리 향기처럼. 실리케가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전해듣기로, 칼리안은 오늘 아침까지도 모닝 티를 마셨다 했다. 때문에 칼리안이 차에 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칼리안은 독을 늘린 것까지 아는 눈치였다. ‘알면서 마셨구나.’ 왜 그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칼리안에게 건네진 차에 독이 든 것이 알려지면, 실리케는 칼리안의 시종과 시녀들에게 죄를 물어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직접 독을 넣었든 아니든, 왕자에게 독을 건넨 행동만으로도 이미 죄가 되니까. 주제에, 그것을 걱정한 것이다. 제가 죽을 것을 모르고. 실리케가 웃으며 말했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구나.” 칼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모르는 일이군요.” “모르는 일이란다.” 칼리안은 잠시 커피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더니 가지고 온 것을 꺼내들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설탕 통에도, 똑같이 생긴 것이 가득 들어있었다. 시계 소리를 뒤로 미뤄내며, 칼리안이 솔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면은 쓰지 않기로 했으니까. “사실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레넌에게서 빼낸 증거를 써먹어볼까. 그냥 레넌을 잡아다 협박을 해볼까. 스승님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볼까. 전하께 얘기를 해볼까. 아니면 나도, 내 형제에게 뱀의 피를 줘 볼까.” 실리케가 눈썹을 꿈틀했다. 칼리안은 그것을 무시하고 말했다. “독을 쓰는 것은 그리 내키질 않았고. 다른 것들은 뭐, 다 피해가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그냥, 당신이 가진 패를 강제로 가져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딴 패는 앞으로도 영영 사용하지 못하도록.” 두 번 다시, 독 따위를 쓸 생각은 하지 못하도록. “그러려면 나도 뭔가를 걸어야 할텐데, 당장은 가진 게 튼튼한 심장뿐이라. 그래서 그것이라도 한번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칼리안이 손에 든 것을 실리케에게 보여주었다. 실리케가 저도 모르게 그 손에 올려진 것을 쳐다봤다. “독입니다. 은에도 반응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독이 아니라서 마법 시약에도 검출되지 않습니다. 아, 그럼 약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네요. 사람을 살리는 데 쓴다고도 볼 수 있으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실리케의 손가락이 드레스 자락을 살짝 잡았다. 칼리안의 속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 계획을 실리케가 모두 알아도 상관 없다는 듯,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이것을 먹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나면 잠시 심장을 멎게 하는데, 산 사람을 꼭 죽은 것처럼 만들어놓는다 들었습니다.” 그것은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피신을 위해 소지하는 독이었다. 물론 세크리티아에서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실리케가 독의 정체를 안다 해서 칼리안과 세크리티아를 연관지을 여지는 없었다. 칼리안은 정말로 신기한 물건을 본다는 눈으로 독인지 약인지 모를 그것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내가 이걸 먹더라도, 축복의 힘이 있어서 심장이 멈추지는 않을 테니까요.” 먹어도 소용 없는 약. 그것을 왜 가지고 왔을까. 칼리안이 실리케의 눈에 가득한 의문에 대답했다. “대신 해독을 멈추겠죠.” 독보다 덜 중요한 손바닥 상처가 낫지 않았던 것처럼. 축복의 힘은 심장이 멈추는 것보다 덜 중요한 독을 무시한다. 옆 집의 장미가 말라죽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해도, 지금의 칼리안보다 평온한 표정을 짓지는 않을 것이다. 그 얼굴을 본 실리케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그럼 축복의 힘이 이 독의 기운을 없애는 시간동안, 오늘까지 내가 열심히 먹은 독이 퍼질테고요. 물론 그렇다 해도, 심장이 하도 튼튼해서.” 매일 조금씩 병들게 하는 정도의 독이 잠시 퍼지는 것으로는. “안 죽어요. 고생은 좀 하겠지만.” 심장이 멈추지 않도록 한 뒤, 다시 해독을 시작할테니. “대신, 당신은 조금 귀찮아질테고.” 칼리안의 커피잔에서 퐁당, 하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일부터 차를 보내지 않겠다 약속한다면, 이것은 마시지 않겠습니다. 아픈 것은 나도 지긋지긋해서.” 실리케는 그제야 칼리안의 의중을 파악했다. 죽지 않더라도 중독 증상은 나타날 것이다. 모두의 앞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면 누구나 독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증상만으로는 얼만큼의 양을 섭취했는지 알 수도 없으니, 축복의 힘으로도 해독되지 않을 만큼의 양으로 독살을 시도했다고 보여질 수 있었다. 심지어 지금 실리케는, 칼리안과 단 둘이 연회장에 있었다. 의심의 시선이 반드시 자신에게 닿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실리케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맹랑하게도. 내가 네게 독을 주었다, 이런 말이라도 해서 나에게 누명을 씌우겠다는 생각이로구나.” “그것을 누명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그리고,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 내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당신만큼 간절할 사람이 없을텐데.” 실리케의 입가에 여유로운 웃음이 다시 드리워졌다. 어린 아이가 하루 종일 만들어 둔 모래성에 한쪽 발을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그 좋은 기분에, 가면을 벗은 실리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증거는 만들어 두었니?” 그 말에, 칼리안이 어린 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분히 놀리는 것 같은 과장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증거! 그런 것이 필요합니까?” 칼리안이 스푼을 들어 커피를 천천히 저었다. 그러면서 실리케가 짚어낸 것을 정정해주었다. “나는 당장 당신을 쫓아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스승님이 계신다지만, 브리센 후작이 그 많은 기사들을 전부 끌고 오기라도 하면 제가 어떻게 이깁니까.” “다행히 알고는 있구나.” 실리케가 웃으며 대답하자, 칼리안이 함께 웃었다. “그저, 당신이 더 이상 독을 가지고 장난치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라서. 그러니 증거 같은 건 필요없어요. 이번에는 그냥, 사람들이 나를 대신해서 당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시하도록 만드는 것까지만 할 생각입니다. 보이지 않아서 더 숨막히는 감옥도 있으니까.” 의심만으로는 사람을 처벌할 수 없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것이 실리케였다. “그런 감옥으로는 나를 붙들어 둘 수 없단다.” 보이지 않는 감옥이라니. 겪어본 적 없었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다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니?” 지금까지 숱하게 죄를 저지르고도 이렇게 여유롭게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지 않은가. 실리케는 허리를 숙여 칼리안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리고는 아이같이 활짝 웃었다. “네 어미 그리 보낸 것이 나라는 것을, 이 세상의 누가 모를까!” 아침을 알리는 새의 지저귐처럼, 실리케가 이렇게 속삭였다. ──────────────────────────────────── 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4) 칼리안의 고개가 살짝 들어올려졌다. 그리고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실리케의 웃는 얼굴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내키지 않던 마음을 한번 돌려보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가느다란, 아직 변성기도 겪지 않은 소년의 맑고 예쁜 목소리. 그 소리에 한기가 어렸다. “함부로 찔러 보지 마요. 형제간의 우애가 그리 깊진 않으니.” 실리케의 얼굴에 만연했던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친아들의 안전을 두고 협박해오는 의붓아들의 말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얼굴에도 살짝 주름이 졌다. 칼리안이 스푼을 들어 커피잔 끝을 톡톡 쳤다. 영롱한 소리와 함께, 칼리안의 얼굴이 본래의 평온함을 찾았다. “그래서. 차, 어떻게 할까요?”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늘게 뜬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을 뿐. 칼리안은 묵묵히 실리케의 결정을 기다렸다. 곧 실리케가 대답했다. “할 만큼 해보려무나.” 칼리안이 웃었다. “거절의 뜻인 걸로.” 칼리안은 잔을 들어올렸다. 실리케를 바라보던 시선을 흐트리지 않은 채 남은 커피를 모두 입 속에 흘려넣고, 삼켰다. 그리고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귀족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마부 옆에 앉아 안달을 내던 얀이 급하게 마차를 세웠다. 왕도를 따라 걸어오고 있는 소년과 소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바쁘게 움직이던 길이었으므로, 그들이 그냥 소년과 소녀였다면 당연히 지나쳤을 것이다. 물론 남자의 머리가 물색이고 여자의 머리가 은색인 것도 알아봤지만, 그 뿐이었다면 신경 쓰지 않고 갈 길을 갔을 것이었다. “······ 칼을 들고 왕궁으로 들어가려 했다는 거죠?” 저렇게 번쩍이는 장검을 옆에 차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마차를 세우지 않겠느냔 말이다! 일단 얀은 남매를 마차에 태우고 자신도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마차는 세 사람을 태운 채로 마법사 협회를 잠시 들른 뒤 앨런의 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얀의 질문에, 키리에가 표정 없는 얼굴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네. 왕자님께서 하사하신 검입니다.” 아 나 미치겠네. “오늘은 몸만 들어가요. 칼은 지금 가는 마법사 집에 두고요. 아무튼 오늘은 절대 안돼요.” 왕자 품 속의 나이프도 궁 밖으로 빼낸 마당이다. 장검을 가지고 들어가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얀의 앞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은발의 소녀, 히나가 키리에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 강아지. 이 사람인가봐. 귀엽대서, 여자인 줄 알았는데. 키리에가 그 말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대답은 얀 쪽에서 나왔다. “얀입니다, 강아지가 아니라. 보시다시피 멀쩡한 남자고요.” 수화를 알아보자, 히나가 어깨를 움찔했다. 말투가 평소와 다르게 딱딱했다는 것을 깨달은 얀이 다시 말했다. “대충은 알아보니까 나한테 할 말은 나한테 해요. 아무튼, 지금 정신이 좀 없는 상황이라. 이렇게 맞이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그리고 키리에를 향해 고개를 돌려 다시 무어라 말하려는데, 마차가 멈춰섰다. 창문 너머로 앨런의 저택이 보였다. 얀은 남매에게 일단 기다리라 말한 후 앨런의 집으로 달음박질쳐 들어갔다. 한편 앨런은, 아침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탓에 이제 막 잠에서 일어난 참이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묶고 커피 한 잔을 타고 있던 그는, 조용히 주방으로 걸어가 커피잔 세 개를 더 꺼냈다. “손님이 오시나.” 그러다 또 조금 뒤에는 빈 잔 두 개를 다시 집어넣었다. 마차에서 내려 달려오는 것이 한 명 뿐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잠깐 마나를 확장하여 집 근처를 살피던 앨런이 마차 안의 둘을 느끼고는 혼잣말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리 왕자님, 발이 참 넓기도 하셔라.” 앨런이 두 잔의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을 때, 넓디 넓은 정원을 가로지른 얀이 도착했다. 앨런이 손가락을 튕겨 얀을 가로막았던 문을 활짝 열었다. 그와 동시에, 문 옆에 세워둔 꽃 모양의 대리석 조각상이 넘실거리듯 움직이며 흥에 겨운 목소리로 노래했다.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진짜 미치겠네.” 칼 쓰는 놈이나 마법 쓰는 놈이나! 왜 다 제정신이 아니냐고! 이런 소리를 입 속으로 꾹꾹 눌러 담은 얀이 서둘러 들어갔다. 조각상에 대한 얀의 반응을 기대하며 웃던 앨런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평소와 달리, 얀의 얼굴에 아무것도 드러나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이 생겼군.” 얀은 대답 대신 가져온 것들을 꺼내 앨런에게 건넸다. 나이프와 약 주머니, 보고서. 그리고 편지 한 장이 있었다. 편지를 봉한 인장이 누구의 것인지는 궁금해 할 필요도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을 안하십니다. 곧 누군가 왕자님의 방을 조사할 수 있으니 그것을 숨겨달라고만 하셨어요.” 앨런은 얀의 손에서 편지를 뺏다시피 하여 펼쳐들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는 앨런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 이 놈의 새끼가.” 방법을 찾았다 하더니. “이딴 것을 방법이라고!” 앨런이 편지를 얀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급히 가운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사이 얀이 칼리안의 편지를 펼쳤다. 눈에 닿은 한 문장에 손이 떨려왔다. - 그러니 혹시라도 제가 바로 깨어나지 못한다면. 얀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칼 차고 왕궁에 들어가려는 놈. 조각상에 노래 시키는 놈. 도련님 때려치고 시종 노릇 하는 놈. 그 놈들을 다 모이게 한, 독 차 싫다고 독 처먹는 놈. 그런 놈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 * * 석찬의 시작을 알리는 르메인의 연회사가 끝날 무렵. 두근! 칼리안의 심장이 한 번 요동쳤다. 굳이 손을 가져다 대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불규칙적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칼리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떴다. 모두의 잔에 와인이 채워졌다. 칼리안의 앞에 놓였던 빈 커피잔이 치워지고, 와인을 대신할 음료잔이 놓였다. 칼리안이 음료잔을 쳐다봤다. 물론 멀쩡한 음료였다. 그러나 칼리안은 마치 음료에 독이 들었던 것처럼 보이게 할 생각이었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독에 당했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마법 시약을 이용한 독 검출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반나절 정도가 걸린다. 그 뒤에 음료가 정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상관이 없었다. 지금 이 시간 협회의 마법사들이 거리에 마구 뿌려대고 있을, 수많은 미스터리한 죽음들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받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칼리안의 소식이 더해지는 것이니까. 아무도 검사 결과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칼리안이 음료 잔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실리케가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둘은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시선을 마주하다 약속한 것처럼 서로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 콜록. 기침 소리에, 란델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의 눈과 란델의 눈이 아주 잠시 마주쳤다. 순간, 란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들여다 본 것이다. 칼리안의 밑바닥을. 제 동생이 어떤 상태인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을 걸어왔는지. 오늘, 자신에게 어떤 역할을 맡겼는지. ‘멀쩡합니다.’ 건강을 걱정해주는 말에, 왜 조금도 멀쩡하지 않은 얼굴로 그런 대답을 했는지. 두근! 심장 소리가 다시 들렸다. 약이 완전히 스몄다. 그리하여, 칼리안의 심장은 해독을 멈추었다. 조금씩 사그라져가던 타크리모사의 독기가 물에 닿은 핏방울처럼 번져나갔다. 칼리안이 떨려오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기침 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또 잦아졌다. 귀족들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실리케가 불편한 얼굴을 하는 것과, 르메인이 칼리안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진한 피 비린내가 확 올라왔다. - 쿨럭! 칼리안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토해졌다. 귀족들이 경악성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근! 심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더해졌다. 죽지 않는다 하여 아픈 것까지 줄어들지는 않으니까. 아르센 헤르츠라는 놈이 내리 꽂았던 얼음의 창도 이보다는 덜 아팠던 것 같았다. 기도가 타오르고 폐가 조각나는 것 같은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그러다 결국, - 쿵! 힘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왕자님!” 장내가 소란에 휩싸이고, 카에라의 기사들이 연회장을 둘러쌌다. 곧 르메인이 칼리안에게 다가왔다. “칼리안.” 르메인이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칼리안의 몸을 안아들었다. 앙상한 몸이 쑥 들려 올라왔다. 르메인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칼리안은 버텼다. 버티며, 르메인을 응시했다. 같은 사람에게 같은 짓을 당한 누군가를 기억하고, 묻어두었던 죄책감을 꺼내놓도록. 그래서 조금만, 이성을 잃도록. 결국 르메인의 눈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칼리안이 비로소 정신을 잃었다. 축 늘어진 칼리안의 모습에, 르메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쳐다봤다. 그에 따라, 귀족들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 그 아이가 살기 위해 찾은 것이, 일면식도 없는 마법사가 아니라 아버지였어야 마땅하지요! “기어코······.” 르메인이 읊조리듯 입을 열었다. 곧 그것은 분노가 되었다. “기어코 나의 아들까지 해하려는 것인가!” - 관망만 하시다가는, 잃게 되실 겁니다. 르메인의 눈이, 분노가, 누군가에게 닿았다. 노기 어린 목소리가 연회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실리케!” 처음으로 마주한 국왕의 모습과,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장내의 모든 귀족들이 경악했다. 플란츠가 고개를 숙인 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두근! 축복의 힘이 다시 발현됐다. 퍼져나간 독을 갈무리하고 죽은 조직을 떼어냈다. 아주 느리지만 분명한 움직임으로, 치유를 시작했다. 르메인은 칼리안의 숨이 조금씩 고르게 변해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홀로 그 모습을 본 실리케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 * * 귀족들의 시선이 실리케와 칼리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실리케가 남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르메인이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것이라고, 그렇게 경솔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칼리안의 몸에 나타난 증상들을 살피던 치유사가 입을 열었다. “중독이 맞습니다.” 귀족들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왕자가 정말 독에 당한 것이다. 르메인은 치유사에게 빨리 조치를 하도록 일렀다. 치유사가 목걸이를 손에 쥐고 세렌티의 신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설에나 나오는 신관들처럼 자신의 신력을 쓸 수는 없었으므로, 해독을 위한 힘이 발현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중독이 아니니라.” 그때 실리케가 치유사의 행동을 막으며 입을 열었다. 르메인이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것을 귀족들이 모두 들은 이상, 이 자리에서 그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독이 아니라, 병이니라. 평소 지병이 있다 들었으니.” 그래. 프레이야가 죽은 것도 병 때문이라 하였다. 기사단을 전부 끌고 나타나서는, 그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는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실리케. 거기까지. 더는 참지 않겠으니.” 치유사가 재빨리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실리케는 침착을 가장한 얼굴로 웃어보이며 말했다. “전하께서 모르시는 듯 하여 그럽니다. 우선 다른 이들을 먼저 물리시지요. 소란스러운 와중에 내 아이 상태가 더 나빠질까 걱정이 큽니다.” 그 뻔뻔함에, 르메인이 결국 더 참지 못하고 카에라의 단장을 향해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르메인의 말을 막으며 튀어나왔다. “칼리안은 멀쩡했습니다. 왜 없던 병을 주시는지 모르겠으나, 매일 아침마다 보았어도 이상이 있다고 여겼던 적 없습니다.” 실리케가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내 아이’라니, 다른 사람도 아닌 칼리안에게 해서는 안되는 말 아닙니까.” 실리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애쓰지 마시라고. 그렇게 말을 했었는데.” 실리케의 말을 한순간에 뒤집어 놓은 이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말을 맺었다. “어머니.” 그녀를 보는 연두색 눈. 그것은, 란델의 것이 아니었다. ──────────────────────────────────── 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5) 한 점의 그림을 훑어보듯, 란델의 푸른 눈이 조용히 움직였다. ‘장미가 곧 피겠다더니.’ 칼리안이 왜 그렇게 말을 붙여왔는지를 깨닫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눈빛을 대한 순간,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무슨 이유로 이런 상황을 준비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실리케가 그간 칼리안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었는지를 알았다고 해야겠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했으니, 란델은 이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칼리안의 손을 들어줄지. 혹은 항상 그랬듯 한 발 물러나 있을지를. 란델의 시선이 칼리안에게 닿았다. 그리고 천천히 멀어졌다. 대신 그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칼리안이 원했던대로, 우선은 칼리안의 말이 되어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장미, 어떻게 피어날지 궁금했으니. 그런데, 홀로 의자에 앉아있던 플란츠가 일어났다. 그리고 연회장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더니, 란델의 것으로 따라져 있던 와인을 제 입 속으로 비워내곤 밖으로 나갔다. 솔직히 란델은, 플란츠가 직접 실리케를 구석에 몰아넣었다는 것보다 플란츠가 앞 뒤가 완성된 말을 할 줄 알았다는 것에 더 놀랐다. 때문에 거칠 것 없다는 듯 걸어 나가는 플란츠의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어찌됐거나 자신이 하고자 했던 노릇을 플란츠가 이미 해버렸으니, 란델은 떼었던 발을 도로 내려놓을 밖에. 플란츠가 떠난 뒤, 실리케는 큰 모욕을 당하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연회장을 떠났다. 르메인의 다른 지시가 없었으므로, 카에라의 기사들은 왕자와 왕비가 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어서.” 르메인이 치유사를 채근했다. 세렌티의 신물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조금씩 빛나기 시작하더니, 곧 눈부신 흰 빛이 뭉클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치유사가 칼리안의 몸으로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붉은 빛이 감도는 반투명한 실드가 칼리안을 보호하듯 감싸안았다. 그 바람에 칼리안에게로 향하던 치유사의 신력이 실드에 가로막히며 서로 충돌했다. - 파지직! 그것은 단순한 실드가 아니었다. 실드에 감돌던 붉은 빛이 흰 빛을 뒤덮는 것을, 그리하여 세렌티의 기운이 칼리안의 근처에도 닿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을 모두가 보았던 것이다. 신물의 힘을 막아낸 그것은, 6서클의 그레이트 실드였다. “아예 죽으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마법사가 등장했다. 르메인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할지 뻔히 보였으므로, 급한대로 실드를 보내 칼리안의 몸부터 보호했던 앨런은 연회장으로 저벅 저벅 걸어 들어오며 먼저 말했다. “심장에 이미 서클이 있습니다. 저런 상태에서 신력까지 들어가면 상황만 나빠집니다.” 치유사가 깜짝 놀라 손을 뗐다. 다급하게 처치하느라 칼리안의 몸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것이다. 앨런은 그런 치유사를 질책하는 대신 칼리안을 향해 다시 한번 마력을 운용했다. 이번에는 무영창이 아니었다. 짧은 몇 마디의 주문과 함께, 앨런의 입에서 시동어가 흘러나왔다. [아브턴던트] 한 번 밖에 사용해보지 않았던,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마법이었다. 곧 칼리안의 얼굴이 편안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혀를 찬 앨런이 르메인에게 말했다. “이 일은 제 탓도 있으니, 나중에 한 대만 맞아드리겠습니다.” 르메인에게 그리 큰소리를 쳐놓고, 칼리안이 이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둔 것에 대한 앨런 나름의 사과였다. * * * 한가로운 저녁시간, 말 많은 귀족들이 삼삼오오 몰려 있는 아스트리샤 거리의 하늘에서 하얀 종이가 비처럼 떨어졌다. 종이에는 브리센 가문에 의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이들에 대한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누군가 3왕자를 독살하려 했고, 국왕이 실리케를 지목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손에 들린 종이를 향해 뚝 떨어졌다. ‘왕자에게까지 마수를 뻗는 왕비이니, 그 전의 사람들을 해친 것도 모두 왕비의 짓이 맞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이들을 죽인 왕비라면, 세자위에 위협이 되는 왕자도 얌전히 두었을 리 없다.’ 칼리안에 대한 살해 시도와 그간 브리센이 저지른 악행이 얽혀가며, 서로가 서로의 증거인 것처럼 여겨졌다. 때문에 카이리시스는 제대로 된 태풍을 맞이했다. 프레이야 한 명의 죽음이 가져왔던 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심지어 칼리안도 이 정도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만큼의 큰 혼란이 생겨났다. 피해자들로 알려진 이들과 연관된 사람들이 모여 자료의 사실성 여부를 확인해달라는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브리센 상단과의 거래를 거절했고, 브리센 기사 양성소에 다니던 학생들이 줄줄이 퇴소했다. 아침마다 브리센 후작가에 인사를 올리던 귀족들의 행렬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만에 하나 실낱같은 증거라도 발견되면 하츠아라 광장이 피로 물들 것임은 자명했으니, 행여라도 브리센과 얽혀 광장을 적시는데 일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실리케의 축출을 요청하는 종이가 곳곳에 몰래 붙기에 이르자, 브리센 후작가는 잠시 대문을 닫았다. 더불어, 칼리안의 방에는 선물상자가 다시 쌓였다. 귀족들이 칼리안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며 보낸 것이었다. 물론 명분이 그랬다는 말이다. “많이 급하셨나 봅니다.” 그렇게 쌓여있는 선물들과 불청객을 멀뚱히 쳐다보던 칼리안이, 커튼 너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목소리는 다소 잠겨있었으나, 여유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실리케가 찾아오자, 칼리안은 침실 커튼을 내렸다. 와병 중이라 손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오래지 않아 르니에리 향이 방안 가득 퍼졌고, 칼리안은 옆에 서 있던 얀을 향해 말했다. “창문 좀. 머리 아파.” 꽃 같은 우리 왕자님이 머리가 아프시다니! 얀이 소란을 떨며 방과 테라스의 모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르니에리 향기가 창문을 넘어 빠져나갔다. 실리케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서.” 창문이 모두 열린 뒤, 칼리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칼리안은 이 일의 마무리를 앨런과 르메인이 진행하도록 해두었으나, 르메인은 이번 선물 교환을 온전히 칼리안에게 맡겼다. 목숨을 걸었으니, 알아서 제 값을 받아내 보라는 뜻이었다. 한동안 말 없이 서 있던 실리케가 칼리안의 소파에 가 앉았다. 멋대로 구는 그 행동에 칼리안이 인상을 찌푸렸으나, 다시 일어나라는 말을 할 만큼 야박하게 굴지는 않았다. 곧 실리케가 입을 열었다. “그 동안 마법사 협회가 조금 바빴던 모양이더구나.”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재미가 있어서 짓는 웃음이라기보다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에 가까웠다. 정신을 잃고 있던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은 얀에게 전해들어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실리케가 완벽한 약자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오자마자 무릎 꿇고 사과하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렇게까지 당당하게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칼리안이 웃음을 지워내며 대답했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시는군요.” 그 말에 실리케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그것은 정확히 일주일 전,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실리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만에 눈을 뜨자마자 지금까지의 상황을 전달받았고, 30분도 되지 않아 불청객을 맞이하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기꺼운 마음으로 상대할 컨디션이 되지 못했던 칼리안이 다소 지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배려해주신 덕분에 내가 조금 오래 쉬었습니다.” 그 날의 칼리안이 기억났는지, 실리케의 시선이 잠시 드레스 자락에 가 닿았다. “그런데 하마터면 저승까지 가서 쉴 뻔한 터라. 오래 대면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 하나씩.” 비로소 실리케의 입이 열렸다. 다른 이도 아닌 칼리안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으므로, 그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교환을 하는 것은 어떻겠니.” 일주일 전에 그렇게 말했으면 서로 좋았을 것을.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실리케가 커튼 너머를 볼 수는 없을 것이므로, 그에 대한 말도 덧붙여 주었다. “글쎄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몰리셨던 것 같아서. 어떨런지.” 잠시 시간을 둔 칼리안이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나른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단 어떤 것을 준비해 오셨는지 들어보고요.” 실리케가 쓴 것을 참고 삼키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억지로 말하는 티를 굳이 숨기지 않으며 원하는 것을 말했다. “자료, 사실이 아니라 해 준다면. 전하께서 준비하고 있는 일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마.” 커튼 너머에서 잠시 작은 웃음 소리가 났다. 칼리안은 웃음기가 아직 남아있는 목소리로 실리케의 약점을 쿡 찔렀다. “전하께 후궁 후보 명단이 올려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후궁일지. 혹은, 새로운 왕비일지. 아직 잘 모르겠네요. 혹시 아십니까?” 실리케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카이리시스에 불어닥친 태풍은 생각보다 컸다. 실리케는 칼리안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깊은 감옥에 갇혔다. 고작 마법사단 창설만으로 꺼내 주기 어려울만큼. 그래서 칼리안의 마음도, 바뀌었다. “게다가 군대 창설에 왕비의 허가 같은 것은 애초부터 필요하지 않으니. 그것 말고 다른 것으로 얘기해주세요.”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법사단 외의 다른 것을 들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답은 어차피 정해져 있을 것이므로, 실리케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하려무나.” 칼리안은 더 지체할 필요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스파니안의 후손이 지배하는 땅에, 검 부딪히는 소리가 이리 크게 들려서야 되겠습니까.” 무슨 말이 이어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실리케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칼리안의 침실 쪽을 쳐다봤다. 그 안쪽에서, 여전히 여유롭고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가 이어져 나왔다. “기사단 파벨, 물리시죠.” 파벨이라니! 실리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카이리스 왕실 근위기사단은 본래 라온과 카렌 뿐이었다. 파벨은, ‘왕의 검’이라 불리는 국왕 친위대 카에라를 견제할 목적으로 브리센 후작이 실리케에게 선물한 기사단이었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은 실리케의 검을 내어 놓으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 목숨을 걸었으니, 상대의 무기 정도는 빼앗아야 셈이 맞지 않겠는가? 라고. 실리케가 얼마나 놀랐는지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칼리안이 쐐기를 박듯이 다시 말했다.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아주 단호한 목소리였다. “파벨 해체. 마법사단 창설.” 꽉 쥐어진 부채에서 까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칼리안은 조금 가벼워진 말투로 덧붙였다. “나한테 붙여둔 당신의 시녀도 다시 데려가고요.” 실리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칼리안은 그런 실리케에게 한참동안 생각할 시간을 내어줬다. 그리고 그 인내심의 끝에, 실리케가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 그리 해주마.” 칼리안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칼리안은 실리케의 결심을 재차 확인하는 대신, 곧바로 얀을 보며 말했다. “가져다 드려.” “네, 왕자님.” 기다렸다는 듯, 얀이 협탁 위에 놓인 것을 들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들고 나간 것을 실리케에게 건넸다. 그것은 맹세의 인을 담은 서약서였다. 약속한 내용을 서로의 심장에 새기고, 만약 어길 경우 심장을 조이는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서약서를 본 실리케가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그런 것까지 준비해 둔 것에 대한 놀라움인지, 거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생긴 짜증인지, 혹은 둘 모두인지는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칼리안이 상관할 바 아니었으니까. 칼리안은 그저 당연한 절차라는 듯 말했다. “나와 당신의 신뢰 관계는 그리 돈독하지 않으니까.” 잠시 눈을 감고 큰 숨을 내쉰 실리케가 서약서에 서명을 했다. 그러자 실리케가 지켜야 할 것들로 적혀 있던 글자들이 빛을 내며 떠올랐다. 그리고는 하나의 긴 띠를 이루는 듯한 형상을 만들더니 실리케의 팔을 타고 올라가며 사라졌다. 심장으로 향한 것이다. 물론 칼리안에게도 똑같은 제약이 걸렸다. 볼 일을 끝낸 실리케가 일주일 전에 비해 확연히 수척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리안이 그런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 혹시라도 형제 사이가 꽤 좋았다고 오해를 하고 있을까봐 얘기하는데.” 실리케가 잠시 발을 멈췄다. 하지만 침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플란츠는 나를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실리케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시초가 된, 연회장에서의 말. 아들에 대한 배신감을 상기한 실리케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커튼 너머로도 느껴지는 그 모습에, 칼리안이 혀를 쯧 하고 찼다. “만약 당신이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했었다면.” 르메인이 생각보다 더 이성을 잃었었으니. 그 화가 어떻게 번졌을지. “왕의 검은 그 자리에서 왕비의 목을 쳤을 겁니다.” 아무 말 없이 서있던 실리케가 한 걸음씩 걸어 밖으로 나갔다. ──────────────────────────────────── 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6) “키리에 남매는 만나보셨습니까, 스승님?” 열 한 개. 그렇게 물어오는 칼리안의 입 속으로 열 한 개째의 바나나가 사라져갔다. 침대 옆에 바나나 껍질이 하나 더 늘어났다. 실리케가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하기에 놀라서 왔더니, 실리케는 어느새 가고 없고 일주일만에 눈을 뜬 그의 제자가 태평한 얼굴로 바나나를 까먹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걱정되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간 칼리안 때문에 몸과 마음이 고생한 것으로 인한 부아가 치밀었다. 그리하여 앨런은, 앞에 있는 제자를 한 대쯤은 때려도 괜찮지 않을까 아까부터 고민하다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다음 바나나를 집어들었다. 하는 냥을 보아하니 그 독특한 남매에 대해 설명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으므로,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앨런이 잠시 화를 집어넣고는 사일런트를 발현하며 물었다. “이전 생에서 연이 있던 아이들입니까?”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키리에만. 히나는 없었어요.” 언제나 앨런은 눈치가 빨랐다. 더 물을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러다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히나라는 그 아이가 치유사인 것을 모르셨던 겁니까?” 입에 바나나가 가득 찬 칼리안의 머리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앨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축복의 힘 하나만 믿고 무턱대고 몸 속의 독을 풀었다는 소리였으니까. 입에 든 것을 삼킨 칼리안이 매우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바나나 맛있네요.” 맛있겠지. 아무렴. 죽다 살아나서 처먹는 게 맛이 없을 리가 있나. 앨런이 주먹을 꾹 쥐며 큰 숨을 내쉬었다. 참는 것이다. 아무리 제자라지만, 왕자니까. “저도 듣고 놀랐습니다. 치유사였다니.” “덕분에 빨리 일어났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앨런이 냉랭하게 대꾸하자 칼리안은 상큼한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개운하네요.” 해맑은 미소와 함께 나온 말에, 앨런이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이 기어코 끊어졌다. “개운······ 같은 소리 마시지요. 독차 물리겠다고 어디서 근본도 없는 생독을 가져와 집어 처드신 덕에 일주일을 내리 자빠져 계셨으니.” 세상 그 누가 카이리스의 왕자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멍한 얼굴로 앨런을 보던 칼리안이 한참을 웃다 답했다. “실리케가 자작극이라 우기지 못할 정도는 되어야 했어요.” 자작극이라니. 아무도 그것을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연극 한판을 제대로 짰기에, 피만 좀 토했지 꾀병일 줄 알았다. 그러나 칼리안은 일주일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두 달을 넘게 먹어온 독이 속을 다 망가뜨려 둔 상태에서 퍼진 맹독이었다. 히나가 자연의 힘을 부리는 치유사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때마침 화요일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여전히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뿐만인가? 속이 녹아내리는 것을 고스란히 참으면서 날을 기다리다 일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앨런도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 지독한 놈이 어느새 열 다섯 개째의 바나나를 해치우고 있었다. 일주일 굶은 것을 바나나로 채워넣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일어나자마자 제 몫은 했잖아요.” 빈혈 때문에 아직까지도 창백한 얼굴을 한 칼리안이 실리케와 담판을 지은 것을 말하며 또 웃었다. 결국 앨런은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탁 내쉬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입술 끝이 아려왔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물었다. “그런데 스승님 얼굴은 왜 그렇습니까? 싸우셨어요?” 칼리안이 입술을 가리켜보이자, 앨런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염려하지 마시지요.” 책상 앞에만 앉아있던 놈이, 주먹은 왜 그렇게 맵던지. 터진 입술에는 제자에게만은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속사정이 있었으므로, 앨런은 시선을 돌리기 위해 얼른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칼리안에게 주었다. 칼리안이 맡겼던 나이프, 그리고 돌돌 말려 있는 두 장의 양피지였다. 베개 밑에 나이프를 넣은 칼리안이 양피지를 펼치며 물었다. “무엇입니까?” “아이들의 신원 보증이 필요하시다기에.” 그 말에, 칼리안이 반색하며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일에 신경을 쓰느라 키리에 남매에 대한 부탁을 앨런에게 전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마도 얀이 대신 이야기했던 모양이었다. 문서를 확인한 칼리안이 헉 하며 놀랐다. “이건, 기대 이상이네요.” “그 아이들의 신원 때문에 곤란한 일은 없을 겁니다.” 앨런에게 부탁하려던 신원 보증서가 아닌, 제대로 된 신분 증명서였다. 키리에 남매는 칼리안의 소유인 휘트린 영지에 거주하던 평민이 되어 있었다. 아예 처음부터 칼리안의 영지민이었던 것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증명서를 살피던 칼리안의 얼굴에 처연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이건, 더 생각하지 못했는데.” 증명서에 적힌 남매의 이름 때문이었다. - 키리에 베른, 히나 베른. 칼리안이 눈을 들어, 세상에서 사라진 이름을 다시 꺼내 둔 스승을 쳐다봤다. 앨런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성이 필요하다기에 일러주었습니다. 아무래도 우연히 만나서 데려온 아이들은 아닌 듯 하여.” “······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자, 그런 것은 질색인 앨런이 바나나 더미를 가리켜 보이며 말을 돌렸다. “그것이나 더 드시지요. 어디 얼마나 더 들어가는지도 볼 겸.” 칼리안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바나나를 또 집어들었다. 감동과 허기는 별개니까. 그러다 문득, 앨런이 어떻게 신분 위조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 칼리안이 물었다. “증명서 만들어내기 어렵지는 않았습니까? 스승님은 카이리스에 부탁할 만한 분도 없었을······.” 말을 하며 쳐다보니 앨런의 표정이 참으로 의미심장했다. 그것을 알아본 칼리안이 말을 바꾸어 물었다. “설마 이거, 르메인이 만든겁니까?” “제가 이 곳에서 아는 이들이라고는 고작해야 셋 뿐이니. 그나마 요즘 자주 보는 이에게 부탁을 해보았지요.” 국왕과 왕자와 공작을 ‘고작 셋’으로 묶은 앨런이 말을 이었다. “왕자님의 청이라 하니 다른 말을 묻지도 않고 곧바로 도와주기에 놀라기는 했습니다.” “의외네요. 그런 것을 해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니.” 앨런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지금 르메인이 칼리안을 얼마나 신경쓰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원인을 칼리안이 직접 제공한 것 같았기에, 앨런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며 물었다. “궁금한 것이. 그 날 르메인이 생각보다 더 화를 내는 바람에, 국왕이 그렇게나 아끼는 아드님으로 소문이 나셨는데.” “그렇습니까?” 그 날의 일을 생각하던 칼리안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운이 좋았나 보네요.” 르메인으로부터 ‘내 아들’ 이라는 소리를 꺼내게 만들어 프레이야가 아닌 르메인의 아들이 된, 그래서 왕위를 가지고자 할 때 프레이야의 출신이 방해하지 못하게 할 근거를 얻은 막내 왕자는 그렇게만 말한 뒤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물론 앨런이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얻을 것이 늘어나겠네요. 운이 좀 따라야 되겠지만요.’ 며칠 전에 들은 말을 생각한 앨런이 칼리안의 표정을 보고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독 한번 먹고 얻은 것이 참 많다 싶어서였다. “덕분에 르메인이 왕자님 걱정을 꽤 많이 합니다. 오늘은 로젤리타 가는 것을 미뤄야 할지를 고민하더군요.” 칼리안이 고개를 한 번 가로저은 뒤 대답했다. “어차피 실리케는 당분간 저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재채기만 해도 실리케 탓이라고 할 테니.”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올려, 조심스럽게 마나를 운용했다. 아직 불안정하지만, 따뜻하면서도 강한 느낌이 팔을 감싸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몸을 보호해주는 오러의 힘이었다. “그리고 로젤리타가 시작될 즈음이면, 어지간한 것으로는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이제 더 이상, 심장이 아프지 않았다. 이 몸을 가진 이후 처음으로 느끼는 자유로운 기분에, 칼리안이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그러더니 앨런이 지어보였던 표정을 따라하며 비밀스럽게 말했다. “제가, 검을 좀 잘 씁니다.” 앨런이 마법사 제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 * * 앨런이 돌아간 뒤 다시 잠자리에 드는 칼리안의 옆에 키리에가 말 없이 다가와 섰다. 칼리안이 잠들어 있던 일주일 동안 낮에는 얀과 앨런이, 밤에는 키리에가 곁을 지켰다고 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일주일을 내리 자고 나서도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이 곳에 온 뒤 처음으로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지금껏 함께 있던 아이를 비로소 만났다. 그리고 영영 헤어졌다. 잠에서 깨어난 칼리안이 한동안 울었다. 동이 틀 무렵의 어두운 새벽에, 한 명의 마법사가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왕자를 데리고 왕궁 밖으로 나섰다. 오른쪽 앞 다리에만 하얀 털이 난 검은 말은, 간신히 앉아있는 제 주인이 행여 떨어질까 조심스러워하며 세뉴강을 향해 걸었다. 체르밀 궁과 가장 가까울 강기슭에 선 마법사의 손에는, 그 새벽에 차마 구하기 어려웠던 안네루시아 꽃을 대신할 붉은 불이 피어올랐다. 떠나가는 아이의 눈과 꼭 닮은 색의 불꽃이었다. 왕자의 고개가 꽃을 향해 숙여졌다. 세뉴는 언제나 고요하게 흐르는 강이었다. 강물에 올려진 불의 꽃도 말 없이 흘러 내려갔다. 왕자는, 꽃이 떠나는 동안 다리 위를 지나는 사람이 없기만을 바랐다. * * * 기사단 파벨이 갑작스레 해체되어 브리센 후작가로 돌아갔다. 앨런 마나실이 마법사단이라는 것을 만들겠다 선언했다. 르메인은 왕실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을 믿지 말라 일렀다.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칼리안은, 요즘 감기가 참 독하다 했다. 그리고 세 달이 지났다. 오찬을 위해 옷을 갈아입은 칼리안을 보던 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얼마 전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얀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흠, 메를린.”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던 시녀 메를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대답했다. “슬레이크 경을 만나고 올까요.” “네. 아무래도 많이 작을 것 같다고 전해줘요.”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심어두었던 시녀가 그만둔 뒤 얀의 바로 다음 위치에 오른 메를린이 알겠다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 의상 담당자 섀틴에게, 칼리안의 탄생 기념일 연회를 위해 한달 전 맞추었던 예복을 이번에는 늘려야 할 것 같다고 전하려는 것이다. 매일 칼리안을 보는 그들의 눈에도 확연히 차이가 느껴질 만큼, 칼리안은 부쩍 키가 컸다. 본래에도 또래에 비해 큰 편이었지만, 독차를 끊은 뒤부터는 정말 눈에 띄게 자라고 있었다. 조찬에서 란델이 놀란 눈으로 쳐다볼 정도로 많이 먹고, 하루 대부분의 시간 동안 키리에와 온갖 체력 단련을 하며 지냈더니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다. 얀은 어느새 자신과 주먹 하나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칼리안을 보며 웃었다. 그것이 왠지 체이스가 베른을 보며 지어보이던 것과 비슷해서, 칼리안도 마주 웃었다. 준비를 마친 칼리안이 오찬을 위해 세뉴관의 소연회장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제 자리에 멈춰 섰다. 연회장의 안에는 르메인과 앨런, 그리고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 그 자리가 정확히 어떤 것을 위한 오찬이었는지는 얀에게도 따로 전해지지 않았기에, 르메인이 있는 자리인 줄은 전혀 몰랐던 칼리안이 조금 놀란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 자리에 앉도록 손을 들어 보였다. 칼리안이 그 곳으로 걸어가 조용히 앉았다. 그런 칼리안을 가만히 지켜보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그 사이에 키가 더 컸구나. 이젠 플란츠보다도 커 보이는데.” 칼리안은 르메인이 이 곳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보다 지금 들린 말에 훨씬 더 놀랐다. 르메인이 달라졌다고 듣기는 했으나, 저렇게 살가운 말까지 꺼내놓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칼리안의 눈이 아주 잠시동안 앨런을 향했다. 그 눈에는 찬탄의 빛이 담겨 있었다. 대체 사람을 얼마나 구박했으면 저렇게 변한단 말인가? 앨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한 얼굴로 얌전히 앉은 채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속으로 실소하며, 적당한 대답을 골라 꺼내놓았다. “네, 전하. 조금 자랐습니다.” “그래. 살도 많이 붙고. 보기 좋구나.” “감사합니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던 앨런을 쳐다봤다. 그제야 앨런이 칼리안에게 살짝 인사하며 말을 꺼냈다. “소개시켜 드릴 이가 있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왕자님.” 그렇게 말한 앨런이 옆의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 로젤리타에서 왕자님을 호위하게 될 마법사입니다. 저를 대신해 왕자님의 마법도 보아드릴 수 있을 겁니다.” 앨런이 로젤리타에 함께 가지 않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시점에 앨런이 궁에서 나오면 마법사단에 대한 일을 진행하는 것이 불가하거니와, 르메인의 안전에도 문제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그래도 이미 지그프리드 영지에서 호위기사들을 보내준 터라, 마법사의 호위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던 칼리안이 기대감 어린 얼굴로 그 남자를 쳐다봤다. 그리고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낯이 익은 자인데.’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채 깨닫기도 전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칼리안을 향해 허리를 숙여 보이며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왕자님."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심장에 내리꽂히는 순간, 칼리안의 가슴에 시린 냉기가 들어찼다.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마치, 베른의 마지막 날처럼. ──────────────────────────────────── 제8장. 아주, 반갑습니다. (1) (수정) 아르센 헤르츠. 가끔 생각이 났다. 당연히 언젠가 만날 날이 있을 것이라고도 각오를 했다. 사사로운 원한 같은 것도 없었다. 상대가 베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적국의 기사였기 때문에 죽인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심지어 죽어가는 베른에게 꽤나 예의를 갖춰주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괜한 원망이 치미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르센의 말에, 칼리안이 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아주, 반갑습니다.” 그 웃음이 묘하게 플란츠와 닮아 있었다. 유일하게 그것을 눈치 챈 앨런이 칼리안과 아르센을 한 번씩 번갈아가며 쳐다보다 작게 혀를 찼다. 인사 채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저 마법사 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된 탓이다. “마법사단에 속하게 될 유능한 인재라 하니, 가는 길에 많이 배우면서 서로 친해져 보거라.” 다른 이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르메인이 때마침 이런 말을 했다. 칼리안의 무릎 위에 올려진 손가락이 소리 없이 움직여 긴 곡선을 그려냈다. 손 끝의 잔상을 따라가듯, 칼리안의 얼굴에도 같은 곡선을 가진 미소가 그려졌다. “네, 전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려다 붙인 그 웃음을 본 앨런의 팔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고, 르메인은 그저 기꺼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은 아직 기억하지 못했으나, 사실 아르센은 칼리안을 두 번째 보는 것이었다. 물론 그 처음은 아르센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스승의 영결식 날, 다리를 건너려는 칼리안을 막아섰을 때였다. 그 때 가졌던 칼리안에 대한 첫인상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앨런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을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왕궁을 찾은 그였다. 때문에 아르센은, 그날 보였던 칼리안의 미소와 오늘의 미소가 가지는 의미가 꽤 많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칼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로젤리타 준비는 다 되었느냐?” 문득 르메인이 칼리안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익숙해지기 힘든 자상한 목소리 때문에, 칼리안이 조금 어색해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모두 마쳤습니다.” “헌데, 마차를 타지 않겠다 했더구나. 불편하지는 않겠느냐?” 십수 가지의 편의 마법이 적용된 것은 물론이고, 천하의 앨런 마나실이 걸어 놓은 각종 방어 마법에, 그 지고한 고룡 시스파니안이 이공간을 활용해 만들었다는 마차용 침실과 샤워실과 화장실까지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는 화려하고 고급스럽고 넓고 쾌적한 대륙 최고의 마차를 두고 말이나 타는데 어떻게 안불편하겠느냐는 얼굴로, 칼리안이 조신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다 레이븐 때문이었다. 칼리안이 마차 안에 들어가면 옆에 서서 걷지를 않았다. 말과 유난히 친하다던 엘프의 피를 가진 키리에 남매도 레이븐을 다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레이븐을 두고 가느냐 마차를 두고 가느냐를 놓고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고, 이참에 운동이나 실컷 하라는 앨런의 조언에 따라 그의 사랑스러운 말과 함께 로젤리타를 다녀오기로 한 터였다. “말이 워낙 영특하니, 별 탈은 없을 겁니다.” 르메인을 안심시키겠다는 것인지, 칼리안을 놀리겠다는 것인지, 아무튼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의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그래. 말에 올라 카이리스 이곳 저곳을 살펴 볼 기회도 없을 테니. 좋은 생각을 한 것이라 믿으마. 왕자의 신분으로 그리 자유롭게 왕궁 밖을 다닐 기회도 또 없을 것이니.” 칼리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칼리안과의 대화가 마무리되자, 르메인의 고개가 이번엔 앨런을 향해 돌아갔다. 다만 대화의 주제는 여전히 칼리안이었다. “근래 왕자의 마법은 어떠한가?” 아르센이 함께 있는 자리였으나 칼리안의 마법 수준이야 어차피 아르센도 알게 될 일이었으므로, 르메인이 편하게 물었다. 같은 이유로, 앨런 역시 편하게 대답했다. “시스파니안이 울고 갈 정도입니다.” 그 말에 르메인이 조금 놀란 얼굴로 앨런을 쳐다봤다. 그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말인지 하는 표정이었다.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축복을 준 것이 아까워서.” 덜컥! 국왕과 왕자 앞에서 나온 앨런의 말에, 지레 놀란 아르센의 손에서 큰 소리가 났다. 떨굴 뻔한 나이프를 간신히 붙든 아르센이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이 자리를 함께하는 높은 분들의 눈치를 보았다. 칼리안은 나이프 소리는 물론 앨런의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여유로운 식사를 이어나가고 있었고, 르메인은 앨런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앨런은 꼴딱꼴딱 물을 마셨다. 르메인이 그런 앨런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경은 참 한결같군.” “여부가 있겠습니까.” 결국 르메인의 깊고 푸른 눈이 다시 칼리안을 향했다. “실로 오랜만에 왕가에서 마법사가 나는 것이니라. 마나실 경이 이리 엉망으로 굴어도 그 능력은 출중하니, 로젤리타를 다녀오거든 마나실 경에게 더 많이 배우고 노력하거라.” 르메인의 입에서 엉망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면, 평소 르메인을 대하는 앨런의 행실을 알 만 했다. 칼리안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는 살짝 고개 숙여보이며 얌전히 대답했다. “네, 전하. 더 노력하겠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고작 14세의 나이에 3서클을 마스터했음을, 그것이 앨런 마나실보다 1년 빠른 성취임을 알 리 없을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높은 스승님 때문에 괜한 소리를 들은 칼리안은, 억울할 것도 없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식사에 열중했다. 물론 앨런은 본래부터 한결같은 모습으로 식사중이었다. 오로지 아르센만이, 셋의 기에 짓눌려 마른 입을 적셔낼 뿐이었다. 그렇게 몇몇 대화가 오가며 오찬이 마무리되었다. 항상 바쁜 르메인과 속이 바쁜 아르센이 먼저 돌아간 뒤, 칼리안과 앨런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께 밖으로 걸어나갔다. 얀과 키리에가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칼리안과 앨런은, 둥글게 다듬은 가로수가 회랑처럼 길게 이어진 녹빛의 길을 나란히 걸었다. 그 곳은 세뉴관의 주변을 담처럼 감싸고 있는 멋진 산책로였다. 8월의 더운 햇빛이 나뭇잎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고운 자갈길 위에 구슬같은 무늬를 올려놓고 있었다. 앨런이 자연스러운 순서인 것처럼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이 대단한 마법사가 카이리스에 와서 가장 많이 쓴 마법이라는 것이 고작 사일런트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것에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을 앨런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칼리안에게 물었다. “인사를 물릴까요, 왕자님?” 아르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를 떠올린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가슴 한 켠을 쓸어내렸고, 그것을 본 앨런은 베른과 아르센이 어떤 관계인지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가만히 들려오는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칼리안이 물었다. “그 자,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이제 스물 여덟입니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왕자님과 함께 지내기 좋을 만큼 젊은 마법사를 고르다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베른을 공격했을 때 서른 여덟의 나이로 군단장 직을 수행했다는 소리다. 그 나이에 마법사단을 이끌 정도라면, 인재였다. 칼리안만이 홀로 기억하는 응어리 때문에 그런 인재를 놓쳐야 할 이유가 없었다.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로 두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얀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말이 ‘알아서 하겠다’라는 칼리안의 호언장담이라는 것을, 앨런은 아직 몰랐다. 그래서 앨런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벌써부터 마법사들을 모으고 있는 겁니까?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마법사단 창설을 준비한지 고작 세 달이다. 하다못해 그들을 훈련시키고 머물게 할 건물도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먼저 모으고 있는 것 같아, 칼리안이 걱정스러운 마음을 드러냈다. 그러자 앨런이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왕자님의 호위를 위해 그 자만 미리 부른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지요. 그리고 아직 카이리스에 인재라 할 만한 마법사가 많지 않아서, 머릿수를 채우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하기사, 어련히 알아서 하겠나. 이런 생각이 든 칼리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칼리안을 보던 앨런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법사단의 이름, 정했습니다.” 칼리안의 고개가 앨런에게 돌아갔다. 르메인이 만들었던 군대이니, 칼리안이 미리 만들어 쓰더라도 그 이름만은 르메인이 직접 정하도록 했으면 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그 이름을 앞서 알려주지 않았었다. “무엇으로 정했습니까?” 그러자 앨런이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맞춰보라는 것이다. 칼리안이 실소하며 입을 열었다. “발칸.” 역시, 하는 표정으로 앨런이 미소지었다. “맞습니다. 르메인이 그리 부르자 하여, 그리하겠다 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이름까지 정해지니 조금 실감이 나네요.”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곧 리베른에 머무는 제 며느리와 손녀를 부를 생각입니다. 아마 로젤리타에서 다녀오실 즈음이면 만나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칼리안의 발이 순간 멈칫하다 앞으로 나갔다. 매우 어색한 웃음이 칼리안의 얼굴에 드러났다. “손녀······가 있으셨군요.” 아르센보다 더 젊어보이는 앨런이 할아버지 미소를 지었다. “당차고 예쁜 아이입니다. 다만 손녀가 아니라 며느리 때문에 부르는 것이지요. 지금 리베른에서 마법을 가르치고 있으니, 아무래도 발칸의 마법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에 도움이 될 듯하여.” 칼리안은 리베른에 대해 그리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저 마법사들에 대한 대우가 좋고, 사람들의 성정이 굉장히 자유로운 나라라는 정도만 알았다. 때문에 리베른의 마법 교육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칼리안이 앨런에게 물었다. “리베른에 마법 학원이라는 시설이 궁금하군요. 그 곳에서 가르침을 받아도 마법사로서 활동을 할 만큼 충분히 배울 수 있습니까?” 일대 다수의 마법 교육이 과연 얼마나 효율적일지 알 수가 없어서 묻는 질문이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브리센의 기사 양성소와 비슷합니다. 재능과 노력에 결과가 따르는 것이니, 서로 다를 바가 없지요.” 그에 대한 칼리안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생각에 빠진 것임을 느낀 앨런이 말 없이 칼리안의 옆에서 느긋한 걸음을 옮겼다. 칼리안의 입은 세뉴관을 거의 한바퀴 돌았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열렸다. “스승님, 혹시 오늘 오후에 다른 일정이 있습니까?” 그 말에, 앨런은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칼리안이 찾는다면, 일정이 있어도 없앨 앨런이었으니까. “특별한 일정은 없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번에 칼리안이 찾는 것은 앨런이 아니었다. 칼리안은 기대감 가득한 앨런을 향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마차 좀 빌려주세요.” 뜬금 없이, 마차라니. 예상치 못한 말이었으므로, 앨런은 의문 어린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아니라 제 마차에게 볼 일이 있으신지요?” 꽤 이상한 소리였기 때문에 칼리안이 잠깐 웃다 대답했다. “스승님 이름만 잠시 쓰면 되는 일이라서요. 함께 가셔도 상관은 없지만, 오늘은 별로 재미 없으실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보아도 앨런 마나실의 것임이 분명한 그 호사스러운 마차를 타고 앨런 마나실의 이름을 팔겠다는 소리였다. 먼저 가자 청하는 것이 아닌 자리에 굳이 따라갈 미련퉁이는 아니었으므로, 앨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재미 없는 곳은 싫습니다. 아무튼 왕자님께서 제 마차를 쓰시는데 제가 왕궁 밖에서 뭉그적거리고 있으면 이상할 테니, 르메인과 잠시 이야기나 나누고 있겠습니다. 다녀오시지요.” 그 길로 칼리안은 얀과 키리에를 데리고 앨런의 마차에 올라 왕궁 밖으로 나갔다. 시종장으로부터 칼리안이 앨런의 마차를 타고 왕궁을 나갔다는 말을 들은 르메인은, 앨런이 함께 나가는 경우에는 더 이상 보고를 올리지 말라는 말을 했다. 앨런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종장의 뒤로 앨런이 불쑥 나타났다. 그것을 본 르메인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이 망할 마법사가 애를 혼자 내보낸 것이다. * * * 폴룬 상단의 상단주 멜피르 폴룬은, 지금 저택 후원의 작은 연못가에 서서 물고기 밥을 주고 있던 참이었다. 즉, 매우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을 즐기던 그에게 하인이 달려오더니, 검은색의 자개 장식 마차가 저택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동글동글한 멜피르의 눈이 물고기의 것만큼 크게 벌어졌다. “앨런 마나실 경이 이 곳에 오셨다고?” 그 말에, 후원까지 달려오느라 차오르는 숨을 소리 없이 삼키던 하인이 대답했다. “네, 남작님. 방금 그 마차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허어······ 그분께서 대관절 무슨 일로 오셨는가.” 물고기 밥이 담긴 그릇을 뒤에 서 있던 하인에게 넘겨준 멜피르가, 손을 탁탁 쳐서 묻어있던 것을 털어냈다. 그 뒤 서두르는 걸음으로 들어가던 중, 또 한 사람이 멜피르에게로 달려왔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그는, 하인이 아닌 집사였다. 멜피르의 한쪽 눈썹이 쭉 올라갔다. 나이 많은 그의 집사가 저렇게 직접 뛰어온다면,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곧 멜피르의 곁으로 다가온 집사가 귓가에 대고 말을 전했다. 멜피르의 눈이 조금 전보다 더 커졌다. ‘마나실 경의 마차에, 다른 분이 계셨습니다.’ 그 말을 끝까지 전해들은 멜피르는, 하마터면 연못에 빠질 뻔한 다리를 간신히 들어올렸다. 어느새 그의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국왕 탄신 기념일 축제에서 벌어질 뻔한 사고를 막게 했던 목소리가 귓가를 윙윙 울렸다. ‘머리 위가 불안하군요.’ 그 짧은 말로 그의 목숨을 살려냈던 칼리안이 왔다. 3개월 동안 미뤄 두었던 목숨값을 받으러 온 것이다. 그것도 이런 대낮에 직접! 멜피르는, 지금까지 살아온 많은 날 중 오늘의 멜피르가 가장 똑똑하기만을 바라며 서둘러 칼리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 제8장. 아주, 반갑습니다. (2) (수정) 르메인의 고개가 문 밖에 서 있던 카에라의 기사를 향해 돌아갔다. 칼리안을 따라가도록 지시하기 위해서였다. 앨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냥 두시지요. 왕자님이 곤란할 겁니다.” 르메인이 굳은 얼굴로 이 사달을 낸 원흉을 향해 말했다. “위험한 것보다는 곤란한 것이 낫지.” 그 말에, 앨런의 입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감히 앨런 마나실의 마차를 습격할 이는 이 카이리스에 없을 것이니, 안심하시지요.” 안전하기로는 이 아르피아 궁에 버금갈 곳이 바로 앨런 마나실의 마차인 것은 맞았다. 다만 그 마차의 안전함이 칼리안에게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못할 앨런은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게다가 숨겨둔 검도 따르는 중이니, 위험할 것이 없습니다.” 르메인의 눈썹이 움직였다. 호위 시종을 두고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에 대해 보다 자세히 묻는다면 왕자가 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에 대한 질책이 따라야 하므로, 르메인은 그 말을 듣지 못한 척 대답했다. “일단 기다려보도록 하지.” 그렇게 일단락을 내고 난 뒤에야, 르메인의 팔이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지금껏 앨런을 문가에 세워 두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굳이 권하지 않았어도 앉을 참이었던 앨런이 그 앞으로 가 앉았다. 앨런을 잠시 쳐다보던 르메인이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이미 한번 큰 일을 치른 아이라, 걱정이 앞서는군.” 이렇게 걱정 많은 양반이 그 동안 어떻게 그리 무심했는지. 아몬드 쿠키 하나를 집어든 앨런은, 문득 떠오른 이런 생각과 함께 쿠키를 씹어 삼켰다. 우물거리는 앨런의 입을 잠시 보던 르메인이 물었다. “무엇때문에 나간 것인지는 알고 있나?” 앨런이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알 것 같아서였다. “리베른의 마법 학원에 대해 묻던 중 팔랑팔랑 나가셨습니다.” “마법 학원이라? 그 아이가 학원까지 만들 결심을 한 것인가?” “결심을 한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요.” 애매한 대답을 한 앨런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러더니 굳이 가시를 숨기지 않은 질문을 꺼내놓았다. “만약 마법 학원이 세워진다 하더라도, 전하께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재라는 것은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으니. 혹여 그것이 전하의 걱정거리가 될런지요?” 칼리안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겠느냐는 질문이었고, 르메인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섣불리 내 자리를 욕심 낼 아이가 아닌 것은 이미 알고 있으니, 그런 이유로 내가 칼리안을 견제할 일은 없을 것이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날을 세울 이가 넘쳐나니, 그것이 걱정이 될 뿐이지. 칼리안의 옆에 경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 중이니 그리 쳐다보지 말게.” 앨런이 왜 자신의 편에 서있는지 모르는 르메인이 아니었다. 처음 오던 날부터 못을 박지 않았던가. 칼리안이 무탈히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집안 정리를 해줄 뿐이라고.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이번 로젤리타에 경이 함께 가는 것이 어떠한가?” 실리케가 얌전히 있는 중이라지만, 지그프리드의 영지까지 가는 그 먼 길에 행여라도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하는 말이었다. 물론 앨런도 이런 르메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앨런은 부드럽게 웃으며 르메인을 안심시켰다. “밖에 있을 왕자님보다 안에 계실 전하의 목이 더 간당간당하니, 쓰잘데기 없는 걱정은 내려두시지요.” 르메인이 조용히 이마를 감싸쥐었다. 그리고, 칼리안이 빨리 와서 이 인사를 좀 치워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칼리안이 기다릴 것만 생각하고 무작정 달려가던 멜피르가 잠시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혼자 오셨는가?” “네. 시종 둘만 대동하고 오셨습니다.” 혼자서, 그것도 앨런 마나실의 마차에 탄 채로 왔다. 분명한 비밀 방문이다. 멜피르가 긴장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인들 중 왕자님을 뵌 이가 있나?” “안그래도 먼저 주변을 물려달라 하시어 따로이 보는 눈 없이 뫼셨습니다.” “그래. 잘했네.” 멜피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후다닥 뛰어갔다. 지쳐버린 집사가 더 따라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숨을 고르다 다시 멜피르가 간 곳을 향해 달렸다. 저택으로 들어선 멜피르는 서둘러 손을 씻고 옷의 먼지를 털어낸 뒤 응접실로 향했다. 생각 같아서는 편히 입고 있던 의복도 정갈한 것으로 갈아입고 싶었지만 왕자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수가 없었다. 응접실 밖에 서 있는 얀과 키리에가 보였다. 미리부터 주변을 물려둔 그 모습에, 멜피르도 집사를 밖에 두고 홀로 응접실에 들어갔다. 그러자 창을 등지고 앉아 찻잔을 들고 있던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칼리안과 시선이 마주친 멜피르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멜피르 폴룬, 3왕자님을 뵙습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오랜만입니다.” 그저 속삭이듯 말하고 스쳐 지나간 것이 첫 만남의 전부였기 때문에, 칼리안의 제대로 된 목소리를 대면한 멜피르가 허리를 조금 더 숙였다. 지나치게 정중한 인사를 하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하필 얼마 전부터 본격적으로 텐실과의 다이아몬드 거래를 시작한 폴룬 상단이었다. 그러니 목숨값으로 대체 뭘 달라고 할지 걱정이 태산일 터였다. “연락 없이 찾아와 미안합니다. 드러내기가 어려워서요.” 사실 칼리안이야 대놓고 멜피르를 찾아오든, 궁으로 부르든 상관이 없었다. 왕자가 남작을 만나겠다는데 누가 참견을 하겠는가. 그러니 이렇게 눈에 띄지 않는 방법으로 멜피르를 찾은 것은, 칼리안이 아니라 멜피르를 위해서였다. 마법사 협회 외에는 그 어떤 귀족과도 손을 잡지 않은 칼리안이다. 때문에 멜피르와 따로 만난 것이 알려지면 그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러한 이유가 있음을 아는 멜피르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찾아주시니 그저 무한한 영광입니다.” 고개를 끄덕여 화답한 칼리안이 테이블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앉으세요. 잠시 이야기 할 것이 있으니.” 조금 더 긴장한 얼굴이 된 멜피르가 주섬주섬 걸어와 조용한 몸짓으로 자리에 앉은 뒤, 칼리안의 입이 열렸다. “그간 생각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레이븐의 목걸이를 선물해서 의중을 떠보려 했더니, 완전히 간파했다는 것처럼 목걸이 값을 보내온 칼리안이었다. 그 이후로 아무 말이 없어서 혹시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더 큰 것을 요구하려 하는지를 알지 못해 속이 편칠 않았다. 칼리안의 말에, 멜피르는 특별히 부정하지 않고 답했다. “네, 왕자님. 천성이 장사꾼인지라 받기만 했던 적이 없다보니, 내심 걱정을 하였습니다.” 솔직한 대답이 참 마음에 들었다. 칼리안이 웃음을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잠시동안 멜피르를 쳐다봤다. 그 시선을 마주한 멜피르가 마른 침을 삼킬 때 쯤,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폴룬은 무엇을 거래합니까?” 멜피르의 어깨가 잠시 경직됐다. 말과 다이아몬드요, 라는 대답을 하는 순간, 저 어린 왕자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왕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성격에, 지금 마시는 차 값도 치르고 갈 것이 뻔했다. 그래야 훗날에 또 얽힐 일이 없을 테니까. 이렇게 생각한 멜피르의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앞에서, 칼리안은 다시 여유롭게 차 향을 즐겼다. 한 모금의 차를 더 넘겼을 때, 멜피르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거래하는 것이 없습니다, 왕자님.” 칼리안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폴룬 상단은 말과 다이아몬드 거래를 하고 있지만, 멜피르 폴룬은 아직 누구와도 손을 잡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칼리안이 기대했던 대답, 그리고 기대했던 모습이었다. “아직이라 하니.”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멜피르를 응시했다. “내가 폴룬 남작과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을까요?” 수완 좋은 상단주 멜피르 폴룬 말고, 능력있는 남작 멜피르 폴룬을 상대하고 싶다고, 칼리안은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칼리안이 멜피르 폴룬을 찾아온 것은 재화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기사였던 베른은 어차피 상단의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자질구레하게 미래의 일들을 예견해서 돈을 벌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상단주 멜피르와는 대화할 필요가 없었다. 멜피르가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켰다. “허어······.” 저도 모르게 버릇 같은 숨을 내쉰 멜피르가 대답 없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다시 한번 차를 마셨다. 달칵. 찻잔이 한번 더 작은 소리를 냈고, 멜피르의 입이 열렸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습니다, 왕자님.” 칼리안의 눈에 흡족한 빛이 들었다. 살려놓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칼리안이 천천히 말했다.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잘 되었군요.” 멜피르가 자세를 다잡아 앉았다.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다만 구체적인 내용은 아니었고, 조금 두루뭉술한 질문이었다. “남작은 상단이 아닌 다른 것도 운영할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여 왔습니다.” 앨런이야 칼리안의 사람이니 무슨 일을 시키려는 것인지부터 숨김 없이 말하고 부리겠으나, 멜피르는 아직 아니었으니 그 의중부터 판단해보려는 것이다. 멜피르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사람이 있고, 돈이 있으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람도 있고, 돈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브리센도 있을 것이라서.” 앨런이 추측한 것과 같이, 칼리안은 지금 마법 학원을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일이 마법사단을 만드는 것만큼 위험하지는 않을 터였다. 대신 브리센과 얽혀 귀찮은 일들이 생길 지도 몰랐다. 브리센이라는 말에, 멜피르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떼며 물었다. “그렇다면 왕자님도 계신 것이 아닙니까?” 칼리안이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네요. 맞습니다. 나도 있습니다.” “사람과 돈이 있고, 브리센 앞에 왕자님이 계신다면. 그 역시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온 이유에 대한 수수께끼를 더 이어나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았으므로, 칼리안은 더 숨기지 않고 본론을 꺼내들었다. “카이리스에, 마법 학원을 세워볼까 합니다.” 학원 하나 쯤 세울 돈은, 칼리안의 금고 안에 차고 넘쳤다. 교육을 담당할 이들이야 협회의 마법사든 앨런이든, 써먹을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운영이 문제였다. 태평하기 그지 없는 마법사들이 학원을 제대로 운영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러다 이 수완 좋은 상단주가 생각났고, 아직 받지 않은 목숨값이 떠올랐다. 그 길로 이렇게 멜피르를 찾아온 칼리안이었다. 마법 학원의 운영을 맡아달라는 말임을 알아들은 멜피르가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고민을 시작했다. 생각해야 할 것이 많으리라는 것을 아는 칼리안은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렸다. 단순히 학원을 운영하는 것을 떠나, 멜피르 폴룬 남작이 3왕자 칼리안의 편에 서게 되는 일이었으니까. 결정을 내린 듯, 멜피르가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칼리안의 제안에 대한 대답이 아닌 다른 말이 먼저 나왔다. “그것이 저의 목숨값입니까?” 자신을 살려준 대가로 시키는 일인지. 그래서 의지와 상관 없이 꼭 해야 하는 일인 것인지. 그리 물어왔다. 칼리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받았습니다, 목숨값.” 달칵. 마지막 모금을 비운 차를 내려놓은 칼리안이 그리 답했다. 멜피르의 시선이 한동안 빈 찻잔에 머물렀다. 그리고 곧, 시원한 웃음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석달 동안 멜피르의 마음 한 구석에 얹혀있던 짐을 털어낸 것에 대한 후련함이었다. “하겠습니다.” 멜피르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 * * 이틀이 지난 아침. 체르밀 궁의 식당에서는, 빨갛게 물을 들여 구운 빵, 체리가 가득 들어간 파이, 붉은 색을 가진 온갖 과일과 채소가 준비되고 있었다. 체르밀 궁을 둘러싼 회랑은 붉은 실로 장식됐고, 인공 호수 주변에는 빨간 라프라니아 꽃이 한가득 놓였다. 바람결에 흩어진 꽃잎이 호수 위를 맴돌았다. 카이리스 사람들은 탄생을 축하하고 죽음을 슬퍼하는 것에 구분을 두지 않았다. 죽은 이들의 앞에 붉은 꽃을 놓았던 것처럼, 생일을 맞은 이들에게도 붉은 꽃을 건넸다. 그들에게 붉은색은, 죽음과 탄생을 아우르는 색이었다. 그러니 그 얼마나 개성 없는 풍속인가,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산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같은 색을 건네다니. 아무튼 칼리안 혼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전통을 바꿔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잠에서 깨자마자 석류 주스를 마신 뒤 메를린이 건네주는 열 다섯 송이의 라프라니아 꽃을 받으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칼리안의 생일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카이리스의 3왕자가 드디어 성년이 되는 감격스러운 날인 것이다. “열 다섯 번째 탄생일을 맞이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래서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을 이 말을 오전 내내 들었다. 세뉴관에 모인 귀족들로부터 축하 인사와 생일 선물을 받는 것에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로젤리타 여정에 함께 할 이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간단한 감사 인사가 포함된 건배사를 하고 긴 시간에 걸쳐 밥을 먹고 차를 함께 했다. 쉴 틈 없이 저녁 만찬을 위한 예복으로 갈아입고 지그프리드관을 향해 갔다. 붉은 실로 매우 화려하게 장식된 검은 색의 망토가 어쩐지 칼리안의 외양을 떠올리게 했다. 메를린이 일부러 그런 색으로 고른 것이 분명했다. 검은 색 재킷과 바지에는 별다른 장식을 넣지 않았으나, 어디서나 눈에 띄는 망토 덕에 어차피 재킷이나 바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나마 한가지 흠이었던 마른 몸에도 살이 붙었으니, 귀족들의 시선이 칼리안에게 다시 머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게다가 오늘의 주인공이기도 했고. “반갑습니다.” 칼리안은 또 이렇게 인사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반갑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귀족들이 심한 고민을 했더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뒤, 별 뜻 없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계속 그렇게 인사를 해온 터였다. 그러다보니 버릇이 되었다. 귀족들의 찬탄 가득한 눈길을 한 몸에 안은 칼리안이 언제나와 같은 기품있는 걸음으로 자신의 자리에 갔다. - 우뚝. 그리고, 정말로 아주 잠시 동안 발을 멈칫했다. 석 달 동안 얼굴을 비추지 않았던 플란츠가 나와 있었다. ──────────────────────────────────── 제8장. 아주, 반갑습니다. (3) (수정) 요즘 뭐가 그리 바쁜지 몰라도 란델은 조찬에도 가끔 나오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도 늦게 올 모양이었는지, 란델은 없었다. 왕자들을 위해 마련된 동그란 테이블에, 반갑지 않은 놈 한 명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칼리안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지려는 것을 참아낸 칼리안이 플란츠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칼리안과 플란츠가 한 자리에 앉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유를 궁금해 할 필요도 없었다. 칼리안에게 ‘참 독한 감기’를 안겨준 실리케를 말 한마디로 몰아넣은 플란츠가 아닌가? 게다가 그 일이 있은 뒤 처음으로 둘이 함께 앉는 자리였다. 그러니 적도 아니고 아군도 아닌 둘의 사이가 어떨지 심히 궁금할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칼리안은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차피 플란츠와 가야 할 길이 다르니, 억지로 친한 척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귀족들의 시선도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야.” 그런데 놈이 말을 걸어왔다. 여전히 자신을 보는 귀족들을 한 명씩 빠짐없이 쳐다보며 시선을 돌리게 한 플란츠가, 테이블에 상체를 누이듯이 기대며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래 전에 있던 일과 같은 상황이 또 한번 벌어졌다. “야. 피눈깔.” “칼리안.”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호칭에 곧바로 대꾸한 칼리안이, 플란츠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소 딱딱한 어조로 덧붙였다. “넘겨 듣는 것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형님.” 그 말에, 플란츠의 연두색 눈이 잠시 빛났다. 한참동안 칼리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플란츠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곧 그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잖아.” 아니잖아. 칼리안의 눈이 조금씩 가늘게 변했다. 플란츠의 눈에는 날이 섰다. “대들고, 칼도 쓰고, 말도 타고.”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른한 한숨 같은 목소리가 칼리안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너. 누구냐고.” 칼리안은 말 없이 그 눈을 쳐다보았다. 그래. 플란츠 정도면 눈치 챌 만도 하다. 제 손에 올려놓고 그리 괴롭혀오던 동생이 하루 아침에 바뀌었으니, 모르면 얀이다. 칼리안은 아주 잠시 고민을 했다. 상관없다. 그렇게 결정했다. 긍정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는 것으로. 그리고 오래지 않아, 칼리안의 입에 여유로운 미소가 걸렸다. “이상한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앨런처럼 마음을 얻어내야 할 상대도 아니니 사실을 이야기 해 줄 필요가 없었다. 만약 플란츠가 칼리안에 대해 아무리 확신한다 한들, 밝혀질 수 있을 비밀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그냥 잡아 떼면 그만이다. 그렇게 결론지은 칼리안의 얼굴은 평온했다. 속은 시끄러웠으나, 아무튼 겉보기로는 그랬다. 그런 칼리안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른 말 없이 연회장에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문득 옛 칼리안이 떠나면서 전해주고 간 기억 속의 플란츠가, 그가 칼리안에게 저질렀던 일들이 생각났다. 그 뒤에는 세크리티아를 망국으로 이끌었던 플란츠가 생각났다. 그리하여, 칼리안의 시선이 플란츠의 빈자리에서 떼어지질 않았다. 멀리서 그런 칼리안을 본 앨런의 얼굴에 걱정이 들어앉았다. 둘의 대화를 엿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플란츠가 떠난 이후부터 칼리안의 표정이 굳어있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곧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앨런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칼리안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앨런은 칼리안에게 다가가는 대신,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이는 것으로 걱정하는 마음만 전했다. * * * 다음 날. 연회장에서의 일로 마음이 뒤숭숭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 칼리안에게, 아침부터 앨런이 찾아왔다. 앨런은 칼리안을 보자마자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은 다 털어내셨는지요.” 칼리안이 정말 신통방통하다는 눈으로 앨런을 쳐다봤다. 이 현명한 마법사는 그깟 말 한마디를 안해도 칼리안의 속을 다 알아보는 것이다. 앨런이 조용히 웃으며 덧붙였다. “아직 못 털어내셨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시면 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건네온 그 말에, 칼리안은 그제야 웃었다. 가끔씩 이렇게 아무 도움 안되는 말을 슥 꺼내놓는데, 그것이 어찌나 좋던지. 다만 정말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맞았으므로, 칼리안은 곧 웃음을 멈추고 전날 플란츠와 있던 일을 이야기했다. 플란츠가 칼리안이 바뀌었다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다는 말에,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플란츠라면, 알았을 만 하지요. 망나니처럼 굴고 있어도, 생각까지 짧은 아이는 아니니.” 앨런의 후한 평가에, 칼리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칼리안은 그냥 다음 말을 꺼냈다. “우선은 모르는 척 했지만, 당연히 믿지 않겠죠.” 그 말을 들은 앨런이 조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칼리안을 향해 물었다. “무엇을 믿게 해야 합니까?” 칼리안이 대답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닫았다. 그것을 본 앨런이 칼리안을 대신해 말했다. “이전 칼리안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왕자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알아도 밝혀내지지 않을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을 굳이 걱정하지는 마시지요.” 그렇게 말한 앨런은 흠, 하는 소리를 잠시 냈다. 그리고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정체를 들킨 것은 둘째치고, 베른으로 살지 않겠다 하였음에도 또 플란츠에게서 과거의 모습을 찾아내어 가라앉아 있으니, 그 말을 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앨런이 손을 댈 것이 아니라 생각되어 다시 입을 닫았던 터였다. 대신 앨런은,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받으십시오.” 주석으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였는데, 그것을 여니 은색의 반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아무 무늬도 없는 그냥 두꺼운 모양의 반지를 꺼내든 칼리안이 물었다. “무엇입니까?” “끼워 보시지요. 꽤 마음에 드실 테니.” 좀 큰 크기의 반지였기 때문에, 어디에 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칼리안은 그것을 둘째 손가락에 끼웠다. 그러니 신기하게도 반지가 알아서 줄어들며 손에 꼭 맞게 바뀌었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음을 안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는 앨런을 쳐다봤다. “가끔 늙은이 생각이 궁금할 때 부르시면 됩니다.” 통신용 마법이 걸린 반지라는 소리다. 칼리안은 정말 깜짝 놀랐다. 사실 그것이 가장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앨런이 없으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었으니까. “왕궁에는 시스파니안의 힘이 닿아 있어 그것이 소용 없습니다. 때문에 제가 왕궁에 있을 때에는 대화가 어렵겠으나, 왕궁 밖에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응답을 드리겠습니다.” 칼리안이 이해했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앨런이 지금 왕궁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음은 알았지만, 그래도 가끔씩 앨런에게 기댈 수 있으리라는 것이 든든했다. “감사합니다. 든든하네요.” 학회의 보물창고가 또 털렸다며 에우리아가 울상을 짓고 있는 것을 모르는 채로 그저 좋아하는 칼리안을 보며, 앨런은 또 현명한 마법사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다 이 곳에 온 다른 이유가 생각난 앨런은, 자세를 다잡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 마차가 갔던 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멜피르 폴룬을 말하는 것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시 만나 보셨습니까?” “네. 어제 찾아왔기에 만났습니다. 인재를 또 찾으셨더군요. 어찌나 셈이 밝던지.” 그리고 앨런은 품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꺼내 칼리안에게 건넸다. 학원 부지 선정을 포함한 건설 비용과 초기 운영비, 교사 선임비 등이 적혀 있었다. 즉, 돈 달라는 내용이었다. 칼리안이 그것을 꼼꼼히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참으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으므로, 앨런이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첫 비용을 전부 왕자님께서 부담하겠다 하셨다던데, 무리가 가지는 않을런지요?” “돈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왕실 재정으로 부담하지 않고 폴룬 남작 개인이 운영하는 학원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래야 제가 직접 참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스승님 만큼은 아니더라도 저도 뭐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한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는 뜻을 보였다. 곧 칼리안이 몸을 일으켜 금고에서 수표 뭉치를 꺼내와 앨런에게 건넸다. “저 대신 좀 전해주세요.” “큰 돈인데, 그 남작에게 바로 건네도 되겠습니까?” 제대로 사용하는지에 대해 감시할 필요가 없는지를 묻는 말이었고, 칼리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맡겨두시면 됩니다.” 아무리 큰 돈이라 하더라도, 멜피르에게까지 큰 돈은 아닐 터였다. 게다가 저 정도 돈에 신임을 버리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폴룬 남작은 상인인지라, 마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스승님이나 협회장에게 간혹 자문을 구해올 테니, 제가 없는 동안 잘 대해주시고요.” “그것은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그 뒤 칼리안은 마법 수업 대신 마법 학원에 대한 이런 저런 질문을 앨런에게 건넸다. 멜피르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따로 말을 전해달라고도 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얀이었다. “왕자님, 죄송합니다만 다음 일정이 있습니다.” 이만 대화를 마쳐달라는 이야기였다. 그 소리를 들은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오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마법 수업을 하기 위해 오겠다는는 말이었다. 그런 앨런에게 칼리안이 말했다.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 잠시 인사를 하고 갈 겁니다. 오래 걸리지 않으니, 다른 일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은 저와 얘기나 나누시죠.” 수업은 치우고 수다나 떨자는 말이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시스파니안을 만나러 떠나는 칼리안이었으니, 한동안 보지 못할 터였다. 때문에 앨런은 웃으며 그리하자 대답했다. * * * 체르밀 궁의 정문 앞에, 검은 갑옷을 갖춰입은 스무 명의 기사가 도열하여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슬레이만이 보낸 지그프리드의 정예 기사들이었고, 출발 전날 칼리안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 체르밀에 방문한 것이었다. 칼리안보다 먼저 나와있던 키리에는, 상당히 호승심 강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키리에 역시 검을 다루는 이였으니, 서로간의 차이를 가늠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던 탓이다. 물론 지그프리드의 기사들 역시 그런 키리에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공작의 기사와 왕자의 호위가 알게 모르게 기싸움을 벌이는 사이, 궁 밖으로 칼리안과 앨런, 그리고 얀이 나왔다. 칼리안과 앨런이 나란히 걷고, 시종인 얀은 당연히 조금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기사들이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얀은 그런 것도 모른 채 그저 반가운 얼굴로 기사들을 보며 눈인사를 보냈다. 전날 오찬때는 이들을 이끄는 유란 라우첼이라는 기사만 참석했기 때문에, 칼리안은 나머지 기사들은 처음 만난 터였다. 때문에 그들의 앞에 선 뒤 하나하나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호오.’ 곧 칼리안의 입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말로만 듣던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라니, 실로 대단한 위용이다. 슬레이만이 얼마나 고르고 골라 보냈는지 알 만 했다. 덩치며 기백이며, 그 앞에 선 키리에가 어린애처럼 보일 정도였다. 물론 그것 때문에 칼리안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 봐라?’ 칼리안을 호위하겠다며 찾아온 기사들의 눈빛이, 지켜줘야 할 왕자를 보는 그것과는 너무나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을 굳이 말로 써본다면, - 우리 공자님을 시종으로 부리고 있는 새끼가 너였냐? 딱 이런 느낌이라 하면 될 것이다. 옆에 서 있던 앨런이 이런 모습을 보며 매우 흥미로운 것을 본다는 얼굴을 했다. 로젤리타 여정 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저들이 칼리안의 칼 솜씨를 볼 일이 한 번쯤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을 보았을 때의 표정이 정말 궁금했다. 그것을 볼 수 있을 키리에는 매우 기대되는 표정을 살짝 드러냈고, 이런 상황을 알 리 없는 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불편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왕자님?” 칼리안이 조금 더 노골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카이리시스에서 나가자마자 땅에 묻힐 것 같아서 불편하다는 말을 하는 대신, 칼리안은 기사들과 눈을 마주한 채로 힘주어 말했다. “얀. 마실 것 좀 가져와.” 그 말에, 엄청난 투기가 기사들 사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함께 가는 이들이 이렇게나 반겨주니, 가는 길에 플란츠 생각을 할 일은 없겠다 싶었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 기싸움을 보던 앨런이 말했다. “같이 못간다는 것이 이렇게 아쉬울 때가 있나.” 한동안 기사들을 하나하나 쳐다보며 선전포고를 마친 칼리안이, 비로소 입을 열어 말을 건넸다. “가는 곳까지, 잘, 부탁합니다.” 어느새 버릇이 된 것 같은 진한 웃음이 다시 한번 맴돌았다. ──────────────────────────────────── 제9장. 확인해. (1) 칼리안은 그저 여느때와 다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방 밖으로 나왔다. 다만 평소 달리 식당이 아닌 궁 밖으로 곧장 나와 르메인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조찬을 마친 후에는 간단한 예식을 치렀다. 그리고 르메인에게 인사를 올린 뒤 레이븐의 등에 올랐다. 칼리안의 앞에는 아르센이, 좌 우로 키리에와 얀이, 뒤로는 치유술을 쓸 수 있는 히나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런 일행의 앞 뒤로 검은 옷의 기사들이 도열했다. 왕실 마차를 탔다면 왕실 문양이라도 있었을텐데, 칼리안은 딱히 왕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표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안그래도 눈에 띄는 외양인데다 아직은 같은 편보다 적이 더 많은 칼리안이었으니, 굳이 나서서 왕족임을 알려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스파니안을 닮은 왕자가 로젤리타를 떠난다 하니, 광장부터 카이리시스 외성에 이르는 왕도 주변에 환송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 칼리안이 나섰다. 화려한 마차는 없었으나 지그프리드의 기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칼리안이 있었다. 때문에 이전의 왕자들에 비해 그 위용이 결코 부족하지 않았으므로, 칼리안이 지나가는 걸음 걸음마다 환호성이 울리고 무탈을 기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의 성인식.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의 의지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 로젤리타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출발 후 나흘 동안은 별 문제가 없었다. 칼리안이 가게 될 도시들에 왕궁의 연락이 미리 전해진 것도 있었고, 누가 섣불리 접근할 만한 기사의 수도 아니었던 까닭이다. 싸움이 나면 피해야 하나 나서야 하나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이 허탈했을 만큼, 칼리안은 레이븐의 위에서 편히 앉아 구경이나 하고 얀과 대화를 나누며 보냈다. 그리고 닷새째 되던 날. - 네, 스승님. 별다른 일은 없으십니까? - 갑자기 텐실에서 사신들이 왔다더군요. 르메인이 바쁘니 늙은이 혼자 적적합니다. 레이븐의 위에 앉아 한가롭게 앨런과 대화나 해볼까 했던 칼리안은, 조금 실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반지에 불어넣었던 마력을 뺐다. 둘러둘러 말하지만, 르메인이 바빠서 앨런도 정신 없다는 소리임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얀이 물었다. “마나실 경이 상대 못해드리겠다 합니까?” “응. 바쁘신가봐.” 그 말에, 얀이 웃으며 대꾸했다. “매일 그렇게 대화를 보내시는데 매번 받아주는 것이 더 신기하네요. 제가 상대해드릴테니 그만 무료해하세요.” 꼭 아무 일이 없다며 투정을 부린 것 같아서, 칼리안이 어울리지도 않는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 칼리안 일행은 라트리아 숲을 지나 라트란이라는 도시로 향하는 중이었다. 낮은 숲을 끼고 도는 왕도 아래로, 열 개 남짓의 둥근 호수가 보였다. 특이하게도, 호수들이 서로 굉장히 비슷한 형태였고, 하나하나의 크기가 상당히 컸다.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물었다. “요츠바라, 맞나?” “네, 맞습니다. 요츠바라 호수예요.” 호수라고는 해도 물이 거의 말라 있었다. 당연한 것이, 자연히 물이 차올라 만들어진 호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래가 확실히 전해져 내려오는 그것은, 시스파니안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호였다. 물론 그 고룡이 할 일 없이 이런 곳에 호수나 만들어보자 했던 것은 아니었고, 악신을 쫓으며 운석을 끌어와 떨어뜨린 자리에 물이 고여 만들어진 곳이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500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계곡에 남길 정도의 힘을 지닌 용을 지금 만나러 가고 있다는 것이 새삼 와닿았던 탓이다. 그 웃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몰라도, 얀이 이런 말을 해왔다. “한번 둘러보실 겸 이 곳에서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라트란까지 두 세 시간 정도 더 가야 하는데, 더 가면 쉴 만한 마땅한 곳이 없기도 하고요.” 특별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얀은 이미 이 곳을 몇 번이나 지나다닌 사람이었고, 칼리안은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칼리안은 선선히 동의했고, 일행은 왕도에서 조금 벗어난 평평한 풀숲으로 이동했다. 풀을 뜯는 것에 열중인 레이븐의 다리에 기대 앉은 칼리안이, 이전 도시에서 가져온 샌드위치를 건네 받았다. 곧 히나가 다가와 칼리안과 얀에게 물 잔을 내밀었다. “고마워.” 히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키리에의 옆으로 가 앉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얀이 말했다. “키리에가 히나를 엄청 챙기던데요.” “여동생이니까.” 그 말에 얀이 웃으며 대꾸했다. “하긴. 제 동생도 저러면 참 챙겨주고 싶을텐데.” 얀이 먼저 가족 얘기를 꺼내는 것이 처음이었다. 왕궁에서 벗어날수록, 얀은 조금씩 시종이 아닌 본래의 얀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지금만 보아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옆에 나란히 앉아 밥을 먹고 있는 것이다. 얀이 꺼내두는 가족 이야기에 칼리안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생일 선물 안 줬다고 자고 있는 오빠한테 칼 내리꽂는 여자애가 하나 있는데, 왕자님께서도 이제 곧 만나보시게 될 겁니다. 조심하세요.” 칼리안이 마지막 남은 빵을 입에 넣다 말고 웃었다. 그 모습이 상상됐기 때문이다. 얀은 분명 엉엉 울었을 것이다. 얼마 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칼리안이 다시 레이븐의 등에 오르려 했다. 그런데 그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 사삭! 덤불을 헤치고 다가오는 작은 소리. 그와 함께 숲으로 이어진 무성한 덤불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칼리안이 그 곳을 쳐다봄과 동시에, 어느새 다가온 키리에가 칼리안의 앞을 막고 섰다. 기사들 역시 칼리안과 얀을 가운데 두고 방어 태세를 갖췄다. “아니, 잠깐······.” 칼리안이 이렇게까지 경계해야 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하려는데, 히나보다도 훨씬 작은 인영이 덤불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겨누고 있는 기사들과 마법사를 보더니 깜짝 놀란 눈을 했다. 그러더니 양 손을 들어보이며 외쳤다. “맞아! 살려줘!” 이게 무슨 소리인가? 말을 이해하지 못한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칼리안은 조금 다른 이유로 표정이 굳었다.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에게야 더러 익숙했을지 몰라도 칼리안에게는 그렇지 않은 외양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인영은 바로 초록색 단발머리를 한 남자 아이였는데, 얼굴 옆에는 인간의 것보다 조금 더 길고 뾰족한 귀가 붙어 있었다. 항상 말이 없는 키리에가 아이를 보곤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엘프?”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엘프 소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칼리안의 평화로운 여행에 일어난 큰 파문의 시작은, 이렇게 갑작스레 튀어나온 한 명의 엘프 소년이었다. 칼리안이 생전 처음 본 엘프의 온전한 귀를 보며 신기해 할 틈도 없이, 그 엘프가 말했다. “나, 시아.” 이제 모두의 얼굴에 같은 표정이 드러났다. 아까부터 저 엘프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사대장 유란 라우첼의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엉뚱한 침입자에게 겨눈 검을 집어넣어야 할지, 아니면 그냥 계속 경계해야 할지를 물어오는 것이다. 엘프들은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거짓말도 잘 하지 못한다. 때문에 경계심을 조금쯤 풀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칼리안은 칼을 치우라는 제스처를 하며 그 엘프에게 한발 가까이 갔다. 그와 함께 기사들의 검이 거두어졌다. 살짝 허리를 숙인 채 엘프의 얼굴을 살피던 칼리안이 물었다. “시아? 네 이름이야?” “응. 배고파.” “먹을 것 달라고 온 거야?” “숨어 있었어.” 대화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얘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그런 얼굴을 한 칼리안이 볼을 긁적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칼리안은 고개를 돌려 키리에를 쳐다봤다. 엘프들은 다 이렇냐고 묻고 싶었는데, 키리에가 똑같은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 옆에 선 히나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그 표정을 본 칼리안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너희가 알 수가 없구나.” 칼리안이 다시 한번 볼을 긁적이더니 입을 열었다. “이런 데서 뭘 하고 있어?” “맞아. 미안.” 음. 칼리안은 이 대화를 집어 치우고 밥이나 먹여 보낼지 조금 더 인내심을 가져볼지 고민했다. 그러다 돌연, 칼리안의 눈빛이 바뀌었다. 천천히 허리를 편 칼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 쫓아오는 이가 있었으면 그걸 먼저 말해줬어야지.” 말 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것만으로는 그리 큰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다만 칼리안 일행을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다는 것, 그 손에 검이 들려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채 갈무리하지도 못한 투기가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기사들이 다시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고마워.” 그렇게 말한 시아라는 이름의 엘프가 울상을 지으며 칼리안의 옷자락을 꼭 붙들었다. 아까부터 꺼내놓는 말은 이해가 안됐지만 그 행동은 알아볼 수 있었다. 도와달라는 뜻이었다. 차라리 입을 안 여는 편이 대화가 편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에,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칼리안은 도와달라는 그 손짓에 대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좀 보고.” 우선 칼리안은 레이븐의 안장에 매어 놓았던 로브를 꺼내 시아의 머리를 덮었다. 그리고는 시아를 뒤쪽으로 보내며 키리에를 향해 말했다. “데리고 있어.” 고개를 끄덕인 키리에가 시아를 데리고 가 제 옆에 세웠다. 그 사이 칼리안의 앞을 막은 기사들이 언제든지 검을 뽑아들 태세를 했고, 아르센은 언제든지 실드를 펼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칼리안은 소매 속의 나이프를 잠시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을 꺼내들 일이 있기는 할까 싶었다. 다가오는 말은 한 마리였으니까. - 다각, 다각. 곧 그가 일행의 근처까지 다가와 멈추었다. 스무 명의 기사가 함께하는 검은 머리 소년의 일행이 무엇인지도 신경쓰지 않은 채 계속 다가오는 이를 향해,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장발의 남자였다. 어디에 속한 사병인지는 몰라도, 병사의 복장을 한 채였다.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일행을 스윽 살펴보았다. 칼리안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마도 생김새만으로 칼리안을 알아보지는 못하는 듯 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귀족이나 상단 소속일텐데. 그 정도면 내가 움직이는 경로를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그때 대장 유란이 앞으로 나섰다. 다행히 저렇게 의심스러운 기색의 상대에게 칼리안이 누구인지를 굳이 먼저 알려주는 눈치 없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누구냐.” 그 말에, 남자가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도둑 한 명이 물건을 훔쳐 도망치는 바람에 쫓는 중인데. 혹시 이상한 아이 보지 못하셨습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유란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도둑을 쫓는 기색이 아니구나.” “도둑 쫓는 얼굴이 따로 있습니까?” 유란은 굳이 말을 더 허비하지 않고 단호히 대답했다. “그런 아이는 이 곳에 없으니 물러가거라.” 남자는 다시 한번 일행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한 구석에 서 있는 로브 쓴 아이를 발견했다. 누가 보아도 의심스러운 모습이었으므로, 남자가 빙글 웃었다. “있는 것 같은데. 잠깐 좀 보고 가겠습니다. 기사님들께 싸움이나 걸어보자고 온 것은 아니니, 길 좀 터 주십시오.” 남자가 말에서 내려 일행을 향해 한 발 다가왔다. 스무 명의 기사가 있는 곳에 저렇게 서슴없이 들어오는 것이 영 꺼림칙했다. 투기도 갈무리 못하는 병사였으니, 분명 뭔가 믿는 구석이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던 칼리안에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같은 것을 눈치챈 것인지, 유란이 조금 더 경계하는 표정을 했다. 그리고 검을 들어 남자의 앞을 막으며 다시 말했다. “멈춰라.” 남자의 믿는 구석. 즉, 반대편 수풀 속에 숨어 이 쪽을 향하고 있는 몇 개의 활이 있음을 파악한 칼리안은, 잠시 유란을 쳐다본 뒤 앞으로 나섰다. ──────────────────────────────────── ──────────────────────────────────── 제9장. 확인해. (2) 칼리안이 걸어나오자, 남자가 칼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칼리안은 그런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유란을 향해 물었다. “저 자가 누굴 찾는다고요?” “물건을 훔쳐 달아난 아이를 찾는다고 합니다.” 칼리안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유란을 보며 다시 말했다. “그냥 찾으러 왔다기에는 꼬리가 많이 긴데.” 유란의 시선이 잠시 칼리안을 훑었다. 그가 눈치챈 것이, 칼리안의 입을 통해 나온 까닭이다. 그것을 짐짓 못본 적, 칼리안이 남자에게 물었다. “찾는 이가 어떻게 생겼는데?” “초록 머리 엘프입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일행 쪽을, 정확히는 시아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확인해.” 그 말에, 로브 안쪽에서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갑작스레 길을 열자, 남자가 잠시 칼리안을 보았다. 그리고 칼리안은 살짝 고개를 돌려 유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유란의 고개가 아주 조금 위 아래로 움직였다.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매단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찾던 이가 아니었다는 것처럼 돌아가. 살고 싶으면.” 남자의 눈초리가 다소 사납게 변했다. 칼리안은 그 시선을 무시하며 다시 한번 주변의 기운에 집중했다. 남자가 일행에게 한 발 더 다가온 순간부터 미약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살기를 숨긴 이들도 있을테니 수풀 속에 몇 명이 숨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해도, 이 곳을 향해 몇 명이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 방향이 이상했다. 살기가 남자와 시아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가 로브를 들춰 그 안에 든 것이 시아가 맞다고 확인되는 순간, 둘 모두를 죽이려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남자가 진작부터 동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시아라는 저 엘프가 훔쳤다고 하는 물건이 그리 좋은 일에 엮여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눈 돌리지 말고 들어. 아까부터 숲 속에서 누가 널 겨누고 있어. 저 애한테도. 확인하는 순간 화살이 날아올 거야. 그러니 그냥 가. 그 자들이랑 더 친하게 지내지 말고.” 당연하게도, 남자는 칼리안의 말을 믿지 않았다. 때문에 저도 모르게 숲을 쳐다보았고, 칼리안은 쯧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지 말라니까.” 그 말이 신호가 되었다. 유란과 기사들의 검이 뽑혀나옴과 동시에 여섯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그 중 네 발이 시아를 향하고 있었다. 진작부터 긴장하고 있던 키리에와 기사들이 검을 휘둘러 화살을 막아냈다. 그 직후, 화살이 다시 한번 날아왔다. 이번엔 칼리안도 움직였다. - 화악! 칼리안은 남자를 잡아당겨 몸을 숙이게 한 뒤, 날아오던 화살들을 쳐냈다. 그 뒤를 이어 다시 쏘아진 화살이 넓게 펼쳐진 실드에 막혀 튕겨나왔다. 아르센이다.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씩 웃으며 아르센을 쳐다봤다. 곧 유란이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확인하고 와. 멀리까지 쫓지는 말도록.” 화살을 쏜 이들을 굳이 잡을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에서 내린 지시였다. 저들의 공격이 칼리안을 향한 것이 아니기도 했고, 칼리안의 호위가 우선이었으니까. 유란의 말에, 다섯 명의 기사가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그 직후 다시 한 번 화살이 날아왔으나, 마찬가지로 해를 입히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그 뒤로는 더 이상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다. 도망가는 것을 택했으리라. 시아의 곁에 있던 키리에와 두 명의 기사가 칼리안에게 다가왔다. 칼리안이 붙들고 있는 남자를 인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남자의 손이 슬며시 검 손잡이로 향했다. 그것을 본 키리에가 깜짝 놀라 소리를 높였다. “왕자님!” 자신을 구한 것이 칼리안이라는 것도 잊은 것인지, 남자가 재빨리 검을 뽑아 그대로 올려그었다. 다행히 칼리안의 반응이 조금 더 빨랐다. 검이 뽑히는 것을 안 순간, 칼리안이 남자를 붙든 손을 놓았다. 그 뒤 옆으로 몸을 틀며 나이프를 들어 검의 방향을 반대로 흘려보냈다. 동시에 칼리안의 입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윈드 애로우] 주문 없는 시동어에, 순식간에 바람의 화살이 발현됐다. 그것은 곧 검을 쥐고 있던 남자의 어깨를 관통한 뒤 사라졌다. “아악!” 날듯이 뻗어나온 키리에의 검이 남자의 검을 쳐냈다. - 카앙! 남자의 검이 힘 없이 날아가 떨어졌다. 남자는 그것에는 관심도 두지 못했다. 예리하게 집약된 바람이 뚫고 지나가 너덜거리는 어깨를 붙들고, 머릿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남자를 뺀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기사들의 눈이 칼리안에게 고정되었다. 칼리안은 조용히 소매 속으로 나이프를 집어넣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런 칼리안에게 유란이 걸어오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호위 기사가 스물이나 되면서 정작 몸싸움은 칼리안이 혼자 했으니 하는 말이다. 물론 칼리안이 앞으로 나서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저 자나 데려가 확인해보세요.” “네, 왕자님.” 곧 유란의 지시에 따라 두 기사가 남자를 제압하고 지혈했다. 심문은 해야 했으니, 남자가 혹여 죽거나 기절하면 곤란했던 탓이다. 남자의 상처를 보던 기사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지금 그들의 머릿속에는 같은 것이 떠올라 있었다. 방금 전 칼리안의 움직임과 마법이 계속하여 눈에 아른거렸던 것이다. 얀이 그러지 않았던가? 앨런 마나실이 마법 재능이 없다고 공언한데다 검이라고는 호신술 조금 배운 것이 다라고. 꽃 같은 왕자님이라고! “······ 어딜 봐서?” 평온하기만 한 얼굴의 칼리안을 쳐다본 기사들은, 남자를 칼리안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갔다. 다시 시아를 쳐다보려던 칼리안의 고개가 중간에 멈췄다. 이번에는 얀이 칼리안을 보고 있었다. 마법을 쓰는 것이야 당연히 알았고 그간 키리에에게 검을 배운 것으로도 알고는 있었으니, 놀라움보다는 조금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저 문제가 있다면 보는 눈이 좀 부족하다는 것 뿐이다. 오죽했으면 슬레이만이 검술 전승을 포기했겠는가. “또 일이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폭풍같은 잔소리가 시작됐다. 기사들 두고 뭘 믿고 앞으로 갔냐는 둥, 그러다 다치면 어쩔 것이냐는 둥, 운이 좋았다는 둥, 뭐 그런 이야기들이 한참을 이어졌다. 칼리안에게 칼 한번 휘둘러보려다 어깨가 꿰뚫린 채 실려간 남자는, 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잔소리를 들어 넘기던 칼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어쩐 일인지 유란은 칼리안의 눈을 피했다. 얀의 둔함을 알고 웃음을 참는 것이 분명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잔소리가 비로소 끝나갈 즈음, 숲으로 들어갔던 기사들이 돌아왔다. 다친 곳은 없는 듯 보였으나, 소득도 없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잡아오라 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유란은 질책하지 않고 기사들에게 물었다. “몇 명이 있었지?” 다섯 기사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답했다. “총 일곱 명입니다. 따로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곧바로 흩어졌습니다.” “그래. 알겠다.” 밥을 먹고 엘프를 만났을 뿐인데 생각지도 못한 일에 휘말린데다 잔소리까지 얻어 들은 칼리안이, 저벅저벅 시아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귀를 감췄던 로브를 휙 벗겼다. 남자와의 싸움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웃는 얼굴로 시아를 대했던 칼리안의 눈매가 제법 매섭게 변해있었으므로, 시아의 눈에 겁이 잔뜩 쌓였다. 그리고 시아와 칼리안의 말이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루카가 그랬어. 난 몰라.” “네가 훔쳤다는 게 뭐야.” 말이 겹치자, 칼리안이 시아를 쳐다봤다. 시아가 다시 말했다. “응. 몰랐어.” “몰랐다고?” “나 아니야.” “놈들이 네가······.” 거기까지 말을 하다 말고 중간에 말을 끊은 칼리안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제야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이해했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그나마 이 상황에 가장 잘 대처할 만한 이를 불렀다. “헤르츠 경.” “네, 왕자님.” 이 곳에서 가장 똑똑할만한 마법사 아르센이 곧장 칼리안에게 왔다. 칼리안이 찌푸린 얼굴로 시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얘, 질문보다 대답을 먼저 하는데.” 그제야 시아의 말을 되돌려보며 칼리안이 말한 것을 깨달은 아르센이 아, 하는 짧은 소리를 내며 놀라워 했다. 이상한 말솜씨를 가진 엘프와의 대화에 더 이상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았으므로, 칼리안이 아르센을 보고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지는 나중에 알아내고, 저 남자는 라우첼 경이 취조할 것 같으니 헤르츠 경은 그 엘프가 하는 말부터 정리해서 줘요. 이게 무슨 일인지. 그리고 걔 떼놓을 때까지 걔랑 대화는 경이 맡아요.” 아르센의 가시밭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맞아.”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자네는 아는 것이 없고······.” “몰라.” “게다가 자네의 경우에는 물건이 무엇인지······.” “아니야.” “더욱이 자네는······.” 옆에서 들려오는 대화 아닌 대화 소리 때문에, 기사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깨들이 떨렸다. 마음껏 웃을 수가 없으니, 차라리 울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유일하게 이 곳에서 마음대로 행동해도 괜찮은 칼리안만이 큭큭거리며 웃고 있었다. - 불쌍해. 마법사. 히나의 수화에, 키리에가 살짝 웃었다. 한참 뒤, 노트 하나에 시아의 말을 받아 적은 아르센이 얀을 향해 눈짓했다. 칼리안에게 이야기를 전해도 괜찮을지 묻는 것이었다. 칼리안의 허락을 구한 얀이 말의 속도를 줄여 키리에 쪽으로 갔다. 곧 아르센이 칼리안의 옆으로 와 내용을 전했다. “웅크린 말의 정령이라는 뜻이야. 어머니 나무가 지어주셨어.” “아이의 이름은 시아루스 티안 유레하, 엘프이며, 12세라 합니다.” 아르센의 말에 함께 타고 있던 시아가 잠시 ‘끼어들었다’. 잠깐 침묵하던 아르센이 어색하게 말했다. “······ 그렇다고 합니다.” “계속하세요.” 칼리안이 짧게 대답했다.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질문보다 대답이 빠른 것은, 본인도······.” “헤르츠 경.” 말을 막은 칼리안은 잠시 눈을 돌려 아르센을 쳐다봤다. 아르센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왕자님.” 칼리안이 손가락을 들어 시아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순서대로.” 아르센이 잠시 긴장하여 말을 멈췄다. 순서대로 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했고, 시아에 대해 알아보라고 말한 순서대로 보고하라는 말이었음을 깨달았다. 어쩐지 칼리안이 자신에게만 굉장히 엄격하게 군다는 생각을 떨쳐내려 애쓰며, 아르센이 답했다. “죄송합니다. 우선 어떤 물건을 훔친 것인지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저 아이는 루카라는 이름의 엘프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나무 조각품을 팔았다고 합니다. 루카라는 엘프는 저 사내를 공격한 무리가 특이한 것을 가지고 있다며 쫓아가게 되었고, 그 물건을 슬쩍······ 한 것 같습니다.” 루카라는 엘프가 어떤 물건을 훔쳤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시아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엘프가 정말로 도둑질을 했다는 것이 의외였으나,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음 말을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다 쫓기게 되었고, 루카라는 엘프와 중간에 헤어졌답니다. 그 뒤로 왕자님과 만난 것 같습니다.” 칼리안의 고개가 다시 한번 위 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대답을 먼저 하는 이유는 본인도 자세히 모른다고 합니다. 저절로 입이 열린다고 하는데, 아이의 설명만으로는 정확한 파악이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르센의 말을 모두 들은 칼리안이 시아를 쳐다봤다. 칼리안의 입이 열리자, 시아가 대답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예지력을 가진 것인지를 묻고자 했던 칼리안이 한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유란과 다른 기사 사이에 묶인 말에 올려진 남자를 잠시 쳐다봤다. 남자가 결국 기절해서 깨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아직 물은 것이 없었다. “더 전할 것은?” “없습니다.” 결국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칼리안에게 다시 인사를 올린 아르센이 뒤로 가고, 제자리로 돌아온 얀이 물었다. “직접 알아보실 생각이십니까?” 가야 할 길이 멀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얽혀들어서 이 곳에 발이 묶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자세한 조사는 라트란 영주에게 맡기도록 해.” “네, 왕자님. 그럼 저 꼬마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까 들어보니 히리스카 숲에 산다는데요.” 그 말에, 칼리안이 다소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히리스카 숲이라면 영지의 병사들이 보호하며 데려다 주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다. 대신, 하필이면 지그프리드 영지로 가는 방향의 인근에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옷자락을 잡힌 것을. “숲 입구까지는 아니더라도, 근처까지는 데리고 가도 돼.” “네, 왕자님. 이제 위험하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전하겠습니다.” 길이 바빠도 엘프 꼬마 한 명 쯤은 데리고 다닐 수 있었으니. 칼리안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제9장. 확인해. (3) 라트리아 숲을 지난 곳에 중소 도시 라트란이 있었다. 그 규모 면에서는 중소 도시에 속하겠지만, 알고 보면 인근의 구리 광산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크고 깨끗한 건물들이 즐비한 것이 멀리서부터 잘 보였다. 마치 아스트리샤 거리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칼리안이 조금 감탄한 눈으로 도시 전경을 보고 있자, 혹시라도 칼리안이 영주에게 호감을 가질까 우려한 얀이 입을 열었다. “헤일 라트란 백작, 혹시 생각 안나십니까?”” “아, 그······.” 이름과 작위가 붙으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칼리안이 살짝 눈썹을 올리며 기억을 떠올렸다. 플란츠의 말실수로 상처 입은 막내 왕자에게 선물상자를 보냈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박쥐.” 칼리안의 짧은 평가에, 얀이 씩 웃었다. “그 전에는 란델 왕자의 편에 있었습니다만, 6년 전 대사막의 전사들과 텐실의 전쟁이 있었을 때 곧바로 플란츠 왕자 쪽으로 전향한 자입니다.” 대사막의 전사들은 ‘사막의 늑대’라 불리는 전사 집단이었다. 대륙에 위치한 왕국이 넷임에도 카이리스가 바다를 가지지 못한 이유는, 북쪽과 서쪽이 끝을 알 수 없는 사막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사막이라 불리는 척박한 그 곳에는 아직 제대로 된 형태의 나라가 없었다. 그 곳에서 유랑 생활을 하는 이들은 주신 세렌티가 아닌 그들의 민속신앙을 믿었다. 그것을 빌미로, 나라도 작고 신력의 근원인 신물의 힘도 서서히 떨어져가는 텐실에서 북쪽 사막으로의 영토 확장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제대로 된 군대가 없으니 해볼 만 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벌어지자 순식간에 모여든 늑대들의 전력이 생각 외로 강력했다. 괜한 짓을 했다가 궁지에 몰린 텐실에서는 란델과의 관계를 앞세워 카이리스에 조력을 요청했다. 그리고 당연히, 실리케가 반대했다. 그 덕에, 텐실은 큰 손해만 보고 물러나야 했다. “그래도 때를 보고 빠질 줄은 아는 박쥐네.” 그런 자가 자신에게 한 발을 올리려 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그런 생각을 한 칼리안이 잠깐 웃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도시 입구 근처에 다다랐다. 입구까지 나와서 왕자의 일행을 기다리던 헤일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반가운 얼굴을 하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곧 칼리안이 레이븐의 속도를 조금 높여 일행의 가장 앞으로 나섰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헤일이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칼리안 왕자님을 뵙습니다. 헤일 라트란입니다.” “반갑습니다.” 칼리안의 대답이야 항상 같았다. 인사도 나눴으니 안으로 들어갈까 하고 있는데, 헤일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어지는 말이 참으로 길고 길었다. “이렇게 왕자님을 직접 모시게 될 날이 오다니, 이 헤일에게 무한한 영광입니다. 왕자님께서 도착하시는 날만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인근에 당도하셨다는 말을 듣고 어제는 제가 잠을 꼬박 설쳤습니다.” 그 말에, 칼리안이 잠깐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는 척 했다. 낯간지러운 말에 질색한 표정을 감추기가 영 어려워서였다. 이 길은 카이리시스에서 지그프리드로 가는 최단 경로다. 그러니 헤일은, 듣기만 해도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저 말을 작년의 플란츠에게도 똑같이 했을 것이 분명했다. 곧 다시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웃으며 대꾸했다. 피곤한 걸음을 세우고 건넨 말이라는 것이 저런 입에 발린 소리였던 탓에, 썩 고운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앞마당부터 정리하고 기다렸다면 더 좋았을텐데요.”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공격했던 남자를 잠시 쳐다봤다. 칼리안에 가려져 있던 피투성이 환자를 그제야 보았는지, 저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를 낸 헤일이 물었다. “일행이십니까? 의술사를 준비시키겠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치료가 필요하지 않게 된 자입니다.” 헤일이 다시 한번 헉 소리를 냈다. 지금 칼리안이 꺼낸 말은 귀족들이 험한 말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 쓰는 일종의 은어로, 사형수를 뜻했기 때문이다. 카이리스에서 범죄자에 대한 치료를 해주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형수는 예외였다. 어차피 죽을테니 굳이 치료를 해 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남자는 칼리안에게 검을 겨눴다. 칼리안은 왕자였다. 그 결과로, 남자는 상처를 치료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왕자님.” 남자가 칼리안을 공격했다는 것을 안 헤일이 고개를 조아렸다. 앞마당이라고 했으니 라트란 영지 내에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자칫하면 헤일 역시 책임을 면치 못할 상황이 되었으니, 하늘이 내려앉는 기분일 터였다. 무어라 대답을 해주려는데, 하늘에서 물방울이 하나 뚝 떨어져 칼리안의 손등을 적셨다. 곧 또 한방울이 뚝. 그리고 또, 뚝. 레이븐이 작게 투레질을 했다. 콧잔등에 물을 맞은 모양이었다.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얀이 서둘러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려 했다. 그리 많이 내리는 비가 아니었으므로, 괜찮다고 손짓한 칼리안이 헤일에게 말했다. “사과보다는, 지붕이 먼저 필요하겠네요.” 내성을 지나 영주성에 도착할 즈음에는 빗줄기가 꽤 많이 굵어져 있었다. 8월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날에 내리는 비에, 주변에는 금세 습한 기운이 돌았다. 비가 오는 모양새를 보던 칼리안이 유란을 향해 말했다. “일단 성의 병사들에게 넘기고, 다른 설명은 하지 마세요.” “네, 왕자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성으로 오는 사이 은근히 젖은 터라, 헤일이 내어 준 방으로 간 칼리안은 우선 몸부터 씻었다. 그리고는 방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빗소리가 방안에 가득 들어찼다. 하늘을 살피니 아무래도 내일까지는 빗속에 갇혀있어야 할 꼴이었다. 안 그래도 먼 길이라 발이 묶이기 싫어 조금 전의 일에 손을 대지 않으려 했는데, 비 때문에 결국 발이 묶여버렸으니. “그것 참.” -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얀이 들어왔다. 칼리안이 부탁한, 차가운 얼음이 가득한 민트 차를 손에 든 채였다. “고마워.” “밖에 라우첼 경이 와있습니다. 그 자에게서 찾은 것이 있다 하는데, 라트란 백작에게 건네라 할까요?” 이곳에 오던 길에 나머지 조사를 헤일에게 맡기겠다 했던 말 때문에 물어오는 것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어떤 건지 먼저 확인해볼게. 들어오라고 해.” 그 말에 유란을 방으로 부른 얀이 잠시 나갔다 오더니, 유란 몫의 민트차를 가져와 건넸다. 때문에, 자리에서 튕겨지듯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양 손으로 민트차를 받들어 든 유란이 정중히 다시 자리에 앉는 웃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당황하던 얀이 다시 밖으로 나간 후, 유란은 손수건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 칼리안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 자의 신발에 숨겨져 있었다며 병사들이 전해준 것입니다. 아, 손수건은 제 것입니다. 지저분하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혹시라도 더럽다 할까봐 설명해오는 말에 칼리안이 웃었다. 창 밖에서는 빗소리가 나고, 방금 씻어 개운한 기분에 시원한 민트차까지 한 모금을 머금으니, 절로 미소가 생긴다. 그 작은 여유로움을 만끽한 칼리안은, 잔을 내려놓고 손수건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칼리안의 얼굴에 만연했던 웃음이 서서히 지워졌다. 칼리안의 분위기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바람에, 유란은 그것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입을 다물고 앉아있었다. 한동안 손수건 안에 든 것을 쳐다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물었다. “이걸, 그 자가 가지고 있었다고요?” 그것은, 유란이야 자세히 몰랐겠지만, 칼리안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해 주었던 물건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는 칼리안을 보며, 유란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칼리안이 어떻게 단번에 알아봤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이다. 칼리안이 설탕 조각처럼 생긴 그것을 보며 물었다. “라우첼 경은 이것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오래 전 치안대에 있을 때, 리베른의 암상인을 검거하며 보았습니다. 잠시동안 죽은 것으로 위장해주는 독이라 하더군요. 그런데. 왕자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아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모를 리가 있나. 자신을 일주일간 앓아 눕게 한, 대신 자유를 준 독을 쳐다보며, 칼리안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먹어봤던 것이라서.” 창밖의 빗소리가 거셌다. 하필 비가 와서 발이 묶였다. 거기에, 빼낸 발도 도로 돌려놓게 할 만한 것이 나타났다. 그러니 더 이상 어떻게 관심을 끄고 가던 길이나 계속 가겠는가? “투기도 갈무리 못하던 놈이 독을 가지고 있었네.” 칼리안이 볼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투기’라는 말에 유란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검술이 뛰어나신 것 같았습니다만.” 그 말에,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남자.” 매우 노골적인 말 돌리기였다. 사실 가장 궁금했던 부분인데 입도 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작은 나이프 하나로 장검을 흘려냈던 칼리안의 모습을 기억에서 잠시 접은 유란이 대답했다. “네. 왕자님.” “지금 내가 한번 만나볼게요.” 유란이 놀라서 물었다. “직접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은 대답 대신 물방울이 맺힌 잔을 톡톡 건드렸다. 두 번 말하기 싫다는 뜻이리라. 대충 칼리안의 성격을 파악한 유란이 다시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 * * 불의 마법은 상처를 태운다. 얼음의 마법은 상처를 얼린다. 바람의 마법은, 상처를 헤집는다. 회오리치는 바람의 힘에 어깨가 관통됐다. 말이 좋아 관통이지 갈가리 찢겼을 것이다. 대충 붕대만 감아둔 채로 방치된 상처 때문에, 제대로 혈액이 닿지 않은 손은 퉁퉁 부은 채 짙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칼리안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어디에서 왔어?” 남자가 고개를 들어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픽 웃었다. 유란이 표정을 찡그렸지만 칼리안은 그냥 두라는 듯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귀한 집 도련님인 줄 알았더니.” “더 귀한 집 자식이라.” 남자의 상처를 훑어보는 칼리안의 눈에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남자에 대한 미안함이나 걱정하는 기색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물론 유란 역시 칼리안이 그 남자에 대해 부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유란은, 열 다섯의 소년이 제 손으로 사람을 다치게 한 뒤 지어보이는 얼굴이 지나치게 담담하다고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구리 광산 경비대원이다. 놈들이 찾아와서는 사람 찾는 것 좀 도와주면 사례하겠다기에 잠시 도운 것 뿐이다.” “그 설탕같은 것, 어떻게 네가 가지고 있어?” “놈들이 하나씩 나눠가졌다. 좋은 건 줄 알고 빼돌렸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라 믿기로 했다. “놈들이 찾는 건 뭐였어?” “모른다.” “누군지는 알아?” “서로 이름도 부르지 않았고, 복면 때문에 얼굴도 못봤다.” “다른 기억나는 건?” “없다.” 칼리안이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올리며 남자를 살폈다. 붕대 위로 배어나온 진물이 흥건했고, 열이 나는지 얼굴이 붉었다. 아무리 마법에 의한 상처라지만, 이런 덥고 습한 곳에서는 벌써 곪아들어가기 시작했을 터였다. “치료, 해줄게.” 남자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이 도시를 통틀어 남자가 어느 정도로 고통스러울지 가장 정확히 알고 있을 칼리안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치료가 안될 것 같으면 자르기라도 해줄게. 대신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걸 줘. 없으면, 서로 아쉬운 거고.” 남자는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채근하지 않았다. 한참 뒤, 남자가 입을 몇 번 달싹이더니 말했다. “한슨 마을에 아내가 있다. 놈들도 알고 있다.” 아마도 남자가 사실을 발설할 경우를 대비해 협박을 해둔 모양이었다. 칼리안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잃어버린 것. 뭐야.” “······ 손톱만한, 투명한 구슬같은 것. 텐실의 신관에게 확인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란 말을 들었다.” 신물을 가지고 있던 모양이다. 신물을 닥치는대로 모으고 있는 텐실에서 비싼 값에 살 테니, 그것을 빼앗겼다면 그리 난리를 칠 만도 했다. 게다가 신물이라면, 엘프가 기운을 느끼는 것도 말이 되었다. 칼리안이 다음 질문을 했다.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지?” “이 곳에 머무는 이들이 아닌 것 같았다. 하얀 머리 엘프가 있었는데, 놈을 쫓아갔을 것이다.” “놈들의 정체는?” “아까도 말했지만. 얼굴도 못봤고, 이름도 모른다.”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 실망하는 칼리안의 귀에,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대신, 그들의 대장인 듯한 놈을 부르는 호칭은 들었다.” 계속 말하라는 듯 칼리안이 턱짓을 했다. 남자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짚더니 말했다. “푸른 솔새. 그렇게 불렀다.” “······.” 하. 아버지. 당신의 새가 왜 여기까지 날아왔을까요. 칼리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제9장. 확인해. (4)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 자네는 어떻게 그런 명예롭지 못한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랬더니, 그 천인공노할 인사가 하는 말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시끄럽다. 술 취한 놈은 딱 싫다. 취해서 시끄러운 놈은 더 싫다. 칼리안이 불편한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으며 앞에 앉은 헤일을 쳐다봤다. 저녁을 먹은 뒤, 칼리안을 공격했던 남자가 저지른 짓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을 꼬치꼬치 물어오기에, 그 입을 좀 막을 겸 꼬투리 잡을 거리를 좀 만들어 볼 겸 술이나 한잔 하라 권했더니 저 지경이 됐다. 팔을 뻗어 와인잔을 집어들려던 그가 헛손질을 했다. 덕분에 와인잔이 옆으로 넘어져, 붉은 술이 하얀 테이블보를 적셨다. “아, 왕자님! 제가 좀 취했나 봅니다.” 알고는 있으니 다행이다. 그래. 누굴 탓하겠는가. 칼리안이 잘못했다. 테이블에 흘러 넘친 와인이, 바닥으로 한 방울씩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괜스레 다른 모습이 연상됐다. ‘그러고 보니 그 자, 이름도 묻지 않았네.’ 유란의 검에 결국 한쪽 팔이 잘려나간 남자를 잠시 떠올리던 칼리안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헤일의 말은 끝없이 이어졌다. “아무튼 그 뒤로, 세 달이 넘도록 이렇게 연락을 한번 안합니다. 그러니 왕자님께서는 결코 그런 자와 상종을 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 시끄러운 것으로도 모자라 이 근처 어딘가의 영주를 침이 마르도록 험담하는 헤일을 보던 칼리안이 혀를 쯧 찼다. 그리고는 헤일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이곳이나 인근에 텐실의 신관이 방문할 예정이 있습니까.” 굳이 궁금해서 묻기보다는, 저러다 행여 저 입에서 르메인 험담이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꺼낸 말이었다. 그 말에, 비로소 말을 멈춘 백작이 얼큰해진 눈으로 기억을 뒤져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있던가······. 없던가······.” 대답 한번 가관이다. 칼리안이 실소했다. 헤일의 곁에 선 집사가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보였다. 이 곳에 오는 길에 칼리안이 공격을 당한 것도 모자라 칼리안의 앞에서 술에 취하질 않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 내어 놓는 것이 ‘있던가 없던가’ 라니. “텐실 신관들 콧대가 하늘을 찔러대는데, 이런 시골 구석에 올 리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쐐기를 박아 넣듯, 헤일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집사는 아예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고, 칼리안은 드러나지 않게 웃었다. ‘이 정도면 내일 내가 방에서 안나와도 의심하지 않겠네.’ 칼리안이 헤일의 꼬투리를 잡으려던 이유는, 곧 이 성에서 몰래 나갈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일 아침까지 들어오지 않는다면 헤일이 의심할 것이 분명했으니, 헤일의 저런 무례한 태도에 화가 나서 만나주지 않은 것으로 꾸미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성에서 몰래 나가야 할 이유는 바로, 조금 전 만나고 왔던 남자의 입에서 튀어 나온 이름 때문이었다. - 푸른 솔새. 세크리티아 국왕인 데블란의 세작. 칼리안이 기억하는 푸른 솔새의 임무는, 카이리스와 텐실의 관계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감시였지 직접 텐실 신관을 만나야 하는 정도의 임무가 주어졌던 적도 없었고, 그런 일을 했다고 보고 받은 적도 없었다. 뿐만인가? 그가 담당한 지역은 이런 시골이 아니라 카이리시스였다. 텐실 신관의 그림자도 찾기 어려운 이런 곳에서 카이리스와 텐실의 관계를 어떻게 감시하겠는가. 물론, 베른도 아닌 칼리안이 지금 세크리티아 세작이 자신의 활동 범위에서 벗어난 이유 따위가 궁금해서 이 일을 알아보려 한 것은 아니었다. 푸른 솔새는 베른과 약간의 친분이 있던 이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푸른 솔새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 한번도, 임무에 실패한 적이 없었지.’ 그런 솜씨 좋은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카이리스의 왕자를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으니, 그것을 감수하고 칼리안의 일행에게 활을 쏠 만큼 중요한 일이 대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왕자님.” 잠시 푸른 솔새에 대해 생각하던 칼리안을, 얀이 작게 불렀다. 얀이 보고 있는 방향을 쳐다보니, 어깨가 조금 젖어 있는 아르센이 식당으로 찾아온 것이 보였다. 그가 다른 말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나갈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제스처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알 리 없을 헤일이 앞에서 또 주절거렸다. “텐실 신관들은 아주 속이 시커먼 놈들입니다. 제가 만나보지 않았습니까? 텐실 왕국 사람들도 그렇고 신관들도 그렇고. 다들 뒤집어 보면 먼지 없는 것들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헤일을 대신해, 집사의 허리가 숙여졌다. 칼리안은 마치 불쾌하다는 것처럼 머리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곧 칼리안의 입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슬립] 그와 함께, 계속 중얼거리던 헤일에게서 코 고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든 칼리안이 천연덕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집사의 머리는 이제 아예 바닥에 닿을 기세였다. “가지가지 하시는군.” 칼리안이 무릎 위에 펼쳐둔 냅킨을 들어 테이블에 탁 올려놨다. 얀이 얼른 다가와 의자를 빼주며 집사를 향해 질책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칼리안은 고개를 조아리는 집사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뒤돌아 나왔다. 방으로 돌아가는 칼리안의 걸음이 매우 빨랐다. 아르센이 그의 뒤로 얼른 따라 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새, 잡았습니다.” 지금 아르센이 잡았다 하는 것은, 전서구였다. 다행스럽게도, 칼리안이 처음 이 도시에 들어올 때 시아에게 로브를 씌우지 않았었다. 그 뿐인가? 칼리안의 눈에 들고 싶어하던 헤일이 꽤나 떠들썩하게 칼리안을 맞이했었다. 그러니, 푸른 솔새 본인은 아니더라도 추격자 무리 중의 일부는 시아를 보았을 것이고, 이 도시 안에 머무르면서 푸른 솔새에게 상황을 전달하리라고,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마법사 길드에 아르센을 보냈다. 이런 비와 어둠을 뚫고 날아가는 이상한 새가 있다면 전부 다 잡아달라고. 그리고 그 새를 잡았다고, 아르센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생각보다 빠른 결과에, 칼리안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디입니까.” 전서구가 출발한 지점을 묻는 질문이었다. 아르센이 곧바로 답했다. “레드위크 거리입니다. 그리 멀지 않습니다. 라우첼 경에게 위치를 전해두었습니다. 그리고, 내성 밖으로 나가시면 기사들이 말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새를 찾으라고만 했지 그 밖의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아르센의 일처리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그 후 칼리안은 방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가 문을 닫기 전, 칼리안이 밖에 선 아르센을 향해 말했다. “헤르츠 경. 밤에 또 놈들이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러니 부탁할게요.” 아르센이 매우 진지한 얼굴로,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왕자님.” 아르센이 돌아간 뒤, 방 문을 닫은 칼리안은 곧바로 반지를 들어 마력을 불어넣었다. 남자를 만난 뒤부터 틈틈이 시도했으나 계속 연결이 되지 않았었다. 이번에도 자리에 없을까 하고 살펴보는데, 반지가 잠시 빛나며 앨런의 말이 머릿속에 들렸다. - 라트란에는 잘 도착하셨습니까. - 스승님! 아! 이렇게나 반갑다니! 칼리안의 얼굴에 모처럼 빛이 돌았다. - 가는 걸음이 편치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앨런은 앨런이다. 목소리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이런 대화에서도 칼리안의 낯빛을 읽는다. 칼리안은 재빨리 시아를 만난 뒤부터 푸른 솔새를 알게 된 경위까지를 모두 전했다. 그러다, 카이리시스의 새 판매점에 갔던 일을 이제야 알리게 되는 바람에 잠시 혼이 났다. - 계속 그렇게 칠락팔락 돌아다녀 보시지요. 늙은이는 그만 따뜻한 남쪽나라로 요양이나 가버릴 터이니. 듣던 중 무서운 소리다. 칼리안이 거추장스러운 재킷을 벗으며 웃었다. 앨런의 말이 이어졌다. - 그러니까.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찾는 물건과 얽혀들어서 이제는 왕자님 목도 간당간당하다, 이런 말씀이십니까? - 아. 제 목은 괜찮습니다만. 칼리안의 대답에, 앨런이 웃는 것 같은 느낌이 전달되어 왔다. - 쫓기는 자의 목이 과연 아직 붙어있을까, 하는 걱정은 됩니다. 제가 곧바로 따라 나설 처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칼리안이 창 밖을 쳐다봤다. 비는, 여전히 사납게 내리고 있었다. - 그래서 지금 나가시려는 겁니까? - 네. 그보다 스승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 말씀하시지요. - 라트란 인근에 텐실 신관이 있는지. 그것을 좀 알아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세작이 신관을 만나 확인할 것이 있다고 했다네요. 얀이 건네주는 로브를 입으며, 칼리안이 그렇게 말했다. 앨런은 다른 말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 그리하지요. 내일 아침까지는 확인을 해두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나니, 키리에와 유란이 방으로 들어왔다. 키리에는 칼리안이 바르샤 거리에서 구매했던 두 자루의 검을 모두 들고 온 상태였는데, 칼리안은 그 중 처음으로 샀던 가벼운 검을 받아 들었다. 앨런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은 뒤 반지에서 마력을 뺀 칼리안이 얀에게 말했다. “쉬고 있어. 아마 찾지 않겠지만, 혹시 라트란 백작이 나 어디 갔는지 물어보면 적당히 잘 말해줘.” 얀에게도 역시 상황을 알려두었다. 얀이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주사나 부리는 라트란 백작의 무례함에 화가 나셔서 바람쐬러 나가셨다 하겠습니다. 내일도 알아서 잘 거절할게요.” 이보다 더 좋은 핑계가 또 있을까. 칼리안이 씩 웃었다. “딱 좋네.” 얀은 그래도 예전 만큼 걱정하지는 않는 표정이었다. 유란도 있고, 키리에도 있고. 시아를 만났을 때의 일을 보고 잔소리는 했지만, 칼리안 스스로도 어느정도 제 몸을 챙길 만큼은 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돌아서는 칼리안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펄럭, 하고 검은 로브 자락이 창문 아래를 스쳐지나가 곧 사라졌다. 그러더니, 키리에와 유란이 칼리안의 뒤를 따라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칼리안의 방은 3층에 있었다. 얀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아무리 그래도 문으로는 나갈 줄 알았지! * * * 비와 어둠에 숨어 내성 밖으로 나간 뒤, 유란이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저기, 기다리고 있군요.” 유란의 말에 고개를 돌린 칼리안의 눈에, 미리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지그프리드 기사들이 보였다.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다가오더니 각자 타고 있던 말의 고삐를 셋에게 건넸다. 종일 행군에 지쳐있을 본인들의 말이 아닌, 영주성의 말이었다. “수고했어요.” 칼리안의 말에 씩 웃은 기사들이 몸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성 안으로 몰래 들어가 사라졌다. 돌아올 때는 또 다른 기사들이 말을 가지고 들어가기로 약속을 해두었다. 몇몇 기사들만 계속 안보이면 의심을 살지 모른다며, 유란이 의견을 준 것이었다. “이제 제가 앞장 서겠습니다.” 칼리안이 말에 오르자, 전서구가 날아올랐던 위치를 아르센으로부터 미리 전해들은 유란이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어둠에 잠긴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비가 와서 더 그럴 것이었다. 그런 거리를 몇 개쯤 지나친 뒤, 꽤 평범한 외관의 술집 앞에서 유란이 멈춰섰다. 도착했음을 알고 말에서 내린 칼리안이 로브를 깊이 눌러쓰며 말했다. “5분만 있다가 들어와요.” 일단은 먼저 들어가서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한 말이었다. 유란은 걱정하는 얼굴로, 키리에는 평상시와 다름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칼리안은 망설일 것 없이 술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제9장. 확인해. (5) 밤. 비. 술집. 썩 어울리는 조합이 아닌가. 칼리안은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 밤에 빗속을 뚫고 술집을 찾은 열 다섯의 소년이려나. 아니면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이려나. 분명 푸른 솔새의 일행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들어선 곳에서 아주 의외의 것을 발견한 탓에, 로브 아래로 보여지는 입술이 언젠가와 같이 호선을 그렸다. “내가 너무 마음이 급했나보네.” 칼리안은, 바 안쪽에 선 채로 유리컵을 닦고 있던 바다 색 머리의 여자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누가 보아도 그 외모를 칭송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 여자는 이런 술집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어찌 보면 실리케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그러니 이상하지 않은가? 저런 아름다운 여자가 운영하는 술집에, 비 내리는 밤에. 손님은 아무도 없고 피 비린내가 진동을 하니. 긴 속눈썹의 여자가 컵을 내려놓고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칼리안이 그녀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밖에 있는 이들은 그저 나를 따라온 것 뿐이니.”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으므로, 밖에 남겨진 유란과 키리에를 걱정하여 꺼낸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여자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관계 없는 이들에게 칼을 보낼 만큼 매정하지는 않으니 걱정 마세요. 뒷처리하기 귀찮은 분들이기도 하고요.” 칼리안의 입매가 씰룩였다. “돈 궁한 남자와 어린 엘프에게 활을 보낼 정도로는 매정한 것 같았는데. 다행이네.” 여자가 다시 웃으며 칼리안의 말을 받았다. “관계 있는 이들이 되었으니까요.” 칼리안이 여자의 뒤에 널려있는 일곱 구의 시체를 슬쩍 쳐다봤다. 낮에 칼리안의 일행을 향해 활을 쏘았던 이들과 수가 같았다. 칼리안의 시선을 따라 같은 곳을 보던 여자가 말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고요.” 푸른 바다색 머리의 여자, 푸른 솔새가 그렇게 말했다. * * * 오밤중에 자신을 찾아온 앨런을 보며, 르메인은 자연스럽게 안경을 꺼내 썼다. 또 서류뭉치를 꺼내놓겠거니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을 본 앨런이 웃으며 말했다. “그저 궁금한 것이 있어 온 것이니 편히 계시지요.” “그럴 리가 없는데.” 이제 조금씩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기 시작한 르메인을 향해, 앨런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신임을 많이 잃었군요.” 그제야 르메인이 안경을 벗고 소파로 갔다. 이제는 권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맞은편에 앉는 마법사를 보며, 르메인이 말했다. “궁금한 것이나 묻자고 이 시간에 찾아온다니. 왕관 맡아주는 사람 취급에서 이제는 정보원 취급이 되었군.” 늦은 시간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한 불만이 숨김 없이 들어간 말이었음에도, 앨런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일전에 전하께서 제가 궁금한 것에 대한 답을 들여다보고 계셨던 것이 생각났지요. 그러니 잘 아는 분을 코 앞에 두고 굳이 어렵게 확인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과거 앨런이 마법사단을 만들자며 르메인을 찾았을 때, 르메인이 보고 있던 서류가 바로 신관들의 거주지와 관련된 것이었다. 리베른의 국왕은 그런 것은 직접 보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었던 기억이 난 덕분에, 그 길로 왕궁으로 온 앨런이었다. “텐실의 신관이 카이리스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여 왔습니다.” 그 말에 르메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필 지금 시점에 텐실의 신관에 대해서 묻는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경이 뭘 알고 묻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우연히 궁금해진 것인지 모르겠군.” 그러자 이번에는 앨런의 미간이 움직였다. 텐실의 신관과 관련된 다른 일이라도 있다는 듯한 대꾸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텐실의 사신들이 그 일로 왔었네.” 텐실에서 갑작스럽게 사신이 왔다는 것은 앨런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 방문 이유는 모르고 있었지만. 르메인이 책상 쪽을 잠깐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카이리스에 열 네 명의 신관이 있는데, 이곳 왕궁에 있는 한 명을 제외하고 전부 찾아서 데려가겠으니 더는 신관을 요구하지 말라 하더군.” 물론 그 작고 힘 없는 텐실의 사신들이 카이리스 씩이나 되는 나라에 와서 저렇게 공격적인 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돌려돌려 저리 말했다는 소리겠지만, 아무튼 카이리스 입장에서 기분 좋을 상황은 아니었다. 애초에, 카이리스에서 텐실에 신관을 요청했던 적이 없었던 탓이다. 심지어 왕궁에 있는 치유사도, 텐실의 공주 아이샤와 르메인의 혼인 기념으로 알아서 보내주었던 이였다. 신관들이 부리는 치유력이 매우 효과가 좋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관 좀 보내달라며 카이리스에서 텐실에 약한 소리를 해야 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 것을 내어 놓으라며 윽박지를 르메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런 저런 것을 기념한답시고 제 멋대로 신관들을 보내놓고, 그간 카이리스에서 강제로 신관을 뺏어다 쓰고 있던 것처럼 말을 하니 뭐라 할 말이 없더군.” 르메인의 말을 듣던 앨런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텐실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는 르메인의 모습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며 구구절절 일러바치는 아이 같았기 때문이다. “신물이 어느 정도로 부족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퍽 어려워졌나 봅니다. 상황은 드러내기 싫고, 신관은 데려가야 되겠고.”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았네.” “그래서 어찌 하셨습니까?” “신관들을 찾아다 전부 목을 매달까 했지만.”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앨런도 잘 알았다. 그 순간 텐실과의 전쟁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르메인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 전쟁을 치뤄봐야 브리센만 이득이니, 그럴 수는 없고. 란델을 보아 한 번은 참겠다 했네. 따로이 관리하고 있지 않으니 알아서 찾아 데려가라 하였지.” “잘 하셨습니다. 아무튼 저에게는 알려주시지요. 제가 아니라 칼리안 왕자님께서 궁금해하시는 부분이니.” 르메인의 미간에 또 주름이 졌다. 지금 칼리안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르메인도 보고를 받았고, 그것 때문에 짓는 표정이었다. “이미 신관이 있는 곳에 도착을 했으면서. 굳이 그것을 왜 묻지?” “어느 곳을 말씀하십니까?” 앨런은 갑자기 어딘가 찝찝한 기분을 느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칼리안은 분명 주변에 신관이 없는 것처럼 물어왔었다. “라트란. 텐실이 사막과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텐실에서 라트란 백작에게 신관을 선물했네. 그땐 란델과 라트란 백작 사이가 꽤 좋았으니. 지금이야 사이가 틀어졌다지만, 굳이 한번 준 신관까지 돌려받지는 않은 듯 하던데.” 그 대답을 들은 앨런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 르메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찌푸려졌던 표정을 금세 되돌려놓은 앨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만들어낸 핑계를 꺼내들었다. “아닙니다. 왕자님의 시녀 아이가 치유사이니, 신관에게 한번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앨런을 쳐다보는 르메인의 얼굴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정말 신임을 잃었나 봅니다. 이렇게 믿질 않으시니.” “고작 그런 것을 묻자고 이 시간에 국왕의 집무실을 찾아왔다는데, 그 말을 어느 누가 믿겠나.” 하긴, 맞는 말이다. 앨런이 핑계를 거두고 솔직히 말했다. “자세한 것은 사실 저도 잘 알지 못하는지라. 내일 다시 와서 말씀드려도 될런지요? 일단 이 이야기를 왕자님께 전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아무튼 라트란 백작이든 누구든 카이리스의 왕자에게 해를 입힐 만큼 삶이 무료한 인사는 없을 것이니, 걱정은 거두시지요.” 왕궁에서 나가야 칼리안에게 내용을 전달할 수가 있었으니, 시간을 끌어야 좋을 것이 없었다. 적당히 타협하기로 한 르메인이 마뜩치 않다는 얼굴로 그리하라 답했다. * * * 평소 즐겨하던 남장을 그만 두고 서 있는 푸른 솔새를 보던 칼리안이, 서두르지 않는 움직임으로 로브를 벗어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낮에 누가 내 일행을 공격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공격을 한 줄 알았는데.”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같은 것을 본 여자가 말했다. “알고 있었죠. 말을 해 두고 갔었는데. 경솔했어요.” 푸른 솔새는 칼리안 일행을 공격하지 말도록 이른 뒤 루카라는 엘프를 따라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일행이 칼리안 쪽으로 활을 쏘도록 했고, 덕분에 저렇게 시체 일곱 구가 되었다는 소리였다. 상황을 파악한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그럼, 이제 나도 관계 있는 사람이 된 건가?” 푸른 솔새가 칼리안을 공격할 생각인지를 묻는 말이었다. 그 말에, 푸른 솔새가 한동안 칼리안을 쳐다보았다. 곧, 푸른 솔새가 숨겨두었던 검에서 손을 뗐다. 그와 함께, 푸른 솔새를 향하던 칼리안의 날카로운 살기가 사라졌다. 푸른 솔새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칼리안을 보며 말했다. “그렇다 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으려나.” 칼리안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네가 따라갔다던 엘프는, 이미 죽었나?” 푸른 솔새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숲의 길로 도망치는 엘프는 쫓기 힘들더군요. 물건은 두고 도망갔는데, 다시 쫓아갈지 포기할지 머리가 아프네요. 그래서 돌아와보니 더 머리 아픈 일이 생겨 있고.” 그 말에, 칼리안이 목을 잃고 죽어 있는 이들을 다시 쳐다봤다. 똑같이 고개를 돌려 같은 것을 한번 더 쳐다본 푸른 솔새가 말했다. “살기 보내는 왕자님이나 기사들이 쫓아다니는 것은 별로 달갑지가 않은데. 서로 별달리 해를 입은 것도 아니니, 돌아가 주시겠어요? 그럼 저도 꼬마에게서 손을 뗄게요.” 기껏 찾아와서 만났는데, 그냥 돌아가 달라니.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몇 가지만 묻고, 말해주면 돌아갈게.” 푸른 솔새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궁금한 것까지는, 적당히 대답해 드릴게요.” 그 말에, 칼리안의 질문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신관도 아니면서, 신물을 왜 찾은 거지?” “요즘 제법 비싸니까요.” “그 말은, 네가 신물을 팔고 있었다는 소리같은데.” 푸른 솔새가 유리컵에 술을 한잔 따라 마셨다. 짙은 알콜 냄새에, 푸른 솔새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다 대답했다. “뭐, 저도 본업만 가지고는 조금 아쉬울 때가 많으니까요.” 카이리시스에서 세작 노릇을 하다가 손에 넣은 신물을 팔기 위해 이 곳까지 왔다는 소리였다. 그때, 칼리안의 손가락에서 미약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앨런이 찾는 것을 안 칼리안이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곧바로 앨런의 음성이 들려왔다. - 왕자님, 라트란 백작에게 신관이 있다더군요. 신관에 대해 물었을 때 있던가 없던가, 라며 되도 않는 말을 지껄이더니. 헤일이 이미 신관을 데리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칼리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 일단 알겠습니다. 확인해볼게요. 그런데 스승님. 신관들이 신물을 많이 씁니까? 몇 번이고 계속 사야 할 만큼? - 아닙니다. 한 두 개면 십 년은 쓸 겁니다. 푸른 솔새는 계속해서 신물을 팔아온 것처럼 말했다. 신관이 직접 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푸른 솔새를 향해 다시 물었다. “신물을 사주는 사람이 지금 라트란에 있나? 굳이 이런 시골에서 팔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 카이리시스라면 신관들을 찾기가 더 수월할테고.” “그 구매자만큼 값을 많이 쳐주는 이가 없거든요. 본래부터 연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본래부터, 세크리티아의 세작과 연이 있는 사람이라?’ 본래는 다른 일로 세크리티아의 세작과 연결이 있었고, 그러다 신물을 사고 파는 관계가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이 칼리안에게는, 누군가 푸른 솔새에게 카이리스의 정보를 팔아오다가, 이제는 푸른 솔새로부터 신물을 구매하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칼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곧 칼리안이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그 구매자. 헤일 라트란 백작, 맞나?” “적당한 질문이 아닌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한 푸른 솔새가 생긋 웃었다.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긍정을 표한 것이다. 데리고 있는 신관을 숨기고, 쓰지도 않는 신물들을 비싼 값에 사 모으는, 세크리티아 세작과 연이 깊은 자. - 헤일 라트란, 조금 이상합니다. 확인 해봐야 할 것 같아요. ──────────────────────────────────── 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1) 첫 시작은 시아였다. 쫓기고 있던 것을 도왔다. 그 후에는 시아를 잡으려다 칼리안을 공격한 남자를 체포했다. 그랬더니 남자의 입에서 푸른 솔새의 이름이 나왔다. 그리고, 푸른 솔새는 또 다른 이름을 내어 놓았다. 헤일 라트란.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의 귀결점이 된 남자를 떠올리며, 칼리안이 빗속을 질주했다. 찬 비를 맞으니 생각이 조금씩 정리가 됐다. 그러다보니, 신물을 사 모으는 이유를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전히 마력이 흘러나오는 반지를 슬쩍 쳐다본 칼리안이 말을 전했다. - 란델이예요. 텐실에 신물을 가져다 바치면서, 란델과의 끈을 이어 둔 겁니다. 플란츠의 편에 서 있었으니, 당연히 신물을 사 모으는 것은 비밀리에 진행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그렇게 비싼 값을 주고, 세크리티아의 세작을 통해서 구매했으리라. - 란델과의 끈을 이어둔 채로, 플란츠 편에 발을 올려놓고, 뒤로는 저에게 선물을 보내고. 카이리스 정보까지 세크리티아 세작에게 팔고 있다니. 칼리안의 말에, 앨런이 허허 웃는 것이 느껴졌다. - 대단한 작자로군요. - 일단은 성으로 빨리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란델의 편에 서 있는 자라면, 칼리안에게는 적일 수 있다. 때문에 불안감이 들었다. 석찬 자리에서 그가 취해 있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워낙 숨기는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혹시라도 칼리안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떠보려고, 혹은 다른 꿍꿍이로 술에 취한 척을 했었다면. 멀쩡한 사람을 재워버린 꼴이 된다! 칼리안은 이미 달리고 있는 말을 채근했다. 왜 이렇게 발이 느린지, 레이븐이었다면 이미 도착했을 것을! - 천천히 달리십시오. 그러다 목 부러집니다. 태평하게 걱정해주는 앨런의 말을 들은 척 만 척, 칼리안은 계속하여 말의 속도를 올려갈 뿐이었다. 그 사이 앨런은, 자신의 저택에 도착하여 노래하는 조각상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방에서 커피 한 잔을 내리기 시작했다.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검은 커피의 향을 여유롭게 음미하고 있으려니, 칼리안의 말이 다시 전해져왔다. - 그런데, 여기 있다는 그 신관 이름이 무엇입니까? - 말콤 체티쉬. 집사장일 것이라고 르메인이 그러더군요.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대충 훔쳐낸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집사장이라면, 신관에 대해 물었을 때 옆에서 어쩔 줄을 몰라하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칼리안이 말했다. - 제대로 속았네요. 라트란 백작이 무례해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라트란 백작이 거짓말을 하고 있어서 그랬나 봅니다. 그에 대해서는 앨런이 따로 해줄 말이 없었으므로, 앨런은 다른 질문을 건네왔다. - 그 솔새인가 하는 세작 입단속은 잘 해두신 겁니까? 칼리안은 앨런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네. 라트란까지 와서 카이리스 왕자를 몰래 만났다는 것이 세작들 사이에 알려지면 결코 좋을 것이 없으니, 입은 알아서 잘 닫을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칼리안이 달리는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영주성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를 뚫고 달려온 말의 몸에서 더운 김이 풀풀 났다. 말을 데려갈 기사들이 나오기를 기다리자니 마음이 급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뒤따라온 키리에와 유란에게 말 고삐를 넘겼다. 그리고 주변의 시선이 없는지 더더욱 주의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 * * “왕자님께서는 지금 산책 중이시라 얘기했는데. 너무 끈질긴 것이 아닌가?” 방에 돌아온 칼리안이 클린 마법으로 비와 흙을 뒤집어 쓴 몰골, 그리고 창틀과 외벽의 진흙자국을 해결하고 나니, 방문 밖에서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있는대로 날이 선 얀의 목소리였다. “백작께서 석찬에서 있었던 불손한 모습에 대해 꼭 좀 사과를 드리고 싶으니 밤이 가기 전에 왕자님을 뵙고 싶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언제 도착하시는지 만이라도······.” 그리고 이런 말이 뒤를 이었다. 집사 말콤이었다. 아마도 헤일 라트란이 칼리안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며 이 시간에 말콤을 보낸 것 같았다. 칼리안이 산책을 나갔다 둘러대는 얀에게, 말콤이 끈질기게 들러붙고 있었다. 다만 말콤이 꺼낸 말은 백작이나 백작의 집사가 꺼낼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때문에 더욱 불쾌해진 얀의 대답이 들렸다. “불손함을 덮겠다는 태도가 아니지 않나. 백작의 집사가, 언제부터 왕자님의 걸음을 추궁하게 되었지?” 집사를 질책하는 얀의 목소리가 아주 냉랭하게 바뀌어 있었다. 일단은 저 집사를 먼저 돌려보내야 했으므로, 칼리안은 재빨리 로브를 벗어 문 뒤로 숨겼다. 그리고 셔츠 단추 하나를 풀고 머리도 적당히 흐트러뜨렸다. 그 후에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을 만들어낸 뒤 문을 벌컥 열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도저히.” 없다던 칼리안이 불쑥 나오니, 말콤이 매우 놀란 얼굴을 했다.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쉴 수가 없는데.” 칼리안은 어쩐지 지금 자신이 플란츠를 따라하고 있다는 듯한 불쾌한 느낌이 들었으나, 불청객을 쫓는 것에는 이만한 것이 없을 터였다. 말콤이 안절부절 못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뒤 칼리안의 시선이 얀을 향했고, 칼리안은 얀을 질타하듯 말했다. “넌. 적당한 핑계를 대어 물리라 했더니, 그것 하나를 못하고.” “죄송합니다, 왕자님.” 눈치 빠르게 사과하는 얀을 본체만체한 칼리안이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 쾅! 그렇게 하고 나니, 말콤이 사과하며 잰 걸음으로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뒤 얀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 집사 외에 찾아온 사람이나 수상한 것은?” 칼리안의 질문에, 문 뒤에 둔 로브를 주워 든 얀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방금 왕자님께서 쫓아내주신 집사가 다입니다. 그 외에 수상한 것은, 창문 타고 나갔다가 창문 타고 들어온 어떤 왕자님이 있었는데요.” 창문을 뛰어넘는 모습 때문에 꽤 놀랐었는지, 그 목소리에 가시가 가득했다. 칼리안이 얀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그렇게 됐어. 아무리 그래도, 넌 왜 그렇게 화를 내고 있었어? 궁에서는 안 그랬잖아.” 그 말에, 얀이 다시 한번 화난 얼굴을 하더니 대답했다. “왕궁에는 저 정도로 선을 넘는 이가 없으니까요.” 그러더니,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일러바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가시기 전에 말씀드렸던대로 얘기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 잠시 산책가셨다고. 그런데 그 집사, 정말 무례하더군요. 언제 어디로 나가셨는지, 특히 언제 오시는지 계속 묻던데요. 그러다 왕자님께서 쑥 나오신 거고요.” 한 가지가 의심 되니 백 가지 행동에 다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보니, 얀이 전한 말이 또 이상한 것이다. 칼리안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가 언제 오는지를 계속 물었다고?” 뒤를 캐려던 심산이었다면 언제 어디로 나가는지를 물어보는 것 까지는 이해가 된다. 그런데 언제 오는지를 더 궁금해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칼리안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듯, 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언제 오시는지를 더 알고 싶어 했습니다. 석찬의 일에 대한 사과를 드리고 싶다면서요.” 그 말에, 칼리안은 더 이상의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전할 말을 마친 얀은, 칼리안이 비에 푹 젖어 들어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저는 그럼 목욕물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곧 칼리안은 자리에 앉아 버릇처럼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여전히 연결을 끊지 않고 있던 앨런은,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텐데도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한동안 그렇게 오도카니 앉아있던 칼리안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앨런을 불렀다. - 스승님. 앨런의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 네. 말씀하시지요. - 라트란 백작이 일단 취하지 않았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취한 상태에서 마법으로 재웠다면 벌써 일어날 리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은, 앨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 그리고 그 집사가 찾아와서는 제가 언제 오는지를 계속 물었다 합니다. 그러니까, 라트란 백작은 제 뒤를 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가 뒤를 캘까봐 경계한 것 같습니다. 백작이 취한 척을 해 가며 자리를 피하고 싶을 이유는 딱 하나였다.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 푸른 솔새가 술집에 있던 것은, 제가 아니라 라트란 백작을 기다리기 위해서였을 것 같습니다. 신물 거래 날짜가 오늘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백작은 취한 척 자리를 피하려했고요. 그런데 일어났을 땐 제가 이미 밖으로 나갔다 하니, 혹시 제가 뭔가 눈치챈 것이 있을까봐 그렇게 꼬치꼬치 물은 것이고요. 칼리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둥, 모시게 되어 영광이라는 둥, 입에 꿀을 그렇게 발라대더니. 그 시간부터 이미 석찬에서 어떻게 빠져나갈지를 궁리하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어찌됐건, 그냥 넘어갈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푸른 솔새의 말이 맞다면, 세작에게 카이리스의 정보를 팔아가며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으로 텐실에 좋은 일을 하고 있는 놈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칼리안이 앨런에게 말을 전했다. - 내일도 비가 올테고, 저는 발이 묶였으니. 세작에게 카이리스 정보를 팔고 있는 박쥐 좀 잡고 가야겠습니다. 그 말에, 앨런이 곧바로 물었다. -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 내일 일정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칼리안 역시 이렇게 곧바로 되물었다. 항상 그랬지만, 칼리안의 말이라면 일정이 있어도 모두 취소할 앨런이었다. 때문에 앨런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 르메인을 만나기로 했습니다만, 미루면 됩니다. 지금 누가 누구때문에 누구와의 약속을 미루겠다는 건지. 칼리안이 아연한 표정으로 우려 섞인 말을 했다. - 스승님 그러다 정말로 리베른으로 추방되실지도 몰라요. 이번에는 앨런이 웃었다. 칼리안이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 오래 걸릴 일 아니니 전하 먼저 뵙고 어디 좀 다녀와주세요. - 알겠습니다. 무엇을 하면 될런지요? - 라트란 백작의 집에 사람을 보내주세요. 카이리시스에 있을 헤일의 집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성에 헤일 외에는 없었으므로, 나머지 가족들은 분명 카이리시스에 머물고 있을 터였다. 그 집에 사람을 보내 증거가 있는지를 살펴봐 달라는 의미였다. - 그리고 브리센 상단에 가주세요. 그 말에 앨런이 굉장히 재밌어하며 말했다. - 라트란 백작이 구리 광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브리센 상단에 가서 구리 시세나 물어보는 척 하고 돌아오면 되겠습니까? 앨런이 수도에서 무언가 조사를 하는 듯한 낌새가 있으면, 헤일 측에서도 움직임이 있을테니 그것을 노리자는 말이었다. 말의 의미를 잘 알아들은 앨런에게, 칼리안이 대답했다. - 네. 맞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그리고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으로 전서구 한마리 보내주시면 됩니다. 라트란 성으로요. - 네. 말씀하시지요. 곧 칼리안이 앨런에게 편지 내용을 일러주었다. 편지에 들어간 어떤 이름을 들은 앨런이 매우 크게 웃었다. * * * 그 날 밤은 참으로 길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앨런과의 대화를 마친 칼리안은 목욕을 잠시 미루고 다시 한번 남자를 찾았다. 그리고 비로소 남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노튼. 노튼 라미레즈다.” 그렇게 말하는 노튼은, 한쪽 팔은 사라졌지만 오후보다는 많이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빠르게 괴사가 진행된 팔을 살려낼 수 없었다는 것을 그래도 잘 받아들인 듯 보였다. 그것이, 하루 걸러 중상자가 나오는 광산의 경비병으로 일을 해왔기 때문일지, 사형수의 몸이 되었기 때문일지는 칼리안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노튼은,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냐는 듯한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칼리안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어떤 불안한 생각을 떠올렸는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제이나에게, 내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겼······ 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꼬박꼬박 반 말을 하더니, 아내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이번에는 이렇게 물어오는 노튼이었다.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튼에게 그런 되먹지 않은 협박을 했을 만한 이들은 이미 머리가 사라졌으니까. 푸른 솔새는 아마 노튼의 아내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를 수도 있었다. 노튼의 아내는 푸른 솔새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였으니까. “그 쪽은 걱정 안해도 돼.” “그럼 무슨 일로······.” 그 말에, 칼리안이 노튼을 보며 말했다. “이대로 있으면 넌 며칠 뒤에 사형이야.” 처음 보았을 때는 어깨를 망가뜨리고, 두 번째에는 팔을 가져간 칼리안이, 세 번째로 찾아와서는 넌 이제 곧 죽을 것이라는 말 따위를 꺼내놓고 있었다. 그러니 노튼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화가 난 노튼이 뭐라 입을 열기 전, 칼리안이 말을 가로챘다. “날 도와.” 자신을 도와달라는 부탁도 아니고. 도우라는 명령을 이렇게 당당하게 하는 사람은 처음 만나보는 노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칼리안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면. 치료, 받을 수 있게 해 줄 테니.” 그것은 칼리안이 오후에 하고 갔던 말과 비슷했다. 다만 이번에 칼리안이 말한 것은 팔을 낫게 해 준다는 뜻이 아니었다. 치료 받을 필요가 없는 사형수라는 꼬리표를 떼어 주겠다는 소리였다. 노튼은 곧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의 팔을 쳐다보았다. 칼리안은 답답해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나한테 칼 뽑아든 대가로 그 팔 가져왔으니, 풀어주겠다고. 다른 영지에서 살 수 있게 조치도 해 주고 적당한 집과 농사지을 땅도 마련해 줄 수 있어.” 속내를 알 수 없는 말이었으므로, 노튼이 인상을 찌푸렸다. 칼리안이 가장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 “물론, 위험할 수는 있어.” 참 뻔뻔하게 사람을 부리는구나. 그렇게 생각한 노튼이 실소하며 대답했다. “시키시오. 뭘 하면 되는지.” ──────────────────────────────────── 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2) 헤일 라트란 백작의 표정이 가히 좋지 않았다. 칼리안 때문에 쌓인 분이 도저히 풀리지 않아 밤이 새도록 이를 갈았다. “보란듯이 선물 돌려보낼 때부터 알아봤지. 건방진 새끼.” 원색적인 욕지거리가 저절로 나왔다. 눈 앞에서야 칼리안이 카이리스의 왕자라며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말했지만, 속마음까지 그렇지는 않았던 것이다. 모르는 이들이야 그깟 구리 광산 하나 가진 일개 백작이 왕자를 깔아볼 만큼 유세가 있느냐 하겠으나, 헤일이 믿는 구석은 구리 광산이 아니라 그간 많은 돈을 들여가며 카이리스의 중앙 귀족과 쌓아 둔 연줄이었다. 물론 그 중 으뜸은 브리센 후작이다. 브리센 상단에 구리를 싸게 납품해가며 간신히 연이 닿지 않았던가. 이런 저런 일들로 벌어들인 돈이 전부 다 브리센 후작에게 들어갔다. 그리하여, 얼마 전에는 카이리시스에 가까운 부유한 영지 하나를 내려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그런데, 실리케가 사고를 쳤다. 칼리안에게 독을 썼다. 감기에 걸렸느니 어쨌느니 하는 소리로 무마했다지만, 아는 이들은 다들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 일을 떠올린 헤일이 또 다른 누군가를 잠시 욕했다. “멍청한 년. 일을 냈으면 제대로 죽일 것이지.” 아무튼 그 사건으로 인해 브리센이 휘청이니, 약속의 이행은 먼 미래로 미뤄졌다. 그 뿐 아니라, 당장 브리센 상단과의 거래로 벌어들이던 막대한 수익부터가 반토막이 났다. 그러니 지금쯤 꽃밭이어야 할 발 밑이 여전히 구리밭인 것은, 결국 실리케의 심기를 건드린 칼리안 때문이라고, 헤일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로 그 칼리안이 찾아왔다. 그것도 하필이면, 푸른 솔새와 거래를 하기로 했던 날에 말이다. 그것부터 일단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핀잔을 주질 않나, 함부로 마법을 써대질 않나. 왕자라는 직책 때문에 참고 넘어가 줄 수 있을 한계를 넘어섰다. 심지어 칼리안과 얀이 집사 말콤에게 보인 행동까지도 헤일의 화를 돋우고 있었다. “그깟 마법사 하나 꼬신 것을 두고 세상을 얻은 것처럼 구는 것도 꼴 보기 싫고. 어제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다른 왕자들과 제 놈이 같은 급이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둘 중 누구든 왕이 되면 그야말로 갈 곳 잃은 새 새끼 신세가 되는 것도 모르고 날뛰는 천한 핏줄 같으니.” 행여 누가 듣기라도 하면 그 길로 목이 달아날 말만 쏙쏙 골라 중얼거리고 있는데, 말콤이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 똑똑. “백작님. 일어나셨습니까.” “어. 잠깐만 들어와봐.” 그 말에, 조심스러운 몸짓의 말콤이 들어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헤일이 말했다. “그 놈과는 다시 연락이 됐나?” 칼리안 때문에 약속 시간이 지나버려서 만나지 못한 푸른 솔새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집사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오늘 중으로는 연락을 해올테니, 밤에 다시 만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헤일이 테이블을 탕 하고 쳤다. “이런 놈도 신관이라고 집사 자리를 준 내가 잘못이지! 너처럼 멍청한 놈은 세상에 또 없을 것이다!” 말콤의 어깨가 움찔했다. 헤일의 손이 이번에는 창문을 탁탁 쳤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보라는 뜻이었다. “날이 저렇게 안좋으니, 그 평민의 자식이 오늘도 여기에서 잘 것이 아니냐?” 그제야 헤일의 의중을 파악한 집사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일정을 미루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왕자가 간 뒤에 서로 속 편하게 거래를 하자고 해.” “네. 알겠습니다.” 그 후 헤일은, 오늘 입을 것으로 준비된 옷을 쳐다봤다. 어째 색깔이 오늘 하늘만큼이나 우중충해 보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다른 옷 없나? 너무 수수하지 않아?” 금단추가 화려하게 달린 재킷을 보면서도 그런 말을 꺼내놓는 헤일을 보며, 말콤이 얌전히 대답했다. “다른 옷을 찾아오라 이르겠습니다.” “그래. 하나하나 전부 콧대를 눌러서 아주 조용히 지내다 가게 만들어 놔야 해.” 곧 하녀들이 여러 벌의 옷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헤일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다시 고르기 시작했다. * * * 아침 준비를 마치자, 얀이 빵 한 덩이와 차가운 홍차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왔다. 얀은 우선 유란이 한 말을 전했다. “밤새 라트란 백작과 집사 모두 밖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랬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얀이 아직 내려놓지도 않은 빵을 집어 들어 한 입 뜯어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백작이 오늘 조찬 시작을 조금 늦춰주실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왜?” 칼리안은 별다른 표정 없이 그렇게 되물었고, 칼리안을 대신해 매우 언짢은 얼굴이 된 얀이 대답했다. “비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는데, 어찌할까요.” 그 말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컨디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옷이나 골라 입고 있겠지.” 지금 헤일은 어제의 일에 대한 항의를 하는 것이다. 백작의 작위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니다. 그런 헤일을 식사 자리에서 멋대로 재워버리고, 사과를 청한 것도 완전히 무시했으니. 그에 대해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을 저렇게 전해오는 것이었다. 다만 칼리안 역시 헤일을 곱게 보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런 항의를 굳이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 “싫다고 해. 제 시간에 나오라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곧 칼리안은 손에 들린 빵을 손톱만한 크기로 뜯어 티 테이블 위에 여기 저기 늘어놓았다. 얀은, 칼리안이 일부러 어질러 놓는 테이블을 치우고 차를 내려놓는 대신 잠시 서서 기다렸다. 그러자 칼리안의 침대가 있던 곳에서부터 푸드득 하는 작은 날갯짓 소리가 들리더니,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테이블 위에 앉았다. 그리고 칼리안이 내려놓은 빵을 하나하나 쪼아 먹기 시작했다. 새가 빵을 먹는 모습을 쳐다보는 칼리안의 눈이 퍽 자상했기 때문에, 얀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 새, 혹시 계속 데리고 다니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어느새 빵 조각을 다 주워 먹은 새를 조심스레 안아든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아니. 주인에게 돌려줄 때를 고민중이야.” 칼리안의 침대 옆에 새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새벽에 찾아온 아르센이 두고 간 것이었다. 칼리안은 새장을 열어 새를 안에 넣었다. 사람 손을 많이 타 보았던지, 얌전히 칼리안의 손에 들렸던 새는 알아서 움직여 새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쩐지 갑자기 새가 들어와 있다 했더니, 주인이 있었군요.” 아침에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새장을 보며 깜짝 놀랐던 얀의 말에, 칼리안은 빵을 조금 더 뜯어 새장 안에 넣어주고 돌아와 앉은 뒤 그렇다고 대답했다. 새에게 준 빵보다 칼리안이 한 입 먹은 것이 더 많았다. 그리고 새에게 주고 남은 빵은 더더욱 많았다. 그렇게 남은 빵은 칼리안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얀은, 그걸 왜 네가 먹냐는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조찬에 가셔야 하는데 그런 것으로 배를 채우십니까.” 칼리안이 남은 빵 조각을 한 입에 털어넣고 웅얼웅얼 대답했다. 왕궁에서는 결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맛있어. 그리고 어차피 조찬에선 많이 못 먹어.” 헤일 라트란과의 식사 자리가 불편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한 얀은, 테이블을 닦아낸 뒤 차를 내려놓았다. 그 뒤에는 새장으로 걸어가 구경하다가, 새의 발목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전서구네요?” 새의 발목에 편지를 넣어둘 수 있을 작은 통이 묶여 있는 것을 이제야 본 것이다. 칼리안이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맞아. 그래서 창문만 열어주면, 주인에게로 갈거야.” 저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답고, 위험한. 푸른 솔새에게로. 전날 밤, 푸른 솔새에게 소식을 전하려 날아가다 아르센의 손에 붙들려 온 전서구를 쳐다보며, 칼리안이 차를 한 입 홀짝였다. * * * 헤일이 또 과한 웃음을 만들어 보이고 있었다. 집사 말콤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얀의 얼굴에는, 누구보다 깊고 큰 의구심이 자리했다. ‘많이 못드시겠다고 하셨잖습니까?’ 딱 이렇게 말하는 표정이었다. 얀의 시선이 닿아 있는 칼리안은, 아주 열중하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새가 먹을 빵을 대부분 뺏어 먹어 놓고서는, 아침은 아침대로 참 야무지게 잘 먹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헤일은 헤일대로 곤욕이었다. 왕자가 첫 마디를 건네지도 않고 밥만 먹고 있으니, 그 앞에 앉아있는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할 말을 꾹꾹 눌러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헤일이 마음 속으로 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그 얼굴을 슬쩍 쳐다본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헤일이야 감춘다고 감추었겠지만, 밤새도록 날을 세우던 사나운 눈빛이 모두 가려지지는 않았으니까. 그에, 칼리안은 이 식사 자리에서 자신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를 확실히 결정할 수 있었다. 곧 칼리안은,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얼굴로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아 참, 그렇지. 얘기하세요.” 식사 자리에서는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헤일에게 말을 허락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헤일은 화난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더 웃었다. “식사는 입에 맞으십니까?” 칼리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렇게 잘 먹고 있는데 맛 없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네. 맛있네요.” 그러자, 헤일이 기쁜 표정을 만들며 말했다. “이전에 제가 보내드린 선물을 거절하셨기에, 혹시라도 저를 마주하시는 것이 불편하시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식사라도 대접해드릴 수 있으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그런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 선물을 거절하셨던 이유를 여쭈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그다지 특별한 이유도 아니었다는 말투로 답했다. “누군지 몰라서요. 들어 본 이름이 아니던데.” 그야말로 완벽한 지방 귀족 나부랭이 취급이었다. 얀이 입술 안쪽을 꽉 깨물었다. 웃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헤일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웃어야 했기 때문이다. “······ 모르셨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제 이름을 아시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입니다.” 그렇게 말한 헤일이 탁자 아래 내려 둔 주먹을 꽉 쥐었다. ‘보자보자 하니, 이 새끼가!’ 칼리안이 자신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다시 깨달은 헤일은, 어제 칼리안이 멋대로 자신을 재워버린 일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들어야 밥이 넘어갈 것 같았으니까. 다만, 연기였든 아니든 칼리안의 앞에서 추태를 부린 것은 맞았으니 그에 대한 사과를 먼저 내밀었다. “아무튼, 어제는 제가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괜찮습니다.” 마치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칼리안이 빠르게 답했다. 헤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혹시 어제 저에게 마법······.” “내가 더 불쾌해지기 전에 재웠으니까요.” 헤일이 입을 딱 벌렸다. 지금 칼리안이, 주사를 부린 것이 괜찮다는 게 아니라 자신이 불쾌해지기 전에 재워서 괜찮았다고 말한 것이다. “아. 그······러셨군요.” “그러니 더는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항의할 수가 없었다. 불쾌할 것 같아서 재웠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무슨 반응을 해야 좋을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헤일은 그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항의해보지 못했다. 오히려 사과를 하고, 용서를 받았다. 속이 터질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헌데, 어젯밤에는 왜 그렇게 안달을 냈습니까?” 안달이라는 표현에, 포크를 쥐고 있던 헤일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알았는지, 칼리안이 곧바로 그 손을 쳐다본 뒤 헤일을 봤다. 익숙치 않은 붉은 눈을 마주하자, 헤일은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제 실수에 대해서 사과를 드리려 하였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 저를 습격했던 자에 대한 조사가 고단하여 쉬고 있었습니다. 백작이 내게 굳이 사과를 올리고자 하는 마음에 벌어진 일이니, 그렇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모든 것이 헤일의 잘못이 되는 순간이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한 칼리안이, 조용히 차를 들어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조사 중에 이상한 것이 나오더군요.” 헤일이 순간 뜨끔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노튼이라는 이름의 습격자가 칼리안을 공격한 일에 대해 그렇게 알아내려 했지만, 칼리안의 호위로 따라온 스무 명의 기사들이 틈 없이 지키는 바람에 접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세한 내용은 조금도 알아내지 못한 헤일이었다. 그동안 헤일은 그리 깨끗하게 살아오지 않았다. 때문에, 행여라도 노튼과 자신의 연결고리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속이 타오른 헤일이 물을 마셨다. 칼리안이, 어느새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헤일을 보며 말했다. “카이리시스에서 새의 이름을 가진 수상한 자를 하나 봤었는데. 나를 공격한 이들이 또 다른 새와 연관되어 있지 뭡니까. 그래서 새의 이름을 가진 자에 대해서도 조사중입니다.” 칼리안의 말에 너무 놀라 물을 뱉어낼 뻔한 헤일이, 손수건을 들어 급하게 입을 가렸다. 몇 방울의 물이 헤일의 옷과 손에 떨어졌다. 말콤이 재빨리 다가와 그것을 닦아주려 하자, 헤일이 무의식중에 신경질적으로 뿌리쳤다. 헤일의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스치듯 떠올랐다. ‘설마, 푸른 솔새를 말하는건가? 습격자에 대한 조사를 하는데, 대체 왜 세크리티아 세작에 대한 말이 나오지? 설마 세크리티아의 세작 놈이 저 새끼를 죽이려 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왜지?’ 신관 씩이나 되는 말콤이 헤일에게 지나친 저자세를 취하는 것, 잠시였지만 헤일의 눈빛이 흔들린 것. 칼리안은 그 두가지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샐러드를 집어 먹었다. 헤일은 무조건 그 노튼이라는 놈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라도 알아야 대응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렇다면 저도 함께 그 조사를 돕겠습니다. 왕자님께 해를 가하려던 이가 이 라트란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저도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칼리안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지금까지 확인된 내용들은 이미 모두 왕궁으로 전달했고. 그러니 백작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연관이 없다면 아무 일 없을테니.” 어쩐지 마지막 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을 느낀 헤일이,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 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3) 헤일의 표정을 본 칼리안이 마찬가지로 눈썹을 찌푸리며 직설적으로 말했다. “백작의 표정이 좋지 않군요.” 푸른 솔새에게 정보를 팔았다는 게 알려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헤일이 얼른 인상을 폈다. 그리고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만에 하나 잡히더라도, 독하기로 소문난 세크리티아인이 아닌가? 잡히는 순간 목숨을 끊을테지.’ 이렇게 안심할 구석을 찾은 헤일이 다시 입에 꿀을 발랐다. “아닙니다. 왕자님을 습격한 자에 대한 분노가 깊어 그렇습니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이 헤일도 범인 잡기에 앞장을 서겠습니다. 제 영지에서 발생된 일이 아닙니까?” 두 번이나 이렇게 부탁을 해 오니 더 이상 거절할 수도 없었다. 칼리안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을 잠시 보였다. 그 표정을 통해 칼리안이 뭔가 숨기는 것이 있음을 확신한 헤일이 잠시 칼리안을 비웃었다. ‘나를 떠보려 한 것이군. 하여튼 건방지기는.’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칼리안은 그 뒤로 다른 말 없이 식사를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식당으로 조용히 찾아온 유란이 얀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돌아갔다. 그리고 얀이 칼리안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여 방금 유란이 해준 말을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칼리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곧, 칼리안의 눈이 헤일을 향했다. 헤일은 유란이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칼리안에게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굳이 헤일을 부를 필요 없이 곧바로 말했다. “노튼이라는 그 자. 나에게 직접 해야 할 말이 있다는군요.” 더 생각난 것이라도 있는지, 칼리안과의 대면을 요청한 것이다. 전해들은 이야기를 말한 칼리안은 곧바로 냅킨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문에 아직 제대로 뭘 먹지도 못한 헤일도 일어서야 했다. 헤일이 몸을 세우자마자 칼리안이 물었다. “가볼까 하는데. 같이 갈 생각인지?” “지금 왕자님께서 직접 감옥으로 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 말에, 칼리안이 한동안 헤일을 쳐다봤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안 될 것이 있습니까?” 당연한 것이 아닌가? 어떻게 죄수들이 있는 그 더러운 곳에 자신을 데리고 가겠다는 말을 한단 말인가? 가려면 혼자 갈 것이지! 헤일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이런 말들을 꾹 눌러담았다. 생각 같아서는 노튼이라는 자를 데리고 와서 보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가겠다는데.” 결국 헤일은 노튼을 불러다 조사하자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리고는 감옥에 수감되러 가는 죄수와 비슷한 얼굴이 되어 칼리안의 뒤를 따라갔다. 지하 감옥은 어린 시절의 헤일이 호기심에 한번 가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다 피고름 가득한 죄수들의 몰골과 바닥에 깔린 짚풀 아래에 우글거리는 지네 떼를 보고 기함을 한 뒤로 두 번 다시 걸음하지 않았었다. 그런 곳을 오랜만에 다시 찾은 헤일이 코를 감싸쥐었다. 비가 유난스럽게도 내리고 있는 탓에 한껏 짙어진 불쾌한 냄새 때문이었다. 헤일은 아침을 얼마 먹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노튼의 앞으로 걸어갔다. 노튼은 전날 칼리안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그가 칼리안과 헤일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집사 말콤이 앞으로 나섰다. “일어나 예를 보이지 않고 무얼 하는 것이냐!” 그 말에, 노튼이 말콤을 노려보며 말했다. “망할 신분 때문에 하루 아침에 죽을 날 세는 신세가 됐는데, 내가 지금 예까지 갖춰야 하나?” 그와 칼을 맞댄 것이 왕자가 아니라 같은 평민이었다면 이런 상황이 되지는 않았을테니 하는 말이다. 헤일은 당장 이 무례한 놈의 목을 내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더 큰 잘못을 저지른 범인을 잡기 위해 살려두어야 할 놈이었다. 노튼 역시 그것을 알고 저렇게 배짱을 부리는 것이리라. 화가 잔뜩 난 헤일이 잠시 칼리안의 기색을 살폈으나, 칼리안은 특별히 불쾌해하는 낯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 앞에서 헤일이 어떻게 더 화를 내겠는가? 그저 일이 모두 끝나면 절대 곱게 죽지 못하게 하리라 다짐하며 열이 오르는 것을 꾹 참을 밖에. 그런 사소한 일이 잠시 있은 뒤, 노튼이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생각나는 것이 있어 오시라 했소.” 칼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말해.” 노튼이 잠깐 헤일과 말콤을 쳐다봤다. 그 뒤에는 기사들을, 그리고 감옥 벽과 주먹만한 창문들을 잠시 보았다. 그렇게 주변을 한번 둘러본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푸른 솔새라 불리는 그 자. 세크리티아의 세작이오.” 밖에서 천둥 소리가 났다. 헤일의 머릿속에는 번개가 쳤다. 많고 많은 새 중에 하필이면 그 새가 저 입에서 왜 나오는지! 노튼이 칼리안과 헤일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그러더니 아주 큰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물건을 팔 예정이라 했소. 아주 오래전부터 연이 있던 자라고 했지.” 노튼은 빙글빙글 웃었다. 헤일의 낯짝을 보아하니 아주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백작 씩이나 되는 이를 구석으로 몰아보겠나 싶은 마음에, 노튼이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그 말이 좀 이상하지 않소? 세작과 오랫동안 연을 맺었다니. 세작과 연을 맺고 할 만한 것이 뭐가 있겠소?” 여기까지. 노튼은 전날 밤 칼리안이 시킨 일을 능청스럽게 수행했다. - 몇가지만 더 자백해. 내가 말해주는대로. - 거짓말을 하라는 소리요? - 거짓 아니야. 그냥 내가 네 입을 빌리는 것 뿐이야. - 팔도 뺏어간 사람에게 입이라고 못 뺏기겠나. 알겠소. 전날 밤 노튼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던 칼리안이 노골적인 눈빛으로 헤일을 보며 말했다. “세작질 밖에. 없겠지.” 그리고는, 헤일의 반응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안 그렇습니까, 라트란 백작?” 헤일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닐까 싶은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노튼을 향해 물었다. “그 자의 이름은 들은 적 없어?” “들었던 것 같은데. 영 기억이 나질 않소.” “곧 카이리시스로 호송될 거야.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 이름, 꼭 생각해내도록 해.” 칼리안이 단순히 자신을 떠보려는 자리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헤일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냄새, 저 불쾌한 냄새가 머릿속을 멋대로 휘저었다. 짚풀 아래 있던 지네 떼가 온 몸을 기어다니는 것 같다. 팔다리에 피고름이 매달려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감옥에 자신이 갇혀있는 모습이 끝없이 상상됐다. 아무리 평민의 증언이라지만, 재수 없으면 저 증언을 곧이곧대로 믿은 르메인이 헤일의 목을 댕강 잘라버릴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헤일은,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브리센 후작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당장! 그런 헤일의 뒷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서 바쁘게 움직이라고. 그래서, 제대로 된 증거 좀 만들어 달라고. * * * 감옥에서 나와 잠시 다른 곳에 들렀다 온 칼리안이 자신의 방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어야 할 곳에 두 명의 손님이 있었다. 바로 시아와 히나였다. 시아는 멀뚱멀뚱 칼리안을 쳐다봤고, 히나가 깜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아하니, 청소를 하다 말고 새 구경을 하고 있던 것 같았다. “히나는 청소하러 왔어. 내가 따라왔어. 새가 여기 있어서. 히나는 오면 안된다고 했어.” 그 말에, 칼리안이 이상하다는 표정이 되어 말했다. 물론 시아의 답이 먼저 나왔다. “알아. 히나 혼내지 말라고 말한 거야.” “왜 왔는지 물을 생각 없었어.” 대화 담당자 아르센이 필요했지만, 없었다. 새 잡으러 돌아다닌 것도 모자라 밤새 시아 곁을 지키느라, 잠이 든지 얼마 되지 않았을 터였다. 푸른 솔새가 시아에게서 손을 떼겠다 말했으나, 칼리안은 그 길로 시아를 내쫓지 못했다. 때문에 히리스카 숲 앞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근까지는 동행하는 것으로, 암묵적인 결론이 난 상태였다. 시아와 헤어질 때 쯤이면 이 대화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칼리안이 실소했다. 아마도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다, 푸른 솔새가 이야기했던 말 중에 ‘숲의 길’이라는 것이 생각난 칼리안이 시아를 쳐다봤다. 분명, 숲의 길로 도망치는 엘프를 따라갈 수가 없다고 했었다. ‘숲’ 까지만 운을 떼니, 시아는 알아서 대답했다. “맞아. 숲의 길, 나도 조금 알아. 인간들이 다니는 길보다 빨라.” 칼리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길을 이용해 지그프리드 영지까지 빠르게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시아가 먼저 말했다. “어머니 나무는 인간에게 숲을 열어주시지 않아. 그래서 인간들은 못 가는 길이야.” 치사하다. 칼리안은, 엘프들이 왕도를 쓰지 못하게 하자고 르메인에게 건의해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지웠다. 그때, 옆에서 히나가 시아를 쳐다봤다. 매우 이상하고 신기한 그 능력 덕분에, 시아는 굳이 수화를 보지 않고도 히나의 말에 대답했다. “알았어.” 그러더니 칼리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미안하대. 나가보겠대. 청소는 이따 대장 없을때 다시 와서 하겠대.” 히나의 말을 통역해 준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칼리안의 방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한 시아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히나는, 서둘러 청소 도구를 챙겼다. 그 와중에도 새장에 자꾸 눈이 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조금 전까지 성의 지하에 있느라 잔뜩 눅눅해진 기분이 싹 마르는 느낌이 든다. 물론 히나는 칼리안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저런 여동생이 있으면 잘해줄 것이라는 얀의 말에 백번이고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곧 칼리안이 히나에게 말했다. “새, 오늘 저녁에 보내줘야 해.” 히나는 실망한 표정을 짓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궁으로 돌아가면 다른 새를 사줄게.” 히나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곧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시녀의 방에 새장이라니. 함께 지내는 메를린이 불편할 것이다. 칼리안이 잠시 창 밖을 쳐다봤다. 하도 비가 많이 와서, 하늘 색 만으로는 지금이 몇 시쯤 되었는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한동안 말 없이 서 있던 칼리안이, 그 창문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내가 석찬에 들어가면 새장 문 좀 열어줘. 창문도.” 알겠다는 듯,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르메인이 처음으로 자신의 방문을 반기는 것 같다고, 앨런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난 밤 칼리안의 소식을 전하다 만 뒤로 오늘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 주겠다 하였으니, 그것 때문에 저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리라. 기다린 만큼 소식도 빨리 전해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때문에 앨런은 이번에도 본론부터 꺼내놓았다. “카이리스 정보를 다른 나라에 파는 작자와, 왕자님을 공격한 무리와 얽혀있는 작자 중에, 어느 작자의 죄가 더 중합니까?” 르메인은 말 없이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그게 무슨 뜻의 대답인지를 가늠하기도 전에, 르메인이 카에라의 기사 단장을 불렀다. 라트란으로 기사단을 보내려는 것이다. 그것도, 카에라를! 앨런은 어울리지도 않게 감정적인 행동을 하는 르메인을 서둘러 만류했다. “국왕 친위대 발이 그렇게 가벼우면 왕자님께 좋지 않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카에라는 전하의 곁에 있어야 할 이들이니 다른 기사단을 부르시지요.” 르메인의 눈초리가 꿈틀했다. 앨런이 설명한 것은, 왕실에서 직접 나서서 단죄해야 하는 중죄 중의 중죄다. 그러니 왕실 기사단을 보내는 것이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카에라를 보내려 한 것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반역자들이 모인 곳에 있는 그 아이에게, 아예 브리센의 칼까지 보내라는 말인가?” 브리센 소속의 기사단이 그 곳에 혼자 있을 칼리안을 제대로 도울 리가 없으리라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다. 그런 르메인의 말을 들은 앨런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 반역자 중 한 명이 브리센도 배신했으니, 이번 일에 대해서는 별 탈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앨런은, 지금 잡아야 할 둘이 어떤 이들인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말해주었다. 그러자 르메인이 깊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라트란 백작이 입에 발린 말을 잘 하는 것은 알았어도, 그 정도일 줄은 몰랐군. 게다가 세크리티아의 세작이라니. 그 아이가 대체 어쩌다 그런 험한 이들과 얽혔는가?” 앨런이 별 것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어쩌다보니 그리 되었다 합니다.” 둘러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으니 설명할 것이 없었다. 르메인이 손깍지를 끼며 입을 열었다. “기사단 카렌을 보내겠네.”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라트란 백작의 저택에 사람을 좀 보내주실 수 있을런지요?” 가능성은 매우 적었지만, 만에 하나 이번 일에 대한 증거가 카이리시스 저택에 있을 수도 있으니 하는 말이었다. 이미 그렇게 할 생각이던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 것이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한 앨런이 테이블에 놓인 레몬차를 쳐다봤다. 더운 여름에도 르메인은 뜨거운 차를 즐겼는데, 차에서 김이 펄펄 나는 것을 본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찻잔을 톡 쳤다. 피어오르던 김이 사그라들며 살얼음이 생겼다. 추위와 더위를 잊는 경지는 이미 진작에 넘었지만, 그래도 여름에는 시원한 것을 마셔야 맞지 않겠는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차가운 레몬차를 마신 앨런이 말했다. “한가지 더 부탁드리자면. 제가 오늘 가야 할 곳이 있는데.” 르메인이 앨런을 쳐다봤다. 앨런의 표정이 매우 부드럽게 변했다. “제 걸음이 다소 시끄럽더라도, 그러려니 하시지요.”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 얼굴에 웃음기가 있었다. ──────────────────────────────────── 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4) 히나가 나간 뒤, 칼리안은 키리에와 두 명의 기사를 한슨 마을로 보냈다. 혹시라도 헤일 라트란이 노튼의 아내를 데려다 협박을 할까 우려됐기 때문이다. 물론 헤일이 노튼을 해치려 할 가능성도 많았으므로, 감옥 역시 제대로 지키도록 해 두었다. 그리고 이제 막 르메인을 만나고 궁에서 나온 앨런에게 연락을 취한 뒤 이렇게 말했다. - 스승님. 브리센 상단으로 가시면 안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앨런이 의문을 가지는 것이 느껴졌다. 헤일이 브리센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을 넌지시 알려주기 위해 브리센 상단을 찾으려던 것이었지 않나? 브리센에서 자신을 어찌 맞이할지 모르니, 걸음이 시끄러울 것이라 르메인에게 미리 말도 하지 않았던가. 헌데 그것을 가지 말라 하니 이상할 수 밖에. - 다른 것이 확인되었습니까? - 네. 다른 것들은 그대로 진행해주시면 되는데, 상단 쪽은. 말을 잠시 멈춘 칼리안은, 조금 전 지하 감옥에서 나온 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칼리안이 감옥에서 올라온 뒤, 방으로 돌아오기 전에 만난 것은 바로 집사 말콤이었다. 텐실의 신관이었음에도 헤일에게 너무 저자세를 취하는 것이 이상했던 터라, 헤일 몰래 그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칼리안은, 그저 헤일이 말콤의 약점을 잡고 있을 것이라는 정도로만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것을 해결해 준다면 헤일이 숨겨둔 무언가, 이를테면 거래를 입증할 만한 장부같은 것을 찾는 일에 말콤이 도움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살려주십시오, 왕자님!” 그랬으니, 방 안에 들어와 있던 칼리안을 본 말콤이 이렇게 말하며 발 밑에 엎드리는 것을 보고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말콤에게 약점이 있기는 있었다. 대단할 만한 것은 아니었고, 흔하디 흔한 돈 문제였다. 헤일에게 큰 빚을 지게 되어 그것을 빌미로 그리 잡혀 지냈다고 했다. 따라서 칼리안은, 이제 텐실에서 신관들을 다시 데려가게 되었으니 빚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질 않는다고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말콤은 후련해하는 대신 이렇게 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살려달라 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번 일로 백작님이 정말 처벌을 받으면, 그래서 신물을 사고 판 일에 제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들키면, 저는 텐실에 가자마자 죽습니다.” 헤일을 압박하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두었던 것이, 오히려 말콤을 더 겁먹게 한 모양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말콤의 말에, 칼리안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신물을 산 건 알겠는데. 팔았다니? 텐실의 환심을 사려고 신물을 사다 텐실에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는 소리야?”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헤일이 푸른 솔새에게서 구매한 신물을 텐실에 보냈다고. 그렇게 란델과의 끈을 이어놓은 것이라고. 놀랍게도, 말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목숨 살릴 구명줄이 칼리안 뿐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백작님은 완전히 미움을 받고 있어서, 텐실 측과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아무래도 플란츠 왕자님께서 세자위와 멀어진 것 같자, 끊어진 줄을 다시 연결할 방법을 이리저리 찾으셨습니다.” 헤일이 텐실로부터 한 번 돌아선 뒤, 플란츠의 미래가 영 어두운데다, 칼리안 역시 헤일에 대한 반응이 시원치 않았으니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때문에 다시 란델과의 끈을 이으려 했으나, 란델이나 텐실 측에서 헤일을 만나주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물론 여기까지는, 흥미롭기는 해도 놀라운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리 놀라지 않은 칼리안의 얼굴을 잠시 살피던 말콤이, 결심한 듯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푸른 솔새는 백작님에게 완전히 매수되어 있습니다. 카이리시스에서 얻어지는 정보로 신물을 찾아다가 백작님에게 파는데, 그 양이 꽤 많습니다. 그래서 그 일이 혹시 들통날까봐 왕자님께도 제가 신관인 것을 숨기자 하였습니다. 아무튼 백작님은 그것을 사서 다른 곳에 싸게 되팔았습니다. 텐실과 연결을 시켜주면 그때부터는 그냥 주겠다고 거래를 했었습니다.” “어디로 되팔았는데?” 그 후 이어진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을 다시 떠올린 칼리안이 앨런에게 말했다. - 아무래도 브리센 후작이 자식 교육을 잘못 시킨 것 같은데요. “브리센 상단의 상단주, 실리케 왕비의 오빠인 레넌 브리센 자작입니다. 그가 텐실에 신물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레넌 브리센. 그가 텐실에 줄을 댔다. 플란츠를 배신하고 란델의 편에 선 것이다! 그것은 곧, 레넌이 자신의 아버지인 브리센 후작과 동생 실리케에게서 등을 돌렸다는 소리와 같았다. 칼리안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가 났다. 엘프 꼬마 하나 만난 뒤, 비 때문에 발이 묶였을 뿐인데. 카이리스에 두 번째 태풍을 몰고 올 바람길을 찾은 칼리안이 조용히 물었다. - 어쩌죠? 현명한 마법사 앨런 마나실은, 제자의 짧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앨런은 마차를 돌렸다. 막내 아들이 여우 잡겠다 놓은 덫으로 곰을 잡은 것 같다는 말을, 르메인에게 당장 전해줘야 했다. * * * 앨런과 르메인이 얼결에 걸린 곰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에 대해 매우 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문제의 발단이 된 칼리안은 석찬을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레넌도 레넌이지만 헤일부터 잡는 것이 우선이니, 칼리안은 일단 계획한대로 일을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 오전 중에 만난 히나를 통해, 이 시간에 새장을 열어놔달라 부탁해 두었던 칼리안이었다. 그러니 만약 새가 곧바로 주인을 찾았다면 지금쯤 저 안에는 아주 반가운 손님이 와 있을 터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방문을 열어주려 하던 얀을 불러세웠다. “나, 차 한잔만 가져다 줘.” “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얀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가고, 칼리안이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한대로, 있었다. 열린 새장과 열린 창문이 보였다. 그리고 하얀 비둘기 대신 푸른 솔새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혹시나 누가 들어올까 싶어 마법으로 방문을 잠궈버린 칼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엄청 빨리 왔네.” 푸른 솔새는 이전처럼 여유롭게 굴지 못했다. 칼리안을 도울 만한 두 명의 검사가 없음에도, 그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전서구가 가져온 칼리안의 편지를 읽은 탓이다. 푸른 솔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칼리안에게 말했다. “편지 내용이 너무 감명깊어서요.” 카이리스인을 도와 제 실속을 단단히 차렸다는 사실이 나에랑샤 새 판매점에 전달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찾아오라고. 칼리안은 그렇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푸른 솔새의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지.” 칼리안이 부르는대로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얀 수리가 이 사실을 아는 순간 평생을 쫓기며 살텐데, 어떻게 무시하겠는가? 생각지 못한 일을 마주한 탓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로 협박을 하는건가요?” 칼리안이 잠시 창 밖을 보다 말했다. “헤일 라트란이 신물을 거래한 증거, 그리고 정보를 팔았다는 증거. 그것들이 필요해서.” “백작에게 확인하면 될 것을, 굳이 저에게?” 말콤의 말에 따르면, 헤일은 거래 증거를 남겨두지 않았다고 했다. 발각되어 제 목을 조를까 우려한 듯 싶었다. 물론 말콤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으니 수색은 하게 될 것이지만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푸른 솔새를 다시 불렀다. 헤일에게 증거가 없다는 것을 굳이 푸른 솔새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으므로, 칼리안은 웃으며 대꾸했다. “일단 네 것 부터.”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푸른 솔새가 앉아있던 곳에 올려두었던 서약서를 가리켜 보였다. 실리케와 거래했을 때 사용한 것과 같은, 맹세의 인을 담은 것이었다. “증거를 넘기면, 네 비밀은 지켜줄게.” 푸른 솔새가 발 끝으로 바닥을 톡톡 쳤다. 정보를 넘기고 돌아갈지, 칼리안을 죽여 입을 닫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푸른 솔새의 발이 잠시 멈추었다. 그와 함께 숨 막힐 듯한 살기가 칼리안을 향했다. 칼리안은 살기에 짓눌리는 대신,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이게 대답인가?” “귀찮은 관계가 만들어졌으니까요.” 관계가 있는 이들은 없앤다는 말을 했었으므로, 지금 그녀는 칼리안을 죽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다른 기사들이 오기 전에 빠르게 일을 끝내고 돌아갈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칼리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내가 너 때문에 어떤 일에 얽혔는지 알면, 그런 말 못할텐데.” 그 말에, 푸른 솔새가 생긋 웃었다. 그와 함께 딸깍,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고, 세 개의 구슬 같은 것이 칼리안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왔다. 그것은, 화염구의 힘을 응축시켜 만든 마력탄이었다. 하나라도 정통으로 맞는다면, 시신을 수습할 때 집게를 써서 한조각씩 모아야 할 정도의 화력을 지닌 것이었다. 꽤 비싼 물건인데 이렇게 준비해온 것을 보면, 애초부터 칼리안의 거래에 응할 생각은 없었다고 보아야 할 듯 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으나, 칼리안은 재빨리 실드를 펼치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 쾅! 쾅! 콰앙! 마력탄이 벽에 닿아 터지며, 세 번의 폭발음이 울렸다. 건물이 흔들렸다. 자욱한 먼지가 칼리안과 푸른 솔새의 시야를 방해했다. 칼리안이 인상을 쓰며 생각했다. ‘본래 칼을 썼었는데, 왜 마력탄을!’ 공격을 해 올 것은 대비했으나, 마력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검을 매우 잘 다뤘다. 마력탄 같은 것을 이렇게 쏘아보내는 싸움을 하지는 않았다. 급한 와중에도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푸른 솔새에게 검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 조언했던 것은, 다름 아닌 베른이었다. 젠장! 곧 다시 한번 딸깍, 하는 소리가 나며 칼리안의 그림자가 보이는 곳을 향해 마력탄이 날아왔다. 칼리안은 다시 피했고, 폭발음이 또 울렸다. - 콰아앙! 결국 네 번의 마력탄에 직격당한 벽이 무너졌다. 커다란 구멍을 통해 라트란 시의 전경이 그대로 보였다. 창문이 필요치 않게 된 귀빈실 벽을 보며, 칼리안이 실소했다. “다 죽이겠네.” 그때, 방문 밖으로 다가온 얀과 기사들의 소리가 들렸다. 다수의 싸움을 할 만큼 방이 크지 않았고 폭발 범위는 상당히 넓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문에 다시 한번 락을 걸며 말했다. “들어오지 마.” 그 후 먼지가 걷히자, 그녀의 손에 또 하나의 마력탄이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칼리안이 아연하여 실드를 둘렀고, 마력탄이 마치 암기와 같은 속도로 날아왔다. - 쌔애액! 검을 뽑아 든 칼리안은, 이번에 날아오는 마력탄을 피하지 않았다. 이 성은 카이리스 왕궁과 달랐다. 그러니 마력탄이 또 벽을 두드리면, 정말로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칼리안은 실드를 두른 채 검을 휘둘러 마력탄을 쳐냈다. 뚫린 벽 밖으로 날아간 마력탄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푸른 솔새가 칼리안에게 한발 더 다가섰다. 칼리안이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또 있어?” 푸른 솔새가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없어요.” 그와 동시에, 푸른 솔새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검이 날듯이 뻗어나오며 칼리안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칼리안이 검을 들어올려 공격을 막았다. - 카앙! 두 개의 검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불안했다. 키리에와 연습을 하느라 여러 차례 무리가 가해졌던, 평범한 철검이었다. 제대로 된 오러를 버텨내기는 힘들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검 대신 몸에 오러를 둘렀다. 그리고 검을 비틀어 푸른 솔새의 공격을 흘려보낸 뒤 곧바로 내리그었다. 그녀가 다시 검을 휘둘러 칼리안의 검을 튕겨냈다. 그리고 그 순간, 푸른 솔새의 시야에서 칼리안이 사라졌다. 푸른 솔새는 다급히 검을 회수하며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녀의 뒤로 돌아간 칼리안의 검이 날아오고 있었다. 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위험을 느낀 푸른 솔새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으나, 팔이 길게 베이는 것을 막지 못했다. 칼리안은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푸른 솔새는,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다시 날렸다.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없다더니.”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쳐낼 만한 충분한 공간이 없었다. 찰나와 같은 시간에 결정을 내린 칼리안의 검이 짙게 빛났다. - 우웅! 미세한 떨림과 함께 청명한 소리가 들렸다. 푸른 오러가 검에 씌워져 차갑게 빛났다. 칼리안은 오러의 힘이 담긴 검을 들어 이미 지척까지 날아온 마력탄을 내리그었다. - 서걱!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던 마력탄이 오러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반으로 잘라져 땅에 떨어졌다. 푸른 잔상이 허공에 한참을 남았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폭발은 없었다. 대신,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리며 칼리안의 검이 산산조각났다.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칼리안이 눈을 내리깔았다. “어찌해야 하나. 내가, 너를.” 잠시 베른의 눈이 되어 푸른 솔새를 보던 칼리안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에일라.” 푸른 솔새는, 지금 칼리안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칼리안의 부서진 검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경악한 빛이 가득했다. 여섯 번째 소드마스터가 지금 그녀의 눈 앞에 서있었다. ──────────────────────────────────── 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5) 에일라의 손에 힘 없이 들려있던 검이 떨어졌다. 깊이 베인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 입을 연 에일라에게서,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쭉쭉 갈라진 소금 같은 목소리가 간신히 나왔다. “어떻게······?”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 새 판매점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벌써 검의 길에 올랐는지. 수많은 의문이 섞인 질문이었고, 같은 의미의 빛이 그 눈에 떠올랐다.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칼리안은 단 하나도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곧바로 칼리안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가 에일라의 눈을 보고 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에일라의 턱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에일라가 저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냈다. “읏!” 세작들이 항상 물고 다니는 독약을 꺼내려 한 행동이었으나, 에일라의 입 속 어디에서도 독은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독을 삼킨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독약을 빼고 다녔던 것임을 안 칼리안이 실소했다. “에일라.” 칼리안이 다시 부르자, 에일라가 어깨를 움찔했다. 칼리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 증거.” 그런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거짓을 말할까. 여기서 보내주면 건네주겠다고 말할까. 에일라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깜박이듯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대로 잡힌다면 그 길로 죽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던 에일라가 넌지시 물었다. “말해주면, 풀어줄건가요?” 칼리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제와서?” 살기를 보내며 다짜고짜 공격을 하더니, 이제와서는 살려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기회를 더 줄 수 있겠는가.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세크리티아인들은 독하다고 다들 그러던데, 너는 아닌가보네.” 그리고 혼잣말 같은 투로 덧붙였다. “아닌 건지, 아니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에일라가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칼리안의 얼굴을 보니, 살려줄 생각 같은 것은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곧 에일라가 칼리안을 향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섰다.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검의 파편을 가리켜보였다. 살려주지 않겠다 하니, 살 길을 찾으려는 것이다. “소드마스터의 칼이 오러 한번에 부서졌네요. 기사도 아닌 호위의 것보다도 못한 검을 들고 다니는데. 왜일까요?” 언제 키리에의 검을 보았는지, 에일라가 그의 검을 언급하고 있었다. 칼리안은 대답 없이 에일라를 응시했다. 다음 말을 내놓으라는 뜻으로 해석한 에일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주변에서는 모르고 있는 거예요. 실력을 숨기고 있는거죠?” 그렇게 은근슬쩍 운을 띄운 채 칼리안을 관찰하던 에일라는, 우월한 자리를 차지한 이들의 눈빛을 했다. 칼리안이 살짝 주먹을 쥐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에일라는 멈추지 않고 말했다. “날 그냥 보내주는 게 좋을거예요. 안 그러면, 당장 밖에 있는 기사들에게 내가 방금 뭘 봤는지 전부 말할거니까.” 칼리안은 분명히 기회를 줬다. 전부 다 눈 감아 줄 테니 증거만 놓고 가라고. 어떻게든 살려주려고, 기회를 줬다. 말 없이 서 있던 칼리안의 입에서 결국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그러다 돌연, 칼리안이 에일라의 멱살을 움켜잡고 앞으로 당겼다. 그리고 에일라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이를 악물고 사납게 말했다. “살고 싶었으면, 이렇게까지 해 가면서 살려달라고 할 거였으면, 내 앞에서 죽을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칼리안의 살기가 폭발하듯 터져나와 에일라를 내리눌렀다. 붉은 눈이 당장에라도 에일라를 집어 삼킬 것 같이 번뜩였다. 에일라의 얼굴에 본능적인 공포가 어렸다. “기대하지 마. 그러기엔, 네가 너무 멀리 왔으니.” 지금 칼리안의 속이 어떤지는,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감히 공감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칼리안이 잠시 천장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쏟아지는 빗줄기를 쳐다봤다. 한참이 지난 후, 서서히 살기가 흩어졌다. 평소와 같은 얼굴과 목소리로 돌아온 칼리안이 에일라를 보며 말했다. “네 목숨이랑 바꿀 만큼 대단한 비밀 아니야. 그러니 증거나 말해. 그럼 다른 심문은 받지 않도록 해줄게.” 왕족에 대한 암살 시도. 당연히 참수형이다. 세작인 것이 알려지든, 혹은 암살자로 알려지든, 숨긴 것을 모조리 뱉어내게 할 고문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것을 피하게 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에일라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 잡힐 것이라고는, 그래서 그대로 죽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던 탓이다. 때문에 그녀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지 절대로 말하지 않고 죽는 것으로 억울함을 좀 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마치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심문을 하게 된다면, 우리가 안 해. 내가 누구를 좀 불러올 생각이라서.” 에일라가 다시 한번 찌푸려진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이 무미건조한 얼굴로 말을 맺었다. “하얀 수리. 심문은 그가 할 거야.” 그 말은 진심이었다.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 모두를 배신했으니, 처벌의 권한도 함께 나누어야 할 터. 그제야, 에일라의 눈에 뿌리 깊은 공포감이 들어찼다. 마치 칼리안의 살기를 대했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배신자를 대하는 하얀 수리의 잔혹성은 칼리안도 잘 알았다. 하얀 수리가 추적해 잡아낸 배신자의 시신을 보고, 체이스는 사흘을 넘게 밥을 넘기지 못했었다.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이에게 생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자라는 것을, 에일라 역시 모르지 않는 것 같았다. “술집 옆 건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세 번째 칸.” 곧바로 이렇게 말했으니까. * * * 에일라는 포박당한 채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유란과 기사들이 직접 감시를 시작했다. 왕실의 기사단이 도착해 카이리시스로 이송 될 때까지, 절대로 도망치지 못하게 하라는 칼리안의 엄명이 따랐다. 그리고 칼리안은, 키리에와 함께 한슨 마을로 간 두 명, 그리고 에일라와 노튼을 감시할 여섯 명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 모두에게 에일라가 말한 곳과 술집을 수색하도록 지시했다. 성의 하인들이 칼리안의 얼마 안되는 짐을 성에 마련된 또 다른 귀빈실로 옮기는 틈을 타, 칼리안이 홀로 지하 감옥을 찾아갔다.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은 에일라가 아니라, 노튼을 찾아 간 길이었다. 주변을 잠시 물린 칼리안은 종이에 싸인 작은 것을 노튼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노튼이 퉁명스레 물었다. “뭐요, 이게?” 칼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일 아침에 먹어.” 그렇게 말한 칼리안은 더 이상의 말과 설명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펼쳐 보니, 자신이 숨겨왔던 설탕 조각이었다. 노튼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으나, 그냥 이제는 뭔들 못하겠냐는 심정이었으므로 그것을 잘 챙겨 품 속에 숨겼다. 방으로 돌아온 뒤, 칼리안이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종이 한 장을 들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카이리스의 중범죄자를 잡는 것에 매우 큰 도움을 준 말콤 체티쉬라는 이를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것을 봉인한 뒤 얀에게 건네주며, 칼리안이 말했다. “집사에게 전해주면 돼.” 얀은 기꺼이 그리하겠다 대답했다. * * * 한편, 그 시간. 헤일 라트란은 불안한 표정으로 방 안을 걸어다니는 중이었다. 이미 전부 물어뜯어 사라진 손톱을 또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영 탐탁하지를 않았다. 칼리안의 방에 암살자가 들었다. 온 성이 흔들리도록, 벽에 구멍이 나도록 싸움을 했다. 그런데 칼리안은 그에 대해 설명해주지도, 추궁하지도 않는 것이다. 게다가 말콤이 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기에, 돌아오면 한 소리를 해야겠다 하고 있었는데 밤이 다 되어가도록 오지를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냔 말이다!” 답답해하며 다시 손톱을 물고 있는 헤일에게, 한 명의 하인이 돌돌 말려 있는 작은 편지를 가져다 주고 돌아갔다. 바로, 전서구를 통해 전해진 소식이었다. “설마, 왕실에서 집을 수색했다는 내용인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나, 집의 일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어차피 헤일은 증거 자료를 남겨 두지 않았다. 게다가 헤일은 오전에 전서구를 보내 레넌 브리센에게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해 둔 상태였다. 이런 일에 힘이 되어 달라고 지금까지 그렇게 공을 들여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미리미리 대비를 잘 해뒀다 생각한 헤일이 편지를 펼쳐들었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그의 집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 변호를 맡아 줄 이가 필요할걸세. 그래서 자네를 좀 도와 달라고, 실리케 왕비 저하께 자네가 무엇을 팔다 그리됐는지 내가 잘 설명해두었네. 그러니 마음 푹 놓게. <앨런 마나실> 헤일의 손에서 편지가 뚝 떨어졌다. 대체 칼리안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그것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앨런 마나실의 편지에 적혀 있는 ‘무언가’가 신물을 뜻하는 것이 정말 맞는지를. 헤일이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마음을 고쳐먹고는 다시 들어왔다. “아니야. 그 능구렁이 같은 마법사 새끼, 이미 다 알고 저런 편지를 보냈을 테지. 그 평민의 자식에게 왕자님 소리하며 굽신거리는 것도 지친다. 일단 숨기기나 하자.” 헤일이 방 문을 걸어잠궜다. 만에 하나 왕실에서 보낸 이들이 수색을 하다가 비밀공간이 드러날 경우를 대비해, 꼭 숨겨야 할 물건이 있었다. 실리케나 브리센 후작이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되는 것. 신물! 그간 푸른 솔새로부터 구매해두었으나 아직 브리센 상단에 넘기지 못한 신물을 꺼내려는 것이었다. - 드르륵! 침실 난로 위의 시계를 돌리자, 침실 옆에 놓인 책장이 작은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리고 그 안에 쌓여 있는 수많은 귀중품이 눈에 보였다. 헤일은 그것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서두르는 걸음으로 가장 구석에 놓인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잠시 뚜껑을 열어 그 안에 든 것을 확인했다. 꽤 많이 모인 신물들이 보였다. 이 정도면 한 재산 챙길 수 있었을 텐데, 레넌 브리센과 조금 더 협상을 해보려 따로 모아 두었더니 이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에 쩝, 하고 입맛을 다신 헤일이 얼른 상자 뚜껑을 닫고 몸을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를 들었다. 헤일이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 들었다. 그의 눈 앞에, 어떤 남자의 머리가 둥둥 떠 있었다. 그러더니 마치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머리부터 목, 어깨, 상체가 조금씩 나타났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을 마주한 헤일이 헛숨을 들이키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 누구냐!” 그는, 어딘가 낯이 익은 이였다. 전날 밤 비에 젖은 채로 칼리안을 찾아왔던 마법사······. 마법사! 곧 온 몸이 다 보여지게 된 그가, 헤일을 보며 뒤늦은 자기 소개를 해주었다.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중한 얼굴이었다. “마법사,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칼리안이 에일라와 싸움을 벌이느라 마법으로 잠근 문을 아무도 열지 못했던 이유는, 그것을 열어 줄 만한 단 한명의 마법사가 헤일의 방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에 두었는지 집사 말콤도 알지 못하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인 신물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칼리안이 말하기를, 증거는 차고 넘칠수록 좋다 하였으니. 종이에 적힌 거래 기록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렇게 눈에 잘 띄는 것이 있으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때문에 4서클의 인비저빌리티를 유지하며 몇 시간째 헤일의 방에 숨어 있었던 아르센 헤르츠가, 매우 정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수고스럽게 찾아주신 만큼, 잘 쓰겠습니다.” 아르센이 넋을 잃은 헤일의 손에서 상자를 뺏어들었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백작께서 아무 저항 없이 순순히 전해주셨다고, 능구렁이 같은 마법사 새끼와 평민의 자식인 왕자님께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사양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헤일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숨소리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 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6) 많은 일을 끝마친 칼리안은 자리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몸 속의 마나를 순환시키며, 외부의 마나를 천천히 끌어와 정제시켰다. 곧 따스한 기운이 몸 속으로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칼리안은 그렇게 모여든 마나를 조심스럽게 심장 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네 번째의 서클을 만들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마나가 띠를 이루며 무리 없이 심장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3서클을 마스터한 이후, 지금의 단계까지는 항상 성공을 했었으나 이 다음을 넘기지 못했던 칼리안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더욱 집중하며 마나의 띠를 조심스럽게 심장으로 이동시켜갔다. 그러다 갑자기, 원활하게 이동하던 마나 띠의 성질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나의 따스한 온기가 강인하면서도 날카로운 예기로 전환되는 것이다. 성질이 바뀐 마나가 빠르게 단전으로 흘러들어갔다. 마나 띠의 꼬리가 단전으로 들어가 사라지니, 심장으로 가던 마나 띠 역시 거꾸로 움직이며 단전으로 빨려들어가듯 흡수되어 버렸다. 서클을 이루어야 할 마나가 오러의 근원으로 바뀌어, 심장이 아닌 단전에 쌓인 것이다. 이번에도 서클을 만들어내지 못한 칼리안이 짧은 말을 내뱉었다. “또.” 오늘도 역시 같았다. 칼리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머릿속으로 앨런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앨런이 웃음기를 굳이 지우지 않으며 말을 전해왔다. - 더욱 강한 오러를 지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것이 어찌 칭찬이겠는가? 저렇게 비꼬지 말고, 차라리 개똥만도 못한 놈이라고 욕을 하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았다. - 칼 휘두르던 버릇을, 아무리 잠시라지만 물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이해하고 있으니, 성공하기 전까진 카이리시스에 발 못 들이시리라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앨런의 응원 같은 협박에,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오러와 마법을 운용하는 것 자체는 그 원리가 다르지 않았다. 축복의 힘 덕분에, 칼리안은 오러와 마법을 모두 사용하는 것이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마나도 잘 모아두고 있었다. 때문에 이미 축적된 힘을 발현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모아둔 마나로 서클을 만들려 하면, 이 놈의 마나가 전부 단전으로 가버린다는 데에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오러를 쌓는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4서클을 만들질 못하고 있으니, 아무리 옆에 아르센이 있다 한들 마법을 알려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시스파니안이 울고 갈 것이라고 앨런이 르메인에게 얘기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차고 넘치는 마나가 전부 오러로만 변해가고 있으니, 보는 앨런도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래도 마나가 단전으로 흡수되는 시점이 늦춰지고 있으니, 아무리 늦더라도 지그프리드 영지에 도착하기 전에는 성공을 할 수 있으리라. 앨런이나 칼리안 모두 그렇게 기대하고 있는 상태였다. -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왕자님 부친께서 벌인 일 때문에, 보름은 꼼짝 없이 궁에 있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대화에 응해드리기 어려울 수 있으니, 제 응답이 없더라도 걱정은 하지 마시지요. 그런 앨런의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껏 일을 벌인다면 칼리안이나 앨런이 벌였지, 르메인이 일을 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 전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 말에, 앨런이 잠시 대답이 없었다. 조금 놀랐기 때문이다. 언제나 앨런과 대화를 할 때는 르메인의 이름을 부르던 칼리안이었는데, 르메인을 부르는 칼리안의 호칭이 바뀌어 있었다. 그것이 아마도 이번에 푸른 솔새를 잡으면서 생긴 변화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으나, 굳이 언급하지는 않고 대답만 전했다. - 별 일 아닙니다. 그저 다 제 업이지요. 적당히 얼버무리는 그 말에,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웃는 소리를 냈다. 도무지 마법사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칼리안이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앨런이 숨길 이유가 없으므로, 칼리안은 그저 둘이 또 뭔 일이 있었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대신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 그래서, 레넌 브리센의 일을 어떻게 하실지, 결정은 되었습니까? 칼리안의 질문에, 앨런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헤일 라트란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헤일이 신물을 브리센 상단에 판매한 일이 알려질 터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 분명했으므로, 만약 그 사실이 공개된다면 그 순간 브리센 후작을 비롯한 모두가 레넌의 마음이 바뀌었음을 알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니, 르메인은 그 사실을 숨겨둘지, 공개하여 이득을 노릴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그 고민의 결과를 묻고 있었다. 앨런으로부터 침중한 느낌과 함께 말이 전달됐다. -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번질 불인지 가늠하고 있는 듯 하니, 우선 지켜보시지요. 그것이 단순히 부자간의 싸움이라면, 마음을 바꿔먹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싸움이 벌어지는 브리센이라는 집안의 몸뚱이가 너무 크다는 것이 문제였다. 둘의 싸움이 내전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자칫 1, 2왕자의 세력 싸움으로도 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벌써부터 왕자들의 싸움을 걱정하는 전하도 고민이 크시겠네요. 일의 발단을 들고 온 칼리안이 그렇게 말하자, 앨런이 웃었다. - 르메인도 장자가 아니었으니,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왕자님 앞길이나 잘 걸어가시면 됩니다. 레넌의 배신이 불러오게 될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가며 숙고하고 있을 르메인을 존중하여, 칼리안은 그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는 대신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곧 왕궁에 들어가야 한다 했으므로 그대로 이야기를 마칠 줄 알았는데, 앨런이 다시 말을 전해왔다. - 메를린이라는 시녀 아이가 찾아왔었습니다. 휘트린 영지에서 수익금을 보냈다는데, 왕자님께서 부재중이시니 그것을 어찌 해야 할지 물어봐달라 하더군요.어떻게 처리해드리면 되겠습니까? - 아, 시기가 그렇게 되었군요. 칼리안의 금고를 열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칼리안은 금고 관리를 잠시 앨런에게 부탁하며 금고의 위치와 마법 문양 해제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반지에 불어넣던 마력을 끊었다. * * * 앨런의 손에는 커다란 짐 가방이 들려 있었다. 분명, 무엇을 넣든 그 크기와 무게가 늘어나지 않는 마법 가방을 가지고 있는 앨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신의 몸 만큼이나 큰 짐 가방을, 그것도 다른 이를 시키거나 마법을 쓰지도 않고 이렇게 낑낑대며 직접 들고 온 것이었다. 그 의도를 알아채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므로, 르메인이 높낮이 없는 말투로 물었다. “미안하다 생각하라는 말인가.” 굳이 짐 가방을 르메인의 책상 옆에까지 들고 와 내려놓은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나마라도 알아보시니 다행입니다.” 그리고는 가방 손잡이 자국이 진하게 남은 손바닥을 르메인 앞에 펼쳐보이며 말했다. “전하께서 아드님을 잠깐 과하게 아끼시는 바람에 늙은이가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시겠습니까?” 르메인은 보고 있던 서류로 눈을 가져가며 대답했다. “나의 검이 아닌 이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러자, 앨런의 눈이 치켜올라갔다. 칼리안에게 암살자가 들었던 것은 맞다. 왕궁에서 나간 뒤 열흘도 되지 않아 두 번의 공격을 당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말 카에라를 보내면 어쩌자는 것인가? 분명 기사단 카렌을 보내기로 했던 르메인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에 브리센이 깊이 얽혀있음을 알고는 곧장 카에라를 출정시켰다. 그것도, 앨런이 칼리안이 시킨 일을 하기 위해 왕실 전서구 담당자를 찾아간 그 잠깐 사이에 말이다. 그야말로 날림 출정이 따로 없었다. 덕분에, 앨런은 이렇게 짐을 싸들고 왕궁에 와야 했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처럼 꼴랑 열 명만 남겨둔 카에라의 기사들을 대신해서 르메인의 호위를 맡게 되었으니까. “전하께서 이렇게 칼리안 왕자님에게만 특별한 대우를 하시게 되면, 지금으로서는 왕자님에게 좋을 것이 전혀 없습니다. 편애한다 여기는 순간 순간마다, 왕자님 생명줄이 깎인다는 말입니다. 그런 일이 없게 하려고 아무에게도 관심을 안보이셨던 분 아니셨습니까?” 르메인이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 둔 바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내일 점심은 두 왕자와 함께 하기로 했네.” 그 말에, 앨런이 실소하며 말했다. “고작 밥 한끼와 카에라를 같은 무게로 두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두 아이의 사이도 좀 볼 겸.” 왕자간의 세력 싸움이 일어날 조짐이 있는지 보려 한다는 말이었다. “볼 것도 없지요. 당장 피바람이 안 부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니.” 그렇게 말한 앨런이 소파로 걸어가서 털썩 앉았다. 그런 앨런을 보던 르메인이 안경을 고쳐쓰며 물었다. “경이 볼 때, 그렇게까지 사이가 안좋은가?” 하나하나 살펴보는 수준까지는 되었으나 셋을 한꺼번에 놓고 볼 정신까지는 없는 르메인을 향해, 팔자에도 없던 호위 노릇이나 하게 된 앨런의 한쪽 입꼬리가 말아올려졌다. 그것을 본 르메인이 얼른 말을 막았다. “아니야, 말하지 말게. 알아 들었으니.” 투견장의 개들도 왕자들보다는 사이가 좋을 것이라 이야기 해주려던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 대체 칼리안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놈을 주워다 놨느냔 말이다. 정작 앨런과 가장 많이 붙어 있게 된 르메인이, 라트란이 있는 방향을 잠시 쳐다봤다. * * * 잠에 들기 전, 얀과 마주 앉아 차가운 민트 차를 마시며 쉬고 있던 칼리안에게 아르센이 찾아왔다. 아르센은 헤일로부터 빼앗아 온 신물들을 내려놓은 뒤, 고생했다 말하는 칼리안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켜보고 있으니 라트란 백작의 언행이 좋지 않았습니다. 감히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그에 대한 처벌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칼리안은 익히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 말에, 아르센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 불손한 내용을 제가 왕자님께 전해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대개 마법사들은 암기력이 좋다. 복잡한 주문식과 마법진 구성, 마나 배열 등등, 외워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리안을 호위할 단 한 명의 마법사로 뽑힌 아르센은, 마법사들 중에서도 암기력이 매우 우수한 편에 속했다. 그러니 헤일이 했던 짧은 말을 억양까지 완벽히 외우는 것 쯤은, 아르센에게 있어 별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을 간과한 칼리안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욕을 먹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그간 아르센에게 엄한 태도를 보였던 것을 얼른 반성한 뒤, 방에 구금하려던 헤일을 고문실 바로 옆의 옥사로 보냈다. 그곳은 지하 감옥의 옥사 중 가장 습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그런 곳에 깔린 짚풀 아래에 무엇이 살고 있을지, 온 몸으로 배워보라는 의미를 담은 처사였다. 왕실 모독죄는, 왕자의 권한으로도 충분히 처벌을 내릴 수 있는 죄목이었으니까. 그 후 닷새 동안, 칼리안은 아르센과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키리에와 검을 주고 받은 뒤 고쳐야 할 것을 일러주거나, 얀과 대화를 나누며 카이리시스에서 올 기사단을 기다렸다. 닷새가 지난 뒤, 칼리안은 그 위용도 당당한 카에라의 기사들이 라트란에 입성하는 것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앨런이 왜 왕궁에 있어야 했는지, 그것이 왜 앨런의 업이라 말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눈 깜빡할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카에라는 라트란에 도착한 뒤 딱 하루를 쉬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한 노튼을 제외한 두 죄수, 즉 에일라와 헤일을 데리고 곧바로 카이리시스를 향해 출발했다. 물론 사망 후 성 밖으로 내보내진 뒤 다시 잘 깨어난 노튼은, 부인과 함께 휘트린 영지를 향해 가고 있을 것이었다. 그의 새로운 신분 증명서는 앨런이 보낸 사람을 통해 영지로 전달될 예정이었다. “무탈한 여정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다음 날, 칼리안은 새로운 영주가 오기 전까지 영지 관리 대리인직을 맡게 된 말콤에게 감사 인사를 받으며 라트란을 떠났다. 보름이 지났다. 헤일은 작위가 해제됐고,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닷새가 더 지났다. 에일라에 대한 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막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히리스카 숲을 보며, 앨런의 말을 전해들은 칼리안은 고개만 끄덕였다. ──────────────────────────────────── 제11장. 의도한 건 아니었어. (1) 카이리스 북쪽에 위치한 카이리시스는,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었다. 때문에, 9월이 시작되자 곧바로 선선한 아침 바람이 불었다. 그렇다 하여 벌써부터 창문을 닫아 두어야 할 만큼의 서늘함은 아니었으므로, 체르밀 궁의 두 왕자가 식사 중인 곳에도 아직은 창문이 열려 있었다. 열린 창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테이블을 장식한 화병의 꽃잎을 흔들었다. 그러자 말 없던 두 왕자의 눈이 똑같이 꽃에 가 닿았다. 그리하여, 며칠동안 한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둘의 눈이 결국 서로를 향하게 되었다. 란델은, 아침마다 한마디씩을 건네던 막내를 대신해 앉아있는 둘째를 보며 말했다. “칼리안이 떠난 뒤로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들었다.” 언뜻 들으면 칭찬이었다. 잘했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그렇게 줄창 술을 마셔댔으니, 이제라도 그 좋지 않은 버릇을 고쳐 다행이라는 소리로 여길 만한 말이었다. 그것이 일반적인 형제였다면, 분명 그 뜻이 맞았을 것이다. “아쉬우십니까.”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아는 플란츠는, 이렇게 답했다. 란델은 대답 없이 잠시동안 플란츠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언젠가 칼리안이 느꼈던, 사람의 속내를 끝까지 헤집어보는 그런 시선이었다. 그 안에서 무엇을 찾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란델은 앞에 놓인 접시로 다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지나가는 소식이나 전해주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오늘 광장에 레니시타 잎이 깔렸더구나.” 레니시타 잎은, 그 생김이 나뭇잎과 유사하여 모두가 잎이라 부르고는 있지만 사실은 레니시타라는 이름을 가진 선인장의 넓적한 가시였다. 주변의 물기를 빨아들이는 성질이 강했다. 간혹 카이리스 왕실에서 하츠아라 광장 바닥에 이 레니시타 잎을 까는 경우가 있었다. 레니시타 잎 위에 단두대를 설치하여, 광장의 하얀 바닥에 핏물이 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란델은 칼리안을 습격했다 체포된 범인의 참형이 진행된 일을 입에 올린 것이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 올려두기에는 썩 좋은 화제가 아니었다. 란델의 말을 들은 플란츠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평소 말도 없던 란델이 굳이 먼저 입을 연 이유를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오해가 깊으신 것 같은데요.” 그래서 플란츠는, 실리케가 또 칼리안에게 손을 댔는지를 묻고 있는 란델에게 이와 같이 대답했다. 사실 란델도 이번 일이 실리케와 연관이 없으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 실리케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따라서 란델은 플란츠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금만 더 조용히 지내자꾸나.” 관계의 끝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언젠가는 서로가 서로에게 비수가 되겠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란델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플란츠는 잠시 앉아 있었다. 마지막까지 서 있는 것이 과연 란델일지, 혹은 칼리안일지. 플란츠는 그것을 가늠해볼까 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대신 연회장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칼리안을, 정확하게는 칼리안이 숨긴 것을 떠올렸다. 플란츠가 란델의 빈 의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 이상 어떻게 더 조용하라는 말씀이신지.” * * *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다 비 때문이야.” 지금 이런 상황이 생긴 것은 순전히 비 때문이라고. 라트란에서 출발할 때, 칼리안은 분명 시아를 히리스카 숲 인근까지만 데려다주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내렸던 그 유난스러운 비 때문에 산에서 토사가 잔뜩 흘러내렸고, 산을 통과하는 유일한 길이었던 왕도를 막아버렸다. 아르센과 칼리안의 마법으로 해결 될 만큼의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일행은 어쩔 수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아침에 작별 인사를 나누었던 햄프티쉬 자작의 저택에 다시 가서 하루를 더 잤다. 칼리안의 감정을 상당히 고생시켰던 바로 그 비 때문에, 결국 몸까지 고생을 한 것이다. “카이리시스로 돌아가면, 공간이동 장치를 만들어야겠어.” 칼리안의 말에 얀이 매우 좋아했고, 아르센은 못 들은 척 했다. 칼리안이라면 분명히 적임자를 찾아 맡겨놓고 감독만 할 테고, 지금 칼리안이 가진 인맥 중에 가장 한가하면서 능력있는 마법사는 아르센 뿐이었으니까. 어쨌거나 당장은 공간이동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으므로, 칼리안 일행은 조금 돌아가는 다른 경로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새로운 길로 쭉 내려오다보니 히리스카 숲의 코앞에 떡하니 도착해버렸다. 히리스카 숲 앞에 시아를 데려다놓고 잘가라고 인사를 하려다 보니, 그날 밤을 보낼 곳이 마땅하지가 않았다. 예정에서 벗어난 길로 이동 중이기 때문이었다. “마을에 같이 가. 루카 있어. 장로도 있어. 대장, 자고 내일 가.” 그런데 마침, 시아가 이렇게 일행을 초대했다. 자신의 마을에 가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출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그것은 그동안 시아가 꺼낸 말 중 가장 현명한 소리였으므로, 칼리안은 그리하겠다 대답을 했다. 노숙을 하기 싫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엘프 마을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물론 그런 마음이 비단 칼리안만의 것은 아니었는지, 칼리안의 대답을 들은 일행들은 매우 좋아하는 얼굴을 했다. 엘프의 마을은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로지 엘프들만이 찾을 수 있는 길을 따라 들어가야 마을에 들어설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시아의 뒤를 따라 숲 속으로 굽이굽이 들어가자, 정말 놀랍게도 어느 한 순간 마을이 딱 보였다. 한 발자국을 뒤로 물리면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는데, 다시 한 발자국을 앞으로 디디면 커다란 계곡과 여러 채의 돌집이 모여 있는 멀쩡한 마을이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마을까지 일행을 안내한 시아가 장로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오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명의 엘프가 일행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인간들의 왕, 누구인가?” 그 말에 칼리안이 얀을 쳐다봤다. 무슨 말인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서였다. 그런데 얀은 칼리안을 보고 있었다.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일행의 눈이 칼리안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엘프가 칼리안에게 다가오자, 칼리안이 재빨리 해명했다. “인간의 왕 같은 그런 대단한 사람은 여기 없어.” “그런가? 장로께서는 인간들의 왕을 만나고 싶어하신다.” ‘평생 못 만나겠는데.’ 인간 종족의 왕이라는 것이 아예 없으니, 어찌 만나보겠는가. 분명히 르메인의 탄신 기념 축제 때 엘프들도 축하 사절을 보냈다 했는데, 그들과 달리 이곳의 엘프들은 인간의 체계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 자리에서 그런 것까지 상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칼리안이 말했다. “인간의 왕은 아니지만 내가 이 일행의 대표인 것은 맞아.” 그러자 엘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좋다. 나를 따라와라.” 칼리안은 그렇게 엘프를 따라갔고, 마을의 가장 큰 집에 있던 장로와 마주하게 됐다. 히나와 같은 은발을 가진 상당한 미남형의 장로는, 칼리안을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히리스카 마을의 장로, 제르라 하네. 시아는 내 아들이네.” 그 말에 칼리안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시아가 장로의 아들이어서 놀랐다기 보다는, 장로의 아들이 조각품이나 팔러 다녔다던 사실 때문이었다. 한 마을의 장로라면, 인간으로 치면 영주 정도 되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인사를 받았고 상대는 인간도 아니었으니, 칼리안은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통성명을 했다. “칼리안.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그 말에, 제르의 뾰족한 귀가 한번 움직였다. 제르가 칼리안을 보며 말했다. “반갑네.”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던데.” 적당히 시아를 데려다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나 받겠거니 하고 물어본 말이었다. 그런데 제르의 말은 칼리안이 생각한 것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맞네. 그대가 해결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보자고 했네.” 아니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칼리안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오늘 처음 본 사이에, 그것도 아들을 구해다 준 은인한테,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 망정 대뜸 뭘 해결해달라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방금 이 곳에 도착한 내가 왜 엘프들의 일을 해결해야 하는지 이해가 어려운데.” 피로와 짜증이 딱 절반씩 섞인 칼리안의 말에, 엘프 장로 제르가 대답했다. “그대가 인간 일족의 왕이기 때문이다.” “일족 아니고 카이리스. 왕 아니고 왕자.” “그거나 그거나.” 누가 잘못 들으면 칼리안 목 날아갈 소리를 하는 제르를 향해, 칼리안이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 많이, 다른 뜻이라서.”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가는 통에, 옆에서 한 마디도 못하고 이 꼴을 보고있던 얀은 제 머리를 다 쥐어 뜯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아무튼 그대가 우리 일을 좀 도와줬으면 한다.” 상상 이상으로 상식적이지 않은 말을 꺼낸 제르는, 칼리안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돌아왔던 루카가, 이번에는 다른 두 엘프를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갔네.” “아니, 잠깐만.” “그 후로 열흘이 넘게 돌아오지 않아서 사흘 전에 그들을 찾아오려고 두 명이 더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는군.” 그게 지금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물어보려는데, 제르의 말이 끊이질 않았다. 도무지 중간에 끼어들 만한 틈이 없는 것이다. “인간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그리 말을 했는데도 기어이 나가서 사라져버렸으니. 그래서 그들을 찾는 것을 그대가 좀 해줬으면 좋겠네. 이 곳의 엘프들은 인간 세상을 잘 모른다네. 더는 엘프만 내보낼 수가 없겠더군.” 칼리안이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로 물었다. “여기 엘프 다섯 명이 사라진 것을 나더러 찾아달라는 말인가? 내가 왜?” “그대가 인간 일족의 왕이니까.” 도돌이표가 따로 없다. 엘프가 인간 마을에서 사라졌고, 없어진 이들을 찾아오기에는 바깥 세상을 잘 알지 못해서 때마침 찾아온 칼리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뭐 그런 말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칼리안이 해결을 해줘야 한다는 이유가 어딘지 엉성할 뿐더러 도움을 요청하는 태도도 영 좋지 않았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건지.” 결국 칼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밖에 어둠이 내렸으나, 칼리안은 그 길로 엘프 마을에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런 곳에서 불편하게 하루를 묵느니 그냥 노숙을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자, 제르가 다시 입을 열어 칼리안을 붙들었다. “그냥 도와달라는 말은 아니네. 그에 대한 대가를 주겠네. 물론 시아를 구해준 것에 대해서도 대가를 치를 것이고.” 칼리안은 얼핏 얀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엘프들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뭐 하나라도 도움을 받으면 자신들의 기준에 맞는 대가를 주며 꼭 갚기는 한다고. 칼리안의 눈이 잠시 키리에를 향했다. 엘프의 피가 반만 섞였던 키리에도 그랬었으니까. 장로가 일어나 있는 칼리안을 보며 말했다. “지그프리드의 땅으로 가는 길이라던데, 맞나?” “맞아.” 그러자, 장로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손가락 열 개를 펼쳐 하나씩 꼽아가며 계산을 하는 시늉을 했다. “인간의 길은 너무 느리니. 그 곳까지는 두 달 가까이 더 가야 할 텐데. 아닌가?”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대체 언제 도착할 수 있을지 깜깜해졌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브리센 때문에 왕궁이 불안불안한데, 정작 칼리안은 이렇게 밖에 나와 있으니 답답하기도 했고. 장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숲의 길로 간다면 보름이면 족하니. 만약 우리를 도와준다면, 어머니 나무께 숲의 길을 열어달라 청을 하겠네.” 보름이면 족하다는 말에, 칼리안의 어깨가 움찔했다. 칼리안은 재빨리 몸을 돌려 자리에 다시 앉았다. 엘프가 다섯 명이나 사라졌다니! 당연히 도와줘야지. ──────────────────────────────────── 제11장. 의도한 건 아니었어. (2) 칼리안이 마음을 바꾸자, 장로 제르가 씩 웃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은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 전까지 계속 뻣뻣하게 굴다가 숲의 길이라는 말에 태도를 싹 바꾼 것이니까. 애초에 제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 앉았으니, 어떻게 포장할 말도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제르를 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 숲의 길 때문에 하는 것이니까, 약속은 꼭 지켜.” “인간 일족의 왕은 숨김이 없군. 걱정 말게. 엘프는 약속을 중히 여기는 종족이네.” 그 말에,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 때문은 아니었고, 아까부터 계속 입에 담는 호칭이 매우 거슬렸던 탓이다. “이름 말해줬으니, 더는 멋대로 부르지 말고.” 제르가 다른 말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은 그런 제르를 향해 물었다. “없어진 엘프들. 내가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나?” “모두 20대 초반에서 중반의 남자 엘프라네.” “싸움은 할 줄 아는 이들인가?” “그대의 기사들에게야 상대도 안되겠지만, 어느정도는 하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칼리안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싸울 줄 아는 엘프는 이렇게 찾으면서, 더 오랫동안 사라졌던 시아를 찾으러 온 엘프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시아는 왜 안찾았지?” “그대가 보호하는 것을 루카가 보았다 했네.” “사람을 너무 믿는 것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라면서.” 제르가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이며 대답했다. “시아의 얼굴이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하기에, 그 말을 믿었지.” 처음 만났을 때 잔뜩 겁에 질렸던 시아의 얼굴을 잠깐 떠올리는데, 제르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 마을의 어린 엘프는 모두 나의 아들이며 딸이라네.” 그 말을 듣고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칼리안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들이라는 말이 시아가 그의 진짜 친아들이라는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내 어린 영지민’과 비슷한 뜻일 것 같다고 이해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루카라는 그 엘프는 무엇을 한다며 나간 것인가?” 시아를 찾겠다며 나갔다면 라트란 방향으로 가며 찾아보기 위해 질문한 것이었다. 그런데 제르가 갑자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돈을 벌러 나갔을 것이네. 한번 인간 마을에 다녀오더니 그대로 홀려서는, 돈을 벌겠다고 마을 밖으로 도망가기를 벌써 몇 번을 했네. 그래도 이렇게 돌아오지 않던 적은 없었는데.” 조각품을 팔고, 비싸 보이는 신물을 훔친 이유를 알게 된 칼리안이 실소했다. 생각해보니 라트란 사건에 칼리안을 얽히게 한 진짜 원흉은 바로 루카가 아닌가? 칼리안이 약간의 원망을 담아 제르에게 사실을 일러바쳤다. “루카라는 그 엘프가 인간의 물건을 도둑질했다는 것은 알고 있나?” 그러자 제르의 얼굴이 매우 심각하게 바뀌었다. 그럴만 하다. 엘프가 물건을 훔쳤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칼리안도 적잖이 놀라지 않았던가. “찾아 오면, 제대로 교육좀 시켜. 그 엘프가 훔친 물건 때문에 내 속이 꽤 시끌시끌 했으니까.” “알겠네.” “아무튼, 조각품을 파는 엘프는 흔치 않을테니. 내일부터 우리가 바로 찾아보지.” 그리고 제르가 손가락을 들어 각각 오른쪽과 왼쪽을 가리켜보였다. “일단 숲의 양 옆으로 도시가 둘 있네. 네리카와 스팅이라는 이름의 도시인데, 그 곳부터 찾아보면 조금 나을것이니 참고하게.” 두 곳의 이름을 기억해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와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한 제르가 다른 엘프를 시켜 일행이 머물 곳과 저녁을 준비해주도록 말했다. * * * 엘프들이 내어 준 저녁식사는 생각 외로 괜찮았다. 생풀만 뜯어먹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호밀 특유의 시큼하면서도 텁텁한 맛이 나는 흑빵에 오렌지 잼을 발라 맛있게 먹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칼리안의 주변에서 들리기 시작한 대화 주제 때문이었다. 기사들 사이에서 얼마 전 라트란에서 있던 일들이 화두에 올라 있었다. 그다지 되새기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나오는 말을 막을 수는 없었으므로, 칼리안은 그저 묵묵히 이야기만 들었다. 그런데 말이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떻게 하면 검을 산산조각 낼 수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한 토론이, 칼리안이 들으라는 듯이 시작된 것이다. “마력탄을 막으신 거겠지.” “검에 그을린 자국이 없었잖아. 게다가 마력탄은 안 터졌어. 깔끔하게 잘려 있었던 것 봤잖아.” 점점 목소리가 커진다. 아마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직접 설명해주기를 바라는 모양새였다. 칼리안은 못 들은 척 빵만 뜯어먹었다. 칼리안의 눈치를 보다 대답이 나올 기색이 없자, 기사들이 이번에는 아르센을 쳐다봤다. “자네라면 어떻게 할 텐가?” 칼리안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사실 칼리안도 궁금했었다. 과거, 아무리 오러를 사용해도 부서지지 않았던 검이 아르센의 손짓 한 번에 조각나지 않았던가? 질문을 받은 아르센은 대답 대신 손에 들린 나이프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나이프에 곧바로 새하얗게 서리가 맺히며 얼어붙더니 ‘쩡’ 하는 소리와 함께 긴 금이 생겼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아르센이 조용히 말했다. “물론 이런 나이프와 검은 제련하는 방법부터가 다르니, 이와 같이 빠르게 얼려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유사한 방법으로 파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있습니다.” 아직은 그 방법을 깨우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말에, 기사 한 명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검을 부순다니. 마음만 먹으면 소드마스터도 잡겠군.” 그래, 잡혔다. 그런 생각을 한 칼리안이 방금 말을 꺼낸 놈의 이름을 단단히 기억해두는 사이, 다른 기사들의 눈이 일제히 칼리안에게 와 닿았다. “소드······?” 슬레이만의 기사들이다. 소드마스터라는 단어까지 나왔으니, 칼리안의 부서진 철검에서 연상된 것이 어찌 없겠는가? 때문에 칼리안은 자연스럽게 웃으며 빵을 한번 더 뜯어먹었다. 어차피 슬레이만과 만나면 오러를 쓰는 것을 바로 들킬텐데. 며칠 더 빨리 알게 되든 말든. 뭐 그런 심정이었다. * * * 다행히 그 뒤로 기사들이 칼리안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사실을 묻거나, 대련을 신청하는 일은 없었다. 사흘동안, 칼리안이 자신을 대신해서 조사를 해오라며 모조리 숲 밖으로 내보내버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사들은 칼리안의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평복을 입고 돌아다니며 수상한 정황을 보이는 도시가 있는지를 먼저 살폈다. 제르가 말해준 스팅과 네리카를 시작으로, 그 다음 도시들로 발을 넓혀갔다. 굳이 칼리안이 직접 나서지 않은 이유는, 우선은 조심히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제르의 말을 듣자마자 칼리안이 생각했던 것은 바로 엘프 노예 밀매였다. 젊고 건장한 엘프였고, 제르의 말을 들어 보아 싸울 줄은 알지만 출중하지는 않은 것 같았으니 충분히 타깃이 될 만하다고 여겼던 까닭이다. 그러니, 만약 왕자가 직접 나서서 노예 밀매 정황을 살핀다는 것이 알려지기만 해도, 모조리 꽁꽁 숨거나 도망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사흘 째 되던 날 밤, 숲으로 돌아온 유란이 이렇게 말을 했다. “특별히 이 근방에서 노예 밀매가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용병인 듯한 이들은 간혹 보였으나 범죄와 연관 있는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다음날에는 칼리안이 직접 밖으로 나왔다. 아직 조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키리에만 대동한 채였다. 이미 마을을 뒤져본 기사들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으니 함께 가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먼저 가시겠습니까?” 엘프 마을에서 나온 뒤 키리에가 이렇게 물어왔다. 숲을 가운데 두고 서로 반대편에 위치해 있는 스팅과 네리카 중 어디를 먼저 갈지를 묻는 말이었다. 질문을 받은 칼리안은 얀이 설명해준 것을 떠올렸다. 두 곳의 규모도 비슷한데다, 두 도시의 영주가 비슷한 나이대의 자작이다 보니 서로 경쟁이 심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다보니, 둘 중 어디를 먼저 갈지 고르기가 힘들었다. “일단 이름 짧은 곳 먼저 가자.” 별달리 고민할 것이 없었다. 가장 가깝고 가장 이름 짧은 곳에서 출발해서 발을 넓히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이런 생각이었다. 묵묵히 숲을 통과하여 두 시간 정도 말을 달리니, 스팅에 도착했다. 칼리안은 곧바로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뒤집어 썼다. 스팅은 그리 큰 도시가 아니었다. 멀리서 보아도 라트란과는 확연히 다른 규모였다. 그래도 정돈은 잘 되어 있는 편이었고, 오가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행색들을 보아 크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유란의 말마따나 겉보기로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으므로, 칼리안은 일단 주린 배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칼리안이 키리에를 보며 짧게 말했다. “고기. 고기 먹을래.” 그 말에, 키리에가 평소보다 더 확실하게 웃음을 보였다.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며 여기까지 와서 한다는 첫 마디가 고기라니. 짐짓 그것을 못본 척하며,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고기 먹고, 무기 상점에 가서 쓸만한 검도 사고. 그리고 나서 조금 더 둘러보자.” 또 일반 검을 사겠다는 말이었으니, 키리에가 의문을 보였다. “왜 더 좋은 검을 구하지 않으십니까?” 키리에는 칼리안에게 검을 배우는 입장이었으므로, 칼리안은 키리에에게 자신이 소드마스터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까지는 말을 했었다. 때문에 키리에는 검이 깨진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묻는 말이었다.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궁으로 돌아가면 어차피 쓰지도 못할 뿐더러.” 그러더니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켜보였다. “곧 좋은 재료가 저기서 떨어질 것 같아서.” 키리에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지만, 수수께끼 같은 그 말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웠다. 칼리안은 더 이상의 말 없이 레이븐을 움직였다. 다음 해 초에 제대로 된 운석이 떨어진다고, 예언가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무튼 그렇게 식당을 찾아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밖으로 나와 무기 상점을 찾은 둘은, 상점 주인이 하는 말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검이 없소.” 검이 없다니? 무기 상점에?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칼리안이 다시 물었다. “다 팔렸다는 말인가?” 그러자 주인이 칼리안을 슥 쳐다보더니 대답 대신 이렇게 물었다. “용병이오? 아직 어린 것 같기는 한데.” 칼리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키리에와 자신을 순서대로 가리켜보이며 대충 꾸며낸 대답을 들려줬다. “용병 맞네. 이쪽은 검사고 나는 마법사. 아무튼 검이 한 자루 필요한데 구하기가 어렵겠나?” 그러자 주인이 팔짱을 끼며 무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모양새가, 말을 할까 말까 갈팡질팡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매우 잘 알고 있는 칼리안이, 품에서 은화 두 개를 꺼내 주인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주인은 조금 더 망설였고, 기어코 하나의 은화를 더 받은 뒤에야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얼마 전부터 암암리에 용병들이 모이는 것 같기는 했소.” “암암리에? 공고도 없이?”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더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오늘 낮에 병사 둘이 와서는, 오늘 밤에 무기를 가져갈테니 모두 넣어두라 했소.” 칼리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주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 용병이면, 저기로 가보시오.” 그렇게 말한 주인이 턱짓으로 가게 밖 어딘가를 가리켜 보였다.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은 바로 영주성이었다. 칼리안의 눈이 조금씩 빛났다. 비슷한 규모의 소도시 두 개가 가까이 있고, 은밀히 용병을 모으고 있는데다, 성내의 무기를 징수했다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였다. “전쟁을 치르려는 것이군.” 유란이 사흘을 걸려 알아내지 못한 것을 밥 한끼 먹고 알아낸 칼리안이, 고개를 숙이곤 볼을 긁적였다. “그것 참.” 돈을 벌려는, 적당히 싸움 좀 하는 엘프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또 이상한 일에 발을 담궜다는 것은 더 잘 알 것 같았다. 히리스카 숲 엘프 마을은, 두 도시의 사이에 있었다. 둘의 싸움이 벌어지면, 당연히 엘프 마을에도 피해가 생길 터였다. 그러니 제르가 왜 굳이 칼리안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역시, 알 수 있었다. ‘그대가 인간 일족의 왕이니까.’ 제르는, 그들을 찾아온 카이리스의 왕자가 두 도시간의 싸움을 막아주기를 부탁해온 것이었다. 후드 아래 가려진 칼리안의 미간이 매우 많이 찌푸려졌다. ──────────────────────────────────── ──────────────────────────────────── 제11장. 의도한 건 아니었어. (3) 싸움의 징조를 확인한 칼리안은 곧바로 키리에를 영주성에 보냈다. 용병으로 지원을 하는 척 영주성에 간 키리에는 가장 만만해 보이는 병사에게 은화 몇 개를 건넸다. 그리고 임시 숙소에 다섯 명의 철없는 엘프가 옹기종기 모여있다는 사실과, 이번 전쟁의 원인에 대해 전해 들었다. 칼리안이 기다리고 있던 곳으로 돌아온 키리에가, 전해듣고 온 내용을 말해주었다. “브리센 상단이 원인입니다.” 브리센 상단! 또, 레넌 브리센이다. 칼리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다하다 이제는 영지간의 싸움에까지 원인을 제공하는가 하는 마음이 든 까닭이다. “이 주변에 들어오는 상단은 브리센 뿐인데, 라트란의 일로 인해 브리센 상단이 이쪽 지역으로는 발을 끊겠다는 말을 했다 합니다.” 그렇게 이어진 키리에의 말은 이러했다. 두 영지 모두 밀 농사가 불가능한 지역이라, 브리센 상단으로부터 밀과 호밀을 구매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브리센 상단이 멋대로 거래를 끊었다. 그나마 네리카 영지에 비축된 밀이 있어 스팅에서 밀을 좀 팔아달라 했고, 네리카에서는 터무니없는 금액을 불렀다. 그로 인해 벌어진 다툼이 전쟁 준비로 이어졌다. 상황을 전해들은 칼리안은, ‘밀과 호밀’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얼굴을 했다.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벌이는 싸움이니, 오래 가지는 못하겠네.” 당연한 일이었다. 병사는 물론 용병까지 고용한 마당에, 밀과 호밀 없이 어떻게 장기간 싸움을 이어가겠는가. 돌아가는 내용을 대충이나마 파악한 칼리안은, 그 이상의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엘프 마을로 되돌아왔다. “잘 다녀 오셨습니까?” 방에 도착해 문을 여니, 의자에 앉아있던 얀이 반가워하며 일어났다. 그 인사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칼리안이 왕자의 인장을 꺼내놓으며 말했다. “편지지 좀 가져와줘.” “네, 왕자님.” 대답과 함께 밖으로 나갔던 얀이 곧바로 몇 장의 편지지와 펜, 봉랍을 가지고 돌아왔다. 칼리안은 얀이 보는 앞에서 똑같은 내용의 편지 두 장을 썼다. ‘일정이 조금 변경되어 조만간 방문하게 될 테니, 내가 불편함 없이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것을 본 얀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대놓고 저렇게 대접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자신의 인장까지 찍어가며 쓸 사람이 아니니까. 다만 칼리안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으므로, 얀은 우선 얌전히 옆에 서서 기다렸다. 칼리안은 다 쓴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봉인하며 말했다. “하루 이틀 내로 스팅과 네리카가 전쟁을 치를 분위기야. 장로는 그걸 막아줬으면 해서 나한테 부탁을 한 것 같아. 말로는 엘프 다섯을 찾아달라면서.” 그 말에, 상황을 파악한 얀이 잠시 공작 아들처럼 굴었다. 깜짝 놀란 칼리안이 얀의 입을 막으며 욕도 막은 뒤에, 재빨리 다른 말을 꺼내들었다. “두 영주는 내가 이미 이 곳을 지나간 줄 알고 싸움을 준비하는 것일 테니, 내가 찾아간다고 하면 일단 멈출거야.” 백작인 헤일 라트란의 영지에 국왕 친위대 카에라가 왔었다는 소식이 이미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칼리안에게 조금이라도 위해가 되는 일이 생기면 르메인이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역시 모두가 알고 있을 터였다. 따라서, 칼리안이 근처에 있다는 것. 심지어 자신의 영지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다 준비한 전쟁을 보류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리라. 칼리안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속물 근성 가득한 편지를 썼는지 이해한 얀이 물었다. “그럼 그 뒤에는요?” 싸움이 보류될 뿐, 칼리안도 찾아오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시작될테니까. 일단 보류시킨 후에는 어떻게 할지를 묻는 것이다. 칼리안이 얀을 보며 웃었다. “엘프 다섯 명 돌아오겠지.” 그게 거래 조건이었잖아? 그런 의미를 담아 말한 칼리안은 방금 쓴 편지 두 장을 달랑달랑 들고 제르의 집으로 걸어갔다. * * * 일을 맡은 뒤 나흘만에 앞에 나타난 칼리안이 편지 두 장을 내밀자, 제르가 그것을 쳐다보다 물었다. “편지가 아닌가?” 칼리안이 제르의 맞은편에 편한 자세로 앉으며 대답했다. “스팅과 네리카에 하나씩 보내. 그럼 전쟁이 한 달 쯤 미뤄질거야. 엘프들이야 당연히 돌아올 거고. 그 후에는 다시 안 나가게 당신이 알아서 잘 관리 해.” 그렇게 대답한 칼리안은 제르의 책상을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여기가 남아 있다면.” 제르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를 묻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그런 모습을 본 칼리안이 웃었다. 그래도 엘프니까. 그래서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로 자신을 속였음을 알게 된 까닭이다. “진짜네. 두 영주가 싸우리라는 것 알면서, 속였네.” 칼리안이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그 모습과 썩 어울릴 법한 삐딱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를.” 엘프들이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 진실을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도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배웠다. 그것을 제대로 알려준 제르의 입이 한참만에 열렸다. “설마, 이대로 떠나겠다는 말인가?” “엘프 다섯 찾아달라며? 찾아줬잖아.” 화가 난 것인지, 부끄러운 것인지, 제르의 긴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제르는 입을 몇 번 달싹였으나, 말을 하지는 못했다. 칼리안은 더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진 자신의 편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그건 우리가 그동안 먹고 잔 값으로 치고, 우리는 내일 아침에 바로 떠날 거야. 숲의 길, 필요 없어.” 돌아서서 걸어나가는 칼리안을 보는 제르의 귀가 조금 더 빨갛게 변했다. 칼리안이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제르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대는, 그대의 나라에서 전쟁이 나도 괜찮다는 말인가?” “이유가 있으니 싸우겠지. 저러다 말 거고.”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손가락을 들어 바닥을 가리켜보였다. “여기가 그렇게 중요하면, 네가 직접 지켜. 수작 부리지 말고.” 그 뒤 칼리안은 문을 열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제르는 한동안 말을 잊은 얼굴로 칼리안이 나간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예상한 것과 너무 다른 일이 벌어져버린 것이다. * * * 한편, 방으로 돌아온 칼리안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표정이 그리 개운하지 않았으므로, 옆에 서 있던 얀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칼리안은 지금 하루 아침에 밀 거래를 끊었다는 브리센 상단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주변은 광산이 많은 곳이지 대규모 농사를 지을 만큼 비옥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니 식량은 무조건 거래에 의지해 왔을 것이 분명했다. 그 거래를 독점한 것도 모자라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구는 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먹을 것 가지고 함부로 굴면 안되는데.” 칼리안이 이렇게 중얼거리는데,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왔을지는 보지 않아도 분명했으므로, 칼리안이 얀을 향해 문을 열어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칼리안의 방에 들어온 것은, 예상한대로 제르였다. 그의 얼굴을 본 칼리안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표정이 참으로 볼만했기 때문이다. 왕자 씩이나 된다는 사람이, 코앞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그냥 두고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제르는 그런 칼리안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한참동안 기다려도 제르에게서 나오는 말이 없자, 칼리안이 눈썹을 찌푸렸다. “할 말이 있어서 온 것 아니었어?” 그러자 제르는 큰 결심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여보였다. “미안하네. 내가 설명을 하겠네. 조금만 들어주게.” 무엇을 설명하겠다는 것인지는 몰랐으나, 칼리안은 일단 듣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자 제르의 입이 열렸다.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조금 전 제르의 방에서 보았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제르는, 칼리안도 이미 전해들어 알고 있는 브리센 상단의 일을 말했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루카로 인해 그대가 라트란의 일에 엮인 것을 알고 있었네. 그런데 이번 전쟁의 발단이 라트란에서 일어났던 일이니, 차마 먼저 말을 할 수가 없었네. 정말 미안하네.”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염치 없지만 우리는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네. 그 문제는 우리가 해결을 할 수가 없네. 그리고 이 주변의 인간들도, 싸움이 끝나더라도 상단이 계속 들어오지 않으면 정말 많이 힘들 것이네.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네.” 브리센 상단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영지민들도 고생하고 엘프들도 고생하니, 결국은 도와달라는 소리였다. 칼리안은 곧바로 답을 주지 않았다.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생각에 빠져 들었다. 제르는 초조한 얼굴이 되어 칼리안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칼리안은 속으로 한 명의 이름만 계속해서 되뇌고 있었다. ‘레넌 브리센.’ 란델에게로 진영을 바꾸어 문제를 일으키더니, 멋대로 거래를 끊어서 전쟁을 유발하고 있었다. 그보다 앞서 다이아몬드 교역권을 두고 멜피르 폴룬을 없애려 들었던 것도 레넌이었고, 칼리안에게 건네질 독을 만들어 준 것도 레넌이었다. 계속, 계속, 계속! 발목을 잡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칼리안이 낮고 빠르게 말했다. “아직 네리카는 가보지 않았어. 아마 비슷할거야. 가서, 그 곳에서도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지 확인해. 만약 맞다면 그 편지를 주고 오면 돼. 그리고 밀 말고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도 알아 와. 그럼 내가 영주들을 만날테니.” 도와주겠다는 소리였다. 물론 칼리안은 엘프를 돕겠다는 뜻에서 말한 것이 아니었다. 브리센 상단의 상단주, 레넌 브리센을 이제 잡아야 할 것 같다고. 그런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어찌됐건 제르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누구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 딱 질색이야. 그리고 꿍꿍이 있는 놈들이랑은, 거래 안해. 그러니 이번에는 제대로 해.” 제르는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 * * 창 밖으로 햇살이 들었다. 칼리안은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앨런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른 시간인 탓에 아직 집에 있었던지, 앨런이 곧바로 답했다. - 밤을 새셨습니까? 칼리안은 은근히 아침 잠이 많았다. 때문에 이렇게 새벽같이 깨어 있을 때는, 늘 밤을 샌 뒤였다. - 네. 생각을 좀 했어요. - 말씀하시지요. 그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을 전했다. 말을 들은 앨런이 놀라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럴만 하다고 생각한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정말 그리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앨런이 이렇게 되묻는 것이 처음이다. 칼리안이 웃었다. 보지 않아도, 앨런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뻔했다. 분명 침대나 소파에 기대 앉아서 관자놀이를 주무르고 있을 것이다. 칼리안은, 잘못 말한 것이 아니라는 듯 다시 한번 말했다. - 네. 전하께 말씀해주세요. 브리센 후작에게 레넌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려달라고. 지금 칼리안이 이야기 한 것은, 레넌 브리센이 텐실과 거래한 정황을 에반 브리센, 즉 브리센 후작에게 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계시는 것이 맞을런지요?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앨런이 이렇게 말해왔다. 내전의 위험, 왕자간의 싸움이 시작될 위험. 어찌 모르겠는가. - 그것도 알고, 브리센 후작이 돈을 좋아하는 것도 압니다. 이번에 헤일 라트란을 보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집사 말콤이 전해 준 내용이었다. 헤일이 번 돈을 후작에게 건넨 뒤에 영지 하나를 선물 받기로 했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 후작에게 뇌물을 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아뇨. 그렇게 말을 전한 칼리안이 밤새 생각한 내용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말했다. - 브리센 후작에게 내용을 전하고, 다른 문제 없이 조용하게 레넌을 축출하면 브리센 상단을 사주겠다 해주세요. 앨런은 또 말이 없었다. 지금 칼리안이 뭘 사겠다는 말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칼리안의 설명이 이어졌다. - 실리케가 저에게 독을 썼다고 소문이 났을 때, 브리센 상단 피해가 가장 컸어요. 레넌과 거래하던 헤일이 그것 때문에 타격을 입었을 정도니까, 브리센 상단의 피해는 상상 이상일 겁니다. 레넌이 물러났을 때, 브리센 후작이 그 골칫덩이 상단을 떠안고 싶어할 리가 없어요. 애초에 브리센은 기사 가문이었다. 검에 소질이 없는 레넌이 만들어 시작한 것이 브리센 상단이었다. 브리센 후작은 돈이 된다는 이유로 레넌의 상단 운영을 그대로 두고 있었으나, 이제는 돈도 되지 않고 기사 가문의 간판에도 어울리지 않을 상단을 달가워 할 리가 없었다. - 아무리 그래도 카이리스 제일의 상단입니다. 그것을 어찌 사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운영 적임자는 이미 있지 않습니까? 폴룬 상단의 상단주인 멜피르 폴룬을 생각하며 하는 말이었다. - 상단 이름이 폴룬으로 바뀐다면, 적자 문제도 해결될 테고요. - 운영할 이가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지요. 지금 마법사단 발칸이 사용할 부지를 구매하고 건물을 세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져 가치가 내려갔다고는 하나, 그만한 상단을 구입할 만큼 자금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앨런이 뭘 오해했는지를 알아챈 칼리안이 말했다. - 아직 제 금고 열어보지 않으셨군요. 르메인은 프레이야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란델의 모친인 아이샤 왕비가 죽은 뒤 후궁 프레이야를 맞이한 르메인은, 프레이야에게 퍽 괜찮은 영지를 하사했다. 그 이후에 왕비로 들어온 실리케는, 프레이야를 독살할 궁리에 빠져있느라 영지는 내버려 두었다. 죽은 프레이야의 영지는 칼리안에게 상속됐다. 그리고 옛 칼리안은,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도, 칼리안이 소유한 영지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 레넌 브리센, 이제 치워주세요. 스승님. 카이리스 최대의 밀 생산지에 위치한 휘트린. 휘트린의 영주 칼리안이 그렇게 말했다. ──────────────────────────────────── 제11장. 의도한 건 아니었어. (4) 르메인이 안경을 벗었다. 곧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르메인은 긴 숨을 내쉬었다. 레넌 브리센의 배신이라는 칼을 이번에 휘두르겠다는 칼리안의 말을 전해들은 까닭이다. 심지어, 그 칼자루를 쥐는 것은 칼리안이 아니었다. 브리센 후작이 직접 아들을 잡도록 하겠다는 말이었다. “후작을 돈으로 사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그것이 가능한 정도의 금액이 있는 것도 놀랍지만, 후작을 돈으로 부리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앨런이 말했다. “이번 일은 저와, 폴룬 남작이 진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전하와 칼리안 왕자님은 이 일에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해두는 것이 좋지 않을런지요.” 칼리안이 나서서 란델의 사람을 공격했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게 하겠다는 말이었다. 돈은 멜피르 폴룬이 지불하는 것으로 꾸미고, 에반과의 협상은 자신이 나서서 진행하겠다는 것이 앨런의 계획이었다. 물론 그렇게 한다 해도 란델 측에서 눈치를 챌 수는 있겠지만, 칼리안이 전면에 나서지만 않는다면 대놓고 문제를 키우지는 못할 터였다. 앨런의 말을 들은 르메인은, 얼마동안 더 생각을 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실리케 왕비의 아버지이기도 한, 에반 브리센 후작을 만나러 가기 위함이었다. * * * 그 날은 중앙 귀족의 정기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때문에 카이리스 왕궁에 가기 위해 저택 밖으로 걸어나오던 에반 브리센은, 정문 쪽을 보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시간이 지나도 그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뒤에 서 있던 집사가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하려 정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에반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집에 있겠다.” 집사는, 에반이 준비를 모두 마치고 출발을 하려다 마음을 바꾼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에반이 먼저 말하지 않는 것을 물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토를 달지 않고 바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집사의 고개가 다시 들릴 때 쯤, 저 멀리 저택 정문으로 작은 마차 한 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귀족들이 탈 만한 그 마차에는, 폴룬 남작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그 마차를 잠시 지켜보던 에반은,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서재로 안내해라.” 그 말에, 집사의 얼굴에 다시 한번 의문이 생겼다. 방문객들은 항상 응접실에서 만나오던 에반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서재로 데려오라는 말을 하니 이상하다 여겨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다만 집사는 이번에도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에반이 들어간 뒤, 느긋한 속도로 저택 앞에 도착한 마차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이를 본 집사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동글동글한 인상을 가졌다는 멜피르 폴룬을 대신해, 적은발의 머리를 하나로 묶어내린 매우 날카로운 인상의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앨런 마나실이었다. 굳이 자신의 마차를 타고 와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낼 이유가 없었으므로, 멜피르의 마차를 얻어 타고 이 곳에 온 터였다. 멜피르를 영입할 때 칼리안이 써먹었던 방법을 앨런도 따라한 것이다. 그렇게 평생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곳에 발을 디딘 앨런은, 자신을 경계하는 수많은 기사들의 시선을 유유히 받아 넘기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집사의 안내를 받아 에반이 기다리는 곳으로 들어갔다. 에반은 이미 서재에 마련된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나이만으로 따진다면 앨런보다 대여섯 살 정도가 많을 것이다. 흰 머리가 반쯤 섞인 청록색 머리카락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 에반의 얼굴을 향해, 앨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앨런 마나실입니다.” 어찌 모르겠냐만은, 에반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는 짧게 대답했다. “에반 브리센.” 첫 만남에 대한 그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의 무미건조한 첫인사가 이렇게 오갔다. 에반은 앞 자리를 가리켜보이며 입을 열었다. “미리 언질을 주었다면 준비를 해 두었을 것을.” 그러자, 날카롭게 생긴 앨런의 눈이 아주 둥글게 휘어졌다. 그렇게 흠잡을 데 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앨런이 말했다. “너무 많이 준비하실 듯 하여 그냥 왔습니다.” 브리센에서 앨런을 위해 준비할 것이 환영일지, 독일지, 검일지. 어떻게 알고 미리 알리겠는가? 이렇게 가시가 박힌 말에, 에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에반이 권한 자리에 앉은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곧바로 본론이 나왔다. “후작님의 둘째 아드님이 전하의 첫째 아드님을 바라보더군요.” 앨런은 그렇게만 말한 뒤 에반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에반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들이 배신했다는 말임은 알아듣고 있었다. 잠시 뒤 에반이 앨런을 보며 말했다. “생각지 못한 이야기군.” 그러자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은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입만 열어 말했다. “하지만 레넌은 그런 일을 벌일 만큼의 그릇이 못되네.” 아버지와 동생을 배신하고 다른 편에 설 만큼 용기가 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앨런이 웃으며 대꾸했다. “평가가 꽤 박하시군요.” 레넌이 마음을 바꾼 것을 믿으려 하질 않는 것이다.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가락을 튕겼고, 아무것도 없던 곳에 가죽 가방 한 개가 나타났다. 그것을 본 에반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굳이 응접실을 두고 서재에서 앨런을 맞이한 이유는 이곳에 설치된 마법 방해 장치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앨런과 공방을 주고 받을 것을 대비한 일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마법을 쓰니, 방해를 해도 소용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앨런은 가방 속에서 꺼낸 서류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 에반을 한번 쳐다봤다. 그리고는 그가 무엇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는지 안다는 듯 여유롭게 말했다. “세월을 거슬러 사는 마법사를 그냥저냥 생각하진 마시지요.” 이미 서재에 뭐가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곧 앨런이 서류를 들어 에반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아드님보다는 믿을만 할 겁니다.” 에반이 묵묵히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 헤일과 말콤, 그리고 에일라에게서 확인한 내용들을 추린 것이었다. 서류를 넘겨가는 에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손이 조금씩 떨리는 것은 볼 수 있었다. 매우 화가 난 것을 숨기는 듯한 얼굴로, 에반이 말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앨런은 평온한 얼굴로 답했다. “이미 레넌을 물러나게 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낱 마법사가 간섭할 일은 아니지.” “······ 그것은 한낱 칼잡이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군요.” 그 말을 들은 에반의 기세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당장이라도 앨런의 사지를 조각낼 것 같이 날카로운 살기가 앨런의 온몸을 향해 쏘아졌다. “이런.” 살기를 느낀 앨런이 조금 당황한 듯한 얼굴을 했다. 말 한마디에 자신을 향해서 살기를 보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앨런 마나실이 아닌가. “생각 외로 만만하게 보이고 있었나 봅니다.” 앨런이 그렇게 말하며 슬쩍 웃었다. 지금 에반이 무엇을 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싸움이 벌어져 보아야 서로 좋을 것이 없었으니, 정말로 공격을 하겠다는 행동은 아닐 터였다. 다만 거슬리는 소리를 하는 앨런의 기를 누르려는 심산인 것이다. “감당하실 수 있을런지.” 언젠가 앨런은 르메인에게도 이 말을 했었다. 의미는 달랐지만. 앨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을 맴돌던 공기가 순환을 멈추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를 담아냈다. 에반의 동공이 확장됐다. 칼을 쥐는 이들은 살기를 다룬다. 그리고 마나의 이치를 아는 이들은 피어를 내보낸다 하였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둔 공포감을 끌어내는 힘이다. 그 방법은 서로 달랐으나, 결국 상대방을 짓누른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었다. 살기를 밀쳐내며 에반의 숨을 틀어막은 앨런이 말했다. “나는 내 제자와 달라서, 그리 무르지 않으니.” 앨런이, 에반을 향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우선 오늘은 조용히 대화나 나누시지요.” 앨런의 미소는 바뀌지 않았다. 에반을 옭죄는 공포감도 줄어들지 않았다. 잠시 앨런의 반응을 떠보려던 에반이 살기를 거두었다. 그러자, 앨런 역시 평소와 같은 만만한 마법사로 돌아왔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기싸움에서 물러난 에반의 귓가에 앨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드님은 알아서 잘 거두시리라 믿겠습니다.” 말 없이 앨런을 응시하던 에반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어느정도 본래의 얼굴로 돌아온 에반을 향해 앨런이 말했다. “그리고 한가지 제안이 있습니다만.” 그 말에 에반이 눈을 조금 찌푸렸고, 앨런의 설명이 이어졌다. 란델을 포함한 모두가, 레넌이 왜 축출되는지를 알지 못하도록 조용히 마무리를 지어주면 브리센 상단을 사겠다는 말이었다. “상단을?” 에반이 되물었다.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기는 했다. 후작 가문의 이름을 딴 상단이라니,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 않았던가. 다만 그것을 구매하겠다고 나선 이가 앨런, 아니. 칼리안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3왕자에게 득이 될 일을 왜 내가 해야 하지?” 어느새 평정심을 찾고 이렇게 말하는 에반을 향해, 앨런이 무슨 말이냐는 듯한 얼굴을 보이며 대답했다. “왕자님에게 브리센 상단을 살 만한 돈이 있을 것 같습니까? 애초에 이 곳에 계시지도 않는 것을.” “칼리안 왕자가 아니면 누가?” “카이리스 제일의 상단을 운영하고 싶어하는 이가 있지요.” 물론 이렇게 꾸며내는 것에 대해 멜피르의 동의는 이미 구해 둔 상태였다. 이름이 한 번 팔리고 브리센 상단이 생기는데, 멜피르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파시지요. 그렇게 하시면, 그럴싸한 가격에 살 겁니다.” 그와 함께 앨런이 제시한 금액을 본 에반은 적잖이 놀랐다. 에반은 잠시 고민했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란 아들 한 명, 그리고 처치 곤란한 상단 한 개와 바꾸기에는 충분한 액수였다. * * * 헤일 라트란이 잡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레넌 브리센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행여라도 그와 자신의 관계가 들통날까봐, 당장 전 재산을 팔아 텐실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매일매일 걱정을 했다. 그런 헤일 라트란이 감옥에 갇혔고, 자신에게는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이런 일을 또 겪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레넌은 그 길로 라트란이 있는 쪽으로는 두 번 다시 발을 붙이지 않겠노라 선언도 했다. 그와 거래하던 몇몇 영지가 있었지만 그리 신경을 쓸 만큼 대단한 곳들도 아니었다. 그깟 영지 몇 개쯤, 식량난이 오든지 말든지. 그리고 오늘, 헤일 라트란이 모아서 보내왔던 신물을 무사히 텐실의 신관에게 넘겼다. 란델 왕자와의 만남을 주선해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레넌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흥얼거림을 멈추지 않으며, 창가에 두고 키우던 화초에 직접 물을 주고 잎을 닦았다. 며칠 동안 신경을 쓰지 못했더니, 화초 잎이 영 비실비실한 것이 보였다. 그 꼴이 꼭 얼마 전의 칼리안 같아서, 레넌이 재밌다는 듯 큰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보자. 영양제가 어디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뒤로 돌아선 레넌의 발이 멈췄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두 명의 기사가 레넌의 앞에 서 있었다. 레넌이 아는 이들이었다. 몇 개월 전까지 왕궁을 지키던 기사단 파벨의 기사들이었다. 때문에 레넌은 움찔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창가에 등이 닿았다. “뭐야! 네 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레넌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기사들이 레넌의 벌어진 입 속에 천쪼가리를 우겨넣었기 때문이다. 레넌을 꽁꽁 묶은 기사들은 검은 천 하나를 꺼내 그의 몸을 뒤집어 씌웠다. 레넌은 끝까지 발버둥쳤다. 결국 기사들이 레넌을 기절시키기 직전까지 온 몸을 뒤틀며 저항했다. 그 바람에, 조금 전까지 레넌이 애지중지 키우던 화분이 창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화분의 가치가 어느정도인지 알았다면 기사들이 조금쯤 아쉬워했을까. 레넌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 안이었다.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브리센 후작 저택 지하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레넌의 고함소리가 공허하게 울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 제11장. 의도한 건 아니었어. (5) (수정) 레넌이 사라졌다. 그 후 앨런의 일처리는 신속했다. 곧바로 멜피르 폴룬을 통한 상단 인수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덕분에, 칼리안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스팅과 네리카의 영주를 엘프 마을로 불러냈다. 두 영지의 싸움 중재를 위해서였다. 영주들과의 일이 마무리되면 더 이상 엘프 마을에 머물러야 할 필요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므로, 칼리안은 두 영주를 만난 뒤 곧바로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물론, 장로 제르가 열게 될 숲의 길을 통해서였다. 때문에 조금쯤은 들뜬 상태로 영주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야 할 칼리안은, 들떠 있다고 보기에는 많이 어려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손버릇 나쁜 엘프 루카가 또 훔쳐온 어떤 물건 때문이었다. 조금 전, 엘프 마을로 돌아온 루카는 마을에 칼리안의 기사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 자리를 조용히 벗어나려다 히나와 부딪혔고, 넘어졌다. 그 바람에 루카가 들고 있던 가방에 담긴 물건이 쏟아졌다. 그 소란에 시선을 돌린 칼리안이, 가방에서 나온 어마어마한 양의 귀금속을 보게 되었다. 또 어디선가 훔쳐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 눈에 띄는 검은 돌을 집어든 시아에게 변화가 생겼다. 시아의 독특한 말버릇, 대답을 먼저 하는 능력이 사라진 것이다. 숲의 길을 안내해주기로 한, 그래서 잠시 더 동행하게 된 시아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시아. 밥 먹었어?” “응. 먹었어.” 돌을 든 시아에게서 정상적인 대답이 나오자, 칼리안의 눈꼬리가 가늘게 변했다. 옆에 서 있던 아르센이 큰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그만큼 이상한 일이었다. 곧 칼리안은 시아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다시 건네받았다. 그리고 한번 더 시아에게 말을 걸었다. “응. 저 쪽에 있어.” “히나 봤어?” 다시, 대답이 먼저 나온다. 칼리안은 자신의 손바닥에 놓인 것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황금색의 문자가 새겨진 작고 검은 조약돌이었는데, 보기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시아 외에는 그 돌에 영향을 받는 이들도 없었다. 시아의 이상한 말버릇을 고쳐주고 있는 그 돌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칼리안에게, 아르센이 물었다. “이건. 역시, 신물일까요?” “가능성은 크겠지만. 조금 더······.” 그렇게 말하던 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아르센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칼리안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비슷한 것을 맡은 유란 역시 칼리안의 손에 들린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위험해 보이네요.” 그 검은 조약돌에는 피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멀쩡하던 이가 죽게 될 때 흘리는 피, 생명력 강한 피에서 느껴지는 그 독특한 기운. 기사들은 그것을 느끼는 훈련을 한다. 저 돌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직 살아갈 수 있을 생명이 강제로 꺼져가며 흘린, 생명력 강한 피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곧, 조약돌의 원래 주인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됐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것을 어떻게 루카가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좋지 않은 과거를 담은 물건임에는 틀림없었다. 칼리안이 루카를 향해 물었다. “이 돌, 어디서 훔쳤어.” “기억 안나. 다른 것들이랑 같이 들어 있었어.” 루카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칼리안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하자, 옆에 서 있던 장로 제르가 칼리안을 달래듯 말했다. “의도치 않게 손에 들어온 물건이라 하니 어쩌겠는가? 엘프를 인간의 법으로 규제할 수도 없으니, 나에게 맡기게. 내가 나중에 꼭 벌을 주고 타이르겠네.” 루카는 제르의 아들, ‘진짜’ 아들이었다. 아주 귀하게 여기는 아들이었던지, 제르는 루카를 다그치는 칼리안을 이렇게 말리고 있었다. “어머니 나무께 내가 이미 청을 해두었네. 곧바로 숲의 길로 출발할 수 있을 걸세. 그러니 이 곳의 일은 더 걱정하지 말고 가게.” 루카의 도둑질에 더는 신경쓰지 말고 갈 길이나 가라는 소리다. 칼리안이 그런 제르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정말, 내가 본 중 최악의 엘프이자 아비로군.” 그 말을 들은 제르의 눈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 심한 것 아니냐고, 제르가 그렇게 말을 하려 하는데, 두 명의 영주가 마을에 도착했다는 말이 전해졌다. 칼리안은 제르에게서 시선을 떼고 얀을 향해 말했다. “이 쪽으로 안내해줘.” “네, 왕자님.” 굳이 안에 들어가 이야기 할 것도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영주를 불러오게 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다시 시아에게 건넸다. “가지고 있어.” “루카꺼 아니야?” 돌을 받아 든 시아가 그렇게 물었고, 칼리안은 제르를 응시하며 답했다. “신물은 개인 소유물이 아니야. 왕궁에 돌아가서 처분해야 하니 일단 가지고 있어.” 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자신의 것을 뺏겼다고 생각했는지, 루카의 표정이 영 좋질 않았다. 도무지 개선의 여지가 없는 그런 모습을 본 칼리안이 혀를 찼다. * * * 얀이 데려온 두 명의 영주들에게, 칼리안이 한 말은 딱 한마디였다. “폴룬 상단이 곧 거래를 하러 올 겁니다.” 참으로 간단하지 않은가? 그들의 싸움 때문에 발이 묶인 칼리안이, 싸움의 원인인 레넌 브리센에게 화가 난 나머지 브리센 상단을 사버렸다는 것을 영주들이 알 리가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그저 좋아하며 감사의 말을 건넬 뿐이었다. 이 일을 가지고 싸움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런 둘을 보던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싸움과는 관련 없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스팅 자작.” 스팅 영지의 영주인 헤이즌 스팅이 칼리안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네, 왕자님.” “내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루카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엘프가 귀관의 영지에 용병으로 있던데. 그것이 가능합니까?” 엘프가 용병으로 있던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냐는 듯한 말투였다. 때문에 헤이즌은, 칼리안이 자신을 질책하려 꼬투리를 잡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헤이즌이 살짝 고개를 들어 칼리안의 옆에 서 있는 시종 얀을 쳐다봤다. 일반적으로 이런 것은 시종이 미리 알려주었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얀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헤이즌은 다소 민망해하며 말했다. “그것이······. 종족이 다르더라도 용병으로서는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왕자님.” “아, 그렇군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칼리안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관리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물론 엘프들이야 다들 순진하고 착하다지만. 잘못을 저질러도 처벌을 받지 않을 것 같아서 괜한 걱정이 드는군요.” 헤이즌은, 칼리안이 갑자기 왜 이런 것을 묻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것이······. 무력을 쓸 수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용병으로 활동하는 엘프는 예외입니다. 때문에 활동하는 나라의 법을 적용받습니다. 과거 엘프 대장로와의 협약에 그런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방금 스팅이 한 말은, 아무리 엘프라고는 해도 용병이라면 인간의 법이 적용된다는 말이었다. 즉, 루카의 도둑질을 카이리스의 법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말이 되었다. 칼리안이 웃었다. 그리고 제르를 보며 말했다. “그렇다는데.” 지금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를 깨달은 제르의 얼굴이 있는대로 구겨졌다.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궁금했던 거지, 의도한 건 아니었어. 나도.” 곧, 칼리안의 눈이 얀을 향했다. 칼리안이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 챈 얀이 헤이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칼리안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에 대해 설명을 했다. 용병으로 등록한 뒤 인간들의 물건을 훔쳐댄 엘프가 여기 있으니, 저놈의 엘프 잡아다가 뒷꿈치를 꼭 좀 잘라놓으라고. 저놈 때문에 꽃 같은 왕자님 심기가 불편하니, 신경써서 잘 자르라고. 헤이즌의 고개가 빠르게 위 아래로 움직였다. 눈 앞에 범인이 있고, 증거가 있다. 게다가 왕자의 심기가 불편하다고 한다. 누가 어떻게 거부하겠는가? 곧바로 움직인 헤이즌의 기사들이 루카를 붙들었다. 데려가서 심문을 하고, 죄가 있음이 밝혀지면, 정말로 뒷꿈치가 잘려나갈 터였다. “우리는 출발하죠.” 루카가 체포되는 것을 지켜본 칼리안이 레이븐의 등에 올랐다. 영주들의 싸움도 말리고, 버릇 나쁜 엘프도 잡았으니 이제 떠나려는 것이다. 그것을 본 일행들도 모두 말에 올랐다. 칼리안의 말에 오르자, 제르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루카가 훔친 물건이 너무 많았다는 것은, 제르도 잘 알고 있었다. 저대로 끌려가면 정말로 뒷꿈치가 잘려나갈 것이 자명했다. 귀가 빨갛게 변한 제르가 칼리안의 앞을 막아섰다. “잠깐 기다리게! 내 말을 좀 들어주게! 저렇게 잡아가면 어찌하는가! 기다리게!” 얼결에 칼리안을 붙들려던 제르의 손이, 레이븐의 목덜미에 살짝 닿았다. 그리고 항상 고고한 자태를 뽐내던 왕자의 말이 눈을 까뒤집는 것을 보곤 경악하여 손을 뗐다. 그런 제르를 향해, 칼리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저 엘프에 대한 벌은 인간들이 줄 테니, 나중에 잘 타일러줘. 뒷꿈치 잘리는 엘프는 처음인데. 못봐서 아쉽네. 네가 잘못한 거니까 내 탓은 말고.”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제르가 미리 열어둔 숲의 길로 유유히 들어갔다. 그 뒤를 이어 칼리안의 일행들도 하나 둘 칼리안의 뒤를 따랐다. 기사들에게 끌려나가는 루카와,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의 제르를 남겨 둔 채였다. * * * 숲의 길은 정말 숲 속의 길이었다. 푸른 나무들이 가득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길을 걷는 레이븐의 등 위에서, 칼리안은 검은 조약돌을 손에 든 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글씨가 새겨진 것 외에는 그다지 특이할 것이 없는 돌이었다. 그런 모습을 본 유란이, 말의 속도를 늦춰 칼리안의 옆으로 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왕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자, 칼리안은 그 말에 대해 대답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조금씩 옅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묻는 칼리안이 의미 모를 웃음을 짓고 있었다. 순간 무슨 말이냐며 되물을 뻔했던 유란이, 칼리안을 다시 한번 살펴보는 듯한 눈빛을 했다. 돌에 배어 있던 피 냄새가 옅어지고 있지 않느냐고, 칼리안은 그렇게 묻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들이나 맡을 법한 냄새를 이미 알고 있는 칼리안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멀리하기에는, 이상한 물건이라서요.” 이상한 물건이라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시아의 말버릇을 고쳐주는 돌이었기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앞선 대답을 한다는 것. 대화를 하는 그 순간의 시아는, 다른 이들보다 조금 앞선 시간을 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지도 않은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겠는가. 그런데 그런 능력을 사라지게 만드는 돌이 나타났다. 시간의 뒤틀림을 바로잡는, 혹은 시간과 관련된 시아의 능력을 무효화 시키는 효과를 지닌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칼리안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 시간의 축! 시간의 축 역시, 시간과 관련된 신물이라 여겨지지 않았던가. 그러니 검은 돌이 아무리 불쾌한 물건이라 해도, 손에서 놓을 수는 없었다. 칼리안이 다시 한번 손에 들린 돌을 움켜잡았다. * * * 카이리시스의 왕궁, 그 중에서도 체르밀 궁. 가장 높은 층에 마련된 란델의 방에서, 시종이 말을 전했다. 상당량의 신물을 텐실로 전달하게 되었다. 그 일에 굉장히 큰 도움을 준 것은 레넌 브리센이다. 그런데, 레넌이 갑작스럽게 행방불명 되었다. 브리센 후작이 백방으로 조사하고 있으나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브리센 후작은 앨런 마나실과 멜피르 폴룬을 가장 먼저 의심했으나, 관련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때문에 돈을 노린 집단의 소행이 아닐까 조사중에 있다. 이것은 바로, 브리센 후작이 적당히 만들어 퍼뜨린 내용이었다. 란델은 소식을 알려준 시종에게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는 이만 나가보라는 뜻을 보였다. 그리고 시종이 나간 뒤 읽던 책을 다시 펼쳤다. 한참이 지나도록, 책장은 다음 페이지로 넘겨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아무 소리도 나지 않던 방 창가에 새 한마리가 날아와 지저귀기 시작했다. 조용히 일어난 란델이 창가로 걸어가니, 놀란 새가 포르륵, 날아갔다. 란델은 조금 아쉬운 기분을 느끼며 창문을 열었다. 하늘이 맑았다. 란델의 구불구불한 황금색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렸다. 눈을 감고 한동안 바람을 즐기던 란델의 눈이 살짝 떠졌다. 맑은 하늘, 새 소리. 날씨가 좋지 않아 잠을 설쳤다 하고, 새 소리가 그립다 했던. 그리고, 장미가 곧 피어날 것이라던 말이 생각난 까닭이다. 칼리안. 이번에는 레넌을 물린 것이구나. 잠시 창 밖을 보며 동생을 생각하던 란델이 밖으로 나갔다. 곧바로 시종들이 따라왔다. “정원에.” 짧은 말이 나왔고, 따라오던 이들 중 한 명이 화초들을 관리할 도구를 챙기러 달려갔다. 란델은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으로 호수를 지나, 장미가 심겨 있는 정원에 도착했다. 곧 뒤따라온 시종이 그에게 정원 가위를 전해주고 우산을 펼쳐 해를 가렸다. 란델은 조용히 앉아 잔가지를 쳐내고, 잡초를 뽑아냈다. 꽃은 없었다. 이미 가을이었으므로, 이미 모두 피고 졌다. 그런 란델의 눈에 나무 아래에서 자라난 작고 약한 꽃가지 하나가 보였다. 다른 가지들에 눌려 차마 곧게 뻗어나오지도 못한. 그것은, 오래 전의 칼리안과 같은 가지였다. 그 가지를 가만히 바라보던 란델이 소매 속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목걸이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그 작은 가지에 가 닿았다. 휘어진 가지가 곧게 펴지고 꽃봉오리가 생겼다. 그 뒤에는 작고 붉은 장미가 한 송이, 피어났다. “아직은 보기 좋으니. 조금만 더 그렇게 있거라.” 란델은, 홀로 핀 붉은 장미를 내려다 보다, 방으로 돌아갔다. ──────────────────────────────────── 제12장. 살고 있습니다. (1) 칼리안 일행은 열흘하고도 사흘 동안 숲을 달렸다. 길잡이를 자처해 준 시아의 안내에 따라 달리고, 멈추어 쉬고, 일어나 또 달렸다. 그 푸름에 질려 눈이 시큰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쯤, 마지막 나무 사이를 지나자 멀리 작은 언덕이 보였다. 흙과 바위, 하늘이 있었다. 길고 긴 길을 비로소 벗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시아의 길은 여기까지였다. “대장! 이제 안녕, 해!” 방금 전 일행이 빠져나온 숲의 앞에서, 시아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헤어지자는 뜻이었다. 시아는 인근의 다른 숲 마을에 잠시 머물다, 본래 있던 곳에 돌아가기로 했다. 칼리안은 아직 천진한 시아가 그 이상한 마을로는 돌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으나, 가족이 전부 그 곳에 있는 시아가 홀로 다른 마을에 가서 살 수도 없을 일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이제 돌아가겠다는 시아를 보며 짧은 대답만 건넸다. “그래.” 작별 인사는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그저 시아의 머리를 오래도록 쓰다듬었고, 다른 일행들도 한 마디씩 덕담을 건넸다. 그래도 한 달을 함께 해온 사이였으니,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히나와 꼭 끌어안으며 가장 긴 인사를 끝낸 시아가, 다시 칼리안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 동안 일행들과의 원만한 대화를 위해 들고 있던 검은 조약돌을 내밀었다. “이제 대장이 가져. 잘 썼어!” 사실 이 곳에 도착하기 얼마 전, 칼리안과 시아는 대답을 먼저 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시스파니안의 의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니, 혹시라도 그녀에게 이유를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때문에 그 때까지 동행을 계속 하는 것은 어떨지 시아에게 물었으나, 시아는 거절했다. - 어머니 나무가 그러셨어. 이렇게 대답하는 게 나한테는 제일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내가 혼자 다르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하셨어. 말하는 건 달라도, 내가 엘프인 것까지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그러니까 알아봐주지 않아도 돼. 고마워!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은 조금 부끄러운 기분을 느꼈었다. 자신도 모르게 시아가 말하는 버릇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날을 생각한 칼리안이, 다른 말 없이 돌을 돌려받았다. 그러자 시아는 아직 꺼내지 않은 칼리안의 말에 대한 대답을 했다. “그래! 그럼 진짜 기쁠거야. 고마웠어! 구해줘서!” 이미 답을 들었지만, 칼리안은 말을 멈추지 않고 꺼내놓았다. “다음에 만나.” 시아가 다시 한번 팔을 크게 흔들더니,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 사라졌다. 칼리안이 만난 여러 엘프 중 가장 착한 엘프와의 동행은 그렇게 끝났다. 시아가 들어간 풀섶이 흔들리지 않게 된 것을 확인한 칼리안이 레이븐을 다시 움직였고, 목적지를 향한 마지막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언덕의 정상에 올라선 칼리안이 큰 숨을 들이마셨다. 레이븐이 언덕 꼭대기에 한 발을 올려 놓은 순간 눈 앞에 펼쳐진 장엄함 때문이었다.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레이븐의 발을 멈추었다. “저곳이구나.” 코끼리들의 땅, 지그프리드 공작령! 1년 전의 플란츠가, 3년 전의 란델이, 그리고 더 오래 전 언젠가의 르메인이 서 있었을 그 자리에서, 칼리안은 한참동안 말을 잊고 그렇게 지그프리드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드높은 성벽은 카이리시스의 외성보다 견고했고, 웅장했다. 외성의 거대한 정문 양 옆에 높이 세워진 두 개의 석상은 절로 고개가 숙여질 만큼의 엄숙한 느낌을 주었다. 시스파니안의 땅을 지키겠다는 그 일념이 저 성벽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니 장담하건대, 이 자리에 섰던 모든 카이리스의 왕자들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저들이 초식동물인 것에, 그리하여 결코 왕좌를 노리지 않았던 것에 감사하면서. 꽤 오랜 시간 동안 감상을 마친 칼리안이 결연한 얼굴로 옆을 쳐다봤다. 이 곳에 온 이상, 코끼리의 땅에 발을 딛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얀.” 칼리안의 부름에, 얀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싹싹하게 대답했다. “네, 왕자님.” “들어가면, 시종 노릇 하지 마.” 제발. 그 말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칼리안을 보았을 때, 그들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얀이 시중을 들고 있다는 그 왕자라는 놈을 어떻게든 혼쭐을 내주겠다고. 스무 기사의 마음이 그랬으니, 저 안에 칼리안이 도착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기사들이 몇이나 될지, 유란조차 가늠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 곳에 오면 모두 밝혀질 일이었으므로, 얀은 키리에와 히나, 그리고 아르센에게도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알려주었었다. 때문에 셋의 얼굴에도 웃음이 어렸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얀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 대답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이제야 깨달은 칼리안은 또 잠시동안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 * * 앨런이 깜짝 놀란 얼굴을 하더니, 르메인을 향해 양해를 구했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눈을 부비적거리고,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것을 본 르메인은, 자신이 괜한 말을 했음에 대해 매우 후회하며 말했다. “싫으면 말고.” 그러자 앨런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집무실의 테이블에 놓인 술병과 두 개의 잔을 보며 웃었다. “전하께서 먼저 술을 찾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말에, 르메인이 별다른 말 없이 맞은편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하지만 앨런은 자리에 앉는 대신, 창 밖을 가리켜 보였다. 사위는 어두웠고, 가을 하늘의 달이 오롯이 밝았다. “좋지 않겠습니까.” 밖에서 마시자는 것이다. 르메인이 잠시 멈칫했다. 국왕의 위에 오른 이후 제대로 된 산책 한번 마음 편히 다니질 못했다. 이 거대한 나라를 홀로 떠안은 힘 없는 왕에게는, 넓은 궁에 놓인 책상 앞을 제외한 그 어떤 곳도 안전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달이 밝고 마법사가 옆에 있는 이런 날이라면. 좋지 않겠는가. 르메인이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앨런이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고, 술병과 술잔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곧 앨런은 르메인을 데리고 아르피아 궁의 후원에 들어갔다. 지그프리드관에 만들어진 것보다 조금 더 큰 개울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흐르고 있는 곳이었다. 잔디밭으로 저벅저벅 걸어간 앨런은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그 옆의 바닥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그 곳에 앉으라는 소리였다. “앉으시지요. 이 곳이 가장 좋습니다.” 그 무례한 꼬락서니에 카에라의 단장이 어쩔 줄을 몰라했고, 이제는 그냥 저 무례함이 과연 어디까지 가는지 보기나 하자는 심정이 된 르메인이 앨런의 옆으로 가 앉았다. 그러자, 조금 전 앨런이 챙겨둔 술병과 잔이 그들의 앞에 놓였다. 앨런이 직접 르메인의 잔에 술잔을 채우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라 넣었다. 그리고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안심이 되어 그러십니까, 다른 걱정이 되어 그러십니까.” 그날 저녁, 칼리안이 지그프리드의 땅에 발을 올렸다. 무사히 슬레이만의 품에 도달한 것이다. 때문에 그것이 좋아 술을 청한 것인지, 다른 걱정거리가 있는지를 묻는 말이었다. 르메인은 일단 술부터 마셨다. 그 뒤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카밀론의 불을 언제 켜야 할지. 고민이 되어 그러네.” 왕세자의 궁, 카밀론. 칼리안이 돌아오면 세 왕자가 모두 성인이 된다. 그 말은 곧, 세자위를 정해야 할 날이 다가온다는 뜻이기도 했다. 때문에 르메인은 오랫동안 불이 켜지지 않는 카밀론 궁의 주인을 언제 정해주어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장 진중한 란델은 그 속이 깊고도 깊어 보이질 않고. 가장 강한 플란츠는 계속 엇나간 길로 가려 하는데.” 그렇게 두 왕자를 언급한 르메인이 작은 한숨을 섞어 덧붙였다. “칼리안은 아직 다 자라지 않았으니.” 르메인에게 가장 도움이 되어 주는 왕자도, 가장 마음이 가는 왕자도, 칼리안이었다. 그러나 칼리안은 가장 어렸다. 나이도 어렸고, 지닌 세력도 이제 막 자라기 시작했다. 앨런이 짧게 소리내며 웃더니, 찬 소리를 했다. “그리 급하시면, 제일 마음에 안드는 놈을 먼저 올리시지요. 올리자마자 사라질테니.” 성급한 고민에 대한 타박이라고는 하나, 그 말에 돋힌 가시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르메인이 화가 반쯤 섞인 말투로 말했다. “정말 그 입 좀 어찌 안되겠는가?” 앨런은 르메인의 질책을 무시하며 손가락을 들어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켜보였다. 헤이시아 궁, 바로 실리케가 있는 곳이었다. “칼리안 왕자님이 저 궁을 비워내기 전까지, 란델은 얌전할 겁니다. 란델의 속은 그때 가면 들여다 보실 수 있겠지요.” 르메인은 앨런의 손 끝을 따라 헤이시아 궁 쪽을 쳐다봤다. 앨런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 때까지는 전하께서도 속내를 보이시면 안됩니다. 또 저기 저 친구 함부로 내보내면,” 왕의 검, 그리고 모든 기사들의 우상. 국왕 친위대 카에라의 기사단장을 ‘저기 저 친구’라 언급한 앨런이, 르메인을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 주어 말했다. “늙은 마법사는 정말로 남쪽 나라에 요양이나 갈 터이니.” 그것이 칼리안을 위해서든 다른 두 왕자를 위해서든, 한 명에게만 특혜를 주지 말라는 협박이었다. 앨런은 언젠가 칼리안에게도 같은 말을 했었는데, 칼리안은 그 말을 들으며 듣던 중 무서운 소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르메인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진심이 담긴 긍정은 아니었으므로, 피식 웃은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카밀론의 주인이 누가 되든, 때가 되면 스스로 증명을 할 것입니다. 구태여 앞서서 고민하지는 마시지요. 오늘은 그저, 달이나 보시면 됩니다.” 르메인은 걱정과 기대가 반씩 섞인 눈을 하며 술잔을 비웠다. * * * 칼리안은, 지그프리드 공작령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꼈다. 외성을 통과하면 늦은 밤에는 슬레이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칼리안의 기대는 완벽한 착각이었다. “이제 이틀 정도만 더 가면 지그프리드 성에 도착하겠네요.” 외성 정문을 통과한 뒤, 느긋한 말투의 얀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지그프리드의 외성 정문과 연결된 시트렌 시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자리를 잡고 앉은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주변의 마나를 끌어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운이 모여들자, 칼리안은 항상 그랬듯이 정제된 마나를 심장으로 보냈다. 서클을 늘리는 것을 다시 시도하는 것이었으나, 결국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마나가 단전에 흘러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때문에, 오늘도 실패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실망하던 때. 문득 시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말하는 건 달라도, 내가 엘프인 것까지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그 말을 떠올린 칼리안의 눈이 빛났다. 마나가 오러로 전환되었다 하여, 근원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오러와 서클의 근원이 같은데, 그것을 왜 다르다 생각했을까! 서클을 만드는 것은 서툴지라도, 오러를 다루는 것은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지 않은가. “마나를 오러로 바꾸는 버릇을 못버리겠으면, 오러로 서클을 만들면 되는 것을.” 엉뚱한 해결 방법을 떠올린 칼리안이, 다시 눈을 감았다. 곧바로, 단전에 둥글게 모여있는 오러의 힘을 풀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운용하기 시작했다. 곧, 강인하고 날카로운 오러의 힘이 하나의 띠를 이루며 심장으로 흘러들어갔다. 본래의 따뜻한 온기를 품은 마나 대신, 잘 벼려진 검날과 같은 오러의 기운이 조금씩 둥글게 뭉쳐지고, 점점 긴 형태를 이루며 칼리안의 의도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칼리안은 계속 속도를 높여가며 같은 것을 반복했다. 잠시 후, 칼리안이 운용하던 마나가 비로소 하나의 고리 형태를 이루었다. 그리고 마침내 힘차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렇게 서클의 회전에 집중하던 칼리안이 눈을 떴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심장 부근을 어루만졌다. 정확히 네 개의 서클이 서로 연결된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세 개의 서클을 가지고 있었던 때와 비교하지 못할 만큼의 마력이 심장에 담긴 것이다. “하하.” 고작 그 작은 차이 하나를 깨달았을 뿐인데. 이 몸을 얻은 후 처음으로 얻게 된 새로운 성취에, 칼리안의 눈에 큰 만족감이 들었다. 칼리안은 다시 자세를 바로하고, 주변의 마나를 한번 더 모아 정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클을 만들어내느라 소모된 오러를 채워넣었다. 그런 칼리안의 방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침부터 대기 중에 휘몰아치는 마나를 느끼고 얼른 이 곳으로 달려온 그는, 바로 아르센 헤르츠였다. 지금 칼리안이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괜찮으신 겁니까?” 그런 그의 옆에 서 있던 얀이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용히 물어왔다. 아르센이 칼리안의 방 앞에 서서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선 채로 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는 까닭이다. 얀의 질문에, 아르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갈무리 되고 있습니다. 걱정하실 일은 아니니, 잠시 기다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따뜻하고 온화한 것과는 거리가 먼, 오싹하리만치 시린 칼리안의 마력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음을 느끼며, 아르센이 이렇게 말했다. ──────────────────────────────────── 제12장. 살고 있습니다. (2) 아침부터 좋은 일이 둘이나 있었다. 4서클을 완성했다. 그리고 시트렌 시의 시장이 준비한 조찬에, 굴이 나왔다! 세크리티아나 리베른과 비교적 가까운 이 지역의 사람들은 해산물을 즐겨 먹는다 하더니, 특유의 바다 비린내가 나는 커다란 생굴이 올라 있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려놓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칼리안이 네 번째 서클을 만들었다는 것보다 생굴에 더 감격했다는 사실을 앨런이 알았다면 참으로 많은 말을 해주었을 터였다. 아무튼, 지그프리드에서의 첫 날은 그렇게 기분 좋게 시작됐다. 항상 칼리안의 옆에서 말을 몰던 얀은, 유란과 함께 일행의 가장 선두에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얀을 반겨하며 인사를 올리는 여러 사람을 대해야 했던 탓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칼리안의 옆에 아르센이 붙어 있었다는 이유가 더 컸다. 아르센은 아침에 느꼈던 칼리안의 기운을 떠올리다 말했다. “왕자님의 기운이 마치 칼날과 같았습니다.” 그 말에, 칼리안이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이유가 있습니다.” 아르센은 무슨 이유가 있는지 설명해주기를 기다렸으나, 그 후에 달리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이유가 있지만 이 자리에서 알려주기는 어렵다는 뜻 같았으므로, 아르센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 후 몇 개의 거리를 지나는 동안 말 없이 있던 칼리안이, 아르센의 손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헤르츠 경이 만드는 얼음은, 어느 정도로 강합니까?” 그 말에, 아르센이 잠시 생각을 하다 물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말씀하신 강함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설명을 요청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르센의 말은 항상 뒤가 길었다. 그냥 설명해달라고 하면 될 것을, 무엇이 그리 어려운지. “경의 얼음이 얼마나 큰 힘에 부러지는지. 그리고 얼마나 단단한 것을······ 꿰뚫을 수 있는지.” 소드마스터의 단단한 육신을 관통했던 아르센의 얼음창을 생각하면서, 칼리안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아르센은 다시 한번 고민을 했다. 아직 그런 것까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도 했지만, 칼리안이 굳이 마법의 강도를 묻는 까닭을 몰랐던 이유도 있었다. 곧 대답이 될만한 것을 떠올린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베른과 잠시 겨루었던 적이 있습니다.” 칼리안이 어깨를 경직시키며 아르센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베른이라는 이름이 이제 키리에의 성이기도 하다는 것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따라서 아르센이 말하는 것이 자신이 아닌 키리에라는 것을 깨달은 칼리안이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그래서요?” “그때 제가 베른에게 얼음의 창을 보냈습니다만,” 하필 또 그것을 썼다!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고, 아르센은 매우 아쉬워하는 얼굴을 하며 말을 이었다. “베른의 검에 제 얼음 창이 부러졌습니다.” 그 말에,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키리에를 쳐다봤다. 그리고 키리에는, 갑자기 칼리안이 왜 저렇게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런 상황을 알지 못하는 아르센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얼음창으로는, 통나무를 꿰뚫었던 적이 있습니다. 베른의 검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알고 계시니, 이렇게 설명을 드리면 가늠하시는 것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네. 충분합니다.” 키리에의 검술이 빼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간 열심히 가르쳐놓기도 했고, 스스로의 재능이나 노력이 결코 적지 않았다. 칼리안이 보기에 유란을 제외한 지그프리드의 기사들과 붙어도 쉽게 지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아직 칼리안이 ‘강하다’ 여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키리에의 검에 얼음창이 부러졌다면, 얼음창의 강도가 칼리안이 원하는 만큼이 되지는 못한다는 말이 되었다. “흠.” 아르센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 여쭤보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잠시 고민을 접어놓고 웃었다. 공손하기 짝이 없는 저 말투 때문이었다. 이제 칼리안도 아르센과 언제 처음 만났는지를 알고 있었다. 망자가 죽음의 강을 건너가는 자리에서, 죽음을 선사한 자와 죽음의 강을 되건너온 자가 다시 만났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하고 한참을 웃었었다. 아무튼, 칼리안이 누구인지 몰랐을 그 때에도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하던 아르센이었다. 보기에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발칸의 단장에게 썩 어울릴만한 모습도 아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시도 때도 상대방도 가리지 않고 지나치게 공손한 저 태도를 조금만 고쳐보라고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런 생각을 마치고 문득 옆을 보니, 여전히 아르센이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아르센이 방금 전 자신에게 질문을 했다는 것을 상기한 칼리안이 얼른 대답했다. “아. 저는 검을 지니고 다니질 못하니까요.” 마법으로 검을 대신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때마침 오러로 만들어진 마력까지 지니게 되었으니까. “다만 그 정도의 강도라면 검으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고민을 조금 더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칼리안의 말에, 아르센은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저런 고민을 하는지야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으나,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별히 아르센의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은 레이븐의 갈기를 흩트리며 고민을 이어나갔다. * * * 다음 날 저녁. 칼리안은 다시 한번 레이븐의 발을 멈추었다. 멀리 보이는 바위산 때문이었다. 때마침 석양이 들었다. 저무는 햇빛에 닿아 주홍색으로 신비롭게 물들어가는 바위산은, 그 아래 자리한 고성의 위엄이 바로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웅대하고도 아름다웠다. 지그프리드 공작령의 내성 안에 위치한, 존재 자체로 이미 하나의 역사가 된 그 바위산을 가리켜보인 얀이 말했다. “저 곳입니다, 왕자님.” 다른 설명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매우 담백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곳에 시스파니안의 빈 둥지가 있다는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석양이 거의 사라지고 하늘이 어둠에 물들기 시작했을 때 쯤, 내성 앞에 도착했다. 성문 안쪽으로, 수많은 기사들이 도열한 채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칼리안을 이 곳까지 호위해 온 기사들과 똑같은 검은 색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칼리안이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 그리고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그들의 사이를 지나갔다. 그 길의 끝에, 하얀 말에 올라 있는 중년의 기사가 있었다. 왕자의 앞이지만 굳이 말에서 내려 인사하지 않아도 되는, 이 나라 카이리스의 유일한 공작. 바로,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였다. “어서 오십시오!” 칼리안과, 그 옆의 얀을 확인한 그가 이렇게 말하며 양 팔을 벌렸다. 딱히 달려와서 안기라는 뜻은 아니었고, 이 땅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대충 그런 의미의 제스처였다. 칼리안이 씩 웃으며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슬레이만의 얼굴에도 비슷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지그프리드 공.” 둘은 지금 두 번째 만나는 것이었고, 처음 보았을 때에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었다. 그저 슬레이만은 칼리안이 귀족들을 향해 신나게 뿜어내던 서슬을 느꼈고, 칼리안은 슬레이만이 그것을 눈치 채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집어넣지 않았던 것이 둘이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그러므로 둘은 이제야 처음으로 말을 나누게 된 것이었으나, 어색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미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슬레이만이 잠시 칼리안을 살펴보더니 상당히 감탄한 눈을 했다. 그리고 그 놀라움을 굳이 숨기지 않고 입에 담았다. “이야! 정말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그것이 겉모습일지, 아니면 속에 담아둔 힘일지. 무엇이 달라졌다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칼리안은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달라진 것은 맞았다. “네. 그때보다는, 조금 나아졌습니다.” 칼리안의 대답을 들은 슬레이만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칼리안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흑마인 레이븐의 위에 올라 있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칼리안과, 백마를 탄 근육질의 슬레이만이 나란히 걷고 있으니, 둘의 모습이 완벽하게 대비되었다. 그러면서도 굉장히 오랜만에 만난 막역한 사이와 같은 분위기가 감도니,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얀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칼리안과 슬레이만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 막돼먹은 입의 마법사를 꽉 붙들어 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참 한결같은 앨런 마나실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던 슬레이만조차 이렇게 평가를 하니 말이다. 때문에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대답을 들은 슬레이만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섯 번째 검이 마법까지 다루고 있으니, 그놈의 마법사가 제자 하나는 잘 뒀습니다. 아주 신이 나 있겠습니다.” 칼리안이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것을 알아보고 하는 말이었다. 물론 칼리안은 놀라지 않았다. 검의 길에 오른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브리센 후작은 몰라도, 슬레이만이라면 단번에 알아볼 것이라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으니까. “신이 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생은 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칼리안이 그의 스승을 떠올리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안, 어느새 둘은 성의 출입구 앞에 도착했다. 슬레이만이 말 머리를 다시 돌리며 말했다. “조금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서쪽 구역의 시찰을 미룰 수가 없습니다. 해서, 남은 이야기는 아무래도 내일로 미뤄야 하겠습니다.” 어차피 칼리안이 지나치게 빨리 도착했기 때문에 일정이 틀어진 것이었으므로, 칼리안은 불쾌해하지 않고 대답했다. “내일, 시스파니안의 의지를 만난 것까지 보태서 이야기를 나누면 되겠네요.” 그 말에, 슬레이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쪼록 몸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다녀오시면, 풀어놓을 이야기가 아주 많으실 겁니다.” 그리고는 아주 유쾌한 소리로 웃었다. * * *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 지극히 위대한, 시스파니안. 시스파니안의 이름 앞에 붙어 있는 두 개의 칭호는, 자존감 높은 용들이 그녀를 위해 자발적으로 붙여준 것이었다. 그 정도의 대우를 받을 자격은 충분히 지니고 있었던 시스파니안이었다. 한때는 온 대륙을 공포에 떨게 하였고, 한때는 악신을 봉인하여 대륙을 지켜냈으며, 또 한때는 인간을 사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누군가는 생의 권태를 이기지 못해 자연으로 돌아갔다 했고, 누군가는 잠든 세렌티를 대신해 신이 되었다 했다. 그런 시스파니안이 남겨둔 의지를 만나고자 아주 먼 길을 온 칼리안이, 눈 앞의 거대한 공동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왕자의 성인식은 홀로 치뤄진다. 시스파니안의 뜻이었다. 다른 이들은 산 아래에 남았다. 따라서 칼리안 역시, 혼자였다. 잠시 머릿속으로 시스파니안에게 물을 것을 정리한 칼리안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공동 입구로 발을 디뎠다. 밝은 아침이었으나, 공동에 한 걸음을 내딛기가 무섭게 어둠 뿐인 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때문에 잠시 발을 멈칫했던 칼리안은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하는 발걸음 소리가 공동을 둔중하게 울리다 아련하게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얼만큼의 길을 걸어왔는지 문득 궁금해진 칼리안이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와 동시에, 빛이 폭발했다. 적막한 어둠을 사납게 쫓아내는 것 같은 황금색의 빛이 온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때문에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렇게 또 얼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눈부심에 익숙해졌다고 느꼈을 때 쯤. - 사아아······.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바람결을 타고 함께 날아온 풀냄새가 코 끝을 맴돌았다. 공동 안에서 느끼기에는 힘들 그 감각에, 칼리안이 눈을 떴다. 그리고, 숨을 멈추었다. 칼리안은 앨런처럼 마나의 이치를 깨달은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마나 그 자체를 느낄 수는 있었다. 때문에 알 수 있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의지가, 아니다!’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심대한 마력.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듯한 공포감! 그것은 결코, 의지 따위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허리를 숙였다. “지극히 위대한.” 검은 머리. 붉은 눈. “시스파니안을 뵙습니다.”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 제12장. 살고 있습니다. (3) 칼리안이 공동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눈부신 빛이 공동을 휘감고 있었다. 아침이었음에도, 이틀 거리에 있는 시트렌 시에서조차 그것을 볼 수 있을 만큼의 밝은 빛이었다. 분명 불길한 느낌의 빛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위산 아래에서 칼리안을 기다리던 일행들은 완전히 마음을 놓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얀은 안절부절 못하며 공동 입구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얀을 향해 누군가 소리 없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얀의 곱슬거리는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말을 건넸다. “네 꼬맹이가 그리 걱정되느냐?” 여러 기사들이 있는 곳이었다. 기사들 뿐인가? 아르센을 포함한 칼리안의 사람들도 있는 자리였다. 이런 자리에서 칼리안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이는, 당연 슬레이만 외에는 없었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를 부여잡은 얀이 슬레이만을 보며 놀란 눈을 했다. 그가 도착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시찰 가신다면서요?” 슬레이만이 확인해야 했던 서쪽 구역은 한나절 거리에 있었다. 전날 저녁에 출발했다 해도, 시찰을 마치고 벌써 올 만큼의 시간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얀의 질문을 받은 슬레이만이 살짝 옆으로 비켜서며 대답했다. “운 좋게 반가운 손님을 마주쳐서, 빨리 오게 됐다.” 그 말에, 얀이 고개를 돌려 슬레이만의 거대한 몸집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슬레이만을 보았을 때의 몇 배는 더 놀란 얼굴을 했다. 모녀 사이로 보이는 두 명의 여자가 그 곳에 있었는데, 둘 모두 얀이 만나보지 못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얀의 또래로 보이는 소녀의 적은발이, 그녀가 누구의 핏줄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반가워요. 베로니카 마나실이에요.”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붉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건네오는 소개에, 얀은 잠시 공동 안의 칼리안을 잊어버렸다. * * * 고요한 가운데 풀잎 스치는 소리가 지나가자, 그리 대단할 것 없는 풀내음이 가득 퍼졌다. 지금 칼리안이 디디고 서 있는 곳은 언덕진 작은 들판이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땅도, 바다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하늘 아래 덩그러니 놓인 섬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이곳이 카이리스가 맞을지, 아니. 인간의 땅이 맞을지를 가늠하지 못했다. - 지극히 위대한, 시스파니안을 뵙습니다. 칼리안의 인사를 받은 시스파니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변의 모든 공기를 잠식할 것 같던 마력과,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릴 듯한 공포감을 사그라뜨려 주었다. 처음 시스파니안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위압감이 한층 사라졌다. 시스파니안을 대하는 것이 확연히 편안해진 것을 느낀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배려에 감사하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그런 칼리안을 보고 있던 시스파니안이 말 없이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들판의 끝자락으로 천천히 스치듯 걸어갔다. 그녀의 길고 검은 머리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다 내려앉기를 계속했다. 그러다 문득, 시스파니안의 목소리가 칼리안의 귓가에 닿았다. “세상에 없어야 할 아이가 나를 찾기에, 무슨 일일까 하였다.” 시스파니안은, 이미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던 칼리안이 어떻게 이 곳에 와 있는지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다른 시간에 살던 기억을 지니고 있기에, 무슨 일일까 하였다.” 칼리안이 베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까닭을 확인하고자 했다. “나의 축복을 칼날로 벼려두었기에, 무슨 일일까 하였다.” 시스파니안이 축복을 내려준 심장에 담긴 칼리안의 마력이 남들과 다른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여전히 들판의 끝에 선 채로 먼 곳을 좇던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하여, 내가 너를 불렀다.” 그제야 칼리안은, 시스파니안이 왜 의지가 아닌 본신으로 칼리안의 앞에 나타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시스파니안은 지금, 칼리안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직접 만나보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란델과 플란츠는 시스파니안의 본신을 만난 적이 없을 터였다. 이 특별한 만남이 성사되었음에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칼리안이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곧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그녀는 어느새 칼리안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서 있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덕분에 칼리안은 시스파니안이 갑자기 코앞에 나타났음에도 놀라지 못했다. 그렇게 칼리안과 마주보고 선 시스파니안이 말했다. “보겠다.” 무엇을 본다는 말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단순히 그렇게만 말한 시스파니안은, 자신의 것과 닮아 있는 칼리안의 눈을 오랫동안 쳐다봤다. 그러면서, 간혹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고, 작게 웃기도 했다. 그 모습에, 칼리안은 지금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 기억을 보고 있는 것인가.’ 그 생각대로였다. 시스파니안은, 칼리안의 생을 직접 살펴보고 있었다.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기억을 뒤져보는 태도에 기분이 나쁠 법도 했건만, 칼리안은 의외로 담담했다. 애초에 시스파니안이 누군가의 양해를 구해야 할 존재도 아니었거니와, 시스파니안에게 자신이 겪은 일들을 숨겨야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칼리안에게서 눈을 뗀 시스파니안이 말했다. “이해하였다.” 시스파니안은 그렇게만 말했다. 베른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던 일에 대해 놀라기는 커녕, 의구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았으니 되었다는 듯한 반응인 것이다.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맥 풀린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시스파니안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결국 무리한 짓을 벌였구나.”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시스파니안이, 읊조리듯 말했다. 그녀는 분명, 그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칼리안에게 닿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말했음에도 들리지 않은 것이다. 칼리안은 시스파니안이 입을 달싹이는 것도 보았으나,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심지어, 그 입모양조차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때문에 의문이 가득 떠오른 칼리안의 얼굴을 본 시스파니안이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 방금 전의 일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나의 말을 네가 듣지 못하는구나. 그녀가 원치 않는 까닭이다.”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의 말을 듣지 못하도록, 금제를 걸었다는 것이다. 시스파니안이 말한 ‘그녀’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세렌티.’ 주신 세렌티가 아니라면, 이 세상의 그 누가 감히 시스파니안에게 말의 제약을 가하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작스레 드는 궁금증이 있었다. 아직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세렌티는 잠들어 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의 말을 막는 것입니까?” 악신을 봉인하는 과정에서 잠들었다던 세렌티가, 멀쩡히 활동하는 것처럼 시기 적절하게 나타나 시스파니안의 입을 막았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그러자 시스파니안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나조차도 의지를 남겨두고 이곳에 있거늘.” 세렌티가 깨어 있지 않았다 해도 시스파니안의 입을 막는 것 쯤은 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시스파니안의 말이 조금 이상했다. 세렌티가 의지를 남겨두고 잠에 빠져든 것처럼, 시스파니안 역시 의지를 남겨두고 ‘이곳’에 와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이 다시 한번 질문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입니까?” “인간의 발이 닿을 수 없는 곳이다.”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니었다. 사실 이해를 하라는 뜻으로 한 대답도 아닌 것 같았다. 알려줄 생각이 아예 없다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때문에 칼리안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대충 알아들었다는 뜻을 보였다. 지금 칼리안에게 중요한 것은 시스파니안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가 아니었다. 곧 칼리안이 이 곳에 올 때 가지고 왔던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바로, 엘프 루카가 누군가로부터 훔쳐온 검은 조약돌이었다. 그것을 본 시스파니안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칼리안으로부터 건네 받은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던 시스파니안이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들이 만든 것이구나.” 이 말 역시, 들리지 않았다. 칼리안이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을 안 시스파니안이, 조약돌을 돌려주며 다시 말했다. “지니고 있거라.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그 말에, 칼리안은 또 세렌티의 금제가 있었음을 눈치챘다. 시스파니안 역시 세렌티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 같았으므로, 이번에도 칼리안은 고개만 끄덕였다. 물론 그것으로 궁금증을 모두 접을 생각은 없었던 칼리안이 잠시 입 속으로 말을 골랐다. 성인식을 빌미로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려 시스파니안을 찾아온 진짜 목적, 정말로 확인하고 싶어 했던 것을 꺼내놓기 위해서였다. “궁금한 것이 많은 아이구나.” 칼리안의 질문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시스파니안이 이렇게 말을 했다. 다행히, 끈질긴 질문 세례가 귀찮아서 꺼낸 말은 아니었다. 어쩐지 칼리안은, 그 말을 꺼낸 시스파니안이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조금 더 편안해진 마음이 된 채로 질문을 했다. “세크리티아에 시간의 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시스파니안이 낮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알고 있다.” 그 한숨이 조금 전 칼리안의 기억을 뒤져볼 때 보였던 것과 매우 달랐다. 깊은 탄식이 어려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때문에 질문하는 것도 잊었던 칼리안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카이리스에서 시간의 축을 원했던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은 시스파니안이 다시 입을 열었으나, 이번에도 금제가 걸렸다. 이번에는 아예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세렌티가 시스파니안의 말을 막아선 탓이다. 때문에 시스파니안은 이번에도 다른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는 네가 조급하게 굴지 않기를 원한다. 네 죽음 뒤의 상황에 대해 네가 섣불리 알아내어, 앞으로의 일을 망쳐놓을까 우려하는 까닭이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거라.” 시스파니안 역시 칼리안이 왜 자신을 찾았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때문에 너무 실망하지 않도록 이렇게 말을 해 준 터였다. 그런데 그 말에, 칼리안의 눈이 빛났다. 칼리안은 실망하지 않았다. 계속하여 시스파니안에게 금제가 걸리는 그 모습에서 알게 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려지는 것을 방해하려 세렌티가 직접 나설 만큼의 일이 벌어지기는 했었다는 말씀이시군요.” 신의 개입이라니. 생각보다 판이 크지 않은가? 10년이나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이, 그것도 세크리티아를 멸망시킨 이 카이리스로 오게 된 것이,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잠시 흥미로운 눈으로 칼리안을 보던 시스파니안이 답했다. “네 말이 옳다.”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곧 칼리안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습니다.” “듣겠다.” 곧바로 허락이 나왔음에도 칼리안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주저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얼굴로, 칼리안이 물었다. “형님께서 저를 되살리고자 시간의 축을 사용한 것이, 맞습니까?” 시스파니안의 입가에 진짜 웃음이 떠올랐다. 웃는 것 같다는 느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웃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을 질책하며 짓는 웃음처럼 여겨졌다. 시스파니안은 웃음이 채 지워지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네 생각이 깊지 않구나. 그 역시, 차차 알게 될 일이다.” 그 말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하지만 시스파니안은, 굳이 한번 더 입을 열어 칼리안의 생각이 짧았음을 지적했다. “그는 네 형제이기 이전에 왕이다. 이치를 거슬러가며 너 하나를 우선할 만큼, 네 형제가 그리 아둔한가.” 그것은 분명한 질책이었다. ──────────────────────────────────── 제12장. 살고 있습니다. (4) 그 날, 지그프리드 공작령에서는 하루종일 새가 날아올랐다. 온갖 색의 전서구와 전서응이 카이리시스를 향해 출발한 것이다. 새들의 생김은 모두 달랐으나, 편지의 내용은 모두 같았다. -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의 빈 둥지에 들어서니 밝은 빛이 뻗어나왔다. 그 빛이 지그프리드 외성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지그프리드에 머무는 귀족의 가신들이 적어낸 소식은 거기까지였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으니 다른 내용이 담길 수가 없었다. 그것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칼리안은, 산책이라도 다녀온 듯한 얼굴로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성인식을 온전히 마쳤음을 간단히 선언한 뒤, 곧바로 지그프리드 성으로 돌아갔다. 공작 슬레이만은 그런 칼리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칼리안의 방에 점심식사를 따로 올리도록 전한 뒤 응접실과 연결된 테라스에 나와서 유유자적 바람을 쐬고 있었다. 테라스에 서 있던 중에 몇 마리의 전서구가 창공을 날아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 슬레이만이 허허 웃었다. 그리고 순수한 놀라움을 담아 말했다. “내 영내에 저렇게 많은 입이 있는지 이제야 알았다!” 지그프리드의 땅에 거주하며 밖으로 소식을 전달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파악하지 않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때문에, 슬레이만의 옆에 있던 칼리안 또래의 여자아이가 핀잔을 주었다. “이것이 지금 감탄만 하실 일입니까?” 바로, 얀의 여동생이자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소가주인 드미레아였다. 드미레아는 얀처럼 동그란 눈매를 가진 귀여운 얼굴이었는데, 어색한 것 같지만 또 묘하게 잘 어울리는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새 훌쩍 커서는 잔소리까지 하기 시작한 딸을 보며, 슬레이만이 부드럽게 말했다. “감탄만 하고 넘어가도 괜찮지 않겠느냐?” 그러자 드미레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 힘을 시기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 아닙니까. 저들이 우리 가문과 엮일 일이 영영 없겠습니까? 어떤 가문의 가신들이 이 곳에 있는지 미리 알아두고 경계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를 들어가며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전달하고 있었다. 지그프리드의 다음 주인으로 조금씩 커가고 있는 드미레아의 모습을 본 슬레이만이 흐뭇하게 웃었다. “좋구나. 너도 나를 조금만 닮은 모양이다. 내가 아무튼 결혼을 잘 했다!” 자식들이 자신을 많이 안닮았다며 좋아할 사람은 아마 슬레이만 뿐일 것이다. 항상 생각이 깊은 지그프리드 공작부인을 떠올리며 한바탕 웃은 슬레이만이, 드미레아를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레아야. 우리 가문이 저들을 경계하면, 그것은 정치가 된다. 우리는 지키는 이들이지 다스리거나 옹립하는 자가 아니다. 우리가 힘을 기르는 것은 방패를 들기 위함이 아니냐.” 그 말에, 드미레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슬레이만과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조금 뒤, 드미레아가 멀리 보이는 창문 하나를 가리켜보였다. 칼리안이 머물고 있는 귀빈실 쪽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얀이 왕궁에 있으니, 그것도 칼리안과 아주 깊이 관계되어 있으니 하는 말이었다. 물론 슬레이만이라 하여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심지어 얼마 전 왕궁을 찾았을 때 이미 한번 얀에게 이름을 팔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얀이 다음 번에 필요로 하는 것이 과연 슬레이만의 이름 뿐일지, 그의 검일지. 그것은 슬레이만도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경계하지 않더라도 대비는 하고 있지 않느냐.” 그렇게 대답한 슬레이만이 성내에 마련된 훈련장 쪽을 쳐다봤다. 수많은 기사들이 어김없이 검을 맞대며 훈련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막 그렇게 매가리가 없지는 않다!” 얼빠진 것처럼 말하고 있기는 해도, 자만이라기 보다는 자신감이 어린 소리였다. 다만 슬레이만은 무조건 자신의 생각만 고집할 인물은 아니었다. 때문에 드미레아의 머리를 얌전히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누구의 가신들이 여기 살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두마.” 그제야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슬레이만에게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꺼내려는데, 테라스 문이 열리며 얀이 밖으로 나왔다. “와, 전서구 진짜 많던데요?” 순수하게 감탄만 하는 인간이 한 명 더 늘어났다. 드미레아는 얼굴을 굳혔고, 슬레이만이 다시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많지 않더냐? 나는 매도 보았다!” 그 말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 새가 또 날아올랐다. 그것을 보며 ‘또 간다, 우와!’ 따위 말을 지껄이는 부자를 보는 드미레아의 눈에 시름이 깊었다. 언젠가는 이 가문을 짊어져야 할 어깨가 매우 무거워진 탓이었다. * * * -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 생각되는 날에, 다시 찾아오거라. 시스파니안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던 칼리안이 실소했다. “또 무슨 말을 해주려고 그러시는지.” 잠시 슬레이만을 만나고 돌아와 칼리안과 마주 앉아있던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도 꼬리도 제대로 붙지 않은 말이었지만, 시스파니안과의 대화를 떠올리다 나온 소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다. 칼리안은 그 시선에 대답하는 대신 테이블에 놓여 있던 차가운 민트차를 들어올렸다. 컵 속에 든 얼음이 맑은 소리를 냈다. “충분한 준비라.” 여전히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얀은 칼리안을 보던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쳐다보고 있는 것이 괜히 대답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일까봐서였다. 그러자 칼리안도 창 밖을 쳐다봤다. 슬레이만의 기사들이 잔뜩 있는 훈련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거기까지 찾아갔는지, 키리에인 것 같은 키 큰 소년이 기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튼 열심이라 생각하며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는 정원에 앉아 있는 히나가 눈에 들어왔다. 히나는 무언가를 계속 쓰다듬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브론즈 색 곱슬거리는 털을 가진 푸들이었다. 얀을 하도 닮아서 이름까지 ‘얀’이 되어버렸다던 슬레이만의 강아지였다. 해맑게 웃는 히나의 얼굴을 본 칼리안이 중얼거렸다. “새보다 강아지를 더 좋아하네. 체르밀궁에 개를 키워도 되나.” 이제껏 한마디도 붙이지 않고 같이 차만 마시던 얀이 말했다. “자꾸 히나에게 뭘 해줄까 하는 생각을 하시네요. 지난번에는 새를 물으시더니.” 그렇게 말하는 얀의 목소리가 꽤나 의뭉스러웠다. 무슨 생각에서 저런 말을 하는지 뻔했으므로, 칼리안이 곧바로 오해를 풀어주었다. “그런 관심 아니야.” 연애를 꿈꾸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반쯤 믿기로 한 얀이 다시 히나를 쳐다보다 웃었다. 히나가 푸들 얀의 눈 앞에 대고 손짓을 하는 모습을 본 까닭이다. “강아지한테까지 수화를 쓰네요. 귀엽다고.” 그 말에, 문득 궁금해진 것이 생긴 칼리안이 물었다. “넌 어떻게 수화를 알아?” 별 생각 없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얀으로부터 대답이 없었다. 괜한 것을 물었음을 깨달은 칼리안이 말을 돌리려 할 때, 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창 밖을 보던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형이 있었어요.” 있었다는 그 말만으로도 설명이 되었다. 하지만 얀은 꺼낸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해주었다. “건강하지 못해서, 같이 지내려면 배워야 할 것이 많았어요. 곧 전부 소용 없게 됐지만요.” 그렇게 말한 얀이 차를 들어 한모금을 마셨다. 대답할 만한 말을 찾지 못하는 칼리안의 얼굴을 보던 얀이 웃으면서 말했다. “오래 전 일이니, 괜찮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화제를 찾는 것이 분명한 목소리로 창 밖의 강아지를 가리켜보였다. “쟤, 겁 엄청 많아요. 얼마나 짖는데요. 체르밀에서 키웠다가는 플란츠가 가만 있지 않을겁니다. 란델 왕자도 그렇고요.” 오래 이야기하며 침울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어색해하는 칼리안을 위해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죽은 형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 집어넣으려는 의도임은 분명했기 때문에, 칼리안도 더 묻지 않고 새로운 화제에 대해 대답했다. “그럼, 카밀론으로 가야겠네.” 카밀론궁, 왕세자의 거처였다. 얀이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지금껏 단 한번도 세자위에 대해 언급한 적 없던 칼리안이 처음으로 이런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얀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말했다. “개나 키우겠다고 카밀론에 가겠다는 사람은, 왕자님 밖에 없을 겁니다.” 칼리안도 차를 한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민트 특유의 청량한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그 뒤, 칼리안이 여유로운 얼굴로 창 밖을 보며 입을 열었다. “시스파니안의 본신을 만난 왕자도 나 밖에 없을걸.” 그 말에, 얀의 손에 들려 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지그프리드의 내성은 카이리스 왕궁과 마찬가지로 시스파니안의 힘이 닿는 곳이었다. 때문에 앨런과의 소통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앨런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한 적당한 곳으로의 안내를 얀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얀은, 시스파니안이 정말 살아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칼리안을 직접 불러들여 대화를 나누었다는 소식을 접해 놀란 마음을 채 진정시키지도 못한 채 칼리안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시스파니안의 힘이 닿지 않으면서 인적이 드물고, 내성에서 가장 가까운 적당한 장소를 가까스로 생각해낸 뒤 칼리안을 안내했다. 얀을 따라 어디엔가 도착한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보다 큭큭거리고 웃었다. 웃고 있는 칼리안의 주변에는, 망자들의 비석이 온통 가득했다. 얀이 안내해온 곳이 지그프리드가의 중요 인물들을 위한 묘지였던 것이다. 확실히, 다른 어떤 곳보다 사람이 없기는 했다. 그나마 조금 높은 곳으로 가니 비석이 놓이지 않은 너른 땅이 있었다. 그 곳에 간 칼리안이 앨런을 불렀다. - 로젤리타는, 잘 마치셨습니까?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한 앨런의 대답이 들려왔다. 분명 앨런도 궁금했을 것이다. 시간의 축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시스파니안을 만나보라고 조언한 것이 모두 앨런이었으니까. 때문에 칼리안도 시스파니안과의 대화가 정리되는대로 곧장 앨런을 찾은 것이었다. - 성인식은 마쳤고, 시스파니안은 잘 만났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칼리안이 공동 안에서의 일을 모두 전했다. 앨런의 첫 반응 역시 얀과 다르지 않았다.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칼리안은, 앨런이 얀보다 몇 곱절은 더 놀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텐실의 신관들에게 세렌티가 있다면, 세상 모든 마법사에게는 시스파니안이 있다 하지 않던가? - 함께 갈 것을 그랬습니다. 역시나, 앨런이 이런 말을 했다. 놀라움과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물론, 함께 왔다 해도 앨런이 시스파니안을 만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공동의 빛이나마 볼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서야 아쉬움만 커질 뿐이다. - 준비가 될 때 다시 찾아오라 하였으니, 다음 번에는 꼭 스승님과 함께 오겠습니다. 그 말에, 앨런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 듣던 중 감사한 말이군요. 그래서, 왕자님께서는 무슨 준비를 하고자 하십니까? 칼리안이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 지금 제가 해야 할 준비는 하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제 자리부터 지켜야죠. 돌아가면 다시 일어나 있을 실리케부터 상대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왕궁의 상황을 물었다. - 브리센 쪽은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실리케도요. 칼리안이 그것을 물어올 것이라 생각했는지, 앨런이 곧바로 대답했다. - 열흘이 지나도록 레넌을 찾지 못하니, 아무래도 이상한 점을 느낀 듯 합니다. 오늘 아침에 브리센 후작이 궁에 들었다 나갔습니다. 실리케가 에반 브리센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는 이야기였다. 수족처럼 부리던 레넌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답답했으리라. 그것을 생각한 칼리안이 잠시 웃다가 말했다. - 후작이 직접 이번 일에 대해 사실을 밝힐 수는 없을 테니, 실리케가 의심을 한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겁니다. 에반 브리센은 앨런과 ‘맹세의 인’을 나누었다. 그러므로 레넌이 어디에 있는지 실리케에게 말하지는 못할 터였다. - 그럼 실리케가 레넌을 대신할 다른 수족을 찾을 때가 됐겠네요. 왕궁 밖을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는 것은 칼리안이나 실리케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분명히 자신을 도와 줄 다음 사람을 찾을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칼리안이 앨런에게 물었다. - 왕궁에 새로 드나드는 브리센 측 인물이 있습니까? 그 말에, 앨런이 소리 없이 웃었다. 자신이 말해주려던 것을 칼리안이 먼저 말했기 때문에 짓는 웃음이었다. 앨런은, 오늘 르메인을 상당히 골치아프게 한 편지를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 레넌이 사라지자마자 부른 것 같은 사람이 한 명 있지요. 아직 드나들고 있지는 않지만, 왕자님보다 조금 빨리 왕궁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편지에는, 야만족들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카이리시스로 돌아와 잠시동안 요양을 하고자 하니, 자신을 잠시 대신할 사람을 영지로 보내달라는 요청이 적혀 있었다. - 아아. 편지 내용을 읽어준 것이 아니었는데, ‘아직 드나들고 있지 않다’는 말만 들은 칼리안이 누구인지 알겠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 브리센 변경백인가요. 그레이 브리센. 에반 브리센 후작의 두 아들 중 첫째이자 후계자인 이였다. - 드디어 얼굴을 보겠네요. 왕궁으로 돌아가면 가장 먼저 상대해야 할 다음 목표가 누구인지 가늠한 칼리안이 잠깐 카이리시스가 있을 방향을 쳐다봤다. 다시 한번 전서구가 날았다. 그것이 전할 소식과 그레이 브리센, 그리고 칼리안. 셋이 만날 날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 제12장. 살고 있습니다. (5) 칼리안은 앨런에게, 며느리인 레이첼 그레이스가 지그프리드 영내에 있다는 말을 전했다. 리베른은 카이리스와 달라서 결혼을 하더라도 여자의 성을 바꾸지 않는다 하더니, 레이첼 역시 자신의 성을 사용했다. 아무튼 칼리안의 말을 들은 앨런은 매우 반가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 아주 잘 되었습니다. 엘프들이 다니는 숲의 길 만큼은 아니더라도, 함께 오시면 그나마 살만 할 겁니다. 칼리안은 시찰에 나섰던 슬레이만이 예정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슬레이만이 시찰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레이첼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레이첼은 마법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동 마법을 연구하는 마법사였던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 칼리안은, 성에 돌아오자마자 레이첼과 아르센을 응접실로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운을 뗐다. “준비했으면 하는 일이 있어 두 분을 불렀습니다.” 카이리스의 땅은 넓다. 너무, 넓다. 지그프리드의 영지로 오면서 이 사실을 여실히 깨달은 칼리안이었다. 수도에서 공작령으로 오는데에만 두 달이 걸린다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런데,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에게 ‘다시 오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직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시간이 아깝다는 것이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엘프들을 또 만나는 것은, 고려해 볼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그프리드에 다시 오기 위해 왕복 네 달이 넘는 시간을 길 위에서 허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 곳에 다시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두 지역간의 이동 시간을 단축해두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칼리안이었다. 만약 각 지역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면, 마법사단 발칸도 훨씬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터였다. 왕자들의 싸움이 어떻게 번질지는 몰라도, 만에 하나 그것이 내전으로 바뀔 것을 대비하고자 한 것이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을 잠시 떠올린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카이리스에 공간 이동 마법진을 구축할 생각입니다.”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당연히 공간이동이다. 공간이동을 위해 있어야 할 것은, 당연히 이동 마법진이다. 그리고 칼리안은, 마법진 구축을 위한 적임자 둘을 찾았다. 이동 마법을 연구하는 마법사. 그리고, 할 일 없는 마법사. 칼리안이 공간 이동에 대해 관심을 처음 가졌을 때, 그 일이 자신에게 올 것 같다는 불안한 예측을 했던 아르센이었다. 게다가 칼리안이 공동에 들어갔던 사이, 아르센은 레이첼이 어떤 것을 연구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들었었다. 때문에 아르센은 칼리안이 이제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얼추 알 것 같다는 표정을 했다. 쉽게 말해, 당분간 잠을 자기는 글렀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짐짓 모른척하며, 칼리안은 먼저 레이첼에게 물었다. “리베른에 각 지역으로 통하는 이동 마법진이 있다 들었습니다.” “네. 단순히 있다고 할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만들어져 있다고 해야겠지요. 비싸기는 해도 돈만 있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요.” 칼리안은 아직 공간이동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마법진은 칼리안의 전문 분야도 아니었다. 따라서, 레이첼의 답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 칼리안은 다시 한번 질문했다. “말했듯이, 나는 그것을 카이리스에도 구축하고자 합니다. 다만 리베른보다 이동 거리가 멀 수 있는데, 혹시 어렵겠습니까?” 레이첼은 리베른의 이동 마법진 구축에 이미 여러 차례 도움을 주었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장거리 이동에 대한 해결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거리가 멀더라도 그리 문제가 될 것은 없어요.” 별 것 아니라는 그 표정을 본 칼리안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르센은, 매우 안심하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칼리안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가장 중요한 조건을 덧붙였다. “좋군요. 그런데, 당장은 내 세력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두 왕자 세력과 어떤 식의 다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구나 쓸 수 있을 마법진을 구축하는 것은 득이 될 것이 없었다.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하던 레이첼이 물었다. “리베른에서는 마법진 자체를 경비합니다. 그런데 왕자님 말씀은. 이동 마법진이 있는 지역의 보안 설비가 아니라, 외부인은 마법진 자체를 이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칼리안이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네. 좋은 것은, 독점해야 더 좋으니까요.” 만고불변의 진리다. 웃고 있는 칼리안의 얼굴이 어쩐지 앨런과 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레이첼이 대답했다. “그런 조건을 적용했던 적은 없었어요. 한번 생각해볼게요.” 마법사단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찾아온 레이첼이 카이리시스에 도착도 하기 전에 숙제부터 안겨준 셈이었다. 그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여, 칼리안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고맙습니다.” 그 뒤 칼리안은 아르센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헤르츠 경도 함께 생각해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아르센이 물었다. “혹시 수도에서는 반대할 이가 없겠습니까? 전하께도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함이 맞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러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전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만, 전하께서는 반대하지 않으실 겁니다. 다른 세력들도 언제까지고 반대하지는 못할 테니 괜찮습니다. 그러니 당장 진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때가 되면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미리 계획을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만들어 놓기는 하겠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결론은, 다른 말 말고 일단 고민이나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는 왕자님 너도 마법사 아니었냐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던 아르센은, 그 길로 지그프리드 성의 도서관으로 갔다. 그리고 이동 마법에 대한 책을 산더미처럼 들어다 놓고 레이첼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 * * 레이첼과 아르센을 만난 뒤, 칼리안은 슬레이만을 찾아갔다. 칼리안의 대화 요청에, 슬레이만은 흔쾌히 응하며 말했다. “조용히 이야기 나눌 수 있을 만한 딱 좋은 곳이 있습니다.” 그 뒤 슬레이만이 칼리안을 데리고 간 곳은, 칼리안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응접실이나 서재, 혹은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던가? 칼리안은 은은한 차 향이나 묵묵한 책의 내음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땀 냄새가 강하게 밴 슬레이만의 개인 수련실을 어색하게 둘러봤다. “이게 또 은근히 앉을 만 합니다.” 칼리안의 어색함을 눈치채지 못한 슬레이만이 수련실 한 쪽에 놓인 통나무를 가리켜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결국 칼리안의 웃음보가 터졌다. 얀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당장 난리를 쳤을 테지만, 칼리안은 사양하지 않고 통나무 위에 기분 좋게 걸터앉으며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함께 왕궁으로 가자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두 분이 같이 계시면 어떤지도 보고 싶고.” 칼리안이 말한 ‘두 분’이란, 당연히 앨런과 슬레이만이었다. 묘하게 닮은 듯 아닌 듯한 둘이 함께 있으면 어떨지 도무지 상상이 안되는 까닭이다. 더불어 왕궁으로 가자는 소리는, 다른 뜻이나 의도 없이 순수한 호의에서 나온 말이었다. 곧 지그프리드의 땅을 떠나야 하니, 슬레이만을 자주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보인 것이었다. 슬레이만 역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생각 같아서는 저도 왕자님께 이 곳에서 저와 검이나 겨루며 지내시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칼리안의 지위나 상황같은 것은 전혀 계산하지 않은 말이었다. 곧 둘 사이에서는, 누가 듣는 자리에서 나누기는 어려울 대화들이 오갔다. 얀의 둔함이 주 이야깃거리가 됐다. 얀은 칼리안이 호신술 수준의 검술만 조금 익힌 것으로 믿고 있다는 말에, 슬레이만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슬레이만은 칼리안이 어떻게 오러를 다룰 수 있게 되었는지 의심하거나 궁금해하지 않았다. 특별히 중요한 일이 아니라 생각하는 까닭이었고, 같은 이유에서 칼리안도 굳이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 후로도 최근 르메인이 왕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고, 그것이 앨런의 독설 덕분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더 꺼내둔 뒤에야, 칼리안의 입에서 본론이 나왔다. “오늘 시스파니안을 만났습니다, 지그프리드 공.” 칼리안이 공동에 간 것을 슬레이만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시스파니안을 만났다는 말을 꺼낸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눈치 챈 슬레이만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슬레이만의 얼굴에 항상 드리워져있던 큼지막한 미소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러더니 곧 큰 웃음소리가 되었다. “으하하하! 그럴 줄 알았습니다! 살아있을 줄 알았습니다!” 실존하는지조차 모르는 고룡의 빈 둥지를 500년이나 지켜온 가문의 가주였다. 시스파니안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 기분이 오죽 기쁘겠는가? 때문에 슬레이만은 그 후로도 한참을 웃다가 말했다. “지고하신 고룡께서 한번 들러주기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소리에, 칼리안은 본래 하려던 말을 다시 꺼내들었다. “시스파니안이 이 곳으로 직접 올 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시스파니안을 한번은 더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슬레이만이 한번 더 놀란 얼굴을 했고, 칼리안은 조금 전 아르센과 나눴던 이야기의 연장선에 섰다. “그래서 말인데. 카이리시스와 지그프리드를 조금 더 빠르게 오갈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싶습니다. 북쪽에 위치한 카이리시스와 남쪽의 지그프리드를 연결하는 것을 시작으로, 카이리스 곳곳에 이동 마법진을 늘려나가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슬레이만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카이리스에는 왕도가 있기 때문에, 이동 마법진까지 있으면 외부의 침입에 노출될 위험이 높아진다는 의견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만약 공께서 동의를 해주신다면, 카이리시스가 아니더라도 휘트린 영지와 경로를 연결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칼리안의 영지인 휘트린은 카이리시스에서 나흘 거리에 있었다. 그러니 수도와 연결이 어렵다면 칼리안 개인의 땅에 마법진을 만들겠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구축을 하게 된다면, 나의 허락을 받은 이들만 이용할 수 있도록 제한할 겁니다. 그리고 이 곳에 세워질 이동 마법진은 지그프리드 외성과 하루 이상 떨어진 거리에 구축할 예정입니다. 마법진으로 인해 이 곳의 안전에 위해가 된다고 판단된다면, 언제든지 없애셔도 무관합니다.” 여기까지 설명이 되자, 슬레이만은 잠시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이상의 거리라면,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아무나 오지 못하도록 제어가 된다면, 그리 하셔도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동의를 해준 것이다. 칼리안이 웃으며 감사의 뜻을 전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드릴 것이 더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슬레이만의 말에, 칼리안이 씩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예리한 기운의 마나가 칼리안의 손 끝에 응집되기 시작했다. 칼리안이 자신에게 대련을 신청한다고 생각한 슬레이만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그런 생각으로 왕자님을 이 곳에 뫼셨는데, 먼저 말씀을 꺼내시니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칼리안이 부탁하려는 것은 조금 달랐다. 어느새 칼리안의 손에 응집된 마나가 커다란 사과 정도의 크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을 본 슬레이만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어렸다. 지금껏 단 한번도 보지 못한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도, 얼음도, 바람도 아닌, 전혀 새로운 힘이었다. 칼리안이 속성을 모두 지우고, 서클의 근원이 되었던 오러의 기운만 남긴 순수한 마력 덩어리였다. 칼리안은 수많은 유리 파편이 서로 뒤얽히며 휘몰아치는 듯한 자신의 마나 응집체를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오러의 기운으로 만들어진 마나입니다.” 그 후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고 집중하자, 마나 응집체의 형태가 바뀌기 시작했다. 서서히 길이를 늘려가며 얇아지더니, 곧 하나의 ‘검’과 같은 모습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본 슬레이만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이것을 제 ‘검’으로 쓰고자 합니다만. 아직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강도도, 예리함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이 하는 말은,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힘이 어느정도인지를 알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야 칼리안이 뭘 원했는지 제대로 깨달은 슬레이만이, 강렬한 투기를 보였다. 그 얼굴에 만연한 웃음이 칼리안의 ‘검’을 향하고 있었다. 슬레이만이 짧게 말했다. “오십시오.” 어느새 뽑아 든 슬레이만의 검에 푸른 오러가 맺혔다. 동시에, 칼리안의 신형이 사라졌다. ──────────────────────────────────── 제12장. 살고 있습니다. (6) 슬레이만은 대륙의 두 번째 소드마스터였다. 그것은 곧, 살아있는 이들 중 검의 길에 오른 지 두 번째로 오래된 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소드마스터로 지내온 기간이 강함과 완전히 비례한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깨달음 이후 보낸 시간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간단히 말한다면, 슬레이만은 강자였다. 슬레이만의 검은 그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묵직하되, 둔하지 않았다. 그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공기가 찢겨나가는 소리가 났다. 검 끝을 따라 일렁이는 오러의 푸른 빛이 잔상을 남기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칼리안의 검은 매섭도록 빨랐다. 하지만 결코 요란하지 않았다. 슬레이만이 찢어낸 공기를 칼리안의 검이 다시 베어냈다. 성난 천둥 같은 소리를 내는 슬레이만의 검 사이를 소나기처럼 누볐다. - 촤악! 슬레이만의 검이 다시 한번 칼리안의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재빨리 몸을 돌려 피한 칼리안이, 순간적으로 노출된 슬레이만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뻗었다. 슬레이만이 칼리안의 검을 휘감듯 쳐내자, 칼리안은 곧바로 슬레이만의 심장을 노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살수를 퍼붓는다. 둘 모두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칼리안이 부탁한 것은 얌전한 대련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레이 브리센. 아버지인 브리센 후작보다 검의 길에 먼저 오른 대륙 세 번째 소드마스터. 그와 칼리안이 검을 맞댈 일은 반드시 생길 터였다. 그러니 그레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칼리안 스스로가 가진 힘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따라서 슬레이만은 칼리안이 한계를 꺼내도록 돕는 것이었다. - 쉬이익! 푸른 빛의 오러가 칼리안의 어깨를 노리고 달려들었으나, 칼리안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날카롭게 벼려진 마력의 검이 슬레이만의 뒤에서 날아왔다. 어느새 슬레이만의 뒤로 돌아간 칼리안의 검이 이미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빠르다! 칼리안은 슬레이만조차 간혹 움직임을 놓칠 만큼 빨랐다. 근력이 부족한 만큼 검에 실린 힘도 부족했으나, 대신 검을 움직이는 속도가 범상치 않았다. 슬레이만이 검을 회수하며 마력으로 만들어진 검을 올려쳤다. - 채앵! 베어내고, 막고, 내리치고, 흘려보내는 공방이 쉼 없이 이어졌다. 날붙이와, 날붙이보다 날카로운 마력의 덩어리가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수련실을 가득 메웠다. 슬레이만의 검을 한번 더 흘려보낸 칼리안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챙! 채앵! 챙! 챙! 순식간에 이어지는 네 번의 베기가 슬레이만의 급소를 노렸다. 슬레이만의 검에 힘이 들어가며 칼리안의 검을 모두 쳐냈다. 상당히 예리한 공격이었으나 슬레이만이 그리 어렵지 않게 방어했으므로, 칼리안의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갔다. 한층 강해진 살기가 슬레이만을 향하자, 슬레이만에게서도 같은 기운이 뻗어나와 칼리안의 손발을 옭죄려 했다. - 탓! 칼리안의 발이 마치 허공을 밟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 이후에는 어김없이 칼리안의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에, 슬레이만이 재빨리 검을 뻗어 칼리안의 움직임을 막으려 했다. 그러자 칼리안은 검의 날을 부드럽게 쓸어올리는 듯한 동작으로 그것을 흘려보냈다. 슬레이만은 방향이 틀어진 검을 힘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혼자서만 관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검을 뻗거나 회수하는 것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슬레이만은 그렇게 회수한 검을 그대로 칼리안의 상체를 향해 휘둘렀다. 칼리안이 다시 한번 검을 빗겨대며 공격을 흘려냈다. 슬레이만이 씩 웃었다. 이렇게 늘어져서야, 제 힘의 한계를 어찌 알겠는가! 곧 슬레이만은 손에 든 검에 힘을 집중했다. - 우웅! 슬레이만의 검이 한번 떨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푸른 빛이 한층 짙어졌다. 검에 담긴 오러의 양이 늘어난 것이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 쿠궁! 슬레이만이 수련실 바닥을 거세게 박차며 몸을 날렸다. 그리고 머리 위로 검을 들어 칼리안의 몸을 두동강 낼 기세로 내리찍었다. 칼리안이 재빨리 검을 횡으로 들어올려 공격을 막았다. 온 몸에 흐르는 피를 전부 얼려버릴 것 같은 한기가, 슬레이만의 검을 타고 안개처럼 흘러나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칼리안의 검이 마치 불이 깜빡이듯 점멸하다 사라졌다. 자신의 것보다 몇 배는 묵직한 슬레이만의 오러를 제대로 견디지 못한 것이다. “······!” 내리치려는 슬레이만의 검과, 그것을 막으려는 칼리안의 검이 서로 맞닿은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칼리안의 검이 사라지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지지대를 잃은 슬레이만의 검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이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자, 슬레이만이 깜짝 놀란 소리를 내며 검을 회수하려 했다. 하지만 칼리안이 움직임이 한 발 빨랐다. 칼리안은, 검을 이루던 마력이 흩어짐을 느끼자마자 곧바로 몸을 틀었다. 그리하여 슬레이만의 검 끝은 칼리안의 얼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에 그쳤다. 덕분에 칼리안의 뺨에는 길고 가는 혈선이 하나 생겼다. 하지만 칼리안은 상처에 신경쓰거나 검이 사라지는 커다란 문제를 알게 되었음에 대해 당장 고민하는 대신, 곧바로 다시 만들어낸 검을 움켜쥐었다. 슬레이만의 검격 범위에서 벗어난 칼리안의 모습이 사라졌다. 슬레이만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틀어 뒤로 돌며 검을 뻗었다. 수가 읽히자, 칼리안은 뻗어나온 슬레이만의 검을 툭 치듯 밟고 다시 몸을 날렸다. 그리고 허공에 잠시 떠오른 몸이 떨어지는 힘까지 더해 마력의 검을 내리꽂았다. 정확히 슬레이만의 정수리를 향해서였다. 슬레이만은 빠르게 검을 틀어 그것을 막은 뒤 곧바로 뻗어냈다. 날붙이가 사납게 뒤엉키는 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 카앙! 검과 검이 맞붙은 채, 슬레이만과 칼리안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칼리안이 씩 웃었다. 조금 전 슬레이만의 검이 낸 것과 비슷한, 칼날이 떨리는 소리가 칼리안의 검에서도 흘러나왔다. - 우웅! 유리 조각 같던 마력의 응집체가 파란 빛을 머금었다. 오러로 만들어진 마력의 검에, 다시 한번 오러를 입힌 것이다. 칼리안의 투기는 그 어느때보다 강렬했다. 아껴둔 패는 나도 있다고, 칼리안의 검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슬레이만은 기다리지 않고 다시 한번 검을 내질렀다. 칼리안의 발이 더 빠르게 움직이더니, 푸른 빛이 넘실거리는 마력의 검이 슬레이만의 어깨를 향해 떨어져내렸다. 슬레이만이 검을 틀어 그것을 가볍게 튕겨냈다. 공격이 막힌 칼리안이 검을 돌려잡고 올려치자, 슬레이만이 빗겨냈다. - 타앗! 칼리안이 슬레이만의 시야에서 또 사라졌다. 그 잔상을 좇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안 슬레이만은 감각을 열었다. 그리고 칼리안의 걸음이 향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곳을 향해 검을 뻗어냈다. 하지만 슬레이만의 검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이미 한 번 수를 읽혔는데, 같은 공격을 다시 가할 칼리안이던가? 그런 생각이 든 뒤에야 칼리안의 움직임에 속았음을 깨달은 슬레이만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어느새 반대편에 선 채로 슬레이만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칼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슬레이만이 깜짝 놀라 공격을 막았다. - 채앵! 칼리안의 검이 슬레이만의 목 바로 옆에서 간신히 멈췄다. 슬레이만의 목에 긴 상처가 생겨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 우웅! 슬레이만의 검이 다시 한번 울음소리를 냈다. 검에 스민 오러가 깊은 바다와 같은 색으로 변했다. 또! 더 위협적인 소리와 기운을 고스란히 느낀 칼리안의 눈이 치켜 떠졌다. 믿기지 않게도, 슬레이만이 가진 오러의 기운이 한번 더 짙어진 것이다. 그와 함께 슬레이만이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칼리안을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저건, 정말 위험하다! 흘려낼 수 있는 검이 아니다. 칼리안이 곤두세우고 있던 모든 감각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남겨둔 오러를 전부 끌어모아 검으로 옮겼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가오는 슬레이만의 검을 있는 힘껏 올려쳤다. - 카아앙! 지금까지 들렸던 그 어떤 소리보다 큰 굉음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칼리안의 검이 빛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한계에 달한 것이다. * * * 슬레이만의 검에 긴 금이 생겨 있었다.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슬레이만의 마음에도 긴 생채기가 났다. 검 때문은 아니었다. 애검이 망가진 것도 물론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일로 상심할 만큼 슬레이만의 마음 씀씀이가 좁지는 않았다. 딸 자식 키워봐야 소용 없다는 말은 들어봤다. 그래. 조금 더 양보해서 아들 자식 키워봐야 소용 없다는 말도 언젠가 한 번쯤 들어 봤다 치자.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 애비 목에서는 아직도 피가 철철 나는데! “흉이라도 지면 어쩌시려고 얼굴에 상처를 내셨어요! 다른데는, 괜찮으세요? 어디 부러지거나 한 곳은 없으세요?” 수련실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뛰쳐 들어와서는 곧바로 칼리안에게 달려간 얀이, 만지면 부스러질까 건드리면 깨질까 애지중지하며 칼리안을 걱정하는 꼴을 본 것이다. 스스로가 마음이 꽤 넓은 남자라고 생각해왔던 슬레이만은, 알아서 낫고 있는 실금같은 상처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얀을 향해 툴툴거리는 소리를 냈다. “저 내새끼가 어째 영 내새끼가 아닌 것 같다.” 그런 슬레이만의 옆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히나였다. 히나의 손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슬레이만의 목에 난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수련실에서 울려퍼진 굉음에 깜짝 놀라 달려온 것은 둘 뿐만이 아니었다. 내성에서 키리에와 함께 있던 기사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덕분에 슬레이만은 억울한 것이 하나 더 늘었다. 방금 전의 대결은, 분명히 슬레이만이 이겼다. 지닌 오러를 다 쓴 것도 아니었으니, 꽤 여유롭게 이겼다. 그런데 칼리안의 부서진 검은 형체가 안남았다. 슬레이만의 검에는 쩍 하니 금이 갔다. 칼리안의 얼굴에 난 상처는 애초에 크지도 않았거니와, 축복의 힘 덕분에 조금씩 아물고 있었다. 슬레이만의 목에는 반 뼘 길이의 자상이 있었다. “공작님, 설마 지셨······?” 그러니, 유란이 매우 주저하며 이렇게 물어 올 수 밖에. 슬레이만은 말을 잃었고, 칼리안은 웃음보가 터졌다. * * * 아침에는 공동에서 빛이 나고, 오후에는 슬레이만의 수련실에서 폭음이 났다. 그저 칼리안이 왔을 뿐인데 항상 조용하던 코끼리들의 땅이 들썩들썩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는 성대한 석찬이 진행됐다. 칼리안과 슬레이만은 물론이고 칼리안의 일행들부터, 앨런의 가족인 레이첼과 베로니카, 칼리안을 호위했던 스무 명의 기사들까지 모두 함께 모여 떠들썩하게 즐기는 자리였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그렇게 기대하던 슬레이만의 바이올린을 드디어 들을 수 있었다. 검을 다루는 손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훌륭한 연주였다. 때문에, 악기라고는 만져본 적도 없었던 칼리안은 진심으로 감동했다. 그러다, 얀 역시 바이올린을 잘 켠다 했던 슬레이만의 말이 생각났다. 때문에 얀에게도 연주를 부탁하려 고개를 돌렸던 칼리안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잠시 베로니카에게 가 닿은 얀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호라.’ 성에서 다시 출발하게 되면 놀릴 거리가 생긴 것을 알게 된 칼리안이 혼자 웃고 있는데, 연주를 마친 슬레이만이 칼리안의 옆으로 와 앉았다. 히나에게 치료를 받은 슬레이만의 상처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상당히 아물어 있었다. 칼리안이 목의 상처를 살피는 것을 본 슬레이만이 걱정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이 정도는 간지럽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 슬레이만은 얼굴이 아주 조금 붉어져 있었다. 취기를 굳이 몰아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칼리안이 웃으며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한계치 이상의 힘을 마주하면 검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게다가 어느 정도의 힘에 마력의 검이 사라지는지도 알았으니, 그보다 큰 수확이 또 없었다. 만약 실제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조금 전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정말 위험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검이 사라지지 않도록 유지하면서 오러와 마법을 부리는 것을 수련할 차례였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칼리안이 슬레이만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슬레이만도 칼리안에게 와인을 마실지 물었으나,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사들이 적당히 술에 취하니 주변이 꽤나 시끌시끌해졌다. 헤일 라트란이 술에 취한 척 시끄럽게 굴 때에는 그렇게 듣기가 싫더니, 지금은 퍽 신이 났다. 그렇게 얌전히 앉아 주변을 좀 구경하고 있는데, 슬레이만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빠른 검술은 그리 특이할 것이 없으니 괜찮습니다만.” 그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슬레이만을 쳐다봤다. 그러자 슬레이만이 낮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검을 횡으로 벨 때나 연타 이후 허리에 먼저 힘을 싣는 것은 세크리티아 기사들의 특징입니다, 왕자님.” 그 이름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슬레이만은 칼리안의 검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칼리안은 표정의 변화 없이 슬레이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슬레이만이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쳐 보이며 다시 말했다. “카이리스에서는 다리에 중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검술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허리를 쓰든 다리를 쓰든 그저 개인의 습관이라 할 수 있겠으나, 눈에 띄는 다른 점들과 함께 엮어 생각하면 의심의 싹을 키우게 될 겁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브리센 변경백이라면 알아볼 수 있으니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칼리안이 세크리티아 기사들의 검을 쓰는 것만으로는 이상할 것이 없겠지만, 칼리안이 급격히 변화한 모습을 보인 것 같은 다른 상황들과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칼리안의 정체를 의심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이야기였다. 칼리안은 그에 대해 대답하는 대신 슬레이만을 쳐다봤다. 그 눈빛의 뜻을 읽은 슬레이만이 씩 웃으며 말했다. “대장 코끼리가 새끼 사자 속에 뭐가 들었는지 신경 써봐야, 어디 쓸 데도 없습니다. 나중에 한번 더 겨뤄주기나 하십시오.” 그 말에, 칼리안이 짧게 답했다. “고맙습니다.” 슬레이만이 칼리안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마시지 않겠다 했던 칼리안에게 술을 강권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주변의 눈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었다. “신경 쓰일 일이 많을텐데, 여러모로 힘드시겠습니다.” 어찌 쉽겠는가.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보니 그리 되어 그냥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 대답에 허허 웃은 슬레이만이 얀을 쳐다보다가, 다시 칼리안을 봤다. 무엇을 묻고 싶은지가 빤히 보였다. 얀이 칼리안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다만 그것은, 칼리안이 더 묻고 싶은 문제였다. 칼리안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얀은. 눈치를 채고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아마 알고는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던 슬레이만이, 자신의 아들이 어떤 인물인지를 잠시 떠올렸다. 그리고 웃음을 지우며 조용히 덧붙였다. “······ 설마 정말로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에이, 설마요. ──────────────────────────────────── ──────────────────────────────────── 제13장. 찾았습니다. (1) 시스파니안을 만난 지 열흘이 지났다. 그리고 칼리안은 여전히 지그프리드의 성에 있었다. - 그냥 영영 안 오실 요량이십니까? 절반 쯤의 타박과 절반 쯤의 서운함이 섞인 앨런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웃었다. 칼리안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앨런에 대한 절반 쯤의 미안함과 절반 쯤의 고마움이 섞인 웃음이었다. 칼리안도 본래부터 이렇게 오랫동안 머물 예정은 없었다. 일정이 늦어질수록 실리케가 어떤 것을 준비해둘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가능한 서둘러 돌아가고자 했다. 그런 칼리안이 지그프리드 성에 열흘이나 머물게 된 것은, 얀으로 인해 떠올리게 된 한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시스파니안을 만난 후 슬레이만과 거하게 칼을 맞댄 그날, 칼리안은 ‘과연 얀이 칼리안의 본 모습을 알고 있는가’에 대해 슬레이만과 아주 잠깐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러다 슬레이만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은, 제 오러를 알아보겠죠?” 브리센 후작보다 검술이 뛰어나다 알려졌으니, 아마도 칼리안의 몸 속에 오러가 있다는 것을 눈치챌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슬레이만과도 검을 섞어본 것이었다.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슬레이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 정도라면, 알아볼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러를 숨길 방법은, 역시 없을까요?” 소드마스터가 걷는다는 ‘검의 길’이란 곧 깨달음의 길이다. 마법과 달리, 마나를 오러로 전환하는 것에는 정해진 방법이 없었다. 각자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고 검의 길에 들어선다. 소드마스터가 고작 여섯 뿐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 수가 극히 적다 보니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대충이나마 아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오러를 숨겨야 할 필요성도 없었다. 베른의 기억을 가진 칼리안도 처음에는 오러를 숨길 방법을 찾으려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베른이 아닌 칼리안은 경우가 달랐다. 칼리안.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소드마스터가 아닌가? 그러니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과 싸울 땐 싸우더라도, 열 다섯 살의 ‘마법사’가 검의 극의를 깨달았다는 사실을 되도록 숨겨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칼리안의 정체에 대해 얀에게 굳이 이야기 하지 않은 것처럼. “흠······. 오러를 숨기는 것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슬레이만이 묵직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칼리안의 눈이 아르센에게 가 닿았다. 오러 자체를 숨길 방법은 없었으나 어쩐지 유사한 해결 방법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칼리안이 아르센을 불렀다. “헤르츠 경.” 또 무슨 일을 시키려 그러나 하는 표정의 아르센이 칼리안 쪽으로 왔고, 칼리안은 간단한 질문을 했다. “마나를 숨길 수 있는 마법, 알고 있죠?” 그 말에, 아르센이 곧바로 대답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네 개의 서클을 가지고 계시니, 이제 왕자님께서도 사용하실 수 있는 마법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소드마스터이자 마법사, 그리고 서클과 오러의 근원이 같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칼리안이 웃었다. 칼리안은 그 자리에서 마나를 숨기는 마법을 배웠다. 마법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유지에 있었다. 걷고, 말하고, 먹고, 자는 동안에도 마법을 유지하는 것에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오러를 완전히 감추는 것에 다시 사흘이 걸렸다. 칼리안에게서 오러의 기운이 새어 나오는지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슬레이만 뿐이었으니, 지그프리드 성을 떠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열흘을 머물렀다. “이야, 이제 정말 감쪽같습니다! 칼 근처에도 못 가본 얌전한 왕자로밖에 안보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 아침, 오러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슬레이만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따라서 칼리안은 이제 조금 익숙해진 공동묘지를 찾아 이렇게 앨런과 대화를 하게 된 터였다. 칼리안이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수두룩한 비석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조용히 서서 칼리안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얀이 보였다. - 준비가 길었습니다. 내일은 정말로 출발할 겁니다. 그렇게 말을 전한 칼리안이 앨런에게 물었다. - 브리센 변경백은 출발했을까요? - 변경백령에 대리인을 보내는 것을 최대한 늦췄지요. 그러니 보름은 더 지나야 출발할 수 있을겁니다. 그레이가 빨리 도착해봐야 좋을 것이 없으니, 카이리시스에 당도할 날을 가능한 늦추도록 수를 썼던 모양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자, 앨런의 말이 이어졌다. - 그리고, 곧 마법 학원의 예비 수련생 모집 시험을 치를 예정입니다. 아마 왕자님께서 도착하실 즈음이면 학생들을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멜피르 폴룬에게 맡겨두었던 마법 학원의 진척 상황이었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칼리안이 꽤 놀란 얼굴을 하며 물었다. - 브리센 상단 인수로 바쁠텐데, 마법 학원까지 벌써 준비가 된 것입니까? - 네. 일처리가 아주 빠릅니다만, 그래도 손이 모자라는 듯 합니다. 마법 학원 일을 도와줄 이는 제가 적당히 골라 맡기겠으니, 상단의 인재가 될 만한 인물이 있는지 한번 찾아봐 주시지요. 앨런 마나실이나 키리에를 데려왔던 것처럼, 칼리안이 알고 있는 ‘미래’에 이름이 날 인재가 있는지 기억을 뒤져보라는 소리였다. 카이리스의, 그것도 별 관심 없던 상단과 관련된 내용이다보니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이 미안함을 담아 답을 전했다. - 당장은 떠오르는 인물이 없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그렇게 앨런과의 대화를 마친 칼리안은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가며 성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지그프리드 성에서는 다시 한번 성대한 석찬이 열렸다. 이제 떠나겠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칼리안의 볼 일이 모두 끝났으니 이제 떠나리라는 것을 안 슬레이만이 준비해 준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칼리안은 슬레이만과 드미레아의 환송을 받았다. 유란을 포함한 기사들은 함께하지 않았다. 레이첼의 이동 마법을 통해 빠른 이동이 가능했으나, 마법을 적용할 수 있는 인원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칼리안과 키리에, 그리고 아르센만으로도 충분한 전력이었으니 크게 위험할 일은 아니었다. “또 오실 때는 봐드리지 않겠습니다.” 얀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슬레이만을 향해, 칼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때는 지금처럼 만만하지 않을 겁니다.” “으하하! 그야말로 기대되는 소리입니다.” 르메인과 앨런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말을 끝으로, 칼리안과 슬레이만은 다시 잠시 헤어졌다. 이제, 카이리시스로 돌아가는 것이다. * * * 수도 카이리시스의 아스트리샤 거리가 아침부터 모여든 귀족들로 북적였다. 카페마다 삼삼오오 모인 귀족들의 대화 주제는, 속속 도착하고 있는 전서구에 묶인 편지 내용이었다. -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의 공동에 들어서자, 찬란한 빛이 번쩍였다! 시스파니안을 닮았다는 이유로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는 칼리안이었다. 그랬으니, 지금 전해진 내용의 의미가 대체 무엇일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시스파니안이 다음 대 국왕으로 칼리안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는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들렸다. 심지어 칼리안이 바로 시스파니안이 아니냐는 허무맹랑한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랬으니, 마치 이맘때 쯤 소식이 전해질 것이라 알고 있었다는 듯이 하필 딱 그 날부터 시작된 ‘폴룬 마법학원 예비 수련생 모집 시험’에 카이리시스의 모든 청소년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구경 잘했어요, 마나실 님. 그럼 저는 이만.”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 마법 학원 시험장을 보며,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 에우리아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재빨리 뒷걸음질쳤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앨런의 몸이 슉 사라지더니 에우리아의 등 뒤에 다시 슉 나타났다. 어느새 자신의 등 뒤에 서서 웃고 있는 앨런을 보며, 에우리아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세 보 앞으로 워프 쓰지 마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텔레포트가 아니라, 워프다. 무려 6서클의 스킬이다. 에우리아는 쓰고 싶어도 못 쓰는 고레벨의 마법을, 앨런은 고작 에우리아 한 명 붙들자고 쓰고 있는 것이다. 에우리아의 말을 들었는지 안들었는지, 앨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한 가운데 놓인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닥치고 가서 앉으라는 뜻이었다. 에우리아가 울상을 지었다. 폴룬 상단의 상단주 멜피르 폴룬이 마법 학원을 세우려는 것이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 예비 수련생 모집 시험이 오늘부터인 것도 물론 알았다. 카이리스에도 마법 학원이 생긴다니, 정말 환영할 만한 일이라 생각했다. 앞으로 카이리스의 마법이 발전할 생각에 매우 기뻐하며 멜피르 폴룬에게 응원의 말도 성의 있게 건넸다. 그리고 입학 시험날 아침이 되자, 앨런이 찾아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갈 데가 있다며 에우리아를 질질 끌고 여기까지 왔다. 그래,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 에우리아가 아닌가. 학원 입학 시험이 있다는데, 함께 앉아 자리를 빛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질질 끌려 시험장까지 오기는 했지만, 그런 생각이 든 에우리아는 도망가려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임시로 만들어진 시험장의 긴 테이블로 걸어가 한 자리 채워주는 것에 동의했다. 만약 시험 감독을 볼 사람이 부족하면 도와주겠다는 생각도 했다. - 폴룬 마법학원 교장 에우리아 세이렌 그런데 테이블 한 가운데 놓인 저 명패는 뭐란 말인가? 다섯 개의 자리에 놓인 명패들 중에 왜 가운데 놓인 저것만 가장 크고, 심지어 저것만 금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말인가? 에우리아는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 의사를 표했다. “저 바빠요, 마나실 님.” 그 말에 앨런은 고개를 대충 끄덕끄덕하며 다시 한번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시끄러우니 가서 앉으라는 뜻이었다. 에우리아가 그리 바쁘지 않다는 것은 앨런이 아주 잘 알았으니까. 이렇게 앨런은 말 한마디 안한 채 마법 학원의 일을 도와줄 이를 적당히 골라 앉혔다. * * * 그 후로 한 달의 시간이 지났다. 칼리안은 호숫가의 낮은 절벽에 세워진 레딩턴 성에서 사흘을 머무르게 되었다. 왜 하루가 아닌 사흘이 되었느냐면, 앨런의 손녀 베로니카의 말이 다리를 다쳤기 때문이었다. 레이첼의 마법으로 빨라진 속도 때문에, 바닥의 구덩이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넘어진 것이다. 다행히 키리에가 곧바로 베로니카를 잡아내어 사람은 다치지 않았고, 베로니카의 말은 히나가 치료 할 수준은 되었다. 물론 히나의 치유가 한번에 모든 상처를 아물게 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말이 다 낫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덕분에 레딩턴 성을 찾아오게 된 칼리안은, 이른 아침 영주성 밖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고요한 물안개가 피어오른 거대한 호수와 푸른 하늘이 상당히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떼 지어 날아오르는 물새들을 보던 칼리안의 뒤에서 작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입니다.” 키리에였다. 무려 키리에가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낼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 말에 동의하듯, 얀이 따뜻한 민트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영주인 레딩턴 자작도 사려 깊고 진중하기로 유명합니다. 곧 카이리시스에 들어갈텐데, 사흘 동안 푹 쉬고 간다 생각하세요.” 칼리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얀의 말대로였다. 이제 이 곳에서 나흘만 더 가면 카이리시스였다. 앨런과 르메인, 그리고 실리케와 란델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그러니 사고가 아니었더라도 하루만 보내고 가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 것이 분명했다. 왕궁에 도착하면 당분간 이렇게 먼 곳까지 나올 일도 없을 뿐더러, 지금 같이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도 없을테니까. 그리고 그 여유는 딱 한나절동안 이어졌다. 그날 오후, 창 밖으로 레딩턴 성에 세 대의 마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마차의 옆에 새겨진, 검을 쥔 그리핀 문장을 본 칼리안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이런 반가운 우연이 있나.” 그것은, 브리센 가문의 문장이었다. ──────────────────────────────────── 제13장. 찾았습니다. (2) 칼리안의 시녀인 메를린이 방 문을 열며 말했다. “들어가십시오.” 비어 있는 칼리안의 방을 찾은 것은 앨런이었다. 앨런이 안으로 들어가자, 메를린이 밖에서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곧 앨런은 침실 옆의 금고로 걸어가 조금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그것을 열었다. 레넌과의 일로 금고가 꽤 많이 비워져 있었으므로, 앨런이 그 속을 잠깐 쳐다보다 손에 들린 서류와 수표 몇 장을 그 안에 넣었다. 이제는 폴룬 상단이 된, 옛 브리센 상단의 수익금 일부였다. 상단을 살 때 멜피르 폴룬의 이름이 쓰이긴 했어도 실질적인 돈은 모두 이 금고에서 나왔었다. 받기만 하는 것은 질색이었던 멜피르는, 상단 수익의 일정 금액을 멋대로 칼리안에게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것 역시 거래이니 칼리안도 거절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때문에 앨런이 폴룬 상단의 첫 수익금을 넣어두기 위해 이렇게 주인 없는 방에 들어온 터였다. 흥얼거림 같은 혼잣말이 앨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왕자님은 돈이 마를 날이 없으시니.” 처음 금고 속을 들여다 봤을 때 얼마나 놀랐었는지를 잠시 떠올린 앨런이 혼자 피식 웃었다. 그 때의 놀라움은, 오닉스 스톤으로 만들어진 욕조를 보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칼리안의 금고에 대한 볼일을 모두 마친 앨런이 방에서 나와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달칵, 하고 메를린이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려올 즈음. 앨런은 때마침 계단을 올라오는 누군가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앨런은, 지금 이 순간 레딩턴 성의 창 밖을 보던 칼리안이 입 밖으로 내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런 우연이 있나.’ 계단 난간 아래로 보이는 옅은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 또 그 아래로 보이는, 빛 없는 연두색 눈동자. 플란츠였다. 계단을 오르던 플란츠가, 옆으로 비켜서는 이의 발 끝을 잠시 쳐다봤다. 그리고 다리를 움직여 앨런이 있는 곳까지 올라온 뒤에는 물끄러미 앨런의 얼굴을 봤다. 물론 상대가 2왕자라 하여 상대하기 어려워 할 앨런은 아니었으니, 앨런은 그저 작게 웃는 표정을 한 채로 플란츠를 향해 여유롭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플란츠 왕자님.” 그 말에도, 플란츠는 대답 없이 앨런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서 있는 시간이 꽤 길었다. 아무리 플란츠가 왕자라 하더라도, 앞에 서 있는 이가 앨런 마나실이었다. 브리센 후작조차, 아니 국왕 르메인조차 앨런을 함부로 대할 수 없지 않던가. 때문에, 앨런의 인사에 답하지 않고 이렇게 세워두는 것에 플란츠의 시종이 불안함을 느낄 때 쯤, 플란츠의 입이 열렸다. “마법사. 당신을 만나서 바뀐걸까, 바뀌어서 만난걸까.” 인사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로젤리타를 떠나기 전, 플란츠가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말을 앨런에게 전했었다. 그러니 플란츠가 하는 이야기가 칼리안의 정체와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을 앨런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주변에 듣는 귀가 있음을 의식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말버릇이 그런 것인지, 꺼내든 내용이 상당히 추상적이었다. 그래서 앨런은, 웃고 있던 얼굴 그대로 되물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신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앨런의 태도에, 플란츠가 다시 한번 말했다. “내 아우님이 많이 바뀌었던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 대답을 못들어서. 당신은 알까, 하고.” 굳이 대답이 필요하다면 ‘칼리안이 바뀌어서 앨런과 만난 것이다’ 라고 해야 할 터였다. 앨런은 흠 잡을 데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술을 물리시니 생각이 많아지신 겁니까, 아니면. 생각이 많아져 술을 물리신 겁니까.” 2왕자인 플란츠에게 ‘술’을 직접 언급한 것은 르메인이나 실리케, 그리고 란델이 전부였다. 그만큼, 지금 앨런이 꺼낸 것은 상당히 무례한 말이었다. 물론 르메인이었다면 이 정도의 말은 이제 그저 일상적인 표현으로 듣고 넘기겠지만. 플란츠의 시종이 앨런을 쳐다봤다. 주의를 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앨런의 시선은 플란츠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말했다. “아쉬워하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군.” 플란츠가 더 이상 망나니같은 행동을 하지 않고 있음을 아쉬워할 이라면, 란델 뿐일 것이다. 따라서 앨런은, 언젠가 란델도 플란츠가 술을 끊었다는 것에 대해 말을 했었나보다 하는 정도로 이해했다. 그리고 플란츠의 첫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누구나 변합니다, 플란츠 왕자님.” 플란츠는 다시 한번 앨런을 응시했다. 여전히 의심을 놓지 않는 것이다. 앨런이 다시 한번 작게 웃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변함의 방법이 술을 끊는 것이든, 형제들의 미친 짓에 집어먹었던 겁을 끊는 것이든. 차이가 있겠습니까.” 순간, 둘 사이에 정적이 맴돌았다. 생각지도 못한 앨런의 독설에 할 말을 잊은 것이다. 곧 플란츠가 하, 하며 헛웃음 소리를 냈다. 앨런은 날카로운 선을 지닌 눈으로 플란츠를 고스란히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저 그 뿐이지요.” 그 말을 끝으로, 앨런은 플란츠에게 가벼운 목례를 한 뒤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가 사라졌다. 플란츠는 화를 내는 대신 가라앉은 눈빛으로 앨런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앨런의 독한 말을 한 번 곱씹었다. “미친 짓이라.” 플란츠는 한동안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 * * 레딩턴 영지의 영주인 테시드 레딩턴 자작은 40대 중반의 키 크고 마른 사내였다. 사려 깊고 진중하기로 유명하다던 얀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는 지금 상당히 깊은 생각에 빠진 얼굴로 창 밖을 보고 있었다. 테시드는 특별히 어떤 왕자의 편에도 서지 않은 몇 안되는 귀족 중 하나였다. 다만 르메인의 탄신일 축제에 나타난 칼리안의 모습을 꽤 인상깊게 느꼈던 바는 있었다. 때문에 예정에 없던 칼리안 왕자의 방문은, 물론 갑작스럽기는 했으나 특별히 싫을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저 칼리안이 불편함 없이 머물다 가도록 조금만 신경을 쓰면 되리라,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 들어오고 있는 저 마차들이 없었다면, 그 생각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을 터였다. 테시드의 입에서 지금의 심경을 나타내는 한 마디 말이 툭 튀어나왔다. “낭패로군.” 마차에 보란듯이 새겨 넣은 브리센의 문장을 알아보지 못할 테시드가 아니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카이리시스로 오는 중이라는 것은 몰랐으나, 저 문장을 붙인 마차에 있는 이들과 칼리안의 관계가 그리 유쾌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무튼 이제는 창 밖이나 보며 고민할 시간이 더는 없었다. 결국 테시드는, 아무래도 지금 들어오는 이들에게 칼리안 왕자가 이곳에 와 있음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다. 완곡한 말로 브리센의 사람들을 돌려보내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테시드에게 분명 좋지 않은 영향이 있겠지만, 이미 먼저 와 있는 손님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 “칼리안 왕자님의 시종이 전해드릴 말이 있다고 합니다.” 분명 칼리안도 밖에 나타난 저 마차를 확인했을 것이다. 보란듯이 당당히 새겨 둔 저 문장을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이 전할 말이라는 것은, 코앞까지 다다른 브리센의 마차에 대한 것임이 분명했다. 테시드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들어오라 하게.” 곧 그의 앞으로 온 칼리안의 시종 얀이, 테시드를 향해 간단한 인사 후 칼리안의 말을 전했다. “왕자님께서는, 자작께서 저들에게 왕자님이 이 곳에 계신 것을 미리 알리고 돌려보낼 생각을 하고 계신지를 여쭈어보라 하셨습니다.” 생각을 그대로 들킨 것 같은 기분에, 테시드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것을 보고 대답을 짐작한 얀은, 별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것이 다른 이들이라면 그리 해도 괜찮지만, 만약 브리센 변경백이라면 보내지 말고 함께 차나 마시자 하셨습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아닌 가문의 다른 사람들이라면 돌려보내고, 만약 그레이가 맞다면 들여보내달라는 의미였다. 그레이라니. 예상치 못한 이의 이름이 나오자, 테시드가 다시 한번 놀란 눈을 했다. 그리고 곧 칼리안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느꼈다. 그레이 쯤 되는 이를 돌려보내려 한다면, 단순히 좋지 않은 영향을 받는 정도의 선에서 끝나지 않을테니까. 그러니 무리하지 말고 들여보내도 괜찮다고, 칼리안이 이렇게 배려를 해 준 것이었다. 그의 고개가 얼른 위 아래로 움직였다. “알겠네. 그렇게 하겠다 전해드리게.” 할 말을 마친 얀이 밖으로 나갔다. 이제 정말 코앞까지 다다른 마차를 본 테시드가 다소 긴장한 얼굴을 했다. * * * 칼리안이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브리센 변경백, 알고 있는대로 얘기해줘.” 얀의 머릿속에는 대부분의 귀족에 대한 정보가 완벽히 정리되어 있었다. 왕자의 상급 시종이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었다. 때문에 얀은 주저함 없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14년 전 변경백으로 봉해졌는데, 그 당시 브리센 후작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변경백이라는 자리보다는 수도에서 기사들을 양성하다 후작 작위를 세습하고 싶어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리고 전형적으로 안하무인한 성격이라 합니다. 또 하나 안좋은 소문은,” 그렇게 말한 얀이,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 뒤를 이었다. “집에 마련된 별실이 네 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지막 말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집에 별실을 마련했다는 내용 역시 귀족들의 은어였다. 한 마디로, 첩만 넷이라는 소리다. 정리하자면. 검을 잘 다루면서 안하무인하고, 변경백의 자리에는 그리 애정이 없지만 후작의 자리에는 욕심을 냈었고, 한 편으로는 여자를 좋아한다. 이런 말이었다. 얀의 평가를 기억해 둔 칼리안이 한 가지를 더 물었다. “나는 변경백을 만난 기억이 없는데. 혹시 만났던 적이 있었어?” “제가 왕자님의 시종으로 오기 전에 한 번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기억나지 않으실 수도 있어요.” 얀이 없을 때였다면, 칼리안이 11세가 되기 전이라는 소리다. 칼리안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더할 나위 없이 멍청했을 때의 나를 봤겠군.’ 물론 실리케로부터 칼리안에 대한 많은 것을 전해듣기는 했을 것이다. 그가 칼리안에 대한 실리케의 말을 어디까지 믿고 있는지는, 이제 곧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그때 똑똑, 하고 노크를 하는 소리가 났다. 얀이 밖으로 나가 방을 찾은 이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칼리안이 언뜻 고개를 돌려 보니 레딩턴 자작의 집사인 듯 했다. 다시 한번 창 밖을 쳐다보니, 여전히 같은 곳에 놓인 마차가 보였다. 그리고 하인들이 마차의 말을 풀어 마굿간으로 데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레이가 방문한 것이 맞다는 뜻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레이를 만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곧 얀이 돌아서 걸어와 칼리안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칼리안이 예상한대로, 상대는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맞았다. “응접실에 브리센 변경백과 레딩턴 자작이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바로 가시겠습니까?” 칼리안이 선선히 대답했다. “그래야지.” 먼 남쪽에서 열심히 달려온 칼리안과, 대리인 발령이 지연되는 바람에 예정보다 늦게 출발한 그레이 변경백. 둘이 같은 날 한 장소에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웃으며 응접실로 걸어갔다. 그리 호화롭지 않게 꾸며진 응접실에는 딱 둘만 있었다. 그레이, 그리고 테시드. 테시드는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이었으나, 그레이는 아니었다. 칼리안이 들어서자 테시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레이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말 위에 앉은 채로, 혹은 자리에 앉은 채로 왕자를 맞이할 수 있는 귀족은 오로지 단 한명,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 공작 뿐이었다. 그 외의 모든 귀족은, 기실 왕자보다 아래의 서열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문 앞에 선 채로 잠시동안 그레이를 쳐다봤다. 그런 칼리안의 시선을 한참동안 즐기던 그레이는, 실리케를 닮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하여, 온전한 예를 갖추지 못하겠군요. 칼리안 왕자님.” 당연히, 핑계다. 저 멀끔한 얼굴과 옷매무새 그 어느것도, 병자의 행색은 아니었으니. 그리하여 칼리안은, 실리케가 칼리안에 대해 상세히 전했을 그 내용을 그레이가 전혀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레이는 지금, 앨런 마나실 하나 등에 업고 천지분간 못한 채 날뛰는 3왕자 칼리안을 휘어잡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군요.” 칼리안이 당황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레이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이며 대꾸했다. “네, 그러니 이해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칼리안의 얼굴에 담겨 있던 웃음이 지워졌다. 실리케를 대했을 그 때처럼, 붉은 눈에 서늘한 빛이 어렸다. 카이리스 3왕자의 입에서, 위압감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라도 숙이거라. 변경백.” ──────────────────────────────────── < 제13장. 찾았습니다. (3) [유료연재 시작 편] > - 고개라도 숙이거라. 칼리안이 응접실 문 바로 앞에 선 채로 말을 했기 때문에, 밖에 있던 얀은 칼리안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고스란히 듣게 되었다. 때문에 불안한 마음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키리에라도 있으면 안심이 될텐데, 칼리안은 성 내에서는 키리에의 호위를 받지 않았다. 자유롭게 수련을 하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늦게 오더라도 기사들을 데리고 올걸.’ 그동안 특별히 무력 충돌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빠르게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여 기사들을 두고 오자는 의견에 동의한 것이 이렇게 아쉬울 줄은 몰랐다. 왕자를 만나는 자리였으니 응접실 안에 들어간 그레이가 무장을 하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평소 슬레이만을 잘 보고 자라온 얀이었다. 소드마스터에게는 손에 들린 그 어떤 것도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그레이가 혹시라도 이성을 잃고 날뛸까봐, 얀은 그렇게 계속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응접실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칼리안에게 이동 마법에 대한 숙제를 받은 아르센과 레이첼이었다. 아마도 그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응접실로 오는 듯 했으나, 응접실은 이미 사용하는 이들이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서 이야기 나누세요.” 따라서 얀은 이렇게 이야기하며 둘을 돌려보내려 했다. 얀이 밖에 있다는 것은 닫힌 문 안쪽에 칼리안이 있다는 말이었으므로, 아르센은 다른 것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에게, 테시드의 집사가 다가와 눈치 빠른 소리를 했다. “윗층에도 대화를 나누실 만한 곳이 있으니, 제가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레이첼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디인지 알고 있으니, 굳이 수고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한 레이첼이 아르센을 향해 눈짓을 했다. 그 쪽으로 가자는 뜻이었으므로, 아르센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둘은 집사가 이야기했던 곳으로 가기 위해 발을 돌렸다. 그러나 둘은 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발을 멈추어야 했다. 멀리 복도를 허겁지겁 뛰어오는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내딛는 걸음 걸음마다 흔들리는 은발이 눈에 확 띄었다. “히나?” 그것은 바로 히나였다. 하지만 평소 히나는 절대로 저렇게 뛰어다니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저 모습은,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말과도 같았다. 히나를 부른 얀이 표정을 굳힌 채로 성큼성큼 걸어가 물었다. “무슨 일이예요?” 히나는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었다. 얀을 보며 수화를 했는데, 그 손이 많이 떨리고 있어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얀은 허리를 숙여 히나의 얼굴에 눈을 맞추었고,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히나, 천천히요. 괜찮으니까.” 그 말에, 히나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리고는 조금 더 느려진 속도로 손을 움직였다. - 오빠, 기사들. 수화를 모두 알아볼 정도로 잘 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얀은 히나의 손짓 중 딱 두 가지 단어를 알아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충 무슨 상황인지를 알 수 있었다. “브리센?” 짧게 묻는 말에,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리에와 브리센의 기사들, 히나는 그 말을 하고 있었다. 얀이 표정을 굳히며 한번 더 물었다. “어디죠?” - 말. 말. 마굿간이다. 이제는 더 물을 것도 없어진 얀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시 응접실 쪽을 쳐다봤다. 아직 칼리안과 그레이의 대화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히나가 전해온 것을 확인하러 직접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르센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내가 가보겠네.” 함부로 자리를 비우기 어려운 상황에서 선뜻 나서주는 아르센에게, 얀이 고맙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며 말했다. “키리에와 브리센 기사들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굿간에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옆에서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얀의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 그것까지 확인한 아르센이 바로 마굿간 쪽으로 가려는데, 얀이 말을 이었다. “헤르츠 경, 그 쪽에 경이 먼저 해를 입히면 안됩니다.” 그 정도를 모를 아르센이 아니었다.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그런 아르센의 뒤를 따라 레이첼도 가보려 했으나 얀이 만류했다. “헤르츠 경이 혼자 처리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레이스 경은 히나를 좀 봐주세요.” 아르센은 칼리안의 사람이 맞았으므로 문제가 생겨도 칼리안이 해결할 수 있었으나, 레이첼은 아직 아니었다. 게다가 레이첼은, 이제 막 리베른에서 카이리스에 들어온 이방인이었다. 브리센과의 일에 얽히면 곤란한 일이 생길 터였다. 그런 이유임을 모두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레이첼은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히나의 어깨를 감싸쥐고 같이 방으로 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는 히나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얀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의 기사들이, 하필이면 칼리안이 제 핏줄처럼 아끼는 키리에와 히나를 건드렸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일을 칼리안이 알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얀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채, 응접실 안에는 태풍의 눈과 같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고요한 가운데,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은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미소가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덕분에 다소 부자연스러운 모습이기는 했지만 웃음 비슷한 것을 얼굴에 걸어두는 것에는 성공했다. 지금 그레이는 화를 내기보다는 제 귀를 의심하는 중이었다. 이런 말을 들을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붓을 들어 그려 넣은 것 같은 어색한 웃음을 띄운 채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은 그런 그레이의 눈을 아까부터 응시하고 있었다. 한기가 어린 눈을 그대로 둔 채였다. 그레이를 내려다보는 표정 역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칼리안이 또렷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변경백.” 그레이 브리센은,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의 장자. 실리케 브리센 왕비의 오빠. 검술에 한해서라면 대륙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이자, 변경백. 그런 자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뻔하다. 시종이나 하고 있는 공작가 맏아들이 정말 이상한 것이다. 대부분은 당연하다는 듯 그레이같은 사람이 되고, 살아간다. 칼리안, 아니 베른은 그런 이들을 수도 없이 보아 왔다. 착해 빠진 체이스를 대신해 그들을 상대하고, 다스렸다. 그래서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대에게. 고개를 숙이라 하였다.” 이런 부류는, 바닥 끝까지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배를 보이든, 발톱을 내밀든, 선택을 한다. 르메인조차 하지 않는 완벽한 하대에, 그레이가 저도 모르게 험악한 얼굴을 했다. 옆에 서 있던 테시드가 침묵을 지키는 사이, 그레이가 입을 열었다. “방금, 뭐라······.” “그대가 움직여야 할 것이 입이 아닐텐데.” 칼리안은 그레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그런 칼리안의 목소리는 변함 없었다. 그것을 본 그레이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키가 큰 편인 테시드보다도 머리가 한 개는 더 큰 장신이었다. 그렇게 큰 몸을 꼿꼿이 한 그레이의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살기를 꺼내놓으려나. 혹은 이성을 놓고 어딘가 숨겨두었던 검이라도 뽑아 들려나.’ 아니면 예상 외의 현명한 대처를 보여주려나. 칼리안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들이 오고 갔다. 그레이의 다음 행동을 예상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칼리안이 예측하던 이런 수들은, 곧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일어나셨으니, 예를 보이고 앉으십시오. 브리센 변경백님.” 테시드가 이렇게 그레이의 행동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테시드를 향한 칼리안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레이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지금 테시드가 돕고 있는 것은 칼리안이 아니라 그레이였다. 더 이상 실수하지 않도록, 이 사소한 감정 싸움이 더 큰 사고를 부르지 않도록 중재하는 것이다. 고작해야 자작인 자가 변경백을 말리고 서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터였다. 아쉬운 점이라면 그런 테시드의 의도와 마음가짐을 칼리안만 파악했다는 것, 그리고 칼리안은 테시드가 나서지 않기를 바랐었다는 것 뿐이었다. 칼리안이 잠시 테시드를 향했던 고개를 돌려 그레이를 다시 똑바로 쳐다봤다. 멀찍이 서 있었으므로, 저보다 키가 큰 그레이를 딱히 올려다 볼 필요는 없었다. 그 눈빛을 본 그레이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 예전의 3왕자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실리케가 보내왔던 편지의 한 줄, 그 의미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실리케로부터의 소식 뿐 아니라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는 칼리안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헌데 그것이 과장이 아니었을 줄이야. 그레이는 당장 칼리안의 목을 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만약 그런 일을 벌였다면, 브리센 후작가 전체가 도륙을 당할 터. 아직은 섣불리 검을 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한 것이다. 다만 그렇다 하여 얌전히 물러날 생각까지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의 얼굴이 비틀린 웃음을 만들어냈다. “일어났으니, 그럼.” 검을 뽑아드는 대신, 그레이는 아주 과장된 팔동작을 만들어 보였다. 누가 보아도 거짓이 가득한 예절이 그레이의 손끝에서 만들어졌다. 마치 서커스단의 광대가 할 법한, 윗사람을 향한 조롱의 의미가 가득 들어간 인사였다. “그레이 브리센이, 위대한 카이리스의 3왕자님을 뵙습니다.” 그 후 그레이가 고개를 들어 칼리안을 쳐다봤다. 인사를 시켰고 인사를 했으니, 그 모습이 경박한들 칼리안이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러니, 이런 인사에는 과연 어떤 대응을 할 것인가? 이런 의미를 가진 눈빛이었다. 그렇게 예를 올리고 고개를 든 그레이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칼리안의 고개가 테시드를 향해 있었다. 그레이의 인사를 쳐다보지도 않은 것이다. 칼리안은 그레이에 대해 더는 볼 것이 없다는 듯 테시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피곤하다는 듯한 표정을 한 채로 입을 열었다. “고단하여 먼저 올라갈테니 레딩턴 자작이 잘 챙겨주세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의 고개가 그제야 그레이를 향했다. 칼리안이 담담한 말투로 말을 맺었다. “많이 아프다 하니.” 그리고는 더이상 그레이를 상대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는 것처럼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완전히 무시를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레이의 눈빛이 변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레이가 칼리안의 뒤를 따라 한 발을 내딛었을 그 때. - 콰앙! 생각지도 못한 굉음이 성을 흔들었다. 유리창이 흔들거릴 만큼의 큰 폭음이었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순간적으로 느껴진 마력의 주인은, 바로 아르센의 것이었다. < 제13장. 찾았습니다. (4) > 아르센은 자신에게 건네지는 말을 정말 진지하게 듣는다. 그렇다 해서 흘려들어야 할 말과 곧이곧대로 들어야 할 말을 구분할 줄 모른다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센은 자신에게 유리한 말에 한해서, 진지하게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 한 가지 설명을 덧붙이자면. 일전에 아르센이 칼리안에게 헤일 라트란 백작의 욕설을 그대로 전달했던 것은 칼리안에게 욕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칼리안이 헤일의 무엄함을 제대로 느끼고 엄히 처벌하도록 하고자 한 행동이었다. 정말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아르센이 결코 구분 없이 진지한 바보가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 그 쪽에 경이 먼저 해를 입히면 안됩니다. 따라서 아르센은, 얀이 자신에게 건넨 저 말에서도 진지하게 들어야 할 말을 구분해냈다. 그러므로 아르센이 그레이의 마차를 시원하게 폭발시킨 것은. 그레이의 기사들이 히나에게 집적거리는 것을 막아선 키리에를 일방적으로 폭행한 것에 대한 화를 참지 못하고 저지른 일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행동의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정말이다. * * * 아르센의, 폭음이라. 이보다 더 이상한 조합이 또 있을까. 칼리안의 눈이 바닥을 향해 조용히 내리떠졌다. 테시드 레딩턴이 곧바로 창가로 다가가 밖을 쳐다봤다. 하지만 응접실의 창문 쪽에서는 딱히 보이는 것이 없었다. 따라서 테시드는 집사를 불러 무슨 일이 있는지를 확인하도록 전달했다. 물론 그레이도 밖에 있던 기사를 불러 이 예상치 못한 일이 무엇인지 알아오라 지시했다. 칼리안은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주변의 기운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르센의 마력이 더 느껴지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런 칼리안에게 다가온 얀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님.” 여전히 아래를 향하고 있던 칼리안의 눈동자가 얀에게로 조용히 움직였다. 그리고, 얀의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있는 표정을 보게 되었다. 얀은 지금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밖에서 난 소리가 아닌 칼리안을 신경쓰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칼리안은, 얀이 무언가를 알고 있으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그레이를 상대하느라 가라앉아있던 목소리가 채 정리되지 못하고 흘러나왔다. “뭐야.” 칼리안의 질문을 받은 얀이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듯한 얼굴을 했다. 키리에에게 일이 생긴 것 같다는 말을 하는 순간 칼리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얀은, 칼리안의 앞을 살짝 가로막고 서며 말했다. “제가 내려가서 확인해보고 올게요.” 의도가 다분했다. 칼리안이 직접 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칼리안은 얀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그리고 얀을 피해 돌아간 뒤 계단 쪽으로 뚜벅뚜벅 발을 옮겼다. 잠시 후, 방으로 향하는 오르막과 밖으로 향하는 내리막의 사이에 멈춰 선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바깥쪽을 가리켜 보이며 입을 열었다. “헤르츠 경은 저 난리를 피우면서 나를 부르고, 너는 내가 저기 내려가지 않았으면 하고.” 아르센이 칼리안을 ‘부르고 있다’고 판단한 이유는 하나였다. 아르센이 폭음을 냈기 때문이었다. 폭음이 들렸다는 것은 곧 화염 마법이 사용되었다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아르센은, 본래 얼음을 사용하는 마법사다. 그러니 폭음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 아르센이 일부러 화염을 써가며 폭발을 일으켰다는 소리였다. 만약 정말 긴급한 일이 있었다면, 아르센은 잘 쓰지도 않는 마법을 쓰는 대신 상대방에게 얼음의 창을 날려보냈을 것이다. 그러니 저 폭발에는, 다른 의미가 있을 터였다. 속마음을 정확히 짚어내는 칼리안의 말에, 얀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유를 물은 것인데, 너는 대답을 하지 않으니. 내가 직접 가 볼 밖에.” 그러자 얀이 잠시 말을 고르다 걸음을 빨리 하여 칼리안의 앞을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걸음을 막아선 것에 대한 사과에, 칼리안이 눈을 찌푸리며 얀을 쳐다봤다. 얀이 이렇게까지 나설 정도라면,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 칼리안이 다시 발을 옮기기 전에 얀이 작은 목소리로 재빨리 입을 열었다. “왕자님. 여기서 변경백과 더 충돌하시면 안됩니다. 잘못 건드리면 왕자님만 불리해집니다. 잘 아시죠? 섣부르게 나서지 말아주세요.” 얀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쪽이 뭘 건드렸는지부터 보고.” 그리고는 다시 발을 놀려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갑자기 나타난 허여멀건한 마법사가 일언반구도 없이 말 머리통만한 화염구를 만들었을 때, 그레이의 기사들은 상당히 당황했다. 그러다 말 머리통만한 그 화염구가 자신들을 향해 날아올 때에는 모두 기겁하여 허리를 움츠렸다. 그렇게 기사들의 머리통을 스치듯 지나간 화염구는 그대로 그레이의 마차를 날려버렸다. - 콰앙! 엄청난 소리가 고막을 뒤흔들었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였던 네 명의 기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뒤에서 일어난 일을 확인했다. 세 대의 마차 중, 하필이면 그레이의 마차가 ‘사라져’ 있었다. 그것을 본 기사들 중, 그레이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 기사 엑토르가 살기를 띄우며 아르센의 앞으로 달려왔다. “이게 무슨······!”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센은 엑토르로부터 등을 돌리고 섰다. 그리고 키리에의 지저분해진 옷부터 ‘클린’ 마법으로 제대로 돌려놓아 주었다. 흙과 피로 지저분해진 옷은 다시 깨끗하게 되었으나, 이미 난 상처까지 어찌하지는 못했다. 언뜻 보아 큰 상처는 없는 것 같았으나, 여기저기 까지고 멍이 들어 그리 보기 좋은 꼴이 되질 않았다. 아르센이 혀를 차며 키리에를 향해 물었다. “왜 맞기만 하였는가?” 키리에가 대답 없이 살짝 웃었다. 아마도 브리센의 기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칼리안이 곤란해질까 걱정했으리라. 아르센의 입에서 타박하는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자네. 모르긴 몰라도 왕자님한테 좋은 소리 듣긴 힘들 것이네.” 걱정해주는 말이었으므로 키리에가 감사를 전하려는데, 그런 둘의 대화를 더 두고보지 못한 엑토르가 한 발 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땔감으로 쓰기 딱 좋게 변한 마차를 가리켜보이며 살기 등등한 기세로 소리쳤다. “저게 무슨 짓이냐? 감히 저것이 누구의 마차인 줄 알고!” 그러자 아르센은 키리에를 가리켜보였다. “감히, 이 소년이 누구의 사람인 줄 알고 건드린 것인가?” 마차와 키리에를 같은 선에 놓고 비교하는 것이 조금 미안하기는 했으나, 아무튼 아르센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엑토르가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 “너도 3왕자의 따까리냐?” 자신 때문에 일에 말려든 아르센이 비난을 듣자, 키리에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르센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네.” 말이 조금 거칠기는 하지만, 자신이 칼리안의 따까리인 것은 맞았다. 아르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는 그대는 후작 아들의 개인가?” 이번에는 저 따위 놈과 개를 같은 선에 놓고 비교하는 것이 미안했으나, 아무튼 아르센은 그렇게 물었다. 엑토르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당장 검을 뽑아 들 기세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센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옆에 서 있던 키리에에게 내밀었다. 찢어진 눈가에서 피가 계속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키리에가 그것을 받아들자 엑토르가 한 발 더 앞으로 나왔다. 아르센이 자신을 그리 신경쓰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것에 대해 화가 난 까닭이었다. 그러자, 엑토르의 발 앞에 커다란 얼음창이 내리꽂혔다. - 콰직! 깜짝 놀란 엑토르가 발을 물리며 아르센을 쳐다봤다. 엑토르의 발 앞에 얼음창을 날려보낸 아르센이 침착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법사들은 칼 든 사람이 가까이 오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네. 거기서 말해도 다 들리니 더 다가오지 말게.” 하마터면 얼음창에 그대로 발등을 찍힐 뻔한 그가 노기 어린 목소리를 터뜨렸다. “이 새끼가!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 말에, 저 멀리서 대답이 들렸다. “개 짖는 소리가 이렇게 커서야.” 칼리안이었다. 꽤 거리를 두고 걸어오는 칼리안의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칼리안이 한 말이 모두에게 또렷이 들리고 있었다. 덕분에 모두가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어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잠깐 고개만 돌렸다. 그리고 그레이의 마차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 후에는 아르센을 향해 짧게 물었다. “마차값, 내가 변상해야 합니까?” 그러자 아르센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제 급여에서 제하시면 됩니다, 왕자님.” 그 말에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아르센의 급여가 어느정도인지 칼리안이 모르지 않았다. 변경백의 마차값을 제하려면 아마 몇 달은 한 푼도 받지 못할 터였다. 칼리안이 웃자, 칼리안의 뒤에 서 있던 얀이 매우 불안한 눈을 했다. 칼리안이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키리에의 얼굴부터 확인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저 기사들의 목을 치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일텐데 오히려 재밌다는 듯 웃고 있으니, 불안할 수밖에.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은 여전한 속도의 걸음으로 아르센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내 시녀가 여기에 있었을텐데. 어디 있습니까?” 히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얀이 할 수 있었으므로, 얀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르센의 말이 먼저 나왔다. 그런데 아르센은, 히나가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왜 여기에 없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왕자님의 시녀인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칼리안은 그럭저럭 마음의 여유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매우 화가 나는 상황이기는 했으나, 일을 더 키우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화를 다스리고 있었다. “반반하게 생긴 벙어리 계집이 있으니, 변경백이 좋아하겠다 싶었다더군요.” 그런 칼리안의 이성을, 정직한 아르센이 툭 건드렸다. 칼리안이 새하얗게 웃었다. 얀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주 조금만 이성을 잃은 칼리안의 손에 투명한 빛이 어렸다. * * * 그레이가 건물 밖으로 나갔을 땐, 이미 모든 일이 끝나 있었다. 왕자의 시녀를 추행한 기사 넷의 혀를 자르고, 왕자의 시종에게도 해를 입힌 죄를 물어 그들의 작위를 박탈한 것에 대해, 칼리안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차마 화를 낼 정신도 챙기지 못한 그레이를 보며, 칼리안은 담담한 눈으로 이렇게만 말했다. “헤르츠 경이 실수로 부순 마차 값은, 카이리시스에 가면 마나실 경이 지불해줄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리고는 그대로 자신의 방에 돌아갔다. 그에 대해 그레이는 단 한마디도 항변하지 못했다. 테시드의 마굿간 하인들과 병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가는 정말로 경을 칠 것 같아서, 결국 그레이는 그 길로 레딩턴 성을 떠나기로 했다. 때문에 테시드에게 마차를 빌리고자 하였으나, 테시드는 그런 그레이에게 하필 지금 마차의 축이 고장나 수리중이라며 사과를 전했다. 그레이는 그에 대해서도 화를 내지 못했다. 결국 그레이는, 어여쁜 두 명의 첩을 짐을 싣는 마차로 옮겨 앉도록 했다. 핑크색의 하늘거리는 커튼과 진주 구슬이 달린 장식을 모조리 뜯어낸 그레이가, 카이리시스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괴성을 질렀다. < 제13장. 찾았습니다. (5) > 가만히 창 밖을 보던 칼리안이 문득 말했다. “조용해지니까 좋네요.” 그레이가 떠난 뒤, 레딩턴 성의 병사들과 하인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때문에 그레이의 흔적을 지우고 본래의 평화로운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칼리안 역시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즉, 태평한 얼굴로 테시드의 집사가 건네준 따뜻한 밀크티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런 칼리안과 마주보고 앉아있던 테시드가 우려하는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브리센 변경백이 화가 많이 났습니다. 어떻게 나올지 걱정되지는 않으십니까?” 칼리안의 안위에 대한 말이었다. 그레이의 화를 그렇게 돋워놨으니, 카이리시스로 돌아가기 전에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칼리안은 짧은 대답으로 해야 할 모든 말을 대신했다. 테시드에게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하기도 어려웠거니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태평한지 누구에게 말 할 거리도 되지 못했던 탓이다. 칼리안이 이 응접실에서 그레이를 마주했던 그 순간, 칼리안은 그레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매우 강한 오러를 느꼈다. 때문에 안심하고 그레이의 자존심을 꾹꾹 내리눌렀다. 그레이의 오러가 느껴졌다는 것은, 최소한 칼리안과 동급이거나 그 이하의 상대라는 소리였으니까. 게다가 수도에는 앨런과, 앨런이 준비하고 있는 마법사단이 있었다. 이 일을 알게 된 앨런과 르메인이 어떤 결정을 하게 될 지, 칼리안은 알고 있었다. ‘발칸의 창설을 앞당기겠지.’ 아무리 훈련이 안되어 있다 해도 능력 있는 마법사들의 집단이다. 때문에 섣불리 나서서 건드려 보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 개인 대 개인의 싸움이든 세력 대 세력의 싸움이든 당장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부딪혀야 할 사람과 만났을 뿐이니, 걱정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테시드와 눈을 마주치며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의 얼굴에서 불안함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테시드는 그런 모습이 오히려 신기하기까지 했다. 곧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움직여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 조금 가까운 곳을 보고 있었다. 사실 그 곳에는, 그레이만큼 테시드의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누군가가 아까부터 눈에 밟히고 있었다. 테시드가 조금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저 소년은 계속 저대로 두실 겁니까?” ‘저 소년’이란, 성의 훈련장을 벌써 몇 십 바퀴 째 달리고 있는 키리에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칼리안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저렇게 해서라도 가르쳐 놔야지요.” 칼리안을 위해 기사들의 매타작을 견딘 키리에는 히나의 치료도 허락받지 못한 채 곧바로 뜀박질을 시작해야 했다. 물론 테시드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칼리안을 믿지 못한 행동에 대한 벌이었다. 키리에와 반대로 아르센은, 칼리안의 직위와 대처 능력, 그리고 재력을 믿었다. 그래서 엄청난 금액의 마차 한 대를 한 계절 잘 써먹을 장작더미로 만들어 경고를 빙자한 화풀이도 했다. 겸사겸사 폭발음을 들은 칼리안이 나오도록 불러낸 뒤에는, 적당히 화를 돋워서 놈들을 처벌하게끔 만들었다. 그리하여 칼리안으로 하여금 직접 피를 보게 만든데다 안그래도 많이 비어있던 금고를 한번 더 털게 만든 것에 대한 대가로, 아르센은 지금 꿀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저 아이와 내가 감당할 일이 서로 다르니, 이제 그것을 깨우칠 때가 되었습니다.” 칼리안은 키리에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먼저 일러주지 않았다.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달리고, 깨닫고 난 뒤 찾아오라 했을 뿐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무리하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왕자님.” 어느새 노을마저 지고 달이 밝아오고 있었다. 테시드마저 이렇게 키리에를 신경 쓸 만큼의 시간이 지났으나, 칼리안은 그저 말 없이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곧 칼리안이 창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내가, 저 정도를 견디지 못할 이에게 내 등을 맡기려 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여유로웠고, 목소리에는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때문에 테시드는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시드가 걱정할 영역이 아님을 깨달은 탓이다. 그레이나 키리에와 관련해서는 테시드와 더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게다가 테시드에게 하고자 하는 말도 있었다. 따라서 칼리안은, 티스푼을 들어 주위를 환기시키듯 밀크티를 몇 번 저은 뒤 입을 열었다. “자작의 가족들은 카이리시스에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제가 간혹 오가고 있습니다.” 그 말에, 칼리안의 시선이 이제는 어두워져 어슴푸레 보이는 호수를 향했다. 그러다 아침에 보았던 평화로운 광경이 떠오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런 조용한 곳이라면 자작의 손이 직접 닿지 않아도 유지하기가 어렵지 않을텐데, 굳이 이 성에 계속 머무르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테시드가 칼리안과 같은 곳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책을 읽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없다보니, 떠나있을 마음을 가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책이라······ 그렇군요.” 그렇게 답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곳이라면 책을 보며 지내는 생활에 욕심을 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두기에는 아까운 마음이 더 컸으므로, 칼리안은 조금 전부터 고민하던 말을 꺼내놓았다. “자작의 마차, 정말로 축이 고장났을까요?” 마차를 빌려달라던 그레이의 말에, 태연한 얼굴로 축이 고장나 타실 수 없다 말하던 테시드의 얼굴을 떠올리며 묻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테시드가 잠깐 웃는 소리를 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지어보였던 그레이의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곧 테시드의 대답이 이어졌다. “이런 작은 영지의 영주가 타는 마차를 함부로 내어주면, 자칫 갈 곳이 없어집니다.” 당연하겠지만, 핑계를 대서 거절했다는 말이었다. 칼리안의 얼굴에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거절한 것이 맞다는 것을 확인해서가 아니라, 함부로 어느 쪽 편에 서기 어려웠다는 속마음을 칼리안에게 말했다는 것에 대한 만족이었다. 칼리안은 사려 깊고 진중한, 그리고 상대를 구분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나서거나 빠질 줄 아는 이 자작이 꽤 마음에 들었다. 생각과 셈이 빠른 멜피르 폴룬과 썩 잘어울리지 않겠는가? 과거의 기억에서 떠오르는 적당한 인재가 없으면 찾아서 쓰면 되는 것을. 게다가 인재란, 눈에 띄었을 때 아낌 없이 주우라 하였으니. 칼리안이 테시드를 깊이 응시하며 물었다. “읽어야 할 책이 많이 남았습니까?” 테시드가 한동안 말 없이 찻잔과 창 밖을 쳐다봤다.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칼리안의 눈에도 보였다. 그 후 테시드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 때문에 하시는 말씀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같이 가시죠. 카이리시스에.” 칼리안은 곧바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 후 자신을 쳐다보는 테시드의 얼굴에서 답을 확인한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 폴룬 남작을 도울 만한 사람,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 달 전에 전해진 앨런의 요청에 대해 대답했다. * * * 칼리안이 이렇게 여유 가득한 자세로 앉아 인재 발굴에 힘쓰는 사이, 이미 발굴된 인재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사건도 많고 사고는 더 많은 칼리안을 보좌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얀이었다. 그레이가 돌아간 뒤, 얀은 그레이의 마차값부터 가늠하여 따로 적어두었다. 칼리안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아르센을 찾아가, 마차의 변상은 칼리안이 할 것이라는 내용과 오늘은 ‘숙제’에 신경쓰지 말고 푹 쉬라는 칼리안의 말을 전달했다. 아르센이 마음껏 날뛴 덕분에 오늘 하루 얀의 심장이 얼마나 쇠약했는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뒤에는 성의 주방장에게 부탁해두었던 아이스크림을 건네받아 히나의 방을 찾아갔다. 달래주기도 할 겸, 키리에가 곧바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훈련장을 뛰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려던 것이다. 그런데 히나의 반응이 꽤 의외였다. - 이제 괜찮아요. 울어서, 미안해요. 빈 말이 아니라, 히나는 정말로 굉장히 멀쩡했다. 부어있는 눈이 아니었다면 아까 그렇게 울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키리에가 무사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던 히나는, 키리에가 벌을 받게 된 것에 대한 얀의 설명을 들은 뒤 덤덤하게 대답했다. - 맞아요. 오빠는 혼나야 돼. 곰 같은 키리에는 혼나는 그 이유를 몰라서 다친 몸으로 훈련장을 뛰고 있는데, 히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떠먹었다. 잠시 할 말을 잊었던 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오늘 일은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요.” 그랬더니 히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 괜찮아요. 왕자님이 전부 갚아줬어요. 얀은 몰랐지만, 칼리안이 키리에 남매를 데려올 때 히나의 잘린 귀와 말을 하지 못하는 것 등을 갚아주겠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히나는 칼리안이 기사들에게 왜 그런 벌을 내렸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야 그 이유를 달리 설명했지만 사실 칼리안이 그들의 피를 본 진짜 이유는 히나를 희롱했기 때문이 아니라 말 못하는 것을 조롱했기 때문이며, 기사 작위를 박탈한 것이 희롱에 대한 처벌이었다는 것을. 그러니, 칼리안은 키리에를 때렸다는 이유로는 기사들을 처벌하지 않은 셈이었다. 오히려 기사가 아닌 키리에를 벌 주고 있지 않은가? 아무튼 히나의 일에 대해서는 칼리안이 전부 갚아주었으니, 히나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속상해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속사정을 모를 얀은 히나가 괜찮다 하니 그저 천만다행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 * * “전하의 아드님께서 이번에는 남의 마차를 부쉈다더군요. 돈이 또 나가게 생겼습니다.” 사실은 칼리안이 아닌 아르센이 저지른 일이었으나, 앨런은 그냥 이렇게만 말했다. 당신의 망나니 아들이 또 사고를 쳤다는 듯한 말투로 전해진 소식에, 르메인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너무 당연한 것을 되묻고 말았다. “설마 칼리안이 그랬다는 말인가?” “설마 란델 왕자님이나 플란츠 왕자님이 그런 막되먹은 짓을 하겠습니까.” 란델이야 당연했고, 아무리 그래도 플란츠가 밖에서까지 남들에게 해를 입힌 적은 없었다. 비록 얀에게 한번 식사용 나이프를 집어던진 적이 있지만 어쨌거나 얀이 다치지는 않았으니, 수도에서 코끼리떼를 보게 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러고보니 언제 슬레이만에게 그 일을 얘기해볼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앨런에게, 얀이 누구 아들인지는 꿈에도 모를 르메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이 그리 행동할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렇게 믿음이 잔뜩 담긴 대답을 한 르메인이 서랍에서 수표지를 꺼냈다. 그리고 금액을 써 넣는 곳에 펜을 가져가며 앨런을 쳐다봤다. 칼리안의 금고에서 빠져나간 돈이 많았으니, 마차값 정도는 르메인이 지불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앨런이 씩 웃었고, 르메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앨런의 입을 쳐다봤다. 또 뭔가 한 소리가 나올 기세였으니까. “마차 부순 값으로 막내 아드님 목을 내어드릴 셈입니까?” 또 혼났다. 르메인이 마차의 값을 대신 지불하게 되면, 르메인이 칼리안의 행동을 용인했다는 것을 마차 주인에게 알리는 꼴이 된다. 즉 그것은, 칼리안이 르메인을 등에 업고 있다는 것을 르메인 스스로가 증명해버리는 행동이었다. “그냥 누구의 마차인지만 궁금해하시면 됩니다.” 평상시의 르메인이라면, 선뜻 돕겠다며 수표를 꺼내들기보다는 칼리안이 누구와 충돌했는지를 가장 먼저 물었을 터였다. 때문에 앨런은 지금 그 점에 대해 일침을 놓는 중이었다. “누구의 마차였기에?”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의 마차라 합니다.” 그 뒤 이어진 앨런의 설명에 르메인의 얼굴에서 한 십년 쯤의 세월이 오르락 내리락 했다. 그레이가 데려온 열 명의 기사 중 넷의 작위를 박탈한데다 평생 말을 못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르메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해 카이리스 법도 내에서 가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벌을 적용한 처사였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새 손이 상당히 매서운 아이가 되었군.” “그만큼 제 사람을 아끼는 것이지요. 참을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할 줄은 알고 있으니, 너무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칼리안이 그렇게나 제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불러올 여파를 따져보던 르메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발칸에 소속될 마법사들의 명단이 얼추 만들어졌지.” “생각보다 적기는 하지만, 두 기사단에 기가 죽지 않을 만큼은 될 겁니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30명의 마법사를 떠올리며, 앨런이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발칸의 창설은 두세 달 정도의 여유를 더 두고 시작하려 했다. 언젠가 칼리안이 생각한 것처럼, 그들을 수용할 전용 건물도 없는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브리센에서 그레이를 불러들이는 등 상황이 바뀌어가니, 르메인도 조금 서둘러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지금 르메인에게 필요한 것이 마차값으로 칼리안의 행동을 용인해주는 배포가 아니라, 브리센의 기에 눌려있지 않을 진짜 힘이라는 것을. 르메인이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다 큰 숨을 내쉬었다. 큰 결정을 내리려는 것이다. “기사단 파벨이 왕궁 내에서 사용하던 건물과 부지에 발칸을 들이게.” 발칸의 창설을 앞당긴다. 그리고 실리케의 무기가 되어주었던 파벨의 구역에, 마법사단 발칸을 들인다. 그것은 곧, 브리센에 대한 르메인의 선전포고였다. 르메인의 말을 들은 앨런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르메인을 보며 대답했다. “축하드립니다. 머지않아 정말로 목이 간당간당하게 되셨으니.” 머지않아 목이 간당간당하게 될 르메인이 같이 웃었다. < 제14장. 오랜만입니다. (1) > 너무 이르다. 이것은, 지금 사람들이 칼리안에게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르메인의 생각이었다. 칼리안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다. 걱정이었다. 칼리안이 카이리시스에 도착하기 하루 전.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의 귀환을 환영해주려는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시스파니안을 닮은 왕자가 공동이 빛나는 상서로운 일을 만들어내고 돌아온다 하니, 이번에도 모여든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다. 때문에 거리마다 가득한 이들의 입에서 칼리안의 이름이 내려가질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칼리안이 차기 왕세자가 될지, 되지 않을지를 벌써부터 점쳐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르메인이 이르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르메인은, 그런 그들의 관심 때문에 칼리안이 실리케와 란델의 집중 타깃이 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 오. 그것을 아는 분이 라트란 성에 기사단 카에라를 보내셨던 거군요. 르메인의 걱정을 들은 앨런이 어김 없이 한 소리를 했었다. 물론 앨런의 지적은 언제나 옳았으므로, 르메인은 사과를 씹어먹으며 말을 내뱉던 그 입을 향해 별 소리를 하지 못했다. 아무튼 이런 르메인이 걱정은 얼추 들어맞았다. 란델의 생각은 알 수 없었으나 다른 한 명의 심기가 더 많이 비뚤어진 것이다. “내일이면, 다시 만나겠구나.” 붉은 입술 틈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결코 곱지 않았다. “어찌나 대단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지. 반갑기도 하여라.” 칼리안이 독차를 물렸던 그 날 이후, 친아들과 거의 다섯 달 만에 처음 만나는 오찬 자리였다. 하지만 실리케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오직 칼리안에 대한 경계의 말, 그리고 르니에리 향기 뿐이었다. 물론 플란츠는 그 이상의 것을 실리케에게 바란 적도 없었다. 아마도, 없었다. “내 아우님을 반겨하는 마음에 나를 보자 하셨는지.” 플란츠의 낮은 목소리에, 다소 마르긴 했으나 여전히 아름다운 실리케가 여전히 아름다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곧 변경백이 올 것이라, 그것을 알려주려 부른 것이란다.” 실종 상태인 레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저 새로 오게 될 그레이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플란츠가 성의 없는 고갯짓을 보인 뒤 대답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그렇게 말한 실리케의 눈에 찬 기운이 어렸다. 앞에 앉아 이 자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들을 보는 실리케의 귓가에 칼리안이 건넨 말이 아른거렸다. - 플란츠는 나를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칼리안이 독을 마신 날. 항변하는 실리케를 플란츠가 막은 것이, 실리케를 살리기 위함이었다던 그 말을 실리케는 전혀 믿지 않았다. 언제나 플란츠는 실리케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못해 안달이었으니까. 지금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레이가 오는 것이 플란츠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이득이 될 텐데도, 그저 탐탁지 않게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실리케는 조곤조곤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네가 걷게 될 길이란다. 너도 알고 있지 않니? 그러니 무의미한 반항들은 이제 그만하렴.” 그 말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어차피라는 말은 좀 짜증나는데.” 그렇게 말한 플란츠는,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 모습에 걸맞는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 마음대로 정해진 길인지도 모르겠고요.” 실리케가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누구의 마음대로인지 너무나 당연해서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까닭이다. 대답이 올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던 플란츠가 말을 이었다. “마법사들이 알아낸 일들이,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많던데요. 훨씬.” 칼리안이 공개했던, 실리케로 인해 죽은 이들에 대한 내용을 말하는 것이었다. 플란츠는 실리케가 정말로 그들을 전부 해한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이미 사실임을 알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실리케는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왜 아직도 이렇게 어리게만 구는걸까.” 다른 대답이 필요할까. 플란츠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날. 그냥 닥치고 있을걸.” 이성을 잃은 르메인이 카에라 단장에게 무슨 말을 하든, 그냥 두고 보았어야 했다고. 플란츠는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칼리안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안 실리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 뿐, 달라진 것이 없었다. 지금 실리케는, 그 날의 르메인을 막아선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플란츠의 말에 다시 한번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실리케가 자신의 것과 똑같이 생긴 플란츠의 연두색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내 아들. 그리 애쓰지 말려무나.” 언제나 플란츠가 하던 말이 실리케의 입에서 나왔다. 조용히 있으라는 말에, 플란츠도 실리케의 눈을 쳐다봤다. “누구는 너무 변했는데. 누구는 너무 안변하네.” 그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플란츠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독한 르니에리 향기가 다시 느껴졌다. “계속 애쓰실 것 같아서. 원하시는대로 조용히 있겠습니다.” 플란츠는, 칼리안이 변한 것을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저 향기가 멈출 것 같아서였다. * * * - 늦더라도 다음주 전까지는 레딩턴 자작이 카이리시스에 도착할 겁니다. 상단 일을 해본 자는 아니지만, 잘 적응할 것 같습니다. 카이리시스로 올 마음을 먹고 나니 열의가 대단하더군요. - 다행입니다. 폴룬 남작의 과로사는 면하겠으니. 칼리안이 없는 사이 멜피르와 많이 친해진 모양인지, 앨런이 꽤 반겨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곧 칼리안 쪽에서 전할 말이 끝나고, 이번에는 앨런이 소식을 전해왔다. 하마터면 르메인이 마차 값을 낼 뻔했다는 말을 듣고 실소하던 칼리안이 물었다. - 그럼 발칸은 제가 도착한 직후에 창단되는 겁니까? 칼리안의 질문에, 앨런이 잠깐 대답하지 않다 물었다. - 제가 왕자님께 그 말을 했었습니까? - 아뇨. 제가 사고친 것 때문에 날짜를 앞당겨야겠다고 결정하셨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제가 카이리시스 밖에 있을 때 창단하면 자칫 공격이 있을까 걱정하셨을테니, 제가 간 직후로 날짜를 잡고 그 전까지는 비밀로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앨런이 웃는 것이 전해졌다. - 왕자님 손에서 사이 좋게 놀고 있었군요.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왕자님께서 돌아오시면 곧바로 창단을 발표하고, 그 다음주에 창단식을 가질 예정이지요. 그 전까지는 외부에 알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 마법학원은 테이난샤 거리의 빈 건물을 임시로 쓰고 있다고 하셨는데, 마법사단은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발칸이 어디에서 지내도록 할 지에 대해서는 칼리안도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때문에 앨런은 칼리안의 놀란 반응을 기대하며 말했다. - 파벨의 영역을 침범하기로 했지요. 역시나, 칼리안으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앨런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레이븐의 고삐를 꽉 쥐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한참 뒤에야 말을 전했다. - 실리케가 워낙 화가 많아서, 전하께도 위협이 있을텐데요. - 감안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카에라의 기사들을 너무 얕잡아 보지는 마시지요. 카에라의 기사를 얕보지 말라니. 칼리안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앨런에게는 전달되지 않을 웃음이었다. - 얕보다니요. 정확히 보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입니다. 기사단장조차 검의 길에 들어서지 못했는데, 두 명의 소드마스터로부터 르메인을 어떻게 지킨단 말인가. 앨런이야 자신이 곁에 있으니 괜찮으리라 여기고 말았겠으나 칼리안은 안심하기가 어려웠다. 지금 상황에서 그레이가 카이리시스로 가게 되면 르메인의 목숨이 정말 위험할 터였다. 테이블 대신 레이븐의 안장을 톡톡 치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반지와 연결된 앨런이 아니라, 옆에서 나란히 말을 달리던 얀을 향해서였다. “레딩턴에서 카이리시스로 가는 길은 이 곳 뿐인가?” 그 말에, 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굳이 빙 돌아가는 것이 아닌 이상, 이 길 뿐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중얼거렸다. “변경백이 그 분홍색 마차를 타고 수도까지 가진 않겠지. 그럼 잘 하면, 만나겠네.” 그리고는 잠시동안 생각에 빠져들었다. 방금 결정한 일에 대한 여러 경우의 수를 가늠해보는 시간이었다. 곧 칼리안이 장난 같은 말을 건넸다. - 스승님. 저 어쩌면 사고 하나 더 칠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들은 앨런이 우려된다는 듯이 말했다. - 왕자님과 브리센 변경백이 만난 것이나 둘의 경로가 같은 것은 이 곳에서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괜한 오해 살 일은 벌이지 마시지요. 혹시 칼리안이 성급히 칼을 휘두를까 걱정하는 말이었다. 그레이를 죽일 생각은 칼리안도 없었다. 그렇다 해서 카이리시스로 가게 둘 생각은, 이제 없어졌다. 칼리안이 웃으며 대꾸했다. - 제 칼은 탈이 나지 않을 때 휘두르겠습니다. - 칼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그리 하시지요. 무슨 사고를 치겠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사고치는 아들을 보며 머리아파 하는 것은 르메인의 몫이었다. 따라서 앨런은 그저 재밌는 구경거리 하나 늘어나는 셈 치며 이렇게 답했다. * * * 아르센과 레이첼은 지금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칼리안은 이동 마법진과 관련해서 카이리시스에 도착하기 전까지 어느정도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르센은 카이리시스 입성일이 가까워지는 것을 거의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 같이 느끼고 있었다. 결국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레이첼과 토론을 이어나가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말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에 있었다. 속도가 이렇게까지 빨라진 것은 칼리안의 요구사항 때문이었다. 앨런과의 대화를 마친 직후, 말들이 견딜 수 있을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리게 해달라 한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내, 말은, 맹세의 인, 같은 것을, 활용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거죠!” “그런데 맹세의 인은 일대 일의 계약이니컥!” 앞의 목소리는 레이첼이었고 뒤는 아르센이었다. 아르센의 말이 이상한 소리와 함께 끊긴 이유에 대해, 칼리안은 굳이 궁금해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대신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촉박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말 위에서 입 열지 말아요. 혀 씹히니까.” 정작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의 목소리는 평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우아한 레이븐은, 빠른 속도로 달려도 여전히 우아했으니. 아무튼 이런 일련의 일들을 거치며 두어 시간을 더 달린 뒤, 일행은 드디어 말의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칼리안이 찾던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앞서 달리는 마차에서 그레이의 기운이 뻗어나오는 것을 확인한 칼리안의 입 꼬리가 말아올려졌다. “찾았다.” 벽 틈에 숨은 생쥐를 발견한 고양이의 울음 같은 칼리안의 목소리에, 일행들이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얀은 알아서 뒤로 물러났고, 레이첼은 히나와 베로니카를 자신의 뒤로 보냈다. 저들과의 일로 자정이 넘어서까지 훈련장을 달리다 간신히 칼리안의 뜻을 깨닫게 된 키리에는 투지를 불태우며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이제는 칼리안에 대한 쓸데없는 배려심 때문에 바보같이 참고만 있지는 않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아르센은, 지난번에 부순 것 다음으로 비싸보이는 마차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칼리안은 일행들을 향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말해주는 대신 잠깐 웃었다. 한편, 이제 내일이면 카이리시스의 집에서 편안하게 발 뻗고 잘 생각을 하며 불편한 마차를 간신히 참고 있던 그레이에게 집사가 말했다. “변경백님. 뒤에 누군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곧바로 마차 뒤의 커튼을 젖히고 뒤를 쳐다본 그레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왜 또, 저 왕자인가! 대체 어떻게 따라왔지?’ 물론 이유는 간단했다. 칼리안의 일행은 레딩턴 성에 들어가 사흘을 쉬었다. 그 후 이동 속도를 올려주는 마법을 사용해 나흘 거리를 이틀 만에 주파했다. 그 사이 그레이는 마차를 구매하여 정비하는 것에 하루를 쓰고 나흘을 달렸다. 못 만날 수도 있었던 그레이를 칼리안이 찾을 수 있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자신을 향해 점점 다가오는 칼리안이 심지어 살짝 웃고 있음을 확인한 그레이가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마법을 좀 배웠다 하더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그 안하무인한 성격 뿐 아니라 마법사를 우습게 보는 것도 에반 브리센 후작을 꼭 닮은 그레이였다. “진정으로 인내하고 있는 것이 나라는 것은 꿈에서도 모르겠지.” 그가 대단한 착각에 빠져 이런 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칼리안이 마차를 거의 다 따라잡았다. 그러자, 그레이의 집사가 들창을 통해 물었다. “변경백님. 마차를 세울까요?” 그레이가 날이 잔뜩 선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차가 서면 왕자의 목을 비틀어버릴 것 같다. 그냥 무시하고 가도록.” “네, 네.” 아주 거친 표현에 화들짝 놀란 집사가 다시 몸을 돌리며 마부를 채근했다. 그 사이, 칼리안이 그레이의 마차 근처로 다가왔다. 그레이는 창문의 커튼을 내린 채 꼼짝 않고 앉아있었다. 칼리안이 마차 옆으로 가고자 했으므로, 레이븐은 마차를 둘러싼 기사들의 말 사이를 우아하게 파고들었다. 그렇게 용케 마차의 바로 옆까지 달라붙은 칼리안이 달리던 그대로 입을 열었다. “변경백. 버릇없는 모습은 여전하군.” 마차 안에 있던 그레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일단 실리케를 만나기 전까지는 저 왕자를 살려둬야 한다고, 그 생각만 되뇌고 있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고개를 돌려가며 그레이의 일행을 둘러보다 물었다. “그런데, 변경백. 네 기사가 여섯 뿐이구나. 나머지 기사 넷은 어떻게 했나?” 그레이가 칼자루를 꽉 말아쥐었다. 칼리안이 볼을 긁적였다. “아. 이제 기사가 아니었지.” 레딩턴 호수에 사는 물고기들의 식사가 된 네 명의 멍청이들이 생각난 여섯 명의 기사들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칼리안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이었다. “아무튼 나는 네 개들이 사라진 것도 이렇게 궁금한데. 그대는 혹시 궁금해 해본 적 없나?” 그렇게 말한 후 잠시 뜸을 들인 칼리안이 아주 느긋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대의 동생이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어차피 레넌은 가문에 큰 도움이 된 것도 아니었으니, 그레이도 그리 크게 궁금해하지 않던 일이었다. 그리고 브리센 후작이 말하지 않았던가? 돈을 노린 이들의 소행일 것이니 차차 찾으면 된다고. 그것이 레넌이든. 혹은 레넌의 시신이든. 따라서 그레이는 칼리안의 말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리안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실, 누가 브리센 후작에게 돈을 아주 많이 줬거든. 레넌 좀 치워달라고. 그랬더니 레넌이 사라졌지. 그러다보니 궁금한 것이 생기더군. 후작은 후작 작위 탐내는 첫째 아들도 돈 받고 치워주려나.” 그레이의 마차 속에서 살기가 확 피어올랐다. 살기의 방향을 확인한 칼리안의 눈이 긴 호선을 그렸다. < 제14장. 오랜만입니다. (2) > 칼리안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그레이의 살기를 털어내듯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마차 안에서 그레이의 흉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차를 세워라.” 그 말에, 계속 달리던 마차가 비로소 멈춰섰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레이의 살기를 느낀 키리에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고, 아르센과 레이첼의 손에는 마력이 감돌고 있었다. 칼리안이 손을 들어 그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도록 주의를 보냈다. 특히, 분홍색 마차를 보며 대충 각을 재보는 아르센 쪽을 집중적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얀을 보며 말했다. “키리에만 남고 먼저 가고 있어. 곧 갈테니.” 지금부터 할 일은 칼리안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칼리안의 비밀을 아는 키리에 외에는 이 곳에 있지 않아야 했다. 칼리안의 굳은 표정을 본 얀은, 두 말 없이 일행들을 데리고 왕도를 따라 멀어져갔다. 그들의 뒤를 보던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았다. 잠시동안 칼리안이 아닌 베른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레이는 카이리시스로 가면 안된다. 다만 죽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적당히만 손을 봐주어 뒤탈이 생긴 염려를 만들어도 안된다.’ 따라서 칼리안은, 그레이를 완전히 바닥 끝까지 끌어내릴 생각이었다. 두 번 다시 칼리안에게 대서지 못하도록, 완전히 배를 보이도록 만들어야 했으니까. - 드르륵! 그레이가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그와 함께, 칼리안이 감았던 눈을 떴다. 어느새 베른의 눈빛을 한 칼리안이 창 밖을 쳐다보는 그레이를 내려다봤다. 그런 변화를 알 리 없었으므로, 그레이는 커다란 검은 말 위에 앉은 채 마차 안의 자신을 내려다보는 칼리안을 향해 잇소리를 냈다. “천한 년의 핏줄이 어디 감히! 내가 참다 참다······컥!” - 콱! 칼리안이 창문 너머로 손을 푹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레이의 멱살을 붙들어 잡아챈 뒤 확 당겼다. 순간적으로 마차 벽에 목이 눌린 그레이가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살기도 그레이가 먼저. 욕도 그레이가 먼저. 그러니 이제부터는, 정당방위다. 칼리안이 손에 붙들린 그레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참고 억누르고 있던 화를 터뜨렸다. “참다 참다, 뭐.” 칼리안이 사납게 웃었다. - 쾅! 칼리안이 팔을 뻗었다 다시 마차 벽으로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그 손에 붙들린 그레이는 머리를 또 박았다. 그레이가 눈을 치켜떴다. “이······컥!” - 쾅! 칼리안은 왕도에서 그레이를 마주친 그 순간부터 오러를 감추던 마력을 해제하고 있었다. 그것을 그레이는 눈치채지 못했다. 여섯 중 세 번째의 소드마스터.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제 막 소드마스터가 된 칼리안의 기운조차 느끼지 못한다. 사실상 검의 길에 오른 뒤 제대로 수련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칼리안이, 강자였다. “이, 뭐.” - 쾅! 한번 더 마차 벽에 머리를 들이박은 그레이의 눈에서 이성이 사라졌다. 결국 그의 손이 검 손잡이를 향했다. 그 움직임을, 마차 밖의 칼리안이 놓칠 리가 없었다. - 쾅! 칼리안이 세 번째로 머리를 박은 그레이 쪽으로 고개를 더 숙였다. 그리고 창문 안쪽으로 보이는 그레이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내리거라.” 그와 동시에, 칼리안의 살기가 폭발했다. 레넌, 그레이, 실리케, 그리고 플란츠! 참아왔던 브리센에 대한 모든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죽기 싫으면.” 갑작스러운 난리통에 그레이의 두 애첩이 마차 밖으로 나왔다. 집사와 마부도 자리에서 일어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시선이 그레이와, 여섯 명의 기사들에게 닿아 있었다. 그리고 여섯 명의 기사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멀리 서 있던 키리에조차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낄 정도의 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칼리안은 이 정도로 살기를 내비친 적이 없었다. 잠깐 드러난 살기로 앨런 마나실을 긴장시켰던 칼리안이었다. 그러니, 제어하지 않은 온전한 살기를 고스란히 받은 그레이는 오죽하겠는가? 그레이의 온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리라고 하였다.” 그레이는 지금 저 말이 마차에서 내리라는 말인지 이승에서 내리라는 말인지도 구분이 안됐다. 결국 칼리안이 다시 팔에 힘을 주었다. - 쾅! - 콰직! 오러가 집중된 팔의 힘을 마차 벽이 감당하질 못했다. 칼리안은 그레이를 창문 틀 째로 끌어냈다. “잠깐, 잠깐만!” 그레이가 다급한 소리를 냈다. 칼리안이 그런 그레이를 멱살째로 들어 내팽개쳤다. 그리고 레이븐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 상관에 그 부하다. 그 칼리안에 그 아르센이다. 스승님 가라사대, 칼만 아니면 얼마든지 사고치라 하셨으니. - 우웅! 칼리안의 손 끝에 투명한 빛이 어리더니, 둥글고 길쭉한 막대기 모양을 만들어냈다. 쉽게 말해, 몽둥이다. “좀 맞자꾸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타작이 시작됐다. 그레이는 허리춤에 찬 검을 뽑지도 못했다. 그 역시 소드마스터였다. 그런데도 몽둥이가 너무 빨라서 검을 뽑기는 커녕 피할 틈도 없었다. 그저 온 몸에 오러를 둘러 덜 아프게 맞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바로 얼마 전 호수에 던져버린 네 명의 기사도, 놈들의 뼈가 모조리 부서지도록 화풀이를 했었다. 그런데 오히려 맞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문의 힘과 스스로의 힘 덕에 단 한번도 맞아 본 적이 없었다. ‘이 곳만 벗어나면,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수치심과 분노가 함께 밀려들어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다시 한번 살기가 뿜어져나왔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웃었다. 그리고 그레이의 복부를 걷어찼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수도 없이 걷어 차고 짓밟고 즈려밟았다. 그레이의 칼을 빼앗지도 않았다. 칼을 겨눈다면 그것도 상대해주리라 생각했다. 그저 그레이가 칼을 뽑아들 생각도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커어어······.” 기어코 그레이의 입에서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그레이의 몸을 지탱하던 오러가 물에 넣은 설탕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오러의 근원이 사라진 것이다. 대륙의 소드마스터를 다시 다섯으로 줄여놓은 칼리안의 손에 아까보다 조금 더 큰 모양의 길쭉한 원형 막대기가 생성되었다. 쉽게 말해, 조금 더 센 몽둥이다. 투명하게 빛나는 예쁜 몽둥이가 공중에 화려한 궤적을 수놓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감히.” - 퍽! “내 앞에서.” - 퍽! “핏줄을 말했느냐.” - 퍼억! “케엑!” 그레이가 몸을 뒤틀며 이빨 섞인 피를 게워냈다. 분노는 진작에 사라졌다. 수치심은 조금 남아 있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 퍽! 퍽! 그레이가 게워낸 것 외에는 피가 튀지도 않았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칼리안은 지금 그냥 더럽게 아프고 죽지 않을 곳만 싹싹 골라서 야무지게 때리고 있었다. 그 손이 참으로 매웠다. “잠깐, 잠깐만······.” 칼리안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레이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더니 아주 잠시 두 애첩을 쳐다봤다. 여전히 자존심이 남아있었으므로, 칼리안은 다시 수고스러운 활동을 시작했다. 그레이는 미칠 노릇이었다. 왜 맞는지는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 안 맞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또 맞았다. 대체 저 몽둥이는 어디서 자꾸 튀어나온단 말인가? 그런 그레이의 얼굴에 생각이 깊어 보였으므로, 칼리안은 계속 때렸다. 오러가 없어도 기절을 하지 않았다. 기절 안할 곳만 골라서 때리고 있었던 탓이었다. 너무 아팠다. 오랜 시간 검을 들어왔으나, 이렇게 아픈 것은 처음이었다. 결국 한 시간여가 넘도록 매타작을 당한 뒤에야, 그레이가 칼리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몽둥이가 사라졌다. 칼리안이 그레이를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레이의 몸이 움찔 하며 뒤로 물러섰다. 칼리안이 손을 들어 그레이의 멱살을 다시 잡아 들어올렸다. 뿌리 깊은 공포감이 그레이의 눈에 어렸다. 칼리안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때렸느냐.” 그렇게 묻는 목소리 끝에 살기가 짙어졌다. 대답 잘 하라는 뜻이었다. - 후작은 후작 작위 탐내는 첫째 아들도 돈 받고 치워주려나. 그 순간, 조금 전 칼리안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 것은 생존에 대한 본능이었을까. 그레이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에반, 에반 브리센 후작······.” 지금 내뱉은 대답이 어떤 뜻인지 모르는 것이 아닐텐데. 참으로 돈독한 부자관계가 아닌가. 칼리안의 얼굴에 냉소가 걸렸다. 그레이는 지금, 그것조차 너무 무서울 뿐이었다. 그 얼굴 그대로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봤다. 여섯 명의 기사를 포함한 그레이의 가솔들이 간신히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칼리안이 손에 쥐고 있던 그레이의 멱살에서 힘을 풀었다. 털썩, 하고 그레이의 몸이 힘 없이 쓰러졌다. 곧 칼리안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들을 이리 만들었으니. 참으로 비정한 아비로구나.” 그 말과 함께, 칼리안이 그레이의 등을 밟았다. - 콰직! “끄아아악!” 척추가 부러지는 고통에, 그레이가 결국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그 모습을 담담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칼리안의 눈초리가 그레이의 집사에게 가 닿았다. “넌. 내 말을 알아들었을 머리인가.” 그 말에, 집사가 고개에서 꺼떡꺼떡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끄덕여댔다. “지금 당장 변경백령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로 겪은 억울함을 알리겠습니다! 후작, 후작께서 아드님과 불화가 깊으셨다고! 이 곳으로 사람을 보내셨다고! 그래서 아드님을 이렇게 만드셨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변경백이 움직인 이동경로가 나와 같구나. 그것은 우연인가?” 집사의 입이 재빨리 답을 찾아 올렸다. “아닙니다! 변경백께서 이리 되신 것은 이, 이틀 뒤입니다! 왕자님께서는 그 시점에 궁에 계셨으니, 우연히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꽤 흡족한 대답이었으므로, 칼리안이 고개를 한 번 움직였다. 그리고 얼어붙을 것 같은 목소리로 마지막 경고를 보냈다. “그래. 그 소문에 내 이름이 한 글자라도 들어가면.” 집사를 포함한 모두의 얼굴이 사색이 된 것을 본 칼리안이 씩 웃었다. “찾아가마. 어디든.” 집사가 울먹거리며 다시 고개를 움직였다. 칼리안이 비로소 몸을 돌렸다. 레이븐의 안장에 오른 칼리안이 키리에를 보며 말했다. “겸사겸사 네 것도 갚은 거야.”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던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칼리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다리던 일행들에게, 다각다각 걸어오는 두 필의 말이 보인 것은 거의 두 시간여가 지난 뒤였다. 때문에 저녁 시간을 한참 넘긴 뒤에야 마지막 영주성인 넨시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칼리안은 오랜만에 실하게 움직인 덕에 저녁도 걸렀다. 그리고 앨런에게 내용만 대충 전한 뒤 그대로 골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까지 단잠을 자는 칼리안의 옆을 키리에가 밤새 지켰다. 혹시라도 그레이의 기사들이 복수하러 올까 걱정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레이의 기사들은 칼리안의 얼굴만 떠올려도 진저리를 치고 있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그리고 다음 날, 아침부터 얀과 히나가 매우 분주했다. 덕분에 칼리안은 이 곳이 체르밀인지 아니면 넨시아 영주의 성인지를 잠시 혼돈했다. “사람들이 엄청 많이 몰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출발할 때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에, 얀이 이런 말로 칼리안을 살살 달랬다. 따라서 칼리안은 대체 여행길에 왜 챙겨왔는지도 모를 왕자의 정복을 쳐다봤다.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결국 얀을 이기지 못한 칼리안이 정복까지 입으며 멋을 부리고 나니, 다른 일행들이라고 대충 입을 수가 없었다. 어찌됐건 왕자의 로젤리타 수행원들이니 격은 맞춰야 했다. 따라서 모두들 이른 아침부터 목욕과 단장을 마친 후 말에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머무른 넨시아 영주성을 떠나 한 시간 거리의 카이리시스에 도착했다. 그 뒤 칼리안은, 외성 안에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정복을 입은 것을 곧바로 후회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너무 잘 생겨서 지나치게 멋있는 것도 피곤할 때가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이런 환호성이 왕궁 내에까지 들렸으니, 서재에서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던 르메인과 앨런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도착했나보군.”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아있던 르메인이 비로소 찻잔을 들어올렸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꽤 긴장했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앨런이 들어오자마자 또 이런 소리를 한 탓이다. “전하의 아드님께서 이번엔 남의 허리를 부쉈다더군요.” 조금 익숙한 듯한 말이었지만 이전과는 또 많이 다른 것이 부서졌다 하니, 르메인이 양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앨런이 일전에 알려준 올바른 질문을 꺼내들었다. “누구의 허리였는가.” 앨런이 만족한 듯한 웃음을 보이며 칭찬하듯 대답했다. “그레이 브리센의 허리였다 합니다.” 이랬으니, 도무지 안심이 되겠느냐는 말이다. 대체 그 소드마스터 허리를 어떻게 부쉈냐는 말에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어찌저찌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답니다.” 설마 혼자서 대섰겠느냐, 칼리안은 다친 곳이 없다더라, 그러니 이래저래 싸우다 넘어지기라도 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앨런의 말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 르메인을 보며, 앨런이 부드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라는 자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으니. 자식이 나서서 도둑을 쫓아내준 것이지요.” 그것은, 그 어느때보다도 폐부를 깊이 찌르는 한 마디였다. 그리고 잠시 뒤. 왕궁 안으로 들어온 칼리안이 레이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그새 밖으로 나와 있던 앨런의 품에 쏙 안겼다. “스승님!” 앨런은, 남의 허리 부숴놓고 달려오는 이 어여쁜 제자를 온 팔로 꼭 안아주었다. 그 뒤 르메인을 향해 웃어보이는 앨런의 승리감 어린 얼굴이, 다시 한번 르메인의 폐부를 깊이 찔렀다. < 제14장. 오랜만입니다. (3) > 체르밀 궁은 언제나 같았다. 그저 계절이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이 없었다. 칼리안의 무사 귀환을 축하한다며 쌓여 있는 선물상자도 똑같았다. “그 동안 이 곳이 참 쓸쓸했는데,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기쁩니다, 왕자님.” 무뚝뚝한 메를린이 이런 인사를 건네자, 메를린 뿐 아니라 다른 시녀들도 돌아가며 한 마디씩 칼리안을 반겼다.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왕궁을 떠나있던 그 짧은 기간만에 환복을 도와주는 손길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체르밀에서 오직 칼리안만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다시 익숙해져야 할 칼리안의 일상이었다. “저도 집에 돌아갔을 때 그랬어요. 오늘 푹 쉬시고 내일부터 다시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금방 적응될테니 걱정마세요.” 어색해하는 티가 많이 났던지, 얀이 이렇게 말하며 민트차를 건네왔다. 밖에서 가장 많이 마셨던 것이었기 때문에, 차를 본 칼리안이 괜히 웃었다. 떠날 때는 더운 바람이 불었는데, 돌아오니 어느새 쌀쌀한 바람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썩 나쁘지 않았으므로, 칼리안은 잠시 테라스로 차를 들고 나가 홀짝홀짝 여유를 즐겼다. 칼리안을 따라 나온 얀이 옆에 놓인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왕자를 모시는 온전한 시종으로의 생활에 얀도 아직 다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그에 대해 지적할 마음은 조금도 없던 칼리안은 그냥 티가 나지 않도록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참 이상하지.” 칼리안이 잔잔한 인공호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칼날 위에 살고 있는 왕자들이 셋이나 있는데. 왕궁 밖 어느 곳보다도 조용한 것이.” 그렇게 말한 칼리안은 손에 들린 민트차를 가만히 마셨다. 오랜만에 돌아온 일상에, 상념 가득한 오전의 한 때가 그렇게 묵묵히 지나갔다. * * * 앨런은 정말 바빴다. 발칸의 창단을 앞두고 마지막 정비를 하고 있었다. 칼리안과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던 앨런은 점심 시간을 조금 넘긴 뒤에야 도착했다. 시계도 보지 못하고 일하느라 왕자와의 약속 시간에 늦을 만큼 바빴다. 심지어 앨런은, 가족인 레이첼과 베로니카와도 아직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고 했다. 둘은 아직 입궁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곧바로 앨런의 저택으로 가야 했던 탓이다. 둘의 입궁을 르메인에게 요청할 만큼의 시간도 없었다는 이야기였으므로, 칼리안은 어쩐지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염두에 두지 마시지요. 어차피 내일부터는 체르밀까지도 드나들 수 있을 터이니.” 그런 마음까지도 눈치챈 앨런이 훌륭하게 잘 구워진 스테이크를 썰어내며 이렇게 말했다. 왕자들의 공간에 굳이 두 모녀의 출입을 요청하게 된 것은 이동 마법진 때문이었다. 언젠가 아르센이 생각했던 것처럼 칼리안도 마법사였으므로, 도무지 답을 내지 못하고 있는 ‘특정인만 사용할 수 있는 이동 마법진’을 만드는 방법을 함께 연구해보기로 했던 것이다. 칼리안이 이곳 저곳을 다니기 어려웠으니 연구할 이들을 칼리안의 방으로 불러올 수 밖에. 레이첼과 베로니카를 생각하던 앨런이 칼리안을 보며 물었다. “제 가족들과는 이야기를 좀 나눠보셨습니까?” 칼리안이 앨런과 똑같은 머리색을 가진 베로니카를 떠올려 보았다. 칼리안보다 한 살이 적고 이제 막 2서클을 만들어낸 어린 마법사라는 것 외에는 특별히 아는 것이 없었다. “그레이스 경은 얘기를 좀 나눴습니다만. 베로니카와는, 첫인사 외에는 말을 나누질 못했습니다.” 베로니카를 생각하던 칼리안이 짓궂은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얀이 있을 방문 밖을 가리켜보이며 소근소근 말했다. “사실, 얀이 베로니카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얀도 저와 함께 움직여야 했던 터라 제대로 된 말을 주고 받지는 못한 것 같더군요. 제가 방해꾼이 되었습니다.” 의외의 말이 튀어나오자, 앨런이 깜짝 놀라 물었다. “제 손녀인 것을 알면서도 그렇다는 말입니까?” 얀이 앨런을 썩 좋아하질 않으니 하는 말이었다. 칼리안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둘 다 그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데다 그래도 얀의 태도가 예전보다 많이 나아진 것 같아 딱히 캐묻지 않고 있었다. “눈길이 가는 것에 조건이 없을 나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도 그저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주 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시는군요.” 그 말에 칼리안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이리스에는 흔하지만 칼리안에게는 조금 생소한 견과류인 개암, 즉 헤이즐넛을 하나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일상적인 이야기와 그간 서로 겪은 일들을 한동안 주고 받으며 식사를 마친 뒤, 둘은 오랜만의 산책에 나섰다. 장미 정원까지 걸어온 뒤, 앨런의 입이 먼저 열렸다. “한번 보여주시지요.” 무엇을 보여달라는 것인지 되물을 필요가 없었다. 아마 앨런은 칼리안을 만나보기가 무섭게 이것부터 보고 싶었을 것이다. 칼리안이 손을 내밀어 마력을 집중해보였다. 무엇이든 베어버릴 듯한 예리한 기운의 마력이 둥근 구체를 이루었다. “허.” 그것을 본 앨런이 정말 신기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 지고한 시스파니안도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이니, 앨런이라 하여 달랐겠는가? “그럼, 이 마력에 속성의 힘도 담을 수 있습니까?”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마력을 다시 감추었다. “가능은 합니다만 아직 자유롭게 쓸 만큼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검으로도 쓰고 몽둥이로도 쓰셨다, 이 말이군요.” 아아, 실로 고급스러운 몽둥이였다. 칼리안이 전날의 일을 회상하며 피식 웃었다. 참지 않고 온전하게 화를 내 본 것이 얼마만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범상치 않은 힘이니, 혹시라도 브리센 변경백이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걱정입니다.” 그 말에, 칼리안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에 베여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겠지만, 맞아서 죽게 되리라고는 생각한 적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자신을 그렇게 매타작 할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서워하고 있을 것이라서. 운이 좋아 다시 걷고 검을 들게 된다 하더라도 저와 두번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아 할 테니까요.” 대체 사람을 얼마나 패 두었기에 소드마스터였던 이가 그 정도의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인지,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이리시스에서는 그런 사고를 내시면 안 됩니다, 왕자님.” 그레이가 수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그래서 르메인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과감히 저질렀던 일이었다. 그러니 그 손속이 무자비했음을 칼리안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칼리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던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제는 후작이 좋지 않은 소문에 시달리겠습니다.” “네. 아들을 아주 잔인하게 대했으니 여파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발칸 창단 발표는, 그 소문이 생긴 이후로 조금 미루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레이의 집사가 했던 말에 따르자면, 그레이는 이틀 뒤에 후작이 보낸 사람들에게 공격당해 허리를 크게 다치고 변경백령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그 뒤 후작의 천인공노할 짓을 일파만파 퍼뜨리겠다 했으니, 에반 브리센은 한동안 소문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을 터였다. 르메인의 코앞에 발칸의 마법사들이 들어와 살게 되는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기가 어려울 만큼. 그러니 그 이후에 발칸 창단을 발표하고 기사단 파벨의 구역을 발칸의 공간으로 바꾸자는 말이었다. 물론 앨런이나 르메인도 생각이 같았다. “맞는 말씀입니다. 본래는 오늘이나 내일 쯤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일주일 정도 미루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고보니, 폴룬 남작이 레넌을 살해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있었는데, 그 흉흉한 말도 사라지겠군요.” 그것은 칼리안이 이 곳에 오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레넌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멜피르가 브리센 상단을 인수하게 되었으니 레넌의 실종과 멜피르를 엮는 이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멜피르의 마음고생이 좀 있었을 터였다. “공교롭게도, 부녀가 모두 악소문에 시달리게 되었으니.” 부녀라는 앨런의 말에,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실리케가 생각난 탓이다. 누구를 떠올리고 있는지 분명히 보였으므로, 앨런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제 실리케가 플란츠 왕자와 따로 만났다고 합니다.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리케가 다섯 달 만에 처음으로 움직였다니, 그 쪽에도 신경을 좀 쓰셔야 할 겁니다.” 다른 곳의 소문이 커질 수록 본래의 소문이 잦아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것은 곧, 실리케가 다시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고개만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 * * 그동안 앨런과 반지를 통해 그렇게 많은 말을 나누었는데도 할 이야기가 많았다. 덕분에 칼리안은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두 시간 가까이 산책을 한 뒤에야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선물 상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저것들을 좀 열어볼까.” 선물을 무조건 돌려보내기보다는 하나 둘 받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로 보내오는 선물이었으니, 그들 중 얀의 평가가 괜찮은 이들의 상자를 열어보려 한 것이다. 그런데, 잠시 나갔다 들어온 얀이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선물은 오늘 밤이나 내일 열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정이 생겼다는 말투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 칼리안의 눈빛에, 얀이 난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씻고, 옷 갈아입으시고, 석찬에 드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세 왕자님들과 저녁 식사를 하겠다 하셨다네요.” 그 말을 들은 칼리안도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방금 밥 먹고 산책하고 왔는데.” 비록 그 산책이 두 시간짜리기는 했지만, 밥을 먹고 산책하고 또 밥을 먹는다 하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그렇다 해서 르메인에게 못가겠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은 서둘러 샤워부터 한 뒤 그리 튀지 않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무래도 다른 두 왕자가 있는 자리였으니, 굳이 화려한 복장으로 눈에 띌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머리 손질을 받는 동안 옆에 서 있던 얀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말에서 내리시자마자 마나실 경에게 달려가신 바람에, 전하께서 많이 서운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 확실히 그것은 칼리안의 실수였다. 아무리 앨런이 반갑다고는 해도 르메인에 대한 인사가 먼저였어야 했다. 르메인이 너그럽게 이해해주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왕궁에 도착을 하자마자 호되게 혼이 날 뻔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권했으니, 싫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맙다 할 일이었다. 곧 준비를 모두 마친 칼리안이 아르피아 궁에 마련된 소규모 만찬장으로 갔다. 출발할 때 체르밀 궁 앞에 마차가 한 대 뿐인 것을 보고 이미 예상했듯이, 란델과 플란츠가 모두 와 있었다. 너무 늦장을 부린 것 같아서, 칼리안은 그에 대한 사과의 의미까지 함께 담아 두 형에게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두 분 형님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란델과는 로젤리타를 떠나기 전까지도 하루 한 두 마디 씩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때문에 란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친 곳 없이 잘 다녀와 다행이라는 정도의 인사치레를 해 주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잘 왔다.”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은, 정확히 비교하자면 앨런이 시간의 축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했던 그 날 만큼 놀랐다. 플란츠의 환영 인사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다. 물론 진심이라고는 귀에 오러를 집약시켜도 찾아 들을 수 없을 목소리였으나, 어쨌거나 환영의 뜻이 아닌가. 때문에 칼리안은, 저 놈이 이제는 약을 처먹나 하는 생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했다. 칼리안이 채 감추지 못한 놀라움을 확인한 플란츠의 한 쪽 입꼬리가 올라갔고, 란델은 그런 플란츠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결국 플란츠의 꿍꿍이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르메인이 들어왔고, 석찬이 시작됐다. 르메인은 칼리안보다 다른 두 왕자들에게 더 많은 질문을 하는 것으로 칼리안을 배려했다. “란델. 읽고 있다던 시르테이야의 논서는 모두 읽었느냐? 네 학식이 갈수록 깊어지니 기쁜 일이구나.” 라거나, “검술을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하더니 지난번보다 몸이 더 좋아진 것 같구나, 플란츠. 언제 둘이 사냥이라도 가보자꾸나.” 라거나. 칼리안에게는 그저 밖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왔는지만 물었고, 칼리안은 얌전히 그렇다고만 대답했다. 배운 것이 많은지, 부순 것이 많은지는 르메인이 더 잘 알테니까. 아무튼 란델과 플란츠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르메인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을 보니, 칼리안이 없는 동안 여러 번 이런 자리를 가졌던 것 같았다. 확실히, 앨런의 공이 컸다. 그렇게 평화로운 부자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만찬장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시종 한 명이 시종장 라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나갔다. 그리고 라울이 매우 당황한 얼굴을 하다 르메인에게 무슨 말을 전했다. 작은 미소가 머금어져 있던 르메인의 얼굴이, 라울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굳어졌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들어오라 하게.” 국왕과 왕자들의 식사자리에 들어올 수 있으나, 방문 만으로도 시종장을 당황시킬 수 있는 사람. 르메인이 결코 반겨하지 않을 사람. 누가 찾아온 것인지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되었다. 칼리안이 잠시 눈을 내리 뜬 채 작은 숨을 들이마셨다. 또각. 또각. 구두가 만들어내는 소리에도 르니에리 향기가 감도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무엇을 감추려 저렇게나 짙은 향기를 내는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웃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실리케. < 제14장. 오랜만입니다. (4) > 오랜만입니다. 특별히 하대도 아니었으나 그렇다 하여 존대도 아니었다. 아무리 르메인의 앞이었다 해도, 또 아무리 란델과 플란츠가 있는 곳이었다 해도, 실리케에게 그 이상의 높임을 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 이유를 모를 이는 이 곳에 없었으므로 칼리안을 탓하는 이는 없었다. 물론 실리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시종이 빼 주는 의자에 앉은 실리케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칼리안에게 여전히 하대를 하니, 실리케 역시 예의를 차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딱히 존대를 기대하지도 않았던 칼리안은 신경쓰지 않고 식사를 이어나갔다. “무슨 일이지.” 칼리안을 쳐다보는 실리케를 향해 르메인이 물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실리케는 이러한 홀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초대되지 않은 식사 자리에 찾아올 때부터 이미 각오했을 것이다. 실리케가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네요, 전하.” 르메인은 굳이 가릴 것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보던 것을 안 보게 되었으니. 그런데 지금 다시 보이는군.” 르메인이 꺼내든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적대적인 말이었다. 르메인의 눈에 안 보이다 보이게 된 실리케는,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내는 저 말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러더니 칼리안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3왕자가 잘 다녀왔는지, 그것이 궁금해서 왔어요.” 그리고 칼리안을 향해 웃는 얼굴을 꺼내 보였다. 르메인은, 마치 칼리안에게로 향하는 실리케의 시선을 가로채듯 말했다. “굳이 그것을 확인하러 온 것인가.” “탈이 많던 아이였으니까요.” 탈이 많았다니. 친부와 계모의 기싸움을 조용히 듣고 있던 칼리안의 눈썹 끝이 잠시 움직였다. 저 정도의 음해에 기분이 나빠져서는 아니었다. 평생 일으킨 탈과 궁 밖을 나갔던 잠깐 사이에 벌인 탈 중에 어떤 것이 더 많은지 가늠이 어려웠던 탓이다. ‘네가 부리려던 두 형제가 모두 나로 인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면, 그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칼리안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르메인이 조용하지만 위엄 있는 소리로 경고의 말을 보냈다. “실리케. 왕자에 대한 말을 신중히 꺼내도록.” 실리케는 가벼운 말실수였다는 듯이 웃었다. 칼리안은 일상적인 안부인사를 들은 사람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잘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실리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앓고 갔던 감기가 워낙 독했던지라. 밖에서는 그만큼 큰 탈을 줄 것이 없더군요.” 실리케의 독을 언급하자, 르메인의 얼굴이 다소 경직됐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할 시간이 잠시 흘렀다. 그 뒤에는 실리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 참. 다행이구나.” 칼리안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입니다. 워낙 저에게 신경을 써주시니.” 칼리안의 대답에, 플란츠가 웃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리고 실리케는 아주 잠시동안 웃음을 지웠다. 더는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으니 이만 나가달라는 말이 칼리안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때문에 칼리안은 물잔을 들어 물과 말을 함께 삼켜냈다. 들어오라 한 것이 르메인이었으니, 칼리안이 나가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리케가 이번에는 르메인 쪽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전하.” 이 여자, 도무지 갈 생각을 안 한다! 칼리안은 질렸다는 표정을 그대로 지어보였다. 아주 작정을 하고 왔는지, 실리케는 가시 가득한 방석 위에 앉은 채 잘도 재잘거리고 있었다. 란델 쪽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물론 실리케는 신경쓰지 않았다. “지그프리드의 땅에서 놀라운 일이 있었다 하던데. 혹시 들으셨나요?” 르메인이 대답 없이 실리케를 쳐다봤다. 실리케가 자상한 어머니와 같은 얼굴이 되어 칼리안을 보았다. “사람들의 칭찬이 헤이시아 궁에까지 들어오니, 정말 놀랍고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단다.” 칼리안이 마음 속으로 실소했다. 무슨 말을 꺼내려 저렇게 거창한 칭찬을 입에 담는지 얼추 예상이 되었다. 실리케의 시선이 다시 르메인을 향했다. “그런데 함께 들려오는 말이 있다기에, 그것을 여쭤보고 싶네요.” 시스파니안의 둥지에서 있었던 일과 묶여 있는 소문은 딱 하나뿐이었다. 적당히 운을 뗀 실리케가 르메인의 푸른 눈을 노려보듯 쳐다보며 꺼내지 말아야 할 소리를 입 밖에 냈다. “정말로 다음 왕세자로 칼리안, 저 아이를 생각하고 계시는 것인지. 그것을 알려주세요.”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확히 칼리안이 예상한 바로 그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이 없구나. 실리케.’ 왕세자. 세 명의 왕자가 있는 이 자리에서 그 말은 하나의 금기어와도 같았다. 실리케가 그것을 꺼내놓은 것이다. 그것도 하필, 칼리안을 걸고 넘어지면서. 르메인이 아무 말 없이 실리케를 쳐다봤다. 저 말에 르메인이 무슨 대답을 하겠는가? 그렇다 할 수도, 아니라 할 수도, 심지어 대답 없이 실리케를 내쫓을 수도 없다.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테니까. 일단은 이 쯤에서 저 질문을 멈추게 하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르메인 쪽에서 여유로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얼마 전에 마나실 경이 그런 말을 하더군.” ‘스승님?’ 의외의 이름이 이 자리에서 나오자, 칼리안이 나서려던 것을 참고 르메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일 마음에 안 드는 놈부터 카밀론에 보내라. 그렇게 하면 알아서 사라질 것이다, 라고.” 그렇게 말한 르메인의 눈이 왕자들을 한번씩 훑었다. “허나, 모두가 소중한 나의 아들인 것을. 그 때문에 내 고민이 깊었는데.” 그렇게 말한 르메인의 푸른 눈동자가 실리케를 깊이 응시했다. 르메인이 아무런 감정도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지금 그대가 고민을 덜어주려 하고 있군. 고맙게도.” 실리케가 고개를 숙였다. 일그러진 얼굴을 감출 부채가 없어서였다. 칼리안도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였다. ‘아아.’ 앨런 마나실의 입에 세렌티의 영광 있으라! * * * 르메인을 궁지에 몰아넣을 생각으로 왔던 길이다. 칼리안을 세자위에 올리겠다 하면 편애하는 것이냐며 반발하려 했고, 올리지 않겠다 하면 그 말을 약속해달라 요구하려 했다. 대답을 미룬다면 기사단 카에라를 움직인 이유를 추궁하려 했다. 그런데 르메인은 그냥 플란츠를 세자위에 올리겠다는 말로 오히려 실리케를 협박해왔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이란 말인가? “더 할 말이 없다면 나가도록. 정말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렇게 말한 르메인이 문 근처에 선 시종들을 향해 손짓을 보냈고, 시종들이 문을 열었다. 그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실리케에게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괜한 걸음을 하게 된 실리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의 오만함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나를 이렇게 대한 것을 후회할 날이 올거예요. 반드시.” 전 왕비 아이샤가 죽은 뒤 브리센의 힘을 얻으려 실리케를 왕비로 들였던 그 날부터 이미 후회만 하고 있었다는 말을, 르메인은 굳이 전해주지 않았다. 여전한 태도의 르메인을 뒤로한 채, 실리케가 다시 또각 또각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갔다. ‘브리센 변경백을 돌려보내고 온 것이 천만다행이군.’ 실리케의 뒷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상황에 그레이까지 수도에 들어왔다면 당장 내전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앨런 마나실에게 잘 배운 말 한마디로 실리케를 내보낸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살폈다. 그리고 실리케를 대할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에게 악의가 있어 한 말이 아니니라. 왕비와 너를 같은 선에서 보고 있지 않으니 오해 말거라.” 실리케에게 했던 이야기에 혹시라도 플란츠가 신경을 쓸까봐 우려한 것이다. 플란츠가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압니다.”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여보인 르메인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둘러보는 듯한 눈을 했다. “너희들의 백부가 어찌 지내고 있는지 모두 알 것이다.” 칼리안의 백부라 함은, 곧 르메인의 친형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는 칼리안만 빼고 다들 아는 모양이었다. 둘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베른은 타국의 왕제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옛 칼리안은 자신이 왕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므로, 르메인이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나 남은 형제가 어떻게 되었는지에는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았다. 관심을 가져봐야, 자신의 어두운 미래만 미리 알게 되는 꼴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칼리안은 르메인에게도 형이 있었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 사람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까지 관심을 둘 만큼 여유롭지를 않았다. ‘얀에게 물어봐야겠네.’ “나는 너희들 중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될 이가 없기를 바란다.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말을 마친 르메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식사를 더 이어나갈 분위기가 아니었으므로 왕자들도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연회장 밖에서 기다리던 중 실리케가 들어갔음을 알게 된 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별 일이 없었음을 확인하고 안심하는 얀을 보며 칼리안이 웃었다. 가장 늦게 체르밀에 도착한 칼리안이 말했다. “잠깐 걷자. 소화가 안돼.” 얀은 칼리안이 키가 크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많은 양을 먹고 잘 소화해내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얀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는 표정 대신 알겠다는 말만 하며 칼리안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오늘만 두 번째로 호수 옆을 걸어가는 동안, 칼리안이 조금 전 르메인이 전했던 말을 들려줬다. 그리고 르메인의 형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조금 복잡한 표정이 된 얀이 대답했다. “본래 세자위에서 밀려난 왕자들은 스무 살이 넘으면 카이리시스를 떠납니다. 자신의 영지를 하사받고 그 곳에서 지내요. 사병을 거느리지 못하고 왕실에서 병사들을 보내준다는 것과, 카이리시스에 닷새 이상 머물지 못한다는 것을 빼면 별다른 제약이 없어요.” 그것은 싸움 없이 세자위를 받지 못한 다른 왕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또한 칼리안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굳이 르메인이 언급했다면, 르메인의 형은 다른 결과를 가지게 되었다는 소리일 터였다. 역시나, 얀이 다시 입을 열어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여생을 보낸 왕자들은 그리 많지 않으셨어요. 대부분은 형제가 왕이 된 이후 광장에 세워지거나······.” 참수형이나 교수형에 처해진다는 뜻이다. 섣불리 말을 꺼내기 어려운 주제였으니, 얀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 “외딴 곳에 갇혀 평생을 보냅니다.” 전 카이리스 국왕은 시스파니안의 축복으로도 고쳐지지 않는 병을 앓았다고 했다. 때문에 일찍부터 왕세자를 결정했다. 그것이 르메인이었다. 문제는 르메인이 장자가 아니었다는 것에 있었다. 때문에 르메인의 형이 반기를 들었고, 그에 대한 결과가 이제 얀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전하의 형님 되시는 왕제께서는 지금, 지그프리드령보다 더 남쪽에 있는 베레카 협곡 깊은 곳의 탑에 계십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를 걱정하는 것으로 보였던지, 얀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왕자님께서 카밀론에 들어가지 못하시면, 저희 집으로 모셔갈 생각이니까요.” 당당하게 꺼내놓는 얀의 계획에,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얀의 말대로 되려면 지그프리드는 공작령이 아니라 왕국이 되어야 할 터였다. 카이리스에 독립을 선언하고 전쟁이라도 벌이지 않는 이상은 왕세자위에서 밀려난 왕자를 데리고 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얀 역시 그런 사실을 익히 알고 하는 말이었으니, 칼리안이 웃을 수 밖에. 아무튼 르메인은 형제들이 서로 피 튀는 싸움이나 하다 죽거나 갇혀 살게 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잠시 가늠해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평화로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칼리안이 잠시동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왕자님.” 얀의 조용한 목소리가 칼리안을 불러세웠다. 얀을 쳐다보니, 그 시선이 칼리안의 허리춤에 닿아 있었다. 얀의 눈길을 따라간 칼리안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칼리안의 허리춤, 정확히는 재킷의 주머니 안에서 붉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칼리안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엘프 루카로부터 받아왔던 검은 조약돌이었다. 시스파니안이 지니고 있으라 했기 때문에 버릇처럼 항상 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녔던 것이었으나, 지금처럼 빛이 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실드] 갑작스러운 상황에, 칼리안이 긴장하며 얀의 앞에 실드 하나를 만들었다. 혹시라도 폭발 같은 일이 벌어질까봐 걱정한 것이다. 곧 칼리안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조약돌을 꺼내려다,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 정원의 한 구석, 장미 나무 아래 자라난 작은 꽃가지. 이 쌀쌀한 날에 홀로 피어있는 붉은 장미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단순한 꽃이었다면, 그저 이상하게 생각하고 넘겼을 것이다. 작은 꽃이 참 늦게도 피었구나 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으므로, 칼리안의 입에서 의문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왜?” 장미는, 조약돌과 똑같은 색의 빛을 내고 있었다. 칼리안의 눈과도 닮은, 피같이 붉은 빛을. < 제14장. 오랜만입니다. (5) > 엘프 시아, 장미, 조약돌, 시간의 축, 시스파니안. 그리고 세렌티. 순식간에 떠오르는 여러 단어들을 뇌리에 새긴 칼리안이 한 발을 뗐다. 그러자 얀이 나서며 말했다. “제가 살펴볼게요.” 무슨 용기인지는 몰라도, 위험해 보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칼리안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리고 한 걸음씩 뒤로 걸었다. 대여섯 걸음을 물러서자, 조약돌의 빛이 사라졌다. 물론 꽃의 빛도 사라졌다. 다시 앞으로 몇 걸음. 꽃과 돌이 함께 빛난다. 칼리안은 곧 장미 정원을 한바퀴 돌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같은 빛을 내는 것은 찾지 못했다. 같은 꽃이 더 없음을 확인한 칼리안이 다시 본래 서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신중한 걸음으로 꽃 앞으로 걸어가, 왼손에는 돌을 든 채 오른손을 내밀어 꽃잎을 건드렸다. 그러자, - 파스스······. 붉은 꽃잎이 순식간에 시들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함께 조약돌의 빛도 사라졌다. 생각지 못한 모습에, 섣불리 손을 댔다는 것을 깨달은 칼리안이 당혹스러운 소리를 냈다. “이런.” 떨어진 꽃잎은 곧 검게 타들어간 재와 같이 바스러져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마치 멈추어 놓았던 시간이 한 순간에 흐른 것 같다고,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그 생각의 꼬리를 잡아챘다. ‘시간.’ 장미가 언제 피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만약, 오래 전부터 피어 있던 것이라면.” 그렇게 가정한 칼리안의 눈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선 시간의 말을 듣고 대답하던 시아. 그리고 시간을 멈추어 둔 것처럼 오랫동안 피어 있던 꽃. “틀어진 시간을 바로잡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시간을 바로잡는다면, 가장 먼저 바로잡혀야 할 것은 칼리안 자신이 아닌가. 그런 칼리안이 멀쩡히 서서 이 곳에 있으니, 지금 떠올린 결론은 정답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 그녀는 네가 조급하게 굴지 않기를 바란다. 시스파니안의 음성이 기억을 헤집고 올라왔다. 그것이 주는 답답함 때문에, 칼리안은 치미는 욕지거리를 집어넣으려 아주 오랫동안 눈을 감았다 떴다. “눈 앞에서 시간이 흘러갔는데, 조급하게 굴지 말라니요.” 그리고 냉소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 * * 앨런은 따로 집사나 하인을 두지 않았다. 어지간한 것은 마법으로 대충 해결할 수 있었지만, 마법사들이 으레 그렇듯이 집에 외부인이 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더 컸다. 그러다보니 카이리시스에서 앨런이 고용한 사람은 딱 한명, 마부 오스카 뿐이었다. “마나실 님, 오늘은 귀가가 빠르시네요.” 벌써 반년 가까이 앨런의 유명한 자개 마차를 몰고 있는 오스카가 이렇게 말하며 친근해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빠르다 해도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새벽이 아닌 밤 공기를 맡으며 집에 돌아가려는 길이었다. 그나마도 르메인이 왕자들과 석찬을 가지기로 하지 않았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을 일이리라. 오스카의 인사에, 앨런이 그와 비슷하게 웃으며 말했다. “빨리 도망가세.” “네? 도망이라니요?” 오스카가 놀라서 물었고, 앨런은 대답 대신 일단 마차에 올랐다. 마부석 뒤의 들창 너머로 어딘가 신난 듯한 앨런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전하께서 석찬에 가셨다네. 그 사이에 대강대강 정리해두고 몰래 도망쳐 나오는 길이니 얼른 가야 하네.” 분명 르메인은 석찬 이후 마법사단에 대한 일을 마저 하자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앨런은 그 말을 못들은 척, 급한 일만 대충 마무리한 뒤 이렇게 빠져나온 것이었다. 자신이 없어진 것을 알면 르메인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괜스레 우쭐해진 마음에, 앨런의 입이 다시 열렸다. “오늘 리베른에 살던 며느리와 손녀가 도착했네. 전하께서는 어찌 그리도 무심하신지. 이런 날은 알아서 집에 가보라 하는 것이 도리 아닌가? 늙은이 부려먹는 것에 아주 재미가 드셨으니.” 오스카가 큰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얼른 도망가겠습니다.” 오스카는 곧 말의 고삐를 고정시킨 끈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앨런이 한숨을 쉬었다. 마차를 향해 누군가 황급히 달려오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르메인이 보낸 사람이 아니면 집에 가려는 앨런을 붙들러 올 이가 없었다. 때문에 앨런이 입을 열어 구시렁거렸다. “아니 대체 밥을 어디다 말아드시고 왔기에 벌써 아셨나?” “네?” 앨런에게 달려오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마부가 되물었고, 앨런은 대답 없이 다시 한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곧 멀리서 황급히 앨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나실 경, 기다려 주십시오!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그제야 앨런의 한숨과 푸념 소리를 이해한 오스카가 들창 너머로 말을 전했다. “마나실 님, 아무래도 도망 못가시겠습니다.” 결국 앨런은, 빨리 출발하지 못한 것을 조금 미안해하는 오스카를 뒤로 하고 터덜터덜 아르피아 궁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르메인을 만나면 꼭 한 소리를 해 줘야지. 그런 다짐을 하면서. 그런데 시종이 앨런을 안내한 것은 집무실이 아니었다. 아르피아 궁의 후원 한 가운데에서 익숙한 기운 하나가 멀뚱히 있는 것이 느껴졌으므로, 앨런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드님이 끊으신 것을 대신 드시나.” 또 술을 마시자는 것이다. 그것도 10월의 이 쌀쌀한 밤에.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고 더 걸을 것 없이 손가락 한 번을 움직여 르메인의 바로 앞으로 워프했다. 술잔에 술을 따르려던 르메인이 슬쩍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오는 것을 보니 마법사가 맞기는 맞군.” 얀이 그랬던 것처럼 꽤 놀라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무덤덤하다. 재미가 사라진 앨런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이런 날 밖에 앉아 술 드시면 입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손을 튕겨 르메인 주변의 온도를 조금 올렸다. 몸이 따뜻해진 것을 느낀 르메인의 입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역시, 술 상대로 마법사만한 이가 없지.” 르메인이 자신의 맞은편 바닥을 손으로 툭 쳤다. 다른 말 없이 르메인의 손이 닿은 곳에 털썩 앉은 앨런이 르메인의 손에서 술병을 건네 받아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그리곤 그 앞에 놓인 빈 잔에 자신의 것도 따랐다. 세 왕자와의 저녁을 말아먹고 온 뒤에 갑자기 술이라니. 무슨 일이 있는지 묻는 대신, 앨런이 르메인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히며 말했다. “지난 것을 생각해보아야 속만 아픕니다.” 신통방통한 앨런의 눈치가 어디 칼리안에게만 쓰이겠는가? 멍하니 먼 곳을 보던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앨런을 쳐다봤다. 제 속을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이었다. 뻔한 일이다. 모두가 성인이 된 왕자들 셋을 한꺼번에 보고 왔으니. 이런 자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까 착잡했으리라. 경쟁에서 밀릴 두 놈을 걱정하다보니 먼 곳에 갇힌 형 생각도 나고, 실리케를 들인 것이 후회도 되고 했을 터였다. 그러게 하나만 낳을 것이지, 왕자를 셋이나 만들어 놓고는 왜 후회를 하는 것인지. 잠깐 이런 생각을 하던 앨런은, 칼리안이 막내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르메인이 셋을 낳았으니 자신이 그런 어여쁜 제자를 만난 것이 아닌가. “그냥 앞길만 보고 사시지요.” 그 속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 것으로 오늘의 이른 귀가를 막은 르메인에 대한 복수를 마친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그 후로 둘은 말 없이 술잔만 주고 받았다. 개울에 흐르는 물 소리가 익숙해져 풀벌레 소리가 더 크게 느껴질 때 쯤,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세 왕자님을 다 합쳐도 체이스 하나 못 따라간다 생각했지요.” 르메인은, 뜬금 없이 왜 남의 자식들을 비교하고 있느냐는 말 대신 조용히 말을 받았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 말인가.” 앨런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그 뱀 같은 성정의 데블란 밑에서 어떻게 그런 아들이 났는지 신기하다고, 르메인도 그리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전하의 세 아드님이 체이스만큼 대단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두고 보니 영 천치들은 아니더군요. 다들 알아서 제 살길은 마련해두고 움직일테니 걱정 마시지요.” 그 말을 들은 르메인의 눈이 잠시 앨런을 응시했다. 제 살길 마련하기 힘들어보이는 한 놈이 있었기 때문이다. 곧 르메인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에 하나 칼리안이 길을 잃게 되거든.” 그렇게 나온 말이 한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르메인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뒤 말을 이었다. “경에게 부탁을 하고 싶네.” 만약 칼리안이 왕세자위에 앉지 못하면, 칼리안을 살려서 도망쳐 달라는 말이었다. 굳이 그것을 앨런에게 부탁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칼리안이 밀려나는 상황이라면, 그때 자신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앨런이라면 그런 사정을 잘 알테고 또 칼리안을 굉장히 아끼니, 이런 부탁 정도야 당연히 들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진지한 고민 끝에 건넨 르메인의 말을 들은 앨런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전하의 막내 아드님을 챙겨갈 일이 있을런지.” 앨런이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고 생각한 르메인의 얼굴이 크게 찌푸려졌다. 그것을 본 앨런이 장난기 다분한 눈을 하며 물었다. “새끼 코끼리 한 마리가 전하의 막내 아드님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이어진 말에, 앨런의 워프에도 담담했던 르메인의 눈이 치켜떠졌다. 칼리안이 밀려나게 된다면 칼리안이 아니라 나머지 두 왕자의 살길과 카이리스의 앞길을 걱정해야 된다는 것을, 그러니 앨런은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이었다. 결국, 술이 완전히 깨버렸다. * * * 칼리안은 이틀 동안 조찬에 나가지 않았다.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진심과 핑계가 반반 섞인 이유를 댔다. “왕자님. 혹시 내일도 조찬을 물릴 생각이십니까?” 결국 이틀 째 되는 날 밤, 얀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실리케가 왕세자를 언급하고 간 것과 연관을 짓는다거나, 혹은 칼리안의 건강을 염려하는 소리가 나온다거나 하는 것들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내일까지만. 모레부터는 갈게.” 아침 하나 마음대로 못 하는 생활로 돌아온 것을 여실히 깨닫거나 불평하는 대신, 칼리안은 이렇게만 대답했다. 얀도 칼리안이 왜 조찬에 나서지 않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다른 잔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전해둘게요. 그럼 저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주무시기 전에 창문 꼭 닫으시고요.” “알았어.” 그렇게 끝인사를 전한 얀이 밖으로 나가 문을 잠근 뒤, 혼자 남은 칼리안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후우.” 칼리안이 조찬에 나가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 란델 때문이었다. 칼리안은 빛난 것이 단지 장미꽃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란델을 연관지었다. 논리적인 근거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란델이 가꾸는 정원이었던 까닭이었다. 물론 조약돌과 란델이 관련되어 있으리라 여기지는 않았다. 단지, 장미의 시간을 멈춰놓은 것이 혹시 란델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에 생각이 미쳤을 뿐이었다. 신관들이 태어나는 텐실의 피가 란델에게도 흐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뜬구름 잡는 의심을 뒷받침할 근거가 아무것도 없으니, 우선은 란델의 행보를 지켜보아야겠다는 결정을 내린 칼리안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란델을 의심하는 눈길을 보낼까봐 일단 란델과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사람 마음을 꿰뚫는 것이 앨런과 비슷한 수준이 아니던가? 그렇게 잠자리에 누워 이런 저런 생각을 이어가던 칼리안은 곧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동이 트기 직전의 어두운 새벽. - 사락······. 바람에 커튼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고, 감겨 있던 칼리안의 눈이 스르륵 떠졌다. 누군가의 소리 죽인 발걸음을 느낀 까닭이다. ‘침입자.’ 얀은 분명 방문을 잠궜다. 얀이 가진 열쇠가 아닌 다른 것으로 열면, 시스파니안이 만든 경보 마법이 발동된다. 그러니 방문으로 누군가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답답한 기분에 창을 열어둔 채로 잠에 들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창문의 경보 마법이 발동되지 않은 것이다. 얀의 말을 듣지 않아 귀찮은 일이 생겼음에,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누운 채로 침입자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실리케. 혹은, 란델. 과연 누가 보낸 손님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벌써부터 이리 환영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잠시 후, 침실 커튼을 조용히 젖히는 소리가 났다. 이제 완연히 가까워진 침입자의 기색을 살피던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한, 하지만 이렇게 찾아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칼리안은 ‘검’을 만들려던 것을 미루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침입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뭡니까.” 침입자는, 얼굴을 가리지도 않은 채였다. 그리고 그는 칼리안이 깨어난 것에 놀라지 않았다. 경계심 가득한 칼리안의 말에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칼리안의 눈을 마주보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마법이나 좀 쓴다더니, 바람결에 깰 줄을 알고.” 그것이 누구든, 이 시간에 창문으로 들어온 이를 반겨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불쾌한 낯빛을 굳이 가리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왜 오셨는지 물은 겁니다. 이런 시간에, 이런 식으로.” 눈빛부터 목소리까지 온 몸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칼리안을 보며, 손님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 제14장. 오랜만입니다. (6) > 도대체. 초대 받지 않은 자리에 마음대로 걸음하는 것은, 실리케를 닮은 것인가? 방문으로 나가 긴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온 뒤 다시 긴 복도를 걸어와 방문을 두드리는 대신, 창문으로 나와 바로 아래 창문으로 들어오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칼리안을 찾은 사람. 바로, 윗방 사는 플란츠였다. 아무리 형제라지만, 어떻게 일국의 왕자가 잠들어 있는 방에 침입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당장 기사라도 불러내면 어찌하려고? 하는 생각을 하다가, 체르밀 궁의 기사들도 결국 브리센 가문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문에 칼리안은 짜증 섞인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여전히 날이 선 목소리로 세 번째의 같은 질문을 했다. “말을 나누러 오신 겁니까. 싸움을 나누러 오신 겁니까.” 플란츠의 대답은 짧았다. “말.”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 있을 가장 어두운 시간에 나눠야 할 말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도, 다름아닌 칼리안과 플란츠의 사이에서. 때문에 칼리안은 플란츠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뒤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가운을 걸쳐 입었다. 플란츠와, ‘말’이라는 것을 한번 나눠보기로 한 것이다. “차는 못 드리고, 술은 없습니다.” 칼리안의 말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고, 칼리안은 테라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새벽 공기가 찼지만, 어차피 칼리안은 기온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플란츠야 뭐, 감기에 걸리든지 말든지. 플란츠가 뒤따라 나와 테라스의 의자에 앉자, 칼리안이 잠시 주문을 외운 뒤 마력을 운용했다. [사일런트] 굳이 플란츠의 앞에서 마법을 쓴 것은 물론 이 조용한 새벽에 둘의 대화 소리가 밖에 새어나갈까 우려한 까닭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플란츠가 칼리안의 정체를 그만 의심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플란츠는 사일런트의 반투명한 막을 본 뒤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말했다. “하실 말씀, 듣겠습니다.” 이런 칼리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장미가 사라졌던데. 네 짓일테지.” 칼리안이 잠시 웃었다. 어쩐지 범상치 않은 꽃인 듯 하더니. 꽃을 보았을 때 칼리안이 예상했던 것처럼, 꽃은 계속 시들지 않고 피어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도, 플란츠가 관심을 가졌을 만큼 오랫동안. 직접 살려뒀던 장미도 아닌 마당에 장미를 없앤 것까지 부인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칼리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런 날에 홀로 피어있는 것이 신기하여 자세히 살펴보다 그리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플란츠를 추궁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꽤 아끼시는 꽃이었나 보군요. 꽃 한 송이 사라졌다고 이런 무례한 방법으로 찾아오시다니.” 그 말에, 플란츠가 멀리 장미 정원 쪽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한 번 보고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꽃 한 송이 없앴다고 이렇게 꼭꼭 숨어 있는 것을 보니, 그냥 꽃이 아니라는 걸 아우님도 눈치를 챈 것 같은데.” 플란츠는 단순히 그 꽃이 오랫동안 피어 있었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여겼던 듯 했다. 칼리안이 이상함을 느낀 것과는 이유가 조금 달랐다. 그리고 또 하나, 칼리안이 조찬에 나가지 않는 이유도 얼추 눈치챈 모양이었다. 물론 칼리안이 그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거나, 플란츠의 말을 인정할 필요는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플란츠의 생각을 정정해주듯 대답했다. “제 시종이 말을 전했을 텐데요. 여독이 풀리지 않아 못 간 겁니다. 꽃 때문이 아니라.” 그 말에, 플란츠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인 것을 알지만 그냥 그런 셈 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장미 정원 쪽에 보내두었던 시선 그대로 입을 열었다. “란델 형님에게 정원에 한 달이 넘도록 시들지 않는 장미가 있는 것을 아는지 물으니, 모르는 일이라 대답하더군.” 한 달이라니. 칼리안이 잠시 놀란 눈을 했다. 신관의 능력이 아니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생명을 이어둘 수는 없다. 문제는, 신관이라는 점을 란델이 왜 숨기느냐는 것이었다. 그냥 밝히면 되는 것을 숨기니 그 뒤에 뭔가 더 있으리라 여겨지는 것이다. 때문에 플란츠는 란델을 향한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칼리안도 장미를 살려둔 것이 란델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플란츠는 의심되는 것을 곧이곧대로 물어보았다는 것이었고 칼리안은 자신이 의구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감추려 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의심되는 것을 저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보면 누가 인정하겠는가? 거칠 것 없는 그 행동이 실로 플란츠답다고 해야 할지. 어리숙하다고 해야 할지. 칼리안이 실소하며 말했다. “안다, 내가 했다, 이런 대답을 기대하고 물으신 겁니까?” 칼리안의 비꼼에, 플란츠가 한 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건방지기는.” 새벽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잠시 쓸어 넘긴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칼리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다른 이야기였다. “형님에게는 내가 태워버렸다 했으니 그렇게 알아라.” 그 말에,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플란츠가 그 장미를 자신이 없앴다는 핑계를 대줬단 말이라는 것을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칼리안도 의심을 하게 되었음을 란델이 알지 못하도록 나서줬다는 그 행동을, 칼리안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입니까.” “의심하는 것을 안 들키려고 조찬에 안 나온 것 아니던가.” “제 말은.” 칼리안이 매서운 눈으로 플란츠를 쳐다봤다. “왜 형님이, 란델 형님의 눈에서 저를 가려주셨는지를 물어보는 겁니다. 차라리 저까지 경계하는 것이 형님께는 더 좋은 일일 텐데요. 게다가 형님께서는 저도 의심하고 계셨잖습니까.”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플란츠는 칼리안을 도울 사람이 아니다. 플란츠가 옛 칼리안을 얼마나 모질게 대했는지 잘 알고 있으니 장담할 수 있었다. 플란츠는 절대로, 칼리안에게 좋은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형님과 저. 그럴만한 사이가 아닌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기억은 하나보지.”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잠깐 웃음소리를 냈다. 역시, 여전히 칼리안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의심이 아니라 확신일지도 몰랐다. 칼리안은 기억에 대해 대답하는 대신 다시 물었다. “왜 나서서 숨겨줬다는 것인지, 그것을 물었습니다.” 그 말에, 플란츠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를 쳐다봤다. 플란츠의 눈이 헤이시아 궁이 있는 곳을 향했다. 실리케가 있을 곳이다. “무슨 힘을 가지고 있든, 어차피 란델 형님은 이기지 못할 테니까. 나처럼.”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플란츠의 말은, 란델이 실리케에게 이길 수가 없으니 칼리안을 돕기로 했다는 말과 다름 없었다. 그것은 곧 칼리안이 실리케를 축출해주기를 바란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지금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아시는 것이 맞습니까.” 칼리안의 질문에 플란츠는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동생이 암살되고, 형이 타국으로 도망치고, 아버지가 의문사했다. 그렇게 비어있는 왕좌에 오른 뒤에는 미친 왕이라 불렸다. 그것을 기억하는 칼리안이 플란츠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형님은. 카밀론 궁에 가실 생각이, 없으셨던 거군요.”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답을 전했다. * * * 지금 칼리안이 원치 않던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플란츠가 일으킨 전쟁이 그 원인이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옛 칼리안이 그런 삶을 살다 간 이유에도 플란츠의 멸시와 괴롭힘이 상당한 몫을 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플란츠와의 대화 한 번으로 그에 대한 증오를 모두 털어내지는 못했다. 실리케에게 권력을 가져다 줄 도구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했던 플란츠에 대한 연민을 느끼거나 동정심을 가져 줄 만큼 착한 사람도 되지 못했다. 다만 아르센 헤르츠에게 그랬던 것처럼, 과거에 있었던 악연의 그림자를 플란츠에게 투영시키진 않겠다 하는 정도로는 마음을 바꿨다. 거기까지가 지금의 칼리안이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이해였다. 그리고 그렇게 플란츠를 ‘이해’해주기로 한 것의 결과로, 칼리안은 빠지려 했던 조찬에 참석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결국 플란츠가 그 새벽에 찾아와 하고자 한 말은, 란델이 의심하지 않도록 알아서 눈을 가려 놨으니 괜히 몸을 사려서 의심받지 말고 아침밥 먹으러 오라는 것이었으니까. ‘밥 먹으라는 말 뒤에 붙여둔 것들이 너무 많았지만.’ 조찬에 가겠다는 칼리안의 말에, 얀이 좋아하며 준비를 서둘렀다. 때문에 평소보다 조금 일찍 준비가 끝났다. 물론 플란츠가 창문 너머로 다시 사라진 이후 칼리안이 다시 잠들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시간이 남게 되었으니, 칼리안은 아직까지도 방 한 구석에 잔뜩 쌓여 있는 선물 상자를 보며 얀에게 말했다. “선물, 지금 보자. 확인 하고 조찬에 가면 될 것 같아.” 이틀간 생각에 빠져 있느라 미뤄뒀던 선물을 열어보려는 것이다. 다만 플란츠와의 대화를 통해 떠올린 것이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두 개의 조건을 더했다. “기사 가문, 그리고 적당히 믿을 만한 이들이 보낸 선물만.” 그 말에, 얀이 의문 어린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마법사가 아니라, 기사 가문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당장 능력이 있는 마법사들은 스승님의 마법사단에 소속될 거야. 그리고 앞으로 능력이 있을 마법사는, 마법학원을 통해 내 수중으로 들어올 테고. 그렇게 되면 그들의 가문도 자연스럽게 나와 손을 잡게 되니 굳이 가문을 따로 챙길 필요는 없어.” 이렇게 마법사들의 힘을 얻었다면 기사 세력은 불필요한가. 당연히 아니었다. “마법사들이야 당연히 강하지만, 많지 않잖아. 일순간 브리센이 사라져버렸을 때 카이리스 이곳 저곳에 퍼져 있는 귀족들이나 다른 나라에서 싸움이라도 걸어오면, 마법사단만으로 대처하기 어려울 수 있어.” 칼리안의 말대로였다. 브리센의 기사단은 르메인을 위협하면서, 한편으로는 카이리스와 카이리스의 왕실을 보호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면, 왕실의 위협과 왕실의 안위가 함께 사라진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칼리안이 지금 당장 칼을 들고 나가 실리케와 브리센 후작을 암살해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레이와는 달랐다. 그야말로 필요악인 것이다. “필요악 같은 것이 없게 하려면, 브리센의 기사단을 대신할 기사 세력이 있어야 해. 그렇다 해서 코끼리들을 내 자리 싸움에 끌어들일 순 없으니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기사 가문들과 손을 잡아야지.” 언젠가 슬레이만이 그의 딸 드미레아에게 말했던 것처럼, 지그프리드는 왕을 옹립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들을 카이리시스로 불러올 수는 없었다. 칼리안의 이런 설명에, 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많은 선물 중 몇 개를 골라내어 칼리안의 앞에 늘어놓았다. 중소 규모의 기사 가문들에서 보내온 선물이었다. 그 수가 예상보다 많았으므로, 잠시 선물상자들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말했다. “하나하나 만나보기 어렵겠는데.” 우선은 그들의 이름을 잘 기억해 둔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식당으로 향하는 내내, 브리센의 눈길을 끌지 않으면서 만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브리센에 의해 세력이 많이 기울었다는 기사 가문의 가주 에이프린 백작이 보내온 것은, 백작 부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호밀 쿠키였다. 온갖 보석이나 귀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선물들과 많이 달라서 칼리안이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것이기도 했다. 바로 그 쿠키 하나를 집어들어 입에 넣은 앨런이 물었다. “란델 왕자에 대한 뒷조사를 해 볼 요량이십니까? 필요하시다면 협회장을 불러와 드리지요.” 그 말에, 별 탈 없이 조찬을 마치고 돌아와 앨런과 마주보고 앉아있던 칼리안이 소리내서 웃었다. 카이리스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 겸, 폴룬 마법학원의 교장 겸, 칼리안 전용 정보조직의 보스를 맡고 있는 에우리아의 얼굴이 생각난 까닭이다. “협회장은 안 와도 됩니다. 소용 없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란델은 지금의 저와 비슷해요. 숨기고 있는 것이 어떤 힘인지 직접 제 입으로 말하고 드러내지 않는 이상은 알 수 없으니, 뒤를 캐도 나오는 것이 없을 겁니다.” 누군가가 칼리안이 사실은 베른이라는 것을 밝혀내려면, 칼리안이 직접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아닌 이상은 절대로 칼리안이 숨긴 것을 밝힐 방도가 없다. 란델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내가 신물의 힘을 쓸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는 한은 알아낼 수가 없을 터였다. “하나 궁금한 것은, 대체 왜 남들이 다 보는 정원에 그 장미를 피워냈느냐는 것입니다. 덕분에 다들 란델을 의심하게 되었으니까요.” 그 말에,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밝혀지지 않을 비밀이라면 한 번쯤 드러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요. 이리 생각이 깊으신 우리 왕자님도, 키리에를 구하겠다며 오늘만 사는 것처럼 굴었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도박장에 가서 칼부림을 했던 날을 말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앨런의 가시를 들은 칼리안이, 부끄러움에 얼굴을 조금 붉혔다. 사실 앨런의 말이 정답이었다. 칼리안이 레넌을 축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원에 나갔던 란델이, 칼리안을 닮은 장미가 있기에 피워냈을 뿐이니까. 그것을 모를 칼리안은 그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하나 얻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곧 칼리안이 주머니 속에서 검은 조약돌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어찌됐건 이것과 란델의 힘이 왜 반응했는지를 알아보려면, 란델이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정원에 꽃을 피운 이유도, 숨겨왔던 것도 스스로 꺼내놓을 테니까요. 그런데 란델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은 딱 하나 아닙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안을 보는 앨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앨런이 르메인에게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칼리안이 실리케를 내보내면 란델도 움직일 것이라고. “실리케를 축출하는 것. 그래서 저와 란델이 둘만 남으면, 그때는 숨긴 것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칼리안이 그 때의 앨런과 같은 말을 하고는 뒤를 이어 말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고요.” 잠든 신의 신력을 사용하는 신관이 숨긴 것이 클지. 소드마스터의 기억을 가진 마법사가 숨긴 것이 클지. 열어보면 알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칼리안이 앨런의 것을 닮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와, 독대를 하고 싶습니다. 아무도 모르게요.” 아들이 제 아버지를 몰래 만나보고자 한다는 그 말에, 앨런이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귀족들의 입맛에는 도무지 맞지 않을 호밀 쿠키 하나를 더 집어먹었다. <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1) > 르메인이 항상 부려먹기만 한다는 앨런의 말은 정말 개똥같은 소리였다. 분명히 르메인은, 앨런을 부려먹는 만큼 대우를 해주고 있었다. 왕궁에서 일하는 이들 중, 르메인의 집무 공간인 아르피아 궁에 개인 집무실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앨런이었으니까. “와······” 앨런의 집무실이 있는 곳에 처음 와본 칼리안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직 집무실에는 들어가보지도 않았으니, 집무실의 시설이나 넓이에 감탄한 것은 아니었다. “엄청난데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앨런이 항상 르메인과 붙어있게 된 이유를 한 눈에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아르피아 궁의 엄숙한 복도에 자신의 웃음소리가 울리는 것을 깨달은 뒤에야 간신히 웃음을 멈춘 칼리안이 말했다. “전하께서 스승님을 너무 잘 챙겨주셔서 불평을 하신 거군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아르피아 궁 가장 상층에 위치한 두 개의 집무실을 쳐다봤다. 역대 카이리스 국왕들의 초상화가 빼곡히 걸린 복도의 왼쪽에는 르메인의 집무실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앨런의 집무실이 있었다. 즉 르메인은, 자신의 집무실 바로 맞은편에 앨런이 일할 곳을 마련해 준 것이다. 문만 열면 국왕이 있으니, 카이리스에서는 별다른 작위도 없는 앨런에게 이보다 더한 대우가 과연 어디 있겠는가? “그런 말씀 마시지요.” 옆에 있던 앨런이 이렇게 툴툴거렸다. 본래 나르실관에서 일하던 그에게 더 크고 좋은 방을 준다기에 왔더니 르메인의 맞은편 방이었다. 싫다고 하니, 르메인은 그럼 그냥 자신의 집무실에 책상 하나를 더 놓겠다고 했다. 국왕의 이런 파격적인 대우에, 울며 겨자먹기로 새 집무실에 들어온 지 어언 4개월이다. “매일 얼마나 시달리는지 아마 가늠도 안되실 겁니다.” 앨런의 주 업무는 마법사단 발칸과 관련된 것이었다. 물론 르메인과 함께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르메인이 자신의 몫을 하나 둘 앨런에게 넘겨놓기 시작했다. 덕분에 ‘왕자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스승이 남는 시간에 국왕의 일을 조금 돕는’ 것을 생각했던 앨런은, 이제 일하고 남는 시간에 왕자의 마법을 간신히 보아주는 정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앨런이 칼리안의 스승을 자처했던 것은 왕궁 안에 들어오기 위한 하나의 명분에 불과하긴 했다. 게다가 칼리안 역시 옛 칼리안이 잘 익혀둔 지식으로 혼자서도 마법을 잘 수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전하께서 내려주시는 일거리가 어찌나 하해와 같은지.” 하염 없는 푸념을 늘어놓는 앨런을 보며, 칼리안의 웃음이 다시 시작됐다. 앨런은 얼른 집무실 문을 열어 웃음을 끊지 못하는 제자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렇게 앨런의 집무실 안에 들어선 칼리안은, 웃음을 지우려 노력하며 소파에 앉았다. 지금 칼리안이 이렇게 앨런을 따라 아르피아 궁으로 온 것은, 르메인과의 독대를 위해서였다. 칼리안의 부탁을 듣기가 무섭게 앨런이 이 곳으로 칼리안을 데려온 것이다. ‘어차피 전하와 왕자님은 아무리 몰래 만난다 해도 다 들키게 됩니다. 그러니 그냥 제 집무실에 볼 일이 있다 하고 당당히 가시지요. 그 편이 낫습니다.’ 덕분에 칼리안은 앨런과의 대화를 마치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매우 많은 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당당히 아르피아 궁에 도착했다. “잠시 계십시오. 이제 전하를 몰래 모셔 올 터이니.” 앨런이 이렇게 장난스레 말하며 나간 뒤, 칼리안의 심장이 다시 두근두근 소리를 냈다. 르메인과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칼리안이 요청했던 것은 맞았지만,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곧바로 만날 줄은 몰랐던 까닭이었다. 칼리안은 앨런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 목을 가다듬고 얼굴 근육도 몇 번 움직여보고, 또 옷매무새도 점검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긴장한 것이다. 오래지 않아 문이 다시 열리며 앨런이 먼저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들어서는 르메인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칼리안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그래.” 짧은 말로 칼리안의 인사를 받은 르메인이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앨런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독대를 원한다 했으므로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 재밌다는 듯 웃으며 이 곳에 온 사람이 맞을까 싶을만큼 진지한 표정이 된 칼리안이 르메인을 향해 말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그 말투가 상당히 딱딱했다. 그런 칼리안의 얼굴을 보던 르메인이 편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어려워하지 말거라.”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고, 르메인의 말이 이어졌다. “석찬에서 왕비의 언행을 마음에 담아 둔 것은 아닌지 걱정하였는데, 웃고 떠드는 것이 들려오니 좋더구나.” 아무래도 복도를 울리는 칼리안의 웃음과 대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민망해진 칼리안이 사과를 전하려는데, 르메인의 말이 먼저 나왔다. “나쁘게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염려하지 말거라. 오히려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자란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으니.” 진심 어린 르메인의 말에, 칼리안은 세크리티아의 국왕 데블란에게도 가져본 적 없던 깊은 감사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전하. 마음을 써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대답에, 르메인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행한 일이다.” 그렇게 말한 르메인은 아주 잠시동안 칼리안의 눈을 깊이 응시했다. 그리고 조금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마나실 경이 하는 말이, 네가 또 뭘 부술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한번 들어보라 하던데.” 걱정과 우려가 함께 들어있는 말이었다. 그런 르메인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칼리안의 눈이 문 쪽을 향했다. 앨런이 있을 곳이었다. 지금 르메인의 말만 들어보면, 그야말로 플란츠의 몇 배 쯤 되는 망나니가 따로 없지 않은가?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그 마음을 잘 알 것 같아서, 르메인은 칼리안의 한숨 소리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곧 칼리안이 앨런을 향한 원망의 눈빛을 접고 르메인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네, 전하. 부술 것이 있기는 있습니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부술 것인지 마음의 준비를 해 둘 테니 이야기 하라는 뜻이었다. “당연히, 브리센입니다.” 칼리안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르메인의 시선이 창 밖을 향했다. 레넌 브리센, 그레이 브리센. 둘을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이번에 칼리안이 입에 올린 것은, 특정 한 명이 아닌 브리센 후작가 그 자체였다. 물론 르메인 역시 그 말을 아주 잘 알아들었다. 다만 르메인은 그에 대해 다시 우려하는 대신 가능한 담담하려 애쓰며 말했다. “그래.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지. 계속 말하거라.”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우선은 기사 가문의 귀족들을 만나볼 생각입니다. 때문에 그것이 혹시 전하께 누가 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당돌한 질문이다. 칼리안의 세력이 커지는 것이 르메인에게 해가 되거나 혹은 르메인이 경계할 문제가 될지를 묻는 것이다. 즉 칼리안은, 자신의 힘이 커지는 것을 르메인이 어찌 생각하게 될지를 묻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것을 이해한 르메인이 실소하며 말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하더니.” 그 말에, 칼리안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했다. “네가 마법학원을 만든다 하였을 때, 마나실 경이 같은 것을 물었지. 헌데 이제는 기사들이구나.” 그렇게 말한 르메인이 칼리안을 보며 퍽 자상한 아버지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괜찮으니 원하는대로 해보려무나.” 허락을 받은 칼리안이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부탁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나갔다. “제가 대화를 나눠보고자 하는 몇몇 이들이 있습니다만, 브리센의 눈을 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석찬 자리에서 플란츠 형님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조금 키워서 추진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석찬에서 르메인이 꺼낸 말은 모두 빈말이 아니었다. 때문에 르메인은 칼리안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를 바로 알아차렸다. “사냥을 말하는 것이냐?” “네, 전하.”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식사 중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인데다 제가 아닌 플란츠 형님에게 권하셨던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갑자기 추진된다 해도 의심할 자가 적을 것입니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게다가 사냥대회이니, 기사 가문의 귀족들이 모두 참여한다 하여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왕비께서도 자리하지 않을 것이고, 곧 브리센 변경백에 대한 소문이 퍼질 것이니 브리센 후작 역시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말에, 르메인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사냥대회 한 번 여는 것이 어려웠던 탓은 아니었다. 칼리안의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르메인이 조용히 물었다. “혹시 플란츠와 왕비가 서로 등을 돌린 것이냐.” 브리센의 눈은 피해야 한다 말하면서, 정작 플란츠가 반드시 참석할 수 밖에 없는 자리를 마련해달라 하니 물어보는 것이었다.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최소한 플란츠 형님은 마음을 돌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르메인은 다소 착잡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려울 것 없는 일이다. 준비하라 일러두마.” 흔쾌한 허락에, 칼리안은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얘기하거라.” 이어진 칼리안의 말은 르메인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카이리시스와 지그프리드령 사이에, 대규모 이동 마법진을 만들어두고 싶습니다. 추후에는 다른 지역으로도 연결되도록 하고자 합니다.” 장장 2개월을 달려가야 닿을 수 있을 코끼리들의 땅. 그 곳을 사흘 안에 갈 수 있도록 할 이동 마법진의 구축을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지그프리드라.” 지금 칼리안이 꺼낸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만약의 경우 슬레이만의 기사들이 사흘만에 카이리시스를 뒤덮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앨런을 통해 칼리안의 시종이 지그프리드의 장자임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가주인 슬레이만의 성정 역시 잘 알고 있는 르메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칼리안이 꺼낸 이야기는 그들에 대한 신뢰만으로 쉽게 결정할 수 있을 문제는 아니었다. 결국 르메인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답했다. * * * 사람 취향이란 본래 어느 한 순간 손바닥 뒤집히듯 바뀐다. 베른이 즐겨 마셨던 커피를 칼리안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실리케의 앞에서 몸 속의 독을 풀었던 그 날에 마신 것이 커피였기 때문에, 칼리안은 특별히 누가 주는 것을 거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커피를 먼저 찾아서 마시지도 않았다. 은근한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 이후, 얀은 단 한번도 칼리안에게 커피를 내어 준 적이 없었다. 항상 커피를 달고 사는 앨런이지만, 그 역시 이런 칼리안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체르밀 궁에서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때문에, 르메인과의 대화를 마친 칼리안과 함께 체르밀 궁으로 되돌아온 앨런은 무엇을 마실지 묻는 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 것이나 주면 되네.” 그리고 앨런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르센은, 같은 것을 묻는 얀에게 정중히 대답했다. “진한 커피 한 잔만 부탁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따라서 얀은, 눈 밑이 퀭해진 이 마법사의 앞에 심연의 어둠을 담은 듯한 고농축 커피를 툭 내려놓았다. 민트차를 한 입 머금다 곁눈질로 커피를 본 앨런은, 아르센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 그거 다 마시면 죽을걸세.” 과로로 죽든, 아공간 비슷한 색을 내는 커피를 마시고 죽든 특별히 다를 것이 없던 아르센은 별 말 없이 커피 한 잔을 쭉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본 칼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공간이동 마법진을 개발하지 못해 저러는 것이라 생각한 탓이다. 특별히 아르센을 압박한 적 없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르메인도 바로 답을 주지 못하겠다 했으니 급할 것이 없던데다가, 저러다 아르센이 발칸의 군단장이 되기도 전에 죽을 것 같아서였다. “일단 오늘은 좀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냥 일반적인 마법진으로 만드세요. 경비를 강화하면 되니까.” 이렇게까지 아르센을 혹사시킬 생각은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은 자신이 주문했던 것을 물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르센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답을 내었습니다, 왕자님. 맹세의 인이 발동하는 원리를 변형했습니다. 다수의 사람과 마법진 사이의 사용 계약이 가능합니다.” 그럼 잠이 아니라 생명을 줄일 것 같은 저 커피는 왜 마셨냐고 묻는 듯한 눈의 칼리안을 향해, 아르센이 씩 웃으며 말을 맺었다. “왕자님께서 이동 마법진을 독점하실 수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 말이다. 칼리안이 아르센을 보며 신뢰의 미소를 보였다. “고생했습니다.” 칼리안의 이 말을 듣기 전에 잠들까봐 얀의 커피를 들이켰던 아르센은, 그대로 칼리안의 소파에 졸도하듯 쓰러졌다. 그리고 오랜만의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것을 본 앨런이 칼리안을 향해 물었다. “저 친구, 할 일은 더 없습니까?” 마법진 구축이야 마법사 협회의 마법사들을 파견시켜 진행할 생각이었으므로, 애석하게도 아르센은 이제 또 한가한 마법사가 되었다. 앨런이 그것을 왜 묻는지 눈치챈 칼리안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자, 그 얼굴에서 마음대로 대답을 찾은 앨런이 흡족하게 웃었다. 마법사단의 일이 아르피아 궁에 잔뜩 쌓여 있거늘. 장래 군단장이 될 이가 이리 한가해서야 쓰나. <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2) > 사흘이 더 지났다. 항상 푸른 잎의 르니에리 화분으로 가득했던 실리케의 온실이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칼리안과 만나 맹세의 인을 교환하고 돌아온 날, 실리케의 화풀이에 전부 깨져버렸다. 그 이후 실리케는 며칠 전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실리케의 온실도 깨끗이 치워지기만 한 뒤 새로 채워 넣어지지 않은 채로 몇 달을 보냈던 것이다. 그런 온실의 한가운데 마련된 응접실 안에서 실리케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걸음 걸음마다 냉기가 흐르는 것 같아서, 시녀들은 차마 그 곁으로 갈 엄두도 내지를 못했다. 또각 - 차르륵 또각 - 차르륵 손에 들린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며 온실 안을 서성이던 실리케가, 제 자리에 멈춰 서며 입술을 깊이 깨물었다. 그레이 브리센이 오지 않는다. 수도 인근까지 온 것은 분명했다. 그 후로 갑작스럽게 소식이 끊겼다. 레넌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능성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이유가 있다면 납치가 되든 살해가 되든,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레이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아닌가. 때문에, 지금 실리케는 그레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여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레이가 어떤 다른 마음을 품고 사라진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실리케에게 시녀장이 달려와 몇 마디 말을 전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수도 인근에 도착했을 때, 에반 브리센 후작이 보낸 자들이 공격을 했다 합니다. 이로 인해 변경백이 큰 부상을 입고 변경백령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들은 실리케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버지가? 어째서?” “그것이······. 후작위를 빼앗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돌아가서 두번 다시는 카이리시스로 돌아오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그에 대한 이야기로 귀족가가 매우 소란합니다.” 귀족들의 입은 정말로 빨랐다. 수도로 요양을 오던 그레이가 에반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는 소문 역시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레이는 소드마스터였다. 그런 이가 아버지로 인해 재기가 힘들 정도의 큰 부상을 입었다 하니 어찌 입에 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실리케가 미간을 찌푸렸다. 손에 들린 부채가 몇 번 펼쳐졌다 접히기를 반복하며, 실리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후작의 자리를 노릴 것 같아서 미리 쳐냈다. 이런 시점에.” 그러다 뭔가 이상한 것이 있다는 듯, 실리케가 다시 시녀장을 향해 물었다. “아버지가 직접 가신 것도 아닐텐데, 누가 변경백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다는 말이냐?” “변경백은 이미 부상을 입어서 수도로 오는 중이 아니었습니까? 때문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답을 들은 실리케의 눈이 번뜩였다. 실리케가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다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레이는 부상을 입어 온 것이 아니었다. 카이리시스에 올 때 그렇게 핑계를 대라 시킨 것이 바로 실리케였다. 그 후 플란츠를 세자위에 올리는 것을 도우면 에반 브리센 후작을 축출한 뒤 그 자리에 그레이를 앉혀주겠다고, 그렇게 말을 했었다. - 차르륵 실리케가 머릿속으로 몇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그레이의 계획을 안 에반 브리센이 직접 나서서 공격했다. 그레이가 실리케를 배신한 뒤 핑계를 대고 돌아갔다. 아니라면, 드러나지 않은 누군가가 그레이를 공격했다. 곧 실리케가 날카롭게 뜬 눈으로 시녀장을 보며 말했다. “브리센 변경백령으로 치료약을 보내라. 변경백이 정말 부상을 당해 변경백령에 있는 것이 맞는지와 누구에게 공격을 당했는지를 정확히 확인하고 오거라. 가능한 빠르게, 직접 눈으로 보고 와야 한다.” 시녀장이 허리를 숙이며 그렇게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당장 테일 경을 찾아서 데려오거라.” 테일은, 칼리안으로 인해 왕궁에서 물러난 기사단 파벨의 부단장이었다. 실리케를 대신하여 여러번 검을 휘둘렀던 이였기도 했다. 돈만 준다면 무엇이든 하였으니, 급한대로 그레이를 대신해 수족 노릇을 해 줄 사람으로는 그보다 나은 이가 없을 터였다. 시녀장이 황급히 밖으로 빠져나간 뒤, 실리케가 다시 한번 온실 안을 서성였다. 실리케는 지금 자신이 가정한 세 가지를 모두 확인해보려 하고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그레이를 만나고 온 시녀가 확인을 시켜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테일을 통해 확인해 볼 참이었다. 드러나지 않은 누군가라는 것을 떠올리니. “왜 자꾸.” 칼리안. 그 아이가 생각나는지. - 차르륵! 실리케는 불쾌한 예감을 떨치려 애쓰며 방으로 돌아갔다. * * * 그날 오후, 르메인의 중대 발표가 있었다. 발칸이라는 이름의 마법사단을 창단할 준비가 모두 끝났으며, 일주일 뒤 창단식을 거행한 뒤 곧바로 운영을 시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발칸의 임시 군단장은 앨런 마나실. 부군단장은, 아르센 헤르츠였다. 그날 오전 그레이에 대한 소식으로 얼굴을 찌푸렸던 실리케는, 그 소식에 또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 “파벨의 건물과 훈련장을 쓰겠다니.” 다시 한번 실리케의 심기가 불편해졌음을 안 시녀장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전하께서 예전의 일들을 모두 잊으신게지.” 실리케의 입 속에서 까드득 하고 이를 악무는 소리가 났다. 기사단 파벨이 사라졌다 하여 실리케의 힘이 없어진 것이 아닐진대. “거기가 어디라고 마법사들을······.” 그렇게 말하던 실리케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지.” 그것을 따져 묻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상기한 것이다. 브리센 후작이 자신의 아들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실리케가 르메인의 뜻을 반대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실리케에게로 향하게 될 터였다. “전하께서 모아 놓은 마법사가 서른 명이라 했느냐?” “네, 그렇습니다.” 실리케가 비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 가지고는 무엇도 하실 수 없을 테니. 군대 놀이가 하고 싶다 하시는데 구경은 해드려야지. 일단 알겠다.” 그렇게 말한 실리케가 몸을 돌렸다. 그러자 시녀장이 다시 조심스러운 말로 그녀의 발을 붙들었다. “말씀하신 이를 데려왔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실리케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파벨의 기사 테일이 찾아온 것이다. 실리케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만나러 내려갔다. 응접실 앞에서 주변을 모두 물린 실리케가 홀로 들어갔다. 테이블 앞에 평범한 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테일이라는 그 기사였다. 테일은, 전형적인 기사란 이런 것이라 말하는 듯한 외모를 지닌 자였다. 게다가 행동거지가 반듯하고 말수도 적었다. 때문에 처음 보는 이들은 테일의 진짜 모습이 어떤지 상상도 하지 못한다. 다만 실리케만은 알고 있었다. 그의 손에 당장 금화 세 개만 쥐여줘도, 왕궁 밖의 그 누구든 죽여서 데려올 자라는 것을. - 잘그락 때문에 실리케는, 응접실에 앉은 테일의 앞에 돈이 든 주머니를 먼저 건넸다. 그 내용물을 확인한 테일이 물었다. “상대할 이가 여러 명입니까?” 돈이 꽤 많았기 때문에 묻는 말이었다. 실리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한 명이니라.” 그 말에 테일이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얼마 전에도 한 명을 상대하고 큰 돈을 받았기 때문이다. 레넌 브리센. 그를 잡아다 후작의 앞에 데려다 놓은 두 기사 중 한 명이 바로 테일이었다. 물론 테일은 입이 무거운 기사였으므로 실리케는 그것을 영원히 모를 터였다. “누구입니까.” 실리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칼리안의 로젤리타를 수행했고, 왕궁에 머무르지 않으며, 앨런 마나실의 가족이 아닌 자. “아르센 헤르츠. 마법사다.” 오늘 하루 그레이와 함께 카이리시스 귀족들의 입에 열심히 오르내린 발칸의 부군단장. 그 이름을 테일도 들었다. “그레이 브리센과 마주쳤는지, 마주쳤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 오면 된다. 알아낸 뒤에는 그 입을 잘 막아두어야 할 것이다. 잘 처리하면, 그 두 배를 더 주마.” 돈 주머니가 무거웠던 이유를 깨달은 테일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머니를 품 속에 넣은 뒤 실리케의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 * * 그리고, 그날 저녁. 얀은 굉장히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칼리안에게도 세력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발칸과 관련된 내용 그 어디에도 칼리안의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얀은, 마법사단 발칸이 칼리안의 군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 서른 명 뿐이지만 곧 엄청나게 늘어날 겁니다. 그러니 왕자님도 이제 당당하게 다니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얀의 말에, 얀과 나란히 서서 칼리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리던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지금보다 더 당당해지셔도 괜찮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진심 가득한 그 말에,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플란츠나 란델 왕자에게 어찌나 치이고 사시는데요. 특히 플란츠가 우리 왕자님께 얼마나 독한 짓을 하는지 알면 그런 말 못할 겁니다.” 칼리안이 그 플란츠와 반쯤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면 정말 놀랄 얀이 이렇게 말했다. 때문에 샤워실 안에서 얀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잠깐 난처한 얼굴을 했다. 플란츠와의 일을 얘기해줘야 하는데 저래서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 된 탓이다. 그렇게 복잡한 마음을 안고 샤워를 마친 칼리안은 간단한 예복을 갖춰 입었다. 그리고 세뉴관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아직 발칸이 공식적으로 창단된 것은 아니었으나, 르메인이 창단을 발표한 것을 기념하는 가벼운 석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오래지 않아 연회장 안에 들어선 칼리안은, 그 어떤 때보다 더 많이 집중된 시선 때문에 잠시 발을 멈칫했다. “칼리안 왕자님께서 오셨다!” 그들은 전국에서 모인 마법사였고, 칼리안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랬으니,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칼리안을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그 눈이 정말 시스파니안의 것처럼 붉은지를. 덕분에 칼리안은 마법사들 모두와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해주어야 했다. ‘란델과 플란츠가 오지 않은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실리케는 물론이었고, 둘 모두 그럴싸한 이유로 불참을 알려왔다. 칼리안이 이렇게 주목 받는 것을 보이지 않아도 되니, 반겨할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실소하던 칼리안에게, 마지막으로 아르센이 다가왔다. 상당히 피곤한 얼굴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헤르츠 경. 괜찮습니까?” “곧 안 괜찮아 질 것 같습니다, 왕자님.” 솔직한 대답에, 칼리안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창단식 날에도 연회가 있을테니, 오늘은 그냥 가서 쉬세요.” 그러자 아르센의 표정이 조금 밝아지다 말았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갈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석찬이 끝난 뒤 다시 마나실 님을 뵈러 가야 합니다.” 이대로 마음대로 집에 가버리면, 과연 내일 앨런이 무슨 말을 할지 상상도 되질 않았다. 그 얼굴을 보던 칼리안이 다시 웃었다. “스승님께는 제가 말을 잘 전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순간 칼리안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 아르센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럼 오늘은 먼저 가보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가는 길에 잠들지 말고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아르센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앨런이 쫓아올 것 같은 느낌에 얼른 걸음을 옮겨 마차에 올랐을 뿐이었다. 아르센의 집은 세뉴 강을 건너가야 있었기 때문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칼리안은 잠들지 말라 했지만, 사람 눈꺼풀이라는 것이 어디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던가? - 다각, 다각. 규칙적인 말 발굽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르센의 눈이 스르르 감겨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세뉴 강을 건넌 뒤, 마차의 불안한 흔들림과 마부의 급박한 목소리가 아르센을 깨우기 전까지. “헤르츠 님!” 이상한 기분에 슬쩍 눈을 뜬 아르센을, 마부가 다시 불렀다. “일어나십시오!” 그제야 정신이 든 아르센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마차가 심하게 요동쳤다. - 쿵! 항상 평온하던 아르센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아르센은 아직 달리는 마차의 문을 확 열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빨라진 마차가 정신 없이 달리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아르센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 대신, 적당해 보이는 곳을 눈에 담으며 마부를 향해 소리쳤다. “그대로 계속 달려 도망가게!” 그리고 신속하게 마력을 운용했다. [텔레포트!] 그와 동시에, 아르센의 몸이 마차에서 사라졌고, 그가 조금 전 보아두었던 곳에 정확히 나타났다. 달리는 마차에서 바닥으로 몸을 옮긴 아르센은 곧바로 실드를 생성해 몸을 보호했다. 그러자, 마차를 뒤따라 온 것 같은 여러 마리의 말이 아르센을 둘러쌌다. 달빛에 번뜩이는 칼날이 모두 아르센을 향하고 있었다. 의심되던 상황이 맞음을 깨달은 아르센이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반갑네.” 오로지 빠르고 효율적인 대인 공격 마법만을 연구해 온, 그리하여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얼음창을 만들어내는, 이제 고작 스물 여덟인 5서클 마스터 마법사! “마법사단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라 하네.” 아르센 헤르츠의 얼음이 시린 빛을 머금은 채 쏘아져 나갔다. <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3) > 버릇 같은 자기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번뜩이는 얼음창 두 개가 기사들을 향해 쇄도했다. - 쌔애액! - 콰직! 날카로운 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렸다. 빠르다! 감각이 좋은 한 명은 거의 낙마하듯 뛰어내리며 간신히 피해냈다. 나머지 하나는 가슴에 바람 구멍이 생긴 채로 말 위에서 떨어졌다. 그에게서 흘러내린 피가 금세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대비할 틈도 없이 한 명이 죽자 기사들이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그들이 가까이 오도록 굳이 기다려 줄 용의는 없었으므로, 아르센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쉬이익! 쉬익! 두 개의 얼음창이 아르센의 정면에 서 있던 기사에게 연달아 날아갔다. 검을 휘둘러 하나를 쳐낸 그는, 곧바로 날아오는 두 번째 얼음창에 맞아 죽었다. - 쿵! 육중한 몸이 쓰러지는 소리에, 남은 기사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대상을 정하고, 계산하고, 주문을 외우고, 발동시킨다. 그것이 마법사의 전투가 아닌가? - 쌔애액! - 서걱! 칼잡이의 안일함을 비웃듯, 파열음이 다시 이어졌다. 어두운 밤에 날아드는 아르센의 얼음은 그 자체로 암기였다. 보이는 순간, 죽는다! - 풀썩. 테일의 옆에 있던 기사 한 명이 바닥에 엎어졌다. 관통된 목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무슨, 미친!’ 말에서 내려 아르센을 포위하는 그 짧은 순간에 셋이 줄었다. 테일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기사 일곱의 한가운데에 선 아르센이 고개를 돌렸다. 다음 타깃을 찾는 시선이 정면을 향함과 동시에, 아르센의 뒤에 서게 된 두 기사가 일사불란하게 달려들었다. 각각 아르센의 목과 심장을 겨눈 채였다. 그들의 검이 바람처럼 휘둘러졌다. 그것을 조금 늦게 알아차린 아르센이 고개를 돌렸다. 이미 지척에 다다른 검날이 아르센의 눈동자에 비춰졌다. 그리고, - 팅! 티딩!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경쾌한 금속음과 함께 아르센의 실드가 두 번 빛났다. 목표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한 두 개의 검이 튕겨나왔다. 망연자실한 표정이 된 두 기사가 다시 검을 뻗어내려 할 때, 어느새 날아온 얼음조각이 그들을 덮쳤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여지없이 이어졌다. - 카드득! 콰직! 한 명이 심장을 꿰뚫린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폐가 사라진 또 한 명은 심장을 잃은 동료를 한동안 부러워하다 피거품을 게워내며 죽었다. 그 꼴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테일이 이를 악물었다. ‘젠장!’ 지금까지 테일이 살아있는 것은 실력이 아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테일이 그것을 가장 잘 알았다. 눈 깜짝 할 새 후작가의 정예 기사 다섯이 죽어나갔으니까! ‘잘못 건드렸다!’ 아르센은 테일에게 충분히 후회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엄습해오는 서늘한 느낌에 테일이 고개를 비트는 순간, 차가운 얼음의 날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베인 것인지, 목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아르센의 실드가 다시 빛났다. - 티딩! 팅! 테일이 공격받는 순간을 노려 실드를 내리친 두명이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에게 날아올지 모를 얼음을 막기 위해 정면을 주시했다. - 쉬이이익! 그런 기사들을 농락하는 것처럼, 이번 얼음창은 한 명의 머리 위에서 생성되어 그대로 내리꽂혔다. - 쿠웅! 불운한 타깃이 된 기사가 정수리부터 턱까지 꿰뚫린 채 절명했다. 얼음 끝을 따라 흘러내린 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다. 테일은 그저 아르센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살았다. 산 것을 안 순간, 테일의 몸이 바닥을 박찼다. 아르센을 향해서가 아니었다.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그런 테일의 움직임을 본 다른 기사들 역시 슬금슬금 도망 칠 때를 보았다. 그 때, 기사 한 명이 아르센에게로 달려들었다. 예리한 칼날이 실드와 아르센을 함께 갈라낼 것처럼 날아들었다. 아르센은 실드의 방어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혹은 저 칼날의 예리함이 얼마나 될 지를 가늠하는 대신 입을 열었다. [텔레포트] 낮은 목소리와 함께 아르센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와 함께, 아르센에게 검을 휘둘렀던 이를 제외한 기사들이 저마다의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테일도 그 중 하나였다. 아르센의 신형이 테일의 바로 뒤에서 나타났다. 보기만해도 소름끼치는 얼음창이 테일과, 또 다른 기사 한 명을 향해 쏘아졌다. 테일이 허리를 뒤틀며 등 뒤로 검을 휘둘렀다. 이 기적적인 움직임이 그의 목숨을 살려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얼음창이 튕겨 나간 것이다. - 푸욱! 그와 함께, 앞서 달려나가던 기사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빠져나갔다. 눈동자만 간신히 움직여 그것을 본 테일의 손이 떨렸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 꽤 강한 마법사라 생각했다. 그래서 왕궁에는 알려지지 않은 아홉 명의 동료를 더 불렀다. 테일을 포함하면 합이 열이다. 열 명이 나누고도 충분한 돈이었던데다, 성공하면 두 배를 더 주겠다 했으니 당장 나눠가지는 돈이 그리 아깝지 않았다. 테일이 헛웃음을 지었다. ‘성공할 생각을 했다니. 고작 열 명으로.’ 짧은 판단으로 오늘 당장 죽게 생긴 테일의 눈에 뒤늦은 후회가 가득 어렸다. 실리케가 준 돈이 어째서 그렇게 많았는지를 의심했어야 했다. 아르센을 둘러싼지 5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 열 명의 기사 중 셋이 남았다. - 쌔액! - 콰직! 아니, 둘이다. 등을 돌린 채 미친듯이 달리던 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얼음창을 피하지 못했다. 결국은 거대한 얼음창에 몸이 꿰뚫린 채 죽었다. 그의 시체가 강둑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세뉴 강의 맑은 물에 검붉은 피가 퍼져나갔다. 아르센에게 검을 휘둘러 본 한 명, 그리고 도망을 포기한 테일. 이제 둘 밖에 남지 않았다. 그제야 아르센의 공격이 멈추었다. “이제 둘만 남았네.” 아르센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둘 중 누가 살겠나? 나는 한 놈만 필요하다네.” 그리고 이렇게 물어왔다. * * * 아르센이 나간 직후, 여유로운 얼굴로 탄산수를 한 모금 마신 칼리안이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으니, 언뜻 본다면 혼잣말처럼 보였다. “키리에.” 이제 막 석찬이 시작되어 분위기가 소란스러웠다. 서로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인사 소리도 컸다. 잔을 부딪히는 소리도 끊이지 않았고, 이곳 저곳에서 식기 부딪히는 소리도 작지 않았다. 그 가운데 흘러나온 칼리안의 목소리에, 칼리안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얀과 함께 서 있던 키리에가 곧장 다가왔다.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는 키리에는 상상 이상으로 청력이 좋았으니까. “네, 왕자님.” 칼리안이 잠시 키리에를 바라보다 말을 전했다. 주변의 소리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했겠지만 오로지 키리에만은 칼리안의 말을 전부 알아들었다. “할 수 있겠어?” 말을 마친 칼리안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 키리에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고, 키리에는 그 길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키리에의 뒷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 앨런이 있는 곳을 잠시 쳐다보았다. 르메인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앨런이 자연스럽게 칼리안을 보았고, 칼리안은 다른 말 없이 연회장에서 나갔다. 그러자, 앨런이 곧바로 칼리안을 따라나왔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칼리안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레이에 대한 소식이 오늘 전해졌으니, 실리케가 움직였을 겁니다. 제가 그레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어 할 것이라서.” “안그래도 헤르츠 경이 보이지 않기에 궁금해하고 있었지요.” 곧바로 상황을 이해하고 이렇게 답한 앨런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흥미로운 상황을 눈 앞에 둔 것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실리케의 암수가 헤르츠 경을 향했겠군요. 제가 다녀오면 될런지요?” 그 말에, 칼리안이 웃었다. “스승님께서는 그저 들어가셔서 전하께 알려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시스파니안이 토끼를 잡는 모양새가 나와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아르센을 공격하는 이들을 잡는 것에 굳이 앨런의 힘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아르센을 믿고 있다는 말이겠지만, 아르센 한 명으로도 충분히 처리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실리케는 지금 브리센 후작이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도 의심하고 있을 겁니다. 불안할거예요.” 그레이가 실리케를 도우러 온 것이 형제간의 깊은 우애 덕분이 아니라는 것은 칼리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분명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실리케가 그레이에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은, 후작의 작위 외에는 없다. 그런데 후작의 자리는 거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왕의 자리처럼 이양할 수도 없다. 반드시 에반 브리센이 죽어야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실리케는, 에반이 실리케의 계획을 눈치채고 그레이를 직접 처벌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을 터였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려 변경백령에 사람을 보내도 돌아오려면 며칠이 걸립니다. 그 전까지는 후작이 직접 그레이를 공격했던 것이 아닌지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겠죠. 그러니 실리케는 후작의 기사를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어요. 자칫하면 그들의 칼이 자신에게 향할 테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깊은 조소를 머금은 채로 헤이시아 궁 쪽을 바라봤다. “더군다나 헤르츠 경의 무력이 어느정도 되는지 알려져 있지 않았으니, 고작해야 기사 몇 명을 불렀을까 말까. 그러니 헤르츠 경 한 명이면 충분한 상대가 될 겁니다.” 앨런의 양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게나 거부감을 느끼더니. “로젤리타에 다녀온 뒤 헤르츠 경에 대한 믿음이 꽤 굳건해지셨군요.” 그 말에, 칼리안이 앨런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믿을 수 밖에요. 이 곳에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이였으니.” 처음 칼리안이 아르센을 본 날 보여준 반응을 보고, 베른과 아르센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얼추 눈치를 챘던 앨런이었다. 지금의 대답을 듣고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확신한 앨런이 혀를 내둘렀다. * * * ‘가는 길에 잠들지 말고요.’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야 이해한 아르센이 앞에 세워둔 둘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칼리안, 공격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혼자 보냈다! “믿음에 감사를 드려야 할지, 아니면 방임에 원망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왕자님.” 아르센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칼리안이 무슨 이유로 자신의 실력을 철썩같이 믿는지 몰랐으니까. 그런 아르센을 보는 테일과 또 다른 기사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둘의 손에는 여전히 검이 들려 있었다. 아르센과의 거리는 불과 한 보 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센은 저렇게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물론 둘 모두 그런 아르센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검을 들어올리기도 전에 아르센의 얼음이 이미 몸을 관통하고 있을 테니까. 아르센이 둘을 보며 다시 물었다. “이제 정했나?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아르센은 둘 다 살려둘 생각이었다. 서로 살기 위해 경쟁하듯 정보를 뱉어내게 할 참이었다. 테일이 입을 열었다. “저를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칼리안 왕자님께 데려가 주십시오. 그럼 제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왕궁에는 칼리안도 있지만 실리케도 있다. 왕궁까지만 가면, 실리케가 살려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기사가 매서운 눈으로 테일을 노려봤다. 아무리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지만, 그와 테일은 12년을 함께 지냈다. 그런 동료를 어찌 저렇게 쉽게 버린단 말인가? “알겠네. 그럼······” 협박을 위해 다른 한 놈 쪽으로 손을 가져가던 아르센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다그닥, 다그닥!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말 발굽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르센이 앞에 선 둘을 그대로 둔 채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이를 살폈다. 잠시 후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고, 아르센이 씩 웃었다. “방임이 아니셨군.” 아르센을 찾아 온 것은, 바로 키리에였다. 말에서 내린 키리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난색을 표했다. “조금 늦게 왔군. 그냥 가게. 오래 볼 것이 못 되네.” 온통 가득한 피 냄새, 곱게 죽지 못한 시체들. 아직 어린 키리에가 그런 모습을 보았을 리 없다 생각한 것이다. 아르센의 말처럼 처음 보는 광경임은 맞았으나, 키리에는 그저 담담했다. “더 독한 곳에서 지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한 키리에가 살아있는 두 기사를 잠시 쳐다보다 아르센을 향해 물었다. “둘을 왜 남겨두신 겁니까.” 키리에의 질문에, 아르센은 별 생각 없이 테일을 가리켜보이며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확인하실 것이 있지 않겠는가? 안그래도 왼쪽에 있던 친구가 왕자님을 뵙겠다 하기에······.” - 서걱! 아르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른쪽 기사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가 사라진 몸뚱이가 둔중한 소리와 함께 허물어졌다. 검을 지닌 채 긴장하고 있던 브리센의 정예 기사. 그런 이의 목을 순식간에 내리친 것은 키리에였다. 피가 방울방울 맺힌 단검을 털어내며, 서로 다른 색을 지닌 키리에의 눈이 아르센을 향했다. “데려올 필요 없다 하셨습니다.” 테일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4) > 실리케의 기사단 파벨. 테일은 바로 그 파벨의 부단장이다. 그런 테일이 지금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마법사가 쏘아대는 얼음을 피해 이제껏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거늘. 고작해야 팔뚝 길이의 단검으로 동료의 목을 떨궈낸 소년의 입에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데려올 필요 없다.’ 당연히 칼리안의 전언일 터였다. 배후고 뭐고 궁금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테일은 그냥 포기했다. 당장 목에 구멍이 나든, 아니면 목이 사라지든 둘 중 하나는 될 판이다. 동료까지 팔아가며 살고자 했는데, 지금 남의 비밀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겠는가? 포기하고 나니 항상 무거웠던 입이 절로 열렸다. “두 분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왕자님께 드릴 말씀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왕궁에만 가면 실리케가 살려줄 것이라고. 테일은 여전히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테일은,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선 채 제멋대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들으면 칼리안의 앞에 데려가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저를 잘 살려두셨습니다. 제가 직접 의뢰를 받았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여기 이렇게 돈 주머니도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테일의 말은 끝이 날 줄 몰랐다. 테일은 비단 실리케의 돈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레넌과 에반으로부터도 돈을 받고 값에 맞는 많은 일들을 했다. “칼리안 왕자님의 시종에게, 레넌 브리센이 건네준 뭔가를 전달했다던 시녀를 처리한 적이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제가 증언을 하겠습니다.” 얀에게 처음으로 독차를 건넨 후 사라졌다던 시녀의 이야기였다. 그에 대해서는 아르센도 어느정도 들은 바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테일의 짓인 모양이었다. 다만 아르센은, 칼리안이 이미 그 일을 묻어두겠다며 실리케와 맹세의 인을 나누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테일 역시 시녀를 왜 죽였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인 듯 하니, 그런 증언이 이제 와 필요할 리 만무했다. “그것은 이제 소용이 없네. 그리고 왕자님께서는 그 때의 일은 생각도 하기 싫어하신다네.” 칼리안의 앞에서 진한 커피를 쭉 들이켰던 아르센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테일의 뒤에 서 있던 키리에를 쳐다봤다. 이제 그만 처리하고 가자는 뜻이었다. 키리에가 반 걸음 앞으로 나왔다. - 저벅. 키리에의 발자국 소리가 생명줄 끊어지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들었으므로, 테일이 얼른 둘을 만류했다. “제가 중요한 것을 하나 더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이건 정말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 말에, 키리에가 다시 뒤로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안도한 테일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후작님의 자금원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뇌물 아닌가.” “물론 그것도 큽니다만 그것은 비정기 수익 아닙니까. 정기적인 자금원은 따로 있습니다. 궁에서 나온 뒤 제가 담당하고 있는 곳입니다.” 결국 테일은 꼭꼭 닫아 두었던 상자를 열기에 이르렀다. 테일이 비장의 한 수라는 듯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깔았다. “카이리시스에 사설 도박장이 있습니다. 사람을 놓고 도박을 하는데, 하루 오가는 돈이 상상 이상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려드릴테니, 저를 칼리······.” “혹시 ‘시스파니안의 깊은 술냄새’ 4층을 말하는 겁니까.” 테일의 입이 조용히 닫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센이 키리에를 보며 물었다. “그거 설마, 술집 이름인가? 이름 한번 경박하군.” “겉으로는 술집이지만 지하에 도박장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대단한 정보는 아닙니다.” 테일이 입술을 물어뜯다가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넌 브리센, 그가 누구 때문에 실종된 것인지 아십니까?” 누구긴. 우리 왕자님이지. 아르센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지만 테일은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레넌 브리센이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은 모르셨을 겁니다!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시면 저를 칼리안 왕자님께,” 아르센이 테일의 말을 자르며 키리에에게 물었다. “레넌은 브리센 후작가에 감금됐을 거라 하셨던가?” “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칼리안의 예측이었다. 테일의 눈꼬리가 틀어졌다. 레넌 브리센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조금 전 떨어져내린 동료의 머리가 아까부터 계속 테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따라오라 말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제 정말 마지막 정보입니다.” “괜찮네. 그냥 안 듣겠네.”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 아르센이 긴 하품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쯤 되니 칼리안이 왜 데려올 필요가 없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테일은 레넌에 대해 이야기 할 때보다도 더 낮은 목소리로 아주 은밀한 것을 알려준다는 듯이 말했다. “이번에 변경백님이 다치신 것은 아마도 후작께서 직접 나서서 진행하신 일이 맞을 겁니다. 후작님 말고는 변경백님을 다치게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긴. 그것도 우리 왕자님이지. 아르센의 눈이 점점 감겨들어갔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피곤했다. 이동 마법진 개발때문에 며칠을 잠을 못 잤다. 그 후 딱 한번 단잠을 자고 난 뒤 곧바로 앨런에게 붙들렸다. 몸도 피곤하고 스트레스도 심한 상태에서 오랜만에 마력까지 펑펑 썼으니, 이렇게 세월 좋게 대화나 나눌 정신이 되지 못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일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후작님께서는 사실 검의 길에 오르신지 굉장히 오래 되셨습니다. 저와, 저기 강둑에 누워있는 놈. 이렇게 둘이 후작님의 검이 다 부서진 것을 봤었습니다. 후작님께서는 그것을 변경백님께도 숨기셨습니다.” 그 말에, 느슨해지던 아르센의 눈꺼풀에 힘이 들어갔다. 아르센이 비로소 관심을 가지며 물었다. “그것은 왕자님께서 조금 좋아하실 지도 모르겠군. 혹시 그것 말고는 알려드릴 것이 더 없는가?” 테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 하나 더 있습니다. 후작님과 변경백님의 관계인데, 변경백으로 봉해지기 전에 두 분 사이에 큰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뵙게 해주시면 다른 귀족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거기까지 들은 아르센이 손을 들어 테일의 말을 잠시 막았다. “자네는 아는 것이 참 많은 것 같네.” 그리고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테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원하는대로, 칼리안과 대면을 시켜주리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아르센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네가 살아있던 것은 아는 것에 비해 입이 무거워서였을 것 같네. 안 그런가?” 어쩐지 온전한 칭찬은 아닌 것 같았으므로, 테일은 대답 없이 아르센을 쳐다봤다. 아르센은 키리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그래서. 그 비밀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핑계로 왕궁에 가면, 실리케가 자네를 구하겠다 나서주기라도 할 것 같던가?” 그렇게 많은 비밀은 알면서 정작 실리케가 어떤 사람인지는 잊었던 테일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 순간, 키리에의 단검에 달빛이 담겼다. 차가운 날이 테일의 목을 스치듯 지나갔다. - 서걱! 결국 테일은 말을 모두 마치지 못했다. - 퉁! 조금 전 떨어져내린 과묵한 기사의 머리 옆으로 테일의 머리가 데굴, 굴러갔다. 실드를 펼쳐 피가 튀는 것을 막은 아르센이 떨어진 테일의 머리를 잠시 바라보며 말했다. “한 번 무거웠던 입은 계속 무거워야 하네. 괜한 머리를 쓰려 입을 열면 명이 줄어드는 법이라네.” 곧 아르센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리고 키리에를 보며 말했다. “도우러 와 줘서 고맙네. 이제 자네는 이만 궁에 돌아가게. 내 마부가 신고를 했을 터이니, 곧 수도 치안대 병사들이 올 걸세.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고 돌아가겠네.” 키리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테일이 조금 전까지 손에 들고 있던 돈 주머니를 집어들어 품에 넣은 뒤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헤르츠 경은 눈에 띄지 않아야 합니다." 아르센은 그것이 무슨 말이냐는 듯 키리에를 쳐다봤다. 키리에가 자신의 말 안장에서 검은 로브를 꺼내 아르센에게 건넸다. 그리고 칼리안이 전한 말을 마저 꺼냈다. “아무에게도 연락을 취하지 말고, 마나실 경의 저택에서 닷새 동안 푹 쉬라 하셨습니다.” 이유까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푹 쉬란다. 그 말에 아르센의 입이 웃다 말다 했다. 휴가는 휴가인데 앨런의 집에서 지내는 휴가라니. 이것을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 * * 후작이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완전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요긴하게 쓰일 정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 후작이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 역시 모르던 사실이었다. 칼리안의 옆에서 키리에의 말을 함께 들은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일전에 브리센 상단을 사겠다 했을 때, 후작이 너무 성급하게 화를 낸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앨런은, ‘칼잡이’라는 자신의 말에 곧장 살기를 내비쳤던 에반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또 금방 고분고분해졌는데, 어쩌면 그것이 제 눈을 가리려고 일부러 그리 굴었던 것은 아닐런지요?” 그 말에, 칼리안이 그럴 수 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을 한번 만나보면 정확히 확인해 볼 수 있겠네요. 이제 저도 중앙 귀족 회의에 참석을 할 수 있으니, 기회는 많이 있을 겁니다.” 곧 칼리안은 작은 종이에 몇 가지 말을 적어 얀에게 건넸다. “지금 보내줘. 변경백령으로 보내면 돼.” 전서구를 보내라는 말이었다. 그것을 받아든 얀이 밖으로 나간 후, 칼리안은 고생했다는 짧은 말로 키리에를 격려한 뒤 이만 쉬도록 돌려보냈다. 그렇게 앨런과 둘이 남게 되자, 앨런이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칼리안에게 할 말이 있다는 의미였으므로, 칼리안이 앨런의 얼굴을 응시했다. “르메인은 마법사단의 부군단장을 해치려 한 이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하셨습니다.” 왜 테일을 붙들어오지 않고 굳이 전부 죽여 없앴느냐는 말이었다. 칼리안은 테이블에 놓인 주머니를 쳐다봤다. 채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있는 그것은, 실리케가 테일에게 건넸던 돈 주머니였다. “파벨이 여전히 왕궁 안에 있던 기사들이라면 그렇게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자는 이제 실리케가 아니라 후작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레넌의 일에도 관여를 했겠죠.” 예전에는 실리케의 심부름을 했지만 이제는 에반의 수족이 되었다는 것. 그것 때문에 잡지 않고 전부 죽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자가 왕궁 안에 잡혀 있으면, 후작이 경계할 겁니다. 그 자가 밝혀낼 비밀들을 빌미로 전하나 제가 어떤 것을 요구할지 알 수 없으니 신경을 곤두세우겠죠.”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앨런의 앞에 놓인 호밀 쿠키를 가리켜보였다. 어찌나 많이 보냈는지, 아무리 먹어도 도통 줄어들지를 않는 것이다. “저 아직 다른 귀족들 만나보지도 못했잖아요. 그래서 후작은 아직 저에게 관심을 가지면 안됩니다. 지금은 그레이와 실리케의 사이에서 줄다리기만 하게 두는 것이 낫습니다.” 즉, 칼리안을 경계한 에반이 실리케와 다시 손을 잡는 것을 막고자 했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실리케와 에반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없었다. 아직 그만큼의 세력은 되질 않았다. 그래서 야금야금 그들의 세력을 줄여가는 중이었다. 레넌과 그레이를 실리케의 손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그레이가 원인이 되어 실리케와 에반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칼리안은 그 상태를 최대한 유지시키면서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다. 곧 칼리안이 테이블의 주머니를 툭 쳐보이며 씩 웃었다. “대신 실리케는 더 많이 불안해져야 하고요.” 테일이 죽었다. 테일과 함께 있던 아홉의 기사도 함께 죽었다. 그런데, 아르센도 사라진다. 앞으로 닷새 동안은 아르센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을 터였다. 만약 아르센이 살아있다면, 테일로부터 무엇을 들었을까. 들었다면, 그것을 칼리안에게 전했을까. 그리고 칼리안은 자신의 수족을 공격한 실리케를 어떻게 할까. 등등. “실컷 고민해보라 해야죠.” 머리를 싸맬 실리케를 생각하니, 칼리안의 입에 진한 웃음이 어렸다. <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5) > 처음에는 눈을 감자마자 바로 뜬 줄 알았다. 앨런의 집에 도착해 잠들었을 때에도 밤이었는데, 잠에서 깬 뒤에도 여전히 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바로 깼다 하기에는 이상하게 몸이 개운했다. 그래서 한참을 멍하게 상황을 따져보던 아르센은, 잠들기 전보다는 시간이 이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하루를 꼬박 잠으로 보내고 다시 밤이 되어 일어났다는 것을 가까스로 깨달았다. 스무 시간을 넘게 잠만 잔 것이다. - 꼬르륵. 정신이 드니 공복감이 밀려들며 뱃속이 요동을 쳤다. 칼리안이 정말로 단단히 얘기를 해 두었으므로, 앨런은 잠들어 있는 아르센을 깨우지 않고 왕궁에 나갔다. 그리하여 다시 밤이 되어서야 부스스 일어나는 호사를 누리게 된 아르센이 비척비척 방을 나섰다. 집에 불은 켜져 있었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르센이 앨런의 부엌에서 계란같이 생긴 것 몇 개를 찾아내 접시에 깨뜨려 넣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작은 불을 일으켜 대충 대충 익혔다. 곧 아르센은 소금조차 넣지 않고 매우 원시적인 방법으로 만든 그것에 날 빵을 곁들여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무언가 상당히 부족한 듯한 맛이었으나, 지금 입에 들어가는 것이 닭의 알인지 오리의 알인지도 구분 못하는 아르센이 무얼 더 하겠는가. - 탁. 그런 아르센의 앞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닭고기 스튜가 놓여졌다. 매우 향기로운 냄새에 취해 스튜를 쳐다보고 있으니, 잔소리 비슷한 말이 들려왔다. “대사막의 늑대들도 그런 식으로는 안 먹어, 아저씨.” “아······ 고맙다.” 앨런의 손녀인 베로니카였다. 오히려 열 여섯의 히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베로니카는, 이제 친해졌으니 서로 말을 놓을 때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저렇게 편하게 아르센을 대하고 있었다. 아르센이 딱 제 나이의 두 배라는 것을 제외하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나 말고 할아버지께 고마워 해. 할아버지께서 어디 나가지 말고 아저씨 챙겨주라고 하셨으니까.” 베로니카와 알고 지낸지도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었지만, 할아버지라는 그 말이 여전히 생소했다. 아르센보다 젊은 외모의 앨런에게 손녀가 있다는 사실이나, 그런 앨런을 스스럼 없이 할아버지라 부르는 모습이 아직 익숙하지가 않았던 탓이다. “자빠져 자다 굶어 죽기 딱 좋게 생긴 꼴이라고.” 하지만 손녀가 맞긴 맞았다. “아저씨는 절대로 집 밖에 나가면 안된다고 했으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주면 돼. 내가 도와줄게.” 아르센은 스튜를 한 입 먹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베로니카가 그 옆에 앉더니 아르센이 구워낸 오리 알을 집어먹었다. 그 뒤에는, 그저 굽기만 했을 뿐인데 해괴한 맛을 만들어낸 아르센의 요리 솜씨에 매우 감탄하며 입에 든 것을 뱉어냈다. 그 정도는 아닌데, 하고 중얼거리던 아르센이 물었다. “혹시 내가 왜 나가면 안되는지 말씀하신 것이 있나?” 아르센은 여전히 자신이 왜 나가면 안되는지를 몰랐다. 일단 시키는대로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유 정도는 듣고 싶었다. 앨런에게 들은 것이 있었는지, 베로니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왕비가 아저씨를 많이 찾을거라고 그러셨어. 왕궁을 빼면 여기만큼 안전한 곳은 없으니까 더 묻지 말고 그냥 여기 있어.” 아아.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히 칼리안의 뜻을 이해한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리고 앞에 놓인 치킨 스튜를 다시 떠먹기 시작했다. 왕비가 찾는다 하니 이를 어쩌나. 덕분에 잘 쉬게 생긴 아르센이 씩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에반 브리센 후작은, 집사가 전해온 말을 들은 뒤 아프지도 않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레이가 다친 것에 자신이 얽혀 있다는 얼토당토 않은 소문에 대해서도 미처 파악이 되지 않았는데 문제가 또 생긴 탓이다. ‘이상한 소문이 또 돌고 있습니다, 후작님.’ 특별히 칼리안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에반에 대한 좋지 않은 소식이 하나 더 퍼지고 말았다. 마법사단 발칸의 부단장, 아르센 헤르츠가 귀가 중 습격당해 행방이 묘연한 까닭이다. 아르센의 마부와, 아르센에게 전할 말이 있어 뒤를 따라갔던 키리에의 증언이 있었고, 세뉴 강변에 널브러진 열 구의 시체가 증거가 되었다. 모두 브리센 후작가의 기사들이었다. 시체들의 몸에 난 상처가 워낙 제각각이었던 탓에, 아주 매끈하게 목이 잘린 시체가 섞여있던 것이 그리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얼음창으로 사람을 꿰뚫을 수 있다면, 얼음칼을 만들어 목도 베어낼 수 있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 브리센 후작이 이번에는 아르센 헤르츠를 납치했다! 때문에 이런 소문이 생겨났다. 정작 에반이 직접 손을 댄 레넌의 일은 그리 주목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만난지 십 년도 더 된 그레이나,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아르센의 일에 에반이 얽혀 있다는 이야기가 계속 퍼져나가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날 오후에 르메인이 아르센을 입에 담는 바람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르메인이 브리센에 대응하기 위해 발칸이라는 것을 만들었음을 모를 이가 없었다. 그런데 발칸의 창단이 발표되기가 무섭게 아르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브리센 기사의 시체가 있었으니. 에반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이 의심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이 일로 오늘 오후에 카에라의 기사들이 방문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대놓고 후작의 집을 조사하겠다는 의미였다. 르메인 역시 에반이 르메인의 세력을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첩첩산중이 따로 없다. ‘그레이의 문제까지 있으니 당장 르메인과 대서서 좋을 것이 없다.’ 이렇게 생각한 에반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다. 도착하거든 정중히 안내해라.” 그렇게 말하던 에반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이 일의 원흉이 된 한 놈이 생각난 탓이다. “대체 테일은 무슨 일로 그 놈과 얽혔다 하더냐?”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 에반의 앞에 서 있던 집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날 낮에 테일이 궁에 다녀왔다 합니다. 아마도 왕비님께서 부르셨던 것이 아닐까요?” 아닐까요, 라는 말로 조심스레 묻기는 하였어도 분명 그 이유일 터였다. 실리케가 부르지 않는 이상 쫓겨난 기사단의 기사가 왕궁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실리케······. 또 실리케인가.” 레넌과 손잡고 멍청한 짓을 벌여서 가문에 아직까지도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남기더니, 이제는 제 아비를 아주 구렁텅이에 몰아넣기 시작했다. 대체 왜 후작가의 기사를 멋대로 부려 이 사달을 내었단 말인가! 곧 에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지금 바로 궁으로 가겠다.” “왕비님을 만나보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에반의 눈에 노기가 들었다. “아예 내 손으로 자식을 죽여 없애는 꼴이 보고 싶더냐!” 지금 실리케를 만나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를 만큼 실리케에게 화가 나 있다는 말이었다. 말 한 글자 한 글자마다 피어오르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말을 잘못 꺼냈음을 안 집사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후작님!” 집사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본 에반이 뻗치는 살기를 거둬들였다. 그리고 다시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왕자를 만날 것이다.” 당연히 란델이나 칼리안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에반이 직접 플란츠를 만난다 하는 것이 의외였으나, 집사가 그에 대해 이유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집사는 그저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보이며 서둘러 준비를 하겠다 답했다. * * * 칼리안은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 사냥대회 날짜가 잡혔습니다. 사흘 후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비가 많이 와서 땅이 심하게 젖으면 미뤄질 수도 있다고 하네요. 왕자들과의 석찬에서 사냥 이야기가 나왔으니, 지난 봄에 취소된 사냥대회를 이번에 개최하자는 르메인의 의견에 특별히 반대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렇게 며칠동안 날을 골라 개최일이 확정된 뒤, 거짓말처럼 하늘이 흐려졌다. 하루 빨리 기사 가문의 귀족들을 만나야 하는 칼리안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비가 오지 말아야 할텐데.’ 봄의 사냥대회도 폭우 때문에 취소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저 비가 칼리안의 앞을 참 많이도 가로막는다. 레넌은 돈으로 치우고 그레이는 몽둥이로 치웠는데. 쓸데없이 비를 내리는 하늘은 무엇으로 치워야 하나. 창 밖을 보며 이런 소득 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칼리안의 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께서는 사냥에 함께 가십니까.” 하필 딱 사냥 생각을 하던 차였기 때문에, 하마터면 칼리안이 입을 열어 그럴 것이라 대답을 할 뻔했다. 간신히 입을 다물고 상념에서 벗어난 칼리안이 방금 질문한 플란츠를 흘낏 쳐다봤다. 란델 역시 플란츠를 일별한 뒤 대답했다. “가지 않을 생각이다.” 란델은 저 사냥대회가 무엇때문에 이렇게 급히 진행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르메인이 플란츠와 둘이 가려던 사냥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정도라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결국 르메인이 플란츠를 위해 마련한 자리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생각할테니, 그런 곳에 란델이 참석할 리 없었다. 게다가 사냥은 란델의 취향에도 맞지 않았다. “가끔씩 바깥 바람도 쐬시는 것이 좋을텐데요.” 굳이 한번 더 권하는 플란츠를 본 칼리안이 속으로 웃었다. 정말로 란델이 그 자리에 왔으면 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안 올것을 알고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란델이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해주니 고맙구나.” 걱정을 해주는 쪽이나, 걱정에 고맙다 답하는 쪽이나. 저들의 말에서 진정성을 찾느니 실리케에게서 인간성을 찾는 것이 빠를 터였다. 그렇게 두 형의 대화를 들으며 얌전히 밥을 먹던 칼리안에게 란델의 시선이 닿았다. “발칸의 부군단장인 이가 실종되었다 들었다. 네가 걱정이 많겠구나.”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란델을 쳐다봤다. 란델이 관심도 없어 하던 마법사단 이야기를 굳이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아르센과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걱정이 클 것이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발칸과 칼리안이 아무 상관이 없다 알려졌음에도, 굳이 칼리안을 지목해서 ‘부군단장’을 걱정하는지 묻는 것이다. 곧 칼리안은, 이틀 전에 사라진 뒤 여전히 속 편히 잠이나 자고 있을 아르센을 떠올리다 대답했다. “로젤리타 기간 동안 많이 익숙해진 이였으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입니다. 그래도 저보다는 전하와 스승님의 걱정이 더 크실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정도면 훌륭한 답이 될 터였다. 란델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대답이니까. 란델이 그런 답을 내어놓은 칼리안을 한동안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칼리안은 생각이 깊어지는 것을 감추려 샐러드를 집어먹었다. 로젤리타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스산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대화가 있든 없든 식사 자리에서 눈치 싸움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마음에 없는 안부, 혹은 날씨 얘기나 주고 받는 것이 다였건만.’ 그 이유가 칼리안이 성인이 되어서인지, 혹은 플란츠가 술도 끊고 옷도 잘 갖춰 입고 다녀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란델에게 슬슬 심경의 변화가 오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칼리안은, 저런 란델을 혼자 감당하기 싫었던 플란츠가 아침밥 먹으러 오라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닐까 하는 또 다른 소득 없는 생각을 하며 식사를 마치고 가장 먼저 식당 밖으로 나왔다. “지금쯤이면 전서구는 이미 도착 했을테지?” 변경백령으로 보낸 칼리안의 편지를 말함이었고, 곁으로 다가온 얀이 대답했다. “네, 어제 오후에 도착했을 겁니다.” “그래. 그럼,” 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 우뚝. 그러다 돌연, 입을 닫고 발도 멈추었다. 칼리안의 눈이 벽 너머의 먼 곳을 향했다. 체르밀 궁 밖에서 아주 흥미로운 기세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을 느낀 탓이다. 끝 모를 공포감과 살기가 서로의 크기를 재고 있었다. 이 카이리시스에 저런 기운을 내세울 이들은, 칼리안을 제외하면 딱 둘 뿐이다. 때문에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 스승님이 왜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 “마나실 경이요? 화가 나다니요?” 옆에 서 있던 얀이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칼리안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테라스에 있을테니 따뜻한 차 좀 준비해줘.” 앨런 마나실과 에반 브리센의 기 싸움이라니. 용과 호랑이가 서로 붙어 으르렁거리는데, 느긋하게 구경이나 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6) >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힘겹게 앉았다. 그리고 전서구 편에 보내졌다는 편지를 펼쳤다. 그레이가 스스로 일어나 앉는 것을 본 집사가 감격스러운 얼굴을 했다. 자신이 정말 큰 일을 해냈다는 만족감 때문이었다. 칼리안의 매타작으로 허리가 부러졌던 그레이가 이렇게 앉아있는 것에 집사의 공이 크기는 했다. 빠르게 처신한 덕분에, 집사는 그레이로부터 아주 큰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약 일주일 전. 다 죽어가는 그레이를 마차에 태운 집사는 일단 인근에 치유사가 있는지를 먼저 확인했다. 그리고 레딩턴 성에 텐실의 치유사가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간신히 접할 수 있었다. 집사는 그 길로 이틀을 꼬박 달려 레딩턴 성에 도착했다. 그 뒤 레딩턴 영지 관리 대리인직을 맡고 있던 신관 말콤 체티쉬를 만나게 되었다. ‘이 분은 브리센 후작가의 장남이신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시오. 돈은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으니 꼭 좀 치료해주시오.’ 그때 말콤은, 칼리안에게 덜미를 잡혀 체포된 헤일 라트란 백작을 대신할 새 영지 관리인에게 인수인계를 하던 중이었다. 그 일로 텐실로 돌아가는 것을 잠시 미루고 있었던 참이었다. 의식을 잃은 그레이의 입에서 ‘칼리안’이라는 이름이 계속 튀어나왔다. 덕분에 말콤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자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것이 칼리안 왕자님이구나!’ 라고. 치유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그레이는, 묘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말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조건 단전부터 고쳐놓거라. 무조건!’ 그레이의 말을 들은 말콤은 아주 잠시 고민했다. 꿈에서 만나도 이가 갈리는 헤일이 그렇게나 좋아하던 브리센 가문 사람의 청을 들어주어야 할지. 혹은 헤일로부터 해방시켜준 뒤, 텐실에서 목숨을 부지하게 해 줄 장문의 편지까지 써준 칼리안의 편을 들어주어야 할지.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고, 말콤은 곧 치유를 시작했다. 단전의 손상된 조직을 이어 붙이지 않고 아물게 한 것이다. 앞으로 그레이가 다른 어떤 치유사를 만나더라도 절대로 고칠 수 없도록. 대신 적당히 일어나 걸을 만큼 허리는 붙여놔주었다. 물론 검을 다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게 치유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레이는 반쯤 고쳤으나 검을 다시 들기는 힘들 몸으로 변경백령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칼리안이 모르는 사이에 은혜를 잘 갚은 말콤은, 재빨리 인수인계를 마치고 텐실로 출발했다. 아무튼 그런 과정을 거쳐 제 스스로 일어나 앉아 편지를 펼쳐든 그레이가 갑자기 온 몸을 떨기 시작했다. 칼리안이 보낸 편지였기 때문이다. ‘칼리안! 잊지 말라고 협박까지 하려는 것인가!’ 이성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이미 나은 상처들이 다시 아파오는 것이다. 손에 들린 것은 전서구 편에 온 짧은 몇 문장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레이는 그것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간신히 편지의 내용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곧, 그레이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칼리안이 보낸 편지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던 탓이다. - 레넌은 죽거나 실종되지 않았다. 후작의 저택 지하에 온전히 감금되어 있다. 만약 후작이 죽고 레넌을 되찾으면, 실리케는 너와 레넌 중 누구에게 작위를 주고 싶어 할까. 실리케가 수족같이 부리던 레넌이 사라졌기 때문에 자신을 불렀다는 것을, 그레이 역시 잘 알고 있었다. - 곧 실리케의 사람이 너에게 갈 것이다. 처신 잘 하거라. 만에 하나 몸이 나아 칼리안에 대한 복수를 꿈꿀 수 있게 되더라도, 그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일 터였다. 그러니 당장은 실리케나 레넌, 혹은 에반 브리센 후작의 손에 죽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결국 그레이는 이를 악물며 집사를 불렀다. 칼리안의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 * * 다 큰 어른들의 싸움이라는 것도 기실 알고보면 별 것 없다. 한 쪽이 건드리고 한 쪽이 못 참으면, 싸움이 된다. 즉, 앨런이 건드렸고 에반이 참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싸움이라는 소리였다. “방금 뭐라 지껄였나, 마법사?” ······ 이렇게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앨런이 에반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앨런이 그 정도로 막돼먹은 인사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이렇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면. 그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앨런은 일단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않는 아르센의 생사를 대충 확인한 뒤, 베로니카의 배웅을 받으며 레이첼과 함께 집에서 나왔다. 지금 왕궁에서는 기사단 파벨이 사용했던 건물인 벨루아 관을 마법사들에게 맞게 개조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때문에 레이첼은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벨루아 관으로 갔다. 그리고 앨런은 아르피아 궁에 들러 르메인과 아침식사를 했다. ‘칼리안 왕자님이 말하기를, 이 참에 브리센 후작에게 조금 더 압력을 행사하셔도 좋을 것 같다 하더군요.’ ‘그래. 안 그래도 오늘 후작의 저택을 수색할 예정이네. 그나저나, 헤르츠 경은 무탈한 것인가?’ ‘죽은 것처럼 잘 살아있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대충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 그 뒤 앨런은 칼리안을 만나러 체르밀 궁으로 갔다. 그리고 그 입구에서, 플란츠를 보러 온 에반과 딱 마주쳤다. 물론 둘은 두 번째 만나는 것이었다. 다만 처음의 만남이 비밀리에 이뤄졌던 탓에, 앨런은 첫인사를 다시 건넸다. “앨런 마나실입니다.” 그런 앨런을 잠시 노려보던 에반은, 무언가를 씹어 뱉는 듯한 얼굴을 하며 자신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에반 브리센.” 그 말에 앨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서로 갈 길 가자며 조신하게 옆으로 비켜선 앨런을 향해, 에반이 입을 열었다. “부하 한 명이 사라졌는데, 얼굴이 참 태평하기도 하군.” 앨런의 아랫사람이 사라진 일 때문에 골치가 아프던 차에, 정작 앨런은 그리 걱정거리가 없어 보이니 부아가 치민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앨런 역시 편한 속이 아니었다. 누가 시켰건 결국은 에반의 기사들이 아르센을 공격한 것이 아닌가. 아무리 아르센이 멀쩡히 돌아와 앨런의 오리알이나 깨먹고 있다지만, 브리센으로부터 선제 공격을 당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부하가 열 명이나 죽었다던 후작께서도 퍽 태평한 얼굴을 하고 계시는군요.” 따라서 앨런의 입에서도 이렇게 곱지 않은 대꾸가 튀어 나왔다. 에반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앨런은, 에반이 주먹을 쥐는 것을 슬쩍 쳐다본 뒤 속 시원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제 아랫사람이 그리 죽어 돌아왔다면, 이렇게 쉬이 왕궁에 찾아오기보다는 당장 장례부터 신경을 쓰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죽었던, 그것이 윗사람의 도리 아닐런지요.” 졸지에 윗사람 구실도 못하는 이가 된 에반이 앨런을 향해 잇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누굴 가르치려 드는 것인가. 설마 전하의 앞에서까지 그리 건방지게 행동하는가?” 당연히, 르메인의 앞에서는 더 건방지게 행동한다. “후작께서 참견하실 영역이 아닙니다. 선은 지키시지요.” 카이리스에서 앨런은 평민이나 다름 없다. 그럼에도 앨런은,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중앙 귀족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런 앨런이 에반의 말에 단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것이 에반의 이성을 자꾸 흩트려 놓았다. 에반이 그 뒤틀린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런 작자를 총애하며 옆에 두고 있으니, 전하의 안목도 결코 믿을 것이 못되는군.” 그리고 에반이 체르밀 궁이 있는 곳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하니 3왕자의 성품도 알 만 하고.” 앨런이 짧은 웃음 소리를 냈다. 르메인을 넘어서 칼리안까지 저 입에 담겨졌으니, 그나마 참고 있던 앨런의 입이 완전히 풀려버렸다. “고작 마법사 한 명을 잡겠다며 덤비다 정예기사 열이 죽어 나간 기사 가문보다는 믿을 만 하겠지요.” 방금 저 말은 지금의 에반에게 있어 가장 굴욕적인 부분이었다. 그것을 푹 찌른 앨런이 계속 입을 열었다. “그런데 듣자하니, 시신들이 누운 모양새가 사방으로 도망가다 죽은 꼴이라 하더군요.” 앨런의 시선이 에반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를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올라왔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말씀하셨으니. 후작의 칼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저도 좀 알 것 같습니다.” 순간 에반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가라앉았다. 에반이 간신히 참고 넘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입을 아주 조심해서 놀려야 할 것이다, 마법사.” “후작의 검이나 조심해서 놀리시지요. 나트랑샤 거리의 건달들도 돈 받고 사람 잡아가는 짓은 안 합니다. 부끄러워서.” 하다하다, 건달이란다. “닥치거라!” 칼리안이 말하기를, 앨런 마나실의 입에 세렌티의 영광 있으라 하였으니. 닥치란다고 닫아질 입이었으면 그런 말을 했겠는가. 앨런이 확연한 조소를 입에 띄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얼마를 받았다고 합니까.” 그렇게 물은 앨런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주 작은 소리로, 하지만 또렷하게. “물론 그 날보다 더 많이 받지는 못했겠지요.” - 당신이, 당신의 자식을 팔아 치운 그 날보다. 앨런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눈에 담긴 말을 들어버린 에반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쇳소리 섞인 음성이 에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방금 뭐라 지껄였나, 마법사?” 그와 함께 에반의 온 몸에서 살기가 피어 올랐다. 일전에 에반의 서재에서 보였던 것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짙은 살기였다. 그때 모든 힘을 내보이지 않았던 탓에 다시 한번 살기를 꺼내보인 듯 했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또 한번 기 싸움을 하게 되어버린 앨런이 혀를 찼다. 아무리 에반이 7서클 마법사를 제대로 겪어본 적이 없다지만, 저택에서 한 번 부딪혔던 일을 통해서도 배운 것이 전혀 없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에반은, 6서클에 그냥 1서클만 더하면 그것이 바로 7서클이라 생각하는게 분명했다. 대륙에 7서클 마법사가 고작 세 명 뿐이라는 사실만이라도 기억해내면 좋으련만. “나는 그리 무르지 않다 하였는데, 그새 잊으셨나 봅니다.” 확실히 에반의 살기는 강했다. 체르밀 궁 안에 있던 칼리안이 그것을 느꼈을 정도였으니 어설픈 힘은 아니었다. 다만 그 상대가, 앨런 마나실이었다. “이리도 주제를 모르시니, 정말 어찌 감당하실런지.” 그 말과 함께 지극히 원초적인 공포가 온 몸을 죄여왔다. - 사아아······. 형언할 수 없는 위대한 이의 앞에 무릎 꿇은 듯한 느낌이 에반을 엄습했다. 에반의 살기만 더 짙어진 것이 아니었다. 앨런의 공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반은 깊고 깊은 구렁텅이에 홀로 침잠하는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의 귀에 앨런의 목소리가 울렸다. 에반의 살기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한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 소리의 울림에도 공포가 있었다. “생각을 좀 하시지요.” 그것을 이겨내려는 듯, 에반의 살기가 한층 짙어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앨런의 공포감이 몇 배로 늘어났다. 곧 앨런이 고개를 살짝 숙여 에반의 눈을 직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누구인지.” 그와 함께 또 한 번, 앨런의 기운이 에반을 짓눌렀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에반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결국 에반이 이를 악물며 살기를 흩었다. 그것을 느낀 앨런도 피어를 멈추었다. 곧 에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홀로 강한 것은 결코 오래 남지 못한다, 마법사.” 순간, 앨런의 머릿속에 칼리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때문에 앨런은 여유롭게 답할 수 있었다. “나는 홀로 강하지 않으니 상관 없습니다만.” 그렇게 입을 뗀 앨런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누구를 믿고, 또 무엇을 바라고 여기 오려 했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에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앨런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실리케가 있는 헤이시아 궁을 향해서였다. “브리센은 홀로 강하고자 하는 이들이 너무 많군요. 얼마나 오래 갈지는, 내가 지켜보지요.” 결국 에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에반이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아보였으므로, 앨런은 그런 에반을 내버려두고 자리를 떠났다. * * * 차를 가져다 달라는 칼리안의 말에, 얀이 곧바로 움직였다. 방금 나온 곳이 식당이었으므로, 얀은 재빨리 식당 옆에 마련된 다과 준비실로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따뜻한 코코아, 그리고 코코아에 잘 어울릴 옥수수 쿠키를 준비해 칼리안의 방으로 갔다. 얀에게 알렸던 바와 같이 칼리안은 테라스에 나와 있었다. 이제 날이 많이 추워졌으므로, 얀은 테라스 테이블에 차를 놓고 다시 방으로 가 가디건을 챙겨왔다. “감기 걸리십니다.” 얀이 이렇게 말하며 가디건을 건넸고, 칼리안은 그것이 굳이 필요치 않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가디건을 받아 걸쳐 입었다. 곧 칼리안의 옆에 선 얀이 물었다. “무엇을 그리 보십니까?” 거칠거칠한 식감이 매력적인 옥수수 쿠키를 한 입 베어 문 칼리안이, 멀리 보이는 체르밀 궁 입구 쪽을 가리켜보였다. 그리고 쿠키를 우물우물 씹어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저기.” 인공 호수와 장미 정원을 빙 둘러 가야 체르밀 궁의 입구가 있었기 때문에, 얀에게는 그저 두 사람이 서 있는 것 정도만 가늠이 되었다. 눈에 힘을 잔뜩 주며 누가 있는 것인지 확인하려는 얀을 본 칼리안이 뜻 모를 소리를 했다. “오싹오싹하네, 아주.” 여전히 얀은 이해가 잘 안된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는 무슨 일인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기분 좋은 일이 하나, 그리고 재미있는 일이 하나.” 앨런이 이겼으니 기분이 좋았고, 에반의 오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 재미가 있었다. “늙은 호랑이인 줄 알았더니. 발톱 숨긴 살쾡이였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한참을 웃었다. <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7) > 이대로 체르밀 궁에 들어갈 것인가. 방향을 돌려 헤이시아 궁에 들어갈 것인가. 모두 아니라면, 브리센 저택으로 돌아갈 것인가. 에반은,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한참을 서 있었다. 앨런의 아랫사람에게 에반의 부하가 졌다거나, 앨런 본인에게 말과 기세 모두에서 크게 밀려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 두 가지도 자존심이 크게 상하고 화가 나는 일임은 맞았으나, 그보다는 앨런의 마지막 말이 그의 심경을 건드리고 있었던 탓이 더 컸다. -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누구를 믿고, 또 무엇을 바라고 여기 오려 했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앨런이 건넸던 말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변경백인 그레이가 대체 왜 수도에 왔는가.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은 하나였다. ‘실리케.’ 레넌이 브리센을 버리고 란델을 선택한 것처럼, 실리케가 에반을 버리고 그레이와 손을 잡으려 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퍼져나온 소문에 정신을 온통 팔려서는, 정작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이런 사실을 하필 앨런의 입을 통해 상기하게 되었으니, 그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을 또 가르치려 든 마법사의 목소리와 얼굴을 지워내기 위해, 에반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곧, 에반의 눈이 자연스럽게 헤이시아 궁을 향했다. ‘네가 기어이, 나를!’ 에반이 감아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자식이 아비를 쳐내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에 대한 분노였다. 에반은, 지금 당장 헤이시아 궁으로 달려가려는 발을 붙들어맸다. 그렇게 간신히 화를 삼켜낸 에반이 다시 고개를 돌려 체르밀 궁을 쳐다봤다. 플란츠가 있을 곳을 살펴보려던 에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섣불리 만나면 안된다.’ 사실은 플란츠와 실리케의 관계가 어떤지를 확인하려 찾아온 길이었다. 만에 하나 자신이 실리케를 궁 밖으로 내보낼 경우, 플란츠가 영향을 받을지를 알고자 했다. 제 어미를 내쫓았다며 브리센과 척을 질 듯 하다면, 플란츠를 왕으로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레넌을 꺼내주고 브리센 전체가 란델의 손을 들어주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실리케가 에반을 배신했다면, 플란츠가 누구의 편인지를 완벽하게 파악한 뒤에 만나야 했다. 그러니 일단은 이 준비되지 않은 만남을 미루기로, 에반은 그렇게 결정을 했다. 그리하여 결국 에반은 발을 돌렸다.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로, 작은 성과도 같은 브리센의 거대한 저택으로 돌아간 것이다. 실리케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 쏴아아아······. 그리고 기어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 *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과 창 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 그 너머로 발길을 돌리는 에반의 모습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방향을 보니, 왕궁 밖으로 나가려는 듯 하네요.” “그나마 가장 현명한 판단을 하였습니다. 같은 싸움을 또 걸어오기에 영 머리가 나쁜 줄로 알았는데, 그래도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는 모양입니다.” 이러한 앨런의 말을 들은 칼리안은, 에반을 함께 비웃는 대신 자신조차 오싹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던 앨런의 피어를 떠올렸다. “조금 전에는 정말 굉장하셨습니다. 그 정도의 기운은 저도 처음 겪어봤습니다. 아, 물론 시스파니안을 제외하고요.” 앨런은, 에반의 앞에 서 있던 사람과 같은 이가 맞을까 싶을만큼의 상냥한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놀라기는 했습니다. 스승님의 앞에 있던 것이 제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키리에는 아예 숨도 못쉬던데요.” 칼리안은 그 기싸움에 대한 감상을 여기까지만 전했다. 자신이 에반의 오러를 느낄 수 없었음을, 그러니 당장은 에반이 자신보다 강하리라는 말을 앨런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다. 괜한 걱정을 끼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로막는 벽이 있으면, 부술 힘을 더 키우면 되는 일이니까. 부수는 것은 참 잘하는 칼리안이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혹, 제가 물러났어야 했을런지요?” 재미있는 것을 눈 앞에 둔 듯한 칼리안의 웃음을 어찌 해석했는지 몰라도, 앨런이 이렇게 물어왔다. 이 말을 아마 르메인이 들었다면 분명 능구렁이 같은 질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 칼리안이 무슨 대답을 할지 알면서 묻는 말이니 말이다. 굳이 제자의 칭찬을 받고자 하는 기대감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있는 앨런에게,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스승님. 아주 잘 하셨습니다. 어차피 알리려 했던 정보이기도 했으니까요.” 세상에서 무서울 것 하나 없을 이 대마법사가, 왕자의 칭찬을 받고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아마 아무도 모를 터였다. “마법은 모르겠지만, 입으로 스승님을 이길 자는 이 땅에 아무도 없을 겁니다.” 칼리안이 진심을 담아 덧붙인 말에, 앨런은 세상에서 가장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마법은 누가 가르쳐 줄 수나 있지. 입을 놀리는 것은 누구에게 배울 수도 없는 능력이 아닌가? “제 입이, 세상 어디에서도 적수가 없을 입이기는 하지요.”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한참을 웃었다. 잠시동안 칼리안의 웃음이 끝나길 기다린 앨런이 화제를 바꾸었다. “아무튼 이제 저들의 사이가 보기 좋게 틀어지겠군요.” 칼리안은 그레이에게, 실리케가 레넌의 손을 잡을 것이라 언질을 주었다. 그리고 앨런은 에반에게, 실리케와 그레이가 협심하여 후작위를 빼앗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겉으로는 셋이 서로를 의심하고 견제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들춰보면 아니죠.”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겉으로는 셋이 힘겨루기를 하는 듯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레이와 에반 모두에게 공통된 적이 생긴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바로 실리케다. “실리케가 어찌 나올지. 궁금하네요.” 같은 것이 궁금하다 여기며 고개를 끄덕이던 앨런이, 문득 떠오른 다른 의문을 꺼내들었다. “그럼 왕자님께서는 이제 무엇을 할 요량이십니까?” “가보려고요. 궁금증 풀러.” 가보다니? 앨런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설마 실리케와 독대를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내일 쯤 만나볼까 하고 있습니다. 빠르다면 내일 중에 그레이에게 보낸 이들이 전해온 소식이 도착할테니, 그레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좀 떠볼 겸 해서요.” 앨런이 손가락을 들어 귀를 후비적거렸다. “누가 또 오늘만 살 것처럼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칼리안이 씩 웃었다. 앨런의 말 뜻을 알아들은 탓이다. 지금 앨런은,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또 독차를 내어줄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런 수에 당할 칼리안이 아님을 알았으니까. 그저, 실리케를 만난 칼리안이 화를 참지 못하고 또 무슨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사고 치러 가는 것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레이와 에반이 실리케를 경계하기 시작하니, 실리케는 그 둘이 아니라 저에게 집중하게 만들어 놔야죠. 그래야 자신의 처지를 잊고 무모하게 움직일 테니까요.”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집중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앨런이 참 잘 아는 방법이기도 했다. 사람 속 뒤집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왕자의 말에, 사람 비꼬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스승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맞이할 사람이나 찾아올 사람이나 서로 미리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알 수 있었다. 오늘 밤에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 때문에 이 추운 밤에 창문을 연 채로 방문객을 기다리던 칼리안은, 테라스에서 난 ‘툭’ 하는 작은 소리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얼굴로 자신이 앉아있는 맞은편의 소파를 가리켜보였을 뿐이었다. “앉으십시오.” 고작 두 번 만에, 플란츠의 방문이 익숙해지다니. 칼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마도 플란츠 역시 칼리안의 방에 이런 식으로 또 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터였다. 오전에 느껴진 짙고 짙은 살기에 창문 밖을 내다 보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칼리안의 맞은편에 털썩 앉은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아침에, 마법사가 기사를 내쫓는 것이 보이던데.” “전하께서 형님의 검술 실력을 칭찬하시기에 반만 믿었는데, 과언은 아니셨나 봅니다.” 앨런과 에반의 기싸움을 느끼고 칼리안을 찾아온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이렇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플란츠는 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눈이 닿는 곳에서 칼리안과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으므로, 하루 종일 고민을 했을 것이 뻔했다. 앨런과 에반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왜 둘이 그런 싸움을 벌였는지. 그리고 에반은 왜 다시 돌아갔는지. “후작과 혹시 자주 만나십니까.” 칼리안은 플란츠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궁금한 것을 먼저 물었다. 이 대화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플란츠 역시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자신의 질문을 무시하고 건네진 칼리안의 물음에 대답을 해줄 수 밖에 없었다. “따로 대면했던 적 없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플란츠를 따로 만난 적 없었다는 그 말에, 에반의 심경 변화를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실리케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것까지는 몰랐어도, 실리케를 먼저 버릴 생각을 하고는 있었던 것이군.’ 상황을 조금 더 파악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형님의 집안이 워낙 화목했던지라, 그리 많은 것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곧바로 골이 생기는군요.” 그 말에 플란츠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대체로 그 눈에 빛이 돌지 않는 모습만 보아 왔었으므로, 칼리안은 문득 생소한 느낌을 받았다. 칼리안은 그에 대해 별다른 티를 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때문에 후작이 형님을 찾아온 것 같습니다. 형님 의중을 확인하려고. 그러다 제 스승님과 마주쳤고, 사소한 자존심 싸움이 있었고. 그냥 돌아간 겁니다.” 별 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으나, 그 이면에 숨겨진 것을 파악하지 못할 플란츠가 아니었다. “그러니, 형님의 어머니가 물러나는 것만을 바라신다면. 굳이 제 편을 더 들어주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두어도 형님의 어머니는 이 곳에 오래 있지 못할 듯 싶군요.” 플란츠는 지금의 말에 대해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칼리안의 말이 끝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니, 계속 해보라는 듯 고개만 살짝 움직였다. “그런데 만약 형님의 어머니가 있든 없든 상관 없이 카밀론 궁에 가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저는 갈 생각이 있으니 겸사겸사 제가 돕겠습니다.” 실리케만 배척하고 왕이 될 생각이 있다면 후작에게로 가고, 여전히 왕위에 관심이 없다면 자신의 편에 서라는 소리였다. 플란츠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이미 대답을 한 줄 알았는데.” 그것은 칼리안의 손을 잡을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는, 플란츠 나름의 명확한 대답이었다. 실리케가 있든 없든, 왕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니까. 칼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카이리스와의 전쟁에서 죽은 뒤 카이리스에서 되살아나서. 아르센을 거느리고, 플란츠와 손을 잡을 상황에 놓였으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이 목숨을 바쳤던 형을 대신해 앉아 있는,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형을 보며. 칼리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플란츠는 고개를 한번 더 움직여 보였다. 질문을 하라는 뜻이었지만, 칼리안은 잠시 입을 다물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 물었다. “형님의 어머니. 이번에는 정말 최악의 선택을 할 지 모릅니다. 제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 생각이라서.” 최악의 선택. 플란츠의 눈이 깊이 잠겨들어갔다.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저는, 실리케를 구제해 줄 생각이 없습니다.” ‘형님의 어머니’라는 길고 긴 표현을 집어치운 칼리안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츠아라 광장에 실리케를 위한 레니시타 잎이 깔리더라도 내 손을 계속 잡을 수 있겠느냐고. 칼리안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질문을 정확히 이해한 플란츠의 입에는 깊은 조소가 어렸다. 다만 그것이 누구를 향한 비웃음인지는, 플란츠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열어 둔 창문 사이로 거센 빗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내 어머니가 그리 애써가며 걸어간 길에.” 르메인의 검에 죽든. 에반 브리센의 손에 죽든. 혹은 광장에 선 죄인으로 죽든. “그것 말고 다른 끝이······ 있기는 할까.” 플란츠는 담담하려 노력하는 것이 분명한,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정없이 휘청거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렇게 칼리안은, 플란츠와 완전히 손을 잡았다. < 제16장. 내가, 당신에게. (1) > 분명한 것은, 얀이 어딘가 많이 허술하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바로 옆에서 칼리안을 보필하는 것이 얀의 일이다. 칼리안의 몸에 베른의 영혼이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칼리안이라는 사람의 옆에는 얀이 있었다. 그런데 얀은 칼리안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얀이 칼리안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얀은 칼리안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칼리안의 습관 하나, 취향 하나,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이런 얀이 의심을 안하니, 오히려 불안하게 여길 수 밖에. 때문에 얀이 어째서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항상 안고 살았던 칼리안은,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조금 알게 되었다. “플란츠가 너한테 칼을 던졌던 게 기억이 안나?” “칼을 던진 것은 알죠. 그런데 저한테 던진 것이었던가요?” 얀은 그냥 바보였다는 것을. 플란츠와 대화를 나눈 다음 날 오전. 서서히 그쳐가는 비를 보며 실리케를 만나러 갈 준비를 마친 칼리안은, 플란츠와의 일을 얀에게도 설명해줘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다보니 오래 전 조찬에서 플란츠가 얀에게 나이프를 던졌던 일이 생각났다. 슬레이만이나 얀은 그다지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얀은 공작가의 귀한 자제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플란츠의 그 행동에 대해 얀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얘기를 꺼내려 했다. 그런데 얀은 플란츠가 바로 자신을 향해 칼을 던졌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직도 왕자님 손에 흉이 남아있잖아요. 정말 그 일만 생각하면 얼마나 화가 치미는지······!” 분명 그날 얀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나이프를 피하면 플란츠가 더 화를 낼까봐 그냥 가만히 서있었다. 그리고 얀에게 날아가던 나이프를 붙들어 잡은 칼리안이 손을 다쳤다. 아무리 햄이나 자르는 무딘 칼이라지만 그래도 자칫 크게 다칠 뻔했던 일이다. 그러니 그 정도는, 당연히 기억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어떻게 자신에게 나이프가 날아온 것을 쏙 빼먹고 그 나이프에 칼리안이 다친 것만 또렷이 기억을 하느냐는 말이다. 결국 칼리안은, 전날 플란츠와 나누었던 유쾌하지 않은 대화 때문에 감정이 얽혀있던 것도 잊은 채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래. 그래도 언제 또 얘기를 나누게 되면 너한테 제대로 사과해달라고 할게.” “얘기를 나누다니요?” 칼리안의 말에 얀이 되물었고, 칼리안은 자신이 플란츠와 손을 잡았음을 알렸다. 당연히 얀이 가장 먼저 물어본 것은 ‘왜’였다. 왜, 플란츠가 실리케로부터 등을 돌렸는지. “그건.” 그렇게 입을 뗀 칼리안이 잠시 플란츠를 떠올렸다. 플란츠는 실리케가 자신을 왕으로 만들겠다며 벌이는 악행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왕이 되지 않기 위해 온갖 기행을 해왔던 것 같았다. 그렇게 하면 실리케가 포기하리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실리케는 그런 일로 제 욕심을 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다 마법사 협회에서 공개했던 자료를 보게 되었을 것이고, 실리케가 얼마나 많은 목숨을 빼앗아가며 자신을 키워왔는지를 제대로 알았을 터였다.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 물론 처음부터 실리케를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르메인의 말을 가로채면서까지 실리케를 보호하려 나서던 플란츠가 아닌가. 그러나 결국에는, 죽음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실리케를 막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리라. “마음을 접은 거야.” 칼리안은 자신이 예상한 내용을 입에 담는 대신 짧게만 대답했다. 따라서, 본래에도 사람 속 읽어내는 재주가 별로 없는 얀은 플란츠의 마음이 바뀐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때문에 얀은 칼리안과 플란츠의 관계가 이전과는 조금 달라지게 되었음을 그리 탐탁지 않아 했다. 다만 칼리안에게 그런 거부감을 드러내어 알리지는 않았다. “그럼, 그 동안 왜 그렇게 왕자님을 괴롭혔다고 합니까?” 그 말에, 칼리안은 얀을 멀뚱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안 물어봤어.” 옛 칼리안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플란츠가 칼리안을 괴롭힌 것은 오로지 다른 이들이 함께 있을 때 뿐이었다. 플란츠가 얀에게 칼을 던졌던 바로 그 날에도, 란델이 오기 전에는 조용히 있지 않았던가. 그런 것들에 의거하여 괴롭힘의 이유도 가늠해 볼 만 했으나, 칼리안은 그렇게까지 해가며 플란츠를 포용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한들, 플란츠를 이해하고 용서할지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옛 칼리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으니까. “서로 쌓인 것을 털어놓고,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려고 손을 잡은 것이 아니잖아.” 이번에도 칼리안은 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간단하게만 얘기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실리케를 만나러 가려는 것이다. 넓은 듯 보여도 무척이나 좁은 이 왕궁에서, 지금 어디에 가려 하는지를 얀에게 숨길 수가 없었다. 때문에 얀의 얼굴에 다시 걱정이 들어찼다. 칼리안은 그런 얀의 얼굴을 못본 척 말했다. “다녀올테니, 스승님께 가서 오늘 귀가 전에 잠깐 들러주시라고 전해줘.” 그 말에 담긴 다른 뜻 때문에, 얀은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헤이시아 궁에 혼자 가시려는 것은 아니죠?” 칼리안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혼자 갈 거야. 실리케의 그 얼굴을 또 보는 건 나 하나면 족할 것 같아서.” 앨런은 칼리안이 사고를 칠까봐 걱정하고, 얀은 칼리안이 사고를 당할까봐 걱정하고. 과한 걱정들을 뒤로 하고, 칼리안은 제 고집대로 혼자서 실리케가 있는 헤이시아 궁으로 갔다. * * * 실리케의 손에는 작은 편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에게 보낸 시녀가, 변경백령에서 왕궁으로 다시 출발하기 전에 보낸 전서구였다. 편지를 들고 있는 실리케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편지를 쥔 손은 핏줄이 고스란히 보일 정도로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 변경백을 멀리서 보았을 때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심신의 안정이 매우 중요한 상태라 하여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성의 하인들을 탐문해 보았으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멀리서 보았다. 대면하지 못했다. 입을 열지 않는다.” -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며 이만 돌아가 주기를 청했습니다. “돌아가라.” 편지의 내용을 읊조리는 실리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른 새벽에 전해진 그 편지를, 실리케는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 돌아가라.” 왕비가 보낸 사람을 대할 때에는 충분히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심지어 실리케의 오빠라면, 이런 내용이 예법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응당 그렇게 접대해 주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전해진 내용을 보면 그레이를 찾아간 시녀를 완전히 무시하며 불청객과 다름없는 취급을 했다는 말이 아닌가. “크게 다친 곳은 없는데, 돌아가라 하였다.” 실리케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지금 시녀장은 몇 시간 째 실리케의 옆에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녀장은 힘든 것을 느끼기는커녕 실리케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금 실리케가, 이 온실의 르니에리 화분을 전부 깨뜨렸던 그날만큼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온실 밖에서 한 시녀가 들어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시녀장에게 말을 전했다. “지금······ 칼리안 왕자님께서······.” 하필 지금 칼리안이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따로 없었다. 물론 전날 미리 약속을 잡았던 것은 맞았다. 하지만 지금 실리케가 칼리안을 만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가늠이 어려웠다. 때문에 시녀장은 조용한 목소리로 실리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칼리안 왕자와의 약속은 다른 날로 바꾸도록······.” “아니다.” 약속을 미루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시녀장의 말을 이렇게 가로막은 실리케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꽉 쥐고 있던 편지를 비로소 손에서 놓았다. 그것을 시녀장에게 건넨 실리케가 입을 열었다. “들어오라 하거라.” “네, 왕비 저하.” 실리케의 말을 들은 시녀장이 서둘러 온실 밖으로 나가 칼리안과 함께 다시 들어왔다. 뚜벅, 뚜벅. 칼리안의 구두 소리가 온실 안을 조용히 울렸다. 곧 칼리안이 실리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실리케의 눈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따로 보는 것은 오랜만인 것 같군요.” 그리고 바로 그 날과 같은 표정을 한 채 웃었다. “실리케.” 실리케가 실소했다. 칼리안이 또 자신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이 없구나.” 곧 시녀 한 명이 따라 들어와 커피 두 잔을 놓고 나갔다. 그리고 실리케는 시녀장을 향해 나가 있으라는 제스처를 했다. 주변이 비워진 뒤, 실리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방문에 그리 반가운 마음이 들지는 않는구나. 무슨 일로 찾아왔니?” “줄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짧게 대답한 칼리안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 탁! 지난 번에는 설탕처럼 생긴 독약을 내려놓더니. 칼리안이 꺼내둔 것에 묻어 있는 얼룩을 본 실리케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지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검게 마른 핏자국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실리케에게 매우 낯이 익은 것이기도 했다. 실리케가 직접 테일에게 건넸던 돈 주머니였기 때문이다. “테일이라고 했던가. 그 자가 가지고 있었다 하더군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쳐다봤다. 이미 죽은 이의 피가 잔뜩 묻은 것을 손으로 만지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꽤 큰 돈이 들어 있던데.” 그렇게 말한 칼리안은 주머니를 다시 닫은 후, 그것을 실리케 앞으로 툭 던졌다. 자신의 커피잔 바로 옆에 떨어진 주머니를 본 실리케가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보자, 칼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헤르츠 경이 당신 오빠 마차를 땔감으로 만드는 바람에, 내가 물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변경백령에 사람을 보내기는 싫고. 혹시 변경백을 만나거든 당신이 대신 좀 전해줬으면 합니다.” 실리케가 테일에게 건넨 돈을 칼리안이 주워오더니, 그레이의 마차값이라며 실리케에게 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본래 당신 돈이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테일을 보낸 이가 실리케라는 사실을 이미 확신하는 말투였다. 실리케가 한쪽 눈썹을 살짝 움직이더니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죠. 그날 테일을 만난 것도 기억나지 않을 테고.” 실리케의 말을 자른 칼리안은, 담담한 얼굴과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헤르츠 경을 적당히 잡아다가 그레이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오라 한 적도 없을 겁니다.” 그 날의 일을 고스란히 들킨 실리케의 웃음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리고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기억나지 않는구나.” 그 말에도 칼리안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실리케는, 지금 칼리안이 테일의 일을 두고 자신을 협박을 하러 온 것인지 다른 이유로 온 것인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분명히 아는 것은 단 하나. 앞에 있는 칼리안이 지나치게 거슬린다는 사실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내게서 가져간 것은, 고작해야 기사단 하나란다. 하나를 빼앗았다고 꽤 기고만장해진 모양이다만. 나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그리 작은 사람이 아니란다. 그러니 건방진 행동은 그만했으면 좋겠구나.”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정말로 우스운 것을 보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실리케를 쳐다봤다. “그렇게 큰 사람이라는 분이, 굉장히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얼굴을 하고 있군요.” 그리고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와서 그런 것인지.” 실리케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순간적으로 그레이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칼리안이 똑같이 차가워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새가 와서 그런 것인지.” 새······! 실리케의 눈빛이 바뀌었다. 칼리안은 그레이로부터의 전서구를 이야기하는 것이 분명했다. 실리케의 머릿속에 빠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제 집으로 돌아간 변경백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변경백은 카이리시스로 오던 중 연락을 끊었다. 엔디시아 영지에서 새로운 마차를 구입하느라 일정이 지연된다는 연락을 한 것이 마지막. 그런데 마차를 새로 사야 했던 이유는······.’ 레딩턴에서 칼리안과 그레이가 대치했고, 지금은 실종된 아르센 헤르츠라는 마법사가 그레이의 마차를 부숴놓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졌었다. 하지만 그 뿐, 그레이는 그 길로 레딩턴 성에서 나왔고 칼리안은 그 곳에 사흘을 더 머물렀다 했었다. 그레이가 연락을 두절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그 사이에 둘이 무슨 일이 있었구나.’ 이렇게 상황을 따져보던 실리케의 귀에, 재밌어하는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이 복잡해 보이시니, 보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요.” “변경백에게 무슨 수를 쓰기는 한 모양이구나. 너를 도와주면 무슨 대단한 것을 주겠다는 약속이라도 하였느냐?” 그렇게 입을 연 실리케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네가 줄 만한 것이 있을까 모르겠다만.” 제대로 잘못 짚었다. 칼리안은 그저 실리케가 에반과 그레이로부터 눈을 돌려 자신만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앞뒤 안 가리고 칼리안을 없애겠다는 마음을 먹게 하기 위해 왔을 뿐이니까. 칼리안이 대답하지 않자,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고 여긴 실리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를 얻었다고 신이 난 모양이지만.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착각하지 말거라.” 그 후에는, 예전의 그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어미도 그랬단다. 널 낳고 어찌나 신이 나 있던지.” “아, 참.” 프레이야를 언급했으나 칼리안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자르자, 실리케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칼리안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제 어머니를 얘기하시니, 문득 궁금했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방금 전 실리케의 말을 듣고 어떤 의문이 떠오른 것이다. 그레이에 대한 이야기보다 조금 더 실리케를 자극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그런 의문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그레이에 대한 말을 잠시 미루고 새로운 질문을 먼저 꺼내기로 했다. 여유로운 동작으로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신 칼리안이, 한동안 실리케를 응시했다. 그리고 물었다. “전 왕비 아이샤는 정말 병사한 것이 맞습니까?” 실리케의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런 실리케를 관찰하듯 바라보던 칼리안이 작게 입을 열었다. 낮은 중얼거림, 혹은 속삭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구나.” < 제16장. 내가, 당신에게. (2) > 칼리안과 실리케가 대면하던 시간. 에반 브리센 후작이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꽉 쥔 주먹에서 한 방울의 피가 뚝- 떨어졌다. 하룻밤! 그는 꼬박 하룻밤 동안 자신의 침실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어제 왕궁에서 앨런과의 일전을 치르고, 그 와중에 실리케의 배신을 알게 된 에반이었다. 때문에 에반은 매우 예민해진 상태로 저택에 돌아왔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화를 다스리며 하루를 보내던 중, 르메인이 보낸 이들이 저택을 찾았다. 바로 국왕 친위대인 카에라였다. ‘하필 카에라를 보내다니.’ 사실 에반은, 왕궁의 기사들이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썩 좋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었다. 다른 이들도 아닌 카에라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르메인을 두고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그 누군가가 국왕의 안위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 자일 때뿐이었으니까. 그러니 르메인이 아르센을 찾겠다며 카에라를 보냈다는 것은, 발칸 부단장의 실종이 르메인의 안위와 연결된다고 생각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아직 정식으로 창단되지도 않은 발칸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기도 했다. ‘분명히 보여주기 식 방문일 테지.’ 즉 르메인은, 이번에 에반의 집을 조사하라며 카에라의 기사를 보내는 행동을 통해 발칸이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어떤 목적의 군대인지를 널리 알리려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계획적인 움직임에 자신이 쓰였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카에라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저택을 수색하라는 왕명을 받고 왔습니다.” 에반의 앞에 선 기사. 카에라의 기사단장인 렌 아드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렌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말하지 않았다. 에반을 향해 예를 보이지도 않았다. 에반은 렌이 언제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노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네놈.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죄인 취급인 것이냐.” 범죄자, 그것도 카에라가 직접 움직여야 할 만큼 르메인에게 큰 피해를 입힌 범죄자를 대할 때의 표정을 한 렌이 짧은 대답을 전했다. “왕명, 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내는 것은 비단 렌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기사들도 모두 완전히 무장하고 있었고, 표정들이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제야 에반은 자신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카에라의 방문은 ‘보여주기 식’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껏해야 자신을 찾아와 몇 마디 묻고 갈 것이라 생각을 했건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곧 렌이 기사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에반의 허락은 구하지도 않았다. 렌의 손짓을 따라,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명 이들은 아르센 헤르츠라는 마법사를 찾으러 왔을 텐데, 기사들은 마치 사람이 아니라 작은 동전이라도 찾으러 온 것처럼 온 저택을 뒤져나갔다. 결국 더 참지 못한 에반이 노호성을 터뜨렸다. “내가 그 작자를 이곳에 숨겨두기라도 했다는 말이더냐!” 에반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보면서도, 렌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무감정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기다리십시오.” 그 한 마디와 함께, 렌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 중 두 명이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에반을 침실로 ‘안내’했다. 에반은 당장 검을 들어 그들을 베지 않기 위해 인내해야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상황에 에반이 가장 먼저 생각한 이가 르메인이 아닌 실리케였다는 사실이었다. 실리케가 배신을 했기 때문에. 실리케가 그레이와 손을 잡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해괴한 소문에 자신이 얽혔기 때문에. 카에라의 기사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고도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실리케.” 에반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수색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끝났다. 에반의 저택이 워낙 컸고, 카에라의 수색이 상상 이상으로 꼼꼼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에반에게 있어 한 가지 다행이었던 일은, 레넌을 숨긴 곳은 들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특수 장치로 잘 숨겨두었던 지하실 입구는 발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상 없는 것 확인했습니다. 쉬십시오.” 렌은 이런 짧은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기사들이 떠난 후 에반에게 남겨진 것은 어질러진 저택, 그리고 분노였다. * * * 에반이 한참 화를 내고 있던 바로 그 시간. 뚱한 얼굴로 창밖을 보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이것이 정말 저를 위한 일이 맞을는지요?” 그리고는 붉게 충혈된 눈을 부비적거리며 긴 하품을 했다. 갈수록 방만해지는 앨런의 태도에 잠시 혀를 찬 르메인이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안경을 찾아 쓰며 대답했다. “배부른 소리를 하는군.” 그렇게 말하며 서류를 하나 집어들고 읽어내려가기 시작하는 르메인을 향해, 앨런의 대꾸가 이어졌다. “도무지 올 생각을 않으니 의심을 하는 것이지요.” “아드리안 경이 꼼꼼한 성격이기는 하지.” 지금 앨런은 카에라의 기사단장인 렌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렌이 빨리 와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꼼꼼한 것이 아니라, 오다가다 죽은 것이 아닌지를 걱정해야 할 판이 아닙니까?” 전날 오후. 자신의 집무실에서 얌전히 일을 하고 있던 앨런은, 르메인의 집무실 주변을 구석구석 호위하던 기사들이 반 이상 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깜짝 놀라 르메인의 집무실로 찾아가니, 태평한 얼굴의 르메인이 이런 말을 했다. “카에라를 내보냈으니, 올 때까지 내 뒤를 부탁하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찾아온 사람에게 자신의 업무를 계속 넘겨주더니, 이제는 시시때때로 호위까지 맡기려는 르메인에게 앨런이 넌지시 물었다. “이번에는 전하께서 후작의 집을 부술 요량이십니까?” 카에라의 기사들이 에반의 집을 수색하러 가는 것임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수가, 누군가의 집을 수색하겠다는 인원이라기보다는 부수겠다는 인원이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경고의 의미를 담은 수색이지. 마찰이 있을까 우려되기도 하고. 그러다 좀 부서지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겠나.” ‘경고의 의미를 담은 수색’이라는 말에 앨런이 웃었다. 에반의 집에서 아르센을 찾겠다는 핑계로 에반에게 화풀이를 하려는 마음이 눈에 보인 까닭이다. 물론 렌은 모르고 출발했지만, 아르센은 여전히 앨런의 집에서 유유자적 노닐고 있었다. 다만 외부에는 아르센이 실종 상태였으므로, 처음 르메인은 아르센을 찾는 척 적당히 장단만 맞춰 줄 생각이었다. 그러다 카에라가 출발하기 조금 전에 마음을 바꾸어, 그렇게 많은 인원을 보내 후작의 집을 아예 샅샅이 뒤지도록 한 것이다. 한 마디로, 화풀이였다. 르메인이 화풀이를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낮에 앨런과 에반이 주고받은 설전 때문이었다. 아무리 임시직이라고는 해도 앨런은 발칸의 군단장이었다. 그런 앨런을 무시하고 들었다 하니, 이참에 발칸이 어떤 군대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수색’의 수위를 높인 르메인이었다. 물론 평소였다면 수색을 핑계 삼아 에반에게 경고를 보내는 일을 절대 할 수 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르지 않은가. 따라서 앨런은, 이참에 르메인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알려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전하께서 나서서 제 복수를 해주시겠다 하니, 기사들이 돌아올 때까지는 여기에 있지요.” 그리고 더 이상의 다른 말 없이 르메인의 소파에 앉아 렌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고, 결국 밤이 지났다. 그 뒤 아침이 오도록, 렌은 돌아오지 않았다. 슬슬 렌이 에반의 집 주춧돌까지 들춰보고 오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될 때쯤. - 똑똑. 비로소 렌이 돌아왔다. 밤새 무엇을 그리 뒤졌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렌은 다소 피곤한 얼굴로 들어와 르메인에게 보고를 전했다. “헤르츠 경은 찾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무언가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저택의 지하에 사람 한 명이 갇혀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레넌 브리센으로 추정됩니다.” 이 꼼꼼한 기사단장은, 비밀통로의 입구를 열어 레넌이 감금된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원 상태로 돌려두었다. 그리하여 에반 모르게 레넌의 위치를 알아내 온 참이었다. 쓰일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의외의 소득인 것은 맞았으므로, 르메인은 수고했다는 말을 전한 뒤 렌을 내보냈다. 그러더니, 앨런을 보며 물었다. “경은, 리베른에서는 자작위를 받았다 했던가.” 리베른에 있을 때 앨런의 작위를 묻는 것이었다.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앨런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딜 가든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이지만, 세크리티아에서는 남작이기도 하고, 리베른에서는 자작이기도 하지요.” 워낙 한 나라에 묶여있질 않았으니, 가는 곳마다 작위를 주며 앨런을 붙들어두려 했던 결과였다. 정작 본인은 작위 같은 것에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지냈던 앨런이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래도 카이리스 3왕자의 스승인 앨런 마나실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그 말에, 르메인이 피식 웃으며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서류를 집어들었다. “그 입이 내 마음에 드는 말을 할 줄도 아는군.” “능력 좋은 입이니,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런 대답을 끝으로, 앨런은 이제 슬슬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서류 너머로 그 모습을 흘낏 본 르메인이,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카이리스에서는, 3왕자의 스승이자 백작인 앨런 마나실로 하지.” 르메인은, 에반이 무엇을 빌미로 앨런에게 시비를 걸었을지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앨런의 위치에 맞는 작위를 내리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무슨 평일 아침에 날씨 얘기하듯 꺼내시는지.”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 * * 전 왕비 아이샤는 병사하지 않았다. 란델은, 알고 있을까. 아이샤의 죽음에 실리케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그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은, 이내 란델은 모르고 있으리라는 결론을 냈다. 베른의 기억을 통해, 란델이 텐실의 국왕이 된 이후에도 카이리스와 텐실의 사이가 특별히 나쁘지 않았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하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플란츠보다 란델이 먼저 내 방에 찾아와 손을 잡자 했겠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칼리안이 실리케를 축출해주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 이것을 란델에게 알려줘야 할지, 혹은 그냥 두어야 할지.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기게 된 칼리안이 짧게 웃으며 실리케를 쳐다봤다. 그리고 실리케는, 이미 칼리안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향한 시선을 그대로 둔 채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시계의 초침이 두 바퀴 쯤 돌았을 때, 실리케가 입을 열었다. “네가 또 무언가를 오해한 모양이구나.” 그 말에, 칼리안의 입에 짙은 조소가 떠올랐다. 실리케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오해라.” 그렇게 중얼거린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 칼리안의 질문을 받고 지어보였던 표정을 실리케 스스로가 본다면, 그것을 결코 오해라 할 수 없을 터였다. 칼리안은 아이샤가 죽은 원인을 확신하고 있었고, 실리케 역시 칼리안이 자신을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오해를 했다 하니 웃음이 나올 밖에. 꽤 오랫동안 웃음소리를 내던 칼리안이, 사납게 치켜 뜬 눈으로 실리케를 쳐다봤다. “내가 고작 그레이 브리센 따위와 손을 잡았을 것이라는 당신의 불쾌한 착각. 그런 것을 바로 오해라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는 필요 없거든. 당신 같은 족속들.” 그 말에, 실리케의 얼굴이 조금 전 편지를 쥐고 있던 손보다 더 하얗게 질렸다. 왕자로부터 반말과 폭언을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실리케가 충격을 받았든 말든, 칼리안은 안쓰럽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다시 말했다. “그런데, 내가 왔을 때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한테 필요 없는 브리센 변경백에게는 당신이 필요 없었나 보네요.” 실리케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칼리안.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아주 정신이 나간 게로구나.” “당신만큼 나가진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 입에 내 어머니를 계속 담습니까.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그렇게는 못합니다.” 가만히 앉은 채로 실리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꼴을 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텅텅 비워져 있는 온실을 쭉 둘러본 칼리안이 실리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온실 다시 채우지 마요. 당신, 이곳에 오래 못 있을 겁니다.”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냉담한 얼굴로 실리케를 내려다보며, 실리케의 머릿속에 오로지 칼리안의 이름만 남게 할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내가, 당신에게 끝을 보여줄 테니.” < 제16장. 내가, 당신에게. (3) > 칼리안이 제 자리에 선 채 가만히 눈을 내리떴다. 얀은 칼리안이 생각할 것이 많을 때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무엇 때문에 그리 깊은 생각에 빠졌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얀은 칼리안의 생각이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렇게 말없이 서 있는 시간이 하염없이 늘어났다. 그러자 칼리안에게 깊은 상념을 준 무언가가 다시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꾸물럭거리는 느린 춤을 추며 발랄한 노래를 부르는 석상을 본 칼리안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웃음을 참고 있었다. 방금 전 칼리안은 실리케와 대면을 했다는 것과, 아이샤의 죽음 뒤에 실리케가 있는 것 같으니 확인이 필요하다는 말을 르메인에게 전했다. 플란츠와 손을 잡았다는 것도, 자신이 플란츠에게 얼마나 냉정한 말을 했는지도 모두 르메인에게 풀어놓았다. 그런 칼리안의 말을 모두 들은 르메인은, 미안한 것이 많다 대답했다. 그렇게 칼리안은, 르메인의 사과 덕에 더더욱 가라앉은 기분을 한 채로 앨런의 저택까지 온 길이었다. ‘밖’에서 만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앨런의 저택 현관 앞에 세워져 있던 석상이 갑자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미치겠네.” 간신히 웃음을 참아낸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자, 지금껏 칼리안의 기분에 맞춰주느라 함께 웃음을 참고 있던 얀이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저도 이거 처음 봤을 때 똑같은 말 했었어요.” 얀이 앨런의 집에 언제 왔는지를 기억하지 못한 칼리안이 얀을 쳐다봤다. “언제 스승님 댁에 왔었나?” 그런 칼리안의 질문에, 얀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지금 그들은, 왕궁 밖에 있었다. 앨런의 마차를 타고 남몰래 밖에 나온 길이었으므로 얀은 시종의 옷차림도 아니었다. 그래서 얀은, 잠시 시로이안 지그프리드가 되어 대답했다. “어떤 분이 독차가 싫다고 독약을 처드셨던 날에요.” 그 날의 일에 대해 쌓인 것이 누구보다 많은 얀이었으니까. 옆에 있던 앨런은 그런 얀의 심정에 깊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뒤에 서 있던 키리에가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앨런과 아르센에 이어 이제는 얀에게까지 욕을 얻어먹은 칼리안이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으니.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결국은 칼리안의 웃음보가 터져버렸다. “이렇게나 마음에 들어하시니, 왕자님 방 앞에도 하나 놓아드리겠습니다.” 앨런의 말에, 칼리안이 급히 손사래를 치며 발을 옮겼다. 그렇게 간신히 들어간 앨런의 집 안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베로니카는 점심 식사를 준비 중이었고, 폴룬 마법 학원의 이사장이기도 한 멜피르와 그 마법 학원의 교장이기도 한 에우리아가 학원의 운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바로 옆에서, 아르센이 베로니카의 마법 학원 과제를 해주고 있었다. “무료한 마음에 제가 먼저 도와주겠다 했습니다, 왕자님.” 마법학원 이사장과 교장 옆에서 학생의 과제를 마음대로 해주고 있던 아르센이, 칼리안을 보며 그렇게 변명 같은 설명을 했다. 칼리안은 그 말을 반쯤만 믿기로 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함께 점심식사를 마친 뒤, 칼리안과 아르센, 그리고 멜피르와 에우리아가 응접실 테이블에 빙 둘러 앉았다. “내가 없는 동안 다들 고생이 많으셨다 들었습니다.” 카이리시스 밖에 나섰던 칼리안도 이런저런 일들을 꽤 많이 겪기는 했으나, 안에 있던 이들 역시 한가하지 못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칼리안이 벌여놓고 간 일들 때문이었다. 칼리안은, 더 이상 동글동글하지 않은 멜피르의 얼굴을 보며 정말 미안해했다. 제대로 쉬지 못해 그새 많이 홀쭉해진 것이다. “이틀 전에 레딩턴 자작이 도착했습니다, 왕자님. 좋은 분을 보내주시어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제 좀 숨이 트입니다.” 애초에 바빠진 것이 칼리안 탓이었으나, 멜피르는 이렇게 칼리안을 배려하는 말을 했다. 고개를 끄덕여 멜피르의 감사 인사에 화답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번 사냥 대회에서, 기사 세력을 가진 귀족들을 만나 볼 생각입니다.” 그 말과 함께, 얀이 멜피르와 에우리아의 앞에 종이 한 장씩을 건넸다. 그것은 바로, 칼리안에게 선물을 보낸 기사 가문 귀족들의 명단이었다. 멜피르나 에우리아 모두 총명한 이들이었으니, 칼리안이 왜 기사 가문의 사람들을 만나고자 하는지 이해한 눈치였다. 칼리안은, 종이 안에 적힌 이들을 쭉 훑어 내려가는 둘을 보며 말을 이었다. “폴룬 남작.” “네, 왕자님.” 칼리안의 손이 종이를 가리켜보였다. “그들 중, 남작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신용하기 어려운 이들을 골라내 주시면 됩니다.” 상단을 운영하면서 각 귀족 가문들과도 수많은 거래를 해왔던 멜피르가,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듯 대답했다. “네, 확인해보겠습니다.” 그 후 칼리안이 에우리아를 보며 말했다. 마법사 협회장이나 마법학원의 교장이 아닌, 정보조직 보스인 에우리아의 거름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에우리아는 칼리안이 따로 말을 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브리센에 대해 조사했던 내용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브리센과 연관이 있는 이들을 명단에서 제외시켜 놓겠습니다.” 칼리안이 믿음직스럽다는 눈으로 둘을 보며 고마움을 전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칼리안이 직접 한 명 한 명 만나가며 판단해나가는 것이었으나,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칼리안은 그렇게 많은 이들을 일일이 대면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멜피르와 에우리아의 눈과 귀를 빌리려는 참이었다. 첫 번째로 얀이 걸러낸 이들 중 멜피르와 에우리아의 손까지 거친다면, 꽤 믿을만한 이들만 남을 것은 분명했다. 완벽하게 걸러지지는 못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내가 마음 놓고 신용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전부이니.’ 칼리안의 최측근인 앨런, 얀, 키리에. 그리고 아르센. 칼리안이 완전히 등을 맡길 수 있을 사람들이다. 그보다 조금 넓은 범위에는 지금 눈 앞에 있는 멜피르와 에우리아, 그리고 르메인과 슬레이만이 있었다. 이들까지는 칼리안이 속내를 드러내고 대해도 괜찮을 터였다. 그리고 이제부터 만나게 될 귀족들은 앞서 언급한 이들보다 조금 더 먼 범위 안에 속하게 된다. 누구든, 언제든지 칼리안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손을 잡아야 할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히 걸러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녁까지는 여기에 있을 테니, 그때까지 알려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아르센을 쳐다봤다. 칼리안의 눈이 긴 호선을 그렸다. “닷새 정도면 푹 쉬는 것이라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베로니카의 과제를 해준 아르센이, 이제 다시 바빠지리라는 것을 예감하고는 씩 웃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마법학원의 과제보다는 재미가 있으리라. “네, 왕자님. 충분합니다.” 칼리안이 아르센과 비슷한 얼굴로 마주 웃었다. * * * 아침부터 멜피르 폴룬이 선물을 보내왔다. 그가 보낸 선물은 이번에도 칼리안의 허를 찔렀다. 아주 특별한 선물이 도착했다는 말에 조찬을 마치자마자 밖으로 나온 칼리안은, 체르밀 궁 앞에 있는 커다란 두 마리와 작은 한 마리를 보며 또 웃고 말았다. “하여튼 폴룬 남작.” 칼리안의 귀환도 축하하고, 마음에 쏙 드는 테시드 레딩턴이라는 인재를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보내온 선물이었다. 멜피르가 처음 칼리안에게 보냈던 선물은 레이븐의 목걸이였다. 아직도 채워 줄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칼리안이 가진 그 어떤 장신구보다 비싼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선물 역시 칼리안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덕분에 얀의 입이 귀에 걸렸다. 키리에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건지.” ‘커다란 두 마리’는 무려 레이븐의 형제 말이었다. 브리센 상단을 인수하면서 처음 플란츠에게 레이븐을 보냈던 마주와도 계약을 한 듯 했다. 한 마리는 옅은 갈색, 또 한 마리는 짙은 갈색이었는데, 각각 얀과 키리에를 위한 선물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두 마리 모두 순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 대체 레이븐은 왜 혼자 그 모양인지. “저 짙은 색 말이 원래 플란츠 왕자에게 보내려던 녀석이었대요. 플란츠 왕자가 하도 레이븐을 마음에 들어 해서 어쩔 수 없이 레이븐을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얀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볼을 긁적였다. 플란츠는 그런 말을 고스란히 칼리안에게 빼앗겼다는 소리니까. 공교롭게도 그 날 플란츠가 던진 칼 때문에 손을 다쳤었으니, 칼리안은 미안해하는 대신 그냥 그에 대한 보상이었던 셈 치기로 했다. 아무튼 얀이나 키리에나 이제 왕궁 밖에 나갈 일이 많아 슬슬 말을 한 마리씩 마련해줄까 했으니 아주 잘된 일이었다. “오늘 사냥에 바로 타고 나가면 되겠네.” 때문에 이렇게 말하며 얀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말을 받는 것을 허락한 칼리안이, 이번에는 ‘작은 한 마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새를 사줄까, 개를 사줄까 했더니.” 멜피르를 만난 칼리안은, 키리에의 동생이 왕궁에서 키울 만한 동물을 상단에서 판매하고 있는지를 물어봤었다. 어쨌거나 히나에게 약속을 했었으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선물로 보내온 모양이었다. 푸른 색과 갈색의 오드아이를 가진 은백색의 새끼 고양이였다. 언뜻 보면 히나의 머리색과 비슷하고 키리에의 눈을 꽤 닮았다. 그 짧은 사이에 어떻게 찾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폴룬 남작은 여러모로 비범하네요.” 칼리안이 얀의 감상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옹거리는 새끼 고양이를 보며 가장 좋아한 것은, 당연히 선물의 주인인 히나였다. 칼리안이 고양이를 안아올려 히나에게 건넸다. 키워도 좋다는 뜻이었으니, 히나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언제나 느끼지만, 보는 이들의 복잡했던 마음을 전부 잊게 만들어주는 웃음이다. “잘 받겠다고 전해줘.” “네, 왕자님.” 그나저나, 멜피르. 처음에는 칼리안이 아끼는 말을 위한 선물을 주더니, 이번에는 칼리안이 아끼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보냈다. “내 선물을 보내 줄 날이 오긴 오려나.” 정작 멜피르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한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멜피르는 재밌는 사람이다. * * * 비는 이미 그쳤다. 늦가을 날씨는 아주 좋았고, 사냥대회는 취소되지 않았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왕자님. 아이즌 에이프린입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만났다. 사냥대회는 몇몇 귀족들이 한 조를 이루어 가장 많은 사냥감을 잡는 이들에게 우승 상품을 주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앞서 얀은 멜피르와 에우리아가 말한 이들을 제외한 최종 명단을 칼리안에게 정리해줬었다. 서른 명 가까이 되던 귀족들은, 세 명의 거름을 거쳐 어느새 열한 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각자의 기사들과 마법사단이 모이면, 브리센, 그리고 브리센과 우호 관계에 있는 귀족들의 병력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힘을 낼 터였다. 칼리안은 바로 그 명단을 르메인에게 전달했다. 그리하여 명단에 적혀있던 인물들은 모두 칼리안과 한 조로 묶이게 되었다. 시큼 텁텁한 호밀 쿠키를 한가득 보낸 에이프린 백작을 보며, 칼리안이 호감 가득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쿠키가 아주 맛있더군요.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모인 다른 열 명의 눈을 하나하나 들여다 본 칼리안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칼리안을 마주 쳐다보는 귀족들의 눈빛은, 단순히 사냥대회에 참석하러 온 이들의 것과는 달랐다. “반갑습니다.” 지금의 자리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한 조에 참여하게 된 다른 이들의 면면을 보며 알았으리라. 칼리안이 이제 브리센과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리라는 것을. “내가, 칼리안입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이렇게 두 번째로 자신의 이름을 먼저 알렸다. < 제16장. 내가, 당신에게. (4) > 왕족은 자신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않는다. 빈민보다도 못한 삶을 살았던 키리에도 그 정도는 알았다. 그런데도, ‘내가 칼리안’ 이라니. 분명 의도한 말이겠지만, 자세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모두들 일단 고개를 숙이며 입부터 열었다. “저는 헤밀란 토르카입니다.” “카인 세르트입니다, 왕자님.” 운 좋게 칼리안에게 먼저 인사를 했던 아이즌을 제외한 남은 열 명의 사람들이, 이렇듯 매우 서둘러가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는 웃지 못할 광경이 잠시 펼쳐졌다. 그 모습을 보는 칼리안의 얼굴에는 어떻게 보면 장난기가 짙은 듯하면서 또 어떻게 보면 자신감이 가득해보이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칼리안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단박에 눈치 챈 얀은 눈에 띄지 않게 웃었다. 오래 전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에서 사람들의 앞에 나서기 전, 칼리안이 농담처럼 했던 말이 함께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들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 같던데. 아, ‘그’ 칼리안!’ 그때는 ‘그’에 포함된 의미가 결코 좋지 않았었다. 나약한, 겁 많은, 힘없는, 등등의 수식어가 칼리안의 이름 앞에 항상 붙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도 칼리안을 ‘그’ 칼리안이라고 불렀다. ‘그’에 들어가는 말들은 이제 완전히 바뀌었지만,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 만큼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과장된 평가도 많았다. - 내가, 칼리안입니다. 그러니 이 인사는, 당신들 머릿속의 ‘그’ 칼리안이 아니라 당신들 앞에 서 있는 내가 진짜 칼리안이라는 뜻을 담아 건넨 말이었다. 칼리안이 어떤 사람인지는 직접 보여줄 테니, 칼리안에게 선물을 보낼 결심을 하게 했던 기대감과 선입견은 일단 다 버리라는 소리인 것이다. 그러니, 이보다 자신만만한 인사가 또 어디 있을까.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든 이들이 칼리안의 얼굴에 나타나 있던 미소를 보았다. 그리하여 칼리안의 인사에 담긴 뜻을 이해한 몇몇은 마주 웃었고, 또 몇몇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웃고 있는 이들을 쳐다봤다. 자신을 따르겠다고 먼저 알려온 이들에게, 칼리안은 이렇게 평생 잊지 못할 첫인상을 심어주었다. * * * 르메인이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바로 옆에 있는 앨런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이것이 정말 왕자들을 위한 일이 맞을지 모르겠군.” 바로 며칠 전 앨런이 했던 것과 아주 비슷한 말이었다. 앨런은 그때 르메인이 대꾸한 것을 따라하며 ‘배부른 소리를 하시는군요.’ 등으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다른 귀족들이 함께 있었던 탓이다. “충분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답한 앨런이 적당히 활을 들어 올려 멀리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새를 향해 쏘았다. 마법사의 손에 들린 활이라니, 참으로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팅!’ 하는 힘 빠진 소리를 내고 날아간 화살은, 새가 앉은 나무의 근처에도 못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를 잡기에는 지나치게 부족한 활 솜씨에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은 놀랐고, 앨런은 툴툴거렸다. “그리 웃지 마시지요. 마법사는 마법이나 잘 쓰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이 끝났을 바로 그 때였다. 방금 전까지 나무 위에 있던 새가, 갑자기 작은 울음소리를 길게 내더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죽은 것이다. 그것을 본 귀족들의 눈이 르메인의 웃음을 보았을 때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의 크기로 벌어졌다. 다만 르메인만은 그리 놀라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마법으로 사냥을 해도 된다는 규칙이 없으니, 저것은 무효로 보아야겠는데.” “마법으로 사냥을 하면 안 된다는 규칙도 없으니, 유효한 것으로 보아 주시면 안될는지요?” 둘은 지금 가벼운 말싸움이나 나누고 있었으나, 함께 있던 귀족들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새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르메인이 ‘마법’임을 말한 뒤에야 앨런이 무엇인가 수를 썼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 소리도, 아무 기척도 없었다. 심지어 앨런은 아까부터 계속 르메인을 보던 채였다! 이 자리에 선 이들은 모두 브리센과 동맹 관계에 있는 기사 가문의 귀족들이었다. 즉, 칼리안이 지금 만나고 있는 귀족들과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곧, 이들 역시 검을 꽤 잘 다루는 사람들이라는 뜻도 되었다. 에반 브리센 후작만큼은 아닐지라도 모두들 무력에 대한 제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런의 화살이 날아가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저것이 나에게 날아왔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한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물론 이 곳에 모인 이들의 놀라움에는 관심이 없던 르메인은 앨런을 보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유효로 본다니, 안 될 일이지.” 그러더니 숲을 둘러보는 듯, 혹은 브리센 편의 귀족들을 노려보는 듯,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주변을 한 번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 “경은 이곳에 있는 전부를 사냥할 셈인가.” 그 말을 들은 귀족들의 입에서는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고, 앨런의 입에서는 짧은 웃음소리가 났다. 곧 앨런의 날카로운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냈다. 그런 그의 가느다란 입술 사이로 차디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 큰 나무에 보란 듯이 앉아 있으니.” 또 한 마리의 새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새의 마지막 울음을 뒤로 하고 들려오는 앨런의 말이 모두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다. “못 잡을 것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 * * 르메인과 앨런이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며 브리센 측의 귀족들을 압박하는 사이, 칼리안과 함께 있는 이들은 소풍 같은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 피잉! 칼리안의 손을 떠난 화살이 가벼운 파공음을 냈다. 화살은 방금 날아오른 새의 목을 거침없이 꿰뚫었다. 활을 한 번 쏠 때마다 어김없이 한 마리가 죽었다. 어차피 사냥은 목적이 아니었으나 적당히 구색은 맞추어야 했으므로, 칼리안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새들을 몇 마리 잡고 있었다. 칼리안의 활솜씨가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던 탓에, 날개를 펼친 새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본 이들의 입에서 이번에도 작은 탄성이 터졌다. 물론 그들 중에는 얀도 있었다. “키리에. 왕자님께 활도 가르쳐드린 겁니까?” 그 말을 들은 키리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칼리안이 활을 다룰 줄 안다는 사실을 얀에게 말하지 않았었다는 것에 놀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심하지 않는 얀의 둔함에 놀랐다. 아무튼 키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 안에서 칼리안에게 활을 가르칠 수 있을 만한 이는 키리에밖에 없었으니까. “네, 제가 알려드렸습니다.” 이렇게 말한 키리에는 말 안장에 매인 활을 잠시 쳐다봤다. 그리고 오늘은 절대로 활을 들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검은 다뤄봤지만 아직 활은 한 번도 손에 들어보지 못했던 까닭이다. 키리에의 대답을 들은 얀이 뿌듯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우리 왕자님은 무기를 다루는 것에 소질이 조금 있으신가봐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이다. 덕분에 주변에 있던 이들은 다소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소질 조금만 더 있었으면 아주 큰일이 났겠다 싶어서였다. “네. 배움이 매우 빠르십니다.” 그리고 하프엘프 키리에는, 이제 완벽할 만큼 능숙해진 거짓말을 입 밖에 내며 얀의 둔함을 응원했다. 이들의 조금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웃던 칼리안이 옆을 쳐다봤다. 그 방향에 있던 아이즌이 칼리안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에이프린 백작.” “네, 왕자님.” “보내주신 쿠키, 왜 호밀이었습니까?” 조금 맥락 없는 질문이기는 했으나, 칼리안은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중이었다. 카이리스의 귀족들은 호밀을 먹지 않았다. 물론 칼리안이나 앨런은 그렇지 않았으나, 얀은 쿠키가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먹지 않았었다. 얀이 그럴 정도면 다른 귀족들은 볼 것도 없지 않은가? 다만 호밀은 밀보다 영양이 더 좋고 값이 훨씬 저렴했다. 때문에 평민들에게 있어서는 없어선 안 될 식재료였다. 그러니, 나라에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정작 귀족들은 입에 대지도 않는 독특한 작물이 바로 호밀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내내 궁금했다. 왜 하필 호밀일까. 백작 씩이나 되서 왕자에게 평민의 생활을 보여주겠다는 감성적인 이유는 아닐 텐데. 칼리안의 질문을 받은 아이즌이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것을 보낸 뒤에 혹시라도 다른 이유가 있다고 오해를 하실까 후회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칼리안에게 쿠키 선물을 보낸 뒤에 후회를 했다는 소리였는데, 칼리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곧바로 알아들은 듯 다시 물었다. “내 어머니에 대한 조롱의 의미로 받아들일까봐 걱정했다는 말입니까?” 프레이야가 평민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숨김없이 물어오는 칼리안의 말에, 아이즌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왕자님.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 그런 의미가 맞았다 하더라도 칼리안의 환심을 사긴 했을 것이다. 그렇게 정성스러운 조롱이라니. 칼리안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보낸 이의 얼굴을 한 번 보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내 어머니의 출신에 대해서는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해서, 나에게는 오히려 반가운 선물이었습니다.” 그렇게 솔직한 감상을 전한 칼리안이 다시 아이즌을 쳐다봤다. 그러니 이제 호밀의 이유를 좀 알려달라는 의미였다. 그랬더니 아이즌이 다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밀도 좋지만 호밀도 필요하다는 의미로 보내드린 것입니다.” 밀도 좋지만 호밀도 필요하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은, 마치 어려운 문제를 풀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더 강력한 마법사들도 좋지만, 덜 강력해도 그 수가 월등한 기사들도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간 칼리안이 마법사 위주로 세력을 불려나가니, 이제 기사들도 좀 봐달라는 뜻에서 보낸 선물이라는 소리였다. “먹지 않고 돌려보냈다면, 백작은 지금 이 자리에도 나오지 않았겠군요.” 그 말에 아이즌이 대답하지 못하고 민망해하는 얼굴을 했다. 호밀 쿠키 하나로 시험을 해 봤다. 오히려 아이즌이, 칼리안을. 아이즌을 보던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멜피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 탓이다. 말 목걸이를 보내서 칼리안의 의중을 떠보려 했던 그 모습과 참으로 닮지 않았는가? “선물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같은 것을 생각했으니, 백작의 문제를 비슷하게나마 맞혔다고 쳐 주면 안 되겠습니까?”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고, 아이즌은 더 대답하지도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그런 아이즌을 가만히 보던 칼리안이 레이븐을 살짝 움직여 조금 더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돌아서 섰다. 그러자 칼리안이 홀로 귀족들을 마주보고 선 모양새가 되었다. “맑은 날 ‘밖’에 나온 김에 전할 말이 있습니다.” 모두를 앞에 둔 칼리안이, 가벼운 말투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내가 곧 사냥을 할 겁니다. 물론 여기 있는 분들과 함께.” 이미 사냥대회가 시작된 지 한참이었다. 이제 와서 이 자리에서의 사냥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눈치가 있든 없든 잘 알아들은 듯 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독수리도 아니고 사자도 아닌 그런 사냥감은 나도 처음 잡아보는 것이라. 다들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번에는 모두가 웃었다. 모두의 머리에 브리센의 문장 속 그리핀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하나같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칼리안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웃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칼리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원금을 보내겠습니다.” 당장 이들에게 칼리안이 줄 수 있는 도움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시 불어나고 있는 자금뿐이다. 그리고 자금은 이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할 터였다. “눈에 띄지 않게, 본래 하던 일을 조금만 더 열심히 해주면 됩니다. 나는 에이프린 백작을 통해 연락을 취할 테니, 주기적으로 서로 교류하기를 바랍니다.” 그 말에, 모두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그들을 다시 한번 살펴본 칼리안이 낮지만 위엄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다음에는, ‘안’에서 만나게 되겠군요.” 카이리스 왕궁,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제17장. 그 걸음. (1) > 실리케, 그리고 에반 브리센. 과연 누가 더, 먼저인가. 르메인이 사냥을 하겠다며 기사단 카에라, 앨런까지 모두 대동하여 궁 밖으로 나가자, 실리케가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단 라울과 카렌의 단장들을 불렀다. 당연히, 둘은 최근 파벨의 기사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되도록 실리케의 눈에 띄지 않으려 나름대로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실리케가 직접 이들을 찾은 것이다. 결국 명을 거절하지 못한 두 기사단장이 실리케의 온실을 찾았다. 그리고 예상했던대로의 말을 듣게 되었다. - 돌아오는 월요일, 마법사단 발칸의 창단식. 그 자리에서 실리케가 시키는대로 일을 해 준다면 충분한 보상을 하겠다는 소리였다. 무엇을 시킬 것인지, 무엇을 보상할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두 기사단장은 우선 생각할 시간을 달라 답한 뒤 헤이시아 궁에서 나왔다. 깊은 수심이 그들의 얼굴에 가득했다. “난감하기 이를 데 없군.” “나도 그렇네.” 아직 무슨 일을 해주길 원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실리케는 그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 말했을 뿐이었다. 깊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가 카렌 단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일 아침까지 답을 달라 하셨는데. 자네는 어찌 할 생각인가.” 라울의 단장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더니 말했다. “본래는 후작님의 명만 듣는 것이 맞겠네만.” “하지만 이 곳은 왕궁이 아닌가. 왕비 저하의 명을 어찌 거역하는가.” 그들은 왕실의 기사단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르메인의 명을 들어야 하는 이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대화 어디에서도 르메인의 이름은 없었다. 실리케의 말을 들을 것인가, 혹은 에반을 따를 것인가. 오로지 그것 뿐이었다. 결국 둘은 답을 내지 못하고 헤어져 각자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둘 모두,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발신인 역시 같았다. 바로, 에반 브리센 후작으로부터 전달된 편지였다. 같은 사람으로부터 두 기사단장에게 전해진 편지.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눈을 움직여가며 편지의 내용을 읽어내려가는 두 단장의 얼굴이, 똑같이 심각하게 굳어져갔다. * * * 절대 잊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니, 그것은 분명한 칼리안의 실수였다. “애옹!” 장미 정원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려주었어야 했다. 사냥 대회에 참석하느라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 그 정도는 꼭 일러주고 출발을 했어야 했다. “애옹, 애오옹!” 무슨 이유에서든 고양이가 그 곳에 가면 안 된다고 말을 했어야 했다. 그러니. 칼리안이 아직 베른의 모습을 다 버리지 못했을 때 만난 탓에 누나라기 보다는 제 동생처럼 여기면서 보호하게 된 히나가, 칼리안의 눈에는 불한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플란츠와 엮이게 된 것은. 모조리 칼리안의 잘못이었다. * * * 그 일은, 사냥대회가 있던 그 날의 조찬에서 주고 받은 대화로부터 시작됐다. 식당에 가장 먼저 도착해 혼자 앉아있던 칼리안은, 이제 막 들어서는 플란츠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렇게 물어왔다. “심한 몸살에 걸리셨다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플란츠는 사실 그 어떤 날보다 컨디션이 좋았다. 몸살은 커녕 재채기 한 번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플란츠는 칼리안을 향해 왜 아침부터 짖는 소리를 하는지를 묻는 대신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냥이나 할 상태는 아니군.” 아주 대놓고 사냥에 오지 말라 하고 있는데, 이 외에 어떤 말을 더 하겠는가? 물론 플란츠는 칼리안이 사냥대회를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그 이유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이 왜 그 자리에 가면 안되는지 역시 어느정도 이해를 했다. 귀족들을 반 브리센과 친 브리센 세력으로 나누어 한 쪽은 회유를 하고 한 쪽은 겁박을 주려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란츠는 브리센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런 분위기를 알아챈다면 실리케에게 전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브리센 쪽에 칼리안의 정보를 전달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달할 수도 없다. 그러니 중간에 껴서 치이지 말고 속편하게 방에나 있으라는 말인 것이다. “전하께는 저도 잘 말씀을 드릴테니, 푹 쉬십시오.” 시종들의 이목이 있으니 그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플란츠는 그 길로 제 방에 돌아왔다. 덕분에, 르메인이 플란츠를 위해 마련한 사냥대회는 당일에 갑작스럽게 불참을 알려온 플란츠를 제외하고 치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아침 내내 꼼짝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던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간단한 옷으로 환복한 뒤 체르밀 궁 밖으로 나왔다. 후원에 마련된 수련장에 갈 생각이었다. 남들의 눈에 몸살을 좀 떨쳐냈다 여겨질만 할 때 쯤이 되었다 싶었던 것이다. “애옹!” 그러다, 아침에 창 밖으로 언뜻 보았던 은백색 털뭉치가 어디론가 열심히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까지만 봤으면 신경을 안 썼을텐데, 잠시 뒤에는 같은색 머리를 한 시녀 한 명이 그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하필이면 정원에 란델이 있을 시간이었다. “······하.” 플란츠가 발을 움직였다. 칼리안의 고양이가 벌일 사고의 뒷치다꺼리를 위해서였다. 그것이 무슨 이유에서건 상관 없이, 지금의 이런 시점에 칼리안과 란델이 대치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했으니까. * * * 왕자들의 산책을 위한 길이었으니, 그 곳은 시종이나 시녀들이 홀로 드나들 수 없었다. 때문에 히나는 정원에 가 본 적도 없었고, 그 정원이 어떤 곳인지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새끼 고양이가 히나의 품을 빠져나가 도망쳤을 때, 히나는 곧장 정원에 가지 않고 메를린을 찾아가려 했다. 그러다 메를린이 얀을 대신해 회의에 참석 중임을 떠올렸다. 왕자가 선물한 고양이를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잃어버릴 수는 없었으므로, 히나는 어쩔 수 없이 정원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왕자들이 모두 사냥에 간 줄로만 알았으니 빨리 들어가서 고양이만 찾아 나올 생각이었다. “애옹!” 인공호수를 지나니 고양이 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를 따라가는 바람에, 마주치게 되었다. ‘아······.’ 정원 한 구석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장미를 손질하는 중이던 첫째 왕자와, 그 옆으로 가 흙장난을 친 듯한 고양이. 그리고 그런 고양이를 우악스럽게 잡아 든 채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히나를 노려보는 첫째 왕자의 호위 시종을. “누구냐.” 히나가 깜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큰일났다.’ 란델의 상급 시종 역시 회의에 참석했을 터. 그런 그를 대신해 란델과 함께 나와있던 호위 시종이 물었다. 몇 번 마주쳤을 법도 했으나, 히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누구냐고 묻지 않았느냐.” 란델의 호위 시종은 키리에와 많이 달랐다. 덩치가 컸고, 무섭게 생겼고, 말은 위협적이었다. 수화를 해보여야 할지 품 속의 수첩을 꺼내 글을 써야 할지 결정할 시간을 주지 않고 히나를 다그쳤다. “이것도 네 짓이겠구나. 감히 이 곳이 어디라고 이딴 것을 들이느냐.” 고양이를 들어보이며 그렇게 물은 시종이 히나에게 한 걸음을 다가왔다. 결국 히나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수첩을 꺼내려 했다. 그런데, 이 곳에 새로 도착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히나의 행동을 멈추게 했다. - 저벅. 시종과 히나 사이에 플란츠가 걸어와 섰다. 시야가 캄캄하게 막힌 것에 깜짝 놀란 히나가 고개를 들었다가, 에메랄드 색 머리카락을 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진짜 큰일······!’ 란델의 앞에 보란듯이 달려간 것도 모자라 플란츠까지 이 곳에 나타났다. 메를린이 회의에서 나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또 뵙습니다.” 왕실 예법을 다시 만들기로 작정을 한 것인지, 시종도 없이 혼자 정원에 온 플란츠가 고개를 까딱 숙이며 멋대로 축약시킨 인사를 란델에게 건넸다. 그러더니 란델의 시종을 잠시 쳐다보곤 입을 열었다. “눈이 나쁜건지, 머리가 나쁜건지 모를 호위는 왜 데리고 다니시는지.” 란델의 시종을 입에 담는 것임에도 거침이 없었다. 체르밀에서 일하는 이들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질책을 한 것이다. 저러면서 어떻게 호위를 하겠다는 것인지 이해 못하겠다는 눈빛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시종이 플란츠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플란츠는 그에 대해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등 뒤에 선 히나를 흘끗 돌아보며 말했다. “치워.” 당연히 고양이를 말함이다. 허리 숙여 인사를 전한 히나가 시종의 손에 들린 고양이를 빼앗듯이 돌려받은 뒤 빠른 걸음으로 정원에서 벗어났다. 철모르는 고양이가 히나의 품에서 애옹애옹 소리를 냈다. 고양이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란델이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에게는 사냥에 오라 하더니. 너도 가지 않은 것이냐.” 플란츠의 무례함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므로, 자신의 앞에서 시종에게 한 소리를 한 것에 대해서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래서 나아질 성격이었으면 진작 고쳤을 것이다. “그렇게 됐습니다.” 플란츠는 간단한 대답만 했다. 란델은 고개를 끄덕여보이지도 않았다. “형님이 계실 시간인 줄 모르고 왔습니다. 가보겠습니다.” 곧 플란츠는 이렇게 말하며 뒤로 돌아섰다. 란델과 오랫동안 말을 섞어봐야 속내만 들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 플란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란델이 말했다. “둘의 사이가 많이 좋아진 모양이구나.” 플란츠의 발이 제 자리에 멈춰섰다. 호위 시종은 몰랐더라도 란델은 히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플란츠가 굳이 이 시간에 정원에 들른 이유를 눈치 챈 것이다. 왜 굳이 플란츠가 칼리안의 시녀를 도왔는지를 말이다. 칼리안과 플란츠가 손을 잡은 것은 아닐까, 라고. 플란츠가 힘주어 눈을 감았다 떴다. 어차피 한 번 의심을 하기 시작한 란델은 더 이상 속일 수 없다. 그리고 란델이라면, 이 일을 브리센에 알리지는 않을 터였다. 때문에 플란츠는 무슨 사이를 말하는 것인지를 묻는 대신, 비웃음이 잔뜩 매달린 대답만 했다. “이것도, 아쉬우십니까.” 그 말에, 란델이 다시 돌아앉았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 말이 플란츠에게는, 경쟁자 한 명이 줄어 오히려 기쁘다는 뜻으로 들렸다. 플란츠는 더 이상의 말 없이 정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체르밀 궁의 앞에 서 있는 히나를 다시 보게 되었다. 굳이 자신을 기다리고 서 있었던 것 같은 모양새였으므로, 플란츠가 잠깐 히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러자 히나가 손에 들고 있던 수첩 하나를 건네왔다. 얼결에 내용을 보니, 짧은 문장이 써 있었다.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플란츠는, 히나가 칼리안의 시녀라는 것은 알았으나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제야 눈치를 챘다. 다만 그에 대해 뭐라 다른 말을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저 고개만 끄덕여보인 뒤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이 되어 사냥 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칼리안 역시 그 일을 전해들었다. 다만 그에 대해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조용한 듯 그렇지 않은 듯한 날이 지나갔다. 그리고, 월요일. 발칸의 창단식이 치뤄질 날. 많은 이들이 각자의 이유로 기다려온 그 날이 다가왔다. < 제17장. 그 걸음. (2) >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 무엇이라 해도 좋을 그 어두운 시간. 실낱같은 바람이 방 안을 한 번 맴돌자, 침대에 누워 있던 플란츠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바람결에 눈을 뜰 줄 아는 이가 비단 칼리안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플란츠는 베개 밑에 두었던 검을 꺼내드는 대신 입을 다문 채 어둠 속을 살폈다. 예상한대로,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에 동생의 붉은 눈이 비춰지는 것을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마법사 짓이군.” 플란츠는 창문을 열어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안이 플란츠의 침실에 들어설 수 있던 이유는 단 하나. 시스파니안의 경보 마법이 누군가에 의해 작동을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이 카이리스에 그런 짓이 가능할만한 사람은, 물론 앨런 마나실 외에는 없었다. “두 번은 못하겠다 하셨으니, 또 올 일은 없을 겁니다.” 이 비범하기 짝이 없는 형제간의 만남을 위해 잠시 동원되었던 쓰임새 많은 스승을 생각하며,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플란츠가 짧게 물었다. “왜 왔는데.” 칼리안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침실 안에 놓인 작은 소파로 가 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말 없이 플란츠의 얼굴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것 하나, 권해줄 것 하나, 그리고. 고마운 것, 하나.” 아마 절대로 입에 담고 싶지 않았을 ‘고마운 것’ 때문에 잠시 뜸을 들인 모양이었다. 칼리안의 얼굴에 딱 그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저런 놈한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날이 오다니, 라고. 물론 칼리안이 고마워 할 일이라고는 딱 하나였다. 칼리안의 시녀를 도와준, 혹은 살려준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란델의 앞에 선 시녀가 아무 말 없이 품 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려 했다. 그것이 수첩일지, 아니면 암기일지, 호위가 어찌 알겠는가? 그러니 플란츠가 그 앞에 서지 않았다면 무슨 결과가 생겼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플란츠 역시 칼리안같은 놈한테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 시녀, 히나에게 이미 듣기도 했고. 그래서 플란츠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마지막 것은 관심 없다.” 그 말에, 칼리안이 실소하며 ‘물어볼 것’을 먼저 입에 담았다. “란델 형님께서 눈치 채셨습니까.” “그래.” 플란츠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고, 칼리안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플란츠와 손을 잡은 것을 가능한 오래 숨기려 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로 틀어진 까닭이었다. “왜들 그렇게 눈치가 빠른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하루하루 목숨을 내놓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인 왕자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이미 잘 알았다. 당장 칼리안만 보아도, 카이리스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단 하루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반응은요.” “아우님도 이미 알텐데.” 란델이 당장 싫어하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왕위를 포기한 것이 둘 중 누구였든, 란델에게 손해가 될 일은 없었다. 그러니 둘의 동맹을 공개하여 두 세력을 하나로 합치려 하지 않는 이상은 경계하지 않을 터였다. 어쨌거나 행동에 더 조심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인 칼리안이 두 번째 말을 꺼냈다. “오늘 하루만 더 아프실 생각은 없습니까.” 발칸의 창단식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 어떤지 권하는 말이다. 이것은 칼리안에게 득이 될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세번째 목적이었던 ‘고마움’과 연관된 소리였다. 즉, 히나를 도와줬으니 플란츠를 한번 배려해주기 위해 건넨 말이었다. 실리케가 무언가를 하기 위해 마음을 먹었다면, 발칸이 창단되기 직전에 일을 벌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칼리안에 대한 복수심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테니, 칼리안이 그렇게 추진해오던 일과 칼리안을 한꺼번에 망쳐놓기로 결심을 했을 터였다. 그러니 플란츠가 발칸의 창단식에 나온다면, 실리케가 일을 벌이는 것을 목격하게 될 터였다. 그러느니 그냥 보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묻는 중이었다. 플란츠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한참이 지난 뒤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제 넘는 짓은 거기까지.” 플란츠는 이렇게 대답함으로 그 자리에 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칼리안은 그런 플란츠를 더 설득하려 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칼리안은, 그대로 물러나지 않고 경고의 의미를 담은 말을 덧붙였다. “대신 이번에는 무슨 일이 생겨도 끼어들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고맙다는 말은 진짜 생략한 채로. * * * - 사락······. 청포도 빛의 아름다운 드레스 위로, 실리케의 에메랄드 색 머리가 흘러내렸다. 결 고운 머리를 빗겨 내려가는 시녀의 얼굴이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며칠 전 칼리안이 다녀간 이후로 망가진 실리케의 기분이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심기가 틀어져도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다. 아니, 소리만 지른다면 다행이었다. 그동안 벌써 몇 명의 시녀가 실리케의 손찌검에 당하고 또 실리케가 던진 물건에 맞아 다쳤는지 모른다. “머리를 올리겠습니다.”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울 속에 보이는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스치듯 쳐다본 시녀는, 곧 실리케의 머리를 굵게 땋아 틀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날을 계속 견디느니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하던 젊은 남작과 결혼이나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남작 부인도 나쁘지는 않아. 결혼해서 살다보면 작은 영지도 익숙해지겠지. 그러다 예쁜 아이도 둘 쯤 낳고. 그런 상념이 너무 깊어서였을까. 순간적으로 시녀의 손이 방향을 잘못 찾아가고 말았다. - 툭.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작은 소리가 났고, 그 후에야 상황을 파악한 시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머리를 고정할 핀을 집어들다, 실리케의 머리를 손 끝으로 툭 건드리고 만 것이다. 거울 속에 보이는 실리케의 눈이 시녀를 향해 치켜 떠졌다. 실리케는 사과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고, 세차게 손을 휘둘렀다. - 짜악! 실리케가 시녀의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침실을 날카롭게 훑고 지나갔다. 몸을 휘청이던 시녀는, 맞은 곳의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방금 전 자신을 노려보던 그 연두색 눈이 너무 무서워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 짜악! 실리케의 손바닥이 다시 한번 시녀의 뺨을 내리쳤다. 지금껏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였다. 곧 실리케는 옆에 서 있던 시녀장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 의미를 아는 시녀장은, 실리케가 시녀에게 다시 손을 대기 전에 얼른 밖으로 보냈다. 그리고 실리케의 앞에 허리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곧바로 왕궁에서 내보내겠습니다.” 실리케는 냉랭한 눈으로 그런 시녀장을 노려보다 자리에 앉았다. 그 뒤 다른 시녀가 다가와 실리케의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빗기기 시작했다. 숨도 쉬기 어려울 시간이 잠시 지나고 머리 손질이 끝났을 때, 실리케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도착은 했느냐?” 카이리스 왕실의 제2기사단 라온의 단장이 왔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토요일에 제1기사단 카렌의 단장과 함께 나간 뒤, 일요일에 홀로 실리케를 찾아왔던 이였다. 카렌의 단장과 함께 있을 때는 그렇게나 주저하는 얼굴을 하더니, 따로 찾아온 뒤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시키는 일을 할테니 자신을 카렌의 기사단장으로 발령해달라는 요구까지 해온 것이다. 실리케는 당연히 수락했다. 실리케의 질문에, 시녀장이 재빨리 대답했다. “네,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실리케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사라졌다던 자는 아직인가?” 아르센 헤르츠를 말하는 것이다. 시녀장은 이번에도 빠르게 입을 열었다. “네. 아직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합니다.” “그래.” 그 대답을 끝으로 실리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 밖으로 나가려 걸음을 옮기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한 얼굴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아이, 내보내지 말거라. 쓸 곳이 있으니.” 자신의 머리를 건드린 시녀를 그대로 두라는 말이었으므로, 시녀장이 조금 놀란 눈을 한 채 실리케를 쳐다봤다. 한번 실수한 이를 두 번 보지 않는 실리케가 이런 말을 했으니,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리케는 같은 말을 다시 설명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 라온의 단장이 실리케의 명을 잘 수행했기를, 그래서 준비해오라 한 물건을 가지고 왔기를 바라면서. * * * 헤이시아 궁에 숨이 멎을 듯한 긴장감이 가득찼던 그 시간. 마찬가지로 옷을 입고 머리 손질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칼리안이, 침실 커튼 너머로 보이는 앨런을 향해 물었다. “오늘 전하께서 스승님께 백작위를 내리실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잘 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언급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소문이라는 것이 본디 비공식적이고 출처를 알기 어려울수록 빨리 퍼져나가는 법이 아닌가? 때문에 그 소식이 칼리안의 귀에 들어오는 것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단치 않은 일입니다. 발칸의 출정식이 더 중요하지요.” 어차피 앨런은, 작위가 있든 없든 그 이름 하나만으로 이미 가치를 입증해 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오늘 백작이 되든 말든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축하드립니다, 스승님.” “축하를 해주시니 좋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거저 주시는 자리는 아닌 듯 하여 걱정이 됩니다.” 이제 공식적으로 귀족이 되었으니, 르메인이 더 많은 일을 줄 것 같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은 설마요, 하고 조심스레 대답한 뒤 입을 닫았다. 어쩐지 앨런의 걱정이 괜한 것이 아닐 듯한 예감이 무럭무럭 들었던 탓이다. 잠시 뒤 칼리안이 준비를 마치자, 얀이 걸어가 침실을 막고 있던 커튼을 올렸다. 그리고는 시간을 확인한 뒤 말을 건넸다. “바로 식사를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그날 칼리안은 조찬에 가지 않았다. 앨런이 갑자기 찾아오는 바람에, 그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기로 한 것이다. 얀의 말에 칼리안이 고맙다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칼리안과 앨런만 방에 남게 되었다. 칼리안은 그제야 앨런을 제대로 보게 되었는데, 덕분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대단치 않은 일이라 하신 분은 어디 계십니까?” 백작이 되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다던 사람이, 처음 보는 고급스러운 옷을 쫙 빼입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작위 수여 이후에는 발칸의 군단장임을 뜻하는 로브를 걸쳐야 했으니, 저 멋들어진 옷은 분명 작위 수여를 위한 것일 터였다. 심지어 앨런은 지난 새벽에 칼리안이 플란츠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도왔다.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렇게 멋을 부리고 왔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의 웃음에, 앨런이 조금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레이첼이 마련해 준 것이니 그리 보지 마시지요.” “멋지십니다. 잘 어울리시네요.” 기념할 것이 많은 날이었으므로, 앨런의 며느리인 레이첼이 새 옷을 맞춰 준 모양이었다. 아침에 새 옷을 입니 마니 꽤나 신경전을 벌였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것을 상상한 칼리안이 다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 웃음은, 칼리안이 앨런의 맞은편에 앉기 전까지만 이어졌다. “그래서.” 자리에 앉은 후 이렇게 입을 열며 앨런을 마주 보는 칼리안의 얼굴에서는, 장난스런 웃음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앨런과 농담을 주고 받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눈빛을 한 칼리안이 하려던 질문을 이어나갔다. “브리센 후작, 다녀갔습니까?” 평소에도 불쑥불쑥 오던 앨런이기는 했지만, 이런 바쁜 날 아침에 찾아왔다면 필시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이를테면, 실리케가 대체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서 애가 잔뜩 탄 에반 브리센이 갑작스럽게 르메인을 찾아왔다거나 하는 그런 일 같은. 아니나 다를까, 앨런이 살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조금 전에 브리센 후작이 전하와 독대를 마치고 갔습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실리케를 잡는 것에 협조할테니 이번에 실리케가 벌이는 일에서 브리센 가문까지 피해를 입지 않게 해달라는 말을 하러 왔을 터였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해 앨런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헤르츠 경이,”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앨런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 콰아앙! 결코 무시할 수 없을 폭발음이 울려퍼진 까닭이다. 테라스의 창문이 우르르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 함께 느껴졌다. 칼리안과 앨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테라스로 나갔다. 그리고 보여지는 광경에,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 소리를 냈다. “내가 아무리 오래 못 있을 것이라 했다지만.” 들은 대로, 그리고 느낀 대로였다. 폭발이었다. 그것도, 카이리스 왕궁 안에서 일어난 폭발이었다. 헤이시아 궁에서 검은 연기가 풀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칼리안의 입가에 의미를 읽어내기 어려울 미소가 드리워졌다. 옆에 서 있던 앨런 역시 그리 당황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번에 저에게 줄 누명은 꽤 화려하네요. 이걸 고맙다 해야 할지.” 과거의 실리케는, 옛 칼리안이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웠었다. 그것을 빌미로 옛 칼리안을 암살했었다. 이번에도 실리케의 사고방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저 폭발의 범인을 칼리안이라 몰아세우려는 수작일 터였다. 칼리안은 여유로운 얼굴을 한 채 속삭이듯 말했다. “처음에는 독을 주시더니, 이제 누명까지 주시려 하니.” 받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갚아도 드려야지요. < 제17장. 그 걸음. (3) > 거대한 폭음이 카이리스 왕궁에서 터져나오자, 인근의 사람들이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저택으로 들어서던 에반 브리센의 마차가 잠시 멈췄다. 에우리아가 마법사 협회 건물 옥상으로 뛰쳐 올라갔다. 멜피르와 테시드가 동시에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르센은, 발칸 부군단장의 로브를 어깨에 둘렀다. * * * “끝을 보여주겠다 하였으니. 이제 어찌 하겠느냐.” 실리케가 읊조리는 소리를 들은 시녀장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시녀장은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짙고 검은 연기를 지켜보는 실리케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어려 있는 것은 볼 수 있었다. 시녀장은 오늘 줄곧 실리케와 함께 있었고, 그래서 실리케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모조리 지켜 보아야 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셨습니까.’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떠올려 본 시녀장이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키려 제 두 손을 마주잡았다. 조금 전, 라온의 기사단장이 실리케를 찾아온 뒤. 준비를 모두 마친 실리케가 응접실에 홀로 들어갔다. 시녀장이 알려주었던대로, 라온의 기사단장이 그 곳에서 실리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실리케에게 예를 보인 뒤, 준비해 온 검은 색 상자 하나를 건넸다. 그리고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위험한 물건입니다. 어떤 이유로 찾으셨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그렇게 기사단장의 말을 끊은 실리케가, 검은 상자를 잠시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뒤 하나를 꺼내들고는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기사단장을 보며 말을 이었다. “경에게 무엇을 받았던가요?” 방금 그 상자요. 이렇게 말하지 못한 라온의 기사단장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실리케를 대면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과연 좋은 선택을 한 것인지를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 실리케 왕비의 전횡이 심각하여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바, 기사단 카렌과 라온은 더 이상 실리케 왕비의 명을 따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에반의 편지에 적혀있던 내용이 계속 생각났다. 카렌의 단장은 분명 에반의 말을 따르리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순간적인 욕심에 실리케를 찾아왔던 라온의 단장이었다. 일요일에 실리케를 만나고 돌아오던 그 순간부터,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심상치않은 물건을 가져다 달라 하던 실리케가 꼬리를 자르려는 의도가 분명한 말까지 하니, 아무래도 영 불안해진 것이다. “좋아요.” 가벼운 어투로 말한 실리케가 검은 상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응접실 문 옆에 놓인 협탁에 상자를 올려둔 뒤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려요. 곧 돌아올테니.” 그리고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응접실에서 나갔다. 그렇게 라온의 기사단장을 두고 밖으로 나온 실리케는,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시녀장과 시녀들을 보았다. 실리케의 눈이 유난히 눈에 띄는 얼굴이 된 시녀에게로 향했다. 머리 손질 중 손을 잘못 놀렸던 바로 그 시녀였다. “이리 오거라.” 그 시녀는 잔뜩 겁에 질린 채였다. 움츠러든 어깨가 펴지질 않았다. 입술은 터져 마른 피가 엉겨붙어 있었고, 볼에는 시퍼런 멍이 든 탓에 퉁퉁 부어 있었다. 두 번의 따귀가 그녀의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두었다. 그것을 본 실리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내 손이 과했구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듯한 말이 아닌가.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실리케를 쳐다봤다. 실리케는, 손 안에 든 작은 짐승을 어루만지는 듯한 보드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때문에 시녀장마저도 그 미소 안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짚어내지 못했다. ······ 그렇게 오랫동안 실리케를 지켜봤으면서도. “하나만 부탁하마.” 이렇게 말한 실리케가, 조금 전부터 손에 들고 있던 구슬을 시녀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응접실 안에 놓인 검은 상자에 그것을 도로 넣어달라 말했다. 최근 실리케는 시녀들은 물론 시녀장에게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간혹 그 입이 열리면 듣는 이들의 심장을 갈래갈래 찢을 것 같은 독기어린 목소리가 나왔었다. 그리하여 너무나 오랜만에 이런 자상한 얼굴과 부드러운 목소리를 대한 시녀는, 실리케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네, 알겠습니다.” 흡족해한 실리케가 구슬을 든 시녀의 손을 감싸잡았다. 그리고 살짝, 힘을 주었다. - 딸깍. 불안한 소리가 시녀의 손 안에서 들렸다. 그것을 느낀 시녀가 실리케를 쳐다보자, 실리케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서. 들어가보렴.” 그리고는 곧바로 뒤로 돌아서 걸어나갔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언제나와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 * * 헤이시아 궁의 폭발음을 들은 르메인이 고개를 들었다. 바쁜 걸음 소리가 아르피아 궁 이곳 저곳에서 들렸고, 카에라의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와 르메인의 주변을 에워쌌다. 아르피아 궁의 집무실 창문은 왕궁 정문을 향해 나 있었다. 때문에 실리케가 머무는 헤이시아 궁은 르메인의 집무실에서 보이지 않았다. “시작했군.” 조용히 중얼거린 르메인이 정말 피곤하다는 얼굴로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폭음에 놀라거나, 그 원인을 확인하려 하거나, 혹은 밖을 살피려는 등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던 시종장 라울이 놀란 얼굴을 한 채 밖으로 나간 뒤, 르메인의 뒤를 지키던 카에라 기사단장 렌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 마나실 경을 불러오라 하겠습니다.” “마나실 경은 무슨 일로?” 르메인이 이렇게 되묻자,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한 렌이 입을 다물었다. 르메인은 여전한 얼굴로 말했다. “내 호위는 이 곳에 다 모여 있는 줄 알았는데. 나에게 다른 호위가 또 있던가.” 앨런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가벼운 질책이었으므로, 렌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집무실 문이 다시 열리며 라울이 들어왔다. “헤이시아 궁입니다. 응접실 쪽에서 폭발이 있었다 하는데, 다른 이들의 피해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왕비께서는 무사하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말한 라울이 잠시 말을 얼버무렸다. 차마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전해들은 탓이었다. 르메인이 라울을 향해 말했다. “그것이?” 곧 라울은 난처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말을 맺었다. “아르센 헤르츠가 왕비 저하를 공격했다 합니다.” 아르센 헤르츠! 발칸의 부군단장 이름이 엉뚱한 곳에서 나오자, 렌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르메인은 피식 웃었다. 곧 르메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지랄하네.” * * * 테라스에 서 있던 칼리안이 몸을 돌렸다. 폭음이 들림과 동시에 칼리안의 방으로 뛰쳐 들어온 키리에가 잔뜩 굳은 얼굴로 칼리안의 곁에 섰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얀이 들어왔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겠다던 얀은, 식사 대신 재밌는 이야기를 칼리안의 앞에 내려놓았다. “오늘 아침에 헤르츠 경이 실리케 왕비를 찾아갔다 합니다. 그리고 지난 번 습격의 주동자가 실리케라는 말을 왕자님께 들었다 주장하더니, 일방적으로 공격을 했다 합니다.” 말을 하고 있는 얀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이었고, 말을 듣는 앨런과 키리에는 웃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물었다. “내가 헤르츠 경을 사주해서 실리케를 공격하게 했다?” “네. 그렇다는데요.” 죽일거면 내가 했지. “그래.” 아르센의, 폭음.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또 접하게 된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레이의 마차가 폭발했다 하니, 아르센이 화염구 쓰는 것을 퍽 좋아하는 줄로 안 듯 했다. 파벨의 기사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신경쓰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어찌됐건 사람들이 듣기에는, 그레이의 마차가 폭발한 것과 실리케의 응접실이 폭발한 모양새가 퍽 비슷해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기대한대로, 제법 머리를 썼군요. 마력탄도 구한 듯 하고.” 칼리안의 말대로였다. 실리케가 머리를 제법 굴렸다. 최근 행방불명된 아르센을 꺼내 올 생각을 했다니 말이다. 칼리안이 아르센을 사주했다는 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면 칼리안은 물론 발칸까지, 그리고 발칸의 군단장인 앨런도 무사히 넘어가지는 못할테니까. “헤르츠 경이 붙들렸을 때,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우리가 해명할 수 없으리라는 것까지는 생각을 해낸 모양입니다.” 에반의 집에서도 아르센을 찾지 못했으니, 칼리안이 아르센을 숨겨두고 있다는 것까지는 결론을 냈던 것 같았다. 만약 칼리안 측에서 아르센을 보호하고 있었다면, 실리케가 공격을 받은 그 시간에 아르센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칼리안이 변호해 보아야 소용이 없지 않겠는가. 실리케를 공격하라 사주한 것이 칼리안이니, 칼리안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들 중 누구의 얼굴에서도 난처함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칼리안은 여전히 걱정 없다는 듯한 얼굴로 얀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르메인이 어떻게 나올지를 묻는 말에, 얀이 씩 웃었다. “발칸 창단식에 늦지 말라십니다.” 창단식을 미루지 않았다. 르메인 역시, 실리케의 주장을 개소리로 들은 것이다. * * * - 차르륵! 실리케의 부채가 센 소리를 내며 접혀들었다. 헤이시아 궁의 폭발이 있은 지 벌써 한참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 누구도 조사를 하러 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르메인의 말이 전해져왔다. - 왕비가 무사하다 하니, 마법사단 발칸의 창단식이 마무리 된 이후 사고 조사를 하겠다. 실리케는 분명 사고가 아니라 하였다. 습격이 있었다 했고, 범인의 이름까지 알렸다. 그럼에도 르메인은 ‘사고’라는 말로 일의 본질을 바꾸었다. 이런 일까지 벌였음에도, 실리케의 말을 듣지 않는다. “만에 하나 이것이 정녕 사고였다 하더라도, 행사는 미루어야 함이 아니더냐. 전하의 의중이 이제 명확히 보이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실리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실리케는 평정심을 찾기 위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시녀장을 향해 말했다. “기사단 라온의 부단장을 불러, 라온 전원을 빌헬름 관으로 집결시키도록 하거라. 라온의 단장이 나와 함께 있다 하면 말을 들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기회에 칼리안을 잡아야 했다. 왕이 나서지 않겠다면, 실리케가 직접 움직일 수 밖에. 곧 실리케는 몇몇의 호위기사들과 다른 시녀들을 대동한 채, 발칸 창단식이 치뤄질 빌헬름 관으로 이동했다. 기사단 파벨이 사용하던 곳이었으니, 빌헬름 관은 헤이시아 궁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때문에 그리 오래지 않아 행사장에 도착한 실리케는, 부채를 쥔 손에 다시 한번 힘을 꾹 주어야 했다. 왕궁에 폭발사고가 생긴 이후였다. 그런데 그 누구의 얼굴에도 불안함은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아침을 보내고 온 것 같은 얼굴들을 하고선, 지극히 평범한 인사들을 주고 받고 있었다. 그 곳에 모인 누구도, 폭발에 대해 입에 담지 않았다. 친 브리센 성향의 귀족들이 계속 눈에 띄었으나, 그들은 아주 조용했다. 실리케에게 인사만 건넨 뒤, 고개를 돌렸다. 앨런과 밀접한 발칸의 창단식이 있는 날이 아닌가. 그러니 앨런이 말했던 ‘눈에 띄는 큰 나무’에서 살짝 발을 뗀 것이다. ‘감히, 나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 겪는 실리케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와 걱정어린 말을 했다. “폭발이 있었다던데, 괜찮으신 듯 보이니 다행입니다.” 말을 한 이를 쳐다 본 실리케의 눈에 독기가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실리케에게 사고 소식을 물어온 이는, 칼리안이었다. “네가 주도한 일을 가지고 참 뻔뻔하게도 묻는구나.” 실리케의 목소리가 상당히 컸고, 주변은 조용했다. 장내에 있던 귀족들, 창단식을 위해 모여있던 새하얀 로브의 마법사들, 그리고 다른 두 왕자들의 눈이 모두 실리케와 칼리안을 향해 움직였다. 그들을 한번 둘러본 칼리안이 다소 굳은 얼굴을 했다. “섣부른 말은 삼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행사가 끝나면 원인을 찾을 것이라 하셨지 않습니까.” 비아냥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진심으로 실리케를 걱정하는 그런 말투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칼리안은 평소 실리케를 이런 식으로 대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지금 저 모습은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한 연기라는 것을 실리케는 알았다. 실리케만, 알았다. 손에 들린 부채가 까드득, 하는 소리를 냈다. “그 마법사를 찾아오거라. 그 마법사의 소행임을 내가 똑똑히 보았으니, 반드시 찾아와야 할 것이다.” 그 말에,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역시나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실리케가 웃음을 지었을 때. “그 마법사라 함은.” 실리케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자를 말하는 것입니까, 왕비.” 익숙한 목소리.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실리케가 고개를 돌렸다. 에반 브리센이 그 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서 있던 한 명의 마법사가 고개를 숙였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정중한 목소리로, 마법사가 실리케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아르센 헤르츠, ‘그 마법사’ 입니다.” 실리케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대체 왜 아르센 헤르츠가 칼리안이 아닌 에반과 함께 들어오고 있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으므로. 그렇게 한 걸음 물러서 에반과 아르센을 쳐다본 실리케의 고개가 칼리안 쪽으로 돌아갔다. 칼리안은, 웃고 있었다. 당신의 끝이 보이느냐는 질문이 그 웃음에 담겨 있었다. < 제17장. 그 걸음. (4) > 아주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이틀 전 토요일. 칼리안이 반 브리센 세력에게 제 이름을 소개하고, 새 잡던 앨런 옆에서 르메인이 친 브리센 세력을 잡고, 플란츠가 히나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던 그 시간. 에반 브리센 후작의 저택으로 폴룬 상단의 마차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안에는, 멜피르도 앨런도 아닌 아르센이 들어 있었다. “처음 뵙습니다.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아르센의 자기 소개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정중하되, 왜인지 모르게 사람 심기를 쿡쿡 건드리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물론 에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아르센이 사라진 일 때문에, 에반이 발칸을 시기해서 젊은 인재를 죽이려 했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저 놈의 마법사 한 명 찾겠다고, 카에라의 기사들은 마굿간의 건초더미까지 헤집어두고 갔다. 뿐만인가? - 그 스승에 그 제자라 말씀하셨으니. 후작의 칼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저도 좀 알 것 같습니다. 아르센이 에반의 기사 열을 죽여놓는 바람에, 앨런에게 평생 잊을 수 없을 치욕적인 말까지 들었다. “아르센······ 헤르츠. 네 놈이, 그 놈이구나.” 바로 그 아르센 헤르츠가 제 발로 찾아 들어왔으니, 에반은 당연히 너 이놈 잘 만났다 하며 검부터 집어들었다. 앞뒤 사정 구분 없이 저 놈 하나 죽여버리면 속은 시원하겠다 싶어서였다. 에반의 손에 들린 검이 웅웅 소리를 내는 것을 본 아르센이 손을 내밀었다. 마법을 쓰기 위함이 아니라, 제 손에 끼워진 반지 하나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방해하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마나실 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전에 칼리안이 끼고 다녔던, 통신용 마법이 걸린 반지였다. “혹시라도 제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곧바로 찾아오시겠다 전해달라 하십니다.” 아르센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아르센은 지금 자신의 앞에 선 것이 누구인지 알고는 있는걸까 싶은 평온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후작께서도 마나실 경께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제가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안타깝게도, 통신용 반지가 무엇인지는 에반도 잘 알았다. 그것이 에반의 검을 붙들었다. 결국 에반은 검에 불어넣었던 오러를 회수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능구렁이 같은 마법사 놈이······.” 그러자, 반지의 빛이 조금 더 진해지는가 싶더니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전에 들은 바 있던 말이라 식상하다 하십니다. 그래도 언제 한번 꼭 오시겠다고 전해달라십니다.” 에반이 노기 가득한 얼굴로 아르센을 쳐다봤다. 지금 장난이나 칠 때인가 싶어서였는데, 아르센의 얼굴 그 어디에서도 장난스러운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마법사는, 소드마스터 앞에서 아주 진중하게 대화에 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정말로, 자신의 욕설을 앨런에게 전한 것이다. 결국 에반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치다시피 말했다. “왜 왔느냐! 그 용건이나 말하고 꺼지거라.” 그러자 아르센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월요일, 발칸 창단식이 있을 때까지 이 곳에 머무르라는 칼리안 왕자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 뭣이라? 닷새의 휴가가 끝나자마자 제 편 하나 없을 사지에 찾아오게 된 아르센은, 할 말을 잃은 에반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왕자님께서는, 왕비께서 분명 제 거취를 빌미로 일을 꾸미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후작께 제가 몸을 의탁하고 있으면 거취에 대한 보장이 가장 확실할 것이므로, 이 곳에서 이틀만 지내라 하셨습니다.” 에반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일을 꾸민다니? 실리케가 무슨 일을 꾸민단 말이냐?” 그러자 아르센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말을 들었다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것을 아셨으면 왕자님께서 저를 이런 곳에 보내셨겠습니까.” “이런 곳이라니? 이런 건방진 놈을 보았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반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실리케가 무슨 일을 꾸민다면, 분명 발칸의 창단식 날이 맞기는 할 터였다. 거기까지는 에반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일을 꾸민다는 그 자체가 심히 마음에 걸렸다. 아르센의 입에서 다음 말이 나왔다. “후작께서 이번에 칼리안 왕자님을 도우신다면, 저를 해치려 했다는 소문에서는 벗어나실 수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물론 플란츠 왕자님께 해가 될 일도 없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칼리안이 괜히 아르센을 에반의 저택에 보낸 것이 아니었다. 에반이 아르센을 해치려 했다는 누명이 사라져야, 실리케가 기사들을 사주했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 에반만큼 아르센의 거취를 정확히 보증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브리센이 아닌가. 브리센이 보증을 한다면 아무리 실리케라도 아르센을 더 몰아세우지 못하리라는 것이 칼리안의 생각이었다. 다만 그것은 칼리안에게만 이득이 큰 일이었다. 에반은 그깟 소문 하나 이기자고 아르센을 이틀이나 집에 묵게 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따라서 에반은 거절의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아르센의 말이 먼저 나왔다. “그리고, 도박장에 대한 비밀을 지키겠다 하셨습니다. 그 이상한 이름의 술집 3, 4층 말입니다.” 물론 브리센과 관련하여 칼리안이 알고 있는 비밀은 더 많았다. 이를테면 레넌 브리센이 어디에 있는지 라거나, 그레이가 무슨 일로 이 곳에 와서 무슨 일을 겪고 다시 돌아갔는지 라거나, 혹은 플란츠가 이미 왕위에서 마음을 뗐다는 사실이라거나, 더불어 아이샤 왕비의 사망 원인에 대한 의구심 같은 것들. 하지만 아르센의 이틀치 숙박비에 맞을 교환품은 이 정도였다. 좋지 않은 소문, 그리고 도박장. 나머지는 칼리안이 사실을 알고 있음을 에반에게 들키기에는 너무 값이 비싼 것들이었다. 칼리안의 계산은 정확했다. 양대 기사가문 중 하나인 브리센 후작가의 가주가 도박장 운영이라니. 그 일은 절대로 공개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결국 에반은 칼리안의 거래에 응하고 말았다. 도박장에 대한 정보를 칼리안이 함구하는 대신, 자신의 기사들을 도륙낸 이 마법사를 이틀 동안 맡아주기로. “······다른 기사들에게 공격당하는 것까지 참견하지는 않겠다. 그러니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없는 것처럼 있다 가도록.” “알겠습니다.” 아르센은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당연히, 없는 것처럼 지내지 않았다. 아르센이 에반의 집에 있었다는 사실을 에반만 알고 말 것이라면 뭐하러 목숨을 걸고 왔겠는가? 때문에 아르센은 기사들, 그것도 아르센이 자신의 동료를 죽였다며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 기사들이 득시글한 그 곳에서 당당하게 마법사 로브를 걸쳐 입고 온 저택 안을 헤집고 다녔다. 그 와중에 몇 번 싸움이 있었으나, 아르센은 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폭음이 들려올 그 즈음에는 온 저택의 사람들이 적어도 한 번은 아르센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에반은, 실리케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불안해진 마음에 카렌과 라온 기사단장에게 실리케의 말을 듣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것만으로는 불안이 가시지 않았으므로 월요일 오전에는 르메인을 찾아가 실리케를 축출하는것을 묵과할테니, 실리케와 브리센 가문을 연관짓지 않도록 해달라는 말도 했다. 그 후 저택까지 잘 간 뒤에 카이리스 왕궁에서 터져나온 폭음을 들었다. 때문에 다시 왕궁으로 온 상태였다. 자신의 딸에게 가장 큰 독이 될, 아르센 헤르츠라는 그 마법사와 함께. * * * 사실 칼리안은 정말 많은 생각을 했었다. 실리케가 어떻게 일을 벌일지를 예측하기 위해서였다. 칼리안이 실리케를 만나러 갔던 날. 밖에서 칼리안을 기다리던 시종이 무슨 짓을 꾸몄다는 말을 할까봐 얀도 데려가지 않고 실리케를 혼자 만났다. 그만큼 가능한 많은 경우의 수를 두고 생각을 했다. 그 중 하나가 아르센이었을 뿐이다. 마력탄까지 써 가며 헤이시아 궁에 폭발 사고를 일으킬 정도로 막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아르센을 빌미로 암살을 시도했다는 누명을 씌우지 않을까 하는 예상까지는 했다. 그래서 대비를 했다. 그리고 실리케는, 아르센이라는 미끼를 덥썩 물었다. 이제 그 낚싯줄을 힘껏 당길 차례였다. 칼리안이 한번 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제 막 들어와 왕자들의 곁에 앉아 있던 르메인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 뚜벅, 뚜벅. 고요한 가운데 칼리안의 구두 소리가 울려퍼졌다. 르메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이목이 칼리안에게 집중됐다. 때문에 칼리안의 목소리도 모두에게 들렸다. “전하.” 칼리안은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가며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수많은 이들이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헤이시아 궁의 사고를 조사해 주십시오.” 제 손으로 마력탄을 터뜨리고, 그것으로 칼리안을 내치려 했던 것을 밝혀달라고. 그리하여, 실리케가 절대로 견디지 못할 시간을 만들어달라고. 그렇게 말했다. 르메인의 눈이 잠시 플란츠에게 가 닿았다. 플란츠는 아무 말 없이 르메인의 시선을 받기만 했다. 곧 르메인의 입이 열렸다. “그리하겠다.” * * * 가장 먼저 확인된 것은 아르센에 대한 사실이었다. 실리케의 부친이기도 한 에반이 아르센의 거취를 보증했다. 사고가 있던 당시 아르센이 에반의 집에 있던 것을 본 눈이 너무 많아서 의혹의 여지조차 없었다. 실리케가 그렇게 애써 만든 덫이 너무 쉽게 벗겨졌다. “섣부른 말을 삼가시라고, 그리 말씀을 드렸는데.” 실리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칼리안의 말에, 실리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실리케는 분명 아르센을 보았다 했다. 칼리안에게 그 마법사를 당장 데려오라 소리쳤다. 그 마법사가 모든 일의 범인이라 했다. 헌데 아니었다. 심지어 아르센은, 오히려 실리케가 파벨의 기사들을 사주하여 자신을 공격하게 했다는 말을 했다. 애초에 아르센을 죽이려 한 것이 에반이 아닌 실리케라는 말에,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그러던 중, 시종장 라울이 르메인의 곁으로 와 무언가를 알렸다. 이야기를 들은 르메인이 저도 모르게 침통한 소리를 냈다. “실리케.” 르메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장내의 소란을 가라앉혔다. “폭발에서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크게 다쳤다.” 실리케가 고개를 치켜들었고 플란츠는 고개를 숙였다. 실리케는 누군가 살았다는 말 때문에, 그리고 플란츠는 누군가 또 죽었다는 말 때문에. 시녀가 죽었다. 기사단장은 크게 다쳤다. 르메인이 다시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뉘우치지 않을 생각인가.”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실리케의 뒤에 있던 시녀장을 봤다. 그 시선을 느낀 시녀장이 눈을 꼭 감았다. 그녀는 이 곳에 오기 전부터도 얼굴이 창백했다. 떨리는 손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주시해왔던 칼리안이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무조건 따르기만 해서는 바로잡을 수 없다. 감싸는 것만이 네 길인 것은 아니니라.” 생각해보라. 얀은 칼리안에게 욕도 했다. 이 얼마나 바람직한 시종의 모습이란 말인가? 그 때를 생각한 칼리안의 얼굴에 아주 잠깐 미소가 스쳤다. 그리고 실리케가 그 미소를 보았다. “그래. 참으로 많이 닮았구나.” 실리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같았다. 아무 위협도 되지 않는 옛 칼리안에게 어떻게든 끈질기게 손을 뻗어 죽여버렸던, 칼리안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던 여자였다. 프레이야를 닮았으니까. 너무 많이 닮았으니까. 기사가 깨어나든, 시녀장의 입이 열리든. 에반까지 완전히 돌아섰으니 어차피 실리케는 이제 더 이상 왕비일 수 없었다. 실리케가 그것을 가장 잘 알았다. 그리하여 실리케는, 칼리안에게 달려들었다. 어느새 그 손에는 숨겨두었던 비수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칼리안과, 앨런과, 키리에와. 플란츠가 보았다. * * * 끼어들지 말라고, 무슨 일이 생겨도 끼어들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 * * 빌헬름 관의 하얀 대리석 바닥에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소리내지 못했다. 르메인이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란델의 눈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실리케는 칼리안에게 비수를 휘둘렀다. 그녀의 비수가 누군가의 가슴을 길게 베며 깊이 파고들었다.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한 발을 떼었을 그 때, 칼리안에게는 이미 앨런의 그레이트 실드가 씌워져 있었다. 사실 그렇게 튼튼한 6서클짜리 실드가 없어도, 평생 칼 한번 휘둘러보지 않은 그 움직임은 지나치게 느렸다. 굳이 칼리안이 손을 쓸 필요조차 없을 만큼 느렸다. 그러므로, 칼리안은 완벽하게 안전했다. 그 똑똑한 플란츠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니 플란츠는, 일부러 달려든 것이다. “꺄아아악!” 실리케의 비명소리가 정적을 깼다. 청포도 빛의 아름다운 드레스에 핏물이 스몄다. 그러나 아무도 그 소리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비수와 함께 잘려나간 실리케의 아름다운 손에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길게 베이다 간신히 심장 앞에서 멈춘 플란츠의 깊은 상처에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죽겠다고 달려든 원수 같은 놈 살리겠다고, 제 스승이 씌워준 실드를 깨느라 만들어 낸. 투명한 검에 어린 푸른 오러 때문이었다. < 제17장. 그 걸음. (5) > 미친 새끼 같으니. 내가 널 어떤 마음으로 살려뒀는데. 저딴 칼에 네가 죽으면 내 생은 뭐가 되냐고. 진짜 미친 새끼 같으니. * * * 칼리안의 손에서 검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플란츠가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뒤에야, 행사장은 비로소 혼란에 휩싸였다. 지금 놀라야 할 일이 칼리안이 푸른 빛무리를 발현했다는 것만은 아니었음을 깨달은 까닭이다. 왕비가 왕자에게 칼을 휘둘렀으니까! 제 아들이 흘리는 피를 또 보게 된 르메인이 플란츠에게로 다가가던 걸음을 휘청였다. “플란츠.” 그런 르메인을 붙든 앨런은 칼리안을 보며 혀를 쯧 찼다. 모두의 앞에서 힘을 들켜버렸으니,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다만 지금 당장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잘 알았으므로, 앨런은 다시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우선 이 곳을 벗어나 계시지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더 지체하지 않고 르메인을 보호하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와 함께, 카에라의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일부는 앨런과 함께 르메인을 호위했고, 또 일부는 실리케를 포박해 끌고 나갔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귀족들도 모두 내보내며 주변을 통제했다. 발칸의 마법사들은 빌헬름 관에 누군가 더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분위기에 휩쓸려 발생될지 모를 또 다른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혼란의 한 가운데 있던 칼리안은 이 모든 일들을 지켜보지 못했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하는 것이 맞을 터였다. 칼리안은 조금 전 그 많은 이들 앞에서 오러를 썼음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르메인과 얀, 란델과 에반까지 모두 다 칼리안이 숨긴 것을 보았다는 걱정도 모조리 미뤄뒀다. 칼리안이 입술을 깨물며 플란츠의 상처를 내리눌렀다. 머릿속을 맴돌던 욕지거리가 기어이 입 밖으로 나왔다. “미친 새끼.” 플란츠는 이미 정신을 놓았다. 실리케의 비수는 사정 없는 상처를 남겼다. 상처가 길고 또 깊었다. 심장이 뛸 때마다 피가 솟구쳤다. 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축복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손이 정말로 특별하기를 바랐다면, 축복의 힘도 더 강했어야 했다. 하지만 시스파니안은 그 정도의 힘을 남겨주지는 않았다. 그녀는 정말이지 빌어먹게도 사려깊었으니까. 이대로는, 진짜 죽는다. 멈추지 않는 피를 보던 칼리안이 채근하듯 입을 열었다. “치유사를, 빨리.” “이미 부르러 갔습니다. 히나가 오는 것이 빠를 것 같아서 얀 님은 체르밀 궁으로 갔습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칼리안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은 키리에가 다가오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칼리안과 함께 플란츠의 상처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무언가를 떠올린 칼리안의 고개가 휙 들렸다. 바로 이 곳에, 치유사가 있지 않은가. 란델이 있지 않은가? “란······.” 때문에 란델을 부르며 고개를 들었던 칼리안의 입이, 하려던 말을 멈추고 서서히 닫혔다. 란델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로, 계속하여 칼리안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든 칼리안과, 앉아있던 란델의 시선이 곧바로 맞닿았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칼리안이 보게 되었다. 지독하리만치 이성적인, 란델의 밑바닥을. 란델은 칼리안과 달랐다. 자리에서 일어섰고, 밖으로 나갔다. 숨긴 모습을 풀어놓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길게 웃었다. 칼리안은 그런 란델을 원망하는 대신, 상처를 누른 손에 힘을 주었다. 악다문 이 사이로 다시 한번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오래지 않아, 히나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 * * 가만히 앉아 있던 실리케가 고개를 들었다.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발소리가 어두운 복도에 울렸다. 그 걸음 소리만으로도 누가 온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곧 소리가 멈추고,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다. 말 없이 선 채로 쇠창살 너머의 실리케를 지켜보던 이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아주 깊이 잠긴 목소리였다. “나를, 찾았다고요.” 피 묻은 옷, 오른손이 있어야 할 곳에 감긴 붕대, 창백해진 얼굴까지. 실리케의 모습은 아침과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했다.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독기어린 모습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불렀단다.” 그렇게 말하던 실리케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 눈이 오른 손에 가 있는 것을 보니, 잘린 곳이 아픈 듯 했다. 칼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잠시동안 말을 멈추고 있던 실리케가 입을 열었다. “너.” 그렇게 칼리안을 부른 실리케의 눈이 칼리안의 면면을 훑어내려갔다. 칼리안은 묵묵히 실리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숨기는 것이 있지?” 칼리안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예상했던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작 그것을 물으려 이 곳까지 불러낸 것인가. 칼리안이 숨긴 것에 대해 뭐가 그리 궁금해서. 이제와서 이런 질문이나 한단 말인가. 곧 칼리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실리케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느끼며, 칼리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숨기는 것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와서 그의 비밀을 실리케에게 알려 줄 이유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실리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칼리안은 그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때문에 실리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온 김에 나도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칼리안은 긍정으로 들었다. “아이샤 전 왕비, 당신이 죽인 것이 맞습니까?” 란델의 친모이기도 한 전 왕비의 죽음에 실리케가 정말 연관이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아이샤······.” 그렇게 말한 후 한동안 기억을 더듬는 척을 하던 실리케가, 떠오른 것이 있다는 표정을 만들어보였다. “내가 그 일을 어떻게 잊겠니.” 어린아이가 보여줄 듯한, 순수하면서도 잔인한 웃음을 지은 실리케가 칼리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 손으로 처음 건넨 독이었는데.” 실리케는 아이샤도 죽였다. 지금 그것을 저렇게 추억거리 꺼내놓듯 말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르메인을 이제까지 살려둬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실리케의 부드러운 음성이 복도를 울렸다. “나는 이렇게 솔직하게 말했는데, 넌 아니구나.” 그렇게 말한 실리케는 다른 말 없이 칼리안이 있는 쪽을 보고 있었다. 뭐라 대답을 해주기를 바라는 듯 했으나, 칼리안은 더 이상 실리케와 나누고 싶은 말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만 발을 돌릴까 하던 칼리안은, 곧 걸음을 멈추고 잠시동안 실리케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조용히 큰 숨을 들이킨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실리케의 말에 대한 대답이 아닌 새로운 질문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물어볼 줄 알았는데. 안 물어보네요.” 플란츠에 대한 말이었다. 제 손으로 아들에게 칼을 휘둘러놓고도, 실리케는 이제껏 단 하나도 묻지를 않는 것이다. 칼리안의 말에 실리케가 냉랭한 목소리를 냈다. “······ 끝까지 나를 방해했잖니.” 결국은 여전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살짝 내리 뜬 눈으로 바닥을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더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 나도 화가 좀 나 있어서.” 칼리안이 손을 들어 심장이 있는 곳을 가리켜보였다. “당신의 그 서툴고 작은 칼에, 어떻게 그런 심각한 상처가 났을지. 그걸 좀 생각해봤으면 하는데.” 다시 반말이 나왔으나, 실리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만 하나 남은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말아 쥐었을 뿐이었다. 잠시 뒤 실리케의 눈이 드레스에 묻은 붉은 핏자국을 향했다. 누구의 피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천천히 허리를 숙여 실리케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느린 속도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지키려는 쪽으로, 뛰어듭니다.”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칼리안이 마지막 말을 전했다. “그러니, 당신이 걷던 그 걸음. 한 번만 돌려 보지 그랬습니까.” 칼리안은 다른 말 없이 뒤돌아 걸어 나갔다. 마지막을 알리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그 곳에 또 한번의 정적이 찾아왔다. 실리케는 한참동안 칼리안의 말을 곱씹었다. 곧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복도에 퍼져나갔다. * * * 실리케에 대한 형 집행은 빠르게 진행됐다.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말했던 것처럼 광장에 레니시타 잎을 깔지는 않았다. 다만, 아주 길고 고통스럽게 숨을 끊는 독이 전달됐다. 르메인의 결정이었다. 도무지 깨어날 생각을 않는 플란츠를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그토록 많은 이들을 독살했던 것에 대한 똑같은 죗값이라 여긴 것이었는지는, 르메인만 알 수 있을 일이었다. 그 날의 세뉴 강에는, 그 어떤 꽃잎도 떠내려가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실리케를 위한 안네루시아를 준비하지 않았다. * * *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났다. 사람들의 입에서 실리케에 대한 이야기가 점차 사라지고, 칼리안을 언급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그 날, 칼리안이 손에 들었던 그것은 분명히 오러였다.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귀족들과 기사들이 보았다. ‘왕자님께서는 이제 고작 열 다섯이십니다. 지금껏 그 나이에 소드마스터가 된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뿐만입니까? 마법도 사용하신다 하지 않습니까.’ 흉한 일을 겪었으니, 이제 좋은 일을 공표해야 할 때가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들이 르메인에게 계속 전달됐다. 하지만 르메인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고 있었다. 아니, 할 만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칼리안을 일단 만나봐야 무슨 말이라도 할 것이 아닌가? 칼리안은 지금 일주일 째 플란츠의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차마 강제로 불러내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 것이다. 르메인이 이마를 감싸쥐었다. 속은 시끄러운데 앞에 앉은 새끼 코끼리가 자꾸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다. “자네 말은, 칼리안이 호위에게 호신술을 배우다가 검의 길에 올랐다는 것인가.” 일 평생을 검술 수련에 오롯이 바치며 살아온 슬레이만이 거품 물고 쓰러질 소리를 한 얀은 정말로 진지했다. 심지어 얀은 칼리안의 성취를 매우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깊이 잠든 듯 일어나지 않는다는 플란츠만으로도 걱정이 태산인데, 칼리안의 일까지 더해져 르메인을 괴롭히고 있었다. 하필 이런 때 앨런도 없었다. * * * 체르밀 궁은 고요했다. 스산해진 날씨만큼이나 분위기도 싸늘했다.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으므로, 이 곳이 과연 왕자들이 사는 곳이 맞기는 할까 싶을 정적이 그 곳을 감돌았다. 특히 플란츠가 머무는 4층의 분위기는, 카이리스 왕궁 그 어느곳보다도 침체되어 있었다. 시종과 시녀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제 할 일에 열중했다. 그리하여 누구도 함부로 4층에 발을 디디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아무도 알지 못했다. “······ 그래서 넌, 왜 안 가는데.” 카이리스의 2왕자가 이미 깨어났으며, 아주 멀쩡해진 몸으로 짜증 섞인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을. “변명 거리를 아직 못찾았습니다.” 그리고 칼리안이, 자신이 어떻게 검의 길에 올랐는지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서 일주일 째 이 곳에 틀어박혀 있었다는 것도. 덕분에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얀을 부른 르메인이 지금 어떤 고초를 겪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를 칼리안은, 아주 뻔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 신경쓰지 말고 쉬십시오. 아직 많이 어지러우실 겁니다.”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라고 씌여있는 목줄을 한 고양이가 침대로 올라와 애옹거리고, 그 옆에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는 시녀가 있고, 그 뒤는 오드아이 검사가 말 한마디 안한 채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데, 또 그 옆에는 7서클 마법사가 검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이틀 전 눈을 떠서 이 광경을 처음 봤을 땐, 설마 실리케로 인해 우울해할까 걱정해서 저러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우애좋은 형제 사이가 아니지 않나. “······ 가라고.” 애초에, 내 동생이 맞기는 하느냔 말이다. 그런 플란츠를 보며 칼리안이 씩 웃었다. 싫다는 뜻이리라. < 제17장. 그 걸음 (6) > 사실, 칼리안은 거짓말을 잘 못했다. 정말이다. 베른은 정직함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은 우직한 기사였고, 옛 칼리안은 애초에 남을 속일만한 성격이 되지를 못했다. 그랬으니, 지금의 칼리안이 거짓말과 친할 리 없었다. 덕분에 칼리안의 몸을 가지게 된 지 1년도 안 된 지금, 칼리안의 과거를 완전히 알고 있는 이가 벌써 두 명이었다. 물론 앨런과 키리에다. 게다가 슬레이만은 칼리안이 말하지 않았음에도 비밀을 꿰뚫어봤고, 플란츠는 진실에 거의 접근해가고 있으며, 아르센 역시 정확히는 아니지만 칼리안에게 남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것까지는 눈치를 채고 있었다. 이들이 칼리안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은 이제 그리 큰 문제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칼리안도 극구 부인하는 것을 그냥 포기해버렸다. 하지만 르메인의 경우는 달랐다. 이 세상에 칼리안의 비밀을 알면 안 되는 단 한명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르메인이니까. 때문에, 검의 길에 어떻게 올랐는지에 대한 적당한 핑계거리를 찾는데 일주일이 넘게 걸린 칼리안이었다. “그러니까, 시스파니안의 둥지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그 뒤에 슬레이만과 대련을 하며 검의 길을 깨우쳤다. 그렇게 얘기를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앨런의 질문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자 앨런이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얼굴이 되더니 툭 내뱉었다. “한번 가서 말씀해보시지요. 그 입에서 욕이 나오는 것을 저도 좀 보고 싶었으니.” 폭발 사고가 있던 날 르메인이 참으로 거친 말을 했을 때, 그 곁에 없었던 것을 매우 아쉬워했던 앨런이었다. 그러니 칼리안이 저런 말을 설명이라고 들고 나타나면, ‘지랄한다’는 그 소리를 한 번 더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뜻이었다. 호신술 배우다 깨우침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놈이나. 드래곤에게 검의 이치를 배웠다고 말하겠다는 놈이나. 칼리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무엇이라 설명을 해야 합니까.” 아무튼 플란츠가 깨어난지도 벌써 사흘이다. 더는 플란츠의 방에 머물기도 힘들었다. 눈만 뜨면 나가라고 성화를 부렸으니. 결국 칼리안은 아무 대비도 하지 못한 채 앨런과 함께 아르피아 궁으로 갔다. 칼리안이 찾아왔다는 것을 들은 르메인은, 조찬을 서둘러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 얼굴이 상당히 수척해져 있었기 때문에 칼리안은 굉장히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변명거리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플란츠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사흘이나 숨기게 된 것이 아닌가.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칼리안의 인사에, 르메인이 어서 앉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칼리안이 르메인의 맞은편에 앉은 뒤 시종장 라울이 들어와 차와 과일을 내려놨다. 그 후 라울이 나가며 집무실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르메인의 입이 열렸다. “네가 요즘 고생이 많다 들었다.” 플란츠를 간호하느라 그 방에 있는 줄로 알고 있으니 하는 소리였다. 그야말로 칼리안의 양심을 쿡쿡 찌르는 말이었으므로, 칼리안이 서둘러 대답했다. “플란츠 형님은 잘 깨어났습니다. 무탈합니다.” 그 말에, 르메인이 아주 기뻐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다시 걱정하는 눈빛을 보였다. “괜찮은 것이냐?” 방금 전에 몸이 다 나았다 했으니, 이번에는 다른 것에 대한 질문일 터였다. 당연히 그 속이 괜찮을지를 묻는 소리였다. 실리케의 비수가 길고도 깊은 상처를 낸 것이 비단 몸만은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다른 생각은 없는 듯 합니다. 그래도 완전히 괜찮아지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당장 실리케 뒤를 따라가겠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으니 그것 하나는 다행이었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상처가 좀 아물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터였다. “그래. 네가 신경을 써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아닙니다, 전하.”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칼리안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까지 플란츠를 돕게 되리라고는 단 한순간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플란츠에 대한 시름을 내려놓은 르메인은, 이제 다음 시름거리를 꺼내놓기 위해 잠시 말을 골랐다. 칼리안은 그런 르메인의 말이 이어지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그 일이 있던 날, 네가 보여준 것에 대해 왕궁 안팎으로 오가는 말이 많구나.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나도 그렇고.” 칼리안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지그프리드의 그 아이에게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만.” “죄송합니다.” 칼리안이 얼른 사과의 말을 꺼냈다. 얀이 르메인에게 얹어준 시름에 대한 것이었다. 세상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둘째 치고, 그런 생각을 고스란히 르메인에게까지 전할 줄은 칼리안도 몰랐다. “제가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르메인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뒤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마력의 덩어리를 만들어 보였다. 언제나와 같이, 투명한 유리조각이 뭉친 모양의 구체가 손바닥 위에 놓였다. “허.” 그날 잠시 보았던 것이 이렇게 눈 앞에 나타나자, 르메인이 다시 한번 놀란 눈을 하며 짧은 감탄을 냈다. 칼리안은 그것을 무딘 날의 작은 칼로 만들어보인 뒤, 오러를 불어넣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흩어냈다. 아무래도 국왕의 앞이었으니 무기를 오랫동안 보이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마력과 오러를 함께 사용할 수 있다보니, 이런 재주가 생겼습니다.” 칼리안의 말에 르메인이 웃었다. 방금 그 모습을 고작 재주라 표현한 말에 대해 웃은 것이었다. 칼리안이 그런 르메인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죽어 사라진 검사의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는 설명을 했다. 그것은 사실이라 하기에도, 그렇다고 거짓이라 하기에도 어려운 말이었다. “지그프리드 공작과 검을 맞대본 적이 있습니다. 공작의 말로는 제가 사용하는 검술이 세크리티아 기사의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너무 허황된 소리임을 칼리안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빙성을 주기 위해 슬레이만의 이름도 적당히 섞어 덧붙였다. 칼리안이 대체 언제 세크리티아 기사를 만나보았겠는가. 그러니 그들의 검술을 칼리안이 쓸 줄 안다 하면, 믿지 않기도 어려울 터였다. “언제부터 그런 힘을 지니게 되었느냐?” “기억을 가지게 된 것은 전하의 탄신 기념일 조금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방금 보여드린 그것은 지그프리드 공작령에 도착한 뒤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르메인이 갑자기 짧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목이 간당간당한 것이 네가 아니라 나일 것이라 하더니. 마나실 경은 이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구나.” “미리 말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르메인이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창 밖에 보여지는 왕궁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네가 있는 곳이 왕궁이 아니었다면, 숨길 이유가 없었으리라는 것을 안다. 숨긴 것에 대해서 질책할 생각은 없으니, 미안해하지 말거라.” 그렇게 말한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호신술이나 배우다 깨우친 것은 아니라 하니 다행이다.” 웃어야 할지, 또 사과를 해야 할지. 칼리안의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 얀은, 정말이지 얀이다. “다만 힘을 얻게 된 과정에 대해서까지 모두에게 알리기는 어렵겠구나.” 과정을 빼고 칼리안의 검의 길에 올랐다는 것만 알리겠다는 소리였다. 아직 그레이가 어떤 상태인지는 모를테니, 칼리안이 여섯 번째 검이 되었다는 소식이 퍼져나갈 터였다. “발칸의 창단식 자리에서, 내가 알리도록 하마.” 실리케의 일로 발칸의 창단식이 조금 미뤄졌다. 얀을 통해 일주일 쯤 뒤에 진행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칼리안은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많은 이들 앞에서 힘을 보였으니, 이미 세작들을 통해 대륙의 모든 나라로 칼리안의 이야기가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니 막을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훈련할 길이 생겼음을 반겨할 수 밖에. “그리고, 일전에 네가 말했던 이동 마법진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다.” 공간이동 마법진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칼리안이 눈을 빛내며 르메인을 쳐다봤다. 대답을 꽤 기다리고 있던 듯한 모습이었으므로, 르메인이 살짝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수락하마. 그 역시 원하는대로 해보려무나.” 본래 르메인은 아무래도 어렵겠다며 거절을 하고자 했다. 그런데 칼리안이 검의 길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퍼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에반 브리센 후작이 경계를 하기 시작할 것은 분명했다. 따라서, 지그프리드와 카이리시스를 연결시킨다면 브리센에서 허튼 생각을 할 일이 적어지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 르메인이었다. 더불어, 란델에 대해서도. 당연히 르메인은 란델이 신관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플란츠가 쓰러졌을 그 당시 칼리안과 란델이 보인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칼리안은 플란츠에게로 달려갔고, 란델은 밖으로 나갔다. - 칼리안 왕자님이 저 궁을 비워내기 전까지, 란델은 얌전할 겁니다. 란델의 속은 그때 가면 들여다 보실 수 있겠지요. 앨런의 말을 잠시 떠올린 르메인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졌다. 그날 란델은 제 속내를 드러낸 것이나 다름 없었다. 칼리안과 플란츠를 제 형제이기 이전에 경쟁자로 보겠다는 소리였다. 그런 란델이 왕위에 오른다면, 칼리안이나 플란츠를 어떻게 처분할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칼리안이 기뻐하며 그렇게 대답하는 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르메인이 대답했다. “그래.” 칼리안에게 주어진 저 힘이 과연 득이 될지. 혹은 또 다른 독이 될지. 르메인의 눈에 채 씻어내지 못한 걱정의 빛이 어렸다. * * * 카이리스 왕궁에서는, 실리케와 연관된 모든 것을 지워냈다.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이라는 위대한 이름으로 시작되는 카이리스 역대 왕비의 목록에서, 실리케 브리센이라는 글자 위에 두 줄의 선이 그어졌다. 실리케가 만들었던 온실은 완전히 해체하여 치워냈으며, 사고가 있었던 곳에 대해서도 보수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실리케와 연관된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처분이 있었다. 죄의 유무와 경중을 따져 죄가 있는 이들은 감옥에 가게 되었다. 죄가 없다 하더라도 왕궁에 둘 수는 없었으므로 모두 왕궁 밖으로 내보냈다. 그로 인해, 플란츠의 시종과 시녀들이 모두 왕궁 밖으로 내쳐지게 되었다. 단 한 명도 빠짐 없이 모두가 실리케의 수족이었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왕궁의 내정 담당관은 새로운 시종과 시녀를 직접 뽑을 생각인지, 혹은 왕궁에서 배정해야 할지를 묻는 서신을 플란츠에게 보냈다. 본래대로라면 플란츠가 그것을 결정하기 전까지 임시로 보필할 이들을 먼저 보내야 했으나, 칼리안이 플란츠를 대신해 거절했다. 자신의 시종과 시녀들이 돌아가며 플란츠를 살피기로 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덕분에 플란츠는 새로운 시종도 배정받지 못한 채 칼리안의 시종과 시녀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멀쩡히 일어난 뒤에도 ‘여전히 혼수상태’인 척을 하며 아직 내정 담당의 서신에 대해 답을 하지 못한 채였다. 칼리안이 안나갔으니까. 도무지 나갈 생각을 하질 않았으니까! ‘형님 때문에 다 망했으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주십시오.’ 정작 플란츠는 제대로 보지도 못한 그 힘을 사람들에게 들킨 이유가 바로 플란츠 때문이라 하니, 플란츠는 창문으로 3층과 4층을 오가며 눌러앉아 있는 칼리안을 더 내치지도 못하고 그저 꾹꾹 참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내 동생이 맞기는 하느냐는 그 질문도 꺼내지 못한 채로, 꾹꾹 참았다. 아무튼 그런 일들의 결과로, “애옹!” 고양이가 계속 찾아왔다. 칼리안이 르메인을 만나겠다며 드디어 밖으로 나간 뒤였다. 혼자 남아 창 밖으로 언뜻 보이는 헤이시아 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저 고양이가 침대 위로 폴짝 올라왔다. 청소를 하는 히나를 몇 번 따라다니더니 플란츠의 방을, 그것도 침대를 제 영역으로 삼은 것이다. “애오옹!” 처음 봤을 때는 손바닥만하던 것이, 벌써 한 배 반은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방문 아래 난 틈으로 참 자유롭게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닫힌 문의 틈이 그렇게나 컸다는 것을, 고양이를 보고서야 알았다.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목걸이에 써둔 글자를 쳐다보던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방문을 잠시 쳐다봤다. 곧 노크소리가 들리겠거니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 똑똑. 아니나 다를까, 오래지 않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혼수상태’인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고, 곧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히나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로 플란츠를 향해 수화를 했다.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청소를 하겠습니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등등. 플란츠는 몇가지 수화를 배우게 되었다. 매번 수첩에 적어 보여주는 것이 신경쓰여서 그냥 배웠다. 아무튼 히나의 말은 고양이가 또 들어왔으니 하는 사과였고, 플란츠는 짧게 대답했다. “둬.” 발치에 고양이 한 마리 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 감사합니다, 좋은, 왕자님. 플란츠는 감사하다는 말만 알아들었고, 히나는 웃었다. 언제나처럼, 마음에 가득 찬 그림자는 전부 지워내주는 그런 웃음이었다. 어느새 플란츠는 헤이시아 궁을 보던 것도 잊고 발치의 고양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 * * 시간은 다시 흘렀다. 빌헬름 관에서 벌어진 일을 지우려는 것처럼, 발칸은 같은 자리에서 더 성대한 창단식을 치뤄냈다. 플란츠는 잘 회복해나가고 있었다. 사고가 있던 빌헬름 관에 칼리안과 함께 입장함으로서, 자신이 건재함과 함께 두 왕자가 완전히 손을 잡았음을 알렸다. 그리하여 란델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새로 맞췄던 화려한 옷을 대신해 평소 입던 차림을 한 앨런 마나실은, 최근에 주인을 잃은 라트란 영지를 하사받으며 백작위에 봉해졌다. 때문에 그 곳은 이제 마나실 영지가 되어야 했으나, 그런 것은 딱 질색인 앨런은 영지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아르센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그것이 발칸의 부군단장에 정식으로 위임된 감격 때문일지, 다시 시작된 야근으로 인한 피로 때문일지는 아르센과 앨런만 알았다. 반 브리센 세력의 기사들을 이끌게 된 아이즌 에이프린은, 기사 양성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와 뜻을 함께 하기로 한 열 개의 기사 가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브리센 후작가는 잠시 대문을 닫았다. 에반은, 사고가 있던 그 날 칼리안의 오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음을 생각하며 수련에 임했다. 물론 그것은 칼리안이 마법으로 지워냈기 때문이었으나, 에반은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발칸의 창단식을 마친 이후, 르메인은 카이리스에 여섯 번째 검이 탄생했음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사람들은, 시스파니안을 닮은 3왕자가 검의 길에 올랐음에 환호했다. - 카이리스에 세렌티의 영광 있으라! 그리고 겨울이 왔고, 지나갔다. 고요한 세뉴 강을 꽁꽁 얼려두었던 얼음이 녹자, 봄의 시작을 알리는 프레디아 꽃의 향기가 온 사방에 퍼져나갔다. 그렇게 르니에리 향기는 지워지고, 새로운 봄이 왔다. 브리센 후작가의 대문이 다시 열렸다. < 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1) > - 쌔애액! 삽시간에 만들어진 얼음창이 쏘아져 나갔다. 아르센과 상대의 거리는 불과 세 걸음 남짓. 때문에, 아르센의 얼음창은 생성과 동시에 상대방의 가슴팍에 도달했다. - 카앙! 하지만 상대는, 그것을 막아냈다.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내리쳐진 얼음이 산산히 부서졌다. 눈으로 보고 움직이면 죽는다. 소리를 듣고 움직이면, 반드시 죽는다. 그것이 아르센의 얼음이었다. 그만큼 빨랐다. 그럼에도 상대는 그 얼음의 첨예한 끝이 몸에 닿기 전에 쳐내거나, 혹은 회피하고 있었다. 아르센은 이제 몇 번째 공격이 막힌 것인지 세는 것도 포기했다. 어디에서 어느 방향으로 얼음창을 날려도 죄다 막혀버리고 있었던 탓이다. 그들의 주변을 멀찍이 둘러싼 이들의 시선이 땅에 떨어진 얼음 조각에 가 닿았을 무렵, 아르센의 손을 따라 연달아 세 번의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 쌔액! 쌔애액! 쌕! 심장과 뒷목, 그리고 정수리를 노린 세 개의 얼음창이 동시에 공기를 갈랐다. 달라진 공격 패턴에, 상대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검을 쥔 그의 몸이 잔상을 남기며 빠르게 움직였다. - 카아앙! 타당! 심장으로 날아오던 얼음을 손쉽게 날려버린 그가 곧바로 몸을 비틀듯 돌아서며 검을 뻗고, 회수했다. 뻗어나간 검에 머리 위로 떨어지던 얼음이, 회수되어 돌아오는 검에는 뒤에서 날아오던 얼음이 가로막혔다. - 투둑, 투두둑! 바닥에 떨어진 얼음들은 어김없이 조각조각 흩어졌다. 단순히 쳐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얼음에 그만큼의 충격을 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르센은 멈추지 않고 공격했다. - 쌔액! - 카아앙! 사납게 달려든 얼음창이 또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아르센이 약한 것이 아니었다. 상대가 강했다. 이 얼음창 한 번에 브리센의 기사들이 한 명씩 죽어나갔던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아르센을 상대하고 있는 이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얼추 가늠이 되리라. - 쉬이이익! 아르센의 손 끝에서 얼음 줄기가 쏟아져 나갔다. 바늘같이 가늘고 날카롭게 응집된 얼음이, 언뜻 보기에도 십수 개는 넘는다. 그 수를 확인한 상대의 손에서 검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기 보다는 순식간에 형태를 바꾸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날카로운 예기를 발하던 검은 어느새 둥글고 넓적한 방패가 되어 있었으니까. - 타다다다당! 새롭게 만들어 낸 방패로 공격을 막은 상대가 땅을 박찼다. 공격을 막기만 하던 그가 당장 코 앞까지 달려드는 것을 본 아르센이 지체없이 마력을 운용했다. 시동어 없이 사라진 그의 모습이 상대의 뒤에서 나타났다. 목표가 사라졌으나 상대는 당황하지 않았다.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등 뒤를 향해 방패를 휘둘렀다. - 부웅! 순간 낭패한 얼굴이 된 아르센의 몸이 다시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곳의 허공을 가르게 된 방패가 금세 검의 형상을 취했다. 다만 이번에는, 장검이 아닌 단검이다. 동시에, 아르센이 상대방으로부터 조금 먼 곳에서 나타났다. - 쉬이익! 그 생각과 움직임을 이미 읽었다는 듯, 아르센이 나타난 곳으로 상대방의 단검이 날아왔다. “이크!” 깜짝 놀란 아르센이 재빨리 실드를 발현했다. 그렇게 몸을 보호하며 다시 텔레포트를 하려던 그 때, - 카가각! 불길한 소리와 함께, 날아온 단검이 실드를 관통했다. 브리센의 기사들이 몇 차례나 공격하고도 멀쩡했던 실드가, 단검 하나에 뚫려버린 것이다. 잠시 희게 빛나던 실드가 허무하게 사라졌다. 곧 유리 조각 같은 칼날이 그대로 아르센의 목으로 짓쳐들었다. 아르센이 자신의 실드가 파괴된 것을 인지하고 아주 잠시 멈칫한 사이의 일이었다. 지켜보던 모두가 위험을 느낀 그때. 당장이라도 목을 뚫어낼 기세를 보이던 단검이 마치 누가 붙들기라도 한 것처럼 우뚝 멈췄다. 그리고는 공기중에 흩어지는 듯한 모양새로 형태를 잃고 사라졌다. 아르센의 목에 작은 상처를 낸 뒤였다. - 꿀꺽. 피부가 살짝 따끔거리는 것을 느낀 아르센이 마른 침을 삼켰다. 만약 단검이 멈추고 사라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르센의 목에는 딱 단검만한 구멍이 났을 것이다. 그러니 아르센의 패배였다. 아르센은 양 손을 들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졌습니다, 왕자님.” 오랜만에 불쑥 찾아와 아르센과 대련을 했던 상대,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습니다, 헤르츠 경.” 그 말에, 숨도 쉬지 못하고 둘의 대련을 지켜보던 하얀 로브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모두의 입에서 환호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우와아아!” “멋집니다!” 아무리 오러를 쓰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소드마스터가 아닌가? 그런 칼리안과 아르센이 공방을 주고 받는 것을 눈 앞에서 보았으니, 꽤 괜찮은 눈요기가 되었을 터였다. 훈련장을 뒤흔드는 함성 소리에 잠깐 웃은 칼리안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르센에게 건넸다. 한 방울씩 흘러내리는 피 때문이었다. “놀랐습니다. 이제 시동어 없이 텔레포트도 하는 겁니까.”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레이스 경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동 마법의 대가인 레이첼 그레이스에게 공을 돌리는, 겸손한 대답이었다. 곧 둘은 나란히 서서 훈련장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칼리안이 아르센을 보며 물었다. “헌데, 굳이 검을 든 이에게 근접하여 공격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도 그랬지만, 베른의 마지막을 기억해보아도 그랬다. 아르센은 코앞까지 다가와 베른의 검을 막고, 파괴했다. 아르센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상대방과 떨어져 있으면 싸우는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칼리안이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아르센을 쳐다봤다. 아무리 텔레포트가 있다지만, 마법사들은 검을 든 이들보다 몸이 느릴 수 밖에 없다. 방금 전 아르센 역시 실드가 깨진 뒤 이렇다 할 행동을 못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인 공격 전문 마법사는 검사와 코앞에서 공방을 주고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방금 죽을 뻔 했으면서.” 때문에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자, 아르센이 씩 웃었다. 그저 재밌다는 이유로 위험을 무릅쓰고 사는 아르센을 보며, 칼리안은 더 참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베른도 잡아낸 아르센이었다. 물론 팔도 하나 없었고, 사흘을 넘게 잠을 자지 못해 집중력도 개똥이었던데다, 몸에는 화살이 열댓개 쯤 박혀있었고, 출혈도 많아서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아무튼 소드마스터를 이겼던 마법사니까. 뭐, 알아서 잘 하겠지. “다른 대원들에게 그리 하라 가르치지는 마세요.” “물론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정중하게 대답한 아르센이 목덜미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런데 왕자님께서 검을 집어던지실 때에는 많이 놀라긴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거리를 두고 싸울 의미도 없겠습니다. 마력의 검을 손에서 떼낸 뒤에도 유지하시게 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진심어린 감탄의 말이었다. 칼리안은 아직 멀었다는 듯 대답했다. “잠깐 던질 정도로는 유지할 수 있는데,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그리고는 굉장히 무심한 말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한 번 던지면 컨트롤도 못하고 회수도 안 되서.” “······ 네?” 잠깐만요. 컨트롤도 안되고 회수도 안된다뇨. 우뚝 발을 멈춘 아르센이 묘한 얼굴이 되어 다시 물었다. “그것을 알면서 던지신 것은 뭡니까.” 칼리안이 웃었다. “경의 실력에 대한 믿음.” 믿음 같은 소리 한다! 그냥 운이 좋아서 목 앞에서 사라졌다는 소리지 않나! 아르센이 굉장히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했다. 이런 아르센의 마음을 알 리 없을 마법사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이제 50여 명으로 늘어난 발칸의 대원들이었다. 자칫했으면 방금 전에 꽃잎 타고 세뉴 강을 건너갈 뻔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르센이, 혼잣말을 하듯 칼리안을 욕했다. 오랜만에 눈호강을 하게 된 마법사들이 신나게 떠드는 통에, 아르센이 내뱉은 욕은 아마 칼리안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터였다. 키리에가 다 들었다. * * * 곧 아르센은, 훈련장 안으로 마법사들을 불러들인 뒤 방금 전 오간 공방에서 배울 점들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훈련장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혼잣말은 아니었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플란츠를 향한 질문이었다. 세상사에 관심 없다는 눈으로 앉아 있던 플란츠가 물었다. “뭐가.” 칼리안이 굳이 이 좋은 봄날에 밖에 나와 아르센과 한 판을 벌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플란츠 때문이다. 물론 플란츠와 사이좋게 소풍이나 온 것도 아니었다. 마법사단 발칸. 단순히 마법사들을 바글바글 모아놓고 불덩이만 내쏘는 집단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악마라는 악명까지 붙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거 발칸은 르메인이 창단했지만 플란츠가 썼다. 그러니, 누가 저들을 ‘악마’로 만들었겠는가? “저 마법사들, 훈련시켜 볼 생각 없습니까.” 바로 플란츠였다. 나라 운영은 전부 다 실리케에게 맡겨두고, 발칸의 육성에만 몰두했었다는 것을 칼리안은 안다. 물론 플란츠는 아직 어리다. 과거와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플란츠가 그 나이의 일반적인 소년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도, 칼리안은 안다. “또 짖네.” 검이나 좀 휘두르던 플란츠에게 갑자기 마법사들을 훈련시키라 하니, 플란츠의 입에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말이 나왔다. 어차피 하루 한 번은 듣는 말이니, 칼리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검을 가르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군사훈련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칼리안은 욕심이 생겼다. 어차피 놀고 있는 원 주인이 바로 옆에 있는데, 뭐하러 다른 이에게 일을 맡기겠느냐는 생각이 든 것이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플란츠가 실소하며 말했다. “아우님도 잘 하실 수 있는 일에 굳이 왜 나를 불러내는지 모르겠는데.” 그 말에 칼리안이 마주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아는 건 이 나라 것이 아니라서요. 들킵니다.” 그렇다. 이제는 플란츠도 칼리안의 비밀을 적당히 알고 있었다. 칼리안은, 르메인에게 했던 이야기를 플란츠에게도 똑같이 했다. 물론 왕제이자 기사였던 베른이 카이리스의 전략전술을 어찌 모르겠냐만은. 발칸의 일에 직접 관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저는 안 그래도 가진 것이 많아서, 발칸까지 제가 관리하게 되면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길 겁니다.” 발칸의 힘이 우습지 않다는 것을 이제 브리센과 란델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때문에 발칸은 아직 칼리안의 것이 되어서는 안됐다. 브리센 혹은 란델이 혼자 남을 때까지는, 힘의 균형을 유지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플란츠가 발칸과 관여되어야 할 큰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칼리안이 진지한 얼굴로 플란츠를 향해 말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제 그늘에 있으면, 형님 죽습니다.” 브리센 후작가의 대문이 열렸다. 에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리였다. “형님과 제가 손을 잡았고, 그런데 형님은 제대로 된 세력이 없지 않습니까. 분명 제일 먼저 형님부터 없애려 들 겁니다.” 그러니까 시키는대로 하라고, 칼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플란츠가 말 없이 훈련장을 바라봤다. 고민하는 중인 듯 했으므로, 칼리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런 그들의 뒤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 왕자님.” 칼리안이 고개를 돌리니, 얀이 서 있었다. 정말 전하기 싫지만 전해야 할 말이 있다는 그런 표정을 한 채였다. 칼리안은 무슨 일인지 묻는 얼굴이 되었고, 얀이 대답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이 지금 만나뵙기를 청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 꿍꿍이를 알 만 했으므로, 칼리안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내 오러가 보이는지, 그걸 확인하러 오셨나.” 재밌는 일이다. 에반은 지금 칼리안보다 자신이 약하다 여기고 있을 테니까. 그동안 칼리안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으므로, 칼리안은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플란츠를 보며 입을 열었다. “보십시오. 바로 티를 내지 않습니까.” 얀은 분명 칼리안이 플란츠와 함께 이 곳에 있음을 알렸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칼리안을 지목해 만나기를 청했다는 것은, 에반의 시선에 더 이상 플란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발칸, 한번 맡아보시죠.”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 눈에 긍정의 뜻이 나타났음을 알아본 칼리안은,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훈련장 밖으로 나갔다. 발톱 숨킨 살쾡이가 얼마나 컸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 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2) > 칼리안이 조금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걸 왜 지금 말해.” 키리에는 세뉴 관을 둘러싼 산책로를 지날 때가 되어서야 아르센이 욕했다는 말을 전해줬다. 때문에 이렇게 묻는 칼리안에게, 키리에가 조용하지만 명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헤르츠 경은 능력있는 자입니다, 왕자님.” 저 대답을 칼리안의 질문과 연결해서 이해해본다면, 칼리안이 아까운 인재 한 명을 정말 세뉴 강 건너편으로 보내버릴까봐 그 자리에서 일러바치지 못했다는 소리 정도가 될 것이다. 칼리안으로서는 억울할 일이었다. 집어 던진 검을 회수하지 못할 뿐이지, 언제 사라지는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어련히 알아서 던졌을까.” 실드를 맹신하는 듯한 아르센에게 적절한 경각심을 줄 만큼의 거리를 정확히 확인하고 공격했던 칼리안이 이렇게 툴툴거렸다. 그런데 그때,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걷고 있던 얀이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참. 오늘 란델 왕자님의 일정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시간이 좀 애매해서, 오고 가는 길에 두 분이 마주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의 발이 잠시 멈추었다. 칼리안이 볼을 긁적이며 얀을 향해 말했다. “넌 또 왜 그걸 지금 말해.” 그러자 얀은, 미안하기는 하지만 나도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뭐냐는 눈으로 쳐다보니, 얀은 참으로 얀 같은 대답을 당당하게 내어 놓았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있었어야죠. 헤르츠 경과 그렇게 험하게 훈련을 하시는 것을 보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그러다 진짜 다치시면 어떡하시려고요.” 칼리안이 진짜로 다치는 것은 둘째치고 칼리안이 진짜로 아르센을 죽여버리는 게 아닌지를 걱정해야 할 판에 이런 말을 한다. 정말,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아무튼 놀라서 잊었다 하는데 다른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일단 알겠어. 마주치지만 않으면 되지.” 결국 칼리안은 키리에에게도 얀에게도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만 대답했다. ‘란델.’ 실리케가 그렇게 된 이후 란델은 조찬에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플란츠가 다쳤던 그 자리에서 제 속내가 드러났다는 것과 칼리안이 플란츠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굉장히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때문에 체르밀 궁에서는 우연히도 마주치지 않았다. 평소 란델이 밖에 나올 일이라 해봐야 장미 정원에 가는 것 뿐이었으니, 그냥 칼리안이 피했다. 다른 행사에 함께 나간 자리에서는 한 마디 말도 섞지 않았었다. 본인이 불편하다는데 굳이 가까이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 날 그냥 그렇게 가버리신 것에 대해서 정작 플란츠 왕자님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란델 왕자님이 왜 그러시는지.” 그리하여 칼리안의 앞에서는 특별히 다른 왕자들의 험담을 하지 않는 얀이 이런 말을 할 정도였다. “세상만사 귀찮으신 플란츠 형님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거야.” 칼리안이 그렇게 대답하며 에반이 기다리고 있을 세뉴 관으로 들어섰다. * * *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은 대륙의 세 번째 검이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은 그보다 먼저 검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니,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시기에 소드마스터가 된 에반이 눈을 치켜떴다. 지금 막 들어서는 칼리안을 본 뒤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에반은 대문까지 닫고 겨울 내내 수련만 했다. 이쯤 했으면 됐겠지 싶어 문을 열고 나온 터였다. 그런데, 오러의 힘이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검의 길에 오른지 아직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애송이인데, 겉보기로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년일 뿐이었다. 슬레이만의 말마따나 칼 근처에도 못 가본 얌전한 왕자 꼴이었으니까. 단단히 각오하고 왔음에도,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도록 막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에반의 속내는 모조리 칼리안에게 까발려지고 있었다. 의도했던 상황이었으므로, 칼리안은 우스워하지 않고 조용히 에반의 앞 쪽으로 걸어와 섰다. 에반은 그 때까지도 생각에 깊이 잠겨 있었다. 때문에 칼리안의 뒤에 서 있던 얀이 입을 열었다. “브리센 후작. 일어나십시오.” 집안 내력임이 틀림 없다. 먼저 예의를 차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엎드려 절 받는 식으로 에반의 인사를 상대한 칼리안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에반이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내 형님이 아니라 나를 만나고자 청했습니까.” 칼리안과 에반은 지금 처음 만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일전에 실리케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아르센을 매개로 접점을 한번 가졌었다. 때문에 에반은, 그 일을 빌미로 칼리안과 브리센이 손을 잡는 것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왕궁을 찾아온 상태였다. 그런데 칼리안은 시간이 아깝다는 티를 풀풀 풍겨대고 있었다. 차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꺼내든 그 말에, 에반의 눈썹이 꿈틀했다. 다만 앞에 있는 이는 앨런처럼 멋대로 성질을 부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때문에 에반은 떨떠름한 얼굴을 지우며 말했다. “검의 길에 오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왕자님.” “고맙습니다.” 칼리안이 짧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에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칼리안 역시 여전히 에반의 오러를 느끼지 못해서 그리 보는 것이었으나, 에반이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그저 다음 말을 빨리 꺼내고 헤어지자는 종용의 뜻으로 밖에는 받아들여지질 않았다. 그러니, 괜히 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에반은 꺼내봐야 손해일 것이 분명한 ‘칼리안과 브리센의 동맹’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고 그럴싸한 방문 사유를 입 밖에 냈다. “사실은 플란츠 왕자님께서 잘 지내고 계신지를 확인하고 싶어 왔습니다. 아무래도 저를 직접 보는 것은 꺼려하실 듯 해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짧은 웃음 소리를 냈다. 대놓고 비웃음을 보인 것이다. 그것을 본 에반의 눈썹이 다시 꿈틀했고, 칼리안이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계절 얼었다 녹은 강물 소리는, 제 귀에도 들립니다.” 세뉴 강이 얼었다 녹을 만큼 시간이 지난 뒤에야 플란츠의 안부를 묻느냐는 질책이기도 했고, 에반의 꿍꿍이 가득한 행보를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어찌됐건 그 속내를 다 들킨 것은 분명했으니, 에반의 얼굴이 한 겨울의 세뉴 강처럼 꽁꽁 얼었다. * * * 같은 시간. 새로 추가 된 20명의 발칸 대원에 대한 평가 결과 보고를 위해 르메인을 찾은 앨런이, 편지 한 장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이것이 왕궁에서 나와서 라트란을 들렀다가 다시 왕궁으로 왔더군요. 아무래도 사람이 남아나는 모양입니다.” 앨런에게 줄 편지가 굳이 라트란 백작령을 거쳐 다시 왕궁으로 돌아온 뒤에야 받게 되어 하는 말이었다. 앨런이 건네준 보고서를 보고 있던 르메인이 고개를 들어 편지를 보았다. 그리고는 카이리스에서 일을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려주는 것보다는 조금 더 나을 대답을 했다. “발송이 다 끝난 모양이군. 백작에게까지 도착한 것을 보니.” 새로운 호칭이 이제 조금 익숙해진 앨런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편지를 다시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지나가는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것은 초대장이었다. 금박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편지에는, 르메인의 서른 아홉 번째 탄신 기념일 축제에 초대한다는 내용이 온갖 미사여구와 함께 적혀 있었다. 르메인의 생일은 5월이었다. 때문에 세크리티아와 리베른, 텐실에 보내는 초대장은 새해 초에 이미 발송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먼 곳에 거주하는 카이리스의 귀족들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이리시스 인근에 머무는 귀족들에게 보내졌다. 그러니, 앨런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발송된 초대장을 받은 것이라 보아도 될 터였다. “이번에는 작년처럼 버리지는 말도록.” 카이리스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괜한 트집을 잡으려 들었던 일을 꼬집는 말에, 앨런의 입가에 웃음이 들었다. 새 초대장 달라는 앨런을 스승님으로 삼아버렸던 칼리안의 당돌한 모습이 생각난 까닭이다. “걱정 마시지요. 제가 받은 초대장은 시스파니안이 와서 버리라고 해도 못 버립니다.” 그렇게 말한 앨런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상자에서 초콜릿 하나를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그러자 낯설면서 친숙한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리베른의 것입니까?” 귤 잼이 들어간 초콜릿이었기 때문에 꺼낸 질문이었다. 카이리시스에서는 귤을 접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으니까. 르메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세크리티아.” 그러더니 초콜릿 상자를 앨런 쪽으로 밀었다. 앨런이 단 것을 좋아하니, 전부 다 가져다 먹으라는 뜻이었다. “새로 봉해진 남작이 보내왔는데 손이 잘 가질 않는군.” 그 말을 들은 앨런이 르메인에게 보이지 않을 묘한 미소를 지었다. 세크리티아의 귤이라니. 앨런보다 몇 배는 좋아할 사람이 딱 한 명 있지 않은가. 르메인이야 칼리안이 세크리티아 기사의 기억만 가지게 된 것으로 알고 있으니 떠올리지 못했겠지만, 앨런은 아니었다. 때문에 앨런은 더 먹지 않고 그의 어여쁜 제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줄 요량으로 상자를 집어들며 물었다. “혹시 세크리티아에서는 누가 오는지 회신이 있었습니까?” “아직. 답이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지.” 칼리안에게 있어 귤만큼 반가운 사람이 오게 될런지. 퍽 기대되는 눈을 한 앨런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 * 꺼려하던 이를 마주치는 것만큼 곤욕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에반과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체르밀로 돌아오는 길에, 결국은 란델을 마주치고 말았다. 체르밀로 들어가는 세 개의 계단을 사이에 두고, 칼리안이 계단 위에 선 란델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란델 형님을 뵙습니다.” 예전 같았다면 ‘그래’ 라는 말과 함께 지나갔을 란델은, 발을 멈추고 칼리안을 내려다봤다. 플란츠였다면 인사는 건넸고 할 말은 없으니 먼저 가겠다며 자리를 떴을 것이다. 하지만 차마 그런 것을 따라할 수는 없던 칼리안은, 속을 알 수 없을 이 첫째 왕자가 빨리 자신에게서 관심을 접고 가던 길을 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날, 네게 응하지 않아서 미안하구나.”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란델은 여전히 계단 위에 선 채로 이런 말을 건네왔다. 그날 플란츠를 살리겠다며 나서지 못해 미안하다는 소리였다. 란델은 자신이 신관이라는 사실을 칼리안이 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플란츠가 피를 쏟아내던 그 상황에서 치유사를 찾다 말고 란델을 불렀으니, 눈치를 못 채면 그야말로 얀이다. 그리고 칼리안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한 것과는 무관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결례인데.’ 같은 서열의 왕자를 계단 위에 선 채로 내려다본다는 것은, 아무리 란델이 장자라 하더라도 칼리안에게 취해서는 안될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은 입으로는 사과를 말하면서도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첫째 형을 슬쩍 올려다봤다. 란델은 여전한 얼굴과 표정으로 칼리안을 보고 있었다. 푸른 눈이 여전히 깊고 어둡다. 그리하여 마치 푸른 짐승의 아가리 속에 고개를 처넣는 기분이 든 칼리안이, 웃었다. 지금 란델은 고작 세 칸짜리 계단으로 다시 한번 제 속내를 드러낸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칼리안이 아래 선 채로 란델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계속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 뒤 칼리안은 천천히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조용한 체르밀 궁에 계단 밟는 소리와 칼리안의 목소리가 함께 울렸다. “그 장미, 무슨 뜻이었는지.” - 타박, 타박, 오래도록 피어 있었다던 그 작은 장미. 도무지 왜 그 곳에 그렇게 꺼내두었는지 알 수 없던 그것. 말라 비틀어지고 시들어있지 말고, 보기 좋게 제대로 피어 있으라는 뜻이었다. 대신, 란델의 발 밑에서. - 타박. 능력있고 말 잘 듣는 착한 동생은 베른이 이미 한 번 했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간 칼리안이 같은 높이에 있는 란델의 눈을 쳐다봤다.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가 칼리안의 입에서 나왔다. “싫습니다.” 그러니 칼리안은, 안 할 거다. < 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3) > “아주 자알 하셨습니다.” 혼났다. 한 겨울 잘 보내고는 반 나절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에반 브리센 후작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란델과는 완벽하게 척을 졌다. 그것도 꽤 성질을 부려가며 그리 만들어놨다. 그랬으니, 앨런의 그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하시는 김에 둘 다 불러다놓고 서로 통성명이나 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이 참에 둘이 잘 지내봐라 했으면 딱 좋았겠습니다.” 에반의 검술 실력까지 칼리안보다 좋을지는 알 수 없지만, 오러를 쌓아 온 시간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쉽지는 않았음을 다시 확인했다. 결국 앨런에게도 더는 숨기지 않고 이 내용을 알렸다. 게다가 란델이 칼리안을 동등한 관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도 명확히 알게 되었다. 간혹 도와주기도 하고 말을 받아주기도 했던 그 모든 행동들이, 칼리안이 ‘그럭저럭 쓸 만한 도구’로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문에 거부했고, 이것도 앨런에게 말했다. 그래서 혼났다. 아니, 혼나고 있었다. “후작 쪽이야, 그간 쌓인 것이 많으셨겠지요. 저도 압니다. 그래도 아직은 브리센이 꼬리를 말고 있으니, 오러 차이가 나든 말든 한번 쯤 화내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앨런은 속이 답답해 안되겠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테라스 문이 활짝 열리며 찬 바람이 훅 들어왔다. 좀 살겠다는 표정이 된 앨런의 시선이 다시 칼리안에게로 닿았다. “브리센은 그렇다 치더라도. 란델의 속 알맹이가 하루 이틀 의뭉스러운 것도 아니었는데, 그걸 굳이 들쑤셔서 불씨를 만드십니까. 왕자님 답지 않은 행동입니다.” 칼리안답지 않게 왜 그리 날을 세우고 왔느냐는 소리였다. 평소였다면,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할 때까지 적절히 몸을 사렸을 테니까 말이다. 충분히 귀 기울이며 앨런의 말을 다 들은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초콜릿 맛있네요.” 신나게 얘기했더니 이러고 있다. 이런 어여쁜 제자가 또 어디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든 앨런에게서 피어가 조금 새나왔다. 태연한 얼굴로 스승이 흘린 공포감을 떨쳐 낸 칼리안은, 초콜릿 안의 귤 향을 한껏 느끼며 조금 전 란델과의 일을 떠올렸다. 사실 그때 란델의 입장에서라면 칼리안의 행동이 상당히 어처구니 없을 수 있었다. 지난 일에 대한 미안함을 전했더니, 장미를 운운하고는 ‘싫다’고 대답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이런 맥락 없는 대화가 또 어디 있을까. ‘아쉬운 일이구나.’ 그런데 란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행위에 대한 담백한 감상이면서, 또 한 편으로는 칼리안의 생각이 맞다고 인정한 것이기도 했다. “아무튼. 제가 생각 없이 날을 세우고 온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회상을 마치고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설명을 기다리는 앨런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플란츠 형님과 한 배를 탔으니까요. 형님이 실리케의 비밀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고 있는 비밀이 있으면 그걸 저에게 말했는지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를 테고. 그러니 불안할 것 아닙니까.” 전 왕비 아이샤에 대한 소리였다. 범인인 실리케는 이미 죽었으나, 에반이 그 일에 관여하지 않았을 리 없다. 하다못해 독이라도 구해다 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칼리안이 이미 그 사실을 실리케로부터 들었으리라고는 생각 못 할 것이다. 다만, 플란츠가 그 일을 알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심은 할 터였다. 그러니, 란델과 손을 잡을 생각을 하더라도 우선은 플란츠를 떠올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혹시 플란츠가 아이샤에 대한 일을 알고 있는가. 안다면 그것을 칼리안에게 전했는가.’ 라고. “제가 입 한번 잘못 놀리면 텐실 왕가에서 브리센을 노릴테니, 예전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섣불리 란델 형님에게 손 내밀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란델 형님은, 제가 브리센과 등진 것을 확신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안할 테고요.” 그런 이유로 마음 놓고 성질을 한 번 부려 본 칼리안이 초콜릿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었다.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어느새 앨런은, 다시 어여쁜 제자를 보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 * * 잠결에 손을 뻗으니, 희고 보드라운 것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부드럽게 뭉클거리는 느낌이 나쁘지 않아서 잠시 가만히 있던 플란츠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기분만 좋고 넘어갈 일이 아님을 깨닫고는 몸을 확 일으켰다. 언뜻 보면 쿠션 같기도 한, 둥글납작한 것이 플란츠의 옆에서 단잠에 빠져 있었다. 당연히, 칼리안의 고양이였다. “또 왔네.” 정작 칼리안의 방에는 제 발로 간 적 없다는 이 놈의 고양이는, 여전히 틈이 날 때마다 찾아왔다.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있는 놈 덕에 잠이 확 깬 플란츠는, 더 잘 생각도 들지 않아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한번 움직임을 멈췄다. 침실 커튼 너머, 소파 위에 고양이 주인이 앉아있는 것을 본 탓이다. 이렇게 올 일은 더 없을 것이라 해놓고, 칼리안이 또 왔다. 두 번은 못하겠다던 앨런이 한번 더 수고를 해주고 간 덕분이었다. “어떻게 깨워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다행이네요.” 꽤 깊이 잠이 들었던 탓이었는지, 아니면 칼리안이 조금 더 조용히 움직일 수 있게 된 까닭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이번에는 고양이와 고양이 주인이 들어온 것을 전부 다 눈치채지 못한 플란츠가 물었다. “뭐야.” 칼리안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아침부터 어딜 좀 가야해서, 조찬에 못 갑니다.” 조찬에 못 간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전할 말이 있지만 조찬에 올 수가 없어서 찾아왔다는 소리였다. 플란츠는 대답 없이 칼리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근시일 내에 브리센 후작이 형님을 찾을 겁니다. 빠르면 오늘일 수도 있고요.” “······ 그래.” “상대하기 불편하시겠습니까?” 실리케의 일에 에반이 꽤 크게 관여를 했기 때문에, 플란츠가 에반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칼리안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묻는 말이었다. 사실 에반과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지내기에는 썩 보들보들한 사이가 아닌 것은 맞았다. 하지만 얼굴 보는 것이 꺼려질 만큼도 아니었다. 따라서 플란츠는 별 것 아니라는 말투로 대답했다. “상관 없다.” 커튼 때문에 플란츠는 칼리안의 얼굴을 볼 수 있지만 칼리안은 플란츠의 표정을 살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저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는 어려웠으나, 칼리안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플란츠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잘 대접해서 보내면 되나.” 칼리안이 에반에게 얼마나 큰 무안을 주고 되돌려 보냈는지는 플란츠도 알았다. 그러니 에반이 그 다음으로 란델이나 자신을 찾아오리라는 것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처신을 어찌 해야 하나 아직 결론을 못내렸는데, 칼리안이 그 문제를 대신 풀어 준 셈이었다. “적당히 대접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입을 열었다. 끄덕여 봐야, 안 보일 테니까. “알겠으니, 가.” 칼리안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대신 말을 한번 더 골랐다. 조금 꺼내기 어려운 말 하나를 더 전해야 했다. 풀썩, 하고 플란츠가 침대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의 말이 끝날 것 같지 않아서 다시 앉은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드릴 말로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칼리안이 왠일로 이렇게 뜸을 들이자, 플란츠가 잠깐 고개를 돌려 헤이시아 궁 쪽을 쳐다봤다. 또 실리케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브리센 후작이 형님께서 뭔가를 알고 있는지를 떠보려 할 수 있습니다. 미리 알고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알고 계신다는 티도 내시고, 저에게 말했다는 티도 내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주의하라는 듯 말을 이었다. “비밀은 아는데 저한테는 말 안했다는 것처럼 보이면, 형님 죽습니다.”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요즘 죽을 일 참 많아졌다 싶어서였다. 그런 플란츠의 반응과 상관 없이, 칼리안은 진지했다. 칼리안이 플란츠에게까지 닿을 거리로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그리고 조금 더 말을 고른 뒤 꺼내놓았다. “아이샤 전 왕비는 독살됐습니다.” 커튼 너머에서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대답 대신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잘 알아들었다는 뜻일테니, 칼리안은 더 이상의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간단히 고개를 숙여보인 뒤 제 방으로 돌아갔다. * * * 에우리아 세이렌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에서 나왔다. 본래는 폴룬 마법학원으로 가서 교장 에우리아가 되어야 하는 날이었으나, 그 날은 달랐다. 카이리스 마법사 협회 건물로 간 것이다. 마차가 협회 건물 앞에 다다를 때 쯤, 무언가를 발견한 에우리아는 낭패한 듯한 얼굴이 되었다. “아이고.” 이제 카이리시스 사람들이 모두 알아보는, 오른쪽 발목에만 하얀 털이 난 검은 말이 마굿간에 있었기 때문이다. “큰일났네.” 약속 시간보다 30분을 빨리 왔는데, 칼리안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에우리아가 서둘러 마차에서 내린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는 유난히 사람들이 많았다. 클린 마법 하나 쓰기 귀찮아서 머리를 벅벅 긁고 돌아다니던 마법사들이었는데, 오늘따라 다들 멀끔한 차림새들을 하고 있었다. 칼리안이 방문하는 날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에우리아를 본 마법사들이 활기찬 인사를 건네고, 그녀는 그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마법사들 사이를 헤치며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미 차를 반쯤 마신 칼리안이, 이제 막 들어온 에우리아를 보며 웃었다. 딱 봐도 허겁지겁 달려온 티가 난 까닭이다. “내가 일찍 온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마치 엘프 시아와의 대화처럼, 에우리아가 무슨 소리를 할 것인지를 짐작한 칼리안의 대답이 먼저 나왔다. 칼리안에게 인사를 건넨 에우리아가, 곧바로 책상으로 걸어가 편지 한 장을 들고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제 저녁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칼리안에게 건네진 편지는, 바로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기사 세력의 준비가 어느정도 되어 가는지 적혀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아이즌은 이렇게 에우리아를 통해 칼리안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이렇게 보고받은 내용에 대한 지시사항과 지원금을 다시 에우리아를 통해 그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편지를 읽던 칼리안이 잠시 침음을 냈다. 그간 문제 없이 준비가 되어 가고 있다는 내용만 적혀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전염병이라니.” 기사 가문 중 한 곳의 영지에서 전염병이 돌아, 영지민과 기사들 중 열에 한 명이 죽는 피해가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추위가 저물면서 문제가 생긴 듯 했다. “이젠 카이리스에 치유사들도 없으니 많이 어려웠겠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소강을 보이고 있다 하니 다행이네요.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는지 말씀을 드려봐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잠깐 뒤를 봤다. 얀이 다가와 수표 한 장을 내려놓았다. 본래 생각했던 것보다 금액을 더 높게 쓴 칼리안이 그것을 에우리아에게 전하며 말했다. 카이리스의 일이었으므로, 전염병에 대해 생각나는 것이 없던 칼리안의 마음이 썩 가볍지만은 않았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이것 뿐이군요. 폴룬 남작 통해서 필요한 물품을 함께 보내세요. 인근의 다른 영지들도 피해가 있다면, 그 곳들도.” “네, 왕자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곧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런 칼리안을 배웅하려던 에우리아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수표에는, 평소 지급하던 금액보다 ‘0’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영지 복구가 아니라 영지 구매가 가능할 돈을 든 에우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왕자에게 지급되는 용돈이 아니라, 칼리안의 사비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 * * 청년은, 지닌 성격 만큼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에는 얼마 전 카이리스로부터 도착한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기사가 걱정 가득한 눈을 하며 물었다. “정말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위험할 수 있습니다.” 청년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실 경을 좀 만나야 해서. 바쁘다 하니, 내가 가야지.” 청년의 고집을 잘 아는 기사는,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본 청년이 작게 웃었다. 바람이 불었다. 청년의 청은발이 잠시 흔들렸다. < 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4) >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생각할 거리가 있을 때 보이는 두 번째 버릇이다. 다만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손 끝에서 소리가 나지 않게 신경을 썼다. 주변에 꽤 많은 이들이 있었으나 그렇다 하여 소란하지는 않았던 까닭이다. 지금 칼리안이 있는 곳은 중앙 귀족 정기 회의가 진행되는 회의장이었다. 성인식을 치르고 난 뒤 칼리안도 참석하고 있는 자리였다.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은 귀족들 중 가장 젊어 보이는 이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올 초에 있던 큰 비로 텐실의 피해가 크다 합니다.” - 그해 봄, 텐실에 유례없는 수해가 발생했다. - 텐실의 신관들은 세렌티를 경배하는 마음이 부족한 탓이라 했으나, 다른 이들은 그것이 운하 건설을 위해 물길을 막아서 생긴 일이라 했다. 사실 칼리안은, 회의에 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 카이리스에서 이를 돕기 위해 식량을 지원했으나, 텐실에서는 거절했다. 시간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칼리안 혼자만 알고 있는 내용이 언급되면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수해가 생기면 가장 부족한 것은 식량이 아니겠습니까.” - 이 일로 양국의 사이가 한동안 좋지 않았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카이리스에서, 지금 언급되는 ‘식량’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것은 칼리안 뿐이었다. 때문에 고민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양국의 우호 관계 유지를 위해 밀을 지원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음흉한 놈의 입을 틀어 막을지, 떠들도록 그냥 둘지. 카이리스와 텐실은 밀 수확 시기가 달랐다. 수해가 있다 해도, 1월에 마지막 수확이 끝난 텐실의 밀은 각 영지의 저장고에 안전하게 잘 쌓여 있었다. 정작 부족한 것은 따로 있었음에도 넘쳐나는 밀을 지원했으니, 거절하는 쪽이나 거절 당한 쪽이나 서로 기분이 상할 수 밖에. 즉, 이것은 양국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여 란델의 입지를 좁히려 한 브리센의 수작이었다. 칼리안의 기억과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니, 브리센은 아직 란델의 편에 설 생각은 없는 듯 했다. 플란츠를 염두에 두었거나, 칼리안에게 여전히 마음이 있는 것이리라. “결정을 해주시면 담당자를 정하겠습니다.” 아무튼 란델의 입지만 좁아지고 말 일이면 저 입을 그냥 둘 텐데, 칼리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칼리안의 금고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폴룬 상단이 텐실과 다이아몬드 거래를 하고 있지 않은가. ‘나서야 되나, 그냥 둬야 되나.’ 앨런과 키리에, 그리고 멜피르를 제 옆에 둔 것과 마법사단을 만든 것. 칼리안이 아는 정보를 활용해서 벌인 일은 이 정도였다. 이것만으로도 미래가 꽤 많이 바뀌고 있는데, 상단 수익을 위해 양국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일에 직접 간섭을 해도 될지. 고민이 깊어진 칼리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런데 그때, 예상 외의 말이 들려왔다. “필요치 않다.” 르메인이었다. 이어진 르메인의 말은 칼리안이 생각한 것과 거의 같았다. 왜 밀이 필요하지 않은지, 르메인은 이미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칼리안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테이블 위에 작은 곡선을 그렸다. 얼굴에 띄우지 못할 웃음을 테이블에 만들어내는 것이다. 과거의 르메인은 저 의견이 잘못됐음을 알면서도 반박하지 못했던 것임을 안 까닭이다. 그러니 결국은 칼리안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바꾼 셈이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지원을 한다면.” 지금껏 조용히 앉아만 있던 3왕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자, 장내의 모든 이들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칼리안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정답을 말했다. “소금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만.” 지금 텐실은 염전과 소금 저장소가 모두 물에 잠겼을 테니까. 르메인이 칼리안을 보며 살짝 웃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지켜본 에반 브리센 후작이 마뜩치 않은 것이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안되겠군.’ 의도했든 아니든 칼리안이 브리센의 일을 또 방해한 셈이 되었으니 칼리안과 손을 잡는 것은 안되겠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에반은, 란델의 손을 잡기 위해 일단 플란츠를 만나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 * * 중앙 귀족 회의가 끝난 후. 플란츠에게 만남을 청한 에반은 귀족들과 적당히 끝인사를 나눈 뒤 약속 장소로 발을 옮겼다. 다른 이들과 따로 인사를 나눌 필요가 없는 플란츠는 이미 에반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사실 에반이 플란츠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러모로 실리케를 많이 닮았다는 것,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칼리안과 손을 잡았다는 것. 그런 이유로 플란츠와는 절대로 손 잡을 일이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때문에 란델 쪽으로 마음이 기운 상태였다. 그런데 에반은, 세뉴 관의 응접실에 앉아 자신을 쳐다보는 플란츠를 본 직후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구나.’ 플란츠의 얼굴 어디에서도 에반에 대한 악감정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플란츠는 에반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지닐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실리케를 축출해야 한다 마음을 먹은 것이 플란츠 자신이었으니, 그 일에 도움을 주었다 해서 에반을 멀리 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플란츠가 무엇 때문에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는 모를 에반은, 지금 자신을 대하는 플란츠를 보며 한가지 잘못된 가정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플란츠가 실리케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고, 때문에 칼리안과 잠시 손을 잡고 실리케를 몰아낸 것인가.’ 라고. 그리하여 에반은, 이런 생각의 끝에 마음을 살짝 바꿨다. 플란츠가 정말로 자신에 대한 적의가 없다면, 칼리안도 란델도 아닌 플란츠와 손을 잡기로 한 것이다. ‘칼리안보다 이 놈을 먼저 만났어야 했구나.’ 에반은 괜히 칼리안을 먼저 찾아가서 그런 취급이나 받은 것을 잠시 후회했다. 그리고 플란츠에게 걸어가 간단한 예를 보인 뒤 맞은편에 앉아 첫 마디를 건넸다. “그간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플란츠의 앞으로 걸어가는 그 잠시동안 고민을 마친 결과로 나온 소리였다. 에반의 첫 말을 들은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에반이 자신을 ‘써먹기 좋은 호구’로 보았다는 것을 파악했으니까. 똑똑한 플란츠는, 그 때부터 에반을 ‘적당히’ 상대해주기 시작했다. * * * 칼리안은 웃음을 참는 것이 영력한 표정이 되었다. 에반이 플란츠를 들춰보고만 갈 줄 알았다. 아이샤에 대한 비밀을 칼리안이 알고 있다면 계속 칼리안에게 손을 뻗을 것이고, 아닌 것 같아 보인다면 란델에게 가리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다. 실리케로 인해 서로 껄끄러울 것이 분명한 플란츠를 제 편으로 만들 생각은 안하겠지, 라고. 그런데 브리센은, 플란츠를 선택했다. “형님의 좋은 머리에 감사드립니다.” 플란츠는 자신이 왕이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꿍꿍이 모를 란델을 왕으로 세울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에반이 란델에게 가지 못하도록 그 마음을 붙들어놨다. 적당히 자존심을 세워줘 가며 에반과 손을 잡은 것이다. 또 건방진 소리를 하는 칼리안을 향해 피식 웃은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발칸의 일은 내일부터 맡도록 하지.” 그렇게 하면 에반과 손을 잡은 뒤 일부러 발칸의 일을 맡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발칸의 힘까지 브리센의 손에 들어온다 생각할 에반은, 물론 더없이 좋아할 터였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 후에, 형님과 제 사이가 적당히 나빠져야 할텐데요.” “언제는 좋았던 것처럼 들리는데.” 그 말에, 칼리안이 씩 웃었다. “아무튼 며칠 안에 제가 브리센과 사이 나빠질 일을 하나 하겠습니다.” 플란츠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알아서 잘 하리라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칼리안 역시 플란츠가 발칸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다. 알아서 잘 할 테니까. 그저, 미친 왕이라 불렸던 이를 상관으로 맞이하게 될 아르센만 고생길에 오를 뿐. 물론 칼리안이 신경쓸 바는 아니었다. * * * 과거 언젠가 앨런이 키리에를 보며 물은 적이 있었다. ‘자네는 여섯 번째 검이 될 생각인가?’ 이런 뜬금 없는 질문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하루 18시간. 키리에가 칼리안의 수련실에 틀어박혀 검술을 수련하는 시간이다. 칼리안에게 배우든, 칼리안과 대련을 하든, 혹은 홀로 연습을 하든. 키리에는 그 시간을 채우고 나서야 하루를 마무리했다. 칼리안이 시킨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그리 하고 있었다. 그러니, 칼리안이 하나 줄여 놓은 소드마스터의 수를 다시 돌려놓고 싶은지 물어보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검을 쥔 그 누구라도 그것을 바랄테니 괜한 질문을 한 셈이 아닌가, 하고. 그런데 예상 외로 키리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지만 결코 자신 없지 않은 목소리가 대답을 내어놓았다. ‘저는 쓸만한 검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칼리안이 쓸만한 검. 사실 이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이미 칼리안은 그 스스로 강자였으니까. 그러므로, 칼리안이 쓸만한 검이 되려면 검의 길에 오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 분명했다. 키리에도 그런 사실을 알고 이렇게 대답했을 터였다. 눈치 빠른 앨런이지만, 앨런조차 그런 키리에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얀이야 어차피 오래 전부터 칼리안을 모셔왔었고, 아르센은 어쩌다보니 칼리안에게 코가 꿰였다. 물론 앨런은 자신이 무엇때문에 칼리안을 돕는지 잘 알았다. 그리고 칼리안은, 베른으로서의 과거를 알고 있으니 키리에를 아낀다지만 키리에는 그런 과거를 알지 못했다. 그러니 이 과묵한 소년이 대체 칼리안의 무엇을 보고 칼리안에게 제 생을 바치기로 했는지 그것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쓸만한 검이라니. 그것 참 어려운 것을 하겠다고 나서는구나.’ 다만 앨런은 앨런이었으므로, 굳이 키리에의 속마음을 캐묻지 않고 이렇게만 대꾸했었다. “키리에.” 그리고 그 쓸만한 검을, 칼리안이 불렀다. 그 후에는 ‘브리센과 사이가 나빠질 일’ 하나를 지시하며 물었다. “할 수 있겠어?” 언젠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키리에는, 만약 ‘할 수 없다’는 대답을 하더라도 칼리안이 자신을 탓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곧바로 대답했다. “네.” 칼리안은 이번에도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키리에 역시 간단한 인사만 마친 뒤 곧바로 칼리안의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그날 밤. 한 마리의 갈색 말이 왕궁에서 나왔다. 말이 향한 곳은 퍽 이상한 이름의 술집이었다. - 시스파니안의 깊은 술냄새 홀홀단신으로 그 곳에 찾아간 키리에는, 칼리안이 건넸던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묻던 점원이 키리에의 검을 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키리에는 다른 말 없이 손가락을 세워 아랫층을 가리켜보였다. “문만 열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이가 아니었으므로, 점원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달려가 비밀 문이 있는 방을 열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방에 들어선 키리에는, 칼리안이 알려준대로 비밀 통로를 열었다. 그리고 3층을 지나쳐 4층부터 찾아갔다. 욕설과 고함, 환호성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키리에는 손에 쥔 검을 다잡았다. 그리고 오래 전 칼리안이 키리에를 꺼내오기 위해 들어섰던 사무실을 향해 발을 옮겼다. < 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5) > 차 한잔을 내려놓은 시종장 라울이 창문을 열며 말했다. “잠시 쉬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바람이 좋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니 하는 말이었다. 작년 이맘때만 같았어도 그런 말을 절대 듣지 않았을 르메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지.” 그리고는 찻잔을 손에 들고 창가로 가 섰다. 그 모습을 보는 라울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밖으로 나갔다. 어느 날부터인가 더는 강박적으로 일에 몰두하지 않게 된 르메인은, 이제 아르피아 궁이 아닌 카밀리아 궁에서 잠을 잤다. 집무 공간과 거주 공간을 오가는 시간조차 아끼던 습관을 버린 것이다. 르메인 역시 자신이 많이 변했으며, 그 변화에 칼리안과 앨런의 공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시작점이 바로 작년의 국왕 탄신 기념일 축제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작년의 축제에서 벌어진 일이 참으로 많았다. 성대하게 벌어지는 축제인 만큼 매 해 말도 많고 탈도 많기는 했지만, 어디 작년만 했을까. “이번에는 좀 조용하려나 했더니.” 때문에, 올해의 축제는 작년에 비하면 조용히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어찌됐건, 실리케와 관련된 일이 마무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르메인이 책상으로 다시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전서응을 통해 도착한 편지 한 장이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제대로 된 편지로 전달해야 하나, 방문자 선정에 시간이 지체되어 부득이하게 새를 이용한다는 설명이 편지 내용의 8할이었다. 격식에서 어긋난 편지를 받은 르메인이 불편해할까 눈치를 보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편지의 내용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딱 두 줄이었다. 먼저, 누가 오는지에 대한 설명. 그리고 안전을 위해, 그들이 카이리스 왕궁에 도착하기 전까지 방문자 정보를 비밀에 부쳐달라는 부탁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보니, 왜 그렇게 회신이 늦었으며 또 왜 그렇게 눈치를 보는 내용으로 도배를 했는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격에 맞지 않는 편지를 받아 심기가 불편해진 르메인이 방문자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을까 우려한 것이다. 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걱정을 하는지. 르메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곧 다시 창 밖을 보며 혼잣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시끌시끌하겠군.” 그 후 르메인은, 그들의 요청대로 방문자 정보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 마음을 먹었다. * * * 아르센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발칸의 임시 군단장이기도 한 앨런이 그런 아르센을 어르고 달래듯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생각해보게. 저 분을 자네 아랫사람으로 두는 것은 아무래도 안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내가 물러나고 저 분을 군단장으로 두자니, 그도 안 될 일이 아닌가? 그러니 부군단장이 둘이 된 것이라네.” 그 말에, 아르센이 오해하지 말라는 것처럼 곧장 대꾸했다. 그런데 아르센의 얼굴과 말투가 평소와 달리 매우 격양되어 있었다. “제가 지금 부군단장이 한 명 더 늘어나는 게 싫어서 이러겠습니까. 왜 반대하는지, 군단장님께서도 잘 아시면서 이러십니까.” 아무리 혈연 지연이 우선시되는 왕궁이지만, 그래도 칼리안은 능력을 중시하고 공정한 인재 편성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오시는 것이 칼리안 왕자님이셨으면, 제가 당장 제 자리라도 내어드렸을 겁니다. 그런데 아니지 않습니까.” 아르센은 지금 상황이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칼리안의 결정이라 하면 두 말 없이 따르던 아르센이 생각 외로 심하게 반발하자 앨런이 혀를 쯧 찼다. 아르센이 당사자를 코앞에 둔 채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앨런으로서도 상당히 난감했던 것이다. 아르센은 그런 앨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뜬금없이 임시 부군단장에 임명됐다는 2왕자를 보며 뚱한 얼굴로 물었다. “마법사셨습니까?” 마법사도 아닌 놈이 무슨 발칸 부군단장을 하느냔 말이었다. 당연히 그 의미를 잘 알아 들은 플란츠는, 매우 여유있는 자의 얼굴을 한 채 한 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리고 짧게 답했다. “왕자다.” 능력이 왕자다. 특기가 왕자다. 재능이 왕자다. 할 줄 아는 바, 왕자다. 그러니, 그깟 마법사 나부랭이가 아니어도 발칸 부군단장 쯤은 할 수 있지 않겠나. 이런 뜻이다. 재수없다. 세상사 참 더럽고 치사하다. 플란츠가 요 며칠 계속 빌헬름 관을 왔다갔다 하며 발칸 대원들이 훈련을 받는 냥을 지켜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어딘가 계속 뒷맛이 찝찝하더니 결국은 일이 이렇게 됐다. 아르센이 불만을 채 지우지 않은 목소리를 다시 냈다. “왜 플란츠 왕자님께서 발칸의 영역에 손을 대십니까.” 아르센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몰래 욕을 했으면 했지, 앞에서 대놓고 이런 식으로 직언을 했던 적은 없었다. 그만큼 불만이 큰 것이다. 물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플란츠 왕자님께서는 브리센 후작과 같은 길을 가기로 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발칸이 아니라 카렌이나 라온으로 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제 형이라고, 칼리안이 숨긴 것까지 내놓으면서 기껏 살려주고 지켜줘가며 지금까지 목숨줄 연명시켜 놨더니 에반 브리센과 손을 잡았단다. 그러니 아르센의 입에서 고운 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다. 그 말에, 플란츠가 아르센에게서 시선을 떼어 앨런을 쳐다봤다. “마법사들 말버릇은 다 이따위인가.” 그 마법사들에 앨런 본인도 포함된다는 것을 앨런 역시 잘 알았다. 오래 전 플란츠에게 ‘미친 짓’을 운운했던 일 때문에 하는 소리일 터였다. 앨런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발칸의 마법사들은 다 이모양이지요. 제일 윗 줄 입이 이러니 다른 것을 보고 배울 수 있겠습니까.” 앨런의 말에도 가시가 가득했다. “아아.” 그러자,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플란츠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 아우님이 말을 안 했군.” 칼리안은 플란츠에게 많은 신경을 쓰는 듯 하면서도 의외로 그리 섬세하질 못했다. 앨런에게 말하여 발칸의 임시 부군단장 자리를 만들어 플란츠를 넣어주는 것 까지는 해놓고, 플란츠가 에반과 실제로 손을 잡지는 않았다는 중요한 말을 잊은 것이다. 다만 앨런은, 칼리안이 말을 하지는 않았어도 대강의 사정을 눈치는 채고 있었다. 다만 어여쁜 제자가 손해를 보아가며 플란츠를 도왔으니, 그에 대한 앙금을 털어낸 것 뿐이었다. 물론 이런 눈치 면에서는 거의 얀과 비슷한 수준인 아르센은, 그냥 몰랐다. 둘을 잠시 지켜보던 플란츠가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제 무릎을 천천히 두드렸다. 그렇게 참으로 왕자다우면서도 왕자답지 않은 자세를 한 뒤에는 나른한 눈으로 둘을 쳐다봤다. “늙은 마법사는 알면서 저러고. 젊은 마법사는 몰라서 저러고. 아주 가관이군.” 반대로 속을 들킨 앨런이 슬쩍 웃었고, 아르센이 다시 화가 난 얼굴을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플란츠가 앨런과 아르센의 빈정거림을 두고 이들이 왕자를 모욕했다며 처벌을 할 성격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저는 도저히······!” - 끼익. 그리고 또 하나는, 화가 난 아르센이 발칸의 부군단장을 때려치겠다는 말을 하기 직전에 칼리안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셋이 모여 있는 것을 본 칼리안이, 조금 의외라는 표정이 되었다. 다만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듯 플란츠를 보며 말했다. “형님. 제가 이전에 말씀드렸던 일을 지금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일부터 저와 사이 나쁘게 지내주시면 됩니다. 후작이 화를 많이 낼 테니, 잘 달래주세요.” “그래.” 이 대화에, 어딘가 조금 잘못된 것이 있음을 안 아르센의 표정이 묘하게 바뀔 때 쯤. 칼리안의 시선이 이번에는 앨런을 향했다. “그리고 스승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앨런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을 쳐다봤고,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오늘, 스승님 이름을 좀 써야 합니다.” 바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말이었다. 곧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한 칼리안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제야 비로소 ‘플란츠가 에반과 거짓으로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된 아르센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됐다. 그런 것을 알 리 없을 칼리안은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로 말을 마친 뒤 나갔고, 앨런 역시 칼리안이 부탁한 일을 하기 위해 서둘러 사라졌다. 조용한 방에, 이제 플란츠와 아르센만 남았다. * * * 키리에가 큰 숨을 들이쉰 뒤 내뱉었다. 점원은 건드리지 않는다. 손님은 아쉽지만 보낸다. 철창 속 ‘투견’들은 놔준다. 그리고 ‘그들’은, 전부 죽인다. ‘할 수 있겠어?’ ‘네.’ 키리에로서는 당연한 대답이었다. 키리에에게 있어 이 도박장은, 언젠가 반드시 왔어야 할 곳이었다. 그 언젠가가 오늘이 되었을 뿐이었다. 칼리안은 에반의 숨겨진 면을 꺼내 보일 요량으로 이 일을 계획했겠지만, 키리에는 참아 온 복수에 대한 허락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 서걱! 입장료를 받던 사내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사내의 몸이 허물어졌다. 손가락 세개를 펼친 채였다. 사내의 죽음을 시작으로, 키리에의 검이 도박장에 있는 이들의 생과 사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실수도 없었고, 두 번의 검격도 없었다. 마치 아르센의 얼음창처럼, 키리에의 검이 한 번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생명이 떨어졌다. “으아아악!” ‘생’을 허락받은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앞다투어 계단을 올라갔다. 4층의 소란을 느낀 무사들이 더 들이닥치겠지만, 상관 없었다. - 촤악! - 서걱! 그렇게 거침 없이 도박장의 사람들을 베고 찌르며 앞을 향해 가던 키리에가 잠시 발을 멈췄다. 도박장 한 가운데 설치된 철창. 무수한 ‘투견’들이 서로 싸우며 유흥거리를 주었던 바로 그 곳. 그 철창의 그늘에 한 남자가 숨어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매우 잘 아는 이였으므로, 키리에는 주저없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사회자였다. 그가 키리에의 얼굴을 쳐다봤다. 잊기 어려운, 서로 다른 색의 두 눈이 사회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나는 아무 것도 안했어!” 언제나 유쾌한 목소리로 ‘괴물 눈알’을 소개하던 입에서 두려움에 가득 찬 말이 터져 나왔다. ‘이런,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종종 있는 일입니다.’ 손님들 앞에서 키리에의 동료 한 명이 죽었을 때, 사회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문득 그 날이 생각난 키리에가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했습니다.” - 촤아악! 동시에 사회자의 피가 철창 안으로 흩뿌려졌다. 창살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던 키리에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 4층의 소란을 알고 십여 명의 사내들이 더 내려왔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그렇게 이어진 키리에의 복수가 사무실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네 명의 사내가 예리한 검을 든 채 키리에를 막아서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들은 키리에도 아는 이들이었다. 바로, 사무실의 남자를 지키던 네 명의 검사였다. “이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가장 덩치 큰 사내가 이런 말과 함께 검을 뻗자, 나머지 셋의 검도 키리에에게 내리떨어졌다. 그런데, 이제껏 무표정하던 키리에의 얼굴에 작게 웃음이 띄워졌다. ‘느리다.’ 처음 이 곳에 붙들려 왔을 때는 저들이 그리도 무서웠는데. - 카캉! 검을 한 번 떨쳐내는 것으로 그들의 공격을 빗겨낸 키리에가 다시 팔을 움직였다. 한 번의 베기에 두 명의 목에서 피분수가 터졌다. “아악!” 남은 둘 역시 오래 살아있지 못했다. 비명을 지르던 머리가 먼저 떨어졌고, 도망치던 마지막 사내의 머리가 철창 앞까지 굴러갔다. 키리에는 그 머리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지 않은 채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발을 멈칫했다. 사무실 안이 비어 있었다. 칼리안과 키리에의 몸값을 놓고 흥정을 하던 남자는 그 곳에 없었다. 대신 남자가 늘 앉아 있던 곳 뒤편의 거대한 금고가 있었고, 그 안에서 숨 죽인 소리가 들려왔다. 키리에가 잠시 선 채로 검을 쥔 손목을 빙글 빙글 돌렸다. 그 뒤 조용히 걸어가 금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 쉬이익! 기다렸다는 듯 한 자루의 단검이 날아왔다. 키리에가 재빨리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아냈다. - 카앙! 단검은 튕겨나가지도 않았다. 그대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르센의 얼음에 비한다면 우스운 속도다. 칼리안이 던진 단검이었다면 검과 목을 같이 꿰뚫었을 것이다. 따라서 손쉽게 그것을 막은 키리에가 금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남자의 고함 소리가 금고 속을 윙윙 울렸다. “오지 마! 더 오면 죽여버린다!” 독기가 잔뜩 오른 남자가 여자 한 명을 방패 삼은 채 키리에에게 소리를 질렀다. 남자의 손에 들린 나이프가 여자의 목에 닿아 있었다. ‘저 자가 마지막.’ 키리에가 한 걸음을 앞으로 걸었다. 남자의 나이프가 여자의 목에 가는 상처를 냈다. “꺄아아악!” “오지 말라고, 괴물 새끼야!” 키리에의 발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키리에는 여자의 눈과, 남자의 눈을 한 번씩 봤다. 눈물 범벅을 한 여자가 겁에 잔뜩 질린 눈으로 살려달라는 말을 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키리에가 다시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그와 함께 거칠 것 없이 검을 뻗었다.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숨을 죽인 소리는 둘이었다. 겁에 질려 흐느끼는 소리는, 없었다. 서늘한 날이 겹쳐 서 있는 남녀의 심장을 향해 내리꽂혔다. - 콰직! 살과 근육, 뼈가 끊기는 소리가 금고 안을 잠시 울렸다. 여전히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이 곳의 관리자와, 그와 함께 금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여자의 숨이 같이 끊겼다. 정적이 찾아들었다. 둘의 몸에서 검을 뽑아든 키리에의 물색 머리를 타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모두 다른 이들의 피였다. 그렇게 온 몸이 피에 젖은 채로 잠시 숨을 돌린 키리에가 곧 주변을 뒤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고 안에 쌓인 장부들 중 적당해보이는 것들을 꺼내들고 밖으로 나갔다. 1층의 술집이 텅 비어 있었다. 점원도, 손님도 모두 도망친 모양이었다. 덕분에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온 키리에가 말 안장의 가방에 장부들을 챙겨 넣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돌아가 있어.” 레이븐의 형제 말은, 레이븐 만큼은 아니었지만 엘프의 피가 흐르는 소년의 말을 알아들을 만큼은 똑똑했다. 따라서, 키리에가 매어 준 가방을 등에 진 채로 왕궁을 향해 다각 다각 돌아가기 시작했다. 점점 작아지는 말 발굽 소리를 듣다 온 몸에 밴 피 냄새에 코 끝을 찌푸렸을 때 쯤, 수도 경비대가 도착했다. 얼굴조차 식별되지 않을 만큼 온 몸이 피에 젖은 소년이 검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본 경비대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무기를 내려놓거라!” 키리에는, 그들이 오기까지 한참을 기다렸다는 말 대신 순순히 검을 내려놓고 손을 들어올렸다. 그 뒤에는 그들을 보며 침착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시종입니다.” < 제19장. 형님 (1) > 도박장에 대한 일이 터진 그날. 칼리안은 밤새도록 증거자료를 훑어봤다. 그것은 도박장의 운영과 상납에 대한 내용들이었고, 그 안에 에반의 이름은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었으니, 칼리안은 크게 상심하지 않았다. 어차피 주 목적은 플란츠와 칼리안의 관계를 가리는 것이었고, 겸사겸사 세력이나 줄여보자며 던진 돌이었으니까. 그렇게 아침이 되었고, 르메인이 칼리안을 불렀다. 키리에가 연관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리안은 키리에에 대해서 언급하는 대신, 르메인에게 있어 다소 뜬금없는 말을 꺼내들었다. “브리센 후작이 란델 형님과 손잡지 않도록, 플란츠 형님이 후작의 편에 선 것처럼 나서 주셨습니다. 그런 의도를 의심하지 못하게 하려고 제가 후작의 도박장을 건드린 것입니다.” 그 후 이어진 상황 설명을 들은 르메인은 정말 놀랐다. 어느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칼리안의 덫 놓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던 탓이다. 일련의 설명을 마친 칼리안이 르메인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너무 커져서 후작이 다른 마음을 먹으면, 상황만 악화될 수 있습니다.” 이번 일의 목적을 잊지 말았으면 해서 하는 말이었다. 이 일로 에반을 지나치게 궁지에 몰았다가, 에반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란델에게 손을 뻗거나 혹은 르메인에게 반기를 들까 걱정한 것이다. “그러니, 조사에서 드러나는 이가 있다면 그 자를 걸러내는 것으로 마무리 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흠, 하는 소리를 낸 르메인이 잠시동안 칼리안의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앨런을 쳐다봤다. 에반이 지닌 기사단과 발칸의 힘을 잠시 재보는 것이다. 그 판단의 결과로,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아무리 세력이 줄어들었다 해도 브리센이다. 여전히 그의 기사단은 건재했다. 지그프리드와 나란히 카이리스 양대 기사가문이라 불리는 그 위명이 어찌 하루 아침에 사라지겠는가. “그렇게 하마.” 칼리안은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리고 르메인이 그런 칼리안을 향해 시험문제를 내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후작이 누구를 앞세울 것이라 생각되느냐.” 그 말에, 칼리안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답을 내놓았다. “도박장을 운영할 정도의 재력이 있으면서 최근 브리센 후작의 눈 밖에 난 이라면, 게레스 자작일 것입니다. 브리센 후작은 이번 일에 대한 범인으로 그를 내어 놓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레스는 지난 회의에서 텐실에 밀을 보내자 말한 뒤, 불가하다는 르메인의 말에 단 한마디도 항변하지 못한 이였다. 아스트리샤 거리의 건물들 중 상당수가 그의 것이니 사병보다는 재력으로 브리센과 친분을 둔 자라 할 수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르메인은 알겠다는 말과 함께 칼리안을 돌려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유력 용의자에 ‘샤일 게레스’ 라는 이름이 적혀있는 조사관의 보고서가 르메인에게 전달됐다. 그것을 본 르메인이 설탕에 조린 감을 집어 우물거리는 앨런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상당히 뿌듯해하는 눈으로 말했다. “내 아들이 참으로 비범하군.” 어쩐지 ‘내 아들’이라는 단어에 굉장한 자부심이 들어가 있었다. 때문에 앨런은 얼른 입에 든 것을 삼켜낸 뒤 입을 열었다. “제 제자가 참으로 비범한 것이지요.” 그렇게 말한 앨런이 우아한 동작으로 감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러자 르메인은, 마치 앨런의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말을 이었다. “누굴 닮아 그리 영특한지, 놀라울 따름이네.” 만약 입 안에 달달한 감이 들어있지 않았다면, 지는 것이 질색인 앨런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몰랐다. 체이스를 닮았지요. 뱀 같은 데블란이나 소 같은 르메인, 안 닮았습니다. * * * 뱀 같은 데블란의 혈육으로 태어나 체이스의 교육을 받고 자란 뒤 소 같은 르메인의 아들로 살고 있는 복잡한 인성의 칼리안은, 욕조에 몸을 푹 담근 채였다. 정확히는 따뜻한 물이 받아진 검은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손가락으로는 물 표면을 톡톡 치며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한마디로, 정말 생각이 많은 상태였다. 때문에 칼리안의 취침 준비를 도우려던 얀은, 발소리도 내지 않고 방 밖으로 도로 나왔다. 그리고 할 말이 생겨 칼리안의 방에 들어가려던 키리에를 막아섰다. “지금 왕자님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었으나, 키리에는 더 묻지도 않고 알겠다는 말을 남긴 채 돌아갔다. 그 늦은 시간에 다시 수련장에 가는 모양새였으므로, 그것을 본 얀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박장의 일이 처리되고 두 달이 지났다. 게레스 자작의 모든 재산이 몰수됐다. 사실상 에반의 편에 서 있었다는 것 외에는 도박장과 관련 없는 이였으니, 에반과 손을 잡은 매개체가 된 재산만 몰수하여 에반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르메인은, 키리에에게 살인에 대한 죄를 묻지 않았다. 다만 시종으로서 궁 밖에서 검을 휘두른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두 달간의 직무 정지 처벌을 내렸다. 근신도 아닌 직무 정지, 왕궁 밖을 나가야 하는 처분이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다녀올 곳이 있었는데, 잘 됐네.’ 외부에 나갈 일이 생긴 와중에 직무 정지라니. 키리에가 왕궁에 없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그것은 처벌이라기 보다는 왕궁 밖으로 키리에를 내보내기 위한 근사한 핑계거리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두 달을 나갔던 키리에가 카이리시스에 돌아온 것이 오늘이었다. 그리고 키리에는, 칼리안을 보자마자 짧은 인사만 마치고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 ‘카이리시스로 오는 길에 텐실의 축하사절단 행렬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수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일반적인 축하 사절단은 호위를 포함해 50을 넘지 않는다. ‘백 명 가까이 됩니다. 신관들이 포함된 것 같았습니다.’ 칼리안이 눈을 내리떴다. 일반적인 축하 사절단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수가 카이리스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당연히 칼리안은 곧바로 르메인을 찾아가 이 내용에 대해 물어보았고, 르메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일전의 무례를 사과하고 소금 지원에 대한 보답의 뜻으로, 텐실로 돌아왔던 이들을 포함해서 신관 서른 명을 보내겠다 하더구나.’ 무례한 방법으로 신관들을 되돌려받았던 것에 대한 사과와, 수해를 입었을 때 지원했던 소금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서른 명의 신관을 보냈다는 말이었다. 그것을 수락하기로 한 르메인의 결정에 대해 칼리안이 왈가왈부 할 수가 없었다. 말만 들어보면, 기분은 나쁘더라도 의심할 내용은 아니었다. 텐실에서 신관을 보내온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불안했다. 그 말을 듣고 돌아온 칼리안은 한 나절 동안 테이블을 톡톡 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고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의문들 때문에, 욕조에 들어가 또 생각에 잠긴 채였다. - 란델이 뭔가를 하려는 것 같은데. 장미를 보았을 때도 그랬다. 근거는 조금도 없으면서 무조건 란델이 떠올랐다. 헌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키리에의 말을 듣자마자, 란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신관을 데리고 도모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칼리안이 깊은 숨을 내쉴 때. 발소리도 내지 않고 자리를 비켜준 얀과는 그 배려심의 깊이부터가 다른 한 명의 목소리가 욕실 밖에서 들려왔다. “적당히 하고 나오지.” 생각에 잠긴 동생의 깊은 고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매우 애증하는 둘째 형님의 목소리였다. 칼리안이 단박에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나오라시니, 나가야지 별 수 있겠는가. 칼리안은 많고 많은 생각을 떨치고 일어나 가운을 걸쳐입고 밖으로 나갔다. 둘은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은’ 채였다. 그말인즉슨, 여전히 할 말이 있어도 대놓고 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아르센을 통해 간단한 말을 전달하곤 했다. 문제는, 아르센이 두 달 사이에 플란츠가 의외로 인내심 많은 성격임을 깨달았다는 것에 있었다. 덕분에 아르센이 플란츠에게 조금씩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플란츠의 인내심이 걸어오는 싸움을 참아줄 만큼은 아니었으니, 둘은 얼굴만 보면 서로 으르렁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 정도면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스승님?’ ‘저 정도면 화목한 것이니 걱정 마시지요.’ 그런 둘을 보며 칼리안이나 앨런이 중재를 했겠는가? 당연히 내버려뒀다. 나름 괜찮은 구경거리였으니. 그 결과로, 칼리안과 플란츠는 그냥 서로 창문을 잠그지 않고 자기로 하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아르센을 통해서는 제대로 된 의사 전달이 불가능했으니까. “이런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잠자리에 들 때이기는 했으나, 둘이 대화를 나누기에는 퍽 이른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고,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조만간 변경백이 돌아올 것 같다.” 그레이 브리센. 그가 또 카이리시스로 온다는 소식이다. 칼리안이 실소했다. 아직 맞은 자리가 많이 쑤실 텐데,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에반이 불렀습니까?” 그레이는 더 이상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 플란츠는 알지만 에반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란델이라고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아무리 란델이라지만 그것까지 알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소드마스터가 아닌 것을 들키는 순간 목이 떨어지리라는 것을 그레이가 가장 잘 알 테니, 그레이는 어떻게든 사실을 숨겨왔을 터였다. “후작은 변경백에게서도 오러를 느끼지 못할테니, 변경백을 만난다면 자신보다 변경백이 강해졌다 여길 겁니다.” 에반이 그레이의 실력도 확인하지 않은 채로 그를 수도에 불러올 이유가 없다. 게다가 변경백령의 사병을 탐낼 이유도 아직은 없지 않은가. 칼리안의 그런 생각에 동의한다는 것처럼,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작도 정보를 전해 듣고 놀라던데.” “그럼.” 잠시 말을 멈춘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켜보였다. 그레이를 부른 것이 란델인지를 묻는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런 말과 함께 플란츠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사실 칼리안은 라트란 백작령에서 만났던 신관 말콤 체티쉬가 그레이에게 무엇을 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에우리아가 전해주는 정보를 통해 그레이가 어느새 걷는 것 까지는 한다는 이야기만 들은 상태였다. 다만 파괴된 단전이 어떠한 경우에도 복구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으므로, 그레이가 다시 소드마스터가 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알았다. 물론 그레이도 그것을 잘 알 터였다. 서른 명의 신관. 그레이. 그리고, 란델. 연관성이 떠오르지 않아 생각이 깊어지던 칼리안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듯한 웃음이 드리워졌다. “재미있는 수수께끼를 내주시는군요, 형님.” 칼리안의 혼잣말이었다. 문제가 어렵다고 좋아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미친 놈이 어딨냐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또 다른 형의 눈초리는 신경쓰지 않은 채였다. * * * 앞을 살피던 기사의 눈이 찌푸려졌다. 곧 그가 뒤를 따라오는 일행을 보며 말했다. “모두 잠시 멈추거라.” 그 말에, 왕도를 따라 카이리시스로 향하던 이들이 말의 고삐를 당겼다. 기사만큼 시력이 좋은 사람이 일행 중에 또 없었기 때문에,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로 멈춰 서 있었다. 곧 기사가 말 머리를 돌려 일행의 한 가운데 있던 이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돌리는 그에게 말했다. “멀리 앞에 텐실의 신관들로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평상시와 달리 더 늘어난 텐실의 축하 사절단을 보게 된 이가 비단 키리에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왕도는 결국 카이리시스로 통하니,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같은 길에서 마주친 듯 했다. 그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기사의 말을 들은 이가 말했다. “마주치면, 인사나 하면 되지.” 상당히 태평한 말이다. 텐실과 그들은 완벽한 적대관계였다. 그럼에도 인사나 하겠다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모습을 하루 이틀 대면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기사는 그에 대해 별다른 말 없이 다시 설명했다. “신관들로 보이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른 명입니다.” 고집 피우지 말라는 뜻이었으므로, 그 말을 들은 이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 거의 다 왔을텐데, 아쉽네.” 인근에서 하루를 보내고 가겠다는 소리였다. 기사는 그제야 목례하며 물러났다. 곧, 일행이 지낼 만한 영지를 알아보도록 지시하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가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관이 서른 명이라.” 깊이 내려온 하얀 후드 아래,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 제19장. 형님 (2) > 아침부터 광장을 오가는 걸음이 분주했다.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 축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왕궁이 거대한 만큼 광장 역시 넓었으므로, 광장 이곳 저곳을 꾸미고 구조물을 설치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바쁜 하루를 시작할 때. - 다각, 다각! 경쾌한 말 발굽 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작업이 끝나기 전까지 일반인의 광장 출입은 금지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광장이 아니라 왕궁을 찾은 손님이 왕도를 지나가는 소리일 터였다. ‘이번엔 또 누가 오셨나.’ 그런 생각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이들이 깜짝 놀라며 일제히 몸을 세웠다. 그리고 황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보였다. 왕궁에 찾아오는 어떤 이가 아니라, 왕궁에서 나오는 ‘어떤 분’이 낸 소리라는 것을 확인한 탓이었다. “왕자님이시다!” 검은 머리, 검은 정장. 그리고 검은 말. 호위도 대동하지 않고 왕궁 밖을 나올 수 있는 왕자. 당연히, 칼리안이었다. 평소의 칼리안은 느릿하게 걸으면서도 유난히 큰 발굽 소리를 내는 말에 오른 채 사람들의 인사를 전부 받아주곤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바쁜 일이 있는 듯, 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 가볍게 눈만 맞추며 어디론가 서둘러 가고 있었다. 칼리안은 달리기 직전의 속도로 세뉴 강의 다리를 건넜고, 정말 오랜만에 바넨샤 거리에 들어섰다. ‘로튼 대장간’ 그렇게 도착한 익숙한 이름의 상점 안으로 쑥 들어가니, 여전한 근육질의 주인이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와, 왕자님? 어이쿠, 왕자님!” 그리고 굉장히 어색한 동작으로 인사를 올렸다. 덕분에 주인이 앉아있던 의자가 우당탕 소리와 함께 넘어졌으나, 그에 신경 쓸 정신도 없는 듯 했다. 이 모든 것이 예법에는 전혀 맞지 않는 행동들이었으나, 오히려 그것이 보기 좋았던 칼리안이 조용히 웃었다. “오랜만이네.” 마치 언젠가 봤었다는 듯한 말이었으므로, 한참을 정신 없이 헤매던 주인이 뭔가 생각났다는 얼굴을 하며 반가워했다. 칼리안의 목소리를 듣고, 1년 전에 찾아왔던 수상한 어린 소년이 바로 왕자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며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냐만은, 칼리안은 일단 이 곳에 직접 오게 된 들뜬 마음부터 해결하고 싶었다. “얼마전에 내 시종이 좋은 재료 하나를 맡겼을걸세.” 그리고는 제 눈을 가리켜보이며 덧붙였다. “눈 색이 서로 다른 아이인데.” 그 말을 들은 주인이 곧바로 키리에를 떠올리며 우렁차게 말했다. “네, 왕자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주인이 물건을 치우면서 걷는 것인지, 쓸어버리면서 걷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허둥거리며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두 자루의 검을 들고 나와 칼리안의 앞에 공손히 내려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왕자님.” 검을 보는 칼리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토록 기다린 재료, 운철로 만든 검이었다. 이것이 바로 키리에가 두 달 동안 밖에 나갔던 이유였다. 운석을 습득해 직무 정지가 끝나는 날에 맞춰 돌아오느라, 키리에는 이제 막 완성된 이동 마법진까지 이용했다. 그리고 칼리안이 운석이 떨어진 곳과 시기를 기억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 베른이 이것을 매우 탐냈었기 때문이었다. 브리센 상단에서 우연히 운석을 주워 경매를 한다기에 참여했는데 결국은 지고 말았다. 그 일을 너무나 아쉬워하는 베른을 본 체이스가 데블란에게 청해서 검을 하나 선물했고, 그것이 바로 베른과 마지막을 함께했던 세크리티아 왕실의 보검이었다. 참으로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하지만 정작 가져본 적 없던 그 검을 드디어 손에 쥔 칼리안이 감개무량한 얼굴을 했다. “최상급 중에서도 다시 최상급에 해당되는 운철이라 합니다, 왕자님. 오러를 쓰신다 해도 몇 대를 걸쳐 모두 견뎌낼 겁니다.” 물론 그럴 것이다. 아르센에게 당하지만 않는다면. 아무튼 칼리안은 매우 흡족한 얼굴로 두 자루의 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재색에 가까운 짙은 날이 예리한 기운을 뻗어내고 있었다. “둘 중 어떤 것이 왕자님께서 사용하실 검입니까?” 그 질문에, 칼리안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결국 이번 생에서도 칼리안이 직접 쓰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둘 중 더 날렵한 검신을 자랑하는 검은, 당연히 키리에의 것이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도 칼리안의 것은 아니었다. 사실 훨씬 더 효율적인 칼리안만의 검이 있으니 굳이 이 귀한 운철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검을 들고 가볍게 휘둘러보며 확인하는 모습을 본 주인이 괜스레 뿌듯하다는 듯 다시 말했다. “제가 다 기쁩니다, 왕자님. 작년에 오셨을 때는 검을 들어올리지도 못하셨······.” ······ 아차. 주인의 말과 칼리안의 움직임이 동시에 우뚝 멈췄다. ‘내가 입을 잘못 놀렸구나!’ 주인은 주인대로 말 실수를 했다고 여겨서였고,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비밀을 또 들켜버린 듯 해서였다. ‘아, 맞다.’ 1년 전에 검을 들지도 못하던 어린 애가 1년도 안되서 소드마스터에 올라버린 것이다. 그게 말이 되는가? 또 들켰냐는 앨런의 잔소리가 귓가를 윙윙 울렸다. 곧 칼리안이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려 노력하는 것이 분명한 얼굴로 어색하게 말했다. “아, 그, 다들 알지 않나. 그 때, 그래. ‘감기’를 앓던 중이라서.” 그 때 칼리안이 앓은 감기가 실리케의 독이었음을 모를 이가 카이리시스에 있을까. 주인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주인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하며 의문을 지웠다. 추억이고 나발이고, 칼리안은 그 곳에 더 머물지 못하고 서둘러 나왔다. 더 있었다가는 진짜로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른 레이븐에 올라 폴룬 마법학원으로 갔다. * * * “새로운 내용은 없었습니까?” 아마도 로튼 대장간의 주인이 보았다면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검을 보며 그렇게나 신나하더니, 그런 얼굴은 싹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칼리안은 에우리아에게 그레이, 그리고 텐실의 신관들에 대한 새 정보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다시 한번 마법사들의 정보망을 한껏 이용한 에우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브리센 변경백은 여전히 변경백령에 있습니다.” “플란츠 형님 말만 들으면 당장이라도 올 기세였는데, 꽤 느리네요.” 그 말에 에우리아가 잠깐 웃다 대답했다. “아무래도 지그프리드 공작 때문이 아닐까요?” 에우리아의 말은 이런 뜻이다. 본래 슬레이만이 카이리시스로 오려면 두 달 전에 출발을 해야 했다. 그런 사람이 한 달이 채 안 남도록 공작령에서 움직이지를 않으니, 그레이는 아마도 슬레이만이 이번 축제에 참석하지 않으리라 여겼던 듯 했다. 그래서 곧바로 카이리시스로 돌아올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레이가 아직 모르는 것이 있었다. 슬레이만은 이제 두 달 전에 출발할 이유가 없었다. 이동 마법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슬레이만은 딱 닷새 전에 공작령을 떠났고, 이미 카이리시스에 있는 지그프리드의 저택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에우리아는, 그레이가 슬레이만을 피해 일정을 미뤘으리라 말하는 것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법진이 이런 식으로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는데. 나쁘지는 않군요.” 그레이가 슬레이만을 피해야 할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레이의 오러가 아무리 강해졌다 해도 슬레이만보다 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슬레이만이 그레이의 오러를 느끼지 못한다면 분명 누구든 이상하게 여길 터였다. “그럼 그레이는 카이리시스에 오는 것을 탄신일 축제가 지난 뒤로 미뤘겠군요. 지그프리드 공과 마주치면 안되니까.” 칼리안의 말에 에우리아가 긍정을 표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알아보고 있는 내용에 대해 전했다. “그리고, 텐실의 신관들은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인원 그대로 어제 카이리시스에 입성했습니다.” 앞서 칼리안은 에우리아에게, 혹시라도 오는 길에 몇몇이 빠져나와 다른 짓을 하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달라 했었다. 그런데 모두 얌전하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뒤 잠시 생각을 마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신관 중에 혹시 말콤 체티쉬라는 자가 있는지 알아봐주세요.” “알겠습니다.” “그 외에도 계속해서 신관들 꼼꼼하게 살펴보세요. 그레이 쪽도 그렇고.” “네, 왕자님. 걱정 마십시오.” 아무렇지 않게 이것 저것 시키기는 하지만, 마법진 구축 때문에 고생한 협회의 마법사들을 또 부려먹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칼리안이었다. 그러다보니 영 미안한 마음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그런 생각을 어떻게 눈치챘는지, 에우리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힘든 일은 해도 하기 싫은 일은 절대 못하는 것이 마법사입니다.” 다들 좋아서 돕는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일 터였다. 칼리안이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 * * 에우리아의 말은 맞았다. 마법사들은 힘든 일은 해도 하기 싫은 일은 절대 못한다. 그랬으므로 빌헬름 관의 발칸 대원들은 오늘도 열심히 힘들 예정이었다. 물론 플란츠 덕분이다. 지금 플란츠가 가르치고 있는 일은, 둔한 마법사들이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고 마법을 발현하는 그 사이에 공격을 받아 죽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발칸 대원 전체가 마치 한 사람처럼 주문을 외고 마법을 발현하게 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은 것이다. 그 결과로, 마법사들이 빠릿하게 움직이고 모두가 한 몸처럼 호흡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체력 훈련이 매일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칼리안이 밖에서 에우리아를 만나고 있을 그 시간. 플란츠는 그 날도 어김없이 빌헬름 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다만 평소와 달리 산책을 겸해 마차를 타는 대신 천천히 걷고 있었다. 빌헬름 관은 르메인이 있을 아르피아 궁을 지나가야 있었는데, 아르피아 궁 인근에 다다랐을 즈음 시종이 말을 건넸다. “왕자님. 그런데 오늘 오찬에 함께 하실 손님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란델 왕자님은 다른 일정으로 오찬 참석이 어렵다 하셨습니다.” 축제를 앞두고 있었으니 왕자들 역시 다시 바빠졌다. 매 식사마다 모임이 있었다. 더 이상 작년처럼 마음대로 굴 수가 없었으므로, 플란츠 역시 그런 일정에 빠지지 않았다. “손님 누구.” “마나실 백작을 포함한 두 명이라 하는데, 다른 한 명에 대한 정보는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국왕과 왕자들, 그리고 앨런과 연관이 있는 누군가라니. 묘한 조합이다. 슬레이만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던 플란츠가 이내 아닐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만약 그였다면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오찬에 들면 알 수 있을 일이었으니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플란츠가, 무언가를 보고 잠시 발을 멈췄다. “아니, 누구시길래 왕궁에서 얼굴을 가리고······.” 뒤에서 같은 모습을 본 시종이 이렇게 작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플란츠가 발을 멈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카이리스 왕궁에서, 그것도 아르피아 궁으로 들어가려는 이가, 하얀 로브의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이 굉장히 시선을 끌고 있었다. 따라서 플란츠는 제자리에 선 채 계속해서 그를 보게 되었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혹은 우연인지. 하얀 로브를 입은 이 역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플란츠 쪽을 바라봤다. 후드가 없었더라도 눈이 정확히 마주칠 만한 거리는 아니었으나, 플란츠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가 정확히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때문에 천천히 상대방을 살피던 플란츠의 눈에 날이 섰다. “어째서 여기에 있지.” 수행원들의 수, 그들의 복장, 호위중인 기사의 기운. 그의 로브 아래 보여지는 긴 청은발. 그리고, 알 수 없는 거부감.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으나, 플란츠는 알 수 있었다. “······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마치 그 말을 들은 것처럼. 하얀 로브의 청년, 체이스가 플란츠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 제19장. 형님 (3) > 체이스의 발걸음이 플란츠의 앞에서 멈추었을 때, 르메인의 집무실에 들어서려던 앨런의 움직임도 멈췄다. 앨런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 어찌 여기를 찾아왔을까.” 오찬에 온다던 또 한 명의 손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챈 순간, 앨런은 평소와 달리 전혀 침착하지 않은 얼굴로 르메인의 집무실 문을 노려봤다. 친애해 마지않는 카이리스의 위대한 국왕 전하께서, 사상 최악의 개똥같은 일을 벌인 것이다. 칼리안은 체이스가 카이리스에 왔었다는 말을 한 적 없었다. 만약 올 것을 알았다면, 철 모르는 새끼 오리처럼 그렇게 신이 나서 왕궁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을 터였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베른이 있던 시간에서, 체이스는 왕세자의 몸으로 타국에 올 만큼 위험천만한 일을 벌이지 않았으니까. ‘베른이 없다는 것이 어떤 영향을 주었기에, 체이스가 직접 이 곳으로 왔다는 말인가?’ 체이스가 누구를 만나겠다고 이 곳까지 왔을지는 모를 앨런은, 그저 이런 생각에 황망해 할 뿐이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체이스와 플란츠가 만난 것 같았다. 둘 모두 베른과 연관된 기억이 없을 텐데도 풍겨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앨런은 르메인의 집무실에 가려던 것을 미루고 밖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칼리안이 보기 전에 체이스를 데리고 들어오기 위해서였다. ‘흔들릴 것이다.’ 칼리안은 분명히 흔들릴 터였다. 준비할 시간을 줘야 했다. 아르피아 궁의 건물 내에서는 공격마법이나 이동마법은 전혀 쓸 수 없었다. 국왕의 안전을 우려한 시스파니안의 혜안에 마음 깊이 감사하며, 앨런은 걷는 속도를 더 높였다. * * *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것이 체이스가 플란츠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왕족 대 왕족. 본래대로라면 체이스와 플란츠의 시종들이 서로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과정이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체이스가 나선 것이 너무 빨랐다. 그런 체이스가 꺼낸 것은 정말 평범한 한 마디였고, 별 다를 것 없는 말이었다. 허나 그것은, 칼리안의 말버릇이기도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 플란츠는 또 한번 깊은 거부감을 느꼈다. 생전 처음 보는 놈을 상대하는데 왜 자꾸 내 동생 놈 냄새가 나느냐는 말이다. 칼리안이 누구를 닮았는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 플란츠는 지금 이렇게까지 불쾌한 기분이 드는 이유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플란츠는 여전히 체이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낮은 목소리를 냈다. “반가운 것은 알겠는데.” 체이스는 분명 다른 나라의 세자였다. 게다가 아무리 대국 카이리스라고는 하나 세크리티아가 카이리스의 종속국인 것도 아니었다. 양국의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시종들이 설명을 하지 않았더라도 둘은 이미 서로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 먼저 예를 보여야 할 것은 플란츠였다. 하지만 플란츠는 마치 체이스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감히. 일국의 왕자 앞에서 낯을 가리는 것은, 어느 나라의 예법이지.” 카이리스의 2왕자. 플란츠이기에 보일 수 있는, 실로 오만한 태도였다. 주변의 공기가 하얗게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로브 안의 이가 체이스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시종의 입이 벌어졌다. 동시에 체이스의 뒤에 서 있던 기사에게서 강렬한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요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플란츠 자신과 체이스 뿐이었다. 로브 아래로 보이던 체이스의 입술이 작은 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저렇게 웃는 꼬락서니도 칼리안과 똑같다. 이런 생각에 플란츠가 다시 날 선 말을 꺼내들려 할 때, 체이스가 손을 움직였다. 그는, 앞으로 나서려는 기사를 물린 뒤 천천히 손을 올려 후드를 벗었다. “내가 계속 이런 차림으로 오다 보니.”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청은발이 잠시 흔들렸고, 맑은 감청색의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플란츠 왕자.” 그저 설명을 했을 뿐, 그 말에 미안함이나 변명은 들어있지 않았다. 순간 플란츠는, 로브 아래 든 생김새가 칼리안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에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그리고는 이제야 알아봤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런.” 그렇게 말한 플란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양 쪽 입술이 고르게 올라갔다. 그리고 정말 간신히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 고개를 숙여 예를 차린 뒤 물었다. “세크리티아 왕세자께서 이 먼 곳까지 무슨 이유로 오셨는지.” 플란츠 역시 사과의 뜻 따위를 입에 담을 성격이 아니었다. 일부러 이렇게 삐딱하게 구는 것임을 모를 리 없건만, 체이스는 그리 신경쓰지 않는 얼굴로 플란츠의 예를 받았다. 그 뒤 플란츠의 질문에 대해 답을 했다. “축하할 일과, 만날 이가 있어 왔습니다.”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칼리안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엄청난 크기의 왕궁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여 이렇게 생각지 못한 대화도 나누게 되니, 이 곳이 어디인지 비로소 실감이 됩니다.” 플란츠가 잠시 말 없이 체이스를 쳐다봤다. 너랑 대화하러 온 것은 아니니까 텃세는 그만 부리라는 소리임을 알아들은 까닭이다. 사실 플란츠를 보러 온 것은 아니라 해도 먼저 말을 건 것은 체이스였다. 따라서 플란츠의 대답도 계속 곱지 않았다. “카이리스까지 오셨는데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르셨을 리 없을텐데.” 텃세 부리는 것이 당연하단다. 알고 왔을테니 그냥 참으라는, 상당히 공격적인 말이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둘의 신경전에, 플란츠와 체이스의 곁에 서 있던 이들 모두 조마조마한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플란츠를 보필하게 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궁에서는 오래 있었던 시종 레릭은, 플란츠의 심기가 뒤틀릴 때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기사 테일란은 체이스가 평소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이 둘은 지금 굉장히 난감해하고 있는 상태였다. 두 왕족의 대화는 양국의 관계에도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때문에 중재가 필요했으나, 레릭은 왕자와 왕세자의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었고 테일란은 나서지 말라는 체이스의 뜻에 반할 수가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체이스 저하. 그리고, 좋은 아침입니다. 플란츠 왕자님.” 그리하여 그 둘은, 이렇게 들려온 목소리에 세상이 밝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 * * 아르피아 궁의 밖의 이런 상황을 눈치챈 이는 또 있었다. 르메인에게 얼굴을 비추러 왕궁을 찾아왔던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였다. “허어······. 르메인! 아주 대단한 이를 초대했군!” 슬레이만이 이름을 부르며 편히 대하고 있음에도, 마주 앉아 있던 르메인은 그리 언짢은 얼굴이 아니었다. 사실 둘은 꽤 막역한 사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르메인과 슬레이만이 아니라, 르메인의 형과 슬레이만이 둘도 없이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다보니 르메인과도 격이 없어지게 되었고, 둘만 있는 사석에서는 늘 이렇게 대화를 해온 터였다. 그러니 아마도 르메인의 앞에서 그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사람은, 이 세상에 딱 슬레이만 뿐일 터였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한 슬레이만의 말에, 마주 앉아있던 르메인이 물었다. “세크리티아 왕세자?” 그 말을 들은 슬레이만이 한참을 웃었다. 항상 조용하던 르메인의 집무실이 떠들썩하게 울렸다. 르메인의 아들인 칼리안이 숨겨둔 것을 알았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슬레이만이다. 뿐만인가. 친우가 왕위에 오르고자 일을 도모하다 실패하여 탑에 갇힐 때에도 코끼리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그런 슬레이만이, 세크리티아 왕세자에게 관심을 가지겠는가. “내가 언제 왕족을 보고 놀라던가! 당연히, 검이다.” 왕세자와 함께하는 검. 대륙의 첫번째 검, 테일란 카스트린. 그가 왔다는 소리였다. 그는 본래 국왕 데블란을 호위하는 기사였다. 그리고 데블란은, 체이스에게 왕세자위를 내릴 때 테일란을 함께 내렸다. 때문에 지금은 테일란이 체이스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이 곳에 체이스가 왔다면 테일란도 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슬레이만이 그의 기운을 느꼈다는 말에 르메인이 조금 놀란 얼굴로 슬레이만을 쳐다봤다. 오러를 느낀 것인지를 묻는 눈초리였으므로, 슬레이만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투기를 뿜고 있다. 오러와는 다르지. 내가 과연 카스트린 그 자의 오러를 보고 죽을 날이 있으려나 모르겠군.” 오러는 느끼지 못했고, 테일란이 내보낸 투기를 눈치챘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 말의 뜻이 심상치 않았다. 테일란이 왜 남의 나라 왕궁에서 투기를 뿜는다는 말인가? 그 의문을 눈치챈 슬레이만이 답을 알려줬다. “여기 왕자 중 한 놈이랑 세크리티아 왕세자가 싸움이라도 벌이는 모양이다.”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르메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르메인의 팔을, 슬레이만의 커다란 손이 붙들어 앉혔다. “국왕 전하 엉덩이가 이렇게 가벼우면 안 되지! 마법사가 나갔으니 알아서 잘 하겠지.” 르메인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슬레이만의 말을 들어 밖으로 직접 나가지는 않고, 대신 창가로 걸어가 멀리 보이는 무리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무리로 다가간 앨런이 체이스를 데리고 아르피아 궁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오래지 않아 플란츠가 자리를 떠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것을 본 뒤에야 안심한 듯, 르메인은 다시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왔다. 저 멀리 왕궁 입구에서, 한참을 서 있던 검은 말을 보지 못한 채였다. * * * 칼리안이 조용히 웃었다. “······ 그래서였구나.” 아침부터 그리도 설렜던 것이, 도무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애가 탔던 것이. 검 때문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시선을 내렸다. 레이븐의 고삐를 쥔 손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레이븐은 자꾸만 앞으로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것을 말렸다. 죽을 힘을 다해 말렸다. * * * 그날 오찬에 들기 위해 준비하는 칼리안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서, 얀의 걱정이 컸다. “아무래도 오찬을 물리고 쉬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평소 같았으면 웃기라도 하며 대답할 칼리안은, 차게 굳은 얼굴로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키리에를 데리고 다녀올게. 지그프리드 공이 궁에 들었다 하니, 만나고 와.”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대답을 하려 했으나 차마 거절하기가 어려운 얼굴이었다. 때문에 얀은 그렇게 하겠다 대답한 뒤 키리에를 불러왔다. 오찬이 있을 자리에 가는 동안, 키리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얀보다 더 걱정스러운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 앨런에게서 사람이 왔고, 짧은 말을 전했다. -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카이리스를 찾았다.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칼리안의 웃는 얼굴이 왜 저모양인지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칼리안이 세뉴 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복도를 따라 한참 걸어가, 연회장의 입구에 섰다. 문을 열려는 기사의 손길을 키리에가 막았다. 이곳까지 걸어온 칼리안의 발걸음 소리가 결코 일정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잠시 있다 들어가십시오.” 칼리안의 입에서 긴 숨이 들고 났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혹은 키리에에게 건네는 말인지 모를 말을 꺼냈다. “어차피 모르실테니.” 칼리안이 누구인지, 체이스는 모른다. 조금쯤 어색하게 굴어도, 체이스는 어차피 모를 것이다. 앨런은 이해할 것이고, 플란츠는 눈치는 채겠지만 관심가지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괜찮다고, 칼리안은 생각했다. 곧 칼리안의 눈이 문 앞에 서 있던 기사들에게 향했다. 문이 열리고, 칼리안의 입장을 알렸다. 한 걸음씩 칼리안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비로소 그 얼굴을 마주했다. ······ 형님. < 제19장. 형님 (4) > 사력을 다해 멈춰야 했던 것이 비단 레이븐만은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에 그토록 찾았던 체이스가 눈 앞에 있었다. 때문에, 손과, 발과, 말과, 눈빛까지, 모두 다. 칼리안은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정말 만나고 싶었습니다, 칼리안 왕자.”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던 칼리안의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새하얗게 변했다. 지금 당장 칼리안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닌가. 그런데 그 말을 꺼낸 것은 오히려 체이스였다. 아무것도 모를테니, 그 이름난 3왕자를 비로소 만났다는 생각 때문에 저리 말하는 것일 터였다. 칼리안이 간신히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역시, 같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을 하고는 있었으나, 체이스라는 그 이름만은 입 밖으로 내질 못했다. 이름을 말했다가는 형님이라는 말이 함께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짧은 말 끝에 입을 다물었다. “인사는 차차 나누셔도 될 터이니, 우선 앉으시지요.” 때마침 눈치 빠른 앨런이 이런 말로 잘 나서 주었다. 덕분에 다른 말을 더 하지 않고 자리에 앉게 된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칼리안을 한번 본 앨런이 소리 없이 혀를 쯧 찼다. 똑똑하게 굴던 놈이 체이스 앞에서는 영 맥을 못추고 있지 않은가. 당연한 일이니 탓할 마음은 없었다. 그저 안쓰러운 마음만 들었다. 그리고 이 사달을 만든 그 놈의 르메인이나 빨리 들어와서 오찬을 시작하고 끝내주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칼리안이 평소답지 않은 것을 눈치 챈 것이 비단 앨런만은 아니었다. 플란츠도 묘한 눈으로 칼리안을 보고 있었다. ‘아우님이 오늘따라 왜 저러나.’ 딱 이런 얼굴을 한 채였다. 그런 플란츠와 눈이 마주친 뒤에야, 칼리안은 비로소 정신을 조금 차렸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체이스만은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깨달은 것이다. 이제까지 마음 먹고 잘 적응해온 칼리안으로서의 생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상기한 칼리안은 테이블 밑의 주먹을 꽉 쥐고는 다시 체이스 쪽을 쳐다봤다. 그러다, 주먹 쥔 손에 다시 한번 힘을 주어야 했다. 체이스의 곁을 지켜야 했던 베른보다 먼저 발칸의 수도 입성을 막아선, 그리하여 그 목숨으로 세크리티아의 멸망을 사흘 뒤로 미뤄 주었던, 테일란 카스트린. 베른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가, 이제는 제자를 보는 눈이 아닌 매우 흥미로운 상대방을 살피는 얼굴로 칼리안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님.’ 칼리안이 왕궁 입구에서 체이스를 발견했을 때, 곁에 있던 테일란도 보았다. 때문에 칼리안은 세뉴 관에 들어서기 전에 오러를 가리고 있던 마법을 해제한 상태였다. 들키는 재주가 남다른 칼리안이 이 와중에 이것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 실로 다행한 일이었다. 만약 테일란이 칼리안의 힘을 느끼지 못했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니까. 테일란이 칼리안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는지, 앞에 앉아 있던 체이스가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칼리안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얼마 전, 소문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칼리안이 검의 길에 오른 것에 대한 소리일 터였다. “운이 좋았습니다.” 칼리안은 다시 한번 짧게 대답했고,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플란츠를 보며 말했다. “사적인 이야기지만. 나로서는 참 부러운 일입니다, 플란츠 왕자. 저런 동생을 두었으니.” 그리 부러우면 그냥 데려가서 네 동생 삼으시라고. 체이스를 만났을 그 때부터 심사가 꼬여있던 플란츠는, 그렇게 대답을 할까 하다 잠시 옆에 앉은 칼리안을 쳐다봤다. 사실 별 생각 없이 돌렸던 시선이었다. 그런데 칼리안의 얼굴이 보였다. 플란츠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야 알았다. 계속 느껴온 거부감의 이유가, 저 세크리티아 놈한테서 칼리안 냄새가 풀풀 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왜 그렇게 칼리안 냄새가 났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알게 되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체이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비꼼이라고는 전혀 들어있지 않은 말로 대답을 전했다. “당연히,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둘도 없을 다정한 형의 모습이 되어 말을 맺었다. “세상 어디에 내어놓아도 자랑스러운 내 동생이 아닙니까.” 둘의 사이가 얼마나 안 좋은지에 대해서는 세작들을 통해 이미 다 들었을텐데도, 체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체이스만 고개를 끄덕였다. 앨런과 키리에는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느라 다른 곳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특히 앨런은 순간적으로 플란츠가 다시 술에 손을 대는지까지 의심하다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반성했다. 체이스가 하필 동생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바람에 다시 한번 혼이 나가버리는 기분이 되었던 칼리안 역시 그 말을 들었다. 왜 어울리지도 않는 다정한 말을 했는지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칼리안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플란츠. 또 알아냈구나. ······ 실로 애증하는 형님 같으니. * * * 르메인을 만나고 나온 슬레이만이, 옆에 서 있던 얀을 쳐다봤다. 그리고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한 말에 대해서 나도 들었다.” “무슨 말이요?” 칼리안이 소드마스터에 올랐던 이유에 대해 르메인에게 뭐라 지껄였는지를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말똥말똥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얀을 보며, 슬레이만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차마 저 얼굴에 대고 화를 낼 수가 없다. “그래. 내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이 놈이 내새끼가 맞나, 하고.” 누가 봐도 슬레이만의 새끼다. 일단 그 머리색과 눈 색부터가 똑같았으니, 나란히 놓고 보면 얀은 분명한 새끼 코끼리였다. 때문에 얀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 자식이 맞으니까 지금까지 안 들키고 있죠.” 귀티가 영 안 난다는 소리였다. 누가 봐도 얀은 공작 아들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물론 슬레이만 역시, 일국의 공작으로 보기에 어려움이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니 둘은 어엿한 부자지간인 것이다. 그런 얀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슬레이만이 입을 열었다. “그렇지. 내새끼가 맞긴 맞지.” 그나마 칼리안이 내치지 않고 잘 보듬어주면서 데리고 다니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냥, 내가 참 마음이 복잡해서 그런다.” 심지어 칼리안은 얀이 공작 아들이라서 참아주고 있는 것도 아닌 듯 했으니, 그야말로 은인이 따로 없다. 아비로서 칼리안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애잔한 얼굴을 한 슬레이만이, 곧 손을 들어올려 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래······. 건강하게만 살아라. 너만 좋으면 됐다.” 평생 얀을 보며 저 말만 한 탓에 얀이 정말 건강하게만 살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겠냐만은, 이제 와서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부스스해진 머리를 다시 묶던 얀이 물었다. “오늘 세크리티아의 세자께서 오셨다던데요. 혹시 만나보셨어요?” 카이리스까지 그렇게나 명성이 자자한 체이스였다. 때문에 실제로 보았을 때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던 터였다. 그런데 칼리안이 오찬에 얀을 두고 가는 바람에 만나보지 못했으니 슬레이만에게 묻는 것이다. 그런 얀을 보며 슬레이만이 험상궂게 웃었다. “내가 세크리티아 왕세자를 만났으면 오늘 이 왕궁에서 하나는 죽어 나갔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세자를 호위한다는 테일란이라는 기사 말이다. 세자를 내가 만났으면, 그 놈도 만났을 것 아니냐.” 그러자 얀은 무슨 되도 않는 말을 하고 있느냐는 듯 대꾸했다. “아버지가 진다면서요. 레아 아직 어려요.” 요 이쁜 내새끼 같으니. 아비한테 한다는 말 한번 곱기도 하다. * * * 플란츠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오찬을 마쳤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온 칼리안은 곧바로 테라스에 나왔다. 체이스는 이 곳에 보름을 머물다 간다 했다. 앨런을 만나러 온 길이었으니, 앨런과의 대화가 길어진다면 그 일정도 더 늘어날 수 있으리라 했다. 보름은 긴 시간이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나아질 터였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스리며 테라스 의자에 앉아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는 테이블에 무언가를 탁 내려놓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술이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리고는 이런 밝은 대낮에 왜 찾아왔냐는 말 대신 조용히 대꾸했다. “술 끊었습니다.” 안마신다는 것과 끊었다는 것은 많이 달랐다. 게다가 그 말은 칼리안의 입에서 나올만한 소리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란츠는 별다른 반응 없이 칼리안의 옆에 앉았다. “내 아우님께서 술을 끊으셨다니, 마실 사람이 없군.” “형님 드십시오. 좋아하셨잖습니까.” “마셨던 적 없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칼리안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지금 플란츠는, 그 동안 술을 마신 척 연기를 했었다는 말을 한 것이다. 플란츠는 별 것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서로 숨겼던 것을 하나씩 들켰으니, 없는 셈 치면 되겠군.” 그 계산 한번 후하기도 하다. 칼리안이 소리내서 웃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침실에 있는 금고로 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검 한 자루를 꺼내왔다. 오전에 찾아왔던 두 자루의 검 중에, 둘 중 덜 날렵하고 더 묵직한 검. 바로, 브리센 가의 검술에 맞춰 만든 것이었다. “레이븐을 주셨으니, 그 값이라 생각했는데. 셈이 틀렸네요.” 그 검을 플란츠의 앞에 내려 둔 칼리안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손바닥의 흉터를 보여주며 말했다. “레이븐은 그냥 이 흉터 값으로 치고, 그 검은 비밀 값으로 치면 맞겠습니다.” 플란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레이븐은 본래부터 흉터 값이 맞았으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어차피 헤르츠 경에게 검도 잃으셨으니, 형님 쓰십시오.” 그 망할 놈의 마법사! 플란츠의 눈매가 급격히 사나워졌다. 잠시 그렇게 이를 갈던 플란츠가 손을 뻗어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곧, 부드럽게 뽑혀나온 그 검날에 완전히 매료된 표정이 되었다. 얼마 전 아르센이 검을 부쉈던 일에 대해서는 잊은 얼굴이었다. 칼리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만든 이의 말로는 오러 정도는 충분히 담아낼 것이라 했으니, 열심히 수련하시라는 의미로 드리는 겁니다.” “매우 좋은 검이군. 비밀 지키는 값으로는 꽤 과한데.” 칼리안은 더 묻지 말고 그냥 쓰라는 듯한 얼굴이 됐다. 원래 플란츠가 썼던 것이라는 소리는 굳이 하지 않은 채였다. 다만, 남은 한 자루의 원래 주인이어야 했을 슬레이만에게 갈 검이 없었다. 그것은 키리에에게 줄 생각이었다. 칼리안은 그것을 그냥 모자란 아들 잘 맡아주는 값인 셈 치기로 했다. 칼리안의 계산은 꽤 정확하니까. 곧 검을 옆에 내려 둔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설명을 좀 해 줘야 하지 않나.” 어떻게 칼리안이 체이스의 동생이었는지. 이해가 되는 듯 하면서도 결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으니, 설명을 해달라는 말이었다. “이미 다 알아내신 것 같던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칼리안이 짧은 주문과 함께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어느 정도는 이야기를 해 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대신, 그보다 앞서 한 가지 물을 것이 있었다. 이제는 답을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던 말이었다. “만약.” 그렇게 운을 뗀 칼리안이 아르피아 궁 쪽을 쳐다봤다. 지금쯤 그 곳에 있을 체이스를 떠올리는 것이다. “형님께서 정말 원하는 것이 생겼다고 했을 때. 그런데 그것이 다른 사람 손에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왜 묻는지는 몰랐으나, 플란츠는 일단 대답을 건넸다. “다른 놈 손에 든 것 뺏는 취미, 없다.” 칼리안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체 전쟁은 왜 일으켰는지 생각하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다. 누군가 플란츠의 성격을 바꿨든, 혹은 플란츠를 대신해 전쟁을 일으켰든, 어차피 지금의 플란츠는 답을 모를 질문이다. 답을 안다 해서 바뀔 것도 없었으니. 그냥 플란츠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확인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간이 거꾸로 흘렀습니다.” 플란츠는 칼리안을 쳐다보지 않았다. 칼리안의 말이 짧게 이어졌다. “저는 저 분의 동생이었고, 지금은 형님의 동생입니다.” 칼리안은 그렇게만 말했다. 그 이상을 말할 수는 없었다. 남의 것 뺏는 취미 없다는 이 원수같은 형님이 뭘 했는지 어찌 알려주겠는가. 그러다 문득, 오찬에서 보였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구는 것이 쉽지는 않네요.”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더 놀라지도 않았다. 하도 놀랄 것이 많다보니, 그 정도는 이제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된 까닭이다. 그리고 플란츠는, 술을 끊었다던 칼리안의 연세가 실제로 어떻게 되시는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똑똑한 플란츠는 모르는 것이 득이 될 때도 있다는 것을 잘 알았으니까. 그래서, 자신이 칼리안의 무엇을 빼앗았는지도 묻지 않았다 < 제19장. 형님 (5) > 한동안 말 없던 앨런의 입이 열렸다. “그래요. 이제 정해도 되겠습니다, 왕자님.” 이럴 땐 대꾸하지 않는 것이 답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얌전히 앨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왕자님 비밀을 누구에게 알려주실 것인지 미리 정해주시지요. 모르는 놈들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알려주실 순서 정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칼리안이 걱정되는 마음에 서둘러 일을 끝내고 와 보니 이번에는 플란츠에게 비밀을 말했단다. 물론 칼리안은 정말로 플란츠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되돌아갔다는 것과 체이스와의 관계만 말했다. 나머지는 그간 칼리안이 보여준 행동이나 이전에 둘러댔던 말들을 잘 엮은 플란츠가 혼자 알아낸 것이다. ······ 라고는 해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지 않느냔 말이다. 차라리 얼마나 더 들키고 다닐지를 지켜보는 것이 속이 편할 판이 아닌가? 곧 앨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화를 내야 하는데, 오늘 체이스의 일로 마음 고생 한 것을 알고 있으니 다른 말을 더 못하는 중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조금 전 플란츠가 놓고 간 술을 얼른 건넸다. 하다하다 로튼 대장간의 주인에게까지 들킬 뻔 했다는 것, 아니 어쩌면 조금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절대 말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이제 정말 더 없을 겁니다, 스승님.” 그나마도 확답이 아니다. 그 말에 하도 기가 차서, 결국은 앨런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나왔다. 그와 함께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스승의 화가 풀렸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아무튼 화가 풀렸다 해서 얽힌 속까지 풀린 것은 아니었으니, 앨런은 칼리안이 건네준 술을 혼자 따라 마셨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놀란 눈을 하며 물었다. “허, 왕자님의 형님이 그간 이런 것을 마셨었답니까?” 마시려고 구한 술이 아니라 여기저기 뿌려대려고 구한 것이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독주였을 터였다. 아무튼 칼리안은 별다른 대답 없이 앨런의 빈 잔에 술만 더 따라줬다. 제 비밀 지키는 건 젬병이어도 남의 비밀은 잘 지키는 칼리안이니까. “한 잔 안하시겠습니까? 어차피 다 들킨 판에.”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는 앨런의 말에,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이렇게 많은 이들이 참으로 속 시끄러운 하루를 보낸 다음 날. 그 원인을 불러온 르메인을 위한, 카이리스 국왕 탄신 기념일 축제가 시작되었다. 사실 르메인이라 해서 생일 맞이가 특별히 다르지는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붉은 석류 주스를 마시는 것도, 붉은 색 가득한 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시작한 것도 똑같았다. 다만 칼리안과 달랐던 것이 있다면 나이 수 만큼의 라프라니아 꽃을 받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칼리안이야 시녀인 메를린이 챙겼었다지만 르메인은 아니었다. 그렇다 해서 꽃을 챙겨줄 왕비나 공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르메인은 이른 아침부터 떨떠름한 표정으로 찾아온 앨런과, 그 옆에서 서른 아홉 송이의 라프라니아 꽃을 들고 있는 시종장 라울을 보며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르메인의 질문에, 라울이 느리지만 정중한 말투로 대답했다. “네, 전하. 마나실 백작이,” “버리게.” 르메인이 라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덕분에 앨런은 하나도 익지 않은 배를 씹은 표정이 됐고, 라울이 매우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앨런은 르메인이 무엇을 오해할지 익히 예상했다. 때문에 억울했다. “오해 마시지요.” 세상에서 앨런이 꽃을 사 주는 이는 딱 한 명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베로니카 뿐이었다. 몰래 체이스를 불러오기나 하는 르메인 같은 놈에게 앨런이 무슨 이유로 꽃을 챙겨 주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그 꽃은 앨런이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저는 다른 이유 때문에 따라 들어온 길입니다.” 앨런은 르메인의 방에 꽃과 함께 들어온 이유, 즉 손에 들린 보고서를 르메인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매우 마뜩찮다는 얼굴로 말했다. “꽃은 어여쁜 제 제자가 전해달라 한 것이니, 버릴 필요 없이 잘 받으시면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르메인의 눈이 다시 라울에게로 향했다. 다시 한번 발언권을 얻은 라울이 조금 더 빠르고 정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네. 마나실 백작이, 칼리안 왕자님이 보내온 꽃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쓸데 없는 앨런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지만, 결론은 칼리안이 준비해서 앨런 편에 전한 것이라는 소리였다. 사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메를린의 말을 들은 얀의 의견을 수락한 칼리안이 다시 메를린을 통해 꽃을 준비시킨 뒤 앨런과 라울의 손을 거쳐 르메인에게 전달한 것이라 해야 맞을 터였다. 칼리안도 그런 것을 알아서 챙길 만큼 세심한 성격이 되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어차피 아침 일정으로 르메인에게 인사를 하러 오겠지만, 다른 형제들이 있는데 칼리안만 꽃을 들고 가기가 어려워서 미리 보냈을 뿐이었다. 르메인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고, 라울은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꽃을 올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붉은 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앨런이, 이 상황을 빚어낸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질문했다. “새 결혼은 안 하실 요량이십니까?” 그 말에, 르메인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어떻게 보면 답답한 것도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안 그래도 최근 들어 새 왕비를 맞이하라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왕자가 셋이나 있고 머지않아 란델이 결혼을 해야 할 나이인데 그런 말이 나오니 짜증이 날 밖에. “그 이야기 좀 그만.” 따라서 이렇게 나온 대답에 앨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도 시달리는 모양이란 생각이 든 탓이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장 라울이 다시 들어왔다. 이제 세 왕자가 탄신일 축하 인사를 위해 올 것이라는 말이 이어졌고, 앨런은 그 말을 들으며 밖으로 나왔다. 르메인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이어지는 동안, 앨런은 체이스와 이야기를 좀 나눠 볼 생각이었다. 앨런을 만나러 왔다던 체이스가, 정작 어제 하루 종일 다른 일정으로 바빴던 탓에 앨런과 따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 * 르니에리에서 벗어나니, 이제는 장미다. 이러다가는 세상의 온갖 꽃이 다 꺼려질 것 같은 기분에, 꽃봉오리 가득한 장미 정원을 보던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 생각 없이 창 밖을 보았을 뿐인데,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장미를 보니 생각난 까닭이다. 오늘만은 마주침을 피할 수 없을 사람. 바로 란델이었다. 칼리안의 기분이 영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품 속의 고양이가 이상한 울음소리를 냈다. “므에옹!”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지금 칼리안의 품에 안겨 있었다. 맞다. 고양이는 아직까지도 이름이 없었다. 레이븐의 이름은 단박에 지었던 칼리안이었으나 고양이에게까지는 세심하질 못했고, 다른 이들은 칼리안의 고양이에 감히 마음대로 이름을 붙이질 못했다. 아무튼 히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라고만 불리는 녀석을 칼리안에게 맡겨두고 광장의 일을 지원하기 위해 나갔다. 그리고 그 고양이를 칼리안으로부터 다시 받아들며, 얀이 말했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고양이 털 떼세요.” 그 말에, 여전히 정원에 시선이 닿아있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왕자의 정복에 새하얗게 내려앉은 고양이 털을 마법으로 털어낸 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얀과 키리에를 대동한 채 아르피아 궁으로 갔다. 르메인이 이미 아르피아 궁에 나와 있었으므로, 올해에도 그 곳에서 왕자들을 맞이하기로 한 탓이다. “대화 나누고 나오세요.” 그런 말과 함께 르메인과의 대면 자리에 칼리안을 보내 둔 얀과 키리에는, 다른 시종들과 함께 르메인의 집무실 밖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다 얀이 제 옷에도 고양이 털이 붙은 것을 보고 그것을 떼어내는데, 멀리서부터 저벅 저벅 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르메인은 물론 왕자들까지 모두 집무실 안에 든 상태였고, 시종이나 시녀들은 발소리를 내지 않았다. 때문에 누구의 발소리인지 알기 위해 고개를 든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딱 보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청은색의 머리, 바로 체이스였다. 르메인 집무실의 맞은편, 그러니까 앨런의 집무실에 찾아온 체이스가 잠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목례를 건네는 시종들 중 키리에를 향해 걸어왔다. “어제 보았던 아이구나. 칼리안 왕자의 시종이었지.” 그리고는 이렇게 아는 체를 했다.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그 동안 얀에게 배운 것이 있었으므로, 키리에는 당황하지 않고 정중히 대답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 인사드립니다. 칼리안 왕자님의 시종입니다.” 그러자 체이스가 부드러운 음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네 검술이 아주 뛰어나다 들었다. 세크리티아의 새들은 참 부지런하거든.” “저하.” 세크리티아의 세작을 통해 도박장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다는 소리였으니, 깜짝 놀란 기사 테일란이 체이스의 말을 막아섰다. 키리에가 속으로 잠시 웃었다. 칼리안이 비밀을 잘 들키는 것은 아무래도 체이스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심지어 체이스는 제 비밀도 아니고 세크리티아의 비밀을 입에 올리고 있었으니, 그나마 칼리안이 낫다고 보아야 할 일이다. 아무튼 테일란의 저지에 살짝 웃어보인 체이스가, 다시 키리에를 보며 물었다. “이렇게 기억이 난 것도 인연일테니. 네 이름이나 알고 싶구나.” 순간 키리에가 머뭇거렸다. 얀이 얼른 키리에를 쳐다보았다. 왕족이 이름을 물을 때 머뭇거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세크리티아라 해서 다르지 않은 예법이었다. 다행히 체이스는 별다른 말 없이 키리에의 말을 기다렸다. “키리에, 입니다.” 성을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이다. 세크리티아에서는 성이 없는 평민도 왕궁에서 일을 한다 했으니 그렇게만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체이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성은 없느냐?” 고개 숙인 키리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성은······ 베른입니다.” 체이스의 눈이 아주 잠시 놀란 빛을 띄었다. 그러나 곧 다시 웃는 낯이 된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키리에, 베른. 그것이 네 이름이구나.” “네. 그렇습니다.” 이만 체이스의 앞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음에도, 체이스는 키리에를 놓아주질 않았다. 아무래도 소드마스터인 칼리안이 데리고 있는 아이인데다 무력도 강하다 하니, 관심이 간 듯 했다. “신기한 일이구나. 네가 가진 성은 세크리티아의 왕실에 내려오는 아주 오래된 말이다. 알고 있느냐?” 칼리안은 베른이라는 이름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 알려준 적 없었다. 그저 좋은 의미라는 말만 했을 뿐, 정확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세크리티아 왕실에 내려오는 말은 제가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키리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양신 전쟁이 발생했을 때보다도 훨씬 전에 사용했다던 대륙의 고대 언어, 그것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은 오직 세크리티아 뿐이었다. 그러니 카이리스의 키리에가 그것을 알리는 만무했다. 체이스 역시 키리에가 그 뜻을 알고 있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 입을 열어 설명을 해주었다. “베른. 잊혀지지 않을 영웅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그러니 너에게도 썩 어울리겠구나. 카이리스에서는 의미가 없을지라도, 좋은 뜻이니 기억해두려무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런 뜻이라면. 그 말은 완전히 틀렸으니까요. * * * 앨런은 체이스와 키리에의 대화를 중간에 끊지 못했다. 괜찮겠지 생각해서 그냥 두었던 것인데, 베른이라는 이름까지 언급되는 것을 깨닫고는 뒤늦게 후회를 했다. 결국 키리에의 감사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집무실 문을 연 앨런이, 서둘러 체이스를 불렀다. “바깥 분위기가 이렇게나 화기애애하니, 홀로 듣고 있기가 적적합니다. 어서 드시지요.”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체이스가, 키리에를 보며 짧은 인사를 건넨 뒤 앨런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테일란을 포함한 모든 수행원들을 밖에 둔 채였다. 문이 닫히고, 앨런의 맞은편에 앉은 체이스가 뒤늦은 대답을 했다. “이곳에서 그 말을 듣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대화를 좀 나누느라 늦었습니다.” “듣고 있었습니다.” 곧 앨런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놨다. 전날 마신 술 때문인지 속이 타는 느낌이 든 까닭이다. “커피 좋아하는 것은 여전하군요, 마나실 경.” 세크리티아에서는 자작이고 카이리스에서는 백작인 앨런이었으므로, 무어라 불러야 할지 고민하다 그냥 존칭만 붙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항상 일이 많으니, 이것이 없으면 이제 불안합니다.” “이해합니다. 항상 있던 것이 없으면 불안한 마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한 체이스가 잠시 앨런의 커피잔을 쳐다봤다. 커피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수증기가 흩어지는 모습이 서너 번 쯤 반복되었을 때, 체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항상 없던 것이 생겨나도 불안하더군요.” 그 말이 가진 뜻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던 앨런이 체이스를 쳐다봤다. 아마도 지금 체이스는 앨런을 만나러 온 이유를 말하려는 듯 했다. “잊어서는 안될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내가.” 항상 잊고 지내던 기억이 떠올랐다는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이 먼 타국까지 찾아온 체이스가 앨런을 쳐다봤다. < 제19장. 형님 (6) > 시덥지 않은 생일 축하 인사와 형식적인 감사 인사가 오간 뒤, 르메인이 세 아들을 향해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 내용이 오래 전 함께했던 석찬 때와는 또 달랐다. “칼리안.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궁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은 하였으나, 너무 잦은 것 같구나.” 꼭 흔한 아버지들과 같은 표정을 하며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전날, 평소 밖에 나가는 날이 아님에도 외출을 했던 것에 대해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플란츠. 헤르츠 경은 실력이 뛰어난 자다. 그런 이와 매일 다툼이 있다는 말이 나에게까지 들려서야 되겠느냐.” 뿐만 아니라 아르센과 계속 싸움을 해대는 플란츠에게 이렇게 우려 섞인 소리도 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무려 르메인이 잔소리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는 소리다. 앨런의 잔소리를 하도 듣는 바람에 스스로도 잔소리를 하게 된 모양이었다. 일국의 국왕이 아들들을 앞에 놓고 잔소리를 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때문에, 칼리안은 체이스에 대한 일도 잠시 잊고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옆에 앉아있던 플란츠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 칼리안과 꽤 비슷한 고생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르메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란델을 향해서였다. “조만간 함께 산책이나 하자꾸나. 장미가 많이 피었겠구나.” 하필 장미 얘기다. 란델은 별다른 기색 없이 알겠다는 간단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이어진 대화도 끝이 난 뒤 모두 일어서 나가려는데,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플란츠, 잠깐 있거라.” 따로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으니, 칼리안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지금껏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던 키리에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으려 하는데, 뒤에서 칼리안을 불러세우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 산책이나 하자꾸나.” 이렇게 르메인이 했던 이야기를 똑같이 꺼낸 것은, 란델이었다. * * * - 잊고 있어서는 안될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내가. 체이스가 잊지 말아야 했던, 하지만 잊게 되었던 것. 앨런을 찾아오기까지 두 달이 걸렸으면서, 그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에 또 한번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체이스는 다시 한참동안 말을 골랐다. “이런 얘기를 믿을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시 나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지, 어느새 커피잔에서는 더 이상 김이 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마나실 경이라면, 들어는 주지 않을까 해서.” 때문에 앨런은, 그 속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조금쯤 짐작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지요. 듣겠습니다.” 체이스는 커피에 시선을 둔 그대로 입만 열어 말을 시작했다. “시간의 축이 사라졌다 말한 것을 기억합니까.” 앨런의 예상대로, 시간의 축이 언급되었다. 그래서 앨런은 곧바로 기억을 하고 있다 답할 수 있었고, 체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축이 사라지던 그 날, 그 자리에 내가 있었습니다.” 죽은 베른이 칼리안의 몸을 지니고 눈을 떴던 바로 그 날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앨런은 대답 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생소한 기억들이 하나씩, 하나씩.” 그 말과 함께, 체이스가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생소한 기억들이 떠올랐다는 말이었다. 겪지 않은 일에 대한 기억이 하나씩 머릿속에 새겨질 때, 얼마나 소름돋는 기분을 느꼈는지에 대해서는 덧붙이지 않았다. “믿기 힘든 일이었으니, 처음에는 그저 긴 꿈을 꾼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다, 기억 속의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을 느낀 뒤에는 의심을 했습니다. 아, 물론 몇번인가는 내가 미쳐가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고.” 체이스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상당히 거친 표현이 들어 있었다. 혼자 혼란스러워하던 그때가 생각났는지, 기운 빠진 웃음 소리를 내던 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다 결국은 믿을 수 밖에 없게 됐습니다. 단순한 착각, 혹은 내가 미쳐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겪었던 일을 기억해내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앨런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체이스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눈 앞에서 시간의 축이 사라진 뒤 변화를 겪었음에도, 스스로의 기억이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온전히 믿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터였다. “마치, 앞으로의 일을 보고 온 것처럼.” 앨런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베른과 체이스가 겪었다 말하는 현상이 서로 달랐다. 그러니 체이스는 스스로 시간을 되돌아온 것이 아닐 터였다. 그저 시간의 축이 지워낸 일들을 기억해내고 있을 뿐. 시간의 축이 사라지던 자리에 있던 탓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더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찌됐건 중요한 사실은, 체이스가 이미 사라진 일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는 것에 있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얼만큼을 기억하십니까.” 앨런의 질문에, 체이스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체이스의 말을 들은 앨런이 놀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은 말을 되묻지도 않았다. 단지 확인이 필요한 것에 대해 묻고 있었다. 체이스가 작게 웃었다. “진작 올 걸.” 앨런이 이번 일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혼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안 허탈감 때문에, 체이스가 잠시 그렇게 웃었다. “지난 가을부터 시작된 일이고, 과거의 일들은 거의 다 기억합니다. 앞으로의 일은 때때로 생각 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그 말에, 앨런은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는 질문 하나를 간신히 삼켜 넣었다. 차마, 베른을 기억하느냐는 그 말을 먼저 꺼낼 수 없어서였다. 그것을 본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것 때문에, 아무래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축하 할 일이 하나. 그리고 만날 이가 한 명. 그것이 체이스가 이 곳에 온 목적이었다. “무엇을 확인하고자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답을 모르는 것이 아님에도, 앨런은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체이스가 다시 한번 웃다 대답했다. “아무래도.” 체이스의 말은 잠시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잊지 말아야 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앨런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체이스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내 형제가, 여기에 있는 것 같아서.” 칼리안을 만나러 왔다는 말이었으므로, 앨런이 소리내서 웃었다. 긍정할 수도,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던 탓에 웃었다. 어차피 체이스는 확신하고 있을 테니까. 이미 죽었어야 할 왕자가 저렇게 버젓이 살아서는, 체이스의 기억과 유난히 다른 행보를 걷고 있으니 어찌 모르겠는가? 따라서 앨런은, 불필요한 긍정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혹, 시간의 축으로 살리려 하셨습니까.” 베른을 살리기 위해 시간의 축을 돌렸는지를. 시스파니안으로부터 내용을 들었던 칼리안이 이미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었지만, 직접 답을 듣고자 꺼낸 질문이었다. 체이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것을 빼앗기 위해 일으킨 전쟁, 그리고 지키기 위해 받아들인 전쟁입니다.” 시간의 축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베른이 죽었다. 그런 베른을 살리겠다고 시간의 축을 사용할 만큼, 체이스의 생각이 짧지는 않았다. 시스파니안이 이미 답했던 내용과 같았다. “나는 끝까지 지켰을 뿐. 손 대지 않았습니다.” 체이스 역시, 시간의 축을 지키다 죽었다는 소리였다. 아니. 상황이 그 지경이면 한번 돌려볼 만 하지 않느냐고, 앨런은 그런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 불만과 답답함이 가득해 보이는 앨런의 얼굴 때문에, 체이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화제를 돌렸다. “어제 나를 보았을 때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기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다시 칼리안에 대한 이야기였다. 체이스가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 칼리안에게 이야기하지 말아달라는 소리였다. “잘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체이스 입장에서 칼리안을 위해 하는 말이었으나, 앨런은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한참 뒤에 고개만 끄덕였다. 체이스가 꺼내둔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들으며 당황하고 놀란 탓에 잊은 것이 둘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였다. 칼리안과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늘 꺼내두던 사일런트를 잊었고, 문 밖에 가만히 서 있던 시종이 있음을 잊었다. 따라서, 이번에도 키리에는 다 들었다. * * * 산책이나 하자는 말에,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서 있던 키리에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눈치였으나 일단은 란델과의 일이 먼저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얌전히 란델을 따라 나섰다.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촉박했으므로, 둘은 잠시 아르피아 궁 후원으로 갔다. 한참을 걷도록 란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칼리안은 이번에 또 무언가 들킨 것이 있는지를 심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미 까발려질대로 까발려진 능력 말고는 다른 것이 없었다. ‘아니면 설마, 플란츠와 등 돌린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나.’ 하지만 그 후로도, 란델은 계속하여 말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 이대로 산책이나 하다 돌아가자는 말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자, 칼리안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불편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도 알 수 없을 뿐더러 그간 칼리안을 어떻게 여겨왔는지를 안 이상, 좋은 태도로 란델을 대하기가 힘들었다. “물을 것이 있다.” 칼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란델이 입을 열었다. “레넌 브리센을 찾고자 한다.” 나란히 걷고 있었으므로, 란델이 칼리안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다. 따라서 칼리안은 마음 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서른 명의 신관과 그레이에 이어, 이제는 레넌 브리센이다. 과연 세 가지가 다 란델과 연관 있는 것이 맞기는 한가 싶을 만큼, 서로간의 상관관계가 너무 없었다. “그 자를 왜 저에게 물으십니까.” 칼리안은 이렇게만 말했다. 아마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했던지, 란델의 대답이 곧바로 나왔다. “휘트린 영지의 수익금이 어느 정도인지를, 내가 모르고 있었겠느냐.” 칼리안이 레넌을 치워냈다는 것과, 그 방법을 이미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다르게 해석하자면, 칼리안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는지를 알면서도 그냥 두고 보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두고 본 이유야 한 가지다. 란델에게 해가 될 것이 없었으니까. 가만히 두면 알아서 실리케도 없애고 브리센도 야금야금 줄여주니, 란델이 칼리안을 막을 이유가 없었을 터였다. 아무튼, 란델이 정황을 이미 다 알고 있다 해서 덥썩 물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새 또 들키고 왔느냐며 앨런에게 끝없는 잔소리를 또 들어야 할 터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일단 발을 뺐다. “레넌 브리센의 행방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란델은 칼리안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고 확신하는 듯 했다. 때문에,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을 안다는 것처럼 살짝 눈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이렇게까지 경계할 필요 없는 일이다.” 그 말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야말로 의미 없는 말이었다. 경계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칼리안이 이렇게까지 란델에게 날을 세우게 만든 것은 바로 란델 자신이었으니까. 칼리안은 고개를 돌려 란델의 눈을 쳐다봤다. 그리고 체르밀 궁의 계단을 올라갔던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형님이 만들어 두었던 선을 제가 넘었다 여기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란델은, 그에 대해 별달리 부정하지 않으며 말했다. “브리센 자작의 일은 내 개인적인 사정이다. 확인할 것이 있을 뿐, 자리 싸움과는 관련 없는 일이니 그렇게 날 세우지 말거라.” 란델의 그 말과 함께, 칼리안의 발이 잠시 멈칫했다. - 개인적인. 자리 싸움과 관련 없는. 저 말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오른 까닭이다. 란델은, 자신에게 등을 돌리겠다는 뜻을 명확히 한 칼리안을 굳이 불러내어 레넌의 행방을 물었다. 세자위 싸움과는 관련이 없다지만, 란델에게는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소리였다. 서른 명의 신관을 왜 들여왔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와 레넌을 불러 란델이 확인하고자 할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칼리안은 곧바로 다시 발을 놀렸다. 때문에 란델은 방금 자신이 칼리안에게 무엇을 떠올리게 했는지를 눈치채지 못했다. ‘설마.’ 전 왕비 아이샤의 죽음에 대해 확인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에, 칼리안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란델이 이 일을 알게 되면, 텐실과의 전쟁이 시작될 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것은, 베른의 과거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 제20장. 이번에는 (1) > 플란츠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네가 그 정도의 언행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타국의 왕세자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느냐.” 전날 플란츠가 체이스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전해 들은 르메인이, 생일 축하 인사를 하러 온 플란츠를 따로 남겨놓고 혼을 내기 시작한 탓이다. “체이스 왕세자는 훌륭한 왕의 재목이다. 충분히 보고 배울 점이 많은 이를 그리 대했다 하니, 내가 너를 잘못 보았던 것은 아닌지 참으로 걱정이 많았다.” 1년 전 르메인의 앞에서 프레이야를 욕했을 때 르메인은 플란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질책하는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그 정도의 관심조차 없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르메인이, 실상 아무 상관도 없는 체이스에게 무례를 범했다며 꾸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플란츠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르메인을 이렇게 만든 아우님에게 화풀이를 해야 할지. 아니면, 고맙다 해야 할지. “나라의 크고 작음으로 위와 아래를 정하려 하지 말거라. 그것은 만용이니라.” 자신의 말을 한 귀로 듣고 고스란히 흘리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르메인은 여전히 엄한 표정을 한 채 말을 맺었다. 그런 르메인을 보던 플란츠가 조금 늦은 대답을 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런데 주의하겠다는 대답과는 달리, 플란츠의 말 끝에 웃음기가 있었다. 그것을 느낀 르메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물론 비웃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혼을 내는데 웃는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아직 생각해본 적 없었기 때문에 잠깐 멈칫했을 뿐이다. 당황한 것이 아니다. 정말이다. “그래.” 결국 르메인은 짧은 대답과 함께 다른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어찌 지내느냐.” 실컷 혼낸 것도 모자라, 이제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플란츠가 르메인의 얼굴을 다시 쳐다봤다. 그런 반응에, 르메인이 말을 덧붙였다. “내가 나서지 않는 것이 약이라 하여 따로 찾아 부르거나 물어보지 않고 있었다만, 사실 그 일이 지나간 뒤 걱정을 많이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나서야, 플란츠는 르메인이 무슨 일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가을에 있었던 실리케에 대한 일을 잘 잊고 지내고 있는지를 이제야 묻는 것이다. 그것도, 저렇게 조심스러운 표정을 한 채로. 나서지 말라 한 것 역시 앨런의 조언이었을 것이다. 실리케에게 결국 독을 내린 것이 르메인이었으니, 플란츠의 앞에서 쓸데없이 얼쩡거리지 말라 했을 것이 분명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렇게 대답한 플란츠가 작게 실소했다. 르메인이 이렇게 어려워하는 정도인데 정작 그 일에 가장 크게 관여해놓고는, 이래도 죽을거다 저래도 죽을거다 해가며 걱정인지 참견인지를 계속 해대던 웬 놈이 생각난 탓이었다. 혼냈더니 웃는다. 걱정했다 하니 피식 웃는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아들의 이상한 반응에, 상당히 복잡한 심정이 된 르메인의 표정은 보지 못한 채였다. * * * 르메인을 만나고 나오면 곧바로 말해주려 했다. 란델과 산책을 끝내고 오면 곧바로 말해주려 했다. 때문에 문 밖까지 체이스를 배웅한 앨런이 키리에를 보자마자 곧바로 들어오라 손짓했을 때, 키리에는 정말 난감한 기분을 느꼈다. “다 들었는가?”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얀을 두고 키리에만 집무실로 불러들인 앨런이 물었고, 최근 거짓말이 많이 늘어난 키리에가 시치미를 뗐다. 다만, 상대가 앨런이었다. 하프엘프의 거짓말에 속을 위인이 아니지 않은가. “자네가 들은 것을 왕자님께 말씀드릴 생각인지 묻는 것이네.” 결국 키리에는 못들은 척 하기를 포기하고 대답했다. “제가 들은 것은 곧 왕자님께서도 들으신 것이어야 합니다.” “그 귀는 걸러 듣는 것은 모르는 귀인가?” “모릅니다.” 숨기지도, 거르지도 않고 모조리 이야기하겠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이 우직한 칼잡이를 어찌할꼬. 이렇게 생각한 앨런이 허허 웃었다. “그리고.” 칼리안에게 사실을 전할 생각을 한 것에 대한 다른 이유가 있다는 듯, 키리에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제 이름을 말씀드렸을 때, 세크리티아의 세자께서 많이 놀라셨습니다. 칼리안 왕자님의 과거에 대해 제가 직접 알려드린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키리에는, 자신이 ‘베른’이라는 성을 말해서 체이스가 눈치를 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체이스가 칼리안과 베른을 연관지은 과정은 조금 더 복잡했다. 그리고 그에 있어 키리에가 아주 큰 역할을 한 것은 맞았다. 당연하겠지만, 기억을 찾은 체이스는 처음부터 칼리안과 베른을 함께 생각하지 않았다. 연관짓기는 커녕 베른이 어딘가 살아있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자신이 기억을 찾았을 그 즈음 가장 떠들썩했던 ‘실리케 축출’ 소식과 죽었어야 했을 3왕자가 실리케를 몰아내는 것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뿐이었다. ‘칼리안이 어떻게 살아있을까.’ 모든 것이 자신의 기억과 똑같이 굴러가고 있는 상황에서, 칼리안과 연관된 것들만 틀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되니 자연스럽게 카이리스 3왕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칼리안은 리베른으로 돌아갔어야 할 앨런 마나실을 스승으로 삼았고, 앨런 마나실이 발칸을 만들었다. 심지어 칼리안이 여섯 번째 검이라는 이야기까지 전해졌다. 호기심에서 알아본 내용이 범상치 않았다. 그때부터 체이스는 칼리안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가 지난 후, 칼리안의 시종 한 명이 어떤 도박장에서 한바탕 칼부림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종의 이름도 함께였다. - 키리에. 그때까지만 해도 체이스는 키리에의 성이 무엇인지 몰랐다. 카이리스의 시종들은, 대체로 성을 공개하지 않고 일했으니까. 하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했다. 체이스가 너무나 잘 아는 이름이었다. 베른을 대신해 화살받이가 되어 죽었던 충성스러운 기사가 아닌가. 세크리티아로 와야 할 키리에가, 죽었어야 할 칼리안과 함께 있었다. 이제 체이스는, 하필 그 둘이 함께하게 된 출발점을 알아보게 되었다. - 칼리안 왕자가 ‘어딘가’에서 직접 데려온 아이. 이미 키리에와 도박장을 함께 떠올리던 중이었다. 그랬으니, 조금 더 지난 일을 생각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작 체이스는 알지도 못하는 ‘붉은 고니’라는 이름의 소년 세작이 새 판매점의 암호를 모조리 꿰고 있더라는 보고. 그리고 붉은 고니가 도박장 정보를 알아간 바로 그 날, 도박장에서 사라진 오드아이의 소년. 체이스는,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었다. 카이리스의 왕자이며 소드마스터이자 키리에를 데리고 있는 칼리안이, 바로 붉은 고니일 수 있다. 소드마스터이자 키리에와 막역했던 베른은,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을 관리했었다. ······ 그러니, 어쩌면. 혹시 어쩌면. 이런 사고의 결과로, 체이스는 칼리안을 직접 만나보기 위해 카이리스에 왔다. 자신을 대하는 칼리안의 반응을 보고 예감했다. 키리에를 보았고, 물었다. 그리고 들었다. ‘키리에 베른.’ 맞았다. 칼리안이 바로 베른이었다. 잊어버려서도, 잃어버려서도 안 됐을. 동생이었다. 그렇게 오랜시간, 아주 긴 과정을 거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것을 자신의 한 마디 때문이리라 생각한 키리에가 앨런을 향해 다시 말했다. “저 때문에 벌어진 것이니 더더욱 제가 숨겨서는 안 될 일입니다.” 앨런이 침음을 흘렸다. 물론 거기에 대해 앨런이 왈가왈부 할 입장도 아니었다. 칼리안 본인이 아닌 다른 이의 말을 들을 키리에였으면 칼리안이 제 등 뒤에 놓을 생각도 안했을 테니까. 또 한 편으로는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앨런 역시 이 일을 칼리안에게 숨겨야 할지 고민이 컸던 일이다. 그러니 저 우직한 키리에가 제 소신대로 말을 하도록 두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래도, 지금은 귀족들이 많이 모이는 기간이네. 그들 앞에서 평정심 잃은 모습을 보이시지는 않도록 축제 기간만 보내고 이야기하게.” “제가 고민을 해보겠습니다.” 다 칼리안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거늘, 그나마도 고민해보고 결정하겠단다. 칼리안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네, 밖에 안하는 키리에다. 그리고 앨런은 명색이 칼리안의 스승이며 현명한 대마법사다. 심지어 르메인조차도 앨런의 말이라면 한 수를 접고 들어오는 위인이 아닌가. 그런데 이 놈의 칼잡이는, 곧죽어도 앨런의 말을 바로 듣질 않았다. “그래. 다 그냥 자네 알아서 하게.” 결국은 앨런이 이렇게 한 수를 접고 말았다. 어쩌겠는가? 이게 다 귀 밝은 놈 옆에 두고 마법 안 쓴 놈 잘못인 것을. * * * 란델이 칼리안을 깊이 응시했다. “무리한 부탁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만.” 자칫 전쟁을 부를지도 모를 정보를 알려달라 하고 있으면서,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니. 그런 란델을 향해 ‘레넌을 왜 찾는질 말해주시면 알려드릴지 말지 생각해볼게요’ 따위로 대답을 할 수가 없지 않은가. 때문에 칼리안은 란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다시 대답했다. “모르는 것을 계속 물으셔도, 답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 말과 함께 자리를 피하려는데, 때마침 란델의 시종이 조심스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얀과 키리에 역시 함께 있었다. 광장에 나가야 할 시간이 되어 더 기다리지 못하고 찾아온 듯 했다. 곧 칼리안이 란델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일정이 있으니, 산책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가겠다는 의미로 간단히 목례한 후 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당연하겠지만, 그런 칼리안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안그래도 어제부터 계속 말도 잘 안했는데 더 심해진 것이다. 그것을 본 얀의 표정이 굳었다. 대체 어떤 놈이 우리 꽃 같은 왕자님 심기 건드렸냐고. 라고 할 뻔 하다가, 오늘 칼리안이 만난 이라고는 위대하신 국왕 전하와 그 국왕 전하의 장자이신 1왕자님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얌전히 입을 닫았다. 어느새 옆으로 돌아온 키리에 표정도 그냥저냥 보고 넘기기 어려울 판에 칼리안까지 이러니, 사정 모를 새끼 코끼리는 그저 울고 싶을 뿐이었다. 아무튼 그런 얀의 사정과는 관련 없이,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곤욕이었다. 란델과의 대화가 꽤 길어진 탓에, 칼리안은 제대로 된 고민도 해보기 전에 광장에 불려나가 인사를 마치고 연달아 이어지는 귀족들과의 티 타임에 참석하게 되었던 탓이다. “반갑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도 칼리안이 제 스스로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 낼 짓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 그렇게 생각이 쌓였냐는 듯, 칼리안은 참으로 여유로운 행동과 미소로 귀족들의 인사에 화답했다. 멀리 에반 브리센 후작이 보였지만, 서로 반가울 사이가 아니었으니 간단한 시선만 주고 받았다. 그렇게 자리에 앉은 뒤에는,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아이샤가 독살됐음을 말할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다. 란델에게 그녀의 사망 원인을 알리지 못하는 것은, 칼리안의 입장에서 미안함을 느낄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어차피 피해자도 가해자도 모두 죽은 사람이다. 괜스런 전쟁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 칼리안은 심지어 실리케를 눈 앞에 두고도 참지 않았던가. 때문에 칼리안이 고민하는 것은 조금 달랐다. 레넌 브리센을 꺼내면 안된다. 그레이 브리센이 와서도 안된다. ‘계속 숨겨둬야 하나. 아니면······.’ 죽여야 하나. 아이샤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 불분명한 둘을 어찌 처분해야 할지였다. ‘아무래도 축제 이후 둘을 만나봐야 할 듯 한데.’ 만나보고, 그 입을 열어두어도 될 지를 결정해야겠다고. 그렇게 결론이 날 즈음이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 체이스 듀라한 세크리티아께서 입장하십니다.” 생각지도 못한 기사의 목소리.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체이스가 들어왔다. 칼리안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물론 체이스를 다시 만나게 된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큰 것은, 체이스와 함께 들어온 테일란 때문이었다. 지금 이 곳에는 에반이 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마법으로 오러를 감춘 채였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고, 결국 칼리안은 마법을 해제하기로 결정해야 했다. 대륙의 첫번째 검에게 의심을 받는 것보다는 에반과 정면 충돌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오러는 그대로 감추고 계셔도, 괜찮습니다.” 그 때, 칼리안의 뒤로 걸어온 키리에가 이렇게 말했다. “······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의미를 알아챈 순간, 칼리안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 제20장. 이번에는 (2) > 실로 비인도적이고 비언어적이며 윤리적이지도 않은데다, 그것을 실현하는 것에도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것은 지극히 불완전하여 머리가 아닌 심장에 한껏 휘둘리기도 하는 존재이므로. 이성의 끝자락을 간신히 틀어 쥔 채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 때릴까. 이렇게, 앨런의 마음속에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을 향한 맹목적인 폭력성이 가득 들어앉았다. 두 대도 말고, 그냥 진짜 딱 한 대만. 때려 보면 안되나. “카이리스 중앙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 타국의 왕세자를 대관절 왜 부르셨습니까?” 앨런의 숨결 하나하나에 짙은 한기가 맺혀있는 것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연회장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던 르메인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대화를 나누어보니 그 생각의 깊이가 남다르더군. 나조차도 감탄을 금치 못하였는데 귀족들이라 하여 다르겠나.” 중앙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 체이스를 초대했다. 물론 르메인도 칼리안이 마법으로 무엇을 감추고 다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저질렀다. 그러니까, 체이스 초대하는 것에 신경을 쏟느라, 그 뒤꽁무니에 누가 따라다니는지를 떠올리지 않은 것이다. “왕자들도 함께 하는 자리이니, 견식을 넓히도록 내가 초대하였네. 게다가 그 세자, 초대 자리를 극구 사양하더군.” “극구 사양하는 것을 들어 앉혀 놓으신겁니까?” 그제야 앨런은, 둔하고 눈치 없기로 얀과 쌍벽을 이룰 경쟁자가 바로 르메인이었음을 다시 깨달았다. 하기사 제 아들 죽어가는 것도 모르던 작자였으니 이 정도 쯤이야.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전하.” 르메인이 뭔 소리를 하느냐는 얼굴로 앨런을 쳐다봤다. 생일 축하는 이미 오전에 다 했으면서 뜬금 없이 또 무슨 축하 인사인가 싶었던 까닭이다. 앨런은, 저 혼자 무엇을 생각하고 결론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오늘 전하의 고민거리 하나는 더시겠습니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건지.” 앨런이 요즘 참 많이 참았다. 르메인이 체이스만 안 불러왔어도 누구보다 평화로운 마음으로 축제를 만끽했을 것이다. 그것을 방해받았으니 참고 참았던 입이 결국 열렸다. “오늘 세 왕자 중 한 놈 어디 먼 곳으로 보내버리게 생기셨으니, 다른 둘 중에 누구를 남길지만 결정하시면 되겠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화가 난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로라하는 칼잡이가 넷이나 모인 그 자리에 늙은 마법사는 차마 못 가겠으니, 전하께서는 뒤에 서 있는 저 친구 데리고 다녀오시지요.” 그리고는 저벅저벅 걸어가 집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물론 앨런은 그 정도 상황이라면 키리에가 칼리안에게 사실을 알려주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별 일 없이 잘 넘어갈 수는 있을 터였다. 그저, 하나만 알고 둘은 계속 모르는 르메인이 한번 더 정신을 차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서 그리 말했다.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굴다가는 조만간 뒷통수 맞기 딱 좋겠다 싶어서였다. ‘내로라 하는 칼잡이?’ 일단 칼리안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그 뒤로 슬레이만과 에반이 떠올랐다. 거기까지 생각해낸 르메인이 길게 탄식했다. 앨런이 화를 낸 이유를 그제야 눈치를 챈 것이다. “3왕자를 빨리 불러오게.” 때문에 르메인은, 일단 칼리안부터 꺼내기로 했다. * * * - 알고 계십니다. 칼리안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이 칼리안에게는 하늘을 찢는 천둥이었다. 그럼에도 얼굴 표정,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저, 깍지를 낀 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손이 하얗게 변했을 뿐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칼리안이 짧게 대답했다. “알았어.” 그것은, 그 말을 왜 이제야 전해주었느냐는 질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체이스가 무엇을 안다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란델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고, 플란츠가 이제 막 도착해 자리에 앉은 차였다. 연회장 입구에서 몇몇 안면이 있는 듯한 귀족들과 인사를 나눈 체이스가, 저벅저벅 발 소리를 내며 칼리안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플란츠와 먼저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좋게 말해 가볍다는 것이지, 그냥 서로 고개만 까딱한 정도라 하면 맞을 것이다. 그 후에는, 플란츠를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부드러운 얼굴을 한 채 칼리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또 보게 되는군요, 칼리안 왕자.” 체이스는 아직 칼리안이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를 몰랐다.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고 그 얼굴을 쳐다봤다. 생각해보니 제대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동안 체이스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그리고는 한동안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그럴싸한 미사여구를 붙이려고 저러나, 하는 눈으로 칼리안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곧 칼리안이 짧은 말을 덧붙였다. “참 좋습니다.” 그럼 그렇지. 귀족들은 딱 이런 표정이 됐다. 말주변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언제 누굴 만나든 반갑다는 말 밖에 안하는 3왕자가 아니던가. 그나마 다른 나라 세자라고 조금 더 길게 말했구나, 하는 정도로 여기고 고개를 돌렸다. 체이스가 웃었다. 칼리안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었는지 혹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전날 칼리안이 했던 것과 같은 말로 답을 전해왔다. 그렇게 인사를 주고 받은 체이스와 두 왕자가 자리에 앉으려는데, 연회장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르메인의 시종장, 라울이었다. 안그래도 르메인의 입장이 계속 늦어지고 있었으므로 귀족들의 시선이 다시 쏠렸다. 그리고 라울은, 곧바로 칼리안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말했다. “전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그러더니, 연회장에 앉아있는 귀족들을 보며 조금 큰 목소리로 르메인의 말을 전했다. “전하께서, 먼저 이야기 나누시라 하셨습니다.” 르메인의 생일을 축하하러 모인 자리에 르메인이 늦는다는 소리였다. 이들은 모두 중앙 귀족이었다. 때문에, 만약 작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꽤 많은 곳에서 웅성거림이 들렸을 터였다. 귀족들을 전부 모아두고는 정작 본인이 늦는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말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다들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둥그렇게 삼삼오오 모여앉은대로 저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별 것 아닌 듯 보여도, 그것은 정말 큰 변화였다. 잠시 그런 분위기를 확인한 라울이, 정중한 손짓으로 밖을 가리켜보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만 나가자는 말이었다. 르메인이 부른다 하니 달리 거절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라울을 따라 나섰다. 칼리안이 걸어나가는 모습을 잠시 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맞은편의 체이스를 쳐다봤다. 칼리안이 나갔고 르메인과 란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둥근 원탁에 달랑 둘만 앉아 있던 까닭이다. 그 시선을 느낀 체이스 역시 플란츠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말 없이 서로 쳐다보던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플란츠 왕자는.” 그리고 함께 입을 다물었다. 곧 체이스가 가볍게 손짓을 보였다. 먼저 이야기 하라는 뜻이었다. 플란츠가 사양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또 무슨 일로 오셨는지.” 또 시비였다. 카이리스의 세 왕자 성격들이 천차만별이며 그 중 둘째가 가장 사납다던 세작의 말이 딱 맞는 소리였다. 아무튼 체이스가 하려던 말은 플란츠의 질문에 대한 답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문에 체이스는 본래 하려던 이야기를 그냥 다시 꺼냈다. “플란츠 왕자는,” 그렇게 입을 연 체이스가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드나 봅니다.” 그 말에, 플란츠의 한 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차피 주변이 소란스러워 서로에게만 말이 들리고 있었으니 딱히 말을 숨길 것도 없었다. “그보다는, 의문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체이스는 플란츠가 무슨 의문을 가졌다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얼굴로 플란츠를 쳐다봤다.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어 말을 이어나갔다. “굳이 세자께서 여기까지 직접 오실 일이 무엇일까. 정말 마나실 백작을 보러 온 것은 맞을까, 하는 의문.” 앨런 마나실을 만나기 위해 왔다지만, 정작 체이스는 오늘 아침 아주 잠시동안 앨런을 만났을 뿐이었다. 보름이나 체류하겠다 했다면 그만큼 확인해야 할 것이 많다는 소리임에도 만남이 너무 짧았던 것이다. 체이스가 작게 웃다 대답했다. “맞습니다. 명목상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앨런을 만나겠다는 것은 핑계라는 소리다. 의외로 선선하게 그것을 인정해버린 체이스가 플란츠를 쳐다보며 말했다. “만날 이는 따로 있었고, 잘 만났습니다.” 그것이 어쩐지 칼리안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고, 플란츠는 괜스레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혹시 어쩌면, 체이스도 칼리안과 마찬가지로 남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때문에 플란츠가 살짝 찌푸린 눈으로 체이스를 쳐다보는데,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체이스가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최근 플란츠 왕자께서 발칸의 육성에 꽤 열의를 보이신다 들었습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세작들이 카이리시스에 있는 것인가? 카이리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보아도 될 정도였다. 플란츠가 또 다른 의미의 불쾌감을 담아 대답했다. “세크리티아에 흘러가는 카이리스의 정보가 그 정도로 많을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가 없군요. 전하께서 새 키우는 것을 워낙 좋아하셔서.” 별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꾸한 체이스가, 꽤 의미심장한 얼굴로 아까 꺼냈던 이야기를 다시 언급했다. “그렇게 열의를 가진 발칸, 플란츠 왕자의 힘입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플란츠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타국의 왕세자와 플란츠가 편히 나눌 주제의 말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왜······.” 그렇게 입을 떼던 플란츠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한동안 말 없이 체이스를 노려보았다. 플란츠의 입에서, 본래 하려던 말이 아닌 새로운 말이 나왔다. “내가 뭔 짓을 하긴 했군. 당신은 그걸 알고.” 말투도, 호칭도 모두 바뀌었다. 설마 칼리안이 제 과거를 누구에게 말했을까. 체이스는 이렇게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그런 플란츠의 반응을 보며 조금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아마 칼리안이 얼마나 많은 곳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들키고 다녔는지 안다면, 체이스는 이렇게 여유롭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아직까지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어찌됐건 플란츠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 체이스에게 더 묻지 않았다. 궁금했다면 이미 칼리안에게 물어봤을 것이다. 세렌티가 찾아와서 미래를 알려주겠다 해도 싫어할 마당에, 뭐하러 되돌아온 시간의 일을 알려 하겠는가. “발칸은,” 때문에 플란츠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전날과 마찬가지로 체이스의 눈을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내 동생의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 말에, 체이스가 부드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꼭, 그래야 할 겁니다. 플란츠 왕자.” * * * ‘전하께서 체르밀 궁으로 돌아가 휴식하라 하셨습니다.’ 라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굉장히 허탈해졌다. 기껏 마음 먹고 체이스를 대하고 있었는데 굳이 불러내서는 방에 가서 쉬란다. 무엇을 걱정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는 않았지만 맥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연회장 안에서 두 형님들이 어떤 기싸움을 벌이는지 알았다면 르메인에게 큰 감사함을 느끼며 잘 도망쳤을 테지만, 몰랐으니까. 아무튼 칼리안은, 그냥 걸어서 체르밀까지 가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뒤에서 키리에가 이런 말을 했다. 진작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임을 알아들었으므로,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키리에의 잘못이 아니니까. “아무튼 전하께서 좋은 명분을 주셨으니,” 오후 내내 쉴 수 있을 시간이 생겼으니, 같이 수련장이나 가자고. 칼리안은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나게 된 칼리안이 우뚝 발을 멈췄다. - 명분. “어쩐지 산책을 하자시더니.” 실리케에게 칼리안이 썼던 것과 똑같은 것을, 란델이 쓴 것이다. “아이샤가 어떻게 죽었는지 이미 알고 계셨나보군.” 란델은 아이샤의 죽음이 브리센의 짓임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에대해 칼리안이 안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이샤의 죽음을 떠오르게 할 만한 말로 칼리안의 시선을 레넌에게로 붙들어두려 했던 것이다. 미안함과 고마움의 뜻이라는 좋은 명분으로 보내 온 서른 명의 신관들. 그들이 온 진짜 목적에 대해, 칼리안이 집중해서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바쁜 와중에 갑자기 칼리안을 불러내 산책이나 하자 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레넌은 그냥 미끼인 것이다. 먼 곳에 보이는 장미 정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길게 웃었다. 언젠가 란델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았던 그 때와 똑같은 웃음이었다. “산책 좋아하시네.” < 제20장. 이번에는 (3) > 칼리안의 입술 사이로 조소 가득한 말이 흘러나왔다. “마음 앓는 것도 하지 말라며 이리 마음을 써주시니······.” 체이스가 베른을 기억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참 좋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찰나의 시간조차, 무너질 수 없었다. 지금 칼리안을 끊임없이 쫓아다니는 이가 있지 않은가. 마치, 체이스에 대한 상념과 과거의 일에 얽매여 허우적거리지 못하도록 붙들어두는 것처럼. 때문에 칼리안은, 이것이 마치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란델의 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너는 카이리스의 3왕자라고. 태평하게 형님 하나만 지키면 될 왕제 베른이 아니니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 손에 당장 밀려나게 될 것이라고. “깊은 관심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들을 이 없을 자신의 빈 방에다 대고 한숨과 비아냥이 섞인 감사인사를 건넸다. 그 후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채로 한참을 보낸 뒤에야, 칼리안은 체이스에 대한 감정을 조금 더 미뤄두는 것에 성공했다. 그렇게 온전한 모습으로 간신히 돌아온 칼리안이, 제 손에 들린 쪽지를 다시 한 번 읽었다. - 카이리시스에 입성한 신관 중 ‘말콤 체티쉬’ 없음. 방으로 돌아오니, 멜피르 폴룬이 전해온 마법 서적이 도착해 있었다. 칼리안이 주문하지 않은 것이었다. 돌려보내는 대신 익숙한 손놀림으로 두 번째 책을 펼치니, 에우리아의 쪽지가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에우리아가 멜피르를 통해 칼리안에게 전달할 내용이 있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 없이 그냥 사람을 보내 알려줘도 된다 일렀는데, 에우리아는 어느새 정보원 노릇에 꽤 심취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칼리안의 책장에 의미 모를 마법 서적만 잔뜩 쌓여갔다. 아무튼, 쪽지의 내용은 전날 칼리안이 에우리아에게 알아봐달라 부탁한 것에 대한 답이었다. 라트란 영지에서 칼리안이 구해 주었던, 그리고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의 단전을 회복 불가한 상태로 만들어버린 바로 그 신관에 대한 내용인 것이다. 아무래도 신관 중 안면이 있는 이는 말콤 뿐이었기 때문에 한번 만나보고자 했는데, 이번 사절단 일행에 그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텐실에서는, 돌려받았던 신관을 포함한 서른 명의 신관을 보낸다 했었다. 분명 그렇게 말했다. 칼리안이 소파에 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말이 좀 다른데.” 말콤을 뺀 나머지 신관들은 모두 들어왔는지, 혹은 아닌지. 물론 대답해 줄 이는 그 곳에 없었으므로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칼리안 혼자 생각해내야 할 일이었다. 곧 칼리안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 똑똑. 얀이 들어와 말린 딸기와 민트를 함께 우린 차 한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칼리안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마나실 백작이 연회장에 오지 않았던데, 불러다 드릴까요?” 고민 상담할 상대가 필요하느냐는 말이었다. 얀의 앞에서는 따로 표정 관리를 하지 않았으니,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하고 이틀 내내 걱정만 했을 터였다. 생각해보니 ‘밖’에 있을 때는 대체로 얀과 상의를 했는데, 성인식을 마치고 왕궁에 다시 들어온 뒤에는 얀에게 말해준 것들이 별로 없었다. 그것이 어쩌면 서운했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에, 칼리안이 맞은편 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무슨 일인지 알려주겠다는 뜻이었으므로, 얀이 화색을 띠며 그 앞에 앉았다. “들어봐.”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얀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란델이 서른 명의 신관을 수도로 들여왔어. 목적이 있을텐데 일단 명분은 따로 있어. 란델이 그레이도 부른 것 같지만 그레이는 네 아버지 눈치 보느라 못 오고 있어. 그리고 란델이 오늘 갑자기 나에게 레넌의 행방을 물었어. 아무래도, 란델이 지금 꾸미고 있는 제일 중요한 일은 신관들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나한테 레넌 위치를 알려달라고 한 게 너무 이상하잖아. 그것도 이런 날에. 그래서 내 생각은 이래. 사실 란델이 처음에는 그레이를 불러서 시선을 돌려놓으려고 했던거지. 그런데 그레이가 못 오게 되니 급하게 다른 미끼를 던진거야. 내가, 신관들에게 신경 쓰지 않게 하려고. “그래서 내 질문은 그거야. 신관들은 왜 왔을까.” 얀이 물끄러미 칼리안을 쳐다보다 말했다. “······ 음.” 새끼 코끼리. 이해 못한 것 같다. 사실 특별한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것은 칼리안의 일이니까. 그런데, 가만히 앉은 채 칼리안을 계속 보고 있던 얀이 말했다. “서른 명이나 보낼 수가 없는데요.” 얀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얀의 대답은 보다 근본적인 것에 닿아 있었다. “보낼 수가 없다니?” “이번 봄에, 카이리스에도 병이 돌았었잖습니까?” 방금 그 말은 칼리안도 익히 잘 아는 사실이었다. 칼리안을 따르던 기사 가문 중 한 곳이 전염병 피해를 입었다 해서, 칼리안이 꽤 많은 지원금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것이 생긴 탓이었다. 칼리안이 비로소 조금 펴진 얼굴로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수해가 있었으면, 당연히 병이 돌았을 텐데.” 젖은 음식은 썩는다. 젖은 지붕도, 젖은 나무 벽도, 곰팡이가 슬고 결국은 썩는다. 날은 점점 따뜻해지고, 모든 환경이 썩어가는 상황에서 생긴 전염병은 쉬이 가라앉지도 않는다. 멀쩡한 상태에서도 날이 풀리니 전염병이 돌았는데, 왕국 전체가 물에 잠긴 뒤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꼭 필요한 것은 당연히 신관이다. 그런데 안그래도 신물이 부족하다며 어려움을 겪던 나라에서 카이리스에 신관을 보냈다. 제 나라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옆나라 왕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서른 명이나 되는 신관을 보내는 것은 정말로 미치지 않고서는 하지 못할 짓이다. 그것을 왜 가늠하지 못했을까. 이번에는 칼리안의 생각이 짧았다. “진짜 신관이 아닐 수 있겠구나.” 전부, 혹은 눈속임을 위한 일부를 제외한 이들이 가짜 신관이라면, 말콤이 없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럼 가짜 신관들은 왜 보냈을까?” 평생 똑똑할 것을 모아서 지금 쓴 듯한 얀을 향해 칼리안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얀은, 왜 그런 것을 자신에게 묻고 있느냐는 듯한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저도 모르죠.” 아, 그렇겠구나. 평생 똑똑할 것 모아서 방금 다 썼지, 참. * * * 칼리안에게 호밀쿠키를 선물했던 아이즌 에이프린은, 백작이기는 했으나 사실 많은 이들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이였다. 사실 브리센 후작가와 손 잡지 않은 기사 가문의 가주들은 대부분 그랬다. ‘이를 어찌해야 하나.’ 때문에 아이즌은 지금 다소 난처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지방 귀족의 티 타임에 참석을 하기는 했으나 주변에 친분 있는 귀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티 타임이 진행되는 동안 대화 나눌 상대가 없어서 난처해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아이즌이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 물어볼 만한 이가 없어서였다. - 누구 혹시, 3왕자님 왜 안 오시는지 아는 사람? 이런 질문 말이다. 처음에는 조금 늦나보다 했다. 그런데 나머지 두 왕자와 국왕 르메인까지 입장을 했음에도 칼리안이 오지 않으니 당황스러운 마음이 컸다. 르메인이 간간히 칼리안에 대한 칭찬을 하는 것을 보아 르메인의 눈 밖에 나는 등의 좋지 않은 일 때문에 오지 못한 것도 아닌 듯 했다. 그러니, 칼리안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괜한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계속 문을 흘끔거리며 티 타임을 마치고 나가려는데, 한 시종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스쳐가는 걸음으로 아주 짧은 말을 전하고는 곧바로 멀어졌다. “가장 마지막에 나오십시오.”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아이즌이 구두 끈을 풀었다. 저 시종의 말은 칼리안의 전언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함께 온 하인이 풀린 구두 끈을 얼른 묶어주려 했으나, 아이즌은 그것을 거절한 채 먼저 연회장 밖으로 나가라 말했다. 그렇게 허리를 숙인 채 구두 끈 묶기에 열중하고 있을 즈음. 뚜벅뚜벅, 하는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야.” 아이즌의 고개가 움찔했다. 하늘 아래 홀로 고고하다 말하는 것 같은 저 낮은 목소리. 칼리안의 것이 아니었다. 아이즌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은대로, 당장 죽어도 여한 없다는 듯한 표정의 플란츠가 앞에 서 있었다. ‘하필 플란츠 왕자라니.’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는데 플란츠를 만나게 되었다. 하필이면, 저를 살린 칼리안을 배신한 바로 그 2왕자가 아닌가. 칼리안 왕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한 아이즌이, 적당한 답을 전했다. “구두 끈을 묶는 것에 익숙치가 않아서 지체하였습니다, 왕자님.” 그 말을 들은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고개도 숙이지 않은 채 시선만 내려 아이즌의 구두를 쳐다본 플란츠가, 다시 아이즌을 쳐다봤다. “헛소리 말고.” 그 모습을 본 아이즌이 다시 조금 더 놀랐다. 싹퉁머리 없는 말버릇 때문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는 세상 어떤 것에도 미련없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더니, 어느새 사냥을 앞둔 매의 눈이 되어서는 아이즌을 쳐다보고 있던 까닭이다. 플란츠의 목소리가 다시 아이즌의 귀를 파고들었다. “내 아우님. 왜 찾냐고.” 아이즌 역시 아둔한 이는 아니었다. 때문에 아이즌은 그 순간 몇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조금 전 시종이 전달한 말은 칼리안이 아니라 플란츠의 전언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 자신이 칼리안을 찾고 있었음을 플란츠가 정확히 눈치챘다는 것. 또 어쩌면. 칼리안과 플란츠가 적대 관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것도. 아무튼 생각에 깊이 잠긴 아이즌이 계속 말을 삼가고 있자, 플란츠는 다시 나른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잘 안 믿네.” 플란츠 왕자는 머리 꼬리 없이 말하는 것이 주특기라더니 딱 맞는 소리였다. 지금 플란츠는, 칼리안을 찾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도 설명해주지 않고, 칼리안과 사실은 무슨 관계인지도 말해주지 않고, 그저 칼리안을 왜 찾는지만 묻더니 자신을 믿지 않는다며 질책을 한 것이다. 세상에 이런 고약한 언변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온화한 카리스마를 지닌 칼리안과는 영 딴판인 플란츠와의 대면에 채 적응도 하지 못했는데, 플란츠는 기다리지도 않고 계속 말을 꺼냈다. “발칸에 싸움 좋아하는 정신 나간 마법사가 하나 있는데, 내일 쯤 그대와 한번 겨뤄봐도 좋겠군.” 그리고는 더 볼 일 없다는 듯 연회장 문을 향해 발을 옮기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하필 내 아우님이 내일 구경을 오겠다 했으니.” 본래 내일은 사신들과 함께 하는 일정이 있었다. 그러니 그 일정에 칼리안이 참석할 리 없었다. 체이스와 함께 다니는 기사 테일란을 의식한 르메인이, 분명 칼리안의 동석을 제외시킬테니까. 그러니 그때 칼리안과 아이즌이 만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플란츠가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그제야 플란츠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아이즌이, 걸어나가는 2왕자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플란츠 왕자님.” 물론 플란츠는 그런 것에 화답할 성격이 아니었다. * * * 저녁의 석찬까지 아주 잠시간의 시간이 있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피곤해진 얼굴을 한 채 제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 이후의 일정에 대한 시종들의 회의가 있다기에, 플란츠는 레릭을 보내고 혼자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문 앞을 서성이는 은발의 시녀를 보게 됐다.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히나가 플란츠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플란츠의 방에. 고양이는 자랐고 문틈은 늘어나지 않았는데, 놈은 여전히 자유자재로 드나들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족속이 아닌가. “또 왔나.” 히나를 향해 또 왔느냐는 질문은 아니었다. 고양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 죄송합니다. “뭐가.” 고양이가 드나드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때문에 대충 대꾸하고 넘긴 플란츠가 방문을 열었다. - 쾅! 그리고 그냥 닫았다. 안에 뭔가 있었다. 히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봤고, 플란츠는 잠시 이 곳이 4층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히나를 보며 말했다. “두고 가.” 고양이 그냥 두고 가라는 소리였다. 어차피 왕궁의 일이 바빴던 터라서, 고양이를 맡아주겠다 하니 감사할 일이었다. 때문에 히나는 웃으며 다시 인사를 했다. - 감사합니다, 좋은, 왕자님. 여전히 저 ‘좋은’ 이라는 수화를 배우지 못한 플란츠였다. 도통 알려주질 않는 것이다. 이번에도 가르쳐 줄 생각은 없었던 히나는 얼른 인사하고 뒤돌아 갔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플란츠가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기가.” 방 안의 소파 위에는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있었다. 그리고 소파와 고양이 사이에 칼리안이 있었다. “내 방인 줄 알았는데.” 보통 어떤 방에 고양이와 고양이 주인이 있으면, 그 방은 고양이 주인의 방이 아니던가? 때문에 플란츠가 이 곳이 4층이 맞는지를 확인했던 터였다. 주인도 없는 방에 멋대로 들어온 한 명과 한 마리를 보며 플란츠가 짜증 섞인 소리를 냈고, 칼리안이 씩 웃었다. 그리고는 멀리 환하게 불을 밝힌, 그리하여 한밤에 홀로 빛나는 보석 같은 지그프리드 관을 가리켜보이며 뜬금 없는 말을 꺼냈다. “오늘 석찬에 저와 함께 드시죠.” 설명 따위 없어도 그 의미를 알아듣는 것은 쉬웠다. 두 왕자가 다시 손을 잡았음을 알리자는 소리가 아닌가. 플란츠가 또 무슨 꿍꿍이냐는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봤고, 칼리안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제가 어디 휘둘리는 건 질색이라.” 30인의 신관에 대해 칼리안이 신경쓰지 못하도록 란델이 얕은 수를 썼으니, 칼리안도 똑같이 되갚아 줄 생각인 것이다. 30인의 가짜 신관으로 뭘 꾸몄든 상관 없다. 칼리안과 플란츠의 동맹에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 제20장. 이번에는 (4) (수정) > 찬란히도 아름다운 지그프리드 관. 대륙에서 가장 화려하다 칭송받는, 카이리스 왕궁의 대연회장. 크리스털과 백금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그곳에 귀족들이 모여 갖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왕국의 미래를 점쳐보는 말, 자식을 걱정하는 말, 지식을 뽐내기 위한 말, 제 안위를 도모하는 말, 말, 말. 세상이 뒤집혀도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이런 말들이 만약 거짓말처럼 일순간에 사라진다면, 그 이유가 될 만한 것은 단 하나였다. - 칼리안. 항상 그래왔듯,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다. 이 셋째 왕자가 오늘은 무엇을 입었는지, 어떤 장신구를 했는지,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할지.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와 함께 있을지.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지그프리드 관에 모여 있던 모두가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아니, 말을 잃은 것에서 모자라 하나같이 경악한 얼굴로 연회장의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검붉은 재킷을 입고 금사로 수를 놓은 검은 망토를 걸친, 실로 인상적인 칼리안의 예복 차림 때문이 아니었다. 보란듯이 다시 착용한 셔츠 핀의 루비 펜던트 때문도 아니었다. ‘플란츠 룬 카이리스 왕자님과,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 입장하십니다.’ 기사의 외침을 뒤로 하고 칼리안과 함께 들어온 플란츠 때문이었다. 둘이 다시금 한 편에 선 것이다! 그리하여, 좌중을 압도하며 들어오는 두 왕자를 본 귀족들이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그런 둘을 조용히 바라보던 란델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체르밀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 없다는 듯 옹기종기 모여앉아 평화로운 한 때를 보내는 세 명의 사람이 있었다. “잘 들어보게. 집중하고.” 완벽한 침묵에 잠긴 연회장의 한 구석탱이에서, 그들 중 한 명이 이렇게 소근거렸다. 바로, 남들 눈에 띄지 않을 곳에 일찌감치부터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아르센이었다. 그런 아르센의 말이 향한 곳에는 키리에가, 또 그 옆에는 얀이 있었다. 아무튼 무언가를 잘 들어보라는 아르센의 말에, ‘이런 곳에 쓰라는 귀가 아닌데’ 하는 표정이 된 키리에가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곧 칼리안과 플란츠가 자리로 가 앉자, 귀족들의 입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동안 그 소리를 듣던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헤르츠 경.” 키리에가 제 이름을 부르자, 그것 보라는 표정이 된 아르센이 얀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나, 키리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졌습니다.” 아르센이 이겨서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져서 불렀다는 소리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단 얀이 반대로 아르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 봐요. 우리 왕자님한테 아무도 그런 말 못한다니까요.” 쉽게 말해 지금 둘은, 내기를 했다. 칼리안의 어머니를 독살하고 칼리안도 살해하려 한 실리케의 아들 플란츠. 그리고, 그런 실리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칼리안. 상황만 놓고 보면, 원수도 이런 상 원수가 따로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안이 플란츠를 도우며 동맹을 맺었고, 잘 알려진대로 플란츠가 칼리안의 뒷통수를 후려치면서 멀어졌다. 그런데 오늘 또 다시 사이 좋게 입장을 했다. 그랬으니, 내막을 모를 귀족들이 이런 결정을 내린 칼리안을 보며 무슨 평가를 할까. 이것을 두고 얀과 아르센의 의견이 갈려 돈을 건 것이다.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처음으로 나올 말이 무엇일지를. “우리 왕자님을 호구라고 부를 간 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내기에서 이긴 얀이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자, 어딘가 억울하다는 표정이 된 아르센이 그럴 리가 없다는 눈으로 키리에를 보며 물었다. “정말로, 왕자님께서 배포가 크시다 했다는 말인가?” 얀은 귀족들이 칼리안의 배포를 칭찬하리라 했다. 그리고 아르센은, 이 대륙에 칼리안만한 호구가 없다 할 것이라 했다. 배신하고 돌아선 형을 다시 받아 준 꼴이니 분명 그리 말할 것이라고. 헌데 틀렸단다. 아르센은 내기에서 지기는 했으나 꽤 기꺼운 얼굴이 되었다. “그래도 아주 잘 된 일이네.” 그것이 칼리안의 능력에 대한 인정이든, 혹은 두려움이든. 이유야 어찌됐건 이제 공적인 자리에서 칼리안을 욕하는 이들이 사라질 정도의 위치에는 올랐다는 소리였으니까. 그것은, 그저 인기가 좋은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궤도였다. 아르센이 싱긋 웃었다. 평생 모실 칼리안이 인정을 받고 있으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그 좋은 기분에, 칼리안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일을 해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내기로 걸었던 은화 다섯 개를 주지 않은 채였다. * * * 아들들이 하나같이 똑똑했다. 처세에 능할 뿐 아니라 정치적인 행동도 곧잘 했다. 일반적인 부모라면야 당연히 환영할 일이겠으나, 르메인에게는 양날의 검과 같이 느껴졌다. - 탁. 르메인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반을 마시고 내려놨다. 본래 르메인의 테이블에는 슬레이만과 에반 브리센 후작, 그리고 앨런이 함께 앉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슬레이만은 그냥 안왔고, 에반은 슬레이만이 보기 싫어서 안 왔다. 물론 슬레이만과 에반은 불참을 미리 알렸다. 때문에 르메인은 빈 자리에 누굴 채울지 생각해보다가, 그냥 비워두라 일렀었다. 둘이 안오더라도 자리를 채울만한 한 명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르메인이 혼자 앉아 궁상을 떨고 있는 이유는, 멋대로 안오고 있는 앨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쓸데 없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 오늘 연회장에, 플란츠 왕자님과 칼리안 왕자님께서 함께 들어왔다 합니다. 조금 전 연회장에 도착한 르메인은, 시종장 라울로부터 이런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르메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었다. 칼리안과 플란츠가 거짓으로 등을 돌렸던 사실은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번에 그 반대의 행보를 보인 것이 란델을 견제할 목적이라는 것 역시 잘 알았다. 그러니 둘의 행동이 못마땅해서 인상이 써진 것은 아니었다. ‘과연 란델이 순순히 물러나겠는가.’ 이런 생각이 떠올랐던 탓이다. 당연하겠지만, 르메인은 세 아들을 모두 아꼈다. 하지만 왕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의 잣대로 정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므로 란델은 아니었다. 죽어가는 플란츠를 그대로 버려두고 빌헬름 관에서 나왔던 그 날. 란델은 스스로 왕의 재목이 아님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그런 란델이 혹시라도 벌써부터 다른 둘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도 되고, 그렇다고 나서서 세자위를 내릴 수도 없으니.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왕이어야 할 르메인은 애가 탈 밖에. 아무튼 그런 이유로 잠시 혼자 앉아 있으려니, 온갖 상념이 계속 머리를 들이밀었다. 때문에 조금 어두운 얼굴로 짧은 한숨을 쉴 때. - 드르륵! 르메인 곁으로 누군가 걸어와 털썩 하고 앉았다. “왕자님들 저리 구는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매번 그렇게 오늘 내일 할 상으로 계실겁니까?” 앨런 마나실의 것으로 배정된 자리였으므로, 앉은 이도 당연히 앨런이었다. 사실 자리가 아니었어도 저런 말을 꺼낼 수 있는 이는 앨런밖에 없었다. 낮에 그렇게 화를 내고 나갔던 앨런이었으나, 화를 낸 사람도 화를 일으킨 사람도 그런 것에 오래 신경을 두는 편이 아니었다. 때문에 르메인은, 낮의 일에 대해 언급하는 대신 그냥 자연스러운 대답을 꺼내놓았다. “그것이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어야지.” 그 말에,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뱀 같은 데블란 밑에서 어떻게 체이스 세자가 났는지를 궁금해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걱정 많고 둔하고 생각도 짧은데 손까지 많이 가는 르메인 밑에서 저런 아들들이 어떻게 났는지, 그것부터가 난제였다. 그 말에 피식 웃은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것이 참 신기해지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 왕자들의 일에 신경쓰지 말라는 말은 이미 여러 번 한 앨런이었으므로, 그에 대해 더이상 언급하지 않고 다른 화제를 꺼내들었다. “체이스 세자가 이 곳에 오는 길에 이상한 것을 보았다 하더군요.” “이상한 것이라니?” 르메인의 질문에, 앨런이 물을 한 잔 쭉 들이키고는 입을 열었다. “텐실의 신관 서른 명을 보았다는데, 혹시 그것도 전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까?” 어쩐지 또 한 소리 들을 듯한 기분이 무럭무럭 들었으나, 그리 한 것을 두고 안 했다 할 수도 없을 일이었다. 때문에 르메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랬지. 내가 허락했네. 얼마전에 칼리안도 그것을 묻더니 백작도 묻는군.” 칼리안이 이미 그 일을 아는 줄은 몰랐으므로, 앨런이 잠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갑자기 칼리안과 플란츠가 함께 연회장에 들어온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체이스 세자의 말로는 그들이 아마도 가짜 신관일 것이라 했습니다. 전하께 직접 이야기하자니 이 나라에 참견을 하는 것으로 여기실까 우려된다며 그리 말하더군요.” 앨런의 말대로였다. 카이리시스로 오는 길에 서른 명의 신관을 보았을 때 곧바로 그들이 가짜임을 파악한 체이스였다. 다만 이것을 국왕에게 직접 전하기에는 자신의 위치가 애매하여 앨런에게 전해달라 했던 터였다. “이것을 칼리안 왕자님도 알고 있었다면, 전하의 두 아드님이 갑자기 함께 나타난 것도 그 일과 관련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르메인이 다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네. 나도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 그렇게 대답한 르메인이, 란델의 빈 자리를 한참동안 쳐다봤다. * * * 석찬이 끝나고, 지그프리드 관에도 불이 꺼졌다. 그렇게 밤이 가고 다음 날이 되었다. 플란츠가 생각한대로, 르메인은 이번 해에도 사신들과의 일정에 왕자들을 동석시키지 않았다. 작년에는 술 마시는 플란츠 때문에, 그리고 올해에는 오러를 숨겨야 하는 칼리안 때문에. 체이스가 이미 내용을 알고 있으니 칼리안이 앞에 나서도 무관했으나, 그것을 르메인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얌전히 르메인의 결정에 따랐다. ‘아우님을 찾는 놈이 하나 있던데.’ 그리고 플란츠가 친절하게 잡아 준 약속에 따라, 빌헬름 관에 마련된 아르센의 집무실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다.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이었다. 꽤 오랫동안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이즌은 칼리안을 보자마자 아주 반색하며 예를 올렸다. “칼리안 왕자님을 뵙습니다.” 사실 전날의 석찬에서도 칼리안을 보았으나,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터였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한 칼리안이, 아이즌을 보며 물었다. “나를 만나고자 청했다 들었습니다.” 플란츠였다면 분명, ‘뭔데’ 혹은 ‘뭐야’ 정도로 말을 했을 터였다. 때문에 아이즌은, 이렇게 건네오는 칼리안의 말에 매우 큰 감사함을 느꼈다. “네, 왕자님. 돌려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뵙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한 아이즌이 내민 것은, 지난 번에 칼리안이 지급했던 금액의 남은 돈이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허탈한 듯 웃으며 물었다. “이것을 돌려주려 온 겁니까.” 자신을 찾았다기에는 지나치게 별 것 아닌 이유였다. 굳이 돈을 돌려주고자 했다면, 에우리아를 통해서도 충분했을 일이니까. “네, 왕자님. 그리고······.” 때문에 칼리안은 이렇게 이어진 아이즌의 말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 되었다. 다행히, 돈을 돌려주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곧 아이즌이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직접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 말만으로도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기사들의 준비가 되었다는 말일 터였다. 아이즌의 말이 이어졌다. “왕궁의 기사단을 대체할 정도로는 충분할겁니다.” 기사단 카렌과 라온을 대체할 만큼의 수. 물론 칼리안이 최종적으로 목표한 것은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기사들이었다. 다만 지금 아이즌이 말한 수의 기사들이라 하더라도 상당히 빠른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칼리안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당장은 다른 문제가 있어서 곧바로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날이 되면 연락하겠습니다.” “네, 왕자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아이즌이 칼리안에게 예를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칼리안은, 잠시 눈을 내리뜬 채 무언가를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란델과 브리센. 과연 어느 쪽에 먼저 검을 드리우게 될 지를. < 제20장. 이번에는 (5) > 칼리안은 무릎에 팔꿈치를 댄 채로 턱을 괴고 있었다. 턱을 괴지 않은 손의 긴 손가락 끝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 톡, 톡, 톡. 아르센의 집무실은 참 단출했다. 그 흔한 그림 하나, 화분 하나 없었다. 책상과 의자, 그리고 소파와 테이블이 전부였다. 그런 것에 비해 집무실 크기는 또 상당히 큰 편이라, 작게 말하는 소리도 꽤 크게 울리는 곳이었다. 덕분에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의 끝에도 작은 울림이 있었으나, 칼리안은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칼리안은 아르센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기다리면서, 란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칼리안이 실소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란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찰 날이 이렇게 빨리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이유를 알기 어려울 일은 아니었다. 그저 칼리안이 그리 중요하게 따져보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다. 칼리안보다 세 살이 많은 란델은 이제 열 여덟이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남지 않았다. 그러니, 그 전에는 결정이 될 터였다. 자리에서 밀려나 카이리시스를 떠나야 할지. 세자가 되어 왕궁에 계속 있을지. ‘혹은, 죽게 될지.’ 그런 이유로, 란델의 움직임에 대해 이해 아닌 이해를 해주기로 한 칼리안이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 - 똑똑. 그 때 집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아르센이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와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는 그의 손에는 두세 장 정도 되어 보이는 서류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 눈으로 쳐다보니, 아르센은 손에 든 것을 칼리안에게 내밀며 대답했다. “군단장님께서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앨런이 시킨 일이라는 소리였다. 받아 보니, 카이리스로 보내겠다며 텐실에서 전달해 온 신관 명단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전에 카이리스에 머무르던 신관들의 정보였다. 앨런이 줬다지만, 분명 르메인이 건넨 것일 터였다. 두 명단을 양쪽에 두고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기존에 있던 신관들 모두가 지금 오기로 한 신관 명단에 빠짐 없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말콤 체티쉬 역시, 이번에 방문하기로 한 신관의 명단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없었다는 건데.” 마법사들의 정보 수집 방법은, 마법사답지 않게 아주 많이 무식한 면이 있었다. 말콤이라는 신관이 실제로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몇몇 마법사가 그들 주변에 숨어 있었을 것이 뻔했다. 무슨 방법을 썼든, 서른 명이 서로를 부르는 것을 하나하나 훔쳐 들었을 터였다. 그렇게 그들 중 누구도 말콤이라 불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리라. 그러니 에우리아의 정보가 더 정확하다. “하마터면 그냥 넘어갈 뻔했네요.” 사실 이상하다는 것만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이런 방법을 쓰지도 않았을 터였다. 곧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다시 아르센을 쳐다봤다. 서류는 앨런이 전해달라 한 것이었고, 칼리안이 아르센에게 지시한 것은 따로 있었다. 지금 아르센의 눈 밑이 또 시커멓게 변한 것과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네, 왕자님. 브리센 후작의 집을 밤새 지켜봤습니다만, 특별히 사람이 드나들지는 않았습니다.” 칼리안이 플란츠와 손을 잡았으니, 란델이 에반에게 손을 뻗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석찬이 끝난 뒤 에우리아를 바로 만날 수가 없었던 탓에, 급한대로 빌헬름 관에 있던 아르센에게 부탁을 했던 칼리안이었다. 그러니 지금 쯤이면 에우리아의 사람들이 후작의 집 근처에 꼭꼭 숨어 드나드는 이들을 체크하고 있을 터였다. “신관들이 가짜인 것은 확실하고, 브리센 후작과 만나는 것 같은 기미는 없고.”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며 생각을 정리해 낸 칼리안이, 아르센을 보며 다시 말했다. “전하께 부탁드릴 것이 있다는 말 좀 전해주세요.” “네, 왕자님. 어떻게 전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란델 형님이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있는지, 그것을 물어봐 주셨으면 좋겠다고요.” “지금 말씀이십니까?” 아르센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플란츠와 투닥거리며 지내기 시작한 뒤로, 쓸데 없이 정중하던 아르센의 말투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저 질문은 훨씬 길게 이어졌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베른을 공격했을 당시의 아르센은 반말을 쓰고 있었다. 혹시 그 역시 플란츠와 연관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든 그런 생각에,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아무튼 ‘지금’ 해야 할지를 묻는 말을 시간에 대한 질문으로 알아들은 칼리안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아직 특별한 일정이 시작되지 않을 시간이니, 전하께서도 충분히 이야기 나누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칼리안이 무언가를 오해했음을 깨달은 아르센이 다시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아직 왕자님께서 란델 왕자님의 의중을 잘 모르시는 상황이기 때문에 여쭤보았습니다.” 이 쪽에서 이상함을 느꼈다는 것을 란델에게 알리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느냐는 소리였다는 말이다. “아, 내가 잘못 알아들었네요. 그 신관들 정체 말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곧 칼리안의 얼굴에 플란츠를 닮은 웃음이 걸렸다. 란델의 의도를 대충 파악해 두었다는 뜻을 담은 비웃음이었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질색하는 표정을 했다. 플란츠가 종종 칼리안을 만나더니, 애한테 이상한 것을 가르쳐놨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아르센의 속내를 알 리 없을 칼리안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그리고는 그것을 하나씩 접으며 설명했다. “의외로 진짜 신관일 수도 있고. 세작일 수도 있고. 자객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거기까지 말한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르센에게 말했다. “셋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속 편하겠네요.” 사실 말을 숨긴 네 번째는 조금 억지를 부려 떠올려 본 것이었으니 굳이 아르센에게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아무튼 그들을 데리고 뭔 짓을 꾸미려는지, 내 추측만으로는 범위를 더 좁히기가 어려워서요. 그냥 직접 알려주게 만들려고 합니다.” 또 덫을 놓겠다는 소리였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것이 칼리안이 놓은 덫에 뭐가 걸리는지 보는 것이 아니던가. 때문에 아르센의 눈에 흥미로운 기색이 가득 들어앉았다. “손자도 잘 맡아 주고, 다이아몬드도 사 주고, 소금도 보내줬는데. 고마움을 이런 식으로 갚으려는 것을 보고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아르센이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칼리안이 언급하는 것은 텐실의 국왕이었다. 란델이 아닌 것이다. 아르센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왕자님······.” 텐실을 잡으시려는 겁니까. 그런 의미였으므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나 전쟁 싫어해요. 그래서 이번에는 되도록 피할 생각이고.” 순간 그 말이 아르센에게는, 텐실을 못 잡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싫어서 안 잡는다는 소리로 들렸다. 하긴. 칼리안이니까. 큰 덫 놓는 일이 조금 복잡할 뿐. 칼리안이 지금 고작 왕자의 위치에 있다 해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런 생각에 빠져있느라, 아르센은 칼리안이 말한 ‘이번에는’ 전쟁을 피해 볼 생각이라는 말에 별 의미를 두지 못하고 넘어갔다. “주제 모르고 자꾸 덤비면 제 핏줄 어찌 될지 생각해보라고. 경고만 해주는거죠.”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의 표정을 본 아르센은, 칼리안 따까리나 하면서 평생을 살기로 한 것이 얼마나 잘한 결정이었는지를 잠시 깨달았다. 그렇게 말을 맺은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야 할 곳과, 그 곳에 데려갈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칼리안이 짧게 입을 열었다. “아차.”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선 칼리안이 다시 몸을 돌려 아르센을 봤다. 그리고 꽤 의미심장한 얼굴로 농담과 우려가 섞인 말을 했다. “플란츠 형님 검은 부수지 마요. 귀한 거라서.” 그 말을 들은 아르센이 살짝 떫은 표정으로 그리하겠다 답했다. 안그래도 영 부수기 힘들게 생겼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연구하던 중이었다는 말은, 절대 꺼내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면서. “그리고.” 그런 아르센을 본 칼리안이 씩 웃으며 한 가지 말을 더했다. “내 새끼 코끼리가 경에게 못 받은 것이 있다고 징징대던데.” ······ 에이씨. 아르센이 느릿느릿 돈 주머니를 꺼냈다. * * * 칼리안은 본래 검은 옷을 좋아했다. 옛 칼리안은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그리고 베른은 피가 튀어도 티가 잘 나지 않아서였다. 지금도 칼리안은 그랬다. 검은 옷을 즐겨 입었다. 플란츠는, 원래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원수같은 형님이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까지 칼리안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플란츠가 언젠가부터 갑자기 밝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것도, 칼리안은 몰랐었다. 그것을 이제 알았다. 정확히는 그 이유를 이제 알았다. 그래서, 플란츠의 시종 레릭이 방문을 닫자마자 칼리안의 웃음보가 터졌다. 한참을 웃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름표 바꿔드리겠습니다. 제 이름 빼고, 형님 것으로.” 그리고는, 플란츠의 품에 안긴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를 가리켜보였다. 플란츠는 뭐 어쩌라는 것이냐는 표정이 되어 대꾸했다. “짖지 말고.” 아마 플란츠 앞에서 그렇게 소리 내서 웃을 위인도, 이런 말에 전혀 신경쓰지 않을 위인도 칼리안 외에는 없을 터였다. 곧 고양이를 내려놓은 플란츠가 칼리안을 보며 물었다. “또 왜.” 왜 또 왔나. 그 잘난 시종들은 어디 두고 직접 와서 웃고 난리냐. 아무튼 처 웃지 말고 왜 왔는지 말하고 빨리 꺼져라. 등등이 함축된 말이었다. “잠깐 저와 가실 곳이 있습니다.” 플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석찬에 한 번 같이 갔으면 됐지 또 어디를 가자는 말인가. 그런 플란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으므로,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브리센 후작 만나러 갑니다. 말 타고요.” 두 왕자가, 매우 눈에 띄어가며 브리센 후작의 저택에 간다는 소리였다. 완전히 보여주기 식의 행차였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플란츠가 잠시 말 없이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칼리안의 속내를 짚어냈다. “속이는 건가.” 역시 플란츠는 똑똑하다. 칼리안이 웃었다. 두 왕자가 브리센 후작을 만나러 간다. 그런데 보란듯이 드러내놓고 움직이는 것이다. 지나치게 눈에 뻔한 칼리안의 행동을 보면, 란델은 분명 이렇게 생각할 터였다. -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하는 행동이다. 칼리안과 플란츠의 행동이 꾸며낸 것임을 깨닫는다면, 어제 석찬에 둘이 함께 왔던 것도 혹시 거짓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할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르메인이 란델을 불러 신관에 대해 묻는다. 그리하면 란델은, 칼리안이 신관들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플란츠와는 일부러 손을 잡은 척 연기를 하고 있다 생각을 하게 될 터였다. 그렇게 해둔 뒤, 오늘 밤 란델의 방에 찾아 갈 생각이었다. 하루종일 칼리안에 대해 아주 많은 생각을 했을 란델에게, 이렇게 말을 할 생각이었다. 나랑 손을 잡고 브리센부터 치자고. 그럼 네가 숨긴 것에 대해 내가 알아낸 것들은 전부 입을 다물겠다고. 란델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를 손 위에 두고 싶어 안달하시는 분이니.” < 제20장. 이번에는 (6) > 아무래도 이번 생애 르메인의 사인은 심장 쇠약이 아닐까.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있다 해도, 이쯤 되면 르메인의 심장에 뭐가됐든 문제가 하나 쯤은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앨런은 매우 재밌는 구경거리 하나를 찾았다는 표정으로 딸기 파이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그것을 본 르메인이 불만 어린 소리를 냈다. “지금 먹을 것이 입에 들어가는가.” 앨런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단 것 싫어하는 르메인의 집무실에 항상 설탕 가득한 간식이 준비되어 있는 것은, 시시 때때로 찾아와서는 달달한 것만 골라 먹는 한 마법사 때문이었다. 그러니, 올 때마다 열심히 집어먹어 주는 것이 그 마법사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이런 앨런의 태평한 마음과는 달리 르메인의 심기는 오늘도 편치 않았다. 이래서야 탄신일 기념 축제의 주인공이 맞을까 싶을 만큼, 얼굴이 또 곯아 있는 것이다. 조금 전 라울이 전해주고 나간 소식 때문이었다. 아들 중 둘이 왕궁 밖으로 나갔다. 호위나 수행원도 없이 달랑 둘이서 말을 타고 나갔다. 맛있다는 듯 감탄한 눈으로 남은 파이 조각을 쳐다보던 앨런은, 마치 이 파이 어디서 샀냐고 묻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브리센 후작이 그렇게 생각이 짧지는 않으니, 왕자님들께서 어디 한 군데씩 잃어버리고 올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 마시지요.” 어디 한 군데를 잃어버린다니. 정말 저 입을 어찌해야 하느냔 말이다. 게다가 앨런은 르메인이 무엇을 걱정하는지에 대해서도 잘못 짚었다. 때문에 르메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내가 걱정하는 것은.” 둘째는 검을 곧잘 다뤘다. 그리고 셋째는, 아마 대사막에 던져놔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니 르메인이 걱정하는 것은 두 아들의 안전이 아니었다. “브리센 후작 쪽이네.” 성격 사나운 둘째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셋째가 좀. 특히 브리센을 앞에 둔 셋째는, 좀 그랬다. 브리센만 만났다 하면 뭐든 하나는 부숴놓던 칼리안이 직접 에반을 만나러 갔다 하니, 어찌 걱정이 안되겠는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싸울 때가 아닌 것은 서로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핑계 그만 대시고 이리 와서 앉으시지요.” 그렇게 말한 앨런이 테이블에 놓인 체스 판을 가리켜 보였다. 란델에 대한 일로 르메인의 시름이 하도 깊어 보였던 탓에, 앨런이 한 판 두자 해서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 시종장 라울이 왕자들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다. 그리고 르메인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창가로 걸어가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두 수만 더 두면 앨런의 승리인 상태였다. 설마 르메인이 그런 이유로 앨런의 앞에 오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르메인은 그럴 인사가 아니지 않은가. 핑계를 댄다 말하면서도, 앨런은 그렇게 믿었다. “곧 란델 왕자님이 도착하실 터이니······.” - 똑똑. 앨런의 말을 자르는 노크 소리와 함께, 때마침 란델이 도착했다는 라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르메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란델을 바로 들이라 말했다. 그리고는 앨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1왕자가 왔으니, 아쉽지만 다음에 다시 둬야 되겠군.” 그렇게 말하는 르메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린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앨런의 착각일 것이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르메인이 아닌가. * * * - 다각, 다각. 고아한 자태를 뽐내는 은백색 말과, 세상 천지 나보다 높은 사람이라고는 오직 칼리안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한 검은 말이 에반 브리센 후작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에반과 칼리안이 다시 만났다. 물론 에반 역시 두 왕자가 어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들었다. 사전에 플란츠가 에반에게 알리지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당혹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칼리안이 아무런 예고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에반을 찾아 온 것이다. 미리 얘기하고 오지 그랬느냐, 만나서 반갑다, 뭐 이런 인사는 이미 필요하지 않은 사이였다. 따라서, 에반은 가장 먼저 이렇게 물었다. “3왕자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에반이 플란츠와 손을 잡기 전, 왕궁에서 칼리안을 마주쳤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 당시 칼리안이 에반을 상대하며 보여주었던 호의적이지 않은 모습과, 에반의 도박장을 칼리안이 없애버렸던 일에 대한 앙금 때문이었다. 아무리 란델의 눈에 띄려 온 길이라고는 해도, 목적 자체가 없는 걸음은 아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곧바로 입을 열어 찾아온 이유를 알렸다. “어제 석찬에도 들지 않고 그냥 돌아오신 듯 하던데요.” 그 말을 들은 에반은, 내가 돌아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물었다. “3왕자님께 허락을 받았어야 할 일입니까?”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봤다. 생각 깊은 플란츠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다. 따라서 지금,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말 한마디 없이 창 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칼리안이 다시 에반에게 시선을 두며 대답했다. “어제, 중앙 귀족 모임이 끝나자마자 왕궁을 나갔다 들었습니다.” 어제의 석찬에 슬레이만과 에반이 모두 참석하지 않아 르메인이 잠시 외롭게 앉아있지 않았던가. 아무튼 그 일은 이미 왕궁에도 알렸었으니, 에반이 칼리안에게 다른 변명을 해야 할 것은 없었다. 때문에 에반은 무슨 말이든 계속 해보라는 듯 대꾸했다. “그렇습니다만.” “그러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중앙 귀족과의 자리에서 칼리안이 중간에 나갔다. 다른 귀족은 몰라도 에반은, 그 많은 이들이 모인 곳에서 르메인이 칼리안을 불러낸 이유를 궁금해해야 했다. 칼리안과 란델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아야 하는 입장이니까. 하지만 에반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칼리안과 플란츠가 동맹을 알렸다. 그런데 아르센은, 에반의 집에 특별히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다고 했다. 에반은 소식의 중요성을 잘 아는 이였다. 도박장의 일이 터졌을 때만 해도, 에반에게 곧바로 보고가 가지 않았던가. 그러니 밤새도록 상황을 확인해보려 이리저리 분주해도 모자랄텐데, 에반이 지나치리만치 조용했던 것이다. 칼리안의 붉은 눈이 날카로운 빛을 머금었다. “왜 그것이 내 눈에는······. 집을 오래 비워두기 어려울 일이 있어서 일단 돌아왔고, 내 속내를 궁금해하기 어려울 만큼 큰 것을 숨겨뒀다는 듯이 보이는지.” 에반은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은 한 모금 마신 차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레이 브리센, 돌려보내요. 숨겨두지 말고.” 에반은 아무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마치,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자신의 생각이 맞음을 확신했다. 칼리안의 짐작이 틀렸다면 곧바로 비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을 터였다. 칼리안이 아는 에반은 그런 성격이었다. “란델 형님이 불러서 온 사람을 설득시켜 옆에 붙여놔 봐야, 후작에게 도움 될 것 없습니다.” 칼리안은 이 집에 들어오는 내내 그레이의 오러를 느끼지 못했다. 단전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를 에반은 그레이의 무력이 강해졌다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반나절 이상 집을 비우지도 못했던 것이다. 혹시라도 그레이가 다른 마음을 먹을까봐. 브리센이란, 항상 그래왔던 가문이 아니던가. 잠시 에반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 칼리안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에반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부러진 허리 나았다 해서 예전만한 실력이 나오지도 않을 텐데요.” 나올 실력이나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들은 에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칼리안의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 창 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플란츠도 고개를 돌렸다. 칼리안이 어투가 좋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에반이 낮은 음색으로 말했다. “허리가 부러졌다는 것은 알리지 않았습니다만.” 그레이의 상태는 ‘재기가 불가할 만큼의 큰 부상’이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정확히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에 대해서까지는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았다. 에반의 말에, 칼리안은 별 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달칵. 그리고 다시 한 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했으니까.” 태연하게 꺼내놓는 저 말에, 에반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리안이 이것을 알린 이유는 단순했다. 칼리안의 무력 수준을 모르고 있는 에반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다시 한 번 묶어두기 위함이었다. 란델과 칼리안이 서로 힘겨루기를 할 때 혹시라도 란델 쪽으로 발을 올리면 곤란해질 테니 말이다. 물론 에반이 그 일에 대해 달리 화를 내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에반에게 그레이는 자식이기 이전에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새끼 그리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에반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굳이 기다려서 그 말을 들을 필요는 없었으니, 칼리안은 다소 질책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란델 형님이 무엇을 노리고 변경백을 불렀는지도 모르면서, 뭘 믿고 옆에 두려 합니까.” 그렇게 제 말만 다 꺼내놓은 칼리안은, 할 말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여전히 앉아 있는 에반을 내려다보며 마지막 말을 전했다. “변경백령 비워두지 말고 당장 보내요.” * * * 에반의 집에서 나온 칼리안은, 레이븐의 위에 앉아 눈을 내리 뜬 채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왕궁까지는 레이븐이 알아서 찾아갈 수 있었고, 플란츠는 굳이 생각에 빠진 칼리안에게 먼저 말을 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칼리안은 그 상태 그대로 왕궁 입구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입구에서 레이븐을 멈춘 칼리안은, 그제야 비로소 플란츠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세이렌 경을 좀 만나고 가겠습니다.” 에우리아를 만나러 갈 테니 먼저 들어가라는 소리였다. 마법 학원은 지금 온 길을 어느정도 되돌아가야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에반의 저택에서 각자 헤어졌다면 조금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굳이 왕궁 앞을 왔다 돌아가는 것은, 칼리안 나름대로 플란츠의 호위를 보아 준 셈이었다. 그것을 왜 모르겠느냐만, 플란츠는 그냥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플란츠의 뒤로, 다각 다각, 하며 레이븐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플란츠는 말을 멈춘 채 조금 전 칼리안의 이야기를 되새겼다. ‘내가 했으니까.’ “하.” 곧 짧은 웃음과도 같은 소리가 플란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그레이의 허리를 누가 부러뜨렸든, 플란츠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웃은 이유는, 그런 말을 에반의 앞에서 서슴없이 꺼내드는 무모하기까지 한 자신감과 싹퉁머리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참 대단한 아우님을 두게 됐군.” 이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앞으로 걸어가던 플란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말을 멈춰 세웠다. 누군가 그 앞에서 인사를 건네온 까닭이다. “다시 보는군요, 플란츠 왕자.” 이 넓은 왕궁에서 매일 한 번씩은 맞딱뜨리니. 우연에 우연도 이런 악연이 있나. 참으로 대단한 아우님과 꼭 빼닮은 웃음을 짓는 옆 나라 왕세자의 모습에,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 * * 과거의 형님과 지금의 형님이 또 만났다는 것은 꿈에도 모를 칼리안은, 잠시 에우리아를 만나 말을 전한 뒤 왕궁으로 돌아왔다. 밤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수련장에 갈 생각이었다. 마법이나 검술이나 요 며칠 제대로 훈련을 하지 못했던데다, 조용한 방 안에 혼자 있으면 떠올리지 말아야 할 기억에 다시 잠겨들 수 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 계획을 세우며 체르밀 궁 앞에 도착한 칼리안이 레이븐에서 내려섰다. 그리고는 체르밀의 시종에게 레이븐의 고삐를 넘긴 뒤 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의 얼굴에 긴 미소가 드리워졌다. 인공 호수 쪽에 선 채 칼리안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던, 깊고도 깊은 푸른 색의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란델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란델 쪽에서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던 듯 했다. 덕분에 5층까지 벽을 타고 올라갈 수고가 줄어든 셈이다. “마음이 급하셨군.” 조용히 중얼거린 칼리안은,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란델의 앞까지 걸어가 예를 취했다. 란델은 고개만 끄덕여보인 뒤 앞서 걸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으나 산책이나 다시 하자는 의미인 것은 분명했으니, 칼리안은 사양하지 않고 뒤를 따랐다. 호수 가운데 시스파니안 조각상 인근을 지나고 호숫가의 산책로도 모두 지나친 뒤 장미 정원에 이르렀다. 그제야 란델의 입이 열렸다. “잠시 같이 걷자꾸나.” 칼리안의 걸음이 멈췄다. 이미 칼리안은 란델과 함께 걷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말로 걸음이나 같이 걷자는 뜻이 아니다. 손을 잡자는 소리였다. 손을 잡으려면, 주고 받는 것이 있어야 했다. 칼리안이 가진 50명의 발칸처럼, 플란츠의 브리센처럼, 단순히 텐실이라는 배경 말고 눈에 보이는 힘이 있어야 했다. 칼리안은 란델조차 뜻을 가늠하지 못하는 미소를 지은 채 란델을 쳐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그런 말은 보통, 오가는 것이 있을 때 나옵니다.” 칼리안이 먼저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란델은 방금 제 입으로 신관들의 정체를 알린 것이다. 지금 들어온 30명의 신관은, 신관이나 세작 혹은 자객 따위가 아니었다. 거래가 가능할 만큼의 힘을 지닌 이들이라는 뜻이었다. 란델 역시 발을 멈추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어느새 훌쩍 자라 얼추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동생을 향해 란델이 말했다. “너무 많이 자랐구나.” “계속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지금껏 돌봐주기라도 하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사신들이 묵고 있을 곳, 서른 명의 신관들이 묵고 있을 루비아 관을 가리켜 보였다. “나를 얻으려고 욕심내지도 말고, 저기에 있을 당신의 검도 당장 치우십시오.” 억지를 부려 생각해냈던 것. 고작 서른 명이지만 란델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만한 무리. 카이리스 곳곳으로 흩어져 치유사 노릇도 할 수 있을 뿐더러, 한데 모이면 란델의 검이 될 이들. 텐실의 신성 기사. 왕궁 안에 제 검을 몰래 들여오는 놈이라는 것을 안 이상, 꿈에서라도 손 잡을 생각은 없어졌다. 칼리안의 살기 가득한 눈이 심연 가득한 란델의 눈을 응시했다. “전부, 죽여버리기 전에.” < 제21장. 심연의 이면에 (1) > 칼리안이 란델을 만나기 조금 전. 플란츠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자신을 막아선 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아우님의 잘난 형님께서, 또 무슨 일로.” 체이스는 쓴 것을 삼킨 듯한 얼굴로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체이스는 혼자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항상 함께 다니던 테시드라는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이나 수행원들도 곁에 두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는 마치 플란츠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플란츠의 앞에 나선 것이다. 혼자 있는 것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자, 그 의미를 알아들은 체이스가 간단히 대답했다. “몰래 나왔습니다. 귀찮아서.” 귀찮아서라니. 카이리스를 정말 무르게 보았음이 틀림없다. 저러다 르메인이 마음을 바꿔먹고 볼모로 삼든, 아니면 란델이 숨겨둔 것들이 공격이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찰나의 순간에 떠오른 이런 생각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굴 걱정한다고.’ 방금 전 칼리안이 플란츠를 왕궁 앞까지 데려다 놓고 다시 나갔지 않은가. 모르긴 몰라도 혼자 있을 때 위험하기로는 이 카이리시스에 플란츠만한 이가 없을 터였다. 아무튼 체이스는, 더 없이 차분한 얼굴을 한 채로 말 위의 플란츠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플란츠는 몰랐지만, 아마 앨런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꽤나 감탄했을 것이다. 처음 앨런이 칼리안을 만났던 날, 말 위의 앨런을 쳐다보던 칼리안이 딱 같은 표정이었으니까. - 일단 내려라. 얘기 좀 하게. 이런 표정 말이다. 물론 저 모습이 칼리안과 그리도 닮았음을 알았든 아니든, 플란츠의 기분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 터였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을 또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분이 매우 나빴기 때문이다. “어제는 발칸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하더니. 아직 할 말이 남으셨는지.” 예의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을 이런 말을 툭 내보낸 플란츠가, 가벼운 놀림으로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어차피 플란츠의 언사가 어떤지는 전날에 이미 많이 겪은 터였다. 그러니 이 정도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체이스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름이, 세뉴 관 맞습니까. 걷기 좋은 곳이 있던데.” 잘 다듬어진 가로수 사이의 산책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결국, 조용한 곳에서 대화 좀 하자는 뜻이었다. 플란츠가 마뜩치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냥 이 곳에서 말하면 안되는지를 묻고 싶어하는 것이 그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 다각, 다각. 그러나 마치 그 생각에 대한 대답을 하는 듯, 왕궁으로 들어오는 한 대의 마차가 보였다. 이렇게 마차며 말이며 끊임 없이 드나드는 길 한복판에서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카이리스의 2왕자가 말싸움이나 할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칼리안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플란츠는, 굳이 그런 곳에 왜 하필 당신과 가야 하는지를 묻는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던지.” 그리고는 주변에 보이는 기사 한 명에게 말 고삐를 넘기고는 저벅 저벅 앞서 걷기 시작했다. 걷는 내내 체이스는 말이 없었다. 물론 플란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간 중간 플란츠를 만난 이들이 예를 보이고는 서둘러 멀어졌다. 요즘이야 조용하지만 혹시라도 플란츠의 심기가 꼬여 있을까 걱정한 탓이다. 그것을 본 체이스가 조용히 웃었고, 플란츠는 못들은 척 했다. 곧 둘은 나란히 세뉴 관의 산책로에 들어섰다. 이제 조금씩 울창해지기 시작하는 나무 사이에 발을 디딘 플란츠와 체이스의 입이, 또 동시에 열렸다. “그래서.” “한 가지.” 쯧, 하고 혀를 찬 플란츠가 체이스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먼저 말하라는 뜻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고, 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이틀 전에는 오러가 있었고, 어제는 없었다고. 그런 말을 들었는데 혹시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혹시라도 가진 힘이 온전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를 걱정한 모양이었다. 플란츠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걱정하는 것을 보니.” 그렇게 입을 연 플란츠가 말을 멈췄다. 걱정이 되어 카이리스까지 오고, 걱정이 되어 언제 올지도 모를 나를 계속 기다리고. 그런 것을 보니 아주 둘도 없는 형제였나보다고. 그렇게 말하려다 말았다. 그리고는 그냥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법이다. 내 아우님 칼솜씨가 얼마나 모자란지 알면 안 될 사람이 있어서.” “브리센 후작 말입니까.” 도대체가 세크리티아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맞기는 한 건지. 모르는 것이 없다. 아무래도 체이스가 가고 나면 나서서 새부터 좀 잡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플란츠의 대답에, 체이스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칼리안이 자신의 앞에서도 오러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 어떤 사고의 결과인지를 눈치 챈 것이다. 곧 체이스가 플란츠를 쳐다봤다. 차마 말을 꺼내질 못하고 있는 것이 훤했다. 지금 무슨 말이 목구멍을 치받고 있는지 아주 잘 알아들은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소리를 냈다. “내 아우님도 안다고.” 체이스의 발이 멈췄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플란츠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아우님의 형님께서 내 아우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을 내 아우님도 알고 있다고. 아는데 티를 안내는 거라고, 내 동생이.” 칼리안이 나한테는 그 말을 한 줄 아냐고. 나도 그냥 눈치 챈 것을 너는 왜 모르냐고. 그보다도, 내가 왜 이런 말이나 하고 있냐고. 그냥 둘이 만나면 안되냐고. 도대체 나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고. 라고 화를 내는 대신, 플란츠는 그냥 세뉴 관을 다 돌도록 말 없이 체이스 옆에서 저벅 저벅 발을 옮겼다. 무슨 말을 하겠느냔 말이다. 저딴 얼굴을 하고 있는데. * * * 베른이 이제 막 열 살이 되었을 때. 세크리티아의 국왕 데블란이 두 아들을 데리고 바다에 나갔었다. 그리고는 광막한 그 바다 한가운데에 베른을 집어던졌다. 후궁의 아들인 체이스가 왕비의 아들인 베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확인할 겸, ‘이제 다 큰’ 베른에게 국왕인 자신에 대한 두려움도 심어줄 겸 해서 벌인 일이었다. 체이스와 모래성이나 쌓고 놀았던 것이 겪어 본 바다의 전부였던 베른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 깊은 바다에 그대로 잠겨들어갔다. 그것을 본 체이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베른을 붙들러 뛰어든 뒤, 같이 빠졌다. 체이스도 수영을 못했으니까. 결국 기사 테일란이 둘을 모두 건져내왔고, 그 후로 베른은 데블란을 일생일대의 원수처럼 여기며 살았다. 자신을 물에 빠뜨려서가 아니었다. 데블란 때문에 체이스가 죽을 뻔했던 탓이었다. 아무튼 칼리안이 그 일을 이렇게 갑자기 떠올린 이유는, 바로 란델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란델의 저 눈 때문이었다. 칼리안의 불 같은 눈이 란델의 물 같은 눈을 바라봤고, 란델이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란델의 눈은 그 날의 바닷속과도 같았다. 바라보고 있으면 한없이 잠식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간신히 이어 온 실낱같은 숨결조차 놓아버려야 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느끼게 하곤 했다. 그런 란델의 눈에 칼리안이 비춰졌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어린 아이가, 깊고 깊은 곳에 숨겨둔 란델의 이면을 찾아 기어코 내려오고 있었다. 어느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이제는 오히려 란델의 숨통을 옭죄려 하고 있었다. “항상 궁금하였다.” 그렇게 말한 란델이 짧은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시선에 맞닿아 있는 칼리안의 살기 때문이다. 살의가 아닌 그 어떤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붉은 눈이 란델의 심연을 끊임 없이 헤집어놓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이리 변했을까.” 칼리안이 대답했다. “덕분입니다.” 칼리안은 거짓말을 잘 하지 못했다. 지금의 대답 역시 거짓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오로지 란델 하나만을 향하고 있는 칼리안의 살기 역시,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아시는 겁니까.” 란델은 웃었다. 비웃음이나, 악의에 찬 웃음이 아니었다. 살기를 잊기 위해 지어보이는 억지 웃음도 아니었다. 완벽할만큼 무의미한 웃음이었다. 때문에 그 웃음을 본 칼리안은, 순간적으로 란델을 베어버릴 뻔 했다. 칼리안으로 살겠다 다짐하지 않았었다면, 때문에 란델이 제 핏줄임을 끊임없이 되뇌고 있지 않았다면, 이성적인 판단은 완전히 잊어버린 채 그대로 검을 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무감정한 얼굴을 한단 말인가. “알고 있다.” 그 날의 바다를 생각했던 칼리안은, 이제 풀내음 가득했던 날의 시스파니안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 란델은 칼리안의 기억을 되짚어 본 이후의 시스파니안과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아무런 감정 없이, 칼리안과 베른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했다 말하던 바로 그 모습 말이다. 시스파니안은, 그녀의 반려였던 하츠아라에게 ‘인간적인’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러나 하츠아라의 죽음과 함께 그에게 배운 것들도 잃어버렸다 했다. 칼리안도, 플란츠도. 잃은 것이 참 많았는데. - 란델 역시, 잃은 것 때문에 저리 되었을까. 그런 잡스러운 생각이 잠시 들었다. 어찌됐건 왕궁에 제 검을 들인 것이 무슨 짓인지 안다 하니, 칼리안은 상념을 버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물리십시오. 제가 가기 전에.” 경고였다. 사실, 그것은 경고일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란델은 그에 대해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을 터였다. 신분 상으로 저들은 엄연히 신관이다. 저들 중 한 명의 기사는 ‘말콤 체티쉬’라는 이름의 신분 증명서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무기를 들고 왕궁에 들지도 않았으리라. 지금 란델은 그것을 믿고 저리 태연하게 구는 것이다. 그렇게나 증거 좋아하던 실리케가 어떻게 치워졌는지 보았으면서, 제 앞날은 다르리라 믿고서. “네가 정말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는구나.” 칼리안이 그들에게 칼을 들 수는 없으리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의 입에서 한기가 잔뜩 맺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겪어 보시던가요.” “네 마법사들과 목적이 같다. 그러니 너와 전하께 해가 될 이들이 아니니라.” 발칸과 같은 목적. 결국 브리센을 견제하기 위해 들여온 이들이니, 그냥 모르는 척 두라는 소리였다. 목적이 같다 해서 텐실의 기사들을 발칸과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었다. 백 번을 양보해서 란델의 말이 진실이라 해도, 브리센을 치기 위해 텐실의 기사를 들인다니. 묵인할 수 있을 일이 아니었다. “그리 떳떳하시면 숨겨오지 말고 당당히 들이십시오. 제대로 된 명분을 가지고, 제대로 된 방법으로.” 발칸은 칼리안이 목숨을 걸고 기회를 얻어 만든 군대였다. 르메인의 허락 아래 정당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브리센 변경백은 이미 돌아가고 있을 겁니다. 만약 그 쪽을 먼저 없애 둘 생각이셨다면, 그 역시 늦었습니다.” 그레이 브리센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자, 란델이 다시 한번 칼리안을 쳐다봤다. 이번에도 칼리안은 란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칼리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숨긴 것이 무엇인지, 이제 완전히 알게 되었다. 그레이를 카이리시스로 부른다. 그리하면 변경백령도 비워지고, 칼리안과 플란츠의 눈도 속인다. 그 사이 텐실의 신성 기사들이 카이리시스로 오고, 그레이가 없는 변경백령을 친다. 신성 기사 서른 명이면, 주인 없는 변경백령의 기사들은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닐 터였다. 소식을 들은 그레이가 변경백령으로 돌아오면, 그레이도 없앤다. 변경백령의 기사들을 상대한 서른 명 중 스무 명의 신성 기사만 살아남아 있더라도, 그레이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테니까. 만약 그레이까지 처리하지 못하더라도 변경백의 병력을 없앤 것만으로도 큰 타격일 것이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으리라. “둘째를 염두에 두었는데. 네가 막을 줄은 몰랐구나.” 플란츠의 눈을 속이려 했는데 칼리안이 막아섰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모를 것이라 여겼거나. 알아도 막지 않을 것이라 여겼거나. “기사들은 돌려 보내마. 조용히.” 란델이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리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대신.” 그렇게 말한 란델이 조용히 손을 뻗어 장미 덩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유난히 비죽이 자라 있던 장미 가지 하나를 꺾어 들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장미 한 송이가 란델의 손에 들렸다.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너무 그리 자라지도, 벗어나지도 말거라.”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고, 란델의 손이 잠시 붉게 빛났다. 그리고, 장미는. 언젠가 칼리안의 손에서 사라졌던 그 모습처럼. - 파스스······. 생명을 잃고 검게 말라가다, 불에 타고 남은 재와 같은 모습으로 부서지며 흩어졌다. 항상 평온한 란델의 목소리가 칼리안을 향했다. “보기에 좋지 않으니.” 칼리안은, 흩어져 사라져가는 마른 장미를 말 없이 지켜봤다. 그것이 모두 사라지도록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에는 다시 란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란델은 지금, 그리 말하고 있었다. 왕이 될 자신의 뒤를 받쳐 줄, 쓸모 있는, 능력 좋은 동생 노릇. 그런 노릇이나 하고 살라고. 칼리안의 붉은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카밀론 가서 개 키울 겁니다.” 란델의 말은 절대 안 듣기로 했다. < 제21장. 심연의 이면에 (2) > 그날 저녁, 텐실의 사신단 대표가 르메인을 찾았다. 석찬에 들기 조금 전이었다. 즉, 르메인에게 별다른 일정이 없는 시간이었으니 아무리 갑작스러운 방문이라고는 해도 아예 만나주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다. “돌아가십시오.” 그러나 시종장 라울은 이렇게 말했다. 르메인은 사신단 대표와의 만남을 거절했다. 용무가 바쁘다는 이유였다. 거절의 의사를 전하는 라울의 얼굴에는, 아무나가 아무때나 찾아와서 만나뵐 수 있는 분인 줄 알았느냐는 의미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 순간 라울은, 대륙 최강국 카이리스의 국왕 르메인을 보좌하는 대변인이었다. 텐실의 우방국인 카이리스의 국왕을 모시는 시종이 아니었다. 텐실의 사신단 대표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다른 반박도 하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 본국의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신관들의 카이리스 체류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르메인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사과의 뜻을 전해달라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왕궁에서 빠져나갔다. 여전히 석찬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그만큼 신속히 물러났다는 뜻이었다. 창가로 걸어간 르메인은, 왕궁에서 나가는 텐실의 마차를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이 집무실만 1년 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싶을 만큼, 지금 르메인의 분위기는 딱 작년 이맘때의 그를 생각나게 했다. 차갑고, 무표정했다. 그런 상태로 딱 세 시간 전에 만나본 란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특별한 이야기를 들은 바 없습니다.’ 오후에 르메인의 집무실을 찾았던 란델은, 신관들에 대해 묻는 르메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태연한 얼굴로 그리 말했을 뿐이었다. 그 후 칼리안이 란델을 만났고, 신관들이 왕궁을 빠져나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모른다면, 르메인은 당장 왕위에서 물러나야 할 터였다. 저 신관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란델도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니,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말이 되었다. 어쩌다 란델이 그리 되었을까. 분명 그것은 르메인의 탓일 것이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르메인은 지금 스스로에게 굉장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란델의 표정이 잊혀지지가 않네.” 그 말에, 우두커니 소파에 앉아있던 앨런이 르메인을 쳐다봤다. 란델을 만난 직후, 칼리안은 곧바로 아르피아 궁에 왔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가 신성 기사라는 것을 알렸다. 칼리안이 그 일을 앨런에게 먼저 알린 이유는 단 하나였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르메인을 보호해달라는 뜻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다시 르메인의 집무실에 들어앉아 있던 앨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엘린느의 아들을 만나보신 적 있습니까?” 엘린느, 리베른을 떠나는 앨런에게 마차를 선물했던 리베른의 국왕이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왕자를 이야기 함이다. 뜬금없는 말이었으나 앨런의 말은 항상 들을 가치가 있는 것이니, 르메인은 그냥 얌전히 대답했다. “리베른의 국왕은 만나본 적 있으나, 왕자는 만나본 적이 없네.” “아주 인물도 그런 인물이 없습니다.” 비아냥이 잔뜩 들어간 말. 진심으로 칭찬하는 말이 아니었다. 다만 여전히 그 의도를 알 수 없던 르메인은, 그저 다음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잠시 말을 멈추고 할 말을 정리한 앨런이 입을 열었다.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테이안 공은 사형됐습니다.” 테이안은 국서, 즉 국왕 엘린느의 남편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국왕의 남편이 사형된 일이면서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이 깊이 연관된 일이기도 했다. 온 대륙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르메인이 그 일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 일은 알고 있네.” 그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랬다. 엘린느가 앨런을 총애하는 것을 남녀간의 문제로 오해한 테이안이 앨런을 독살하려 시도했다. 무력으로는 죽일 수가 없으니 독을 고른 것이다. 그러나 우연한 일로 앨런이 아닌 앨런의 아들이 죽었다. 그 뒤, 사건의 배후에 테이안이 있는 것을 안 엘린느는 곧바로 테이안을 사형에 처했다. “그 때부터 엘린느의 아들이 꽤 많이 엇나갔지요.” 그 때의 일을 생각하다가, 잊고 살던 아들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때문에 앨런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한참 뒤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 놈을 엘린느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글쎄.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네.” 타국의 국왕이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하는지까지는 르메인이 알 수 있을 일이 아니었다. 재밌는 일이었던지, 앨런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제 며느리, 레이첼의 집을 한 달 동안 청소하도록 시켰습니다.” 리베른에는 다른 왕자나 공주도 없었다. 하나뿐인 왕자에게 하인들이 하는 일을 한 달이나 시켰다는 것이다. 그것도 테이안에 의해 죽은 이의 집 청소를. 그 곳에 직접 가서, 테이안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직접 깨우치게 했다는 말이었다. “제 아비가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뒤로는 참으로 얌전히 지내더군요.” 르메인은, 앨런이 왜 그 말을 꺼냈는지를 이해했다. “데블란이 아무리 손이 과했어도, 제 자식에게 관심은 가졌습니다. 그러니 란델 왕자가 그렇게 속 시커먼 놈이 된 것은 전하의 잘못이 맞을 겁니다. 그것은 전하께서 반성하실 일이 맞지요.” 르메인이 자책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 잘못이라 생각해서 란델을 탓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번 르메인의 속내를 꿰뚫어 본 앨런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잘못은 잘못이니, 그에 대한 벌은 주셔야 합니다. 증거가 없어 처벌을 못할 뿐이지, 부모로서 자식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여전히 르메인은 앨런에게 배울 것이 많았다. 도무지 왕자의 스승인지 왕의 스승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저 마법사를 보며,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곧 르메인은 시종장 라울을 불러와 란델에게 몇 가지 말을 전하도록 시켰다. 함부로 타국의 기사를 들여와 왕실의 안전을 위협한 것에 대해 반성할 시간을 가지라는 내용이었다. * * * 결핍. 부족한 것. 처음부터 없었던 것. 혹은, 어느새 잃어버려 사라진 것. “레이븐은 발목에 티가 있습니다. 내 고양이는 이름이 없고.” 칼리안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수련장 밖 잔디밭에 털썩 앉은 채였다. 붉은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나는 이 계절에, 어울리지도 않을 가을 바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키리에는 눈 색이 다르고, 히나는 말을 못해요.” 참 뜬금없는 말이었기 때문에, 플란츠는 내 아우님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됐다. 하지만 칼리안은 계속 말을 이을 뿐이었다. “얀은······ 얀이고.”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다 세어보기 너무 어려운 얀의 이름을 꺼내면서, 칼리안은 잠시 웃었다. 플란츠의 얼굴에는 짜증이 섞였다. 체이스의 한탄을 듣고 오자마자 칼리안의 한탄을 듣고 있었으니까. 칼리안은 아직 란델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뭘 말하자고 만난 것도 아니었다. 란델을 만난 후 아르피아 궁에 들렀다 온 칼리안. 체이스를 만나서 아주 사이 좋게 세뉴 관을 다섯 바퀴 쯤 같이 돌아 주고 온 플란츠. 그렇게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수련장을 찾아왔고, 마주쳤을 뿐이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키리에가 있어서.’ 수련장은 넓었고, 키리에는 어차피 언제나 있었다. 때문에 오늘따라 왜 그러는지를 묻는 눈으로 쳐다보니, 칼리안이 다시 설명했다. ‘오늘은 간섭하면 안 될 상태 같습니다.’ 칼리안은 딱 그렇게만 말했다. 무엇을 간섭하면 안 된다는 것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수련장 앞에 앉아서는 밑도끝도 없이 우울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튼 들어가지 말라 하는데 굳이 들어갈 수도 없었고, 칼리안의 입은 이미 열렸다. 그러니 또 어쩌겠는가. 들어줘야지. 그나저나 무슨 소리를 하려고 서두가 이렇게 긴 것인지. 이쯤 되니 그냥 네 할 말 다 해봐라 하는 마음도 들고 있었다. “내 스승님은 아들을, 전하께서는 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심지어 그분은 막내 아들을 이미 잃었다는 것도 모르십니다. 흔들 흔들. 말을 삼키고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던 칼리안은, 맞은편에 앉아있던 원수같은 형을 잠시 쳐다봤다. “게다가. 아무것도 가져본 적 없어서 잃어버린 것도 없을 내 형님은. 아마도 여전히, 불행하시고.” “······ 내 아우님이 미치셨나.” 새로 베인 상처보다, 엊그제 생긴 멍이 더 아프다. 칼리안의 말이 딱 그랬다. 딱 그만큼 아픈 말로 플란츠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저는, 온 생을 잃었으니.” 이 놈이 남의 상처 눌러놓더니 제 상처를 헤집는다. 더 이상 다른 말도 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다. 치사하기가 이를 데 없다. 독 처먹던 놈이 이번에는 또 뭘 처먹고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지.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얼굴을 했다. 칼리안이 실소하며 다시 말했다. “그렇잖습니까. 왕궁 어디에도 온전한 놈 하나 없는데.” 그러더니 손가락 끝으로 등 뒤의 체르밀 궁을 가리켜 보였다. “저 분은, 무엇이 그토록 억울해서 홀로 그리 되셨을까.” 뒤에 있을 것이라고는 체르밀 궁 뿐이었으니, 플란츠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지금 칼리안이 누구를 이야기하려 하는지 알아들었다. “왜 그것이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안쓰럽기도 하고, 화도 나고. 그냥 그런 겁니다.” 칼리안이 란델을 만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 플란츠는 그냥 적당히 안좋은 일이 있었겠거니 하고 있었다. 그런 플란츠의 얼굴을 본 칼리안은, 그제야 자신이 란델에 대한 말을 미처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때문에 다시 입을 열어, 조금 전 있던 일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표정이 굳어지던 플란츠는, 란델이 알 수 없는 힘으로 장미를 말라죽게 했다는 말을 들은 뒤 완전히 날카로운 눈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말을 모두 전한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냥 형님께서 카밀론 가시겠습니까? 조금 무서운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린 플란츠가 대답했다. “싫다.” “왜 싫으십니까. 이제는, 달라졌을텐데.” 플란츠를 마음대로 휘두를 실리케가 없음에도 굳이 왜 왕이 되기 싫은지를 묻는 것이었다. 플란츠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왕궁 안을 둘러봤다. 고요하고, 적막했다. 숨이 막혔다. 곧 칼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린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살고싶어서.” 잠시 말 없이 그런 플란츠를 응시하던 칼리안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플란츠가 살고 싶단다. 이보다 더 기꺼운 말이 어디 있을까. * * * - 란델 왕자가 귀족들과의 석찬에서 멋대로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한 벌로, 3개월간 체르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궁 밖에는, 적당한 이유를 담은 이런 소식이 전해졌다. 칼리안과 플란츠가 석찬에 함께 입장했던 것을 본 뒤 밖으로 나간 행동에 대한 벌이라는 뜻이었다. 사실 체르밀에 갇히게 된 이유는 텐실의 신성 기사 때문이었으나, 그것을 외부에 알릴 수는 없었으니까.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는, 고작 석찬에서 자리를 비운 것 때문에 내린 벌이라 하기에는 조금 과한 벌이 아닌가 하는 술렁거림이 잠시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주목되지는 않았다. 본의 아니게, 칼리안이 또 일을 냈기 때문이었다. 축제 마지막 날, 마지막 일정. 무도회. 사람들은 이번에도 칼리안이 플란츠와 함께 들어올 것인지를 주목했다. 정말로 둘이 손을 잡은 것이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문이 열리며, 칼리안의 입장을 알리는 기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와 함께 귀족들의 시선이 칼리안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모두가 입을 벌렸다.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듯, 칼리안은 혼자 입장하지 않았다.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과,” 그런데 그 옆에 있는 것은, 플란츠가 아니었다. 당연하겠지만 앨런 마나실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드미레아 지그프리드 소공작 입장하십니다.” 브론즈 색 곱슬머리를 곱게 땋아 올린, 그리고 아주 단정한 잿빛 드레스를 입은 드미레아가 칼리안의 옆에 있었다. 그것은 정혼의 의미 따위가 아니었다. 드미레아는 그 이상의 힘을 지닌 인물이니까. 칼리안. 3왕자 칼리안이. 지그프리드를 등에 업었음을 선언한 것이다. < 제21장. 심연의 이면에 (3) > 칼리안의 옆에 드미레아가 섰던, 축제 마지막 날의 이른 새벽. 그날따라 유난히 새들의 지저귐이 컸다. 그리고 칼리안은, 그날따라 유난히 긴 꿈을 꾸었다. 지금껏 베른이었을 때의 꿈을 꾼 적이 없었는데, 꿈 속의 칼리안은 베른이었다. 거울 속에 비춰지는 연보라색 눈을 보며, 청은색의 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었다. 그리고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일상처럼 체이스에게 갔다. 꿈 속의 체이스가 베른을 보며 웃었다. 베른이 무언가를 말했지만, 꿈 속에서는 체이스의 목소리만 들렸다.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서 그랬나보다. - 피곤해 보이는구나. 더 쉬고 오거라. - 내가 네 형이니라. 네가 아니라, 내가 너를 걱정해야지. 그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것이 너무 좋아서,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못할 만큼 좋아서, 한참이 지나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꿈 속의 체이스는 머리가 짧았다. 그랬다. 체이스는, 한 번도 머리를 기르지 않았었다. 둘의 머리 색이 완전히 똑같아서였다. 둘 모두 데블란의 얼굴을 닮은 탓에, 둘 다 머리까지 길면 재미가 없다며 웃었었다. 그래서 체이스는 항상 머리가 짧았다. 머리를 기른 적 없었다. 그것을 왜 몰랐을까. 카이리스를 찾아온 체이스의 모습은, 그래. 베른을 많이 닮아 있었다. 한 눈에 알아봤어야 했던 것을 이제야 눈치챘다는 생각에, 그만 정신이 들고 말았다. “하.” 잊고 지내던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추억이 될 수 있겠지만, 또 누군가는 그 기억 때문에 숨을 참고 버틴다. 날개 접은 새들이 고이고이 울던 그 날 아침, 칼리안은 몸을 일으켜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신 차리라고. 속삭임같은 목소리가 촛불처럼 흔들거렸다. * * * 고양이 찾으러 왔다는 강아지 같은 시종의 얼굴은, 어딜 봐도 고양이를 찾으러 온 이의 표정이 아니었다. 이제와서 나이프 던진 일을 사과 받고 싶은 것인지, 혹은 다른 일이 있는지 몰라도 아무튼 그랬다. 한 마디로, 놈은 마치 백 번 째의 전투에 나서려는 노련한 장수의 그것과 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플란츠 왕자님.” 플란츠는, 얀의 방문을 알린 시종 레릭만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귀찮음과 짜증이 반씩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그랬더니 얀은 당장이라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 되서 입을 열었다. “왕자님 눈이 빨개요.” “원래 빨갛다.” 주인 닮아서 아침부터 너도 짖냐고. 그런 눈으로 얀을 쳐다보니, 얀이 다시 말했다. “아뇨. 왕자님께서 요즘 계속 기운이 없으셨습니다.” ······ 기운이 없기는. 어제 이야기가 끝났을 때 쯤 키리에가 수련장에서 나왔다. 그것을 본 미친 아우님이 대련이나 하자고 했고, 수락했다. 죽을 뻔했다. 밤새 잘 아문 목의 상처가 아직도 욱신거리는 것 같다. 살짝 눈을 감은 듯한 플란츠가 무슨 말을 삼키고 있는지 알 리 없을 얀이, 오죽했으면 내가 여기 왔겠느냐는 얼굴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 때문에,” “너. 지그프리드.” 플란츠가 얀의 말을 잘랐다. 얀이 다소 굳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짧게 입을 열었다. “왜요.” 지그프리드를 불렀으니, 공작 아들이 되어 대답하는 것이다. 호칭 한 번에 눈에 띄게 변하는 얀을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소파로 가 등을 기대고 앉은 뒤 맞은편을 가리켜보였다. 시종 얀 말고, 공작 아들 시로이안과 마주 앉아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으니, 얀은 사양하지 않고 가 앉았다. 그와 동시에 플란츠의 입이 열렸다. “불러. 소공작.” 얀이 플란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는 드미레아가 이 곳에 오는 것이 어떤 의미인 줄은 알고 하는 말인지를 묻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우리가 개입해야 할 만큼의 상황인 겁니까?” 얀의 말을 들은 플란츠의 한 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들이 어떤 이들인지, 르메인이 왕위에 오를 때 슬레이만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플란츠가 모를 리 없다. “개입해달라 하면 할 것처럼 말하는군.” 지그프리드는 옹립하는 자가 아니다. 칼리안도 이것을 알았다. 때문에 기사의 힘이 필요하다 여겼을 때에도 슬레이만이 아닌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을 찾지 않았던가. “검은 필요 없으니, 방패만 들고 오라고.” 개입을 원했다면 드미레아가 아닌 슬레이만을 불러오라 했을 것이다. 물론 거절하겠지만. 플란츠가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내 아우님은 그조차도 부탁 못할 성격이시니.” 란델이 가진 패가 심상치 않았다. 눈에 보이는 기사단이나 마법사단같은 힘이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힘으로 칼리안을 협박해왔다는 것은,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할 때가 왔다는 소리였다. 그러므로 지그프리드가, 그들의 ‘이름’이 필요했다. 앨런 마나실과 발칸만으로는 텐실과 브리센 양쪽을 모두 견제할 수 없으니, 눈에 띄는 세력이 하나 더 있어야 했다. 둘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할 상황이 오지 않도록, 그들이 당장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 이름만으로도 양쪽 모두에게 충분한 위협이 되어 줄 수 있을 거대한 집단 말이다. 창 밖을 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해보던 얀이 대답했다. “올해에는 소공작도 카이리시스에 왔으니, 얘기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잠시 멈춘 얀이 플란츠의 눈을 보며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나서서 도우시려는 건지 궁금하네요. 저는 그냥 이유만 좀 알았으면 해서 온 것인데.” 그 말을 들은 플란츠가 자조 섞인 웃음소리를 냈다. - 형님 때문에 다 망했으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주십시오. 상황이 이렇게 된 원인이, 플란츠에게 있었다. 칼리안이 강자인 것을 몰랐다면, 란델은 우선 브리센과 플란츠만을 목표로 잡았을 것이다. 칼리안은 일단 란델의 눈 밖에 있었어야 했다. 칼리안이 레넌을 물렸든 발칸을 창설했든, 제 손 안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리라 안심하고 내버려 뒀을 테니까. 그런 란델에게 칼리안이 숨겼던 힘을 들켰다. 거기에 더불어 계속 플란츠와 손을 잡았고,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란델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기사단도 발칸도 미완성인 상태에서 란델에게 칼을 겨누게 된 셈이다. 그러니 이제 란델의 다음 대상은, 칼리안이 될 것이다. 쓸 수 없다면 없애버려야 더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결국 칼리안이 플란츠를 살려내는 바람에 일이 이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칼리안의 예정에 이런 상황이 있었을 리 없다. 다만 그것을 구구절절 설명해 줄 만큼 친절한 플란츠는 아니었으므로, 플란츠는 그냥 간단히 대답했다. “빚졌으니까.” 가진 것도 없는데, 빚까지 있어서야. 게다가 얀의 말을 듣자 하니, 지금 칼리안을 저대로 두면 안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란델과 브리센 쪽으로 잔뜩 날을 세우느라, 또 다른 한 쪽에 시선을 안 두려 무리하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인다. 그러니 코끼리 그늘이라도 있어야, 숨을 좀 쉬지 않겠느냐고. 그것이 플란츠의 생각이었다. * * * 칼리안은 당황했다. 고양이 찾아오겠다던 새끼 코끼리가, 한참을 안 돌아오더니 다른 코끼리를 데려왔다. “고양이는 어디가고?” “자던데요. 윗방 침대에서. 쿨쿨.” 배까지 뒤집고요. 아무래도 왕자님 방보다 윗방이 더 편한가봐요. 이런 의미를 담은 얀의 대답이었고,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정말 고양이 이름표를 바꿔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일단 이렇게 고양이 안부 묻기가 끝난 뒤, 칼리안은 멀뚱히 옆에 서 있던 작은 코끼리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드미레아.” “네, 왕자님.” 얀과 얼굴만 비슷하지 성격은 완전히 딴판이다. 얀의 말로는 어머니를 닮았다던데 칼리안은 얀의 모친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간단한 인사를 주고 받은 칼리안이, 잠시 제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오래지 않아, 그 손가락으로 윗층을 가리키며 물었다. “형님 생각인가?” “네.” 자기 빚을 왜 지그프리드로 갚겠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이것 참.” 플란츠의 생각대로였다. 칼리안이라면 절대로 지그프리드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이 될 때가 아닌 이상, 슬레이만의 그늘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도움을 받게 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 더해, 브리센과 란델의 눈을 돌리게 해 줄테니 잠시 마음을 놓으라는 뜻임을, 칼리안도 알았다. 단 한 순간도 흐트러질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됐으니, 혹시라도 더 흔들릴까 체이스를 계속 모르는 척 미뤄왔던 칼리안이었다. 그런 칼리안에게, 체이스를 제대로 한번 만나고 올 여유를 준 것이다. “살고 싶다 하더니, 살려주려 하시네.” 참으로 애증하게 된 원수같은 놈 덕에, 숨 돌릴 틈을 얻은 칼리안이 웃었다. 그리고 드미레아를 향해 말했다. “오래 귀찮게 하지는 않을게.” “상관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다르니까요.” 그 말이 매우 의미심장했다. 어쩌면, 지그프리드가 처음으로 왕을 옹립하게 될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이 든 칼리안의 입에, 마음에 든다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 * * 화려했다. 마치 미리부터 준비했다는 듯, 칼리안의 재킷 역시 짙은 잿빛이었다. 은으로 된 단추가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짙푸른 색의 망토의 끝에는 은사로 테를 두르고, 망토 여밈 장식에는 다이아몬드 펜던트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변치 않는 다이아몬드. 이번에 처음으로 바꿔 단 저 장식은, 신념을 지켜온 지그프리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완전한 동맹 선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귀족들은 그렇게 웅성거렸고, 그것을 들은 키리에가 드러나지 않게 웃었다. ‘매번 같은 것만 하시면 없어 보입니다.’ 칼리안의 옷을 완전히 담당하게 된 메를린이 이렇게 말했다. 금고 사정 좋은 칼리안은 그 말을 잘 새겨 들었고, 없어 보이지 않을 것을 새로 구매했을 뿐이었다. 사실 몇 시간 전에 성사된 동맹이었으니, 그런것을 따져가며 옷과 장신구를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이렇게 칼리안을 잘 꾸며 놓은 메를린은, 드레스를 갖춰 입고 다시 찾아온 드미레아에게도 무언가를 더 얹어주려 했었다. 물론 드미레아는 질색했다. 그리고는 사람의 품위가 ‘그런 것’에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말로, 매우 화려하게 차려입은 칼리안을 웃게 만들었다. 칼리안도 처음 이 곳의 예복을 봤을때 똑같이 질색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런 과정을 거쳐 둘이 함께 입장을 했고, 무도회가 진행되는 내내 함께 앉아 있었다. 슬레이만의 저택에 있는 내내 대련도 여러 번 하고 말도 많이 나눠 본 사이였으니, 칼리안은 퍽 편안한 얼굴이 되어 이야기를 하고 웃기도 했다. “두 분께서 꽤 잘 어울리십니다. 안그렇습니까?”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앨런이, 이런 말과 함께 웃음을 보였다. 그 말을 들은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이 이 곳까지 나설 줄은 몰랐군.” 그 말을 들은 앨런이 다시 웃었다. 앞에 앉은 에반 브리센 후작을 쳐다보면서. 아마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놀란 것은 에반일 것이다. 그런 에반이 영 마뜩찮은 얼굴을 하며 슬레이만에게 물었다. “식성을 바꾸셨습니까.” 코끼리가 왜 왕세자위 다툼에 끼어드냐는 말이었다. 상당히 공격적인 목소리였으나, 슬레이만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칼 쓰는 사람 마음이 칼 잘 다루는 왕자에게 가는 것이 이상할 일인가?” 그리고는 르메인을 향해 자신의 목 근처를 보여줬다. 아주 희미하지만 상당히 긴 흉터가 남아 있었다. “이것 보십시오. 전하의 아드님께서 이렇게 손이 험하지 뭡니까. 내가 아주 큰일을 당할 뻔 했습니다!” 칼리안의 검에 입은 상처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뭐가 좋은지 박장대소를 했다. 오직 에반만 웃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에반은 일단 칼리안으로부터 시선을 떼기로 했다. 우선 란델부터 끌어내리고, 칼리안과 지그프리드를 떨어뜨려 놓아야 되겠다고, 그렇게 계획을 바꾸었다. 지금의 이 상황이, 동생 좀 쉬라며 플란츠가 만들어 준 판이라는 것과, 이 일이 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였다. < 제21장. 심연의 이면에 (4) > 적당히 시간을 채운 에반 브리센 후작이 자리를 떠났다. 곧 누군가 플란츠에게 걸어가 어떤 말을 전했고, 이야기를 들은 플란츠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래서야, 아예 대놓고 왕세자위 쟁탈전을 준비하러 가겠다는 소리와 다를 것이 뭐란 말인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앨런이 툭 던지듯 말했다. “아무래도 전하 목숨줄이 오늘 내일 하셨던 것을 저만 몰랐나 봅니다.” 란델이나 에반이나, 하고 있는 꼬락서니가 아주 나라를 뒤집어 엎을 모양새다. 이래서야, 왕세자위가 아니라 정말 왕좌를 둔 전쟁에라도 나서는 것 같지 않은가. 앞길 창창한 젊은 국왕이 이렇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말이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이 하루 이틀 간당간당했던 게 아니라서 감흥도 없으십니까?” “간당간당, 딱 맞는 말이다! 푸큽큭큭!” 앨런 마나실의 입이 열린 것을 오랜만에 본 탓에, 옆에 있던 슬레이만의 웃음보가 터졌다. 지금 앨런의 말을 정말 좋게 풀어 설명하면, 란델과 에반이 저렇게 천지 분간도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냥을 계속 두고 볼 생각이냐는 소리였다. 르메인이 무조건 칼리안의 손을 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런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어찌 편하겠냐만은, 어여쁜 제자가 중간에서 혼자 고생을 다 떠안고 있으니 앨런도 얌전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제발, 그 입들 좀.” 당연히, 그런 말에 닫아질 입들이었으면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 열리지도 않았다. “덩치만 큰 순한 놈들까지 불러들인 김에, 그냥 제가 나서지요. 오래 걸리지도 않을 터이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아주 싹 치워버리고 내 영지로 오게. 지키는 것 하나는 참 잘하니, 내 잘 숨겨 주지!” 이 곳이 무도회장인 것이 정말 다행이다. 악사들의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말 소리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이 곳에는 침 삼키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나지 않고 있을 터였다. 르메인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알았으니까, 좀.”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가 양쪽에서 이러고 있으니, 가운데 앉아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 한 명만 속이 썩는다. 카이리스를 받치고 선 큰 기둥 세 명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방금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아마 아무도 모를 터였다. 르메인이 정말 난처해하고 있음을 알았는지, 고맙게도 슬레이만이 나서서 화제를 바꿔줬다. “1왕자가 거하게 한 탕 하려다 걸렸다면서?” 아. 그냥 아까 하던 얘기가 나은 것 같다. 앨런을 향한 이 철딱서니 없는 질문에, 르메인은 다시 한번 이마를 감싸쥐었다. 앨런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대답했다. “내 어여쁜 제자 손에 딱 잡혔지. 그럼 그럼.” “그러고 보면 제자 한번 진짜 잘 두었네. 그 김에 여기 한 번 다시 보게! 자네 제자 손이 어찌나 빠르던지, 아주 그냥 냅다 칼을 휘두르는데······!” 거기까지 말하던 슬레이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참, 1왕자는 살아 계신가? 자네 제자에게 잡혔으면 몸 성하기 힘들었을 것인데.” “마음씨 여린 내 제자가 어디 그리 함부로 손을 쓰던가? 걱정 말게. 잘 살아 계시네.” 칼리안은, 란델이 장미를 말려 죽였던 것을 앨런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다. 칼리안 스스로도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던 탓이다. 그것을 알았다면, 앨런은 결코 ‘란델이 잘 살아 있으니 걱정 말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를 둘의 이런 농담같은 말에, 결국 더 버티지 못한 르메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랬더니 슬레이만은 ‘벌써 가시려고?’ 따위의 속 보이는 말을 꺼냈고, 앨런은 잘가라는 듯 웃어보였다. 결국 르메인이 깊디 깊은 한숨을 남기고 아르피아 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해서, 처음 넷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이제 슬레이만과 앨런 둘만 남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거칠 것 없다는 듯 웃고 떠들던 슬레이만은, 어느새 매우 조용한 모습으로 와인을 한 잔 마셨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딱 셋이 있지.” 대륙 두 번째 검인데, 무서운 것이 참 많기도 하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무섭냐는 눈으로 쳐다보니, 슬레이만이 다시 말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우리 세리에, 그리고 멍멍이 얀.” 세리에는 슬레이만의 아내였다. 그리고 멍멍이 얀은, 공작령에 있는 진짜 강아지 얀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제 아들을 닮았어도, 어떻게 아들의 애칭을 개한테 붙여주는지. 참으로 슬레이만 답다. “놈 때문에 남아나는 신발이 없거든.” 어쨌거나 지그프리드 영지에 있는 그 갈색 푸들이 두 번째로 무섭다 말한 소드마스터가 앨런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세번째는, 자네의 그 주둥이.” 그 말에, 앨런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내 주둥이가 우리 어여쁜 왕자님께도 인정 받은 주둥이기는 하지.” 둘은 거의 열 살 가까운 나이 차이가 있었어도 정신연령이 꽤 비슷했다. 앨런이 7서클을 달성하여 세월을 거슬러 살기 이전부터, 이것저것 다 집어치우고 그냥 친구나 하기로 한 지가 어언 20년이 넘었다. 아무튼 그렇게 말한 슬레이만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나 더 늘었지.” 그렇게 말한 슬레이만의 눈이 멀찍이 앉아있는 칼리안의 등을 향했다.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알아들은 앨런이 그럴만 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슬레이만이 입을 열었다. “그런 살기, 나도 처음 겪었네. 지금도 오싹오싹해.” 그리고는 목에 남은 흉터를 쓸어내리며 뒷 말도 삼켰다. 그 날, 정말로 죽을 뻔했다고. 숨겨진 말을 읽어낸 앨런이, 역시 제자 하나는 잘 뒀다는 생각에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 * * 에반에 이어 플란츠까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방패 역할은 확실히 한 것 같네요.” “더할 나위 없었지.” 칼리안이 다시 한번 고마움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드미레아가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칼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첫째 왕자 쪽도 조용해야 할 텐데요.” 그 말에 칼리안이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드미레아 역시 지그프리드였으니,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숨길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어제 란델을 만나 겪은 일을 이미 전했었다. “오래 가지는 않겠지만, 당장은 외부의 누구도 만나지 못할 거야. 만약 곧바로 나를 죽일 생각이 있었다면 어제 이미 손을 댔을테지만 그렇지 않았으니, 그것도 일단은 괜찮고.” “조만간 다시 부딪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말이었다. 칼리안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대답했다. “그 심연의 이면에 또 뭐가 있든, 안 져.” 그리고는 날카로운 눈을 한 채 그 눈빛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라서.” 아주 자신만만하고 호기로운 대답이었다. 그 말을 들은 드미레아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울었다던데.” 아, 이놈의 새끼 코끼리! 순간 할 말을 잃고 멈칫했던 칼리안이 굉장히 어색한 얼굴로 거짓말을 시도했다. “안 울었어.” “눈이 빨갛게 됐다던데.” “원래 빨개.” 드미레아의 얼굴에는, 등 뒤로 사탕을 숨긴 어린 동생을 보는 듯한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지그프리드 집안 사람들은 죄다 할 말을 얼굴로 내뱉는 모양이다. 아무튼 란델이 무서워 울었다는 오해는 벗어야 했으므로, 칼리안이 포기한 듯 대답했다. “그냥. 꿈을 꿨어.” 그 말을 들은 드미레아가, 잠시 칼리안의 얼굴을 쳐다봤다. 얀이면 모를까, 칼리안이 고작 악몽이나 꾼다고 울 만한 놈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는 가끔 얀이 지어보이는 것과 꼭 닮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얼마나 좋은 꿈이었기에 그러셨습니까.” 얼마나 좋은 꿈이었으면 꿈을 꿔서 운 것이 아니라 깨어나서 울었냐고. 그렇게 물었다. 칼리안은 그냥 한동안 웃기만 하다가, 혼잣말같은 대답을 내려놓았다. “다시는 안 꿀 꿈이라서.” * * * 여전히 한참 시끌벅적한 지그프리드 관에서 나온 뒤, 칼리안은 얀도 키리에도 모두 보내고 혼자 발을 옮겼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을 플란츠가 줬으니, 이제 답답하게 구는 것은 그만 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체이스를 만나보려는 것이다. 더 피하지 말고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였다. 루비아 관의 입구까지 그렇게 거침 없이 걸어온 칼리안의 발이 잠시 멈췄다. ‘내일 다시 올까.’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나. 아무리 그래도, 예전처럼 밤새 술 마시고 떠들 수 있을 사이도 아닌데. 그냥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가도 괜찮을까.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서 그냥 이대로 체르밀 궁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올까, 하다가. 그리하면 두 번 다시는 걸음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억지로 발을 옮겼다. 짙푸른 망토가 칼리안의 걸음을 따라 같이 흔들렸다. - 에일라. 걸음마다 눈에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그 망토 때문인지는 몰라도, 문득 푸른 솔새가 떠올랐다. 그녀와의 일을 겪으면서, 베른의 모습을 버리고 온전하게 칼리안으로 살겠다고 마음을 먹었었지 않나. 그러니 이번에도 다를 것이 없다고. 같은 형이 아니라 그저 베른에 대한 기억만 가진 다른 사람이니, 그것을 잊지 말자고. 그러니 그냥 웃으면서 이야기나 적당히 나누다 오면 되는 일이라고. 그런 생각만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눈치채지 못했다. 체이스는 이미 한참 전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칼리안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칼리안.” 주저함 가득한 걸음을 지켜보던 체이스가 먼저 칼리안을 불러세웠다. 지금 체이스는, 루비아 관 앞에 심겨진 커다란 가문비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그 큰 나무의 그림자 속에 서 있어서, 칼리안에게는 체이스의 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칼리안의 발이 다시 멈췄다. 목소리를 들었는데, 어디에 있는지도 보았는데, 발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래 전, 베른이 처음 기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베른의 고집을 꺾으려던 테일란이 베른에게 밤새도록 훈련장을 달려보라 시킨 적이 있었다. 지금 칼리안의 다리는, 그것을 버텨서 결국 테일란을 설득시켰던 그 날만큼이나 무거웠다. - 자박 칼리안은 그렇게 발을 떼어냈다가, 다시 땅에 붙이기를 몇 번이나 계속했다. 그러다, 이대로는 밤새 제 자리에 서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때문에 양 주먹에 힘을 꽉 쥐고는 다시 체이스가 있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베른이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졌으니, 미련하게 굴지 말아야 한다고. 이대로 다 내려놓고 세크리티아에 갈 수도 없지 않느냐고. 그런 말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제 내 이름은, 칼리안인 것을. 아는데. 알고 있는데. “······ 왜.” 체이스에게 가까이 간 칼리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칼리안이 고개를 떨궜다. 아, 이건. 반칙이다. 정말 이건, 반칙이다. 체이스는 웃었다. “머리카락, 왜······.” 그 긴 머리를 어느새 싹뚝 잘라낸 채로, 웃고 있었다. 데블란의 노호성으로부터 베른을 지켜줬을 때가 생각났다. 베른에게 어려운 문제들을 내고는 맞혀보기를 기다리며 짓고 있던 웃음이 생각났다. 처음 말에 올랐다 떨어졌을 때 베른을 업고 달래주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베른에게 기사 서임을 하면서 지어보였던 아픈 표정이 생각났다. 모두가 죽었던 날. 성문을 막으려 밖으로 나서는 베른을 붙들고 울던 얼굴이 생각났다. 그런 체이스에게, 다녀오겠다고 대답하던 베른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 생각이 쌓인 무게가 너무 커서 칼리안은 결국 버티질 못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하루만, 무너져 내렸다. “······ 형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번. 조금만 쉬라고 말하는 체이스의 품에 안겨 울었다. 다녀올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 너무 미안해서, 정말 열 다섯 살 어린애가 된 것처럼, 그렇게나 서럽게 엉엉 울었다. 형님. 형님. 형님······. < 제21장. 심연의 이면에 (5) > 에반 브리센 후작의 눈이 홉떠졌다. 플란츠의 말은, 칼리안이 드미레아와 함께 입장했을 때보다도 더 놀라운 것이었다. “신성 기사라니. 1왕자가 정말 놈들을 왕궁에 불러들였다는 말씀이십니까.” 플란츠 역시 칼리안 만큼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싫어했다. 아니,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는 성격이라 하는 것이 맞을 터였다. 때문에 플란츠는, 정말이라는 말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브리센은 강한가.” 강하냐니. 브리센의 힘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런 생각에, 에반은 왜 당연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강합니다. 무력도 강하지만, 카이리스의 귀족들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곳이 바로 브리센이 아닙니까.” 에반이 이렇게 말하며 자부심 가득한 눈으로 플란츠를 쳐다보자, 플란츠의 한 쪽 입꼬리가 여지없이 올라갔다. “하는 꼴은 승냥이인데.” 실리케, 레넌과 그레이, 앨런의 피어, 칼리안의 오러, 칼리안과 지그프리드의 동맹 등등, 지금껏 에반은 참 많은 것들 때문에 계속 몸을 사려 왔다. 눈치를 보고, 발을 빼고, 계획을 수정하고, 다시 발을 물리고. 이것만을 반복해왔지, 제대로 나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플란츠가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리핀은 커녕 사자도 못 되는 승냥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플란츠나 에반이나, 서로가 혈육이라는 것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필요에 의한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왕자로서 말했고, 에반은 후작의 입장에서 그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왕자로부터 생각 외로 박한 평가를 받은 에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불쾌한 감정을 담아 뭐라 말을 꺼내려는데,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내며 에반의 말을 막았다. “내 아우님은 숨 쉬는 것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해.” 그렇게 말한 플란츠는, 고개를 돌려 에반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사람을 내려다보는 기색이 분명한 눈빛을 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래야 사니까.” 에반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란델 형님은 내 아우님과 다를 것 같던가. 내 말이 정말인지 묻는 것을 보니, 매일 꽃이나 쳐다보고 있다며 우습게 여겼나본데.” 플란츠의 말이 맞았다. 매일 같이 정원에 나가 꽃을 돌보고 책이나 들여다보는, 텐실 따위의 핏줄. 그것이 에반이 보는 란델이다. 장자라는 것은 카이리스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란델이든 텐실이든, 란델을 지지하는 일부 귀족 세력이든. 그정도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둘을 상대하겠다면서, 그저 잔머리만 굴리지.” “왕자님, 말씀이 너무······.” 나른하게 휘어져 있던 플란츠의 눈매에 칼날이 담겼다. “장담하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에반에게 검을 뽑아들 것 같은 그런 눈으로,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계속 이딴 식이면, 브리센은 내 아우님은 고사하고 란델 형님도 못 이겨.” 도박장 만들어 굴릴 시간에, 아무 소득 없는 그레이를 데려다 일을 꾸밀 그 시간에, 어떻게 하면 플란츠를 세자위에 올릴지 제대로 궁리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니 이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는데.” 물론, 란델을 끌어내리기 전까지만. 숨은 뜻을 가진 말로, 플란츠는 이렇게 에반의 정신머리부터 고쳐놓으려 하고 있었다. 칼리안의 말마따나 언제까지고 칼리안 그늘 밑에 있을 수는 없었으니, 에반과 브리센이라는 칼을 란델에게 제대로 써먹기 위해서였다. 플란츠의 말에 에반이 조금 더 매서워진 눈을 했다. 어차피 이제와서는 플란츠 외의 다른 왕자들에게 손을 댈 수도 없게 되었다. 망나니인 줄로만 알았던 플란츠에게 이런 말까지 듣고 있으니,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넋 놓고 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 제대로 한 번 힘을 써보기로 마음을 먹을 밖에.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왕자님.” 그런 에반의 대답을 들은 플란츠는, 그나마라도 이해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과연 에반이 얼마나 머리를 써줄 지는 몰라도, 예전보다는 나으리라. 그렇게 에반과 몇몇 대화를 더 나누고 헤어졌을 땐, 이미 무도회가 완전히 끝난 뒤였다. 따라서 플란츠도 체르밀로 돌아갔다. 그리고 체르밀 궁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시종을 보게 됐다. 도대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는 칼리안도 모른다 했던, 바로 그 대단한 시종 얀이었다. 플란츠를 마주한 얀은,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는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그런 얀의 앞을 지나치던 플란츠가 문득 발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너.” 지그프리드, 라는 말이 안붙었으니 이번에는 시종 얀을 부른 것이다. 때문에 얀은 오전보다는 조금 더 공손해진 태도로 대답했다. “네.” “그 시녀 불러. 너 말고.” 플란츠는 말이 짧고, 얀은 눈치가 짧다. 그러므로, 2왕자를 쳐다보던 시종의 얼굴에 ‘좀 알아 들어 처먹게 말해라’와 같은 표정이 떠오른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표정이 역력한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눈으로 얀을 보며 다시 말했다. “히나라는 그 시녀 나와 있게 하라고. 너 가라고.” 그 말을 들은 얀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우리 왕자님 다치셨어요?” 어떤 새끼가 꽃 같은 우리 왕자님 건드렸냐고. 딱 그 말이 나오기 직전에, 플란츠가 그 입을 대신해 말했다. “짖지 말고.” 그리고는 더 알아들었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라는 듯 저벅 저벅 걸어서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 * *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체이스가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칼리안이 찾아간 것으로 이미 충분했으니, 굳이 입 밖으로 말을 낼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칼리안은, 체이스에게 많은 것을 털어냈다. 체이스에 대한 죄책감, 마지막 날에 대한 기억. 그 동안 겪어 온 많은 일들. 그리고, 베른까지. 전부 다 체이스의 앞에 내려놓았다. 체이스는 말 없이 전부 받아주었다. 칼리안이 무엇 때문에 베른일 수 없는지 온전히 이해 할 수 있을 유일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로지 체이스 뿐이었다. 때문에 체이스는, 칼리안을 안은 팔에서 힘을 풀며 베른도 놓았다. 그리하여 베른은, 체이스의 품에서 빠져나온 그 순간부터 다시 칼리안이 될 수 있었다. 얼굴을 보고 지낼 수는 있겠지만 형제일 수는 없다는 것을, 그렇게 함께 받아들이기로 했다. 칼리안이 잦아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중에,” 모든 일이 다 끝나면. 그때. 칼리안에게 돌아갈 곳이 생겨도 괜찮게 될 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믿고 마음을 놓아도 괜찮을 때. 그 때가 되면. “나중에······.” 그 뒤의 말이 차마 이어지지 않았다. 칼리안은, 거짓말을 잘 하지 못했으니까. 그것조차 이해한 체이스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만 돌아가세요. 칼리안 왕자.” 이미 너무 늦었으니. 돌아가라면서. 그렇게 칼리안의 걸음을 되돌려 보냈다. * * * 영문도 모른 채 나와 있던 히나는, 품 안의 고양이가 체르밀 궁 안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을 그냥 두었다. 어차피 4층으로 갈 것이 분명했으니 굳이 붙들 이유가 없었다. ‘혼자서 어디를 가셨기에, 이렇게 안오시지.’ 그리고는 조금 심심해하며, 얀을 대신해 칼리안이 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저도 모르게 나오는 하품을 참을 때 쯤. 자박 자박 하고 멀리서 걸어오는 칼리안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눈치를 챘다. ‘아······.’ 축복의 힘이 부은 눈은 치료를 안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소용이 없을 만큼 많이 부었던 것인지. 칼리안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그런 모습에, 히나가 얼른 칼리안에게 달려갔다. 칼리안의 얼굴에 반가운 빛이 들었다. “히나.” 그리고는 곧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보이고 싶지 않은 얼굴 탓이다. “왜 나왔어. 감기 걸릴라. 어서 들어가.” 칼리안은, 유난히 히나에게 다정하게 굴었다. 그것이 이성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는 것을 히나 역시 잘 알았으므로, 나이도 어린 칼리안이 그렇게 오빠처럼 구는 것이 재밌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아무튼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한 얼굴을 한 채로도 히나부터 걱정해준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 칼리안의 앞을 잠시 막아선 히나가 얼른 말했다. - 들어가면, 큰일 나요. 왕자님 눈, 두꺼비. 얀이 또 걱정할걸. ‘두꺼비’ 빼고는 히나의 수화를 다 알아들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멈췄다. 그리고 히나는 칼리안의 팔을 붙들고 체르밀 궁의 호숫가로 데려가 바위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그 큰 눈으로 잠시동안 칼리안을 쳐다보다 물었다. - 다, 울었어요?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응’ 이라고 대답했다. 말보다는 행동이 더 솔직한 법이므로, 히나는 웃었다. -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요. 히나는 작은 손으로 칼리안의 두 눈을 덮었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 칼리안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이제야 비로소 누나 노릇을 해보는 것이다. 안온한 빛을 머금은 히나의 손바닥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어떤 말을 해 줄 손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히나는 그냥 가만히 칼리안의 등만 토닥토닥 했다. 히나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빛이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체르밀 궁의 창가에서는, 야옹 야옹 소리가 잠시 들리다 곧 멀어졌다. * * * 항상 큰 일이 벌어지지만, 정작 축제의 주인공은 그 일들에 그리 크게 개입하지 않는 르메인의 탄신일 기념 축제가 끝났다. 그런 개입이야 어찌됐건, 아무튼 생일을 보낸 것은 분명 르메인이었다. 그런데 칼리안의 얼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르메인을 대신해 나이를 퍼먹은 듯한 모양새였다. 때문에 앨런이 혀를 쯧 차며 말했다. “효도하시는 겁니까?” 스승의 말을 한참동안 이해하지 못하던 칼리안을 보며, 옆에 있던 슬레이만이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왕자님 고생한 것이 얼굴에 다 나온다는 소리입니다!” 그리고는 앨런의 말을 해석해 낸 것이 스스로 참 대견하다는 듯 웃다가, 얼굴을 확 찡그리며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분명히 전 날에는 멀쩡하던 슬레이만의 저 널찍한 가슴팍에, 팔뚝만한 길이의 자상이 나 있었던 탓이다. 앨런이 그런 슬레이만을 향해 혀를 쯧 찼다. “둘 때문에 내가 그냥 다시 늙게 생겼습니다.” 그 말에, 칼리안이 더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날 아침. 그럭저럭 마음을 잘 추스른 칼리안이 얀과 마주 앉아 아침 밥을 먹고 있을 때, 아르센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히나를 잠시 데려가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이 이지경인 줄은 몰랐던 칼리안은, 앨런도 좀 볼 겸 하는 마음으로 히나와 함께 빌헬름 관에 왔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처참하게 조각조각 난 채 나뒹구는 바닥의 대리석과, 그 위에 널브러져 있는 슬레이만, 그리고 멀쩡한 모습으로 슬레이만의 옆에 앉아 있던 테일란을. 회의가 있던 얀이 함께 오지 못한 것이 참 다행한 일이었다. ‘이 정도는 간지럽지도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하며 웃던 슬레이만은 곧 졸도했다. 결국은 앨런이 나서서 슬레이만의 커다란 몸을 옮겨다 놨다. 아주 오래 전, 슬레이만이 테일란에게 검을 들이댔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때문에 슬레이만이 테일란과 한 번 더 붙어볼 날을 그렇게나 기다렸다고 했다. 질 것을 알면서도! 아무튼 그랬던 슬레이만이 어제 무도회 자리에서 술이 부족함을 느꼈고, 결국 앨런의 집무실에서 한바탕 더 술판을 벌이며 밤을 샜다. 그렇게 아침이 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테일란을 만난 뒤에는, 딱 좋은 숙취 해소 거리로 테일란과의 한 판을 요청했다. 그리고 저렇게 됐다. 반파된 훈련장을 본 칼리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 깨어나 앉아있던 슬레이만에게 말했다. “복구 비용 받을겁니다.” “당연히 갚아야지요! 치료해주신 값까지 제가 잘 쳐서 갚아드리겠습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슬레이만이 대답과 함께 또 웃었다. 원 없이 싸우고 져서 더는 미련이 없다더니, 그 때문에 웃는 모양이었다. 그런 슬레이만을 가만히 지켜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돈 말고 다른 것으로.” 그 말을 들은 슬레이만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혹시 지그프리드의 방패 말고 검을 요구하는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든 것이다. 그것을 읽은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것은 드미레아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럼 무엇으로 갚아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 눈을 내리뜬 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뒤, 슬레이만을 향해 대답을 전했다. “전하께는 내가 허락을 받겠으니, 공의 저택을 좀 빌려주세요.” 카이리시스에 있는 지그프리드의 저택을 말하는 것이었다. 슬레이만의 얼굴에 의문이 들어섰고, 칼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내 기사들을 공의 저택에 숨겨 두고 싶다는 소리입니다.” 지그프리드의 저택에도 기사들이 머무는 훈련소가 있었다. 그리고 아이즌이 만든 기사단은, 당연하겠지만 아이즌의 영지에 있었다. 그 기사들이 카이리시스로 몰래 들어와 있을 곳으로, 지그프리드의 드넓은 저택보다 좋은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칼리안이 말한 ‘기사들’이라는 것이, 왕실 친위대 카렌과 라온을 대신할 이들임을 눈치채지 못할 슬레이만이 아니었다. 대리석 바닥 값으로 상당히 비싼 것을 요구하는 칼리안을 보며, 슬레이만이 씩 웃었다. < 제21장. 심연의 이면에 (6) > 당돌하기가 짝이 없다. 자의가 아니었다지만 어찌됐건 지금 칼리안은 천하의 지그프리드를 방패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림막으로도 쓰겠단다. “어떻습니까, 지그프리드 공. 어렵지 않은 일일 것 같은데요.” 지그프리드의 도움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는가. 그들이 정해 둔 신념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탑에 갇힌 카이리스의 왕제, 아스난은 그것을 가늠하지 못했었다. 둘도 없는 친우였으니 슬레이만이 자신의 부탁을 모두 들어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지그프리드의 소가주였던 슬레이만은, 자신을 도와 검을 들어달라 했던 친우의 청을 단칼에 거절했었다. “칼리안.” 때문에 슬레이만은 웃었다. 지금 칼리안은, 슬레이만이 허락할 수 있을 경계선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슬레이만이 지그프리드의 신념을 망치지 않으면서 칼리안을 도울 수 있는 일의 범위는 정확히 거기까지였다. “칼리안. 칼리안······. 으어아하하하!” 왕자를 목전에 두고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른 슬레이만이,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박장대소를 했다. 상처가 또 벌어지는 바람에 히나가 당황한 얼굴을 했지만 신경쓰지 않고 웃었다. 그러더니,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앨런을 보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새끼가 하도 나만 닮아서 영 비루먹기만 한 줄 알았는데, 사람 하나는 잘 골랐다!” 둘의 대화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앨런이 조용히 말했다. “자네 새끼는 자기가 뭘 골랐는지도 모른다네.” 정확한 지적이었으므로, 얀의 눈에는 여전히 그저 꽃같기만 할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슬레이만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허락의 뜻으로 보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슬레이만이 큼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어딘지 장난스러운 기색이 다분한 얼굴을 만들어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 대리석 값으로 치기에는 너무 비싸지 않습니까. 하나 더 주십시오.” 그리고는 이렇게, 흥정을 해왔다. 어쩐 일로 똑똑하게 구는 슬레이만을 본 앨런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리고 칼리안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야기 하라는 뜻이었으나, 슬레이만은 잠시 말 없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상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검에 시선을 두었다.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알 것 같아서, 칼리안이 손을 들어 슬레이만의 말을 막은 후 히나에게 말했다. “히나, 잠시만.” 그 말에, 히나가 고개를 끄덕끄덕 해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와 동시에 슬레이만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테일란이 사용하는 검술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전에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어떻게 지금의 테일란과 칼리안이 같은 검술을 사용하는지가 궁금하다는 소리였다. 슬레이만은 칼리안의 속에 든 것이 온전히 칼리안 본인이 아닐 것이라 짐작했을 뿐이었다. 몇 달 만에 갑자기 오러를 쌓아 나타난 것은 둘째 치고, 그때까지만 해도 칼리안은 완연한 세크리티아 기사의 검술을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칼리안은 그에 대해 슬레이만에게 직접 말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왕세자를 호위하는 기사가 세크리티아의 다른 기사들을 가르치지는 않을 겁니다, 왕자님. 다른 나라의 왕자를 가르칠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상한대로의 질문이 나오자, 칼리안이 파리한 얼굴로 웃었다. 어차피 다 알던 사람이 자세한 내용 좀 더 안다고 문제 될 것이 있겠냐만. 지금 칼리안은 그런 말을 꺼내들 기분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칼리안의 얼굴을 슬쩍 훑어 본 앨런이 입을 열었다. “제가 설명을 할 터이니, 왕자님께서는 이만 들어가시지요. 생각하시는 바에 대해서도 제가 전하와 얘기를 나누고 따로 왕자님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슬레이만에게 칼리안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도, 르메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대신 해줄테니 쉬라는 소리였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 없을 텐데도. 앨런은 이렇게 칼리안을 챙기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런 스승의 배려에 감사를 전한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슬레이만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밖으로 나왔다. 앨런은 쉬라 했지만, 가야 할 곳이 또 있었다. 에우리아 세이렌과 멜피르 폴룬도 만나야 했고, 먼저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칼리안의 도움을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을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생각할 것도, 가야할 곳도, 만나야 할 이들도 이렇게나 많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에 소리 없이 웃던 칼리안이 곧 다시 발을 옮겼다. * * * “애옹!” 안아달라고 졸라대는 소리에, 손을 뻗어 놈을 안아올렸다. “도대체 넌.” 창 밖만 쳐다보고 있으면, 꼭 이렇게 안아달라고 채근을 하는 것이다. 우울한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듯이. 그러니 정말 뭘 알고서 이러는지, 아니면 항상 우연인지 궁금해질 수 밖에. 물론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일은 아니었으므로, 플란츠는 그냥 손을 움직여 고양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그 목에 채워 놓은 목걸이 색이 조금 바뀐 것을 눈치챘다. 처음에는 몸집이 커져서 새 목걸이를 달았겠거니 했는데, 조금 이상했다. 때문에 목걸이에 시선을 둔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분명, 히나일 것이다. 그의 아우님은 지금 머리도 시끄럽고 속도 시끄러운 상태인데다, 애초에 이런 것을 할 성격도 되지 못했으니까. 훨씬 더 길어진 이름이 적힌 목걸이로 바꿔 맨 고양이를 잠시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 똑똑. 누군가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플란츠는 대답 없이 잠시 방문 쪽을 쳐다봤다. 매년 그래왔듯, 국왕 탄신일 기념 축제가 끝나면 왕자들의 일정은 더 많아진다. 축제 준비로 인해 미뤄뒀던 행사들이 일제히 진행되는 까닭이다. 그랬으니 가장 바쁜 것은 시종들이었고, 플란츠의 시종 레릭은 얀과 마찬가지로 회의중에 있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시녀들과 한 명의 시종 외에는 아직 다른 시종을 더 뽑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레릭이 회의에 들어갈 시간에 누가 찾아오면 직접 대답을 해줘야 했다. “뭐야.” 물론 친절한 대꾸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플란츠의 말에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고양이를 찾으러 히나가 왔나, 하는 생각에 방문을 연 플란츠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잠시 뒤, 나른한 목소리가 플란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 아우님 방은, 아랫층인데.” 체이스의 기사, 테일란을 향해서였다. * * * 텐실의 신성 기사를 데리고 그레이가 있는 변경백령을 공격하려 했다. 그리고 계획이 실패했다. 과연 란델이 여기서 멈추겠는가. “절대.” 그렇게 입을 연 칼리안이, 앞에 앉아있던 에우리아와 멜피르를 향해 말을 이었다. “안 멈출 겁니다. 시간이 촉박하다 생각하는 만큼 분명 다른 일을 벌일 계획을 또 짜고 있을 텐데.” 란델의 입장에서 란델보다 먼저 생각을 해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가 절실했다. “워낙 상식적이지 않은 일을 벌이셨던 분이라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네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실소했다. 지나칠만큼 이성적인 란델이 지나칠만큼 비이성적인 행동을 했으니, 그것이 웃겨서였다. 곧 칼리안이 에우리아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신성 기사들은 제대로 빠져나가고 있습니까?” “그 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에우리아의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유가?” 그러자 에우리아가 재밌는 일이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젯밤에, 란슬럿 영지에 있던 기사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란슬럿? 브리센 쪽에 선 남작이던가요?” “맞습니다. 무력 충돌을 일으킬 분위기는 아니었고, 텐실 국경까지 잘 안내하고 올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섣불리 빠져나가거나 말 머리를 돌려 다른 공격을 꾀하지 못하도록, 아예 근처에서 바짝 쫓아가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짧게 소리내서 웃고는 혼잣말을 꺼냈다. “내 형님께서 이렇게 또 도움을 주시나.” 그들이 누구인지 에반은 몰랐다. 그러므로, 플란츠의 손이 닿은 것일 터였다. 그 에반이 거기까지 생각을 확장시킬 인물은 못됐으니까. “그래도 손 놓지 말고, 우리 쪽에서도 계속 지켜봐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걱정 마세요.” 에우리아가 이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웃음을 보였다. 그 후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있던 멜피르를 쳐다봤다. 직접 대면하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영지들이 있으면, 모두 확인해주세요.” 멜피르 역시 에우리아만큼이나 많은 정보를 접하는 인물이었다. 카이리스 곳곳의 영지와 거래를 하고 있는 곳이니까. “지금까지는 특이한 점이 없었고,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바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타격이 있을 겁니다.” 이것은 텐실과의 다이아몬드 거래에 대한 이야기였다. 폴룬 상단에서 텐실과 거래하는 것 중에 가장 큰 수익을 내는 것이 바로 다이아몬드였으니까. 란델의 일로 텐실의 왕실에서 분명 그에 대한 보복성 제재가 있을 터였다. 때문에 이렇게 먼저 말을 꺼냈고, 멜피르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그러더니 칼리안의 앞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주석으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였다. “무엇입니까?” “지금 카이리스에서,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보다 귀한 것이라니? 이런 생각을 하며 상자를 열어 본 칼리안이 순간 어리둥절한 얼굴이 됐다. “루비 아닙니까?” 멜피르가 둥글둥글한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 역시 본의 아니게 카이리스의 루비 수요가 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다이아몬드를 대체할 만큼일 줄은 몰랐다. “세크리티아의 사신단에 루비를 취급하는 이가 있기에, 어제 만났습니다. 생각 외로 굉장히 호의적으로 나오더군요. 그러니 텐실에 대해서는 신경 써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 하고,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죽었어야 할 멜피르가 살아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멜피르가 누구와 손을 잡았을지는, 굳이 오래 고민할 거리도 못 되었을 터였다.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여러 걱정 거리가 덜어졌으니까. 플란츠, 그리고 체이스 덕분에.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한 명을 만나볼 일만 남게 된 칼리안은, 조금쯤 가벼워진 마음을 한 채로 마법사 협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레이븐은 칼리안을 태운 채 참으로 편안한 걸음걸이로 발을 옮겼다. 레이븐이 알아서 왕궁까지 잘 데려다 줄 테니, 칼리안은 입고 온 로브의 후드를 깊이 눌러쓴 채 눈을 감았다. 그런다고 사람들이 칼리안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기에는 조금 피곤한 마음이 들었던 탓이었다. - 다각, 다각. 어떻게 알았는지, 레이븐은 발굽 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기특한 녀석이 아닌가. 그런 생각에 다시 혼자 웃을 즈음, 레이븐이 발을 멈췄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눈을 뜨고 앞을 쳐다봤다. 칼리안과 마찬가지로 로브를 입고 후드를 쓴 사람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후드 아래 비춰진 모습을 본 칼리안은, 레이븐처럼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여긴······.” 무슨 일로, 어떻게 여기에 왔느냐고. 그런 질문 대신, 칼리안은 웃으며 그 이름을 불렀다. “시아.” 녹색 머리의 엘프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대장! 오랜만이야!” 그런 시아의 대답은, 질문보다 앞서 있지 않았다. <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1) > 엘프 종족은, 선하지 않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폭력을 꺼려하며 숲 속에 모여 산다 하여 그들을 ‘선하다’ 할 수 없다는 것을, 몸소 겪으며 깨달은 칼리안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엘프라는 종족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을 일찌감치 집어 치웠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그들에 대한 악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엘프가 선하지는 않다는 것을, 그들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선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정도였다. “대장이 맞았어! 너무 좋아!” 이렇게 칼리안과 마주 앉아 해처럼 웃는 시아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브를 쓰고 있어 칼리안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특징 있는 외형의 레이븐을 알아봤다. 그래서 얼른 레이븐의 앞을 막고 서게 되었다고 했다. “다시 만나니까 정말 기쁘다.” 칼리안은 이렇게 말하며 기뻐해주는 시아를 향해 진심어린 미소를 보냈다. 생각만 해도 짜증이 솟구치는 엘프 장로 제르가 있는 마을에 시아가 다시 돌아간다 했던 것을 걱정했는데, 이렇게 밝은 모습을 보니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혼자 온 거야?” 시아를 데리고 마법사 협회 건물로 되돌아온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다. 어느새 칼리안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주변을 가득 채운 책들을 신기하다는 듯 구경하던 시아가 대답했다. “우리 마을 장로님이 이번에 여기 오는 장로님으로 뽑혔어. 그래서 내가 막 부탁했어. 대장이랑 히나랑 만나고 싶어서, 나도 오고 싶다고 졸랐어.”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 축제에 참석하는 엘프 사절단에 함께 섞여 왔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장로 제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시아가, 칼리안의 오해를 얼른 풀어줬다. “제르는 이제 장로 아니야. 대장로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 제르랑 루카는 오랫동안 벌을 받을 거야.” 그 말에 칼리안이 안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버릇 나쁜 루카의 발뒷꿈치가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떠올려 보아야 칼리안만 불쾌해지는 이들이었다. 더불어,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너, 말은?” 말을 어떻게 ‘제대로 하는지’를 묻고 싶었는데, 시아에게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 뒷말을 삼켰다. 다행히 칼리안의 말 뜻을 알아들은 시아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의 눈빛이 아주 잠시 가라앉았다. 칼리안 역시 잘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또 있었군.” 검은 조약돌. 칼리안이 지닌 것과 완전히 똑같은,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바로 그 신물이었다. “루카 가방에 하나가 더 있었어. 루카는 어디서 났는지 정말 모른다고 해서 주인을 못 찾았어. 그래서 장로님이 나더러 가지고 있으라고 하셨어.” 시아가 조약돌을 칼리안 앞에 내려놓더니, 생긋 웃으며 말했다. “맞아. 가져가.” 모든 신물은 카이리스 왕실에서 회수하여 관리한다 말했던 것을 아직 기억하는 것이다. “나 주려고?” 그렇게 질문한 뒤, 시아가 이미 대답을 했음을 깨달았다. 돌이 없으면 대답이 빠른 것은 여전한 모양이다. 칼리안이 시아를 보며 마주 웃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시아에게 돌려줬다. “그래도 돼?” “그냥······ 응.” 빨리 가져가. 어차피 같은 것은 칼리안에게도 있었으므로, 굳이 시아와의 대화를 힘들게 이어나갈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라도 필요해지면, 시아를 찾아가 돌려받으면 될 일이니까.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여전히 항상 지니고 다니는 같은 돌을 손으로 쥐어 본 칼리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나가 아니었단 말이지.” 분명 시스파니안도 이 돌의 정체를 알아봤다. 주신 세렌티의 개입으로 그 말이 칼리안에게는 전해지지 않았으나, ‘모르겠다’는 분위기는 아니었었다. 일단 시아는 그에 대해 더 아는 것이 없어 보였으므로, 칼리안은 일단 돌에 대한 의문을 잠시 접어두었다. “그래서, 카이리시스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야?” 그러자, 시아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장로님이 대장의 대장한테 할 말이 있댔어. 그래서 아직 조금 더 있다가 갈 거야.” 시아의 대장의 대장이라면 르메인일 것이다. 르메인과 대장로 사이에 이야기 나눌 것이 있다는 듯한 말이었다. ‘대충 무슨 말을 할 지 알겠네.’ 시아는 왕궁의 루비아 관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했다. 왕궁 출입은 허가가 되었으나, 체류는 허가되지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음을 아는 칼리안이, 그 말을 듣고 실소했다. 칼리안이 엘프들과 얽혀 겪게 되었던 일에 대해 르메인이 항의 표시를 한 것이리라. 대장로는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일 테고.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인 칼리안은, 그 후 잠시동안 시아와 함께 소소한 대화를 조금 나누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다른 일은 없었는지 뭐 그런 것들. 그리고는 내일 히나와 시아를 만나게 해주기로 약속하며 시아를 돌려 보냈다. 그리고 에우리아를 다시 불렀다. 시스파니안은 기다리라 했지만, 무작정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가 아니었다면, 어딘가에 또 있을 것이라는 소리였으니까. 그러니, 란델의 장미와 같은 색을 발하던 이 돌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 * * 세크리티아 새들의 능력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플란츠는 이제 그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체르밀 궁은 왕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르메인의 집무 공간인 아르피아 궁처럼 외부인 방문이 자주 있는 곳과는 완전히 달랐다. 물론 플란츠는 몰랐지만 그 앨런조차도 체르밀 궁의 입궁을 바로 허락받지 못했었다. 그 덕에 굳이 수고스럽게 ‘워프’를 하여 칼리안의 방으로 들어와야 했지 않았던가. 그러니, 르메인이 아무리 체이스를 존중한다 하더라도 타국의 왕세자가 체르밀 궁에 들어오는 것까지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서 겁이 없으신건지.” 그런데 지금 세크리티아의 기사, 그것도 대륙 첫번째 소드마스터인 기사가, 카이리스의 왕자들이 머무는 체르밀 궁에 보무도 당당히 들어와 있는 것이다. “아니면, 생각이 없으신건지.” 때문에 플란츠는 테일란의 손에 들려 있는 입궁 허가서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위조된 것임이 분명했으니까. 물론 그것을 위조할만한 이들은 당연히 왕궁의 허가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고 있을 세작들 뿐이다. 그러니 그들이 지닌 능력의 한계치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플란츠의 말에 한쪽 눈을 살짝 찌푸렸던 테일란이 입을 열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체이스가 기다리고 있으니 나오라는 소리다. 체르밀 궁의 밖이라 하면, 당연히 인공호수나 장미 정원이 있는 그 곳일 터였다. 수련장으로 이어지는 후원에 체이스가 가 있지는 않을 테니까. 테일란의 말에,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대꾸했다. “불러. 여기로.” 카이리스 왕궁 안을 혼자 돌아다니질 않나, 위조된 허가서를 들고 이렇게 밝은 시간에 찾아와서는 당당히 밖에 있질 않나. 그 왕세자, 대체 뭘 믿고 그리 제멋대로 군다는 말인가. 그러다, 란델이라도 마주치면 어찌하려고. “당장.” 때문에 플란츠는 이렇게 덧붙인 뒤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감은 채 동생의 형이었던 이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히나가 첨언을 해 두는 바람에 길고 긴 이름이 더 길어진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놈이 얼른 달려와서는, 플란츠의 무릎에 자리를 잡고 몸을 뉘였다. - 똑똑. 그와 동시에, 체이스가 플란츠의 방에 들어섰다. 그래도 체이스 쪽은 칼리안보다 얼굴이 좀 나았다. 정말 나은 것인지, 나은 척을 하는 것인지까지 플란츠가 걱정해 줄 일은 아니었다. 그 후 플란츠의 눈이 잠시 체이스의 목 언저리에 가 닿았다. 꽤 길었던 체이스의 머리가 확 짧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사정이야 알 수 없었지만, 서로간에 머리카락을 자른 이유를 묻거나, 어제 있던 일에 대한 안부를 주고 받을 만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았다. 그래서 플란츠는 말 없이 맞은편 자리만 가리켜 보였다. 그곳에 앉은 체이스가, 오전의 햇살 아래 플란츠의 무릎 위에서 몸을 말고 누워있는 고양이를 봤다. 그리고는 의외라는 듯 말을 건넸다. “생각도 못했습니다. 플란츠 왕자와 고양이라니.” 누군들 생각했을까. “······ 자꾸 들어와서.” 간단히 대답한 플란츠는, 고양이의 목줄을 손으로 가렸다. 딱히 체이스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체이스의 짙은 보랏빛 눈을 보며 다소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준비성이 대단하시던데.” 그 말에, 출입 허가증을 떠올린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혹시 쓸 일이 있을까 해서 마련해 뒀습니다.” 여전히 당당한 대답이었다. 그 쓸모라는 것이 칼리안을 만나기 위해서였을지, 아니면 칼리안에게 뭔가를 뺏었을 자신의 목을 노리기 위해서였을지. 잠시 둘 중 어떤 것이 답인지를 가늠해보던 플란츠가 실소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일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세크리티아의 세자께서 여기까진 무슨 일로.” 그 말을 들은 체이스가, 대답에 앞서 잠시 웃었다. ‘내 아우님의 형님’이라던 거추장스러운 호칭 대신, 처음 체이스를 봤을 때와 같이 자신을 부르는 것을 느낀 까닭이다. 눈치가 빠른 걸까. 아니면, 칼리안이 얘기를 했을까. 아무리 체이스라 해도 그것까지 가늠해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체이스는 그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대답했다. “전해 줄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내 새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물어왔기에.”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카이리스에 와서는,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알아낸 정보를 카이리스 왕자에게 알려주겠단다. “하.” 대충 둘러대도 될 것을 솔직하게도 알려주는 모습이 누군가와 참 많이도 닮았다. 플란츠는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 해보라는 뜻이었고,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다만 체이스가 꺼낸 것은, 세작들의 소식에 대한 말이 아닌 다른 이야기였다. “그 신관들을 쫓는 브리센의 기사들은, 플란츠 왕자의 생각입니까.” “······ 세크리티아의 세자께서 이 곳을 떠났을 때, 내가 뭘 해야 할지 확실히 알겠군.” 세작부터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굳히며, 플란츠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체이스는 별 문제 없다는 듯 대답했다. “내 동생도 모를 곳으로 다시 숨었으니 쉽지 않을 겁니다. 카이리스에 해가 될 일도 없을 테고.” 예상하지 못한 단어가 하나 들어가 있었다. 플란츠의 표정을 읽은 체이스가 아주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다 내려놓고 갔으니, 나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제가 아닌 것을 받아들인 것과는 별개로, 그래도 한 명쯤은 계속 기억을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래야 ‘베른’이라는 그 이름이 가진 의미가 상하지 않을 테니까. 체이스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플란츠가 그런 체이스를 한동안 쳐다보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말했다. “그래서. 내 아우님의 옛 형님께서 하실 말씀이 뭔지.” 호칭이 또 바뀌었다. 체이스가 웃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카이리스 국왕 전하께서도 곧 아시게 되겠지만. 내 새들이 조금 더 빠르니까.” 자부심 한 번 대단하다.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텐실과 대사막의 늑대가 만났습니다. 내 동생에게 전해주면, 알아 들을 겁니다. 내 생각엔 플란츠 왕자도 무슨 말인지 이해 할 것 같지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플란츠의 눈이 예리한 빛을 발했다. 왕이 없는 대사막의 늑대들. 그들의 무력은 상상 이상이다. 수해를 잔뜩 입은 텐실이 이제와서 그런 대사막의 늑대들과 다시 전쟁을 일으킬 리 없었다. 그러니 둘이 만났다는 것은, 신을 모시는 텐실과 신을 부정하는 대사막의 늑대가 서로 손을 잡았다는 소리와 같았다. 그러니 그것은, 란델의 힘이 늘어났다는 말이었다. <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2) > - 대사막의 늑대와 텐실이 만났다. 고작 그 한 마디에 플란츠의 눈빛이 바뀌자, 체이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한 층 짙어졌다. 그리고 그 미소를 흩어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내 동생이 많이 무뎌졌기에,” 체이스가 딱 거기까지 말했을 때, 플란츠의 입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새나왔다. 헛웃음과 비웃음의 중간 쯤 되는 그런 소리였다. 많이 무뎌졌단다. 누가 들으면 칼리안이 그냥 예쁘장한 왕자님이기만 한 줄로 착각할 소리를 한다. 칼리안과 대련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목을 베인다. 그레이가 카이리시스에 들어오는 것을 막겠다며 허리를 부러뜨려 둔 놈이다. 에반 브리센 후작의 의심을 덜고자 일을 좀 벌이겠다 했을 때에는 쉰에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 그 일을 벌이고 돌아온 키리에로부터 상황을 전해들은 동생 놈은, 놀란 기색도 없이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레이븐이 칼리안만 따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앨런에게도 대서는 그 미친 아르센이 칼리안에게만 꼬리를 내리는 것에도,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무뎌졌다니. 지금의 칼리안이 어떤지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체이스라면, 칼리안의 행적에 대해 플란츠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웃은 것이다. 대체 ‘과거’에는 어땠길래, 라는 뜻의 웃음이었다. “그래서일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플란츠의 복잡한 마음에는 관심 없을 체이스가 이렇게 의미심장한 소리를 했다. 평소 플란츠가 그리하는 것처럼, 머리와 꼬리는 찾아볼 수 없을 말이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그 말의 의미와 말에 든 가시까지도 아주 잘 알아들었다. “내 아우님이 나를 살려 둔 것이 아주 놀라운 일인가보군.” 지금 체이스는, 칼리안의 마음이 약해져서 플란츠를 살려둔 줄 알았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말을 한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플란츠가 한 번에 알아들었으니, 그것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그러니 한 마디로, 칼리안이 화를 참고 살려두었을 만큼은 똑똑하다는 소리인 것이다. 플란츠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칭찬으로 들어야 하나.” 체이스가 다시 한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 맞다는 소리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칭찬이었는지는 플란츠가 알아서 걸러들으면 될 일이니까. 그 외에 서로간에 더는 할 말이 없었으므로, 체이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궁금해지는데.” 그 말에, 뭐가 궁금하냐는 듯 체이스가 플란츠를 쳐다봤다. “내 아우님의 옛 형님께서는 왜 가만히 있는지.” 칼리안은 움직이고 있었다. 제 목숨 값으로 발칸부터 만들었다. 그리고는 마법사와 기사를 모아가며, 스스로는 검술과 마법을 수련해가며, 아주 열심히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이 비단 왕세자위에 오르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자리만을 바랐다면, 그렇게 얌전히 앉아서 눈치 싸움이나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플란츠와 란델의 목을 꺾는 것만큼 쉬운 일이 칼리안에게 또 있을까. “내 아우님과는 다르게.” 칼리안은 뭔가를 대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때문에 카이리스를 최대한 망치지 않으면서 제 힘을 키우려 하는 것이 눈에 훤했다. 그러니 궁금한 것이다. 체이스가 칼리안과 같은 것을 안다면, 최소한 발칸과 유사한 집단이라도 만들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세크리티아의 행보는 매우 평범했다. 그저 세작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달았을 뿐, 그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것은.” 체이스가 그렇게 입을 열었다. 깊은 보랏빛의 눈. 하지만 란델의 것처럼 사람의 숨을 죄이는 것이 아닌, 통찰이 담긴 눈빛을 한 채였다. “내가 건드려야 할 부분이 아닙니다.” 체이스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과거와 똑같은 결정을 하고 똑같은 나라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야 칼리안이 그 힘을 손에 쥔 유일한 사람이 될 테니까. 그런 뜻이었으므로, 플란츠는 그냥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화가 끝났다 여긴 체이스가 밖으로 발을 옮기려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는지,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나실 경도 내 동생의 비밀을 아는 것 같던데. 혹시 내용을 아는 이가 또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러자, 체이스가 처음으로 당황한 얼굴을 했다. 모르는 이가 누구인지 묻는 것이 빠를 것이라는 의미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 * * 앨런이 앞에 놓인 귤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서류를 보던 눈을 잠시 돌려 그 모습을 본 르메인이, 쓰고 있던 안경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듯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실 텐데.” 앨런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굳이 입에 넣고 씹을 때를 기다려서 시다고 말했다. 노린 것이 분명하다. 뱉을 수도 없고 삼키기도 힘들만큼 신 귤을 간신히 씹어 넘긴 앨런이 툴툴거렸다. “웃지 마시지요.” 서류로 얼굴을 가린 르메인이 괜한 헛기침을 했다. 분명하다. 웃었다. 곧 얼굴을 가리고 있던 서류를 손에 든 르메인이 안경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앨런의 맞은편으로 와 앉더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기사들을 모을 예정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었네. 때문에 사냥대회도 열어주었던 것이고.” 칼리안이 슬레이만에게 요청했던 일과 관련해서, 칼리안을 대신해 르메인에게 허락을 받으러 온 길이었다. “다만. 열 한 곳이나 되는 가문에서 모은 기사단이라 하니.” 그렇게 혼잣말처럼 입을 연 르메인이 앨런을 향해 말했다. “기사는 마법사들과는 다를 수 있네. 그들처럼 맹목적이지 않을 텐데.” 칼리안이 완전히 믿을 수 있을 발칸과 달리, 기사들은 칼리안으로부터 마음을 돌릴 수 있다는 말이었다. 심지어 한 가문의 기사단도 아닌 열 한 곳이 모였다 하니, 그들을 어디까지 신용하고 수도에 들여야 할지 고민이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칫하면.” 왕세자위 싸움이 정말로 내전으로 번질 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런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앨런이 귤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한 조각을 먹어도 시고, 여러 조각을 먹어도 십니다.” 어차피 칼리안이 직접 키워낸 기사단이 아니었다. 한 가문이 모였든, 여러 가문이 모였든,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니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똑같다는, 그런 말로 알아들은 르메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앨런이 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브리센만 있든, 브리센 외의 다른 기사들이 있든, 전하 목숨 간당간당한 것은 똑같다는 말입니다.” 아. 내 목 얘기였나. 르메인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앨런은 그런 르메인의 모습에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만약 그들이 왕궁을 향해 검을 드는 날이 온다면.” 거기까지 말한 뒤 잠시 말을 멈춘 앨런은, 그 신 귤을 하나 더 떼어내어 입에 넣었다. 그러더니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한번 더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맺었다. “그 맞은편에는 전하의 셋째 아드님이 있을 터이니, 그것은 걱정 마시지요.” 제 사람 하나는 확실히 지키는 칼리안이 아닌가. 그리고, 칼리안이라 하여 그들의 배신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다. 이미 모두 고민을 끝낸 일일 터였다. 어차피 귀족들은 제 잇속에 따라 움직인다. 그렇다면 칼리안을 따르는 것이 계속 그들에게 이익이 되면 될 일이다. 그러니 어려울 것이 없지 않겠는가? 라고. “내일까지는 답을 주겠네.” 물론 르메인이라 하여 무조건 앨런의 말을 다 들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앨런 역시 예상한 답이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신 귤은 처음 봤습니다.” 무언가에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귤 얘기였다. 아직 푸른 빛이 감도는 그 귤은, 단 맛을 찾기 어려울 만큼 셨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가져왔다더군.” 체이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테이블 위에 있던 귤이 바구니째로 사라졌다. 앨런이 챙긴 것이다. 먹지도 못하는 걸 왜 가져가냐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르메인에게, 앨런이 날카로운 눈매를 둥글둥글하게 만들어보이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다른 것 드십시오.” 체이스가 르메인 먹으라고 보존 마법까지 걸어가며 귤을 가져왔겠는가? 그러니 전부 다 어여쁜 제자에게 가져다 줄 요량이었다. * * * 에우리아는 참으로 마법사다웠다. 칼리안이 내보인 돌에 대해 엄청난 호기심을 보인 것이다. “시간을 바로잡는 힘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정확하지 않습니다. 내 예상일 뿐.” 시아가 대답하는 순서를 바로잡고, 시들지 않는 장미에 묶여 있던 시간을 흐르게 했었으니까. 시간을 거슬러 온 칼리안에게는 아무 영향이 없었지만, 시아와 장미만 놓고 본다면 ‘시간’과 관계가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았다. “재밌는 힘을 가졌군요.” 본래 칼리안은 앨런에게만 돌에 대한 내용을 알렸었다. 세렌티가 개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왕궁의 자리 싸움과는 완전히 다른, 어찌 본다면 칼리안 개인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었으니 그에 대해서까지 마법사들과 에우리아의 힘을 빌리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이 문자가 무엇인지도 모르겠고요.” 물론 에우리아 역시 아는 것이 없으리라는 생각도 한 몫을 했다. 칼리안의 예상대로, 돌에 새겨진 문자를 본 에우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해듣기로는 세크리티아에도 잊힌 문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혹시 그것은 아닐까요?” “아닙니다. 그 쪽은 이미 알아보았습니다.” 칼리안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언어가 아닌가. 특별할 것 없이 전승되어 내려온 그것을 떠올리며,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 에우리아는 서재에서 온갖 신학 서적을 가져왔다. 그 중 한 권을 들어올린 칼리안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의외네요. 마법사 서재에, 양신전쟁 연대기라니.” 그 말에, 에우리아가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마법사들은 텐실의 신관과는 다릅니다. 세렌티의 생존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시스파니안께서 그 자리에 있으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모든 마법사들은 세렌티에 대해서도 상세히 배웁니다, 왕자님.” 옛 칼리안의 기억에는 양신전쟁 뿐 아니라 주신 세렌티에 대한 자세한 지식이 들어있지 않았다. 왕자의 수업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다. 독학으로 마법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종이와 펜을 들어 칼리안이 가진 돌에 새겨진 문자와 돌의 모양을 베껴낸 에우리아가 물었다. “로젤리타 기간, 그리고 스팅과 네리카 영지 맞으십니까? 루카라는 엘프 소년이 가지고 있었고요.” 칼리안이 맞다 답했고, 에우리아가 알겠다는 듯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제 몫입니다, 왕자님. 이만 궁으로 돌아가십시오. 확인되는 것이 있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에우리아가, 왜 그러는지를 묻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칼리안이 그에 대한 답을 전했다. “재밌어서요. 요즘 왠지 내가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아서. 다들 나는 그냥 가라고 하니.” 그 말에, 에우리아가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왕자님께서 직접 움직이시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칼리안은 부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근래 들어 의도치 않은 배려를 계속 받다 보니 꺼낸 말이었다. 아무튼 칼리안이 더 이상 에우리아에게 도움이 될 것은 없었으므로,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 주의를 덧붙였다. “그 돌을 처음 얻었을 때, 피 냄새가 아주 짙었습니다.” 누군가 생명을 잃었던 물건이니 조심하라는 의미로 건넨 말이었다. 기사들이 맡는 피 냄새가 어떤 의미인지는 에우리아 역시 잘 알았다. 따라서 에우리아는 잘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침에 슬레이만을 만나고, 마법사 협회로 왔다. 에우리아와 멜피르를 만나고 돌아가던 길에 시아를 만났고, 다시 협회로 돌아왔다. 그리고 에우리아와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아.”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시간이 흘렀음을 알게 된 칼리안이 난처한 소리를 냈다. “얀이 걱정하겠네.” 금방 다녀올 생각이었으므로, 행선지도 알리지 않고 키리에도 없이 혼자 나왔다. 분명 안달을 내고 있거나 아니면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 수소문을 하고 있을 터였다. 칼리안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오르자, 여유롭게 걷고 있던 레이븐이 알아서 걸음을 빨리 했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레이븐의 갈기를 흩뜨리듯 쓰다듬었다. 그렇게 레이븐이 알아서 왕도를 향해 걷고 칼리안은 후드를 깊이 눌러 쓴 채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잠시만, 레이븐.” 이번에는 칼리안이 레이븐을 멈춰세웠다. 그리고 고개를 들며 재밌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레이븐이 멈추지 않았을 만큼 잘 감춰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카이리시스는 넓었다. 어디에서든 한적한 곳은 있었다. 그런 한적한 곳에서, 시아도 알아보는 왕자의 검은 말을 향해 몇몇 인영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카이리시스의 축제 기간이었으니 손님들이 참 많이도 찾아온 모양이었다. 때문에 낮에는 시아가, 그리고. 밤에는.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을까.” 붉은 눈에, 아주 반가운 것을 보았다는 빛이 떠올랐다. 정확히 자신을 향하고 있는 그들 특유의 투기를 느끼며, 칼리안의 웃음이 짙게 변했다. “······ 늑대들.” <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3) > 대사막의 늑대. 그렇게 불리는 대사막의 전사들은, 한 명 한 명이 상급 기사 이상의 힘을 지닌다. 저들이 ‘전사’의 이름을 받았다면, 왕실 기사단원 정도의 솜씨는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칼리안은 아직 베른의 검술을 완전히 사용하지 못한다. 몸도 더 자라야 했고, 오러도 더 쌓여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작 다섯이라.’ 칼리안이 소드마스터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 다섯 명 뿐이다. 숨긴 패가 있다고 밖에는 보기 어려운 숫자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리고는 그 예쁜 웃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서늘한 눈빛을 한 채로, 놈들이 숨긴 패보다 더 궁금한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란델 형님은······ 아닐테고.” 텐실과 대사막의 늑대들이 손을 잡았다던 체이스의 말을 전해 듣지 못한 칼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델을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칼리안에게 해를 입히고 싶어 할 가장 유력한 인사가 바로 란델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떠올렸을 뿐. 칼리안은 란델에 대한 의심을 곧바로 지웠다. ‘시기가 맞지 않는다.’ 란델은 이미 신성 기사를 보냈고, 실패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텐실에 도착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란델은, 칼리안을 손에 넣으려 했다. 그런 란델의 뜻을 거부한 지 불과 사흘도 되지 않았다. 그 전까지 란델은 칼리안에게 해코지를 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테니, 만에 하나 란델이 저들을 보낸다 하더라도 보름 쯤은 뒤에나 도착해야 앞뒤가 맞는 것이다. 따라서 란델은 아니다. “브리센 후작도 아닐텐데.” 에반은 칼리안의 뒤에 지그프리드가 있음을 안다. 몸 사리기 좋아하는 에반이, 카이리시스에 슬레이만과 그의 기사들이 있는 이 시기에 칼리안을 습격하려 할 리 없다. 때문에 에반도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한 웅큼의 바람이 칼리안의 손 끝을 스치듯 지나갔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바람이 한 번 불어오는 그 사이에 란델과 에반에 대한 사고를 이미 마쳤다고 해야 할 터였다. 그 바람을 타고, 시린 기운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보낸 선물일까.” 그런 칼리안의 혼잣말에 대답하듯, 전사들 중 한 명이 칼리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허리에 검이 매여 있기는 했지만 뽑아들지는 않은 채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아무리 살기가 아니라지만, 저런 투기를 뿜어대면서 반갑게 인사라도 나누자는 것은 아닐텐데. 배후도, 의도도, 파악되지 않는다. - 탁! 그때, 레이븐이 제 자리에서 앞 발을 한 번 굴렀다. 칼리안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하기사. 칼리안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누군가를 앞에 두고 긴장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랬으니 레이븐의 이런 모습 역시 처음일 밖에. 때문에 레이븐의 발구름이 칼리안에게는 ‘긴장하지 말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믿기지 않겠지만, 말이 사람을 걱정해주는 것처럼 들렸다는 뜻이 맞다. 얀은 물론이고 앨런부터 히나까지 주변의 모든 이들이 칼리안을 걱정해주고 있는데, 레이븐의 걱정까지 받아서야 되겠는가. “괜찮아.” 따라서 칼리안은, 레이븐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등에서 훌쩍 뛰어내린 뒤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검은 머리, 붉은 눈. 칼리안의 얼굴을 확인한 전사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것은, 이들이 정확히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세 보 남짓 거리를 두고 칼리안과 대면한 그가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하르난.” 이름을 말한 것이리라. 칼리안은 고개만 끄덕였다. 칼리안은 왕자였고, 또 저들은 이미 칼리안의 이름을 알고 있을 테니까. 대신 칼리안은, 언젠가의 플란츠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질문을 건넸다. “싸움, 대화. 어느 쪽이야.” 하르난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칼리안이 매우 마음에 들어 할 만한 대답을 했다. “싸움.” 동시에, 숨막히던 정적이 찢겼다. - 카앙! * * * “애오옹!”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긴 울음소리를 냈다. 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고양이의 입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나갔다 오더니 뭔가를 얻어먹고 온 모양이다. 플란츠가 피식 웃으며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곧 못들어오겠군.” 아닌 게 아니라, 살이 많이 쪘다. 정작 손으로 잡아보면 아직 작은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꽤 묵직해졌다. 이러다가는 저 문틈을 넓혀 놓지 않는 이상은 들어오다 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안아달라는 고양이를 들어올린 플란츠의 눈에, 목걸이가 다시 보였다. 목줄에 적힌 동생의 이름에 시선이 닿았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달빛에 비춰진 그 이름을 한동안 응시하고 있으려니 불가피한 사념이 떠오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고양이를 쓰다듬던 손은 멈추고, 고양이가 게으른 하품을 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이어져 나간 생각의 끝에 선 채로, 플란츠가 낮게 읊조렸다. “눈치 채기 싫었는데.” 칼리안은 하루 아침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식당에서 자신을 노려보던 칼리안의 그 눈빛을, 플란츠는 잊지 않았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그 동생, 그리고 지금의 칼리안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왕위에 올랐을 카이리스의 2왕자. 그런 이들이 서로 얽힐 만한 일. 그 일을 겪은 칼리안이 ‘죽이지 않도록’ 사력을 다하는 눈빛으로 플란츠를 직시하게 만들 만한 일. “미오옹!” 고양이가 다시 울었다. 플란츠가 고양이의 목덜미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다시 꺼내들었다. “확실히 나는,” 플란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 왕이 된 자신이 무슨 짓을 하게 됐을지를. “왕이 될 재목은 아니었나보군.” 이유는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예상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베른과 체이스는, 플란츠가 벌인 전쟁으로 인해 죽었으리라. * * * - 두근! 가히 오랜만에 듣는 소리다. 축복의 힘이 이 정도로 크게 느껴진다는 것은, 허리에 생긴 상처가 꽤 깊다는 뜻이리라. 조금 전 하르난의 검에 허리를 베였을 때, 칼리안 역시 하르난의 어깨를 벴다. 그러나 하르난의 상처는 오래지 않아 흔적 없이 사라졌다. - 툭, 투둑. 투두둑. 굵은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씩 웃었다. 상처 따위에 개의치 않고 검을 뻗었다. - 카아앙!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을 다시 한 번 뒤흔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누군가 이 곳에 직접 발을 들이지 않는 이상, 이 한적한 곳에서 카이리스 왕국의 3왕자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르난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이 칼리안과 하르난을 감싼 채 대규모 사일런트 막을 생성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다섯 명이 칼리안을 찾아 온 이유였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저것을 사일런트라 칭해도 된다면 말이다. - 카앙! 카강! 캉!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칼리안의 빠른 검격을 막아낸 하르난의 검에 붉은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앨런이 발현했던 그레이트 실드에 감도는 붉은 빛과 다르다. 그것은 앨런의 주종인 불꽃의 힘었으나, 저것은 아니었다. - 타다다당! 란델이 보여줬던, 바로 그 빛이었다. 칼리안의 손에 들린 투명한 방패가 쏟아지듯 이어진 하르난의 검격을 되받아쳤다. 그 힘에 밀린 하르난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하아. 잠시간의 틈을 타 칼리안이 소리 없이 숨을 내뱉었다. 곧 방패를 장검으로 다시 바꿔 든 칼리안이 조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재밌는 힘을 쓰네.” “누가 할 말을.” 무기를 바꿔가며 싸우고 있는 칼리안의 공격을 언급하듯 대답한 하르난이 다시 발을 박찼다. - 카아앙! 날아오는 검격을 막은 칼리안이 하르난의 검을 밀어낸 뒤 아래로 내리그었다. 하르난이 훌쩍 뛰어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듯 공격을 피했다. - 우웅! 하르난의 검에 검붉은 빛이 다시 얽혀들었다. 지금 당장 저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중요치 않다. 때문에 일단 그것을 그들의 ‘오러’ 정도로 이해하기로 한 칼리안의 손에도 한층 짙어진 한기가 어렸다. - 우우웅! 그리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칼리안의 신형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는 동안, 하르난 역시 검을 뻗고 들어올리며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느리다! - 푸욱! 쇄도하듯 뻗어나온 칼리안의 검이 하르난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큭!” 짧은 신음과 함께 뒤로 주춤 물러선 하르난의 입에 조소가 어렸다. 그것을 본 칼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번에도 역시 붉은 기운이 모여들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젠장.” 시스파니안, 당신. 역시 조금 덜 사려깊었어야 했어. 하르난이 큭큭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힘들 것이다, 3왕자.” 비웃음이 잔뜩 어린 목소리와 함께, 붉은 빛의 잔상이 다시 칼리안을 덮쳐왔다. 그것들은 어김 없이 칼리안의 푸른 검 앞에 막혔다. - 카앙! 캉! 들어올린 팔에 힘을 주자, 붉은 피가 쏟아지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딱 그만큼의 통증이 찾아들었다. 칼리안은, 이번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상처 하나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심장을 향해 달려드는 하르난의 검을 검신으로 막은 칼리안이 단검을 생성한 뒤 지체없이 놈을 향해 날렸다. - 쌔액! 무기가 끊임없이 바뀌는 칼리안의 공격에도, 하르난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칼리안의 ‘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하르난은 밀려난 검을 재빨리 틀어 날아오는 단검을 쳐낸 뒤 다시 공격을 가해왔다. 막았고, 상처가 벌어졌고, 눈 앞이 아찔해졌다. 하아. 다시 한번 숨을 몰아쉰 칼리안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한 번만.’ - 우우웅! 다시 한번 오러를 발현한 칼리안의 신형이 놈을 향해 날듯이 움직였다. 푸른 빛의 잔상이 칼리안의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허공에 길게 이어졌다. 검에 어린 오러가 뻗어나갔고, 놈의 붉은 빛이 그것을 막았다. - 카아앙! 칼리안과 검을 맞대고 선 하르난이 피식 웃는 것이 보인다. 검을 든 채 버티고 선 칼리안의 힘이 빠져나감을 느낀 것이리라. “여기까지 하지.” 하르난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마주 웃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작은 목소리를 냈다. [윈드 스피어.] 바람의 힘을 담은 칼날 같은 마력이, 아르센의 것보다 날카롭고 거대한 창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빛과 같은 속도로 내리꽂혔다. 칼리안의 검을 막고 서 있던 하르난은, 피하지 못했다. - 쌔애액! - 콰직! 형체를 잃은 하르난의 몸이 천천히 무너지듯 쓰러졌다. 칼리안이 무심한 얼굴로 뒤로 돌아섰다. 축복의 힘과 오러에 더불어 무리하게 운용된 마력까지. 울컥 치밀어 오르는 피를 되삼킨 칼리안의 붉은 눈이 나머지 네 명의 늑대들을 향했다. * * * “소가주님!” 수련장에 있던 드미레아에게 하인 한 명이 다급히 달려왔다. 흘러내린 땀을 대충 닦아낸 드미레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고, 하인은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요!” 하인의 얼굴에서 다급함을 읽은 드미레아가 재빨리 달려나갔다. 수련장 바로 앞에 검은 말이 더운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말이 밟고 선 땅에 붉은 피가 흥건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차마 왕족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한 하인들을 지나쳐 다가간 드미레아가, 서둘러 칼리안의 몸을 끌어내 눕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칼리안의 손이 드미레아의 어깨를 붙들어 잡았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한 칼리안의 목소리가 드미레아의 귀에 가 닿았다. “내 형님을······ 불러줘.” 어깨를 붙들고 있던 칼리안의 손이,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4) > - 나는, 대사막의, 위대한 늑대다! 이 말을 끝없이 되뇌며, 남자는 달렸다. 국왕 탄신일 기념 축제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당연하겠지만, 밝은 빛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했다. 때문에 남자는 골목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쉼 없이 다리를 움직였다. 얼마나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진작에 포기했다. 다리를 움직이고, 숨을 쉬는 것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두 가지를 하기에도 벅찬 상태였다. “헉, 헉! 허억!” 오른팔은 진작에 잘려나가고 없었다. 부여잡고 싶었지만, 팔을 감싸 쥘 왼쪽 손이 없었다.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그것만은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 다행한 일이라 해야 할까. 잠시 스스로를 향해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 남자가 다리에 다시 힘을 주었다. 멈추지 않고 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점점 감각이 사라져가는 두 다리를 계속해서 채근했다. - 쿠당탕!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남자는 쓰러지듯 바닥을 뒹굴었다.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움직여 다리를 살펴보려 했으나, 그조차도 힘겨워지고 있었다. 남자는 치유의 힘을 하르난만큼 다루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남자의 온 몸이 점점 마비되어 가는 것은, 등에 입은 깊은 상처 때문일 터였다. 남자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아니, 악물어보려 했다. “쿨럭!” 둥글게 뭉쳐진 핏덩이가 목을 타고 올라왔다. 채 뱉어내지 못한 그것이 남자의 숨을 막았다. 고개를 돌려 토해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말해야 한다······ 알려줘야······ 한다.’ 달빛 아래 진득하게 묻어나오던 살기가 떨쳐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숨통을 비틀어버릴 것 같은 그 붉은 눈빛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피를 흘려가면서도 표정 한 번 바뀌지 않던 소름끼치는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니 더 달려야 했다. 달려가서, 그들을 보낸 이에게 알려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늑대들을 더 보내야 한다고. 늑대를 전부 보내서라도 당장 죽여 없애야 한다고. 살려두면, 계획이, 틀어질 것이라고. 그것을······. 말해······ 줘야······. * * * 칼리안의 손이 떨구어지자, 푸른 빛이 감도는 회색 눈이 고요히 잠겨들었다. 모여 있던 이들이 그 모습을 모두 보았으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눈 깜빡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적이 찾아들었다. 슬레이만과 아내 세리에는 자리를 비웠다. 내일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3왕자가 죽기 직전의 모습을 한 채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지그프리드의 영역 안에 패닉에 빠진 이가 없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유란.’ 그들의 앞에 선 소녀를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이다. “네, 소공작님.” 드미레아의 침착한 목소리에, 칼리안의 로젤리타에 함께 했던 기사 유란이 대답했다. 칼리안의 가는 숨을 확인해 본 드미레아가 집사로부터 건네 받은 수건으로 피를 막으며 입을 열었다. “히나. 그 시녀가 와야 한다. 그리고,” 드미레아가 하던 말을 멈추고 칼리안이 전한 단 한마디를 잠시 떠올렸다. - 내 형님을 불러줘. 이런 상황에 찾는 것이, 왜. “······ 2왕자를 모셔오도록.” 르메인이 아닌 플란츠란 말인가. 칼리안의 뜻이 너무나 명확했으므로, 짧은 한숨을 내쉰 드미레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유란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오라버니 외의 다른 누구에게도 내용을 전해서는 안 된다.” 르메인은 물론이고 앨런에게조차도 사실을 전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내용을 전달받은 유란은 다른 의문 없이 간단한 목례만 보인 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플란츠를 호위해 올 몇몇 기사들을 골라 서둘러 움직였다. 그런 유란쪽은 더 볼 것 없다는 듯, 드미레아는 칼리안을 안으로 옮겨 눕히도록 했다. 상처에서 떨어진 핏자국이 수련장과 저택의 복도를 지나, 침실까지 쭉 이어졌다. - 울컥! 침대에 뉘인 칼리안의 입에서 한웅큼의 피가 토해져 나왔다. 독은 아닐 것이다. 더 이상 칼리안은 그런 것에 해를 입지 않는다. 분명, 오러와 마력을 무리하여 운용한 것이리라. 칼리안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 토해내는 피를 흘려낸 드미레아가 하인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거추장스러운 왕자의 재킷을 벗겨내고 셔츠를 들어올려 상처를 살폈다. 깊다. 칼에 베인 채로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상처가 크게 벌어진 것이 바로 보였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드미레아는 상처 부위를 다시 압박했다. ‘소드마스터의 짓이다.’ 똑같은 오러 사용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상처. 상대방이 죽었을지, 살아서 다시 칼리안을 노려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당장 칼리안을 살려두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로난시테.” 지그프리드가의 수석 기사단장 로난시테를 부른 드미레아가, 빠른 말로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공격에 대비한다.” “알겠습니다.” 로난시테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며 짧게 답했다. 하지만 드미레아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대문은, 닫지 않는다.” 이토록 모순적인 행동이라니. 대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언제 들어올지 모를 적에 대비하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사 로난시테는, 유란과 마찬가지로 의문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있을테니, 따르는 것이다. 드미레아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 “케인, 핏자국을 따라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을 전부 다 찾아오도록. 데카르는 케인이 찾아낸 흔적을 모두 지워라. 시신이 있다면 저택으로 보내고, 작은 핏방울 하나 남기지 않아야 한다.” “네, 소공작님.” 짧게 답한 두 기사가 다시 방에서 나간 뒤, 드미레아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집사장을 향해 그가 해야 할 일을 알렸다. “입단속을.” “알겠습니다, 소가주님.” 당장의 조치를 모두 마친 드미레아가 다시 칼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상처를 덮은 수건이 어느새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 때마침 하인 한 명이 들어와 약품과 붕대를 내려놓았고, 드미레아는 그것을 도로 가지고 나가도록 했다. 섣불리 건드리면 축복의 힘과 히나의 치유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드미레아가 새로운 수건을 들어 상처를 다시 눌렀다. 그리고는 칼리안을 내려다보며 혼잣말 같은 말을 건넸다. “죽지 않을 자신으로 이 곳까지 오셨으면, 버티십시오.” 지그프리드의 저택은 수도 중심에서 꽤 먼 곳에 있었다. 칼리안이 어디에 있었든, 이곳까지 오는 것보다는 왕궁으로 가는 것이 빨랐을 것이다. 왕궁으로 갔다면 곧바로 히나를 만나 치유받을 수 있었을 터였다. 그것을 전부 포기하고 이 곳으로, 왔다. 그리고 플란츠를 불렀다.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따라서 대문을 닫지 않도록 했다. 흔적을 지우고 입을 다물도록 했다. 그것이, ‘방패’가 되기로 했던 드미레아의 몫이다. * * * 고양이는 잠들고, 플란츠는 깨어 있었다. 고양이가 잔다 해서 사람까지 잠자리에 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으므로, 플란츠는 여전히 불 꺼진 방의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그렇기 때문에 곧바로 들을 수 있었다. 방문 밖 복도 먼 곳에서 들리는 작은 대화 소리를. “아니, 지금은 어려울 것 같다.” “혼자 계시고 싶다 하셨으니, 돌아가거라.” 시종 레릭의 목소리만 들렸으나, 레릭은 분명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렇다는 것은, 찾아온 이가 히나라는 뜻이다. 고양이를 찾으러 온 것 같아서, 플란츠는 슬쩍 고개를 내려 무릎 위를 쳐다봤다. 무엇이 그렇게 편한지 몰라도, 놈은 또 무릎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들어올리면 깰 테니, 플란츠는 밖의 대화를 못 들은 척 고양이를 건네주지 않고 그냥 두기로 했다. 그런데 레릭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나도 들어가기가 어려우니 어찌하느냐?” “내가 내일······.” - 달칵. 결국 플란츠의 방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레릭의 말이 멈췄다. 복도의 소란스러움이 불편했던 플란츠가 밖으로 나온 것이라 생각한 레릭이, 얼른 허리를 숙여 보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그리고는 히나를 향해 어서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특유의 낮은 음색이 복도를 작게 울렸다. “데려가.” 그 말에, 히나가 레릭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뒤 플란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와 동시에, 플란츠의 목소리가 히나를 향했다. “뭔데.” 히나가 아주 잠시 그런 플란츠를 쳐다봤다.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고.” 고양이 때문에 온 것이 아님을 눈치 챈 것이다. 히나가 저도 모르게 수화를 해보이려다, 플란츠가 알아보기 힘든 말이 너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에 수첩을 꺼내 내용을 적었다. 달빛이 밝았으므로, 글자를 적어감과 동시에 플란츠도 내용을 봤다. - 칼리안 왕자님이 플란츠 왕자님을 찾아요. 밖에 있어요. 거기까지 읽은 플란츠가 방 안으로 들어갔고, 히나는 몇 마디 말을 더 적기 위해 수첩을 다시 들었다. ‘칼리안 왕자님이 다쳤고, 주변에 알리지 않고 몰래 나가야 한다’ 라는 말을 다시 전하려 한 것이다. “애옹!” 그런 히나의 팔에 고양이가 얹어졌다. 고양이 찾으러 왔다는 핑계를 댔으니, 데리고 나가라는 뜻이었다. “나와.”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히나를 내보낸 뒤, 검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체르밀 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 * * - 탁. 칼리안의 방 안에 귤 바구니를 내려둔 앨런이, 옆에 서 있던 얀을 향해 물었다. “이 시간까지 수련을 하신다는 말이냐?” 그 말에, 얀이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대답했다. “요즘 게을리 하셨다며 수련장에 드신 뒤로 나오질 않으시네요. 과일은 왕자님 오시면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그런 얀의 얼굴을 한동안 쳐다보던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 그리하거라.” 그리고는 다른 말 없이 걸어 밖으로 나갔다. 앨런의 발 소리가 멀어짐과 함께, 얀의 얼굴에 띄워져 있던 미소가 조금씩 사라졌다. 주먹 쥔 손은 이미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얀의 입에서 자책과 자괴감 가득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 * * 칼리안을 앞에 둔 플란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드미레아는 란델과 칼리안의 관계가 좋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고, 체이스와 칼리안의 관계는 알지 못했다. 때문에 칼리안이 드미레아에게 불러달라 한 것이 플란츠 자신인 것은 맞다. 그 이유 역시, 안다. 칼리안의 옆에 선 채로,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를 너무 믿으시는군.” 타국의 왕세자 신분인 체이스는 제대로 나서기 어렵다. 그리고 체이스는, ‘세자위를 원하는’ 칼리안이 어떤 사고를 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상황에 칼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할지, 그것을 가장 잘 알만한 이는 오로지 플란츠 뿐이었다. 그것을 알고 플란츠를 부른 것이다. “내 아우님께서.” 누군가에게 건넨 말이 아니었으므로, 그 자리에 있던 히나와 드미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히나는 그저 칼리안의 상처에 치유술을 쏟아내고 있을 뿐이었고, 드미레아는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드미레아의 방패는 이미 세워졌으니, 그 안에서 행동해야 할 것은 플란츠였으므로. 조용히 눈을 뜬 플란츠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등받이에는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창백하게 질린 칼리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참 뒤 생각을 마친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소공작.” “네, 왕자님.” 즉각 대답해오는 드미레아를 향해,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브리센 정도는 막을 수 있겠지.” 그 말을 들은 드미레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공격 없는 방어입니까.” 칼리안은 놈들의 배후를 모른다. 왕궁에 돌아간 칼리안을 르메인이 밖으로 내놓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을 터였다. 그때부터 앨런의 경호가 시작될 것이고, 놈들은 다음을 노릴 터였다. 언제 올지 모를 적을 얌전히 기다리는 것은, 칼리안이 성격에 절대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칼리안은, 놈들의 배후를 알아낼 때까지 왕궁에도 가지 않고 모습을 내놓지 않을 생각이리라. 축제의 여흥에 취해있던 이들에게, 어둠속에 숨어 달리는 검은 말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칼리안이 이 곳에 없음을 주장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이후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그프리드는, 내 아우님이 사라진 것을 브리센의 짓으로 착각하고, 나를 불러들여 인질 삼았다. 내 아우님을 내놓기 전까지는 나도 브리센에 못 보내준다 하면 되겠는데. 어려운 일인가.” 칼리안은 왕자다. 아르센과 다르다. 그냥 ‘없다’고 해서 없어질 수 있을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 칼리안을 습격한 배후의 인물이 그것을 믿게 할 만큼 큰 판이 벌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왕자의 행방불명을 이유로 한,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의 대립 정도의. 때문에 플란츠를 불렀다. 뒷수습도 맡길 겸, 인질 노릇도 해줄 겸. 겸사겸사. 플란츠의 말을 들은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문 닫겠습니다. 편하게 지내십시오.” 그리고는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 “지키는 것은 우리가 잘 합니다.” <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5) > - 사아아아······. 바람결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고요히 머물다 지나갔다. 체르밀 궁을 돌아 건물 뒤 후원으로 들어서면, 자작나무가 몇 그루 쯤, 그리고 이름 모르는 나무들이 또 몇 그루 쯤 심겨진 작은 산책로가 있었다. 본래에는 없었던 것이나, 칼리안과 플란츠가 수련장을 자주 이용하게 되니 수련장으로 향하는 길 왼쪽의 잔디밭을 산책로로 꾸며두게 된 것이었다. 플란츠는 종종 그 곳을 찾았고, 칼리안은 호수 옆 산책길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후원의 나무 사이를 거닌 적이 별로 없었다. 란델은 언제나 장미 정원으로 갔으므로 당연히 후원을 찾지 않았다. 따라서, 칼리안과 플란츠가 왕궁 안에 없는 어두운 밤에 그 곳을 걸으려 들어올 왕자는 없었다. “후우······.” 대신, 어울리지 않을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년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검을 놓지 말 걸. 많이 다치신걸까. 지금 쯤은 깨어나셨을까. 아직도 못 일어나셨으면, 어쩌지. 혹시라도 영영······ 아니야.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자꾸 헤집어 두어서, 얀은 결국 잠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밖에 나와 청승을 부리고 있었다. - 자박, 자박. 한참을 그렇게 오도카니 앉아 있는데, 자갈을 밟고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려본 얀이, 의외라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키리에.” 이 시간까지 검을 수련했는지, 키리에는 땀에 푹 절은 채였다. 돌아가던 길에, 산책로 한 가운데 놓인 벤치에 앉아 청승을 떠는 얀을 본 모양이었다. “왜 나와 계십니까.” 칼리안이 잠에 들 시간이었으니, 이 때 얀이 밖에 나오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때문에 이렇게 물어오는 키리에를 보며, 얀은 아주 잠시 고민을 했다. 칼리안이 지금 이 곳에 없는 것을 이야기해줘야 할지를. 그러다, 왕궁에서 나간 것이 비단 칼리안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히나도 함께 자리를 비운 것이다. “잠깐 할 말이 있어요.” 때문에 얀은 키리에를 옆에 앉혀둔 뒤 키리에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놀라는 것도 아니고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알겠단다. “걱정 안되십니까?” 때문에 얀이 이렇게 물었고, 키리에는 무엇을 걱정해야 하는지를 묻는 듯한 얼굴로 얀을 쳐다봤다. “히나가 갔고, 아직 아무 소식이 없는 것 아닙니까.” 괜찮다는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지만, 괜찮지 않다는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히나가 가서 치료를 하고 있다는 말일테니 걱정할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태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키리에의 말이 이어졌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왕자님께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어두운 가운데 파란 쪽의 눈이 유난히 도드라져보이는 얼굴로, 키리에가 말을 맺었다. “놈들도 나도 살아있지 않을 테니 괜찮습니다.” 쫓아가서 다 죽여버리고 같이 죽겠다는 말이었다. 칼리안에게 해를 입힌 놈들이라면 키리에가 상대하기는 버거운 이들일텐데도 저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대책 없지만 너 좀 멋있다는 눈으로 키리에를 쳐다보자, 키리에가 작게 웃다가 물어왔다. “무력한 것이 싫어서 이러고 계셨습니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모두가 제 할 일이 있었다. 그 작은 히나 역시 칼리안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이가 아니던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걱정하는 일 뿐인 얀이,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키리에의 질문에 대한 긍정의 뜻이기도 했다. 그런 얀을 본 키리에가 말했다. “쓸모 없는 사람 끌어안고 가실 분 아닙니다.” 칼리안이 하필이면 자신의 ‘검’이 되어달라 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무력하지 않은 적 없던 키리에가 그렇게 말했다. “왕자님 돌아오시면, 걱정했다고 하시면 됩니다. 그 말에 기대어 쉬시는 분이니까요.” 검술이나 마법으로 도움이 되든, 가문과 기사단으로 도움이 되든, 똑똑한 머리로 도움이 되든, 혹은. 칼리안의 어떤 면을 보든 꽃 같기만 하다며 애지중지 해주는 것으로 도움이 되든. 칼리안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이들 중 하나인 눈치 없는 새끼 코끼리는, 키리에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잘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마음 놓고 칼리안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 * * 칼리안이 오전에 궁에서 나간 뒤 입궁하지 않았다. 한 밤에 플란츠가 시녀 한 명을 데리고 궁에서 나간 뒤, 마찬가지로 입궁하지 않았다. 그런데 플란츠는 지그프리드의 보증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지그프리드는, 대문을 닫은 채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집무실에서 꼬박 밤을 새운 르메인이 차갑게 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이제껏 앨런의 말이라면 대체로 고분고분 들어왔던 르메인은, 별 일이 아닐 테니 조금만 기다려 보라는 말을 들어 딱 하룻밤을 참았다. 이유가 있으리라는 말에 긍정한 것이다. 칼리안이었고, 또 지그프리드였으니까. 별 탈은 없으리라고 믿은 것이다. 그런데, 플란츠와 함께 사라진 시녀가 바로 히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르메인의 이성은, 일단 그 사실이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까지만 유지되었다. “반역의 의미로 보아야 하나.” 그리고 얀을 불러온 후 이렇게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므로, 얀이 즉각 부정했다. “아닙니다, 전하.” 르메인이 더 참지 못하고 얀을 몰아세웠다. “멀쩡한 2왕자가 아무 이유 없이 치유사를 데리고 나가지는 않았을 터. 3왕자에게 일이 생겼다는 말이고, 그 일에 지그프리드가 개입했는데.” 얀이 잠시 눈을 감았다. 르메인의 오해를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드미레아로부터 다른 연락이 일체 없었으므로, 얀 역시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반역이 아니라는 말인가.” 소름이 끼칠 만큼 차디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 르메인이 얀을 응시했다. 얀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절대로, 반역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가 더 기다려야 할 이유를 말하게.”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지금 당장 발칸과 카에라를 지그프리드의 저택으로 보내기라도 하겠다는 듯한 말이었다. 칼리안에게 분명 계획이 있다. 왕궁에 들어오지 않고 플란츠를 부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발칸과 카에라가 지그프리드를 치면 안 된다. 그것만은 미뤄야 했다. 얀이 주먹 쥔 손에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어젯밤, 칼리안 왕자님께서······.” 습격을 당했다고. 부상을 입었고, 치유를 위해 히나가 나갔다고. 그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유가 있을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말을 꺼내려 했다. - 벌컥! “죄송합니다, 전하. 용서하시지요.” 그리고, 마법사가 개입했다. 무례한 행동에 대해 일단 사과부터 한 앨런이 집무실 안으로 성큼 성큼 걸어 들어왔다. 앨런 역시 표정이 굳어 있었다. 지금껏 칼리안이 행방불명 된 적이 없었던데다, 칼리안이 부상을 입으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칼리안에 대한 앨런의 걱정이 르메인의 것과 비교하여 크게 모자라지는 않을 터였다. 멋대로 들어와 멋대로 얀의 옆에 앉은 앨런이 멋대로 입을 열었다. “어젯밤, 칼리안 왕자님을 습격한 무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답니다.” 언젠가 앨런은, 이번 생에 르메인의 사인이 심장병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적 있었다. 그 날이 바로 오늘이 될 것 같은 얼굴이 된 르메인을 향해 앨런이 계속 말했다. “아무래도 왕자님께서 직접 지그프리드로 피신을 하신 것 같습니다. 더 안좋은 일이 있다면 지그프리드의 대문이 닫히지 않았을 겁니다. 소식을 전했겠지요.” 지금 앨런이 하는 말은 체이스로부터 전해 들은 것이었다. 칼리안의 뒤를 따르던 것은 아니었으나, 드미레아가 싸움의 흔적을 지우기 전에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그것을 먼저 보았다. 핏자국이 지그프리드 저택으로 이어진 것을 확인했다는 보고를 받았고, 칼리안과 플란츠가 사라졌다는 내용도 들었다. 체이스가 칼리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집중시켜 둔 세작들이 여전히 같은 활동을 했기 때문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직접 갔다는 말인가. 왕궁을 두고?” 믿을 수 없다는 소리였다. 체이스는 소문의 출처가 세크리티아의 세작임을 밝혀도 좋다 했다. 양국의 관계에 큰 문제가 생기겠지만,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칼리안의 계획이 망쳐지지 않게 돕기로 한 것이었다. 다행히 르메인은 이야기의 근원지를 묻지 않았다. 더 확실한 확인처가 있었으니까. 르메인의 눈이 다시 얀을 향했다. 조금 전 할 말이 이것인지를 묻는 얼굴이었고 얀은 무거운 얼굴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데려오겠네.” 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르메인이 이렇게 말했다. 지그프리드 영지도 아닌 저택에 부상 당한 칼리안을 그냥 둘 르메인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데려 올 생각이었다. 때문에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싸움의 흔적이 사라진 뒤 플란츠가 찾아갔고, 그 후 대문이 닫힌 것까지 알게 된 체이스가 두 왕자가 무슨 계획을 짰을지를 어느정도 가늠한 것이다. 수일 내로 지그프리드가 브리센과 대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의 검이 향해야 할 곳은 지그프리드가 아닙니다.” 내용을 모두 전한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지그프리드 공작이 함께 있을 테니 왕자님의 안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우선은 상황을 주시하시고, 방향이 정해지면 그 곳으로 발칸을 보내십시오.” 그 말이 끝난 후, 르메인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깊은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앨런의 말에 따라 일단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르메인을 진정시키는 것에 간신히 성공한 앨런은, 몇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르메인을 끌어내리는 것에 한번 더 애를 써야 했다. ‘내 새끼가 내 집 문을 안 열어주는데, 혹시 이게 무슨 일인지 아는 사람?’ 따위의 말을 지껄이며 왕궁을 찾아온 슬레이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 * * - 틱, 톡, 틱, 톡 밤이 새도록 저 소리만 듣고 있었다. 칼리안의 상처는 많이 아물었다. 완전히 아물지 않은 것은, 더 두었다가는 히나에게도 문제가 생길 것 같다 판단한 플란츠가 히나를 내보내 재웠기 때문이었다. “서신, 보냈습니다.” 꼬박 밤을 새고 난 뒤에도 미동 없는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플란츠를 찾아온 드미레아가 이렇게 말했다. 중간에 슬레이만이 찾아왔으나 들여보내지 않았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슬레이만을 들이지 않은 것은, 만에 하나 왕궁에서 이 일을 ‘반역’으로 여겼을 때 그 책임을 슬레이만에게까지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드미레아는, 별 일 아니니 며칠만 더 나갔다 오시라는 말만 대문 너머로 전했다. “알겠다.” 따라서 슬레이만에 대한 내용은 알지 못할 플란츠는, 고개만 끄덕이며 이만 나가보라는 의미로 이렇게 대답했다. 서신이 도착할 곳은 당연히 브리센 후작의 저택이었다. 억지 주장이 가득한 편지를 받고 불같이 화를 낼 에반의 얼굴이 눈에 훤했다. 혼자 찾아오든, 기사들을 이끌고 찾아오든, 오래지 않아 두 가문의 대치가 시작될 것이다. 드미레아는 몰랐으나, 플란츠는 왕실의 개입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히나가 온 것으로 칼리안이 이 곳에 있음을 눈치 챌 것이고, 그렇다면 누구든 르메인을 말려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앨런이든, 혹은. 체이스든. - 틱, 톡, 틱, 톡 시간이 다시 흐른다. ‘누가.’ 밤이 새도록 생각했다. 대사막의 늑대, 그리고 텐실. 그들과 란델, 오러 사용자에게 입은 듯한 칼리안의 상처 등등. 알고 있는 모든 내용을 떠올리며 습격자의 배후가 누구일지에 대해 고민하고 다시 고민했다. ‘무슨 이유로.’ 플란츠의 날카로운 연두색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더 이상의 출혈은 없었으나 칼리안은 여전히 잠든 채였다. 레이븐의 털이 온통 피에 젖어 있었다 했다. “······ 감히.” 플란츠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틱, 톡, 틱, 톡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따져보지 않았다. 그저 앉아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리고. “형님.” 비로소, 깨어났다.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리자,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말아올려졌다. 하. 실로 애증하는 아우님 같으니. <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6) > 칼리안 아니라 칼리안 그림자라도 봤다면. 최소한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게 무슨 어처구니 없는 소리란 말인가!” 칼리안이 사라진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라진 것도 이제 알았다. 그런데 칼리안을 내어 놓지 않으면 플란츠를 못 보내겠단다. 아니, 플란츠는 또 뭘 믿고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을 따라 나섰느냔 말이다. 그 밤중에 불러냈으면 의심을 했어야지, 왜 제 발로 지그프리드 저택에 가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레이를 부상 입혔다는 오해도 억울하기 짝이 없었는데, 아르센을 감금했다며 집을 들쑤셔 놓질 않나, 이제는 칼리안을 붙들고 있다고 하고 있으니. 레넌 브리센을 감금해둔 것과 도박장을 운영했던 것 외에는 아주 결백한 에반 브리센 후작이 분통을 터뜨렸다. “코끼리들이 왜 자리 싸움에 엉덩이를 들이미는 것인가!” 그런데 또 웃긴 것은, 정작 르메인은 조용하다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에반이 잠시 뒤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하긴.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겠지.” 셋째 아들이 사라지고 둘째 아들이 억류되어 있는 상황에서, 지그프리드에 마음대로 공격을 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칫 플란츠마저 잘못되거나, 지그프리드가 최초로 왕을 끌어내리는 사태를 맞이하기는 싫을 테니까. 때문에 이 일을 직접 해결해야 할 처지에 놓인 에반은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옆에서 물어오는 기사의 목소리에, 당장 기사단을 준비시키라 말하려던 에반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뒤,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 잠시 혼자 있겠다.” 생각을 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기사들을 이끌고 가고 싶었다. - 하는 꼴은 승냥이인데. 하지만 손자 뻘 되는 놈, 아니 손자인 놈에게 이런 말을 들었지 않나. 두 번 다시 그런 취급은 받고 싶지 않았다. “3왕자가 사라졌다면.” 3왕자가 사라졌을 때, 그리고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이 대립하게 될 때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이 과연 누구인가. 볼 것도 없이 란델이다. 정신 나간 코끼리들이 거기까지 생각도 못하고 브리센을 몰아세우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3왕자는 소드마스터가 아닌가.” 칼리안과 당장 맞붙었을 때, 자신 역시 이기는 것을 장담하기가 어렵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몰라도, 오러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슬레이만 정도의 무력을 지니지 않은 이상은······. 거기까지 생각하던 에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슬레이만의 자작극인가?” 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슬레이만과 그의 아내 세리에는 어제 오후부터 조금 전까지 수도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함께 왔던 기사 테일란을 염두에 두었던 에반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그런 짓을 벌일 이유도 없고, 체이스가 왕궁 안에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테일란이 그런 일을 벌이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그럼. 남는 것은 단 하나. “그레이.” 에반은 여전히 그레이가 오러를 쓰지 못하는 것을 모르는 상태였다. 그 덕에, 안그래도 란델의 편에 한 발을 슬쩍 올리고 있던 그레이가 이번 일에 개입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되었다. “놈이 3왕자와 무력이 비슷하거나 더 위일 테니, 3왕자를 잡아 죽이거나 가둬버리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 결국은 란델과 그레이가 합작하여 일을 벌인 것이리라고 결론을 지어버리고 만 에반은, 책상에 앉아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지그프리드에 직접 찾아가지 않고 일단 서신부터 보내 볼 생각을 한 것이다. 란델이 그레이와 손을 잡은 것이 정말 맞다면, 당장 지그프리드와 척을 지어서는 안 됐으니까. * * * 통찰과 심연이 맞닿았던 순간.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다. 분명히, 알아보았다. 전날. 플란츠를 찾아 체르밀 궁에 갔던 체이스가 잠시 장미 정원을 거닐었을 때의 일이었다. “더는 잘라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장미를 살피는 란델의 손길을 보며, 체이스가 그렇게 말했다. 낯선 목소리에 잠시 고개를 돌렸던 란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시종을 뒤로 물린 채 이 깊은 곳까지 찾아 들어온 이방인에게 조용히 대답했다. “조금만 두어도 자라있어서.” 그렇게 마주하게 되었다. 둘은 첫 만남에 대한 인사를 나누지도 않은 채 가만히 서서 서로를 살폈다. 심연은 통찰을 삼키려 했고, 통찰은 심연을 꿰뚫어보았다. “자라도록 그냥 두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체이스의 말이었고, 그런 체이스의 짙은 보랏빛 눈을 잠시 바라보던 란델이 대답했다.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손을 다칠까.”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 끝에 머문 장미 향이 사라질 때 쯤, 체이스가 싱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 걱정이 되어 하는 말입니다.” 부드럽게 맴도는 향기같은 목소리가 웃음의 뒤에 이어졌다. “가시가 있으니.” 다시 한번, 바람이 불었다. * * * 루비아의 별관. 카이리스를 찾은 사신들 중에서도 귀빈을 위해 지어진 곳이었다. 카이리스에서 별관을 내어 줄 정도의 귀빈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사실 극소수였다. 때문에 이 별관 역시 자주 개방되지 않았으므로, 별관에 사람이 드나드는 일 역시 많이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물론 요 근래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 체이스가 별관에 든 뒤로는 루비아 관의 별관이 꽤 분주했다. 그리고 어제부터는, 궁 밖과 루비아 관을 분주하게 드나드는 몇몇 사람이 유난히 눈에 띌 정도가 되었다. 그 중 한 명은 바로 기사 테일란이었다. - 똑똑 상당히 큰 보폭으로 빠르게 발을 옮겨 별관 안으로 들어간 테일란이, 별관의 가장 높은 곳에 마련된 체이스의 방 문을 노크하며 말했다. “카스트린입니다, 저하.” 그리고는 들어오라는 허락이 없었음에도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테일란이 체이스의 호위기사이기 때문에 허락된 행동이었다. 체이스는 문에서 등을 돌린 채 창 밖을 보며 서 있었다. 창문에 비춰지는 테일란을 보며,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 쪽은 아직인가?” 칼리안의 상황을 묻는 말이었다. 오늘 테일란을 볼 때마다 건넨 질문이었으므로, 테일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아직 다른 소식은 없습니다.” “그래.” 작은 한숨이 체이스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왜 그렇게 카이리스 3왕자의 일에 신경을 쓰는지 알지 못하는 테일란이었으나, 그에 대해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것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테일란은 질문 대신 체이스에게 전해야 할 내용을 입에 올렸다. “협회의 마법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새들을 들여보내야 할까요.” 에우리아의 마법사들을 이르는 것이었다. “그대로 움직여. 충돌하지 않을 테니.” 앨런의 손이 닿았을 것이므로, 체이스는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듯 대답한 뒤 물었다. “다른 소식은?” “네. 브리센 후작가는 아직 반응이 없습니다. 그 외에 수도 내 움직임은 없고, 수도를 빠져나가거나 들어오는 이들 중에 이상점이 있는 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합니다.” 오전부터 수도 출입에 대한 검문이 강화됐다. 르메인의 지시였다. 카이리시스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새들이 물어오는 정보 속에서도 놈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았다. 아직 몸을 사리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거나,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났거나, 혹은 이미 모두 죽었거나. 다만 세작들이 싸움의 흔적을 발견했을 땐 이미 시신이 없었으므로, 관련된 이들이 모두 죽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후작이 생각보다 반응이 느리네.” 그렇게 중얼거리던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 “네, 저하.” 나가보라는 의미였으므로, 테일란은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보는 체이스의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체이스가, 전날 만났던 란델을 떠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란델 왕자는,” 체이스는 란델이 칼리안에게 무엇을 이야기했는지까지 알지는 못했다. 다만, 텐실의 왕이 된 그의 성향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베른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란델이 다른 두 형제를 어떻게 여기고 있을지 짐작하는 것은, 체이스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 아닌 것 같고······.” 칼리안에게 당장 검을 보낼 만큼 구석으로 몰리지 않았다.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할 인물은 아니었다. 이번 일에 대해 란델이 아는 것이 없으리라는 것도. “누굴까.” 창문에 비춰지는 체이스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 * * “소문을 좀 냈으면 좋겠는데.”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침대에 기대 앉아 있던 칼리안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 대한 소문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소문이라는 것에는 완전히 관심을 끄고 살아왔던 드미레아가 물었다. 그러자 칼리안은, 당장 다시 정신을 놓아도 이상할 것 없을 안색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짖궂은 얼굴로 대답했다. “응. 나, 사라졌다고.” 귀족들이 소문을 얼마나 신경쓰는지 가장 잘 아는 것은 칼리안이었다. 그들의 명예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니까. 때문에 칼리안 역시 지금까지 몇 번이고 거짓 소문의 힘을 이용해먹지 않았던가. “브리센 후작이 더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침대 옆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플란츠를 잠시 쳐다봤다. 조금 전 플란츠는, 마지막으로 칼리안과 만난 뒤부터 지금까지 있던 일을 모조리 칼리안에게 주입시켰다. 무도회 자리에서 에반을 만나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때문에 에반이 이번 일을 조용히 넘어가고 싶어할 것이라 판단한 칼리안은, 다시 한번 소문의 힘을 빌기로 했다. “후작이 가만히 앉아서 서신만 보내면, 너무 조용하잖아.” 따라서, 들고 있던 바나나 껍질을 까며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협회의 마법사가 인근에 있을 겁니다. 전달해 두겠습니다.” 에우리아가 움직이리라는 것은 따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평생 똑똑한 것을 다 써버린 얀과 너무 다른 드미레아의 모습을 보며,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또 징징대고 있겠네. 나 일어난 것도 얘기해줘.” 누굴 생각하는지 빤했으므로, 드미레아가 잠시 웃는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고마워.” 정말 여러모로 신세를 지고 있었다. 방패에 대한 내용은 명분일 뿐이었으니, 이렇게 대문까지 걸어잠그며 나서주는 것은 동맹에 따른 결정이라기보단 드미레아가 일방적으로 칼리안을 도와주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고마움을 표한 칼리안을 보며 드미레아가 답했다. “대가는 나중에 다 받을 겁니다. 비싸게요.” 그리고는 쌓여 있는 바나나 껍질을 가리켜보이며 덧붙였다. “바나나 값까지.”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드미레아는 간단한 인사 후 밖으로 나갔다. 저택 주변 어딘가에 숨어있을 에우리아의 마법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드미레아가 나간 뒤, 칼리안이 플란츠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다만 그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기 전에 플란츠가 먼저 말했다. “필요없다.” “네.” 때문에 이번에도 고맙다는 말은 그냥 때려치운 칼리안이 마지막 남은 바나나 하나를 플란츠에게 들어보였다. “드시겠습니까.” “아니.” 같은 말 두 번 안하는 칼리안은 같은 권유도 두 번 하지 않았으므로, 고개를 끄덕이며 바나나를 까먹었다. 그리고는 플란츠를 보며 말했다. “······ 늑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아직 드미레아에게 알리지 못할 내용이었다. 란델이 사용한 것과 비슷한 느낌의 그 힘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란델 형님께서 사용하셨던 힘을 대할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러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이가 하나, 마법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이가 넷이었습니다. 가장 강한 것은 검사였고, 다섯 모두 치유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플란츠가,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뜨며 물었다. “대사막의 늑대들이 신력을 썼다는 소리인데.” “신력이라고 불러도 된다면요.” 그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농담처럼 말했다. “란델 형님께 물어볼까요? 그게 뭐냐고.” “짖지 말고.” 참으로 플란츠 다운 타박에, 칼리안이 씩 웃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플란츠가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텐실일지도.” 지금껏 알려진 정보는 명백하게 텐실을 지목하고 있었다. 적당한 명분도 있었다. 란델의 앞길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바로 칼리안이었으니까. “내 아우님이 워낙 특출나시니.” 만약 란델이 카이리스의 국왕이 되면, 텐실에 그보다 더 큰 이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란델과 별개로 칼리안의 목숨을 노려볼 법 했다. 플란츠의 말에 잠깐 웃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가능한 상황이 아닐텐데요. 아무리 대사막과 손을 잡았다지만.” 일이 틀어질 경우 즉각 전쟁으로 번질 일을 과연 텐실이 저질렀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이런 저런 가능성을 따져보며 고민에 빠져 있는 칼리안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생각 그만 하지.” 배터지게 바나나를 먹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고는 있다지만, 곧 죽을 얼굴을 한 채였던 탓이다. 플란츠의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누웠고,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잠시 일어났던 칼리안은 하루를 꼬박 더 보낸 뒤에야 다시 눈을 떴다. 그 사이 에우리아가 충실히 퍼뜨린 소문에 결국 브리센 후작이 찾아와 한 차례 으름장을 놓은 뒤 돌아갔다. 그렇게 닷새가 더 지나자, 카이리시스는 온통 칼리안의 실종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찼다. 칼리안을 지지하던 귀족들이 매일같이 왕궁을 찾았고, 르메인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놈들이, 움직였다. 소식을 전해 들은 칼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 불러줘.” 다섯 놈 상대하고 죽을 뻔했다. 미쳤다고 혼자 가겠는가? 제자 사랑 가득한 앨런 마나실의 실력을 볼 때가 온 것이다. <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7) > 덫에 걸려든 이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조금 전. 꽤 나른한 햇살이 가득 드는 창가에 기대 선 드미레아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 찌이익 그러자, 손에 들려 있던 편지가 경쾌한 소리와 함께 종잇조각으로 바뀌었다. 벌써 네 통째. 에반 브리센 후작으로부터 전해진, 반 협박성 편지였다. 무슨 내용이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드미레아는 그의 편지를 그냥 봉투 째 찢어버린 참이었다. 어차피 이쯤되면, 보낸 쪽에서도 내용을 읽으리라 기대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다, 조각 나버린 편지지에 씌인 ‘조부’ 라는 단어를 보게 된 드미레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플란츠의 조부로서 혈육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니 이제 그만 플란츠를 보내달라 뭐 그런 내용이 적혀있던 듯 했기 때문이다. “웃기고 있네.” 조부라니. 브리센 후작이 자신의 혈육들을 어떻게 여기는지는 드미레아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심기가 매우 불편해보이는 목소리였으므로, 드미레아의 서재에 함께 들어와 책을 읽고 있던 히나가 고개를 들었다. - 또, 거기예요? 그것을 본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정말, 강아지 오라버니보다 못한 사람입니다.” 강아지 오라버니란, 당연히 지그프리드 영지에 있는 강아지 얀을 이름하는 것이다. 슬레이만이나 세리에, 심지어 새끼 코끼리 얀조차 아무렇지 않게 강아지 이름을 불렀으나 드미레아는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얼결에 강아지 오빠를 하나 더 두게 된 셈이었다. 아무튼 드미레아의 말은, 에반이 개만도 못하다는 소리였다. 대단한 욕설에는 어울리지 않을 귀여운 표현에, 히나가 잠시 웃었다. 그것을 본 드미레아가 같이 실소했다. 강아지 오라버니라는 말 때문임을 알아서였다. “아버지 성격이 아무리 자유분방하시다지만, 이름을 왜 그렇게 지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드미레아가 강아지 이름을 지어준 슬레이만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다, 얼마 전 체르밀에서 본 하얀 고양이가 생각났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칼리안 왕자님보단 아버지가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칼리안은 아예 고양이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드미레아의 말을 들은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떠보이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 일부러, 안 지어주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세상의 누구도 지어보이지 못할 맑은 미소를 그리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이름이 생기면, 제가, 고양이를, 부르기 어려우니까. 이름이 생기면 이름 철자를 손으로 만들어내며 불러야 하니, 그냥 ‘고양이’라고만 불러도 되도록 이름을 안지었다는 소리였다. 물론 칼리안이 제 입으로 고양이 이름을 짓지 않는 이유를 말한 적은 없었다. 그저 다들 칼리안이 세심하지 못한 탓이라 했고, 히나는 자신이 생각이 맞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덕분에 엄청나게 길어진 고양이의 독특한 이름이 떠오른 탓에, 히나가 다시 웃었다. * * * 왜 플란츠를 믿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왜 자신을 믿었는지 굳이 묻지도 않았다. - 그런 말을 나눌 만큼 우애 좋은 형제 사이는 아니지 않나. 실상이야 어떻든 똑같이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던 탓이다. 아무튼 플란츠가 알아서 해줄 것이라 믿은 칼리안이 플란츠를 불렀고, 플란츠는 알아서 칼리안의 덫을 대신 놨다. 그 덫에 드디어 짐승이 걸려들었다. “이 저택과 브리센 후작가 인근을 살펴보고 돌아가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드미레아가 전해 온 말을 들은 플란츠가 살짝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방 안을 훑어 본 드미레아가 물었다. “3왕자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말 보러.” 칼리안이 있어야 할 침실에 칼리안은 없고 플란츠가 앉아 있었기 때문에 묻는 말이었다. 플란츠는 마굿간에 있을 칼리안을 떠올리며 짧게 답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에게는 내가,” 칼리안이 오면 자신이 말을 전달하겠다 하려던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칼리안을 봤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란츠는 더 이상의 말 없이 손을 들어 칼리안 쪽을 가리켜보인 뒤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저기 왔으니까, 그냥 네가 다시 말하라는 뜻이다. 그런 플란츠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드미레아가 칼리안에게 같은 말을 한번 더 했다. 모르긴 몰라도 얀보다 더 많이 놀랐을 레이븐을 살피고 올라온 칼리안이, 드미레아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고생 많았어.” 그리고는 눈을 내리 뜬 채 잠시동안 생각에 빠져들었다. 다행인 것은, 놈들이 제 동료들의 시신을 치워가면서 칼리안의 흔적을 쫓지는 않은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칼리안이 찾아왔을 당시 지그프리드 저택 인근에서 수상한 이가 발견되지 않았고, 세크리티아의 세작들 역시 그들을 마주치지 않았으니까. ‘아니라면, 나를 꺼내려는 함정일 수도 있고.’ 물론 칼리안의 흔적을 따라 칼리안이 이 곳에 있음을 알고는 있지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칼리안을 꾀어내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일 터였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으니.” 아무튼 놈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그것이 그들이 만든 함정이든 아니면 칼리안의 덫에 그들이 걸려든 것이든 칼리안이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번에는 혼자 찾아가지 않을 생각이었으므로, 칼리안은 놈들이 있을 곳에 동행해 줄 믿음직한 마법사를 지그프리드 저택으로 불렀다. “이번에 입궁하시면 두 왕자님 모두 란델 왕자님과 오붓한 시간 보내게 되시는 줄만 아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마법사는 칼리안을 보자마자 이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했다. 둘 다 왕궁 안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란 소리였다. 란델처럼 체르밀 안에서만 머물러야 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당분간 밖에 나오는 것은 절대로 허락되지 않을 터였다. 칼리안이야 당연한 일이었고, 이유야 어찌됐건 시종에게도 알리지 않고 거의 무단으로 궁을 빠져나온 플란츠도 마찬가지였다. 괜한 피해만 입게 된 플란츠를 떠올린 칼리안이 슬쩍 웃었다. 미안한 마음이 왜 없겠냐만은, 플란츠라면 그리 상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차피 칼리안이 끌고 나가지 않는 이상, 플란츠가 혼자 왕궁 밖으로 나갈 일도 없었으니까. 때문에 칼리안은 플란츠에 대한 미안함을 잠시 접어두고, 잔뜩 화가 나 있는 앨런을 향해 말했다. 앨런의 화를 어떻게 풀어줘야 하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스승님 뵈니까 좋네요.” 그 말에, 칼리안을 잠깐 쳐다본 앨런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여쁜 제자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양 쪽으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떻게 더 숨긴단 말인가? “······그래요. 무사하니 되었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이렇게 화를 풀 수 밖에. 그런 앨런이 밖에 나갈 것이 분명해보이는 옷차림을 한 칼리안을 보며 물었다. “같이 가시려는 겁니까?” “스승님 혼자 가시려고 하셨습니까?”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듯 이렇게 대꾸한 칼리안이 옆에 서 있던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앨런에게 어리광 비슷한 것을 부리는 3왕자의 모습을 직면한 드미레아의 정신적인 충격에는 신경을 써주지 못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내 형님, 의외로 되게 약하시니 잘 부탁해. 지그프리드 공이 곧 오겠지만.” 소드마스터의 입장에서 약하다는 것이 어느정도일지는 가늠이 어려웠으나, 드미레아는 일단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칼리안은 검은 후드를 푹 뒤집어 썼다. 어느새 날이 져서 밖이 어두웠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의 눈에 다시 띄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할 터였다. 앨런의 얼굴에는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을 염려하는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칼리안이 플란츠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앨런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칼리안도 그냥 칼 좀 쓰는 소년일 뿐이니까. 칼리안이 그런 앨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 알아서 지켜 주시겠죠. 가만히 앉아서 두고 보기는 싫습니다.” 대놓고 짐덩이 노릇을 하겠다는 소리였으므로, 앨런이 기분좋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리하시지요.” * * * 에우리아의 마법사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체이스의 새들은 조용히 움직였다. 때문에 그는, 앨런 마나실이 건물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뒤에야 비로소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앨런이 직접 움직일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앨런의 움직임이 그의 눈과 귀에서 벗어났을 뿐이었다. “상대하지 못한다.” 그는 에반 브리센 후작과 달랐다. 앨런이 지닌 서클의 힘이 그저 숫자 6에 1을 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지극히 평온한 표정의 앨런이 작은 건물의 문에 손을 올렸을 때, 아홉이 도망쳤다. 남은 한 명은 그들을 비밀 통로로 내보내고 통로를 완전히 파괴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 딸랑 그가 제자리로 돌아옴과 동시에, 은적색의 긴 머리를 느슨하게 묶어내린 날카로운 눈의 마법사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 저벅, 저벅 그는, 천천히 다가오는 저 발소리가 생의 마지막을 알리는 소리임을 알아들었다. 따라서, 검을 뽑아드는 대신 외눈 안경을 고쳐썼다. 그리고는, “찾는 책이 있으시오?” 하고 물었다. * * * 앨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앨런이 가게 문을 닫고 한 발자국 더 걸어 들어오자, 가게 안의 창문과 문, 벽과 천장이 한꺼번에 울리기 시작했다. 가게에 장치해 두었던 모든 차단막이 저절로 움직였다. 문이 잠기고, 덧창이 내려지고, 천장의 유리 창문이 가로막혔다.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한 일이 아니었다. 가게 전체를 그를 가둘 새장으로 만든 것은, 당연하겠지만 물론 앨런이었다. 그와 어느정도 떨어진 앞에 서있던 앨런이 한 발을 더 내딛었고, 사라졌다. 그 직후에 그의 등 뒤에서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책은 아니고 물을 것이 있네.” 손이 떨려왔다. 그것은, 공포였다. 심장을 얼릴 듯 옭죄는 공포를 버텨내자, 앨런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데블란이 뱀 같기는 해도 제 아들은 지극히 아낀다네.” 그렇게 말한 앨런이 그의 눈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 뿐인 아들 놈이 왕궁에 있는데 이런 짓을 할 리 없지.” 앨런의 말을 듣던 그가 짧게 호흡했다. 입 속의 독을 씹으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앨런의 손에서 딱!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가해지는 중력이 순간적으로 증가했다.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근육 하나하나가 땅으로 꺼질 것 같은 느낌에, 그 어떤 것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간신히 눈을 돌려 앨런을 쳐다봤다. 앨런의 손 위에, 사람의 눈알만한 붉은 공이 하나 생성됐다. 마치 흐르는 용암을 유리 구슬 안에 가두어 둔 듯한 모양새였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다. 상상도 못할 힘의 화염을 압축시킨 불의 힘. 스치기만 해도 사람의 몸을 숙주 삼아 타올라, 심장을 녹이기 전까지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의 힘. 이 세상에서 오로지 앨런 마나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그것은, 7서클의 플레임 스피어였다. 앨런이 그것을 가게 바닥 아래로 내려보냈다. 구체는 바닥을 뚫지도 않고 그대로 통과하여 사라졌다. 앨런의 고요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울렸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면서 내 앞에서 독을 쓰려고 드는가.” 독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질색인 앨런의 손 위에 두 번째 플레임 스피어가 떠올랐다. 먼 곳에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눈에 핏줄이 섰다. 그것을 본 앨런이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명 죽었네. 고작 한 명이니, 지금이라도 잘 따져보게.” 그는 대답 없이 앨런을 노려봤다. 독을 뱉어낼 기색이 없었고, 그것은 곧 앨런이 궁금한 것을 알려주지 않겠다는 말과 같았다. 앨런은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앨런의 손에서 두 번째 플레임 스피어가 떨어져 내려갔다. 그리고 앨런은, 그 어느때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나는 내 제자만큼 무르지 않으니.” 또 한번의 비명이 뒤를 이었다. 세 번째 플레임 스피어가 떠올랐다. 앨런이 그의 눈을 쳐다보며, 한 때 그의 것이었던 이름을 불렀다. “하얀 수리.” <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8) > 하얀 수리. 세크리티아 세작들의 근거지를 관리하던 이였다. 1년 전 칼리안에게 독과 지도를 팔았던 이였기도 했다. 세작이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자국에 충성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숨어들어 그들을 속여가며 정보를 얻어내는 이들이다. 그런 그들이 마음을 바꾼 것을 배신이라 보아야 하는가, 혹은 늘 하던 것을 했을 뿐이라 여겨야 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됐건 하얀 수리는, 이제 더 이상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아니었다. 데블란의 새장에서 스스로 빠져나간 새였다. 변절자였다. ‘진짜 이름이 뭐였는지 생각나질 않네요.’ 오래 전 언젠가, 앨런과 함께 차를 마시다 문득 그를 떠올려보던 칼리안은 이렇게 말했었다. 몇 번인가 사적인 대화도 나눠보았던 푸른 솔새와 달리, 하얀 수리와는 그리 가깝게 지내질 못했다고. 외눈 안경을 즐겨 쓰는 점잖은 인상의 중년 남자. 그러나 사실은, 누구와 견주어도 지지 않을 잔악함을 숨긴 자. 칼리안은 그 정도로만 기억을 하고 있었다. 본래 하얀 수리가 누구였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고, 그렇게 얘기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베른으로서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충직한 하얀 수리였으니까. “하얀 수리.” 스스로 저버린 이름이 불리자, 앨런의 손에 떠오른 세 번째의 플레임 스피어를 보고 있던 하얀 수리가 입을 열었다. “그만하시오.” 그리고는 입 속에 숨겨두었던 독을 뱉어냈다. 그런 하얀 수리를 응시하던 앨런이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 달칵 그러자, 앨런이 잠궈두었던 가게 문이 잠시 열렸다. 이 곳에 누군가를 더 들여보내도 괜찮으리라 판단한 까닭이었다. 딸랑- 하고, 문에 달린 종 소리가 다시 한번 울리며 누군가가 더 들어왔다. - 저벅, 저벅, 조용하지만 주저하지 않는 발소리. 그 주인의 성격을 꼭 닮은 걸음 소리가 뒤를 이었다. - 저벅. 소리가 멈춘 뒤에는 한동안의 침묵이 찾아왔다. 하얀 수리도, 앨런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정적을 흐트리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네르드.” 보랏빛의 고요한 시선이 하얀 수리였던 이에게 닿았다. * * * 그것은 칼리안의 생각이었다. 앨런과 함께 지그프리드의 저택 대문을 나서기 직전, 서둘러 움직이던 레이븐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것을 본 앨런도 말을 멈춰 세웠다.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문득 떠오른 의심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보니, 좀 이상합니다.” 칼리안의 말에, 앨런이 물었다.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씀이신지요?” “너무 명확한 정보가 갑자기 전해졌지 않습니까.” 수상한 이들이 지그프리드 공작과 브리센 후작의 집을 살피고 돌아갔다는 정보에 대한 소리였다. 그들이 언제 어디로 향했는지 확인이 되자마자 앨런을 불러왔고, 그들이 있다 알려진 곳으로 곧장 찾아가려던 참이었다. “숨어들려는 이들은 의외로 사람이 적은 곳을 꺼립니다. 눈에 더욱 잘 띄니까요. 그런데 그들이 숨었다 전해진 곳은 인적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앨런이 말 없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분명 칼리안은 그것이 함정이어도 괜찮다 했었다. 칼리안을 불러내기 위한 거짓 정보라 해도 상관 없이, 그들을 제대로 상대하고 배후를 파악하기 위해 앨런과 나가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지금 칼리안이 이상하다 여기는 것은, 갑자기 명확히 전해진 정보가 거짓인지에 대한 부분이 아닐 터였다. 때문에 앨런은, 칼리안이 생각을 마치고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레이븐의 안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 혹시 그 동안 새들의 정보와 마법사의 정보가 일치했습니까.” 질문을 하고는 있었지만, 사실을 이미 다 파악했다는 듯 확신이 어린 목소리였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의 목소리에 날이 세워졌다. “그럼. 확실히, 이상하네요.” 정보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세크리티아의 세작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앨런은 별 의심 없이 넘겼을 수 있다. 하지만 칼리안의 마음속에는 큰 의문이 생겨나고 있었다. 칼리안을 도와 이런 저런 정보들을 모아다 주고 있다고는 해도, 에우리아의 마법사들은 정보원이 아니었다. 그에 비해, 데블란이 왕위에 있던 지금 시기의 카이리시스에 얼마나 많은 세작이 얼마나 활발히 활동했는지는 칼리안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새들이 물어오는 정보가 더 많았어야 한다. “정보가 똑같은 건 말이 안돼요. 세크리티아에서 알아낸 정보가 더 많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보가 똑같았다니.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내놓는 것인지, 칼리안의 말이 빠른 속도로 이어졌다. “그 외진 곳에서 카이리시스에 떠도는 소문을 접하고 대응책을 세우려면, 왕복하는 이들이 있었어야 합니다. 새들은, 그들의 움직임을 놓쳤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얼마나 능력있는지를 설명하는 카이리스 3왕자의 말에도, 앨런은 웃지 않았다. 칼리안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한 까닭이다. “체이스······ 왕세자께서.” 칼리안은, 자연스럽게 붙어 나오려던 ‘형님’이라는 단어를 가까스로 집어넣었다. 고삐를 쥐고 있던 주먹에 잠시 힘을 준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 전하지 않은 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체이스가 무언가를 알아냈다. 알아낸 것을 앨런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새들이 몇몇 정보를 숨기고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체이스가 눈치챘을 수도 있다. 혹은, 정보를 모으는 과정에서 새들 중 일부가 개입했음을 알았을 수도 있다. 체이스가 어떻게, 무슨 사실을 알아냈는지는 칼리안이 정확히 짚어내기 어려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새장에서 나간 새가 있습니다.” 새들 중 변절자가 있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칼리안 역시, 세크리티아에서 마음을 돌렸던 푸른 솔새를 이미 만나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런 이들이 더 있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서 그것을 알게 되신 듯 하고요.” 앨런의 눈꼬리가 가늘게 좁혀졌다. 체이스가, 세크리티아의 세작들 중 변절자가 있으리라는 사실을 숨기고 에우리아와 똑같은 정보만 추려내어 앨런에게 전달했으리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혹시 이 곳에 오시기 전에 만나보셨습니까?” 체이스를 만나봤는지를 묻는 말이었고, 앨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체이스가 보낸 사람을 통해 내용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앨런은 그것이,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기 어려웠기 때문이리라 생각하고 넘겼었다.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칼리안을 만나러 왔기 때문에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을 시간도 없었다. 앨런의 답을 들은 칼리안이 파리한 웃음을 지었다. 재미가 있어서 웃는 것이 아니었다. “세크리티아의 새들이 제가 습격당한 것과 관련되었음을 아셨고, 새들을 직접 만나보려고 정보를 숨기신 겁니다.” 체이스는 베른과 비슷했다. 겁이 없었다. 무턱대고 혼자서, 그리고 직접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플란츠까지 우려 섞인 생각을 했을 만큼, 제멋대로 왕궁을 활보하던 이가 아니던가. 그러니 이번에도, 직접 움직인 것이다. 변절한 세작들에 대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러니 지금 칼리안이 하는 말은, 체이스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리를 비워야 해서 앨런에게 사람을 보내 내용을 전했으리라는 소리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놈들의 본거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마법사들과 새들이 알려준 위치는 칼리안을 잡기 위한 함정이 맞을 것이다. 그 쪽으로 칼리안이 가면 공격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체이스만 알고 있는, 놈들의 본거지는 따로 있으리라. 놈들의 공격이 칼리안에게 집중된 틈을 타서, 공격에 가담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 변절한 세작들을 만나러 갔으리라는 소리였다. 체이스가. 질린 얼굴을 한 칼리안을 본 앨런이 달래듯이 말을 꺼냈다. “따로 움직이신다 해도 카스트린 경이 있을 터이니,” 일단은 칼리안을 해치러 나올 놈들을 먼저 잡자고. 앨런은 그렇게 말을 하려 했다. “마나실 백작.” 칼리안의 목소리가 앨런의 말을 잘랐다. “궁으로 가세요. 마법사들이 행적을 파악했을 겁니다. 그 분께서 가신 쪽으로 따라가세요.” 제자로서 스승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었다. 카이리스 3왕자가 백작 앨런 마나실에게 명령하는 것이었다. 앨런은, 놈들에게 행적을 들키지 않기 위해 궁의 입구에서 지그프리드의 저택까지 워프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그러니 앨런이 빠르게 움직이면, 말을 타고 가는 체이스를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 앨런이라면 가능하다. “다른 호위기사들만 데리고 가셨을 겁니다.” 세크리티아 왕궁의 탑 꼭대기에 서면 내성을 이루는 성벽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였다. 그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베른은 홀로 성문 앞을 지켰다. 내성을 등지고 선 이는 단 한 명, 베른 뿐이었다. 먼 곳에 있던 체이스가 베른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성벽을 등지고 선 베른이 죽어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것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보았으리라. “카스트린 경은, 제가 가야 할 곳으로 올 테니.” 체이스는, 같은 일을, 또 겪고 싶지 않아 할 것이다. * * * 하얀 수리, 아니. 네르드라 불린 이를 부른 체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선 채로, 그 어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묻는 눈으로, 네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변절했는지. 왜 늑대들을 돕고 있는지. 늑대들의 뒤에 누가 있는 것인지. 늑대들은, 칼리안의 목숨을 왜 노렸는지. 그것을 묻고 있었다. “이 곳까지 오셨는데. 내어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 수많은 질문에, 네르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보를 사러 찾아온 칼리안에게 물을 내어놓았던 그였다. 그는 언제나, 찾아온 이들에게 무언가를 꼭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이었던 이의 아들에게만은, 줄 것이 없었다. 그것이 한 잔의 물이든. 혹은 정보든. “죄송합니다, 저하.” 체이스가 올 것은, 네르드 역시 예상하고 있었다. 이 곳으로 향하는 체이스와 호위기사들에 대한 소식을 이미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단 한 사람. 가게 문 바로 앞으로 워프하여 이 곳을 찾아온 앨런 뿐이었다. 네르드는 웃지도, 화내지도, 결연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시간을 끌어서, 도망친 이들이 비밀통로를 빠져나가게 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알겠다.” 체이스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분노하지 않았다. 체이스는 분노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체이스의 시선이 앨런에게로 가 닿았다. 그리고 조용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앨런이 함께 왔으니, 우선 앨런이 하는대로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앨런이 그의 방식대로 정보를 알아내면, 체이스는 자신의 방식대로 네르드를 처분하면 될 일이다. “나는 내 제자만큼 무르지도 않지만, 여기 이 세자 저하처럼 차분한 성격도 되질 못한다네.” 체이스가 물러서자 앨런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조금 더 길어진 설명을 덧붙이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네르드가 마주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것이 너무 없어서 실망할텐데. 괜찮겠소?” 그것은 네르드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앨런의 손에서 세 번째 플레임 스피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개 같은!” 체이스를 대할 때와는 달랐다. 네르드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나왔다. “새장에서 나간 새끼 새가 여섯 남았네.” 다시 한번 비명이 들려왔다. 다만 이번에는 이전처럼 긴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함께 있던 이들이 마법에 당한 이의 목숨을 끊어낸 듯 했다. “하나만 묻지.” 그렇게 말한 앨런의 손에, 여섯 개의 플레임 스피어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자네들이 도와준 늑대들의 뒤에, 텐실이 있는가?” 네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앨런은 이번에도 주저 없이 손을 아래로 내렸다. 붉은 구체가 스르륵 움직이는 것을 본 네르드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은, 국가에 소속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입을 열었다. <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9) > - 그들은, 국가에 소속되지 않았다. 그 말과 함께 앨런의 손에 들려 있던 플레임 스피어가 다시 위로 올라왔다. 그것을 본 네르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푸른 솔새가 처형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이 찾아왔소. 푸른 솔새가 단순한 암살자가 아니라 세작임을 이미 알고 있었지. 그녀가 하던 일을 대신 해줄 이들을 찾아달라며 많은 돈을 줬고.” 조용히 뒤에서 지켜보던 체이스가 설핏 웃고 말했다. “누가 들으면, 세크리티아가 엄청 가난한 줄 알겠는데.” 과거의 지금 시기, 고작 열 일곱이었을 베른. 데블란은, 베른이 검술을 배우기 시작함과 동시에 세작에 대한 일을 베른에게 맡길 생각을 했다. 따라서 베른은 일찍부터 세작의 관리를 도왔다. 그리고 현재, 세작에 대한 데블란의 대우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과거와 다르지도 않았다. 그러니 지금 체이스의 목소리에 자조가 가득한 것은, 이런 일련의 내용들이 알려주는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과거와 같지만 단 하나가 다르지 않나. 베른의 부재. 그것이 원인이 된 것이다. 앨런은 체이스의 기분을 짐짓 모르는 척 하며 물었다. “국가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대사막의 늑대였으니. 어차피 국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이들이었다. “비단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리베른의 마법사도 보았고, 텐실의 사제도 섞여 있소. 이 이상은 나도 아는 바가 없소. 그들이 무슨 이름으로 활동하는지도 모르니까.” 여러 나라의 이들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조직이라는 소리였고, 그들이 칼리안을 공격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네르드를 찬찬히 살핀 앨런이 체이스를 쳐다봤고, 체이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더 숨긴 것이 없으리라는 것에 둘 모두 동의하는 눈빛을 한 채였다. 곧 앨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체이스를 향해 말했다. “아주 대단하지 않습니까. 다른 새들을 이리도 아끼는 듯 하니.” 남은 이들을 전부 죽이겠다 하는 말에 곧바로 입을 연 네르드에 대한 평가였다. 지금 앨런이 어떤 대답을 원해서 한 말이 아님을 알았으므로, 체이스는 침묵을 지켰다. 앨런의 시선이 다시 네르드에게로 돌아왔다. “······그런데, 자네.” 네르드를 부른 앨런이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물었다. “저들의 이름은 알고 그리 구는가?” 앨런의 말에도 네르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손속이 무자비함에 대한 분노를 드리운 채 앨런을 노려보던 얼굴 그대로였다. 언뜻 보면, 부하 혹은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입을 연 것처럼 보였다. 한 명에게 플레임 스피어를 보냈을 때 곧바로 붉어진 그 눈이 그것을 증명하는 듯 했다. 그러나 본래 세작들은 서로의 정체조차 몰랐다. 네르드 역시 마찬가지다. 칼리안이 그것을 이용해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가능했을 만큼, 세작들은 서로간의 친분이 전혀 없었다. 카이리스에 와서 없던 친분이 생겼을까. 그렇게 친해진 10명이 나란히 손 잡고 변절을 한 것일까. “속이려 들지 말게.” 사람 비꼬는 것만큼이나 사람 속 읽어내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앨런 아니던가. 변절을 하도록 꾀어낸 이가 있으리라고, 그리하여 열 명 모두 제각각 변절하여 이 곳에 온 것이리라고, 앨런은 그렇게 생각했다. 대부분의 변절자는 그렇게 생겨나지 않던가. 앨런이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이리 보여도, 거짓 얼굴에 속지 않을 만큼은 살았으니.” 물론 앨런이 직감만으로 네르드의 거짓을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네르드의 행동이 거짓임을 확신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얀 수리’는 세크리티아에 아주 충직한 세작이었다. 그렇다 하여, 그것이 다른 세작에 대한 그의 애정이 깊다는 뜻이 되지는 않았다. 과거 칼리안은, 정보를 밝히지 않으려는 푸른 솔새에게 ‘하얀 수리로 하여금 취조를 시키겠다’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 말에 푸른 솔새의 입이 즉각 열렸다. 네르드의 잔혹함을 겁냈기 때문이었다. 그런 푸른 솔새 역시 세작이 아니던가. 세작들을 정말 아낀다면, 변절에 대해 분노할 수는 있겠지만 ‘취조가 끝난 시신을 본 체이스가 사흘 동안 밥을 먹지 못했을 만큼’ 잔혹하게 보복하지는 못한다. 칼리안이 그러했듯이. “게다가, 자네 행동이 참으로 모순되지 않은가.” 네르드는 아홉을 빼돌렸다. 그리고 앨런의 앞에서, 독을 먹으려 했다. 둘을 죽였을 때 입 속의 독을 뱉었다. 질문을 했고, 네르드는 말하지 않았다. 때문에 하나를 더 죽였고, 남은 여섯을 모두 죽이겠다 했을 때 입을 열었다. “정녕 저들을 살리고 싶었다면, 독을 깨물려 할 것이 아니라 발악을 했어야지. 그것이라도 해보고 죽을 생각을 하는 것이 진짜가 아닌가.” 다 버리고 먼저 죽을 것처럼 굴 때는 언제고, 저들이 하나씩 죽어나가자 분노한다는 것은. 완벽한 모순이다. 검을 들어 앨런을 공격하지 않았다. 굳이 숨소리를 드러내가며, 독을 쓰려 하고 있음을 티냈다. 앨런이 막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취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그것조차, 시간을 끌기 위한 일이었으리라. 게다가 네르드는 시간을 벌어야 하는 이유도 알려 준 셈이었다. 남은 여섯을 다 죽이겠다 했을 때 즉각 입을 열었지 않나. “하나라도 살아서 도망쳐야 늑대들을 이 곳으로 다시 부를 테니까?” 네르드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바뀌었다. 앨런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기대하지 말게.” 여섯 개의 플레임 스피어가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 * * 두 개의 알약. 네르드와 마주 앉은 체이스는, 앨런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개의 알약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그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설명해야 할까?” 생과 사. 두 개의 길을 내어 줄 약을 보던 네르드가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하.” 세작들이 필요로하는 모든 물건을 취급했던 네르드였으므로, 그 정도의 약은 충분히 구분할 수 있었다. 체이스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다만, 선택지를 주기는 어렵겠구나.” 그렇게 말한 체이스가 둘 중 하나의 약을 집어 바닥에 버렸다. 버려진 것은, 죽음을 가져다 줄 독이었다. 그것이 네르드에게는 한 줄기 희망이었다. 고요한 숲 같던 미소와는 결코 어울릴 수 없을, 마치 카이리스의 혹독한 겨울을 옮겨놓은 듯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으니.” 그의 눈과 입과 귀를 앗아갈, 평생토록 보고 듣고 말하지 못하는 생을 안겨 줄 독이 남았다. 체이스의 손짓에 따라, 그의 주변에 서 있던 기사들이 네르드의 입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남은 약을 그 입에 털어 넣었다. 네르드는 저항했으나, 약을 뱉어내지는 못했다. “절망 속을 후회로 거닐며 살아보거라.” 그 말을 끝으로, 체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나갔다. 들어올 때와 다르지 않은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그것이, 네르드가 마지막으로 보고, 듣고, 불러세우려 한 이의 모습이었다. * * * 당연하겠지만, 테일란의 검은 강했다. 무려 사흘이다. 이끌고 나간 세크리티아의 기사단이 전멸한 상황. 발칸의 마법사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테일란은 카이리스의 기사단을 홀로 막았다. 세크리티아가 마지막 전열을 재정비 할 수 있도록, 사흘을 홀로 버텼다. 세크리티아 왕궁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을 그렇게 막아내던 이가 바로 테일란이었다. 아직 그 날로부터 9년이 앞서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일란은 테일란이었다. - 서걱! 앞을 막아선 이의 팔을 잘라낸 테일란의 검이, 놈의 심장을 반으로 가른 뒤 멈췄다. 검을 회수하는 그의 뒤로 한 명의 전사가 달려들었다. 테일란이 검을 들어 붉은 오러가 맺힌 그 검을 막으려 할 때. - 콰직! 뼈가 꿰뚫리는 소리와 함께 테일란을 공격하려던 전사의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널브러진 시신의 목에는 팔뚝만한 구멍이 나 있었다. 바람의 화살이 뚫고 지나간 자리였다. 칼리안의 화살이었다. 곧 또 다른 곳에서 날아오는 검을 막아낸 테일란이 그의 목을 벴다. 그리고 칼리안에게 향하는 두 명의 전사 중 한 명의 다리를 잘라냈다. 남은 한 명은 심장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졌다. 이번에는, 바람의 창이었다. - 화르륵! 멈추지 않겠다는 듯, 무언가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놈들의 마법사가 만든 거대한 불덩이가 테일란에게로 쇄도했다. 그것을 막기 위해 테일란의 검이 한층 푸르게 빛난 순간. [실드]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칼리안이 테일란의 앞에 섰다. 그리고 오러의 방패에 덧씌워진 실드로 화염구를 받아냈다. - 콰앙! 엄청난 폭발음이 들림과 동시에, 사방으로 크기를 늘린 방패가 한 차례의 열폭풍을 막았다. 그와 함께, 칼리안은 입 속의 비릿한 무언가를 삼켜냈다. 그런 상태를 테일란이 모를 리 없었다. 테일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칼리안에게 말했다. “물러나 계십시오.” 테일란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잠시 멈칫했다. 테일란이야 알지 못했지만, 참 오랜만에 옛 스승의 존대를 들은 까닭이었다. 앨런은 사제의 연을 맺은 이후에도 칼리안에게 계속하여 존대를 했지만, 테일란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여전히 살기 가득한 여섯의 전사를 앞에 두고, 그리고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을 한 채로, 칼리안이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짐이 되는 것은 질색이라서.” 그리고는 다시 한번 바람의 화살을 만들어 달려드는 전사의 미간을 꿰뚫었다. 그것을 본 테일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검을 털어낸 뒤, 붉은 오러를 만들어내며 달려드는 기사의 목을 벴다. 놈들은 테일란에게 집요하게 들러붙지 않았다. 마지막 한 놈까지, 모두 칼리안을 노렸다. 하아. 테일란이 세 명의 기사를 베어내는 사이, 다시 한번 화염구가 날아들었다. 짧은 한숨을 뱉은 칼리안이 방패를 들어 그것을 막아냄과 동시에 마나를 운용했다. - 콰앙! - 쌔애액! 칼리안의 방패에 화염이 막혀 폭발음을 낸 그 순간, 바람의 창이 대기를 찢었다. - 콰직! 잠시 후, 한참 뒤에 선 채 화염구를 보낸 마법사의 가슴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던 마법사의 몸뚱이가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 쿵! 그것을 끝으로, 칼리안에게 덤벼들었던 열 여섯의 전사가 모두 죽었다. 하나 하나의 무력은 처음 칼리안을 공격했던 다섯의 전사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하지만 까다로운 이들이 열 여섯이나 되니 칼리안도 혀를 내둘렀다. 칼리안이 자신의 앞에서 검을 쓰지 않은 것을 단순히 몸 상태 때문이라 생각한 테일란이 입을 열었다. “살려두지 않아도 정말 괜찮은겁니까.” 이미 다 죽여놓고 하는 질문이었다. 칼리안의 검술은 테일란으로부터 배웠다. 아니, 테일란보다 오히려 나은 면이 있었다. 앞으로 10년 뒤 테일란과 베른이 사용할 검술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테일란의 앞에서 검을 쓰지 않고 마법과 방패만으로 놈들을 상대한 칼리안이, 새하얗게 질려있는 얼굴로 웃었다. “왜 공격했는지 알게 되었으니 괜찮습니다.” 주머니 속의 조약돌을 손에 쥐어 본 칼리안이 그렇게 답했다. * * * 플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신 향기가 맞은 편에 앉아있던 플란츠에게까지 닿은 까닭이다. 잠들듯이 쓰러진 것인지, 혹은 쓰러지듯 잠든 것인지. 아무튼 칼리안은 왕궁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하루를 침대 위에서 보냈다. 얀이 걱정하는 소리가 플란츠의 방까지 울렸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칼리안에게 앨런이 잠시 다녀갔다. 그 뒤 칼리안은, 귤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비척비척 4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것을 까먹기 시작했다. “······ 무슨 짓이지.” 라고, 벌써 네 번을 물었다. 배고프니까 잠깐만 기다려달라 답한 칼리안은, 플란츠의 방에 신 귤 냄새가 가득 찬 뒤에야 입을 열었다. “브리센을 완전히 조각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왜.” 뜬금 없는 소리였으므로, 플란츠가 되물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주머니 속의 돌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며 말했다. “텐실과 대사막이 손을 잡았다는 정보도 새들이 전했습니다. 그 정보를 받기가 무섭게 저를 공격했고요.” 칼리안이 아니었다면, 플란츠나 체이스가 아니었다면. 누구든 이번 공격이 텐실의 짓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브리센 후작이 그리했던 것처럼. “저를 공격할 시기를 보던 중에 대사막과 텐실이 손잡으리라는 것을 알게 됐고, 이 때다 싶어 들이닥친겁니다. 전하께서, 이번 일의 배후가 텐실의 짓일 것이라 생각하시게 하기 위해서요.” 왕자를 공격한 이들의 배후에 텐실이 있다고 착각하게 하기 위해 공격 시기를 벼르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칼리안은, 조금 전 꺼내 둔 돌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그렇게 눈가림을 만들어 둔 뒤, 제가 이 힘을 쓸 줄 아는지를 확인해보려던 것 같습니다. 확인하는 김에 그냥 죽여버릴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시아도 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아는 검을 사용할 줄 몰랐고,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아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소리다. 반면, 칼리안은 오러를 쓸 줄 알았다. 그것도 어느 순간 갑자기 드러나게 된 힘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것과 칼리안의 힘이 같은지를 확인해보려 한 것이라고, 그것이 칼리안의 결론이었다. 늑대들의 붉은 오러가 빛날 때마다 함께 빛나던 조약돌을 떠올리던 칼리안이 그렇게 말했다. “제 힘은 그런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테고 여러모로 저를 더이상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한 셈이 되었으니, 당분간은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만.” 잠시 말을 멈춘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을 떠올렸다. “끝은 아닐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준비하듯 계속 힘을 키워왔던 칼리안을 보며, 그리고 이제는 브리센의 힘도 있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들으며, 플란츠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 아우님이 나를 참 귀찮게 하시는군.” 칼리안이 무엇 때문에 굳이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눈치 챈 것이다. “란델 형님과의 일이 해결되면, 브리센은 고스란히 살려서 형님께 드리겠습니다. 놈들 힘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아서, 브리센도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왕이 될 생각도, 왕궁에 있을 생각도 없다면, 후작 노릇이나 하라고. 그런 말이었다. “밖에서 고양이 키우십시오. 수도 떠나지 않으셔도 되도록, 방법은 제가 찾을테니.” 칼리안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10) >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 바위를 뚫고 솟아오르는, 따뜻한 물. 체온보다 조금 높은 그 물에 온 몸을 담그고 살며시 눈을 감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카이리시스에서 동쪽으로 이틀을 더 가면, 온천으로 유명한 슈린츠 지방에 도착할 수 있다.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거리겠지만, 기실 귀족들에게 있어 이틀 거리는 그리 부담스러운 걸음이 아니었다. 어차피 일 년에 한 두번은 멀고 먼 자신의 영지까지 다녀오는 이들이 대다수였으니까. 때문에 카이리시스에 거주하는 많은 귀족들이 관광 혹은 요양을 위해 종종 슈린츠를 찾곤 했다. 하지만. “걱정은 안하셨습니까.” 이렇게 입을 연 드미레아의 얼굴에는 온갖 감정이 다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표정 중 가장 큰 것을 해석해보자면, ‘아버지,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정도가 될 것이었다. 그래, 물론. 제 핏줄이라고는 해도 도저히 이해해줄 수 없는 것이 꼭 한 두 가지는 있게 마련이다. 그 살기등등한 왕자를 보며 꽃 같다 말하는 얀도 당최 이해하기 어려운 족속이지만, 차라리 그 쪽은 그래. 꽃 같이 생기기라도 했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줄 수는 있다. “내가 설마 걱정을 안했겠느냐?” “걱정하셨다기엔 피부가 너무.” 매끈매끈 윤기나는 슬레이만의 얼굴을 보며, 드미레아가 이렇게 대꾸했다. 르메인을 찾아가 드미레아가 문을 닫아 잠근 이유를 들은 슬레이만은,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르메인에게 돈이나 좀 빌려달라 말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세리에와 함께 온천에 갔다. 드미레아가 그랬지 않나, 며칠 더 쉬다 오라고. 그래서 갔다는 것이다. 수도에서 이틀 떨어진 거리에 있는, 슈린츠에. 저 태평함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을 이해하기엔, 드미레아의 이성이 너무 건강했다. “아주 잘 쉬고 오신 것 같네요.” 두 왕자를 사이에 두고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이 대립하는 상황에, 지그프리드의 가주인 슬레이만이 어정쩡한 곳에 있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 그러니 그냥 멀찍이 떨어지는 것으로 드미레아를 도운 것임을 알고는 있다. 그런데 저 얼굴 좀 보란 말이다. 딸 걱정, 집안 걱정, 나라 걱정이라고는 공기중에 퍼진 먼지만큼도 안하고 정말로 아주 그냥 푹 쉬기만 한 저 얼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냔 말이다. 그것이 고스란히 얼굴 밖으로 나왔으므로, 슬레이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장난기를 지운 채 웃음만 남긴 얼굴로 말했다. “세리에가 걱정하지 말라 했고, 나도 그리 생각했다.” 슬레이만이 허락한 ‘방패’의 의미를 멋대로 확장시켰다. 보호와 옹립의 뜻을 교묘하게 달리 해석하여, 칼리안을 돕는 것이 자신들의 신념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눈속임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드미레아를 걱정하지 않았다. 혼내기는 커녕, 믿었단다. 그렇게 말한 슬레이만이, 드미레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보마.”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고, 슬레이만은 들고 있던 투명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그것이 참 궁금했다.” 그렇게까지 해 가며, 칼리안을 도운 이유를 묻고 있었다. 드미레아는 얀이 아니다. 얀만큼 칼리안을 많이 겪어보지 않았고, 만나보지도 않았다. 그렇다 해서 슬레이만처럼 칼리안의 진짜 모습을 파악한 것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칼리안이 지그프리드 공작령에 방문했던 그 며칠동안 칼리안을 본 것으로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의 무엇을 보고 마음을 정했는지를. 슬레이만의 물음에, 드미레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웃잖아요.” 하늘 아래 온갖 불행은 다 내꺼라는 얼굴을 하고 살았던 얀이 ‘묵은 똥 싼 얼굴’을 하더니, 칼리안과 잠시 손을 잡아달라는 말을 하러 찾아왔을 땐 웃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 준 사람이니, 원하는 걸 해보도록 도와줘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정도의 결정에 대한 결과는 제가 감당할 수 있으니까요.” 드미레아다운 담백한 이유였다. 그 말을 들은 슬레이만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큼지막하게 웃는 얼굴을 한 슬레이만이 고개를 끄덕끄덕 해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나 내일 내려간다. 우리 세리에랑 둘이 가마.” 지그프리드 공작령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이었다. 지금 그 곳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니 오래 비워두기 어려운 것은 알고 있으나, 급작스러운 말이었다. 수도에 와서 한 일이라고는 앨런과 함께 르메인을 놀리고, 앨런과 술 마시고, 테일란에게 시비걸었다 죽을뻔하고, 집에서 쫓겨나 온천에 다녀온 것이 전부인 슬레이만을 보며 드미레아가 말했다. “네.” 수도에 드미레아만 두고 가겠다는 말이다. 칼리안을 어떻게 돕든, 알아서 결정하고 행동하라는 소리였다. 자신이 내려감으로서 드미레아에게 그만큼의 권한을 넘기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결정과 행동을 믿겠다는 아버지를 보며, 드미레아가 살짝 웃었다. * * * 여행을 마친 슬레이만이 집에 들어가고,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고양이 키우기를 권하고 있던 그 시간. 시종장 라울에게 엘프 대장로와의 만남을 미루라 한 르메인이, 창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정원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텐실이 나왔다고.” 그 말에, 르메인의 뒤에 서 있던 렌이 대답했다. “네, 전하. 텐실의 왕실과 주고 받은 서신이 다수 발견됐습니다. 이번 일에 대한 계획에 대해서도 모두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네르드가 있던 책방을 수색한 결과였다. 꼼꼼한 렌과 카에라가 직접 나서서 수색을 진행했으니, 놓친 증거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확인된 결과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모두 텐실이었다. 증거도, 정황도, 모두가 텐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칼리안이 사라졌을 때 가장 큰 이득을 볼 것은 란델이었다. 란델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이득을 보는 것은 당연히 텐실이다. 그러니 습격을 한 이유 역시 너무나 명백했다. “전부, 태우거라.” 때문에 르메인은 이렇게 명했다. 이번 일의 배후에 대해 앨런에게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텐실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 배후라는 것을. 물론 르메인은 그들 중 죽은 이가 세크리티아의 세작임을 알지 못했다. 이번 일에 크게 나서 준 체이스에 대한 앨런의 배려였다. 예상치 못한 명령을 들었지만 렌은 반박하지 않았다. 지그프리드의 기사 로난시테, 체이스의 기사 테일란, 그리고 키리에가 그러하듯이. 고개 숙여 예를 보인 렌이 밖으로 나간 뒤, 르메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처벌이 있어야겠지.” 칼리안에 대한 처벌을 말하는 것이다. 칼리안이 습격당한 것을, 세상은 모른다. 연회장에서 멋대로 나간 란델을 체르밀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했으면서, 멋대로 근 일주일간 실종되었던 칼리안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한밤에 왕궁 밖으로 나갔던 플란츠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그런 플란츠를 억류한 지그프리드 역시 빠뜨릴 수 없었다. 물론 드미레아는 지그프리드에 대한 처벌도 자신이 받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다만 드미레아가 몰랐던 것이 하나 있었다. 벌을 내릴 르메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드미레아보다 슬레이만이 조금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그프리드 공이 내일 수도를 떠난다더군요.” 어떤 벌을 내려야 할지 고민하는 르메인을 돕기 위해, 앨런이 지나가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르메인이라지만, 이런 시기에 굳이 수도를 떠나겠다는 슬레이만의 의도를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곧 르메인이 시종장 라울을 불렀다. 그리고 몇 가지 내용을 전달했다. “수도에 혼란을 일으킨 지그프리드 공작을 내일 당장 카이리시스 밖으로 내보내고, 해가 가기 전까지는 카이리시스 입성을 금지한다.” 드미레아를 대신해 슬레이만이 처벌을 받는 것이다. 칼리안의 방패가 되는 것이 드미레아의 몫이었다면, 드미레아의 방패가 되는 것이 슬레이만의 몫이니까. “그리고, 2왕자와 3왕자 모두 왕궁 밖 출입을 금지시키겠다.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외부 행사에도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꽤 강한 처벌이었으나, 앨런이 보기에 그것은 ‘보호’ 였다. 카이리스에서, 시스파니안의 손길이 어린 이 왕궁만큼 안전한 곳은 없으니까.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을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 * 그래.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이 왕궁 안에 갇혀 있는 순간 순간이 생의 마지막이 될 것처럼 숨이 차올라서, 그리 말했다. 왕이 되고 싶지 않다고. 살고 싶다고. 칼리안은, 플란츠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왕의 아들로, 그리고 왕의 동생으로, 플란츠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을 왕궁에서 보냈을 테니. 때문에 플란츠의 말에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렇다고 해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의 저택에서 혼잣말처럼 꺼냈던 말을 다시 내보냈다. “내 아우님이 나를 너무 믿으시는 것 같은데.” 설마했지만, 브리센을 넘기겠다니. 태연한 얼굴로 귤 껍질을 까며 할 만한 이야기라 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지 않은가. 플란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겁을 잃으신 건지. 자신이 넘치시는 건지.” 처음 칼리안의 방을 찾았을 때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칼리안은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손에 쥔 것이 없으면 죽는다며 발칸을 빌려주더니 브리센까지 쥐어주려 하는 칼리안을 보며, 플란츠가 그렇게 말했다. 대체 뭘 믿고 이러느냐고. 내가 당장 마음을 바꿔먹으면 어찌하려고. 그러다 만약 내가, “내가, 또,” 이렇게 말하던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말을 멈춘 것을 느낀 칼리안의 움직임도 잠시 멈췄다. 플란츠가 무엇을 되삼켰는지 칼리안도 느낀 탓이다. 그렇게 아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칼리안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는, 신 귤의 껍질을 다시 벗겨내며 입을 열었다. 붉은 두 눈이 연두색 귤 껍질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였다. “······ 거기까지만 생각하십시오.” 시디 신 귤의 향이 코 끝을 맴돌았다. 그 끝에 한 사람이 자꾸 떠올라서 혼자 먹질 못하고 굳굳이 여기까지 왔는데. 떠올리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된 사람이 앞에도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눈치가 빠른건지. 칼리안이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말했다. “넘겨짚는 것 까지만, 하십시오. 확신하지 말고.” 전쟁이 있었다는 말도,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그것이 누가 일으킨 전쟁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절대 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칼리안 혼자 겪은 과거의 일이다. 체이스가 기억해주고 있다지만, 결국 아무 의미 없는 일이 아닌가. 지금에 와서는 일어나지도 않은 그 일을 왜 혼자 알아내서는 저러고 있느냔 말이다. “플란츠.” 살짝 눈을 감았다 뜬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으니까.” 지금의 플란츠와 아무 관련 없는 일이니까. 그 일은, 절대로, 되풀이되지 않을 테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고,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뜬 칼리안은 귤을 한 조각 떼어내어 입에 넣었다. 유난히 신 맛에,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났다. 한참을 오물거리며 귤을 씹어 삼킨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형님께서는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이 결단코 싫다 하셨고, 란델 형님께서 왕위에 오르셔서 형님과 저를 나란히 탑에 가둬두는 것은 더 싫으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 믿는 겁니다.” 나도, 무턱대고 너를 믿어줄 만큼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며 미련 떨지 말라고. 그런 의미라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한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어서 세자위가 필요해지시면, 그냥 달라고 하세요. 생각해 볼 테니까.” 남의 것 탐내본 적 없는 플란츠에게, 칼리안이 그렇게 말했다. 그 꼴을 본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버릇 없는 새끼.” 칼리안이 양쪽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은 귤을 들어 플란츠에게 내보였다. “형님 드시겠습니까?” 플란츠가 작은 소리를 내며 실소했다. 그리고 칼리안의 손에 들린 귤을 건네 받았다. 시고 시고 또 셔서, 머릿속에 든 생각이 싹 사라져버린다. 그러니 어쩌겠나. 쓸데 없는 생각 말고 고양이나 키워야지. < 제22장. 건드리지 말라고 (11) > 히나가 웃었다. 그동안 단 한번도 보여준 적 없던 수화를 하며 생긋 웃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욕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무슨 말인지 물었을 때, 키리에는 칼리안의 눈을 피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히나의 수화를 고스란히 외워뒀다. ‘드미레아한테 물어봐야지.’ 드미레아라면, 그것이 욕이든 아니든 무슨 뜻인지는 알려줄 것이 분명하니까. 아무튼 매우 좋지 않은 뜻임에는 틀림 없다. 칼리안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다지 좋은 말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기껏 살려놨더니 다 낫지도 않은 몸으로 닷새만에 밖에 나갔다. 앨런이 같이 가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 따로따로 움직였단다. 그래서 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걸 다시 고쳐놓다 잠시 쉬는 사이에 제멋대로 4층에 가서는, 다 낫지도 않은 속을 한 채로 그 많은 신 귤을 다 까먹었다. 거기서 끝났으면 다행이다. - 왕자님의 고양이도, 왕자님보다는, 말을 잘 들어요. 칼리안은, 플란츠와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수련장에 갔다. 꼬박 일주일을 누워있어도 모자랄 판에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않는 것이다. 결국 수련장에 있는 것을 히나에게 들켰고, 혼이 났다. 축복의 힘이나 히나의 치유가 부족한 피를 채워주지는 못하니까. - 오빠도, 나빠. 말렸어야지. 물론 칼리안의 고집을 꺾지 못한 키리에도 같이 혼났다. 잠시 본가에 간 얀을 대신해 칼리안을 말려야 했음에도, 나란히 수련장에 있었으니까. 그 모습을 본 칼리안이 걱정 말라는 듯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정말로 무리하지 않고 키리에의 수련을 봐준 뒤 올라가겠다며 먼저 체르밀 궁에 돌아가 있도록 했다. - 또 다쳐도, 안 고쳐줄 거예요. 보는 것만, 하세요. 어울리지도 않는 엄한 얼굴로, 히나가 이렇게 말했다. 결국 칼리안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몇 번을 다쳤더니, 전부 다 얀이 되어 버렸다. 르메인은 물론이고 앨런과 히나까지. “고맙지만 얀이 해주는 걱정이면 충분해.” 그래도 그것을 귀찮다 여길만큼 막되먹은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들어가 있어. 감기걸릴라.” 칼리안은 히나가 밖에만 나오면 감기에 걸리는 줄 아나보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것인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끄덕 해보이며 되려 자신을 걱정해주는 칼리안을 못미더운 눈으로 쳐다본 히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발을 돌려 돌아갔다. 히나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키리에가 조용히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칼리안이 결코 가만히 있지만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고, 칼리안은 피식 웃었다. 어느새 그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 하나를 상대 못해줄까.” 그리고는 이렇게, 꽤나 뼈아픈 말로 키리에를 자극했다. 키리에가 살짝 웃는 얼굴을 하더니, 묵빛의 검을 들어 그대로 칼리안에게 내질렀다. 칼리안 역시 재빠르게 팔을 들어 그것을 막아냈다. - 카앙! 실컷 내려다보는 말을 들어도 기분이 상하지 않는 것은, 칼리안의 상태를 걱정한 키리에가 제대로 싸우려들지 않을까봐 하는 소리임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키리에는 최선을 다해 검을 움직였다. 여유로운 얼굴로 검을 받아 넘기던 칼리안은, 놀란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다. ‘생각보다······.’ 생각보다 더 많이, 강해졌다. 스스로의 검술과 마법, 그리고 주변 상황에 몰두하느라, 꽤 오랫동안 키리에를 보아주지 못했다. 그리고 키리에는 그 사이에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 있었다. - 카강, 캉! 카아앙! 연타를 방어한 칼리안의 검이 키리에의 허리를 노리며 뻗어나갔다. 그것을 어렵지 않게 막아낸 키리에가 다시 공격을 해왔다. 즐거운 마음이 든다. 확실히, 키리에는 노력하는 천재다. ‘괜한 걱정을 한 것일지도.’ 습격이 있던 날, 에우리아를 만나고 궁에 돌아온 뒤 봐주려던 것이 바로 키리에의 검이었다. 플란츠와 수련장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던 날, 키리에가 ‘벽’을 마주하고 있음을 느꼈던 탓이다. 마법사가 깨달음을 얻어 다음 서클을 완성하듯이, 검술 역시 스스로의 한계를 넘고 다음 단계로 성장하게 되는 때가 있다. 지금의 키리에가 바로 그 시기를 겪고 있었다. 수련장 한 가운데에서 검을 내려놓고 앉은 채 깊은 생각에 빠져있기에, 수련장에 들어가려던 플란츠를 붙들어 앉혔지 않나. 다만, 지금까지는 칼리안이 알려준 검술을 수련했다면 이제는 스스로가 깨우쳐 나가야 할 일이라 생각했으므로 그저 지켜봤다. 그러다 아무래도 조금쯤은 도움을 줘야 할 것 같아서 궁에 들어오면 키리에부터 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일이 꼬였었다. - 카강! 카아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수련장 전체를 끊임없이 흔들어댔다. 대부분의 공격은 키리에가 했고, 칼리안은 간혹 반격하며 키리에의 반응을 살폈다. “느려.” 그리고 이렇게, 한계를 파악하기 위한 말로 계속해서 키리에를 몰아세웠다. 키리에의 움직임이 끝을 모르고 빨라졌다. 그 때마다 칼리안은, 대단할 것 없다는 듯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냈다. 이 정도라면, 슬레이만의 기사 유란과 견주어도 승패를 알 수 없으리라.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키리에의 검이 칼리안의 미간을 노리고 쏘아져 나왔다. 칼리안이 알려준 공격 방식이 아니었다. 칼리안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 카앙! 그것을 막아낸 칼리안의 모습이 키리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뻗어낸 검을 즉각 회수한 키리에가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상체를 숙였다. - 쉬익! 조금 전까지 키리에의 머리가 있던 곳으로 칼리안의 검이 지나갔다. 그것을 느끼며 몸을 돌려세운 키리에의 귀에, 아주 미세하게 바닥을 스치는 칼리안의 발소리가 들렸다. 키리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곧바로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검을 뻗어냈고, “말했잖아.” 또 다른 곳에서 칼리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느리다고.” 실로, 어마어마한 속도의 움직임이다. 곧 쓰러질 것처럼 비척비척 이 곳으로 걸어온 사람이 과연 맞을까 싶다. 뻗어낸 검을 다시 한번 회수한 키리에가 바닥을 박찼다. 그와 함께, 키리에의 신형도 사라졌다. - 카아앙! 캉! 카앙! 흐릿한 그림자가 서로 얽히며 다시 한번 맞붙었다. 칼리안이 자신의 공격에 절대로 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한 키리에는, 온 힘을 다해 검을 다뤘다. 그렇게 수십 차례의 공방이 다시 오갔을 때. 키리에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수련장이 아닌, 오로지 칼리안과 키리에만이 존재하는 그런 공간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키리에는, 지금껏 가져보지 못한 그 이질적인 느낌에 아주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들었다. 칼리안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을 디디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칼리안이 어디로 움직일지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이유는 몰랐다. 그저, 알게됐다. 주저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알았으니, 공격할 뿐이다. - 쌔애액! 예리한 파공음이 대기를 갈랐다. 키리에의 검이, 당장이라도 칼리안의 심장을 꿰뚫을 기세로 뻗어나갔다. [실드] 그리고 칼리안은, 아주 치사했다. * * * 오러로 만들어진 실드는, 그 자체로 위협적이다. 칼리안의 실드는 당장이라도 키리에의 검을 조각낼 기세였다. 물론 칼리안의 의지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무엇이든 조각낼 기세의 ‘실드’라니. 참으로 모순된 힘이 아닌가. 마치 파열된 유리조각을 다시 모아둔 형상의 실드 안에서 칼리안이 씩 웃었다. “미안, 죽을 것 같아서.”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실드에 가로막힌, 정확히 칼리안의 심장 앞에서 멈춘 자신의 검 끝을 보던 키리에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기특한 손주를 보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졌어.” 그 말을 듣고도, 키리에는 한동안 가만히 서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 이겼······ 다. 이겼다. 칼리안을 이긴 것이다. 한 순간에 검의 이치를 깨닫거나 오러를 방출하는 기적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것은 정말 말 그대로 기적에 가까운 일일 뿐이다. 키리에는 그런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키리에는 감각을 확장시키는 법을 깨달았다. 뛰어난 청력을 이용해 싸우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타인의 기운을 느끼고, 동화하며, 오직 상대와 나만이 존재하는 상태로 검을 나누게 되는 능력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리 크게 기뻐하지 않는 목소리였으나, 키리에의 얼굴을 쳐다본 칼리안이 웃었다. 그 얼굴 속에 숨겨진 감격스러운 웃음을 읽어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생에서는, 키리에도 검의 길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흐뭇한 기분으로 한 발을 내딛던 칼리안이 잠시 휘청였다. 정신이 잠시 아득해진 까닭이다. 깜짝 놀라 부축해오는 키리에를 보며 칼리안이 웃었다. “배고파서 그래.” 키리에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제 속은 썩어가면서, 얀을 다독이고 플란츠의 짐을 덜어주고 히나를 걱정하더니 키리에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 그 고집을 어떻게 이기냐 싶어 검을 꺼내 대련에 응했지만, 당장 걷지도 못하는 것을 보니 원망스러운 마음이 든다. 곧 죽어도 아프다는 말을 안 하는 것이다. 이유를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말해줘도 좋지 않을까. 지금 너무 힘드니까, 조금만 미뤄달라고. 이런 상태로 찾아와서 도와주면 고마울 줄 아느냐고. 오히려 미안하기만 하지 않느냐고. 그런 말을 하는 대신, 키리에는 그냥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잠깐 실례할 테니 이해하라는 뜻이었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걸어갈 수 있겠냐는 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 키리에는 그냥 덤덤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칼리안을 냅다 들춰 업었다. 어차피 저대로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새도 아니었다. 의외로, 칼리안은 얌전히 키리에의 등에 업혔다. 그러더니 키리에의 등에 머리를 기대고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아, 오랜만이다.” 분명히 웃고 있는데, 그 말 끝이 아프다. 그것이 무엇 때문일지 알아들은 키리에가 짧게 물었다. “제가 업어드린 적이 있습니까.”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리고는, 열 다섯 살의 입에서 나오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꺼냈다. “응. 내가 취했을 때. 많이.” 키리에. 칼리안이 유일하게 마음 놓고 붙잡을 수 있는 과거의 끈이 아니던가. “술 좋아하셨습니까.” “나보다는 네가 더 좋아했어.” 기분이 참 묘하다. 과거의 일일텐데도 과거가 아니니, 이것을 어찌 받아들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칼리안이 잠겨드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사실 다 안 나았어. 움직이는 것도 내 맘 같지 않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해. 다음엔 안 져.” “네.” 그렇게 답한 키리에가 피식 웃었다. 과거의 일이야 어찌됐건 키리에는 그저 들어주면 될 일이다. 가끔씩 이렇게 약한 소리가 나올 때마다 고개만 끄덕여주면 될 일이니 어려울 것이 있겠는가. 지그프리드 덕에 당분간 란델도 얌전히 있을 테고, 란델에 대한 처벌로 텐실에도 경고를 했으니 또 기사를 보내는 식의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브리센은 플란츠가 막고 서 있으니 그도 괜찮다. 습격자들도 일단 물러났다. 그러니 조금만 쉬시라고. 키리에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났다. <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1) > 칼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틀간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언제까지가 될지 기약도 없는 외출 금지령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이건 좀 너무 과하지 않나. “호위기사라니.” 르메인이 세 왕자에게 호위기사를 보냈다. 왕자들에게는 호위기사를 붙이지 않는다는 왕실의 규율을 깨버린 것이다. 물론 그것을 과한 행동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자식들이 연중행사인 냥 돌아가며 피를 쏟고 있으니, 카에라의 기사를 두 명씩 차출하여 보낸 정도면 르메인도 꽤 많이 자제한 것이라 볼 수 있을 터였다. 솔직히 앨런은, 체르밀 궁의 기사들을 전부 빼버리고 그들을 모조리 카에라 단원들로 채우지는 않을까 걱정했었으니까. 그에 대해 브리센은 생각 외로 조용했다. 란델이 한번 브리센을 노렸다 실패한 뒤 혹여 플란츠에게 칼 끝을 돌리는 것은 아닐지 우려한 탓이리라. 문제는, 칼리안에게 있어 그들이 ‘방문 잠금장치’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잠깐 산책만 갈 거라니까.’ ‘불가합니다, 왕자님.’ 발칸의 훈련 모습도 보고 아르센도 좀 만나야 하는데, 이 우직한 기사들은 절대로 내보내주지 않았다. 히나가 권고한 ‘7일’을 정확히 채우지 않는 이상은 결코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리라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붙어보자고 해볼까.” 저 기사 나부랭이들이 나를 이기면, 말 듣겠다고. 결국 칼리안이 눈을 빛내며 이렇게 무서운 말을 꺼내들었고, 옆에 서 있던 얀이 깜짝 놀라면서 작은 목소리로 칼리안을 달랬다. “그러다 또 다치시면 어떡하시려고요.” 누가, 누구에게? 칼리안이 딱 이런 눈이 되어 얀을 쳐다봤다. 아무튼 얀은 한결같은 얀이었다. “쉬셔야 합니다. 또 키리에에게 업혀 오시면 안되잖아요. 헤르츠 경은 제가 불러올게요.” 결국 칼리안은 깊은 한숨을 쉬며 테라스로 향했다. 순간 얀은 칼리안이 그대로 테라스를 넘어 도망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으나, 다행히 칼리안은 테라스의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안 갈 테니까, 차나 한 잔 가져다 줘.” 그런 얀의 표정을 읽은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고, 나가기를 포기했음을 안 얀이 웃으며 얼른 밖으로 나갔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있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무 답답한데.” 해야 할 일이 태산인데 이렇게 안에 처박혀 있으니. 심지어 앨런도 오지 않았다. 앨런이 오면 분명 일거리를 만들어낼 칼리안임을 알고 있을테니, 이참에 아주 그냥 푹 쉬라는 의미에서 아예 발도 들이질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다 해서 일거리를 만들지 않을 칼리안은 아니었다. 이렇게 무료하기만 해서야 사는 낙이 있다고 할 수 있나, 따위의 생각이나 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일단 헤르츠 경을 만난 뒤에 드미레아를 불러서 잠깐 얘기를 좀 하고. 그 후에는······.’ 따라서 칼리안이 테이블을 손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방에 갇혀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정리하고 있을 때. “니아앙!” 칼리안의 무료함을 떨쳐 줄 고양이 한 마리가 테라스 밖에서 날아들어왔다. * * * 라즈베리 잼을 넣고 구운 오트밀 쿠키에서 달큼한 향이 났다. 쿠키 하나를 통째로 입에 넣고 씹던 앨런은, 딱 그만큼 달큼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있었다. - 카이리스의 3왕자와 지그프리드 소공작의 관계 칼리안과 드미레아가 정혼한 사이일 것이라는, 만약 정혼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사이는 아니리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이다. 앨런은 입에 든 것을 다 넘긴 뒤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소문이 날 만 하지 않겠습니까?” 함께 무도회에 입장한 것으로 모자라, 무도회가 진행되는 내내 둘이 따로 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 뒤에 드미레아는, 칼리안이 사라졌다며 플란츠를 붙들어두고 브리센에 항의하기도 했다. 그 신분과 능력만 따져보더라도 서로만한 배필을 찾기 어려울 정도인데, 심지어 나이도 똑같았다. 그러니, 말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귀족들 사이에 그런 말이 안 생기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해명하지 않고 그대로 둘까 하는데.” 소문이 생긴 것이 이상해서 말을 꺼낸 것이 아니라, 소문을 해명할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를 칼리안에게 전해달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왕실에서 그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면, 귀족들은 그것을 기정 사실로 믿을 것이 분명했다. 르메인의 말에, 앨런이 슬그머니 웃으며 말했다. “전하의 욕심입니까, 아니면 왕자님을 위함입니까.” 또 이렇게 떠보는 소리를 한다. 지그프리드 공작가를 사돈으로 두어 자신의 힘을 늘리려는 것인지, 아니면 칼리안의 입지를 단단히 만들어주려는 생각인지를 묻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자신을 꼭 칼리안의 경쟁자 보듯 하는 앨런을 향해, 르메인은 별다른 반응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덕에 3왕자가 사라졌던 것에 대한 이야기가 줄어들었지 않나.” 자신보다는 칼리안을 위한 결정이라는 소리였다. 곧 르메인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브리센 후작이 가만히 있질 않으니, 그 때문에 왕자의 위신이 깎이는 것보다는 낫지.” 드미레아에게 제대로 놀아난 에반은, 그 일을 어떻게든 부풀리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 날에 있었던 일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브리센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키고 칼리안이 왕자로서의 자질이 있는 것이 맞는지를 정확히 알려달라는 이야기였다. 만약 에반이 원하는대로 ‘왕자의 직무에 부담을 느낀 칼리안이 수도 밖으로 도망갔다 잡혀 들어온’ 것으로 이야기가 굳어진다면, 추후 칼리안에게 굉장히 큰 결점이 될 수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이 아예 그 일에 대한 관심 자체를 가지지 않도록, 그냥 드미레아와의 정혼설을 인정하는 분위기로 만드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 르메인의 생각이었다. “그러다 정말 국혼으로 이어져도 나쁠 것은 없으니.” 이렇게 덧붙여진 르메인의 말에, 앨런의 미소가 짙게 변했다. “그럴 일은 없을 터이니, 염두에 두지 마시지요.” 드미레아와의 실제 나이 차이를 의식할 것이 분명한 칼리안도 칼리안이지만, 지그프리드를 버리고 왕자비, 혹은 왕비 노릇이나 할 드미레아가 아님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소리였다. 때문에 이렇게 장담한 앨런이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1왕자님에 대한 혼담은 오가는 것이 없습니까?” 칼리안이나 플란츠는 아직 그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다지만, 란델은 이제 곧 있으면 19세가 되니, 슬슬 정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아니던가. 그 말을 들은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두루마리 뭉치를 가리켜보였다. 왜 없겠느냐는 소리다. “안 그래도 이제 생각을 해보려는데. 텐실과 대사막이 손을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로 유난히 많아졌군.” 순간 앨런은 그들의 명단을 알려달라는 말을 꺼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타국의 왕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는, 무조건 자국 내 사람과 혼인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다시 말해, 텐실의 핏줄이기도 한 란델은 다시 텐실의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되면 이 나라가 텐실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 분명하니까. 그 말인즉슨 저 두루마리에 적힌 이들은 모두 란델을 지지하는 카이리스의 귀족들이라는 말이었으니, 앨런이 이참에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르메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 되네.” 왕자비 간택에 대한 내용은 국왕과 왕비의 고유 권한이다. 불필요한 권력 싸움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비가 없었으므로 오로지 르메인이 혼자 확인하고 결정하게 될 사안이니 앨런이 끼어들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명단 역시 보여줄 수 없다는 말에, 앨런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오트밀 쿠키를 하나 더 집어 먹었다. “대신 지난번에 얘기했던 것, 기사단. 허락하지.” 지그프리드의 저택에 아이즌의 기사단을 숨겨두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소리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므로, 앨런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르메인은, 그런 앨런을 보며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항시 궁금했었는데.” 그렇게 말한 르메인이 한동안 앨런을 쳐다봤다. 말해보라는 듯 가만히 앉아있는 앨런에 대한 르메인의 질문이 이어졌다. “시스파니안을 닮은 왕자가 마법을 쓸 줄 알면 재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말했었지.” 처음 르메인을 찾아왔을 때, 앨런이 칼리안의 마법 스승이 되겠다며 했던 말이었다. “······ 나는 자네를 어디까지 믿어도 되겠나.” 그 말에, 앨런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것 참 빨리도 물으십니다.” 자신이 없을 때 칼리안을 데리고 피신해달라는 부탁을 해올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그런 것을 묻는지. “그 때는 사제간의 정이 끈끈하다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말한 르메인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달칵, 하는 찻잔 소리가 집무실을 잠시 울렸다. “세크리티아 세작까지 써가며 왕자의 일을 도울 만큼인 줄은 몰랐으니까.” 칼리안의 일에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도움을 줬음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인지, 습격자들 중 세작이 있다는 것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무튼 르메인 역시 듣는 귀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칼리안의 일을 도운 이들의 정체를 알게 되어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물론 칼리안을 돕기 위해 나서준 것이었으니 체이스에게 다른 해가 가지는 않을 터였다. 르메인도 그 정도의 융통성은 있었으니까. 다만 르메인은 말 그대로, 앨런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설 만큼 칼리안을 아끼는 진짜 이유가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늙은이가 핏줄처럼 생각하고 키우는 중이니, 염려 마시지요.” 어딜 보아도 어여쁘고 안쓰럽기만 한 제자인데, 수단 방법 안가리고 돕는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그렇게 말한 앨런이 웃음기 어린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한결같이 마음에 담고 있던 말을 꺼내놓았다. “전하께서 왕자님 앞길 막으려 들 때 제가 전하의 숨통을 막을 일은 있겠으나, 제가 왕자님을 마주보고 설 일은 없을 터이니.” 이제는 앞에 앉아있는 마법사에게까지 목숨을 위협받은 르메인이, 세상에서 제일 믿음직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러니까.” 뜬금 없는 고양이 세례를 받은 칼리안이 품에 안긴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무료한 인생이 싫다고 했지, 하늘에서 고양이가 떨어지는 꼴이 보고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고양이는 왜······?” 칼리안의 질문에 플란츠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플란츠는, 칼리안의 방에 오려던 것이 맞기는 했다. 다만 고양이까지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그럴 성격도 아니었을 뿐더러, 고양이를 안고 조심조심 아랫층에 방문할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다. 대낮이니까. 따라서 안고 있던 고양이를 내려놨고, 테라스 아래에서 칼리안이 내는 소리를 들었고, 테라스 문을 열고 뛰어 내렸다. 그리고, 고양이가 같이 뛰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움직임으로 고양이를 잡아챈 칼리안을 향해, 일련의 과정을 떠올리던 플란츠가 간단하게 답했다. “어쩌다보니.” 저 불친절한 대답을 그냥 ‘일부러 데려오려던 것은 아니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같이 오게 됐다’ 정도로 생각하고 넘긴 칼리안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여보인 뒤 테라스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플란츠가 자리에 앉자, 분명 칼리안의 고양이인 플란츠를 더 좋아하는 고양이가 플란츠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고양이 위에 손을 올리는 플란츠를 보며, 칼리안이 웃음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형님은 왜 오셨습니까?” 그것도, 또 창문으로. 멀쩡한 대낮에 테라스로 온 이유야 뻔했다. 르메인의 호위기사를 피해야 했다는 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호위기사를 통해 르메인이 알지 못해야 할 말이 있다는 뜻일 터였다. 플란츠의 연두색 눈이 사일런트를 발현한 칼리안에게 향했다. “혹시 조만간 기사단이 들어올 예정인가.” 칼리안의 눈이 길게 구부러졌다. 지난 가을의 사냥대회에서, 아이즌을 포함한 기사 가문의 이들을 만날 것이라는 이야기는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직접 했었다. 그 이야기 후 시간도 꽤 지났지만, 그 뒤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야기해준 적 없었다. 그저, 축제 기간 중 플란츠가 칼리안과 아이즌이 만날 자리를 마련해줬던 일이 있었을 뿐이었다. “역시, 형님은 참 똑똑하십니다.” “짖지 좀 말고.” 칼리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이 들어올 예정이 맞다는 뜻이기도 했고, 계속 이야기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잠시 입 속으로 말을 고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카렌, 라온. 내가 손에 넣을 수 있다.” 왕실의 두 기사단을 굳이 아이즌의 기사단으로 바꿀 필요 없이, 플란츠가 자신의 손에 넣겠다는 뜻이었다. 칼리안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그 정도로 나서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힘들게 모아 만든 아이즌의 기사단을 왕궁 안에 묶어두지 말고, 칼리안의 기사단으로 만들라는 소리임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하는 소리였다. 한동안 말 없던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께서 고양이나 키우라고 하시니.” 브리센을 가지기로 한 이상 제대로 나서주겠다는 말이었다. 발칸을 빌려준 것에 대한 대가로 기사단을 선물받은 셈이 된 칼리안이 씩 웃으며 물었다. “말씀드릴까요?” “필요없다.” 그리고 이번에도, 고맙다는 말은 생략됐다. <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2) > 사라졌다. 분명히 방 안에 있었는데, 플란츠가 사라졌다. 밖에 있는 호위기사들이 들을새라 크게 놀라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하던 플란츠의 시종 레릭이, 어느 순간 헉 하는 소리를 냈다. 테라스 바깥 쪽에서 플란츠가 턱 하고 나타난 까닭이다. “왕자님, 어딜 다녀 오십니까.” 이렇게 말을 꺼낸 레릭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으로 들어왔으면 다녀왔다고 할 일이 맞을텐데. 그랬으면 잘 다녀오셨냐고도 덧붙여 볼 텐데. 이런 생각 때문에 지금 이것이 어딜 다녀왔냐고 해도 될 일일까 하는 고민이 생긴 까닭이다. “뭐가.” 그리고 플란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냐는 말인 것도 같고, 뭐가 잘못됐느냐는 말인 것도 같고, 뭘 봤느냐는 말인 것도 같다. 정확한 뜻이 무엇이건간에, 저 태연한 대꾸는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간의 숙련된 눈치로 플란츠의 짧디 짧은 말을 이해한 레릭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왕자님.” 살짝 고개만 끄덕인 플란츠가 물었다. “왜.” 이럴 때면, 상냥한 3왕자를 모시는 얀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그래도 항시 냉기가 흐르는 1왕자보다는 플란츠가 나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한 레릭이 입을 열었다. “점심 식사를 어찌할지 여쭈려고 했습니다.” “됐어.” 플란츠는 끼니를 제때 챙기질 않았다. 이번에도 또 거르겠다는 말이었으니 레릭이 걱정스러운 말을 하려는데, 플란츠가 저벅저벅 걸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기사들이 따라오든 말든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 발을 옮겼다. 굳이 아랫층 어딘가에서 테라스로 올라와 방에 도착해놓고, 문으로 나가는 것이다. 다시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레릭이 빠른 걸음으로 플란츠의 뒤를 따랐다. * * *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은 또 있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고양이와, 그 고양이 주인의 윗방 사는 사람이 다녀간 뒤의 일이었다. 조금 전, 할 말 끝낸 플란츠가 테라스 난간을 디디고서 가벼운 몸놀림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러자 고양이가 쪼르르 방문 밖으로 나갔다. “진짜 더 좋아하네.” 그런 고양이에게 서운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메를린이 들어왔다. 손에는 두 잔의 차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얀의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얀이 나간 이후 플란츠가 와서 대화를 나누고 갔으니, 차를 가져온다 하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터였다. 그런데 방에 들어온 것이 얀이 아닌 메를린이다. 때문에 얀은 어디 갔는지 묻는 눈으로 쳐다보자, 메를린의 정중한 대답이 건네져 왔다. “아무래도 아르센 경을 빨리 불러와야 할 것 같다며 빌헬름 관에 갔습니다, 왕자님.” 메를린을 찾아 차 준비를 맡기고 아르센을 부르러 갔다는 소리였다. 하도 답답해하니 말상대라도 불러다 줄 생각을 한 듯 했다. 괜스레 미안해하는 칼리안을 본 메를린이 빠르게 다음 말을 전했다. “히나는 조금 전에 키리에 님과 함께 나갔습니다. 돌아오면 말씀드리도록 전해두었습니다.” 시아와 히나를 만나게 해주기로 약속해놓고서는 시일이 미뤄졌다. 때문에 이제야 약속을 다시 잡고 둘을 내보낸 터였다. 곧 메를린이 자신의 손에 들린 차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밖에 마나실 백작이 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의 눈에 반가운 기색이 가득 차올랐다. 그 모습에 소리 없이 웃은 메를린이 테이블에 차를 내려놓은 뒤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 후 방문이 다시 열리며 앨런이 들어왔다. “스승님!” 칼리안의 목소리가 잔뜩 들떠 있었다. 날을 채워 방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절대 만나지 못할 것 같던 앨런이 들어온 것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또 헤실헤실 웃었다. 물론 지난번처럼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반가워서 짓는 웃음이었다. 강제로 방 안에 발이 묶여 있는 것을 참기 어려워할 성격임을 잘 아는 앨런이, 자신을 반기는 칼리안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밖에 저 친구들 때려 눕히지는 마시지요. 전하께서 보내신 이들이니.” 그리고는 이렇게, 칼리안의 속을 훤히 들여다 본 것처럼 주의부터 주었다. 안 그래도 이삼일 뒤 쯤 대련을 청해볼까 날을 재봤던 칼리안이 숨긴 것을 들킨 얼굴이 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이 된 앨런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베어 눕히셔도 안 됩니다.” “네. 노력해볼게요.” 칼리안이 얼마나 거짓말을 못하는지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앨런은, 그나마 노력이라도 해보겠다는 말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아 달달한 밀크티를 홀짝이던 앨런에게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앨런이 자리에 앉아서 저렇게 오랫동안 차만 마시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칼리안이 조금 불안한 듯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꺼내시기 어려운 얘기입니까?” 왕궁 밖에 못 나가고, 방에 갇히고, 감시인인지 호위인지 모를 방문 잠금장치 두 명이 생긴 것으로 모자라 또 무슨 처벌이 있는지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시간을 끄는 바람에 괜한 불안감을 만든 셈이 된 앨런이 말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걱정 마시지요.” 그저 밀크티가 입맛에 맞았을 뿐이라는 말을 꺼내기가 어쩐지 민망했던 탓에, 앨런이 장난기 짙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용건을 꺼냈다. “축하드립니다. 일찌감치 정혼자가 생기셨으니.” 그렇게 말한 앨런이 다시 한번 밀크티를 목으로 넘겼다. 그 사이 앨런의 말 뜻을 파악한 칼리안이 물었다. “혹시 드미레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할 일 없이 배부른 입들이니, 전해지는 말이 참 많기도 합니다.” 그제야 드미레아와 자신 사이에 의도하지 않은 소문이 생겼음을 안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괜한 수고가 줄었네요.” 앨런의 말을 괜히 빨리 알아들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마치, 소문이 안 났다면 소문을 낼 생각이라도 했다는 말로 들렸다. 때문에 이번에는 앨런이 칼리안을 쳐다봤고,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시기가 그렇지 않습니까. 브리센 후작은 어떻게든 이번 일을 되갚아주려 할 텐데, 그것을 무마하려면 더 큰 소문이 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앨런과 동시에 밀크티를 한 입 마셨다. 달달한 소문에 딱 걸맞을 법한 단 맛이 확 느껴졌다. 장래 지그프리드의 주인이 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드미레아를 떠올려 보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안그래도 드미레아만 괜찮다면 한번 더 지그프리드 이름을 빌려볼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드미레아가 수도에 왔고, 칼리안과 무도회에 참석을 했다. 이것이 귀족들에게는, 지그프리드가 이제 정치에도 관심을 둔 것으로 여겨질 터였다. 그렇다면 아직 어린 소공작과 자신의 자녀를 어떻게든 연결시켜 보려는 이들이 줄을 이어 나타날 터였다. 드미레아가 그것을 반겨할 리 없었다. 그러니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자신의 소문을 가라앉히고 드미레아는 드미레아대로 밀려드는 관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둘의 ‘정혼설’을 한번 내보는 것이 어떨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드미레아만 괜찮다면 해명하지 않고 싶은데,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신다고 합니까?” 앨런이 단박에 재미가 사라진 얼굴을 했다. 당황하고 놀라는 것을 기대했는데, 어찌보면 국혼이 걸려있을지도 모를 소문을 이용하겠다며 저리도 태연히 말을 한다니. “어디 가서 그리 굴지 마시지요. 제 나이로 안 보입니다.” 일반적인 열 다섯 살이라면 자신의 혼인을 걸고 이런 식의 계산을 해보지는 않으니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의 고개가 위로 휙 치켜올라갔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채로 말하는 탓에, 조금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체르밀에 그런 분이 둘이나 더 계시는데요.” 이 건물 4층이랑 5층에 한 분씩 있어요. 특히 4층에 사시는 분이요. 고양이 키우랬더니 왕실의 기사단을 장악해 주겠다 하고 가셨는데요. ······ 저는 뭐. “그리고 지그프리드 저택에도 한 명 있네요.” 드미레아는, 정혼자가 있는지에 대한 첫 질문을 받자마자 칼리안을 떠올릴 터였다. 그것이 이번에 세워 준 방패 값이든, 내어 준 바나나 값이든. 그 값으로 칼리안의 이름을 내놓으라고 할 것이 뻔했다. 어찌됐건 제 나이에 안맞게 사는 이들이 주변에 차고 넘친다는 말이었으므로, 앨런이 짧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또 참으로 궁금할 일입니다.” 천재 마법사 앨런 마나실의 손녀인 베로니카는 아주 평범한 소녀이자 마법사였다. 그런데 데블란의 아들인 체이스나, 르메인의 아들들이나, 슬레이만 따위의 딸이 도무지 범상치 않았으니, 그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무튼 그 일은 전하께서도 그대로 두는 것이 낫겠다 하셨으니, 그리 알고 계시지요.” “네.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 앨런이 사일런트를 발현한 뒤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기사단의 체류를 허락하셨습니다.” “아, 그럼 마침 잘 됐네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앨런을 향해, 칼리안이 조금 전 플란츠와 나눈 대화를 전했다. “날을 보아서 조금씩 수도로 들여보내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드미레아를 한번 만나기는 해야겠네요.” 하루도 지체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만큼 자신을 혹사하고 있었다. - 달칵 앨런이 찻잔을 내려놓은 뒤 가만히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왕자님.” “네, 스승님.” 불러놓고 한동안 말이 없다. 불투명한 찻물이 잠시 잔 속에서 흔들리다 가라앉을 때가 되어서야 다음 말이 나왔다. “카밀론에는 왜 가려 하십니까.” “그야 당연히,” 시간을 돌려야 했을 일.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다 드러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 그것이 무슨 일이었든 관계 없이 대응할 수 있으려면, 제가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요. 이미 했던 그 말을 다시 꺼내는 대신, 혹은 개를 키우러 가겠다는 농담 대신, 칼리안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닐 테니까. “왕자님께서는 무엇을 하고자 하십니까.” 칼리안의 반응을 본 앨런이 이렇게 다시 물어왔다. 막고자 하는 일에 필요하다면 왕좌에라도 오르겠다고. 앨런을 처음 본 날, 칼리안은 그리 말했다. 그것은, 칼리안을 위한 계획이 아니었다. “원하시는대로 모든 것을 다 지켜낸 이후의 왕자님을 생각해 본 적 있으신지요.” 칼리안이 부드럽게 웃었다. 대답은, 이어지지 않았다. * * * “이 곳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체이스는,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불쑥 찾아온 것에 꽤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언젠가 플란츠가 했던 것을 따라하는 것이 분명한 말을 덧붙였다. “내 동생의 현재 형님께서.” 장난이나 치고 놀 만큼 친해진 사이는 아니지 않나. 이런 생각에, 플란츠가 짜증난다는 얼굴을 감추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얘기 좀 하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여보인 체이스가, 들어오라는 듯 안쪽을 가리켜보였다.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간 플란츠가 창가에 놓인 의자에 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체이스가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마법사들로만 구성된 군대는, 만들고 운영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제대로 된 공격을 감행하기 어렵다.” 나른한 목소리. 그리고, 내가 키우는 고양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설명하는 것 같은 말투. 체이스는 그것이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날씨 얘기 정도는 하고 나서 본론을 꺼내주는 것이 상대방을 위한 예의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 까닭이다. 당연하겠지만 평생 그런 것을 해본 적 없는 플란츠는, 지금까지 자신이 파악한 발칸의 구성과 훈련 방법을 포함한 여러 정보를 줄줄이 알려주기 시작했다. 상세한 설명은 없었다. 그런 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체이스라면 충분히 알아 들으리라는 것이 플란츠의 생각이었다. 혹은,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고. “······ 그렇게 하면, 마법사가 적은 세크리티아에서도 충분히 쓸만한 군대가 나올 것 같은데.” 반 년치 할 말을 한꺼번에 다 꺼내놓는 것 같은 플란츠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체이스가, 말이 끝난 뒤 입을 열었다. “기밀일텐데.”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인지는 아느냐는 뜻이었고,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대꾸했다. “상관 없어.” 그렇게 말한 플란츠의 눈에 서늘한 달빛과도 같은 예리함이 담겼다. “당신. 아무것도 안한다고 했지.” 체이스는, 미래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모든 것이 칼리안이 쥐어야 할 힘이라고, 그렇게 말했었다. “해. 당신도.”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너도 같이 움직이라고. 플란츠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아우님한테 다 떠넘기지 말고.” 나는, 별 것 아닌 이유로 전쟁을 벌일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너도, 준비해. <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3) > 마흔 아홉의 국왕 친위대와, 한 명의 왕제. 그렇게 쉰 명이 성문 앞에 섰다. - 마흔 아홉 명 - 마흔 여덟 명 처음에는 수를 줄어들게 하는 이들을 원망하다가, 줄어드는 수를 착실히도 세어내는 두 눈을 원망했다. 그렇게 하면 원망 받을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 열 다섯 명 바라건대 혹여 어디엔가 계신다면 이제 모두 되었다 그리하시며 멈춰주실 수는 없겠느냐고 - 다섯 명 태어나 처음으로, 그리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세렌티를 찾았다. - 두 명 ··· 키리에. 잠든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 명 차마 보지 못하여 눈을 감고자 하였으나 그조차 담아내야 함에 감지 못하였다. ············ 아···. 망국의 왕이 해야만 했던 마지막 일은 지키다 죽는 이를 지켜보며 오롯이 홀로 남는 것이었다. * * * 별관 앞 정원에 설치된 분수에서 물줄기가 뻗어나갔다. 부질 없이 솟아오르다 하릴 없이 떨어져내리는 물방울에 햇빛이 깃든다. 의미 없는 움직임이 끝없이 이어지며 만들어낸 그 소리가 유난히도 소슬하게 들려왔다. 체이스는, 무의미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물소리를 감상하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고요한 두 눈이 잠시 감겨들었다. “······ 플란츠 왕자.” 플란츠가 체이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픈 것을 뱉는 듯, 혹은 삼키는 듯한 말이 체이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혀.” 플란츠는 그저 넘겨짚기만 했다. 어떤 것도 확신하지 않았다. 그러니 플란츠는 과거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이 맞았다. 겪지도 않은 과거의 일이 보내오는 상념에서 간신히 벗어난 체이스가 마른 입을 열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해서, 괜한 말을 한 셈이 됐군요.” 혹시라도 같은 일이 반복될까 하는 마음에 건넨 말. 고작 그것만으로, 플란츠는 여기까지 따라왔다. 따라와서는, 대비하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괜한 일을 눈치 채게 한 것에 대해 사과를 건네는 체이스를 보며,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군가 사과를 해야 할 일도 아니었고, 사과를 받을 일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어차피 출발점은 칼리안이었다. 들키는 것 잘 하는 칼리안이 플란츠를 처음 보았을 때 채 갈무리하지 못한 살의를 눈치 채는 바람에 시작된 의문이었지 않나. 그러니 누구의 말 혹은 누구의 실수 때문에 플란츠가 이 자리에 찾아왔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 생각에 당신, 그때도 손 놓고 있었을 것 같은데.” 이번에도 또 지켜볼 생각이냐는 소리였다. 체이스가 웃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맞을까 싶어서, 웃었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년 2월입니다.” 그때부터 준비를 시작하겠다는 것인지, 혹은 그때까지 준비를 마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말인지. 수수께끼 같은 말을 꺼내놓은 뒤 한동안 플란츠를 깊이 응시하던 체이스의 손가락이 플란츠를 향했다. 의자에 기대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모습을 가리켜보인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더 이상 나를 앞에 두고 그렇게 앉아있지 못할 겁니다. 말을 낮추지도 못할 테고.” 왕자 플란츠, 그리고 왕세자 체이스. 플란츠는 이미 체이스에게 예를 지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보다 더 큰 격차가 생긴다면, 그때는 플란츠도 지금처럼 체이스를 대하지는 못할 터였다. 국왕, 체이스 듀라한 세크리티아. 그를 앞에 두고서는 말이다. “하.” 플란츠가 짧은 바람 소리를 냈다. 뱀 같은 데블란이 얌전히 양위를 할 리가 없다. 그러니 지금 체이스는 데블란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즉위가 이루어질 날을 저렇게 차분한 얼굴로 꺼내놓는 것이다. 혹시라도 친부의 죽음을 너무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까봐, 체이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데블란의 사인은 의혹의 여지 없는 병사였다.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데블란의 건강은 좋지 않았다. “막을 수 있는 일은, 그때부터 준비하겠습니다.” 당장은 플란츠가 이야기한 것을 시행할 수 없겠지만, 스스로가 왕위에 오른 이후부터는 자신도 준비를 시작하겠다는 의미였다. 언제부터가 됐든, 이제 가만히 두고 보는 입장에서는 벗어나겠다는 뜻이었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때문에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플란츠의 말에 대한 긍정의 뜻인 것처럼 웃어보인 체이스가 말을 건넸다. “헌데, 내가 나서는 것이 이 나라에 어떤 영향을 줄지, 불안해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본격적으로 힘을 기르겠다 마음 먹은 체이스의 세크리티아가 어떻게 될지, 세크리티아가 카이리스에 해를 입히지는 않을지. 그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체이스는, 칼리안이 직접 왕위에 오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과 플란츠가 왕위에 관심이 없음을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플란츠가 짧게 입을 열어 체이스의 오해를 지적했다. “내 아우의 옛 형님이 그렇게 나오면, 불안해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아우님인데.” 어차피 이 곳의 왕이 될 것은 칼리안이니, 체이스가 힘을 키우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 없다는 말이었다. 체이스가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을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베른은 결코 왕위에 미련을 보였던 적 없었으니까. 때문에 이번에도, 플란츠를 왕위에 올린 뒤 옆에서 도우리라는 생각은 했지만 직접 그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런 모습을 본 플란츠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까지 떠넘기지 말라고.” 안그래도 내 짐이었던 것을 대신 끌어안고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플란츠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은 할 말을 다 전했고, 체이스도 대답을 한 셈이니 이제 정말로 해야 할 말이 없었다. * * * 앨런은 한참동안 칼리안을 응시했다. 대답이 이어지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해본 적 없었던 이야기를 이제와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때문에 칼리안은 다시 한번 웃었다. “······ 그리 하지 마시지요.” 칼리안의 웃음을 본 앨런은 이렇게 말했다. 그에 대해 무슨 답을 줘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칼리안은 그냥 고개만 끄덕이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이 말을 제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에, 칼리안이 잠시 웃었다. 그리고 다시 달달한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제가 세이렌 경에게 부탁해 둔 일이 있습니다.” 본래부터 전하려 했던 말이기도 하고, 화제를 돌리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속아주는 기분으로 칼리안을 쳐다보는 앨런을 향해,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마법사 협회장 에우리아에게 검은 조약돌에 대해 알아봐달라 했던 일을 간단히 전달한 칼리안이 앨런에게 말했다. “제가 직접 갈 수가 없으니, 혹시 조금이라도 확인된 것이 있는지 물어봐주세요.” 칼리안은 당장 밖에 나갈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그렇다고 바쁜 에우리아를 불러들일 수도 없었으니, 조금 더 바쁘지만 더 능력 있는 앨런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씁쓸한 마음을 잠시 접어 둔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화제가 바뀐 이상, 다시 말을 꺼내봐야 소용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 없이 그냥 그렇게 하겠다고만 대답한 앨런이 물었다. “왜 갑자기 그 돌에 대해 알아보려 하십니까?” 그제야 칼리안은 앨런에게 그 동안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 꽤 있었음을 깨달았다. 특히 란델에 대해서 거의 말을 전하지 않았었다. 앨런에게 불필요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은 조금 전에 버렸다. 앨런은 이미 더할 나위 없이 칼리안을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까짓거 하는 김에 조금 더 하시라는 마음이 된 칼리안이 오랜 시간에 걸쳐 그간의 이야기를 전했다. 대사막의 늑대들이 붉은 빛의 힘을 썼고, 그들이 힘을 사용할 때마다 조약돌이 붉게 빛났던 것. 란델이 피웠던 장미에 조약돌이 반응했던 것. 장미 정원에서 칼리안을 앞에 둔 란델이 사용했던 힘에 대해서. “안 됩니다.” 그리고는, 지금 당장 5층으로 워프할 것 같은 스승님을 뜯어말리며 이렇게 덧붙였다. 도대체가. 마법사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호전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피식 웃으며 이런 생각을 한 4서클 마법사 칼리안을 향해 앨런이 물었다. “1왕자의 그 못되먹은 짓을 그냥 두셨습니까?” 딱, 친구들과 싸우다 다치고 온 손자에게 말하는 할아버지가 건네는 것 같은 핀잔이었다. “궁금해서요. 왜 그렇게 구시는지.” 이유를 알게 되면, 이해를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어쩐지 르메인이 벌인 일을 자신이 다 감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애써 지우며, 칼리안이 그렇게 대답했다. “여기서 나가도 된다 하실 때, 한번 만나볼까 합니다.” 분명 같은 건물에 있지만 도무지 만나지 못하는 첫째 형님을 생각하며, 칼리안이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이해의 초석이 되든. 혹은 틀어짐의 연속이 되든. 계속 저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던 칼리안을 향해, 앨런이 더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뭘 하시든 그때 가서 하시지요.” - 딱! 그리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의 눈이 스르륵 감겨들었다. 어여쁜 제자가 푸르딩딩한 낯으로 계속 일을 하시겠다 하니, 아주 그냥 푹 재워드리는 것이 스승의 도리 아니겠는가? 아르센이야, 헛걸음을 하든지 말든지. * * * 시종 레릭이 얼른 방문을 열었다. 저벅 저벅 들어간 플란츠는 별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혼자 있겠다는 소리였으므로, 레릭은 코앞에서 닫힌 문을 잠시 쳐다보다가 돌아섰다. 그리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바로 뒤에 누가 서있던 탓이다. 고개를 숙이니 은색 머리의 정수리가 보였다. 히나였다. “고양이 데리러 왔느냐?” 이렇게 물어오는 레릭의 말에, 히나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밥 먹일 때가 되어 찾아온 참이었다. 레릭이 다시 한번 난처한 얼굴을 했다. 분명히 플란츠는 혼자 있고 싶다는 의사 표현을 했으니까. - 달칵 그때, 작은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잠시 뒤 방문 안쪽에서 플란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려가.” 그 말을 들은 레릭이 고개를 끄덕였고, 히나가 살짝 인사한 뒤 플란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입구 쪽에 서있으려니, 플란츠가 고양이 있는 곳을 가리켜 보였다. 들어가서 데리고 가라는 뜻이었다. 생긋 웃은 히나가 플란츠를 보며 손을 움직였다. - 감사합니다. 좋은, 왕자님. 매번 뭐가 그렇게 감사한지. 그리고 ‘감사합니다’와 ‘왕자님’ 사이에 있는 그 말은 대체 뭔지. 묻는 대신,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 왕자님은, 식사, 하셨어요? 그리고 히나가 이렇게 물어왔다. 레릭이 오기 전까지 칼리안의 시녀들이 플란츠를 같이 챙겼었으니, 히나 역시 플란츠가 끼니를 잘 거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각 없어.” 그 말에, 히나의 표정이 엄하게 변했다. - 드세요. 자꾸, 거르시면. 그리고 칼리안이 이해하지 못해 고스란히 외워뒀던 말을 플란츠에게도 똑같이 했다. - 맴매할 거야. < [외전] 아브턴던트 > 아픈 것 잊는 마법을 뭐하러 익히느냐? 네가 있는데. * * * 태평. 아니, 태만. 그래, 굳이 고르자면 그것은 태만이다. 리베른 놈들은 대체로 태만하다. 카이리스 놈들은 계산적이며 사치하고 세크리티아 놈들은 지독하기가 이를 데 없으며 텐실의 놈들은 믿음을 가장한 허울 투성이다. 그리고 대사막의 늑대들은, 의뭉스럽거나 잔혹하다. 대사막 건너, 혹은, 해룡 아르나이젤이 지킨다는 바다 건너 어딘가에 다른 대륙이 있다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멀고 먼 길을 떠나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남쪽 나라 가서 남은 여생이나 해치울란다.” 잠시 지냈던 텐실을 떠나 이제는 아예 바다 건너 리베른에 가겠다는 앨런의 선언에, 곁에 서 있던 로닐이 싱긋 웃었다. “아버지 불러주는 곳이 그렇게 없을 줄 몰랐습니다.” 시시껄렁한 농담이었다.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에서 보낸 초대장이 불쏘시개로 변해 사라진 지 오래였음을, 로닐도 잘 알았다. 세상 떠난 앨런의 아내가 물려주고 간 감청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넘실넘실 휘날리는 꼬락서니가, 앨런이 보기에도 꽤 근사했다. 로닐은 앨런의 얼굴을 빼다 박았으니까. “카이리스에는 왜 안가세요? 지그프리드 공과 친하시잖아요.” “재미 없어 안 간다.” 만약 슬레이만이, 첫째 아들이 아프니 치료 방법이 있을지 함께 찾아주면 안되겠냐는 말을 했다면 고민도 않고 당장에 갔을 터였다. 로닐은 꽤 쓸만한 약제사였으니까. 하지만 그때 슬레이만은 그 말은 쏙 빼고 그냥 와서 잠시 지내보면 어떻겠냐는 말만 했었다. 때문에 거절했고, 그 일은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여하간 그때는 몰랐었으니, 7서클이 목전인데 뭐 좋다고 시골 구석에 들어가 술이나 퍼먹겠나 하는 생각 때문에 카이리스로는 가지 않았다. 그래서 정한 곳이, 리베른이었다. “같이 갈테냐?” 텐실은 약제사가 지내기에 그리 좋은 곳이 아니었다. 사방 팔방에 치유사가 널렸고, 치유사를 찾지 못할 이들은 약을 살 돈도 없었으니 돈벌이가 될 리 만무했다. 물론 그것은 로닐의 아내인 레이첼도 마찬가지였다. 능력있는 마법사 앨런이 아닌 다른 마법사에게 있어, 신성왕국은 지내기 어려운 곳이었다. 때문에 식견을 넓히겠다며 앨런을 따라 텐실까지 와서는 괜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저희도 갈게요.” 그렇게 앨런은, 아들 부부와 베로니카를 데리고 텐실을 떠났다. * * * 안 드실 거예요? 아, 이거 단 맛 나는 술이예요? 저 주세요. 아버지 단 것 질색하시니까. 집에 가서 제가 마실게요. * * * 리베른의 국왕 엘린느는, 항상 좀 돌아 있었다. “아니야. 당장 안 할거니까 내버려 둬.” “그럼 이것들은 다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급하면, 그대가 하면 되겠네.” 리베른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7서클을 달성했다. 그 일을 감격에 겨워 하기도 전에 서류에 도장을 찍어대는 일에 귀한 노동력을 착취당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오자마자 이것 저것 다 지원해주겠다며 10년짜리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라 마라 하더니, 마법의 ‘마’자만 들어간 서류만 보이면 죄 앨런에게 떠넘기고 저는 놀았다. “대관절 저를 왜 불러다 앉히셨습니까?” “나이는 많은데 젊고 잘생긴 대마법사가 옆에 있으면, 내가 일을 안해도 아무도 말을 못할 거 아냐.” 어떤 미친놈이 너한테 안 좋은 말을 하겠냐고. 딱 그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되삼켰다. 엘린느는. 게으르고, 말이 험하고, 말했듯이 항상 조금 돌아 있었으며, 강력한 군주였다. 그리고 그 권력을 넘보는 한 놈을 견제하려 앨런을 불러왔다. 국서 테이안. 엘린느의 남편이었다. 그러니, 테이안의 편에 선 귀족들과 관련된 업무를 죄 미뤄놓고 팽글팽글 놀고 있는 것이다. “괜찮아. 그놈들이 처리해달라는 일은 전부 테이안에게 득이 되는 것들이니까.” 이런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은 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득이 될 일은 또 귀신같이 찾아서 했다. 결국, 부부간 권력 다툼에 끼어든 형국이 된 앨런만 죽어났다. 처음 2년은 참았다. 그 후 3년은 엘린느와의 친분을 빌미로 버텼다. 6년이 되던 해, 기어코 폭발했다. “계약, 파기 해주시지요. 더는 참지 못하겠으니.” 테이안이 국왕과 대마법사의 사이를 의심하고 있었다. 한시를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의심을 이제껏 미뤄왔으면 많이 참은 셈이라 해야 할까. 결국 테이안은. 권력과 아내를 제 손에 쥐겠다는 욕심에, 해서는 안 될 일을 벌이고 말았다. 그는 앨런에게 독이 든 술을 보냈고 앨런은 마시지 않았고 로닐이 그것을. * * * 무력하고 무력하고 또 무력하여. [······ 아브턴던트]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 * * 고작 세 보 남짓 되는 좁은 땅에 하나뿐인 아들을 묻었다. 사고는 사건이 되고 사건은 마무리됐다. 앨런은 리베른을 떠나지 않았다. 모두가 떠나리라 예상했지만, 떠날 수가 없었다. 엘린느는 사죄했고 테이안은 사형됐다. 앨런이 채 용서를 하기도 전에, 앨런이 채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모든 것이 그렇게 끝났다. 용서를 하지도 못했고 구하지도 못하여서, 하지 못한 것이 그리 많아서, 리베른을 쉬이 떠날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2년은 참았다. 그 후 3년은 엘린느와의 친분을 빌미로 버텼다. 이미 잃었으니,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겪지는 않으리라고. 그 사실 하나로 스스로를 위로해가며, 버텼다. 그렇게 다 묻었다고 여겨졌을 때, 비로소 리베른을 떠났다. 그리고, 만났다. * * *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스승님께 인사드립니다. * * * 그래. 내 너를 살려주마. 라고, 다짐했다. <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4) > 칼리안을 찾아왔던 아르센이 되돌아가고, 앨런이 재워버린 칼리안이 꿈 꾸지 않을 단잠에 빠진 시간. “애오옹.” 어느새 빵빵해진 배를 한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낑낑거리며 닫힌 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테이블 앞에 앉은 플란츠의 무릎 위로 폴짝 올라왔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히나가 말했다. - 제가, 데리고 있을게요. 몸을 둥글게 말고 헤설프게 애옹거리던 고양이는 잠을 자기라도 할 것인지 꼼짝 않고 얌전히 있었다. 고양이의 따끈따끈한 체온이 전해졌다. 때문에 플란츠는 짧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둬.” 그리고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포크를 들고 있던 손을 움직여 샐러드를 집어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히나는, 플란츠에게 기어코 밥을 먹이고 있었다. 집요하게 샐러드만 주워먹고 있다지만, 히나와 함께 서 있던 플란츠의 시종 레릭은 일단 그 정도로도 만족해하고 있었다. 아예 손 대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억지로 먹고 있다는 티를 팍팍 내던 플란츠가 히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왜 안가.” 레릭이 서 있는 것이야 항상 그래왔으니 이해하겠는데, 플란츠의 시녀도 아닌 히나가 서 있으니 하는 소리였다. 칼리안은 새근새근 잘 자고 있을 테고 이 시간엔 그리 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히나는 신경쓰지 말라는 듯한 얼굴을 해 보이며 대답했다. - 다 드시는 것, 보고, 가려고요.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히 이해한 플란츠가 짜증난다는 얼굴을 했다. 계속 저렇게 서 있을 것이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참견은 싫은데.” - 참견이 아니라, 걱정하는 거예요. 히나는 곧장 이렇게 대답했고 플란츠는 알아보지 못한 척 했다. 달리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런 것을 눈치 챘는지는 몰라도, 히나가 생긋 웃었다. 본래 이 곳에서 플란츠를 어려워하지 않는 것은 칼리안이나 앨런 정도뿐이었다. 그 란델도 플란츠와는 되도록 말을 섞지 않으려 했으니까. 그런데 둘이 늘었다. 아르센, 그리고 히나. 거기에, 고양이까지 포함하면 셋이나 된다. 전부 다 동생 놈 때문에 늘어난 이들이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플란츠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별수 없다는 듯 샐러드 접시에 다시 손을 가져갔다. 둘의 대화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던 탓에, 아무래도 얀에게 수화를 배워봐야 하겠다는 생각이나 하며 창 밖을 보던 레릭이 입을 열었다. “커튼을 내려드리겠습니다, 왕자님.” 길어진 오후의 햇살이 창을 통해 길게 들어와, 햇빛이 테이블에 반사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그러자 히나가 아주 조금 미간을 찌푸리며 레릭의 팔을 붙든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두라는 뜻이었다.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레릭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플란츠 쪽에서 답이 들렸다. "건드리지 마.” ‘둬’, ‘놔둬’, ‘그냥 둬’ 보다 훨씬 강경한 말이었다. 그 뒤 플란츠는 잠시동안 손을 멈춘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 탁! 그리고 결국,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석 삼아 베고 누워있던 무릎이 움직이자 깜짝 놀란 고양이가 바닥으로 내려왔다. “다 먹었으니, 나가.”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등을 돌려 침실 쪽으로 걸어가버렸다. 갑자기 변한 태도에 놀란 레릭이 채 반도 비워지지 않은 접시를 보고 있자, 함께 서 있던 히나가 손가락으로 창 밖 어딘가를 가리켜보였다. ‘왜 이렇게 생각이 짧아요?’ 이런 얼굴을 한 채로. 손 끝이 가리키는 곳과 히나의 얼굴을 본 뒤에야 그 쪽 커튼이 내려졌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상기한 레릭이 자신을 책망하는 얼굴을 했다. ‘아······.’ 멋대로 생각한 것이다. 시간이 지났고, 티를 내지 않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고. 시간이 지나고, 티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 괜찮다는 뜻은 아닐텐데도. 도도도도, 하고 플란츠를 따라간 고양이가 안아달라 조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앨런은 설탕을 넣지 않은 진한 커피를 좋아했다. 만약 이 것을 칼리안이 알았다면 꽤나 의외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앨런은 칼리안의 앞에서 커피를 마시지 않으니, 칼리안이 앨런의 커피 취향을 알 일은 앞으로도 평생 없을 터였다. “마나실 경이 이렇게 쓴 커피를 마실 줄은 몰랐습니다.” 대신 체이스가 이렇게 말했다. 처음 앨런을 보았을 때도 앨런이 커피를 내어주기는 했지만, 그 날은 칼리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마시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야 하는 말이었다. “버릇이 되어 그렇습니다.” 앨런은 그냥 이렇게만 대답했다. 그리고 이 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묻는 눈으로 체이스를 쳐다봤다. 체이스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가, 플란츠가 와서 하고 간 이야기를 앨런에게 전했다. 발칸의 부단장인 플란츠가 타국의 왕세자에게 기밀을 줄줄이 알렸다는 그 말에, 발칸의 단장이기도 한 앨런이 잠시 웃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야말로 플란츠 왕자님 다운 일을 했습니다.” 차후 세크리티아에서 유사한 군대가 창설되었을 때, 앨런이 그 목적을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온 참이었다. 그런데 앨런은 언짢아 하기는 커녕 웃는 것이다. “그래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하였지요.” 그리고는 이렇게 입을 열며 체이스를 쳐다봤다. “세크리티아가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하면 그 몫이 전부 칼리안 왕자님에게로 갈 테니, 그것을 걱정하였을 겁니다.” 앨런은 얼마 전 칼리안이 자신을 ‘마나실 백작’이라 부르며 체이스를 따라 나서도록 말했던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체이스가 나서서 칼리안을 돕겠다며 홀로 나서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냥 기사 테일란과 함께 세작을 찾아갔다면, 앨런은 예정대로 칼리안을 따라 나섰을 터였다. 오로지 앨런에게만은 자신이 짐이 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칼리안이 아니던가. 그러니 앨런과 함께 갔다면, 칼리안은 앨런의 실드 안에 선 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랬다면, 그렇게 무리를 해서 다시 쓰러지는 일도 없었으리라. “물론 저하께서 그리 하신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확실히 이번에는 걱정이 과하셨습니다.” 체이스가 그렇게 무모하게 굴었던 이유를 앨런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눈 앞에서 자신의 핏줄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비참한 기분은 앨런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플란츠도. “이유를 알기 때문에 더 그리했겠지요. 같은 일이 있으면 또 무모하게 구실 터이니.” 만약 같은 상황이 또 생긴다면, 아무리 생각이 깊고 이성적인 체이스라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또 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플란츠가 체이스를 찾아간 것이다. 짐은 이미 충분하니, 적어도 제 몸은 건사할 상황은 만들어놓고 칼리안을 돕든 말든 하라는 뜻으로. 앨런의 말에,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해서 저 역시 그렇게 하겠다 답했습니다.” 그 말에, 앨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하께서도 그에 대해 다른 우려는 하지 않으실 겁니다.” 적어도 앨런이 발칸을 이끄는 한, 체이스가 아무리 강한 군대를 만든다 하더라도 발칸을 이기지는 못할 테니까. 그것을 아는 르메인이, 체이스의 의도를 우려해서 섣부른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체이스가 온 목적에 대해서는 해결이 되었으므로,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앨런이 나지막이 말했다. “헌데, 저하께 제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 하십시오.” 고개를 끄덕여보인 앨런은 칼리안에게 묻지 못했던 것에 대해 질문했다. “과거의 왕자님께서 왕위를 포기하신 이유를 알고 싶은데, 얘기해주실 수 있을런지요.” 칼리안은 체이스가 더 나은 군주가 될 수 있다 생각해서 왕위를 포기했다 했었다. 그것을 위해 굳이 체이스에게 기사 작위까지 받아가며 포기를 했다. 거기까지는 앨런도 알고 있었으나, 이유가 단지 그것 뿐인지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 뿐이라면 그야말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베른의 의도가 아니라, 그런 베른의 뜻대로 움직여 준 체이스의 의도가. 지금의 체이스를 본다면, 베른을 기사로 만드는 것에 절대 찬성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알려주기 힘들 일은 아니었다. 마치 옛 일을 떠올려보듯 기억을 훑어보던 체이스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체이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꿈 속의 일처럼 떠오르는 그 기억들을 되짚어 본 뒤 말을 이었다. “세크리티아의 귀족들은 불씨를 남겨두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서.” 데블란이 베른을 바다에 던져가면서 체이스의 의중을 확인해보려던 것과 같은 생각을 세크리티아의 귀족들도 하고 있었다. 베른이 왕위에 올랐을 때, 여러모로 비범한 체이스가 과연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지에 대해서. 그 싹을 자르려 들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베른이 알고 있었다. 때문에 왕위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체이스를 살리려고. 앨런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이번에도 같은 것이군요.” 칼리안은 앞으로의 일에 대응하기 위한 힘이 필요해서 세자위에 오르겠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앨런은 그런 칼리안의 말에 의구심을 품었다. 세자가 되면, 힘은 생길지언정 그 행동에 제약이 생기지 않나. 처음에야 플란츠와의 관계가 극악했다지만, 지금은 아니다. 때문에 플란츠와 우호 관계를 유지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란델에 대한 일만 해결한 뒤 플란츠를 세자위에 올리고 수도에서 벗어나 제 힘을 가지는 것이 낫다. 플란츠 성격에 칼리안을 견제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자위에 오르겠다는 것이 이상했었다. 그 자리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저하의 말씀을 들으니 이제 알겠습니다.” 여러모로 비범한 칼리안이 왕위에서 멀어진 뒤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지를 생각하는 것은 세크리티아나 카이리스나 다르지 않을 터였다. 다만 다른 것은, 칼리안을 암살하는 일이 쉽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상황이 역전될 수 있다. 칼리안을 옹호하는 세력이 세자위에 올라있을 다른 왕자의 목숨을 노리게 될지도 몰랐다. 거기에 덧붙여 플란츠가 왕위를 절대 원하지 않고 있으니, 자신이 그 자리에 서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플란츠를 살리겠다고. 그리고 플란츠는 그것을 알고 칼리안을 돕는 것일 터였다. “이 얼마나 눈물겨운 형제애인지.” 앨런이 이렇게 말하며 커피를 한 입에 털어넣었다. 결코, 칭찬의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 * * 하루를 꼬박 잠으로 보냈다. 자꾸 눈만 감았다 뜨면 날짜가 휙휙 바뀌어 있는 것에 실소한 칼리안이 서둘러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전날 하지 못한 것들을 빨리 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헤르츠 경을 좀 불러줘.”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칼리안을 본 얀이 조용히 키리에를 쳐다봤다. - 눈 뜨자마자 또 일 하겠다는 말 하시면 그냥 기절시켜요. 칼리안이 일어나기 전, 얀은 키리에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키리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고 싶고 말고 할 것 없이, 일단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얀의 눈에는 당연히 스치기만해도 픽픽 쓰러질 왕자겠지만, 자칫 그렇게 건드렸다가 칼리안이 무의식중에 반격이라도 하는 순간 키리에 팔이 잘려나갈지도 모를 일인 것을.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얀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 투기를 본 칼리안이 경계하는 낯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얀이 툴툴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식사 준비 해뒀으니 식사부터 하세요.” 안그래도 하루 내내 잠을 잤더니 속이 꽤 허했으므로, 칼리안은 얀이 시키는대로 얌전히 자리에 앉아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칼리안은 플란츠와 달랐다. 끼니는 절대 거르지 않았다. 밥이 보약 아니던가? 따라서 아주 야무지게 음식을 먹어치워가는 칼리안을 보던 얀이 말했다. “그래도 저는 다행이네요. 레릭은 플란츠 왕자님이 밥을 잘 거르신다고 걱정이 크더라고요.”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잠깐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실리케의 일 이후 끼니를 잘 안챙긴다는 것은 알았지만 여전히 그러고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들어 창 밖을 쳐다봤다. 테이블이 놓인 위치는 칼리안의 방이나 플란츠의 방이나 똑같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아주 잘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헤이시아 궁. 실리케가 머물던 곳이다. 유난히 높은 지붕 탓에, 르메인의 집무 공간인 아르피아 궁의 뒤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보이고 있었다. 놈이 밥을 왜 안처먹는지 곧바로 알아챈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저걸 보면서 밥이 넘어가는 게 이상할 일이긴 하지.” 그리고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뒤 손가락을 움직여가며 아주 잠시 고민을 했다. 지금 생각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을지, 혹은 없을지. 곧 생각을 마친 칼리안이 얀을 향해 말했다. “헤르츠 경 오는 길에 뭐 하나만 하고 오라고 전해줘.” “네, 어떤 것을 하라고 할까요?” 칼리안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창 밖의 헤이시아 궁을 가리켜 보였다. “저 지붕, 날려버리라고.” 어차피 갇혀 사는 김에, 그냥 조금 더 갇혀 있으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우리 형님, 밥은 제 때 드셔야지. <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5) > 칼리안도 사람이다. 그러므로, 칼리안도 상처를 받는다. 예를 들면, 불면 날아갈까 스치면 바스라질까 어화둥둥 내새끼 해가며 자신을 아껴주던 시종의 얼굴에 이런 표정이 떠올랐을 때 그렇다. - 방금 어디서 개가 짖었는데. 아무리 플란츠로부터 하루 걸러 한 번씩 짖는다는 말을 들어왔던 칼리안이라지만, 얀의 얼굴에 나타난 이 말은 상당히 뼈에 사무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헤이시아 궁의 지붕을 날려버리라는 칼리안의 말을 한번 되새겨 본 얀이, 공작가 장남 시로이안과 시종 얀을 반반 섞은 얼굴이 된 채로 말했다. “식사 마저 하세요.” 닥치고 밥이나 먹으라는 소리일 터다. 부수는 것은 잘 하지만 거짓말과 빈말은 잘 못하는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키리에.” “네, 왕자님.” “네가 가.” 얀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키리에가 뭐라 대답할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니까. “네.” 이렇게. 칼리안이 ‘국왕 전하 앞에 가서 칼 한번 뽑아봐라’ 라고 말해도 저렇게 담백한 대답을 하고 그대로 할 사람이 바로 키리에다. 그러니 그깟 지붕 하나 없애라는 말을 아르센에게 전하는 것 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닐 터였다. 그리고 또 하나. 보태지도 빼지도 않은 칼리안의 말을 고스란히 전달받게 될 아르센은, 이 곳에 오는 길에 있는 헤이시아 궁에 잠시 들러 가벼운 마음으로 불덩이를 날리고 올 위인이었다. 정말로. 그야말로 충직한 따까리와 미친 따까리의 조합이 아닌가? “잠깐, 잠깐만요.” 개중에 그나마 내일이 있는 것처럼 살고는 있는 얀이 황급히 키리에의 앞을 막아서며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왕자님, 이건 그냥 내친김에 부수고 말고 할 일이 아닙니다. 헤르츠 경 죽어요. 왕자님도 무사히 못 넘어가신다고요.” 그 말에, 칼리안이 잠시 웃다 대답했다. “괜찮아.” 그리고는 키리에를 보며 눈짓을 했다. 얼른 가보라는 뜻이었으니, 키리에는 지니고 있던 검을 벽에 기대놓은 뒤 아르센을 부르러 밖으로 나갔다. “걱정 말고. 넌 가서 히나 오라고 해줘.”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얀이 무어라 더 얘기하려 하는데,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 말을 잘랐다. “원래 내 나이 때는 사고도 좀 치고 그러면서 커.” 책임은 내가 지고 뒷수습은 전하께서 해주실텐데. 뭐 어때. * * * 드미레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본래 카이리시스에 있는 지그프리드 저택을 관리하던 것은 그녀의 어머니인 세리에였다. 그리고 세리에는 슬레이만과 함께 지그프리드 영지로 갔다. 덕분에 생각지도 않았던 저택 일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 터였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당연한 것이니까. “몇 번째지.” 보던 책을 잠시 덮은 채 상당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어오는 드미레아를 향해, 앞에 서 있던 집사장이 차분히 대답했다. “여덟 번 째입니다.” 그런 집사장이 들고 있는 쟁반에는 편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물론, 에반 브리센 후작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칼리안과 플란츠의 일로 명예가 실추된 브리센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집사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번에도 소각하라 이를까요.” 드미레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집사장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한번 읽어나 보자는 뜻이었으니 집사장이 얼른 편지를 건넸다. - 팔락 그것은 두 장의 편지였다. 빠르게 훑어내리며 내용을 대충 대충 살핀 드미레아가, 편지를 집사장에게 건넸다.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본래 그랬던 것처럼 무시할지, 다른 대응을 할지를 묻는 것이다. 집사장의 손에 되돌아간 편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드미레아가 물었다. “플란츠 왕자님이 이 저택에서 훼손이나 파손하신 것이 있던가.” 칼리안이 다친 채 이 곳에 머무는 동안, 플란츠는 그다지 돌아다니지도 않고 거의 방에만 있었다. 훼손되거나 파손된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없습니다, 소가주님.” “그럼 보상은 됐으니.” 짧게 고개를 끄덕인 드미레아가 집사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입 안다물면, 여기서 지낸 숙박비와 식비 청구하겠다 전하도록.” “숙박비와 식비 말씀이십니까?” “그래. 플란츠 왕자 앞으로.” 에반에게, 이 일을 가지고 또 왈가왈부하면 플란츠에게 숙박비와 식비를 청구할 것이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라는 소리였다. 어차피 칼리안이 이 저택에 숨어 있어야 했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그러니 지그프리드에서 플란츠를 ‘억류’하고 있었다는 오명 역시 계속 떠안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플란츠에게 식비와 숙박비를 청구하겠다 으름장을 놓으라는 소리였다. 강제 억류가 아니라, 플란츠가 원해서 있었던 것으로 상황을 바꿔놓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드미레아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명해진 김에 이름 한번 제대로 나 보지.” 2왕자가, 한밤중에 제 발로 소공작이 ‘혼자’있는 저택에 몰래 찾아와서 일주일을 있었다. 그런데 공작가 소가주는 3왕자의 정혼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일단은 모두 성인이다. 2왕자와 3왕자, 그리고 소공작. 말 많은 귀족들이, 이 셋이 얽힌 상황을 보고 또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까. “하지만 그리 되면 소가주님께 피해가 있지 않겠습니까.” “누가 더 손해일지는 후작이 잘 판단할 일이지.” 아무리 심한 추문이 돌아도 소공작 자리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공작 가문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누가 봐도 플란츠만 손해를 볼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집사장이, 저도 모르게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소가주님. 말씀하신대로 바로 회신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집사장이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드미레아의 서재에서 나갔다. 드미레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덮어놓았던 책을 다시 펼쳐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히나의 품에 고양이가 안겨 있었다. 칼리안은, 이제 꽤 묵직해보이는 녀석을 히나로부터 건네 받아 안았다. 고양이를 안은 채로는 수화를 할 수 없을 테니까. 맞은편 소파에 히나를 앉힌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히나. 물어볼 게 있어.”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칼리안은 작은 애옹 소리를 내는 고양이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발칸에서 일할 수 있다면 할 생각이 있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으므로,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발칸은 마법사들의 군대가 아니던가. 마법사가 아닌 이는, 능력과 특기가 왕자인 플란츠 뿐이었다. 그래서 잠시동안 칼리안의 말 뜻을 생각해보던 히나가 뭔가를 알아챘다는 듯 ‘아!’ 하는 입모양을 만들더니 손을 움직였다. - 그 곳에, 시녀가 모자라요? 칼리안이 풋 하는 웃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퍽 부드러운 얼굴을 한 채 대답했다. “설마 내가 널 다른 건물 청소나 하라며 보낼까.” - 그럼, 치료 때문에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 얘기한 건 아니지만, 형님께서 왕실 기사단을 발칸에 합류시키실 것 같아.” 국왕 친위대 카에라를 제외한 두 개의 기사단, 카렌과 라온. 그들을 마법사단 발칸에 흡수시킬 것이라는 뜻이다. 군단장 앨런 마나실을 주축으로, 마법사단을 담당할 아르센과 기사단을 담당할 플란츠. 이렇게 구성된 발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플란츠가 자신의 구체적인 계획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플란츠가 두 개 기사단을 손에 쥘 가장 평화적인 방법이 그것임을 칼리안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훈련 방법도 달라질 거야. 많이 다칠 테니, 반드시는 아니지만 치유사가 있다면 더 낫기는 하겠지.” 마법사와 기사가 함께 훈련을 받게 되면, 당연히 부상이 늘어날 수 밖에 없을 테니까. 물론 어느 정도는 명분이고 핑계였다. 귀하디 귀한 능력을 지닌 히나를 언제까지고 시녀로 부려먹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히나가 그동안 별 불만 없이 시녀로서 일해왔지만, 혹시라도 다른 일을 더 원하지는 않을까 싶어 꺼내 본 말이었다. 그것도 히나가 좋다 했을 때의 일이겠지만. - 할게요. 그리고 히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 고민 없이 대답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칼리안이 살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군대야, 히나. 지금이야 왕궁 안에서 평화롭게 있다지만 나중에 때에 따라서는 전투에도 따라가야 해.” - 알고, 있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히나의 까만 눈을 잠시 응시하던 칼리안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히나. 나 때문에 하겠다 하지 말고.” 히나의 눈이 다시 동그랗게 변했다. 칼리안이 시키니 그냥 하겠다 답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금껏 칼리안은 딱히 누군가의 의사를 묻고 일을 시킨 적 없었다. 키리에와 히나를 대할 때에만 ‘하겠는지’, 혹은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때문에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어 설명을 덧붙였다. “깊이 생각하고 결정해. 키리에와도 얘기해 봐. 왕궁 안에 네가 할 수 있는 다른 일도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하는 말이니까 선택은 네 몫이야.” 거기까지 들은 히나가 맑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 그렇게 할게요. 자상한, 왕자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화가 끝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고양이가 다시 애옹애옹 소리를 냈다.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문득 그 목줄에 새겨진 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시선을 내려 그것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거 바꿔줘.” 조금쯤은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몇 글자를 추가했던 히나가, 혹시라도 칼리안이 언짢은 마음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우려하는 눈을 했다. 칼리안이 오해하지 말라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내 형님 이름만 넣어. 내 이름, 지우고.” 누가 보아도 고양이의 진짜 주인은 플란츠가 아니던가. 칼리안의 말에, 히나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동안 칼리안의 붉은 눈을 응시하다가,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 싫어요. 칼리안은 가만히 웃었다. * * * 그리고 아르센은, 신났다. 키리에의 말을 전해듣기가 무섭게, 아르센은 매우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전혀 들떠있지 않았지만, 아르센은 분명 신나 하고 있었다. “고맙네.” 때문에 키리에의 귀에는, 이런 아르센의 답이 ‘칼리안의 말을 전해주러 이 곳까지 온 수고에 대한 고마움’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한바탕 날뛸 기회가 왔음을 전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으로만 느껴졌다. 어찌됐건 할말을 전했으므로, 키리에는 곧바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아르센이 수행하고 칼리안이 책임을 질 일이니, 거기에 키리에가 끼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아무튼 그렇게 키리에가 자리를 벗어난 뒤, 아르센은 빠른 걸음으로 훈련장에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발칸의 마법사들을 향해 말했다. “실전 훈련을 진행할 테니, 모두 따라오도록.” 그 말을 들은 마법사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무슨 실전 훈련이란 말인가? 플란츠만 오면 그것이 바로 실전이며 지옥인 것을. 다만 이런 말을 입 밖에 내기는 힘들었으므로, 그저 시키는대로 아르센을 따라 빌헬름 관의 훈련장 밖으로 나갔다. 빌헬름 관은 헤이시아 궁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체르밀에서 헤이시아의 지붕만 보였다면, 이 곳은 건물 전체가 다 보였다. 중간을 가로막는 것은 오로지 몇 그루의 가로수 뿐이었다. 바로 그 헤이시아 궁을 향해 선 아르센이 자신과 헤이시아 궁 사이에 얼음 방벽 하나를 세운 뒤 말했다. “표적이다.” 그저 야외라는 것만 제외하고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르센은 항상 이렇게 얼음 방벽을 세운 뒤 화염구 실습을 해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법사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르센이 검지를 들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딱 한 방.” 아르센의 손가락이 얼음 방벽을 향했다. “있는 마력 없는 마력 전부 쥐어 짜서 딱 한 방만 한꺼번에 쏴라. 그래서 저 방벽이 부서지면, 오늘 훈련은 여기서 끝내고 술 한잔 사지.” 어때? 하고 물어 볼 필요도 없었다. 그 칼리안이 그리 생각하지 않았던가. 마법사들은 대체 왜 이렇게 호전적이냐고. 그리고 발칸은, 일반적인 마법사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 호전적이지 않았다. 녀석들의 눈은 이미 불타오르고 있었다. “셋 하면 쏜다.” 이렇게 말한 아르센의 앞에 시뻘건 불덩이가 생성됐다. 그리고 그 몸집을 거대하게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레이의 마차를 날려버리던 그 날의 불덩이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과연 아르센의 주종이 얼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거대한 크기였다. 그것을 본 마법사들의 앞에도 일제히 화염구가 떠올랐다. “하나.” 마법사들이 집중력은 대단했다. 지금 아르센이, 얼음 방벽을 유지한 채로 화염구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둘.” 불과 얼음. 완벽한 상극인 두 힘을 함께 운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간신히 만든 얼음 방벽이 얼마나 약할지도, “셋.” 당연히 생각하지 못했다. - 쌔애애액! 얼음의 방벽은, 첫 화염구가 닿기도 전에 부서져 사라졌다. 막아 줄 방벽이 사라진 51개의 거대한 화염구가 날아갔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향한 끝에는, 이제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건물 하나가 있었다. - 콰아아아앙! 지축이 흔들리고, 주변의 나무들이 휘청거렸다. 앨런의 책상이 진동했다. 체르밀 궁의 유리창이 흔들거렸다. 드미레아의 귀에 폭음이 들렸다. 화염폭풍과 자욱한 먼지가 걷히고 난 뒤, 방금 저지른 일의 결과를 확인한 아르센이 중얼거렸다. “어이쿠.” 칼리안은 지붕을 부수라고 했고, 아르센은 지붕도 부쉈다. “방벽이 못버틸 것을 계산 못했네.” 그것은 엄연히, 훈련 중 실수에 의한 사고였다. * * * 약 30분여가 지났다. 앨런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전달받은 르메인은, 잠깐 혼자 있고 싶다고 대답했다. <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6) > 그렇잖습니까. 왕궁 어디에도 온전한 놈 하나 없는데. 저 분은, 무엇이 그토록 억울해서 홀로 그리 되셨을까. * * * 뚝, 뚝, 뚝, 하고. 테이블에 점점이 떨어지던 핏방울. 거기서부터 기억이 난다. 무엇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그 날이 언젠가의 이른 아침이었다는 것. 플란츠가 늘 그래왔듯이, 다만 평소보다 조금 더 심하게 화를 냈고, 결국은 참지 못해 나이프를 던졌다는 것. 아마도 칼리안이 그 나이프를 손으로 잡았으리라는 것. 핏방울, 그리고 플란츠에게 건넨 말. - 괜찮습니다. 그것이 칼리안에 대한 란델의 첫 기억이다. 그 전의 칼리안이 어땠는지 따위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이전의 칼리안은 그림자 같이 지냈다. 억눌려 있었고, 말하지 않았고, 고개 들지 않았다. 그런 칼리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은, 란델에게 있어 굉장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르겠으나 란델은 르메인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르메인의 무관심은 그저 지독했다. 채 설명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 지독함을 없애주지 못했다. 빈틈 없는 무관심 속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홀로 보내온 란델이, 어린 란델의 눈에는 그저 냉막하기만 했던 르메인에게서 무엇을 보고 배웠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그랬으니. 이렇게 말을 건네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생경하고, 어느 정도는 신기했다. 그래서 그리하였다. 지켜보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도움이 되어 줄지. 혹은, 그 반대일지. 그것을 가늠할 수 있을 때까지. 그랬더니. - 카밀론 가서 개 키울 겁니다. 이런 말을 했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란델을 향해, 숨길 생각조차 없는 살기와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당장이라도 란델의 목을 꺾어버릴 기세로. 탁-. 다시 한번 떠오른 칼리안에 대한 생각 때문에, 창 밖을 잠시 바라보던 란델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거칠 것 없이 날아간 화염에 부서진 과거의 잔재. 그것이 보내오는 매캐한 연기가 방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 * * 술은 못 샀다. 대신 불려갔다. 의외로, 체포되지는 않았다. ‘마나실 군단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빌헬름 관의 잡무를 보아주는 한 시종이 다가와 이렇게 말했고, 아르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앨런의 집무실로 향했다. 앨런은, 수많은 마력이 비정상적으로 움직였음을 이미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냥 두었던 것은, 아르센이 허튼 짓을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어느정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르센은, 그 믿음을 와장창 깨부순 상태였다. 그러므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였는지 물어볼 것이 뻔했다. 때문에 아르센은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 똑똑 “들어오게.”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문에서 등을 돌린 채 창 밖을 향해 서 있는 앨런이 보였다. 헤이시아 궁이라기보다는 ‘옛 헤이시아 궁 터’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게 변해버린 폐허의 모습이 창문을 통해 아주 잘 보이고 있었다. 실리케가 마력탄으로 헤이시아 궁의 한개 층을 망가뜨렸을 당시, 대마법 보호진이 함께 파괴됐다. 그래서 ‘가능’했다. “······ 설명해보게.” 고개를 돌려 누가 들어왔는지도 확인하지 않은 앨런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르센은 정중한 말투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르센의 말에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그 말을 끝까지 다 들어준 앨런이 조용히 되물었다. “훈련 중 방벽이 깨지는 바람에 벌어진 사고인데, 너무 놀라서 마력을 흩을 생각도 못했다. 51명이 하나같이, 그 생각을 못했다. 맞는가?” “네. 맞습니다, 군단장님.” 믿지도 않겠지만, 믿으라고 하는 거짓말도 아니었다. 앨런이라면 지금쯤 눈치 챘을 것이다. 이 일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말이다. 어차피 칼리안도 이 일이 자신이 계획한 일임을 앨런에게까지 숨기지는 않을 터였다. 그리고 칼리안은, 아르센이라면 르메인에게 둘러댈만한 적당한 핑계거리를 만들어가며 일을 벌이리라는 것을 믿었다. 항상 그래왔듯, 아르센은 칼리안이 책임져 줄 수 있는 선 안에서 사고를 쳤으니까. “······ 그래서 화염구 50개가 헤이시아 궁 중앙 기둥을 가루로 만들었고. 유난히 큰 불덩이 하나가 이유 없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렸고. 그 한 개가 지붕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건물이 폭삭 주저앉게 되었다. 그 말도 맞는가?” “그렇습니다.” 아르센의 대답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때문에 앨런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그래. 그럼 이제 이 일을 어찌할텐가?” 여기에 대해서는 매우 확실하게 생각해 둔 대답이 있었다. 때문에 아르센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 급여에서 제하시면 됩니다.” * * * 밥. 그래, 밥. 밥 때문이란다. 세상에어떤미친놈이 자기형밥먹이겠다고 궁전을날려버리는지 “제 형님께서 헤이시아 궁이 신경쓰여서 식사를 못하신다는데. 능력이 닿는대로 좀 도와드리는 것이 아우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5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그것도 시스파니안이 직접 짓고 직접 사용했던 그 아름다운 헤이시아 궁을 그 꼬라지로 만들어놨다. 아르센도 예견한 바와 같이, 훈련중 실수라는 얼토당토 않은 말은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 앨런은 아르센이 어떤 놈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건 분명, 칼리안이 뭔가를 또 꾸민 것이리라. 다만 이 일에 칼리안이 개입했음을 함부로 언급하기는 힘들었으므로, 일단 르메인에게만은 아르센이 일러준대로 똑같이 알렸다. 그리고 곧장 체르밀 궁으로 왔다. 그 후에는 칼리안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물었고, 너무나 어여뻐서 환장해버릴 듯한 꽃 같은 제자는 거짓말도 안했다. 차라리 아르센처럼 눈에 빤히 보이는 핑계거리라도 대면 좋으련만. “그러니까, 플란츠 왕자의 끼니거름이 걱정되어 저리 만들어두셨다는 말씀이 맞으신지요?” 이 몸이 늙고 늙어 이제 귓구녕에 주름이 졌나. 딱 이런 표정으로 물어오는 앨런을 향해, 칼리안이 방긋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승님. 맞습니다.” 아······! 시스파니안이시여. 제 앞날 생각 않고 형님들만 챙긴다고 걱정했더니, 그야말로 주옥같은 인생을 불태우며 살아가고 계시는 이 제자님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앨런이 관자놀이를 아주 꾹꾹 눌러댔다. “왕자님, 헤이시아 궁은.” “시스파니안이 지냈던 곳이라는 건 압니다.” 그런 것은 몰랐다는 거짓말이라도 제발 좀 해주시면 안되겠느냐 물어볼까 하는 생각을 집어치우며, 앨런이 애써 침착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이유가 또 있으시겠지요?” 칼리안은 주고 받는 값이 꽤 정확한 사람이다. 물론 플란츠를 걱정하여 저런 일을 벌인 탓도 있겠지만, 그것 하나만 가지고 궁을 없애버릴 만큼의 인사는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정말, 참으로, 다행하게도.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란의 여지도 좀 필요했고, 과시도 해야 했고, 그래서요.” 앨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방금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담담한 얼굴로 있던 칼리안이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제가 생각보다 일찍 잠들어서요, 스승님. 드리려던 말씀을 다 못드렸습니다.” 앨런이 자신을 재워버린 것에 대해 툴툴거리는 것이다. 어찌됐건 칼리안을 위해 한 일이니 앨런은 그에 대해 사과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구체적으로 계획이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말씀 드릴게요.” “듣겠습니다.” 칼리안이 웃음을 지운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히나에게 했던, 왕실의 두 기사단과 발칸을 하나로 통합할 계획에 대해서. 이것은, 전날 앨런 때문에 잠이 드는 바람에 미처 못 전한 말이기도 했다. 발칸의 통합, 그것을 위해 필요한 분란의 여지와 과시. 그것과 헤이시아 궁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가늠해보던 앨런이 말했다. “브리센 후작이 속는 것을 보는 것도 슬슬 지겨워질 판입니다.” 칼리안이 헤이시아 궁을 폭발시킨 이유를 앨런이 제대로 이해해서 하는 말이었다. 칼리안이 공감한다는 듯 웃었다. 그러니까 칼리안의 계획은 이것이었다. 만약 평화롭지 못한 방법으로 브리센을 흡수하면, 브리센 후작을 따르던 수많은 귀족들의 세력이 분열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장은 왕궁 안에 있는 플란츠가 그들을 제대로 관리할 상황도 되질 못했다. 게다가 지금은 그레이 브리센, 그리고 레넌 브리센에 대한 처분 방향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그러니 왕궁 밖에서는, 브리센 후작이 후작가를 잘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이런 상태에서, 플란츠가 왕궁 내 기사 세력을 ‘평화롭게’ 가져오는 방법은 딱 하나다. 에반 브리센 후작이 두 기사단의 통솔권을 제 손으로 직접 플란츠에게 넘기는 것. 그것 때문에 헤이시아를 건드렸다. “형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가져올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시간을 조금 당기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비록 지금은 주인이 없다지만, 헤이시아는 브리센이 휘두르던 권력의 상징이다. 그것을 발칸의 부군단장이 부숴버렸다. 아르센이라면 알아서 적당히 면피할 구실을 만들어두고 일을 벌일 것이라 믿었다. 아르센은 그런 사람이니까. 아무튼 그리 되면 아르센은 처벌 받지 않는다. 에반의 성격에, 당연히 기분이 나쁠 것이 분명했다. 안그래도 칼리안의 세력에 대해 이를 갈고 있을 에반은 플란츠를 만날 테고, 플란츠는 적당히 에반을 구슬리면 된다. ‘무시하지 못할 무력을 지닌 마법사들과 대치할 만한 힘이 필요하니 기사단 통솔권을 달라’고. 판은 칼리안이 깔아뒀으니 그 설득은 에반을 만날 플란츠가 알아서 할 일이다. 이것이 통한다면 빠르게 일이 진행되니 좋고, 안 통하면 플란츠가 생각했을 원래 계획대로 다시 진행하면 되는 일이니, 칼리안이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냥 속 시원하게 헤이시아를 치워버린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겸사겸사. “이렇게나 자꾸 이용만 당하니, 이제는 좀 딱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습니다.” 앨런이 작은 한숨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한다지만, 그리 얘기하는 앨런의 얼굴에는 조금의 동정심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행한 일이죠.” 칼리안이 대답을 전하며 살짝 웃었다. 칼리안에게는 그들이 생각이 짧은 것만큼 다행한 일이 또 없었다. 그레이든 레넌이든 에반이든. 셋 중 단 한명만이라도 드미레아 같은 사고가 가능했다면, 그래서 그 강력한 칼을 제대로 썼다면, 칼리안은 이미 운명을 달리했을 테니까. 일단 플란츠의 식사 하나 때문에 궁을 박살 낸 것은 아니라 하니, 앨런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조금 조심스러워진 말투로 물었다. “그럼 왕자님께서는 플란츠 왕자에게 발칸의 절반을 아예 나눠주시려는 생각이신지요.” 발칸을 구성하는 세력 중 마법사에 대한 권한을 아르센에게, 그리고 나머지 절반인 기사들에 대한 권한을 플란츠에게 완전히 주려는 것인지를 물었다. “네.” 칼리안은 고민하지 않았다. * * * 플란츠는 가만히 서 있었다. 굉음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소리가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흔들, 흔들, 흔들. 하얀 오팔을 가루내어 채색해두었던 탓에 언제나 신비로운 빛을 내던 헤이시아 궁의 지붕 한 면이 그대로 사라진 채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그리고 그리 오래지 않아, - 쿠구궁······. 바닥이 우르르 진동하는 것과 함께 불안한 소리가 다시 울렸다. 화염이 치솟고, 재 섞인 검은 연기와 뿌연 먼지가 퍼져나오며 이전과는 또 다른 굉음을 토해냈다. 그래도 플란츠는 계속 가만히 서 있었다. 더운 열기가 담긴 바람이 불어왔다. 플란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매캐한 냄새가 열린 창을 통해 방 안까지 들어왔으나, 미동도 않은 채 창 밖을 지켜봤다.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느새 먼지 구름이 걷혔다는 것만 알았다. 자욱한 먼지가 걷히고 난 뒤, 아르피아 궁 뒤로 보이는 것은 그저 새파란 하늘 뿐이었다. 그 하늘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에 노을이 지고, 붉게 물들다가 어둑해지는 것을 보며, 계속 서 있었다. 그렇게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 사락······. 플란츠가 걸치고 있던 긴 가디건의 끝자락이 바닥에 닿았다. 우두커니 서 있던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은 플란츠가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실리케를 꼭 닮은 연두색 눈이 느리게 감겼다. 이번에도 알 수 있었다. 어미를 배신한 아들이라는 죄책감.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모정에 대한 갈망, 혹은 원망. 짙고 짙어서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르니에리 향. 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도 좋지 않겠느냐고, 칼리안이 묻고 있음을. “미친새끼······.” 더운 바람이 불었다. <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7) > 칼리안일 것이다. 르메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헤이시아 궁을 박살낸 주모자는 분명히 칼리안일 것이라고. 아르센이 어떤 인물인지는 여러 번 들어왔으나, 그래도 아르센이 혼자서 그런 엄청난 짓을 벌일 리 없다는 것은 알았다.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반면 눈치는 없는 르메인이라지만 이런 것까지 모르고 넘어갈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어찌한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건물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리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문제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마를 감싸 쥔 르메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라도 얘기를 해보지.” 맞은편에 앉아있는 앨런을 향한 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내 알 바 아니라는 표정으로 사과 젤리를 집어먹고 있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말씀을 드리면 될런지요.” “사실 그대로.” 그 아르센이, 그 발칸이, 훈련 중 실수를 했다는 말도 안되는 핑계가 아닌 진짜 이유. 앨런은 손에 들린 포크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사실을 따져본다면, 전하께서 직접 부순 것이 되겠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지?” 날카로운 앨런의 눈에 부드러운 기색이 담겼다. 늘 그렇듯, 독한 말을 하겠다는 신호였다. “헤이시아는 전하의 실수와 잘못으로 쌓아올린 탑이 아닙니까. 그것이 너무 높아 그림자가 사라질 생각을 않으니, 그냥 시원하게 없애버린 겁니다.” 그 전에 누가 살았든. 누가 만들었든. 얼마나 오래됐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칼리안이 그렇게 물었다. 전설이 아닌 살아있는 시스파니안을 만나 보았기 때문에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 속에 카이리스의 역사에는 아무 관심도 없을 세크리티아 왕제가 들어 있어서 하는 소리도 아니었다. - 망자의 이름이 산 자의 길을 막아서야 되겠습니까. 헤이시아 궁 따위, 없어진 것이 대수냐고. 칼리안은 그리 말했다. “전하께서 벌인 잘못이 너무 커서, 아무것도 잃지 않고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이 아주 싹 없어진 판국이니, 어찌하겠습니까. 길을 내려면 막은 것부터 부수는 것이 맞지요.” 르메인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소파에 등을 기댄 채 고개만 끄덕였고, 앨런은 칼리안이 설명했던 내용을 가감 없이 전했다. 발칸과 기사단의 힘을 합칠 것이라는 내용도 전했다. 그 중 반을 아르센이, 나머지 반을 플란츠가 가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했다. 거기까지 들은 르메인이 잠시 눈을 떴다. “왜, 아르센인가.” 절반을 플란츠에게 준다면 절반은 칼리안의 것이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아무리 발칸의 총 군단장이 앨런이고 그 앨런이 칼리안의 사람이라지만, 조금 이상하지 않느냐는 듯한 눈초리였다. 앨런의 대답이 곧바로 이어졌다. “상관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앨런의 말이라기보단 칼리안의 답이었다. 앨런도, 같은 것을 물었던 탓이다. 칼리안은 부리는 이였다. 그 어디에도 제 이름 하나 올려놓지 않았으나, 발칸도, 마법 학원도, 폴룬 상단도, 휘트린 영지도, 곧 만들어질 아이즌의 기사단까지도, 전부 칼리안이 부리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부리는 이들이 모두 칼리안의 사람 아니던가. 아이러니하게도 저를 따르지 않는 고양이 목줄에만 제 이름을 올려둔 칼리안을 생각하며, 앨런이 그렇게 대답했다. “일단······ 알겠네.” 아무튼 저 궁이 부서진 것에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크다 하니, 르메인으로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처벌은 내리셔야지요.” 르메인이 아무 말 없이 알겠다고만 대답하자,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보면 앨런은 상벌에 꽤 민감하게 구는 편이었다. 이번 일도 혹여 유야무야 넘어갈까 저렇게 나서서 처벌을 내리라 말하는 것이다. 르메인을 볼 때마다 ‘네가 잘한게 뭐가 있냐’며 타박을 하는 것도 그랬다. 어찌됐건 조용히 넘어갈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르메인도 알고 있었으므로,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해야지.” “헤르츠 경이 궁 재건 값을 자신의 급여에서 제하라 하던데,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한 앨런은 젤리 하나를 더 집어먹었다. 부하 직원의 급여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는데, 이전에 그레이의 마차를 부쉈을 때에도 아르센이 같은 말을 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마차 값은 칼리안이 지불했지 않나. 뭐. 정확히 말하자면, 실리케가 아르센을 처치하라며 기사 테일에게 전달했던 돈을 주운 칼리안이, 그레이의 마차값이라며 실리케에게 되돌려줬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실리케가 마차 값을 낸 셈이었지만, 본래 칼리안이 지불하기로 했던 것은 맞았다. 그리고 이 일은, 르메인 역시 아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르메인은 살짝 웃는 얼굴을 한 채 시종장 라울을 불러 말했다. “헤이시아 궁 재건이 끝날 때까지 헤르츠 부단장의 급여를 1플로린으로 감하도록. 더불어 재건 완료 전까지는 3왕자에게 어떤 지원금도 지급하지 않겠다.” 앨런이 웃었다. 그야말로 보여주기 식 처벌이었으니까. 착실한 상단주 멜피르는 폴룬 상단 뿐 아니라 마법 학원에서도 좋은 수익을 내고 있었다. 휘트린 영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지원금이 사라진데다 본래 아르센이 받던 급여의 두 배에 해당되는 금액이 매달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칼리안의 금고는 건재할 터였다. 과일 향이 진한 홍차를 들어올린 앨런이 입을 열었다. “지원금이 없어진 것을 아시기는 할런지.” 그리고는 호로록 소리를 내며 따듯한 홍차를 한 입 마셨다. 하여튼 얄미운 입이다. 칼리안의 금고가 자신의 것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넉넉하다는 것을 르메인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다 뜬금없이, 온천 갔던 슬레이만이 왕궁에 들르지 않고 지그프리드 영지로 간 것이 떠올랐다. “아.” 슬레이만이 빌려간 돈이 생각나 버렸다. * * * 베른. 다른 이들의 앞에서는 국왕과 호위기사였고, 왕가가 모인 자리에서는 국왕과 왕제였다. 그리고 둘이 있을 땐, 형과 동생이었다. ‘그래도 제가 형님보다 잘 하는 것이 하나는 있어 다행입니다.’ 사석에서는 늘 이렇게 편한 호칭을 올리며 말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항상 이렇게, 자신을 낮췄다. 검을 쥐는 것 말고는 체이스보다 나은 것이 없다면서. ‘네가 나보다 못한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구나.’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체이스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모든 것이 체이스와 같은데 검까지 다루니 오히려 베른이 나은 것이 아니냐고. 거짓이 아니었다. 물론 베른은 이 사실을 단 한번도 인정한 적 없었다. 그리 생각하며 체이스를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음을, 체이스도 알았다. - 어찌 보면, 나보다 더 나았지. 베른은 구분을 잘 했다. 말이 필요한 곳, 칼이 필요한 곳, 포용이 필요한 곳을 정확히 알았다. 그렇게 사람을 회유하고 내치고 제 것으로 만들었다. 사람을 상대하고 부리는 것이 뛰어났다. 때문에 데블란은 베른에게 왕위를 주고자 했었다. 왕에게 있어 사람을 잘 모으고 제대로 쓰는 것 만큼 중요한 능력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베른은 그 능력으로 자신이 왕이 되는 대신, 왕이 된 체이스를 도왔다. “여전하구나.” 잠시 기억을 짚어보던 체이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앨런으로부터 대략적인 내용을 듣자마자 칼리안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를 알 수 있었다. 세크리티아에서도 비슷한 일을 한 번 저질렀던 베른이었다. 칼리안은 여전히 구분을 잘 했고, 머뭇거리지 않았고, 제 사람을 잘 부렸다. 이번 일에 가장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한 마법사의 이름을 떠올리던 체이스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아르센 헤르츠. 얼음창을 쓰는, 칼을 부서뜨리는, 기사의 바로 앞에서 싸움을 하는 발칸의 마법사. 그리고 이제는, 칼리안 왕자의 충신이 된 천재 마법사. “너는. 버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에도 경계가 없는 것인지.” 베른의 마지막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당연히 기억한다. 직접 겪지 않은 일이라 해도, 만에 하나 그것이 단순한 악몽이었다 해도 잊지 못할 만큼의 참담함을 잊지 못한다. 그것을 떠올리자, 스스로도 겪었던 시리디 시린 마지막 기억이 함께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 일만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린 체이스가 짧게 웃었다. 확실히 베른은, 그리고 칼리안은, 체이스보다 나았다. * * * 누구나 우습게 여겼던 마법사들의 군대. 그들이 얼마나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는지, 보라.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발칸! 르메인은 헤이시아 궁에 설치되어 있던 시스파니안의 대마법 방어진이 파괴된 상태임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었다. 복구할 예정이었고, 보안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보아야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문은 더더욱 부풀려졌다. 딱 한 번이었다. 고 서클의 마법도 아니었다. 마법 학원의 학생들 중에 화염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극소수였다. 그런 화염구를 모았을 뿐이고, 모아서 딱 한 번 쏘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격에,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헤이시아 궁이 무너졌다. 50여개의 화염구가 궁전 하나를 돌무더기로 만드는 데까지 단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느긋한 얼굴로 소파에 앉은 칼리안이, 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유명해져서야.” 물론 유명해진 것은 칼리안이 아니라 발칸이었고, 르메인이었다. 르메인의 목이 조금쯤 단단하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문이 난 시기가 참으로 묘했는데, 드미레아와의 정혼설로 시끄러운 상태에서 발칸의 이름이 난 것이다. 그러다보니 앨런 마나실과 칼리안의 관계가 연상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칼리안과 발칸을 함께 입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얀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꽃 같은 우리 왕자님과 내 동생이 정혼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느냐면서 볼멘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것이 아마 드미레아가 아깝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았으므로, 칼리안은 그냥 웃기만 했다. “왕자님 지원금 끊겼대요.” 하루 사이에 왕궁 밖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꼼꼼하게 알려준 얀이, 전날 밤 르메인의 시종장 라울로부터 전달된 내용을 전했다. “지원금이 있었지, 참.” 그리고 칼리안은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적당히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이번 달부터 헤르츠 경 급여는 직접 챙겨줘. 두 배 쳐서.” “네, 알겠습니다.” 이참에 헤이시아 재건비에도 손을 좀 보탤까 생각하던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즌과 기사단을 꾸려야 할 때가 되었으니, 일단은 좀 아껴 쓸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헤이시아 궁과 관련된 일에 대해 보고를 받고 지시를 모두 내린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라스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는, 훌쩍- 하고 테라스 난간을 밟고 뛰어오른 뒤 사라졌다. ‘밥은 오늘부터 4층에서 먹을거야. 내가 알아서 왔다갔다 할 테니까 4층으로 가져다 줘. 기사들 눈에 안 띄게 적당히 잘 숨겨오는 것 잊지 말고.’ 이미 얀에게 말해두었던 것이었으니, 얀은 놀라는 대신 짧은 한숨만 내쉬었다. 문을 막으면 뭐하냐고. 창문이 열려 있는데! * * * - 뭐야. - 빵이요. - 무슨 짓이냐고 묻는 거잖아. - 밥 먹자는 것 아닙니까. - 왜 이러냐고. 계속. - 살고 싶다면서요. 그러니까 사시라고요. 계속. 살게 해드릴테니까. <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8) > 칼리안은 밥을 먹었다. 헤이시아 궁을 왜 저 꼴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 이번엔 또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일을 벌였는지에 대한 말,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등등.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정말 밥만 먹었다. 빵을 뜯어 입에 넣고, 베이컨을 씹어 삼키고, 샐러드도 집어 먹고, 물도 마셨다. 같이 밥이나 먹자며 올라온 주제에 ‘같이’는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마치 세상에서 제일 가는 진수성찬을 앞에 뒀다는 것처럼. 조용하고 우아하게 잘도 처먹고 있었다. 그 어처구니 없는 꼴을 한참 쳐다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때문에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경박하기는.’ 언젠가 그런 말을 했었지, 하는 기억이 난 탓이다. 물컵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를 보다 물었다. “안 드십니까.” 엄밀히 말하면 안 먹었다기 보다는 다 먹었다고 해야 할 일이다. 칼리안처럼 오늘만 먹고 죽을 것 같이 먹지 않을 뿐이지 플란츠도 분명 식사를 했다. “됐어.” 그래서 ‘다 먹었다’ 하는 의미로 이렇게 대꾸하자 기다렸다는 듯한 말이 나왔다. “네.” 팍팍한 답을 꺼내 둔 칼리안이 곱게 접힌 냅킨을 들어 입을 닦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를 향해 걸어갔다. 딱 봐도 이제 식사 끝났으니 다시 내려가겠다는 모양새인 것이다. 하, 하고 짧은 한숨과 웃음이 섞인 소리를 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앉아.” “네.” 곧바로 대답한 칼리안이 다시 걸어와 본래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그것을 본 플란츠의 입에서 한번 더 헛웃음 소리가 났다. 대체, 말을 잘 듣는 것인지 안 듣는 것인지. 창 밖은 조용했고, 안은 고요했다. 시녀들이 다가와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테이블의 식기를 치우는 동안, 칼리안은 물끄러미 플란츠를 쳐다보고 있었다. “고마워. 나가보도록 해.” 곧 테이블에 차와 디저트를 올려둔 시녀들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자, 칼리안이 이런 말로 그들을 내보냈다.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플란츠의 말이 튀어나왔다. “왜 이러는데.” 식사를 하기 전에 건넸던 질문과 같았으나 그 의미는 달랐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가며 살려주겠다 하는 그 이유를 묻고 있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말씀드려야 합니까.” 순간 순간, 칼리안은 계속 플란츠를 살려 왔다. 첫 조찬에서의 칼리안이 자신을 죽이지 않기 위해 얼마나 죽을 힘을 다했을지 알고 있다. 실리케의 비수를 막기 위해 숨겨뒀던 오러를 꺼내놓은 것부터 제 힘을 빌려준 것, 그리고 어제의 일까지.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물었다. “이해가 안 되는데.” 동정심 따위로 저런 일을 벌일 놈이 아님을 안다. 애초에 자신을 동정할 놈도 아닐 뿐더러 그런 어울리지 않는 감정으로 대하는 것을 몰라볼 플란츠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는 말을 좀 해줘도 되지 않나. 궁전까지 부서뜨려가며 살려놓겠다 하는 이유 정도는. 칼리안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옅은 녹색의 민트 차에서 시원하면서도 단 향이 났다. 차에 띄워진 민트 잎이 천천히 맴돌았다.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냥. 겁이 나서요.” 그것은 앞으로의 일에 대한 계획도,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한 설명도 아니었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플란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 * 블루베리는 보라색인지 파란색인지. 그것을 두고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은 말싸움이 된 적이 있었다. 물론 아주 어릴 때의 일이다. 히나가 이제 막 수화를 배웠을 무렵이었다. 서툰 손짓으로 그것이 ‘파란색’이라고 설명을 하던 히나는 키리에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말보다는 손이 느렸고 아는 단어도 많지 않았으니까. 그 억울함에, 어린 히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히나가 이겼다. 그 뒤 키리에에게 있어 블루베리는 무조건 파란색이었으니, 블루베리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은 당연히 하늘색이었다. “히나.” 체르밀 궁의 주방장이 만들어 준 하늘색 아이스크림 두 개를 가져온 키리에가, 고고한 자태로 운동 중인 레이븐의 앞에서 당근을 흔들어보이고 있던 히나를 불렀다. 키리에의 목소리를 들은 히나가 반가운 얼굴로 웃으며 달려와, 키리에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고는 손을 움직였다. - 맛있어. 왕궁의 세 왕자 모두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이들이 없었지만, 주방장은 시시 때때로 갖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두었다. 히나가 아이스크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알게 된 칼리안이 부탁한 탓이다. 물론 그런 부탁이 없다 하더라도 히나가 좋아했다면 선뜻 수고해주었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 이거, 주려고, 온 거야? 그 질문에,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히나의 앞에서나 보여주는 꽤 시원스러운 미소였다. - 잘, 됐다. 오빠한테, 할 말이 있어. 그리고는 예전에 키리에와 얀이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체르밀 궁 후원의 산책로 쪽으로 걸어갔다. 벤치에 앉아 두 개의 아이스크림을 모두 히나의 옆에 내려놓은 키리에가, 검을 풀어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 히나는 잠깐 대답하지 않다가 키리에의 손을 끌어와 그 위에 ‘발칸’ 이라는 글자를 써 보였다. - 자상한, 왕자님이, 여기에서 일하고 싶으면, 말하랬어. 생각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키리에가 물었다. “발칸? 치유사로 일하라고 하신 건가?” 그 말에 히나가 깜짝 놀라는 얼굴을 했다. 곰 같은 키리에가 히나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던 칼리안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음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 어떻게, 알았어? 키리에가 웃었다. 조금 전 보여줬던 시원한 미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웃음을 지으며,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묵빛의 검을 잠시 쳐다보았다. ‘운철이야.’ 칼리안은 그 검을 건네주며 그렇게만 말했고, 키리에는 그것을 준 뜻을 이해했다. 운철이 무엇인지는 키리에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오러를 담아낼 수 있는 몇 안되는 귀한 재료 중 하나가 아니던가. 그러니 운철 검을 주었다는 것은, 키리에가 빨리 ‘일곱번째 검’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연습했고 벽 하나를 넘었다. 그리고 칼리안을 이겼다. 칼리안이 말했던대로 칼리안의 몸이 정상은 아니었고 또 오러도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순수한 검술로 칼리안을 이긴 것은 분명했다. 칼리안이 히나에게 다른 길을 보여줄 생각을 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키리에가 칼리안을 이겼다는 것은, 칼리안의 ‘검’이 되는 것에 한 발 다가섰다는 의미였으니까.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를. “너만 괜찮으면,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칼리안은 키리에를 잘 알았다. 자신을 믿고 기회를 줬다는 이유만으로 제 목숨을 바칠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왜, 좋을 것 같아? 칼리안은 과거의 키리에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지만, 키리에는 분명히 자신이 베른보다 먼저 죽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어떤 이유든 할 것 없이, 베른을 지켜내고 죽었으리라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키리에는 생각했다. 물론 칼리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언제까지고 왕궁 시녀로 있는 것보단 낫잖아.” 그러니 혹여 키리에가 없더라도, 괜찮도록. 제 앞가림은 하고 살 수 있도록 히나에게 길을 내어 준 것임을 이해했다. 그런 키리에를 잠시 쳐다보던 히나가 말했다. - 둘 다, 왜 그래? 두 개의 아이스크림이, 하나는 고스란히, 그리고 또 하나는 몇 입 대지도 않은 채로 녹아가고 있었다. 하늘색 물이 되어가는 아이스크림에는 눈도 두지 않은 채 히나가 이야기했다. - 오빠도, 왕자님도, 이상해. “왕자님과 내가 이상해?” 이렇게 물으니,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칼리안 앞에서 애써 숨겼던 화를 키리에에게 냈다. - 죽을 생각을 하면서, 살아, 왜? 그렇게 말을 꺼내는 히나의 손짓이 빨라졌다. 키리에가 아니면 알아보지 못할 만큼. - 왕자님은, 아무것도 안 가지려고 해. 고양이, 목걸이에서도, 이름을 지우래. 아무것도, 안 남겨놓으려고 해. 그런데, 오빠도 그래. 왜? “히나.” 카이리스에서 가장 안전한 왕궁에 살면서, 언제나 목숨을 내어놓고 살고 있는 왕자. 그리고 그 왕자의 호위가 아닌가. 그러니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대비해두는 것 뿐이라고, 죽을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칼리안의 생각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말하려 했다. 그런데 히나가 키리에의 말을 막았다. - 저기, 갈 거야. 가서, 치유사 할 거야. 늙어 죽을 때까지, 오빠랑 왕자님 도우면서, 살 거야. 키리에는 대답 없이 히나의 손만 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히나를 달래주려 생각했던 말을 다 잊어버렸다. 키리에가 대꾸하지 않자 히나가 다시 말했다. - 미련 없이 죽는게, 엄청, 멋있는 줄 알지, 멍청이들아. 그리고는 일어나서 체르밀 궁으로 돌아가버렸다. 하늘색 물이 되어버린 아이스크림이 잠시 흔들렸다. * * * 항상 꽁꽁 얼어붙어 있다는 북쪽의 대사막. 그 곳에 꽃이 피고 나비가 팔랑거린다 하면, 차라리 그 말을 믿을 것이다. 그런데 칼리안이, 겁이 난단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그렇게만 말했다. 티 스푼을 들어 찻잔에 띄워진 민트 잎을 툭툭 건드리면서, 다른 말은 하지도 않은 채로. 연세가 몇이신지도 모를 동생의 한 마디를 조용히 곱씹던 열 여섯의 플란츠가 툭 내뱉듯 말했다. “그리 겁 많으신 내 아우님께서, 어제 내 어머니의 궁을 없애주셨군.” “내 어머니께서 머무르시던 곳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작은 웃음 소리를 냈다. “다른 이유도 있었고, 겸사겸사요.” 굳이 플란츠 하나 때문에 없앤 것은 아니었으니까. 대충 무슨 생각으로 일을 저질렀을지는 밤새 가늠해봤던 탓에, 플란츠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 대신 다시 원래의 주제를 꺼내들었다. “몇 번을 묻게 할 셈이지.” 알아들을 수 있게 똑바로 대답해달라는 소리였다.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질문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그냥 적당히 넘어가려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을 때. “애옹!”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플란츠의 방에 들어왔다. 그러더니 웬일로 플란츠가 아닌 칼리안의 무릎으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고양이를 안아들곤 목줄을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내용이 바뀌지 않은 것을 본 탓이다. 그 꼴을, 그 표정을 보던 플란츠가 조용히 말했다. “짜증나게 하네.” 또 뭔가를 혼자 눈치를 챈 모양이다.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플란츠를 쳐다봤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미친 왕이 되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 칼리안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똑똑하셔서 형님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못 꺼내겠습니다.” “짖지 말고.” 기껏 체이스에게까지 찾아가서 준비해라 마라 오지랖을 부리고 왔는데, 앞에 있는 동생 놈이 생에 대한 미련이 없음을 알아채버렸다. 그래서, 플란츠를 살리려는 것이다. 만에 하나 칼리안이 없을 때 칼리안을 대신해서 왕위에 앉으라고. 플란츠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테이블에 올려진 플란츠의 손가락이 톡톡, 소리를 냈다. 그렇게 앉아 칼리안의 붉은 눈을 응시하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싫다고 했을 텐데.” “자리에 관심 없으신 것은 압니다. 그냥.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세렌티의 장난일지 배려일지 모를 저주스러운 행동 때문에 망자가 될 육신을 빌려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데. “제 쓰임새가 다하는 그런 날이 온다면. 아니, 그런 날이 왔을 때. 그 이후에도 제 생이 이어질까. 알 수가 없어서요.” 그것에 겁이 났다고. 죽는 것은 겁나지 않았는데 그 빈 자리가 드러날까 겁이 났다고. 푸른 솔새를 만나고, 시스파니안을 만나고, 체이스를 만나고, 하얀 수리의 일을 겪으면서. 베른이 사라진 그 빈 자리를 느끼게 된 이후 계속 키워 온 그 생각을, 칼리안이 지금 저보다 한참 어린 원수 같은 형의 앞에 풀어놓고 있었다. “저는 이미 누구보다 절실하게 살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만약에.” 쉽게 사라질 생각도, 죽을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그런 날이 온다면. 어쩔 수 없는 그런 날이 온다면. 지그프리드의 저택에 플란츠가 찾아왔던 그 때처럼. “똑똑하신 내 형님께서 어떻게든 해주셨으면, 해서.” 하고, 칼리안이 웃었다. 플란츠가 말 없이 차를 들어올렸다. 영 익숙하지 않은 민트 향이 입안을 맴돌았다. 재수없는 칼리안의 시종은 칼리안의 입맛에 딱 맞을 차를 가져다 놨다. “그만 짖어.” 민트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플란츠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이 원하시는대로 살아 드릴테니.” 원하는대로 밥 먹을 테니까 아르피아 궁에서 평생 고생하는 건 너 혼자 하라고. 그런 뜻이었다. 알아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 제23장. 그런 날이 온다면 (9) > 툭,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자신의 방에 내려온 칼리안이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검은색 일색인 칼리안의 방과 달리 플란츠의 방은 꽤 환했었다. 커튼이며 카펫이며 멀리 침실 안 쪽으로 보이는 침구며, 대부분 밝은 색이었다. 당연히 고양이 때문일 터였다. 무시무시할 만큼 털이 빠지는 고양이가가 온 방을 휘젓고 다닐테니 별 수 있겠는가. 밝은 옷만 입는 것처럼 방도 밝아진 것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이 이제 막 방에 들어온 얀을 보며 말했다. “앞으로 4층에 있을 땐 민트 차 올리지 마.”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굳이 민트 차 한 잔을 싹 비워낸 플란츠의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고양이한테도 맞춰 사는 플란츠 성격에 차가 입에 안맞는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 하는 말이었다. “끼니 때마다 계속 올라가시게요?” “당분간은.” 칼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의외로 얀은 그리 거부감 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헤르츠 경을 부르라 하셨는데, 아무래도 오늘 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왜? 무슨 일 있어?” 혹시라도 이번 일로 불이익을 받았을까 걱정되어 묻는 말에 얀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헤이시아 궁 잔해 처리하는 것을 돕는다고 합니다.” 다른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르센이 자리를 비우고 칼리안을 찾아올 수 없는 상황인 것은 맞았다. 귀한 능력 가진 마법사 뒀다 어디 쓰냐는 앨런의 의견에 따라 헤이시아 궁의 잔해 처리에 발칸이 투입된 까닭이다. 그것은 르메인이 아니라 발칸의 군단장인 앨런이 내린 벌이었다. 툴툴거리면서 일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 아르센의 모습이 떠오른 탓에, 결국은 참았던 웃음이 터졌다. 한참을 웃던 칼리안이 대답했다. “알겠어. 이따 회식이라도 하게 돈이라도 보내줘.”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얀이 가지 않았다. 또 할 말이 있다는 것 같았기 때문에 칼리안이 얀을 쳐다봤고, 얀이 입을 열었다. “밖에 지그프리드 소공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든 왕자가 시킨 일에 대한 보고와 알아야 할 내용의 전달이 먼저였으니, 다른 내용을 모두 전한 뒤에야 그 말을 꺼낸 것이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들어오라고 해.” “네, 왕자님.” 간단히 대답한 얀이 밖으로 나간 뒤 오래지 않아 드미레아가 들어왔다. 그런 드미레아를 본 칼리안이 씩 웃었다. 내가 이래서 드미레아를 좋아하지. 드미레아는 짙은 감청색의 바지 정장을 입은 채였다. 무도회에 참석하기 전에 왕궁에 왔을 때에는 가벼운 원피스를 입었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 드미레아가 칼리안을 향해 가볍게 예를 보인 뒤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곧 얀이 들어와 아무 말 없이 차 두 잔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자신의 동생이며 집안의 일이 연관된 이야기가 오갈 것임을 모르지 않을텐데도, 끼어들거나 간섭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너도 앉아.” 때문에 칼리안이 이렇게 얀을 불러 세웠다. 얀이 듣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었을 뿐더러, 어찌됐건 얀도 같은 가문 사람이니까. 가볍게 고개 숙여 보인 얀이 드미레아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둘의 대화를 듣기는 하겠으나 끼어들지는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속으로 잠시 웃었다. 무엇때문에 저렇게 선을 긋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체이스가 함께 있으면 항상 한 발 물러나 있는 것으로 체이스를 존중했던 베른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그런 얀을 존중하기로 한 칼리안은 얀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드미레아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 정혼자님.” 농담 섞인 인사에도 얀은 별다른 반응 없이 앉아있었고, 드미레아는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정혼자’라는 소문에 대해 짧은 말을 전했다. “그 소문은 바나나 값으로 치고 저도 잘 쓰겠습니다.” 밖에서 칼리안을 제 정혼자라 소개하고 다니는 것으로 저택에서 칼리안이 먹어 치운 바나나 값을 대신하겠다는 말이었다. 물론 칼리안도 필요에 의해 받아들인 소문이었으나, 드미레아 역시 덕을 보고 있었으니까. 바나나 두 송이에 왕자의 이름을 판 셈이 된 칼리안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 후작은 다른 반응 없고?”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 브리센 후작을 얌전히 만들기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까지는 굳이 전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조용해진 것은 사실이니까.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때문에 이렇게 본론을 꺼내드는 드미레아를 향해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곧 기사단을 하나 만들거야.” 아이즌의 기사단을 지그프리드의 영내에 잠시 숨겨두겠다 했던 이야기에 대해서였다. 이것은 슬레이만으로부터도 이미 전해들었던 내용이었으므로, 드미레아가 조용히 대답했다. “왕궁의 기사단을 대체할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아니. 생각이 바뀌었어. 계속 왕궁 밖에 있을 새로운 기사단으로 키울거야.” 드미레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왕궁 밖에 있을 기사단이라면, 칼리안의 사병을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왕궁을 공격할 기사단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였다. “만약 왕궁을 공격할 용도의 기사단이라면, 저는 돕지 않겠습니다.” 칼리안이 걱정 말라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런 일로 쓸 이들이었다면, 지그프리드의 땅에 숨길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걱정하는 그런 것 아니야. 내 힘이 되어 줄 이들이고, 관리도 내가 할 거야. 잠시만 지그프리드 안에 숨겼으면 하는데.” 말이 좋아 숨긴다는 것이지 실상은 그 안에서 기사단을 키우겠다는 의미나 다름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의 이름은 못 드립니다.” 그들을 숨겨줄 뿐이지 훈련시키고 관리하는 것은 오로지 칼리안이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칼 같이 선을 긋는 그 말에, 칼리안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에이프린 경의 기사단인 것으로 해 둘테니 걱정 마.” “왕자님이 아니라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만일을 대비해 칼리안의 이름을 넣어두지 않겠다는 의미인지, 혹은 아이즌을 브리센과 같은 힘을 지닌 무가로 키워내겠다는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드미레아가 그 이유를 묻는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굳이 내 이름일 필요는 없잖아.” 그저, 부리면 되는 것을. 그런 뜻의 말이었다. “상단이나 학원과는 다릅니다. 기사단의 주인을 정해두지 않는 것은 위험한 행동입니다. 발칸과도 다릅니다, 왕자님. 마법사들의 신의와 기사들의 충의는 다릅니다. 검을 쥔 모든 이들이 키리에와 같을 것이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곧바로 드미레아가 이렇게 말했다. 기사들이 어떤 이들인지를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기도 했다. “에이프린 백작을 믿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보실 문제가 아닙니다.” 기사들이 어떤 이들인지, 칼리안보다 잘 알지는 않을 터였다. 칼리안이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래서 그래.” “그래서 그렇다니······.” “네가 나 대신 지켜보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드미레아가 입을 다물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칼리안의 의중을 따져보던 드미레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여러모로 부리려고 하시네요.” 왕궁의 안에서 언제나 눈 아래 둘 수 있을 때와는 또 달랐으니까. 언젠가도 이야기했듯, 그의 기사단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는 칼리안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아이즌을 어디까지 믿어도 좋을지를 지켜보기로 했다는 소리였다. 그 후에 그들을 독립된 하나의 기사단으로 만들지, 혹은 다른 방법을 강구할지에 대해서. 그러니 지금 칼리안이 하는 말은, 그들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하기 위한 ‘감시자’ 역할을 드미레아에게 맡기고자 한다는 뜻이었다. “부리는 게 내 일이니까.” “뻔뻔하시기도 하고.” “정혼자 특혜로 쳐 주면 안되나?” 드미레아의 얼굴이 볼만하게 구겨졌다. 당장이라도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므로, 칼리안이 재빨리 손사레를 치며 말린 뒤 다시 말했다. “부탁할게.” 한동안 그런 칼리안을 쳐다보던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도와드리죠.” “고마워. 드미레아.”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웃음을 보였다. 앨런이었다면 그 웃음을 보고 참으로 좋아할 법 했으나, 드미레아는 그런 것에 넘어갈 성격이 아니었다. “지난 번 숙박비도 못 받았습니다. 이번 것도 전부 받을 생각이니 넘어가려 하지 마십시오.” “바나나 값은 갚았잖아. 안 떼먹고 다 갚을게.” 결국 드미레아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조금 많이 유명해지셨던데요.” 사고를 치려면 나처럼 치라고 외치듯이 뻥 날려버린 헤이시아 궁을 말하는 것이었다. 칼리안이 짐짓 모르는 일이라는 듯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 아니야. 발칸이 실수한 일이지.” “발칸이 왕자님의 것임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에 대해 칼리안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잠시 보던 드미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기사단 들어오는 날짜 정해지면 말씀해주세요.” “아, 드미레아.”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드미레아를 불러세운 칼리안이 얼마 전에 히나가 보여줬던 바로 그 수화를 보여줬다. “이거. 혹시 무슨 뜻이야?” 서툰 손짓이긴 해도 알아보기 어려운 단어는 아니었다. 때문에 드미레아의 얼굴이 묘하게 바뀌었다. ‘맴매’라니. “왕자님, 시녀에게 그런 말을 듣고 다니십니까.” 칼리안이 알아듣지 못할 수화를 구사하는 사람이 히나 외에는 없었으니 하는 소리였다. 역시 욕이구나 하는 표정이 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드미레아 옆에 앉은 얀을 흘깃 보며 말했다. “아무도 안 알려줘. 얀도 말을 안해.” “무엇을 잘못하셨기에 그런 말을 들으십니까.” 역시 좋은 뜻은 아니었구나. 이런 생각을 한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대꾸했다. “사실 내가 잘못하는 게 한 둘이 아니라서.” 드미레아가 마지막 한 모금의 차를 넘긴 후 찻잔을 내려놨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신차리고 사시면 됩니다. 같은 말 듣지 않도록.”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결국 히나의 말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였다. 대체 무슨 말이기에, 하고. 칼리안의 의문만 커졌다. * * * 드미레아가 나간 뒤. 칼리안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그냥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신차리고 살라는 그 말이 오전에 플란츠가 했던 이야기와 얽혀든 탓도 있었고 딱히 할 일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수련장도 가질 못하고, 발칸이 있을 빌헬름 관에도 가질 못하고, 하다못해 산책도 못 가는 처지가 아니던가. 그나저나, 정신차리고 살라니. “······ 뭘 알고 하는 소리인지.” 때문에 축 늘어져 앉아 이런저런 생각이나 하며 중얼거리고 있는데 얀이 다가와 맞은편에 앉으며 차게 식힌 민트 차를 내려놨다. 오늘만 두 잔 째다. 굳이 얘기하지 않는 이상은 같은 차를 두 번 내오지 않았던 얀이었으나, 칼리안은 별 말 없이 그것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생각 깊을 땐 항상 민트 차를 달라고 하셔서요.” 제 나름대로 칼리안을 배려해서 가져온 차라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했고, 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4층에 계속 가셔서 식사 하실 것 같다고, 마나실 백작에게 말했습니다.” 그 말에 칼리안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러다 곧 얀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의 잘못을 일렀다는 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렇게 움직이실거면 그냥 편히 다니게 해달라고 얘기했어요. 전하께 허락 받는 것은 마나실 백작이 알아서 할 테니까, 내일쯤 부터는 체르밀 궁 안에서라면 자유롭게 움직이셔도 될 것 같아요.” 위험한 방법으로 4층에 가거나 이렇게 우울해하지 말고 지내라는 뜻이었다. 때문에 그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데 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러지 마세요.” 수화는 멀리서도 보인다. 운동을 마친 레이븐을 다시 데려다 놓기 위해 밖으로 나갔던 얀은 히나가 하는 말을 보았다. 하늘색 아이스크림을 옆에 내려놓은 히나의 수화는 빨랐고 모두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알아듣고 나니, 숨이 멎기 딱 일주일 전에 제 물건을 전부 가져다 불태우던 형이 생각났다. “살았으니까 빈 자리가 나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없애요. 그러니 빈 자리 걱정할 시간에 그냥 사세요.” 잠시 말을 멈춘 얀이 창 밖을 쳐다보다 다시 칼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곧 그 시선이 민트차로 향했다가, 다시 칼리안에게로 갔다. 청량한 민트 향과는 정 반대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일을 또 겪지는 않게 해주세요.” 그러니까 나는 그냥 만일에 대비한 것 뿐이라고. 누가 당장 죽겠다 했냐고. 나도 살고 싶다고. 대체 다들 왜 나서서 이러느냐고. 하는 말 대신, 칼리안은 그냥 웃었다. 이렇게 붙드는 손이 있으니 죽어도 못죽겠다 싶어서였다. “알았어.” < 제24장. 이해의 초석(1) > - 팔락 오늘의 에우리아는 마법사 협회장이기도 했고 칼리안 전용 정보조직의 보스이기도 했다. 그런 에우리아가 건넨 서류를 넘겨보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이건.” 그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 앨런은 칼리안이 에우리아에게 부탁했던 ‘검은 돌’에 대한 조사 결과를 확인하러 찾아온 길이었다. ‘가지고 있으라고, 때가 되면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시스파니안의 말을 전해주던 칼리안의 목소리가 잠시 떠올랐다. 그 말대로인지는 몰라도, 검은 돌에 대한 내용은 고서적 어느 곳에서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다만 에우리아는 그것과 별개로 조금 흥미로운 내용을 앨런에게 전한 상태였다. 소파에 기대 앉아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앨런이 말했다. “자네 혼자 조사한 건가?” “네.” 앨런이 에우리아의 눈을 지긋이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보던 에우리아가 다소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너무 큰 비밀을 알았으니까 이제 죽어라, 그런 말 하실 얼굴인데.” 애들 가르치는 사람이 무슨 그런 재미 없는 농담을 하는건지. 하는 생각을 하며 에우리아를 쳐다보고 있던 앨런의 얼굴이 굳었다. 농담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앨런의 눈이 찌푸려졌다. “나를 대체 어떻게 보는데 그런 말을 하나?” 눈 하나 깜빡 안하고 사람 태워죽이는 분이요, 하고 대답하려던 에우리아가 곱게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의 주변에 있으면서 무력을 쓸 줄 아는 이들 중에 살생한 수가 가장 적은 사람이 바로 앨런임을 깨달은 탓이다. “매우 이성적이고 인정 많으신 대마법사님이시죠. 제가 실언했습니다.” 이렇게 말을 바꾼 에우리아를 보고 있던 앨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앞에 놓인 사과를 집어들려다 멈칫했다. 사과 껍질이 녹색인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실 것이 분명한 사과 대신 차를 들어 한 모금 삼킨 앨런이, 에우리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튼 이 일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말게.” “왕자님께는요.” “왕자님께도.” 에우리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칼리안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말을 그대로 따르기가 꺼려졌기 때문이다. “마나실 백작님. 제가 딱히 왕자님과 주종 관계는 아니긴 한데, 그래도 이게 왕자님께서 알아봐달라고 말씀하신 거라서요.” 이런 키리에같은. 앨런이 혀를 쯧 찼다. 아무리 칼리안이 시킨 일이라 해도 다 이유가 있으니 입을 다물라 하는 것을, 키리에나 에우리아나 곱게 말을 듣질 않는다. 앨런을 그야말로 살아있는 신처럼 여기며 떠받들던 에우리아가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이제 싫다는 소리를 곧잘 하는 것이다. “지금 아시면 안되네. 내가 알아서 말씀드릴테니 아무튼 자네는 입 닫게.” “······ 네.” “이 일에 더 이상 손 대지 말고.” 정말 죽을지도 모르니까, 라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마법사 협회장이라는 이름이 헛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무력에 있어서는 아르센보다 확실한 우위에 있는 에우리아였다. 다만 ‘그들’이 그 칼리안을 어떤 상태로 만들었는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다른 말 없이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도 키리에보다는 에우리아쪽이 말을 좀 잘 듣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것이 기가 막혀서, 앨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서류를 가장 앞으로 넘겨 첫 장부터 다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만든 신물이라······.” 우려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낮은 중얼거림이 앨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 * 언젠가 칼리안이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엘프들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르메인은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엘프라는 족속들은 왜 다 저따위인가.’ 애석하게도 시아와 같은 착한 엘프가 있음을 겪어보지 못한 르메인의 얼굴은 차갑게 굳은 채였다.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카이리스 땅에 눌러 살고 있으면서, 로젤리타 중인 카이리스 3왕자를 이용해먹으려 든 것도 모자라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은 엘프들이 아닌가. 그런 엘프의 사절단이 르메인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방문했다. 때문에 르메인은 그들의 왕궁 내 체류를 허락하지 않았다. ‘굳이 왕궁에 머무르고 싶다면 이번에 사과하고 다음에 다시 와라’ 정도로만 내용을 전달했다. 물론, 르메인이 엘프들의 카이리시스 방문을 허락했을 당시에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사후 통보였다. 그러니 한 마디로 그것은, 르메인이 그들에게 건넨 하나의 큰 엿이라 하겠다. 심지어 그들은 곧바로 항의하지도 못했다. 르메인이 칼리안의 잠적과 왕궁 내 폭발사고를 이유로 만남을 계속 미루다 이제야 그들을 대면하고 있었던 탓이다. “대장로께 내용을 미리 전했다면 좋게 끝났을 일을 이렇게 키우다니요. 문제를 일으켰던 이들은 지금 우리의 규율에 따라 처벌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그 아들은 인간의 법에 따른 처벌도 이미 받았지 않습니까.” 문제 일으킨 엘프가 벌을 받았든 말았든 그것은 르메인이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으므로, 르메인은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것까지 내가 염두에 두어야 하나.” 사실 이 정도 참았으면 많이 참았다 할 일이다. 칼리안이 굳이 전하지 않았던 일을 앨런을 통해 들었을 때, 당장 군대를 보내 그 숲을 싹 태워버리라 명하고 싶던 마음을 간신히 되돌렸으니까. “불편한 점이 있었으면 그대들의 대장로가 직접 말하라 전하게. 물론 그 전에 사과와 감사가 있어야 할 터.” 사과와 감사라니. 무엇을 사과하고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설명을 해달라는 듯, 엘프의 귀가 잠시 쫑긋거렸다. 이를 본 르메인이 말을 덧붙였다. “일국의 왕자를 우롱한 것에 대한 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살려둔 왕자의 자비에 대한 감사.” 그렇게 말하는 르메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 * * 시종을 미리 보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텐데. 이렇게 뒤늦은 후회를 해보아야 이미 늦었음을 안다. 알면서도 굳이 이런 생각을 하며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숨겨야 할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버릴 것 같아서였다.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 인사드립니다.” 앨런을 만나기 위해 르메인의 집무 궁인 아르피아에 잠시 들른 길이었다. 외부 일정으로 부재중이라는 말을 듣고 아르피아 궁에서 나오던 중, 마주치고 말았다. - 왕제는 전사했다. 조금 어려진 얼굴과 조금 더 긴 머리. 여전히 당당하고 여전히 정중하며 여전히 냉철한 태도. 체이스가 잠시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고요한 미소를 애써 지어보이며 앞에 선 아르센을 향해 대답했다. - 그 왕제,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안타깝게 됐군. “이렇게 만나는군요.” 체이스의 화답에 아르센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늘 ‘반갑다’ 하던 평소의 인사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으나, 기사 테일란은 다른 말 없이 체이스의 뒤에 서 있었다. - 너무 원망하지는 말았으면 하네. 어떻게 원망하는 마음이 안 들까. 어떻게 다 접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저 기억만 가진 채로도 이렇게 흔들리는데, 너는. 상념이 지워지지 않은 탓에, 체이스가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여전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아르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 헤르츠 부단장. 이름을 많이 들었습니다. 칼리안 왕자를 따르고 있다고요.” 왕세자님 저 놈이 왜 남의 나라 사정에 신경을 쓰고 계시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아르센과, 우리 주군께서 또 세작들이 알아온 비밀을 입에 올리시는구나 하는 표정의 테일란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그렇게 테일란과 무언의 감정을 담은 눈인사를 주고 받은 아르센이 대답했다. “발칸은 전하를 따릅니다.” 그러므로, 발칸의 부단장인 아르센 헤르츠는 르메인을 따른다는 말이었다. 마법 잘 쓰고 싸움도 좋아하는 아르센 헤르츠는 칼리안의 말만 듣는다는 소리까지는 굳이 꺼낼 이유가 없었다. 타국의 왕세자에게 알릴 만한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으로 대답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체이스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굳이 자신의 이름을 뺀 채 ‘발칸’이 누구를 따르는지를 알렸다는 것의 의도를 알아챈 것이리라. 대비 없이 아르센을 딱 마주친 탓에 잠시 평정심을 잃을 뻔 했던 체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왕비궁과 관련된 일은 유감입니다.” 아르센이 잠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금까지 저 말을 수백 번은 들은 것 같았다. 각오하긴 했지만 타국의 왕세자까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나저나, 오래된 건물이던데 주저함이 보이지 않더군요.” 이런 체이스의 말은 아르센에게 있어 꽤 의외의 것이었다. 아르센이 체이스의 보라색 눈을 쳐다봤다. 내막을 모르는 이의 말투라기에는 지나치게 느긋한 감이 있었다. 이미 이 일의 배경을 모두 알고 묻는 듯한 말이 아닌가. “지나간 시간에만 얽매여서 더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겠습니까.” 때문에 아르센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정도의 건물은 카이리스 어디에나 있다는 말도 붙일까 하다 그만두었다. 아무리 아르센이라지만 타국의 왕세자에게 싸움을 걸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군요.” 체이스가 작게 웃었다. 아르센은 칼리안이 의도한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일을 벌였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웃은 것이다. 체이스가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아르센이 마법사이기 때문이었다. 마법사에게 있어 시스파니안이, 그녀가 머물렀던 장소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체이스도 잘 알았다. 때문에 아르센이 시스파니안이 직접 머물렀던 궁을 칼리안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너뜨렸는지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아르센에게 그 정도의 신의가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아르센은, 칼리안이라면 저 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일을 시켰으리라 믿고 일을 저질렀다 답했다. 체이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아르센이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 문득 떠올랐다. - 정말, 미안하네. * * * “브리센 후작은 만나셨습니까?” 갑작스레 건네진 질문이었으나, 플란츠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직.” “네.” 칼리안과 플란츠의 대화는 여전히 이런식이었다. 대화의 길이도 짧고 오가는 말도 적었다. 실리케가 비수를 들었던 그 날 이후 왕자들의 조찬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도 그 전까지는 꼬박꼬박 침묵 속에서 식사를 함께 했던 형제였으니 대화가 적다는 것은 플란츠에게 있어 그리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불편한 것은 딱 하나. 동생 놈이 식사 때마다 앞에 앉아있다는 것 뿐. “왜 자꾸 오는데.” 처음 이틀은 그러려니 했다. 플란츠를 생각한다며 4층까지 올라와 식사를 할 만한 놈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냥 조용히 넘어갔다. 그래서 이틀 동안 별 말 없이 꾸역꾸역 식사도 했다. 그런데도 계속 오는 것이다. 마치 그 날 이후 플란츠의 방에서 나가지 않았던 그 때처럼. “말 상대 해드리고 좋지 않습니까.” “또 짖지.” 진심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저 뻔뻔한 대답에,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그 많은 빵과 고기와 샐러드를 먹은 뒤에도 배가 차지 않았는지, 바나나를 까먹던 칼리안이 손에 들린 것을 흔들어보이며 말했다. “벌써 다 드셨습니까. 과일은 손도 안 대시고.” “참견 말고, 대답.” 왜 자꾸 오느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라는 소리였다. 신기하게도 플란츠의 말을 찰떡같이 잘 알아듣는 칼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검, 가르쳐드릴게요.” 그리고는 별 것 아니라는 듯한 투로 말했다. “키만 크지 생각보다 약하시던데.” 칼리안의 검술을 배울 수 있을 만큼 잘 먹고 쑥쑥 크시라는 뜻일 터였다. 그 말을 들은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 제24장. 이해의 초석(2) >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붉은 색과 푸른 색이 맞닿았는데, 어찌 저리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지 말이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앉아있다가 창 밖이 점점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석양이 내리는 그 하늘을 잠시 바라보던 앨런이 이런 생각을 했다. 완벽히 다른 두 색으로 나뉜 하늘이 전혀 이상하지 않아서였다. “저 불가해한 뒤섞임도 세렌티의 가호일런지.” 이렇게, 생각 많은 대마법사가 꽤 감성적인 말을 중얼거렸다. 사실 그것은 굉장히 마법사답지 않은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앨런이 고민하는 주제 역시 마법사가 할 만한 것은 아니었으니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 200여년 전, 시온 제라드라는 이름의 학자가 ‘인간의 힘으로도 신물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 출신지와 신상과 관련된 내용은 확인되지 않으며, 본인의 학설을 증명할 방법을 찾던 중 실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에우리아가 건넨 조사 결과를 함축하면 이러했다. 마법사 협회의 자료실에 있던 신학 관련 서적을 모조리 뒤져 찾아낸 결과라 했으니, 텐실을 찾아가지 않는 이상 다른 정보를 알아내기는 어려울 터였다. 사실 저 얼토당토 않은 내용에 대해 다른 정확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기는 할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생각이 이어지는 바람에 내려두었던 커피가 어느새 완전히 식어 있었다. 때문에 귀한 능력을 잠시 낭비하여 마력으로 커피를 데운 앨런이 쓰디 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신물을 만든다······.” 전날 에우리아를 만났을 때 꺼냈던 것과 비슷한 혼잣말이 다시 흘러나왔다. 커피의 쓴 맛 때문인지, 혹은 침범하지 말아야 할 선을 건너려 한 이가 있었음을 알게 된 까닭인지 몰라도, 입이 아주 깔깔했다. 언젠가 르메인의 시종 라울이 챙겨줬던 코코넛 쿠키 하나를 집어먹은 앨런이 다시 한번 생각에 빠져들었다. “우리 왕자님, 안 그래도 고민하실 거리가 넘쳐날 것인데.” 이번 일과 연관이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하지만 찜찜하기 그지없는 기록을 칼리안에게도 알려줘야 할 텐데. 과연 언제 알리는 것이 좋을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워서였다. ‘그러고보니 란델 왕자를 만나시겠다 하셨었지.’ 그러다 이렇게, 칼리안이 란델을 다시 한번 만나보겠다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때문에 지금의 정보와 텐실이 연관되지 않았을까 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란델을 대하지 않도록 우선 칼리안이 란델을 만나보고 온 뒤에 알리는 것이 낫겠다 마음을 정했다. 생각을 갈무리하며 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던 앨런이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님이 오시나.” 그리고는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덜 진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시간에 커피를 내어놓아도 괜찮을까 하는 고민은 그만두었다. 어차피 앨런의 집무실에는 커피 외의 다른 것이 없었으니까. 새로 내려지는 커피 향을 음미하고 있으려니, 손님이 도착했다. 물론 체이스였다. “이 시간이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왔습니다.” 자리에 앉아 이렇게 건네오는 말에,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늙은이를 워낙에 잘 써먹으시니, 궁에서 나가지를 못합니다.” 사실은 칼리안과 관련된 일로 고민이 깊어 가지 못했으나 그냥 일이 많아 귀가하지 못했다는 핑계만 댔다. 그리고는 조용히 앉아 커피만 쳐다보고 있는 체이스를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심기가 많이 어지러우신가 봅니다.” 앨런의 앞에서 속내를 감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정도는 잘 아는 체이스였다. 때문에 체이스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낮에 마나실 경을 만나러 이 곳에 잠시 왔었습니다. 그러다 발칸의 부군단장을 만나는 바람에.” 아, 하고 앨런이 잠시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아르센을 떠올릴 때 제 가슴을 쓸어내리던 칼리안과 지금의 체이스가 지어보인 표정이 같아서였다. 하기사, 플란츠의 검이었을 발칸의 군단장이 아니던가. 그러니 왕과 왕제 모두 아르센이 직접 마지막을 내렸으리라. “아, 나는 괜찮습니다.” 앨런의 표정을 본 체이스가 이렇게 말했고, 앨런이 작게 혀를 찼다. 플란츠를 살리고 란델에게도 손을 내밀어보려는 그 칼리안조차 제 심장을 꿰뚫었던 냉기를 잊지 못했다. 체이스라 해서 다를 리 없다. 그런데도, 고스란히 그 감각을 기억해내고 있는 얼굴로 괜찮다 하고 있으니. 심지어 체이스는 한 번을 보고 한 번을 겪었을텐데. “직접 겪은 일이 아님을 알고,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누가 누굴 걱정해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체이스가 이렇게 말했다. 결국 앨런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두 분 모두 이해의 범위가 어찌 그모양이신지.” 칼리안은 아르센을 받아들였다. 플란츠를 살려냈다. 체이스는 그런 칼리안을 믿으니 괜찮다 한다. 그런데, 베른은 체이스를 죽음에 이르게 할 뻔 했던 데블란을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 했다. 체이스는 칼리안을 공격하게 만든 하얀 수리를 용서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플란츠가 옛 칼리안을 괴롭힌 이유조차 알려 하지 않는다. 옛 칼리안을 대신하고 있음을 미안해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르메인이 왜 그리 무관심했는지 생각해보려 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고 생각을 하면, 용서해야 하니까. “보통은 그리 하지 못합니다.” 사람이니까.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 해도 감정이 섞이게 마련인데, 어쩜 이렇게 철저하게 과거의 일과 아닌 것을 자로 재듯 나누어 대처하고 있는지. 체이스까지도. 이런 앨런의 말에, 체이스는 다른 말 없이 조용히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결국 범위를 정한 것은 칼리안이었고 체이스는 따르고 있을 뿐이니 체이스가 할 말이 없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체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일로 온 것이 아니라, 그 아이에게 전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앨런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직접 만나지 않고 말만 전해달라는 듯한 투였기 때문이다. 그 눈초리를 읽었음에도, 체이스는 앨런의 생각에 대한 다른 반응 없이 말을 이었다. “텐실의 마차 축이 부러진 것은 사고가 아닐테니, 그것을 염두에 두라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텐실의 마차 축. 텐실의 현 국왕과 왕세자가 한꺼번에 사망했던 사고를 말함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앨런이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때문에 지금 체이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텐실과 관련이 있는 내용인 듯 했으므로, 일단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 전해드리지요.” 선선한 대답에 체이스가 고맙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뒤 찻잔을 들어올리는 체이스를 보며 앨런이 물었다. “해서, 언제쯤 출발하실 요량이십니까?” 체류하기로 예정했던 날이 채워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칼리안을 생각하면 영영 가지 못하게 해두고 싶기도, 혹은 지금 당장 세크리티아로 가라 등을 떠밀고 싶기도 한 복잡한 마음을 가진 채였다. 체이스의 입에서 낮은 한숨 소리가 나왔다. 스스로도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리라. * * * 칼리안이 만들어내는 검은 그 어떤 것보다 예리했다. 때문에 그것을 온전히 받아내며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슬레이만과 아르센, 그리고 드미레아와 키리에 정도였다. 칼리안의 손에 들린, 그 예리하기 짝이 없는 독특한 검을 쳐다보는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갔다. “그것이군.” 플란츠 때문에 들켰다고, 그래서 망했다고 했던 힘. 그것을 이제야 보게 된 것이다. 지금껏 계속해서 수련용 철검만 들어 플란츠와 대련을 해왔던 칼리안이었다. 그런 칼리안이 제 힘을 꺼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플란츠도 잘 알았다. 칼리안이 정말로, 자신의 검을 가르쳐 줄 셈인 것이다. “브리센 후작의 검을 본 적은 없습니다만. 형님의 것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칼리안이 검 끝으로 바닥을 톡톡 치다 이렇게 입을 열었다. 에반 브리센이 기사들에게 전수하고 기사들이 플란츠에게 알려줬던 것은 브리센 가문의 진짜 검술이 아니리라고.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니라서.” 플란츠가 브리센 가문을 잇게 되리라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만약 잇게 되더라도 그레이, 혹은 그레이의 아들이 물려받게 될 테니 플란츠에게 브리센의 검을 알려 줄 이유가 없었다. 왕위에 오르게 될 지도 모를 이에게 브리센의 검을 알려줘봐야 에반에게 득이 될 것이 없으니까. 플란츠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늘어뜨린 검을 쥐고 있던 칼리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저 역시 같습니다.” 칼리안 역시 플란츠에게 제대로 된 검을 보여준 적 없다는 말이었다. 에반과 비슷한 이유였다. 브리센의 인물에게 베른의 검술을 알려줘서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칼리안의 검 끝이 살짝 올라가는 것을 본 플란츠의 눈빛이 바뀌었다. 호랑이를 마주한 늑대와 같은, 날카로우면서도 긴장감 가득한 눈을 한 채 칼리안의 검 끝을 내려다봤다. 그것을 본 칼리안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그리 보고만 계시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칼리안의 모습이 플란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칼리안은 스스로가 약자가 아님에도 항상 기습적으로 대련을 시작했다. 실전에서 그 누구도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검을 보내지 않으니까. “······ 죽습니다.”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방향을 가늠하지 못할 곳에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플란츠가 검을 휘둘렀다. - 카아앙! 키리에의 것보다 조금 더 묵직한 검이 칼리안의 공격을 막아냈다. 뒤이어 플란츠의 검이 대기를 갈랐다.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무게감 있는 타격음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플란츠의 검 역시 약하지 않다. 결코, 약하지 않다. 드미레아에게 쉽게 질 만큼은 아닐 터였다. 열 번을 싸우면 두 세 번은 플란츠가 이길 것이라 여겼다. 수련하는 시간의 차이를 생각한다면, 플란츠 역시 재능이 있다는 소리였다. - 쌔애액! - 카강! 캉! 한기를 내뿜는 듯한 칼리안의 검과 묵빛의 검이 얽혀들며 강렬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예리한 날을 세우며 쇄도해오는 검격이, 둔중한 기운의 검에 막혔다. 그리고 다시 공격을 이어간다. 심장을 향해 달려드는 검을 쳐낸 칼리안이, 힘이 뻗어나간 방향으로 몸을 회전시키듯 검을 내질렀다. 재빨리 허리를 틀며 공격을 흘려보낸 플란츠가 대각선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 카앙! 언제 회수했는지 모를 검으로 공격을 막은 칼리안을 본 플란츠가 칼리안의 검을 밀어냈다. 그 후로 몇 수가 오갔는지는 아무도 세어보지 않았다. 날카로운 공격과 틈 없는 방어가 계속 이어졌을 뿐이다. 칼리안의 모습이 다시 사라졌다. 이전에 보여주던 움직임과 격이 다를 만큼 빠른 속도다. 분명 실제로는 저보다 더 빠를 터였다. 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속도를 낸단 말인가. - 쌔애액! 어느새 뒤에서 달려드는 예기를 느낀 플란츠가 몸을 틀며 검날을 앞으로 했다. 여지 없이 강렬한 타격음이 터져나오며, 보이지도 않던 검이 플란츠의 미간 바로 앞에서 막혔다. “생각이 많으셔도, 죽습니다.” 짜증나는 놈! “그만 좀 짖으라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꾸한 플란츠의 눈에 다시 한번 날이 섰다. 화려한 궤적이 허공을 가르며 뻗어나갔다. 칼리안이 서 있던 곳도 아닌, 나아가고 있던 곳도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해서였다. - 카아앙! 날붙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급히 발을 멈추고 플란츠의 공격을 쳐낸 칼리안의 입가에 웃음이 그려졌다. 플란츠가 그 짧은 사이 칼리안의 동선을 읽고 다음 위치를 ‘눈치’ 챈 것이다. 역시, 똑똑한 플란츠. 칼리안이 땅을 박찼다. 제 키보다 높이 솟은 몸이, 한 순간 형체를 일그러뜨리며 사라졌다. 이번에도 칼리안이 향할 곳을 빠르게 판단한 플란츠가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며 검을 뻗었다. 그리고, - 사아악! 목 언저리의 기분 나쁜 느낌과 함께 뼛속까지 치미는 한기가 플란츠에게 전해졌다. 예상한 방향과 완전히 반대되는 곳에서 뻗어나온 유리조각 같은 검이, 플란츠의 목을 가볍게 스치듯 베어낸 것이다. 또, 목을 베였다. 칼리안의 승리였다. * * * 히나의 손에 온기가 어렸다. 한 차례 칼리안 혼내기를 끝낸 히나가 플란츠의 목에 난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던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득 떠오른 기억 때문이었다. 과거의 플란츠가 굳이 운철을 얻어다 검을 만들어 사용했던 이유. 어쩌면, 단순히 귀한 재료라는 이유만으로 운철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어쩌면. ‘나머지 한 자루의 주인은, 지그프리드 공이 아니었을지도.’ 칼리안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 기대가 큽니다, 형님.” “또.” 저것은 분명 ‘또 짖지’ 라는 말일 터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이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히나가 가만히 웃으며 손짓했다. - 다, 됐어요. 그리 큰 상처가 아니었으니 아무는 것도 금방이다. 상처 치료가 끝난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별 다른 말 없이 수련장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플란츠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히나가 칼리안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 다행이에요. “뭐가?” 그리고 히나는, 늘 그래왔듯 햇살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을 건넸다. - 자상한, 왕자님이랑, 좋은, 왕자님이랑, 많이 친해진 것, 같아서요. ······ 음. 잠깐만. 섞이지 말아야 할 말이 하나 들어있는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우리 히나’의 손짓을 보던 칼리안의 발이 조용히 멈췄다. 언젠가 한 번은 보겠지 했지만 벌써부터 보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던 한 단어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좋아하는’과 ‘좋은’의 차이는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이성적인 사고는 그냥 깔끔하게 집어치운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형님.” 애증해 마지 않는 우리 형님 너 이 새끼 잠깐 저랑 대련 한 번만 더 하고 가시라고. 그런 의미를 담은, 예쁘디 예쁜 웃음이었다. < 제24장. 이해의 초석(3) > 아침 햇살이 깃든 호수의 윤슬이 참 아름답다. 오늘따라 창 밖의 저 모습이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금 칼리안과 플란츠가 있는 곳이 2층에 위치한 식당이었던 탓이다. 그리고 이들이 굳이 식당까지 와서 식사를 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셋째에게 검을 배우기 시작했다 들었다.” 굳이 체르밀 궁까지 와서 조찬을 가지겠다며 갑작스레 통보해 온 르메인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침 잠 많은 칼리안은 새벽부터 울리는 종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떠야 했다. 플란츠라 해서 그리 다르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리고 란델은 심한 감기를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조찬 후에 잠시 들르겠다 전하게.’ 르메인은 그런 란델의 태도를 책망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 후 지금까지 다른 말 없이 식사를 이어나가다가 검술 수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참이었다. 마시던 물을 조용히 내려놓은 플란츠가 간단히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검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기에는 이제 고작 하루 지났다. 정확히는 하룻밤이 지났다. 전날 밤에 대련 두 번 해본 것이 다였다. 그나마 두 번째 대련은 칼 한번 부딪혀보지 못하고 끝났다. 빛이 번쩍하는 느낌과 동시에 첫 번째보다 조금 더 깊은 상처가 생기고 끝났으니까. “그래. 둘이라도 사이 좋게 지낸다니 기쁘구나.” 사이 좋단다. 칼리안과 플란츠의 손이 동시에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는데, 플란츠는 접시에 둔 시선을 바꾸지 않은 채였다. 칼리안에게 대답을 넘기는 것이다. 정신 나간 동생놈과의 사이를 표현해 낼 만한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혹은, 세상에 저런 미친놈과 사이 좋을 사람은 세크리티아 왕세자밖에 없을 것이란 말이 튀어나올까 걱정된 탓도 있었다. 거기에 더불어, 짖는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 몰라도 동생놈이 좀 무는 것 같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플란츠를 슬쩍 쳐다본 칼리안이 르메인에게 대답했다. “네. 사이가, 아주 좋습니다.” 못한다던 거짓말이 술술 잘도 나온다. “스스로의 단련도 해야 할 텐데 네 형의 검술까지 보아주겠다 하니 좋은 일이다. 다만 서로 다치지는 않도록 조심하거라.” 칼리안이 속으로 웃었다. 지금 저 말을 들으니, 르메인이 이렇게 유례없는 일을 벌인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어젯 밤 두 형제의 대련이 끝나고 히나가 수련장을 찾았더라는 말을 전해듣고 플란츠가 걱정된다는 이유로 와 본 것이 분명했다. 부수는 것 좋아하는, 아니 잘 하는 칼리안의 손이 행여라도 과했던 것은 아닌지 살펴보려고. “네, 전하.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굳이 말하지 않는 진짜 이유도 알 것 같았지만, 칼리안은 짐짓 모르는 척 대답하며 생긋 웃었다. 창 밖의 호수처럼 반짝이는 그 웃음을 본 르메인이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플란츠는 그냥 물만 한 모금 더 마셨다. 남들은 못알아볼지 몰라도, 칼리안은 지금 플란츠가 얼마나 많은 말을 꾸역꾸역 넘겨내고 있는지 아주 잘 알았다. 다리 위에 얌전히 올려놓은 칼리안의 손 끝이 허벅지 위에 곡선 하나를 그려냈다. 진지해야 할 입을 대신해 웃어주는 것이다. “네 몸은 좀 괜찮은 것이냐? 무리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구나.” 칼리안이 너무 멀쩡한 얼굴로 야무지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탓에, 셋째 아들이 죽을 고비를 넘긴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상기한 르메인이 물었다. 질문 순서가 조금 바뀐 것이 아니냐는 말 대신, 칼리안은 다시 한번 걱정 말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 나았습니다.” ······ 그래 보이는구나.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다행히 속마음과 조금 다른 제대로 된 대답을 꺼낸 르메인이 칼리안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근신이 풀리더라도 혼자 밖에 나서는 일은 절대 없도록 주의하거라.” 주의라는 강경한 표현까지 쓰는 것을 보니, 근신이 풀리더라도 호위기사는 절대로 물리지 않을 분위기였다. 칼리안이 조금 풀 죽은 얼굴이 되자, 르메인이 살짝 웃는 얼굴이 되어 말을 덧붙였다. “왕실 숲까지는 가도 좋으니, 정 답답하거든 그리 걸음하고.” “네, 전하. 감사합니다.” “그래.” 왕궁 후문과 이어져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숲을 말하는 것이었다. 칼리안은 물론 옛 칼리안도 가보지 못한 곳이기도 했다. 엄마 찾는 강아지마냥 한 시를 가만히 있지 못하는 칼리안을 생각해서 해준 말일 터였다. “그런데, 플란츠. 지난 번 보았을 때보다 더 마른 것 같구나. 혹여 아픈 곳이 있느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잘 챙겨 먹어야지. 한참 자랄 때이니.” “네, 전하.” ‘아······.’ 이렇게 이어지는 대화가 너무 평범하고 평화로워서, 칼리안은 하마터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놓치고 그저 좋아할 뻔 했다. - 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해했을까. 좋아할 뻔 했던 만큼의 미안한 마음이 차올라서, 웃음을 지운 칼리안이 잠시 창문을 쳐다봤다. 밝은 창에 언뜻 비치는 붉은 눈동자를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칼리안. * * * “애오옹!” 배가 똥똥해진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입니다.’ 고양이가 앞 발을 들어 플란츠의 손을 끌어당겼다. 졸린데 잠은 안오니 빨리 쓰다듬어 보라는 소리다. 무릎 위에 제멋대로 올라와 앉은 채로도 원하는 것이 또 남은 고양이를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른하게 감겨들어가는 서로 다른 두 색의 눈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또 다른 소리가 맞은편에서 들렸다. 애교 섞인 고양이 울음과는 전혀 다른, 버석버석하기 짝이 없는 동생의 목소리였다. “너무 서운하게 여기지는 마십시오.” 플란츠의 말은 앞 뒤가 없었고 칼리안은 항상 좀 뜬금없었다. 잠시 그 말의 의도를 헤아려보던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다지. 별 생각 없는데.” 그래도 대화가 곧잘 이어지는 것은, 말을 나누고 있는 이들이 칼리안과 플란츠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다른 이들이었다면 이런 식의 대화가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네.” 아무튼 칼리안이 서운해하지 말라 하는 것은 르메인의 방문 사유에 대한 것이었다. 칼리안이나 플란츠가 다쳐서 앓고 있을 때에는 찾아오지 못하다가 이제 와서 ‘플란츠가 혹시 다친 것은 아닌지’가 걱정됐다는 듯 발걸음을 한 진짜 이유 말이다. 란델. 르메인은 지금 둘째와 셋째 아들을 핑계로 란델을 만나보러 왔으리라.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는,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두들겨지지 않고 무사히 잘 있음을 확인한 뒤 아프다는 란델을 굳이 만나러 다시 발을 옮길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서운해하지 말라 한 것이다. 르메인이 이 곳에 방문한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애오옹······.” 어느새 플란츠의 손이 멈췄는지 고양이가 나른한 소리를 내며 다시 졸랐다. 차 한 모금 마실 새도 주지 않겠다는 고양이의 채근에, 플란츠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그래도 형님 걱정을 하신 것은 맞을 겁니다.” 르메인이 변한 것을 모를 리 없었다. 플란츠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내 아우님이 워낙 사나우시니.” 그리고는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한 곳을 두 번이나 베인 탓에,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아서였다. 한동안 말 없이 있던 플란츠가 칼리안을 노려봤다. 조찬이 끝난 뒤 꾸역꾸역 플란츠의 방에 찾아온 칼리안이, 어울리지도 않게 신경을 써주는 듯한 말을 왜 꺼내놓고 있는지도 알기 때문이었다. 플란츠가 짧게 입을 열었다. “해. 사과.” “미안합니다.” 준비된 듯 빠른 사과가 이어졌고,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도 묻지 않았다. 칼리안이 잘못했고, 사과 받겠다는 말에 사과를 했고, 플란츠는 그 사과를 받았으니 더 필요한 것이 없었다. 물론 히나가 지금 이 광경을 봤다면 참 어처구니 없다 했을 일이지만. “브리센 후작은 언제 만나십니까.” “오늘.”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만나시는지는 아시는 것 맞습니까?” 아직 칼리안은 헤이시아 궁을 폭발시킨 또 다른 이유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플란츠가 이미 가늠을 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알아.” 플란츠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알고 있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 물어보고 확인하는 대신 칼리안은 슬쩍 웃기만 했다. 플란츠라면 알아서 잘 할 테니까. “다녀오시면, 오늘은 키리에에게 배우십시오.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그리고 지금은 저보단 키리에가 나을 겁니다.” 칼리안의 검은 빠르고 날카롭다. 슬레이만의 검술은 묵직하고 강렬하다. 플란츠는 그 중간이었다. 칼리안의 것보다는 무겁고 슬레이만의 것보다는 날렵했다. 때문에, 처음 배우기에는 키리에가 적격이었다. 플란츠보다는 가볍고 날렵한 검술을 쓰지만 칼리안보다는 무거웠으니까. 게다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키리에에게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플란츠는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 * 에반 브리센 후작의 얼굴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근 1년 사이 이런 저런 고생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지금만큼 마음 고생 심한 시기는 없었으리라. 실리케가 축출되고 난 뒤, 브리센을 지지하던 귀족들은 열에 한 명 꼴로 등을 돌렸다. 그나마 그 정도 선에서 멈춘 것에는 플란츠를 붙들어 둔 덕이 한 몫을 했다. 그런데 그레이가 사고를 치고 칼리안이 지그프리드와 손을 잡으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게다가 이번 사건은 브리센에 있어 악재중의 악재였다. 다섯에 한 명. 다섯에 한 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슬금슬금 연락을 끊고 에반을 피하는 것이 눈에 확 보였다. - 발칸! 바로, 칼리안 때문이었다. 그 헤이시아 궁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으로 모자라 르메인의 처벌이 지나치게 경미했다. 그것이 귀족들의 눈에는 칼리안에 대한 르메인의 총애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상황이 좋을 것 같지는 않은데.” 때문에 에반을 보자마자 이렇게 물어오는 플란츠를 보며, 에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다 자라지도 않은 지그프리드의 코끼리에게까지 이용당하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할 말이 없군.” 아니 지금 이게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그러니까 대체 그 시간에 거기는 왜 기어들어가서 일을 이렇게 꼬아놓느냐는 눈을 한 에반을 향해 플란츠가 말을 이었다. “내가 검을 쥐면 뒤집힐 것 같은데. 어때.” “무엇을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었다면 이 정도 말로도 충분했겠지만, 애석하게도 에반은 그렇지 못했다. 불필요한 말을 덧붙여야 함에 답답함을 느낀 플란츠가 짜증 섞인 말투로 입을 열어 계획을 말했다. “기사단 카렌과 라온의 통솔권을 나한테 넘겨. 발칸을 반으로 나눠놓을 테니까.” 자신만만한 말에, 에반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 “안 믿네. 나를.” “아닙니다, 왕자님. 믿지 않는다기 보다는······.” 그렇게 말을 얼버무린 에반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생각을 이어나가던 에반의 입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 의뭉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고스란히 매단 채로 에반이 입을 열었다. “기사단 통솔권 드리겠습니다.” 순순한 의도가 아니었으므로, 플란츠는 대답 대신 에반의 눈을 가만히 쳐다봤다. “대신.” 그렇게 말한 에반이 자신의 심장을 가리켜보이며 말을 맺었다. “맹세의 인을 걸고 약속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브리센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맹세의 인. 약속을 어긴 이의 심장을 옭죄는 계약. 에반은 지금, 플란츠에게 칼자루를 주는 대신 목숨을 걸라 말하고 있었다. 그리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내 심장을 걸라는 말이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에반을 쳐다보는 플란츠의 입에, 아주 오랜만에 그려보는 미소가 지어졌다. 그 언젠가의 실리케를 꼭 닮은 해맑은 미소였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더 잔인해지는 어린아이와 같은, 그런 미소였다. “해.” 그까짓것. 아깝지도 않아. < 제24장. 이해의 초석(4) > 적막한 방. 한편으로는 놀라고 또 한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정원에는 그렇게나 화려한 꽃을 피워내면서, 방 안에는 그 흔한 화병 하나 두지 않았다. 시계조차 없는 이곳에 늘 홀로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손에 칼리안의 피가 묻고, 자신의 눈으로 플란츠의 결핍을 보고, 아무것도 없는 이 방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그것을 깨닫는다. 이미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다는 것을 함께 느낀다. 국왕이기 이전에 아버지여야 했고 아버지이기 이전에 국왕이어야 했던 르메인은, 입 밖에 내지 못할 후회를 담아 란델을 바라봤다. “심한 감기에 걸렸다 하던데. 괜찮은 것이냐.” 자신을 피하기 위해 핑계를 댄 것임을 당연히 안다. 알면서도 찾아왔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탄신일 축제 중 마지막으로 보았고 체르밀 궁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벌을 주었다. 그 뒤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란델은 변함 없는 모습을 한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변함 없이,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래.” 내가 서툴렀다. 서툴러서 그렇게 눈을 돌렸다. 눈을 돌리니 보이지 않았고, 보이지 않으니 잊고 지냈다. 잊고 지내니 시간이 흘렀고, 시간이 흐르니 알게 되었다. 잘못했다는 것을. “······ 그래.” 르메인은 해야 할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같은 말만 다시 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사과의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저 변명이었고, 나를 이해하라 종용하는 폭력임을 알았다. 그리 잘 알았으면서. 꾹 다물고 있던 입을 비집고 수만마디 말이 담긴 한 줄기 한숨이 기어코 새어 나왔다. “아프면 혼자 참지 말고······ 혹여 내가 또 모르거든 말해주거라.” 고작 이런 말이나 건넨 르메인이 앞에 놓인 차를 꾸역꾸역 마셨다. 마주 앉아 있던 란델은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한참만에 꺼내진 이야기에도, 란델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만큼의 간극이었다. 그 곳에 더 있는 것조차 무언의 강제가 될까 걱정되어, 르메인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께 일어난 란델의 눈을 들여다보던 르메인이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또 오마.” 란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 * * “칼리안 왕자님께서 잠시 와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이보다 기꺼운 초대는 없을 것이다. 어여쁜 제자가 찾는다는 말에, 앨런은 보고 있던 서류를 곧바로 뒤집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칼리안의 청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얀의 뒤를 따라 체르밀 궁에 들어서니, 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수련장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 말을 들은 앨런이 생각 많은 얼굴로 웃었다. 명색이 칼리안의 스승인 앨런 마나실이 아니던가. 그런데 칼리안의 방이 아닌 수련장에서 만나자는 말이 이렇게나 생소해서야. 칼리안이 워낙 알아서 잘 수련해왔던 탓에 정작 스승 노릇은 몇 번 해보지 못했다. 이것이 민망했던 앨런은 얼른 수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술 수련장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마법 수련장에 들어서니, 널찍한 공간 한 가운데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칼리안이 보였다. 르메인과의 조찬 때문에 매일 아침 해오던 마나 축적을 이제야 하는 중이었다. 방해 되지 않도록 조용히 서서 그 모습을 보던 앨런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실로 방대하구나.’ 그것이 시스파니안의 축복 때문인지, 옛 칼리안이 유난히 뛰어난 재능을 가졌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확한 것은 정제되어 쌓이고 있는 마나의 양이 다른 마법사들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랬으니 오러를 숨기는 마법을 상시 유지하면서, 때에 따라 검과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테지. ‘4서클의 벽도 가장 빨리 넘어설 것이다.’ 이미 앨런보다 앞선 나이에 3서클을 마스터했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때문에 앨런은 자신이 4서클의 마지막 벽을 넘어 4서클 마스터가 되었던 나이가 언제였는지를 기억해보고 있었다. “스승님!” 그러던 중, 변함 없는 반가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앨런을 불러냈다. 곧바로 기억에서 빠져나온 앨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칼리안이 자신을 왜 불렀는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무엇을 가르쳐드리면 될지요.” 수련장으로 불렀으니 하는 말이었다. 칼리안이 웃는 낯을 바꾸지 않은 채 수련장 한쪽에 놓인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로 가 앉았고, 마주 앉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헤르츠 부군단장은 좀 어떻습니까?”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앨런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섞인 답이 나왔다. “마법 쓰는 족속들은 어찌 다들 그모양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족속들의 우두머리가 그 족속들을 모아서 써먹어보자 했던 왕자에게 이렇게 말한 뒤 말을 이었다. “지금 아주 영웅이 되었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리안의 한 마디 말을 곧바로 실행했던 대쪽같은 신의. 적절한 위치에 표적을 세워 헤이시아 궁을 한방에 날려버리도록 유도한 칼 같은 계산. 건물 값 정도는 자신의 급여에서 제하라 외치던 멋짐까지. 아르센은 지금 발칸의 우상이 되어 있었다. “이러다 빌헬름 관에 동상 세우게 생겼습니다.” 실로 마법사다운 반응이 아닌가. 칼리안이 재밌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일 처리가 그렇게 확실하니 제가 헤르츠 부군단장을 신용할 수 밖에요.” “그리 부리지 마시지요. 다음에는 무엇이 없어질지 가늠도 되지 않습니다.” 칼리안이라고 다음에 뭘 부술지 알겠는가. 때문에 칼리안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본론을 꺼내들었다. “발칸에 자리 하나만 더 만들어주세요, 스승님.” “왕자님의 것입니까?” 앨런이 이렇게 반가워하며 물었다. 드디어 제 것을 가지려는가 싶어서였으나 애석하게도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히나요. 이제 발칸에 둘까 하는데, 앞서서 준비를 좀 해주셨으면 해서.” 전날 밤 플란츠가 수련장에서 나간 뒤, 마음을 굳혔다며 다부진 얼굴로 이야기하던 히나를 떠올린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본래 헤르츠 경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잔해 처리에 열의를 쏟는 중인 것 같아서요.” “그리하지요.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발칸 총수인 앨런을 불러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미안해진 칼리안의 말에, 앨런이 걱정 말라는 듯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스승님.” 칼리안이 웃었다. 언제 무슨 말을 하든 흔쾌히 따라주는 앨런만큼 든든한 조력자가 또 있을까. “그리고 헤르츠 경은 제가 시켜서 일을 벌였을 뿐이니 너무 타박하지 말아주세요.” 타박이라니. 앨런이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얼굴을 맞대 본 이래 그렇게 신나있는 꼬락서니를 처음 봅니다. 걱정 마시지요.” 거짓이 아니었다. 아르센은 지금, 꾹 누르면 노래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을 한 채로 건물 잔해를 치우고 있었으니까. 그런 아르센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치유술을 위해 부르시는 것일 테니, 오후에는 베로니카를 불러 돕게 하면 좋겠습니다.” 칼리안보다 한 살 어린, 지금 마법학원에 다니고 있는 앨런의 손녀를 말하는 것이었다. 칼리안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앨런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표정을 했다. “마법 재능은 고만고만한 것이 약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히나 그 아이의 심부름이나 하게 하면 어떠신지요?” 대마법사이자 왕자의 스승인 백작이다. 유일하게 아르피아 궁에 집무실을 둔 귀족인 앨런이 자신의 손녀로 하여금 시녀였던 히나의 일을 돕도록 하겠다는 말이었다. 누가 듣든 말도 안된다 소리가 나올 법한 그런 말을 꺼내면서도, 앨런은 그것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얀이나 앨런이나 이런 구분이 잘 없었으니까. 물론 그것은 칼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베로니카가 왜 약에 관심이 많은지는 아직 모르는 칼리안이 별다른 반응 없이 대답했다. “베로니카만 괜찮다면 저는 좋습니다.” 어차피 당장 바쁘게 할 일이 없을테니 히나의 말 상대라도 해주면 좋겠지 싶어서였다. “그럼 당분간 왕자님의 새끼 코끼리도 좀 빌려주시지요. 배우는 것 좋아하는 놈들이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발칸의 마법사들에게 수화를 가르치겠다는 말이었다. 같은 생각을 했었으므로, 칼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히나에 대한 일을 얼추 전달한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제 ‘배울 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이다. 곧 칼리안이 손바닥을 내밀어 무언가를 만들어보였다. 붉은 빛의 마력 덩어리. 평소 잘 사용하지 않아 불안정한 움직임을 보이는 그것을 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담지 않거나 바람의 힘을 주로 사용하다보니, 불을 다루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네요. 혹시 도와주실 수 있을까 해서 오시라 부탁드렸습니다.” 칼리안이 배우려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앨런의 표정에 잠시 그늘이 졌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생각 난 까닭이다. 검은 돌과 텐실의 마차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는 것이 낫겠다 판단한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가르쳐 드리지요.” * * * - 퐁당. 아침의 호수는 그리 예쁘게 반짝이더니 석양에 함께 물드는 호수는 왜 이렇게 처연하게 붉은지. 붉어서, 처연해 보이나. 돌아가는 앨런의 편에 얀을 함께 보냈다. 곧바로 수화 알려주기를 시작했는지, 얀은 한나절이 지나고 저녁이 되어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궁의 잔해를 치우는 인원과 수화를 배울 인원을 나누고 돌아가면서 알려주려면 시간이 꽤 걸리기는 할 터였다. 에반 브리센 후작을 만난 플란츠가 체르밀에 도착했다 하기에 키리에를 보냈다. 둘은 아직 수련장에 있을 것이다. 메를린이 함께 나오겠다는 것을 말려놓고 혼자 나왔다. 멀찍이 서 있는 두 명의 호위기사는 어차피 있으나 마나, 그냥 없는 취급 하기로 했다. - 퐁당······! 지금 칼리안은 손가락만한 마력 덩어리를 뭉쳐 물에 던지는 중이었다. 마치 작은 돌을 던져 넣는 것처럼, 퐁당 하는 소리가 듣기 좋아서였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호숫가에 앉은 채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밤이 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차차 다가온 어둠이 짙게 내려앉고, 붉었던 호수는 그저 검게 일렁였다. 곧 칼리안의 손에 붉은 빛이 어렸다. 아침에 앨런에게 급히 배운 것을 운용하느라, 두 번을 꺼트린 뒤에야 제대로 된 모양을 만들어냈다. “그 날은 어떻게 하는 건지 내가 잘 몰랐어. 말로만 전해들어서.” 칼리안의 입이 이렇게 홀로 열렸다. - 찰박. 불어오는 바람에 인 잔물결이 칼리안의 발 끝에 닿았다. 칼리안은 잠시 몸을 일으켜 손에 들린 붉은 빛을 물가에 내려놓았다. “오늘도 꽃은 없어.” 하는 말과 함께, 또 하나의 붉은 빛이 물 위에 올려졌다. 망자에게 건네는 한 마디 말에 한 송이의 꽃과 촛불을 물에 띄운다. 그렇게 건네는 수많은 불빛, 그 만큼의 말이 망자의 마지막 걸음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강에도 못 가지만, 비슷하니까 봐 줘.” 세 번째의 붉은 빛, 아니. 안네루시아를 따라한 불꽃이 호수에 띄워졌다. 오늘은, 칼리안의 기일이었다. 카이리스에서는 망자의 기일을 챙기지 않는다. 그래도 굳이 이렇게 한번 더 옛 칼리안을 떠올리고 있는 것은, 보내주기 위해서였다. “미안.” 체이스에게 베른을 내려놓은 것처럼, 이제는 옛 칼리안에 대한 부채감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이기적이라 할지 모르지만. “나도 살고 싶어서.”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은. “미안해.” 그렇게, 미안하다 건네지는 말의 수 만큼 물 위에 올려진 불꽃들이 붉게 빛났다. 수십 개의 불꽃을 물 위에 올려두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조용히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이 시간에 굳이 칼리안이 앉은 곳까지 찾아 올 사람은 한 명 뿐이다. 풀썩, 하고 곁에 앉은 플란츠가 호수를 쳐다봤다. 붉게 빛나는 크고 작은 불꽃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살피던 칼리안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찬까지만 해도 없었던 이질적인 마력의 기운이 느껴진 까닭이다. “살고 싶다더니.” 살겠다는 놈이 제 심장에 속박을 걸어놓고 왔다. 분명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을 것이다. 살기 위한 길을 열기 위해선 목숨을 거는 것도 아깝지 않다는 모순. “내 아우님께서 어련히 살려두실까.” 플란츠가 이렇게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시 호수로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 너무 잘 아시네요.” 어차피 칼리안은 플란츠가 죽게 두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칼리안도 플란츠도 걱정할 것이 없는 일이다. 곧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옛 칼리안에게 해야 할 말은 다 했고, 플란츠가 에반에게 얻을 것을 얻었다. 이 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부는 바람에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던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나만.” 발을 옮기려던 칼리안이 가만히 멈춰섰다. 그리고 다른 말 없이 불꽃 하나를 더 만들어 플란츠에게 건넸다. 플란츠는 조용히 그것을 받아 들었고, 칼리안은 체르밀 궁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한동안 말 없이 앉아있던 플란츠의 손에 올려진 불꽃이 호수 위에 올려졌다. 방 안에 들어와 열린 창 밖으로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손을 움직였다. 할 말을 모두 전했으면, 보내줘야 하니까. 향할 곳 없는 호수 위에 올려져있던 수많은 미안함이 하나 둘 떠올랐다. 거꾸로 오르는 별처럼, 밤하늘을 밝히듯 높이 높이 날아올랐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아름다운 광경이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속죄임을 칼리안도 알았다. 유난히 많은 말을 담아서, 유난히 느리게 올라간 마지막 불꽃 하나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 제24장. 이해의 초석(5) > 하늘의 한 조각이 반짝이는 듯 했다. 수십 개의 붉은 빛이 천천히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광경이 많은 이들의 눈에 띄었다. 르메인 역시 그런 이들 중의 한 명이었다. 창가로 가보려는지 안경을 벗어 내려놓는 르메인을 향해, 맞은편에 앉아있던 앨런이 말했다. “시선 두지 마시지요.” 저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를 위한 불꽃인지 알아서는 안 되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르메인이 아니던가. 때문에 앨런은 진작부터 르메인의 집무실에 찾아와 앉아 있던 참이었다. “체르밀 궁 쪽인 것 같은데.” 그 말에 앨런이 입을 다물었고 르메인이 그런 앨런의 눈을 깊이 응시했다. “무슨 일이지?” 칼리안과 관련된 일들 중 앨런이 르메인에게 굳이 전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알아야 할 내용까지 숨기거나 속이는 일은 없었으므로 르메인은 그에 대해 굳이 캐묻지 않았었다. 평소 같았으면 칼리안이 장난이라도 치는 모양이니 그냥 두라는 정도로라도 얼버무릴 앨런인데 아예 보는 것조차 하지 말라 한다. 그러니 저 빛이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평소 알아서 적당히 넘어가던 르메인이 오늘따라 이렇게 구는 것이 단순한 호기심인지, 제 핏줄에 대한 막연한 예감인지. 짧게 혀를 한 번 찬 앨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셋째 왕자님께서 길을 찾아 가시는 것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르메인이 한동안 창 밖을 쳐다보다,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술이나 한 잔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앨런은, 르메인의 대답이 없었음에도 테이블 위에 술병과 술잔을 척척 꺼내놓았다. 마시자는 허락을 구할 생각도 없이 이미 준비를 해 온 것이다. 오전에 란델을 만났던 일로 마음이 복잡했던 르메인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지.” 앨런은 조용히 웃으며 두 잔에 술을 채웠다. 옅은 보랏빛을 띄는 술이 잔에 채워지는 냥을 보고 있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오늘 다시 한번 통감했네.” “무엇을 통감하셨습니까.” 그 말에, 르메인은 앨런이 채 건네지도 않은 술잔을 집어들어 먼저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현명하지 못했음을. 왕으로서도 아비로서도 자격이 없구나, 하고.” 선왕의 선택으로 왕세자위를 받고 형이 반기를 들었을 때, 그냥 내어주었다면 어땠을까. “무슨 그런······.” 르메인이 오전에 란델을 만났음을 알고 있었던 앨런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말하고 있는 눈이 굵게 휘어져 있었다.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하시는지.” 곧 죽어도 르메인 편은 안 들어준다.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저런 성격이니, 앨런이 가져온 술에 뭐가 들었을지 확인도 않고 먼저 마시고 있는 것이다. 앨런이 잠시 창 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붉은 기운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칼리안의 불꽃이 하늘에 거의 닿은 것이리라. “혹여라도 이미 늦어버린 일을 되돌리려 하지는 마시지요.” 그것은 오만이니. “하지 않네.” 르메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반쯤 남은 술을 마저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길을 잘 찾아야 할 것인데.” “보이는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불을 밝히는 이도, 말을 건네는 이도 있으니, 이번에는 제대로 된 길을 찾으리라고. 앨런이 그리 말하며 가만히 웃었다. * * *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마법사단 발칸의 통솔권은 앨런에게 있고, 기사단 카렌과 라온은 이제 플란츠의 손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앨런은 일단 르메인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리고 플란츠는, 르메인의 생명연장과 무병장수를 원하는 칼리안과 손을 잡은 상태다. 그래서 르메인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습다 하는 것이다. 본래에는 모두가 국왕의 소유여야 할 것들이 아니던가. “나라 꼴이 참······.” 뒷말을 흐린 이유는, 아무리 혼잣말이라지만 ‘나라 꼴이 개똥이다’라는 말이 왕자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짙은 검은색의 욕조에 몸을 담근 채로 고개만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 우웅. 수온 조절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따뜻하게 맞춰둔 물이 식을 만큼 오랫동안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만큼 이런저런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괜스레 마음이 복잡해져서 물 속에 들어왔고, 생각의 꼬리를 이어나가다가 르메인의 간당간당한 목숨에까지 가 닿은 참이었다. 곧 칼리안은 너무 멀리 가버린 생각을 붙들어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물에 불어 쪼글쪼글하게 주름이 생긴 손 끝을 쳐다보면서, 칼리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맹세의 인을 그렇게 덥썩 받다니.” 안 그래도 고민거리가 산더미다. 조약돌, ‘그들’의 정체, 시간의 축과 세렌티, 란델의 꿍꿍이와 감춰둔 힘, 아이즌의 기사단, 히나가 말한 ‘좋은’의 참뜻, 만약 카밀론에 가게 되면 무슨 개를 키울 지 등등. 그런데 형님놈께서 하나를 더 얹어주고 갔다. 내 아우님께서 어련히 살려두겠지, 라는 태평한 소리나 하면서 말이다. “알아서 해결하게 그냥 둬버릴까보다.” 그러니까 시스파니안. 조금만 덜 사려깊었어야 했다니까요. 심장을 옭죄는 것이면 당연히 축복으로 해결이 되어야죠. 당신이 내린 축복의 힘이, 당신이 만든 맹세의 인에 속박되어 버린다니.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 정말이지.” 옛 칼리안에게 작별을 고한 일로 감상에 젖을 새도 없었다.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태고의 고룡에게 답답함을 토로하며,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일단 계약 조항을 들어보고.” 시스파니안에게 푸념을 해봐야 답이 나올 리 없다. 휴대하기 좋도록 가볍게 개선한 것이 분명한 에반의 머리에서 나온 계약 조항이니, 빠져나갈 구멍은 있을 터였다. 그러므로 그 문제는 일단 조건을 들어본 뒤 다시 고민하기로 했다. 다음으로 떠올린 것은 란델이었다. 르메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지는 모르겠지만, 란델에게 르메인이 큰 영향을 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절대로 르메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 테니까. “세렌티께서는 내가 이 집안의 문제를 다 해결해주기를 원하신 건가.” 이를테면 르메인이 저지른 잘못의 뒷수습 같은. 얼토당토 않은 상상에 피식 웃은 칼리안이 욕조에 머리를 기대고 천장을 쳐다봤다. 그렇게 가만히 물 속에 몸을 누이고 있다가,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또 왔다는 것을 느낀 까닭이다. 사생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저 단호한 목소리에, 잠시 인상을 찌푸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네.” 나오라시는데, 나가야지. * * * 고양이와는 사이가 좋다. 란델과는 사이가 나쁘다. 민트는 싫어한다. 신 것은 못 먹는다. 익히지 않은 양파는 그리 내켜하지 않는다. 고기는 잘 안 먹는 것 같다. 견과류가 들어간 빵은 안 먹는다. 쨈이나 버터에는 손도 안 댄다. 풀을 잘 먹는다. 하얀 빵은 곧잘 먹는다. 계란도 먹는다. 우유는 그럭저럭, 주스는 대체로 다 마신다. 커피는 모르겠고 홍차는 잘 마신다. 입이 험한데 욕은 안한다. 아, 짖는다고는 한다. 눈치가 빠르다. 말 하는 것을 귀찮아 한다. 잘 움직이지 않지만 굼뜬 것은 아니다. 생각이 깊다. 한 번 생각에 빠지면 결론을 낼 때까지 가만히 있는다. 그리고 의외로, 성격이 급하다. 배려심은 고양이한테 다 퍼준 것 같다. “애옹!”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플란츠의 품에서 울음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창문 말고 문으로 들어왔는지 몰라도, 아무튼 고양이까지 데리고 당당히 들어왔다는 소리다. “무슨 일이십니까.” 칼리안이 여전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그대로 둔 채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티를 고스란히 내고 있었다. 물론, 플란츠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계약 내용.” 에반과 맹세의 인을 나눈 계약의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려고 호숫가의 칼리안을 찾아왔고, 그 말을 못해서 다시 방에 찾아왔다는 소리다. 내일 식사 때 말 해도 될 것을 기다리지 않고. 굳이 이 밤중에, 또. 아무튼 플란츠가 꺼내놓는 저 네 글자를 이번에도 찰떡같이 잘 알아들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얘기해주세요.” “브리센을 배반하지 않는다.” 겨우 그것 하나인가? 라는 눈으로 칼리안이 쳐다보니, 플란츠가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오만하니까.” 내가 생각한 ‘배반’의 범위가 여기서부터 여기라면 다른 이들도 그렇게 여기겠지, 라고 믿는 것이다. 자신의 판단이 곧 보편적인 기준이니,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판단을 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라고. “이런 말씀 죄송합니다만.” 너무 멍청합니다. 라는 말을 뒤에 이으려 했는데, 플란츠가 먼저 대답했다. “알아.” “네.” 짧게 대답한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어쩐지 아무리 그래도 맹세의 인을 쉽게 받아들이고 왔더라니. 아마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지 않았다면 에반의 생각은 더 깊었을 터였다. 그랬다면 최소한 세부 조항 하나쯤은 더 만들어 냈을 것이다. 때문에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겠다 말했으리라. 다른 꿍꿍이를 집어넣을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더 할 말이 있는지 묻는 눈빛이었으므로, 플란츠가 말을 이었다. “전하께도 말씀을 드려야 할텐데.” 기사단의 통솔권이 플란츠에게 넘어오기 전에, 그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르메인에게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무슨 짓을 하든 에반이 그 권한을 르메인에게 넘길 일은 없을테니, 차라리 플란츠가 가져온다면 르메인으로서도 더 나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아무 말 없이 진행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내일 형님께서 말씀하세요. 저는 여기서 못 나가니까.” 내일까지, 칼리안의 운신 범위는 체르밀 궁 내였다. 앨런처럼 르메인을 오라가라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거니와, 이번 일의 주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플란츠였으니 르메인을 대면하는 것도 플란츠여야 함이 맞지 않겠는가. 플란츠의 얼굴에 민트차를 마실 때와 비슷한 표정이 떠올랐다. 당연한 일이다. 란델 만큼은 아닐테지만 플란츠 역시 르메인에 대한 골이 남아 있을 테니, 단 둘이 만나는 것이 기꺼울 리 없었다. 곧 플란츠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나왔다. 알았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내일 헤르츠 경을 같이 만났으면 하는데. 이번 일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도 좀 해야 하니까요. 어떠십니까.” 플란츠의 표정에 짜증이 가득 떠올랐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웃었다. 처음으로 플란츠가 제 나이로 보여서였다. “너무 그렇게 싫어하지 마십시오. 알고 보면 재밌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을 보며,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곧 소파에 등을 기댄 플란츠가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은······ 마음이 넓으신 건지, 기억이 짧으신 건지.”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고 플란츠를 쳐다봤다. “참 잘도 받아들이셨군.”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앨런이 없었다면 누가 발칸을 지휘했을지, 그리고 그런 아르센을 누가 막아섰을지를. “그런 것을 기억해두려니, 억울한 것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요.” 이미 억울한 것이 참 많은 얼굴이었으나, 플란츠는 이번에도 그냥 모르는 척 했다. 베른을 넘어선 아르센의 창이 가장 마지막에 누구를 향했을지에 대해서도 모르지 않는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아무래도 내일은, 저만큼 억울한 분 만나러 가봐야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이 손을 들어 위를 가리켜보였다. 홀로 억울한 마음에 텅텅 비어버린 한 사람을 만나보려는 것이다. 플란츠가 말 없이 칼리안을 쳐다보다,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 제24장. 이해의 초석(6) > 커튼 밖에서 작은 발소리가 났다. 시녀들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침실의 두터운 커튼을 걷어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침실로 들어온 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설마 또 밤을 새셨습니까, 왕자님?”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아 손인사를 건네는 칼리안을 본 탓이다. 어지간해선 칼리안이 먼저 일어나 있는 경우가 없었다. 만약 깨어 있다면 대부분 밤을 샜을 때였다. 사실 베른일 때에도 아침 잠이 많았는데, 스승이었던 테일란보다 먼저 나와 준비한 날이 드물 정도였다. 그런데 몸이 바뀌어도 그 버릇만은 고쳐지질 않는 것이다. 어김없이 잔소리를 준비하는 얀을 향해, 칼리안이 얼른 입을 열었다. “좋은 꿈 꿨어?” 저도 모르게 ‘네’ 라고 대답할 뻔한 얀이 입을 꾹 다물자, 칼리안의 눈꼬리가 둥글게 말렸다. “미안.” 에반 브리센 후작이 생각하는 ‘배반’의 범위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일지. 그 수많은 가정에 대한 각각의 해결 방법들을 가늠해보다 그대로 밤을 새웠다. “잠이 안 왔어.” “그래도요. 아직은 잘 쉬셔야 할 때가 아닙니까.” 르메인이 칼리안 안부 묻기를 깜빡 할 만큼 좋아진 혈색은 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눈 앞에서 테라스를 넘어 4층으로 간 것은 진작에 홀랑홀랑 잊어버렸으리라. 그런 얀을 본 칼리안의 입에 소리 없는 웃음이 걸렸다. 결코 싫지 않은 얀의 잔소리와 함께 여유롭게 준비를 끝내고 나온 칼리안이 복도로 나왔다. 당연하겠지만, 고양이 울음소리가 머무는 조용한 방에서 아침을 먹기 위해서였다. 계단으로 향해 가던 중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 식사에 헤르츠 경을 불렀으면 좋겠어.” “네, 헤르츠 부군단장에게 전달해둘게요. 두 분께서 드시는 겁니까?” “아니. 내 형님도.” 그 말을 들은 얀이 저도 모르게 웃는 소리를 냈다. 그것이 어쩐지 기분이 좋아 웃는 느낌이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이 잠시 뒤를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왕자에게 ‘내가 좀 웃기는 했지만 신경은 쓰지 말아주세요’와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을 꺼낼 수 있는 시종은 얀 뿐일 것이다. 물론 시종에게 이런 말을 듣고도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 왕자도 칼리안 외에는 없을 테지만. 아무튼 얀이 웃은 것은 칼리안의 호칭 때문이었다. 작년 초 즈음까지만 해도 칼리안은 플란츠와 란델을 굳이 구분해 부르지 않았었다. 입에 담기 어려워 할 만큼 둘을 무서워했으니, 굳이 말해야 할 때에는 ‘형님들’ 혹은 ‘두 형님’ 정도로만 언급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플란츠’ 라고만 부르던 호칭이 잠시 ‘플란츠 형님’이 되었다가 지금처럼 바뀐 것이다. 분명 플란츠의 ‘내 아우님’ 소리 때문에 저도 모르게 저렇게 말하게 되었을텐데, 그 변화를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여전히 알 수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 터였다. 아무튼 서둘러 웃음을 집어 넣은 얀이 칼리안의 말에 대한 대답을 꺼냈다. “그런 자리면, 식당에서 드시는 것이 낫겠네요. 플란츠 왕자님께서도 그 편이 편하실 테고요. 석찬 준비 해놓도록 일러두겠습니다.” 얀이 이렇게 말하자, 칼리안이 의외라는 눈으로 다시 한 번 얀을 쳐다보며 말했다. “형님이 불편해하든 말든 신경 안 쓸것 같더니.” “왕자님께서 신경을 쓰시니까요.” 플란츠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칼리안이 그렇게나 신경을 써주고 있는데 계속 마뜩찮게 여길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뜻이 담긴 대답이었다. 얀이 플란츠를 완전히 이해해주는 날은 절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칼리안도 알았다. 얀은 플란츠의 옛 모습을 절대로 잊지 않을 테니까. “그래.” 때문에 칼리안은 이렇게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계단에 발을 디디며 통보하듯 말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수련장에 좀 더 오래 있을 거야.” “네? 왕자님 지금······.” 또 한 번 우려 섞인 말을 꺼내려던 얀이 입을 다물었다. - 타박, 타박.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들은 탓이었다. 이미 진작부터 그 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굳이 말을 멈추지 않았던 칼리안이, 그런 얀의 얼굴을 일별한 뒤 계속 계단을 올랐다. 마치 시계바늘처럼 정확한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발소리. 그 주인이 바로 란델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 탁. 칼리안을 마주한 란델의 발이 멈췄다. 그리고 칼리안의 입에는 숨길 생각 없어 보이는 냉소가 자리를 잡았다. ‘어찌나 한결같으신지.’ 딱 두 계단. 칼리안이 밟고 선 곳보다 두 계단 위에서 발이 멈췄기 때문이다. “얀.” “네. 왕자님.” “내 형님께, 전해.” 칼리안의 발이 계단을 밟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두 계단을 더 올라가 란델과 나란히 선 칼리안이, 란델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오늘 식사 같이 못하겠다고.” 란델을 향한 인사보다 플란츠에 대한 전언 먼저. ‘계단 두 칸’에 대한 칼리안의 화답이었다. 이해를 해 보겠다 했지, 져 주겠다고는 안 했다. * * *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크림 스프, 모락모락 김이 나는 흰 빵, 넘칠 듯한 샐러드, 삶은 계란과 구운 콩, 향신료 없이 소금으로만 간을 한 훈제 햄, 몽글몽글하게 잘 구운 양파, 토마토 주스. 그야말로, ‘싫어하는 것은 다 뺐으니 팍팍 먹고 운동해라’ 식단인 것이다. 사용하는 검술이 다른 만큼 칼리안보다 근력을 더 많이 써야 하는데 음식만 앞에 두면 깨작거리고 있으니, 그것이 꼴 보기 싫다는 뜻이리라. “······ 검을 괜히 받았군.” 지나치게 좋은 검을 선뜻 주면서 사람 좋게 굴 때 알아봤어야 했다. 놈이라면, 분명히 이런 상황을 계획하고 있었으리라. 좋은 검을 받았으면 좋은 검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일 테지. “니아아, 애옹!” 느지막이 일어난 친구를 반기듯,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플란츠의 발목 언저리에 제 몸을 부대끼며 맴돌길 반복했다. 그런 고양이를 안아 든 플란츠가, 시종 레릭이 내려놓은 말린 닭고기를 들어 고양이에게 건넸다. 그 사이 레릭은 얀으로부터 전달된 내용을 플란츠에게 알렸다. “칼리안 왕자님께서는 오늘 불참하신다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테이블을 다시 쳐다봤다. 스프도 두 개, 주스도 두 개, 접시도 두 개. 미리 알리지 못하고 식사를 준비시킬 만큼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란델 형님이라도 만났나.” 그 정도 일이 아니고서는 식사를 거를 칼리안이 아니지 않나. 근육이 타들어갈 정도로 빠른 속도를 내는 검술, 그리고 오러를 숨기기 위해 언제나 유지하고 있는 4서클의 마법. 안 그래도 빨리 크겠다며 잘 먹던 칼리안이다. 거기에 이 두 가지가 덧붙었으니, 칼리안이 소비하는 에너지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먹어대면서도 근육이 붙기는 커녕 살도 안 찌는 것이다. 플란츠도 그것을 알았다. 덕분에 칼리안이 불참하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가늠해 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침실로 발을 옮겼다. “식사를 거르시려는 겁니까?” “이따가.” 거를 생각이라기 보다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조금 더 자려는 심산이었다. 칼리안만 밤새 고민했던 것은 아니니까. 그런 플란츠를 레릭이 다급히 붙들었다. “밖에 칼리안 왕자님의 그 시종이 기다리는 중입니다. 조금 더 쉬시겠다면, 잠시 후에 찾아오도록 물릴까요?” 그 호위 시종 말입니다. 이렇게 입모양으로 이어지는 말에, 플란츠가 짜증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오후에 르메인을 만나러 아르피아 궁에 갈 생각이었으니 오전에 검술 수련을 하겠다 했었다. 때문에 벌써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생각보다 약하시다더니. 어제 저녁, 플란츠와 검을 맞대 본 키리에는 저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키리에는 말 수가 적었다. 플란츠만큼 적었다. 뒷말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애석하게도 플란츠 역시 말을 귀찮아하는 타입이었다. 때문에 물어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것이 ‘그래도 예상보다는 강하시군요’ 따위는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도 했고. “둬.” 키리에를 보내지 말고 그냥 두라는 소리다. 칼리안이나 플란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리에를 떠올려보던 플란츠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입에 거슬리는 것 하나 없는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동생 놈의 시종에게까지 계속 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 * - 텐실의 마차 축이 부러진 것은 사고가 아닐 것이다. 만약 체이스가 전해달라 했던 이 말을 칼리안이 이미 알고 있었다면, 란델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쯤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몰랐고, 그래서 란델을 대하는 칼리안의 모습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제 밑으로 안 들어오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에 카밀론에서 개 키우겠다 했던 그때와 똑같았다. 굳이 두 계단을 더 올라온 뒤 플란츠를 먼저 입에 담았다. 그 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태도로 예를 보였다. 그런 칼리안을 잠시 쳐다보던 란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따라오거라.” 어차피 이야기를 나눌 참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그 길로 란델의 뒤를 따라 장미 정원으로 갔다. 흔들림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란델의 뒷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잠시 기억을 떠올렸다. ‘텐실의 왕이 된 뒤 어땠더라.’ 열심히 머리를 써봐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텐실이었기 때문이다. 세크리티아와 텐실은 완벽한 적대 관계였다. 서로 이를 드러내고 지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항상 그랬다. 당장 둘 사이에 언제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 없다고, 늘 그렇게 여겨왔다. 하나의 기원, 두 개의 국가. 그것이 바로 세크리티아와 텐실이었으니까. 과거 양신 전쟁을 승리로 이끈 8명의 영웅 중, 초대왕 하츠아라와 고룡 시스파니안, 그리고 시스파니안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기사 퀴트로스 혼 지그프리드. 이들이 세운 나라가 바로 카이리스다. 그런데 이들보다 앞서 나라를 세운 이가 한 명 있었다. 세렌티를 모셨던 마지막 신관. 바로, 세크리티아 대왕이다. - 이름 없는 왕. 카이리스보다 3년 먼저 세크리티아라는 나라를 세운 그녀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죽었다. 무슨 이유였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오로지 ‘세크리티아 대왕’이라고만 알려진 이름 없는 왕이 세운 세크리티아는, 처음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카이리스에서 시스파니안이 종적을 감췄을 그 무렵, 세크리티아의 신관들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었다. 세크리티아 왕실에서 신물을 이용한 치유술의 이용을 허락하지 않아서였다. 때문에 일어난 반란이었고 세크리티아는 군사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렇게, 반란은 독립이 되었다. 그것이 텐실이다. 이런 이유로 세크리티아와 텐실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작을 관리하던’ 베른이 텐실에 대한 정보에 어두운 것은, 베른이 왕제였기 때문이었다. 텐실에 대한 정보는 국왕인 데블란과 체이스가 직접 관리했으니까. “괜찮은지 정도는 물어보실 줄 알았는데요.” 때문에 란델이 어찌 되는지 알지 못하는 칼리안이, 이제 벌어지기 시작한 붉은 꽃봉오리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기껏 따라오라 말한 란델이 아무 말 없이 장미 손질을 시작한 까닭이다. 란델은 뒤에서 들려온 칼리안의 목소리에 잠시 손을 멈추고 있다가 대답했다. “네가 그 정도에 당할 아이더냐.” ······ 역시 내 걱정 해 주는 건 얀 뿐이야. 죽을 뻔 했다는데, 르메인은 밥 잘먹는다고 안심하고 란델은 아예 걱정도 안했다는 투다. 칼리안이 짐짓 농담인 것처럼 대꾸했다. “늑대 아가리가 생각보다 커서요.” 아가리. 란델의 손이 다시 한 번 멈췄다. 란델의 앞에서 누군가 이런 표현을 꺼낸 것이 아마 처음일 터였다. 잠시 칼리안이 꺼낸 말의 의미를 새겨보던 란델은, 말투를 지적하는 대신 몸을 돌려 칼리안을 마주 보고 섰다. “늑대라니.” 텐실과 늑대가 손을 잡은 것은 란델도 안다. 칼리안을 공격한 것이 늑대들이었음을, 란델은 모른다. 칼리안과 플란츠가 그 난리를 피우는 사이, 벌을 받는다는 이유로 체르밀 궁 안에 들어앉은 채 태평하게 책이나 보고 지냈을 란델에 대한 억울한 마음.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다른 이의 손을 빌어 제 동생을 해치려 할 놈은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음에 대한 안도의 마음. 딱 그렇게 반반 나뉜 마음이 들었다. 그 묘한 마음을 그대로 담은 칼리안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형님께서도 모르시는군요. 그들이 누군지.” 란델은 대답 없이 칼리안을 들여다봤다.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시선을 거부했다. 칼리안이 손을 뻗어 방금 전까지 란델이 살피던 장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 끝에 오러의 힘을 담은 채였다. “저 좀 보시죠.” 손가락에 스친 장미가 툭, 하고 부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을 본 란델의 눈에 아주 잠시 감정이 스쳤다. 그런 란델을 향해 칼리안이 냉랭한 목소리를 냈다. “이거. 말고.” 다시 말하지만. 이해를 해보겠다 했지 져 주겠다고는 안했다. < [외전] 키리에 > - 내가 아직 말을 안했던가? -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 네 이름의 뜻. 여기서는 꽤 그럴듯한 의미가 있거든. * * * 툭, 툭. 한낮의 볕에 적당히 마른 흙 위로 짙은 점이 하나 둘 생겨났다. 코 끝과 이마에 툭 하고 떨어져 닿은 물방울들은 이내 비가 되었다. 적당히 마른 흙에서 적당히 기분 좋은 비 비린내가 풍겨나오다 곧 흩어졌다. 비가 오기 시작했음을 진작부터 알았지만, 굳이 손을 뒤집으며 하늘을 쳐다본다. 여지없이 툭 하고 떨어진 물방울이 손바닥 위에 얌전히 자리를 잡았다. “아침에는 그렇게 맑더니. 이상하구나.” “제가 그랬잖습니까. 비가 올 것 같았다니까요.” 핀잔과 놀림이 조금씩 섞인 말을 꺼내든 베른이 씩 웃었다. 그리고는 체이스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내기에서 졌으니, 걸었던 돈을 달라는 뜻이다. 그 의기양양한 웃음을 본 체이스가 마주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없으니 들어가서 주마.” “또 잊어버렸다 하시려고요.” “내가 언제 그런 것을 잊은 적이 있었느냐?” “네. 많이요.” 또 티격태격. 이 형제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키리에가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일은, 뜬금없이 건네진 베른의 한마디 말에서부터 시작됐다. ‘형님. 오늘 비가 올까요?’ 아침에 체이스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물어오는 베른을 향해, 체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비가 오지 않을 것 같다’는 대답을 했다. 그러자 베른은 곧바로 내기를 하자 말했다. 베른이 걸어오는 내기는 한 번도 사양한 적 없었으므로, 체이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베른이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잘 봐둬. 형님께서 분명히 비가 안 온다 하셨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기사 베른이 아닌 왕제 베른에게 충성 서약을 한 유일한 기사, 키리에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베른이 먼저 내기를 제안하고 체이스가 받아들이면, 키리에가 증인이 됐다. 그렇게 내기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이렇게 투닥거리며 끝났다. “나는 네게 줄 돈을 잊어버린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그런 말씀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시죠.” 아마 귀족들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터였다. 그 왕제 베른이 고작 은화 한 개를 가지고 국왕 체이스에게 툴툴거리는 소리를 하고 있으리라고는. 그런 형제의 모습을 보는 키리에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한 명은 국왕이었고 한 명은 왕제였으나, 그들은 그저 형제였으니까. 그것이 보기에 좋아서였다. 그들이 왕과 왕제가 아니었을 때. 그래. 키리에가 그들을 처음 만났던 그 날에도 둘의 모습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었다. 특히 베른은, 지금과 완전히 똑같았다. 지금에 비해 입이 조금 더 거칠고 눈빛이 조금 더 사나웠지만 아무튼 똑같았다. 적어도 키리에가 보기에는 그랬다. * * * 베른을 처음 만났을 그때. 텐실에는 큰 홍수가 났었다. 이제 막 봄이 오는 시기에 일어난 재해였다. 밀은 넉넉했고 소금이 부족했다. 귀족들을 위한 밀은 본래 비쌌다. 소금은 더 비쌌다. 밀과 소금을 구하지 못할 가난한 이들의 몸은 썩어들어갔다. 그것을 버티지 못한 이들은, 국경을 넘었다. 병력이 넘쳐나는 카이리스보다는 세크리티아에 숨어드는 것이 나았다. 적어도 세크리티아는, 난민을 무조건 사형시키진 않았으니까. 물론 그것은 난민들의 사정이었다. 세크리티아에서는 국경을 넘어오는 이들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전염병을 옮겨올 수 있었고 범죄가 늘어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들의 정착을 전부 지원해주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어찌하라 하십니까?” 귀족들이나 데블란이 앞에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베른은 데블란을 꼭 ‘아버지’라 불렀다. 친근해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인륜을 배반할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어서였다. 그만큼 데블란을 증오했다. 그런 베른을 모르는 것이 아니면서도, 체이스는 그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데블란과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던 탓도 있었고 베른의 성정을 잘 알았던 까닭이기도 했다. “살펴보고 결정하자꾸나.” 직접 살펴보고 직접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데블란이 난민에 대한 문제를 체이스에게 일임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데블란이 수백, 혹은 그 이상에 이를지 모를 난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이제 막 열 아홉이 된 왕세자에게 넘긴 것이다. 그로 인해 텐실과 세크리티아의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는 상태로. “저는 호위나 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베른이 슬쩍 웃었다. 데블란이 왕세자에게 내어 준 첫 시험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살펴보고 결정하자’며 베른과 함께 문제를 풀 의중을 보였던 체이스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국경을 넘어서다 붙들린 이들이 있는 곳에 왕세자와 왕자가 발을 디뎠다. 천막 하나 없는 너른 공터에 모여있는 난민의 수는 딱 생각한 만큼 많았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그들을 쭉 둘러보던 베른의 눈이 한 곳에서 멈췄다. 연보랏빛의 날카로운 눈이, 수많은 난민 사이에 섞여 있는 한 명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저거.” 체이스가 낸 문제를 마주했을 때. 상대하기 버거운 적을 만났을 때. 죽여버려야 할 세력을 찾았을 때. 등등. 그것이 무엇이든 흥미가 동하는 무언가를 앞에 대했을 때 짓곤 하던 표정이 베른의 얼굴에 떠올랐다. “난민 아닌데.” 물빛 머리의 소년을 보며, 베른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 * * 체이스보다 한 살이 어렸다. 그러니 베른보다는 한 살이 많았다. 물론 그들은 왕족이었으니 나이 차이 따위가 사람의 위 아래를 바꿔놓지는 않았다. “열 여덟이라고.” 베른의 연보랏빛 눈에 짙은 호기심이 돌았다. 왜 텐실의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을까. 왜 세크리티아로 오려 했을까. 왜 카이리스를 떠나왔을까. 고작 열 여덟인데 왜. 저렇게 짙은 피냄새를 풍길까. 나 만큼. “그렇습니다.” 생명을 담지 않은 것 같은, 서로 다른 두 색의 눈동자가 베른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해서 베른은 다시 한 번 웃었다. - 이 새끼 눈이, 돌았는데. 그것도, 나 만큼. 그것이 키리에에 대한 베른의 첫 인상이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고, 훗날 언젠가의 술 취한 베른이 그렇게 말했었다. 눈이 돌아 있어서. “칼 쓰나? 아니면 주먹 쓰나.” “다 씁니다.” “그래.” 그 말과 동시에 은색의 긴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와 키리에의 앞에 던져졌다. 베른의 검이었다. 키리에가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려니 베른의 입이 열렸다. “써 봐.” 주변의 기사들이 잠시 긴장하는 눈빛을 했다. 베른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난민 앞에서 어린 소년을 베어 죽일 셈인가, 하는 눈빛이었다. 그런 기사들을 슥 훑은 베른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 새끼, 이런 데서 죽을 새끼 아니야.” - 타앗!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베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키리에의 몸이 벼락같이 움직였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그대로 베른을 향해 내지른 것이다. 베른이 제 자리에 선 채로 몸을 틀었다. 맥락 없이 곁눈질로 배운 검은 베른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그리고 베른은, 오러도 두르지 않은 발을 내밀어 그대로 키리에를 걷어찼다. - 쿠당탕! 그리고는, “거봐.” 하고. 멀찍이 나가 떨어진 키리에를 향해 씩 웃었다. * * * “이름.” “키리에입니다.” 그 말을 들은 베른이 피식 웃었다. “이름 한 번 거창하네.” 키리에는 베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었다. 더는 무릎 꿇리지 말라는 베른의 명 때문이었다. 왕자를 공격하려 했음에도 체포되지 않았다. 베른은 키리에에게 씻을 물을 내어주고, 새 옷을 주고, 밥을 먹였다. 그리고 이렇게 마주앉아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 참이었다. 분명 씻고 나온 꼴은 맞았다. 그럼에도 풀풀 풍겨오는 피비린내가 가시질 않았다. 기사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약했으나 베른에게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베른은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카이리스를 왜 도망쳤는지도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입에 올렸다. “키리에. 기사가 되고 싶은가?” 서로 다른 색의 두 눈. 키리에의 두 눈이 처음으로 생기를 찾았다. 어쩌면 열망이라 불러야 할. “검입니다.” 검이라. 베른의 눈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키리에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데블란마저 마주보기를 꺼려하는 살기어린 눈동자를 앞에 둔 채, 키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검이 될 것입니다.” 그 검이 사람을 베는 검일지, 사람을 지키는 검일지. 이런 고리타분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베른은 그런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좋아.” 해봐, 하는 말과 함께 베른이 씩 웃었다. “내가 만들어주지.” * * * - 안 궁금해? 네 이름 무슨 뜻인지. - 궁금합니다. - 안 가르쳐 줄 건데. 평생. - ······ 왜 안 알려 주십니까. - 그럴듯 하다고 했지 좋다고는 안 했어. - 네. - 뭐야. 뭐가 안 좋은지는 안 궁금해? - 어차피 그런 것은 하나도 안 맞습니다. - 그런가. 그럼 내 이름도 안 맞으려나. * * * “또 내기를 하셨습니까.” “아아.” 얼마 전에는 비가 올지 오지 않을지를 두고 내기를 하시더니. 하고, 조금쯤 타박하는 말투의 키리에를 향해 베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것은 좀 장기적인 내기였어. 한 3년쯤 전에 했나.” 조금 장기적인 내기여서 내깃돈도 컸던 모양이다. 뿌듯한 얼굴로 체이스에게 받아낸 금화 한 개를 튕기며, 베른이 웃었다. “공돈 생겼다. 술 먹으러 가자.” 베른은, 유일하게 키리에에게만 왕자 시절의 말투를 그대로 썼다. 그리고 술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그러면서도 늘 ‘나보단 네가 더 술을 좋아하지.’ 하고 키리에 핑계를 댔다. 술집은 잘 안 갔다. 베른이 술집 문을 열고 들어서면 술집 공기가 딱딱하게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런 역할을 자처했으니 어쩔 수 있겠냐만은, 술에 취한 베른은 그런 분위기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술에 취한 베른은 그렇게 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베른의 진짜 모습임을, 함께 취했던 키리에만 알았다. 왕궁의 주류 창고에서 온갖 술을 죄 꺼낸 뒤 빈 자리에 금화 하나를 올려 둔 베른이 씩 웃었다. “이 정도만 꺼내면 형님께 안 혼나겠지.” 그리고는 왕궁 첨탑 꼭대기로 올라갔다. 세크리티아의 수도 세크레타. 그곳은, 온 세크레타가 전부 보이는 유일한 곳이었다. 베른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그런 곳에 올라간 뒤, 취하도록 술을 퍼마셨다. 종류도 따지지 않았다. 안주 같은 것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좋아서 마시고 기분이 나빠서 마셨다. 취기를 흩어낼 수 있으면서도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머리 꼭대기까지 술에 취해서는, 항상 키리에의 등에 업혀 첨탑을 내려왔다. “무슨 내기 했는지 안 궁금해?” 키리에의 등에 업힌 채, 혀 꼬인 발음으로 베른이 물었다. “궁금합니다.” “그럼 물어봐야지.” 키리에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먼저 묻는 법이 잘 없었다. 베른은 늘 그것이 답답하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했다. 물론 티는 내지 않았다. “무슨 내기를 하셨습니까.” “네 키가 얼마나 자랄지.” 형님의 집무실 문을 지날 때 네가 고개를 숙여야 할 만큼 키가 자랄지, 그렇지 않을지.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까 네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더라고. 그래서 내가 이겼지. 이렇게 중얼거리는 말에, 키리에가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일국의 국왕과 왕제가, 비가 올까 오지 않을까 하며 은화 한 개를 걸고. 수하의 키가 얼마나 클까 하며 금화 한 개를 걸고. 그런 내기를 하다 결국은 티격태격 해버리는 곳. 세크리티아는 그런 곳이었다. 언제까지고 그런 곳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 * * 마지막 날. 베른이 그리도 좋아했던 첨탑 위에서. ‘··· 키리에.’ 체이스가 흘려보낸 말은. 어느 누군가의 이름이었으나 그 누군가의 이름인 것만은 아니었다. 키리에, 그것은. 잠든 신의 자비를 청하는, 세렌티를 향한 기도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 * * 잊혀지지 않을 영웅. 이 세크리티아의 마지막 영웅. 체이스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영웅. 모든 것을 포기했던 키리에에게 생을 준 영웅. 베른. 왕의 곁을 지켜야 할 베른이 성문을 나섰다. 이미 늦었음을 안다. 베른을 포함한 모두가 알았다. 알면서도 검을 쥐었다. 알았기 때문에 검을 쥐었다. 그들은 모두, 왕의 검이었으니. - 플란츠 루 룬 카이리스가 시간의 축을 요구했다. - 세크리티아는 거절했다. 갑작스러운 전쟁 앞에서 세크리티아는 강인했으며 나약했다. 저들이 내세운 마법사들, 그 새하얀 악마들의 손길 앞에 마지막까지 제 목숨을 불태웠다. 불길이 치솟은 몸뚱이로 마법사를 끌어안고 죽었다. 지옥. 그래.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 곳이리라. 플란츠의 발칸은 세크리티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국왕과 왕제가 은화 한 닢을 두고 내기를 하던 세크리티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테일란이 죽었다 했다. 베른은 울지 않았다. “멈추지······ 마십시오.” 울며 막아서는 체이스를 밀어내고 성문 앞에 나섰다. 베른은 울지 않았다. “보은을······.” 마흔 여덟의 기사가 앞서 죽어나갔다. 베른은 울지 않았다. “······ 고작 이것 뿐이지만······.” 베른은 오열했다. 제 앞을 막아서고 화살에 꿰여 죽어가는 키리에를 보며 울었다. 이제 막 검의 길에 들어서려던 그 웃음이 떠올라서 울었다. 내기 좀 그만하라며 정색하던 얼굴이 우스워서 울었다. 술에 취한 베른을 업고 내려오려 항상 남겨두었던 마지막 잔이 생각나서 울었다. 제 여동생을 보고싶어 하던 눈이 안타까워 울었다. 고작 이렇게 가려고. 이렇게 가려고. 충성이랍시고 바쳐진 그 목숨이 아까워 울었다. 그 목숨이 서러워 울었다. 이것이 모두의 마지막임을 알아서 울었다. * * * 그러니 세렌티시여. 부디 자비를 내리소서. 나의 생을 다하여 보은할지니. [키리에] < 제24장. 이해의 초석(7) > 서류 너머로 들리던 르메인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독이 든 차 때문에 죽어가는 몸을 추스르며 앨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왕자의 정복을 처음 입은 날이기도 했다. 플란츠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이지 않기 위해,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심장이 뜯겨나가는 기분을 참아내며 버티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르메인과 플란츠를 살려놓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쓰게 되리라는 것을, 그 때의 칼리안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때문에 한 번 이해를 해보려는 것이었다. 란델도.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지 몰라도 나중에는 란델을 살려놓으려 애를 쓰게 될까봐서. ‘내가 이러는 것을 아시면 체이스 왕세자께서 꽤 놀라실 것 같은데.’ 문득 떠오른 이런 생각에, 칼리안이 쓰게 웃었다. 말보다 검이 빨랐던 베른이 아니던가. 물론 그 때와 지금의 상황이 판이하게 다르다지만 이렇게까지 오지랖을 부리게 될 줄이야. “조금 걱정했는데 그래도 다행입니다.” 칼리안이 이렇게 말을 건넸다. 스치듯 지나간 분노의 감정을 어느새 사그라뜨린 푸른 눈을 향해서였다. 장미를 건드렸을 때조차 란델의 표정이 바뀌지 않을까봐 걱정했었다. 그래도 그 정도로 늦지는 않았다니 다행한 일이다. “아끼시는 것이 있는 듯 하니.” 이렇게 말하는 칼리안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잘려 떨어진 장미를 가리키고 있었다. 굳이 이렇게 고약하게 구는 것은, 분노하는 것이 가장 쉽기 때문이었다. 감춰 둔 감정 중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이 분노임을 베른의 삶을 겪으면서 배우지 않았던가. 르메인을 만나고 온 뒤 왕자의 정복도 벗지 않은 채로 장미 나무를 손질하던 란델이다. 갈피를 잡지 못할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가장 먼저 찾은 것이 장미라면, 그것을 건드려 란델의 속내를 끄집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혹시 그것을 빼앗으면 화를 내지 않을까. 화를 내면 말이 통하지 않을까, 하고. “이유가 무엇이냐.” 란델이 이렇게 물었다. 왜 장미를 꺾어냈는지를 묻는 것은 아닐 터였다. 이렇게까지 해가며 란델과 마주 보려는 이유가 궁금한 것이겠지. “궁금해서요. 무엇을 알고 계시는지. 또 무엇을 숨기고 계시는지.” 가벼운 어투로 답한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대화라는 것을 한 번 주고 받아 보고 싶은데.” 대화를 하고, 란델이 숨긴 것이 힘이든 혹은 속마음이든. 이제는 좀 들춰봐야 하겠다고. 칼리안이 그렇게 말했다. “대화를 하자는 것이냐. 나와, 네가.” “어렵겠습니까.” 욕심내고 협박하고 그런 어려운 것 말고, 얘기나 잠깐 하자는 말. 란델의 시선이 잠시 칼리안의 손 끝을 따라 내려갔다. 그 끝에 떨어져 있던 장미를 한참 쳐다보던 란델이 입을 열었다. “또 그리하지는 말거라.” 그것이 대화의 시작이었다. 같은 것을 잠시 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벗어난 장미는 전부 잘라내시면서, 벗어나지 않은 것은 그렇게 아까우십니까.” 어디에 피었든 어차피 다 같은 장미인데요. 칼리안이 이렇게 묻는 눈으로 란델을 쳐다봤다. “쓸모가 없어지지 않았느냐.” 그 말에, 칼리안이 다시 한번 웃는 얼굴을 했다. 베른도 란델과 마찬가지로 가지치기를 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지치기에 쓰였다 해야겠지만. 데블란에게 해가 될 이들의 생명을 수도 없이 끊어냈다. 나이 성별 상관 없이 모두 끊었다. 물론 체이스는 모르는 일이다. 그것이 장미 나무가 아닌, 정말로 생명을 가졌고 피를 뿜어대는 사람이었을 뿐. 베른이 했던 일도 어찌됐건 가지치기에 속했다. 원해서 했던 적도 있고 그렇지 않았던 적도 있지만, 어차피 그것은 지금 중요한 일이 아니니. 아무튼 같은 짓을 해 봤으니 저 말이 조금 이해가 된다. “쓸모는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장미를 주워 들었다. 그 칙칙한 방에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사실 장미라면 조금 신물이 나기도 하지만, 아무튼 물에 꽂아 두면 필 테니까. “지금 제가 란델 형님의 쓸모를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말한 칼리안의 눈에 잠시 날이 섰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껏 대화의 우위는 항상 란델이 가져갔다. 칼리안을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 했으니까. 때문에 이번에는 칼리안이 위에 서야 했다. 란델이 웃었다. 칼리안은 검을 꺼내지 않았다. 지난 번의 그 때만큼 감정이 없던 것은 맞았으나, 한 번 겪고 나니 좀 익숙해졌다. 때문에 칼리안이 마주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형님의 힘, 무엇입니까.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란델의 웃음이 그쳤다. 그리고 답했다. “너무 미약하여 느끼지 못하는 것이더냐.” 그렇게 말하는 란델의 목소리에 두 번째의 감정이 들어섰다. 그것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아마 ‘아쉬움’ 정도가 되지 않을까. 란델의 얼굴에 스치듯 나타난 그 의외의 감정을 보던 칼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그 뒤 잠시동안 란델을 살피던 칼리안의 입가에 긴 호선이 그려졌다. “······ 빌어먹을.” 그려내듯 만들어진 웃음과 어울리지 않을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오늘만 두 번째로 막말을 꺼내놓는 막내를 보면서, 란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맹세의 인.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언젠가의 약속. 그 약속의 힘이 심장을 묶고 있음을 이제야 눈치챈 것에 대해서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텐실입니까.” “그래.”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말씀 못하십니까.” “그래.” 맹세의 인을 나눴다는 말조차 먼저 꺼낼 수 없을 계약. 에반 브리센 후작보다는 똑똑한 것 같은 누군가와 아주 자세한 계약을 했다는 말이다. 텐실은 란델에게 힘을 주고, 아마도 란델은 그런 텐실을 돕고.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칼리안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둘째 형이 덥썩 받아 온 속박도 머리가 아픈데, 첫째 형까지 난리다. 다시 한참동안 란델을 보던 칼리안이 물었다. “브리센 때문입니까.” 신성기사로 하여금 브리센을 공격하려 했었으니 묻는 말이었다. 혹시라도 란델이 브리센을 없애기 위해 계약을 한 것인지를 묻는 소리이기도 했다. 만약 그렇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칼리안은 지금 브리센을 살려놓으려 하고 있었으니까. 란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온갖 것이 뒤섞인 감정의 흔적이 그 얼굴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설마.” 그 원한의 끝이 르메인에게도 닿아 있었느냐고. 그것을 위해 텐실과 맹세의 인을 나누고 칼리안의 검을 필요로 했느냐고. 똑같이, 어미를 잃었으니까. “맞습니까. 제 생각.” 란델은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심연 가득한 푸른 눈이, 생명인지 죽음인지 알 수 없을 붉은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피곤하구나.”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한 뒤, 그 길로 체르밀을 향해 걸어갔다. 그 걸음을 좇던 칼리안의 시선 끝에 길고 긴 한숨이 매달렸다. * * * 이거. 아무래도. 플란츠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검을 맞대고 있는 키리에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 까닭이다. 애석하다 여겨야 할지 아니면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몰라도, 아무튼 그 심상치 않은 기운이 오러는 아니었다. 그렇다 해서 투기도 아니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자신을 내리누르는 키리에의 검을 힘 주어 올려 친 플란츠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만.” 잠시 말 없이 그런 플란츠를 쳐다보던 키리에가 검을 거둬들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것은 살기였다. 저도 모르게 살기를 보낸 키리에를 가만히 쳐다보던 플란츠가 검을 집어넣었다. 대련이 너무 길었다. 플란츠는 키리에의 움직임을 읽고 다음을 예측하는 것이 빨랐고, 키리에는 일반적인 감각을 뛰어넘어 플란츠의 검을 짚어 낼 수 있었다. 실전에서야 키리에를 이길 수 없을 테지만 키리에가 몇 수를 접고 벌이는 대련이었으니 검을 마주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그러다, 키리에로부터 살기가 흘러나왔다. 대련에 심취한 키리에가 자신을 정말로 죽이려 들었던 이유를 플란츠가 눈치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키리에도 분명 칼리안의 과거를 알고 있는 것이리라. “됐어.” 때문에 이런 말로 적당히 대답한 플란츠는, 잠시 입을 다문 채 키리에의 두 눈을 응시했다. 무슨 관계였을까. 이것을 가늠해볼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특별히 의식해서 떠올렸다기 보다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 거기까지만 생각하십시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목소리에, 플란츠는 생각을 접고 한 발을 더 뒤로 물렸다. 그런 플란츠의 행동을 보던 키리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분간 대련은 왕자님과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게 될까 우려하는 듯 보였으므로 플란츠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키리에가 말을 이었다. “왕자님께서는 플란츠 왕자님을 탓하지 않고 계십니다. 오해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였다. 플란츠에게 말을 하는 것인지, 플란츠에게 살기를 내비친 스스로를 다스리려 하는 것인지.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내 아우님이 나를 탓하지 않는 건 나도 아는데.” 조금 전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살기등등한 검을 떠올린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작 너는 아니군.” 키리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귀가 밝습니다. 제가 아는 것을 왕자님께서는 모르십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칼리안은 키리에에게 플란츠와 관련된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칼리안이 플란츠와 대화를 나눴던 날이 많았고, 키리에가 밖에서 다 들었을 뿐. 플란츠가 실소했다. 자의였든 타의였든. 칼리안이 자신의 비밀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흘리고 다닌 건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체이스를 마주했을 때 생각한 것처럼 정말로 비밀을 모르는 이들을 세는 것이 빠를 지경이 아닌가. “할 생각이면 지금 해.” 복수. 이번에는 절대로 칼을 막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표정을 한 채로 플란츠가 말했다. 그것을 본 키리에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자님께서 원하실 때 하겠습니다.” 칼리안이 원한다면 그 때 하겠다는 소리였다. 키리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답이었으므로, 플란츠의 입가에 다시 한번 비웃음이 걸렸다. “그러던지.” 그리고는 수련장 한 가운데 키리에를 남겨 둔 채 미련 없이 밖으로 나갔다. * * * 기사들이 칼리안의 앞을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체르밀 궁의 정문을 지키는 기사들이었다. 칼리안의 앞을 꼿꼿하게 막아선 채로, 한 명의 기사가 입을 열었다. “오늘까지는 이 곳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란델이 체르밀 궁으로 들어간 뒤. 한참동안 가만히 서 있던 칼리안이 장미 정원에서 나와 향한 곳은, 체르밀 궁이 아닌 정문이었다. 체르밀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당황한 얀이 빠르게 뒤로 따라 붙었으나 칼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화가 났거나 당황했거나 놀란 표정을 한 것이 아니라, 생각에 깊이 빠진 얼굴이라는 것을 얀이 알아봤다. 때문에 얀은 일단 아무 말 없이 칼리안의 뒤를 따라왔다. “나가야 해.”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고, 기사들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막아. 그럼.” 막을 수 있겠으면. 그런 의미가 담긴 칼리안의 눈에 미약한 살기가 어렸다. 다행인 것은, 칼리안을 마주한 기사들이 주춤거리거나 뒤로 물러서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대신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가려던 것을 가까스로 멈춰야 했다. “전하께는 내가 말씀 드릴테니까. 비켜.”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한 발자국을 더 움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이 움직이지 않자, 뒤에 있던 얀이 입을 열었다. "왕궁 밖으로는 나가시지 않게 할 테니, 비켜주세요.” 그리고는 칼리안의 뒤에 선 채로 자신의 머리 위에 손가락 뿔을 만들어 보였다. 우리 꽃 같은 왕자님이 심기가 많이 불편하시니, 사달 나기 전에 적당히 비켜달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본 뒤에야, 어쩔 수 없다는 듯 기사들이 양 옆으로 비켜섰다. “고마워. 미안.” 그들을 향해 짧은 말을 남긴 칼리안이 다시 서둘러 발을 옮겼다. “왕자님, 마나실 백작에게 가시는 겁니까?” 이제야 비로소 칼리안의 행선지를 묻는 얀의 목소리에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한 속도로 발을 재촉하는 그의 뒤로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루비아 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 별관에 머물고 있는 체이스를 만나려는 것이다. < 제24장. 이해의 초석(8) > 주변의 시종들과 시녀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흐트러짐 없으나 빠른 걸음으로 루비아의 별관에 들어선 칼리안이 잠시 발을 멈췄다.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크기를 늘려가는 사념 때문에, 제자리에 선 칼리안이 잠시 이마를 짚었다. 루비아 본관에서 기다리도록 얀을 떼어둔 것이 다행이었다. 발을 놀리려니 머리가 빙글거리고, 머리를 움직이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끌어안고 있던 짐은 가문비나무 앞에 전부 내려뒀다. 그 날 내려놓은 짐의 무게만큼 숨이 찼다. 너무 미안해서. ‘정신차리자.’ 바로 전날 옛 칼리안에게 ‘나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마치 ‘어디 한번 살아봐라’ 라는 대답을 전하듯 이렇게 또 하나의 숙제가 쌓였다. 란델이 지닌 붉은 빛의 힘. 그것을 알아내야 했다. 란델의 입을 열어 퍼즐 조각을 얻어 내야 했다. 란델의 입을 열려면 속박을 풀어야 했다. 머릿속이 꼬이고 꼬여서 풀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이 곳에 왔다. 체이스에게로. “하.” 만나야지. 어디 한번 살아보라 하는데, 살아야 하지 않겠나. 이마에 가져갔던 손을 떼고 다시 발을 옮겼다. 더 멈추지 않고 그 길로 체이스가 머문다 했던 곳까지 왔다.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사 테일란은 아마 방 안에 있거나 혹은 없는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한 칼리안이 하얗게 변해 있던 손을 들었다. 칼리안의 몸을 얻은 뒤 단 한번도 해본 적 없는 ‘노크’라는 것을 하기 위해서였다. “들어오세요.” 그런데, 칼리안의 손 끝이 문에 닿기도 전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리안 왕자.” 이번에도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었음에 실소한 칼리안이, 짧은 숨과 함께 문을 열었다.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닫혔다. 기사 테일란은 안에 없었다. 체이스만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호위를 물리고 계시면 어떡합니까.” 이 곳에 오는 동안 마주친 것은 오로지 카이리스 왕궁의 사람들 뿐이었다. 이 별관에 머무는 것이 체이스 외에는 없다지만 호위 하나 없이 혼자 있다니,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창가에 서 있던 체이스가 담담하게 웃었다. 아마 저 창문으로 칼리안이 이 곳에 오고 있는 것을 보았던 듯 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체이스의 손이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그제야 왕세자에 대한 예도 생략한 채 먼저 말을 걸었음을 깨달은 칼리안이 잠시 발을 멈칫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고 있다는 듯, 체이스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괜찮으니, 앉아요.” 칼리안은 죄송하다는 말 대신 고개만 살짝 숙여보인 뒤 자리로 가 앉았다. 그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던 체이스가, 손수 내린 커피 두 잔을 들고 와 테이블에 내려놨다. 커피. 칼리안의 입가에 웃음이 맴돌았다. 베른은 커피를 즐겼다. 체이스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꺼려했다. 그래서 웃음이 난다. “감사합니다.” 다만 다른 말 없이 이렇게만 이야기 한 칼리안은, 이 곳에 있는 누구도 즐기지 않는 향 좋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마셔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그것 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다쳤던 탓에 커피를 마셔도 괜찮을지를 걱정하는 말이었다. 베른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굳이 감추지 않는다. 차라리 그 편이 칼리안에게도 편하리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큰 이상은 없었고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한동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귤, 잘 먹었습니다.” 습격을 당했을 때 도움을 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해하지 않았다. 카이리스에서 세크리티아 세작을 마음대로 부리고, 테일란을 칼리안에게 보내고. 그런 도움을 감사해하면 다음에 또 무모하게 굴까봐. 그래서 어지간한 사람은 입에도 대지 못할 그 신 귤에 대해서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 밖에 나온 말이든 아니든 다 알아들었다는 뜻이다. ‘그러고보니 형님께도 셨을 텐데.’ 이제야 생각이 났다. 그날 플란츠가 귤을 먹었었는데, 하고. 속으로 잠시 웃은 칼리안이 체이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는 란델과 관련된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조금 전 정원에서 만나 나눈 이야기까지 전부 다 체이스의 앞에 풀어냈다. “제가 텐실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혹시 체이스 왕세자께서, 기억을 하고 계시는 것이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묵묵히 칼리안의 말을 모두 들은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조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내용이 없습니다. 과거에도 있었는지, 혹은 미래가 바뀐 것인지도 알아내지 못했고.” 그것은 칼리안 역시 짐작하는 바였다. 플란츠나 아르센의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는 한, 아무리 체이스라 하더라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새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면 과거에 이미 알았어야 하니까. “다만 텐실이라면.”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혹시라도 텐실에 대한 기억을 추려낸 것 외에 다른 기억이 더 있을지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직접 겪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련된 내용들을 떠올려보는 것에 시간이 필요했다. “란델 왕자가 어떻게 그 곳의 왕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마차 축이 부러진 사고 말씀이시군요.” 그 말에 체이스가 잠시 웃었다. 앨런에게 이야기를 전해달라 했는데 아마 아직 듣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체이스는, 앨런이 중간에서 묶어 둔 말이 있었음을 알리지 않았다. 앨런이 아직 칼리안을 만나지 못했거나, 말을 전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었으리라 여긴 것이다. 곧 체이스가 설명을 시작했다. “사고가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달칵. 테이블의 커피를 다시 집어들려던 칼리안이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른 말 없이 눈을 내리떴다. 여전한 버릇이 튀어나오자 체이스가 눈으로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체이스가 이 말을 전하고자 한 이유는 간단했다. 란델이 그저 숨죽여 지내다 텐실로 도망친 것이 아니니 주의하라는 뜻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일이 언제 있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번에도 대답은 조금 느리게 나왔다. “내년 9월입니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플란츠가 왕세자위에 오르는 것은 내년 11월, 18세의 생일을 지낸 뒤였다. 그리고 6년 후 르메인이 의문사하며 이 나라의 왕이 되었다. 일련의 상황을 가늠해보던 칼리안이 말했다. “란델 형님이 있었다 해도 세자위는 당연히 플란츠 형님에게 갔을 겁니다.” 실리케가 왕궁 안을, 브리센 후작이 왕궁 밖의 병력을 붙들고 있었다. 상권은 레넌이 틀어쥐었고, 주요 변경백 세력은 그레이를 중심으로 단합되어 있었다. 특히, 지금 그레이가 수비하고 있는 곳은 텐실과의 접경지역이다. 그말은 곧 란델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텐실에서 곧바로 군사를 보낼 수 없다는 뜻과 같았다. 그레이가 막을 테니까. 그랬으니 란델은 절대로 카이리스의 왕세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란델 형님께서는. 텐실의 왕이 되고 싶었거나, 아니면.” 죽고 싶지 않았거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낸 그 말이 무엇인지는 체이스도 잘 알아 들었다. 때문에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니라면 맹세의 인을 나누었다는 모종의 인물이 원했거나.” 란델은 칼리안의 앞에서 왕이 되고자 하는 뜻을 비춘 적이 있었다. 계단으로 말이다. 그러니 왕이 될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칼리안을 손에 넣을 것’을 염두에 둔 지금의 란델에게 주어진 선택지다. 아마도 과거의 란델은 왕이 될 생각을 진작에 접었을 가능성이 높다. 브리센이 있는 한 절대 이루지 못했을 테니까. “제 예상과 달리, 란델 형님은 아이샤 전왕비께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과거에서도 알고 있었을 것 같고요.” 란델의 즉위 이후 카이리스와 텐실의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아이샤가 어떻게 죽었는지 란델이 몰랐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란델은 이미 내용을 알고 있었고, 그 일에 칼리안의 변화가 영향을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과거의 란델 역시 실리케가 아이샤를 해쳤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면서도 카이리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브리센, 혹은 르메인에 대해 칼 끝을 들이기 위해 맹세의 인을 나눌만큼 감정적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지독할 만큼 이성적이다. 그것이 란델이다. 텐실의 왕이 된다 하더라도 카이리스에 복수할 수 없음을 아는 란델이, 굳이 그 곳까지 가서 왕위를 잇기를 원했을까. 그것이 어떤 나라든 상관 없이 ‘왕’이면 족하다 여겼을까. “왕위 때문에 직접 그런 일을 계획할 사람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고요.” 물론 란델에 대한 예상이 한 번 빗나가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틀리지는 않으리라 여겼다. 차라리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카이리스에 남아서 기회를 엿보다 플란츠의 심장을 노릴지언정 힘 없는 나라의 왕위를 탐내서 텐실의 국왕을 해칠 방법을 계획할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계획한다 하더라도, 그 일을 텐실까지 가서 직접 수행해 줄 만한 인사가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칼리안이 잠시 놓친 것이 있다는 얼굴로 체이스를 쳐다봤다. “그런데, 왜 사고가 아닐 것이라 말씀하신겁니까.” 체이스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을 이제야 묻느냐는 얼굴이었다. “그 때, 그 일을 알아보던 새들이 전부 죽었습니다.” 당연히 베른은 모르는 일이다. 텐실에 대한 정보는 체이스가 관리했으니까. 한동안 말 없이 앉아있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맹세의 인을 파기하려면 계약 당사자가 사라져야 합니다.” 실리케가 죽는 순간 심장에 묶인 속박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만이 맹세의 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니, 칼리안이 선택해야 할 방법은 둘이다. “맹세의 인과 관련된 놈들을 찾아서 다 죽여버리거나, 란델 형님에게 비밀 듣기를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네요.” 지금 텐실을 이끄는 국왕과 반대되는 세력이 있을 것이다. 란델이 카이리스에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돕겠다며 란델을 제 수중에 넣은 뒤, 텐실의 왕이 된 란델을 수족처럼 부리려는 이가 있을 터였다. 카이리스의 브리센 같은 놈들 말이다. 그러니 그들 중 계약을 했던 이를 찾아서 죽여버리거나, 란델이 아는 정보와 란델을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칼리안을 보며, 체이스가 소파 옆의 협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두꺼운 종이 뭉치를 꺼내 칼리안에게 내밀었다. 화려하지 않은, 그리고 유려한 글씨체. 체이스가 직접 쓴 것이었다. “텐실은 카이리스와 달라서, 세력이 꽤 여러갈래로 나뉘어 있습니다. 필요하면 참고하세요.” 종이를 잠시 넘겨보던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바로, 란델이 즉위한 이후 하나씩 사라진 귀족 세력의 정보였다. 칼리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 가지치기.” 혈혈단신으로 텐실에 망명해 곧바로 즉위한 란델. 그런 란델이 귀족 세력을 숙청했다. 누군가 란델을 도왔다는 말이었다. 맹세의 인을 나눈 대상이 도왔거나, 맹세의 인을 나눈 대상을 죽이기 위해 란델이 새로운 세력과 손을 잡았거나, 둘 중 하나. 새로 맞춰 봐야 할 퍼즐을 받은 얼굴로, 칼리안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런 칼리안을 가만히 쳐다보던 체이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일 돌아갈 겁니다.” 확인하고자 했던 것을 알았고, 도울 수 있을 것을 도왔다. 이 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리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자연스러운 듯 아닌 듯 갑작스럽게 꺼내진 체이스의 말에,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칼리안을 보며 체이스가 다시 말했다. “내년 초에 마법사들을 모을까 합니다. 나도.” 갑자기 내일 당장 카이리스를 떠나겠다는 말도 놀라웠지만 지금의 말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칼리안이 아는 체이스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체이스가 칼리안을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왜 놀랐는지 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찾아와서는 한 짐 더 얹어놓지 말라며 한참 동안 잔소리를 하고 갔는데. 칼리안 왕자는 모르는 일이었나 보군요.”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플란츠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한참 동안’ 잔소리를 하는 플란츠가 잠시 상상이 되지 않아서,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런 칼리안에게, 체이스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혹여 같은 일이 되풀이됐을 때, 세크리티아는 지켜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으므로 체이스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미 충분히 하였으니.” 그것은, 형이자 왕이었던 이가 내려준, 베른에 대한 면죄였다. < 142화 제24장. 이해의 초석(9) > 짙은 갈색, 혹은 옅은 검은색. 무엇이라 해도 좋을 커피에서는 쓴 맛이 났다. 나중에야 그 맛을 즐기게 됐었다지만, 어린 시절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을 때에는 향기와 다른 그 쓴 맛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단 향이 나면 단 맛이 나고 쓴 향이 나면 쓴 맛이 나야지, 그렇게 고소한 향을 내면서 시큼하고 씁쓸한 맛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 이미 충분히 하였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아르센 역시 그 날의 베른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의미가 같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체이스로부터 다시 듣게 되었다. 체이스의 말이 코로 맡으면 향기롭고 입에 머금으면 쓰기만 한 커피 같이 느껴진 까닭에, 칼리안이 조용히 웃었다. “······ 감사합니다.” 체이스가 무엇을 위해 그리 말했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알기 때문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기 때문에 다른 말 없이 체이스의 뜻을 받았다. 이미 충분하다. 귀로 듣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말. 마음에 담는 순간 심장을 조각내는 말. 어떻게 충분할 수 있겠는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하였든, 오로지 비극만 남기고 끝나버린 것을. 그것을 어찌 충분하다 하겠는가. 칼리안은 이미 잊혀진 이가 홀로 즐기던 커피를 한 모금 더 삼켜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봤다. 속절 없이 올랐다 떨어지는 분수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시선을 그대로 둔 채 입을 열었다. “혹시 배 안고프십니까?” 떠올려 보니 아침도 안 먹었다. 그러므로 지금 이렇게나 속이 쓰린 것은, 방금 들은 말 때문이 아니라 빈 속에 마신 커피 때문일 것이라고. 짧은 머리가 유난히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냥 속이 비어서 그런 것이라고. 체이스를 언제 다시 마주할 수 있을지 모르니, 어울리지도 않게 감상적인 사람인 척 하지 말고 밥이나 먹자고. 그렇게 생각했다. 여전히 뜬금없이 건네오는 말에, 체이스가 웃었다. * * * 르메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알겠다.” 시종을 먼저 보내지도 않고 갑작스레 찾아와서는, 참으로 담백하게 본론만 꺼내놓은 플란츠를 향해서였다. 왕궁의 기사단과 마법사단이 하나로 합쳐진다 하더라도 그 병력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왕실 친위대 카렌과 라온은, 르메인의 휘하에 있다지만 르메인의 명을 듣는 기사단이 아니었다. 때문에 르메인은 왕실 내 기사단을 플란츠의 손 아래 두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았다. “헌데······.” 다만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던 르메인이 이렇게 다시 입을 열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이 두 기사단의 통솔권을 흔쾌히 내어주었을 리 없다 여긴 까닭이었다. - 똑똑 그런데 이렇게,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르메인의 말을 막았다. 시종장 라울일 터였다. 플란츠와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문을 두드렸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리라. 때문에 르메인은 플란츠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눈길을 준 뒤 라울을 들여보냈다. 라울의 손에는 쪽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플란츠를 앞에 두고 말로 전하기 어려운 소식이었던 까닭이다. 잠시 라울이 전해준 것을 본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봤다. “칼리안이 루비아 관에 걸음했다 하는구나. 아직 그리해도 될 날이 아니거늘.” 그 목소리와 표정에 참으로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르메인이 최선을 다해 좋게 풀어 말했으나 플란츠의 눈에는 ‘이 망할 막내놈이 또 도망갔단다’ 정도의 말로 바뀌어 보였다. 때문에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올라갔다. 아침에 예상했던대로 칼리안과 란델이 만났음을 안다. 장미 정원에서 나오는 란델과 정원에 홀로 남아 우두커니 서 있던 칼리안의 모습도 보았다. 그러니 두 번 다시 안 만날 것처럼 굴던 체이스를 칼리안이 찾아갔다면, 이유가 있으리라. “검술에 막히는 것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때문에 플란츠는 이렇게 말했다. 찾아간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르메인이 칼리안과 체이스를 연관짓기보다는 그 기사에게 용건이 있다 생각하는 것이 나을 테니까. 그것을 굳이 왜 오늘 찾아갔는지 궁금해하면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잠시 플란츠의 말을 곱씹어 본 르메인이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렇구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래. 내일 떠난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나 보구나.” 슬레이만을 계속 보아왔기 때문에, 칼잡는 놈들의 성향을 얼추 아는 르메인이었다. 세리에를 만나 결혼한 뒤 그래도 꽤 머리를 굴리게 된 슬레이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련이나 하겠다며 타국의 기사를 발칸의 훈련장에 데려가지 않았던가. 발칸이 얼마나 중요한 이들인지 모를 리 없으면서도. 그래서 칼리안이 검술에 막히는 것이 있어 테일란을 찾아갔다는 것에도 큰 의심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럴만 하다 여긴 것이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 그리 제멋대로 구는지. 이번에는 제대로 혼을 내야 겠구나.”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내일 돌아가기로 했습니까.” 플란츠는 그런 르메인의 말을 못 들은 척 물었다. 말을 돌리려 한 것임을 눈치채지 못한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어제 그리 전해오더구나.” 그런데, 이렇게 답하는 르메인은 조금 당황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플란츠가 먼저 질문을 한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르메인이 다음 말을 바로 꺼내들지 못한 탓에 집무실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서둘러 원래 나누던 이야기를 떠올린 르메인은 어느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었다. “그래. 조금 전에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은.” 이렇게 운을 뗀 뒤 생각을 정리한 르메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브리센 후작이 그것을 순순히 내어줬을 리는 없을 터인데.” 플란츠의 얼굴에 아주 잠시 의외라는 표정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르메인은 보지 못했지만, 그것은 분명 ‘놀라움’이었다. 생각은 많지만 눈치가 없는 소 같은 르메인이 꽤 예리한 것을 짚어냈으니까. 플란츠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걱정하실 만한 계약은 아니었습니다.” 사실을 감추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인 르메인에게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이유보다는, 아직도 반성할 일이 많이 있음을 되새겨 보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이미 매일매일을 반성하며 사는 것 같기는 했지만, 플란츠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여전히 멀었으니까. 플란츠의 대답에 르메인의 표정이 식었다. 에반에게 무엇을 내어주고 받아 온 기사단인지 알게 된 까닭이었다. 손을 잠시 말아 쥔 르메인이 긴 숨을 내쉬었다. 한 번 맺은 맹세의 계약은 깰 수 없다. 그렇다 해서 무턱대고 심장을 건 아들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걸 것이 없던 칼리안이 제 목숨을 걸고 독차를 마신 것처럼, 플란츠도 같은 선택을 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뭔가를 얻어내려 제 것을 걸어야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그 날의 칼리안이 그랬듯이, 가진 것이 목숨 뿐이니 목숨을 걸었을테지. “······ 내 탓이 크구나.”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까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 말은 못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미안하다 하기가 미안해서 못했다. 살짝 눈을 감았다 뜬 플란츠가 작게 말했다. “하셔도 됩니다. 사과.” 그리고 플란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담담해서, 르메인은 해야 할 말을 잃어버렸다. 플란츠가 어느새 자랐다. 너무 많이 자랐다. 예전에는 허리춤에 왔었던 손녀가 지금은 더 많이 자랐을 것이라던 앨런의 말이 생각났다. 더 어릴 적의 플란츠가 어땠는지 상상이 되지 않아서, 르메인은 사과를 할 수가 없었다. “고맙구나.” 그래서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했다. 그것이 사과임을, 불쑥 자란 플란츠는 알아들었다. * * * 세크리티아에서는 주방장이 음식을 데워 왔었는데. 이 곳에서는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았지만, 칼리안과 체이스는 그런 것에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음식이 전부 식을 만큼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대화가 많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 말 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놀리던 칼리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즉위식, 미리 축하드립니다.” 체이스의 즉위식. 체이스의 손이 잠시 멈췄다. 칼리안은 데블란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직접 가서 축하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 나라의 왕위가 계승되는 자리였다. 때문에 타국의 왕족이 축하사절단과 함께 방문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체이스가 즉위했을 때에는 왕족이 오지 않았었다. 텐실에서 하나 뿐인 왕세자를 세크리티아에 보낼 리 만무했고 리베른 역시 왕자가 한 명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이리스는 왕자가 둘이었다 하지만, 둘 모두 방문하지 않았다. 세자위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이 누구든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매년 돌아오는 르메인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체이스가 이 곳에 온 행동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 데블란을 어떻게 설득했는지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알아요. 고맙습니다.” 체이스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접시 위에 올려둔 음식에 시선을 둔 채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체이스를 쳐다봤다. 체이스의 말은 그 후로 한참 뒤에 나왔다. “이 곳이 많이 변해가고 있음을 압니다.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테고.” 그것이 전부 칼리안의 손 끝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제 할 말만 꺼내놓던 플란츠와, 칼리안에 대한 굳은 신의를 보였던 아르센. 노력하기 시작한 르메인. 그리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장미 사이에 서서 자신을 응시하던 란델까지. 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 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혹여 모두를 이해하기 위해 오히려 다칠까. 그것이 걱정되어서.” 발칸에 속한 저 마법사 한 명 한 명이 세크리티아를 태워낸 불길이다. 그러니 플란츠가 아니더라도, 아르센이 아니더라도. 결국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베른에게는 칼날이다. 그들을 다 끌어안느라 생긴 상처가 얼마나 될는지. 얼마나 덧나고 얼마나 곪았을지. 얼마나 아플지. 가늠하는 것조차 어려워서. 그것이 걱정되어서. 칼리안은, 차분한 빛의 붉은 눈으로 뒷말을 잇지 못하는 체이스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동안의 시간이 지난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 히나.” 히나.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키리에의 동생, 이름이 히나입니다. 귀가 길었는데 잘랐고, 말을 못하지만 수화로 혼을 내고, 새도 좋아하고 강아지도 좋아하고. 고양이도 잘 돌보는데 특히 고양이 목줄에 글씨를 잘 씁니다. 아이스크림을 잘 먹고. 그리고······ 잘 웃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두서없는 말을 시작했다. 그조차도 아까워서, 체이스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 “······ 살아있어요.” 죽어가는 몸으로, 무모하고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키리에를 찾았다. 히나가 함께 있었다. 살아있었다. 그것이 칼리안에게는 빛이었다. 구원이자 희망이었다. 치유였다. “그래서 괜찮습니다.”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 괜찮다니. 더는 연보랏빛도 아니고, 또 돌아있지도 않은 붉은 눈을 본 체이스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칼리안 왕자.” 칼리안은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괜찮다는 말은 괜찮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 괜찮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켜낸 그 ‘빛’을 보며 잘 버티고 있다는 말일 뿐. “혹여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어지게 되면, 그 때는 스스로를 지켰으면 하는데. 과한 부탁일까요.” 베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서 하는 말이었다. 오로지 지키는 것만 해왔기 때문에 할 줄 아는 것도, 생의 목적도, 무언가를 지키는 것 외에는 없으리라고. 그러니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어지면 멈추지 않던 두 발이 향할 곳을 잃게 되리라고. 베른은 그런 사람임을 알아서 걱정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이번에는 붉은 눈이 보라색 눈을 응시했다. 베른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얼굴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과연 제가 지켜야 할 것이 없어질 날이 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살고 싶다 하고, 살겠다 하면서, 정작 살 생각은 하나도 없는 얼굴로 풀만 처먹는 놈을 계속 살려놓기로 했으니까. 그런 놈이 그런 짓을 한 이유도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맨날 애꿎은 장미만 들여다보고 있는 속 모를 놈도 살려놔야 하니까. 그렇게 해서 과거의 형제든 지금의 형제든 전부 다 지켜내야 하니까. 이런 생각을 하며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제가 체이스 왕세자께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말하지 못한 것이 하나 뿐이겠나 싶지만 아무튼. 무엇인지 이야기 하라는 듯,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언제 보게 될지 모를 체이스의 두 눈을 머릿속에 꾹꾹 담은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커피, 싫어합니다.” 콩 볶은 냄새가 아니라 르니에리 향기가 나는 것 같아서. 커피 좋아하던 베른 말고 커피 싫어하는 칼리안은 지킬 것이 없어져도 잘 걸어갈테니 걱정 말라고. 칼리안은 그리 말했고 체이스는 그리 알아들었다. 분수대의 물 줄기가 부서져 흩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언젠가의 체이스는 그것이 소슬하다 느꼈으나 이제는 더 할 나위 없이 청량하다. 튀어오른 물방울에 얽힌 햇빛이 무지개를 띄우는 것을 깨닫는다. 체이스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베른이 아닌 칼리안을 향해 웃었다. “다음에는 다른 것을 대접하겠습니다. 칼리안 왕자는 무엇을 좋아합니까.” “민트차요.” 그러니 다음에 볼 땐 민트차 주십시오. 또, 잊어버리지 마시고요. < 제24장. 이해의 초석(10) > 칼리안은 없거나 한 번. 그리고 플란츠는 세 번 쯤 될 것이다. 한 번에 발휘할 수 있는 인내심의 수가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항상 똑같지는 않겠지만 대충 따져본다면 그 쯤 될 터였다. “갑자기 왜 오지 말라 하시는 겁니까?” 하, 하는 토막난 숨이 플란츠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뭐 하나 한 번에 ‘네’ 하는 법이 없는 놈 때문이었다. 말 한번 더럽게 안 듣는 저 미친 마법사를 정말 어떻게 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일단 한 번 참았다. “너, 마법사.” “부군단장입니다, 부군단장님.” 플란츠가 잠깐 눈을 꾹 감았다. 두 번째로 참는다. 참는 김에, 상식과 이성을 토대로 생각을 해 본다. 그래. 저 미친 마법사가 하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놈도 발칸의 부군단장이고 플란츠도 발칸의 부군단장이 맞다. 그런데 플란츠는 누구나 익히 다 알고 있는 대로. 왕자다. 속으로 조용히 덧셈을 해 본다. 아르센 저 놈은 그냥 부군단장이다. 플란츠는 부군단장에 더해 왕자다. 플란츠를 지칭하는 말이 더 길다. 이제 반대로 뺄셈을 해 본다. 놈에게서 부군단장을 빼면 쥐뿔도 없다. 플란츠에게서 부군단장을 빼면 왕자가 남는다. 시스파니안의 혈통을 가진 고결한 왕족이다. “여기가 빌헬름관이던가.” 르메인의 집무실에서 나와 아르피아 궁의 계단을 내려오던 플란츠. 그리고 앨런의 집무실에 가려고 아르피아 궁의 계단을 올라가던 아르센. 이 둘이 만났다. 그러므로 이 곳은 분명 아르피아 궁이었다. 빌헬름관이 아니었으니, 플란츠는 발칸의 부군단장이기 전에 왕자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발칸의 일로 만나자 하신 일을 오지 말라 하실 때에는 부군단장으로서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아르센은 이렇게 말대꾸를 했다. 칼리안은 발칸의 일원이 아니다. 그냥 아르센을 부리는 왕자였다. 불러서 할 말이 발칸과 관련된 일이었든 아니든, 어쨌거나 칼리안은 아르센을 ‘그냥’ 불렀다. 그런데 칼리안이 부른 것을 플란츠가 오지 말라 한다고 저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어가며 이렇게 대서는 것이다. 저 미친 마법사가! 아무튼.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해 본다. 세 번 참았다. 플란츠의 악다문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렇게 대단하신 내 아우님께 오늘 심기 불편하실 일이 생겼으니 오지 말라고. 내가 그 대단하신 내 아우님 시간 되실 때 잘 모시고 빌헬름관으로 가겠다는데. 대체, 왜, 넌.” “부군단장입니다, 부군단장님.”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자면, 플란츠는 열 여섯 살이다. 즉, 아르센은 플란츠보다 열 세 살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싸움이 가능한 이유는 둘 중 한 명의 정신연령이 지나치게 높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낮거나 혹은 둘 다이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이렇게 플란츠가 가진 세 개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천천히 머리를 쓸어넘기는 플란츠의 얼굴에 아이같이 예쁜 미소가 그려졌다. “부군단장, 너. 계속 그렇게 오늘만 짖고 영영 꺼질 것처럼 구는데.” 여기까지. 그 대상이 무엇이든 폭발 지점 하나는 기차게 알고 있는 아르센이 급격히 정중해진 말투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지금은 제가 계속 외근중이어서 자리에 없을 수 있으니 빌헬름 관에 오셔서 부르시면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외근이란다. 헤이시아 궁의 잔해를 청소하는 벌을 참 듣기 좋게 포장해 내보인 아르센이 고개 숙여 예를 보였다. 할 말 끝났으니 보내달라는 뜻이다. 그 꼴을 보다 다시 한 번 눈을 감은 플란츠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눈 뜨기 전에 빨리 사라지라는 의미였다. 그 모습을 보며 씩 웃은 아르센이 앨런의 집무실을 향해 다시 발을 옮겼다. “······ 하.” 칼리안은 참지 않거나 한 번 쯤 참는다. 그리고 플란츠는 세 번까지는 참는다. 그 참을성이 끝났을 때 칼리안은 칼이나 몽둥이를 꺼낸다. 그리고 플란츠는 눈을 감는다. 레이븐과 아르센, 이 두 마리가 무조건적으로 칼리안을 따르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임을 플란츠도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형이 되어서 동생 놈처럼 짖고 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서 플란츠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인내심을 발휘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아르피아 궁 쪽으로 걸어오는 체이스를 보게 되었다. 서로 눈이 마주친 플란츠와 체이스의 발이 동시에 멈췄다. ‘하필, 지금.’ 플란츠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다시 나왔다. 이미 체르밀로 돌아갔는지, 칼리안은 없었다. 아르센을 석찬에 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 칼리안 때문인 것은 맞았다. 내일 간다는 체이스를 만나고 온 뒤, 플란츠와 아르센을 쌍으로 앞에 두고도 괜찮으면 그야말로 미친놈이니까. 그래서 억지를 부려가며 아르센을 못 오게 했다. 궁까지 부숴가며 밥 챙겨 준 것에 대해 값은 치러야 하지 않겠나, 대충 이런 생각이었다. 값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체이스를 마주쳤다. 플란츠는 체이스가 이미 아르센을 만났음을 몰랐다. 대신 체이스와 아르센이 어떤 악연일지 정도는 대충 눈치를 챘다. 그래서 앨런의 집무실에 이미 누가 있으니 그냥 돌아가라는 정도로는 이야기를 해주려 했다. 때문에 열렸던 입을, 플란츠는 도로 꾹 다물었다. 체이스 역시 이런 시점에 플란츠를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덕분에 체이스가 미처 가리지 못한 것이 플란츠의 앞에 드러났다. 그것을 봐서 입을 다문 것이었다. 그 보라색 눈에 비춰지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플란츠의 눈꼬리가 가늘게 변했다. * * * 단 하나도 잊히지 않는다. 피 웅덩이를 고스란히 짓밟으며 똑바로 걸어오던 모습.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한 얼굴. 마주한 이의 목을 틀어쥔 것 같은 낮고 차가운 목소리. 애통하여 온 뼈가 다 부스러지는 기분으로, 절망하여 온 살이 다 저며드는 기분으로, 끝끝내 마지막 남은 피 한방울까지 문드러지는 기분으로 마주했던 광경을 똑똑히 기억한다. 체이스는, 그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 미쳐버린 왕. 모두가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던 이유를 곧바로 알았다. 그 눈. 마치 사방으로 금이 간 유리구슬 같았다. 어디든 살짝만 건드려도 산산이 조각나 깨어질 것 같은, 연두색의 유리구슬. 이제 막 생명을 머금은 풀잎 같은 색의 눈에, 어떻게 아무런 빛도 담겨있지 않을까. 그 비통한 가운데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우습게도. * * * 스치듯 지나친 눈빛. 아르센의 창이 심장을 꿰뚫으며 끝난 마지막 기억. 그 직전에 마주보았던 플란츠의 눈. 그 기억이, 채 막을 새도 없이 머릿속을 헤집고 튀어 나왔다. 지금 자신을 보고 있는 이의 눈을 보며 문득 치미는 기억을 떠올려버린 체이스가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말했다. “잠시만.” 지금껏 의연하게 플란츠를 대했으면서도, 이렇게 갑자기 동요했다. 과거의 환시가 앞에 서 있는 플란츠와 겹쳐졌다. 칼리안과 오랜 이야기를 나눈 뒤였기 때문이었다. 칼리안이 걸어갈 길을 염려하느라, 베른이 지키려던 것을 떠올리느라, 베른이 채 지키지 못하고 떠난 이후의 기억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만나면 항상 말을 많이 하거나 많이 걷게 만들던 체이스의 이런 모습에, 플란츠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물론 보지는 못하겠지만. 잠시 뒤 손을 내린 체이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또 보는군요, 플란츠 왕자.” 아무 말 없이 그런 체이스를 지켜보던 플란츠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 왕자를 본 게 아닌데.” 인사에 대한 화답이 아니었다. 정확한 지적에, 어느새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 체이스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플란츠의 눈치가 빠르고 생각이 많은 것도 이미 알았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에 놀라지는 않았다. “오늘 조금 시끄러웠어서. 괜찮습니다.” 플란츠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괜찮은지 아닌지는 플란츠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괜찮다 하니 그런가보다 하는 얼굴을 해 보일 밖에. “내 아우님을 만나고 있는 줄 알았더니.” 때문에 플란츠는 조금 전에 보인 모습에 대해 묻거나 걱정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딱히 걱정해 줄 만한 입장도 아니었으니까. “만났습니다. 다시 돌아갔고.” 체르밀 궁으로. 그리고 칼리안으로. 돌아간 것이 무엇인지 알아들었는지는 몰라도, 이번에도 플란츠는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체르밀 궁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마나실 백작은 이따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체이스가 내일 출발하는 것은 안다. 르메인과의 조찬이 있겠지만 르메인이 굳이 왕자들을 동석시키지는 않을 터였다. 이 어마어마한 집안의 혈기왕성한 세 아들이 전부 다 사고를 쳐서 전부 다 근신 중이 아니던가. 그러니 플란츠 역시 오늘이 지나면 당분간 체이스와 이야기 할 일이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런에 대한 내용만 전한 채 돌아가려 한 것은, 묻고 싶은 말이 생길까봐서였다. 칼리안이 참으로 오지랖 넓은 이해심을 가졌다면, 플란츠는 참으로 오지랖 넓은 죄책감을 가졌으니까.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플란츠의 발을, 놀림인지 놀라움인지 모를 말이 붙들어 잡았다. 고개를 돌린 플란츠가 체이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할 생각이냐는 뜻이 분명히 담겨있는 눈초리였다. “칼리안 왕자는 플란츠 왕자가 나를 찾아왔었던 일을 모르더군요.” 젠장. 호칭이 또 바뀌었다. 한여름 카이리스의 날씨만큼 변덕을 부리는 저 호칭에, 플란츠는 또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플란츠 왕자가 칼리안 왕자를 그렇게까지 해 가며 도우려 한 것도 의외였고, 칼리안 왕자가 그 일을 모르는 것도 의외였고.” “······ 그다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굳이 알려가며 움직일 필요도 못 느꼈다. 어차피 서로 모르는 일이 한 둘도 아닌데 의외일 것 까지야. 이런 의미를 담은 세 글자의 대답을 내 놓은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체이스는 칼리안이 아니었으니 아마 제대로 못알아 들었을 것이라 생각한 까닭이다. “별로.” 그래서 이렇게 덧붙여줬다. 별로 대단할 것 없으니 신경쓰지 말라는 소리였다.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대충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래서 플란츠는 별다른 인사 없이 체르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번에야말로 돌아가려 한 것이다. “그런데.” 체이스의 말이 플란츠의 걸음을 또 붙들었다. 체이스의 기억 속에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붙들지 못할 것 같던 무감정한 걸음이, 너무 쉽게 돌아선다. “또 뭐.” 귀찮아하는 기색이 가득하지만 사려 깊은 목소리. 살짝 웃은 체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차피 이 부분은······ 칼리안 왕자가 모르는 일이라서.”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어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나에게 준비를 하라 했을 때. 당신이 그런 일을 벌일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던데.” 시선을 돌려 플란츠의 눈을 본 체이스가 말했다. “아마 맞을 겁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으니까.”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현재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체이스가 지금, 베른이 겪었던 그 시간에서 플란츠와 만난 적이 있었다 말하고 있음을 알아들었다. 플란츠의 고개가 살짝 올라갔다.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혹은 듣기 싫다는 듯한 반응을 보여도 체이스가 그에 대해 실망할 수는 없을 일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플란츠는 지금껏 보여준 모습 중 가장 집중하는 모습으로 체이스를 쳐다봤다. “이유가 있으리라고,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던 탓에 억울한 마음이 들었었고.” 아쉽게도 그 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수는 없었다. 고갯짓. 연두색의 눈이 감기며 내저어진 고갯짓 한 번. 그와 함께 걸어 나온 발칸의 군단장. 조용히 건네진 미안하다는 말. 그것이 마지막이었으니까. “플란츠 왕자의 그런 행동이, 돕는 것인지 갚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서 해주는 말입니다.” 칼리안을 돕기 위해 움직이는지, 아니면 칼리안에게 진 빚을 갚으려는 것인지. 그것을 모르겠다는 소리였다. “갚지 말고, 도와달라고.” 이 말을 들은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 날의 플란츠를 입에 담는 것이 플란츠에게 약이 될지 혹은 독이 될지 체이스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알려주는 것은, 만약 이 이야기가 플란츠에게 독이 된다 하더라도 지금에 비해 특별히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미 제멋대로 독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아무래도 스스로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구명줄이 되지 못하는 듯 해서, 사실을 알려준 것이었다. “어떤 이유가 있었다 한들 그 날의 플란츠는 베른에게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플란츠가 스스로를 이해할 이유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체이스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플란츠는 듣기만 했고 체이스는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떴다. “그래.” 체이스가 이 말을 왜 꺼냈는지 플란츠도 모르지 않았다. “새겨 듣지.” 때문에 플란츠는, 어느새 평소대로 돌아온 얼굴로 이렇게만 말했다. 체이스는 그런 플란츠를 향해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보인 뒤 루비아 관 쪽으로 걸어갔다. 앨런은 잠시 뒤에 만나러 오기로 한 채였다. 만나서 반가웠다거나 다음에 또 보자거나. 그런 말을 나눌 만한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그런 인사는, 먼 훗날 언젠가 하면 될 테니. < 제24장. 이해의 초석(11) > 잠시 잊고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식사용 나이프를 돌려줬을 때. 우아하기 짝이 없는 그 특유의 말투로 그레이의 허리를 부러뜨린게 자신이었다고 말했을 때. 그리고, 헤이시아 궁을 무슨 이유로 무너뜨렸는지 눈치챘을 때. 이미 생각했었지 않나. 내 동생놈이 좀 미친 것 같다고. “이것 참······.” 그 동생놈, 칼리안이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짜증난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칼리안을 쳐다봤다. 플란츠는 분명, 체이스를 만난 칼리안이 플란츠 자신과 아르센을 보기 어려워 할 것이라 여겼다. 둘을 앞에 놓고도 괜찮으면 그게 바로 미친놈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했다. 미친놈이 맞다는 것을 상기했어야 했는데 잊어버리고 있었다. “제가 형님의 과묵함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배려심에 놀라야 할지.” 조용히 웃으며 꺼내진 칼리안의 말. 그 붉은 눈에 ‘기특하긴 한데 안 어울리게 왜 그랬니’ 정도의 말이 담겨있음을 안 플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다 동생놈보다 조금 더 많이 미친 것 같은 그 마법사 때문이다. 분명 플란츠는 오늘 아르센을 만나 석찬에 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세 번의 인내심을 쓰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플란츠가 간과한 두 가지 문제가 있었고, 그 때문에 칼리안이 저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짖을 거면 입 닫아.” 플란츠가 간과한 것 하나는, 자신이 지나치게 말이 없는 성격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르센을 못 오게 했다는 것을 어디에든 알렸어야 했지만 그렇게까지 많은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덕분에 아무것도 모르는 주방장은 3인분의 저녁 만찬을 착실하게 준비했고, 칼리안 역시 석찬에 참석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플란츠의 배려를 받기에는 칼리안의 사고체계가 다소 정상적이지 않은 범주에 속해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아르센을 굳이 다시 부르겠다 말했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만약 석찬이 취소된 것을 매우 아쉬워 한 아르센이, 칼리안이 건넸던 돈을 들고 발칸의 마법사들과 술판을 벌이러 나가지 않았다면, 칼리안은 기어코 아르센을 다시 불러왔을 터였다. 이런 이유로 플란츠의 심기는 그리 쾌적하지 않았다. 그런 플란츠로부터 또 한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늘 그랬듯 한 귀로 흘린 칼리안은, 그냥 계속 짖었다. “형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제 속이 좁지는 않습니다. 오늘 헤르츠 경을 만나지 못할 이유도 없고요.” 안 그래도 말 없는 플란츠는 더더욱 할 말을 잃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저것이 단순히 속이 넓고 좁고로 따질 만한 문제인가 싶어서였다. 결국 플란츠는 칼리안이 뭔 소리를 하든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의 칼리안이 아르센을 꺼려해야 할 서른 가지 쯤의 이유가 동시에 떠오르는 것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슬며시 웃는 얼굴을 한 칼리안이 플란츠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형님께서 이렇게나 신경을 써 주시니,” 무슨 말이 나올지 안다. 고맙다는 말이 나올 차례였다. 여지없이 플란츠의 입이 먼저 열렸다. “치워.” “네.” 칼 같은 거절에, 칼리안은 칼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집어치웠다. 곧 칼리안은 주방장과 시종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자리를 비켜달라 말했다. 그렇게 주변을 물린 뒤에는 여유로운 태도로 3인분의 만찬에 손을 가져갔다. 이 중 2.5인분 정도는 아마 칼리안의 몫이 될 테니 주방장이 애써 만든 음식이 남을 염려는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석찬이었던 탓에 저녁 식단이 ‘플란츠 맞춤’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샤프란 향이 가득한 오리 고기 스튜, 바질을 태운 연기에 훈연한 송아지 고기, 계피와 사과를 졸인 소스를 뿌린 돼지 안심 구이, 후추 향이 진한 양고기 등. 음식들을 대충 훑어 본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생고기를 뜯어 먹을 성격으로 알려진 카이리스 2왕자가, 알고보면 편식을 넘어 거식에 가까운 식성을 가졌다는 것을 주방장한테 알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플란츠는 향신료 범벅의 고기 요리 사이에서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에게 나눠줘도 될 것 같은 무미건조한 닭가슴살 샐러드를 용케 찾아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지나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드시면 키리에는 절대 못 이기실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깨작거리는 것을 멈출 줄 알았다. 그런데 키리에의 이름을 들은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갔다. 음식에서 시선을 뗀 플란츠가 칼리안의 눈을 직시하며 대꾸했다. “그 전에 죽겠던데. 내가.” 대련 중 키리에가 살기를 내비친 일에 대한 말이었으나 칼리안은 아직 그 일을 몰랐다. 때문에 칼리안은 아주 오랜만에 플란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 됐다. 플란츠의 입이 한 번 더 열렸다. “내 아우님의 귀 밝은 시종이 화가 많으시다고.” 그제야 칼리안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난처한 얼굴을 했다. 칼리안과 플란츠의 난해한 대화를 조각조각 모은 키리에가, 결국은 과거의 일을 짐작하게 되었음을 안 까닭이다. 평소 조용한 키리에가 칼리안과 관련된 일에 어떤 변화를 보일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의 키리에도 그랬으니까.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키리에는 분명, 대련과 실전을 구분하지 않았을 터였다. “내일부터는 다시 제가 나가겠습니다.” 칼리안은 그 일에 대해 키리에를 혼내거나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기억 없이 추측만 할 뿐이라 해도, 과거의 일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칼리안이 가장 잘 알았다. 그에 대한 감정을 절대 강제할 수 없다는 것도. 때문에 칼리안이 키리에를 대신해 뭐라 말하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플란츠가 먼저 말했다. “됐어.” 설명이든 사과든 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키리에가 내용을 알았다는 것을 전해주고 대련 상대를 바꾸라는 뜻으로 한 소리였지, 플란츠가 키리에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닐 테니까. “네.” 그래서 칼리안은 이번에도 짧게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사과든 감사든 참 열심히 거절하는 모습 때문이다. 웃음이 잘도 나오지, 하는 생각이 든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봤다. 호수와 그 뒤의 장미 정원에 시선을 둔 채로,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뭐였는데.” “란델 형님께도 하나 있습니다.” 란델을 만나고 체이스를 찾아가게 한 그 일이 뭐냐는 질문이었고, 칼리안은 마치 질문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테이블 반대편에 앉은 플란츠의 가슴께를 가리켜보였다. “그거.” 심장을 말함이다. 짧게 설명하고 끝낸 붉은 눈에 형제들을 향한 질책이 그득하다. 때문에 칼리안의 말이 ‘란델도 맹세의 인을 했더라’는 뜻임을 알아들은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내 아우님이 구명하실 것이 하나 늘겠군.” 스스로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가벼운 말투. 결국 칼리안은 플란츠와 비슷한 모양새로 짧은 웃음을 흘렸다. 곧 칼리안은 플란츠의 심장을 가리켜보이던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네. 덕분에 여기가 좀 더 바빠졌고요.” 잠시 침묵하던 플란츠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언제나와 같이 나른한 한숨 같은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뭔데.” 종전과 비슷한 질문이지만 아무튼 의미는 다르다.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이건 제가 풀 문제라서.” 란델이 가진 맹세의 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싫다는 말이었다. 플란츠가 그럼 말은 왜 꺼냈느냐는 눈으로 쳐다보니, 칼리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저리 구시는 것에도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넘기시면 된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란델 형님 마주쳤을 때 괜히 시비거실까봐 걱정되서요. 두 분 사이 안좋잖아요. 많이.” “또 짖지.” 하루에 두 번 짖기를 성공한 칼리안이 웃었다. 칼리안은 미래의 일에 대해 앨런 외의 다른 이들에게 알린 적 없었다. 그럴 권리는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그런데 란델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체이스가 건네 준 정보를 한껏 활용해야 했다. 당연하겠지만 그것은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때문에 플란츠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눈치, 채실 것 같아서. 이번에는 그러지 마시라고.” 칼리안이 이렇게 솔직한 이유를 덧붙였다. 플란츠가 그 일을 궁금해하면 눈치를 챈다. 그래서 참고하고 있어야 할 내용만 미리 알리고 막은 것이었다. 그냥 두면 플란츠의 저 똑똑한 머리로 어떤 사고를 통해 어떤 결론을 내게 될 지 칼리안도 가늠할 수가 없어서였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플란츠가 물잔을 손에 쥐었다. 다만 그것을 들어올려 마시지는 않았고, 차가운 유리잔 겉면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잔에 맺힌 물방울이 손가락 끝을 따라 지워지는 것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말했다. “텐실의 권력은 꽤 복잡하게 나뉘어 있을텐데.” 생각하지 말랬더니. 란델이 맹세의 인을 맺었다는 소리 하나에 저만큼을 따라왔다. 칼리안이 플란츠를 잠시 응시했다. 오래지 않아 칼리안의 입에서 짧은 한숨 소리가 났다. “내 형님께서 말을 너무 안들으시네.” “내 아우님은 버릇이 너무 없으신데.” 말은 그렇게 귀찮아하면서 한 마디를 안 지려고 든다. 왜 말을 못해주는지, 그 이유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플란츠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알려고 든다. 숨겨도 소용 없으니 그냥 얘기하라는 의미일 터였다. “말씀 안 드릴 겁니다.” “뭘 하려는 건지는 말을 해도 되지 않나.” “이해해보겠다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해를 해 볼 준비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조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를테면 이해의 초석을 다진다고 해야 할지. 제가 제대로 이해를 해야 납득을 하고, 납득을 해야 해결을 해 볼 테니 말입니다.” 란델이든, 플란츠든, 카이리스든, 세렌티든. 일단 이해부터 해보겠다는 말이었다. “대체 왜, 여기서.” 이렇게 말하던 플란츠가 말을 멈춘 채 입을 다물었다. 대신해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상관 있어서 하는 짓이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왜 여기서, 왜 카이리스에서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 일에 그렇게 나서느냐는 말. 플란츠가 그 말을 삼켰음을 알아듣고 한 대답이었다. “아무튼 제 말은, 무작정 걷지 마시라는 겁니다. 보이지도 않는 길에 뭐가 있는 줄 알고 그렇게 가십니까. 겁도 없이.” 끼어들지 말라 하니 기어코 끼어들고, 확신하지 말라 하니 어떻게든 확신하고. 아무튼 지긋지긋하게 말을 안 들어 처먹는 형을 향해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대로 살펴보고 다 알게 된 뒤에 움직이셔도 됩니다. 모두 확인하고 나서도 괜찮겠다 싶으면 그때 걸으셔도 안 늦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식사하십시오. 골고루.”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씩 웃었다. 닭가슴살 샐러드 사이에 있는 피망 빼지 말라는 소리였다. * * * 온전한 내 편. 그 짧은 사이, 칼리안의 편이 참 많이 생겼다. 그 많은 이들 중에서도 무조건 기댈 수 있고, 부끄러움 없이 의지할 수 있으며, 흔쾌히 도움을 주고 그에 대한 값을 받아낼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을 사람. 무슨 짓을 하고 돌아가도 온 팔로 가득 안아주며 반겨 줄 사람. 아득히 먼 훗날의 언젠가에도 반드시 곁에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을 사람. 그런 이가 있을까 할 때 고민 없이 곧바로 떠오르는 한 사람. “아······.” 앨런 마나실. “스승님.” 새벽까지 뒤척이다 잠이 들었고, 얀의 종 소리에 눈을 떴다. 커튼 너머로 둘이 보였다. 소파 위에 고롱고롱 소리를 내는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있었고, 그 옆에 앨런이 앉아 있었다. 칼리안의 목소리에, 앨런의 다리에 편한대로 기대어 엎드린 채 기분 좋은 게으름을 피우고 있던 고양이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언제 고롱고롱 소리를 냈었냐는 듯 문 밖으로 우다다다 달려 나갔다. 지금껏 기대고 있던 다리의 주인부터 챙기는 칼리안 대신, 더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가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다 앨런을 향해 고개를 돌린 칼리안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폈다. “오셨습니까.” 유난히 반갑다. 항상 반갑지만 정말 유난히 반갑다. 커튼에 가려져 칼리안이 웃는 것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앨런은 마주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또 멋대로 와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앨런은 언제든 환영이다. 정말 언제든 앨런이라면 무조건 좋다. 이렇게나 환영 받는 앨런은, 자신을 반겨하는 칼리안의 목소리 끝에 맥이 풀려 있음을 알아 들었다. 사실 그것을 알아들으려고 찾아온 길이지만. 얀에게 차를 부탁한 칼리안이 서둘러 준비를 마쳤다. 잠시 후 시녀들이 모두 나가자 제자 걱정 가득한 얼굴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속이 좀 어떤지는 물어 볼 필요가 없었으므로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너무 눌러두지는 마시지요.” 첫인사를 주고 받기가 무섭게 위로부터 해주는 스승을 보며, 칼리안이 다시 웃었다. “잠깐 바람이나 쐐요, 스승님.” 체르밀에서 왕궁 정문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과 함께 테라스로 나간 칼리안이 의자에 앉았다. 오래지 않아, 얀이 민트차와 밀크티를 내려놓고 나갔다. 칼리안이 커피를 싫어하게 된 이후, 얀은 칼리안의 차를 되도록 직접 준비하려 했다. 새끼코끼리가 온갖 정성을 다해 우려낸 차는 언제나 맛이 달랐다. 그래서 늘 맛있었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칼리안과 나란히 앉은 앨런이 손가락을 튕겼다. 훈훈한 온기가 테라스를 가득 채우는 것을 느낀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웃음 소리를 냈다. 칼리안은 겨울의 대사막에 발을 디뎌도 추위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 따뜻하다고 느꼈다. 칼리안은 얀의 앞에서 언제나 꽃같은 왕자였고 앨런의 앞에서 그저 어여쁜 제자였다. 늘 그것이 좋았다. “손가락, 굳이 안 튕기셔도 되잖아요.” 웃은 것이 괜스레 민망해진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다. 항상 궁금했지만 매번 묻지 못했었다. 왜 항상 마법을 쓸 때 저 경쾌한 소리를 내는지 말이다. 앨런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다가 테라스 너머의 호수를 봤다. 그것이 언젠가의 칼리안에게는 세뉴강이었으니 앨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떠난 이를 생각하며 바라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풍경이 아니겠는가. “시동어 없애기를 연습할 적에, 이렇게 해보라고 누가 그랬습니다. 시동어도 대신하고 멋도 있어 보이니 좋지 않겠냐 하였지요. 그것이 버릇이 되어 이렇습니다.” 그런 앨런의 얼굴에는 그리움 가득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그가 누구였는지 묻지 않았다. 그런 웃음을 짓는 법을, 칼리안도 배웠으니까. “누군지 아주 잘 알려드렸네요. 멋있습니다.” 대신 칼리안은 이렇게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고자 했던 칼리안의 깡마른 손이 르메인이 아닌 앨런을 붙들었던 그 날. 르메인의 아들일 수도 없고 데블란의 아들일 수도 없는 칼리안을 앨런이 보듬어 안았다. 그러니 칼리안은 분명 앨런의 아들이었다. 이제는 앨런도 칼리안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오늘 아침 칼리안을 찾아온 앨런의 얼굴에서는 걱정이 지워지질 않았다. 때문에 앨런을 보는 칼리안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 다음에는 좀 덜 신 귤을 보내달라고 말해두었습니다. 또 한 번에 다 드실 것이 분명하니.” “왜 그러셨어요. 귤은 셔야 맛있는데요.” “늙은이랑 좀 나눠드시지요. 그리 신 것을 다 가져와서는 혼자 욕심을 내십니까.” 그것이 귤이든, 혹은 시디 신 서러움이든. 혼자 다 차지하지 말고 나눠주라는 마법사의 말에 칼리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런두런. 르메인과 조찬을 마치고 나온 체이스가 멀리 보이는 체르밀 궁을 잠시 바라보는 동안. 체이스를 태운 말이 왕궁의 정문을 지나 왕도에 오르도록. 광장을 벗어난 체이스가 카이리시스 외성을 나설 때까지. 입담 좋은 스승과 듣는 것을 더 좋아하는 제자의 소소한 대화가 계속, 계속 이어졌다. 두런두런. < 제25장. 있어야 할 곳(1) > 하얗고 긴 손가락들이 가지런히 모였다. 그 손에 쥐는 검이 이 세계의 어떤 명검보다 특별했던 까닭인지 아니면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그런 곳에까지 영향을 주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다 자라지 않은 흰 손에는 흉터는 물론 굳은살조차 없었다. 진득한 피는 물론이고 흙탕물에도 닿지 않았을 것 같은 그 손이 조용히 올라갔다. 스스로는 핏빛이라 여기고 남들은 루비의 색이라 말하는 붉은 눈이 손 아래 감춰졌다. 그렇게 칼리안은, 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잠시 덮었다. 웃음을 참고 있었다. 가느다란 어깨가 잠시 들썩이더니 흐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크게 움직였다. 그 후에는 참아내지 못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결국은 웃음보가 터졌다. 앨런의 집에 갔을 때 꾸물꾸물하는 꽃 모양의 석상이 노래를 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웃음이 터졌었는데. 이번에도 한결같다. “아, 마법사들이란.” 정말이지. 마법사들이란.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손에 들린 것을 다시 들여다봤다. [우리는 왜 가게를 부쉈나?] [내 이성이 지극히 감성적이었던 시간을 회상하며.] [떠오르는 의문. 우리는 왜 멀쩡한가.] 이런 제목이 적힌 종이들, 정확히는 보고서 형식의 무언가를 손에 든 채로 칼리안은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숨이 넘어갈 듯이 웃었다. “다 돌았나봐.” 그리고는 정말 간신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칼리안이 손에 쥔 이것은 마법사들의 경위서, 정확히 말하자면 반성문이다. 전날 술 마시러 나갔던 발칸의 마법사 몇몇과 일단의 무리 사이에 시비가 붙었단다. 그것이 말싸움이 됐고, 하나같이 입심 좋은 마법사들이 이겼다. 그것에 분개한 무리가 친구들을 데려왔다. 그리하여 평화로운 대화의 장이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했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마법으로 사람을 팼다. 사람만 팬 게 아니라 가게도 팼다. 가게는 왜 팼냐고 물어보니 기억이 안난다 했단다. "술은 왜 처먹은거야? 이미 돌았는데.” 아. 이미 돌아서 마시기도 하지. “돌아서 마실 만큼 심하게 돌아있는 놈은 없었는데.” 이렇게, 얀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던 칼리안이 경위서를 다시 쳐다봤다. 경위서 제목이 이따위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물론 칼리안을 우습게 봤다거나 놀리려는 마음에서 저런 식으로 쓴 것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웃었다. 누군가 작성한 [집중 탐구 : 술기운과 폭력성의 상관관계] 라는 제목의 경위서가 가장 위에 있었다. 이번 일의 책임자라서 혹은 그들 중 가장 윗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나마 가장 ‘진지해보이는’ 제목이라서 맨 위에 올려두었을 터였다. 자신들도 아는 것이다. 마법사라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족속들인지. 그동안 마법사들의 보고서는 앨런과 에우리아가 전해주는 것만 받아왔던 칼리안이었다. 그러니 진짜 마법사들이 보고서를 어떻게 쓰는지 지금 처음 봤다. 그리고 그 안에 적힌 내용은 제목보다 더 했다. “왕자님, 말씀을······.” 꽃 같은 왕자의 입에서 험한 말이 쏟아져 나오자, 옆에 서 있던 얀이 잠시 주의를 주려다 멈췄다. 분명 웃었고, 웃는 눈이었고, 웃는 입이었으나 분위기가 달랐다. 화가 나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얀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을 느낀 칼리안은 경위서를 향한 고개를 그대로 둔 채 시선만 돌렸다. 그리고는 굳어있는 얀을 향해 표정을 풀며 말했다. “눈치 보지 마. 안 그래도 돼.” 얀이 살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말을 좀 곱게 해라’라는 소리를 다시 꺼내놓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은 안 다쳤대?”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란 싸움 한 놈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마법사들은 빌헬름 관에서 숨죽이고 있었고 마법사들에게 마법으로 얻어맞은 놈들은 전부 치료소에 들어앉아 있었다. 크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이미 그에 대해서는 가장 먼저 전달했으므로, 싸움과 관련 없는 일반인에 대해 묻는 소리임을 안 얀이 대답했다. “네. 가게 부서진 것 말고 다른 피해는 없다고 합니다.” 하, 하고 짧은 한숨을 쉰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헤르츠 경은 말리지 않고 뭘 했다는데?” 아르센이 함께 나서서 싸움을 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고 하는 소리였다. 전해진 경위서에 아르센과 관련된 이야기가 없기도 했고, 아르센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았으리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싸움 시작되기 전에 집에 돌아갔다고 합니다.” 아르센은 술 좋아하고 술 약한 마법사였다. 그런데 뭐가 좋다고 술을 처먹으러 나간 거야. 술도 못 처먹는 놈이 왜 술을 처먹다 먼저 처들어가서 일을 만드느냐고. 이런 말을 입 밖에 내면 새끼코끼리가 또 무어라 염려하는 소리를 할 테니, 칼리안은 얌전히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보나마나 한 경위서를 대충 훑어 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보상부터 해 주고, 헤르츠 경 불러줘.” 치안대에 붙들려 간 마법사들은 이 일이 발칸이나 왕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치안대에서는 이에 대해 곧바로 왕궁에 알렸다. 그날 앨런은 이른 아침부터 계속 칼리안과 함께 있었다. 그래서 급히 전해진 보고는 칼리안이 함께 듣게 되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앨런은 이 일에 대한 뒷처리를 어찌해야 할지 칼리안의 의견을 물었다. 르메인이 아닌 칼리안의 의견을 물은 것이다. 어차피 놈들이 ‘발칸이 아닌 개개인’으로 사고를 쳤다 말했으니까. 해서 칼리안은 잠시 생각을 해보겠다 말하고 앨런을 먼저 돌려보냈다. 마법사들이 스스로 제 무덤을 팠으니 굳이 나서지 않고 지켜 보기만 할 이유가 없었다. “네, 왕자님.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얀은 아르센을 불러오기 위해 곧바로 움직였다. 그런 얀을, 칼리안이 다시 붙들어 잡았다. “아니다. 잠깐만.” 마음을 바꾼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그와 동시에,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포크를 움직이던 플란츠가 잠시 손을 멈췄다. 그 무릎에 누워있던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털을 세우며 낮게 위협하는 소리를 냈다. 둘 모두 식사 자리에 어울리지 않을 미미한 살기를 느낀 탓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새끼코끼리를 향해,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냥 내가 간다고 해.” 첫 실수. 일이 일어난 김에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는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자신들이 무엇을 실수한 것인지 알고 있다면 말이다. * * * 시종장 라울이 올려두고 간 쿠키를 한 입 먹어본 앨런이 흡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엘린느가 보낸 것입니까?” 보존 마법 덕에 코코넛 특유의 식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쿠키였다. 리베른의 국왕 엘린느의 식사를 담당하는 요리사가 직접 만든 그 쿠키는 리베른에 머물 당시 앨런이 가장 즐겨 먹던 것이기도 했다. 발칸의 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르메인이 그런 앨런을 보며 무어라 말을 하려다 그냥 입을 닫았다. 왕궁에 무슨 일이 있든 칼리안과 연관된 일만 아니라면 크게 신경쓰지 않는 앨런임을 상기한 것이다. 그리고 앨런이 저렇게 태평하게 구는 것에는 항상 믿는 구석이 있었을 알았다. 때문에 르메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네.” 체이스가 칼리안을 위한 귤을 르메인에게 주었다면, 엘린느는 앨런을 위한 쿠키를 르메인에게 보냈다. 그것을 르메인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재밌기도 하고 괜히 미안하기도 해서 앨런이 잠시 웃었다. “그리 큰 일은 아닙니다. 심려 마시지요.” 이 말을 들은 르메인은 왕궁의 정예 병력이 왕궁 밖에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렸는데 그것을 어떻게 심려하지 않겠느냐는 눈이 됐다. “두 왕자님께서 그리 큰 일이 안 되게 잘 해결할 터이니.” 때문에 앨런이 이렇게 덧붙였다. 덕분에 르메인은 다시 한번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일을 왕자들에게 맡겨뒀다는 말인가.”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에 한 입을 먹고 남은 반 쪽의 쿠키를 입에 넣었다. 그것을 본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과 그들이 벌인 사고의 뒷수습을 하는 것은 다소 차이가 있지 않겠나.” “어려울 것 있겠습니까. 누구보다 잘 하실 겁니다.” 쿠키를 입에 넣은 채 이렇게 대꾸한 앨런이 그것을 모두 삼킨 뒤 느긋한 대답을 꺼내놨다. “지금껏 왕자님들께서 해 온 일이 그것 아닙니까.” 르메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무슨 말이 이어질지 알 것 같아서였다. 때문에 거기까지만 말해도 잘 알아들었다 하려는데, 앨런의 입은 닫아지지 않았다. “전하께서 벌인 일의 뒷감당.” 그래. 전부 내 탓이다. 발칸의 마법사가 술 먹고 싸움질을 한 일을 얘기하다 또 한 소리를 들은 르메인이 포기한 듯 긴 숨을 내쉬었다. * * * 플란츠가 잠시 칼리안을 쳐다봤다. 늦은 아침이라 하기보다는 점심에 가까운 시간에 식사를 시작한 참이었다. 햄을 썰어내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제가 그렇게 폭력적이진 않습니다.” 혹여 발칸의 마법사들에게 직접 검을 들거나 몽둥이를 꺼내들까봐 저렇게 보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플란츠가 짧은 웃음 소리를 냈다. 칼리안이 거짓말 못하는 것을 플란츠도 안다. 그러니 칼리안이 한 저 말은 진심일 터였다. 자신이 폭력적이지 않다 생각하는 놈이 저지른 짓들을 생각해보던 플란츠는 대충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냥 무시하고 말지, 뭐 이런 생각이었다. “같이 가시죠. 헤르츠 경도 볼 겸.”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어제 보기로 했었는데 못 보았으니 겸사겸사 같이 얼굴이나 보러 가자는 소리였다. 어차피 아르센에게도 ‘아우님 모시고 내가 직접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플란츠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동행은 하겠으나 이번 일에 개입할 생각은 없는 얼굴을 한 채였다. 말 없이 하얀 치즈를 올려 구워낸 납작한 빵을 한 입 삼키는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물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알아서 해.” 관심 없다는 듯, 플란츠는 시선을 내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관심 있으신 것 같은데요.” 칼리안이 발칸의 마법사들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관심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플란츠가 처음으로 키워내고 있는 무언가가 아니던가. 비록 온전히 플란츠의 것이라 할 수 없을 ‘대여품’ 정도로 여기고 있다지만, 플란츠는 분명히 발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으니 잠깐 흘린 살기에 걱정하는 빛을 보였겠지. 혹시라도 칼리안이 마법사들에게 크게 화를 낼까봐서. “마법사들이 술 마시고 사고쳐서 화난 것 아닙니다.” “알아.” 칼리안이 왜 화가 났는지 플란츠도 안다. 알지만 개입은 하지 않겠단다. 칼리안이 씩 웃으며 플란츠를 쳐다봤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묻는 눈이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적당히 이해했겠거니 하고 넘어가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확인을 하려 들고 있었다.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리며 말했다. “내 아우님이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것 같은데.” 플란츠가 아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기분 나빠 하는 것이다. 칼리안이 갑자기 왜 태도를 바꾸었는지, 그것도 알 것 같아서. 칼리안이 책장이 팔락이는 듯한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르쳐 드릴 겁니다. 전부 다.” 칼리안은 옆에 놓인 붉은 토마토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여전한 얼굴로 자신을 계속 쳐다보고 있는 플란츠를 향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반만 똑똑하시면 오래 안가 죽습니다.” “······ 매일 짖는 게 일이 됐군.” 평소와 같았다면 이런 말도 그냥 웃어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잔뜩 날 선 붉은 눈이 플란츠를 직시했다. “입으로만 살겠다 하지 말고, 몰래 배려해주지도 말고, 적당히 돕다 뒤로 빠질 생각 말고, 일부러 관심 없는 척 하지 말고.” 플란츠의 눈이 고요하게 잠겨들어갔다. “평생 제 그림자 노릇이나 하면서 죽은듯이 살 생각도 마시라는 겁니다.” 제대로 살 수 있게. 남김없이 전부 다 가르쳐 줄 테니까. < 제25장. 있어야 할 곳(2) > 없던 숙취가 생기는 기분이다. 아르센은 지끈거리기 시작한 머리를 휘휘 가로저었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열 세 명의 마법사를 하나하나 쳐다봤다. 말이 좋아 군단이지 고작 50명이다. 칼리안이 생각하는 규모에 비한다면 턱없이 부족하다 하기에도 모자란 수다. 이제 시작하는 단계가 아니던가. 그런데 아르센은 고작 50명 뿐인 발칸의 대원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물론 누가 됐든 왕궁 밖에서까지 그들을 따라다니며 통제할 수는 없음을 안다. 마법사들을 통제한다니. 차라리 앨런을 찾아가서 당신의 제자도 정상인은 아니라는 걸 혹시 아시는지 넌지시 물어보고 살아서 나오는 게 쉬울 것이다. 그러니 통제하지 않아도 별 탈이 없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르센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을 통해서 그동안 아르센이 헛짓거리를 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싸워서 지지 말라고 배운 마법인데, 싸울 때 써봐야지 언제 써보겠나. 그건 이해한다.” 나도 화 나면 마법 쓰니까. 이렇게, 대원들을 훑어보던 아르센이 혼잣말인 듯 혼잣말 아닌 소리를 꺼냈다. “싸우다 보면 가게가 날아갈 수도 있지. 너희가 취해서 이상한 곳에 쏜 게 아니라 가게가 거기 있던 것을 어쩌겠나. 그러니 그것도 이해한다.” 나도 몇 번 날려 봤어. 괜찮아. 그럴 때마다 그냥 조금 가난해졌을 뿐이지 별 탈은 없었어. “마법사답게 싸웠고, 안 졌고, 안 다쳤으니 됐다. 잘 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아직 체계가 완벽하게 자리잡은 것도 아니고, 매일매일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으니 쌓인 스트레스가 있는 것도 안다. 신이 나서 술을 마셨고 시비도 붙을 수 있다. 참지 못하면 마법을 꺼낼 수도 있다. 말했지만, 그러라고 배운 마법이니까. “마법사 우습게 보고 덤빈 놈들이 잘못이지.” 앞에 서 있는 놈들을 봐라. 딱 봐도 또라이같은 게, 누가 봐도 마법사 아닌가. 그런데도 덤볐으면 각오는 했어야지. 마법사가 일반인을 공격하는 게 억울할 거였으면 지들도 마법을 배워놓던가. 그걸 못했으면 입을 조심하며 살든지. “그런데 문제는······.” 전부 이해하고 넘길 것 같던 아르센이 어울리지 않게 뒷말을 흐렸다. 잘못한 것이 있음을 알고는 있는지, 열 셋의 마법사는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고는 어제 쳤고 치안대에는 새벽에 들어갔는데 나는 그 사실을 전하와 군단장님과 플란츠 부군단장님께서 모두 알게 되신 뒤에 전해들었다. 아, 칼리안 왕자님께서도 알고 계신다지.” 숨도 쉬지 않고 억양도 없이 줄줄 이어져 나오는 말에, 마법사들의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게다가 치안대에 붙들려 가서는 발칸과는 관련이 없다 했군.” 이 부분은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대원들을 둘러본 아르센이 말을 이었다. 아니, 이으려 했다. “헤르츠 부군단장.”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르센의 말을 자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 * * “애오옹!” 하고, 이런 곳에서 들리지 말아야 할 소리가 들렸다. 플란츠가 고양이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어느새 가까이 와 있었다. 칼리안과 함께 빌헬름관으로 가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진 것인지, 고민할 거리가 생긴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인지는 플란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칼리안만 보냈다. 그 뒤 후원의 산책길을 찾아왔고 고양이를 만났다. 플란츠를 부르기가 무섭게 다가와 다리에 제 몸을 부비는 것을 보니, 아마도 플란츠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차마 미워할 수 없을 녀석을 쑥 안아 든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겁이 없지.” 장미 정원에도 불쑥 들어가고, 플란츠의 방에도 불쑥 들어오고. 이렇게 외진 곳까지 겁도 없이 찾아와서는. “······ 길 잃으면 어쩌려고.” “미야옹!” 꼭 플란츠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고양이가 소리를 냈다. 플란츠는 결국 피식 웃으며 고양이를 안은 채 벤치에 앉았다. 손바닥을 찾아 제 머리를 가져다 대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플란츠가 잠시 고개를 올렸다. 하늘이 참 파랗기도 하다. 나무마다 비춰진 햇살이 플란츠가 앉은 곳까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칼리안의 말이 또 떠올랐다. - 평생 제 그림자 노릇이나 하면서 죽은듯이 살 생각도 마시라는 겁니다. 플란츠가 왜 그렇게 구는지 이미 알면서 그딴 소리를 하고 있다. 알면서 하는 소리임을 알아서, 플란츠도 어쩔 수 없이 짜증이 나는 것이다. “······ 미친 놈.” “애옹!” 제 주인 욕 하는 것은 어떻게 알아듣고, 고양이가 타박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플란츠가 저도 모르게 고양이를 향해 대꾸했다. “미친 놈 보고 미친 놈이라 하는데. 왜.” “애오옹! 애옹!” 하.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고양이나 앞에 두고 말싸움을 하는 꼴이라니. 차라리 아르센을 상대하는 게 덜 우습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고양이와 투닥거리는 사이, 잠시 바람이 불었다. - 사아아······. 자작나무 잎은 작았고, 잘 흔들렸다. 햇빛 가득한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한가득 지나갔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가 눈을 찌른다. 때문에 고개를 들고 머리카락을 대충 치워내던 플란츠의 손이 문득 멈췄다. 히나가 서 있었다. 아무래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 버린 기분에 오도가도 못하고 서 있던 히나가 얼른 플란츠를 향해 예를 보였다. 고양이랑 말싸움하던 왕자가 그런 히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왜.” 왜 그렇게 보고 있었느냐는 말인 것 같아서, 히나가 생긋 웃었다.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의 생긋거림과는 그 본질부터 다른 순수한 웃음이다. 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던 히나는 손가락으로 고양이와 플란츠의 발치를 가리켜 보였다. 고양이를 데리러 가까이 가도 괜찮은지를 묻는 것 같아서,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몇 걸음을 더 걸어온 히나는 플란츠에게서 조금 떨어진 옆에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놨다. 슬쩍 쳐다보니 컵에 담긴 하늘색 아이스크림이었다. 히나가 말을 하려면 당연히 손에 든 것이 없어야 했다. 때문에 플란츠는 자신의 옆에 무언가를 내려놓은 시녀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햇살이, 반짝반짝해서, 고양이를 데리고 나왔는데, 또, 도망을 갔어요. 모두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말이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히나가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고양이를 데리고 나왔다는 정도로만 알아들었다. - 고양이가, 좋은 왕자님을, 따라갔어요. 좋은 왕자님을, 정말, 좋아하나봐요. ‘고양이가 ‘어떤’ 왕자님을 정말 ‘무엇’ 하나봐요.’ 그리고 이번에는 이렇게 보였다. 두 단어가 퍽 비슷하게 생겼다. 뒤만 달랐다. 그것이 무슨 말이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좋은, 왕자님.’ 플란츠는 최소한 칼리안보다는 이성적인 사람이다. 때문에 앞에 나온 ‘좋은’과 뒤에 나온 ‘좋아하는’의 차이를 오해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좋은 왕자라니. 평가가 많이 잘못됐다. 너무 많이 잘못됐다. 바람에 이리저리 뒤척이는 나뭇잎들은 연두색으로 반짝이는 물결처럼 고요하고 평화롭다. 히나는 플란츠가 지금 꼭 같은 모습의 눈을 하고 있다고 말을 해줄까 하다가, 그냥 미소만 짓고 말았다. 지금의 플란츠가 알아듣기에는 너무 어려운 말이니까. 대신 옆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가리켜보이며 말을 건넸다. - 아이스크림, 좋아하세요? 안 먹은 건데. 의자에 내려놓았던 음식을 왕자에게 권하는 시녀는 아마 히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대담함에 피식 웃은 플란츠가 대답했다. “싫어해. 파래서.” 파랗고 둥글둥글한게 꼭 윗층 사는 누구 눈깔 같아서, 라는 말은 뺐다. 히나에게 들려줄 만한 말은 아니었다. 블루베리가 파란색이라서 싫다는 사람은 처음 본 히나가 소리없이 웃었다. - 그럼, 무슨 맛, 좋아하세요? 플란츠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궁금해하는 질문을 처음으로 받아서였다. 내가 뭘 좋아했을까. 금방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주는대로, 보여져야 하는대로, 필요한대로 지냈으니까. 싫어하는 것은 많았어도 좋아하는 것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때문에 단 것은 다 별로라고 대답하고 말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쯤 기억이 났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 딸기.” 그래서 이렇게 한참 늦은 대답을 했다.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히나가 손을 움직였다. 그 손 끝을 따라 플란츠의 시선도 같이 움직였다. - 다음에는, 주방장님께 부탁해서, 딸기 아이스크림, 가져다 드릴게요. 이번에도 모르는 단어가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있었다. 좋아해주는 고양이와 좋아하는 것 물어보는 시녀 때문에, 짜증나던 기분이 가라앉은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던지.”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묻지 않았다. 기어코 살려두겠다는 동생놈이 뭐든 다 알려주겠다 하지 않나. 그것을 배우려면 머리를 좀 비워둬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니 모르는 단어들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묻기로 했다. 플란츠가 좋아하는, 딸기 맛 아이스크림 가져왔을 때. * * * 칼리안은 앨런의 말을 참 잘 듣는다. 칼을 쓰지 말라는 앨런의 말을 잘 듣고 몽둥이를 들었었다. 몽둥이를 꺼내 그레이를 다져놨다. 칼리안은 플란츠의 말도 참 잘 듣는다. 엄밀히 따지자면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칼이나 몽둥이를 꺼낼까 걱정한 것은 알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칼도 안꺼내고 몽둥이도 안 꺼냈다. 다만. 화도 내지 않겠다고는 안 했다. - 뚜벅, 뚜벅. 칼리안은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두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표정도 없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천천히. 그 뿐인데도 압도한다. 느긋한 속도로 가까워지는 구두 소리가 빌헬름관의 훈련장을 뒤흔드는 느낌이다. 이미 51명이 있던 곳에 한 사람이 더 들어왔을 뿐인데 공기가 달라졌다. 그냥 어른도 아니고 그냥 귀족도 아닌, 알고 보면 한 명 한 명이 모두 출중한 능력을 가졌다 할 발칸의 마법사들을 완전히 내리누르고 있었다. 왕비의 거처가 부서진 것을 안 뒤 ‘어이쿠’ 따위의 말을 하던 마법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앞에 도열해 있던 마법사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나지막한 구두 소리가 아르센의 옆에서 멈췄다. 멈춘 소리를 따라 마법사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제 입으로 불러낸 발칸의 진짜 주인. 칼리안을 향해서였다. “헤르츠 부군단장.” 오래 전 칼리안이 그레이를 상대할 때,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풍겨오던 칼리안의 살기를 이미 겪었던 아르센이었다. 그 때에 비한다면 지금의 기세는 별 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불린 아르센은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그 뒤에야 ‘네’ 하는 대답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런 아르센을 잠깐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내가 하겠습니다.” 내가 혼을 내겠습니다. 내가 벌을 주겠습니다. 내가 잘 얘기하겠습니다. 내가 경고를 하겠습니다. 이런 거 말고. 내가 다 죽여버리겠습니다. 그게 제일 간단하잖아요. 이렇게 들린다. 아르센은 마음 속으로 번역되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나서겠다는데 어떻게 막겠는가.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려줘야 할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왕자님.” 아르센의 대답과 함께 칼리안이 마법사들을 향해 돌아섰다. 열 세 명의 마법사를 하나하나 응시하는 붉은 눈에 그대로 심장이 타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이들입니까. 발칸과 관련 없다 한 것이.” 이미 알고 있을 텐데도 이렇게 묻는다. 아르센은 대답하지 않았고, 마법사들은 고개를 떨궜다. 다른 답은 필요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마법사들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와 함께 아주 조용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어찌할까.” 진짜 살기가 피어올랐다. 조금 전의 것은 그냥 나 좀 보라는 인사치레였던 것처럼. 수천, 수만 개의 칼날이 온 몸을 도려내는 것 같은 섬뜩한 기운이 마법사들을 향했다. “생명 붙어 있고 숨 쉬는 내내 내 품에 있을 놈들일 줄 알았지. 나는.” 마법사들의 얼굴에서 다시 한번 핏기가 사라졌다. 발칸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얄팍한 책임감. 발칸의 책임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말아야 한다는 뒤늦은 걱정. 그냥 마법사와 발칸의 대원 사이를 말 한 마디로 가르려 한 잔머리.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어떻게든 그들을 보호하고 책임져 줄 수 있는 ‘칼리안’이라는 울타리에서도 벗어나게 됐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왕궁 안에서는 발칸이고, 밖에서는 마법사인 새끼들. 나도 필요 없는데.” 칼리안의 품 안에서 제 발로 벗어났던 마법사들. 그들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 제25장. 있어야 할 곳(3) > 하루에 이 말을 대체 몇 번을 하는지. “미친.” 빌헬름 관에 혼자 가라는 말을 들은 칼리안이 아무 말 없이 알겠다 했을 때,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했어야 했다. - 마법사들이 술 마시고 사고쳐서 화난 것 아닙니다. - 알아. 그때 플란츠는 분명 ‘안다’고 했다. 칼리안은 그에 대해 무엇을 아는지 물었고,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 가르쳐드릴 겁니다. 그 말을 했을 때부터 이미 칼리안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어느정도 바뀌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칼리안이 어떤 놈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했다. 그 가르침이 이렇게나 사나운 방식일 줄 알았다면, 그 태평한 얼굴을 보며 ‘생각할 게 있으니 오늘은 빌헬름에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럼. 쉬십시오. 조금 전 식사가 끝나고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이렇게만 말한 칼리안이 나간 뒤, 플란츠는 후원으로 가 산책을 했다. 고양이와 히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체르밀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그 때. 지금 당장 누구 하나는 찢어죽일 듯한 살기가 느껴졌다. 칼리안의 것이었다. 빌헬름 관에 있을 미친 동생놈이, 체르밀 궁에서 느껴질 정도의 살기를 줄기줄기 내뻗고 있는 것이다. 플란츠는 그 길로 말에 올라 곧장 빌헬름으로 달렸다. 칼리안이 그 속에 무슨 생각을 담고 발칸의 앞에 섰을지, 누구에게 함께 화가 난 상태였을지 너무 늦게 알았다. 발칸을 아끼는 것이 분명하면서 관심 없어 하는 척,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다 하는데도 무관심한 척, 직접적인 책임이 두 부군단장에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 상관 없는 척. 그런 모습을 보인 플란츠에게 함께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네가 신경 안 쓰면 내가 다 잡아버리겠다고. 내 멋대로 화 내고 내 방식대로 다 짓눌러 버리겠다고. 말에서 내려 빌헬름 관으로 들어서는 플란츠의 악다문 이 사이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화를 낼 거면······.” 화를 낼 거면, 그냥 나한테 내라고. 책임감 없게 굴지 말라 그냥 말을 하라고. 그 쪽에 다 쏟아내지 말고! * * * 집무실에 앉아 커피향을 음미하던 앨런이 순간 팔을 멈췄다. “······ 우리 왕자님께서 생각보다 화가 많이 나셨나.” 여유롭게 내뱉은 말과는 달리, 날카로운 편에 속하기 때문에 항상 힘을 빼 두려 노력하고 있는 눈초리가 예리한 빛을 냈다. 살기 때문이었다. 아르피아 궁과 빌헬름 관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농도 짙은 살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칼리안은 분명 살기를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동안 칼리안이 이렇게 범위 없는 살기를 내보내는 일은 좀처럼 없었지 않나. 고개를 갸웃하던 앨런이 저도 모르게 긴장한 목을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너무 과한 것이 아닌지.” 화를 내고 혼을 내는 정도로 끝낼 줄 알았다. 필요하다면 처벌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럴 권한은 충분히 있었으므로 다른 참견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굳이 빌헬름 관이 아니라 아르피아 궁에서 집무를 보고 있던 앨런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은 혼을 내고 처벌하는 것의 범위를 넘어섰다. 칼리안의 바로 앞에서 이 기운을 마주치고 있는 이들은 진심어린 생명의 위협을 느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앨런의 어깨가 굳었다. 얼마 전 앨런의 집무실을 찾아왔던 체이스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체이스가, 아르센을 마주쳤던 날이었다. ‘설마?’ 설마. 칼리안이 지금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 체이스조차 자기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지 않나. 게다가 오늘은 체이스가 카이리시스를 떠난 날이다. 그런 상황에서 발칸을 마주했으니. 이것을 떠올린 앨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여유로움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자책을 한 앨런이 서둘러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만에 하나라도 앨런이 우려한 것이 맞다면, 오늘 빌헬름 관에 딱 51구의 시체가 생기기 전에 빨리 가 봐야 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르메인을 호위하는 렌이 이 엄청난 살기를 느끼지 못할 리 없으니, 우선 그 쪽이 함부로 빌헬름 관에 가보지 않도록 말을 해 둘 필요도 있었다. - 벌컥! 그렇게 급히 문을 연 앨런의 눈에 누군가가 보였다. 앨런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이를 본 까닭이다. 전례 없는 칼리안의 살기에 집중하느라 누가 이 곳에 찾아왔는지를 신경쓰지 못했다는 것을 이제야 눈치챘다. 동글동글한 청회색의 눈, 브론즈 색의 곱슬머리. 새끼 코끼리 얀이었다. “아. 마나실 백작님.” 르메인의 집무실 앞에서 시종장 라울과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던 얀이 고개를 돌려 앨런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앨런을 향해 간단한 목례 후 입을 열었다. “기다리시면 된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의 전언이었다. 다른 설명이 없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미 앨런이나 렌이 움직일 것을 예상하고 얀을 먼저 보내 두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저 어마어마한 살기가 결코 실수가 아니라는 뜻이니까. 아주 잠시동안 생사를 오고 간 기분이 든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그저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얀의 모습에, 앨런은 여러 감정이 들어간 긴 한숨을 저도 모르게 내쉬었다. 칼리안을 걱정할 줄이나 알았지 여전히 칼리안이 어떤 사람인지를 종종 잊곤 한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우리 왕자님······.” 칼리안은 절대로. 한 가지 일에 하나의 이득만 챙기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복도의 창 밖으로 보이는, 급히 달려오는 은백색의 말과 그 위에 올라 있는 이를 본 앨런이 혀를 쯧 찼다. “이렇게나 마음 씀씀이가 넓으셔서야.” 그렇게 말한 앨런은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다시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쿠키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르메인에게서 뺏어온 엘린느의 쿠키였다. * * * 세상에는 바보가 있고 머저리가 있다. 괜찮은 또라이와 답 없는 또라이가 있다. 그리고 물론, 똑똑한 사람과 좋은 사람도 있다. 이것이 바로 아르센이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물론 저 기준으로 나눌 가치조차 없는 부류, 이를테면 에반 브리센 후작이나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 같은 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아르센에게 있어 ‘사람’으로 치부되지 않으니 논외다. 참고로 레이븐은 괜찮은 또라이에 분류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르센보다 똑똑하지 못했으므로 ‘바보와 머저리’ 외의 다른 분류를 짓지 않았었지만 근래 똑똑한 사람이라는 부류를 하나 만들었다. 앨런, 그리고 앨런을 상회하는 의외의 지적 생명체 플란츠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 부류에는 딱 한 명이 있다. 칼리안이다.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죽은 스승의 뒤를 이어 ‘좋은 사람’의 분류에는 항상 칼리안만 있었다. 그렇게 구분해 둔 것에 이견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왕자님.” 그런데 지금 아르센은 굉장히 불안한 눈으로 그 좋은 사람을 보고 있었다. 눈으로는 칼리안의 움직임을 좇으면서도 손 끝에 차가운 마력이 집중되려는 것을 계속하여 참아내는 중이었다. 칼리안의 살기가, 그만큼 짙었다. ‘더 버티기 힘들 텐데.’ 마법사들은 물론 다 정신 나간 족속들이지만 그만큼 예민하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마법사들이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검을 들거나 마법을 쓰면, 그것이 나을 것이다. 당장 죽을 듯한 것보다는 어디 한 군데 베이고 부러지는 것이 나을 테니까. “왕자님.” 때문에 아르센은 다시 한번 칼리안을 불렀다.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살기를 집어넣지도 않았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마법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더 기다리지 못한 아르센이 열 세 명의 마법사들 앞으로 나서기 위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제야 칼리안의 고개가 아르센을 향해 돌아갔다. 그 눈에 담긴 것이 작은 질책임을 안 아르센이 ‘아차’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칼리안.”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가 칼리안을 불러세웠다. 당연하겠지만 아르센의 것이 아니었다. 왕궁에서 칼리안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단 세 명. 그들 중 한 명인 2왕자 플란츠가 칼리안의 앞으로 걸어와 섰다. 정확히 마법사들과 칼리안의 사이를 가로막은 채였다. “그만하지.” 칼리안이 시선을 돌려 자신과 마법사들 사이에 선 플란츠를 쳐다봤다. 살기는 감추지 않은 채였고, 플란츠 역시 긴장한 얼굴이었다. 이 정도의 한기는 플란츠 역시 처음이었으니까. 플란츠가 살짝 고개를 돌려 뒤에 선 마법사들을 쳐다봤다. 적어도 절반은 당장 주저앉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질린 얼굴이었다. 그들을 살핀 플란츠가 다시 고개를 돌려 칼리안 쪽을 쳐다봤다. 포기한 듯, 혹은 졌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았으니까.” 칼리안의 얼굴에, 아주 잠시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것은 꽤 복잡해서 플란츠조차도 의도를 바로 파악해내기 어려웠다. 즐거움인지, 노여움인지, 안타까움인지, 기쁨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을. 혹은 그 모든 것이 다 섞여 있는 것 같은 얼굴. 그런 얼굴을 한 채 스치듯이 플란츠를 쳐다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짧은 대답이 이어졌다. “네.” 칼날같이 휘몰아치던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와 함께 칼리안이 마법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난 죽을 때까지 발칸일 새끼들만 데리고 갈 거야. 아닌 새끼 필요 없어.” “네, 왕자님.” 마법사들은 곧바로 대답했다. 살기가 사라졌음에 주저앉거나 칼리안을 원망하는 눈으로 보는 놈들은 없었다. “술 처먹고 사고 칠 거면 내 이름 걸고 쳐.” 칼리안의 이름 걸고 칠 만한 사고가 아니라면 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아르센이 그러하듯이. “알겠습니다.” 마법사들은 기사와 다르다. 그들의 신의는 충의와 다르다. 맹목적이며 헌신적이지만 언제 어떻게 튈 지 모르는 이들이다. 그런 그들을 강제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칼리안도 익히 아는 것처럼, 그들은 돌아있으니까. 그러니 키리에가 그랬던 것처럼 그저 훈련장 몇 바퀴 뛰는 것만으로는 절대 저놈들의 인식을 바꿔놓을 수 없다. 내가 어느 정도 힘을 가졌는지,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참고 있는지 모두 다 낱낱이 보여줘야 믿는다. 지극히 이성적으로 미쳐있는 마법사들 아닌가. “내 이름 걸고 치는 사고는 내가 전부 다 막아 줄 테니까. 그러라고 가진 힘이니까.” 저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검은 머리와 붉은 눈 말고. 진짜 힘. 그것을 직접 겪어봐야 믿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을 보는 마법사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돌아서다. 방금 전까지 칼리안이 자신들 숨통을 죄이던 놈인 것을 아니까. 이제 정말로 믿을 터였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칼리안이 잠시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렇게, 시선은 플란츠에게 둔 채 마법사들을 향해 말을 맺었다. “이런 게, 진짜 책임감이라는 거다.” 어줍잖게 피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한 것처럼 제대로 나서서 보호하라고. 그것이 네 위치에서 네가 가져야 할 책임감이니까. 플란츠. < 제25장. 있어야 할 곳(4) > 뒷통수가 움츠러드는 느낌이다. ‘머리 그냥 풀고 올 걸.’ 드미레아가 이렇게 잠깐 후회를 했다. 국왕을 만나러 오는 자리였기에 단정한 하얀 셔츠와 바지, 검은 색의 짧은 재킷을 걸쳤다. 거기에 조금 더 깔끔해 보이는 올림머리를 했던 터였다. 덕분에, 뒷통수가 빳빳하게 곤두서는 이 느낌이 짧은 머리를 억지로 땋아서 틀어올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칼리안의 것인 듯한 엄청난 살기 때문인지 헷갈렸다. - 후우. 르메인의 뒤에 서 있던 렌이 작게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것으로 보아 지금의 이 기분은 역시 살기 때문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던 드미레아는, 르메인을 만나고 나가는 길에 칼리안을 찾아가 대련이나 한 번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저 정도 살기를 느꼈음에도 저택으로 그냥 돌아갈 드미레아가 아니었다. 그 호승심만큼은 슬레이만을 꼭 닮은 것이다. 그때, 르메인의 곁으로 잠시 다가온 렌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이 종료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전하.” 칼리안의 살기가 씻은듯이 사라졌으니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르메인은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르메인은 발칸이 저지른 사고에 대해서는 이미 알았다. 다만 그 문제에 대해 칼리안과 플란츠가 발칸의 군기를 조금 엄하게 잡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리 큰 문제라 여기지 않고 있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 드미레아와 렌이 어떤 기분으로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절대 알 수 없을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지난 번에 나서 준 일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여러가지로 칼리안을 도와 준 일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공작가의 소가주였으니, 그만큼의 대우를 담은 말이기도 했다.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드미레아가 살짝 웃으며 화답했다. “어느새 긴밀한 사이가 되었는데, 서로간의 어려움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비록 드미레아 역시 필요에 의해 응한 소문이라지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소문을 해명하지 않고 기정 사실로 만든’ 르메인의 처사, 그리고 도움의 대가에 대해 짚고 넘어간 것이었다. “그래.” 르메인은 ‘서로간의 어려움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 말하는 드미레아를 잠시 쳐다봤다. 이미 지그프리드가 칼리안의 어려움을 도와주었으니, 추후 지그프리드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왕실에서 지그프리드를 돕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야기임을 알아들은 탓이다. 확실히 드미레아는 슬레이만이나 얀과 달랐다. “당연한 일이지. 내 잊지 않으마.” 결국 르메인은 이렇게 향후의 도움을 약속했다. 이미 칼리안에게도 ‘도움에 대한 대가’를 확실히 받아내기로 했지만 그 쪽은 그 쪽이고 이 쪽은 이 쪽이니까. 아무리 르메인의 권력이 약하다 하더라도 어쨌거나 국왕이니까. 명분 뿐인 이름이 필요할 때가 생길 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흡족한 약속을 받아 낸 드미레아가, 작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그리고는 르메인을 찾아 온 진짜 이유를 품에서 꺼내놓았다. “공작령에서, 전하께 이것을 꼭 전해드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슬레이만의 심부름을 왔다는 소리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본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돈이었다. 떼먹고 도망갔던 온천 여행 값을 드미레아 편에 보낸 것이다. 슬레이만의 시커먼 속내가 훤히 보인다. 그래서 웃었다. 칼리안과 드미레아의 접점을 한 번 더 만들어 주려는 속셈인 것 같아서였다. “지그프리드 공이 3왕자를 꽤 좋게 보았나 보군.” 당연하겠지만 슬레이만이 드미레아를 왕자비로 앉힐 생각은 아닐 것이다. 칼리안을 데릴사위로 삼으려는 생각일테지. 이런 생각을 한 르메인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는 빚을 지지 않습니다, 전하. 그 뿐이니 다른 오해는 없으셨으면 합니다.” 불쾌하다는 뜻이다. 그냥 빌린 돈 갚으러 온 것이니 혹시라도 칼리안과 드미레아의 관계를 엮으려 들거나 착각하지 말라는, 뭐 그런 말이기도 했다. 그 단순한 슬레이만에게서 어떻게 저런 인재가 나왔을까 하는 생각에, 플란츠와 란델의 아버지인 소 같은 르메인이 허 하고 한 번 웃었다. * * * 사고를 친 놈이든. 사고 안 친 놈이든. 발칸의 마법사들은 오늘, 지금껏 살아온 날 중 손에 꼽힐 수 있을 만큼은 될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아니, 대다수의 마법사들에게 있어 오늘의 일은 지금껏 겪어 본 것 중 가장 섬뜩한 경험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술집을 날려먹은 마법사들이 ‘이번 일은 발칸과 관련이 없습니다’ 라는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나 자상하게 웃던 칼리안이 단박에 달려와서 왕궁을 뒤흔들 만큼 화를 내며 욕설까지 뱉어낼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칼리안이 이렇게까지 화를 낸 근본적인 이유까지 완벽히 이해한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플란츠 뿐이었다. ‘전쟁.’ 칼리안은 전쟁을 겪었다. 그것은 플란츠의 머리로도 온전히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체르밀 궁까지 뻗어나와 플란츠에게 경고를 전한 소름 돋는 기운이 그저 그런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플란츠도 안다. 부숴버린 마차 값을 내 주는 것, 치료비를 갚아주는 것, 가게 기물을 보상해주는 것, 궁을 부순 죄를 덮어주는 것 같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제 윗사람을 믿고 의지해야, 그런 끔찍한 현실에 당면했을 때 스스럼없이 목숨을 맡기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칼리안이다. 그 믿음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칼리안이 모를 리 없다. 누군가 맡겨온 것을 완벽하게 책임져줘야 더 큰 것을 맡기는 것임을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가르쳤다. 그렇게 쌓아올린 믿음이 있어야 한 명이라도 덜 죽는다는 사실을, 칼리안은 직접 겪어가며 배웠으리라. “저도 사람이라서. 가끔 돕니다.” 때문에 이렇게까지 심하게 화를 냈다는 것을 플란츠는 안다. 플란츠가 그것을 알고 있음을 아는 칼리안은 이런 말을 꺼냈다. 오늘 일에 대해 앨런에게 보고하러 간 아르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또 뜬금 없이 말을 한 것이다. 오늘 잠깐 돌았었다고. 자신도 사람이라서. 세크리티아의 왕제였을 때의 칼리안은 아마 오늘 보여준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플란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체이스가 분명 ‘많이 무뎌졌다’ 했으니 어쩌면 더 호전적이고 더 잔인했을지 모르지만 제 사람을 끔찍이 아끼던 놈이었으리란 것은 분명하다고. 그런 놈이 전쟁을 겪었다. 아마도 전부, 죽었을 것이다. 같은 일을 또 겪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리가 없다. 사람이니까. 그러니 돌았던 거다. “······ 알아.” 훈련장 밖 의자에 앉아있던 플란츠가 이렇게 대답하며 훈련장 쪽을 봤다. 그런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가 형님께 화를 낸 것은······.” “알아. 그것도.” 몇 달 전.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발칸의 훈련을 지켜보던 플란츠가 발칸을 맡아보겠다 마음을 먹었다. 칼리안이 먼저 의사를 묻기는 했지만 결심을 했던 것은 분명 플란츠였다. 그랬으면서, 발칸을 그저 자신의 목숨 유지를 위해 잠시 빌려온 힘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거리를 두고 책임지기를 피하려 하지 않았나. 감당해야 할 몫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모습이 르메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는 제 사람은 커녕 자신의 목숨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똑같이 굴고 있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발칸의 대원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플란츠에게도 화를 냈다. “그래야 사니까.” 나도, 저 마법사들도. 플란츠가 어쩐 일로 말을 덧붙였다. 이제 배우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칼리안의 의도를 파악했음을 제대로 확인시켜 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귀찮음을 감수한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씩 웃었다. “역시 형님은 똑똑하십니다.” “또 짖지.” 분명 화를 낼 때와 완연히 다른 웃음임에도, 플란츠는 잠시 손 끝이 차게 식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전 마주봤던 칼리안의 한기가 다시 떠오른 탓이다. 아주 잠시동안 칼리안의 앞에 섰던 플란츠가 이 정도였으니, 플란츠가 말을 달려 오는 동안 칼리안의 화풀이를 고스란히 감당한 마법사들은 훈련을 받을 만한 꼬락서니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때문에 플란츠와 아르센은 오늘의 훈련을 취소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것은 분명 집에 가서 쉬라는 의미였다. 결코, ‘저런 짓’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마법사들이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를 본 플란츠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내 아우님은 매일 짖는 것이 일이고, 저놈들은 하루 하루 미쳐가는게 일이군.” 그 말에, 칼리안의 웃음보가 터졌다. 그 플란츠가 굳이 입을 열어 이렇게 긴 소리를 꺼낼만 했기 때문이다. 아르센의 분류에 따르자면 ‘답 없는 또라이’인 마법사들은 지금, 여전히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로 칼리안의 동상을 먼저 세울지 아르센의 동상을 먼저 세울지 따위를 토론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라고 허락해 준 휴일이 절대 아니었음에도. 누가 보면 새로운 마법 주문식이라도 만드는 줄로 착각할 만큼 열띤 모습이었다. 지극히 마법사답게 평화로운 모습이다. 한참을 웃던 칼리안이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마법사답지 않습니까.” 옆에 앉은 망할 동생놈도 마법사였음을 잠시 잊었던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대답하지 않던 플란츠가 마법사들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강했겠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플란츠는 지금 과거의 칼리안이 겪었던 발칸이 강했는지를 묻고 있었다. 마법사를 보호하려는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의 눈에 원망은 없었다. 그래서 물어볼 수 있었다. 그때와 지금의 자신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것을 알았으니까. “······ 강했습니다. 끔찍할 만큼.” 그래서 대답할 수 있었다. 칼리안도. 절대로 알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을 잠시 접고, 그 날의 일을 처음으로 입에 올렸다. 플란츠가 얼마나 강한 집단을 만들어냈는지를. 칼리안의 말에, 플란츠는 고개를 숙이는 대신 발칸의 답 없는 또라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그렇게 행동하게 된 원인이 사라져버린 헤이시아 궁일지, 딸기 아이스크림일지, 체이스의 말 때문이었을지는 플란츠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여전히 앞을 쳐다보는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발칸의 미래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일부터는 기사단도 둘러보셨으면 하는데. 어떠십니까.” 이제 슬슬 발칸의 통합을 준비해보자는 소리였다. 플란츠에게 과거의 일에 대해 더 자세히 풀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발칸이 얼마나 강했는지, 그것만 알면 될 일이니까. 생각해보아야 좋을 것 없을 기억을 꺼내놓아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니 부지런히 움직여서 발칸에 대한 훈련도 계속 하고, 카렌과 라온 기사단에 가서 눈도장도 좀 찍으라는 말만 전했다. 어차피 하루 아침에 합쳐질 수 있는 병력이 아니니,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맹세의 인에 대해 알아보고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기사단을 손에 넣자는 것이다. 어쨌거나 플란츠가 그들의 힘을 가져오기로 한 이상 미뤄 둘 이유가 없었다. “가능한 빠르게 발칸으로 합쳤으면 해서요.” 물론, 빠르게라 하더라도 시일은 걸릴 것이다. 당장 플란츠가 기사단부터 온전히 손에 쥔 뒤에 합쳐야 별 탈이 나지 않을 테니까. 때문에 안그래도 그렇게 할 생각이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고,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관리는, 오늘 보신대로 하시면 됩니다.” 사람을 제 것으로 만들어 다루는 방법은 오늘 칼리안이 알려줬다. 기사들에 맞추어 대응하는 것이야 플란츠가 알아서 할 일이다. 실수하면, 그때 다시 알려주면 되니까. 플란츠는 이번에도 고개만 움직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다시 한번 길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무력으로 누를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형님이 집니다. 의외로 엄청 약하셔서.” 그러니 싸우려 들지는 마시고 알아서 잘 처신하시면 됩니다. 하고 덧붙이는 칼리안을 보며 플란츠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짖지 좀 말라고.” 오늘도 양껏 짖은 칼리안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짖을 만큼 짖었으니 그만 짖겠다는 소리였다. < 제25장. 있어야 할 곳(5) > 별을 녹여내어 만든 검. 그 재료의 독특함 때문에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는 묵색의 검. - 콰앙! 카가강! 그리고, 마주한 이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고스란히 비춰낼 듯 반짝이는 은색의 검. 플란츠의 검이 밤을 담았다면, 드미레아의 검은 한낮의 태양을 담은 듯 했다. 이렇듯 완벽히 다른 두 검의 공통점을 굳이 찾아본다면 그 무게감이라 해야 할 것이다. 둘 모두 칼리안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묵직한 검이었으니까. 그래서 칼리안은 지금 이 순간에도 기사들을 열심히 양성하고 있을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 역시 무게감 있는 검술을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이리스 검술의 원류가 지그프리드니까.’ 카이리스에서 역사가 깊다 할 만한 몇몇 기사 가문의 검술은 결국 슬레이만의 검을 기준으로 조금 더 무겁거나 혹은 조금 더 가볍거나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터였다. - 카가가강! 카아앙! 그랬으니 카이리스의 양대 기사가문이라 지칭되는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의 검이 맞닿는 소리가 이렇게나 요란할 수 밖에. 드미레아의 검을 맞받아 친 플란츠의 검에서 불꽃이 튀었다. 둘이 그 정도로 진심을 다해 대련에 임하고 있다거나 뭐 그런 뜻의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불꽃이 튀었다. 비등비등한 힘의 칼날이 계속 얽히고 있으니 검이 맞닿을 때마다 사방으로 불티가 비산하는 것이다. - 카아아앙! 카앙! 정통으로 맞부딪힌 검이 튕겨나오자,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의 회전 방향을 바꾼 드미레아가 다시 한번 검을 내리그었다. 그러나 그것은 드미레아의 움직임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한 플란츠의 검에 막혔다. 그렇게, 주로 드미레아가 공격을 하고 플란츠가 방어를 하는 식의 공방이 이어졌다. 아직 싸움을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때문에 칼리안은 지금 플란츠가 드미레아의 검을 ‘분석’하고 있는 중임을 알아보았다. 칼리안은 검을 주고 받는 것에도 머리를 쓰는 플란츠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 좋은 버릇이 아니라는 말을 꼭 해줘야겠다 생각하면서. “레아가 많이 늘었네요. 바로 질 줄 알았는데.” 빌헬름 관에서 쓸데 없는 동상 얘기나 하며 뭉그적거리는 마법사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아르센은 아직 오지 않았고, 칼리안의 옆에 있던 플란츠는 지금 수련장 안에서 드미레아와 대련중이었다. 덕분에 혼자 앉아있던 칼리안의 옆으로 얀이 다가와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왕자의 시종이나 지그프리드의 장자라기 보다는 동생 얘기하는 그냥 흔한 오빠의 모습을 한 채였다. “드미레아가 내 형님에게 바로 질 것 같았어?” “아직 어리고, 또 아무래도 힘의 차이가 있으니까요.” 당연하겠지만 얀도 검을 쥘 줄은 안다. 말 그대로 쥘 줄만 알지만 아무튼 안다. 그러므로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의 검을 다루는 데에 있어 ‘힘’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힘의 차이······. 글쎄, 어떠려나.” 이렇게 중얼거린 칼리안이 살짝 웃는 얼굴을 했다. 둘의 실력을 제대로 가늠해내지 못하는 얀의 눈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칼리안을 꽃 같은 왕자로만 보듯 드미레아를 그저 어린 여동생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 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오러 다루는 칼리안이야 논외겠지만 어찌됐건 드미레아는 ‘힘’에 있어 플란츠에 비해 불리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성별에 따른 신체적인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고. 그러나 드미레아다. 그냥 검을 좀 다루는 열 다섯의 소녀가 아니라, 지그프리드의 드미레아다. 그런 차이 따위는 개한테나 줘버리라는 듯, 드미레아의 검격은 하나같이 세차며 묵직하다. 칼리안이 가벼운 몸과 검을 극한에 가까운 속도를 내는 것에 몰았다면 드미레아는 가벼운 만큼 빨라진 속도에서 나오는 힘을 무게로 다시 치환한다. 그러니 드미레아의 검은 충분히 강하다. - 콰앙! 카아앙! 충돌이라 해야 맞을 듯한 모습을 띄며 두 검이 다시 한 번 정면으로 부딪혔다. 드미레아가 튕겨나온 검을 다잡으려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사이, 플란츠의 검이 꽤 그럴듯한 일격을 가했다.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뻗어나간 검이 드미레아가 검을 되돌리는 틈을 정확히 파고든다. “앗.” 그것을 본 얀이 짧은 소리를 냈다. 누가 뭐라 해도 코끼리의 핏줄이 맞다는 듯, 드미레아에게 공격이 가해지는 순간을 얀도 본 것이다. 때문에 꽤 의외라는 얼굴이 된 칼리안이 아주 잠시 동안 얀을 쳐다봤다. 드미레아에게 빈 틈이 생기는 순간과 플란츠의 검을 따라갈 만큼은 되는 눈을 가졌다는 뜻이니까. 그러면서도 칼리안을 방금 구워낸 도자기인형 쯤으로 취급하고 있으니, ‘넌 저런 걸 볼 수 있으면서도 나를 걱정하는거냐’ 하는 눈빛을 한 채였다. - 카강! 팔과 목 사이를 노리고 달려드는 검 끝을 본 드미레아가 검 손잡이를 틀어 플란츠의 일격을 막았다. 그리고, - 카아앙! 카앙! 캉! 세 번의 연계 공격을 물 흐르는듯이 쏟아냈다. 조금 전까지 플란츠에게 보여줬던 공격 패턴과 완전히 다른 방향, 완전히 다른 회전력, 완전히 다른 힘이다. 이번 공격 역시 막히기는 했으나 칼리안은 플란츠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자신의 검을 살펴보고 있음을 간파한 드미레아가 공격 방식을 달리했음을 눈치 챈 까닭이다. 지그프리드의 검을 머리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 고스란히 담겼다. “저래도 질 것 같아?” 칼리안이 흡족하게 웃으며 물었다. 드미레아는 맹수다. 검을 쥔 드미레아는 치밀하게 움직여 사정 없이 목을 물어뜯는, 절대적으로 힘의 우위에 선 맹수였다. 그런 드미레아로부터 맹렬하게 쇄도해오는 공격을 받아낸 플란츠도 태도를 바꾸었다. 언젠가 칼리안을 앞두었던 그 때처럼, 숨을 죄여오는 맹수를 앞에 둔 늑대와 같이. 사나움과 침착함을 모두 담은 그런 눈빛을 한 플란츠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준다. 드미레아로부터 뻗어나온 검을 막고, 내리치고, 몸을 돌려 되 찌르는 공방이 이어진다. “그래도 레아가 이길 것 같기는 하네요.” 얀의 대답에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들의 싸움을 살피던 칼리안이 웃었다. 플란츠가 평소에 좀만 더 잘 처먹었으면 칼리안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드미레아가 ‘이길 것 같기는’ 하다고. 키리에를 구하러 갔던 도박장에서 모든 승패를 맞췄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둘이 처음으로 검을 마주댔을 때, 이미 칼리안의 머릿속에서는 승패가 결정났다. 플란츠의 검 끝이 미세하게 밀려났던 것을 보았으니까. “드미레아가 무조건 이길 거야. 아직 내 형님은 드미레아의 상대가 못 되겠네.” 드미레아는 모르겠지만 플란츠 스스로도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느꼈을 터였다. 그래서 더 머리를 쓰려 한 것이리라. - 카아앙! 둔중하면서도 예리함을 잃지 않은 굉음과 함께 두 검이 세 번째로 정면 충돌했다. 힘대 힘이 맞붙었으니 그 소리가 마른 하늘을 조각내는 천둥과도 같다. “키리에를 부를 걸.” 이 곳에 오기 전 키리에부터 찾은 칼리안은 빌헬름 관에서 무언가를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수련이나 하고 있으라 말했었다. 칼리안의 안전과 관련 있는 일이 아닌 것을 안 우직한 키리에는 살기가 뿜어지든 말든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터였다. 때문에 이런 좋은 눈요기를 놓치게 된 키리에가 아쉬워 할 것이 느껴진다. “그런데, 레아는 왕자님과 대련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는데요.” 이렇게, 드미레아보다 늦게 빌헬름에 도착한 얀이 질문 아닌 질문을 했다. 칼리안과 대련을 해 보고 싶다 해서 이 곳에 칼리안이 있으리란 사실을 알려준 것이 얀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오늘 안돼.” 다른 설명을 하기는 어려웠으므로 칼리안은 그냥 이렇게만 말하고 웃었다. 상대가 누구든 오늘은 칼을 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바로 조금 전 ‘베른’에 근접할 만큼 화를 냈으니 혹시라도 키리에와 같은 일을 벌이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라도 대련과 실전을 구분하지 않게 될까봐. “그럼 따뜻한 차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조금 안정이 되실 텐데요.”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를 알아들은 것일까. 얀이 어느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로 이렇게 물어왔다. 얀은 참 신기하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눈치가 없으면서도 칼리안의 기분 하나는 완벽에 가까울 만큼 잘 읽어낸다. 커피를 싫어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도 그랬다. 아무것도 티 내지 않았는데 딱 한 번 커피를 내 온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커피를 꺼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얀을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몬 넣은 꿀차 먹고 싶어.” “네,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드미레아와 플란츠의 공방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당장 더 걱정해줘야 할 것은 그 쪽의 대련이 아니었다. 드미레아가 다치거나 질 일은 없을 것 같아 보였으니 말이다. 때문에 얀은 미련 없이 일어나 차를 준비하러 빌헬름 관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다시 수련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카가가강! 카앙! 플란츠의 호흡이 다소 가쁘게 변한 것이 보였다. 불편할지 모를 검은 재킷 차림 그대로 대련에 들어섰던 드미레아의 얼굴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곧 드미레아가 검을 들어 수직으로 내리쳤다. 마치 거울과도 같은 검신에 반사된 햇빛이 눈부시다. 그 반짝임을 거부하듯 플란츠가 검을 올려쳤다. 어두운 밤하늘을 담은 것 같은 검신이 드미레아의 공격을 막았다. - 카아앙! 카강! 카강! 캉! 그리고 플란츠의 반격이 이어졌다. 검 끝을 밀어내듯이 되받아친 뒤 힘이 뻗어나간 방향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빠르게 연이어 급소를 찔러나가는 공격. 마치 검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듯한 모양새를 내는 그것을 보던 칼리안이 한 번 더 놀란 얼굴을 했다. 이번에는 얀 때문이 아니라 플란츠 때문이다. “저거······.” 내 껀데. 그것은 분명, 이전에 플란츠를 상대할 때 칼리안이 딱 한 번 보여줬던 공격이었다. “내 형님께서 배워가신 게 생각보다 많은데.” 가르쳐 준 적 없는 것까지 배워간 머리 좋은 형을 향해 중얼거린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플란츠를 가르치는 것이 생각만큼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어서다. 칼리안의 이런 반응을 알 리 없을 드미레아가 넓은 검격을 펼치며 플란츠의 공격을 막아냈다. - 쉬이익! 곧 드미레아의 검이 마지막 파공음을 냈다. 플란츠의 검이 그 앞을 가로막았고, 온 힘과 온 무게를 다한 공격을 실은 은색의 검이 묵색의 검을 저만치 먼 곳으로 날려버렸다. - 카아앙! - 챙강! 몇 미터를 날아간 검이 수련장 바닥에 떨궈지며 수련장을 다시 한 번 울렸다. 플란츠는 검이 날아간 쪽을 보지 않았다. 자신의 심장 앞에서 정확히 멈춘 드미레아의 검 끝, 그리고 그 무거운 검을 지탱하며 대련을 했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손, 그만큼 굳건한 청회색의 두 눈을 차례로 쳐다봤다. “졌군.” 그리고 이렇게, 패했음을 인정했다. 드미레아가 검을 거뒀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검을 집어넣은 드미레아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왕자님.” 그리고는 날아가 떨어진 검을 주워 손잡이 쪽을 플란츠에게 내밀었다. 승리자의 친절에 피식 웃은 플란츠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험하게 다뤄졌음에도 조금도 상하지 않은 검날을 살짝 훑은 플란츠가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드미레아가 말했다. “아주 좋은 검입니다.” 아마 이 말을 칼리안이 들었다면 미안한 얼굴을 했을 것이다. 같은 재료로 만들어 키리에에게 건넸던 또 하나의 검. 과거에서는 그 검의 본래 주인이 드미레아였던 듯 했으니까. 플란츠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다 대꾸했다. “좋은 만큼 무겁던데.” 비밀 지켜주는 값이라며 칼리안이 건넸던 검이다. 그것이 결국은 이렇게, 삶에 미련 한 줌 없던 플란츠의 발을 땅에 묶어놓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 어떤 것보다 플란츠에게는 무겁게 느껴지는 검이기도 했다. 다소 더워진 탓에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친 드미레아가 대답했다. “생과 사의 길을 나누어 놓는 물건인 것을요. 무겁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서로 다른 이유. 하지만 결국 같은 결론이었다. 플란츠도, 드미레아도. 손에 쥔 검이 무겁지 않은 이는 없을 테니까. 물론 그들로부터 저만치 먼 곳에 앉아 꿀차를 홀짝이고 있는 칼리안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아, 귤이네.” 얀은 이것을 어떻게 또 알았는지. “레몬보다 귤을 더 좋아하시게 된 것 같아서요.” “응. 좋아.” 레몬 대신 귤을 한껏 담은 꿀차의 향이 달았다. 그 향기에, 가장 무거운 검을 쥐고 사는 칼리안이 얀과 마주보며 함께 웃었다. < 제25장. 있어야 할 곳(6) > 똑같은 블론즈 색의 곱슬머리. 똑같이 동그란 눈 속에 담긴 청회색의 눈동자. 누가 보아도 남매라는 생각이 들 법한 외견이었으나 그 누구도 그런 의심을 하지 못했다. 한 명은 3왕자의 시종이었고 또 한 명은 무려 카이리스 유일의 공작가를 이끌어나갈 소공작이었으니까. 본래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차남이었으나 현재는 장남이 된 시로이안은, 슬레이만의 첫째 아들이 죽은 일로 충격을 받아 저택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다 알려져 있었다. 물론 한 때의 얀이 정말로 그리 굴었던 것은 맞았으므로, 그 소문이 영 잘못되었다 하기도 어려웠다. 다만, 바로 그 시로이안이 지금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 채로 ‘우리 꽃 같은 왕자님’을 쫄래쫄래 따라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뿐이었다. 그러니 저 둘이 남매지간이라는 생각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여기 좋네요.” 자박자박 소리를 내는 자갈 위를 걷던 드미레아의 말이었다. 플란츠와 드미레아의 대련이 끝난 뒤, 그 둘에 아르센을 포함하여 석찬이나 함께 하자는 칼리안의 제안이 있었다. 발칸과 기사단의 일로 서로 공유해야 할 이야기도 많이 있었던데다 생각지 않게 성질을 많이 부린 칼리안의 배가 아주 많이 고파졌던 이유가 컸다. 다만 세뉴관에서의 석찬 전까지 두 왕자와 아르센이 먼저 나눠야 이야기가 있다 하기에, 코끼리 남매는 이렇게 잠시 산책이나 하던 중이었다. 언젠가의 칼리안과 앨런이, 그리고 언젠가의 체이스와 플란츠가 찾아갔던 바로 그 산책로 말이다. “맞아. 왕자님께서 마음에 든다 하신 곳이거든.” “칼리안 왕자님이 마음에 들어해서 좋다는 겁니까.” 얀의 말에, 드미레아가 이렇게 물었다. 말을 들은 얀은 무엇 때문에 드미레아가 질문을 했는지도 모르는 얼굴로 대답했다. “왕자님께서 좋아하시면 좋은 거지.” 칼리안이 마음에 들어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는 소리다. 얀은 그야말로 칼리안을 모시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 같다. 모든 것에 있어 칼리안을 우선으로 두는 것이다. 물론 드미레아는 그런 얀의 사고방식이 잘못됐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삶에 있어 우선하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드미레아에게는 검과 가문이었고, 얀에게는 칼리안이라는 것을 드미레아는 안다. 그 사실을 칼리안이 모르는 것도 아니고, 칼리안 역시 잘 알고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드미레아는 얀의 말에 대한 다른 평가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 그래요. 여기가 좋다는 게 중요한거니까.” 그 말을 끝으로, 산책로의 중간 지점에 다다를 때까지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몇몇 있었기 때문에 스스럼없는 말을 나누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재킷 들어줄까?” 얀은 인근에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이렇게 물었다. 호위기사는 물론 하인 한 명 대동하지 않고 혼자 말을 타고 왕궁에 온 드미레아는 검은 재킷을 여전히 직접 들고 있었다. 그래서 얀이 그것을 들어줄지 물은 참이었다. “저한테까지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라버니.” 드미레아는 꽤 정색하는 얼굴로 대답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책로가 좋은 이유조차 시종다운 얀이, 자신의 앞에서까지 시종처럼 굴지 말았으면 해서 하는 소리였다. 그것을 알아들었는지 얀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 정도로 직급이 낮지는 않거든. 불편해 보여서 한 말이야.” 칼리안의 손님이 들고 있는 짐을 대신 들어주는 것은 상급 시종인 얀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얀은 진작부터 드미레아를 동생으로 대하고 있던 터였다. “들어주세요, 그럼.” 그제야 드미레아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에 들린 재킷을 얀에게 넘겨줬다. 굳이 재킷 하나에 불편할 일이 있겠냐만은, 그나마라도 오빠 노릇을 해주고 싶어하는 듯 보여서 장단을 맞춰준 것이었다. - 절그럭. 팔을 들어 재킷을 건넬 때 드미레아의 다리 쪽에서 소리가 났다. 기사는 아니었지만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이기 때문에 왕궁에 들고 들어오는 것이 허락된, 때문에 조금 전 플란츠의 검을 멀찍이 날려버리는 것에 사용될 수 있었던 드미레아의 검에서 난 소리였다. 만약 제 자리를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얀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기도 했다. 잠시동안, 얀의 눈길이 드미레아의 검에 머물렀다. 그런 얀의 모습을 그냥 못본 척 할까 하던 드미레아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뭘 해도 오라버니보다 제가 나았습니다.” 생각이 더 깊은 것도, 셈이 더 빠른 것도, 귀족들을 앞에 두고 더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도, 바이올린을 더 잘 켜고 검을 더 잘 다루는 것도. 모두 드미레아였지 얀이 아니었다. “어차피 제가 더 잘 하는 일이었고, 제가 하고 싶어 하던 일이었고, 결국은 제가 하게 될 일이었습니다.” 드미레아의 말이 맞았다. 따라서 500년을 이어 온 방패의 무게를 견디는 것도 본래부터 드미레아의 몫이었을 터였다. - 내가 죽으면 넌, 좋은 것 아냐? 얀은, 단 한 마디 말의 무게조차 견디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저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은 그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검을 보던 얀의 눈에 들어있는 것은 부러움이나 놓친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니었다. 고작 한 마디 말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망친 것, 그래서 나라 유일의 공작 가문이라는 그 무거운 이름을 동생에게 전부 떠넘긴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때문에 드미레아는 소공작 자리를 받은 것이 자신이 얀보다 나아서였지 억지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는 말을 전했다. 반박할 여지가 없는 말이었다. 드미레아는 확실히 얀보다 낫지 않던가. 그러니 드미레아는 지그프리드의 소가주로, 얀은 칼리안의 시종으로, 각자의 위치에 잘 있으면 될 일이었다. “우리 레아, 다 컸네.” 그래서 얀은, 언젠가 칼리안의 키가 훌쩍 자란 것을 보았을 때 지어보였던 것과 같은 웃음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드미레아는 꽤 부드러운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나저나 벌써 다 컸다니. 이것이 칭찬인가 아니면 악담인가. 하여튼 멍멍이 오라버니보다 생각 짧은 오라버니라는 말은 굳이 입에 담지 않은 채였다. * * * 칼리안이 조용히 이마를 감싸쥐었다. “제가 왕자님을 따른다고 했지 왕자님 형님이신 플란츠 왕자님까지 따르겠다고는 안 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뒤 과묵하게 앉아있는 파란머리 마법사와, 짜증난 얼굴을 지우지 않고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풀먹는 형 때문이다. 앞으로 기사 세력까지 들이게 될 테니 발칸 내부적으로 분란이 없게 해달라는 말이 시발점이었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플란츠가 ‘쟤만 잘하면 된다’는 투로 이야기를 했고, 아르센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둘의 말싸움이 또 시작됐다. 플란츠가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 정말, 내가 쟤를 데리고 전쟁을 낸 것이 맞나? 그 차분한 눈에 딱 이런 질문이 담겨 있는 것 같았으므로, 칼리안은 어깨만 한 번 으쓱여 보였다. 낸들 아느냐는 소리다. 아무튼 사이가 좋은 듯 거지같은 둘을 앞에 둔 칼리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얀의 꿀차가 한 잔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얀이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안 그래도 오늘 이런저런 일로 마음도 싱숭생숭하고 화도 많이 쌓인 칼리안이 아니던가. 때문에 흘러나오는 한숨 끝에 미미하지만 명백한 살기가 실려있음을 안 둘이 조금 놀란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8월 말.” 그리고 칼리안은, ‘더 떠들면 둘 다 죽여버릴거야’ 라는 눈을 한 채 이렇게 입을 열었다. “8월 말에 발칸은 마법사단과 기사단을 모두 갖춘 군대가 될 테고, 그 전에 마법사 인원을 두 배 이상 늘릴 생각입니다. 그러니 헤르츠 부군단장은 빨리 저 잔해 다 치워버리고 마나실 백작과 상의해서 추가 인원 들여놓으세요.” 지금이 5월 말이다. 말이 좋아 8월 말이지 고작 세 달 안에 인원을 두 배로 늘리라니. 갑작스러운 통보에 아르센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내년 2월. 그 때가 되면 마법사단은 적어도 300명 이상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때가 되면 체이스가 즉위한다. 그리고 체이스는 왕위에 오른 즉시 세크리티아만의 강력한 군대를 만들게 될 터였다. 비록 베른이 없는 세크리티아라 하나 그들의 새로운 왕은 여전히 강인하고 현명할 것이다. 그런 왕이 만드는 새로운 군대는, 어쩌면 칼리안도 예상하지 못한 강력함을 지니게 될지 모른다. “그 뒤로도 마법사 수는 계속 늘려나갈 생각이니 긴장 풀지 말아요.” 때문에 칼리안도 발칸의 육성에 전력을 다할 예정이었다. “왜 갑자기.” 플란츠가 이렇게 물었다. 왜 갑자기 발칸의 덩치를 키우려는 것인지를 묻는 말이었다. 칼리안이 소리 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약소국의 힘을 넘보면 안 되니까요.” 아르센이 함께 있었기에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못했으나, 플란츠가 알아듣기에는 부족함 없는 설명이었다. 체이스를 견제하고자 함이 아니라, 체이스를 견제하려 할 르메인과 귀족들 때문이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발칸의 힘이 명백하게 우위에 있어야만 카이리스에서 세크리티아를 불필요하게 경계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발칸의 규모를 최대한 키워놓아야 한다는 것이 칼리안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의 마법사가 모이면 이번에는 내부적으로 시끄러운 소리가 날 겁니다. 기사단으로 견제하기 어려울 것이라 여길 것이 분명해서.” 마법사의 수가 갑작스럽게 늘어나면, 에반 브리센 후작이 당연히 경계를 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비등비등하게 힘의 균형이 맞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헤이시아 궁의 폭발로 힘의 우위를 조금쯤이라도 깨달았을 터였다. 그런 상태에서 1년도 되지 않아 마법사 수가 몇 배로 늘어난다면, 에반은 당연히 마법사들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기 시작할 것이다. 칼리안과 같은 생각을 한 플란츠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문 칼리안은, 자신의 무릎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얼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그 때 쯤,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을 발칸에 보내겠습니다.” 그 말에, 플란츠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아이즌 에이프린의 기사단은 분명 칼리안이 가지기로 했던 힘이 아니던가. 곧 그들을 수도로 불러들여 칼리안이 직접 키워나갈 생각을 하고 있음을 플란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플란츠였으니까. 그런데 칼리안은 지금, 그들을 직접 가지지 않고 발칸으로 들이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플란츠에게 기사단을 더 넘기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왜 또 그런 결정을 했느냐는 듯한 눈초리에,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마법사단이 커지는 만큼 기사단이 커져야, 형님이 안 죽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의 손이 자신의 심장을 툭 건드려 보였다. 마법사 수가 늘어나는 것을 플란츠가 손 놓고 보고 있는 것이 ‘브리센을 배반하는’ 행위에 들어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하는 소리였다. 도대체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으니 일단은 조심할 수 밖에.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본 칼리안은, 언젠가 플란츠 모르게 에반 브리센 후작의 숨통을 끊어버릴 생각을 곱게 숨겨 놓으며 입을 열었다. “브리센 후작이 정해놓은 ‘배반’의 선을 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렇다고는 해도,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군.” 플란츠의 말이 맞았다.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다. 칼리안이 아이즌의 기사단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왕실 기사단 카렌과 라온을 손에 넣으려 했던 플란츠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에반과 맹세의 인을 나누었다. 그런데 칼리안은 맹세의 인을 조심하겠다며 아이즌의 기사단을 플란츠에게 주겠다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법사단의 규모가 커지는 것이 맹세의 인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결정한 일이다. 그런데 마법사단의 규모를 키우는 일은 세크리티아의 힘이 커지는 것을 카이리스에서 경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세크리티아의 힘이 커지는 것은, 플란츠가 체이스에게 ‘준비’를 하라 일러두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플란츠로 인해 손에 쥔 것을 다시 내려놓게 된 셈이 되었다. “있어야 할 곳에 가는 것 뿐이니, 괜찮습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도, 괜찮다고. < 제25장. 있어야 할 곳(7) > 아르센은 본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누구를 만나든 좀처럼 한 번에 마음을 주는 법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가져온 버릇 아닌 버릇이었다. 때문에 아르센은 사람 뿐 아니라 마법 주문식 하나도 의심 없이 믿은 적 없었다. 누군가는 그런 아르센이 꼼꼼하다며 좋아했고 또 누군가는 그저 깐깐하기만 하다며 마뜩찮아 했다. 그리고 의외의 지적 생명체 한 명은 다 됐으니까 그냥 꺼지라고 했다. 아무튼. 그리 존경했던 스승도 처음부터 믿지는 않았던 아르센이 의심 없이 믿어 본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주위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칼리안이다. 이유는 단 하나. 첫인상이 지극히 좋았던 탓이다. 어처구니 없을 만큼 단순한 이유일지 몰라도, 아르센은 정말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칼리안을 믿었다. - 굳이 망자의 걸음을 방해할 이유가 없지. 그의 생에 있어 유일한 ‘어른’이었던 스승의 영결식. 누가 보아도 평민임을 알 수 있을 만큼 허름한 상복 차림이었던 아르센. 검은 말, 검은 로브. 세뉴강의 안네루시아를 묵묵히 바라보던 모습. 그리고, 붉은 눈. 왕자. 이제 막 앨런을 만났을 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 기억에 두지 않았으면 하네만. 그것이 칼리안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망자를 위해 말에서 내릴 줄을 알고, 진심어린 목소리로 명복을 빌어주며, 자신을 알아본 평민에게 함구하라 명령하는 대신 ‘기억에 두지 않았으면’ 하고 부탁 같은 말을 내려놓던, 위태롭기 짝이 없는 붉은 눈의 왕자. 떠내려가는 안네루시아를 바라보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잊히질 않았다. 로브로 가려져 표정이 어땠는지 전혀 알 수 없었음에도 그 얼굴이 선명히 그려졌다 하면, 그 심정이 아르센에게 모조리 전해졌다 하면, 누군들 믿어줄까. 결국 아르센은 칼리안의 부탁을 어겼다. 머릿속에 새겨진 그 날의 칼리안을 고스란히 기억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리라는 믿음을 의심치 않아서였다. “죄송합니다만, 안 괜찮으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르센은 ‘있어야 할 곳에 가는 것 뿐이니 괜찮다’는 칼리안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칼리안의 명령 하나는 정말 잘 듣지만 그 외의 것은 알아서 잘 어기는 아르센이 아니던가. 물론 아르센이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칼리안이 자신의 형을 살려두려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정도는, 아르센도 이미 안다. 이유는 하나도 모르고 이유를 알아도 공감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어쨌든 칼리안이 지금 플란츠의 살 길을 열어주려고 무리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아르센은 바보 혹은 머저리가 아니었으니까. “왕자님 살 길 막고 플란츠 왕자님 살 길 열어주는 것은, 백 번 천 번을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 것 같습니다.” 플란츠에게 시선을 둔 채로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때문에 이 말을 함께 듣게 된 플란츠는 눈을 감지도, 비웃음을 띄우지도, 모르는 말을 들은 것처럼 굴지도 않은 채 그냥 테이블의 한 쪽 모서리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아무리 아르센이라지만 이 정도로 매몰찬 말을 꺼낼 만큼 플란츠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해서라도 칼리안의 생각을 고쳐놓아야 하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 날, 세뉴강의 다리 위에서 로브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표정이 지금 칼리안이 짓고 있는 것과 똑같았으리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잃어버리는 것에 묵묵히 순응하는 표정 말이다. “헤르츠 경.” 칼리안이 이렇게 아르센을 불렀다. 칼리안이 아르센을 부르는 호칭은 참 제멋대로였다. 언제는 경이고 언제는 부군단장이다. 특별한 구분이 있어서는 아니었고 그냥 되는대로 대충 불렀다. 어떻게 부르든 아르센은 잘 대답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아르센은 칼리안의 말을 안 들었다. 대답 대신 다른 것을 말했다. “이유를 알면 제가 입을 닫겠습니다, 왕자님.” 형제애라고는 말라 비틀어질 것도 남아있지 않은 사이. 성인식인 로젤리타를 떠나기 직전까지 칼리안과 플란츠 관계가 어땠는지도 알고, 실리케로 인해 엮인 둘의 악연도 안다. 말이 좋아 형제였지 저보다 더한 악연이 또 있을까. 그러니 서로 생긴 것만큼이나 판이하게 다른 길을 걷던 둘이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그러나 아르센은 칼리안이 플란츠를 살리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르센의 이런 태도에 잠시 머리가 아프다는 얼굴을 하던 칼리안이 한숨을 쉬듯 중얼거렸다. “내가 괜찮다는데도 믿지를 않고 이유나 알려달라 하니.” 그 말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누가봐도 그것은 명백한 자조였다. “내 아우님께서 거짓말을 다 하시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뱉는 ‘괜찮다’의 절반은 거짓말일 테다. 그에 비해 칼리안의 괜찮다는 아마 9할 이상이 거짓말이지 않을까. 시스파니안의 환생이라 알려졌고 대마법사의 제자인 왕자가 아니던가. 르메인의 총애도 받고 있는데다 지그프리드의 방패까지 얻었다. 그러나 칼리안이 쥔 것은 결국 옹립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방패 뿐. 검도 마법도 쥐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플란츠와 에반 브리센 후작이 쥐게 되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에반이 칼리안을 그냥 두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칼리안의 말은 플란츠에게 향할 검 끝을 자신에게로 돌려 놓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걸 알았으니 아르센이 이렇게까지 반발을 하는 것이었다. 발칸의 힘을 엉뚱한 곳에 베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서였다. “꼭 무력으로만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자님. 브리센 후작의 세력을 우습게 보시면 안됩니다.” 아르센이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이 아무리 강하고 또 앨런의 보호를 받는다 해도, 결국 그것은 목숨을 지키는 것에만 쓸모가 있지 않나. 제 것을 전부 플란츠에게 넘긴 칼리안이 에반과의 세력 싸움에서 어떻게 이기겠느냐는 소리였다. 칼리안은, 플란츠의 앞에서 대놓고 자신의 손을 들고 있는 아르센을 보며 잠시 웃었다. 과거에는 플란츠의 명으로 베른의 숨을 끊었던 아르센이, 플란츠와의 세력 대결에서 칼리안이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설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 참······. 의도한 것은 아닌데. 되게 묘한 상황이네.” 칼리안이 잠시 웃으며 다시 한번 혼잣말을 했다. 플란츠와 아르센은 그런 칼리안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플란츠는 의미를 알아들었기 때문이었고 아르센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헤르츠 경.” 이렇게 아르센을 다시 부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걱정 마세요.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도 아니고 자리 싸움 하는 방법은 내가 경보다 더 잘 압니다. 많이 겪어 보기도 했고. 그리고······ 우리가 이러는 이유도 분명히 있지만. 입에 담는 것은 나중으로 미뤘으면 좋겠는데.” 플란츠가 맹세의 인을 했다는 것도, 그런 플란츠를 왜 굳이 살려놓으려 하는지도, 당장의 아르센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으니 부탁하는 것이었다. 아르센이 여전히 입을 다문 채로 플란츠를 쳐다봤다. 자신의 앞에서 칼리안의 손을 들고 있는 아르센을 보면서도 플란츠는 그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칼리안 역시 플란츠가 그리 구는 것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 여기고 있었다. 정말로, 말해주지 못할 이유가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 알겠습니다. 다만.” 고집 가득한 마법사의 신의를 담은 파란 눈으로, 아르센이 못을 박듯 말했다. “소유자가 누구든, 발칸의 마법사는 칼리안 왕자님을 따를 겁니다.” 그 말에, 남은 두 사람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낯간지러워서 들어 줄 수가 없군.” “아니. 전하와 군단장 말을 들어야죠. 나 말고. 군대잖아.” 적당히 대꾸한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어찌됐건 이 정도로 넘어가 주니 고맙다는 뜻이었다. 곧 칼리안이 플란츠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 이상의 계획에 대해서는 형님께도 말씀 안 드릴 겁니다.” “그래.” 이제부터는 칼리안이 에반에 대응할 계획을 세워야 했다. 세자위 싸움에서 지면 칼리안을 위한 레니시타 잎이 광장에 깔릴 터였다. 란델로부터 정보를 얻어 놈들에 대해 알아내거나 플란츠를 브리센 후작으로 만들려면 일단 칼리안부터 살아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플란츠에게 공유하거나 들켜서는 안 될 것이기도 했다. 계획을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 역시 맹세의 인에 반하는 행동일 수 있었으니까. 때문에 칼리안은 플란츠를 보며 당부하듯 다시 말했다. “똑똑하신 내 형님, 또 혼자 눈치 채버리시면 안 됩니다. 모르고 계셔야 안 죽습니다.” “내 아우님은 이제 짖는 게 버릇이지.” 늘 그렇듯, 칼리안이 한 번 더 씩 웃었다. 알면 죽는다 말하며 웃는 동생과, 그 말을 개소리 취급하는 형의 모습을 본 아르센이 얼마나 복잡한 기분이 됐는지는 모르는 채였다. * * * 얀이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외부 손님인 드미레아가 함께 하는 자리였으니, 석찬은 체르밀 궁이 아닌 세뉴 관에서 진행됐다. 다만 그 준비는 체르밀 궁의 주방장이 직접 했다. 왕자들이 함께 하는 식사를 다른 이가 준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언제나 그렇게 진행되었던 일이었으니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다만 얀이 당혹스러워 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 때문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식단인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딸기를 졸여 만든 소스를 가득 얹은 송아지 스테이크, 말린 딸기를 넣고 구운 빵, 딸기 식초로 마무리 한 샐러드, 생딸기와 생크림으로 장식한 와플과 팬케이크, 딸기 향이 가득한 크레이프와 샌드위치. 후식으로 준비되고 있는 딸기 타르트와 딸기 푸딩, 딸기 청을 넣은 소다에 딸기 티라미스. 온통 딸기다. 정성들여 달지 않게 만들어낸 딸기 가득한 석찬 메뉴에, 식당에 먼저 들어와 검수를 하던 얀이 질린 얼굴을 했다. “아무리 딸기를 좋아하신다지만······.” 그런 얀과 함께 들어온 시녀가 미안해하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 제가 말을 하다가, 내용이 잘못, 전달 됐나봐요. 좋은 왕자님이 딸기를 많이 좋아하셔서, 오늘 석찬에 다른 음식과 더불어 딸기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주면 안되겠는지. 히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주방장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 왕자님이 딸기를 좋아하시니 ‘오늘 석찬의 다른 음식과 아이스크림에 딸기를 더불어 만들어주면 안되겠는지’ 물어오는 히나의 부탁을 아주 흔쾌히 들어줬다. 때마침 얼마 전에 왕궁으로 선물 된 딸기를 나누어 받은 참이었으니 재료도 충분했다. 덕분에 만들어진 붉디 붉은 식단을 보던 얀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 죄송해요. 이걸, 어떻게 하죠. 열심히 수화를 배우고 있지만 아직 원활한 의사소통이 될 정도는 아니었던 탓에 생긴 문제를 두고 뭐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칼리안이 그것에 대해 싫어할 성격도 아니었고, 이 일의 원흉인 플란츠는 저 좋아하는 딸기 가득한 밥을 먹게 생겼으니 플란츠 쪽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드미레아야 잘 이해해 줄 테고, 미친 따까리는 알아서 처먹으라지. “우리 왕자님도 딸기 좋아하시니까 괜찮아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그렇게 얀이 얼추 상황을 파악할 때 쯤, 생각보다 빠르게 칼리안 일행이 들어왔다. 딸기 향 가득한 식단을 본 일행의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예상한대로 드미레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아르센은 이게 무슨 장난인지 궁금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플란츠는 질린 얼굴로 메뉴를 살펴보다 히나를 보곤 피식 웃었다. 대충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와, 전부 다 딸기네.” 이렇게 말하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런 칼리안의 얼굴을 본 얀이 잠시 멈칫했다. 그것은 분명, 즐겨하지 않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 할 때의 표정이었다. < 제25장. 있어야 할 곳(8) > 향이 강한 것을 싫어했다. 르니에리가 생각나서 문득 싫어졌다. 몇 년 전의 일이었는지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래 전 언젠가부터 그렇게 됐다. 주위의 것들을 모조리 자신의 향으로 덮는 그 지독함이 몸서리쳐져서 향이 지나친 것은 다 싫었다. 그것이 정말 혐오였을지 혹은 그 반대의 감정을 덮어두려는 반발일지, 플란츠는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그냥 싫어하기만 했다. 그런 이유까지 가늠했든 아니면 그냥 무식하게 하나하나 지켜봤든, 아무튼 동생놈이 그 사실을 알았다. 물론 플란츠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오늘, 플란츠만큼 조용한 히나가 생소한 것을 물어왔다. 그래서 한참의 고민 끝에 대답을 해줬다. 그래. 딸기를 좋아한다고. 그렇게 대답했다. 딸기를 좋아한다고 했지, 딸기에 미쳐있다고는 안했다. “혹시. 왕궁에 무슨 딸기 농장이라도 있습니까.” 무표정하게 앉아있던 드미레아가 식사 말미에 결국 이런 말을 했다. 마지막 디저트로 기어코 딸기 아이스크림이 나왔을 때였다. 드미레아의 말에 플란츠의 팔이 아주 잠시 갈 곳 없이 멈췄다 다시 움직였음은 아마 히나만 봤을 것이다. 때문에 히나의 고개가 하염없이 수그러들었다. 만약 이런 뒷이야기를 알았다면 칼리안은 아마도 또 한 번 난리를 쳤을 터였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칼리안은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를 알아채지 못했다. - 딸기를 좋아하세요, 형님? 족히 며칠은 입에서 딸기 냄새가 날 것 같은 음식들을 야무지게 잘 먹어치우던 중, 툭 하고 던져지듯 떠오른 생소한 기억을 함께 삼켜야 했던 탓이다. 지금의 칼리안이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아주 오래 전 언젠가의 기억 말이다. “······ 딸기 좋잖아.” 때문에 칼리안은 드미레아의 말에 조금 늦게 반응했다. 다소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말을 인지하고 고개를 든 칼리안은, 그야말로 정신 나간 메뉴임이 분명하다 장단을 맞춰주는 대신 이렇게 말하며 작게 웃었다. “그러고보니 히나가 제일 좋아하지, 딸기 아이스크림.” 그리고 히나를 향한 말로 화제를 돌리며, 히나에게도 아이스크림을 꼭 챙겨주도록 얀에게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 이상 이 기괴한 저녁 메뉴에 대해 다른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한 것이기도 했다. 이 자리의 주인인 칼리안이 불만이 없다는데 누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얼마 후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 이 사달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아는 만큼 나름대로 열심히 식사중이던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것이 대답이었으니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전하께는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을 언제쯤 들이겠다 말씀하셨습니까.” 딸기 향 만큼 가까이 하기 힘든 기억이 떠오른 칼리안이었다. 그것에 잠시 머뭇거리느라 식사 중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못해서 이제야 말을 꺼내놓은 참이었다. 탄산수의 분홍색 거품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잠깐 쳐다본 플란츠가 대답했다. “6월 중순 전.” 칼리안은 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드미레아를 보며 말했다. “그때까지 준비 좀 해줘, 드미레아. 처음은 아마 200명 가량 될 거야.” 지그프리드에 맡겨 둘 기사의 수를 말함이었다. 적은 수는 아니었으나 드미레아는 별 문제 없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왕자님.” “뭐라고 포장하는 게 좋으려나.” 아무리 지그프리드라지만 갑작스레 200의 기사가 늘어나면 주위의 시선이 끌릴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무슨 핑계로 의심을 지울지 고민하는 칼리안에게 드미레아가 대답했다. “외가의 기사들이 다시 찾아온 것으로 해두겠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그프리드의 저택에는 슬레이만의 아내인 세리에와 세리에의 동생 부부, 그리고 그들 부부의 가솔과 기사들이 함께 머물렀었다. 세리에 혼자 그 넓은 저택을 지키게 두기에는 슬레이만의 걱정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지난 해 말 그들 부부 사이에 아이가 생겨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간 상태였다. 따라서 드미레아는, 그 기사들이 다시 저택을 찾아와 머무르기로 했다 하는 것이 가장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슬레이만이 이끄는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기사 200명이 수도를 찾아왔다 하면 에반 브리센 후작의 가벼운 엉덩이가 또 들썩거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 들어가는 비용은 내가 부담할 테니 알려줘. 내가 그것까지는 셈이 어려워서.” “알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칼리안이 핑크빛 소다수를 한 모금 마시며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얀. 미안한데 자리 좀 물려줄래?” 주방장을 포함한 식당의 시종들은 후식을 내옴과 함께 이미 자리를 벗어난 상태였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은 플란츠의 시종인 레릭과 호위기사들, 그리고 히나와 얀 본인에게 자리를 비켜달라 말을 한 것이었다. 얀은 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숙여보인 뒤 다른 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다시 쳐다봤다. 이제 에반 브리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였다. 물론 그것은 플란츠가 몰라야 하는 이야기였으니 이만 자리를 비켜달라는 뜻이 담긴 눈빛이기도 했다. “그래.” 소리 없이 일어선 플란츠가 아직 꺼내지도 않은 칼리안의 말에 대해 대답했다. 의도가 무엇이든 축객령은 축객령이 아닌가. 그러니 ‘죄송합니다만’ 이라는 사과로 시작될 것이 분명한 칼리안의 말이 나오기 전에 막은 것이었다. “네.” 시종과 기사를 먼저 내보낸 뒤 플란츠에게 말을 꺼낸 것으로 왕자의 입장에 대해 나름의 배려를 해준 칼리안이 짧은 답으로 사과를 대신했다. 그것 역시 잘 아는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곧 플란츠까지 밖으로 나가고, 드미레아와 아르센을 포함해 셋만 남겨진 식당에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처음은 아르센을 향해서였다. “헤르츠 경. 나 대신 브리센 변경백 좀 만나고 와줄 수 있을까요. 알다시피 내가 외출 금지 상태라서.” 이렇게 말하는 칼리안은, 마치 평범한 사고를 친 뒤 평범한 벌을 받은 평범한 열 다섯 살 소년같은 얼굴이었다. “네, 왕자님. 무슨 말을 전하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아르센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칼리안의 부탁에 흔쾌히 응하며 이렇게 물었다. “내가 보냈다 하지 말고, 경이 마음을 바꿀 것처럼. 변경백이 수도에 올 생각이 아직 있는지 물어봐줘요. 혹시 아직도 란델 형님과 연락을 하는 상태인지 확인해주면 더 좋고.” 아르센이 칼리안을 배반하고 플란츠 혹은 란델의 편에 설 것처럼, 그리고 그레이와 손을 잡을 것처럼 굴며 의중을 떠봐달라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왕자님.” 아르센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정말 평범한 부탁을 받은 것처럼. “에우리아 경이 브리센 변경백령 쪽으로도 이동 마법진을 구축할 예정이라 하니, 궁에는 관련 업무로 자리를 비운다 해두면 될 겁니다.” 이렇게 아르센을 향한 지시를 마친 칼리안이 드미레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드미레아. 형님들이나 내 편에 서지 않은 이들 중에 새로운 변경백이 될 만한 사람들이 있을지 알아봐줘. 전하께 추천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완전한 중립을 고수하는 새로운 변경백. 그레이가 수도로 왔을 때, 그레이의 빈 자리를 대신 할 수 있을 사람. 르메인의 인사 평가를 믿지 못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르메인이 그것을 알아보려 할 때 르메인의 주변에 있을지 모를 에반의 귀에 내용이 전해질까 우려한 이유가 더 컸다. 그래서 드미레아의 눈을 빌리려는 것이었다. 플란츠가 그리했던 것처럼 탄산수의 기포가 퐁 하고 터져 사라지는 것을 잠시 쳐다보던 드미레아가 대답했다. “공작께서 아셔도 될 일입니까.” 슬레이만에게 조언을 구해도 될지, 드미레아의 선에서 처리해야 할 일인지를 묻는 말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 “얀이 나갔잖아.” 얀에게조차 비밀로 해야 할 일이니 슬레이만 역시 몰랐으면 한다는 뜻의 대답이었다. 최대한 비밀리에 움직여야 할 일이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변경백 후보를 물색해보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드미레아는 다른 말 없이 알겠다는 대답만 했다. 이쯤 되니 드미레아와 아르센은 칼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가늠해냈다. 그래서 드미레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의 자리 싸움에 직접 관여하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아르센이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른 것이 아닙니까. 아직 왕자님의 기반 세력이 그리 많지 않으니, 발칸이 자리를 잡은 뒤에 움직이셔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에반 브리센 후작 숙청. 혹은 암살. 둘 중 어느 쪽으로 발을 옮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칼리안이 지금 에반이 사라진 이후의 상황을 대비하려는 것임은 분명했다. 에반을 치워내면 브리센의 지지세력이 이곳 저곳에서 들고 날 터였다. 그런 그들이 여전히 브리센을 옹호할지, 혹은 칼리안이나 란델에게로 떨어져 나갈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칼리안의 힘이 조금 더 단단해지면 그 때 움직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소리였다. 게다가 칼리안이 내년 2월까지 발칸의 몸집을 불려 놓겠다고도 하지 않았던가. 아르센의 의중을 파악한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발칸의 마법사단이 자리를 잡더라도, 그것은 전력이지 세력이 아니니까요.” 무슨 일이 있을 때 아르센의 말처럼 칼리안을 위해 직접적인 싸움에 나서줄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발칸 자체가 귀족 사회의 한 조각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칼리안의 말대로 발칸의 마법사단은 전력이지 세력이 아니니까. 물론 귀족들이 칼리안의 편에 설 이유가 되어 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시기에 맞게 저를 지지하는 세력이 생기도록, 제가 때를 맞춰 움직일 겁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헤르츠 부군단장은 우선 브리센 변경백 의중 먼저 정확히 확인해주세요.” 칼리안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세력을 어떻게 만들 생각인지, 에반을 어떻게 치워낼 생각인지, 그 후에는 어떻게 정리할 생각인지, 이런 것들은 아직 칼리안의 머릿속에 꼭꼭 숨겨진 채 나오지 않았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행히 칼리안의 속내까지 속속들이 알고자 하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으므로 아르센은 이번에도 쉽게 수긍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칼리안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석찬을 마쳤다. 억지로 좋은 척 먹어댄 딸기 향이 여전히 입 속을 맴돌았다. * * * - 똑바로 봐. 문득. 정말, 문득. - 피하지 말고, 제대로 봐, 나를. 죽어가고 있다는 걸, 외면하지 마. 기억 속 깊은 곳에 가만히 묻어두었던 것. 그 날의 모습이 떠올라 버렸다. - 그래. 그렇게 보고, 이제는 제대로 알아야지. 너도. 얀에게 있어 그것은. - 왜 그래. 내가 죽으면 넌, 좋은 것 아냐? 하얗고, 작고, 가는 손가락이 만들어 낸 소리없는 비수였다. * * * 똑바로, 피하지 말고, 나를 제대로 보라던 말. 그것이 하필이면 칼리안의 얼굴을 보았을 때 생각이 나 버렸다. 드미레아와 이야기하는 동안 잠시 떠올렸던 기억 때문일 터였다. 굳이 꺼내두지 않았던 그 기억이, 피할 곳 없이 불어닥친 바람처럼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간 것이다. 식당에서 나온 얀이 문 앞에 멈춰 섰다. “먼저 가 있어요, 히나.” 그리고 바닥을 향해 시선을 둔 채 히나에게 말했다. 히나가 대답하는 것을 확인하려면 그 손을 보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히나가 발을 돌려 멀어지는 것이 언뜻 보였다. 아마 알겠다는 대답을 했을 것이다. “후우.” 잠시 숨을 내쉰 얀이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 때, 식당 문을 한 번 더 여는 소리와 누군가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안에서 나올 사람은 칼리안이 중요한 대화를 하겠다며 남겨둔 이들이 아니던가. 때문에 얀이 고개를 뒤로 돌려 누가 나온 것인지 확인하려는데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 문 앞을 지키는 기사들까지도 물려두었던 탓에 직접 식당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물론 플란츠였다. 아. 저 자식이 왜 하필 지금. 이런 생각이 든 탓에, 결코 곱지 않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왜요.” 플란츠가 실소했다. 지금 플란츠는, 얀을 ‘지그프리드’라 부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얀이 이런 식의 답을 한 것이다. “······ 내 아우님의 시종이 주제를 모르는데.” 그래서 플란츠는 굳이 ‘시종’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물론 최근의 얀이 플란츠에게 그리 좋은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아무래도 얀의 머릿속이 지금 뒤죽박죽인 것 같아 보여서 플란츠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정리를 해 준 것이었다. “아.”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따져 본 얀이 낭패한 얼굴이 됐다. 3왕자의 시종이 2왕자에게 ‘왜요’라는 대답을 하다니. 당장 궁에서 쫓겨날 만큼의 큰 실수가 아닌가. “제가 잠시······.” “됐어.” 그리고 플란츠는 이렇게 얀의 말을 잘랐다. 당연하겠지만 미안하다는 말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 아닌 얀은, 무엇이 됐다는 것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사과, 됐다고. 둘 다 없는 셈 치자고.” 순간 얀은 이런 와중에도 레릭을 잠시 동정했다. 칼리안이 저 따위로 말을 했다면 얀은 쫓겨나기 전에 제 발로 궁을 뛰쳐나갔을 거다. 대체 저게 뭔 소리냐고.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이런 말이 얀의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얀이었으니까. 때문에 인내심 강한 플란츠는 짜증났다는 표정이 되면서도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나이프.” 말이 또 짧았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이해를 했다. 칼리안이 언젠가 말한 적이 있었다. 얀에게 나이프 던진 일에 대해 얀에게 사과하도록 말을 해두겠다고. 그러니 지금 플란츠는, 그 때의 일과 지금 얀의 실수를 맞바꾸자는 말을 하는 것일 테다. 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제대로 기억도 안 나는 일과 지금의 실수를 같이 묻어주겠다 하니, 얀으로서는 오히려 고맙다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 얀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플란츠가 지나가려다 말고 입을 열었다. 얀의 얼굴에 드러난 것이 그것 뿐만은 아니었던 탓이다. “······ 원래 싫어했는데. 내 아우님은.” 오늘따라 플란츠가 참 말이 많다. 그래도 조금 전 실수한 것이 있었으므로, 마음이 복잡한 것을 잠시 미뤄둔 얀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또 못알아들은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좋아해도 저 정도로 차려놓으면, 누구든 질색할테고. 원래 싫어했기도 했고.” 조금 전 식당에서 칼리안의 표정을 보던 얀이 멈칫한 것을 플란츠는 놓치지 않았다. 칼리안이 웃는 이유가 화가 나서인지 기뻐서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얀이 유일하지 않던가. 그런 얀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해서 어울리지도 않는 실수를 했는지 예상하는 것은 플란츠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얀을 그대로 두면 그 생각이 어디로 향할지를 눈치채는 것 역시, 똑똑한 플란츠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뇨. 왕자님은 분명 좋아하셨는데. 오늘 갑자기······.” “원래, 싫어했다고.” 얀의 말을 자른 플란츠가 이렇게 말했다. 고작 딸기 하나를 두고 칼리안의 시종과 말싸움을 벌이는 것이 귀찮고 짜증났으나, 일단은 계속 말을 이었다. “억지로 좋아하는 척. 그랬던 거라고. 너 궁에 오기 전에.” ······ 나한테 말 한 번 걸어보려고. 칼리안은 거짓말을 잘 못했다. 지금의 칼리안만, 거짓말을 잘 못했다. 옛 칼리안은 아니었다. 그러니 얀의 눈에는 그것이 억지인지 아닌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변하지 않나. 그러니까 내 아우님 입맛 하나 놓친 걸로 그렇게 유난 떨지 말지.” 고작 딸기 하나 가지고 다른 것까지 의심하지 않도록, 혹여 나중에 또 같은 일이 있어도 별 생각 하지 않도록. 플란츠가 이렇게 말했다. 누구보다 많이 바뀐 플란츠가 이런 말을 한다. 덕분에 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주십니까.” 왜 이렇게 참견을 했느냐고. 어울리지 않게. 그 말에,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모든 진실이 반드시 밝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영원히 덮어두어야 할 진실도 있음을 플란츠는 안다. 나중에 언젠가 결국 밝혀질 일이라 해도. 그것이 적어도 지금은 아니어야 함을 안다. “손에 쥔 것 다 내려놓은 내 동생이 마지막으로 기댈 구석은 있어야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칼리안에게 있어 그것 하나만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 역시 플란츠가 안다. 그러니까 얀은 그냥, 얀 답게. 그냥 얀은, 얀 처럼. 그랬으면 해서 건넨 말이었다. < 제25장. 있어야 할 곳(9) > 석양이 지고 먹구름이 든다.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아서, 석찬을 마친 칼리안은 드미레아와 아르센에게 각각 마차를 내어주도록 했다. 그 뒤 세뉴관에서 나온 칼리안이 체르밀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얀과 만나고, 플란츠가 혼자서 체르밀에 가버린 것을 안 레릭이 방황하고, 집에 돌아가는 대신 술집에 모인 창백한 얼굴의 마법사들이 탄산수를 홀짝이며 칼리안의 동상을 어떻게 만들어야 덜 혼날지 토론하던 시간. 두 개의 분홍색 아이스크림을 든 히나가 수련장을 찾았다. 키리에에게 ‘미련 없이 죽는 것이 멋있는 줄 아느냐’며 화를 낸 이후로 아직 키리에를 제대로 만나 화해하지 못한 탓이다. 사실 화해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키리에는 계속 히나의 눈치를 보며 말을 걸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니 히나가 키리에를 찾아간 것으로 이미 화해를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키리에는 아주 오랜만에 히나의 은색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속상했겠네.” 오늘 석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 막 설명을 마친 뒤였다. 히나의 말을 제대로 전해듣지 못한 주방장이, 그 말도 안되는 주문에 대해 얀이나 레릭에게 확인 한 번을 하지 않고 딸기 가득한 메뉴를 준비했다고. 얼핏 들으면 재밌다 할 일이겠으나, 키리에는 웃지 않았다. 블루베리 때문에 히나와 말싸움을 했던 키리에는 그날 히나가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단지 입을 열어 소리를 내지 못할 뿐인데, 불편하고 억울한 일이 너무 많다는 것도 잘 알았으니까. - 여기 사람들, 다 이상해. 키리에의 말에, 히나는 속상했는지 아닌지를 대답하는 대신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뭐가 이상한데?” - 아무도, 화를 안내. 아무 말도, 안해. 당연하다는 듯이 수화를 배우겠다 하질 않나, 수화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을 불편해하기는 커녕 말하는 방법이 다르니 어쩔 수 없다며 그냥 넘어가질 않나. “너를 아껴서 그래.” 이렇게 말한 키리에가 히나로부터 받은 딸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었다. 플란츠가 수화를 배운 것은 키리에로서도 의외였지만 발칸의 마법사들에게 수화를 가르친 것은 키리에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칼리안이 시키지 않았어도 앨런이 나서서 수화 교육을 이야기했으니까. 앨런이 아니었다면 아르센이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체르밀의 몇몇 사람들이 수화를 배운 것도 칼리안의 지시가 아니었다. 그 역시 모두가 히나를 아껴서 그런 것이리라고, 키리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하나 뿐인 핏줄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주관적인 관점을 버리고 생각해보아도 히나는 누구나 아껴줄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 나, 여기가, 너무 좋아.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 그것을 히나라고 모를까. 이 곳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벙어리’ 혹은 ‘장애’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는 히나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괴상한 저녁 식단을 나무라는 대신 딸기 아이스크림을 챙겨 준 칼리안과, 히나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웃고 넘어간 플란츠가 생각난 까닭이다. - 나, 다음 주부터, 저기로 가서, 일하게 될 거야. 정말 열심히, 할 거야. 발칸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키리에가 조금 걱정하는 눈빛을 했다. 다시 새로운 일을 하게 된 상황에 대한 걱정이었다. 체르밀의 사람들은 다 좋았다 하지만 과연 발칸의 마법사들은 어떨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물론 아르센이 어련히 알아서 챙겨주겠냐만은 오빠로서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 그리고, 베,로,니,카, 님이 오신다고, 했어. 나, 도와주신대. 그러니까, 걱정, 하지 마. 세심하지 못한 칼리안은 이런 얘기를 키리에에게 전해주는 것도 잊어버렸다. 때문에 키리에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베로니카님이?” 상대적으로 신분에 따른 차별이 적은 리베른에서 자란 탓인지 아니면 앨런의 영향인지 몰라도, 베로니카는 히나를 꽤 격 없이 대했었다. 게다가 로젤리타에서 돌아오는 한 달 동안 일행 중 또래의 여자아이라고는 둘 뿐이었으니, 히나와 베로니카는 상당히 친하게 지내기도 했었다. 그것을 생각한 키리에가 조금 안심한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다행이네. 그래도 너무 버릇없게 굴지 않도록 조심해.” 고개를 끄덕여보인 히나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 그분도 좋고, 마법사님들도, 다, 좋아. 자상한 왕자님도 좋고, 좋은 왕자님도, 좋아. 무서운 왕자님은, 조금 무섭지만, 그래도 괜찮았으니까. 여기에서도 발,칸,에서도 잘 지낼 수 있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렇게 말한 히나가, 내려놓았던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며 행복한 표정을 했다. 세 명의 왕자 중에서 자상한 칼리안과 무서운 란델을 제외하는 간단한 뺄셈을 끝낸 키리에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는 보지 못한 채였다. “······ 그랬구나, 히나.” 히나의 손에서 ‘좋은’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히나식 표현에 따르면 ‘착하고 듬직한’ 그냥 오빠 키리에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의 저 말을 조금만 일찍 들었어도, 플란츠와의 대련 중에 그렇게 쉽게 칼을 거둘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분간 그 불한당 같은 놈과 직접 대련할 일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면서도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 맞다. 좋은, 왕자님도, 딸기 좋아하셔. 나도, 좋아하는데. 애써 덤덤한 척 딸기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져가던 키리에의 손이 딱 멈췄다. 그리고 키리에는 아이스크림을 고스란히 다시 내려놨다. 키리에가 선호하는 과일 목록에서 딸기가 영원히 사라지는 순간은,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 * * “미야앙, 애옹!” 체르밀 궁으로 돌아온 칼리안은 조용히 테라스로 나가 자리에 앉았다.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찾아와 무릎에 올라왔다. 그리고는 관심을 받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칼리안의 손에 제 머리를 부벼댔다. 칼리안이 녀석의 머리와 턱 밑을 간질이듯 쓰다듬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딸기 아이스크림 같은 분홍색 발바닥을 그대로 보여주며 칼리안의 손가락을 붙들려는 장난을 걸어 왔다. 걱정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녀석의 모습에 칼리안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고양이가 이렇게 사람을 좋아했나.” 칼리안이 아는 고양이는, 늘 경계심이 많고 발톱을 세웠다. 무슨 일이 있든 그것이 누구든 제 곁을 온전히 내어주지 않는 도도한 사냥꾼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녀석은 달랐다. 늘 누군가의 곁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장난을 쳤다. 제 곁에 사람이 없으면 살지 못할 것처럼 굴었다. - 똑똑. 두 번의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칼리안은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확인할 것도 없이 허락을 했다.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저 소리는, 분명 얀의 것이니까. 곧 작게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테라스로 얀이 찾아왔다. 상쾌한 민트 향이 코 끝을 감돌았다. 테이블에 시원한 차 두 잔을 내려놓은 얀이 칼리안의 옆에 앉았다. 따로 허락을 구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칼리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얘기가 잘못 전달돼서, 오늘 실수가 있었습니다.” 얀은 굳이 히나를 입에 담지 않은 채 말했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얀과, 얀이 내려놓은 차를 한 번씩 쳐다봤다. 그리고 고양이의 장난을 봤을 때처럼 작게 웃었다. 평소보다 더 많은 민트 잎, 그리고 시나몬을 넣은 탄산수였다. 혹시라도 소화가 되지 않았을까봐 이렇게 준비를 해왔음이 분명하다. “드시기 불편하셨죠. 딸기 싫어하셨던 것, 제가 몰랐어서······.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언젠가 얀이 말린 딸기와 민트를 넣은 차를 건넸을 때가 생각났다. 그 때는 용케 넘어갔는데 이번에는 꺼려하는 것이 티가 난 모양이다. ‘익숙하지 않았다는 게 맞을 테지만.’ 옛 칼리안의 진짜 입맛은 오늘 식사 중에 알았다. 새로 접하게 된 기억의 끄트머리를 붙들고 떠올랐으니까. 그 전까지는 칼리안도 그저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다. 베른일 때는 그리 즐겨한 것이 아니었어서 그 많은 딸기 요리에 억지 웃음을 지었는데, 얀이 그것을 알아 본 듯 했다. “맛있게 잘 먹었어. 미안해 할 일 아니야.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대답을 하다가, 사과를 건네는 얀의 태도가 조금 묘하다는 느낌을 받은 칼리안이 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작 입맛 하나 맞춰주지 못한 것을 사과하는 태도는 분명 시종이었다. 그런데 허락 없이 옆에 앉은 모습은 시종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얀은, 시종인 얀과 오랜 시간 칼리안을 지켜봐 온 보호자 시로이안, 두 사람의 입장에서 모두 사과를 건네는 것일 터였다. “그 말 하려고 왔어? 식사 시간이잖아.” 칼리안이 얀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때문에 보통은 칼리안이 식사를 모두 마친 뒤 시종과 시녀들이 따로 모여 식사를 했다. 다른 날이었다면 지금쯤 얀도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인데 이렇게 칼리안을 찾아왔으니 하는 말이었다. “그냥 생각이 많아져서요.” 그 말에 칼리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이야기 해보라는 말이었다. “아까 플란츠 왕자님이 무슨 말을 하셨는데······.” 이렇게 운을 뗀 얀의 말이 한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칼리안은 조용히 앉아서 점점 검게 변해가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제가 왕자님에 대해 전부 다 아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에도 제가 똑바로 보지 않고 있는걸까, 왕자님이 변한 것을 제대로 못 보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요.” 나를 꽃 같다고 할 때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어. 라고 말하거나, 고작 딸기 하나로 대체 어디까지 고민을 한 것이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말 없이, 아직 끝나지 않은 얀의 말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손에 든 것을 다 내려놓으셨다고도 하셨는데. 저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이해를 못했어요.” 그 뒤를 이었던, 원수같은 동생놈 걱정해주던 형 다운 말이 생략된 까닭에 칼리안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원수같은 형놈이 어린애한테 대체 뭔 소리를 한 건가 싶어서였다. 그러다 플란츠가 더 어렸음을 깨닫고 얼른 다시 인상을 폈다. 아무튼 얀은 자신이 칼리안에 대해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으나 조금씩 어긋나는 것들이 눈에 보여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똑바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소리인지는 몰랐으나 대충 그런 의미일 터였다. 그것을 눈치 챈 플란츠가 얀에게 무슨 말을 한 듯 했고. 대충의 상황을 파악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나는 내 고양이가 내 형님을 더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 그리고는 이렇게,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내 형님이 고양이를 좋아해서, 얘가 그렇게 기를 쓰고 올라갔던게 아닐까. 아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어.” 민트도 시나몬도 향이 강했다. 적당히 넣었으면 잘 어울렸겠지만, 칼리안을 걱정하는 만큼 듬뿍듬뿍 넣은 탄산수 맛은 최악이었다. 딸기보다 더 맛없는 그것을 또 맛있게 삼킨 칼리안이 말했다. “나는 내 고양이가 어떤 녀석인지도 몰랐는데 네가 나를 어떻게 다 알아. 모르는 게 당연하지.” 비밀을 알게 돼서 슬퍼하면 얼마든지 같이 슬퍼해주고 위로해줄 수 있었다. 혹시라도 지금의 칼리안이 싫어졌다 해도, 어떻게든 붙들어 옆에 둘 자신도 있었다. “나에 대해 모르는 걸 또 알게 되든, 내가 어떻게 변하든. 어차피 넌 계속 같이 있을거잖아.” 이곳에서 처음으로 눈을 떴던 날. 손톱 자국 가득한 손으로 옷 주름을 펴주던 얀이다. 아무리 무시받는 왕자였어도, 얀에게는 그 자체로 생의 전부였음을 칼리안이 안다. 그러니 칼리안의 한 발자국 뒤. 혹은 옆. 그 자리는 늘 얀의 자리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단 한 번도 얀에 대해 불안해하고 걱정한 적 없었다. “손에 들린 것 다 내려놔도 상관 없어. 중요한 것 아니야. 몰랐다고 자책하지 않아도 돼. 나에 대해 똑바로 안 봐도 돼. 보고 싶은 것만 봐도 돼. 내 새끼코끼리는 원래 그랬어. 괜찮아.” 뚝뚝, 하고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 비린내. 언젠가의 좋은 기억이 코 끝을 스쳤다. 비 비린내, 짙고 짙은 민트와 시나몬 향이 썩 잘 어울린다. 이전의 칼리안이 그것을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뭐 어떻겠는가. 이제부터 좋아하면 되지. “얀, 나랑 내기 하나 할래?” 내 키가 너보다 커질지, 그렇지 않을지. 금화 한 개 걸고. < [외전] 안녕 (수정) > 당연하게 여겨온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될 때. 사람들은 보통 화를 내거나, 울거나, 웃거나. 혹은 도망친다. 그리고 소년은, 도망친 사람이었다. * * * - 왜, 이걸, 배워야 해요? 이렇게 물어보았을 때, 소년의 어머니는 차마 다시 떠올리지도 못할 얼굴로 웃었다. 그래서 소년은 두 번 다시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 손 끝으로 말을 하는 법을 모두 배웠을 때. 소년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저택의 어딘가로 찾아가게 되었다. 손을 쥔 어머니의 손이 얼마나 더웠는지, 얼마나 떨리고 있었는지, 소년은 오랫동안 그것을 잊지 못했다. 저택 2층의 가장 오른쪽 끝 방. 아무도 그 곳에 가지 말라 한 적 없지만 괜한 무서움에 한 번도 가까이 가 보지 못했던 방. 나무가 녹이 슬면 이런 소리를 내지 않을까 싶은 무거운 음색과 함께 늘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소년은 어머니와 함께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을 애써 움직여 웃어보이는 이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그 얼굴을 본 소년은 저도 모르게 어머니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바로 그날 아침까지 열심히 연습한 말을 만들어냈다. - 안, 녕. 서툰 손짓으로 소년의 형을 향한 첫 인사를 건넸다. - 나는, 시,로,이,안, 입니다. 반가워, 반갑, 습니다. 바보같은 말이었으나 소년의 형은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침대에 앉은 채, 기꺼워하는 얼굴로 자신의 양 팔을 펼쳐 보였다. 그것은 굳이 손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소년은 조심스럽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괜찮은지’를 묻는 말이었고 어머니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활짝 웃으며 쪼르르 달려가 침대 위로 올라갔고, 자신과 똑같은 블론즈 색 머리와 청회색 눈을 가진, 그리고 자신과 아주 많이 닮았지만 조금 더 큰 소년을 꼭 안아주었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낯설고, 앙상하고, 차가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형아, 안녕.” 들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꼭 불러보고 싶었어서. 소년은 형을 만난 첫 자리에서 그렇게 말해보고 싶던 짧은 말을 입에 담았다. 형아, 안녕. 내가 시로이안이야. * * * 그 방의 공기는 언제나 농도가 짙은 느낌이었다. 숨을 들이키고 내뱉는 것을 의식해야 할 만큼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안에서 항상 웃어주던 형이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소년의 형은 아팠고,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소년의 여동생은 그 방에 자주 가지 못했다. 혹시라도 소년의 형이 앓는 병이 어린 동생에게도 옮겨갈까봐서였다. 그래서 여동생이 소년만큼 크면 그때부터 같이 가기로 했었다. - 오늘, 매미가, 울었어. - 매,미? - 응, 매미. 매미가 우는 건, 신기해. 어느 날 갑자기, 매앰 매앰 해. 언제부터 우는지, 아무도 몰라. 그냥, 갑자기, 매앰 매앰. 이렇게, 울어. 소년의 형은, 저택 밖을 나가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걷는 것을 못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밖에 나가면 더 아팠다. 기침을 하고 열이 났다. 그래서 소년은 형을 대신해 열심히 매일매일 밖에 나갔다.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보려고 매일매일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리고 매일매일 2층의 가장 오른쪽 끝 방을 찾아가 이야기를 해주었다. - 여름이 되면, 이만한 까맣고 못생긴 게, 어느 날 갑자기부터, 엄청 시끄럽게 울어. 매앰 매앰 하고. - 까맣고 못생겼어? - 응. 날개가 달렸고, 까매. 배에서, 소리를, 내. - 그게 뭐야. 괴물 같아. - 아니야, 못생겼지만, 괴물 같지는 않아. 매앰 매앰 하고 우는 까맣고 못생긴 날개 달린 것. 게다가 배에서 소리를 내는 것이라 하면 누구라도 괴물 같다고 생각할 텐데. 그 생각을 못했다. 그러니 내일은 매미를 잡아와 볼까, 하고. 소년은 그런 생각을 했다. - 보고 싶으면, 내가 내일, 잡아올게. 매미를 보면 형이 놀랄까? 재밌어 할까?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 형에게 도움이 될까. 아니면······. - 보고 싶지 않아. 괴물처럼 생겼을 것 같아. 그냥, 바이올린, 들려줘. 소년의 형이 이렇게 말했다. 소년은, 매미는 괴물이 아닌데 하고 말하는 대신 그냥 알겠다고만 했다. 그리고는 형이 듣지도 못하는 바이올린을 열심히 연주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굳이 보아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소년의 형은 보고 듣고 싶은 것조차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 * * 소년은 그렇게 매일매일 형을 찾아갔다. 그리고 매일매일, 소년의 형은 조금씩 무너져갔다. 조금씩 닳아 사라지는 바이올린 현처럼, 한 줄씩 끊어져가는 바이올린 활처럼. 조금씩, 하지만 착실하게 무너져갔다. 소년은 그것을 몰랐다. 소년의 형은, 건강하지 못한 자신과 건강한 동생을 비교하는 마음을 미워했다. 그것이 다시 병이 되었다. 그 사실을 소년은 너무 늦게 알았다. 때로는 부러움 만큼 키워진 상실감이 병이 되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이미 늦은 뒤에야 그것을 알았다. 바보같이. * * * ‘병세가 날로 심해집니다. 마나실 경의 아드님이 약을 잘 다룬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는 다시 한 번 마나실 경에게······.’ ‘다른 일이 있다 하는데 내가 붙들 수는 없지.’ 처음엔 그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주님······.’ ‘내 아들이 아프다 하여 길을 막을 수가 있겠나.’ 병세가 심해지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약을 다룬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지금 소년의 아버지가 무엇을 포기하겠다 말하는 것인지. 소년은 모두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또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 형. 소년은 언제나와 같이 2층의 맨 오른쪽 방을 찾아갔다. - 형, 레아를 데려왔는데······. 소년의 여동생도 이제 곧잘 수화를 했다. 형에게 다른 병이 옮지는 않으리라고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그렇게 허락을 받아 함께 온 자리였다. 처음으로 셋이 모이는 자리였다. 그래서 동생은 머리에 예쁜 꽃도 달았다. 잘 입지도 않던 치렁치렁한 치마도 입었다. - 나가. 소년의 형은 이렇게 말했다. 너무 예쁘게 꾸민 동생에게 미안해서, 소년은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 형. 많이, 피곤해? 잠깐 레아만. 소년의 형은 처음 보는 얼굴을 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얼굴을 했다. 무서운 얼굴을 했다. - 내가, 피곤한 것처럼, 보여? 소년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어린 동생의 손을 꼭 잡은 채 형이 하는 말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 똑바로 봐. 피하지 말고, 제대로 봐, 나를. 소년은 동생의 눈을 가렸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 죽어가고 있다는 걸, 외면하지 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제 눈을 못 감고 동생의 눈을 가렸다. - 그래. 그렇게 보고, 이제는 제대로 알아야지. 너도. 그래서 형의 말을 고스란히 다 보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보고만 있었다. 그저 울기만 했다. - 왜 그래. 내가 죽으면 넌, 좋은 것 아냐?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했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 * * 그리고 어느 날, 소년은 악몽을 꿨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 속을 혼자 헤매는 꿈을 꿨다. 사방에서 바이올린 소리와 매미 소리가 윙윙 울렸다. 앞으로 가야 할 지, 뒤로 가야 할 지도 모르는 그런 곳에서 온통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해서 길을 잃고 마는 그런 꿈을 꿨다. “공자님, 공자님!” 그 꿈 때문에 한참이 지난 뒤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 기사 유란이었다. 소년이 눈을 뜬 것을 확인한 유란은, 다른 말 없이 소년을 붙들어 안았다. 그리고 작은 담요로 소년의 몸을 감싸고 그대로 방 밖으로 달려나갔다. “왜 그래?” 소년은 이렇게 물었고, 유란은 잠깐 뒤에 대답했다. “불이 조금 났습니다.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왜 밖으로 나가?” 유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담요로 소년의 머리를 감싸고 그 위를 제 팔로 끌어안았다. 한 팔로 소년을 안고 한 팔로 소년의 양쪽 귀를 막으려고. 소년이 숨차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유란은 그것을 풀어주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그리하여 제 삶의 흔적을 지우려 방에 불을 낸. 말 못하는 형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 그 끔찍할 만큼 아픈 소리를 소년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것을, 소년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바보같이. * * * 그 누구도 소리내지 않는 며칠이 다시 지났다. 그리고. “얀.” 놀라지 말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그렇게 이어진 아버지의 말. 그것은, 눈을 뜨면 어느새 들리는 매미 소리 같았다. “네 형이. 어제.” 준비도 없이 들려와서는 제멋대로 여름이 되었다 외치는 매미 소리 같았다. * * * 매미가 울었다. 여름의 마지막을 보내기 싫은 것처럼, 매앰, 매앰, 하고. 소년도 울었다. 전부 다 타버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2층의 오른쪽 끝 방에서, 이제는 주인마저 사라진 그 방에서 매일매일 엉엉 울었다. 해주지 못한 말을 매일같이 혼자 꺼내놓으며, 그렇게 매일매일 울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되고. 그렇게 봄이 왔다, 가고. 또 다시 매앰 매앰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결국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을 데리고 억지로 집 밖을 나섰다. 나가기 싫다며 자지러지는 소년을 품에 안고 성 밖으로, 공작령 밖으로, 억지로 그렇게 나섰다. 별을 보여주고, 하늘을 보여주고, 강을 보여줬다. 소년의 형이 보지 못해서 자신도 보지 않겠다는 고집쟁이의 눈에 억지로, 이것 저것 다 담아줬다. 그렇게 두 달.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2층의 오른쪽 끝 방에 갔던 그 날처럼.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거대하고 아름답고, 하지만 삭막하기 짝이 없는 어딘가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삭막한 곳에서 누구보다 화려해야 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를 보았다. 그래, 바싹 마른 나뭇가지 같은. “저 아이, 누구예요.”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1년 만이었다. 소년은 1년 만에 스스로 무언가를 보고 물어왔다. “이 나라의 셋째 왕자님이시란다.”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의 질문에 감격하는 대신 얼른 이렇게 대답을 했다. 소년은 그 말을 듣지도 않았다. 홀린 듯 아이에게로 걸어갔다. “······ 안녕.” 그리고 이렇게. 인사를 건넸다. < 제26장. 어렵지 않은 일(1) > - 똑똑 사실 노크를 할 때마다 작은 고민을 한다. 만약 안에 있던 이가 ‘누구냐’라고 물어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안에 아무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런 고민은 하지 않았다. 물론 아무도 없다면 왜 노크를 하느냐 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비어 있는 곳이라 해도 왕자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 히나의 정론이었다. 생각한대로 노크에 화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때문에 히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 뒤 불을 켰다. - 탁! 그리고 재빨리 다시 밖으로 나왔다. 굉장히 당혹스러운 얼굴을 한 채였다. 주변을 휙휙 둘러본 히나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소리 없이 외쳤다. ‘아닌데? 맞는데?’ 시녀로서의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칼리안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시트를 확인하고 방을 청소해놓기 위해 들어간 참이었다. 어차피 칼리안은 자리에 없을 것이라 했으니 조금 여유있게 청소를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 이후로는 자신의 손으로 청소를 해 줄 일도 없을 것이라서 더 꼼꼼하게 보아 줄 마음도 먹었다. 그런데. ‘왜, 저 분이, 여기 있지?’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것은, 히나가 소리를 지르지 못했기 때문이지 이 상황에 놀라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히나는 정말 많이 놀랐다. 문을 열고 들어간 방이 검은색 일색임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경황 없이 되돌아 나올 만큼 놀랐다. 눈이 화등잔만큼 커진 히나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봤다. 3층과 4층을 하도 많이 오갔으니 층 수를 헷갈린 것인지를 거듭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3층 맞아.” 히나의 어깨가 움찔했다. 소리 없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 방 안에서 들려 온 탓이다. 곧 히나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짙은 색의 커튼과 카펫, 소파, 멀리 침실 안 쪽으로 보이는 검은 시트, 검은 가구. 주인의 평소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검은 색 일색의 내부가 이 곳이 칼리안의 방이 맞다는 것을 다시 알려줬다. 그런데, 하얀 고양이와 검은 소파 사이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연두색 왕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히나가 들어오는 소리에, 칼리안의 방에 또 멋대로 들어와 멋대로 생각에 잠겨 있던 플란츠가 눈을 뜨고 히나를 쳐다봤다. 그래야 히나가 하는 말을 볼 수 있으니까. 플란츠의 시선이 닿은 히나가 얼른 말을 꺼냈다. - 제가, 실수를 했어요. 정말······. 칼리안의 방에 플란츠가 들어앉아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 예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나갔었으니, 그에 대한 사과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됐어.” 플란츠는 이렇게 히나의 말을 잘랐다. 어차피 남의 방에 들어와 있던 것은 플란츠였다. 그러니 사과를 받을 이유도 없었다. 왜 자신이 이 곳에 왔는지 설명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는 플란츠를 향해, 히나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저는, 청소를, 하려고, 왔어요. 자상한 왕자님께서는, 지금 안 계세요. 숲에 가셨어요. 히나의 말 중 몇 마디 말을 알아듣지 못한 플란츠가 잠시 대답 없이 히나를 쳐다봤다. 이해하지 못한 말이 있을 때 그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는 히나가, 수첩을 꺼내 ‘숲’이라는 글자를 써서 보여줬다. 칼리안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 갔음을 안 플란츠의 눈꼬리가 살짝 찌푸려졌다. 다만 그 곳에 왜 갔는지를 물어볼 성격도 되지 못했으므로,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곧 플란츠의 무릎에 있던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애옹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보던 플란츠가 고양이 턱을 몇 번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데려와도 돼. 빌헬름에.” 내일부터 고양이를 봐줄 사람이 없으니, 그냥 빌헬름관으로 데리고 와도 된다는 말이다. 카이리스에서 정신 나간 놈들만 잘 모아서 뭉쳐놓은 듯한 곳이지만 그래도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내지 못할 만큼 엉망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 하는 입모양을 만든 히나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 감사합니다, 좋은, 왕자님. 또, 좋은 왕자란다. 칼리안을 언급할 때에도 알아보지 못할 수화가 하나 붙어있었다. 때문에 히나가 이름을 말하기 어려우니 나름대로 구분해 부르는 호칭인 듯 하다는 것까지는 플란츠도 눈치를 챘다. 다만 자신에게 붙는 저 호칭이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플란츠는 조용히 히나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 잘 먹었어.” 딸기. 너무 많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식단의 석찬을 마친 뒤 벌써 닷새가 지났다. 그 후로 히나는 빌헬름 관에 갈 이런저런 준비를 하느라 플란츠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때문에 플란츠 역시 이제야 저 말을 꺼낸 터였다. 아마도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해보는 것이 아닐까 싶은 ‘고맙다’는 의미의 말 말이다. 플란츠의 말에 다시 한 번 놀란 얼굴을 해 보였던 히나가, 소리 없는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에는, 아이스크림만, 가져다 드릴게요. 여기 사람들은 다 이상하다. 실수를 해도 괜찮다 하고. 다 이해해주고. “그래.” 고맙다고 말해주는, 정말 좋은 왕자님도 있고. * * * 달빛을 가득 머금은 바람이 싱그럽다. 카이리스 왕궁의 후문과 이어진 왕실 숲에서는 녹빛 짙은 풀내음이 났다. 개울이라 하기엔 크고 계곡이라 하기엔 어울리지 않을 물줄기에서 시원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르피아 궁의 후원에도 분명 그럴싸한 인공 개울이 있지만, 아무렴 진짜만 할까. 언제나 고요한 세뉴강을 향해 흐르는 물 소리를 들으며, 칼리안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숲이 이렇게 클 줄도 몰랐고 이렇게 좋을 줄도 몰랐다. 베른은 물론 옛 칼리안도 몰랐다는 소리다. 카이리스 왕궁의 크기만큼, 숲은 정말이지 상상 이상으로 컸다. 칼리안은 분명히 이 곳이 그리 크지 않은 숲이라 들었다. 그런데 직접 와 보니 시스파니안이 아닌 이상 이 숲을 작다 느낄 이는 없을 정도의 크기다. 도대체가, 넓이에 대한 카이리스 사람들의 배포가 얼마나 크면 이 숲을 보고 그런 평가를 한 것인지. “전하께서도 여기에 오셨던 적이 없나봐.” 사냥대회를 위해 찾는 숲은 따로 있었다. 숲은 왕실과 마찬가지로 시스파니안의 손길이 닿은 곳이었기 때문에 짐승이 없었다. 그랬으니 책상 앞에만 앉아있다 가끔 사냥대회나 개최하는 르메인이 이 곳에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신 적이 있었으면 나더러 여기 오라고는 못하셨을 것 같은데.” 만약 르메인이 이 숲에 왔었다면, 그래서 이 곳이 열 다섯의 소년이 돌아다니다 길을 잃기 딱 좋을 곳임을 알았다면, 칼리안이 이 곳에 와도 된다는 허락은 절대 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무튼 난 너만 믿어.” 어둑한 주변을 둘러보다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 칼리안이 레이븐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렸다. 오랜만의 산책, 그것도 초록색 가득한 숲으로의 밤 산책에 신이 난 레이븐이 푸릉 하는 소리를 내며 대답 비슷한 것을 했다. 레이븐이 있는 한 이 곳이 얼마나 어두워지든, 혹은 얼마나 깊은 곳으로 들어가든 걱정할 것이 없었다. 지금 당장 레이븐의 등에 기대 잠이 든다 해도, 알아서 체르밀에 돌아가 줄 레이븐이 아닌가.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진작 와 볼 걸.” 적막함이 감도니 혼잣말이 늘어난다. - 다각, 다각. 단단히 마른 흙길을 밟는 레이븐의 작은 발 소리가 물 소리와 참 잘 어울린다. 곧 레이븐은, 달빛을 고스란히 받는 너른 땅 앞에 멈춰섰다. 칼리안이 원하던 장소를 귀신같이 찾아낸 것이다. 레이븐의 위에 앉은 채 바람을 즐기던 칼리안이 훌쩍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잠시 선 채 하늘을 쳐다봤다. “보여, 레이븐?” 마치 칼리안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레이븐이 살짝 고개를 치켜 들었다. 정말로 하늘을 보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칼리안이 웃었다. “별이 다 파란색이야. 너도 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렇게, 혼잣말일지 레이븐에게 건네는 말일지 모를 이야기를 했다. 봄과 여름의 사이에 든 하늘에는 유난히 푸른 별이 많다. 별의 색은 곧 그 별의 나이라는 말을 언젠가 들었었는데, 그것과 연관짓기 어려울 만큼 이 시기의 하늘에는 푸른 별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세크리티아에만 찾아오는 ‘세렌티의 시간’을 지상이 아닌 하늘에 불러낸 것처럼. 마치 파란 반딧불이가 온 세상에 내려앉은 것 같은 모습이 되는 시간. 베른이 태어났던 시간이기도 한 그 특별한 순간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려보던 칼리안의 입에 쓴웃음이 그려졌다. 이 왕궁에서 그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는 사람은 아마 칼리안 자신 뿐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 와 그것을 떠올려 보아야 의미 없는 일이겠지만. “멀리 가 있어. 부를 때까지 오지 말고. 위험하니까.” 곧 칼리안이 레이븐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플란츠로부터 뺏어오게 된 이런저런 것들 중 가장 귀하다 할 수 있을 레이븐이, 다시 한번 푸르륵 소리를 내곤 이제껏 온 길로 돌아갔다. 칼리안이 부를 때 까지는 알아서 먼 곳으로 가 있을 터였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칼리안이 작은 바위 위에 곱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것이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칼리안은 근 닷새 동안 서류를 들고 씨름을 했다. 체이스가 남겨놓고 간, ‘란델이 텐실의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의 귀족세력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상세히 적어 둔 서류였다. 그것을 모조리 기억해낸 것도 모자라 그 정도의 분량을 직접 적어서 건네 준 것도 참으로 감사할 일이었다. 손가락 두 마디는 될 두께의 종이 뭉치를 이해하고 통째로 외워 놓는 것에 닷새가 걸렸다. 칼리안은 내용을 모두 외웠다는 것을 확인한 즉시 그것을 불에 태워 없앴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정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칼리안의 금고에 잘 보관해두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이 아닌가. ‘오늘 출발합니다, 왕자님.’ 그렇게 닷새를 보냈을 때, 아르센이 왕궁을 나섰다. 닷새 전 칼리안이 지시한 일, 바로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을 만나 그 의중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때마침 구축중인 이동 마법진의 일로, 마법사 협회장 에우리아가 그 곳에 갈 일이 있다 하여 아르센과 함께 보냈다. 인근까지만 동행을 한다 하더라도 아르센 혼자 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아무튼 그렇게 아르센을 보냈으니 칼리안도 준비라는 것을 해야 할 때였다. 그러려면 일단 근처에 사람이나 건물이 없어야 했다. 누군가 혹은 무엇이 있으면, 분명 부서질 테니까. 그래서 이렇게 부서질 것 없는 숲을 찾아 온 참이었다. 그 후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 저벅, 저벅. 오도카니 앉아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칼리안을 향해 다가오는 그리 크지 않은 발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이 자리에 있어도 절대 부서지지 않을 한 사람이 칼리안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칼리안이 반가운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었다. “스승님.” 앨런이었다. 칼리안은, 어여쁜 제자의 ‘준비’를 돕기 위해 흔쾌히 이 곳까지 걸음한 앨런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투명한 오러의 검을 만들어냈다. - 쉬이익! 예리한 파공음이 공기를 가른다. 칼리안이 앨런을 향해 마력과 오러를 가득 담은 검격을 날린 것이다. 주저하지 않는 어마어마한 속도의 공격에도 당황하지 않은 앨런의 손 끝에서는 붉은 빛의 장막이 펼쳐졌다. 그와 함께 칼리안의 신형이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듯 사라지고, - 콰아앙! 폭발음에 가까운 굉음이 고요한 숲을 뒤흔들었다. < 제26장. 어렵지 않은 일(2) > 그날 낮. ‘오늘 일과 끝나시면 잠깐 시간 좀 내주세요, 스승님.’ 집무실을 직접 찾아온 칼리안의 이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앨런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필요하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따라 나서지요.’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르메인이 넘긴 일 따위, 칼리안에 비하면 중요할쏘냐. 늘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는 앨런이 아니던가. 그런데 칼리안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오러를 뒤집으려면 아침보다는 밤이 나아서요.’ 그러더니 이렇게, 앨런으로서는 알쏭달쏭하기만 한 말을 했다. 뭐 어쨌든 어여쁜 제자가 그렇다는 데 그런 것이겠지. 밤이 낫다 하면 낮을 밤으로 바꾸어서라도 밤에 만나야지, 암. 다행히 칼리안은 앨런에게 낮을 밤으로 바꾸는 일까지 부탁하지는 않았다. 얌전히 조금만 기다렸다가, 숲 속의 적당한 장소를 자신이 먼저 보아 둘 테니 찾아와 달라고만 했다. 때문에 앨런은 흔쾌히 알겠다 답했다. 그렇게 밤이 되고 보름달이 떴다. 앨런은 조금 남은 일거리를 아르센에게 넘길까 하다가, 녀석이 지금 칼리안이 시킨 일을 하러 궁을 떠난 것을 기억해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맞은편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남은 서류를 집무실 주인의 책상 위에 곱게 올려놨다. 그리고는 책상 앞에 앉은 사람에게 ‘늙은이 힘들어서 오늘은 먼저 갑니다’ 하고 자신있게 말한 뒤 멋지게 돌아나왔다. 그 뒤에는 후다닥 숲으로 왔다. - 다각, 다각. 때마침 숲과 왕궁의 경계선 너머에서 검은 말 한 마리가 걸어나왔다. 오른쪽 앞 발목만 하얀, 가끔 고약하지만 그만큼 똑똑한 칼리안의 말이었다. “네 주인은 숲 속에 있느냐?” 앨런이 이렇게 묻자, 도도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 슬며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 푸르릉 소리를 내고는 돌아섰다. 그것이 마치 칼리안을 찾는 중이라면 알아서 찾아가라는 것처럼 여겨진 탓에, 앨런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고놈 성깔 참 제 주인이랑 잘 어울린다 싶어서였다. 아무튼 칼리안이 숲에 이미 도착한 것을 알았으니, 숲 속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어 움직이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것이 없었다. 시스파니안의 손길이 닿은 곳이라 해도 마법은 쓸 수 있었으니까. 숲에 들어서고 오래지 않아 칼리안을 찾은 앨런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며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니 주변은 온통 달빛에 젖은 녹빛이다. 빨간 눈의 고양이같은 제자는 새하얀 달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앉아 있었다. “스승님.” 마주 쳐다보면 낯이 닳을까 같이 걸으면 발이 부르틀까 그저 부둥부둥 업고만 다녀도 모자랄 그 어여쁜 제자가 반가운 얼굴로 앨런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 고운 손으로 서슬퍼런 칼을 날렸다. 찰나의 순간, 앨런이 허 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칼리안은 분명 잠시 시간을 내어 달라 했지, 잠시 목숨을 내어 달라고는 안했으니까. 뭐, 아무렴 어떠한가. 그러니 저러니 해도 어여쁘기만 한 것을. 때문에 앨런은 자신의 목젖을 향해 치닫는 곱디 고운 칼날을 흐뭇한 마음으로 쳐다봤다. 기꺼운 미소가 그려지고, 칼을 막기 위한 붉은 장막과 소리를 막기 위한 대규모 사일런트가 동시에 펼쳐졌다. - 콰아앙! 그리고 이렇게, 거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 * * 아침부터 계속 앨런이 바빴다. 아르센은 그날부터 자리를 비웠다. 플란츠는 기사들을 만나느라 빌헬름관에 없었다. 발칸의 마법사들은 신이 났다. 딱 두 시간 동안 신이 났다. 아르센이 해야 할 일이 마법사들에게 내려온 까닭에, 애석하게도 그 이상 신이 나 있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날 아침 마법사들은, 오늘로 끝나게 된 헤이시아 궁의 잔해 처리 마무리 작업과 아르센이 남겨놓고 간 서류 처리 업무를 어떻게 나눌지 깊이 고민했다. 딱 두 시간 동안 고민했다. “난 잔해 처리.” “나도 잔해 처리.” “나도.” “그래, 나도.” 그렇게 50명이 전부 다 잔해 처리에 지원했고, 점심 시간이 됐다. 그래서 놈들은 일단 점심을 먹고, 제비 뽑기를 통해 인원을 반반 나눴다. 그것 역시 딱 두 시간이 걸렸다. 무의미한 여섯 시간을 날려버린 50인의 또라이들이 부랴부랴 일을 하기 시작했다. 훈련은 하지도 못하고 야근만 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잔해 처리와 서류 처리에 다시 네 시간이 흘렀고, 결국. 저녁 시간이 됐다. 아, 물론 마법사들은 똑똑하다. 단지 돌았을 뿐이다. 아무튼 똑똑해서 돈 것인지 돌아서 똑똑한 것인지 모를 발칸의 마법사들은, 부랴부랴 저녁을 챙겨 먹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일을 끝냈다. 문제는 그 뒤에 생겼다. “이게······ 뭐지?” 보라와 분홍의 사이쯤 되는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마법사 니들렌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겉으로 드러난 모든 잔해가 싹 치워진 헤이시아 궁 터의 한 가운데 선 채였다. 그다지 한 일은 없지만 늦은 시간까지 고생한 덕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탄산수를 홀짝이던 마법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한결같이 미간을 찌푸렸다. “헤이시아 궁에 지하는 없었지 않나?” “없었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것 같은 진지한 얼굴이 된 채로, 마법사들이 바닥의 한 지점을 쳐다봤다. 섣불리 다가서거나 손대려 하지 않은 채였다. “군단장님 모셔오겠네.” 낯선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가장 잘 아는 것이 바로 마법사가 아닌가. 때문에 그들 중 한 명이 아르피아 궁으로 갔고, 나머지 마법사들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같은 곳을 계속 주시했다. 흙더미 속. 마법사들의 시선이 모여든 곳에서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 * * - 대부분의 기사들은 오러를 깨치기 전에 마나부터 쌓는다. 어차피 그렇게 해 봐야 검의 길에 오르는 건 극소수 중에서도 극소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들 그렇게 하지. 너도 그랬을 테고. 칼리안이 앨런을 불렀던 것은, 과거의 스승이었던 기사 테일란의 말 때문이었다. - 마법사들은 쌓아 둔 마나 그 자체를 쓰니 상관 없지만, 기사는 다르다. 잘못 쌓인 마나는 아무리 많아도 오러로 발현되지 않지. 다만 오러를 깨치기 전에 쌓아 둔 마나가 많아 봐야 얼마나 많겠나. 마나를 그렇게 많이 쌓아 둘 정도면 기사 말고 마법사를 하는 게 나으니까. 그러니 차이가 미미해서 다들 무시하고 넘길 뿐이지. 그 때에는 베른도 그 말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테일란도 그저 참고하라 말해줬을 뿐, 무언가를 바꾸길 원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미미했으니까. 그랬던 칼리안이 테일란의 말을 상기하게 된 것은 늑대들의 습격을 받았던 날의 일 때문이었다. 분명 그날 칼리안은 뽑아낼 수 있을 만큼의 오러를 모두 뽑아내어 검을 운용하고 있었다. 그러다 검술만으로는 놈을 상대하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고 윈드 스피어를 사용했다. 발현된 마법은 그대로 놈의 몸을 관통했다. 놈은 그 붉은 빛의 오러를 사용하는 이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칼리안의 마법이 놈의 몸을 한 방에 꿰뚫었다. 마치 아르센의 공격처럼 말이다. ‘마법이 너무 강했어.’ 그 후 남은 네 명을 상대할 때에도 마법이 발현됐다. 칼리안의 기준에서 그것은 분명 불가능했어야 할 일이었다. 그 때의 일을 떠올리니 테일란의 말이 생각났다. 그 날 그렇게 마법이 강했던 이유도 짐작하게 되었다. 오러로 바뀌지 않는 잔여 마나가 있다는 소리였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칼리안이 지닌 마나의 절반은 옛 칼리안이 모은 것이니, 그 성질이 지금의 칼리안이 모은 것과 판이하게 다를 수 밖에. 그래서 앨런을 불렀다. ‘오러를 뒤집는’ 일을 하려고. 베른에게 있어서는 치환되지 않은 마나가 지나치게 미미했을지 모르지만, 칼리안은 아니었으니까. 시스파니안의 축복을 받은 옛 칼리안의 마나는 결코 미미하지 않았으니까. - 콰아아앙! 뻗어나간 검 끝이 붉은 막에 걸렸다. 여섯 번의 공격이 가해졌으나, 애석하게도 앨런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처음 만들어 낸 붉은 장막을 새로 펼치지도 않았다. - 우웅! 칼리안의 검에 푸른 빛이 어렸다. 오러의 힘을 얻은 칼리안의 검이 찬 빛을 뚝뚝 흘렸다. 칼리안은 조금의 주저함 없이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앨런의 앞에 놓인 붉은 장막을 향해서였다. - 서걱! 오러의 힘을 싣고 나서야, 붉은 장막이 잘려나가듯 길게 갈라지더니 흩어졌다. 그와 함께 앨런의 모습도 사라지며 저만치 먼 곳에 다시 나타났다. 앨런은 검을 다루는 이가 아니었으므로 그 눈이 칼리안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굳이 그런 것을 눈으로 보아야 할 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장막이 사라짐을 직감한 즉시 몸을 옮긴 것이었다. 칼리안의 모습이 다시 한 번 사라졌다. 그리고 득달같은 공격이 이어졌다. - 쌔애액! 카강! 카아앙! 어느새 다시 생성된 붉은 막이 크게 흔들리다 사라졌다. 몸을 감싸던 장막을 잃은 앨런의 모습이 먼 곳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몸을 보호하는 대신 거대한 창을 만들어 쏘아보냈다. - 쉬이익! 이글거리는 불의 창이 칼리안의 심장을 노리고 짓쳐들어왔다. 드디어 공격을 해 오는 스승의 모습에, 씩 웃은 칼리안이 검을 넓게 휘둘렀다. - 카앙! 아르센의 창이었다면 부서졌거나 튕겨 나갔을 것이다. 그것은 얼음이니까. 앨런의 불은 달랐다. 투명한 검에 맞부딪힌 불꽃의 창이, 마치 먹잇감의 몸을 휘감는 거대한 뱀과 같이 칼리안의 검날에 얽혀들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길이를 늘려가듯 몸집을 부풀리며 칼리안의 팔을 집어삼키려 했다. 살아있는 불. 앨런의 불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보게 된 칼리안의 미소가 짙게 변했다. - 우우웅! 그와 함께, 손에 들린 검이 깊은 울음소리를 내며 조각조각 흩어졌다 다시 뭉쳤다. 일순간 숙주를 잃은 불이 투둑투둑 함께 끊어져 공기 중으로 사라져갔다. 칼리안의 검에 푸른 빛의 회오리가 감겨들었다. 불을 상대하는데 있어 가장 좋은 것은 얼음이니, 들고 있던 검에 얼음의 속성을 담은 것이다. 청명한 물빛으로 빛나는 그 검을 든 채, 칼리안이 다시 한 번 모습을 숨겼다. 앨런의 팔이 조용히 움직였다. 칼 좀 다루는 마법사 제자가 과연 어디까지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즐거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 따악! 손가락 끝에서 경쾌한 소리가 울린다. - 화아악! 칼리안의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붉은 빛을 넘어 새하얗게 타오르는 그 불길이 금방이라도 칼리안을 태워 없앨 것처럼, 모든 것을 제 아가리 속에 넣고 삼켜낼 것처럼 위협을 해 왔다. 칼리안의 손에 들린 검이 넓은 방패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전신을 감싸안을 만큼 넓어진 방패에 어린 푸른 빛이 마치 지금의 하늘을 모아 담은 것처럼 반짝였다. - 쉬이익! 지면을 뚫고 솟아오른 물줄기 같은 여러 갈래의 불이 그런 칼리안의 온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온기도 한기도 느끼지 않게 된 몸 속에 저릿한 열기가 든다. 불길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쏟아지듯 이어지는 불길 속으로 뛰어든 칼리안이, 몸에 불이 붙을 여유를 두지 않을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칼리안의 모습이 다시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가히 찰나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시간이 흐른 뒤, 칼리안의 신형이 앨런의 바로 뒤에서 나타났다. - 카가강! 콰앙! 칼리안은 손속에 여유를 두지 않았다. 있는대로 오러를 뽑아내며 앨런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붉은 빛이 일렁임과 동시에 다시 한번 앨런의 보호막이 사라졌다. 칼리안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속에 감춰진 앨런의 등을, 그 안의 심장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 쌔애액! 여지 없이 앨런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로 불의 창이 다시 날아왔다. 칼리안은 재빨리 몸을 비틀어 그것을 피하며 한번 더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 카아앙! 캉! 마법사와 기사의 공방이다. 아니,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의 공방이다. 칼리안이 밟고 지나간 자리는 모조리 타올랐다. 앨런이 사라진 자리는 모두 잘려나갔다. 오로지 두 사람만 조금도 상하지 않은 모습으로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 - 카가강! 앨런은 끊임 없이 자리를 바꿔가며 공격했고, 칼리안은 그것들을 쳐내거나 피해내며 앨런의 뒤를 쫓았다. 언제 어디로 사라질지 모를 앨런의 흔적을 따르는 칼리안의 공격에 머뭇거림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공격이 날아오면 쳐내거나 막아내고, 뒤이어 검을 내뻗고 휘둘렀다. 칼리안의 입에 긴 호선이 그려졌다. 앨런이 강하리라는 것은 당연히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일 줄은 몰랐다. - 카아앙! 다시 한 번 칼리안의 검이 붉은 막을 가격했다. 푸른 빛과 붉은 빛이 서로 얽히다, 붉은 막이 파스스 흩어졌다. 이 쯤 되면 또 다른 곳으로 피하던 앨런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붉은 막도 만들지 않은 채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발현된 말 머리통만한 화염구가 칼리안의 복부로 날아들었다. 칼리안은 위험을 느낌과 동시에 검을 방패로 바꾸었다. 몸을 보호하던 오러를 모조리 방패의 곁에 둘렀다. 그 위에 얼음의 막을 덧씌웠다. 그것으로 부족하여 실드까지 발현했다. - 콰아아앙! 순식간에 주변의 산소를 빨아들인 화염구는, 다급히 대처하는 칼리안을 비웃듯 곧바로 새하얀 폭발을 일으켰다. 푸른 솔새가 내던진 마력탄이나 아르센의 화염구와는 비교조차 불가하다. 흰 빛의 화염구는 그 위력부터 달랐다. - 콰직! 카가강! 불에 닿음과 동시에 실드가 조각나 깨어지고, 얼음은 사라졌다. 오러의 푸른빛이 출렁일 정도의 거대한 폭발력에, 칼리안의 몸이 저만치 먼 곳으로 나가 떨어졌다. 오러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어디 한 군데는 사라졌을 만큼의 위력이다. 저도 모르게 큭 하는 소리를 내뱉은 칼리안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쉼 없이 검을 생성했다. - 우우웅! 조금 전보다 확연히 옅어진 푸른 빛이 검을 감쌌다. 칼리안은 지치지도 않고 다시 앨런에게 달려들었다. 앨런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칼리안의 눈 앞으로 새하얀 화염의 창이 뻗어나왔다. 머리보다 빠르게 반응한 팔의 움직임이 그것을 떨쳐냈다. - 콰지직! 갈라져나간 창 끝이 바닥에 박히며, 대지가 붉게 타올랐다. 그런 모습에는 시선조차 두지 않은 칼리안이 또 한 번 앨런에게 달려들려 할 때. - 파삭! 단단한 것이 완전히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에 들린 검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다시 한 번 오러를 운용하려 하였으나 텅 빈 단전에서 올라오는 힘이 없었다. 사용할 수 있을 오러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드디어.’ 단전이 텅 빈 것을 느낀 칼리안이 제 자리에 멈춰섰다. 몰려오는 탈력감에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고 싶은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선 채로, 칼리안이 긴 숨을 내뱉었다. 붉은 눈이 서서히 감겨든다. - 두근! 오러를 남김없이 비워낼 때. 단 한 줌의 오러도 남아있지 않을 때. 그리하여 그저 마법으로만 발현되었던 옛 칼리안의 마나까지도 모두 오러로 변환할 수 있을 때. 그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 두근! 칼리안의 심장이 요동쳤다. 소비되는 기존의 오러가 자연스럽게 다시 쌓이는 시간조차 주지 않을 만큼의 맹공을 퍼부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칼리안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시스파니안의 축복을 받아 쌓아올렸던 옛 칼리안의 마나, 세 개의 서클을 이루고 있던 그 방대한 마나가 심장에서 흘러나와 칼리안의 단전으로 향했다. 칼리안은 자리에 앉을 새도 없이 흘러들어오는 마나를 오러로 바꾸기 시작했다. 심장에서 뻗어나오는 순수하기 짝이 없는 마나를 쉼 없이 운용해나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그 힘이 칼리안의 단전을 가득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 두근! 칼리안의 주변으로 냉막한 기운이 몰려든다. 화염의 힘에 달아올랐던 대지가 식는다. 언젠가 아르센이 느꼈던, 예리한 칼날과 같은 마력이 칼리안의 몸을 휘감아돈다. 단전을 거쳐 오러로 변환된 마나가 다시 심장의 서클로 들어간다. 여전히 세차게 회전하는 세 개의 서클을 이루는 힘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 두근! 바뀐 것이 있다면. 오로지 네 번째의 서클만 오러의 힘이었던 예전에 비해 이제는 네 개의 서클이 모두 오러의 힘이라는 것. 그리하여 그 네 개의 서클을 이루는 마나를 모조리 오러로 전환해 사용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 옛 칼리안이 쌓아 둔 마나를 기반으로 다시 제대로 된 오러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아마도 이제는, 에반의 앞에서 오러를 감출 필요가 없으리라는 것. “이제.” 검게 변한 대지의 한 가운데 선 칼리안이 깊이 고개숙여 인사했다. “되었습니다. 스승님.” 옛 칼리안을 닮은, 그리고 베른을 닮은, 검붉은 빛의 검이 칼리안의 손에 들려 있었다. < 제26장. 어렵지 않은 일(3) > 대륙에 여섯, 아니 사실상 다섯 뿐인 소드 마스터. 그리고 대륙에 셋 뿐인 7서클 마법사. 되도록 피하려 했고 어지간해서는 피했어야 했을 둘의 대련이었다. 물론 앨런이야 칼리안의 공격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준 정도라 해야 하겠으나 칼리안은 아니었다. 지니고 있던 오러를 모조리 털어낼 만큼 온 힘을 다해 앨런을 상대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둘의 대결이 불러온 결과는 어마어마했다. 일단 칼리안의 오러가 전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달라졌다. 그것은 마치 짙은 핏빛 같기도 했고, 어둠 속에 모질게 남겨진 단 하나의 불씨같기도 했으며, 지독한 죽음과 지고한 생명을 함께 담은 것 같기도 했다. “실로 유일무이한 오러가 아닙니까.” 물론 에반 브리센 후작을 만나 그의 오러가 느껴지는지를 확인해야 정확하겠지만, 에반보다 오러의 양이 많아진 것이 맞다면 더 이상 오러를 숨기는 마법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되면 정신력의 소모도 덜 할 것이고 얀과의 키 크기 내기에서 이길 확률도 늘어날 터였다. 그러니 이 얼마나 대단한 성과란 말인가. 때문에 앨런은, 한 칼리안의 오러를 보며 축하를 보냈다. “축하드립니다. 아무튼 제가 제자 하나는 잘 두었습니다.” 물론 칼리안은 기뻐했다. 칼리안의 오러가 늘어난 것이 이번 대련이 가져 온 결과의 전부였다면, 앨런이 그러하듯 그저 기뻐하기만 했을 것이다. “······ 음.” 하지만 칼리안은 기뻐하기만 할 수가 없었다. 칼리안이 달빛을 받으며 앉아있던 조그만 바위는 멀쩡했다. 그것만 멀쩡했다. 바위를 중심으로 온 사방이 초토화됐다. 칼리안의 검은 카이리스 왕궁에서 가장 날카로울 것이고, 앨런의 불길은 이 대륙에서 가장 뜨거울 것이다. 사정 없이 조각났다 하면 딱 어울릴 바위와 나무들, 그리고 숯처럼 검게 그을린 대지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나. 물론 여기까지는 예상했으므로, 주변의 상황이 칼리안의 감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칼리안은 숲을 엉망으로 만든 것을 그냥 모르는 척 하려 했다. 어쨌거나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곳이니 알려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만약 르메인이 알게 된다 한들, 뭐 어쩌겠는가.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부서질 바위이며 시간이 흐르면 어차피 다시 자랄 나무인 것을. 그리고 이제 르메인도 이 정도 사고는 그냥 그러려니 할 정도의 담력은 쌓였을 터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앨런과 함께 기뻐하기를 마친 뒤 레이븐의 등에 얹힌 채 체르밀 궁으로 돌아가려 했다. 돌아가서, 그 좋아하는 목욕이나 하며 피로를 푼 뒤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건, 흠. 그래, 이건 좀 고민이 되는군.” “상황을 보면 군단장님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위 아래를 생각하면, 그래도 왕자님이 먼저 아닐까?” 앨런을 찾으러 간 마법사는 분명 한 명이었다. 아르피아 궁에 앨런이 없자, 마법사 대표는 급한대로 칼리안을 찾아갔고 칼리안의 시종을 통해 칼리안과 앨런이 ‘숲’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마법사는 숲으로 왔다. 호기심 많은 몇몇이 숲으로 따라왔다. 그래서 빌헬름 관에 총 세 개의 동상이 들어앉게 생겼다. 일의 원인과 결과가 완벽히 들어맞지 않는 기분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됐다. 칼리안이 앨런과 대련을 했고, 빌헬름 관에 세워질 동상이 늘어났다. 아무래도 히나가 빌헬름에 가면 가장 먼저 치료해야 할 것은, 저들의 머리가 아닐까. ‘그렇게 되면 히나의 동상을 세우겠다 하겠지.’ 정말 다 돌았나봐. 어떡하지. 이런 생각에, 칼리안은 그만 이마를 부여잡고 레이븐에 기대 앉아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린 앨런은 칼리안의 안색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얼른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는 들어가 쉬시지요. 헤이시아 궁 쪽의 일은 제가 확인을 하겠습니다.” 지금 칼리안의 피로를 불러온 것이 앨런과의 대련인지, 아니면 하얀 로브 입은 미친자들이 세우고 있는 빌헬름관의 인테리어 계획인지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칼리안이 녹초가 된 것만은 분명해서 하는 소리였다. “잠시 들르기만 할 것이니 괜찮습니다.” 칼리안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앨런을 부르러 온 것이라 하지만 함께 이야기를 들은 이상 칼리안도 앨런과 같이 움직일 생각인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헤이시아 궁이 아닌가. 시스파니안이 머물던 곳에서 ‘빛을 내는’ 무언가가 있다는데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칼리안을 향해 앨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 것을 또 혼자 드십니까.” 분명 고민거리를 나눠 주기로 해놓고 이런 말을 하니, 또 혼자 무리하려 드느냐는 의미로 꺼낸 소리였다. 이래서야 조약돌이 ‘사람이 만든 신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칼리안에게 알릴 수나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는 채였다. “확인 후에 말씀을 드리러 갈 터이니 오늘은 쉬십시오.” 가벼운 밤 산책을 마친 듯한 정도의 컨디션인 앨런의 말에, 칼리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확인되는대로 꼭 알려주세요.” “걱정 마시지요.” 그리하여 칼리안은, 헤이시아 궁에서 발견됐다는 것에 대한 궁금증과 기어코 숲까지 부순 것에 대한 약간의 미안함, 그리고 어떻게 해야 발칸에 동상이 세워지는 것을 막을지에 대한 걱정 등을 일단 모두 앨런에게 넘긴 채 체르밀로 향했다.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체이스의 정보를 외워 놓느라 닷새 동안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으니, 앨런의 말을 들어 일단은 좀 쉬기 위해서였다. - 다각, 다각. 칼리안의 결정을 눈치 챈 레이븐이 체르밀 궁을 향해 알아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앨런의 모습이 사라졌다. 헤이시아 궁이 있는 곳으로 향한 것이다. 남겨진 발칸 마법사들은 다시 돌아가기 위해 각자의 말에 올랐다. 앨런을 따라 공간이동을 하는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숲에서 헤이시아 궁 까지의 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앨런 정도가 아니라면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었으니까. * * * 그래. 분명히 있었다. 옅은 베이지색 소파와 은백색의 고양이 사이에 검은 색 칼리안이 앉아있던 적이 분명 있었다. - 타악!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검은색의 소파와 은백색의 고양이 사이에 삶은 완두콩같은 놈이 앉아 있을 필요는 없지 않나. 자신의 방 문을 열었다가 곧바로 닫은 칼리안이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도 제 발로 한 번 그런 짓을 해 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그리고 자신의 방이 무슨 색인지도 익히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곳이 3층인지 4층인지를 둘러보는 헛짓을 하지는 않았다. “안 들어와도 돼. 알아서 잘게. 너무 피곤해서.” 대신, 함께 들어와 잠자리를 정리해주려 하는 얀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남의 방에 멋대로 들어와 있는 플란츠를 얀이 곱게 볼 리 만무했으니까. 칼리안의 얼굴이 정말로 좋지 않았으므로, 얀은 한껏 걱정하는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것 있으면 부르세요.” “푹 자면 괜찮아져. 걱정 마.” 그렇게 얀을 안심시켜 돌려보낸 칼리안이 방의 불을 켜며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문 밖에 서 있는 두 명의 호위기사에게 이 시간에 몰래 찾아온 손님이 있음을 들켜봐야 좋을 것이 없었던 탓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후에는 이렇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도 하필 오늘, 그리고 지금.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다. 대련의 여파로 몰골이 엉망인 것은 아니었다. 칼리안은 마법사들이 숲에 찾아온 그 순간 이미 옷매무새를 싹 정리했다. 남들의 눈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파리하게 변한 안색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칼리안의 얼굴을 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은 무리하는 것이 취미인가보군.” 플란츠의 맞은편에 앉은 칼리안이 실소하며 말했다. “내 형님께서 이제는 걱정을 다 해주시니.” “짖지 말고.” 어김 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곧 플란츠가 고양이를 안은 자세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꼬박 하루는 퍼질러 자야 할 것 같은 놈을 앞에 두고 떠들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으니까. 플란츠가 일어났는데도 깨지 않는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를 보던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이 저 정도로 잠에 빠져들 만큼, 한참 동안 이 곳에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말씀하세요. 괜찮습니다.” 또 무슨 일로 왔는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는지는 들어봐야 되지 않겠나 싶어서 하는 말이었다. 한동안 그런 칼리안을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같은 높이에서 칼리안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기사단에 새가 있는 것 같은데.”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기사단에 있다는 소리 아닌가. “와.” 진심어린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체이스와 플란츠 모두를 향한 감탄이었다. “몰랐습니다.” 플란츠가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칼리안은 정말로 몰랐던 사실이다. 과거에는 기사단에까지 세작을 심어두지 않았었다. 그러니 이것은 체이스가 한 일이다. 타국의 왕실 기사단에 세작을 둔다니. 기사단 카렌과 라온에는 르메인의 손이 닿지 못한다. 르메인이 하는 일은 이미 확정된 기사단원에 대한 마지막 보고를 받는 것뿐이니까. 그러니 이것은, 기사단에 한해 여전히 변함 없는 르메인의 무능과 에반의 빈틈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라고도 보아야 할 일이다. 아무튼 칼리안은 에반의 몸통에 세작을 심어 둔 체이스의 대담함에, 그리고 그것을 알아낸 플란츠의 눈치에 감탄한 것이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몰라.” 누구인지 모른다는 소리다. 그럼 새가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묻는 눈이 되자, 플란츠가 작게 접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어느새 주머니에 있던데.” 기사단을 만났을 테니 기사들과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든 이야기를 나눠보든 했을 터였다. 그 사이 누군가 플란츠에게 이 쪽지를 넘겼다는 소리였다. 플란츠 역시 검을 곧잘 다룬다. 그런 플란츠에게 몰래 무언가를 전해 줄 수 있을 정도라면, 만만치 않은 실력자라는 뜻이다. 하기사. 왕궁에 직접 들어 올 세작이니 그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을 테지. 플란츠로부터 쪽지를 받아든 칼리안은, 내용은 확인하지도 않은 채 잠시 눈을 내리떴다. 고민에 가까운 생각을 하기 위해서였다. 세작을 숨기는 것은 브리센에 반하는 것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선택지에 대해서. 잠시 후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브리센 후작에게 전하십시오. 세작이 있다고.” “알려지면.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서 곤란해지실텐데.” 체이스와 세크리티아의 곤란함. 그리고 플란츠의 심장. 어떤 것의 무게가 더 나가는가. “전하시는 것이 낫습니다.” 이것이 칼리안의 답이었고,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숨겨두면, 역으로 쓸 데가 있겠지.” 세작을 그대로 두면 역으로 체이스를 속이는 것에 쓸모가 있을 수도 있으니 굳이 에반에게 알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가짜 명분이겠지만 그렇다 해서 거짓인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반대로 이용하기 위해 세작을 살려두는 것은 브리센에 반하는 행동이라 보기 어려울 테니까. “전서구 노릇이나 하는 새는 무시해도 돼.” 자신의 기사단에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있는 것을 알게 된 카이리스의 왕자가 이런 말을 한다. 사실 새들이 더 알아갈 것도 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기밀은 플란츠가 제 입으로 직접 다 알려줬지 않나. 게다가 플란츠 나름대로 체이스나 칼리안을 배려하려는 것임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때문에 더 이상의 반박 없이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은, 그제야 손에 들린 쪽지를 펼쳤다. - 그날,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더 할 나위 없이 유려한 글씨체. 바로 오늘 아침까지 칼리안이 기를 쓰고 외웠던 자료에 있던 것과 똑같은 글씨체.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주었다 했을 때 이미 예상했지만, 그것은 체이스의 것이었다. 쪽지에는 간단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 믿는 이와 부정하는 이를 만나게 한 것은 주인의 아들입니다. 칼리안은 그 내용을 두 번 읽지도 않았다. 세렌티를 믿는 신관과 세렌티를 부정하는 늑대가 손을 잡도록 힘을 쓴 것은 텐실의 국왕이 아닌 왕세자라는, 이해하기에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말이었으니까. 손에서 작은 불을 일으켜 쪽지를 태우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소파에 살짝 등을 기댔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나른한 목소리가 나왔다. “텐실이라면 계약에 어긋날 일 없지 않나. 내가 알아도.” 이번에도 칼리안은 플란츠의 말을 잘 해석해냈다. 쪽지에 적힌 내용에 대해, 그날 칼리안과 체이스가 마지막으로 나눴던 일에 대해 플란츠가 알게 되더라도 에반과의 계약에 침해되는 것이 없으리라는 소리였다. 그러니 지금 저것은, 텐실과 란델에 대한 일을 알려달라는 말이기도 할 터였다.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절대 말씀 안 드릴 거라고.” “왜.” 란델과 관련된 것은, 미래의 일이니까. “그것도 이미, 말씀 드렸을텐데요.” “그런 낯짝으로 잘도 짖지.” “신경 쓰실 일 아닙니다.” 칼리안의 대답에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재수없는 웃음이다. “내 아우님이······.” 이렇게 운을 뗀 플란츠가 테라스 밖을 잠시 쳐다봤다. 그 시선이 어느 방향을 향한 것인지 본 칼리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내 아우님이 마법사와 싸울 만한 이유가 대체 뭘까.” 발칸의 대원들이 체르밀 궁으로 찾아왔을 때, 칼리안과 앨런이 숲에 갔음을 들은 것이다. “······ 하.” 칼리안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지금 플란츠가 무엇을 입에 담는지 알아서였다. “내 머리가 내 아우님 것보다 나을테니, 꺼내. 그만 짖고.” 플란츠는 지금 칼리안을 협박하는 것이다. 텐실에 대한 조사를 자신에게 맡기라고. 그렇지 않으면 ‘칼리안이 무엇을 준비하려 앨런과 대련하는지’에 대해 더 생각하겠다고. 제 목숨을 걸고 협박하는 망할 형놈이 다시 입을 연다. “도와줄테니까.” 칼리안의 미간이 조금 더 깊이 찌푸려졌다. 자료. 괜히 태웠다. 다시 써야 한다. < 제26장. 어렵지 않은 일(4) > 많이 향긋하고, 조금 달고, 적당히 쓰다. 베르가못의 향이 나는 홍차 잎, 그리고 단맛과 쓴맛이 함께 느껴지는 자몽. 이 둘이 어우러진 케이크의 맛이 그랬다. 많이 향긋하다가 조금 달더니 적당히 썼다. 그 뒤섞임이 어찌보면 란델과 썩 어울리는 것도 같고 또 어찌보면 영 어울리지 않는 것도 같다고, 칼리안은 그런 생각을 했다. 란델은 그만큼 복잡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가구 외에 놓인 것이라고는 오로지 책 뿐인 방은 적막하다 못해 삭막했다. 심해를 담은 눈을 가진 이가 지내는 곳으로 지나치게 잘 어울리는 것 같다가도, 또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막막함을 가진 곳이었다. 그 겉은 장미 정원처럼 화려하며 조금의 어긋남 없이 완벽하지만, 마치 이 방처럼 속에 든 것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 이것 저것 많은 것이 뒤얽혀 있지만 또 한 편으로는 텅텅 빈 사람. 케이크도, 그리고 이 방도, 꼭 란델 같다고.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짙은 붉은 색 커튼 사이로 스민 햇빛이 금빛의 머리카락을 비췄다. “처음이구나.” 향긋하고 달고 쓴 케이크의 맛이 한꺼번에 감도는 입으로 조금 더 쓰고 조금 더 향긋한 홍차를 삼킨 란델이 이렇게 말했다. 란델에게 시간을 내어 달라 먼저 이야기 한 것도 처음이었고, 란델의 방에 찾아온 것도 처음이었고, 이 형제가 마주보고 앉아서 차를 마시는 것도 처음이었다. 게다가 란델과 플란츠는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때문에 플란츠와는 거의 속마음을 읽고 대화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모양새를 만들어내는 칼리안도, 란델이 무엇을 두고 처음이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쉬이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칼리안은 그냥 이렇게 물었다. 그 푸른 눈을 대신해 갈색 같기도 하고 붉은 색 같기도 한 찻물을 쳐다보는 채였다. “나를 경계하지 않는 것이.” 란델은, 이런 대답으로 칼리안이 할 말을 놓치게 만들었다. 지금껏 칼리안을 자신과 같은 눈높이에서 보지 않은 것은 란델이었다. 심지어 1년 전까지는 아예 칼리안을 보고 있지도 않았던 란델이었다. 그런 란델이 이런 말을 한다. 칼리안이 자신을 경계했다고. 그것이 누구 때문인데.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칼리안이 란델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거짓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을 곧은 눈매로 대답했다. “단 한순간도 란델 형님을 경계하지 않았던 적 없었습니다. 지금도요.” 옛 칼리안도, 그리고 지금의 칼리안도. 란델은 항상 경계의 대상이 아니었던가. “그래.” 막냇동생의 솔직한 대답을 들은 란델은 표정을 바꾸거나 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더는 외면하지도 않았다. “얘기 해보려무나.” 칼리안을 마주보던 란델이 이렇게, 자신을 만나자 청해 온 이유를 말할 시간을 내어주었다. 괜스레 입이 써진 칼리안은 자신보다 더 복잡할 것이 분명한 란델의 인성 같은 케이크를 한 입 더 먹었다. 그 맛이 꼭, 처음으로 커피를 접했던 그 때를 생각나게 한다. 향긋하려면 향긋하기만 하고 쓰려면 쓰기만 할 것이지. 무턱대고 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까이 할 수도 없을 것 같은 첫째 형을 향해 칼리안이 물었다. “카이리스입니까, 텐실입니까.” 돌려 말하지 않았다. 란델에게는 그 편이 나았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오는 란델의 눈에 시선을 맞추며 덧붙였다. “가지고자 하시는 자리. 어느 쪽의 왕좌입니까.” 찻잔을 내려놓은 란델이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늘 감춰두고 깊이 내려놓는 것에 익숙한 생각을 겉으로 꺼내려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채근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왜 묻느냐 할 법도 하건만, 란델은 다른 것을 물었다. “네 눈에는 어떤지 궁금하구나. 내가 어느 쪽을 원하는 것으로 보이는지.” “모르겠어서요. 이제와서는 자리를 원하시는 것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왕좌를 원하는 것이 맞기는 한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원한다면 그것이 카이리스의 것인지. 아니라면 텐실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란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지 못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란델이 다른 내용을 더 꺼내놓을 때까지 기다렸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 생각했었다. 조금 더 큰 조각이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을 뿐.” 왕좌를 원한 것은 맞았다는 소리다. 이왕이면 조금 더 큰 카이리스의 왕좌를.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돌려 란델의 텅 빈 방을 둘러봤다. 란델은 무엇을 가질 생각조차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왕좌를 원하는 이유는 결국 한 가지다. “목적으로서의 자리가 아니라, 수단으로서의 자리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겠죠.” 나처럼. 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 왕좌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그래.” “무엇을 위한 수단입니까.” 이 말의 끝에서, 칼리안이 낮은 목소리로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그리고 지난 번에 대답을 듣지 못했던 것을 다시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브리센을, 그리고 전하를 향해 칼날을 드리울 생각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으신지. 이번에는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맹세의 인과는 관련 없는 사실일 테니까. 이번에는 란델이 먼저 자리를 피할 수도 없으니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으로 물었다. 란델의 눈빛이 깊은 곳으로 침잠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란델의 심연을 더 헤집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스스로 꺼내 보여주기를 종용하듯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것이 왜 궁금해졌느냐.” 란델은 그제야 이유를 물었다. 자신에 대해 왜 그렇게 알고자 하는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왜 알려 하는지. 이미 자신의 손에서 벗어난 것으로도 모자라 왜 반대로 뒤흔들어 놓으려 하는지. 칼리안은 어느새 날카롭게 변한 눈빛을 채 지우려 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란델 형님을 마주봐야 할지. 등을 보여드려야 할지. 결정해야 할 것 같아서요.” 란델과 마주 보고 검을 드리울지, 란델을 등 뒤에 놓고 그 앞을 막아서야 할지. 그것을 결정해야 했다. 생각지도 못한 것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대답, 해주세요. 란델 형님.” * * * 그날 오전, 란델을 만나기 전. 칼리안은 하룻밤 하고도 반나절을 잠으로 보낸 뒤였다. 텅텅 비어있던 오러가 어느 정도 돌아옴에 따라 피로감도 함께 사라졌다. 운동을 조금 많이 한 그 나이대 소년이 가질 수 있을 정도의 것으로 내려갔던 체력과 근력도 다시 소드마스터의 검을 쓸 수 있도록 회복되었다. 사실 회복이라기보다는 다시 강화되었다 하는 것이 맞겠지만 어쨌거나 평상시의 상태를 어느정도 되찾았다. 오러를 담아두기 전과 후의 신체 상태가 너무 극명하게 달라지는 것을 여실히 체감하게 되어, 두 번 다시는 오러를 한계까지 소비하지 않겠다 다짐을 한 채였다. 그렇게, 익숙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칼리안은 곧바로 앨런을 찾아갔다. 앨런이 분명 헤이시아 궁에서 발견된 것이 무엇인지 확인을 하면 알려주겠다 하였으나 도무지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어서였다. “스승님!” 빌헬름 관에 들어가려던 칼리안이, 때마침 밖으로 나오고 있던 앨런과 마주쳤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을 부르는 칼리안을 반겨했을 앨런이 조금 타박하는 말부터 꺼냈다. “더 쉬고 오셔도 될 것을 무엇하러 벌써 오셨습니까.” 일어나자마자 이 곳으로 온 것임을 안 까닭이다. 칼리안이 앨런을 보며 생글거리는 얼굴을 했다. “궁금해서요.” “아무튼 왕자님 고집이 제 입보다 질기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이제 저 얼굴이 자신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지어보이는 것임을 알면서도, 절대 이기지 못할 앨런이 짧은 한숨을 탁 내뱉었다. “함께 가시지요. 안 그래도 그 쪽으로 가는 길이니.” 그렇게 사제가 나란히 빌헬름관에서 벗어나 헤이시아 궁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앨런이 짧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전하께는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궁의 지하가 있던 것을 아셨는지도 확인할 겸.” 당연한 일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왕비의 거처에서 생긴 일이니 당연히 르메인이 알고 있어야 했다. 때문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여보이며 물었다. “전하께서는 무어라 하셨습니까.” “헤이시아 궁에 지하가 있었음을 모르셨다 합니다. 나온 물건에 대해서는 일단 확인된 결과를 보신 뒤 결정하겠다 하셨지요.” 르메인조차 몰랐던 공간에서 물건이 나왔다는 말이다. “그리고 며칠 전에 세이렌 경을 만나고 왔을 때,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얇은 막이 둘러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칼리안이 다소 긴장한 얼굴을 했다. 마법사 협회장 에우리아와 앨런이 만났고, 그 일로 사일런트를 발현하여 이야기를 꺼낼 정도라면, 중요한 일일 테니 말이다. “왕자님께서 가지신 돌, 어쩌면 인위적인 신물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칼리안의 눈이 고요하게 잠겨들었다. “인위적인 신물이라 하면, 만들어진 신물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것이 가능한지, 그에 대한 결과가 그 돌이 맞는지 확인된 것은 없습니다만, 유사한 내용을 세이렌 경이 찾았습니다. 조금 더 알아보려 하는 것을 제가 막았습니다.”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칼리안이 잠시 눈을 내리 떴다. 빌헬름 관의 구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헤이시아 궁에 도달할 때까지 칼리안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앨런은 그런 칼리안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았다. “······ 신물을 인간이 만든다니. 그것은 이미 신물이라는 범위를 벗어난 것이 아닙니까.” 신의 축복을 받은 물건이라는 뜻을 가진 것이 신물인데, 그것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부터 이미 모순이 아닌가. 질문인지 아닌지 모호한 칼리안의 말에 고개만 끄덕여보인 앨런이 에우리아가 알아낸 내용을 칼리안에게 전했다. 사실 전할 것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추측일 뿐 정확히 확인된 내용은 없었으니까. 고요한 눈으로 앨런의 말을 모두 들은 칼리안이,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 외에 알아낸 것은 더 없었습니까.” “돌에 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새로 발견된 것은 일단 도착해서 확인해 보시지요. 둘이 연관이 있을지 없을지는, 조금 더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한 앨런의 목소리에 깊은 근심이 어려 있었다. 대체 무엇이 발견됐기에 저러는지, 하는 마음이 된 칼리안이 걷는 속도를 높였다. 헤이시아 궁의 입구는 여섯 명의 마법사들이 막고 서 있었다. 창단식 이후 처음으로 마주한 진지한 얼굴의 마법사들을 지나친 칼리안에게 마법사 니들렌이 다가와 예를 보였다. 술집에서 사고를 낸 뒤 [우리는 왜 가게를 부쉈나?] 라는 제목의 반성문을 냈던, 아르센 다음으로 무력이 강한 마법사임을 알아본 칼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움직여 예를 받았다. “이 쪽으로 오십시오, 왕자님.” 그렇게 말한 니들렌이, 십여 명의 마법사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곳으로 칼리안을 안내했다. 그 곳에는 어디론가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헤이시아 궁이 사라짐으로 인해 드러나게 된, 지하 어딘가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안쪽에서는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제가 앞서 갈테니 뒤따라 오시지요.” 이렇게 말한 앨런이, 칼리안의 주변에 붉은 빛이 감도는 실드를 둘러줬다. 혹시 모를 위험으로부터 칼리안을 보호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과보호임을 말하는 대신 칼리안은 얌전히 앨런의 뒤를 따랐다. 앨런은 이미 여러차례 계단 아래를 내려가보았던 듯, 옅은 불빛으로만 밝혀져 있는 다소 어두운 계단을 익숙하게 내려갔다. 칼리안도 어둠 속의 물체를 또렷이 구분할 정도의 시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별 어려움 없이 앨런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 타박, 타박. 둥글게 생긴 계단이었으므로 어느 정도를 내려왔는지 가늠이 어려웠다. 앨런도 칼리안도 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기만 했다. 아마도 서너 층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은 깊이까지 내려왔을 때, 석문 하나가 눈에 보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실소하며 입을 열었다. “시스파니안입니까.” 석문에는 검은 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위에 오망성과 몇 가지 문양을 덧그려 넣는다면, 그것은 곧 카이리스의 문장이 될 테지만 벽에는 그저 새카만 몸과 날개, 긴 꼬리, 그리고 붉은 눈을 지닌 드래곤을 형상화한 그림만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맞습니다. 이 곳에 오는 입구 자체가 헤이시아 궁으로 막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비밀 통로가 있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확인이 어렵습니다.” 돌로 된 벽을 타고 조금 울리는 앨런의 대답에 칼리안이 설핏 웃었다. 어여쁘신 제자님이 궁을 날려먹었으니 통로가 어디로 연결됐었는지 확인 할 방법이 있겠느냐는 가시가 담긴 말이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석문을 살펴봤다. 분명 500년은 족히 지난 공간일 터였다. 그러나 이 곳에 내려오는 원형의 돌계단도, 석벽도, 그리고 석문에 그려진 시스파니안의 문양까지도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정말로, 시스파니안의 힘이 닿은 곳이라는 소리였다. “보물창고는 아니니 일확천금을 기대하지는 마시지요.” 석문에 손을 가져가며,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이 긴장한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보물창고라니. 만약 그녀가 그런 것을 모아두었다면, 그 보물들은 이 왕궁의 지하가 아니라 지그프리드 저택 뒤에 있는 바위산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지그프리드의 방패가 지키는 그 곳보다 안전한 장소는 이 대륙에 없을 테니까. “실망스럽네요.” 그래도 칼리안은 이렇게, 빈 말로 앨런의 농담에 맞장구를 쳤다. 긴장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였다. 앨런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문을 열었다. - 그르릉 묵직해 보이는 석문이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며 석벽 안으로 사라졌다. 별다른 잠금장치조차 없었던 것처럼, 그냥 열렸다. 별다른 잠금장치조차 없는 문. 보물창고가 아니라는 앨런의 말은 정말이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밝아진 사위에 익숙해지자, 널찍한 돔 형태의 공간이 보여졌다. 석벽에는 정밀한 조각이 있었다. 무언가를 그려놓은 것 같았으나 칼리안은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니, 관심을 둘 수 없었다 해야 맞을 터였다. 둥근 공간의 한 가운데, 이 곳을 밝히고 있는 물건 때문이었다. “직접 모시고 온 것은, 왕자님께서는 아마도 알아보실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이렇게 말해오는 앨런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 들으며, 칼리안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원형의 고리. 알 수 없는 문자가 잔뜩 새겨져 있는, 금색의 고리 한 개. 칼리안의 입에서 잠긴 목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알아보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 금색의 고리가 몇 겹인가 겹쳐져 있었다. 여전히 기억난다. 잊을 수가 없다. 그러니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몇 겹으로 겹쳐져 서로 다르게 회전하는 금색의 고리 안에, 커다란 모래시계가 있었다. 그것을 좇아 1년을 보냈으니, 어찌 잊겠는가. 사라졌어야 할 것의 잔재를 눈 앞에 둔 칼리안의 손 끝이 차갑게 식었다. “······ 시간의 축.” 그것은 바로, 시간의 축의 조각난 일부였다. < 제26장. 어렵지 않은 일(5) > 그냥 사라졌어야지. 차라리 그랬어야지. 사라져서 두 번 다시 눈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지.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갑자기. ······ 이렇게 갑자기. 대체 왜! * * * 마치 베른처럼.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을 수 없는 시간과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었다. 조각나 온전하지도 않은 모습을 한 채로. 그래. 마치 베른처럼.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나았다. 모르는 것이 백배 천배는 나았다. 시간의 축이 왜 움직였는지, 누가 무엇을 위해 움직였는지를 알고자 했다. 그것을 좇았다. 결코 시간의 축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않았다. - 단 한 번, 시간을 되돌린다 하더구나. 체이스의 말이었다. 오래 된, 아주 오래 된 책에서 찾아낸 딱 한 줄. 그것이 시간의 축에 대한 유일한 정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것을 당연한 사실로만 여겼다. 그 한 번을 썼으니 사라진 것이라고, 그렇게 여겼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보고 말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단어를 끌어모아서 입 밖에 낸다 해도 지금 칼리안의 심정을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허공에 홀로 둥둥 떠 있는 금색의 고리를 보던 칼리안의 입이 작게 열렸다. “하······.”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확실한 말을 담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숨을 내쉬는 것을 보니 그래도 다행히 생을 포기할 만큼 끔찍하지는 않은 모양이라, 한숨의 끝에 헛웃음이 함께 나왔다. 이 곳에 들어서기 전, 앨런이 평소 잘 하지도 않는 농담까지 해가며 칼리안의 기분을 풀어주려 한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들어와서 저것을 보는 순간 칼리안이 어찌 될지 그것을 걱정했을 것이다. 놀라지 말아라, 동요하지 말아라, 차마 그런 언질조차 주지 못해서 농담이나 한 마디 건넸을 터였다. “재밌네요.” 그런 앨런의 마음을 가늠한 칼리안이 조용히 말했다. “제 형님께서 밥만 좀 제대로 처드셨어도 저딴 것을 이렇게 갑자기 볼 일은 없었을텐데.” 헛웃음이라도 나온 김에, 칼리안도 농담을 했다. 말은 좀 험했지만 칼리안 나름의 농담이었다. 칼리안의 뒷통수만 보고 있을 앨런을 향해,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축의 파편이 다시 발견된 것과는 일말의 연관도 없이 무고한 이를 입에 담았다. “다행입니다. 그나마 일부 뿐이라서, 일부가 여기에 있어서.”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일부분이라서 다행이라고. “하지 말아야 할 기대를 안 해도 되고, 같은 일이 반복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것은 정말 다행입니다.” 일부 뿐이니 하지 말아야 할 기대를 하지 않아도 되어 얼마나 다행이냐고. 일부가 여기에 있으니 나머지가 어디 있든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는 않을 것이라서 그 역시 얼마나 다행이냐고. 결국 칼리안 스스로를 위해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도 없는데도, 이렇게. 베른의 생이 아예 지워져 잊힌 것을 알게 된 그 날처럼 다행이라는 말을 했다. “······ 그리 삼키지 마시지요. 왕자님 속이 다 짓무를 터이니.” 실리케의 독차를 꾸역꾸역 삼키다 속이 다 녹았던 칼리안이다. 다른 이들 앞에서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그걸 다 삼켰다. 멀쩡한 목소리로 다행이라 말하고 있다지만 이번이라고 다르겠는가. 안 그래도 헤진 속에 또 독이 들어갔는데. 칼리안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앨런은 당장 그 옆으로 가 칼리안의 얼굴이 어떤지 확인하고픈 마음을 애써 내리눌렀다. 칼리안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보냈다. 앨런은 아무 말 없이 칼리안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혹여 무너질까, 그것이 걱정되어. “괜찮습니다. 심장이 튼튼해서.” 한참이 지나 비로소 칼리안으로부터 대답이 들려왔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죽을만큼 끔찍한 기분은 아니었음을 알았으니 됐다고 여겼다. 이것을 보았다 하여 어찌 할 방도가 없음을 이해해냈다. “이것이 있다 해서 이제와 달라질 것이 있겠습니까.” 만에 하나 시간의 축을 온전히 손에 넣어 시간을 다시 움직일 수 있다 해도 이미 이렇게나 어긋난 것을 또 어떻게 뒤바꾼단 말인가. 베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또 잊혀지면 어찌하려고. 칼리안이 아닌 다른 사람이 또 이름을 잃으면 어찌하려고. 그러니 그저 눈을 감을 밖에. “······ 어떻게 처리하실 요량이십니까.” 칼리안의 괜찮다는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앨런은 이렇게만 물었다. 차라리 다른 쪽으로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이 낫겠지 싶어서였다. “저 하나로 족합니다. 더는 안돼요.” 칼리안이 이렇게 대답인 듯 아닌 듯한 말을 하며 금빛 고리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일단은 그것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본 뒤 파괴하려는 생각이었다. 시간의 축이 신물이든 아니든,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저것에 그 어떤 힘이 담겨있든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 있든 상관없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끔찍한 일은 두 번 다시 없어야 했다.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 탁! 그러나 그 발은 채 세 걸음을 떼지 못하고 멈춰섰다. 고리의 바로 앞에서 발이 멈춘 까닭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에 막혀 더 다가가지 못했다 해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벽이 시간의 축과 칼리안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무언가가 축의 파편을 보호하고 있었다. - 우웅······. 그것을 안 칼리안은 고민 없이 검을 꺼내들었다. 검붉은 오러가 가득 담긴 검이 짙은 공명음을 내자, 칼리안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앨런이 칼리안에게 둘러주었던 자신의 보호막을 거둬들였다. 그와 함께 칼리안이 검을 휘둘렀다. - 카앙! 날카로운 소리가 시스파니안의 공간을 메웠다. 참담한 빛을 뚝뚝 떨궈내는 듯한 칼리안의 검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허공에서 멈췄다. 다시 검을 휘둘러 보았으나 모든 공격이 벽에 막혔다. 칼리안이 하는 냥을 잠시 두고 보던 앨런이 조용히 말했다. “검은 그만 거두시지요. 저도 들어가보지 못하였으니.” 앨런마저 저 벽 너머로 가보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입 속을 짓씹었다. 괜히 보안장치가 없던 것이 아니었다. 접근을 못하는데, 이것을 누가 건드리겠나. 결국 칼리안은 검을 이루던 마나와 오러를 흩어버렸다. 칼리안을 닮은 검붉은 빛무리가 이리저리 비산하다 사라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시스파니안······.” 앨런도 어찌하지 못하는 힘으로 만들어진 장벽. 굳이 이 곳에 그런 장치를 해둘 만한 이는 하나 뿐이다. 이 공간의 주인임이 분명한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 말이다. “시스파니안이 한 일이겠네요.” 그녀가 아니라면 세렌티겠지. 다만 칼리안은 세렌티에 대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이렇게만 말했다. 신의 개입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입에 담을 만큼 생각이 짧지는 않았으니까. “스승님. 세크리티아에서 시간의 축을 보셨었죠.” “네. 한 번 보았습니다.” 체이스가 시간의 축에 대해 알아보려 했을 때, 세크리티아로 앨런을 불렀다. 그때 앨런도 이것을 보았다. “그럼 그 때는 세크리티아에 멀쩡히 잘 있었다가 제가 눈을 떴을 때 사라졌고,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곳에 일부가 들어왔다는 말이겠네요.” 칼리안은 고개를 그대로 둔 채 시선을 내렸다. 빠른 생각과 말이 동시에 이어졌다. “직접적이든 아니든 시스파니안이 연관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축의 파편은 시스파니안이 직접 숨긴 것 같으니까요. 저를 만나기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지그프리드령에 있는 시스파니안의 빈 둥지는 알려진 곳이다. 이 곳은 아무도 모르는 곳이다. 그녀가 만약 무언가를 숨기고자 했다면, 그런데 ‘자신의 이공간’이 아닌 다른 곳에 숨겨야 하는 사정이라도 있었다 가정하면, 이 장소가 가장 안전하다 여겼을 수 있다. “그러다 궁이 부서지는 바람에 드러났고요.” 아르센의 동상을 세우는 것까지는 허락을 해줘야 하나. 문득 든 이런 생각에 속 없는 웃음을 흘린 칼리안이 주머니에서 조약돌을 꺼냈다. 앨런이 ‘인위적인 신물’일 수 있다 말한 바로 그 검은 돌이었다. 축의 파편과 돌의 공통점, 바로 칼리안도 읽지 못하는 문자였다. 베른이었을 때 시간의 축에 새겨진 문자까지는 눈여겨 본 적 없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벽 안으로 들어가 가까이 살펴 볼 수가 없으니 이 곳에서라도 글자를 비교해보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확인을 하였습니다.” 칼리안이 생각하는 것을 눈치챈 앨런이 말했다. 앨런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때문에 에우리아가 베껴간 글자를 가지고 이미 비교를 해 본 뒤였다. 그래서 이 곳에 오는 길에 돌에 대한 이야기도 꺼낸 것이었다. “같은 글자는 없었습니다. 다만 비슷한 형식의 문자인 것은 확인을 하였습니다.” 글자의 모양이나 구조가 시간의 축에 새겨져 있던 것과 유사하다는 말이었다. 잠시 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한 걸음 쯤 뒤로 물러섰다. 앨런이 그것을 대충 확인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잘 알았으니까. “같은 문자의 다른 글자라는 소리겠네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다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칼리안의 말을 기다리던 앨런이 주변을 둘러봤다. 양신전쟁을 승리로 이끈 8명의 이야기가 조각되어 있는 벽이었다. 그들 중 ‘세크리티아 대왕’의 얼굴만은 채워져 있지 않았다. 이름 없는 그녀의 얼굴은 오로지 윤곽 뿐. 눈 코 입 어떤 것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것을 떠올린 앨런이 쓰게 웃었다. 베른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겠지만, 그녀 역시 얼굴과 이름이 잊힌 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곧 칼리안의 목소리가 앨런을 상념으로부터 꺼내놓았다. “아무튼 이제는 조금 더 서둘러서 움직여야겠네요. 발견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발견해버렸으니. 직접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시스파니안을 만나보실 요량이십니까.” 칼리안이 이 일에 대해 물어볼 수 있을 만한 이를 떠올린 앨런이 이렇게 물었고, 칼리안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자리에서 축의 파편을 없앨 수는 없는 것 같고······. 아무래도 만나보아야 하겠습니다.” ‘과거’에서 쓰임새를 다하고 ‘현재’에서 사라진 시간의 축이 왜 일부분만 남아서 이 곳에 있는지. 나머지는 제대로 사라진 것이 맞는지. 그 이유를 알 만한 이들 중 칼리안이 만나볼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시스파니안 뿐이었다. 또 대답하지 못할 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만나는 봐야했다. 생명과 죽음을 상징하는 주신 세렌티를 직접 만나겠다며 세뉴강을 건너가 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곧바로 가실 겁니까.” 그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일 마무리 한 뒤에요. 아무리 이동 마법진이 있다지만,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더 급하니까요. 자리 비운 사이에 손 많이 가는 두 놈이 뭔 일을 또 저지를지 믿을 수가 없어서.” ‘손 많이 가는 두 놈’이 누굴 이야기하는지 알아들은 앨런이 슬쩍 웃었다. 어차피 시스파니안도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찾아오라 했지 않나. 축의 파편이 이 곳에서 발견된 것과 칼리안이 해야 할 준비는 서로 완전히 다른 문제였으니까. “일단 란델 형님부터 다시 만나봐야겠네요.” 시간의 축에 있었던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글자가 새겨진 검은 조약돌. 그리고 조약돌이 반응했던, 모종의 조직에서 사용하던 힘. 그들과 란델의 연관성. 손 많이 가는 두 놈 중 한 놈을 만날 결심을 굳히며,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 * * “대답, 해주세요. 란델 형님.” 내가 너를 적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아니면 너 역시 끌어안고 가야 하는지. 그것을 직접 알려달라고. 맹세의 인에 숨겨진 것이 얼마나 있는지는 지금 당장 알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일단 그것 하나만 알려달라고. 그리 말하고 있었다. 칼리안을 잠시 바라보던 란델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너는 브리센과 전하를 계속 함께 두고 있구나.” 브리센과 르메인을 같은 선상에 놓고 있음을 안 것이다. 르메인은 물론이거니와, 만약 란델이 브리센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그것을 막겠다는 의도가 다분하지 않은가. 칼리안은 숨길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과 변경백을 브리센과 같은 위치에 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가문 전체를 적으로 두려던 생각을 접었다는 말이었다. 여전히 어디엔가 감금되어 있을 레넌까지, 떠올리는 것조차 불쾌한 그 셋만 적으로 두고 가문은 살려놓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것이 네 자만인지 자신인지 모르겠구나.” 브리센이라는 세력은 유지하면서 머리를 모조리 없애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렇게 연명시킨 브리센을 제대로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성 낮은 일인지에 대한 말인 것 같았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요. 아마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찻잔의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 믿는 구석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생기면, 그때 가서 쳐내면 되니까요. 어려울 것 있겠습니까.” 브리센의 세력이 필요하지만 귀하지는 않다. 플란츠의 손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놈들이 생기면, 없애면 된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가지치기. 이미 너무 많이 해 본 일이 아니던가. “네가 믿고 있는 그 아이를 의심하지는 않는구나.” 믿는 구석이 플란츠임을 이미 알고 하는 말이었고, 칼리안이 잠깐 웃는 소리를 냈다. 란델의 말이 맞다. 애증해 마지않는 삶은 완두콩. 의심한 적 없었다. 베른은 제 사람을 잘 만들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울타리에 들어온 놈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뒷통수, 당연히 맞아봤다.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아픈지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사람은 의심하지 않았다. “나를 더 믿으니까.” 멍청하게 사람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배신 따위로 추락할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감일 수도 있고 자만심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지금의 칼리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플란츠와 손을 잡기로 했을 그 때부터, 증오할지언정 의심은 안 했었다. “그래. 알겠다.” 란델이 이렇게 대답했고, 칼리안이 란델을 다시 응시했다. 이제는 대답을 해달라는 의미였다. 잠시 칼리안을 보던 란델이 입을 열었다. “다른 것이다. 전하나 브리센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란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말씀 못해주십니까. 계약 때문에?” “그래.” 란델이 목표하는 것은 맹세의 인에 가로막혀 말하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일단 이 정도면 족하다. 일단은. 결정을 내린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르메인 생명이 단축되지 않도록 지키는 김에 시간의 축을 파괴하기 전까지 남들 손에 또 넘어가지 않도록 지키고. 풀 먹는 놈 심장 지키는 김에 첫째 형님 것도 좀 지키고. 다 지키면 되겠네, 뭐. 하는 김에 겸사겸사 하면 될 일이니 어려울 것도 없겠네. “알겠습니다.” 식어버린 홍차에서는 더 이상 베르가못의 향이 올라오지 않았다. 올라오지 않는 것인지, 그 향은 여전한데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이제는 쓴 향만 나고 쓴 맛이 났다. “란델 형님께는 늘 등을 보이게 되는군요.” 지금으로서 란델과 마주보고 나눌 수 있는 것이 친목은 아니었다. 만약 마주본다면 검을 겨눌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이번에는 등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라는 사소한 차이가 있지만, 결국 칼리안이 란델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저 등 뿐이었다. 그것이 지금의 최선이다. 칼리안의 붉은 눈이 란델의 심연을 응시했다. “더 이상 제 그늘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숨막히게 죄여오는 그 짙푸른 바다 빛 눈을 향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손을 내밀었다. “죽습니다.” < 제26장. 어렵지 않은 일(6) > 봄의 바람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 히나의 표현에 따르면 ‘햇빛 가루가 바람에 담긴’ 느낌을 주는 것이다. 겨울처럼 매섭지도, 여름처럼 숨이 막혀오지도, 가을처럼 쓸쓸하지도 않은 봄의 바람은, 정말이지 그 자체로 이미 훌륭했다. 바람을 타고 실려오는 장미향이 테라스까지 넘어온다. - 내가 한 말을 되돌려 받는 것 같구나. 언젠가 손 위에서 벗어나지 말라 했던 자신의 말을 떠올린 란델이 이렇게 말했다. 목적은 완전히 달랐지만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이른 것은 맞았으니, 칼리안은 그에 대해 달리 부정하지 않았다. - 그리 하마. 그리고 란델은 이렇게, 칼리안이 내민 손을 붙들었다. 덕분에 언제나 마음 한 구석을 묵직하게 내리누르던 저 장미의 향기가 이제야 조금쯤 가볍게 다가왔다. 그 조금의 차이와 함께 찾아온 잠시간의 여유에, 칼리안이 꽤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향기 좋다. 라임 향도 좋고 장미 향도 좋고.” 칼리안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뒤 얀이 가져온 차에서도 장미 향이 났다. 동그랗고 얇게 자른 연두색의 라임 조각과 함께 들어있는 말린 장미 꽃잎에서 나는 향이었다. “어제 많이 피곤하셨던 것 같아서요. 그리고 장미는 지난번에 주셨던 것을 히나가 차로 만들었어요.” 딱 한 송이. 예전에 장미 정원에서 란델의 시선을 돌려놓느라 잘라냈던 장미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뒤 곧바로 체이스를 찾아가느라 얀에게 맡겼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차를 만들어 온 모양이었다. 피로한 것을 조금이나마 달래보라며 함께 넣은 라임도 마음에 들었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정원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앉아서, 바람결에 함께 불어오는 장미 향을 맡으며 라임과 장미가 든 차를 마시다니. 란델을 만나고 오지 않았더라면 새콤하고 향긋한 이 차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을텐데, 지금은 별 다른 생각 없이 그저 여유롭다. 잠시뿐인 여유겠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고마워. 챙겨줘서.” 그래서 이렇게 얀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챙겨준 것이 장미꽃인지, 라임인지, 혹은 칼리안인지 알쏭달쏭한 말이었지만 얀은 그냥 좋아하기만 했다. - 똑똑. 다른 대화 없이 느긋하게 차 한 잔을 비워 낼 때 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작은 소리. 노크를 하기에 앞서 주저하는 것인지, 거의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한 두 번 두드린 뒤 조금 더 세게 두드려 만들어내는 소리. 늘 그렇게 노크를 했다. “들어와.” 그래서 칼리안은, 얀에게 그러하듯 이번에도 누구인지 묻지 않고 말했다. 물어보아도, 들려 올 대답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곧 아주 작은 발소리와 함께 히나가 테라스로 왔다. 그런 히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말했다. “잘 어울리네.” 히나는 하얀 로브를 입고 있었다. 장식용 금단추가 달려 있고 왼쪽 가슴에는 카이리스의 문장을, 등에는 히나를 위해 새로 만든 자주색의 치유사 표식을 수놓았다. 로브자락의 끝단과 소매 끝으로 갈수록 더 촘촘해지고 화려해지는 금색의 자수, 그리고 로브가 벌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키기 위한 서로 다른 길이의 금색 체인 세 줄 때문에 그 외양이 상당히 화려했다. 바로, 발칸의 제복이었다. - 아직, 어색한 것 같아요. 칼리안의 말에 히나가 이렇게 말했다. 키리에와 히나를 구해냈던 날, 칼리안이 둘러준 것을 입은 뒤로 처음 입어보는 제대로 된 로브였다.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 다음으로 히나가 보물처럼 아끼는 것이 바로 그 날에 입었던 검은 로브였다. “가 보면 바로 실감날거야.” 이 카이리스에 정신 나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게 될 테고. “지내기 전에 실망부터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워낙 이상한 놈들만 모여 있어서.” 돌은 놈들. 왕궁으로 향하는 길에 그나마 남아있던 제대로 된 사고 체계를 미련 없이 탈탈 털어버리고 온 것 같은 그런 놈들이 아닌가. - 전부, 괜찮은,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해요. 히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칼리안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괜찮을 거야.” 놈들이 너한테 안 괜찮게 굴면, 나도 놈들한테 안 괜찮게 굴 거라서. 칼리안이 속으로 삼킨 말이 무엇인지 모를 히나가 티 없는 맑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 웃음, 그리고 향긋한 차 한 잔 덕에 휴식을 마치고 다시 움직일 기운을 낸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칼리안은 히나와 함께 빌헬름 관에 갈 참이었다. 그래야 히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써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가자. 데려다 줄게.” 칼리안이 가볍게 발을 옮겼다. 히나를 데려다 준 뒤에 허전해진 손에 다시 쥘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 * * 타닥, 타닥, 하는 장작불 소리는 언제나 평화롭다. 죽은 것을 태우며 나는 그 소리가 평화롭다 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물었던 스승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때문에 아르센의 얼굴에는 잠시 고요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것을 본 에우리아가 물었다. “꽤 괜찮지?” 왕궁을 떠나온지 이제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길을 헤맸다. 멀쩡한 왕도에서 정확히 하루 만에 길을 헤맸다. 갈래길에서 잘못된 쪽으로 향한 탓에 되돌아오다 하루가 다 갔다. 그 덕에,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가 있는 도시를 찾지 못해서 결국 야영을 결정했다. 어차피 아무 곳에나 대충 앉아서 자는 것이 일인 마법사들이었으니 그것이 야외라 해서 특별히 불편할 것은 없었다. 그래서 에우리아는 신이 났고, 아르센은 별 생각이 안 났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는 말이다. 해가 기울기 전에 밥이나 먹고 대충 자고 일찍 출발하자는 것은 에우리아의 의견이었다. 아르센은 역시 별 생각이 없었으므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에우리아의 응원을 받으며 야생 닭 한 마리를 잡아왔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모닥불 위에 둥둥 뜬 채 익어가는 닭고기의 노릇노릇한 냄새를 확인하는 에우리아를 향해, 아르센이 적당히 대답했다. 근 10년만에 야영이라는 것을 해 보는 에우리아는, 마법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요리에 굳이 모닥불을 피웠다. 다른 이유 없이 그냥, 야영에는 모닥불이 제격이지 않느냐는 이유 때문이다. 숲 속으로 퍼져나가는 냄새나 조금 뒤 어둠이 내렸을 때 이 모닥불이 주변의 눈에 띌 것이라는 걱정은 애초부터 하지도 않았다. 수도에서 고작 하루 거리의 숲에 도적이 있을 리도 만무했고, 만약 그런 무리를 만나더라도 특별히 문제 될 것이 없어서였다. 주섬주섬 자신의 공간을 열어 찻잎을 꺼낸 에우리아가, 두 잔의 차를 우려내어 아르센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받아든 아르센의 하얀 로브, 그리고 그 가슴에 새겨진 왕실의 문장을 보며 에우리아가 말했다. “누구 밑에 있을 놈이 아닌데. 의외였어.” “저는 협회장님께서 정보원 노릇 하는 게 더 의외였습니다.” “생각보다 재밌더라. 정보원.” 그래서 나중에 시간 나면 정말로 만들어보려고. 정보조직. 이렇게 말한 에우리아가 혼자 웃음 소리를 냈다. 둘 다 의외의 짓을 하고 있는 것이 똑같이 칼리안 때문이었음을 생각한 것이다. “협회장님께서는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에우리아의 웃음소리가 끝나길 기다리던 아르센이 물었다. “이동 마법진 살펴보러.” “왕자님께서는 모르셨던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있었습니다만, 그레이스 경이 이미 가 있지 않습니까.” 아르센이 말하는 ‘왕자’란 늘 칼리안이었다. 에우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긴 한데. 근처에서 다른 알아 볼 것도 좀 있고.” 자세한 설명을 꺼려하는 것 같아서, 아르센은 그냥 고개만 몇 번 주억거렸다. 이번에는 에우리아의 질문이 아르센을 향했다. “헤이시아, 왕자님이 시키신거지.” 헤이시아 궁을 폭발시킨 주동자를 묻는 말이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딱히 그것 말고는 할 말이 없어서 꺼내든 참이었다. 에우리아의 질문에, 아르센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실 만한 분이 또 있겠습니까.” “마나실 백작님이 한 소리 하셨겠네.” “못 하십니다.” 앨런이 칼리안을 어찌 대하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아르센일 터였다. 그제야 앨런의 무한한 제자 사랑을 상기한 에우리아가 ‘하긴 그렇겠구나’ 하는 말을 하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보니 술집 사고는 어떻게 잘 넘어갔나보네? 왕자님 성격에 몇 놈 앓아누울 줄 알았더니.” 아르센의 시선이 물끄러미 에우리아를 향했다. 발칸 내에서는 꽤 떠들썩했지만 칼리안의 ‘성의 가득한 배상금’ 덕에 바깥에는 별 소문이 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에우리아가, 남의 일에 관심 많은 귀족들조차 모르는 일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냥 질문입니까 정보 수집입니까.” 아무리 에우리아가 칼리안의 편에 서 있다지만, 아르센은 그리 쉽게 사람을 믿지 않았다. 게다가 칼리안에게는 마법진을 살펴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수도를 벗어나 있으니, 혹시라도 에우리아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어 꺼낸 말이었다. “······ 꼬맹이 다 컸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말에 이런 대답이 돌아오자, 에우리아가 곱게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제복 입더니 겁대가리 내려놓고 다니고.” 아, 잊고 있었다. 순식간에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에우리아의 피어에 움찔한 아르센이 얼른 대답했다. “찾아왔습니다, 겁대가리.” 어디 발칸의 마법사들만 돌았겠는가. 마법사들은 다 돌았다. 그런 마법사들을 5년 넘게 무탈히 잘 이끌고 있는 유능하신 분을 앞에 놓고 의심 따위를 했다니. 내가 진짜 돌았었나보다, 하면서. 그런데 에우리아의 피어가 사라지지 않았다. 말 실수에 너무 화를 내는 것 아니냐고 물으려던 아르센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본 에우리아가 다시 말했다. “크긴 컸네, 꼬맹이.” 그리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진 것이 분명한 누군가의 움직임이 에우리아의 사위에 걸려든 것이다. 그것을 늦게나마 눈치 챈 아르센을 칭찬하는 말이었다. 아르센이 손에 든 차를 홀짝 마셨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조사하시는 일이 위험한 일입니까. 꽤 수가 많은데요.” 에우리아는 보라색 머리를 느슨하게 묶고 있던 끈을 풀어 조금 더 단단히 묶으며 말했다. “어, 좀.” 그 역시,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다. 아르센이 툴툴거렸다. “위험할 것을 알면서 같이 가자 하셨습니까.” “그래도 싸울 줄은 알잖아, 너도.” 발칸의 부군단장을 ‘싸울 줄은 아는 꼬맹이’ 정도로 평가한 에우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것을 보던 아르센이 씩 웃으며 함께 일어났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목도하게 되었다. 얼음 속성의 5서클 마스터 아르센을 싸움 좀 하는 꼬맹이로 취급하는 마법사. 그럴 능력이 충분한 몇 안되는 마법사의 마법을. - 파직, 파지직!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하는 하늘, 저무는 태양을 등지고 선 마법사의 손에 옅은 보랏빛의 스파크가 일었다. 발 밑에서는 물의 힘을 담은 푸른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중 속성. 물과 전기를 모두 다루는 5서클 마스터 마법사. 그것이 에우리아 세이렌이었다. * * * 국왕 르메인의 집무공간인 아르피아 궁. 국왕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머무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필연적으로 외부인의 방문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런 아르피아 궁의 1층에는 그 어떤 외부인의 방문도 허용되지 않는, 오로지 왕족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역대 왕가의 초상화 원본이 전부 전시되어 있는 곳. 르메인의 집무실이 있는 층에 걸려있는 국왕들의 초상화는 전부 이 곳에 있는 것의 사본이었다. ‘기억의 전당.’ 있는 것은 알았지만 피했던 곳이다. 예전의 칼리안 역시 단 한 번도 그 곳을 찾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은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이 공간에 발을 들인 참이었다. 이 곳에 오기 전, 히나를 빌헬름관에 데려다주고 얀을 함께 두고 왔다. 아직은 원활한 소통이 가능할 만큼 수화를 배우지 못했으므로 당분간은 그리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둔 뒤 혼자 이 곳을 찾아왔다. 왕족이 아닌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할 신성한 곳이었으니, 호위기사들은 문 밖에 둔 채였다. 전당은 1층 전체를 할애하여 만든 탓에 단순히 넓다고만 하기에는 부족할 만큼 넓었다. 마치 그 유구한 역사를 직접 확인하라는 듯한 모양새인 것이다. 다만 역사만으로 따진다면 오히려 조금 더 긴 시간을 이어왔던 왕조인 세크리티아에서 지냈던 칼리안은 그 수많은 초상화에도 그리 큰 감명을 받지는 않았다. - 뚜벅, 뚜벅. 칼리안이 고요한 구두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시작은, 당연하겠지만 초대왕 하츠아라와 시스파니안의 초상화였다. 지그프리드령에 갔을 때 만나보았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시스파니안과 익히 여러 번 보아 익숙한 하츠아라. 그들의 아들이자 2대 카이리스 국왕의 왕세자 시절이 담긴 초상화도 있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그 곳을 지나쳐 계속 걸어들어갔다. 2대에서 3대로, 4대로, 그렇게 쭉 걸어들어간 칼리안의 발이, 가장 마지막 초상화가 놓인 곳 앞에서 멈춰섰다. ‘르메인 루 룬 카이리스.’ 현 국왕이자 세 왕자의 아버지인 르메인의 조금 젊은 시절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아직 세자위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란델과 플란츠, 그리고 칼리안의 초상화는 없었다. 아랫쪽으로 란델의 모친인 아이샤 아리엘리의 초상화가 보였다. 그 옆의 빈 공간은 아마도 실리케의 자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었다. 눈 앞을 한동안 응시하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정말, 닮으셨네요.” 선홍색의 머리. 색이 달랐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거울 속에서 보던 모습과 참 많이 닮았다. 쌍커풀 없이 큰 눈, 콧날, 입매. 정말 많이 닮았다. 낯설지만 분명한 칼리안의 모친이었다. 후궁, 프레이야 휘트린. 처음으로 마주한 그 얼굴을, 칼리안은 말 없이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사과의 의미를 담은 채였다. - 달칵.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먼 곳에서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집무실이 아닌, 그리고 걸음하기 조금 꺼려지는 곳에서 만나자는 요청에 응한 것은 물론 르메인이었다. 멀리 전당의 입구 쪽을 한 번 바라본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돌려 프레이야의 눈을 바라봤다. 그렇게 다시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르메인이 칼리안의 곁으로 걸어왔다. 르메인 쪽으로 몸을 돌린 칼리안이 예를 보였다. 칼리안으로부터 아이샤에게로, 그리고 비어있는 실리케와 프레이야의 초상화를 한 번씩 쳐다본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이 곳에서 만나자 하였느냐.”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불편해하는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아이샤의 얼굴도, 프레이야의 얼굴도, 그리고 실리케의 빈자리도. 모두 다 편치 않을 터였다. 그것을 알면서 굳이 이 곳으로 와달라 요청한 이유를 말하기 위해,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이라.” 그렇게 되풀이하는 목소리가 실로 부드러웠다. 관심 두지 못한 사이에 죽어가던, 그로 인해 르메인으로부터 유일하게 ‘내 아들’이라는 말을 들은 막내아들. 어느새 달라져 온갖 사고는 혼자 다 치고 다니는 말썽꾸러기. 하지만 유일하게 르메인에게 ‘부탁’을 하는 아들이 바로 칼리안이 아니던가. “어렵지 않은 일일 수도,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 이야기 해보거라.”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것과 꼭 닮은 붉은 눈을 응시하면서, 칼리안이 말했다. “제 어머니를 왕비로 추숭시켜 주십시오, 전하.” 손에 쥔 것을 전부 내려놓은 칼리안이 이렇게. 정통성을 입에 올렸다. < 제27장. 지금이었다면(1) > 칼리안의 말대로였다. 어렵지 않은 일일 수도 있고,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프레이야를 왕비로 추숭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재 르메인에게 다른 왕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당연하겠지만 르메인은 그 일을 진행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유일한 이였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더냐.” “진심입니다.” 곧바로 이어진 대답에 르메인이 짧은 숨을 쉬었다. 칼리안의 이 갑작스러운 부탁이 프레이야의 명예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닐 것임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혈통. 후궁, 심지어 평민 출신의 후궁을 어미로 둔 왕자라는 꼬리표. 그것을 떼내려는 것일 터였다. 물론 이제와 그것을 떼려는 이유는 단 하나 뿐이었다. “세자위에 마음을 두고 하는 소리일테지.” “그렇습니다, 전하.” 칼리안은 이번에도 숨김 없이 대답했다. 이전에야 스스로 지닌 발칸이라는 강력한 힘이 있었으니, 프레이야가 후궁이든 평민이든 상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칼리안은 그 힘을 모조리 플란츠에게 쥐여줬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아내어 르메인을 만나러 온 길이었다. 전력이 아닌, 세력을 가지기 위해서 말이다. 칼리안이 왕세자가 되리라 예상하는 귀족들도, 어느정도 칼리안의 손을 들어주는 귀족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칼리안의 출신만은 ‘흠’이라 말했다. 비하의 의미든 아니든, 왕비의 아들이 아닌 것이 문제라 여기는 것만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그런 상황이니 란델이나 플란츠를 지지하는 이들은 어떠하겠는가. 오래 전 왕실 몰래 신물을 거래하고 카이리스의 정보를 세크리티아의 세작에게 판매하다 체포된 헤일 라트란이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칼리안은 ‘평민의 자식’이라고. 칼리안이 아무리 특출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해도, 아무리 강한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해도, 아예 왕족으로 여기지를 않는 것이다. 브리센의 세력이 약해짐에 따라 정말 만에 하나 플란츠가 세자위에 오르지 못한다면 차라리 란델이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 낫다고, 그리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것만은 제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체이스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지 못하도록 체이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기사 서임을 받았던 베른이 아니던가. 귀족들이 그 대단하신 혈통을 따지는 모습은 세크리티아와 다르지 않았다. 단지 평민 출신의 후궁을 어미로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혐오하는 모습은, 오히려 세크리티아보다 더 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카이리스의 귀족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르메인도 알고 있었다. 프레이야가 왕비의 위를 받게 되면, 유일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사라지게 되는 것임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는 안다. 다만, 칼리안.” 그렇게 말한 르메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진작부터 칼리안이었다. 르메인의 정치적인 파트너로서도 칼리안이 지대한 도움이 되고 있고, 인품이나 능력을 보아도 차기 왕으로서 가장 어울리는 것은 칼리안이었다. 물론 가끔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지나치게 큰 일을 터뜨리기는 하지만 그것에도 확실한 이유는 있었다. 왕권이 내려갈대로 내려간 지금 상황에서는 르메인이 걸어왔던 것과 달리 과감하기 짝이 없는 그런 행보가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 진작부터, 왕세자의 자리를 칼리안에게 내려주어야 하겠다는 마음은 먹고 있었다. 세자위를 내리는 것에 도움이 된다는 것만 따져본다면, 당연히 들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다른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리했으리라는 말이다. “지금으로서는 위험한 일이다.” 다만 아직은 위험했다. 그래서 하지 못했다. 때문에 르메인이 이렇게 거절의 의사를 담아 대답했다. 표정 없던 르메인의 얼굴에 침통함, 자괴감, 그리고 죄책감이 모두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르메인이 지닌 힘이 크지 않아서 생긴 문제였기 때문이다. 왕권이 조금만 더 강력했다면, 르메인의 아이를 낳은 이를 ‘평민’이라 욕하는 일은 절대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하는데. 어찌 생각하느냐.” 르메인은 세자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칼리안이 주제 넘은 짓을 하는 것은 아닌지, 왕이 되려는 마음을 지나치게 쉽게 드러내는 것은 아닌지 등을 떠올릴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때문에 이렇게만 물었다. 란델이 20세가 되기까지 아직 1년 이상의 시간이 남았다. 그 안에 르메인 스스로의 왕권을 더 키우고, 텐실과의 자잘한 문제를 해결하고, 브리센의 손을 조금이라도 더 떨치고 나서. 그리하여 칼리안을 반대할 세력이 조금이라도 더 줄어들면, 그 때 부탁한 것을 이뤄주겠노라고. 그렇게 대답했다. “무엇이 위험하다고 여기십니까.” 르메인의 답을 들은 칼리안이 이렇게 물어왔다. “당연히······.” 지금 이 시기에 프레이야를 왕비로 추숭하는 것은 곧 르메인의 결심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직 왕세자위에 올려놓지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는 결정을 내렸다는 표현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다. 그것이 위험하다 여기는 것이었다. ‘제일 마음에 안 드는 놈 먼저 세자위에 올려놓으면 알아서 사라질 것’이라는 앨런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을 테니까. 브리센에서, 그리고 텐실에서, 별다른 세력 없이 홀로 강한 칼리안을 그냥 두겠는가.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던 르메인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칼리안을 응시했다.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모를 칼리안이 아니다. “네가 갑자기 그것을 부탁하는 이유가 궁금하구나. 혹 무슨 일이 있는 것이더냐.” 그 말에,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섣부르게 안된다는 말만 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드리는 부탁이라기보다는.” 르메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프레이야를 추숭하면 에반은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칼리안은 그것으로 말미암은 명분을 만들어 브리센의 머리를 다 잘라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명분이 있는 가지치기와 명분이 없는 가지치기는 다르니까. 또 하나. 프레이야의 추숭 소식 이후 브리센이 흔들거리면 칼리안 쪽으로 발을 돌릴 귀족들. 그것이 칼리안이 손에 쥘 세력이었다. 칼리안이 만들어낼 ‘명분’을 빌미로 칼리안의 구명줄을 만들어 줄 세력 말이다. 명분 있는 가지치기, 그리고 새로운 세력. 그 두 가지가 함께 진행되어야 칼리안이 산다. 다만 이것을 르메인에게 사실대로 알릴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한 가문의 수장들을 살해한 혐의를 뒤집어 쓸 터였다. 광장에 칼리안을 위한 레니시타 잎이 깔리면 어찌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르메인은 분명히 반대할 것이었다. “저는 그저······.” 그래서 칼리안은 조금 더 솔직한 대답을 하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속에 감춘 꿍꿍이,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진짜 이유를 꺼내겠다고.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들어 르메인을 쳐다봤다.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그린 채 잠시동안 르메인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르메인을 바라보며, 남은 대답을 전했다. “살려달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전하.” 조금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 그것은 르메인이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부탁이었다. * * * 아르센은 화염 폭발을 좋아한다. 하지만 아르센을 이중 속성을 다루는 마법사라 칭하지는 않는다. 할 줄 아는 것과, 두 개의 주종을 가진 것은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아르센은 그저 화염을 함께 쓸 줄 아는 것 뿐. 두 속성의 마법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르센이 헤이시아 궁을 향해 화염구를 날려보낼 당시, 동시에 사용했던 얼음의 벽이 현저히 불안정했던 것처럼 말이다. 두 개의 속성 모두 주종으로 다루는, 그리하여 서로 다른 속성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든 아니든 상관 없이 언제나 완벽한 완성도를 지니는 마법사. 그것이 이중 속성의 마법사다. 물론 앨런은 예외였다. 7서클의 장벽을 넘는 순간 속성의 경계도 사라진다. 때문에 앨런에게 있어 속성이란 그저 무엇을 더 자주 사용하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법사들은 대개 본인에게 맞는 것 하나만을 주종으로 삼고 수련을 한다. 언젠가 나도 고서클이 되겠지, 하고. 두 개의 주종을 가지려면 마법적인 재능과 속성 친화력은 기본이고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뒤따라야 했으니까. 다만 에우리아는 굳이 앨런의 경지를 욕심내지 않았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 뭐 이런 생각이었다. 그래도 남들에게 지는 것은 싫었으므로 두 개의 속성을 모두 주종으로 삼았다. 그리고 불가능에 가까운 그것을 성취해냈다. 그런 에우리아였으니, 지금의 아르센보다도 한 살이 더 어렸던 나이인 5년 전에 마법사 협회장에 올랐던 것이리라. “스물 셋.” 그래서 아르센은 그냥 싸움 좀 할 줄 아는 꼬맹이 역할에 충실히 임하고 있었다. - 파지지직! 눈부신 빛이 대지를 뒤덮었다라고 밖에는 표현하지 못할 마법이 에우리아의 손 끝에서 뻗어나왔다. 에우리아를 향해 달려들려던 다섯 명의 기사를 향해서였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검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설 수 있어야, 공격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 손에 들린 것이 붉은 오러를 뿜고 있든 아니든 그것은 일말의 영향도 주지 못했고 에우리아에게 그 어떤 위협도 되지 못했다. - 쿠웅! 다섯의 기사가 온 몸에서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을 나뒹굴다 이내 잠잠해졌다. 스치기만 해도 죽을 정도의 힘에 저 정도의 저항을 하는 것은 분명 검에 두른 것과 같은 빛의 실드 때문일 것이다. “열 여덟.” 어찌됐건 에우리아 혼자로도 놈들을 잡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으므로, 아르센은 에우리아와 놈들의 사이에 가상의 선 하나를 그어놓고 그 곳을 넘어오는 놈들만 처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다 별반 할 일이 없어서 이렇게 놈들의 숫자를 세어주는 역할까지 맡았다. 잠시 바닥에 쓰러져있는 놈들을 보던 아르센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 스물 하나.” 에우리아의 번개가 어느정도로 강한지는 아르센도 잘 안다. 이미 열 두 번은 더 절명했어야 할 공격을 맞았다. 그런데 쓰러진 다섯 중 셋이 다시 일어났다. 그러니 남은 놈들의 숫자를 세는 것도 생각해보면 꽤 어려운 역할이다. 쓰러져 누운 놈이 죽은 놈인지 다시 일어났다가 죽을 놈인지까지 가늠해서 세어야 하니, 이 얼마나 헷갈리는 일이란 말인가. “저 실드가 두꺼운 겁니까, 협회장님이 약해지신 겁니까.” 그리고 이렇게, 간간히 에우리아를 응원하는 고무적인 역할도 자처하고 있었다. 닭 잡아 왔을 때 에우리아가 해줬던 응원과 비슷한 것이었다. 에우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앞에 선 스물 한 명에 겁대가리 또 내려놓고 뒤에 서 있는 한 놈까지 포함해서 스물 둘. 그 스물 두 명을 싹 다 죽여버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는 생각을 애써 접어놓기 위해서였다. 잠시 앞을 살피던 에우리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저 놈들이 쓰는 힘, ‘그거’ 같은데.” 작은 목소리였으나 아르센에게도 뚜렷이 들리는 말이었다. 저 기이한 붉은 빛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이었으므로 아르센이 가만히 물었다. “면식 있는 힘이었습니까?” 붉은 빛이 일렁거리는 기분 나쁜 힘과 구면인지 묻는 말에, 에우리아의 번개가 잠시 아르센을 향했다. 아르센이 씩 웃으며 에우리아의 옆에 섰다. 이제 그만 놀리겠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딱 네 번의 공격으로 마흔 명을 스물 한 명으로 줄여놓은 에우리아에게 계속 장난을 칠 수는 없으니까. “마나실 군단장님의 실드도 붉은 빛을 내긴 하는데, 저건 확실히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마나실 백작님은 화염이라 그렇고. 저런 것과 비교하면 안되지.” 놈들의 능력이 굉장히 이상한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조금 전 쓰러졌다 일어난 놈들. 에우리아의 번개에 맞아 다 벗겨진 놈들의 피부가 재생되는 속도를 지켜 본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사람 맞습니까. 텐실의 치유사도 저 정도는 못 합니다.” “어, 사람 맞아.” 번개의 힘을 가득 담은 물의 구체를 직격으로 맞고 죽은 듯이 쓰러진 것을 분명히 봤다. 물을 뒤집어 쓴 채 맞은 번개에 온 몸이 타들어가는 것도 분명히 봤다. 그렇게 두 번 만에 마흔 명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들 중 스물 세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이 끊이지 않은 이상, 회복이 되는 것이다. “놈들은 아마······.” 칼리안을 습격했던 이들과 같은 힘을 쓰는 놈들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려던 에우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을 공격한 놈들에 대해 아르센에게 알려주어도 괜찮을지, 그것을 결정할 수 없어서였다. 에우리아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방금 전 일어나 다시 검을 집어드는 놈들을 향해서였다. 에우리아를 향해 어떤 욕설을 퍼붓는 것 같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붉은 실드가 놈들을 다시 둘러싸기 직전, 보라색의 빛줄기가 놈들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 쌔애액! - 콰앙! 가늘고 긴 쐐기 형태를 지닌 보랏빛의 창. 번개의 힘을 담은 에우리아의 창이 채 실드로 보호되지 않은 세 기사의 머리를 꿰뚫었다. 놈들의 몸이 생명을 잃고 축 늘어졌다. 에우리아는 그 모습을 오래 보고 있지 않았다. 매섭게 가늘어진 눈이 이제 막 회복을 마치고 에우리아를 향해 다시 공격을 하려는 놈들을 빠르게 훑어냈다. 짙은 갈색의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들. 입고 있는 옷에는 그 어떤 표식도 없고 놈들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기사도 마법사도 모조리 같은 복장이다. “마법사부터 처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드 때문이었다. 저 귀찮은 실드부터 쓰지 못하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뭐하러 그런 짓을 해. 귀찮게.” 누굴 골라서 먼저 죽이는 건 에우리아의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 아닌가. 전기의 힘은 얼음과 다르다. 광범위하다. 그러니 그냥 싹 다 잡아버리면 된다. 달려들면 붙들어놓고, 멀리서 쏘면 막으면 되는 것을. 굳이 귀찮게. 두 대를 맞춰 죽이든 세 대를 맞춰 죽이든. 전부 다, 죽여버리면 될 일이 아닌가. “몇 명 남았지?” 번뜩이는 눈빛의 에우리아를 본 아르센은, 실로 능력있으신 협회장 에우리아께서 만에 하나라도 ‘마법사부터 처치하자는 의견이 묵살된 아르센이 불만을 가진’ 것으로 오해하지 않으시도록 유난히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십팔 명이요.” < 제27장. 지금이었다면(2) > 칼리안을 습격한 놈들은 대사막의 늑대였다. 지금 에우리아를 찾아온 놈들은 그냥 사람이다. 카이리스인지, 세크리티아인지, 혹은 텐실이나 리베른의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사막의 전사들이 아니라면 개개인의 무력은 엇비슷할 테니 그것이면 됐다. “다섯 명만 잡아, 꼬맹이.” “알겠습니다.” “붙어서 싸우지 말고. 너도 죽어.” “······ 네.” 그렇게 덧붙인 에우리아의 로브 끝자락이 펄럭였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었건만, 어느새 집중된 마력에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르센이 에우리아로부터 조금 떨어져 섰다. 곧 아르센의 손 끝이 살짝 움직였고, 그와 거의 동시에 아르센에게 접근하던 기사 한 명의 머리 위로 얼음창이 떨어져 내렸다. 공격이라 하기보다는 놈들이 두르고 있는 실드가 어느 정도의 방어력을 지녔는지를 가늠해보기 위함이었다. - 카가각! 단단한 무언가에 쇠가 긁히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며 얼음창의 끝이 갈려나갔다. 놈의 실드가 잠시 일렁이는가 싶더니 금세 회복되는 것도 보였다. - 쌔애액! 적당히 놈들이 지닌 힘의 범위를 가늠하고 있던 아르센을 향해 거대한 바람의 창이 날아왔다. 앞에 선 기사가 아니라 멀찍이 숨은 마법사 나부랭이가 쏘아보낸 것이다. 하필이면 바람이라니. 바람 마법에 어울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딱 한 명 밖에 없는데. 문득 든 생각에 피식 웃은 아르센이 손을 휘두르자, 족히 두 뼘 너비는 될 얼음의 장벽이 순식간에 생성되어 아르센의 앞을 막았다. - 콰강! 이 두께의 얼음 벽을 뚫고 들어 올 바람의 창은, 아마 앨런이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아르센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람의 창은 얼음 벽을 반 쯤 파고든 뒤 멈췄다. 얼음과 바람의 힘이 맞부딪히는 굉음 때문인지 혹은 생각 외로 강한 공격력 때문인지 아르센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얼음 방벽을 해제한 아르센이 바람의 창을 보낸 마법사를 향해 마력을 운용했다. 다가오던 기사는 일단 무시한 채였다. - 쌔애액! 쌔액! 날카롭게 벼려진 두 개의 얼음창이 모두 마법사 쪽으로 날아갔다. 딱 막기 좋을 속도로 다가오는 얼음창을 본 마법사의 실드 앞면이 진하게 빛났다. 실드의 힘을 한 쪽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동시에 아르센의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고, - 쌔액! 마법사의 뒤에서 나타난 얼음창이 내리꽂혔다. 당연하겠지만, 이번에는 한낱 마법사가 몸을 움직여 피할 수 있을 속도의 것이 아니었다. - 콰직! 마법사의 심장이 그대로 꿰뚫렸다. 쿵, 하고, 시신 한 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잠시 적막을 깼다. 그와 함께 또 하나의 얼음창이 생성되어 조금 전까지 아르센에게 달려들던 기사의 발을 멈추게 했다. - 카각!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얼음창이 실드에 막혔다. 그것을 본 기사가 비죽이 웃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기사가 코 앞까지 다가왔음에도 피하지 않는 마법사라니. 아무리 발칸의 부군단장이라지만, 너무 오만한 것이······. - 우지직! 기사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무언가 바스라지는 소리와 함께 실드에 박힌 얼음창이 순식간에 형태를 바꾼 까닭이다. 화로 위에 놓인 얼음이 녹듯 형태를 바꾼 아르센의 얼음이 마치 거미줄이 뻗어나가는 모양새를 그리며 붉은 실드 위를 빼곡히 둘러쌌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것은 실드 겉면이 이미 푸른 얼음에 뒤덮인 뒤였다. “반갑다.” 기사의 검을 앞에 두고도 덤덤한 마법사의 목소리에, 한껏 올라갔던 기사의 입꼬리가 천천히 돌아왔다. 자신의 시야를 방해하는 희뿌연 서리 때문에 정확히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파악을 하지 못한 채였다. “나는 카이리스 마법사단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다.” 스승님 가라사대, 사람을 만났으면 일단 인사부터 하라 하셨으니. 특별한 매개체도 없이 만들어진 실드를 얼려낸 얼음 마법사가 자기 소개를 마쳤다. 다만 놈을 기억해 둘 생각은 없었으므로, 놈이 화답할 시간을 굳이 내어주지는 않았다. 아르센의 손 끝에 다시 한 번 차디찬 마력이 모여들었다. - 쌔액! - 콰지직! 얼어버린 실드는 한낯 석영 조각보다도 약하다. 보호 받지 못한 기사의 맨 몸은, 그보다도 더 약하다. - 쿠웅! 내리쳐진 얼음의 날에 실드와 함께 목의 절반을 잃은 기사의 시신이 잠시 기우뚱 했다. 그리고 곧 바닥으로 추락했다. 쓰러진 기사의 시신 뒤로, 푸른 물줄기가 대지를 가르며 쇄도해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르센이 싸우는 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던 에우리아의 것이었다. 어느새 에우리아는 기사들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 쉬이이익! 에우리아의 발 밑에서 일렁이던 푸른 기운이 빛의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그것이 마치 땅을 가르며 뻗어나가는 날개 없는 용의 모습처럼 빠르고 날카롭다. 한 줄기에서 시작한 물은 마치 강이 갈라지듯 여섯 개의 줄기로 갈래갈래 나뉘었다. 그리고 에우리아를 향해 달려들던 여섯 명의 기사를 향해 제각각 뻗어져 나갔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한참 앞에 서 있던 여섯 놈의 발 아래까지 물이 당도했다. - 쿠콰앙! 목적지에 다다른 물줄기는, 일순간도 지체하지 않은 채 회오리치며 용솟음하는 여섯 개의 물기둥이 되었다. 그것이 그대로 놈들을 덮쳤다. 바람이 아닌 물로 만들어진 토네이도와 같이 거꾸로 회전하며 솟구치는 물의 힘은 실로 강력했다. 단지 물이었으나 그 안에 칼날을 담은 듯, 물기둥의 한가운데 갇힌 채 간신히 서 있는 이들의 붉고 단단한 실드를 갈가리 찢어냈다. - 파지직! 파직! 거의 동시에, 놈들이 이고 선 하늘에서 보라색 빛의 번개가 떨어졌다. 대지에 도달하기 전 정확히 여섯 개로 나뉜 번개가 물기둥 속에 갇힌 기사들의 위로 내리꽂혔다. 말 그대로 멀쩡한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 콰아아앙! 숲을 쩌렁쩌렁 울려대는 굉음과 함께, 놈들을 감싸고 휘몰아치는 물기둥이 번개의 힘을 고스란히 머금었다. 실드를 없애고도 사라지지 않은 물의 힘이 놈들의 온 몸에 상처를 냈다. 깊이 벌어진 상처 사이사이로 번개의 힘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고 치유력이 채 발동하기도 전에 피부를 태우고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 파지직! 에우리아의 힘은 아르센의 얼음과 달랐다. 오히려 앨런의 불과 비슷했다. 아르센의 얼음창은 순식간에 상대의 목숨을 앗아간다. 그러나 앨런의 불은 달랐다. 끊임없이 뇌를 깨워내어 심장이 멎을 때까지 고통을 느낀다. 에우리아가 다루는 전기의 힘 역시 마찬가지였다. 좀처럼 정신을 잃게 하질 않는 것이다. 온 몸의 감각 세포를 일깨우는 지독한 느낌에,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났던 놈들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물에 젖은 몸에 스민 번개의 기운은 절대로 흩어지지 않았다. - 콰아앙! 콰앙! 콰앙! 한 번, 두 번, 세 번. 지치지 않고 떨어져내리는 번개의 공격이 놈들의 몸에 모조리 적중했다. 그 심장이 모두 타버리도록, 그 어떤 치유력으로도 재생되지 않도록. 순식간에 여섯 명의 기사가 여섯 구의 시신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열 둘.” 놈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계속하여 공격을 해왔다. 그러니 에우리아와 아르센 역시 멈추지 않았다. 에우리아의 앞으로 달려드는 기사의 발목을 아르센이 얼리고 에우리아가 내리쳤다. 아르센에게 휘둘려지는 기사의 검붉은 검이, 오러를 머금은 그대로 산산히 조각나 부서졌다. 그 위로 여지 없이 얼음창이 내리떨어진다. “열.” 아르센의 말과 동시에, 에우리아의 손이 하늘을 향해 치켜올라갔다. 피곤하고, 배도 고팠다.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 쩌저저적! 이제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청보랏빛의 하늘이 불안한 비명소리를 낸다. 말 그대로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새하얀 스파크가 하늘을 뒤덮었다. 천둥을, 그리고 번개를 모아갔다. 고양이의 그르렁거림이 하늘에 메아리친다. 그것은 어느새, 냉혹한 범의 으르렁거림과 같은 소리로 바뀌었다. - 쩌저적, 쩌적! 하늘이 두 갈래, 세 갈래로 나뉘는 듯. 거대한 손아귀로 하늘 조각을 찢어내는 듯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하늘의 울음은, 천둥은, 모든 생명의 근원적인 공포를 자아내는 대상이다. 그런 하늘을 올려다 본 놈들의 발이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움직였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놈들의 발을 묶었다. - 우르릉······! 번쩍이는 빛이 하늘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찾아 온 폭풍전야. 조용하기 짝이 없는, 제 숨결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대지 위를 장악했다. 사위가 적막함에 잠겨들었다. “모두······.” 그 침묵을 이기지 못한 기사 한 명이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신호가 되었다. - 콰앙! 쾅! 콰아앙! - 쿠콰과광! 콰앙! 모두 공격하라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모두 도망치라는 말이었을까.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 소리가 터져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짙은 보랏빛의 번개가 줄기줄기 내리꽂힌다. 끊임 없이, 끊임 없이. 에우리아의 양 팔은 여전히 하늘을 향한 채였다. 계속하여 그렇게 하늘의 분노를 갈구했다. 그와 동시에 대지에서는 사방을 파헤치고 뿜어져 올라오는 푸른 물이 놈들의 온 몸을 적시고 시야를 방해했다. - 파지지직! 에우리아의 말이 맞았다. 실드 따위, 기사와 마법사의 구분 따위,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입을 열었던 기사에게 내리꽂힌 번개는 바닥을 타고, 물을 타고, 그 옆에 서 있던 마법사에게로, 그 뒤의 기사에게로 계속하여 옮겨갔다. 마치 보라색의 스파크로 만들어진 감옥에 갇힌 듯, 놈들은 제자리에 발이 묶인 채 고스란히 그 공격을 모두 맞았다. - 콰과광! 쿠궁! 한 번 불러낸 번개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놈들의 재생력이 이미 다했음에도, 생명이 모두 꺼졌음에도, 끊임없이 바닥을 내리치고 짓이겼다. 그렇게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에우리아의 팔이 비로소 아래로 내려왔다. 손에 머금던 스파크도 완전히 가라앉았다. 바닥에서 솟아오르던 물도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여기 저기 패이고 짓뭉개진 대지와 그 위에 놓인 마흔 개의 시신. 새카맣게 타버려 형체조차 찾기 힘든 그 시신들만이,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듯 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아르센이 고개를 돌려 에우리아에게 시선을 보냈다. “칼 잡는 폼은 엉성하기 그지 없는데 오러를 쓰고, 눈 앞의 것만 좇는 멍청한 마법사가 제 얼음을 뚫어낼 힘을 쓰고. 심지어 마법사와 기사가 치유력을 지녔습니다.”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목소리. “왕자님을 공격한 것, 저놈들입니까.” 아르센의 질문에,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을 소비한 탓에 아주 조금 창백해진 에우리아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맞아.” 그래서. 그래서 발칸의 인원을 늘리라 하셨던 것일까. 아르센의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직접적인 이유는 달랐지만 칼리안이 준비를 요청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맞았다. 정확히 알지 못할 앞으로의 일에 대비하고자 함이었으니까. “꼬맹이. 잡 생각 그만하고 이리 와. 닭 먹자.” 어느새 태평해진 목소리에, 아르센이 질렸다는 듯 말했다. “바로 옆에 시체가 마흔 구 있습니다, 협회장님.” “그래서 뭐. 나눠먹으라고?” 소싯적 투입되었던 야만족과의 전투에 꽤나 이골이 났다던 마법사협회 협회장이 그렇게 대꾸했다. 스승님과 함께 대사막을 누비고 다녔던 발칸의 부군단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그 옆에 앉았다. 어쨌거나 둘 모두 친숙한 것이다. 적의 죽음이라는 것에. “아, 너무 익었다.” 다섯 놈 잡으랬더니 세 놈 잡았지. 퍽퍽살 너 먹어. 힘들어서 못 씹겠어. * * * 살려달라는 말.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르메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말이었다. ‘칼리안이 살기 위해 찾은 것이 일면식도 없는 마법사가 아니라 아버지였어야 마땅하다’고, 앨런이 그리 말하지 않았나. 그러니 지금 내밀어진 저 손을 르메인이 대체 무슨 말로 거절하겠으며 어떻게 뿌리칠 수 있겠는가. 결국 르메인은 고개를 끄덕여 줄 수 밖에 없었다. 칼리안이 바라는대로, 다가오는 생일에 맞추어 특별한 선물을 해주겠노라고. ‘부디, 조심하거라.’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조심은 할 테니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방문 잠금장치 두 명을 좀 거둬가 주실 수는 없을지 물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도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르메인과의 만남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미 저무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야 저무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되네.” 그것을 알 수 없어서, 칼리안이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가 참 짧고도 길었던 탓이다. 멀리 보이는 빌헬름 관의 불이 꺼져 있었다. 헤이시아 궁을 지키기로 한 몇몇의 발칸 대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돌아갔을 터였다. 물론 아무도 다가가지 못한다지만, 그래도 시간의 축의 존재를 감추기는 해야 했으니까. 히나와 얀은 이미 체르밀에 돌아갔을 터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빌헬름을 향해 발을 옮겼다. 체르밀의 수련장에는 키리에가 있을테니, 키리에를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검을 좀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조금쯤 혼자 있고 싶은 생각도 들었고. 그랬는데. - 타앗! 불도 켜지지 않은 빌헬름 관의 실내 훈련장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 부우웅! 무거운 쇳덩이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대충 짐작한 칼리안이 피식 웃는 얼굴로 훈련장의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갔다. 창문 틀에 조각난 달빛이 비추는 훈련장 안에, 어둠을 품은 검이 저 혼자 춤을 춘다. 검은 밝게 비춰지는 달빛을 하나도 반사하지 않았으나 칼리안이 그 움직임을 좇는 것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검을 든 손의 주인은 어둠 속에 잠겨든 칼리안을 발견하지 못한 듯 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조용히 선 채로 놈이 하는 냥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누군가 보고 있는 것을 알 때의 검과 그렇지 않을 때의 검은 또 다르므로. - 부웅! 둥글게 가로새겨지는 검의 끝을 따라 예리한 기운이 물씬 흘러나온다. 쏘아내듯 찌르는 첨예한 날붙이에는 어느새 흔들림이 사라져 있었다. 휘둘러지고 내리치는 동작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호오.’ 많이, 늘었다. 잠시 제 자리에 멈춰 서 있던 놈이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조금 다른 자세를 취하며 검을 움직였다. 확연히 다른 속도와 확연히 다른 가벼움이 검 끝에 매달린다. - 쉬익! 브리센의 검은, 좋게 말하면 적당하고 나쁘게 말하면 애매하다.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무겁지만, 그렇기에 속공을 하기도 어렵고 타격에 따른 피해도 덜 입힌다. 칼리안과 드미레아의 검을 모두 받아낼 수는 있지만 치명타를 주는 것에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저 검으로 칼리안의 것을 만들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조금 더 빠른 공격을 하고자 하여. 아마 드미레아로부터도 분명 무언가를 배워냈을 터였다. 플란츠니까. 끝이 나뉘어지듯 뻗어나오는 플란츠의 검을 보며,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깨 망가집니다.” 플란츠의 검은 모두 확인했다. 그래서, 자신의 것을 모두 펼쳐낸 뒤 칼리안의 가벼운 검술을 시도하려는 것을 막았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플란츠의 움직임이 조용히 멈췄다. 검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훈련장의 입구를 쳐다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 뭐야.” 칼리안의 것을 시도하려다 들켰음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었다. 애초에 그것이 부끄러울 놈이었으면 칼리안의 앞에서 태연히 고양이를 쓰다듬지도 못했을 것이다. 숨어서 쳐다보고 있던 것에 대한 불쾌감이겠지. “지금 시도하실 수 있을 속도 아닙니다. 몇 번은 괜찮아도 오래 쓰실 수는 없습니다.” 불쾌하건 말건 상관 없다는 듯 이어진 말. 잠시 가만히 서 있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쓸 데 없는 부끄러움도 없지만 쓸 데 없는 고집도 없는 성격이니까. 곧 플란츠가 검을 집어넣고 저벅저벅 걸어나왔다. 그대로 체르밀에 돌아가려는 것 같았으므로 칼리안이 의외라는 듯한 얼굴이 됐다. 쓰지 못할 기술을 버렸으니 쓸 만한 기술을 배우려 들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서였다. 때문에 칼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련 한 번 하시겠습니까.” “됐어.” 단박에 거절이 돌아온다. 전날 앨런과 대련을 마치고 들어왔던 칼리안의 상태를 아직 신경쓰는 듯 했다. 베른으로, 옛 칼리안으로, 많은 과거의 모습으로 하루를 보낸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를 향해 말했다. “그럼 식사나 하시죠. 형님.” “귀찮아.” 같이 먹기 귀찮다는 소리다. 저래놓고 또 풀이나 뜯겠지, 삶은 완두콩. “그러다 키 안 큽니다.” “짖지 좀 말라고.” 칼리안이 씩 웃었다. 오늘도 하루 한 번 짖기 했으니까. < 제27장. 지금이었다면(3) > 초상화 속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니, 오히려 초상화보다 더 실물 같은 조각이다. “대단하군.” 르메인은 짧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을 꺼냈다. 시스파니안이 남겨둔 방이 발견된 지 정확히 2주 만에 내부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위험한 요소가 있는지 미리 확인 중에 있으니 조금 뒤에 걸음하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되도록 르메인에게 시간의 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앨런이, 이와 같은 핑계로 르메인의 방문을 늦췄었다.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해 축의 파편을 꺼낼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파편을 꺼내는 것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석벽에는 양신전쟁의 과정이 조각되어 있었다. 악신을 봉인하기 위해 8명의 영웅이 모인 것, 그들이 어떤 싸움을 벌였고 누가 어떤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했는지에 대한 내용, 마지막 전투에서 악신을 봉인하며 함께 잠든 주신 세렌티에 대한 묘사가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르메인은 마지막 장면, 악신이 봉인되고 난 직후의 모습 앞에 선 채였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네 명인 카이리스 초대왕 하츠아라와 고룡 시스파니안, 퀴트로스 혼 지그프리드, 그리고 세크리티아 대왕의 모습이 보였다. - 우리는 분명 이루었고, 지켜냈으나, 잃어버렸다. 다른 조각들에는 별다른 글귀가 없었으나,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시스파니안의 말인지, 혹은 다른 누군가의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조각 속 세크리티아 대왕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영웅들 중 최후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알려져 있던 기사 네리아드의 시신을 끌어안고서. 시스파니안도 세크리티아 대왕의 뜻을 존중했던 것인지, ‘죽기 전 자신에 대한 것을 모두 지우라 했다’는 기록을 제외한 다른 흔적이 없는 세크리티아 대왕의 얼굴은 이 조각에서도 볼 수 없었다. 다만 그 상실감과 절망만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망각하지 않는 시스파니안이 직접 보고 겪었던 기억을 옮겨 둔 것이니 그럴 수 밖에.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은 그 빈 얼굴을 잠시 보던 르메인이 앨런을 향해 물었다. “이 외에 발견된 것은 저 고리 하나 뿐인가.” 그리고는 이렇게, 돔 형태의 방 한 가운데 놓인 시간의 축의 파편을 보며 물었다. 곁에 서 있던 앨런이 조용히 대답했다. “네, 전하. 다른 것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고리를 옮길 수 없는 것이 아쉬운 일이군. 그 때문에 시스파니안께서 직접 남기신 기록까지 숨기게 되었으니.” 말 그대로 카이리스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을 만큼의 대단한 발견이 아닌가. 그저 이 장소를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왕실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할 수 있을 기회였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이 방의 한가운데 놓인 금빛 고리 때문이었다. 칼리안을 습격한 이들과 관련이 있는 물건인듯 하니, 이 장소 자체를 공개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앨런으로부터 들은 것이다. 고리를 옮기는 것이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당연하겠지만 그 고리가 무엇의 일부인지와, 그것이 벽의 조각 따위와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중요한 물건이라는 사실은 숨긴 앨런이 조용히 대답했다. “향후에 공개하면 되는 일이니 너무 그리 아쉬워는 마시지요.” “칼리안의 청을 허락한 뒤로 걱정이 되고 안달이 나니 어찌하겠나.” 지금 르메인은, 프레이야의 왕비 추숭에 대한 일 때문에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르메인의 자리가 조금이라도 더 단단해져야 칼리안에게 탈이 생길 일도 줄어들텐데, 그것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이번 발견을 알릴 수 없게 된 상황이 안타깝다는 말이었다. “이후의 일은 왕자님께서 감당하실 몫입니다. 알아서 잘 대처하실 것이니 걱정 마시지요.” 앨런이라 하여 걱정되는 마음이 다르겠는가. 오히려 앨런은 르메인과 달리 칼리안이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까지도 얼추 예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말한대로, 그것은 칼리안이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섣불리 나서서 돕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브리센을 상대하겠다는 그 속내에 대해 르메인의 백 배 쯤은 될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있었는지 없었는지 눈을 씻고 들여다봐도 못 찾을 왕권 아닙니까. 이제와서 개구리 코딱지만큼 강해져봐야 달라질 것도 없을 터이니 너무 그리 아쉬워하지 마시지요.” 이 장소를 공개한다 해도 왕권 약한 것이 개선될 일 없다는 소리였다. 왕권 챙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르메인은 다시 한 번 고개만 끄덕였다. 목숨줄 연명시켜주고 있는 마법사의 저런 말이 그냥 평범한 안부인사 정도로 들리는 지경에 이른 상태였다. 그냥 그러려니 해버리고 마는 단계도 초월한 것이다. 밖에 비가 오는 것도 르메인 탓이라 할 마당에, 이 정도 쯤이야. 괜스레 헛헛해지는 마음에, 저녁에는 란델을 좀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제대로 만나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 * * - 쏴아아아······. 갑작스레 쏟아져내리는 빗줄기가 테라스의 유리창을 두드렸다. 시원스럽다 못해 눈 앞이 부옇게 흐려질 정도로 내리는 갑작스러운 비는 때때로 반갑다. 이 말은 이런 비를 반겨하지 않거나 아주 난처한 눈으로 빗줄기를 볼 일이 더 많이 있다는 소리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이 바로 그 ‘때때로’에 속하리라는 사실은 칼리안에게 있어 퍽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일단 칼리안은 실내에 있었고 오늘 하루는 별다른 일정도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비에 젖는 것을 심하게 꺼려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비에 밖에 나가는 것을 기꺼워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칼리안은 매우 평화로운 마음으로 빗소리를 즐기며 접시에 남은 마지막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적당히 익힌 스테이크의 맛이 아주 좋았다. “애오옹!”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진 긴 창문을 타고 또르륵 굴러내리는 빗물이 신기했던지,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창문 이곳 저곳에 발을 가져다대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빗물을 잡으려는 행동인 것 같아서, 고양이를 본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눈에 보여도, 그건 못 잡아.” 그리고 이렇게 고양이를 향해 말을 건넸다. “애옹, 애옹!” 그것이 꽤 억울했던지, 고양이는 창문을 번갈아 바라보며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이내 우다다다 소리를 내며 달려가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플란츠의 무릎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이제 익숙해진, 테이블과 플란츠의 무릎 사이의 어두운 곳에 몸을 말고 누웠다. 칼리안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와인에 재워 잡내를 없애고 약간의 후추와 소금만으로 밑간을 한 뒤 핏물 하나 안 배어 나오도록 완전히 익힌 스테이크를 씹어 삼킨 플란츠가 자세를 조금 바꿨다. 고양이 눕기 편하도록. 오래지 않아 식사가 끝나고, 테이블 위에는 식기 대신 차와 디저트가 놓였다. 비 오는 날에 딱 어울릴, 말린 사과와 오렌지를 함께 우려낸 차였다. “아일란, 비버리안, 요른, 트리필드, 벨리.” 소리 없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플란츠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플란츠가 먼저 입을 여는 것이 드문 경우는 아니지만, 앞 뒤도 없고 맥락도 없을 뿐 아니라 일반적인 단어조차 아닌 말을 하는 경우는 아마 처음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물을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크리온, 퍼드, 셀틱, 채프먼, 메이어, 리갈.” 플란츠는 한 번 더 이상한 소리를 했다. “꽤 많네요.” 물론 칼리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하기는 커녕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까지 했다. “많은가.” “사라진 가문이 서른 곳 가량 되는데 셋에 한 곳이면 많은 편이죠.” 그리고 이렇게, 세상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대화가 어김없이 이어졌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시간의 축을 마주한 그날. 칼리안은 바로 그 날부터 이틀 밤을 꼬박 세웠다. 세운 것으로 모자라 이틀 내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종이와 펜을 들고 씨름을 했다. 정보를 모두 외운 뒤 태워버렸던 텐실의 자료를 다시 써낸 것이다. 오로지 펜을 잡기 위해 손가락에 오러를 두르는 경험까지 해 가며, 날이 더 지나기 전에 플란츠에게 자료를 넘기는 것에 간신히 성공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란델이 지닌 맹세의 인과 관련되었을 세력을 찾는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플란츠에게 맡겨버린 것이다. 다른 고민거리도 많았으니 굳이 칼리안까지 이중으로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이 닷새에 걸쳐 외운 그 자료를 나흘만에 머리에 새겼다. 그 뒤 다시 일주일이 지났고, 플란츠는 자료에 적힌 내용 중 집중해서 확인해보아야 할 가문들을 추려냈다. 얼결에 같이 묶여 잘려나간 곁가지를 제외한, 굵직한 가지에 해당되는 가문들. 그 이름을 칼리안에게 전한 것이었다. “즉위하기가 무섭게 이런 짓을 하고도 잘도 사셨군, 형님은.” 란델이 즉위한 뒤 사라진 가문이 삼십여 개. 일반적인 경우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 어떤 귀족이 즉위하기가 무섭게 칼을 휘두르는 국왕을, 그것도 별다른 기반도 없는 국왕을 그대로 두고 목을 내어 놓겠는가. 그러니 플란츠는, 란델이 반란도 야기하지 않고 그 많은 귀족들을 숙청해낸 것을 신기하다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직접 손대신 것이 아니겠죠. 모르셨지 않을 텐데요.” 드러내지 않고 휘두르는 칼. 서로가 서로의 목을 노리도록, 결코 스스로를 드러내거나 직접적인 손을 쓰지 않고 진행한 숙청일 터였다. 당하는 이들조차 그것이 누구의 안배인지 알 수 없도록 하면서. “의외라서.” 칼리안의 말대로, 플란츠 역시 몰라서 한 말은 아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던 란델이 그런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나,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계획을 무사히 성공시킨 것에 대해 새삼 놀랐을 뿐이었다. “열 곳에서 더 줄여보는 것은 어려우시겠습니까.”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 그것도 ‘과거’의 체이스가 아닌 지금의 체이스가 기억해낸 내용을 토대로 전해진 정보였다. 그러니 중간중간 빠진 내용도 많았고 당시의 세작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정황도 많이 있을 터였다. 그 가운데에서 그나마 셋에 하나를 추려낸 것이 대견하다 할 일이었으나, 그렇다 해서 그 열 개의 가문을 모두 일일이 확인하기에는 버거운 일이었다. 때문에 물어오는 칼리안의 말에, 플란츠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왕세자 쪽 정보도 필요할 것 같은데.” 텐실과 대사막이 손을 잡았던 것에 왕세자가 연관되어 있다 하였으니 그에 대한 내용과 란델의 행보를 연관지어 보려 하는 말이었다. 당연히 르메인의 세작들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매우 유능한 자신만의 정보조직 보스를 떠올리며 살짝 웃었다. “세이렌 경이 돌아오면 협회 쪽으로 부탁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빠르면 며칠 내, 늦는다면 3주일. 에우리아가 돌아오기까지 그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동 마법진이 구축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했으니, 돌아올 때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면 오래지 않아 돌아올 터였다. 만약 아니라면 2주에 걸쳐 돌아오는 기간을 포함해야 했다. “어차피 형님께서도 그 때까지는 다른 일이 많으실테니.” 사안이 사안인 만큼 에우리아 외의 다른 이에게 부탁할 수 있을 일도 아닌데다가, 아르센의 부재로 플란츠도 꽤 바쁠 터였다. 아르센과 똑같은 직위의 부군단장이 아닌가. 플란츠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찻잔에 손을 가져가려던 칼리안을 향해 낮은 목소리를 냈다. “마법사들이 내 발을 자꾸 막던데. 내 아우님 짓일까.” 지금 발칸의 마법사들이 플란츠의 발을 막아설 곳은 헤이시아 궁 뿐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찻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네.” 칼리안이 거짓말 못하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앨런일 테고, 그 다음으로 잘 아는 사람이 아마 플란츠일 것이다. 그래서 칼리안은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솔직히 대답했다. “왜.” “그걸 말씀드릴 수 있으면 들여보내 드렸겠죠.” 그리고 플란츠는, 칼리안이 자신에게 꽤 순순히 대답을 내어놓는다는 바로 그 점까지도 잘 알았다. “잔해 다 치웠고 길목이 막혔으면, 뭔가 나왔다는 건데.” 정확한 추측에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발칸의 마법사들조차 그 계단 아래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그것을 다른 이도 아닌 플란츠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브리센, 그리고 형님의 어머니와 관련된 일 아닙니다.” 헤이시아 궁에 대한 일이기 때문에 묻는 것이 분명했으므로, 칼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실리케와 관련된 것이 아니니 그만 물어봐달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2주 동안 고작 텐실에 대한 일 하나만 생각한 것이 아니었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시스파니안이겠군.” 그리고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곧바로 시스파니안이 튀어나오느냐는 표정이 된 칼리안을 향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말해.” < 제27장. 지금이었다면(4) > 얌전한 고양이는 잠을 자고, 형님의 똑똑함을 잠깐 잊어버린 하나도 안 얌전한 칼리안이 비밀 공유를 종용받고 있던 그 시간. 창 밖에는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내렸고, 빌헬름 관에는 마법사가 수두룩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앳된 소녀가 입을 열었다. “이건 멍 든 거잖아. 피 나면 와.” 마법사들을 향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히나가 발칸에 오기 훨씬 전부터 빌헬름관에 드나들던 베로니카였다. 베로니카는 앨런이 이 곳에 있었던 탓에 모든 마법사와 안면이 있었다. 물론 베로니카의 어머니인 레이첼도 빌헬름에 있었어야 했으나, 이동 마법진 구축을 위해 대체로 카이리시스를 떠나 있는 경우가 잦았다. 어찌됐건 베로니카는, 실로 비범한 할아버지를 둔 탓에 사람의 나이는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을 너무 잘 깨달으면서 자랐다. 그래서 빌헬름에 처음 온 이후 딱 일주일동안 발칸의 온 마법사들과 전부 안면을 튼 뒤 50명의 마법사 전원과 반말도 텄다. 이제 친해졌으니 서로 말을 놓아도 된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귀여움이 9할, 그리고 설득력이 1할 쯤 섞인 그 주장을 들은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딱 그 때까지만 귀여웠다는 게 사소한 문제였으나 아무튼 그랬다. “피 멎었네. 약 바르면 돼.” 앨런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베로니카는 지금 물 만난 물고기처럼 아주 신이 나 있었다. 마법학원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도 그냥 빌헬름에 와 있는 것이다. 곧 베로니카는, 줄 서 있던 다음 차례의 마법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감기면 그냥 레몬차 마셔. 열 나서 쓰러지면 와. 약 줄게.” 본격적으로 히나를 돕기 시작한 베로니카가 하고 있는 가장 비중 있는 일은, 히나를 찾아오는 마법사들을 모조리 퇴짜 놓는 것이었다. 전부 다 꾀병인 것이 눈에 보여서였다. 난생 처음으로 치유사를 마주한 호기심 많은 마법사들이, 2주 째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히나를 찾아온 탓이다. 새로운 것은 겪어보지 않으면 못 견디는 놈들이 아니던가. 때문에 그 치유술이라는 것을 받아보려고 찾아오는 가짜 환자들은 베로니카에게 전부 다 쫓겨나고 있었다. - 멍 든 것도, 치료, 할 수 있어. 전부, 거절하지는, 않아도 돼. 덕분에 2주 동안 그다지 하는 일 없이 베로니카에게 수화나 알려주며 지냈던 히나는 결국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비가 올 것 같아서 고양이도 두고 왔는데, 고양이 밥 주는 일까지 사라져버리니 할 일이 더 없어진 까닭이었다. 히나의 말을 본 베로니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아무 상처나 전부 다 치유해달라고 하는 것도 버릇 돼. 잘못 든 버릇은 개한테도 못 주는 거라고 할아버지께서 그러셨어.” 대체 앨런이 어린 손녀한테 뭘 가르친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베로니카는 이렇게 말했다. 히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 힘든 것 아니니까, 너무 그러지 마. 칼리안이나 플란츠의 상처를 치료할 때에 비하면 마법사들의 상처는 정말 솜털같이 가벼웠다. 끝없이 흘러나오는 피도 없고, 깊이 베여 벌어진 피부 사이를 보게 될 일도 없으니까. 그런 히나를 보던 베로니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직 몰라서 그래. 내가 왜 그랬는지 언니도 곧 알게 될 거야.” 훈련장에 모여있을 마법사들이 ‘한 명을 대표로 뽑아서 마흔 아홉 대를 맞은 뒤에 찾아가보면 어떨까’ 라거나, ‘칼리안 왕자님 이름 걸고 기사들이랑 한 바탕 싸워보면 치료 받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따위의 의견을 주고 받고 있으리라는 것을 히나가 언제쯤 알게 될지, 그것을 가늠해보면서. “고양이는 오늘 안 왔어?” 그리고는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의 안부를 물었다. - 비, 맞으면 아플까봐, 두고 왔어. “2왕자님이 봐주시는 거야?” 사실 아르센을 대신해 바빠야 할 플란츠가 왜 아직 오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플란츠가 아직 안 왔으니 고양이도 플란츠 방에 있을 것이었다. 때문에 지금쯤 플란츠의 방에서 고롱고롱 자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히나가 대답했다. - 아마, 그럴 거야. 사람 좋아하는 고양이는 베로니카도 잘 따르는 편이었다. 강아지인지 고양이인지 구분이 안되는 녀석을 생각하던 베로니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양이 이름 안 지어 줄 거야?” 그 말에, 히나는 언젠가 드미레아에게 이야기했던 설명을 한 번 더 해주었다. 칼리안이 왜 고양이 이름을 짓지 않는지에 대해서. “아니야. 그래도 이름은 있어야지.” 그 말을 들은 베로니카가 이렇게 말했다. “안 그러면 그 고양이는 그냥 고양이인거잖아. 평생을 그냥 고양이로 살다 죽을텐데. 그 후에 그 고양이가 보고싶어지면 어떻게 불러보려고 그래. 이름이 없으면 그냥 사라지는 거잖아. 그러면 안돼.” 아, 하고. 히나가 소리 없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끄덕 해 보이며 베로니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떠나보낸 기억이 있는 사람은 늘 떠나보낸 이후를 생각할 수 밖에 없다지만, 그것을 너무 빨리 깨달은 것 같아 보여서였다. - 알았어. 꼭, 지어달라고, 말씀드릴게. 사람들이 조금 불편해도 수화를 배우고 히나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히나가 조금 불편해도 고양이 이름을 불러주면 되는 일이니까.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 * * 툭, 투둑. 빗물이 창문을 두드린다. ‘멍청하게.’ 칼리안이 잘못했다. 답지 않게, 플란츠의 유도질문에 그대로 넘어가버렸다. 발칸의 마법사들이 궁의 입구를 막았다. 무언가 숨겨야 할 것이 생겼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칼리안은 그것이 브리센이나 실리케와는 연관이 없는 일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답이 나왔다. 칼리안이 입을 열 생각을 않자, 의자에 등을 묻은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하에 숨겨진 것이 있었을테고.” 잔해가 남아있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잔해 속에서 발견된 물건을 숨기려 했으리라는 의심을 해보겠으나 마법사들은 분명 잔해가 모두 치워진 이후에 움직였다. 그래서 플란츠는 건물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은 곳, 즉 지하에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났으리라는 가정을 했다. “······ 헤이시아에는 지하가 없고.” 아무리 실리케와 가깝지 않았다지만 플란츠도 헤이시아 궁에 가보기는 했다. 지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만큼은 가봤다. 그리고 헤이시아는 당연하겠지만 단 한번도 개축된 적 없었다. 그러니 건물을 건축할 당시 뭔가를 숨겼다는 소리가 된다. “내 아우님께서 나서서 나를 막을 정도의 일과는 연관이 있고.” 더불어 칼리안이 마법사들을 움직여서 굳이 플란츠의 접근을 통제할 정도가 되려면, 플란츠가 알아서는 안될 중요한 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소리일 터였다. 이를테면 ‘새 좋아하는 놈이 다스리던 나라에서 시퍼런 귤이나 까드시던 연세 모를 미친놈이 어쩌다보니 내 동생이 되어서는 맨날 짖다 가끔 무는’ 그런 일 말이다. 그런 일에 관련될 수 있으면서 헤이시아 궁의 아래에 무언가를 숨길 만한 이는, 단 한 명 뿐이지 않나. 시스파니안. “시스파니안이 뭔가를 숨겨놨고, 이번에 발견됐다는 건데.” 칼리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플란츠 성격 상, 알아내려 마음 먹은 일은 어떻게든 알아낼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그래서 다른 말 없이 플란츠를 쳐다보고 있었다. 꼭, 들어야 하겠느냐는 얼굴을 한 채로. 꽤 많은 말을 한 플란츠는 더는 입 열기 귀찮다는 얼굴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냥 말하라는 뜻이다. “하······.” 적당히 둘러대서 납득할 놈이 아님을 안다. 그곳에서 무엇이 발견되었는지,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전부 다 알려고 들 것이다. 관심 가지지 말라는 의미로 ‘브리센이나 실리케와 관련이 없다’고 말을 했는데, 그 순간 이미 정답을 알려준 것이나 다름 없음을 깨달은 칼리안이 긴 한숨을 뱉었다. 그 끝에 진심 가득한 말이 듬뿍 묻어나왔다. “아무래도 내 형님께서는 축복을 머리로 받으신 것 같은데.” “짖는 거 말고. 말.” 대충 넘어가려 수작 부리지 말라는 소리에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맞은편에 앉은 희멀건 놈이, ‘과거’의 자신이 시간의 축 뺏겠다고 전쟁냈다는 사실을 알면 또 절인 양배추같은 낯짝이 될까봐 말하기 싫은 것이 아니었다. 시간의 축은 발칸과는 달랐다. 발칸이 강했는지 묻고, 강했다고 대답해주고. 그것과는 달랐다. 적어도 칼리안에게 있어서 시간의 축은 그 자체로 베른이었다. 베른의 생이었다. “······ 그것 참.” 칼리안이 플란츠로부터 시선을 떼어 창 밖을 쳐다봤다. 빗물에 번진 창문으로 가려진 탓에 바깥의 모습이 일렁이듯 아른거린다. 그것이 꼭 베른에 대한 기억과도 같았다. 밖을 보려 창을 열면 비가 들이치고 몸이 다시 젖을 터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그냥 언뜻 보이기만 하는대로 그렇게, 창문을 닫아 두었다. 눈에 보여도 잡을 수 없으니 그냥 흘러내려가 어느새 잊혀지도록. 지워진 이름처럼 그냥, 그렇게 닳아가도록. 그리 해 두고 있었는데. “내 형님께서는 왜.” 칼리안의 붉은 눈이 다시 맞은편의 플란츠를 향했다. 향하다가, 이내 아래로 떨구어졌다. 테이블로, 찻잔으로, 그 아래 어딘가 있을 칼리안의 밑바닥으로. 마치 빗물에 번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 창 밖 풍경처럼, 무엇이 있는지는 알지만 굳이 드러나 보이지 않도록 살짝 감춰 둔 기억. 지금의 칼리안이 아닌 베른의 마지막 날이 담긴 곳으로. “······ 잘 닫아 둔 것을 기어코 열어보려 하시는지.” 그리고 이렇게 물어봤다. 왜 그렇게 확인하려 하느냐고. 그 때의 당신과 같은 사람이 아닌 것도 이제 알면서. “부수는 것이나 여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플란츠가 이렇게 말했다. 물끄러미, 영롱하게 빛나던 헤이시아 궁을 떠올리고 있었다. 실리케가 있던 그림자를 부서뜨려버린, 칼리안의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단 하나 남은 흔적까지 없애버리고 기어코 살게 만든 것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았다. 단지 그 때와 똑같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대로 두면 썩는 것도 똑같을 텐데.”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어코 살고 있는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잃어버렸다며.” 칼리안은, 지금 이 말이 ‘온 생을 잃었다’ 했던 자신의 말에 대한 이야기임을 이해했다. 지금 플란츠가 똑같이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알아들었다. 똑같이 일방적이고 이기적으로 내미는 손임을 알아보았다. 비가 들이치든 말든, 비에 젖든 말든, 춥든 말든, 아프든 말든. 창문 밖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알려달라고. “말, 해보라고.” 한 번 쯤은 들어줄테니까. 원망하라고. 그런 소리임을 아주 잘 이해한 칼리안이 시선을 다시 들어올렸다. 그렇게 한참동안 자신을 보는 연두색 눈을 쳐다봤다. 그날. 먼 곳에서 지켜보던. 이미 시들어버린 눈과는 완전히 다른. 아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시간이 조금 흘렀다. 그런 뒤에야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분명,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미친놈이 기억력은 좋아가지고.” 이렇게, 하라는 원망은 안하고 욕만 했다. 같은 놈도 아닌데 원망을 왜 하나. 이 참에 욕이나 해야지. 이 정도면 됐지. 그리고는 자신을 딱 마법사 보듯 쳐다보는 플란츠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위험해서 못 엽니다. 내 형님께서 아직도 되게 약하셔서.” 시스파니안을 만났을 때 칼리안이 그리 생각하지 않았던가. 판이 크다고. 그러니 아직까지는 섣부르게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올라갔다. “내 아우님이 알아서 살려두시겠지.” 그리고는 또 이렇게 사람 복장 터뜨리는 소리를 지껄였다. 원망 끝났으면 그건 됐고, 궁금한 것은 여전히 알아야겠고, 위험해지면 그 때의 되게 강한 아우님이 알아서 살려놓을 테니까 지금의 아우님 너는 걱정하지 말고 얼른 말하라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뭐 이딴 놈이 다 있느냐는 얼굴로 플란츠를 쳐다보다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졌다는 듯 입을 열었다. “······ 일어나시죠. 보여드릴테니까.” 결국 비를 맞게 생겼다. 허락의 말을 꺼낸 칼리안이 조용히 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잠시 덮었다. 어떡하지. 실수로 죽여버릴 뻔 했을 때 그냥 죽여버릴 걸 그랬나봐. < 제27장. 지금이었다면(5) > 잿빛 비둘기 한 마리가 창가로 날아왔다. 그리 특별할 것 없을 외형을 가진 비둘기의 부리가 톡톡, 하고 창문을 쪼았다. 그러자 오래지 않아 창문이 열리며 햇빛에 그을리고 굳은살 가득한 손이 조심스레 새를 감싸잡았다. 신기하게도 새는 도망가지 않고 얌전히 그 손에 잡혀들었다. 부작용이 크고 그 성격이 잔인한 흑마법은 카이리스의 초대 왕비 시스파니안의 의지에 따라 대륙에서의 사용이 전면 금지되어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만 흑마법 중 하나인 ‘테이밍’만은 위험요소를 배제한 일반 마법으로 변형, 개선된 뒤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사용이 허락되고 있었다. 지금 막 창문을 두드렸던 새에게 바로 그 마법이 걸려 있었다. 주인의 위치를 인지하거나 날아가야 할 곳의 좌표를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즉, 전서구인 것이다. “조금 늦었네.” 쏟아지는 비를 뚫고 날아온 전서구를 안아든 기사가 응접실로 들어가자, 차 한 잔을 들고 이제 막 자리에 앉은 이가 이렇게 말했다. 밤새 무슨 고민을 그리 했는지 몰라도, 새벽이 되어 잠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막 씻고 나온 뒤인지 제대로 말리지도 않은 청은발에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었으니까. 그는 여정을 함께 할 수행원에 시종과 시녀를 한 명도 포함하지 않았었다. 기사는 자신의 주인이 시종들을 왜 데려가지 않았는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짐작을 했다. 카이리스 왕궁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돌아다닐 생각을 했기 때문이리라. 어느 날 갑자기 기르더니 또 어느 날 갑자기 짧게 잘라버린 그의 머리카락을 잠시 쳐다보던 기사, 테일란이 대답했다. “어제부터 날이 좋지 않아 도착이 늦어진 것 같습니다.” 확실히 새가 날기에 좋지 않은 날씨이기는 했다. 그들 역시 이렇게, 전날 밤부터 내렸던 비 때문에 세크리티아로 돌아가던 발이 잠시 묶였으니 말이다. “하긴 그렇지.” 그렇게 대답한 체이스가 손을 내밀자 테일란이 전서구의 다리에 묶여 있던 편지를 건넸다. 곧 보랏빛 눈으로 편지에 적힌 내용을 스치듯 읽어낸 체이스가 테이블에 놓인 향초의 불에 쪽지를 태웠다. - 한낮의 사신, 늑대 사냥꾼, 둥지 떠남. 새끼 그리핀 혹은 방울뱀 소굴 방향. 말쥐 심부름꾼 40마리 떨어뜨림. 말쥐 발자국 없음. 그것이 언제든 짙은 먹구름을 불러와 죽음을 선고하는 에우리아, 스승과 함께 대사막을 누비다 충돌했던 대사막의 전사들을 학살했던 아르센. 세크리티아 세작들이 그들 나름의 존중을 담아 지어 준 별명이었는데, 이 쪽지에 담겨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기도 했다. 지금 저 쪽지는 에우리아와 아르센이 카이리시스를 떠나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령 혹은 텐실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던 중 ‘그들’의 하수인 40명을 죽였으며, ‘그들’이 속한 단체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다른 단서는 찾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다 죽여버렸다니.” 언제나 부드럽던 체이스의 눈매가 차가운 빛을 내며 가라앉았다. 세크리티아의 새들은 지금 그 단체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잔당을 쫓은 결과를 보내야 했으나, 그 대신 에우리아의 개입으로 무산되었음을 담은 연락을 보내 온 것이다. 찬 기운과는 어울리지 않을 고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더 덩치가 컸나본데. 마법사들은 생각만큼 강하고.” 체이스는 에우리아가 ‘검은 돌’에 대해 조사를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그 단체가 무엇 때문에 에우리아와 충돌했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이 40명이나 되는 하수인을 부릴 수 있다는 것에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했으며, 두 명의 마법사가 미지의 힘을 이용하는 이들 40명을 모두 죽였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의 힘에 대해서는 직접 겪어본 기억도 있었으니까. “간신히 잡은 꼬리인데 놓친 셈이 되나.” 그리고는 이렇게 조금 아쉬워하는 말을 꺼냈다. 단체의 하수인들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고, 그들의 뒤를 쫓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단 두 명의 마법사에게 모조리 죽은데다 다른 단서까지 없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보라색 눈을 내리 뜬 채 테이블을 손 끝으로 톡톡 두드리던 체이스가 테일란을 향해 말했다. “협회장 뒤는 쫓지 말고 수도로 돌아가서 다른 단서 없는지 다시 조사하라고 전해줘. 자칫하다간 협회장 손에 내 새들도 다치겠네.” “알겠습니다, 저하.” 그렇게 대답한 테일란이 그대로 서 있었다. 보통은 할 말이 끝나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체이스의 뒤를 지키거나 밖으로 나가던 테일란이었으므로 체이스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은 뒤 입을 열었다. “얘기해.” “카이리시스의 새들이 많이 줄었는데,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테일란은 그저 ‘많이’ 라고 이야기했으나 사실 카이리시스에 심어두었던 세작은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태였다. 체이스의 명을 받은 테일란의 검이 휘둘러진 결과였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정황을 보이는 것이 체이스의 눈에 띈 새들이 전부 테일란의 손에 죽었다. 미세한 의구심 하나 넘어가지 않고 가차없이 구분지어 모조리 죽였다. 칼리안이 체이스를 찾았을 때나 플란츠가 체이스와 만났을 때 테일란이 함께 없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새장에서 벗어난 새들이, 새장 밖에 무엇이 있는지 채 알기도 전에 전부 없애버린 것이었다. 제 손으로 키워냈던 새들의 목숨을 직접 거두어들인 체이스가 낮은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당장은 늘리지 않으려고.” 카이리스 국왕이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된 이상 곧바로 수를 채워놓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만 체이스는, 무시하기 어려울 타격이 있을 것임을 충분히 감안하고 새들을 죽였다. 그러니 이제 와 아쉬워 할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언제든지 보낼 수 있게 돌아가는대로 준비는 해둬.”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테일란의 발이 한 발자국 뒤로 멀어졌다. 찻잔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채였던 체이스의 눈동자가 그 발 끝을 따라 움직였다. 조금 전의 눈빛 만큼 차가워진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 곳에서의 일, 전하께는 알리지 말았으면 하는데.” 거부한다면, 테일란 역시 버리겠다는 의미가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 평온한 말투였으나 테일란은 결코 거부할 수 없을 명령이었다.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테일란은 알겠다 답하는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것만 말씀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카이리시스의 세작들이 조사하던 것을 멋대로 바꾸고, 세작들을 멋대로 움직이고, 은거지를 바꾸고, 세작들의 존재를 카이리스 국왕에게 알리고, 세작들을 죽여 없애고. 데블란이 알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일.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렇게까지 무리를 해 가며 카이리스의 왕자 한 명을 도와준 것에 대해서. 심지어, 대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채로. 체이스의 고개가 곁에 서 있던 테일란을 향해 들어올려졌다. 잔잔한 바람에 흔들거리는 깊은 숲을 담은 눈으로 테일란을 보던 체이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냥. 잃어버린 동생 찾은 것 같아서.” 말도 안되는 진실. 거짓보다 믿기 어려운 진실. 그러니 절대로 의심받지 않을 진실. 오로지 진실 뿐인 대답이었으나, 그것이 진실임을 결코 알지 못할 테일란이 체이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카이리스 3왕자에 대한 첫인상이 어지간히도 좋았나보다 하는 얼굴이었다. 왕위에 오르기에 부족함 없던 3왕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향후 양국 관계를 위해 그렇게 도왔던 것이겠지. “알겠습니다. 전하께는 함구하겠습니다.” 알아서 판단하고 넘긴 테일란의 대답에, 오랜 시간 말 없이 앉아있던 체이스가 비에 젖은 얼굴로 웃었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민트의 향이 코 끝을 스쳤다. * * * 예상했던 것처럼 비를 맞았다. 헤이시아 궁을 향해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시간의 축이 있는곳을 향해 한 발을 더 다가갈 때마다 조금씩 더 많은 비를 맞았다. 비가 오는 것을 알았고 비를 막을 우산을 가지고 나섰으나 몰아세우듯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비를 맞았다. - 내 어머니가 그리 애써가며 걸어간 길에. 그것 말고 다른 끝이······ 있기는 할까. 문득. 정말 문득. 뒤따라 오고 있는 플란츠의 말이 생각났다. 발이 향하는 곳이 헤이시아였기 때문일지, 다른 상념이 들었던 까닭일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생각났다. 그날 칼리안이 플란츠의 손을 잡지 않았거나 혹은 플란츠가 칼리안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오늘의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서 떠올랐을 수도 있겠다고, 칼리안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 기억은 하나보지. 문득 떠올랐던 말이 시작이 되었다. 헤이시아 궁으로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갈 때마다 한 마디씩, 놈이 했던 말들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 대들고, 칼도 쓰고, 말도 타고. 너. 누구냐고. 떠올리기 그리 유쾌하지는 않은 말들을 되짚어보며, 칼리안은 조금씩 자신의 밑바닥을 향해 고요하게 잠겨들어갔다. - 그래. 불러야지. 이름으로. 사람의 걸음에는 늘 끝이 있는 법이다. 칼리안의 걸음도 마찬가지였다. 되짚어 올라가던 걸음과 헤이시아로 향하던 걸음이 모두 멈췄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물에 빠진 완두콩이 보였다. 칼리안의 뒤를 따라 온 플란츠라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결국 같은 길을 걸어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플란츠 역시 같은 비를 맞았다. 맞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칼리안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잠시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이 다시 발을 옮겼다. 한 칸 한 칸,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닫아두었던 창문이 있던 방으로 잠겨들어갔다. 멀리 빗소리가 멀어져가고, 숨 막히는 정적 속에 두 왕자의 발소리만 고요히 울려퍼졌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며 옷이며, 칼리안은 그냥 내버려 뒀다. 플란츠에게 괜한 친절을 베풀 생각도 하지 않았다. - 기억하마. 이름이 무엇이냐. 결국 누구도 온전히 불러주지 않고, 누구의 기억에도 온전히 남지 않게 된 이름을 스스로 떠올리기에도 벅찼던 탓이다. 탁. 그 방. 감춰진 것을 다시 숨겨둔 그 방 앞에 도착한 칼리안이 발을 멈췄다. 그리고 뒤로 돌아섰다. 칼리안의 뒤를 따르고 있던 플란츠의 얼굴이 가까운 곳에서 보였다. 그 연두색 눈을 응시하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 베른에 가까워진 만큼 달라진 목소리. 버거울만큼 무겁고, 놓고 싶을 만큼 괴롭고, 외면하고 싶을 만큼 아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체이스가 그러했듯이. 만약 기억이 돌아오는 방법이 시간의 축을 마주하는 것이라면, 플란츠 역시. “기억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플란츠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그것을 보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형님께서도 기억하게 될지 모릅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똑같은 악몽을 겪게 될지 모릅니다. 나조차 알 수 없는 일을 떠올리게 될지 모릅니다.” 그 말을 들은 플란츠는, 체이스가 어떻게 칼리안의 본모습을 알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체이스 역시 안에 든 무언가를 접했고 그로 인해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칼리안이 이런 말을 하는 것임을 이해했다. 칼리안조차 알 수 없는 일. 플란츠가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빼앗기 위한 전쟁을 일으킬 만큼 망가진 이유, 혹은 무언가를 빼앗아야 할 만큼 절박했던 이유. 어쩌면 그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임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플란츠가 칼리안의 얼굴을 마주 응시했다. 무겁고, 괴롭고, 아픈, 단지 그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표정의 칼리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열어. 같이 봐줄 테니까.”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기억이 돌아온 체이스를 잠시 형제로 대했던 것처럼, 기억이 돌아온 플란츠를 적으로 대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마지막으로 그것을 고민했다. 그리고 다시 뒤로 돌아서서 플란츠로부터 등을 보였다. 그것이 고민에 대한 답이자 칼리안의 결정이었다. 타인으로부터든 과거의 그림자로부터든, 지켜내면 될 일이니 어려울 것 없다고. 그렇게 생각을 마쳤다. - 그르릉 작은 소리와 함께, 비로소 문이 열렸다. < 제27장. 지금이었다면(6) > 두 번째로 찾은 시스파니안의 공간은 한층 서글프다. 괜스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그것은 동행한 이가 달라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칼리안은 잠시 앨런을 생각하려 애썼다. 앨런과 함께 왔을 때에는 이 정도로 숨이 막히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잠시 숨을 쉬었다. “이곳입니다.” 그리고 뒤따르던 플란츠를 향해 이런 당연한 사실을 담백하게 입에 올린 뒤, 뚜벅 뚜벅 걸어가 축의 파편 앞에 섰다. 말 없이 걸어 온 플란츠가 칼리안의 옆에서 발을 멈췄다. 플란츠의 연두색 눈이 잠시 축의 파편을 훑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듯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 플란츠로부터 시선을 돌린 칼리안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베른. 이제는 없는 한 사람에 대한 유일하게 온전한 기억. 그것을 담아두었던 깊은 곳의 창문을 활짝 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평생을 돌아서 살았던, 지키며 살고 지키려 싸웠던, 끝내 지키지 못하고 죽었던 베른이 되어 눈을 떴다. 그 눈으로 앞에 놓인 황금빛의 고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 시간의 축.” 그것이 칼리안에게, 그리고 플란츠에게 독이 될지. 아니라면 약이 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모르는채로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본래 세크리티아에 있었고, ‘지금’의 시간대에도 작년까지는 세크리티아에 온전히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사라졌다 들었습니다만 얼마 전 이 곳에서 이렇게 일부분만 남은 채로 발견됐습니다.” 문득 꺼내놓는 누군가의 옛날 이야기처럼, 오늘 아침에 들은 부풀려진 경험담처럼, 꽤 그럴싸한 책 속의 설화처럼. 마치 내 일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입 밖으로 꺼내진 말이 이어졌다. “단 한 번,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물건입니다. 신물이 아닐까 여겼으나 정확히는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베른이, 어울리지 않을 붉은 눈을 돌려 플란츠를 향해 섰다. 그런 상태로 다시 입을 열었다. 원망은 아니었지만 조금쯤 궁금해하는 얼굴을 한 채였다. 왜 그랬을까, 라는 의문을. “어느 날 이것을 사이에 두고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베른과 체이스가 플란츠로부터 이것을 지키려 했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 말해서 상처를 만들 이유가 없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누군가가 겪었던,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참극이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그저 두 나라의 전쟁일 뿐이었다. 원인도 결과도 분명한 단순한 전쟁. 언제나 있어왔던 그런 전쟁 말이다. 누군가는 이겼고, 누군가는 패했다.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단지 그 뿐임을 지금의 베른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플란츠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볼 수 있도록 단어를 골랐다. 그것이 베른이 내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식 같기도 혹은 자조어린 비웃음같기도 한 소리가 플란츠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플란츠는 똑똑했다. 베른이 내어준 배려를 무시하고 굳이 한 발 가까운 곳까지 걸어와 베른의 말을 들었다. 언젠가의 플란츠가 저것을 뺏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음을,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참상을 겪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고작.” 이 곳에 숨겨진 것. 플란츠가 함께 알고 있기를 종용한 비밀이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일지, 그것까지는 플란츠도 가늠해내지 못했을 터였다. “고작, 저것을 빼앗자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흔들렸다. 플란츠는 이곳에 숨겨진 것이 베른의 비밀과 관련된 어떤 물건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라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칼리안이 꾹꾹 눌러담고 있는 베른의 일들에 대해 함께 알고자 했으리라고. 베른은 그렇게 생각했다. 베른의 죽음과 세크리티아의 멸망을 직접적으로 야기한 원인을 눈으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네. 고작 이것을.” 이렇게 대꾸한 베른이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여전히 숨을 쉰다. 플란츠 역시 숨을 쉬고 있으니, 둘 모두 아직은 살만한 것임을 안다. 그래서 멈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오랜 생각을 하도록 두느니 다른 말을 들려주는 것이 나을 테니까. “사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매 한 마리의 발목에 묶인 편지에 쓰여 있더군요.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것을 달라고. 그리하면 물러가겠다고. 이유조차 제대로 적혀있지 않은 요구였고,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베른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설명도 이유도 없는 짧은 서신이었다. 그것을 돌이켜보니, 지극히 플란츠다운 행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웃었다. 말 귀찮아하는 플란츠라면 그런 편지를 보내고도 남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탓에, 그래서 잠깐 웃었다. 참 아프게도 웃었다. 처음으로 앨런에게 베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날. 앨런은 ‘시간의 축과 관련된 일로 체이스와 베른 모두 나를 찾았으니 둘이 형제는 형제인가보다’라고 말했었다. 그 때 꺼내졌던 앨런의 말에 지어보였던 것 같이, 비슷하지만 또 많이 다른 의미가 담긴 아픈 웃음을 지었다. “지금이었다면. 당신의 그 짧은 말을 내가 알아봤을까.” 지금이었다면, 미친 왕이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한다 여기기 전에 무슨 마음으로 편지를 썼을지 알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글자로 적히지 않은 말을 전부 다 이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뭐 어쨌거나 이미 늦었으니까. 그건 됐고. 아무튼.” 편지 내용을 다시 떠올려 곱씹어보지는 않았다.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을까봐. 그것이 우습고 무서워서. 말 없이 서 있는 플란츠에게서 축의 파편으로 시선을 돌린 베른이 고리의 테두리에 적힌 알 수 없는 문자를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눈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였다. “새를 되돌려보낸 뒤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플란츠의 고개가 베른을 향해 돌아왔다. 베른은 말 없이 잠시 서 있었고, 플란츠가 말했다. “그건. 이상한데.” 확실히 이상하다. 카이리시스와 세크리티아는 그 정도로 가깝지 않다. 그런데 새가 다시 날아가고 한 달이 되지 않아 전쟁이 벌어지다니. “당신도 이상하다 여기는데. 우리는 오죽했을까.” 그 예고 없는 전쟁 앞에서 오죽 놀라고, 오죽 당황하고, 오죽 절망했을까 라는 말 대신, 베른은 그냥 어깨를 으쓱여보이며 농담처럼 가볍게 대꾸했다. “카이리시스에서 세크리티아까지 한 달 반이 걸립니다. 군대라면 더 오래 걸릴 텐데 그렇게나 빨리 왔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몰랐습니다.” 그 동안 아무것도, 몰랐다. 국경 인근에서 수많은 마법사들과 기사들을 발견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 많은 군인이 국경을 향해 다가오는데 수많은 세작들은 그 어떤 정보도 전달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그들이 세크리티아를 배반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섣불리 판단할 수 있을 내용은 아니었다. 그 전까지 그들은 충성스러운 새들일 뿐이었으니까. “새들이 다 죽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해서 비밀리에 준비를 해 두었을 수도 있고.” 세작들의 배반, 세작들의 죽음, 혹은 이동 마법진, 등등. 이제와서는 가정들일 뿐이지만 세작들이 소식을 전달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전달하지 못한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확인할 수 있다 한들 이미 많은 것이 틀어져 소용 없는 상태가 아닌가. 베른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발발했습니다.” 당시에는 더더욱 그랬다. 무슨 이유였는지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군대를 확인했을 땐 이미 너무 늦었고, 더 많은 것을 확인하기 전에 모든 일이 끝났다. “이미 아시는대로 발칸은 강했으니 막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영지는 건드리지도 않고 곧장 세크레타로 진입하더군요. 좀 쉬엄쉬엄 왔어도 좋았을 것을, 어찌나 한결같은지.” 그 말의 끝에 베른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때 베른이 플란츠를 향해 얼마나 많은 욕을 했는지, 플란츠는 죽어도 모를 거다. “세크리티아의 기사단이 전멸했습니다. 내게 검을 가르쳐 준 스승님, 기사 테일란. 그가 발칸의 진입을 사흘 미뤘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마지막 준비를 했고. 나를 뺀 모두가······ 죽었습니다. 나도 꽤 오래 버텼는데 밤이 몇 번 갔는지, 아침이 몇 번 왔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납니다. 아마 스승님께 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다 발칸의 군단장이라는 이가 나섰고.” 이름 물어보더니 공격하던 미친 마법사 한 명을 떠올린 베른이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결과는 이미 아시는대로, 이렇게.” 그렇게 말한 베른이 자신의 몸을 툭 쳐 보였다.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다시 시작됐다. 그런 의미를 담은 채였다. 거기까지가 베른의 기억이었다. 굳이 그날 본 플란츠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플란츠에게 있어 확실한 독일 뿐이니 입 밖으로 꺼낼 이유가 없었다. “내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베른이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한껏 흐트러진 기억을 다시 보듬었다. 손에 모인 것을 그러모아 칼리안의 밑바닥 가장 깊은 곳에 다시 두었다. 베른의 기억을 누군가의 앞에 내어놓을 일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더는 아쉽지 않았다. 그렇게 추스른 뒤 다시 칼리안으로 되돌아와 눈을 떴다. 소리 없이 긴 숨을 내쉬는 플란츠의 모습이 보였다. 칼리안의 입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말씀드렸듯이 시간은 한 번 밖에 되돌리지 못한다 하였고, 제가 온 그 날에 세크리티아에 온전히 있던 시간의 축도 사라졌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 이렇게 다시 찾게 됐네요. 두 번 다시는 못 쓰도록 부숴버리려고 했는데, 애석하게도.” 칼리안이 발을 뻗어 눈 앞의 허공에 발 끝을 몇 번 가져다 댔다. 툭툭, 하고 무언가에 발이 닿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원망도 화풀이도 못하게 되어서 곤란해하고 있는 중입니다.” 플란츠가 원망하라고 기껏 내어줬던 자리를 굳이 마다하고 욕만 했던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아무 말 없이 칼리안의 모든 말을 들은 플란츠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래.” 아무런 감상도 들어있지 않은 말이었으므로, 칼리안이 묘한 미소를 띄워올리며 말했다. “모으신다면, 사용하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기억이 돌아오게 되면 시간의 축을 다시 원하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플란츠가 가장 후회하는 것들을 되돌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었고, 만약 ‘과거’의 플란츠가 그것을 원했던 이유를 기억해내면 다시 되돌리고 싶어질지 모른다는 말이기도 했다. “말 끝나니 바로 짖네.” 플란츠가 곧바로 대꾸했다. “어떻게 해야 없어지는데.”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며 물었다. 그것이 더는 기회도 아니며 축복도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없애버릴 방법을 알려달라는 의미였다. “아직이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시스파니안을 만나러 갈 생각인데.” 시스파니안을 만난다는 말에 플란츠의 눈이 다시 가늘게 변했으나, 칼리안은 설명해주지 않았다. 베른에 대해 이야기해주겠다 했지 칼리안에 대한 것까지 털어놓겠다고는 안 했다. “일단 급한 것 먼저 해결해놓고 가려고요.” ‘급한 것’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자신임을 잘 알고 있는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곧 칼리안이 석벽의 조각들을 한 번 쭉 둘러본 뒤 계단 쪽으로 발을 돌렸다. “잠깐만.” 그런 칼리안의 발걸음을 플란츠가 불러세웠다. 아직 물어볼 것이 있었다. 이제 막 나가려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봤고, 플란츠가 짧게 물었다. “네 이름. 뭔데.” 칼리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을 읽어내기 어려운 얼굴로 밖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쳐다보고 있었다. 베른의 이름을 알려달라는 말임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냥 잠시 멍해져서 말 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기억하는 것,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알려달라고.” 이왕이면 연세도 같이 알려주면 좋고. 플란츠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선 채로 가만히 있던 칼리안이 웃기 시작했다.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한, 속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더는 칼리안으로 살고 있는 베른이 아니었다. 속에 담아 둔 베른을 다 꺼내 보여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칼리안입니다, 형님.” 그리고는 남은 감정 다 씻어낼 비 맞으러, 곧은 걸음을 뗐다. 이번에도 연세는 알려주지 않은 채였다. < 제28장.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1) > 비 오는 밤. 달은 분명 밝을 터였다. 다만 대지와 하늘 사이를 가린 저 먹구름에 가려 제 빛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뿐임을 안다. 언제나와 같이 밝을 것이 분명한 달조차 보이지 않는 비 오는 밤이란 또 얼마나 운치있는지. 그러니 분명 누구든 그 비 오는 밤이 참 기껍다 느껴지던 어느 날이 한 번 쯤은 꼭 있으리라. 물론, 지금 잠자리를 마련한 곳이 야외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야외만 아니라면 기꺼웠을 터였다. 비와 함께 흘러내리는, 어울리지도 않을 감수성에 마음껏 젖어든 채 맥주든 혹은 카이리스에서 가장 독하기로 이름난 히몰리카든, 무엇이어도 좋을 한 잔의 술을 손에 들고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는 떨어지는 빗물을 보며 애진작에 때려친 다른 속성의 마법에 대한 씁쓸한 추억이나 한 점 되새겨 보았을 터였다. - 그 때 태워먹은 집이 이제는 흔적도 남지 않았겠구나······. 하, 세월이란 어찌나 허망한지. 따위의 되새김 말이다. “도무지 그칠 생각을 안 하네.” 봄을 보내기 위한 비일지, 아니면 여름을 부르기 위한 비일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계속 비가 내렸다. 하지만 당장은 감상에 젖어들 수 있을 창문도 없었고, 빗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려줄 지붕도 없었다. 지금 있는 곳이 따뜻한 실내가 아니라는 사실도 불만이 컸지만, 무엇보다도 손에 들릴 술이 없었다. 그것이 가장 불만이었다. “아. 술 마시고 싶다.” 그래서 에우리아는 이렇게, 본능에 충실한 한 마디를 꺼내드는 것으로 불만을 조금 털어냈다. - 타닥, 타닥. 마치 그 말에 대한 대답을 내어놓듯. 조용히 타오르는 모닥불의 불티 하나가 허공으로 비산하다 어느새 꺼져 사라졌다. 가망 없는 희망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처럼. 그래서 에우리아는 더욱 커진 불만을 가득 담은 눈으로 빛이 사라진 곳을 좇았다. 곧 에우리아의 시선이 먼 하늘을 향했다. “나도 참 사서 고생이지.” 그 말 그대로였다. 동행하고 있는 아르센이야 칼리안의 명 때문에 가야 할 길이라지만 에우리아는 아니었다. 심지어 칼리안은 에우리아가 이곳에 왜 왔는지 그 이유도 제대로 모르고 있지 않나. 그러니 남들 몰래 핑계를 대가며 이 자리까지 온 것은 그저 에우리아 스스로가 자처한 고생이 맞았다. “알고는 계셔서 다행입니다.” 누군가가 에우리아의 말에 말대꾸를 했다. 당연하겠지만 아르센이었다. “여기 이렇게, 사지도 않은 고생 하는 사람도 있으니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십시오.” 녹지 않을 얼음막을 만들어 지붕 삼고, 비에 젖은 땅과 장작을 마법으로 말리고, 쉬이 꺼지지 않을 불꽃을 일으켜 장작에 붙였다. 이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부려지는 아르센이 혼자 했다. 그러니 불만이 잔뜩 쌓여 있을 밖에. “뭐, 그럼 내가 해?” 아르센의 말을 들은 에우리아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고, 내가 너보다 더 세고, 내가 너보다 더 감상적인데. 왜 그걸 내가 하냐. 내리는 비 감상하기도 바쁜데. “그나저나 저 새들은 이 빗속에 밥은 챙겨 먹고 다니나 모르겠네.” 그리고 에우리아는, 모닥불에서 튀어오르는 불티들을 계속 눈으로 따라가며 말했다. 인근까지 마나를 확장시켜 체이스의 세작들이 여전히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본 뒤였다. “뭐, 그럼 밥이라도 챙겨주시려고 그러십니까?” “겁대가리.” 뭐 한 마디 할 틈을 안 준다. “네, 다시 찾아왔습니다.” 가히 학살이라 해야 할 광경을 자아내며 40명을 나란히 저승길로 보내더니 어울리지 않게 남의 끼니 걱정이나 하고 있는 에우리아를 슬쩍 쳐다본 아르센이 물었다. “놈들이 왜 따라붙는 것인지 정말 모르십니까.” “어, 몰라.” 그렇게 대답한 에우리아가 약간의 화를 담아 입을 열었다. “하루만 더 따라오면 다 잡아버려야지.” 새들이 따라붙는 것을 알고 이리저리 경로를 바꿔가며 오는 통에 일정만 지연됐다. 덕분에 비 오는 날 술도 못마신다. 그러니 화가 나겠나, 안 나겠나. 그 말에, 사지도 않은 고생에 이제는 도가 튼 아르센이 열심히 멧돼지 고기를 뒤집어 익혔다. 혹시라도 새 대신 파란 머리 마법사 잡으려 들까봐서였다. 고기는 씹는 맛이 제일이라는 에우리아의 말 때문에, 안그래도 근육질 가득한데 두툼하게 썰기까지 한 고기가 쉬이 익지 않았다. 심지어, 고기는 익히는 사람의 정성만큼 맛있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은근슬쩍 마법으로 익히려던 것까지 포기했다. 그래서 멍한 눈으로 고기가 느릿느릿 익어가는 것을 보던 아르센이 화제를 바꾸려 다른 질문을 했다. “그나저나, 왕자님께는 정말 알리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지금 어디로 왜 가시는지요.” “위험하니까 너는 꺼져있으라고 예쁘게 말씀하실 것 뻔한데 뭐하러.” 물론 예의범절 중시하는 칼리안은 그렇게 말 한 적 없었다. 그냥 의미가 그렇다는 소리다. 아무튼 에우리아는 칼리안이 지닌 검은 빛의 돌에 대해 조사중이었다. 그러던 중 한 명의 학자가 ‘신물을 만들 수 있다’ 주장한 기록을 보았고, 그 자가 마지막으로 살았다고 알려진 연구실에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칼리안을 습격했던 단체의 놈들을 만났다. 그래서 다 죽였다. 그 뒤로 따라 붙은 것은, 재밌게도 놈들이 아니라 체이스의 새들이었다. 그래서 에우리아는 지금 놈들도 죽여버릴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는 참이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도 같은 것을 조사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고기 탄다.” 말을 돌리려는 게 아니라 진짜 탔다. 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에우리아는 고기만 걱정했다. 관심 두는 것 외에는 눈 돌리지 않는 소신있는 모습. 이 얼마나 실력있는 마법사다운 면이란 말인가. 멧돼지 잡아 왔을 때의 마음을 담아 정확히 열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 있던 고기를 서둘러 뒤적거린 아르센이 에우리아를 쳐다봤다. 고기 뒤집었으니 대답해달라는 의미였다. “그럴 수도 있고.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지. 그 왕세자가 왜 우리 왕자님한테 그렇게 신경을 쓰는지 알 수가 없어. 왕자님께서 왕위에 오르시면 잘 지내보려 도와주는 것 아닐까 싶다가도 도와주는 티도 안 내는 걸 보면 그도 아닌 것 같고.” 일반적으로 대가를 바라고 도움을 줄 땐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나중에 이 정도는 해라’ 하고 티를 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체이스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래서 에우리아가 이상하다 여기는 것이었다. “티내는 것 하나 없이 그냥 신경을 써. 심지어 마나실 백작님은 그걸 당연하게 여긴단 말이지.” “군단장님은 그러실 수 있습니다.” 아르센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세상에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은 칼리안을 도와 마땅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바로 앨런 아닌가? “하지만 왕자님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체이스의 도움을 그 칼리안이 모를 리 없다. 게다가 사소한 것 하나 대가 없이 받지 않는 것이 칼리안 아닌가. 그런데 체이스의 도움만은 주섬주섬 잘도 받았다. “그런 왕자님이 도움을 그냥 받았다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르피아 궁 앞에서 마주했던 체이스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 아르센이 다시 한 번 고기를 뒤적거렸다. “속 모를 도움 받으시는 분 아니니 그냥 두십시오.” 궁금한 것 못 참는 마법사가 이렇게 말을 한다. 다 이유가 있을테니 그냥 믿고 넘기라고. 놈들과의 두 번째 싸움이 있던 날. 체이스에게 앨런을 보내고 칼리안에게 기사 테일란을 보냈던 둘을 생각한 에우리아가 ‘그런가’ 하고 중얼거리며 입술을 오므려 닫았다. “그나저나, 혼자 가시기에는 위험한 것 아닙니까.” 칼리안에게 그리 큰 해를 입힌 것은 소드마스터에 가까운 검술을 지닌 이였다고 했다. 상대가 소드마스터가 아니었음에도 칼리안이 당했다는 뜻이다. 만약 지금 에우리아가 쫓아가고 있는 이들 중 한 명이라도 그런 실력을 지닌 이가 있다면 에우리아 역시 안전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너 데리고 갈 거잖아.” 아르센은 그래도 꽤 여러번 칼리안과 대련을 했다. 게다가 그 동안 상대해왔던 이들도 대체로 검을 쓰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움직임 빠르고 제대로 검술 사용할 줄 아는 기사를 상대로 싸우는 것은 아르센이 나을 때가 많았다. 이미 자신을 데리고 목적지로 갈 생각을 했다는 말에, 아르센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할 일 있습니다.” “어. 거기 나도 같이 가려고. 나도 도와줄테니까 꼬맹이 너도 도우면 되겠네.” 저 멀리 작게 보이는 변경백령의 불빛을 보며, 아르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변경백령에도 할 일 있지만 발칸에도 일이 쌓였을 겁니다. 놈들 분명히 제멋대로 일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플란츠 부군단장님이 제 일 도와줄 위인도 아니고 말입니다. 게다가 수도에 노는 마법사 많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바빠서 못 도와주니 너 혼자가라는 소리였다. 싫으면 카이리시스로 돌아가서 다른 한가한 마법사 데리고 다시 오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에우리아는 화를 내는 대신 곱게 웃었다. 그리고는 아르센이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한 마디를 꺼냈다. “이동 마법진 거의 다 완성되고 있어. 도와주면 태워줄게.” 이동 마법진 따위로 꼬시려 들다니. 아무리 이동 마법진을 한 번도 이용해본 적 없다지만 사람을 너무 쉽게 보는 것 아니냔 말이다. 이런 생각에, 아르센이 다 익은 고기가 가지런히 놓인 접시를 에우리아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협회장님. 저만 믿으십시오.” 이것 참. 마법사들이란. * * * 칼리안은 늘 그랬다. 굳이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미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칼리안이 베른을 꺼내든 날에는 검을 집어넣는다는 것을. 늘 그랬다는 것을 플란츠는 알고 있었다. “형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빌헬름.” 그래서 플란츠는, 계단을 모두 올라온 뒤 헤이시아 궁을 나서려다 말고 물어오는 칼리안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한 바퀴 하고도 절반은 더 돌아버린 것 같은 또 다른 부군단장이 남겨놓고 간 일을 처리해야 했던 탓도 있었고, 체르밀로 돌아가면 그 어두운 방에서 또 생각이 이어질 것 같아서였기도 했다. 그렇게 할 일이 끝나고 나면, 수련장에 가서 키리에를 붙들어 볼까. 어쩐지 오늘이라면 살기등등한 그 검을 제대로 받아봐도 좋을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같이 가시죠, 빌헬름 관. 훈련장으로.” 대련을 하자는 소리였다. 무슨 생각인지 묻는 눈으로 쳐다보니,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대답이 들려왔다. “지금쯤 전하께서 체르밀에 계실 겁니다. 오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마주치기엔, 죄송하지만 조금 피곤하네요.” 르메인이 온다는 이야기는, 당연하겠지만 플란츠 역시 들었다. 다만 란델을 만나러 온다 했었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피곤하다더니.” 르메인을 마주치기엔 피곤해서 대련을 하자는 말이 앞 뒤가 안맞는다. 하여튼 거짓말을 할 줄 알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운 놈이다. 그렇게 되나, 하고 피식 웃은 칼리안이 다시 대답했다. “사실 딱히 갈 곳도 없고요. 이런 꼴로 어딜 가면 전부 걱정을 해서.” 얀에게 가면 얀이 걱정을 하고, 앨런에게 가면 앨런이 걱정을 한다. 심지어 레이븐까지 걱정을 하니 숲에도 못 간단다.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었다. 흰 고양이를 안고 다니면서도 당당하게 검은 옷만 입는 놈 아니던가. 물에 들어갔다 나온 꼬락서니는 놈의 주문 한 마디면 곧바로 멀쩡하게 바뀌는 것을 안다. 그러니 지금 저 말은 어줍잖게 둘러대는 두 번째 핑계일 터였다. 제 걱정 해 줄 사람 가득한 이 궁 안에서, 아무도 걱정 안 해줄 플란츠가 신경쓰여 하는 말인 것이다. 그래서 플란츠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대꾸했다. “내 아우님께선 마음이 어찌나 넓으신지.” “그것을 이제야 아셨습니까. 똑똑하신 만큼 눈치도 빠르신 줄 알았는데요.” “짖지, 또.” 그래서 한 소리를 했더니 한 술을 더 뜬다. 조금 전 시간의 축을 보던 그 표정을 고스란히 지켜본 사람을 향해서.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 하.” 더는 할 말도 없어진 플란츠가 이렇게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던지.” 결국 또 이렇게 칼리안이 하자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은 정말로 동생 손에 죽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어쩔 수 있겠나 싶어서였다. 그렇게 감추려던 것을 굳이 들춰내 헤집어 놓은 것은 플란츠인데, 정작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칼리안이다. 그것을 플란츠도 알고 있으니 짜증나는 것을 참아 줄 밖에. 이런 플란츠를 보며 씩 웃은 칼리안이 뒤로 돌아 헤이시아 궁 밖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다시 멈췄다. 방금 전 걸어나온 시스파니안의 방 안에서 무언가 느껴진 까닭이다. 곁을 돌아보니 플란츠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변을 지키던 마법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기운을 오로지 칼리안만 느끼고 있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칼리안이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만. 먼저 가시겠습니까.”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느낀 것임을 눈치챈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더 숨기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만나러 가려 했더니 찾아오셨네요. 아무래도 저를 부르시는 것 같은데.” 헤이시아의 주인 말입니다. 숨겨진 말을 들은 플란츠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칼리안의 입에는 짙은 호선이 그려졌다. < 제28장.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2) > 그저 살고자 했을 뿐인데. 길을 나서면 비가 내리고, 손에 쥐고 나면 놓게 되고, 간신히 벗어나 올라오니 다시 내려오라 부른다. 선택이 잘못된 것인지. 운명이 잘못된 것인지. 하기사. 그토록 증오하던 놈까지 굳굳이 살리고자 살고 있으니, 틀어질대로 틀어진 삶을 두고 무언가를 탓하겠다 말하기도 힘겹다. “하······.” 그래서 칼리안은 그냥 한숨만 한 번 쉬었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 미련 없이 돌아섰던 헤이시아 궁의 지하로 다시 내려갔다. 그래도 베른을 떠올리며 잠겨드는 기분을 또 느낀 것은 아니었으니, 그것 하나만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래로 내려가자 조금 생소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늘 닫혀 있던 석문이 열려 있었다. 항상 잠시동안만 열렸다가 곧 닫히던 문이었는데 지금은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치 초대한 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한 칼리안이 한 발자국 안으로 들어서니, 이제는 익숙해진 듯한 소리와 함께 석문이 닫혔다. 칼리안은 그것만으로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로 이 곳의 주인이 찾아와 있다는 것을. 문 앞에 선 칼리안이 내딛으려던 발을 멈췄다. 그리고 말 없이 앞을 바라봤다.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발견한 까닭이다. 날갯짓. 이 비와 절대로 어울리지 않을 한 생명의 가느다란 날갯짓. - 팔랑 나비였다. 작고 검은 나비 한 마리가 칼리안의 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리고는 팔랑 팔랑 날갯짓을 해 가며 방 안의 이곳 저곳을 날아다녔다. 석벽의 조각을 제멋대로 둘러보듯이, 하지만 뒤따르는 눈길을 충분히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날고 있었다. 나비의 뒤를 따라 반짝이다 사라지는 까만 빛무리에 시선이 머무른다. 만약 저 하늘 어딘가에 검은 별이 있다면 그 별의 발자국을 흩뿌리는 것 같다고,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 팔랑, 팔랑 곧 검은 나비는 날아다니는 것이 진부해진 것처럼 굴었다. 그리하여 그 날갯짓이 조금 느려진 것이 확연히 눈에 뜨일 때 쯤, 나비는 방향을 돌려 축의 파편을 향해 날았다. 그리고는 칼리안이 무슨 수를 써도 들어가지 못했던 벽을 쉬이 지나, 파편의 위에 보란듯이 내려앉았다. 그것을 보던 칼리안이 나비의 날갯짓같은 가느다란 호선을 입가에 그려냈다. “검은 나비는.” 그리고는 그 작고 검은 나비를 향해 이렇게 말을 건넸다. 고작 나비 한 마리를 앞에 두고 꺼내진 것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정중한 목소리였다. “죽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리 환영받지 못합니다.” 마치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나비가 날개를 한 번 팔락였다. 그러자 지금껏 나비의 뒤를 따라 반짝이던 검은빛의 입자가 나비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나비를 중심으로 작은 우주가 만들어진 것 같은 모양새를 냈다. 밤을 담은 색이 어찌 저리도 찬란하게 빛날 수 있을까! 칼리안은 진심으로 감탄하는 눈을 한 채 칠흑의 반짝임을 잠시 지켜봤다. 조금씩 모여든 빛무리가 어느새 작은 나비의 몸을 가릴 만큼 늘어나더니 점점 더 그 크기를 부풀려 나갔다. 그리고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형태를 빚어나갔다. 인간의 것에 비견되지 않을 존귀함을 지닌 이의 모습으로 변화해갔다. “그러니 오직 너에게만은 환영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 구불구불한 긴 머리카락의 끝에 그 반짝임이 잠시 머물다 천천히 사라져 갈 때 쯤, 나비이기도 했고 밤하늘이 담긴 빛이기도 했으며 스스로 위대한 존재이기도 한 시스파니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칼리안의 말에 대한 답을 전했다. 칼리안은 깊은 미소를 드리운 채 고개 숙여 예를 보였다. “지극히 위대한, 시스파니안을 뵙습니다.” 칼리안이라면 죽음을 반겨주리라는 말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였다. 칼리안의 앞에 다시 한 번 나선 태고의 고룡,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말 없이 칼리안의 눈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해하고자 했다. 하여 다시 너를 불렀다.” 지금 시스파니안은 그 존재 자체를 드높일 피어를 전혀 내보내고 있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고개 숙이고 무릎 꿇어야 할 것 같은, 스스로의 목을 졸라야 할 것 같은 그 대단한 공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다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감조차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마치 이 곳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래서 칼리안 홀로 이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덕분에 칼리안은 잠깐 고민할 수 있었다. 당신이 살던 궁을 부숴버린 이유를 변명해서 이해시켜 드려야 할지, 혹은 어떤 것에 대한 이해를 원하시는지를 물어보아야 할지에 대해서. “무엇에 대한 이해를 말씀하십니까.” 그러다 결국은 이렇게 직접 묻게 되었다.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봤다. 칼리안은 이제 막 방 안에 들어선 참이었다. 그리고 시스파니안은 발을 옮겨 마지막 조각이 새겨진 벽화 앞에 선 채로 대답했다. 둘의 거리가 꽤 멀었으나, 마치 칼리안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은 작지만 또렷한 음성이었다. “무엇이어도 좋겠지.” 아······. 초대왕 하츠아라시여. 도대체 저런 분이 어디가 좋아서 청혼을 하셨습니까?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한 분인데요. 이쯤되니 알겠다. 말이 짧은 것은 유전임이 분명하다. 르메인도 말이 길지 않고 란델은 아예 말이 없다. 심지어 나머지 한 놈은 삶은 완두콩이다. 놈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머리만 아프고 말해봐야 공기가 아깝다. 그런 칼리안을 본 시스파니안이 조금 웃는 듯한 얼굴을 했다. 표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나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방금 전 칼리안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시스파니안은, 자신이 살던 옛 궁을 시원하게 없애버린 것을 힐난하려 들지는 않았다. “재앙의 파편이 있는 곳에 걸음을 해도 될 이를 구분하지 않더구나.” 재앙의 파편. 시스파니안은 시간의 축의 파편을 그렇게 불렀다. 시간의 축을 재앙이라 이름했다. 그것이 너무나 정확한 표현이라서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웃음 소리를 냈다. 그 후에 시스파니안이 꺼낸 말의 뜻을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지금 시스파니안은 칼리안이 이 곳에 플란츠를 데려온 것을 질책하는 말을 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시간의 뒤얽힘과 무관한 이에게 사실을 알리고 시간의 축을 보여준 일에 대해서. 그 행동의 경솔함에 대해서. “제게는 치유 받을 권리조차 없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이렇게 물었다. 그것조차 할 수 없느냐고. “아무도 모를 칼날을 끌어안아 상처입고, 짓무르고, 곪아서. 썩은 것을 도려내고 도려내어 끝내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그리 살아야 할까요. 저는. 그래야 합니까.” 원망. 그래, 원망하였다. 화풀이를 하였다. 많은 것을 알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시스파니안에게, 사실은 시스파니안의 귀를 빌려 세렌티에게. 화풀이 같은 원망을 전했다. 이미 잘 알고 이해하고 결정하여 받아들인 것임에도 그렇게 말했다. - 사락······.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을 향해 몸을 돌려 섰다.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 끝이 석벽을 스쳤다. 그 작은 소리가 심장 박동만큼 크게 들렸다. 시스파니안은 생명의 힘이 가득 담긴 듯한 그 붉은 눈으로 칼리안의 핏빛 눈을 쳐다봤다. 결국 자신과 같은 색의 그 눈을 깊이 내려다보다, 고요한 바람결에 떨구어진 나뭇잎 같은 대답을 내려놓았다. “내가 이해하였다.” 그렇게만 대답했다. 자신의 질책에 대한 칼리안의 대답을 이해했다고. 다 짓이겨지도록 힘껏 품어두었던 속마음을 이해했다고. - 원망도 화풀이도 못하게 되어서 곤란해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제야 조금 전 플란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시스파니안은 시간의 축이 있는 곳에, 재앙이 있는 곳에 플란츠를 데리고 들어온 칼리안을 보았다. 그 속내마저도 함께 보고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와주었다. 그 누구에게도 꺼내놓지 못할 원망과 화풀이를 들어주려고.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 감사합니다.” 이 사려 깊은 고룡이 이 곳에 왜 왔는지를 이제야 이해한 칼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 * * 마법사의 옷은 하나도 젖지 않았다. 단지 그것이 신기해서, 제 손으로 우산을 든 것이 조금쯤 어색했던 플란츠가 앨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칼리안이 형제의 미친짓에 겁을 먹기를 그만두었다던 말을 집어던지듯이 건네고 사라진 앨런이었다. 그 후로 이렇게 맞닥뜨린 것이 처음임을 깨달았다. 물론 그동안 발칸의 일로 몇 번을 만나기는 했으나, 그 때마다 정신머리가 온전하지 않은 것이 분명한 마법사 한 명이 꼭 끼어 있었으니까. “안녕하십니까, 플란츠 왕자님.” 플란츠를 본 앨런이 예를 보였다. “이런 곳에 홀로 무슨 일이신지요.” 그러더니 이렇게 곧바로 입을 열었다. 카이리스에서는 왕족이 예를 받기 전에는 먼저 입을 열 수 없었고 리베른에서는 아니었다. 다만 앨런이 그 정도의 예법을 혼돈해서 이렇게 말을 건넨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무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신경을 안 쓰는 것일 뿐. 그래도 될 정도의 능력은 있는 사람이니까. 사실 플란츠 역시 예법을 잘 지키고 있다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랬다면 얇은 가디건 차림으로 밖에 나오지도 않았을 테고, 제 손으로 우산을 들고 서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비에 맞을지언정 제 손에 들린 것 하나 없이 늘 꼿꼿이 서 있어야 하는 왕족이 아닌가. 그래서 플란츠는 앨런의 태도를 지적하는 대신 잠시 입을 다물었다. 빗속에 멀뚱이 서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해야 할지, 같이 오다 훌쩍 가버린 동생놈 덕분에 어디로 가야할까를 다시 결정하고 있었다 해야 할지, 갑자기 왕궁을 찾아온 전설 속의 조상님이 헤이시아 궁의 지하에서 살아 숨쉬고 계시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깊이 고민중이었다 해야 할지. “당신은.” 그래서 그냥 이렇게 되물었다. 왕자니까. 대답 쯤이야 안 하고 넘겨도 무방한 것이다. 예법을 챙길 때에야 왕족이 아닌 것이 좋지만 또 이럴 땐 왕족인 것만큼 편한 위치가 어디 있겠는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런 플란츠의 꼬락서니를 보던 앨런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뭐 하냐 묻는 말에 그러는 너는 뭐 하냐 되묻고, 그에 대해 실례한다고 대답했으니, 아무튼 지금 서로 할 말만 하고 있는 상황이 맞다. 그러거나 말거나 앨런은 실례하겠다 말했으니 하고자 한 일을 계속 했다. 애초에 지금 하려는 일에 허락을 구할 생각으로 꺼낸 말도 아니었다. 앨런이니까. - 딱! 경쾌한 소리가 앨런의 손 끝에서 나오자, 비에 쫄딱 젖어있던 플란츠의 머리와 옷이 일순간에 마르며 깨끗해졌다. 그러고보니 칼리안은 끝끝내 플란츠의 옷을 말려놓지 않고 내려가버렸다. 애초에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줄 사이도 아니었으니 그건 됐다. 비가 그치지 않으니 곧 다시 젖겠지만, 잠시 찾아온 쾌적함이 영 싫지는 않았다. “마법사. 당신은 여기 왜 왔는데.” 그래서 플란츠는 이렇게, 쾌적해진 마음을 담아서 조금 더 정확한 질문을 해 줬다. 마법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칼리안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 했지 않나. 그러니 앨런이 시스파니안의 기운을 느끼고 이 곳에 온 것은 아닐 터였다. 만약 그랬다면 앨런이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지도 못했으리라. 플란츠에게 있어서는 그냥 좀 오래된 조상님이지만, 마법사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던가. “잠시 둘러보고자 왔습니다.” 플란츠의 생각이 맞았는지 앨런이 이렇게 대답했다. 저 아래 무엇이 있는지 플란츠가 이미 보았음을 몰랐으므로 ‘벽에 조각된 것을 다시 꼼꼼히 둘러보려 한다’는 방문 사유를 정확히 말하지 않은 채였다. “나중에 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플란츠가 이렇게 대답했다. 가디건 끝이 다시 젖어드는지 조금씩 묵직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긴 것을 입고 나오지 말 걸 그랬다.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계단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 아우님께서 먼저 둘러보고 계시는 중이라.” 칼리안과 플란츠가 함께 이 곳에 온 것으로 보이는데다, ‘아래’ 무언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안다는 듯한 반응이다. 때문에 앨런은 복잡해진 얼굴로 플란츠를 쳐다봤고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들었어. 시간의 축. 내가 뭘 했는지도.” 어차피 앨런은 칼리안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을 플란츠도 알았다. 그래서 플란츠는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고 확실하게 알렸다. 플란츠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던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누어 드셨다더니, 정말이었나 봅니다.” 체이스가 카이리시스를 떠났던 날, 사제간에 오고갔던 수많은 이야기 중 플란츠에 대한 말이 나왔었다. 체이스가 가져온 신 귤을,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표정이 된 플란츠가 같이 먹었다는 말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었다. 그런 앨런의 말 뜻을 알아들었을 리 없는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눠 먹은 게 하도 많아서 대체 뭘 말하는지도 몰랐지만, 내새끼한테 친구 생겼다고 좋아하는 것 같은 앨런의 얼굴이 딱 짜증난다는 것만은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저보다 세 배는 넘는 세월을 산 대마법사에게 짖지 말라는 말을 할 만큼 위아래 없는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플란츠는 그냥 그대로 입만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지요.” 앨런은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뭐가 됐건 칼리안이 이미 지하에서 무언가를 확인중에 있고 플란츠가 방해하지 말아달라 얘기하고 있으니, 굳이 아래로 내려가 볼 이유가 없었다. 다만 앨런은 바로 돌아가는 대신 잠시동안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당부하듯 말했다. “혹여 나중에 악몽을 보시더라도, 그것을 감당하겠다며 스스로 쌓지도 않은 탑에 갇혀 지내지는 마시지요.” 현명한 마법사는 제 자식같은 칼리안이 지금 무엇을 가장 걱정하고 있을지 잘 알았으니까. “탓하고 책임 지우기 위한 길이 아니라 살려놓기 위한 길을 홀로 걷는 분이니, 그것을 바라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것이 세크리티아든 카이리스든, 체이스든 플란츠든. 이유가 있어 망가져간 것을 전부 되돌려놓겠다며 끌어안고 있는 이가 아니던가. “알아. 나도.” 플란츠가 짧게 대답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하면, 알아준다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 * * 검은 돌이 누군가 만든 신물인지 물었다. 시스파니안은 그렇다고 답했다. “이면의 힘을 담았으니, 세렌티의 흔적을 담은 것이 아니다.” 신물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다만 또 한 번 늘어난 수수께끼 같은 말. 이면의 힘. “너를 믿는 아이들이 나섰으니, 때가 되면 너 역시 알 수 있겠구나.” 시스파니안은, 그것에 대해 자신의 입으로 전하지 못한다는 말을 대신해 이렇게 일러주었다. 믿는 아이들이 정확히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문득 에우리아가 떠올랐다. 때문에 칼리안은 에우리아가 여전히 그것을 조사하는 중인지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축의 파편은, 혹시 당신께서 찾고 계시는 것입니까.” 부서진 시간의 축의 파편을 찾는 중이냐고. 그래서 찾게 된 조각을 이 곳에 둔 것이냐고. 그렇게 물었다. “세상에 나타난 것을 내가 이 곳에 두었다.”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칼리안은 그 고갯짓을 따라 온 세상이 흔들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다른 조각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당신이, 이것을.” 왜 이것을 찾아와 이런 곳에 두었는지. 그것을 물었다. 시스파니안이 나지막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전했다. “네가 직접 거두어야 할 물건이 되었으니.” 칼리안이 이 재앙을 사용하기 위해서 거두어야 한다는 것인지, 부서뜨려 없애기 위해서 거두어야 한다는 것인지. 그것만은 알려주지 않은 채. 검은 나비 한 마리가 칼리안의 곁을 스쳐 날아가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 제28장.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3) > 칼리안이 생각에 잠기면 앞을 안 본다. 플란츠가 생각에 잠기면 시간 가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계단을 올라온 칼리안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던 플란츠를 못 보고 그대로 지나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방금 지나온 자리에 풀 냄새 날 듯한 익숙한 뒷통수가 있었음을 깨닫고 뒤를 돌아봤을 때, 자신이 세워뒀던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는 희멀건한 놈을 본 칼리안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래도 칼리안은 앨런과는 조금 달라서, 플란츠가 지금 왜 여기 서 있는지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잠시 발을 멈춘 채 플란츠를 향해 멀뚱히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사람을 못 보고 지나친 것에 대한 사과가 먼저라는 상식이 있는 놈이었으면, 예의라는 것은 화염구 만들 불쏘시개로 삼은 듯한 그 파란 마법사를 부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애진작에 포기한 플란츠는 ‘그게 지금 네가 할 말이냐’는 표정만 짓고 말았다. 플란츠의 이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은 짧은 한숨을 쉬듯 실소하며 말했다. “대련 말고, 그냥 체르밀로 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속이 좀 헝클어져서.” 얼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시스파니안을 만나 심각한 대화를 한 것 같았다. “배고프네요.” ······ 그래서 배고프단다. 속이 헝클어져서 배가 고프시단다. 미친놈이. 숨겨놨던 밑바닥 보여주고 심장이 짓눌릴 것 같은 이야기를 털어놓은 뒤 태고의 고룡을 만나서 가볍지 않은 대화를 한 탓에 배가 고프다는 놈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들었는지. 그래. 허기가 들었겠지. “하.” “드릴 말씀도 생겼고요.” 그냥 밥만 먹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밥 먹으면서 할 말까지 있다는 소리였다. 하기사. 속이 헝클어졌으니 일단은 다 잊고 좀 쉬어야겠다는 기본적인 상식이 있는 놈이었으면 헤이시아 궁을 이렇게 허허벌판으로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 체르밀.” 때문에 포기한 듯 대답한 플란츠가 저벅저벅 걸어 앞서 나갔다.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칼리안이, 잠시 잊고 있었다는 듯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비 그쳤네요.” 그 말대로, 어느새 비가 그쳤다. 먹구름은 여전했으나 더 이상 비는 내리지 않았다. “방금 전에.” 그것이 마치 시스파니안이 두고 간 또 다른 선물 같아서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검은 나비의 모습을 한 채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입을 열었다. 사실 플란츠도 플란츠지만 칼리안도 칼리안이다. 앞 뒤 없는 말을 하는 것이나 뜬금 없는 말을 하는 것이나 도긴개긴이라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플란츠는 그게 무슨 짖는 소리냐 되묻는 대신 조용히 대답했다. “하필.” 죽음을 의미한다는 검은 나비. 시스파니안이 왜 하필 그런 모습으로 왔느냐는 말이었다. 앞에서 걷고 있으니 플란츠가 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칼리안은 자신도 같은 생각을 했었음을 알려주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라면 환영하지 않겠느냐 하시면서. 대답은 못 드렸습니다.” 그 말에, 잠시 말이 없던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 그래.” 사라져 잊히는 것 말고 죽는 것. 살다가, 죽는 것. 칼리안은 자신이 사라진 이후의 부재가 무섭다 했으나 플란츠는 그 사라짐이 단순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안다. 죽음조차 잊혀지는, 누군가의 부재조차 잊혀지는 그런 사라짐을 무서워 하고 있음을 안다. 플란츠는 이름도 듣지 못한 어느 누군가의 빈 자리. 그런 빈 자리가 또 생길까 무섭다며 플란츠를 온전히 살려두겠노라 하는 칼리안이 아닌가. 완벽히 사라진 한 명의 부재를, 그 부조화를 조금이라도 인지하고 빈 자리를 채워 놓을 만한 사람이라고는 똑똑하고 눈치 빠른 플란츠밖에 없을 것 같아서. “너라면 그렇겠지.” 언제 갑자기 찾아올지도 모를 잊혀짐까지 준비하는 칼리안에게, 사라지는 것 아닌 온전한 죽음만큼 절실한 것이 또 있을까. 그러니 그것은 사려깊은 고룡이 오로지 칼리안만을 위해 건네준 기원이며 축복이자 위로였으리라. 부디 이번 생의 끝에는 사라지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라는. 그 뜻을 알아들었으니 칼리안은 결코 부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칼리안은, 그러한 죽음이 지금의 생보다 안온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고자 하고 있으니 선뜻 긍정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장의 안식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시스파니안은 그 소리 없는 대답을 알아서 다 이해했을 터였다. 같은 것을 이해한 플란츠는 더 이상의 다른 말 없이 계속 걸어갔다. 밥 먹으러. * * * 꽃잎에 맺힌 빗방울은 여전히 투명하다. 장미의 짙붉은 빛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다가도 툭 떨어져 내리는 그 순간에는 장미 가지의 초록색을 품고, 바닥에 놓이면 젖은 흙의 갈색을 다시 품는다. 마지막에는 정원을 밝힌 마법 등불의 빛으로 잠시 반짝이다가 이윽고 흘러내려가 사라졌다. 빗방울은, 정말로 투명하여 제 주변의 것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것인지 혹은 세상의 그 많은 색을 이미 전부 품고 있어 투명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담긴 것이 없어 공허한 것인지 담긴 것이 너무 많아 공허해 보이는 것인지 쉬이 알아낼 수 없을 짙푸른 눈이, 저와 꼭 닮은 짙붉은 물방울을 잠시 바라봤다. “이야기만 들어왔는데 정말 좋은 곳이구나.” 그런 란델을 향해 르메인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석찬을 마치자마자 찾아 온 길이었다. 왕자의 것과 비견되지 않을만큼 불편한, 길고 검은 망토까지 두른 채로 곧장 체르밀 궁에 왔다. 그 뒤에는 잠시 산책이라도 하는 것은 어떻겠느냐며,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넓은 방에서 란델을 꺼냈다. 싫어하고 귀찮아하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좋으련만, 란델은 그저 묵묵히 뒤를 따라왔다. “이런 곳을 꾸려냈다니 대단하구나.” 완벽하게 다듬어진 장미 정원을 칭찬하는 말에 란델이 짧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과찬이라는 말도, 아직 부족하다는 말도, 당신의 말에 나 역시 공감한다는 말도 아니었다. 르메인의 칭찬에 대해 스스로의 생각은 완전히 배제한 채 감사하다는 말만 전했다. “그래.” 아비가 자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현명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그래서 평생에 걸쳐 잘못만 해왔던 르메인이다. 그나마 배운 것이라고는 전부 다 르메인이 잘못했다는 것 뿐, 과묵한 아버지가 더 과묵한 아들과 무슨 대화를 나눠봐야 하는지는 앨런조차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 곳에는 붉은 장미만 있구나.” 그래서 그냥 되는대로 말하고 되는대로 질문을 했다. 무작정 이 곳으로 찾아 온 것처럼 무작정 물었다. 사실 이것저것 알고 싶은 것이 이제 와 너무 많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고작해야 붉지 않은 장미도 키우고 있는지, 장미는 언제 피고 언제 지는지, 가지는 어떻게 잘라내는지 따위의 쓸데 없고 소소한 질문들이었다. “가시에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려무나.” 그 말을 들은 란델이 아주 잠시 발을 멈칫했다. 언젠가 이 곳에서 마주쳤던 이방인의 보랏빛 눈동자가 떠올라서였다. 그 왕세자가 말했던대로, 결국은 가시에 찔렸다. 그래서 그 장미에 시선을 두었다. 상처를 입은 것이 문득 생소하여, 가시 가득한 장미를 버리지 않고 옆에 두기로 했다. 그러니 그 이방인이 걱정한 것은. 상처 입을 손이었을까, 상처 입힐 장미였을까. “왜 장미를 키우는지 궁금하구나. 왜 좋아하는지.” 자신의 말에 란델이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지 알 리 없는 소 같은 르메인은 이렇게 또 다른 것을 물어왔다. 다음에 다시 오면 질문할 거리가 하나도 없을텐데도 그냥 전부 다 끄집어내어 물었다. 잠시 떠올랐던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함께 떠오른 칼리안에 대한 생각을 미뤄둔 란델이 조용히 대답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소소한 질문에 대해 돌아오는 것이라 하기에는 결코 소소하지 않은 답이었다. 그리하여 르메인은,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이유조차 잊어버리고 살게 된 것이 자신의 탓임을 알아서. 그런 란델이 이제 고작 열 여덟이라는 것을, 오늘이 아닌 다른 날에는 더 많이 어렸으리라는 것을 다시 깨달아서. “그래. 혹여 생각이 난다면, 언제든지 알려주면 좋겠구나.” 그런 르메인을 가만히 응시하던 란델이 입을 열었다. “전하.” 처음으로 란델이 르메인을 먼저 불렀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말이 이어졌다.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기억을 되돌리는 것. 이 관계를 되돌리는 것. 그 밖에 다른 모든 것들 역시,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말이었다. 되돌리고자 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쌓아올리고자 온 것이었으나 르메인은 그런 속내를 말하지 못했다. 르메인에게 있어서는 없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으나, 란델에게는 이미 수도 없이 홀로 쌓아 올리다 결국은 무너진 관계임을 알았으니까. “그래. 되돌리려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마음을 접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란델 쪽으로 무리해서 걷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누구도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비였으니. 여전히 사과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지난 번에는 마주보았고 오늘은 조금이지만 같이 걷고. 지금 당장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이 결코 란델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여기까지만 같이 걷고 나머지는 또 다른 언젠가 어느날에 찾아오기로, 그런 생각에 한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비가 그치니 바람이 부는구나.” 르메인의 말대로였다. 어느새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르메인의 긴 망토가 펄럭였다. 바람에 날린 망토 자락이 장미 가시에 걸렸다. 소 같은 르메인은 그것도 몰랐다. “이만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뒤 몸을 돌렸고 앞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란델이 그것을 눈치 챘을 땐 너무 늦었고, 르메인은 이미 늦은 뒤에 눈치를 챘다. - 뚜둑! 비가 그치니 바람이 불어서. 바람이 망토에 담겨서. 장미에는 가시가 있어서. 르메인은 소 같아서. 그래서, 몇 송이의 장미가 제멋대로 꺾여 바닥을 나뒹굴었다. 란델의 푸른 눈이 떨어진 장미를 향해 내려갔다. 그리고. 소 같은 르메인을 쳐다봤다. 한참동안 말도 없이 그렇게 르메인을 쳐다봤다. 화가 난 것이 분명한 눈빛을 감추지도 못한 채 르메인을 쳐다봤다. “······ 죄송합니다, 전하. 먼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여전히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모두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한 르메인은 란델을 마주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예를 보인 란델이 뚜벅뚜벅, 체르밀 궁으로 돌아갔다. “아······.” 란델의 뭔가가 달라지긴 했는데 뭐가 달라진 줄은 모르는 르메인이 뭘 잘못했는지는 안다는 얼굴로 입을 열어 뭔소린지 모를 소리를 냈다. 붉은 장미 꽃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 * * 잠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던 칼리안이 웃었다. 생각지 않게 플란츠의 방에서 하루종일 뒹굴거리던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였다. 옆에 놓인 긴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플란츠가 그런 칼리안을 쳐다봤다. “아뇨, 그냥. 소 뒷걸음질에 뭐가 잡힌 것을 봐서.” 만약 이 말까지 플란츠가 이해했다면 칼리안은 오늘 또 한 번 놀랐겠으나 다행히 플란츠는 미간을 찌푸렸다. 칼리안은 여전히 웃음기 어린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전하의 멋모르는 걸음 때문에 란델 형님께서 화가 나셨습니다. 아마 다음에 만날 때에는 그래도 지금 보다는 낫겠네요. 전하의 손으로는 절대로 열지 못하셨을 문이 바람결에 열린 셈이라 해야 하나.” 르메인이 뭔가를 했고 란델이 화를 냈고 다음에는 둘이 조금 나은 대화를 할 것 같다. 플란츠는 이 정도 선에서 이해하고 넘겼다. 그리고 얇게 저민 소고기를 여러 겹 겹쳐 튀겨낸 뒤 라즈베리 소스를 살짝 얹은 요리를 입에 넣었다. 튀겨낸 고기 속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피망의 향기를 애써 무시하면서. 그것을 시작으로, 실로 우아한 형제간의 식사가 이어졌다. 언제나와 같은 하얀 빵과 짜지 않은 치즈가 올려진 아스파라거스 구이, 토마토 소스에 조린 닭고기, 양파 없는 샐러드 등등. 플란츠가 먹은 것의 네 배는 될 양을 먹어치운 칼리안이 플란츠보다 조금 늦게 식사를 마쳤다. 속이 어떻게 헝클어지면 저렇게 잘 먹어대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결국 얻은 것은 없고 의문만 늘어난 것 아닌가.” 식기가 치워지고 따뜻한 홍차가 놓였다. 시종들이 모두 나가기를 기다려 지그프리드 영지와 헤이시아 궁에서 만난 시스파니안과의 대화를 모두 전한 칼리안을 향해 플란츠가 이렇게 짧은 감상을 전했다. 결국 얻은 것이 없다고. 은은한 과일 향이 맴도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신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시스파니안은 말에 제약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아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슬쩍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사람이 꼭 말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서. 아, 사람은 아니지만요.” 시스파니안이 보고 있던 석벽. 마지막 조각이 새겨져 있던 석벽을 떠올렸다. “저를 만났을 때 유난히 한 곳을 바라보고 있기에, 시스파니안이 떠난 뒤 가보았는데.” 죽은 기사를 끌어안고 있던 세크리티아 대왕. 그런 그녀의 모습이 아주 잠시동안 바뀌었다 돌아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선 채로, 무언가를 손에 든 채로. “조각이 조금 달라져 있더군요. 무언가를 이렇게, 손에 든 것처럼.”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자신의 팔을 조금 벌려 둥근 것을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을 취해 보였다. 시스파니안의 방, 그 석실 한 가운데 놓여 있던 고리 정도의 크기를 지닌 것을. “그것을 보니, 마지막 전투에서 시간을 돌렸을 리는 없을텐데. 왜 시간의 축을 지니고 마지막 전투를 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무언가를 조금 더 생각하듯 눈을 내리떴다. 그리고 잠시 뒤 말을 이었다. “시스파니안은 시간의 축을 제가 거두어야 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가 그것을 가진 뒤 시간을 다시 한 번 되돌리거나 파괴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니라.” 같은 언어가 씌여져 있던 검은 돌. 란델의 힘이 닿은 장미의 멈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했던 검은 돌이 떠올랐다. 그것이 만약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무언가를 흉내낸 힘을 담아 만든 것이라면. 그 무언가가 시간의 축이라면. “그것으로 아마도, ‘그들’이 사용하는 비정상적인 힘에 대응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칼리안이 거두어야 한다던 시간의 축에는 어쩌면, 칼리안이 가질 수 있는 다른 힘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칼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 제28장.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4) > 아르센의 파란 눈은 서늘한 빛을 띤다. 아르센의 눈 역시 르메인이나 란델처럼 푸른 색이지만 또 조금 달랐다. 두 왕족의 눈이 깊고 어두운 심해를 담았다면, 아르센의 눈은 어느 맑은 겨울날의 새벽 어스름을 담은 서늘한 파란 빛이었다. 그런 아르센의 눈이 앞에 서 있는 멍청이를 응시했다. “왜 그런 얼굴로 보십니까, 변경백님.” 칼리안의 검 키리에. 국왕 친위대 카에라의 기사단장 렌 아드리안. 카이리스의 유일한 공작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 칼리안을 따르는 기사가문 연합의 대표, 백작 아이즌 에이프린.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검을 다루는 이들이라는 것. 그리고 아르센의 기준 상 평범한 인간 혹은 평범을 조금 상회하는 정도의 머리를 지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똑똑한 편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소리다. “왜 그런 얼굴로 보기는. 왜 나를 찾았는지, 그 진위를 물었지 않나.” “방금 전에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그리고 앞에 앉아 있는 그레이 브리센은 그냥 칼 쓰는 멍청한 생물이다. 그래도 에반보다는 조금 나은가 싶긴 한데 그래봐야 머리카락 두께 차이다. 칼리안의 둘째 형이 이들과 같은 핏줄이 정말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물론 그 머리색과 눈을 보면 틀림 없는 에반 브리센 후작의 핏줄이 맞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이 될 정도로, 브리센의 나머지 놈들은 하나같이 멍청했다. ‘원래 기사들은 다 멍청해. 꼬맹이 네 주변이 이상한거지.’ 변경백의 저택 앞에서 잠시 헤어진 에우리아가 한 말이 생각났다.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기사들은 대부분 그랬다. 그럭저럭 똑똑하면서 검까지 잘 다루는 칼리안의 측근들이 이상한 것이지, 일반적인 기사들은 그리 똑똑하지 않았다. 어차피 검을 배워 먹고 살 수 있는데 글을 배워 무엇하고 머리를 써서 무엇하겠는가. 브리센 역시, 굳이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지나치게 덩치가 큰 가문이었으니 그들의 지능을 전부 카이리스의 둘째 왕자에게 넘겨주고 마음껏 멍청해져도 사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을 터였다. 그러니 이해는 한다. 때문에 아르센은 조금 전에 했다는 그 말을 다시 한 번 꺼냈다. “집이 좁고 불편하기에, 조금 넓은 터전이 있을지 둘러보려 왔다고 말입니다.” 알아듣기 어려울 말도 아니었다. 칼리안의 품을 떠나 브리센과 손을 잡아도 될지 그것을 가늠해보러 왔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예 그냥 대놓고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그런데 못 알아 듣는다. 아니, 적당히 알아는 들었지만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르센은 답답하다는 얼굴을 쉬이 숨기지 못해 곤란해하고 있었다. 그레이가 이 정도로 머리를 못 쓰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화가 이뤄지질 않는 것은, 맞은편에 앉은 아르센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는 진한 술 냄새가 원인일 터였다. 한 마디로 어젯 밤 퍼마신 술이 아직 안 깬 것이다. 전날의 비 오는 밤, 술이 생각난 것이 비단 에우리아 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냥 매일 퍼마시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성함 뒤에 변경백 말고 조금 더 큰 것을 달 생각은 없으신지 여쭤보고 있는 겁니다, 변경백님.” 그래서 아르센은 숙취 해소에 딱 좋을 만한 말을 했다. 돌려말하기도 아니고 귀족들이 나누는 고상한 언어도 아니고 그냥 직접적인 말로.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 말고 그레이 브리센 ‘후작’이 될 생각은 없는지에 대해서. ‘경이 마음을 바꿀 것처럼. 변경백이 수도에 올 생각이 있는지 알아봐줘요. 혹시 아직도 란델 형님과 연락을 하는 상태인지 확인해주면 더 좋고.’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으니, 지금 아르센은 혼신을 담은 연기를 펼치는 중이었다. 다행히 그런 속내를 꿰뚫어보지는 못한 그레이가 가늘게 변한 눈을 하며 대꾸했다. “조금 더 큰 것이라니······.” 내가 가질 수 있는 작위 중에 변경백보다 조금 더 큰 것이라면 후작 뿐이지 않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레이가 말을 멈췄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면담을 요청한 발칸의 부군단장이,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이제야 눈치챈 것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레이가 아르센을 노려봤다. “무슨 말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군. 나는 지금의 자리보다 큰 것을 원한 적이 없는데.” 그래서 그레이는 이렇게 발뺌을 했다. 당장 아르센의 말에 반색하며 달려들 만큼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일 도와주면 후작위 주겠다던 실리케의 말에 넘어가서 카이리시스로 오던 중에 허리 부러지고, 여기로 다시 실려오셨던 것 아닙니까?” 돌려말하기를 때려치니 단어 그대로 뼈 아픈 소리가 줄줄 나온다. “그래서 요양이나 하다가 시키는대로 하면 후작위를 넘겨주겠다는 1왕자님의 말에 또 넘어가셨던 것 같습니다만. 덕분에 남몰래 수도로 왔다가 들켜서 다시 여기로 돌아오셨고. 그러니 묻는 겁니다. 더 큰 자리에 정말로 욕심이 없으신지를.” 이 말에, 그레이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기는 했으나 단 두 번 카이리시스로 발을 옮겼던 것이 모두 후작위를 탐냈기 때문이 맞았으니까. 다만 아직 그것을 입 밖에 내어 인정하지는 않았으므로, 아르센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아니면 혹시, 여전히 장미 향에 취해 있느라 새끼 늑대 쪽으로는 눈을 안 두시는 겁니까?” 아직 란델과 손을 잡고 있는지. 그래서 플란츠 쪽에 발을 둘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르센의 말을 들은 그레이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실리케와 브리센의 보호 아래 있을 때, 사람들은 플란츠를 새끼 사자라 불렀다. 왕세자라는 날개만 얻으면 제대로 된 그리핀이 될 새끼 사자. 그리핀이란 그리핀을 가문의 문장으로 쓰고 있는 브리센을 뜻했으니, 사람들의 이 말은 플란츠가 세자위를 받으면 브리센 가문에 무한한 힘을 안겨 줄 완벽한 꼭두각시가 되리라는 기대 혹은 조롱을 담은 것이었다. 그러나 실리케가 실각하고 브리센이 휘청이게 되면서, 왕궁에 홀로 남은 플란츠는 더 이상 그렇게 불리지 않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에반 브리센과 손을 잡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상호 이득을 위한 관계일 뿐. 실리케라는 매개체가 없는 플란츠를 브리센의 온전한 꼭두각시로 부리지는 못하리라는 것이 귀족들의 평가였다. 브리센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에 더불어, 오히려 에반 브리센이 플란츠에게 휘둘린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으니. 혼자서도 제 살 길을 제대로 찾을 줄 아는 맹수라는 의미를 담은 새로운 별명이 생긴 것이다. “새끼 늑대라니.” 늑대, 라고. “네놈이 3왕자의 최측근임을 내가 모르지 않는데, 어째서 새끼 늑대를······.” “대체 언제적 얘기를 하시는지.” 입에 담기만 해도 뱃속이 허하고 허리가 아린 이름, 3왕자 칼리안. 그 칼리안이 수족처럼 부리는 것이 아르센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아르센이 말한 것은 칼리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것을 묻는데 아르센이 그레이의 말을 잘랐다. “지금 상황에서 올라갈 곳 없기로는 변경백님이나 저나 같은 처지 아니겠습니까.” 수도에서 후작 소리 들으며 흥청망청 사는 것이 그레이의 목표임을 아르센이 잘 안다. 사실 그것이 누구든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란델이 어떻게 그레이를 이용해먹을 생각을 했겠는가. 그런데 에반 브리센 후작은 소드마스터다. 모르긴 몰라도 긴긴 세월 무병장수 할 것이라는 소리다. 에반이 살아있는 한 그레이는 절대로 후작이 되지 못한다. 운이 좋으면 그레이의 아들이 후작위에 오를까 말까. 절대로 그레이에게 순서가 오지는 않을 터였다. “그분께서 카밀론에 가시면, 제 앞길은 여기서 막힙니다.” 칼리안이 세자위에 오르면 평생이 가도 발칸의 군단장은 앨런의 것이다. 안 그래도 강한데다 남들보다 나이 먹는 것까지 느리니, 아르센이 부군단장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레이가 후작위에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지금 아르센의 말은, 그레이나 아르센이나 같은 처지라는 소리였다. 오래오래 사는 윗사람 덕에 평생 2인자 자리나 하기는 싫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게다가 변경백님과 제가 손을 잡으면 도와주게 되는 쪽은 저 아닙니까. 그러니 같은 처지에 같은 술 좀 마시자는데, 왜 그렇게 경계를 하십니까.” 이렇게 말한 아르센이 플란츠의 것과 완벽히 똑같은 비웃음을 만들어다 붙였다. 언젠가 칼리안이 그랬던 것처럼. “아······ 허리 부러져봐서 무서우신가. 아니면 찢어진 것 때문에 무서우신가. 어느 쪽입니까.” 사람 심기 비트는 데에는 플란츠의 비웃음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칼리안만큼 잘 아는 아르센이 아니던가. 그레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가 더이상 소드마스터가 아니라는 것을 아르센이 알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당시 그 자리에서 벗어나 있었던 탓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져봤던 기대가 일순 무너져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센의 말이 이어졌다. “마법사들 움직이면 소드마스터 한 명 사라지는 것쯤은 일도 아닐텐데, 뭐가 그리 무서우신지 몰라도 몸 사리는 것은 그만하고 제대로 대화나 해보시죠.” 그것은 협박이기도, 자신의 힘에 대한 증명이기도 했다. 플란츠 왕자를 제대로 지지해서 세자위에 올릴 만한 힘이 있다는 것. 에반의 목 없애버리는 것쯤은 쉬운 일이라는 것. 그레이에게 있어 누구보다 든든한 동맹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런 말이었다. “그렇게 강한데 왜 굳이 나와 손을 잡는지 모르겠군.” “쓸모가 있는 것은 변경백님이 아니라 브리센이라는 이름입니다.” 여유로운 손놀림으로 차를 마시고 내려놓은 아르센이 다시 한번 플란츠식 비웃음을 입에 걸었다. “저도 넓은 품에 들어가서 안락한 생활을 누려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변경백님께서는 후작 위에 올라서 제 뒷배경 노릇이나 해주시면 되는 일입니다. 어려울 것 없을 것 같습니다만.” 거기까지 들은 그레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에반을 죽이고 후작 작위를 줄 테니, 플란츠를 왕세자위에 앉힌 이후에는 조용히 지내라는 소리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듣자듣자 하니 네 놈이 참 건방지게 구는구나.” 여기에서 밀리면, 만약 아르센과 손을 잡는다 하더라도 정말로 아르센이 말하는 것처럼 뒷방에 처박혀 지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니 자신이 나눠 가질 지분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아르센에게 밀리면 안되는 것이다.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것을 보는 아르센의 푸른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변방에서 숨죽이고 사시느라 잊으신 듯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기가 몰아쳤다. 아르센과 그레이의 사이에 놓인 탁자에 새하얗게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곧 그것은 새하얀 실 같은 얼음의 가닥을 사방으로 펼쳐나갔다. - 쩌적, 쩌적 매우 불안한 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채워가며 값비싼 테이블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음 가닥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테이블 다리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과 찻주전자를 모조리 얼렸다. 똑같은 한기가 어린 목소리가 그레이의 귀를 찌르듯 흘러나왔다. “저는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변경백님.” 그렇게 말한 아르센이 손가락 하나를 펼쳐 그레이의 앞에 보였다. 그리고 그 손가락 끝으로 찻잔의 끝을 툭 건드렸다. - 와장창! 테이블이, 부서졌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테이블, 얼어붙어있던 찻잔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조각으로 부서져 바닥에 흩어졌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르센이 다시 한번 그레이를 쳐다봤다. 어느새 세뉴강같이 고요하게 변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번만 더 그딴 소리 하시면, 안 참습니다. 저는 손을 잡자고 온 것이지 누구 따까리 하겠다고 온 것 아니라서요.” 물론 그 내용까지 고요하지는 않았다. * * * 또 한 번 살기가 피어 올랐다. 누가 칼리안의 검이 아니랄까봐. 이번에도 여지 없이 저렇게 살기가 피어오른다. 다만 이번의 플란츠는 ‘그만’ 이라고 말하는 대신 검을 다잡았다. 그리고 자신을 집어삼킬 듯 노려보는 서로 다른 색의 두 눈을 보며 똑같은 기운을 내보냈다. 살기. 단 한 번도 제 손에 다른 사람의 피를 묻혀본 적 없었으나, 반드시 살인을 해보아야 살기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칼리안의 것처럼 극한에 닿은 공포감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키리에의 것처럼 노골적인 살의를 담은 것도 아니었으나, 예리하고 날카롭게 심장을 찔러오는 듯한 서늘한 기운이 키리에를 향했다. 멀찍이 수련장 벽에 기대고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칼리안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오늘도, 제법.’ 지는 것을 확실히 싫어한다. 배우는 것이 확실히 빠르다. - 카아앙! 살짝 눈을 감았다 뜬 플란츠가 검을 내뻗자, 플란츠를 향해 달려들던 키리에의 검이 막혔다. 뭉클, 하고 키리에의 살기가 한층 더 짙어진다. 플란츠는 날카롭게 잠겨든 눈으로 그런 키리에의 검 끝을 쳐다봤다. 곧 키리에가 다시 한 번 움직였다. 플란츠는 이번에도 제 자리에 멈춰 선 채 키리에의 움직임을 눈으로 잠시 좇았다. 그리고 발을 박찼다. 키리에의 검은 플란츠의 것보다 가볍기 때문에 방향 전환이 빨랐다.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검을 올려치듯 막은 키리에가, 튕겨올라간 검을 회수하기 직전인 플란츠를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플란츠는 그것을 보기도 전에 이미 몸을 한 발자국 뒤로 물렸다. 키리에의 검이 어떤 움직임을 가지는지 이미 파악했으니, 틈새를 노릴 것임을 예상하고 미리 피한 것이다. - 타앗! 그 사이 검을 회수한 플란츠가 앞으로 도약하며 키리에를 향한 긴 곡선을 그려냈다. ‘부웅!’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검의 궤적이 허공을 갈랐다. - 카앙! 높이 도약하여 떨어지는 힘까지 모두 실어낸 플란츠의 검이 키리에에게 막혔다. 실려있는 힘이 이전에 비해 많이 묵직해졌는지, 키리에의 검이 살짝 뒤로 밀렸다. 키리에는 버티지 않고 검을 내려 플란츠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자칫 중심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플란츠는 검이 미끄러지는 궤적을 따라 몸을 함께 회전시키며 다시 한번 공격을 가했다. - 카강! 카아앙! 흥미로운 볼거리를 찾았다는 정도의 얼굴을 한 칼리안을 무시한 채로 둘의 공방이 계속됐다. 무게를 실은 공격을 어떤 식으로 흘려내는지, 속도를 가한 공격을 어떻게 되받아치는지 알려주는 것처럼, 키리에는 정말 여러 가지 방법으로 플란츠의 검을 막고 다시 공격했다. 확실히 키리에는 적당히 무겁고 적당히 빠른 검의 장점을 제대로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데에 있어 가장 적합한 대련 상대였다. 다만 지나치게 살기등등하여 칼리안이 있을 때에만 대련이 가능했으나 그것은 그리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어차피 실전에서는 모두가 목숨을 내어놓고 검을 들지 않던가. - 카앙! 카가강! 플란츠의 허리로 내뻗은 검을 비틀어 올려치자, 급하게 검의 경로를 튼 플란츠가 그것을 막아냈다. 검 끝을 아래로 내린 채 가까스로 막아낸 공격에, 플란츠의 눈이 사나운 빛을 냈다. 진짜, 죽일 셈이군. 이제는 숨길 필요 없는 살기가 다시 한 번 강하게 몰아치며, 키리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키리에가 다시 한 번 바닥을 박찼다. 플란츠 역시 그것을 마주보며 검을 내질렀다. - 사아아······! 그와 동시에. 키리에에게 또 한 번의 변화가 찾아왔다. 사방이 깊은 정적에 휩싸였다. 방금 전까지 눈에 보이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칼리안과의 대련에서 일깨웠던 감각이 한 번 더 확장됐다. 검만큼 머리를 쓰고 있는 저 상대가 앞으로 어디로 올지, 검을 휘두를지 찌를지 내리칠지, 그 후에는 어떻게 움직일지. 마치 하나의 궤적이 그려지는 것처럼. 그 순서가 그려지는 것처럼. ‘어디를 베어야 할지.’ 어디를 베어야 할지. 어디를 얼만큼 베어야 상대방이 죽을지. 그것을 누군가 알려주는 것처럼. 사방이 온통 흑백으로 바뀐 듯한 그 공간에, 붉은 혈선 하나가 눈 앞에 그려진다. 저 곳을 베어내는 것이 정답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키리에는 바로 그 혈선을 따라 검을 움직였다. 키리에의 검이 일순간 형체를 잃고 사라졌다. - 쌔애액! 형태를 잊은 검이 공기를 찢어내는 소리가 들렸고, 그와 동시에. - 카아아앙! 그 어느때보다 날카로운 소리가 수련장 안을 뒤흔들었다. 그 소리를 들은 뒤에야 키리에가 앞을 쳐다봤다. 붉은 혈선을 향해 내리그었던 검 끝이 어디를 향했는지 알게 됐다. 키리에의 앞에 플란츠가 서 있었다. 검과, 검이 맞닿아 있었다. “축하해. 키리에.” 검과, 플란츠의 심장 사이를 검붉은 기운을 가득 담은 검이 막고 있었다. 멀찍이서 둘의 대련을 보고 있던 칼리안이 어느새 플란츠의 앞을 막아선 채로. 그렇게 키리에의 검을 막아선 채로. “그런데 내 형님 심장은 안 돼.” 또 한 번의 성장을 한 키리에를 축하하며 씩 웃었다. < 제28장.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5) > 카이리스 북부의 겨울은 혹독하다. 하츠아라는, 눈 좋아하는 시스파니안을 위해 그 큰 대륙의 북쪽에 도시를 세웠다. 이쯤되면 시스파니안이 인간 남자 한 명을 아주 호구로 삼은 악독한 드래곤이라 보여질 수 있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시스파니안은 그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아름답다는 말을 한 번 했을 뿐이고, 그것을 기억해내어 카이리스 북쪽의 추운 지역을 수도로 삼은 것은 하츠아라였다. 인간 사는 곳이 너무 비좁고 답답해서 너랑은 절대 결혼 안할거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왕궁을 그렇게 거대하게 지은 위인이니 오죽했을까. 아무튼. 그렇게 추운 곳이 바로 카이리시스다. 그러니 한 겨울의 세뉴강은 말 그대로 꽁꽁 얼어붙는다. 그런 세뉴강을 ‘툭’ 건드리면, 과연 파열되는가. 언 바위를 밟는다 해서 그것이 깨지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아무리 카이리시스가 춥다고 해도 얼어붙은 강과 바위가 조각날 만큼 급속도로, 그리고 극저온으로 얼어붙지 않으니까. “이, 이게 대체······.” 산산조각난 대리석 테이블을 보며 저도 모르게 경악한 말을 꺼냈던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놀란 소리를 꺼내봐야 스스로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이게 대체 얼마 짜리인 줄 알고 부숴놨단 말이냐!” 그래서 이렇게, 자연스러운 척 말을 돌렸다. 겁을 먹는 놈보단 물건 아끼는 속 좁은 놈 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아르센의 참담한 눈빛을 보며 잠시 후회했다. “대답 해주십시오, 변경백님.” 아르센은 대리석 테이블과 한눈에 보아도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던 범상치 않은 고급 찻잔 값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의 따까리를 자처하고 있을 때에나 칼리안의 이름도 팔고 급여도 팔았지, 지금의 일은 칼리안이 감당해줄 수 있을 일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1플로린으로 내려간 급여에서 뭘 더 제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자신의 마차를 폭발시켰을 때부터 정상적인 놈이 아닌 것은 알았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그레이가 침음을 흘렸다. 아무 말 없이 그레이의 대답을 기다리던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오래지 않아 1왕자님께서 스무 살이 되실 테니까요.” 오래지 않아 세자위가 결정되는데, 이대로 두면 누가 세자가 되든 그레이에게 돌아올 것이 전혀 없었다. 플란츠가 세자위에 오른다 해도 에반이 좋을 일이지 그레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니까. 그러니 지금이라도 어딘가에 숟가락 하나 얹어놔야 수도로 갈 길이 생기는 것이다. “일단 생각을 좀 해보겠다.” 실리케나 란델이 불렀을 때에도 족히 사흘은 고민을 했던 그레이였다. 멍청해서 그렇지 즉흥적으로 행동하며 살지는 않았었다. 칼리안을 마주했을 때에도 나름대로 꽤 인내하지 않았던가. “얼마나 시간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사흘이면 되겠군.” 그레이는 이전에 고민했던 시간과 똑같이 사흘을 달라 말했다. 아르센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그 무엇이든 그레이의 요구를 따라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주도권은 무조건 아르센 자신이 쥐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뭐, 마법사들 성격 급한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니 그레이가 이해해야지 별 수 있겠나. 언제든지 테이블 대신 그레이를 얼릴 수 있는 마법사를 앞에 두면 없던 이해심도 무럭무럭 생기는 법이니까 괜찮다. 물론 아르센의 입장에서 괜찮다는 소리였으니, 그다지 괜찮지 않은 그레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사흘을 달라고 했지 않나.” “시간 낭비할 것 있겠습니까. 어차피 결론은 난 것 같은데요.” 아르센의 말대로였다. 어차피 그레이는 아르센의 말을 절대로 거절 할 수 없을 터였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은 그레이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아르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대화가 끝났으니 이만 나가도 좋다는 허락같은 것은 구하지도 않은 채였다. * * * 가벼워지는 만큼 무거워진다. 그것이 검이며, 그래야 하는 것이 검이다. 키리에와 플란츠의 사이에 끼어든 검붉은 검이 살짝 비틀어졌다. 크지 않은 동작이었으나, 키리에의 검은 칼리안이 의도한 방향으로 미끄러져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칼리안의 뒤에 서 있던 플란츠는 말 없이 검을 집어넣었다. 겉으로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머릿속으로는 조금 전의 일이 고스란히 되풀이되고 있었다. ‘달랐는데.’ 키리에의 눈빛에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그 뒤 플란츠가 따르지 못할 속도로 검이 쇄도했고 막으려 했을 땐 이미 칼리안이 플란츠의 앞에 서 있었다. 아마 칼리안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심장을 찔렸겠으나 방금 전 죽을 뻔했다는 것에 대한 대단한 감상이 생기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칼리안이 있었으니 무슨 일이 있든 어련히 알아서 살려뒀겠나 싶어서였다. 실제로도 안 죽었으니 그것이 과한 믿음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플란츠는 키리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대련 중 키리에의 무언가가 변했고 칼리안이 축하한다는 말을 했으니, 분명 한 단계 성장을 이룬 것이리라는 정도로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키리에.” 그런데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칼리안의 농담 섞인 말에도 키리에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개입할 정도로 플란츠에게 살의를 느낀 것에 대한 사과는 애초부터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칼리안의 말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 놈이 아닌데 너무 조용했다. 게다가 대련이 끝났음에도 검을 집어넣지 않았다. 칼리안의 축하에 대해 ‘고맙다’ 하기는 커녕, 방금 칼리안이 키리에를 불렀음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무엇보다, 살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 스윽 플란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칼리안이 살짝 더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니까, 조금 더 옆으로 움직여 플란츠의 앞을 완전히 막아섰다는 소리다. 그 말은 곧 키리에가 아직은 위험한 상태라는 뜻일 터였다. ‘내가 어지간히도 싫었나보군.’ 이런 생각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것을 보지 못한 칼리안은 여전히 앞을 보며 입을 열었다. “키리에.”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른 칼리안이 잠시 말 없이 키리에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짧게 한숨을 쉬며 자신의 검으로 키리에의 검을 툭 쳤다.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앞을 보고 있으나 또 다른 무언가를 함께 보고 있던 키리에가 칼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키리에.” “네.” 그제야 대답이 돌아온다.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과 똑같은 얼굴로 웃으면서, 조금 전과 똑같은 말을 했다. “축하한다고 했어. 내가 너한테.” “아······.” 대답이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키리에의 얼굴에는, 믿기 어려운 것을 본 듯도 하고 또 어딘가 다른 생각이 많은 것 같기도 한 그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감사합니다, 왕자님.” 한참이 지난 뒤에야 뒤늦은 감사 인사가 돌아왔다. 칼리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여보인 뒤 키리에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뭐가 보이는지 알아.” 흑과 백의 세상. 그 안에 홀로 색을 지닌 핏빛의 선. 칼리안은 그것을 가름이라 불렀다. 베른이 검의 길에 오르기 전에 겪었던 현상이었으나 누구나 그것을 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베른의 설명을 들은 체이스가 붙여 준 이름이었다. 반드시 목숨을 끊어낼 수 있을, 생과 사를 가르는 선이니 그리 부르자 했다. 과거의 키리에는 죽음을 맞이하기 불과 몇 달 전에 가름을 보았었다. 그러니 지금 그에 비해 훨씬 빠른 시기에 그것을 마주하게 된 셈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지금 당연히 뛸 듯이 기뻤으나 마냥 축하만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위험한 순간인지를 알았으니까. “우선 검을 집어넣었으면 좋겠는데, 키리에.” 칼리안은, 늘어뜨린 채 여전히 손에 들려 있는 검을 가리켜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여전히 살기를 지우지 못하는 키리에를 향해서. “······ 죄송합니다.” 그제야 짧게 사과한 키리에가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그 과정을 칼리안의 눈이 조용히 지켜봤다. 탁, 하고 검집에 검이 완전히 들어간 것을 본 칼리안의 손에서도 비로소 검이 사라졌다. 플란츠는 아직 몰랐으나 칼리안은 알고 있었다. 지금 저 살기가 비단 플란츠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저 앞에 플란츠가 있었을 뿐, 칼리안이 플란츠를 가로막은 뒤에는 칼리안에게도 같은 기운이 닿았다. 그러니 조금 전 키리에는 상대를 구분하지 않은 채 죽음을 내리려 했던 것이었다. “검, 이리줘. 키리에.” 칼리안이 키리에의 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신이 내렸던 검을 돌려달라고 말한 것. 검사에게 검을 빼앗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키리에가 모르지 않았다. 검을 잡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미였다. “네.” 그것을 알면서도, 키리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칼리안에게 검집에 든 검을 건넸다. 아무런 망설임도 의문도 없는 행동이었다. 칼리안이 돌려달라 했으니 돌려주었다. “잠깐 어디 좀 가자.” 검을 받아든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 * * 기어코 에우리아의 고운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맥주 네 잔. 아니 어떻게 사람이 맥주 네 잔을 마시고 취할 수가 있느냔 말이다. 큰 잔이면 이해나 하지, 물컵보다 조금 클까말까한 맥주 네 잔에 고주망태가 되어버린 얼음 마법사를 보며 짜증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술 찾을 때 알아봤어야 했지.” 아르센이 술 약한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레이를 만나고 나와서는 입이 썩을 것 같다느니 혀에 뭐가 난 것 같다는 말을 해 가며 결국 술을 먹자 했을 때 말리지 못한 에우리아가 잘못했다. 상급 히몰리카 한 병을 비우고도 멀쩡한 에우리아가 입을 열었다. “야, 꼬맹이.” “저어는요, 협회장님.” 에우리아의 부름에 반쯤 혀 꼬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리고 시작됐다. “저는 이럴 생각이 없었는데요, 협회장님. 왕자님이 시키셔서 하기는 했는데요. 그 놈이 너무 싫었거든요, 협회장님. 그런데 그 놈 앞에서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부군단장님 편에 서자고 한 게요, 협회장님. 저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요, 협회장님. 그래도 시키셔서 하기는 했는데요. 그런 말 한 게 딱 너무 싫어서요, 협회장님.” “어, 그래.” 아르센은 에우리아의 성의 없는 말에도 개의치 않았다. 아르센이 안주로 시켜둔 감자 튀김을 손에 댔다. 그러자 그 손에 닿은 감자튀김이 살짝 얼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아, 얼었네.” “네가 얼렸잖아.” 에우리아는 참았다. 아직 얼지 않은 감자튀김이 남아있었다. “그런데요 협회장님.” “어, 그래.” 얼지 않은 감자튀김을 잡으려는 손이 계속 새로운 감자튀김을 얼려댔다. 에우리아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늘어난 만큼 언 감자도 늘어났다. “생각해보면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부군단장님이 저런 집안 놈들이랑 얽혀있는게 또 괜히 짜증나서요, 협회장님. 부군단장님이 그래도 영 나쁜 새끼가 아닌 것은 저도 아는데 자꾸 우리 왕자님이 부군단장님 챙겨주시는게요, 협회장님. 그게 부군단장님 탓이 아닌건 아는데 그래도 짜증나고 싫어서요.” “뭔소리야.” “아, 다 얼었네.” “네가 얼렸잖아.” 아르센이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넣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더 먹을 수 있는 감자튀김이 없음을 확인한 뒤였다. “그게 다 저 망할 집안 탓인데요, 협회장님. 우리 왕자님이요 얼마나 좋은 분이시냐면요, 협회장님. 아 제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요, 협회장님. 마차 태웠더니 잘했다 하시고 건물 부쉈더니 급여 올려주신 분이거든요, 협회장님.”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포인트가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아닌데요. 스승님만큼 좋은 사람 맞는데요.” 여기까지 들어주고 그냥 포기했다. 사일런트 켜놓고 아르센의 주절거림을 듣다듣다 못하겠어서, 에우리아는 그냥 사일런트 끄고 슬립만 걸었다. - 풀썩! 그제야 좀 조용해졌다. 나무 테이블에 코 박고 잠든 아르센의 고개를 돌려 죽지만 않게 해둔 에우리아가, 술주정에 죄 얼려버린 감자튀김 하나를 들어올려 씹어보려다 포기하고 집어치웠다. 시퍼런 마법사 옆에 얼어붙은 감자튀김 다 밀어놓은 에우리아는 테이블에 엎어져 잠든 아르센을 잠깐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아무튼 비는 그쳤고 창 밖에 달이 밝았다. 옆에는 술 약한 얼음 마법사가 잠들어 있고, 테이블 앞에는 얼어버린 감자튀김만 가득했으니 어찌하겠나. “여기 히몰리카 한 병이랑 닭 튀김 하나요.” 검은 돌이고 붉은 힘이고 정치고 뭐고. 오늘은 그냥 술이나 마셔야지. * * * 칼리안의 미친 따까리가 감자튀김을 얼리고 있을 그 무렵. 칼리안과 키리에를 태운 두 마리의 말이 숲으로 들어섰다. 가는 동안 칼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 앉은 키리에 역시 다른 말 없이 칼리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하도 비가 많이 왔던 탓에, 숲에서는 여전히 비 비린내가 났다. 그 좋은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신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어때?” 조금 전보다는 그나마 마음을 가라앉힌 듯한 키리에가 조용히 대답했다. “평화로운 곳입니다.” “아마 조금 있으면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 이렇게 대꾸한 칼리안이 조용히 웃었다. 그 말대로였다. 달빛을 가득 받은 바위가 있는 곳까지 들어선 키리에가 깜짝 놀란 얼굴을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온통 파헤쳐진 흙, 잘려 베어나간 나무와 자잘한 바위들, 불에 그을린 것이 분명한 흔적들까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칼리안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이 난장판이 자신 때문에 생긴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네가 배운 것이 내 검이라서 그런 것을 본 거야.” 가벼워지는 만큼 무거워져야 하는, 검. 검의 무게가 버겁지 않을 만큼 검에 익숙해질수록 검이라는 것이 결국 무언가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인지를 여실히 느끼게 된다. 언젠가 드미레아가 말했던 것처럼 검이란 결국 살인을 위한 도구이니, 검의 이치를 안다는 것은 결국 살인의 방법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니 검을 드는 것이 가벼워지게 될 수록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물건인지를 느껴야 했다. 그런데 베른에게 있어 검이란 한없이 가벼운 것이었다. 가벼운 만큼 더 가벼운 것이었다. 지키고자 배운 검으로, 누군가를 지켜내기도 전에 하염없이 생명을 끊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한없이 가벼워졌다. 검에 얹혀진 생명의 무게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가벼워진 검으로 검을 수련하다 가름을 봤다. 상대방의 목숨을 반드시 끊어낼 수 있을 길이 보였다. 지극히 베른다운, 베른의 검에 딱 어울리는 깨우침이었다. “지금도 안 없어지는 것 알아.” 그런데 문제는. 처음 마주한 그 세상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내 위로도 보일 거야.” 상대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였다. 과거 체이스의 위에 나타난 혈선이 보였던 것을 떠올린 칼리안이, 칼리안을 향한 붉은 선이 그려지는 것을 보며 혼란스러워했을 키리에를 조용히 바라봤다. “당분간 푹 쉬면 괜찮아질거야. 네 검은, 가름이 보이지 않게 될 때 다시 돌려줄게.” 그렇게 키리에를 안심시킨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보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단순히 베른의 검을 배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베른과 비슷한 길을 걸었기 때문에 같은 것을 보게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칼리안이 시켰던 일들 때문에 그 많은 피를 묻혀서, 그래서 같은 길을 걷게 되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미리 신경 못 써서 미안.” 사람을 베어내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잊고 살아서. “네 속도 이곳 같은 줄 내가 모르고 있었네.” 할 수 있느냐는 말에 할 수 있다는 대답이 오기에, 늘 평화로운 겉모습을 보여주기에, 괜찮으리라고만 생각해서. 키리에 속도 이 숲처럼, 칼리안 때문에 난장판이 되었을 줄을 몰라서. “미안, 키리에.” 그렇게 검을 휘두르고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서 미안하다고. 너무 큰 짐을 혼자 감당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축하의 말 뒤에 칼리안은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 [외전] 검은 나비 > 지나간 시간을 회상한다. 나의 회상은 반갑고, 기쁘고, 행복하다. 그리고 아련하고, 우울하고, 슬프다. 그 뒤에는······. * * * 바람 소리에 눈을 떴다. 비가 내렸고 기분은 좋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런 날에 눈을 떴을까. 그것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얼만큼을 잠들어 있었는지도 가늠해보지 않은 채 밖으로 나섰다. - 너를 내가 불렀어. 궁금증에 대답해주듯 목소리가 들린다. 기억나지 않는 긴 시간을 살아낸 뒤에 만났던 이의 목소리. 때로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기도, 또 때로는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기도, 변덕 심한 어느 날에는 붉은 새의 모습이기도 한, 하나이자 전부인 존재의 목소리였다. “왜 이런 날에. 싫어하는 것 알면서.” 비오는 날은 싫다. 내가 이런 날을 싫어한다는 것을 분명 안다. 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이였으니 알아야만 했다. - 생겼어. 모르는 것. 이상한 것. 그래서 불렀어.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세렌티에게도, 나를 만든 신에게도 모르는 것이 있구나 하는 정도의 감상 뿐이었다. 그것이 시작인 줄은 ‘몰랐다’. 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어야 할 이 역시 몰랐으니 나라고 알았을까. 물론 그것에 위안을 삼기에는 지나치게 큰 문제였으나 아무튼 그때는 알지 못했다. 양신전쟁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게 될 그 일은 그렇게, 비 오던 어느 날 잠든 나를 깨워낸 세렌티의 작은 부름으로부터 시작됐다. - 시스파니안. 돕도록 해, 나를. 거꾸로 되었다. 누군가에게 늘 도움을 구걸받던 세렌티가 나에게 도움을 구걸했다. 거부하지 못할 신의 언어였으나 그것은 분명 구걸이었다. 그 어느때보다 절박한 목소리였으니까. “말 해.” 그 부름으로부터 마주하게 된 현실은 결코 우습지 않았다. 악신, 그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힘들 이가 눈을 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존재가 세렌티의 눈을 가리고 생명을 취했다. 섣불리 개입한 나의 동족들은 허망하게 죽었고 나는 어린 동족을 숨겼다. 대륙이 나뉘어 멀어지고 남은 대륙의 절반은 아름다움을 잃은 채 삭막하게 바뀌었다. 여러 종족이 사라져 전설이 되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악신의 가장 마지막 먹이가 된 것은 가장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것을 막겠다며 가장 강하다는 인간 몇몇이 모였다. 그래보아야 나약할 뿐이었다. - 그들이 기회라는 걸 나는 알아. 세렌티는 인간을 마지막 기회라 불렀다. 그들에게 힘을 내렸다. 그렇게 모인 일곱 명의 인간. 그리고 내가 악신의 발을 묶었다. 조촐하되 창대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됐다. 우리와 함께 했던 세렌티가 의지를 드러냈다. 모두 죽는 것보단 세렌티가 사라지는 것이 낫다 하였다. 우리는 반대하지 못했고 세렌티는 악신과 함께 잠들었다. 넷이 살았다. 아니, 넷이 죽었다. 그렇게 마지막 전투가 끝났다. 그리고 세렌티가 잠들었음을 모두가 알았다. 신을 잃은 생명들의 혼란은 지나치게 컸다. 그래서 나는 차마 다시 잠들지 못했다. * * * 시간이 조금 흘렀다. 우리는 영웅이라 불렸다. 인간들은 죽은 영웅의 이름 위에 희생이라는 글자를 덧붙였다. 결국은 죽어 사라졌을 뿐임에도 그들의 죽음은 그렇게나 멋드러지게 포장되었다. 그리고 잊혀졌다. 인간들은 살아남은 영웅을 찬양했다. 그래야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기리며 슬퍼하기에는 사라진 것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것을 모두 슬퍼하려면 미쳐버리고 말 테니까. “시스파니안.”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났으니 살아남은 영웅은 죽은 영웅처럼 잊혀져야 마땅했으나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앞으로 나섰고 살아남은 이를 모았다. 죽은 이들에 대한 기억을 묻고 삶을 격려했다. “비는 싫고 눈은 좋아해요?” 그리고 나를 졸졸졸, 쫓아다녔다. 누군가에게 분명 영웅이라 불리는 인간. 그 어떤 인간보다 날카로운 검을 지녔던 인간. 말 한 마디로 다른 인간들을 부릴 수 있는 인간. 가장 강인했던 인간. 그런 그가 나를 쫓아다녔다. 결국 인간인 그가 인간 아닌 나를 끊임없이 쫓아다녔다. “또 어떤 것을 싫어해요?” 이렇게 물어오는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켜낸 세상을 보며 아름답다 하기에, 나는 지금 내려오는 눈이 더 아름답다고 말했을 뿐. 비가 싫다는 말도 눈이 좋다는 말도 한 적 없었다. 그런데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늘 그렇게 물어왔다. 또 어떤 것을 싫어하느냐고. “너.” 그런 그가, 싫었다. * * * 세렌티는 알고 있었을까. 그로 인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를, 내가 어떻게 변할지를, 나의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를. 그것이 내 생의 서막이자 종막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몰랐을까. 만약 알았다면 나의 생이 끝나는 날까지 원망해줄텐데.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몰랐을까. 만약 몰랐다면 나의 생이 끝나는 날까지 원망해줄텐데. * * * “나비를 좋아해요.” 관심 없었다. 내가 관심이 없다는 것에 그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제멋대로 와서는 제멋대로 주절거리고 제멋대로 돌아갔다. “좋잖아요. 꽃이 피어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러니 언제든 봄이 오는 것 같고. 그래서 좋아해요.” 마지막 전투에서 죽은 영웅 네리아드. 네리아드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고 떠났던 그녀의 소식이 전해진 날이었다. 그는 또 무턱대고 나를 찾아와서는 봄같은 얘기를 했다. 꽃이 필 것 같은 얘기를 했다. “세크리티아. 그런 이름으로 지었대요.” 비밀을 간직한. 이런 의미를 가진 새로운 나라, 세크리티아. 그녀가 그런 이름의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주며 좋아했다. 그녀를 감싸고 죽어간 네리아드가 끝끝내 보고싶어 하던 바다를 곁에 둔, 분명 아름다울 나라를 만들었다며 기뻐했다. “나는 그 소식이 나비같아서 좋았어요. 꽃이 핀 것 같아서. 다행히도.” 그녀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살아있으니 다행이라고. 사람들을 모으고 나라를 만들어 다시 일어났으니 다행이라고. 그것이 꽃이라고. 그리 말했다. “시스파니안. 당신은 뭘 좋아해요?” “너 가는 것.” “내가 아는거 말고 다른 거요.” “너 안 오는 것.” 그리고 여전히 귀찮게 굴었다. 제멋대로 충성스러운 퀴트로스 지그프리드와는 너무나 다르게, 제멋대로 말을 안 들었다. “아무튼. 나도 퀴트로스 데리고 나라 하나 만들까봐요.” 그리고 이렇게 개국선언을 했다. * * *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잘 지켰다. 앞으로 나서겠다 하더니 정말 사람들을 모았다. 세상을 구하겠다 하더니 정말 모두를 살렸다. 나라를 세우겠다 하더니 정말 만들어냈다. 카이리스. 봄이 오는 곳. 그에게 딱 어울리는, 그가 지었을 수 밖에 없을 그런 이름을 가진 나라를 세웠다. 다 무너진 옛 왕국과 망가진 옛 영토 위에 새로운 영웅이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나 당신 좋아하는데요. 시스파니안. 아마도 꽤 오래 전부터요.” 그리고는 이렇게 나를 붙들었다. 나는 유희중인 고룡이 아니었다. 인간의 삶을 흉내내며 지독하리만치 긴 세월의 한 조각을 흘려보내던 중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존재 그 자체로 머무르고 있었다. 그 역시 그것을 알았다. 알면서도 제멋대로 굴고 있었다. “나는 아니야.”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부른 적 없었고, 제대로 된 말 한 번 해준 적 없었다. 나는 그저 세렌티를 대신해 인간들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었을 뿐.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잠든 세렌티를 되찾아올 방법을 찾는 것만으로도, 어린 동족이 죽지 않도록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이 세계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바빴다. “인간들이 사는 곳은 너무 비좁고, 답답해.” 너무 비좁고 답답하다. 게다가 시끄럽고 짜증나고 비가 내린다. 비좁고 답답하고 시끄럽고 짜증나고 비가 내리는 곳에서 산다. 인간은 그런 곳에서 산다. 그런 곳에서 너무 짧은 생을 산다. “그래서 너랑은 절대로 결혼 안 해.” 싫었다. 당장 둥지로 돌아가 백 년 쯤 잠들고 싶을 만큼, 그렇게 해서라도 그가 찾아오지 못하게 하고 싶을 만큼 싫었다. “음. 알겠어요.” 항상 말을 안 듣던 그가 어쩐 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마을 하나 크기의 왕궁을 짓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나는 세상을 구한 영웅을 죽여버릴 뻔했다. * * * 대부분의 인간은 편협하고 자만했으며 나약했다. 그는 편협하지 않았고 자만하지 않았으며 강인했다. 자상하고 생각이 깊고 잘 웃었고 말을 예쁘게 했다. 그리고 이기적이었다. 지독할만큼 이기적이었다. “결국 너는 떠날테고, 결국 나는 남겨질텐데.” 그렇게 끝날 것을 이미 다 알면서 왜 그렇게 나를 붙드는지 물었다. “나에겐 생의 전부라서. 내가 당신 생애의 일부라도 되었으면 해서. 이기적이라 해도 그랬으면 해서.” 내가 절대로 그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불렀다. 기억하지 말고 추억해달라며 나를 불렀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언젠가 눈이 내리면 어느날 당신을 귀찮게 했던 내가 생각나서 인상을 찌푸리고, 바다를 볼 때 당신을 쫓아와 시끄럽게 굴던 내가 생각나서 짜증이 나고. 나비를 볼 때 꽃이 필 것 같아 좋다고 했던 내가 생각나서 웃고. 그냥 기억하는 것 말고 그런거요.” 그런 것이 추억이라고, 그리 말했다. “이기적인 건 알지만, 그래도 그랬으면 해서요. 나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그 지독함에 사무쳐 떠나려는 나를 붙들어 잡았다. “대체 내가 너를 얼마나 더······.” “사랑해요.” 그는 정말이지. 정말이지 지독할만큼 이기적이었다. 끝끝내 이기적으로 굴었다.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이미, 아마도 꽤 오래 전부터, 나 역시 그러했으므로. * * * “시스.” “안돼.” “파니.” “아니야.” 새로 만든 나라에서 새로운 왕의 왕비가 되었다. 인간들은 기뻐했고 그는 행복해했다. 그리고, 아이를 가졌다. 그는 이름짓는 것에 정말로, 정말로 소질이 없었다. 나라 이름을 짓고 수도 이름을 지은 것으로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굴었다. “베른.” “싫어.” 잊혀지지 않는 영웅. 잊히지 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래서 싫다 하였다. 인간의 생은 너무나 짧고 또 짧으니 결국 그는 나를 떠날 것임을 알았다. 결국 영웅은 잊혀지고 지워질 뿐이니, 모두가 잊은 뒤에도 나 홀로 기억할 것을 알았다. 그런 이름을 내 아이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카밀론.” 나비. 좋아한다고 했던 그 이름이 그의 입에서 툭 나왔다. “좋아.” “아, 드디어 정했다.” 그가 웃었다. 내가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은 것을 떠올렸을텐데도, 사랑한다는 말 한 번 해주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아이 이름을 정했다며 웃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아이가 태어났다. 나의 검은 머리와 그의 녹빛 눈을 그대로 닮은 것이 신기해서, 작은 축복을 주었다. 아이가 말을 하고 키가 크고 자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흘러갔다. 그는 그만큼의 세월 속에 묻혀갔다. 시간을 묶어둘 수 없는 나는 나약했다. 시간은, 세월은. 세렌티가 내려준 인간의 날은 짧았다. 세어보지 못할 시간을 살아낸 나에게, 그 날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 * * 하츠아라. 가지 마. 사랑해. 그는 웃었다. 나는 울었다. * * * 나를 위해 지은 왕궁은 그리도 컸는데. 그를 위해 지은 무덤은 너무나 작았다. 매일같이 그 곳을 찾았다. 더는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 찾아갔다. 하루하루 시간이 가지 않아서 찾아갔다. 혹시 올까. 혹시 볼까. 나비가 되어 그를 찾아갔다. 우리의 아이도 떠나고 그 아이의 아이가 떠나도록 나는. 검은 나비가 되어 그의 곁을 찾아갔다. 죽은 왕의 곁을 맴도는 검은 나비. 그것이 나였음을 잊은 이들이 새로운 말을 만들어낸 것도 모르는 채 나는. 봄이 오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 * * 그리하여 여전히 나는 지나간 시간을 회상한다. 나의 회상은 여전히 반갑고, 여전히 기쁘고, 여전히 행복하다. 그리고 여전히 아련하고, 여전히 우울하고, 여전히 슬프다. 그 뒤에는 여전히 아프다. 망각을 모르는 기억 때문에, 그것이 추억임을 이제는 아는 탓에. 나 홀로 그리움에 남겨졌음에. < 제29장. 감당할 수 있는 일(1) > 맥주 세 잔. 거기까지는 기억이 난단다. 그리고 네 잔 째의 술을 한 모금 마신 그 순간부터 기억이 안난단다. “어. 딱 그때부터 감자튀김을 얼렸어.” 잠깐씩 겁대가리 내려놓는 것이 일이던 마법사가 상황을 파악해보려 애쓰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혹시 실수는 안 했습니까?” “감자튀김을 얼렸지.” 감자튀김을 얼렸고, 말을 조금 많이 하기는 했다. 아르센이 이곳까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는 대충 들어 알고 있었다. 칼리안 부탁받고 이 곳에 온다 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았었다. 힘든 것은 잘 해도 하기 싫은 것 못하는 마법사가 무슨 마음을 먹고 왔던 것인지는 어제가 되어서야 알았다. 에우리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기억이 정말 안나?” “네, 정말 안 납니다. 제가 매번 세 잔만 마시는데 어제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맥주 세 잔만 마시고 귀가하는 아르센의 대답에, 에우리아는 결국 피식 웃었다. 아르센 스스로는 하기 싫은 일이지만 칼리안의 부탁이니 하고 싶은 일. 그래서 거절하지 않고 이 곳에 와서 그레이와 얘기를 나눴지만 사실은 정말 싫었던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돕고 싶었을 일. 하기 싫은데 하고 싶은 그 모순된 마음의 사이에 껴서 결국은 술을 마셨으니, 취해서 나온 진담이 어디 실수겠는가. 감자튀김 얼린 것은 용서 못할 실수였지만 징징거린 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에우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다른 실수 안 했어. 닭은 안 얼렸으니까.” “닭 드셨습니까? 혼자서?” “혼자 먹지 그럼. 너 잤잖아.” 정확히는 재운 것이지만 중요한 차이는 아니니까. 과한 술에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주무르는 아르센의 앞에 코코넛 과육이 가득 들어간 주스가 놓였다. 숙취 해소하라며 에우리아가 주문해 준 것이었다. 안 그래도 갈증이 심했던 탓에 그것을 한 입에 비운 아르센이 말했다. “저, 술 냄새 납니까?” “안 나. 맥주 네 잔 마시고 술 냄새 나면 그게 사람인가.” 바로 앞에 히몰리카 두 병을 싹싹 비우고도 술 기운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멀끔한 마법사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도 못미더웠는지, 이미 두 번 클린 마법을 썼던 아르센이 다시 한번 마력을 낭비했다. 그레이를 다시 만나러 가려는 것이다. 그것을 보던 에우리아가 넌지시 물었다. “몇 시에 간다고 했어?”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어차피 속이 쓰려서 다른 것은 못 먹겠다 싶은 마음에, 그냥 지금 다녀올 생각을 한 아르센이 대답했다. “그냥 오늘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밥이나 먹어.” 일어나려는 아르센을 도로 앉힌 에우리아가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천천히 가도 돼. 그게 낫기도 하고.” 분명 칼자루는 아르센이 쥐고 있는 상황이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속이 타는 것은 그레이일 터였다. “꼬맹이 네가 꿀릴 게 없다는 걸 알텐데, 뭐하러 빨리 가. 늦게 가는 만큼 그놈 요구조건이 줄어들테니 그냥 더 놀다가 가.” 빨리 가면 아르센 역시 그레이와 손을 잡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 밖에 안 된다. 그러니 그냥 천천히 가서 ‘나는 너랑 손을 잡아도 그만, 안 잡아도 그만’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쓸데 없는 욕심을 안 부린다는 소리였다. “아. 그게 낫겠네요. 감사합니다, 협회장님.” “당분간 나한테 협회장님이라고 안 해도 될 것 같아.” 귀에 딱지가 좀 앉아서. 구운 감자에 버터를 삭삭 펴바르며 대꾸한 에우리아가, 보들보들한 감자 속을 한 스푼 뜨며 뒷말을 삼켰다. 영문 모를 아르센의 눈빛이 스푼을 따라 에우리아를 향했다. “그래. 감자는 뜨거워야지. 언 건 못먹겠더라.” 잠깐 딴 소리를 하며 호호 하는 입으로 감자를 씹어 삼킨 에우리아가, 여전히 들어가지 않는 아르센의 의문에 대한 느긋한 대답을 덧붙였다. “그냥 그런 게 있어.” 그 말이 끝남과 함께 점원이 다시 둘을 찾았다. 그리고 양배추와 소고기를 넣고 매콤하게 끓여낸 스튜를 아르센의 앞에 놓았다. 특별히 그것이 아르센을 위해 주문한 것이라 말하지 않았음에도, 점원은 알아서 척척 요리의 주인을 찾아냈다. 히몰리카 두 병을 혼자 해치운 다음날 버터 바른 감자나 먹고 있는 여자 쪽보다는, 맥주 네 잔 먹고 잠들어있다 실려간 뒤 다음날 비척비척 걸어와 앉아 오만상을 쓰고 있는 남자에게 필요한 음식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점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 에우리아가 스푼 끝으로 스튜를 가리켜보이며 아르센에게 말했다. “아무튼 그거나 먹어. 먹고 쉬다가 나랑 같이 가.” 의외로 섬세하게 챙겨주는 협회장의 말에, 아르센이 조금 못미더운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같이 가자’는 에우리아의 뒷말을 조금 늦게 상기하고는 물었다. “브리센 변경백 만나는 자리에 같이 가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브리센 놈들 멍청해서 싫다는 에우리아 아니던가. 그래서 전날 만날 때도 아르센이 혼자 그레이를 만났었다. 그러던 에우리아가 변덕을 부리니 묻는 소리였다. “어. 심심해서. 오늘은 내가 얘기하지 뭐. 어차피 더 나눌 말도 없겠지만.” 후배 마법사가 하기 싫어하는 일 또 하게 두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심심해서. 분명 어제 술 취해서 말 실수를 한 것일 터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에우리아가 저렇게 나올 리가 없지 않나. 이런 생각에, 아르센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꼴을 보던 에우리아가 아르센의 스튜에서 제일 큰 고기 하나를 뺏어먹으며 웃었다. * * *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 돌아있는 건 알았는데 정말 다 돌아있었구나.” 그 웃음소리에, 찻잔 두 개를 내려놓던 얀이 칼리안의 안색을 살폈다. 발칸의 마법사를 입에 올리면서 웃는 것이 진짜 웃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진짜 웃음이었다. 그래서 얀은 안심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숙여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 웃을 일이, 아니에요. 정말로, 마흔, 아홉 대를, 맞고 왔어요. 보무도 당당한 마법사 한 명이 여기저기 얻어터진 얼굴로 찾아왔을 때 히나가 얼마나 놀랐는지 칼리안은 절대로 모를 것이다. “이긴 놈이 맞았을 거야. 괜찮아.” 마주 앉아있던 히나가 결국은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으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자상한 왕자님도 결국은 마법사구나, 해서. 체리와 딸기가 든 청을 넣은 차에서 좋은 향이 났다. 정확히 히나가 좋아할 만한 달달한 향기와 맛의 차였다. 그것을 들어 한 모금 마시려는데, 우다다다 하는 소리와 함께 고양이가 달려와 히나의 팔을 탁 건드렸다. 반가운 마음에 안기려 한 듯 했다. ‘찻물······!’ 덕분에 몇 방울의 빨간 차가 새하얀 로브 위로 툭툭 떨어졌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고양이를 안아들며 말했다. “사람 좋다고 그렇게 달려오다 다친다, 너.” “애옹!” 또 대든다. 어느새 좀 컸다고 말대꾸를 하는 것 같아서 칼리안이 다시 웃었다. 그리고는 간단히 입을 열어 빨간 얼룩이 진 히나의 로브를 깨끗하게 돌려놓은 뒤, 아직 마시지 않은 자신의 차를 히나 쪽으로 밀어주며 입을 열었다. “히나, 당분간 키리에와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 빨간 얼룩이 진 것을 지워준 것과, 쏟아진 차 대신 새 잔을 건네준 것에 대해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데 생각지 못한 말이 들렸다. 그래서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칼리안을 쳐다봤다. - 무슨 일이, 있어요? 지금의 키리에는 누구를 보아도 가름이 함께 보일 것이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무조건 혼자 있는 것이 나았다. 칼리안 자신은 물론 심지어 히나까지, 되도록 키리에의 앞에 나서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하는 말이었다. “미안.” 이유가 있을 테지만 칼리안은 그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않은 채 대신 이렇게 사과만 했다. 그런 칼리안을 잠시 쳐다보던 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움직였다. - 잘은 몰라도, 왕자님이, 미안하다고, 생각하실 일이면. 오빠도, 똑같이, 잘못을 했을거예요. 정확히는 몰라도 그럴 것이라고. - 그러니까 왕자님 탓으로만, 생각하지는, 말아요.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히나는 그렇게 말해주며 웃었다. 그리고는 칼리안의 품에 안긴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를 보며 말했다. - 고양이, 이름. 지어주세요. 키리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정작 칼리안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기 때문에 꺼낸 말이었다. 큰 일이 아니라면 칼리안도 너무 걱정하지 않도록 다른 고민할 거리를 건네주는 것이다. 미안해하는 마음을 잠시 접어둔 칼리안이 물었다. “네가 불편하지 않겠어?” 이 말에, 히나가 생긋 웃었다. 정말로 히나가 생각한 이유 때문에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던 것이 맞았음을 확인한 탓이다. 이 다정하고 자상한 왕자를 향해 히나가 포근한 얼굴로 대답했다. - 예쁜 이름으로, 지어주세요. 히나는, 그 똑똑하고 멋있는 말에게 칼리안이 지어준 이름이 겨우 검은색 혹은 커다란 까마귀라는 뜻임을 아직 몰랐다. 그랬으니 마음 편히 칼리안에게 부탁을 한 것이리라. “알았어, 고민해볼게.” 칼리안이 걱정 말라는 듯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고양이 이름을 못 지었다. 히나의 부탁이었다. 뭐 하나 허투루 지을 수가 없었다. 신중에 신중을 가하다 보니 마음에 드는 이름이 단 하나도 없었다. “대사막 인근 지역에 야만족이 다시 출몰한다 들었는데. 병력 지원이 필요한가.” 덕분에 회의에 든 르메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새겨듣지 못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음에도 말이다. 내용과 결과를 대충 알고있는, 그리고 늘 반복되었던 야만족 침입 문제보다 히나의 고양이가 중요했다. 굳이 칼리안이 끼어들지 않아도 이제는 르메인이 알아서 잘 처신하고 있었기도 했으니까. 회의는 계속 이어졌다. “사망한 하울핀 남작의 위를 이을 이가 없다 하던데. 내게 그것을 제일 먼저 알려야 할 가빈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군.” 이런 르메인의 말에, 칼리안의 옆에서 피식 웃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근신 중인 란델은 이 자리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니, 분명 삶은 완두콩이 낸 소리일 것이다. 가빈이라는 백작이 주인 없는 땅을 혼자 차지하려 했으리라는 것을 알아서 웃은 것일 터였다. 칼리안 외에는 그 소리를 들은 이가 없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귀족들 앞에서 비웃는 것 역시 좋은 버릇이 아님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접어둔 칼리안이 다시 고양이 이름을 고민했다. 이름이 호명된 백작은 곧바로 르메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하, 그것은······.” “새로운 남작을 조만간 보내도록 하지.” 칼리안은, 다른 일정은 몰라도 귀족들이 모이는 정기 회의에는 꼬박꼬박 참석을 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을 따로 만날 기회를 만들 수는 없었으므로 회의에 에반이 참석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를 만나보아야 오러를 가늠해볼 테니까. “이런 일이 두 번 있지는 않기를 바라네.” 셋째 아들이 지금 누구 한 명 목을 없애버릴 생각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뒤 고양이 이름이나 고민하고 있음을 모르는 르메인은 지극히 평범한 회의를 알아서 이어나갔다. “그럼 이것으로 마치지.” 잠시 후, 조용해진 회의장 안에 르메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르메인은 귀족들 쪽은 보지도 않은 채, 예를 보이는 칼리안과 플란츠 쪽으로만 시선을 한 번씩 준 뒤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라 마찬가지로 자리를 떠나려던 칼리안이 잠시 멈췄다. 회의장 안으로 들어오는 얀을 본 탓이다. 정확히는, 그 손에 들린 쪽지를 봤기 때문이었다. “회의 참석하시는 동안 도착했는데 바로 확인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직 밖으로 나가지 않은 귀족들의 시선이 칼리안 쪽을 향했다. “아, 고마워.” 편지 크기로 보아 분명 전서구 편에 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칼리안에게 전서구를 보낼 만한 이는 아르센 뿐이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던 내용이기도 했다. 어차피 쪽지 하나 받는 것 쯤, 이상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 자리에 앉아 쪽지를 펼쳤다. - 1왕자님과 연락하고 있지 않습니다. 회유했고 요구 조건 없습니다. 저는 이번 주 내로 카이리시스에 돌아갈 것 같습니다. 예상한대로 아르센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그레이와 거짓으로 손을 잡았고, 그레이가 란델과는 연락하지 않는 상태라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곧 생각에 잠겨들었다. ‘기간이 안 맞는데.’ 편지가 온 시기와 돌아오겠다 말한 기간이 조금 이상했다. 새가 날아오는 기간을 제하더라도, 수도에서 변경백령에 도착한 뒤 그레이와 대화를 나누기까지 예상보다 조금 더 오래 걸렸다. 일을 마친 뒤 이번 주 내로 온다는 것을 보니 이동 마법진을 이용할 생각인 듯 보였으나, 그 예정일도 지금 당장이 아니라 이번 주 내였다.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나본데. 거기 더 있으려 할 리 없는데도 조금 더 있다 오겠다 하고.’ 아르센이 그 일을 얼마나 하기 싫어했을지 잘 알았다. 그럼에도 지금 상황에 그 일을 할 만한, 그레이를 회유할 수 있을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낼 상황의 인물이 아르센 뿐이었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으니 칼리안이라 해서 미리부터 적합한 인물을 준비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아르센에게 부탁을 했고 아르센은 다른 말 없이 칼리안의 요구를 따라줬다. 그래도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니 일이 끝나면 곧바로 돌아올 생각을 했을텐데, 굳이 이번 주 내로 오겠다 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 톡, 톡. 습관처럼, 칼리안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천천히 두드렸다. ‘마법진이 아직 완성이 안 됐거나, 아니면 완성은 됐는데 세이렌 경의 일에 끼어들었거나.’ 아르센이 변경백령에 도착하는 시기가 늦어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수도에 오겠다는 시기가 늦춰지는 것은 그 두 가지 이유 뿐이었다. 그리고 에우리아의 일이라면 아마도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에게 언급했던 것과 연관이 있을 터였다. 검은 돌에 대한 조사. 그것을 하러 떠났으니, 지금부터 아르센이 에우리아를 도와 함께 조사를 하고 오겠다는 뜻이리라. 마법진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조금 기다리다 오는 것이면 그리 상관 없었으나, 검은 돌의 일에 아르센까지 얽히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앨런이 에우리아로 하여금 그 일에 더는 신경쓰지 말도록 일러두지 않았던가. 그만큼 위험했으니까. ‘주말까지 오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든 나가봐야겠는데.’ 일단은 거기까지만 생각을 한 칼리안이 마력을 살짝 운용했다. - 화르륵! 순간적으로 칼리안의 손 끝에서 조금 큰 불길이 일며 쪽지가 완전히 타 사라졌다. 아직 나가지 않은 귀족들의 시선이 모였다. “형님. 빌헬름 관에 가시는 길이면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귀족들을 신경쓰지 않은 채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고, 플란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뜩치 않은 것을 보는 듯한 얼굴을 곧 지운 플란츠가 대답했다. “그래.” 일부러 더 크게 피워올린 불꽃임을, 일부러 한 말임을 알아서였다. 칼리안이 마법사임을 귀족들이 모르지 않았다. 방금 전의 불꽃은 그저 시선을 모으기 위한 행동일 뿐. 그렇게 시선을 집중시킨 뒤 플란츠에게 빌헬름에 자신이 가도 되는지를 허락받는 것. 발칸이 플란츠의 것이 되었음을, 스스로 마법사이기도 한 칼리안이 그것을 인정했음을 은연중에 확인시켜주는 행동이었으니까. 미리 예측하지 못한 쪽지 한 장을 이용해 짧은 퍼포먼스를 마친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플란츠가 몸을 일으켰다. 귀족들의 인사를 받으며 밖으로 나온 둘은 말한대로 빌헬름 관을 향해 발을 옮겼다. “쪽지, 뭔데.” 칼리안이 확인한 것이 아르센의 쪽지임을 플란츠가 모를 리 없다. 섣불리 그것을 숨기려 하면 또 눈치챌테니, 칼리안은 그냥 설명을 했다. “세이렌 경이 조금 늦는다고 하네요. 아무래도 그 돌에 대해 조사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르센의 편지였고 그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줄 수 없었으나 편지로부터 추측한 다른 일을 알려주는 것은 상관 없었으니까. “괜찮겠지. 정신 나간 마법사도 같이 있을 텐데.” 플란츠가 이렇게 대꾸했다. 플란츠는 아르센이 이동 마법진 때문에 에우리아와 함께 돌아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 아무리 플란츠라 하더라도 지금 칼리안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고 있었다. “오늘은 석찬까지 있으니 저녁에는 수련장 가기 어려울 것 같은데, 오늘 검술은 빌헬름에서 보아 드리겠습니다.” 플란츠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플란츠를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물었다. “안 궁금하십니까, 키리에가 왜 그랬는지는.” 물어보질 않았다.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고 한동안 걷는 것에 집중하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미처 받아들이기 전에 감당하기 어려울 피를 묻혀서,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더 나은 방법을 깨우치게 되는. 일종의 환각입니다. 보이는 것에 익숙해지면 다시 나타나지는 않으니 곧 괜찮아질 겁니다.” 잠시 말 없이 있던 플란츠가 대답했다. “그래.” “쪽지 말고, 그날 키리에가 왜 그렇게 죽일 듯이 공격을 했는지. 이런 것을 궁금해하셔야죠.” 살기는 되받아치면서, 정작 그런 공격을 받은 것에는 왜 화를 안내는지. 칼리안이 받은 쪽지가 무엇인지는 궁금해하면서 정작 자신에 대한 것은 왜 궁금해하지 않는지. 이번에도 플란츠는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키리에가 그랬습니다. 형님처럼.” 지금의 키리에처럼, ‘과거’의 키리에도 그랬다. 궁금해하지 않았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알려주면 알려주는대로.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채로. 그냥 무조건 다 알겠다고만 했다. 전부 그냥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가름을 봤었다. 지금보다 그때의 키리에가 더 단단했지만 결국 베른과 같은 것을 보았다. “그렇게 하지는 마시죠.” 비단 그것이 꼭 검을 다루는 일에만 속하겠는가. “형님 일에 대해서도 궁금해하고, 물어보고, 화도 내고. 죄책감 버리고 살겠다 마음 먹었으면, 욕심도 좀 내시라는 겁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결국 탈이 나는 것은 똑같으니까. “그러셔도 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줘야 하는 손 많이 가는 놈을 보며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 제29장. 감당할 수 있는 일(2) > 궁금해하고 물어보고 화도 내고. 거기에 더해 욕심을 내보라니. 삶에 대한 연륜이 더 많으실 것은 분명한 동생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를 만큼 어리지는 않았다. 살겠다 했으니 숨 쉬는 것 말고 사는 것을 좀 해보라는 소리겠지. 그러니 적당히 알겠다 하고 넘어갈 수 있을 문제이기는 했으나, 플란츠는 지금 그렇게 곱게 대답해 줄 기분이 되지 못했다. 차라리 시종 레릭이 저런 말을 했으면 그냥 또 짖나보다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칼리안이 그 말을 한 탓에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기어이 말려 올라갔다. “내 아우님께서 하실 말이 아니지 않나.” 루비 장신구 하나에 집중하는 귀족들이, 갑자기 자신들 앞에서 플란츠를 불러세운 칼리안의 말을 놓치고 지나갔을 리 없다. 그러니 한 시간 쯤 뒤면 아스트리샤 거리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 3왕자 칼리안이 발칸이 있는 빌헬름 관에 함께 가도 되는지 2왕자 플란츠에게 허락을 구했노라고. 굳이 귀족들이 있는 곳에서 그 말을 꺼낸 것은, 플란츠가 발칸을 소유했다는 것을 칼리안도 인정했음을 귀족들에게 알리기 위한 행동임이 분명하다고. 이렇게, 귀족들 앞에서 꺼낸 갑작스러운 말 한 마디로 아주 확실하게 발칸을 넘겨주자마자 저런 소리까지 하고 있으니 플란츠의 심기가 매우 불편할 수 밖에. 그 불편함을 모를 리 없는 칼리안이 태평한 목소리로 느긋하게 대답했다. “저는 충분히 욕심 내면서 살고 있습니다.” 레이븐이 잡초 먹는 소리 한다.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얼굴로 말하는 칼리안을 보며 그만 할 말이 없어진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칼리안은, 다 끌어안아 지키는 것을 제 욕심이라 여기는 듯 보여서.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플란츠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이 다른 말 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멀리 보이는 궁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고양이 이름을 카밀론이라고 지으면 히나가 싫어할까요.” 꺼내놓는 말이 뜬금없기로는 카이리스 아니라 대륙 제일일 것이다. 방금 전까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린 것처럼 고양이 이름 얘기를 꺼내 들다니. “아니면 아껴뒀다가 개한테 붙여주는 게 나으려나요.” 플란츠는 당황하거나 그게 무슨 말인지 묻지 않았다. 이름 지어 줄 고양이가 한 마리밖에 더 있나. 방금 전에 오간 대화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그냥 짧은 한숨만 내쉰 뒤 이 갑작스러운 주제에 대해 답했다. “위대하신 분께서 헤이시아에 다시 오시겠군.” 키우는 고양이나 키울 개에게 시스파니안의 아들이자 이 나라의 2대 국왕의 이름을 붙이면 시스파니안이 다시 찾아오겠다고. 이번엔 이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검은 나비’의 의미 그대로 그냥 죽여버리러. “그래도 ‘나비’라니. 사람보다는 고양이에게 더 어울리지 않습니까.” 플란츠가 잠시 말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말한 것이 카밀론의 뜻임을 알아들었고, 그로 인해 칼리안이 지금 세크리티아 왕제의 지식을 꺼내놓고 있음을 상기한 탓이다. 카이리스에서는 그 언어로 이루어진 말이 그렇게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 않았으니까. 아무튼 칼리안도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지 그에 대해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조용한 걸음이 다시 이어졌다. 그렇게 칼리안과 플란츠가 빌헬름 관 근처에 다다랐을 즈음, 말 없이 발을 옮기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 위로.”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고,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더했다. “고양이 이름. 아직 못 정했으면.” 창 밖을 보거나 가만히 앉아 있을 때마다 찾아와서 귀찮게 울어대던, 플란츠를 더 좋아하는 칼리안의 고양이 이름은 그런 뜻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했다. 의외라는 눈으로 플란츠를 보고 있던 칼리안이 곧 웃었다. 고양이 이름 지어 줄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음을 깨달아서였다. “루시, 라고 합니다.” 위로. 그리고, 가장 빛나는 별. 고양이 이름으로 하기에 딱 좋은 말이라서 웃었다. “그렇게 지으면 되겠네요.” 플란츠는 고개만 끄덕였고, 드디어 이틀간의 고민을 끝낸 칼리안은 속 시원한 얼굴로 발을 옮겼다. 그 후 오래지 않아 빌헬름 관에 들어설 때, 플란츠가 뜻밖의 이야기를 하나 더 꺼냈다. “내 이름에도 다른 의미가 있나.” 플란츠. 지금의 언어로는 ‘고귀한 달의 인도자’ 라는, 왕족에 걸맞는 뜻의 이름이었다. 그것은 칼리안은 물론 플란츠 역시 잘 아는 내용이기도 했다. 다만 그 의미 말고 칼리안이 알고 있는 언어에 같은 말이 있는지가 궁금하다는 소리였다. 말이 좀 짧아서 그렇지 그래도 가르쳐주는 것 하나는 잘 배우는 플란츠가 아니던가. 그러니 궁금해하라 말해준 대로 자신의 일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조금 전 심기 사납게 굴었던 놈과 완전히 다른 놈이라는 듯 고양이 이름을 지어주더니 이번에는 자기 이름까지 알려달라 하는 플란츠를 보며, 칼리안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 말을 흐리는 칼리안의 표정이 참으로 묘했다. 웃는 것인지 아니면 난처한 것인지, 혹은 둘 다 담긴 얼굴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형님 이름과 같은 말이 있기는 합니다. 나쁜 뜻은 아닙니다만.” 말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던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내 형님께서 아직 어리셔서, 좀 더 크시면 알려드리겠습니다.” 하. 연세 모를 동생의 이 어처구니 없는 말에, 순간 할 말 잃은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얼굴을 했다. “짖네, 또.” 칼리안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짖은 게 맞다는 소리다. 그리고는 빌헬름 관으로 먼저 들어갔다. 한참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그런 거 있잖니, 잔디같은거. 아니면 나무라거나. 아무튼 초록색 나는 싱싱한거. 너 맨날 처먹는 그거. 그게 플란츠란다.’ 라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냥 짖는 게 낫지. * * * 누군가 찾아왔음을 알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고 진작부터 들어오기를 기다렸을 테니까. “스승님!” 그래서 칼리안은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서며 반갑게 말했다. 자신의 집무실에 칼리안이 오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던 앨런이 웃으며 반겼다. “오래도록 오지 않으시기에, 그냥 잊고 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르센의 부재로 앨런 역시 빌헬름 관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것을 알면서도 빌헬름에 도착한 칼리안이 훈련장에서 나오지 않아서, 오늘은 그냥 수련만 하다 돌아가려나보다 하고 마음을 접고 있던 참이었다. 그랬으니 더 반가울 수 밖에. “키리에가 조금 힘들어 해서, 제가 대신해 형님의 검을 보아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앨런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듯 앨런이 미리 준비해둔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말린 귤을 넣고 우려낸, 앨런의 마음 씀씀이만큼 짙은 향이 나는 차였다. 그 향을 잠시 음미하며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이던 칼리안이 그 동안 있던 일을 풀어놨다. 다만 키리에에 대한 일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지난 일에 대한 것은 나눠 질 수 있을 걱정이 아니라 그저 앨런의 속만 상할 일이었으니까. 대신, 비가 많이 오던 날 시스파니안을 만난 것에 대한 말을 전했다. “갑작스럽게 오신 탓에, 제가 스승님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 뒤에는 앨런을 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시스파니안이 카이리시스에, 그것도 빌헬름 관과 지척에 있는 헤이시아 궁에 왔었음에도 만나지 못했으니까. 앨런은 이번에는 그때만큼 아쉬워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그 날 그 자리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러셨습니까?” 뜻밖의 말에 칼리안이 놀라며 물었다. 앨런이 어딘가 흡족한 얼굴로 설명을 더해주었다. “플란츠 왕자님이 제 발을 되돌려 놓으시기에 다른 시간을 잡아 다녀왔습니다. 무슨 일로 그리하셨나 했는데 이유를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내새끼 친구 생긴 게 진짜구나’ 하는 표정을 짓는 바람에 칼리안을 질색하게 만들었다. 고양이 끼고 사는 풀이랑 친해진 것처럼 보였다는 말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그래요. 시간의 축에 대해서는 저도 계속 확인을 하고 있으니 알게 되는 것이 있으면 바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여보인 칼리안이 물었다. “아무래도 세이렌 경이 그 일에 대한 조사를 계속 하는 것 같은데, 혹시 맞습니까?” 이미 확신을 한 듯한 말이었으므로, 앨런은 칼리안이 걱정할까 굳이 전하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두 놈이 수도를 떠난 다음 날 밤에 갑작스러운 보라색 번개가 한참 떨어졌다 합니다. 번개 떨어진 자리에서 마흔 구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 아마도 협회장이 벌인 일이겠지요.” 그 말에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우리아가, 그리고 아르센이 정말 그 일에 개입을 한 것을 확인 받은 까닭이다. “둘이 수도로 돌아오면 꼭 손을 떼도록 말을 해야겠네요.” “그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남은 것은 왕자님과 제가 알아보면 될 일이니.” 최소한 앨런은 그들로 인해 위험해질 일은 없었다. 칼리안은 그렇게 해달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체이스 왕세자 역시 계속 움직이고 있습니다. 카이리시스에서는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아닐까 추정되는 시신들이 발견됐고, 협회장 뒤를 세작들이 따라간 흔적도 발견됐습니다. 그것은 알고 계시는지요.” 칼리안이 찻잔 속의 귤 조각을 스치듯 바라본 뒤 입을 열었다. “의심되는 부분이 있는 세작들을 내치셨을 겁니다. 그들에 대한 조사도 멈추지 않으셨을 테고.” 그것은 과거의 체이스와는 조금 다른, 베른에 가까운 행보였다. 베른이 맡았던 것들을 전부 맡을 수는 없었겠지만 어느 정도는 해왔을 것이라 생각을 했다. 베른이 없어서 바뀔 만한 사람은 체이스였지 데블란이 아니니까. “확인되는 것이 있으면 알려주실 테니, 새들은 그냥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스승님.” 모르는 척 해달라는 말이었다. 앨런은 그냥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한동안 말 없이 앉아있는 칼리안을 보던 앨런이 잠깐 뜸을 들이다 차를 들어 한 입을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후작을 잘라낼 생각은 아직 그대로십니까.” 자신과 대련하여 오러를 늘리고, 르메인에게 프레이야의 추숭을 요청하고, 아르센을 보내 그레이를 회유하고. 오늘은 발칸의 소유에 대한 명확한 의사를 귀족들 앞에서 보였다 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에반 브리센 후작의 목숨을 빼앗기 위한 준비였다. ‘그들’에 대한 일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플 상황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대로입니다. 브리센 후작이 죽지 않는 한, 형님께는 언제 떨어질 지 모를 칼날 아닙니까.” 심장 위에 칼을 얹고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플란츠가 에반이 정해 둔 기준에서 벗어나는 순간 맹세의 인이 발동될테니까. “브리센 후작이 그리 영민하지 않은 것이 다행한 일입니다만, 혹시 모를 일이니까요.” 브리센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기준에 얼마나 많은 틈이 있었는지 에반이 눈치채지 못할 때 없애버리는 것이 나을 테니까. 그런 칼리안을 잠시 보던 앨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느새 주변에 투명한 막이 일렁이는 채였다. “때가 되면 제가 다녀오지요.” 에반을 죽여 없애도 무리가 없을 때가 되면 칼리안이 아니라 자신이 에반을 죽이고 오겠노라고. 그런 말이었다. 앨런에게 있어 에반 브리센은, 조금 까다로울 수는 있겠지만 위험한 상대는 아니니까. 어려울 것 없는 일이라는 듯 꺼내진 말에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앨런이 이렇게 말을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리센이 우습고 가벼운 그 머리로 카이리스를 집어 삼킨 것은, 브리센 후작의 검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입니다.” 칼리안이 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알 것 같아서, 앨런이 소리 없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준 적 없던 칼리안은 이번에도 정석 같은 대답을 꺼내놓았다. “저는 브리센의 검까지 끊어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칼리안의 말대로 브리센의 머리는 가볍지만 그들의 검은 강했다. 욕심 많고 생각 없는 브리센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검의 강함에 있었다. 그런데 그 검을 온전히 구사하는 것은 에반이 유일했다. 기사들 뿐 아니라 플란츠에게도 모두 알려지지 않은 것이 브리센의 검술이 아닌가. 그나마 그레이가 있다지만 그레이는 소드마스터가 아니었으니 온전한 브리센의 검을 다룬다고 보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의 말은 곧. “플란츠 왕자님에게 그들의 검까지 온전히 알려주시려는 겁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직접 알려주려 하지 않을테니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형님의 이름이 바뀌지 않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플란츠가 브리센을 손에 쥔다 해도 플란츠는 완전한 브리센의 사람으로 여겨질 수 없었다. 브리센을 가지든 후작의 위에 오르든, 왕족인 플란츠의 이름까지 바뀌지는 않는다. 브리센의 가주인 플란츠 룬 카이리스가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에반도 그레이도 모르지 않는다. 그 이름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그들 역시 잘 알고 있으니,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플란츠에게 자신들의 검을 알려주지 않을 터였다. 브리센에게 있어 플란츠는 언제까지고 적당히 가까운 외부인이니까. “머리가 아니라 검으로 유지되고 힘을 부렸던 가문입니다. 형님이 아무리 똑똑해도, 머리만 가지고는 브리센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듭니다.” 카이리스의 양대 기사 가문이 아닌가. 검술로 이어져 온 가문을 하루아침에 이어 받은 머리만 좋은 왕자는, 절대로 그 가문을 유지시키지 못한다. 그들과 아무 관련 없는 칼리안의 검술만 가지고는 브리센의 가주로 인정받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제가 나서면, 가르쳐주지는 않겠지만 보여주기는 하겠죠.” 그들이 플란츠에게는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겠지만, 칼리안을 앞에 두고 살기 위해서는 펼쳐 보일 수 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니 칼리안이 직접 검을 맞대며 그들의 검을 확인하겠다는 소리였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알아낸 검술을 플란츠에게 알려줄 생각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형님이 앉으셨을 자리에 제가 들어앉으려 하고 있으니, 왕위 대신 앉으실 자리는 제대로 만들어 드려야죠.” 이렇게 앨런의 개입을 거절한 칼리안이, 걱정하는 마음만큼 향긋하고 새콤한 차를 마셨다. “누가 들으면 억지로 빼앗으시는 줄 알겠습니다. 쓸데 없는 부채감은 대체 언제 내려놓으실 요량인지.” 안타까운 마음에, 앨런이 이렇게 말하며 혀를 쯧 찼다. 걱정해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던 칼리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 죽을게요. 저는.” 아들을 먼저 보내는 일을 두 번 겪지는 않으리라는 말. 그런 의미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아들은 앨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 * *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났다. 일요일 밤이 되어가도록, 아르센과 에우리아가 돌아오지 않았다. < 제29장. 감당할 수 있는 일(3) > “연락은?” 왕궁 안을 오가는 작은 마차에서 내린 칼리안이, 마중나와 있던 시녀 메를린을 향해 물었다. 얼마 전 회의에서 르메인이 언급했던, 사망했다는 하울핀 남작의 영지를 하사받게 된 새로운 남작이 인사를 올리러 왕궁을 찾아왔다. 사실 왕궁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지만 어찌됐건 휴일인 일요일이었고 왕궁에 들어오기에는 다소 늦은 시간이었다. 다만 이 일을 조속히 진행하고자 했던 르메인의 뜻에 따라 이런 날 그리고 이런 시간에 찾아온 것이었다. 때문에 칼리안과 플란츠 역시 세뉴 관으로 가 짧은 대면을 했다. 그 후 칼리안은 앨런을 만난 뒤 이제 막 체르밀 궁에 도착한 참이었다. “없었습니다, 왕자님.” 당연하겠지만 아르센으로부터의 연락이 없었는지 묻는 말이었으므로, 칼리안과 얀이 없던 사이 체르밀 궁을 지키던 메를린이 바로 대답했다. “그래. 고마워.” 칼리안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 뒤 발을 옮겼다. 연락이 없어 걱정이 된다는 티를 더 내 보아야 좋을 것 없음을 알았으니까. - 이동 마법진 구축은 이미 완료되었다 합니다. 협회 쪽으로도 별다른 소식은 없었습니다. 앨런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동 마법진 구축이 지연되어 둘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레이 브리센이 있는 변경백령 쪽에서 무슨 일이 있다면 이를 알려왔을 마법사 협회의 지부 쪽에서도 다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약속된 기간을 놓칠 사람이 아닌데.’ 다른 이도 아니고 아르센이 아닌가. 그런 아르센이 말 없이 기한을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3층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는 칼리안의 시선이 조용히 발 끝을 향했다. 사실상 앨런을 제외하면 카이리스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 둘이 함께 있었다. 그러니 어련히 알아서 잘 오겠나 하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맞겠으나 칼리안만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중에는 칼리안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이가 섞여있었으니까. 그랬으니 그 둘이 얼마나 능력이 있든 일단 마음이 놓이질 않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통신용 반지라도 들려 보낼 것을.’ 이렇게 잠시 후회 섞인 생각을 하던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다른 이도 아닌 그 아르센 헤르츠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새삼 우스웠던 탓이다. 그렇게 3층으로 와 방 앞에 선 칼리안은, 손을 들어 문을 열어주려는 얀의 행동을 막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얀을 향해 웃어보이며 말했다. “아니. 그냥 혼자 있을게.” 생각할 것이 있을 때 보통 이런 말을 해 왔고, 지금 칼리안이 누구 때문에 걱정을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얀은 다른 의문 없이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왕자님.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괜찮을겁니다.” 칼리안은 고개만 끄덕여 보였고, 얀은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계단 쪽으로 다시 발을 옮겨 멀어졌다. - 달칵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칼리안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불도 켜지 않은 채 테라스로 다시 나갔다. 봄의 끝자락을 붙든 바람이 느껴졌으나, 한가롭게 그것을 감상할 시간은 되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러 나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그래서 그냥 이렇게만 물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더없이 한가로운 태도로 테라스 의자에 앉아있는, 옅은 에메랄드색 뒷통수를 향해서였다. 마차에 앉아 체르밀 궁에 들어설 때 3층 테라스의 난간 너머로 완두콩같은 저 머리꼭지를 이미 알아봤다. 어두운 밤이었으니 시력 남다른 칼리안만 그것을 보았다. 그래서 얀도 물리고 혼자 방에 들어온 터였다. 칼리안의 질문에, 미동도 없이 앉아 눈을 감고 있던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답을 전했다. “전서구 노릇 하러.” 누군가의 말을 전해주러 왔다는 소리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플란츠를 전서구로 쓸 만한 사람이 누구일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 * * - 똑, 똑, 똑 천장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려퍼졌다. 그 정도로 조용했다. 지금 있는 곳이 숲 속의 한 바위 동굴이었던 탓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그 안에서 입을 연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침묵의 가장 큰 이유였다. 그렇게 한참동안 물이 떨어지는 소리만 퍼지는 가운데, 스산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튀어나왔다. “얌전히 가라고 보내줄 때 갔어야지.” 그 옆에 있던 이가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오늘 한 번만 더 참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협회장님.” 물론 당연히 아무 일 없이,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아무 일 없이 잘 있었던 에우리아와 아르센이었다. 에우리아를 말리는 말을 꺼낸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와서 잡기에는 상황이 안좋지 않습니까.” “마법사가 언제부터 상황 보고 사람 잡았다고.” “저는 항상 봤는데요, 협회장님.” 그리고 지금은 여전히 아무 일 아니라는 듯한 얼굴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의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하자면 조금 시간을 거슬러 그 주 화요일까지 간다. 칼리안이 아르센의 편지를 전달 받기 전 날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둘의 일정은 매우 평화로웠다. 물론 맥주 네 잔 때문에 아르센의 머릿속은 그리 평화롭지 않았으나,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브리센 변경백령 이곳저곳도 구경해가며 적당히 시간을 보낸 둘은, 저녁이 되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이 되어서야 그레이를 찾아갔다. 그날 오기로 했던 아르센이 하루가 다 가도록 오지 않자, 괜히 생각할 시간을 달라 말하는 바람에 마지막 기회를 놓친걸까 하는 생각을 한 그레이는 애가 타다못해 얼굴까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런 상황에 아르센 뿐 아니라 마법사협회 협회장이 함께 들어왔으니, 다른 조건을 언급할 생각도 못한 채 아르센이 손을 잡겠다는 답을 내어 놓았다. 그렇게 칼리안의 부탁을 잘 수행한 아르센은 곧 마법사 협회의 지부를 찾아가 칼리안에게 전서구를 보냈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그날 밤 에우리아는 히몰리카를 딱 한 병만 마셨고, 아르센도 딱 세 잔의 맥주만 마셨다. 그레이의 수하들이 뒤를 쫓아오지도 않았다. 둘의 뒤를 쫓는 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지 정도는 그레이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적당히 술도 마시고 밥도 먹고난 뒤 다음날이 됐다. 이제는 에우리아가 해야 할 일을 아르센이 도울 차례가 된 것이다. “여기서 하루만 가면 클램 숲이 나오는데, 그 안 어디에 살았다는 것이 마지막 목격담이랬어.” 신물을 만들 수 있다 주장했던 학자. 이름도 없이 그냥 ‘어떤 학자’라고만 적혀있던 그가 마지막으로 발견됐다 적혀있던 곳. 그곳이 바로 국경 인근의 클램이라는 숲 속이었다. 그런데 이동 마법진은 눈에 띄는 곳에 세울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동 마법진 역시 클램 숲 속에 있었다. 덕분에 에우리아는 이 곳에 지어진 마법진 핑계를 대고 찾아온 참이었다. “클램 숲 말씀이십니까?” “어, 맞아.” 이렇게 물었던 아르센이 뭔가를 잘못 들었다는 듯한 얼굴이 되어서는 한번 더 입을 열었다. “숲 속 어딘가에서 마지막으로 발견됐다는 사람의 흔적을 찾으시겠다는 겁니까?” “그렇지.” “그 넓은 숲에, 이제는 살아있지도 않은 사람을요.” “한 300년쯤 전 기록인데, 살아있으면 그게 사람인가.” 그런 말을 이제서야 해주는 협회장님 너는 사람인가, 하는 눈빛으로 에우리아를 쳐다보던 아르센이 얼른 다시 겁대가리를 찾아왔다. 그런 아르센을 본 에우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도와줬으니까 꼬맹이 너도 갚아야지.” 에우리아가 아르센을 도운 일이라고는 같이 하루종일 돌아다녀주다가 그레이를 만나 한 두 마디를 한 것 밖에 없었다. 그것이 매우 억울했지만 약속은 약속이 아닌가. 때문에 아르센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에우리아와 함께 클램 숲을 들렀다 갈 예정이니 늦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전서구를 칼리안에게 다시 한 번 보냈다. 그렇게 숲에 왔고, 생고생을 해가며 숲을 뒤지다 일요일이 됐다. 이른 아침 새 소리에 잠을 깨어 이번에도 야생 닭 한 마리를 잡아 노릇노릇 구워먹은 뒤, 포만감 어린 하품을 하던 에우리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새집이네.” 에우리아의 말대로, 적당히 높은 나무 위에 새집이 지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에우리아가 아르센을 향해 웃어보였다. “알 먹자.” “새알 말씀이십니까?” 아르센이 지금까지 괜히 야생 닭과 멧돼지만 잡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 흔한 토끼며 사슴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익숙한 닭과 돼지만 사냥을 했다. 그런데 계란도 오리알도 아닌 새알이라니. 새끼 새가 얼마나 귀여운데 그것을 먹겠다니! “안됩니다, 협회장님. 카이리시스 돌아가면 제가 계란 사드리겠습니다.” 사람은 잘만 죽여대면서 새알은 못 건드리겠다는 섬세한 감성의 마법사를 본 에우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러던가.” 아르센은 싫다 하고 직접 가져오긴 귀찮고. 뭐 그런 이유였다. 그래도 아주 조금쯤 아쉬운 마음에 다시 나무 쪽을 쳐다보던 에우리아가 눈가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새 둥지가 있던 나무 뒤쪽을 집중해서 살피기 시작했다. “저기 뭔가 있는데. 혹시 보여?” 자고로 제 눈과 귀로 보이는 것이 아니면 믿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시력 강화 마법은 아예 수련하지도 않은 에우리아였다.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선 아르센이 에우리아를 대신해 그곳을 확인한 뒤 말했다.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조금 더 집중해서 살피다 말을 덧붙였다. “······ 새치기 당한 것 같습니다.” 신나게 닭 잡아먹고 돼지 잡아먹는 사이에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에게 새치기를 당했다고. 그렇게 말했다. 에우리아나 아르센은 앨런처럼 항상 시야를 넓혀둘 수가 없었다. 그만큼의 마나도 없었고 그것을 항상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력도 되질 못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잠시 살폈을 때에는 인근에 아무도 없었는데, 그 사이에 저 가까운 곳까지 와서 먼저 동굴에 들어선 것이다.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에게 여전히 뒤를 밟히고 있던 것을 그제야 알게 된 에우리아가 곱게 웃었다. * * * 에우리아는 돌의 흔적을 찾아 숲에 갔다.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은 ‘그들’을 뒤쫓았다. 에우리아가 자신을 뒤따라오던 ‘그들’을 죽였고,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은 그 사실을 체이스에게 알렸다. - 마법사들을 자극하지 말고 둥지로 돌아가도록. 그리고 이런 내용의 회신을 받았다. 에우리아와 아르센과 부딪하지 말고 카이리시스로 돌아가라는 의미의 명령이었다. 그런데 세작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곳까지 힘들게 뒤쫓아온 이들이 하루아침에 에우리아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에우리아도 분명 ‘그들’의 뒤를 쫓는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따라가면, 다른 단서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런 욕심을 부리게 됐다. 물론 에우리아와 아르센이 얼마나 위험한 이들인지는 잘 알았다. 그래서 정말로 조심스럽게 에우리아와 아르센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얼마 후, 아르센이 브리센 변경백령에 마련된 마법사 협회 지부에서 전서구를 보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하루 뒤 두 번째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첫 번째 전서구는 놓쳤으나, 두 번째 전서구는 잡았다. - 세이렌 경이 이동 마법진 인근에서 확인할 것이 있다 합니다. 제가 함께 움직일 예정이라, 카이리시스 도착이 다소 지연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서도 함께 잡았다. 그리하여 세작들은, 두 번째 편지에 적혀있는 위치로 먼저 움직였다. 혹시라도 조사 중 에우리아를 마주쳐 사망할 것을 대비해 이러한 내용을 담은 편지를 체이스에게도 보냈다.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움직인 것에 대한 사과의 내용, 그리고 찾아낸 단서를 적어서. 그리고 에우리아보다 조금 빠른 시기에 어딘지 의심스러운 느낌이 가득한 동굴 하나를 찾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그렇게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덩굴을 피해 안으로 들어섰다. 마법 등불에 밝아진 동굴 내부는 크지 않았다. 조금 안으로 들어서니,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썩거나 삭아버린 집기들이 이곳 저곳에 널려있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문자가 잔뜩 적힌 종이들이 온 벽을 빼곡히 채우듯 붙어 있었다. 당연히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작들이 생경한 광경을 둘러보고 있던 그 때. “지나가라고 했더니 여기에 와 있었네.” 자박, 하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또렷한 음성이 동굴 속을 메아리치다 흩어졌다. “······ 뒤질라고.” 한낮의 사신. 에우리아의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새들의 귀에 내리꽂히듯 울려퍼졌다. 어두운 기운 가득한 피어가 뭉글뭉글 퍼져나와 동굴 속을 채워나갔다. < 제29장. 감당할 수 있는 일(4) > - 카이리스의 마법사를 상대하려 들지 마라.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에게 내려지는 지침 중 이런 말이 있다. 싸움이든 말싸움이든 단순한 대화든 상관 없이, 카이리스의 마법사는 일단 멀리 하고 보라는 소리였다. 왜 하필 카이리스의 마법사만 상대하면 안되느냐 묻는다면 카이리스 마법사들의 독특한 성향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마법 강국 리베른, 그리고 기사들이 많지만 마법사에 대한 대우가 특별히 나쁘지는 않은 세크리티아. 둘의 공통점이 있다면 마법사들이 의외로 정상적이라는 것에 있다. 타국 출신인 앨런만 보아도 그렇지 않던가. 비교적 사고방식이 자유로운 편이지만 머리가 미쳐있지는 않았다. 입이 미쳐있어 그렇지. ······ 뭐, 아무튼. 카이리스의 마법사들은 호기심이 넘쳐나고, 싸움을 피하지 않으며, 술을 좋아했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전부 다 조금씩 미쳐있었다. 이유는 몰라도 그들은 확실히 어딘가 좀 많이 달랐다. 그런 카이리스 마법사들의 우두머리. 즉,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피해야 할 최우선순위 마법사가 말했다. “거기 짹짹이들.” 이 말에, 나란히 무릎꿇린 세 명의 세작들이 일제히 한 쪽을 노려봤다. 그 곳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자세로 바위에 걸터앉은 보라 머리 마법사가 있었다. “그래, 너희들.” 세작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에우리아가 살짝 웃는 얼굴로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세작들은 저도 모르게 옷깃 안쪽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뒤질라고.’ 그날 아침. 세작들을 마주한 에우리아의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물 덩어리 세 개가 생성됐다. 딱 사람 머리만한 그 물덩이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세작들의 얼굴을 집어삼키듯 감쌌다. 피하는 것은 둘째 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바로 깨닫지 못했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치 진득한 젤리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농도 짙은 물이 세작들의 코로, 그리고 입으로 꾸역꾸역 흘러들어왔다. 숨을 쉬는 것은 물론 독을 씹어 삼키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저항하지 못하는 채로 세 명의 새들이 하나씩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렇게 나란히 포박되어 있었다. “헤르츠 부군단장이 살려두라고 해서 안 죽인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만나면 고맙다고 한 마디씩 해, 짹짹이들.” 이 말에 세작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 마법사가 자신들을 참새 세 마리 정도로 보고 있음을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에우리아. 입 조심하지.” 세 명의 리더 격인 ‘노란 울새’가 이 악문 소리를 냈다. 죽었으면 죽었지 저딴 취급은 못 받겠다 싶은 마음에 한 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체 모를 집단의 뒤를 쫓던 세작들이다. 그것도 왕세자 체이스의 직접적인 명령을 수행할 정도로 신임을 받을 만큼의 충성심과 무력을 갖춘 이들이었다. 그 충성심이 지나쳐서 이 사달을 냈고 에우리아 앞에서는 아무 소용 없는 무력이었다는 사소한 문제만 제외한다면 더없이 훌륭한 인재인 것이다. “왕이 아니라 왕세자의 새들인 것 같아서 살려뒀어. 나도 참고 있으니까 입 정도는 그냥 둬.” 노란 울새를 흘깃 쳐다보며 말한 에우리아가 손에 들린 종이 뭉치로 다시 눈을 돌리며, 아주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고 있던 독은 다 빼놨으니까 참고하고, 뭐 물어볼 것도 없으니까 혀 깨물 생각 하지 말고. 내일 되면 풀어줄게.” 완벽한 무시였다. 세작들이 사나운 눈으로 에우리아를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우리아는 바위에 걸터앉은 채 손에 들린 종이들을 하나씩 넘겨가며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노란 울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유는 몰라도 지금의 체이스가 이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았다. 그래서 그 정보를 확인해 체이스에게 전달할 욕심에 명령까지 어겼다. 체이스에게 돌아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 결정한 일이다. 정말 쓸데없고 방법도 잘못된 충성심을 지닌 세 세작들, 특히 노란 울새는 이왕 이렇게 된 것 뭐 하나라도 더 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 몇 시인가. 저하께 보고하지 않으면 추적이 있을텐데.” “밤이야. 다들 잘 자더라. 배고프면 말해. 먹고 남은 돼지 있어.” 에우리아는 체이스의 추적이 있으리라는 거짓말에는 신경쓰지 않은채 이렇게 대답했다. 정신 잃은 세작들에게 슬립까지 걸었었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였다. “이곳은 어디지. 누가 지내던 곳인가.” “동굴. 죽은 사람.” 너희들이 찾은 걸 왜 나한테 물어, 하고 중얼거리는 에우리아의 시선은 여전히 종이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럭저럭 대화가 이어지는 것을 느낀 노란 울새가 입을 한 번 꾹 다물었다 떼며 말했다. “우리는 ‘제온’을 추적하고 있었다. 협력한다면 서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에우리아의 눈이, 세작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잠시 빛났다. 제온. 칼리안을 습격한 단체의 이름임을 알아들었다. 지금 노란 울새는 에우리아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거래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에우리아가 궁금해 할 만한 정보, 하지만 비밀은 아닌 것을 슬쩍 흘려가며 에우리아의 흥미를 끌도록. 그래서 서로 아는 것을 어느정도 교환하게끔. 호기심 강한 마법사 아니던가. 궁금한 것이 생긴다면 무조건 달려들 것이라 생각했다. “뭐하러. 됐어.” 만약 에우리아가 일반적인 마법사였다면 그랬겠지만 지금 에우리아는 마법사 협회장이 아니라 정보조직의 유능한 보스로서 앉아있는 상태였다. “보고 있는 것은 그들과 관련된 자료인가.” “어, 아마도.” 그래서 이렇게 반대로, 노란 울새가 궁금해 할 정보를 슬쩍 흘렸다. 읽지도 못하면서. 다른 집기는 다 부서져 있었으나 종이만은 멀쩡하지 않았던가. 분명 중요한 자료일 것이다. 때문에 노란 울새는, 어떻게든 저것을 가져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했지만, 에우리아. 우리가 추적하던 이들과 네가 조사하던 이들은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마법사들은 겁이 많아서 누구랑 손 안 잡아.” 아마 이 말을 아르센이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모르겠으나, 일단 세작들은 불신 가득한 얼굴을 했다. 노란 울새는 방금 들은 말을 거절의 의사 정도로만 잘 알아들은 뒤 다른 것을 물었다. 포박된 세작이 감시중인 에우리아를 향해 질문하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발칸의 부군단장은 어디에 있나.” “이 종이 여기서 나가면 없어질 것 같아서 심부름 갔어.” 세작들이 잠들어 있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굴 밖으로 종이 쪼가리 하나를 들고 나갔었다. 그러자 동굴의 경계를 벗어남과 동시에 모두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에우리아나 아르센의 공간에 넣어도 마찬가지였다. 동굴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은 마찬가지였던 까닭이다. “동굴 전체에 ‘종이’에 대한 보존 결계가 걸려 있나 보더라고.” 보존 마법은 두 마법사가 구사할 수 있는 마법의 영역이 아니었다. 때문에 아르센은 이동 마법진 인근에 머무는 마법사들에게 도움을 받고자 그들을 찾아간 참이었다. 세작 세 명과 함께 있는 에우리아보다는 에우리아와 함께 있는 세작 세 명을 걱정하면서. 어찌됐건 범상치 않은 자료임을 다시 확인시켜 준 셈이 되었다. 곧 노란 울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배가 고프군. 먹을 것이 있다 했던가.” 조금 전에 배고프면 말을 하라 했으니까. 포박을 풀어주면 달려들어서라도 저것을 확인해 보아야 되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어, 잠깐만.” 가볍게 대답한 에우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 콰과과광! 동굴 밖에서 폭음과도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동굴이 우르르 울리며 바닥이 진동할 만큼의 거대한 소리. 천장에서 돌가루가 잠시 떨어져 내릴 정도로 큰 파장이었다. 물의 장막을 펼쳐 쏟아지는 돌가루와 먼지를 막은 에우리아의 눈이 사납게 바뀌어 있었다. 꼬맹이 아르센이 아직 밖에 있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리라. * * * 세 명. 세 명이었다. - 지지직! 첨예한 얼음의 끝이 갈라지는 소리가 숲을 울렸다. 조각난 얼음의 끝이 수 십, 수 백 개의 가느다란 실처럼 가지를 늘려가며 상대방의 붉은 막을 뒤덮었다. 빠르게 형태를 변경한 얼음이 서로 뒤얽히며 붉은 방어막 위를 감쌌다. 곧 아르센의 손을 따라 마력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얼음이 서로 조여들며 방어막 전체를 사방에서 압박했다. 그렇게 약화시킨 방어막 위로 네 개의 얼음창이 한꺼번에 꽂혀들어갔다. - 콰직! - 콰지직! 두 개의 얼음창은 방어막을 뚫지 못했고 두 개는 뚫었다. 목과 심장을 한꺼번에 뚫린 전사 한 명이 생명을 잃은 채 바닥에 무릎을 댔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힘 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 쿠웅! 곧 그의 머리가 바닥을 찧는 소리가 둔중하게 울렸다. 아르센은 그의 죽음을 인지했으나 그가 천천히 쓰러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얼음창을 쏘아보냄과 동시에, 그의 앞에서 사라진 아르센의 신형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나타났다. 이제 두 명. 고작 두 명인데!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라 했나.” 조금 전 자신을 마주한 아르센이 건넨 말을 기억한 전사 한 명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붉게 타오르는 것 같은 그녀의 검 끝은 바닥을 향해 있었고 아르센을 바라보는 얼굴은 평온했다. “나는 타미라. 그리고 저 쪽은 마르시타. 방금 네 놈이 영면시킨 자는 유르카다.” 관심 없다. 아르센은 그저 인사를 건넸을 뿐, 상대방의 이름이 궁금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위대한 전사의 이름을 듣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죽거라.” 상황이 반대로 되고 보니 이보다 더 짜증나는 일이 없었다. 스승님께서는 그래서 인사부터 건네라고 하신 걸까 하는 생각에, 아르센이 실소했다. 그와 함께, 아르센의 앞에 수십 개의 작은 창이 생성되어 타미라라 말한 대사막의 전사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 쐐애액! 달빛에 반사된 얼음 결정이 푸른 잔상을 남기며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먼 발치에 있던, 마르시타라 불린 마법사의 손이 잠시 붉게 빛나며 타미라의 앞에 붉은 막을 만들어냈다. - 타다당! 타당! 감각 없던 왼팔에서 올라오는 아릿한 통증보다 방금 전의 공격이 무력화된 것이 더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르센이 한번 더 손을 움직였다. 타미라 쪽을 향한 거대한 얼음창이 쥐를 발견한 매와 같이 땅으로 내리꽂혔다. 마법사 쪽에서 붉은 기운이 돌며 타미라에게 두 번째 보호막을 걸었다. 그와 동시에 마법사의 뒤에서 만들어진 얼음창 두 개가 정수리와 심장을 노린 채 떨어져내렸다. 이전에 40명이 모여 있던 놈들을 처리할 때 아르센이 한 번 썼던 수법이었다. - 쌔액! 죽음의 선고와 같은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뼈가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카앙! 캉! 대신 타미라가 던진 단검 두 자루가 마법사 쪽으로 날아간 얼음창을 쳐내는 소리가 들렸다. 한 손으로 들어올린 검으로 아르센의 창을 막고, 마법사 쪽으로 향한 얼음창을 단검으로 막아낸 것이다. 대사막의 늑대. 대사막의 전사들. - 쐐애액! 마법사 뒤로 부서져 떨어진 얼음이 일제히 떠올라 다시 한 번 마법사를 공격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파편이 순식간에 마법사를 덮쳤다. - 카드드득! 순간을 노린 공격이었으나,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마법사의 뒤에서 붉은 막이 잠시 빛났다. 그리고 얼음 조각이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욱씬. 깊이 베인 왼쪽 어깨에서 다시 한 번 통증이 찾아왔다. 흘러내리는 피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냄새가 역하다. 아르센의 팔을 타고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던 타미라가 검을 들어올렸다. 얌전히 죽어 줄 생각은 없던 아르센이 한번 더 몸을 이동했다. 순식간에 사라진 아르센의 신형이 상대 마법사의 바로 뒤에서 나타났다. 그러자 그 앞으로 붉은 기운이 가득한 단검 하나가 바람을 찢으며 달려들었다. 정말 놀랍게도 그것은, 마법사가 휘두른 공격이었다. - 카득! 푸른 빛이 허공에서 잠시 일렁이며 아르센의 실드가 휘청였다. 얼굴을 굳힌 아르센의 오른손 끝이 잠시 움직이자, 실드가 단단하게 재구성됐다. 그와 동시에 아르센은 마법사의 심장 앞에 얼음의 구체 하나를 만들어냈다. 그것으로 마법사의 몸을 완전히 뒤덮어버릴 심산이었다. - 쉬이익! 구체에서 쏟아지듯 흘러나온 냉기가 마법사의 몸뚱이를 완전히 휘감았다. 그것을 그대로 얼리려던 찰나, - 타아앙! 날듯이 달려온 타미라의 대검이 아르센의 실드를 강타했다. ‘젠장!’ 아르센이 재빨리 뒤로 몸을 빼며 조금 전 타미라가 서 있던 곳을 향해 얼음 창 여섯 개를 쏟아냈다. 무엇이든 꿰뚫을 것 같은 창 끝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타미라는, 이미 그 곳에 없었다. - 우우웅! 텔레포트로 몸을 이동시킨 아르센을 향해, 이미 지척까지 따라붙은 타미라가 대검을 들어올렸다. 당장이라도 아르센의 몸을 양분하겠다는 듯 그녀의 손에 든 검이 진동하며 짙은 오러를 만들어냈다. 피하지 못한다. 막을 수 없다. 타미라의 입에 걸린 웃음이 보였다. - 쉬이익! 그녀의 검이 아르센을 향해 내리쳐졌다. 검에 어린 붉은 빛이 번뜩임을 느낀 그 순간. - 콰과과광!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숲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괜찮습니까.” 검붉은 기운이 뚝뚝 떨어져내리는 검을 든. 아르센의 목을 향해 내리떨어지는 붉은 오러를 가로막은. 타미라의 붉디 붉은 오러보다 더 붉은 눈을 지닌 이가, 자신으로 하여금 두 번이나 누군가의 앞을 막아내게 한 따까리들 중 ‘미친’을 담당한 마법사를 향해 말을 건넸다. “앞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일만 해줬으면 좋겠는데. 헤르츠 경.” 그렇게 자신의 앞을 막아선 칼리안의 등을 보며 아르센은 굳은 결심을 했다. “죄송합니다.” 칼리안의 동상은 녹지 않는 얼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전신 동상으로. 멋짐과 잘생김 많이 넣어서. < 제29장. 감당할 수 있는 일(5) > 칼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믿는 이에게 가는 길목의 큰 숲에 마법사와 새가 있고, 부정하는 이가 섞인 ‘그들’이 새를 찾아갔습니다. 믿는 이는 텐실, 부정하는 이는 대사막의 늑대를 뜻했다. 입을 꾹 다문 채 쪽지에 적힌 수수께끼같은 내용을 확인한 칼리안이, 종이를 태워 없애는 대신 플란츠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대로 테라스를 뛰어 넘어 나가버렸다. 오래지 않아 달리는 말의 발굽 소리가 왕궁을 울렸다. 왕자를 태운 검은 말은 앞을 막아서는 기사들 사이를 유려한 움직임으로 피해가며 그대로 내달렸다. 테라스에서 그 꼴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칼리안과 마찬가지로 테라스를 통해 밖으로 뛰어내린 뒤 아르피아 궁으로 향했다. 칼리안이 쪽지를 돌려줬지 않나. 분명 뒷처리를 맡긴다는 의미일테니 아르피아 궁에 말을 전하러 가는 것이다. “······ 하.” 내 동생 도망갔다고. * * * 동굴 안.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선 채 마나를 흩뿌려 외부 상황을 살핀 에우리아가 입을 열었다. “짹짹이들.” 동굴을 울린 폭음으로 긴장하던 중 들린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던 노란 울새가 욱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우리아의 목소리는 태평했다. “꼬리 밟혔다.” 누군가 이 곳을 노리고 달려오고 있었다. 정확히 이 동굴을 노리고 달려드는 기세를 보아하니 우연히 지나가다 인사나 건네러 오는 모양새는 절대 아니었다. 이렇게 범상치 않은 낯선 기운을 감지했음에도, 에우리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에우리아의 말에 노란 울새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꼬리가 밟히다니? 무슨 소리인가.” “꼬리가 꼬리지. 누가 뒤쫓아왔다는 말이잖아. 우리 꼬리인지 너희 꼬리인지 모르겠는데. 아마 너희일거야.” 노란 울새는, 이미 자신들에게 꼬리를 밟혔으면서도 이번에는 세작들의 꼬리가 밟힌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인 에우리아를 향해 짧게 물었다. “누구인지는 모르는 것인가.” “어, 몰라. 여기 서서 그걸 알면 내가 사람인가.” 곧 에우리아가 양 주먹을 한 번씩 쥐었다 폈다. 그리고는 목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근육을 풀었다. 그렇게 마치 기사들이 전투에 나서기 전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낸 에우리아가 노란 울새를 향해 말했다. “너희들만 도망가는 건 상관 없는데. 동굴 밖으로 자료 들고 나가면 종이 망가진다. 동굴 무너져도 망가질 거야. 그러니까 알아서 얌전히 자료 지키고 있어.” 노란 울새가 험악한 얼굴을 했다. 이번에도 그리 신경쓰지 않는 얼굴을 한 에우리아가 다시 말했다. “대사막에서 온 늑대 새끼 같으니까 괜히 나왔다 죽어서 골치아프게 하지 말고.” 세작들 역시 제온이라는 이들의 힘, 특히 그들 중 ‘대사막의 늑대’와 같은 강한 무력의 전사가 그 힘을 지녔을 때 어떤 괴물이 되는지 알고 있었다. 특별히 에우리아가 그들을 지켜 줄 이유도 없었고 그들이 에우리아를 도울 이유도 없었다. 때문에 어떻게 처신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립] 그냥 두고 가려다 마음을 바꿔먹은 에우리아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훔쳐가려다 자료 다 망쳐놓을 것 같아서 안되겠다.” 에우리아는 나란히 쓰러져 잠든 세 명의 세작들을 보며 느긋하게 말한 뒤, 이제 지척까지 다가온 늑대 잡으러 동굴 밖으로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손 끝에 모여든 보라색 스파크가 파직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 * 보이지 않았다. 숲이 울렸고, 칼리안이 공격을 막았다. 멀리서부터 칼리안이 지금 서 있는 곳까지의 바닥에 길고 가는 검흔이 남아 있었다. 아르센은 그것을 본 뒤에야 칼리안이 이동 마법진 쪽에서 왔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바닥을 긁듯 검을 늘어뜨린 채 달려온 뒤, 떨어져내리는 붉은 오러의 검을 올려쳤다는 것도 땅의 검흔을 보고 알았다. 달려오던 힘을 담아 강하게 올려친 칼리안의 검과, 아르센에게 도약했던 힘을 실어 내리친 타미라의 검이 정통으로 부딪혔기 때문에 그렇게나 큰 굉음이 울렸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아니었다면 지금 칼리안이 어떻게 왔는지, 타미라의 검을 어떻게 막은 것인지 절대 몰랐을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마법사 잡아요. 죽이지 말고.” 타미라의 연갈색 눈을 노려보는 채로,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등 뒤의 아르센을 향해서였다. “네, 왕자님.” 어깨에 입은 상처가 깊었던지 피 냄새가 짙었다. 다만 대답은 잘 하는 것으로 보아 당장 죽을 만큼은 아닌 듯 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때문에 칼리안은 곧바로 아르센으로부터 관심을 돌렸다. 사고 친 마법사 말고 바로 앞에 서 있는, 검 좀 쓰는 듯한 대사막의 전사 쪽으로. - 카아앙!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아르센의 손에 푸른 빛의 기운이 모였다. 공기중에 퍼져나가다 다시 손으로 흡수되듯 사라지길 반복하는 기운을 갈무리한 아르센이 상대방 마법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껏 아르센을 고생시킨 타미라는 칼리안이 해결할테니, 타미라가 자신을 계속 노리든 말든 그냥 저 마법사 한 명만 사로잡으면 되는 것이다. ‘마르시타’라 소개 받았으나 아르센의 머리에 하나도 남지 않은, 특별히 기억할 것 없는 바로 그 마법사 말이다. - 파앗! 뭉클거리며 모여든 기운이 일순간에 아르센의 손바닥으로 빨려들어가듯 회오리치며 사라졌다. 익숙한 냉기가 손바닥 안에 집약되는 것을 확인한 아르센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리고 여러 걸음 떨어져 있던 그 마법사의 코앞에 다시 나타났다. 칼리안의 개입으로 같은 수끼리 싸우게 되었음을 깨닫고 있었던 탓에, 마법사는 당황하지 않고 붉게 빛나는 단검을 휘둘렀다. - 쉬이익! 그것이 정말 마법사의 공격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빨랐으나, 이미 한 번 당해본 경험이 있는 아르센은 더 이상 당황하지 않았다. 아르센의 손 끝이 움직였다. 물안개를 모은 것 같은, 따뜻한 차에서 올라오는 수증기를 모은 것 같은, 높은 산을 휘감은 구름을 모은 것 같은 느낌의 푸른 기운이 단검을 휘감았다. - 탁! 까드득! 그와 함께 마법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손톱으로 쇠를 긁어내는 것 같은 불쾌한 소리가 이어졌다. 단검의 표면에 어려 있던 붉은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담금질 직후 물 속에 들어간 쇠처럼, 단검의 표면이 새카맣게 변하다 종내에는 새하얀 실금이 생겨났다. 그레이의 대리석 테이블처럼, 붉은 오러가 어려 있던 단검이 얼어붙은 것이다. - 째앵! 곧이어 잘 만들어진 도자기 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났고, 마법사의 단검이 산산히 부서져 바닥에 흩뿌려졌다. 오러가 담겨있던 검을 깨뜨린 것에 성공했음을 감격해 할 새도 없이, 아르센이 다시 한 번 냉기를 모았다. 마법사의 손에 커다란 화염구가 생성되고 있음을 눈치 챈 까닭이다. 붉게 일렁이는 화염구가 지척에 있던 아르센을 향해 날아왔다. 마법사의 앞에 서 있던 아르센의 모습이 점멸하듯 사라졌다. - 콰앙! 방금 전까지 아르센이 있던 곳으로 날아간 화염구는 허무하게 바닥을 강타하며 폭발했다. 그 폭발에 대한 화답이라도 보내듯 일순간에 모여든 냉기가 마법사의 주변을 휘감았다. 그리고 네 개의 창이 마법사를 향해 쏘아지듯 날아갔다. - 쌔애액! 처음 세 개의 얼음창은 마법사의 실드에 막혔다. 실드에 박힌 얼음창이 형태를 바꾸며 넓게 펼쳐졌다. 그리고 이전과 똑같이 붉은 빛 실드를 빼곡하게 감싸며 얼어붙었다. 마지막 네 번째 얼음창이 쏘아졌다. - 쌔액! - 까드득! 까득! 얼음창이 내리꽂히는 충격에 형태를 잃은 실드가 공기중에 흩어져 사라졌다. 마법사의 실드를 깨고 나서도 힘을 잃지 않은 마지막 얼음창은, 그대로 마법사의 어깨를 꿰뚫고 바닥에 꽂혔다. “크윽!” 순식간에 입은 상처의 아픔보다 뼛속까지 얼릴 듯한 한기가 더 참을 수 없었다. 마법사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자신의 어깨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주고 받은 셈 치면 되겠군.’ 땅에 꽂혀 여전히 녹지 않은 얼음의 창에 어깨가 꿰인 채인 마법사에 비한다면 아르센의 상황이 훨씬 낫다 하겠으나, 아르센은 그렇게 계산했다. 곧 아르센의 마력이 한 번 더 움직였다. 커다란 돌처럼 둥글게 뭉쳐진 얼음 조각이, 피하지 못하는 마법사의 뒷통수를 향해 내리쳐졌다. - 빠악! 상당히 뼈아픈 소리가 울려퍼지며, 마법사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 * 무게감 없는 검은 방향을 전환하는 것도 빠르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타미라의 검을 힘주어 올려친 칼리안이 들어올려진 자신의 검을 곧장 내리그었다. 그 속도에 깜짝 놀란 타미라가 뒤로 도약하며 몸을 뺐다. 허공을 가른 칼리안의 검이 다시 방향을 바꾸며 집요하게 타미라를 공격해갔다. - 카아앙! 발칸의 마법사들을 향해 쏟아내던 것과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른, 피하지 못할 죽음의 저주와 같은 살기가 타미라의 숨을 틀어막는다. 타미라의 붉은 오러와 극명한 차이가 있는 칼리안의 검붉은 오러. 갈라진 심장에서 울컥 쏟아진 핏덩이와 같은 그 섬뜩한 빛이 검의 궤도를 따라 번뜩였다. 검의 궤적은 숲에 내려앉은 농밀한 어둠조차 베어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아르센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검을 내지르던 대사막의 늑대는, 찰나의 실수로 목이 떨어져나가지 않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 쉬이익! 캉! 카강!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검이 실드를 내리치는 소리가 뒤따랐다. 강력한 실드가 없었다면 검이 두 번 얽혀들 일은 없었을 것이다. 벌어진 상처가 빠르게 치유되지 않았다면, 칼리안과의 첫 공방에서 이미 영면에 들었을 것이다. - 카가각! 어김없이 잘려나가는 실드를 본 타미라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타미라를 마주보고 있던 붉은 눈이 일순 사라졌다. 똑같이 붉은 입술이 그려낸 긴 호선이 타미라의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았다. 강하다. 이제 막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 뜯은 맹수의 그르렁거림을 듣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포식자의 만족감 가득한 그 소리와 꼭 닮은 검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짓쳐드는 공포에, 당장이라도 검을 내려놓고만 싶은 피식자의 패배감. 강하다. 전해들은 말로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죽을텐데. 그러다.” 의문 가득한 시선에 대한 대답인 것처럼,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아직 앳된 목소리가 타미라의 뒤에서 들렸다. 그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타미라의 검이 반응했다. - 부웅!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잡은 타미라가 번개와 같은 속도로 한 바퀴 회전하며 주변을 샅샅이 베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 끝에 닿는 것이 없었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오러의 빛이 짙게 변했다. 주변이 일순 밝아진 느낌이 들었으나 눈에 보이는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그때, ‘탓!’ 하고 작게 발을 박차는 소리가 들리며 하늘 위에서 검붉은 검이 떨어져 내렸다. - 카앙! 순간적으로 검을 들어올린 타미라가 칼리안의 공격을 막아냈다. 날듯이 도약하여 내리쳐진 검의 힘이 그리 묵직하지 않은 것을 느낀 타미라가 눈을 빛냈다. 제대로 된 근육조차 없는 몸, 그리고 가벼운 검. 그것을 깨달은 타미라가 온 팔에 힘을 주어 칼리안의 검을 밀어냈다. 뒤로 넘어갈 검에 휘둘릴 때 드러나는 상체를 공격할 생각을 했다. 곧 타미라의 검에 느껴지던 무게감이 일순 사라졌다. 그리하여 다시 검을 휘둘러 앞에 선 이를 베어내려던 찰나. - 쉬이익! 검과 함께 밀려나 중심을 잃었어야 할 칼리안이 오히려 타미라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밀려난 검을 미련 없이 없애버린 칼리안이 타미라 쪽으로 뛰어들었다. - 우우웅! 어느새 다시 형태를 갖춘 검붉은 검이 타미라의 목을 향해 치달았다. “······ 죽는다니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 때. 똑같은 빛의 무언가를 갈구하듯 뻗어나온 검이 거침없이 살을 가르고 생명을 취해냈다. - 툭 더 이상 숨 쉬지 않는 전사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 제29장. 감당할 수 있는 일(6) > 녹빛 가득했던 숲은 이제 짙은 잿빛 어둠에 잠겨 있었다. 유난히 푸른 별이 많은 계절이었으나, 깊고 울창한 숲은 한 조각의 하늘도 온전히 보여주지 못했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간신히 보이는 하늘에 푸른 별이 잠시 보이다가도, 바람을 마주한 나뭇잎의 흔들림에 이내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기를 반복했다. 그때 푸른 별똥별 하나가 짧은 잔상을 남기며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을 보며 소원을 웅얼거릴 수 있는 이는 이 곳에 없었다. 일단 하늘이 보이지 않았고, 하늘을 바라보다 탄성을 지를 만큼 한가로운 이들이 없었다. - 파직, 파지직! 대신 떨어진 별똥별의 꼬리를 손아귀에 쥔 듯한 모습의 마법사 한 명은 있었다. 모여드는 보랏빛 마나에 바람이 깃들어, 바닥에 닿을 만큼 긴 로브가 크게 부풀며 펄럭였다. 먼 곳을 보거나 어둠 속을 식별할 만큼 시력이 좋지도 않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할 마법도 배워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정확히 적이 오고 있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디디고 서 있는 바닥에 얇고 거대하게 펼쳐둔 마나에 어느 곳에서 몇 명이 다가오고 있는지 매우 정확히 감지되고 있었으니까. “두 명인건가.” 말 발굽 소리는 들리고 있지 않으니, 분명 두 다리로 달려오는 속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르다. 그것을 느낀 에우리아가 슬쩍 웃으며 중얼거렸다. “모래 바람만 쐬다 숲에 오니까 신이 났나. 늑대새끼들.” 말과 몸짓, 표정에서는 그 어떤 긴장감도 없었으나 눈빛만은 아니었다. 지금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이들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지금 아르센의 상황이 어떤지 전혀 알 수 없었던 탓이 더 컸다. - 파직! 파직! 에우리아의 손에서 짧게 명멸하기를 반복하던 번개의 힘이 손 끝으로 집중됐다. 땅에 내려온 보라색의 별처럼 빛을 내던 그것이 조금씩 크기를 줄여가며 집중되더니 이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사라졌다. 그 뒤 에우리아가 오른손을 들어 앞을 향했다. 넓은 소매 자락에 항상 가려져있던 긴 손가락 끝에서 색깔과 빛이 전혀 없는 가느다란 번개가 소리 없이 뻗어나갔다. 그와 함께 발 밑에서는 뭉클거리는 느낌이 잠시 들었다 사라졌다. 물의 움직임이었다. 고요한 번개와 물을 적들에게 보내고 오래지 않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등불 같은 보라색의 빛이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시작됐다. - 콰광! 콰아앙! 소리없이 응집된 물이 바닥에서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다가오는 두 전사의 몸이 완전히 물에 젖은 그 때, 대기중에 함께 둔 마나에 전기의 힘이 담겼다. - 파지지직! 콰앙! 물에 젖은 전사들의 몸 속 깊은 곳까지 그대로 전류가 흘러들어갔다. 숲에 사는 그 어떤 짐승도 한 번에 절명할 이 공격이 성공한 것을 확인한 에우리아가 한참 멀리 떨어진 오른 편 나무의 굵은 가지 위로 텔레포트했다. 전사들이 저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까. 에우리아는 칼 든 놈들과 절대로 가까이 붙어 싸우지 않았다. 공격자의 위치를 확인한 저들이 곧장 달려들기 전에 몸을 움직여야 했다. 시야를 가리는 나뭇잎들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여전히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다가오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 지지지직! 다시 한 번 번개의 힘을 움직인다. 조금 전 공기중에 퍼뜨려 둔 마나를 다시 모아 놈들 두 명의 온 몸을 감싸안은 뒤 다시 한 번 전기의 힘을 내보냈다. - 쿠콰앙! 쾅! 콰앙! 숲이 번쩍일 때마다, 이제 지척까지 다가온 놈들의 모습이 언뜻 언뜻 보였다. 둘 모두 검을 들었고, 얼굴이나 몸에 큰 상처가 없었다. 놈들 주변에 일렁이는 붉은 실드를 없애지 못한 것이다. ‘번개는 못 부르겠고······.’ 한 떼로 몰려와 에우리아와 아르센을 공격했던 그 날의 검사들과는 확실히 다를 터였다. 하늘에 먹구름을 불러내고 번개를 내리꽂는 동안 에우리아는 움직이지 못한다. 보조해 줄 다른 마법사가 없는 상태에서, 대사막의 전사들을 앞에 두고 그런 대형 마법을 부리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제대로 쓰기도 전에 달려들어 검을 들이댈 테니까. 그러니, 그냥 죽일 수 밖에. 에우리아의 몸이 다시 한 번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놈들이 달려온 방향, 즉 놈들 뒤쪽의 조금 떨어진 바위 위에서 나타났다. 바닥이 젖었고, 놈들 주변에는 여전히 마력이 퍼져있었다. 놈들은 아직 에우리아가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했고, 에우리아는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소용돌이 치는 가느다란 물줄기 같은, 그러나 그 끝은 무쇠를 단련하여 만들어낸 것보다 더 단단하고 예리한 창 두 개가 생성되었다. 그 표면에 휘감긴 또 다른 마법에서 보라색 스파크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엉켜들었다. - 쌔애액! 에우리아가 아니라면 만들어내지 못할, 물과 전기를 모두 담은 창이 놈들을 향해 하나씩 날아갔다. 눈부신 궤적을 그리며 순식간에 치닫는 창을 본 두 전사가 각각 검을 들어 그것을 쳐내려 했다. - 촤악! - 파지직! 파직, 파직! 칼에 닿은 창이 곧바로 형태를 잃으며 칼날 위로 쏟아졌다. 물에 스며있던 전기의 힘이 칼을 타고 손으로 전해졌다. 몸 주변을 실드로 보호하고 있으니, 검을 쥔 손에 직접적인 번개를 보낸 것이다. “윽!” 순식간에 몸 속으로 파고드는 전기의 힘에, 놈들은 검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감전에 따른 일시적인 마비였다. 에우리아가 득달같이 팔을 들어올렸다. - 콰아아! 놈들이 디디고 선 바닥에서 물줄기 두 개가 솟아 올라 놈들을 가두어 회오리쳤다. 동시에, 눈이 시릴 만큼 밝은 스파크가 에우리아의 손에서 연거푸 쏘아져 나갔다. 용솟음치는 물 기둥에 갇인 채 번개 공격을 마주한 놈들의 몸이 잠시 붉게 빛났다. 몸 주변에 실드를 둘러 발현되는 빛이 아니었다. 몸 자체가 붉게 빛나는 것, 치유력이 발현된 것이다. - 콰아앙! 콰앙! 놈들이 멈칫한 새 부른 두 줄기의 번개가 물기둥 한 가운데로 떨어져내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두 놈 중 한 명이 팔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검을 휘둘렀다. 우우웅! 하는 진동음과 함께 그 검에 붉은 오러가 어리더니 강하게 회전하는 물기둥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오.” 아무 의미 없는 순수한 감탄사가 에우리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지금까지 물기둥을 베었던 이들이 없었으니까. 에우리아의 눈에 흥미 가득한 빛이 떠올랐다. 번개의 빛에 비춰진 놈의 녹색 눈이 에우리아를 정확히 쳐다보고 있었다. - 타악! 여전히 물기둥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자 쪽을 도와줄 생각도 않은 채, 놈의 몸이 땅을 박찼다. 그리고 순식간에 에우리아의 앞에 뛰어내리며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검을 내리그었다. 검격을 막아낸 푸른 실드가 크게 흔들렸고, 동시에 에우리아의 몸이 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한 번 나무 위로 올라간 에우리아가 팔을 뻗었다. - 쌔애액! 물과 번개의 힘이 함께 담긴 마력의 창이 놈을 향해 쏘아졌다. 그것을 내리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이미 배웠던 놈이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놈이 피한 그 창은, 이제 막 물기둥에서 벗어나 달려오던 또 다른 전사의 허리를 스치듯 베어낸 뒤 바닥에 꽂혀 사라졌다. “크읏!” 조금 전의 공격으로 미처 실드를 모두 두르지 못한 놈이 이를 악물었다. 스치듯 베인 상처로 스민 전기가 온 혈관을 지나가는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런 일행을 쳐다볼 틈도 없이, 공격을 피했던 전사는 에우리아가 올라 있는 나무를 향해 다시 달려갔다. 놈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들었다. - 카아앙! 놈이 뛰어올라 휘두르는 검이 다시 한 번 실드를 강타했다. 실드를 빠르게 복구한 에우리아가 놈의 배를 향해 번개와 물을 함께 쏘아냈다. - 콰앙! 거대한 나무가 흔들거릴 만큼의 굉음이 터져나오며 뛰어오르던 놈이 바닥으로 내리쳐졌다. 강한 충격에, 놈의 입에서 피 섞인 기침이 토해져 나왔다. 놈에게서 시선을 떼어 다른 한 쪽을 보니 온 몸에서 치유의 붉은 빛을 내뿜는 다른 전사가 에우리아 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피 토하는 놈, 그리고 달려드는 놈. 피할까, 말까. 찰나와 같은 고민을 마친 에우리아의 손 끝에 체리만한 크기의 물방울이 하나 만들어졌다. 투명한 물방울 한가운데 보랏빛의 스파크가 뭉친 채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퍽 예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의 힘을 손톱만하게 응집하여, 그것을 압축된 물로 감싸 고정시킨 것. 아직 사람에게 써본 적 없고 이름조차 붙이지 않은 자신만의 마법을 만들어낸 에우리아가 손가락을 까닥이듯 움직였다. - 쉬익! 손 끝에 맺혀있던 그것이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놈의, 벌어진 입 속으로. 꿀꺽. 제 입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피하지 못하고 삼키는 것을 본 에우리아가 나무를 박차고 몸을 띄웠다. 그와 함께 에우리아의 몸이 허공에서 사라져 모습을 감췄다. 목구멍 속으로 들어간 물방울이 형체를 잃었다. 그 속에 숨겨둔 번개를 몸 속으로 풀었다. 온 몸을 감싼 강력한 실드조차 내장을 보호할 수는 없었으므로, 연약한 위벽에 달라붙은 전기가 내장 벽을 타고 온 몸을 헤집었다. - 파지직! 파지지직! 파직! 에우리아의 번개는 사라지지 않는다. 놈의 입 안에서 보랏빛 스파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성대가 타버린 놈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시력을 잃어 백탁된 눈에서도 스파크가 흘러나왔다. 온 몸을 뒤틀며 저항해보지만 인간의 몸 속에 가두어진 번개의 힘은 그 속을 모조리 태울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 풀썩. 더 이상 숨 쉬지 못할 이의 손이 바닥에 떨궈졌다. 그 입에서 시커먼 연기가 풀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료의 끔찍한 죽음을 본 전사가 검을 다잡았다. 그리고 멀찍이 선 채 자신을 향해 번개의 창을 내쏘는 보라색 머리의 마법사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 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마주치면 무조건 죽음을 내린다던 저 마법사의 목을 비틀어버리려 했다. - 우뚝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발이 땅에 묶인 것처럼. 혹은 갑작스럽게 몸무게가 열 배로 불어난 것처럼 느껴져서 손 끝 하나 고개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저 마법사가 지금까지 써왔던 마법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번개를 내리치고 바닥에서 물을 솟아오르게 하는 마법을 부리고 투명한 구슬 하나로 사람을 죽였으나 이런 식의 공격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다니며 창을 쏘아내면서도 달려드는 전사의 발을 묶지는 못하지 않았던가. - 꿈틀! 손 끝을 간신히 움직여 보았으나, 몸이 풀리지 않았다. 마비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거웠다. 때문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알고자 시선을 돌린 그의 눈에,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크기의 선홍빛 구체가 먼 곳에서부터 날아오고 있었다. ‘실드를!’ 놈은 날아드는 그 구체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실드를 펼쳐냈다. 에우리아의 번개를 막고, 물기둥의 폭격에서도 몸을 지켜냈던 두텁고 강력한 실드로 온 몸을 둘러쌌다. - 툭! 검을 쓰지 않는 이가 돌 덩이 하나를 집어던진 것 같은 속도로 날아온 그것이 붉은 실드에 툭 닿았다. 그 속도가 굉장히 느렸으므로, 여전히 잘 움직이지 않은 몸을 한 놈이 슬쩍 웃었다. 뭐야. 별 것도 아니었네. 그냥 빨갛기만 한······. - 스윽 놈의 생각대로 구체는 실드를 파괴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한다면, 파괴하지 않았다. 그저 통과했다. 그 두껍고 강력한 실드를 그대로 통과해 안으로 들어왔다. 놈의 눈에 그제야 구체의 모습이 정확히 비춰졌다. 사람의 눈알만한 작은 구체. 선홍색의 용암이 유리구슬 안에서 미친듯이 회오리치고 있는 듯 했다. ‘아······.’ 그것이 무엇인지, 뒤늦은 깨달음이 왔다. 부드러운 움직임을 가진 그것이 손 끝에 툭 닿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가장 먼저 닿은 것이 손이었음에, 대사막의 전사는 큰 아쉬움을 느꼈다. 왜, 심장이 아니고 손에 닿았는지. 그런 아쉬움이었다. 손 끝에서부터 시작해 아주 천천히 온 몸을 태워낸 뒤 가장 마지막에 심장을 태워낼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느끼는 아쉬움이었다. - 화르륵! 그렇게, 고요하고 잔인한 앨런 마나실의 불이 전사의 몸을 섭식했다. * * * 어깨의 부상이 가볍지 않았다. 살펴 볼 필요도 없이 피 냄새가 달랐다. 시퍼렇게 변한 아르센의 얼굴을 보던 칼리안이 숲 속을 향해 고개 돌리며 입을 열었다. “레이븐.” ‘다각’ 하는 낮은 발굽 소리와 함께 세상 어디에 두어도 우아한 자태를 잃지 않을 듯한 검은 말이 칼리안 쪽으로 다가왔다. 그런 레이븐의 목덜미를 몇 번 쓰다듬은 칼리안이, 레이븐의 안장을 가리켜보이며 아르센에게 말했다. “마법진 이용해서 왕궁으로 가요. 형님께서 아마 히나를 불러두셨을 테니 바로 치료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아르센이 의문 가득한 얼굴을 했다. 어깨가 아파서 의문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칼리안이 말하는 ‘형님’이 플란츠라는 것은 이미 안다. 플란츠가 히나를 불러두었을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특별히 의문스러운 점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아르센의 얼굴을 가득 메운 의문은, 칼리안이 말하는 것이 마치 레이븐을 타고 가라는 것처럼 들린 탓이다. “왕자님의 말을 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아르센은 어지러운 와중에도 이렇게 물었다. 레이븐의 안장에 매여 있던 로브 자락을 길게 찢은 칼리안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상처를 감싸기 시작하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더 늦으면 위험할텐데요. 이제 감각도 없을 것 같고.” 게다가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도록 크게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빠르게 달릴 수 있고, 중간에 아르센이 기절하더라도 문제 없이 왕궁까지 잘 배달해줄 녀석이 레이븐 말고 또 있을까. 그러니 칼리안은 지금 최선의 판단을 내린 셈이었다. “제 말은······!”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이 앞에 있는 저 시커먼 것이 누굴 태우고 다닐 요량으로 태어난 놈이 아닌 듯 하다는 데에 있지 않느냐 물으려던 아르센이 말을 멈추고 눈을 찌푸렸다. 상처를 다 감싼 로브의 끝을 칼리안이 힘주어 묶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아르센이 하필이면 왼쪽 어깨를 다친 것을 하필이면 칼리안이 응급처치해주고 있는 상황이라니. 치료받지 못할 만큼 망가진 왼쪽 어깨를 직접 잘라냈던 기억을 밀어낸 칼리안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가요. 나 지금 화가 좀 나있어서.” 화를 더 돋우지 말고 시키는대로 하라는 말이었다. 칼리안의 마음을 잘 읽은 레이븐이 옆에서 ‘푸릉’ 하는 소리를 냈다. 잡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자는 뜻이었다. 아르센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 되어 한 팔로 레이븐의 안장을 잡은 뒤 위에 올랐다. - 탁! 바닥에 발을 한 번 구르는 것으로 정말 싫지만 참아준다는 기색을 드러낸 레이븐은, 아르센이 칼리안에게 인사를 하기도 전에 출발했다. 배를 차는 것은 물론 고삐를 쥘 필요도 없었다. 말 그대로 알아서 갔다. 그런 아르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칼리안이 몸을 돌렸다.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으니까. 자박 자박 걸어가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마법사를 툭 건드린 칼리안이, 간신히 눈을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안녕.” 그리고는 참으로 어여쁘게, 생긋 웃었다. < 제30장. 내 사람(1) > 투명한 보랏빛의 라벤더 차에서 향이 올라왔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라벤더라는 그 꽃도 차와 똑같은 색을 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을 가라앉히시는 것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전하.’ 칼리안이 멋대로 궁을 나갔음을 함께 전해들은 시종장 라울이 이런 말과 함께 내려놓은 차였다. 라벤더라는 그 꽃이 마음의 안정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신경을 써 준 것이리라. 차의 색 때문인지 향이 의외로 짙어서인지 몰라도 그 향기마저 보라색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플란츠는 하얀 잔에 담긴 보라색 차를 한참동안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이상 시들지도, 그렇다고 피지도 않게 된 꽃이 다른 것을 물들이는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참 아름답다 여겨지겠지만. 글쎄. “마시지 않고 무얼 그리 보고 있느냐.” 아무리 관심을 가져도 눈치는 늘지 않는 법이라, 르메인은 자신의 둘째 아들이 찻잔에 손을 대지 않는 이유를 가늠하지 못했다. 대신 찻잔을 왜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하는 모양이었다. “네, 전하.” 그래서 플란츠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질문에 맞지 않는 답이라는 것을 알지만 차를 왜 쳐다보고만 있는지를 설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실 수도 없어서였다. 그 이상 차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차를 마시도록 다시 한 번 권해올 것 같아서, 플란츠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봤다. 체르밀 궁에서 들었던 레이븐의 발굽 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미친놈.’ 당연히 르메인을 향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 레이븐의 등에 오른 채 말도 없이 궁 밖으로 나간 어떤 미친놈 생각이 난 까닭이다. 그 미친놈은 절대로 자신의 앞에 꽃이 든 차를 내려놓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무슨 색의 꽃이든, 어떤 향을 내는 꽃이든, 향이 있는 꽃을 앞에 둔 플란츠가 무엇을 떠올릴지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조금 전 그 미친놈은 ‘아르센을 구하러 가겠다’는 말을 차마 제 입에 담지도 못했다. 입을 열면 아르센을 구하겠다는 그 말을 같이 하게 될까봐 뒷수습을 해달라는 소리조차 하지 못하고 그냥 나가버렸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란츠의 앞에서 꽃을 치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센을 구하러 뛰쳐 나가고. 미치지 않고서야 그 괴리 위에 어떻게 버티고 서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자기 이름이 ‘칼리안’이라 말하는 연세 모를 그 놈은 분명 미친놈이 맞다. 미친 칼리안이다. “그나저나, 아무리 마나실 백작이 함께 갔다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로구나.” 르메인이 이런 말로 플란츠의 시선을 다시 잡아당겼다. 조금 전 플란츠가 르메인을 찾아왔을 때. 르메인은 플란츠의 가벼운 차림을 보고도 별반 놀라지 않았다. 플란츠가 무슨 말을 전하러 급히 왔을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던 탓이었다. 르메인이 말하기를, 발칸의 인원을 늘리는 것과 관련하여 앨런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열린 창문으로 말 발굽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이 시간에 왕궁 안에서 말을 달릴 이가 없지 않나 하고 의아해하니 발굽 소리가 아르피아 궁 앞에서 멈췄단다. 그 뒤로 잠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뜬금없게도 앨런이 일어나더니 ‘칼리안 왕자님과 다녀올 곳이 있으니 남은 일은 전하 혼자 다 해라’ 정도의 의미를 가진 말을 건네고는 그냥 나가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플란츠가 찾아온 것이었다. “괜찮을 겁니다.” 조금쯤 무뚝뚝한 대답이었으나, 플란츠로서는 최선이었다. 누굴 안심시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앨런 마나실은 능력 있는 마법사이지 않습니까.” 잠시 틈을 둔 플란츠가, ‘앨런 마나실은 능력 있는 아버지’라는 말을 대신해 이렇게 덧붙였다. 앨런이라면 당연히 말을 타고 온 이가 칼리안임을 알았을 것이다. 다급히 달려와서는 아르피아 궁 앞에 선 채 들어오지 않으니 그 뜻이야 뻔하지 않겠나. 그렇게 앨런을 불러 함께 나갔다 하니 칼리안이 다칠 일은 없을 터였다. 지금 당장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칼리안 하나만은 알아서 잘 지킬 앨런이니까. “그래. 과한 걱정인 것을 안다.” 그렇게 말하던 르메인이 무언가를 퍼뜩 떠올린 듯한 얼굴을 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앨런이나 시종장 라울, 혹은 기사대장 렌이 아니라 둘째 아들이 아니던가. 그러니 칼리안에 대한 말을 너무 많이 한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든 탓이다. “플란츠. 혹여 셋째를 유난히 아낀다 서운히 여기지는 말아주려무나.” 말을 꺼내고 나니 변명 같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오해가 없을까 잠시 말을 고른 르메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없이 조용하다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그렇게 달라져서는 온갖 걱정거리를 안겨주고 있으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아서 이러는 것이니.” 플란츠가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런 플란츠를 보던 르메인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람이란 참 모순된 탓에, 나는 또 그것이 기껍게 느껴지기도 하더구나.” 말이 없고, 나약하고, 겁이 많고, 항상 주눅들어 있다던 모습 보다는 지금이 기껍다는. 그런, 말. “전하.” 르메인의 말을 막은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옛 칼리안이 한없이 조용했던 것은 오로지 자신의 탓이었으나 ‘그렇게’ 달라지게 된 것은 둘 모두의 탓이었다. 사실을 알려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르메인이 그것을 두고 기껍다 말하지는 않아야 했다.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르메인만은 절대로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부탁하듯 말했다. “기껍다 여기지는 말아주십시오.” 르메인이 그런 플란츠를 잠시 쳐다봤다. 그리고는 그 말을 ‘기꺼워 하기에는 칼리안이 사고를 너무 많이 일으킨다’는 정도로 이해한 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다. 그리 여기지 않으마.” 플란츠는 그에 대해 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눈을 떠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남겨두고 급히 왔습니다. 이만 나가보도록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꺼낸 말이기는 했지만 거짓 핑계는 아니었다. 기사들을 보내 칼리안의 뒤를 쫓지 말아달라는 말을 전했으니 다른 것을 하나 더 해야 했다. 히나를 불러 이동 마법진 방향의 외성문 쪽에 보내는 일이었다. 아무리 레이븐이 빠르다지만, 전속력으로 달린다 하더라도 왕궁 외성 밖의 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에 도착하기까지 족히 1시간은 걸린다. 체이스가 말한 ‘그들’이 아르센을 언제 공격할지 몰라도, 만약 시간이 맞지 않는다면 아르센이든 에우리아든 다쳐서 돌아올 확률이 높았다. 소드마스터이기 이전에 일국의 왕자인 이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던 놈들이니, 둘의 지위와 무력으로는 상대하지 못할 이들일 수 있었다. “그래, 가보려무나.” 허락의 말을 들은 플란츠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정적이 내려앉은 집무실 안에 남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보랏빛 차를 한동안 쳐다보던 르메인이, 깊고 깊은 한숨을 한참 내쉬었다. 또 소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서였다. * * * 마법사의 눈이 공포에 젖어들었다. 마법사를 굳이 깨워낸 칼리안은 잠깐 잊은 것이 있다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에 목이 잘려나간 이와, 아르센에게 죽은 이의 시신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시신의 품을 확인하는 손과 얼굴에서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아직 굳지 않은 피가 흐르든 말든, 하얀 손에 그들의 피가 묻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마법사의 상처가 아물었다. 마력도 있었고 단검도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다른 행동을 할 생각도 못한 채 그런 칼리안의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역시.” 한참 뒤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생각한대로 놈들의 시신에서 나오는 것이 없었던 까닭이다. 곧 다시 마법사에게로 돌아온 칼리안이, 마법사와 눈을 마주치며 다시 한 번 웃었다. 흠잡을 곳 하나 없을 예쁜 웃음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는 게 별로 없을 것 같기는 했는데, 혹시 몰라서 살려두라고 했어.” 소름이 끼쳤다. 사로잡힌 상대방에게 겁을 주기 위해 일부러 웃던 놈들은 많이 만나봤다. 하지만 달랐다. 마법사는 칼리안이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르센에 의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뜨니 지금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서웠다. - 자박 칼리안이 마법사를 향해 한 발을 더 다가섰다. 마법사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있는대로 입을 벌린 살모사와 눈을 마주친 개구리가 된 것처럼, 그 붉은 눈을 보는 순간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마법사 역시 대사막의 전사였다. 칼리안의 실력에 비견될 만큼은 아니었으나 그 역시 마법을 부리고 검을 쓸 줄 알았다. 거기에 더해 칼리안은 사용하지 못할 힘이 있었음에도 다시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았다. - 사락 재킷 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의 얼굴이 가까이 내려왔다. 살짝 무릎을 숙여 마법사와 눈을 마주친 칼리안이 사일런트를 발현하며 입을 열었다. “먼저 말해 줄 생각이 있으면 들을게.” 무엇에 대한 말인지, 칼리안은 제 입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마법사가 알아서 칼리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꺼내놓기를 종용하는 것이다. 마법사는 대답하지 않았고 칼리안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 쉬익! 어느새 손에 들린 짧은 단도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냈다. 그와 함께 무시무시한 통증이 찾아왔다. 조금 전 어깨를 관통당한 것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말 그대로 끔찍하리만치 고통스러운 감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저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왔다. 빠르게 뻗어나온 칼리안의 손이 마법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가는 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강한 압박에 마법사의 비명소리가 가로막혔다. 칼리안은 조용히 하라는 듯 다른 쪽 손의 검지를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대며 나지막이 말했다. “소리지르지 말고 말을 해.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 아니잖아.” 숨긴 것을 강제로 알아내는 일은 진저리가 났다. 그래서 이전에 만났던 이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다. 손해인 것을 알면서도, 더 위험해질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내가 사실 이런 일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래서 저번에 찾아온 놈들은 그냥 다 죽였어. 하기 싫어서.” 직접 하고 싶은 생각도, 누군가에게 시키고 싶은 생각도 없어서. - 푸욱! 아물기 시작한 상처의 끝에 다시 한 번 칼날이 닿았다.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마법사를 보면서, 칼리안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얌전히 나만 건드리고 갔으면 나도 얌전히 기다렸을 텐데.” 그리고는 한 번 더 칼을 쥐었다. 마법사가 정신을 차리고 이렇다 할 대답을 꺼낼 시간도 주지 않은 채였다. 오러인지, 혹은 마법사의 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검붉은 것이 짧은 검신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나 말고, 내 사람 건드리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치유력을 가진 대사막의 전사. 그리고 어떤 곳을 베이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게 되어버린 카이리스의 3왕자. 승자가 결정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제30장. 내 사람(2) > 고요했다. 싸움이 끝난 이후에는 언제나 한결같은 고요함이 찾아왔다. 조금 전까지 번개가 내리치고 물기둥이 치솟던 그 곳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그런 고요함의 한가운데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앨런의 눈이 에우리아에게 닿았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였다. 말 없이 계속 이어진 그 시선에, 조용히 서 있던 에우리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앨런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불어오는 바람에 의미 없이 흔들리던 그 보라색 머리카락 끝을 잠시 보던 앨런이 침잠하는 목소리를 냈다. “기만이네.” 앨런은 위험을 경고했고, 손을 떼라 했다. 에우리아는 그 말을 어겼다. 제온의 수하들이 실은 에우리아가 아닌 세작들의 뒤를 밟은 것이라 해도, 에우리아가 순수하게 칼리안을 위해서 시작한 일이라 해도, 그것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해보기 위한 참고사항이 될 뿐이다. 에우리아의 잘못을 정당화해주거나, 흘린 피를 다시 집어넣도록 해주지는 못했다. “교만이고, 방만이고, 자만이네.” 이렇게 말하는 앨런의 눈이 길게 가늘어져 있었다. 칼리안만큼, 앨런 역시 화가 나 있던 것이다. 다만 화를 내고 있는 이유가 조금 달랐다. 당장의 칼리안이 아르센의 부상에 화가 나 있었다면 앨런은 지금 에우리아의 짧은 판단을 질책하고 있었다. “자네가 잘못했을 때 죽는 것은 자네가 아니야. 그것을 알아야지. 그것을 잠시 잊은 사이에 죽는 것은 자네를 믿고 목을 걸어놓는 아랫사람이네.” 이 말을 들은 에우리아의 눈이 크게 떨렸다. 아르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를 묻는 눈빛이었다. 그런 부분을 오해하게 하여 괴롭힐 생각은 없었으므로, 앨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큰 탈은 없는 듯 하네. 단지 때마침 도착하여 살린 것이니 다행이라 여기지는 말게. 조금만 늦었어도 죽었을 것이 아닌가. 자네 때문에.” 에우리아는 변명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앨런의 말이 틀리지 않았으니까. 그런 에우리아를 보던 앨런이 고개를 돌려 칼리안이 있을 방향을 쳐다봤다. 레이븐의 위에 오른 아르센의 기운이 이동 마법진 쪽으로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이제 칼리안이 있는 곳에는 둘이 살아 있었다. “왕자님을 생각해서 한 일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네만.” 둘은 싸움을 하는 기척이 아니었다. 적을 앞둔 칼리안이 평화롭게 대화나 나누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칼리안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보다 무슨 마음으로 그 일을 하고 있을지가 더 신경이 쓰이고 안쓰러워서, 앨런이 조용히 말을 맺었다. “앞으로는 그리 하지 말아주게.” 그 후 오래지않아 한 쪽의 기운이 끊겼다. 저 드넓은 곳에 살아있는 이는 이제 한 명이었다. * * * 스산했다. 밤 공기에 더는 몸을 움츠리지 않아도 될 만큼의 날이었다. 하지만 플란츠에게는 그저 스산하게만 느껴졌다. 덩그러니 어둠 속에 남겨진 마법 등불의 빛도, 그 빛 하나에 의존해 앞으로 달리는 마차의 소리도, 그것에 일부러 귀를 기울이고 있는 마음 속도 전부 다 스산했다. - 다각, 다각. 발칸의 마법사들은 왕궁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상태의 키리에는 딱 생글거리는 칼리안만큼 믿음이 안 갔다. 그들을 제외하고 칼리안의 이동 마법진이 있는 구역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은 히나와 얀, 그리고 플란츠 뿐이었다. 그런데 얀에게 히나를 데리고 이동 마법진까지 다녀오라 할 수는 없지 않겠나. 히나를 혼자 보낼 수도 없고. 이러한 사유의 결과로, 플란츠는 그날 밤 무단으로 외출한 두 번째 왕자가 됐다. 사실 르메인을 만났을 때 제대로 허락을 받았어야 했는데, 잘못 없는 라벤더와 악의 없이 꺼내진 말 때문에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플란츠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정문을 지키고 선 이들이 플란츠가 손에 넣은 기사단 카렌의 사람이었던 탓에 플란츠의 말을 고분고분 들었다는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런 생각에 마차의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스산한 풍경을 보다 문득 앞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맞은편에 마주앉아 있던 히나가 손을 들어올렸다. - 걱정이 되어서, 그러세요? 표정, 안 좋아요. 플란츠가 특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지 않았음에도 히나가 이렇게 물어왔다. 그런 히나를 보던 플란츠가 조용히 대답했다. “아니. 스산해서.” 뭐가, 아니야, 됐어, 안 해, 등등. 충분히 이렇게 대답하고 넘겼을 법 한 플란츠가 조금 길게 대답을 했다. 딸기에 대한 보답이나 히나에 대한 배려, 혹은 별달리 의미 없는 변화일지도 몰랐으나, 무엇이든 좋다고 생각한 히나가 웃었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하얀 로브를 주섬주섬 벗어 플란츠에게 건넸다. 플란츠가 ‘왜’ 라고 물으려다 팔을 뻗었다. 이유를 들으려면 손이 비어야 할 것이 아닌가. 덕분에 일단은 주는대로 로브를 건네받은 플란츠를 향해 히나가 말했다. - 보온, 마법. 따뜻해요. 히나는 여전히 체르밀 궁의 본래 지내던 숙소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그 숙소와 빌헬름 관을 오고가다 감기 걸릴까 걱정한 칼리안이 앨런에게 보온 마법을 부탁했다. 성인식에 사용하기 위해 준비했었던 마차에도 마법을 걸어줬던 앨런이니 로브 쯤이야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고나니 곧 다가올 여름에 우리 히나가 행여 더위라도 탈까 걱정이 됐다. 체르밀 궁과는 달리 빌헬름 관에는 온도 조절 마법이 걸려 있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것도 앨런에게 부탁을 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늘어난 요청사항 덕분에, 아무 마법도 걸려있지 않은 다른 발칸 대원들의 로브와 달리 히나의 것에는 온도 조절, 경량화, 모든 속성의 기본 마법 저항, 3회까지 자동 발현되는 실드 등등, 칼리안의 걱정만큼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앨런의 마법이 걸리게 되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클린’ 까지도 부여됐다. - 덮고, 계세요. 그런데 플란츠가 스산하다 하니, 돈 주고도 구하지 못할 그 귀한 로브를 건네주고 있는 것이다. 칼리안이 카이리시스에 없어서 그 꼴을 보지 못하는 바람에 생명줄이 이어졌음을 모르는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됐어.” 어차피 추워서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스산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뿐이니까. 때문에 이렇게 거절하며 돌려주는 로브를 보던 히나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 따뜻하면, 마음이, 폭신폭신해져서, 좋아요. 플란츠는 히나의 ‘폭신폭신’ 이라는 말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알아들었다. 지금 짓고 있는 표정만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 뭘 안다고.” 그래서 플란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뭘 안다고 위로의 말을 하고 말고. 어쩌면 날 선 말로 들릴 수 있을 소리를 꺼냈다. 엄한 곳을 향한 화풀이라기보다는 그저, 익숙하지 않은 것을 건네는 사람에 대한 경계였다. 그런 플란츠를 잠시 바라보던 히나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플란츠의 손에 들린 로브를 받아들어 펼치고는 제멋대로 플란츠의 무릎을 덮었다. -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것도, 있어요. 당당하기도 하다. 지금 왕자를 상대하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것인지. 그래서 이렇게 멋대로 구는지. 하고 물어보려던 플란츠는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고 창 밖을 봤다. 그러다가는 앞 쪽으로 고개를 되돌렸다. 그 뒤에는 습관처럼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다른 곳을 보고 있거나 눈을 감고 있으면 말을 못 꺼낼 테니까. 히나가. 그러다 문득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로브에 새겨진 자주색의 표식이 들어왔다. 치유사를 뜻하는 것이니 발칸에서 히나의 것만 유일하게 자주색인 셈이었다. 히나가 어디에 있든 눈에 띄도록. 다쳤을 때 빠르게 찾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늦지 않게 치유 받을 수 있도록. 그 자주색 표식을 잠시 보던 플란츠의 눈에, 동그란 원형 표식의 안쪽에 함께 새겨진 다른 무늬가 보였다. 별처럼 생긴, 아주 작은 것. “또 꽃이군.” 플란츠가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 하얀 로브에 하얀 실로 새겨졌기에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그것은 분명 꽃이었다. 안 그래도 꽃 때문에 질려있던 참이었는데 또 꽃이다. 그래서 로브를 들어 히나에게 다시 돌려주려는데, 히나의 말이 멋대로 눈에 보였다. - 라, 리, 시, 움, 이에요. 향기없는, 꽃. 그래서, 좋아요. 라리시움. 히나는 그런 이름의 꽃을 좋아한다고 했다. - 꽃은, 향기가 없고, 저는, 말을 못하니까. 그래서 이름 대신, 넣었어요. 향기가 없는 것이 말 못하는 자신 같아서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름을 새겨 넣듯 수를 놓았다는 말이었다. 플란츠가 로브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나지막이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향기 없는 꽃이 있다는 것이 플란츠에게는 오히려 반갑고 다행한 일이다. 세상 모든 향기를 르니에리로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과도 같지 않은가. 세상 모든 향기가 르니에리 같다 해도, 이 꽃만은 무조건 르니에리가 아닐 테니. 그러니 향이 없든, 말을 못하든. 그게 뭐 어때서. 플란츠의 말에,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알아요. 그냥, 저랑, 닮았다고, 한 거예요. 그 말을 들은 플란츠가 살짝 웃었다. 그리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향기 없다는 꽃이, 작은 별처럼 생긴 그 꽃이, 플란츠에게는 달 없는 밤의 오롯한 별 같아서였다. 싫어하는 보라색 꽃이 하나 생겼고. 싫지 않은 하얀색 꽃을 하나 배웠고. 그것을 더하고 빼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등을 기댔다. 루시 대신 무릎을 덮은 로브가 루시만큼 따뜻해서, 등을 기댔다. * * * 적막했다. 그 사이에 홀로 서 있던 칼리안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선 채로, 바닥을 향한 채로 그저 그렇게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 자박 조금 먼 곳에서 바닥 밟는 소리가 났다. 칼리안은 여전히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의식하거나 경계하지도 않았다. 누구의 소리일지 알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저 소리를 경계할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 자박, 자박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 소리가 칼리안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칼리안의 옆에서 조용히 멈췄다. 다급해보이던 칼리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이 곳까지 함께 온, 칼리안의 의사에 따라 이 곳은 그대로 두고 에우리아를 도우러 갔던 앨런이었다. 에우리아가 말한 동굴로 다시 들여보낸 뒤, 주변에 남은 적이 없음을 확인하고 칼리안에게 되돌아온 앨런이 물었다. “다친 곳은 없으신지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칼리안의 귓가를 울렸다. 칼리안이 성장했음을 알았고, 이 곳의 이들이 칼리안에게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이렇게 물었다. 그 물음이 인사치레가 아님을 아는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다치지 않았습니다.” 칼리안의 주변에 시신은 없었다. 이미 처리를 한 것인지, 혹은 시신을 두고 다른 곳으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앨런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다행입니다.”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잠깐 주변을 둘러보던 칼리안이 단조로운 목소리를 냈다. “오늘 이 곳에 온 이들과 세이렌 경을 처음 습격했던 40여명의 무리의 목적이 서로 달랐나 보네요. 처음 습격했던 이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더군요. 무력의 차이를 보아도 그렇고, 그쪽은 세이렌 경을 노렸고 이번에 찾아온 이들은 세작들의 뒤를 밟았다 하였으니 거짓은 아닐 것 같습니다.” 칼리안의 말마따나, 오늘 숲을 찾은 것은 제온의 일원 중 대사막의 전사들이었고 처음 에우리아를 습격한 것은 제온의 일원은 맞았지만 대사막의 늑대들이 아닌 일반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후 칼리안은 주머니에 든 것을 꺼내 앨런의 앞에 꺼내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앨런이 침통한 얼굴로 물었다.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두 개의 조약돌이었고, 칼리안이 지니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던 것은 그 색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짙은 회색, 그리고 조금 더 연한 회색의 두 조약돌은 색깔을 제외하면 칼리안이 지니고 있던 것과 그 모양이 완전히 같았다. “한 개는 파괴됐습니다. 심장이 망가져서요.” 아쉽다는 듯, 별 것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으나 그 말에 숨은 의미는 그리 가볍지 않았다. 나머지 두 개는 온전한 심장 속에 있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한 번 생명을 다하면 두 번 사용할 수는 없다 하였으니, 다른 시신까지 건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앨런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고······.” 거기까지 들은 앨런은 칼리안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직 모두 자라지 않아 여전히 앨런보다 작은 칼리안을 제 품에 꼭 안았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토닥토닥, 칼리안의 등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꼭 진짜 열 다섯 살 아이를 달래는 소리 같이 들린 탓에, 앨런의 품에 푹 파묻힌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 네, 스승님.” 등을 툭툭 두드리는 손이, 그 품이, 어찌나 따뜻하던지. < 제30장. 내 사람(3) > 에우리아는 깔끔한 사람이었다. 맺고 끊는 것도 깔끔했고 말을 주고 받거나 이해하는 것도 깔끔했고 마법도 깔끔했다. 물론 누군가 새카맣게 탄 40구의 시신을 본다면 에우리아가 생각하는 깔끔함의 기준이 ‘깔끔하게 떨어진 번개에 살아남는 놈 하나 없이 깔끔하게 싹 태워 죽이는 것’인지를 의심할 것 같기는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에우리아의 마법은 깔끔했다. 그런 에우리아였으므로 반성 역시 깔끔했다. 건성으로 듣지 않았고 제대로 잘 새겨 들었다. 이번 일로 배운 것도 많았고 칼리안을 보자마자 죄송하다는 사과도 다시 한 번 했다. 그리고는 담백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해당 단체의 이름은 제온입니다, 왕자님.” 반성은 반성이고, 해야 할 일은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이 사달을 낸 원인을 먼저 챙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곳에서 발견된 자료입니다만, 읽거나 뜻을 알기는 어려운 상태입니다.” 이런 말과 함께 건네진 종이 뭉치를 살짝 훑어 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고생했습니다.” 빌헬름 관에 모두를 모아놓고 살기등등한 가르침을 내렸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죄송하다’는 에우리아의 말에도 그저 알겠다는 말만 하고 넘어갔다. 앨런 때문이었다. 이 곳에 오는 동안, 앨런이 칼리안에게 부탁을 했다. ‘협회장은 제가 아주 혼쭐을 내어 놓았습니다. 수도로 돌아가면 부군단장에게도 이야기를 할 터이니 더 타박하지는 말아 주시지요.’ 칼리안의 성격에 둘에게 얼마나 난리를 칠지 모를 앨런이 아니었다. 유난히 이런 일에 민감한 칼리안 아니던가. 그래서 대신 나섰다. 칼리안이 과한 질책을 할까 우려해서라기보다는 칼리안이 오늘 또 어딘가에 신경을 쓸까 우려해서였다. 그래서 칼리안도 다른 말 없이 넘어가기로 했다. 둘이 왜 나섰는지 이유를 모르지 않았으니까. “되도록 이것을 그대로 왕궁에 가져가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스승님?” 가능하냐니. 하늘에 떠 있는 저 달을 체르밀 궁에 가져가겠다 하면 달을 끌어다 옮길 궁리부터 해 볼 판에, 이깟 종이 뭉치 따위가 대수겠는가. 동굴을 옮겨서라도 가져갈 수 있도록 해 줘야지. 때문에 앨런은 가능한지 아닌지 따져보기도 전에 이미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주시지요.” 칼리안으로부터 종이를 넘겨받아 살펴본 앨런이 잠깐 마력을 운용한 뒤 자신의 공간에 쑥 집어넣었다. 다른 두 마법사의 공간에 들어갔을 때에는 흔적도 없이 바스라졌던 종이는 아무런 변화 없이 잘 보관되었다. 종이에 따로 보존 마법을 건 것이다. 역시 스승님은 멋있어요, 하는 눈으로 앨런을 봄으로써 앨런으로 하여금 마법사가 된 일생일대의 보람을 느끼게 해 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제 저 놈들 처리하면 되겠네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의 고개가 세작들을 향해 돌아갔다. 에우리아가 조금 전 폭발이 있기 전까지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하나도 빠짐 없이 이야기를 전했다. “······ 그래서 우선 재워놓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왕자님.” 이렇게 끝난 말을 들은 노란 울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에우리아의 말대로 폭발음을 들은 뒤 잠에 들었고, 눈을 떠 보니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상황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 역시 무력 강한 검사였으며 에우리아를 앞에 두고 긴장한 상황이었음에도 에우리아의 ‘슬립’에 걸려들었다. 그 정도의 정신력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곧 둘의 실력 차이에 대한 증명이기도 했다. 그런 에우리아보다 더한 사람 둘이 추가됐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작은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걸어온 칼리안이 나란히 포박된 이들 중 노란 울새의 앞으로 가서 섰다. 그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탓도 있었지만, 사실 노란 울새가 세 명의 대표 격임을 이미 알고 있던 탓이 더 컸다. 칼리안은 저항할 생각을 완전히 포기한 듯한 노란 울새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이름.” “잊었소.” 대답은 빨랐고 그 답을 들은 칼리안이 설핏 웃었다. 과거 언젠가 같은 말을 했던 기억이 떠올라서이기도, 놈의 대답이 꽤 흡족하기도 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웃음 끝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이 이어졌다. - 화악! 순간적으로 피어오른 매서운 살기. 칼리안의 붉은 눈빛 만큼이나 섬뜩하고 날카로운 살기가 노란 울새를 찔러들어갔다. 조금 더 서늘해진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이름.” “······ 잊었다고, 했잖소.” 목소리는 흔들렸으나 대답은 같았다. 마법사보다 감각이 좋은 검사들은 살기에 대한 감응도도 더 높다. 게다가 지금 칼리안은 꽤나 날이 서 있었다. 그만큼 살기도 짙었으나 놈의 행동은 똑같았다. 세작명이 그리 큰 비밀이 아님에도, 그조차 일러주지 않는 것이다. 한동안 노란 울새를 보던 칼리안이 살기를 거두며 다시 말했다. 언제 죽일듯이 노려보았냐는 듯 평소와 다름 없는 목소리였다. “돌아가면, 너희 다 죽어.” 지금의 체이스는 예전과 많이 달랐다. 의심된다는 이유만으로 세작의 반을 다 죽였지 않나. 명령을 어긴 새들을 용서할 리 없었다. 만에 하나 용서하겠다 마음을 먹었더라도, 자신의 말을 전해들은 칼리안이 직접 나섰고 덕분에 대사막의 전사들과 또 대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반드시 죽일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이유가 있다 한들 그것까지 용서할 리는 없을 사람임을 칼리안이 안다. “대충 알고 있었을텐데, 왜 고집을 피웠어.” 이 곳에 오지 않았다면 셋을 찾아온 전사들에게 죽었을 확률이 높았겠지만 어쨌거나 이제는 그들이 아니라 체이스의 손에 죽게 되지 않았나. 이번에도 노란 울새는 대답하지 않았다. 슬쩍 옆을 쳐다보니 다른 두 놈도 마찬가지로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자님.” 옆에서 칼리안을 지켜보던 에우리아가 물었다. 죽이라면 죽일 것이고 살려보내라 하면 살려 보낼 것이었다. 칼리안과 체이스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음을 에우리아도 알고 있으니까. 칼리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눈을 내리떴다. 어찌해야 할까, 그것을 고민했다. 카이리스의 내부 정보를 캐고 있다면 카이리스의 왕자로서 처벌했겠으나 지금 이들이 뒤를 쫓는 것은 제온이라는 조직이었다. 체이스와의 관계를 차치하고 보더라도 왕실에 해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물론 칼리안에게는 도움이 될 테고. 곧 칼리안이 노란 울새를 향해 시선을 움직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세이렌 경, 내가 잠깐 이들에게 할 말이 있는데.” 자리를 피해달라는 소리였으니 에우리아는 가타부타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앨런은 여전히 옆에 있었으나 앨런에게 비밀로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앨런에게까지 나가달라 하지는 않았다. “돌아가면 말해.” 그래도 모든 놈이 하얀 수리나 푸른 솔새처럼 제 잇속 채우자고 달라지진 않았음을 알게 된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세크리티아의 세작들 일이니 지금껏 그리 했던 것처럼 관심을 꺼야 할지. “나를 만났고, 칼은 거두셨으면 좋겠다 했다고.” 노란 울새, 서베인. 살려두시라고. 무력도 무력이지만 감각이 좋고 포기할 줄도 모르던 우직한 세작. 항상 위험을 감수하고 정보를 물어오던 그런 놈이었으니, 이제는 새들의 충성을 완벽히 믿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눈 감아 주시라고. 제 손으로 제 살 도려내는 일, 이번에는 하지 마시라고. 그런 의미임을, 체이스는 알아 들을 것이다. “그리고 넌. 네 목이랑 정보 중에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제대로 재보고 움직여. 정보 하나 물어다주고 죽는 놈보다는 정보 하나 포기하고 살아 오는 놈이 더 쓸모있으니까.” 그리고 칼리안은 이렇게 조금만 더 오지랖을 부렸다. “······ 알겠소.” 의외의 말을 들었음에,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노란 울새가 대답했다. 어차피 새들에게 더 할 말이 없었다. 중요한 내용이 있다면, 굳이 이들을 두고 심력을 쏟지 않더라도 체이스가 알아서 연두색 전서구한테 전해줄 테니까. 따라서 칼리안은 다른 말 없이 그들을 내버려둔 채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동굴 밖에 서서 숲을 바라보고 있던 에우리아에게 말했다. “이제 가죠.” “네, 왕자님.” 에우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뒤를 따라 한 발을 옮기던 칼리안이 잠깐 멈칫하며 에우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작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저 새들이나 경 가방 속의 돼지나, 질겨서 못 먹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두고 가요.” 세작들을 죽이면 오게 될 여파가 걱정되니 살려두기로 했다는 소리이기도 했고, 먹고 남았다는 돼지고기 놈들에게 전해주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배고프다 했다 하니, 밥은 먹여야 하지 않겠나. * * * 새벽이 짙었다. 이런 시간에 왕궁 밖을 나온 것이 딱 두 번째였다. 한 번은 그들의 습격에 당했던 칼리안이 플란츠를 찾는다 했을 때였고, 또 한 번이 지금이었다. 그러니 두 번 모두 칼리안과 연관이 있었다. 동생놈이 치는 사고의 뒷수습에 항상 불려다니는 신세가 된 플란츠가 잠시 눈꼬리를 찌푸렸다. “직접 이 곳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마법진이 있는 곳까지 직접 움직이는 동안은 별 생각이 없었는데, 머리색만큼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채로도 저딴 말을 지껄이는 마법사를 보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 “괜히 왔군.” 그냥 왕궁에 있을 것을 괜히 왔다, 라고. 칼리안은 플란츠가 히나를 불러놓으리라고는 예상했지만 마법진이 있는 곳까지 직접 와서 기다릴 줄은 몰랐을 것이 분명했다. 아르센 역시 마찬가지겠고. 그러니 고마우면 고맙다고 말을 하든가. 하여튼 좋게 보려 해야 볼 수가 없는 놈이 아닌가. - 다각 게다가 곁에 서 있는 저 검은 말. 이 새벽 어둠 속에 깊이 잠긴 그림자 같은 털과 갈기. 그 때문에 새하얀 오른쪽 발목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말. 게다가, 두 발로 걷는 하찮은 동물 셋이 앞에 모여 있다는 듯한 저 표정까지. 두 번 볼 것도 없이 레이븐이 아닌가. 칼리안이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플란츠는 한 번도 올라보지 못한 레이븐을 아르센이 타고 온 것이다. 그것을 보니, 레이븐의 본래 주인이었던 플란츠의 짜증이 무럭무럭 솟구쳤다. “입을 다치지는 않았나본데.” 매우 아쉽다는 말이었으므로, 아르센이 무언가 대답하려다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입은 안 다쳤지만 어깨는 많이 다쳐서였다. 그것을 본 히나가 플란츠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아르센도 대충은 알아듣겠지만 플란츠만큼 많이 알고 있지는 않아서였다. - 싸움, 그만. 이대로 두면 말싸움이 번질 것이 뻔해서 미리 말린 것이었다. 둘 사이가 안 좋은 것을 모르지 않았다. 평생 누구에게 지고 살 일 없을 왕자와, 칼 때문에 지는 것은 용납하더라도 말 때문에 지고 싶어하지는 않는 마법사가 아닌가. - 우선 안으로, 들어가요. 치료부터, 해요. 히나의 말을 본 플란츠가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밥 안 먹던 플란츠에게 기어코 음식을 먹게 했던 저 엄한 표정 때문이 아니라, 어찌됐건 다쳐서 올 놈 치료하자고 온 길이었음을 상기한 탓이다. 정말로. 말싸움을 접은 플란츠가 아르센을 보며 히나의 말을 통역했다. “치료부터.” 주요 단어 딱 하나만. 그리고는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따라와서 치료 받든지 밖에 있다 그냥 죽든지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보며 슬쩍 웃은 아르센이 건물 안으로 뒤따라 들어갔다. 건물을 지키던 마법사들이 안심한 얼굴을 하며 아르센을 자리에 앉혔다. 안 그래도 초죽음이 된 채 곧바로 왕궁으로 가겠다는 아르센을 혼자 보내는 것이 안심이 되지 않았는데 히나가 함께 들어온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 놈들 짓인가.” 아르센을 향해 플란츠가 물었다. 밝은 곳으로 오니 어느 정도로 다친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얀 로브의 절반이 시커멓게 얼룩져 있었다. “네. 생각보다 강합니다.” 언제 말싸움을 했냐는 듯 아르센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사이, 히나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칼리안이 매어 두었던 로브 조각을 풀어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르센이 말했다. “그건 내가 가지고 가겠네. 왕자님께서 해주신 것이라서 버릴 수가 없으니.” 가서 마법사들한테 자랑하려는 것이다. 칼리안 왕자님이 직접 묶어준 붕대라고.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나 하는 것을 본 히나가 풋 웃으며 그것을 넘겨줬다. 그리고 플란츠를 보며 말했다. - 괜찮을, 거예요. 여기서, 지혈 하고, 돌아가서, 치료하면, 돼요.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인 뒤 통역했다. “괜찮다는데.” 의미가 조금 변질되기는 했으나 아르센이 오해를 한 것은 아닐 터였다. 때문에 히나는 다른 말 없이 바로 지혈부터 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난 뒤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게 되었을 때, 히나가 잠시 깨끗한 붕대를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방 안에 사일런트 막이 둘러졌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부군단장님.” 아르센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 눈이, 칼리안이 매어줬던 로브 조각에 닿아 있었다. “왕자님께서 상처에 붕대를 직접 감아주셨습니다만 그런 것을 어떻게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어떤 왕자가 붕대 매는 법을 배우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 뿐 아니라 칼리안이 보여준 능력이며 살기며. 의심이라기 보다는 많은 의문들이 쌓여왔을 터였다. “배웠는데. 나도.” 그래서 플란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아우님께서 워낙 거짓말을 못하시니. 형님 된 입장에서 이 정도는 도와줘야 하지 않겠나. < 제30장. 내 사람(4) > 아르센은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칼리안과 플란츠가 상처에 붕대 감는 법을 배웠다고 한 말도 믿지 않았다. 사실 세상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시종과 시녀들의 손을 빌리는 왕족이 아닌가. 만약 백 번 쯤 양보해서 플란츠의 말을 믿어본다 해도 의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배운 것과, 할 줄 아는 것과, 능숙한 것은 엄연히 달랐으니까. “그러셨습니까.” 그래서 아르센은 이렇게 대답했다. 플란츠가 저렇게 말도 안되는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한 것이 ‘내 거짓말을 믿으라’는 뜻이 아님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플란츠는 아르센 스스로 의문을 접을 만한 명분을 주었을 뿐. 칼리안이 숨기는 것이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플란츠는 알고 있지만, 저 거짓말을 믿어주는 정도의 선에서 알아서 납득하고 넘어가라는 소리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실 칼리안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꽤 오래 전부터 느끼고는 있었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냥 넘어가라 하니 넘어갈 수 밖에. “그럼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됩니까.” “또 뭐.” 말을 못알아들었을리 없는데 또 질문을 하겠다 하니, 플란츠가 귀찮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대답했다. 당장 잠들 것 같은 기색임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잠들지 않는 아르센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로브, 왜 부군단장님께서 들고 계십니까.” 그렇게 말하는 아르센의 시선은 왕자의 손에 들린 하얀 로브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뒤 히나에게 돌려주기 전에 아르센을 만난 탓이었다. 그런 아르센을 잠시 쳐다보던 플란츠가 말했다. “내가 설명을 해야 하나, 마법사.” “궁금해서 그럽니다, 부군단장님.” 플란츠의 얼굴에 한번 더 짜증스러운 기색이 드러났다. 저 ‘부군단장님’이라는 호칭이, 좋은 심보로 튀어나온 것이 아님을 알아서였다. 보통 저 정도로 다치면 말을 못하던데 참 잘도 나불거린다. 그래서 플란츠는 그냥 옆에 놓인 소파로 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아무래도 사일런트라거나, 클린이라거나, 슬립 같은 마법을 어떻게 좀 배워볼까. 배우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애써 집어넣은 플란츠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까지 설명하거나 저 호칭을 지적하기 위해 심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싸우지 말라 하기도 했고. - 똑똑 때맞춰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히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타박 타박 걸어와 아르센의 상처를 다시 한 번 살피는 히나를 보던 플란츠가 무릎에 놓인 로브로 시선을 돌렸다. 별 생각 없는 행동이었다. 아르센의 어깨는 괜찮다고 했고, 지혈도 됐고, 자신은 이 곳에서 더 할 일도 없었으니까. 그래서였다. 라리시움이 몇 송이인지, 어떻게 생긴 꽃인지, 그 하얀 자수를 다시 살피게 됐다. 그리고 지금 플란츠가 있던 곳은 마차보다 밝았다. 그래서였다. ‘베······ 른.’ 눈에 띄었다. 이름 대신 수를 놓았다는 하얀 꽃들 사이에 작게, 아주 작게 새겨진 글자가 눈에 띄었다. “베른 경. 이 시간에 이렇게 나오게 해서 미안하네. 경의 오빠도 걱정을 했을텐데.” 아르센의 목소리가 들렸다. 발칸의 마법사들이 그러하듯, 히나 역시 같았다. 발칸의 대원이 되었으니 ‘경’이라 불렸다. 그것은 플란츠 역시 알고 있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둘 다 베른이라 구분이 어렵군. 언제 경의 오빠를 만나면, 키리에라고 이름을 불러도 되는지 물어봐야겠네.” 시종과 시녀들은 왕궁 내에서 자신의 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름조차 본명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더불어 히나를 발칸에 들인 것은 앨런과 아르센이었다. 플란츠는 기사단의 일로 그에 대해서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동생의 시종과 시녀가 같은 성을 쓰는 남매였음을, 그들의 성이 무엇인지를, 플란츠는 몰랐다. 알려준 이도 없었을 뿐더러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베른.’ 아르센의 말을 적당히 흘려들으며 플란츠가 하얀 글씨로 수놓아진 히나의 성을 한 번 더 되뇌었다. ‘낯이 익은데.’ 그것은 낯이 익은,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이름이었다. - 어떤 이유가 있었다 한들 그 날의 플란츠는 --에게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갚지 말고 도와달라 하며 체이스가 건넸던 말. 그 말을 새겨 듣겠다 답했음에도. * * * 늘 그래왔듯이. “나와 계셨습니까.” 칼리안은 다른 말 없이 이렇게만 말했다. 그저 왕궁이 아닌 곳까지 플란츠가 나와있었음이 다소 의외이기는 했으나 특별히 놀랄 정도는 아니었던 탓이다. 앨런과 에우리아는 숲 주변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오기로 했다 하였다. 한 밤중 왕궁을 멋대로 벗어났으니,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던 칼리안은 먼저 돌아왔다. 그렇게 이제 막 카이리시스 외곽의 이동 마법진에 도착한 칼리안과, 지혈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던 플란츠가 마주친 참이었다. 플란츠 역시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늘 그래왔듯이, 감사하다는 말은 물론 다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왕궁으로 돌아가죠.”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앞서 걸어나갔다. 그리고는 이동 마법진 외부에 세워둔 마차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검은 자개 마차. 이 카이리스에 검은색 자개 마차라고는 딱 하나 밖에 없었다. 당연하겠지만 사전에 빌리는 것을 허락받을 수 없었을, 그러니 멋대로 빌려 끌고 나온 것임이 분명한 앨런의 마차였다. “잘 하셨습니다.” 웃음을 멈춘 칼리안이 플란츠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플란츠 역시 자신의 목숨이 그리 안전하지는 않음을 잘 알았다. 호위들을 대동할 수도, 왕실의 마차를 탈 수도 없는 상황에 앨런의 마차보다 더 안전한 것이 또 있을까. 그러니 앨런의 마차를 타고 온 것은 플란츠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다. 칼리안의 칭찬에, 플란츠는 이번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플란츠를 보며 다시 웃은 칼리안이 앨런의 마차에 히나와 아르센을 태웠다. 그리고 지금까지 타고 왔던 아르센의 말 고삐를 플란츠에게 내밀었다. “마차가 편하시면 마차를 타셔도 좋고요.” 어차피 아르센은 치료를 계속 받아야 하는 상태였으니, 마차에 플란츠가 함께 있어 보아야 좋을 것이 없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거절 않고 칼리안이 건네는 말 고삐를 받았다. 그 손에 여전히 들려있는 히나의 로브에 칼리안이 잠시 눈을 두었으나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 대단한 마차에 놓인 대단히 편안한 소파에 앉은 아르센은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잠인지 기절인지 알 수 없었으나 플란츠도 칼리안도 그 이상의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히나가 함께 있었고, 또 별 탈은 없으리라 했으니까. - 다각, 다각 곧 한 대의 마차와 두 필의 말이 왕궁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지혈도 하고 급히 해야 할 조치를 했다고는 해도 치료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되도록 빠르게 왕궁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이번에도 말 발굽 소리가 작지 않았다. 그것을 조용히 듣고 있으려니 칼리안이 말을 건네왔다. “굳이 나와 계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피곤하시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플란츠가 잠시 심기 불편한 얼굴을 했다. 자신을 무슨 온실 속의 파릇파릇한 화초 쯤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서였다. “안 피곤해.” 그렇다고 피냄새 풀풀 풍기며 돌아온 아우님에게 짜증을 낼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서 적당히 대답했다. “넌.” 그리고 이렇게 되물었다. 오히려 피곤한 것은 칼리안이 아닌가, 하고. 플란츠가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것은 처음일 터였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은 그냥 어깨만 으쓱여보이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래.” 그것이 다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친 곳은 없는지, 그런 것을 물을 사이는 아니니까. 그렇게 다시, 다각 다각. 아무 말 없이 마차의 뒤를 따라 말을 몰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남매였나.” 히나에 대한 말일 터였다. 히나의 귀에 생긴 흉터가, 그리고 그 치유력이 하프엘프이기 때문임은 알고 있었다. 그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키리에는 아니었다. 하프엘프라는 티가 전혀 나지 않았었다. 그런 히나와 키리에가 함께 왕궁에 들어온 것도 알았고 둘이 친한 것도 알았지만, 그 살기등등한 키리에와 히나가 너무 달랐어서 남매인 줄은 몰랐다. 이제와 둘이 남매인 것을 상기하고 생각해보니 키리에의 귀가 그렇게나 밝았는데도 플란츠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는데도. 키리에를 생각하면 같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에 대해 너무 깊이 파고들지 않으려 한 탓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네. 남매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래서 그렇게 히나에게 신경을 썼느냐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이 둘을 아끼는 이유. 키리에가 플란츠를 경계하는 이유. 그것이 플란츠에게 썩 유쾌한 것이 아니었던 탓이다. 키리에와 마찬가지로 히나가 그 일을 아는지도 모를 일이었고. “세크리티아 사람인가.” 대신 이것을 물었다. 칼리안의 과거에 어떻게 키리에를 만났을지 그 접점이 궁금했던 탓이다. 그런 플란츠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물었다. “궁금하십니까.” “추측만 하고, 넘겨짚고, 그러기는 싫어서.” 그것이 히나에 대한 궁금증일지, 키리에에 대한 궁금증일지. 혹은 칼리안에 대한 궁금증일지. 정확한 것은 칼리안은 물론 플란츠 역시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난번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궁금한 것을 물어왔다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웃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입니다.” 그리고는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아르센은 물론, 히나도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고가 있었습니다. 저 역시 자세히 알지 못하는, 있지 말았어야 할 그런 일이요. 그래서 키리에만 세크리티아로 왔습니다.” 이것은 베른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칼리안의 이야기일까. 그것은 알 수가 없었다. 절대로 알려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일을, 칼리안은 선뜻 입에 담고 있었다. “그렇게 검을 가르쳤는데 꽤 잘 배웠습니다. 많이 친했던 탓에, 이 곳에 온 뒤 키리에부터 찾았습니다.” 그 말에 숨겨진 이야기를 플란츠 역시 알았다. 칼리안이 왜 그렇게 히나를 아끼는지, 그것 역시 가늠을 했다. “······ 다행이군.” 그래서 언젠가의 칼리안과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다행이라고. 시간의 축에 대한 이야기, 전쟁에 대한 이야기, 수많은 죽음들에 대한, 베른의 이야기. 그것들은 이제 꺼내지 않기로 하였고 더 이상 괜스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기로 하였으니 그냥. 향기 없는 꽃이 있음을 알려줄 아이 하나가 살아서 다행이라고. 물론 그것을 칼리안이 알게 될 일은 없겠지만, 그런 뜻을 담아 꺼낸 말이었다. “네. 다행입니다.” 잊혀져야 할 이의 이름. 그것을 기억하는 다른 이를 통해서는 더 이상 전해질 수 없을 이름. 칼리안은, 자신의 옛 이름을 새로 이어가게 된 히나를 떠올리며 웃었다. 베른을 대신해 살고 있는 아이가 아니던가. 그러니 그보다 소중한 아이가 또 있을까. 그것이 다행이다 말해주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났음에 진심으로 웃었다. < 제30장. 내 사람(5) > 한겨울의 새하얀 백사장. 그 위를 노닐던 파도의 포말이 가만히 잠겨드는 목소리. 모든 것을 품을 듯 잔잔하게 오가다, 어느새 눈을 돌리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밀어닥치는 파도같은 목소리. 고요한 듯 혹은 몰아치는 듯. 관대한 듯 혹은 가차없는 듯. “내가.” 갈피를 잡기 어려운 그런, 목소리. “발을 물리라는 이야기를 전한 것 같은데. 꿈을 꾼 걸까.” 언제나 숲과 같던 목소리에 파도가 깃든 느낌에, 새벽 이슬을 머금으며 날아온 새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새를 내려다보는 눈은 깊이 눌러 쓴 하얀 후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나, 그 속에 감춰진 것이 자비가 아님은 잘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세 명의 세작을 바라보며, 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꿈이라면 이미 지치도록 많이 꾸어서 나는 이제 잠에 들기에도 버거운데. 그래도 내가, 꿈을 꾼 걸까.” 마법사들을 쫓지 말라는 말. 카이리시스로 돌아가라 했던 말. 분명 그런 말을 전했던 것 같았는데 그것이 내 착각이었는지. 노란 울새가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전했던 말을 그렇게 가볍게 저버릴 리 없다고 생각해서.” 차라리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했다고. 그래서 의도치 않게 명령을 어기게 되었다 대답하라고. 차라리, 그렇게 변명을 해달라고. 그런 말임을 모르지 않았다. 체이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노란 울새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면목이 없습니다, 저하.” 체이스의 명령을 분명히 확인했지만 따르지 않았다는 말. 변명할 것이 없다는 그런 말.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멋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독단이라······.” 꿈을 꾼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명령을 어겼다는 답이 돌아오자, 하얀 로브 아래로 보이는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려냈다. “내가 꿈 속에서 만났던 새들은 그런 것을 몰랐는데. 참 이상하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어 웃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를 향해야 할지 모를 원망이 치밀어서 웃고 있었다. “언제부터 내 새들에게 머리가 생겼을까.” 칼날과 같은 싸늘한 말. 그 짧은 비수가 향한 곳은 새들이 아니라 체이스 자신이었음을, 새들은 알지 못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서 노란 울새는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차라리 그 이유라도 이야기해준다면 좋으련만. 분명 체이스를 위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었을 텐데도 그조차 말하지 않고 사과만 하고 있었다. 그런 태도에 또 화가 나고 먹먹하여, 체이스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스러지듯 사라졌다. 모래 속으로 스며 사라지는 파도의 잔재만큼이나 무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이곳에 와서 나는 오로지 기대를 버리는 것밖에 하지 못했는데. 너희들은 남겨둔 내 새들에 대한 기대까지 전부 내려놓게 하는구나.” 노란 울새는 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체이스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무엇에 대해 환멸하고 있는지, 어떤 기대를 버려두고 왔는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고개만 숙였다. - 스릉 차게 벼려진 소리가 노란 울새의 귓가를 울렸다. 마치 도자기를 구워낸 것 같은 새하얀 검. 이제는 구할 수도 없다 알려진 순백의 강철을 녹여 만든, 생명을 취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결한 그 검신에 새벽의 햇살이 가늘게 반사됐다. “남길 말이 있다면 하거라. 내가 들을 테니.” 그것이 체이스의 결정임을 알아들은 노란 울새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더 숙였다. - 돌아가면 말해. 나를 만났고, 칼은 거두셨으면 좋겠다 했다고. 칼리안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노란 울새도 알고 있었다. 그 이후에 칼리안이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앞으로는 정보보다 목숨을 무겁게 쓰라고. 그러니 분명, 체이스에게 선처를 부탁하려 한 말일 터였다. 그래서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없습니다, 저하.” 노란 울새는 군인도 아니었고, 기사도 아니었다. 그들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한 곳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새였다. 그런 새들이 상부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살려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노란 울새를, 그리고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무릎 꿇고 있는 다른 두 명의 세작을, 체이스가 한동안 내려다봤다. 꽤 오랜 시간이 말 없이 지나갔다. - 탁! 꺼내진 칼이 아무것도 베어내지 못한 채 제 집으로 되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언뜻 반사되어 보이던 칼날이 사라졌음을 안 노란 울새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체이스를 쳐다봤다. “둥지로 돌아가도록.”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소리 없이 그들의 뒤로 다가와 있던 것은 체이스의 호위기사, 그리고 검술 스승인 테일란이었다. “필요할 때 연락하겠다.” 그것은 곧, 살려주겠다는 의미였다. * * * 며칠 전, 르메인은 앨런에게 혼이 났다. 잔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혼이 났다. 플란츠에게 내어 주었던 라벤더 차 때문이었다. ‘세상 천지에 제 자식이 품은 상처 들쑤시는 아비는 전하밖에 없을 겁니다. 칼리안 왕자님이 저 궁을 왜 무너뜨렸는지 아직도 모르셨습니까. 아프지마라 서럽지마라 보듬기만 하기에도 아깝기만 한 것이 자식인데, 간신히 제 발로 걷겠다고 일어난 놈을 그렇게 흔들어놓고 그것도 관심이니 되었다 여기셨습니까?’ 그리고는 칼리안의 앞에서 커피를 꺼내놓지 말고, 플란츠를 대할 때는 꽃이든 뭐든 향기나는 것은 싹 치우고, 란델의 장미는 스쳐 만지지도 말라 신신당부를 했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려면 아픈 것부터 살피라는 소리였다. ‘아비 노릇이 처음이라 서툴다는 변명 마시고 이해를 좀 해보시지요. 또 그리하시면 아비 경험 있는 제가 세 왕자님 싹 다 챙겨서 남쪽으로 가 버릴 터이니.’ 뒤이어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안 그래도 제 무덤이라도 직접 파고 들어갈 기세로 반성하고 있던 르메인은, 국왕의 앞에 선 백작이 왕자 셋을 한꺼번에 납치해버리겠다 하는 그 말에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결국 르메인은 칼리안과 플란츠의 무단 외출은 그냥 묻기로 했다. 란델의 근신도 해제했다. 왕자들이 무슨 일을 벌였어도 전하가 한 짓거리보다는 낫다는 앨런의 말에 스스로도 공감했던 까닭이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던 덕분에, 칼리안은 무리 없이 다시 숲을 찾을 수 있었다. 체르밀 궁과 달리 장미 향이 묻지 않은 공기는 그 자체로 완벽하게 청아했다. “밤에는 별이 좋았는데, 아침에는 바람이 좋네.” 생각해보니 이 곳을 밤에만 찾았다. 사실 밤에만 찾았다 하기에도 어려운 것이, 이 곳에 온 일이 딱 두 번 뿐이었다. 그러니 그것을 늘 밤에만 왔다 말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 어찌됐건 칼리안은 세 번째로 숲을 찾아왔고 지금은 이른 아침이었다. 시스파니안의 기운을 꺼려하는 험한 짐승은 살지 못해도 새들은 둥지를 트게 마련이라, 낯선 이의 방문을 경계하는 여러 지저귐이 예쁘게 울렸다. - 노란 새가 제 말을 전한다면 살려주시고, 전하지 않는다면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새의 지저귐을 듣다 보니 얼마 전 체이스에게 보낸 편지가 생각났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기사단 카렌을 찾아갔을 때 너무 잘 아는 이가 그 안에 있던 탓에 놀랐던 것도 함께 생각났다. 체이스가 정말 소식이나 전할 용도로 쓰기 위해 심어 둔 세작이었는지, 베른이었을 때 잘 알던 이가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분명 칼리안이 그를 알아보고 필요하다면 사용하도록 둔 것일 터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연두색 전서구를 통해 카렌의 기사에게 편지를 전했다. ‘이 자를 살려달라’는 칼리안의 말을 그 세작이 직접 한다면 살려놓고, 만약 하지 않는다면 정말 믿을 수 있을 사람으로 여겨달라는 뜻이 담긴 편지였다. 유일하게, 정말 유일하게 베른이라는 이름을 지녔던 이를 기억해주는 체이스가 아니던가. 비록 과거를 함께 보냈던 바로 그 체이스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래도 칼리안의 부탁은 들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후로 매일 이 곳에 와 있었습니다. 모자람 없이 늘 좋은 곳이었습니다.” 별과 바람이 좋았다는 칼리안의 말에 대해 조금 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 말을 꺼냈던 칼리안이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잠시 기다렸다 답을 한 것은 키리에였다. 칼리안이 깊은 숨을 들이쉰 뒤 말했다. “내가 잔뜩 어지럽혀 놨는데, 그래도 괜찮았어?” 앨런과 대련하며 그 숲을 어지럽힌 것이 칼리안이었으니 하는 말이었다. 겉보기에만 멀쩡하지 속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두지 않았던가. “익숙해지니 그것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모두 숲의 일부가 된 것 같아서, 왕자님의 칼자국도 좋게만 보였습니다.” 칼리안이 살짝 웃는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키리에의 속도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물론 칼리안이 장담하고 함부로 안심하기에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큰 문제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랗고 까만 키리에의 눈이 칼리안을 볼 때, 더 이상의 혼란스러움이 없었으니까. “이제 히나를 만나러 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칼리안에게 확신을 심어주듯 조심스럽지만 주저하지 않는 목소리로 키리에가 물었다. 칼리안이 일부러 히나를 떼어놓았음을 이해했던 모양이었다. 그 말이 이제 더는 가름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으므로,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얼마든지.” 오랫동안 걷고 싶은 생각에 숲의 입구에 레이븐을 두고 왔다. 키리에의 말 ‘이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둘은 흙을 밟아가며 말 없이 나란히 걸었다. 그렇게 천천히 걷기만 하다가,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제가 왕자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 물어보라는 허락을 했음에도 키리에는 섣불리 말을 하지 않았다. 답답해하는 대신 칼리안은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숲으로 들어서는 깊은 오솔길을 지나, 물 소리 가득한 그 곳에 도착했을 때 쯤. 키리에가 칼리안을 향해 섰다. 칼리안의 발이 함께 멈추자 키리에의 조용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저에게 자격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궁금해하던 것을 물어왔다. 칼리안은 그것이 무엇에 대한 자격인지 묻지 않았다. 칼리안이 잠시 거둬들였던 그 검을 키리에가 다시 쥘 자격. 언젠가 칼리안의 기사가 되어도 될 자격. 칼리안의 곁을 계속 지킬 자격. 그런 것들이 전부 포함된 말일 테니까. 어쩌면, 사람을 벨 자격이 있을지 묻는 말일 수도 있었고. “키리에.” “네, 왕자님.” 키리에를 마주보고 선 칼리안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더니 키리에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체이스의 집무실에 들어올 때 키리에가 고개를 수그리던 날. 그래서 체이스에게 금화 한 개를 받게 했던 날. 그 때에도 여전히 키리에의 나이가 더 많았지만, 그래도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 기특하다 생각한 베른이 그리 했던 기억이 나서.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키도 큰 키리에의 물빛 머리카락을, 어린아이 달래주듯 칭찬해주듯 그렇게. 슥슥 쓰다듬었다. “네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보여준 것이 뭐였을 것 같아?” 그리고는 이렇게 담담한 목소리로 마지막 날을 입에 담아 물었다. 그 날의 마지막에 키리에가 베른에게 무엇을 보여주었을지 알겠느냐고. “제 등입니다.” 고민같은 것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대답.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 - 정신 차리십시오. 멈추지······ 마십시오. 여전한 키리에. 키리에의 답이 맞았는지, 맞지 않았는지,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의 얼굴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를 부드러운 미소만 지었을 뿐이었다. “그 대답이 네 질문에 대한 답도 되어줄 것 같은데.” 그 마음을 두고 칼리안이 어떻게 자격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감사하다 생각할 뿐이야.” 왕의 어미도, 왕의 기사도, 왕의 마법사도, 왕의 신하들도, 모두가 미쳐버렸을 나라. 그 곁에서 홀로 미치지 않아 홀로 미쳐있었을 왕. 그가 무엇을 결정하고 또 무엇을 결심했을지. 무엇을 각오하고 검을 들었을지. 무엇을 위해 매를 날려보냈을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을 위해 그 많은 이들이 죽었던 것인지 여전히 의문 투성이지만, 무엇을 위해 베른이 돌아왔을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 내가 너를 다시 찾았으니.” 모두에게 등을 보여야 할 칼리안의 앞을 유일하게 막아서 줄 사람을 다시 얻게 되었으니. “감사할 일이지.”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손에 들린 묵빛의 검을 내밀었다. 두 번 다시는 되돌려 받지 않으리라 자신하면서. 두 번 다시는 먼저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이번에는 보은하겠다 약속하면서. 키리에. < 제31장. 아직은 아니지만(1) > 받아 본 적은 많았지만 주었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체이스, 그리고 베른과 체이스의 두 어머니들을 위해 준비했던 것 같기도 했지만, 정확히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어릴 때의 일이었다. 생일 선물을 말함이다. 키가 좀 자란 뒤로는 한 번도 직접 준비해 본 적이 없었다. 특별히 어떤 날을 기념해 선물을 준비할 만큼의 여유를 가지기도 어려웠다. 왕족의 ‘선물’이란 늘 축하하는 마음 이상의 과도한 의미가 담겼기 때문에, 주변의 이목을 염두에 두느라 체이스에게조차도 직접 나서서 뭔가를 챙겨주지 못했다. 칼리안이 된 이후, 물론 그 이유는 달랐지만 선물 챙기기를 못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카이리스에서 챙기기 어려운, 달력에도 표기되지 않은 독특한 날에 태어나버린 베른의 생일은 칼리안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냥 잊어버리고 지나갔다. 사실 인지할 수 있다 해도 딱히 그것을 챙겨야 할 이유도 이제는 없었고. 앨런의 생일이 얼마 전이었다는 것은 어제 얀이 이야기 해 준 덕분에 알았지만, 생일은 지난 이후에 챙기는 것이 아니라 하여 그냥 모르는 척 했다. 오래오래 만수무강하실 것이 분명한 앨런의 생일은 내년부터 챙기면 될 일이다. “저기 있는 녀석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재채기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철렁하고 하품하다 나온 눈물 한 방울에도 마음이 미어질 우리 히나의 생일만은 넘어갈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익숙하지 않은 생일 선물을 챙기느라 고민이 깊은 것은 당연히 칼리안이었고, 뜻밖의 고생을 하는 것은 폴룬 상단의 상단주 멜피르였다. 갑작스러운 칼리안의 부탁에 무려 스무 마리의 말을 끌고 왕궁으로 와 칼리안의 앞에 내보여야 했던 탓이다. 아무튼 폴룬 상단이 보유한 최상급의 말들 중 칼리안이 선택한 말을 본 멜피르가 다행이라는 얼굴을 했다. 혹시라도 칼리안의 마음에 드는 말이 없을까 걱정했던 탓이다. “왕자님의 말 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좋은 혈통을 가진 말입니다. 지나치게 덩치가 큰 것도 아니고 온순한 성격이니 베른 경과도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한 마리 말을 골라낸 칼리안을 보며, 멜피르가 이렇게 말했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꺼낸 얘기였다. 사실 이 대륙의 어떤 말이 레이븐만큼 영특하겠나 싶다. 얀과 키리에의 말도 분명 레이븐과 같은 핏줄이지만 확연히 다르지 않던가. “네. 부족함 없이 훌륭해 보이네요.” 때문에 칼리안은 꽤 흡족한 얼굴을 하며 이렇게 답한 뒤 갑작스러운 고생을 하게 된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세크리티아와 루비 거래까지 하게 되어 많이 바쁠텐데 직접 이렇게 와 줘서 고맙습니다, 폴룬 남작.” 왕족이 전하는 고맙다는 말에도 멜피르는 크게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권위 없이 언제나 솔직한 인사를 꺼내놓는 성격임을 알아서였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부르십시오.” 그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고, 뒤에 서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얀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칼리안이 고른 말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멜피르가 칼리안을 향해 조금 더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왕자님.” 그러더니 말을 잇지 않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른 할 말이 있어 그러는 것임을 안 칼리안이 눈짓으로 얀을 다시 뒤로 물린 뒤, 작은 미소가 어린 얼굴로 물었다. “다른 일로 값을 치러달라는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저 말의 값을 돈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받았으면 하는 듯 보여서 꺼낸 말이었다. 칼리안이 ‘청탁’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아는 멜피르가 저렇게 구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 칼리안은 일단 멜피르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칼리안이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짚어냈음에, 멜피르가 싱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레넌 브리센입니다, 왕자님.” 에반 브리센의 저택 지하에 갇혀 있는 레넌 브리센. 카이리시스 뿐 아니라 브리센과 연관된 귀족들의 영지 인근 상권을 독식하고 제멋대로 휘두르던 이가 아닌가. 심지어 그는, 칼리안이 마신 독차를 포함해 실리케가 사용했던 모든 독을 조달해온 인물이기도 했다. 말과 레넌 브리센에 대한 무언가를 교환해달라는 이야기임을 알아들은 칼리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달갑지 않은 그 이름이 떠오른 탓에, 칼리안의 얼굴에 드러나있던 미소가 짙게 변했다. * * * 마른 잔디의 색, 혹은 옅은 밀크티 색이라고 생각했다. - 백금색 말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하지만 히나가 백금색이라고 했으니 이제부터 저 말은 백금색이다. 결국 다 비슷한 색이지만 아무튼 무조건 백금색이다. 내일 당장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저 말은 백금색인 것이다. “이름은 네가 지어. 네 말이니까.” 생일 선물로 백금색 말 한 마리를 선물해 준 칼리안이 흐뭇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물론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도 제일 먼저 했다. 어쩌다보니 키리에보다도 먼저 했다. 결과부터 말한다면 칼리안은 히나에게 선물한 저 말의 값을 제대로 치렀다. 돈 대신 다른 것으로 값을 대신했다는 것이 아니라 금고 속의 금화를 잘 꺼내서 멜피르에게 건넸다는 소리다. 히나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거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였다. 그리고 칼리안은, 레넌에 대해 멜피르가 부탁한 일은 조금 뒤에 다시 고민을 해보기로 했다. 일단 히나의 생일 축하가 중요했고, 먼저 살펴보아야 할 다른 일들도 있었으니까. - 제, 말이요? 몸 전체는 백금색, 그리고 긴 꼬리와 갈기는 아주 옅은 백금색을 지닌 말이었다. 정오의 따스한 햇살 아래 한껏 반짝이는 듯한 신비한 색의 말을 보던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물었다. 로젤리타 기간 동안 히나 역시 말을 탔었으니 말 탈 줄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 왕실에서, 지급해주는, 말이 아니라, 왕자님께서, 주시는, 말이에요? 발칸의 마법사에게도 당연히 말이 한 마리씩 제공되므로 히나 역시 왕실에서 말을 지급해 줄 예정이었다. 그것을 칼리안이 취소시키고 이렇게 직접 마련을 한 것임을 눈치채고 묻는 소리였다. “응. 맞아.” 앨런이 베로니카를 앞에 둔 것과 비슷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끄덕이는 칼리안을 본 히나가, 칼리안의 뒤에 서 있는 키리에를 아주 잠시 쳐다보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 같아서는 다른 마법사들과 똑같은 말을 타겠다며 거절하고 싶었으나 키리에가 칼리안의 선물은 그냥 받으라며 미리 귀띔을 해 준 탓이었다. 칼리안이 무슨 이유로 히나를 챙기는지는 키리에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 감사합니다, 자상한, 왕자님. 이 말에,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본래 선물이란 받는 이보다 주는 이가 더 즐거운 법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세상에서 가장 환하게 빛나는 우리 히나가 고맙다는데. 당연히 기쁠 수 밖에. * * * 히나에게 맞을 마구를 맞추는 것은 얀에게 부탁을 했다. 키리에는 아주 오랜만에 되찾게 된 검을 가지고 수련장으로 향했다. 일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칼리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근육은 물론 뼈와 연골까지 모두 다쳤던 탓에 여전히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던 아르센의 안부를 확인한 뒤, 전시품인 듯 자랑스럽게 걸어둔 검은 로브 자락을 보며 질색한 얼굴로 당장 태워버리도록 말했다. 그리고 앨런의 집무실에 들러 텐실의 왕세자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전했다. 란델의 심장에 얽힌 맹세의 인을 풀기 위한 준비단계였다. 그 후에는 체르밀 궁으로 돌아온 뒤, 여러 종이뭉치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검은 조약돌에 새겨진 문자, 에우리아와 아르센이 찾아낸 종이에 적힌 문자. 그리고 시간의 축에서 베껴낸 문자들이 적힌 종이들. 그것들을 차례로 살펴가며 며칠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거기에 더해 레넌 브리센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려니, 머릿속이 복잡하여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아우님에게서 피 냄새가 계속 나는데.” 그런 칼리안을 향해, 언제나와 비슷한 낮은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슬쩍 웃었다. 하는 일 없이 소파에 앉아 고양이나 쓰다듬고 있길래 끌고 내려온 똘똘한 완두콩이, 도와달라는 수수께끼 풀기에는 관심 없다는 듯 이런 말이나 꺼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까.” 옛 칼리안만큼 꺼려하지는 않았던 탓에 내어놓아도 된다고 말했던 딸기. 그 딸기를 얇게 저민 것을 올려 구워낸 비스킷을 플란츠의 앞 쪽으로 밀어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내 형님께서 어찌나 예민하신지.” 장난스럽게 말한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조금 놀란 채였다. 기사들만이 느낄 수 있는 피 냄새는 일반인이 코로 냄새를 맡는 것과 달랐다. 피의 기운 자체를 감지하는 감각을 확장시켜 느끼는 것이다. 특별히 숨길 생각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특별히 먼저 알려줄 만한 것도 아니었는데 플란츠는 지금 그것을 묻고 있었다. 체르밀 궁의 어떤 기사도 눈치채지 못한, 칼리안이 꺼내 온 두 개의 조약돌에서 흘러나오는 그 기운에 대해서. “좋은 머리 써주시라고 모셔왔는데 냄새나 맡고 계시면 어떡합니까.” “짖으라고 물어본 말 아닌데.” 조금 전 칼리안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배워 돌려준 플란츠가 눈꼬리를 가늘게 좁혔다. 다른 소리 그만 하고 설명하라는 뜻이었다. “그날, 대사막의 늑대들이 지니고 있던 조약돌을 꺼내 온 겁니다. 며칠은 더 지나야 사라질텐데 불편하시면 이만 올라가세요.” 그 말에 플란츠가 다시 한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에게서 돌을 ‘꺼내왔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아들은 듯 했다. “됐어.”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며 말린 배와 함께 우려낸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것이 꽤 의외의 반응이었던 탓에 칼리안이 신기하다는 얼굴을 했다. 예민하기로는 카이리스에서 제일 갈 것 같은 파릇파릇한 놈이 아니던가. 피가 배어 나오는 스테이크도 안 먹으면서 굳이 이 냄새를 참겠다 하니, 기특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미안하다는 생각을 해야 하나. “네.” 참 많은 의미를 섞은 짧은 대답을 내어놓은 칼리안이 다시 종이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붉은 빛의 힘. 생명을 태워가며 사용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짙어지는 것 같다 하고요. 완전히 검게 변한 돌을 어떻게 쓰는지는 모른다 했습니다.” 찻잔을 내려놓던 플란츠의 손이 잠시 멈췄다. 똑똑한 플란츠는 지금 칼리안이 누구에게서 어떻게 얻어낸 정보를 전해주고 있는지 잘 알아들을 터였다. 대사막의 전사가 아닌가. 단순히 앞에 앉혀놓고 노려본다고 정보를 일러주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플란츠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칼리안이 아르센을 구해 왔던 그날 지금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풍겨오던 피 냄새가 무엇 때문에 밴 것이었는지도 이제는 눈치를 챘을 것이다. “······ 그래.” 플란츠는 이렇게만 말하며 내려놓은 찻잔을 도로 들어올려 다시 한 번 차를 마셨다. 알려달라 해서 알려주는 것이니, 그것의 무게가 얼마나 나가든 잘 받아들이는 것도 플란츠의 몫이었다. 궁금해하기 시작했다면 이제는 그런 궁금증에 무엇이 뒤따르는지에 대해서도 배울 차례였으니까. 말 없이 종이뭉치를 뒤적이던 칼리안이 문득 떠올랐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전서구 노릇 한 번만 더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칼리안이 계속해서 기사단 카렌의 영역에 발을 디딜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플란츠를 통할 수 밖에 없었다. “또 왜.” 귀찮다는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은 질문에, 칼리안이 앞에 놓인 종이를 툭툭 쳐 보이며 말했다. “시간의 축이 일부 뿐이니 혹시 기억을 하실 수 있을까 하고요. 기억해보실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체이스의 기억 속 시간의 축에 새겨진 글자들을 혹시라도 체이스가 모두 기억하고 있을지 그것을 물어보고자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들은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앉았던 허리를 천천히 폈다. 그렇게 한동안 칼리안을 쳐다보던 플란츠의 입이 짧게 열렸다. “······ 당신.” 이렇게. 칼리안일지, 베른일지, 혹은 둘 다일지 모를 누군가를 불러냈다. “모든 사람이 다 당신같이 잘 미쳐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디에서 온 믿음일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칼리안은 묻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눈을 한 채 플란츠를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 이야기를 하라는 뜻일테니, 플란츠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 당신보다 어리다고.” 베른에게 있어 체이스는 언제나 형이겠지만, 사실은 베른보다 어린 사람. 그러니 그만큼 불안정할 수 있는 사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얻게 된 기억 때문에 분명히 괜찮지 않을 사람. 칼리안만큼 잘 미쳐있기에는 아직 너무 어린 체이스에게, 모든 일의 시작인 시간의 축에 대한 기억을 들춰보란 말을 할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고. 그렇게 말하며 화를 내고 있었다.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 제31장. 아직은 아니지만(2) > 칼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벌어지고 바람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작은 소리로 이어지던 그것을 어찌하지 못하여, 결국은 흐느끼듯 뱉어냈다. 그렇게 웃음이 터졌다. 미치지 않고 못 버틸 세상밖에 안 살아봐서 진작부터 돌아버린 놈이, 돌지 말아야 할 놈을 보며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진작부터 돌아있었음을 들킨 것이 웃겨서 웃음이 터졌다. 다시 살려고 보니 눈물 나도록 웃긴 세상이라서 웃음이 터졌다. 내가. 지금. 왜 이러는데.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을 도로 삼켰다. 그렇게 삼켜온 것이 너무 많아서 체한 것처럼, 토악질하듯 터져 나온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 * * - 레넌 브리센입니다, 왕자님. 칼리안이 삼켜낸 말. 조금 전 칼리안을 찾아온 멜피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그 말. 1년 전 칼리안은, 레넌이 란델을 지지하고 있음을 에반에게 알리며 레넌을 알아서 처리해주도록 요구했었다. 그리 해준다면 심각한 적자로 빚만 쌓여가던 브리센 상단을 사들이겠다 하였다. 그 레넌의 이름이 다시 언급되자, 칼리안은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와 동시에 둘의 곁에 사일런트 막이 둘러졌다. 밖에 선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반투명한 막을 확인한 멜피르가 입을 열었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브리센 후작이 레넌 브리센 자작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더니, 레넌이 살아있고 곧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겠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거짓 소문이다. 자신의 저택 지하에 직접 가둔 레넌을 에반 브리센이 수소문하고 있다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에반이 모종의 이유를 가지고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상단에 영향이 있습니까.” 칼리안은 에반이 그런 짓을 꾸미는 이유를 가늠해보기 위해 이렇게 물었고, 멜피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대답했다. “네, 왕자님. 레넌 브리센이 사라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폴룬 상단과 거래를 하던 귀족들이 조금씩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상단 수익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그것이 비단 상단만의 문제는 아닐 터였다. 브리센의 눈치를 보며 슬쩍 발을 빼려던 귀족들이 다시 브리센 쪽으로 붙을지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조금 이상한 것이 있었다. “브리센 눈치 보던 귀족들 마음이나 돌리자고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은 아닐텐데요.” 레넌이 무엇 때문에 어디로 사라졌었는지의 진위에 대해 에반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당시 그것을 두고 거래를 주도했던 앨런과 맹세의 인을 나누었지 않았던가. 물론 그 때 앨런을 통해 맹세의 인을 나누게 한 것은 실리케가 레넌을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으니, 양쪽 모두 진실만 밝히지 않는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안전한 계약이라 해도. 레넌을 저택의 지하에 계속 가두어두는 것만큼 안전할까. “레넌을 끌어와 상단을 다시 꾸려준다 해서 브리센 후작에게 당장의 이득이 생기지도 않을테고요.” 이득도 없겠지만, 에반은 애초에 레넌의 상단을 달갑게 여기지도 않았었다. 기사 가문에 상단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늘 불만을 보였다던 에반이 아니던가. 그렇게나 돈을 밝히면서도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단박에 상단을 팔아치웠을 만큼, 에반은 레넌의 상단을 눈엣가시로 여겨왔었다. “굳이 그렇게 해가면서 레넌을 꺼내려 드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 하고 중얼거리던 칼리안이 한동안 말 없이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아’ 하는 짧은 소리를 내고는 멜피르를 보며 말했다. “폴룬 남작은 하던대로만 해요. 소문에 신경 쓰지 말고.” 에반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는 얼굴을 한 채였으나, 그 내용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얼마 전 칼리안이 무슨 일을 꾸몄는지에 대해 멜피르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어서였다. ‘그레이가 올 것을 알았군.’ 에반이, 그레이가 다시 수도로 오리라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제 자식을 가장 못 믿는 에반 아닌가.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령에, 그것도 그레이와 꽤 가까운 거리에 자신의 사람을 심어 두었다면 그 사실을 접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터였다. 그레이가 알아서 숨긴 덕분에 에반 역시 그가 더 이상 소드마스터가 아님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발칸의 부군단장과 소드마스터인 그레이가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에반이 전해들었다면 충분히 그런 소문을 퍼뜨릴만 했다. 아직도 정해지지 않은 브리센의 소가주 자리를 ‘1년 만에 간신히 찾은 귀한 아들 레넌’에게 주면 그레이가 수도에 오더라도 제 편을 만들지 못할 테니까.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혀를 쯧쯧 찼다. 에반의 행태가 답답하기 짝이 없어서였다. ‘가문 명맥 끊어질 건 생각 못하고.’ 그레이가 언제 자신에게 칼을 들이댈지를 걱정하느라, 그레이를 곁에 두고 가문의 검을 완전히 가르칠 생각도 못하고 변경백으로 만들어 멀리 보내버린 에반이 아닌가.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내 생각이 맞다면 브리센 후작이 자작을 다시 내놓는다 해도 상단을 꾸려주지는 않을 겁니다. 폴룬 상단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테니 우선은 지켜보죠. 다른 일이 있다면 내가 내용을 전하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이 없어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일단 지켜보자 하는 말에 대해서까지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때문에 멜피르는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후 칼리안은 한참 동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멜피르를 안심시킨 것과는 별개로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였다. ‘아무리 그래도 레넌 브리센을 꺼낼 생각을 할 줄은 몰랐는데.’ 에반이 생각보다 더 생각이 없었음에 기인한 놀라움과 짜증 때문이었다. 그 에반에 그 그레이다. 보고 배운 것이 욕심 뿐이다. 에반이 레넌을 소가주로 만들었을 때 그레이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결국 부자 셋이 후작위 하나를 놓고 싸움을 벌이는 형국이 벌어질 지도 몰랐다. 물론 셋이 서로 물어뜯다 공멸하는 것을 칼리안이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것은 그레이 브리센이어야 했다. 플란츠가 20세가 되어 왕궁 밖으로 나서기까지 에반의 뒤를 이은 ‘소드마스터’로서 브리센 후작가를 문제 없이 지탱하고 있어야 했으니까. 그러므로 그레이는 일단 살아있어야 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일단 아르센을 통해 그레이가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편지를 보내달라 부탁을 했다. 그러나 그 말을 그레이가 들을지 듣지 않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시기를 더 앞당겨야 될지도.’ 그러니 일을 확실히 해결하려면 에반을 빠르게 없애 버릴 수 밖에 없지 않겠나.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제온’이다. 놈들은 에우리아가 카이리시스를 벗어나길 기다렸다는 듯 뒤를 쳤다. 그런 놈들을 등 뒤에 둔 채 에반을 상대하겠다며 전력을 투자할 수가 없었다. 급작스럽게 에반이 죽은 뒤 잠시 혼란할 나라에 아무 일도 없으려면 ‘제온’에 대해서도 대비를 해야 했다. 플란츠를 살리려면 에반을 없애야 하고. 에반을 없애려면 그레이가 필요하고. 에반이 그레이를 죽이지 않도록 에반을 없앨 시기를 앞당겨야 하고. 그러려면 제온을 파악해야 하고. 그래서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체이스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체이스가 어떤 상황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보가 필요하다 여겼기 때문에. 썩어가는 제 심장을 또 한번 도려내는 마음이 되어, 플란츠의 심장과 체이스의 심장을 두고 무게를 재어 본 뒤 내린 선택의 결과로. * * * 더는 웃음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칼리안의 목소리도 플란츠의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다. 자신이 온 것을 눈치챈 칼리안이 사일런트를 쓴 것인지, 아니면 둘 다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지금 칼리안을 찾아가면 안 된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복도에 서서 칼리안의 방 문을 노크하려다 손을 뗀 키리에가 조용히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갑작스러운 칼리안의 웃음소리에 놀란 표정이 되었던 얀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듣지 못한 것으로 해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묻지 말아달라는 소리이기도 했고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 쓰지 않아야 할 것 같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키리에.” “네.” 짧게 대답하는 키리에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혹시라도 지금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들려온 것인지를 물을까봐 걱정한 탓이었다. 체이스에 대한 내용은 얀에게 알려줄 수 없었으니까. 다행인지 아닌지 몰라도 얀은 칼리안이 알려주지 않은 일에 대해 캐묻지 않는 성격이었고,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레릭이라는 시종 기억하세요? 플란츠 왕자님의 상급 시종이요.” “네. 알고 있습니다.” 대답을 들은 얀이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황금빛의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방문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저 문 너머에서 칼리안과 함께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한 행동이었다. “레릭이 오늘 하는 말이, 플란츠 왕자님이 창가 커튼을 내렸다고 하더라고요. 이제는 식사도 나름대로 잘 하고 다시 수련장에도 열심히 가고 매일 같이 기사단 둘러보면서. 그래서 너무 다행이라고 좋아하더라고요.” 혼잣말처럼 속삭이는 말이었으나 키리에가 알아듣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키리에는 작은 의문을 가졌다. 칼리안의 방 안에서 들려오다 뚝 끊긴 저 웃음소리를 들은 얀이, 왜 플란츠의 변화를 입에 담는지를 아직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그런데 저는 레릭의 말에 잘 됐다는 대답을 못했습니다. 선뜻 대답이 안 나와서요.” 플란츠가 좋게 변하는 것이 싫어서도 아니었고, 칼리안이 플란츠의 과거를 묻어두고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플란츠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이 칼리안의 결정이라면 얀 역시 어떻게든 따를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니 플란츠가 변했다며 좋아하는 레릭이 아니꼬워서 대답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 왕자님은 다른 왕자님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셨었는데, 무슨 다짐을 하셨는지 몰라도 갑자기 바뀌셨거든요. 키리에가 이 곳에 오기 얼마 전에 갑자기요. 갑자기 거울을 보시고 앞머리도 자르시고. 그리고는 다른 왕자님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면서 그렇게 지금 이 자리까지 오셨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아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변해가시는 것이 너무 불안해서요.” 키리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차라리 칼리안의 변화가 의심된다거나 이상하다 여긴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변명을 해줄텐데 얀은 그렇게 여기고 있지도 않았다. “점점 더 위태로워 보여요. 재작년보다, 아니. 지금까지의 어느때보다도 훨씬 더 위태로워 보여서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한 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까마득한 곳으로 추락할 것처럼. 누구의 앞에 서든 칼리안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얀의 앞에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랬으니 지금 얀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저 얀의 눈에만 그렇게 보여진다는 소리였다. 그 누구보다 칼리안의 속내를 정확히 보는 얀이었으니, 아마 틀리지는 않을 터였다. “언젠가 왕자님께서 하셨던 말대로, 가느다란 칼날 위에 간신히 서 있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아서 그냥 좋다고만 생각이 되지를 않아요. 나도 레릭처럼 마음놓고 안심하고 좋아하고 싶은데, 그게 안돼요.” 방문 밖으로 흘러나오던 칼리안의 웃음 소리가 정말 기쁘고 좋아서 웃은 것이 아님은 곧바로 알았다. 왜 그렇게까지 감정적인 소리를 냈는지는 몰랐으나, 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유가 아니었으니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걱정이 될 뿐. “오늘 일만 해도 그렇고요.” 잠시 멜피르가 간 뒤의 일을 곱씹어보던 얀이 다시 말했다. “폴룬 남작과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왕자님이 제일 처음 하신 말씀이 계속 신경이 쓰이거든요.”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 브리센 후작과 관련된 소문이 있을 거야. 내 형님 귀에 그 얘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해줘. 절대로. 레릭의 입단속을 부탁하는 말이었다. 아스트리샤 거리에 도는 소문을 왕족이 접할 방법이 시종의 말 전달 외에 또 있겠는가. 실제로 칼리안 역시 얀을 통해 이런저런 소문을 접하고 있었다. 흥미 때문이 아니라, 처세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릭 역시 그들에 대한 이런저런 말을 플란츠에게 전하고 있을 터였다. 의뭉스러운 에반은 그 일에 대해 플란츠에게 말하지 않겠지만 레릭은 그렇지 않았으니 그것을 막아달라 부탁을 한 것이다. 때문에 얀은 레릭을 만났고, 이유도 모르는 채 ‘어쨌거나 플란츠 왕자님을 위한 일이니 협조해달라’는 뜬구름 잡는 말로 레릭을 설득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릭은, 그것이 칼리안의 부탁이기 때문에 수락을 했다.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해가 될 일을 하지는 않을 테니 믿겠다는 말, 그리고 칼리안 덕에 플란츠가 많이 바뀌어서 요즘 굉장히 기쁘다는 말도 함께. 그래서 같이 기뻐할 수가 없다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괜찮으실 겁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떨어지지 않고 잘 버틸 것이라는 말. 키리에가 한 저 말에 믿음보다는 바람이 더 많이 들어있으리라는 사실을 눈치챈 새끼코끼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그런 길로 가겠다 하시니, 믿어드릴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칼리안이 플란츠를 지키겠다며 무엇을 접어두었는지 제대로 깨닫게 된 탓에, 플란츠에 대한 복잡한 마음을 함께 접은 키리에가 이렇게 말했다. < 제31장. 아직은 아니지만(3) >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버릇이 됐다. “버릇이라는 게 원래 다 그렇게 들던가. 아니면 나만 그런 건가. 잘 모르겠네.” 어느새 비어버린 와인잔을 채워 넣으며, 체이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건물 옥상에 올라가 앉아 그렇게 술을 기울이는 날이 하루에서 이틀, 사흘로 늘어나면서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버릇이 됐다고. 별 말 없이 그런 체이스의 곁을 지켜보던 테일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기도, 혹은 아니기도 합니다.” “그런가.” 큰 뜻 없는 목소리로 대꾸한 체이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은빛의 달과 파란 별 아래, 비슷한 색을 내는 청은발이 함께 흔들거리다 가라앉았다. “저하께서 카이리스 3왕자의 기호를 따르려 일부러 들이신 버릇 같은 것이 아니라면,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이 더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갑작스럽게 버릇처럼 입에 대고 있는 민트차를 말함이다. 조용히 이어진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체이스가 테일란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 독하지 않은 와인이었으므로 체이스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러니 방금 전에 테일란이 한 이야기도 잘못 들은 말은 아닐 터였다. “아, 들켰구나.” 그래서 체이스는 이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웃음의 끝에 깊고 서글픈 한숨이 매달렸다. 본래의 체이스는 그런 얼굴을 내비친 적 없던 사람이었다. 그것이 누구든 언제나 웃어보였을 뿐. 서린 한기같은 표정도, 곧 스러질 것 같은 물안개같은 표정도 지어보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체이스의 시종보다 더 오랜 시간 그를 보아왔고 또 가르쳐왔던 테일란은 그것을 알았다. 그랬으니 갑작스레 마시는 민트차가 무엇 때문일지, 그것 하나를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지 않은가. “체이스.” 때문에 테일란은, 언제나 붙여오던 정중한 말 대신 이렇게 입을 열었다. 하나하나 흩어져 떨어지는 마른 낙엽같이 웃고 있는 체이스를 붙들었다. 세자위에 앉은 뒤로는 들어본 적 없는 호칭에, 체이스가 조금은 놀란 듯 혹은 우스운 듯한 표정이 되어 테일란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내가 취한 것이 맞나······. 내 스승님이 이름을 다 불러주시고.” 그리고는 이렇게 농담같은 말을 꺼내놓았다. 그만 묻고 더 이상 관심 가지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말을 돌리려 한 것이기도 했으나 테일란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이 되어 이러는 것이 아니냐.” 체이스가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발 아래 이어진 작은 도시의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버릇처럼 술을 마시고, 내 스승님은 버릇처럼 내 옆을 지키고. 나는 버릇처럼 꿈을 꾸고, 내 스승님은 버릇처럼 나를 걱정하고.” 그 동안 버릇이 된 것이 참 많아서 떠오르는 것도 많았다. 때문에 이런저런 버릇들을 읊어나가던 체이스의 보랏빛 눈이 테일란을 향해 움직였다. “그 정도로 족합니다, 스승님. 민트차 말고.” 칼리안의 기호를 체이스가 왜 따라하고 있는지, 그에 대해서는 스승 테일란에게조차 이야기해줄 수 없다는 말. 그것까지는 걱정하지도 말고 궁금해하지도 말아달라는 말.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도울 수 있지 않겠느냐. 지금 당장 저 아래로 뛰어내릴 것 같은 그런 모습으로 앉아있지 말고.” 발 아래 놓인 것들을 향해 미련 없이 뛰어내릴 것 같은 그런 모습을 더는 볼 수가 없다고. 하나뿐인 제자를 보며 그리 말하는 테일란의 얼굴에 수심이 깊었다. 테일란이 체이스를 제자로 대하고 있었으므로 체이스 역시 잠시동안 제자의 모습이 되어 고요한 목소리를 냈다. “당장 저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은 것을 참았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요.” 아, 오래 전이 아닌가. 이런 말을 덧붙인 체이스가 다시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체이스.” 이번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테일란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체이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을 뿐이었다. 꿈이 버거워도 잊지는 않아야 했고, 휘청거려도 넘어지지는 않아야 함을 알고 있었다. 고작 이런 일로 다 내려놓을 만큼 가벼운 생이 아님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소리 없는 웃음같이 소리 죽인 바람이 한번 불어오다 흩어졌다. 그 끝을 따라가듯 먼 어딘가를 눈으로 좇던 체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 * * 검을 들어 지키겠다 하였으니. 원하는대로 해보거라. 지켜내든 버텨내든 어디 한 번 해보거라. 해 내면. 그 놈을 살려 내 자리에 앉히마. 네가 원하는대로. * * * 짜증을 내지도 않았고 눈을 감지도 않았다. 앞에 앉은 이의 웃음이 멈추도록, 그냥 가만히 앉은 채 자리를 지켰다. 웃음인지, 혹은 다른 무언가인지 모를 것이 다 멈추도록. 선명히 타오르는 붉은 눈이, 선명히 빛나는 연두색 눈을 바라볼 때까지. “······ 처음에는.” 한참을 웃다가 숨을 쉬다가 다시 한참을 웃던 칼리안이 간신히 다시 숨을 쉬듯 말했다. “꿈을 꾸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고 나면 모든 것이 꿈 속의 일이 되어버리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요.” 한 팔을 잃고, 피를 흘리고, 가슴에 구멍이 난 채로. 그보다 더한 것들을 잃은 채로 서서히 식어 죽어가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고. “사실 생각이라기보단 갈망했다 하는 것이 맞겠지만.” 말 사이에 숨긴 것을 들었을까, 듣지 못했을까. 플란츠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칼리안의 시선에서 자신의 눈을 떼어냈다. “아쉽게도 그것이 꿈은 아니더군요.” 꿈 속에서 옛 칼리안을 만났고, 꿈 속에서 체이스를 만났다. 이제는 없는 이들을 그렇게 만나고 헤어졌다. 손에 잡히지 않도록 지나가버린 이들을 꿈 속에서 만나고 잃었다. 이제 칼리안은 그 어떤 꿈도 꾸지 않았다. 꿈꾸지 않는 이가 어떻게 그 안에서 깨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칼리안에게 있어 그것은 꿈이 아니라 끝이었다. - 달칵 식어버린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 얼마 전, 이 곳에 머무르던 세크리티아 세작의 절반이 죽었다 들었습니다.” 꿈 얘기를 하더니 누군가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 여전히 뜬금 없이, 그렇게 한결같이. “크게 놀랍지는 않았습니다. 만약에 저였다면 그리 했을 것이라서,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을지 곧바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다만,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하실 수 밖에 없게 되었음을 알게 돼서. 그것이 조금쯤 생소했다 해야 할까요.” 제가 키운 세작들을 제 손으로 거두는 일을 그렇게나 담담하게 입에 올린 칼리안은 플란츠의 다른 감상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과거와 지금의 사이에 생긴 빈 자리를 느끼셨을 겁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빈 자리를 직접 채워놓으셔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셨으리라고, 그래서 그런 결정을 내리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체이스는 여전히 현명했다. 현명하기만 했다. 그것이 문제가 되어 이곳 저곳에서 균열이 생겼다. 그러니 체이스는 기억 속에 남은 베른이 해온 일이 무엇이었을지 깨달았을 것이다. 그 일을 대신 해줄 이가 더는 없었음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체이스를 현명한 성군으로 남기기 위해 베른이 무엇을 했는지를, 체이스 홀로 빛에 두기 위해 베른이 어디에서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었을 터였다. 그 빈 자리가 얼마나 크게 보일지. 그 자리를 홀로 채우는 것이 얼마나 버거울지. 끝없이 이어질 꿈에서 깨면 찾아오는 악몽같은 현실이 얼마나 끔찍할지. “제가, 그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베른의 빈 자리가 체이스의 균열이 되고 있으리라는 것을 칼리안도 알았다. 칼리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이스를 찾는 것이 너 때문이라고 말하는 대신 차를 들어 한 모금을 더 넘겼다. “알기 때문에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이스를 찾는 것은, 과거의 체이스보다 지금의 체이스가 몇 배는 더 단단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베른이 있었을 때보다 상황이 나쁘겠지만. 체이스를 대신해 베른이 뒤집어 쓴 피 냄새가 얼마나 지독했을지 이제야 깨닫고 힘들겠지만. 그래도 결국은 그 빈 자리를 잘 채워놓을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 상대의 패를 가져오려면 나의 것을 먼저 걸어야 한다고. 그리 말하지 않았더냐.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거는 것이 있어야지. 그러니 어디 한번 해보거라. 그 놈 지키는 것이 네 꿈이라 하였으니. 체이스를 대신해 그림자 속을 걸었던 베른은 지금의 체이스보다, 지금의 플란츠보다, 지금의 칼리안보다 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았다. 돌아버리긴 했어도 무너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 사람의 아들로 살아왔을 만큼은 강한 사람이니까.” 체이스와 베른은 아주 많이 닮은 형제가 아니던가. 그 지옥같은 데블란을. 그것은, 베른이 있고 없고를 떠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러니, 혹여 흔들리실지는 몰라도 주저앉지는 않으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달칵 플란츠가 대답 없이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곧바로 손을 뻗은 칼리안이 그 잔을 빼앗듯이 건네받아 멀찍이 내려놨다. 식은 홍차 속에서 지나치게 우러난 사과의 단 냄새가 마치 꽃향기만큼 진하게 풍겨오고 있었음을, 찻잔이 치워진 이후에야 느꼈다. “······ 게다가 어디 계시는 누구처럼 손이 많이 가는 분도 아니시니.” 짖지 말라고 해야 할지. 짖지 마시라고 해야할지. 플란츠가 잠시 그것을 고민하는 동안, 칼리안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놨다. “전서구 노릇, 한 번만 더 부탁드립니다.” 테이블에 놓인 것을 본 플란츠가 소리 없는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로젤리타를 떠나는 칼리안에게 비슷하게 생긴 반지를 건넨 앨런의 손목에 있었을, 아무 무늬도 없는 은색의 팔찌였다. 왕궁 안에 있을 때에는 소용이 없겠지만 밖에서라면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든 상관 없이 목소리를 전달해 줄 그것을 보던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매가 필요하겠군.” 편지보다 무거운 것을 들고 가야 할 테니 비둘기로는 안 되겠다는 말이었다. 칼리안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의미를 함께 담아 대답을 전한 플란츠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왕궁 밖으로 잘 도망가는 동생놈이 이제는 얼마나 더 자주 도망갈지 가늠이 어려웠던 탓이다. 대화를 하려면, 왕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을 눈치챈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형님께서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서로 대화를 나누고자 시간을 할애할 만큼 여유롭지 않았으니 하는 소리였다. 그러니 저 팔찌는, 그래도 될 만큼 여유로운 날을 만들어 보겠다는 칼리안의 약속이기도 했고 그런 날을 만들 수 있도록 정신 차리고 도우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필요할 때라면 언제든 말을 걸고 무엇이든 도움을 청할테니 떼어놓지 말라는 이기심 가득한 부탁이기도 했다. “제가 그렇게 속만 썩이는 동생은 아니라서요.” 더는 꿈 꾸지 않게 된 이가, 악몽같은 현실과 현실같은 악몽의 사이에서 길을 잃어가는 이를 불러낼 목소리를 선물하면서 습관처럼 웃었다. 고양이 키우는 것보다 조금 더 좋은 꿈을 꾸었으면 하는 이를 보면서. < 제31장. 아직은 아니지만(4) >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쟤가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는 더 모르겠다. 생각하면 할 수록 의문이 늘고 짜증이 무럭무럭 솟구치는 미친놈은 태어나 처음 겪어봤는데 그놈이 하필 내 동생인 그런 문제 때문에, 플란츠는 결국 그냥 다 집어치우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됐다. 하긴, 칼리안 같은 놈이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이 세상은 정말 평화로웠거나 혹은 이미 다 망했거나 둘 중 하나일거다. 그러니 저런 놈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던 탓에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것이 참으로 애석하면서도 실로 다행한 일이 아닌가. “하.” 플란츠는 짜증인지 걱정인지 미안함인지 답답함인지 모를 그 모든 것들을 죄 담아낸 한숨을 다시 한 번 내쉬었다. 실로 미묘한 이 형제의 대화를 적당히 좋게 마무리하고 싶어하는 칼리안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느새 화가 풀렸던 플란츠도 적당한 선에서 한 발을 물리려고 했다. “웃네, 또.” 쟤가 웃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비둘기 대신 매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고 매일 왕궁 밖으로 도망갈 놈 뒤치다꺼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뭐 그런 생각까지 했으니, 또 웃지만 않았으면 플란츠는 분명 대화를 잘 마쳤을 것이다. 그런데 저 미친놈이 웃었다. 칼리안은 체이스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다 했고 플란츠는 괜한 말을 했음에 잠시 후회했으며 미친놈이 처웃었다. 칼리안은 걱정할 일은 없으리라 말했고 플란츠는 그 말이 왠지 거북하다 느꼈으며 미친놈이 처웃었다. 저 미친놈은 거짓말을 못했고 플란츠는 똑똑했으며 칼리안이 처웃었다. 조금 전에는 살기 싫다는 듯이 웃더니 이제는 이미 죽은 것처럼 웃었다. - 저는 저 분의 동생이었고 지금은 형님의 동생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구는 것이 쉽지는 않네요. 체이스가 카이리시스에 들이닥쳤던 날. 체이스를 처음 마주한 뒤에 돌아와서는 짖어댔을 때 딱 지금 같은 얼굴을 하고 웃었던 놈이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분명 플란츠가 알면 안 되는 무슨 일이 생겼으리라고. 그리고 칼리안은 플란츠가 내걸고 온 심장을 신경써주느라 체이스 쪽을 내려놨을 것이라고. 그게 아니고서는 세뉴 관의 산책길을 빙빙 돌던 날의 체이스를 그대로 베껴놓은 것 같은 저딴 얼굴을 하며 웃을 일이 없지 않나. 그러니 저 팔찌는 플란츠의 심장 대신 내려놓은 체이스에게 건네는 썩은 밧줄임을, 같이 살자고 꺼낸 것이 아니라 잘 버텨보자고 주는 구렁텅이임을, 플란츠가 알아봤다. “그래. 쉽지 않겠지.” 칼리안조차 알아듣지 못할 말을 꺼낸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숫자를 한 번 세 봤다. 손에 든 것을 전부 다 플란츠에게 넘겼을 때. 원망하라 했더니 욕만 했을 때. 그리고 오늘. 굵직한 것만 생각해도 이미 세 번을 참았다. ······ 미친놈. 몇 바퀴 쯤을 돌아 제 자리에 서 있어서 아무도 못 알아볼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뜯어보면 세상에서 제일 크게 돌아버린 놈. 자기가 돈 것을 알면서 안 돈 척 하던 미친놈. 그래놓고 플란츠를 미친놈이라 욕했던 진짜 미친놈. - 제가 그렇게 속만 썩이는 동생은 아니라서요. 장담하는데, 저렇게 다채롭게 속을 썩이는 동생 새끼는 대사막까지 전부 뒤져봐도 쟤 밖에 없을 거다! 그렇게,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과 매우 객관적인 감상을 마친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떴다. 연두색 눈이 잠시 테이블 위를 훑다가 칼리안이 옆으로 밀어놓은 찻잔에 가 닿았다. 그것을 묵묵히 눈에 담던 플란츠가 웃었다. 어린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렇게, 사람을 참 불안하게 만드는 미소를 지어보이던 플란츠가 돌연 표정을 싹 굳히며 씹어뱉듯 말했다. “내 아우님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겠군.” 그리고는 굳이 옆으로 치워 준 홍차를 도로 가져와 주저없이 마셨다. 자고로 미친놈을 정신차리게 하려면 그 미친놈보다 조금 더 미치면 된다. 나이프 잡아챈 날의 칼리안이 알려주지 않았던가. 그래서 플란츠는 스스로에게 독이 될 것이 분명한 그 향긋한 차를 남김없이 마셔버렸다. 짙고 짙은 향기에 진저리가 쳐졌지만 생각만큼 지독하지 않아서 스스로도 잠시 놀랐다. “뭐 하시는 겁니까.” 갑작스럽게 변한 플란츠의 태도에, 칼리안이 이렇게 물어왔다. 그런 칼리안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속 썩이는 형님 노릇.” 칼리안에게 배운 것을 잘 활용해 보여준 플란츠가 찻잔을 세게 내려놨다. 그리고는 칼리안이 건네 준 팔찌를 집어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 쾅! 그래서 칼리안은 당황했다. 플란츠가 뭘 알았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서. 대놓고 동생 속을 썩이겠다고 선언하는 사춘기 형님은 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것도 모르겠어서. * * * 그리고 앨런도 당황했다. 난데 없이 찾아온 푸성귀 같은 2왕자가 듣도보도 못한 요구를 해 온 탓이다. “창문 열어봤고. 보온 마법 걸어봤고. 그러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법사.” 칼리안이 가져간 팔찌를 플란츠가 가져왔다. 그리고는 생떼 같은 요구를 부탁처럼 했다. 아니, 요구같은 부탁을 들어달라며 생떼를 부렸다. 난생 처음 보는 플란츠의 모습에 앨런이 살짝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플란츠의 말마따나, 앨런은 시스파니안의 보안 마법을 풀어서 플란츠의 방 창문을 열어 준 적이 있었다. 히나의 로브에 각종 마법도 걸어준 적 있었다. 하지만 지금 플란츠가 하는 말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시스파니안님의 힘이 닿는 곳에서 개인을 위한 통신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풀어달라 하시면······.” “내가.” 앨런의 말을 끊은 플란츠가 비딱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뭘 하든 놈 앞길을 막게 되는 게 짜증나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까 했는데.”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앨런의 집무실 창 밖으로 보이는 헤이시아 궁의 터를 가리켜보이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놈이 저딴 짓만 안 했어도 죽은듯이 살았을텐데. 사람을 살려놨으면 살게 해야지. 살려놓고 숨막혀 죽게 만드는건 또 뭔데.” 여기까지 말을 들은 앨런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똑똑하고 예민하고 입맛 까다롭고 성격 사납지만 칼리안 말은 잘 듣는. 그래, 꼭 레이븐 같은 2왕자의 앞 뒤 없는 얘기를 아주 잘 알아들은 까닭이다. “칼리안 왕자님이 또 고약한 일을 저질렀나 봅니다.” 플란츠는 대답 없이 눈꼬리만 찌푸렸다. 그것을 보며 설핏 웃은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제가 가진 것이 커피와 민트밖에 없으니 다른 차를 준비해달라 하겠습니다.” 찾아오자마자 어울리지도 않게 말을 쏟아낸 플란츠 덕분에 아직 차도 내오지 못해서 하는 말이었다. “······ 민트.” 사실은 커피 쪽이 나았지만 짙고 짙은 사과 단 내가 아직도 입 속을 맴돌았던 탓에, 플란츠가 이렇게 대꾸했다. 그리고는 문제 많은 내새끼랑 놀아주는 유일한 친구를 대하는 표정을 또 지어보이는 앨런을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플란츠를 향해 웃어보인 앨런이 집무실 한 쪽에서 차를 준비했다. 햇살 가득한 창가에서 비춰오는 맑은 햇빛이 소파까지 들어와 플란츠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데블란은 뱀 같은 자입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 때, 고요함을 깨고 이런 이야기가 들려왔다. 데블란, 플란츠도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냉철하고, 가차없고, 도전적인, 결코 실수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라는 평가가 늘 함께 붙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왕세자위에 등극하자마자 제 손으로 형과 누이들의 목을 쳤던 사람입니다.” 달칵, 하고 플란츠의 앞에 따뜻한 차 한 잔이 놓였다. 아주 연하게 풍겨오는 민트 향이 스치듯 지나갔다. “세상에는 여러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보라색 꽃이 무엇을 보여주는지조차 모르는 이도 있지만, 불신의 근원을 뽑아버려야 마음을 놓는 이도 있으니.” 다른 나라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새들. 끝없는 의심. “누군가를 상처입혀 자신을 지키는 아비로부터 제 형제를 보호하는 것밖에 하지 않아서, 자신을 상처입혀 누군가를 지키는 법만 압니다. 그러니 그것이 너무 야박하다 여기지는 마시지요.” 그렇게 이야기를 건네는 앨런을 보던 플란츠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안 그래. 알아, 나도.” 놈이 뭘 보고 자랐는지, 뭘 하고 살았는지는 몰라도 왜 그러는지는 알았다. 그러니 그것을 두고 어떻게 야박하다 생각하겠나. 답답하고 짜증이 나는거지. “팔찌. 세크리티아의 왕세자한테 보내려는데.” 그 말에, 앨런이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그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하는 생각을 삼키는 것이 보여서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양이 대신.” 고양이 대신 팔찌를 체이스에게 보내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으면 칼리안이다. 적어도 앨런은 정상적인 소통이 가능한 정도의 어휘능력을 가졌으니까.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안 플란츠가 설명을 덧붙였다. “마법사. 당신 아들 당신이 살리라고. 능력 있잖아, 당신은.” 아들이라는 말을 이 곳에서 이렇게, 그것도 플란츠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은 몰랐던 앨런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곧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하지요.” 연한 빛을 내는 민트차를 보니 어떤 놈이 생각난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또 놈의 앞길을 막든 말든 내 할 일 내가 알아서 계속 할 거니까 아우님은 골치가 아프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가만히 주는 것만 받으면서 살지는 않을 거니까. 체이스와는 다르니까. * * * 그 후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간이 흘렀다. 칼리안과 플란츠는 여전히 가끔 함께 밥을 먹고, 거의 매일 마주보고 앉은 채로 종이뭉치를 들여다보며 골머리를 썩였다. 헤이시아 궁의 지하에서 벽의 조형을 샅샅이 뒤졌다. 한 발을 담그게 된 할 일 많은 마법사 아르센도 한 두 번 와서 밤을 샜다. 체이스로부터의 서신은 없었다. 플란츠는 분명히 세작을 통해 편지를 보냈다 했으니 하늘을 날아가는 매를 누군가 붙들었거나 체이스가 시간의 축을 떠올리는 것에 시간이 걸리는 것이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쯤. 칼리안의 검지에 끼워진 반지가 빛을 냈다. 체르밀 궁의 3층에서, 종이에 적힌 문자의 기원보다 루시가 왜 자꾸 허벅지를 꾹꾹 눌러대는지를 더 궁금해하던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리고 루시를 안은 채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칼리안 왕자. 하늘에 떠 있는 푸른 별과 은빛 달이 꿈결같이 빛나던 시간. 이런 곳에서 이렇게나 빠르게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꿈결같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칼리안이 조용히 일어나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이 사태가 누구 때문에 벌어졌는지 이해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놈이 무엇을 위해 이런 짓을 벌였는지 이해하기까지는 조금 오랜 시간이 걸렸다. - 플란츠 왕자로부터, 칼리안 왕자가 나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 하니 직접 말을 걸어보라는 내용으로 전서응이 왔는데. 내가 마력을 다룰 줄을 몰라서, 카스트린 경의 도움을 받느라 늦었습니다. ······ 망할 놈. 시간의 축에 대한 기억이 필요하다는 말을 안 전했다. 필요하면 직접 하라는 소리다. 나는 안 할 거니까 네가 알아서 하라는 소리다. 저 목소리를 듣고서도 할 수 있겠으면 어디 한 번 해보라는 소리다. - 아······. 칼리안이 양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잠깐, 꿈을 꾸는 것 같아서. - 칼리안 왕자? 마음의 준비도 없이 언젠가의 꿈 속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가 똑같이 들려온 바람에, 꼭 꿈을 꾸는 것 같아서. 해야 할 말을 잊어버리고 할 수 있을 말도 잊어버리고 그렇게 얼굴을 덮었다. 검은 하늘 아래 은색의 달이 비추면 그것이 꼭 별빛처럼 아른거리던 베른의 긴 머리카락이 자꾸 떠올라서 얼굴을 덮었다. 그 기억을 닫아 둔다고 해서 닫아질 줄 아느냐고. 미친놈이 그렇게 묻는 소리가 함께 들리는 것 같아서 할 말을 다 잊어버렸다. - 제가. - 얘기해요. 뭐든. 괜찮으니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도 모르면서 선뜻 대답을 해오는 바람에, 칼리안의 어깨가 아주 잠시 흔들렸다. - 아직은 아니지만. 날개 접은 새들이 고이 울던 그 새벽처럼, 칼리안이 한번 더 숨을 참았다. - 나중에······.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지면. 정말로 괜찮아지면 그때. - 체이스 왕세자님과 저와, 그리고 키리에까지, 다 같이. 왕궁 첨탑에서. 술이라도 같이 마셨으면 해서. 그래도 괜찮은지. 그것을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나중에. 나중에. - 더 자라면 오세요. 얼마든지. 흔쾌한 대답이 흘러내리듯 내려앉았다. < [외전] 순백의 맹금 > 새까만 밤. 푸른 빛무리가 하늘을 밝힌다. 어둠에게 종말을 고하는 태양은 틀림없이 붉었다. 그런 붉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푸름으로도 밤을 내몰 수 있음을 알려주려는 듯, 한밤에 모인 파란 빛무리가 검은 밤을 밝히다 눈처럼 내렸다. 밤을 물리치는 것은 똑같을진대, 그 붉고 푸름의 차이는 또 어찌나 확연하던지. 거리를 오고가는 사람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은 눈, 녹빛 눈, 갈색 눈. 그 다양한 색의 눈들에 새파랗게 반짝이는 밤 하늘이 담겼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별빛 가루가 그들의 머리와 이마와 손에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 세렌티의 시간. 2월의 마지막과 3월의 처음 사이. 어느 해에는 찾아오고 또 어느 해에는 찾아오지 않는 그 황홀한 날이 왔음에, 누군가에게 하는 말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잊고 있었는데.” 하늘에 모여든 빛이 눈처럼 흩뿌려지다, 어느 순간 다시 하늘로 떠올라 저물면 그제야 다시 밤이 되었다. 한 밤을 대낮처럼 밝히다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이 마치 빠르게 지나가버린 날처럼 느껴진다 하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 신비로운 시간에 ‘하루’를 담자 했다. 다만 그 시간은 결코 매년 찾아오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달력에 없는 날을 만들어 그 시간을 기념하였다. 그렇게 찾아온 짧은 하루. 2월 30일. 베른은,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은 사내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내 생일이었구나.” 달력에는 없는 아름다운 하루.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세렌티의 축복과 같은 시간. “아버지는 알았을텐데. 하필 이런 날에 나를 보냈네.” 이런 소년의 말에 두려움 가득한 얼굴의 사내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툭, 하고. 소년이 사내의 숨을 앗아간 탓이다. 붉은 피가 방울방울 맺힌 검에 파란 별이 비쳤다. 겨울의 끝을 담은 듯한 연보라색 눈이 한 번 더 빛을 잃는다. 쏟아지듯 내려오는 푸른 반짝이의 한 가운데, 소년은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날. 오로지 소년 홀로 땅을 보았다. 깊이 눌러 쓴 검은 후드에 배인 피 냄새가 지워지지 않아서. 제 손으로 막을 내린 그 많은 생명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아서. 소년은 고개 숙여 걷기만 했다. 세크리티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며 가장 빛나는 곳의 그림자 속으로, 비척비척. 그 날이 생일임을 이제는 알았음에도. * * * 2월 30일. 기억되기 힘든 짧은 하루. 그런 날에 태어났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영원히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의 어머니가 지어주었던 이름. 베른. 그것은 소년이 받았던 첫 생일 선물이었다. * * * 세크리티아 왕궁. 그 한 구석의 넓은 방으로 돌아간 베른은 버릇같은 말을 꺼냈다. “혼자 있을 거야.” 한밤. 검은 로브와 검을 들고 밖으로 나선 베른이 무엇을 하는지 아는 것은 데블란, 테일란이 아닌 데블란의 다른 호위 기사, 그리고 데블란의 서신을 전달해주는 베른의 상급 시종 뿐이었다. 살아있는 이들 중에는 그 셋이 전부였다. 기사들이나 테일란은 의심을 했다. 시도때도 없이 묻어있는 지독한 피 냄새를 모를 리 없으니까. 하지만 베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들은 왕자나 왕자의 상급 시종을 추궁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못했다. “네, 왕자님.” 검은 로브를 걸친 베른이 돌아올 즈음이면 베른의 시종은 분주히 움직였다. 그 날이 겨울이든 여름이든, 벽난로에 장작을 넣어 불을 활활 피워 두고 커다란 욕조에는 차가운 물을 받아 두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는 깨끗한 붕대와 약을 올려두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베른을 위한 최선임을 알고 있어서였다. - 탁! 문을 닫고 굳게 잠근 베른이 벽난로 앞으로 가 섰다. 검은 옷과 로브에서 피 비린내가 뚝뚝 떨어지는 기분이라, 베른은 타오르는 불길 속에 그것을 전부 던져 넣었다. 그럼에도 지워지지 않는 누군가의 크고 작은 목숨들을 차가운 물로 씻어내렸다. 그렇게 물이 닿은 팔뚝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팔뚝에 난 얕은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서늘한 눈을 한 베른이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아프다.” 오늘, 죽은, 그들은, 더, 많이, 아팠을텐데. 베른의 검이 아무리 빨라져도, 다른 곳을 손대지 않고 오로지 목만 베어도, 그래도 많이 아팠으리라고. 끊임없이 떠오르는 죄책감을 떨치지 못한 채 차디찬 물 속에 몸을 담근다. - 똑똑 찬 기운이 가득한 침묵을 깨고 작은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욕실 밖 방문 건너 먼 곳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자님.” 분명 혼자 있겠다 하였는데.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던 베른이 퍼뜩 놀란 얼굴을 했다. 시종이 굳이 베른을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체이스 왕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베른이 떠올린 이유가 맞았음을 알려주듯 시종이 이렇게 말을 해왔다. 반가움, 기쁨, 난처함, 당황, 등. 베른의 얼굴에 처음으로 제 나이 다운 표정이 스쳤다. “아······.” 서둘러 가운을 입고 욕실 밖으로 나온 베른의 눈이 벽난로를 향했다. 이미 전부 타 버려 까만 재가 된 옷가지가 보였으나 베른은 그조차도 체이스의 앞에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제가 나갈게요, 형님.” 때문에 이렇게 말하며 팔의 상처를 붕대로 꾹꾹 감싸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 * * 세크리티아 왕궁의 첨탑 꼭대기에 서면, 온 세크레타가 발 아래 펼쳐졌다. 베른은 먼 곳이 보이는 그 첨탑 위를 가장 좋아했다. 그런 베른과 나란히 선 채로 베른의 시선 끝에 이어진 긴 성벽을 함께 보던 체이스가 말했다. 바다를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지금이요?” 그 말을 들은 베른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가보겠느냐?” “지금이 아닌 언제든지요.” 체이스는 생각이 깊었고, 언제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고, 항상 부드럽게 웃었다. 대신 조금 뜬금없었다. 조금 많이 뜬금없었다. “나는 지금 가고 싶은데. 내 동생이랑.”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싱긋 웃었다. 바로 조금 전 베른이 무엇을 하고 왔는지 모르는 채로. 데블란의 사촌 동생과 가까이 지내오던 한 백작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안 돼요.” 죽을 때까지 체이스에게 알리지 않을 비밀 하나를 늘린 베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 새벽에 일국의 왕자 둘이 수도를 떠나 바다를 가자고 한다. 아무리 바다가 가깝다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모르지도 않으면서 가자고 했다. 물론 베른이 가장 먼저 걱정한 것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습격이 아니었다. 그 부분도 우려되는 것들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문제가 더 컸다. “형님 감기 걸려요.” 감기, 걸릴까봐서. 베른이 열 살이 되던 그 날 밤에도 세렌티의 시간이 왔었다. 그 밤이 지난 아침, 데블란은 두 형제를 데리고 바다에 나갔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방법으로 체이스를 시험했다. 베른을 물에 빠뜨렸고 체이스가 뛰어들었다. 세크리티아의 겨울이 아무리 짧다지만 어린 아이가 물에 들어가도 될 만큼은 아니었다. 결국 체이스는 감기에 걸렸다. 심한 감기는 심한 폐렴이 됐고,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 때문에 베른에게 있어 감기란 세상에서 가장 크고 무서운 병이 되었다. 그리고 데블란은 더 이상 베른의 혈육이 아니게 되었다. “감기 정도야. 나으면 되지.” 하지만 정작 그 일을 겪은 당사자에게는 아니었던지, 체이스는 이렇게 대꾸했다. “스승님과 함께 가실 생각 아니잖아요. 누가 따라오기라도 하면 어찌하시려고요.” “네가 있는데 무엇을 걱정할까.” “형님 목숨이요.” 그 말을 들은 체이스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다만 그것이 결코 생각을 접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체이스의 고집은 그의 어머니인 후궁 루이즈도 꺾지 못했으니, 베른이 그 고집을 이기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결국 베른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사들은 알아서 물려주세요. 아버지에게도 직접 얘기하세요. 저는 모릅니다.” 데블란이 체이스에게는 큰 소리를 내지 않았으니 하는 말이었다. 데블란은 체이스가 무엇을 하든 그냥 두었다. 그 어떤 간섭도 하지 않았고, 체이스에게 세자위를 주겠다고도 약속했다. 베른이 데블란을 위해 ‘가지치기’를 하는 대신이었다. 체이스를 살리는 것이니, 그 정도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그 정도 쯤이야. 얼마든지.”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 같은 체이스의 대답에, 베른이 피식 웃었다. 세렌티의 시간도 다 지나버린 어두운 새벽. 두 왕자의 말이 결국 바다를 향해 달렸다. * * * 바다를 가자 하기에, 당연히 왕실 바다를 이야기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체이스는 그보다 아주 조금 더 먼 곳으로 왔다. 은빛 달이 물 위에 떠올랐다 이지러지길 반복하는, 달에 비친 윤슬이 고요하게 반짝이는 그 바다를 말없이 지켜보던 베른이 입을 열었다. “선물이라기엔 너무 큰데요.” “생각을 하다보니 점점 그리 되더구나.” 작은 바위가 하나 있고, 작은 나무집이 하나 있었다. 파도 소리가 좋은 좁은 백사장이 있는 아주 작은 바닷가였다. “아리안느는 검이 좋겠다 하였는데, 그것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멀리 달릴 수 있을 말을 사줄까 했는데 말은 이미 세 마리나 있고. 그래서 별장을 사줄까 하였는데 그것도 어머님께 물려받았으니. 네게 없을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하다가 바다를 샀지.” 작은 바닷가를 동생에게 선물한 체이스가 칭찬이라도 바라는 얼굴이 되어서는 이렇게 설명을 했다. “마침 어머님께서도 근처에 계시니, 더 좋지 않겠느냐.” 한 달 전 사망한 세크리티아의 왕비. 바다는, 베른의 어머니인 디에나 왕비의 묘지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귀족들 말이 많을 텐데요.” 귀족들은 안그래도 말이 많다. 동생의 생일 선물로 바다를 선물하는 형이라니. 분명히 또 여러 말이 나올 터였다. 체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리안느의 소유였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눈에 안 띄도록 이렇게 몰래 와서 주기도 했고.” 두 형제의 오랜 친구이자 체이스의 정혼자인 아리안느. 그녀라면 자신의 이 작은 바닷가를 1왕자에게 팔아 치웠다는 비밀을 잘 지켜주리라는 말. 그리고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이 새벽에 베른을 데려왔으니, 그것도 문제가 없으리라는 말이었다. 결국 베른은 더 거절하지 못하고 이 대단한 선물을 받기로 했다. 어머니를 잃은 지 오래 되지 않았음에도 별다른 티를 내지 않는 베른을 걱정하여 챙겨주는 것임을 모르지 않아서였다. 어머니와 가까운, 게다가 잔잔한 파도소리와 좋은 냄새가 나는 이 선물이 아주 마음에 들기도 했고. “언제 찾아오든 아무도 없을테니 아무때나 오려무나. 아무때나 와서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그리하거라.” 모래사장은 맨 땅보다 달리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종종 이 곳에 와서 달리기나 연습하면 되겠다 따위의 생각을 하는 베른을 보며, 체이스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곳이니. 가끔은, 아니. 자주여도 좋으니 언제든 와서 편안히 지내거라. 그리했으면 좋겠구나, 나는.” 이제 고작 열 네 살.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하나 뿐인 동생. 그런 동생을 향한 안쓰러운 마음이 마디마디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베른은 하루의 대부분을 기사 테일란과 함께 보냈다. 매일같이 물집이 터지고 피고름이 새도록 검을 잡았다. 어머니를 잃었던 그 며칠을 빼고는 언제나 검을 잡았다. 누구를 위해 그리 하는지, 체이스는 알았다. 그 손에 이미 얼만큼의 피가 묻었는지는 몰랐으나 그 정도는 알았다. 그런 동생에게 바다를 선물했다. 숨을 좀 돌리고 쉬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베른은 그냥 웃기만 했다. 밀려왔다 나가는 파도소리가 듣기에 좋아서. 피 비린내 말고, 소금기 가득한 바다 비린내가 마음에 들어서. “베른.” 그런 베른을 보던 체이스가 가만히 베른을 불렀다. 체이스와 꼭 닮은, 단지 체이스보다 머리가 길고 눈 색이 더 옅을 뿐인 베른이 체이스를 쳐다봤다. “······ 아무래도 나는 네가 기사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려운 일일까?” “언제는 듬직하니 좋다고 하셨으면서.” “그것이 진담인 줄은 몰랐지.” 베른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거짓말 못하는 것 아시잖아요.” “그때는 그것도 미처 몰랐으니. 정말 하겠다 할 줄 내가 알았겠느냐.” “이미 다 늦었어요. 검이 좋은 것을 어찌합니까.” 고집 세기로는 체이스나 베른이나 똑같았다. 비단 얼굴만 닮은 것이 아니었으니 다를 것이 없었다. 때문에 이번에는 체이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둠 짙은 바다. 푸른 빛이 모두 사그라들어 이제는 달빛과 별빛만 아득한 그 암흑 속에서도 동생의 손이 너무 잘 보였다. 상처 가득한 것이 어디 손 뿐이겠냐만은, 그 손이 유난히도 속상하여 더 말을 못했다. 체이스의 목소리만큼 가만가만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삼켜진 말을 대신했다. “자주 오겠습니다. 선물 잘 받을게요, 형님.” 영특한 베른, 생각이 깊은 아이. 언제나 안타까운 소중한 동생.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바람이 부는 숲 같은 목소리가 파도 위에 흩어졌다. 체이스의 짧은 청은발이 바람을 따라 흔들리다 제자리를 찾았다. 그 뒤를 따라 베른의 긴 청은발도 함께 흔들렸다. “그 자리는 너의 것인데.” 베른의 나이가 열 넷이 된 그 날. 날이 밝으면, 데블란은 세자위를 체이스에게 주겠노라 했다. 그것이 또 마음이 쓰였나보다. “제 자리 아닙니다.” 이 땅의 주인이 앉을 자리. 신성한 이의 핏줄이 앉아 신성한 대지를 지켜야 할 자리. 누군가는 그 자리를 가지기 위해 피를 묻히고, 또 누군가는 그 자리를 가지지 않기 위해 피를 묻히는 끔찍한 모순의 대상. “누구의 것이든 상관 없잖아요.” 누구의 것이든, 정말로 아무 상관 없는 자리. 하지만 둘 모두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체이스의 것이어야 하는 자리. 그러니 베른에게 있어서는 조금도 탐나지 않는 그런 자리. “저는 안 가질래요.” 이렇게 말한 베른이 큰 숨을 들이켰다. 바다 비린내, 조금이라도 더 담아가려고. * * * 중앙 귀족이 모두 모인 곳에서 데블란은 단 한 마디만 했다. 체이스를 세자위에 올리겠다고. 그 이상의 다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후궁의 소생이 아닙니까.” 귀족들은 반발했다. 데블란의 권력이 있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발했다. 데블란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입으로는 체이스를 언급하면서도, 그 시선은 베른에게 닿아있음을 모두가 알았기 때문에. “아무리 1왕자님이라 하지만, 왕비님의 아드님 되시는 2왕자님을 두고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반발은 거세기만 했다. 다른 이성적인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데블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베른을 내려다보았다. ‘어디. 이것도 한번 이겨보거라.’ 베른의 눈이 차게 식었다. 베른의 이런 살기등등함을 꺼려하여 절대로 베른과 독대하지 않던 데블란이 제 아들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베른이 세자가 되면 체이스는 죽는다. 귀족들은, 지금껏 보여온 체이스의 거대한 날개를 완전히 꺾어버리려 들 것이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깟 왕관 하나 때문에, 그깟 왕좌 하나 때문에. 체이스를 잃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이다. 톡톡톡, 하고. 베른의 손 끝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몇 번이고 이어진 그 소리에 귀족들의 시선이 베른에게로 모였다. 데블란 역시 베른을 쳐다봤다. 베른도 데블란을 쳐다봤다. 베른의 손 끝이 둥글게 움직였다. 그 끝을 따라, 베른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보시죠.’ 아버지. - 드르륵 묵직한 의자가 뒤로 밀렸다. 귀족들의 시선이 따라왔다. 데블란의 눈에 날이 섰다. - 저벅 한 걸음. 높이 묶은 긴 머리가 그 걸음을 따라 흔들렸으나, 그 뿐. 그것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도 흔들리지 않았다. “베른. 멈추거라.” 데블란의 목소리를 흘려들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데블란의 말을 어긴다. - 저벅 다시 한 걸음. 멈추지 않고 올곧게. 오로지 체이스만을 향해. 걸었다. 그의 동생이 무엇을 할지 이미 깨달은 체이스는 미소를 지었다. 왜 그리해야 하는지 모르지 않아서, 왜 거절할 수 없는지 너무 잘 알아서. 죽어도 잊지 못할 만큼 아픈 미소를 지었다. “······ 일어나시어.” 나지막한 목소리. “서약의 언을 들어주십시오.” 베른의, 나지막한 목소리. 그것은 태풍이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체이스의 보랏빛 눈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인 동생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나 베른 세크리티아가 세렌티의 이름을 빌어, 나의 유일한 주인이 되실 체이스 세크리티아 왕자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기사의 맹세는 세렌티의 가호를 받기에, 그것이 시작되면 그 어느 누구도 막아설 수 없었다. “나의 검은 주군을 위해 쓰일 것이고, 나의 방패는 주군의 앞을 막을 것이며, 나의 죽음은 주군보다 앞설 것이니.”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베른의 말을 막지 못했다. “기사의 명예를 지니고, 주군을 위해 싸우다 죽기를 허락해 주십시오.” 핏줄의 힘을 가진 왕자가, 고작 그것 하나가 부족했던 형을 살리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체이스는 그런 베른을 이기지 못했다. 그 고집을, 절대로 이기지 못했다. 검은 바다의 파도 소리가 체이스의 귓가를 스쳤다. “허락······.” 소금기 가득한 바다 비린내가 베른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것을 잊지 않는 한, 피 비린내 따위는 얼마든지 몇 번이고 견뎌낼 수 있었다. “허락하겠다.” 그리하여 베른은 기사가 되었다. 왕좌를 위한 길을 내려놓고 체이스의 기사가 되었다. 왕의 동생으로, 왕의 신하로, 왕의 기사로. 그 모든 모습으로 오로지 체이스 하나를 지키고자 하여서. 그렇게 살다 죽기를 진심을 다해 바랐으므로. * * * 순백의 맹금, 체이스. 그 이름의 뜻과 같이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제왕이 되어, 이 땅의 오롯한 빛으로 남으시기를. 다른 모든 어둠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몫으로 기꺼이 받들 터이니. < 제32장. 나의 검(1) > 세크리티아는 겨울이 짧았다. 그리고 카이리스는 여름이 짧았다. 그런 세크리티아의 가을, 어쩌면 카이리스의 겨울. 그 즈음의 어느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높은 곳에 올라 있던 체이스가 뛰어내리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을 한 것이. 과한 것은 아니었으나 버릇처럼 즐겨하던 와인도 오늘은 입에 대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도무지 말을 하지 않으니 알 수 없었으나, 테일란의 눈에 간신히 보일 만큼 아주 미약한 빛을 내는 저 통신용 팔찌가 어찌나 감사하던지. 때문에 테일란은 카이리시스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집어넣었다. 지금 머무는 곳에 옥상이 없는 것이 아쉽다 하던 체이스는, 틈만 나면 마셔대던 민트 차 한 잔을 가지고 테일란과 함께 테라스로 나갔다. 서린 달빛 아래 한참을 서성이다 깊은 숨을 들이킨 체이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 칼리안 왕자.” 사용하는 법을 몰라서 이렇게, 처음에는 입을 열어 말했다. 테일란이 얼른 옆으로 다가가 다시 한 번 설명을 해주었다. “소리를 내어서는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아. 그랬었지, 참.”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곁에 선 테일란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고마워. 카스트린 경.” 이렇게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된 것은 전부 다 테일란의 덕이었다. 플란츠는 말도 짧았지만 글도 짧았다. 그 커다란 매에게 팔찌 하나를 쥐여 보내주면서 ‘3왕자가 물어볼 것이 있다던데.’ 라고만 적어 보냈다. 그래서 그 팔찌가 무엇인지, 어떻게 쓰는지, 왜 그것을 써야 하는지. 아무것도, 정말로 아무것도 적어주지 않았다. 그것을 개조하기 위해 앨런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물론, 행여 데블란의 앞에서 팔찌가 보여 난처해질까 우려한 앨런이 발현되는 빛을 줄여놓은 것도 당연히 말하지 않은 채였다. 다만 그 편지에 적힌 것이 ‘내 아우님’이 아닌 ‘3왕자’였던 것에, 플란츠 나름의 배려를 느낀 체이스가 잠시 웃었다. “다시 해 볼게.” 곧 이렇게 이야기 한 체이스가 다시 집중을 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제대로 이야기를 시작한 듯 보였다. 몇 번을 웃다가, 고개를 숙였다. 또 몇 번을 웃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테일란은 조용히 테라스를 닫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체이스로부터 어느정도 떨어진 곳까지 걸어오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잃어버린 동생을 찾으신 것 같다 하셨던가······.” 언젠가의 체이스가 분명 그런 말을 했다. 그런데 체이스는 조금 전, 칼리안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몇 번을 마주쳤을 때 늘 느꼈던 묘한 기분이 무엇인지 이제야 대충 알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참 많은 것이 체이스와 닮아있었지 않나. 말투며 행동이며, 심지어 둘의 걸음걸이까지도 꽤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던 것 같았다. “신기한 일이군.” 어찌됐건 체이스의 얼굴에서 큰 그늘 하나가 사라진 듯 보였으니, 카이리스 아니라 텐실의 왕자라 하더라도 환영할 일이다. 테일란은 단비만큼이나 반가운 낮은 웃음 소리가 새어 들어오는 방에서 나와 문을 꼭 닫았다. 항상 해가 뜰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잠에 들던 체이스가 실로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 * * - 바다도 좋지 않겠습니까. 카이리스에는 바다가 없으니. 이렇게 물어오는 말에 칼리안이 작은 웃음소리를 보냈다. 가는 모래 가득한 모래사장 말고, 동글동글한 검은 돌이 가득한 그런 바닷가에 파도가 밀려올 때 들려올 것 같은 그런 소리였다. - 네. 좋아합니다, 바다. 세크리티아 왕궁의 첨탑은 좋은 곳이기도, 혹은 그렇지 않은 곳이기도 하여서. 언제나 홀린 듯이 찾아가 언젠가의 기억들을 되새기던 곳이었으나 또 그만큼 아려오는 곳이기도 하여서. 그러니 첨탑도 좋지만 바다는 어떻겠느냐고. 체이스가 그렇게 물었다. 그것이 누구의 기억을 열어 대답하는 것인지 둘 모두 신경쓰지 않은 채로. 첨탑이 좋을지 혹은 바다가 좋을지. 와인이 좋을지 다른 술이 좋을지. 그런데 지금 술을 마실 줄은 알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물어보고, 대답하고. 그리 하였다. - 얼마 전에 작은 바닷가를 선물받았습니다. 사실은 제 값을 주고 사겠다 하였는데, 이번에도 똑같이 동전 하나에 셈을 치렀습니다. 집은 조금 더 커졌지만 작은 바위가 있고 작은 섬이 있고. 달이 뜨고 별이 빛나고. 평화롭고 고요한 그런 곳입니다. 칼리안 왕자도 좋아할만한 그런 곳이 있어요. 칼리안은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멀리 언덕 위에 가는 비가 내리는 것 같은 그런 소리로. - 어떻게 되어 있을지 궁금하네요. 많이 가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어서. 그곳이 어디에 있는 바다인지 둘 모두 말하지 않았지만 같은 곳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 때의 칼리안이 여전히 같은 곳에 서 있을지, 말을 하고 웃을 수 있을지, 그 때에도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을지, 이번에는 잊히지 않을 수 있을지. 그 날의 세크리티아가 여전히 평화롭고, 소소하고, 아름다울지. 그 모든 것들을 다 접어 둔 채로. 처음으로, 아무것도 불안해하지 않는 목소리로 꿈을 꾸었다. - 그래서. 그 꿈이 끝나갈 즈음이 되어 체이스가 이렇게 말을 해왔다. - 내가 무엇을 알려주면 되겠습니까, 칼리안 왕자. 현명한. 여전히 현명한 체이스. 그곳까지 매를 보내고 매의 발목에 팔찌 하나를 보내고. 그렇게 건넨 이야기가 어쩌면 모닥불 끝의 불티 같을지 모를, 빨갛고 작은 불꽃이 눈에 보여 손으로 잡고 나니 어느새 식어 까만 재만 남겨져 있을지도 모를 그런 꿈 이야기만은 아니리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꿈 이야기 말고 정말로 무엇을 알려주어야 할지, 이제는 그것을 말해달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 다음 번에, 그 때에도 여전히 부족하다면 그 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플란츠의 생각대로. 저 목소리를 듣고 나니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생각보다 체이스가 더 많은 것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서. 칼리안은 이런 말로 질문을 미뤘다. - ······ 시간의 축. 그리고 체이스가 이런 말을 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잠시 숨을 들이켰다. - 나의 새들이 그 날 동굴에서 무언가를 보았는데 알 수 없는 문자였다 하더군요. 그것 말고는 지금 칼리안 왕자가 나를 통해 알아보려 할 만한 정보가 없을 것 같은데. 혹시 그 문자와 시간의 축에 새겨져 있던 것을 비교해 볼 생각인지. 이야기를 해줘도 괜찮겠습니까. 체이스는 헤이시아의 지하에 그것이 다시 나타났음을 알지 못했다. 다만 지금 상황에 칼리안이 무언가를 궁금해한다면, 그것에 대해 체이스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려 한다면, 시간의 축 외의 다른 것은 아니리라는 생각까지는 하고 있었다. 칼리안으로부터의 대답이 없자 또 멋대로 결정을 내린 체이스의 말이 다시 들렸다. - 사실 그것을 그리 떠올려보지 않아서 나 역시 자세히 알지 못할 수 있겠지만. 한번 돌이켜 보겠습니다. 생각이 나는대로 보낼게요. 그것이면 되겠습니까. 칼리안은 또 한 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하는지, 설명하고 변명하고 사과하지 못했다. - 그리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칼리안 왕자. 왜 체이스에게 썩은 밧줄을 건넸는지 그것 역시 이야기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말 역시 할 수 없었다. - ······ 감사합니다. - 혼자 있을 때. 아니면 답답한 일이 있을 때도 좋겠고. 그도 아니라면 혹여. 다만 체이스는 마력에 담겨 전해진 말과 전하지 못한 말을 모두 알아 들었다. 알아듣고, 이해했다. - 혹여 아무 이유 없을 그런 때. 다시 연락을 하겠습니다. 당장 예전의 이름을 불러주고, 혹은 함께 앉아 민트 차를 마셔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연락은 하겠다는 그런 말. - 얼마든지, 언제든지. 좋습니다. 칼리안이 대답했다. 가느다란 풀잎 끝을 스치는 바람같은 웃음 소리가 이어졌다. * * * 다시 며칠이 지났다. 일상인듯 일상이 아닌 듯, 기묘하게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얼마쯤 흘러갔다. 그리고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아침. “그러니까 저게······.” 앨런의 집무실을 찾은 칼리안이 아르센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한 칼리안이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종종 그래왔던 것처럼 웃음을 참는 것이다. “대체 저게······.” 칼리안은 지금 말을 두 번이나 잇지 못할 만큼 힘들게 웃음을 참는 중이었다. 지금 절대로 웃으면 안되는 상황임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그 후 칼리안은 자신에게 인사하기 위해 일어나 있는 파란 머리의 얼음 마법사를 최대한 노려봤다. 분명 칼리안은 하고자 하는 일이 있어 키리에와 함께 빌헬름 관을 찾아왔다. 앨런을 보기 위해서였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않습니까.” 칼리안은, 앨런의 널찍한 집무실의 테이블 옆에 기대어 세워져 있는 고급스러운 액자를 쳐다봤다. 하얀 배경의 액자에 검고 긴 천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검은 로브 자락이었음을 칼리안이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태우라고 했는데. 헤르츠 경.” “마나실 군단장님께 보존 마법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제가 꼭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줄 겁니다, 왕자님.” “피 냄새 심해요.” 아르센이 웃었다. 칼리안이 매준 저 로브자락을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득 담아낸 웃음이었다. “제 피라서 괜찮습니다.” “나. 내가 안괜찮은데.” 이런 식의 소득 없는 대화 끝에, 고집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칼리안이 한 발을 물렸다. 다른 것이 또 있던 탓이다. 엉뚱하다 못해 기괴하기 짝이 없는 그 액자에서 간신히 시선을 뗀 칼리안의 눈이 이번에는 앨런의 테이블 위에 가 닿았다. 손바닥 만한 크기의 사람 형상이 그 위에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이리 줘요. 녹여버리게.” 칼리안이 아르센의 앞을 막아섰던 바로 그 날의 모습이 고스란히 새겨진 얼음 조각이었다. 저 미친 따까리가 진짜로 만든 것이다. 칼리안의 조각상을! 칼리안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키리에가 숨을 참는 것이 느껴졌다. 그 키리에조차 웃음을 참고 있었다. “하.” 아직 세자위에 오르지도 않은 왕자의 동상을 세우는 것이 칼리안에게 그리 좋은 영향을 주지 않으리라는 이유 때문에, 실제 칼리안의 키 만한 크기로는 만들지 못했단다. 나중에 카밀론에 가서 개 키우실 때가 되면 그 때는 제대로 된 크기로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열의까지도 보이고 있었다. “드리는 것은 상관 없습니다만, 왕자님. 제 생각에 이것을 드리면 저는 어차피 또 만들 것 같습니다.”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칼리안에게는 거짓말하지 않는 아르센이 아니던가. 그러니 정말로 진심에서 하는 말이었다. 다만, 앨런의 집에 놓인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석상처럼 그날 칼리안이 내뱉은 멋진 말을 하는 기능을 조각상에 넣을 수 있을지, 앨런에게 그것을 묻기 위해 와 있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을 말하면, 정말로 눈 깜빡 할 새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경을 괜히 구해왔지, 내가.” 거짓말 못하는 칼리안 역시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런 말을 했다. 그리고는, 언젠가 아르센이 퇴근한 뒤에 빌헬름 관에 들러 여전히 걸려있는 로브자락이며 저 소름끼치는 조각상을 꼭 없애버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을 본 앨런이 슬쩍 웃으며 마력을 움직였다. 칼리안과 똑같이 생긴 작은 조각상이 금세 녹아내리더니 증발하듯 사라졌다. 또 만들 수 있다고 했으니까. “우선 앉으시지요. 자네도 앉게.” 무려 아르센이 칼리안의 앞에서 고집을 부리게 한 원흉을 손끝 하나로 없애버린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제대로 만들어도 될 때가 되면 그때 다시 해보겠습니다, 그럼.” “하지 마요. 절대 하지 마요.” 마법사들 미쳐있는 것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니 괜찮았는데. 아르센이 제일 가는 놈이었음을 이제야 여실히 깨달은 칼리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키리에를 불러 함께 자리에 앉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런 칼리안을 향해 앨런이 이렇게 물었다. 화제를 좀 돌려보기 위함이었다. 정확히 앨런의 입맛에 꼭 맞을, 지나치게 많은 시럽이 올라간 수플레 케이크의 단 맛을 본 키리에가 살짝 놀란 얼굴을 했을 때 쯤. “기사들 합류하면 훈련 시킬 사람이 부족할 것 같아서요, 스승님.”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키리에를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었다. “교육을 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기사들 대련 상대 정도는 충분히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플란츠가 관리를 시작한 기사단, 카렌과 라온. 그곳에 속한 기사들과 대련을 해 줄 만한 인물로 키리에를 두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런 칼리안을 잠시 보던 앨런이 키리에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벌써 그리 자랐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앨런은, 도박장의 사람들을 향해 검을 휘두른 뒤에도 꿋꿋하게 서 있던 키리에의 눈과 지금의 눈빛은 조금 다른 데가 있었음을 알아봤다. 본인을 앞에 두고 꽤 대견해하는 듯한 앨런의 말에도, 키리에는 별다른 말 없이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스스로의 능력을 평가하는 말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 지 아직 잘 알지 못해서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전하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곁에 앉아있던 아르센이 키리에를 보며 웃었다. “축하하네.” 그리하여 키리에는 매우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벌써 그리 자랐습니까’ 라는 앨런의 말부터 지금까지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 하나도 이해하지를 못했다. 칼리안은 아무 설명 없이 키리에를 데려왔으니 말이다. 카렌이나 라온의 기사들과 대련을 하는 것 까지는 그리 어려울 것 없이 이해를 했는데, 난데 없이 무슨 축하란 말인가. 그런 키리에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본 아르센이 설명을 했다. “호위 시종이 기사들과 대련을 할 수 있겠나.” 그 말을 들은 뒤에야 무슨 이야기인지를 조금 이해한 키리에를 향해, 칼리안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내 방패 말고 다른 것 해야지. 키리에.” 기사 서임. 칼리안의 검. 키리에에 대한 기사 작위를 내려주겠다는 이야기였다. < 제32장. 나의 검(2) > 우유를 가득 넣어 만든 하얗고 부드러운 빵. 향 없는 하얀 버섯과 함께 끓인 스프, 부드러운 딸기청을 가득 넣은 탄산수. 그리고. 닭가슴살을 안에 넣고 보기 좋게 구운 빨간 피망, 몽실거리는 계란과 함께 구워낸 초록색 피망, 둥글게 뭉쳐 구운 돼지고기와 함께 올리브유에 구워낸 빨간 피망, 가끔 보이는 양배추 덕분에 이것이 샐러드임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초록 피망 뭉치. 식탁 위를 한번 훑어본 플란츠가 한숨이 섞인 것이 분명한 말투로 짧은 감상을 전했다. “또.” 요즘 매일같이 피망이 올라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속 썩이는 형님 노릇을 한 다음날부터 피망이 올라왔다. 그날 칼리안은 체이스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말하지도 않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식사 자리에 피망을 올렸다. 왕자들이 딸기에 미쳐있다 생각했던 주방장은 이제 피망에 미쳐있다 여기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이것은, ‘아이고 우리 형님이 형님 노릇 하셨구나. 그런데 어쩌죠, 어른은 피망 안 가리는데.’ 식단인 것이다. 돌다 돌다 나까지 같이 돌아버릴 동생놈의 안배에 정말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을 간신히 집어넣은 플란츠를 향해 레릭이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 “칼리안 왕자님은 마나실 백작의 일정 때문에 시간 조정이 안되서, 식사 없이 먼저 나가겠다는 말을 전해주시라 했다 합니다.” 심지어 이따위 메뉴를 차려 올리고는 오지도 않는단다. “······ 해보자는건가.” 평생의 숙적으로부터 비아냥 가득한 선전포고를 받은 국왕의 그것과 같은 얼굴을 한 채 중얼거리는 플란츠를 보며, 레릭이 다시 한 번 말을 건넸다. “거슬리신다면 치우고 새로 올리겠습니다, 왕자님.” 플란츠의 눈꼬리가 살짝 찌푸려졌다. 피망 싫어하는 것을 레릭이 알고 하는 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피망은 그냥 피망이라 싫었다. 향이 많이 나서 싫은 다른 음식들과는 조금 달리 그냥 싫어했다. 그걸 알아서 칼리안도 이렇게 식단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이겠지. “됐어.” 란델보다 한 살이 많은 레릭은 실리케의 일이 마무리 된 이후에 온, 어찌보면 얀과도 조금 비슷한 상황에서 플란츠의 시종을 담당하게 된 이였다. 얀 외에는 칼리안의 상급 시종을 하겠다 자처한 이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했다. 레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브리센과의 일에 휘말릴까 몸을 사리던 이들 중 유일하게 나선 것이 레릭이라는 것을 플란츠도 알았다. 게다가 레릭은 플란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어딘가로 보고하지 않는 첫 시종이기도 했다. 그러니 굳이 입맛 하나를 두고 수고를 시킬 생각은 없었다. 잠시 식탁을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앉아.” “······ 네, 네?” 잘 알아듣지 못해 눈치를 잔뜩 보며 되묻는 것이 일상인 레릭을 향해, 플란츠가 설명을 더했다. “같이 먹자고.” 피망 가득한 식단. 양은 또 어찌나 많은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레릭을 보던 플란츠가 한 번을 더 말했다. “싫으면 말고.” “아니요, 왕자님! 싫지 않습니다!” 싫을 리가 있겠냐고 말하며 빠릿빠릿하게 자리에 앉더니, 감격에 겨운 얼굴을 한 채로 자신을 보는 레릭을 향해 플란츠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어쩐지 주변에 귀찮은 놈이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와 같이 플란츠의 무릎 위를 점령하고 있던 루시가 애옹애옹하는 소리를 냈다. * * * 날이 참 좋았다. 햇살은 그 자체로 훌륭히 빛났고 따스함을 품은 바람이 조금씩 불었다. 검은색과 갈색의 말이 카이리스 왕실 숲의 입구에 멈춰선 뒤, 말에서 내린 두 사람이 숲 속으로 들어섰다. 칼리안과 키리에였다. 바람이 숲을 지나며 사락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키리에에게 다시 검을 돌려준 이후, 둘은 거의 항상 이 숲에서 대련을 했다. 키리에가 자신이나 칼리안과 닮은 듯한 이 숲을 정말 마음에 들어 한 이유도 있었지만 키리에의 실력이 늘어나면서 사방이 막힌 수련장이 좁게 느껴지게 된 이유가 더 컸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할 필요 없이 검을 겨루기 딱 좋을 공터가 된 바로 그 장소로 가는 동안, 키리에는 계속해서 조금 전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 이제 내 방패 말고 다른 것 해야지. 칼리안의 검. 당연히 언제나 꿈꿔왔던 일이었고 그것이 되기 위해 지금껏 노력을 해 왔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기사 서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줄 몰랐다. 그래서 키리에는 기사 작위를 내릴 예정이라는 말에 크게 좋아하거나 감격해하지를 못했다. 그저 얼떨떨한 얼굴로 앉아있다가 칼리안을 따라 나왔다. “왕자님.” 한참이 지난 뒤, 키리에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칼리안을 불렀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키리에를 쳐다보자 키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기사가 되면 왕자님을 모시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왕자님들은 호위기사를 두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은 별 문제 없다는 듯한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을 전했다. “어차피 전하께서 무용지물로 만드셨잖아. 오히려 지금은 나한테만 호위기사가 안 붙어있는 상황이니까.” 칼리안이야 아니지만 플란츠나 란델의 곁에는 여전히 호위기사들이 따르고 있지 않던가. 비록 르메인의 기사라 하더라도 어쨌거나 기사는 기사였으니까. 그들을 대신해 키리에가 호위기사 노릇을 한다 하면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는 아직 기사가 될 만큼 큰 공을 세운 것도 없습니다. 제가 조금 더 실력을 쌓고 자격을 갖춘 뒤에 내려주셔도 늦지 않습니다.” 칼리안의 검을 대신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고 느끼는 것이다. “실력을 쌓으려면 더더욱 기사가 되어야지. 언제까지고 나한테만 배울 수는 없지 않겠어?” 혼자 성장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칼리안이 거의 매일같이 검을 맞대며 가르쳐주고, 간혹 플란츠 혹은 아르센과 대련을 한다지만 그것만으로는 당연히 부족했다. 일단 아르센은 마법사였으니 아르센과의 대결은 검술에 대한 소양보다는 갖가지 상황에 대한 기민한 대처 방법을 배우는 쪽에 가까웠다. 그리고 플란츠의 경우 키리에가 한 수를 접어주고 있으니 키리에의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대에 대한 살기를 감추거나 한발 물러나는 인내심을 향상시키는 쪽에 가깝달까. 그러니 이들이 아닌 다른 여러 사람의 검을 상대해보는 것도 반드시 필요했으나, 지금의 위치 상 그런 기회를 얻기가 어려웠다. ‘과거’에는 베른의 기사단이 있었고 그 기사단의 기사들과 어우러졌던 키리에가 아니던가. “네가 아무리 검을 잘 쓴다 해도, 그 기사들의 눈에 너는 그냥 시종일 뿐이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형님 같지는 않거든.” 조금 전 아르센이 설명했던 말대로, 여러 기사들과 대등하게 실력을 비교해보기 위해서는 키리에도 같은 위치에 있어야 했다. 키리에의 신분에 신경 쓰지 않고 검을 배우고 있는 왕자 플란츠가 오히려 이상하다 할 일이니까. 이런 이야기를 한 칼리안이 자신의 붉은 눈을 가리켜보이며 말을 이었다. “키리에.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가치를 정하는 이들이 많아. 나는 그런 문제 때문에 너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데.” 그러니 르메인이 앨런에게 백작위를 내렸던 것처럼, 칼리안이 화려한 예복을 입고 만찬에 나서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챙겨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이유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왕자님. 하지만 그래도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전하께서 작위를 내려주시면······.” 여기까지 이야기하던 키리에가 뒷말을 흐렸다. “아.” 칼리안이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키리에가 무엇때문에 결정을 달가워하지 않는지, 그 진짜 이유를 이제야 알아낸 까닭이다. “충성 서약 때문이구나. 키리에.” “······ 네.” 칼리안의 말을 들은 키리에가 조금 주저하는 듯 하다 대답을 했다. 르메인이 직접 기사 작위를 내려주면 기사가 주군 될 이의 앞에서 충성을 서약하는 절차가 생략된다. 키리에는 그 점이 싫어서 계속 다른 핑계를 대고 있던 것이다. 칼리안이 잠시 발을 멈추고 뒤따르던 키리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올려 키리에를 쳐다봤다. “안 받을 건데. 나는.” 키리에가 베른에게, 베른이 체이스에게 맹세했던 것. 기사가 될 이가 주군으로 모실 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약속하고. 주군보다 앞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맹세에 대한 허락을 구하고. - 허락하겠다. “이번에는 허락 못할 것 같아서.” 분명 신성하고 숭고하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키리에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의식이자 절차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허락하겠다는 간단한 대답을 절대로 내뱉지 못할 것 같아서. 칼리안이 허락하지 못하는 그 한가지가 무엇인지 가늠한 키리에가 조용히 가라앉은 눈을 했다. “키리에. 여기서 들었던 대답으로 나는 이미 충분해.” ‘과거’의 칼리안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준 것이 자신의 등이었으리라 말하던 그 순간 이미 모든 것이 충분했다. “그날 너는 이미 나의 검이 되었는데.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할까.” 키리에에게 다시 검을 전해줬던 그 순간이 칼리안에게는 서약이었다고, 칼리안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키리에가 소리 없이 미소만 지었다. 다른 이들보다 청각이 좋은 키리에에게는, 그 조용한 왕궁조차 언제나 소란했다. 그런 곳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는 이 곳은 키리에에게 휴식이었다. 늘 좋았던 물 소리. 청량한 바람이 내는 소리. 들이쉬고 내쉬는, 칼리안의 작은 숨 소리. 내리비치는 햇볕에서도 즐거운 소리가 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그렇게나 좋은 곳에서 무엇이든 다 기꺼운 마음이 된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언젠가 히나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늙어 죽을 때까지 왕자님 도우면서 살겠다고 말입니다. 그 때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지 잘 몰랐는데, 그 때 히나가 저를 왜 멍청이라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를 했습니다.” 사실은 키리에 뿐만 아니라 칼리안에게도 멍청이라 말했던 것이지만, 그것까지 알릴 수는 없었으니까. 아무튼 이렇게 운을 뗀 키리에가 칼리안을 제대로 마주 보고 섰다. 숲속 한 가운데, 그것이 꼭 칼리안과 키리에의 마음 속처럼 뭉개지고 베어지고 전부 불타버린 그 너른 폐허 위에 칼리안을 세웠다. “제가 아직 기사 서임을 위해 맹세하는 내용을 다 외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검게 퇴색된 그 땅 위에서, 칼리안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키리에.” “그래도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칼리안의 말을 막은 키리에가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런 키리에의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 다른 사람들처럼 딱딱한 인사치레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칼리안의 말은 무조건 다 듣는 키리에였지만, 충성 맹세를 받지 않겠다는 칼리안의 말만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 왕제님을 대신해 검을 잡고, 방패를 들겠습니다. 왕제님을 대신해 죽겠습니다. - 뭐야. 다른 기사들 맹세랑 결국 다 같은 말이잖아. - 진심만 말씀드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의 기억이 또 한 번 떠오른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 그냥 외워 말하기 싫다고 해. - 미사여구 없어도 제가 드리고 싶은 말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키리에는 모를 거다. 그때도 이미 제멋대로 기사 서약을 했었다는 것을. 그 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칼리안을 보며, 키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제멋대로 정한 약속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많이 다른, 그런 약속이었다. “언젠가 또 힘에 부치시거나 술에 취하실 때가 있으면 업어드리기도 하고, 잡아도 드리겠습니다. 왕자님 혼자 앞서 가시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해지겠습니다. 걱정하고 지켜주시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많은 것을 보고 배운 기사들의 멋드러진 말 말고 이렇게 또 한번. 키리에가 할 수 있을 약속들을 칼리안의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혼자 남지 않도록, 혼자 잊히지도 않도록, 지켜드리겠습니다.” 그것이 키리에의 맹세였다. 흔들림 없이 약속되는 그 말에, 키리에를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로 작게 웃었다. 그 때보다 더 듣기 좋은 말이라서. “······ 그래.” 웃음 소리, 그리고 들이쉬고 내쉬는 작은 숨 소리가 다시 들렸다. 칼리안의 그 무엇 하나 허투루 듣지 않는 키리에는 그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허락하겠다.” 좋은 날. 흐르는 물이 청량하고 내리비치는 햇살이 따스했던 그런 날. 키리에가 칼리안의 기사가 되었다. < 제32장. 나의 검(3) > 맑은 녹빛의 차에서 은은한 꽃향이 났다. 결코 호사스럽지 않은 차 향의 끝을 조용히 매만지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곁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난 것 같기도 한 꽃의 향기가 꽤 오랫동안 느껴졌다. 바위 위에 홀로 피어난 꽃이 생각나다가도, 또 어찌 보면 들판에 눈 내리듯 함박 피어난 작은 풀꽃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니 그 차는 히나와 참 잘 어울리는 그런 향을 지니고 있었다. - 잘, 지내셨어요? 찻잔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던 히나가 이렇게 물어왔다. 그 말과 함께 애옹거리며 다가온 루시가 드미레아의 발치로 다가와 몸을 부볐다. 밝은 상아색의 바지를 입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던 드미레아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평화롭습니다.” 루시의 등을 살살 쓰다듬어 준 드미레아가 이렇게 대답했다. 잘 지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는 히나를 마주했을 때에 항상 느껴지던 기분에 대한 감상이었다. 다만 그것이 대답도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굳이 질문에 대한 답까지 덧붙이지는 않은 채로 이렇게만 말을 했다. 사실 지금 드미레아가 히나와 함께 있게 된 것은,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을 통해 준비를 마친 기사들이 어제 드미레아의 저택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본래는 왕실의 기사단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사단이었고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쥐어 주려 했던 힘이었으나 결국은 플란츠의 검이 될 이들이 아닌가. 왕궁을 찾은 드미레아는 그들이 막 도착했고 아직까지는 별 탈 없이 지그프리드의 방패 아래로 들어왔음을 칼리안에게 알렸다. 그리고 그동안 줄곧 미뤄왔던 부탁을 하나 더 전했다. ‘대련?’ 기사들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드미레아가 직접 왕궁에까지 올 필요는 없었지만 ‘정혼자’들의 만남이 너무 적음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도 막을 겸, 그리고 칼리안과 대련도 좀 해볼 겸 해서 직접 걸음을 한 참이었다. 하지만, 대련을 청해오는 드미레아를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손으로는 내 검 못 받아.’ 칼리안의 말대로 지금 드미레아의 손이 조금 엉망이었다. 최근 한 단계 더 무거워진 검에 익숙해지기 위해 조금 무리를 했던 탓이었다. 덕분에 이번에도 대련 신청을 거절당했다. 누가 보면 데이트 신청이라도 했다 거절당한 듯한 얼굴을 하는 드미레아를 본 칼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너까지 나처럼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책도 보고 바이올린도 켜고 얀을 불러다 이야기도 나누면서 지내.’ 이렇게, 무슨 조카 뻘 동생을 대하는 얼굴이 되서는 걱정해주는 말을 하더니 또 다른 말을 덧붙였다. ‘내 정혼자가 나를 봐주는 게 좋기는 하지만. 나는 네가 조금 더 지그프리드답게 지내도 될 것 같은데.’ 하고. 딱 싫은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이다. 물론 드미레아가 연애 감정을 가지고 칼리안을 본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런 뜻이었다면 드미레아는 대련이 아니라 결투를 신청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왕궁을 찾았을 때 칼리안이 마법사들에게 내보내던 살기를 의식해서 무리를 했으리라는 것을 눈치채고 하는 말임을 드미레아도 알았다. 하지만. 동갑, 수련 시간이 적은 왕자, 소드마스터. 칼리안이 무슨 비밀을 가졌는지 알지 못하는 드미레아로서는 이런 칼리안을 보는 것이 경외심도 들고 자존심도 상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 때문에 조금 더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렇게 능글거리는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는 뜬금 없이 말린 닭고기 육포 몇 개를 건네주면서 돌아가는 길에 히나에게 이것을 좀 가져다 줄 수 있는지 부탁을 했다. 덕분에 이렇게 히나를 만나 함께 차를 마시기 시작한 참이었다. - 루시, 간식이네요. 얀의 손을 거쳐 꼼꼼히 쌓인 종이를 펼쳐본 히나가 살짝 웃더니 드미레아를 보며 다시 물었다. - 그동안, 다른, 일은, 없으셨어요? 드미레아로부터 평화롭다는 대답을 듣기는 했지만, 히나의 집무실에도 잔뜩 있는 루시 간식을 굳이 드미레아 편에 보냈다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서 한 질문이었다. “네. 항상 언제나와 같으니까요. 그다지 큰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내새끼가 막내 왕자와 정혼을 했다는 소식을 알음알음 퍼진 소문으로 전해들은 슬레이만이 ‘그래서 3왕자는 언제 지그프리드 공작령으로 올 예정인지’를 물어오는 편지만 열 통 쯤 보냈다는 문제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별달리 큰일은 아니었다. 지난 주 즈음부터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가짜 정혼임을 드디어 알았거나, 아니면 르메인에게 같은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거나, 혹은 세리에에게 들켜 혼이 난 뒤 편지 보내기를 그만두었거나 셋 중 하나겠지만 그 역시 큰일은 아니었다. “그보다, 축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베른 경.” 그렇게 큰일 아닌 이야기를 접어둔 드미레아가 히나를 보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드미레아보다는 히나 쪽에 좋은 일이 많이 생겼지 않았던가. 히나도 능력에 맞을 자리에 올랐고 키리에 역시 기사 서임을 받게 되었다 하였으니. - 저, 보다는, 오빠가 더, 좋아해요. 저는 그냥, 조금, 심심해졌어요. 히나는 여전히 심심한 편이었다. 에우리아와 아르센이 돌아온 뒤로 베로니카는 더 이상 학원에 가는 것을 멋대로 쉬지 못하게 됐고, 덕분에 베로니카가 없는 오전 시간에는 더더욱 할 일이 없었다. “치유사가 한가한 것보다 좋은 일이 또 있겠습니까.” 다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 게다가 8월에 아이즌의 기사단까지 발칸에 합류시킨다면 그 때부터는 히나 역시 바빠질 지도 모를 일이니, 그 전에 할 수 있을 만큼 여유를 부리는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때문에 그런 대답을 건넨 드미레아는, 히나가 준비해 준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내려놓으며 말했다. “향이 정말 좋습니다.” 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군단장, 님께서, 주셨어요. 리, 베, 른, 에서 보낸 선물. 난초, 꽃이, 들어있대요. 정확히 말한다면 앨런이 칼리안에게 준 것을 칼리안이 다시 히나에게 건넨 것이다. 자신을 찾아왔던 칼리안이 차를 꽤 마음에 들어하자 앨런이 칼리안에게 그것을 주었고, 칼리안은 자신의 방에 들렀던 히나가 향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히나에게 들려 보냈으니까. 생때같은 칼리안이, 그리고 히나가 좋다는데 뭔들 못 내어줄까. 이런 기묘하기 짝이 없는 내리사랑의 결과로 히나에게 전해졌던 녹차를 드미레아가 다시 한 번 입에 머금었다 삼켰다. 그 모습을 보며 기분 좋아지는 웃음을 지어보인 히나가, 찻잔을 쥔 드미레아의 손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 치료, 해드릴까요? 손바닥 이곳 저곳에 크고 작은 물집과 상처가 있는 것을 이제야 눈치채고 묻는 소리에, 드미레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냥 두는 것이 더 낫습니다.” 드미레아의 검은 아직 슬레이만의 것만큼 무겁지 않았다. 차츰차츰 그 무게를 늘려가고 있었는데, 이번에 조금 욕심을 부려 무게를 더 많이 늘렸더니 이렇게 물집이 잔뜩 생겨버리고 말았다. - 그래도 아프면, 얘기해줘요. 이렇게 말하는 히나를 본 드미레아가 살짝 웃는 얼굴을 했다. 칼리안이 왜 자신을 히나에게 보냈는지 깨달은 탓이다. 치료받지 않아야 할 상처라는 것을 칼리안도 알 테니, 그보다는 또래와 함께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을 가지라는 뜻이리라. “지금도 아픕니다. 그래도 물집이 터지고 나아야 굳은살이 생기니까요. 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겉으로 보면 드미레아의 손은 그저 작고 예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손을 조금만 뒤집어 보면 온통 굳은살과 물집이 잔뜩이었다. 오히려 키리에의 손이 더 부드럽다 할 정도였으니 다른 설명을 해서 무엇할까. - 오빠도, 그런 말을, 했었어요. 치료가, 필요 없는 상처도, 있다고. 이렇게 말을 하다 멈춘 히나가 자리에서 일어서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가져와 드미레아에게 건넸다. 지금 마시고 있는, 난꽃이 들어간 그 녹차가 담겨있었다. 앨런에게 보내진 리베른의 선물이라면 꽤 귀한 차일 터였다. 그것을 덜어내지도 않고 통째로 건넨 것이다. 전부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하려던 드미레아를 향해 히나가 손을 움직여 보였다. - 치료, 하지 않더라도. 가끔씩, 쉬어요. 쉴 때, 마셔요. 히나는, 자신보다 어린 드미레아가 너무 무거운 검을 가진 것 같다는 말 대신 그냥 쉬라는 말만 했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런 히나의 말을 다 알아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드미레아는 뜻밖의 선물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이렇게 대답했다. 히나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플란츠는 똑똑하다. 한 번 본 것은 어지간해선 잊는 법이 없고 생각의 전환도 빠르며 눈치까지 좋다. 덕분에 칼리안이 알려주는 많은 것들을 잘 익히고 배워서 써먹고 있었다. “내 형님께선 어찌나 배움이 빠르신지······.” 피망을 넣은 파프리카 구이, 파프리카와 어우러진 피망 볶음, 피망과 파프리카 샐러드, 피망과 함께 갈아 만든 파프리카 주스. “내 아우님께서 잘 가르쳐주신 덕분에.” 칼리안이 드미레아를 만난 탓에 주방에 말을 전하는 것이 늦었다. 이미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만 듣고 그러려니 했는데 플란츠가 이럴 줄은 몰랐다. “배우셨던 것을 이렇게 써먹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요.” 고기가 없다. 고기 없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오로지 피망과 파프리카만 가득한 극단적인 식탁을 본 칼리안이 씩 웃으며 감상을 전했다. 그 말끝이 흐려지는 것을 보니 썩 기분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던 탓에,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잘 말려 올라갔다. “아. 몰랐군.” 미친놈을 다스릴 땐 그놈보다 조금 더 미치면 된다는 깨달음을 여전히 잘 실천하고 있는 플란츠가 아니던가. 놈이 가리는 음식이 있든 말든 이 정도면 누구라도 싫어할 만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생각해 낸 식단이었다. 그런 둘을 보던 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어제 플란츠와 같이 식사를 하고 온 뒤 감격의 대성통곡을 한 탓에 여전히 눈이 퉁퉁 부어있는 레릭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 유치한 싸움을 끝내려면 주방장을 갈아 엎든가, 아니면 히나를 불러다 저 꼬락서니를 보여줘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질린 얼굴의 시종들이 밖으로 나간 뒤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먹어, 사양 말고.” “형님도 드시죠. 많이.” 그렇게. 전쟁이 시작됐다. 아무 소리 없이 구운 피망을 가져다 반 자르니, 잘게 다진 각양 각색의 파프리카 조각이 퐁퐁 새어 나왔다. 플란츠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그 정체 불명의 알록달록한 피망 구이를 한 입 가져다 먹었다. - 달그락 생전 내지 않을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칼리안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그리고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또 어깨가 떨렸다. 웃음이 터졌다. 속 썩이겠다더니 피망 속에 파프리카를 채워 가져오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는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되는지, 칼리안도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웃었다. “아······ 어떡하지······.” 그 불손하고, 예의없고, 경박한 모습을 보면서도 플란츠는 아무 말도 안했다. 하던대로 계속 신물 날 것 같은 피망을 집어먹었다. 그것도 결국 풀이었던 탓에 적응이 된 것인지 아니면 그냥 꾹꾹 참고 먹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플란츠는 의연하게 잘 먹었다. 정신없이 웃던 칼리안만 제대로 먹질 못한 채로 그렇게, 전쟁 같은 저녁 식사가 마무리됐다. 홍차를 마시는데 피망 맛이 났다. 식사가 부실했을 것을 생각한 얀이 함께 준비해 온, 바나나를 얹은 팬케이크를 먹는데 피망 맛이 났다. 작게 자른 딸기에 달지 않은 설탕 시럽을 씌워 굳힌 디저트를 먹는데 피망 맛이 났다.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울듯이 웃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칼리안이 하는 냥을 조용히 쳐다보던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하겠다고 해.” 피망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는 것인지, 어린애 취급 하지 말라는 것인지, 혹은 다른 뜻인지. 칼리안도 가늠이 안 되는 말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웃음을 멈춘 칼리안이 조금 늦게 물었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르니에리 때문에 미안해하는 짓.”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은 고요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 아셨습니까.” 옛 칼리안과 플란츠의 일은 지금의 칼리안이 접근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알 생각도 하지 않았고 옛칼리안을 대신해 플란츠를 욕하지도 않았고 용서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것을 제외한 다른 문제. 옛 칼리안에 대한 일을 제외하고 그냥 지금의 플란츠와 칼리안, 그리고 실리케의 관계만 따져봤을 때. 향기를 싫어하게 된 플란츠를 만든 것은 실리케인가, 아니면 실리케와의 관계를 미처 다시 쌓아보기도 전에 실리케를 밀어낸 칼리안인가. 플란츠의 동의가 있었다 하더라도, 칼리안에게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플란츠에게 있어 가장 큰 그림자이자 동시에 빛이었던 실리케를 치워낸 것은. 과연 선인가, 위선인가. 그런 생각에서 기인한 과보호까지는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것 역시 어느 한 쪽이 이해하고 용서하고, 그렇게 간단히 더하고 빼는 셈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플란츠를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답했다. “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칼리안의 손, 정확히는 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가리켜보였다. “같은 취급 필요 없어.” 체이스에게 하듯 자신을 대하지 말라는 소리다. 플란츠 심장 지키겠다며 체이스를 헤집어놓고 그것을 플란츠에게는 숨기고. 사실을 알았을 때 제대로 화도 내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앨런은, 칼리안이 그런 방법 밖에 몰라서 그렇다 했다. 혼자 다 떠안고 체이스를 지키는 법만 배워서 그렇다 했다. 칼리안이 왜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지 플란츠는 모른다. 왜 혼자 떠안기만 했는지 모른다. -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것도, 있어요. 언젠가의 히나가 했던 말처럼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거다. 전부 알고 이해해주고, 그렇게 모든 상처를 다 치료하고 넘어갈 필요는 없지 않나. “잿더미에서 구르는 법은 나도 알아.” 칼리안이 잠시 시선을 내렸다. 빨간 눈동자가 서서히 내려가 멈추었다. “······ 네.” 칼리안은 손에 끼워져 있는 것을 한동안 그렇게 내려다보다 흘려내는 듯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반지를 내려다보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최근 가장 하고 싶었지만 참고 참았던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꺼냈다. “피망. 싫어해.” 다시 고개를 들어 플란츠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의 웃음이 또 터졌다. 플란츠가 정성을 담아 준비한 한끼 식사 덕에 칼리안도 같은 것이 싫어진 탓이었다. < 제32장. 나의 검(4) > 조용히 안경을 벗어 내려놓은 르메인이 고개를 들었다. 대체로 흐름을 느끼기 어려울 깊은 물과 같이 잠겨들어 있던 그 눈에 오늘따라 꽤 많은 말이 담겨 있었다. 분노처럼 보이다가 짜증같기도 하고,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오다가도 회한이 깃든 그런 눈빛이었다. 풀이하자면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분노, 이런 말을 듣고도 반박 할 수 없음에 대한 짜증, 언제까지 이것을 상대해줘야 하는지에 대한 귀찮음, 이런 놈과 친하게 지낸 과거의 시간에 대한 회한 정도가 될 것이다. - 언제나 봄을 기다리는 이 카이리스에 실로 봄이 올 것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으니, 가슴이 벅차오르는 이 기쁨을 어찌 말로 하겠습니까만은······. 어울리지도 않는 미사여구가 가득한 편지. ‘내새끼랑 정혼했다는 네 셋째 아들 빨리 내려보내라. 나 심심하다.’ 라는 내용을 고상하게 바꿔 써 넣은 그 편지를, 토씨 하나 고치지 않은 채로 매일같이 한 통씩 보내고 있었다. 답장을 받을 때까지 보낼 생각인 것이 분명했다. 일국의 하나 뿐인 공작이 보낸 편지였으니 그것을 차마 태워버리지도, 찢어버리지도, 하다못해 마음껏 구겨버리지도 못하고 다시 고이 접어 시종장 라울에게 건네준 르메인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멀찍이 떨어진 소파에 앉아서는 마법사들끼리 벌어진 싸움 구경하듯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남의 자식 이용해먹다 막내 왕자님 보내주게 생겼습니다.” 딱 강 건너에 붙은 불이 어디까지 번질지 가늠해보는 정도의 얼굴로 이렇게 말을 한 뒤에는, 타르트 위에 올려진 살구를 집어 먹었다. 설탕을 가득 넣고 뭉근하게 조려낸 살구가 앨런의 입맛에 아주 잘 맞았다. 아무튼 슬레이만도 정말로 칼리안을 사위 삼아 데려가려는 목적보다는 드미레아의 소중한 이름을 팔아먹었던 르메인의 태도를 꼬집고 있는 것일 터였다. 르메인이 이미 드미레아에게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겠노라 약속을 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슬레이만은 슬레이만대로 르메인을 놀려 먹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의미 없이 단순한 장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르메인은 제대로 골치아파 하고 있었다. 아무리 악의 없는 편지들이라지만 왕가와 공작가 사이의 일이 아닌가. 슬레이만이라면 몰라도 르메인만은 이 편지들을 가볍게 무시할 수도, 그렇다 해서 무턱대고 진지하게 대응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왕자님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습니다.” 칼리안을 지그프리드로 보내라는 소리다. 조금 전 앨런은 발칸의 마법사를 늘리겠다며 인명부를 들고 찾아와서는, 마법사 늘리는 김에 칼리안의 호위 시종 한 명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달라는 말을 했다. 키리에와 히나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휘트린 영지의 평민인 ‘키리에 베른’으로 위조를 해준 것이 바로 르메인 아니던가. 그것이 떠올라 과연 그 시종을 칼리안의 호위기사로 둘 만큼 믿을 수 있는지 우려하는 말을 했다가, 너보다 걔가 칼리안을 더 잘 챙기니까 걱정 말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르메인은 좀 우울했다. 그런데 이제는 칼리안을 그냥 지그프리드로 보내란다. 당연히 농담이겠지만 우울했던 르메인은 조금 짜증이 났다. “마나실 백작에게는 이 일이 그저 재미있는 구경거리인 모양이군.” 슬그머니 웃은 앨런이 포크를 다시 집었다. 그리고는 타르트 위에 올려진 살구를 몇 개 쯤 더 먹은 뒤 라임과 민트 향이 가득 배어나오는 차로 입가심을 했다. “재미가 있으니 이렇게 바쁜 시간을 내어 구경하고 있는 것이지요.” 소문 덕을 보겠다며 칼리안과 드미레아의 정혼설을 묵인하고 기정사실로 만든 탓에 슬레이만에게 이렇게 시달리는 르메인을 대체 언제 또 구경해 보겠는가. 타르트 위에 얹어진 살구만 싹싹 골라먹으면서 한 마디도 안 지는 저 입을 대체 누가 막겠나 싶은 마음에, 르메인이 작은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칼리안 왕자께서 지그프리드로 가신다면 저야 환영할 일이 아닙니까. 전하께서 앉아 계시는 종이 의자 넘겨 받는 것보다는 지그프리드 공작저의 뒷마당이 몇 배는 더 편안하고 안전할 터이니.” 언제는 칼리안에게 세자위를 주려고 카이리스에 왔다더니 이제는 그냥 다 됐단다. 한 술을 더 떠 이 참에 국혼을 치르란다.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칼리안에게 세자위를 내린 뒤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그렇게나 걱정하더니 지금은 또 내려보내라는 소리를 하고 있다. 심지어 농인지 아닌지조차 구분이 되질 않는 말투였다. 르메인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본 앨런이 민둥민둥해진 타르트에서 마지막 살구를 집어먹은 뒤 말했다. “그냥 술이나 몇 병 보내면 잠잠해질 작자 아닙니까. 행여 사과라도 하겠다며 구구절절 설명하려 들지나 마시지요.” 앨런이 이제야 제대로 된 조언을 꺼내들었다. 다른 설명 덧붙이지 말고 그냥 술이나 보내라는 뜻이다. 술에 담긴 의미야 슬레이만이 알아서 해석하도록 르메인은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어찌됐건 둘 사이의 국혼은 평생을 가도 이뤄지기 힘들 일이 아니던가. 칼리안이 세자위 포기하고 지그프리드로 가겠다 할 리도 없지만, 그 드미레아가 왕비 노릇 하겠다고 공작위를 내려놓을 리도 없었으니까. 다만 서로 나서서 그런 사실을 확인하느니 그냥 대충대충 넘겨가며 각자 이득이나 보라는 말이었다. 이미 당사자들도 그렇게 지내기로 협의를 봤으니 말이다. “차후에 칼리안 왕자님이 별반 손에 든 것 없는 빈털터리라는 것을 알아도 귀족들이 함부로 머리 돌리지 않도록, 지금 관계는 적당히 유지하고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 드미레아의 아버지란 작자가 슬레이만이라는 물건이라서 이런 일에 휘둘리게 하는지, 하고 이야기하려던 르메인이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절대 하지 않을 저 마법사가 그런 얘기를 듣고 무슨 험한 대꾸를 할지 적당히 예상이 된 탓에, 다른 말 없이 그냥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 * * 그것을 계속해서 꿈이라 해도 좋을지. 아니면 과거의 일이라 해야 할지. 혹은 어디엔가 살았을 또 다른 나의 기억이라 해야 할지. 도무지 무엇이라 칭하기조차 어려울 것들을 떠올린 체이스가 조용히 눈을 떴다. 잠들기 전 내려 둔 커튼 사이로 밝은 햇살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동안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해서 늦은 아침이 지나서야 간신히 눈을 떴지만 최근에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계속하여 꿈을 꾸느라 잠이 길어졌다. 억지로 깨려 하지 않고 보이는대로 전부 다 기억에 담아두며 계속해서 그렇게 꿈을 꾸었다. 곧 체이스가 다른 소리를 내지 않으려 주의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생각지 못한 것을 꿈꿨네.” 칼리안이 부탁했던 것에 대해 조금만 더 자세한 꿈을 꾸고 싶었는데, 꿈이 길었던 탓인지 생각지 않던 새로운 기억을 함께 떠올리게 되었다. 때문에 밖으로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를 낸 체이스의 눈이 멀리 보이는 방문을 향했다. 테일란 카스트린. 지금은 체이스의 스승이자 호위 기사. 그리고 과거에는, 베른의 스승이었으며 데블란의 호위 기사였던 대륙 최강의 소드마스터. 잠에 들어 있을 때에는 절대로 건드리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 두었으므로, 기사 테일란은 체이스의 방 안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계속 밖을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체이스는 자신이 일어났음을 테일란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소리 죽여 몸을 일으킨 참이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 앉은 체이스의 보랏빛 눈에 혼란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것을 테일란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다시 한 번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일까, 아니면 상상일까.” 가끔씩 체이스가 의문을 가지는 것이 있었다. 꿈 속에서 보이는 것이 정말 있었던 사실들 뿐일지, 혹시라도 체이스의 상상이 섞여있는 것은 아닐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것을 사실이라 믿기에는 너무 가혹하여 그저 상상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도 있었고 단순한 상상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 좋은 기억이라 사실이기를 바랐던 것도 있었다. 대체로 베른에 대한 내용이 그랬다. 사실이라 믿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했고, 상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행복하고 좋은 기억이 혼재했다. 때문에 어떤 것은 상상이었으면 싶다가도 또 어떤 것은 사실이었으면 싶은 그런 기분이, 베른에 대한 꿈을 꿀 때마다 느껴졌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베른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음에도, 사실이라 믿기에는 가혹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은 그런 꿈을 꾸었다. - 베른. 차마 소리로도 내지 못하고 입만 열어 그 이름을 입에 올려보던 체이스가 혼잣말을 이었다. “······ 감추고 살았던 것이 너만은 아니었구나.” 나 역시 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음을. 나 역시 지금껏 모르고 있던 사실이 하나 있었음을. 오늘에서야 알게 된 숨겨진 이야기 하나를 되새겨보며, 체이스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 후에는 고개를 움직여 손목에 채워진 얇은 은색의 팔찌를 한참동안 쳐다봤다. 커피 향이 나는 것도 같고, 민트 향이 나는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짙은 바다 비린내, 혹은 또 다른 것의 비린내가 나는 듯한 그런 기분도 함께 들었다. 그 기억에 계속 잠겨들다가는 꿈 속의 언젠가처럼 깊디 깊은 바닷속에 함께 잠겨들다 숨을 놓치는 기분이 될 것 같아서, 체이스는 막힌 숨을 터뜨리며 기침을 토해내듯 입을 열었다. “카스트린 경.” 그와 함께 곧바로 문이 열리며 키 큰 테일란이 방으로 들어왔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났음을 눈치채고 있었던지, 상당히 빠른 반응이었다. 침대 발치에 선 채로 잠시 체이스의 안색을 살피던 테일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또 악몽을 꾸셨습니까.” 최근 들어 조금 괜찮았던 것 같았는데 다시 꿈을 꾸게 되었는지를 우려하는 빛이 가득했다. 악몽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체이스는 항상 ‘악몽이 아니었다’고 정정했었다. 하지만 오늘 체이스는 그런 설명을 하지도 않은 채 한참동안 테일란의 두 눈을 응시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몰랐다. 체이스는 계속 그렇게 테일란을 보다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카스트린 경.” 이렇게, 다시 한 번 테일란을 불렀다. “네, 저하.” 테일란은 무슨 일인지 묻는 대신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침묵이 찾아왔다. 여전히 침대에 앉은 채로, 혼란스러운 눈을 한 채로, 꿈 같은 사실을 이제 막 깨우친 채로. “그대는 나의 검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검인가.” 하는 질문을 했다. 체이스가 데블란을 ‘아버지’라 불렀던 적이 있던가. 생소한 호칭에 찰나와 같이 떠올랐던 의문을 잠시 접은 테일란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는 체이스의 것과 달리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대답을 전했다. “과거에는 전하의 호위였으나 지금은 저하의 검입니다.” 데블란에게는 단순한 호위였으나 체이스에게는 다르리라는 말. 그 충성의 대상을 스스로 바꾸었다는 테일란의 솔직한 말에 체이스가 설핏 웃었다. 한번 주인을 바꾼 기사를 믿어도 될지 의심이 되어 웃은 것은 아니었다. 테일란이 언급한 ‘과거’라는 단어가 체이스에게 조금 다르게 들려온 탓에 웃은 것이었다. “과거에도 결국은 나의 검이었지.” 테일란으로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한 체이스가 테일란의 눈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하루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아.” 세크리티아로 가는 길을 하루만 미루자는 말에, 테일란이 다시 걱정하는 낯으로 체이스를 봤다. 그렇게나 심한 악몽이었는지 묻고 싶어하는 기색이 분명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은 체이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경에게, 조금 긴 이야기를 하나 해 줄 생각이라서.” 말도 안되는 진실. 거짓보다 믿기 어려운 진실. 지옥보다 더 지옥같은 그런 진실을, 이제 이야기 해주겠노라고. 그러니 이번에도 데블란이 아닌 나의 검으로 살라고. 그렇게 해달라고. 그런 뜻을 담아 꺼낸 이야기였다. * * * 결국 형제는 닮게 마련이다. 굳이 더 이상은 내 오지 않아도 된다고 일렀건만 배려심 넘치는 주방장이 다시 한 번 피망 섞인 양고기를 내어 놓았다.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형제는 형제인지라. “두분 다 똑같으십니다.” 다른 요리를 모두 먹었음에도 유일하게 조금도 손대지 않은 그 접시를 보며, 얀이 툴툴거리듯 입을 열었다. 칼리안과 플란츠가 똑같다는 말이 얀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험한 말이었다. 물론 시종으로서 할 만한 말도 아니었으니 곁에 있던 레릭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으나 얀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얼굴을 하며 칼리안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몰라. 냄새도 맡기 싫어.” 얀에게 혼난 것이 한 두 번은 아니었던 탓에 가볍게 대꾸하고 넘긴 칼리안이 생글거리며 앞을 쳐다봤다. 그 원흉이 된, 왕궁 어딘가에 돋아난 잔디 한 줄기처럼 꼼짝 않고 앉아서 고양이나 쓰다듬고 있는 연두색 놈이 거기 있었다. 오래지 않아 얀과 레릭이 밖으로 나간 뒤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에이프린 경의 기사들이 어제 왔습니다. 믿을 만한 이들인지는 저를 대신해서 드미레아가 확인 해주기로 했고요. 말씀 드렸듯이 8월이 지나기 전까지는 모두 발칸에 합류하게 될 겁니다. 그 전에 키리에가 기사 서임을 받고, 형님 일을 도왔으면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특별히 반대할 만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었거니와, 이미 혼자 다 정해놓고 괜찮냐고 물어보는데 싫다고 할 수가 있나. 때문에 플란츠는 그냥 가볍게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치유사도.” 그리고는 이렇게 한 마디를 한 뒤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를 한참동안 마주 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할 말 끝났다는 저 얼굴을 보며 되려 할 말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말씀을 좀······ 늘려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말이 너무 짧다. 아무리 칼리안이 제 말을 잘 알아듣는다지만 좀 너무하다 싶을 만큼 말이 짧을 때가 많아졌다. “텐실의 치유사. 히나에게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아무것도 모르잖아.” 치유 방법은 다르지만 치유를 한다는 것은 똑같으니, 치료해야 할 사람이 더 늘어나기 전에 텐실의 치유사를 불러다 히나에게 뭔가를 좀 가르쳐 줄 수 있을지 부탁을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그런 소리였다. 히나는, 치유력은 있으나 그에 대한 지식까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아버지인 로닐이 남겨 둔 자료들로 약초 공부를 하고 있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생각해보니 히나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하다못해 붕대 감는 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착하디 착하면서 능력까지 대단하여 어디 하나 빠질 곳 없는 우리 히나가 너한테도 히나인건지, 한번만 더 그 귀한 이름 입에 담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으로 잠시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 가시죠.” “싫어.” 치유사에게 히나를 부탁하려면 란델을 통해야 하니 하는 말이었다. 말 꺼낸 사람이 올라가서 부탁하라는 칼리안의 이야기에 곧바로 싫다는 말을 한 플란츠가 또 한 번 한 줄기 잔디처럼 움직임을 멈추고 창 밖을 쳐다봤다. 결국 다시 한 번 란델을 찾아가게 된 칼리안이 나지막한 한숨을 쉴 때. - 칼리안 왕자. 그야말로 햇살같은 반가운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 시간의 축, 생각이 조금 더 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맙고 미안한 이야기를 건네왔다. < 제32장. 나의 검(5) > 날카롭다. 칼리안의 날카로움이 숨겨진 비수와 같다면, 베른의 날카로움은 언제든 휘두르기 위해 칼집마저 내다 버린 거대한 칼과 같았다. 그리고 체이스의 날카로움은 들쥐의 심장을 꿰뚫어보는 매의 시선과 같았다. 베어내고 상처입히는 날카로움이 아니라, 상대가 누구든 혹은 대상이 무엇이든 제대로 짚어보고 정확히 판단하는 날카로움이었다. 즉, 통찰이다. ‘저하께서 이미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왕자님으로부터 피 냄새가 짙게 느껴지는 날이 간혹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이들이 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사라진 이유도 알았으며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 역시 알고 있었다. 데블란. 데블란이 어떤 방법으로 귀족들의 위에 군림하고 있는지 체이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데블란이 휘두르던 검이 누구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설마, 아비가 자식을. ‘더는 두고 보기가 어려워 말씀을 드립니다.’ 그 말을 전해듣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몇 년을 지켜만 보다가 이제서야 그런 말을 해 주는 것인지, 그러고도 당신이 그 아이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지. 그런 말로 테일란을 원망하지 않았다. 믿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이해했다. 체이스 역시 데블란의 아들, 뱀의 새끼였으니. 제 동생에게 충성 서약을 받아가며 세자위에 올랐던 형이 아닌가. 하여, 겉과 속이 다를지 모를 체이스에게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음을 알아보았다. 테일란 자신의 개입이 더 큰 파도가 되어 베른을 휩쓸어갈까 두려운 마음에 줄곧 지켜만 보았음을 알아보았다. 때문에 체이스는 테일란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 누구를 원망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죄는 체이스 스스로가 짓고 있던 것이 아닌지를 자책하며 후회했다. 이러고도. 형이라 할 수 있나.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해. 세자 저하 당신이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 안 해. 당신이 뭘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당장 잘못한 것부터 고쳐야지, 후회를 왜 해? 시간 많아?’ 아리안느는 말이 항상 날카로웠고 그 말에 달린 칼날에 베여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살펴보고, 더 정확히 통찰했다. 결정한대로 움직였다. - 방울뱀 소굴의 술사가 네빌라드의 큰 둥지로 가고 있습니다. 그 무렵 데블란은 병을 앓고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병이었고 병세는 나날이 심해져갔다. 후궁의 아들로 태어나 힘들게 오른 세자위, 어미 다른 혈육들을 제 손으로 굳이 꺾고 올랐던 왕위. 그렇게나 소중한 왕위를 잃고 싶지 않아 하던 데블란은 결국 왕실의 법을 무시하고 텐실의 치유사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데블란이 키운 새는 치유사가 세크리티아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착실히 모아 체이스에게 알려왔다. ‘카스트린 경.’ ‘네, 저하.’ ‘나는 반역자의 핏줄이 내 땅을 밟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체이스는 데블란이 아니라 법을 지키기로 했다. 그렇게 하여 아비로부터 동생을 지키는 것이 체이스의 선택이자 결정이었다. 치유사를 만났다면 고칠 수 있는 병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차라리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마지막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치유사. 제가 전부 치웠습니다.’ 하지만 세상 그 무엇도 완벽할 수 없으므로. 완전 무결한 순백이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아버지.’ 착해 빠진 체이스. 그런 체이스 역시 데블란의 아들, 뱀의 새끼였으니. * * * - 시간의 축, 생각이 조금 더 났습니다. 그 말에 대한 대답이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때문에 체이스가 다시 한 번 말을 했다. - 매의 편에 서신을 보냈는데, 기다릴 것 같아서 미리 연락을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서신으로 갈테니 확인해보세요. 시간의 축에 쓰여 있던 문자들을 기억해냈다. 다만 베른이 그러했듯 체이스 역시 그것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것을 떠올렸다 해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굳이 대화를 보낸 것은, 그냥. 혹은 아무 이유 없을 때 연락을 하겠노라 했으니까. 그래서 그냥. - ······ 무리하신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고맙다는 말,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 대신 칼리안은 걱정을 했다. 걱정된다는 말을 숨기지 않고 전했다. 그런 칼리안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 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연락을 취해 온 것에 대한 걱정이었다. 분명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것을 떠올리려 무리한 것은 아닌지. 싫은 기억을 떠올린 것은 아닌지. 체이스는 걱정하지 말라 이야기 하려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사실 조금 다른 기억이 함께 떠올랐습니다. 유쾌한 일이 아니어서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그 이상으로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며 생각지도 못했던 기억을 잠시 떠올리다 입을 열었다. - 이제와 같은 일을 마주한다 해도 여전히 나는 같은 선택을 했으리라는 것을 알아서. 베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베른이 있었다면, 이제와 같은 일을 마주한다 해도 고민 없이 똑같은 선택을 하고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니 체이스도 같았다. 데블란이 무엇 때문에 그리 잔혹한 일을 저질러왔는지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분명한 이유가 있어 그런 짓을 벌였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결정하고 실행한 일에 대해 실망하거나 욕지거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은, 체이스 자신이라면 베른의 그늘을 알고도 그 뒤에 숨어 홀로 빛나려 할 사람이 아님을 알았던 까닭이다. 그것이 분명한 잘못이라 하더라도 두 번을 후회하지는 않았으리라고. 그것이 체이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었다. -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괜찮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칼리안은 조금 생소함을 느꼈다. 체이스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유쾌하지 않았다는 그 일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시간의 축에 대한 이야기일까, 혹은 또 다른 것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것을 잠시 고민해보는데 체이스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 기억 속에서 아리안느도 보았는데, 지금보다 더 말이 험해서 놀랐습니다.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웃음 소리를 냈다. 베른에게 남의 속 뒤집는 방법을 알려줬던 사람이 바로 아리안느다. 세렌티의 영광을 가져간 앨런 만큼은 아니지만 아리안느 역시 꽤 괜찮은 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입담을 배워가 잘 써먹고 발전시켜 아리안느에게 다시 알려준 것은 베른이었다. 그런 상호작용의 결과였으니, 지금보다 과거에 말이 더 험했을 수 밖에. - 지금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칼리안은 그것 역시 베른의 부재 때문인 것을 굳이 알리는 대신 이렇게만 대답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테니까. 지금 체이스의 곁을 지켜줄 수 있을 사람에게까지 베른의 빈 자리가 드러나 있음을 굳이 확인시켜 줄 필요가 없었다. - 말이 아주 조금 덜 날카로운 것을 빼면 여전합니다. 여전히 잘 싸우고, 잘 혼내고, 잘 달래주고, 그렇게.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 칼리안이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체이스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 이유 없이 연락을 했는데 할 말이 너무 많았다. - 카스트린 경에게 사실을 알렸습니다. 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 믿어주지 않으면 어찌하나 고민을 했는데 다행히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장 일어나 카이리시스로 가려는 것을 간신히 붙들었습니다. 칼리안이 웃었다. 체이스의 일을 제대로 알고 곁에 있어 줄 사람이 비로소 한 명 생겼음에 웃었고, 대륙 첫 번째 소드마스터의 검을 막아설 뻔했던 일이 사라졌음에 웃었다. - 감사합니다. 그래서 칼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혼자 앓지 않고 입 밖으로 내어 주어 고맙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그 강직한 테일란을 붙들어줘서 고맙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테일란이라면 정말 큰 힘이 될 것이다. 앨런처럼. - 카스트린 경도 그 말을 하더군요. 내 일을 털어내줘서 고맙다는 말도 했고. 자신의 마지막이 아주 마음에 든다며 그것을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도 했고. 또 이것저것 고맙다는 말을 했는데 내가 그새 다 잊어버려서. 울었다는 말은 뺐다. 아무리 그래도 과거의 스승인데 위신은 세워줘야지. 스물 한 살에 검의 길에 올랐던 베른. 테일란이 자신보다 2년을 앞서 검의 이치를 깨달은 그 대단한 제자를 키워냈다는 것을 알려준 것에 고마워했다는 말도 전하지 않았다. 베른이 왜 그렇게 빠르게 소드마스터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 알게 되어서이기도 했지만, 아무리 이야기를 해 주어도 테일란이 ‘베른’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함을 알게 된 탓이 더 컸다. 그래서 칼리안에게 그 말을 전하지 못했다. - 카이리시스에서 내가 칼리안 왕자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또 있는데. 이렇게 말한 체이스는 잠시동안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사실 카이리시스에서 체이스가 칼리안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꽤 많았다. 여차하면 다 포기하고 플란츠를 정말 죽여버리려 했었다는 이야기도, 체르밀에서 란델을 만나 경고아닌 경고를 했었다는 이야기도, 아르센을 보고 마음이 복잡했다는 이야기도, 플란츠에게 베른의 이름을 말했었는데 아마 플란츠도 그것을 잊어버렸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그리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꽤 많았다. - 검을, 가지고 갔었습니다. 만약 맞다면 돌려주고 싶어서. 베른이 썼던 새하얀 강철의 검. 세크리티아 대왕의 남편, 기사 베른 네리아드가 썼던 그 검. 지금의 베른과 달리 그 이름의 뜻대로 정말 잊히지 않는 영웅이 된 그의 검을 칼리안에게 주려고 가져갔었다. 하지만 건네지 못했다.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해서. 그런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 저는 다른 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체이스 왕세자께서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에, 체이스가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검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린 적 없었던 탓이다. 비록 칼리안이 볼 수 있을 얼굴은 아니지만 분명 놀란 얼굴을 한 채로 팔찌를 내려다봤다. 때문에 대답이 없자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 커피 주실 때 알았습니다. 생각해보니 호위도 없이 혼자 계시면서 너무 여유로웠고. 그래서요. 체이스 손의 굳은살을 보았다는 소리였다. - 그런데 제 주변에 검만 보면 깨뜨리고 싶어하는 미친 마법사 한 명이 있습니다. 어떻게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보기 좋게 미쳐있는데, 혹시 마주치게 되면 검은 내보이지 말아주세요. 이번에는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르센 헤르츠. 그에 대한 말을 건네오는 것에 한 점 머뭇거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체이스는 다시 한 번 안심했다. 생각만큼 끔찍한 곳에서 홀로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파란 머리 마법사. 조심하겠습니다, 칼리안 왕자. 생각만큼 끔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체이스 역시 알았으니,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에도 서늘한 기분이 조금쯤 줄어들었다. - ······ 이름. 칼리안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리고 한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체이스가 찻잔에 든 것을 세 번쯤 마시고 내려놓았을 때가 되어서야 다음 말이 이어졌다. - 이름, 부르고 싶으신 대로 불러주셔도 괜찮습니다. 누군가 함께 들을 수조차 없는 이 대화에서까지 굳이 참아내지 말라는 말. 이름을 내려놓은 것은 칼리안의 몫이니 그것까지 체이스가 나눠 감당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였다. 체이스가 싱긋 웃었다. 오랜만에 내려 마시는 커피에서 민트 향이 나는 기분이 꽤 마음에 들어서. - 술 마실 때. 그렇게 할게요. 나중에. 칼리안의 웃음소리가 전해졌다. 부드러운 음성이 이어졌다. - 바닷가에서. - 네. 바닷가에서. * * * 피식거리다 웃더니 피식거리다 웃는다. 아무래도 내 동생이 진짜 좀 이상한 것 같다. 아니지. 이상한 게 맞다. 아무튼. 이상하든 돌았든 미쳤든, 웃든 말든 다 상관 없는데. 여긴 내 방이었다. 식기를 치우기가 무섭게 시작된 저들의 대화가 끝나지 않음에, 내 동생인데 남의 동생인게 맞지만 아무튼 내 동생인데 연세는 좀 있으셨던 것 같은 그런 이상한 내 동생을 언제쯤 쫓아내야 할 까 고민하고 있을 때 쯤. -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공사 다망하신 동생님을 대신해 들어오라 이야기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레릭이 혼자 왔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차를 올려온데다 얀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시종들간의 다른 일이 잠시 있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별 생각 없이 앉아있던 플란츠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커피 향기. - 달칵 얇게 썰어 말린 귤의 반쪽에 초콜릿을 입힌 디저트가 내려놓아졌다. 그리고 레릭은 새콤 달콤한 그것과 무척이나 잘 어울릴 음료를 함께 내려놓았다. 그래. 초콜릿과 같은 색을 내는 커피였다. 어느새 대화가 끝이 났던지, 더는 빛나지 않는 반지를 잠깐 쳐다본 칼리안의 시선이 커피에 가 닿았다. “말고.” 그리고 플란츠가 말했다. 커피 말고 다른 것 가져오라는 소리다.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이제는 저 정도 말은 곧바로 알아듣게 된 레릭이, 내려놓은 커피를 도로 가져가려 다가왔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살짝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아니야. 잘 마실게. 고마워.” 덕분에 레릭은 두 번 수고할 것 없이 인사를 건넨 뒤 밖으로 나갔다. 3층에 사는 왕자님은 고맙다는 말도 하시는구나,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은 그런 눈빛을 한 채로. 칼리안에게 커피를 가져다 준 것을 알게 된 얀에게 얼마나 혼이 날지도 모르는 채로. 레릭이 나가며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릴 때 쯤, 칼리안이 아주 의외라는 얼굴을 한 채 플란츠를 쳐다봤다. 플란츠의 앞에서 커피를 마신 적이 없기는 했으나, 마신 적 없었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역시 보인 적 없어서였다. 조용히 손을 들어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은 칼리안이 말했다. “우리 형님, 그 정도 눈치면 어디 가셔도 굶지는 않겠습니다.” “짖지 말고 나가.” 말린 귤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먹은 칼리안이 아직 한참 남은 커피를 툭 쳐 보였다. 다 마시고 알아서 나갈 테니까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바빠.” 그랬더니 플란츠가 걸치고 있던 가디건을 툭툭 건드려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옷 갈아입고 나가서 할 일 많으니 내 방에서 이제 좀 꺼지라는 소리다. 새하얀 가디건. 긴 가디건. 그것을 본 칼리안은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잊지 말았어야 할, 하지만 상황과 기분이 영 좋지 않아 그만 잊고 지냈던 그 일이 선명히 떠올랐다. “형님.” 칼리안이, 짜증 가득한 얼굴의 푹 삶은 완두콩을 불렀다. 그러고보니 너 이 자식 지난번에 우리 히나 로브 왜 들고 있었냐고. 생각해보니 그 때 이미 한 번 참았는데 조금 전에는 닳아 없어질까 아까운 그 고운 이름까지 입에 올렸지 않느냐고. “대련 한 번 하시겠습니까.” 플란츠가 바쁘다 했던 것은 홀랑 까먹은 채로 그렇게 방긋방긋 웃었다. 하마터면 두 번 참을 뻔 했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안도감 가득한 미소였다. 그 뒤에는 향 좋은 커피를 다시 한 번 마셨다. < 제33장. 개 키울 거라고 (1) > 로튼 대장간의 주인 긱스는 요즘 좀 한가했다. 애초에 로튼 대장간에서는 검 종류가 아니면 만들지 않았던 탓에, 손님도 별반 없고 할 일도 그리 많지 않았다. 다른 곳처럼 철을 쓰는 물건들이라도 좀 만들어다 팔거나, 하다못해 마구라도 만들면 폴룬 상단에 내다 팔기라도 할 텐데 긱스의 고집이 그것을 허락하질 않았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적당히 먹고 살면 되지 사람이 꼭 바쁘게 돈 벌 이유가 있나, 뭐 이런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으니 전쟁도 없고 주변에 야만족도 없는 수도 카이리시스에서 검 만드는 사람이 바빠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손님 오셨어요!” 그렇게 한가한 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인가, 용돈이나 좀 주며 부리던 아이가 신이 나서 들어오며 이런 말을 했다. 그런 아이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이를 본 긱스의 눈이 벌어졌다. 생김이 보여주는 나이에 비해 상당히 큰 키, 검은색의 가죽 조끼와 하얀 셔츠, 그리고 짙은 갈색의 바지를 입은 소녀. 거기까지는 특별히 긱스의 시선을 끄는 것이 없었으나 그 허리춤에 매달린 검은 그렇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검 하나는 제대로 보는 긱스가 아니던가. 한 눈에 보아도 그것은 아주 무겁고 품질이 굉장히 좋은 검이었다. 소녀가 한 발 앞으로 나와 긱스의 앞에 섰다. 할 일 없고 아는 것이라고는 쇠 다루는 것밖에 모르는 긱스였지만 그래도 눈치는 있었다. 저 정도의 무거운 검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닐 만한 블론즈 색 곱슬 머리 소녀라면 이 카이 리시스에, 아니 이 카이리스에 한 명 뿐이지 않나. “설마, 지그프리드 소공작님 되십니까?” 그래서 이렇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렇습니다.” 무표정해서 동그란 눈매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얼굴에 딱 어울릴 만한, 조금 낮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을 한 소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것을 보자마자 긱스의 허리가 수그러졌다. 이 쇳내 나는 골목의 구석진 가게에 왜 자꾸 이런 거물들이 찾아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평생을 가야 이야기 한 번 나누기 어려울 사람이다. 왕족 다음으로 지체높은 신분인 공작의 후계가 아니던가. 뿐만 아니라, 신분의 귀함을 떠나서 이 거리에서 무기 좀 만든다 하는 이들 치고 저 소공작을 만나보고 싶어하지 않을 이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지그프리드의 후계자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선망의 대상인데, 얼마 전 카이리시스를 들었다 놨다 했던 대단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내 정혼자 찾겠다고 2왕자를 억류하고 브리센을 압박했으니, 그 배짱과 행동력이며 자신감이 가히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정도였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러니 여러모로 긱스의 우상이 될 만한 그런 인물이 지금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뵙게 된 것이 가문의 영광입니다, 소공작님.” 때문에 긱스는 이렇게 진심 가득 담긴 인사를 올렸다. 사실 한 달 쯤 전에 찾아왔던 칼리안의 정체를 알았을 때에는 너무 놀라서, 인사를 하기는 했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도 아무튼 지금은 제대로 된 인사를 했다.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드미레아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날이 조금 상했는데, 이 곳에 한 번 와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찾아왔습니다.” 존대였다. 드미레아는, 제 가문의 아랫사람이 아닌 이상 그 누구에게든 함부로 말을 내리지 않았다. 물론 세리에로부터 같은 교육을 받은 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런 것을 알 리 없던 긱스는 더더욱 황송한 얼굴이 되어 더듬더듬 답을 했다. 드미레아에게 그 말을 했을만한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를 생각하는 것도 잊은 채였다. “네, 네. 제가 보아드리겠습니다.” 이 말에 드미레아가 검을 풀어 긱스에게 건넸다. 생각했던 그 만큼의 무게였던 탓에 긱스가 짧게 숨을 멈췄다. 아무리 지그프리드라지만 아직 앳된 소녀의 허리에 매여 있었다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의 무게였다. 조심스럽게 검을 뽑아 살펴보던 긱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는 몇 번 검을 올렸다 내렸다 해보고 손잡이도 잡아보며 무언가를 살피다 물었다. “저······ 소공작님. 혹시 본래의 검날을 떼고 새 날을 쓰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드미레아가 살짝 웃었다. 혹시 검이 상하면 이곳을 한 번 들러보라 했던 칼리안의 말을 새겨듣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긱스가 말한대로 최근 검의 무게를 많이 늘렸지 않나. 다만 지금 저 검은 드미레아조차 잘 느끼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재조립 된 것이었다. 그것을 바로 알아차렸으니 확실히 눈썰미가 다르다 할 일이었다. 한동안 검을 살피던 긱스가 입을 열었다. “저······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상한 날보다도, 검날과 손잡이의 무게 중심이 조금 맞지 않아서 쓰시기에 조금 불편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 역시 정확했다. 무게를 늘린 뒤 손에 이런저런 상처가 생긴 것도 어느정도는 그 때문이었다. 손에서 자꾸 밀려나는 검을 다잡고, 조금씩 틀어지는 검의 움직임을 힘으로 다루려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을 눈으로 본 것처럼 말한 긱스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 드미레아를 향해 다시 말했다. “혹시 검날을 손봐드리는 김에 손잡이를 새로 달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굳이 본래의 손잡이를 계속 쓴 것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서 한 질문이었고, 긱스의 말에 조금 생각을 해보던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함께 부탁하겠습니다.” 사실 그동안 길이 잘 들어 있던 손잡이를 버리기가 아쉬워서 계속 같은 손잡이에 날을 바꿔가며 썼었는데, 이쯤 되니 한번 새 것을 잡아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 말을 들은 긱스가 고개를 살짝 숙여보인 이후에 말했다. “하루 정도는 걸립니다, 소공작님. 다 만들어지면 제가 공작저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가게를 비워야 하지 않습니까.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멋있고 능력도 있고 왕족에 버금가는 신분인데 아랫사람에게 존대를 하는 소공작님이 배려심까지 넘치는 것을 알게 된 긱스가, 그야말로 어찌 할 줄을 모르며 말했다. “할 일이 없습니다, 소공작님.” 라고,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스럽지만 기쁜 마음에 너무 진심어린 소리가 나와버렸다. 새빨개진 얼굴의 긱스를 보던 드미레아가 다시 한 번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가게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다 가까운 곳에 놓인 칼을 하나 들어 살펴본 뒤 말했다. “이 곳의 물건은 모두 직접 만듭니까.” 순간 긱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보일 뻔 했다. 칼리안이 이 곳을 찾았을 때에도 똑같은 질문을 했던 탓이다. “네, 소공작님. 모두 제가 만들었습니다.” 솜씨 좋고 할 일 없다는 긱스를 잠시 바라보던 드미레아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말했다. “내일, 검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주면 고맙겠습니다.” 직접 오겠다던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할 일도 없고 공작저를 구경해보는 일도 하게 되었으니, 긱스는 아무래도 좋은 얼굴로 그리하겠다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 날, 검 쓸 일이 엄청나게 많아진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기사들이 쓰는 검을 전담하여 만들고 수리하는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을 들었다. 긱스는 그 자리에서 감사하다고 소리쳤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적당히 먹고 살면 된다던 인생 목표가 조금 바뀌는 순간이었다. * * * 내기.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해서라기 보다는 재미가 있어서 했다. 거의 대부분 이겼고 거의 대부분 돈을 받지 못했다. 어디 사는 보라색 눈의 왕세자가 매번 내기 내용을 잊어버렸다는 핑계로 그 한 푼을 내주지 않은 까닭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아주 오래전의 언젠가에는 비가 오는 것이나 키리에의 키를 두고 내기를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얀과도 키 내기를 했다. 덕분에, 카이리스의 양대 기사 가문의 핏줄로 태어나 쑥쑥 잘 크고 있는 새끼 코끼리 한 마리가 매일 아침 조금씩 커지는 제 키를 보며 울상을 짓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치기만 하면, 지그프리드 공이 썼던 기술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대신 못하시면, 5층은 형님이 가십시오.” 이렇게. 플란츠를 상대로도 내기 아닌 내기를 제안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칼리안에게 한 번 꺼냈다가 대륙 최고의 검은 말 한 마리를 고스란히 뺏긴 전적이 있던 플란츠가 아니던가. 때문에 플란츠는 칼리안의 말을 듣고 인상을 좀 찌푸렸다. 아무리 오러를 발현하지 않겠다 했지만 오러를 속에 담아둔 이상 그 신체 능력 자체부터 확연히 다르지 않나. 때문에 받아들이자니 불리할 것이 뻔하고, 받지 않자니 알려주겠다는 기술을 포기하기가 싫었다. 란델을 마주보는 것과 슬레이만의 기술, 둘의 무게를 잠시 재 보던 플란츠가 짧게 입을 열었다. “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칼리안이 씩 웃었다. 동시에 플란츠가 검을 휘둘렀다. - 부웅! 늘 선제공격을 하던 것은 칼리안이었다. 소리 없이 사라져서는 앞이든 뒤든 갑자기 튀어나와서 검을 내질렀었으니까. 그것을 잊지 않은 플란츠가 먼저 공격을 했고, 아직 웃음을 지우지 않은 칼리안이 허리를 틀어 검을 피했다. 날카로운 기세를 잃지 않은 묵색의 검이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는 칼리안의 옆구리를 할퀴려는 것처럼 날카로운 바람을 흩뿌렸다. - 우웅! 두 번의 공격을 피한 뒤, 오러 없이 마력으로만 만들어 낸 검붉은 빛의 검이 발현됐다. 부드럽게 팔을 뻗어 자신의 허리를 노리던 플란츠의 검을 밀어낸 칼리안이 발을 박찼다. 오러를 쓰지 않겠다 하였으나 그것이 곧 플란츠를 봐주겠노라는 말은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의 모습이 작게 일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속도를 냈다. 검을 틀어 회수한 플란츠가 계속 회전하려는 힘에 몸을 실어 방향을 바꿨다. 순식간에 반대 방향으로 선 채로 한 발을 뻗으며 검을 내질렀다. - 카앙! 이미 뒤로 움직여 공격을 해오던 칼리안의 검이 막히며 날 선 소리를 냈다. 어둠을 뚝뚝 흘리는 검붉은 검,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는 묵색의 검. 두 검이 서로 교차한 사이로 붉은 눈과 연두색 눈이 닮은 듯 닮지 않은 듯한 빛을 냈다. 맞닿았던 검이 떨어짐과 동시에, 예리하게 바람을 가르는 한 줄기의 살기와 묵빛의 칼날이 함께 달려들었다. 칼리안은 둘 모두 피하지 않고 검을 들어 그것을 받아쳤다. - 카아앙! 그리고 플란츠의 앞으로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급히 손잡이를 틀어 검을 막는 플란츠에게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사들 앞에서는 살기 내보이지 마십시오.” 플란츠의 검술이 어느정도인지, 살기를 다룰 정도가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 제대로 된 실력이 후작에게 전해져서 좋을 것 없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대답 대신, 플란츠의 살기가 한 층 짙어졌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니 짜증난다는 뜻이다. - 카앙! 캉! 위에서 아래로 내리친 것을 막으니 검을 되돌려 횡으로 베어내려 든다. 그 기운에 상당히 날이 서 있는 것을 느낀 칼리안이 슬쩍 웃으며 바닥을 박찼다. 베어야 할 대상 없이 휘둘린 검 끝에 바람이 일었다. 바람 앞에 서 있었어야 할 칼리안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정도 속도에는 이제 익숙해진 플란츠가 되돌린 검을 틀어 오른쪽을 향해 내뻗었다. - 부웅! 하지만 이번에도 플란츠는 칼리안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어느새 방향을 다시 되돌린 칼리안이 플란츠의 뒤에서 검을 들어 내리찍으려 하고 있었다. 그 기운을 느낀 플란츠가 빠르게 허리를 틀며 묵색의 검을 가로로 들어올려, 머리 위로 내리떨어지는 검을 막았다. 올려 친 검을 다시 회수하며 한 발을 물린 플란츠가 칼리안의 어깨를 노리며 검을 내리그었다. - 카아앙! 캉! 카앙! 확실히 감각이 좋은 편이라는 것을 느낀 칼리안이 아래에서 위로 검을 쳐올렸다. 드미레아의 것보다는 가벼우나 충분히 묵직한 타격이 느껴지는 그 공격에, 플란츠가 손에 힘을 쥐며 검을 다잡았다. 동시에 칼리안의 손에서는 검이 사라졌다. 대사막의 늑대를 상대했을 때 그리했던 것처럼, 회전하는 검의 힘을 이기려 무리하는 대신 검을 그냥 없애버린 것이다. - 우웅! 다시 만들어낸 검이 이번에는 반대로 플란츠의 옆구리를 노리며 뻗어나왔다. 재빨리 발을 움직여 검을 피한 플란츠는, 처음으로 본 칼리안의 이런 공격 방식에 짜증을 내는 대신 조금 더 검 끝에 집중했다. 회수되는 칼리안의 검을 길게 밀어내듯 쳐낸 플란츠가 발을 박찼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여 휘둘러지는 검의 반경 아래로 통과하며 굳게 잡은 검을 가로로 잡고 다시 한번 칼리안의 허리를 베려 했다. - 카앙! 캉! 발을 뒤로 물린 칼리안이 세로로 쥔 검으로 공격을 막았다. 상대의 공격 반경 안으로 파고드는 꽤 대담한 공격에 칼리안의 입꼬리가 한 번 더 호선을 그렸다. 칼리안을 지나쳐 뒤로 돌아간 플란츠가 내리 잡고 있던 검을 대각선으로 들어올리듯 쳐올리려 했을 때. 분명 등을 보이고 서 있던 칼리안이 툭, 하고 제 자리에서 바닥을 한 번 찼다. 그리고 또 한 번 눈 앞에서 사라졌다. ‘왼쪽.’ 타닥, 하고 발을 밟는 소리가 왼쪽에서 들렸다. 그리고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조금 뒤에서 들렸다. 살짝 눈꼬리를 좁히던 플란츠가 정면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그와 동시에 조금 아쉬운 생각을 떠올렸다. 아. 공격이 아니라 막았어야 했는데, 하고. 플란츠보다 조금 빠르게 뻗어나온 칼리안의 검이 플란츠의 목을 스치듯 베어냈다. 살짝 베인 상처에서 피가 맺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 사락 칼리안의 소매를 여미던 끈 장식 하나가 예리하게 잘린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 제33장. 개 키울 거라고 (2) > 흉터. 상처가 모두 아문 것을 증명하듯 남은 자국. 그것을 아는 이들은 이제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었지만, 베른의 손과 몸에는 꽤 많은 흉터가 있었다. 그리고 칼리안의 오른쪽 손바닥에도 가늘고 긴 흉터가 있었다. 무슨 의도였는지는 플란츠만이 알 그 망나니같은 행동 때문에 입은 상처가 바로 치료되지 않아 생긴 것이었다. 물론 그 외에는 다른 흉터가 전혀 없었다.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착실한 치유력을 보인 까닭이었다. 플란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 심장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맹세의 인은 치료하지 않는 축복의 힘이지만, 칼리안에게 목을 베여 생긴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하여 눈 앞에서 상처가 아물어 사라질 만큼은 아니었으니, 히나가 없는 이상 적어도 반나절은 지나야 모두 사라질 터였다. “보기 좋은 상처는 아니구나.”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웠음에도 상처를 가리지는 못했다. 하얀 목에 길게 생긴 혈선을 두고 건네진 말에, 플란츠가 표정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보기 좋은 상처도 있습니까.” 실리케의 비수에 상처를 입기 얼마 전, 이름 없는 새끼 고양이였던 루시가 멋 모르고 장미 정원에 들어갔던 날. 그래서 란델로부터 히나의 앞을 막아섰던 날. 그날 이후로 이렇게 마주보며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처음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려면 둘 사이에 제대로 된 대화라는 것이 오고 갔던 적이 있었는지부터 따져보아야 할 테지만 어찌됐건 플란츠는 그 정도로 생각을 했다. “때로는 필요한 상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런 것을 보기에 나쁘다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앞에 앉은 란델의 말에 공감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특히 검을 쥘 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굳은살이 있다면 검을 쥐는 것이 조금 더 편하지 않을까, 하고. 다만 란델이 이야기하는 필요한 상처라는 것이 검사들의 굳은살을 뜻하지는 않을 터였다. 실리케의 비수. 그 날에 입은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그 때 네가 만약 깨어 있었다면 과연 지금처럼······.” “드릴 말씀만 하고 가겠습니다.” 그에 대해 많은 생각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던 플란츠가 이렇게, 란델의 말을 막았다. 아무것도 없는 란델의 방에서는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다. 장미 향이라도 가득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꺼려했으나, 생각해보니 이미 이 곳에 왔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향이 나지 않았으니 란델을 만나는 일을 조건으로 두고 내기를 걸었겠지. “할 말이 있다 전해 온 것은 네가 아닌데. 재미있는 일이구나.” 재미라는 것이 무엇인지 과연 알까 싶은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싫으십니까.” 그래서, 재미라는 것이 무엇인지 사전적인 정의만 간신히 알고 있는 플란츠는 이런 대답을 했다. “싫으시면, 가겠습니다.”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타이를 매고, 셔츠의 칼라 끝을 서로 연결하는 백금 체인 장신구를 했다. 체르밀 궁에서 늘 걸치고 있던 가디건 대신 품에 딱 맞는 재킷까지 입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드는 것이 과연 답답한 옷 때문인지 혹은 앞에 앉은 진짜 형제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던 탓인지 가늠해보는 대신, 플란츠는 찻잔을 들어 속에 담긴 것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쓰디쓴 초콜릿이 그대로 녹아있는 그 맛이 썩 달갑지는 않았지만 앞에 앉은 란델의 눈을 마주보는 것만큼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겠지.” 칼리안이 왔든, 아니라면 찾아오겠다 했던 칼리안을 대신해 플란츠가 왔든. 둘 중 누가 왔더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소리다. 란델 역시 이제는 칼리안의 그늘에 들어서기로 했으니 이미 칼리안과 손을 잡은 플란츠가 찾아오든 칼리안 본인이 직접 찾아오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말이기도 했고, 둘 중 누가 왔든지 결국 란델에게는 ‘누군가와 잠시 대화를 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은 플란츠는 잠시 아쉬움을 가졌다. 란델의 이런 감정에 대한 아쉬움이라기보다는 혹시라도 란델이 자신과 대화하기를 꺼려한다면 그것을 핑계로 그냥 내려가버릴 생각을 하고 있어서 가지게 된 아쉬움이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 했으니 빠져나갈 곳 없이 그대로 계속 대화를 해야 했으니까. “발칸에 치유사 한 명이 있습니다. 텐실의 치유사를 통해 훈련이 필요할 것 같아서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결국 플란츠는 이렇게, 란델에게 부탁하는 말을 했다. 그리고 속으로 딱 두 명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한 명은 이 이야기를 꺼내게 된 원인을 제공한 플란츠 자신이었고, 또 한 명은 아르센이었다. 칼리안과의 대련은 졌지만 내기에서는 분명 이겼지 않나. 때문에 칼리안에게 슬레이만이 사용하는 보법 하나를 배웠다. 속도가 빠른 이를 상대할 때, 효율적으로 몸을 피하고 곧장 반격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술이었다. 그 뒤 칼리안은 얀을 시켜 잠시 뒤에 자신이 찾아가겠다는 말을 란델에게 전하도록 했다. 그리고 아르센에게 연락이 왔다. 급히 전할 이야기가 있어 칼리안을 찾아오겠다는. “허울이 아니었나보구나. 네가 내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을 보니.” 덕분에, 이렇게. 굳이 들을 필요 없는 이야기까지 듣게 된 것이다. “제가 발칸에 나선 것을 허울로 보셨습니까.”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 눈에 보여주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이름 뿐인 부군단장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얼마 전 칼리안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플란츠 역시 똑같이 여기고 있었을 테니까.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란델을 향해 플란츠가 다시 무어라 답을 하려는데, 창 밖의 장미 정원을 한 번 바라본 란델이 플란츠를 깊이 응시했다. 피하지 못할 깊은 심연이 생명 가득한 연두색의 눈을 집어삼키듯 바라봤다. “허울이리라 생각했다. 네가 감히 셋째의 덕을 보려 할 줄 내가 어찌 알았겠느냐.” 제대로. 관심을 두고 지켜본 적도 없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런.” 플란츠가 짧은 소리를 냈다. 손을 올려 타이 매듭을 잡았다.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것을 풀어내려다, 깊은 숨을 들이쉬며 도로 손을 내렸다. 좋지 않은 행동을 란델의 앞에서 보여야 할 필요는 이제 더 이상 없어서 참아냈다. “제가 칼리안에게 뭘 했는지, 기억을 하기는 하십니까.” “그것을 기억에 담아 둘 필요가 있겠느냐. 그저 아는 것을 말했을 뿐.” “적어도 그것이 형님께서 하실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하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 쉬운 것을 셈하기도 어려우십니까.” 이렇게 말한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하나만 하시죠. 언제까지고 피해자인 척, 상처를 입어오기만 한 척, 주변에 보이는 것 아무것도 닿지 않게 전부 다 닫은 채로 장미 가지나 쳐내면서 멀찍이 서 계시든지. 아니면 제대로 마주해 본 뒤에 제 탓을 하시든지. 둘 다 하시는 것은 욕심입니다.” 이제 막 심연에서 벗어난 연두색의 눈에 불이 붙은 것을 본 란델이 조용히 웃었다. * * * 짙은 회색의 대리석 바닥. 얼룩 하나 없이 잘 닦인 바닥에 검붉은 빛이 비춰져 반짝였다. - 도도도도, 탁! 고양이라는 생물이란 앞에서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있다면 일단 잡고 보아야 하는지라, 그것을 본 루시가 열심히 달려와 반사되는 빛을 붙들려 했다. 그러나 그 앙증맞은 솜방망이같은 두 발이 그것을 잡아채기 직전에 팟 하고, 바닥에서 반짝이던 빛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애옹!” 범인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는 똑똑한 루시는, 소파에 앉아 자신을 구경하는 새빨간 눈을 보며 한 번을 울었다. 그러자 그런 루시를 달래주려는 듯 조금 다른 크기와 모양새를 가진 검붉은 빛이 저만치 먼 곳에 두둥실 떠올랐다. - 도도도도, 탁! 이번에는 빛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것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형체가 없는 반짝거림이었으니, 두 발로 디디고 선 루시가 아무리 앞 발로 잡아 채려 한들 잡힐 리 없는 것이다. “므에옹!” 검붉은 빛을 붙드는 것에 연달아 실패한 루시가 억울하다는 듯한 소리를 내며 칼리안을 올려다 봤다. 윗방에 있을 누군가를 꼭 닮은, ‘내가 너 때문에 굳이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아야겠냐’ 쯤으로 해석하면 좋을 듯한 짜증 가득한 얼굴을 본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루시. 기분 나쁜 이유가 이걸 못 잡아서야?” 이런 말을 알아들을 리 없을 루시는, 칼리안의 의지에 따라 방 안 이곳 저곳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빛을 좇았다. - 도도도도, 탁! 물론 결과는 똑같았다. 세 번이나 같은 일을 겪고 온 몸의 털을 동그랗게 부풀리며 노려보는 루시를 본 칼리안의 웃음이 다시 터졌다. 소름끼치는 기운이 가득한 검붉은 오러. “보통은 잡으려 하기도 전에 기분 나빠하거나 무서워할텐데. 그냥 신기하기만 한가보네.” “애오옹!” 항변인지 말대꾸인지 경고인지, 아직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의미가 담긴 그 울음소리에 마음이 조금쯤 편해졌다. 방 이곳 저곳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빛을 따라 뛰어다니는 루시를 보며, 칼리안이 다시 한번 말을 건넸다. “창 밖 빗물도 잡으려 들더니. 잡히지 않을 것들을 그렇게 좋아하면 어떡해.” “애옹!” 아무리 봐도 말대꾸다. 억울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지,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간다는 말을 하고 싶은지, 이게 다 너 때문 아니냐는 말을 하고 싶은지는 몰라도 말대꾸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괜히 놀려 미안한 마음이 든 칼리안이 말린 소고기 한 조각을 꺼내 루시에게 건넸다. 도도도도, 하는 소리를 내며 달려온 루시가 냄새 좋은 간식을 물고 저만치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 그리고는 행복해하는 얼굴이 되더니 짭짭짭 하는 소리를 내며 육포를 먹기 시작했다. 보고 있으면 밑도 끝도 없이 평온해지는 그 작은 생명을 보던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개 키울 거라고 했었는데, 널 키우고 있네.” 정확히 따져본다면 루시를 키우고 있는 것은 팔할이 완두콩이지만, 누구 손에 자라고 있든 루시는 칼리안의 고양이였으니까. 사람의 목소리가 한 번 가고 고양이 울음이 한 번 돌아오고 그렇게 도란도란, 칼리안은 잠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얀이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오는 파란 머리 마법사를 본 칼리안이 웃었다. “다 나았습니까.” 어깨를 고정시키던 붕대를 푼 것을 보아서 하는 말에,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걱정해주신 덕분에 빨리 나았습니다, 왕자님.” 걱정은 전혀 안했다고 하면 서운해할까봐 칼리안은 그냥 다시 한 번 웃기만 했다. 잠시 밖에 나갔던 얀이 다시 돌아와서는, 아르센의 머리카락과 완전히 반대되는 새빨간 색의 체리가 잔뜩 올라간 케이크와 홍차를 내려놓고 나갔다. 케이크 한 귀퉁이를 잘라 한 입 먹는 아르센을 향해 칼리안이 말했다. “경이 나에게 중요하게 전할 말이 있다 들었는데.” 그것이 만에 하나 그 이상한 동상 만드는 것을 허락해달라는 헛소리면 당장 다시 팔을 분질러버릴 생각이었다. “네, 왕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그것에 대해서도 언젠가 허락을 맡을 생각이 있기는 했으나, 다행히 아르센은 오늘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기사단 카렌의 기사가 오늘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전해주었는데,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부군단장님께서 종일 자리를 비우셔서 저에게 왔다고 하더군요.” 아. 하필 오늘. 할 일이 있고 바쁘다 했던 플란츠가 생각났다. 아마 기사단에 가려 했던 모양이었으나 그리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그대로 대련을 했던 것인데, 그 사이에 세크리티아의 새가 다녀간 듯 했다. 아르센이 품에서 꺼내 놓는 몇 장의 종이를 보며 칼리안이 묘한 얼굴을 했다. 분명 체이스는 아르센을 믿어도 좋으리라는 내용의 대화를 칼리안과 나누기 전에 저 서신을 보냈다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세작이 플란츠를 대신해 아르센을 찾은 것은 분명, 체이스가 스스로 사고한 결과로 아르센도 믿을 수 있는 이의 범위에 넣었다는 뜻일 터였다. “그런데 왕자님. 제가 일부러 보려 한 것은 아니었는데 실수로 편지를 떨구는 바람에 내용을 조금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 알리지는 않았습니다.” 아르센을 믿을 수 있는 이의 범주에 넣은 체이스가, 만약 플란츠가 부재인 경우 아르센을 통해 편지를 전달해달라 일렀고 플란츠가 자리에 없었다. 플란츠가 자리에 없게 된 것은 칼리안 때문이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무슨 관계이시기에 이런 일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니 아르센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결국 칼리안의 탓이었다. < 제33장. 개 키울 거라고 (3) > 언젠가는 해야겠지, 하고. 몇 번이고 미뤄온 이야기. 그것을 홀로 떠올려보던 칼리안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칼리안의 비밀에 대해 무엇 하나 빠짐 없이 전부 아는 이는 앨런이었고, 칼리안의 비밀을 절대 알아야 하지 말아야 할 이는 르메인이었다. 물론 죽을 때까지 비밀을 숨겨두었으면 하는 이는 얀이었다. “······ 그것 참.” 그리고, 비밀을 제발 좀 알았으면 하면서도 절대로 몰랐으면 하는 역설적인 마음이 들게 하는 이. 그것이 바로 아르센이었다. 아르센은 르메인이 알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소드 마스터의 기억을 가졌다는 그 설명만으로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칼리안도 알고 있었다. 르메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르센은 르메인보다는 조금 더 똑똑했으니까. 너무 바쁜 탓에 채 자르지 못하고 기르기 시작했다던 새파란 머리카락. 그날의 짧은 머리와 참 많이 다르면서도 또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헤르츠 경은 왜 나를 따릅니까.” 그 머리카락의 끄트머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다.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아르센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은 채 칼리안을 쳐다봤다. 때문에 칼리안이 조금 더 말을 이었다. “내가 경에게 무언가를 잘 해준 기억이 전혀 없는데 이렇게까지 나를 따르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쩐지 이상하기도 해서.” 다른 발칸의 마법사들과 같이 검은 머리와 붉은 눈 때문이라면 그것은 결코 지금의 칼리안을 따른다 볼 수 없을 일이었다. 본래의 칼리안은, 아니. 그 안의 베른은 이렇게 짙고 검은 빛의 짧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무엇을 태우는지 알지 못할 불꽃 같은 눈도 가지지 않았었으니까. 곧게 빛나는 맑고 푸른 눈이 칼리안을 봤다. 겨울의 그 작은 바닷가에서 해가 뜬 직후에 올려다보았던 하늘과 같은 빛의 눈으로 칼리안을 보면서, 아르센이 살짝 웃었다. “오늘 답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왕자님.” 왜 나를 따르는지를 묻는 질문에 좋은 사람의 범주에 칼리안 혼자 들어있어서라는 대답을 해도 됐을 테지만 아르센은 그냥 이렇게만 말했다. 그런 아르센을 보던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 알아들어서였다. “이래서 내가 결국 헤르츠 경을 멀리하지 못했습니다.” 아르센은 칼리안에게 비밀이 있음을 이미 안다. 하지만 그 비밀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 주어도 좋을지를 결정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칼리안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그냥 기다리겠노라고. 그런 뜻을 담아서 한 말이라는 것을 칼리안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때문에, “그래. 이 정도 대답은 해줘야지. 내 숨을 끊어놓은 사람인데.” 하고. 말했다. * * * 민트의 향이란 때로는 시원하다가 때로는 달았다. 그 향이 어느새 좋아져서 손에서 놓지 못하게 되었다. “아, 그러고보니.” 조용히 중얼거리던 이의 손 끝이 찻잔의 끝을 톡톡 쳤다. 고요하던 찻물에 일었던 작은 파문이 가라앉을 때 쯤, 짙은 보라색 눈이 테일란을 향했다. “그 마법사도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내가 미처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네.” 칼리안의 말을 아주 잘 따르는 듯하던 파란 머리 마법사. 그 마법사가 칼리안에 대한 일을 알고 있는지를 따져보지 않았다. 또 무슨 뜬금없는 말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테일란을 본 체이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마법사도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혹시라도 플란츠 왕자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 마법사를 통해 칼리안 왕자에게 편지를 전달하면 된다 일러두었는데. 그 마법사가 칼리안 왕자의 과거를 알고 있는지, 그것을 따져보지 않았어.” ‘그 마법사’ 아르센이 칼리안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을지, 그것을 모르는채로 아르센을 끌어들였음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소리였다. 그 뒤늦은 깨달음의 결과로 고양이와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칼리안이 또 한 번 들키는 재주를 발휘하게 생겼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체이스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음. 몰랐으면 어떡하지.” 물론 상황을 인지하는 것과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인지라. 뭐 어떻게든 하겠지 싶은 마음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한 체이스가 살짝 웃었다. 체이스의 말에서 ‘될 대로 되라’는 말 뜻을 잘 알아들은 테일란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며 물었다. “그 마법사라면, 그 마법사 아닙니까.” 도무지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할, 체이스의 동생이자 자신의 제자였던 이와 체이스의 마지막을 취했다던 마법사. 아르센이라는 마법사가 바로 그 마법사가 맞는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도 체이스는 웃거나 핀잔을 주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그 이야기를 제 입에 담지 못해 둘러둘러 말했음을 알아서였다. 맞아, 하고 대답한 체이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은 잘 갚고 있는 것 같긴 했는데 내용을 알아서 갚는 것인지를 생각 안해서.”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속으로 칼리안의 비밀을 알고 있을 만한 이들을 꼽아보며 그 안에 아르센이 있었는지를 가늠해보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칼리안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을 세는 것이 빠르리라는 플란츠의 말이 귓가에서 다시 들리는 것 같아서였다. 주변의 대부분이 사실을 아는 것 같아서, 아예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체이스의 실수였다. “이왕이면 알고 갚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이 말을 들은 테일란은, 그것이 정말 실수였는지를 묻는 대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올렸다. 시원하기도 하고 달기도 한 그 향이 테일란에게도 꽤 마음에 들었다. 그 셋째 왕자와 참 잘 어울리는 향기가 아닌가, 하고. * * * 왜 웃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왜 그리 웃는지 묻지 않았다. 란델의 웃음에 뭐가 담겼는지, 담기기는 했는지, 가늠해보려 하지 않았다. 멀찍이 선 채로 항상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전부였던 이에게 그 이상의 관심을 두고 싶지도 않았다. - 소란하게 굴지 말거라. 어차피 달라질 것은 없으니. 예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를 앞에 두고, 예전의 일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음을 말하지도 않았다. “둘 다 하는 것은 욕심이라.” 자신의 죄로부터 눈을 감은 채 홀로 아프기만 했던 것처럼 다른 이를 탓하기만 하지 말라는 이야기. 받은 상처가 많았다 해서 상처 준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이야기. 그 말을 곱씹어보던 란델이 플란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쉬운 일이구나.” “아쉬울 것 없습니다.” 둘 다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다는 소리에 대해 플란츠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런 플란츠의 얼굴을 내려다보듯 바라보던 란델이 고요하게 입을 열었다. “혹여 너는, 나 역시 전하와 같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더냐.” 르메인과 비교되는 것이 불편하다는 심기를 감추지 않고 건네진 말이었다. 한동안 그런 란델을 보던 플란츠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 정도면 란델은 알아 들을 터였다. 하지만 플란츠는 굳이 귀찮게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 전하께서는 찌른 것과 찔린 것이 다르다는 것은 아십니다. 전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했던 적은 없는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무슨 답을 드려야 할까요.” 최소한 르메인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 뒤에 숨으려 하지는 않았으니까. 자신도 피해자라는 위선을 떨지는 않았으니까. “이 왕궁의 그 누구도 형님과 같지 않습니다. 오롯이 홀로 억울하다 생각하는 분께 참으로 어울리게도.” 귀찮게 장미를 꺾어 눈 앞에 흔들어보일 필요도 없었다. 란델의 밑바닥에 르메인이 있음을 플란츠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르메인보다 못하다는 소리가 란델에게 어떻게 들릴지 역시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언젠가 칼리안이 했던 말로 하고싶은 말을 대신했다. 덕분에 란델은 또 한 번 플란츠의 눈을 응시했다. 늘 그 눈을 꺼려했으나 그렇다 하여 피하려 한 적은 없었으므로, 플란츠는 묵묵히 그 눈을 마주했다. 이제는 명확히 빛을 내는 플란츠의 눈을 향해 란델이 물었다. “그리 보면, 달라지는 것이 있더냐.” 제대로 현실을 보든 그렇지 않든 결국 달라지는 것이 없는데 굳이 왜 제대로 보아야 하느냐는 소리였다. 플란츠가 웃었다. “이미 늦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말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을 알았으므로 란델은 다른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늦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무엇이 늦었음을 알게 되는지 모르겠구나.” “어차피.” 플란츠가 손을 올렸다. 조금쯤 뼈마디가 도드라진 긴 손가락이 란델을 향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듯한 눈이 아닌 다른 많은 것이 담겨 있을 심장이 있는 곳을 향했다. “열어보지 않으실텐데. 무엇이 그렇게 궁금하신지.” 그 손 끝을 가만히 보던 란델이 플란츠를 다시 쳐다봤다. 알고 있던 모습과는 많이 다른 플란츠를 향해 낮은 목소리를 냈다. “의외로구나. 너와 이런 말을 나누는 것이.” 플란츠가 란델의 눈을 응시했다. 그 안에 참 많은 것을 담은 채로 대답했다. “저 역시 의외라 생각했습니다. 그 작은 것조차 하지 못하시는 분께서 감히 제 동생의 덕을 보려 할 줄, 제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란델이 저도 모르게 다시 한 번 웃음을 보였다. 작은 소리로 이어지는 웃음을 보던 플란츠가 다른 설명 없이 몸을 일으켰다. 어찌됐건 전해야 할 말을 모두 했으니 이만 일어나 내려갈까 하는 생각을 하던 플란츠의 귀에 란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려주고 가려무나. 무엇을 위해서 네가 이렇게 바뀌었는지.” 굳이 란델을 찾아와 굳이 부탁을 하고. 마주보기 싫으니 돌아가라 건넨 상처에 굳이 새로운 상처를 돌려주며, 돌아가지도 않고 그렇게 굳이 마주 서 가며. 굳이 그렇게 구는 것이 무엇을 위해서인지. 자리에서 일어난 플란츠가 여전히 앉아있는 란델의 등을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살려고요. 고양이 키우면서. 숨 쉬면서.” 셋째는 개를 키운다더니. 둘째는 고양이를 키운다고 하면. 이 나라는 누가 키워야 할지. 그것까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로, 할 말 끝난 플란츠가 저벅저벅 밖으로 나갔다. * * * 베른으로서 말을 했던 것은 단 한 번. 칼리안으로서 말을 했던 것은, 글쎄. 몇 번이었더라. 베른이었을 때에는 거짓말을 못했어도 숨기는 것은 참 잘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숨기는 것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숨기는 것에 신물이 나서 그런가. 아니면 그냥. “······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 들어서 그런가. 굳이 숨길 마음도 어느새 잘 들질 않아서.” 모든 이야기를 전해준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홍차 한 모금으로 마른 입을 조금 축였다. 입이 또 써서, 홍차에서 커피 맛이 났다. “그래도 경에게는 숨겼으면 하는 생각도 했고 반대로 제일 먼저 이야기를 하고 싶기도 했고. 그렇게 1년을 보냈습니다.” 주절주절, 말을 했다. 아르센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로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얼굴을 보지 않은 채로 홍차를 마시고 괜스레 곁에 다가온 루시를 끌어다 안았다. 까만 옷에 루시의 털이 잔뜩 묻어나는 것을 마법으로 털어냈다. 그렇게 했는데도 또 털이 묻어서 다시 한 번 마력을 운용했다. 그렇게 쓸데 없이 시간을 보냈다. 계속해서 아르센을 보지 않은 채로. “그것이 정말입니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아르센이 이렇게 물었다. 이야기가 믿기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아르센이 덧붙였다. “제가 정말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부군단장님 밑에서 일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 지금. “믿기지 않는 게 그쪽이야?” 저도 모르게 완전히 하대를 해 버린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아르센을 쳐다봤다. 아르센은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다치고 죽어가던 베른의 숨을 끊었던 그 날과 너무 다른 얼굴을 한 채였다. 이야기를 해 주어 고맙다는 말이나 믿기지 않는 말이라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앨런처럼 안쓰러워 하지도 않았고 키리에처럼 누군가를 향한 화를 드러내지도 않았고 플란츠처럼 죄책감을 떠안지도 않았다. 베른의 마지막을 가져갔다는 것에 대해 비틀린 자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얼굴을 한 채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기억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숨을 끊어놓은 것 말고. 전쟁에 나선 것 말고. 약속한 말을 지키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이렇게만 이야기를 했다. 그런 아르센을 가만히 보던 칼리안이 씩 웃었다. “이러니 내가 그리 할 수가 있나.” 이러니 내가. 이 미친 마법사를 멀리 할 수가 있나. < 제33장. 개 키울 거라고 (4) > ······ 칼리안이라니까. 다들 왜 그렇게 지나간 이름을 궁금해하는지. 그건 넘어가줘요. 이제 와서 경이 그걸 기억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 이름은 나한테 간신히 생긴 흉터같은 것이라서. 이제 막 아문 상처같은 그런 것. 흉터, 많았어요. 여기저기.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잘 다치고 다녀서. 아니, 왕자는 꼭 곱게 살라는 법 없잖아요. 싸우기도 하고 사고도 좀 치면서 클 수도 있지. 그렇게 살던 사람도 있고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살려고 하면서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도 생기고 그러다 보면 여기저기 다치기도 하고 못내 돌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내 형님 왜 살려놨냐고? 칼 뽑아서 해결이 될 문제 같았으면 경부터 잘라놨지, 내가. 결혼은 안했습니다. 정혼자는 있었는데 그렇게 사이가 좋진 않았어요. 서로 바빠서. 그리고 나 그렇게 나이 많지 않았는데. 지금 경보다도 더 어렸으니까. 가끔 보면 내 형님은 내가 나이가 좀 많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굳이 정정해 줄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그냥 뒀어요. 재밌잖아. 술이라. 술을 좋아했던가. 내가 너무 돌아서 취하면 제자리로 올까 하고 마시다가 곧 버릇이 되어서 마셨는데. 그걸 좋아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종종 마셨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키리에와 함께. 취하고 나면 늘 키리에가 업어줬는데 키리에가 나보다 훨씬 커서, 그게 나는 좀 편했거든. 나는 편했는데. 귀찮지는 않았는지 물어볼걸. 이제는 물어볼 수가 없네, 그런것도. 키······ 키는 꽤 컸는데. 아마 지금의 키리에나 스승님보다 조금 더 큰 정도? 이번에도 그렇게 자라면 좋을텐데, 어찌 될지 알 수가 없네요. 전하께서도 작지 않으시니 비슷하게는 커지지 않을까 하는데. 글쎄요. 머리는 길었습니다. 세크리티아 왕세자님과 똑같은 색이었고. 생긴 것이 비슷해서 나만 머리를 길렀는데 조금만 길러야지 하다가 어느새 잘 자르지 않게 되어서, 묶고 나서도 허리춤에 와 닿을 만큼은 길었습니다. 아. 혹시나 싶어 말하는 건데. 그동안 숨긴 것 이해하고 넘어가는 조건이다 하니 어쩔 수 없이 말해주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좀 찝찝해서. 그런 이유인 척, 그냥 궁금했던 척 물어봐놓고 지난번 그것 같은 괴상한 동상 만들어놓지 마요. 지금 모습이든 지난 모습이든 아무튼 다. 눈에 띄면 싹 부숴놓을거야. 아니, 동상 말고. 헤르츠 경을. 내가. * * * 유난히 더 큰 란델 방의 문은 유난히 더 굳게 닫혔다. “하······.” 이제는 그냥 버릇이 된 것이 아닐까 싶은 깊은 한숨 소리를 내뱉은 플란츠가 계단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두 형제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던 레릭이 급히 다가오며 플란츠의 뒤를 따랐다. 안에서 나눈 대화는 전혀 듣지 못했으나, 지금 플란츠의 얼굴만 보아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만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 툭!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재킷을 여민 단추를 푼 플란츠가 계단에 발을 디딜 때 즈음에는 셔츠 칼라를 이어주던 체인 장신구를 뜯어내듯 떼어냈다. 그리고는 계단을 내려가며 신경질적으로 타이를 풀었다. 숨을 죄여오던 것들에서 차차 벗어나 그렇게 4층의 방으로 내려간 뒤에는 방문 앞에 잠시 섰다. 그 후 방문 손잡이에 직접 손을 얹으며 짧게 말했다. “둬.” 레릭을 향한 말이었다. 저녁 식사도 됐고 따라 들어와 옷 시중 받을 필요도 없으니 그냥 혼자 있게 두라는 소리였다. 레릭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고 플란츠는 그대로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높고 거대한 방문을 잠시 바라보던 레릭이 함께 뒤따르던 시녀 한 명을 향해 말했다. “오늘 플란츠 왕자님 저녁식사는 따로 하시겠다고 전하게.” 누구에게 그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당연히 칼리안 측에 이야기하라는 뜻이었고, 시녀는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뒤 멀어졌다. 잠시 고개를 돌려 플란츠의 방문을 쳐다보던 레릭이 2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떤 차가 좋으려나.’ 플란츠가 란델의 방에 들어가고 난 뒤 란델의 시종이 따뜻하게 녹인 초콜릿 음료를 가지고 들어갔던 것을 이미 보았던 터였다. 플란츠의 입맛에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으니, 비록 혼자 두라 하기는 하였으나 조금이라도 안정을 취할 만한 차를 준비해 갈 생각이었다. 꽃 차는 전부 안되고 향이 진한 과일차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다과 준비실에 마련된 여러 종류의 찻잎과 말린 과일들을 보며 한참을 고민하던 레릭은 꿀에 절인 생강차를 준비하여 4층으로 올라갔다. 마음이 차면 몸도 차가울 테니까. 너무 맵고 달지 않도록 신경을 써서 탄 차를 들고, 혼자 두랬더니 왜 들어왔느냐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들을 준비까지 마친 레릭이 방문을 노크했다. “레릭입니다, 왕자님. 잠시만 들어가겠습니다.” 어차피 혼자 있겠다 하였으니 들어오란 말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레릭은 이렇게 말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는 익숙한 방. 익숙한 흰색 대리석 바닥과 익숙한 베이지색 커튼. 같은 색의 익숙한 소파와 그 곳에 등을 묻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익숙한 연두색 왕자. 그리고 그 맞은 편에 앉은 익숙한 검은색 왕자. ······ 검은색? “아, 생강인가보네.” 생글거리는 얼굴이 레릭을 향했다. “나도 한 잔만. 꿀 많이 넣고. 많이 많이.” 그리고 너무 자연스럽게 이런 말을 했다. 그래, 마치. 내 방과 내 시종인 것처럼. * * * - 달칵 얼떨떨한 표정의 레릭이 밖으로 나갔다가 한참 뒤 돌아와 꿀이 많이 많이 든 생강차를 내려놓도록, 플란츠는 계속 눈을 감은 채 소파에 기대 있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늘 그래왔듯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뭔데.” 레릭이 다시 나가며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릴 때 쯤, 칼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고 플란츠가 말했다. 그런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이 열었던 입에 담으려던 말 대신 대답을 먼저 전했다. “헤르츠 부군단장이 왔었습니다. 새들이 전한 쪽지를 전해주려다보니 형님께서 안계셔서 헤르츠 부군단장에게 갔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헤르츠 부군단장이 체이스 왕세자께서 보낸 편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끈적이고, 쓰고, 텁텁한. 기분 나쁘기만 한 쓴 초콜릿의 맛과는 완전히 다른, 알싸한 단 맛의 생강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래서.” 아르센이 체이스의 편지를 본 일을 이야기하러 이 곳에 왔느냐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알싸하고 아주 많이 단 차를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똑똑하신 내 형님께서 붕대 감는 법은 언제 배우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제 그런 것은 잊어버리셔도 됩니다. 모르고 계셔도 상관 없게 되어버려서.” 아르센이 다쳤던 날, 붕대 감는 법을 칼리안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던 아르센에게 의문을 가지지 말라 하기 위해 꺼냈던 이야기를 칼리안이 알고 있었다. 이제는 아르센의 눈과 귀를 막을 필요가 없으니 플란츠가 더 숨겨주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단 냄새 보다는 매운 냄새가 더 많이 나는 차를 잠시 들여다보던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잘 들키는 것은, 보고 배워서인가.” 칼리안이 아르센에게까지 정체를 들킨 이유가 똑같이 잘 들키는 체이스를 닮아서인지. 그런 이야기였다. 체이스가 연관된 사고였다 말하지 않았지만 듣는 것이 플란츠였으니까. 새들이 제멋대로 아르센을 찾아가지는 않았을 테니 이 일이 누구의 ‘실수’로 인해 생겼는지 정도는 바로 알아들은 것이다. “그보다는, 헤르츠 부군단장이 읽지 말아야 할 내용을 멋대로 읽어버린 것이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만.” 물론 아르센이 그것을 읽게 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칼리안이겠지만, 체이스가 의도했든 아니든 플란츠가 자리에 있었든 없었든. 아르센이 내용을 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이건 전부 그 파란 머리 마법사 때문이라고, 조금 전에는 분명 스스로를 탓했던 것도 잊고 아르센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저를 따르겠다는 이가 딱 둘이 있습니다.” 또 뜬금없다. 뜬금없이 찾아와서는 아르센에게 정체를 들켰다 이실직고를 하더니 저를 따르겠다는 사람이 둘이 있단다. “그런데 둘 다 오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서. 그래서 왔습니다.” 플란츠로서도 상관관계를 찾기 어려울 말을 꺼낸 칼리안이 살짝 웃는 얼굴을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길고 긴 말을 돌려 돌려가며, ‘뭔데’라고 물었던 플란츠의 말에 대한 답을 꺼내놓는 중이었다. “한 명은, 방금 말씀드린대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버렸고. 또 한 명은.” 그렇게 말한 칼리안의 손가락이 자신의 귀를 가리켜보였다. 그것을 본 플란츠의 눈꼬리가 찌푸려졌다. “오늘 수련을 더 하실 것인지, 그것을 물으려 레릭을 찾아갔었나 봅니다.” 미친 따까리는 읽지 말아야 할 서신을 읽었고. 충직한 따까리는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었다. 예상치 못하게 칼리안과 플란츠가 대련을 해버려서, 예정되어 있던 키리에와의 검술 수련을 혹시 그대로 진행할 생각인지. 키리에는 그것을 묻기 위해 레릭을 찾아갔다. 레릭은 5층에 있었고 5층에는 란델과 플란츠가 있었고, 키리에는 귀가 밝았다. 덕분에 란델과 플란츠가 나눴던 대화를 조금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자신이 들은 모든 것은 칼리안 역시 알아야 했으므로 칼리안에게 모두 전했다. “몰랐습니다.” 그래서 찾아왔다는 소리였다. 적당히 사이가 나쁜 줄은 알았지만 그정도로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을 줄은 몰랐어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아르센을 미루고 칼리안이 란델을 만나는 것이 나았으리라는 생각에서 꺼낸 말이었다. “싫다고 했을텐데.” 탁, 하고 찻잔을 내려놓은 플란츠가 이렇게 말했다. 5층 가라는 소리에 분명히 한 번 말했지 않았던가. 가기 싫다고. “보통 그 정도로 싫은 것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담백하게 말 안합니다.” 피망 싫다는 것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표정으로 말하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듣느냐고. 란델이 피망만큼 싫다거나 피망이 란델만큼 싫다는 정도로 알아듣지. 그게 르니에리 만큼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아무튼 그래서. 혼자 있겠다 하셨다기에 왔습니다.” 어차피 거절할 사과 대신 이렇게만 말한 칼리안이,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한 체이스의 서신을 꺼내 내려놓았다. 이런 식으로 혼자 있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말라 비틀어지게 하는지는 칼리안이 참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러느니 그냥 일이나 하고 밥이나 먹자는 의미였다. “가라고.” 3층 사는 놈이나 5층 사는 놈이나 둘 다 싫은데 넌 대체 왜 안가냐고. 딱 그런 얼굴을 한 채로 말하는 플란츠를 보며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싫은데요.” 뭐 어찌됐건 서로 꼴보기 싫은 것 마주보면서 짜증도 내고 화도 좀 내고, 그러다보면 숨도 좀 쉬게 되고. 그런 거지. * * * 또라이인 것은 알았는데. “그러니까 베른 경. 아 아직 경은 아니지만 곧 그리 될 테니 그냥 경이라고 하겠네.” 술 약한 또라이인 줄은 몰랐다. “아무튼 베른 경. 내가 말일세. 우리 왕자님이 뭘 숨겨놨겠거니 하긴 했거든. 그런데 베른 경. 왕자님이 말일세.” 개인 수련을 마치고, 씻고 나와서 플란츠의 수련 일정을 묻기 위해 레릭을 찾아갔다가 일정 대신 다른 일들을 듣게 되었다. 아무래도 칼리안에게 비밀로 해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칼리안을 찾아갔다. 이제 막 아르센이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고, 그래서 칼리안에게 자신이 들은 것을 전부 전한 뒤 나왔다. 조금 전에 밖으로 나갔던 아르센이 키리에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 혹시 술 마시나?” 그러더니 이렇게 물어봤다. “네.” 그래서 키리에는 간단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즐겨서 찾아 마셨다기 보다는 ‘시스파니안의 깊은 술냄새’의 도박꾼들이 건네는 것을 몇 번 마신 적이 있어서였다. 그러자 아르센이 반색을 하며 키리에를 데리고 왕궁 밖으로 나갔다. 얀에게 가타부타 말을 전할 틈도 없이, 메를린에게만 대충 내용을 일러두고 아르센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는.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아직 귀가하지 않은 앨런의 빈 집에 멋대로 들어왔다. 찾아온 손님이 누구인지 식별한 석상이 상큼 발랄한 노래를 마치며 문을 열었다. 솔직히 키리에는, 그것이 그냥 노래만 하는 석상이 아니라 문지기 역할도 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마법진 구축도 다 되어서 그레이스 경이 돌아왔거든. 베로니카는 그레이스 경 집에 있을걸세. 그러니 지금 군단장님 댁만큼 조용하고 안전한 술집이 또 어디있겠나.” 앨런이라면 분명히 자신의 집에 파란머리 물색머리 남자 둘이 쳐들어왔음을 알았을 것이다. 때문에 언제 어디서 불벼락이 떨어질까 긴장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키리에를 보며 피식 웃은 아르센은, 앨런이 아껴두고 있던 쓰디쓴 술을 보란듯이 죄 꺼내왔다. “괜찮아. 군단장님도 공범이거든. 그러니 이번 일은 별 말씀 못하실 걸세.” 이렇게, 가벼운 말투로 키리에를 안심시킨 뒤 술병을 까기 시작했다. 그런 아르센이 아예 취할 작정을 하고 앨런의 집에 왔음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 왕자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냐면 말일세, 베른 경. 마차 태웠더니 잘했다 하시고 건물 부수니까 급여 올려주신 그런 분이란 말이네, 베른 경. 자네도 알지 않나? 세상에 그렇게 좋은 사람이 또 없을 걸세. 그런데 베른 경. 우리 왕자님이 말일세. 붕대도 잘 감으시는 그런 분인데 검을 또 엄청 잘 다루시거든. 헌데 우리 왕자님은 마법사란 말이지. 게다가 잘 생기셨잖아.” 전부 꺼내온 술을 전부 열어서 싹 다 섞더니, 멋도 맛도 모르게 온통 섞인 그 술을 딱 한 잔 마시고 저렇게 됐으니까. “그러니 카밀론 가시기에 우리 왕자님만큼 어울리시는 분이 또 있겠나, 베른 경? 차고도 넘치는 분이시네. 그래서 내가 가끔 그런 생각을 했네. 세렌티께서 무슨 변덕으로 좋은 것을 다 모아서 주셨을까. 내가 마법사인데 오죽했으면 그런 생각까지 했단 말이지.” 그렇게 말한 아르센이 술을 더 들이킨 뒤에 말을 이었다. “그런데 베른 경. 내가 말이네. 우리 왕자님을 저기 저 세뉴 강에서 처음 봤거든. 그때 왕자님이 말에서 내려 주셨네. 그러더니 안네루시아를 계속 쳐다보셨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무슨 생각으로 그것을 보셨을까. “안네루시아를 계속 그렇게 하염없이 보셨는데······.” 여기까지 말하던 아르센이 고개를 푹 꺾었다. 온갖 술을 섞어서 딱 한 잔, 그리고 한 모금 만에 잠이 들었다. 그런 아르센을 내려다보던 키리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아르센을 들춰업었다. 그 바람에 설핏 눈을 뜬 아르센이 웅얼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업어다 놓는 것이 귀찮았을지 물어보질 못했다고 하셨는데. 귀찮았나, 베른 경? 아. 베른 경이 베른 경이 아니라서 못 물어보시겠다 했던가······.” 그리고는 또 푹, 하고 고개가 꺾였다. 그 모가지를 아예 돌려놔버릴까 잠시 고민하던 키리에가 한숨을 푹 쉬며 걸어갔다. 앨런의 집 어디에 손님 방이 있는지는 알았지만 굳이 거기까지 잘 데려가 눕혀줄 생각은 들지 않았던 탓에, 거실 소파로 아르센을 업어다 던지듯이 눕혀놓았다. 무슨 배짱으로 하필 키리에를 데려다 짧은 시간 술 친구를 삼았는지 모르겠지만. “귀찮아 했겠습니까.” 그 키리에가 이 키리에였든 아니든. 귀찮아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아르센은 듣지 못할 대답을 하고 앨런의 집에서 나왔다. 결국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였다. < 제33장. 개 키울 거라고 (5) > 혀를 차는 소리에도 머리가 울린다. 6서클이 되면 안 취하고 술을 마실 수 있게 된다던데 발칸의 마법사들은 대부분이 4서클이었고 몇몇이 5서클이었다. 그러니 아쉽게도 5서클 마스터의 장벽을 넘은 뒤 다음 서클을 열지 못한 아르센 역시 취하지 않고 술을 마시는 경지에 다다르질 못했다. 덕분에 독주를 전부 섞어놓은 술 한 잔과 한 모금을 마시고 기절하듯 쭉 잤다. 어쩌면 쭉 잔 것처럼 기절했다 깼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실 둘을 구분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아무튼 아르센은 키리에가 언제 앨런의 집에서 나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하필 자신을 붙들고 하소연을 하는 것에 매우 복잡한 마음이 된 키리에가 아르센의 목을 꺾어놓을지 말지 고민했던 것도 몰랐고 소파에 버리듯 집어던진 것도 몰랐다. “참 자알 했네.” 그리고 호기롭게 전부 열어 섞어버린 그 술들이 얼마짜리였는지, 그것도 당연히 몰랐다. 물론 앨런은 아직 칼리안이 아르센에게 비밀을 이야기 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적어도 숙취를 해소 할 만한 마실 것 정도는 먼저 내어 준 뒤에 타박을 했을 터였다. 그래서 아르센은 그 일을 설명하고 그 동안 앨런이 사실을 함께 숨겨온 것에 대해 불만을 얘기하고 당당히 앨런의 집에서 도망쳐 나올 생각이었다. 칼리안이 술을 마시겠다 하는 날에 함께 열어 오붓하게 마시려고 슬레이만이 눈독을 들이는 것도 못 본 척해가며 아끼고 아껴뒀던, 게다가 만든 지 40년이 넘었다 하니 실로 어마어마한 풍미일 것이 분명한 세크리티아산 최상급 바질리카가 그 안에 섞여있던 것이 조금 문제가 됐다. “다시 구할 수도 없는 것이니 이를 어찌할텐가?” 아르센이 자신이 사고 친 이유를 당당히 말하기에는 그 가치가 너무 엄청났다. 게다가 다른 이도 아닌 칼리안과 함께 마시려 했던 것이라 하니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숙취 때문에 머릿는 빙글빙글 돌고 속은 속대로 울렁울렁거리는 기분을 참으며,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 왕자님께서는 술 안 드실 것 같습니다, 군단장님.” 그리고 최선을 다해 생각해 낸 이따위 대답을 해서 앨런을 아주 조금 더 화나게 만들었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든 구해보겠습니다.” “데블란의 술 창고라도 털어 올 셈인가?” 대륙에 딱 두 병. 앨런의 집에 하나, 그리고 데블란의 술 창고에 하나. “털어올까요?” 아르센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되물었다. 어찌됐건 수습 가능한 선 안에서만 사고를 쳐 오던 아르센이 아니던가. 사고를 쳤으면 해결을 해야지. “지그프리드 영지까지 이동 마법진 이용해서 가면 세크리티아 금방입니다, 군단장님.” 그래서 세크리티아 왕궁 깊은 곳에 있는 국왕 전용 술 창고를 터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따져보지도 않고 이렇게, 오고 가는 것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말만 했다. 자신감인지 자만심인지 아니면 그냥 겁대가리가 없는 건지 모를 이 미친 마법사를 보며 앨런이 질렸다는 얼굴을 했다. “말을 말아야지. 되었으니 그냥 두게.” 별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라지만 아무튼 데블란이 가진 것과 같은 술을 마신다는 것이 칼리안에게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것 같으니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도 들어서 하는 소리였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국의 관계 악화를 막은 앨런이 자신보다 몇 살쯤 많아 보이는 아르센의 몰골 아닌 몰골을 보며 다시 한 번 혀를 쯧 찼다. “자네가 술 때문에 이렇게 앞 뒤 안 재고 일을 벌인 것을 아시면 왕자님이 참 좋다 하시겠네. 대체 왜 그랬나?” 빨리도 물어본다. 테이블 위에 놓인 물을 따라 석 잔 쯤을 들이킨 아르센이 전날 칼리안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니까 또 들켰단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르센한테 다 말했단다. 아르센 꼬락서니를 보니 별 문제는 없는 것 같다지만 어쨌거나 이번에도 여지없이 팔랑팔랑 다 들켰단다. 앨런의 날카로운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 내가 이 놈을 그냥.” 순간적으로 흘러나왔다 사라진 피어 때문에 앞에 있던 아르센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앨런이 아르센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무튼 자네는 집 깨끗하게 잘 치우고 오늘은 궁에 오지 말고 그냥 쉬게. 나는 왕자님 만나러 가보겠네.” 내가 이번에는 정말로 혼쭐을 내 줘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꼭 혼쭐을 내 줄 테다. * * * ······ 는 무슨. “스승님!” 비밀 캐낸 놈이 잘못한 거지. 비밀 들킨 분은 잘못이 없지.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이 있어 보였으면 적당히 눈 감고 넘어갈 줄도 알고 알아도 모르는 척 봤어도 못 본 척 들은 것도 없는 척 눈치껏 굴었어야지. 제 놈이 과거에 뭘 잘했다고 내 어여쁜 제자 면전에 대고 감히 사실을 알려달라 말라 했다는 말인가? 봄 바람처럼 따스하며 겨울 서리처럼 반짝이는 칼리안의 해맑은 웃음을 보곤 저도 모르게 화가 다 녹아버린 앨런이 아무리 그래도 비밀 들킨 것까지 잘했다 잘했다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렸다. “다음 순서 알려주시지요. 미리 가서 없애 놓을 터이니.” 그래도 예전에는 혼내는 시늉이라도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마저도 못하겠다. 알려줄 사람 순서 정하랬더니 진짜 정해서 알려주고 있는데, 아니 스승님 말을 이렇게 잘 듣는 저 하나뿐인 소중한 제자를, 세상에 혼쭐 낼 곳이 어디 있어 혼쭐을 낸다는 말인가? 그저 곱게 자라기만 하라고 보듬보듬 토닥이기만 해도 행여 탈이 날까 아까운 것을. 그러니 어여쁜 제자 마음 고생 안하도록 다음 순번을 그냥 없애버리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 “모르는 사람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제는 더 들키면 진짜 안되지 않을까요?” 아니 그걸 아는 놈이. “조심할게요.”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에우리아나 드미레아, 혹은 르메인을 없애버리면 안 된다고 부탁하면서. 결국은 또 포기했다는 한숨이 탁 새어 나왔다. 그것이 용서의 의미임을 이제 누구보다 잘 아는 칼리안이 방긋방긋 웃었다. 멀찍이 떨어진 맞은편에서 그 꼴을 보며 정말 못견디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방 주인은 신경쓰지 않은 채였다. 삶은 닭가슴살과 채 썬 아보카도를 안에 넣고 사과 식초에 살짝 절여 길게 썰어낸 오이로 돌돌 말아 만든 훌륭한 요리를 한 입 먹던 플란츠는 지금 뱉고 싶은 것이 오이인지 욕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묵묵히 식사를 이어나갔다. 어쩌다 셋이 함께 점심을 먹고 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기사단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돌아왔더니 너무 자연스럽게 앨런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두툼한 베이컨에 몽글몽글하게 잘 구워진 양파를 얹어 입에 넣은 앨런을 향해 칼리안이 물었다. “헤르츠 경은 괜찮습니까? 궁에도 못 왔다던데요.” 아르센이 왕궁에 오지 않은 것은 플란츠를 통해 들었다. 전날, 키리에가 처음으로 자세한 이야기 전하기를 삼갔다. 때문에 칼리안은 아르센이 앨런의 술을 싹 다 망가뜨려놓는 천인공노할 짓을 했다는 것과 술 마시다 잠이 들었다는 것 외에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를 듣지 못한 채였다. 입에 든 것을 느긋하게 씹어 삼킨 앨런이 대답했다. “그 친구는 별 일 없으니 걱정 마시고 칼리안 왕자님 속이나 좀 들여다 보시지요. 왕자님 속도 같이 뒤집어졌을 터인데.” 그 아르센의 속이 어떤지까지 신경을 써 줄 속이 남아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카이리스 왕궁 사람 속을 죄 신경쓰는 칼리안 속은 앨런이 신경써야 하지 않겠는가. “안그렇습니까, 플란츠 왕자님?” 그러더니 대뜸 이렇게 플란츠를 불러냈다. 제 속이 껄끄러워 올라오는지 플란츠 속이 껄끄러워 올라오는지는 몰라도 계속 같이 밥을 먹고 있다 하니 조금 친해졌을까 했는데 지켜보고 있으려니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지 않나. 해서 앨런이 플란츠에게 말을 좀 걸어보는 것이었다. 내 동생의 새아빠와 내 동생이 같이 밥 먹는 자리에 내가 낀 것 같은 기분인데 여기는 내 방인 그런 상황에 처해진 탓에 말 한 마디 안하고 밥만 먹던 플란츠가, 별다른 대답 없이 옆에 놓인 사과 탄산수를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아, 오늘은 둘 다 시끄러워서요.” 앨런의 의도를 알았는지 몰라도 칼리안이 이런 말로 앨런의 시선을 다시 불러왔다.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일이 있으니 플란츠 그냥 두라는 소리였다. 칼리안의 말을 적당히 알아들은 앨런이 눈꼬리를 찌푸리며 말했다. “하여튼 왕자님들 낳아놓은 것 말고 잘한 일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으니.” 르메인을 생각하며 하는 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었든 플란츠 속이 시끄러운 것은 무조건 르메인 탓 아니겠는가. 때문에 이렇게 말하며 혀를 쯧쯧 찬 앨런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르메인을 또 구박할 기세였으므로,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 혹시 시간 되시면 잠깐 저 좀 도와주세요. 바쁘시면 가셔도 되고요.” 세렌티 멱살을 잡아다 시간을 멈춰놓든가 저 해를 붙들어 두고서라도 시간을 만들 앨런이다. 심지어 칼리안이 도와달라는 말을 하는데 어떻게 거절을 하겠는가. 때문에 앨런은 일정이 어떤지 생각도 해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지요. 도와드리겠습니다.” 오후에 르메인을 만나야 할 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했지만 르메인이야 기다리든지 말든지. * * * 적당히 단 맛의 밀크티 세 잔이 소파 사이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저 밀크티와 똑같았던 색의 말을 백금색이라 했던 히나가 생각난 칼리안이 살짝 웃는 사이, 칼리안이 펼쳐놓은 것을 보던 앨런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텐실 왕세자의 정보가 필요한 일과 이것은 다른 일이 맞습니까?” “네. 텐실 왕세자 쪽 정보는 란델 형님 때문에 필요하고, 이건 제 일입니다.” ‘제온’과 관련된 일은 칼리안의 일이 맞았다. 플란츠 때문에 조금 서둘러 확인하고 있었고 또 조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 모두와 연관 있는 일이라 해야 하겠으나 일단은 칼리안이 확인해야 할 일인 것이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에 올려진 것을 한 장 들어 살펴봤다. 시간의 축이 본래 어떻게 생겼는지 그것을 꽤 자세히 그려놓은 그림과 그 고리에 새겨져 있던 문자들을 기억나는대로 적어둔 것. 바로 체이스가 보낸 자료였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돌에 새겨진 문자의 뜻을 안다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겠습니까.” 칼리안이 시간의 축에 새겨진 글자들을 확인하고 그 뜻을 어떻게든 알아낸다 해서 과연 제온의 근본을 찾는 것에 도움이 될지를 묻는 말이었다. “그들이 새들만 건드렸다면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을텐데 처음에 협회장 뒤까지 쫓아갔다 하니까요. 돌에 새겨진 문자 말고 그 동굴 벽에 있던 글자들이요.” 돌에 새겨진 것과 같은, 동굴 벽에 붙은 종이의 내용을 읽으려 한다는 말이었다. 다만 글자를 해독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고작해야 세 가지의 정보를 비교해보며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방대한 정보와 지식이 있어야 한 두 글자 쯤의 의미를 파악해볼까 말까 하지 않던가. “너무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읽으려고 했던 것은 일단 미뤄뒀습니다.” 꽤 가벼운 말투로 이렇게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앞에 앉은 플란츠를 보며 말했다. “똑똑한 머리 빌려달라고 했더니 역시 똑똑하신 제 형님께서 뭔가를 똑똑하게 잘 찾아내셔서요.” “계속 짖지.” 전날부터 계속된 그 똑똑하다는 말에 플란츠가 짜증을 냈다. 그러든지 말든지, 칼리안이 시간의 축에 새겨진 문자들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여기 글자들에 보면 작은 점이 있는데 이게 글자의 일부가 아니라 다른 표식이라고 생각을 해 보면.” 상당히 거대한 크기의 고리. 그 고리에 적혀있던 손톱만한 문자들. 칼리안은 그 중 몇개를 차례로 짚어가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같은 위치에 점이 찍힌 글자들이 있고 그것들을 모으면 공통되는 획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점이 찍힌 글자들에 혹시 다른 의미가 있는것이 아닐까 하고 겹치는 부분들만 추려봤는데.” 여기까지 말한 칼리안이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써 냈다. 손 끝에서 살짝 흘러나온 검붉은 빛의 오러가 어떤 문자를 만들었다. “신기한 게 나오더라고요.”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그리하여 이 대륙에서 오로지 세크리티아 왕가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문자. 칼리안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온, 이라고 읽습니다. 그리고.” 앨런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말. 하지만 칼리안의 기억 속에 분명히 남아있는 말. “인간의 왕 이라는 뜻입니다. 우연일까 생각했는데 여기에도 적혀 있으니 무시할 수가 없어서요.” 두 번 다시 마주치기 싫었던 귀 큰 종족들.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불렀는지를 떠올려보던 칼리안이 말을 맺었다. “전하께서 혹시 엘프들을 많이 박하게 대하셨습니까? 아무래도 한 번 만나봐야 할 것 같은데요, 엘프 대장로.” 혹은 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어머니 나무라는 것을. < 제33장. 개 키울 거라고 (6) > 더운 바람이 부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방금 전에 깊이 눌러 쓴 하얀 로브의 후드가 새삼스럽게 거추장스러운 기분이 든다 여겨진 체이스는 후드를 도로 벗었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눈과 꼭 닮은 듯한 빛의 여명 위에 이제 막 떠오르는 해와 아직 채 지지 않은 달이 함께 떠 있었다. -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입니다. 말에 오른 체이스가 이렇게 이야기하며 새벽 어스름 속의 하얀 달을 올려다봤다. - 무엇이 신기하십니까. 칼리안의 음성이 머릿속에 전해진다. 꿈 속에서 마주했던 이의 목소리와는 많이 다르지만 또 굉장히 닮아있는 면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체이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번에도 체이스가 먼저 연락을 취했었다. 해와 달이 모두 떠 있는 이른 시간이었으나 아침 잠 많을 것이 분명한 칼리안은 곧바로 답을 보냈다. 그러더니 며칠 전 체이스로부터 받은 자료 덕에 알아낸 것을 알려주며 고마움을 전해왔다. 그러니까 아직 칼리안은, 전할 말이 분명 있음에도 체이스에게 먼저 대화를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말을 걸기 꺼려진다기 보다는 먼저 이야기를 건넬 수가 없는 것이다. 차마, 여전히. 그것을 가늠한 체이스는 정말로 아무 일이 없을 이 새벽에 다시 한 번 테일란의 도움을 받아 칼리안을 불러냈다. 그리고 감사 인사를 받아낸 뒤에 눈에 보이는대로 신기하다는 말을 꺼냈다. 여전히 그 시선을 하늘에 둔 체이스가 조금 늦은 대답을 했다. - 해가 떠오르는데, 아직 지지 않은 달과 별이 함께 보인다는 것이. 자는 사람 깨워내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새벽에 해와 달과 별이 전부 다 보여 신기하다는 정도의 가벼운 말이었다. 그럼에도 칼리안은 정성스레 듣고 대답을 전했다. - 완연히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으니 함께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혼자서 너무 밝지도, 그렇다고 너무 어둡지도 않은 탓에 전부 다 같이 빛난다는 말. 그것을 들은 체이스가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 생각보다 마음에 듭니다. 내 눈에는 이 쪽이 더 보기에 좋은 것 같고. 편안하기도 하고. - 편안하다 하시니 다행입니다. 이렇게 답하는 칼리안의 음색이 반가움을 한가득 안고 있었다. 조금 어두워진 대신 다 같이 보이는 것이 나아보인다는 소리가 어쩐지 지금의 체이스 심정을 알려준 것 같아서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완벽하게 비밀을 지키고 있는 것보다는 조금씩 나누어 가진 뒤가 나았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리 들렸다. - 네. 오롯이 빛나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밝아서. 눈을 찌푸리고 한 걸음을 뒤로 물리고. 그보다는 지금이 낫군요. 나에게는. 이렇게 덧붙인 말에 칼리안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체이스는 다른 이야기를 더 하지 않은 채 잠시 말을 몰았다. 저 멀리 보이는 끝자락에 아직은 검기만 한 산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 곳을 향해 말을 움직이고 있는데, 칼리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얘기해요. 언제나 무엇이든. 그것이 언제 건네오는 질문이든 어떤 질문이든, 무조건 상관 없으니. - 혹시 란델 왕자와 플란츠 왕자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를 체이스 왕세자께서 기억하시는 내용이 있을까 해서요. 서로가 왕이 된 이후 두 나라 사이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보면 전쟁이 나지 않았던 것이 신기할 정도라서. 정말 무엇이든 물어보는구나. 체이스에게 새로운 형제간의 일을 물어볼 만큼 조금이나마 마음이 풀어진 것이, 서운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기꺼운 기분이 든다. 먼저 이야기를 걸어올 만큼 조금 더 풀어지면 더 좋을텐데. - 글쎄요. 그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것이 잘 없는데. 새들을 보내볼까요, 칼리안 왕자의 형님들에게?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농담처럼 건넨 말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때문에 체이스가 조금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일행의 가장 앞에서 말을 몰던 기사 테일란이 살짝 뒤를 쳐다본 뒤 흐뭇한 얼굴이 되어 다시 앞을 쳐다봤다. 확실히 웃는 날이 많아졌고 버릇같이 입에 대던 와인을 찾는 날도 줄어들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왕궁에 돌아가신 뒤에도 괜찮으실지. 그것이 걱정이군.’ 데블란. 그가 있는 곳에 돌아간 뒤에도 괜찮을지. 그런 테일란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음을 멈춘 체이스가 다시 이야기를 했다. - 골이 아무리 깊었다 한들, 겉으로 보일 이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 세크리티아에서 알 수는 없었을 겁니다. ‘우리’라는 소리를 꺼내려다 멈추고 바꿔 말한 체이스가, 제 손에서 벗어나 자라는 장미는 차라리 없애는 것이 낫다 말했던 란델의 모습을 떠올렸다. - 시간이 지나면, 궁금해했던 과거의 일도 알게 되지 않을까요. 만약 그 때에도 알 수가 없고 여전히 궁금하다면 얘기하세요. 새들을 보내 줄 테니까. - 참아주세요. 이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카이리스의 왕자인데 너무 허물 없이 세작을 보내주겠노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 재밌어서였다. 만약 칼리안이 부탁한다면 당연하다는 듯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정말로 보내주리라는 것을 알아서, 그것 때문에도 웃었다. - 란델이라. 어리다고 해야 할지 노련하다 해야할지. 그 속에 담긴 것이 단순한 분노도 아니었고 단순한 욕심도 아니었고. 그러니 그것을 무어라 해야 할까. 그 잠시간의 만남에서 체이스는 란델의 본질에 대해 참 많은 것을 꿰뚫어 보고 경고를 했었다. 다만 그렇다 하여 란델의 과거를 파악하거나 그 생각을 읽어낼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지금 칼리안이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도움이 되기는 어려울 터였다. - 복잡한 사람이죠. 사실 얼마전에 만나서 도움을 주겠다 했고, 알겠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일이긴 한데, 괜한 궁금증이 들어 먼저 여쭤봤습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얼마 전 만났던 란델을 떠올렸다. 베르가못 홍차의 향이 함께 생각나며 란델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날 란델은 플란츠가 칼리안을 배신할 것을 걱정하지는 않는지 물었었다. 칼리안은 그에 대해 란델의 배신을 염두에 두고 답했었다. 상관 없다고. - 정말로 다, 끌어안고 갈 생각입니까. 우려 섞인 체이스의 말이 들려왔다. - 네. 정말로 다 끌어안고 갈 생각입니다. 제가 할 줄 아는 것이 그것 뿐이라서. 칼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앨런이나 체이스나, 키리에와 아르센, 심지어 플란츠까지도 이런 칼리안을 각자의 방법으로 걱정해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칼리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 걱정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걱정하실만큼 제가 그렇게 무른 사람은 아니고, 아시다시피 저는 제 것을 나눠가져주겠다 하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얼마전에 체이스 왕세자께서 새로 늘려주신 이도 있고. 들켰네, 하고 체이스가 웃었다. 아르센이 칼리안의 비밀을 알 수 있도록 일부러 끌어들였다는 것을 칼리안이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 체르밀에서 지내다 왕궁 밖으로 나올 생각은 아니라 들었습니다. 그러려면 디디고 올라설 계단이 되어 줄 수 있을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조금 멋대로 굴었습니다. 그 사람의 온전한 믿음을 얻으려면 우선 온전히 보여주어야 할 테고. 아르센이 진심으로 칼리안을 도울 수 있도록, 그래서 카밀론에 가는 것에 도움이 되도록 조금 오지랖을 부렸다는 이야기였다. 아르센이 이 이상 어떻게 더 칼리안을 진심으로 따를지 생각해보는 것이 겁날 정도였지만, 그런 이야기 대신 칼리안은 그냥 신경 써 주어 고맙다는 말만 전했다. 이야기를 일단락 지은 체이스가 먼 곳을 봤다. - 오늘, 조금 뒤에. 조금씩 떠오르는 태양에 선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아름다운 산이 눈에 들어왔다. - 도착할겁니다. 여름이 긴 대신 겨울이 짧고, 눈이 많이 내리지 않는 대신 별이 내리고, 녹빛의 산과 깊은 계곡이 있는 곳. 너른 들에 꽃이 피고 광막한 바다 위에 달빛이 빛나는 그런 곳. 정녕 아름다운 세크리티아에. - ······ 네. 고생하셨습니다. 안그래도 계속하여 날짜를 가늠해보고 있던 칼리안은, 새벽같이 말을 건네오는 체이스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 순간부터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다. 아직 세크리티아 왕궁까지는 꽤 먼 거리가 남았지만 국경을 넘어서게 되면 정말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쉬운 마음에, 서신에 대한 답도 들을 겸 떨어지지 않는 발을 좀 달래볼 겸 칼리안을 불렀으리라. - 그래서 칼리안 왕자는 이제 또 무엇을 할 겁니까. 대장로를 만나러 갈 생각입니까? - 제가 작년에 엘프들과 사이가 조금 틀어져서, 그 때문에 전하와 엘프 대장로가 만날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내년 초 쯤이 아닐까 싶은데 그때 함께 자리하게 해 달라 전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정확히는 스승님을 통해 말을 전해달라 하였지만요. 내년 초. 칼리안에게 전해지지 않게 그 날짜를 혼자 되뇌어 본 체이스가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 그래도 칼리안 왕자에게 마나실 경이 함께 있는것이 다행입니다.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서. - 네. 감사한 일입니다. 정말로요. 칼리안은, 테일란도 체이스에게 그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려다 그냥 접어두었다. 칼리안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체이스는 칼리안이 원하는대로 테일란을 대하기 위해 일부러 노력할 것 같아서, 일부러 말고 체이스 스스로 필요해서 테일란에게 의지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또 조금의 말을 더 나눈 뒤 대화를 마쳤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꽤 긴 시간이 흘렀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해가 떠올라 있었다. 그 해가 어느정도 하늘 중간을 향하게 되었을 때 쯤 잠시 휴식을 취했고 다시 출발했다. 그 뒤 다시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때. “너무 안와서, 내 정혼자 잃어버리는 줄 알았잖아.” 아쉬운 만큼 반갑고, 아쉬운 만큼 반갑고, 아쉬운 만큼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카이리스를 벗어남에 아쉬워하는 만큼 세크리티아로 돌아왔음을 반겨주는 그런 목소리였다. “아리안느.” 체이스가 부드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활짝 웃는 얼굴의 아리안느가 왕세자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며 악수를 청해왔다. “고생했어, 세자 저하.” * * * 이제부터는 체이스가 정보를 통제하기 힘들다. 그러니 데블란은 분명 보고를 받게 될 터였다. 왕세자 체이스가 왕궁으로 향하던 길에서 벗어나, 바다에 갔음을. - 쏴아아······. 언젠가 들었던 웃음소리가 떠오르는 파도 소리가 귀에 들렸다. 모래사장의 파도소리 말고 작고 동글동글한 돌이 파도에 씻겨 구르는 그런 맑은 소리. 한 밤이 되어서야 도착한 바다는 여느 때와 같았다. 보고 싶던 그 작은 바닷가는 아니었으나 바다는 어디든, 항상 평화로웠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굳이 마중 나오지 않아도 됐는데. 후작이 또 걱정했겠네.” 한동안 바다의 짠내를 깊숙이 들이마시던 체이스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내 정혼자 내가 보고싶어 나온건데 뭐 어때. 엄마는 뭐, 이런 것까지 신경 썼으면 이미 진작에 드러누우셨을걸.” 이렇게 말한 아리안느가 체이스를 올려다봤다. 가장 아름다운 시간의 석양을 그대로 담은 듯한 보석같은 두 눈이, 새벽 어스름을 담은 체이스의 눈을 응시했다. “마음이, 좀 편해진건가. 그래 보이는데. 아닌가? 모르겠네.” “아리안느.” “응.” 화를 낼 때는 한없이 무섭고. “아리안느.” “응.” 혼을 낼 때는 한없이 엄하고. “······ 아리안느.” “응.” 걱정해줄 때는 한없이 다정한 사람. 체이스가 허리를 조금 숙였다. 마주 보고 선 아리안느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짙은 초콜릿 같은 긴 곱슬머리가 이마와 볼을 간질이는 느낌이 좋았다. 그 좋은 기분에 살짝 눈을 감은 체이스의 입에서 속삭임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뭔가를 두고 왔어. 내가.” 아리안느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 대신, 손을 올려 체이스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찾아다 줄까?” “아니. 그러면 안 되는 거라서. 두고 왔어.” “당신한테 많이 중요한 거야?” “많이 중요하지.” “내가 찾아다 줄까?” 똑같은 질문에, 체이스가 아리안느에게 기댄 채로 살짝 웃었다. 찾아다 달라 하면 진짜로 찾아올 것 같아서 웃었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다 달라 이야기하는 대신 똑같은 대답을 다시 전했다. “아니. 두고 와야 해서 두고 왔어.” “그랬구나.”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은 이런 말에도, 아리안느는 그냥 계속 체이스의 등을 토닥이기만 했다. 한동안 그렇게 있던 체이스가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괜찮아. 걱정 마.” “알아. 내가 있는데 괜찮아야지.” 체이스가 웃었다. 웃으며 어떤 이야기를 하나 시작했다. 토닥이는 작은 손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오랜 이야기가 끝나도록 계속. < 제33장. 개 키울 거라고 (7) > 금박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하얀 찻잔. 그 안에 담긴 붉은 빛의 차에 눈길이 간다. 향도 느껴지지 않고 맛은 더더욱 알 수 없어서, 체이스는 오로지 그 차의 빛을 닮은 눈동자만 떠올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주앉아 있던 이가 잔뜩 쉬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얘기하거라.” 제 ‘하나 뿐인’ 아들조차 믿지 못해 그저 오래 된 감기일 뿐이라며 숨기고 있었으나, 체이스는 저 목소리가 왜 그리 갈라지는지 알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왜 그리 기침이 늘었는지 역시 체이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앞에 앉은 이는 그것 역시 감기라 하였다. “서북부 귀족 모임에서 특별한 문제는 없는 것으로······.” “네룬드 남작이 특별한 일 없이 모임에 참석할 위인이 아니지 않더냐.” 의심. “이미 지난 달에 남작의 세력을 전부 잘라내시지 않았습니까. 이번 모임에서 남작이 다른 귀족들을 만나 요청한 것은 식량 지원 뿐입니다. 이번 태풍으로 피해가 컸던 탓에······.” “체이스.”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는 버릇만은 여전하다. 고칠 생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부름에, 말을 멈춘 체이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네, 전하.” 요란한 기침이 집무실을 울린다. -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서북부의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인데. 굳이 저들끼리 만나 나눈 이야기가 고작 식량 뿐이었을까. 이 답답한 곳에 다시 갇히게 된지도 어느새 한 달이 훌쩍 넘어갔다. 8월의 태양보다 붉은 저 찻물의 색 때문에 타는 듯한 더위가 더 심하게 느껴짐에도, 체이스의 머리는 한없이 차갑게 식어들어갔다.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서북부의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인데. 굳이 저들끼리 만나 나눈 이야기가 고작 식량 뿐이었을까.” 얼마 전 떠올린 기억과 똑같은 말이 이어졌다. 이유 없는 의심. 끝날 때까지 결코 끝나지 않을 의심의 말. 그때 나는 무슨 대답을 했더라, 잠시 생각해보던 체이스가 기억 속의 자신과 똑같은 대답을 내어놓았다.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전하.” 이제 앞에 앉은 이는 대답하지 못한 채 밭은기침을 내뱉다 손만 휘저을 것이다. 그 후에는 얌전히 일어나 예를 올리고 집무실에서 나가면 된다. 머릿속에 떠올린 것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모습으로 기침을 내뱉던 이가 손을 휘저었다. 체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릿속에 떠올린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예를 올린 뒤 집무실에서 나왔다. - 달칵 먼 훗날이자 먼 과거인 언젠가의 키리에가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던 곳. 그곳의 커다란 문이 작은 소리를 내며 닫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걸음 수를 세어가며 다른 생각을 접어두었다. 언제나와 같은 평온한 얼굴로, 언제나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는 채 스무 걸음, 서른 걸음. 의심, 받지 않도록. 여느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오로지 자신의 걸음에만 온 신경을 쏟으며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 테일란이 함께 들어와 문을 닫으려 했다. “저하.” “아니.” 거의 동시에 체이스가 이렇게 테일란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더더욱 작은 목소리로 채 나오지도 않은 말에 대한 답을 전했다. “나는 그런 적 없었어, 카스트린 경.” 국왕의 집무실에서 나와 왕세자의 집무실로 돌아온 뒤, 곧바로 누군가와 독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가 있어.” 지금 체이스는 기억과 일치하는 일들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행하고 있었다. 베른이 없었고 테일란이 곁에 있었다. 지금의 체이스는 검을 쓸 줄 알았고 얼마 전 카이리스에도 다녀왔다. 그러니 모든 것이 완벽히 똑같을 수는 없었고 기억이 나지 않는 날들도 허다했다. 그러나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에 한해서는 가능한 모든 것을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데블란의 의심어린 시선이 체이스에게 닿지 않도록, 그리하여 체이스가 기억하는 ‘미래’가 크게 틀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네, 저하.” 지금껏 이미 여러 차례 이런 제지를 받은 바 있던 테일란은 간단한 대답만 마치고 예를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체이스가 부를 때까지는 다시 들어오지 않을 터였다. 집무실 문이 다시 닫히며 완전히 혼자 남게 된 체이스가 비로소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 후에는 지나치게 신경을 쓴 탓에 몰려오는 피로 때문에 잠시 눈을 감았다. 조금 전 데블란과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서 그대로 되풀이됐다. 기억 속의 일과 오늘의 일은 완전히 같았다. - 이미 지난 달에 남작의 세력을 전부 잘라내시지 않았습니까. 이 역시 기억 속 ‘과거’의 체이스가 꺼냈던 말이었다. 그것이 알려주는 하나의 사실 때문에 체이스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굳이, 베른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은 누가 데블란의 검으로서 움직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데블란의 호위기사들 중 한 명일테지만 그것까지 알아낼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베른이 없음에도 과거와 지금 가지치기되는 이들이 완전히 똑같았다. 사라진 이들도, 그들이 사라진 날짜도, 심지어 그 방법과 그에 대한 데블란의 반응까지도 모조리 똑같았다. 그렇다는 것은 곧. 과거에도 굳이 베른이 나섰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는 말과 다름없다. 베른이 없는 지금은 그 빈 자리를 대신한 또 다른 누군가가 손에 피를 묻혔겠지만, 적어도 그 누군가가 채 자라지도 않은 열 넷의 어린 아이는 아니지 않나. ‘대체 왜.’ 당장이라도 다시 그 거대한 문이 있는 집무실로 달려가 묻고 싶었다. 지금의 데블란은 베른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고 싶었다. 왜. 당신의 아들을. 한낱 날붙이로 썼느냐고. 피를 토해내듯 묻고 싶은 것을 참아냈다. 손끝 발끝이 다 잘려나가는 기분을 꾹꾹 눌러가며 참아내고 있었다. 이 왕궁에 되돌아온 이후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놓지 않은 채 일분 일초를 모조리 참아내고 있었다. 참아내면서, 기억을 뒤져가며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모든 것을 똑같이 만들어놓고 있었다. - 똑똑 소파에 기대 앉아 하지 못할 말을 삼켜내던 체이스가 조용히 눈을 떴다. “저하, 나야. 들어갈게.” 시종조차 통하지 않고 직접 건네오는 말. 데블란이 아닌 그 누구의 앞에서든 상관 없이 흘러나오는 편안한 말투. 체이스는 들어오지 말도록 말하지 않았다. 사실 거절할 시간도 없었다. 통보하듯 알려오는 목소리 뒤로 문이 빼꼼 열리며 고불고불한 긴 머리가 눈에 들어왔으니까. “아리안느.” 당연히 아리안느였다. “뭐하고 있어?” 머릿속을 뒤져가며 퍼즐을 맞추고 있어. 흐트러진 것이 있는지 따져가며 하나도 빠지지 않도록 조각을 이어나가는 중이야. - 짝!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대답을 이어나가던 체이스가 생각을 멈췄다. 체이스의 눈 앞에서 큰 소리로 박수를 한 번 친 아리안느가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마주했다. 그 뒤에는 손을 들어 서늘한 이마에 따뜻한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한동안 체이스와 눈을 마주치던 아리안느가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 마치 체이스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지 아는 것처럼. “그림처럼 움직이지 말고 하던대로 해. 그래도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모든 것은 똑같이 굴러가야 해, 아리안느. 적어도 올 겨울까지는.” 체이스가 가만히 입을 열어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래야만 같은 날에 치유사가 이 곳을 찾아오다 문제 없이 ‘실종’ 될 테니까.” 그래야만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형태로 왕관을 물려받게 될 테니까. 아무 문제 없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리하여 다른 그 어떤 나라에도 영향을 주지 않도록, 내년 초에 움직이겠다는 칼리안의 계획이 틀어지지 않도록······. “세크리티아의 법은 내가 당신보다 더 잘 알아. 그게 누구든 절대로 어기지 못하게 할게.” 반역자의 핏줄이 절대로 세크리티아 땅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데블란이 무엇을 약속하고 누구와 거래를 하든, 그 어떤 수를 써서 텐실의 치유사를 언제 어디로 부르든 다 상관 없게끔. 수많은 이들의 무덤 위에 홀로 서 있는 데블란이 단 하나의 법만은 절대로 어기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그러니까 숨 쉬어도 돼, 체이스.” 이런 말로 체이스의 생각을 또 한 번 막은 아리안느가 생긋 웃었다. * * * 붉은 빛이 숨겨진 검은 색 실크 드레스. 지그프리드 관의 밝은 마법 등불 아래에서 움직일 때마다 붉은 빛이 살짝 살짝 드러나도록 만들어진 그것은, 왕실 의상 담당자 섀틴에게 특별히 부탁을 해서 만들었다. 드레스를 입을 이가 화려한 장식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는 섀틴은 그 독특한 검은색의 실크 위에 재질 다른 검은 실로 수를 놓았다. 코르셋도, 치마를 부풀려 줄 고래 힘줄 패티코트도 필요치 않았다. 턱 밑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검은 드레스는 이미 충분히 완벽했다. “선물.” 드미레아에게 걸어온 칼리안이 포장된 상자 하나를 건넸다. 붉은 셔츠 위에 검은 예복을 갖춰 입고, 드미레아와 똑같은 문양의 검은 자수가 수놓인 선명한 붉은 빛 망토를 걸친 채였다. 드미레아와 완벽히 대비되는 색을 지닌 칼리안의 예복, 그 위에 더해진 다이아몬드 망토 이음 장식까지. 그 모든것이 보기 좋게 어우러지되 지나치리만치 화려했으나, 1년에 단 하루 찾아오는 오늘만큼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았다. 오늘. 8월 16일. 카이리스의 3왕자, 칼리안의 탄생일. 그러니 오늘의 칼리안은 그 누구보다 더, 지나치리만치 화려해야 했다. “선물은 제가 드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괜찮아. 선물받고 기분 좋을 날은 아니라서.” 작은 미소를 지은 채 말하는 드미레아에게 가볍게 대답한 칼리안이 눈짓으로 제 손을 가리켜보였다. 여전히 손에 들려있는 선물 어서 받으라는 뜻이었다. 왕자의 생일 축하연에 나서기 전, 여전한 동맹을 보여주듯 나란히 자리할 정혼자에게 건네는 것을 받은 드미레아가 서두르지 않는 손으로 그것을 풀었다. 그리고 단박에 인상을 찌푸렸다. 화려해서가 아니었다. 치장을 싫어하긴 하나 장신구에 대한 결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생일을 맞이한 칼리안의 옆자리에 있어야 했으니 그 자리에 어울릴만한 장신구 하나 쯤 하는 것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그 장신구가 ‘무엇’으로 꾸며진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있었다. “······ 왕자님. 지금 저 가지고 선전포고 하십니까.” 그 의미를 단박에 파악한 드미레아가 이렇게 묻자, 칼리안이 별 일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감추지도 않고 건네진 대답에, 할 말을 잃은 드미레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칼리안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 이름을 어디까지 이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칼리안과 함께 있던 얀이, 그것이 자신의 동생의 입에서 나온 소리임을 알면서도 미간을 찌푸렸을 만큼 무례한 말투였다. 하지만 사전 약속도 없이 드미레아의 이름을 또 팔아먹을 생각을 한 것은 자신임을 잘 아는 칼리안은 그저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만 하고 나와주면 일주일 동안 대련해줄게.” 천하의 지그프리드 이름을 어떻게든 써 먹으려 들면서 내거는 것이 고작 일주일짜리 대련이다. 물론 드미레아라면 그 일주일 동안 수도 없이 많은 것을 배워 갈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지 않나. “보름.” 보름은 되어야지. 하여튼 드미레아는 드미레아다. 괜히 지그프리드의 드미레아가 아니다. 장신구 하나 해 주는 조건으로 칼리안의 검술을 제대로 뜯어갈 생각인 것이다. “알았어, 보름.” 결국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래를 수락했다. 밑지는 거래는 해본 적 없는 드미레아가 흡족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연회장에서 뵙겠습니다, 왕자님.” “그거 하고 와. 꼭.” “네.” 그 장신구 하나에 담긴 의미가 어떤 것일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보름치 대련에 더 값어치를 두는 드미레아의 모습에 칼리안이 결국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 * * 언제나와 같이 화려한 지그프리드 관. 그 자체로 보석같은 그 곳에 마법 등불이 밝혀지고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칼리안의 탄신일이다. 그러니 그 어느때보다 많은 귀족들이 지그프리드 관을 찾았다. 그 수많은 귀족들이 칼리안이 오늘 어떤 말을 하고 누구와 함께 있을지를 확인하기 위해 눈과 귀를 모두 열어둔 채 주인공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3왕자,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께서 드십니다!” 그리하여 바로 오늘. 그 많은 귀족이 모여있는 이곳에, 비로소 칼리안이 걸음을 했다. 그렇게 입장한 칼리안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반갑다’는 말을 하며 모든 귀족들에게 인사를 했고 그 후에 여유로운 걸음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답답해 보이시는데요.” 그리고 그 뒤로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2왕자 플란츠에게만 말을 걸었다. “그다지.” 검은 색의 예복, 그리고 베이지 색의 망토, 같은 색의 장신구까지, 잘 차려입은 플란츠가 적당한 대답을 건넸다. 그런 플란츠를 보며 칼리안이 느긋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란델 형님은 못 오신다고 하던데, 많이 아프신지 걱정이네요.” 플란츠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 아파서 오지 못하는 것인지, 언젠가 그리했던 것처럼 오늘 하루 아프면 안 되는지를 물어오는 동생의 말 때문에 오늘 하루 감기에 걸리기로 한 것인지 정도는 구분하고 있던 탓이다. 란델이 벌였던 일에 손을 들어준 텐실에 대한 경고의 연장선, 그리고 플란츠와 여전한 사이임을 알리기 위한 행동임을 모를 리 없으니까. 그렇게 별 것 아닌 보여주기 식 대화가 몇 차례 이어졌을 때. “드미레아 지그프리드 소공작 입장입니다.” 그 말과 함께 다시 한번 귀족들의 시선이 지그프리드 관의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귀족들은, 플란츠와의 매우 좋은 관계를 보여주고 있던 칼리안과 드미레아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술렁거림이 이어졌다. 그런 드미레아를 본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나도 감기가 옮았군.” 이렇게 꺼내진 낮고 나른한 목소리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이런. 그러셨습니까.” 곧, ‘이 자리에 오지도 않은 란델에게 감기가 옮은’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다른 말 없이 저벅저벅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드미레아의 장신구, 정확히 말하자면 이마에 살짝 드리우도록 만들어진 둥근 머리 장신구를 보았기 때문이다. 누가 보아도 칼리안과 연관시킬 루비와 지그프리드를 생각해내기 딱 좋을 다이아몬드로 꾸며진 그것은, 비록 굉장히 얇고 또 작았지만 명백히 티아라를 떠올리게 하는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작은 왕관인 티아라. 아무리 진짜 티아라가 아니라 하더라도 티아라를 연상시킬 수 있을 만한 그런 장신구는, 당연하겠지만 왕자의 정혼자가 착용할 수 있을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래. 세자의 정혼자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조금 전 칼리안은 세자의 정혼자나 할 법한 장신구를 드미레아에게 준 것이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리고 미리부터 계획한대로. 드미레아에 대한 청혼의 의미가 아니었다. ‘세자의 정혼자’가 할 법한 장신구를 착용하는 이의 옆에 선 사람이, 그렇다면 과연 누구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의미를 안 플란츠는 ‘예고 없는 3왕자의 기행에 화가 난 나머지 다시 등을 돌린 둘째 형’ 역할을 할 때임을 눈치채고 연회장을 벗어난 터였다.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 드미레아의 앞으로 갔다. 그리고 누구든 감탄할 만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어서 와, 정혼자님.” 개 키울 준비. 세자위에 대한 욕심을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낸 칼리안의 손가락이, 허공에 둥근 곡선을 그려냈다. < 제34장. 내가 거짓말을 못해서(1) > 드미레아를 향한 칼리안의 미소는 변하지 않았다.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완벽한 미소를 얼굴에 만들어보이며, 정말 짓고 싶던 짙은 미소를 손 끝으로 그려냈다. “드미레아, 이 쪽으로.” 그 후에는 이제 비어있게 된 자신의 자리로 드미레아를 직접 안내했다. 지금 이 곳에서는 짧은 숨 소리와 스치는 시선 하나에도 낙인과 같은 의미가 따르게 된다는 것을 드미레아 역시 아주 잘 알았다. 때문에 드미레아는 살짝 미소 띤 얼굴로 고개 숙여 칼리안의 환대에 응했다. 그리고 칼리안의 뒤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술렁임이 잦아들었다. 지그프리드 관에 모인 귀족들이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든 해석하고 받아들이려 애를 쓰고 있었다. 지금까지 넘겨 짚어오던 예상이 들어맞았음에, 상상만 해오던 그 날이 현실이 되었음에, 모두 굳게 입을 다물었다. “브리센 후작이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둘이 앉은 자리와 귀족들의 자리 사이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때문에 드미레아는 마치 가벼운 인사라도 나누는 듯한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이렇게 말했다. 그 어느때보다 시끄러운 술렁거림으로 가득한 정적 속에 혹시라도 소리가 퍼져나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지금 이 자리에 꼭 있어야 할 한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알려주는 드미레아의 ‘가벼운 인사’에 화답하듯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대답했다. “응, 알고 있어.” 지금 이 자리에 칼리안 혹은 조금 전 자리를 비운 플란츠보다 신분이 높은 이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미레아와 에반보다 두 왕자가 먼저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드미레아에게는 일부러 그리하도록 미리 일러두었었다. 이미 모두 한 자리에 모여있던 귀족들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아 칼리안의 욕심을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너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이유겠지. 아마 곧 올 거야.” 에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의 영향력과 지니고 있는 힘이 왕자들보다는 높은 위치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제대로 된 타이밍에 이 자리를 망치려 열심히 손가락을 꼽아 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어쩌면, “국왕 전하 드십니다!” “······ 전하보다 자신의 힘이 더 크다고 말하고 싶겠지.” 르메인의 도착을 알리는 기사의 외침과 겹치듯 흘러나온 말에 드미레아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칼리안 역시 그 뒤를 이어 일어났다. 앨런은 자리하지 않았다. 칼리안에게 축하를 해줄 수도, 축하를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날이었기 때문에 사전에 르메인에게 불참 의사를 밝혔다. 보라색이 감도는 짙은 회색 예복을 차려입고 발 끝까지 이어지는 검은 망토를 두른 르메인이 곧바로 칼리안을 향해 걸어왔다. 그 발걸음의 뒤를 따라 귀족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 이 자리에서 화를 내며 경솔했음을 탓할까. - 무시하고 지나치지 않을까, 원래 그랬던 것처럼. - 아니. 오히려 좋아하며 반겨할 것 같은데. 소리 없는 이야기들이 작은 새의 지저귐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과연 르메인이 드미레아를 보고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 그에 따라 나는, 아니 우리 가문은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칼리안.” 르메인은 귀족들의 예상을 모두 벗어났다. 진심을 담아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넨 르메인이 말 없는 미소를 지으며 칼리안을 한참 바라봤다. 그것이 정말 생일에 대한 축하인지, 아니면 성공적으로 이 쇼를 마친 것에 대한 축하인지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칼리안은 이렇게만 이야기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후 르메인은 드미레아와 짧고도 평범한 안부 인사를 주고 받았고, 비어있는 에반의 자리를 잠시 쳐다본 뒤 자신의 자리로 갔다. 그리고 칼리안의 생일을 축하하고자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며 간단한 인사를 마쳤다. “그럼 이제, 3왕자를 위한 축배를.” 르메인의 짧은 말과 함께 칼리안을 포함한 모두의 앞에 샴페인이 채워졌다. 붉은 술 안에서 방울방울 솟아올라 터지기를 반복하는 기포를 바라보던 칼리안이 눈에 띄지 않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생일을 축하할 때 사용되는 라프라니아의 색으로 보일 새빨간 샴페인. 하지만 칼리안의 눈으로 아무리 살펴보아도 안네루시아를 고스란히 녹여낸 색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잠시 칼리안을 휘저은 복잡한 마음을 알지 못할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위대한 카이리스의 3왕자가 태어난 이 기쁜 날을 축하하는 의미로.” 생명이기도, 그리고 죽음이기도 한 불꽃의 빛을 담은 샴페인을 손에 든 르메인은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울림이 느껴지는 낮은 목소리가 이어지기를 기다리는 귀족들을 쭉 훑어본 르메인이 힘 있는 말투로 칼리안에게 무엇을 선물할지 이야기하려 했을 그 때.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불청객. 국왕의 축사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지금은 입장이 불가하다는 기사를 제치고 안으로 들어선, 불청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한 사람의 목소리 하나가 르메인의 말을 막았다. 신분의 구분을 떠나 그 스스로가 가진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리고 최근에 기적적으로 찾게 된······. “에반 브리센 후작과 레넌 브리센 자작입니다.” 레넌 브리센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뒤늦게 도착한 한 사람. 바로 에반이었다. 제멋대로 연회장에 들어온 이가 누구인지 설명하는 카에라 소속 기사의 말을 뒤로 한 채로, 에반과 레넌이 연회장 안으로 저벅 저벅 들어왔다. - 찰그랑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샴페인이 채워지기 한참 전부터 놓여 있던 석류 주스. 그 속에 가득 차있던 얼음이 녹으며 맑은 소리와 함께 조금 가라앉았다. 칼리안에게는, 얼음이 낸 그 작은 소리가 연회장에 들어오는 에반과 레넌의 발걸음 소리보다도 훨씬 크게 들렸다. 짙은 푸른 색 예복에 화려한 백금 장식을 두른 채 입장한 에반의 눈이, 꼿꼿이 허리를 펴고 서 있는 칼리안에게로 향했다. 자신의 손으로 물린 레넌을 생일 선물로 받게 된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내심 궁금했던 까닭이다. 마치 그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석류 주스나 붉은 샴페인을 담아낸 듯 투명하게 빛나는 신비로운 눈이 에반을 향했다. 그리고 곧 거두어졌다. 레넌에게는 아예 스치는 듯한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지금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정도의 시선. 그리고 지금 당장 눈 앞에서 소리를 내고 있는 석류 주스에 조금 더 많은 흥미가 동한다는 얼굴을 한 채였다. 레넌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은 그 행동에 잠깐 눈썹을 들어올리던 에반이 곧 평정을 찾았다. ‘하긴. 알고 있었겠지.’ 사실 레넌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소문이 파다하지 않나. 칼리안을 축하하기 위한 이런 극적인 날 보란듯이 함께 나타날 것임을 칼리안 역시 감안하고 있었으리라. 때문에 에반은 담담한 칼리안의 반응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비어있는 플란츠의 자리,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드미레아. 드미레아의 머리에 올려진 사연 많은 장신구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드미레아는 한 술을 더 떴다. 아예 에반까지도 쳐다보지 않았다. 르메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드미레아의 이마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 챈 에반의 눈썹이 한 번 더 꿈틀했다. ‘이래서 플란츠가 자리를 비운 것이군.’ 아무리 에반이라지만 그래도 두 발로 걷고 말을 하는 사람인지라. 열심히 준비한 이 깜짝 파티가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는 것과 지금 칼리안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정도는 이해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조금 빨리 와서 저것들이 입장할 때부터 모조리 지켜볼 것을!’ 뒤늦은 후회를 떠올린 에반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그 소리를 홀로 들은 레넌이 에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를 가둔 사람이 제 아비라는 것도 모르는 채 에반에게 ‘구출’되어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대접받다 이 자리에 함께 오게 된 레넌은 영문 모를 얼굴로 에반과 칼리안과 르메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상황 파악 못하는 레넌 덕분에 에반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일단은 의연하게, 다른 이들의 눈에 당황한 것이 절대 보여지지 않도록 대처하는 것이 중요했다. 곧 에반이 칼리안으로부터 시선을 뗐다. 그리고 귀족들 중 가장 앞에 놓인 곳에 마련된 빈 자리로 천천히 걸어가 앉았다. 늦게 도착했음에 대한 사과의 말은 커녕 르메인과 칼리안에 대한 제대로 된 인사도 생략한 채였다. - 톡, 톡, 톡. 샴페인 잔을 손에 쥔 칼리안의 손 끝이 유리잔을 톡톡 두드렸다. 에반의 밑도 끝도 없는 오만한 태도에 화를 내지 않기 위해서 참는 중이었다. 일단 지금은 에반이 문제가 아니라 르메인이 남은 말을 마저 해야 했으니까. 그러니 제발, 빨리 좀 말씀해주시라고. 이런 눈을 한 칼리안이 르메인을 올려다보았다. 르메인이 칼리안을 살짝 바라본 뒤 시선을 거두며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후궁 프레이야 휘트린에게······.” 그리고 비로소. “왕비의 위를 내리겠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한 줄기 벼락같은 말이 장내를 울렸다. 소리 죽인 채 잔잔하게 이어지던 음악이 멈췄다. 축배사를 위해 들어올렸던 샴페인 잔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귀족들의 눈이 서로를 살폈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하고. - 톡, 톡, 톡. 칼리안의 손이 다시 한 번 소리를 냈다. 지금 칼리안이 흥미 가득한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는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귀족들의 소란에도 절대 동요하면 안 되었다. 좋아해서도 안 되며 르메인의 이야기에 거절의 의사를 비춰도 안 된다. 무조건 담담하게, 담담한 얼굴로 주변을 살펴야 했다. ‘누가 앉고, 누가 일어나는지.’ 그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 했으니까. * * * 한 가지 달라진 점과 여전한 점이 있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자신을 부를 때 더 이상 ‘왕자님의 형님 되시는’이라는 이상하고 긴 호칭을 더 이상은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느 순간 생겨나서 어느 순간 매번 붙여오던 그것을 이제는 더 쓰지 않았다.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께서.” 그리고 여전한 점은, 사람이 좀 얌전해졌거나 아니면 ‘왕자님’이라는 제대로 된 호칭으로 부르고 있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이제 아르센은 플란츠를 ‘칼리안의 형님’ 범주에서 뺐다. 정확히 말하자면 란델과 플란츠의 형제에서 칼리안을 뺐다고 해야겠지만 아무튼 둘을 더 이상 형제로 엮으려 들질 않았다. 덕분에 좀 짧아진 듯 아니면 더 괴상해진 듯한 그 호칭에 이미 익숙해져 있던 플란츠는 별 반응 없이 대답했다. “감기.” “감기 걸리셨습니까?” 이렇게 말한 아르센이 슬그머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새로 온 100명 챙기기에도 벅찹니다. 옮기시면 안 됩니다.” 마법 학원의 조기 졸업자를 포함한 새로운 인원 100명이 발칸의 마법사단에 추가됐다. 뿐만 아니라 기사단 카렌과 라온의 기사들이 발칸의 기사단으로 정식 합류했다. 덕분에 찾아온 예상했던 변화는 당연히 ‘바쁘다’였다. 그냥 바쁜 정도가 아니라 이제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이 바빴다. “시끄러.” 썩 좋은 기분이 되지는 못했던 플란츠가 아르센과 완전히 반대편에 자리한 곳으로 가며 망토를 풀고 셔츠 핀과 타이까지 전부 풀어 소파에 던지듯 내려놨다. 레릭은 또 어디다 버려뒀는지 몰라도 아무튼 돕는 사람도 없이 푸는 것 하나는 참 잘한다. 재킷에 베스트까지 죄 벗어던지고 셔츠 차림이 된 플란츠가 소매를 걷는 것을 보던 아르센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감기인데 왜 오셨습니까?” “일.” 아, 왕자님. 제가 정말 그랬단 말입니까? 말이 짧은지 인성이 짧은지 고르기도 힘든 저 사람을 믿고 제가 전쟁을 냈다고요? 소리 없는 절규를 내보이던 아르센이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책상 앞에 앉았다. 저만치 놓인 플란츠의 책상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자신의 책상이었다. 발칸의 규모가 늘어나며 예상했던 변화는 바쁘다였고,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는 지금 이것이었다. 기사단에 마련되어 있던 플란츠의 책상이 아르센의 가구 없고 넓기만 한 비효율적인 집무실 안에 들어오게 됐다는 것. ‘내 형님께서 숫기가 없어 그렇지 알고 보면 꽤 순하시니까 잘 지내봐.’ 칼리안의 판단은 정말 지독하리만치 합리적이었다. 물론 일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저 똑똑한 2왕자가 일을 엄청 빠르게 잘 하고, 그렇기 때문에 두 부군단장이 같은 집무실을 쓰면 일의 효율이 엄청나게 많이 늘어나리라는 것은 다 맞았다. 하지만 얼굴만 보고 있으면 효율은 늘고 생명이 줄어드는 둘을 한 집무실에 밀어넣어 둔 것은 정말 너무하지 않느냔 말이다. 원망 안한다더니 정말 원망을 안하는 것이 맞는지 의심이 되기 시작했단 말이다. 이런 아르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얼굴이 되어 아르센을 향해 말했다. “마법사.” “부군단장입니다, 부군단장님.” 이미 백만 번 쯤 알려줬지만 저것 하나를 도저히 모르는 플란츠의 호칭을 다시 한 번 정정해주는 아르센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가.” 숫기 없고 알고 보면 꽤 순한 왕자의 축객령에 숫기 많고 알고 보면 꽤 독한 마법사가 얌전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기는 제 집무실인데요, 부군단장님.” 다시 말하지만, 둘은 열 세 살 차이였다. 짜증을 감추지 못하고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를 흐트러뜨린 플란츠가 연두색의 눈에 날을 세우며 아르센을 봤다. “나가라고.” 그 뒤에는 그 반짝이는 연두색 눈으로 서류를 훑어내려가며 흘려보내듯 덧붙였다. “내 아우님 생일인데 축하는 해야 하지 않나.” 생일 축하 같은 소리 한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는 눈으로 플란츠를 쳐다보려던 아르센이 잠시 창 밖을 봤다.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지그프리드 관이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그곳을 보며 꽤 오랫동안 생각하던 아르센이, 벽에 걸어두었던 새하얀 로브 하나를 걸쳐 입으며 입을 열었다. “왕자님 생신 축하드리고 오겠습니다, 부군단장님.”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 그 직위를 제대로 보여주는 황금 월계수잎 문양이 잠시 반짝이다 문 뒤로 사라졌다. 아무것도 일러주지 않고 그저 축하해주라는 이야기만 했으니 에반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배신하지 않은 플란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류로 다시 눈을 돌렸다. * * * 칼리안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그날. 그날보다 더 할지언정 결코 덜하지는 않을 소란이 연회장을 메웠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앞을 살피던 칼리안의 눈이 에반을 향했다. 에반 역시 칼리안의 눈을 직시했다. 에반이 제 자리에서 일어나 르메인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프레이야의 왕비 추숭이 어떤 의미인지 에반이 모를 리 없을텐데도.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것을 보던 칼리안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샴페인이 든 잔에 맺힌 물방울을 훑어내리듯 움직였다. 잔 위에 투명한 호선이 또 한 번 만들어졌다. “아아.” 르메인이 부탁을 들어주었고 드미레아가 제대로 역할을 했다. 플란츠가 시기 적절하게 자리를 비웠다. 게다가 실로 기쁜 일이 하나 더 있음을 방금 확인한 칼리안이 그려내던 호선의 끝에서 손의 힘을 풀었다. 손 끝을 벗어난 샴페인 잔이 허공에 잠시 맴돌다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 쨍그랑······! 유리잔이 대리석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피와 같은 붉은 샴페인이 새하얀 바닥에 번져나갔다. 그 날카로운 소리에, 르메인에게로 향하던 에반의 생각 없는 발이 멈췄다. 멋모르고 퍼져나오던 소음도 멈췄다. 그렇게 지그프리드 관의 소란을 잠재운 칼리안이 바닥에 퍼지듯 흘러나온 새빨간 술을 내려다봤다. 이제야 저것이 라프라니아 빛으로 보인 까닭에, 하루 종일 마음을 누르던 옛칼리안에 대한 상념에서 벗어난 칼리안이 흡족한 얼굴을 하며 살짝 웃었다. 에반의 오러가. “······ 드디어.” 보. 인. 다. < 제34장. 내가 거짓말을 못해서(2) > 버릇이 됐다. 버릇이라는 것이 쉬이 버려질 수 있다면 그것에 왜 굳이 버릇이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따로 부르겠는가. 쉽게 버릴 수 없기 때문에 버릇이라는 말이 생긴 것이겠지. - 무슨, 일, 있어요? 그러니 히나도 어느새 버릇이 된 것이다. 주저하듯 아주 작은 소리로 문을 두어 번 건드린 뒤 똑똑똑, 하고 점점 더 커지는 소리로 노크를 한다. 작은 소리는 그 간격도 항상 달랐고 횟수도 천차만별이었지만 점점 더 커지는 그 소리는 정확히 세 번. 버릇이 된 그 독특한 노크 소리에 누구인지 묻거나 돌아가라 하는 대신 들어오라 말하는 것은 플란츠의 버릇이 되었다. 루시가 다리 위에 올라왔을 때 좀 더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불편한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주저함 뒤에 이어지는 노크소리에 곧장 들어오라는 말을 하게 된 그런 버릇 말이다. “들어와.” 버릇이 된 노크 소리에 버릇같은 대답을 하니 히나가 들어왔다. 그리고 집무실 안의 어지러운 풍경을 둘러본 뒤 버릇처럼 걱정을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아르센 때문이 아니고서야 이 집무실에 짜증 가득한 얼굴로 앉아 서류나 들여다보고 있을 일이 있겠느냐는 말을 자신의 식대로 설명했다. “알 텐데.” 플란츠와 아르센의 사이를 모르는 이가 과연 발칸에 있을까. 그러니 굳이 묻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물어보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하던 일을 일단 접고 히나를 쳐다봤다. 왜 왔는지를 묻는 것이다. 소리 없는 질문을 한 뒤 소리 없는 대답을 들을 준비를 한 플란츠를 본 히나가 살풋 웃었다. 그리고는 소파에 널브러진 플란츠의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곱게 정리해두기 시작했다. 시녀로서의 버릇이 여전히 남아서일지, 아니면 그냥 루시 챙기듯 챙겨주는 것일지 모를 친절이었다. 그런 히나를 보던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리며 말했다. “둬.” 어차피 곧 레릭이 와서 알아서 치워갈 일이다. 지금쯤이면 플란츠가 연회장에서 사라진 것을 알았을 테니까. 이런 말에도, 대답 할 손이 없으니 그냥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얼굴로 웃은 히나가 제멋대로 정리를 시작했다. 되는대로 집어던져서 엉켜버린 타이를 잘 풀어서 돌돌 감아놓고, 셔츠 핀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베스트와 재킷을 옷걸이에 걸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키보다도 큰 것 같은 망토를 척척 개어서는 소파 한 쪽에 놓은 뒤 플란츠를 보며 손을 움직였다. - 왜, 여기, 있어요? 아르센과 싸운 것이야 늘 있는 일이라지만, 널브러진 것들을 보아하니 분명한 예복이다. 그러니 지금쯤 칼리안의 생일 기념 연회에 있어야 할 2왕자가 왜 이런데서 서류나 들여다보고 있는지 궁금할 수 밖에. 그런 히나의 말에 플란츠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 대부분 그렇지 않던가. 어디가 아픈지를 묻는 사람이 치유사라면 저도 모르게 이곳 저곳을 알려주는 것 말이다. 그냥 아는 사이라면야 아픈 곳이 어디인지 섣불리 알려주지 않겠지만, 히나는 치유사니까. 때문에 누구나 그렇듯, 플란츠 역시 저도 모르게 성실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 감기.” 물론 성실한 대답이 꼭 솔직한 것은 아니었다. 북쪽의 대사막에 삼십 분 쯤 세워두면 모를까. 이 여름 날에, 그것도 플란츠가 감기라니. 다행히 히나는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을 만들어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렇다 해서 고분고분 넘어가지도 않았다. 잠깐 무언가를 생각해보던 히나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 가지 말고, 잠시만, 여기 있어요. 플란츠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은 딱히 갈 곳도 없다는 말을 굳이 해야 하나 싶어서였다. 드미레아의 티아라 덕분에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있을 지그프리드 관에 가서 같이 말려들고 싶지는 않았다. 르메인의 배려인지 아니면 앨런의 오지랖인지 혹은 이 세상에 없는 누군가의 모습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어떤 놈의 부탁 때문인지는 몰라도 라프라니아 생화라고는 단 송이도 없이 온통 빨간 종이꽃으로만 장식된 체르밀에 벌써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쯤 훈련장에서 기사들과 함께 있을 키리에와의 수련 역시, 오늘은 그리 관심이 가지 않았다. 결국 이런 것들을 설명하는 대신, 플란츠는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인 뒤 서류를 향해 눈을 돌렸다.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하고 있던 히나가 잠시 밖으로 나간 뒤 다시 들어왔다. 한 품으로 루시를 힘들게 안고 있던 히나의 나머지 한 손에 들린 것은, 아이스크림이었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감기 걸렸다는데.” 다른 말 없이 루시를 내려놓은 히나가 딸기 아이스크림을 건네주며 예쁜 웃음을 지었다.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 아이스크림 색깔이 루시 발바닥이랑 너무 똑같아서였다. * * * “아, 베른 경.” 발칸의 부군단장 표식이 달린 새하얀 로브를 걸쳐 입은 아르센이 빌헬름 관에서 터벅터벅 걸어나오다 훈련장에서 빠져나오는 키리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체르밀 궁 밖에서도 검을 소지할 수 있게 된 키리에가, 검집과 연결된 가죽 벨트의 위치를 살짝 교정하던 손을 놓은 뒤 아르센에게 목례를 보이며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다크서클이 한가득 내려온 우중충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냥 어디가 아니라 영 먼 곳으로 가버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는 했으나 일단은 그렇게만 물었다. “자네 혹시 술 생각 안 나나?” “네. 생각 안 납니다.” “나는 생각나네.” 빠른 권주에 돌아온 빠른 거절에도 굴하지 않고 말한 아르센은, 그래서 뭐 어쩌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키리에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갈 곳이 없어졌거든. 그러니 어쩌겠나. 술이나 마셔야지.” 누가 들으면 엄청 많이 마시는 줄 알겠다. 칼리안의 비밀을 안 그 날 원치 않게 아르센의 눈물 겨운 주량을 알게 된 키리에는 굉장히 꺼려하는 표정을 지으며 발을 뒤로 물리려 했다. 차라리 안에 들어가서 기사들과 다시 한 번 대련을 하는 것이 낫다는 얼굴이었다. 아니면 훈련장 주변을 또 달리거나. “갈 곳이 왜 없습니까. 할 일 많으신 분이.” “쫓겨났네.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께.” 그런데 거기가 사실은 내 집무실인데 내 집무실에 갑자기 들어와서는 걸친 것 다 떼버리더니 나더러 나가라지 않겠나.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하여튼 인성 하고는. 이렇게 중얼거린 아르센이 대충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키리에에게 설명을 했다. 앞서 아르센은 그레이와 몰래 손을 잡은 척을 했고, 덕분에 그레이가 수도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반은 그레이의 수도 입성을 대비해 레넌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을 플란츠는 몰랐다. “왕자님께서 지금 쯤이면 아주 신나게 다 휘젓고 계실텐데 브리센 후작이 그냥 두고 볼 리가 없거든.” 그리고 아르센은 플란츠가 모르는 것도 함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부군단장이신 왕자님은 브리센이랑 얽히면 안되고, 딴에 걱정은 되는 모양이고, 우리 왕자님이 다 넘겨주고 간 발칸을 제맘대로 우리 왕자님께 다시 돌려주려고 나를 쫓아낸 것은 알겠는데 정작 나는 거기에 가면 안 된단 말이지. 그런데 내가 왜 우리 왕자님한테 가서 편을 들어주면 안 되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지 않나. 그렇다고 여기서 얼쩡거리다가 부군단장님 만나면 다 들통나지 않겠나? 쓸데없이 눈치는 또 왜 그렇게 빠른지.” 그레이 변경백과의 일이 있으니 브리센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왜 못나서는지를 플란츠에게 설명할 수도 없고, 적당히 핑곗거리를 만들어 둘러대려 하면 플란츠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으니 일단 그냥 시키는대로 나왔다는 소리다. 그런 이유로 일단 자리를 피하기는 했으나 갈 곳이 없으니 키리에에게 또 한 번 술 친구 역할을 맡기는 것이었다. “나는 발 둘 곳이 없고, 우리 왕자님은 손에 쥔 것이 없고. 부군단장이신 왕자님은 대놓고 챙겨줄 사람도 없고 생일 축하인지 사과인지 모를 말을 받아 줄 사람도 없는 모양이니. 그냥 두 따까리끼리 모여서 축하주인지 위로주인지 모를 술이나 한 잔 하자, 이 말이네.” 정말 한 잔 밖에 못 마셨던 원수 같은 놈이 구구절절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고작 술 한 잔을 하자는데. 어쩌겠는가. 키리에는 더 거절하질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간혹 꿈을 떠올린다. 칼리안을 아는 그 누구도 그것을 기적이라, 혹은 행운이라 부르지 못할 이 생을 살게 된 뒤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꾸었던 꿈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주쳤고 완전히 헤어졌으며 매일같이 거울 속에서 만나게 된 아이를. 그를 대신한 단죄라 하면 지나치게 거창한 것 같아서, 그럴 자격이 과연 스스로에게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칼리안은 그냥 앞으로 자신이 할 행동을 화풀이라 이름짓기로 했다. 몇 날 며칠이 걸리든 혹은 몇 개월이 걸리든. 그것이 내 화풀이든 아니면 널 대신한 화풀이든, 굳이 어려운 생각 하지 않고 그냥 화풀이를 하겠노라고. “과분한 선물을 받으셨습니다, 왕자님.” 누군가를 꼭 닮긴 했는데 그것을 닮았다 여기면 그 놈한테 영 못할 짓인 것 같은 그런 비웃음을 입에 건 에반이 이렇게 말을 건네 왔다. 칼리안이 깨뜨린 잔을 치우기 위해 잠시 주변이 소란한 틈을 타 꺼내진 말이었다. “네. 좋군요.” 그런 에반을 보는 칼리안이 짧은 대답과 함께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숨을 쉬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버릇처럼 유지해오던 마법 하나를 풀어냈다. 오러가 늘어날수록 더 큰 마력을 필요로 하던 그 속박같은 힘이 해제되며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든 칼리안이 숨을 한 번 들이쉰 뒤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불과 2년 전, 실은 그보다 더 오래된 어느 날. 소금기 가득한 바다 비린내를 심장에 담는 심정으로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던 바로 그 어느 날이 생각났다. 그 날 만큼 속이 씻기는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가벼워진 공기가 그리 싫지 않았다. 그렇게 큰 숨을 한 번 쉬고 나니 그보다 더 꼿꼿할 수 있을까 싶었던 허리가 한층 더 당당함을 지닌 채 곧게 세워졌다. 그 후 조용히 눈을 뜬 칼리안이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아주 살짝 비딱해진 고개를 한 채로 에반을 보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안 보이는 것 같은데. 맞으려나.”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이 어쩐지 자신의 면면을 깊이 살펴보는 느낌이 든 에반이 불쾌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무엇이 안보인다 하시는지.” 나는 네 것이 보이고, 너는 내 것이 안 보이고. 그것을 확신한 칼리안이 살짝 눈을 내리떴다. 샴페인 잔에 꾹꾹 갇혀있던 붉음이 사방 팔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았을 그 때보다도 더 좋은 기분이 된 채로, 앞에 있는 저 놈을 이제 어떻게 요리해먹을지를 잠시 고민했다. “무엇을 보시든, 보지 못하시든. 스스로의 미래를 살피시지요. 섣부른 욕심은 화를 자처하는 법입니다, 칼리안 왕자님.” 그리고 그 기분을 제대로 망쳐놓으려 작정한 것이 분명한 에반이 이렇게 짖었다. “살피는 중이야, 안 그래도.” 칼리안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긴 속눈썹 아래에 든 붉은 눈이 미래를 살피고 있기는 했다. 다만 그것이 칼리안 스스로의 미래가 아니라 에반의 모가지가 똑 떨어지는 미래였을 뿐. 칼리안이 무엇을 살피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를 에반이, 자신의 앞에 선 채로 태연한 대답을 내어 놓는 왕자를 보며 다시 입을 열려 했다. “신이 나서 살피고 있어.” 그런 에반의 말을 가로채며 먼저 이야기 한 칼리안이 눈을 떴다. 과연 네 검은 얼마나 빠를지. 얼마나 무거울지. 얼마나 예리하고 얼마나 매서울지. 어떤 생각이 담겨 있을지, 어떤 이들의 기억이 담겨 있을지. 그것을 전부 다, 남김 없이 나에게 알려줄 그 날이 언제일지. 화풀이 할 수 있는 그 날이 과연 언제일지. “그 날이 언제일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어.” 봄에 만났던 그 날보다도 더 버릇 없어진 말투를 들은 에반이 눈꼬리를 찌푸렸다. 평민 출신 후궁이 왕비가 될 판에, 앞에 선 3왕자는 자신이 이미 세자위에 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에반의 심기를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 “하찮은 이의 핏줄로 왕가를 더럽히려 하지 마십시오, 왕자님.” 사람들은 모르지만 에반은 안다. 칼리안은 지금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고작 정통성 하나 가진다 해서 가질 수 있을 자리가 아니지 않나. 흩어진 유리조각이 치워지는 동안 잠시 소란했던 주변 분위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에반과 칼리안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듣고 싶었던 까닭에 모두가 알아서 침묵을 지켰다. 어느새 바닥에 흩어진 유리조각이 이미 모두 치워지고 붉은 샴페인도 모두 사라졌다. 완전히 깨끗하게 돌아온 바닥을 보던 에반이 손가락을 들어 그곳을 가리켜보이며 칼리안이 아닌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렇게 흔적 없이 치워지실 날이 올 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칼리안은 에반의 손이 가리키는 것을 보지 않았다. “그보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왕자에게 신변의 위협을 가하는 에반을 향해 함께 화를 내는 대신 여유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칼리안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다. 석류주스 안에 든 얼음조각처럼, 투명하기까지 한 맑은 미성에 소름끼치는 한기가 어렸다. “나에 대한 예는 언제 보일 생각인지.” 다만 나는 화풀이를 끝내고 나서도 제대로 살 것이라서. 언제나 그래온 것처럼 이번에도 경고만 하고 넘어갈 생각 하지 말고 너도 한 번 제대로 준비해서 화를 내 보라고. 그래야 제대로 다 뺏어올 수 있을 테니까. “허리를 숙이거라. 후작.” 새빨간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 제34장. 내가 거짓말을 못해서(3) > 허리 숙여 예를 보이라는 말. 그 말을 듣자마자 귀족들은 저마다 각자 다른 이를 떠올렸다. 누군가는 친구를, 누군가는 가족을, 또 누군가는 장성한 자식들을.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각자의 사정에 따라 이 자리에 오지 못한 이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귀족들은 그들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아 지금 이 순간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흥미진진한 광경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주어야 조금이라도 더 사실적인 설명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갔다. 그것이 에반의 편에 선 귀족들이든 그렇지 않든 귀족들이 가장 처음 떠올렸던 것은 그렇게나 귀족다운 생각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기에 왕자님께서 직접 저런 말씀을 하시지?’ 칼리안 왕자와 에반 브리센 후작. 한때 함께 손을 잡고 실리케를 몰아냈던 사이가 아니던가. 심지어 칼리안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플란츠와 매우, 물론 귀족들 눈에 그리 보였다는 이야기지만 아무튼 매우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그 사이에 에반과 무슨 대화가 있었으면 칼리안이 에반을 향해 예를 보이라는 이야기를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후작님에게······. 너무 오만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귀족다운 생각의 끝에서, 에반의 편에 선 귀족들은 이런 것을 떠올렸다. 에반이 비록 왕자보다 낮은 서열의 후작이라 하나 이 연회장 안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지체 높은 사람이다. 그런 이에게 왕자가 허리를 숙이라 명령하는 것이 단순히 흥미있는 일이기만 한 것은 아닐 터였다. ‘저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세자위에 오르지 않은 왕자가 있다. 그 왕자가 자신에게 저런 말을 했을 때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뒤이었다. 더 나아가 또 한 가지. ‘칼리안 왕자가 왕위에 오르면 이보다 더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후작에게까지 저런 이야기를 하는 왕자가 먼 훗날 왕위에 오른다면, 그 왕자는 후작보다 훨씬 낮은 직위의 귀족들을 어떻게 대할지 벌써부터 걱정과 반발심이 드는 것이다. “브리센 후작.” 수많은 눈동자가 바삐 움직이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고요함을 깨뜨리며,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에반을 불렀다. 그런 칼리안의 눈에 멀찍이 선 레넌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귀찮게 되었다. 기껏 조용히 집어넣어 놓은 레넌을 다시 꺼내놨으니 다시 치워버리게 생겼지 않나. 그것이 거슬리는 마음에 칼리안의 미소가 조금 더 짙게 변했다. 반대로 에반의 미간은 조금 더 찌푸려졌다. ‘웃어?’ 칼리안의 오러가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신경써왔으나 이제는 그런 생각도 떠오르질 않았다. 당장은 저 피같은 두 눈을 당장 뽑아놓고 싶은 마음 뿐. 스치는 듯한 눈인사라도 했다면 그것을 핑계 삼아 넘기기라도 할 텐데, 생각해보니 정말로 인사를 안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칼리안이 시키는대로 정말 허리까지 숙여 가며 인사를 했다가는, 기다렸다는 듯 브리센에서 발을 뺄 귀족들이 너무 많았다. 저도 모르게 피어오르려는 살기를 억누른 에반이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려 필사의 노력을 했다. 이 자리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서, 평생 굴리지 않았던 머리에 강제로 기름칠을 하고 필사적으로 생각을 이어나갔다. 당연하겠지만 화를 낼 수는 없다. 이 순간 조금의 살기라도 비춰지면 그날로 끝이다. 앞에 선 칼리안이 문제가 아니다. 르메인을 호위하는 카에라의 기사들이 당장 그것을 눈치 챌 테고 그렇게 되면 르메인이······. ‘가만. 르메인이 있었지.’ 지금 감히 왕자가, 국왕 르메인을 앞에 둔 채 귀족에게 예를 요구하고 있지 않나. ‘르메인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제까짓 것이 나에게 예를 보여라 마라 한다는 말인가?’ 이 자리를 현명하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린 에반의 미간이 보란듯이 펴졌다. 마치 에반의 잔머리 굴리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흠결 하나 없던 미소를 천천히 지워낸 칼리안이 르메인이 있는 방향 쪽으로 살짝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자신과 조금 떨어진 뒤에 르메인을 둔 채, 이 조용한 지그프리드 관에 들어와 있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또렷하고 엄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하께, 예를 차리는 방법까지 내가 알려주어야 하나. 브리센은 이제 국왕 전하에 대한 경의조차 보이지 않기로 하였는가.” 도망갈 길을 찾는 쥐를 내려다보던 고양이처럼. 빠져나갈 구멍 하나를 남겨두고 이 맛 좋은 먹이가 얼마나 빨리 그 곳을 찾아내는지 재밌게 지켜보던 고양이처럼. 비로소 간신히 찾아낸 탈출구로 달려가려는 쥐의 앞에 느긋하게 앞발을 내려놓으며 만족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는 고양이처럼, 말했다. - 까드득! 칼리안의 귀에 에반의 입 속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칼리안은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에반을 응시했다. 칼리안은 후작의 작위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조금도 보여지지 않는 완전한 하대를 해 가며 에반을 자극했다. 그리고는 분명 자신에게 허리 숙여 예를 보이라는 뜻으로 말을 했다. 르메인이고 뭐고 다 필요 없이 자신의 앞에 무릎 꿇으라는 듯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그래놓고서는 이제와서 르메인을 팔았다. 자신이 아닌 르메인에게 예를 보이라고. ‘플란츠는 왜 하필 이 자리에 없는 것인가!’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거들며 에반의 편을 들어야 할 플란츠가 없었다. 그리고 르메인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칼리안과 에반을 주시했다. 그저 주시하고만 있을 뿐, 그 얼굴에 그 어떤 표정도 드러나있지 않은 채였다. 르메인이 나설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국왕에 대한 예의를 보이라며 왕자가 귀족을 힐책하는데 그것을 하지 말라 할 이유도 없고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나서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라는 정도는 르메인도 알았을 것이다. 르메인은, 그것이 정말 자신에 대한 예의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에반과 르메인의 사이에 선 모양새를 한 채 예를 보이라 하는 칼리안의 저 행동을 보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리라. ‘빠져나갈 구멍이 없구나.’ 국왕을 입에 올린 이상 에반이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칼리안의 오만함을 잠시 의심하던 귀족들은 어느새, 그럼 그렇지 하는 정도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스스로가 아닌 르메인에게 예를 보이지 않아 화가 났다는데 그것을 두고 어떤 다른 생각을 하겠는가. 결국 에반이 르메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늦었지만······ 국왕 전하께, 인사, 드립니다.” 르메인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남겨두었던 단 하나 뿐인 탈출구를 막아버리고 에반의 인사를 함께 받은 칼리안의 손가락이 오늘 그려낸 것 중 가장 깊은 호선을 그려냈다. 그렇게 또 한 번, 손 끝으로 웃었다. 천천히 허리를 들어올린 에반의 고개가 칼리안을 향했다. 플란츠의 것보다 짙은 녹빛의 눈이 포식자의 만족스러움으로 가득찬 핏빛의 두 눈을 파고들듯 노려봤다. 그것을 마주보는 칼리안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지배자의 인자함 이상의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온화한 얼굴을 한 채로, 칼리안이 느리게 말했다. “굳이 나에게까지 한 번 더 인사할 필요는 없으니 이만 자리로 돌아가거라. 후작.” 라고. 하찮은 혈통을 지녔으나 누구보다 고귀하고 자애로운 왕족의 너그러운 마음을 가득 담아서. * * * 시퍼렇게 빛나는 손을 보던 키리에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 마십시오.” 앞에 있는 저 얼음 마법사가 이성을 잃었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랐고 과연 자신이 그것을 막을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던 탓에, 키리에는 사뭇 긴장한 채였다. “내가······.” 서늘한 눈빛으로 키리에를 마주보던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무언가를 잔뜩 억누르고 있는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벌어진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내가 참아야 할 이유가 있나.” “네.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키리에가 낮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 더 참지 않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있는 것은 오히려 키리에였으므로, 다소 화가 난 듯한 얼굴이 된 채였다. “닭 튀김은 얼면 맛 없습니다.” 그리고는 아르센이 얼리려던 접시를 멀찍이 치웠다. 꽁꽁 얼어붙은 닭고기가 가득한 두 개의 접시 옆에 이제 갓 튀겨져 나와 모락모락 김이 나는 노릇노릇한 닭 튀김을 피신시킨 키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얼리시면 그냥 갈 겁니다.” “아, 그건 안되겠네. 혼자 마시는 술은 심심하다네.” 혼자 술 마시는 것이 심심하다 생각했으면 닭을 얼리지 말았어야지. 아니면 그냥 얌전히 세 잔만 마시던가. 오늘은 컨디션이 좋고 기분만 별로라는 근본 없는 소리를 하더니 기어코 한 잔을 더 시켰다. 키리에의 잘못이 있다면 아르센의 맥주 주량이 몇 잔인지 이제야 알았다는 것, 그리고 아르센에게 있어 얼려놓으면 참 예쁠 것 같이 생긴 따끈따끈한 닭 튀김을 참 좋아한다는 것 정도랄까. 그런 키리에의 서글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네 잔째의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킨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일세, 베른 경.” “오늘같은 날 칼리안 왕자님 곁에 그 하얀 로브 입고 서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이미 여섯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가지 진짜 돌려버리기 전에 좀 닥치라고. 그런 의미가 가득 담긴 이 악문 소리에, 아르센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내 말은 그게 아니야. 내가 말일세, 베른 경.” 키리에가 주먹을 꼭 쥐었다. 손 많이 갈 것 없이 제 할 일 알아서 잘 하는데다 알고보면 그렇게 많이 미쳐있는 사람도 아니니까 그래도 한번 잘 지내보라는 칼리안의 말이 없었다면 아마 진작에 저 모가지를 보기 좋게 다듬어놨을 것이다. 그렇게 많이 미쳐있지 않다는 것이 다분히 칼리안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임을 이제야 깨달은 키리에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맘대로 그냥 할 말 하라는 뜻이었다. “나는 발칸의 부군단장이네, 베른. 아니, 베른 경. 이런 내가 오늘같은 날 왕자님 곁에 있었으면 씹다 뱉은 쑥빵같은 그 후작놈이 우리 왕자님한테 기어오를까 걱정할 일이 없었지 않겠나? 그러니까, 베른 경. 내가 굳이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과 한 집무실을 쓰고 우리 왕자님 앞에서만 예쁜 말 쓰시는 군단장님 밑에서 지내는게 막 서러운 것 다 참아가면서 지내는 것이 말일세. 오늘같은 날 내가 우리 왕자님 옆에 딱 서있으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는 말이지.” 너 때문에 나까지 왕자님 곁에 못 서있고 여기서 닭 튀김이나 지키고 있는 것을 너는 아느냐고. 딱 그런 얼굴을 한 키리에가 결국 손을 들었다. 저 말도 이미 네 번을 들었으니 이만 재워도 될 것 같아서였다. 이 정도면 술 친구 역할은 충분히 한 것이 아니겠나. 그리고 아르센은 다시 입을 열었다. 또 말을 시작했다. “우리 스승님이 그러셨거든, 베른 경. 마법사는 다른 것 다 필요 없이 자기보다 조금 더 돌아있는 놈 따라다니면 된다고. 그 생각이 나서 곰곰히 따져봤더니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잘 찾은 것 같은데, 베른 경. 그런데 내 맘대로 따라다닐 수가 없다는 말이지. 그런데 부군단장이신 왕자님은 나더러 우리 왕자님한테 다시 가라고 하시니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고 그렇지 않겠나, 베른 경.” 마음 같아서는 칼리안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고 싶은데 플란츠 신경쓰는 칼리안의 상황 때문에 그렇게 못하고,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칼리안에게 아르센을 돌려보내려 하는 꼴이 답답하고 속상하다는 소리다.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베른 경.” 그렇게 말한 아르센이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한 번 지어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오늘 후작저로 가서······.” - 퍼억! 아, 이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후작저로 가서 뭘 할지는 몰라도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한 발칸 부군단장을 얌전히 만들 최선의 방법이 이것 밖에 떠오르질 않는데 어쩌겠나. 뒷목을 맞고 쓰러진 아르센이 잘 기절한 것을 확인한 키리에가 조금 식은 닭 튀김을 하나 집어들며 담담하게 말했다. “주무십시오, 그냥.”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간 것은 우연이지 결코 사심이 아니었으니 그것도 별 수 없는 일이다. 모가지 안 돌아갔으면 됐지. * * * 그 자체로 칼리안의 생이었다. 햇살보다 더 따사로운 미소에 온 마음이 풀어지고 그 작은 손 끝의 따스함에 언 심장이 녹는 것 같았다. 그러니 히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칼리안이 숨을 쉬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그런 소중한 선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나 소중한 우리 히나가 접어둔 것이 분명한 저 망토는 대체 뭐냐고. 삐져나온 곳 하나 없이 완벽한 각도로 접은 망토를 동글게 말아둔 저 귀여운 모양새는 우리 히나의 솜씨인 것이 분명한데, 레이븐이 참 좋아하게 생겨먹은 네 놈의 망토를 왜 우리 히나가 개어 놨느냐고. 그러고보니 오늘부터 너랑 나랑 잠깐 나이 같아진 것 너 혹시 아느냐고. 이 참에 진짜 가만 두지 않겠다고. 라고 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간신히 꾹꾹 참았다. 대련하자는 말도 안했고 욕도 안 했다. “파란 별이 내립니다.” 오늘 하루 참은 것이 너무 많아서, 스스로를 잠시 기특하게 여겨 준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아르센을 만나러 왔더니 있으라는 아르센은 없고 한 이틀 삶은 것 같은 분위기의 완두콩 한 알이 창문 앞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냥 소파에 앉아서 맞은편 소파에 놓인 망토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이렇게 문득 입을 열었다. 그냥. 정말로 축하 받아야 할 아이가 생각났고. 정말로 축하 받아야 할 그 날이 생각났고. 그냥 그래서.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세상 그 어떤 날보다도 더 아름다운 하루가 있는데. 가끔 오기도 하고 오지 않기도 해서 축하를 받기도 했다가 받지 못하기도 했다가. 그랬습니다.” 여느 때처럼 뜬금없는 말이기는 해도 세렌티의 시간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그러니 지금 들린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는 플란츠도 알아들었다. 플란츠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뒤에 앉아있던 사람을 쳐다봤다. 누구의 모습을 하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해서. “이렇게 아침부터 일어나 빨간 꽃을 받고 축하 인사를 받고 축하주를 받고. 그런 날을 맞이하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낯설기도 하고.” 거기까지 듣던 플란츠가 말 없이 옷걸이에 걸려 있던 재킷을 입었다. 다른 복잡한 것들은 다 두었지만, 셔츠 차림으로 아직 귀족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빌헬름 관 밖으로 나갈 수는 없어서였다. 그리고는 가끔씩 나이차이 말고 세대차이 느껴지는 말을 하는 동생놈을 향해 짧게 입을 열었다. “배고파.” 쓸데 없는 얘기 말고 밥이나 먹자는 소리에 칼리안이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 * * 어여쁜 나의 아가, 일어나보렴. 밤하늘에 파란 별이 피어났단다. 이렇게나 예쁜 날에 태어났으니 오로지 너 하나만은 특별하단다. 어디에도 남지 않은 너의 생일을 이다지도 많은 별이 기뻐하잖니. < 제34장. 내가 거짓말을 못해서(4) > 에반 브리센 후작의 눈꼬리가 쭉 올라갔다. 이 순간 누군가 그를 향해 씹다 뱉은 쑥빵이라는 이야기를 했음을, 그리고 그 말을 꺼낸 이가 당장 에반의 숨통을 끊어놓을 생각을 하다 깊이 잠들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찌감치 저택에 돌아와 곧바로 서재에 틀어박힌 채 가만가만 화를 가라앉히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다스려지던 울화통이 말 한마디에 터져버리고 말았다. “생각을 좀 하고 말하라 했지 않느냐. 빛 못 보던 시간 동안 생각하는 법도 잊었나보구나. 독이나 자객을 보내라니, 그게 통할 것 같다고 생각했느냐?” 덕분에 에반은 기어코 자신의 울화통을 터뜨린 레넌을 향해 매서운 눈을 하며 화를 냈다.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언급한 에반을 보며 레넌이 함께 성을 냈다. “갇혀있던 얘기는 왜 꺼내십니까?” 챙겨질 건 전부 꼬박꼬박 챙겨졌으나 어디인지 알 수 없던 곳에서 빛 한 줌 보지 못하고 1년을 살았다. 감옥보다는 나았으나 그렇다 해서 살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유도 모르고 갇혀 살았던 날들을 떠올린 레넌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멜피르 폴룬 그 놈이 손을 쓴 것이 분명하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려도 누가 저를 가둬놨는지 알아 볼 생각도 안하시고, 왜 놈에게 상단을 팔았는지도 설명 안 하시는 것을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연회장에 끌고 가시질 않나, 제 딴에는 아버지를 생각한다고 하는 말에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못 보던 사이에 왜 이렇게 변하신겁니까?” 레넌은 자신을 감금시킨 것이 에반이라는 사실이나 그 동안 감금되어 있던 곳이 에반의 집이었음을 전혀 몰랐다. 영문도 모르고 1년 가까이 어딘가에 갇혀있다 나왔는데 에반은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 줄 생각을 하질 않았다. 실리케의 죽음과 상단의 신속한 매각, 대략적으로 굴러가는 상황 등을 꼼꼼하게 따져보면 그 모든 일의 주범이 바로 에반임을 알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겠으나 애석하게도 레넌은 그렇게까지 생각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구해낸’ 에반이 범인 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데다, 무슨 말만 하면 멍청하다며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대는 태도에 화가 날 뿐. “네놈 머리가 2왕자 반만 따라갔어도 내가 이렇게 속 터질 일은 없었을 것을! 오래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 나가거라.” 플란츠 반도 못따라가는 그 머리가 누굴 닮아 나온 것인지는 모르는 채 이렇게 이야기한 에반이 레넌을 밖으로 쫓아냈다. 그리고는 탄식인지 여전한 짜증인지 모를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놈만 아니었어도 저것을 꺼내놓을 일은 없었을텐데.” 그나마 조금 더 머리를 굴릴 줄 알지만 그만큼 욕심도 큰 그레이가 아니었다면 레넌을 다시 꺼내놓을 일이 없었을 터였다. 굳이 답답함을 감수해가며 레넌을 꺼내주었는데 그런 보람도 없이 일만 꼬였으니 지금 속이 터질 지경인 것이다. “그나저나 3왕자를 어찌 해야 하나.” 귀족들의 앞에 레넌을 내보이고 일파만파 퍼지는 소문을 그레이가 접해듣게 할 겸, 앨런과 칼리안의 속을 좀 뒤집어 둘 겸 손꼽아 기다린 연회날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어처구니 없는 꼬투리를 제대로 잡히는 바람에 프레이야의 왕비 추숭에 대해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내가 아무 소리를 하지 못했으니 다른 놈들도 큰 소리를 못 낼 것인데.” 한참을 고민해도 칼리안을 막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질 않았다. 그러다 결국 그리 유쾌하지 않은 한 놈의 얼굴이 떠오른 에반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플란츠를 찾아가봐야 하나.” 플란츠를 찾아가서 방도를 알려달라 조언을 구해볼까 하다가, 오래지 않아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 번 더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 좀 써 가며 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 까닭이다. 놈에게 또 그런 이야기를 듣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나. 어느정도는 더 고민을 해 보고 그래도 생각나는 것이 없으면 그 때 찾아가보기로, 그렇게 생각을 했다. 얄팍한 자존심을 세우느라 플란츠를 멀리하기로 한 것이 칼리안이 예상했던 그대로의 결정임을 모르는 채로. * * * 자박, 자박 하고 발을 옮기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서로 보폭이 다른 그 발 소리는 잠시 겹쳐 울리기도 했다가 또 잠시 엇박으로 울리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 맞아들어가다가 엇나가면서도 결국 같은 속도로 걷고 있는 것이 괜스레 재미가 있던 얀이 웃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어느새 훌쩍 자라 자신과 눈높이를 맞춰오게 된 동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련하더라도 내일은 말고 조금 뒤에 와. 오늘 왕자님 심기가 안 좋으셔서.” 에반 때문에 칼리안 기분이 좋지 않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매년, 칼리안이 한 순간 태도를 달리한 직후였던 작년에도, 생일을 맞이한 칼리안은 항상 날이 서 있었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귀족들과 실리케의 앞에 나서야 했던 까닭이었든 혹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든 언제나 칼리안은 그래왔으니까. 다만 그런 일을 드미레아에게 굳이 일러 줄 이유는 없었으므로 얀은 그냥 간단하게만 이야기를 했다. 칼리안을 저택에 숨겨두었을 때 에반을 상대해가면서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가 생각났던 드미레아가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어차피 저도 곧바로 시간이 나지는 않으니까요.” 칼리안에게 칼리안의 사정이 있다면 드미레아에게는 드미레아의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소공작인 드미레아 역시 다른 일정들이 빼곡했으니, 아무리 그것이 칼리안이 알려주는 검술이라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매일 궁을 찾아와 수련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때문에 이렇게 대답을 하고 다시 산책하듯 발을 옮겼다. “그래. 다음 주 이후로 괜찮은 시간 알려주면 일정 조정할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궁에서 나가지 못하는 칼리안을 대신해 드미레아를 저택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칼리안은 시간도 늦었으니 오랜만에 본가에서 하루를 지내고 오라 했지만, 그런 말을 건네는 표정이 썩 좋지 않았던 탓에 선뜻 알겠다 대답하지 못한 채였다. - 매앰, 매앰. 마차가 있는 곳까지 가기 위해 조용히 발을 옮기고 있을 때, 발소리에 잠을 깬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밝게 빛나는 왕궁의 불빛 때문에 잠에 들지 못한 것인지 매미가 울었다. 매미 소리를 들은 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가 밝아서 매미가 잠을 못 자나보다.” “혼자 갈 수 있으니 들어가세요, 오라버니.” 그렇게 대답하는 드미레아의 목소리가 조금 커져 있었다. 피할 수도 없는 여름 매미 소리를 얀이 얼마나 꺼려하는지, 또 왜 그렇게 꺼려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드미레아였으니 말이다. “그게 참 이상해, 드미레아.” 드미레아의 말에 대한 대답인듯 아닌 듯한 말을 꺼낸 얀이 살짝 웃었다. “작년 여름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어차피 늘 체르밀 궁에만 있었고 가끔 저 소리가 들릴 때면 안으로 피하곤 했었는데······. 작년에는 집에 가는 내내 들었을텐데도 매미 소리를 내가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하나도 생각이 안 나더라.” 이렇게 말한 얀은 가만히 들려오는 매미 소리에 귀기울이며 천천히 걷다 다시 말했다. “다녀오는 내내 왕자님이 하도 사고를 많이 치셔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그래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거야. 내가 매미 소리를 들었나 안 들었나, 하고.” 로젤리타에 가는 길 오는 길 내내 두루두루 잘 부수며 돌아다닌 칼리안에게 온 신경을 쓰는 바람에 매미가 우는지 안 우는지 듣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지금 들려오는 매미 소리도 그렇게 꺼려지질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드미레아가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오늘 드미레아 역시 겪었지 않았나. 칼리안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나 큰 사고를 칠 수 있는 사람인지. “정신 없었을 만 합니다.” “응. 얼음 넣은 민트 차를 계속 만들어다 드렸던 건 기억이 나는데, 매미 소리는 기억이 안 나. 정말 하나도.” 이렇게 다시 한 번 말한 얀이 드미레아와 똑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는 슬레이만이 그렇게 하듯 손을 올려, 어엿한 지그프리드의 작은 방패가 되어 자신까지 계속 걱정을 해주고 있는 드미레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손을 올린 것이 얀이 아니었다면 당장 그 손모가지가 날아갔을 테지만, 어쨌든 드미레아는 싫은 내색 없이 그냥 가만히 있었다. “너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하지 말고 나도 걱정하지 말아, 드미레아. 나도 자라고 있거든.” 서로 다른 발자국 소리같이 자라는 속도도 조금 다를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결국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은 똑같으니까. 훌쩍 자란 드미레아 만큼 얀도 키가 크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웃던 얀이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그러고 보니······!” 무슨 일인지 묻는 얼굴이 된 드미레아를 내려다보던 얀이 울상이 되어서는 말했다. “나 키가 너무 빨리 커지는 것 같아. 이러다가 내기에서 이기면 어떡하지?” 사실 새끼 코끼리는 꽃같은 우리 왕자님과의 키 크기 내기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새끼 코끼리 아빠가 너무 큰 코끼리였던 탓에, 아빠 코끼리를 잘 닮은 새끼 코끼리는 하루하루 쑥쑥 잘 자라고 있었다. 덕분에 자칫하면 칼리안과의 내기에서 이겨먹게 생긴 얀이 어떻게 하면 키가 덜 자라는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안 드미레아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이러니 내가 걱정을 안 하게 생겼느냐고. 딱 그런 말을 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 * *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꿈뻑 꿈뻑 하고 눈을 감았다 떴다.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꿈인지 아닌지를 가늠해보고 있는 빨간 눈이 다시 한 번 시야에 들어왔다. “왕자님?” 새파란 눈으로 새빨간 눈을 본 아르센이 반갑다는 듯 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의 끝이 제대로 꼬부라져 있던 탓에 할 말을 잃어버린 칼리안이 잠깐 하늘을 봤다. 실로 아름다운 밤 하늘에 노란 별이 무수하다. 그것을 하나하나 세어보다가, 너무 많은 별을 속으로 가늠해내기가 어려운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려 옆을 봤다. 별을 세느니 차라리 곁에 서 있는 연두색 놈을 보면 마음이 좀 차분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앗! 우리 왕자님이 여기 계시네!” 소용 없는 짓이다. 꼴보기 싫은 얼굴을 암만 봐도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우리 왕자니임. 칼리안 왕자니임.” 아······ 진짜 미친놈이 진짜 미쳤나보다. 칼리안이 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웃기 시작했다. 키리에에게 반쯤 들려있다시피 부축받은 채 왕궁으로 들어온 아르센이 헤벌쭉 웃었다. 그것을 본 키리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전까진 괜찮았는데······.” 조금 전까진 얌전히 잘 기절해 있었는데 갑자기 깼습니다. 라는 뜻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큭큭거리는 칼리안의 웃음소리가 빌헬름 관 앞마당을 울렸다. 이 순간에도 미간을 찌푸린 채 조금도 웃지 않는 플란츠가 정말 신기했지만 그것을 따질 겨를이 있나. 내가 웃기면 웃는 거지. “왜······.” 입 밖으로 미처 나오지 못한, 쟤 왜 저러느냐고 묻고 있는 손가락으로 아르센을 가르킨 채 한참을 웃어댔다. 흐느끼듯 흔들리는 어깨를 따라 손가락 끝이 마구 흔들렸다. 그 손을 가만히 쳐다보던 아르센이 아직 다 돌아오지 않은 정신머리로 입을 열었다. “왕자니임, 제가요. 오늘요.”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께서 왕자님한테 가라고 했는데요, 하고 말하려던 아르센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앗! 부군단장이신 왕자님도 여기 계시네!” 움직이는 쓰레기가 여기 있다는 듯한 얼굴을 한 채 아르센을 보던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며 칼리안에게 말했다. “치우고 와.” 칼리안의 반응을 보아하니 지그프리드 관에서 아르센을 만난 것 같지가 않아서 안그래도 이상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 아르센이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왔는데, 아무 이유가 없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무슨 이유인지 알려줄 리도 없고. 때문에 뭔 일인지 눈치 채기 전에 그냥 알아서 자리를 피하겠다는 뜻이었다.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걸음을 옮기는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이 아르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는 것은 칼리안도 마찬가지였던 탓이다. “헤르츠 경.” “네, 왕자니임.” 하늘은 맑고, 노란 별이 떴고. 배는 고픈데 밥을 못 먹었고. 미친 마법사가 술에 취해서 실려왔다. “말해요. 들어줄 테니까.” 그러니 뭐가 그렇게 속이 상해서 이렇게 술을 처먹고 왔는지 그냥 얘기하라고. 그 말을 들은 아르센이 다시 한 번 싱긋 웃었다. “왕자님. 제가요.” 맥주 네 잔 마신 기운을 빌어 사양 않고 말을 시작했다. 그동안 칼리안에게 하고 싶던 말이 너무 많았지만 꾹꾹 눌러담아 두기만 했던 이야기들이 봇물 터지듯 한참을 흘러나왔다. 플란츠가 체르밀 궁에 돌아가고 키리에가 늦은 수련을 다시 한 번 하는 동안, 하기 싫었던 일, 하고 싶은 일, 힘든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 전부 다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쌓고 쌓아뒀던 말들을 모으고 모아서 그렇게 한참동안. < 제34장. 내가 거짓말을 못해서(5) > 칼리안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아직까지도 가끔씩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환상통을 남긴 그 대단한 얼음 마법사는 아마 6서클이 아니었을까 라고. 아니,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왕자니임.”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을 수준이 됐으니 그 플란츠 밑에서 잘 지내다 베른의 앞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었다면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플란츠에게 술주정을 하다가 발칸에서 잘렸거나 모가지가 잘렸거나 뭐든 하나는 잘렸을테니까. 그나마 다행한 일은 칼리안이 아르센의 유능함을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아직까지는 어디 하나 잘라놓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고, 조금쯤 불행한 일은 같은 이유로 인해 발칸에서 잘라내 줄 생각도 아직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칼리안은 지금 빌헬름 관으로 들어가는 계단에 아르센을 앉혀놓고 그 옆에 나란히 앉은 채였다. 남들이 밟고 다니는 계단에 칼리안이 앉아있는 것을 누가 본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테지만 이 시간의 빌헬름 관에는 아무도 없었으니 굳이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 꼬르륵 그리고 아까부터 뱃속에서 들려오는 참 낯선 소리에도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생일인데, 하필 눈 뜨자마자 받은 것이 라프라니아 종이꽃이었던 탓에 하루종일 뭐 하나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음을 다시 깨달은 칼리안이 다 체념한 듯 말했다. “네. 듣고 있습니다.” “제가요, 왕자님. 이렇게까지 징징거릴 생각은 없었는데요.” 만약 조금 더 다행한 일 하나를 찾아본다면 사람이 굳이 술을 처먹어가며 움직이는 쓰레기가 되고 싶어하는 이유를 칼리안이 참 잘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조금 더 불행한 일 하나는 칼리안이 지금 세 번 째 반복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 정도랄까. “알고는 있으니 다행입니다, 헤르츠 경.” 쉽게 말해 무려 세 번을 참은 칼리안이 깊은 한숨같은 대꾸를 하며 이 순간 누구를 탓해야 할지를 조용히 손꼽아 따져보기 시작했다. 일단, 보리 발견한 놈. 그 놈부터 따져본다. 그리고 보리 심어본 놈, 보리 키우기 시작한 놈, 보리 잘 키워서 남긴 놈, 남은 보리로 뭐 할지 고민해본 놈, 남은 보리로 술 만든 새끼. 그래. 그 새끼가 잘못했다. “그래서 지난번부터 제가 그렇게 말씀 드렸잖아요, 왕자님. 부군단장이신 왕자님 살리겠다고 왕자님 손에 있는 것 털어내는 일은 안 하셨으면 좋겠다고요.” “나 그렇게 욕심도 없고 미련도 없는 그런 사람 아닌데. 왜 다들 모르지. 그리고 그렇게 대책없이 사는 사람도 아닌데, 어쩐지 그것도 잘 모르는 것 같고.” 그래도 일단은 아르센이 영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또 아니라서. 미쳐버리고 난 뒤에 두어바퀴 쯤 돌아버릴 것 같긴 했지만 일단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런데 부군단장이신 왕자님도 그게 싫어서 오늘 저를 그렇게 보내신 건 알겠는데요, 왕자님. 그런데 제가 정작 제 맘대로 할 수가 없으니까요, 왕자니임.” 그리고 아르센은 제 할 말을 했다. 아무 소리도 안들린다는 듯, 대화를 하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머릿속에 든 것을 순서대로 꺼내놓는 쪽에 가까운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말을 삼켰다. “아······ 어떡하지······.” 누가 내 따까리 이렇게 만들어놨냐고. 맥주 만든 그새끼 대체 누구냐고. 말인지 욕인지 모를 것을 꾹꾹 삼켰다. “헤르츠 경.” 지금까지 세렌티 외에는 특별히 누구 하나 원망하고 살아본 적 없던 칼리안이 맥주 만든 놈을 향한 온갖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아르센을 부른 뒤 말을 이었다. “내가 거짓말을 잘 못해서 이것저것 참 많이 들키면서 살고 있기는 한데. 정작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게 하나 있습니다.” 저보다 열 세 살이 어린 둘째 왕자와 말싸움을 하다 쫓겨나서는 열 살 어린 하프엘프 기사와 술을 마신 뒤에 열 네 살이 어린, 아니 이제는 열 세 살이 어린 셋째 왕자의 앞에서 주사를 부리던 스물 아홉 살의 마법사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사실 매일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지 수도 없이 다짐을 했으면서도 아침에 눈 뜨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다시 잠에 들 때마다 버릇같이 같은 생각을 해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잠시 아르센을 쳐다봤다. 여전히 정신머리 못차린 것이 분명한 그 얼굴을 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누구일까, 하고.” 술 마셔서 정신나간 놈 앞에서, 술 안 마시고도 정신나간 놈이 그렇게 속내를 끄집어냈다. “누가 물어보면 당연하다는 듯이 칼리안이다 하고 대답을 하는데. 나 스스로도 그것이 당연한 답이라 생각은 하는데. 그것이 정말일까 하고 한 번을 더 되새겨 보면 문득 문득 잘 모르겠다 싶은 그런 때가 있거든. 아직도, 버릇처럼.” 쉽게 고쳐지지 않으니 버릇이다. 매일같이 다짐을 해도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드니 어쩔 수가 없어서 버릇인 것이다. “혹여 이런 날에는 파랗게 내리는 별이 보고싶기도 하고. 그 작은 바다에서 나던 비린내가 여전히 나는 그리워서.” 술 취한 아르센이 이 이야기를 다 듣고도 기억하지 못할 것을 알아서, 칼리안은 계속 아르센이 모두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이어나갔다. “그런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어도 되나, 그럴 자격이 있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치밀듯이 변덕이 드는데, 내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해야 할까. 이런 내가 나를 칼리안이라 여겨도 정말 괜찮은걸까. 그것을 아무리 고민해봐도 정답을 모르겠어요. 솔직히 이걸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잖아. 나 말고 이런 일 겪은 놈이 있어야 묻든 말든 하지.” 누구도 겪어보지 않았을 흔치 않은 경험담을 입에 담으며, 머릿속으로는 흔하지 않았던 꿈을 떠올렸다. - 알아. 나는 괜찮아. 그 뒤에는 소리 없이 바람만 뱉어내며 웃었다. 정신 없는 와중에도 지금은 일단 칼리안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아챈 아르센이 칼리안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 나는 평생이 가도 답을 내지 못할 것 같다 했고 온전히 그 애의 생을 대신하진 못할 지도 모르겠다 했어요. 조금 더 안심을 시켜주고 싶었는데 도무지 거짓말을 못하겠어서. 그런데 괜찮다고 하더라고.” 칼리안이 낯설고도 익숙한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졌다. 그 뒤에는 하얗게 빛나는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애는 그렇게 허락을, 해줬는데. 정작 나는 괜찮지가 않아서. 내 머리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게 도대체 어떻게 괜찮을까 싶어서. 그래서 나는 여전히 궁금해해요. 버릇처럼. ” 이렇게 말을 맺은 칼리안이 ‘그런데 이 얘기를 왜 꺼냈더라’ 하고 중얼거리다가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욕심도 버리고 미련도 안 남기고 살기에는 빚진 것이 너무 커서, 나는. 정말로 잘 살아야 하거든. 그러니 나는 욕심도 미련도 많아야 하고, 대책없이 다 털어내고 살 수도 없는 사람이라서. 그러니까 가끔씩 그렇게 다 털어내는 것처럼 보여도 다 포기하고 사는 것은 아니라는 걸 조금 믿어주면 좋겠는데. 어려운 일일까.” 희뿌연 안개가 낀 것 같은 멍청한 눈으로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르센이 또 한 번 헤죽거리며 웃었다. 그 꼴을 본 칼리안이 내일 아침 아르센의 기억이 남아있기를 바라야 할지, 아니면 망각의 축복을 기원해줘야 할지를 고민하는 사이. “사람 맞았네, 우리 왕자니임.” 아르센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무려 왕자의 얼굴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그러셨거든요, 왕자님. 생각이 많아서 돌아버린 놈은 사람이라서 돌아버린 거니까 이왕 나보다 돌은 놈 찾아서 따라다닐 거면 생각 많아서 돌은 놈 따라다니라고. 그러니까 내가 역쉬이 사람 하나는 잘 골랐네. 우리 스승님이 지인짜 좋아하시겠네에.” 왕자의 얼굴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더니 돌은 놈이란다. 미친놈이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을까. 이런 생각에 또 큭큭거리며 웃던 칼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한 여름 밤, 계단에 기대서 밤새 잠들어 있어도 입 돌아갈 일은 없다는 것은 경험상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자신의 옷부터 툭툭 털었다. 그리고는 어쩐지 멍이 들어 있는 것 같은 아르센의 뒷목을 유심히 내려다보다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얘기 잘 들었습니다, 헤르츠 경.” 기억이 제발 좀 남아있었으면 싶기는 한데 그랬다가는 내일 아침 체르밀 궁 앞에 사직서 내려놓은 채로 무릎꿇고 손 들고 있을 것 같아서. 아무리 그래도 발칸의 어엿한 부군단장인데 그렇게 둘 수야 있겠나. - 퍽! 두고 두고 잘 부려먹어야지. * * * 늦은 시간 불려나왔을 것이 분명한데도 정성은 똑같다. 먹기 참 좋을 만큼 잘 구워진 소고기 스테이크 위에, 와인에 조려낸 양송이 소스가 보기 좋게 올라가 있었다. 오리 가슴살 구이와 곁들여진 무화과 퓨레의 맛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잘 구운 감자에서 풍겨 오는 버터 향도 좋았다. 푹 삶은 완두콩이 들어간 스프 색깔 때문에 잠깐 웃을 뻔 했지만 아무튼 그것 역시 맛은 있었다. “본가에서 하루 쉬라니까.” 주방장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란 이야기와 함께 이런 말을 건네는 칼리안을 보며 얀이 싱긋 웃었다. “나중에요. 오늘 말고요.” 오늘 얀은 단 한 번도 칼리안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티를 안 내려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또 걱정을 끼쳤음을 안 칼리안이 미안해하는 얼굴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 말만으로도 이미 하루를 쉰 기분이 된 얀이 레릭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사실 그냥 바로 3층으로 가서 잠이나 잘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저 앞에 앉은 형님께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아르센 치우고 오라고 말이다. 생각 많은 놈도 하루종일 제대로 먹은 것이 없을 테고, 생각 많아진 칼리안도 하루종일 먹질 못했고. 그래서 결국은 또 이렇게 식사를 하게 됐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여러 요리들을 보던 칼리안이 가장 끝에 놓인 스튜에 시선을 두며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그 얼굴에 무슨 말을 할지가 잘 떠올라 있던 탓에 플란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야.” 내가 시킨 것 아니라고. 거짓말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분이 좋아진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뜻 대답했다. “네.” 그리고는 토마토 소스에 가지와 호박을 넣고 함께 끓여낸 홍합 스튜를 신나게 먹었다. 어차피 입맛 까다로울 플란츠는 먹지 않을 테니 사양 않고 혼자 다 먹어치웠다. 구운 오리고기 조금과 완전히 익은 스테이크 몇 점, 그리고 파프리카 뺀 샐러드 조금으로 식사를 끝낸 플란츠가 조개를 잔뜩 먹고 고기도 먹고 감자도 먹고 꿀에 잰 밤까지 잔뜩 집어먹는 칼리안을 질렸다는 듯 쳐다봤다. 오러 감추는 마법을 해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배는 많이 고픈 것을 어쩌겠나. 때문에 칼리안은 저것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플란츠를 싹 무시하며 양껏 배를 채웠다. 그렇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포만감 가득한 식사를 마친 칼리안을 향해,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아마 전하께서 신경을 쓰셨을 것 같은데.” 지나가는 듯한 말투. 여느 때와 다름 없을 낮은 목소리. “······ 모르셨을 테니.” 머리 꼬리며 몸통까지 제대로 붙은 것 하나 없는 여전히 짧은 말.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아마도.” 라프라니아 종이꽃. 아무리 생각해도 르메인이 그렇게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꺼낸 소리였다. 굳이 르니에리를 떠올려가며 과한 손을 쓰지는 않겠노라 했던데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으로 안 그래도 정신 없었을 칼리안이 직접 거기까지 신경을 썼을 리 없고, 칼리안을 아는 앨런이 그 정도로 생각 없는 오지랖을 부렸을 리 없고. 그러니 르메인일 것이라고. 소같은 르메인이 이번에는 꽃향기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것만 생각을 한 것 같다고. 그런 말이었다. 플란츠를 물끄러미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것을 신경쓰셨습니까.” 어쩐지 하루 종일 푹 삶아져 있더라니. 자신 때문에 생명 없는 꽃으로 생일 축하를 받게 된 것을 신경 쓰고 있던 모양이다. 지금의 칼리안을 떠올렸든 옛 칼리안을 떠올렸든, 어느 쪽에게도 그것이 축하의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리 없을 테니. “그런 것에 신경 쓸 만큼 제가 어리지는 않은데요.” 그리고는 텅텅 빈 접시 하나를 가리켜 보이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저는 꽃보다 이게 더 좋을 나이라서.” 남은 조개 하나 없이 싹싹 먹어치운 그것을 본 플란츠가, 꽃보다 조개 스튜가 좋으려면 대체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 것인지를 묻고 싶은 얼굴로 강조하듯 대꾸했다. “아니라고, 나.” 거짓말은 못해도 거짓말 하는 사람을 못 알아 보는 것은 아니라서. “잘 먹었습니다. 내 형님께서 잘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이렇게, 생일 맞이로 한 번을 짖은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 제35장. 유령(1) > 전설이 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약 시간의 축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발칸의 하얀 악마들을 앞에 두고 사흘을 홀로 버틴 테일란은 전설이 되었을 것이다. 몇 날 며칠을 두고 서서히 죽어가는 동생을 지켜보면서도 국왕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우선하다 끝내 목숨을 잃은 체이스도 전설이 되었을 것이다. 더불어 그리 빠른 시간에 세크리티아를 함락시킨 그 날의 플란츠도. 그래, 결국은 전설이 되었겠지. 수많은 전설과 영웅이 탄생하고 스러지는 전쟁을 떠올려버리는 바람에 심기가 불편해진 플란츠가, 그 대단한 위인들이 만들어냈을 전설과 비교할 수 없을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든 마법사를 보며 짜증섞인 목소리를 냈다. “어쩌라고.” 칼리안의 미친 따까리 아르센. 빌헬름 관 입구에서 대자로 누워 자던 중, 새벽의 짙은 어둠 때문에 ‘미처 앞을 분간하지 못한’ 앨런 마나실의 위대한 발에 즈려밟힌 5서클의 얼음 마법사. 새하얀 로브 한 가운데 남겨진 그 위대한 발자국을 가리켜보이며 내가 급여가 없지 자존심이 없냐 외치던 아르센의 당당함에 깊은 감명을 받은 앨런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아르센의 포부를 고스란히 실현시켜 주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1플로린의 급여를 석달동안 감봉해 준 것이다. 그 경이로운 전설이 만들어진 빌헬름 관의 계단 앞에 모인 발칸의 마법사들이 아르센의 이름을 드높여 불러대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에 푹 젖은 해면같은 몸을 한 채 뒷목을 붙들고 끙끙대던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말씀을 해주셔야 제가 알고 고치지 않겠습니까.” “말했는데.” 햇살 가득 드는 창가. 아르센이 가장 좋아했던 바로 그 자리를 자신의 책상 놓을 자리로 정해버린 플란츠는 한여름의 내리쬐는 햇살에 비춰 더 밝게 보이는 옅은 에메랄드 빛 머리를 천천히 쓸어넘겼다. 그야말로 혼란한 인간 세상에서 한 발자국 비켜 서있는 듯, 실로 여유롭고 반짝이는 모습을 보인 플란츠가 넓은 집무실 한 구석탱이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비켜선 그 혼란한 세상 한 가운데에서 닳고 닳은 인간 군상을 죄 담은 듯한 마법사의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보던 플란츠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아우님께서 뭘 키울지 고민 안해도 될 것 같았다고.” 인세에서 벗어난 이 귀한 얼굴에 곱게 붙어있는 입을 굳이 귀찮게 한번 더 열어 설명해주자면, 어제 너는 그냥 개 같았다는 소리다. 저 비뚜름한 표정을 똑같이 따라해가며 웃어주고 싶은 마음은 당장 태양에 닿아 녹아 없어질 만큼 드높은데 모가지가 제대로 안 움직이는 것이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제가 취해서 사람 아닌 것이 됐다는 말씀은 알아들었습니다만.” 카밀론 가서 굳이 무슨 개를 키울지, 개 이름은 뭘로 정할지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아르센 한 마리 데려다 놓으면 되겠다는 말이라는 것을 못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책상에 놓인 거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아르센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밤새 계단에 기대어 잠들어 있던 탓이 더 큰지, 아니면 얻어맞은 탓이 더 큰지, 혹은 앨런에게 밟혀서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목을 가눌 때마다 어마어마한 근육통이 밀려들었던 까닭이다. “무슨 실수를 했기에 제 목이 이렇게 됐는지를 알 수가 없잖습니까.” 가까스로 아프다는 말을 참아낸 아르센이 자신의 뒷목에 든 시퍼런 멍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분명 여러 다른 방법으로 재울 수 있었으나 굳이 키리에가 때려놓은 딱 그자리를 정확히 다시 한 번 때려 놓은 칼리안 덕에, 멍은 아예 짙은 보라색을 내고 있는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오늘 아침 아르센을 찾아온 히나는 생긋 웃으며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 왜 다친 건지, 알아요. 자상한 왕자님께서, 그냥 두랬어요. 왕궁에 머무는 텐실 치유사의 치유술보다 베로니카의 단호한 태도를 더 빨리 배운 듯한 그 냉랭한 모습을 떠올리던 아르센이 다시 한 번 플란츠를 쳐다봤다. 다친 것 고쳐주지 말라는 절대 자상하지 않은 말을 한 자상한 왕자님의 부탁을 잘 들어준 히나는 그런 말만 하고는 자신의 집무실로 휙 가버렸었다. 그랬으니 아르센은 더더욱 불안할 수 밖에. “다행한 일 아닌가.” 이렇게 말한 플란츠가 그 이상 말을 잇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더위를 쫓겠다며 냉기를 풀풀 풍겨대는 마법사 때문에 입고 있던 옅은 노란색 가디건을 벗고 화려한 금장 장식이 된 짙은 자주색 재킷을 어깨에만 걸치듯 입었다. 소매에 팔을 끼우기에는 밖이 더웠던 탓이다. 나가려 준비하는 것이 분명한 모습을 보던 아르센이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밖.” 그래, 밖이겠지. 여기서 어디 더 들어갈 구석도 없으니 당연히 밖에 가는 거겠지. 그런데 그 밖이 체르밀인지 아르피아인지 빌헬름 수련장인지 그걸 모르니까 묻는 것 아닌가. 그러니 제발 좀 제대로 대답해주면 안되겠느냐는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아르센이 굳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어 물었다. “바깥 어디 가시는지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왜.” 그렇게 애지중지 아끼고 예뻐하는 루시가 자신보다 말이 많다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말이 짧은 저 왕자가 과연 알고 있을까. 아르센이 정말 답답하다는 얼굴을 했다. 일에 방해된다며 밖으로 내보낸 시종 레릭이라면 그래도 저 말을 온전한 한 문장으로 바꿔서 번역해 줄 수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다가, ‘내가 왜 너같은 놈한테 내 행선지를 알려야하나, 마법사.’ 라고 번역해 줄 것 같아서 그만두고 대답만 전했다. “기사단에 가실 거면 같이 가려고 그럽니다.” 아르센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또 한 번 올라갔다. 무엇 때문에 아르센이 행선지를 묻고 같이 나서겠다 하는지를 눈치챈 까닭이다. “감시하는 건 싫은데.” “제가 뭐하러 부군단장이신 왕자님을 감시합니까. 그럴 시간에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이 낫습니다.” 진심 가득한 투덜거림에 플란츠가 곧바로 대꾸했다. “기사들이 나에게 아무 말 못하게 하려는 것을, 감시가 아니면 뭐라고 하는데.” 이번엔 루시보다 긴 말이었으나 아르센은 오히려 대꾸할 말이 없어진 얼굴이 되어 버렸다. 아르센은 정말 아무 티도 안 냈다. 그저 기사단에 간다면 같이 가겠다는 말을 했을 뿐. 단지 그 한마디 속에 숨은 뜻을 곧바로 눈치챈 플란츠의 말에, 아르센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 “감시 아닙니다.” “브리센 자작이 돌아온 것은 이미 알아.” 에반 브리센이 레넌 브리센을 도로 꺼낸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으니, 굳이 따라와서 그 말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할 필요 없다는 말이었다. - 좋은, 왕자님이, 그 일을 알지 못하게, 해 달라고, 자상한 왕자님이, 전해달랬어요. 오늘 아침 히나가 아르센을 찾아온 것은 칼리안의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어제 칼리안의 생일 축하연에 레넌 브리센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플란츠에게 알려지지 않게 해 달라는 소리였다. 그동안은 플란츠의 시종인 레릭의 입만 단속하면 되었다지만 이제 파다하게 퍼졌을 그 소문을 브리센 소속인 기사들도 당연히 전해들었을 테니까. 그러니 기사들이 플란츠에게 건네는 이야기 속에 혹시라도 레넌에 대한 말이 들어있을까 걱정한 칼리안이 그나마 가장 자연스럽게 아르센을 찾아갈 수 있는 히나를 따로 불러 말을 전해달라 부탁을 했던 터였다. 그런데 그것을 플란츠가 다 알고 있단다. 아르센이 잠시 할 말을 잊어버린 채 플란츠를 쳐다봤다. 레넌이 돌아온 것을 알면 저 좋은 머리가 무엇을 또 가늠해낼지 그것부터 걱정이 된 탓이다. “따라오지 마. 그 이상 생각 안 할 테니까.” 이 말에, 조금 묘한 얼굴이 된 아르센은 저도 모르게 질문을 했다. “그걸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까?”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아르센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자신의 발치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어리석은 생물들 중 한 마리를 바라보는 눈을 한 채였다. “다른 생각들을 안 멈추면 되는 것 아닌가.” 쉼없이 다른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으로 레넌에 대한 생각의 흐름을 막으면 된다는 소리. 제 할 일을 엄청난 속도로 해 나가면서 아르센과 이야기를 하고 기사단을 둘러보고 밥을 먹고 쉬는 그 모든 순간에, 쉼없이 다른 생각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는 말이다. 무의식적으로 레넌에 대한 일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니 걱정 마시라고 내 아우님한테 전해.”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지를 따져볼까 하다 또 한 번 올라오는 목의 통증에 인상을 찌푸린 아르센으로부터 고개를 돌린 플란츠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생각을 많이 하면 된다니. 그것 참 똑똑하신 건지 무식하신 건지 알 수가······ 응?” 닫힌 문을 하릴없이 쳐다보다 이렇게 중얼거리던 아르센이 퍼뜩 입을 다물었다. ‘생각 많아서 돌아버린 놈은 사람이라서 돌아버린 거니까.’ ‘우리 스승님이 지인짜 좋아하시겠네에.’ 갑작스레 찾아온 어떤 기억의 편린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던 까닭이다. 오래지 않아 아르센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전날 칼리안에게 삿대질을 하며 엄청나게 무례한 말을 하는 이 기억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일단 어제 칼리안에게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게 왜 다행이라는 것인지부터 생각을 좀 해내야 할 듯 해서, 플란츠의 좋은 머리에 대해 새삼 놀라는 것도 잊어버린 아르센이 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그리고 한 두 시간 쯤이 흐른 뒤. 아르센은 책상 서랍에 들어있던 고급스러운 종이 한 장을 꺼낸 뒤 굳은 결심을 한 얼굴을 한 채 펜을 들었다. 그리고 곧 비장한 표정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과 각오를 담아 제목을 썼다. ‘잘못했습니다.’ 사직서 들고가면 정말 죽을 것 같아서, 아직 어디 하나 잘리고 싶은 생각은 없던 아르센은 장렬한 사과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에반 브리센 후작이 생각한 바와 같았다. 프레이야의 왕비 추숭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해야 할 에반이 일단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뿐만 아니라 지금껏 그 어떤 경우에도 보인 적 없던 정중한 모습으로 르메인에게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빠르면 다음 주 중으로 진행이 될 것이라 합니다. 광장에서 행사가 같이 있을 예정이라서 오늘 저녁 식사 시간 전에 슬레이크 경이 올 거예요.” 프레이야를 추숭하는 예식에 나서게 되는 주인공은 당연히 칼리안이다. 그러니 그때 입게 될 새로운 예복을 맞추기 위해 의상 담당자 섀틴이 왕궁에 올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메를린 말고 내가 직접 만날게.” 이런 말에 얀이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옷 고르는 것이 질색이라며 늘 메를린에게 의복을 부탁했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다만 칼리안이 그에 대해 다른 설명을 할 의향이 없어 보였으므로 얀은 질문을 덧붙이지 않고 대답을 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그프리드 소공작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다음 주 토요일부터 시간이 괜찮으신지 여쭈어달라고 합니다. 대련이요.” 유리잔 안에 든 민트 차를 살짝 흔들어 짤랑, 하는 얼음 소리를 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매일같이 마법과 검술을 수련하고 있었으니 언제가 되었든 상관 없는 일이었다. “세이렌 경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고?” 텐실의 왕세자에 대한 정보를 모아봐 달라는 이야기를 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과거’ 왕세자가 탄 마차 사고를 조사하던 새들이 모두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더욱 조심해달라 했었는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오래도록 연락이 없는 상태였다. 칼리안의 말에 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카이리시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조사하고 있어서, 아마 시간이 조금 걸릴 거예요.” 조심해서 조사해달라고는 했으나 수도에서 나가지 말라는 말은 한 적 없던 칼리안이 얀을 쳐다봤다. 미간을 오므린 얀이 말했다. “어디 계시는 어떤 왕자님이 또 한밤에 몰래 구하러 3층 밖으로 뛰어내릴 일은 없어야죠.” 얀 몰래 아르센과 에우리아를 구하러 밖으로 뛰쳐나간 일을 아직까지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모양이다. 어찌됐건 자신을 대신해 누군가가 위험해지는 것은 칼리안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더 기다리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아마 오늘 중으로 헤르츠 경이 올 거야. 편지 같은 것 몰래 주고 돌아가려고 할 텐데, 잘 붙들어서 내 앞에 데려다 줘.” 그레이 쪽을 속여서 데리고 있으려는 계획을 조금 수정하기 위해서였다. 본래대로라면 칼리안은 뒤로 빠진 채 아르센을 통해 그레이를 움직이려 했었는데, 전날 고주망태가 된 모습을 보게 된 덕분에 더 이상 그 일을 아르센에게 맡기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때문에 그레이를 몰래 만나 직접 대화를 해보려는 참이었다. “왕자님.” 그 말을 들은 얀이 칼리안이 앉아있던 곳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시종 얀 말고, 지그프리드의 첫째 아들이자 칼리안의 보호자로서 할 말이 있던 탓이다. “또 위험한 일 하시려는 거죠.” 그렇게 물어오는 얀을 보던 칼리안이 재밌다는 듯 말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하여튼 얀은 얀이다. 아르센 불러와달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해 왔는데, 오늘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저렇게 지레 걱정을 하고 있다. 칼리안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정말 걱정하지 마. 이번에 만날 사람은 나한테 아무 짓도 못해.” 엄청 겁먹고 있을 것이라서. 칼리안이 생글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하고, 그것을 믿지 못한 얀이 입술을 앙다물어보이던 그 때. - 이렇게 하는거야? 맞나? 정말.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가 들려오며 반지가 빛났다. - 되는거야, 아닌거야? 들리고 있는건가? 이 생을 살며 아직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알아듣지 못할 리 없는 그 목소리가 칼리안의 반지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아리안느······?’ 칼리안의 손에 들린 민트차에서 다시 한번 짤랑, 하는 소리가 났다. < 제35장. 유령(2) > 태양이 만들어내는 가장 경이로운 순간. 아쉬울 만큼 짧고, 짧은 만큼 소중한 석양의 빛. 아리안느는, 붉음보다 온화하고 푸름보다 따뜻한 석양같은 그런 아름다운 빛을 내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 계속 대답 안 할 거예요? 시간 많아요? 물론 눈에 든 것이 그리했다는 말이지 입에 든 것까지 그랬다는 소리는 결단코 아니다. - 아, 내 정혼자가 놓고 왔다던 게 당신 맞아요? -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줘요. 순식간에 ‘아리안느의 정혼자가 놓고 왔다던 거’가 되어 버린 칼리안이, 머릿속을 계속 울려대며 빨리 답하라 재촉하는 아리안느에게 답을 보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음 말이 흘러들어왔다. - 와, 진짜 되네. 내 정혼자가 놓고 왔다던 분, 안녕하세요? 아마도 처음이 아니겠지만 나는 처음이니까 소개 먼저 할게요. 아리안느 린이라 하고, 엄마가 법무담당관이라 어쩌다보니 나도 그 밑에서 붙들려 있어요. 아, 그리고 세크리티아 왕세자 저하가 내 정혼자예요. 대륙의 모든 나라는 분명 공용어를 쓴다. 그러니 아리안느도 칼리안이 ‘잠시만 기다려달라’ 한 말을 못알아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소개가 곧바로 이어졌다. 제멋대로라는 말로는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할 그 성격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깨달은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것을 본 얀이 소리 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왕자님,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갑자기 반지에서 빛이 나며 칼리안이 입을 다무는 것을 로젤리타 기간 내내 보아왔었던 탓에, 지금 칼리안이 어떤 상황인지를 알아채고 하는 소리였다. 최근 칼리안이 그 반지를 어떤 경우에도 빼지 않는다는 것을 얀 역시 알고는 있었겠지만, 실제로 체르밀 궁 안에서 빛이 나는 것은 처음 보았을 터였다. 칼리안은 그 반지와 이어진 팔찌를 누가 가지고 있는지는 물론 어떻게 해서 체르밀 안에 있을 때에도 반지에서 빛이 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았었다. 로젤리타에 다녀올 때 이후로 얀의 앞에서 반지를 이용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얀, 내가 이따 설명해줄게. 미안해.” “괜찮아요.” 그러나 얀은 그냥 그러려니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궁금하지만 참는다는 것이 아니라, 칼리안에게 어떤 사정이 있을 테지만 굳이 그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표정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칼리안이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칼리안의 안전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면 먼저 궁금해하는 법이 없는 새끼코끼리가 아니던가. “필요하신 것 있으면 불러주세요.” 때문에 얀은 이렇게 담백한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래. 고마워.” 미리 이야기를 해주지 못한 것에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 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생각 같아서는 얀에게 상황을 좀 설명해주고 싶었으나 당장은 아리안느가 대화를 걸어온 경위 확인이 먼저였다. 태평하게 자기소개부터 하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좋지 않은 급박한 상황에 연락을 취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어찌됐건 체이스 역시 칼리안과 같을 것이 아닌가. 분명 어떤 경우에도 그 팔찌를 풀어놓지 않을텐데, 대체 무슨 이유와 사정에서 아리안느가 대화를 걸었는지는 빨리 확인하는 것이 좋을 터였다. - 반갑습니다, 아리안느. - 아. 원래 이름으로 불렀나 보구나. 그래요, 반가워요. 아리안느는 2서클의 마법사이기도 했다.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수련 도중에 마음을 접었다. 세크리티아에서 마법사를 특별 취급하지 않아서였거나 집안에서 반대를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리안느 스스로 마법사라는 것에 큰 관심을 가지지 못해서였다. 아무튼 아리안느의 반응을 본 칼리안은 체이스가 자신의 비밀을 아리안느에게도 이야기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잘 된 일이고, 다행한 일이다. 체이스에게 있어 아리안느는 언제나 하늘에 떠 있는 큰 별과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아리안느라면 테일란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체이스의 마음을 붙들고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알려줄 것이 분명했다. - 그럼 나는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 이름이면 충분합니다. 본래는 서로 이름만 부르며 편하게 말을 주고 받는 사이였던 탓에 저도 모르게 이런 대답을 한 칼리안이 낭패한 얼굴을 했다. 아리안느가 어떤 이름을 불러올지 알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그럴게요. 그럼, 칼리안. 그리고 아리안느는 곧바로 이렇게 대꾸함으로써 칼리안을 두 번 놀라게 했다. 아무리 먼저 허락했고, 또 아무리 타국이라 하더라도 왕족의 이름이 아닌가. 그럼에도 조금의 고민 없이 왕자의 이름을 서슴없이 부르는 저 당당함이 여전한 것에 한 번 놀랐고, ‘베른’이 아닌 ‘칼리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에 한 번 더 놀랐다. 칼리안은 아직, ‘베른’이라는 이름을 기억에 담으려면 체이스의 경우처럼 스스로 그 이름을 떠올리거나 앨런 혹은 키리에처럼 칼리안에게 직접 이름을 전해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 저하 얘기로는 우리가 꽤 친했다는데 나는 기억이 안 나요. 특별히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 것 같아서 미안해하지는 않을 거예요. 어차피 나중에 만나서 다시 친해지면 될 일이니까 서로 신경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찮겠죠? 칼리안이 머리를 부여잡고 작은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빨리 대답 안 한다며 시간 많은지 타박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사설이 길어서야. 게다가 미안해 할 생각 없다니, 이 얼마나 아리안느다운 사고방식이란 말인가. - 네. 괜찮습니다. 다시 친해지면 될 일이니. - 말 잘 통해서 좋네. 어련히 잘 통할까. 당신이 나한테 알려준 것이 얼마나 많았는데. - 아무튼, 칼리안. 부탁할 것이 있어서 내 멋대로 연락을 했어요. - 얘기하세요. 무엇이든 도와줄테니까. 이 말에 꽤 오랫동안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 때문에 조금쯤 불안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쯤, 아리안느로부터 다시 답이 왔다. - 아, 진짜 이상하다. 저하랑 말하는 게 똑같아. 테일란이 엄청 닮았다고 하던데 진짜 닮았나보네요. 미안해하지 않겠다더니 아플 만한 곳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툭툭 치고 있다. 다만 그것이 꼭 치료해야 할 곳을 들춰보는 의술사의 손길 같아서, 칼리안은 아파하는 대신 오랜 기억 속의 친구를 떠올리듯 미소만 지었다. - 아무튼 부탁할 건 별 것 아니고······. 별 것 아니라던 아리안느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 세자 저하 좀 살려줘봐요. 그리고는 이렇게 별 것 아닌 부탁의 말을 꺼냈다. 지극히 가벼운 말투로, 정말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칼리안이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부탁을. * * * 빌헬름에서 반드시 피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빌헬름 관의 밖에서는 그냥 성격 나쁜 둘째 왕자이지만 빌헬름에 들어서는 순간 완벽한 부군단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플란츠에게 쓸데 없이 말을 거는 일이다. 자칫하면 완벽히 성격 나쁜 부군단장을 마주하게 될 수 있었다. 둘째는, 발칸의 상징이며 모두의 구원이자 이 땅의 빛이신 치유사 히나를 함부로 귀찮게 하는 일이다. 히나에게 쓸데 없는 치료를 부탁하는 등의 일로 귀찮음을 선사하면 활짝 핀 꽃처럼 웃는 3왕자를 반드시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히나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중 세 번째. 발칸에 들어오는 신입들에게 모든 선배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지키기 힘든 바로 그것. 제멋대로 빌헬름과 체르밀을 오가는 은백색의 고양이 루시에게 함부로 먹을 것을 주는 일. “애옹!” “안돼.” 그 냄새 좋은 것을 왜 인간 너 혼자 처먹느냐는 애처로운 울음소리에 깜빡 속아서 자칫 흰 빵 한 입이라도 넘겨주게 되는 날에는, 완벽히 성격 나쁜 부군단장의 얼굴을 한 둘째 왕자와 히나를 모두 만나게 된다. 굳이 히나가 걸음하게 되는 귀찮음을 유발했으므로 부록 삼아 꽃 같은 3왕자도 만날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 그것은 곧 제 발로 세뉴 강을 건너가겠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리라. “애오옹!” 때문에, 아르센 다음으로 유능한 5서클의 전격 계열 마법사 니들렌은 매우 난처한 얼굴로 루시를 보고 있었다. 상대방의 쾌유를 빌 때 건네주는 아디니아 꽃잎을 생각나게 하는, 연보라색과 분홍색의 사이 쯤 되는 색의 짧은 머리카락이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스트리샤 거리 끄트머리에서 꽤 유명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남동생이 만들어 준, 얇은 베이컨과 하얀 치즈가 가득 들어간 호밀 샌드위치를 꺼내 든 것이 화근이었다. 체르밀 궁에서 느긋한 잠을 자고 나와 히나 혹은 플란츠를 찾아 빌헬름까지 온 배고픈 루시가 그 맛좋은 냄새를 맡아버린 것이다. “안돼. 이건 내 꺼야.” “므에오옹!” 칼리안의 말 레이븐은 왕족의 말들을 위해 따로 키워낸 풀과 채소가 아니라면 절대로 입에 대지 않는다던데, 혈기왕성한 저 고양이는 도무지 가리는 법을 몰랐다.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다 먹으려 들었다. 덕분에 플란츠가 루시를 보며 제 주인을 쏙 빼닮았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까지는 알지 못할 니들렌이, 씩 웃으며 품 속에서 종이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루시를 만나면 주려고 동생에게 부탁해 따로 준비해두었던 삶은 닭고기였다. “이거 먹어. 이건 먹어도 돼.” “냐옹!” 그것이 꼭 베이컨일 필요는 없었던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닭고기를 받아가 짭짭 먹기 시작하는 루시를 보던 니들렌이 샌드위치를 한 입 먹으려 했다. “뭐야.” 하는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부군단장인 2왕자가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한여름의 한가롭고 여유로운 점심 시간에 불어닥친 설풍같은 목소리에, 깜짝 놀란 니들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맑은 연두색 눈이 정확히 어디를 보고 있는지 눈치 챈 니들렌은 재빨리 입을 열어 설명을 했다. “소금 넣은 것 아닙니다, 왕자님.” 루시가 이미 거의 다 먹어가는 닭고기가 샌드위치 속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으므로, 그제야 고개를 돌린 플란츠가 니들렌을 쳐다보며 말했다. “넌 왜.” “저는 소금 넣은 것 먹는데요.” 너는 왜 다른 마법사들이랑 같이 안 먹고 여기서 루시한테 닭고기 뺏기면서 혼자 빵 뜯고 있느냐는 질문에 소금 넣은 것을 먹는다는 대답을 듣게 된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아듣는 칼리안이 이상한 놈이라는 것을 플란츠도 안다. 그렇다 해서 굳이 질문을 정정해가며 다시 물어볼 만큼 궁금한 일은 아니었으므로,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한 번 끄덕인 뒤 루시를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루시 간식 챙겨준 것을 잘했다고 해야할지 고맙다고 해야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은 둘 다 말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플란츠 왕자님.” 그런 플란츠를 향해 니들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려 그 플란츠를 앞에 둔 채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잠시 우물쭈물하던 니들렌이 말을 이었다. “어제 제가 괜한 말씀을 드린 것 같아서······.” 아스트리샤 거리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 중 플란츠와 연관 있을 이야기를 동생에게 들었었다. 그러다 어제 칼리안의 탄생일 축하연에서 혼자 빌헬름 관으로 돌아오는 플란츠를 보고는 문득 그 생각이 나서, 레넌이 무사해 다행이라는 말을 건넸다. 그 뒤 그 일이 과연 플란츠에게도 다행한 것이 맞을지 생각을 해보다가, 정말 쓰잘데기 없는 오지랖만 부렸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겉으로 에반 브리센 후작과 손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왕자의 가족관계라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와는 많이 다르지 않던가. 칼리안 역시 후궁 프레이야의 동생과 전혀 소통하지 않고 지내는 듯 했으니 말이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전날 니들렌으로부터 말을 전해 들은 플란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인 뒤 지나갔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말실수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못 들었는데. 무슨 얘기를 말하는지.” 니들렌을 잠시 보던 플란츠가 이렇게 대꾸를 하고는 저벅저벅 제 갈길을 갔다. 혹시라도 그 이야기를 전한 것이 누구인지 알려지면 생각은 깊은데 인내심이 더럽게 짧은 동생놈이 달려올까봐 그냥 아예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는 소리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짝 웃은 니들렌이 다시 자리에 앉아 맛 좋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먹었다. * * * 별 것 아니라더니. 일국의 왕세자 목숨을 살려줘보라며 타국의 왕자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별 것 아닌 일이란 말인가. 조금 더 특별해지려면 세계 정복이라도 부탁하려는 건가. 동시에 떠오르는 여러 상념을 간신히 갈무리한 칼리안이 자세한 내용을 물으려는데, 아리안느 쪽에서 다시 말이 나왔다. - 전하가 치유사를 찾고 있어요. 알겠지만 이 나라에 텐실 치유사가 들어오는 것은 불법이고. 그래서 우리는 입국하는 치유사들을 전부 붙잡아서 추방시키고 있고, 조만간 린 후작이 누명을 쓰고 잡혀들어갈 지도 몰라요. 민트차를 바라보던 칼리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자세한 내막은 숨긴 채 현재 상황만 전해주는 간단한 내용이었으나 숨겨진 뜻까지 간단하지는 않았다. 데블란이 텐실의 치유사를 찾는다. ‘과거’에도 데블란이 텐실의 치유사를 불러들였으나 실패했던 것인지, 혹은 지금의 상황이 과거와 달라진 탓에 찾는 것인지, 칼리안은 몰랐다. 다만 그것을 막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았다. - 위험합니다. 린 후작이라면 아리안느의 어머니가 아닌가. 데블란의 힘에 맞서려 하다 피해를 입게 생겼다는 말이다. 물론 그 세력이 만만치는 않았으니 함부로 가지치기를 하려 들지는 않겠으나 데블란은 지켜야 할 선의 범위가 매우 불확실한 사람이다. 언제 마음을 바꾸어 아리안느의 집에 검을 보낼지 알 수 없을 일이 아닌가. - 테일란이 우리집에 있어요. 얼마전에 내가 술 먹고 들어오다 나쁜 놈을 좀 만났거든. 그래서 정혼자 걱정에 밤 잠 못자던 세자께서 호위기사를 보내주셨어. 연극을 했다는 소리일 터였다. 데블란의 눈을 피해서 정혼자에 눈 먼 세자 역할을 해 가며 아리안느의 집에 기사 테일란을 보내두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굳이, 왜? - 체이스 왕세자께서는 굳이 왜 내전을 감수하십니까. 어차피 과거에도······. - 그 과거, 어차피가 아니었어서. 치유사를 부르든 말든 어차피 죽었을 사람이 아니었음을. 그러니 체이스도 베른도, 서로가 서로에게 어둠 하나씩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들은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 제35장. 유령(3) > 아버지. 그에 대해 애써 생각하지 않았었다. 굳이 생각나는 날에는 굳은살 쯤으로 여겼다. 앓고 나면 더 단단해지는 그런 상처로 여겼다. 그로 인해 잃은 것이 많았지만 덕분에 얻어온 것들도 많았으니, 그렇게 얻어온 것으로 이렇게 살고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여겼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기로 했고 그렇게 생각해서 살았다. 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고 해보려 노력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지금 이 땅 어딘가에 그 뱀같은 작자가 다시 살아나 숨쉬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 역시 굳이 신경쓰지 않으려 애썼다. ‘즉위식, 미리 축하드립니다.’ 어차피 그는 곧 숨을 놓을 테니까. 그가 텐실의 치유사를 불러왔든 그렇지 못했든, 굳이 그 일에 손을 대어 끼어들지 않더라도 병세는 악화될 테니까. ‘과거’에서는 그랬으니까. 하지만. 정말 몰랐던 것일까. 모르고 싶던 것일까. - 그 과거, 어차피가 아니었어서. 아리안느는 그렇게만 이야기했다. 실로 애석하게도 칼리안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더 물어볼 것도 없이,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알아들었다. 찻잔에 어린 물방울이 또르륵 하고 굴러 떨어졌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 읍!” 구역질이 났다. 토해내야 할 것이 화인지 욕인지 기억인지 미련인지 자책인지 후회인지 알 수도 없고 사실 그 모든 것들을 구분할 수도 없었지만 치미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구역질이 났다. 베른의 그림자를 보지 못한 척 하는 것으로 베른을 지켜온 체이스처럼 체이스의 어둠을 애써 눈치채려 하지 않는 것으로 체이스를 존중한 것은 아니었을지.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저 말을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는지. 그러니 베른은, 정말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애써 모르고 싶었던 것인지. - 세자 저하는 절대로 말 안하려고 했고 나도 끼어들 생각은 없었는데 상황이 좀 묘하게 되어서, 아무래도 얘기를 해줘야 할 것 같았어요. 내 맘대로 잣대를 둬서 미안해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예상했던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아리안느가 이런 말을 건넸다. 어떤 일이 생겼는지는 몰라도 계속 비밀로 묻어두려던 것을 아리안느 마음대로 칼리안에게 알렸다고. - 체이스 왕세자께 다른 일이 생겼습니까.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가까스로 침착을 가장하며 이렇게 물었다. 체이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면 테일란이 아리안느의 집에 계속 머무르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불안해진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으니까. - 아뇨. 아직은 별 일 없어요. 집무실이고, 그냥 자고 있어요. 당신이랑 얘기를 해보고 싶어서 내가 재웠어요. 이 말을 들은 칼리안이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 것 같은 와중에도 헛웃음이 나왔다. 반지 너머로 전달되지 않을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아, 또 재웠어······.” 칼리안은 생각할 것이 있을 때 잠을 안 잤고 체이스는 생각할 것이 있으면 잠을 못 잤다. 덕분에 체이스는 불면증을 버릇처럼 안고 살았다. 그것을 보다못한 아리안느는 꼬박꼬박 체이스를 재우기 위해 열을 올렸었다. 문제는 아리안느가 쓸 수 있는 마법 중에 ‘슬립’이 없었다는거다. - 너무 자주 그러지는 마십시오. 수면제 버릇되면 안 좋으니까. - 아. 예전에도 내가 그랬어요? 걱정 말아요. 나는 세자 저하랑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 거니까. 그 언젠가와 똑같은 대답. 문득, 키리에의 등에 업혀 이 방에 왔던 날이 생각났다. 키리에와 술 마신 날이 많았고 때문에 키리에가 베른을 업고 매번 첨탑에서 내려왔던 일을 이야기했던 날. 현실과 과거의 경계를 잊어버린 채 잠에 빠져들었던 그 날. 딱 그 날같은 기분이 들어서 칼리안은 얀이 애써 만들어 준 차디찬 민트차에 시선을 두었다. 그 외의 다른 것에는 눈을 두지 않기 위해서 차 위에 띄워져 흔들거리는 민트잎에만 시선을 두었다. 과거와 지금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실로 애석하게도. - 아무튼 세자 저하 깨기 전에 얘기 끝내야 하니까 다시 말하자면. 아까 나한테 왜 굳이 내전을 감수하느냐 물었는데, 그건 당신이 오해했어요. 마치 그런 칼리안의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아리안느가 다시 본래 나눴던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 저하가 나에게 테일란을 보낸 것은 단지 어머니와 우리 집안을 보호하기 위해서지 전하와 칼을 맞대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저하는 충분히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테일란의 보호를 받아들였을 뿐이지 다른 뜻 없어요. 군사들을 모으고 있지도 않고. 무엇보다 나는 깨끗하게 딱 한 사람만 포기하게 만들 생각이에요. 다른 피 흘리지 않고서. 데블란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도록. 다른 누구도 죽을 일 없이 오로지 그것 하나만 하겠다는 소리다. - ‘과거’의 전하가 지금보다 더했는지 덜했는지는 내가 아는 게 없지만, 지금 전하는 완전히 개자식이에요. 솔직히 세자 저하가 전하를 밀어내면 귀족들은 좋아하면 좋아했지 반발할 일 없어요. 그걸 바라는 귀족들도 꽤 많고요. 체이스와 아리안느가 내전을 일으킬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이기도 했고, 체이스가 왕관을 물려받는 것에 귀족들이 내전을 일으킬 일이 없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 계속 설명하세요. 듣고 있으니. - 전하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안다는 것을 전하는 몰라요. 텐실의 치유사를 불러들이는 것이 전하라는 사실을 우리가 안다는 것도 전하는 몰라요. 나는 그저 이번에 나를 습격했다 도망친 그 괴한이 텐실 치유사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말했을 뿐이고, 엄마는 그 말에 화가 나서 텐실인들의 세크리티아 입국을 더 강하게 막고 있을 뿐. 전하와 직접적으로 대치한 적 없어요. 그러니 전하 역시 함부로 군사를 보낼 수는 없을거예요.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었다는 소리다. 그것이 지극히 사적인 이유라 하더라도, 린 후작이 텐실에 대한 태도를 강경하게 바꾸는 것은 충분한 명분을 가진다. 제 딸이 위험할 뻔 했다는데 같은 일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힘을 지닌 어미가 조금쯤 과한 대응을 한다 해서 그 진짜 의도를 의심할 수는 없을 터였다. - 나는 세자 저하의 칼은 쓰지 않을 거예요. 저하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나는 상관 있어요. 어쨌거나 지금 이 곳에는 당신이 없고, 그런데도 과거와 똑같은 일을 한다는 건 저하가 스스로를 이해시킬 제대로 된 명분 없이 왕관을 뺏어오는 꼴이 난다는 뜻이니까. 과거에는 베른에 대한 복수, 혹은 베른을 보호하기 위해 데블란에게 불려오는 치유사를 죽여 없애버렸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런 이유가 없다는 소리다. 데블란의 가시 가득한 품에서 꺼내 올 베른이 없음에도 데블란의 죽음에 깊이 개입하게 된다면, 체이스는 단지 왕관을 빼앗기 위해 친부의 치료를 방해한 아들이 될 뿐이니까. - 귀족들이 아무리 지금의 전하에게 불만이 많다 한들, 전하의 방식이 아무리 잘못됐다 한들, 전하의 죽음에 개입하고 그 자리에 앉는 것은 저하에게 있어 무조건 찬탈이에요. 그런데 내가 아는 세자 저하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그나마 당신이 있던 때라면 당신을 이유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줬겠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은 베른의 복수를 위해 데블란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 혹은 칼리안을 위해 지금의 칼리안과 아무 상관 없는 데블란을 죽음에 처하게 하는 것. 그것들에는 체이스가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용서할 수 있을 이성적인 명분이 없었다. 데블란을 그토록 증오한 베른조차 데블란을 아버지라 불렀지 않나. 그렇게 해서라도 아비에게 칼을 뻗지 않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체이스라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 체이스는 데블란의 아들이니까. 그러니 아리안느의 말은, 지금의 체이스가 과거와 같은 일을 또 하게 된다면 명분도 없이 아비를 해친 아들이라는 죄책감을 안고 평생을 지낼 것이 불보듯 뻔하다는 뜻이었다. - 난 내 사람이 스스로를 이해시킬 수 있을 명분도 찾지 못한 채로 피를 묻히고 평생 그 일에 짓눌리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의 현명함이 죄책감으로 인해 흐려지는 걸 보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데 세자 저하는 굳이 그 일을 벌이겠대요. 당신 앞길에 방해되지 않아야 한다면서. 나는 그런 저하를 이해하기 때문에 말리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해서 저하가 망가지는 것도 못봐요. 마땅한 소리다. 지금의 체이스가 베른으로 인해 데블란에게 반기를 드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일이 맞다. 칼리안으로 인해 데블란을 죽게 하는 것은 누구도 납득하지 못할 일이 맞다. 그리고 아리안느는 체이스가 죄의식에 휩싸여 살지는 않았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의 체이스는 그 때와 분명히 다른 사람이 아닌가. 있지도 않은 일을 핑계로 일을 벌이지는 말아야 한다고. -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할거예요. 지금까지 전하가 벌인 일들만으로도 나한테는 충분한 명분이 되니까. 그런데 온전히 나 혼자서만은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도와달라고 연락했어요. 솔직히 나 지금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도 알고 있고 당신에게 무슨 말로 사과해야 할지 모를 만큼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난 당신보다 내 정혼자가 더 중요하니까. 그리고 아리안느는 이렇게 덧붙였다. 체이스가 죄의식에 휩싸여 살지는 않았으면 했고, 자신에게는 데블란을 처벌해도 될 명분이 있으니 체이스를 대신해서 나서겠다고. 그러니 도우라고. - 미안해 할 필요 없습니다. 이기적인 것 아니니까. 조금 쓰게 웃은 칼리안이 말했다. 어떻게 자신이 아리안느를 이기적이라 하겠는가. - 얘기해줘요. 무엇을 도와달라는 것인지. - 텐실의 치유사는 이 곳에 못 와요. 말했지만 절대로 오지 못하게 할 거니까. 그리고 전하는 지금 귀족들과 정면으로 싸울 수 없어요. 그러기엔 너무 병들었어요. 그러니 엄마가 만든 명분을 무시하고 강제로 치유사를 들이는 대신 그 명분을 들이대지 못할 다른 치유사를 부르려고 할 지도 몰라요. 이렇게 말한 아리안느가 잠시 말을 멈췄다. 또르륵, 하고 또 하나의 물방울이 컵을 타고 흘러내릴 때 쯤 그 말이 이어졌다. - 분명히 손을 뻗을 거예요. 다른 사람 목숨은 촛불 끄듯 없애면서 자기 목숨은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게 누구든 어떻게든 일단 불러서 낫기만 하면, 그때가서 우리를 다 죽이든 무릎 꿇리든 입을 막고 자기 방식으로 다시 덮으면 된다고 생각할 사람이니까. 그런데 전하가 부르는 것이 텐실의 치유사가 아니라면 우리는 막을 명분이 없어요. 설마. - 그리고 텐실의 치유사가 아닌 또 한 명의 치유사가 누구인지, 전하는 알고 있어요. 과거에는 없었고 지금은 있는 사람. 텐실의 치유사도 아니고 엘프 치유사도 아닌 단 한 사람. 궁지에 몰린 데블란이 손을 뻗을 사람. - ······ 히나. 그 특별한 이름을 읊조린 칼리안의 입에서 재밌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나왔다. 그것을 듣지 못한 아리안느가 칼리안에게 하고자 했던 긴 이야기의 결론을 말했다. - 그러니까 오지 말아요. 전하가 무슨 이유를 가져다 대든 무슨 핑계를 대든 오지 말아요. 당신이 데리고 있는 그 치유사가 절대로 이 곳에 오지 못하게 해줘요. 전하에게서 등 돌리는 일, 이번에는 당신이 해줘요. 체이스가 절대로 칼리안에게 부탁하지 못할 그 말을 아리안느가 칼리안에게 했다. - 미안해요. 정말로.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감고 숨을 참았다. 애써 생각하지 않았던 과거의 그림자가 유령이 되어 눈 앞에 일렁이는 것 같아서. * * * 고래 울음. “이유를 몰라서 궁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나 큰 짐승이 무엇이 그리 서러워서 그런 울음을 내는지.” 어제는 하늘에서 별이 내리는 이야기를 하더니, 오늘은 별이 뜬 밤 바다에서 들려왔다는 고래 울음을 이야기했다. 또 왜. “온 몸을 뒤틀면서 울면 그런 소리가 날까. 제 살점을 다 뜯어먹히면서 울면 그런 소리가 날까. 어떻게 울면 그런 소리가 날까.” 뜬금없이, 그토록 큰 짐승을 본 적이 있느냐 묻더니 그렇게 큰 짐승의 울음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서러웠다는 이야기를 했다. 새카만 커피 한 잔을 앞에 둔 채로. 그러니까, 또 왜. 나는 이제 막 내 방에 왔을 뿐인데 왜 저 새까만 놈이 새까만 차를 앞에 놓고 시커멓게 죽은 눈을 하고 앉아있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은 채로 고래 울음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게 궁금해서, 차마 가까이 가겠다고 배를 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높은 절벽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멀찍이서 달이 반짝이는 그 바다를 바라본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살짝 오므린 손을 제 눈높이로 들어올려 보이더니 아주 천천히 위 아래로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무언가를 흉내내어 보였다. “그냥, 천천히 물 위로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면서 그냥. 숨을 쉬고 헤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너무 평화로울 뿐이어서, 울음소리를 낸 것이 정말 저 짐승이 맞을까 하고 또 궁금하게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헤이시아 궁의 지하에서 플란츠를 향해 말을 건네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은 단지 칼리안으로 앉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그것을 알아서, 플란츠도 다른 말 없이 그 앞에 마주 앉아 이야기 들어주기를 하고 있었다. 또 왜 저러는지, 무슨 일이 있기에 또 저딴 얼굴이 됐는지 묻지 않은 채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지켜보지 않으면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티가 안 나서. 그래서 하마터면 고래 울음을 모르고 살 뻔 했는데. 그 고요한 짐승이 그렇게 울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어 저도 같이 서러워진 것이 참 다행이라 생각했던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손대지 않은 커피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플란츠를 향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언젠가 오래 전에 그 소리를 여기에서 또 들었었는데.” 플란츠는 그냥 한 번 천천히 눈만 감았다 떴다. 특별한 대답을 바라서 쳐다본 것이 아니었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 날의 기억이 났던 탓에, 고래 울음을 다시 듣게 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자 했었습니다. 모르고 지나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런데 오늘 조금 먼 곳에서 그 소리를 한 번 더 듣게 되어서.” 보지 않아도 무엇인지는 안다. 언제나 평온하다는 그 거대한 바다 짐승이 숨을 쉬기 위해 물 밖에 나와야 한다는 것을 플란츠도 안다. 물 밖에 나온 채로는 생을 이어가지 못하면서도, 숨을 얻으려 물 위로 고개를 치미는 모순을 겪어내야 살아갈 수 있음을 안다. “이번에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 처음부터 아무것도 듣지 않고 그냥 지나칠걸 하고 후회를 해야 할지. 아니면 이제서야 그 소리를 알아들은 제 귀를 원망해야 할지. 그것을 모르겠네요.” 그러니 고래 울음 소리를 냈다는 것이 정말 플란츠와 체이스가 맞았을지. 아니면 제게 있어 삼키지도 뱉지도 못할 독만 가득한 이 곳에 올라와 숨을 쉬고 있는 칼리안일지. 플란츠는 그 중 무엇이 답인지를 알려주는 대신 그냥 어제 했던 것과 같은 말만 건넸다. “밥먹고 가.” 그 똑똑한 머리로 생각을 해봐도 정답을 모르겠어서, 뭐만 했다 하면 허기가 드는 그 머릿속에 그냥 어제처럼 오늘도 밥이나 채워넣고 가라고. 그런 플란츠를 한참 쳐다보던 칼리안이 고개 숙여 웃음을 터뜨렸다. “또 밥먹으래.” 뭐만 했다 하면 배고픈 줄 아는 저 파릇파릇한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어서. 그렇게 웃다보니 진짜 배고픈 것 같아서 그냥 계속 웃었다. 이제 짖다 짖다 못해서 방금 너 나한테 반말했냐고 묻는 듯한 연두색 눈동자 무시한 채로. < 제35장. 유령(4) > - 달칵 수국을 우려낸 차에서 은은한 향이 올라왔다. 꽃잎이 내려앉아 있는 차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체이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마시고 또 잠드는 건 아니겠지?” 기억에만 남아있는 낯선 방법으로 취하게 된 휴식을 준 것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리안느가 체이스에게 해가 될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조금 전 자신이 직접 건네주었던 민트차에 무엇이 들었었는지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아리안느는 평온한 일상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건 잠 깨라고 주는 거야. 그렇게 잤으면 이제 일 해야지.” “아리안느.” 가볍게 대꾸하고 넘기려는 아리안느를 부른 체이스가 아리안느의 눈을 깊이 바라봤다. “그러지 마.”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너무 많이 들어있을 그 말에, 아리안느가 못 알아들었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차를 마셨다. 설탕과는 또 다른 깊은 단맛이 입 속을 가득 맴돌았다. “무리하지 마. 더 나서지 않아도 괜찮고 내 걱정도 안해도 돼.”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그 눈에는 곧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만큼 나 그렇게 위태롭지 않아. 필요하다면 무슨 일이든 피할 생각 없어.” 찻잔 속의 수국 꽃잎은 모두 하얀 색이었다. 그것이 언제든 보라색으로, 혹은 푸른 색으로, 분홍색으로 변할 수 있을 그런 꽃이라는 것을 체이스는 알았다. 체이스 역시 변했다. 스스로에 대한 면죄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당성은 만들어지는 것이며 명분이란 결국 자기 합리화의 다른 말일 뿐이다. 저깟 꽃송이 하나도 디디고 선 땅이 달라지면 색을 바꾸는데, 사람이라 하여 바뀌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 귀가 길었는데 잘랐고, 말을 못하지만 수화로 혼을 내고, 새도 좋아하고 강아지도 좋아하고. 아이스크림도 잘 먹고. 그리고······ 잘 웃습니다. 찻잔에 띄워져 있던 하얀 꽃잎 하나가 찻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반대로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의 편린 위에 떠올랐다. - ······ 살아있어요. 그래서 괜찮습니다. 베른이 잃은 것. 그리하여 얻게 된 것. 자신의 생을 모조리 잃어버린 베른이, 모든 것을 잃게 된 대신 유일하게 얻을 수 있었던 단 하나. 그것이 히나였다. 그것이 체이스에게도 정당성이며 명분이었다. 면죄부 따위 필요하지 않다고, 그렇게 여겼다. 데블란이 기어코 칼리안과 히나를 이 땅에 불러들이려 한다면 얼마든지 막겠노라고. 무슨 짓을 하든 막겠노라고. 그렇게 다짐했었다. “그러니까 그 아이에게 상처 주지 마.” 제발. 이미 나락에 든 아이를 더 밀어내지 마. 제발. “싫어.” 아리안느의 답은 빨랐고, 곧았다. 자신이 체이스 몰래 칼리안과 대화를 나누었음을 알고 있었다. 칼리안에게 무슨 비밀을 일러주었고 무슨 요구를 했는지 전부 다 꿰뚫어보고 있는 보랏빛 눈을 마주한 아리안느가 다시 말했다. “나는 당신 믿어. 당신 이야기도 다 믿어.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가 어떻게 끝을 맞았는지, 전부 다 믿어. 의심 안 해. 정말이야.” 그렇게 말한 아리안느의 손가락이 문 밖 어딘가를 가리켜 보였다. “저 사람이 더 오래 살아있게 되면 우리는 결국 같은 처지 밖에 못 된다며. 똑같은 길을 걷고, 똑같이 당신 동생이 만들어 준 그늘 밑에 숨어 있다가 똑같이 죽을 수 밖에 없다며. 그 말도 다 믿어. 그런 말 듣지 않았더라도 저 사람이 이제 사라져줘야 할 백 가지 이유는 내가 찾아낼 수 있어. 그런데 당장 테일란을 데리고 저기에 가지 않는 것은, 오로지 딱 하나. 당신 때문이야.” 색깔이 바뀌어도 수국은 수국이다. 그것이 흰색이든 분홍색이든 푸른색이든, 결국은 수국이다. 르니에리가 되거나 아디니아가 되거나 시나스타가 되지는 않는다. 체이스는 체이스다. 결국 체이스는 체이스다. “지금 당장 상처 주는 게 뭐 어때서. 그런다고 안 죽어. 악역 한 번 하는 게 뭐 어때서. 사람은 누구나 다 나쁜 짓 하면서 살아. 당신 동생 그 정도로 나약한 사람 아니라며. 당신 동생 옆에 좋은 사람 많다며. 그럼 굳이 당신까지 거기 얽매이지 마. 그 치유사는 당신 동생이 알아서 지키면 돼. 당신은 무리하지 말고 당신 지켜. 나는 툭하면 잠 못 자고 술처먹는 내꺼 지킬거야.” 그 말을 듣고 멍하니 있던 체이스가 한 손을 들어올려 제 얼굴을 덮었다. 낮고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내가 엄청 못미더운가보다 싶었던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웃음소리였다. “그럼 아리안느 당신은 누가 지키는데.” “우리 엄마.” 당연하다는 듯 나오는 대답에 체이스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얼마만에 듣게 된 웃음 소리인지 따져보는 대신, 아리안느는 그냥 차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웃음을 멈춘 체이스가 그런 아리안느를 따라 같은 것을 입에 담았다. “그럼 린 후작은 누가 지키는데.” “엄마는 누가 지켜 줄 필요 없는 사람이야.” “아.” 수국차는 민트차만큼 맛이 좋다. 설탕보다 덜 달지만 설탕보다 더 달달해서 좋았다. “그런데 나 예전만큼 술 많이 안 마시잖아.” “카이리스 가기 전보다 많이 마시잖아.” “그래봐야 당신이 한 번 마시는 것보다······.” “입.” ······ 응. * * * 루시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좋아했다. 창 너머로 흐르는 빗물이나 실체 없는 빛을 좋아했다. 그것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으려 들었다. 그렇게나 욕심 많은 것은 도대체 누구에게 배운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루시의 주인인 칼리안이나 루시를 돌보는 히나, 그리고 루시가 제일 좋아하는 플란츠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알려준 적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루시.” 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 그림자를 잡으려고 애를 태우기에 불렀다. 못 잡을 것에 손 내밀다 실망할까봐서. “애오옹.” 왜 이것이 잡히지 않는지 묻는 것도 같고, 잡아달라 부탁을 하는 것도 같고. 그래서 플란츠는 다시 한 번 루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리 와.” “애옹.” 쫓아다닐 땐 참 제멋대로 잘도 쫓아다니면서 오라고 부르면 안 오고 저 멀리서 울음소리를 낸다. 어리광인지 아니면 다른 말이 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어서, 플란츠는 그냥 루시에게 걸어가 은백색의 어린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어리다고는 해도 많이 자랐다. 문 틈으로 드나들지 못할 만큼 자랐다. 덕분에 체르밀 궁 1층부터 4층까지의 모든 문에 작은 문을 하나씩 더 만들었다. 빌헬름 관도 한 차례 수리를 마쳤다. 그 작은 아이 하나가 모두에게 봄처럼 반가웠던 탓에 아무도 그것을 번거롭다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레릭이 전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 쭈우욱 아무튼 그런 날을 지나 이곳 저곳에서 잘 얻어먹고 무럭무럭 다 자란 루시는 엄청 묵직해졌다. 예전에 들어올릴 때에는 폴짝 들어올려지는 기분이 들었었는데, 이제는 쭈욱 하고 허리가 길게 길게 늘어났다. 대체 어디까지 늘어날 셈인지 궁금해질 때 쯤이 되어서야 뒷다리를 바닥에서 떼는 루시의 엉덩이를 받쳐 든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사실은 고양이가 아니라 하얀 족제비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므에옹!” 그 웃음에 뭐가 들었는지를 어떻게 알아봤는지, 루시가 짜증내듯 시비를 걸었다. “늘어나서 웃었는데, 왜.” 그래서, 어디 가서 지고 사는 성격이 아닌 플란츠도 나란히 짜증을 냈다. 애옹! 하는 말대꾸에도 같이 말대꾸를 했다. 만약 이런 플란츠를 레릭이 본다면 내일쯤 세상이 망하려나보다 하고 삶을 한 번쯤 되돌아볼 것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플란츠는 그렇게 한동안을 루시와 싸우며 보냈다. 플란츠의 무릎 위에 앉아 또 허벅지를 꾹꾹 눌러대다가, 그르릉하는 이상한 소리를 한참 내던 루시가 꾸벅 꾸벅 졸다 기어코 잠에 든 그런 오후.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 루시입니다.’ 이름이 생겼지만 오히려 더 길어져버린 이상한 목줄을 한참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루시를 따라 가만히 눈을 감았다. - 아무것도 가져본 적 없어서 잃어버린 것도 없을 내 형님은. 아마도 여전히 불행하리라 말을 했었는데, 하고. 문득 생각이 났다. 가진 것 없이 지킬 것만 더럽게 많은 그 놈은 지킬 것이 늘어나서 그딴 표정이었을지. 아니면 잃을 것이 생겨서 그딴 표정을 하고 있었을지. 그런 생각이 든 플란츠가 소리 없이 눈을 떴다. 잊혀진 이름이나 지나간 나이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 주제에 본 적도 없는 고래 얘기만 줄줄이 늘어놓던 동생놈 말에 세대 차이를 벗어나 이제는 범 국가 차원의 지역적 문화 차이까지 느껴야 하나 싶어서, 긴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커피에서 르니에리 향이 나서 싫어하는걸까 했었는데. “바다 비린내가 나서 못 마셨나.” 마시고 싶어서, 혹은 마셔야 해서 앞에 두었을 그 커피를 왜 끝내 손대지 못하고 밥만 엄청나게 처먹었는지. 문득 그 이유가 궁금해진 탓에 플란츠는 다시 눈을 감았다. * * * 편지는 열어보지 않았다. “사직서는 아니었으면 하는데, 맞습니까.” 의상담당자 섀틴을 만나는 동안 벌 삼아서 계속 기다리게 한 아르센을 앞에 둔 칼리안이 뜯지 않은 편지봉투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기회만 된다면 루시 다니라고 만들어놓은 저 작은 문을 지나서라도 나가고 싶다는 얼굴을 한 아르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성문입니다, 왕자님. 사직서 가져오면 발칸 말고 이승에서 잘라주실 것 같아서 그냥 반성만 많이 했습니다.” 사직서는 사직서라 말하면서 시말서도 아니고 사과문도 아니고 반성문이란다. 그 단어 선택마저 마법사다워서, 그 내용이 한껏 궁금해진 칼리안이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편지를 내려다봤다. “심심할때 볼게요.” 그리고는 편지를 열지 않은 채 테이블 한 쪽에 그대로 내려놨다. 그런 칼리안의 태도를 보아하니 당분간 아르센을 위한 안네루시아가 세뉴 강에 뜰 걱정은 없는 것 같아서, 아르센은 일단 안심했다. 그 뒤에는 시스파니안의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체르밀 궁의 3층에 머무는 마법사 겸 소드마스터의 침실에 놓인 마법 금고에 들어갈 편지 하나를 어떻게 없애야 하는지를 고민해봐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금고를 통째로 없애야 하나.’ 침투 과정은 고민하지 않고 일단 금고 여는 법부터 고민하던 미친 따까리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바로 그 금고 속에서 나오는 하해와 같은 용돈 덕분에 급여가 사라진 이후 오히려 더 풍족한 주머니를 가지게 되었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헤이시아 궁을 폭발시켜서 줄어든 급여를 대신해, 칼리안이 본래 급여의 두 배를 계속 주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금고를 없애면 안 되는 것이다. “그냥 지금 읽어보시거나 아니면 없애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왜요. 재밌겠는데.” 아르센의 반성문이라니, 이것을 왜 벌써 열어본단 말인가. 언젠가 오늘보다 조금 더 숨막히는 날이 오면 그 때 쯤 열어봐야지. 마법사들의 서신이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해왔으니, 완두콩 사는 윗방에 가도 숨이 안 쉬어지는 그런 날에 열어봐야지. 이런 생각에, 칼리안이 장난기 다분한 얼굴을 했다. “헤르츠 경.” “네, 왕자님.” 말린 배가 가득 들어간 녹빛의 차에서 시원하지만 단 향이 가득 느껴졌다. 그것이 아르센과 퍽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달빛 가득한 세크리티아의 밤 바다 생각이 났다가도 빨간 불꽃이 하늘로 떠오르던 어느 밤의 인공 호수가 생각나는 그런 향이라서,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 차가 꽤 마음에 든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경은 무엇을 지키면서 살고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은 아르센이 한동안 칼리안을 보다가, 찻잔 속의 말린 배를 내려다 보다가, 자신이 써온 반성문을 쳐다봤다. 무엇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지 궁금해할까 하던 아르센이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그냥 되는대로 지키면서 삽니다.” 그것이 무슨 말일까, 하는 눈이 된 칼리안을 향해 아르센이 퍽 어른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스승님 말씀도 지키고, 군단장님 앞에서 자존심도 지키고, 부군단장님이신 왕자님 앞에서 소신도 좀 지키고, 협회장님 앞에서는 겁대가리 지킵니다.” 자신이 지켜온 것들을 이렇게 하나하나 이야기하던 아르센이 말을 맺었다. “발칸도 제가 지킵니다.” 지켜온 것이 많은 사람이 고작 칼리안 뿐은 아니었던 탓에, 누구나 지킬 것 한가득 안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나 지켜주겠다는 두 번째 따까리 앞에 놓고,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차를 마셨다. -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맑게 빛나는 붉은 눈을 들어 아르센을 쳐다봤다. “그럼 거기에 하나만 더 넣어요.”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더 지키면 되겠습니까.” 그것이 브리센 추종 세력이든, 제온이든, 알 수 없는 적이든. 혹은, 세크리티아의 국왕이든. 그 모든 것으로부터. “내가 앉을 자리.” 네가 가진 그 세력과 힘으로 내가 가야 할 길에 놓인 것 치워가면서 내 앞길 제대로 지키라고. 지켜달라고. 네가 그리하면 나는 에반을 상대하고, 플란츠를 지키고, 카밀론에 들어가고, 제온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엘프들을 만나고, 란델을 지키고, 르메인도 지키고, 어쩌면 세계도 지키고. 그렇게 나는. "나는 히나 한 명을 지켜낼 테니." 평생을 지켜오던 것에서 자신을 끌어내린 마법사에게 그렇게, 칼리안이 부탁을 했다. < 제35장. 유령(5) > 확실히 미친 것이 맞다. 얼음 마법사인데 왜 그렇게 폭발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물어봤더니 자기도 모르겠단다. 모르겠지만 그냥 좋다 했었다. “그때 말씀 안 드렸지만, 왕자님은 참 좋은 사람이십니다.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이유가 늘어난 것인지, 본래부터 특별한 이유가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냥 왕자님이 좋은 사람이라서 따릅니다.” 그러더니, 언젠가 칼리안이 나를 왜 따르는지를 물었을 때 하지 않았던 그 대답을 ‘내 자리 지켜달라’는 부탁을 들은 뒤에 이렇게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칼리안을 따르는 정확한 이유는 사실 저도 잘 모르겠단다. 그냥 사람 좋아 보여서 따르고 있다는데 대체 그 좋은 사람이라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 후 아르센은 제 앞에 놓인 배 향 가득한 녹차를 쭉 들이켰다. 꼭 잔뜩 긴장해서 목이 타는 사람처럼 시원하고 단 향을 음미할 새도 없이 그렇게 한 입에 차를 마신 뒤에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얼굴로 똑같이 웃다 말을 이었다. “왕자님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싸움에 앞서 상대방에게 항상 제 이름을 알려줍니다. 스승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지키며 살다 보니 버릇이 됐습니다.” 칼리안은 그 말에 대해 딱히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무슨 말인지 되묻지도 않았다. 잊히지 않는 기억의 편린 사이로, ‘발칸의 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를 말해주던 아르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그날’ 제가 누군가의 이름을 먼저 물어본 것은 아마도 왕자님이 처음이었을 겁니다. 기억 하나 안 난다 해도 그건 제가 확신합니다.” 플란츠와는 극명하게 다른 반응이 아닌가. 정말 아무렇지 않게 그날을 입에 담는 모습이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조금 아파서, 칼리안이 실소하며 물었다. “경에게 내 목숨 내어 준 것에 자부심이라도 가지라는 소리입니까.” 이 말을 들은 아르센은 칼리안이 짐작한 그 의미가 정말 맞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대답했다. “왕자님께서 이렇게 굳이 저를 앞에 앉혀 놓으셨는데, 왕자님의 선택이 최선이라 믿으실 수 있을 이유 하나쯤은 알고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칼을 써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리 머리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정말 그 사람을 곁에 두고 신용을 가지며 부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칼리안이나 아르센은 모르겠지만 언젠가의 플란츠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그러니 지금 아르센은, 굳이 아르센을 곁에 두겠다 결정한 칼리안이 스스로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 여길 만한 사실 하나를 알려주고자 그 아픈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아르센을 앞에 두고 보는 칼리안이 더 돌지 않게 막아 줄 자기 위로, 그것을 칼리안의 손에 쥐여주기 위해서. 분명 아르센은 과거의 베른을 존중했으리라고. 그 목숨을 앗은 것을 아깝다 여겼으리라고. 그러니 더 이상 심장이 식는 기분은 느끼지 말아달라는, 그런 말이기도 했다. “하여튼 경은 이상한 사람이야.” 아르센의 말 뜻을 모두 이해한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일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고, 그것을 가지고 위안을 삼으라 알려주고 있으니 확실히 어딘가 이상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이렇게 굴 수 있을까. “이미 알고 있어요. 그 때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이라고 모를까.” 조롱하지 않고, 가볍게 여기지 않고, 분명한 예의를 담아 베른을 상대했음을 여전히 기억한다. 차라리 그 날의 플란츠를 원망했을지언정 아르센을 원망한 적은 없었지 않나. 그냥 좀 엄하게 대했을 뿐이지. “이미 알고 계신다 하니 다행입니다.” 앉을 자리 지켜달라는 말과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 알쏭달쏭한 그런 말을 툭툭 내려놓듯 꺼낸 아르센이, 속 깊은 곳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빛의 두 눈으로 칼리안을 보며 조금 늦은 진짜 대답을 건넸다. “그런 분의 숨 한 번을 빼앗았으니, 이번에는 지키는 것으로 갚겠습니다. 제가 마음 먹고 누구 죽여본 적은 많았어도 마음 먹고 지켜본 적은 없었습니다만. 최선을 다해 성심성의껏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왕자님.” “아니. 나 말고 내 자리 지키라니까.” “사양도 마시고 걱정도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든 왕자님 한 분을 제가 못지키겠습니까.” 미친놈아. 사람 말을 좀 들으라고. “아······ 진짜 괜히 살려놨나봐.”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바뀐다. 정말 죽여버릴 걸 그랬나보다 싶기도 하고 살려놓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아르센은 그런 사람이었다. 울고 싶은지 웃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런 말을 하는 칼리안을 본 아르센이 신의로 가득한 눈을 한 채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음 속 깊은 곳에 꾹 담아 두었던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동상 만들게 해주시든가 저 반성문 태워주시든가 둘 중 하나만 허락해주면 안되겠느냐고. 그래서 칼리안은 예쁘게 웃으며 꺼지라고 대답했다. * * * 안색이 좋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다 해도 분명 겉으로 크게 티를 내는 사람이 아닌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분명히 얼굴 빛이 좋지 않았다. - 지금, 들어가도 돼요? 우리 꽃 같은 왕자님 어디 편찮으신 것 같다고 말하면 무슨 그런 농담을 하냐고 말해 줄 사람 참 많은 왕궁에서 가타부타 의심 없이 곧장 올라와 준 히나를 향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얀이 대답했다. “네. 지금 막 일어나셔서 준비 마치셨어요.” 어차피 칼리안에게 너 어디 아프니까 히나 불러올게 하고 말해봐야 아무데도 아픈 곳 없다고 말할 칼리안이 아니던가. 괜찮다는 그 말 믿었다가 좋은 꼴 겪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어야 그 말을 믿지 않겠나. “부탁해요, 베른 경.” 그래서 얀은 이렇게 그냥 제맘대로 히나를 불렀다. 똑똑, 하고 일정한 두 번의 노크 소리로 자신이 들어감을 알린 얀이 칼리안 방의 문을 열고 히나를 들여보냈다. 테라스 밖을 보며 서 있던 칼리안이 히나를 향해 꽤 놀란 얼굴을 하는 것을 본 얀은 함께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문을 닫았다. 치료는 히나 몫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들어선 히나를 본 칼리안이 문을 닫으며 사라지는 얀을 보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누가봐도 어디 하나 아픈 곳 없는 멀쩡한 얼굴인데, 얀의 눈에만 또 다른 게 보였나보다 싶어서였다. “히나.” 어쩐지 차 두 잔을 가져다 놓더라니. 같이 마시자고 가져온 줄 알았더니 히나를 불러오려고 그랬나보다. 이 더운 날에 어울리지도 않을, 딸기 청까지 넣고 달게 달게 만든 따뜻한 코코아는 그러니까 아픈 칼리안과 단 것 좋아하는 히나 생각에 내 온 모양이다. - 진짜, 안 좋아 보이네요. 자리에 앉은 칼리안의 옆에 선 히나가 이렇게 말하며, 칼리안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따뜻한 그 체온이 싫지 않아서 칼리안은 그냥 웃었다. “걱정하지 마. 어디 안 좋은 것 아니니까.” 누가 보면 곱게 곱게 살고 있는 5층 왕자님인 줄 알겠다. 지금 당장 창 밖으로 뛰어나가 숲까지 달려가도 숨 한 번 안 몰아쉴 사람을 이렇게나 걱정해주니 재미가 있을 수 밖에. - 그럼, 안 좋은 꿈, 꿨어요? 그렇지만 칼리안의 괜찮다는 말 안 믿기로는 얀에 버금가는지라, 히나는 들려온 대답을 싹 무시한 채 칼리안의 이마에서 손을 떼며 다시 물었다. 아. 들켰다. 하고, 칼리안이 또 웃었다. “오래 전에는 떠나는 게 서러운 사람을 만나는 꿈을 한 번 꿨었고, 그 후에는 이미 떠나서 슬픈 사람을 만나는 꿈을 한 번 꿨었는데.” 히나는 여전히 칼리안의 옆에 선 채로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의 말을 끊은 적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는 히나는 늘 이렇게 가만히, 누군가의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은 떠나지 않을 것 같아서 무서운 사람을 만나는 꿈을 꿨어. 유령을 본 것 같은 그런 꿈.” 그 말을 들은 히나가 칼리안을 계속 그렇게 쳐다보다가, 소리 없이 손을 움직였다. - 오빠가, 저 어렸을 적에, 오리들은 ‘꽥꽥’ 운다고, 말을 했어요. 저는 오리를, 못 봐서, 그게 어떤 소리일지, 몰랐어요. 혹시라도 칼리안이 알아보지 못할까봐 아주 천천히 이렇게 말을 한 히나가 잠시 칼리안을 살폈다. 그리고는 자신의 말을 모두 알아본 것을 확인한 뒤 계속 말을 이었다. - 그날, 꿈을 꿨는데, 이 방보다도 더 큰, 커다란 오리가, 꽥꽥 하면서 저를, 따라왔어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꿈 얘기를 하는데 어찌나 재밌는지. 칼리안이 흥미 가득한 눈으로 히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히나가 무서운 것을 봤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이더니 다시 생긋 웃으며 말했다. - 그래서 아침이 되서, 오빠 때문에, 무서운 꿈 꿨다고, 엉엉, 울었는데. 그날 오빠가, 호수에 저를, 데려갔어요. 하얀 오리 뒤를, 노란 새끼오리가 따라다니면서, 꽥꽥 소리를 내는데, 너무 귀여워서, 그 날부터는 오리 꿈, 안 무서웠어요. 칼리안이 생각하는 그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알고 보면 이제는 무서운 사람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그런 이야기인 것이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의 말이 맞다. 그 작자가 아무리 베른의 머릿속에 유령처럼 머물고 있었다 한들, 칼리안의 속에서까지 그러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히나. 내가 하나 물어볼 게 있어.” 가만히 히나의 말을 곱씹어보던 칼리안의 질문에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 받으면 오래오래 살지도 모를 사람이 있어.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이 영영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 사람이 네 도움을 바라게 될 지도 몰라. 와서 고쳐달라고 할 지도 몰라.” 어떻게 할거야, 히나? 내가 그 사람으로부터 고개를 돌려달라고 얘기하면, 실망할거야? 화를 낼 거야? 어쩌면 그것이 더 무서울지도 모르겠어서, 칼리안이 모두 다 꺼내지 못한 질문이 담긴 눈으로 히나를 쳐다봤다. 아기 오리의 것처럼 까맣게 반짝이는 그런 맑은 눈으로 칼리안을 보던 히나가 대답했다. - 안 고쳐 줄게요. 그것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의 병든 곳이 아르센의 멍든 뒷목 같은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히나도 분명히 알 테지만 고쳐주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대답을 했다. - 저는 누구든, 고쳐주고 싶어 하는, 그런 착한 사람, 아니에요. 왕자님이 싫으면, 저도 싫어할 수, 있어요. 아. - 많이, 나쁜 사람이에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사람이 유령같아서, 언제까지고 나를 따라다닐 것 같아서.” 치유사를 앞에 두면 누구나 이런 저런 말을 하게 되니까. 플란츠 뿐 아니라 칼리안도 같으니까. - 무서워요? “아니, 그냥. 아파. 생각하면, 그냥. 조금 아파.” 그 말을 들은 히나가 물 위의 윤슬처럼 웃었다. - 다행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이 아프다는데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몰라도, 오히려 다행이라며 반짝반짝 웃었다. - 아프면, 제가, 고쳐 줄 수 있으니까. 무서운 사람인데, 무서운 것 아니고, 아파서 다행이에요. 그 무섭다는 사람은 고쳐주지 않더라도 칼리안이 아픈것은 잘 고쳐줄 수 있으니, 언제든지 고쳐주겠노라고. 히나는 그렇게 대답을 했다. - 아프면, 말해요. 꼭, 고쳐줄게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 말만으로도 이미 다 나았다는 뜻이 담긴 대답이었다. * * * 덥다. 아무리 카이리스에서 가장 추운 곳 중 하나라는 카이리시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은 덥다. 지그프리드 령에서 또 남쪽으로 보름은 더 내려가야 한다는 케네즈 백작령 인근에서 살았다던 레릭은 이 더운 날이 그리 불쾌하지 않은 듯 보였으나 플란츠는 그렇지 않았다. 덥다. 체르밀 궁에서 나오자마자 덥다. 아침부터 덥고, 더워서 짜증이 난다. 안 그래도 짜증나는데 앞에 서 있는 놈이 신경에 거슬려서 더 짜증난다. “달라고. 빨리.” 머리 좋은 만큼 눈치 빠른 플란츠는 앞에 선 저 놈이 오늘도 뭔가 전할 것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놈이 계속 눈치만 보고 도통 숨긴 것을 내놓을 생각을 않는 것이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부군단장님.” 늘 몰래 다가와 편지를 찔러넣고 사라지던 세크리티아의 새는, 갑자기 다가온 플란츠의 밑도 끝도 없는 요구에 내심 당황하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발을 뺐다. ‘설마 헤르츠 부군단장이 내 정체를 알린걸까.’ 이런 생각을 해보던 새는 이내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둘이 아무리 같은 집무실을 쓰고 있다고는 하나 절대로 그런 일들을 공유할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그의 이런 예상은 정확했다. 확실히 아르센은 세크리티아의 세작으로부터 서신을 받았던 일에 대해 플란츠에게 알리지 않았으니까. 칼리안 역시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플란츠에게 알리지는 않았었다. 그저 플란츠가 진작부터 놈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나 그냥 두었을 뿐. 그는 오늘도 티나지 않게 행동을 했고 제대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상황을 보아서 플란츠에게 편지를 전할 때를 가늠해보기는 했으나 누군가의 눈에 띄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란츠가 곧장 자신에게 다가와 줄 것이 있으면 빨리 달라 닥달을 하니 놀랄 수 밖에. “보라색 눈 달고 다니는 놈이 보낸 거 달라고.” 순간 그는 플란츠를 향해 살기를 뻗을 뻔 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물론 그런 그를 보는 플란츠도 정말 열심히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지만 그런 사실은 몰랐다. “지금, 당장.” 더운 것도 짜증나고, 체이스가 굳이 서신을 또 보내는 바람에 또 한 번 전서구 노릇 하는 것도 짜증나는데 앞에 선 놈이 끝까지 발뺌하려는 것에도 짜증이 난 ‘연두색 눈 달고 다니는’ 왕자가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도 발뺌하면 저 놈 그냥 발칸에서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놈은 날카로워진 눈빛을 감추며 편지 하나를 플란츠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바람 같은 속도로 멀어졌다. 아르센에게 전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매를 통해 보낸 편지인지 평소보다 크기가 조금 크다. 뿐만 아니라 항상 돌돌 말려있기만 했던 그것이 오늘은 제대로 접힌 채 봉인까지 되어 있었다. - 가능한 빠르게. 그리고 겉면에는 이런 짧은 글자만 적혀 있었다. 굳이 그것을 봉인해 둔 이유야 단 한가지다. 칼리안이 아닌 다른 이가 미리 열어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일 터였다. 문양 없는 인장으로 봉인된 편지의 겉면에 적힌 그 문장을 잠시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 아닌데.” 원치 않게 체이스의 글자를 질리도록 봐온 플란츠가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저 글자가 눈에 거슬렸다. 그것도 많이 거슬렸다. 분명 체이스의 필체였으나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그러니까 마치, 누군가 체이스의 글씨를 완벽히 흉내내어 써놓기라도 한 것처럼. 그 미세한 차이를 한 눈에 알아차린 플란츠가 편지를 내려다보며 이것을 그냥 모르는 척 칼리안에게 전할 것인지를 잠시 고민했다. - 부우욱. 그리고는 과감히 편지 봉투를 찢어 내용물을 꺼내들었다. 아무리 매라 해도 세크리티아에서 카이리스까지 날아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칼리안은 바로 어제 체이스 쪽과 대화를 한 뒤 올라와서는 고래 울음이 어쩌고 하며 주절거렸다. 매 편에 편지를 날려보내고 난 이후에 체이스와 칼리안이 소식을 주고 받았다는 소리일테니, 누군가 체이스의 필체를 흉내내어 칼리안에게 말을 전하려 했다는 사실이 체이스의 안위에 이상이 있다는 의미는 아닐 터였다. ‘그놈이 커피에서 바다 비린내를 맡은 이유가 적혀 있겠지.’ 그래서 플란츠는, 어차피 이 편지를 칼리안에게 전달해봐야 칼리안 표정이 또 한번 거무죽죽하게 변하는 것 말고는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고 그냥 뜯었다. 칼리안은 세크리티아 쪽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절대 알려주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또 한 번 말 안듣고 속 잘 썩이는 형님 노릇을 할 수 밖에. 안에 무슨 독이 있을지 모르지 않느냐는 생각을 한 레릭이 깜짝 놀란 표정을 했으나, 플란츠는 신경쓰지 않고 편지를 펼쳐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 하.” 그 후에는 곧바로 어딘가를 향해 발을 옮겼다. 칼리안이 있을 체르밀 궁 말고, 아르피아 궁 쪽을 향해서. 평화로운 남쪽 바닷가 마을에 사는 웬 뱀 한마리가 이상한 짓 벌이려는 것 같다는 사실을 칼리안 말고 칼리안 아빠한테 일러바치려고. < 제36장. 참으세요, 스승님(1) > 플란츠가 잠시 발을 멈췄다. 하얀 띠 자수와 단추로 장식된 옅은 하늘색의 얇은 재킷에 팔을 끼워 제대로 입기 위해서였다. 뒤따라와 그것을 도운 레릭이 그 사이 언제 붙었는지 모를 루시의 털 두 가닥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얼른 떼냈다. 그렇게 차림새를 가다듬은 플란츠가 다시 발을 옮겨 아르피아 궁에 들어섰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곳에 올 때면 혹시나 마주치지는 않을까 항상 긴장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거리감이 컸으니까.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카에라의 기사들을 뒤로한 채 뚜벅뚜벅, 아르피아 궁 가장 윗층의 긴 복도에 들어선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을 때. “플란츠.” 만나고 싶다가도 마주하기 꺼려지고, 반갑다가도 머뭇거리게 되고, 이해가 되면서도 원망스럽고, 안타깝다가도 답답한 그런 사람이 플란츠를 불렀다. 세뉴 관에서의 일정을 위해 이제 막 집무실에서 나오던 르메인이었다. 그러게 왜 집무실을 마주보게 둔 탓에 이 곳에 올 때마다 이렇게 상념거리를 만들게 했는지, 하여튼 뭐 하나 썩 마음에 들게 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애써 접어넣은 플란츠가 우선 예를 올렸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우습지 않은가. 귀족들이 모여 사는 에이난샤 거리에서 가장 거대한 저택에 사는 공작의 자식도, 내성 밖 빈민촌에 살고 있을 이름 모를 이들의 자식도 제 아비를 아버지라 부를 텐데. 오로지 이 사람만은 절대로 그렇게 칭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것이 숨이 막히는 것이다. 사람을 그냥 한 사람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이 왕궁이, 제아무리 크고 화려하다 해도 답답하고 비좁게 느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귀족 회의에 들었어야 할 시간인데.” 끝도 없이 의식적으로 이어나가고 있는 참 많은 생각들 중 가장 쓸데 없고 비효율적인 상념을 떠올리던 플란츠가 자신을 걱정하듯 건네오는 말에 고개를 들어 르메인을 쳐다봤다. 윗층 사는, 딱 싫어하는 것만 모아서 만들어다 놓은 듯한 누구를 빼닮은 빛의 짙푸른 눈이 플란츠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 내려다보는 것도, 바라보는 것도,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살펴보고 있었다. 걱정하는 빛이 역력한 그런 시선에 익숙해질 날이 요원한 플란츠가 무슨 대답을 해야할까 잠시 고민했다. 내 동생이 또 이상한 일에 휘말린 것 같아서 그 일 막아줄 마법사 새아빠 만나러 왔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아······.” 때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 플란츠를 보며 잠깐 무언가를 떠올린 르메인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따로 언질하지 않고 찾아왔기에 혹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이 되어서 한 말이니라. 바쁘고 난처해서가 아니라, 급한 일이라면 일정을 잠시 미룰까 해서 물은 것이니······.” 지금은 바쁘다, 당장은 어렵겠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해왔는지 스스로도 잘 아는 듯 했다. 오죽하면 지레짐작으로 저런 소리를 덧붙이겠나. 당연하겠지만 그것을 알아서 배운 것은 아닐 터였다. 르메인이 내뱉는 말 한 마디, 내뱉는 숨 소리 하나까지 란델과 플란츠에게는 모두 다 가시로 들릴 수 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은 앨런이 알려주었겠지. 이래서야. 앨런이 키운 것이 칼리안의 세력인지 르메인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급한 일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회의에는 오늘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덕분에 플란츠는 더더욱 ‘당신 보러 온 것 아니다’ 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이렇게 적당히만 대답을 했다. 그런 아들을 조금 더 바라보던 르메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다. 혹 이 자리에서 이야기 해도 괜찮은 것이라면 말하려무나.” 그러니까 나는 당신 말고 당신 맞은편 집무실에 있는 마법사 만나러 온 것이라고 굳이 이야기를 꺼내놓게 하려는지. 눈치가 없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는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에 습관처럼 흘러나오는 한숨을 참은 플란츠가, 말했다. “······ 생일에는 생명 없는 꽃을 선물하지 않습니다, 전하.” 그냥 되는대로. 기어코 플란츠가 앨런 아니라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 믿고 있는, 혹은 믿고 싶어하는 저 소같은 남자한테 그냥 되는대로 생각해낸 용건을 말했다. 당신 또 실수했다고. 소 뒷걸음질에 이상한 것 잡는 재주는 도대체 어디에서 배워서 그렇게 잘 써먹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엉뚱한 것을 잡으셨다고. “저를 생각해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칼리안에게는 그리 좋은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플란츠가 참아낸 한숨이 르메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안그래도 이미 진작에 또 한 소리를 들었던 탓이다. 말버릇은 나쁘지만 배울 것도 많고 혼날 것도 많아 멀리 두지도 못하는 마법사로부터, 둘째 생각한답시고 생일 맞은 셋째한테 뭔 짓했는지 알기는 아느냐고 정말 한참을 혼이 났다. 그럼 돌아오는 둘째 생일은 어떻게 해야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불꽃도 꽃이니 불꽃 담은 전등 장식을 해줄까 물었다가 이참에 아예 그냥 그 불꽃 들고 세뉴 강이나 건너가 버리시라는 말도 들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셋째를 찾아가서 제대로 사과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려는데 플란츠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 르메인이 무엇을 고민할지 눈에 훤히 보였으니까. “저는 염려 않으셔도 되니 그냥 주시던대로 주십시오.” 플란츠 딴에는 최선을 다해 성의껏 길게 꺼내놓은 말이었고, 르메인은 한참 뒤에 그 말 뜻을 이해했다. 플란츠 자신의 생일에는 그냥 살아있는 꽃 달라는 이야기였음을 말이다. “세상 모든 꽃이 똑같은 향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으니 괜찮습니다.” 세상 모든 꽃을 언제까지고 피할 수도 없는 일인데다 세상 모든 꽃이 다 르니에리 향을 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히나에게 배웠지 않나. 그러니 돌아오는 봄에 피어오를 꽃향기에서 지나간 상처나 떠올리며 심장 위에 돌덩이 얹어놓는 대신, 비로소 겨울이 지났음에 조금쯤은 반가운 마음을 가져보려 하는 중이었다. 그러려면 생일 축하하는 빨간 꽃부터 기껍게 여겨야 할 테니 조금씩 연습하듯 익숙해져 보겠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해서 당장 라벤더 차를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 그래. 그리하마.” 그 뜻을 전부 알아들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르메인은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고맙구나. 플란츠.” 물론 르메인은 이번에도 미안하다는 말은 못하고 고맙다는 말만 했다. * * * 칼리안이 이제 막 히나를 돌려보내고, 플란츠가 르메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 시간. 얼마 전 지그프리드 관에서 석찬에 들었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귀족들이 세뉴 관을 찾았다. 언제나와 다르지 않은 수의 안건들을 두고 언제나와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이 오고 갈 별 볼 일 없는 중앙 귀족 회의 자리에 유래 없이 많은 귀족들이 모인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러니, 드미레아 양. 아무래도 그 날의 일에 대해 내가 3왕자님과 이야기를 해봐야 하겠네. 거절하실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드미레아 양은 3왕자님의 정혼자가 아닌가?” 칼리안의 생일 축하 연회에서 정중히 꼬리 말고 도망간 에반 브리센 후작과 드미레아 지그프리드 소공작이 세뉴 관에서 있을 귀족 회의에 모두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몰려온 것이다. 좋은 구경거리를 두 번이나 놓칠 수는 없으니 말이다. “······ 그러니 오늘 회의가 끝난 뒤에 3왕자님께 한번 얘기를 전해달라 부탁을 하는 것이네.” 자신이 산 세월의 반의 반 정도를 산 드미레아에게 나름의 예의를 갖춰가며 이런 이야기를 건네는 것은 무려 에반 브리센 후작이었다. 그런 에반을 잠시 쳐다보던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그리하지.” 하대였다. 드미레아의 입에서 하대가 나온 순간, 귀족들은 이 자리에 자신이 함께 하고 있음에 대해 또 한번 큰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에반의 눈썹이 쭉 올라갔다. 방금 들은 이야기에 대해 분명한 항의를 하려던 에반이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의 세력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귀족들도 많은 곳이다. 저 어린 드미레아가 자신에게 하대를 한 이 결례에 대해 똑같이 구는 모습으로 상대하여 좋을 것이 없었다. “드미레아 양. 공적인 자리에서 어찌 그리 예의 없는 모습을,” “나는 지그프리드 소공작이다. 그 무례한 호칭은 어디에서 배웠는지 알 수가 없군.” 수도에 오지 못하는 슬레이만이 자신의 전권을 잠시 양도하고 내려갔다. 게다가 드미레아는 명백한 지그프리드의 소가주였다. 이 순간, 이 세뉴관 안에서만은 공작 슬레이만의 위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니 명백히 이곳에서만은 드미레아가 에반보다 높았다. “무례한 호칭이라니? 조금 더 사이 좋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 존중하는 마음을 더해 부른 것이 마뜩치 않았다면 좋게 이야기를 해도 되는 것 아니겠나? 아무리 어리다지만.” “생각 없이 장식으로 달아 둔 그대의 머릿속에서는 존중인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말한 드미레아가 가리지 않은 살기를 에반에게 내보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또 한 번 그 따위로 날 부르면 나와 내 가문과 지그프리드 공작님, 그리고 내 정혼자인 칼리안 왕자님에 대한 불명예로 간주하고 대응하겠다. 에반, 브리센, 후작.” 거칠 것 없다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 할 말 잃은 에반의 입이 서서히 다물어졌다. * * * - 익숙해졌다 해도 잊히지 않는 것이 있는 법이니라. 이제는 본래 자리로 돌아와 다시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그 한심한 작자가 너를 더 궁금해하기 전에. 지키라는 그 문장에 ‘나로부터, 네 형제를.’ 이라는 말이 숨겨져 있음은 굳이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내용을 되새길 필요도 없다 여겼는지 앨런은 그 자리에서 편지를 없애버렸다. 종이는 태워지거나 구겨지거나 혹은 찢긴 것이 아니라, 플란츠의 눈 앞에서 말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떻게 한 것인지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말이다.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좀.” 정신 나간 것 같은데, 라는 말을 덧붙이려던 플란츠가 중간에 입을 닫았다. 아무리 그래도 동생의 옛 형님의 친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 편지를 정말 체이스가 보냈으리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체이스는 저딴 식으로 이야기 할 성품도 되지 못하거니와, 이곳 저곳에서 주워들은 그런 얘기들을 따져봤을 때 칼리안에게 저런 요구를 할 만한 이는 데블란 뿐이었다. 그러니, 세상 천지 그렇게 짜증나게 하는 놈 찾기 힘들만큼 실로 애증해 마지않는 그 동생놈의 알맹이를 만들어낸 부친이 보낸 편지를 가로채 이 곳에 오다가 그 동생놈의 겉모습을 만들어준 부친과 마주쳐서 그 동생놈 이야기를 한 뒤에 그 동생놈을 지켜줄 진짜 부친의 앞에 앉아있는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앨런은 그저 이렇게만 대답을 했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눈웃음이나 늘 잔잔하게 띄워올리고 있던 미소는 온데 간데 없는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놈이 무슨 말을 하건 신경 안 쓰면 그만이라는 듯한 태평한 얼굴인 것처럼 보이다가도, 지금 당장 세크리티아를 찾아가 누구 하나 갈아버려도 시원치 않아 할 듯한 그런 얼굴로도 보였다.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플란츠는 담담한 표정을 한 채 앨런을 마주 보고만 있다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내 아우님의 옛 모습을 정말 기억해서 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분명 칼리안의 비밀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투였다. 다만 그렇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기억’을 찾았다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안그래도 여기저기 비밀 잘 흘리고 다니는 놈들이지 않나. 그러니 어디서 저도 모르게 새어 나간 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을 이리저리 맞춰 더 믿기지 않는 하나의 가설을 세워낸 뒤 칼리안을 슬쩍 떠보려 보낸 편지라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닌 것이다. 아무튼 데블란은, 칼리안의 비밀을 르메인에게 알리기 전에 세크리티아에 돌아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타국의 왕자를 정말 제 아들로 대하는 듯한 저 뻔뻔한 말투에 치가 떨리는 것을 참아낸 앨런이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조만간 제가 다녀오지요.” 죽여버리겠노라고. 이제는 그 어떤 짐승에 빗대기도 어려운 그 악마같은 놈을 내 손으로 반드시 죽여 없애버리겠노라고. 죽을 때까지 제대로 죽지 못하게, 그러나 뼛가루 하나 남지 않도록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버리겠노라고. 그런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그건 제 일인 것 같은데.” 이 곳에서 들리지 않았어야 할 목소리가 앨런의 말에 대해 짧은 대답을 했다. 굳이 앨런에게까지 기척을 숨긴 채 이 곳까지 찾아와 둘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당연히 칼리안이었다. 소리 없이 찾아와 앨런의 집무실에 들어선 칼리안이 플란츠와 앨런을 한 번씩 쳐다봤다. “아무래도 제 전서구가 길을 잘못 든 듯 하여.” 칼리안에게 전해야 할 편지를 플란츠가 그 자리에서 뜯어 읽어본 뒤 아르피아 궁으로 향했다고, 멀찍이서 플란츠를 관찰하다 아무래도 걱정이 된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아르센에게 이런 내용을 전했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칼리안의 앞길 잘 치워주기로 한 아르센은 세크리티아의 새가 전해온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런 내용을 들고 찾아온 아르센으로부터 지금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전해들은 뒤 플란츠의 뒤를 좇아 이 곳까지 찾아온 칼리안이 느리게 말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왔는데······.” 단단히 화가 난 목소리. 멋대로 자신의 일에 끼어든 것에 대해 그 어느때보다도 화가 나 있는 목소리. “함께 계시네요. 제 얘기 하시면서.” 그 목소리를 들은 플란츠는, 칼리안이 방금 자신을 두고 ‘제 전서구’라 부른 것에 화를 낼 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저 빼고.” 북쪽 대사막의 두꺼운 얼음 밑을 소리 없이 흐르는 달빛 닮은 물, 그 물을 떠올린 것 같은 목소리. 제 눈에 담겨있는 불꽃마저 꺼뜨릴 것 같은 그런 차디찬 목소리. 그것이 플란츠에게는 고래 울음으로 들려서. 두꺼운 얼음의 밑에 갇혀 어디로도 갈 곳이 없어져버린 고래의 울음으로 들려서 화를 못 냈다. < 제36장. 참으세요, 스승님(2) > 피어나기 시작한 생명이 담긴 연두색 눈. 이미 떠나간 생명을 이어가는 붉은색 눈. 모든 것을 다 태우고 남은 잿더미처럼 빛을 잃어가는 붉은색 눈. 그새 또 시커멓게 죽어버린 듯한 그 붉은 눈에서 비린내가 난다. 채 갈무리 되지도 않은 화를 담아 플란츠를 노려보던 그날에 느꼈던 것처럼, 돌아가지 못할 누군가의 모습을 미처 다 감추지 못하던 그날에 느꼈던 것처럼, 그 붉은 눈에서 바다 비린내 말고 피 비린내가 나는 기분이 든다. 다시 떠오른 과거의 망령이 만들어낸 찬 감옥에 홀로 갇힌 채로, 그 누구도 듣지 못할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는 동생을 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칼리안.” 칼리안의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똑같이 생명을 품었으나 완벽히 다른 빛을 내는 눈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그것이 누구든. 아무도 간섭하지 못하게. 아무도 끼어들지 못하게. 그래서 아무도 피해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혼자 또 다 끌어안으려는 것임을 안다. 놈은 항상 그랬으니 저 새빨간 눈 속에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지 다 들린다. 대답 없이 자신을 향한 칼리안의 눈을 보던 플란츠는 지금 상황에 대해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짧은 말을 덧붙였다. “앉아. 짖지 말고.” 제 놈이 시키는대로 장단 좀 맞춰주고 제 고양이랑도 좀 놀아주고 했더니 눈에 뵈는 게 없어졌나보다 싶어서 하는 소리였다. 제멋대로 말을 전해듣고 제멋대로 찾아와선 제멋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제멋대로 화를 내는데, 이 이상 무슨 다른 말을 하겠느냔 말이다. 하다못해 루시에게도 고분고분 져주지는 않는 플란츠가 아니던가. 막돼먹은 동생놈이 그런 플란츠를 한 마리의 얌전한 비둘기인 것처럼 대하니 멍멍이 정도로 봐줄 수 밖에. 그런 플란츠를 보던 앨런이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뒤 칼리안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앨런은 르메인과 달랐으니까. 내새끼한테 새 취급받은 내새끼 형이 내새끼를 개 취급하는 이런 상황에 끼어들어서 너네 지금 뭐하냐 물을 만큼 눈치 없는 그런 인사는 아니었다. - 탁 그렇게 작은 소리를 내며 닫힌 문에는 둘 모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제 자리에 가만히 선 칼리안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어디까지 선을 넘을 셈인지 가늠도 안되는 어린 형을 앞에 둔 채로 조용히 눈을 내리 떴다. -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내 아우님의 옛 모습을 정말 기억해서 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데블란은 실리케가 아니다. 지금 데블란은 거리낄 것이 없다. 서서히 죽어갈 독을 건네며 웃던 실리케와 데블란은 다르다. 그는 진짜 뱀이다. 더 다가가면 독기 가득한 그 이빨에 죽고 만다. 순식간에, 한 순간에 죽고 만다. 스스로도 알지 못할 독니에 물려 어느새 죽고 만다. “멋대로 굴지 마십시오. 제 일입니다.” 그러니 거기까지. 앨런도, 아르센도, 아리안느도, 체이스도, 그리고 플란츠도. 거기까지만 해야 했다. 칼리안의 속내를 또 한 번 고스란히 들어버린 플란츠가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아우님께서 만들어 둔 새장 속에서 얌전히 날개 접고 숨만 쉬는 새 노릇이나 하는 취미는 없는데.” 그런 놈 필요하면 체르밀 5층을 가보시든가 아니면 세크리티아 왕세자를 다시 불러오시든가 마음대로 하라고. 나는, 아니니까. 어처구니 없다는 눈으로 플란츠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대꾸했다. “제 목줄 쥐여드린 적 없습니다, 저는.” 그러는 형님 너는 방금 전까지 멀쩡한 동생 개 취급하셨던 생각이 안나시냐고. 아무리 그래도 개보단 새가 나은 것 같지 않느냐고. 그런 소리였다. 소파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꼰 플란츠가 칼리안을 비딱하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 아우님께서 내 말이 사람 말로 안들려서 안 들으시는지, 안 믿겨서 안 들으시는지 몰라도.” 제 손으로 쌓아올린 하등 쓸모 없는 차디찬 그 벽이 하도 두꺼워서 말이 안들리는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은 무조건 나약하리라는 자만심 때문에 말을 안듣는지 몰라도. “오늘 내 아우님이 여러 번 짖으시는데.” 그리고 플란츠는 칼리안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말 잘 듣는 동생 노릇 때려친 칼리안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뒤에 말 잘 듣는 형 노릇 때려친지 오래였지 않나. 뭣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너 진짜 내 말 더럽게 안 듣는다고. 그런 생각을 한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지금 이 상황이 짜증나고 맘에 안들기로는 플란츠 역시 칼리안 못지 않았으니까. “앉아. 내려다보지 말고. 짜증나니까.” 자신을 어린 놈, 약한 놈 취급하면서 꼿꼿이 서 있는 칼리안을 보며 플란츠가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했다. 내리뜨고 있던 눈을 꾹 감은 칼리안이 애써 화를 삭였다. 살려놓고 보살피고 가르치며 이제껏 잘 키워낸 완두콩이 또 말을 안 들어 처먹고 선을 넘는 것을 지극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손만 대도 툭 끊어질 저 버릇없는 놈의 풀대가리를 일단 없애버리고 일을 시작해야하나 하는 생각을 잠시 집어넣은 칼리안이 앨런이 앉았던 자리로 와 앉았다. 은은한 딸기 향이 난다. 커피와 민트밖에 없던 앨런의 집무실에, 언제든지 우려내어 내어 놓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두었을 말린 딸기를 넣은 차의 향이었다. 앨런의 몫으로 놓여 있던 투명한 붉은 빛의 차를 잠시 쳐다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듣겠습니다.” 앉으라고 했으니 앉았다. 마주 앉아 한가롭게 티 타임이나 즐기자고 한 소리는 아닐 테고, 짖지 말라 했으니 듣기나 하겠다고. “왜 그것을 열어보셨는지. 왜 이곳으로 오셨는지.” 그러니 무슨 말이든 할 말을 해보라는 소리였다. 얌전히 편지나 물어나르는 전서구 노릇이나 했으면 되었을 것을, 왜 굳이 이런 사달을 만드는지. 그 이유는 일단 듣겠노라고. 기어코 칼리안을 꺾어놓은 플란츠가 말을 시작했다. 세크리티아의 세작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일, 그 편지에 적힌 글자를 의심하게 된 일, 그리하여 편지를 뜯어보게 된 이유, 그것을 칼리안에게 알려봐야 또 혼자 처리하겠다 하다 다 죽은 낯짝이나 하게 될 것이 뻔하니 그냥 앨런에게 알린 일, 그것을 확인한 앨런이 당장 세크리티아에 가겠다 한 일까지 알렸다. 데블란이 보낸 것으로 여겨지는 그 편지에 무슨 말이 적혀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고 칼리안은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플란츠가 그것을 일부러 빼고 이야기했다는 생각을 한 칼리안이 말했다. “······ 편지 내용도.” 저 자식이 왜 자꾸 은근슬쩍 말을 내리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그것까지 따지고 들면 밖에 있을 앨런이 들어와 뜯어말릴 상황이 올 때까지 싸울 것 같아서, 마음 넓은 플란츠는 짧은 한숨만 쉬며 화를 삭였다. “그것까지 알아서 뭐하게.” “저에게 보낸 편지 아닙니까. 그것은 제 일이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야 합니까.” 카이리스 왕실과 얽혀서 좋은 꼴 나기 힘드니 조용히 처리할 방법이나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빠짐없이 말해달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결국 플란츠는 그 짧은 편지 내용을 빠짐없이 일러줬다. 앨런이 그것을 없애버렸으나 플란츠는 편지에 적힌 글자 하나 잊지 않고 전부 전했다. 그 의뭉스러운 내용.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인지조차 제대로 분간하기 힘든 그런 내용을 들은 칼리안이 주먹을 꼭 쥐었다. 잊고 살던 유령. 그 망령이 제게 다시 손을 뻗은 것을 알기가 무섭게 가늘게 떨려오는 손을 플란츠로부터 감추려고 주먹을 쥐었다. “그는 카이리스의 3왕자가 검술을 수련한 적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한 순간에 각성하듯 검의 길에 오른 것도 알 테고, 지그프리드 공이 저에게 세크리티아 기사들의 버릇이 있다며 알려준 것을 듣고 고치기 전의 제 검술을 보고한 새가 있다면 어딘가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는 생각도 했을 겁니다. 체이스 왕세자와의 긴밀한 관계며 서로 돕기 위해 안달내던 것도 전부 보고 받아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체이스 왕세자가 누구를 위해 새들을 부리고 있는지도 알았을 수 있습니다.” 분노와 증오, 두려움과 후회, 죄책감, 통증, 그 모든 것을 감춘 채 작은 목소리를 낸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하지만 ‘다시 지키라’는 말을 아무 의미 없이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다시 지키라는 말인지 써있지 않았으나 플란츠는 숨겨진 말을 그리 느끼지 않았던가. 데블란으로부터 체이스를 다시 지키라는 뜻이리라고. 칼리안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의구심이 들었다. 아무리 데블란이 새들을 통해 정보를 전해듣고 이상한 점을 알아냈다 한들, 칼리안의 정체를 의심한다 한들. 데블란은 칼리안의 과거까지 유추해내지는 못한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처럼 직접 기억을 찾았거나 저를 그냥 단순히 세크리티아의 어느 기사였던 이로 생각을 하거나.” 지키라는 것이 체이스였다면 기억을 찾아서 한 말일 테고, 지키라는 것이 세크리티아 왕가 혹은 세크리티아 그 자체였다면 기억을 찾지 못한 채 칼리안을 무작정 들춰보려 한 말일 것이라는 소리였다. “사실을 알든 모르든, 어쩔건데.” 베른에게 누군가를 잡기 위한 이중 삼중의 덫 놓는 법을 가르친 것은 데블란이다. 그런 데블란은 지금 칼리안을 위한 덫을 놓은 것이나 다름 없다. 위험함을 알면서도 목을 들이밀 수 밖에 없을 그런 덫을 놓은 것이나 다름 없다. 데블란의 눈에 한심하게만 보일, 귀족들의 기에 눌려 제 소리 한 번 못 내고 살았던 르메인에게 셋째 아들이 변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리겠다고 협박하면서 말이다. 칼리안에 대한 제대로 된 사실을 알고 있든 아니든, 데블란은 지금 르메인이 칼리안을 의심하는 순간 칼리안이 가진 모든 것이 사라질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을 잃어 보았을 테니, 칼리안으로서 가지고 있던 것만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신이 만든 덫 안으로 서슴없이 달려올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직접 찾아가기라도 할 셈인가.” 그러니 플란츠는 어떻게 할 셈이냐고 묻고 있었다. 앨런이 그렇게 하겠다 한 것처럼 직접 가서 데블란 숨통을 끊어놓고 오기라도 할 셈이냐고. 너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너도,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그래서 이러시는 겁니까.” 데블란의 유령에 쫓기는 칼리안이 실리케로부터 등을 돌렸던 플란츠를 보며 물었다. 체이스가 무엇을 했는지 알지 않으려 애를 쓰고, 플란츠에게는 실리케의 손을 놓을 수 있겠느냐 물어가며 강요를 했던 칼리안이 아닌가. 이런 상황이 우스워서, 칼리안이 결국 웃음을 흘렸다. “칼을 들지 못할까봐, 아니면 정말 그리 할까봐, 이렇게 제멋대로 구시는 겁니까.” 데블란을 없애려 움직이거나 혹은 섣부르게 그 덫에 걸려들까 하여 참견을 하느냐고.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냥 두십시오. 형님 다칩니다.” 웃음의 끝에 이런 말을 하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찻잔 속을 들여다 봤다. 딸기가 담긴 그 안을 말 없이 한참동안 보던 플란츠가 다시 앞을 봤다. 딸기. 좋아하는지를 물어오는 것이 귀찮아서 좋다고만 대답을 했었는지, 정말로 좋아해서 좋다고 대답을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잊은 것인지 잊힌 것인지 몰라도 기억이 안 난다. 그 아이는 그 답을 알고 있었을까. 평생을 가도 그 질문 하나를 못 할 것을 아는 플란츠가 죽을 때까지 답을 알려주지 않을 사람을 쳐다봤다. 찻잔 속에 든 찻물을 그대로 옮겨둔 듯한 눈을 보던 플란츠가 말을 이었다. “제멋대로 구는 것이 아니라 형 노릇을 하는 중인데.” 그러니까 잘난 척 그만하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짓 그만하라고. “칼리안.” 네 놈이 몇 살인지, 이름이 뭔지 다 필요 없고, 나는. 이번에는 후회할 일 안 만들 거라고. “그러니까 그만 짖고 도와주는대로 그냥 있으라고. 짜증나니까.” 신경써서 잘 키워낸 브로콜리 줄기 같은 놈이 제대로 된 형님 노릇 해주겠다는 말을 들은 칼리안이 얼마나 복잡한 심정이 됐는지는 모르는 채로, 플란츠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 말을 들은 칼리안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형님이 얼마나 성가시게 굴 수 있는지를 여실히 깨닫고 있는 제 모습에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할 기분이 됐다. “네.” 그래서 그냥 이렇게만 대답을 했다. < 제36장. 참으세요, 스승님(3) > 이젠 그리 놀랍지도 않다는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또 브리센인가.” 그 작은 중얼거림에, 곁에 있던 시종장 라울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르메인의 기분에 십분 공감한다는 의미를 전했다. 칼리안이 짖고 플란츠가 파닥이다 대충 화해 비슷한 것을 하기로 합의한 그 즈음의 일이었다. 아르피아 궁을 나설 때 만났던 플란츠와의 기분 좋은 대화 덕에 퍽 가벼워진 마음으로 세뉴 관에 들어선 르메인이 한순간에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다는 눈으로 귀족들을 내려다봤다. 아르피아 궁에서 이 곳에 오는 시간이 잠시 늦어진 사이 세뉴 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방금 전달을 받았다. 굳이 따지자면 에반이 구백 구십 아홉 번을 잘못했고 드미레아가 한 번 쯤 잘못 비슷한 것을 했다. 다만 구백 구십 아홉 번을 잘못한 것이 에반이라 하더라도 드미레아가 저지른 한 번이 조금 셌다. 이 일을 빌미로 에반이 또 무엇을 꾀할까 우려되는 것이다. 회의실에 모인 귀족들을 하나하나 보던 르메인의 눈이 드미레아의 앞에서 멈추었다. 그 시선의 뒤를 잇듯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그프리드 소공작.” “네, 전하.” 드미레아는 슬레이만의 외형은 그대로 빼닮았지만 성격만은 겨자씨만큼도 닮지 않은 것을 증명하듯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 많은 귀족들의 사이에 서 있는 드미레아를 잠시 쳐다보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모범을 보여야 할 공작가의 후계자 신분임에도 다른 귀족을 향해 살기를 내비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드미레아는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에반은 제대로 된 꼬투리 하나를 잡은 것에 대한 자신의 속내가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좌중을 슬쩍 둘러보았다. 한 마디로 기분 좋은 티가 나지 않도록 조심했다는 소리다. 지금 르메인이 드미레아가 속한 공작가를 제외한 모두를, 그러니까 에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들을 그냥 ‘귀족’으로 묶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 바로 그 즐거운 마음 때문이었을지 혹은 언제나 즐겁기만 한 가벼운 머리 때문이었을지는 오직 세렌티만이 알 일이다. 이야기를 듣는 드미레아보다 오히려 에반 쪽을 더 오래 쳐다보고 있던 르메인이 드미레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차후 이와 같은 이야기가 또 들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르메인은 그렇게 딱 한 마디를 한 뒤 입을 다물었다. 나이 차이는 둘째 치고 공작의 자제가 후작을 협박했음에도 그냥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라 하고 일단락을 지었다. 이렇게 그저 한 마디 말로 끝냈으니, 이런 르메인의 처사가 결코 마음에 들지 않을 에반이 눈꼬리가 찌푸려지는 것을 숨기려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전하.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드미레아는 르메인의 반응이 그러하리라는 예상을 한 것처럼 한결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자신의 입으로 ‘주의하겠다’는 말도 꺼내지 않고 그저 ‘그렇게 하겠다’라고만 한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근본 없고 편파적인 처사와 뻔뻔한 대답이 또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전하.” 때문에 에반은 불편한 심기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주의하며 르메인을 불렀다. 사실 재작년 이맘때만 같았어도 이렇게 조신한 목소리로 르메인을 부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 때의 르메인은 이런 상황을 만들지조차 못하지 않았던가. 어쨌거나 그 때를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시간이 되돌아갈 일도 없을 것이니, 이제 와서는 하등 도움 안 될 과거의 망상에서 빠르게 벗어난 에반이 자신을 쳐다보는 르메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대로 모든 귀족에게 본을 보여야 할 공작가의 후계자가 왕궁 안에서 그리 무도한 일을 저지른 것은 분명한 잘못입니다. 그에 합당한 처벌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르메인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특유의 짙은 푸른 빛 눈으로 에반을 한참 들여다보던 르메인이 에반의 말을 입 속으로 되뇌듯 말했다. “합당한 처벌이라.” 그 목소리를 들은 드미레아는 조용히 시선만 내렸다. 애초에 에반이라는 작자가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를 따져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일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드미레아는 그런 에반을 향해 짜증난 얼굴을 하거나, 한심해하거나, 혹은 또 한 번 화가 난 얼굴로 에반을 노려보는 등의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누가 먼저 시작한 싸움인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 항변도 하지 않은 채 입만 다물고 있었다. 그것을 말해봐야 좋을 것이 없었으니까. 드미레아와 에반의 대처가 극명히 다른 것을 잠시 지켜보던 르메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후작이 말한대로 소공작은 공작가의 후계자이니, 소공작의 잘못은 곧 지그프리드의 잘못이라 보아야겠지.” 귀족들이 숨 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르메인의 입만 쳐다보는 그런 상황에서 르메인은 다음 말을 꺼냈다. “그러므로 소공작에게 죄가 있다면 가주인 공작에게 그 죄를 묻는 것이 마땅할 터. 후계자를 수도에 홀로 두고 방임한 죄를 물어 현 지그프리드 공작의 작위를 박탈하는 것 정도라면 그 잘못에 합당한 벌이 되겠나.” 공작의 위를 박탈한다니? 프레이야의 추숭에 대한 소식 만큼이나 청천벽력같은 르메인의 말에, 모든 귀족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에반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귀족의 작위는 오로지 사망한 경우에만 승계된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귀족 개인의 죄를 물은 왕명에 의해 작위만 박탈되는 경우다. 이 때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가 있다면 작위는 해당 후계자에게 강제로 승계된다. 물론 법전에도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닌 공작이 아닌가. 왕자들과 동등한 신분을 가진 이였다. 그런 공작의 작위를 박탈한 전례는 없었다. 공작이 아닌 다른 귀족들이라 해도, 고작 후계자가 다른 귀족과 말싸움하다 살기를 흘렸다는 이유 만으로 그런 벌을 받은 전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전하께서 정신이 나가셨나 하는 눈으로 르메인을 쳐다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잠시 귀족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줄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르메인이 다시 말했다. “사소한 말싸움 하나 알아서 해결하지 못하고 나를 통해 굳이 죄를 물어달라 하는 것이 썩 달가운 행동은 아니지만, 후작의 억울한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원하는대로 지그프리드 공작에 대한 처벌을 내리겠다.” 에반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만약 르메인이 말한 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진심에서 하는 소리라면, 그리고 만에 하나 그것을 정말 하게 된다면 곧바로 드미레아에 대한 승계가 이어질 터였다. 그러니 이것은 곧, 이번 일을 핑계로 칼리안에게 제대로 된 힘을 건네주기 위한 르메인의 수작질이다. ‘르메인······!’ 르메인 자신에게건 칼리안에게건 그리 큰 도움 안 되는 슬레이만에게 작위 내놓으라 하면 슬레이만은 이때다 하고 작위 반납한 뒤에 세리에와 함께 카이리스 전국을 돌며 멋들어진 여생을 보낼 사람이다. 그렇게 여행을 즐기다 지칠 즈음에는 남쪽 저 어딘가에서 칼이나 휘두르며 태평한 노년 보내게 하고, 정치질에 제대로 맛들린 드미레아를 진짜 공작으로 만들어서 칼리안에게 쥐여주려는 수작질인 것이다. 양 손 텅텅 빈 칼리안의 한 손에는 정통성을 주고 다른 한 손에는 그 누구도 뚫지 못할 방패를 주어, 르메인과는 완전히 다른 제대로 된 왕좌에 앉히려는 속내가 훤히 보인다. 이번 일을 가지고 프레이야의 추숭에 대해 제대로 반대 한 번 해보려다 오히려 잡히게 생긴 에반이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 스스로 원만히 해결하겠습니다.” 앞으로 드미레아가 에반의 앞에서 무슨 짓을 하건 에반은 그것을 두고 르메인에게 처벌을 요청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드미레아가 무슨 잘못을 하든 르메인은 무조건 슬레이만의 작위를 박탈하겠다 할 테니까. 오히려 에반이 나서서 드미레아에 대한 처벌을 반대하고 다녀야 할 판이다. 르메인의 짙푸른 눈이 에반을 다시 한 번 응시했다. 더는 되돌릴 수 없을 과거 어느날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예리한 빛을 내는 그 푸른 눈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리라고, 순간 에반은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래. 스스로 하겠다 하니 다행한 일이군.” 르메인은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이렇게 얘기한 뒤 에반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종장 라울에게 고개를 한 번 짧게 끄덕여 보였다. 비로소 회의가 시작되었다. * * * 똑똑한 놈은 귀찮다. 예민한 놈은 성가시다. 똑똑한데 예민하기까지 한 놈을 상대하는 건 진짜 싫다. 내 형님이 알고보니 되게 똑똑한데 예민하기까지 한 바로 그런 놈이었다는 걸 알고 안그래도 엄청 싫었는데 그 놈이 갑자기 내 형님 노릇 하겠다고 덤벼드는 걸 보고 있는 건 정말 착잡하다. 착잡하고 답답하고 어처구니 없고, 게다가. “안 됩니다.” 인내심까지 필요로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왜.”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하겠다고요.” 벌써 세 번을 말했다. 생일 연회장에서는 에반 때문에 참고 빌헬름 관에서는 아르센 때문에 참았다. 오늘은 저 풀대가리 때문에 참았다. 특히 오늘은 아주아주 많이많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대견하다 이제 나도 다 컸구나 오늘부터 진짜 어른됐으니까 이제 술마셔도 괜찮겠다 싶을 만큼 정말정말 잘 참았다. 뜬금없이 세크리티아 측과 대화를 하겠으니 반지를 내놔라 드는 저 연두색 전서구, 아니. 전서구 취급은 싫댔으니까 전서구는 빼자. 아무튼 파릇파릇한 감자 싹같은 저 놈한테, 그냥 직접 얘기하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말을 했으니 저 좋은 머리로 이해를 못했을 리 없다. 왜 싫다 하는지 못 알아들었을 리도 없다. 거짓말 못하는 것도 빌어먹게 잘 알고 있으니 이번 일 숨기지 않고 얘기하겠다 하는 말을 못 믿어서 저러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전하실 말씀 저한테 얘기해주십시오.” 형 노릇을 하겠다 하는 건 그냥 냅두기로 했다. 아무튼 칼리안을 칼리안이라 부르며 옛칼리안에 대한 죄책감도 좀 털어내주고 칼리안이 이제 어디에 있어야 할지, 누구로 살아야 하는지 제대로 짚어가며 인정해준 것이 하필 저 놈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얄궂다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꽤 고맙다고 생각했다. 갈 곳 잃고 사방이 막힌 얼음 속에 갇혀있던 것을 꺼내준 것 같아서, 그래. 그건 정말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체이스에게 놈이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반지를 내어준단 말인가? “알았으니까.” 끊임없이 치미는 화와 인내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칼리안을 느긋하게 보던 플란츠가 딸기차를 한 입 마시고 내려놓으며 여유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놓으라고, 그거.” 아. 세렌티시여. 제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덜 익은 딸기 밑둥같은 저런 놈이랑 얽혀서 매일을 인내하며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아니면 스승님. 혹시 딸기차에 기억력 감퇴되는 약이라도 타셨습니까? 그런 약 있으면 세크리티아로 좀 보내주시지 왜 그 좋은 걸 감자 싹인지 딸기 밑둥인지 구분도 안되는 저딴 놈한테 먹이십니까. 이렇게, 향할 곳 없는 답답함과 무럭무럭 치미는 화를 또 한 번 꾹꾹 눌러담은 칼리안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플란츠를 봤다. 그리고는 이왕 세렌티와 앨런을 한 번씩 찾은 김에 인간 생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수양하는 이의 마음가짐을 떠올려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한테 얘기하시면 제가 대신 전하겠습니다.” “그냥 내가 한다고.” 칼리안이 생글 웃었다. “아. 그냥 없애버릴걸 그랬나보다.” 조금 새삼스럽지만, 정말로 진작에 그냥 죽여버릴 걸 그랬다. 아르센이랑 갓 자란 죽순 알맹이같은 저 놈이랑 둘 다 그냥 죽여버리고 스승님따라 남쪽 가서 레이븐이랑 루시 키우면서 살 걸 그랬다. 내일 당장 세상이 망하든 말든 봄 햇살같고 여름 소나기같고 가을 석양같고 겨울 함박눈같아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닳아 없어지면 어쩌나 하루하루 그저 아깝기만 한 사랑스러운 우리 히나한테 잘 익은 딸기랑 딸기 아이스크림 사 주고 키리에랑 같이 코코넛 속이나 빨아먹으면서 살 걸 그랬다. 남쪽 가서 살면서 절벽이랑 대화를 하든가 나무랑 대화를 하든가 들이치는 파도랑 대화를 하든가 아무튼 그렇게 살 걸 그랬다. 그렇게 사는게 덜 답답했을 것 같다. “뭐를.” 뭘 없애겠단 소리냐, 너 지금 또 반말했는데 위아래도 모르고 날뛰는 그건 데블란한테 배웠냐, 그새끼 어디 사냐, 애한테 뭘 가르쳤는지 내가 좀 만나야겠다, 뭐 대충 이런 눈이 된 플란츠를 본 칼리안이 한 번 더 예쁘게 웃으며 덧붙였다. “있습니다. 죽순 알맹이같은 거.” 죽순 알맹이가 뭔지를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던 플란츠가 눈 빨간 동생놈을 향해 한 쪽 입술을 끌어올렸다. “레넌 브리센이 왕궁에 왔던데.” 아이씨. 어떤 새끼냐. 맥주 만든 놈보다 나쁜 그새끼 누구냐. “······ 누가 그럽니까, 놈이 왕궁에 왔다고.” “몰라.” 단 두 글자로 니들렌 목숨을 쭉 늘려준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이 깊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제 심장 걸어놓고 협박을 한다. 레넌이 왜 왔을지, 에반이 레넌을 무슨 이유로 꺼냈을지, 아르센은 정말 이동 마법진 때문에 그레이가 있는 곳 인근에 다녀온 것인지 등등을 생각하기 전에 내놓으라고. 에반을 빨리 죽여 없애버려야 저 짓을 못하지, 하고 다시 한 번 굳은 다짐을 한 칼리안이 자괴감과 회한이 가득한 얼굴로 반지를 빼서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는 속이 타는 것 같아서 앨런 몫으로 놓여 있던 딸기차를 한 입에 쭉 들이켰다. “이상한 말씀 하지 마세요.” “나는 짖는 취미 없는데. 누구랑 달라서.” 데블란을 먼저 없앨지, 에반을 먼저 없앨지, 앞에 앉은 완두콩을 먼저 없앨지에 대해 또 한 번 깊디 깊은 고민을 시작하는 칼리안을 보며 피식 웃은 플란츠가 반지를 톡톡 건드려 보였다. “마나.” 루시 털 떼려고 마법 좀 배워볼까 싶긴 했지만 아무튼 지금은 마나를 조금도 다루지 못하니 빨리 연결시키라는 소리였다. 결국 이번에도 저 완두콩의 고집에 꺾인 칼리안은 버릇이 될 것 같은 한숨을 푹 내쉬며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 후 반지에 집중하며 아마도 대화를 시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던 칼리안이, 잠시 할 일이 없어진 김에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는 마치 칼리안의 방처럼 익숙해진 아늑한 집무실.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많이 풀어지는 기분이 든다. 그것이 모두 언제나 칼리안을 우선하는 앨런의 덕분임을 알기 때문에······. 칼리안을 우선하는······. “스승님?” 그제야 어딘가 허전한 기분이 든 칼리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 집무실 밖에 있던 앨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평소 같았으면 어디 한가하게 산책이나 가셨겠지 하고 넘겼겠으나 오늘은 조금 다르지 않나. 자신이 집무실에 들이닥치기 직전에 앨런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이제야 떠올려본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지금쯤 바닷가 마을 근처에 있는 어느 왕궁에 가 계시고 그런 것은 아니겠지. “······ 에이, 설마.” 이렇게 한 번을 더 중얼거리며 앨런이 어떤 사람인지를 잠깐 떠올려보던 칼리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질풍노도의 완두콩때문에 아무래도 잠깐 조금 먼 곳에 마실가신 것 같은 스승님 찾아오려고. < 제36장. 참으세요, 스승님(4) > 때때로 순서가 바뀌는 것들이 있다. “누구나 그래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그런 얼굴로 산뜻하게 이야기 한 얀이 앞에 놓인 체리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체리는, 딸기만큼 단 향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맛은 더 달았다. 딸기보다 훨씬 더 짙은 붉은색을 지닌 그 동그란 과일의 맛을 가득 담은 케이크가 입 속에서 부드럽게 녹았다. “머리로 정해 둔 순서대로 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체리가 맛있어서 체리를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니라 말간 봄의 어느 날 새하얀 설탕구름처럼 피어난 체리꽃이 예뻐서 체리를 좋아하게 되는 것처럼, 비 개인 후에 떠오르는 동화같은 색의 무지개가 좋아서 소나기를 좋아하게 되는 것처럼. “그러니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칼리안이 그리 좋아하는 민트 차로 입을 개운하게 만든 얀이 앞에 앉은 레릭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주 잘 익은 블루베리, 혹은 동글동글한 포도 색을 가진 레릭의 눈이 축 쳐졌다. 어떻게 눈이 저렇게 쳐질 수가 있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눈꼬리를 축 내린 레릭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을 뵐 때마다 죄송스러운 마음이 너무 커서······.” “레릭. 처음부터 다른 마음 없이 왕궁에 들어오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저도 그랬고요.” 이렇게 말한 얀은 레릭이 내민 돈 주머니를 잠깐 내려다 본 뒤 말했다. “순수하게 왕족의 뒤치다꺼리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왕궁에 오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요.” 누구보다 열심히, 누구보다 완벽하게 칼리안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 얀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꽤나 노골적이고도 험한 말이었다. 때문에 레릭은 주변에 다른 듣는 사람은 없는지 재빨리 고개를 돌려가며 확인을 했다. 다행히 시종들의 휴식 공간에 둘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레릭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보다 나이는 많지만 경험은 적은 레릭의 근심 많은 표정을 한참 보던 얀이 다시 말했다. “다들 다른 이유 하나씩 가지고 들어오는데, 그 이유가 돈이라는 게 뭐 어때서 그래요.” 오로지 실리케의 품 속에서 나고 자란 2왕자가 그 품에 스스로 뛰어들며 비로소 벗어났을 때. 그것이 상처가 되어 몇 날 며칠을 두고 제대로 깨어나지도 못했을 때. 르메인이 실리케의 눈과 귀였던 시종과 시녀들을 모두 왕궁 밖으로 내보냈을 그 때. 아무도. 브리센이나 다른 귀족들의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2왕자의 손발이 되겠노라 나서는 이가 정말 아무도 없었고, 2왕자의 시종으로 결정된 이들이 전부 일을 그만두겠노라 하며 왕궁을 벗어나 도망칠 때. 때문에 칼리안의 시종과 시녀들이 꽤 오랫동안 플란츠를 함께 돌보았던 그 때. - 한 명만 나서면 돼. 그 후에는 구하기 쉬워질 거야. 그러니까 한 명만 찾아봐줘. 칼리안의 다른 시종과 시녀들이 두 배로 불어난 일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란츠의 시종으로 올 사람이 계속 정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걱정해오는 얀의 말에 칼리안이 이런 대답을 했다. 그러더니, 정 어렵다면 사람의 마음을 돌리기 가장 쉬운 수단을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들은 얀이 주저하자 칼리안이 별 일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 순서는 중요한 게 아니야. 그 때는 칼리안의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 체력 좋아서 가장 많이 무리한 메를린이 코피를 쏟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그 말을 더 이해해볼 겨를도 없이 칼리안이 시키는대로 했을 뿐. 그렇게 해서 찾은 사람이 레릭이었다. 적당히 눈치있고, 착해 보이고, 입이 무거운 것 같고. 그리고 빚이 많았다. “저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을 때 나서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진심으로요.” 이렇게 말한 얀은, 칼리안의 금고에서 나와 남몰래 건네졌던 돈을 한 푼도 빼지 않고 담아 둔 주머니를 다시 레릭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플란츠의 상급 시종으로 나서준 것에 대한 대가, 그것을 그냥 받으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저는 더 나빴어요. 정말 나쁜 이유로 우리 왕자님 시종 하겠다고 나섰으니까요.” 바싹 말라가는 영혼을 가지고 있었던 빨간 눈의 어린아이를 만나고 난 뒤에 그 아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됐다.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해서. “어쩐지 우리 왕자님을 지켜보고 있으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게 제가 아니라는 걸 믿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 왕궁에 왔어요.” 당연히 반대할 줄 알았던 슬레이만이나 세리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제 풀에 지쳐 금방 돌아오리라 생각을 해서였을지, 아니면 그렇게라도 무언가에 신경을 쓰며 살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 생각을 해서였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순서가 바뀐거죠. 나 살겠다고 여기에 왔는데 이제는 완전히 바뀌었으니까요.” 얀이 조금 먼 옛날을 떠올리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체리꽃이 예쁜만큼 체리가 맛있다는 것을 배우고, 무지개가 좋은만큼 소나기가 시원하다는 것을 배우고. 누구보다 잔인한 이유로 칼리안을 지켜보기 시작했음에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언젠가부터는 그 첫 이유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온전히 칼리안만 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얘기 들으셔도 우리 왕자님은 그냥 그랬구나 하고 말 거예요. 순서 상관 없이, 지금이랑 앞으로가 더 중요한 걸 아시니까요. 제 생각엔 플란츠 왕자님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플란츠지만, 아마 평생 플란츠를 기껍게 마주할 날은 없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릭이 플란츠를 진심으로 따르게 된 것까지 싫어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반갑고 좋은 일이다. 플란츠의 그 어마어마한 눈치에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레릭이 자신을 찾아온 진짜 이유를 마음에 담아두거나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받아요. 필요한 돈인 것은 맞잖아요. 받아도 되는 대가니까 어느 쪽에게든 미안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우리 왕자님 어차피 돈 많아서, 돌려줘봐야 서로 득될 것도 없어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끝난 얀의 얘기에 결국 또 울먹울먹해진 레릭이 돈 주머니를 다시 품에 넣었다. 그러다 아무리 그래도 이것을 받는 것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도로 꺼내놓으려 했을 때였다. - 벌컥! 하고, 시종들만이 들어오는 휴게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을 본 레릭이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지도 못한 이가 서 있었던 까닭이다. 짙은 청록색의 재킷, 검은 셔츠와 바지, 아주 단순한 디자인의 다이아몬드 브로치. 그리고 무거울 것이 분명해보이는 반짝이는 검. ‘지그프리드 소공작!’ 칼리안의 정혼자이니, 칼리안을 찾아온 것일까? 칼리안이 없어서 물어물어 얀이 있는 곳에 온 것일까? 스치는 생각을 뒤로 한 레릭이 인사를 하려던 찰나. “오라버니.” 청천벽력같은 호칭이 드미레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고보니 드미레아와 완전히 똑같은 색의 곱슬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사람과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이 잠깐 난처한 얼굴을 하더니 드미레아를 봤다. “레아.” 방금 전까지 돈 주머니를 밀어주고 체리가 좋고 순서는 상관 없다는 그런 말을 했던 사람의, 아니 그런 말씀을 하셨던 분께서 대답했다. 아니, 대답하셨다. 그리고 물어보셨다. “무슨 일 있어?” “네. 마나실 백작이······.” 천장이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아서 이어지는 드미레아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흐어어어, 하고. 레릭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 * * 여느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미리부터 예정되어 있던 수련을 하고, 늘 찾던 곳으로 나가 활을 쏘았다. 그렇게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하루를 보내다 찌는 듯한 더위가 절정에 달했을 시간이 되었을 때. 절대 평범하지 않을 일이 일어났다. 미세한 정전기의 따끔한 느낌이 손목을 타고 전해지는 기분이 든 것이다.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마력만 먼저 전달되서 나타난 현상이었는데,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용자가 마나 감응을 눈치 챌 수 있도록 손을 써 둔 앨런의 두 번째 배려였다. “아······.” “왜 그러십니까, 저하.” 화살을 놓치며 놀란 듯, 혹은 반가운 듯 터져나온 한 마디 말에, 곁에 있던 테일란이 곧바로 다가왔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를 걱정한 탓이었다. “무슨 일 있어?” 물론 항시 테일란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 일러두었던 아리안느도 함께 말을 건넸다. 주변에 서 있던 시종들과 시녀들을 물린 체이스가 테일란을 향해 팔찌를 보였다. “이것 좀 봐줘.” 상대방 측에서 먼저 대화를 건 것은 처음이었으나 부탁을 해오는 체이스의 얼굴은 담담했다. 물론 겉모습만. 칼리안이 대화를 걸어오기를 체이스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가장 잘 아는 아리안느가 함께 반가워하며 다가왔다. 아무래도 주변에 보는 눈이 있으니 테일란보다는 자신이 체이스의 손목을 건드리는 것이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 칼리안 왕자? 그렇게 기대에 잔뜩 부푼 체이스가, 여전히 말을 건네오지 않는 칼리안을 불렀다. - 아닌데. 뚝. 단 세 글자의 첫 자를 듣자마자 부푼 기대를 확 접어낸 체이스가 두 번째 글자를 듣기가 무섭게 통신을 끊었다. 다른 뜻은 없었다. 실망해서 끊은 것은 아니다. 플란츠가 썩 달갑지 않은 것은 맞지만 그냥 본능적으로 끊긴 것이지 억하심정이 있던 것도 아니다. 아무튼 그렇다. “뭐야? 왜 시작하자마자 끊어?” “당신 마력이 부족했나봐. 나도 모르게 끊어지네.” 마력이 중단된 것을 느낀 아리안느의 질문에 체이스가 넉살 좋게 거짓말을 했다. 그것을 본 아리안느가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대꾸했다. “부족 같은 소리 하시네.” 아, 또 들켰다. 하고 체이스가 싱긋 웃었다. 세크리티아도 아닌 카이리스에 있는 칼리안에게 무슨 일이 있기도 힘들지만, 무슨 일이 있다면 플란츠가 아니라 앨런이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굳이 마법 못 쓰는 플란츠가 번거롭게 끼어들었을 리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통신을 끊은 터였다. 카이리스 어딘가에 있을 희멀건 왕자가 잔뜩 짜증내는 것이 눈에 훤하지만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데 어쩌겠나. 이런 생각을 한 체이스가 아리안느를 보며 한 번 더 팔을 내밀었다. “다시 해줘, 아리안느.” 귀찮다는 기색 가득하면서도 아무 말 없이 걸어온 아리안느가 한 번 더 팔찌에 마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테일란과 함께 조금 멀리 떨어져서는 과녁을 향해 활을 쏘기 시작했다. 그런 아리안느를 보며 입가에 호선을 그려낸 체이스가 그늘 아래로 걸어가며 말을 건넸다. - 미안합니다, 플란츠 왕자. 내가 조금 놀란 마음에. - ······ 여전하군. 칼리안이 아직까지도 먼저 말을 건 적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 기대감이 너무 컸다는 것을 알 리 없을 플란츠가 마뜩치 않은 감정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도 눈에 훤했다. 하지만 플란츠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든 체이스가 크게 신경을 쓸 일은 아니지 않겠나. - 여전합니다. 별 일 없이 지내고 있고. - 아닌 것 같은데. 이 말에, 아리안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체이스의 시선이 잠시 발치로 향했다. 체이스 측의 상황을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던 탓이다. 때문에 데블란이 칼리안의 치유사를 불러낼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그 사이에 플란츠에게 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일이 있는 것인지를 물으려 했을 때, 플란츠로부터의 말이 앞섰다. - 내 아우님의 옛 형님께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도 내 아우님 얼굴이 반쯤 죽었다 돌아왔어. 제멋대로인 호칭만은 여전했지만 체이스는 웃지 않았다. 웃을 수 없었다. 곧바로 대답을 해줄 수도 없었다. 질책하는 말임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수면제로 날 재워놓은 내 정혼자가 멋대로 이야기를 한 것이라는 변명의 말은 하지 않았다. 한동안 체이스의 답을 기다리던 플란츠가 귀찮다는 듯 다시 말했다. - 무슨 말을 했었는지 알아야겠는데. 굳이 그것을 체이스에게 직접 묻는다는 것은 칼리안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뜻일 터였다. 때문에 체이스는 우선 거절의 의사를 보이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플란츠의 말이 앞섰다. - 제대로 말해. 둘러대지 말고. 체이스가 무슨 생각을 할 지는 뻔하지 않나. 분명 한 번에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여긴 탓이었다. 칼리안이나 체이스나 생각하는 게 똑같으니 말이다. - 그것을 아는게 중요합니까. - 중요해. 체이스가 얼굴을 굳혔다. - 무슨 일입니까. 다짜고짜 칼리안의 반지를 빼앗아 너 내 동생한테 뭔 소리 했느냐 질책하기만 할 목적으로 말을 걸 플란츠가 아니라는 것은 체이스도 안다. 다른 무언가와 연관이 있다 여겼으니 저런 것을 묻는 것이리라. - 세크리티아 국왕께서 내 아우님의 옛 형님 흉내를 내면서 편지를 보낸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손을 뻗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데블란이 칼리안을 향해 덫을 놓았다는 소리임을 알아들은 체이스가 물었다. - 무슨 편지를 보냈습니까. - 말해. 먼저. 플란츠는 완강했다. 해결책은 서로 가린 것 없이 다 드러내고 난 뒤에 떠올릴 수 있는 것 아니던가. 그러니 혹여 숨길 생각 하지 못하도록 일단 먼저 얘기하라는 의미였다. - 당신, 내 동생한테 무슨 소리 했냐고. 무슨 말로 칼리안을 흔들었는지 그것부터 이야기하라는 그런 말에, 눈을 내리 뜬 채로 잠시 말을 잊고 있던 체이스가 소리 없이 웃었다. 다그치는 것은 플란츠고 그 말을 들은 것은 체이스였는데 웃음이 났다. 이유 없이 안심이 되어서. * * * - 다각, 다각. 앨런을 찾기 위해 아르피아 궁에서 나온 칼리안을 찾은 것은 놀랍게도 레이븐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앨런을 따라가기 위해서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레이븐이었다. 똑똑하기도 했고, 왕궁의 기사들을 따돌리고 달리는 것은 레이븐을 따를 말이 없었으니 말이다. 레이븐의 고삐를 잡은 채 아르피아 궁으로 찾아온 얀이 웃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마나실 경이 세뉴관을 찾아왔었다고 하던데요. 급한 일이라면서 레아를 잠시 만났대요.” 이제 막 중앙 귀족 회의를 시작하려던 순간에 쪽지 하나가 르메인에게 전달됐다. 칼리안과 관련된 급한 일이니 잠시만 드미레아를 밖으로 내보내달라는 앨런의 요청이었다. 한 번도 그런 요구를 한 적 없던 앨런이었으므로, 르메인은 곧바로 드미레아를 회의실 밖으로 보냈다. “왕자님께서 저희 집에 가셨을 때 대련하시던 모습을 기사들이 함께 보았는지 물었대요. 아버지와 대련한 것은 아무도 못봤지만 레아나 다른 기사들과 대련했던 것은 기사들도 보고 사용인들도 보고 했었잖아요.” “그랬지.” 앨런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늠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얀의 말이 이어졌다. “레아도 그 말을 했대요. 그랬더니 그 사람들 어딨는지 물어봤고, 전부 공작령에 있다 대답했더니, 저나 왕자님께는 이야기하지 말라 한 뒤에 레아 앞에서 사라졌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레아가 저에게 왔어요. 왕자님 어디계시냐고요.” 앨런이 칼리안에게 비밀로 하라 일러두었다는 것까지 칼리안에게 전한 얀이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이야기가 오가는 과정에서 얀의 정체를 알게 된 레릭이 반쯤 기절했다 깼다는 사소한 이야기는 더하지 않았다. 이건 비밀이니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 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빠르고 정확히 퍼질 수 있는지를 잘 배운 칼리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단 앞뒤 없이 세크리티아로 간 것은 아니구나 싶어서였다. 물론 그렇다 해서 앨런을 쫓아갈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드미레아가 직접 공작령으로 가지 않고 칼리안을 찾은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래, 알았어.” 지금 앨런은 꿍꿍이 많은 데블란 말고, 모든 인간은 다 선하기 짝이 없다 믿어 의심치 않는 순수한 근육덩어리 슬레이만을 잡아 족치러 간 거다. 데블란이 기억을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는 체이스가 확인을 할 수 있을 테고, 앨런은 칼리안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갔는지 아닌지를 확인해봐야 한다고 여겼을 테니까. 만약 데블란이 기억을 찾지 못한 채로 칼리안을 슬쩍 떠보고 있는 것이라면, 칼리안이 세크리티아와 연관이 있다는 정보가 새어나갔을 가장 유력한 곳은 지그프리드 공작령이라는 생각을 한 듯 했다. 칼리안이 아직 세크리티아의 검을 쓰던 버릇을 가지고 있을 때, 누군가의 눈 앞에서 제대로 된 검술을 보인 것은 그 곳이 유일했으니 말이다. 결국 비밀 못 지키는 제자 뒷감당을 하러 간 것이나 마찬가지기는 한데, 그런 앨런에게 미안해 해야 할지, 슬레이만을 애도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된 칼리안이 말에 오르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얀. ” 앨런 행방도 알려주고, 눈치 빠르게 레이븐까지 준비해와 준 것에 대한 인사였다. “너 없었으면 여기서 어떻게 지냈을지 상상도 안돼.” 말이 나온 김에 진심어린 고마움을 함께 전한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앨런이 이미 진작에 도착했을, 지그프리드령으로 향하는 이동 마법진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였다. 그와 동시에 레이븐이 발을 박차고 거칠 것 없다는 듯 왕궁 밖을 향해 달려나갔다. 아무튼 앨런이 제 손으로 오랜 친구 목을 비틀어 놓는 일은 막아야 했으니 말이다. 친구 목 비틀어 놓은 앨런이 겸사겸사 근처에 있는 세크리티아에 들러야겠다 생각하기 전에 제대로 상황도 좀 확인을 해야 했고. “우와······. 오늘 내 생일인가봐.” 선물처럼 전해진 갑작스러운 극찬에 깜짝 놀란 얀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은 듣지 못한 채였다. < 제36장. 참으세요, 스승님(5) > 칼리안은 고집이 세다. 체이스를 닮아서 세다. 뒤집어 말한다면 체이스와 칼리안의 고집은 엇비슷하다는 소리다. - 내년 2월에 무슨 일이 있을지 이야기를 했었는데. 기억합니까. 그랬으니, 칼리안이 이기지 못한 플란츠의 고집을 체이스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특별히 고집 부릴 일도 없이 자랐을 것이 분명한 왕자가 대체 어디에서 그런 고집을 배웠는지는 몰라도 플란츠의 고집은 대단했다. - 기억 못할 리가. 스스로의 똑똑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플란츠의 대답에, 잠깐 웃은 체이스가 말했다. - 그래요. 그 때 나는 그 일에 내가 개입한 것이 없다 말을 했었는데. 칼리안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데블란이 칼리안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그것부터 알려주면 나도 말을 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두어 번 했다. 과거의 데블란이 어떻게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에 대해 플란츠에게 사실대로 알리기에는 다소 적절하지 않은 내용이 섞여 있었던 탓에 되도록 칼리안의 의견을 듣고 플란츠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체이스는 플란츠에게 졌다. 정말 한 마디 말도 통하지 않고, 무슨 말을 해도 도무지 듣질 않았다. 일단 너부터 말하면 그땐 나도 알려주겠다며 끝까지 같은 말만 했다. 이래서야 시간만 낭비될 뿐임을 힘들게 받아들인 체이스가, 포기의 의미가 담긴 한숨과 함께 과거의 자신이 데블란의 죽음에 어떻게 관여했는지를 알렸다.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체이스의 과거도 순백이 아니었음에 대한 어떠한 감상도 전하지 않았다. 체이스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다만 이번에는 그 때와 사정이 달라진 것도 많고 그 때에는 없던 이가 있는 경우도 있어서, 텐실의 치유사에 대한 입국을 금지하는 것만으로 같은 미래가 벌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린 후작은 이제 텐실의 치유사 뿐 아니라 텐실 국적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입국까지 금지시키고 있었다. 그렇게나 강경하게 나오니 데블란이 다음 수를 생각해낸 것이었다. - 혹시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히나에 대해 알고 있나. 칼리안의 말에 따르면 ‘참으로 똑똑하신’ 플란츠는, 체이스가 말한 내용을 들은 뒤 데블란과 칼리안의 연결점을 곧바로 짚어냈다. 평소 칼리안이 히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정도만 보아왔을 뿐, 히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준 적 없었음에도. - 알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워낙 의심이 많으신 분이니. 체이스는 히나를 언급하는 플란츠의 대답에 그리 놀라지 않고 곧바로 답을 전했다. 플란츠의 사고를 이미 여러 번 겪었으니 굳이 놀랄 것도 없던 탓이다. - 란델 형님을 불렀으면 얼마든지 보내드렸을텐데. 아쉽군. 하지만 이 말에는 놀랐다. 란델이 치유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에 일단 놀랐고, 발칸에 대한 내용에 이어 마찬가지로 극비사항일 정보를 또 한 번 아무렇지 않게 언급하는 것에 놀랐고, 얼마든지 보내주겠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란델을 아낌없이 여기는 태도에도 놀랐다. - 참 여러모로 비범하군요, 플란츠 왕자는. - 어쩌다보니. 어쩌다보니 말 몇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능과 눈치를 가지게 됐고, 어쩌다보니 카이리스의 비밀을 그리 아까워하지 않게 됐고, 어쩌다보니 란델과의 사이가 엄청 멀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문득, 어쩌다 그 플란츠와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는 처지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 체이스가 실소했다. - 히나가 엮여 있으면 내 아우님은 말 안해도 절대로 가지 않겠다 했을텐데. 굳이 왜 들쑤셔놨는지 모르겠군. 또 한 번의 질책이 이어졌다. 네가 말 안했어도 알아서 잘 처신했을텐데 왜 굳이 말을 해서 내 동생 얼굴 반쯤 죽었다 돌아오게 했느냐는 소리다. 거기에 대해서는 적절한 대답이 될 말을 플란츠에게 잘 배운 체이스가 답했다. -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 당신 의지는 아니었다는 말인가. 입을 열 필요가 없어서인지 몰라도, 지금의 플란츠는 꽤 말이 많았다. 그리고 정확했다. 여기까지 대충 상황을 파악한 플란츠가 다 식은 딸기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칼리안이 마셨던, 앨런의 몫으로 내려놓았던 것과 극명히 다른 색을 보일 만큼 연하게 탄 딸기차에서 아주 은은한 딸기 향이 올라왔다. 플란츠는 그것을 굳이 삼키지 않은 채 데블란의 편지에 대한 설명을 했다. 체이스의 말을 모두 들었으니까. - 그래서 내 아우님은 나한테 반지 건네 준 뒤에 마법사 잡으러 갔고. 나는 내 아우님의 옛 형님에게 상황 확인하는 중이고. 이렇게, 자칫하면 대마법사가 일국의 국왕을 시해하는 세기의 사건이 될 지도 모를 일을 태평하게 예고한 뒤에 머금고 있던 딸기차를 삼켜냈다. - 마법사가 정말로 거기에 가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 뒤에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앨런이 앞 뒤 안 가리고 세크리티아에 바로 찾아가진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끝으로 말을 마쳤다. 앨런이 오지 않는 것을 매우 아쉽다 느껴야 할지 아니면 다행이라 느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잠시 미간을 찌푸린 체이스의 머릿속에 플란츠의 음성이 이어졌다. - 굳이 같은 미래가 필요하다면 당신이 할 일을 해. 마법사나 내 아우님이 정말로 거기까지 가기 전에. 언젠가 루비아 관에서 비슷한 말을 했었다. 칼리안에게 떠넘기지 말고 너도 움직이라면서. 그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며, 체이스가 답을 전했다. - 다행히 이제는 정당한 명분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데블란이 칼리안에게 덫을 놓았다. 그것은, 체이스가 원하는 일을 직접 행한 뒤에도 스스로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충분한 이유였다. 실로 다행한 일이 아닌가. 이번에도 마음 놓고 증오할 명분이 생겼으니. 그리고 지금 당장 체이스가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였다. 그것을 플란츠에게 알려야 할지, 아니. 알려도 좋을지 잠시 고민하는데 플란츠가 또 한 번 말을 했다. - 그것을 확인하면 될 것 같은데. 다른 누구도 아닌 체이스만이 할 수 있는 일. 직접 데블란을 찾아가 데블란의 속내를 떠보는 일. - 그 자가 내 아우님의 지난 ‘이름’을 아는지. 그것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을 체이스가 해줘야 할 것 같아서 부득부득 우겨가며 체이스에게 직접 대화를 걸었던 터였다. 체이스는 오늘 세 번째로 놀랐다. 팔찌가 빛났을 때, 플란츠가 란델에 대해 말했을 때. 그리고 지금. - 알고 있었습니까. - 어쩌다보니. 세상에서 사라질 것을 걱정한 칼리안이 유일하게 믿고 있는 것이 플란츠의 똑똑한 머리 아니던가. 누군가 강제로 지운 것에 대한 괴리를 깨달을 만큼 똑똑하니, 혹여 자신이 다시 지워진다 하더라도 플란츠만은 눈치를 챌 것이라고. 칼리안의 생각은 정확했다. 그 스스로가 무언가를 쉽게 잊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플란츠가 가장 잘 알았다. 그런데 언젠가 체이스가 말해주었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고, 심지어 그 말을 잊은 것에 대한 그 어떤 의구심조차 들지 않았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이 궁금하지 않았다. - 궁금하지 않는 이유를 궁금해하니 답이 나와서. 그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일에 대해 고집스럽게 생각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늘어나다보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시스파니안 이상으로 대단할 것이 분명한 누군가가 칼리안에게 얼마나 잔인한 일을 벌이고 있는지를. -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데블란의 속내를 들춰보는 방법으로 그만한 것이 또 있을까. 해서 같은 것을 떠올리고 있던 체이스가 대답했다. 결국 체이스가 절대 전하지 못할 말을 아리안느가 칼리안에게, 그리고 칼리안이 절대 부탁하지 못할 말을 플란츠가 체이스에게 건넨 셈이다. 지나치게 아이러니한 현실이 또 한 번 우스워질 수 있음에, 체이스가 피식 웃었다. - 두고 온 것을 잘했다 생각할 일은 없지 않을까 했는데. 너른 바다 대신 너른 왕궁을 내려다보게 되고, 푸른 별의 축복을 받는 대신 붉은 꽃을 받고, 하루하루 실없는 내기를 하는 대신 매일 벼려지는 칼날 위를 걷고, 누구보다 저를 아껴주었던 형제의 품을 떠나서 사는 것이 그저 가엽기만 하였는데. 그것을 두고 온 것에 그저 애가 탔는데. 어쩌면······. - 하지 마. 평생. 플란츠가 체이스의 말을 잘랐다. 두고 온 것을 잘했다 생각하는 일, 하지 말라고. 마음에 안 들어하고 계속 그렇게 걱정하라고. 여차하면 언제든지 찾아가겠노라 생각하며 살라고. 이번 생에서 체이스가 해야 할 형 노릇은 그것이니, 그것마저 포기하고 손에서 놓지 말라고. 그런 의미를 담은 짧은 말이었다. * * * 가느다란 달도 저물고 새벽 어둠에 별이 잠겼다. 불어오는 바람조차 길을 잃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만큼 짙고 짙은 어둠 속에, 그 어둠의 한 면을 베어다 만든 듯한 검은 말이 쉼 없이 달렸다. 한 번 찾아간 길이라면 언제든 잊지 않고 제대로 찾아갈 수 있는 레이븐은, 여기가 어딘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주인을 태운 채 거침없이 발을 놀리고 있었다. 이동 마법진은 지그프리드의 영지로부터 하루 거리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 때문에 칼리안은, 이동 마법진의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숨이 답답해질 만큼 뜨거워진 공기를 제대로 느껴 볼 새도 없이 곧장 길을 나섰다. 중간에 한 번을 쉬고 난 뒤 다시 달렸다. 굳이 말에 오를 필요 없는 앨런이 벌써 어디까지 갔을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 다그닥, 다그닥! 참 오랜만에 이런 숲길을 마음껏 달려보는 레이븐은 힘이 든다기보다는 차라리 신이 난 것 같았다. 물론 레이븐이 그리 신나게 달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칼리안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달려도, 저녁이 가고 밤이 되고 새벽이 되도록 달려도 앨런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제온의 무리가 다시 덤벼들면 앨런이 발을 멈추고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쯤, 언제고 얼만큼이고 반갑기만 한 기척이 느껴졌다. “아, 찾았다······.” 그제야 밀려오는 안도감에 깊은 숨 같은 혼잣말을 꺼낸 칼리안이 앨런이 있는 곳까지 간 뒤 레이븐의 등에서 내렸다. 언젠가의 칼리안이, 언젠가의 플란츠가, 언젠가의 란델이, 그리고 르메인이 섰던 곳. 위대한 이의 영토를 지키는 고집 센 기사들의 땅이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 위에 앨런이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서 있었다. - 타박. 가벼운 발소리에, 이미 오래 전부터 칼리안의 도착을 알고 있었을 앨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붉어지는 앨런의 긴 은발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칼리안이 대답했다. “네, 스승님.” 왜 더 가지 못하고 이 곳에 서 있었는지를 묻는 대신 칼리안은 고개만 끄덕였다. “걱정했습니다. 스승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요.” 앨런의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리베른의 국왕 엘린느가 그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해서 앨런이 어떤 기분으로 리베른에서 지냈는지. 그 모든 것을 칼리안도 이제 알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후 칼리안을 만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을 했다. 데블란의 독니에 혹시라도 칼리안이 물릴까, 그 독에 또 한 번 아들을 잃을까, 앨런이 죽은 아들 로닐의 일을 떠올려가며 칼리안을 걱정할까봐. 그리고 후회도 했다. 진작 알았다면 실리케의 앞에서 독차를 마시지는 않았을텐데, 하고. “갈 곳을 잃은 기분이라, 잠시 발을 멈추고 앞길을 고민하고 있었지요.” 앨런의 조용한 목소리가 깊은 새벽에 맺히는 물안개처럼 흘러나왔다. 칼리안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 언덕에서 내려가 곧장 앞으로 가면 슬레이만이 있을 지그프리드령에 도착한다. 그리고 조금만 방향을 돌려 나아간다면 세크리티아가 나온다. 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고민을 했을까, 아니면 칼리안이 어떻게든 찾으러 오길 기다렸을까. “평소 스승님 같았으면 이렇게 갑자기 움직이지는 않으셨을텐데요.” 칼리안에게 단 한 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정확한 상황은 확인하지도 않고, 르메인의 안전은 완전히 뒷전에 둔 채로 이렇게 충동적으로 올 만한 사람이었을까. 앨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 멀리 서서히 동이 트는 하늘에 붉은 빛과 노란 빛, 그리고 푸른 빛이 들었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아침이지만 매일이 다른 그 하늘을 조용히 보던 칼리안이 말했다. “어릴 때, 만화경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유난히 마음에 들었어서 유난히 기억이 나요.” 유리 조각과 보석 조각, 색색의 예쁜 것들이 들어있던 만화경을 기억 속에 떠올린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하루종일 그 안을 들여다보며 지내기도 했는데, 늘 같아보여도 늘 다른 것들이 보여서. 그게 참 신기하더라고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앨런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도. 같아보여도,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무조건 따르기만 할 생각 없어요. 무턱대고 덫을 밟을 생각도 없어요. 무조건 혼자 해결할 생각도 이제 안 할게요. 언제든지 도와달라고 얘기할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참으세요, 스승님.” 데블란이라면 칼리안과 앨런이 어떻게 움직일지 속속들이 확인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슬레이만의 멱살을 붙드는 것도, 소리소문 없이 세크리티아에 쳐들어가 문제거리를 만드는 것도 참아달라는 소리였다. 지금껏 그것을 결정하지 못해 발을 멈추었던 앨런이 물었다. “왕자님께서 그 가시밭길을 굳이 가도록, 제가 그냥 두어야 하겠습니까.” “가시밭길 아닙니다. 제 아버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압니다.” 체이스를 내려놓은 것처럼. 데블란도. 그러니 정당성도 필요없다. 면죄부도 필요없다. 스스로를 납득시킬 명분 따위 없어도 된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앨런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같이 돌아가요, 아버지.” 가느다란 달도 저물고 새벽 어둠에 별이 잠겼던 밤에, 어여쁜 제자가 어여쁘게 웃으며 앨런의 진짜 아들이 됐다. < 제37장. 없거나 한 번(1) > 플란츠는 간혹 그런 생각을 했다. 칼리안이 자신을 살려놓은 진짜 이유는 사실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칼리안이 앨런을 쫓기 위해 나갔던 그 즈음. 체이스와의 대화를 마친 플란츠는 빌헬름 관으로 가 아르센과 키리에를 만났다. 이유는 묻지 말고 당분간 둘이 번갈아가며 히나 곁을 지키라는 말을 전했다. 그 뒤에는 아르피아 궁에 다시 와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르메인을 만났다. 내 동생 또 도망가긴 했는데 이제는 좀 익숙해지실 때도 되지 않았는지, 매번 레이븐 뒤를 쫓아가야 하는 왕실의 말들이 얼마나 고생할지를 감안해서 외출 금지령을 적당히 풀어주시는 것은 어떨지를 말하고 나니 어김없이 그런 생각이 또 들었다. 공사다망하신 내 아우님은 나를 그냥 유용한 빗자루 정도로 삼으려고 살려놨나보다, 하고. “이번에는 마나실 백작 찾으러 갔습니다.” 벌여놓고 나간 일 죄다 쓸어모아서 알아서 뒷처리까지 해주고 있는 쓸모 많은 연두색 빗자루가 눈치 없이 근심만 깊은 듯한 짙푸른 눈을 보며 말했다. 칼리안은 에반을 들쑤셔놨고, 칼리안의 정혼자인 드미레아는 에반을 뒤집어놨다. 이 와중에 칼리안의 스승인 앨런은 그냥 도망갔단다. 회의장에서 드미레아가 벌여놓은 일 잘 수습한 깊은 바다 색 빗자루가 플란츠의 말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마나실 경이 어딜 그리 급히 갔다는 말이더냐.” “아마도 남쪽으로 갔을 텐데,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았으니 모르는 척 그냥 두십시오.” “내가 또······.” 저도 모르게 이런 대꾸를 하던 르메인이 말을 맺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감잎을 우려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르메인 하는 꼬락서니 속터져서 못 보겠다며 매번 남쪽으로 가버리겠다 하던 앨런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또 뭘 잘못했는데 앨런이 진짜로 남쪽 땅에 갔는지에 대한 깊은 의문이 들었던 터였다. 다만 그런 이야기를 차마 둘째 아들의 앞에서 꺼낼 수는 없었던 르메인은 말을 멈추고 차 한 모금을 마실 시간 동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떠올려봤다. 그 후에는 생각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일단 반성부터 했다. “······ 알겠다. 미리 알려주어 고맙구나.” “아닙니다.” 간단히 대답한 플란츠가, 크게 거슬리는 것 없는 향의 차를 마신 뒤 내려놓았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르메인이 물었다. “혹 오늘 저녁에 시간이 있겠느냐. 괜찮다면 네 형과 함께 식사나 하자꾸나.” 란델은 칼리안의 생일 연회에도 오지 않았고 이번 회의에도 어김없이 불참했다. 칼리안이 때마침 자리를 비웠다 하니 유난히 서먹하다는 첫째와 둘째 사이를 좀 지켜볼 겸, 란델도 만나볼 겸, 상황 상 미리 전해주지 못했던 프레이야의 추숭에 대한 말도 둘에게 전해주기 위해 꺼낸 이야기였다. 함께 식사를 하고 싶으니 시간을 비워두라는 말 대신 괜찮은지를 묻는 말에,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대화를 원하신다면 따로 보시는 것이 낫습니다.” 플란츠와 란델의 사이는 어차피 르메인이 끼어든다 해서 해결 될 일이 아니다. 눈치껏 분위기 맞춰 줄 칼리안도 없이 두 형제와 르메인이 둘러 앉으면 정말 말 한 마디 없는 고요한 식사 자리가 될 뿐이다. 그렇게 괜한 저녁 식사 시간 낭비하느니, 그냥 르메인이 란델만 데리고 따로 이야기 하는 것이 나을 터였다. “그래. 그렇게 하마.” 자세한 설명 없이 짧게 이야기한 플란츠를 잠시 보던 르메인이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플란츠. 네가 자리하지 않아 듣지 못했겠지만. 이번 생일 연회에서······.” 그 후에는 잠시 말을 멈췄다. 실리케의 아들인 플란츠에게 이 일을 어떻게 잘 설명해야 할지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던 탓이다. “잘 하셨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레넌에 대한 일 외에는 열심히 소식을 물어다 주었던 레릭에게 이미 전해들었으니까. 르메인이 저렇게 주저하는 이유 역시 알고 있으니 굳이 어렵게 말을 꺼내도록 둘 필요가 없었다. “칼리안도 많이 좋아했을 겁니다.” 그 뒤 플란츠는 앞에 놓인 남은 차를 남김 없이 모두 마시고 내려놨다. 라벤더 차에 손도 대지 않았던 것이 생각나서, 그냥 전부 다 마셨다. “그래.” 싹 비워진 찻잔을 본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몇 마디 말을 더 나누며 르메인과의 대화를 마친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린 뒤 나왔다. 체르밀 궁에 다녀오겠다던 레릭이 어느새 집무실 앞에 돌아와 있었다. “왕자님, 빌헬름 관으로 가십니까?” “체르밀.” 하루 종일 길고 긴 이야기만 계속 한 탓에 점심 식사를 건너뛰고 난 이후로도 시간이 한참 흘러 있었다. 어차피 시간이 늦었으니 빌헬름 관의 일은 그냥 아르센이 알아서 하도록 두고 오늘은 좀 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때문에 짧게 대답한 뒤 저벅 저벅 아르피아 궁에서 나오던 플란츠가 잠시 발을 멈췄다. 계단 앞, 긴 햇살이 한가득 내리쬐는 길 한가운데에 짝짝이 색 눈을 가진 은백색의 고양이 한 마리가 인형처럼 앉아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본 까닭이다. 그것이 꼭 오랫동안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괜히 그렇게 보였다. 레릭처럼. “루시.” “애옹!” 정말 기다렸다는 듯, 플란츠의 부름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루시가 대답같은 소리를 냈다. 그 낯선 기분이 괜히 반가워서. 기지개 켤 때 잔뜩 힘이 들어가는 앞발도 반갑고 안아들 때 주우욱 늘어나는 허리도 반갑고 잔뜩 흙 묻은 분홍색 발바닥도 반가워서. 플란츠는 옅은 하늘 색 재킷에 고양이 발바닥 모양의 흙도장이 찍히는 것은 신경쓰지 않은 채 기지개 마친 루시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체르밀 궁을 향해 발을 옮겼다. 예민하고 성격 나쁜 2왕자가 고양이 안고 다니는 것에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사람들이 예를 올리며 지나갔다. 그런 플란츠의 뒤를 잰걸음으로 따르던 레릭이 조금 가까이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왕자님.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당연하겠지만, 다른 이들이 보는 곳에서 흙발바닥 고양이 안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등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 말을 건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칼리안에게 돈을 받았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얀은 괜찮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플란츠를 볼 때마다 괜스레 속이 상해서, 언제까지고 안고 갈 불편한 비밀로 두느니 그냥 툭 터놓고 전부 다 이야기 한 뒤에 화를 내든 실망했다는 얼굴을 하든 무조건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으니까.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 본 플란츠가 대답했다. “해.” 레릭이 아직 잘 모르는 것이 있었다. 플란츠의 성격이 꽤 급하다는 것, 그리고 때와 장소를 그리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할 말이 있으면 그냥 그 자리에서 들어야지 굳이 차를 내오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듣겠다 준비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 덕분에 아르피아 궁과 체르밀 궁 사이 어느 즈음의 애매한 곳에서 고양이 안고 있는 플란츠와 마주 선 애매한 상태로, 레릭은 고개를 푹 숙이고 돈 주머니를 꺼내 보여줬다. “왕자님, 사실은 제가······.” 그 주머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다시 발을 돌렸다. 여전한 짧은 말이 뒤이었다. “됐어. 알아.” 미안하다는 말 할 틈도 주지 않은 채로, 그렇게 저벅저벅 앞서나가는 플란츠를 다시 열심히 따라가면서 레릭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됐다고.” “그래도요. 죄송합니다. 안 그럴게요. 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 “애옹! 애오옹!” 됐다는데 굳이 사과를 했다. 이 이상 어떻게 더 열심히 하겠다는 건지 플란츠로서도 알 수가 없었으나 그렇게 말했다. 품 속에서는 고양이가 애옹거리고 뒤에서는 레릭이 종알거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플란츠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가시면 쉬시는 동안 저녁 식사 준비 하도록 이르겠습니다, 왕자님. 드시고 싶은 것 있으세요?” “없어.” 르메인이 란델과 식사를 하기로 했으니 안 그래도 주방이 바빠질 터였다.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대충 대답한 플란츠가, 한참이 지난 뒤 말을 덧붙였다. “같이 먹어.” 르메인은 란델과 식사를 하기로 했고, 칼리안은 앨런 붙잡아서 밥 먹을 테니까. 같이. “······ 네, 네!” 미안한 마음도 들고 고마운 마음도 들고 해서 신이 난 레릭이 여전히 앞서 걸어가는 플란츠만 쳐다보면서 열심히 따라갔다. “그럼 제가 2인분 준비하라고 얘기할게요, 왕자님.” “그래.” “피망 넣지 말고 양파 잘 익혀서요, 왕자님!” 물론 밥을 같이 먹자는 이야기였지, 예민하고 성격 나쁘고 고양이 안고 다니는 2왕자가 피망이랑 안 익은 양파 못 먹는다는 사실을 온 왕궁에 다 소문 낼 것처럼 굴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같이 가요, 왕자님!” 그래서 결국은 다시 짜증이 났다. * * * 칼리안은 간혹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의 행운이라는 것은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의 불행이 될지도 모른다고. “아니, 왜 그러는지는 말을 해줘야지! 다짜고짜 그러면 내가 놀라겠나, 안 놀라겠나?” 그 날 새벽. 때마침 지그프리드 외성 밖 북쪽 지역을 순찰하던 슬레이만의 눈에, 독특한 머리색 마법사와 그의 제자 겸 소드마스터 겸 예비 사위 겸 이 나라의 왕자인 소년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애초부터 둘이 몸을 숨길 생각 없이 서있었으니 밝아오는 하늘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지나치게 눈에 띄이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할 일이었다. 그래서. 때마침 보고를 받고 때마침 오늘 하루 일정이 없던 슬레이만이 곧장 말을 달려 언덕 위로 올라왔다. 그것이 앨런에게는 크나큰 행운이었고, 슬레이만에게는 딱 그만큼의 불행이었다. 붉디 붉은 태양이 떠오르며 하늘이 열릴 때, 어여쁜 아들내미 말에 간신히 닫아둔 앨런의 뚜껑도 활짝 열려버렸으니까. - 타악! 푸른 빛이 넘실거리는 오러에 감싸여 사라져가던 새빨간 불덩이를 떠올린 슬레이만이, 조금 큰 소리로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의문 가득한 눈으로 앨런을 쳐다봤다. “대련이 하고 싶으면 저택으로 오면 될 것을!” 되도록 슬레이만은 만나지 않고 그냥 조용히 돌아가려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둘이 수도를 빠져나온 것은 이미 다 알려졌을 터였다. 이제는 앨런이 슬레이만 목을 꺾어놓을 일은 없을 테니, 둘이 여기까지 왔다 돌아가든 온 김에 슬레이만 만나 이야기 좀 나누고 돌아가든 데블란이 여기서 더 뭘 알아봐야 크게 문제 될 일은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결국은 지그프리드 공작령 안의 작은 술집 하나를 통째로 빌려 들어왔다. 아르센의 발칸이 지키는 왕궁 안에 있는 한 히나도 르메인도 당장 잘못될 일도 없을 테니까. “대체 뭐가 문제인데 공격부터 했나?” 슬레이만의 의문이야 당연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친구가 떠오르는 태양보다 눈부신 불덩이를 인사처럼 날려보냈으니, 사람인 이상 궁금할 수 밖에. “대장 코끼리 네 놈이 여기 살아있는 게 문제라네.” “나는 원래부터 여기 살았었는데, 왜!” “그런 말이 아니지 않나, 멍청한 코끼리야.” 그 후에는 이런 식으로 말싸움이 붙었다. 사일런트도 두르지 않은 채여서, 혹시나 싶었던 칼리안이 소리를 없애야 했다. 그렇다 해서 싸우는 얼굴까지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술집 하나를 통째로 빌려 들어와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꽤 많은 소문이 돌 뻔 했다는 생각이 든 칼리안이 말했다. “그만하세요.” 조금 전 ‘한 번만 더 불러봐주면 안되겠냐’ 하던 앨런의 말에, 생전 처음으로 다른 의미 없이 단어 뜻 그대로 불러본 아버지라는 그 말을 어색하지만 힘들게 다시 한 번 꺼내놓으려 했을 때 슬레이만이 왔다. ‘그러고 보면 행운인 것만은 아니었나.’ 어쩐지 그 일 때문에 앨런이 지금 더 화를 내는 것 같아서 작게 웃은 칼리안이 둘을 말렸다. “저 배고파요, 스승님.” 바로 전날, 생애 두 번 없을 인내심을 발휘하며 진짜 어른이 된 칼리안의 두 배 이상을 살아 온 둘이 아닌가. 이제 다 커도 오래 전에 다 컸을 두 어른들의 말싸움이 한참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던 탓에 와인 말고는 아직 제대로 된 음식 주문도 하지 못하고 둘을 지켜보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한 소리였다. 칼리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을 한 앨런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곧 끝내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내 인생을 끝내겠다는 말인가’ 하는 식의 의문이 가득 든 눈이 되었던 슬레이만이, 앨런을 쳐다보며 너는 왜 애를 굶기고 다니냐는 말을 해서 앨런을 또 한 번 화나게 했다. 그러게 네 놈이 얌전히 집에나 갔으면 우리 왕자님 배 고프시기 전에 내가 뭐라도 먹였을텐데 이게 다 코끼리 네 놈 때문 아니냐, 내 사윗감 이제 나한테 보내주러 왔나 해서 와봤는데 네가 뭔 상관이냐, 내새끼를 내가 너한테 왜 보내냐 내가 미쳤냐, 쟤가 왜 네 새끼냐 소 새끼지, 소 새끼 아니거든 그런데 너 지금 어여쁜 내새끼한테 소 새끼랬냐 진짜 죽어볼래, 뭐 이런 식으로 오고가며 말싸움이 이어졌다. “그만하라고 했는데. 내가.” 결국 참지 못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제일 약하고 신분도 별 볼 일 없고 나이도 어려서 둘 다 내 말을 안 들으시나.” 이렇게 이어진 서늘한 말을 들은 뒤에야 둘의 입이 닫혔다. 간신히 둘을 진정시킨 칼리안이 직접 나서서 이런저런 음식을 주문했다. 고기 위주로, 누구 생각나게 하는 초록색 나는 것 싹 뺀 채로 야무지게 골라서. 그 후에는 ‘나는 여전히 너희들이 왜 찾아왔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어 있는 슬레이만을 잠깐 쳐다보다 다시 눈을 내리뜬 채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또 잠시의 시간이 지나 모락모락 김이 나는 소고기 스튜와 레몬 소스를 얹은 생굴 요리를 포함한 이런저런 음식이 모두 나온 뒤. “지그프리드 공.” “네, 왕자님.” 칼리안이 슬레이만을 불렀다. 그리고는, “혹시 뱀 사냥 해보신 적 있습니까.” 카이리스 왕실을 위해서는 검을 들지 않겠지만 그 상대가 뱀이라면 어떻겠느냐고, 한 번 더 생긋 웃으며 물었다. < 제37장. 없거나 한 번(2) > “없습니다.” 난데 없이 뱀을 사냥해본 적 있느냐는 질문을 들은 슬레이만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해 볼 생각은 있습니까.” 오랜만에 맛보는 생굴 요리를 음미하며 삼킨 뒤 상당히 만족스러운 표정을 한 칼리안이 한 번을 더 물었고, 슬레이만은 이번에도 시원하게 대답했다. “생각 없습니다, 왕자님.” “알겠습니다.” 담백하기 짝이 없는 대답과 그에 못지 않은 반응이었다. 어여쁜 내새끼가 어여쁘게 웃으면서 뱀 잡아 본 적 있느냐고 물어봤으면 살아생전 뱀 아니라 지렁이 한 번을 못 잡아 봤어도 일단은 무조건 있다고 해야지 그걸 그렇게 단호하게 없다고 두 번을 말하면 민망해진 내새끼 수정구슬같은 저 여린 마음에 상처가 생기겠냐, 안생기겠냐, 하는 얼굴로 슬레이만을 노려본 앨런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냥 내가 간다니까 신념까지 근육질인 것 같은 저 지그프리드를 왜 써먹으려 드느냐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왕자님.” 그런 앨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슬레이만이 이렇게 운을 뗀 뒤, 흥미로운 대답을 기대하는 듯한 붉은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지그프리드는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물기 위해 달려드는 뱀을 밟아 없앤다면 모르겠으나, 아무런 위협조차 되지 않는 것들의 앞에 굳이 먼저 나서서 사냥을 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후 칼리안에게서 고개를 돌린 슬레이만이 앨런을 쳐다봤다. 내 대답 좀 멋지지 않았느냐는 눈빛이었으므로 앨런은 그냥 무시했다. 불덩이 안 던진 것이 다행이라는 말을 꾹 참은 채였다. 민트 젤리를 올린 양고기 스테이크를 천천히 씹어 넘긴 칼리안이 여유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구보다 강한 검을 들었으나 옹립하지 않고, 굳건한 방패를 들어 지켜낼 뿐이며, 사냥도 하지 않는 지그프리드.” 그리고, 오로지 시스파니안의 영토 하나만을 지키기 위해 500년을 지내온 강한 신념의 수호자. 그들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진심으로 존중한다. 그들의 신념을 상처입힐 생각은 여전히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혹시 그 동안 사냥을 해 본 적도 없고 할 필요도 없어서 이미 물린 것까지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까, 지그프리드 공.” 뱀 사냥을 해 본 적도 없지만 해 볼 생각도 없다는 그 이유있는 자만이 어느새 선을 넘은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다. 그 독이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밟아 없애는 것조차 하지 않은 채 그냥 지켜보고 있지는 않느냐고. 슬레이만이 칼리안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앨런의 사나워진 눈초리도 무시한 채 한참을 웃던 슬레이만은 자신의 웃음이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칼리안을 향해 재밌다는 듯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땐 사방으로 날 선 투기를 뿜어대는 그냥 꼬맹이였고, 불과 몇 달 뒤에 다시 오셨을 땐 어느새 몸 속에 오러를 가득 담고 계셨던 이상한 분이 바로 왕자님이십니다. 곱게 자란 비리비리한 왕자님께서 아주 오싹오싹한 살기를 펑펑 내뿜으셔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얀이 관심을 가질 만큼 나약했던 왕자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슬레이만이 오싹했다 할 정도의 살기를 내면서 세크리티아 기사들의 특징을 지닌 검술을 쓰고 있었다. “정확히 누구인지는 몰라도 세크리티아의 것이 분명한 알맹이를 가진 것이 분명한 분께서 하필이면 뱀에 대한 경고를 하시니, 이게 또 얼마나 재밌는 일입니까!” 이렇게 말한 슬레이만이 또 한 번 커다란 웃음소리를 냈다. 세크리티아 출신 알맹이를 가진 사람이 대체 왜 데블란을 사냥하겠다 하는지는 묻지도 않고 그냥 웃기만 했다. 그리고는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웃음을 그쳤다. 신나게 웃느라 맺힌 눈물을 닦아낸 슬레이만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튼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세크리티아의 새가 여기 있습니까?” “아마도, 내 기억이 맞다면 그렇습니다.” 베른 역시 지그프리드에 대한 내용을 전해듣지 않았던가. 게다가 베른의 기억 속에서 지그프리드의 땅에 내려섰던 새들은 단 한 번도 발각된 적 없었다. “세크리티아 왕세자의 새도 있겠지만 국왕 데블란의 새가 섞여있을 가능성도 매우 높습니다.” 지금이라 해서 달라진 것은 없을 터였다. 슬레이만이 자신의 땅에 숨어있던 새를 잡아냈다면 체이스를 통하든 얀이나 드미레아를 통하든 칼리안에게 전해졌을테니까. “뱀 사냥에는 여전히 관심이 없더라도 새는 좀 찾아서 잡아주셨으면 하는데. 지그프리드에게 있어서는 그것 역시 사냥일까요.” 만약 슬레이만이 그것 역시 싫다 한다면 더 이상은 강요하지 않을 생각으로 마지막으로 꺼낸 부탁이었다. 생각이 필요했는지 잔에 남아있던 와인을 모두 마신 뒤 다시 한 잔을 따르던 슬레이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성 안에서 날아오르는 새가 많다며 소공작이 걱정을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칼리안이 처음으로 이 곳에 왔을 때, 시스파니안의 둥지에서 눈부신 빛이 흘러나왔던 상서로운 현상에 대해 알리기 위해 참 많은 새들이 소식을 물고 날아올랐던 것을 칼리안도 기억하고 있었다. “왕자님의 부탁 때문이라기보다는 소공작이 이 곳의 일을 더 걱정할 필요는 없어야 할 테니, 제가 새 정도는 잡아 보겠습니다.” 지금 슬레이만은 명분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스스로를 위해서든, 아니면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든. 한낱 왕자가 아니라 그 왕자를 돕기로 한 드미레아를 위해서 칼리안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지그프리드의 땅에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었지만 드미레아를 이유로 내세워서 한 번 나서 보겠다는 소리였다. “만약에 새 잡다가 뱀 허물이라도 보게 된다면 전해드리겠습니다, 왕자님.” 지그프리드의 도움은 거기까지. 칼리안에게 마수를 뻗어 올 데블란을 막아주거나 데블란을 잡으려는 칼리안의 계획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지그프리드에 살고 있는 새 정도는 잡아서 조사를 하겠노라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데블란과의 연결고리를 가진 이가 확인된다면 칼리안에게도 알려주겠노라고. “알겠습니다, 지그프리드 공.” 그 정도의 도움으로 만족하기로 한 칼리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레아라면 모를까 슬레이만을 상대로 그가 정해 둔 선을 넘는 개입을 요구할 생각 없었다. “그럼 공 먼저 들어가세요. 우리도 곧 일어날테니.”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하의 탄신일 연회 때 경황이 없어 대련 한 번을 못했는데, 이 참에 검이나 한 번 겨뤄보자는 말도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갑작스러운 만남이 오래 이어져봐야 득이 될 것도 없을 테니. 오늘은 참겠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하의 탄신 기념일 연회 때 날을 한 번 잡아 볼 것을 그랬지 않습니까?” 테일란에게 덤볐다가 죽을 뻔하고, 그 뒤에는 세리에와 사이좋게 온천 여행을 다녀오느라 칼리안과 검을 겨누지 못했었다. 그것을 홀랑 까먹은 채 날을 잡을 것을 그랬다 하는 뻔뻔함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곧 슬레이만은 새로 따라 둔 와인을 모두 비워 낸 뒤에 먼저 일어나 돌아갔다. 거대한 체구의 공작이 좁은 술집 문을 비집으며 나가는 것을 잠시 지켜 본 칼리안은, 언제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했느냐는 듯한 얼굴이 되어 다시 신나게 생굴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런 칼리안을 보는 것만으로 배부르다는 듯, 마치 육포 먹는 루시를 보는 히나 혹은 플란츠와 꽤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앨런이 물었다. “왕자님께서는 체이스의 새들도 잡을 생각이십니까.” 칼리안이 아무것도 끼고 있지 않은 손가락을 살짝 가리켜보이며 대답했다. “아뇨. 왕궁에 돌아가면 잠깐 물리라고 얘기하려고요. 해가 될 것 없는 새들까지 잡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뭐, 어디까지나 제 입장에서 해가 될 것 없다 하는 것이긴 하지만.” 르메인의 입장에서야 그것이 체이스의 새든 데블란의 새든 차이가 없을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카이리스의 정보를 국외로 물어나르고 있다는 것은 똑같으니까. 르메인에게 해가 되든지 말든지, 새들이 르메인에게 끼칠 피해보다 칼리안의 입 속으로 야무지게 사라져가는 저 생굴 속에 날카로운 조개껍데기 조각이라도 들었을까 하는 걱정이 훨씬 클 앨런이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저 덩치 큰 코끼리가 뱀 사냥을 해봤거나 관심이 있다 했다면, 본래는 무엇을 부탁하려 하셨는지요?” “생각 안했어요.” 마지막 생굴을 집어먹은 칼리안이 스튜에 손을 가져가며 대답했다. “애초부터 그렇게까지 저를 도와주려고 할 사람은 아니라서.” 칼리안은 스튜에 들어 있던 감자를 슬쩍 밀어내고는 그 밑에 있던 소고기를 귀신같이 찾아내 집어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새 잡으라 얘기하면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것 뻔하니까요. 더 큰 것 부탁하려 하다가 작은 것을 얘기하면 그 정도는 별거 아니지 싶을 테고요.” 그토록 많은 새가 영지에서 날아올랐음에도 신경쓰지 않던 사람이 아닌가. “사실 저는 조금 전에 공이 한 말을 들은 이후에야 알게 됐지만 드미레아도 지그프리드의 땅에 다른 이들의 귀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아닌지를 걱정했었나 본데, 소공작의 걱정에도 크게 나서지 않았던 공작에게 3왕자가 대뜸 찾아와서 새 잡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해서 곧바로 들어 줄 리 없으니까요.” 때문에 뱀 얘기를 먼저 꺼냈다는 이야기였다. 더 큰 것을 거절한 이후라면 작은 것은 들어주게 마련이니까. “······ 그런 이유도 있고. 여전히 그 생각이 같은지도 확인을 해 볼 겸, 지그프리드 공이 생각하는 것만큼 지금 상황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좀 느끼게 해줄 겸 해서 꺼낸 말이었어요. 제 생각이 틀려서 도와주겠다 했으면 뭐. 뭐든 부탁을 했겠지만 역시나 거절을 하네요.” 이 말을 들은 앨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 왕자님, 누굴 닮아서 이렇게 말씀 한마디를 허투루 안하실까.” “마법 잘 쓰시는 아버지 닮아서요.” 어여쁘게 마주 웃으며 곧장 대답해오는 사랑스러운 대답에, 하마터면 심장에 잘 쌓아둔 서클 한 두 개 쯤 잃어버릴 뻔한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잘 못들었는데 다시 한 번만 말씀해주시지요.” “아버지 닮아서요.” “한 번만 더.” “아버지이.” 왕궁 들어가면 또 언제 꺼낼 수 있을지 모를 말이라서, 칼리안은 아낌없이 같은 말을 계속 불러줬다. 좋아하는 고기 다 먹고 왕궁에 다시 돌아갈 때까지 계속 그렇게, 정말로 어리광 부리는 어린 아들이 된 것처럼. * * * ‘아이고 죄송합니다, 왕자님이신 부군단장님. 말씀하신대로 베른 경의 호위를 보느라 부군단장님께서 다망하신 바람에 미처 신경 쓰지 못하셨던 일거리를 제가 하나도 못했습니다.’ 꾹 누르면 돈이 펑펑 나오는 칼리안 덕에 부른 배도 지키고 든든하게 뒤 봐주는 칼리안 덕에 자존심도 지키고 있는 미친 파란 마법사 때문에, 플란츠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일을 마치고 방에 돌아왔다. 그렇게 말하는 아르센의 눈 밑이 하도 거뭇거뭇해서, 말은 얄밉게 했다지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화도 못내고 또 짜증만 무럭무럭 솟은 채였다. “왕자님.” 먼저 돌아가라 일러두었던 레릭이 체르밀 궁의 플란츠 방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뭐야.” “그······ 조금 전에, 그······.” 전날 플란츠와 함께 맛있게 밥 잘 먹고 오늘 저녁까지만 해도 계속 싱글벙글이더니, 그새 무슨 일이 생겼는지 잘 익은 포도색 머리카락만큼 퍼렇게 질려있는 얼굴을 한 채로 말을 흐렸다. 그새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안 봐도 뻔하다. “알았어. 가.” 짧은 한숨을 쉰 플란츠가 ‘뭔 상황인지 알겠고 시간은 늦었으니 너는 이만 들어가서 쉬어라’ 라는 말을 제 식대로 건넨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익숙해진 것 같으면서 절대로 익숙하지 않을 것 같은 광경이 보였다. 가느다란 달빛 대신 마법 등불이 비추는 테라스에 검은색 뒷통수 하나와 그 발치에 앉아있는 보름달같은 고양이 엉덩이 하나가 있었다. “······ 하.” 처음 내려갔던 놈이 잘못했지, 그래. 칼리안이 맥주 만든 놈을 탓했던 것과 비슷하게 플란츠 역시 그냥 선례를 만든 자신을 탓했다. 그리고는, 침실 건너편에 세워진 커다란 책장들의 앞에 놓인 책상 쪽으로 먼저 걸어가 서랍 속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든 뒤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제 방인 것처럼 버젓이 앉아있는 것으로 모자라 탄산수까지 두 개 가져다 놓고, 발치에 앉은 루시가 말린 고기 먹는 것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던 칼리안이 먼저 말했다. “늦으시네요.” “그러는 넌.” 탄산수의 기포가 아직도 계속 올라오고 있었으니, 칼리안 역시 이 곳에 온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는 뜻일 터였다. 그러니 플란츠의 말은, 이렇게 늦은 걸 알면서도 왔는지를 묻는 소리이기도 했고 너 역시 이제야 돌아온 것 아니냐는 말이기도 했다. “급해서,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거리가 좀 있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플란츠의 두 가지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을 전한 칼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방 안과 달리 온도 조절 마법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테라스에 나서니 더운 기운이 확 느껴졌다. 바람 한 점 안 부는 한 밤의 더위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플란츠가 테이블 위에 반지를 내려놓았다. 반지 급해서 왔다는 소리일 테니 그것부터 건네준 것이다. “저보다 형님과 더 많이 대화하셨을 것 같은데. 체이스 왕세자와 이제 좀 친해지셨습니까.” “오자마자 짖지.” 농담하듯 건넨 말에 대충 대꾸한 플란츠가 청포도청이 들어간 탄산수를 한 모금 마셨고 칼리안은 양쪽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어 보였다. 달았다. 속 시끄러우면 속 뒤집힐 만큼 단 음료 마시는 제 주인만 생각한 버릇 없는 시종이 준비했다는 티가 확 났다. “스승님은 잘 찾아왔습니다.” “그래.” 별 일 없다는 뜻일 테니 다른 것 묻지 않고 대답한 플란츠가 또 한 번 탄산수를 마셨다. 이 밤에 먹기 어울리지 않을 만큼 달았지만 시원해서 그냥 마셨다. 바람 한 점 안 부는 테라스에서 밖을 한동안 쳐다보던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사이좋게 대화나 하자고 올라왔던 것도 아니었고, 받을 것 받았으니 내려가려는 것이다. 바닥에 앉은 루시 잘 피해서 테라스 난간 쪽으로 걸어간 칼리안의 눈이 잠시 플란츠를 향했다. 그것을 보며 또 한 번 미간을 찌푸린 플란츠가 곧바로 말했다. “됐어.” 그래서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항상 그래왔듯이. “네.” 고맙다는 말 대신 짧게 대답하며 작게 웃은 칼리안이 제 방으로 돌아갔다. 딱 한 모금만 마신 다디단 탄산수는 그냥 남겨둔 채로. < 제37장. 없거나 한 번(3) > 뱀 사냥. 뱀의 꼬리를 잡아도 안 되고 몸통을 잡아도 안 된다. 자칫 잘못된 곳을 건드렸다가는, 저를 잡아챈 팔을 휘감기 위해 온 몸을 비트는 놈의 그 서늘한 눈동자와 마주하고 말 테니까. 세로로 갈라진 시커먼 동공에 어느새 침잠하여 주춤하는 사이, 긴 아가리를 쩍 벌린 뱀은 나약한 피부에 비수같은 독니를 박고 죽음을 밀어넣는다. “저하.” 섣불리 뱀을 잡으려다 되려 당하지 않으려면, 꼭꼭 숨겨 둔 음험한 이빨을 아예 내어 놓지 못하도록 단번에 머리를 꽉 틀어 쥐거나 잘라내야 한다. 뱀이라는 놈은 결코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으니 사냥에 있어 조금의 실수도 저지르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뱀을 사냥한다는 것은, 생각 같아서는 유순한 사슴을 잡는 것보다 쉬이 여겨지다가도 사실 알고보면 성난 불곰의 멱을 끊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세자 저하.” 하지만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다. 이미 한 번을 하였는데 두 번을 못할까. “······ 체이스.” 생각에 잠겨 있느라 부름에 대답을 돌려주지 않으니 곧장 이름이 들려온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자신의 이름을 들은 체이스는 대답을 해주어야 함도 잊고 다시 한 번 사념에 빠져들고 말았다. - 신성한 핏줄을 이은, 순백의 맹금 순백이라. 이토록 꺼려지면서 이다지도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 또 어디에 있을까. ‘차라리 독 중의 독을 이어 받은 칠흑의 뱀이라면 좀 낫겠는데.’ 잡념의 끝에서 이런 생각에 닿은 체이스가 짧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첨탑 모서리에 걸터앉아 있던 아리안느가 답답한 듯 혹은 불안한 듯 물었다. “저하, 왜 그래. 또 무슨 일 있었어?” 그제야 고개를 돌리니 바람이 불고 있었다.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았던 상념에서 간신히 올라온 체이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 아니, 그냥. 바람이 더워서. 더워서 올라왔는데 더운 바람이 부니까 더 더운 것도 같고 좀 나은 것도 같고.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어.” 첨탑은 더위를 피하기 어려운 곳인지 아니면 쉬운 곳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태양에 조금 더 가까운 만큼 더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다가도 높은 만큼 더 시원한 바람이 불어야 맞을 것 같은 그런 모순된 곳이었다. 이곳에 올라오면 자연스럽게 함께 떠오르는 생각에 잠겨 목이 죄여 오는 기분이 드니 그것을 피해야 할지, 아니면 그로 인해 생에 대한 갈망을 느끼고 있으니 기꺼워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가 간혹 있는 것처럼. “위험해, 아리안느. 이리 와.” 무섭지도 않은지 까마득한 아래를 향해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은 채 체이스를 보던 아리안느는 위험하다는 말은 아예 듣지 못했다는 듯 다시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어?” 칼리안은 체이스의 고집을 닮았는데. 체이스는 어쩌면 아리안느의 고집을 닮은 것이 아닐까. ‘플란츠 왕자와 아리안느가 서로 고집을 부려보면 누가 이기려나.’ 또 한 번 의미 없는 생각을 하게 된 체이스가 아리안느를 쳐다봤다. 제대로 된 답을 해 줄 때까지 같은 것을 물어볼 것이 분명했으므로 일단 대답부터 전했다. “이름 때문에. 아무래도 난 이름대로는 살기 어려운가보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 그게 조금 재밌네.” 왕족이 아닌 아리안느는 잊혀진 옛 언어를 배우지 못했으나 적어도 체이스의 이름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체이스의 웃음이 순백의 삶을 살지 못할 스스로에 대한 냉소라는 것도 알아들었다. “뭐야. 난 또 무슨 대단한 고민이나 하는 줄 알았잖아.” 지금껏 오로지 하얗기만 하던 체이스가 무엇 때문에 더이상 새하얀 빛일 수 없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어차피 이 세상에 순백이라는 건 없어. 북쪽 대사막의 설원도 결국 밑바닥은 썩어 문드러진 땅일 뿐인데 당신이라 해서 그게 다르겠어? 그건 이루고 말고 할 게 아니라 애초부터 불가능한 거야. 그게 싫으면 계속 그냥 나한테 맡겨 둬. 내가 할 테니까. 아니라면, 순백으로만 살 수 있는 사람은 어차피 어디에도 없으니 거기에 얽매이지 마. 굳이 직접 나서겠다 하더니 있는 생각 없는 생각 다 쏟아 부은 정성스런 올가미 하나 만들어서 뒤집어 쓰지 말고.” 아리안느의 해법은 언제나 간단하고 명료했다. 항상 앞서 걸어가며 길을 비춰주곤 하던 이를 향해 체이스가 실없는 말을 대답 대신 했다. “죄 없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당신이 하니까 이상하네. 지난 번에도 그러더니.” 법을 다루는 아리안느 아니던가. 그런 사람이 세상에 깨끗한 사람 없단 말을 저렇게나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모순되는지. “올가미 안 짰어. 고민은 끝났고 뭘 할 건지도 이제 다 정했어. 후회도 안 할 거고. 당신이 걱정하는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럼 왜 웃었는데?” “그냥 재밌어서 웃었어. 뜻대로 이루어지는 이름이 결국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그게 재밌어서.” 옭죄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에 더 걱정 않고 고개를 끄덕이려던 아리안느가 ‘결국 하나도’ 라는 말에 든 뜻을 잠시 가늠해보다 물었다. “당신 동생 이름 말하는 거야?” 칼리안과 대화를 했을 때 거침 없이 이름을 불렀던 아리안느였지만 체이스의 앞에서는 그리 부르지 않았다. 체이스가 떠올리는 동생’이 칼리안인지 아니면 그 속에 있는 이름 모를 누군가인지 가르기가 어려워서였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려던 체이스는 여전히 위태위태한 자세로 앉아있는 아리안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단 아리안느부터 안전한 곳에 내려와야 제대로 대화가 될 것 같아서였다. “위험하다니까. 이리 와, 아리안느.” 하필 제 성격 꼭 닮은 화염 마법을 배운 까닭에 이런 더운 날 그저 신발 벗고 첨탑 끝에 걸터 앉아 바람을 쐬는 것이 더위 해소 방법의 전부인 아리안느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 동생 이름은 무슨 뜻이야? 그건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쪽으로 오면 말해줄게.” 아리안느와 플란츠가 말싸움을 할 일이 과연 있을까 싶었으나, 만약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 해도 아리안느가 이기기는 어렵겠다 싶었다. 결국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아리안느가 체이스의 손을 잡고 첨탑 안쪽으로 돌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고집 접어 준 것을 칭찬하는 눈으로 아리안느를 바라본 체이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 일몰의 잔재.” 낯선 말을 가만히 입 속으로 굴려보던 아리안느가 체이스의 보라색 눈을 쳐다봤다. 체이스의 얼굴과 꼭 닮았으면서 머리가 더 길고, 키가 더 크고, 흉터가 많고. 그리고, 체이스의 것보다 더 옅은 빛을 냈다는 신비로운 두 눈을 상상해보면서. 그러고보니 길었던 머리가 당신에게도 참 잘 어울렸는데, 하는 말을 꺼내는 대신 여전히 허전하게 느껴지는 체이스의 목덜미를 잠깐 쳐다본 아리안느가 물었다. “옛날 이름 뜻이야, 아니면 지금 이름 뜻이야?” “어느 쪽일 것 같아?” “지금. 전하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 해도 자기 아들한테 ‘일몰’이니 ‘잔재’니 하는 말로 이름을 짓지는 않았을 것 같네. 옛 언어 모르는 카이리스에서라면 그렇게 지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입을 열어 답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아리안느의 생각은 맞았다. 체이스가 말한 것은 ‘칼리안’이라는 이름을 옛 언어로 해석했을 때의 의미였다. “일몰의 잔재라니, 그렇게 하니까 굉장히 이상한 말이 되어 버리잖아. 무슨 뜻인지 감이 안 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말로는 참 좋은 뜻인데.” 일몰의 잔재. 생각해보면 그보다 어울리는 이름이 있을까 싶다. 머릿속으로는 의미가 그려지면서도 입을 열어 설명하기는 또 어려운 말이니까. “하긴. 더 이상한 이름도 있어.” 이상한 이름 뜻을 가진 사람의 윗층 사는 사람. 그 사람의 파릇파릇하기 짝이 없는 더 이상한 이름이 생각난 체이스가 또 한 번 실소했다. “뭐야. 또 혼자 웃네. 나도 알려줘.” “안돼. 소문나면 곤란해.” “나 입 무거워. 당신도 알잖아.” “그래도 안돼. 미안.” 사실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완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에, 결국은 고집을 접어 주기로 한 아리안느가 조금 전 들은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며 말했다. “당신 동생의 지금 이름이 가진 그 이상한 의미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웃은 것은 아닐테니······.” 그 후 잠깐 짧은 숨을 내쉰 아리안느는 마치 이 더운 날씨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한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당신 동생 진짜 이름 생각했나보구나.” 동생 생각을 안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라도 가볍게 해서 허전하고 쓸쓸하고 슬프고 외롭고 괴로운 그런 기분은 조금이라도 덜 느끼게 해주려고. “베른. 베른이야, 아리안느. 베른이라는 이름이었어.” 체이스는 아리안느가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벌써 수십 수백 번을 일러준 이름을 다시 한 번 입에 담았다. 보석같이 반짝이던 아리안느의 눈에 순간적으로 탁한 빛이 어렸다. 그리고 아리안느는 잠깐 눈을 깜빡이더니 물었다. “동생 이름도 안 맞았어?” 스치는 바람소리가 내 말보다 크게 들렸을까. 그래서 듣지 못했을까. 아예 기억에조차 담지 못할 만큼. 방금 무엇을 놓쳤는지를 궁금해하지도 않을 만큼. “안 맞는다 뿐일까.” 방금 전에도 그러했듯 더 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어긋나고 있는데, 그것을 고작 안 맞는다는 쉬운 말로 어찌 다 설명할까. 체이스는 숨을 참으며 이런 말도 참았다. 그 모습에서 아리안느는 조금 전 체이스가 또 한 번 이름을 말해준 뒤 모진 사실을 다시 확인했음을 눈치챘다. 그래서 아리안느는 말을 돌리듯 툴툴거리며 입을 열었다. “전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맞지도 않을 이름들을 나란히 지어준거야? 괜히 내 정혼자 마음만 시끄럽게.” 서툰 위로의 말을 들은 체이스가 싱긋 웃었다. “그러게. 기원이 아니라 저주하듯이 이름을 주셨네. 내 아버지는.” 생각해보니 이름을 지어주는 첫 만남부터 그렇게나 틀어진 관계가 아닌가. 체이스는 그것을 원망하기보다는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여기기로 했다. “이만 내려가자. 당신 일 해야지. 나도 가야 할 곳이 있고.” 마음 정리를 마친 체이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호기심 많아 궁금한 것은 끝까지 알고 싶어하는 아리안느가 어디에 가는지 묻지 않은 채 함께 일어났다. * * * 가끔씩 짜증이 치미는 때가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본래도 짜증이 좀 많은 편이긴 한데, 가끔씩 저렇게 잔뜩 치미는 얼굴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을 굳이 말로 설명해본다면 갓 건져낸 어린 물미역같은 느낌이랄까. “예민하신 내 형님께서 또 뭐가 불만이실까.” “내 아우님께서 짖지만 않으면 될 것 같은데.” 파릇파릇하긴 한데 어딘가 좀 쩌든 것 같고 짠내도 좀 나는 것 같고 그런 얼굴의 플란츠가 바로 대답했다. 어차피 제대로 대답 안 해 줄 완두콩이 왜 저렇게 푹 삶아져있나 잠깐 고민하던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빈 자리를 대비하겠노라, 혹은 형님 네놈이 뭐든 손에 쥐고 있어야 안 죽는다 이유들을 가져다 붙여놓으며 일거리들을 쥐어주었지만 아무래도 의심이 드나보다 싶어서였다. 알고보면 다 일 시켜먹으려는 핑계인 것은 아닌가 하고. 결과적으로 플란츠는 매일 바빠졌는데 칼리안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바쁘셨습니까.” 칼리안의 말대로, 바빴다. 그것도 많이 바빴다. 히나 호위로 인해 바빠진 아르센이 남긴 일들도 좀 가져와서 해 놓고, 본래 해야 했을 일도 하고, 단지 이름만 왕자인 것은 아니니 왕자라서 참석해야 하는 여러 일정에도 참여하며 힘든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 그렇게 피로한 얼굴로 체르밀 궁 입구에 서니, ‘짤그랑’ 하는 얼음 소리가 가까운 어딘가에서 들렸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살짝 들어 본 것이 실수였다. 무슨 생각 하고 사는지 알다가도 모를 것 같은 얼굴로 테라스 밖을 쳐다보고 있던 새빨간 눈과 딱 마주쳐버렸다. 새벽부터 일어나 일하고 귀족 모임 참석하고 일하고 일하고 오찬에 참석했다가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돌아왔는데, 여유롭게 일어나 쉬고 귀족 모임 참석하고 쉬고 쉬고 오찬에 참석한 뒤에 쉬고 쉬고 쉬고 지금 여유롭게 차까지 처마시고 있는 놈의 빨간 눈 말이다. “쉴 거야.” 새벽부터 귀족 모임과 오찬에 참석한 뒤 이제껏 어디에서 뭐 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 더운 날 얼음 가득 들어 있는 차를 손에 든 저 면상이 짜증날 뿐. 그래서 짧게만 이야기 한 플란츠가 체르밀 궁 안으로 들어서려 할 때, 3층에 서 있던 칼리안이 테라스 밖으로 몸을 날렸다. 들고 있던 민트 차 내려놓을 생각도 않은 채로. “칼리안 왕자님!” 아직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레릭이 깜짝 놀라 외치는 것은 듣지도 않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테라스 아래로 뛰어내린 칼리안이 플란츠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차를 손에 든 상태 그대로 씩 웃으며 물었다. “식사 하셨습니까?” 칼리안은 위에서, 플란츠는 아래에서, 한 쪽이 내려다보고 한 쪽이 올려다보며 대화를 나눌 수는 없으니 그냥 뛰어 내린 것이다. 밥 먹었는지 물어보려고. “생각 없어.” “네.” 밥 생각 없으시면 조금 이따 식사하러 가겠습니다, 배 안고프시면 식사나 하시죠, 피곤하실텐데 밥이나 먹으면 딱 좋겠네요. 등등. 그 동안 밥 먹자고 참 다양한 말로 짖어대던 칼리안이 어쩐 일로 순순히 ‘네’라고 했다. 때문에 또 무슨 꿍꿍이인지를 의심하는 얼굴이 된 플란츠를 본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밥 생각 없다는 말이 나 지금 피곤해 죽겠으니까 좀 꺼져달라는 말인 줄을 모르는 것도 아닐텐데, 밥 생각 없다는 말에는 알았다 하면서도 갈 생각을 안하는 것이다. “피곤해.” “그럴리가요.” 그리고 칼리안은 웃기지 말라는 듯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고작 그 정도 일로 피곤할 거였으면 아르센은 이미 죽었을 거다. 뭐 이런 뜻이기도 했고 아무리 그래도 브리센의 피가 있는데 그 정도가 힘들다는 거냐, 하는 소리이기도 했다. “저희 사이좋게 오래 얘기 못 하니,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시고 적당한 때 숲으로 오십시오.” 연회장에서 드미레아에게 티아라를 씌운 일, 그리고 프레이야 추숭의 일로 또 한 번 사이가 갈라져버렸으니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제멋대로 할 말 전한 칼리안이 빠뜨린 것이 있다는 듯 잠시 발을 멈췄다. 그리고는 또 한 번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검, 잊지 마시고요.” 그 말이 플란츠에게는 지옥에서 보낸 초대 메시지처럼 들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은 여전히 예쁜 얼굴로 웃으며 가볍게 예를 취한 뒤 다시 제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가만히 서서 그 뒷모습을 보던 플란츠가 최근 들어 자신이 히나와 얽힌 일이 있었는지를 따져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특별한 것이 없었다. “왕자님, 피곤하시면 오늘 쉬세요.” “됐어.” “하지만, 굳이 이야기를 듣지 않으셔도······.” 걱정해오는 레릭의 말에, 플란츠가 짜증 난 얼굴 그대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 배우기로 했어.” 레릭이야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어쨌든 저 놈한테 전부 다 배우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지옥으로 부르든 세뉴 강 건너로 부르든. 가야지. < 제37장. 없거나 한 번(4) > 수영을 배웠었다. 일국의 왕자가 넘실거리는 바닷속을 유영할 일이 뭐가 있어 그런 것을 배우느냐 하겠지만, 믿을 수 없게도 그럴 일이 정말 있었기 때문에 배웠다. ‘무슨 생각으로 그 바다에 뛰어드셨습니까. 무섭지도 않으셨습니까.’ ‘무서웠어.’ ‘그것 보십시오. 바다는 정말 무서운 곳입니다. 큰 왕자님께서 그냥 계셨어도 작은 왕자님은 제가 안전하게 구해내어······.’ ‘바다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 카스트린 경.’ 감기를 떨치고 일어나기가 무섭게 테일란을 찾아가 수영을 가르쳐달라 졸랐다. 여전히 차디찬 바다에 다시 들어가서 눈을 뜨는 법과 떠오르는 법, 움직이고 숨을 쉬는 법을 알려달라고 매일 매일 부탁을 했다. ‘그럼 무엇이 무서우셨습니까.’ 감기가 심해진 탓에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고는 했지만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감기에 다시 걸리는 것은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끝을 모를 깊은 물도, 무엇이든 집어삼킬 것처럼 몰아치는 파도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손을 놓칠까봐. 내가 내 동생을 놓쳐버려서 영영 잃어버릴까봐. 나는 그게 무서웠어.’ 정말 무서운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을 배웠으니까. 절대로, 같은 일을 또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 저벅, 저벅. 아리안느를 돌려보내고 이 왕궁에서 가장 거대한 이가 있을 곳으로 향하는 길에 문득 오한이 들었다. 날은 이렇게나 맑고 더운데 그날의 깊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길을 잃고 잠겨드는 기분이 들어서 소름이 돋았다. 물론 그 날의 일은 지금의 체이스가 겪은 기억이 아니었다. 하지만 체이스에게 있어 그것이 언제 겪은 일이었는지에 대한 사실은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그 때의 체이스는 베른의 형이었고, 지금의 체이스는. ‘하지 마. 평생.’ 어쩌다보니 그에게 이런 말까지 들어버렸지 않나. 체이스는 분명 베른의, 그리고 칼리안의 형이었다. 그것 하나가 제일 중요했다. - 달칵. 데블란의 거대한 집무실은 냉엄하고 차가웠다. 체이스의 기억 속에서는 항상 시끄러웠고 웃음소리가 났으며 키리에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던 소소하고 따뜻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감기가 잘 낫지 않나 봅니다.” 특별한 용건 없이 데블란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데블란의 건강을 입에 올린 것도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블란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로 왔는지를 묻거나 웬일로 이렇게 찾아왔는지를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감기에 좋다는 약을 보냈는데,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약을 쓸 필요가 없어 돌려보냈다. 이러다 나을 테니 그리 신경 쓰지 말거라.” 데블란은 하나 뿐인 아들이 건네는 약에 무엇이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확신을 했기 때문에 체이스의 약을 거절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회복을 위한 약이 아니라 그 반대를 위한 것이리라는 의심 가득한 확신. ‘아들이 보내는 약은 믿고 삼키지도 못하십니까.’ 아들은 믿지 못하면서. 언제 돌변하여 심장에 칼을 꽂을지 모를 반역자의 핏줄, 텐실의 치유사들에게는 목숨을 맡겨도 좋다 여기다니. 이런 생각을 한 체이스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우스워도 웃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힘든 것을 참는 얼굴로 소리 없이 웃었다. “네가 유난히 이렇게 나에게 신경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 쇠 긁히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체이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그런 것을 두고 유난히 신경을 쓴다 말하기보다는 자식이 아버지를 걱정한다 이야기합니다. 제가 약을 보낸 것에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있겠지.” 그렇게 말한 데블란이 체이스를 향해 살짝 웃었다. “내가 너를 믿는지, 불신하는지. 그것을 확인하려 보낸 것을 두고 어찌 걱정이라 하겠느냐.” “들켰군요, 제가.” 체이스가 마주 웃었다. 이 얼마나 사이 좋은 부자 관계란 말인가. “너를 가르친 것이 나인데, 알아보지 못할 리 없지.” 밭은기침을 한 데블란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체이스 역시 별 것 아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감기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거라.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을 터인데 괜한 걱정거리까지 생길까 우려되는구나.” 경고. 린 후작이 최근들어 갑작스럽게 텐실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것과 체이스가 데블란의 감기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의 상관관계를 직접 언급하는 대신 건네는 경고. 그렇게 나서다 괜한 ‘걱정거리’ 만들지 말고 신경 끄라는 의미의 경고였다. 체이스에게 걱정거리가 될 이가 체이스 스스로일지, 린 후작일지, 아리안느일지, 혹은 먼 곳에 있을 어떤 막내왕자와 그의 치유사일지는 언급하지 않은 채 이렇게나 평화로운 경고를 전했다. “사실 감기라는 것이 그렇지 않느냐. 때에 따라서는 독해지다가 어느 순간 씻은 듯이 낫기도 하니. 네가 그리 염려할 필요 없다.” “그렇습니까.” 독한 감기가 어떤 식으로 번져가는지 직접 겪었던 이는 지금의 체이스가 아니었다. 때문에 체이스는 남의 일을 이야기하는 정도의 표정을 한 채로 간단히 대답한 뒤 말을 이었다. “그러고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때에 따라 독해지기도 하는 병은 맞는 듯 합니다. 카이리스의 3왕자도 감기 때문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일주일을 앓았던 적이 있다 하였으니.” 데블란은 체이스의 소매 속에 감추어진 팔찌에 대해 아직 몰랐다. 그것을 확신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데블란이 팔찌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체이스의 필체를 흉내내어 칼리안에게 보내는 수고로운 헛짓거리를 하지 않았을 테니까. 편지를 보내자마자 들킬 것이 분명한데 무엇하러 그런 일을 벌이겠는가. “카이리스의 3왕자라.” 그러니 데블란은 체이스가 갑작스럽게 그 이름을 들고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겠으나,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네가 만나러 갔던 그 아이 말이더냐.” 체이스의 카이리스 방문 사유는 분명 ‘앨런 마나실’이었다. 왕궁에 머무는 동안 가장 많이 독대한 것은 앨런이었고 그 다음은 르메인이었으며 그 뒤에는 플란츠였다. 정작 그 아이는. 단 두 번을 따로 만났을 뿐이었다. 오로지 그 아이 하나를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찾아가 단 두 번을 만났다. 마음껏 어르고 달래주지도 못한 채 단 두 번을 만났다. 그리하였음에도 데블란은 체이스가 굳이 만나려 한 것이 칼리안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네, 전하.” 체이스는 부정하지 않은 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데블란이 생각이 맞다 대답했다. “제가 굳이 만나러 갔던 그 아이 말입니다. ‘베른’이라는 이름의.” 기억나십니까. 돌아가신 왕비님과 함께 지으셨다던 이름 말입니다. 왕비님의 기원을 담은 선물이었으나 결국은 전하께서 건넨 저주가 되어버린 바로 그 이름 말입니다. 채 내뱉지 못할 말을 담아 데블란을 쳐다보던 체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해드린 약을 의심하실 필요는 없다는 말씀을 드리려 왔던 것이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안그래도 피곤했다는 듯 데블란이 이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체이스는 간단한 예를 보이며 인사를 전했다. “그럼, 쉬십시오. 아버지.” 탁해졌던 갈색의 눈빛이 본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온 몸에 새겨넣듯 바라보면서. * * * - 미안합니다. 연락이 온 것을 보았는데 곁에 아리안느도 없고 카스트린 경도 없었어서. 늦은 시간에 연락을 보냈던 것은 칼리안인데, 연락을 받지 못한 사람이 사과를 전해왔다. 테일란이 린 후작과 아리안느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분명 전해듣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리 늦은 시간에 연락을 보내면 확인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깜빡 놓치고 말았다. - 시간을 확인하지 못한 제 탓입니다. 팔찌의 빛이 줄어들고, 전해져오는 연락을 쉽게 눈치채도록 약한 전기를 내고, 왕궁에 있는 칼리안에게 언제든지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바뀐 대신, 팔찌에 담아놓을 수 있는 마력의 양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때문에 사용을 할 때마다 매번 테일란이나 아리안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을 가늠하지 못한 것은 분명 칼리안의 잘못이었다. 칼리안은 그것을 깨달은 즉시 통신을 끊었었다. 칼리안의 연락을 곧바로 알아차렸을 체이스가 계속 빛이 나는 팔찌를 보며 안절부절 못할까봐서. - 죄송합니다. 통신을 수신할 최소한의 마력도 없었을 체이스가 팔찌를 바라보며 얼마나 안타까워했을지 잘 알아서, 칼리안도 사과를 전했다. 파도 소리 말고 흘러 내려가는 물 소리 들으면서, 바다 비린내 말고 더운 여름의 풀과 흙 냄새 맡으면서. 바닷가 말고 달빛이 내리비치는 숲 속의 바위 위에 앉은 채로. - 칼리안 왕자가 무슨 일로 연락을 했을까, 그것이 너무 궁금한 마음에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용건을 알려달라는 소리였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체이스는 일부러 늦은 시간이 되기를 다시 기다려 연락을 취했다. 칼리안을 배려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데블란을 만난 이후 연락을 취하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칼리안의 목소리를 들은 뒤 데블란을 만나 이성적으로 굴기 어려울 것 같았다고 해야 맞을 일이다. - 지그프리드의 땅에 머무는 새들을 물려달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공작이 곧 움직일 예정이라, 함께 잡혀들까 우려되어서요. - 아. 그 일이라면, 이미 그렇게 하라 전해 두었습니다. 내 생각에 아무래도 칼리안 왕자가 새들을 좀 잡을 것 같아서. 어차피 나중에는 카이리스에 있는 새들을 다 돌아오게 할 생각이니 미리 빼 두어도 이제는 상관이 없고. 이미 조치를 끝냈다는 말이었으므로,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 제 생각을 다 읽으셨습니까. - 플란츠 왕자에게 상황을 전해들었다고 해야 맞을 겁니다. 칼리안 왕자가 마나실 경을 잡으러 갔다 하니, 누굴 만나 어떤 부탁을 할 지 알 것 같았습니다. 플란츠. 앨런을 붙잡으러 갔던 것까지 체이스에게 말했단다. 앨런이 남쪽에 갔으리라는 것을 똘똘한 완두콩이 예상해낸 것은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덕분에 연락이 닿지 않았음에도 빠르게 새들을 물렸다 하니 좋기는 한데, 이 파릇파릇한 놈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을 전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조금 당황했다. - 아······ 네.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일에 지장이 있으신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당황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해 버린 칼리안이 실소했다. 생각해보니 웃긴 일이 아닌가. 내 나라에서 남의 나라 세작을 물렸다는데, 일에 지장이 있느냐며 걱정을 해주는 꼴이라니. - 새들의 수가 많이 줄어서, 안 그래도 지그프리드령에서는 나와 있도록 하려던 참이었으니 괜찮습니다. 어차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대충이나마 기억을 하고 있기도 하고, 기억이 나면 나는대로, 나지 않으면 나지 않는대로 지내면 됩니다. 그러다 정 궁금한 기밀이 있으면 칼리안 왕자에게 물어보면 될 테고. 체이스는 한 술을 더 떠서 이렇게 말했다. - 저는 안 알려 드릴 겁니다. - 그럼 플란츠 왕자에게 물어보면 되겠군요. 비밀이 없는 사람이던데. 플란츠. 대체 무슨 소리를 했던 거야? 이쯤되니 플란츠가 체이스에게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좀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때, 마치 칼리안의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것 같은 체이스의 말이 들려왔다. - 혹시나 싶어 말해두지만, 플란츠 왕자가 굳이 나에게 직접 말하고자 했던 일이었으니 칼리안 왕자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을 겁니다. 하.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은 칼리안이 애써 웃음을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 많이 친해지셨는지 물어보았을 때 절대 아닌 것처럼 이야기를 했었는데. 많이 친해지신 것 같네요. 두 분. 마음이 복잡하다. 정말 복잡하다. 좋아할 수도 없고 싫어할 수도 없고, 안타깝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슬프다가 황당하고 당혹스럽다가도 당연한 일인가 싶기도 했다. - 생각이 깊고, 사고가 빠르고.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체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체르밀 궁에 들어갈 수 있을 위조 허가증을 만들었던 일은 이미 잊은 것처럼 플란츠를 입에 담았다. - 무엇보다, 칼리안 왕자를 많이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서. - 저를 걱정한다기보다는,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사실 저도 잘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는데, 저한테 그렇게 해주는 이유는 더 모르겠네요. 모르겠다는데 어쩌겠나 싶어서, 체이스는 그냥 고개만 절레절레 가로젓고 말았다. 아무튼 체이스 역시 플란츠를 그 이상 칭찬해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플란츠에 대해 더 말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 그나저나, 이제 나도 마나 다루는 법을 한 번 배워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마나 말씀이십니까. 다른 사람 얘기 말고, 체이스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칼리안이 제일 걱정하고 있을 사람은 플란츠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 네. 아무래도 평생토록 아리안느나 카스트린 경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 말을 한 체이스도 웃었고 칼리안도 웃었다. 결국은 마주보지 못한 채 이렇게 목소리나 주고 받으며 평생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들어간 내용이라서 그냥 둘다 웃었다. 세렌티를 찾아가 소리 높여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니 웃기만 했다. 그렇게 웃던 칼리안이 대답했다. - 나쁘지 않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카스트린 경에게 배우고 계시니 어느 날 오러를 만들게 되실지도 모르겠네요. - 아무리 스스로가 이미 오른 길이라 해도 너무 쉽게 말하는 것 같은데요, 칼리안 왕자. - 제가 그랬습니까.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다시 한 번 체이스에게 전해졌다. - 하지만 정말로, 미리 배워두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기사들 역시 마나 다루는 법을 배운다. 언젠가 검의 길에 오르게 되면 오러를 쌓아야 하니 그것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마나 다루는 법을 배워놓는 것이다. 그러다 자신이 마나를 다루는 재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검까지 놓는 기사들이 간혹 있었다. 칼리안으로서는 그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본인들이 그리 회의감을 느끼고 포기하는 것에 간섭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지금 마나 다루는 법을 좀 알려줘볼까 하는 생각을 했던 터라서. 신기하네요.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마나 다루는 법을 알려 줄 생각이라는 소리임을 체이스는 알아들었다. 굳이 말 가운데 ‘플란츠 형님’이라는 단어를 넣을 수도 없고, ‘플란츠 왕자, 2왕자’ 라고 하기에도 어려워서 되도록 그 이름을 빼고 이야기하는 중임을 알고 있었다. 그 점은 체이스가 간섭해가며 정정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체이스는 그냥 조용히 대답했다. - 플란츠 왕자에게 마나를 알려주려 했다는 말입니까. - 네. 그렇게 하려고요. 아마 오늘 칼리안이 무슨 생각으로 숲에 오라 했는지 알았다면 플란츠가 그것을 지옥의 초대장이라 여기지는 않았을 터였다. 뭐, 물론 만난 김에 겸사겸사 대련을 할 생각도 당연히 있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체이스와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있는데, 레이븐을 앞세운 백마 한 마리와 그 위에 앉아 있는 완두콩 하나가 보였다. 자신을 대신해 플란츠를 이곳까지 데려온 레이븐을 칭찬해준 칼리안이 체이스와의 대화를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셨습니까.”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 말에서 내리는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제가 오늘은 재밌는 것을 알려드릴 겁니다. 매일같이 연습하셔야 하겠지만 재미는 있을 겁니다.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해주십시오.” 플란츠가 말 없이 칼리안을 쳐다보다 말했다. “무슨 약속.” 한동안 그런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왜 알려드리는지, 이번에는 넘겨짚는 것도 하시면 안 됩니다.” 칼리안의 마나, 베른의 오러, 지금의 칼리안이 지닌 오러. 전부 비교해 가며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것을 왜 보여주려 하는지. 마나 다루는 법을 왜 알려주는지. 칼리안 없이 혼자 마나를 쌓아가며 연습하는 법을 왜 벌써 알려주려 하는지에 대해 절대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소리였다. < 제37장. 없거나 한 번(5) > 그날, 그 밤이 오기 조금 전. 적어도 에반 브리센 후작보다는 똑똑할 것이 분명한 레이븐이 자신만을 위해 길러낸 당근을 먹고, 히나를 찾아간 루시가 잘 손질해서 말린 닭고기를 얻어내고, 히나와 함께 있던 키리에가 루시를 쓰다듬어 보려다 긴 꼬리에 얻어맞았을 그 즈음. 민트차를 한 번 마셔보겠다던 아리안느가 인상을 찌푸리며 사람이 이딴 것을 대체 왜 먹느냐 화를 내고, 그것을 본 테일란이 웃으며 민트 향을 음미하고 있을 그 때. 체이스가 데블란의 집무실에 들어가고, 오찬을 마친 플란츠가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있었을 딱 그 무렵. - 달칵. 작은 소리와 함께 찻잔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주 앉아 있던 드미레아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신경쓰지 않은 채 큰 소리로 터진 웃음이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아······ 웃어서 미안해, 드미레아.” “에반 브리센 후작의 무례한 언행을 전해드렸는데 웃음이 나오십니까.” 정색한 얼굴의 드미레아가 이렇게 묻자, 간신히 진정하려던 칼리안이 또 웃었다. 방금 전에 사과를 했으면서도 참을 수 없을 만큼 계속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왕자님······.” 숨이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쉼없이 웃는 칼리안을 얀이 한 번 불렀다. 만약 아르센이었다면, 혹은 플란츠였다면. 재밌어서 웃느냐고 칼리안에게 직접 물어보는 대신 얀을 쳐다봤을 것이다. 그 후 얀의 얼굴에 지금처럼 걱정 가득한 기색이 가득한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을 터였다. 칼리안의 웃음을 많이 겪어보지 못한 드미레아를 향해 얀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것을 본 드미레아가 아주 살짝 눈살을 찌푸리다 입을 열었다. “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드린 적 없습니다. 제가 겪은 불쾌한 일에 대해 말씀드렸을 뿐인데요.” 이 대단한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이 왕자의 기분을 신경쓰거나 왕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져가며 눈치를 볼 사람은 아니지 않나. “아, 미안. 내가 너무 웃었지.” “네.” 게다가 칼리안의 웃음이 길어지는 만큼 자신의 마음이 언짢아지고 있다는 것을 숨길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일이 좀 틀어진 것이 재밌어서 웃었어.” 드미레아가 한 번 더 미간을 찌푸렸다. “일이 틀어져서 웃으시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이 재밌다는 이야기도 이상합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네요.” 드미레아는, 살가운 것은 얀에게 전부 다 건네주고 얀에게 없는 무뚝뚝함을 다 가져온 것 같은 사람이었다. 루시가 유난히 멀리하는 키리에도 이 정도로 재미 없는 사람은 아닌데 사람이 어찌 이렇게 무뚝뚝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한 번 더 짧게 웃은 칼리안이 설명을 했다. “브리센 후작이 머리 좋게 움직이는 것은 평생 못 보겠다 싶기도 하고.” 이렇게 조각조각 흘러나오는 칼리안의 말을 잠시 모아 본 드미레아가 물었다. “저 때문에 브리센 후작이 머리 좋게 움직일 일이 없어졌고, 그래서 왕자님께서 세워두셨던 계획이 틀어졌고. 그것이 재미가 있어서 웃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때문이라고 하면 내가 너를 탓하는 것 같잖아. 그런 말은 아니야.” 기적에 가까운 짜집기로 자신의 말을 추려낸 드미레아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어 보인 칼리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회의장에서 네가 한 행동을 탓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그런 취급 받았으면 당장 검부터 뽑았을 테니 오히려 침착하게 잘 대응했다고 생각해. 내 이름 판 것도, 잘 했어. 그렇게 써먹으라고 있는 이름이니까 필요하면 얼마든지 팔아먹어. 괜찮아.” 이 말에, 드미레아가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하느냐는 얼굴이 됐다. “탓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한 이야기 아닙니다.” 무엇 하나 허투루 넘어가지 않는 드미레아의 말에 칼리안이 다시 웃었다. “그래.” 지금 드미레아는, 에반이 칼리안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으니 그 일에 대해 칼리안이 알아야 할 것 같기도 했고 아무래도 지그프리드에서 한바탕 화풀이를 할 것 같았던 분위기를 보였던 앨런 때문에 그 뒷일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도 확인할 겸 체르밀 궁을 찾은 참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 날 먹은 바나나 값은 다 갚았던가.” “네. 바나나 값은 갚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두 가지 용건을 해결하기도 전에 이렇게 진지하게, 지그프리드 저택에서 칼리안을 보호해 준 값을 아직 다 치르지 못했으니 ‘내 정혼자인 칼리안 왕자님에 대한 불명예’ 운운하며 팔아넘겼던 이름 값을 무엇으로 제하면 될지를 함께 계산해보기 시작했다. “그럼 그 때 내 형님이 지냈던 숙식비를 제한 셈 치면 되려나.” “이름 한 번에 2왕자님 숙식비를 전부 제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얼마 안 드시잖아. 제대로 주무시지도 않았다며. 그 정도면 될 것 같은데.”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칼리안이 먹어치운 바나나 값과 멀쩡히 눈 뜨고 있던 플란츠가 쓴 값을 비슷하게 계산하는 태도에 드미레아가 피식 웃었다. “네. 그 정도로 셈해 드리겠습니다.” 그 날 세워 준 방패 값이며, 칼리안을 대신해 감시하고 있는 기사단이며, 그레이 브리센을 대신할 변경백 후보를 물색하는 것이나 이번에 하고 나간 티아라 값 등등, 칼리안에게서 받아내야 할 것이 아직도 수두룩하게 남았으니 그 정도는 그냥 넘어가주어도 좋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너그러움이었다. 드미레아가 오면 언제나 그렇듯 한 자리 떨어진 곳에 함께 앉아 아무 말 없이 있던 얀이 못말린다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꽃 같은 왕자님이 필요하다 하면 전부 다 퍼줘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따박따박 계산해가며 거래를 하는 것이 영 못마땅한 듯 했으나, 그렇다 해서 둘의 대화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래, 그럼 그 계산은 끝났고.” 그런 얀을 향해 한 번 씩 웃어 보인 칼리안이 다시 본론을 꺼내들었다. “브리센 후작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할 지는 모른다는 말이지?” “네. 만나뵙고 싶다는 말만 전해달라 했습니다.” 에반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레이븐 갈기털보다 가벼운 에반의 주둥이가 회의장에서 말 실수를 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다. “전하께서 나를 생각해주신 것이 참 고맙기는 한데······ 이것 참.” 에반이 어떻게든 칼리안을 없애려 들어야 그것을 핑계로 칼을 댈 텐데, 르메인이 너무 강경하게 나와버렸지 않나. “기껏 긁어놓은 공도 없이, 후작이 이번에도 몸을 사리려 들게 생겼네.” 이리 저리 땅 위를 흘긋거리다 쏙 들어가버리는 봄날 두더지처럼 말이다. 라임 조각과 민트 잎을 넣은 탄산수를 한 입 마신 칼리안이 눈을 내리뜬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얀. 나 단 것 마시고 싶어.” 얀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산딸기 청이 들어왔던데, 그것을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 그냥 꿀 차 마실래. 꿀 많이 넣어 줘.” 드미레아와 함께 있을 때, 칼리안은 되도록 얀을 시종으로 부리지 않으려 했다. 마시던 차를 두고 굳이 다른 것을 가져다 달라 했던 적도 없었다. “네. 가져다 드릴게요.” 얀은 그 이유를 묻지 않은 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 뒷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칼리안은, 문이 닫히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드미레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내일 쯤 대련이나 할까? 시간 괜찮으면. 오늘은 저녁에 내 형님께 뭘 좀 알려드려야 될 것 같은데 그러려면 오늘은 오러를 아껴야 하니까, 내일 쯤.” 본래 약속했던 날짜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아니다. 내일은 내가 란델 형님도 좀 뵙고 변경백에게도 다녀와야 할 것 같다. 그냥 모레 쯤이면 어떨까. 드미레아. 이것저것 많이 알려줄게.”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드미레아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갑작스럽게 먼저 대련을 언급하는 칼리안의 태도가 어딘지 미심쩍었던 탓이다. “오라버니도 일부러 나가게 하시더니 중간에 마음을 바꿔가며 일정을 급히 정하시고. 생각이 채 정리되지도 않은 상태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칼리안은 확실한 이야기 없이 생긋 웃기만 하더니 또 다른 이야기를 했다. “아, 그리고. 브리센 변경백 자리 대신할 사람을 조금만 빨리 찾아봐 줄 수 있을까?” “왕자님.” 말에 대한 대답 대신 칼리안을 부른 드미레아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려놓았다. - 탁! 꽤 큰 소리를 낸 그것은,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고운 티아라였다.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이 드미레아를 ‘세자의 정혼자’로 보이기 위해 내어놓은 것이었다. “음. 드미레아.” 티아라를 내려다보는 칼리안이 장난스러운 말을 건넸다. “우리 벌써 파혼하는거야?” “무덤 파시는 분 정혼자 자리에는 관심 없습니다.” 칼리안이 왜 웃었는지, 웃는 모습에 기분 나빠하는 것을 얀이 왜 말리려 했는지를 이제야 눈치 챈 드미레아가 이렇게 대답한 뒤 말을 이었다. “변경백을 만나고 새 변경백을 정하고, 갑자기 검을 알려준다 하시는데······.” 그렇게 말한 드미레아가 손가락을 들어 창 밖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에반 브리센 목을 직접 치실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만. 아직 이르지 않습니까.” “자세히 알려주기는 어렵지만 일이 좀 꼬였어, 드미레아. 브리센 후작이 무덤 파주기를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도 안 될 것 같고. 마냥 기다리자니 큰 뱀 사냥을 가야 할 일이 생겨서, 내가.” 너희 아버지한테 도와달라 말도 했었지만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멀리 계신 어떤 분이 뱀 사냥을 하신다 하는데, 그 분은 그 뱀이 어떤 뱀인지 잘 모르시거든. 조심한다고 하면서 살짝 들춰보다 물리실 것 같아서 내가 나서야 해. 그런데 그러려면 손 많이 가는 죽순 알맹이 묶어놓은 것부터 좀 풀어놔야 하거든. 그래서 그래. 어차피 순서는 중요하지 않은데다 항상 틀어지기도 해서 이제는 좀 익숙하기도 하고.” 칼리안의 애매한 말을 이해하기를 포기한 드미레아는 그냥 자기가 할 말을 했다. “에반 브리센은 강합니다. 그 자의 오러를 볼 수 있다 해서 검술까지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에반 브리센 건드리면 왕자님 죽습니다.” “아, 그거 내가 맨날 했던 말인데.” 칼리안이 또 웃었다. “나도 그렇게 안 약한데. 그리고 나 안 죽어.” 아무리 칼리안이라지만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제 몸 던져넣을 생각 한 적 없었다. “나 이렇게 만드신 분께서 이런 일로 죽으라고 보내진 않은 것 같아서, 아마 이번에도 잘 살려두실 거야. 지우면 지웠지 죽게 둘 것 같지 않기도 하고. 아무튼 그래.” 아까부터 왜 자꾸 멍멍이 오라버니 같은 소리를 하는거냐 하는 얼굴로 칼리안을 보던 드미레아가 한 번 더 칼리안을 말리려 했다. “죽지 않는다 해도 크게 다치실 겁니다. 다치지 않는다 해도, 후작을 살해한 죄에 대한 책임이 따를 겁니다.” 그것은 칼리안도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가늠했고 각오했고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마쳤다. “안 다치면 뱀 잡으러 가고, 다치면 뱀한테 못 가고. 갇히면 그 핑계로 뱀한테 안 가면 되겠네. 뒷일은 형님께서 알아서 하실 테니까 그것도 괜찮아.” 대체 그 뱀이 무엇인지, 대체 뭔데 그러는지 물어보아야 돌아올 대답이 없음을 안다. 다른 말을 더 해 보아야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드미레아가 한숨을 쉬었다. 설득을 포기한 것이다. “······ 모레 오후에 오겠습니다. 대신.” 어차피 통하지 않을 만류의 말을 더 건네는 대신,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드미레아가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티아라를 집어 다시 품에 넣었다. 그리고 살기 어린 얼굴로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오라버니한테 같은 일 또 겪게 하시면 제가 왕자님 죽여버릴 겁니다.” 알았으니까 무섭게 말하지 마, 하고. 꿀차 기다리는 칼리안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드미레아. 나는 잘 살아야 해. 그러니 걱정 마.” * * * 시디 신 귤.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던, 절대로 잊지 못할 그 푸릇한 귤 향이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숲에서는 녹음 짙은 풀 향이 났는데 코 끝에서는 신 귤의 향이 났다. - 넘겨짚는 것 까지만, 하십시오. 확신하지 말고. 한 글자도 잊히지 않고 기억나는 그 말. 자신이 홀로 보냈던 시간의 일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신 귤을 건네주면서. 그렇게 건넸던 말. - 플란츠. 당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으니까. 유난히 향에 민감한 플란츠였고, 또 유난히 눈치가 빠른 플란츠가 아니던가. 그래서, 무언가를 알려줄 예정이지만 이유는 절대 넘겨짚지 말라는 칼리안의 말에 곧바로 신 귤의 향이 떠올랐다. ‘같은 말 때문인지, 같은 얼굴 때문인지.’ 미간을 찌푸린 채 칼리안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플란츠가 긴 숨을 들이쉬었다. 여전히 귤 향이 난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미친놈이 또 뭔가를 짊어질 생각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넘어가달라는 말을 한다. 그것을 그냥 들어주어야 할지. 아니면 싫다고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칼리안이 다시 말을 했다. “말 안 들으시는 형님 말고, 말 잘 들어주시는 착한 형님이 필요해서요. 지금은.” “짖지.” 버릇같은 헛소리에 버릇같은 말대꾸를 한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리며 칼리안을 쳐다봤다. 평소 지어보이던 장난끼 가득한 웃음 대신, 앨런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아우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데 그러느냐고. “이름이요, 형님.”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름 불러주시면 안됩니까. 그게 더 듣기 편한데요. 지금은.” 아. 쟤가 미쳤나보다. 이름 불러달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은데 알 면 안 된다 하니까 그 쪽으로는 생각 안 하기로 하고, 아무튼 쟤가 오늘도 또 돌아버렸나보다. 그래서 신 귤 냄새가 이렇게 팍팍 났나보다. 미친놈이 짖다 짖다 처돌아서 나까지 처돌아버릴 것 같은 짓을 또 꾸미나본데, 그렇다면 같이 처돌아주는 것이 형님으로서의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짧게 생각을 마친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싫은데.” 없거나 하나 있는 저 놈 인내심이야 바닥이 나든 말든. 루시 발바닥같은 색의 입술 한쪽이 길게 말려 올라갔다. < 제37장. 없거나 한 번(6) > “······ 환장하겠네.” 뭔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싫다는 소리인지, 넘겨짚지 말라는 것이 싫다는 소리인지, 제 입으로 이름 부르는 것이 싫다는 소리인지, 그것들 전부 다 싫다는 소리인지 고민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그냥 내가 환장하겠다. 돌다 돌다 처돌아도 나 하나만 돌겠다는데, 눈 떠보니 삶은 완두콩 한 알이 내 옆에서 같이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을 또 보게 된 이런 기분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 마땅한 말이 없다. “제가 이런 말씀까지는 안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도대체 득이 될 것이 뭐 있다고 옆에서 자꾸 같이 돌겠다고 하는지도 모르겠고 저 놈이 자꾸 같이 도는 바람에 내가 못내 환장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카이리스에서 제일 비싼 실크로 곱게 포장한 루시 응가를 선물받은 기분인 것 같기도 하고. “형님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우리 언제 만난 적 있었니. 혹시 내가 언제 너 때렸니. 피망 준 게 그렇게 싫었니. 너 대체 나한테 왜 이러니. “정말······ 왜 이러십니까.” 플란츠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감싼 채 이야기하는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또 참는다. 주변에 보는 눈도 없고 제 눈에 뵈는 것도 없으니 잘됐다 원수같은 빗자루 이 참에 그냥 죽여버리자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또 참는다. 화를 억누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낙엽 지듯 바스락거리는 목소리로 얌전히 묻기만 했다. 왜 이러느냐고. 그런 칼리안의 머리 꼭지를 말 없이 쳐다보던 플란츠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궁금해서.”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이름.” “칼리안입니다.” “말고.” “칼리안, 입니다.” 속사포처럼 오고 간 문답 끝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그걸 아는 새끼가.” 그걸 아는 새끼가 제 이름 확인시켜달라 했느냐고. 혼자 다 납득하고 이해하고 다 떠안겠다고 신 귤 냄새를 그렇게 풀풀 풍기면서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소리를 하는데 내가 네 놈 말을 듣게 생겼냐고. 나이도 이름도 몰랐는데 이제 알고 싶지도 않아진 눈 빨간 놈을 앞에 놓고 꽤 오랜만에 욕을 했다.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플란츠를 쳐다봤다. 내일은 날이 흐리려는지, 가느다란 달빛이 붉었다. 마음이 흐려졌는지, 칼리안의 눈도 붉었다. “······ 하.” 그 짧은 한숨 한 번에 세상의 모든 욕지거리가 들어있음을 알아들은 플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얘기 좀 하시죠.” 일방적으로 말을 전한 칼리안이 타박타박 앞서 걸어갔다. 할 말이 너무 많은 탓에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진작부터 저 놈과 얘기중이었음을 알면서도 이야기를 나누기 더 나은 곳으로 갔다. 멀지 않은 작은 개울 근처로 간 칼리안이 작고 낮은 바위 위에 털썩 앉았다. 마뜩찮은 얼굴로 서 있던 플란츠도 결국은 아무 바위 하나를 골라 앉았다. 그것을 보았으면서도 칼리안은 말 없이 물 소리만 들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 잘 도는 동생 둔 덕에 같이 돌게 된 형을 앞에 둔 채로, 잘 참는 형 둔 덕에 같이 참게 된 동생이 입을 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칼을 잘 씁니다.” 멀쩡한 목덜미가 욱신거리는 느낌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차갑게 가라앉은 숲의 공기 속으로 여전히 바스락거리는 칼리안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많았다는 말로 셈을 해내기 어려울 만큼 많이 베어 봤습니다.” 세크리티아와 카이리스 사이에 전쟁이 나기 전부터 베른의 생은 이미 그 자체로 전쟁이었으니, 전쟁을 겪었든 겪지 않았든 그 수가 많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 물론. 뺏은 적도 많지만 지킨 적도 많기는 합니다.” 가장 많이 지켜낸 것은 체이스의 목숨이었고 체이스가 아니더라도 꽤 많은 목숨을 지켜봤다. 칼리안이 된 이후에도 키리에와 히나는 물론이고 하다못해 앨런과 얀의 목숨까지 지켰다. 앨런과 얀은, 일반적으로 ‘지킨다’는 말과는 의미가 다르겠지만 칼리안이 살아있기 때문에 제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니 그들의 목숨도 지킨 것이 맞기는 맞을 터였다. “그런데 누군가를 살린 적은 딱 한 번이었습니다.” 이성이고 계산이고 다 때려치고 그냥 살린 사람. “살려야 할 이런저런 이유가 나중에 생각나서 붙여놓긴 했지만 그 때는 그냥 살렸습니다. 살려 놔야 할 것 같아서요.” 그것이 하필 플란츠였다. 그래. 하필, 플란츠였다. 하필 그 플란츠를 앞에 둔 칼리안이 세뉴 강으로 향하는 물소리같은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제 평생을 통틀어 없거나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그런 일을 벌인 그 날부터 제 일이 전부 다 꼬인 것 아십니까. 도무지 한 가닥으로 풀어낼 수 없을 만큼 전부 다 엉키고 뒤얽혔습니다. 지금까지도요.” 언제나 고요한 세뉴강으로 흘러가는 물같은 목소리인데, 그 안에 담긴 말은 결코 고요하지 않았다. 바람 가득한 날의 소나기보다 거셌다. 착실하게 잘 키워가던 발칸이며, 얻어낼 것 확실히 정해가며 차근차근 상대하려던 브리센과의 관계며, 때가 될 때까지 숨기려 잘 감춰뒀던 오러까지, 전부 다. 플란츠를 살려낸 그 때부터 꼬였다. 싹 다 꼬였다. “오러도 들키고 힘도 들키고, 형님 죽지 마시라고 제가 가지려던 발칸 드렸더니 저한테 기사단 주시겠다면서 심장 묶어놓고 오셨죠. 저는 저대로 그 문제 해결하려고 형님한테 기사단 도로 내어 드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좀 살아보겠다고 그레이 툭툭 건드렸다가 에반 때문에 일이 더 꼬였다. 그래도 일단 살려놓은 수박 테두리같은 저 놈부터 신경을 써야 해서 체이스에게 못할 짓까지 했는데, 저 놈이 제멋대로 팔찌를 손봐서 체이스에게 보내버렸다. “덕분에 이제는 피망 냄새도 못 맡겠습니다.” 피망 싫어하게 됐을 뿐 아니라, 세크리티아의 일에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되었다. 기어코. 기어코 세크리티아를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어놨다. 아무튼 플란츠가 끼어들어서 제대로 해결 된 일이 하나라도 있으면 말을 안 한다. 놈이 끼어들어서 일파만파 퍼진 일들 때문에 결국 목숨 걸고 에반 잡으러 가게 생겼다. 그러니 하늘 아래 얘만큼 원수같은 놈이 어디 또 있겠나 싶다. 그런 놈을 내 손으로 직접 살려놨으니 오늘도 속이 썩는 것이다. “개구리 먹으라고 가져다주는 루시 보는 기분입니다, 요즘.” 귀엽고 깜찍한 루시가 요즘 들어 뭔가를 자꾸 가져와서 너도 빨리 먹으라고 애옹거리지 않던가. 그게 뭔지 그리 궁금하지 않은 여섯 다리 달린 검은 것이라거나,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지 않은 들쥐 반마리라거나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지금 칼리안이, 루시의 보은을 받은 딱 그 기분이었다. 단어는 같은데 키리에의 가슴 아린 보은과는 영 딴판인 그런 보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그것도 엄청 팔딱거리는 싱싱한 개구리요.’ 하는 말을 굳이 덧붙인 칼리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제 말은······ 그 동안 제가 세렌티 말고 사람을 원망해 본 적은 없었는데 오늘은 원망이 좀 든다는 겁니다. 형님께요.” 누굴 살린 적 없었지만 이제 한 번. 사람을 원망한 적 없었지만 그것도 이제 한 번. “사는 게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분이 살고 싶다 하시기에, 한 번 살아 보시라고 살려드린 내 형님께서 도대체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으시는지.” 왜 그러는지 묻고 있긴 했지만 사실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아서 더 환장할 것 같은 기분이 된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아직 어리셔서 그러십니까.” “······ 듣다보니 내 아우님께서 점점 짖기 시작하시는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말을 안 들으실 줄 몰랐던 것이 진짜 아쉽네요. 한참 자라나실 때라 그러나······. 게다가 무슨 고집을 그렇게 부리시는지도 모르겠고요. 사춘기가 원래 다 그렇습니까.” “이러다 체르밀에서 개 키우냐는 얘기 듣겠군.” “오늘은 말 길게 하시네요. 혹시 그새 철드셨습니까. 듣는 사람 생각도 하실 줄 알고. 그럴거면 개구리 주워오시지 말고 말이나 좀 잘 들어주시지.” “그만 좀.” 서로 주고 받는 듯 보이지만 결국 제 할 말만 하며 묘하게 이어지는 대화의 끝에서 칼리안이 짧게 웃었다. “아무튼, 살고 싶다 얘기하시기 전에 형님이 진짜 더럽게 말 안 듣는 분이라는 것부터 좀 알려주셨어야죠. 고민이나 한 번 해 보게.” 결국 플란츠도 피식 웃었다. 인내심이 바닥나긴 했는데 그래도 형 취급은 해줘야 해서 칼도 못 들고 몽둥이도 못 들고 결국 그냥 멍멍거리기나 해야겠다 하는 것 같아서. “말 잘 듣는 놈 필요하면 그냥 5층 가라고. 난 아니라고 말 했을텐데.” “무섭다니까요. 그 분이 어디 제 말 곱게 들어주실 분입니까. 올라갈 때마다 어디 숨겨둔 덫은 없나 살펴보기 바쁩니다.” 동생 맞나 싶은데 동생이 맞기는 한 놈에게서 친형 험담을 들은 플란츠가 대답 같은 냉소를 보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깨끗하지 않은 곳에 딱 세 번을 앉아봤다. 그 처음이 칼리안에게 살고싶다 말했던 그 날의 잔디밭이었고, 두 번째는 체르밀 궁의 호숫가였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오늘이다. 결국 죄다 칼리안 때문이다. “혼자 억울한 것처럼 굴지 말고.”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플란츠 식 도와주기에 말려들어 인내할 일이 많아진 모양이었으나,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칼리안을 만나는 바람에 옷이 흙투성이가 되지 않았나. 그러니 칼리안 혼자 억울할 일이 아닌 것이다. “제대로 말 해. 꿍꿍이.” 숲 속. 개울인지 계곡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물줄기 근처. 고개를 숙이고 잘 보이지 않는 물 속을 들여다보려 애써보던 플란츠가 그냥 고개를 들고 하늘을 봤다. 붉은 달을 올려다보는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제가 오늘 뭘 가르쳐드리려는지는 안 궁금하십니까.” “······ 사는 법 알려주겠지.” 역시나 제대로 알고는 있다. “그걸 아시는 분께서 꿍꿍이 말해달라며 이렇게 고집을 부리십니까.” 기가 막히다는 듯 건네진 칼리안의 말을 들은 플란츠가 여유롭게 대답했다. “어차피 내 아우님께서 잘 살려두실텐데.” 뭘 가르쳐주든 이번에는 안 배울 거니까 그냥 네 놈이 나 살려놓으라는 소리다. 세상에 이렇게 고약한 심보가 또 어디에 있을까. “형님 살려드려야 할 형님의 아우님이 자리에 없을지도 모르니 일단 배워두십시오.” 이 말에, 여전히 하늘을 쳐다보던 플란츠의 고개가 칼리안을 향해 내려왔다. “너.” 가늘게 변한 눈에 어린 의문을 본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안 죽습니다. 그냥 배워 두시라고요.” 웃기는 소리다. 안 죽을 거면 나중에 알려주면 될 일을 굳이 미리 배워두라는 것이 말이 안되지 않나. 결국 꾸미고 있는 일 잘못 될 것 대비해서 미리 가르쳐주겠다는 소리나 다름이 없다. “넘겨짚지 마시고, 그냥 한 번만.” 플란츠의 속을 훤히 들여다 본 칼리안이 생각을 막았다. “그냥 한 번만 제 말 좀 들어주시면 안 됩니까.” 한껏 가늘어진 눈으로 칼리안을 노려보다시피 하던 플란츠가 눈을 감았다. 오늘 칼리안이 했던 이야기 중 넘겨짚지 말라 했던 일 말고 다른 것들에 대해 잠시 생각을 했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로, 플란츠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 알았어.” 드디어 원망 한 번 들은 김에 고집도 한 번 접고 가르쳐주는 것을 배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대신. 개구리 말고 뱀.” 대신, 개구리 물어다 주는 루시 말고 뱀 잡는 빗자루 역할 하겠다는 조건을 붙였다. “네. 그 일은 도와주세요. 형님.” 레릭도 알아듣지 못할 말을 어김없이 잘 알아들은 대답에 플란츠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하도 동글동글해서 꺾일 곳 없어 보였던 완두콩의 고집을 드디어 한 번 꺾어 놓은 스스로가 대견하게 생각된 탓이다. “아, 힘들었다.” 완두콩도 이제 잘 다루니까 나 정말 어른 된 것 맞나보다. 이번 일 끝나고 나면 아버지랑 술 마셔야지. 카이리스 히몰리카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 * * 내일 날이 흐리려는지 하루종일 허리가 아팠다. 제대로 치료를 받아 완전히 나았는데도 이런 날이면 어김없이 허리가 쑤셨다. 잠을 자려고 누운지 한참이 되었으나 도무지 잠은 안 오고 허리가 아파서 결국 집사를 불렀다. 생각 같아서는 슈린츠 지방에 가서 그 따스한 온천물에 몸을 누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이 촌구석에서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어 화가 치민다. “변경백님 괜찮으십니까?” 부서진 것이 허리 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쓸모가 워낙 많아서 죽이지 않고 살려 두게 된 집사가, 보온 마법이 걸린 찜질용 수건을 허리 위에 덮어주며 말했다. “이것이라도 대고 계십시오. 혹시 다른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됐으니까 나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걱정이든 급여에서 우러나온 걱정이든 어찌됐건 걱정을 해서 건네오는 말이었으나, 그레이는 짜증스러운 대답만 했다. 아프다고 불러낸 것이 자신임을 잊은 것처럼. 집사 덕에 그나마 두 발로 온전히 걸어다니고 있는데다 소드마스터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도 무사히 숨길 수 있게 되었으니 그만한 은인이 어디있겠냐만은 브리센의 핏줄에는 애초에 그런 도움을 기억할 만한 머리도 없었다. 개구리 잡아다 주는 완두콩이 유난히 이상한 것이지, 브리센은 원래 다 그랬으니 말이다. “네. 그럼 쉬십시오, 변경백님.” 그래서 집사는 다른 말을 하거나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곱게 인사만 하고 밖으로 나갔다. 작게 문 닫히는 소리를 듣던 그레이가 엎드려 누운 채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빌어먹을 치유사 같으니.” 이게 다 말콤인지 뭔지 하는 그 거지같은 치유사 때문이 아닌가. 애초부터 놈이 제대로 치료만 했어도 먹구름 낄 때마다 허리 사이에 습기가 들어차는 그런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끙, 하고 한 번 더 앓는 소리를 낸 그레이가 상스러운 욕설을 더하며 몸을 돌렸다. “왜 엉뚱한 치유사 탓을 하나. 내 탓인데.” 그러다, 어정쩡하게 몸을 돌리려던 자세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이런 날을 대비해 베개 밑에 넣어 둔 칼을 꺼낼 생각도 못하고 소리 내어 누군가를 부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눈을 홉떴다. “조용히 죽은 듯이 살라 하였더니. 내 사람 하나 불러내서는 귀여운 짓을 꾸미려 했더구나, 변경백.” 그래. 마치 뱀의 눈을 마주한 개구리가 된 듯 뼛속 깊이 박힌 공포감에 온 몸이 굳었다. “감히.” 살짝 허리를 숙여 그레이와 눈을 마주친 칼리안이 만개한 꽃처럼 웃었다. < [외전] 시나스타 > 세크리티아에서도 꽃으로 장례를 치른대요. 낮에는 하얗고 동그란 꽃이었다가, 밤이 되면 별이 되어 날아가는 꽃이래요. 신기하지 않으세요, 형님? * * * 무결한 것이 독에 졌고 순수한 것이 독에 졌다. 잔혹하고 가혹하여 혹독한 일이다. 악독하고 지독하여 혹독한 일이다. 적막하다. 삭막하고 막막하다. 그리하여 결국 고독하다. 무엇 하나 지키지 못한 나는 지옥보다 고독한 사유에 잠겨 그저 홀로 고독하다. “플란츠.” 고독보다 지독한 향에 잠긴 나는. 이제야 홀로 남아 비로소 온전히 고독하다. “플란츠. 대답해야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일국의 왕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지 고작 일주일. 입에 담기에도 어려울 3왕자의 악랄한 계획으로부터 무사히 살아남은 왕비의 안녕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 하마터면 늦을 뻔했잖니. 그 아이가 마법을 배우는 것을 알았으면, 나에게도 말을 해줬어야지. 축하하는 것이 정녕 왕비의 안녕일지. - 네가 그 아이 눈을 가린다 해도 마법사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않았니. 혹은, 하마터면 시스파니안을 닮은 왕자가 마법사 연합을 등에 업을 뻔한 것을 잘 막아낸 일일지. -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단다. 플란츠. 그 누구의 발 밑에도 있지 못하여. 그러나 당신이 스스로 올라서기에는 가는 길이 번잡하고 험할 뿐이라. 나를 대신 앞세워 가고자 애쓰는 그 걸음의 끝. 그 곳에 과연 내가 있는지. 묻는다면. 그 끝에는 너 역시 없으리라는 솔직한 답을 해 줄까. - 그러니 늘 정신을 차리거라. 멈추어 서면 안된단다. 지독한 르니에리 향기 사이사이에 스민 피 냄새가 짙고도 짙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빼앗은 생명은 단 하나도 없을진대 어찌하면 이토록 역겨운 향이 나는지. 당신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그래서 이렇게, 날이 갈수록 짙어지는 향에 묻혀 사는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도려낸 피부에 소금을 얹어 둔 듯한 향기 때문에 손 끝이 아려와서, 아무것도 입에 넣지 못한 플란츠가 말을 뱉었다. “······ 악취가 나서.” 차르륵, 하고 부채를 펼치는 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플란츠의 말을 가리려는 것인지 아니면 표정을 가리려는 것인지에 대해 플란츠는 고민하지 않고 일어섰다. 에반의 얼굴이 실리케의 것만큼 굳어 있었고 상황 모르는 레넌은 자신의 옷에서 냄새가 나는지 조용히 킁킁거렸다. * * * 그 꽃, 시나스타라는 이름이래요. 저는 강물 따라서 바다로 가는 꽃 말고, 별이 되어서 하늘로 가는 그 꽃이 더 좋아요. 시나스타라는 그 꽃이 더 좋아요. * * * 어둠을 집어삼킬 듯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무엇 하나 비춰내지 않는 그 어두움이 플란츠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거절을 했다. - 하지만 왕자님.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면 놀라실 겁니다. - 나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레넌이 만약 그것이 무엇인지부터 이야기를 했다면, 플란츠는 그 대단한 선물을 절대로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묵빛의 금속이 어째서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지를 먼저 설명했다면. 그것이 하늘에서 떨어진 별의 조각이었음을, 별을 태우고 남은 재와 같아서 그 무엇도 비춰내지 않는 돌이었음을 먼저 이야기했다면. 그랬다면 오히려 반겨하며 받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와 달리 정말로 돌아있던 또 다른 한 놈을 만나지도 못했을 테지만. “경매에 직접 나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사실 3왕자의 죽음에는 의혹이 많았다. 그 누구도 그것이 타살이라 하지 않았으나 그 누구도 그것을 자살이라 여기지 않았다. 지그프리드. 그들을 제외하고. 3왕자와 아무런 관련 없는 코끼리들이 왜 나서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저 플란츠가 그 이유에 대해 막연한 추측을 했을 뿐이지만 플란츠도 정확한 사실을 알고 있지는 못했다. 알려진 것은 지그프리드가 한 명의 대마법사를 불러들였고, 그를 통해 마법사 연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일까. 다만 애석하게도 그 대마법사가 있던 나라가 카이리스가 아니었기 때문에 구심점 없이 모여들었던 마법사 연합의 진상 조사는 오래지 않아 별다른 소득 없이 마무리되고 말았다. “일부러 어려운 길을 골라 가시는 그런 취미는 언제부터 가지셨던 겁니까.” “입 닫아.” 겉으로 보기에만, 소득이 없었다. 르메인이 지그프리드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브리센을 한 번에 집어삼킬 수 있을 마법사 세력을 준비해나갔다. 또한 르메인은 남은 두 왕자가 서로 동요하여 불필요한 피를 보지 않도록 하겠다는 명목으로 두 왕자의 감시와 호위를 맡아 줄 마법사들을 체르밀 궁에 보냈다. 자신의 막내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고, 남은 두 아들을 모두 지켜줄 마법사들을 보냈다. 그 모든 정황을 눈 앞에 그리듯 눈치채고 있었으나 플란츠는 입을 다물었다. “바깥 나들이가 하고 싶으셨던 것이라면 굳이 그런 곳에 가실 필요 없습니다. 오러도 못 쓰시는 왕자님께서 운석으로 만든 검 들고 뭘 하시겠다는 겁니까.” 하지만 플란츠를 감시할 겸 호위할 겸 찾아온 파란 머리 마법사는 좀처럼 입을 다물지 않았다. “입 닫으라고 했는데. 마법사.” 레넌 브리센이 가져왔던 운철이 경매장에 올랐다. 에반은 이미 그보다 나은 오래된 검을 가지고 있었고, 플란츠는 선물 받기를 거절했었다. 그리하여 레넌은 그것을 경매에 올리며 온 대륙에 소문을 냈다. “나가시는 것은 위험하니 브리센 상단에 경매를 취소하도록 요구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그것이 별의 조각이라서. 단지 그 이유 하나로. “내가. 하겠다는데.” 자신의 손으로 얻어내겠다 고집을 부렸다. “······ 알겠습니다. 준비해서 모시겠습니다.” 그 아이에 대한 특별한 죄책감도 이제는 남은 것이 없다 여겼으나, 그냥. 별의 조각. 정말 그 이유 하나만으로. * * * - 왕자님 머리 색이 워낙 눈에 띄시니, 절대로 후드 벗지 마십시오. 암살자 붙으면 위험합니다. - 알아. 파란 머리 마법사 한 명을 데리고 경매장에 갔다. 그리고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마지막까지 들러붙던 놈이 하나 있었으나 플란츠는 카이리스의 왕자였으니 경매에서 질 이유가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플란츠는 그리 무모한 짓이 그것으로 마지막이리라 여겼었으니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이 맞았다.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시간이 지난 이후의 그가 훨씬 더 무모한 짓을 벌이게 되리라는 것을 몰랐으니까. “왕자님 머리 색이 워낙 눈에 띄시니, 절대로 후드 벗지 마십시오. 암살자 붙으면 위험합니다.” 물론 그렇게 찾아간 곳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주워 듣게 될 줄도 몰랐지만. “붙으면 죽이면 되지. 카이리스 새끼들 검술도 좀 볼 겸.” “왕자님. 말씀을 좀······.” “긁지 마. 안 그래도 짜증나니까.” 후드 아래로 언뜻 보이는 머리색이 말 그대로 워낙 눈에 띄었다. 때문에 그것을 본 플란츠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세크리티아 2왕자.’ 베른 세크리티아. 들리는 것이라고는 악명 뿐인 날 선 미친놈. “가지고 싶었는데. 별의 조각.” 그 놈을 만났다. 정확히는 플란츠 혼자 눈치챈 것이지만 그렇게 만났다. 그리고 스치듯 지나갔다. 플란츠는, 그것 역시 처음이자 마지막이리라 여겼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별빛을 닮은 그 머리 색이 기억 속에서 서서히 지워져갔다. 그리하여 더 이상 그 별빛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게 되었을 때 쯤. “이름 정하셨습니까.” 파란 머리 마법사가 이렇게 물어왔다. 사실 카이리스의 검사들은 자신의 검에 이름을 붙이길 좋아했다. 자신이 사용했던, 별자리가 세공된 그 아름답고 강인한 검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나의 파니’ 따위의 한심한 이름을 붙였던 하츠아라의 영향이 컸다. “검의 이름을 알려주시면 새겨드리겠다 합니다.” 물론 1년에 걸쳐 힘들게 조련한 자신의 검은 말에도 아직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플란츠는 검 같은 것에 이름을 붙일 생각을 한 적 없었다. “······ 시나스타.” 그러니 그것은 결코 플란츠답지 않은, 지극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시나스타.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검 한 자루를 더 만들 수 있다고 하는데, 나머지 한 자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그프리드에.” 어차피 두어 보아야 쓸 일 없던 나머지 한 자루의 검은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에게 보냈다. 왕가를 향한 복수를 원한다면 직접 오라는 의미를 담아서. 공작과는 다르다던 소공작 드미레아라면 복수를 위해 찾아올 것 같아서. 찾아온다면 얼마든지 받아주겠노라는 그런 의미를 담아서 보냈다. 그렇게 여러 날의 시간이 다시 흘러 여러 해가 지나갔다. 묵빛의 검에 이름을 붙이던 그때까지만 해도 미약한 생명의 기운을 품고 있었던 연두색의 눈은 그 사이 하루하루 메말라갔다.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으나 결국 그 모든 것을 막지 못하여서. * * * 밤이 되면 그 꽃은 하얀 별이 될까요? 파란 별이 될까요? 아니면 빨간 별일까요? * * * 사방으로 금이 간 연두색의 유리 구슬. 스러져 간 이들의 피 냄새보다 더한 악취가 자신의 손에서 묻어나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눈. 빛을 내지 않는 제 검과 그리 잘 어울리게 변해버린 두 눈을 지닌 이가, 기어코 제 손으로 저지르고야 만 참상의 앞에 섰다. - 누구 하나를 위해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 하여도 이것은 일방적인 침략입니다. 전하께서 그것을 잊지 않으신다면, 함께 가겠습니다. 그 어떤 이유를 들어 멋들어지게 포장하여도 비극은 단지 비극일 뿐이니. 천고를 보내도 용서 받지 못할 죄에 파묻혀 나락 속에 빠져든 연두색의 두 눈이 왕성 안에 세워진 첨탑의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그 위에 서 있을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을지. 그것을 잠시 상상해보던 빛 없는 눈이 조용히 감겨들었다 다시 열렸다. 멀리 선 파란 머리 마법사의 손이 마지막까지 버티던 한 명의 기사에게 진정으로 마지막을 고했다. 별빛을 닮은 긴 머리가 피웅덩이 속에 잠겨드는 것을 말 없이 지켜보던 미친 왕이 발을 옮겼다. - 저벅, 저벅. 거대한 하나의 무덤이 되어버린 세크레타의 땅을 밟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이미 숨을 멈춘 이의 앞에 섰다. 그 날의 짧은 기억을 되새기지는 않았으나, 그저. ‘가지고 싶었는데.’ 잊는 것을 잘 모르는 머릿속에 문득 그 날의 생각이 떠오른 탓에. 거대한 하나의 무덤 속에서 눈을 감은 기사의 시신 위에 자신의 묵빛 검을 올려놓았다. 이제는 너도. 이제는 나도. 필요치 않게 되었으니. 늦었지만 이제라도 양보를 해주겠노라고. 마지막까지 기사였던 왕제에게, 검을 잃어버린 기사에게, 검을 선물했다. 시나스타. 그래. 그런 이름의 검을. * * * 빨간색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를 닮은 빨간 별이 하늘로 날아가면 저는 정말 기쁠 것 같아요. 형님께서는 빨간색 싫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저는 저를 위한 꽃이 빨간 별이 되어 날아갔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저는. 어디에서든 어떻게든 행복할 것 같아요. < 제 38장. 그 검(1) > 당연히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근래 들어 보기 힘들었던 활짝 핀 얼굴로 어여쁘게 웃고 있는 3왕자의 손에 그레이의 허리가 부서졌다는 것을 말이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검의 길에 오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그레이가 기사 가문 출신이었고 때문에 검술의 수련에 있어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는 하나, 그 역시 소드마스터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상당한 고생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나 힘들게 얻은 힘을 일순간에 모두 잃었음에도 복수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3왕자 칼리안이었다.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곁에 서 있던 것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칼리안을 본 그레이가 아주 잠시동안 후회를 했다. ‘실리케가 경고했을 때 말을 들을 걸. 아니면 아예 카이리시스에 가지 말 걸.’ 이렇게 머리로는 후회를 하면서도, 몸으로는 재빨리 반응을 했다. 간신히 붙여 놓은 허리를 또 한 번 부서뜨릴 수는 없었으니까. 달궈진 검 위에 멋모르고 올라선 개구리처럼 펄쩍 튀어오른 그레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인사였다. “칼리안 왕자님을 뵙습니다.” “그래. 그래도 허리는 잘 붙었나보구나. 삐걱거리지는 않는 듯 보이니.” 브리센을 대면한 이래 가장 빠르고 가장 격식 있는 인사를 받은 칼리안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이제 잘 숙여지기도 하고. 요즘 치유술이 참 많이 좋아졌구나.” 그리고는 이렇게, 그레이 속 박박 긁어놓는 소리를 했다. 그레이가 지난 밤에 술을 입에 대지 않아 다행이었다. 만약 술에 취한 채 잠에 들었다면 저 말에 저도 모르게 살기를 내밀었을테고, 그랬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 목이 떨어져나갔을 테니 말이다. “텐실 신관을 만난 것이냐.” “네, 왕자님. 말콤 체티쉬라는 인물을 만나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름까지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귀한 정보가 술술 나온다. “말콤 체티쉬라.” 지금은 앨런에게 하사된 라트란 영지에 갔을 당시 칼리안이 도움을 주었던 바로 그 신관이 아니던가. 그레이의 단전은 완전히 조각난 채 부러진 허리만 말끔히 고쳐지게 된 숨은 사연을 이제야 알게 된 칼리안이 마음속으로 잠시 놀랐다. 칼리안은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부드러운 얼굴을 만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허나······ 괜한 짓을 하였구나.” 당장 봄바람이라도 불 것 같던 얼굴에 짙고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차피 다시 부러질 것을.” 이렇게, 참으로 어여쁘기만 한 그 입을 다시 움직여서는 그레이 인생에 회색 구름 잔뜩 몰려오는 심란한 말을 했다. - 내 사람 하나 불러내서는 귀여운 짓을 꾸미려 했더구나. 실로 다행스럽게도 에반이나 레넌보다는 아주 조금 더 머리가 좋아서, 칼리안이 찾아온 뒤 꺼냈던 말을 빠르게 상기하는 것에 성공한 그레이가 매우 억울한 얼굴을 했다. 두려움에 완전히 굳었던 몸이나 떨리던 목소리가 진정되었을 만큼 엄청 많이 억울했다. “제가 불러낸 것이 아니라······.” “변명은 되었다. 상황을 이미 다 알고 왔으니.” “저······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 그 마법사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였기에 이제껏 마법 수련하는 것 말고는 아는 것 없이 살아온 그 순한 마법사를 꼬여냈는지, 그것이 궁금하기는 하구나.” 순해요? 아니, 그래. 왕자님 앞에서야 순하디 순한 강아지겠지. 왕자님 눈에 안 순해보이면서 살아있는 사람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순하겠지. 순하니까 멀쩡한 허리로 살아 숨쉬겠지. 마차 한 대를 걸레짝으로 만들어 둔 그 순한 마법사의 퀭한 눈을 잠시 생각해보던 그레이가 질색한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쓰며 말했다. “왕자님. 얼마 전에 그 마법사가 저를 먼저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는.” “헌데. 먼 길을 왔더니 다소 피곤하구나. 간밤에 내가 다른 일을 좀 하기도 해서.” ······ 다른 일 뭐 하셨는데요. 누구 하나 땅에 묻어 놓고 오신 것은 아니리라고, 그렇게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해가며 표정을 관리하는 그레이를 보며 슬쩍 웃은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귀빈 맞이가 이렇게나 무례해서야. 앉을 자리조차 마련하지 않는 것이냐. 아무리 브리센이라지만 예절이 엉망이구나.” 무례요? 예절이요? 여기 제 침실인데요. 남의 침대 머리맡에 대뜸 찾아오셔서 제 허리 또 동강 낼 요량이라고 말씀하시는 귀빈께서 예절이라니요. 말이 좀 이상한데요. 아 그래, 피곤은 하시겠죠. 여기가 6층인데 여기까지 올라오시느라 더 피곤하시겠죠.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만들어 둔 성 외벽을 대체 어떻게 타고 올라오셨는지 몰라도 아무튼 피곤은 하시겠죠. 그래서 간밤에 누굴 묻어놓고 오셨는데요. 하고 싶은 말도 참 많았고 궁금한 것은 더 많았지만 그 중 어느 하나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그레이가 비척비척 움직였다. 허리도 시리고 마음도 시렸지만 말 안 들으면 이번에는 정말 사지를 잘근잘근 밟아버릴 것 같은 저 새빨갛고 형형한 눈빛 때문에 무엇 하나 제대로 말 못하고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를 빼 주었다. 변경백이 제 시종이라도 된다는 듯, 당연한 접대를 받는다는 듯한 태도로 그 자리에 가 앉은 칼리안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린 뒤 입을 열었다. “앉거라.” 결국 그레이는, 잠자리에 들었던 터라 바지 위에 셔츠 한 장만 껴입고 있던 자신의 가벼운 차림새에도 신경쓰지 못하고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 그레이의 얌전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꾸미려던 짓이 괘씸하여 만나자마자 밖으로 던져버릴까 다시 밟아버릴까 고민을 하며 이리 찾아왔는데.” 그레이 앞날에 먹구름 끼는 소리가 또 나왔다. 그러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오해를 어떻게 풀어낼 틈도 주지 않은 채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요즘 인내심이 좀 자랐으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마. 다만 또 그런 짓을 벌이면 그땐 나도 내가 어찌 할 지 모르겠구나.” 이렇게, 혼도 내고 용서도 해 주고 경고도 했다. 아. 이 얼마나 어른스러운 아량인지. “감사합니다, 왕자님.” 스스로 뭔가를 되게 뿌듯해하는 얼굴이라서, 그레이는 칼리안이 오해한 것에 대해 해명하는 것도 못한 채 진심을 담아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어차피 용서도 받은 김에 그냥 잠깐 억울한 것이 허리 또 부러지는 것보다는 백만 배 쯤 나을 것 같아서였다. “후작위에 오르고 싶더냐.” 덕분에, 곧바로 튀어나온 칼리안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만약 집사가 그레이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당장에 멍청하다는 둥 쓸모가 없다는 둥 지능이 모자라다는 둥 온갖 소리를 쏟아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험한 말은 잘 할 줄 모르는 칼리안은 그냥 그레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도록 조금을 기다렸다. “그것을 왜 물어보십니까.” “가지고 싶어하는 것 같아 보이는구나.” 아르센과도 이미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레이는 그 자리에서 아르센에게 후작위에 욕심이 있음을 알려 준 뒤 수도에 갈 준비를 착착 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플란츠의 손을 잡은 에반이 레넌을 찾아다 놓고는 그레이가 설 자리를 싹 없애버렸지 않았나. “네, 왕자님. 저는 텐실의 국경을 막은 채로 평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해 이 자리를 지키고는 있습니다만.” “특별히 잘 막고 있는 것 같지도 않던데. 텐실의 기사들이 국경 넘는 것도 묵과하지 않았더냐.” “묵과라니, 아닙니다. 그 일은 텐실의 국왕과 란델 왕자님께서 그들의 신분을 감추고······.” “묵과. 하지 않았더냐. 알면서도.” 그레이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란델 형님을 지지하던 너는 실리케가 내 어머니를 독살한 것을 묵과하였고, 레넌 브리센 자작이 나를 위한 독을 구해 실리케에게 전했던 것에 대해서도 묵과하였고, 브리센 자작이 신물을 빼돌려 란델 형님께 전달하려 한 정황도 전부 파악했으나 묵과하였고, 텐실의 기사들이 신관으로 위장해 국경을 넘는것도 묵과하였으며, 또한.” 잠시 말을 끊은 칼리안이 그레이의 눈을 응시했다. “내 어머니의 추숭에 화가 난 에반 브리센 후작이 나를 습격하려 한 정황을 알고도 묵과하였다.” 먹잇감을 내려다보는 뱀의 눈으로, 겁에 질린 채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마주 바라보는 개구리의 것과 같은 두 눈을 깊숙이 쳐다봤다. 그리고. “내 말이 틀리더냐.” 그래서 넌. 내 말을 알아들을 머리를 가졌는가. * * * - 제가, 자상한 왕자님, 혼내드릴까요? 칼리안과 숲에 다녀온 다음 날의 이른 아침. 제발 혼 좀 내 달라는 말을 얼굴 가득 새긴 채 히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이는 레릭을 무시한 플란츠가 대답했다. “됐어.” 칼리안은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순수한 대련이라고 항상 말하지만 그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칼리안과 대련을 하면 아르센은 늘 목젖을 찔렸고, 플란츠는 늘 목을 베였다. 그리고 키리에는 멀쩡했다. 그랬으니 그것이 감정 없는 대련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혼을 내 달라고 하면 진짜 그렇게 해 줄 것이 분명한 히나가 생긋 웃었다. - 상처, 치료 했어요. 지난 밤,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마력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기는 했다. 물론 그 방법을 말로 듣고 곧바로 마력을 슉슉 쌓아갈 수 있다면 당연히 좋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녹록했다면 빌헬름관에 있는 파란 머리의 마법사가 왕족을 상대로 그렇게 자존심을 지키며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르센이 아니더라도 기사들을 상대로 기민하게 잘 싸우는 마법사들이 사방에 널렸을 테고, 그랬다면 아르센은 급여 대신 목숨줄이 깎였을 테니 말이다. ‘하루에 한 번 씩 마력을 느끼고 다루는 것을 연습해가면서, 나중에 검의 길에 오르게 되면 쌓여 있던 마력을 오러로 전환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낯선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눈치 챈 것이 틀리지는 않았었는지, 칼리안은 플란츠에게 선물했던 묵빛의 검을 보며 짧은 말을 덧붙였다. ‘그 검, 본래에도 사용하셨던 검입니다.’ 검을 건넬 때에는 해주지 않았던 말. 본래에도 ‘형님’이 사용했던 검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 검을 가지지 못해서 얼마나 억울해 했었는지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때의 플란츠가 검의 길에 올랐었는지, 그 때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그런 것들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하세요. 고양이 키우시려면.’ 다만 오러를 담을 수 있을 그 검을 과거에도 사용했다는 것만은 알려주었다. 그 의미를 스스로 상상하고 스스로의 재능에 대해 좀 더 자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 이번에는, 좀 더, 깊이 베였어요. 두 분, 또 싸웠어요? 물론. 얼마나 억울했는지를 말하지 않았을 뿐. 가지고 싶던 것을 가지지 못했던 그 날의 기억 때문에 아주 조금 더 감정적이 되었을지 그렇지 않았을지는 칼리안만 알고 있는 사실일 터였다. “안 싸웠어.” 진짜 싸웠으면 살아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때문에 플란츠는 이번에도 역시 간단하게만 대답을 했다. 칼리안의 정체를 모르는 히나는 둘이 참 많이도 투닥거리는 형제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웃음을 보이며 플란츠의 맞은편에 앉았다. 히나를 빌헬름관까지 ‘호위’해 줄 키리에가 올 때를 기다려야 했던 탓에 시간이 조금 남아서였다. 보존 마법 덕분에 싱싱함을 잘 유지하고 있는 생딸기와 생크림이 올라간 비스킷을 한 입 먹은 히나가, 벽에 세워 두었던 묵빛의 검을 보다 손을 움직였다. - 좋은, 왕자님하고, 잘 어울리는, 멋있는, 검이에요. 오빠도 그렇지만, 좋은, 왕자님한테도, 꼭 어울리는, 검이라고, 생각해요. 별에서 떨어져 나와 모든 것을 다 태우고 난 뒤에 단단히 남은 조각이라서. 생각한 이유가 어쩌면 다시 상처가 될지도 몰라서, 그것은 설명하지 않은 채로 히나는 이렇게만 말했다. 그런데, 히나의 말에 대체로 다 긍정하던 플란츠가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나보다는 내 아우님 쪽인데.” 칼리안. 현연한 별의 수호자. 그런 이름을 지닌 이에게 그보다 잘 어울리는 검이 또 어디 있을까. < 제38장. 그 검(2) >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했었다. 하지만 르메인은 일찍 일어나서 그냥 일을 많이 했다. 일을 많이 해서 특별히 배가 불러지지도 않았고 스스로의 목숨줄을 늘리는 것에 큰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아무튼 이제는 그나마 카밀리아 궁에 가서 잠을 자고 다시 아르피아 궁으로 돌아오고 있기는 했으나 그렇다 해서 일을 좀 적게 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일은 여전히 많았다. 흐린 탓인지, 시간이 이른 탓인지 어둑어둑한 하늘을 잠시 올려다 본 르메인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칼리안은 아직인가.” 눈을 뜨자마자,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마치자마자, 조식을 대신할 오트밀 스프를 몇 스푼 먹고 내려놓자마자, 카밀리아 궁에서 나서자마자, 그리고 지금 이렇게 아르피아 궁 앞에 서자마자. 일과 관련 없는 말을 벌써 다섯 번째 묻고 있었다. 밤새 잠을 설치며 눈을 뜰 때마다 곁에 서 있던 호위기사 렌에게 물은 것을 합친다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네, 전하.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여전히 가끔씩 생소해지는 이런 질문에, 시종장 라울이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을 전했다. 예상했던 대답을 실제로 듣게 되었음에 짧은 한숨을 쉰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은 간밤에 플란츠와 숲에 다녀온 뒤 곧장 밖으로 도망을 쳤다. 어차피 레이븐을 따라잡을 말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기 때문에 처음만큼 열심히 막아서지도 않는 그 걸음을 굳이 도망이라 하는 것은, 르메인이 아직 칼리안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르메인의 뜻을 벌써 몇 번이고 무시해가며 밖에 나가는 것을 차마 강경하게 막지 못하는 것은. “마나실 백작도 아직이겠군.” 칼리안이 그렇게 바빠진 것이 전부 다 르메인 때문이라는 마법사가 칼리안을 불러다 앉히지도 못하도록 극성스럽게 싸고 돌더니, 전날에는 오히려 르메인보다 더 화를 내고는 칼리안을 당장 잡아오겠다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전하.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시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마나실 백작이 갔으니 설령 실레스티안을 마주친다 해도 무탈하지 않겠습니까.” 칼리안에 대한 걱정을 너무 많이 한다 느꼈는지, 진중하던 라울이 이런 이야기가지 건네며 르메인을 안심시키려 했다. 텐실 인근 대사막에 둥지를 틀었다던 황금빛의 드래곤을 생각하니 시스파니안이 연상됐고, 그 시스파니안의 둥지를 지키는 지그프리드 공작가가 떠올랐고, 그러고보니 얼마 전 그 곳으로 훌쩍 걸음을 했던 앨런을 데려오겠다며 칼리안이 궁을 또 빠져나갔던 일이 떠올라버린 르메인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분명 무슨 일이 있기는 한데. 세자위에 대해서 그리 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궁 밖 출입이 늘어난 것도 그렇고 갑작스럽게 세자위에 욕심을 내는 모습도 그렇고, 칼리안에게 분명 무슨 일이 있으나 앨런도 칼리안도 도무지 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한 말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을 깨달은 라울이 재빨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정 걱정이 되신다면 플란츠 왕자님에게 상황 설명을······.” “되었다.” 플란츠라면 칼리안이 무슨 일로 나갔는지 알고 있을 테니, 플란츠를 불러다 설명을 하게 하자는 이야기를 막은 르메인이 말을 이었다. “란델은 란델을 살피고 대화하고자 만나고 칼리안은 또 무슨 사고를 벌일지 걱정되는 마음에 만나는데. 플란츠만은 유난히 그렇게 만나질 못하고 있으니. 플란츠를 만나 란델의 근황을 묻고 칼리안이 도망친 이유를 묻고, 늘 그런 이유로만 그 아이를 찾고 싶지는 않으니 이번에는 그냥 두거라.” 앨런이 들으면 꽤 기특하다 여길 만한 말을 한 르메인이 멀리 보이는 왕궁 정문을 잠시 쳐다보다 아르피아 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집무실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서 있는 앨런을 보며 미간을 심히 찌푸렸다. 칼리안이 곁에 없었던 탓이다. * * * 아침부터 단 것을 참 잘도 먹는다. 헤즐넛과 아몬드를 넣은 초콜릿, 그리고 산딸기와 커스터드 크림을 올린 타르트를 잘도 집어먹고 있는 적은발의 마법사를 보던 르메인이 안경을 쓰며 말했다. “이번에도 알려주지 않을 셈인가.” “도중에 돌아왔으니 왕자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는 저 역시 모르겠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집무실에 있던 앨런은 칼리안이 왕성을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뒤 곧바로 칼리안을 따라 나섰다. 그런데 칼리안을 붙들지도 못했고 그냥 다시 돌아왔단다. “백작이 왜 남쪽에 내려갔다 왔는지도 말을 하지 않고, 이번 일도 그렇고. 결국 전부 그 아이와 연관이 있을 텐데도 그 무엇 하나 알려주지 않으려 하는군.” 르메인으로서도 답답하여 하는 소리였으나 답답하기는 앨런도 마찬가지였다. ‘그 자가 전하께 언제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어서 걱정이 되네요. 조심해서 금방 다녀올테니 스승님께서 신경을 좀 써주세요.’ 데블란이 이미 칼리안에게 한 차례 편지를 보냈지 않나. 그 데블란이 르메인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들지 몰랐다. 때문에 칼리안은 앨런까지 왕궁을 비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며 다시 왕궁으로 돌려보냈다. “전하.” 르메인이 칼리안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앨런이 해야 할 일은 딱 하나다. 칼리안이 데블란의 일에 직접 나서겠노라 한 마당에, 르메인까지 칼리안의 손에 맡길 수는 없지 않겠나. ‘이번 일에 대해서만은 조용히 넘기시지요. 쓸데 없는 눈치는 명을 당길 뿐이니.’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진심어린 조언을 꾹 눌러 참은 앨런이, 생크림 가득 올라간 진한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찻잔을 내려놓고 르메인을 쳐다보는 날카로운 눈이 둥글게 구부러졌다. “추숭은 언제 하실 요량이십니까.” 데블란이 무슨 핑계를 대어 칼리안을 불러내려 들지 알 수 없으니, 칼리안을 하루라도 빨리 세자위에 올렸으면 해서 하는 말이었다. “다음 주 화요일로 날을 정하고 전할 생각이네. 다만 그리 된다 하더라도 세자위에 올리는 것이 바로 진행되기는 어려울 수 있네.” 마치 앨런의 의도를 알아 챈 것처럼 르메인이 대답했다. 이 소 같은 놈이 오늘따라 이런 저런 눈치가 빠르다. 아마도 칼리안 걱정이 되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 역시 가능한 빠르게 진행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만. 어째서 어렵다 하시는지요?” “칼리안이 베른 경의 일로 엘프 대장로를 만나고 싶다 하지 않았나.” 앞서 앨런은 르메인과 엘프 대장로가 만나는 자리에 칼리안이 함께 가고 싶어 할 만한 이유로 히나를 언급했었다. 하프엘프이기도 했고 엘프들 사이에서도 드문 치유사이기도 했으니, 그들을 직접 만나보는 것이 히나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칼리안이 함께 가고 싶어한다 핑계를 대었다. 발견된 시간의 축에 ‘인간의 왕’이라는 글자가 있었고 그에 대해 확인하고자 대장로를 만나겠다 이야기 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왕자님이 대장로를 만나는 일과 왕자님을 세자위에 올리는 일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관련이 없었지. 그런데 어제 이런 서신을 받았네.” 말을 잠시 끊은 르메인이 책상 서랍에서 서신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앨런에게 건네주라며 렌을 부르는 대신,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앨런의 앞에 내려놓은 뒤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 사이 타르트를 거의 다 먹어치워낸 앨런이 포크를 내려놓은 뒤 서신을 펼쳤다. “······ 음.” 그리고는 곧바로 침음을 냈다. 멀쩡한 머리가 아파오는 느낌 때문에, 앨런은 손을 올려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제가 칼리안 왕자님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세크리티아에서 기어코 일을 낼 모양인 듯 하니.” 데블란. 이 뱀 같은 새끼! * * * 기분이 좋았다. 비록 날은 흐렸지만 아직은 비가 오지 않았고, 앨런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하나 그 사이 왕궁에 무슨 일이 생기지도 않았다. 이제 칼리안을 섣불리 건드리지 않기로 한 것인지는 몰라도 다녀오는 내내 제온 일당을 마주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그레이가 예상보다 똑똑했다. 어차피 플란츠와는 비교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레넌보다는 확실히 똑똑했고 에반보다도 정치적인 머리가 나았다. ‘하긴, 생각해보면 그 날에도 대처를 잘 하긴 했지.’ 칼리안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했던 그 날, 너를 누가 때렸는지를 묻는 질문에 칼리안도 아니고 다른 엉뚱한 이도 아닌 에반의 이름을 꺼내놓는 것으로 제 목숨을 연명했던 그레이가 아니던가. - ······ 네. 제가 묵과했습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이 칼리안 왕자님을 습격하려는 정황을 제가 알았고, 혹시나 싶어 증거도 모아 두었습니다만. 저는 란델 왕자님을 지지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서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로 다시 한 번 제 목숨 연명에 성공한 그레이를 떠올려 본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인성도 없고 손속도 잔인하고 제 아랫사람 귀한 줄도 모르는 그 성격 때문에 오래 살려 둘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적당히 써먹기 좋은 정도의 머리는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될 테고. 그래도 제 살 길 하나는 잘 찾는 놈인 것 같으니 다행인가.’ 성격이 더럽고 멍청하기는 해도 그럭저럭 말은 통하는 놈이다. 그러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한 칼리안이 체르밀 궁의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의 예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칼리안이 왕궁에 돌아왔다는 것은 이미 르메인과 앨런에게 전달이 되었을 테고, 어차피 르메인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면 의복을 갈아입는 등 다시 준비를 해야 했으니 일단은 곧장 체르밀 궁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왕자님!” 인공호수와 장미정원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칼리안이 들어왔음을 전달 받은 얀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잠도 못자고 기다렸을 것이 분명해서 미안했지만 그렇게 기다려주는 것이 더 할 나위 없이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자고 있으라니까.” “잠이 안 와서요.” “들어가 쉬어. 오전에는 메를린과 같이 다니면 되니까.” “목욕하실 준비 해뒀어요. 목욕 끝내시고 식사 마치시면 그 때 쉴게요.” 지금 당장 절실하게 생각나는 것을 이미 준비해 둔 얀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무엇을 하다 이제 왔는지 묻지 않은 채로. “브리센 변경백령에 다녀왔어.” 방에 돌아온 뒤, 밤새 걱정을 했을 텐데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 얀을 보며 칼리안이 먼저 말했다. 정확히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이야기 해줄 수 없지만, 그래도. “그레이 브리센을 만나셨다고요? 그 작자를 왜 만나셨어요? 허리 부러졌던 일 때문에 이를 갈고 있을 텐데, 왕자님께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겁도 없이 거기를 혼자 가셨어요?” 그래도 그냥 괜히 이런 말이 듣고 싶어서. “마나실 백작과 함께 가기 어려우셨으면 베른 경이라도 데리고 가시지 않고요. 그냥 잠깐 다녀오신다기에 가까운 곳에 볼 일이 있으신가보다 했더니, 세상에. 브리센 변경백령이라니요? 이러니까 제가 자꾸 걱정을 하잖아요. 싸우지는 않으셨어요? 다친 곳은 없으세요?” 몸도 찌뿌둥했지만 목욕 말고, 그냥. “안 싸웠어. 안 다쳤어.” 옆에서 뱅글뱅글 같이 돌겠다는 연두색 놈 때문에 복잡했던 머리가 비로소 잠깐 식는 것을 느낀 칼리안이, 여전히 자신보다 조금 큰 얀을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얀. 나 배고파.” 기분이 좋은데 머리까지 식고 나니 배가 고팠다. 잠 못 자서 피곤한 기색이 다 지워질 만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칼리안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얀이, 정말로 다친 곳 없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대답을 했다. “네. 목욕하시는 동안 식사 바로 준비해둘게요.” 그렇게 말하는 얀이 손가락을 들어 윗층을 가리켜보였다. “그러고보니 플란츠 왕자님께서 왕자님 오시면 올라오라고 전해달라 하셨는데. 식사는 4층에 준비할까요?” “그러고보니 라고 하면 안될 것 같은데.” 형님이잖아, 하고 말하던 칼리안이 웃었다. 그래도 이제 존대는 해주고 있으니 그나마 나아졌다고 봐야 하나 싶어서였다. “그렇게 해줘.” “네. 바로 준비할게요.” 플란츠가 아침 식사를 했는지, 돌아오면 바로 찾아오게 하라는 말이 목욕하고 느긋하게 밥이나 먹으러 가도 된다는 말이 맞았는지, 4층에 올라오라는 것이 밥 먹자는 소리는 아니었을텐데 그냥 그 방에 식사를 차려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칼리안이나 얀이나 신경쓰지 않은 채였다. * * * 거슬리는 향이 없었다. 우유와 양파, 그리고 옥수수를 넣은 스프에서 좋은 향이 났다. 레몬과 땅콩이 들어간 소스가 어우러진 대구 스테이크에서도, 소고기를 줄콩과 함께 볶은 요리에서도 맛 좋은 향이 났다. 잘게 다진 닭가슴살을 얇은 빵에 돌돌 말아 둔 요리에서도, 두툼한 베이컨에서도 마찬가지로 군침 도는 향이 솔솔 났다. 문제는, 지금이 아침이라는 것에 있었지 저런 푸짐한 요리를 아침부터 내어 놓은 주방장이나 그걸 또 좋다고 처먹고 있는 동생놈이 잘못한 일은 없을 것이다. 대구에는 손도 대지 않고 스프 몇 입과 소고기 두 점, 노릇하게 구운 빵 한 조각, 그리고 샐러드 몇 조각으로 식사를 끝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밥 먹으라고 부른 적 없는데.” “제가 배고파서요.” 그래. 배고픈 동생 올라오라고 한 플란츠가 잘못했다. 전해 줄 말이 있으니 잠깐 올라오라는 말을 듣고 내려간 뒤 동생 말고 요리 접시 들여놓은 시종에게도, 그래. 잘못은 없을 것이다. 살짝 인상을 찌푸린 플란츠 곁으로 다가온 루시가 예쁜 울음소리를 냈다. 레릭이 건네 준 닭고기 간식을 루시에게 준 플란츠가 말했다. “뭐 하고 왔는데.” “모르고 계셔야 할 일이요.” 플란츠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저 말에 대해서 또 생각을 안 하려면 또 다른 생각을 해야 했으니까. 결국 자신이 물어본 말 때문에 잡생각만 하나 더 늘려야 하게 된 플란츠를 보며, 식사를 마친 칼리안이 물었다. “저는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참 빨리도 물어본다. 아무 잘못 없이 밥 잘 먹은 칼리안을 보며 한숨을 내쉰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세크리티아 국왕이 포기를 모르는 것 같아서.” “제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벌써 포기할 사람이겠습니까.” 체할 것 같다는 얼굴이 된 칼리안이 조용히 대답한 뒤 플란츠를 쳐다봤다. 아침부터 무슨 일로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내는지를 묻는 것이다. “세크리티아 왕세자 흉내를 내고 나서 곧바로 전하께 서신을 보낸 듯 하다고, 마나실 백작이 이야기를 하고 갔는데.” 달칵, 하고. 칼리안이 물 컵을 내려 놓는 소리가 조금 크게 울렸다. 그 소리를 흘려보낸 플란츠가 살짝 눈을 감으며 말했다.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내 아우님과 하프엘프 치유사를 공식적으로 초대했다더군.” - 화아악! 이야기를 마치지 않았음에도 짙은 살기가 퍼졌다. 창 밖에서 뚝뚝,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제38장. 그 검(3) > 앨런이 언젠가 그리 말하였다. “제가 언젠가 전하께, 데블란이 아무리 손이 과했어도 제 자식에게 관심은 가졌으니 전하보다는 낫다고 하였었는데.” 데블란이 아무리 뱀 같은 자라 하나 그래도 제 자식 아까운 줄은 알았다 여겼다. 그렇게 생각했으니 그리 말을 했다. 르메인의 철저한 무관심에 속을 앓다 못해 헤지고 닳아 없어진 가슴팍 안고 사는 왕자들이 딱하고 애처로워서, 끝내 떠나버린 막내의 짧은 생을 차마 슬퍼하는 것조차 해주지 못하고 모질게 구는 것이 끔찍하게 미안하여서, 그래도 너보단 차라리 데블란이 낫다 했던 적이 있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최소한 데블란은 자신의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욕심을 가지게 될 지에 대해 경계를 했으니까. 그 역시 관심이라면 관심일 테니 그래도 르메인보다는 낫지 않겠나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었다. 사실 앨런은 데블란이 베른에게 정확히 어떤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 완전히 알지는 못했다. 칼리안이 자신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고 체이스가 그것을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었으니 앨런이 상세한 내용을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아마 앨런이 그 많은 일들을 다 알고 있었다면 지그프리드령이 보이는 그 언덕에서 결코 발걸음을 망설이지 않았을 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앨런은 베른이 데블란으로 인해 갖은 고생을 했다는 정도의 내용과 데블란 때문에 기사가 되었다는 것과 같은 몇몇 이야기들을 대충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런은 이렇게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말하고 있었다. “데블란이 낫다니, 제가 말 실수를 크게 했습니다. 꿈에서도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전하께 해드렸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나.” 사실 그 이야기에 다소 언짢았었지. 내가 잘못했다는 걸 나도 알고는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뱀 같은 그 놈보다 더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거든. 하고 말하면 분명히 또 한 소리가 들려올 것이기 때문에, 르메인은 얌전히 고개만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앨런의 것과 달리 생크림이 올라가지 않은 커피에서 진한 향이 풍겨나왔다. “이런 되먹지 못한 작자가 제 자식을 어찌 취급할지는 들여다보지 않아도 훤한 일이지요. 그런 자인 줄을 모르고 제가 전하보다 낫다 말했으니 이를 어쩝니까.” 어쩐지 오늘따라 조금 더 펴진 것 같은 르메인의 어깨를 향해 이렇게 얘기한 앨런이 한탄하듯 말을 이었다. “전하나 그 놈이나 똑같은 것을 말입니다. 누가 나은 것을 가늠할 수 없던 것임을 모르고 함부로 위 아래를 비교하려 들었으니, 세상 천지에 이만큼 어리석은 일이 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 언짢았다고 안 하길 잘 했다. 국왕 전하 네 놈이 데블란 그 놈보다 못한게 아니라 그냥 둘이 똑같다고 정정하는 말을 들은 르메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 생각을 했다. 그 후에는 데블란보다 못한 놈에서 데블란같은 놈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여러 감정을 담은 떨떠름한 얼굴이 되어 앨런을 쳐다봤다. 앨런은 그 표정에는 신경 쓰지 않은 채 깊은 자기반성을 이어나갔다. “그래요. 덜 나쁜 부모, 더 나쁜 부모를 구분하는 법이 있을 리 없지요. 나쁜 부모와 괜찮은 부모는 있을지언정, 아이에게 있어 덜 나쁘고 더 나쁜 것은 하등의 차이가 없으니. 그것을 함부로 비교하려 들었다니 제가 아직 배움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과거의 데블란이 부모로서 어떤 자였는지 르메인에게 말해줄 수는 없었으나 지금의 데블란도 체이스를 혹독하게 대해왔을 것만은 분명하지 않던가. 그러니 그냥 르메인이랑 같은 취급을 해 주면 딱 맞겠다 싶어서 하는 소리였다. “······ 그래. 잘 알아들었네.” 그래도 나는 내가 나쁜 놈인 것을 알고는 있다고 말하는 대신, 르메인은 그냥 이번에도 앨런의 말에 얌전히 얻어맞았다. 아무튼 잘못을 한 것은 맞으니 어찌하겠나. 반성을 마친 마법사와 사는 날 내내 반성해야 할 왕이 잠시 말 없이 커피를 마셨다. 생크림 올라간 앨런의 커피는 끝맛이 달았고 르메인의 것은 지나치리만치 썼다. - 팔락 커피 반 잔 쯤을 비워낸 앨런이 다시 한 번 서신을 펼쳤다. 그리고는 불필요하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미사여구는 제외해가면서 그것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체이스 왕세자를 잘 맞이해 준 것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보답으로, 왕세자와 유난히 친분이 있었다던 카이리스의 3왕자를 초빙하여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다. 카이리스의 국왕께서 체이스 왕세자와 교류를 나누었다 하니 이번에는······.” 억누르려 애를 썼으나 다시 화가 치밀어서 더 읽지도 못하겠다는 듯, 차마 구기지도 태우지도 못하는 것이 분하다는 얼굴이 된 앨런이 말했다. “교류라니. 이런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니 뱀 같은 자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단신으로 이 곳에 다녀갔다 한들, 그런 이유만으로 칼리안을 그 곳에 보낼 이유가 없지. 보낼 생각도 없네.” 앨런이야 당연했고 르메인 역시 생각이 같았다. “······ 아니. 없었지.” 이렇게 말을 더한 르메인이 입을 다물었다. 곧 앨런이 서신을 읽어내려가며 상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카이리스에 엘프들이 생활 할 수 있을 터전이 줄어들고 있어 세크리티아의 숲에 정착을 하여도 좋을지를 지속적으로 물었었다. 세크리티아에서는 세크리티아 대왕의 뜻을 이어 세렌티가 아닌 이를 숭배하는 이들에게 숲을 내어 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으나······ 시스파니안께서 이 말을 들으시면 참 좋은 핑계다 하시겠군요.” 잠시 사족을 단 앨런이 서신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체이스 왕세자를 통해 카이리스가 엘프들과 상호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전해들은 뒤 그러한 정책이 폐단이었음을······ 하. 세크리티아에서도 엘프들과 정식으로 교류를 해보려 한다. 그런데 마침 카이리스에서도 엘프들과 대화의 장을 마련한다 하니, 카이리스 국왕의 환대에 대한 보답을 할 겸 양국과 엘프의 대표들이 함께 만나 공통된 규율도 만들 겸, 엘프 고유의 능력인 치유력까지 지닌 바 인간과 엘프 간 긍정적인 관계의 온당한 증거라 할 수 있을 히나 베른······ 이 말 왕자님이 보시면 당장 전쟁납니다. 왕자님께 알리지 마시지요. 아무튼. 베른 경과 칼리안 왕자가 대표로 참석했으면 한다.” 누가 들으면 카이리스가 세크리티아의 종속국이 아닌가 착각할 만큼 대단한 내용이었다. 말도 되지 않는 억지였다. 들어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다 전하께서 물러터진 탓에 생긴 일입니다. 대체 데블란이 카이리스를 얼마나 물렁물렁하게 보았으면 이 따위 말로 이 대국의 왕자를 오라가라 한단 말입니까. 하여튼 전하 때문에 우리 왕자님이 큰 일에 또 휘말리게 생겼으니 이를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대가 말하는 우리 왕자님이 내 아들인데. 왜 내가 또 혼나고 있지. 잠시 짧은 숨을 내쉰 르메인이 말했다. “기실 세크리티아 왕세자는 플란츠와 더 많이 만나고 돌아갔으니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플란츠를 불러야 하는데 왜 칼리안을 부르려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군.” “궁내의 일은 그 자가 알 수 없겠으나, 체이스 왕세자가 세작들을 이용해 칼리안 왕자의 난처한 상황을 도왔던 일을 알았다면 칼리안 왕자와 친분을 쌓았다 여겼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왕궁 안에서 체이스와 플란츠가 몇 번을 만났든 말든. 밖에서 알 수 있는 내용 상 체이스가 각종 품종과 다양한 깃털 색을 자랑하는 새들을 이용해 제일 많이 챙긴 것이 칼리안이었지 않나. “그래······. 무슨 이유든 거절해야 한다면 거절하겠네. 그 작은 나라에서 기어이 악을 쓰고 주먹질을 한다 한들 이 카이리시스에 닿지도 않을 테니.” 양국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고, 그러다보면 눈치 싸움도 좀 할 수 있고, 잠깐 냉랭한 말 좀 주고 받을 수 있고, 그러다 수 틀리면 때려 없애면 되니까. “왕권이 약하다 하여 군사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 않나. 혹 전쟁을 치르면 브리센이 다시 힘을 가질 테고 내 권력은 다시 줄어들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무서워 세크리티아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 갈 생각은 없네.”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있으나 마나 눈에 뵈지도 않던 왕권 다시 줄어들어 보아야 큰 차이도 안 나지 싶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놓지는 않았다. 사실 르메인에게 예쁜 구석이 없어 안 나서줘서 그렇지, 앨런이 마음 먹고 나서면 왕권 다시 올려주는 것 정도는 금방이니 거기까지 걱정할 일도 아니었다. “헌데 그 작자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군.” “그 작자는 지금 전하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목숨줄이 간당간당합니다.” 숨길 것도 없다는 듯 앨런이 곧장 대답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병이 깊다 하는데 텐실 치유사를 부를 수는 없고 엘프들은 인간의 병을 치유하지 않는다 하니, 어떻게든 살 방법을 생각하겠다며 이 난리를 피우는 것이지요.” 엘프들은 규율이 엄격했다. 칼리안의 말에 따르자면 실로 이기적인 방향으로 엄격했다. 카이리스의 땅에 정착해 살며 카이리스의 인간들과 거래를 하고 혹자는 카이리스의 인간에게 피해를 주면서도 절대로 인간에게 그들의 치유력을 선사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엘프의 규율이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카이리스에서 그들이 터를 잡고 살도록 눈감아주고 있는 것은, 그들이 카이리스의 인간들과 나름대로의 교역을 하며 적당히 밥값이라 할 만한 일들을 하고 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들의 ‘어머니 나무’가 지닌 힘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이유가 더 컸다. 아무튼 그런 엘프들을 내세워가며 전해 온 이 웃기지도 않는 요구가 무엇 때문인지를 가늠한 르메인이 조용히 대답했다. “목적은 역시 베른 경이겠군.” “맞습니다. 엘프의 입장에서 보면 필요할 때는 엘프고 곤란할 때는 인간이 되는 사람이지요. 엘프들의 입장에서 베른 경의 치유력 행사를 막을 수도 없고 막을 필요도 없는 일이니 그냥 두었겠으나 자칫 참견을 하면 귀찮아질 터이니, 그것을 가지고 협박을 하는 것입니다.” 세크리티아에서 무엇을 내어놓든 엘프들을 제 편으로 삼았다면, 히나의 치유술에 대해 엘프들이 문제를 삼을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카이리스에서도 이번 회담에 참석하라는 소리다. 굳이 칼리안이 가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이왕 올 것이라면 체이스와 친하다던 그 3왕자가 직접 와서 세크리티아의 융숭한 대접을 보답으로 받아준 뒤 회담에서 히나에게 불리한 일 생기지 않도록 잘 막고 돌아가라는 그런 소리를 데블란이 한 것이다. “혹시나 싶어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고작 치유사 한 명 때문에 왜 이런 귀찮은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마십시오. 그 치유사 한 명 잘못되면 카이리스가 조각날 터이니.” 앨런의 엄포 아닌 엄포에, 르메인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 물었다. “혹시 칼리안 그 아이가 베른 경을 마음에······.” 그러다가, 내 어여쁜 제자가 네 놈 같은 줄 아느냐며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쳐다보는 듯한 앨런의 눈빛에 조용히 입을 다문 뒤 본래 하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 그래. 어찌됐건 혼자 결정 할 생각 없네. 혹시 세크리티아의 의견에 응하고자 한다면 왕세자위를 정하는 것을 미뤄야 할 것이나, 그에 앞서 당사자들의 이야기도 충분히 들어 볼 테니까.” 만약 칼리안이 진짜 그 곳에 갈 생각이라면 왕세자 신분이 아니라 세 왕자 중 한 명으로 가는 것이 덜 위험할 테니 세자위 결정을 미루겠다는 이야기였다. 혹은 가지 않겠다 하면 세크리티아에 당장 거절 의사를 보이고 세자위에 대한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 일은 칼리안 왕자님과 이야기를 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도 말씀하신대로 당사자 의견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베른 경이 비록 발칸 소속이라고는 하나 칼리안 왕자님의 사람인 것은 맞으니.” “알겠네. 의견이 정해지면 말해주게.” “그리하겠습니다.” 대화를 일단락지은 앨런이 남은 초콜릿 하나를 마저 집어 입에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단 것 싹 집어먹은 마법사의 빈 자리를 잠깐 보던 르메인이 쓴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 * * 칼리안이 돌아오지 않았음을 앨런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르밀에 찾아온 것은 빈 방에 들어가 칼리안을 기다렸다 말해야 할 만큼 급히 전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앨런이 칼리안에게 급히 전할 말이 있을 일이라면 한 가지 아니겠나. - 뱀 얘기면 나한테 말해.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빌헬름에 가려다 앨런을 마주친 플란츠가 짧은 말로 앨런을 붙들어 잡아 칼리안에게 ‘허락’받은 오지랖을 부려가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밥 잘 먹은 칼리안에게 말을 전한 뒤 살기를 접했다. 대략적인 상황을 간단히 전한 뒤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뜬 플란츠가, 커다란 솜뭉치가 되어버린 루시를 툭툭 다독이며 결론을 말했다. “내가 갈까 하는데.” 플란츠의 설명이 이어짐에 따라 이성을 잃지 않도록 다잡아가며 조금씩 누그러뜨리던 살기가 구멍 난 공에 든 바람처럼 일순간에 사라졌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들은 탓에 강제로 이성이 돌아와버린 탓이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침착을 되찾은 칼리안이 조용히 물었다. “결론이 이상한데요. 형님께서 왜 거길 가십니까.” “바다 보러.” 뭐라는거야 이 풀대가리가. 구운 대구도 못 처먹는 놈이 지금 뭘 보러 어디에 간다고 하는거지. 곧 칼리안이 자신의 귀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더니 얀을 보며 물었다. “방금 루시가 야옹야옹 한 거지? 되게 사람 말 같네.” “짖······.” 버릇처럼 짖지 말란 말을 하려던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방금 칼리안에게 야옹야옹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형님이 된 입장에서 동생한테 짖는다는 말을 할 수는 없지 않겠나. “칼리안 왕자님, 말씀······ 읍!” 칼리안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얀은, 더 열심히 플란츠의 시종 노릇을 하겠노라 굳게 마음 먹은 레릭이 플란츠를 대신해 제 간을 배 밖으로 꺼내놓는 것을 막았다. 이 상황에 칼리안을 혼내려다가는 레릭의 혼과 육신이 분리되리라는 것을 알아서였다. 그렇게 자신보다 나이는 많아도 키는 조금 작은 레릭의 입을 콱 틀어막은 얀이 두 왕자를 향해 살짝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레릭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시중을 드는 것도, 시중을 든다면서 두 왕자의 야옹야옹과 멍멍 소리를 듣는 것도 여기까지가 허용선이라는 사실 역시 잘 알았으니까. 방문이 닫히는 것을 본 칼리안이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혹시 식사 중에 마음에 안 드시는 음식이 또 있었습니까?” 뭘 잘못 처먹었길래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느냐는 말이다. 참으로 똑똑해서 칼리안의 말을 바로 알아들은 플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직 형님 너랑 동갑이고 화도 좀 났고 그런데 형님 너까지 사람 말을 안 하니 에라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그냥 막 짖을 거다’ 상태의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대로 가져본 적 없는 내 형님께서 이제 검도 가지셨고, 궁금한 것도, 욕심도 가져보면서 살기 시작하셨는데, 가지고 싶은 마음이 과해지셨나봅니다. 제 몫의 신 귤을 아예 통째로 뺏어가려 하시네요.” 왜 그러는지 알기 때문에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 “거기까지만 하십시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같이 해결하게 도와달라 하였지 나를 대신해 데블란을 만나고 일을 해결하라는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귤이 많던데. 하나쯤 통째로 가져오면 안 되는 거였나.” 신 귤이 한 개였으면 나눠 먹겠는데 그 귤이 너무 많지 않나. 그러니 그냥 한 개를 통째로 가져와 먹겠다는데 왜 그것이 욕심이라 하는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갚지 않고 도와주겠노라 하시더니 도로 갚으려 하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또 무엇을 받으셨는데 뱅글뱅글 돌아가서 다시 갚아주려 하시는지 모르겠어서요. 저는 더 드린 것이 없는데요.” “그 검.” 이미 모든 것이 다 타버려서 세상의 어떤 것도 비추지 않는 그 단단한 검. 별의 조각. 별의 잔재. “값을 다 못 치른 것 같은데.” “그건 제 비밀 값이라 말씀드렸습니다.” - 본래에도 사용하셨던 검입니다. “······ 검 값으로 부족한 것 아닌가.” “저 그렇게 계산 못하는 사람 아닙니다. 그냥 형님 쓰시면 됩니다. 저는 이미 다 받았고.”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평상시의 얼굴과 비슷한 표정을 지은 채 루시보다 더 큰 소리로 멍멍거렸다. “아우 된 도리가 있지, 몹시 약하신 내 형님을 그리 멀리 보내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형님께서는 그냥 얌전히 쑥쑥 크셔서 고양이 키우십시오.” 듣는 플란츠 열받아서 검의 길에 오를 법한 소리였으나 의외로 진심이었다. 어차피 칼리안은 거짓말 못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냥 지금처럼 이대로 계속 사시면 됩니다. 벌써부터 잿더미 굴러주실 생각까지는 하지 마세요.” 제온의 일도 있었고 플란츠의 심장 문제도, 란델의 문제도, 그리고 왕세자 책봉에 대한 문제도. 참 많은 일들이 겹쳐 있지 않나. 그런 칼리안이 이 곳을 떠나면 그만큼 위험해질 일 많을 것이 분명하니 머리 좋은 완두콩이 칼리안을 대신해 세크리티아에 간 뒤 신나게 휘젓고 오겠다 생각한 일은 참 기특하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러지는 마십시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칼리안의 손에 묻은 피 냄새를 며칠이 지나도록 맡아내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니 벌써부터 제 손에 피를 묻힐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그리고 창 밖에 쏟아지는 비를 잠시 보다가, 빗속에 드는지 잠에 드는지 모를 얼굴이 되어 다시 입을 열었다. “······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서는 어느새 꿈이 기껍지 않게 되었고. 저는 어느새 꿈을 꾸지 않게 되었는데······.” 고개를 돌려 딸기청 들어간 민트차를 한 모금 마신 칼리안의 새빨간 눈이 플란츠를 응시했다. “한 명 쯤은 악몽 아닌 꿈을 꾸고 살아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언젠가 비슷한 생각을 홀로 삼켰던 기억이 난 까닭이었다. 아직 그리 늦지 않은 한 명은 제대로 된 꿈을 꿔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막 악몽에서 깬 한 명마저 또 다른 악몽을 꿀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이 여전함을 혼자 깨닫게 된 칼리안이 웃음소리를 냈다. “형님은 좋은 꿈 꾸셔야죠. 좋은 검도 받으셨는데.” 그래. 결국 나는 너까지 유령에 쫓기다 악몽을 꾸게 될 일을 겪게 할 생각이 아직 없으니. < 제38장. 그 검(4) > 무뎌졌다. 무뎌진다는 것은 결국 날 서 있던 것이 마모되어 날카로움을 잃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과거의 언젠가에는 지금보다 더 날이 서 있던 때가 있다는 소리다. - 내 동생이 많이 무뎌졌기에. 때문에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단순한 궁금함이라 하기보다는 조금 어처구니 없는 기분이 되어 의문을 가졌었다. 굳이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해본다면 바닥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은 채 끝도 없이 주욱 늘어나는 루시의 허리를 처음 보았던 날에 느낀 정도의 어처구니 없음이라 해야 할까. 그러니까,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접한 탓에 생겨난 자연스러운 의문인 것이다. 루시 허리가 도대체 얼마나 긴 것인지, 루시가 칼리안에게는 정말 개구리를 잡아다 주는지, 루시를 쓰다듬으면 왜 갑자기 그릉그릉 소리를 내는지, 등등. 그런 의문과 같은 종류의 궁금함 말이다. ‘대체 과거에는 어땠길래.’ 그렇게 생긴 의문이었다. 체이스의 말마따나 지금의 칼리안이 무뎌진 것이라면 본래에는 대체 어땠는지를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다. 과거 언젠가에는 지금보다 더 날카롭고, 지금보다 더 인내심이 없었는지. 어쩌면 지금보다 더······. 그런 의문들이 하나 둘 쌓여 도저히 더 담아 둘 곳이 없게 되었을 때, 놈이 닫아 걸었던 창문을 열게 했다. 그렇게 비가 오던 그 날, 시간의 축의 앞에 선 놈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왕제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놨었다. 그리고 다시 닫았다. 그것이 두 번 다시는 열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칼리안도 알았고 플란츠도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 한 가지 궁금한 것이 더 생겼다. 놈이 지난 밤에 어디에서 뭘 하고 왔는지 알려주지 않겠다 하여 그 곳이 어디일지 생각하지 않기 위해 잡생각을 늘리다가 궁금한 것을 늘려버렸다. ‘그 검은 비밀 값으로 치면 맞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검을 선물했던 날. 본래에도 썼던 것임을 알면서, 굳이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으면서 검을 선물했던 그 날. 체이스를 처음으로 다시 마주쳤던 그 날. 과거의 플란츠가 무슨 검을 썼는지를 저 놈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원수같은 놈에게 같은 검을 쥐여주겠노라 마음을 먹었던 그 속내가 어떻게 뒤집어져 있었을지. 그래서 그 날의 놈은 칼리안이었는지, 아니면 그 왕제였는지. 그것이 다시 궁금해졌다. 생각의 고리를 이어나가던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지나치게 좋은 검을 받아서, 좋은 꿈을 못 꾸겠군.” 과연 그 에반이 플란츠를 검의 길에 오르도록 만들었을까. 플란츠가 아무리 자신들의 핏줄이라 하나 플란츠가 정말 그렇게까지 강한 능력을 가지게 그냥 두었을까. 실리케는, 자신의 도구가 그런 힘을 가지길 원했을까. 아니. 그랬을 리 없지. 저리 좋은 검을 플란츠가 어떻게 가졌을까. 브리센의 선물이었을까. 그들의 선물을 그 때의 플란츠가 얌전히 받기는 했을까. 아무 이유 없이 그 좋은 검을 그냥 받아서, 타국의 왕제가 카이리스 국왕의 검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 만큼 소중히 지니고 다녔을까. 아니. 그랬을 리 없지. 그렇다면. 절대로 결단코 검의 길에 오르지 못했을 텐데도 굳이 저렇게나 좋은 검을 지니고 살았다는 것이 과거의 플란츠에게 있어 어떤 의미였을지, 지금의 똑똑한 플란츠가 가늠하게 되리라는 것을 앞에 앉은 저 놈은 알았을까. 아니. 그럴 리 없지. 얌전히 쑥쑥 커서 고양이 키우라는 말이나 하는 저 놈이 아주 오래 전의 자신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면, 저 검을 본래에도 썼다는 그런 말을 해줬을 리 없지. 내가 무엇을 눈치챌지 알았을 테니. 그러니 결국. “어차피 너도, 그리고 나도. 결국 악몽 속을 살고 있는데.” 저 풀대가리 또 뭔 소리 하냐는 얼굴로 플란츠를 쳐다보던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리고 다른 말 없이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가 내리는 하늘은 어둡다. 창 밖은 보이지 않고 창문에 붉은 눈이 비춰진다. 그러니 이건 결국 또 저 망해버릴 비 때문이다. - 신기하지 않으세요, 형님? 새로이 드는 기억을 본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악몽에서 깨어났으나 또 다른 악몽 속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탓에. 그렇구나. 어차피 나도, 그리고 너도. * * * 그 사이 잔뜩 늘어난 자잘한 물집이 아물어갔다. 레몬과 딸기가 들어간 세 잔의 탄산수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은 베로니카가 여전히 신기하다는 얼굴로 상처가 아물어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드미레아의 손을 놓은 히나가 이야기했다. - 무리하지, 말아요. 지난 번에 드미레아를 만났을 때에도 같은 말을 했었다. 물집 투성이인 손이 아프다면서도 절대 검을 내려놓지 않을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래도 조금은 쉬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손을 보아하니 그 날 건네주었던 차를 과연 마시기는 했을까 싶을 만큼 여전히 엉망이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습니다. 칼리안 왕자님께서 소개시켜 준 대장장이 솜씨가 좋아서 이제 불필요하게 상처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과거에 드미레아가 썼어야 할 묵빛의 검을 키리에에게 주는 대신이라 하기에는 맞지 않겠지만 충분히 좋은 검을 만들어 줄 수 있을 사람을 소개시켜 준 셈이었다. “보통 새로운 검은 손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법인데 그 자가 만들어 준 것이 생각 외로 손에 꼭 맞아서 놀랐을 정도니까요.” “왜 갑자기 치료해달라고 온 거야? 지난 번에는 안 받았다면서.” 히나 먹으라고 가져온 딸기 초콜릿 쿠키를 먹던 베로니카가 이렇게 물었다. 베로니카가 생각하는 친목에는 상호 평등이라는 전제가 있었고, 그것은 나이와 신분의 고하를 따지지 않았으니까. 즉, 드미레아가 소공작이건 아니건 여러 번을 보았으니 서로 편하게 말을 해도 된다고 여긴 것이다. “내일 칼리안 왕자님과 대련을 하기로 했습니다. 배우기 위한 자리라서 이런 것으로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아서요.” 드미레아에게 있어 편한 말이란 곧 경어였다. 덕분에 공작의 후계자가 백작의 손녀에게 존대를 하고 하대를 받는 이상한 광경이 되었으나, 공적인 자리가 아니었으니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양쪽 모두 편하면 된 것 아니겠는가. - 원래, 다른 날에 하기로, 했다고, 오빠에게 들었는데, 날짜를 바꿨나봐요. “네, 아무래도······.” 이렇게 말한 드미레아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칼리안 왕자님이 사고를 낼 것 같다는 말을 이 자리에서 하기에는 어렵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히나는 몰라도 베로니카까지 있는 자리였으니까. “3왕자님 또 사고치실 것 같다고 할아버지가 그랬어.” 그런데 그 말이 베로니카에게서 튀어나왔다. 어머니가 또 다른 지역으로 일을 나선 탓에 아침부터 마법 학원이 아니라 빌헬름 관에 오고 있는 베로니카의 말에 드미레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래서 할아버지 요즘 안절부절 못해. 엄마 말로는 꼭 아빠 어렸을 때 대해주듯이 왕자님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 같대.” 말을 마친 베로니카가 웃었다. 저보다 한 살 많은 작은 아빠가 생긴 셈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웃지 않을 수가 있나. - 그만큼, 많이, 아낀다는 것이니까, 보기 좋아요. 히나가 웃으며 이렇게 말하자 베로니카가 배시시 웃던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할아버지 요즘 보기 좋아. 나랑 엄마도 많이 챙겨주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빠 생각 많이 했었는데, 요즘에는 예전같은 얼굴 잘 안해서 좋아.” 이 말에는 드미레아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같은 사람으로 인해 같은 변화를 겪고 있는 한 사람, 얀이 떠올라서였다. 얀 역시 이제는 떠난 이를 생각하는 일이 줄었으니까. - 서운하지는, 않아요? 하고, 아플 만한 곳을 항상 잘 알아보는 히나가 물었다. 앨런이 로닐에 대한 생각을 덜 하게 된 것이 서운하지 않느냐고. 그리고 드미레아에게는 그 말이 얀에 대한 내용으로 조금 바뀌어 들렸다. 얀이 2층의 오른쪽 끝 방을 가슴에 묻어가는 것이 서운하지 않은지. “안 서운해. 가끔씩은 잊어버려야 산다고 엄마가 그랬어. 엄마도 그래서 가끔씩 잊어버리고 산다고 했어. 가끔 잊어버려야 또 가끔 생각나고, 그래야 산대.” 서운하지 않습니다, 라고 드미레아도 같은 말을 떠올렸다. 너무 어려서 잘 기억나지 않는 아빠, 혹은 오빠. 그 자리를 대신해주고 있는 한 사람을 잠시 생각해보던 드미레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언젠가 얀으로부터 칼리안이 히나를 어떻게 여기는지를 들은 적이 있었지 않았나. 그러니까 지금 드미레아는, 저보다 두 살 많은 딸 혹은 손녀를 두고 저보다 한 살 어린 조카딸을 가졌으며 저보다 두 살 많은 남동생을 만든 어떤 사람을 자신의 정혼자로 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탓이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관계인가. 이게 말로만 듣던 멍멍이 오라버니같은 족보라는 바로 그것인가. - 그렇게 중요한, 왕자님이니까, 사고 못 치시게, 해야, 되겠네요. 고민이 깊어진 탓에, 드미레아는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히나의 말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말았다. - 치료 받은, 소공작님은, 돌아가서 다시 연습하시고, 학원 안 간 동생은, 빨리 공부해요. 저는, 잠깐, 나갔다 올게요. 이렇게 말한 히나가 새하얀 로브를 벗고 하얀 블라우스와 남청색의 긴 치마 차림을 한 채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저 긴 소매를 당장 걷어붙일 것 같은 기세라는 생각을 한 드미레아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한 얼굴로 맛 좋은 탄산수를 한 입 마신 뒤 내려놓았다. “비도 오고 조용하고. 참 좋은 날입니다.” 그리고는 베로니카를 향해 이렇게 말하며 살짝 웃다가, 빨리 공부하라는 눈을 해 보였다. * * * 한동안 말이 오고 가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지 않은 한 아이를 함께 떠올렸으나 그 누구도 그 아이를 감히 추억한다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둘 모두 그 아이를 잊어야 살 수 있는 이들이었으나 그 이유가 완벽히 달랐기 때문에. “애오옹.” 히나가 보낸 선물이 담겨있던 상자 속에 들어간 루시가 가는 소리로 울었다. 플란츠에게도 없는, 온도 조절 기능이 들어간 예쁘고 작은 루시 옷이 담겨 있던 빨간 상자였다. 재밌게도 루시는 더위를 피하게 할 옷만큼 그 옷이 담겨있던 상자까지 좋아했다. 옷을 입은 채 상자 안에 들어가서는, 기분이 좋다는 듯 냐옹거렸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결국 상자를 버리지 못하게 된 플란츠가 햇살 잘 드는 창가에 그것을 놓아 두었었다. 그렇게 해 두면 루시는 그 상자가 마치 플란츠의 무릎이라도 되는 양 그 안에 들어가 몸을 말고 고롱고롱 하고 소리를 냈다. 지금도 그런 어느 날의 한가한 어느 때처럼. 말 없는 형제를 보던 루시는 상자 안에 몸을 말고 누워 살금살금 졸기 시작했다. 루시에게 더 중요한 것이 상자였을지 아니면 그 안에 들었던 옷이었을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던 플란츠가 중얼거렸다. “······ 나도 똑같군.” 딸기 향도 나고 민트 향도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플란츠가 잠깐잠깐 잊고 지내던 붉은 눈을 떠올리면서, 그리고 마주보면서 말했다. “내 아우님께서 자꾸 잊으시는데.”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 호칭 참 잘도 바꿔 붙인다 싶어서. “잊지 마. 잿더미에서 구르는 법은 나도 이미 알아.” “네. 아시는 것 같네요.” 칼리안은 순순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뱀의 독니에만 온 신경이 가서, 딱 그 시기의 베른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데블란의 유령에 쫓기느라 또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 떠올리면서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크리티아에 가지 않고 그 날이 올 때까지 미룬다면 참 좋겠지만 그렇게 되기를 손 놓고 기다릴 사람이 아니니, 가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데블란의 눈에서 히나를 가린 채 버틴다면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되겠으나 데블란은 결코 그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이런저런 출구가 있음을 알 테니까. “엘프를 한 번 구슬렸는데 두 번 못하리라는 법은 없겠죠.” 인간들에게 절대로 치유술을 써주지 않는다는 엘프의 규율이 과연 얼마나 탄탄한 것일지, 데블란이 내어놓을 맛좋은 먹이 앞에서도 참을 만큼일지 알 수 없지 않나. “그냥 두었다가 엘프들에게 치료를 받고, 혹시 낫게 되면 머리만 더 아플 것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같은 빛을 띠었으나 조금 전 보였던 누군가의 잔재는 다시 완전히 지워낸 붉은 눈으로 돌아온 칼리안이 찻잔을 잡으려다 잠시 멈췄다. 톡, 톡, 톡. 버릇같은 소리가 몇 번인가를 울리고 난 뒤에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 똑똑똑 주저하는 듯한 여러 번의 소리 뒤에 점점 커지는 노크 소리가 울리고, 잠에 들려던 루시가 눈을 번쩍 뜨며 도도도도 문 앞으로 달려갔다. “들어와.” 플란츠의 허락에 문이 열리며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는 방문자가 두 형제가 있던 방에 들어왔다. 하려던 말을 멈춘 칼리안이 찻잔에 두었던 시선을 떼었고 플란츠는 찻잔을 잡고 있던 손을 뗐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히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착하고 얌전하게 자신의 말을 들을 준비를 마친 왕자들을 본 히나가 일단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러더니 대뜸 소매를 걷어붙였다. “히나?” 칼리안이 당황한 소리를 냈고 플란츠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나가 자신의 말을 시작했다. - 엉뚱한, 부군단장님이랑, 오빠랑, 셋이 갈 거예요. 그래도 위험하면, 협회장님도 같이, 가주실 수 있다고, 했대요. 그리고, 저는, 싸움을 못해도, 말은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왕자님들, 제 일에, 마음대로 끼어들지 말아요. 정말로, 진심으로, 이번에는 봐주지 않고 맴매라도 할 생각을 한 히나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 어린, 애들은, 집에 있어요. 칼리안 상자 속에 누가 들어있든 말든. 플란츠 머리 속에 누가 떠올랐든 말든. 둘이 어떤 악몽을 걷고 있든 말든. 히나는 모르니까. 그런 건 히나에게 있어 그리 중요한 사실도 아니니까. - 얌전히요.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카이리스의 치유사를 불렀다. 왕자와의 친분, 그리고 엘프와의 자리를 구실로 삼았다. 그 일의 당사자인 히나는 자신이 가겠다고 했다. 대신, 왕자님들은 아무도 안 데려갈 것이라고 대답했다. 뱀의 아들로 태어나 소의 아들로 살고 있는 한 놈이랑 애초부터 소의 아들이었던 한 놈이 서로를 쳐다봤다.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 제39장. 내가 많이 참았지(1) > 칼리안은 있지만 곁에 얀이 없을 때가 종종 있다. 얀이 없는 이유야 여러가지였으나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칼리안을 앞에 둔 주변인들이 곤란한 경우도 종종 있다. 그리고 그 곤란함의 이유가 될 법한 것은 딱 한 가지다. 바로, 칼리안이 웃어서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웃음의 진위를 알 수가 없어서다. 얀이 없는 상태에서 칼리안이 웃으면 도무지 저것이 좋아서 웃는 것인지 화가 나서 웃는 것인지 기분이 나쁘거나 혹은 아파서 웃는 것인지, 정말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만은 아니었다. 히나는 몰라도 일단 플란츠는 칼리안의 웃음이 터진 이유를 제대로 알아봤다. 지금 칼리안은, 어딘가 크게 한 대를 맞은 기분이라서 웃고 있었다. “아······ 히나. 그렇구나. 네가 당사자구나. 네 일이었어.”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웃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내 멋대로 약한 사람으로 만들고, 멋대로 지켜주려고 하고, 내가 곁에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할 것처럼 멋대로 단정해버려서 미안해. 진짜 미안. 앞으로는 안 그럴게.” 그리고 이렇게, 제일 먼저 반성한 것에 대해 사과의 말을 했다.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던 플란츠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의 사과에 한 손을 얹었다. 그 행동을 말로 해석해본다면 아마 ‘나도’ 정도가 될 것이다. 물론 히나를 저보다 어린 사람으로 취급한 적은 없었지만, 은연중에 아무것도 못할 약한 사람으로 여겼던 것은 맞았으니까. 히나의 말마따나 싸움을 못한다는 것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만큼 약하다는 뜻이 아니었음에도. “그리고······ 내가 오해를 했었어. 그것도 미안해, 히나.” 두 번째 사과를 한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보다 다시 웃었다. 지금 저 웃음은 아까와 다른 의미임을 알아 본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칼리안이 웃는 두 번째 이유를 눈치채버린 까닭이었다. ‘우리 히나가 형님 너더러 어린애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봄볕에 말린 이불처럼 포근하고 책 읽는 겨울 밤처럼 평화로워서 언제나 사랑스럽기만 한 우리 히나한테는 너도 그냥 집 지키는 애송이다, 플란츠’ 였지만 맥락만 같으면 되는 일이니까. 그 누가 마음 가는 상대를 보면서 어린애라고 말하겠는가. 그것도 플란츠와는 고작 한 살 차이인데. 태초부터 생을 이어 온 시스파니안조차 말 그대로 까마득하게 어린 하츠아라에게 어린애라는 말을 한 적은 없었을 것이라고 플란츠는 생각했다. - 오해, 한 게 있어요? “응. 그런 일이 있었어. 아무튼 미안해.”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또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애초부터 아무도, 심지어 플란츠 본인조차도 그 단어의 의미를 오해한 적 없었다. 물론 친오빠인 키리에는 논외로 둔다. 키리에는 이 상황을 보고 나서도 온갖 것을 골라 보며 오해해야 할 놈이 맞으니까 그냥 빼고 생각해야 한다. 아무튼 그래서 지금 칼리안은 히나의 ‘좋은 왕자님’에 들어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됐기 때문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똑같은 말을 자신도 들었다는 것은 싹 잊어버린 채로. “그만.” 아무튼 저 혼자 오해하고 화가 나서는 지금껏 몇 번이나 화풀이를 했는지 저 놈은 모를 거다. 그러니 지금 사과를 히나에게 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그리고 흐린 날 그레이 허리 아프듯이 욱신거리는 듯한 목덜미 생각 때문에 짜증스러운 얼굴이 된 플란츠가 칼리안을 향해 말한 뒤 히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 돌렸다기보다는 혹시 또 다른 말을 할까 싶어서였다. 플란츠의 말에 간신히 웃음을 멈춘 칼리안이 히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알아들었다는 말이었지 그것이 알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히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러다가는 왕자들 앞에서 허리에 손이라도 얹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로 둘을 쳐다보던 히나가 손을 움직였다. - 안, 가시겠다고, 약속, 해요. 그러자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히나의 얼굴이 엄하게 변하자, 칼리안이 달래듯 입을 열었다. “히나. 그것 말고 다른 것 약속하면 안될까?” 그리고는 누구보다 자상한 얼굴이 되어 부탁을 건네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가려고 했는데. 어떻게든 내가 가려고 했는데 형님도 너도 이렇게 말리려고 해서. 다른 것 약속할게, 히나.” 이야기 해보라는 듯, 끄덕끄덕. “우리도, 너도, 세크리티아에 아무도 안 가도 될 만한 방법을 생각해볼게. 그런 방법이 없으면 그 때 네 말 들을게. 꼭 들을게.” 그것을 보고 있던 플란츠가 한 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고양이 상자고 뭐고, 신 귤이고 뭐고, 악몽이고 뭐고 다 필요 없던 거다. 다 필요 없이 그냥 히나만 있으면 이렇게나 쉽고 빠르게 저 놈 고집이 꺾인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그러니까 이제 답 없는 일 생기면 저 놈 아빠 말고 히나한테 일러바치면 된다는 거지. 맞은편에 앉은 똘똘한 형님이 새로운 것을 또 잘 배웠음을 모르는 채로, 칼리안이 곁에 서 있던 히나를 올려다 봤다. “응? 히나.” 제 얼굴 써먹는 법을 칼리안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카이리스에 또 있을까. 칼리안을 앞에 둔 레이븐처럼 동글동글 순진해진 눈으로 올려다보며 말을 하는 것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드미레아와 플란츠 뿐일 거다. 제일 약한 것은 당연히 앨런이고. - 거짓말, 아니죠? “나 거짓말 못해. 얼마나 못하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아마 세렌티께서도 하루하루 깜짝깜짝 놀라고 계실걸. 이렇게 잘 들키고 다니는 사람인 줄 미리 아셨으면 이런 일을 나한테 시키지도 않으셨을텐데 그건 좀 아쉽네. - 알겠어요. 믿어 볼게요. 그래도 칼리안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원하는 답을 들은 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은 못해도 연기는 잘 하는 칼리안 아니던가. 그러니, 고맙다는 듯 생글생글 웃어보이는 칼리안 머릿속에 또 무슨 계획이 설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불안해지는 것은 오로지 플란츠 뿐이었다. * * * 이번에도 칼리안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 궁금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그러니 이렇게 체이스가 먼저 연락하여 상황을 물어볼 수 밖에. 칼리안에 대한 걱정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에 또 웃음이 나왔다. 미안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여서 웃음이 나왔다. -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할수록 주변에서 보내는 걱정만 더 늘어나는데, 제가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네요. 받아서 기분 좋아지는 걱정은 얀의 것 뿐, 체이스의 걱정은 그저 미안할 뿐인 칼리안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 히나의 말마따나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안에 있으면 누구도 걱정하지 않겠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히나도 체이스도, 그리고 이제 툭하면 같이 도는 삶은 완두콩이 걱정하지 않을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있던 중에 들려온 체이스의 목소리가 또 어찌나 반갑던지. 카이리스의 비는 사납고, 피하지 못하고, 늘 옷을 적시고 마는데. 체이스의 목소리는 그저 단비같았다. 반갑고, 기다려지고, 늘 그리웠다. - 아리안느는 이제 내가 괜찮다 하는 말은 절대 안 믿겠다고 합니다. 내 생각에는 칼리안 왕자의 말도 반 쯤은 걸러 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떨까요. - 이번에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괜찮아졌어요. 멈춰세우고 두들겨 잡아주는 손들이 있어서요. 저는 괜찮아졌는데, 저 때문에 다른 한 놈이 생각지도 못한 비를 맞아서. 그것이 미안하네요. 플란츠에게는 전하지 못할 미안함. 잊고 지냈을 것을 떠올리게 해서, 알지 않아도 될 것을 눈치채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그것을 체이스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어서 속으로만 그리 생각을 했다. 그 검이 그런 의미였을 줄, 몰랐어서. - 저만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오로지 저만. 몰라도 될 것을 알게 되는 바람에 안 그래도 삶아져 있던 완두콩이 또 물에 빠졌고, 체이스 역시 꿈같은 꿈과 악몽같은 현실 속을 거닐고 있으니. - 상관 없습니다. 괜찮아요. 숨겨진 말에서 적어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알아들은 체이스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화제를 돌리듯 곧바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 어제 이야기를 다 마치지 못한 탓에. 혹시 궁금한 것이 더 있을까 물어보려 연락을 했습니다. 조금 애매한 시간이기는 한데 나 역시 오늘은 일정이 있어서. 먼저 연락해서는 혹시 나한테 궁금한 것이 있느냐 물어보는 이상한 말이었지만 칼리안은 웃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체이스에게 먼저 무언가를 묻지 못한다는 것을 칼리안도 알고 있던 탓이다. - 혹시 남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요. 칼리안 왕자. 전날, 숲에서 대화를 하다 플란츠가 도착하는 바람에 대화를 급히 마무리 했었다. 그 후로 그레이를 만나고 플란츠와 또 한바탕 일을 치르고 히나를 만나고, 시간을 쪼개어 쓰느라 이제껏 대화를 잇지 못했었다. “애옹.” 발치에 다가온 루시에게 손을 뻗으니 제가 알아서 머리를 가져다 댄다. 정말 어쩌면 이렇게나 사람을 좋아하는지. 단단한 듯 작고 동그란 그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었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불만족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더니 곧장 맞은 편에 있던 담백한 놈한테 가 버렸다. - 네. 안그래도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자는건지 죽은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얼굴로 눈을 감고 앉아있던 플란츠가 무릎 위에 올라온 루시를 쓰다듬는 것을 보던 칼리안이, 체이스에게 대답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놈은 생각할 것이 많아 보이고, 칼리안은 대화를 나누어야 했으니 이만 내려가려는 것이었다. “그냥 있어.” 그랬더니 플란츠가 이런 말을 했다. 로젤리타를 끝내고 왔을 때 ‘잘 왔다’ 했던 말을 들었던 그 날처럼 놀란 얼굴이 된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역시 아까 먹던 것 중에 맘에 안드는 게 있었나본데. 뭘 잘못 처먹지 않고서야 놈이 저럴 리가 없지 않나. 웬일로 안 쫓아내고 있으라 하는지. “비.” 비는 오고 할 말은 남았을 텐데, 내려가서 체이스와 대화하고 남은 말 하러 다시 올라오느라 쓸데 없이 비 맞지 말고 그냥 있으라는 뜻일 터였다. “네.” 마찬가지로 담백하게 대답한 칼리안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체이스를 향해 말을 했다. - 참견할 일은 아닌지 모르겠으나······ 세크리티아의 국왕 전하를 함부로 들춰보려 하지 말아주십사 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사람이니 섣부르게 건드려보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시는 척, 평소와 똑같이 움직여주셨으면 하는 말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말에 한참동안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정말 한참동안 대답이 없어서 불안해진 칼리안이 체이스를 부르려 할 때, 체이스로부터의 말이 들려왔다. - 사실 이미 한 번을 들춰 보았습니다. 정말 기억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어느 누구로부터 무슨 말을 전해듣고 그런 결론을 낸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 그것을 확인해보기 위해 대화를 했습니다. 체이스와 플란츠가 같은 것을 생각해서 데블란을 한 번 들춰봤었다. ‘베른’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데블란이 그이름을 기억하는지를 확인해 본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을 칼리안에게 알려줄 수는 없었지만 확인한 결과에 대해서는 알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체이스는 가능한 대화의 내용은 숨긴 채 이야기를 했다. - 기억 못하는 것을 확인했고 별 일은 없었으니 걱정 마세요. 괜찮으니까. - 쉽게 단정짓지 마세요. 절대 그러지 마세요. 쉽게 믿으시면 안 됩니다. 별 일이 없었다 해서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 칼리안이 조금 빠르게 경고를 전했고, 혼탁해지다 되돌아오던 데블란의 두 눈을 떠올린 체이스가 대답했다. - 네. 안심하고 있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니 그것도 걱정 말아요. - 그런데 어떻게 확인을 하셨고 어떤 대화를 나누셨다는 말입니까. 궁금하네요. 그런데 하필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확인을 했는지, 다시 말해 무슨 질문으로 데블란의 속내를 떠보려 했는지가 그냥 궁금해서 물어 본 것이었다. - 그것은. 그런데 체이스의 대답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칼리안에게 있어서는 별 생각 없는 그냥 궁금증이겠으나 체이스에게는 최대한 피하고 싶던 말이었으니 어떤 대답도 해 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플란츠를 쳐다봤다. 여전히 살짝 눈을 감고 있던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물었다. “체이스 왕세자께서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기억을 찾았는지 아니면 소문으로 접해서인지를 확인하려 대화를 했고, 확인해보니 기억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하시는데.” 플란츠의 눈꼬리가 찌푸려진다. 무슨 말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알고 있는데 칼리안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는 얼굴이다. 칼리안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엇입니까. 그 방법.” 별 생각 없는 궁금증은 의심이 됐다. 분명 둘이 뭔가를 숨기고 있지 않나. 그 의도야 당연히 칼리안을 위해서겠으나 상대가 데블란이라면 칼리안도 알아야 했다. - 그것은 묻지 않고 넘어가 주었으면 합니다. 칼리안 왕자. 체이스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묻지 마.” 플란츠 역시 같은 말을 했다. 비밀 들키는 것 참 잘 하는 체이스에 대해 온갖 욕지거리를 삼켜내면서. “형님.” 칼리안의 붉은 눈이 플란츠를 응시했다. “얘기, 해주세요. 괜찮으니까.” 그 붉디 붉은 눈이 정말 붉은 색인지 혹은 다른 색인지 잘 모르겠다고. 플란츠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 제39장. 내가 많이 참았지(2) > 순순히 말한다면 둘 모두 형이 맞다. 모질게 말한다면 둘 모두 형이 아니다. 안다.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순순히 굴어야 할지, 모질어져야 할지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너희들이 나를 생각해주는 것이 고맙다 말하지 못했다. 너희가 왜 나에 대한 일을 멋대로 감추느냐 말하지도 못했다. 웃지도 못하고 화내지도 못하는 그런 마음으로 플란츠를 보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괜찮으니까 얘기해달라고. 여전히 그리운 냄새로 기억되는 작은 바닷가에서, 이미 체념했음에도 기사가 되지 않을 수는 없는지를 다시 물어보던 그 목소리로 넘어가 달라 부탁하는 체이스의 말에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짖든가 아니면 물든가, 어찌됐건 그에 대해 더 묻지는 말고 넘어가라는 얼굴을 한 플란츠를 보면서 웃을 수도 없었다. - ······ 아무튼 꼭 조심해주세요. 더 들춰보려 하지 말고 잘 지켜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체이스에게는 이렇게 다시 한 번 당부만 했다. 말 실수라고 하기에는 우습지만 아무튼 칼리안에게 무언가를 들킨 것은 체이스였다. 그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이스에게는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 칼리안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전부 제 심장에 새겨놓을 체이스임을 알아서, 지금 무엇을 어떻게 묻든 체이스에게는 송곳같은 말이 될 뿐임을 알아서 더 묻지 못했다. 플란츠의 말마따나, 그래. 체이스는 지금의 칼리안보다 어리니까. 전부 다 괜찮다 여기기에는 지고 가야 할 것이 너무 무거울테니까. - 내가 칼리안 왕자에게 어떻게든 설명을 해 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아서. -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데블란이 얽혀 있는 그런 일에 평소의 침착함을 잃는 이가 어디 칼리안 뿐이겠나. 체이스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였다. 데블란과 무슨 대화를 했는지에 대해 칼리안이 가벼운 의문을 가지리라는 것을 가늠하지 못하고, 그런 가벼운 의문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 혹은 변명을 해 주지도 못할 만큼 말이다. 이 얼마나 체이스답지 않은 모습인지. - 그저 부탁하고 싶은 말은, 그 일에 대해 자세히······. - 제가. 나중에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때문에 칼리안도 답지 않게 체이스의 말을 끊었다. 잠시 말을 멈춘 체이스가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다시 얘기해요, 칼리안 왕자. 체이스는 차마 더는 말을 얹지 못한 채 이렇게 얘기했다. 칼리안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통신을 끊었다. 그리고 플란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더 묻지 마. 나한테도.” 말 좀 들으라는 듯, 반지의 빛이 꺼진 것을 본 플란츠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체이스에게 질문하지 못한 채 대화를 마쳤으리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물론 체이스 대신 플란츠를 탈탈 털어내려 하는 속내도 눈치를 챘다. 그런 플란츠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칼리안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란델 형님 말은 하나도 안 들었어도 형님 하시는 말씀은 고분고분 들어드리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어처구니 없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플란츠는 인상을 찌푸리거나 비웃지 않았다. 말을 잘 들으려 노력한다는 이야기에 웃지 못하는 이유는, 믿기 어렵지만 저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아서였다. 본래 성격이 대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몰라도 체이스의 말이나 간간히 드러나는 예전 성격대로의 행동들을 보아하면 지금은 참 많이 둥글둥글해진 상태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 않나. “란델 형님은 저를 다루려 하셨지만 형님은 다잡으려 하시니까. 그것을 알아서 저도 꽤 열심히 노력합니다.” 지배하려 드는 것 말고, 플란츠는 그냥 형 노릇을 하려고 들었으니까.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플란츠를 대할 때는 꽤 많이 노력했다. 죽이지 않고 잘 살려둔 데다, 칼은 좀 썼지만 버릇 없게 주먹질을 한 적도 없었고, 밥도 잘 먹여 드렸고, 앉으라 하면 앉고 고집 부리지 말라 하면 꺾여 주고 뭐 그렇게 말이다. 물론 본의 아니게 4층을 제 방처럼 들락거린다거나 사람 말을 하는 날보다 짖는 날이 더 많아졌다거나 하는 작은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지만 아무튼 사람이 노력이라는 것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겠나. 아무렴.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못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은데 하나도 모르겠어서. 그래서요.”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노력도 못하겠다. 무엇에 대한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아서. 형이 맞는지 아닌지 정의 내릴 수 없는 그 둘이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숨기려는 사실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을지. 아니, 누구와 관련된 이야기일지 알 것 같아서. 칼리안이 저지르는 일 뒷처리 하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멀고 먼 남쪽 어느 바닷가 마을에 사는 웬 보라색 눈깔 가진 놈 뒷처리까지 하게 생긴 연두색 빗자루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칼리안.” “······ 네.” 얌전히 대답한 칼리안을 앞에 둔 플란츠가 찻잔 속에 든 딸기 조각, 그리고 민트 잎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알아야 할 내용이면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잘 말해줄 테고, 별 대수롭지 않은 내용이면 이미 얘기를 했을 텐데. 조용히 넘어가면 안 될 일인가.” 칼리안이 대답 없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대수롭지 않은 일도 아닌데 칼리안은 몰라야 할 내용. 그러니까, 베른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 그것을 끝끝내 알려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멋대로 칼리안의 일에 끼어들어 마음대로 사실을 감추고 있으면서, 더 알려 하지 말라는 소리를 참 당당하게 한다. “히나가 멋대로 자신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 했던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셨으면서 제 일에는 왜 이렇게 잘 나서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아우님이나 나나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그 모순된 모습을 언급하는 칼리안에게 플란츠가 대꾸했다. 멋대로 플란츠의 일에 끼어들어 마음대로 사실을 감추고, 더 알려 하지 말라는 소리를 더 많이 하는 것은 오히려 칼리안 쪽이 아니던가. 물론 칼리안에게 있어 그 왕제에 대한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지 않았으나 그렇다 해서 서로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항상 뭔가를 알려드리면 생각지도 못한 걸 함께 배워가시고요.” “내 아우님께서 워낙 잘 가르쳐주시니.” 조금도 지지 않고 대꾸한 플란츠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생각에 빠져들 때 그런 얼굴이 되곤 한다는 것을 아는 칼리안이 다른 말 없이 플란츠의 결정을 기다렸다. “······ 내 아우님께서는 왜 굳이 유리조각 위를 걷겠다 하시는지.” 그것 하나 덜 밟는다고 무슨 큰 도움이 되겠냐만은, 그나마 그 하나라도 덜 밟도록 치워 둔 것을 굳이 찾아가서 지르밟으려 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굳이 밟겠다 하는 이유는.” 비슷한 말을 했던 앨런이 생각난 바람에 소리 없이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질부리려고요, 세렌티 만나면.” 그리고는 말 안들을 때마다 짓던 딱 그 표정을 한 채로 대답을 했다. “주시는 것 전부 다 거절 않고 받아서, 전부 다 겪어내려고요. 피하지도 못할 비만 매번 주시니 그냥 다 맞으려고요. 그래서 나중에 만나면 받은 만큼 전부 다 갚아주려고요. 그렇게 하려면 하나라도 더 받아야 하나라도 더 갚아드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럽니다. 제가 원망은 잘 못해도 셈은 잘 하니 말입니다.” 아. 내 동생 또 미친 소리 한다. “······ 환장하겠군.” 한 번 돌아가시고 두 번째 사시는 분이라 그런가, 생이 남다르셔서 그런가. 그래서 그런가. 어찌나 남다른지 남다르게 미쳐 돌아가는 저 사고방식을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는데 어떡해야 하나. 체이스 돌아갈 때 그냥 걔 동생 하라고 같이 보내버릴 걸 그랬다.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도 같이 묶어서, 쟤 아빠도 보내고 키리에도 보내고 그 버르장머리 없는 시종도 보내고 그냥 전부 다 한 묶음으로 바리바리 싸서 보내버릴 걸 그랬다. 이왕 가는 길에 텐실 앞에 떨구고 가라고 란델 형님도 같이 묶어 보내고 왕궁이 숨이 막히든 말든 카이리스는 그냥 내가 루시 데리고 전하 부양하면서 알아서 어떻게든 해 볼 걸 그랬다. “히나도, 키리에도, 얀도, 스승님도 저 때문에 살고 있으니 그것만으로 다행이다 생각하고 살았는데 비가 내리고. 형님도 살린 김에 카이리스도 살리고 세크리티아도 살리고, 그렇게 해서 이 시스테라 대륙도 좀 살려보려면 저도 살아야 하니 그런 생각으로 살자 했는데 비가 내리고. 그러다보니 더 못 참겠어서요. 참다 참다 더는 못참겠어서요.” 내가 많이 참았지. 진짜 많이 참았지······. “그러니 그렇게라도 해야 살 것 같아서요. 살고는 싶은데 이유를 만들어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제는 정말로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럽니다.” “그러다 세렌티 앞에서도 짖겠군.” “그도 나쁘지 않겠네요. 세렌티 앞에서, 멍멍, 하고.” 꼭 해보겠습니다, 라고 농담 아니라는 듯 대꾸한 칼리안이 씩 웃었다. “알려주세요. 저는 형님만큼 어리지 않아서 괜찮으니까.” 그 비밀이 무엇이든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텐데. 한 걸음 앞서 가다 비를 맞든 한 걸음 뒤에서 비를 맞든 비에 젖기는 마찬가지였으니. 언제가 되었든 맞아야 할 비라면 차라리 지금 맞아서 이를 갈겠노라고. 플란츠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의 의미였다. “미친놈.” 미친놈이 그렇게라도 살겠다는데 어떻게 막겠느냔 말이다. * * * 마음이 답답했던 만큼, 손은 빠르게 말을 만들어냈다. ‘애들도 아니면서, 애들처럼, 굴잖아.’ ‘왕자님들이 그렇게 굴었어?’ 의연하게 빌헬름 관을 나와 체르밀 궁에서 칼리안과 플란츠를 만나고 나온 뒤, 히나가 키리에에게 어리광을 부리듯 속마음을 털어놨다. 베로니카와 드미레아에게는 언니였고 칼리안이나 플란츠에게는 누나였지만 키리에에게만은 동생이었으니 말이다. ‘내 범위를 정해놓고, 생각한대로, 나를, 걱정해주는 게, 나를, 위하는 거라고, 두 분 다, 그렇게만, 생각하니까. 나를 오히려, 어린애처럼, 대하니까. 그게, 싫었어.’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얘기한거야?’ ‘응.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어. 할 줄 아는 것, 있다고, 얘기했어.’ ‘그래. 잘 했어.’ 너를 걱정해서 그렇게 군다거나, 그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하지 않았다. 무조건 히나의 편에서 히나 말만 들었다.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말해주며 네가 이해하라 말하지도 않았다. 블루베리가 파란색이 된 날 이후 키리에는 늘 그랬다. 씩씩하게 두 왕자 앞에서 제 할 말을 하고 와서는 그마저도 속이 상해서 키리에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니 굳이 자신의 생각을 더해가며 히나를 가르치려 들 필요가 없음을 알아서였다. 히나가 몰라서 묻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저 들어주면 되는 일이니까. 그렇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히나를 빌헬름 관에 데려다 주니, 아르센이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베른 경, 혹시 부군단장이신 왕자님이나 왕자님이신 부군단장님 지금 대체 어디서 뭘 하고 계시는지 알고 있나? 내가 지금 너무 바빠서 명줄까지 팔게 생겼는데 부군단장이신 왕자님인지 왕자님이신 부군단장님인지 도무지 오시지를 않아서.’ 이렇게, 플란츠의 행방을 물으면서. 때문에 그 사람 지금 칼리안 왕자님과 대화중이라는 답을 전했다. ‘아. 그렇군. 알려줘서 고맙네.’ 이 말에, 정말 죽을 듯한 얼굴이던 아르센은 아주 깔끔하게 플란츠 찾기를 포기하며 다시 일을 하러 갔다. 어쩐지 며칠 째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마법사들은 워낙 깨끗한 터라 잘 가늠이 되지 않아서 키리에도 그냥 관심을 껐다. 눈 밑은 언제나 검었으니 오늘도 그냥 저러다 잠들든지 기절하든지 죽든지 뭐든 알아서 잘 할 테니까. 그 뒤 별반 할 일이 없어서 다시 체르밀로 돌아왔다. 개인 수련 시간이 현저히 줄어든 탓에 틈이 날 때마다 수련을 하고 있었다. “키리에.” 그렇게 수련장에 들어서니, 반가워하는 목소리로 키리에를 부르는 이가 있었다. 칼리안이었다. 칼리안은 이런 시간에 수련장을 찾은데다 키리에를 보았음에도 검을 뽑지 않고 수련장 바닥에 그대로 앉은 채였다. 대련을 하거나 키리에의 검을 보아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렇게 앉아 숨을 쉬는 작은 소리는 평소와 같았으나 또 어딘가 달랐다. 히나에게 혼이 났다 하여 저렇게 흐트러질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무슨 일이 있는건가, 없는건가. 일이 있는 건 아닌데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어렵네.” 웃는 소리가 미묘하게 흔들린다. 웃음 끝에 매달린 것이 또 아팠다. 그래서 키리에는 다른 것은 더 묻지 않고 칼리안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대련 말고, 가르침 말고, 대화도 말고. 그냥 키리에 등이 필요해서 찾아왔음을 알았다. 그것이 지금의 키리에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기댈 곳이 필요해서 와 있었음을 알았다. 저벅 저벅 칼리안 쪽으로 걸어간 키리에가 털썩, 하고 칼리안의 곁에 앉았다.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술도 못 드시니 업어드릴 수는 없고, 싸움이 난 것도 아니니 등을 보여드릴 수도 없고. 언제나 잘 듣는 귀는 항상 여전하니 칼리안의 목소리는 언제든 다 들을 수 있어서. 역시, 키리에. 흘려보내듯 말한 칼리안이 씩 웃었다. “너도 알고, 스승님도 아시고. 세크리티아의 왕세자······ 체이스 왕세자께서도 아시는데.” 그리고는 또 두서없지만 한결같이 소중하고 아픈 말을 내어 놓았다. “내 형님은 모르신다 하네. 내가 말하지 않아서 그 이름이 안 들리신다고 그러네. 그럴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알고 있어서 괜찮았는데 알고 있으니 괜찮을 줄 알고 굳이 그걸 또 내가 나서서 확인을 했어.” 칼리안이 제 입으로 말해주지 않으면, 혹은 누군가 직접 기억해내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게 된 이름. 잊혀야 하는 이의 그 이름을 세렌티가 정말로 지워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나서서 확인하게 되었음을 입에 담았다. 언제나 그 한 마디 한 마디 허투루 듣지 않는 키리에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들었다. “스승님 말씀처럼 왕궁 앞에 크게 써서 붙여놓을까. 내가 써서 붙여놓으면 안 까먹을까. 안 잊어버리고 알아줄까, 하다가. 그래도 그러면 안 되겠지, 하다가. 어차피 다 아는 거 한 번 해볼까, 하다가. 그렇게 하면 스승님께 혼나려나. 시스파니안께서도 이번만큼은 이해 못해주시겠다 하려나. 하다가. 그냥······ 그러다가.” 바람 소리 같다가도 물 흐르는 소리처럼 들리는 그 목소리를, 그렇게 잊혀져가는 한 사람의 이름에 대해서, 그렇게 흘려가며 다 들어주었다. “알고 있어서 괜찮았는데. 생각해보니까 조금 안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어찌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어찌해야 하나, 생각을 하다가.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그러다보니 갈 곳이 없어서.” 바람 소리 듣듯이 흘려가며 들었다. 물 흐르는 소리 듣듯이 흘려가며 들었다. “그래서 여기 잠깐만, 있다 가려고.” 말 한 마디, 작은 숨 소리 하나까지 전부 다 흘려보내듯 기억해가며 들어주었다. 이번에는 잊히지 않게 하겠노라 서약하였으므로. “그렇게 하십시오. 잠시 계시다 가셔도 괜찮습니다.” 과거의 서약은 이미 지켰으니, 이번 약속도 반드시 지키겠노라 다짐하면서. < 제39장. 내가 많이 참았지(3) > 다행인 점은 죽지 않았다는 것. 불행인 점은 기절도 못했다는 것. 어쩌면 플란츠에게는 둘 다 불행한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아르센은 죽지도 않고 기절도 못한 채 여전히 일에 치이고 있었다.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께서는 당장 이주일 내로 발칸 마법사들이 또 늘어난다는 것을 혹시 아십니까?” “알아.”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께서는 샤워 하셨습니까?” “했어.”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께서는 아침 식사 하셨습니까?” “했어.”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께서는······.” “나가.” 집무실 밖으로든 이 세상 밖으로든 좀 꺼졌으면 좋겠다는 눈을 한 채 대꾸한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옅은 색의 블루 토파즈로 장식된 셔츠 칼라 핀과 커프스를 툭툭 풀어 레릭에게 건네는 것을 본 아르센이 또 입을 열려 했다. “닫아.” 플란츠는 무슨 말이 나올지 뻔한 입을 막은 뒤 곧장 소매를 걷어 올리고 서류로 눈을 돌렸다. 덕분에 ‘바쁜 와중에 샤워도 하시고 식사도 하시고 주렁주렁 잘도 달고 오셨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아르센이 늑대의 동공을 연상케 하는 암흑색의 커피를 쭉 들이켰다. 칼리안과 함께 있느라 늦은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멀끔하고 여유로운데다 호화롭기까지 한 저 모양새를 보니 괜한 울화가 치미는 것이다. 살겠다고 마시는지 죽겠다고 마시는지 모를 카페인을 섭취하는 아르센을 슬쩍 쳐다본 레릭이 플란츠를 향해 말했다. “무슨 차를 가져다 드릴까요, 왕자님?” 빠른 속도로 인명부를 넘겨가던 플란츠가 지나치듯 대답했다. “커피, 말고.” “네. 바로 준비해오겠습니다.” 이렇게 답한 레릭이 아이스 블루 색의 재킷을 걸어두고 비슷한 색상의 얇은 가디건을 플란츠에게 건네준 뒤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 잠시동안 플란츠의 얼굴을 쳐다보던 아르센은 조용히 서류로 눈을 돌렸다. 아무래도 이번에 앨런을 만나게 되면 어리고 똑똑한데 말이 짧고 돈은 많은데 사회성 부족한 부군단장 말고 평범하게 삶에 찌든 사람을 한 명만 더 붙여달라는 말을 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물론 부군단장이 더 늘어나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일 좀 편하게 도와 줄 수 있을 만한 그런 사람으로. - 똑똑 오래지않아 다시 들어온 레릭은 오렌지와 바닐라 향이 나는 홍차를 플란츠와 아르센의 자리에 각각 하나씩 내려놓은 뒤 말했다. “그럼, 필요하실 때 다시 불러주세요.” 이렇게 언제나와 같은 인사를 건넨 레릭이 밖으로 나간 뒤, 차 향에 감탄한 아르센은 잠시 쉬는 기분이 되어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무슨 말씀을 그렇게 나누셨습니까?” “이것저것.” 귀찮아하면서도 대답은 꼬박꼬박 해준다. 물론 그것을 제대로 된 대답이라 할 수 있다면 그렇다는 것이지만. “표정이 안 좋으신 것 같아서 그럽니다.” 어디까지나 플란츠와 함께 있었을 칼리안을 걱정해서 묻는 중이었다. 새로 자란 이끼 같은 2왕자 말고 곱디고운 얼굴로 어떤 지옥을 보여줄 수 있는지 알려주시는 것에 결코 몸을 사리지 않는 3왕자님 말이다. 저 플란츠를 걱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절대로. “부군단장, 너.” “네.” “뱀 사냥 해 볼 생각 있나.” 어쩐 일로 마법사가 아니라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를 찾나 했더니. “큰 뱀.” 플란츠는 별 것 아니라는 듯한 얼굴로 벌써 두 번째 서류 뭉치를 펼쳐들며 이렇게 덧붙였다. “저 이제 급여 없습니다. 더 깎을 급여가 없어서 당분간 사고 못 칩니다, 왕자님이신 부군단장님.” 서로의 부모와 연을 끊어주는 방식으로 우애를 다지려 드는 처돌다 미친 형제 관계에서 ‘처돈 형’을 담당하고 있는 플란츠에게 아르센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 쪽 술 창고에서 바질리카 한 병 꺼내오는 일과는 조금 다르지 않겠습니까.” 바질리카가 뭔지는 몰랐지만 헛소리라는 것은 알아들은 플란츠가 아르센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내 아우님이 시키는 일이라면, 해 볼 생각 있나.” “플란츠 왕자님.” 좋은 향이 감도는 찻잔을 내려다보던 아르센이 플란츠를 불렀다. 청량한 새벽 하늘 빛 눈에 이제 막 피어나는 숲이 담긴 듯한 연두색 눈을 바라봤다. “왕자님께서는 그 일 절대 안 시키실 겁니다. 자칫 잘못되면 세크리티아와 전쟁납니다. 전쟁 날 걱정 없다 하더라도, 왕자님께서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 발칸만은 그 땅에 들이려 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칼리안이, 그 누구도 아닌 아르센을, 그 어떤 군대도 아닌 발칸을, 세크리티아에 들이려 하겠는가. 아르센의 말대로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플란츠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가지 않고 뱀을 잡을 방법. 미친 동생이 그것을 고민하다 대체 무슨 엉뚱한 결론을 내릴지 여전히 알 수가 없어서. “그 일 때문에 아침에 이야기가 그렇게 길어지신 겁니까.” “아니.” 파란 머리 마법사와 서로 으르렁거리지 않고 대화하는 것이 아마 처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탓에 아주 조금 너그러워진 마음이 된 플란츠가 설명을 하나 덧붙였다. “누구 속 도려내는 일.” 이 말에 아르센이 눈살을 찌푸리며 플란츠를 쳐다봤다. 또 무슨 말을 해서 칼리안 속을 긁어놨느냐는 뜻인 듯 보여서,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아니야.” 내가 아니라. 어디 사는 왕세자가 직접 칼을 잡았는데. “······ 내가 시킨 셈인가.” 그 왕제의 형 노릇은 포기하지 말라 하는 바람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던 플란츠가 한 모금 마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결백한 죄인들은 일이나 하지.” 무슨 일인지 더 캐묻기를 포기한 아르센이 킥킥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백한 죄인이라. 그 말 참 마음에 든다 싶어서였다. * * * 특별히 싫어하는 과일은 아니지만 즐기지도 않았다. 물론 칼리안만 그랬다. “좋아하시는 과일인가 봅니다.” 시고, 쓰고, 떫고. 자몽이란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맛을 지닌 과일이 아니던가. 지난 번에는 자몽 케이크를 내어 주더니 이번엔 자몽을 고스란히 담아 만든 소르베다. 그 묘한 맛을 한 번 본 뒤 스푼을 내려놓는 칼리안을 향한 란델의 목소리가 텅 빈 방을 울렸다. “표정이 안 좋구나.” “과일 얘기하는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언제 꺼내든 상관이 있을까.” “걱정하시는 것도 아니면서 말씀을 꺼내시니 그럽니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한들 내가 너를 걱정할 필요가 있겠느냐.” “너무 믿으시네요, 저를. 그래도 사람인데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장담하건대 그럴 일은 없으리라는 듯한 얼굴로 살짝 웃은 란델이 소르베를 입에 넣었다. 그 웃음의 온도가 딱 지금 저 소르베 쯤 되는 것 같다 생각하는데, 입 안에 퍼지는 자몽의 향을 삼킨 란델이 다시 말했다. “브리센일까, 다른 곳일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소르베를 장식한 말린 자몽 조각에 눈을 둔 칼리안은, 섣불리 란델의 의중을 가늠하여 답을 내놓는 대신 정확한 뜻을 물었다. “너를 건드리고 있는 곳 말이다. 네 표정이 보기에 좋지 않으니, 무엇이 너를 그리 만들었을까 궁금하구나.” “정원 손질하실 일이 없으니 생각이 많아지셨습니까. 궁금하신 것이 늘어나셨네요.” 여름의 끝자락, 정원의 장미는 대부분 시들어 떨어졌다. 로젤리타에서 돌아왔을 때 남아있던 한 송이의 장미를 떠올려보던 칼리안의 말에 란델은 대답 없이 다시 한 번 소르베를 입에 넣었다. - 아무래도 그 이야기는 내가 직접 해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연락을 했습니다. 하지 못했던 그 말을 직접 전해주려 칼리안을 찾은 체이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다시 맴도는 기분이 든다. 끝을 모르는 심연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그 심연조차 꿰뚫어 볼 통찰을 지닌 이가 함께 떠올랐던 탓이다. “네. 별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다행이라는 듯 혹은 아쉽다는 듯 건네진 대답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행동과는 별개로 키리에의 앞에 털어놓았던 조금 전의 기억이 꼬리를 물고 계속 떠올랐다. - 그 이름을 내가 플란츠 왕자에게 전했던 적 있습니다. 카이리스를 떠나오기 전 날, 플란츠 왕자와 대화를 하다 그 이름을 입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기억하는 것,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알려달라고.’ 시스파니안을 만나기 전, 시간의 축을 앞에 둔 플란츠는 분명 칼리안에게 베른의 이름을 물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 전해지지 않았군요. - ······ 나의 입으로는 전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 생각됩니다. 아리안느나 카스트린 경 역시 같았는데 키리에나 마나실 경은 기억을 하고 있었으니. 세렌티. - 시스파니안의 입도 막으시는 분인데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 미안합니다. 미안해야 할 것은 체이스가 아니었다. - 미안해요. 칼리안 왕자. 세렌티. 세렌티. 세렌티. -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 사과의 끝에서도 차마 옛 동생의 이름을 말하지 못한 체이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대화를 마쳤다. 그리고 플란츠와도 남은 대화를 마무리했다. - 형님 탓 아닙니다. - 그래. - 세렌티. 만나게 된다면 화풀이는 꼭 해야겠습니다. - 그래. 플란츠는 그 이상의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그 왕제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 뒤 칼리안은 별 일 아니었다는 듯 행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아무렇지 않을 수 없음을 알고 있을 테지만 아무렇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제 막 제 앞가림 하겠다며 이리저리 굴러다니기 시작한 완두콩한테 사실 하나도 안 괜찮다 말할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일어날 수 밖에. 그렇게 키리에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란델을 만나러 왔다. “마음이 복잡하거든 다음에 다시 오거라.” 어느새 깊은 물이 짙은 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체이스와의 대화마저 모두 읽어낸 것이 아닐까 하고 착각하게 되는 눈빛에,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란델 형님 뵈니까 복잡한 마음이 싹 가라앉네요.” “다행이구나. 그리 생각해주니.” 칭찬 아닌 말임을 알면서도 란델은 차분히 답을 했다. 칼리안의 삼켰던 고운 얼음 결정보다 더 차가운 기운의 말이 이어졌다. “도움이 된다면 종종 올라오거라.” “도움이 될 것 같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상대방을 향한 진심이라고는 방금 녹아 사라진 소르베만큼도 없는, 배려심 가득한 경계의 말들이 잠시 오갔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을 한 번만 만나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랜 시간에 걸친 안부 인사 나누기가 끝나기 무섭게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다. 란델은,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소르베를 한 입 더 먹은 뒤 느린 대답을 했다. “부탁인지 지시인지. 그것을 먼저 말해주려무나.” “부탁이라 하면 싫으십니까.” “내키지 않는구나.” 칼리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브리센 변경백을 만나세요. 특별한 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적당히 시간은 끌어 주시고요.” “너의 이득인지 나의 이득인지도 함께 일러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아. 그놈 참 따지는 것도 많다. “저는 속이 편해지고, 란델 형님은 심장이 편해지기 위해 필요한 일이니 둘 모두의 이득이라 하면 되겠네요.” 그레이 브리센을 잘 써먹어서 에반을 속인 뒤에 에반을 없애고 나면 그놈의 완두콩이 이상한 협박을 더는 못할 테니 칼리안은 속이 편해질 테고, 완두콩이 제대로 나서서 도와주면 란델의 심장에 묶인 맹세의 인도 해결이 될 테니 란델 심장도 편해질 일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란델이 눈을 내리뜨며 말했다. “가능한 날짜를 확인해서 내려보내마.” 칼리안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 뒤 다음 질문을 했다. “레넌 브리센은 언제부터 만나셨던 겁니까.” “만나지 못했다.” “한 번도 못 만나신 겁니까.” “로젤리타 중에 네가 치워갔지 않았더냐.” 세작 푸른 솔새가 헤일 라트란 백작과 결탁해 모은 신물을 란델에게 건네주려 한 것이, 바로 당시의 브리센 상단 상단주였던 레넌 브리센이었다. 레넌이 자꾸 앞길을 막는 것을 더 참지 못했던 칼리안이 브리센 상단도 사들이고 레넌을 정리하지 않았던가. 그 일을 상기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때문입니까.” “그렇지.” 세상 모든 일을 대체로 자기 탓으로 돌리는 어떤 놈이랑은 참 많이 다르다. 두 형님을 적당히 반반 섞어놓으면 안되나 싶은 마음을 애써 접은 칼리안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을 전했다. “죄송하다는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편한대로 하거라. 어차피 주고 받는 관계이니.” 드미레아가 할 법한 이야기를 란델이 하니 복잡한 심정이 되어버린다. “그런 말씀은 좀 서운한데요. 형제 사이에.” 이 말에, 시선을 올린 란델이 칼리안을 직시했다. 차갑고, 깊고, 막막한 물이 꺼지지 않을 불을 직관했다. “불편한 말을 올리는구나.” “그러십니까.” “새삼스럽고.” 칼리안이 웃었다. 란델의 눈을 볼 때마다 늘 생각나는 그날의 깊은 바다. 그렇게나 깊었던 추운 바다에 체이스는 대체 어떻게 뛰어들었던 걸까 싶어서. 겁도 없이 무슨 정신으로 뛰어들었을까 해서. 란델이었다면, 물론 플란츠가 다쳤던 날에 이미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지만 어쨌든 란델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분명 앞 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을 체이스, 그리고 생각이 앞섰을 란델이 서로 너무 다른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물어보거라.” “왜 그냥 가셨습니까. 그 날. 도와주시지 않고.” 이런 칼리안의 질문에 란델은 주저함 없이 입을 열었다. 칼리안이 언급하는 그 날이 언제를 의미하는지는 묻지도 않은 채였다. “서로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나는 비밀을 지키고, 둘째는 자리를 지켰으니.” 출혈이 과해 실리케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는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덕에 반 브리센 귀족들의 시야에서 자연스레 벗어날 수 있었던 실리케의 아들을 떠올린 란델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 지독하리만치 이성적인 이의 대답을 들은 칼리안의 손 끝이 테이블 위에 호선을 그린다. 란델과 체이스는 달랐다. 란델과 플란츠도 달랐다. “만약 죽어가던 것이 저였다면 그 때는 나서주셨겠군요.” “그 편이 서로 좋은 일이고, 보기에도 좋지 않겠느냐.” 칼리안은 목숨을 구하고 란델은 숨기는 것을 들키는 대신 발칸을 등에 업은 칼리안과 손을 잡고. 두 형제의 우애를 알려 브리센에 대응하기 딱 좋을 테니, 그런 상황이었다면 란델이 나서서 치유를 해주었으리라. 칼리안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잘못되고 이기적이라 말할 수 없었다. 우습기는 해도 오히려 왕자로서 가장 올바른 생각을 지녔다 해야 할 일이니 그것을 탓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시종 보내주세요. 일정 전달하겠습니다.” 더 이상의 질문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칼리안을 란델이 한 번 더 쳐다봤다. “나도 묻고 싶은 것이 있구나.”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일어나지도 않았다. “카밀론 말고, 아르피아 궁으로 갈 생각은 여전한 것이냐.” 카밀론에서 개를 키우겠다고는 했는데 아르피아 궁에 가서 무언가를 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지 않았던가. 그러니 칼리안이 정말 왕위에 오를 생각인지가 궁금했었다. “형님은 안 가신다 하고. 란델 형님께는 양보 못하겠고. 그러니 제가 가야지 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탐나고 쓰임새 많은 것은 아닌데 그래도 너한테는 왕관 양보 안 할거라는 말에, 란델이 한 가지를 더 물었다. “혹시 이제는 목적으로서 그 자리가 필요해진 것은 아니더냐.” 다른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왕좌 말고, 왕좌 그 자체를 원하게 되었는지 묻는 말. “아뇨. 제 꿈은 오히려 조금 더 커져서요.”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작은 나라의 왕관은 이제 수단으로 쓰기에도 부족하네요. 나중에는 누굴 좀 만나러 갈 생각이라서.” 잠든 세렌티 뒤집어놓고 뒷통수 후려치러 가겠노라고. 그렇게 하면 아르센이 진짜로 동상 세우려 들 테지만 그 때 쯤이면 그 정도는 봐줘야지. 그리고 나서 왕궁 정문에 짧은 이름 하나 대문짝만하게 새겨놓고야 말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정한 막냇동생을 보며, 란델은 마지막 소르베 한 스푼을 입에 넣었다. 여전히 읽어내기 어려운 얼굴을 한 채 가만히 앉아있는 란델을 보던 칼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플란츠와 대화를 했고 히나에게 혼이 났다. 체이스에게 사실을 전해들은 뒤 키리에에게 마음을 털어냈다. 그 후에는 란델을 만나 필요한 것을 요청했다. 해서 이제는 궁금한 것을 물어보러 갈 참이었다. 비에 막혀 걸음을 멈추기에는 지나온 길이 너무 짧으니까. 정신 흐트리지 않고 곧게 걷기에도 아직 먼 길이 남았으니까. 그러니 정신 차리고, 멈추지 않으려 노력하며 헤이시아 궁 터로 가 볼 생각이었다. 지극히 위대한 이를 한 번 더 만나기 위해서.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소르베 맛이 오래도록 입 속에 머물렀다. 시고, 쓰고, 달았다. < 제39장. 내가 많이 참았지(4) > 예고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일. 베른의 생이 그랬고 베른의 죽음이 그랬다. 칼리안으로서 시작된 삶이 그랬고 지금도 계속, 모든 것이 예고 없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사실 세상 그 누구의 생이라 해서 다르겠냐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안은 자신할 수 있었다. 다른 누구에게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예고되지 않은 생에 갑작스레 초대되었으며 그 사이 지내온 생의 모든 것이 갑작스러웠다고 말이다. 그러니 한 번쯤은 반대로, 누군가를 갑작스레 불러내도 괜찮지 않을까. 한 번쯤은 감히 멋대로 찾아도 못 이기는 척 와주시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사려 깊은 시스파니안에 대한 막연하고 이유 없는 믿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갑작스러운 결과에 실소한 것은 칼리안 쪽이었다. “놀라는 것은 늘 제 몫이군요.” 공동 문이 열리고, 이제 완연히 익숙한 내부에서 익숙하지 않은 그림자를 본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답을 기다리고 한 말도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은 우선 고개를 숙여 예를 보였다. “지극히 위대한 시스파니안을 뵙습니다.” 여전히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시간의 축 위에 고운 자태로 앉아 있는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를 향해서였다. 생김은 다르지만 비슷한 경험을 이미 한 번 해보았기 때문인지, 생명이 가지는 그 어떤 존재감도 없는 고양이를 향해 인사하는 기분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온 몸에서 검은 빛이 반짝이는 듯한 느낌의 고양이가,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루비를 세공해 넣은 것 같은 붉은 눈을 들어 칼리안을 바라봤다. 그 눈을 마주보는 칼리안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려냈다. ‘고양이라.’ 검은 나비의 의미는 알아보았었는데 이번에는 왜 고양이일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사람만 보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발치에 몸을 부비는 루시와는 그 색도 행동도 분위기도 완벽히 다른 도도한 자태의 검은 고양이를 보며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가늠이 되질 않았다. 검은 나비는 죽음을 의미하였으나 검은 고양이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았으니까. 앨런이 칼리안을 두고 종종 붉은 눈의 까만 고양이라 말하는 것은 알았다. 다만 그것은 발톱 숨긴 칼리안을 알아보았던 앨런이 붙인 애칭이지 그 외의 다른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지 않나. “이 역시 반겨해줄까 궁금하였다.” 그런 칼리안의 속내를 알아본 것 같은 시스파니안의 조용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느 쪽에서 들려오는지 그 방향조차 알기 어려운 소리였다. “검은 고양이에 어떤 뜻이 담겼을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카이리스에만 전해지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까 생각한 칼리안이 되물었다. 고양이가 큰 눈을 한 번 느리게 깜박였다.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다시 한 번 대답이 들려왔다. “네가 아는 바와 같을진대.” 칼리안이 고양이를 따라 빨간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검은 고양이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아무 의미 없는 검은 고양이의 모습을 검은 나비를 보았을 그 날과 똑같이 반겨 할지가 궁금했다는 말일 터였다. “······ 아.” 그것을 해석하기까지 잠시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칼리안이 말 없이 누군가를 찾았다. ······ 초대왕 하츠아라시여. 물론 제가 먼저 왔습니다. 여쭤 볼 것이 있어서 제가 먼저 찾아오기는 했습니다만 만나 뵙기가 무섭게 후회를 하고 있는데요. 제가 제 형님이 하시는 말씀은 적당히 알아듣고 살고 있는데 시스파니안님의 저 두루뭉술한 말투에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됩니다. 그러니 하츠아라시여. 혹시 저 분의 이야기를 다 이해해가면서 대화를 하셨던 것이 맞습니까? 아니, 그 전에 두 분께서 제대로 된 대화라는 것을 나누기는 하셨습니까? 들리시면 언제 솔직한 대답 좀 부탁드립니다. 어쩐지 제가 당신과 조금 비슷한 고충을 겪고 있는 것 같거든요. 축복보다 더 강력한 것 같은 짧은 말 유전자 때문에요. “제가 찾아온 길이니 어찌 반갑지 않겠습니까.” 물론 하츠아라를 향한 긴 푸념을 말로 꺼낼 수는 없으니 입으로는 퍽 정상적인 대답이 나왔다. 혹시 저 고룡은, 자신이 무슨 모습을 하든 반겨 줄 수 있는 이가 그리운 것은 아닐까. 무슨 모습을 하든 반겨 줄 수 있을 단 한 명이 이제는 없어서 이렇게 엉뚱한 모습을 한 채 찾아와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닐까. 문득 든 이런 생각 역시 접어 둔 채였다. 만약 칼리안이 떠올린 생각이 혹시나 맞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잊힘을 저주하는 이가 잊히지 않음을 저주하고 있을 이를 찾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곧 칼리안은 사그라들 줄 모르고 이어지는 상념을 차곡차곡 정리해 밀어넣으며 한 마디 말을 덧붙였다. “무슨 모습을 취하셨든 본질이 같으신데, 저에게 있어 어느 모습인들 다르겠습니까.” 그것이 검은 나비든, 검은 고양이든, 아직 보지 못한 검은 용의 모습이든, 혹은 늘 보여주었던 한 여인의 모습이든. 그 전부가 시스파니안인데 의미가 있고 없고를 따져 반갑거나 반갑지 않고를 구분할 수가······. ······ 아. 이제야 이해를 했다. 다시 피어오르는 상념 덕에 시스파니안의 뜻을 비로소 이해한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시스파니안. 실로 사려 깊은 시스파니안. 속에 든 것을 잃어가는 이의 목소리를 오늘도 들으셨나보다. 겉모습도 중요치 않고, 사람들 입을 지나 오래도록 남겨지는 의미도 중요치 않고, 그저 속에 든 것이 중요할 뿐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저리 말씀을 하셨구나. 그것을 위해 저런 모습을 하고 오셨구나. 아무 의미 없을 모습을 하고 오셨구나. “항상 가르침을 주시네요.” 고양이의 붉은 눈이 다시 한 번 느리게 움직였다. 그것이 마치 미소처럼 느껴진 칼리안이 마주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생각이 많은 모양이구나.” “생각의 끝에 찾아오게 된 길이라, 어쩔 수 없이 이어집니다.” “그래.” 탓, 하고 고양이가 가벼운 몸 놀림으로 바닥에 내려앉았다. 서로 모아지는 그 발 끝이 루시의 움직임을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뒷발이 땅에 닿은 검은 고양이가 곧바로 빛무리에 둘러싸였다. 그 언젠가의 검은 나비가 그러했듯이 이번에는 붉은 눈을 지닌 검은 고양이의 곁에 작은 우주가 모여들었다. 오래지 않아 고양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며 익숙한 모습을 만들어냈다. 동글동글한 고양이의 발 끝이 가느다란 구두 끝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있을 때, 어느새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두 번째의 만남에서, 두 번째 만난 날 보다는 오늘 조금 더 친근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말투였다. 신기하게도 체이스가 떠오르는 그런 말이었다. “잊히는 것을 너무 서럽다 여기지는 말려무나. 잊히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잊히는 것까지 서럽다 여기면 무엇을 더 서럽다 할지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우니. 그저 조금만 억울하다 여겨주려무나.” 그렇게 말하는 붉은 눈이 칼리안의 것을 꼭 닮아서, 꼭 같이 서러워 보여서, 칼리안은 아무 말도 못하고 짧은 대답만 했다. “네.” 그리운 것이 서러워 서럽다 말하는 자신을 여전히 이해하려 노력중인 고룡의 말에, 나도 서럽다 할 수가 없어서였다. 떠난 이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것이 분명할 저 붉은 눈을 보면서 그 어떤 말의 위로도 꺼내놓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리하겠습니다.” 너 혼자 서러운 세상이 아님을 알려준 저 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위로를 받았다. 그것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칼리안은 위로를 받았다. 위로를 받으려 찾은 길이 아니었건만 이번에도 위로를 받게 되었다. 비로소 웃음이 나온다. “이야기하거라. 듣겠다.” 지난 두 번은 칼리안의 속을 직접 들여다보며 굳이 말하지 않은 속을 꺼내보고 대답을 했던 시스파니안이 이번에는 칼리안에게 먼저 말을 해달라 하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질문을 입에 담았다. 그 질문을 들은 시스파니안이 작은 웃음 소리를 냈다. “참 이상하게도.” 한참 뒤 이렇게 입을 연 시스파니안의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너는 그를 닮았다.” 사실상 하츠아라와는 일말의 관계도 없을 칼리안에게, 시스파니안은 대답 대신 이런 감상을 먼저 전했다. 하츠아라를 닮았다고. “무엇이 닮았습니까.” 이름도 모를 조상님 대신 옆 나라 시조와 내가 닮았다는 말에 당황한 칼리안은 그것이 과연 무슨 뜻인지, 칭찬인지 아닌지를 예상하지 못할 질문을 했다. “마치 이성이 없는 듯 하다는 점이.” 칭찬 아니었다. * * * 특별히 칼리안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 낼 생각은 없었다. - 체르밀 궁에서 1왕자님과 대화 중이라 합니다. 그런데 레릭이 이런 말을 했다. 제딴에는 칼리안과 란델이 함께 있는 것이 플란츠에게 해가 될까 걱정하여 전해 준 모양인 것 같았으나 플란츠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 죄송합니다. 칼리안 왕자님께서 헤이시아에 찾아오셔서, 잠시 자리를 지키느라 늦었습니다. 게다가 한 술을 더 떠 이런 이야기도 들렸다. 당장 내일부터 두 부군단장을 도와 업무 처리를 함께 하기로 한 니들렌을 통해서였다. 어차피 칼리안이 비밀리에 방문한 것도 아니었을 테니 니들렌의 입이 가볍다 여길 일은 아니었다. 안 궁금했다는 것이 문제였지 말한 쪽은 잘못이 없었다. 그래. 분명히 안 궁금했다. 뭔 생각하는지 모를 정신 나간 동생놈이 세렌티 뒷통수를 후려치겠노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더니 란델을 만나고 헤이시아 궁에 갔단다. “······ 하.” 도대체, 그 말을 듣고 안 궁금할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이번에는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무려 시스파니안을 만나려 든다는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한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보고 있던 서류의 마지막 장을 넘긴 뒤 내려놓았다. - 드르륵 플란츠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의자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니들렌을 내보낸 뒤 내일부터 그녀에게 건네 줄 만한 일거리를 따로 빼놓던 아르센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부군단장이신 왕자님은 어디 가십니까.” “할 일 없어.” 그 말에 아르센이 창 밖을 봤다. 아직 해가 다 기울지도 않았다. 내 일 다했으니 갈 거다. 마법사 너는 야근을 하든지 말든지. 이런 말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을 애써 떨군 아르센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저는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께서 어디 가시는지를 여쭸는데요.” 평소 같으면 알아서 뭐하게 묻느냐 대꾸했을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아르센을 쳐다봤다.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은 생명체를 대하는 그런 눈으로 아르센을 내려다보던 플란츠의 입이 열렸다. “내 동생 잡아오러.” 평생 듣지 못할 것 같은 말로 아르센의 입을 잘 막은 플란츠가 여유 가득한 걸음으로 집무실 밖을 향해 나갔다. * * * 비가 그쳤다. 신기한 일이다. 혹시 시스파니안도 비를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올 때마다 내리는 비를 멈추게 하고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값어치 없는 생각을 잠시 하던 칼리안이 피식 웃으며 헤이시아 궁의 지하에서 밖으로 나왔다. 덜 익은 토마토 말려 놓은 것 같은 놈이 있었다. 왜 왔을지는 뻔하다. 때문에 여전히 파릇파릇 풋내 날 것 같은 그 머리꼭지를 말 없이 응시하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고 안 칩니다.” 귀찮아 죽겠다는 음색을 굳이 가리지도 않은 말을 들은 플란츠가 다른 대답 없이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거짓말을 못하는 놈이니 정말 사고 칠 생각이 없던가, 아니면 스스로 그것이 ‘사고’라는 생각이 없던가. 둘 중 하나 아니겠나. “뭔데.” “아시면 또 방해하시려고요.” “내 아우님께서 도무지 감당 못할 일만 벌이시니.” 말 안한다 버텨 보아야 무슨 소리 할지 뻔하다. 심장에 묶인 것 풀지 않는 한은 말싸움에서 저 푸르딩딩한 놈을 어떻게 이기겠나. 때문에 칼리안은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원하는 것이 치유사이지 않습니까. 치유사를 부르겠다는 명목으로 저도 묶어서 부르고는 있지만 어쨌든 원하는 건 그 병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고요.” 사족이 긴 것을 보니 분명 사고를 칠 생각이 맞나보다고 생각한 플란츠가 얼굴을 굳혔다. 그 표정에 드러난 것이 뻔해서, 칼리안이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세크리티아 국왕이 엘프들을 꼬셔도 다른 짓 못하게 하려면 저도 유리한 것 하나쯤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시스파니안을 찾아갔습니다.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요.” 그랬더니 시스파니안께서 웃으시더라고요.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었다. “찾아가서 뭘 하려고.” “세크리티아의 국왕께 배운대로 써먹는 겁니다. 협상은 물 건너 갔으니 그 다음 순서요.” 그랬더니 시스파니안께서 욕하시던데요. 한 번 더 덧붙인 칼리안이 이번에는 생글생글 웃었다. 플란츠의 눈꼬리가 가늘게 변했다. 엘프의 어머니 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시스파니안으로부터 알고자 한 대답을 결국 듣게 되었으니 저렇게 신나하는 것이리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였다. “엘프들의 수호신을 찾아가 뭘 할 생각이냐고.” 불신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며 묻는 플란츠를 향해, 처돌다 미친 형제관계에서 ‘미친 동생’ 몫을 제대로 수행중인 칼리안이 조곤조곤 답을 전했다. 협상이 안 되면 그 다음 것. “나무는 대체로 불에 잘 탑니다.”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칼리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눈치를 챘다. 미친놈이 또 그 새파란 마법사를 써먹을 생각인 거다. 협상이 안 될 것 같으면 그 다음. 협박. 엘프들을 협박할 심산일 터였다. 어머니 나무를 인질 삼아, 세크리티아의 국왕에게 잘 포장된 루시 똥을 보내 줄 계획을 짰음이 분명했다. “아아.” 칼리안의 계획을 적당히 파악한 플란츠가 피식 웃으며 이해했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믿기지 않게도, 이번에는 막을 생각이 없다는 의미를 담은 채였다. 비 개인 하늘이 붉게 타올랐다. 그것을 슬쩍 쳐다 본 플란츠가 똑같이 붉은 칼리안의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잘 타겠지.” 처돌고 미친 아들들을 두게 된 르메인이야 뒷목을 잡든지 말든지. < 제40장. 감당 못 할 텐데(1) > 무엇이든 단 것을 좋아했다. 오로지 커피만 쓰게 마시는 이유도 함께 곁들이는 것들의 단 맛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될 만큼 단 것을 좋아했다. 그러니 단 맛이 강하지 않은 보라색의 고구마와 당근이 들어간 케이크 맛이 이렇게나 단 것은, 리베른의 국왕 엘린느의 요리사가 오로지 앨런의 취향만을 고려했기 때문일 터였다. “맛있는데 왜 안 드십니까? 무려 리베른 국왕께서 보낸 것인데요.” 앨런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단 것을 좋아하는 에우리아가 제 머리색과 꼭 같은 보라색 케이크 한 조각을 순식간에 먹어치우며 이렇게 물었다. “엘린느가 선물 보낸 게 하루이틀도 아닌데 뭘 대단한 것이라고 그러나.” “보존 마법까지 걸어가면서 보낸 선물인데 한 입이라도 드시지 그러세요. 이건 그냥 마나실 백작님 입맛에 딱 맞춘 단 맛인데.” “고구마에 당근 케이크라니. 내가 좋아하는 맛이 아니네.” 사과와 보라색 당근을 조려 만든 퓨레를 층층이 넣은 고구마 케이크 맛이 굉장히 좋았음에도 한 입도 먹지 않은 앨런이, 케이크 잘 먹는 에우리아를 이해 못하겠다는 듯 대답했다. 앨런의 기준에서는 고구마나 당근이나 케이크 재료로 쓰기에는 영 어울리질 않는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칼리안에게 알릴 것도 전할 겸 이번에 도착한 리베른의 선물도 앨런에게 전달할 겸 찾아온 에우리아만 신이 났다. “맛만 있는데요. 하긴, 마쥬리니 한 잔만 있으면 딱 좋을 텐데 그건 아쉽지만요.” 아침부터 찾아와서는 히몰리카 못지 않게 높은 도수를 자랑하는 사과 술을 찾는 에우리아를 본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앨런 역시 술을 즐기기는 했으나 어디 에우리아만 하겠는가. “손도 안 대시니 괜히 마나실 백작님 앞으로 온 것 제가 뺏어 먹는 기분이네요.” “그런 기분이라 하기엔 너무 잘 먹고 있는 것 아닌가?” “맛있어서요.” 아마도 아르센이 본다면 제 눈을 의심할 해맑은 웃음과 함께 대답한 에우리아가 두 번째 케이크 조각을 앞으로 끌어왔다. “리베른에서 이번 달에는 상급 마석이 달린 장신구까지 보냈어요.” “마석 구하기도 힘든데 그건 잘 됐군. 이따 살펴보겠네.” “이 쪽에서 보내는 것은 별반 달라지지 않고 리베른에서 보내는 것은 점점 금액대가 올라가는데 저희 이거 계속 받아도 됩니까?” 사실 먹을 것 뿐 아니라 온갖 마법 도구며 서적이며 장신구까지, 수많은 선물들이 리베른에서 마법사 협회를 통해 주기적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양국 마법사 협회간의 교류를 명목으로 보내오는 리베른의 이런 선물들이 사실상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앨런 뿐 아니라 에우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나 주는 것이니 그냥 다 받으면 되네.” “다른 나라 신경 쓰느라 직접 보내지도 못하면서 협회 이름 팔아가며 매달 이렇게 챙겨보내는 리베른 국왕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적당한 감탄과 적당한 비아냥이 섞인 말이었다. 앨런은 그것이 우정에 기인한 것인지 혹은 아들 로닐의 일에 대한 죄책감에 기인한 것인지 이유를 굳이 따지지 않은 채 엘린느가 보내오는 선물을 전부 다 받았다. 어차피 그 비싼 검은색 자개 마차도 그냥 받았는데 다른 선물들 쯤이야 하는 마음이 컸다. 마석은 좀 의외였지만. 그 선물을 굳이 거절 않고 다 받는 앨런의 속내라는 것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으나, 선물을 받는다고 또 계속 챙겨 보내는 엘린느의 속내 역시 에우리아가 가늠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 맛보기 전에는 도무지 그 맛이 상상되지 않는 보라색 고구마, 딱 그것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덜 익은 감자 맛이 날 것도 같고 포도처럼 달 것도 같고 어쩌면 가지 맛이 날 것 같기도 한 보라색 고구마 말이다. 선물 주고 선물 받는 진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어느 국왕과 대마법사처럼, 보라색 고구마 특유의 싱거운 맛을 설탕과 꿀로 잘 감추고 만들어 낸 케이크를 세 조각이나 뚝딱 해치운 에우리아를 향해 앨런이 손을 내밀었다. “다 먹었으면 이제 주게.” “뭘요. 케이크 값이요?” “싱거운 소리 말고. 텐실 왕세자 뒷조사 결과 말일세. 매번 다른 마법사 통해서 선물만 보냈으면서 오늘은 직접 왔으니, 조사 결과 보여주려고 선물 배달 핑계로 직접 온 것 아닌가?” “뒷조사라 하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이게 다 마나실 백작님 때문에 시작한 일인데 그럴싸하게 포장은 좀 해주세요.” 앨런이 들어줄 리 없을 요구를 하며 툴툴거린 에우리아가 쓴 커피로 입가심을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건 칼리안 왕자님 일이니 왕자님께 제가 바로 드릴 건데요. 마나실 백작님 안 보여드릴 겁니다.” “하여튼 이놈이고 저놈이고 내 말은 오라지게 안 듣지.” 리베른 떠난 이래 제대로 된 대마법사 취급을 받은 기억이 잘 없던 앨런이 미간을 좁히며 대꾸했다. 이놈은 저 같은데 저놈은 누구냐고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에우리아를 향해 앨런이 다시 말했다. “아무튼 지금 우리 왕자님 심기 불편하시니 내가 드리겠네. 어서 주게.” 그래서 그놈의 왕자님은 왜 맨날 심기가 불편하시냐 물어보면 옛다 가져라 하고 눈처럼 새하얀 화염구 하나 던져줄 앨런이다. “네.” 때문에 에우리아는 그냥 군말 없이 대답한 뒤 늘 지니고 다니던 손바닥만한 크기의 가방에서 큼지막하고 두꺼운 서류뭉치 하나를 꺼내 앨런에게 건넸다. 어쨌거나 앨런이 칼리안에게 도움 안 될 일을 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서류를 들어 슬슬 훑어보는 앨런을 향해 에우리아가 지나가듯 물었다. “헤르츠 부군단장은 바빠요? 계란 사준다더니 아직도 말이 없는데.” 브리센 변경백령 다녀오던 길에 새알 먹자는 에우리아를 계란 사주겠다며 막은 일을 잊지 않은 채였다. 물론 아르센은 바빠서 못지켰고 앨런은 몰랐다. “지금 제이아 경 일 가르치고 있을걸세. 오늘부터 헤르츠 부군단장 일 돕기로 한 터라.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계란 사주면서 연애하나? 우리 때는 꽃 사주면서 했는데.” “그런 얼굴로 그런 표정 지으면서 그런 말 하지 마요.” 좋을 때다, 하고 훈훈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20대 외모의 마법사를 질색한 얼굴로 쳐다본 에우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빌헬름 가나?” “오랜만에 니들렌도 보고싶고 꼬맹이도 보고싶긴 한데 학원 일 보러 가야 돼요.” “언제는 왕자님 뵙고 간다더니.” “저 바빠요. 왕자님 뵙는 일이라 굳이 시간 내서 왔는데 백작님이 전해주신다면서요. 심기 불편한 왕자님 피해서 얼른 도망갑니다.” 사실 시간이 거꾸로 흐른 뒤 제일 많이 바뀐 것은 카이리스의 마법사들이 아닐까. 정확히 말한다면 제일 많이 과로하게 된 것이라 해야겠지만. 이런 생각에 혼자 웃은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헤르츠 부군단장 만나면 까먹지 말고 계란 꼭 사주라고 말해주겠네.” “그건 됐고 니들렌한테 안부나 전해주세요. 할머니가 보고싶어 하신다고요.” “알겠네.” 에우리아의 조모인 케이디 세이렌은 6서클의 전격 마법사로, 에우리아와 니들렌의 마법 스승이기도 했다. 지금은 은퇴해 세이렌 백작령에서 노년 생활을 즐기고 있는 할머니를 떠올리며 웃음짓던 에우리아가 무언가가 막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물었다. “참. 그런데 저 세크리티아 진짜 가요?” “그리 바빠서 갈 수는 있겠나?” “가면 가야죠. 오랜만에 바다도 볼 겸. 세크리티아 놈들 낯짝도 볼 겸.” “아직 확정 안 됐네.” 그런 말 왕자님 앞에서는 하지 말라고 해줄까 말까 하던 앨런이 그냥 고개만 휘적거리며 대꾸했다. 안 그래도 주워먹기 좋게 잘 흘리고 다니는 비밀인데 굳이 의심 살 꼬투리까지 건넬 이유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칼리안 왕자님과 전하께서도 함께 얘기를 해보셔야 할 터이니. 정해지면 일러주겠네.” “확정되면 바로 알려주세요. 교장 맡기시던 날처럼 가는 날 아침에 그냥 데려가시고 그러면 안 돼요. 또 그러시면 백작님 날벼락 맞아요.” “알겠으니 좀 나가게.” “네.” 곧바로 대답한 에우리아가 케이크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손님 나간 방에서 잠시 앉아있던 앨런이 서류를 제대로 넘겨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별 생각 없이 케이크 한 입을 떠 입에 넣고는 으으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채 숨겨지지 않고 은근히 풍겨오는 보라색 고구마 특유의 향이 입에 맞지 않을 뿐 케이크가 맛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남은 것은 맛있다고 먹던 에우리아에게 되돌려 보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 * * 같은 시종이라 해도 서로간의 서열이라는 것이 있다. 애초부터 그들 대부분이 귀족이라 해도 그 출신을 따지지는 않았으므로 신분이나 작위의 고하에 따른 서열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진 상하관계는 있었다. 체르밀에 있는 세 명의 상급 시종 역시 마찬가지. 그것도, 공식적인 서열과 비공식적인 서열 두 가지 종류로 나뉘는 것이었다. 공식적인 서열은 상급 시종에 오른 순서를 기준으로 했는데, 란델의 시종인 덴이 가장 높았고 그 다음으로 얀, 그리고 레릭이었다. 비공식적인 서열은 모시는 사람의 지위에 따른 것으로, 역시 덴이 가장 위였고 그 다음이 레릭, 그리고 얀이었다. 왕자들이 태어난 순서에 대한 서열 차이는 없다지만 서로의 나이를 따져 예의 정도는 지켰으니 말이다. 그러니 어느 면에서건 가장 상위에 있는 덴을 제외하고, 얀과 레릭은 그 자리가 어떤 곳인지에 따라 상하관계가 바뀌어야 했다. “왕자님들 말씀 또 길어지는 것 같으니까 저는 잠시 업무 보고 올게요. 왕자님께서도 알고 계시니 저 찾지는 않으실 거고 곧 메를린도 올 거예요.” “넵.” 그런데 안 바뀌었다. 아무리 귀족들 사이에서 차기 왕세자로 칼리안의 이름을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다 하나 확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둘이 있을 때에는 나름대로 얀과 대등하거나 얀보다 높은 사람처럼 굴어도 되는데 그러질 않는 것이다. 이유야 뻔하지 않나. “지난 번 일은 미안해요. 동생이 체르밀 궁 안에서는 다들 아는 사실인 줄 알았대요. 둘이 워낙 닮아서 설마 아직도 모를까 싶었나봐요.” 설마 몰랐다. 얀이 지그프리드의 장자라는 것을 아는 이라 해보아야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칼리안과 르메인, 그리고 각자의 최측근과 플란츠 정도였지 않나. “대부분은 닮았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넘어가는데 동생이 그런 생각을 안 했나봐요. 보통은 사람을 보기 전에 직위를 먼저 보는데 말이죠.” 아무리 상급 시종이라 하나 시종이 아닌가. 귀족이든 왕궁의 식솔이든 하나같이 얀을 그저 왕자의 상급 시종으로만 생각하지 그 외모 특징을 먼저 떠올리질 않았다. 하지만 드미레아는 애초부터 누군가를 사람 이전에 직위로 보질 않았으니 지금 쯤이면 대부분 다 알고 있으리라 여겼던 터였다. 얀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동생이 아직 철이 안들어서 뭘 잘 몰라요.” 그러니까 그 대단하신 소공작님을 그냥 동생이라고 부르시고, 철이 안 들었다 하시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부터 적응이 안되고 있는데요. 이런 말을 삼킨 레릭은 그냥 다시 한 번 얌전하게 네, 라고만 대답을 했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예전처럼 편하게 지내요. 어차피 왕궁에서는 우리 둘 다 똑같이 왕자님들 시종인 것은 맞으니까요.” “······ 넵.” 이렇게, 여전히 뭐가 문제인 줄 잘 모르는 얀이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네고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레릭이 여전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조심스레 대답하는 그런 문제가 가득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둘이 서 있던 복도 건너 방 안에서는 더더욱 큰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형님 똑똑하신 것은 제가 잘 압니다만.” 곤란하다는 듯 입을 연 칼리안이 잠시 말을 멈춘 채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마법과 검술을 같이 배우시는 것이 형님 생각하시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검술 다 배운 채로 죽었다 다시 사시느라 치사하게 마법까지 벌써 4서클에 이르신 칼리안이 이렇게 말을 했다. 딱 잘라 거절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어찌됐건 알려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아보카도와 무화과를 함께 갈아 만든 주스를 한 모금 마신 플란츠가 짧게 물었다. “왜.” 아보카도 알맹이 같은 저 놈이 아보카도 나무가 물 빨아들이듯이 이것 저것 죄다 배우려 들 줄은 칼리안도 알았다. 게다가 옛칼리안이 몰래 독학하여 성취한 마법이 무려 3서클이다. 시스파니안께서 보우하신 이런 유능한 핏줄에 브리센이 끼어드는 바람에 이전의 몇 세대부터 왕자들에 대한 마법 교육이 폐지됐을 뿐, 플란츠 역시 재능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재능이 있다 해서 한계까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나. 마법을 배우겠다 드는 사람이 완벽한 브리센의 핏줄이라는 이런 모순된 상황에 살짝 웃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마나 운용하는 방법이 서로 다릅니다. 마나 쌓아두고 얍 하면 슉 하고 마법이 써지는 것도 아니고, 마나 쌓아두고 있으면 검의 길에 오른 뒤에 오러가 알아서 부웅 하고 나오는 것도 아니에요.” “짖지 말고. 제대로 설명해.” 일부러 어린애 달래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것에 짜증내는 플란츠를 보며 칼리안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지금 처먹은 무화과 속에 무화과 꽃이 같이 들어있는 것도 모르고 그냥 처먹은 놈이 여기서 더 뭘 배우겠다는 건가 싶어서였다. “당연히 형님께도 마법 재능이 있으리란 것 역시 잘 압니다. 그래도 지금 둘 다 하시기에는 버거우실 겁니다.” “당장 아니더라도 배우겠다고.” 칼리안이 대답 없이 마지막 남은 스테이크 조각을 마저 먹었다. 그리고는 진작에 식사를 마친 플란츠를 보며 말을 이었다. “루시 털은 그냥 포기하세요. 저 있을 땐 제가 떼 드릴게요. 식사도 더 하시고요. 형님 키 안 큽니다.” 계속 장난처럼 상대하는 칼리안의 말에 플란츠의 눈꼬리가 찌푸려졌다. “내 아우님께서 이젠 짖는 것밖에 못하시나.” “마나 쌓는 연습 열심히 해두시라는 말씀 드렸고, 오늘 지그프리드 소공작과 대련하기로 했으니 관심 있으시면 와서 보시라는 말에 갑자기 마법 알려달라 하시는데 그럼 제가 무슨 말을 합니까.” “사람 말.” “아, 진짜.” 곧 있으면 드미레아가 올 시간이다. 이러다 완두콩이랑 밥 먹다가 대련하러 오는 정혼자 기다리도록 하게 생긴 칼리안이 결국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저녁에 스승님 만나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스승님께 배우시는 것이 나을 테니까요.” “말고.” 루시 말고 칼리안 인내심을 키울 심산인가 싶은 연두색 눈을 노려보던 칼리안이 한숨을 쉬었다.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에 불 지르는 것은 좋다고 동의하던 저 풀대가리가 밥 잘 처먹다 말고 왜 저러는지 모르지 않아서 결국은 그냥 한숨만 나온다. “무슨 일만 앞두면 사라질듯이, 급하게 뒷정리 하듯이 굴지 말라는 말. 못알아들은 것 아니잖아.” “형님 마나 알려드리고 드미레아에게 검술 알려주려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됐으니까.” 짜증 가득한 얼굴로 칼리안을 마주보던 플란츠가 손가락으로 칼리안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꾸라고, 너도. 제대로. 악몽 깨면. 이상한 꿈 말고.” 좋은 꿈 꾸랬더니 그걸 그새 배웠다. 세렌티에게 복수나 하는 그런 이상한 꿈 세우지 말라는 소리다. 저 핑계를 생각해낸다고 또 고민을 했을 것이 뻔하다. 그렇게 고민한 핑계거리 들이대면서, 칼리안이 제대로 애써 볼 만한 일거리 만들어주겠다면서, 배려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이기적인 손으로 칼리안을 또 잡아채는 것이다. 풀대가리 너 때문에 내가 죽겠다. 내가 진짜 귀찮아서 죽을 맛이다. 두 번의 생을 통틀어 저런 이상한 고집은 어떻게 꺾어야 하는지 배워보지 못한 칼리안이 결국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세크리티아 일 끝나면. 그 때부터 알려드릴게요.”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이번 일을 일단락짓고 나면 완두콩에게 고양이 털 떼는 마법 가르쳐 주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 제40장. 감당 못 할 텐데(2) > 키리에에게도, 플란츠에게도 묻지 않았다. 상대와 마주 보고 서서 인사를 나누고 검을 꺼내들고, 준비가 되었는지를 살피고 검을 겨누고, 더 약한 쪽이 준비한 것을 먼저 보일 수 있도록 몇 수를 물려주고. 칼리안은 그랬던 적 없었다. “싸움, 대련, 교육. 뭐가 좋아.” 하지만 드미레아에게는 말을 걸었다. 다른 것을 배려하지는 않았으나 셋 중 무엇을 위해서 자신과 그렇게나 칼을 맞대려 했는지 묻기 위해 잠시 자리에 선 채 드미레아를 마주보았다. 드미레아가 약해서, 공작가의 귀하신 자제라서, 혹은 여자라서 질문을 하거나 준비할 시간을 내어 준 것은 아니었다. 그딴 이유로 그 정도의 배려를 해 줄 것이었으면 키리에나 플란츠에게도 물었을 것이다. 물론 여자임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면 애초부터 이 자리 자체가 성사되지도 않았을 터였다. 고작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이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려 들 드미레아가 아니었으니까. “셋 다.” - 부웅! 짧게 답한 드미레아가 곧장 검을 내질러왔다. 은빛의 검날이 제 주인의 눈빛과도 같은 묵직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내가 이래서 드미레아를 좋아하지.’ 마음에 쏙 드는 답과 행동을 내어 놓는 드미레아를 보며 어느새 버릇이 된 말을 떠올린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 타앗! 여유로운 미소를 그려낸 얼굴 표정과는 정 반대로, 아직 검을 만들어내지 않은 칼리안의 발이 빠르게 바닥을 박찼다. 그와 함께 방금 전까지 칼리안이 서 있던 곳을 드미레아의 검이 날카롭게 베고 지나갔다. - 우우웅! 드미레아의 머리 위에서 공기 울리는 소리가 났다. 굳이 머리 위를 살필 것도 없다는 듯 드미레아가 재빨리 허리를 틀며 몸을 피했다. 쉬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드미레아가 서 있던 곳으로 검붉은 그림자가 허공을 스친 뒤 사라졌다. 바뀌었다. 분명 칼리안의 검은 투명하지 않았던가. 그 사이 무슨 짓을 했는지 오러의 색이 달라져 있었다. 그것을 이제야 보게 된 드미레아의 얼굴에 강한 호승심이 어렸다. 호승심은 곧 강렬한 투지로 바뀌어 묵직한 눈빛에 육중한 날을 세웠다. - 카아앙! 은빛 검이 검붉은 잔상을 뒤따랐다. 드미레아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아래를 향해 내지른 검을 회수하던 칼리안이 재빨리 공중에서 몸을 틀며 공격을 막았다. 칼리안의 발이 바닥을 밟기가 무섭게 두 날붙이가 맞부딪혔다. - 카강! 카가각! 거리낄 것 없다는 것처럼 맞닿은 두 검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으나 둘 모두 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칼리안의 검을 밀어붙이는 드미레아의 청회색 눈이 붉은 눈을 마주 바라봤다. 공격이 막혔다. 지금 둘의 공방을 지켜보는 키리에나 플란츠였다면 자신의 검을 물리고 한 발을 물러서거나 다시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미레아는 그러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막힌 검을 포기하지 않은 드미레아가 검붉은 검날에 막힌 자신의 검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 힘 싸움! 싸움을 할 것인지 물었으니 그것부터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 카각! 둘의 팔에 순간적으로 힘줄이 투둑 불거지며, 한 쪽은 밀어내려 다른 쪽은 밀리지 않으려 서로의 검에 온 무게를 쏟아냈다. 순간, 칼리안이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다시 주었다. - 카아앙! 무게가 없다시피 한 검이 슬쩍 뒤로 물러나는 듯 하더니, 더 강한 힘을 담아 드미레아의 검을 밀어내듯 올려쳤다. - 카앙! 캉! 카아앙! 카강! 살짝 위로 빗겨난 은색의 검을 밀어낸 검붉은 검의 날이 드미레아의 눈 앞에 어지러이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힘 싸움을 받아 줄 생각 없으니 속도 싸움을 하자는 뜻이다. 연이은 공격이 드미레아를 노렸다. 거의 동시에 각기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듯한 가벼운 검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낸 드미레아가 한 번 더 힘을 주어 짓쳐드는 검을 강타했다. - 카가강! 콰앙! 고막이 얼얼할 정도의 큰 소리와 함께 칼리안의 검을 내려친 드미레아가 발을 박찼다. 가볍디 가벼운 저 검의 속도에 말려들면 싸움에서 불리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바닥을 향하던 검을 빠르게 회수해 몸을 움직였다. 칼리안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쌔액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며 드미레아의 오른 쪽에서 잔뜩 날이 선 공격이 날아왔다. 검을 온전히 회수하지 못한다는 판단을 한 드미레아가, 내뻗으려던 검 손잡이를 내려잡고 날을 위로 세웠다. 검을 거꾸로 든 상태로 오른쪽 목으로 날아드는 공격을 막아낸 드미레아가 다시 한 번 검을 움직였다. - 키잉! 두 검날이 살짝 닿는 가벼운 공명음이 멈추었을 즈음, 검붉은 검의 잔상이 흐려지듯 시야에서 사라졌다. 물론 칼리안의 모습도 함께였다. 드미레아가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양 손으로 굳게 잡은 검 끝이 분명한 투기를 담은 채 칼리안의 그림자를 향해 뻗어나갔다. - 부웅······! 휘둘러진 검에서 다시 한 번 무게감 가득한 바람이 일었다. 그것을 무력화시키듯, 칼리안이 검을 빗겨대어 그 묵직한 검에 실린 강한 힘을 바닥으로 흘려보냈다. - 쉬이익! 카앙! 가벼운 검은 회수에 유리하다. 어둠이 뚝뚝 흘러내리는 검이 곧장 방향을 바꾸어 드미레아를 향해 날아왔다. 무거운 검은 굳이 회수할 필요가 없다. 바닥으로 미끄러지는 검에 오히려 더 힘을 주어 재빨리 몸을 회전시킨 드미레아가, 자신의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으며 상대의 어깨를 노렸다. - 콰앙! 그 묵직한 타격에, 깊은 울림 가득한 충돌음이 울려퍼졌다. “더 빨리.” 서툰 이였다면 방금 전의 공격에 맞아 검을 놓쳤겠지만 애석하게도 상대는 칼리안이었다. 힘이 모자란 것을 메우기 위한 속도가 부족함을 일러준 칼리안은, 다시 한 번 힘 싸움을 걸어오는 묵직한 검을 향해 도약했다. 손에 들린 검이 죽은 피를 사방으로 흩뿌리듯 움직였다. - 카앙! 카아아앙! 캉! 카앙! 속도의 한계점이 없다는 것처럼 몰아치듯 이어지는 검의 그림자 하나하나에 살의가 가득하다. - 타다다당! 카아앙! 수많은 그림자 중 그 무엇 하나도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탓에, 검을 세워 든 드미레아가 팔을 짧게 뻗어가며 공격들을 튕겨내기 시작했다. 부딪혀 튕겨나가는 감각이 분명한데도, 반동 따위 없다는 듯 어느새 다른 방향에서 치고 들어오는 칼리안의 검을 하나하나 눈으로 쫓아가며 막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 쉬이익! 잠시 뒤 무거운 검이 만들어내는 넓은 검막의 틈을 파고든 가벼운 검 끝에서 바람을 갈라내는 소리가 났다. - 캉! 방향을 바꾼 검붉은 검의 첨예한 끝이 다시 한 번 목으로 날아 들기 직전, 허리를 살짝 뒤로 물린 드미레아가 검 손잡이로 공격을 막았다. 어느새 말려들었다. 저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예상했던 일이 생겼음에 입술을 깨무는 대신, 손잡이를 부서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힘주어 검을 다잡은 드미레아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그대로 칼리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차피 저 공격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검격의 범위 안으로 파고들어 빈 허리를 베어내고자 한 것이다. “그 정도는 누구나 생각해.” 너는 달라야지, 드미레아. 질책이 이어졌다. 칼리안의 신형이 흔들리는 촛불처럼 흐려지다 다시 사라졌다. 어느새 뒤에서 날아오는 검의 예기에 몸이 먼저 반응을 했다. 드미레아가 재빨리 몸을 틀며 이번에도 여지 없이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검을 향해 검을 뻗었다. - 카아아앙! 수련장 바닥을 일그러뜨릴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마치 서로 다른 방향을 보며 빗겨 선 것 같은 모양새로 발을 멈추게 된 둘의 검이 서로에게 막혀 멈췄다. 그렇게 찰나의 순간 움직임을 멈췄던 둘의 발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 타닷! 이번에는 칼리안이 드미레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자신의 품을 파고들려 했던 공격을 되돌려주려는 것이다. 굳이 오러를 두르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강화된 팔에서 나오는 힘은 결코 드미레아에게 뒤지지 않는다. 때문에 칼리안은 자신의 빠른 걸음을 막으려는 은빛 검을 힘주어 밀어낸 뒤 쉼 없이 검을 내리그었다. 어깨와 목 사이를 노리고 순식간에 날아드는 검붉은 날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드미레아가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검을 틀었다. - 콰앙! 캉! 카아앙! 카강! 그렇게 한 차례 이어진 공방의 끝에 한 발 씩을 뒤로 물려 본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오게 된 두 칼잡이의 발이 다시 한 번 동시에 움직였다. - 카아앙! 카강! 카강! 캉! 자신들을 지켜보는 다른 두 명의 시선은 이미 잊은지 오래다.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듯 오로지 상대방의 눈만 주시해가며 얽혀드는 두 개의 검이 계속하여 날카로운 빛을 내뿜었다. - 카앙! 카아앙! 어둠 속에 타오르는 화염의 잔재같은 칼리안의 검이, 신념의 깊이를 고스란히 담아 둔 듯 반짝이는 은빛의 검을 사방에서 갉아먹을 듯 짓쳐들어왔다. 속도를 놓은 대신 무게를 선택한 드미레아가 공격에 대한 욕심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온 몸의 급소를 향해 들어치는 칼리안의 검격을 막아냈다. - 쉬익! 카가강! 몸을 뒤로 빼며 들어올린 검의 가드로 아래에서 위를 향해 치고 올라오는 칼리안의 검을 막은 드미레아가 손잡이를 비틀었다. 그렇게 바깥으로 공격을 흘려낸 후에는 뒤로 물린 발을 다시 앞으로 뻗으며 칼리안의 심장을 노렸다. “서두르지 마.” 심장으로 찔러 들어오는 검 끝을 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은 칼리안이 아주 살짝 뒤로 움직였다. 그 붉은 눈이 드미레아의 눈과 잠시 마주친 그 순간. 칼리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낯설지 않았으나 절대로 익숙해지지 못할 그 속도를 쫓는 대신, 뻗었던 검을 돌려세운 드미레아가 제자리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사방으로 날 선 공격을 보냈다. - 탁! 왼쪽 어귀를 찔렀을 때 검 끝에 단단한 것이 닿는 느낌과 함께 날붙이가 맞닿는 소리가 울렸다. 찾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드미레아가 검 손잡이를 꽉 쥔 채 발을 박찼다. 가능한 높은 곳까지 몸을 띄운 드미레아의 팔이 온 몸의 무게를 담아 칼리안이 도달할 곳을 향해 검을 뻗었다. - 콰아앙! 막은 것인지 막아 준 것인지, 단어 그대로 날아드는 무거운 공격을 받아낸 칼리안이 빠르게 움직였다. - 카강! 카아앙! 캉! 카앙! 가장 무거운 검. 그리고 가장 빠른 검. 서로가 서로에게 상극인 검술을 익힌 둘의 공방이 끝맺음을 모르고 이어졌다. 허리를 노리고 어깨를 베려 하고 허벅지를 겨누는 무거운 검을 모조리 흘려낸 가벼운 검이 마주 선 이의 목을 베어내려다 방향을 바꾸어 심장을 관통하려 든다. - 카가강! - 타앗! 카아앙! 캉! 연격을 막아낸 드미레아가 곧장 검을 휘두르는 사이 칼리안의 발은 어느새 드미레아의 왼쪽 바닥을 밟으며 검을 내질렀다. 칼리안의 움직임을 예측한 드미레아의 검이 오른쪽으로 휘둘러진 직후였다. 검이 향한 곳에 칼리안은 없었다. 잘못된 방향, 섣부른 판단. 언젠가의 플란츠가 했던 실수와 같았다. 오래 전의 키리에 역시 같은 실수를 했다.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니 앞서나간 위치로 공격을 보내려다 만들어지는 치명적인 한결같음. 생각이 많으면 죽는다 말하는 대신, 정 반대 방향에서 몸을 드러낸 칼리안의 검이 바람을 갈랐다. - 쉬익! 청회색 눈에 담긴 동공이 맞수를 뒤쫓는 야수의 그것처럼 맹렬하게 벌어졌다. < 제40장. 감당 못 할 텐데(3) > 예측이 틀렸다. 칼리안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잘못 읽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순간 망연하여 갈피를 놓쳤을 것이다. 물론 드미레아의 대처는 달랐다. 반대 방향에서 날아드는 검을 향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실수 정도는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다는 듯, 오른쪽으로 검을 보냈던 드미레아가 몸을 틀었다. 바닥을 지지한 발 끝에 온 힘을 주어가며 정 반대에 선 칼리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칼리안은 육중한 힘이 담긴 드미레아의 공격을 받아내는 대신 바닥을 디딘 발을 미끄러뜨리듯 빠르게 이동하며 검을 움직였다. 힘이 몰린 검 끝이 아닌 검 날을 쳐냈다. - 카아앙! 긴 타격음과 함께 방향을 잃은 드미레아의 검이 크게 흔들렸다. 때를 놓치지 않은 검붉은 검 끝이 수많은 갈래로 갈라지는 듯한 형상을 보이며 다시 한 번 목과 심장을 노린다. - 카아앙! 카강! 카앙! 캉! 동시에 서로를 노리고 다시 한순간에 멀어지는 움직임이 연이었다. 절대로 쉽게 져 주지 않겠다는 의지 가득한 검과, 틈이 비는 곳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알려주려는 욕심 많은 검이 끊임없이 서로의 약점을 노렸다. - 캉! 카앙! 뻗어나간 검을 있는 힘껏 끌어당긴 드미레아가 허리를 숙여 날아드는 공격을 피했다. 단단히 묶어 두었으나 풀려나온 짧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날 선 기운에 잘려 바닥으로 흩어졌다. 드미레아의 눈동자가 재빨리 움직인다. 검 끝이 아닌 칼리안의 어깨를, 발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칼리안이 향하는 방향을 제대로 읽어낸 드미레아가 이번에는 그 속도에 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칼리안 쪽으로 달려들며 허리를 지지하던 힘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담아 칼리안에게 일격을 보냈다. 힘에 더해진 무게가 속도를 내고 그것이 다시 무게가 되었다. - 부웅! 빠르면서 무겁다. 발에서 다리로, 다리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어깨로, 그리고 손으로 이어진 힘이 칼리안의 가슴을 양분할 것처럼 날아들었다. 칼리안의 발이 가볍게 바닥을 찼다. 그 손에 들린 검붉은 검 끝이 날아드는 은빛 검의 검등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검등을 스치듯 위로 움직였다. 힘을 받아내지 않고 고스란히 흘려버리며, 드미레아의 검 끝에서 손잡이까지 이어지는 검등을 긁어낼 것처럼 타고 올라갔다. - 카가가가각! 강하고 빠른 마찰이 길게 이어지자 불똥이 튀었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불꽃을 만들어낸 검붉은 검에서 소름끼치는 마찰음이 울렸다. 칼리안이 드미레아의 지척에 다다른 이후에야 힘이 실린 은빛의 검 끝에서 공기 찢기는 소리가 났다. 은색의 검에 달린 가드에 막히기 직전, 검붉은 검이 찰나보다 빠르게 방향을 바꿨다. 드미레아가 만들어낸 빠르고 강한 일격을 무력화시킨 칼리안이 자신의 검 끝으로 툭, 검을 쥐고 있던 드미레아의 손등을 찔렀다. 처음으로 급소 아닌 곳을 노린 가벼운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한 손등에 얕은 상처가 났다. - 카아아앙! 방금 입은 상처로 인해 검을 쥐고 있던 드미레아의 손 힘이 일순간 흐트러졌다. 온 힘을 담고 있던 한쪽 손이 느슨해진 틈을 놓치지 않은 칼리안의 검이 드미레아의 검을 그대로 후려쳤다. 아. 하는 작은 탄식과 함께 드미레아의 목에 긴 혈선이 생겨났다. “함부로 예측하지 마.” - 터엉! 손을 벗어나 멀리 날아가지도 못한 무거운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죽기 싫으면.” 그리고 칼리안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 * * 멀리 떨어진 곳에 선 채 칼리안과 드미레아를 지켜보던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서로 다른 색을 지닌 키리에의 눈이, 대련을 마친 뒤 드미레아의 검을 살피는 칼리안에게서 아직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플란츠를 향했다. 키리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플란츠가 왜 눈을 돌리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되새기고 계십니까.” 그제야 시선을 돌린 플란츠가 키리에를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두 분의 공방이 길었는데 모두 기억 나십니까.” “기억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려던 플란츠가 입을 열어 답을 전했다. 칼리안이 플란츠를 상대로, 혹은 키리에를 상대로 검을 맞댄 적은 많았으나 지금처럼 길게 검을 주고 받은 적 없었다. 싸움과 대련과 교육을 한꺼번에 건네주려니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던 탓이다. 그리고 플란츠는 그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기억을 했다. 다만 그것이 ‘모든 공방을 기억에 담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왕자님 움직임을 다 따라가지는 못하셨을 것 같은데 혹시 맞습니까.” 거창한 서약도 서임 의식도 없이 르메인의 임명서 한 장을 받고 칼리안의 기사가 된 이를 올려다 본 플란츠가 숨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빨라서.” “괜찮으시면 오늘 왕자님께서 다루신 검술 제가 다시 보여드리겠습니다.” 둘의 공방을 모두 보았으나 애석하게도 플란츠는 칼리안의 움직임을 눈에 모두 담지는 못했다. 하지만 키리에는 아니었다. 벽 하나를 뛰어넘은 덕에, 물론 아직 칼리안의 속도를 따라잡아가며 막고 쳐낼 수는 없지만 눈으로 쫓아가는 것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생각지 못한 친절을 마주한 플란츠가 고요히 잠겨든 눈으로 키리에를 쳐다봤다. 체르밀 궁 후원의 자작나무처럼 큰 키의 키리에를 보고 있자니, 오빠에게 키를 다 뺏긴 듯 조그만 히나가 떠올랐다. 닮은 구석 하나도 없다고 여겼던 둘이 가진 딱 하나의 공통점을 생각한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이상한 남매로군.” “저희가 왜 이상하십니까.” “닮아서.” 그렇게 말하는 연두색 눈이 다시 앞으로 움직였다. 플란츠에게는 들리지 않는 몇 마디 말을 드미레아에게 건네는 칼리안을 향해서였다. 너 또 뭔소리 하는지 난 이해 못하겠다는 얼굴이 되어 버린 키리에가 입을 꾹 다문 것을 보지 못한 채로. “이유도 없이 그렇게. 계속.” “······ 제가 검술 보여드리겠다 한 것이나 히나가 플란츠 왕자님께 신경을 써드리는 것이 과한 친절로 여겨지셨습니까.” 간신히, 정말 힘겹게 플란츠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먹은 키리에가 물었다. “과한건지. 과분한 건지.” 둘 중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삼킨 플란츠가 키리에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칼리안의 검술을 복기해주겠다는 말에 대한 조금 늦은 대답을 했다. “가. 빌헬름.” “지금 가셔도 되겠습니까. 헤르츠 부군단장이 또 찾을텐데요. 잊지 않고 있을 테니 일정 마치신 뒤에 만나도 괜찮습니다.” “상관 없어.” 파란 머리 마법사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상관 없다 여기는 플란츠가 자신의 검을 챙겨들며 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드미레아의 검이 더 무거울지, 자신의 검이 더 무거울지 따져보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숨이 가쁘다는 것을 검을 놓친 뒤에야 깨달았다. 짧은 숨을 몇 차례 뱉어낸 드미레아가 칼리안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련에서 진 것에 의아하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칼리안이 검을 다루는 실력을 다시 겪었고, 검의 길에 오르는 것에는 요행이 없음을 스스로도 잘 알았다.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 드미레아보다 칼리안이 더 나은 실력을 지녔다. 가진 재능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아 보여서 그것은 조금 부러워해볼까 하다가 그냥 말았다. - 무리하지, 말아요. 좇는 것과 부러워하는 것은 다르지 않나. 부러워하면 무리하게 될 테니 오늘은 그냥 마음 편히 차나 한 잔 마시면서 쉴 생각을 했다. 어느 정도의 실력 차이인지 제대로 알았으니 다시 검을 휘두르면 될 일이다. “뒤따르다 보면 따라잡고, 따라잡으면 앞서는 날도 오겠죠.” 그런 생각의 끝에서 드미레아가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은 갑자기 그것이 무슨 말인지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검술 스승이었던 테일란을 앞에 둔 베른 역시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칼리안이 발을 옮겨 떨어진 검을 직접 집어올렸다. 지그프리드령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무거워진 검의 무게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뒤에는 날이 다소 무뎌진 것을 보고 미안한 얼굴을 했다. 대련에서 이긴 것은 미안할 일이 아니었으나 검을 상하게 한 것은 미안해 할 일이 맞았다. “아.” 그러다가 지금 미안해 할 것이 그것 뿐임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재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미안. 드미레아.” 검을 맞대고 있을 때에는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살기 가득한 소리를 내더니 금새 평소의 자상한 얼굴로 되돌아와서는 사과를 했다. 어쩌다보니 한 손에는 손수건을, 다른 한 손에는 자신의 검을 든 채 말하는 칼리안을 본 드미레아가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검을 먼저 받았다. 칼을 다루는 만큼 자잘한 상처 정도는 그리 신경쓰이지 않았다. 게다가 어차피 곧바로 치료해 줄 사람도 있었으니까. “빌헬름 관에 가면 되니 신경은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방금 전 정혼자 목에 빨간 줄 하나 그어 놓았다는 것에 정말로 신경쓰지 않기로 한 모양인지, 칼리안은 드미레아가 괜찮다 했으니 됐다는 듯 웃었다. 뭐. 귀족보다는 기사에 가까운 드미레아의 사고방식이 칼리안이라 해서 다르겠는가. “지그프리드령에는 왕자님만큼 빠른 검을 쓰는 이들이 없습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카이리스에도 없을걸.” 안그래도 테일란을 떠올리고 있던 칼리안이 이렇게 대꾸했다. 앨런이 들으면 어여쁜 왕자님 등짝 때릴 마음 먹게 할 만한 말을 또 흘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나도 많이 배웠어. 정말 많이 늘었네.” “그렇습니까.” “지그프리드 공과는 확실히 달라. 물론 그때 지그프리드 공이 많이 접어가면서 상대해 줬었겠지만 네 검술이 더 까다로운 것 같기도 하고.” “저희 가문에도 보다 가벼운 검술은 전해지니까요. 물론 두 종류를 다 배우지만 제가 다루는 검은 아버지의 것과 조금 다릅니다.” 그렇구나 하는 소리를 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조금 전 오갔던 공방에 대해서는 둘 모두 입에 담지 않았다. 굳이 더 말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보여주며 가르쳤고, 드미레아 역시 방금 전의 대련에서 칼리안이 알려주려 한 것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둘 모두 그 정도의 실력은 가진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검이 좀 상했어.” “소개시켜주신 로튼이라는 자가 실력이 좋습니다. 그것 역시 염두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렇게 말한 드미레아가 로튼 대장간의 주인이었던 대장장이 긱스를 저택에 들인 일에 대해 말했다. 혹시 저택의 사람으로 손이 부족할까 싶어 일러주었던 이를 아예 고용했다는 말에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지나칠 정도로 드미레아다운 행동력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기사들의 훈련도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언제쯤 궁에 들이실 생각이십니까.” “브리센 측 인물은 안 섞여 있어?” “네. 에이프린 백작이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습니다. 눈에 띄는 이는 없습니다.” “좋네.” 자신을 도와 기사 세력을 모으고 육성중인 아이즌 에이프린에 대한 칭찬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마치 자신이 칭찬 받은 것처럼 흡족한 얼굴을 했다. “기회가 닿으면 에이프린 백작도 한 번 만나봐. 나쁘지 않을 거야. 생각 같아서는 백작을 수도로 불러오고 싶은데 나와 연결된 선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하질 못하네.” “네. 그런데 그레이 브리센은······.” “그건 나중에.” 그레이 브리센을 언제 수도로 들일 생각인지, 새로운 변경백 후보로 생각해 둔 몇몇 인물들은 직접 만나 볼 생각인지 등을 물으려던 드미레아가 입을 다물었다. 드미레아는 대련을 한 둘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곳에 키리에가 서 있음을 상기하고는 칼리안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얀의 것과 똑같은 블론즈 색의 고불고불한 머리카락 끝에 매달려 있던 땀 한 방울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뒤에야 자신이 세심하지 못하게 군 것이 또 있었음을 깨달은 칼리안이 생글 웃으며 마력을 운용했다. “잠시만.” 오러로 만들어진 검에서 느껴진 섬뜩함과는 완벽히 다른 기운의 마력이 드미레아를 스치듯 지나갔다. 땀이 마르며 열기가 식었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이 긴장하며 흘린 땀으로 푹 절어있던 상태에서 해방된 드미레아가 마음에 든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확실히 마법은 도움이 많이 되네요.” “도움이 되나.” 하기사. 아무리 못 씻어도 깨끗하게 해주니 야근을 하기에도 좋고, 술 냄새도 안 남겨주니 술 마신 다음 날 신경 안 써도 되고. 옷에 묻은 빨간 차 얼룩도 지워주고. 고양이 털도 없애 주고. “······ 도움이 되긴 되네.”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 칼리안이 드미레아를 보며 말했다. “히나 만나 치료 받고 나서 다시 올 수 있어? 식사도 할 겸 내 정혼자님이랑 산책하면서 얘기도 좀 나눌 겸.” “네. 시간 됩니다.” 마음에도 없는 정혼자 타령은 그냥 넘겨들은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조금 전의 대련에서 아쉬웠던 점을 계속 생각하느라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한 탓이 컸다. 덕분에 빨리 저택에 돌아가서 차 한 잔을 마시며 쉬려 했었다는 생각도, 칼리안이 카이리스 운운하며 또 흘린 비밀 가득한 말에 대해서도, 그리고 칼리안의 검과 마법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왜 그렇게 다른지에 대해서도 모두 특별히 떠올리지 않고 넘겼다. 앨런에게 등짝 맞을 일 사라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늦지 않게 와. 맛있는 것 먹자.” 오러 가리기를 그만두었는데도 여전히 밥이 좋은 것을 보니 아무래도 키가 크려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에, 칼리안이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 제40장. 감당 못 할 텐데(4) > 히나가 또 화났다. 그것도 조금 많이 화가 났다. - 제가, 치료해드린 분들, 거의 다, 자상한 왕자님한테, 다쳐서 온, 사람들이에요. 물론 그들 중에 정작 제일 심하게 다쳤던 것은 칼리안과 플란츠였지만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던 상황이었으니 셈에 넣지 않았다. 하지만 불필요한 상처를 치료하느라 피곤해지지는 않을까 항상 걱정만 되는 우리 히나 귀찮게 일부러 다쳐 오는 놈 눈에 띄기만 하면 치료 받을 꿈도 못 꾸게 영영 재워 버릴 줄 알라던 칼리안이 사실 알고보면 제일 앞장서가면서 환자를 만들어내고 있지 않나. 그랬으니 화가 날 수 밖에. - 자상한, 왕자님과, 대련만 하면, 다들, 목을 다쳐서 와요. 다른 마법사 분들도 그렇고, 엉뚱한 부군단장님도, 특히, 좋은 왕자님이요. 멀쩡한 사람들을 괜히 다치게 만드는 것이 속이 상해서, 드미레아의 상처를 깨끗이 다 치료해 놓은 히나가 이렇게 말을 했다. - 꼭, 일부러 그러시는, 것처럼요. 제일 많이, 상대해주고 계시는, 오빠는, 안 다치니까요. 가장 열심히 나서서 가르치고 대련해주고 있는 키리에의 몸에는 스치듯 생기는 생채기 하나 안 나게 조심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일부러 그러시는 것 맞습니다.” 무려 그 히나가 화를 내는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된 드미레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칼리안이 며칠동안 지그프리드령에 있을 때라 해서 달랐겠는가. 그 때부터도 이미 히나에게 치료 받은 환자가 속출했으니 드미레아 역시 칼리안의 매서운 손속을 잘 알았다. “경고하시는 겁니다. 검이니까요. 방심하면 더 큰 일을 겪게 될 테니 항상 조심하라 알려주시는 겁니다.” - 저도, 그렇게 생각,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말한 히나가 꾹 다문 입에 힘을 주며 미간에 주름을 만들어냈다. 그러더니 까맣고 큰 눈으로 드미레아를 쳐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자상한 왕자님이 그냥 화풀이를 하는 경우도 있어요.’ 가끔 대련하는 척 화풀이를 하는 아주 나쁜 버릇이 하나 있다고. 그런 말을 꺼내 보아야 소득 없을 일임을 알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 소공작님 정도면, 굳이 이렇게 상처까지, 만들어가며, 가르칠 필요가, 없잖아요. 이 참에, 자상한 왕자님 보면, 제가 꼭, 혼내줄 거예요. “더 나아지려면 기억해둬야 하는 상처도 분명 있습니다, 베른 경. 지난 번의 굳은살처럼 말입니다.” 레몬 향을 내는 허브와 말린 사과가 들어간 차에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줄 평화로운 맛이 났다. 저택에 가서 마시려다 잊었던 차 한 잔을 선물 받게 된 기분도 평화로웠다. “지그프리드령에 있을 때에는 이렇게 웃을 일이 잘 없었는데 사고 잘 치시는 3왕자님 덕에 저는 여러모로 즐겁습니다. 가르쳐주시는 것도 많고 이름값도 넉넉한 분이라 저는 불만 없습니다. 상처 정도는 신경쓰지 않으니 혼내지 마세요.” 그 왕자가 잘 챙겨주고 있는 오빠 덕분에 마음의 그림자가 많이 사라진데다 그 왕자 덕분에 만들게 된 생각 깊은 또래 친구를 만나면 잠시나마 제 나이의 다른 평범한 이들과 같은 사람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드미레아를 보던 히나가 생긋 웃었다. - 소공작님은, 저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 많네요. “그렇습니까.” 모르기 때문에 해 줄 수 있는 걱정 대신 알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으니 말이다. - 그래도 나쁜 것은, 나쁜 거니까. 나중에 혹시, 다른 사람한테, 이유 없는 상처를 주시면, 그 때는 정말로, 혼을, 낼 거예요. 거기까지는 막을 이유 없는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언제나 차 향이 참 평화롭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히나의 말에 영 맞지 않는 대답을 한 뒤 조용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 * * 비가 그친 하늘이 맑았다. 드미레아의 생각처럼 평화로운 날이었다. 히나와 드미레아가 칼리안의 화풀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키리에는 플란츠에게 칼리안의 검술을 느리게 펼쳐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일찍 집으로 간 에우리아는 앨런이 보낸 보라색 케이크와 함께 마쥬리니를 마시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프레이야의 추숭 행사일에 입기 위해 칼리안이 특별히 주문한 의상을 완성한 의상담당자 섀틴은 옷과 장신구에 흠이 있는지를 꼼꼼히 살핀 뒤 별 탈이 없음을 확인하곤 늘어지듯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플란츠와 아르센이 함께 쓰는 집무실을 찾아간 레릭이 ‘우리 왕자님 오늘 못 오십니다’ 하고 재빨리 나가버린 탓에, 동종업자의 갑작스런 휴가 소식을 통보받은 후 쌓이는 것이 과로인지 분노인지를 두고 아르센과 니들렌이 토론을 벌였다. 그렇게 모두들 평화롭기 그지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재밌네요.” 그래서일까. 진한 민트 향이 올라오는 차가운 차를 한 모금 마신 칼리안이 웃었다. 빠짐 없이 싹 확인한 에우리아의 조사 결과를 다른 손에 든 채였다. “부탁이나 하나 드리려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보여주시니.” 톡, 톡, 톡. 손에 들린 유리잔을 몇 번 두드리던 칼리안을 향해 앨런이 입을 열었다. “사실은 요즘 안그래도 신경 쓰이는 일이 많으실 터라 그 조사 결과를 곧바로 전해드리지 않으려 했지요. 그런데 엘프의 어머니 나무를 찾아가겠다 하시니 그 자료 먼저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전해드리는 겁니다.” “그렇게까지 막아주지는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확인되는 것들을 제가 다 알고 있어야 해야 할 일을 정하기에도 좋고, 또 머리 아픈 것은 전부 다 떠넘겨도 될 똑똑하신 분도 계셔서요.” “다행입니다. 신 귤을 잘 나눠가지려 하시는 것 같으니.” “네, 뭐. 그 똑똑하신 분 덕에 가끔 환장할 일이 생기는 것 빼고는 도움이 되기는 하니까요.” 과연 가끔일지는 모르겠지만. 짤그랑 하는 얼음 소리가 듣기 좋았던 탓에 유리잔을 몇 번 흔들어가며 부러 소리를 내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정작 조사를 했던 것은 텐실의 왕세자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세크리티아의 국왕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는 기분이 듭니다.” 나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하는지. 내가 지내온 과거를 전부 알지도 못하고 죽었던 사람이 이제 와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눈에 거슬리는 일들을 벌이고 있는지. “제가 ‘붉은 고니’임을 알았을 가능성이 높은 하얀 수리가 제온의 일원이었죠. 세크리티아의 새들이 제가 들렀던 지그프리드령에서 저를 봤을 것도 같고. 체이스 왕세자께서 저를 도와주신 과정을 새들이 봤을 테고. 그 외에도 많은 새들이 제온에 속해 있었고.” “그러했지요. 다 죽어가던 카이리스 3왕자가 어느 날 갑자기 카스트린 경과 비슷한 검술을 쓰면서 새들의 암호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도 데블란이 알았을 겁니다.” “정작 전하께서는 모르시는 사실을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 우습네요.” 농담을 섞어가며 우스운 이야기라 말하고 있었으나 칼리안은 전혀 웃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물론 앨런의 얼굴에서도 웃음기를 찾기는 어려웠다. 톡, 톡, 톡. 유리잔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이번에는 서류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으며 잠시 눈을 내리떴다. “이번에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엘프들을 회유한 뒤에 그것을 빌미로 저를 불렀고. 엘프들은 시간의 축에 적힌 제온, 인간의 왕이라는 말로 저를 칭했고. 시간의 축에 적힌 문자는 제온의 일원들이 가진 조약돌에도 새겨져 있고, 조약돌과 연관 있을 것 같던 학자는 그 문자들을 벽에 붙여놓은 채 죽어 사라진 지 오래고······. 그렇다는 것은 시간의 축과 제온과 엘프들, 그리고 세크리티아의 국왕까지 서로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다 보아야 한다는 말이 맞겠죠.” 앨런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일단 세크리티아 국왕은 시간의 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니 제온을 통해 전해진 제 소식과 시간의 축을 연관짓기가 어렵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데블란의 호위기사였던 카스트린 경이 자신의 검술을 가르칠 만한 사람이면서, 체이스가 그렇게 챙기려 하는 카이리스 3왕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간의 축이 사라진 일과 그런 소식들을 섞어가며 가설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을 터이니.” 내가 당신의 아들이었음을 눈치챘든. 당신과 가까웠을 또 다른 누군가로 착각을 하고 있든. 당신은 내 비밀에 대해 확신을 가졌다. 톡, 톡, 톡. 유리잔 대신 서류 위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제온과 연관 있을 엘프들은 세크리티아의 국왕과 접촉을 했는데, 제온에는 대사막 늑대들도 속해 있죠. 텐실의 왕세자는 그런 늑대들과 손을 잡았고요. 제온을 한 가운데 두고 많은 이들이 얽혀 있네요.” 이 모든 것이 연결된 제온. 제온과 연관 있을 란델의 심장. 란델과 연관이 있을 텐실의 왕세자. 그가 보인 최근 행보가 포함 된 에우리아의 조사 결과. “다릅니다. 제가 알고 있었던 내용, 그리고 체이스 왕세자께서 알려주신 그의 ‘과거’ 행적과 많이 달라요. 제온이 텐실의 왕세자를 과거와 다르게 움직이도록 하고 있는지, 반대로 텐실의 왕세자가 과거와 달리 행동하면서 제온을 움직이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지금껏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가운데에 텐실의 왕세자를 포함시켜 둬야 하는 것은 알겠네요." 톡, 톡, 톡. 종이를 두드리던 칼리안의 손이 비로소 소리 내기를 멈췄다. “테일란 카스트린 경,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 공, 에반 브리센 후작, 그리고 저.” 그레이 브리센을 제외한 다섯 명의 소드마스터 중 넷의 이름을 언급한 칼리안이 붉은 눈을 들어 앨런을 응시했다. “시오나 힐. 그 여자 지금 어디에 있는지 찾아봐야 되겠습니다.” 갑작스레, 행적이 묘연한 나머지 한 명의 소드마스터를 입에 올린 칼리안이 날카로워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계속 생각을 해봤어요. 대사막의 전사들이 그 조약돌을 가졌을 때 그렇게나 능력이 강해지는데 제 심장에 그것을 심으면 제가 스승님을 이길 수 있을까. 시스파니안에게 검을 겨눌 수 있을까······.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럼, 카스트린 경이나 혹은 스승님께서 그것을 가지게 되신다면 어느 정도가 될까.” 모든 일의 중심에 제온이 있다. 심지어 데블란과도 연관이 있는 듯 하니 말이다. “제온이 만약 텐실의 왕세자를 정말 뒤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제온은 그 이상의 일도 저지를 능력이 있다는 소립니다. 이를테면, 소드마스터를 괴물로 만드는 짓 같은 것 말입니다.” “상상하기는 싫지만 그렇겠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앨런을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스승님. 어려운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왕자님 부탁이면 무엇인들 어렵겠습니까.” 지금 당장 데블란을 죽여달라 하면 그리 할 것이고 에반의 목숨을 달라 하면 그 역시 그리 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당장 왕위에 올라야되겠노라 한다면 곧바로 르메인의 집무실에 들어가리라. 뿐만 아니라 이 길로 황금빛 드래곤 실레스티안을 잡아다 달라 하면 시스파니안의 저주를 달게 받으며 그 어린 용의 심장을 꺼내려 할 것이다. 그러니 칼리안의 그 어떤 부탁인들 들어주기 어려운 것이 있을까. “시오나의 행방은 우선 지그프리드 공이나 카스트린 경을 통해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스승님 외의 다른 두 대마법사들. 그들이 정확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도 알아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리베른에 머무르고 있는 두 명의 또 다른 7서클의 대마법사들. 그들은 제온과 연관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파악해두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러려면 당연히, 엘린느를 통해야 했다. 차라리 시스파니안에게 피어를 보내고 이해받는 것이 앨런에게 있어서는 더 쉬운 일일 터였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앨런은 이렇게만 대답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 * * 앨런과의 대화가 길어졌다. 본래 부탁하려던 것에 대해서까지 이야기를 해야 했던 까닭이었다. 덕분에 결국 드미레아를 기다리게 만든 칼리안이 왕궁의 작은 마차를 타고 서둘러 체르밀 궁으로 향했다. 그렇게 체르밀 궁에 들어서다가, 어차피 드미레아와의 대련에 대해서는 키리에가 가르쳐 주었을 것임을 알아서 오늘은 더 볼 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윗층 사람과 딱 마주쳤다. 인공 호수에 둥둥 떠있는 개구리밥같은 놈에게 인사를 건넨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는 빨리 끝나셨나 봅니다.” 플란츠의 기억력이 어느정도인지는 칼리안이 제일 잘 알았다. 플란츠가 눈으로 보지 못한 것들만 알려주는 정도로도 제대로 이해했을 완두콩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때문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은 얼굴로 말을 건네는 칼리안을 향해 플란츠는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오늘 앨런으로부터 듣게 된 일들을 플란츠에게 전해야 하기는 했지만 당장은 드미레아와의 약속이 먼저였던 칼리안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인사를 건넨 뒤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플란츠가 칼리안의 발을 붙들었다. “아르피아 궁에 왜 갔는데.” 사생활. 내 사생활 어디갔냐고. 플란츠 방을 제 방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은 싹 까먹은 칼리안은 내가 어디 갔다 오는지 형님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보려다, 생각해보니 뻔하겠다 싶어 그냥 흘리는 듯한 웃음 소리를 냈다. 특별한 일정도 없었고 빌헬름 관에 안 간 것은 지금까지 빌헬름 관의 수련장에 있었을 저 놈이 더 잘 알 테니 남은 것은 앨런 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겠구나 싶어서였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바빠서요.” 내 정혼자 기다리고 계시니 너랑 한가하게 얘기할 시간 없다는 얼굴로 이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자리를 벗어나려다 잠시 발을 멈췄다. 드미레아와 만나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가지 플란츠에게 확인해야 할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형님.” 살짝 주변을 둘러 본 칼리안이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마력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했으나 그 반투명한 막이 무엇인지는 아는 플란츠가 칼리안을 똑바로 쳐다봤다. 굳이 체르밀 궁으로 들어서는 길 한복판에 선 채로 사일런트까지 써가며 할 말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혹시 카밀론 가실 생각 정말 없으십니까.” 칼리안을 응시하던 플란츠가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더니 마력까지 낭비해가며 별 희한한 소리로 짖는 놈을 앞에 두고 뭔 소리를 하겠나 싶었던 까닭에 아예 대꾸하는 것도 포기한 채였다. “헛소리 하는 것 아닙니다.” “······ 이젠 곱게 짖는 것이 재미없어지셨나.” “저 오늘 피곤합니다. 짖을 여유 없어요.” “뭔데, 그럼.” “사람 말.” 또 반말이다. “자리는 정해야 하고 왕궁 밖에 나갈 일은 많아질 것 같아서 그럽니다. 란델 형님 의중도 모르는데 란델 형님께 드릴 수는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잠깐이라도 형님께서 하시면 안 됩니까.” 반말은 둘째치고 이제와서 왜 갑자기 왕세자 자리 놓겠다는 것인지, 총체적인 문제를 안고 멍멍거리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난 내 아우님한테서 뭘 더 뺏을 생각이 없는데.” “제 손에 든 것 뺏는 게 아니라 원래 형님 자리인 것을 저한테 넘기신건데요. 게다가 저는······.” 제가 무슨 생각을 먹든 제 알맹이가 이 나라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요. 뒷말을 간신히 삼킨 칼리안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속으로 상대할 가치도 없을 생각을 하리라는 것이 뻔하지 않나. “싫어.” 재고해 볼 일말의 가치도 없다는 듯 그 어느 때보다 완강한 답을 한 플란츠가 그대로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결국 이번에도 플란츠 뜻을 다시 확인했을 뿐, 귀한 시간만 허비하게 된 칼리안이 웃었다. 전생의 원수를 만나도 쟤보단 말이 잘 통했겠다 싶어서였다. < 제40장. 감당 못 할 텐데(5) > 드미레아와 대련을 하고 앨런과 플란츠를 만났다. 앨런에게 부탁할 거리 하나를 가져갔다가 제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제는 앨런이 잊고 살았으면 좋겠다 여겼던 일에 대해 결국은 부탁을 하게 됐다. 엘린느를 다시 찾는 일이 앨런의 신 귤임을 알았지만 그에 대해 제 아들이 미안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하는 아비의 마음이 너무 절절해서 기어코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 뒤에는 왕세자위에 관심 없다는 플란츠의 생각이 바뀌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그런데 나 아직도 결정을 못했어. 큰 개를 키울지, 작은 개를 키울지. 검은 개를 키울지, 하얀 개를 키울지.” 결국은 카밀론에 가서 개 키울 사람도, 르메인의 뒤를 이어 카이리스를 연명시켜야 할 사람도 자신임을 허락받은 셈이 됐다. 진작부터 못내 돌아있던 이가, 그 자리를 지키다 끝내 미쳐버렸던 이로부터. 우습게도. “무슨 개를 키울지 고민하시느라 밤을 새셨어요?” “설마. 내가 그 정도로 이상한 사람은 아니야.” “그런데 왜 못 주무셨어요. 불러주셨으면 우유라도 데워드렸을텐데 그러시지도 않고요.” 걱정이 반, 나무람이 반 섞인 말이 데운 우유보다 따뜻했다. “그냥. 생각할 게 많았어.” 전날. 치료를 마치고 다시 찾아 온 드미레아와 식사를 했다. 그리고 드미레아로부터 그레이 브리센을 대신할 새로운 변경백의 자리에 걸맞을 네 명의 귀족을 추천받았다. ‘고마워. 전하께 얘기드려서 넷 중 한 명으로 결정할게.’ 그 후에는 지그프리드 저택에서 몰래 숨겨주고 있는 기사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플란츠의 심장에 걸린 속박이 풀리는 날 일제히 왕궁에 들어올 것이다. 혹시라도 날뛸지 모를 발칸의 기사들을 견제하며, 아르센이 포함된 발칸의 마법사들을 도와 르메인과 플란츠의 입지를 지켜 줄 중요한 병력이었다. 때문에 드미레아에게 지금 생각중인 계획의 일부를 알리며, 염치없지만 다시 한 번 도움을 요청했다. ‘맹세의 인만 사라지면 왕궁 안의 일은 형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수 있으니 지그프리드에서 왕궁의 일에 관여해야 할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그런데 내가 그 때 자리를 비울지도 몰라서, 혹시 내가 없으면 지금 얘기한 것을 형님께 전해드리는 것까지만 부탁해도 될까?’ 에반 브리센을 몰아낼 계획을 지금 플란츠에게 이야기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가 되면 숨겨주던 기사들을 플란츠에게 인계하는 것에는 드미레아 역시 동의를 했었다. 거기에 더해 말 한마디 전해주는 것은 지그프리드의 신념에 문제될 것 없을 일이었다. 때문에 드미레아는 칼리안에게 빚을 하나 더 지우는 것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드미레아를 돌려보낸 뒤부터 지금까지 생각을 했다. 어둠에 잠긴 창 밖이 밝아지고 새들이 다시 울기 시작하는 것들을 잊은 채로 생각을 했다. “조금만이라도 쉬세요. 어제 무리하셨잖아요.” “대련 한 번 정도는 무리 될 것 없어. 밤 샌 것도 괜찮아.” 슬레이만을 보아 왔으니 소드마스터의 체력이 어느 정도일지 모르는 것이 아닐텐데도 쉬라 이야기하는 얀이 칼리안의 얼굴 면면을 살폈다.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았는지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빤했다. “큰 문제 생긴 것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 안해도 돼.” “걱정을 안하게 해주셔야 안하죠.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 제일 걱정되는 건 알고 계세요?” 또 한 번 걱정과 나무람을 섞은 말로 대답한 얀이, 대답 없이 웃기만 하는 칼리안을 보며 작은 숨을 푹 내쉬었다. 그 뒤에는 칼리안의 의복과 머리 정리를 모두 마친 시녀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렇게 모두가 나가고 방문이 닫힌 뒤, 얀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란델 왕자님의 시종이 왔었어요.” “조금 늦으셨네.” 드디어 란델로부터 답이 왔다. “화요일 오전, 이라는 내용만 전달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란델다운 간단한 답이 왔다. 이런 모습을 보면 란델 역시 시스파니안의 후손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혹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셔야 한다면 제가 다시 한 번 여쭤볼게요.” “무슨 말인지 알아. 다시 확인 안 해도 돼.” 가타부타 설명 없이 전달된 말이었으나 이해는 어렵지 않았다. 후궁 프레이야의 추숭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그레이 브리센을 만나보겠노라는 소리였으니까. “날짜 잘 잡으셨네.” 칼리안도 이렇게 가타부타 설명 없는 감상을 내놨다. 안그래도 많은 귀족들이 왕궁에 들 테니 그들 중 그레이 브리센이 섞여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니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자연스럽게 만나려 의도한 것처럼 보여지기 딱 좋을 날이다. 적당히 머리 좀 굴려보려는 에반으로 하여금 그레이가 자연스러움을 가장해 란델을 몰래 만나려 했다 오해하게 만들기에는 그보다 나은 날이 없을 것이다.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칼리안의 의중을 파악한 것처럼 날을 잡아 전해온 란델에게 소리 없는 칭찬을 한 번 더 보낸 칼리안이 말했다. “오늘 전하를 좀 뵈어야 할 것 같아.” “네. 아르피아 궁으로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겠습니다.” “고마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스트리샤 거리에 도는 소문들 중에 나와 관련된 것 빠짐 없이 다 전달해줘. 지금처럼 간단하게 말고 전부 다.” “귀족들이 내는 소문 중에 왕자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을 걸요. 소식 모이는대로 전해드릴게요.” “응. 고마워.” 다시금 고맙다는 말을 하는 칼리안을 얀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그러는지를 묻는 눈이 된 칼리안을 향해 얀이 말했다. “그런 말씀 이제 줄이세요.” “무슨 말?” “고맙다, 미안하다, 이런 말씀이요.” 칼리안이 웃었다. 국왕은 고마워하지 않고 미안해하지도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당연히 여기고 모든 것에 당당해야 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예전의 르메인이 그랬듯이. 그러니 얀의 말은, 르메인의 자리를 이어갈 길이 명확해지고 있으니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감사와 사과의 말을 줄여보도록 하라는 조언이었다. “싫어.” 연두색 놈한테 말이 옮았는지 이런 대답이 절로 나온다. 얀이 슬쩍 웃었다. 왕자의 시종으로서 해야 할 말을 했고 칼리안의 사람으로서 마음에 드는 대답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그렇게 변하면 감당 못 할 텐데. 아무도.” “네. 알아서 하세요, 그럼.”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었다. 그 뒤에는 도대체 무슨 개를 키울 것인지를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 * * 대장장이 긱스가 허허 웃었다. “아니, 소공작님. 하루 새 무슨 싸움을 하셨으면 검이 이렇게 상합니까?” 넉살 좋은 성격 답게 그 사이 드미레아를 대하는 것이 많이 편해져 있었다. “3왕자님의 검을 받아내느라 그렇게 됐습니다.” “어이쿠.” 참 많은 말이 함축된 감탄사 하나를 내뱉은 긱스가 다시 허허 웃으며 팔을 걷어올렸다. 그리고는 어디를 어떻게 고쳐놓아야 하는지 꼼꼼하게 살핀 후 말했다. “저녁까지는 싹 고쳐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다시 오겠습니다.” 저택의 한 켠. 쇠 두드리는 소리도, 붉디 붉은 불꽃도 참 마음에 드는 곳이다. 그러니 굳이 한 번 더 와서 이 곳을 구경하는 것이 수고로울 것이 없었다. 게다가 그 많은 기사들의 검을 죄 관리해주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긱스가 아니던가. “바쁘실텐데 소공작님께서 매번 직접 오십니까.” “어차피 오늘 하루는 전부 다 미루고 쉴 생각이니 괜찮습니다.” 지금의 말처럼, 차도 마시고 책도 읽으면서 여유있게 보낼 생각이었다. 어제 이미 히나 덕분에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기는 하지만, 그 후 칼리안을 만난 뒤 또 마음이 복잡해진 까닭이었다. “어제 3왕자님과의 대련이 많이 피곤하셨습니까?” “피곤하다기보다는.” - 내가 그 때 자리를 비울지도 몰라서. “생각이 많아져서 그렇습니다.”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주워듣게 되어 버린 긱스가 자신의 뜻대로 드미레아의 말을 해석한 뒤 입을 열었다. “생각이 늘어나실 만도 합니다. 검술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참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은 압니다. 독에 당해 근육을 다 손해보셨던 분이 불과 1년 만에 그것을 다 이겨내고 경지에 오르신 것 아닙니까. 그런 분과 대련을 하시면 그게 누구든 생각이 많아질 겁니다.” 독에 당해 근육이 다 망가졌었다고?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정혼자시면서 그것을 모르셨습니까? 실리케의 독 말입니다. 피를 토하고 쓰러지셨던 일이 있기 얼마 전에 왕자님께서 제 가게를 처음 오셨었는데, 그때 이미 검을 채 들지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그런데도 검을 살피는 눈빛이 어찌나 꼼꼼하셨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그렇게 큰 일이 터지고 나서 1년 쯤 뒤에 소드마스터가 되셔서 다시 가게에 찾아오셨죠. 저에게 실리케의 독 때문에 검을 들지 못하셨던 것이었다고 말씀해주고 가셨습니다. 그야말로 검술의 이치를 깨닫고 역경을 이겨내신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검을 그렇게 많이 다루셨을 분께서 얇은 검 하나 마음대로 들지 못할 만큼 몸이 상하셨다니 대체 얼마나 지독한 독을 드셨던 것인지 제 머리로는 도무지 상상도 못하겠다 싶었습니다.” 드미레아는 대답 없이 긱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대단한 칼리안과의 추억 아닌 추억을 회상하느라 드미레아의 표정도 채 살피지 못한 긱스가 말을 이었다. “그랬으니 왕자님께서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하셨겠습니까. 그래도 지금은 저렇게 어엿하게 자리도 잡으시고 또 이번에 프레이야 후궁님을 왕비님으로 올려주신다 하니 그게 다 그 동안 겪으신 고생에 대해 세렌티께서 보답해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독에 당한 것은 당연히 알았다. 그것을 모를 이가 카이리스에 있겠는가. 그런데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든다. “혹시 그 얘기 다른 곳에 한 적 있습니까.” “어이쿠, 제가 누구의 앞에서 감히 3왕자님과의 일을 입에 올리겠습니까. 소공작님께서 왕자님의 정혼자시니 드리는 말씀이죠.” “앞으로도 다른 곳에는 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왕실 자리싸움이 얽혔던 일이니.” “당연히 그리 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소공작님.” 드미레아의 생각이 더 늘어나게 생겼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긱스가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는 희한하게 짖더니 오늘은 쓸데없이 짖는 동생을 앞에 두고 마음에 좀 복잡해졌다. 아무래도 짖는다는 소리를 너무 많이 해서 진짜 짖는 것만 하게 된 것이 맞는 것 같다고, 그렇게 잠깐 자책한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바빠.” 아우님께서 고민할 것이 하도 많으셔서 사소한 것을 잠시 잊으신 것 같은데 그딴 것을 같이 생각해주기에는 내가 좀 바쁘다고 답을 했다. 고기 많이 들어간 많은 양의 음식들을 싹싹 먹고 버터 발라 노릇하게 구운 옥수수까지 하나 먹어 치운 칼리안이, 좋은 향기 나는 빵 한 조각과 양송이 버섯이 들어간 오트밀 스프를 반쯤 먹고 스푼을 내려놓는 플란츠를 향해서 이런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카밀론 가면 무슨 개를 키워볼까요, 라고. 그것이 마치 생애 가장 큰 고민거리라는 듯 진지한 얼굴을 한 채로. 곧, 테이블이 치워지고 두 잔의 주스가 올려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 풀어놓으면 되겠군. 그쪽도 잘 짖던데.” “아. 의외의 방법이기는 하네요.” 바쁜 와중에 결국 칼리안의 고민에 대해 생각을 해 준 셈이 됐다. 내용이야 뭐가 되었든 해결책 하나를 내어 놓았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정말 그렇게 해볼까 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웃음을 터뜨린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짙은 보랏빛 포도주스를 한 입 마셨다. 그리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뭔데, 또.” 아직 살펴보지는 않았으나 에우리아의 조사 결과가 적힌 서류는 이미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헛소리를 하는 꼴을 보니 다른 고민이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티납니까.” “내 아우님께서 숨기는 재주가 없으시니.”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고갯짓을 한 뒤 말했다. “바쁘다고.” 안 그래도 전날 하루를 통째로 쉰 셈이 아니던가. 그러니 빨리 말하고 가라는 소리에, 나도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 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신 귤, 계속 나눠드셔 주실 생각 맞으십니까. 감당 못하실 수도 있는데요.” “말했는데. 이미.” 칼리안이 작은 소리를 내며 웃더니 품에서 돌돌 말린 종이 한 장을 꺼내 플란츠에게 건넸다. “계속 나눠드실 생각이시라 하니. 형님 심장을 위한 안전장치 하나 해두려고요. 뭐, 안전장치가 될 지 안 될 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손해 볼 일은 없으실 겁니다.” 종이를 묶어 둔 얇은 가죽 끈을 풀어 내용을 확인한 플란츠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어차피 해두신 것 하나만 더 하시죠. 저랑.”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고, 실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사람 말을 듣게 된 플란츠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해.” 맹세의 인. 또 다른 계약을 위한 종이를 내려다보면서. < 제41장.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1) > 모순. 서로의 이치에 맞지 않는 일. 당착, 혹은 불합리. 사실은 그것을 노골적으로 이용해볼까 생각했다. ‘브리센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인에 브리센을 배반하겠다는 인을 하나 덧씌우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경우라면 계약 자체가 성립되지 않겠지요.’ ‘아니면 맹세의 인 때문에 죽지 않기, 혹은 기존의 맹세의 인 무시하기, 그냥 아예 안 죽기. 뭐 이런 걸로 새 계약을 하거나요.’ ‘왕자님. 시스파니안은 사려 깊은 고룡입니다.’ 참으로 사려깊게도 앨런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 저 말을 르메인이 물었다면 앨런은 분명 시스파니안이 너처럼 생각 없이 맹세의 인이라는 마법을 만들었을 줄 아느냐 대답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저런 질문을 플란츠가 받았다면 왜 또 짖느냐고 답했을 터였다. 그러니 둘러둘러 고운 말을 찾아 ‘왜 그렇게 멍청한 질문을 하느냐’라고 대답한 것에 고마워하는 칼리안에게 앨런이 말을 덧붙였다. ‘맹세의 인이 서로 충돌하지 않을 틈을 찾아보실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제 심장 거는 것을 일말의 고민도 없이 수락하는 삶은 완두콩을 보며 앨런의 말을 한 번 더 떠올려 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하시는 김에 형님께서도 요구사항 적으십시오. 들어 드리겠습니다.” “쉽게도 말하시는군.” “쉬운 일 아닌 것을 아시는 분께서 정작 본인 심장 거는 것에는 주저하질 않으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계약하자 먼저 말할 때는 언제고 하겠다 하니까 잔소리다. 만약 안하겠다 답했으면 이미 한 번 묶은 심장 왜 이제와서 아끼느냐는 소리를 했을 거다. 플란츠가 종이를 툭툭 치며 칼리안이 적어 온 것을 가리켜보였다. “이런 내용에 대고 뭘 더 쓰라는 건지 모르겠는데.” “뭐든지요.” “내가 무슨 말을 적을 줄 알고.” “무슨 말이든 형님 몫을 제대로 챙기셔야죠. 똑똑하시면 뭐합니까. 장식으로 있는지 허전해서 남겨놨는지 모를 머리 달고 다니는 후작이 계약하자 들었을 때도 그냥 ‘해’ 하고 말았을 것 같은데요.”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아침부터 시비를 거는 칼리안을 본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얼굴을 하려다 말고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다른 말 얹을 생각 없이 에반의 계약을 수락한 것도 맞았고 그렇게 심장을 걸어놓는 바람에 일을 더 크게 만든 것도 맞았으니까. “됐어.” 그런 얼굴을 본 칼리안은, 애매하게 찌푸려진 얼굴의 파릇파릇한 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눈치챈 뒤 싹 무시하며 다시 말했다. 아니, 계속 멍멍거렸다. “워낙 욕심이 없으셔서 그런가 말은 잘 들어주시니 편하고 좋긴 하네요.” “잠깐 사람 말 하더니.” “식사 좀 더 하시라는 말도 잘 들어주시면 참 좋을텐데. 그러다 형님 정말 키 안큽니다.” “그 새를 못 견디고 짖지.” “짖는 게 아니라 많이 드시고 쑥쑥 크시라고 응원해드리는 것 아닙니까.” “내 아우님께서는 카밀론에서 뭘 꼭 키우실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사춘기도 빨리 끝내주시고요.” “그만 좀.” “앞으로는 그 심장 아껴 써달라 부탁드리는 겁니다. 제가, 형님께.” 짖는 소리 끝에 붙어나오는 말에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그 얼굴을 잠깐 쳐다보던 칼리안의 입에서 또 낙엽 바스락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살겠다 하셨으니.” 살겠다 하셨으니 제대로 살아 주시라고. 한동안 대답 없이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포기한 듯 포기하지 않는 듯한 묘한 목소리의 대답이 뒤이었다. “알았어.” 어쩐 일로 한 번 더 싫다 소리 없이 대답한 플란츠는, 칼리안이 준비한 장난스러운 내용을 조금도 수정하지 않은 채 서약서에 서명만 했다. “더 쓸 말 없어.”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적혀있던 글자들이 떠올라 긴 띠를 이룬 채 플란츠의 팔을 타고 올라가 하나씩 사라지는 것을 보던 칼리안이, 자신의 심장에도 제약이 걸리는 것을 느끼며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익숙한 느낌이 들자 실리케의 목숨을 옭죄기 위해 썼던 맹세의 인을 실리케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다시 써먹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탓이다. 왕의 길을 걸을 결심을 굳힌 이가, 절대로 왕이 되지 않겠다 하는 이를 굳이 살려놓기 위해. 온갖 잡소리를 해가면서. 우습게도. 정말, 우습게도. * * * 니들렌이 그랬다. “하지 말 걸.” 아르센의 일을 도운 지 하루만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그런 말도 못 하네. 하지 말 걸 그랬다는 말을 살지 말 걸 그랬다는 말로 잘 걸러들어 주실 분이 계시거든. 사직서 말고 유서 받아주실 좋으신 분.” 지금 저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진실 뿐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니들렌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플란츠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인 루시에게 닭고기 육포 하나를 꺼내 주었다. “어제 그렇게 많은 서류를 처리하고 돌아갔는데 아침에 오니 또 이렇게나 쌓여 있는 게 참 신기하네요.” 증원을 앞두고 카이리스 전역에서 올라오는 발칸 지원 희망서와 추천서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는 피로가 몰려오는데 이미 발칸에 속해 있는 대원들 개개인의 훈련 성과 평가 기간이 겹쳤다. “제가 군단장님 집무실 앞에서 춤이라도 추면, 아 쟤가 바빠서 미쳤구나 하고 좀 살펴봐주시지 않을까요?” “이미 해 봤네.” “네?” “원래 카이리스 마법사들은 다 미쳐있었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위로만 받았네.” “네?” “농담이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농담인가. 그 범위에 따라 굉장히 무서운 말을 들은 것 같아서 당황한 니들렌이 아르센의 덤덤한 얼굴을 애써 못 본 척하며 다시 말했다. “마나실 군단장님께서도 참 너무하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을 어떻게 다 떠맡기실 수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제이아 경이라도 불러다 주셨으니 다행한 일이지. 어제 오랜만에 퇴근도 했지 않나. 그리고 평소에 일이 많기는 해도 이렇게까지 많은 적은 처음이네. 어차피 항상 이 정도인 것은 아니고 잠시 터진 일이라서 군단장님께서도 사람을 영영 늘려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나. 업무 내용 대부분이 기밀 투성이니 잠깐 바쁘다 해서 아무나 붙여 줄 수도 없으실 테고. 그러니 군단장님 원망은 하지 말게.” 푹 쉬고 와서 마음이 갑자기 너그러워진 것인지 아니면 결국 좀 더 돌아버린 것인지를 의심할 만큼, 그리고 플란츠가 봤다면 이렇게 생각하고 살 줄 아는 사람이었나 놀랄 만큼 앨런을 배려하는 말로 니들렌을 다독거려 준 아르센이 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기사 베른 경이 치유사 베른 경 만나러 밖에 와있으니 참고하고.” “이런 씨.” 키리에의 신념 중 하나가 ‘나의 귀는 곧 왕자님의 귀’라는 것임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인 니들렌이, 뒤에 어떤 험한 말이 살짝 붙으려던 것을 간신히 집어 삼키며 고운 색 머리카락을 박박 흐트러뜨렸다. “퇴근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배우게 되었으니 군단장님께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 아무튼, 제이아 경. 가서 일이나 하게.” 멀쩡한 집무실에 아주 우연한 사고인 것처럼 벼락이 떨어졌을 때 과연 자신이 벌을 받을까 칭찬을 받을까를 잠시 고민하던 니들렌이 일단은 화를 꾹꾹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에. 갑니다. 꾹꾹 참고 일하러 갑니다아.” 그리고는 아르센이 넘겨 준 서류들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집무실로 갔다. 왕자와 같은 집무실을 쓰는 것은 아르센 하나로 족했으니까. - 달칵. 그리고 얼마 뒤 집무실 문이 열리며, 베이지 색의 멋진 재킷을 어깨에 걸친 플란츠가 레릭도 없이 혼자 안으로 들어왔다. 어제 그렇게 갑자기 쉰 것은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듯한 얼굴에, 핑크빛 감도는 이름 모를 보석이 박힌 타이 핀이며 같은 종류의 커프스며 오늘도 여전히 왕자다운 모습을 본 아르센이 또 무어라 한 마디를 하려 했다. 그 주렁주렁함이 칼리안의 시녀인 메를린에게 질 수 없다며 열심히 최선을 다해 플란츠를 꾸며주고 있는 레릭에 의한 것임을 아르센은 몰랐으니까. “닫아. 알아서 다 끝낼 테니까.” 그리고 또 이런 말로 할 말이 막혀버렸다. 보통 두어 번은 받아주다 짜증을 내게 마련인데 오늘은 달랐다. 덕분에 아침부터 앨런도 플란츠도 원망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아르센이 여전히 시커먼 커피를 불만스레 마시고 내려놓은 뒤 입을 열었다. “아직 기운이 세서, 오시는 길에 마나 감응력 좋은 마법사 만나셨으면 들키셨을 겁니다. 티가 날까 걱정하셨으면 조금 더 있다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부군단장이신 왕자님.” 그렇게 말하는 아르센의 눈초리가 플란츠의 심장 부근을 향해 있었다. “마법사 아무도 안 만났어.” “그럼 됐습니다. 오후 쯤이면 거의 사라질 테니 비밀로 하셔야 하면 오늘만 조심하시면 될 겁니다.” “······ 또 누가 있는데.” 서류 하나를 펼치려던 플란츠가, 다른 것은 묻지 않고 주의만 주는 아르센을 보며 짧게 물었다. 곧바로 알아듣지 못한 아르센이 플란츠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조심해야 할 사람.” “마나실 군단장님, 제이아 경, 피츠 경, 페일튼 경 정도 됩니다. 뒤에 둘은 오늘 이 쪽에 올 일 없는 놈들이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알았어.” “아. 물론 왕자님도 포함됩니다만 이미 아실 것 같습니다.” 놈이랑 맺은 계약인데 놈이 모를 리가. 말 없이 인상만 찌푸린 플란츠가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볕 잘 드는 책상 위에 늘어져 있던 루시가, 서류 말고 나 보라는 듯 애옹거리며 서류 든 손을 툭툭 쳤다. 그런 루시를 끌어당겨 무릎 위에 올려 둔 플란츠가 서류를 살피려다 도로 루시를 쳐다봤다. “하.” 계약 내용. 루시를 보니 헛점 투성이인 듯 아닌 듯한 이상한 계약 내용이 떠오른 탓이다. - 플란츠는 왕궁에서 나가면 카이리시스의 브리센 후작저에서 고양이 키우면서 산다. - 칼리안은 열심히 돕는다. “······ 생각해보니 사람 말은 아니었나.” 어떤 미친놈이 그딴 내용을 써놓고 심장을 걸자 하느냐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 * * 커피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따로 이유를 들은 적 없었으나 플란츠를 생각하면 추측하는 것이 어렵지도 않았다. 둘째에게는 모든 꽃이 르니에리 같을 것이고, 셋째는 커피에서 르니에리 향을 맡고 있으리라는 것을. “미안하구나.” 지독하리만치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좀처럼 잊기 힘든 그 향기가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것이 실리케의 탓이 아님을 알아서, 르메인은 혼을 내는 것을 미루고 사과를 전했다. “커피도, 생일에 걸어 둔 종이 꽃도.” 미안할 것이 그 뿐이겠냐만은 다른 것을 모두 꺼내두면 오늘 하루가 부족할 것 같아 겨우 두 개를 골라내어 이야기를 했다. “아닙니다.” 르메인의 온전한 사과를 받아도 좋을 사람은 플란츠였고 르메인이 섣불리 사과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란델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칼리안은 르메인의 사과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 때문에 다시 듣게 된 사과의 말에 이번에도 괜찮다는 말을 하지 못했음을 평생 모를 르메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말씀드리고, 허락받을 것이 있어 왔습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잠깐 고개를 돌려 호위기사 렌 쪽을 쳐다봤고, 그것을 본 르메인이 주변을 물렸다. 그 후 칼리안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레이 브리센을 수도로 불러와 할 일이 생겼다고. 그 이유와 함께. 르메인이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플란츠가 에반과 맹세의 인을 맺은 일은 알고 있었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그것에 대해서도 할 말을 찾지 못하겠는데 자신의 아들이, 물론 이유가 있다고는 하나 누군가의 생명을 취할 계획을 만들었다 하니 어떻게 쉽게 대답하겠는가. “어찌 생각하고 어찌 답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허락하시고 잊으시면 됩니다.” “쉬운 일은 아니구나.” “적어도 이 일에 대해서는 전하를 탓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도, 플란츠 형님도.” 선을 명확히 그어놓은 면죄의 말이 차라리 듣기 편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저렇게 대답하는 것도 안다. “······ 미안하구나.” 그래서 르메인은 대답할 수 있을 만한 말을 골라 어렵게 건넸다. 칼리안은 그냥 그 말을 듣지 못한 척 다른 대답 없이 드미레아가 골라낸 네 명의 새로운 변경백 후보를 건넸다. 비밀리에, 특히 플란츠를 포함해 그 누구에게도 절대 알려지지 않도록 비밀스럽게 검토하고 결정해달라는 말을 전했다. 세크리티아의 상황을 한 번 더 확인해 볼 생각이었으므로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를 찾아가 볼 예정이라는 말은 아직 하지 않았다. 르메인 역시 데블란의 요구사항에 대해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지를 묻지 않았다. 칼리안이라면, 때가 되었을 때 알아서 말을 해 줄 테니까. 오래지 않아 르메인과의 대면을 마친 칼리안이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앨런을 잠시 만나볼까 하다 오늘은 그냥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발을 돌렸다. 빌헬름 관에도 들르지 않고 그 길로 다시 체르밀 궁에 돌아왔을 때, 자신을 기다리고 서 있는 누군가를 알아 본 칼리안의 걸음이 그 자리에 딱 멈췄다. 그가 누구인지 칼리안만큼 빠르게 알아챈 얀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레아가 왜······. 오늘은 대련 일정이 없습니다, 왕자님.” 모르지 않았던 이야기에 고개만 끄덕이는 사이, 가까이 온 드미레아가 칼리안의 앞으로 와 예를 올린 뒤 바로 말을 꺼냈다. “검을 수리하러 갔다가 어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슨 일로 왕궁을 찾았는지 물으려던 칼리안이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제대로 된 인사의 말도 없이 곧바로 튀어나온 그 말이 결코 가볍지 않았던 탓이다. 칼리안은 한동안 드미레아를 보고 서 있다 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얀. 잠깐만 얘기하고 들어갈게.” 자신을 쳐다도 보지 않는 드미레아와 그런 드미레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칼리안을 보던 얀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비켰다. 멀어지는 얀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설명하실 기회 드리러 왔습니다.” “무엇을.” “전부 다.” 저 표정만 보아도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가 분명히 보인다. 지그프리드의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니 말이다. 로튼 대장간의 주인으로부터 미심쩍은 이야기를 들은 것이겠지. 그를 저택에 들일 줄은 몰랐다. 아무튼 나도 참 대단하네, 하고 자조감 가득한 웃음을 짓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조금 늦게 왔어도 좋았을 걸.” “돌려 말하는 것 싫어합니다. 숨기는 것은 더 싫어합니다.” “드미레아.” “무엇을 숨기고 계십니까.” 드미레아 한 명에게 비밀을 더 들키는 것 쯤은 아무 걱정할 것이 없었다. 세상 사람 전부에게 들켜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심지어 르메인에게 들키더라도 어떻게든 속여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살았다. 드미레아를 앞에 둔 칼리안이 잠시 눈을 내리떴다. “······ 부탁 하나만. 더 들어줘.” 그래. 세상 사람 전부에게 들켜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얀을 제외하고. “무엇을 달라하든 갚을 테니.” 얀을 붙들어 둘 자신 있었으나 그래도 가능한 몰랐으면 했으니까. 죽을 때까지 얀 하나만은 모르고 지냈으면 했으니까. < 제41장.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2) > 모순. 사람이라는 게 대체 얼마나 이기적으로 모순된 존재인지 시스파니안은 알고 계실까. 세렌티는. 세렌티는 그것을 알까. “저와 달리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아이라서 함께 있었으면 한다고,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을 하며 왕궁으로 갔습니다. 그 뒤로 왕궁에서 오는 편지에는 온통 왕자님 걱정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자님께서 한 순간에 사람이 바뀐 것 같다는 소문이 지그프리드령까지 닿았습니다. 검의 길에 올랐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그저 재능인 줄로 알았습니다.” “드미레아.” “왕실의 일이니까, 아무리 오라버니가 곁에 있었다 해도 어떻게든 눈을 속이고 검을 다루고 숨겨왔겠지. 왕실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살아남아야 하니까, 하고. 저는 그렇게만 생각하고 넘겼습니다.” 그래. 숨겼다. 숨기려 했다. 지금의 나는 옛 칼리안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숨기려 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다들 알아주었으면 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았으면 했다. 제발 좀, 알아주었으면 했다.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 더 이상 데블란의 아들이 아니며 이제는 르메인의 아들일 수도 없는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음을 왜 굳이 일부러 깨우쳐가며 깨달아야 하는지. 그것이 왜 당연한 일이 아니고, 나는 앨런 마나실의 아들임이 당연한 사실이기에 그저 평소에는 잊고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내가 당신의 아들임을 입에 담아 확인하고 서로 상기시켜가며 기뻐해야 하는지. 나는 왜 누군가로부터 확인 받듯 혹은 허락 받듯 굳이 그렇게 이름이 불리고 누군가의 혈육임을 증명해 줄 우습지도 않을 호칭으로 순간 순간을 확인받지 않으면 어느새 숨이 막히는지. “1년 뒤에 검의 길에 오를 정도로 계속해서 검을 써왔다면 아무리 독에 당해도 검 한 자루 못 들 만큼 근육이 망가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있다 하더라도 그 정도로 망가지기 전에 심장이 멎을 겁니다.” 마음을 다잡다가도 치밀어 오르고, 덮었다가도 고개를 들고, 감추었다가도 폭발하는 그런 것들을 차마 다스리지 못해서. 시스파니안의 관심과 이해와 위로를 받아 다시 한 번 걸음을 옮기는 끔찍하게 감사한 기분을 차마 다스리지 못해서. 나는 사실 그 아이가 아니고, 그러나 더 이상은 베른도 아닌, 둘 모두가 될 수 없는 나는. 하지만. 아들을 두 번 잃지는 않도록 하겠노라 약속을 하여서. 아프면 이야기하고 치료를 받겠노라 약속을 하여서. 다시는 기억에서 없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을 받겠노라 약속을 하여서. 울적한 어느 날에 반성 가득한 편지 한 장을 읽어 보겠노라 약속을 하여서. 언젠가 그 작은 바닷가에 찾아가서 함께 술 한잔을 하겠노라 약속을 하여서. 이제는 나도 좋은 꿈을 꾸어 보겠노라 약속을 하여서. 시간이 흘러 누구의 키가 더 큰지 재어 보자 약속을 하여서. 그렇게 너 대신 내가 감히 잘 살겠노라 약속을 하여서. 그래서 차마 포기하지도 못하는 나는. 흘리듯 버리듯 건네진 빨간 만화경을 보며 똑같이 반짝거리던 그 아이이면서 은색의 달빛이 내리던 바다에서 들은 고래 울음 소리에 똑같이 울던 베른이기도 한 나는. “말도 안 되지만, 정신 나간 소리 같지만. 정말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고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였기도 했고 베른이었기도 한 나는. 결국 그 아이도 아니고 베른도 아닌 나는. 그냥, 칼리안.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제발 좀,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아무도 몰라주었으면 했다. 세렌티는. 세렌티께서는. 그 모순을 알까. 아실까. “내가.” 비밀을 지켜야 함을 알면서도 굳이 다 까발리듯 꺼내놓으면서 그래도 몰라주기를 바라는 말도 안되게 이기적인 모순을, 차라리 비밀 말하는 내 입을 틀어막지 왜 지워진 이름을 틀어막는지, 그 높은 뜻을 차마 가늠도 못할 빌어먹을 세렌티께서는 알고 계실까. “설명······ 해줄게. 전부 다.” “네. 말씀해주십시오.” 포기하듯 체념하듯 대답을 했다. 단 한 번도 얀에 대해 불안해하고 걱정한 적 없었다. 하지만 몰랐으면 했다. 모르게 하려 했다. 얀은 몰랐으면 했다. 기억을 하든 못하든, 같은 사람이든 아니든, 내 형제든 아니든. 이 세상에서 오로지 나 하나만은 복수를 하겠노라 원망하는 마음으로 생을 앗아도 될 사람임을 알면서도, 이미 죽은 얼굴로 살겠다 말하던 놈이 언젠가 그 어느날에는 필요해질지 모르니 나도 굳이 살려두겠노라 살리겠노라 미친놈처럼 발악을 하고. 더는 있지도 않은 아이를 대신해 용서해주지 못할 미안하다는 말을 애써 못들은 척 하려 내 속을 깎아내고. 그렇게 매일을 살면서도. 결국 그렇게 꾸역꾸역 살면서도 그냥. “자리 옮기자. 보는 눈이 많네.” 데운 우유 가져다주겠다는 말에 졸음이 와서. 그래서 몰랐으면 했다. - 저벅. 그런데. “······ 레아.” 얀이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는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대화에 끼어들더니 드미레아를 먼저 불렀다. 그러니 그는 얀이 아니라 시로이안이었다. * * * 작은 상자였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옅은 분홍색의 실크로 감싸인 상자가 테이블에 올려졌다. 아르센이 마법사와 기사들의 연계 훈련 감독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여전히 주저하다 점점 커지는 노크 소리가 지나간 뒤 히나가 들어왔다. - 연습, 도와주실 수, 있어요? 그리고는 이틀치 업무를 하루에 처리하느라 정신 없는 플란츠를 앞에 앉혀 둔 채로, 설탕에 재운 딸기가 가득 들어간 우유 두 잔을 앞에 내려놓더니 정작 본론은 꺼내지도 않고 이렇게 물어왔다. “있어.” 그래서 플란츠도 무슨 연습을 얼마나 도와줘야 하는지 묻지 않고 대답했다. - 고맙습니다. 입을 열어 말하는 고마움이나 미안함은 거절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손으로 만들어 보이는 것은 항상 막지를 못했다. 하지 말라 말을 하려면 늘상 손이 먼저 움직이고 있어서, 그 손에서 눈을 떼면 안 돼서 막지 못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상자의 색을 꼭 닮기도 했고 루시 발바닥이나 혹은 히나가 올려 둔 딸기우유 같기도 한 옅은 분홍색의 작은 보석이 박힌 동그란 귀걸이가 한 쌍, 그리고 같은 색 보석이 있는 것을 빼면 세크리티아의 어느 놈이 가지고 있을 것과 똑같이 생긴 얇은 은색 팔찌가 한 개 들어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면 급할 때 쓰지 못할텐데.” 플란츠의 말에 히나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 어떻게, 아셨어요?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플란츠의 똑똑한 머리와 빠른 눈치를 그리 많이 겪어보지는 못했던 탓에, 내용물을 보자마자 그것이 무엇인지와 왜 그것을 받아왔는지를 이미 다 안다는 듯 입에 올리는 반응 때문이었다. “어쩌다보니.” 이렇게만 답하는 플란츠를 보며 생긋 웃은 히나가 말했다. - 리, 베, 른, 국왕님이, 보내주신 마석을, 가공한 것이라서. 마법, 쓰지 못해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이를테면 욕조의 물 온도나 체르밀 궁의 실내 온도를 알아서 조절해주거나, 체르밀 궁에 들고 나는 물건을 각 층으로 옮겨주는 이동 마법진을 구동시키거나, 또는 창문을 잠그는 마법을 알아서 활성화하게 해주는 것과 같은 마석이라는 소리다. 아마 저 분홍빛 보석이 마석이라는 이야기일 터였다. 잘 발견되지도 않는 몬스터를 잡아 힘들게 얻어냈을 손가락 두 마디 만한 상급의 마석을, 저 귀걸이와 팔찌에 맞게 바꾸느라 굳이 깨뜨렸다는 것은 히나도 몰랐고 플란츠나 칼리안도 몰랐다. 돈을 주고도 마음껏 구하지 못할 마석을 매우 아까워하면서도 칼리안의 부탁이기에 두 번의 고민 없이 부순 앨런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 자상한, 왕자님께서, 어떤 일을, 해결하실 때까지. 엉뚱한 부군단장 님이랑, 오빠가, 저를 따라다녀 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 급한 일이 생기면, 저는, 소리를 못 내니까. 그래서, 주셨어요. 팔찌는, 오빠 꺼래요. 칼리안은 이것을 위해 전날 아르피아 궁에 들렀었다. 덕분에 에우리아의 조사 결과를 전해듣고 머리 아파 하기는 했으나 본래 앨런에게 부탁하려던 것이었다. 마력을 쓰지 못해도 통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없을지, 있다면 혹시 구해 볼 수 있을지, 그것을 물으려고. 왕궁 안에서 체이스의 연락도 받고 있으니 히나의 것 하나를 더 늘린다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리베른에서 그것이 가능하도록 도와 줄 물건이 왔다. 그렇게 만들어진 선물이었다. “······ 아.” 마석을 생각 못했다. 혹시 사람의 사고방식을 벗어난지 이미 오래되신 것 같은 동생놈이 마석으로 고양이 털 떼는 것을 만들어주면서 마법 안 가르쳐 주겠다 멍멍거리면 뭐라고 하면서 싫다고 하지. 이런 쓸데 없는 생각으로 좋은 머리 잘 낭비하고 있는 플란츠를 향해 히나가 다시 말했다. - 오빠한테, 제일 먼저, 그리고 좋은, 왕자님한테도,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해 본 적이, 없어서. 혹시 제가, 말을, 잘 못하면, 오빠가, 속상해 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오늘은, 어른스러운, 동생도 안 와서, 생각나는 사람이, 좋은, 왕자님 밖에, 없었어요. “그래.” 처음으로 ‘말’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혹시라도 데블란이 또 다른 정신 나간 짓을 벌일까 걱정되어 준 것이지만 어쨌거나 히나에게는 태어나 처음으로 소리를 내게 해 줄 물건이었다. 연습 상대로 제격일지 최악일지 모를 과묵한 왕자를 찾아온 히나가 상자 안에서 팔찌를 꺼내 건넨 뒤 귀걸이를 했다. 동생놈의 미련한 옛 형제 덕에 대충이나마 반지 쓰는 법을 익혔던 플란츠가 익숙한 듯 팔찌를 받아 손목에 끼웠다. 그리고 귀걸이를 차는 동안 앞에 놓인 딸기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곤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뒤, 플란츠는 히나를 보며 가볍게 고갯짓을 해보이려다 입을 열었다. “말해. 들을테니까.” 보겠다는 말이 아닌 듣겠다는 말에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인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한동안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생소할 것 같기도 하고 익숙할 것 같기도 한 목소리 대신 품에 안겨온 루시의 고롱고롱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햇살 내리쬐는 창가에서, 따뜻한 고양이를 무릎 위에 올려 둔 플란츠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바빠도 여유는 가질 수 있었고 손을 보고 있지 않아도 괜찮았으니까. 또 한동안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용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플란츠는 말 없이 기다렸다. - 안녕하세요. 한참이 다시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 저는, 히나입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지 않아서 띄엄띄엄. 마치 노크 소리같이 아직까지도 많은 것을 조심스러워하는, 그리고 작고 작은. 히나 목소리. 아주 작은 그 목소리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 필요가 없던 플란츠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살짝 웃었다. - ······ 듣기 좋네. 몸을 둥글게 만 루시가 다시 한 번 고롱고롱 소리를 냈다. 햇살 내리쬐는 창가에서 조용한 시간이 한동안 흘러갔다. * * * 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노을 빛으로 물들 준비를 하는 덤불이 심겨진 호수에 부는 바람이 선선해졌음을 느낀다. 얀이 찾아왔고 드미레아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듣지 못한 채로 칼리안은 호숫가 바위 위에 앉아 부는 바람에 물결이 이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비슷한 날씨였던 것 같은데. 그 때는 봄이었나.’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이었으니 아마 그랬을 것이다. 르메인을 처음으로 독대하고 나왔을 그 날에도 호숫가에 바람이 불었다. 그것이 문득 기억났다. 그날 얀은, 르메인을 만나 속이 시끄러울 테니 바람을 쐬고 오라고 말했었다. 그 말을 듣고 산책에 나섰다가 속을 앓은 란델이 장미 손질하는 것을 봤다. 그리고 그 날, 술에 절인 완두콩도 봤다. 아니. 술은 마시지 않았다 했으니 술 냄새에 절은 완두콩이라 해야 하나. 그 란델과 그 플란츠와 이렇게 지내게 될 줄을 그날에는 몰랐었다. 그랬으니 그 얀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게 될 줄도 그날에는 몰랐었다. 바람이 부니 호숫가 물이 일렁거려서, 그 속에 빠질 듯이 기억에 잠겨들었다. 내가 그날 얀에게 가족들에 대해 물었었지. 아직 그 때의 얀이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몰랐던 터라 얀도 얼버무리듯이 대답을 했었고. ‘궁금해 해 볼 걸.’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궁금해 해 볼 걸 그랬다. 과거의 전쟁 때 공작 슬레이만이 직접 참전했으나 소공작 드미레아는 참전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궁금해 해 볼 걸 그랬다. 지그프리드의 장자 시로이안 역시, 참전하지 않았다. 지금의 얀을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 이유를 궁금해 해 볼 걸 그랬다. 3왕자가 짧은 생을 마감한 뒤 전쟁이 났던 그 날까지 10년이 지나는 동안 3왕자의 시종이었던 이가 무엇을 했을지. 괜찮았는지. 살아는 있었는지. 궁금해 해 볼 걸 그랬다. 알아볼 걸 그랬다. “어찌 그 하나를 몰랐을까.” 그 많은 새들을 부렸으면서. 그것이 문득 후회가 되어 말 없이 호수 위의 잔물결을 보고 있었다. - 그런 일을 또 겪지는 않게 해주세요. 죽었다는 얀의 형에 대해 제대로 물어볼 걸 그랬다. 제대로 물어보고 이야기를 다 들어줄 걸 그랬다. “어찌 이렇게 세심하질 못할까.” 과거의 잘못과 지금의 잘못이 다 섞인 혼돈의 가운데에 빠져있을 때 쯤. 자박 자박, 하고 드미레아의 발소리가 들렸다. 습관처럼 뒷꿈치를 들고 걷는 얀의 소리와는 차이가 났다. “드미레아.” 무슨 말을 그리 했는지 묻는 대신 또 한 번 드미레아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얘기를 다 전해주고 그래도 비밀을 지켜달라 부탁할 참이었다. 죽은 형 대신 나를 보고 있는 새끼 코끼리 생각해서, 때가 되면 직접 이야기를 하겠으니 비밀을 지켜달라 부탁를 하려 했다. “왕자님 피곤하시니 그냥 가라고 성화입니다.” 그런데 할 말을 잃어버렸다. 시로이안으로 찾아와 드미레아를 억지로 데려가서는 다시 얀이 되어 이야기를 했단다. “······ 아.” 웃음이 났다. “많이 피곤한지 쉬고 싶어 하시는 것 같으니, 곤란하고 어려워 하시는 것 같으니, 무슨 말을 하러 왔든 오늘은 얘기하지 말고 그냥 가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저는.” 앉아있는 칼리안 곁에 그냥 선 채로, 칼리안의 입에 시선을 두지 않고 붉은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는 채로, 드미레아가 말을 이었다. “저는, 지그프리드의 드미레아입니다. 제 자신 하나보다 가문의 신념이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문의 신념보다 제 오라버니 한 명이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입니다.” 지그프리드의 드미레아. 그런 드미레아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너무나 잘 안다고 대답하는 대신 칼리안은 고개만 끄덕였다. “묻지 않고 돌아가겠습니다. 무엇을 숨기셨는지 모르는 척 완전히 잊을테니, 왕자님께서는 묻어두십시오. 죽을 때까지 묻어두십시오. 오라버니께 빚진 듯이 평생 묻어두십시오.” 하. “들키면 내 손으로 당신 정말 죽여버릴 거니까.” 그렇게 말한 드미레아가 묵묵한 시선으로 칼리안을 여전히 내려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정혼자님.” 웃음이 났다. 평생 갚아야 할 빚을 지운 동갑내기 정혼자가 정말 무서워서. “그래. 약속할게.” 오늘은 괜스레 피곤하여 아무래도 좀 쉬어야 할 것 같으니 데운 우유 한 잔만 가져다 달라 말해야 되겠다는 생각, 할 수 있어서. “고마워. 정혼자님.” 그것이 너무 고마워서. < 제41장.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3) > 모순. 하나의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스파니안이, 때문에 칼리안의 아픈 속은 온전히 이해해주었던 시스파니안이, 잊히지 않는 것을 서러워하는 자신은 잊힌 것을 서러워하는 일을 이해하기 어려우니 조금만 억울하다 여기라 말했던 이유. 모순. 시스파니안조차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그러나 칼리안은 이해하고 있는 것. “괜찮으세요?” 제 동생이 무엇을 확인하러 나를 찾았을지, 얀은 알까. 왕자와 소공작의 말을 끊어내기 위해 공작의 첫째 아들로 찾아와 제 동생을 끌고가선 무슨 말을 더 나눴을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왜 여전히 나에 대해 모르고 있을까. “아니.” 복잡한 생각을 다시 이어나가는 대신,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 안 괜찮아.” 드미레아가 돌아간 뒤 칼리안을 찾아와 안색을 살피던 얀의 얼굴이 꼭 데운 우유마냥 하얗게 질렸다. 괜찮다 말하면 안 믿더니 안 괜찮다는 말은 단박에 믿는 것이 재밌어서 칼리안의 웃음소리가 조금 커졌다. “레아가 무슨 말 했어요? 무례하게 굴었어요?” “그건 아니야. 걱정하지 마.” 이렇게 일축한 칼리안이 잠시 얀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또, 시로이안이 됐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리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을 혼낼 수 있을 사람’이 필요해서 시로이안이 됐다. “그럼 아까는 왜······.” 하마터면 아까는 왜 시로이안이 되었었느냐 물어볼 뻔한 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드미레아와 나의 말을 끊어내기 위해 시로이안이 된 것은 맞을까. 아니면 시로이안이 된 김에 말을 끊으러 왔을까. 다시 드는 의문을 접은 채 그냥 살짝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른 말을 꺼냈다. “안 괜찮은 건 다른 이유니까 드미레아 탓하지 마.” “다행이네요. 그런데 왜 안 괜찮으세요.” 여전히 시로이안이라서, 칼리안이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은 먼저 묻지 않는 얀과는 조금 다르다. 그것을 느꼈으나 칼리안은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괜히 피곤해져서 그래. 잠을 못 자서 그런가봐.” “그것 보세요. 쉬시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오후 일정 비울테니 들어가면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쉬세요.” 다시, 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 얀. 얀의 일을 묻지 않던 칼리안이 자신의 일을 의심치 않는 얀을 보다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 진짜 재밌는 것 같아.” “제가요? 저 재밌어요?” “응. 재밌어.” “다행이네요.” 뭐가 재밌다는 것인지는 궁금해하지도 않고 좋아하는 얀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재밌다는 말에 너처럼 무턱대고 좋아하는 사람 없을걸.” “왕자님 힘드신데 저라도 재밌다 생각해주시면 좋은거지, 이유가 필요한가요.” 슬레이만이 지그프리드령에 있는 멍멍이에게 왜 얀이라는 이름을 지어놨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개한테 자식 애칭을 이름으로 붙인 건 너무했다 싶지만, 새로 지은 궁에 그 궁에서 살아야 할 날이 창창한 아들 이름을 떡하니 붙인 하츠아라를 떠올리니 묘하게 이해가 된다. 하츠아라와 초대 지그프리드 공작인 퀴트로스는 절친한 사이라 하였으니 말이다. 자고로 친구는 서로 닮는다 하지 않던가. ‘카밀론에 가면 개 이름을 슬레이만이라 지어 버릴까.’ 얀의 일을 되갚아 줄 요량으로 시스파니안이 들으면 쟤 또 이성 없는 소리 한다 혀를 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이 민트차에 든 얼음 같은 웃음 소리를 냈다. “그래, 오늘은 쉴래. 생각이 너무 많네. 나 우유 한 잔만 데워다 줘.” 자칫 영원히 하지 못할 뻔 했던 말을 건넨 칼리안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꿀 넣어 드릴까요?” “아니. 단 것 말고 그냥 우유면 돼.” “네.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그리고 말씀 나누시는 동안 기사 베른 경이 찾아왔어요. 왕자님 방에서 기다리라고 전해뒀는데 나중에 다시 오라고 얘기할게요.” “이 시간에 키리에가 왔어?” 좀처럼 이런 시간에 찾아올 일 없는 키리에가 아니던가. 때문에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먼저 가서 얘기하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 “알겠습니다.” 키리에와의 대화가 칼리안에게 또 다른 피로가 될 리 없음을 알아서, 얀은 얌전히 대답한 뒤 칼리안과 헤어졌다. 짧은 시간에 휘몰아치듯 머릿속을 헤집은 생각들이 너무 많았던 모양이다. 괜스레 열이 오르는 것 같은 기분에 잠시 이마를 짚은 칼리안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소파 앞에 서 있는 물색 머리 큰 키의 키리에가 예를 올린 뒤 곧장 말을 걸어왔다. “소공작에게 왜 다른 말씀 없이 고맙다 하셨습니까.” “무슨 일로 왔는지를 먼저 말해야지. 키리에.” 대련 중 키리에의 목에 상처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과 결례를 눈감아주는 것은 달랐다. 때문에 칼리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키리에를 혼냈다.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는 칼리안의 지적에, 키리에가 고개 숙여 사과의 뜻을 보였다. “죄송합니다. 이것 때문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렇게 말한 키리에가 손목의 팔찌를 꺼내보였다. 자신이 직접 앨런에게 부탁한 일이었던 탓에, 그것을 몰라보지 않은 칼리안이 반겨하며 물었다. “선물, 마음에 든대?” “네. 좋아합니다. 히나에게는 업무가 끝나면 찾아뵙고 왕자님께 직접 인사드리도록 말해 두었습니다. 그보다······.” 생소한 방법이었지만 히나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안 키리에는 히나를 보내고 눈가를 슥슥 닦은 뒤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칼리안을 찾았다. 그리고 들었다. “차라리 소공작에게 설명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래서 물었다. 차라리 설명을 하지 드미레아의 다그침을 왜 듣고만 있었는지, 라고. “무엇을?” 정말 몰라서 묻는다는 듯한 칼리안을 보며 키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그것을 설명했다면 소공작은 이해를 했을 겁니다. 굳이 그렇게 묻어두겠다는 말로 왕자님께······.” “왜 내가 이해를 받아야 해?” 키리에가 말문 막힌 표정을 지었다. 칼리안이 웃는 얼굴이 되어 다시 입을 열었다. “설명하고 이해받아야 할 잘못을 드미레아에게 저지른 기억이 나는 없는데. 키리에.” 얀이 그랬다. 미안하다는 말 줄이라고. 싫다고 답했지만 쓸데 없이 미안하단 말 남발하고 다니겠다 대답하지도 않았다. “드미레아는 얀이 더 중요해서 그런 말을 했고. 나는 내가 더 중요해서 그런 말을 들었어.” 무슨 말인지 이해 못했다는 눈이 된 키리에를 보며 칼리안이 설명하듯 말을 이었다. “드미레아는 내가 가진 이유보다 얀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고 나는 내가 가진 이유가 더 중요한 사람이야. 이유가 뭐가 됐든 얀에게 있어 전부였던 사람 몸을 꿰찬 것은 나고 그 사실을 숨기고 있던 건 나야. 얀이 그런 사실을 알고 제대로 이겨낼 기회도 없이 내 멋대로. 나에 대해 보고 싶은 것만 봐도 된다는 말로 눈을 가려가면서.” “하지만 그건 공자님을 위해 하신 선택이지 않습니까.” “알다시피 얀은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야. 좋게 포장하면 얀을 위한다 하겠지만 그것도 결국 나를 위해서야. 드미레아는 그걸 알아서 드미레아 자신이 아니라 얀에게 빚진 마음을 가지라 상기시켜 줬을 뿐이야. 서로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른데 드미레아가 왜 나를 제대로 알아주고 이해해줘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어.” “협박 당하신 건 기억 안나십니까.” “아······ 그랬지. 그러니 내 정혼자께서는 얼마나 생각이 깊으신건지.” 비아냥이 아닌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소파로 가 앉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드미레아였다면 난 물어보러 와서 경고하는 대신 얀을 다시 지그프리드령에 데려다놓고 다시 찾아와 내 혈육 속여온 이상한 놈을 그냥 죽여버렸을걸. 무슨 꿍꿍이로 어떤 방법으로 이 몸을 차지한 줄도 모르고 놈이 말하는 게 진실일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굳이 설명을 듣나. 죽여버리고 말지.” “모순됩니다.” 스스로가 당한 것에는 오지랖 넓은 이해심을 가졌으면서, 드미레아의 이해는 필요 없다니. 모순이 아닌가. 키리에의 얼굴에 혼란함이 나타났다. 모순을 이해하지 못한 시스파니안처럼. “······ 나를 알아주지 않으니 억울하다 여기라는 말로 들리잖아. 너까지 그러지는 마.” 칼리안이 웃었다. 그런 시스파니안을 앞에 두었을 때처럼. “다 이해 안하고 여기저기 억울한 것만 늘어나면 내 생은 뭐가 돼. 다 끌어안고 끙끙대도 난 숨 쉬고 사는 게 더 좋아. 내가 잃었던 것들을 지킬 수 있다잖아. 히나처럼.”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키리에의 팔찌를 보며 부드러운 얼굴을 했다. 동생의 목소리가 담긴 것. 키리에는 분명 많이 좋아했으리라. 물론 칼리안 역시. “그래서 세렌티한테만, 조금만 억울해 할 거야. 그러니 좀 아프게 사는 미친 사람 취급은 하더라도 억울할 것 하나 없는 일에까지 억울해하는 불쌍한 사람으로는 만들지 마. 키리에.” 섣부른 말을 해 죄송하다는 대답 대신, 키리에는 작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해서도 미안하게 여기길 바라지 않을 것임을 이제 알아서였다. 칼리안이 웃었다. 큰 걱정을 씻어낸 사람처럼. “비밀은 더 이상 들키지 않을 거야.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버려서 좀 늦었나 싶긴 한데, 한 번 데이고 나니 정신이 차려지네.” 다행이라는 듯, 다짐을 담아 말했다. “너무 많이 억울해 했었나보다. 내가.” 세렌티. 한 번의 생을 당신에게 통째로 빼앗겼으니. 두 번째 생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리라고. 여전히 나는 지킬 것이 많으니, 전부 다 지켜내리라고. 얀도, 히나도, 키리에도, 란델 심장도, 살라고 했더니 짜증만 내는 완두콩도, 그저 고맙고 미안한 체이스도. 옛 칼리안의 몸도, 베른의 영혼도. 그리고 그 많은 약속들도. 그렇게 나도. “조금만 억울해하면서 살아야지. 그래야 나중에 세렌티 만나 화풀이 할 힘도 남지.” 칼리안이 기지개를 켜듯 일어나 침실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서는 키리에를 보며 말했다. “할 일 없으면 잠깐 지켜. 아무도 못 깨우게. 푹 잘래.” 특히 이제 좀 많이 파릇파릇해진 삶은 완두콩이 뱅글뱅글 찾아와서 오랜만의 단잠마저 방해하지 않도록. 딱 그런 뜻이었으므로, 키리에는 아주 잘 알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은, 곧 돌아온 소중한 새끼 코끼리가 가져다 준 데운 우유를 잘 마셨다. “푹 주무세요. 다른 고민 마시고요.” “그래. 고마워.” 따뜻했고, 부드러웠고, 졸음이 왔다.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었다. * * * 그리 성대하지는 않았다. 광장에 수정판을 세우지도 않았고 수도 치안대와 왕실 병력을 밖으로 보내 감시하지도 않았다. 광장에 단상을 설치하지도 않았다. 마치 프레이야를 궁에 들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추숭식 역시 절차를 간소화하여 왕궁 내에서 진행했다. - 실리케의 일이 있고 아직 1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떠들썩하게 치뤄봐야 좋을 것이 없습니다. 칼리안의 이런 의견 때문이었다. 사실은 하루라도 빨리 추숭식을 치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소리였다. 준비할 것이 많아지면 그만큼 식이 거행되는 날짜가 멀어질 테니까. 그 말을 들어주는 대신 르메인은, 귀족들의 입장은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았다. 그리고 식이 거행되는 장소를 지그프리드 관으로 정했다. “연회가 아닌 공식 행사는 세뉴 관에서 하는데 이번에는 지그프리드 관에서 하는 게 특이하네요.” “전하께서 요즘 생각을 많이 하시나봐.” 지그프리드와 칼리안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것에 있어 그만한 장소가 또 있을까. 때문에 전하께서 요즘 생각을 하긴 하시나봐, 라는 말을 애써 접은 뒤 아주 좋은 말로 포장하는 것에 간신히 성공한 칼리안이 거울을 쳐다봤다. ‘······ 칼리안.’ 프레이야의 추숭식을 앞둔 까닭인지. 첫 꿈을 꾸었던 날, 꿈 속에 든 뒤에야 간신히 만날 수 있던 아이가 생각났다. 잘 먹고 쑥쑥 자란 덕에 이제는 꿈 속에서 보았던 날과 많이 달라진 얼굴을 한참 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예전에는 거울을 싫어했는데.” 문득 이렇게 나온 말에 얀이 놀라며 대답했다. “어쩐 일로 그때의 일을 말씀하시네요.” “그러게. 요즘엔 가끔 하게 되네. 생각해보니 스승님께도 옛날 얘기를 해드렸었고. 내 형님 대신 내가 철이 들었나.” 하고 슬쩍 웃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어머니와 닮은 것이 싫어서 싫어했던 건지 아니면 이유가 있어 싫어했던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서 이제는 잘 모르겠지만.” 그 말에 얀이 잠시 침중한 얼굴을 했다. 프레이야의 초상화는 얀 역시 봤다. 기억의 전당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르피아 궁에 복제해 둔 초상화들은 궁을 찾은 누구나가 다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얀도 칼리안이 프레이야를 얼마나 닮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나에 대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다 이해하고 있어. “······ 뭐였든지. 이제는 걱정할 것 없으니까.” 혼잣말인듯 아닌듯 작게 읊조린 칼리안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 번 더 말을 건넸다. ‘축하해. 늦었지만 이제라도 핏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그리고······.’ 그 아이 역시 분명히 좋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옛 칼리안을 떠올리는 칼리안을 메를린의 목소리가 불러냈다. “준비 끝났습니다, 왕자님. 오늘도 잘 어울리십니다.” 칼리안의 주문을 받은 의상담당자 섀틴이 온 힘을 다해 만든 옷과 장신구. 그렇게나 염원하던 것을 비로소 보게 되었음에, 메를린은 꽤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거울을 한 번 더 살펴보는 동안 얀이 마지막 점검을 했다. 지금쯤이면 란델이 그레이 브리센과 아무 의미 없는 만남을 마치고 지그프리드 관에 들었을 것이다. 다른 귀족들도 모두 마찬가지. 지난 번과 같이 뒤늦게 입장해 손해를 보기 싫을 에반 브리센도 서둘러 안으로 들었을 터다. “이제 나도 가 볼까.” 언제나와 같이 몸에 꼭 맞는 재킷. 하지만 평소의 자수나 단추 대신 생소한 장식이 달린 예복이, 살구 색의 재킷과 하얀 바지보다 더 어색했다. 그리고 그만큼 마음에 들었다. “다 뒤집으러.” 내 상황도, 그리고 에반의 속도. 씩 웃으며 말한 칼리안이 한 번 더 거울을 살폈다. 그리고는 눈을 맞춰 오는 붉은 눈을 향해 조금 전 마치지 못한 말을 다시 전했다. ‘고마워.’ 칼리안이 시선을 옮겼다. ‘이해. 해줘서.’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발이 움직였다. 붉은 보석가루를 가득 붙여 끊임없이 반짝이는 선홍색의 긴 망토가 너울거리며 뒤를 따랐다. < 제41장.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4) > 세크리티아는 따뜻했다. 카이리스, 아니. 카이리시스는 추웠다. 세크리티아를 전부 돌아다녀 봤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어딜 가든 대체로 수도 세크레타처럼 따뜻하거나 더웠고 겨울 역시 그리 춥지 않았다. 그에 비해 카이리시스는 겨울 내내 불어드는 칼바람에 도무지 고개를 들고 걷기 힘들만큼 추웠다. 이게 다 이성 없음의 시초이신 하츠아라 때문이다. 아무튼. 같은 시기에 대한 두 개의 기억을 잘 갈무리하며 하츠아라를 탓하는 것으로 생각을 마친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바람에 펄럭이는 붉은 빛의 망토가 눈에 들어온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붙어있는 보석가루가 점점 많아져 그 끄트머리에는 밑바탕이 되는 두터운 천이 아예 보여지지 않을 정도가 되는 그것은 그 언젠가 보았던 만화경 속의 모습 같기도 했고, 또······. “이제는 진짜 가을이네요. 바람이 달라졌어요.” “그러게. 어느새 가을이네.” 대기중이던 마차에 오르기 쉽도록 돕던 얀이 꺼낸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전히 더울 세크리티아와 서둘러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카이리스. 생소하지만 낯설지 않은 시기의 가을이 됐다.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것 같아.” “아쉬우세요?” “응.”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은 얀이 동그란 눈을 했다. 지난 여름 내내 속앓이를 하는 듯 보였고 이제야 많이 떨쳐낸 것 같았는데 무엇이 아쉽다는 것일까. “네가 민트차에 얼음을 안 넣어 주잖아.” 엉뚱한 이유였지만 칼리안은 진심이었다. 바람이 달라진 것을 안 얀은 더 이상 얼음 가득한 민트차 마시는 일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어젯밤 유난히 늦게 잠에 들어 잘 열리지 않는 눈을 뜨기 위해 차가운 민트차를 가져다 달라 말했다가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그 뒤 건네진 따뜻한 차를 마법으로 몰래 차갑게 만들다 그걸 또 들켜서 한참동안 혼이 났다. 서러웠다. - 다각, 다각.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마차가 움직이는 동안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당장 오늘 아침에만 해도 그래. 아직 안 춥다는데 넌 도무지 내 말을 듣질 않으니.” 아마도 장래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가게 될 이가 자신의 시종에게 뒤끝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민트차 이야기나 하는 것이 재밌었던 얀이 결국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안 드릴 거예요.” 단호한 대답에 칼리안의 입에서 또 몇 마디 툴툴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런 아쉬움을 빼면 벌써 가을이 되는 것이 영 싫지만은 않았다. 얀의 생각대로 여름 내내 속을 앓던 것도 대부분 정리를 했다. 굳이 ‘대부분’이라 하는 것은, 칼리안도 사람인지라 제 속을 완전히 가늠하기는 어려웠던 까닭이다. 그래도 어찌됐건 이제 속이 많이 시원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래도 아쉬운 것보단 좋은 게 더 많은 것 같아.” “다행이네요. 좋은 것이 더 많아서요.” “맞아. 다행이야.” 다가오는 가을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더위 가득했던 여름의 기억을 잊으라는 듯 부는 바람의 냄새가 퍽 평온하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칼리안의 발을 묶으려는 것처럼 기를 쓰고 내리는 비를 볼 일이 조금 줄어들었다는 것. ······ 이었는데. “이런.” 이런은 무슨. 어느새 지그프리드 관에 도착한 마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칼리안을 기다렸다는 듯한 낮은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발을 묶던 것이 비단 비 뿐이 아니었음을 새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어서, 이 좋은 날 불어오는 가을 바람에 꽤 설레던 기분이 싹 가라앉았다. “감기, 앓았어야 했나.” 가능한 늦게 보고 싶던 놈과 지그프리드 관 앞에서 딱 마주치고 만 탓이다. - 오빠한테는 말 안했지만 사실은 플란츠 왕자님께서 말하기 연습하는 것을 많이 도와주셨어요. 바쁘셨을 텐데도 아무 말 없이 잘 들어주셔서 금방 익숙해졌어요. 플란츠 왕자님 그만큼 좋은 분이니까, 칼리안 왕자님도 플란츠 왕자님 그만 괴롭히세요. 아무리 그래도 형님이잖아요. 플란츠 왕자님 그만큼 좋은 분이니까······. 플란츠 왕자님 그만 괴롭히세요······. 데운 우유 마시고 긴 낮잠을 잤던 그 날 저녁에 찾아온 히나의 감사인사 끝에 붙어 나온 청천벽력같은 말이 다시 생각나버렸다. 이럴수가. 살아생전 우리 히나가 저 풀대가리 편을 드는 것을 듣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그런 날이 너무 빨리 찾아온 허탈함과 실망감, 슬픔, 애환이 한꺼번에 싹 몰려왔다. 게다가, 왜. 키리에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지금 당장 저 하늘에 푸르른 꽃을 한가득 피워낼 것 같은 우리 히나의 천사같은 목소리를 감히 형님 네 놈이 제일 먼저 들었다는 것이 이게 진짜 사실이냐고. 호수 위에 반짝이는 햇살같은 어여쁜 목소리로 호수 위를 부유하는 개구리풀같은 형님 네 놈의 이름을 내 이름보다 먼저 부르는 것을, 그것도 훨씬 더 많이 부르는 것을 듣고 내가 얼마나 시름시름 앓았는지 형님 네 놈이 아시기는 하느냐고. 내 마음의 상처가 깊디 깊어 형님 네 놈 보면 이해심이고 나발이고 다 잊어버릴 것 같았는데 그래도 우리 히나 말 잘 들으려고 내가 나이 세 살은 더 먹을 것 같은 기분으로 참으면서 그날부터 지금까지 형님 네 놈 얼굴도 안 보고 피한 것을 알기는 하시느냐고. 하긴. 저 풀대가리가 이런 섬세한 마음을 알 리가 없지. 뭉클, 하고 살기가 피어오르려는 것을 필사의 인내심으로 집어넣었다. 아무튼 오늘은 좋은 날이었고 이제 칼리안은 분명한 어른이니까. “······ 플란츠 형님을 뵙습니다.” “생각이 긴데.” “아닙니다.” 인사를 건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을 지적하는 말에 짧게 답한 칼리안이, 플란츠의 첫 말을 상기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감기 안걸리셔도 됩니다. 그것을 확인하려 안 들어가고 기다리셨던 겁니까.” “내 아우님께서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가 없으니.” “서운하네요. 누가 들으면 제가 항상 사고만 치고 다니는 줄로 오해하겠습니다.” “잘 짖네. 오늘도.” 이젠 짖는다고 해도 안 멈춘다. 안 멈추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보는 눈이 어디 있을지 모르는 자리였으니 자제는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도 않는다. 귓구멍은 고사하고 귓등 아니라 아예 콧구멍으로도 안 듣는 것 같다. 플란츠가 체념 섞인 짧은 한숨을 내쉬는 사이 칼리안의 멍멍거림이 이어졌다. “오늘 행사가 저를 위한 자리라고는 해도 저는 개 키우고 형님께서는 왕궁 밖에 나가 고양이 키우시겠다는 소박한 꿈에 한발자국 다가서는 그런 날인데 연약하고 귀하신 몸 아프기까지 하셔서야 되겠습니까. 잘 참석하셔서 자리 빛내주셔야죠. 꼭.” “큰일이군. 잘 차려입고도 사람 말은 잘 안하시니.” 금색 자수 장식이 된 새하얀 망토. 긴 길이의 짙은 청록색 재킷과 하얀 바지. 그 차림에 참 잘 어울릴 장신구까지, 레릭의 손이 아주 많이 간 듯한 차림새의 플란츠가 자신보다 더한 차림새를 한 칼리안을 보며 속마음 가득 담긴 대답을 했다. 칼리안이 씩 웃었다. “옷 입은 루시도 계속 야옹거리는데 저라고 다르겠습니까. 겉모습이 어떻든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시스파니안께서도 말씀하셨으니 무엇을 입었든지 한결같이 짖을 수밖에요.” 루시에 시스파니안까지 팔아가며 계속되는 동생놈의 멍멍거림에 더 대꾸할 생각 없다는 듯, 확인할 것에 대한 답을 들은 플란츠가 발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칼리안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혹시 그거, 귀한 겁니까.” 이렇게 묻는 칼리안의 손가락이 플란츠의 망토 여밈 장식을 가리켜보이고 있었다. 금색의 커다란 깃털 두 개와 꽤 큼지막한 에메랄드 조각이 달린 것. 한 마디로, 황금색 몸에 녹색 눈을 가진 브리센의 그리핀을 떠올리기 아주 좋을 그런 장식이다. 이왕이면 오늘 하고 왔으면 좋겠다는 짧은 메시지와 함께 에반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는 말을 해줄까 하던 플란츠는 심장 곱게 쓰라던 동생놈의 얘기가 생각나 그냥 고개만 가로젓고 말았다. 칼리안이 그 정도를 모를 리 없을 테니까.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아직까지도 욕심 없는 플란츠에게 귀한 것이 있을 리 없지 않겠나. 제일 귀하게 생각하는 루시는 칼리안의 고양이였으니 무엇을 더 말할까. “네. 마침 잘 됐네요.” 알 수 없는 질문을 하곤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인 칼리안이 팔을 내밀어 지그프리드 관을 가리켜 보였다. 먼저 들어가시라는 뜻이었으므로 플란츠는 더 이상의 말을 나누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생놈의 꿍꿍이가 무엇일지 떠올리지 않기 위해, 이른 새벽 우다다다 들어와서는 가슴팍 위에 훌쩍 뛰어올라 죽일듯이 잠을 깨우던 예쁜 루시를 열심히 생각하면서. 그렇게 플란츠가 들어가고 조금 뒤 모든 귀족과 두 왕자가 모두 들어간 것을 확인한 칼리안이 느릿한 발걸음으로 지그프리드 관 안에 들어섰다.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 드십니다.” 익숙한 소개. 그리고 익숙한 침묵. 약속한 것처럼 침묵이 내려앉았다. 가장 시끄러운 소문을 몰고 다니는 이가 있는 곳은 늘 이렇게나 조용하니 이 역시 참으로 모순된 일이 아닌가 싶던 칼리안의 손가락이 오늘도 작은 호선 하나를 그렸다. “반갑습니다.” 반갑기 그지없는 이 침묵을 이끌어내기 위해 오늘을 그렇게나 기다려왔으니 말이다. * * * 생각이 많았다. 칼리안이 안다면 비웃을 것이 뻔했지만 아무튼 생각이 많았다. 일단 지그프리드는 더 건드리지 않겠다 결정했다. 에반의 반대편에 마련된 귀족들의 상석에 앉아있는 저 도도한 소공작에게 르메인이 정말 작위를 주어버리면 골치아플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일단 귀족들을 좀 흔들어놔야겠어.’ 평민 출신 후궁, 그것도 이미 죽은 지 오래인 후궁을 왕비로 올리는 자리가 아닌가. ‘분명 브리센의 편이 아니라 하더라도 불만 있는 이가 많을 터······. 우선 잘 끌어들여 둔 새끼 늑대를 이번에 좀 써먹어야겠는데.’ 이런 생각을 한 에반이 플란츠에게 선물 하나를 보냈다. 플란츠와 브리센의 관계가 여전할 뿐 아니라 플란츠가 브리센의 앞에 설 왕자라는 사실, 그리고 브리센은 플란츠를 반드시 왕위에 올리겠노라는 뜻을 담은 장신구였다. - 새끼 늑대가 아니라 그럴싸한 날개까지 얻게 될 사자, 새끼 그리핀이 될 왕자로 다시 여겨질 수 있도록. 에반의 뜻을 알면서도 브리센의 요구를 어길 수 없는 플란츠는 약속대로 장식을 잘 하고 왔다. 귀족들이 플란츠와 에반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눈에 보이니 이보다 흡족할 일이 또 있을까. 아무 말 없이 저벅 저벅 걸어간 플란츠는 에반을 보지도 않고 자리로 들어섰다. ‘제 놈을 잘 써먹는 것에 대한 항의라도 하는건가.’ 하지만 어떠하랴. 귀족들은 이미 그따위 것에는 시선조차 두고 있지 않으니. 그런 플란츠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앉아 있는 란델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왕궁에 그레이 브리센으로 추정되는 이가 란델을 만나고 갔다는 말을 간단히 전해들었던 것이 조금 신경쓰였으나 저택에 돌아가 자세한 일을 파악해보면 될 터였다. 그런저런 생각의 결과로 일단은 흡족한 마음을 접지 않고 있을 때.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 드십니다.” 드디어 놈이 왔다. 자리에서 어기적 일어나 적당히 예를 보이던 에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플란츠가 들어올 때는 웅성거리던 귀족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놈이 또 무슨 짓을 했기에······?’ 짧은 시간 든 의문을 버리고 고개를 들어올린 에반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보석을 뿌렸는지 끊임없이 빛나는 선홍색의 망토. 살구색의 재킷과 하얀 바지. 그리고. 손목과 목에 가득한 진주색의 프릴. 욕심껏 멋을 부렸다 비웃지 못했다. 장식이 과하다 욕할 수도 없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에반마저도. “반갑습니다.” 새하얀 드레스 위에 덧입은 살구색의 겹드레스. 층층이 나풀거리던 진주색의 프릴 장식. 다른 색의 섞임 없이 오로지 붉은 계열의 온갖 보석으로 만들어졌던 아름다운 티아라. 그 티아라가 감싸고 있던 선연한 선홍빛의 머리카락. 칼리안은 일부러 피해왔으나 귀족들은 그렇지 않았던,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아르피아 궁에 걸려있던 초상화 속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을 이는 지금 이 곳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프레이야······!’ 하마터면 그 이름을 입 밖에 꺼낼 뻔했다. 제 어미와 꼭 닮은 얼굴을 한 채, 제 어미가 궁에 들었던 그 날에 그려진 초상화를 그대로 옮겨담은 듯한 의복을 입고 나타난 대담하기 짝이 없는 왕자 때문에. 플란츠의 장신구나 브리센의 위상 같은 것은 귀족들의 머릿속에서 이미 모두 잊혔으리라. 에반 역시 아연해졌으니. 무시하지 못할 발자국 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선홍빛의 반짝이는 망토는 프레이야의 머리카락 같기도. 혹은 오래전의 그 언젠가에 흘러내린 프레이야의 선혈 같기도 하다. 유난히 느린 걸음으로 발을 옮기며 그렇게. 자신이 누구의 아들이었는지를 다시 알리고 있었다. - 내 어머니를 내가 기억하는 한. 브리센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무언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천천히 걸어온 칼리안의 시선 역시 에반을 향하지 않았다. 그저 정혼자 드미레아의 앞을 지날 때에만 가벼운 눈인사를 보냈을 뿐. 그 후에는 자리에 앉아있던 란델과 아직 선 채였던 플란츠의 사이로 가서야 발을 멈췄다. 그렇게 둘의 사이에서 자연스레 몇 마디 말을 나누는가 싶던 그 때. ‘······!’ 사나우리만치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귀족들 중에서는 홀로 그것을 느낀 에반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 쩌엉! 곧바로 날이 잔뜩 선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침묵을 가르는 소리. 유리잔보다 강한 무언가가 조각나는 날카로운 소리. 정확히는 단단한 보석이 산산이 깨지는 소리. 그러니까 꼭, 에메랄드 같은 것.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린 것이 언뜻 보인다. 플란츠와 마주보고 선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에메랄드 위에 가져갔던 가느다란 손가락 끝을 거둔 칼리안이 그제야 에반을 봤다. 핏빛 눈을 둥글려 생긋, 예쁜 웃음을 짓더니 붉은 입을 열었다. “······ 이런.” - 툭. 조각난 에메랄드가, 황금빛 깃털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그것을 여미던 장식이 사라졌음에 스르륵 흘러내리려는 하얀 망토를 칼리안이 살짝 잡았다. 그 웃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살펴보려 하였는데 제가 그만 형님께 큰 결례를 끼쳤습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을 하고 계시기에. 몇 마디 말을 감추고 이야기한 칼리안이 자신의 재킷에 달려있던 장신구를 풀어냈다. 시종이 와서 도우려는 것을 막은 채로. 찰칵, 하고 브로치 채워지는 소리가 에반의 귓가를 울렸다. “급한대로 제 것이라도 하고 계십시오. 나중에 따로이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보는 눈을 의식한 듯 그것을 제지하지 않은 플란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귀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플란츠의 망토 위에 자리하게 된 새로운 브로치를 본 에반은 말을 잃었다. ‘고양이?’ 아무 의미 없을 검은색의 고양이. 칼리안 자신을 조금 닮았다는 것 외의 다른 뜻은 아무것도 없었겠으나 이제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거대한 의미를 가지게 될, 루비 눈을 가진 검은 색 고양이를 선물했다.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에반의 앞에서. “그래도 다행히······ 잘 어울리시네요. 형님.” 소름이, 돋는다. < 제41장.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5) > 붉은 눈의 검은 고양이. ‘전하 만나셨을 때 고양이 키우겠다 하셨다고 그러셨었죠.’ ‘네. 제가 그리 말했었지요. 빨간 눈 고양이 한 놈 잘 키워서 왕좌에 올리겠노라 하였습니다.’ ‘고양이라. 마음에 드네요. 지금까지는 별 의미 없는 것이었으니 이제 제가 좀 써야겠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 이유였다. 시스파니안을 연상시키지 않고 온전히 칼리안을 뜻할 상징이 필요할 것 같아서 고양이 모양 장신구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섀틴에게 부탁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을 플란츠에게 넘겨 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조금 더 유용한 사용처가 생겼다. 그래서 에메랄드를 부쉈다. 지금까지 부순 것 중에 가장 작은 것이었지만 의미로만 본다면 헤이시아 궁보다 더 큰 것을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번에도 아주 잘 부숴버렸다. 에반 브리센 후작 속을 뒤집어놓을 겸, 귀족들에게 프레이야를 상기시키는 것과 더불어 어차피 2왕자도 내 손 안에 있으니 브리센과 사이좋게 부서져 없어지기 싫으면 발 디딜 곳 신중하게 고르라는 경고 메시지도 보낼 겸. 그리고 무엇보다, 덜 익은 커피콩 같은 놈 심장에 묶어 둔 두 번째 계약 내용을 제대로 된 의미의 것으로 바꿔치기 할 겸 해서 벌인 일이었다. 자고로 큰 일을 치면 둘 이상의 이득은 취해야 하는 법이니까. - 맹세의 인이 서로 충돌하지 않을 틈. 앨런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맹세의 인이 서로 충돌하지 않으면서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게 될 만한 틈을 찾아보라고. ‘스승님. 맹세의 인은 한 번 맺으면 되돌릴 수 없는 것 맞습니까?’ ‘한 쪽이 죽기 전에는 그렇지요. 그래서 왕자님께서 에반 그 작자에게 칼 뽑을 날을 벼르시는 것을 제가 그냥 두고 보는 것 아닙니까.’ ‘그럼 한 번 맺고 나서 상황이 바뀌어도 맹세의 인은 유효하겠네요.’ ‘알려진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을 뿐이다. 시스파니안이 유일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모순. 그 모순을 성립시킬 별 것 아닌 방법 말이다. 모순된 상황에서 맹세의 인을 맺지 못한다면 맹세의 인을 맺은 뒤에 모순된 상황을 만들면 되는 일 아니겠나. “어울리는 듯 보인다니 다행이군.” 차라리 피망이 맛있다고 해라. 너 정말 이 말도 안 되는 고양이 브로치가 나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이제 보는 눈까지 미쳐 돌았냐, 그나저나 힘은 왜 이렇게 세냐, 키 안 큰다고 그렇게 협박을 해댄 것 무색하게 어쩐지 잘도 주워먹으면서 계속 비슷하게 크더라니 그동안 처먹은 고기 전부 다 오러로 바꾸고 살았던거냐, 하고 묻는 눈을 한 플란츠가 낮고 작은 목소리로 평범한 말을 했다. 물론 그 눈에 담긴 갖가지 욕지거리를 야무지게 알아먹은 것은 칼리안 뿐이었고 여전히 조용한 지그프리드 관에 있던 대부분의 귀족들은 플란츠의 고운 말만 들었다. 다만 꺼내놓은 말이나 눈에 담은 욕설과는 달리 플란츠는 그리 놀라지 않은 채였다. 칼리안이 장식을 두고 귀한 것인지를 묻는 순간 무엇을 할 지는 몰라도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해 뒀으니 말이다. 그리고 칼리안이 기어코 부쉈다. 그 뒤에 건네줬다. ‘붉은 눈의 검은 고양이.’ 이제 당장 오늘 저녁이면 그것은 곧 모두에게 있어 칼리안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특별함 없던 무언가가 하나의 상징이 되어 거대한 의미를 담은 표현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의외로 그렇게 많은 노력이 드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검은 나비, 혹은 그리핀처럼. 그리고 플란츠는 칼리안이 의도한 또 하나의 뜻을 제대로 알아봤다. 맹세의 인이 새겨진 서약서에는 나중에 브리센 후작저에 가서 루시 같은 고양이 좀 키우면 고양이 먹이나 사주겠다는 말처럼 써놓지 않았던가. ‘그 고양이가 그 고양이일 줄은 몰랐는데.’ 브리센의 힘으로 칼리안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우라는 의미인 줄, 그리고 칼리안은 그런 플란츠에게 열심히 부응하겠다는 소리인 줄 누가 알았겠나. 이래서 마법사들 말은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된다는 거다. 마법사들과 함부로 계약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 역시 이번에 아주 잘 배웠다. ‘어쩔 수 없나.’ 그렇다고 이미 맺은 계약을 물릴 수도 없으니. 별 수 있나, 약속은 지켜야지. ······ 그것이 ‘그 집안’의 뜻에 반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나중에 사과는 받도록 하지.” 플란츠의 한 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다른 이들에게야 멋대로 에메랄드를 부순 것에 대한 사과로 들리겠지만 그까짓 것은 아무 상관 없었다. 에반과는 그 의도가 다르니 화를 내지는 않겠으나 어쨌거나 자신을 큰 그림 그려 전시하는 용도의 캔버스로 쓴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그에 대한 사과를 받겠다는 뜻이었다. 칼리안도 보일듯 말듯한 웃음을 지었다. “네.” 아무튼 내 말은 더럽게 안 듣는구나 하는 눈을 한 채였다. 맹세의 인에 적힌 진짜 의도를 파악했을텐데도 별다른 감상이 없는 얼굴이었으니까. ‘플란츠 왕자님께서 왕자님을 도왔을 때, 그리하여 브리센 후작과의 계약에 반하는 행동이 되어 맹세의 인이 상충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가 불확실합니다. 두 힘이 상쇄될지, 충돌의 여파를 심장에 보낼지 알 수 없습니다.’ ‘네.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도 만일의 경우에 무조건 심장을 옭죄는 것보다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것이 낫겠죠. 본래 맺은 맹세의 인에 대한 완전한 안전장치는 아니겠지만요.’ ‘그리 생각하신다면 시도해 보시지요.’ 그렇게, 이 참에 귀족들 머릿속에 칼리안을 뜻하는 의미심장한 상징도 좀 새겨 줄 겸 완두콩 심장에 대한 대비책으로도 쓸 겸 일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또 저렇게 ‘유능하신 아우님께서 나 하나쯤 알아서 살려두시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는 것이 뻔히 보이도록 제 심장 꺼내놓은 표정을 하고 있으니 속이 터지겠나 안 터지겠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입은 웃고 눈은 안 웃는 얼굴이 된 칼리안이 조용히 대답했다. 방금 보여준 칼리안의 행동을 칼리안이 의도한 뜻으로 잘 이해하고 분노한 에반이나, 상황 파악은 잠시 미루고 둘의 대화를 듣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귀족들의 쏟아지는 눈길, 정혼자의 인성이 가득 담긴 정치질을 다시 한 번 목도한 드미레아의 표정, 동생 둘이 만들어놓고 있는 훈훈한 우애 다짐의 현장에는 아무 관심 없다는 듯한 란델에게는 시선을 두지 않은 채였다. * * * 침묵 속의 혼란. 지그프리드 관을 잠식한 숨막히는 침묵 속에 온갖 종류의 혼란이 한겨울 세뉴강 위에 부는 칼바람처럼 사방 팔방으로 날을 세워가며 휘몰아치는 사이. 오늘도 언제나와 같이 그저 평화롭기만 한 빌헬름 관에서는 이제 더 이상 다크서클을 몰아내려 애쓰지 않고 평화로이 받아들이기로 한 아르센이 그 어느 곳에든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한 히나와 마주앉아 블루베리청과 레몬을 우려낸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 블루베리랑 레몬, 피로 회복에, 좋대요. 남기지 말고, 다 드세요. 피곤한 것은, 저도, 치료 못해드리니까요. 히나가 폭신폭신한 파이 속에 몽실몽실한 슈크림을 가득 채운 간식을 맛있게 먹는 동안, 시거나 단 것 보다는 짠 것을 더 좋아하지만 히나의 말은 반드시 잘 들어야 하는 새파란 머리의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건네받은 것을 봤다. “언제 구경해볼까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보게 되었군.” - 연회장에는, 무기랑 마법 도구, 못 가지고 들어간다고, 하니까요. 그래도 오빠는, 자상한 왕자님, 기사라서, 검은, 가지고 들어갔대요. 칼리안의 호위로 함께 지그프리드 관에 들어간 키리에가 히나에게 팔찌를 잠시 맡겼고, 외부인이 많이 드는 날이니만큼 안전을 위해 히나가 아르센의 집무실에 찾아와 있던 참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한 아르센이 잠시 팔찌를 살폈다. 단순한 선물이라 할 수 없을 귀한 것이었다. 평생동안 매일같이 말을 주고 받아도 마력이 모자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값어치 높은 마석이었을지 마법사인 아르센조차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그런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히나나 키리에 모두 이미 충분히 고맙게 여기고 있을텐데 굳이 부담까지 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왕자님께서 호신용으로 선물하신 것이라 해도 기사 베른 경은 많이 좋아했을 것 같네.” 마석 살피기를 마친 아르센이 팔찌를 손목에 착용하자 히나가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보내왔다. - 오빠는 좋아하는 티 많이 안 냈어요. 칼리안 왕자님도 그냥 당연하게만 생각하셨고 많이 좋아하지는 않으셨어요.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히나의 목소리에 잠시 기분이 좋아져 저도 모르게 웃은 아르센이 입을 열어 대답했다. “의외로군. 나는 베른 경이 자네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엄청 좋아할 줄 알았는데.” - 너무 좋아하면 제가 신경쓸까봐 티 안냈을거예요. 말하는 걸 보고 너무 많이 좋아하면 그 동안 말을 못했던 걸 그만큼 안쓰러워했다는 거니까. 제가 그런걸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무덤덤하게 굴었을 거예요. 우리 오빠는 그런 사람이거든요. 그래도 분명히 저보다 더 많이 좋아했을거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칼리안 왕자님도요. 칼리안이 많이 좋아하지 않은 이유가 히나의 말 때문이었을지 아니면 키리에와 같은 이유였을지는 당장 4층에 안 쳐들어가려고 끙끙 앓았던 본인만 알 일이다. “아······ 미안하네. 내가 생각 짧은 말을 했어.” - 아니에요. 부군단장님처럼 생각하시는 게 당연하다는 것도 알고 오빠랑 칼리안 왕자님이 유난스럽다는 것도 잘 알아요. 부군단장님께서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의외로 히나는 대답을 길게 하는 편이었다. 아르센은 그런 히나가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생각하다가 혹시라도 그것이 히나에게 들릴까봐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방금 전 사과를 해놓고서는 또 같은 실수를 한 것이다. - 그리고 이게 있어서, 만약 세크리티아에 정말 가게 되더라도 조금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말을 잘 해야 할 지도 모르는데 하나하나 써서 보여주려면 서로 불편하니까요. “세크리티아? 왕자님께서 아마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겠다 하셨던 것 같은데 아니던가?” - 혹시 모르니까요. 그래도 오빠랑 부군단장님이랑, 괜찮다면 세이렌 협회장님도 가주신다 했으니 걱정은 안하려고요. “그래. 걱정하지 않는다면 다행이네.” 그렇게 대답하던 아르센이 순간 좀 맹한 얼굴을 했다. 방금 이야기에서 뭔가 중요한 이름이 나왔고 중요한 것을 하나 까먹은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게 뭔지 영 떠오르질 않아서였다. “······ 가게 되든 아니든 어쨌거나 유용한 물건이 생겼으니 좋은 일이지. 그래도 우려한 일로 쓰일 상황은 없어야 하니 빌헬름 관이나 체르밀 궁 밖에 나갈 때에는 절대 혼자 다니지 말게.” - 알아요. 오빠도 그렇고 부군단장님까지 귀찮게 해드리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혼자 다니진 않을거예요. 루시가 체르밀 궁에 갓 왔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사라진 루시를 찾으려 혼자 장미 정원에 들어갔다가 위험할 뻔 했었던 일. 그 때 가까이서 처음 본 플란츠의 뒷모습을 잠시 떠올리다 웃은 히나가 말을 이었다. - 그런데 유용하고 좋지만 사실 저는 조금 죄송했어요. 하피의 알 화석에서 꺼낸 마석이라 하셨는데, 하피는 이제 없잖아요. 아주 귀할텐데 이렇게 저한테 주셔서······. “그렇게 생각할 것 없네. 왕자님이나 마나실 군단장님은 자네한테 필요한 것이라면 당장 나가서 해룡이라도 잡아 올 분들이니. 그리고 하피의 알이라면 귀하기는 해도······ 귀하기는······ 해도······ 아!” 알! 맞다. 알. 알을 까먹고 있었다! 아르센의 얼굴이 푸르딩딩하게 바뀌었다. -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아니. 아픈 것이 아니네.” 애써 침착하게 웃어보이던 아르센이 설명을 해주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지금 아픈게 몸이 아니라 목숨줄이라는 사실을 어린 히나에게 어떻게 잘 설명해 줄 방법이 없어서 그냥 때려치고 입을 도로 다물었다가 잠깐 뒤에 질문 하나를 했다. “베른 경. 혹시 자네 왕궁 밖에 괜찮은 식재료 상점이 어디 있는지 아나? 자네 호위 끝나면 나가서 계란을 좀 사야겠는데.” - 계란이요? 저 요리도 안 해봤고 밖을 돌아다닐 일도 적어서, 아마 베로니카는 알고 있을 거예요. 시장 구경하는 것도 그렇고 요리하는 것도 좋아한댔어요. 히나는 갑자기 그게 또 무슨 마법사같은 소리냐는 눈이 되면서도 일단 대답을 했고, 아르센은 곧 죽을 날 잡은 사람의 눈으로 힘없이 웃어보였다. 계란도 사 주고 술도 사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물론 그 전에 위대하신 한낮의 사신께서 약속 잊어버린 꼬맹이를 튀겨버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좋은 계란 파는 곳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 좀 전해주게.” 진짜 좋은 계란. 카이리스 왕궁에 있는 것 다음으로 맛 좋은 그런 좋은 계란으로. * * * 식을 시작하기도 전에 칼리안이 뿌린 것이 너무 많은 탓인지 몰라도, 르메인이 입장한 뒤 곧바로 진행된 추숭식은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르메인의 왕관 옆에 프레이야를 위한 왕비의 관을 올려두고 프레이야에게 왕비의 칭호를 내리겠노라는 선언을 했다. 그리고 몇 가지의 의례를 치른 뒤, 사망한 국왕 일가의 보물이 보관된 곳에 한 번도 착용하지 않은 새 왕비의 관을 가져다 두는 것으로 식을 마쳤다. 그 후 모두 다시 지그프리드 관에 돌아온 뒤, 오늘을 기념하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더 이상 의무적으로 자리할 이유가 없을 란델과 검은 고양이 브로치가 영 짜증스러울 완두콩은 연회 시작 후 오래지 않아 각자 돌아갔다. - 왕비 프레이야. 그를 기억하는 자리. 그리고 그의 아들 칼리안을 위한 자리. 계속 이어지는 귀족들의 인사와 형식적인 대화 나누기에 치인 칼리안은 연회가 끝나도록 쉬이 발을 옮길 수가 없었다. 덕분에 멀리서 앨런과 대화를 주고 받는 르메인, 그리고 종일 칼리안만 신경썼을 앨런에게는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국왕에게는 먼저 다가가지 못하지만 왕자는 아니었으니 이 참에 칼리안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으려는 이들이 의외로 많았던 탓이다. “왕자님.” “아, 키리에.” 결국 그렇게 연회가 끝나고 르메인이 먼저 다가와 고생 많았다는 인사와 함께 자리를 벗어난 뒤. 하나 둘 연회장 밖으로 나가는 귀족들을 바라보는 칼리안에게 키리에가 다가왔다. “어때.” “다들 말하기를 조심스러워 하는 분위기입니다. 다만 몇몇 인물들이 있었습니다만.” 미안하게도 오늘 필요한 것은 키리에의 검보다는 귀였다. 검이든 귀든 칼리안을 위해 쓰는 것이라면 뭐든 좋을 키리에는 몇 안되는 귀족들의 이름을 조용히 전했다. 브리센의 편으로 생각되는 이들의 명단이었다. 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시선을 돌렸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주시해 온 이가 비로소 찾아온 탓이다. “나에게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후작.” 키리에를 뒤로 물린 칼리안이 에반을 향해 물었다. 지난번처럼 하대를 할까 하다가 일단 거기까지는 참았다. 그래도 아직은 후작이니까. “생각해보니 축하 인사를 드리지 않아 찾아뵈었습니다.” “어찌 인사가 따르겠습니까. 마음이 없으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발뺌하는 에반을 잠시 보던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소득 없을 말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피곤하기도 하고.” “다른 이는 몰라도 제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찌합니까. 검의 길을 걷는 분께서 말입니다.” “아.” 칼리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대를 보는 것이 나는 늘 피곤하여.” 에반이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오늘 하루 있던 일을 떠올리는 듯, 플란츠와 비슷하다 여기기 여전히 미안한 빛의 눈동자가 가만히 움직였다. “계속 그렇게 위 아래 구분 없이 지내지는 마십시오. 3왕자님.” 에반이 칼리안과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하기사.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영광이니 계속 누리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리 되면 끝이 곱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칼리안이 손바닥을 펴 살짝 뒤로 돌렸다. 에반이 뭘 우려하든 말든 지금 칼리안은 혹시라도 키리에가 덤벼들까, 그것이 우려됐던 까닭이다. “곱기만 한 끝이 과연 있기는 하겠습니까. 그 고운 실리케도 내 어머니와 같은 것에 스러졌는데 검 잘 쓰는 브리센의 우두머리라 해서 무엇인들 다를까.” 유난히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독. 르메인이 실리케에게 그것을 내린 이유를 이제는 안다. 칼리안이 한 발자국 에반에게 다가섰다. 프레이야의 선혈같은 망토가 오랜 기억을 되살려주기를 바라면서. 오늘 하루 프레이야의 아들임을 온 몸으로 증명해 낸 칼리안이 말했다. “그나저나. 나는 내가 오늘 경고를 한 줄 알았는데. 그대의 것은 그조차 못 알아듣는 머리였나. 아무래도 내 형님께서 그대의 머리를 닮지는 않은 듯 하니 그것만은 세렌티께 감사드릴 일이군.” 어느새 말을 내린 칼리안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깊은 생각 하지 말고, 몸 사리지 말고, 본래 네가 하던대로 그렇게 앞 뒤 안 가리고 나서서 부디. 네 손으로 직접 만들어 낼 멋진 덫에 걸려들어 보라는 의미를 담아 말을 맺었다.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 잊지 말라고. 그렇게 경고를 했지. 너에게, 내가.” 한동안 칼리안을 쏘아보듯 하던 에반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간신히 만들어 낸 웃음을 입에 건 에반이 대답했다. “······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듣지 못하겠습니까.”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에반의 숨막히는 살기가 오로지 칼리안만을 향해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오싹한 느낌에 반가운 웃음을 보였을 때, 칼리안을 완전히 짓이기려는 듯한 기세의 에반이 입을 열었다. “조금도 잊지 않겠으니 기다리십시오. 곧 다시 뵙게 될 겁니다.” 말을 뱉은 에반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 인사하는 것은 또 멋대로 생략해버린 채였다. 그런 에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에반.” 데블란의 치밀함을 안고, 르메인의 혈통을 받고, 앨런의 현명함을 배운, 그리고 프레이야의 원을 절대 잊지 않은 단 한 명. 이 순간만은 그들 모두의 아들인 칼리안의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그래.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 제42장. 그 심장(1) > 가을 하늘은 유난히 맑다. 여름 바람에서는 일렁거리는 물 냄새가 났는데 가을 바람에서는 낙엽 냄새가 났다. 새로 피어나 자라고 물을 머금어 살아내고 끝내 생을 다해 떨어진 그 많은 기억을 담아서 조곤조곤 바스락거리는 냄새가 났다. 그리하여도 제가 보듬던 나무는 겨울을 지내고 다가오는 다음의 한 해를 또 잘 보내리라는 것을 알아서 가볍게 나풀거리는 냄새가 났다. 아직 단풍도 채 들지 않았는데 호숫가에 부는 바람에서 바스락거리고 나풀거리는 낙엽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칼리안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비슷해서 그런가보다.” 옛 칼리안도, 베른도, 꼭 낙엽같아서. 그리 많은 기억을 안고 맞이한 겨울 같은 여름을 지낸 칼리안이 다시 또 생을 이어가리라는 것을 아는 낙엽같아서. “바람 냄새는 좋고, 나는 괜찮아.” 그래서 칼리안은 누구에게 하는 것일지 모를 기분 좋은 말을 잠시 건넸다. 여러 명의 모습으로 하루를 보냈던 예전의 어느 날에는 사실 괜찮지 않았었는데 여러 명의 아들로 하루를 보낸 오늘은 정말 괜찮았으니까. 어쩐지 혼잣말이 조금 늘어날 것 같지만 뭐 어떻겠는가. 누구든 어떻게든 들어줄텐데. 그리고 또 한 사람. 언제든 무엇이든 들어 줄 사람이 있지 않나. 그런 사람으로부터 답이 오기를 기다리며 낙엽 냄새 많이 담은 맑은 가을 바람을 잠시 마주하던 칼리안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 칼리안 왕자······? 호숫가에 부는 바람이 유난히 맑다. 드미레아를 기다리던 그 날에 비할 바 없을 만큼 맑다. 그 맑은 바람에 비로소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비로소. - 네. 맞습니다. 비로소 연락을 했다. 그리하여도 괜찮을 날이어서 연락을 했다. - 혹여 무슨 일이 있습니까. 칼리안의 연락이 오기만을 바라왔으면서도 혹시 무슨 일이 있다는 말일까봐 차라리 아무 연락 없이 지내기를 바라왔을 목소리에도 맑은 바람 냄새가 담겨 있었다. 그렇게나 기다려왔을 연락에 기뻐하기보다는 걱정을 먼저 한다. 그러니 이 얼마나 체이스다운 반응인지, 하는 생각에 선선한 웃음을 짓던 칼리안이 대답했다. - 아무 일 없습니다. 그냥······ 네. 아무 이유가 없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칼리안은 거추장스러운만큼 무겁고 조심스러웠던 예복을 입은 그대로 호숫가 바위 위에 앉은 채였다. 어렵사리 만든 옷을 이렇게 다루는 것을 섀틴이 안다면 조금쯤 서운해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무렴 어떻겠나. 무엇을 하여도 그저 좋을 가을이니. - 내가 축하를 해 주어도 좋을까요. 칼리안 왕자. - 알고 계셨습니까. - 날지 못하게 된 새들이 많아졌다 해도 나는 여전히 유능합니다. 춥지 않다고 그렇게나 말을 하였는데도 얀이 한사코 건네주고 간 따뜻한 담요를 만지작거리던 칼리안의 웃음이 조금 더 선선해졌다. - 네. 축하해주세요. 받고 싶네요. - 축하합니다. 진심으로. 체이스의 생일에도 차마 건네지 못했던 축하의 말을 도리어 이렇게 듣게 되었다. 겪어보지 않아 낯설었을 속박에서 벗어나 다시 왕비의 아들이 된 것에 대해서. - 감사합니다. 축하해주셔서. - 다행입니다. 이제야 제 자리로 돌아온 것 같이 보여서. 짧은 몇 마디 말 뿐이었는데. 여름을 다 보내고 가을을 맞은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신기한만큼 여전히 감사한 마음이 든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추고 대답을 전했다. - 네. 덕분에요. - 나는 칼리안 왕자를 길에서 빗겨나가게 한 일 밖에 생각이 안 나니 내 덕분은 아닐 것 같고. 누구 덕분일까. -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 거짓말 같은데. - 저 거짓말 못합니다.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체이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그래도 못 믿을 말이라서. 내 덕이라 생각하지 않더라도 미안하게 여기지는 않겠습니다. 고집과 타협의 적당한 사이에 서기로 한 체이스가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이 마음을 잡은 것은 자신의 덕이 아님을 알지만 돌연 칼리안의 앞에 나타나 근본부터 흔들리게 만든 것에 대해서, 세렌티의 장난질을 숨기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리고 참 많은 과거의 잘못들에 대해서 전부 다, 미안하게 여기지는 않겠노라고. 칼리안이 가장 원하고 있을 그런 말을 했다. - 거짓말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 나도 만만치 않은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런 말을 합니까. - 하긴 그렇네요. - 거짓말 아니니 걱정 말아요. 칼리안 왕자. 지금 둘의 머릿속에 온통 가득한 데블란의 일은 미뤄둔 채로, 아무 이유 없이 연락을 했으니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가벼운 농담들만 주고 받았다. 그렇게 체이스에게도 알려주었다. 이제 괜찮으니 체이스도 좀 더 괜찮아졌으면 좋겠다고. - 알려주어 고맙습니다. 정말로. 체이스는 그것을 이해했다. - 네. 칼리안은 세크리티아에도 곧 가을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은 짧은 대답을 전했다. 하늘은 높았고, 바람은 선선했다. 실로 기꺼운 가을이었다. * * * - 톡, 톡, 톡. 욕조 모서리에 올려 둔 손가락 끝에 어느새 버릇이 든다. 생을 이어나가려면 여전히 생각은 많아야 했으니 짧은 순간에도 고민이 이어진다. ‘새벽에 폴룬 남작이 왕비님의 일을 축하드린다며 선물을 보냈다고 합니다.’ ‘준비 마치면 확인해볼게.’ ‘네. 그리고 밤 사이에 본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로부터요.’ 조금 전, 칼리안이 이제 막 눈을 뜬 새벽 무렵. 욕조에 물이 채워지는 동안 메를린을 만나고 온 얀, 아니 시로이안이 이렇게 말하며 서신 하나를 건넸었다. - 저택 내 의심요인이 있거나 사라진 인원 없음. 영내에 머무르던 새들은 이미 떠난 것으로 확인됨. 왕자에게 전해지는 서신의 모든 내용은 상급 시종이 먼저 확인을 하기 때문에 슬레이만이 알려온 내용도 칼리안보다 앞서서 보게 된 얀은 조금 어두워진 얼굴이었다. ‘혹시 로젤리타 기간 중에 다른 문제가 있었나요?’ 오래 전부터 칼리안이 자신을 습격했던 무리를 추적중이라는 것 정도는 얀도 알고 있었다. 내용을 읽고 태워 없앤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도 많고 정도 많은 새끼코끼리를 잘 안심시켜주는 것은 늘 칼리안의 몫이었으니까. ‘아니. 아무 문제 없었대. 걱정하지 마.’ ‘혹시 왕자님과 제 본가에 관련된 문제가 생기면 저한테도 꼭 알려주세요. 도와드릴게요.’ ‘그래, 꼭 얘기해줄게. 고마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지그프리드의 입장에서는 다행한 일이었고 칼리안에게는 조금 아쉬울 일이었지만 말이다. - 톡, 톡, 톡. 얀을 내보내고 좋은 온도의 물 속에 온 몸을 누인 채로 생각을 이어 나갔다. 데블란이 칼리안의 정체를 가늠할 수 있을 정보를 전한 사람, 칼리안의 검술을 보았을 사람. 그런 사람이 지그프리드 저택의 기사 혹은 사용인 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했었다. 그리고 슬레이만은 그런 이들이 없었다 알려왔다. “설렁설렁 조사하지는 않았을테니 정말 의심될 것 없다는 말인데.” 아무리 슬레이만이라 해도 그 지그프리드를 이끌어나가는 사람이다.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숨어들어 무엇을 꾸미든 그냥 내버려 둘 위인일지언정 세작이 있는 것도 파악 못할 사람은 아니었다. 에반과는 달랐으니까. “그럼 어디에 있을까.”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계속 생각을 하려 애를 썼다. 그리하여 또 얼만큼을 보냈는지, ‘위잉’ 하고 온도 조절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 밖이 완연히 밝아졌음이 느껴진다. 커튼 사이로 한 줄기 내려오는 햇살을 가만히 보던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또 조급해하고 있었네.” 아직은 시간이 있지 않나. 데블란은 칼리안이 굳이 매를 통해 답을 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자신의 말에 칼리안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터였다. 하루하루 생명이 줄어듦에 애가 타겠지만 그 때문에 서두르다 일을 그르칠 사람은 아니다. 궁지에 몰린 칼리안이 생각하고 답을 정하기까지. 답이 적힌 서신을 다리에 맨 새가 자신을 찾아가기까지 조금쯤은 기다려줄 테니, 아직은 시간이 있다. “순서대로. 일단은 에반 먼저.” 에반의 문제를 해결하고 엘프를 만나면 될 일이다. 본래에는 제온을 경계하느라 에반을 두고 볼까 하였으나 데블란이 끼어들었다. 그러니 에반부터 해결하고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래. 아르센을 믿어야지. 나 하나쯤 못 지키겠느냐 장담했으니 나도 이제는 믿고 맡겨둬야지. 텐실의 왕세자는, 뭐. 에반 치워주면 완두콩이 알아서 하겠지. 그 쪽도 이제는 믿어봐야지. * * * 아니. 도대체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고. 칼리안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깨가 흔들림과 동시에 곁에 서 있던 메를린과 다른 시녀들의 고개가 얀 쪽으로 획 돌아갔다. ‘혹시 화 나신 겁니까?’ 이런 뜻이 가득 담긴 눈들을 한 채였다. 때문에 일단 얀은 칼리안을 그냥 둔 채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조금 질책하는 표정으로 모두를 한 번씩 쳐다봤다. ‘우리 꽃 같은 왕자님이 얼마나 착하고 여리신 분인데 다들 왜 자꾸 화 나셨냐고 묻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기분이 좋으신 건지 화가 나신 건지 왜 아직도 알아보지를 못하는 겁니까? 저렇게 티가 나는데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네, 정말. 그 좋은 귀로 칼리안의 숨소리가 달라졌는지 아닌지를 듣고 칼리안의 기분을 파악하는 방법을 터득한 키리에를 제외하고 나면 앨런조차 제대로 못 알아보는 저 웃음의 진위를 그냥 알아내는 네가 되게 특이하다는 생각은 왜 못하시는지. 주변 사람이 전부 다 이상한 것 같으면 그건 그냥 네가 이상하다는 소리라는 걸 왜 모르시는지. 이런 말이 하고 싶지만 건네지 못할 메를린이, 아무튼 기분 나빠 웃는 것은 아니라 하니 일단 안심한 얼굴을 했다. 칼리안이 화가 났다 해서 아랫사람에게 못되게 군 적도 없었건만 괜스레 눈치가 보였던 까닭이다. “아니, 왜······.” 칼리안은 얼굴을 덮었던 짧은 순간 주변에서 무언의 말이 엄청 많이 오고 갔음을 모르는 채로 작게 입을 열었다. 웃음이 터진 것을 간신히 갈무리한 칼리안의 나머지 한 쪽 팔에 안긴 작은 생명이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냐옹!” 하고. 멜피르의 선물은 항상 수수께끼 같았다. 언제나 칼리안의 것은 없었고 대체로 의미가 있었다. 이번에도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선물을 보내온 폴룬 상단의 상단주 멜피르를 떠올린 칼리안이, 멜피르가 무슨 생각으로 보낸 선물했는지를 깨닫고 고맙게 잘 받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품 속의 작은 생명이 한 번 더 소리를 냈다. “미안. 놀래켜서 미안해.” 짙은 잿빛의 털. 금색에 가까운 호박색의 눈. 분명, 루시가 아니었다. * * * 아침부터 그렇게 웃고도 지치지를 않는다. 말을 채 잇지도 못할 것처럼 웃어대던 칼리안이 드디어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짖었다. “형님 이제 무슨 색 옷 입으십니까.” 하면서. 애옹, 냐옹, 므에옹, 니아옹, 하고 무릎 위에서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마리를 실로 복잡한 얼굴로 조용히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셋 중 한 마리 쯤은 사람 말 했으면 좋겠는데.” 소란스러움 가득한 4층에서 제일 시끄럽게 굴고 있는 까맣고 큰 한 마리가 씩 웃었다. 싫다는 소리다. 그 한 마리만 사라지면 평온함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당장 내쫓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낸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이 사람 말을 따라했다. “루시 털 묻어서 옷을 전부 밝게 입으시는데, 재색 털까지 묻으면 어떻게 하실지 너무 궁금해서요. 다 크면 루시보다 털이 길어질거라고 하던데요.” 조금 전, 식사 자리에 찾아와서는 뜬금 없이 짙은 잿빛의 고양이 한 마리를 내려놓은 칼리안은 테이블 앞에 앉기가 무섭게 웃기 시작했다. 짜증나는 점은 그 부분이다. 왜 웃는지 이해를 영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루시가 특별히 형님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거기까지.” 칼리안이 내려놓기가 무섭게 잿빛의 고양이가 도도도도 달려가더니 플란츠의 다리에 몸을 부비며 인사를 했으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고양이가 형님을 따르는 모양입니다.” 닥치란다고 닥칠 입이면 세렌티의 영광을 얻은 앨런의 입이 아니고, 그만하란다고 그만할 입이면 그런 앨런의 아들이 가진 입이겠나. 당연히 안 그만두지. “그래서, 뭔데.” “고양이요.” “무슨 고양이냐고 묻는 거잖아.” “새끼 고양이요.” 하, 하고 인내심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칼리안은 허브 가득한 녹색의 버터가 올려진 소고기 스테이크를 한 입 느긋하게 씹어 삼켰다. 그러더니 허브 버터 없이 검은 소금만 뿌려진 플란츠의 스테이크를 우아한 손짓으로 가리켜 보였다. “식사부터 하십시오. 설명은 나중에 드릴 테니.” 결국 체념한 플란츠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고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 후. 오리 다리살과 호박을 함께 구운 뒤 눈송이같은 하얀 치즈를 올린 것을 마지막으로 플란츠가 식사를 마친 것을 보았으면서도, 칼리안은 여전히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딸기가 가득 들어간 우유 푸딩과 ‘아주 따뜻한’ 오렌지 차가 놓여졌을 즈음, 놀랍게도 플란츠의 입이 먼저 열렸다. 다만 플란츠는 아직 설명할 생각 없어보이는 고양이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언제 할건데.” 사과. 빗자루 취급은 참겠는데 캔버스 취급은 별로라서. “드렸습니다, 이미.”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하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의 눈이 무릎 위의 잿빛 고양이에 가 닿았다. 폴룬 상단의 상단주이기도 하지만 발칸과 관련 깊은 마법학원을 운영하고 있기도 한 멜피르는, 2왕자와 3왕자가 서로 등을 돌린 상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칼리안을 만나기 위해 체르밀 궁도 자주 찾아왔던 터라 루시가 누구를 더 따르는지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멜피르는 추숭식에서의 일을 전해듣자마자 칼리안에게 고양이를 보냈다. 칼리안이 굳이 입을 열어 사과하지 않아도 되도록 말이다. 캔버스 취급한 건 미안한데 도무지 욕심 없는 그 태도에는 좀 짜증이 나서 멜피르의 뜻을 잘 따르기로 한 칼리안은, 미안하다 말하는 대신 사과의 의미를 담은 선물만 플란츠에게 건넸다. “고양이 털 떼는 마법보다 조금 먼저 배우셨으면 하는 것이 있어서요.” 그리고 멜피르는 의도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를 사과 대신 전했다. “그렇다고 루시 차별하지는 마시고요. 루시는 제 고양이지만 히나에게 선물한 고양이라서 형님 못 드립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한 말을 한 칼리안이 향 좋은 오렌지 차를 한 입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살아 있고, 숨 쉬고, 심장이 뛰고. 작고, 약합니다. 언제 아플지도 모르고, 또. 언젠가는 형님보다 먼저 생을 다할테고.” 사람 일 모른다지만 완두콩 네 놈이 또 심장 팔고 다니지만 않으면 어지간해선 네 놈이 고양이보단 오래 살겠지. “궁금해하고, 욕심내고, 같이 도는 것 말고. 지키는 것도 배워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지키는 것만 하며 살았던 것이 무조건 옳았다 할 수는 없겠지만 또 무조건 헛되었다 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조차도 생을 이어가는 한 방법임을 한번 배워보았으면 하는 마음에. 가느다란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 꾸벅꾸벅 졸던 루시가 눈을 떴다. 그리고는 어르고 달래듯 새끼 고양이를 보듬보듬 안았다. 그 어린 루시도 저보다 약한 것을 지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플란츠가 대답했다. “······ 그래.” 플란츠는 사과를 받았다. 플란츠의 고양이가 작은 울음소리를 냈다. 무엇을 하여도 살아가기에 그저 좋을 가을이었다. < 제42장. 그 심장(2) > 칼리안은 늘 그렇게 생각했다. 일을 하나 벌이면 그에 대한 이득은 둘 이상이어야 한다고. 쏟아붓는 정신력과 낭비되는 체력이 있는데 그 정도는 되어야 셈이 맞지 않겠나. 고양이 브로치 하나로도 얻은 것이 그리 많은데 고양이 한 마리라면 말해 무엇할까. 입 밖에 꺼내두기 마뜩찮은 사과의 말도 대신하고, 지키며 사는 법도 배우게 하고. 거기에 더해 하나 더. “내 형님께서 워낙 똑똑하신지라······.” 에메랄드 깨뜨린 일, 추숭식 날 오전에 그레이가 란델을 찾아온 일. 더 거슬러 올라가 칼리안이 드미레아에게 티아라와 비슷한 장신구를 씌운 일, 에반이 레넌을 되꺼낸 일, 숲에서 칼리안이 앨런과 대련했던 일 등등. 똑똑한 플란츠가 혹시 그 모든 것들 중 단 하나라도 생각을 할까봐. 살짝 고개를 움직여 플란츠 무릎 위의 새끼 고양이를 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덕분에 생각까지 참 많으신 형님께 부족한 동생이 어떻게 도움을 드려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여러모로 잘 됐다 싶네요.” “사람 말이 부족하시기는 하지.” 사람 말이 부족한 놈과 그냥 아예 말이 부족한 놈 중에 어느 쪽이 더 문제가 큰지 재어보던 칼리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유일하게 자신있던 것마저 부족하다 하시니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 말씀을 안하면 되겠는데.” 생글생글. 어여쁜 웃음이 하얀 얼굴에 활짝 피었다. “싫은데요. 저도.” 짤막하게 대꾸한 칼리안이 손가락을 올려 플란츠의 심장을 가리켜 보이며 계속 말했다. 칼리안 일생일대 가장 힘든 고민이 바로 루시 이름짓기 아니었던가. 그러다 결국 삶은 완두콩이 이름을 지었지만 아무튼. “심장 쇠약하신 형님께서는 다른 고민 마시고 고양이 이름이나 생각해주세요.” 물론 텐실 왕세자의 조사 자료를 쥐어주며 중간에 멈추었던 텐실에 대한 확인을 계속 해보라 말했지만, 그리고 지금 발칸의 일을 엄청나게 늘려 두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생각을 할까봐. 이미 내 놓은 심장 제 손으로 또 쥐어 뜯을까봐. 그러지 않도록. “고양이 이름도 정하시고, 앞으로 무슨 색 옷을 입어야 하는지도 고민하시고, 당장 급해진 고양이 털 떼는 마법 배우시려면 마력 느끼는 것도 열심히 연습하시고. 나중에 나가서 고양이 잘 키우시려면 검술도 열심히 수련하시고. 그 정도만 하셔도 좋겠네요. 지금은.” 플란츠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해결하려 저러는지 알 것 같아서 그에 대해 더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얌전히 모셔다 두고 또 한 발 앞으로 나가려는 심산임을 알았음에도 이번에는 싫다고 하지 못했다. 대신, 그래도 고양이 이름을 지은 뒤에 선물해주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나마 남아있는 세심함을 박박 긁어모아 히나한테 쏟아붓는 동생 놈이라면 이번에야말로 나비라고 지었을 것이 분명하지 않나. ······ 사과라거나. “알았어.” 그러니 지금은 시키는대로 조용히 고양이 이름이나 고민해야지. “말 잘들어주시니 좋네요. 편하고.” “가.” “네.” 고양이 두 마리 때문에 꼼짝 못하는 플란츠를 그렇게 놔둔 채로, 오늘도 바쁘게 고민하고 움직여야 할 칼리안이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리고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예를 보인 뒤 제 방으로 돌아갔다. 언제나 빠르고 편리한 테라스 창문 통해서. 금세 비어버린 맞은편 자리를 멀뚱히 쳐다보며 되돌아온 고요함을 만끽하던 플란츠는, 다시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푸딩을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었다. - 지키는 것도 배워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유가 가득 들어간 부드러운 푸딩에서 딸기 향이 났다. 단 냄새를 맡았는지 새끼 고양이가 테이블 위로 머리를 내밀어보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다. 조그만 잿빛 머리가 쏙 올라오더니, 잠시 뒤에는 새하얀 솜방망이같은 루시 앞발이 쑥 올라와서는 잿빛 머리를 꾹 눌러 내렸다. “애오옹!” 그건 먹는 거 아니야, 라고 가르쳐주듯이. 그러더니 답답해하는 새끼 고양이를 다시 끌어안고 재우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플란츠의 무릎 위에서. “무거운데.” 그런 모습이 참 평화롭고 무겁다. 어여쁘면서 무겁고 귀여우면서 무겁다. 숨 쉬고 심장이 뛰는 작은 놈들이 둘이나 무릎 위에 올라있으니 그 무게가 검 만큼이나 무겁다. 그리 무거운 것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선선한 바람결 타고 드는 이런 생각에 피식 웃던 플란츠가,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짧은 소리를 냈다. “······ 아.” 망할 동생놈. 고양이 털 안 떼주고 그냥 갔다. * * * 계란 한 알. 진짜 한 알. “어제 사드리려고 했는데 연회가 생각보다 늦게 끝났습니다. 계란 파는 곳이 없더라고요.” 딱 한 알. “그래서 눈 뜨자마자 사 왔습니다, 협회장님.” “발칸 마법사들은 아침부터 집 앞에 찾아와서 일단 어디든 끌고가는 것이 취미인가봐.” 언젠가 앨런에게 비슷하게 끌려와서 교장 자리 하나 얻게 되었던 에우리아가 이번에는 계란 하나를 얻게 되었다. 에우리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보랏빛 눈으로 하얀 계란을 뚫어져라 보다가 술잔에 가득 따라진 히몰리카를 한 입에 털어 마셨다. 문을 일찍 연 것인지 아직 안 닫은 것인지 모를 어느 술집에 들어와 아르센과 마주앉은 채였다. 잠이 덜 깬 덕분에 아르센 튀기는 것은 잊어버리고 일단 따라온 것이 후회스러워서, 보랏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에우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백작님께서 내가 계란 사오랬다고 그러셨어?” “군단장님께서 제가 계란 안 드린 것을 아십니까?” “어. 내가 말했어.” “왜요?” “그냥. 말하면 안돼?” “아닙니다. 하셔도 됩니다.” 어쨌거나 앨런이 아르센에게 말을 전한 것은 아닌가보다. 하긴, 말을 전했으면 이 아침에 저 꼬맹이랑 계란을 앞에 두고 히몰리카나 쭉쭉 들이킬 일은 없었을 테지. 맞은 편에서 탄산수 홀짝이던 아르센이 계란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아무튼 저는 사드렸습니다.” “그래. 사왔네.” “네, 계란.” “어. 계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새하얀 계란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에우리아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너 진짜 또라이구나.” 진짜 계란을 사올 줄이야. 그것도 딱 한 알을. 이름보다 익숙한 것 같은 또라이 소리는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별 대수롭지도 않은 말이라는 듯 고개만 끄덕인 꼬맹이 또라이가 출근 직전에 안주도 없이 히몰리카를 들이키고 있는 대장 또라이를 보며 말했다. “안주 하십시오. 익혀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냥 둬.” “날로 드시게요? 저희 이제 날 것 함부로 먹으면 안 되는 나이인데요. 제가 얼른 익혀달라고······.” “둬. 계란 대신 너 굽기 전에.” “네. 두겠습니다.” “병아리 만들거니까.” “네?” “그냥 두라고.” “네. 두겠습니다.” 겁대가리 안잃어버리고 얌전히 대답한 아르센이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멀찍이에 멍하게 앉아 있던 점원을 찾아가 무언가 말을 전했다. 얼마 뒤, 아르센 대신 노릇노릇 잘 튀겨진 닭 한 마리와 아르센 대신 노릇노릇 잘 구워진 감자 세 알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맛 좋은 향을 내는 음식들을 흐뭇하게 보던 아르센이 말했다. “드십시오. 오늘은 안 얼리겠습니다.” 그리고는 탄산수 들어있는 유리잔을 톡 치며 싱긋 웃었다. 그 꼬락서니가 너무 웃겼던 에우리아는 끅끅거리며 웃었다. 곧 에우리아는 감자 한 알과 이 아침에 절대 안 넘어갈 듯한 튀긴 닭 한 조각을 나름대로 맛있게 먹어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히몰리카 한 병도 싹 비운 채로. “더 안드십니까?” “아침 먹었어.” “아침 드시고 또 드신 겁니까?” “또 먹지, 그럼. 시켜주는데 안 먹나.” 대충 대답한 에우리아가 주섬주섬 품을 뒤졌다. 계산을 하려는 모양새였으므로 아르센이 얼른 말했다. “제가 사 드리는 겁니다, 협회장님. 계란 잊어버린 것 죄송해서요.” “됐어. 급여도 없는 놈이 사주는 거 먹으면 찝찝해.” “저 급여는 없어도 돈은 많습니다. 왕자님께 용돈 받거든요.” “자랑이다.” 그 말에 아르센이 아주 뿌듯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키는대로 잘 부수고 자존심 세웠더니 급여 없어지고 용돈이 늘었습니다.” “······ 너 진짜 카이리스 마법사의 가장 우수한 표본인 거 같다.” “제가요?” “어. 또라이가 아니라 상또라이였어.” “아.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자랑이다.” 성의라고는 눈을 씻고 쳐다봐도 찾아볼 수 없을 말로 대답한 에우리아는, 돈 많다는 아르센을 싹 무시한 채 점원을 불러다 계산을 했다. “용돈이 얼마든 내 앞에서 돈 자랑 하지 마.” 칼리안에게 용돈을 얼마나 받는지는 몰라도 직업이 세 개라 급여도 세 번을 받는 자신만 할까.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하얀 계란을 들어 자신의 공간과 연결된 작은 가방 한 구석에 잘 넣은 에우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 밖으로 나갔다. 얼른 따라 나온 아르센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내려다보는 에우리아를 향해 물었다. “많이 늦으셨습니까?” “어. 바로 가야돼. 왜?” “숲에서 돌아온 뒤로 처음 뵙는데 아쉬워서요.” “아쉽기는.” 그게 아쉬울 놈이 이 시간에 사람을 끌고 오나 싶던 에우리아가 아르센을 잠깐 쳐다봤다. 그러자 아르센이 숲에서 다쳤던 어깨를 가리켜보이며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런데 어깨 괜찮은지는 안 물어보십니까?” “다 나은 거 보이는데 뭘 물어봐, 입 아프게.” “숲에서 돌아온 뒤로 처음 만나는데 걱정하셨는지 궁금해서요.” 에우리아가 아주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곧 대답했다. “했어.” 아르센이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괜찮습니다, 협회장님.” “그래.” 그렇게 대답하고 나니 더 해야 할 말이 생각나질 않는다. 때문에 잠자코 선 채로 아르센의 파란 머리를 한참 쳐다보던 에우리아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 볼 땐 꽃 사와. 보라색 꽃 싫어하니까 다른 색으로.” 다들 보라색 사오더라고. 식상하게. 중얼거리며 덧붙인 에우리아는 대답 못하고 서 있는 아르센을 내버려 둔 채로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진짜 늦었어. 간다.” 그리고는 간단한 인사만 한 뒤 휙 가버렸다. 파란색 마법사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보라색 마법사를 태운 마차가 안 보일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얌전히 서 있던 아르센이 천천히 입을 열어 혼잣말을 했다. “······ 다행이군.” 아. 하마터면 식상할 뻔 했네. * * * 먹는 건 다 좋아한다. 잘 먹어야 쑥쑥 크니까 다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풀 처먹는 파릇파릇한 놈이 풀만 처먹어서 싫은게 아니라 풀만 깨작거려서 싫은거지 나도 풀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냥 고기를 더 좋아할 뿐. 그리고 생굴도 좋아하고 신귤도 좋아한다. 생각 많을 땐 단 음료가 좋고 평소에는 차가운 민트차가 좋다. 그리고 아플 때는 바나나가 최고다. 딸기는 뭐, 그리 즐기지는 않지만 싫은 것은 아니다. 커피도 싫어한다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 싫다기보다는 꺼려진다 해야 맞을 것이다. 비슷한데 미묘한 차이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먹는 건 다 좋아한다. 아 맞다. 나 피망 싫어하지. 정정한다. 피망 빼고 먹는 건 다 좋아한다. 그런데. “자몽······.” 자몽 싫다. 지난 번에 자몽 넣은 소르베를 입에 넣고 인상을 찌푸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즐기지 않는 것을 골라 일부러 내어왔음을 알아서 이제는 그냥 싫어하기로 했다. “싫어합니다.” 사라짐을 알아달라는 것처럼 온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 빛이 찻잔 속에 담겨 있었다. 그 맑은 빛의 차를 내려다보던 칼리안의 말에, 눈을 내리 뜬 란델이 조용한 손길로 찻잔을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참고 마시거라. 걸러서야 되겠느냐.” “제가 참는 것을 잘 못해서요.” 예쁘게 웃으며 대답한 칼리안이 란델의 시종인 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느새 웃음기가 싹 사라진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차 가져와.” 란델은 하나부터 열까지 말을 안 듣기로 작정한 막냇동생이 자신의 시종을 마음대로 부리는 행동까지 제지하지는 않았다. 잠시 그런 란델의 반응을 살피던 덴이 고개를 숙여보인 뒤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덴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쩌겠나. 옥수수수염 같은 저 놈이 꿍꿍이도 안 보여주면서 틈만 나면 내리누르려고 기를 쓰는데. “얌전하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칼리안의 반응을 지켜보던 란델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얌전하다던, 이라고 해주셔야죠. 란델 형님.” “한 번을 안 지는구나.” “지는 것도 싫어해서요. 자몽만큼.” 란델은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뒤 다시 돌아온 덴이 홍차가 든 잔을 내려놓고 자몽 차를 거두어 나갈 때까지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달칵,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 란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주 보니 좋구나.” “그리 좋으시면 종종 내려오십시오. 고양이 많습니다.” “직접 발을 옮길 만큼은 아니니 염려하지는 말거라.” “네.” 두 층 내려가는 귀찮음을 감수할 만큼 좋지는 않은 정도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칼리안이 담백하게 대답하며 홍차를 한 입 마셨다. “또 무엇을 확인하러 온 것이더냐.” “머리 식히러 오라 하셨으면서. 제가 그냥 왔으리라는 생각은 안하십니까.” “그런 생각은 안 드는구나.” 입에 남은 홍차 향을 잠시 음미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과 무슨 말씀 나누셨습니까.” “너를 온전히 믿지는 말라 하였다.” “란델 형님 심장에도 도움이 될 일이라 말씀을 드렸었는데, 그리 방해를 하셨습니까.” “상관없지 않겠느냐. 어차피 너를 두려워하는 자인듯 보였으니.” 이렇게 말한 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칼리안을 잠시 보던 란델이 질문 하나를 꺼냈다. “둘째에게 브리센의 칼을 정말 쥐여 줄 심산이더냐.” 칼리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브리센의 칼을 든 둘째가 너를 겨누면 어찌하려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란델 형님께 제 등을 보여드리겠다 했던 날에요.” 플란츠의 배신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다고. 란델과 손을 잡기로 했던 날에도 물어보았던 질문을 또 입에 올리는 것에 대해 대답한 칼리안이 말을 더했다. “거기까지 앞서서 걱정을 하기에는 제가 좀 바쁩니다.” “그렇다면.” 답을 들은 란델이 톡, 하고 테이블을 한 번 두드렸다. 자신의 질문에 대한 칼리안의 반응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붉은 눈을 아주 깊숙이 바라보며 질문을 꺼냈다. “내가 너를 겨누면 어찌하겠느냐.” “탑에 가시게 될 겁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대답한 칼리안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주저함 없는 점이 마음에 드는구나.” “주저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정말로 겨눌 분이시니.” “그래. 맞는 말이지.” 붉은 자몽이 든 찻잔이 들어올려졌다. 정 반대의 색을 지닌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 도로 내려놓은 란델이 다시 말했다. “허나 조금 서운하구나. 형제 사이에.” “불편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리 생각하느냐.” “새삼스럽고.” 지난 번의 란델이 했던 대답을 그대로 돌려준 칼리안을 보던 란델의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걸렸다. “하긴 그렇겠구나. 너 역시.” “네. 다만······ 정말로 겨누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형제 사이에.” “그래. 노력해보마.” “감사합니다.” 숨긴 것 없는 짧은 대화를 마친 칼리안이 찻잔을 들어올리며 다시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나저나, 전하께서 승마 공연을 그렇게나 좋아하시는데 올해에는 가질 못하셨네요. 그래서 이제라도 한 번 나가보는 것이 어떠하신지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달갑지 않은 이에 대한 말이었으나 란델은 무표정했다. 홍차 한 모금을 다시 입에 머금었다 삼킨 칼리안의 손 끝에서 달칵, 하고 찻잔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향긋하나 끝이 쓴 홍차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게 된다면 브리센 후작이 함께 하겠다며 나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행이 될지, 불청객이 될지는 저도 모르겠지만요.” 검을 두고 올지, 검을 들고 올지 그것도 모르겠지만. 국왕 일가가 왕궁 밖을 나선다 하면 어떤 식으로든 함께 오지 않겠나. “브리센 후작이 그 정도로 천지 구분 못할 자는 아니지 않느냐.” “구분을 하든, 하지 못하든 상관 있겠습니까.” 살짝 웃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브리센 변경백은 이런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칼리안의 눈을 란델이 말 없이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하는 듯 보여서, 칼리안은 그 눈빛을 거부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에반이 칼리안을 습격할 생각이든 아니든 상관 있겠나. 어차피 증거자료는 그레이가 만들겠다 했으니 칼리안은 적당한 조건만 만들어주면 될 일이다. 물론 칼리안이 나서서 그레이를 만날 수는 없어서 다시 란델을 찾아온 길이었다. 그레이에게, 조만간 국왕 일가가 왕궁 밖에 나설 계획임을 전해달라고. 오래지 않아 란델이 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하루 이틀 뒤에는 그 역시 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 “다행입니다.” 하루 이틀 내로 그레이를 만나 칼리안의 의도를 알려주겠다는 말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다 웃었다. 까다 만 양파같은 첫째 형님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싹싹하게 잘 알아듣는 것이 꽤 기특해서, 그리고 그리핀 우두머리 잡을 작은 덫을 하나 놓은 것이 설레여서 웃음이 났다. < 제42장. 그 심장(3) > - 카아앙! 날붙이의 둔탁하고 묵직한 소리가 훈련장을 울렸다. 후려치는 힘을 이기지 못한 검이 날아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땅에 닿은 뒤 몇 번을 튀어오르며 구르던 검이 멈추는 것을 보던 이를 향해 누군가 말을 걸었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후 훈련을 마치고 지금까지.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의 대련인지 세어보기를 포기한 지그프리드의 수석 기사단장 로난시테가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말을 건 목소리가 갑작스럽긴 했지만 진작부터 그의 접근을 알고 있던 탓에 놀라지는 않은 채였다. “훈련을 시키시는 건지 스스로를 몰아붙이시는 건지 모르겠군.” 로난시테에게 말을 건넸던 지그프리드의 기사 유란이 다시 앞을 쳐다봤다. 지친 기색 가득한 드미레아가 다음 기사를 불러다 앞에 세우는 것이 보였다. 유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슬슬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저 분을 누가 말리겠나. 공자님이라도 오시면 모를까.” 곧 다시 한 번 날과 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훈련장을 메웠다. 조만간 왕궁으로 가게 될 것이라던 기사들이 훈련장 가장자리에 마련된 별도의 장소에서 드미레아와 다른 기사의 공방을 숨죽이고 지켜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그리고 여러 차례 이어지고 있는 대련이었다. 지루해하는 기색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지만 기사들은 물론 드미레아도 이제는 좀 쉬어야 하는 시간이기에 걱정이 되었다. “어쩔 수 없군.” 로난시테가 조용히 팔을 움직였다. 조금 긴 듯한 암갈색의 머리를 다시 단단히 묶어 올린 그녀가 간단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그것을 본 유란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공작님 말릴 사람 없다더니 직접 가시려는 겁니까.” 로난시테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말리질 못하겠으니 쓰러뜨려 놔야지. 별 수 있겠나.” “단장님도 이제 소공작님 잘 못이기시지 않습니까.” “사정을 좀 봐 드린 것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지 말게.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군.” “그렇군요. 자칫 나도 오해를 할 뻔 했는데.” 지금 들려온 마지막 말은 유란이나 로난시테가 한 것이 아니었다. “······!” 둘의 대화에 끼어든 낯선 목소리에, 유란의 등장에도 놀라지 않던 로난시테의 눈이 벌어졌다. 지그프리드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수석 기사단장 로난시테. 그리고 지금은 기사단의 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기사 유란. 그 둘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곁으로 다가와 태연히 말을 건넬 수 있는 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반갑습니다. 아니지.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깊이 눌러 쓴 검은 후드 아래, 붉은 입술이 짙은 웃음을 그려냈다. * * * 드미레아의 서재는 훌륭했다. 책 읽기를 좋아하던 옛 칼리안이나 체이스 덕에 서적에 대한 지식이 상당한 칼리안이 보기에도 수준 높은 책들이 가득했다. “감사합니다.” 얀 만큼이나 정중한 태도의 집사장이 두 잔의 차를 내려놓고 나간 뒤, 드미레아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칼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고마워?” “저택 수비에 문제가 있음을 몸소 알려주셨으니까요.” 아아, 하고 이해했다는 듯한 소리를 낸 칼리안이 대답했다. “나 그래도 대문까지는 레이븐 타고 당당하게 왔어. 그러니까 바깥이랑 대문 지키는 사람들은 혼내지 마.” 그러더니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지금쯤 알아서 훈련장을 달리고 있을 로난시테와 유란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조금 전, 왕궁에서 또 도망을 친 칼리안은 지그프리드의 저택으로 유유자적 발을 옮겼다. 왕자의 외출을 숨기겠다는 것인지 알리겠다는 것인지, 검은 후드 하나를 뒤집어 쓴 차림으로 레이븐을 타고서 말이다. 그 후에는 저택 외부와 대문을 수비하는 기사들 앞에서 후드를 벗어 보이며 아무 충돌 없이 안까지 들어와서는, 수비 기사가 3왕자의 방문 소식을 알리러 가기도 전에 휘리릭 사라져 버리더니 로난시테와 유란의 앞에 나타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드미레아와 마주 앉아 있었다. “소드마스터가 되면 침입하기로 마음 먹은 곳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누빌 수 있는지도 잘 배웠습니다.” “내가 숨어 다니는 걸 잘 하는거야. 소드마스터라서가 아니라 원래 잘했어. 그리고, 고맙다면서 툴툴거리지 말고 그냥 내가 쳐들어와서 휘젓고 다닌 게 마음에 안 든다고 해.” “이미 잘 알아들으셨는데 굳이 제가 말씀을 드릴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 그러네. 하고 칼리안이 또 웃었다. 상식적인 일이 아닌 것은 맞다. 일국의 왕자가 정혼자 혼자 머무는 공작가에, 그것도 한밤중에 몰래 발을 들인 셈이니 말이다. 긴히 전할 말이 있다면 얀을 통해 서신을 보내도 되는 것을 굳이 이런 방법으로 왔으니 그 의도가 의심 될 수 밖에. “왕자님 혼삿길을 아예 막고 싶으시다면 다른 방법을 쓰십시오. 제 길까지 막히겠습니다.” “그래서 온 것 아니야. 그런데 나랑 결혼 안 할거야?” 또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 야밤에 찾아와서 왜 멍멍이 오라버니를 따라하느냐는 눈으로 칼리안을 보던 드미레아가 대답했다. “왕위 놓고 오시면 수락하겠습니다.” “그건 어려운데. 내가 누구 고양이 노릇을 좀 해야 해서.” “아쉽네요.” “그래도 파혼은 나중에 해줘.” “하시는 것 보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 우리 정혼자님 말 잘 들어야겠네. 내가.” 비밀 숨긴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겠다더니. 그 날의 일은 아예 없던 것처럼, 의문을 가진 것조차 없다는 듯 구는 드미레아를 보며 씩 웃은 칼리안이 찻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녹빛의 차에서 은은한 난꽃 향이 올라온다. “아. 혹시, 이거.” 익숙한 향을 알아 본 칼리안이 놀란 눈을 했다. - 자상한 왕자님께서, 주셨던, 차. 친구가, 마음에 들어 해서, 친구 줬어요. 죄송해요. 죄송할 것이 있겠나. 우리 히나가 친구에게 주겠다는데, 녹차 아니라 아예 그냥 차 밭을 통째로 사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을. “네. 베른 경에게 선물 받은 차입니다.” “친구 줬다더니······.” 곧 드미레아는 ‘우리 히나 친구 생겼다더니 그게 너였구나’ 하고 감격에 차 있는 칼리안의 얼굴에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지내온 세월에 대한 연륜이 풀풀 묻어나는 저 꼴은 대체 뭐란 말인가.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부려가며 귀족들 앞에서 행패같은 쇼를 할 때는 언제고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지은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내가 비밀 하나를 숨기고 있는데, 그게 좀 샜어.” 그리고 칼리안은 이렇게, 조금 나아진 드미레아 기분에 찬물을 확 끼얹는 소리를 했다. 드미레아는 비밀 숨긴 것을 ‘모르는’ 사람이지 않나. 그런데 그 비밀에 대한 일로 찾아온 터라 비밀 숨긴 것 서로 모르고 넘기자는 말이 무색하게 그 일을 입에 올리게 됐다. 결국 덮어두기로 한 것을 상기하고 날카롭게 변한 눈이 된 드미레아를 본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너랑 약속하기 훨씬 전에 샌 거니까 나 잡으려고 들지는 말고.” “······ 네. 계속 말씀하십시오.” “응. 아무튼 내 비밀이 세크리티아와도 연관이 있어서 이번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래서 지그프리드 공에게 부탁해서 알아봤거든. 그런데 지그프리드령에는 수상한 사람이 없었다 하더라고.” 이렇게 이어지는 칼리안의 얘기를 듣는 동안 드미레아는 나름대로 칼리안의 말을 정리했다. 칼리안의 비밀은 세크리티아와 연관이 있다. 그 비밀이 노출되어 곤란한 처지다. 아마도 로젤리타 기간 중에 비밀이 샌 것 같다. 그리고. 슬레이만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알고 계셨군요.” “응. 지그프리드령에 갔을 때 바로 들켰어.” 걱정 마 이젠 안 들킬게. 하면서 헤실헤실 웃는 얼굴에 두통이 밀려온다. 그나저나. 이, 아버지가. 다 알면서 나한테는. 그 이상의 험한 말을 하지는 못할 드미레아가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리안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근데 내 로젤리타에 동행한 사람이 지그프리드령 말고 여기에도 한 명 있다는 게 생각나서. 나름대로 좀 가깝게 지냈거든. 물론 지그프리드 공이 같이 조사를 했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 한 번 만나보려고 왔어.” 유란. 유란의 정체가 의심되어 와봤다는 소리였다. 유란은 슬레이만이 결혼을 했을 무렵 지그프리드의 기사가 되었고, 얀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충성스러움으로 남매의 곁을 지킨 기사였다. 그러니 드미레아에게 있어서는 어찌보면 슬레이만보다 더 가까운 가족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이를 의심하고 있다는 말에 불쾌함을 드러내는 대신, 드미레아는 담담하게 물었다. “무엇을 확인해보면 되겠습니까.” 유란이 드미레아에게 있어 어떤 이인지를 칼리안이 감안해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니야. 아까 만나서 내가 이미 살펴봤어. 괜찮은 것 같네.” “잠시 보셨을 뿐인데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런 게 있어.” 우리 도련님 데려다 고생시키는 것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했더니 이제는 우리 소공작님까지 꼬여낸 거냐. 너 이 새끼 잘 만났다, 이 참에 나랑 다시 한 번만 붙어보자. 이런 눈이 되어서는 부글부글거리는 투기를 숨기지도 못하던 유란을 생각한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절대 못 숨기는 거.” 칼리안에 대한 그 가시 돋힌 감정들이 누구를 위하고 걱정하는 마음에서 기인했을지 잘 안다. 그 근원이 될 이의 손을 잠시 내려다보던 칼리안의 눈이 드미레아를 향했다. 언제나 활활 타오르는 듯한 기분이 드는 붉은 빛으로 그 누구보다 차분한 청회색 눈을 마주했다. “드미레아.” “네.” “나는 역사상 가장 빠른 나이에 검의 길에 올랐어.” “압니다.” “본래에도.” 드미레아의 눈이 한 번 더 가라앉았다. “지금처럼 어리지는 않았지만 본래에도 나는, 가장 빨랐어. 그렇게 되어야 했고 그렇게 되길 바랐어. 그래서 가장 빠르게 그 길에 올랐어.” 칼리안의 눈이 이제 다시 드미레아의 상처 투성이 손에 가 닿았다. “당연하겠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포기한 것도 많았어. 아주, 많았어.” 작은 바닷가에서 체이스가 베른에게 부탁했던 말들. 언제든지 와서 쉬라 하던 그 말들을 기억하면서,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드미레아가 칼리안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손을 보다가 다시 칼리안의 눈을 봤다. 칼리안도 드미레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검을 드는 것이 가문을 위해서일지, 얀을 위해서일지, 나를 넘어서고 싶다는 이유일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 길이 우리같은 사람들한테 얼마나 중요한지는 나도 잘 알아. 그러니 다 덮어두고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하라는 그런 소리는 더 안할게. 다만 나는 그냥 조금 궁금해, 드미레아.” “······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포기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 알지만 정말 괜찮아서 그렇게 검을 드는지. 걱정이라기보다는 그냥. 궁금해.” 지금의 드미레아와 그때의 베른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많이 달랐는지. 그 때의 베른이 얼마나 처절하게 검을 잡았는지, 억지로 놓을 수 밖에 없던 것들을 얼마나 많이 포기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무리해가며 검의 길에 오를 수밖에 없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너에게는 그만한 절박함이 없지 않느냐는 말로 들릴까봐서. 드미레아는 베른이 아니었으니 드미레아 역시 무언가를 충분히 절박하게 여기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아서 하지 않았다. “나는 네가 나를 꼭 넘어서기를 바라고 있어. 분명 그렇게 되리라 믿고 있어. 그런 날이 온다면 너만큼 나도 기쁠 거야. 진심이야.” 그 날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런데 드미레아. 나는 네가 뭘 포기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달리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 내가 그렇게 살아온 것을 후회했던 적은 없었지만 그렇게 사는 게 괜찮았던 적도 없었거든. 안 괜찮았어, 하나도.” 녹빛의 차에서 난꽃의 향이 났다. - 나는, 너까지 나처럼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히나에게서 이 차를 받아왔던 그날. 칼리안이 무슨 말을 하며 자신을 히나에게 보냈는지 잠시 떠올린 드미레아가 웃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태평하게 잘도 말한다 싶었는데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물론 너와 나는 다르니까, 넌 아닐 수 있어. 걱정 안해도 된다 하면 더 이상 이런 말은 하지 않을게. 다만 네가 포기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을지. 그건 알고 싶어.” 한동안 말 없이 찻잔을 내려다보던 드미레아가 말했다. “섣부르게 대답하면 안 될 것 같네요. 말이 무겁습니다.” “무거울 것 까지야. 그냥 내 오지랖이지.” “말씀드렸지만, 사실 저는 왕자님께서 재능을 가지신 줄 알았습니다. 그 정도 재능이야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다 생각했고 그래서 조급해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숨기셨던 것을 알고 나니 오라버니의 일과 별개로 또 조금 화가 났습니다. 대가 없이 얻은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사람에게 더더욱 지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 무리를 했습니다.” 안그래도 오늘 훈련장에서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그랬던 것 같아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전에도 가장 빨랐다 말씀을 해주시니······ 조금 재수없지만.” 왕자를 앞에 둔 소공작의 언행에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나쁘지는 않네요. 재능도 있었고 노력도 하셨던 분이라 하니 화는 그만 내겠습니다.” “다행이네.” “제가 워낙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수 있겠지만. 말씀하신 것 잊지는 않겠습니다.” “그래. 드미레아.” “감사합니다.” 마치 대련을 마친 것 같은 기분이 된 드미레아가 이렇게 말하며 살짝 웃었다. 별다른 말 없이 히나의 손을 거쳐간 소중한 차를 끝까지 다 마신 칼리안이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인 할 것도 확인했고 할 말도 했으니 나는 이만 가 볼게. 차 잘 마셨어.” 칼리안의 말에, 잠시 진지한 대화를 나누느라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드미레아가 눈을 빛냈다. “그것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뭐가?” “왕자님 이 곳에 오신 이유 말입니다. 또 있는 것 같아서요.” “그렇게 보여?” “네. 굳이 제 아랫사람을 확인하려 직접 이 곳까지 오실 수 있는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유란을 보러 오겠다는 핑계로 왔고 온 김에 생각난 이야기를 드미레아에게 전한 것이니 ‘할 말’은 애초에 이 곳에 오려던 이유가 아니었을 터였다. 게다가 이미 슬레이만이 한 번 확인을 했다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나겠다며 칼리안이 직접 이 곳까지 올 이유라 하기에, 유란은 너무 작은 파이 조각이었다. “그럼 내 멋진 정혼자 보고 싶어 왔다고 하면 되겠네.” “이상한 소리 마시고요. 또 무슨 꿍꿍이십니까.” 또 안 통하네, 하고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뭐, 아무튼 나는 사냥도 좋아하지만 낚시도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말을 꺼낸 칼리안은 손을 올려 검은 후드를 다시 눌러쓰며 말을 이었다. “적당히 머리쓰는 물고기는 누가 봐도 미끼인 것이 분명한 게 앞에 있으면 절대 안 물거든. 근데 먹을 게 앞에 있으니 다른 데로 가지도 못하고 눈치만 봐. 그렇게 애타게 미끼 눈치를 보다가 그 옆에 제대로 된 것 같은 먹이가 보이면.” 쥐 한 마리를 공들여 잡으려는 고양이의 붉은 눈이 검은 천 아래로 숨어들었다. “두 번 생각 안 하고, 콱. 물어.” 그것도 미끼인 줄을 모르고. 신이 나서 떠드는 칼리안을 한참 보던 드미레아가 조용히 대꾸했다. “저는 2왕자님 아닙니다.” 못알아 들었다는 소리다. “브리센 후작을 사냥인지 낚시인지로 잡으실 생각인 건 압니다만. 설명해주신 것과 이 밤중에 혼자 오신 것이 무슨 관련인지 모르겠습니다.” “차차 이해하게 될 테니까 우선은 구경만 해.” “왕자님.” “응?” “저에게는 무리하지 말라 하셨지 않습니까. 지난 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브리센 후작은 위험한 자입니다. 지략 없이 무력만으로 브리센을 지켜왔을 만큼 강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를 직접 사냥하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무리를 하십니까.” “아까 말했지만.” 얼굴을 온전히 다 가린 칼리안의 입술에 예쁜 웃음이 한 번 더 맺혔다. “누구 고양이 노릇을 해야 하거든. 내가. 야옹야옹, 하고.” 심란하다. 오라버니는 저 사람이 저런 위인인 걸 알고는 있을까. 연회장에서 플란츠에게 넘어간 검은 고양이를 떠올리던 드미레아가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갈 준비를 마친 칼리안이 인사를 건넸다. “또 올게, 정혼자님. 잘 자.” 알쏭달쏭한 인사를 마친 칼리안이 가벼운 걸음으로 나갔다. 드미레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얀이 걱정하며 달려오는 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리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일주일 쯤 지난 뒤, 그 깊은 한숨이 짜증 가득한 분노의 숨소리로 바뀌리라는 것은 모르는 채였다. ‘멋진 내 정혼자 보고 싶은’ 칼리안이 이삼일에 한 번씩 불쑥불쑥 찾아오리라는 것 역시. 그날까지만 해도 몰랐다. < 제42장. 그 심장(4) > 아르센이 에우리아에게 새하얀 계란을 선물했다. 그것을 받아 온 에우리아는 계란 부화시키는 방법을 알음알음 물어가며 배우기 시작했다.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잿빛의 고양이를 선물했다. 빌헬름 관에 루시와 새끼 고양이를 다 데려와 무릎 위에 올려 둔 플란츠는 티내지 못할 무언가를 잊기 위해 새로운 고양이 이름을 열심히 고민하며 일을 했다. 히나가 플란츠에게 새끼 고양이 목줄을 선물했다. 목줄에 새겨진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좋아하는 플란츠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라는 글씨를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르메인에게도 뭔가를 선물했다. ‘요즘 신경 쓰실 일도 많았을 테니, 좋아하시는 승마 공연을 보시면서 잠시나마 여유를 되찾아 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하루종일 키리에와 수련을 하고 난 뒤 조금 늦은 저녁에 르메인을 찾아가서는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을 걱정한 칼리안의 마음이 담긴 선물같은 말이 고맙고 기특해서, 르메인은 크게 고민할 것도 없이 그리하겠노라 대답을 했다. 칼리안을 만난 뒤 업무 보고를 하러 온 앨런에게 르메인이 이런 얘기를 전하며 기분 좋아하고 있을 무렵. 방금 전까지 기특했던 바로 그 놈이 도망을 갔다. 그런 소식을 듣고도 이제 놀라지 않는 자신이 더 놀랍다 생각한 르메인이 이마를 감싸쥐었다. ‘기특한 일을 한 번 하시고 머리 아픈 일을 한 번 하시다니. 확실히 왕자님은 무엇 하나 기울어지게 행동하시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과연 어찌나 공평한 처신인지.’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 아니라 백작이 나를 놀리겠다는 심산 같은데.’ ‘그리 궁금하시면 말씀을 드리지요.’ ‘아니. 알고 싶지 않네.’ 마법사의 감상을 한 귀로 흘리며, 외출 금지를 그냥 풀어버릴까 하다가 일단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규칙을 어기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마저 없으면 왕궁을 그냥 침대 있는 곳 정도로만 생각하고 세상 구경하는 새끼 까치마냥 나돌아다닐 것 같아서였다. 그러니 외출 금지령은 그냥 두고. 이번에 돌아오면 정말로 따끔하게 혼을 내야지. ······ 저 마법사 없을 때. * * * 이렇게, 많은 이들이 훈훈한 선물을 주고 받은 다음 날. 발칸 부군단장들의 집무실에 들어온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정혼자의 집에 잘 다녀온 뒤 일단은 잠을 자고, 아침이 되고 나서 르메인보다 얀에게 더 많이 혼난 뒤였다. 앞으로 얼마 동안은 드미레아를 만나러 계속 왕궁을 빠져나갈 계획이라는 말을 해주면 더 혼날 것 같아서 그 말은 안 했다. 열심히 혼나고 열심히 4층 올라가서 혼나서 서러운 만큼 밥을 먹고 키리에를 불러다가 다시 수련을 하고. 그 후 이렇게 빌헬름 관에 온 참이었다. ‘헤르츠 부군단장은 플란츠 왕자님과 함께 마나실 군단장을 만나러 갔습니다. 돌아가 계시면 체르밀 궁으로 찾아가도록 제가 말을 전하겠습니다, 칼리안 왕자님.’ ‘나보다 더 바쁜 사람 부를 수는 없고. 잠깐 들어가 기다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중간에 마주친 니들렌과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빈 집무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무언가를 봤다. 아니, ‘맡았다’. “······ 어쩐지 아침 내내 푹 절여져 있더라니.” 또 식초에 절인 양배추같은 꼬락서니를 하고 깨작깨작거리는 것을 보다 못해서 ‘그거 다 먹으면 검술 하나 알려줄게’ 해가며 밥을 먹여놨건만. 놈이 왜 그랬는지 이유를 찾았다. 미네시아스. 주먹만한 종을 거꾸로 세워 둔 것처럼 생긴 보라색의 꽃 한 송이가 아르센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것을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향기 좋네.” 언제 뒀는지는 몰라도 집무실 전체에 아주 좋은 꽃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설마 아르센이 자신의 자리에 꽃을 둘 줄이야. 곧 웃음기를 지운 칼리안이 타박 타박 걸어가 꽃을 들어올렸다. “이것을 어찌해야 하나······.” 달라고 하면 이상하고 치우라 하면 더 이상하고. 태우자니 미안하고 버리자니 아깝고. 그런데 이건 웬 꽃이지. 설마 내 따까리 연애하나. 하기사 한참 연애도 하고 좋을 나이기는 하지. 근데 누구지. 아무래도 더 속기 전에 이 놈이 얼마나 미친놈인지 알려줘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내 따까리 설마 진짜 연애하나. 음. 그런 고민을 잠시 하고 있을 때. “둬.” 칼리안의 것이 아닌 또 다른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열어 두었던 문으로 들어온 이가 짧은 말을 했다. 플란츠였다. 고개를 돌리고 간단한 예를 보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건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플란츠는 대꾸도 없이 서류부터 일단 펼쳤다. 그냥 두라고 했으니 나머지는 관심 끄라는 뜻이다. 관심 끌 생각 손톱만큼도 없는 칼리안이 생글거리는 얼굴로 플란츠를 계속 보고 있자, 그제야 답이 나왔다. “어제.” 하루종일 저 향을 맡으면서 일을 했단다. 치워달라는 그 한 마디를 못하고. 하는 짓을 보아하니 아르센한테 말하려는 레릭도 말렸겠지. “내 형님께서는 어찌나 배려심이 넘치시는지.” 짧은 한숨을 쉰 칼리안이 집무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는 바람을 일으켜 집무실 안에 가득한 미네시아스의 향을 멀리멀리 내보냈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불만어린 얼굴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칼리안이 플란츠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과보호 아닙니다.” 플란츠에게 꽃이라는 것이 단순한 기호가 아님을 안다. “괜찮았으면 아침에 그런 얼굴 하고 계시지는 않았겠죠.” 적당히 향이 날아간 것을 느낀 칼리안이 아르센의 책상 서랍을 열어 그 안에 꽃을 넣었다. 그리고 열린 창문을 잠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제 란델 형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자몽 차를 주시더라고요.” 또 뜬금없는 말 시작하는구나 싶었던지 플란츠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서류를 넘겼다. “처음에는 자몽 케이크, 그 다음에는 자몽 소르베. 어제는 자몽 차. 그걸 보는데 문득 자몽이 싫어졌습니다. 갑자기요. 시고, 쓰고, 떫은건지 단 건지 알 수 없는 맛이 갑자기 싫어서.” 자신을 만날 때에는 진득하게 녹인 초콜릿 음료를 내어주던 란델이다. 제 형제가 싫어하는 것에는 참 많은 관심을 두는 듯한 란델의 행태를 생각하던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물었다. “제가 뭐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다른 차 내오라 했겠지.” 당연하다는 듯 나오는 대답에 웃은 칼리안이 말했다. “형님 다른 사람에게 꽃 향기 못 견딘다는 말 하신 적 있습니까.” 칼리안이 눈치채고, 앨런이 알아보고, 르메인이 전해듣게 하는 것 말고 직접 네 입으로 싫어함을 말한 적 있는지. 한동안 대답 없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아직 향이 강해서.” 싫다고 이야기를 해 보아도 소용없던 이의 향기가 아직 강해서. 꽃이 싫다는 말만은 직접 꺼내 보았던 적 없었다고 대답을 했다. “하셔도 괜찮습니다.” 고치려 노력하는 것도 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 해서 억지로 참는 것까지 괜찮다는 건 아니지 않나. “무뎌질 때까지 억지로 참는 건 괜찮아지는 게 아니라 그냥 버티는 겁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루시가 새끼 고양이 가르치듯 하나부터 열까지 손이 간다. 키리에처럼 저 알아서 성장하지도 않고 드미레아처럼 한 두 마디 만으로 제대로 서는 것도 아니고. 뭐 하나 싫다는 말도 못 하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러면서 형 노릇은 또 하겠다 드는 게 미치고 환장할 부분이기는 한데 아무튼. 흰 색과 짙은 회색 사이 어딘가에 머무는 애매한 밝기의 회보라색 재킷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작은 한숨 섞인 말을 했다. “제가 잊어버린 게 있으면 그것도 얘기해주시고요.” 봄 기운을 담은 바람이 이는 듯한 기분이 든다. 클린 마법, 이제 아주 조금 느끼게 된 칼리안의 마력이 스치고 지나간 것을 눈치 챈 플란츠가 낮은 소리로 대답을 했다. “······ 알았어.” 그래도 가르쳐 주는 것들은 고분고분 순하게 알겠다 하니 그것 하나는 참 다행한 일이다. “헤르츠 경은 왜 안옵니까.” “식사.” “아. 혹시 돌아오면 저한테 오라고 얘기 좀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있어.” “네. 그런데 형님 점심은요.” “아직.” “그럼 저랑······.” “싫어.” “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불어드는 선선한 바람 속에서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방긋방긋 웃었다. 망할 놈이 나한테는 참 잘도 말한다. * * * 그래도 영 눈치가 없지는 않은지라. 밥을 먹고 오니 창문은 열려 있고 꽃은 서랍에 넣어져 있고 칼리안이 왔다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아르센은 서랍 속의 꽃을 들고 나와 히나의 집무실에 갔다. 그리고 계란 파는 곳을 알려준 두 조언자에게 감사의 선물로 그것을 건넨 뒤 칼리안을 찾아왔다. 생강과 복숭아를 넣은 블랙 티에서 알싸한 듯 단 향이 올라왔다. “피로 회복에 좋다고 하니 다 마셔요.” 차를 앞에 둔 아르센에게 칼리안이 히나와 똑같은 말을 하자, 싱긋 웃은 아르센이 답을 전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제이아 경 온 뒤로는 꼬박꼬박 제 때 퇴근하고 있습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플란츠가 체르밀 궁에 돌아오는 시간이 빨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아르센 역시 숨 돌릴 틈이 있으리라는 것도 가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큰 일 두 건이 겹쳐 그렇게나 바빠지게 되었던 것이 누구를 위한 누구의 안배인지는 말하지 않은 채였다. “다른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발칸의 일에 더불어 간혹 히나의 호위까지 신경써주고 있는 사람이 또 다른 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칼리안의 웃음에 미안한 마음이 더해졌다. “사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급한 것이 있습니다.” 발칸의 인원이 늘어난 만큼 지휘 체계도 바꾸고 운영 방식도 손보아야 할 때라는 것을 알지만 지금 그것을 말하면 아르센이 유서 써올 것 같아서 일단은 미뤘다. 증원이 끝나고 나면 본인도 필요성을 느낄 테니 그 때 가서 하도록 기다려주거나 비교적 팔팔한 완두콩에게 맡겨보기로 했다. - 탁! 다만 그 완두콩에게 절대 맡길 수 없는 나머지와 관련된 것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잊고 싶은데 잊지도 못할 검은 조약돌. 싹 나은 어깨가 잠시 아려오는 듯 했지만 칼리안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조약돌 보는 아르센도 어깨가 쑤시는데 아르센 보는 칼리안은 오죽할까 싶어서. “쓸데 없는 생각 말고. 헤르츠 경.” “······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과 계시더니 눈치만 느셨습니까.” “나 원래 눈치 빨라요. 형님 눈치가 더 좋은거지.” 칼리안은 그 길고 긴 호칭은 언제 정리할거냐 물어보려다, 자신이 끼어들 문제는 아닌 것 같아서 그것도 그냥 미뤄뒀다. 듣기 싫으면 완두콩이 알아서 하겠지. “오늘 오후 늦게나 내일 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란델 형님을 만나러 올 겁니다. 그때 헤르츠 경이 변경백을 한 번만 더 만나서 얘기를 전해줬으면 하는데.” “알겠습니다.” “아, 물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니 꺼려지면 얼마든지 얘기해요. 정말 괜찮으니까.” 시키는 일 억지로 하고 나서, 또······. 또 그렇게 주사부리다 얻어맞지 말고. “싫은 일 안 시키시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안 싫은 일일 테니 뭐든 제가 하겠습니다.” 근거 없는 믿음에 피식 웃은 칼리안이 찻잔을 들었다. 항상 낯설지만 그렇다 해서 싫진 않은 생강의 향이 진하게 올라왔다. 곧 미세한 마력의 움직임과 함께 사일런트 막이 둘러졌고, 손에 들린 찻잔을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맞아요. 이번에는 나 배신한 척 안 해도 됩니다. 대신 변경백 만나는 것을 왕궁 안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돼요. 내가 직접 만나보고 싶기는 한데 나는 아직 모습 지우는 마법이 익숙하질 않아서.” 투명화 마법 쓴 채로 몇 시간을 버티면서도 무리될 것 없던 아르센이 아니던가. 그러니 그런 상태로 그레이를 좀 만나달라는 이야기였다. “네. 문제 없습니다.” “란델 형님이 브리센 변경백에게 내 말을 전할 겁니다. 국왕 일가가 조만간 왕궁 밖으로 나갈 테니, 그 때 에반이 나를 습격하려 했다는 증거자료 만들라고.” 습격이라는 말에 아르센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다만 칼리안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말을 전할 텐데.” 톡, 톡, 톡. 찻잔 두드리는 소리가 잠시 울렸다. 그것이 아르센에게는 이미 짜 놓은 복잡한 계획을 이리저리 정리해보는 소리로 들렸다. “란델 형님도 몰라야 하는 얘기 하나만 더 전해줘요. 증거자료 만들기 전에 일단 에반 브리센 후작을 한 번 만나라고. 그리고 이걸, 보여주라고 해줘요.” 검은 조약돌을 가리켜 보인 칼리안이 씩 웃었다. “브리센 후작을 잡을 생각입니다. 내 손으로 직접.” “왕자님, 그건.” “스승님도 말렸고, 어제 소공작에게도 한 소리 들었는데, 나는 계속 고집 부리는 중이니까 아무 말 하지 말아요. 이유가 있는데 그걸 경한테 알려주면 안 될 것 같으니 궁금해하지도 말아줬으면 하고.” 에반의 검술을 눈으로 보고 플란츠에게 알려주려는 계획. 나중에 그레이를 좀 털어낼 생각이긴 하지만 절대로 제 손으로 플란츠를 가르칠 생각은 없을 에반의 검술만은 칼리안이 직접 빼낼 계획을 세우는 바람에 일을 이렇게 벌이는 것 아니던가. 브리센의 검술이 끊기지 않았으면 하는 기사로서의 마음, 그리고 플란츠가 제대로 브리센을 장악해서 칼리안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힘을 가지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들은 앨런은 혀를 차며 걱정했지만 반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센은 반대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래서 아르센에게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브리센 후작은 변경백이 란델 형님과 손을 잡았다고 착각할 겁니다. 빨리 형님을 세자위에 올려야 하는데 란델 형님까지 나섰고 내가 그렇게 설쳐댔으니 마음이 급하겠죠. 어떻게든 없애버리고 싶을 텐데 또 어찌나 겁이 많은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국왕 일가가 왕궁 밖에 나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 기회에 나를 공격해볼까, 하는 쪽으로 마음을 먹을 겁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절대로 실행하지는 못할 테고요. 나를 잡을 만한 사람이 카이리시스에 후작 말고 없다는 건 누구나 아는데다, 브리센 변경백에게 누명을 주어 보아야 변경백 실력 별 것 없다는 건 내 쪽에서 잘 알고 있으니 소용 없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라서.” 칼리안의 손가락이 조약돌을 가리켜 보였다. “예전에 내가 누구에게 당했는지, 내가 잠적했을 때 내가 얼마나 크게 다쳤었는지, 그걸 비밀로 하기 위해서 공작저에 몸을 숨겼다는 것까지 전부 다 변경백에게 알려주세요. 변경백이 실수인 척 흘린 얘기 주워들은 후작이, 나를 습격할만한 실력을 가진 이가 또 있다는 걸 알게 되도록.” 칼리안을 습격한 에반이, 제온에게 누명을 씌울 계획을 떠올리게 하도록.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면 미끼 옆에서 왔다갔다 하는 작은 먹이가 아주 맛있어 보일 겁니다.” 세자위에 오를 생각에 들떠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정혼자 집을 들락거리는 왕자 하나쯤은 언제든지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맛있어 보이겠지. “저는······.” 그 뒤로 구체적으로 이어진 칼리안의 계획을 모두 들은 아르센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느긋한 얼굴로 차 향을 음미하는 칼리안을 보며 다짐하듯 말했다. “평생 왕자님 따까리 할 겁니다.” 무서워서 하는 것 아닙니다. 좀 많이 무섭긴 한데 아무튼 무서워서 하는 것 아닙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입 아프게 뭘 그런 말을 해, 하고. 꽃 사랴 일 하랴 앞으로도 계속 바쁠 따까리 보면서 칼리안이 웃었다. < 제42장. 그 심장(5) > 시끌시끌. 삶은 완두콩과의 화목한 점심식사를 단칼에 거절당한 칼리안은 앨런이 내어 준 고기 파이와 쿠키로 배를 잔뜩 채우고 돌아갔다. 그 뒤에는 아르센을 만나 오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날 저녁, 누가 봐도 그레이 브리센인 이가 궁으로 몰래 들어와 란델을 만났다. 란델과 헤어진 그레이가 마차에 올랐으나 마차가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드나드는 이 없이 마차 문이 열렸다 닫혔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나 마차가 바로 출발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그레이의 비밀 방문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브리센 후작가를 발칵 뒤집어놨을 뿐, 귀족들 가득한 아스트리샤 거리를 뜨겁게 달구기에는 부족했다. 아스트리샤는 지금, 그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소식들로 들썩이고 있었으니까. - 왕비 위계가 정말 내려졌으니 이제는······. - 추숭식에서 ‘검은 고양이’께서 입으신 의복이······. - 그리고 그 날 ‘그 브로치’가 2왕자에게······. 프레이야의 추숭이 정말 진행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가는 말이 많을텐데, 추숭식에서 칼리안이 벌였던 일들이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 거리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 검은 고양이에 대한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또 하나. 태풍이라 불러도 좋을 어마어마한 소문이 사람들 사이를 휩쓸고 다녔다. - 그런데 요즘 고양이가 코끼리 집에 자주 간다는데. 단순한 염문설이라 하기에는 그 파장이 너무 컸다. 티아라 닮은 장신구를 내어 주고, 연회장에 함께 입장을 하고, 정혼설을 반박하지 않음으로서 인정한 것 이상의 의미. - 동맹을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거지. -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 그래. 아무래도. - 검은 고양이가 황금 그리핀 날개를 꺾을 것 같지. 왕세자를 발표하지 않았음에도, 그리고 둘이 정말 정혼한 사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음에도, 지그프리드는 어느새 칼리안의 확실한 지지세력, 의심의 여지 없는 우방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과연 칼리안은. ‘맛 좋은 미끼 노릇’만을 위해 공작저를 계속 찾아왔는가. “3왕자님 뵈러 왔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사유를 마친 드미레아가 왕궁을 찾았다. - 지금, 좋은 왕자님, 마법, 알려주고 계세요. 체르밀 궁에서 만난 히나가 메를린을 대신해 이렇게 말을 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이라기보다는 마력 운용을 보아주는 것이었지만. 기다리겠노라는 대답을 하니 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럼, 기다리는 동안, 저랑 같이, 산책해요. 소공작님 또, 훈련장이랑 서재만, 다녔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는 속 시끄러운 드미레아를 끌고 나와 체르밀 궁 후원의 작은 산책길로 왔다. 생각 같아선 호숫가를 거닐고 싶었지만 그곳에 가려면 칼리안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 쪽으로 발을 돌리지는 못했다. - 여름 꽃에는, 햇빛이, 가득 담겨있었는데, 가을 꽃에는, 바람이, 맺힌 것 같아서, 좋아요. 만개한 주홍빛 들꽃이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모습에 생긋 웃던 히나가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그렇습니까.” 계절이 바뀌면 바뀌나보다, 꽃이 피면 피나보다, 지면 졌나보다, 하고 살았던 드미레아는 그냥 무덤덤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엔 정말로 파혼하자 말할 생각으로 왕궁을 찾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꽃에 햇빛이 담기고 바람이 맺혔다는 평온한 말을 한 히나가 생긋 웃으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 기분, 풀어요. 이렇게 좋은데, 왜 화가 났어요. 부드러운 질문에 드미레아가 속내를 보였다. “화가 났다 하기보다는 지그프리드가 왕자님의 뜻대로 휘둘리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그 손이 원하는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서 우려됩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한계점에 도달했으니 여기까지만 하시도록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우리 가문이 왕자님께 드린 것은 방패였지 검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그 왕자는 애초부터 무엇을 들어도 무기로 삼을 사람이라서 방패 아니라 꽃 한송이 조차도 결국 검으로 쓸 것 같다고 말해주는 대신, 히나는 다른 말을 했다. - 약속을, 일방적으로, 어긴 것이면, 자상한 왕자님이, 잘못하신 게 맞겠네요. 그런데 소공작님. 두 분의 사정과 별개로, 말씀드리고 싶던 것이, 있었어요. 히나의 까만 눈이 맑게 빛났다. - 저는, 정치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해요. 그런데 저는, 휘둘리는 것은, 좋지 않지만, 흔들리는 것까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한 히나가 꽃송이 하나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 이 꽃은, 바람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만들기 위해서,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거예요. 열매를 맺는 것이, 이 꽃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꽃가루를 날려보내고, 그렇게 열매를 만든다. 보다 멀리까지 꽃가루를 보내기 위해 바람에 마주 서지 않고 흔들거린다. 꽃을 피운 목적이 열매이기 때문에 그렇다. - 열매를 맺는 것 말고, 다른 중요한 뜻이 있다면, 이 꽃은, 흔들리지 않아도, 괜찮을 거예요. 그런데, 열매를 맺는 것도 잊어버리고, 다른 원하는 것을 모르는 채로, 무작정 흔들리지 않으려고만 버티면, 이 꽃은, 아무 의미 없이, 사라져 갈 뿐이에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히나가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 이유가 있어 흔들리는 것도, 이유가 있어 흔들리지 않는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흔들리는 것 자체를, 경계하기만 하는 것은, 그리고, 왜 흔들리면 안 되는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냥, 습관일 뿐이니까요. 고인 물은 썩는다. 달리기를 멈춘 말의 편자는 녹슨다. - 소공작님은 왜,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으세요? 500년을 이어온 굳건한 신념은 위대하지만 정체되었다. 그 굳건함의 이유가 무엇인지, 단지 굳건하기 위해 계속 굳건해왔던 것은 아닌지. 그것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되었을 만큼. - 계속 움직이지 않아도 좋고, 가 보지 않았던, 곳으로, 걸어도 좋겠지만, 소공작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먼저,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지그프리드는 왜 움직이면 안 되는지. 무엇 때문에 흔들리지 않으려 하는지. 그것을 생각해보아야 할 때인 것 같다고, 히나가 말했다. * * * - 세상 모든 것이 뜻대로 돌아갈 줄 알았느냐. 칼리안의 웃음이 짙게 변했다. 플란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잊지 말거라. 변수가 있으리라는 것을. 증오해야 할 이유만큼이나 기억해야 할 것들을 참 많이 전해준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라서 칼리안이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내리떴다. “뭐야.” 수련을 마치자마자 생각에 잠겨든 칼리안을 보며 플란츠가 물었다. 말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칼리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를 떠올리고 있을 때의 칼리안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칼리안의 표정을 그냥 통째로 외우게 되어버린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 내 아우님께서는 왜 또 뱀을 깨우셨는지.” 무슨 생각을 했기에. 플란츠에게 머릿 속을 들킨 것을 안 칼리안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적당히 숨기려고 해 보아야 괜한 상상만 더해질테니, 칼리안은 그냥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필요해서요.” “뭐가 필요한데.” “경우의 수.” “반말.” “경우의 수요.” 아무렇지 않게 은근슬쩍 말을 내리고, 굳이 그것을 지적하는 말에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은근슬쩍 정정한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앞으로 생길 만한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따져보려니 함께 떠올랐습니다. 뱀에게 배운 것들로 이제껏 살아왔는데 잊어버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플란츠의 생각은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고, 칼리안의 생각은 어디까지 퍼져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세운 계획들에 생길 하나하나의 경우의 수를 따져보려다 언젠가의 데블란이 변수를 주의주었던 일을 떠올려버린 칼리안이 괜찮다는 듯 말했다. “신경쓰실 일 아닙니다. 피하고 싶은 기억이 아니라 필요한 기억이니까.” “반말.” “기억이니까요.” 그 왕제의 지식을 가져올 때면 유난히 버릇없어지는 동생놈을 보며 한 번 더 한숨을 쉰 플란츠가 걸음을 옮겼다. “고양이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아직.” “일주일 지났는데요.” “루시는 더했어.” 루시는 이름 없이 더 오래 있었지 않느냐고. “편애하지 말라며.” 새끼 고양이 이름을 호들갑 떨듯 곧바로 지어주면 루시가 서운해할까봐 천천히 고민하기로 했다는 듯한 대답에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그렇네요. 루시 핑계를 대신다지만 처음으로 얻게 된 ‘형님의’ 소중한 무언가이니 고민이 크시기는 하겠습니다.” “고양이 노릇 한다기에 안 짖을 줄 알았는데.” “고양이 이름도 허투루 정하지 않으시니······ 내 형님께서는 어찌나 세심하신지.” “······ 아니라고.” “정 어려우시면 제가 지어드릴까요. 나비라거나.” “싫어.” 서슴없이 칼리안의 말을 잘라낸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칼리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 주의 돌리려고 쓸데없이 짖지 마.” “제가 그랬습니까.” “안 그래도 돼.” “네.” 무엇에 대한 경우의 수를 보려다 데블란을 떠올렸는지 생각 안하게 하려는 심산임을 알고 있으니 일부러 짖지 말라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한 칼리안은, 갑자기 드는 의문을 참지 못하고 입에 담았다. “그럼 쓸모있게 짖는 건 어떠십니까.” “하.” 플란츠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냥 수련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파릇파릇한 뒷통수를 보며 다시 웃은 칼리안은 내가 쓸모 있게 짖은 적이 있었던가 없었던가 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머릿속을 채우던 데블란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흘러내려가듯 사라져갔다. * * * 꿀 많이 많이 넣은 레몬 차를 받은 칼리안이 웃었다. “나 아직도 생각 많아?”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얀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많아 보이세요.” “반성해야겠네.” “레아도 그랬는데 왕자님까지 복잡해 보이시니 걱정이 되네요.” “드미레아 만났어?” “네. 그런데 왕자님 뵈러 온 것이 아니었는지 치유사 베른 경만 만나고 돌아갔어요.” 조금 늦은 밤.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맞이하는 여유를 가져보려다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칼리안이 말했다. “그래. 히나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드미레아도 생각을 좀 정리할 때가 되긴 했지.” 드미레아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그리고 왜 다시 돌아갔는지 얼추 눈치 챈 칼리안이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 끝나면 내가······!” 하지만 말이 맺어지지 않았다. 변수. 예측할 수 없는 일. 무엇이 발생할지, 언제 발생할지 알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생겼다. - 두근! 심장이 요동쳤다. 칼리안이 말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붉은 눈에 서늘한 날이 섰다. 칼리안을 향해 얀의 고개가 휙 들어올려졌을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흘렀을 때. - 와장창! 부서져 깨어지는 소리. “왕자님!” 레릭의 고함 소리. - 타다닥! 그리고 무언가가 달리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들려오는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테라스 난간 위에 올라 선 칼리안의 손 끝에서 검붉은 빛이 쏘아져 나갔다. 검의 한 면을 뭉텅 잘라낸 듯한 예리한 날이 누군가의 다리를 정확히 베어냈다. 단발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키리에. 밖에 떨어진 것 주워놔.” 차디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칼리안과 마찬가지로 살기를 느꼈을, 그리하여 그 어느때보다 집중하여 칼리안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을 키리에를 향해서였다. 얀이 자리에서 튀어오르듯 일어났으나 칼리안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 어디보다 고요하고 안전해야 할 곳에 찾아든 갑작스러운 소란함. 호위기사들은 물론 칼리안도 눈치채지 못했던 소란함. 그 소란이 발생한 시작점이자 늘 버릇처럼 숨 쉬러 올라갔던 곳에 발을 디디고 있었으니까. - 두근! 심장이 움직인다. 시선이 움직인다. “호위 기사. 카에라의 그 기사가 들어왔습니다. 왕자님께 어떤 말을 전했는데, 왕자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변수. 카에라. 어떤 말. ‘상황 파악은 나중에.’ 놈이 누구인지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 알 필요 없다. 다만 화가 치민다. 저 새끼가 또 자빠져 있는 걸 볼 줄은 몰랐어서. - 두근! 심장이 움직인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서 화가 치민다. 테라스에 선 채로, 방 안에 쓰러진 형제를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손을 덜덜 떠는 레릭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정신 차리고 내 말 제대로 들어.” 레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지 말고 빌헬름 관으로 모셔 가. 키리에와 얀만 데려 가. 내 스승님과 발칸 말고는 믿지 마. 아무도 믿지 마.” 브리센을 배신하지 않는다. 왕궁에서 나가면 고양이 키우면서 산다. 브리센을 배신하지 않는다. 칼리안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우면서 산다. - 두근! 두 개의 인은 상쇄되지 않았다. “더 생각하시면 안돼. 그러니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깨어나시지 못하게 해. 히나를 불러와서 계속 지켜보라고 말해.” “네, 네.” “헤르츠 경을 불러서 곁을 지키라고 해. 스승님께 얀을 보내서 카에라 떼놓고 전하 곁에 계시라고 해.” 레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울듯이 물었다. “그런데 우리 왕자님 왜 이러시는거예요. 갑자기 왜 이러시는건데요.” 브리센을 배신하지 않는다. 브리센의 후작이 되어 칼리안을 돕는다. 고양이 키우면서, 칼리안 도우면서. “살고 싶어서.” 산다. 그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한다. - 두근! 칼리안의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변수가 생겼다. 덕분에 그렇게 열심히 짜 놓은 덫이고 미끼고 다 소용 없어져서 화가 치미는 게 아니라. “그 심장 잘 붙들고 계십시오.” 계약 지키려고, 미친 새끼가 지금 살고 싶어서 안 죽고 쓰러졌다는 걸 알아서 화가 치민다. “······ 검술 하나만 배워 오겠습니다.” 칼리안의 발이 어둠을 박찼다. < 제42장. 그 심장(6) > 자괴감, 죄책감, 분노. 그 어느것 하나 마음껏 누리면 안 될 이가 들어올렸던 팔을 힘없이 내렸다. 설득되었다. 아니, 현실로 돌아왔다. 그것을 본 마법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르메인이 현실로 돌아옴에 따라, 예리한 것에 힘줄을 잘린 뒤 키리에에게 제압된 기사에 대한 처형이 유예되었다. 조사를 진행해야 하니 잠시 살려두어야 한다는 앨런의 말을 듣고 이성을 다시 찾은 덕분이었다. 기사를 데려온 두 명의 마법사에게 앨런이 말했다. “데리고 나가게.” 마법사 중 한 명이 대충 감싸 둔 기사의 상처에 시선을 두다 앨런을 쳐다보며 물었다. “출혈이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칼리안이 내어 놓은 상처였다. 그러니 저 기사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을 만큼의 상처를 내었을 리 없으니까. 그래서 앨런은 기사의 상처는 볼 것도 없다는 듯 짧게 대답했다. “치료는 필요 없네.” 치료가 필요 없게 된 자. 광장의 레니시타 잎 위에 서게 될 자. 말 뜻을 알아들은 마법사들이 고개숙여 인사를 보인 뒤 기사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 후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 카에라.” 아르피아 궁이나 카밀론 궁 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안전해야 할 곳에서 문제가 발생되었음에 대한 깊디 깊은 한숨이 뒤이었다. 그래. 체르밀 궁은 충분히 안전한 곳이다. 밤이 되면 그곳은 시스파니안의 보호 아래로 들어간다. 호수와 후원을 포함한 체르밀 궁 전체를 둘러싼 회랑에 결계와도 같은 보호 마법이 가동된다. 그러니 앨런 정도의 능력을 지니지 않은 이상 외부에서 침입할 수 없다. 그것이 그 동안 왕자들에게 개인 호위기사를 허락하지 않아도 되었던 이유이자 근거였으나 르메인은 이를 무시하고 란델과 플란츠에게 카에라의 기사를 호위로 보냈다. 그리고 오늘, 그렇게 보내진 호위기사가 연루되어 사고가 생겼다. “카에라의 호위기사가.” 곧 고개를 내려 손에 들린 검은색의 작은 주머니를 보던 르메인은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그리고는 위험하니 건드리지 말라 하였던 주머니 속을 기어코 제 손으로 열어 보았다. “2왕자에게 이것을 맡기면서 1왕자의 방에 숨겨놓으라 했다.” 국왕의 친위대에 브리센의 사람이 섞여 있었다는 것. 그런 사실도 모르는 채 그들을 왕자의 처소에 둔 것. 모두 르메인 자신의 잘못임을 알았다. “에반.” 웃음이 터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호위기사의 손과 입을 빌린 에반이 플란츠를 이용하려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그가 내 아들에게 또, 독을 주었다. 내가 내 아들을 또, 지키지 못했다. “상황은 어떠한가.” 눈을 감고 한숨을 쉬고 자신을 향한 욕지거리를 뱉는 것을 일단 전부 다 미룬 르메인이 곁에 선 니들렌을 향해 물었다. 침착한 얼굴의 니들렌이 또박또박 보고를 시작했다. “카에라의 기사들은 모두 무장 해제 하였으며 발칸의 기사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도록 해 두었습니다. 발칸의 마법사 전원이 기사들을 대신하여 경계중입니다. 1왕자님은 체르밀 궁에 모신 상태고 안위에 이상 없습니다. 2왕자님은 빌헬름 관에서 헤르츠 부군단장이 보호 중으로 상황 변화 없습니다.” 유사시 국왕은 왕자와 한 자리에 있지 못한다. 르메인이 당장 아르피아 궁에서 빠져나가 란델의 불안을 살피거나 쓰러진 플란츠의 곁에 있지 못한다는 소리다. 자칫 함께 있다 몰살되면 안되니까. 계속하여 지금까지 확인된 내용들에 대해 가능한 상세히 보고한 니들렌이 밖으로 나간 뒤, 앨런과 둘이 남게 된 르메인이 비로소 속내를 꺼냈다. “내가 또 일을 그르쳤군.” “당연한 말은 접어두시지요.” 이 순간 절대로 그를 위로해주지 않을 마법사의 입이 열렸다. 국왕 직속이니만큼 앨런 역시 손대지 못할 영역. 르메인이 온전히 다스리던 기사단의 문제였으니까. “또 잘못하셨다. 전하 일생에 가장 유능한 날은 아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일 터이니, 그냥 어디 구석에 처박혀 계셔라. 차라리 그런 말을 올려드리면 속이 좀 시원하시겠습니까.” 말이 곱지 않았다. “제가 국왕 친위대 소속 기사가 왕자에게 해를 입힌 기막힌 사건을 목도하려고 이 나라에 찾아온 줄 아십니까. 어딜 보나 어여쁘고 안쓰럽기만 한 생때같은 제 제자가, 전하께서 파놓은 시궁창 메꾸겠다며 발버둥치다 속이 죄 말라가는 꼴을 보려고 이 날까지 살아온 줄 아십니까. 미안하다 잘못했다 생각 짧았다, 매일같이 그딴 소리나 지껄이는 쓸모 없는 모가지가 어디 한 군데라도 소중해서 이렇게 붙여 놓고 있는 줄 아십니까.” 사실 언제나 고운 적 없었지만 지금까지의 그 어느 날보다도 매서운 말이었다. 지금까지 르메인으로 인해 벌어졌던 수많은 문제들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을 뿐더러, 이 시간 칼리안이 무엇을 위해 어디에 갔을지도 모르지 않는 앨런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이 정도면 참 고운 말일지도 몰랐다. 마법도 주먹도 아니고 입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앨런에게 있어서는 고운 것이었다. “국왕 친위대 기사가 다른 이의 손을 타다니. 실로 재밌는 일이라며 시스파니안께서 대소하시겠습니다. 그렇게 매일을 일에 치여 산다면서 그간 무엇을 하셨는지 도무지 제 머리로는 가늠이 안 될 정도니 말입니다.” 칼리안이 온 뒤로 고작 1년. 많은 것이 바뀌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임을 모르지 않아서 그나마 마법 말고 주먹 말고 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국왕 노릇이며 아비 노릇이며 두루두루 부족하기 짝이 없는 놈 그래도 좀 고쳐 써보겠다고. 에라 모르겠다 손 놓기에는 이 나라도 남은 두 왕자도 가엽기만 할 뿐이라. “알아 들었네. 내가 저질러온 일이 누구를 삼키고 있는지도 계속 보아왔고.” 이렇게 대답한 르메인이 침음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래. 후작이 무슨 짓을 했는지, 3왕자가 무엇을 하러 나갔는지, 전부 다 ‘모르고 있어야’ 한다는 말도 알아 들었네. 후작저로 섣부르게 손을 쓰진 않을 테니 걱정 말게. 대신.” 그리고 다시 떴다. 습관처럼 눈 감는 일을 더 하지는 않아야 했으므로. “1왕자가 지금 티는 내지 않아도 신경을 쓰고 있을 것이라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잠시 만나 살펴보고 2왕자의 곁을 지켜보고 싶네. 그것은 괜찮겠나.” 앨런이 대답 없이 쳐다보자 르메인이 말을 이었다. “이런 때 왕자와 함께 자리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내 생각에 어차피 내 모가지는 백작이 직접 떼어 놓기 전까지 잘 붙어있을 것 같은데.” 그것 참. 칼리안이 어련히 알아서 살려주겠지 하고 퍼질러져 누워있는 푸성귀 같은 그 놈이 이 소 같은 놈의 새끼가 맞기는 한가보다. “······ 그리하시지요.” 짧은 한숨 한 번, 그리고 실소 한 번. 복잡한 마음을 드러낸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가지 다른 놈 손에 달아날 일은 없도록 잘 보아드릴 터이니.” * * * 잠깐 기다리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속삭이는 듯한 말에 레이븐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큰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평소 이런 말에 ‘푸르륵’ 하던 대답 대신 보여준 행동이었다. 사실 레이븐 말고 다른 말을 데려올까 했지만 에반을 만나고 다시 궁으로 돌아갈 때를 대비해 그냥 레이븐을 타고 왔다. - 다각, 다각. 말 편자가 조심스레 바닥을 밟는 아주 작은 소리와 함께 레이븐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검은 로브의 후드를 잘 눌러 쓴 칼리안이 온 힘을 다해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생일 선물로 받았던 바다의 비린내를 잔뜩 맡은 이후부터 생긴 버릇. 곧 맡게 될 다른 비린내에 앞서 맑은 밤 공기를 폐에 가득 채우기 위해서였다. - 타박. 짧은 준비를 마친 칼리안의 발이 바닥을 밟았다. 작게 한 걸음, 조금 더 크게 한 걸음, 성큼 성큼 두 걸음. 그렇게 조금씩 보폭이 커지는가 싶더니. - 타앗! 일순간 바닥을 박차고 높이 도약한 이의 검은 로브 자락이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검붉은 기운이 뚝, 하고 그 뒤를 물들이다 함께 사라졌다. 에반 브리센 후작의 저택. 작은 성벽을 연상시키듯 높이 둘러쳐진 외벽 위를 밝히던 마법 등불 하나가 팟, 꺼졌다. 멀리서 그것을 본 병사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 그 옆의 불빛이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마치 밀려드는 파도에 잠겨가듯 하나씩 하나씩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선선한 바람이 왕궁 밖을 휘감아 돌던 그 밤. 조용하고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내려가는 모래성처럼, 한 귀퉁이에서부터 그렇게 에반의 성을 밝힌 불이 꺼져가는 동안.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 * * [아브턴던트] 파란 머리 마법사. 마법을 쓸 때 원래 시동어를 말했던가. 잘 안 쓰는 마법이라 시동어를 입에 담나. 일어나면, 칼리안에게. [슬립] 물어봐야······. * * * “마법은 잘 배우고 오셨어요?” 레릭의 목소리. 소파에 앉은 채 잠시 레릭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눈을 감았다. 옆에 놓인 보드라운 쿠션 위에 새끼 고양이가 잠을 자고, 품에 안긴 루시가 언제나와 같이 예쁜 소리를 낸다. 대답이 귀찮아 그리 한 것인데 레릭이 다시 말을 걸어 왔다. “왕자님, 많이 피곤하세요?” 익숙하지 않은 것. 걱정이 담긴 목소리. “마법은 무리해서 배우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고양이 털은 저희가 전부 다 치울 수 있어요.” “말했는데.” 아랫층 사는 놈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짜증 섞인 대꾸를 했다. “그것 때문 아니라고.” “애오옹!” “니아옹!” 어느새 잠에서 깬 놈까지 합세해서는 플란츠 편을 들었다. 이래서야. 아니라는 소리를 믿어주도록 같이 말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절대 믿지 말라고 방해를 하는 건지. 플란츠가 천천히 눈을 뜨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목욕 준비 해 두었으니 목욕하시면서 좀 쉬세요. 그리고 내일 승마 공연도 보러 가셔야 하니까 혹시 몸 안좋으시면 얘기해주세요.” “알았어.” 항상 그랬듯 짧게 대답한 플란츠가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던 레릭이 종알종알 다시 입을 열었다. “목욕하시면서 드시게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 그래.” “네. 지금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레릭이 나간 뒤 조용해진 방에서, 플란츠가 루시를 안아 새끼 고양이 옆에 뉘였다. 그리고 재킷을 벗어 소파에 걸치듯 올려두었다. -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오래지 않아 레릭이 올 테니 그냥 무시해도 될 일이었으나 어쩌다 보니 시종 없이 지내는 것에 잠시 익숙해졌던 플란츠는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호위기사가 서 있었다. “뭐야.”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왕자님.” 잠시 기사를 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걸음을 뒤로 물리자 기사가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문을 잠갔다면 아마 의심을 했을텐데, 그리 하지는 않았다. 곧 기사가 손에 들린 까만 주머니 하나를 플란츠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이것을, 1왕자님의 방에 두고 와 주시라는.” 그것이 무엇인지 채 눈에 담기도 전에. “브리센 후작의 전언입니다.” “······ 하.” 헛웃음이 났다. 기사는 더 이상의 말 없이 플란츠를 보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리라. 플란츠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머릿속에서 무서운 속도로 사고가 이어지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에반의 머리로 생각해 낼 것은 익숙한 방법 뿐이다. 실리케가 했던 방법을 따라할 수 밖에 없을 테니 결국 손에 들린 이 것은······. “독이겠군.” 통제를 벗어난 머릿속에 그 동안 막아온 생각이 봇물처럼 터져나와 거대한 퍼즐을 완성한다. 칼리안이 그레이를 불러냈다. 그레이를 경계한 에반이 레넌을 꺼내들었고 칼리안은 그레이와 란델이 거짓으로 손을 잡은 것처럼 꾸몄다. 추숭식에서의 일, 지그프리드 소공작과의 관계로 엉덩이가 들썩거린 에반이. - 경우의 수. 변수를 만들었다. “내 아우님과 형님을 위한 덫을 내 손으로 놓으라는 말일 테고.” 란델이 칼리안에게 보낼 독을 준비하던 것으로 꾸민다. 그 뒤 에반이 칼리안을 죽인다. 칼리안을 위한 독을 준비했으나 칼리안이 더 이상 독에 당하지 않을 이라는 것을 뒤늦게 안 란델이 대사막의 늑대든 신성기사든 아무나를 불러낸 것처럼 꾸민다. 그렇게 칼리안을 살해한 죄를 란델과 그레이에게 덮어씌운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리고 르메인은 에반을 의심하겠지만 상관 없다. 란델과 그레이가 칼리안을 해치려 했다는 증거 하나만 란델의 방에서 나오면 되니까. “이것만으로는 완전한 증거가 되기 어려울텐데.” 생각을 계속 이어나가는 동안 플란츠가 질문했다. “증거는 필요 없습니다. 브리센이 증거가 될 테니.” 언제부터 브리센의 사람이었을까. 처음부터 브리센의 사람이었을까. “언제나 그랬듯 브리센이 곧 증거입니다. 칼리안 왕자가 없다면 다시, 그렇게 됩니다.” 기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플란츠가 웃었다. “언제 가능하시겠습니까.” 기사가 대답을 종용하는 동안 플란츠가 살짝 눈을 감았다. 날짜를 가늠해볼 짧은 시간 동안 다시 한 번 생각이 휘몰아친다. ‘독 주머니를 받고 칼리안에게 알릴까.’ 맹세의 인은 어기겠지만 칼리안과 란델은 무탈할 테니 그렇게 할까. 만약 두 개의 인이 충돌하여 나에게 이상이 생긴다면. 놈은 분명 그 길로 에반을 치러 갈 테고 나는 그 동안만 버티면 될 테니, 그렇게 할까. “······ 이 정도로는 배신이 아닌가보군.” 에반을 죽일 생각을 이어나가도 아직 심장에 별 탈이 없는 것을 느낀 플란츠가 혼잣말같은 소리를 하며 기사의 주의를 한 번 더 끌었다. 그렇게 시간을 조금 더 벌었다. ‘칼리안이 에반을 죽여 없애면, 어떻게 되지.’ 놈이라면 분명 에반을 죽이고도 처벌 받지 않을 방법을 잘 만들어두고 있을 텐데 이대로 독을 받아 에반부터 없애게 되면 놈이 짜 둔 계획이 다 망가진다. 자칫하면 그 놈은 아무 이유 없이 에반을 죽인 죄인이 된다. 그걸 알면서도 에반을 칠 것이다. 그럴 놈인 것을 안다. 너무 잘 안다. ‘직접 알리면 안 된다.’ 적어도 내가 이것을 에반에게, 저 기사에게 받았다는 증명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차라리. 지금 당장.’ 플란츠가 숨을 들이마셨다. 기사를 쳐다보며 온 힘을 다해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도망가.” 플란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기사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도망가라고. 내 아우님이 곧 올 테니 복도 말고 창 밖으로 뛰어.” 창 밖으로 뛰어. 칼리안이 잡기 쉽도록. “나는. 내 동생이.” 지금 내 손에 쥔 것을 가지고 살 길을 만들도록. 널 잡고 에반을 죽이고 나 살려놓을 그 놈도 살도록. “왕위에 오르도록 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살기를 흘려보냈다. “살 거니까.” - 두근! < 제43장. 멈추지 마시고(1) > 멈춰 서지 않는다. 어둠 속을 살핀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살아 숨쉬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소년의 발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순서를 잘못 정했었네. 내가.” 핏물 그득한 복도 끝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작은 울림을 만들다 곧 사라졌다. 후회같기도 하고 자조같기도 한 말이었으나 기실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일방적이어야 할 검 앞에 감정을 두면 휘두르는 쪽도 함께 다친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아서였다. “결국 다 잡게 될 줄 알았으면 왕궁에서 싸우지 말고 그냥 여길 먼저 올 걸 그랬지.” 브리센의 병력을 가능한 남겨두려 했다. 가능한 많은 병력을 남겨두어 나중에 일어날 미지의 일에 대비하고자 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실리케를 몰아낼 때에도 브리센의 몸뚱이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었는데. 일이 커지게 되면 카이리시스의 브리센 후작저 뿐 아니라 브리센 후작령에 있는 병력까지 다 죽이게 생겼다. 그러니,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실리케 말고 그냥 에반부터 먼저 칠 걸 그랬지. - 타박, 타박. 완벽한 어둠에 잠긴 그 곳에는 달빛조차 스미지 않았으나 소년의 발은 머뭇거림 없이 계단을 밟는다. “아······ 그랬으면 완두콩이 르니에리 냄새 맡고 돌았겠구나.” 그때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지. 르니에리 향기는 절대 옅어지지 않았을 테니 그냥 두었다면 그 놈도 결국 돌았겠구나. “이 새끼 쪽을 미뤄두길 잘 한거네, 그럼.” 다행인거네. 덕분에 이런 짓을 또 하고는 있지만. “······ 뭐, 사람 살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피식 웃으며 침묵에 잠긴 계단 위에 목소리를 내려놓는다. 혼잣말 역시 버릇이었다. 곧 죽을 이들에게 말을 건네고, 이미 죽은 이들 옆에서 생각을 내뱉고. 더는 소리내지 않는 이들로 가득찬 곳을 계속 지나다니다 보니 어느새 그런 버릇이 생겨 있었다. - 타다닥! 십 수 명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앞을 가로막는다. 아까부터 계속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플란츠와 맺은 맹세의 인이 움직였음을 에반도 느꼈을 테니 이렇게 나름대로 대비를 한 것이리라. 꼭, 지치기를 바라는듯이. - 쉬이익! 놈들이 기사인지 병사인지, 싸울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할 새도 없이 검붉은 칼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날았다. 놈들이 소년을 향해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했으나 하지 못했다. 앞에 선 소년이 그들의 말은 더 이상 듣지 않겠다 마음을 먹었으므로. - 투욱. 사람 목소리 말고, 사람 비명소리 말고, 사람의 묵직한 몸이 바닥에 널브러지는 소리들이 복도를 메운다. 그들의 곁을 지나쳐가며 가라앉은 붉은 눈으로 숨이 끊어졌는지를 살핀 소년이 시선을 돌렸다. 서두르지는 않았지만 여유롭지도 않은 걸음이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긴 복도를 두 번 더 지나고 계단을 한 번 더 올라 아직 불빛이 남은 곳에 도착했을 때. “생각보다 빠르십니다.” 실로 반가운 목소리가 드디어 들렸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검을 아래로 내린 채 걸음을 옮겼다. 타박 타박 하는 발소리와 검 끝이 대리석 바닥을 가르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저택을 지키던 기사 대부분이 죽었다. 도망친 놈들은 내버려뒀지만 덤벼든 놈은 실수 없이 싹 죽였다. 빠뜨리지 않고 전부 다 죽였다. 저택 외벽을 넘어 본관에 들어와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올라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발을 놀렸다. “2왕자는 어떻게 살려두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 한 번을 몰아쉬지 않는 모습을 잠시 보던 에반이 물었다. “2왕자와의 일에 3왕자가 왜 이렇게 나서는지도 참 궁금하고. 이 돌은 어떻게 쓰는 것인지도 궁금하고. 제가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그레이로부터 건네 받았을 검은 조약돌. 에반을 향해 걸어가던 칼리안이 그 손에 들린 돌을 무시하며 생글 웃었다. “나도 궁금한 것 있는데.” 당신 상대하다 방해받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다른 놈들 먼저 잡으며 올라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그러니 딱 하나만 물어볼게. “혹시 내 형님께 브리센 검술을 가르치라 부탁하면 들어줄거야?” “브리센의 검술을 어째서 외부인에게 알리겠습니까.” “······ 그래.” 타박, 타박. “그래서 3왕자께선,” - 타앗! 칼리안이 바닥을 차며 달려들었다. 온 저택을 잠식할 듯한 살기가 함께 터져나왔다. 검은 로브의 끝자락이 나비의 날개처럼 바람을 품었다. * * * 들고 있던 마법서를 내려놓은 아르센이 고개를 돌렸다. - 효과가 있어요. 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원활하게 상황을 전달할 수 있도록 키리에로부터 팔찌를 전해 받은 채였다. 플란츠의 상태가 바뀌는 즉시 대응을 해주어야 했지만,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 볼 수 있는 히나는 치유술을 쓰고 있어 손을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제대로 구현은 되었네.” 히나가 말한 효과라는 것이 차도가 있음을 뜻하지 않음을 안다. 굳이 히나를 통해 전해듣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새하얗게 질려있는 낯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더이상 아픈 것을 느끼지 않을 뿐이다. “이런 게 처음이라 좀 낯설기는 하군.” 누구 생명 끊어놓는 마법은 참 많이 부려 봤는데 누구 안 아프게 하는 마법은 처음 부렸다. 싸우다 죽으면 죽은 놈이 약한 놈이다. 싸움에서 졌는데 죽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았으면 약하기는 해도 운은 좋은 놈이다. 만약 약한 놈이 운도 그럭저럭이라 죽지는 않았는데 다치기만 했다면 아파도 싸다. 그런 생각으로 살고 있는 미친 마법사가 통증 줄이는 마법을 알고 있을 리 없지 않나. 그런 마법을 알고 있었다면 숲에서 다쳤을 때 스스로에게 직접 썼을 것이다. 그때 좀 많이 아팠다. 아르센 자신은 약한 놈이 아니라서 아파도 싼 놈 측에 속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 덕분에 많이 편안해지신 것 같아요. 정말 다행이에요. 텐실의 치유사로부터 교육을 받을 때 앨런이 칼리안에게 치유술과 유사한 마법을 써 주었던 적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것을 떠올린 히나가 아르센에게 말을 전했고, 이런저런 책을 뒤져보다 마법식을 찾아내 슥 읽어본 아르센이 대뜸 플란츠에게로 마력을 쏟았다. 다행히 잘 작동했다. 많이 아파 보여서 서둘러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되면 좋고 안되면 별 수 없으니 그냥 될대로 되라 하고 대충 해 본 것이지, 알고보면 순하다던 저 왕자가 심하게 앓는 모습이 걱정되는 마음에 급히 찾아 발현했던 것은 정말 아니다. “나도 마법사라네.” 아마 지금 아르센이 얼마나 대담한 짓을 했는지 히나가 제대로 알았다면 당장 쫓아냈을 테고, 니들렌이 알았다면 생전 처음 접한 마법을 실수 없이 완벽히 계산해서 곧바로 구현한 천재 마법사의 동상을 꼭 세우겠다고 난리를 쳤을 터였다. 물론 아르센은 히나에게 사실을 알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무모한 짓을 혹시라도 칼리안이 알게되는 날에는 금고 속의 반성문을 뜯어보거나 아르센을 부숴놓거나 둘 중 하나를 하려고 들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으니 말이다. “책에 나온 마법 하나 구현 못해서야 마법사라 할 수가 없지. 다만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니 모르는 척 해주게.” 머쓱하게도 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법이 발현된 결과를 잠시 알려준 뒤에는 다시 온 신경을 집중해 플란츠를 살폈다. 사실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플란츠의 심장에 치유의 힘을 불어넣으며 버티느라 아르센의 헛소리를 제대로 듣고 대답해 줄 정신이 없다 해야 맞을 일이다. 그런 히나의 얼굴도 꽤나 창백해지고 있어서, 아르센은 시간이 지체되면 히나의 치유력이 다해 플란츠가 죽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애써 치워냈다. 그리고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파악해보려 머릿속을 정리해나갔다. 최근에 아르센도 직접 느꼈던 마력의 기운. 그리고 집중해서 살피니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 많이 옅어진 또 하나의 기운. 토막 숨을 내쉰 아르센의 머릿속에 조금 전 키리에로부터 전해들은 말이 떠올랐다. - 두 분이 맹세의 인을 나누셨습니다. 플란츠에게 두 개의 인이 생겼고 그것과 축복의 힘이 싹 다 엉키는 바람에 저 난리가 났다는 것은 조금 전 앨런으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 ‘무슨 소리를 해서 맹세의 인이 발동됐는지는 몰라도 참 묘한 상황이 되었군.’ 맹세의 인은 시스파니안이 만들어낸 ‘똑똑한’ 마법이다. 스스로 약속 이행 여부를 판단하여 심장을 옭죄는 힘이다. 그 맹세의 인에 칼리안이 장난을 쳤다. 플란츠가 브리센을 배반했으니 심장을 멎게 할 마법이 발동되어야 한다. 그런데 플란츠가 기사에게 한 말이 두 번째 계약을 지키겠다는 소리인지라, 맹세의 인은 플란츠가 두 번째 약속을 이행 중인 것으로 보고 심장을 그냥 두어야 하는지 첫 번째 약속을 어긴 것으로 보고 심장을 멎게 해야 하는지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플란츠의 심장을 옭죄려는 마법이 발동과 해제를 반복하게 되어서······. ‘죽었다가 살아났다가 하는건가.’ 아르센이 적당히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묘한 상황이 되었다. 만약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없었다면 심장이 멎었다 다시 뛰기를 반복하는 상태를 오래 버티지 못했겠지만 축복은 축복대로 또 열심히 일을 하고 히나도 힘을 내고 있던 터라, 결과적으로 플란츠는 어떻게든 숨은 쉬고 있었다. “확실히 내가 사람은 잘 봤어.” 아르센이 혼잣말을 했다. 세상 천지에 어떤 미친놈이 고양이 운운해가며 맹세의 인을 만들고 심장을 걸겠나. 그러니 내가 확실히 사람은 잘 봤지. 그렇게 생각하며 헛웃음을 흘리던 아르센의 시선이 다시 플란츠의 얼굴로 향했다. 두 개의 인을 스스로 충돌시켜 그대로 드러누운 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르센이 실소했다. “그러고 보니 세상 천지에 또 하나가 여기 있었지.” 한 놈은 살리려고 심장을 걸고 또 한 놈은 살릴 걸 믿고 심장을 내놓았으니. ······ 똑같이 미친 형제로군. * * * 맹세의 인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은 괜찮다. ‘완두콩이 계속 파릇파릇하다는 걸 시시때때로 확인하려고 맺은 계약은 아니었는데.’ 의외의 효과에 피식 웃은 칼리안이, 지금껏 본 에반의 검술을 잠시 머릿속에 정리하며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검을 뻗었다. - 카아앙! 카앙! 서로에 대한 탐색을 위한 짧은 공방이 계속됐다. 플란츠의 검술과 달랐고 왕궁의 기사들이 쓰는 검과도 달랐다. 그레이와는 애초에 검을 겨눈 적도 없었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면 그레이와도 다르다. 테일란보다 무겁다. 슬레이만보다 가볍다. 테일란보다 느리다. 슬레이만보다 빠르다. 들어본 적 없는 브리센의 진짜 검술은 확실히 달랐다. 나쁘게 말하면 이도 저도 아닌 검술. 좋게 말한다면 양쪽 모두를 다 상대할 수 있을 검술. “좋네.” 칼리안이 웃었다. 오로지 가주만 사용하는 검술. 테일란 역시 브리센의 검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해준 적 없었다. 아니, 브리센의 검이 지그프리드만큼 강하다는 것 말고 알려진 내용이 있기는 했던가. ‘어딘가에 기록을 해 두었거나 다른 후계자가 있나.’ 후계. 레넌 브리센? ‘레넌은 검을 쓰지 못한다 알려져 있는데. 게다가 에반은 스승님과 맹세의 인을 나누며 레넌을 감금시키지 않았던가.’ 물론 감금 사실을 다른 곳에 알리지 않겠다는 정도의 계약이었으니 거짓으로 감금했다 꾸몄을 수는 있지만, 칼리안은 레넌에게 오러를 느껴본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 레넌은 검을 쓰는 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몸이 둔했다. ‘레넌 쪽을 의심하는 것은 섣부르다. 만약 후계를 숨긴 것이 아니라 아직 없는 것이라면 대체 언제까지 혼자 가지고 있을 셈이었을까. 정말로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고 살다 죽을 생각이었나.’ 아니면 또 다른 뭔가를 숨기고 있나. - 카아앙! 생각이 많아진다. 싸움 중에 생각이 많으면 죽는다. 칼리안은 자연스레 이어지는 의문들을 우선 접으며 다시 한 번 검을 움직였다. 에반의 뒤에서 뻗어내던 공격이 막히기가 무섭게 그의 앞에 나타나 목젖을 노렸다. - 카앙! 캉! 후드 속의 붉은 눈이 빛났다. 에반의 발디딤, 팔의 움직임, 검의 휘어짐 하나 놓치지 않고 전부 다 보았다. 머릿속에 전부 다 집어넣어가며 보았다. 전부 다 외웠다. - 카가강! 카앙! 에반의 검이 칼리안의 턱 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 직후 에반은 검붉은 빛을 일렁이며 심장 앞까지 다가오는 검을 재빨리 쳐올렸다. - 우웅! 날카로운 오러를 담아낸 에반의 검이 깊은 울음소리를 냈다. 에반의 오러는 푸른색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칼리안의 오러만 검붉다 해야 할 일이다. 마법사가 아닌 이들은 시전자의 서클에 든 고유한 마나와 오러를 순환시켜 사용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 쉬이익! 카강! 탐색을 위한 공방은 어느새 사라지고 치명적인 일격이 담긴 공격이 연이었다. 완연히 다른 두 색의 오러가 얽히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에반을 향해 내지른 검이 벽을 긁어내고, 칼리안이 서 있던 바닥의 대리석 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벽에 걸려 있던 누군가의 그림은 줄기줄기 뻗어나온 두 오러의 힘에 형체를 잃었다. 칼리안이 검을 세워 횡으로 치고 들어오는 에반의 검을 막았다. 동시에 반대로 튕겨나가는 검을 다잡아 이번에는 에반의 목을 향해 비스듬히 내리그었다. 신속히 회수된 에반의 검이 다시 한 번 칼리안의 수를 막아섰다. 그리하면 칼리안은 어느새 몸을 띄워 전혀 다른 방향에서 검을 보냈다. - 카가강! 도약하여 달려드는 칼리안을 느낀 에반이 재빨리 검을 들어 올려 힘있게 받아쳤다. 검과 검에 실린 힘이 서로를 막고 되튕겨내기 위해 맞부딪히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몇 번인지 세어보기 어려울 만큼의 힘겨루기를 이어나가던 그 순간. - 카앙! 캉! 칼리안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설마.’ 곧 칼리안의 발이 허공을 밟듯 움직였다. 분명 앞에 서 있던 이가 발을 움직였을 뿐인데 곧장 뒤에서 다음 공격이 이어진다. 조금도 느려지지 않고 오히려 계속 가속하는 듯한 빠르기에 질렸다는 얼굴을 한 에반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뒤로 틀었다. 그리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 카아아앙! 공기를 찢어내는 소리가 이어지자 복도 천장에 달려있던 샹들리에가 가늘게 떨리는지, 벽에 드리워진 두 검사의 그림자가 잠시 일렁였다. 방금 전 에반의 오른쪽에서 옆구리를 꿰뚫어내려 했던 칼리안의 그림자가 흩어지듯 사라졌다. 동시에 에반의 앞에서 나타났다.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에반이 검을 뻗었으나, 칼리안은 막는 대신 뒤로 훌쩍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그것을 피해냈다. - 탁! 가벼운 것이 바닥에 닿는 소리와 함께 칼리안이 착지했다. 여전히 입고 있던 검은 로브가 잠시 부풀다 내려앉았다. 깊이 눌러쓴 후드 아래의 입술이 움직였다. “이제······.” 한동안 그렇게 에반을 마주보고 서 있던 칼리안의 입술이 다음 말을 담았다. “다른 것 좀 보여줘도 될 것 같은데. 후작.” “무엇을 말입니까.” “숨겨둔 것.” 칼리안의 시선이 에반의 검에 가 닿았다. 에반의 입에 긴 웃음이 걸렸다. “그리하지.” 짧아진 대답. 그와 함께 벽에 드리워졌던 에반의 길고 예리한 검 그림자가 비틀리며 움직였다. 마치 긴 막대기 하나를 세로로 가르듯 천천히 그렇게. 더 가늘고 날렵한 두 개의 그림자로 나뉘었다.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흡족하다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긴 복도를 서늘하게 울렸다. “그래. 그거.” 어느새 검을 흩어버린 칼리안이 빈 손으로 자신의 목 근처를 한 번 쓸어내렸다. 목 앞에 고정시켜 두었던 로브 끈이 풀어졌다. 가벼운 것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났다. - 스르륵, 툭! 그 많은 이들을 베어내며 이 곳에 왔음에도 피에 젖지 않은 로브 자락이 칼리안의 등을 스치며 바닥에 떨구어졌다. “그게 뭔지 알아내려고 한참 고민했잖아. 내가.” 시야를 가려주던 후드가 걷히고 붉은 눈이 드러났다. 다시 만들어낸 검에서 검붉은 빛이 뚝뚝 흘러내렸다. < 제43장. 멈추지 마시고(2) > 고요한 밤. 빌헬름 관과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각각 예상치 못한 손님들이 방문했다. 빌헬름 관에 있던 아르센은, 본래대로라면 플란츠와 절대로 함께 있지 못할 르메인을 마주하게 된 탓에 상당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래도 이제는 르메인을 처음 봤던 날처럼 긴장하지 않았으므로 당황하지 않고 정중한 단어들을 잘 골라 르메인에게 건넸다. “죄송합니다만, 전하. 치유사에게 방해가 됩니다.” 급여에 반비례한 능력을 지닌데다 단어 그대로 칼리안의 무시무시한 총애를 받고 있는 마법사의 직언을 잘 들은 르메인은 눈으로만 잠시 플란츠를 살핀 뒤 아르피아 궁에 돌아갔다. 그리고 드미레아는, 르메인조차 발길을 돌리게 만든 그 치유사에게 들은 이야기로 인해 생각이 아주 많아진 상태였다. 덕분에 늦은 밤까지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느라 놓친 식사를 홍차와 팬케이크로 대신하고 있던 중 손님 한 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왕자님의 일로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칼리안의 유일한 기사. 그가 전해온 말을 들은 드미레아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 소공작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먼저. 히나가 건넨 소리 없는 말이 귓가를 맴도는 기분이 들었다. * * * 에반의 나이는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후계를 두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만 에반이라면 그럴 수 있지. 아니면 후계를 이미 두었으나 완벽히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고.’ 이런 생각을 하니 궁금한 것이 생겼다. ‘무슨 이유였든, 대체 그 검술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카이리스의 양대 기사가문이라는 그 브리센의 가주가 사용하는 진짜 검술은 왜 알려지지 않았는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 검술이기에 후계를 두거나 공개하는 것마저 경계하는가.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치열한 공방 속에서도 에반의 움직임을 하나도 흘려 보지 않고 모조리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던 탓에 느끼게 된 찰나의 불균형. “눈썰미가 좋구나.” “내가 아직 젊어서.” 그 미세한 의구심을 키워보니 답이 나왔다. “자랑하는 것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용케 숨겼네.” “특별한 전쟁도 내전도 없던 나라인데 가주들이 밖에서 직접 검을 쓸 일이 있었겠나. 게다가 코끼리들이 언제 마음을 바꿀지도 모르는데 우리 것을 다 보여주고 살 수는 없지.” “나한테 보여주고 있잖아. 내 정혼자님 엄청 무서운데.” “걱정말거라. 내 검을 본 다른 놈들처럼 너도 여기서 나가지 못할 테니까.” “아, 그래.”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후작. 반으로 나눈 건 칼인데 왜 말까지 반토막으로 뱉고 그래.” 툭툭, 검 끝으로 바닥을 두어 번 두드리던 칼리안이 고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버릇없어 보이잖아.” 여전한 비아냥에 살기가 뭉클 피어올랐다. 푸른 오러에 휩싸인 두 자루의 검이 득달같이 달려든다. 기대감 가득한 웃음을 보인 칼리안이 양쪽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카가강! 아이고, 삶은 완두콩 고생길 열렸네. 검 한 자루도 제대로 못다루는데 이제 두 개나 쥐게 생겼으니 이를 어떡하나. - 카앙! 캉! 이제 일어나시면 정말로 고기 많이 드셔야겠네. - 카앙! - 캉! 카강! 검술도 다시 배우시고, 엄청 짖는 고양이도, - 카아앙! ······ 제대로 키우시려면! - 카가가강! * * * 시간이 계속 흘렀다. 히나의 손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온 따스한 빛이 플란츠의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마법과 달리 자연에 머무는 마나를 그대로 끌어다 치유력으로 바꾸면 되는 터라 마나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그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할 일이나, 그 뿐. 마나가 부족하지 않다 해도 정신력과 기력까지 무한한 것은 아니지 않나. ‘큰일이군. 인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플란츠의 새하얀 셔츠 위에 고양이 털 대신 올려진 히나의 손 끝이 결국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르센이 침음을 냈다. “······ 왕실 치유사를 불러오라 하겠네.” - 안 돼요. 아르센으로서는 처음 듣는 히나의 단호한 목소리가 곧바로 울렸다. “마법 수련 때문이라면 걱정 말게. 우리 왕자님과는 달리 아직 서클을 만드신 것이 아니니 신력을 받아도 다른 문제는 없을걸세.” - 그런 이유 아니에요. 불러오지 말아주세요. 확고한 거절의 의사였으나 히나는 지금 이유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할 만큼 지쳐있었다. “이전까지 해왔던 치료와 많이 다를 걸세. 그전에야 상처가 아무는 것을 확인하는 동안 잠시 숨도 돌리고 했다지만 오늘은 다르지 않나. 그런 상태로는 오래 못 버티네. 내가 보기에 자네 이미······.” - 다른 사람 손에 맡기기 싫어요. 못 믿겠어요. 말을 멈춘 아르센이 입을 꾹 다물었다. 왕실 치유사로부터 교육을 받는 동안 친분이 생겼을텐데도 이렇게,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했다. 다른 이도 아닌 히나가. “······ 하긴, 누굴 믿을 수 있겠나. 카에라조차 브리센에 물들었는데.” 결국 아르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도저히 안 되겠으면 그 때는 정말로 치유사를 불러오겠노라 말하려 입을 열었을 때. - 달칵. 닫혀 있던 치료실 문이 열렸다. 카이리스의 왕자가 있는 곳. 그 곁에 발칸의 부군단장과 치유사가 있는 곳. 그런 곳에 찾아왔으나 문 앞을 지키던 다른 마법사들이 섣부르게 제지하지 못할 사람. 제 손으로 해 본 적도 없을 노크는 생략해버린 채 문을 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하지 못했던 두 번째 손님을 본 아르센이 천천히 일어났다. ‘여기를 왜······?’ 새벽의 청량한 기운을 가득 담은 푸른 눈동자가, 깊고 깊어 그 속에 무엇을 담았는지 모를 푸른 눈동자를 처음으로 온전히 마주했다. 그는 일어서지 않고 고개만 숙여보인 뒤 다시 치료에 집중하는 히나를 무례하다 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입을 열어 예를 차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아예 고개조차 숙이지 않고 있는 아르센도 탓하지 않았다. 마음이 너그러워서라 하기 보다는 둘의 반응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던 까닭이다. “비켜서지를 않는구나.” 한동안 아르센을 쳐다보던 이가, 시선만 돌려 플란츠를 내려다보다 이렇게 입을 열었다. “내 걸음에 그대의 허락이 필요한 자리더냐.” 아르센은 숨길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대의 뒤에 있는 이가 나의 아우인데도.” “제 뒤에 계시는 플란츠 왕자님께서 바로 란델 왕자님의 아우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해를 줄까 걱정하는 것이더냐.” “······ 걱정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무렴 설마 제가 우리 왕자님의 형님이시자 부군단장인 왕자님을 걱정하겠습니까만. “경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무려 왕자를 의심한다는 말이었음에도 란델은 아무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을 전했다. “오늘 아닌 다른 날에 그리 하거라. 지금은 해하려 찾은 것이 아니니.” 란델의 고요한 눈이 아르센을 응시했다. 그 묵직한 시선을 한참동안 마주보던 아르센이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을 뒤로 물렸다. “······ 알겠습니다.” 듣도 보도 못했던 마법을 플란츠에게 쓴 데 이어 란델까지 마음대로 들여놨으니, 칼리안을 만나면 아무래도 어디 하나는 반드시 부서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혹은 어딘가에 구멍이 하나 생기거나. * * * 칼리안이 오른쪽으로 허리를 틀며 검을 위로 뻗었다. - 카앙! - 쉬이익! 머리 위로 내리떨어지던 검이 막혔고 왼쪽 옆구리를 노리며 치고 들어오는 검이 허공을 갈랐다. 조금 놀란 점은 양 손에 하나씩 검을 들었으나 가해지는 힘이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 덕분에 두 명의 에반과 싸우는 기분이 된 칼리안이 끔찍한 상상을 했다는 듯한 표정을 하며 막았던 검을 털어냈다. - 휘익! 가볍게 몸을 띄운 칼리안을 본 에반이 두 개의 검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쥐었다. 그 상태로 빠르게 몸을 회전시키며 칼리안이 착지해야 할 곳으로 검격을 날렸다. - 카가가강! 검날이 충돌하는 소리가 여러번 울렸다. 칼리안은 달려드는 첫 번째 검을 막아낸 직후 검을 살짝 뒤로 빼 두 번째 검의 공격을 막았다. 두 개의 검을 모두 받아낸 뒤 있는 힘껏 두 자루의 검을 올려쳤다. 그리고는 몸을 틀어 에반의 뒤로 다가섰다. 짧은 숨을 들이킬 만한 시간 동안 방어와 이동을 마친 칼리안이 검을 내찔렀다. - 쉬익! 바람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에반이 허리를 숙였다. 재빨리 일어서 칼리안의 모습을 좇았으나 이번에도 칼리안은 자신의 공격이 막힘과 동시에 다른 방향에 서 있었다. 더. - 캉, 카가강! 더. 더 보여줘. 전부 다 알려줘. - 카앙! 카가강! - 카강, 캉! 뒤를 노릴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어깨와 허리와 다리를 어떻게 움직이고 짚는지, 위에서 혹은 아래에서 달려드는 공격은 어떻게 막는지, 두 검을 반대로 쥘 때는 어떤 공격을 하는지, 두 개의 검이 어떻게 서로를 보완하며 싸우는지. 지금까지 그 누구를 상대했을 때보다 집중하여 검의 경로를 살피고 피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에반이 아닌 에반의 검술을 노렸다. 훔쳐냈다. - 캉! 카아아앙! 다시 공방이 이어졌다. 그렇게 조금씩 에반의 움직임에 익숙해졌을 즈음, 칼리안이 아주 잠시 발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지금껏 보고 담은 것을 빠르게 정리해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에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만큼 완벽히 배울 수는 없겠으나 상관없었다. 게다가 이제 한계가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완두콩이든, 히나든. 그러니 여기까지. 부족한 것은 자신의 검술로 채우면 된다 결정한 칼리안이 아주 잠시 에반과 거리를 벌린 뒤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달려들었다. 에반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 카아앙! 카강! 두 개의 검을 교차시키며 떨어져내리는 에반의 공격을 올려치고, 시간차를 두고 회전하며 들어오는 두 개의 검을 연달아 흘려보냈다. 손에 들린 검을 비틀어 뻗으며 두 검 사이의 빈 공간을 파고들었다. 그것을 본 에반이 두 검의 손잡이를 맞붙여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날을 막았다. 어느새 빠져나간 검붉은 검이 심장을 향해 달려든다. 에반은 한쪽 어깨를 꺼뜨리듯 허리를 돌려 피한 뒤 반대편 검을 내찔렀다. 칼리안은, 그 자리에 없었다. - 오싹! 더 짙어진 살기. 숨김 없이 드러낸 분노와 살의가 에반을 향했다. 새빨간 두 눈이 보인다. 우습게도 에반은 이 순간, 검은 고양이 브로치를 떠올렸다. 저 놈이 그 잘난 마법 스승을 두고 왜 여기 혼자 왔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마법을 쓰지 않고 검으로만 상대했는지 이제야 알았다. ‘내가 이 자리에서 저 놈에게 죽는다면, 빼앗기는 것은 내 목숨이 아니라······.’ 브리센이다. 브리센의 검이다. “네 놈, 지금까지······!” - 카아아앙!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반을 비웃지도 않았다. 지치지도 않고 뻗어내던 검으로 에반의 검술을 노리던 칼리안은 이제, 에반의 생명을 노리고 있었다. 칼리안이 내지르는 검의 잔상조차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들리는 것 같던 발소리가 완전히 감춰졌다. 에반은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칼리안의 기운을 느끼고 막아냈다. - 카강, 카강, 캉! 목을 향해 치닫는 검은 에반이 막아낼 수 있는 속도를 벗어났다. 마지막을 직감한 에반은 검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죽더라도 칼리안을 곱게 두고 죽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방어를 포기했다. 칼리안의 검이 벼락처럼 다가왔다. 그런데 그 순간. - 자박. 예상하지 못한. 경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할아버지······.” 잠에서 이제 막 깨어난 듯한 앳된 목소리. - 우뚝! 그것이 검붉은 검을 붙들었다. 에반의 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의 주인을 반사적으로 바라본 칼리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복도 끝의 방 하나. 그 앞에, 플란츠의 것보다 훨씬 짙은 녹빛의 눈과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아이가 서 있었다. 아닌 것을 알면서. 상관 없는 어린 아이인 것을 알면서. 후계. 그래, 저 아이구나. 저 아이를 후계로 삼으려고 했구나. 레넌이나 그레이의 자식이겠구나. 두 아들에게 위협받지 않으면서 가문의 검술을 알려주려면 그들의 자식을 후계로 삼는 것이 나았겠구나. 그래서 저택에 몰래 숨겨두고 가르치려 했겠구나. 이 모든 생각을 한꺼번에 잘 떠올렸으면서. ‘형······ 님?’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했다. 에반의 검이 바람을 가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 제43장. 멈추지 마시고(3) >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많이 닮아있었다. 너무 닮아서, 언젠가의 플란츠가 떠오른 바람에 갑작스러운 혼란이 찾아들었다. 그 혼란 때문에 말도 안되는 혼돈을 겪고 말았다. 에반의 검을 머릿속에 집어넣느라 예민하게 열어두었던 기억이 뒤섞였다. 순식간에, 혼돈 속에 떠오른 또 다른 기억의 편린이 찾아들었다. 플란츠에 대한 기억 말고 칼리안이 가지고 있던 베른의 기억이 올라왔다. - 그 아이가 아버지께 무슨 방해를 하였습니까. - 이미 휘두른 검에 이유를 물을 필요가 있겠느냐. - 이미 죽여 없앴다 해도 이유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 이제 와서 그것을 알면 달라지는 일이 있느냐. - 대답 안하시면 저기 서 있는 호위부터 그 아이와 똑같이 만들어놓고 다시 질문할 겁니다. 그 아이가 아버지께, 무슨 방해가 되었습니까. - 지난 달에 네가 다녀왔던 곳의 후계자니라. 후계자. 그리고 어린아이. 겨우 그것을 생각했을 뿐인데. 막을 새도 없이 기억 속의 한 때가 머릿속을 잠식해버렸다. - 그래서 너를 다시 보냈다. 후환은 미리 없애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 고작이라니. 그 아이를 그대로 두었다가 너처럼 사납게 자라면 어찌하려고. 갑자기 나타난 저 아이와 왕궁에 자빠져 있을 어떤 망할 놈이 닮아서. 그리고 하필이면 저 아이와 비슷한 나이였을 또 다른 어린아이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서. 숨을 한 번 들이킬 만큼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이었으나, 분명 시선을 빼앗겼다. 생각이 많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을 해왔으면서도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그 생각이 만들어낸 찰나의 틈. 그것을. - 푸욱! 에반은 놓치지 않았다. “······ 하.” 이······. 망할 집안 같으니.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죄다 파릇파릇하니까. 잠깐······ 헷갈렸잖아. 내가. “환장하겠네······.” 풀밭이야 뭐야. * * * 아무래도 너무 늦는 것이 불안하여. 도무지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으니 이를 어찌해야 하나. 에반이 죽으면 앨런의 심장에 걸린 맹세의 인도 함께 풀릴 터였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 창을 보지 않더라도 상황이 끝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가에 선 앨런의 눈이 창 밖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서성이는 발걸음이 창문 앞을 떠나질 못했다. 올 때가 되었는데. ‘칼리안.’ 르메인의 곁을 떠날 수도 없었다. 칼리안의 스승이었으나 앨런은 발칸의 군단장이었다. 왕궁 수비가 줄어든 틈을 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으니, 아무리 마법사들이 있다지만 르메인의 곁에는 일단 앨런이 있어야 했다.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백작.” 아무 말 없이 소파에 앉아있던 르메인이 앨런을 불렀다. 앨런이 가만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불러세운 이를 쳐다봤다. “나 역시 더 기다리기에 힘이 드니 그대가 다녀왔으면 좋겠는데.” 그저 소파에 앉아있을 뿐 마음만은 앨런과 같았던 르메인의 시선 역시 창 밖을 향하고 있었다. “별 일 없을 겁니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지금까지 수천 번 억누르면서, 왜 이 곳에 있어야 하는지를 수천 번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창 밖을 확인한 앨런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 앨런을 가만히 보던 르메인이 말했다. “가서 데려와주게. 그대가 무엇을 하든 내가 책임을 질 테니.” 부탁을 했다. 카이리스의 국왕이 발칸의 군단장에게. 무능하기만 했던 남자가 대마법사에게. 칼리안 아버지가 칼리안의 아버지에게. * * * 하. 헛웃음인지 헛숨인지 모를 소리가 한번 더 새어나왔다. “어린애 앞에서······ 못하는 짓이 없네.” 뚝, 뚝, 뚝. 바닥에 끝이 닿은 검붉은 검과 같은 빛의 굵은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내린다. 복부 한 가운데에 깊숙이 박힌 날붙이를 살짝 내려다 본 칼리안이 자신의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아주 잠시 한눈을 팔았음에 대한 대가 치고는 꽤나 아픈 것을 선사한 에반이 답했다. “말했잖나. 이 곳에서 못 나간다고.” 칼리안은 에반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속을 헤집어 놓은 검에서 시선을 뗀 칼리안이 멀찍이 서있는 녹빛 눈의 어린아이를 보며 예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꿈 꾸는거야.” 꿈이라고 생각해. [슬립] “악몽이니까······ 기억하지마.” - 털썩! 크게 벌어진 눈으로 에반과 칼리안과 에반의 손에 들린 검과 그 검에 꿰뚫린 칼리안을 보던 아이가 바닥에 엎어졌다. 누구인지도 잘 모를 그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한 칼리안은, 그제야 온 몸을 보호하던 오러를 모아 에반의 검이 더 이상 몸 속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반은 칼리안의 몸에 박혀있던 검을 비틀어 뽑아냈다. - 후두둑! 상처를 막고 있던 검이 사라졌음에, 한 웅큼의 핏덩이가 그대로 바닥에 쏟아졌다. 순간적으로 칼리안의 몸이 휘청였다. 에반의 두 검이 칼리안의 목과 심장을 향해 휘둘러졌다. - 카아앙! 칼리안이 가까스로 검을 세워 들고 에반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웃었다. 인상을 찌푸리던 에반이 바닥을 박찼다. 어느새 칼리안이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들고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의 몸에 무엇이 들어왔다 나갔는지 잊은 사람처럼. 에반이 심장을 노려오는 칼리안의 검을 다급히 몸을 돌려 피했다. 아니, 피하려 했다. 생각한 것 이상의 빠르기로 찔러 들어오는 검붉은 공격을 모두 막지는 못했다. 칼리안의 검이 몸을 비트는 에반의 왼쪽 심장 위에 깊이 갈라진 상처를 냈다. - 촤아악! 에반의 상처에서 터져나온 핏방울이 복도 벽에 점점이 흩뿌려졌다. 뚝뚝, 선홍빛의 핏방울이 바닥까지 흘러내렸다. - 타앗! 그 깊은 상처로부터 오는 아픔에 익숙해질 새도 없이, 칼리안의 발이 지면을 박차는 것이 보였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왼쪽으로 공격하기를 미룬 에반이 오른손에 들려있던 검을 들어올렸다. 몸을 날리던 칼리안이 툭, 하고 에반의 검 끝을 밟으며 다시 뛰어올랐다. 칼리안의 검이 조금 더 빨랐던 탓에 에반은 검을 든 자세 그대로 몇 걸음을 다급히 물렸다. 멀찍이 물러나려 했으나 좁혀진 거리가 쉽게 벌어지지 않았다. 날카로운 통증이 계속하여 등줄기를 따라 머리를 흔들어댔다. ‘대체 저 놈은!’ 에반이 입은 상처가 깊었다. 칼리안에게 준 상처는 치명타였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상처의 깊이가 다를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하는 짓만 보면 칼리안의 상처가 훨씬 경미한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 휘이익! 짧은 도약으로 에반에게 다가온 칼리안이 검을 휘둘렀다. 에반 역시 잘 움직여지지 않는 팔을 강제하며 대응했다. 오른손에 들린 검을 가로로 베어냄과 동시에 왼손의 검을 틀어쥐고 내리찍었다. 위에서 짖쳐드는 검을 쳐낸 칼리안이, 움직이는 방향 그대로 칼을 계속 휘둘렀다. 빠르게 베어 들어오던 검이 바닥을 향해 내리쳐지며 방향을 잃었다. - 카아앙! 카강! 오히려 더 거세진 공격. 명백히 달라진 검붉은 검의 움직임에 에반의 자세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다시 집중하여 칼리안을 상대하던 머릿속도 조금씩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 카아앙, 캉, 카앙! 뚝, 뚝, 뚝. 시뻘건 속을 드러낸 에반의 상처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검은 옷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칼리안의 상처에서 핏줄기가 쏟아져내렸다. 검은 옷이 더 짙게 젖어든지 오래였다. 한 번을 휘청이고 다시 몸을 바로 세운 칼리안이 버릇처럼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여유롭던 모습은 어디가고 어느새 숨을 몰아쉬고 있던 에반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아까 내가 눈치 챈 이유를······ 제대로 말 못했는데.” 이 와중에 대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자신에게 상처를 내 놓은 이의 유언을 들어줄 마음은 조금도 없던 에반이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내딛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저 놈을 죽여 없애야 되겠다는 마음 밖에는 드는 것이 없었다. - 쉬이익! 깊이 베인 쪽의 팔을 더 쓰지 않아도 되겠다 여겼는지, 에반은 오른손에 들린 검만 칼리안에게 뻗어냈다. 그것을 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칼리안이 잡고 있던 검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양 팔을 떨구듯 내리며 다시 움직였다. 칼리안의 모습이 여지없이 사라졌다. 피인지, 오러인지, 이제는 구분도 되지 않는 것들이 후두둑, 바닥에 흩뿌려진다. 서늘한 기운이 뒤에서 뻗어나오는 것을 느낀 에반이 빠르게 몸을 틀며 검을 들었다. - 우우웅! - 우웅! 두 번의 소리. 원하는 형태로 언제든지 바뀌는 검. 이번에는 장검 대신, 단검 대신, 방패 대신, 또는 몽둥이나 루시 장난감 대신. 평소의 것보다 더 얇은 검이 칼리안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에반이 두 개의 검을 교차시켜 칼리안의 검을 막아섰다. - 카아앙! 에반이 칼리안의 공격을 막았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검붉은 검이 허공에서 멈춰섰다. - ······ 콰직! 에반이 칼리안의 공격을 막았다. 하나만, 막았다. “안, 쓰는, 거지.” 순식간에 형태를 바꾼 두 자루의 검이 칼리안의 양손에 하나씩 들려 있었다. 하나는 막혔고, 또 하나는. “······ 못 쓰는 게, 아니라서. 나도.” 에반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한 두 번째의 검붉은 검을 바라보며 칼리안이 말을 맺었다. 천천히. 에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칼리안을 쳐다봤다. 선연한 붉은 빛. 그 날에 입은 붉은 망토가 함께 생각났다. -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 더 오래전의 어느 날에 보았던, 지금 흘러내리는 피와 썩 닮은 빛의 붉은 머리카락이 떠오른다. “너······.” 비슷한 빛을 띤 눈으로 에반을 바라보는 칼리안의 얼굴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 파악! 하고 싶은 말을 하겠다는 것이었지 대화를 나누겠다는 소리는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은 손에 들린 검을 흩어버렸다. 더 이상 에반의 눈을 마주 보고 설 필요도 없었고 그의 말을 들어 줄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러게. 가르쳐 주겠다고 하지, 왜 그랬어.” ······ 그러지 말지. - 털썩. 지지할 곳 잃은 에반의 몸이 힘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칼리안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살짝 움직였다. 칼리안의 양 손에 들려있는 검을 한 번씩 쳐다보다가 그렇게. - 쿠웅! 차디찬 바닥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칼리안이 긴 숨을 내쉬었다. 길고 긴 숨을 한참동안 내쉬었다. - 사아아······. 곧이어, 흩어지는 두 종류의 마력이 느껴졌다. 조금 오래 된 것과 더 많이 오래 된 것. 플란츠와 앨런이 에반과 맺었던 맹세의 인이 사라지는 것을 분명히 느낀 칼리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지긋지긋했네.” 비틀, 한 걸음을 옮긴 칼리안이 에반의 시신 근처에 떨어져 있던 검은 조약돌을 주워 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비틀, 몇 걸음을 더 옮겨 조금 전 벗어두었던 로브를 집어든 뒤 이미 숨이 끊어진 에반의 곁으로 돌아왔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팔을 들어 그 검은 천을 펼쳤다. - 펄럭! 굳이 그렇게 자신의 로브로 에반의 시신을 덮었다. 후작에 대한 예의, 혹은 오랫동안 싸움을 나눈 기사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다. 저 복도 끝에 잠들어 엎어진 아이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 싶었으나 그럴 상태가 되지 못했던 탓이었다. 도무지 저 아이를 어디 둘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에반의 시신만 가렸다. “내가 배려해 줄 입장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모를 저 아이가, 이 곳을 정리할 이들이 오기 전에 깨어나서 보는 것이 최소한 제 혈육의 시신은 아니었으면 해서. 앞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지는 몰라도. 악몽이라 믿은 것이 현실임을 벌써 깨닫기에는 너무 어려서. 그건 조금 가혹하니까. - 뚝, 뚝, 투두둑. 숙였던 허리를 펴니 검붉은 피가 다시 한 번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플란츠······ 이 풀대가리.” 어둠 가득했던 창 밖에 아른아른, 불빛이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을 할 수가 없어서 칼리안은 그냥 계속 발을 움직였다. 복부의 상처를 감싸쥔 칼리안이 비틀비틀 발을 옮기다가, 결국은 멈춰서서 벽에 몸을 기댔다. “원수같은 형님 같으니······.” 칼리안의 심장에 묶인 맹세의 인은 여전했다. 그러니, 연두색 완두콩은 아직 파릇파릇하다. 망할 놈. 말 안듣는 데 도가 튼 새끼. 그래도 설마 또 어디가서 심장 팔고 오지는 않겠지. 그러지만 않으면. - 투두둑, 투둑. 아무렴. 네 놈이 고양이보단······. 오래 살겠지. < 제43장. 멈추지 마시고(4) > 란델이 잠긴 눈으로 히나를 보다 입을 열었다. “거두거라.” 칼리안의 말이 뜬금없다면 플란츠의 말은 머리 꼬리가 없거나 그냥 다 없었고 란델의 말에는 배려가 없었다. 아무튼 어딘가 하나씩은 부족한 언어 구사력으로 서로가 형제임을 증명하고 있는 왕자들의 맏이가 하는 말을 들은 히나가 고개를 들었다. “저희 치유사는 하던 일 계속 할 테니 신경쓰지 마시고 하실 일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보던 아르센이 이렇게 말했다. 일단 해를 끼치지 않겠다 하였으니 들여놓기는 했지만 히나의 치료까지 중단하라는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이 참에 발칸이 1왕자의 말을 따라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려주면 좋고. 그런데 히나가 천천히 움직였다. 플란츠가 눈을 뜨기 전까지는 절대로 떼지 않을 것 같던 손을 거뒀다. - 베른 경, 굳이 그러지 않아도 괜찮네. - 반발력이 생길거예요. 저처럼 마나를 쓰시는 게 아니라서요. 란델이 가진 힘을 아직 잘 모르는 파란 머리 마법사가 히나의 말 뜻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란델의 손 끝에 빛이 모여들었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순간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란델을, 공격 할 뻔 했다. 붉은 빛. 치유사의 하얀 빛 혹은 히나의 금빛과 완전히 다른 붉은 빛. 숲에서 만난 늑대들이 떠올라 다시 한 번 어깨가 욱씬거리는 느낌이 든 아르센이 손 끝에 모여든 마력을 감추듯 주먹을 쥐며 가까스로 흩어냈다. 그 붉은 힘 덕에 신력 뿐 아니라 살기도 잘 느끼고 마력도 느끼는 란델은 뒤에서 뭐가 모였다 사라졌는지 신경쓰지 않았다. 아르센이 말한 것처럼 그냥 제 할 일을 했다. - 베른 경.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네. - 플란츠 왕자님 치료해주고 계시는 거예요. 색이 왜 빨간지는 모르겠는데 칼리안 왕자님이 신력의 일종이라고 말씀해주신 적 있어요. - 아까는 아무도 못 믿겠다더니? - 저희가 왕궁에서 제일 못 믿을 사람이 란델 왕자님이잖아요. 원래 제일 의심스러운 사람은 진짜 나쁜 일은 잘 못한다고 베로니카가 그랬어요. 의심 받을 것 알면서 직접 오셨으면 이상한 일을 하시지는 않을거예요. 이렇게 대답한 히나가 곧 눈을 감으며 휴식을 취했다. 플란츠를 치료중인 란델이 혹시라도 마음을 바꾸어 다른 공격을 하려 든다면 아르센이 잘 대처할 터였다. 그러니 지금 히나가 해야 할 일은 란델의 감시가 아니라 쉬는 것이었다. - 자네 방금 좀 마법사 같았네. 결국 아르센은 란델의 속내를 더 고민하지 않고 그냥 두기로 했다. 란델의 치유술은 모여드는 빛의 색을 제외하면 히나의 것과 특별히 다르지 않았는데, 플란츠의 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힘을 불어넣고 있다는 정도의 차이만 있었다. ‘손도 대기 싫어하면서 대체 왜 오셨는지.’ 소리 없이 헛웃음을 지은 아르센이 시퍼런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란델이 하는 양을 계속 지켜보기 시작했다. 란델을 그냥 둔다는 것이 믿는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란델이 치유를 시작하고 히나가 휴식을 취하고 아르센이 두근두근해하는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다. 다시 눈을 뜬 히나가 란델의 치유술이 꽤 안정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아르센은 란델이 한참동안 팔을 뻗고 있음에도 힘들어하지 않는 것에 놀랄 즈음. 아르센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란델의 손에 모여있던 힘이 사그라들었다. 잠시 플란츠를 살펴 본 아르센이 안도한 듯 말했다. - 우리 왕자님께서 해결을 하셨나 보군. 맹세의 인. 그것이 드디어 사라진 것이다. 란델이 손을 치우자 얼른 플란츠에게 손을 올렸던 히나가, 더 이상 플란츠의 심장이 요동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셋째가 오거든 잠시 보자 전하거라.” 란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아르센이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밖으로 나가버렸다. 지금 자신의 행동을 다른 곳에 말하지 말라는 등의 뻔한 소리는 아예 하지도 않은 채였다. * * * 책임이란다. 칼리안 걱정으로 타들어가는 마음에 기름 끼얹는 르메인의 말에, 앨런이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책임질 테니 데려오라니······.” 지금 왕궁 어디에 또 누가 섞여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이를테면, 무려 아르센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던 제온의 기사 혹은 마법사같은 이들 말이다. 게다가 앨런이 맡고 있는 발칸은 군대였다. 뭐가 되었든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그 언젠가에는 한 나라를 불바다로 만든 군대의 수장이 바로 앨런이었다. 앨런이 움직인다는 것은 일국의 대마법사 한 명이 움직이는 것과는 달랐다. “무슨 생각으로 후원 화단 비료로도 못 써먹을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아르센이 손 끝을 움찔하는 정도면 이미 세뉴강 건너편에 잘 도착해 있을 그런 분이, 날이 밝기 전에 완전히 사라질 에반 브리센 후작의 집에 왕자 한 명도 모자라 앨런까지 보내려 하다니. 대체 이게 어느 머리로 생각해 낸 개똥만도 못한 소리란 말인가. 때문에 이번에도 가차없이 르메인을 타박한 앨런이 저벅저벅 걸어 집무실 문 쪽으로 갔다. “어디 가나?” “아드님 데리러 갑니다.” 소 새끼 말고 내 새끼 데리러 가겠다는 뜻이었으나 그 깊은 뜻은 알아먹지 못한 소가 눈을 꿈뻑이다 말했다. “비료로도 못 써먹을 소리라더니.” “국왕 전하께서 시키시는데 다녀와야지요.” “그대가 언제부터 내 말을 그리 잘 들었다고.” “지금껏 들어 본 전하의 쓰잘데기 없는 소리 중에 그나마 몇 되지도 않는 듣기 좋은 말인데 듣지 않고 넘겨서야 되겠습니까.” 카이리스 출신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앨런도 마법사인지라 복잡한 계산 다 때려치고 그냥 가겠노라 대답을 했다. 마법사란 모름지기 머리 아니라 가슴으로 일평생을 사는 이들 아니던가. “그래도 이 쪽을 비워둘 수는 없고 전하 들춰 업고 나갔다가 두 왕자님 중 한 분이 왕궁 문이라도 닫아버리면 마음이 좀 허전하실 터이니, 일단 헤르츠 부군단장을 불러다 앉혀 놓겠습니다. 둘째 왕자님 신변은 제이아 경이 보아 드리면 될 겁니다.” 르메인이 비공식적으로 왕궁 밖에 나갔을 때 왕궁 문이 닫히면 슬레이만처럼 온천이나 며칠 다녀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르메인의 형이 머무는 곳 아래층에 르메인 방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알겠네. 그렇게 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대답한 르메인을 뒤로 한 앨런이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에 서 있던 마법사 한 명에게 아르센을 불러와 달라 말한 뒤 잠시 기다렸다. 앨런의 말을 들은 마법사가 자리를 떠난 직후, 앨런은 이 순간 떠올리고 있지 않았던 사람이 아르피아 궁에 들어서는 것을 느꼈다. “혹시 늦더라도 걱정된다고 왕자님 계시는 곳에 찾아 올 생각은 말아달라 하셨습니다.” 새끼 코끼리. 앨런을 찾아온 얀이 이렇게, 앨런이 또 칼리안 손바닥 위에 있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칼리안이 왕궁을 떠나기 전에 따로 언급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번 일에는 발칸이 더 개입하면 안된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어진 얀의 이야기가 끝났을 즈음. 앨런의 심장에 묶여 있던 맹세의 인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 * * - 정신 차리십시오. 생각이 났다. 아니, 불현듯 떠올랐다. 그저 벽에 기대어 서서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인데. - 멈추지 마십시오. 한 번도 나에게 무엇을 하라 이야기 한 적 없었으면서 하필이면 왜 마지막 날에 그런 말을 해서, 너는. 그래서 나는. 그런 것을 너한테 약속해버려서 어기질 못하고. 내 손으로 내 팔을 끊어가면서, 그렇게 버티면서, 내가. 왜 하필 그런 말을 하고 갔느냐고 너한테 얼마나 툴툴댔는지. ‘정신 차리십시오.’ 해줬으면 하는 게 있었으면 평소에 말을 하지 왜 하필이면 그렇게 말하고 가버려서. 미안한데 더는 못지키겠다는 말도 못하게 해버려서. 그래서 내가 기어코 그 약속 지키려고 네 말을 얼마나 많이 되뇌었는지 너는 알까. 정신 차리고, 멈추지 않으면서. 그래. 그렇게. 다시 돌아가겠노라고. 다녀왔다 인사를 할 거라고. ‘왕자님.’ 내가 얼마나. 그렇게. “칼리안 왕자님. 정신 차리십시오.” 너는. 알까. ‘키리에.’ 너는. 그래. “······ 키리에.” 너는, 이번에도, 나를. 부르는구나. * * * 더 고쳐야 할 것이 없었다. 플란츠는 이제 그저 잠들어 있는 채였다. 사실 칼리안은 혹시라도 맹세의 인을 없애지 못할 상황을 대비하여 플란츠를 깨우지 말라 했었다. 그 말을 레릭에게 전해들은 아르센은 칼리안의 말 뜻을 알아서 잘 해석하고 알아들었다. 그래서 더 이상 플란츠에게 마력을 쓰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니들렌을 대신 보낼테니 아르피아 궁으로 오라는 앨런의 말이 전해졌다. 치료실 밖 여기저기에 호위를 위한 마법사들이 있었으므로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이런 이유로 잠시동안 플란츠 옆에 혼자 있게 된 히나는 플란츠에게 다시 치유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더 고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괜히 불안해서. 혹시나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어떤 문제가 있어서는 아닐까 걱정이 되어서 계속 손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계속 플란츠를 살피며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왜.” 비로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죽을 뻔했다 일어나도 말 짧은 것은 여전한 사람이, 옆에 있던 이가 히나임을 상기하고 조금 더 말을 보탰다. “더 고칠 것도 없는데.” 고개 돌려 수화를 보기에 힘이 들 것 같아서, 히나는 아르센이 놓고 간 팔찌를 플란츠의 손목에 채워주며 대답을 했다. - 고칠 것은 더 없는데 일어나지 않으셔서 불안하기도 하고······ 혹시 다른 곳에 이상이 있나 걱정이 되어서요.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던 플란츠가 천천히 일어나 앉으며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일어났고, 눈 떴으면, 걸을 수 있다. 그리고 일단은 상황 확인이 먼저다. - 칼리안은. - 아직 안 오셨어요. 속박이 풀렸다는 것이 곧바로 느껴졌다. ‘······ 미친 새끼.’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지만. 미친 동생 놈이 정말로 뛰쳐나갔다. 또. 살려놨다.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짧은 한숨을 쉰 플란츠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누워 하루 이틀은 쉬어야 한다 말해야 할 히나는 그 대신 다른 말을 했다. - 아르피아 궁에 마나실 군단장님이랑 헤르츠 부군단장님 계세요. 같이 가드릴게요.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히나의 얼굴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거울이 없으니 지금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는 몰라도 지금의 히나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하다 그렇게 됐는지 모를 플란츠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 쉬라는 말을 해야 할까. 왜 그렇게 무리를 했느냐는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그것을 한참 고민하는 플란츠를 향해 히나가 먼저 말했다. - 네에. 제가 플란츠 왕자님 살려 놓느라 고생 많이 했어요. 힘도 많이 들었고 신경도 많이 썼고 알고 보면 화도 많이 났어요. 저한테 고맙고 미안해하시는 것도 아니까 못하시는 말 굳이 안하셔도 돼요. 혼은 나중에 낼 거고요. 일단 급한 것 먼저 하시고 다시 봐요. 쓸데 없는 데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청천벽력같은 말 하나를 툭 전했다. - 그리고 란델 왕자님께서도 플란츠 왕자님 치료하신다고 많이 애써 주셨어요. 그 의외의 말에도 플란츠는 놀라지 않았다. 단지 옮기려던 걸음을 잠시 멈췄을 뿐. -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전해들으셨나보군. - 네. 알고 계시는 것 같았어요. 플란츠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다시 발을 움직였다. - 그래. 이번에 플란츠는 형제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최선의 방법을 택했다. 란델이라면 그것이 자신만을 위한 친절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알았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을 지기 싫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차피······ 갚으시라 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원치 않은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원치 않을 도움을 주고 간 형제의 뜻을 잘 알아들은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 * 기사 한 명이 아이를 안아들었다. 자신이 어느 집안의 핏줄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은 녹빛 머리의 여자아이. 후작저에 에반 브리센과 아이 외의 다른 브리센 가문 사람은 없었다. 그레이는 칼리안이 다시 부를 때까지 변경백령에 돌아가 있는 상태였고 레넌은 수도 안에 자신의 저택이 있었다. 그래서 기사는 연고 모를 그 아이가 깨기 전에 일단 조심스레 안아들고 피 냄새 가득한 곳에서 빠져나갔다. 함께 들어온 다른 기사들은 여기저기 널브러진, 하나같이 같은 곳에 상처를 입고 죽은 시신들 사이에 혹시 있을지 모를 생존자를 찾으려 수색을 했다. 그렇게 분주한 기사들 사이로 물빛 머리의 기사 한 명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누군가를 조심스레 눕혔다. “제가 히나를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눕기라도 하시지. 앉기라도 하시지. 왜 이렇게······. “제가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제가 모실테니, 정신 잃지 마시고 조금만 버티십시오.” 선 채로, 자신이 흘려낸 피웅덩이 속에 선 채로 벽에 기대 있었다. 피를 쏟아내며 서 있었다. 그런 칼리안을 부축해 일단 깨끗한 곳에 눕혔다. 그랬음에도 바닥에 댄 키리에의 한쪽 무릎이 어느새 축축하게 젖었다. 키리에가 급한대로 걸치고 있던 로브를 찢으려 했다. “왕족 몸에 그런 것 두르면 체포됩니다.” 그때, 이런 말과 함께 깨끗한 붕대 두 개가 눈 앞에 들이밀어졌다. 생사가 오고가는 마당에 그런 것이 죄가 되겠냐만은, 나름대로 키리에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임을 알았다. 그래서 키리에는 붕대를 건넨 드미레아에게 감사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숙여보인 뒤 그것을 받았다. 축복의 힘이 있으니 이대로 안정을 취할 수 있을 상황이면 붕대고 뭐고 그냥 두는 것이 낫겠으나. “바깥 상황은 어떻습니까.” “대치중입니다.”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했다. 레넌의 사병이 왔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왔다. - 가능한 빠르게 해결하고 바로 돌아 올 생각이지만, 형님 상태를 브리센 후작도 알고 있을 거야. 어쩌면 브리센 자작이나 다른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수도 있어. 플란츠가 쓰러지고, 카에라의 기사를 공격해 잡은 뒤 키리에를 부르고, 플란츠의 상태를 확인한 이후에 바로 밖으로 뛰었다. 어느새 재빨리 레이븐을 데리고 나온 얀으로부터 고삐를 전해 받은 칼리안은 쓰러진 기사를 제압한 키리에를 만났다. - 키리에. 너는 형님 모시고 빌헬름 관으로 가. 자세한 건 형님의 시종이 전달할거야. 방금 잡은 저 놈은 발칸에 넘겨. 그리고 지그프리드로 가서 지금 상황 알려줘. 나머지는 드미레아가 알아서 결정할거야. 얀. 너는 밖으로 나가지 마. 대신 스승님께서 분명히 나오시려고 할 테니 그러시지 못하게 해줘. 이 일은 왕자와 귀족의 자리 싸움으로 끝나야 해. 내전이 되어선 안돼. 그렇게 상황을 전달한 칼리안이 먼저 출발했다. 그리고 드미레아에게 내용을 알린 키리에가 저택을 찾았을 땐 어느새 레넌의 사병이 모여들고 있었다. 아직 칼리안을 찾기 전이었다. ‘그냥 다 죽여 없앨까. 가능할까.’ 그들을 지켜보던 키리에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즈음. 드미레아가 기사들을 이끌고 왔다. 칼리안의 기사단을 보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직접 찾아왔다. 와주었다. 그 덕에 곧바로 저택에 들어오게 된 키리에가 이렇게, 살아있는지 알 수 없을 모습으로 서 있던 칼리안을 찾아냈다. “길을 내 드릴 테니 왕궁으로 먼저 가십시오. 저들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창 밖에 어른거리는, 레넌의 사병들이 만들어낸 불빛을 보던 드미레아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칼리안의 상처를 싸맨 키리에가 칼리안을 부축해 등에 업는 것을 도왔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일 아닙니다.” 칼리안의 기사들만 보호해주기로 했던 것을 치우고 직접 나서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에, 드미레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지그프리드는 지키는 것을 가장 잘 합니다.” 그렇게 지켜내서 왕이 되든 말든. 옹립이고 뭐고 이제 다 모르겠고. 내 오라버니가 지키려고 하는 사람 그냥 나도 같이 지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니 내 정혼자도 내가 지킵니다.” 숙고의 끝에 단단히 선 드미레아가 살짝 웃었다. < 제43장. 멈추지 마시고(5) > 어둠 때문은 아니었다. 앞을 가늠하기 힘들어서 발걸음을 조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 키리에.” “네, 왕자님.” 상처가 심했다. 심각했다. 곱게 들어간 날붙이를 비틀어 빼낸 것이 한 눈에 보였다. 죽기를 바라고 내어 놓은 상처였다. 그런 상처를 입은 채로 서 있던 사람을 자리에 눕히고, 다시 조금 일으켜서는 힘주어 붕대를 감았다. 그 뒤에 다시 부축하여 등에 업고 일어서는 동안, 칼리안은 아프다는 말 한 마디를 안했다. 인상 한 번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저 작고 얕았던 숨소리가 잠시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키리에는 이제 막 걷는 법을 배운 것처럼 걸었다. 아프다는 말 못하는 사람이 숨을 또 참을까봐, 발등 위에 귀한 유리잔을 올려둔 것처럼 걸었다. “키리에.” “네, 왕자님.” 칼리안이 왕궁 밖으로 나간 후 플란츠의 손에 쥐여진 독 주머니를 찾았다. 그것을 눈 앞에 둔 기사는 자신이 플란츠를 독살하려 한 것이 아니라며 무슨 소리를 했는지 말했다. 그런 그를 빌헬름 관의 마법사들에게 인계하고 왕궁에서 나왔던 키리에는, 에반의 시신이 있던 층의 복도 끝으로 걸어오는 동안 자신이 알게 된 일들을 칼리안에게 알려줬다. 차라리 그 쪽으로 생각을 해야 덜 아플 테니까. 그래서 칼리안은 기어코 그 와중에 생각을 했고, 드미레아에게 다시 무언가 말을 전한 뒤 얌전히 키리에의 등에 늘어졌다. “미안.” “네.” “다음엔, 취해서 업힐게.” 다음에는 다쳐서 말고 술 취해서 업힐게. “네. 알겠습니다.” 등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한순간에 마르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아플지 가늠도 안 될 만큼 다쳤으면서 피에 젖어드는 옷자락에 또 걱정을 할까봐.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 “······ 배고프다.” 배가 고프다고 했다. 계단 한 층을 다 내려가고 다음 계단을 밟던 키리에가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작게 웃었다. 참 칼리안 다운 말이라서, 아까보다는 그나마 조금 나아진 듯 보이는 마음에 안심이 되어서, 그리고 그 말이 꼭 아프다는 소리 대신으로 들려서 웃었다. “곧 왕궁에 가실 수 있으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응······.” 조그맣게 대답한 칼리안이 키리에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곳에 드러누워 있는 기분이 들어서 칼리안도 소리 없이 웃었다. “바나나 많이.” “네. 공자님께 전해두겠습니다.” “고기도.” “네.” “왜 하필, 또 독 주머니를, 줬을까.” 어리광 같이 가벼운 말 뒤에 무거운 이야기가 갑자기 붙어나왔다. 길게 이어 말하지도 못해 중간 중간 숨을 몰아쉬면서 굳이 그 이야기를 꺼냈다. 키리에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것이 신경쓰이십니까.” 정말 어찌나 손이 많이 가시는지. 어리고 연약하신 망할 형님 기껏 살려놨더니 또 절여지게 생겼잖아. “죽이기 전에, 한 번만 때릴, 걸 그랬지.” “때리지도 못하셨습니까.” “응.” 검술은 안 알려주고 독만 준 놈을 너무 곱게 보냈네. 한 대 때렸다고 말해주면 좀 덜 절여질텐데. “그래도 예전보다는 괜찮으실 겁니다.” “그러려나······.” 키리에는 칼리안이 바람 앞에 놓인 마른 모래같은 목소리로 종알종알 떠드는 것도 막지 않고 다 대답을 했다. 아픈 것보단 그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그런데 이젠, 안 싫은가, 보네.” 처음에는 그렇게 미워하더니. “왕자님을 이해하게 되어서 그렇습니다.” “나를?” “네.” “착하네, 키리에.” 저보다 나이 많은 기사를 또 이렇게 어린애 다루듯 칭찬한 칼리안이 졸음 담은 긴 한숨을 쉬었다. 잠을 쫓으려는 듯,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검술도 새로, 배우려면. 안 괜찮을, 틈도······ 없겠지.” “전부 가르쳐주실 생각이십니까.” “응.” 전부 다 가르쳐줘야지. 잊어버리지 않게 곧바로 알려줘야지. “브리센 후작의 시신 근처에 검이 두 자루 떨어져 있었습니다.” “응. 그렇, 더라.” “그것을 미리 알고 저와 그렇게 수련을 하셨던 겁니까.” 몇 개월 전부터 갑자기 키리에의 앞에서만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수련을 하던 칼리안을 떠올리며 키리에가 물었다. “아니. 그냥······.” 칼리안이 물에 잠겨드는 소리로 웃다 대답했다. “혹시 또, 없어질까봐.” 그리고는 자신의 왼팔을 들어 키리에를 툭툭 두드렸다. 언젠가 잃어버렸던 한쪽 팔을 생각하듯이. 키리에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두운 계단의 끝이 보였다. * * * 지그프리드와 브리센. 카이리스에 하나 뿐인 공작과 후작 가문. 그리고 양대 기사 가문. 왕궁 인근의 에이난샤 거리에 사이 좋게 모여 있는 다른 귀족들의 저택과 달리 이 두 가문의 저택은 왕궁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그리고 왕궁을 가운데 두고 서로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 중 지그프리드 공작저는, 시스파니안의 기사였던 퀴트로스가 수도에서 자신의 기사단을 훈련시키는 것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하츠아라가 직접 마련해 준 것이었다. 때문에 하츠아라의 입맛에 맞을 만큼 거대하게 지어졌다. 공작이 수도에서 사병을 육성하는 것을 국왕이 돕는 모양새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겠으나 퀴트로스를 마냥 신뢰했던 하츠아라는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그렇게 했다. 실제로도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 왕궁을 향해 검을 들었던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으니 하츠아라의 이런 이유 없는 신뢰가 영 똑똑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기는 어려울 일이다. 그보다 한참 뒤에 지어진 브리센의 저택은 그런 지그프리드를 경계하겠다는 명분으로 세워졌는데, 후작이 공작보다 큰 저택을 지닐 수는 없었기 때문에 지그프리드보다 약 세 보 정도 작은 넓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에반 브리센의 저택 역시 크다는 소리다. 아무튼 그런 두 가문의 군사가 수도 안에 있음에도 별다른 충돌이 없었던 것은 상대적으로 더 덩치가 큰 기사 집단인 지그프리드가 ‘코끼리'였기 때문이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되는 순한 초식동물 말이다. 그런데. -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의 대치! 그런데 지금 사상 유례 없는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경계는 하되 직접 맞붙은 적은 없던 두 가문의 기사들이 지금 서로를 향해 검을 드리우려 하는 것이다. 다만 그 광경이 참으로 이상했다.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 에반 브리센의 저택을 등지고 선 상태로 레넌 브리센의 사병들을 막고 있었다. 덕분에 지그프리드에서 레넌 브리센으로부터 에반 브리센의 저택을 수비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를 만들어 내고 있으니 이보다 이상한 광경이 또 있을까. 알고 보면 그들이 수비하는 그 브리센 후작저 안에 살아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더 이상할 일이지만 말이다. “내 아버지를 찾아왔는데, 왜 코끼리들이 길을 막는가!” “공작가에 대한 예의를 지키십시오, 브리센 자작.” “브리센 후작님의 안위부터 확인시켜주는 것이 예의 아닌가?” 어찌됐건, 이 밤중에 지그프리드의 후계자 드미레아와 최근 에반 브리센이 ‘대외용 후계자’로 내세우려 한 레넌이 이제 막 힘겨루기를 시작한 참이었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 대해 전해들었을 왕궁에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이 일과 상관 없는 귀족들은 일단 모두 대문을 닫았다. 그리고 날이 밝았을 때 자신이 줄 서야 할 곳을 가늠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후작의 안위를 확인시켜드리는 것이 예의에 해당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마치 지그프리드에서 에반 브리센 후작을 억류하고 있다는 듯 들립니다. 언행에 주의하십시오.” “지금 이것이 가둔 것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억류하지 않았습니다.” 억류 안했다. 죽였다. 당장은 사실을 알리지 못할 지그프리드의 수석 기사단장 로난시테를 향해 레넌이 다시 소리쳤다. “내가 직접 소공작과 얘기할테니 소공작을 부르거라!” “소공작님은 백작의 위계에 맞는 대우를 받고 계십니다. 예의를 갖추시기 바랍니다. 자작.” 그러니까 레넌이 레넌 아빠 집에 왔는데 옆동네 사람이 와서는 ‘우리한테 제대로 인사하면 들여보내줄게’ 하는 모양새인 것이 맞다. 이 중에서 하필이면 옆동네 사람 역할을 맡게 된 로난시테가 속으로 잠시 웃었다. ‘길 막고 통행세 요구하는 놈들과 지금 내가 썩 다르지는 않은 듯 하군.’ 이런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로난시테도 어쩔 수가 없었다. 드넓은 저택 수색이 아직 끝나지 않은데다 지금 레넌의 발을 묶어 둔 채 시간을 끌 만한 다른 명분이 없던 탓이다.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 왜 여기 있는지를 알려준다면 신경을 써보겠다.” “훈련을 위해 나서던 중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하필 내 아버지의 불 꺼진 집 앞에서 말이냐.” “네. 자리를 잡고 보니 하필 불 꺼진 후작저 앞이군요.” 지금 마법 등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레넌의 사병들 뿐. 이 곳에 서 있거나 저택 수색에 나선 기사들은 전부 다 어둠 속을 보는 것에 익숙한 이들이었다. 덕분에 어둠에 잠긴 후작저에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 이미 발을 디뎠다는 것, 그래서 내부를 샅샅이 뒤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 일이 알려지면 지그프리드라 하여 무사할 것 같더냐!” “후작저 앞에서 잠시 쉬던 기사단을 찾아와서 무례를 범한 것은 자작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대가 레넌이라는 사실. 브리센 상단을 거느렸던 적 있었으나 폴룬 상단의 상단주 멜피르 폴룬과는 달리 따로 관리인을 두고 이득만 취했던 머리 나쁜 놈이 아닌가. 그런 놈을 앞에 두니, 비록 억지를 부리는 쪽이 지그프리드라 해도 일단 말싸움에서는 로난시테가 유리했다. 아무튼 그렇게 한참동안 말싸움이 오고 갈 때. - 절그럭. 무거운 금속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꽤 컸고 또 주기적으로 들려온 탓에 로난시테와 레넌 모두 입을 다물고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난시테의 뒤에 도열해있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좌 우로 한 발자국을 움직이며 길을 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무거운 검이 무언가에 부딪혀 나는 소리. 언젠가의 얀이 그것을 두고 무거운 책임감이 만들어내는 것 같다 느꼈던 소리다. - 저벅, 저벅. - 절그럭, 절그럭. 일정하며 규칙적인, 그리고 주저하지 않는 발걸음 소리에 위압감이 담겨있었다. 은색의 검을 허리에 매고,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새까만 체인메일을 덧입은 드미레아가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걸어와 로난시테를 등지고 섰다. 레넌 브리센을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말했다. “브리센 후작은 사망했다.” 정적이, 찾아들었다. * * * 키리에를 걱정해서 피를 지워냈었다. 이번엔 레이븐을 걱정해서 마력을 썼다. 안 그래도 이전에 많이 놀랐는데 이번에도 다쳐서 오면 혼자 있지 않으려 할 것 같아서, 어차피 남은 마력 아껴서 뭐하냐 하고 또 마법을 썼다. “아이는 일단 지그프리드 저택으로 옮기는 중입니다. 소공작께서는 우선 외부에는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지그프리드의 기사 유란의 말에, 키리에의 등에서 내려 레이븐에게 기대고 선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말이든 알겠으니 가 보라는 말이든 해 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진짜 말이 잘 안 나와서 그냥 말았다. “소공작께서 완전히 주의를 끌고 계시니 이곳으로는 사람이 오지 않을 겁니다.” 브리센 저택 뒷편의 얕은 언덕. 안전히 몸을 뺄 수 있고 인적이 없을 곳에 레이븐을 내려 둔 칼리안이었다. 처음부터 사병들이 오지 않을 장소를 물색한 것이었으니 다른 이들이 여기까지 올 가능성이 적었다. “그래도 왕궁까지 저희가 모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칼리안이 짧게 답했고 키리에가 입을 열어 설명을 더했다. “왕궁 인근에 지그프리드의 기사가 보이면 좋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 쯤이면 왕궁에서도 아마 사람을 보냈을 겁니다. 그 때까지는 제가 잘 모셔갈 수 있습니다.” 앨런 말고, 발칸 말고, 지금 상황에 완전히 믿기 어려운 기사 말고.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이 서로 칼을 겨누고 있는 이 상황에 왕궁 밖에 있으면 가장 위험할 칼리안을 데리러 올 사람이 있으리라는 말이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유란이 예를 올린 뒤 언덕을 내려갔다. 얼마 뒤, 키리에가 칼리안을 향해 몸을 돌린 뒤 레이븐의 등에 오르는 것을 도우려 팔을 뻗었다. 그러다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칼리안의 앞을 막고 섰다. ‘발 소리.’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이 곳에 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시만 계십시오.” 키리에의 손이 천천히 검 손잡이에 가 닿았다. 칼리안은 여전히 레이븐에게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키리에가 있으니 걱정할 일이 있겠나 싶어서였다. 조금씩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기 시작함에 따라 키리에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열 다섯 명, 한 명.’ 말 발굽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기사의 것으로 생각되는 열 다섯 명,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의 발걸음 소리가 났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귀를 기울이던 키리에의 얼굴에 조금 놀란 빛이 스쳤다. ‘설마.’ 곧 키리에가 검 손잡이에서 손을 놓은 뒤 칼리안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왕자님.” “왕궁에서 왔어?” 칼리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 맘 편히 왕궁으로 돌아가서 좀 쉬다가 바나나도 먹고 고기도 먹으면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여기 있는 걸, 용케 알고, 왔네.” “그런데······.” 어울리지 않게 키리에가 말을 흐렸다. - 저벅, 저벅.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감았던 눈을 뜬 칼리안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 자빠져 누워있다 깼으면 얌전히 잠이나 처 잘 것이지. 저 놈. 저 웬수같은 놈. 저 망할 놈. 저 새끼. 등등. 많은 단어를 입 속으로 꾹꾹 눌러담은 칼리안이 인내심을 가득 담아 입을 열었다. “저, 분이 여기를, 왜 오셨을까.” 칼리안은 발칸의 기사 중 몇몇의 이름을 일러주며 자신을 데리러 오게 하도록 앨런에게 알렸다. 그리고 딱 그들이 칼리안의 앞에 서 있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 기사들이 당당히 왕궁 밖을 나설 때 더 당당한 모습으로 무단 외출을 한 뒤에, 동생 놈이 말을 어디에 숨겼을지 그 똑똑한 머리로 참 잘 생각해내고 찾아온 완두콩이 맨 앞에 서있다는 것이 문제였지. 심장 쇠약에서 이제 막 벗어난 탓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환자가, ‘저 새끼 지금까지 잘 살려놨으니까 이제 그냥 죽여버리고 앞으로는 속 편하게 혼자 살아야겠다’ 하는 표정을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띄워놓고 있는 중환자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내 아우님께서 오지 않으시기에. 아무래도 죽었나 하고.” “네······ 아무래도 곧 그렇게 되겠네요.” 간신히 대꾸한 칼리안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기껏 살려놨더니 또 꾸물꾸물 기어나온 희끄무레한 꼬락서니를 보고 있다가. “망할 완두콩······ 파릇파릇하네······.” 잘 살아있는 것 확인한 김에 찰진 욕을 한 번 해 준 뒤에. - ······ 풀썩! 비로소 정신을 잃었다. < 제43장. 멈추지 마시고(6) > 레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드미레아가 눈을 찌푸렸다. 곧 드미레아가 허리 뒤로 팔을 돌려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손가락을 전부 붙인 채 곧게 펴진 모양. 지그프리드의 수신호였다. - 대기. 공격하지 말고 대기하라는 뜻이었는데, 그것을 보인 이유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섣불리 분노하거나 덤벼들지 말고 기다려라.’ 레넌이 고개를 숙였다. 일그러진 얼굴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주 작지만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분명한 웃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귀족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 하지만 지그프리드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기사들은 겪어보지 못했을 상황. “아······!” 속삭이는 듯 흘러나온 작은 탄성. 에반 브리센의 사망 소식을 접한 레넌은, 기뻐하고 있었다. 그래서 드미레아는 대기를 지시했다. 지그프리드에서는 상상해본 적 없었을 반응을 접한 기사들이 혹시라도 동요하여 검을 뽑을까 우려되어서 그리 하였다. “브리센 자작. 내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해보는 것이 먼저 아닌가.” “아, 그렇군.” 너무 기쁜 마음에, 그만. 레넌의 이런 행태를 지켜보던 드미레아가 뒤에 있던 기사를 향해 무언가를 지시했다. 곧, 칼리안의 것이 아닌 다른 검은 천에 덮여 있는 시신이 드미레아와 레넌의 사이에 옮겨져 왔다. 슬쩍 그 천을 열어 에반을 확인한 레넌이 피에 절은 시신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레넌의 옆에 있던 누군가가 레넌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의 말을 들은 레넌은 더 이상 웃음을 흘리지 않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지그프리드에서 내 아버지를 해쳤음을 확인했다.” 대신에 이런 말을 했고, 방금 전 레넌에게 귓속말을 전한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레넌 대신 머리를 써 줄 만한 자를 곁에 둔 것이리라 생각한 드미레아가 레넌을 물끄러미 보다 물었다. “곧바로 우리를 지목하다니. 판단이 성급하군.” “너희들이 저택을 막은 사이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누구를 의심하겠느냐.” “입이 가볍구나, 브리센 자작.” “말을 제대로 하거라, 소공작.” 이제 나는 브리센 후작이다. 들뜬 얼굴로 이렇게 덧붙이려던 레넌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보니 아이가 있었을 텐데. 어디 있지?” “······ 아이라니.” “내 딸이 이 곳에 있는데. 아마 6살인가 7살인가······ 그 쯤 됐을 텐데. 죽었나?” 아무렇지 않게 물어오는 말. 드미레아는 여전히 등 뒤에 올려둔 손바닥을 다시 한 번 펼쳐야 했다. 기사들을 향해서, 그리고 스스로를 향해서도 ‘대기’를 명했다. “저택에 어린 아이가 있었던가.”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보듯 이렇게 말하며 잠시 생각할 시간을 만들어냈다. - 조금 이상하구나. - 무엇이 이상합니까? - 브리센 후작이 자작의 상단 활동을 갑자기 지지할 이유가 없다. 브리센의 자금으로 상단을 꾸린 것만으로도 가문에서 추방하겠다 해가며 싫어하더니 갑자기 자작위를 내어 주고, 또 상단을 전폭 지원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구나. - 레넌 브리센이 검을 쓰지 못한다 하니 살 길을 만들어 준 것 아니겠습니까. -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 그리 생각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구나. 그러다 문득, 오래 전 언젠가 세리에와 얀이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긴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고 기억하기에는 당시 드미레아가 많이 어렸으나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신기하게도 생각이 났다. 칼리안이 아마도 브리센의 후계일 것이라 했던 그 어린 여자 아이. “자작에게 딸이 있었던 줄은 몰랐군. 결혼을 한 줄도 몰랐는데.” “내 사정까지 소공작이 신경 쓸 이유는 없지. 그래서, 아이는 정말 없었나?” 레넌이 이미 결혼을 했다는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랬으니 레넌에게 자식이 있으리라는 생각도 못했다. 소문 없이 결혼을 할 만한 위인은 아니니 아마도 혼전에 생긴 자식일 텐데. ‘그 에반이 꽤 의외의 선택을 했군.’ 그레이 브리센과 에반 브리센의 좋지 않은 관계. 그레이 혹은 레넌을 후계로 삼지도 못했던 에반. 그레이 브리센도 검의 길에 올랐던 자였다. 에반이 자신의 자식이 검의 길에 오르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브리센을 이끌어 온 모든 가주가 검의 길에 올랐던 것은 아니었으니, 그냥 적당히 자라서 검술이나 이어받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레이가 검의 길에 올랐다. 그것을 알자 에반은 그레이를 변경백으로 만들어 멀리 쫓아버렸다. ‘그레이에게 아들이 있다 했다. 그레이를 경계하는 줄은 알았지만 그레이나 그레이의 아들을 후계로 삼느니 레넌의 숨겨진 딸을 데려와 후계로 삼을 만큼, 레넌의 딸을 넘겨 받고 비밀에 부치는 것을 대가로 자작위를 주고 상단을 지원해 줄 만큼이었을 줄은 몰랐군.’ 칼리안의 핏줄에 대해 그렇게 거부 반응을 보였던 에반이, 남몰래 태어난 아이를 후계로 둘 생각을 정말 했다는 것이 놀랍다. 그 아이를 낳은 이는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 드미레아가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까지도 레넌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비밀 유지를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을 가장 확실하게 실행시켜 오던 브리센에서 무슨 짓을 했을지는 뻔했다. 생각, 추측, 확신을 마친 드미레아가 결정을 내렸다. “아이는 없었다.” 제 자식 팔아 잘 먹고 잘 살았던 놈에게 그 자식 다시 넘겨줄 수가 없어서 그렇게 말했다. 게다가 레넌은 이제 곧······. “그래.” 아이는 직접 찾아보면 될 일이라 여긴 레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 대단한 코끼리들도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 드미레아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등을 돌리고 죽은 시신이 없습니다. - 시신 중에 일반 사용인은 없습니다. - 두 번 이상의 공격으로 사망한 것은 에반 브리센 뿐입니다. 이딴 놈들도 사람이라고, 칼리안은 도망가는 놈들도 내버려 두고 일반인도 내버려 두고 덤벼드는 기사들과 에반만 죽였다. 살아남은 이들이 저택을 빠져나가 도망치는 것을 그냥 다 놔뒀다. 그들이 입을 열 것을 걱정하지 않은 것도 아닐 텐데 놔줬다. 그래서 드미레아도 지금껏 검을 뽑지 않았다. 일단 참았다. “소공작님.” 그때 누군가 드미레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기사 유란이었다. 유란은 다른 말 없이 드미레아를 향해 살짝 눈짓을 했다. 드미레아가 소리 없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에 작은 웃음이 어려 있었다. 칼리안을 안전히 빼냈다는 의미임을 알아들었다. 그렇다는 것은 곧, 더는 저 놈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다. “레넌.” 작위도 성도 없이 이름만으로 불린 레넌의 얼굴이 한껏 찌푸려졌다. “나는, 손 대지 않은 이에 대한 근거 없는 내용을 내 가문에 덮어씌우려 한 그대의 발언을 불명예로 간주하겠다.” 드미레아의 손 끝에 힘이 들어갔다. 주먹을 쥐어 보였다. 뒤에 도열해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길게 늘어섰다. 그리고 언제든지 검을 뽑을 자세를 취했다. 순식간에 전투 태세를 마친 검은 체인메일의 기사들을 본 레넌이 저도 모르게 한 발을 물러섰다. ‘도와줘서 고마워, 드미레아. 후작이 죽은 것을 알리고 겁을 좀 주면 레넌은 알아서 물러날거야. 그 이후는 내가 해결할게.’ 드미레아로부터 살기가 흘러나왔다. 레넌은 느끼지 못했으나 그와 함께 있던 사병들과 기사들은 분명히 느꼈다. “아무도 죽이지 마라.” “네, 소공작님.” “죽이지만 않으면 어디를 잘라놓든 용인하겠다.” “네. 소공작님.” - 채재쟁! 채앵! 채앵! 로난시테가 대답함과 함께 기사들의 검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일제히 뽑혔다. 레넌 브리센의 얼굴이 푸루죽죽하게 변했다. 드미레아가 레넌을 쳐다봤다. 지독히 화가 난 청회색 눈으로 레넌을 보면서, 드미레아가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다. “나는. 레넌 브리센만 상대하겠다.” - 채앵! 은빛의 검이 뽑혀 나왔다. * * * 그래. 연두색 그거. 내 눈동자 색 그거. 동그란거. 퍽퍽한거. 달달한거. 오지말걸. “저······.” 저 미친 동생 새끼가 지금 나한테 뭘 갖다 붙였냐고. 라고 하면. 저 놈이 지껄인 말 뜻을 추측하던 기사들이 확신을 하게 될 것이다. 다급히 고개를 돌리는 꼴들을 보아하니 이미 많이 늦은 것 같지만 여기서 화까지 내면 돌이킬 방법이 없다. 피망이랑 안 익은 양파 못 먹는 것도 소문났는데 이 이상은 안 된다. 못 들은 척 하자. 독 주머니를 받았을 때보다 조금 더 빠르게 사고를 마친 플란츠가 열었던 입을 도로 다물고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기회는 이 때 뿐이라는 듯, 마주치자마자 말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짖은 뒤 일생일대의 대업을 달성한 자의 그것과 같은 얼굴로 쳐다보고는 졸도해버린 정신 나간 동생 놈을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잠깐 하늘을 봤다. ······ 점점이 박힌 별이 전부 다 완두콩으로 보이는 것 같아서 그만두고 다시 앞을 봤다. 하기사.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겠나.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플란츠는 결국 짧은 한숨을 쉬며 감정을 털었다. 진작부터 칼리안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어왔을 딱 한 사람은 아무것도 못 들은 듯 행동했다. 키리에. 사실 반응할 정신이 없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키리에는 나무 아래로 떨어진 새끼 새를 둥지에 올려두는 것 같은 손길로 칼리안을 부축해 레이븐의 안장에 올려 앉혔다. 무릎까지 굽혀가며 칼리안을 잘 태워준 레이븐이 푸르릉 소리를 냈다. 칼리안을 향해 시선을 둔 플란츠가 말했다. “보는 눈 많으니 가리고 가.” 레이븐의 위에 엎어진 것이 누구인지 추측을 하는 것과 그것이 칼리안임을 눈으로 보고 확신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 아닌가. 게다가 귀족들은 이미 모두 대문을 닫았다지만 그들의 눈과 귀를 대신할 정보원들은 평소보다 더 많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네. 알겠습니다.” 이미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말하는 대신 짧게 답한 키리에가 자신의 로브를 벗으려 하자 플란츠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너도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 “급히 나오느라 다른 것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이 곳에서 시간을 끌어 봐야 칼리안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더 고민할 것 없다는 듯 제 망토를 풀어내어 키리에에게 건넸다. 레이븐의 안장에 매여 있는 가방 안에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을 새카만 여벌 로브가 두 장쯤 더 들어 있다는 것을 플란츠는 물론 키리에도 몰랐던 터라. 금색 자수가 들어간 새하얀 망토. 그것을 다른 말 없이 받아 칼리안을 덮어준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플란츠 왕자님의 말이 있는 곳까지 제 말을 타고 가십시오. 함께 모시겠습니다.”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에 오르는 대신 함께 온 기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다섯 남고. 나머지는 칼리안 왕자 데리고 돌아가도록.” ‘나머지'에 해당되는 열 명의 기사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키리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왜 기사를 나누십니까.” 플란츠가 레이븐 위에 엎어진 칼리안을 쳐다보더니, ‘제발 잠시라도 좋으니 눈 좀 떠서 내 말을 들어주면 안 되겠나’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득 담아 긴 말을 꺼냈다. “내 아우님께서 저렇게 허약하신데. 형이 된 입장에서 그런 아우님을 호위도 없이 보내드릴 수는 없지.” 어쩌다보니 어린애 둘이서 별 것 아닌 일로 힘 겨루기를 하다 결국 머리채 붙들고 싸움 난 것 같은 판에 끼어든 기분을 애써 치운 키리에가 플란츠를 쳐다봤다. “플란츠 왕자님은 바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플란츠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애초부터 얼굴 가릴 생각 없이 이 곳까지 당당히 온 듯한 차림의 플란츠를 잠시 바라보던 키리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혹시 이 곳에 왜 오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겸사겸사.” 칼리안이 참 좋아할 만한 말을 꺼낸 플란츠가 고개를 돌리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내꺼. 찾으러.” 연두색 눈의 시선이 닿은 언덕 아래, 거대한 저택이 침묵에 잠겨 있었다. * * * 압도. 애초부터 브리센의 기사들이 아닌 사병이었다. 애초부터 지그프리드의 정예 기사들만 있었다. 유란이 내려간 뒤. 언덕에 올라온 플란츠가 칼리안을 왕궁으로 실어 보낸 그 짧은 시간 안에 브리센 사병의 제압이 끝났다. 사병의 수가 훨씬 많았고, 또 모든 기사와 병사들이 검을 들고 있었으나 소용없었다. 휘두르는 족족 막히고 막힌 뒤에는 검을 잃었다. 지그프리드 기사들의 검을 다섯 번도 받아내지 못하고 검을 놓쳤다. 혹은 베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전투는 순식간에 소강됐다. 그리고 레넌은 목젖 앞에서 정확히 멈춘 검을 보며 완전히 질린 얼굴을 한 채였다. - 탁, 탁, 타닥! 짧은 세 번의 타격. 그 세 번의 묵직한 타격에 양쪽 발목이 부러지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질끈 감았던 눈을 뜨니 번뜩이는 은빛의 날이 목을 겨누고 있었다. “상황 정리 끝났습니다, 소공작님.” “도주자는 없나.” “네. 언덕 쪽으로도, 길 쪽으로도 도망친 놈들 없는 것 확인했습니다.” 기사 갑옷 입혀두면 다 기사인 줄 알았던 것 같은 레넌 브리센 때문에 수고했다는 말을 하기에도 아쉬운 상황이라서 드미레아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곧 드미레아가 다시 레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넌은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아는지, 우리가 누구인지는 잊었는지, 대체 너희들 갑자기 왜 이러는지, 그 아픈 와중에도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비로소 한 가지를 정해서 입을 열었다. “브리센 후작을 해한 것에 대해서도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브리센 후작령에서 군대를 이끌어 올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든, 그때 너는 어차피 이 세상에 없을 테니 신경 써 줄 필요 없다.” “너는 무사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왕궁에서 분명 이 일에 대한 죄를 물을 것이다, 소공작.” 드미레아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더 이상 말을 나누기도 싫었던 까닭이다. 대신. - 툭! 무언가가 레넌의 앞에 던져지듯 떨어지며 드미레아를 대신한 대답을 전했다. “누가 누구에게 죄를 묻는다는 말인지 모르겠군.” 낮고 낮은 목소리가 레넌을 향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레넌에게 참 익숙한 검은 주머니였다. 언제나 독을 준비한 것은 레넌이었고 그런 역할 분담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으니까. 레넌이 크게 벌어진 눈으로 앞을 쳐다보다가, 재빨리 주머니를 집어 들고 무어라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 찾아온 이의 말이 조금 더 빠르게 나왔다. “왕궁에서 개입하면 안 된다고 내 아우님이 그랬다는데.” 생소한 의복. 금사로 수놓아진, 무릎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재킷. 가슴 부근에 새겨진 카이리스의 문장. 그리고. 등이 아닌 한쪽 팔뚝에 새겨진 분명한 발칸의 표식. “내가 내 아우님 말을 잘 안 들어서.” 매일 하던 식상한 왕자 말고. 발칸 부군단장으로 찾아 온 플란츠가 레넌 브리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와 함께, - 콰아아앙! 콰앙! 쾅! 지축을 흔들며 터져나오는 굉음이 뒤이었다. 저택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영원히 묻어버리겠다는 듯이. < 제43장. 멈추지 마시고(7) > 왕궁에서 나서면 안 된다는 말 이해 못한 것이 아니다. 플란츠가 제대로 일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 플란츠가 왜 쓰러졌는지 모르는 상황. 뒤늦게 독 주머니에 대한 내용을 전해들었다 하더라도 정보가 한정적인 상황. 그런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음을 안다. 그런데 플란츠가 눈을 떴고, 상황이 바뀌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독 주머니를 손에 쥔 레넌이 앞에 서 있던 플란츠를 향해 물었다. “처음 보는 물건인가.” “네.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생각을 안하네.” “그······ 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레넌은 여전히 전혀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었다. 의사소통에 있어 답답함을 느낄 필요도 없는 놈이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아주 친절해진 마음으로 긴 말을 꺼냈다. “어차피 브리센이 곧 증거 아닌가. 그 브리센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숨기는지, 어디를 뒤지면 증거가 나오는지.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앞에서 왜 발뺌을 하는지 모르겠군.” 브리센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 그것이 바로 플란츠 아니던가. “플란츠 왕자님. 서운합니다.” 플란츠가 발칸의 제복을 입고 온 것이 무슨 의미인지, 어떤 생각으로 왕자 말고 발칸 부군단장으로 왔는지를 알아볼 수 없는 레넌이 어색한 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제 아무리 날뛰어 봐야 우리 없이는 세자위를 넘볼 재간도 없는 놈이.’ 당연하겠지만 여전히 이런 착각을 하고 있는 레넌이라. 분명 그런 말을 꺼내지 않을까 예상했으나 그래도 꺼내지 말았으면 했던 뻔한 것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왕비께서 그런 일을 당하셨다 하나 그래도 브리센은 엄연히 왕자님의 외가이자 같은 핏줄 아닙니까. 그러니,” “아.” 플란츠가 작은 소리로 그 입을 막았다. 그리고 한동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버린 탓에 해맑은 웃음이 함께 떠올랐다. “그 말은 좀······.” 플란츠의 손이 검을 향했다. 곁에 서 있다 순간적인 살기를 느낀 드미레아가 급히 플란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죽은 에반은 이 일에 명백히 연관이 있었으나 레넌의 죄까지 밝힐 수 있는지는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섣부르게 이 자리에서 레넌을 죽여버리면 곤란해 질 수 있었다. 때문에 말리려 했다. “······ 짜증나는데.” 하지만 플란츠의 손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플란츠가 묵빛의 검을 제 손에 꽉 쥐었다. 그 뒤에는. - ······ 뻐억! 검집 채로 들어올린 그 검으로 레넌의 턱을 후려쳤다.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던 레넌의 턱이 바스라지는 소리를 냈다. 가늘다 할 수 없을 몸이 살짝 떴다가 떨어지며 나뒹굴 만큼, 플란츠는 정말 온 힘을 다해 갈겼다. 겸사겸사. 칼리안에게 배운 ‘참지 않기’도 복습하고 여기 있는 기사 중 특정 다섯 명의 머릿속에서 연두색의 동그란 무언가도 깨끗하게 지워버린 플란츠가 바로 그 다섯 명의 기사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거품 물고 기절한 ‘내 핏줄’ 치우라는 뜻이었다. 플란츠의 과묵함에 이미 적당히 익숙해져 있던 기사들이 빠르게 다가와 레넌을 질질 끌고 갔다. “괜찮으신 겁니까.” 곁에 있던 드미레아가 물었다. 드미레아는 방금 전 플란츠가 누구에게 뭘 휘둘렀는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평온한 얼굴을 한 채 어느새 인원이 불어나 있는 발칸의 기사들에게 줄줄이 붙잡힌 레넌의 사병들과 그 옆에 널브러진 레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가.” 창백한 낯빛이나 방금 전의 일로 생겼을지 모를 마음의 상처나 예상치 못한 이 상황. 그 중 어떤 것에 대한 질문인지 몰라서 이렇게 대답을 했다. “굳이 오셔서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들으셨습니다.” “굳이 온 게 아니라 책임지러 왔으니 상관 없어. 말은 예상했고. 익숙하기도 하고.” 칼리안이 잘 가르쳐줬다.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이렇게 해석할 줄은 놈도 몰랐겠지만 아무튼 플란츠는 잘 배웠다. “칼리안 왕자님을 대신해 책임을 지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내 아우님은 이걸 책임 질 필요가 없으니까. 그리고 전하나 마나실 백작보다 내가 오는 것이 책임지기 좋지 않나.” “칼리안 왕자님도 그렇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에반이 플란츠에게 독 주머니를 건넸다. 그것을 알았다 해도, 르메인이나 앨런은 공식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독 주머니의 출처를 파악하고 관련자를 찾아내는 과정을 거친 뒤에야 처벌하겠노라 나설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플란츠는 아니었다. 멋대로 집 한 채를 태워도 좋고 심증만 가지고 군사를 부려봐도 되는 사람. 문제가 없으면 좋고 문제가 있으면 르메인이나 앨런이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칼리안의 가르침에 대해 플란츠가 이해한 ‘책임’의 활용법이었다. 그런 배움의 결과로 브리센 후작저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덤으로 레넌도 체포했다. 한 대 때려놓기도 했다. 드미레아가 여전히 아주 잘 타고 있는 저택을 다시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마력탄이라도 가져오셨습니까. 발칸의 마법사들은 데려오지 않으셨을 텐데 불이 잘 붙었네요.” “말고. 깎일 급여 없어서 드러내놓고 사고 못 치는 미친 마법사 가져왔는데.” 왕궁에서 나가게 되면 살아야 할 집에서 피비린내 날 일 없도록, 플란츠 취향에 딱 맞을 새 집 잘 짓고 살게끔 원래 있던 칙칙한 저택 꼼꼼히 잘 태우고 있는 누군가를 생각한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왕자님의 형님이신 부군단장님 돕는 것이 아니라 왕자님의 형님이신 부군단장님 도우려는 왕자님을 돕는 겁니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인원 열 다섯 명만 데리고 먼저 달려간 플란츠를 대신해 추가로 서른 다섯 명의 기사를 이끌고 오겠다 하면서, 도무지 뭔 소린지 플란츠도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든 이상한 말을 지껄이며 흥얼거리던 마법사. 진짜 미친 그 마법사 생각이 난 까닭이다. “아. 네.” 누가 왔는지는 뻔했으나 적당히 모르는 척 해달라는 말임을 잘 알아들은 드미레아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완전히 태우기 전에는 절대 꺼지지 않을 것이 분명할 얼음 마법사의 화염을 바라보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플란츠가 대답 없이 드미레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하라는 의미로 알아들은 드미레아가 말을 이었다. “후작의 저택에서 레넌 브리센 자작의 딸을 찾았습니다.” “······ 후작이 후계로 키운 아이인가.” “네. 추측으로는 그렇습니다. 브리센 상단과 자작위를 대가로 후작저에서 맡아 키우던 아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레넌이 탐내던 브리센 후작의 자리. 하지만 그레이에게 잠시 넘겼다가 플란츠가 다시 가져오려 했던 자리. 그래서 레넌에게는 안 넘기려고 플란츠가 이렇게 직접 찾으러 온 자리. “후계로 정해둔 아이가 이미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저도 의외라 생각중입니다. 다만 아직 어린 아이라서 자작에게는 알리지 않고 지그프리드 저택에 일단 옮겨두었습니다. 알려지면 자작과 함께 처형될지 어찌될지 알 수가 없어서 제 임의로 숨겼습니다. 저희 남매가 어린 아이들에게 좀 많이 약해서요.” “그런 얘기를 나에게 잘도 하는군. 소공작.” “지금 왕자님 아니고 발칸 부군단장이지 않습니까. 상관 없는 일인 척 흘려 들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플란츠의 의복을 살짝 쳐다본 뒤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해오는 말에 실소한 플란츠가,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다른 곳에는 비밀로 해두고 브리센과 관련되지 않도록 제가 알아서 잘 보호할 예정이니 신경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혹시라도 브리센 자작이나 변경백에게 갑작스레 듣기보다는 내용을 미리 알고 계시는 것이 나을 듯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플란츠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에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참고하지.” 그리고 이렇게만 대답했다. * * * 둘째 아들이 갑자기 쓰러졌다. 셋째 아들이 집을 나갔다. 셋째 아들이 다쳐서 돌아왔다. 둘째 아들이 대신 나갔다. 아들은 분명 셋인데 결과적으로 왕궁 안에는 계속 둘 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한 탓에, 빌헬름 관 치료실 안에 누운 칼리안을 보던 르메인이 걱정과 근심 가득한 긴 한숨을 쉬었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래.” 칼리안은 왕궁에 오자마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곳에 오는 사이 상태가 호전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조금 다른 이유일 것이다. 통증 때문이기도, 신경쓰이는 일이 많아서이기도 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쉬고 있던 히나가 도착하기 전에 칼리안을 찾아온 르메인은, 그래서 한 마디 제대로 된 말도 채 건네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칼리안을 함께 들여다보지 않고 밖에 서 있던 앨런이 이제 막 나온 르메인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잠시만 만나 보고 올 터이니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알겠네.” 무려 국왕을 기다리게 만든 앨런이 고개를 숙여보인 뒤 칼리안이 있는 곳에 들어갔다. 화를 내야지 생각했고 혼을 내야지 생각했다. 그러게 같이 가지 왜 고집을 부렸느냐 말하려 했다. 뭘 했기에 그 엉성한 놈한테 배가 꿰여 왔느냐 물어보든, 찾으러 가겠다 한 것도 거절해두더니 이게 무슨 꼬락서니냐 타박을 하든 하려 했다. “스승님.” 그리고 아무 말도 못했다. 반겨해줘서도 아니고 예쁘게 웃어서도 아니고 그냥 아무 말을 못했다. “저 다녀왔어요.” 이런 말을 하는데 그 대단한 앨런 마나실의 입으로도 해 줄 만한 대답이 영 생각나질 않아서, 그냥 곁에 앉아 머리만 몇 번을 쓸어넘겨줬다. “제가 재워드릴까요.” 이 왕궁에 소드마스터 재울만한 마법사라고는 앨런 뿐이라. 한참이 지난 뒤에 그것만 물었다.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어코 완두콩 소리 나오게 한 그 허연 꼬락서니를 보고 만 터라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어서였다. “헤르츠 경 혹시 있습니까.” “2왕자님 호위 좀 보아드리라 하였더니 아주 세렌티 만나러 가는 길까지 호위를 해 줄 모양입니다. 같이 나가서 안 왔습니다.” “······ 그럴 것 같았어요. 형님께서 발칸 제복 입고 계셨습니다. 아마 레넌 브리센을 체포해 올 겁니다. 헤르츠 경이 갔으면 후작저에 남는 것 없이 싹 태울 테고요. 그러니 레넌 브리센의 저택을 바로 수색해서 증거자료 다 찾아내야 합니다. 그레이 브리센이 곧바로 수도에 올 수 있도록 가능한 빠르게 전달을 해야 하고. 란델 형님 쪽이나 수도 쪽······.” 거기까지 듣던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막았다. “브리센 변경백에게는 이미 전하께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새 변경백 위임도 곧바로 진행하겠다 하셨고 귀족들 사병 움직이는지 제대로 확인하겠노라 하셨으니 그 쪽은 전하께 맡겨 두십시오. 브리센 자작 저택은 바로 수색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후작령 근황 샅샅이 확인하도록 이미 잘 일러 두었고 란델 왕자나 수도 쪽 이상 없는지는 발칸에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왕궁 안에 다른 속셈 가진 놈 있나 잘 살펴보고 솎아내는 것은 제가 싹 해둘 터이니 걱정 마십시오.” “네. 그리고 곧 지그프리드에서 기사단을 보낼 겁니다. 혹시 제가 못 일어나면 스승님께서 신경을 써주세요.” “그리하지요.” “그리고 제가 오래 자더라도 하루에 한 번은 깨워주세요. 상황을······” 꿋꿋하게 입을 열던 칼리안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앨런을 쳐다보다 생글 웃었다. “아닙니다. 그냥 쭉 자게 둬주세요. 나머지는 알아서 해주시고요. 대신 형님께 말을 좀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말을 전해드릴까요.” 그 후 건네진 말에 앨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그만 자라는 듯 칼리안의 머리를 한 번 더 쓸어 넘겨줬다. “그렇게 다른 이들이 걱정되십니까.” 기어코 눈을 떠서 모든 일을 하나 하나 마무리하려 드는 것에 대한 말이었다. 칼리안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늘 혼자 하던 것이 버릇이 되어서요. 고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 그래요. 차차 나아지겠지요.” 앨런이 칼리안을 다시 몇 번인가 쓰다듬듯 어루다가. “아프지는 않으셨습니까.” 부드럽게 웃으며 가장 어려웠던 말을 꺼냈다. 한참동안 앨런을 보던 칼리안이 마주 웃어보였다. 그리고 또 다시 한참이 지난 뒤에 느린 대답을 했다. “조금 아프네요.” 토닥토닥, 앨런이 고생 많이 하고 돌아온 아들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칼리안의 눈이 스르륵 감겨들었다. 앨런의 입에서 나지막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아브턴던트] * * * 후작저는 싹 태웠다. 증거도 없이 그냥 레넌을 체포해 왕궁으로 호송했다. 칼리안이 깼으면 칼리안이 얘기했을 것이고 안 했으면 내가 찾으면 된다. 레넌 턱이 다 부서져서 말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못해도 상관 없다. 결국은 묻는 말에 고개만 끄덕이다 광장의 레니시타 잎 위에 서게 될 테니까. 눈 뜨자마자 일부터 아주 잘 저지른 플란츠가 왕궁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내일 아침이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라도 당장은 잘 돌아왔다. 왕궁에 온 뒤에야 비로소 칼리안의 상태를 확인한 아르센은 딱 제 눈 같은 색으로 얼굴색을 바꿨다. 이미 같은 색 얼굴이던 얀과 키리에가 아르센을 애써 안심시켰고, 그런 색에서 간신히 벗어난 레릭이 가져온 차를 나눠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왕궁에 있는 왕자가 다시 세 명이 되었고, 당장 하루 아침에 두 명으로 줄어들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히나로부터 확인한 르메인도 일단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두 왕자가 저지른 일의 뒷처리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마법사도 같이. “이번 일 말입니다.” 히나가 칼리안을 꾸준히 치료해야 했다. 아르센과 키리에는 히나를 호위하고 있었다. 오늘 사고 한 번 크게 친 플란츠는 왕궁 안전이 확실하게 확인 될 때까지 둘의 호위를 받기로 했다. 그런 사정의 결과로 결국 치료실 양 쪽으로 멀찍이 나뉘어 드러누운 두 왕자 사이에서 호위 노릇을 하게 된 아르센이, 기절하듯 잠시 잠든 히나를 작은 침대로 옮겼다. 그리고 진짜 기절해있는 칼리안이 숨 쉬는 것을 잘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커튼을 내리며 말했다.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부군단장님께서 왕자님 대신 해를 입으실 수도 있습니다. 알고 계시는 것 맞습니까.”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법사, 너.” “부군단장입니다, 부군단장님.” “왕자다.” 제복 벗고 다시 왕족으로 돌아온 플란츠는 이제 져 주지 않았다. “······ 네. 일단 말씀하십시오.” “마법사. 너는 이 일이 내 아우님이 아니라 나 때문에 생겼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 아니었나. 해를 입어도 내가 입는 게 맞다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칼리안에게서 풍겨나오던 어마어마한 피 냄새를 이미 맡았다. 저택 안에 대체 얼마나 많은 시신이 있었을지 가늠이 안 된다. 아무리 브리센 쪽에서 먼저 걸어 온 싸움이라 하나 그 정도의 일은 칼리안 혼자 멀쩡히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언제부터 그런 것을 따지셨는지. 생각보다 형제 사이가······.” 생각보다 형제 사이가 좋았던 걸 몰랐다 놀리려던 아르센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 때문 아니라 레넌의 턱이 왜 부서졌는지가 떠올라서, 오늘은 더 건드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그런데 숨긴 말을 참 잘도 알아들은 플란츠가 대꾸했다. “사이가 좋을 수는 없고.” 잠들기 전 굳이 앨런의 입을 빌리면서까지 전해온 말. - 저택에 누가 있었든 형님께서 잘못하신 것은 없으니, 원하시는 길이라면 멈추지 마시고 발길 돌리지도 마시고 계속 살아가시면 됩니다. 재밌는 일이다. 실리케도 늘 그 말을 했다. 그런데 다르다. 달라서 재밌었다. - 그리고, 검술 배워 왔습니다. 후작가의 후계. 이미 누군가의 것이었던 자리. 그리고 남의 것 뺏기 싫어하는 플란츠. 칼리안은, 드미레아가 그 아이에 대한 사실을 플란츠에게 전하리라는 것도 알았고 플란츠가 신경을 쓰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 신경쓰임이 어디로 이어질지도 잘 알았다. ‘브리센 후작저에서 고양이 키우면서 산다.’ 기껏 꾸게 된 꿈 접어버릴까 고민하리라는 것도 알았다. 칼리안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피 묻히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면서. 피 묻히다 결국 저렇게 다쳤으면서. 그런 말을 굳이 전해주고 잠들었다. “다만 내 아우님이 나를 왜 그렇게 살리려 드는지는 이제 알겠군.” 왜 살려놨는지 칼리안도 완전히는 알지 못하겠다던 그 이유를 플란츠가 알았다. 거둔 생명이 얼만큼인지 보여주는 듯한 짙은 살기. 싸움 중에 생각을 하지 말라던 가르침. 다른 고통 없이 생을 빼앗는 것이 목적인 검술. 놈이 이제껏 지키는 것만 해왔다 했던 앨런의 이야기. 제 손 더럽힌 일이라고는 오로지 텐실의 치유사 없앤 것 뿐이었다던 체이스의 말. 그리고, 데블란. 그 왕제가 뭘 하며 살았는지 눈치채버린 플란츠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아우님께서 참 많이 거절하며 사셨을 말.” 사는 동안 가장 많이 받았을 부탁의 말. 사는 동안 가장 많이 거절해왔을 그 말. “······ 내가 그 말을 해서.” 그 말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눈 감지 않아도 되는 것이 칼리안에게 처음이었으리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루시와 잿빛 새끼 고양이가 생각났다. 그날 꺼냈던 그 말이 칼리안에게 있어서는 고양이만큼 무거운 말이었음을 이제야 제대로 깨달았다. 두 번 다시는 심장 못 팔겠다 싶어진 사람 입에서 작은 웃음 소리가 났다. < 제44장. 잊어버리지 않게(1) > 비로소. 날이 밝았다. 세상이 뒤집혔다. 그렇게밖에는 표현하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하루 아침에, 아니 하룻밤에 에반 브리센이 사망하고 브리센 후작저는 흔적도 없이 타버렸다. 레넌 브리센과 사병들은 알려지지 않은 죄목으로 체포되어 왕궁의 감옥에 갇혔고 그들과 대치했던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공작저로 돌아갔다. 날이 밝기 직전 지그프리드에서 나온 정예 기사단이 왕궁에 들어갔고 아침이 되자 몇몇 기사들, 시종들과 시녀들이 감옥에 갇혔다. ‘에반 브리센이 죽고 레넌 브리센은 다 죽어가는 몰골로 왕궁 기사단에 체포됐다던데.’ ‘지그프리드 공작저는 대문을 닫았다더군.’ ‘텔른 남작 일가는 오늘 아침에 바로 카이리시스에서 나갔다며.’ ‘후작 쪽에 줄 대고 있다가 나간 사람 많다 들었네. 눈치 좀 보다 브리센 변경백 도착하면 다시 들어오겠지. 달라질 것 있겠나.’ 귀족들이 술렁이는 사이, 왕궁은 침묵했다. 밤 사이 일어난 일에 대해 철저한 조사 후 내용을 알리겠다는 이유로 당장은 그 어떤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밤새 일어난 일에 대해 확인해보려 왕궁을 찾았던 이들은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 채 모두 아스트리샤 거리의 카페에 모여 온갖 추측을 내놓고 소식을 교환했다. ‘그런데 혹시 브리센 변경백이 꾸민 것은 아닐까? 요즘 계속 수도에 들락날락 했잖아.’ ‘브리센 변경백이 저지른 일이면 1왕자님이 연관됐을 것 아닌가. 그런데 간밤에 3왕자님의 말을 본 사람들이 많네. 하얀 망토 덮은 사람 한 명 태우고 왕궁에 급하게 들어갔다는데 혹시 3왕자님 아니었을까 하는 말이 나오더군.’ ‘2왕자님도 후작저에 가셨다 했지. 2왕자님께서 도착하시고 나서 후작저에 불이 났다고. 그것 참,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으니.’ 이렇게 모두의 이목을 받게 된 그 왕궁은 마치 외부의 소란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듯 굴었다. 그리고 이틀이 더 지나도록 말을 아꼈다. 조사가 완료되는대로 알려줄 테니 심히 동요할 필요는 없다는 르메인의 말이 한 번 전해진 뒤로 왕궁은 다시 굳게 입을 다물었다. 물론 겉으로만 그랬다는 소리다. 밖에서 본다면 물안개가 내려앉은 이른 아침의 호수 같았으나 그 속까지 고요하지는 않았으니까. 왕궁에서는 모든 기사와 마법사들을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도록 경계하던 상태를 계속 유지했다. 수도 밖에 모여드는 군사가 없는지, 수도 안의 수상쩍은 움직임은 없는지를 민감하게 주시했다. 그리고 브리센의 세력의 움직임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있었다. 그런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빌헬름 관 입구에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왜 또.” “전하께서, 왕궁 밖으로는 절대 못 나가시게 하고, 같이 나가지도 말고, 왕궁 안에서 이동하실 때에는 계속 따라다녀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틀 만에 치료실에서 나와 레릭으로부터 은백색 말의 고삐를 넘겨받은 플란츠의 질문에, 빌헬름 관의 다른 시종을 불러다 자신의 말을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한 아르센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부군단장들이 참 한가하다 생각하겠군.” “원래 일 터지면 제일 바쁜 건 제일 높으신 분 아닙니까. 저희는 잠깐 좀 한가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을 겁니다.” 플란츠는 대꾸도 하지 않고 자신의 말에 훌쩍 올랐다. 그러면서도 멋대로 앞서 출발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모습에 아르센이 슬쩍 웃었다. 물론 그 배려심은 말이 오길 기다려주는 것까지만 발휘되었으므로, 플란츠는 아르센의 말이 도착하기가 무섭게 움직였다. 미리 언질을 해두었는지 몰라도 레릭은 따라오지 않았다. 여유롭게 말에 올라 뒤따라온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디 가십니까.” 플란츠가 대답 없이 고개만 돌려 아르센을 쳐다봤다. 레넌을 만났던 날에 너무 많은 말을 해서 당분간은 입을 열기가 싫었던 탓이다. 덕분에 저 먼 곳 어딘가에 거주하시는 듯한 그런 모습으로 인세에 찌든 놈 내려다보는 눈빛을 또 마주하게 된 파란 머리 마법사가 심기 불편한 얼굴이 됐고, 그제야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북문.” “북문 쪽에는 숲 밖에 없는데요. 숲에는 왜 가십니까?” “옆.” 북문, 옆. 그 곳에 뭐가 있는지는 잘 알았다. 때문에 아르센이 마뜩치 않다는 얼굴을 하며 물었다. “레넌 브리센 저택에서 이미 독초며 거미 독이며 싹 나왔는데 레넌을 굳이 또 만나실 필요 있겠습니까.” “말고. 기사.” “카에라에 숨어 있던 기사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매일매일 같은 집무실에서 지지고 볶고 지내 온 시간이 있는 터라 이런 식으로라도 대화가 이어지기는 했다. 길어진 것이 플란츠의 말이 아니라 아르센의 독해력이라는 다소의 문제가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플란츠에게 처음으로 독 주머니를 넘겼던 기사를 보러 가겠다는 말이었으니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플란츠를 계속 따라갔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했다. “귀족들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데, 에반 브리센을 누가 없앴다고 알릴 생각이십니까.” “아직.” 르메인에게 조금만 시간을 벌어달라 한 뒤 아직 그것을 결정하지 못한 플란츠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고 아르센이 말을 이었다. “레넌 브리센이 벌인 일이라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처음에 독 주머니 보낸 것도 레넌이고, 에반 죽이고 저택 태운 것도 레넌이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요.” “놈이 무슨 수로 소드마스터를 죽였다고 할 건데.” “독······?” “브리센 생각을 하더니 브리센처럼 생각하네.” “고생해가며 저택 태워드린 사람한테 무슨 그런 욕을 하십니까. 그냥 멍청한 소리 말라고 하십시오.” 플란츠가 아르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두면 정말로 멍청하다는 소리를 할 것 같아서,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본래는 에반이 왕자님을 먼저 습격하도록 만들려 했습니다. 에반이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수를 만들었었고 저는 왕자님의 검은 조약돌을 그레이에게 전했었는데 일이 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틀어진 겁니다.” “알아.” 그레이가 란델을 만나기 위해 왕궁에 찾아왔던 날, 그레이의 마차 문이 드나드는 사람 없이 고요히 열렸다 닫혔던 그 때. 투명화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아르센이 그레이를 만나 칼리안의 계획을 전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말인데, 제온에서 에반 브리센을 죽인 것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다각거리는 하얀 말 위에 내리쬐는 가을 햇살 받으면서, 참 고고하게 앉은 채 아르센을 보던 플란츠가 대답을 전했다. “소드마스터도 죽일 수 있을 이들이 포함된 미상의 조직이 주변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면 사람들이 참 좋아하겠군.” “아니면 그냥 왕자님께서 하신 일이라 말하면 안됩니까?” “내 아우님께서 카밀론 대신 체르밀에서 마법사 한 마리 잘 키우다 탑에 가고 싶다 하시면 그렇게 하지.” 마법사의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말. 후작저 없애러 갈 건데 같이 가겠느냐는 소리에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따라와 준 것에 대한 보답인 셈 치기로 한 플란츠가 설명을 더했다. “후작이 내 아우님을 먼저 건드려서 싸우다 후작을 죽였다면 모를까, 내 아우님이 먼저 후작저에 쳐들어가서 죽여버린 것을 알면 귀족들은 내 아우님 절대 안 따를 테니까.” “안 따를 이유는 또 뭡니까. 어차피 왕자님 강했던 것은 이미 다들 아는 사실인데요.” “존경하는 마음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건 한 순간이고. 강한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 있을 사람이라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면 강한 왕이 아니라 폭군으로 보여질 뿐 아닌가. 그런 왕자를 세자위에 올리고 왕으로 삼고 싶어 하는 귀족이 어딨는데.” “여기요. 저요. 저는 좋은데요.” “······ 하.” 보답 끝. “레이븐 돌아다닌 것 다 소문났다던데 그건 아십니까. 어차피 왕자님 거기 가신 것 다들 아는 분위기라 하던데요.” “나간 적 없었다 할 건데.” “검은 말은 레이븐이고 옆에 있던 기사 말은 레이븐 형제 말이고 후드 속에 보인 기사 머리카락은 물색이었다는데 왕자님이 아니었다 하신다고요. 왕자님이 덮고 계셨던 새하얀 망토에는 제 얼굴만한 발칸 문장이 박혀 있었다고 하던데요.” 그 밤에 눈들이 어찌나 밝은지. 예상이야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잠시 왔다 갔다 했을 뿐인데 그 사이 참 많이도 봤단다. 물론 거기까지 플란츠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니었다. “본인이 아니라는데 어쩔거냐고.” 결국 이렇게,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와 생각이 맞는 부분이라고는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좋아하는 플란츠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의 작은 솜주먹 만큼도 없다는 사실만 다시 깨닫게 된 셈이다. 그래도 때마침 감옥 입구에 도착한 탓에, 플란츠는 더 이상의 짜증을 내지 않은 채 말에서 내렸다. 짙은 피비린내가 났다. 이미 그보다 더한 피냄새에 익숙해져버린 플란츠는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저벅저벅 걸어 안으로 들어섰다. 방문을 미리 알려두었던 탓에, 이미 나와 있던 두 명의 기사가 예를 올리며 플란츠를 건물 윗층으로 안내했다. - 달칵 조금 낮은 듯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플란츠가, 밧줄에 몸이 묶여있던 기사의 맞은편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참 오랜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도망갈 길 알려줬더니 여기있었군.” 알려준대로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가 그대로 잡혀들었던 카에라의 기사가 대답했다. “알고 있는 것은 다 알려드렸습니다. 또 무엇이 궁금하신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인데.” 기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플란츠를 보고 있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텐실. 데블란. 어느쪽인지 묻는 거잖아.” 낮은 목소리로 건네진 묵직한 질문. 기사의 눈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 * * 히나가 팔을 올려 쭉쭉쭉 기지개를 켰다. 목숨 아낄 줄 모르는 형제 곁에 있느라, 알려져 있는 유일한 하프엘프 자연치유사인 까닭에 사실상 칼리안 아니라 르메인이나 앨런보다도 더 귀한 신분이어야 할 히나만 갖은 고생을 했다. 그래도 참 튼튼한 칼리안인지라, 이제는 좀 마음 놓고 눈을 붙여도 될 정도는 되었다. 여전히 눈을 뜨지는 못했지만 상처는 많이 회복이 된 것이다. “애옹!” “니아옹!” 칼리안이 누워있을 커튼 안쪽에서 고양이 두 마리의 울음소리가 났다. 아직 일어나지 못한 칼리안의 상처를 루시가 밟기라도 했으면 큰일이다. 깜짝 놀란 히나가 얼른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걱정한대로, 침대 위에서 마음껏 뛰어 노는 고양이 두 마리가 보였다. 대체 언제 들어왔는지 몰라도 그보다 더 신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그리고······. - 오빠. 어디 있어? - 빌헬름 관 수련장이야. 기사들 대련하는 것 봐주고 있어. - 칼리안 왕자님 도망가셨어. 칼리안이 없었다. 정신 못 차리고 계속 잠들어 있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그것을 굳이 ‘납치’가 아니라 ‘도망’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 바나나를 세 송이는 드신 것 같아. 납치 될 사람이 바나나를 저렇게 많이 까먹지는 못 할 테니까. 얀은, 아프다 일어난 칼리안이 바나나를 찾으리라 주방에 말했다. 어쩌다 그 말을 함께 들어버린 발칸의 마법사들 덕분에 소문이 났고 칼리안이 누워있던 치료실에 바나나 선물이 계속 들어왔다. 그렇게 쌓여만 가던 바나나가 꽤 많이 없어져 있었다. “애옹!” 협탁 위에 대체 몇 개인지 모를 만큼 쌓여 있는 바나나껍질을 보던 히나가,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온 루시와 새끼 고양이를 양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 빈 바나나 껍질이 괜스레 웃겨서 한참을 웃었다. * * * 갇혀 있던 기사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빌헬름 관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아르센을 먼저 보내고 체르밀 궁에 잠시 들렀다. 방으로 가는 대신 곧장 수련장으로 향했다. 있으면, 검술을 배우고. 없으면 그냥 혼자 검을 좀 휘둘러 볼 생각이었던 플란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련장 한 가운데 서 있던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기사는 만나보고 오셨습니까.” “그래.” 마치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건네온 말. 그에 대해 짧게 대답한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내 아우님께서는 생에 미련이 별로 없으신 것 같은데.” “그럴리가요. 미련 많습니다.” 지난 번에도 눈 뜨자마자 키리에에게 검술을 알려준다 하다 다시 한 번 크게 앓은 적 있던 놈이 또 이러고 있다. 그 꼬락서니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다녀오신 이야기는 이따 해주세요. 다른 말 들으면 잊어버릴 것 같아서.”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가만히 손을 내리고 오러를 움직였다. - 우우웅! 두 자루의 검. 검붉은 빛을 내는 가늘고 긴 두 자루의 검이 칼리안의 양손에 들렸다. 아직 에반의 검술에 대해 듣지 못했던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형님만큼 머리가 좋질 않아서. 우선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연습은 차차. 일단은 그 좋은 머리에 싹 집어넣는 것 먼저 하라 말한 칼리안이 씩 웃었다. 곧 칼리안이 살짝 살짝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처가 벌써 벌어졌는지 피 냄새가 조금 짙어졌으나 플란츠는 별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천천히 보여드릴테니. 전부 다, 외우세요.” 저것을 알아내기 위해 그 고생을 했는데 더 잊기 전에 싹 다 알려주겠노라 하는 말이었으니 싫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워서였다. “알았어.” 칼리안이 검을 들어올렸다. 하얀 손에 들린 두 자루의 검이 붉은 꽃잎이 되어 허공을 노닐기 시작했다. < 제44장. 잊어버리지 않게(2) > 오랫동안 잠을 잤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채 하루를 보냈다. 그 뒤에는 잠에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깨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반쯤은 여전히 잠에 걸쳐 있었다 하는 것이 맞을 터였다.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혹은 꿈에서 갓 깨어나려는 것 같기도 한 상태로 에반과의 싸움을 끝없이 되새겼다. 어느 때에는 눈 앞에 에반이 있었고 또 어느 때에는 혼자 있었다. 누가 앞에 있든 없든 상관없이 계속하여 검을 놀렸다. 아픈 것을 잊으려 가장 집중할 수 있는 것에 매달렸을까. 아니면 혹시라도 검술을 잊을까봐 걱정을 한 탓일까. 정확한 이유는 칼리안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기나긴 꿈 속을 홀로 보낸 뒤 잠에서 깼다. 검술인지 현실인지 모를 것을 깨우친 뒤에 눈을 떴다. - 꼬르륵. 깨고 보니 배가 고파서 조금 안심이 됐다. 아팠다가 눈을 떴는데 통증보다 허기가 더 크게 느껴지는 정도가 되었으면 다 나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나. 그래서 칼리안은 일단 일어나 앉았다. “배고프다······.” 멍하게 중얼거리고 있으려니 눈 앞에 무언가가 쑥 들이밀어졌다. “아.” 노란 것. 갑작스러운 단 내가 났다. “바나나다.” 반가운 얼굴이 된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바나나에 정신이 팔려서, 그 샛노란 것을 건네준 게 연두색의 파릇파릇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조금 늦게 떠올랐다. “아.” 완두콩이다. 라는 말을 두 번은 못하고 속으로 삼킨 칼리안이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얼마나 잤는지는 몰라도 꽤 오래 잔 것 같아서 그렇게 인사를 했다. 한동안 그런 칼리안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짧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언제부터 근처에 앉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동생 놈이 예도 보이기 전에 바나나부터 찾은 것은 너그럽게 이해해주기로 한 것 같았다. 플란츠는 칼리안에게 괜찮은지 묻거나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알려주거나 지금 상황이 어떤지 일러주지 않았다. 쓰러지기 직전의 칼리안이 일생일대의 숙원을 이루듯 막 짖었던 것도 탓하지 않았다. “히나, 자.” “네.” 단지 이렇게, 고생한 히나가 자고 있으니 깨지 않게 조용히 하라는 말만 한 뒤에 치료실 밖으로 나갔다. 생각해보니 플란츠 입에서 ‘베른 경’ 소리가 나오면 좀 이상할 것 같아서 플란츠가 히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냥 넘겨듣기로 한 칼리안이 말 없이 바나나를 먹기 시작했다. 먹어도 괜찮은지 확인하지 않은 것을 칼리안의 곁에 둘 얀이 아니었으므로 옆에 놓여 있던 출처 모를 많은 바나나들도 더 가져다 꼭꼭 잘 씹어 먹었다. 갑자기 많이 먹으면 안 좋다고 예전에 히나가 그랬으니까 양껏 말고 적당히 먹었다. 히나 일어나면 분명히 혼낸다. 바나나도 그만 먹으라고 할 거다. 그것을 잘 아는 칼리안은 히나가 깨지 않도록 사일런트까지 발현해가며 조심조심 먹었다. 그 후 마력을 써 가며 남들 앞에 나서도 괜찮은 정도로 알아서 단장하고 비척비척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우는지 웃는지 모를 얼굴을 한 채 칼리안이 잠든 사이 있었던 일부터 알려주는 얀과 함께 체르밀 궁으로 돌아왔다. ‘······ 그래서 기사단 카에라는 대부분 복직되긴 했는데 개편도 하고 기사단 이름도 새로 정하게 될 것 같아요. 전하께서는 지금 아르피아 궁에서 집무 보시는 중이고 마나실 백작은 마법사 협회에 세이렌 경 만나러 갔습니다. 란델 왕자님께서는 다른 용무 없이 체르밀 궁에 계시고 플란츠 왕자님께서는 잠시 만날 사람 있다면서 방금 전에 왕궁 감옥으로 가셨어요.’ ‘그래. 고마워.’ ‘수련장 가실거죠.’ 어디서 어떻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체념한 듯 물어오는 얀에게, 칼리안은 걱정 말라는 쓸데 없는 소리는 빼고 대답을 했다. ‘응. 그래야지.’ ‘알겠습니다. 플란츠 왕자님 오시면 알려드릴게요.’ ‘아니야. 아마 알아서 오실 거야.’ 그렇게, 당장 나서야 할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만 확인한 뒤 수련장에 섰다. 그리고 얼마 후에 플란츠가 알아서 찾아왔다. 칼리안이 검을 잡았다. - 우우웅! - 우웅! 두 자루의 검. 한 자루로 사용하는 검술은 보다 덜 중요했으므로 두 자루의 검을 든 것을 바로 보여주었다. 머릿속으로 정리해 두고 꿈 속에서 그렇게 휘둘러 보았던 에반의 검술을 하나하나 천천히 따라했다. 검을 쥐는 법, 베고, 찌르고, 막는 법. 어깨와 팔을 어떻게 쓰는지, 다리는 어떻게 놀리는지, 발은 언제 어디를 밟는지. 플란츠는 섣부르게 팔을 뻗거나 제 검을 들어 따라해보려 하지 않고 일단 칼리안이 시킨대로 전부 다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자신의 서툰 솜씨가 기억에 함께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 하나의 동작을 전부 보여 준 칼리안이 잠시 멈춰 서서 플란츠를 쳐다봤다. 연두색의 눈이 검붉은 검 끝을 한참 보다 붉은 눈을 향했다. “한 번 더 보여드릴까요.” “아니.” 아무튼 우리 형님은 어찌나 똑똑하신지. 입매를 올려 웃어 보인 칼리안이 다음 말을 꺼냈다. “이제 주고 받은 순서 보여드릴게요.” 주고 받은 순서. 에반과의 공방을 그대로 보이겠다는 말에 이번에는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혹 키리에가 플란츠에게 칼리안이 대련에서 보여 준 동작을 따라해주는 경우가 있었다. 이번에는 칼리안이 에반의 검술을 보여줄 뿐. 다를 것은 없을 터였다. “그래.” 에반의 시선이 되어 가상의 칼리안을 상상했다. 그 후에는 에반이 칼리안의 앞에서 보여준 검술을 똑같이, 다만 훨씬 느린 속도로 재현했다. 밀어올리고 베고 찌르고 막으며 공격하고 서로 다른 방향에서 휘둘러가며, 똑같이. ‘푸욱!’ 칼리안에게 상처를 낸 것, 살을 뚫고 들어간 검을 비틀어 빼내던 것까지 전부 다. 평소 칼리안의 검술을 많이 겪어 보았으니 지금 상상하는 또 하나의 칼리안이 플란츠의 머릿속에도 떠올라 있을 터였다. 덕분에 방금 전의 공격을 본 플란츠가 잠시 눈꼬리를 찌푸렸으나 칼리안의 움직임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에반이 칼리안의 공격을 하나만 막아낸 그 순간까지 플란츠의 눈 앞에서 고스란히 펼쳐 보인 칼리안이 자세를 바로 했다. 싸움이 끝난 것을 안 플란츠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너. 싸우다 말고,” 뭔가에 한눈을 팔았는데. “아직이요.” 외운 것은 더 확인할 필요 없이, 다만 플란츠의 의문은 일단 막은 칼리안이 다시 검을 들었다. “이제 보여드릴 것이 바로 브리센의 검입니다. 제일 중요하니 잘 보고 잊지 마세요. 부족한 부분은 제가 차차 채우며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 알았어.” 짧은 대답이 돌아오고 잠시 뒤. 칼리안의 검이 궤적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에반보다 가볍게, 에반보다 무겁게, 에반보다 빠르게, 에반보다 느리게. 한 동작 한 동작 떨어진 것 말고, 싸울 때 활용하는 것 말고. 비록 중간 중간 부족한 부분은 있지만 칼리안이 보고 배운, 칼리안이 파악한, 브리센의 검술. 그것을 펼쳐 보였다. - 타앗! 두 자루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두 손에 들린 검이 떨어졌다 모여들고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하나의 검으로, 다시 두 개의 칼날로. 서로 떨어진 두 자루의 검이었다가 손잡이를 가운데 둔 하나의 긴 날붙이로. 끊임 없이 모습을 바꾸어갔다. 어느 때에는 지금의 칼리안이 쓰는 검보다 더 힘있게 휘둘러졌고, 또 어느 때에는 드미레아가 쓰는 검보다 더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빈 곳을 채우고 허점을 노려가며 두 자루의 검이 서로를 보완해나갔다. 가벼우나 약하지 않고 무거우나 둔하지 않다. 빠른만큼 더 명쾌하고 느린만큼 더 신중하다. 거리낄 것 없다는 듯 허공을 누비다 어느새 내리꽂힌다. 머뭇거림 없이 휘둘러지다 어느새 숨을 노린다. 검 끝이 남기는 잔상이 바람결에 흩어지는 꽃잎 같았다. 비에 젖어 떨어지는 꽃송이 같았다. 검붉은 빛이 피어올랐다. 피 비린내가 났고, 꽃은 흐드러졌다. * * *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 밖에서는 귀족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안에서는 르메인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냥 잠시 딴 생각을 했습니다. 별 일 아니었는데 집중이 흩어져서요.” 그러거나 말거나. 칼리안은 소 안심 스테이크를 눈에 가득 담으며 말했다. 바로 그 스테이크를 여유롭게 자르고 입에 넣은 뒤 잘 씹어 삼킨 플란츠가 천천히 대답했다. “네가, 집중을.” “네. 제가.” “그래.” 에반과 싸우던 중 왜 다쳤는지를 알게 된 플란츠가 다른 곳에 정신을 판 이유를 기어코 물어왔다. 그래서 칼리안은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 그 집안이 워낙 파릇한 풀밭이라 잠깐 나도 모르게 나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며 명상을 좀 했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대답하기 싫다는 뜻 잘 알아들은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말을 돌렸다. “그래서, 카에라의 기사는 왜 다시 만나셨습니까.” “안 맞아서.” “그 자에게 석연치 않은 부분이 또 있었습니까.” 칼리안이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거위 가슴살 바베큐를 바라보며 다시 물어봤고, 이번에도 딱 그것을 집어들어 잘 먹은 플란츠가 답을 전했다. “휴가 기간.” 곧 플란츠는 딸기우유 빛을 내는 소스가 살짝 얹어진 샐러드를 먹었고, 오렌지 몇 조각이 담긴 탄산수로 목을 축인 후에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멀찍이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칼리안을 향해서였다. “에즈론 지역 출신이 7월 초에 집에 가서 8월 중순에 돌아왔던데. 10년 사이 두 번이나.” 에즈론 지역이면 얼마 동안 집에 머무는 기간을 생각하더라도 한 달 반 정도 안에 충분히 다녀올 수 있었다. 때문에 그 기간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잠시 생각해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7월이니 날짜가 안 맞는 거군요. 리츠 강이 범람하는 시기라 길을 돌아가야 하니까.” 그러더니 ‘아이고 우리 형님 그걸 찾아내다니 참 기특하시네’ 하는 얼굴로 플란츠를 쳐다봤다. 식사 마친 플란츠가 칼리안의 이런 표정을 정확히 봤다. 그래서 플란츠는 이미 내려놨던 포크를 다시 집어들어 조금 전 한 입만 먹고 말았던 스테이크를 큼지막하게 한 점 더 썰어 먹었다. - 내일까지, 아무것도, 드시면, 안 돼요. 큰일 나요. 특히 고기, 절대, 드시지, 말아요. 칼리안이 히나로부터 들은 말 때문이었다. 플란츠에게 브리센 검술 잘 주입시킨 뒤 히나가 찾아왔다. 빈 속에 바나나 세 송이를 먹어치운 것 때문에 혼나고, 그걸 먹고 도망간 것 때문에 더 혼나고, 애초에 다쳤던 것 때문에 또 혼났다. 지옥같은 금식이 시작됐다. 그래서 지금 당근 새싹같은 망할 완두콩이 저렇게 열심히 고기를 처먹고 있는 거다. 고기 냄새라도 맡겠다며 올라와 앉아있는 동생에게 냄새 좋은 고기 먹는것까지 잘 보여주려고. ······ 잔악한 놈이다. 뭐 아무튼. “그럼 다른 증거나 의심점 없이 휴가 기록 하나 믿고 곧바로 기사 만나러 가셨던 겁니까.” “제일 빠르니까.” “하긴. 그건 그렇네요. 직접 만나보는 것만큼 빠른 일은 없으니 말입니다.”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의심되는 구석 하나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직접 만나서 떠보면 될 일 아닌가. “넌.” “저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 눈치챈 건 아니고······ 브리센 자작 턱을 날려버리셨다는데 또 얼굴 마주하고 싶어하지는 않으실 것 같고 나머지 사람들은 굳이 형님께서 만나 볼 필요가 없으니까요. 남는 건 독 주머니 건네 준 그 기사 뿐이라, 기사가 숨겼던 게 또 있어서 만나러 가셨나보다 하고 짐작했습니다.” 플란츠는 대답 없이 잠든 고양이들 위에 손을 댔다. “그래서 그렇게 독 주머니에 대한 정보를 술술 말했던 거군요. 더 중요한 다른 비밀 안 들키려고.” “그게 이상해서.” 애초부터 너무 쉽게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 이상해서 놈의 정보를 확인하다가 10년치 휴가 기록지까지 뒤져 볼 생각을 했다는 소리였다. 참 집요하고 독하다 싶지만 아무튼 덕분에 그 기사가 숨긴 진짜 정체를 알게 되었다. “세크리티아의 새였다니. 그러고보면 세크리티아 쪽 세작이 이미 한 명이 있었는데 더 없으리라는 법도 없었겠네요.” 체이스의 전서구 노릇을 하는 발칸의 기사 한 명도 브리센에 숨어들었던 세작 아니던가. 그러니 데블란의 새가 똑같이 브리센으로 먼저 숨어든 뒤 에반의 공작에 휩쓸려 카에라의 기사로 보내지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크리티아 세작이라고 아우님한테 말한 적 없는데.” “그 새가 다른 말은 안 했습니까. 욕을 했다거나.” 혹은 가시돋힌 말을 저주처럼 남겼다거나. “안했어.” “다행이네요.” 그 기사에게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찾아갔다는 말은 했으나 세크리티아의 세작이라고는 아직 알려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칼리안은 정체를 확신하는 듯 말하더니, 그 자가 다른 말을 한 것이 없다는데 다행이라 대답을 했다. 살짝 찌푸린 얼굴로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께서 고기 냄새가 아니라 피 냄새를 맡고 올라오신 듯 한데.” 밥도 못 먹는 칼리안이 굳이 4층에 올라와 밥 먹는걸 지켜본 이유를 이제 알게 된 플란츠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내 형님께서는 정말 어찌나 눈치가 빠르신지.” “짖을거면 가고. 말 할거면 있고.” “형님에게서 풍겨오는 피 비린내가 짙지 않아서, 저에게 묻어 옮은 것인가 했는데 아니더군요. 그 날 에반 브리센의 저택에서 묻은 것도 아닌 듯 했고.” 대답하지 않는 플란츠를 대신해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새들은 어지간해선 자신이 세작이라 누설하지 않습니다. 입 속에 든 것을 씹어 삼키고 말지. 아닌 새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그렇더군.” “그래서 알았습니다. 감옥 찾아가서 뭘 하셨고 뭘 보셨는지.” 세크리티아의 세작은 입 속에 독을 숨긴다. 플란츠는 그 기사가 데블란의 새가 맞는지 확인하러 감옥에 간 것이다. 기사의 정체를 확신한 것처럼 꽉 쥐고 흔들었을 때 놈이 독을 삼키고 죽으면 세작이 맞을 테니까. 왜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써 가며 세작의 정체를 확인하려 들었는지도 짐작한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 것을 배우시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알아.”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저는 카밀론에 갈 수 있습니다.” “알아. 그것도.” 플란츠는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에 책임을 지고자 했다.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에반 브리센을 누가 살해했는지를 귀족들에게 알려야 했고, 칼리안의 개입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고자 했다. 그러다 그 기사가 세크리티아의 세작임을 밝혀낸다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찾아갔고 시간 낭비 하지 않고 정체를 확인했다. 대신 피 냄새를 묻혀왔다. 기사는 죽었을 것이다. 플란츠의 눈 앞에서 독을 삼키고 피를 토하면서. “무리하지 마세요. 다음에는.” “무리 안했어.” 정말로 잿더미를 구르고 온 플란츠에게, 칼리안이 참 복잡한 기분을 담은 말을 건넸다. “고생하셨습니다.”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됐어.” “네.” 레넌 브리센 턱을 부숴버렸다더니. 그래도 의외로 정말 괜찮은 듯 보여서, 어쩐지 차라리 후련해하는 듯 보여서, 칼리안은 서로 고맙다는 말 안 하기로 했음을 다시 확인하기만 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비척비척 아르피아 궁으로 향했다. 칼리안이 죽여 없앤 에반 브리센. 플란츠의 앞에서 죽어간 세크리티아의 새. 둘의 죽음을 합쳐 이번 일을 해결할 열쇠로도 만들고, 데블란에게 건넬 고양이 똥으로도 만들 방법을 르메인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 제44장. 잊어버리지 않게(3) > 르메인을 만났다. 급히 수도에 도착한 그레이 브리센도 만났다.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눈 떠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앨런에게 좀 보여주고 히나와 아르센을 포함해 이번에 고생한 이들을 며칠씩 쉬게 해 주면 어떨지도 말하고 싶었는데, 에우리아를 만나러 갔다던 앨런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둘 다 하지 못한 채 메시지만 남겼다. 그렇게 내일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뽈뽈거린 칼리안이 체르밀에 돌아왔다. 상처는 당연히 아프고 여전히 배는 고팠지만 기분은 그럭저럭 괜찮아서, 칼리안은 얀 몰래 테라스에 나와 서있는 중이었다. 가을 밤. 바람이 조금 짙어진 기분이 든다. 바람이 부니 언제 들려와도 좋을 목소리가 함께 실려왔다. - 미리 알려주어 고맙습니다. 칼리안 왕자. 플란츠가 알아낸 내용. 세크리티아, 정확히는 데블란의 새를 어떻게 찾았는지. 그리고 바로 내일 카이리스에서 그 새를 어떻게 이용하게 될지에 대해 체이스에게 미리 알리고자 연락을 취했다. 세작과 관련된 문제였으니 양국의 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가 없는 일 아닌가. 그것에 혹시라도 체이스가 신경을 쓰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연락을 보냈다. - 혹시 그럼 발칸에 잠입한 새도 이번에 함께 얽혔을까요. - 아닙니다. 전서구 역할만 해왔던 자라서, 스승님께 그냥 남겨두도록 이야기를 전한 것 같습니다. 칼리안이 정신을 놓쳤던 동안, 플란츠가 체이스의 전서구에 대해 앨런에게 따로 말을 해둔 모양이었다. 덕분에 진짜로 전서구 역할만 했던 그 세작은 여전히 무사했다. - 그렇군요. 사실 이제는 이렇게 연락을 취할 수가 있으니 이만 본국으로 돌아오게 할까 생각을 했는데, 혹시 몰라 남겨 두기로 했습니다. 대신 그쪽에서 열심히 훈련 받으면서 잘 지내고 있으라 전해 놓았습니다. - 혹시 부르시게 되거든 돌아가는 길에 꼭 인사하고 가라고 해주세요. 어쩐지 정이 들어서요. 송별 선물이라도 들려 보내겠습니다. 데블란의 세작에 대한 내용을 전해주고, 진짜 새 노릇을 하고 있는 무해한 세작에 대한 농담도 주고 받은 칼리안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시오나 힐. 또 한 명의 소드마스터. ‘지금 이야기를 할까.’ 행방을 알 수 있을지 도움을 받을까 하던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칼리안에 대한 정보가 어디에서 새어 나가 데블란에게 전해졌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 칼리안이 지금 시오나를 찾고 있음을 섣불리 알리기가 힘들었다. 물론. 체이스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테일란 카스트린에 대한 의심이다. 절친한 사이였으며 존경하는 스승이자 검사이기도 했고 지금은 체이스의 기사인 이였으나 한때는 데블란의 호위였던 이다. 체이스로부터 칼리안에 대한 내용을 모두 전해 들어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믿을 수 있다는 것이 확인 되면. 그 때 여쭤보는 것이 낫겠군.’ 때문에 칼리안은 시오나에 대한 내용 말고 다른 말, 체이스에게 꺼내놓기 조금 어려운 말을 하나 꺼냈다. - 그리고 다른 소식을 하나 더 전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연락을 했습니다. - 네. 얘기하세요. - 이번 일로 브리센 후작을 상대하면서 제가 조금 다쳤습니다. - ······ 다치다니. 체이스의 목소리가 일변했다. 소리가 전해지지 않게 웃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 혹시라도 새들을 통해 아시게 되면 많이 놀라실 것 같아서, 잘 낫고 있다는 것 먼저 알려드리려고요. - 어느 정도로 다쳤습니까. 심합니까. 심하다. 밥을 못 먹고 있다. - 아닙니다. 살짝 스친 정도였습니다. 히나의 치유도 있고 축복의 힘도 있어서 빠르게 회복중입니다. 체이스가 기분을 가늠하기 어려운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 그 정도면 내가 놀랄 것이라 생각하지는 못할 텐데. 여전히 그렇게 거짓말이 서툴러서 어찌하나. - 아,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군요. 사실 살짝이라 하기보다는 좀 더 심하게 다쳤었지만 지금 회복 중인 것은 맞습니다.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님에도 체이스가 긴 한숨을 내쉬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하는 것이 분명해서 칼리안도 짤막한 숨을 내쉬었다. 체이스가 조심스러워진 말투로 말을 건네왔다. - 카스트린 경으로부터 에반 브리센 후작보다 칼리안 왕자의 실력이 나으리라는 말을 들었었는데, 어쩌다 다치기까지 했습니까. - 후작과 싸움 도중에 어린 아이 한 명이 튀어나왔습니다. 언뜻 보았는데 예전 기억이 갑자기 섞여들었습니다. 준비 없이 튀어 나온 기억이 현실과 겹쳐지는 바람에,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잠시 잊어버렸습니다. 칼리안은 베른의 과거를 떠올렸던 것은 빼고 다른 이유만 전했다. 눈앞에서 실리케에게 검을 휘둘렀었는데 에반까지. 플란츠가 에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진짜 내면까지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혹시 또 한번 제 혈육을 향해 비슷한 일을 보여주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싸움 중에 결국 생각을 하게 되어서. - 그러다 저도 모르게 손이 멈춰서요. 칼리안이 굳이 입에 올리지 않고 설명하는 사람. 방금 말한 어린 아이가 누구를 닮았다는 소리인지 쉬이 짐작한 체이스가 대답했다. -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습니다. 나 역시 종종 겪었던 일이니. 완전히 자신의 것이라 하기 어려운 기억이 툭 튀어나와서 머릿속을 흔들어대는 경험은 아마 체이스가 가장 많이 겪고 있을 터였다. - 제가 이 곳에서 다시 눈을 뜨기 전의 기억은 되도록 열어보지 않으려 하고 있다보니, 순간적으로 떠오르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놀라게 되네요. - 나의 기억이야 언제 떠오를지 모른다지만 칼리안 왕자는 그렇지 않을텐데. 차라리 예전 기억을 다 열어보면 놀랄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무슨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전부 알게 될 테니 동요할 일도 없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다 열어 볼 수가 없네요. - 왜 열어보지 않으려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딸기 가득한 식사 중에 손을 멈추고, 대화 중에 말을 잇지 못하고, 싸움 중에 검을 잊고. 그런 일들로 손해를 보느니 옛 칼리안의 기억을 다 열어 전부 확인하면 될 것을 알면서 왜 그대로 두는지. 칼리안이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기억이 툭 튀어나오는 것이 반가워서요. 그 아이가 이미 떠난 것을 알지만, 그래도 아직 곁에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반가운 착각이 들어서. 처음 이 곳에서 눈을 떴을 때 궁금해하던 기억을 열어 보여주었던 그 때가 떠올라서, 이렇게 기억이 툭 튀어 나올 때면 여전히 그 때처럼 그 아이가 함께 살아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그 반가움을 차마 버리지 못해서 기억을 다 열어보질 못했다. - 그리고 기억을 전부 열어보고 살아가다가 혹여 작은 것 하나라도 제가 잊어버릴까 걱정돼서······ 그 아이가 가지고 있던 기억들을 그 아이의 것으로 온전히 남겨두고 사는 것도 제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게 잘 간직하고 싶은 그런 욕심에 그대로 지내고 있습니다. 옛 칼리안의 기억을 다 열어 칼리안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결국 이 자리에는 베른과 지금의 칼리안만 남게 될 테니 옛 칼리안의 것이었던 기억을 그냥 빈 공간으로 두고 살기로 했다. - 소중한 것이니까요. 아픈 일이 많았더라도. 체이스가 베른에 대한 기억을 놓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마음. 상황도 방법도 다르지만 그래도 같은 마음일 터였다. - 똑똑하게 구는 것은 아닌데 이해할 수 없을 말도 아니네요. 칼리안 왕자. - 그렇습니까. 그래서 체이스는 그 어리석음을 이해했다. - 다만······. 기억 말고 몸도 좀 소중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 네. 조심하겠습니다. 지금은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흔들리는 물 위에 달이 떠 있고, 달빛에 바스라진 물결이 별처럼 반짝이는 모습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그 곳에서 불어오는 듯한 바람에 잠시 눈을 감았다. -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군요. 한동안 말이 없던 체이스가 이렇게 운을 뗐다. 무엇이 나쁘지 않다는 소리인지 가늠해보려 하던 칼리안에게 체이스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 기억이 날지 모르겠지만 ‘내가’ 오래 전에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형이니, 내가 걱정을 해야 한다고. ‘내가 네 형이니라. 네가 아니라. 내가 너를 걱정해야지.’ 한 글자도 잊지 않은 말이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말을 들은 칼리안이 눈을 꾹 감았다. - ······ 네. 그런 말씀을 하셨던 적 있습니다. - 그 때에는 그렇게나 걱정할 자리를 내어주지 않더니 이제야 틈이 나는군요. 크게 다쳤다는 이야기에 해도 좋을 말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이 생경하고, 또 반가워서. 굳이 예전의 일을 꺼낸 이유를 들은 칼리안이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저 말마따나 베른은 생애 단 한 번도 다쳤다는 소리를 해본 적 없었으니까. 누군가의 걱정까지 받으며 살기에는. 그래. 홀로 버티며 사는 것만으로도 이미 버거운 생이었던 탓에. - 보기 좋습니다. 계속 그렇게 주변에 한 자리씩 양보를 해줬으면 좋겠고. 다쳤다는 말도 하고 아프다는 말도 하고, 때로는 도와달라는 말도 해 가면서. 칼리안 왕자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잘 알고 무엇이든 잘 해결하리라는 것도 알지만. 강한 사람도, 그 사람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도 결국은 다 같은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다쳤다는 말 못하던 사람이 다쳤다는 말을 먼저 하게 되었다는 것이 반가운 마음에, 체이스가 이렇게 부탁을 전했다. - 네. 잊지 않고 지내겠습니다. - 물론 그렇다고 또 다쳐오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치지 말아요. 칼리안이 웃었다. - 그 말씀도 꼭 기억하겠습니다. * * * 바람 가득 담긴 대화가 오가던 밤이 지나갔다. 날이 밝자 르메인은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들을 긴급히 불러들였다. 갑작스러운 부름이었으나 진작부터 브리센에 대한 일의 귀추를 지켜보던 귀족들은 불만 없는 얼굴로 빠짐 없이 잘 찾아왔다. 흥미와 걱정 근심이 다 섞인 표정의 귀족들을 앞에 세워 둔 르메인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그간의 조사 결과 에반 브리센 후작을 통해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왕궁에 잠입했던 것을 확인했다.”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 다른 곳도 아닌 왕궁에 타국의 정보원이 버젓이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앨런의 말마따나 왕실의 문제는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고 한 두 개도 아니었다. 과거에 비해서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 하나 그래도 어차피 다 알려진 무능함이다. 그리고 르메인은 처음으로 자신의 입을 통해 직접 과실을 인정해가며 확인된 내용을 알렸다. “또한 세크리티아의 세작과 에반 브리센 후작, 레넌 브리센 자작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증거와 증언을 모두 확인했다.” 에반 브리센이 왕자를 공격하려 했다는 증거, 그리고 에반과 레넌이 세크리티아의 세작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그럴싸한 증거들은 그레이 브리센이 알아서 잘 준비할 것이다. 혹시라도 증거가 부실해도 괜찮다. 브리센이 저물게 된 마당이 아닌가. 브리센의 편에 섰던 이들이라 하더라도 그 증거가 대체 어디 있는지 보여달라며 국왕에게 요구할 넋빠진 이들은 없을 것이다. 똑같은 것이다. 이제까지는 브리센이 곧 증거였다면, 앞으로는 카이리스 왕실이 곧 증거가 될 테니까. 뒤이은 긴 내용은 르메인이 아닌 시종장 라울을 통해 귀족들에게 전해졌다. - 레넌은 독을 준비했고 에반은 세작의 손을 빌어 그 독을 2왕자에게 건넸다. 이를 알게 된 2왕자가 3왕자에게 내용을 알렸고, 은밀히 내막을 확인하려던 3왕자는 세작들의 공격을 받아 이미 사망한 에반 브리센을 발견했다. 적당한 진실과 적당한 거짓이 만든 눈가리개. 믿을 수 없을 완벽한 진실이나 의심의 여지 없을 완벽한 거짓보다 더 훌륭한 눈가리개가 이렇게 공개됐다. - 3왕자 역시 위험에 처할 뻔 했으나 발칸과 지그프리드가 때맞춰 도착하여 큰 일을 벗어났다. 그 후 레넌이 증거 인멸을 위해 에반의 저택을 불태웠다. 에반과 레넌의 죄목도 알려줄 겸, 발칸이 어엿한 군대임을 알려줄 겸, 플란츠와 칼리안의 동맹 관계를 다시 드러내고 칼리안과 지그프리드의 긴밀한 관계를 과시할 겸, 칼리안도 다쳤다는 내용을 알려 3왕자가 지나친 무력을 가졌으리라는 두려움을 줄일 겸. 참 많은 목적을 가진 상황 설명이 끝났다. 르메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카이리스 왕실에서는 이번 일에 대한 증거를 파악하여 왕실에 먼저 알려 온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의 용기와 그간 카이리스의 국경을 면밀하게 지켜온 성실함을 높이 사, 그레이 브리센을 포함해 이 일과 관련 없는 브리센 일가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않기로 하였다. 따라서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의 후작위 세습을 허락한다.” 겸사겸사. 훗날의 완두콩이 고양이 키우러 갈 가문은 유지하고 그 가문 잠시 운영해 줄 그레이는 살려둘 겸. “다만 세작의 잠입까지 획책하며 왕자의 안위를 감히 위협한 에반 브리센과 레넌 브리센의 죄에 대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 결정한 바, 에반 브리센과 레넌 브리센의 작위를 폐하고 성을 회수하며 레넌 브리센의 사형을 명한다.” 에반과 레넌이 참 유별나게 경멸하던 평민으로 생을 마감하게 해 줄 겸. 둘의 이름에서 ‘브리센’을 빼앗아, 제 필요할 때에만 찾아 부르던 플란츠와의 혈연을 이제라도 영원히 끊어버릴 겸. “아울러 이 사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세크리티아의 세작에 대해 카이리스 왕실에서는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세크리티아 국왕인 데블란의 명확한 해명과 정당한 사과가 있기 전까지는 양국의 왕래를 포함한 모든 거래를 엄금한다. 양국의 원만한 관계 유지를 원한다면, 세크리티아의 국왕 데블란은 이번 일에 대한 입장과 처리 방안을 조속히 밝혀야 할 것이다.” 칼리안과 히나가 세크리티아에 가지 않을 이유도 만들 겸. 데블란이 무시하던 르메인이 어느 나라의 국왕인지를 알릴 겸. 겸사겸사. “폴룬 남작에게 좀 미안하네요.” 르메인의 입을 빌어 에반과 관련된 일을 일단락한 뒤. 갑자기 맞닥뜨린 세크리티아의 세작들 다수를 홀로 상대하다 꽤 많이 다치는 바람에 잠시 요양중인 정의로운 3왕자 역할을 맡은 칼리안이 여유롭게 웃었다. “이번 일로 세크리티아와의 루비 거래에 차질이 생겼으니, 다른 거래처가 있을지 살펴보고 좀 도와주어야 되겠습니다.” 텐실과의 다이아몬드 거래가 칼리안으로 인해 막히고, 세크리티아와의 루비 거래도 칼리안으로 인해 막혔다. 물론 거래가 흥하든 망하든 멜피르 폴룬의 인생을 구해준 것이 칼리안이었고 애초에 그런 거래를 하게 된 것도 칼리안 덕분이었으니 지나치게 미안해하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세크리티아 국왕에 대해서는 일단 이렇게 막아뒀으니 저는 예정대로 엘프들부터 좀 겁주러 다녀와야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세크리티아 국왕을 치료하겠다 나서면 안되니까.” “반말.” “안되니까요. 그래도 형님께서 신경을 아주 많이 써주신 덕분에 장래 폭군 후보에 오를 일은 없어졌네요.” “안 썼어.” “네. 그렇다고 해두겠습니다. 그래서, 정하셨습니까.” “아직.” “빨리 정해주세요. 루시만 이름 있다고 서운해 하겠습니다.” “너.” “네.” “왜 왔는데.” “밥 먹으러요.” 하루 지났다. 고기 먹으러 올라왔다. “피곤해. 잘 거야. 가.” “싫은데요.” “애옹!” “니아옹!” 피곤하다는 말 못 들은 것처럼, 칼리안은 잿빛 새끼 고양이를 품에 안고 ‘나비야, 사과야’ 해가며 빨리 이름을 지으라는 듯 성화를 부렸다. 동생 놈의 버릇 없는 시종은 주방의 시종들과 시녀들이 테이블 위에 여러 음식 차리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도 몽글몽글 잘 익은 양파, 다진 소고기를 뭉쳐 납작하게 구운 뒤 치즈를 가득 얹은 요리, 생강 향이 아주 살짝 밴 돼지고기 볶음, 레몬즙과 식초에 절인 양배추에 돌돌 말린 오리 고기, 흰 버섯과 줄콩을 함께 구운 요리, 많이 짜지 않은 치즈와 블루베리 소스가 곁들어진 샐러드. 그리고 완두콩이 들어간 스프. 크림 소스에 섞인 탓에 눈동자 말고 머리카락과 퍽 비슷한 색을 내는 그 스프를 한참 보던 플란츠가 레릭을 불렀다. “치워.” 피망도 못 드시고 덜 익은 양파도 못 드시는 우리 왕자님 완두콩도 못 드시나보다, 하는 얼굴의 레릭이 얼른 스프를 치워갔다. “왜 못드십니까. 맛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지도 않고 그 푸르스름한 스프를 참 잘도 퍼먹고 있던 칼리안이 물어왔다. 뻔하다. 어제 먹은 고기 완두콩으로 복수하는 것이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얼굴이 됐다. “왜 왔냐고. 또.”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아니잖아.” “형님은 그럼 왜 피곤하신데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로 오리 고기를 삼킨 플란츠가 대답했다. “신경쓰지 마.” “못 주무신 것 아닙니까.”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포크와 나이프를 잠시 내려놓고 플란츠를 쳐다봤다. “어제 체이스 왕세자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러다 한 가지가 생각나서요.” 직접 죽였든 아니든. 눈 앞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그 눈을 처음 봤을텐데. 괜찮을 리가 없겠구나, 하고.” 죽어가던 그 눈이 계속 떠올라 며칠을 앓았던 베른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면서도 왜 그러는지 묻는 체이스에게 별 일 아니라 말했던 베른처럼. “검을 가르쳐드리고 있으니 언젠가 직접 생을 끊어낼 날도 오리라 생각합니다. 그것까지 막을 생각 없습니다만. 혹시 버거운 날에는 말씀 해주세요. 위로하는 건 해 본 적 없어도 들어는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뒤 제 앞에 놓인 고기를 다시 집어올려 먹던 칼리안을 한참 보다가, 플란츠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전날 세작의 일로 잠을 못 자기는 했다는 소리다. “곧 죽을 사람 눈을 본 적은 있었지만. 다르긴 하더군.” “언제 또 보셨던 적이 있습니까. 유쾌할 경험은 아닌데요.” 하필 먹을 것 앞에 두고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식욕이 사라져버린 플란츠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아우님이 잡았던 죄인. 그 남자를 위한 레니시타 잎이 깔렸던 날에.” - 쿵!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플란츠를 쳐다봤다. 심장이 쿵 내리찍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또 들었다. “제 로젤리타 기간 중에 잡아왔던 사람 말씀이십니까.” “그래.” “······ 남자.” 칼리안의 반응에 이상함을 느꼈던지, 플란츠가 더 말하지 않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이 웃고 있었다. < 제44장. 잊어버리지 않게(4) > 재밌는 이야기. 아주 흥미진진한. 고기도 먹고, 배에 구멍난 것도 허전한데 밥까지 못먹어서 마음까지 많이 헛헛한 안쓰러운 동생 앞에서 고기 잘 처먹은 플란츠한테 복수도 하고, 하는 김에 완두콩 속알맹이 또 삶아졌나 안 삶아졌나 좀 살펴볼까 올라왔는데. 생각지도 못하던 말을 듣게 되었다. 사형된 죄인. 레넌 브리센, 아니. 이제 성이 없어졌으니 그냥 레넌. 레넌과 연관되어 있던 헤일 라트란이라는 백작에게 신물을 팔아 넘기고 카이리스의 정보를 샀던 사람. 그렇게 캐 낸 카이리스의 정보는 세크리티아에 넘기고 신물은 돈벌이로 삼았던 사람. 무엇보다, 칼리안을 공격했던 사람. 때문에 왕족을 공격했다는 죄목으로 광장의 레니시타 잎 위에 올랐던 사람. ‘남자.’ 플란츠가 본 이가 정말 남자였는지 되묻지 않았다. 플란츠의 기억이 잘못됐을 리 없으니까. 대신 칼리안은 그 때의 기억을 잠시 되짚었다. 칼리안과의 싸움이 끝난 뒤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헤일 라트란과 같은 감옥에 가둬두지는 않았다. 유란이 포함된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 감옥을 지켰다. 그 이후. ‘카에라.’ 르메인은.칼리안이 왕궁 밖에서 습격을 받은 것에 대해 귀족들에게 경고를 전하는 의미로 기사단 카에라를 보냈다. 그리고 죄인들을 수도로 압송해갔다. ‘카에라의 기사였던 세작.’ 그래. 카에라였다. 플란츠의 앞에서 죽은 세작이 숨어 있던 카에라였다. 당시 머물렀던 라트란 영지에 찾아온 왕궁의 기사들이 영지에서 딱 하루를 머문 뒤 죄인들을 수도로 압송했다. 왕궁에서 사람들이 온 뒤로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은 더 이상 감옥을 감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칼리안은.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죄인에 대한 신상을 왕궁에 알리지 않았다. 왕궁에는 신원 미상의 암살자라 말했다. 그때 칼리안은 헤일 라트란의 거래 정보가 필요했다. 때문에 그것을 넘겨주면 세작이라는 사실을 비밀에 부치겠노라 했다. 심문도, 조사도, 아무것도 거치지 않고 바로 형 집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노라 했다. 때문에 그 정체와 이름을 왕궁에 알리지 않았다. 사실 그 정체를 칼리안이 어떻게 아는지를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해야 맞는 말이다. ‘변장술에 능했지.’ 세크리티아에서 극소수의 세작들에게 지급되는 변장용 마법 물품을 즐겨 썼다. 남장을 했다. 함께 잡혀들었던 헤일 라트란도 남장한 모습만 봤다. 감옥에서는 서로 마주친 적 없었으며 압송 중에도 함께 있지 않았을 것이다. 수도에서 작위를 박탈당하기 전까지 헤일 라트란은 귀족이었으니까. 다만 수도에 온 이후에도 남장을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소지품을 다 압수하니까. 그러니 광장에서 죽은 것은 남장을 한 것이 아니라 진짜 남자였다는 소리다. 그렇다는 것은. ‘······ 바꿔치기.’ 라트란 영지에서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 카에라의 기사들에게 죄인들을 넘기던 그 순간에 남장을 한 뒤 다른 누군가와 바꿔치기했을 수 있다. 아니. 싸움이 끝난 뒤 칼리안은 곧바로 자리를 떴고 그 직후 유란과 기사들이 들어와 체포를 했으니 그 찰나에 이미 남장을 했을 수도 있다. 워낙 외모가 출중했으니, 도중에 바꿔치기를 원했다면 다시 남자로 변장을 하는 편이 나았으리라. 그 결과 광장에 서게 된 죄인이 진짜 남자였다면. 그렇다면. 그랬다면. ‘그렇다면. 그랬다면.’ 칼리안의 무릎에 잠시 올라와 있던 루시가 폴짝 하고 플란츠의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좋아하는 플란츠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함께 달려갔다. 고양이 두 마리를 눈으로 좇으며 시선을 옮기던 칼리안이 조용히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 아래로 보여지는 입술이 꽤 즐거운 듯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 푸른 솔새. 에일라. “······ 너구나.” 찾았다. * * * 발칸의 기사단 인원이 줄어들었다. 기존의 기사들 중 플란츠의 손 안으로 온전히 들어오지 못한 이들을 전부 골라 빠짐없이 다 내보낸 탓이다. 그 직후 발칸의 기사단 인원이 폭증했다. 지그프리드에 있던, 에이프린 백작이 모아 보낸 기사단이 발칸에 정식 합류했기 때문이다. 인원을 감축한 뒤 다시 늘어났으나 새로 들어온 기사들의 수가 월등히 많은 탓에, 결과적으로 발칸의 기사단은 몸집이 많이 불어났다. “왕궁에서 나가게 된 기사들이 그레이 브리센 후작저나 브리센 후작령에 돌아가게 될 텐데, 그들이 그렇게 전력을 보충해도 괜찮겠습니까.” 새로 늘어난 기사들이 왕궁에 오기 직전까지의 훈련 과정 및 성과가 기록된 서류를 받아 든 아르센이 별 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왕자님께서 줄여놓은 후작가 기사들의 수가 워낙 많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새로운 브리센 후작은 왕자님이 어떤 분인지 가장 뼈아프게 알고 있는 이라서 인원이 좀 늘어난다 하더라도 섣부른 행동을 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 성품이나 행실이 에반에 못지 않은 이가 아닙니까. 앞으로의 행보 역시 결코 투명하지 않을 자이니, 자칫 해를 입지 않도록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르센이 히비스커스 꽃잎을 우린 찻잔을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 차의 붉은 색과 썩 비슷한 빛의 눈이 생각난 탓이다. “왕자님 뒤에 발칸 있습니다. 소공작님.” 찻물과는 정 반대되는 빛깔의 눈을 들어올린 아르센이 마주 앉은 드미레아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왕자님께서는, 브리센 후작이 영원히 숨죽이기를 바라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전하와 마나실 군단장님께서 기사들을 내보낼 때 기사 작위를 전부 유지시키신 것도 그런 이유일 겁니다. 그대로 몸집을 다시 잘 불려서, 적당한 때 왕자님 자리를 한 번 넘봐줘야······.” 검지를 들어올려 보이며 말하던 아르센이, 반대편 손을 올려 들어올린 손가락을 확 꺾어보이는 시늉을 한 뒤 말을 이었다. “그 허리 다시 잘 꺾어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칼리안의 계획 속에서 그레이는 어디까지나 임시 후작이다. 앨런을 통해 칼리안이 왜 그레이를 살려뒀는지를 들은 아르센이 찻잔을 들어 한 입을 마셨다. - 똑똑똑. 그때,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늦은 저녁 시간. 더 이상 찾아올 손님이 없었고 집사장은 여러 귀족가문에서 보내오는 갑작스러운 선물들을 직접 되돌려주기 위해 나간 뒤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 노크 소리가 조금 아래에서 들려왔음에, 드미레아가 살짝 웃는 얼굴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 밖에 서 있는 이를 본 아르센이 다소 복잡한 얼굴을 했다. 청록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지닌 어린 아이. “리리에.” “나, 잠이 안와.” 드미레아를 본 아이가 이렇게 말하며 양 팔을 뻗었다. “그래. 이리 와.” 하인들을 불러 아이를 데려가 재우라 말하는 대신, 드미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를 품에 안아올린 뒤 아르센을 향해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드미레아가 밖으로 나간 뒤 아르센이 잠시 닫힌 문을 쳐다보며 작은 침음을 냈다. 아이가 누구인지 물어 볼 필요도 없었던 탓이다. 아이는 에반을 닮았다. 그레이를, 레넌을, 실리케를 닮았다. 플란츠를 닮았다. 찻잔의 붉은 물이 반쯤 사라졌을 때 드미레아가 돌아왔다. “저 아이입니까. 에반의 시신 뒤에 있었다던.” “네. 맞습니다.” “어떻습니까, 성격은.” 작고 귀여운 것을 참 아끼는 아르센이지만, 작고 귀여운 브리센의 핏줄을 편견 없이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사실은 ‘똑똑하냐’고 묻고 싶었으나 어린 애를 두고 할 말이 아니라서 그냥 성격만 물어봤다. “영특합니다.” 그리고 드미레아는 숨겨진 질문에 대한 대답을 건넨 뒤 말을 이었다. “잠에서 깼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서 나갔다고 합니다. 칼리안 왕자님이 손을 멈췄고, 에반은 찔렀고, 칼리안 왕자님이 꿈을 꾸는 것이라 거짓말을 했고, 다시 잠들었다고 합니다.” “에반이 죽은 이유에 대해 왕실에서 공개한 것과 다른 진짜 상황을 알고 있다면 지그프리드 공작령으로 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조부가 죽은 것이 ‘정당한 결과’라 하더군요.” 리리에라는 아이가 에반의 죽음에 대해 원한을 가지지 않았다는 말. 아이의 입을 통해 에반이 사망한 전말이 밖으로 나갈 일은 없으리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소공작님. 수도 안에서 지내도록 하기에는 너무 많이 닮았습니다. 왕자님과 플란츠 왕자님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않을 겁니다.” “여섯 살입니다.” 드미레아가 아르센을 쳐다봤다. “그런데 자신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그 집에 보내졌는지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척하며 지내왔다 합니다. 헤르츠 부군단장은,” 그리고 작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물었다. “그런 아이를 다른 곳에 보낼 수 있는 사람입니까. 그곳이 비록 내 본가라 하지만 아이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낯선 곳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르센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 알겠습니다. 더 이상 그에 대해 걱정하거나 다른 말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드미레아를 향해 내뻗어지던 아이의 팔이 생각나버린 탓에, 칼리안도 플란츠도 그냥 두는 일에 대해 더 참견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아르센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아이를 생각하니 플란츠가 떠올랐다. 그러다 플란츠가 몸져 누웠던 날이 생각났다. 자연스럽게 그런 플란츠를 치료했던 히나도 생각났고 갑자기 찾아와 플란츠를 고쳐주고 무심하게 나간 란델이 떠올랐다. ‘란델 왕자님의 말씀은 내가 왕자님께 전해드리겠네.’ 그리고 이렇게 말하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다. 덕분에 아르센은 아이에 대한 고민을 일단 내려놓고 자신의 미래를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왕자인 란델의 말을 전하는 것을 잊어버려서가 아니었다. 칼리안에게 란델의 말을 전하려면 란델을 어디에서 만났는지 설명해야 하고 그러려면 란델이 플란츠에게 뭘 하도록 그냥 뒀는지도 말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 깨달은 탓이었다. * * * 새 좋아하는 것도 유전인지 모르겠지만. 아빠도 새를 키우고 아들도 새를 키운다. 그 새들 공동육성 한다 해놓고 알고보니 서로 몰래 키우던 새가 몇 마리씩 있어서 새들끼리 싸움도 하고 부자지간에 자기 새들 데리고 경쟁도 하는 뭐 그런 좀 이상한 집안이 있는데 그 집안을 욕하기에는 우리 집안도 어디 하나 빠질 곳이 없어서 차마 저 집안 이상하다 욕을 못하겠는 그런 집안의 새가 우리 집에 숨어있었던 걸 내가 찾았다. 그런데. “······ 에일라.” 이전 생에서 도대체 뭘 하다 오셨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많이 위험한 일 하다 오신 것은 분명한 그런 분이 하필 새 좋아하는 그 집안 둘째 아들이었던 탓에 보는 사람 속을 곧잘 심란하게 만드는 내 동생 쟤가 지금 누구 이름을 부르며 참 좋아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내 고양이 보고 나비야 사과야 해 가며 정신 빠진 것처럼 굴던 동생 놈이 고기 먹다 말고 갑자기 음습해지는 것을 보던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칼리안.” 칼리안의 시선이 플란츠 쪽으로 돌아왔다. 다른 말 없이 자신을 보는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안 잊어버렸습니다.” 그 뒤에는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사람 죽은 얘기 꺼내서 입맛 떨궈놓고는 옛 추억에 빠져 지금 이름 잊어버린 얼굴이 되더니 다시 야무지게 식사를 이어나가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얼굴을 했다. “또 뭔데.” “형님 똑똑하셔서 다행이라는 생각 중입니다.” 접시에 있던 것 중 가장 큰 돼지고기 조각을 집어먹은 칼리안이 대답했다.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제 일을 어떻게 아는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짧은 한숨을 내뱉은 칼리안의 입에서 로젤리타 기간 중 있던 일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 앞에서 제가 새들의 거점을 안다는 것도 밝혔고 실명을 알고 있다는 것도 말했고 제가 소드마스터인 것도 알렸으니, 살아서 나갔다면 문제가 크네요.” “내 아우님께서 참 친절하게도 알려주셨군.” “도망칠 줄 몰랐습니다. 아무튼 살아있는 듯 하니 세크리티아 국왕 말고 또 누구에게 그 말을 전했는지 걱정이 좀 되네요.” 그걸 걱정하는 놈 입에 소고기가 들어가는 것을 묵묵히 쳐다보던 플란츠가, 욕 대신 말을 꺼내느라 꽤 애를 쓰며 입을 열었다. “어쩔건데.” “어딨는지 찾아봐야죠.” “어떻게.” 에일라가 찾으려 했던 신물. 검은 조약돌. 또, 제온이다. 칼리안이 조용히 손을 들어 윗층을 가리켜보였다. “자몽 먹으러 다녀와야 되겠습니다.” “언제.” “지금요.”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이 이미 자신을 찾아오라 이야기했으나, 내용을 아직 전달받지 못한 칼리안이 씩 웃었다. “······ 내려가. 내가 올라갈 테니까.”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칼리안이 대답 없이 플란츠를 응시했다. “쉬라고. 좀.” 그 표정을 해석하자면 또 짜증이 날 것 같아서 플란츠가 다시 말했다. “뱀은 내가 잡아 줄 테니까.” “아.” 칼리안이 웃었다. 웃는 것 말고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었다. 그 꼴을 보던 플란츠가 다른 말을 하나 꺼냈다. “그러고보니. 란델 형님께서 내 심장을 치료해주고 가셨다더군.” 그리고. “그런데 마법을 처음 발현할 때는 원래 시동어를 외치나. 파란 머리 마법사가 책을 좀 뒤적이더니 시동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아브턴던트, 라고.” 이렇게. 뱀 사냥하는 것 잊어버리고 파란 머리 마법사 생각이나 하라는 의미였다. < 제44장. 잊어버리지 않게(5) > 잠시 눈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봤다. 나비나 사과보다 한 발을 더 나아간 ‘튼튼이’라는 이름을 가진 말의 색과도 같은 밀크티가 눈에 들어왔다. 한쪽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하나 뿐인 형의 환대에 응한 플란츠가 찻잔에 띄워진 꽃송이의 진한 향을 버텼다. 밀크티 색의 말. 그리고 그 말의 이름을 지은 이가 알려주던 향기 없는 꽃을 생각하면서. “싫다면 물리거라. 셋째를 불렀는데 네가 온 탓이니.” 자몽 싫다고 난리를 쳤던 칼리안 때문에 밀크티 꺼내놨더니 플란츠가 왔다는 소리였다. 플란츠가 꽃 향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기도 했다. 분명 이 곳에 오겠다는 말을 미리 전했던 플란츠가 별다른 내색 없이 대답했다. “어차피 형님 덕분에 한 계절 내내 장미 향에 시달립니다. 하루 더해진다고 달라질 것 없습니다.” 곧 플란츠가 로즈힙 향 가득한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다. 창문 틈으로 흘러들어와 반 강제로 맡아내야만 하는 붉은 향기와 비슷하니 그나마 참을만하다고 생각하면서. “칼리안, 왜 부르셨습니까.” 플란츠는 칼리안이 말한 그 세작의 일로 찾아왔을 뿐이었다. 란델이 칼리안을 찾았었다는 사실은 방금 전의 말을 듣고 눈치챘으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란델이 분명 누군가를 통해 말을 전해달라 했을 테고, 그 말을 들은 이가 에반을 치워내는 난리통에 잊어버렸든 아직 칼리안에게 전하지 못했든 둘 중 하나이지 않겠나. 그런 사소한 실수를 굳이 드러내어 누군지도 모를 사람의 잘못을 지적할 일을 만들 필요가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게 바로 아르센이었음을 알았다면 상황이 좀 달라졌겠지만 몰랐으니까. “언제부터 셋째의 입과 귀가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주변의 눈과 귀가 사라지니 무료하더냐.”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 셋째 지금 편찮아서 못 올라옵니다. 형님께서는 안 내려가실 테니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실리케의 감시에서 벗어나더니 이제는 칼리안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고 있느냐는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플란츠는 자신이 할 말만 했다. 란델은 고작 두 층을 두고 참 많이도 서먹한 두 형제 사이의 다리 역할을 자처한 중간 층 거주자의 말에 바람을 뱉듯 작게 웃었다. 란델이 잠시 고개를 들어 플란츠를 쳐다봤다. 짹깍짹깍 하는 시계 소리가 들렸다. 지난 번에 이 곳에 왔을 때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였다. 그 때 이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물을 것이 있어 만나자 하였다.” “무엇을요.” “되었다.” 지금은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말인지. 아니면 직접 물어봐야 한다는 말인지. 짹깍짹깍. 다시 들려오는 초침 소리가 거슬린다 여겨질 즈음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 텐실로 신물을 보내셨던 것 알고 있습니다. 텐실의 누구에게 보내셨습니까.” “궁금한 것이 많이 늘었구나.” “본래 많았습니다. 지나칠 만큼.” 잠시 입을 다물고 플란츠를 쳐다보던 란델이 천천히 대답했다. “텐실의 왕세자에게 보냈다.” “누구를 통해 보내셨습니까.” “신관.” “지금도 보내십니까.” “셋째 덕에 요즘은 퍽 한가하구나.” 신물을 보내고 싶어도 그것을 들고 나를 사람이 있어야 보내지 않겠나. 레넌의 상단을 이용하려던 것도 말아먹고 신관도 싹 내쫓아 준 칼리안 덕에 더 이상 텐실에 신물 보내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연장자 우대할 줄 아는 착한 셋째가 첫째 형님 일거리는 없애드리고 한창 파릇하신 둘째 형님 일거리만 계속 늘려드리고 있는 셈이다. “궁금한 것 더 없으면 이만 내려가거라.” “거래. 하나만 진행해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거래를 말함이더냐.” 달칵, 하고 잔을 들어 다시 한 번 밀크티를 삼키고 내려놓은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폴룬 상단입니다. 텐실에서 몰래 들여오려던 신성 기사 잘라낸 일로 텐실과의 다이아몬드 거래 중단되었던 일 기억하십니까.” 란델이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센 상단 통해 신물 보내시려 했던 방법 그대로, 이번에는 폴룬 상단을 내세워주셨으면 합니다. 세크리티아와의 거래가 단절됐으니 다른 판로 찾는다 핑계 대시면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다이아몬드 거래 재개하는 조건으로 신물 거래, 다시 해주셨으면 합니다.” “무엇을 가리기 위한 눈속임이더냐.” “신물 물어오던 새 한마리 찾고 있습니다.” 텐실에서는 폴룬 상단의 상단주 멜피르가 칼리안에게 얼마나 신임을 얻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안다고 하더라도 장사꾼이 이익 좇아 손잡고 있던 이 몰래 다른 주머니 찬다는데 의심을 할 여지가 있겠는가. 그러니 이번 일로 루비 거래가 끊겨 손해가 막심할 멜피르가, 칼리안 몰래 텐실에 신물을 옮겨주는 것을 조건으로 다이아몬드 거래를 성사시키려 한다 하더라도 텐실에서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었다. 그 후 멜피르가 은밀하게 헤일 라트란에게 신물을 찾아다 주었던 이를 물색한다 소문을 내면, 에일라 역시 소식을 접할 것이다. 에일라라면 이 과정이 자신을 잡으려는 칼리안의 함정임을 눈치 채겠으나 상관없다. ‘제 목적은 정말로 에일라가 폴룬 남작에게 속아 연락을 취해오는 것이 아니라, 제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에일라에게 알리는 것에 있으니까요. 이참에 폴룬 남작의 손해도 좀 메꿔주면 좋고요.’ 칼리안이 접시에 놓여 있던 가장 큰 돼지고기 한 점, 그리고 소고기 한 조각을 씹어 삼키는 동안 생각해냈던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은 란델이 조용히 대답했다. “전하께서 아시면 좋아하지 않으실 일을 벌이려 하는구나.” 텐실과의 신물 거래는 불법이었다. 그것을 지적하는 말에 플란츠가 실소하며 대꾸했다. “하면 안 되는 일임을 잘 알면서 손을 대셨던 분께서 하실 말씀 아닙니다. 게다가 언제부터 전하를 신경쓰셨는지.” 물론 르메인에게 따로 이야기를 해 둘 생각이었다. 거래 중에 멜피르가 붙잡히기라도 하면 안 되니 말이다. 세크리티아 왕을 잡으려는 일인데 카이리스 법 좀 어길 수 있지.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왕자 직함 아니던가. “기간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잠시 생각을 해 보던 란델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해 주마. 나에게도 나쁠 것 없는 일이니.” “네. 그럼.” 이제 일어나도 되겠는지를 묻는 듯한 플란츠의 말에, 여전한 눈으로 그를 보던 란델이 입을 열었다. “셋째에게 궁금했던 것을 너에게 물어도 되겠다 싶구나.” “무엇입니까.” “칼리안. 그 아이는······.” 입을 열어두고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기는 듯 보였던 란델이 말을 이었다. “여전한 셋째더냐. 아니면 이제 그저 네 동생이더냐.”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플란츠의 눈에 날이 섰다. 플란츠는 눈에 든 칼날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란델이 의심하기 시작했다면 감추려 들 필요가 없었다. 의심해도 상관 없는 일이다. 이제 와 일말의 의심을 하든 말든. 지독하리만치 이성적인 란델은 절대로 진실을 파악하지 못할 테니까. “제 동생은.” 게다가 칼리안은. “그저, 칼리안입니다.” 칼리안은 그저 칼리안일 뿐이니 문제 될 것이 있겠는가. 툭 던지듯 대답을 내려놓은 플란츠를 보던 란델이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일어난 플란츠가 간단히 예를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타이를 뜯어내듯 풀어내는 소리가 언뜻 들리다 닫히는 문에 가려 사라졌다. * * * 아르센이 왔다. 스스로도 아직 마음대로 움직이면 안 되는 상태임을 모르지는 않았던 터라, 칼리안은 얀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침대 헤드에 기대 앉은 채 아르센을 맞이했다. ‘왕자님 심기가 편치 않으시니 참고하세요.’ 아직 다 회복되지도 않은 칼리안이 아르센을 급히 찾는다는 이야기를 얀에게 전해들었다. 그래서 아르센은 대충이나마 무슨 일이 있을지 나름대로 눈치도 채고 마음의 준비도 했다. 곧바로 오느라 반성문은 못 썼지만 열심히 반성하는 표정도 짓고 있었다. “칼리안 왕자님을 뵙습니다.” 칼리안은, 얀이 미리 언질해 준 것이 아니었으면 아마 아르센을 꽤 반가워한다고 착각했을 만한 그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여 예를 받은 칼리안이 침대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이 쪽으로 와요, 헤르츠 경.” 문과 침실 사이에 세뉴강이 흐르는 것 같다. 저 쪽으로 가면 다시는 못 돌아올 것 같다. 마른침을 삼킨 아르센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칼리안의 침실에 발을 디뎠다. 그러다 침대 옆의 협탁에 무언가가 놓인 것을 보게 되었다. 얼음 속성의 마력을 응축해 둔 것이었는데 도무지 그 용도를 알 수가 없었다. 곧죽어도 궁금한 것은 물어보고 죽어야 하는 마법사가 결국 칼리안을 향해 물었다. “저것이 무엇입니까, 왕자님.” “아, 이거.” 파랗고 아름다운 것. 얼음으로 만든 커다란 꽃을 가만히 바라보던 칼리안이 예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경을 위한 나의 안네루시아.” “아······.” 사람이 뭐든 포기하면 마음이 편해지는지라. 명줄을 포기하고 나니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 된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꽃이라도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습니까.” “네. 잘못한 것 알고 있습니다, 왕자님.” 그 얼굴이 사뭇 진지하고 비장했던 터라, 칼리안이 잠시 웃음을 터뜨렸다. 오래 웃고 싶었는데 배가 당겨서 그러질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치료해주겠다며 온다던 히나 그냥 쉬라고 하지 말고 치료를 받을 걸 그랬나 하고 잠시 생각하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히나가 너무 힘들어 보였고 란델 형님이 그 자리에서 무슨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거나, 생소한 마법까지 곧장 시전해야 할 만큼 형님이 아파보였다거나, 그 쯤은 한 번에 성공할 정도의 실력이라는 자신이 있었다거나. 그런 변명 없습니까.” 마치 그 날의 상황을 눈으로 본 것처럼 입에 담는 칼리안을 향해 아르센이 대답했다. “저는 1왕자님을 불신합니다.” “압니다.” “그리고 마법사는 생명을 상대로 함부로 서툰 마법을 시험해보지 않습니다.” “그것도 압니다.” “그러니 제가 변명할 것이 없습니다.” “잘못을 그렇게 잘 알면 내가 어떻게 할지도 알겠네요.” “안네루시아 주셨지 않습니까.” 지금 아르센이 정말로 몸 어딘가에 구멍 하나쯤 뚫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칼리안도 알았다. 때문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그렇게 무서우면 왜 따라다니는거야, 도대체.” “무서워서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눈으로 아르센을 보던 칼리안이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숱하게 해오던 말을 건넸다. “아무튼 경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대련할 때 목에 몇 번 상처 내놓은 것이나 잔뜩 취했던 날에 한 대 때려 재운 것 말고는 평소에 험하게 대한 것도 없는데 대체 뭐가 무섭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나만큼 사근사근한 사람이 또 어딨다고. 스스로에 대한 매우 객관적인 평가를 마친 칼리안이, 얼음꽃을 잠깐 내려다보다 아르센에게 시선을 되돌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보다는 히나 혼자 두고 왕궁 밖에 나간 것 때문에 화가 날 뻔 했는데 스승님 옆에 잘 앉혀놓고 갔다 해서 말았습니다. 란델 형님이나 형님은 뭐, 헤르츠 경이 알아서 잘 했을 테고. 급하면 레이븐 발이든 루시 손이든 빌릴 판에 뭔들 못할까.” 이 말에 아르센의 눈이 협탁 위의 얼음꽃에 가 닿았다. 그럼 이건 왜 만드신 건지 묻고 싶어 하는 듯 보여서 칼리안이 먼저 대답했다. “라트란 영지에서 잡았던 세작이 살아있어요.” 기억을 되짚어 볼 필요도 없이 곧바로 그 세작에 대해 떠올린 아르센이 눈매를 굳히며 답했다. “······ 사형 집행이 된 것 아닙니까.” “다른 사람으로 바꿔치기 된 것 같은데 덕분에 내가 좀 곤란한 일이 생겨서.” “제가 잡아오겠습니다.” 우리 왕자님의 소중한 비밀이 일파만파 퍼지게 생겼는데 당연히 잡아와야 하지 않겠나.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잡아오겠노라 합니까.” “그걸로 어떻게 해 보실 생각이신 것 아닙니까.” 아르센이 얼음꽃을 가리켜보였다. 눈치가 참 빨라졌다는 생각에, 칼리안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치가 누구랑 같이 붙여놔 준 누구 덕분에 생겼는지는 생각하지 않은 채였다. “열흘 뒤에 그레이 브리센이 후작위 오르는 것 축하하는 파티가 열리는데 나는 못 가니까. 경이 내 대신 선물도 보내고 파티에도 좀 다녀와줬으면 합니다.” “파티 얘기는 못 들었었는데 참 대단한 작자군요. 아버지는 죽고 동생은 사형되고 조카는 사라졌는데 파티라니.” “아. 파티 얘기는 나도 아직 못들었어요.” 가벼운 말투로 대답한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설명을 더했다. “파티하라고 아직 말을 안해서. 내가.” 눈치 많이 좋아진 아르센이 잠깐 멍하게 칼리안을 봤다. 그러다 잠시 후, 파티 예정이 없는 그레이에게 파티를 열라고 지시할 생각이라는 소리임을 이해했다. “특별한 초대장 없이 어떤 귀족이든 참석할 수 있을 파티일 테니 경이든 폴룬 남작이든 상관 없이 축하를 전해 줄 수 있을 겁니다.” “네, 이해했습니다. 폴룬 남작과 제가 의심 받지 않을 정도로 소문 내면서 다녀오면 되겠습니까.” “딱 좋네.” “네. 그럼 제가 무슨 선물을 보내면 되겠습니까.” 칼리안이 손을 한 번 움직여 마나의 속성을 바꿨다. 협탁 위의 푸른 얼음꽃이 금세 형질을 바꾸며 붉게 타올랐다. 불꽃이 되었다. “녹거나 타지 않는 조각상. 물론 생긴 것은 꽃 말고 다른 것으로요.” 플란츠의 부탁을 받은 란델은 란델대로 칼리안이 에일라를 찾고 있음을 알리고.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에일라를 불러내고. “저 그럼 왕자님 조각상으로 만들어도 됩니까?” 이런 의도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각상에 대한 말을 듣기가 무섭게 아르센이 반색하며 물었다.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해 내야 직성이 풀리는 마법사인지라 아르센 역시 포기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실로 마법사 다운 반응이 아닌가? 이렇게 잘 이해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걸 거기 왜 보내, 미친놈아.” 세상에서 이보다 더 미쳐있을 수 있을까 싶은 바로 그 사람에게 미쳤다는 욕을 들은 아르센이 싱긋 웃었다. 아무튼. 칼리안이 자신을 찾는다는 것을 안 에일라가 상황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좀 파악해 보려면 가장 먼저 멜피르를 살펴보아야 할 터였다. 앞으로 파티 전까지는 두문불출할 멜피르가 처음으로 집 밖에 나오는 파티 자리에도 물론 참석을 할 것이다. 변장을 한다면 어차피 잡힐 위험은 드무니까. 칼리안은 그런 에일라에게 눈에 잘 보이는 메시지를 좀 보낼 심산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에일라가 궁금해서든 불안해서든, 혹은 화가나서든 찾아오도록. 물론 그때까지는 왕궁의 마법 보호를 잠시 풀어달라고 앨런에게 이야기를 해 둘 예정이었다. 그렇게 하면, “오랜만이야.” 이렇게나 아름다운 푸른 새가. “······ 에일라.” 다시 찾아 올 테니까. 테라스 난간에 달빛을 등지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이의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본 칼리안이 반가운 듯 웃었다. 아르센을 만난 뒤 보름이 더 지난 어느 날 깊은 밤의 일이었다. < 제44장. 잊어버리지 않게(6) > 생각보다 텐실의 화답이 늦었다. 정확히는 텐실 왕세자로부터의 답이 늦었다 해야 할 일이다. 덕분에 그레이 역시 후작위 승계에 대한 축하 파티를 며칠 미뤘다. 그래서 칼리안은 에일라를 만나기 위해 보름 가량을 기다려야 했다. 보름. 선선하던 바람에 어느덧 찬 기운이 담길 기간. 그 기간 동안 카이리스는 변화의 바람을 품었다. 앨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보름 동안 몇 차례 더 에우리아를 만난 앨런은, 폴룬 마법학원을 르메인의 공식 승인을 받은 폴룬 마법 학교로 변경하고 카이리스 각 지역에 분교를 두기 위한 준비과정에 들어갔다. 그 덕에 ‘마법학원의 교장’이라는 애매한 위치에 있던 에우리아가 직위의 앞 뒤가 맞는 정식 교장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마나실 백작님.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말하게.’ ‘저 그냥 해고해주시면 안 돼요?’ 물론 황금색의 학교장 명패를 다시 한 번 받게 된 에우리아가 앨런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을지는 알 수 없을 일이다. ‘그렇게까지 겸손해 할 것 없으니 자신감을 가지게. 응원하는 뜻에서 술친구 한 명 만들어 줄 터이니.’ 에우리아의 감사인사를 잘 받은 앨런은 카이리스 곳곳에 계속 추가될 이동 마법진의 설치 방법 정형화를 마무리한 며느리 레이첼 그레이스를 수도로 완전히 불러들였다. 그리고 본래 발칸의 훈련을 맡기려던 계획을 조금 수정해 마법 학교의 분교 관리 및 부교장 업무를 맡겼다. 뿐만 아니라 마법사들에 대한 처우 개선, 발칸의 인원이 늘어남에 따른 왕궁 내부 및 수도 외곽의 시설 확충 등의 계획을 실현해나가기 시작했다. 발칸을 ‘군단’이라는 이름에 맞을 몸집으로 키워나가기 위해서였다. 그와 함께 발칸의 성장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일이 진행됐다. - 니들렌 제이아, 페일튼 유즈, 라즈 이베카, 데미안 스콘을 발칸의 사단장으로 임명한다. 마법사단과 기사단에서 각 두 명씩 총 네 명의 사단장을 임명했다. 소대에서 중대로, 대대로, 여단과 사단을 거쳐 군단으로. 애초부터 칼리안은 발칸의 몸집을 조금씩 부풀려가며 그에 맞게 명칭을 바꾸고자 하지 않았다. 서른 명 뿐이었던 발칸을 곧바로 군단이라 불렀다. ‘명칭은 중요해요. 소대라 불리던 발칸이 중대가 되고 대대가 되고 종내에는 군단이 되고. 그렇게 이름을 하나씩 올릴 때마다 귀족들은 국왕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고 매번 경계하려 들 겁니다. 그 때마다 귀족들과 눈치싸움해야 하는데 그렇게 낭비할 시간 없습니다. 처음부터 큰 규모의 이름을 가지고 하위 등급을 하나씩 만드는 게 나아요.’ 발칸을 자신이 목표하는 규모에 맞는 이름으로 부르며 그에 맞는 크기로 키워나가고자 했다. 따라서 앨런은 아르센 및 플란츠와의 상의를 통해 새로 임명한 네 명에게 부군단장의 하위 직급인 사단장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변화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에게 백작의 위를 내린다. - 발칸의 사단장 니들렌 제이아, 페일튼 유즈, 라즈 이베카, 데미안 스콘에게 자작의 위를 내린다. 르메인은 각자의 작위가 없는 이상 수뇌부든 일반 대원이든 할 것 없이 모두 동일하게 준남작으로 대우하던 정책을 바꿨다. 그에 따라 발칸의 수뇌부 일원에게 각자의 직위에 걸맞는 작위를 내렸다. - 발칸의 군단장 앨런 마나실에게 후작의 위를 내린다. 당연히 앨런도 군대를 총 지휘하는 위치에 걸맞는 진짜 작위를 받았다. 사라진지 오래였던 카이리스의 두 번째 후작 자리였다. 귀족들의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섣부른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더불어 또 하나. - 최선의 조치로 3왕자를 소생시킨 발칸의 치유사 히나 베른에게 자작의 위를 내린다. 단순히 귀하다는 말만으로는 그 능력에 대한 가치를 평가하기 힘든 히나에 대한 보상이 주어졌다. 준남작에서 자작으로 무려 두 단계의 신분 상승. 휘하의 대원 없이 단신으로 활동하는 치유사에게 발칸 사단장과 동급의 작위를 준 것이다. 그동안 왕자들을 참 많이 살려낸 것에 대한 보상이자 타국의 왕이 마음대로 넘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히나가 하프엘프인 평민 출신, 심지어 처음에는 성도 없고 신분 증명도 어려운 처지였음을 매우 잘 알고 있는 르메인으로서는 실로 파격적인 인사조치라 할 수 있을 결정이었다. 그 밖에도 이것저것. ‘마치 브리센이 휘청이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움직이는군.’ 귀족들이 이렇게 평가할 만큼, 그레이 브리센 후작이 자리를 잡기 전에 다 바꾸어야 한다는 듯 왕실에는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곧 르메인의 힘이었으며 되돌려 받아야 할 카이리스의 왕권이었다. 그 모든 것이 고작 보름 안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모든 변화의 시작점에 바로 칼리안이 있었다. 그 어디에도 여전히 칼리안의 이름은 없었으나, 그것은 분명 칼리안의 손에서 만들어져 태풍을 불러온 나비의 날갯짓이었다. “저건 나비인가?” “나비 날개가 저렇게 생겼겠나. 딱 봐도 새 아닌가.” 경쾌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는 곳. 불타버린 에반의 저택 대신 레넌의 저택을 임시로 사용하게 된 그레이 브리센의 후작저. 에반의 죽음 이후 브리센이 잠시 휘청이는 상황, 그리고 브리센과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엮인 엄청난 일로 인해 쉬이 걸음하지 않으려던 귀족들은, 발칸의 부군단장이 칼리안의 선물을 들고 참석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 3왕자님과 새로운 브리센 후작 사이가 썩 나쁘지는 않다는 뜻이 되나? - 그러니 선물을 건네주시겠지. 그것도 헤르츠 백작까지 보내신다 하지 않나. - 그럼 아무래도 참석을 해야 되겠군. 이렇게, 칼리안의 선물에 왕자와 후작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의미를 잘 부여한 귀족들이 파티에 참여했다. 그 뒤에는 넓은 정원 입구에 세워진 한 조각상 앞에 몇몇씩 모여 이야기를 주고 받는 중이었다. “아, 그렇군. 새 두 마리로군. 그런데 왜 ‘고양이’도 아닌 새를 보내셨을까?” 칼리안이 보낸 선물. 그 의미를 열심히 가늠해보고 있었다. “내 생각에 이 붉은 새는 그리핀이 아닐까 싶은데.” “그리핀이라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나?” 불과 얼음, 그리고 물을 이용해 만든 조각상.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장식대 위에 한뼘 정도 되는 높이의 물이 고여 있었다. 물을 막기 위한 장치가 하나도 없음에도, 찰랑이는 물은 서로 뭉친 채 아래로 흐르지 않았다. 그리고 양 날개를 하늘로 뻗으며 물에서 이제 막 몸을 띄우려는 듯한 모습을 한 불꽃의 새가 있었다. 다리가 물에 잠겨 보이지 않는 새의 긴 날개가 새빨간 불길에 싸여 타오르는 듯한 빛을 냈다. “그리핀이라 하기 보다는 차라리······.” 새의 길다란 목을 보던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화염으로 만들어진 백조 같은데.” “그렇군. 다시 보니 나도 그렇게 보이네. 그런데 저 백조 입에 대체 뭘 물고 있는 거지?” 얼음. 새의 부리에 얼음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조각이 물려있었다. 사람의 주먹만한 동글동글한 것. 하지만 명백한 형태를 가진 무언가. “······ 참새?” 비슷하지만 참새는 아닌, 푸른 빛의 솔새였다. 그러니까 칼리안은 이제 막 물에서 비상하는 붉은 고니가 푸른 솔새를 물어 죽이는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들어 그레이에게 보낸 것이다. 그레이와 아무 관련 없는 붉은 고니와 솔새의 조각상을 보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이 참새같은 것은 아마 에반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나. 성도 잃고 작위도 잃었으니 어찌 그것을 그리핀이라 하겠는가. 그냥 참새일 뿐이지. 그리고 저 백조는, 과거 덩치만 큰 그리핀과 같이 교만하지 말고 달라진 모습을 보이라는 뜻 같네. 새로워지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노력해서 이전 날의 오점을 다 태워 없애버리라는 그런 뜻이 아니겠나.” “아. 과연 그런 의미로군.” 어차피 뭘 보내든 거창하고 좋은 뜻을 알아서 잘 찾아다 붙여 줄 테니까. “귀족으로 살기 참 힘들어 보입니다.” “너도 이제 진짜 귀족이야, 백작 꼬맹이.”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파란 머리 마법사의 말에 보라 머리 마법사가 가볍게 대꾸했다. “저 위에 번개도 하나 올려둘까? 정신차리고 살라는 뜻도 하나 더 붙여주게.” “그거 보기 좋겠네요.” 그와 동시에 붉은 고니 조각상 위에 보라색 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감탄하며 이내 무언가를 많이 깨달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머리 좋은 멍청이들 같아.” 그 모습을 본 보라 머리 마법사가 솔직한 감상을 남겼다.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하고는 있었으나, 아마 이 자리에 둘 말고 다른 마법사가 있었다면 퍽 놀랐을 것이다. 서로 다른 속성의 마법을 특정 형태로 만들어 유지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참에 그냥 화염 속성도 마스터하는 건 어때? 나처럼 이중 속성으로. 꼬맹이 너 불 좋아하잖아.” “전 이중 속성 안 합니다.” “왜?” “진짜 좋아하는 건 취미로 해야 재밌는 거라고 스승님께서 그러셨거든요. 그리고 사람 잡는데는 얼음만한 게 없습니다.” 물 뿌리고 번개 불러와서 대학살을 내려주는 한낮의 사신에게, 한 명 한 명 심혈을 기울여 심장을 꿰뚫어주는 얼음 꼬맹이가 말했다. “그리고 저는 빨리 6서클 될 겁니다.” “6서클 왜. 술 마시게?” “네. 협회장님 안주 안 얼리려면 술 잘 마셔야 하지 않습니까.” “어, 그래. 잘 해봐.” 발칸의 부군단장이며 천재 마법사이자 백작인 이가 6서클 달성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는 이유를 들은 에우리아가 대강대강 대답을 했다. “그러고보니 폴룬 남작님이 안 보이는데.” “아내분과 근처에 있습니다. 저랑 계속 가깝게 있으면 괜한 의심 살 것 같아서요. 그런데 폴룬 남작은 남작님이고 저는 백작 꼬맹이입니까?” “꼬맹이가 꼬맹이지, 그럼.” 그렇게 간단한 대화가 오고 갈 무렵, 흘러나오던 음악이 바뀌었다.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네가 찾는다던 짹짹이는 저걸 봤으려나.” “봤을 겁니다. 멀찍이서 조각상만 보다가 슬그머니 사라진 남자 한 명 있었습니다.” 그래, 하고 답한 에우리아가 틀어올린 머리를 잠시 매만졌다. 보석이 잔뜩 붙은 하늘색 실크 드레스나 짙은 보라색의 하이힐도 그렇지만, 늘 대충 땋아 내리거나 하나로 묶기만 하던 긴 머리를 틀어 올리니 무겁기도 하고 목 뒤가 영 허전했던 것이다. “불편하십니까?” 그것을 어떻게 눈치채고는 물어오는 아르센을 향해 에우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요즘 좀 바빠서 파티에 참석을 잘 안했더니.” “그래도 로브만큼 잘 어울리십니다.” “그렇겠지.” 당연하다는 듯한 에우리아의 대답에, 셔츠부터 재킷과 바지 모두 검은 색으로 갖춰 입고 보라색의 타이를 맨 아르센이 씩 웃었다. 그러더니 딱 제 머리색을 닮은 얼음꽃 하나를 만들어서는 다른 장식 없이 고정만 해둔 보라색 머리카락에 살짝 꽂았다. “뭔데?” “이것도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요. 안 식상하고.” 새로 생긴 장식 핀을 살짝 만져 본 에우리아는 안그래도 긴 머리가 무거워서 장식핀을 다 빼버리고 왔다 말하는 대신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식상하게 돈 주고 사는 보라색 꽃 말고 훨씬 보기 좋은 파란 꽃 만드는 법 알려준 칼리안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 인사를 남긴 아르센이 손을 내밀었다. “오신 김에 한 곡 추고 가시죠, 협회장님.” “어. 한 곡만 추고 술 마실 거니까 꼬맹이 넌 구경만 해. 남의 집 얼리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 일 끝난 두 마법사가 사이 좋은 모습으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 * * - 팔락 서류를 넘기는 소리에, 잠들었던 루시가 분홍색 발바닥을 쭉 펼쳐보이며 잠꼬대같은 소리를 냈다. 에우리아의 머리카락보다 훨씬 짙은 보라색의 발바닥을 위로 향하고 잠들어 있던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좋아하는 플란츠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루시의 잠버릇에 설핏 눈을 뜨고 꼬물거렸다. 깊은 밤. “깨워서 미안. 계속 자.” 잿빛의 새끼 고양이를 깨운 원인을 제공한 칼리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새끼 고양이 턱 밑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완두콩이 하도 바빠서 네 이름 짓는 것도 까먹었나보다. 그치, 나비야.” “니아옹.” 대답인 듯 얇은 소리를 낸 새끼 고양이가 살살 눈을 감더니 다시 잠에 빠졌다. 그 작은 모습이 너무 소중해서, 칼리안이 조심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멋들어지게 차려 입고 ‘외근’을 나간 아르센의 일까지 처리하느라, 플란츠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칼리안은 플란츠 대신 자신을 찾아온 두 고양이를 얌전히 재우며 이번에 바뀐 여러 일들에 대한 보고서를 살펴보던 중이었다. - 팔락 열린 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몇 장의 종이가 소리를 냈다. 다만 이번에는 루시도 새끼 고양이도 깨지 않았다. 작은 두 고양이가 또 깰까봐, 고양이와 테이블 사이에 사일런트를 발현한 덕분이었다. - 팔락, 팔락 잘 한 일이다. 아니었으면 고양이들이 정말로 깰 뻔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난간에 잠시 기대어 앉아 있던 이가 사뿐하게 움직여 테라스 안으로 발을 디뎠다. 찾아온 이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그것이 꼭 너울거리는 파도 같아서 칼리안은 잠시 소금기 가득한 비린내를 떠올렸다. “겁도 없고.” 덧붙여진 말을 들은 이, 에일라가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으며 생긋 웃었다. “생각보다 늦게 찾으셨네요.” 긴 속눈썹 속 맑은 물빛의 눈동자가 칼리안을 응시했다. “겁도 없이.” 자신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대답이 기껍게 들린 탓에 칼리안의 눈이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냈다. “마력탄은 쓰지 마. 고양이들이 시끄러운 것 싫어하더라.” “안 가져왔어요.” “진짜?” “진짜. 흉터 남는 것 싫어하거든요.” 그렇게 말한 에일라가 소매를 살짝 걷어 보였다. 라트란 영지에서 싸우던 중 칼리안에게 베인 상처의 흉터가 길게 남아 있었다. “내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니지?” “미안해 할 일 맞다면 사과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해달라면 해야지.” “됐어요.” 어둠에 잠겨들기 위함인 듯, 딱 달라붙는 검은 복장을 한 에일라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아무튼. 저는 왜 불렀어요?” “죽이려고.” “설마. 궁금한 것 많으실텐데.” “너는 왜 왔는데?” “죽이려고요.” “흉터 싫다더니.” “혹시 모르니까.” “나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 아니야, 에일라.” 작게 웃으며 대답한 칼리안이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살짝 내려놨다. 누가 보아도 돈이 담긴 주머니였기 때문에, 에일라가 그것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나는 돈 준다고 아무거나 하는 사람 아닌데.” “대답 몇 개는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흠······ 글쎄요. 어떠려나.” 잠시 칼리안을 보던 에일라가 살짝 몸을 움직여 주머니를 손에 들었다. 동전 부딪히는 소리 말고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에일라는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돈 아니네요.” “좀 더 좋은 거.” 동전보다 작고 동그란 것들이 잔뜩 뭉쳐있는 것을 손 위에 올린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한 에일라가 물었다. “루비?” “눈치 빠르네. 여전히.” “흐음. 왜일까.” 상상 이상의 금액을 미련 없이 손에서 내려놓은 에일라가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비딱하게 기울이며 칼리안을 쳐다봤다. “나는 물어보고, 왕자님은 대답하고. 그 대신 루비 안 받는 건 어때요?” “안 받으면, 질문 끝나고 죽을텐데.” “예쁘장한 왕자님이 입은 안 예쁘시네요. 여전히.” “다 예쁘면 재미없잖아.” 칼리안의 답이 재밌다는 듯 작은 소리를 내며 웃던 에일라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는 손가락을 들어 칼리안이 건넨 주머니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저것도 받고 질문도 받으면 돌려보내 주실건가요?” “에일라.” 장난스러운 말을 끊은 칼리안이 붉은 눈을 들어 에일라를 쳐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해서 왔으면 도와달라고 말을 해.” “······ 우와.” 에일라의 눈에 미미한 살기가 어렸다. “나 도망 중인 것도 아시나보네.” “네 주인이었던 사람이 입 말고 마음이 안 예쁘다는 걸 알거든, 나는.” 그 살기 그냥 받아넘긴 칼리안이 평온하게 대답했다. 칼리안에게 큰 패로 쓰일 법한 비밀을 알고 있는 새 한마리를 그대로 살려 둘 데블란이 아니지 않나. 그러니 만약 에일라가 정말 도망쳤고, 칼리안의 비밀을 데블란에게 알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면. 데블란으로부터도 도망을 쳤으리라 생각을 했다. “똑바로 말하면 저것도 주고 도와도 줄게. 대신 너도 나를 좀 도와야 해. 어때.” “왕자님이 진짜 누구인지 알려주면, 생각해볼게요.” “고작해야 생각해보는 정도야? 서운한데.” “나 쉬운 사람 아니라니까요.” “알아.”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모를 리가 있나. 네 진짜 주인이 나였는데.” 살기가 짙어진다. 칼리안이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 에일라. 죽이기 싫으니까. 여전히.” 서늘한 바람이 불고 고양이들은 새근새근 잠을 자는 시간. 평온한 밤이 잠잠하게 깊어갔다. < 제44장. 잊어버리지 않게(7) > 바다 비린내. 꽃처럼 향기롭지도 않고 케이크처럼 달지도 않고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텁텁한 소금 냄새. 베른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세크리티아로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프고 힘들어서가 아니라, 정말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바다가 보고 싶은 날이 있다. 사무치게 보고싶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뼛속 깊이 그 소금내를 꽉꽉 채워야 속이 좀 시원할 것 같은 그런 때가 있다. 오늘, 지금처럼. 이곳에 없는 그 바다가 그렇게나 그리운 순간이 있다. “진짜 주인이라는 말, 무슨 뜻이에요?” “내가 진짜 누구인지 알려달라며.” “나는 왕자님을 오늘로 세 번 봤어요.” 비 오던 밤 술집에서, 서로 검을 겨눴을 때, 그리고 오늘. 잠시 그 수를 세어 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나’도 널 세 번째로 봤어.” 칼리안의 것보다도 긴 듯한 에일라의 속눈썹이 살짝 내려앉았다 다시 올라왔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킬 때면 꼭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왕자님에 대해 확인해 볼수록 모르는 것만 늘어나네요. 변장하지 않은 내 모습,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요? 왕자님이 새 판매점을 어떻게 찾아왔는지, 우리가 쓰는 암호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지, 붉은 고니라는 이름은 왜 쓰셨던 건지, 세자 저하께서 왜 그렇게 왕자님에 대해 알고 싶어 하셨는지, 세자 저하께서 이 곳에 온 뒤에 왜 왕자님을 돕고 하얀 수리를 내치셨는지. 그리고 왕자님이 그 검술을 어디에서 배웠는지. 왕자님의 정체가 뭔지. 진짜 주인······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날. - 내 앞에서 죽을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왜, 어떻게. 그런 눈을 하고 있었는지. “······ 이해가 안돼요.” “이해가 안 되는 거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깍지를 낀 채 다리 위에 올려두었던 하얀 손가락이 반대편 손등에 둥근 호선을 그렸다. 조금 전까지 숨김 없이 웃음을 보였고 지금 당장 얼굴 가득 웃어보여도 아무 문제도 없을 테지만, 칼리안은 얼굴의 웃음기를 다 지워버렸다. “내가 널 부른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너에게 도움을 주리라 생각하고 온 거잖아. 너를 쫓는 세크리티아의 다른 새들로부터, 세크리티아의 국왕으로부터, 내가 너를 보호해 줄 것이라 믿고 찾아온 거잖아. 내가 이미 너를 사형대에 올렸던 것을 잘 알면서.” 오늘이 되기 전까지 고작 두 번 봤다. 싸움을 했고 에일라의 잘못을 눈감아주지 않은 채 체포했다. 사형대에 올렸다. “그런 나를 이번에는 어떻게 믿고 이 왕궁까지 찾아왔는지 묻고 싶은데, 에일라. 결코 눈감아주지 않고 곧바로 다시 체포할 것이 뻔한 사람을 왜 찾아왔는지.” “그건.” “나였으면 여기 절대로 안 올 것 같거든. 나에 대해 확신하는 바가 있지 않고서는.” 이 곳에 찾아올지 찾아오지 않을지, 절반의 확률이었다. “네가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짐작하고 있다면 찾아 올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오지 않으리라 여겼어. 찾아오지 않는다면 또 다른 방법을 짜내서 널 잡아들이려고 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잡아서 필요한 정보를 얻고 이번에는 제대로 사형대에 올리겠노라고.” 제대로 된 사고 방식을 가졌다면 카이리스 왕궁 안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왔어. 그것도,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왔어. 아무리 네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몰린 상황이라 해도 레니시타 잎 위에서 생을 마감하려고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왔다면, 넌 이미 내가 누구인지를 얼추 알고 있다는 소리 밖에 안 돼.” 에일라가 테라스에 나타났던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지금 에일라는 칼리안이 누구인지 몰라서 온 것이 아니라 이미 확신을 했기 때문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에일라. 나에 대해 정말 모르는 채로 온 게 맞아?” 에일라의 눈이 칼리안을 바라봤다. 칼리안이 그 눈을 마주 봤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록 눈을 떼지 않던 에일라가 입을 열었다. “당신······ 정말 누구에요?” 칼리안이 웃었다. 푸른 머리카락이, 물빛 눈이. 혼자 기억한 그 모습이 꼭 바다같아서 웃었다. “그만 좀 잊어버려.” 다들 어찌나 잘 잊어버렸는지. 매번 설명하기도 귀찮아 죽겠네. “네 주인이라니까. 내가.” 에일라. * * * 니들렌이 고개를 숙였다. 아디니아 꽃잎 닮은 머리카락이 함께 쏟아지듯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그런 니들렌의 뒷통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왜.” “이 시간에 들어가시지도 못하게 하고, 또······ 왕자님께 이런 부탁 드려서요.” “됐어.” 플란츠는 짧은 대답만 한 뒤 니들렌의 손에 들린 커다란 종이 한 장을 받아 들었다. 니들렌이 잘못한 것이 없었다. 따져본다면 니들렌 뿐 아니라 누구도 잘못한 것은 없었다. - 아무래도 너희들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혹시 조금이라도 편치 않다면 숨김 없이 말해주려무나. 곧바로 취소할 것이니. 그날 오전 르메인은 란델과 플란츠를 따로 불러 이런 말을 했다. - 빌헬름 관을 지금의 헤이시아 궁이 있던 곳까지 증축하고 헤이시아 궁은 카밀리아 궁 옆으로 자리를 옮겨도 좋을지 묻고 싶구나. 시스파니안의 공동이 발견되어 잠시 재건을 미루고 있던 헤이시아 궁을 국왕이 거주하는 카밀리아 궁 옆에 나란히 위치하도록 옮겨 짓는 것이 어떤지에 대해서 두 왕자의 생각을 묻는 중이었다. 빌헬름 관과 가장 가까이 있던 빈 공간인 헤이시아 궁 터에서, 시스파니안의 공동으로 가는 입구를 일부 허락된 이들만 드나들 수 있도록 폐쇄하고 발칸을 위한 건물을 추가로 짓는 것이 어떨까 하는 의견이 있었던 까닭이다. 물론 칼리안의 의견이었다. 그런 내용을 실제로 입에 올릴 수 있을 사람은 카이리스를 통틀어 칼리안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 알겠습니다. 란델은 그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좋다 싫다를 언급하는 대신 알겠다는 말을 했다. 헤이시아가 어디에 세워지든 상관 없다는 의미였다. 사실 르메인이 가장 걱정한 것은 란델보다는 플란츠였다. 실제로 헤이시아 궁에 살았던 ‘어머니’를 찾아가고 만난 기억이 있는 이는 르메인과 플란츠 뿐이었으니까. - 이견 없습니다. 플란츠 역시 그것이 좋은지 싫은지에 대한 내용은 배제한 대답을 했다. - 그래, 알겠다. 르메인은 괜한 말 덧붙이는 대신 이렇게만 말하고 빌헬름 관 증축을 진행하도록 수락했다. “원래 헤르츠 부군단장님께 말씀드리려 했는데 계속 안 오셔서요.” “알아.” 덕분에 헤이시아 궁 터 어디에 무엇을 더 지을지 대략적인 계획을 세워야 했고, 그 일을 담당하게 된 니들렌은 아르센의 조언을 받으려 했다. 아무리 마법사라 해도 상식이 있는데 그에 대한 의견을 어떻게 플란츠에게 묻겠는가. “괜찮으니까 그만 사과해.” “네, 왕자님.” 그래서 오매불망 아르센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다 못한 플란츠가 먼저 나서서 니들렌을 돕기 시작했다. 내일 하면 될 일을 굳이 오늘 하겠다고 저러고 있으니 그냥 빨리 돕고 퇴근이나 시켜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들 돌아간 저녁부터 늦은 밤이 되도록 함께 헤이시아 궁 터 이곳 저곳에 뭘 세울지 계획을 짜냈다. 그 뒤에는 생각한 계획대로 보고서를 써도 괜찮을지를 최종 확인하기 위해 헤이시아 궁이 있던 곳으로 함께 찾아왔다. “그런데 왕자님. 제가 누군지는 아시는 것 맞죠?” 플란츠가 자신을 계속 ‘마법사’라 부르는 것을 듣던 니들렌이 이렇게 물었다. 평생을 보내도록 누구의 이름도 외울 필요 없이 사는 왕족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결례가 되는 질문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플란츠와 그래도 좀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꺼낸 말이었다. “루시한테 닭고기 뺏기고 소금 넣은 거 먹는 마법사 사령관.” “······ 네.” 그냥 이름을 아는지가 궁금했을 뿐인데 예상 외의 일을 잊지 않고 있으니 이걸 고맙게 여겨야 할지 아니면 그 기억이 남아있는 것을 씁쓸하게 여겨야 할지. 덕분에 어색한 얼굴이 된 니들렌을 슬쩍 쳐다 본 플란츠가 덧붙여 말했다. “니들렌 제이아.” “아. 맞아요. 감사합니다, 왕자님.” 니들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 나쁘고 예민하고 말 짧고 죽도록 힘든 훈련만 쏙쏙 골라 잘도 시키면서 고양이에게만 잘해주는 저 왕자가 의외로 그렇게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플란츠는 대답 없이 빈 공터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 시선이 한 곳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에, 니들렌이 그 쪽을 가만히 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화원이 있던 곳이네요.” 화원이라기보다는, 온실이었다. 헤이시아 궁 화원의 한 가운데. 실리케의 온실이 있던 곳이었다. 실리케에 대한 형이 집행된 직후 해체되어 사라졌으니 그 이후에 발칸에 들어온 니들렌은 궁 밖에서라도 보지 못했을 터였다. 잠시 그 온실을 생각하던 플란츠가 뒤로 돌아섰다. 더 할 것이 없었으니 이만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향기가 참 좋았어요.” 멈칫. “르니에리라고 하던데 귀한 꽃이라고 들었어요. 저 자리에 심겨져 있다가 궁이 무너질 때 많이 상해서 잔해 치울 때 뽑아내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한 송이가 피었더라고요.” “······ 심겨 있었다니.” “네. 저기에 꽤 많이 심겨져 있었어요. 향이 정말 좋아서 아직도 기억이 나요.” 실리케의 온실이 있던 자리. 실리케는 르니에리를 온실 바닥에 심지 않았다. 수많은 화분을 두고 길렀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그 온실을 찾았을 때, 온실은 비어 있었다. 르니에리는 없었다. 멈춘 발이 한참동안 움직이질 않았다. 멈춰 선 채 바닥을 내려다 보던 플란츠가 고개만 끄덕인 뒤 발을 옮겼다. 그 때. 그 누구도 실리케를 위한 안네루시아를 띄우지 않았었다는 것은 플란츠도 알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그것을 아쉽다 여긴 적 없었다. 실리케가 안네루시아를 원치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 미친놈.” 제 손으로 치워낸 목숨 제멋대로 제대로 배웅해준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된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네?” “아니야.” 르니에리를 심어놓고 갔다. 아직까지도 커피에서 르니에리 향을 맡는 주제에. * * * 검은색 자개 마차. 왕궁 밖에서 가장 안전할 그 마차에 검은옷 입은 사람을 태운 칼리안이 말했다. “어차피 네 얼굴 아는 사람 세크리티아 국왕이나 왕세자님 아니면 나밖에 없어. 그리고 그 집에서 함부로 마법 쓰면 큰일나니까 당분간 변장하지 마. 밖으로도 나오지 말고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얌전히 그 안에 있어.” 할 말 끝났다는 듯 왕궁 밖에서 누구 숨기기 가장 좋을 곳에 데려다 줄 검은 마차 문을 닫으려는 칼리안을 향해 에일라가 물었다. “누구 집인데요?” “가면 알아. 문 앞에서 노래하는 애가 알려줄 거야.” 칼리안이 이렇게 대꾸하며 마차 문을 닫았다. 곧 다각 다각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라지는 말고.” 마차가 왕궁 문을 벗어날 즈음이 되어 장난스럽게 덧붙인 칼리안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 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참 유쾌한 꽃 모양 석상이 생각난 탓이었다. 마차가 왕궁을 벗어남과 함께 왕궁 전체를 휘감아 도는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더 이상 중단할 필요 없는 보안 마법이 다시 구동된 것이다. 에일라가 궁에서 빠져나가는 길에 왕궁의 기사들에게 붙들릴까봐 직접 배웅까지 해 준 칼리안이, 보안 마법을 막느라 꽤 고생했을 앨런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다시 타박타박 체르밀 궁으로 돌아가다가, 건물 입구에서 잠시 발을 멈췄다. 그리고 방향을 바꿔 호숫가 쪽으로 걸어갔다. “안 들어가고 뭐 하십니까. 늦었는데요.” 이 밤중에 하얀 달빛 가득한 호수 보면서 청승떨고 있는 개구리밥같은 머리꽁지가 보여서였다. “너.” “저는 왜 기다리셨습니까.” 플란츠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 서서 찰랑이는 호숫물을 한참 쳐다보도록 대답이 없었다. 어차피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옆에 누가 있든 말든 신경 안쓰고 제 세상에 빠지는 놈인걸 알아서, 칼리안은 그냥 다음 말이 나오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고양이 이름.” “네.” 고양이 이름을 드디어 정했나보다. 더 이상 나비야 사과야 할 수 없게 될 것 같아 조금 아쉬운 마음이 생긴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기억하겠다는 말, 뭐라고 하는데.” “세크리티아의 옛 언어 말씀이십니까.” “루시가 돌봐주고 있으니까.” 루시 이름도 세크리티아의 옛 언어로 지었으니 새끼 고양이도 똑같이 짓겠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안네, 입니다.” 안네루시아. 잊지 않겠노라는 약속의 말로 떠난 이를 위로하는 꽃. 그것을 잠시 떠올렸는지 플란츠가 다시 호수를 쳐다봤다. “그걸로 해.” 나비 말고, 사과 말고. 잘 살라며 가르쳐 주고 있는 것 안 잊어버리고 고양이 잘 돌보겠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 뜻은 언제 알려줄건데.” “형님 더 크시면요.” 생글생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체르밀 궁을 가리켜 보였다. 날 추우니 연약하신 형님 빨리 들어가시라는 뜻이었다. 혹시 내 이름 뜻이 완두콩인 것은 아닌가 하는 끔찍한 생각을 문득 떠올린 플란츠가 깊은 고민에 빠져드는 것은 모르는 채였다. < 제45장. 바다 보러(1) > 버터 향이 가득했다. 마늘 향이 났고 후추 향도 조금 났다. 빨갛게 익은 껍질에서 새하얀 속살을 떼어내니 버터 향이 더 짙게 올라왔다. 함께 구워진 브로콜리, 아삭할 정도로 익은 양파와 노란 파프리카에서도 버터 향이 났다. “버터는 이렇게 많이 안 써도 괜찮아요.” 벗겨낸 껍질을 옆으로 치우며 하는 말을 들은 베로니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할 줄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에일라가 잘 구워진 랍스터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긴 머리를 틀어올려 고정시킨 비녀의 하얀 구슬 장식이 흔들거리며 반짝였다. “사흘만에 처음으로 하는 말이 버터 많다는 소리면 듣는 사람이 기운 빠지잖아. 적어도 만나서 반갑다거나, 자기소개라거나, 그런 말이어야지.” “사흘만에 처음으로 하는 말이 너 버릇없다는 소리인 것보다는 낫잖아요.” 앨런의 집에 온지 닷새, 베로니카를 만난지는 사흘. 그러니 정확히 따지자면 닷새만에 처음으로 입을 연 에일라를 향해 베로니카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미안. 혹시 기분 나빴어요?” “버릇이 없다는 소리지 기분이 나쁘다는 건 아니니까 편한대로 해요.” 아무리 후작의 손녀라 해도 자신보다 나이 많은, 신분이나 작위를 모르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반말하는 것이 버릇없는 일이라는 걸 베로니카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에일라에게도 말 트는 것에 대해 허락을 구했다. 에일라가 대답하지 않았고 베로니카는 그것을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였을 뿐. “할아버지 보고 자라서 그래. 미안.” 정작 그 앨런은 말이 매운 것이지 뒤가 짧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튼 베로니카는 항상 이렇게 이유를 붙였다. 결국 다시 반말이었지만 어쨌거나 편한대로 하라 말한 것은 맞았던 탓에 에일라는 고개만 한 번 더 끄덕였다. 그 뒤 완전히 익지 않아 하얀 빛이 도는 양파를 슥 밀어내고는 옆에 있던 브로콜리를 집어 먹었다. 그런 에일라를 지켜보던 베로니카가 입을 열었다. “여기 왜 숨어 있는 거야?” 칼리안은 세심하질 못했고 앨런은 바빴다. 덕분에 빈 집에 에일라만 보내놓고 앨런의 집에 누가 왜 와 있는지에 대해 베로니카에게 설명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베로니카가 레이첼과 사는 집을 두고 앨런의 저택에 들를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야 맞을 터였다. 에일라 혼자 알아서 잘 지내던 둘째날 저녁, 앨런의 집에 놀러 온 베로니카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둘 모두 모를 것이다. 물론 그런 베로니카를 마주친 에일라가 등 뒤로 숨겼던 단도를 소리 없이 집어넣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둘 뿐만 아니라 베로니카도 모르는 일이지만. “사정이 있어서요.” 자신이 옆 나라에서 도망친 새라고는 말할 수 없을 에일라가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결코 친절하지 않은 말이었으나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물었다. “칼 쓰는 사람이야?” “왜 그렇게 생각해요?” “마법사는 아닌 것 같아서.” “마나실 후작 애인이냐고 먼저 물어볼 줄 알았는데, 특이한 걸 묻네요.” “할아버지는 자기가 몇 살인지 까먹고 사는 사람 아니야.” “마법사가 아니라 해서 무조건 칼 쓰는 사람인 것도 아니고요.” “알아. 그런데 할아버지 집에 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둘 중 한 두 개는 쓰더라.” 물론 둘 다 쓰는 사람은 칼리안 왕자님 뿐이었지만. 이렇게 대답하는 베로니카를 잠시 쳐다본 에일라가 새하얀 랍스터 속살을 한 점 더 집어 올리며 말했다. “칼 써요. 3왕자님 사람이고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생각이 맞았다는 사실에 기분 좋은 표정을 한 베로니카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나는 베로니카야. 나는 칼이나 마법 말고 약 쓰는 사람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야. 머리카락이랑 말버릇은 할아버지 닮고 생긴건 엄마 닮아서 나머지는 아빠 닮으려고.” 그런 베로니카를 잠깐 보던 에일라가 포크를 내려놓고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이름은 나중에 알려줄게요. 나도 반가워요.” 버터 많다는 얘기로 시작해서 자기 소개와 악수로 끝난 이상한 순서의 대화를 마친 베로니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엄마 올 때 돼서 가 봐야 해. 내일도 올게. 혹시 먹고 싶은 것 있어? 해줄게.” “······ 생굴.” 해산물 먹는 것이 퍽 자연스러워 보이더니 먹고 싶은 것은 생굴이란다. “카이리시스 사람들이 해산물을 그렇게 좋아하질 않아서 파는 곳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내일 한번 찾아볼게.” 해산물을 좋아하고 칼리안과 관계가 있다면 지그프리드 공작가 사람인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이런 대답을 했을 때 쯤, 멀리 문 밖에서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문 밖의 깜찍한 석상과의 대면이 퍽 인상깊었던 탓에 하마터면 남의 집 문지기를 부술 뻔했던 일이 떠오른 에일라가 고운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곧 달칵 하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어보이는 베로니카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에일라의 눈과 비슷하지만 더 옅은 물색의 머리. 키리에였다. “일어나십시오.” 의미를 알기 어려운 얼굴로 에일라를 잠시 바라보던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굴 먹을 일 당분간 없으리라는 말을 전해왔다. * * * 에반이 죽은 뒤의 후폭풍이 어느정도 가라앉았다. 벌을 받아야 할 이들에 대한 조치와 그에 따른 급한 건이 마무리 되었고 대대적인 인사 이동도 있었다. 그러니 이제 상을 주어야 할 차례가 아니던가. 왕궁의 안전을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근 한 달 가까이를 긴장 속에 보냈던 발칸 마법사들에 대한 휴가가 주어졌다. 물론 전원을 한꺼번에 쉬게 할 수는 없었으니 돌아가면서 보름 씩을 쉬도록 했다. 그것이 발단이 됐다. “협회장니임.” 할 일이 없으면 잠이나 자면 될 텐데 쉬는 법을 다 까먹은 마법사들이 집에서 나와 꾸물꾸물 모였다. 탄산수를 홀짝이면서 아르센이 어떻게 검을 부수는지를 토론하며 놀고 있으려니, 아직 휴가 날짜가 되지 않아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아르센이 보였다. 아르센은 며칠 못 볼 줄 알았던 부하 마법사들을 만난 것이 반가운 마음에 합석을 했고, 다들 마시는 탄산수 굳이 거절하고 혼자 맥주를 시켰다. 그리고 맥주를 딱 두 잔 마시는 동안 자신이 검을 어떻게 부수는지를 설명해준 뒤 깔끔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다시 집을 향해 걸어가다가, 반가운 보라색 머리를 봤다. - 꼬맹이. 잘 됐다. - 무슨 일 있으십니까? - 어. 리베른에서 보낸 선물 때문에 마나실 후작님을 좀 뵈려고 했는데 바쁘신 것 같더라고. 칼리안 왕자님 일로 할 말도 있고 하니까 잠깐 시간 되면 얘기 좀 하고 가. - 네. 알겠습니다. 그런 이유로 둘은 대화하기 딱 좋은 술집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른 사람이 훔쳐 듣지 않도록 사일런트를 발현하고, 아르센이 취하지 않도록 맥주를 딱 두 잔까지만 마시게 했다. “칼리안 왕자님이 조만간 정보조직 보스 안 해도 되게 해주시겠다 하셨어. 괜히 낭비되던 협회 마법사들 이제 다른 일 해도 될 것 같은데.” “네에.” “그리고 리베른에서 좀 두꺼운 수정판으로 된 마법 용품을 보내왔는데 이게 아무래도 통신용인 듯 하거든. 나도 처음 봐서 정확하진 않은데 설명이 그래. 그러니까 마나실 후작님 시간 괜찮으시면 한 번 찾아뵌다고 얘기 좀 전해줘.” “아······.” 그런데 아무래도 아르센 반응이 영 이상한 것이다. 설마 술이 더 약해졌나 싶어서 쳐다보니 아르센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요, 협회장님. 사실 아까 두 잔 마시고 오던 길이었거든요. 마신 지 조금 지났으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요, 협회장님.” “······ 젠장.” 대화고 말 전달이고 나발이고 맥주 네 잔 마신 아르센으로부터 감자튀김을 지키느라 바빠진 에우리아의 입에서 조금 험한 말이 나왔다. “그런데 병아리는요? 제이아 사령관 말로는 병아리 깨는데 20일 정도면 된다고 했는데요, 협회장님.” “어. 죽었나봐. 안 깨. 내일 후라이 해먹으려고, 그냥.” “우리 협회장님 너무하시네에. 병아리 만드신다더니 먹어버린다고 하시면 서운하잖아요, 협회장님.” 이렇게 말한 아르센이 테이블을 톡 건드렸다. 쩌저적, 하고 얼음 줄기 하나가 뻗어나가더니 멀찍이 떨어뜨려 둔 감자튀김 접시에 닿았다. 기어코 얼려버렸다. “······ 아니다.” 언 감자를 손에 집었다가 도로 내려놓은 에우리아가, 썩 괜찮은 품질의 바질리카 한 잔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보온 마법에 충격 완화 마법까지 싹 다 걸어놓은 계란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그냥 지금 먹어야겠다. 그게 낫겠어.” 이 말은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아르센이 얼른 계란을 뺏어가며 말했다. “안돼요, 협회장님. 계란 불쌍해요.” “난 저 감자튀김이랑 네 뱃속에 든 맥주 네 잔이 더 불쌍해.” 그렇게 옥신각신, 지금 먹겠다 안된다 이리저리 계란을 서로 빼앗아가며 투닥이고 있는데. - 뽀직! 하고 새하얀 계란에 실금이 갔다. 순간 두 마법사의 움직임이 멎었다. - 뽀직, 뽀직! 그러거나 말거나 또 한 번 금이 생겼다. 아르센이 눈을 치켜뜨며 에우리아를 쳐다봤다. “설마.” 설마 진짜 깨는 건가, 하는 말이 에우리아의 입에서 맴돌 때 쯤. - 뽀지직! 조금 더 큰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오래지 않아, 작은 것이 뿅 하고 알 껍질 밖으로 튀어나왔다. 새까만 눈, 아직 젖었지만 보송보송할 것 같은 노란색 털. 그리고 뭉툭한 부리. “음.” ······ 뭉툭한 부리? “오리?” “삐약!” 귀엽고 작은 새끼 오리가 아르센을 보고 있었다. 오리알과 계란 구분 못하는 파란 머리 마법사가 오리알과 계란 구분 못하는 보라 머리 마법사를 향해 싱긋 웃으며 멋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드리는 오리입니다, 협회장님.” 그리고는 쿵, 하고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은 뒤 잠들어 버렸다. * * * 완두콩은 아니라고 했다. 아니라니 다행이긴 한데 놈이 웃었다. ‘그런 뜻은 아니니까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게다가 말까지 흐렸다. 놈은 거짓말을 못한다. ‘더 크시면 말씀 드린다니까요. 그만 궁금해 하십시오.’ 그러니까 내 이름 대체 무슨 뜻이냐고 아무리 물어봐도 계속 같은 말만 하고 있다. 얼마나 더 나이를 먹으면 알려주겠다는건지 몰라도 도무지 말을 안하는 것이다. 그러다 내가 쟤 형이라는 게 생각났다. 그래서 짜증이 났다. “생각.”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 타다당! 카앙! 플란츠가 빠르게 몸을 돌려 목소리 끝에 치고 들어오는 두 자루의 검을 받아냈다. “검에 생각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 알아.” 저도 모르게 잡생각을 하고 있던 플란츠가 다시 검을 다잡았다. 대련 끝나고 저 놈 씻을 때 몰래 내려가서 저 반지를 훔칠까. 그래서 새 좋아하는 보라색 눈 가진 놈한테 이름 뜻이 뭔지 물어볼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안 되는 걸 안다는 말이 생각 안하겠다는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 카가강! 곧 두 개의 검이 다시 한 번 플란츠의 눈 앞으로 쇄도했다. 플란츠가 양 손에 든 검을 들어올려 공격을 막은 뒤,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빼내어 내찔렀다. - 카앙! 당연하겠지만 여지 없이 막힌 검에서 강한 타격음이 울렸다. 잔뜩 날이 선 소리를 듣던 플란츠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보니 뭐였을까. 그렇게나 생각하지 말라는 놈을 한달 가까이 요양하게 만든 것은. - 카아앙! 휘둘러지는 검을 막은 왼손이 저릿했다. 그것을 느낄 새도 없이 오른손에 들린 검을 다시 뻗어 위에서 내리꽂히는 공격을 막았다. 곧 플란츠의 왼손에 들린 검이 칼리안의 목을 노렸다. 그것을 쳐낸 칼리안의 또 다른 검이 빛과 같은 속도로 플란츠를 향했다. - 카가강! “······ 형님.” 코앞까지 당도한 검을 쳐낸 플란츠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다. “생각이 많으면 죽는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러는 넌.” “안 죽었습니다. 저는.” 에반과의 싸움 중 한눈 판 일을 또 궁금해하는 플란츠에게 대충 대답한 칼리안이 한 발을 물렸다. “세크리티아 국왕으로부터 아직 의견이 안 나왔습니다. 속으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지 모르는데 체이스 왕세자님도 다른 움직임을 못 찾고 계십니다. 어차피 다른 생각을 하실 거라면 그 쪽으로 해주십시오. 비단 제 일만은 아니니까요. 궁금한 게 있으면 저 말고 형님 일에 대해서 궁금해하시고요.” 칼리안의 양 손에 들린 검붉은 검이 스르륵 사라졌다. “아, 이름 뜻은 말고요. 더 크시기 전에는 안 알려드릴 거니까.” “짖지.” 플란츠의 말에 생글생글 웃은 칼리안이 잠시 수련장 창 밖을 봤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에 어스름한 달빛이 비췄다. “며칠 전에 찾은 새가 곧 올 겁니다. 당분간은 신물 찾아서 보내는 일을 담당할 거고, 제온에 대한 실마리 잡히면 협회장 대신 제 눈과 귀 노릇을 맡길까 합니다. 브리센 후작 쪽은 당분간 조용하겠지만 아마 란델 형님과 접촉하려 들 테니 주시하고 있어야 하고요. 형님이 있는 한 자신의 자리가 단단하지 않을 것을 알 사람이라서요.” 말을 듣던 플란츠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리안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알려드린 검술은 키리에 통해서 연습하시면 되고 마법은 스승님께 부탁을 드려놨는데 혹시 바쁘시거든 헤르츠 경 통해 연습하십시오.” “너.” “네.” 칼리안의 눈을 잠깐 쳐다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저렇게 뒷일 부탁하는 말을 하는지 눈치를 챈 까닭이었다. “언제 갈건데.” “내일 쯤이요.” “언제 오는데.” “열흘 정도, 길게 보면 보름 쯤 걸릴 겁니다. 지그프리드 공작령에 가서 사나흘은 더 가야 엘프 마을이 나오는 것 같고 어머니 나무도 만나고 협박도 좀 하고 하려면 그 정도 시간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적당히 몸이 나았으니 엘프들이 있는 곳으로 가 담판을 지을 생각에서 하는 말이었다. 데블란과 잡은 손도 놓게 하고, 제온과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다면 찾아보기 위해서. “전하께는 말씀 안 드렸으니 적당히 둘러대주세요. 란델 형님이야 어차피 관심 없으시겠지만 혹시 물어보시면 란델 형님 쪽도요.” 그런 칼리안을 다시 한참 보던 플란츠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보름치 외출을 하려면 무슨 짐을 싸야 하는지, 루시랑 안네는 두고 가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하면서. < 제45장. 바다 보러(2) > 하나를 읽었고 하나를 놓쳤다. 샤워를 하는 동안 창문을 잠갔다. 혹시 몰라 반지도 그냥 끼고 씻었다. 대련하다 말고 뚫어져라 반지를 쳐다보기에, 영글다 만 키위같은 그 머릿속에 뭔 생각이 떠올랐을지 눈에 훤히 보여서 창문을 잠근 것이었다. 아주 꽉꽉 닫고 꼭꼭 다 잠갔다. “도대체 그걸 왜 그렇게 궁금해하시는지.” 키리에가 대련 중에 제 심장에 칼 꽂을 뻔한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면서, 화를 내기는 커녕 동생의 시종이 자신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문도 보이지 않은 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는 꼬락서니에 속이 터졌다. 지금은 좀 나아졌다지만 그 때 놈은 사는 것에 일말의 여한도 없던 그런 상태였으니 그 일을 두고 키리에에게 화를 내는 건 아예 기대조차 안했다. 대신 뭐든 좋으니 형님 너도 궁금증이라는 것을 좀 가져봐라 했더니 예상치 못한 것을 궁금해했다. - 그래서 뭐냐고, 내 이름. 쇠약한 심장 기껏 고쳐놨더니 이 질문을 다시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닷새 동안 눈만 마주치면 그 파릇파릇한 눈을 번뜩이면서 이름 뜻이 뭐냐고 물어보는 통에 아주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집요하기로 따지자면 창밖에 튄 빗물 잡으려는 루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다. 그렇다고 적당히 둘러대려 해도 망할 입이 도통 거짓말을 못하니 이러다간 가위라도 눌릴 것 같았다. 호기심을 가르쳐 줬더니 어디서 고집을 같이 배워 온 모양이지 않은가. “대체 왕궁 어디에서 그런 걸 배운 거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삭막한 왕궁 어디에서 그런 걸 배웠는지······ 하고 한탄을 하다가. “······ 나구나. 나였겠네. 나 말고 누구겠어. 나 밖에 더 있나. 내가 가르쳐 줬겠지. 나겠지. 그래, 내가 그랬네.” 가볍게 마력을 운용해 새카만 머리에 잔뜩 맺힌 물기를 털어내 말리고 시녀들이 준비해두고 나간 옷을 알아서 갖춰 입던 칼리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뺏길 뻔했던 반지에 시선이 닿았다. 그래도 뭔 수작을 부리려는지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고 있는 스스로가 웃겨서 참 복잡한 마음이 되어버린 칼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우리 형님께서는 생각이 어찌나 뻔하신지.” 그러다 이런 말을 하며 피식 웃었다. 아직 사춘기가 다 안 끝난 탓에 칼리안 말은 절대 안듣기로 했던 굳은 결심을 조금도 잊지 않은 질풍노도의 완두콩이 내일 무슨 짓을 벌일 계획을 세웠는지는 상상조차 못한 채였다. 그렇게, 플란츠의 작은 계획 하나를 읽고 원대한 계획 하나를 놓쳤으나 놓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한 칼리안이 문 밖을 향해 입을 열었다. “들어오라고 해.” “네, 왕자님.”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얀의 목소리가 곧바로 들린 뒤 조용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첫날보다는 조금 더 편한 차림이 된 에일라가 들어섰다. “어서 와, 에일라.” 아마도 칼리안과 같은 이유에서 좋아하는 것이 분명할 색의 옷. 어찌 보면 참 안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그보다 더 잘 어울릴 색이 또 있을까 싶은 검은 무광의 가죽 바지와 재킷을 걸친 채였다. “오래 기다렸어?” “조금요.” “미안. 윗층 사시는 분 신경쓰느라 편하게 씻질 못해서 그랬어. 그동안 잘 쉬었어?” 버터 향 가득한 바닷가재를 떠올려 본 에일라가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 “네. 오랜만에요.” “그래. 잘 했어.” 가벼운 몇 마디 인사가 오가고 얼마 뒤, 이번에도 에일라가 누구인지는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을 얀이 들어와 두 잔의 차를 내려놓고 나갔다. 인사 주고 받기를 마친 에일라는 시트러스 향이 감도는 홍차를 가만히 내려다 볼 뿐 다른 말을 더 꺼내지 않았다. ‘원래 그랬지.’ 에일라는 본래 그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직업 특성 상’ 사교적으로 굴었을 뿐. 그러니 지금 이렇게 조용해진 것은 칼리안에게 있어 참 기꺼운 일이었다. “내가 좀 편해졌나보네. 조용해진 것을 보니.” 대답 없이 칼리안을 응시하던 에일라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저를 잘 아시는 것에 안 놀랄 만큼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가끔 왕자님을 이상하게 쳐다봐도 이해해주세요.” “이해하고 있어. 이미 오래전부터.” 이제 와 설명하자면, 칼리안은 에일라에게도 ‘들켰다’. 때문에 더 이상 비밀 안 들키고 살겠노라 약속했던 드미레아를 잠시 떠올리며 약속 어긴 것을 자책할 법도 했건만 칼리안은 그러지 않았다. 엄연히 따지고 보면 에일라에게 들킨 것은 이미 1년 전이 아닌가. 드미레아와 약속을 하기 한참 전, 플란츠에게 들킨 직후의 일이라 보아야 맞을 것이다. 그래서 칼리안은 드미레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닷새 전에 이미 훌훌 잘 털어낸 상태였다. 윗층 사는 누구처럼 죄책감 많은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나도 내가 바뀐 것에 안 놀랄 만큼 적응하는 데 한참 걸렸거든. 그러니까 괜찮아.” 사실 적응을 다 했는지 안했는지는 칼리안도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어쨌거나 이전에 비해 많이 좋아지기는 했다. 아무튼 칼리안도 적응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남들은 오죽할까. 칼리안이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것을 그냥 다 그러려니 하고 넘겨가며 상대해주는 키리에가 무던한 것이겠지. “저는 왜 부르셨어요?” “줄 게 있어.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렸지만.” 짧게 대답한 칼리안이 테이블 옆에 두었던 것을 가리켜 보였다. 양피지 하나와 종이 한 장. 그 중 종이를 먼저 집어든 에일라가 몇글자 적혀있지 않은 내용을 빠르게 읽어내려간 뒤 짧은 웃음 소리를 냈다. “저에 대해서 정말 잘 아시네요.” - 사망자 신원 확인, 에일라 베르단디. 성이 포함된 실명이 적힌 종이를 손에 든 에일라의 짧은 감상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거짓말은 안 한다니까.” “에반에게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니 그건 조금 불쾌하지만요.” “기분 좋으라고 만든 것 아니니까 투정은 부리지 말고.” 말 그대로, 사망자 신원 확인서였다. 에반과 함께 발견되었다는 여러 세작들의 시신 중 에일라의 신원이 확인됐다는 내용의 서류였다. “위조 서류도 잘 만드시는 것을 보니······ 정직한 왕자님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보네요.” “내 입으로 거짓말 못 한 다는 소리가 거짓말 써먹을 줄도 모른다는 말은 아닌데.” “그런 분이 저 하나를 안 봐주고 사형대에 올리려 하셨고요.” “필요없는 패 끌어안는 사람은 아니라서. 내가.” “그럼 지금은 어떻게 저를 믿고 필요있는 패로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스스로 내 사람이라 여기고 있는 패를 내칠만큼 몰인정한 사람도 아니고.” 에일라가 입을 다물고 눈매를 찌푸렸다. 베로니카에게 자신을 두고 ‘3왕자의 사람’이라 소개한 일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칼리안이 생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베로니카 의심하지 마. 너 데리러 갔던 내 검이 귀가 좀 밝아서 이것저것 잘 주워듣고 다닐 뿐이니까.” 베로니카를 향해 그 말을 한 지 한참 뒤에 찾아온 키 큰 기사를 떠올린 에일라가 다문 입에 살짝 힘을 줬다. 앞으로는 말수를 더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 사람 사생활까지 침해하는 취미는 없으니 걱정말고 남은 것이나 확인해 봐.” 여전히 웃는 얼굴로 아랫사람의 사생활이라 여기는 범위가 꽤 좁은 듯한 말을 꺼낸 칼리안이 테이블 위의 양피지를 가리켰다. 잠시 마뜩찮은 얼굴을 하던 에일라가 양피지를 꺼내 펼쳤다. - 에일라 브리지트 성만 다른 같은 이름을 본 에일라가 입을 열었다. “그냥 푸른 솔새라고 써 놓으셔도 됐을 것 같네요.” 칼리안이 작은 소리로 재밌다는 듯 웃었다. 칼리안의 소유인 휘트린 영지에서 나고 자란 21세의 영지민임을 증명한다는 신분 증명서로 진짜 신분을 어떻게 가리겠느냐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네가 죽었다 해도 세크리티아의 국왕은 안 믿어. 네 시신을 눈앞에 가져다 놓지 않는 이상은 절대 안 믿어. 그럴 바에는 그냥 대놓고 내 사람이라 해 두는 게 나아. 함부로 못 건드리게.” “그런 생각이셨으면 성은 왜······ 아니에요.” 질문을 하던 에일라가 말을 도로 집어넣었다.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만들어 준 성까지 계속 쓸 필요는 없잖아.” “네. 이해했어요.” 도무지 모르는 것이 없는 3왕자를 보며 짧은 한숨을 쉰 에일라가 물었다. “이제 무슨 일을 할까요?” “당분간 내가 자리에 없을 거야. 스승님께 내용은 전해놨으니 왕궁에서 지내. 그리고 지내는 동안 네가 잠시 호위를 해 줄 사람이 있어. 원래 호위하던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요즘 너무 바쁜 것 같아서.” 언젠가 에일라의 새하얀 전서구를 좋아하며 구경하던 얼굴을 떠올리며 둥글둥글한 웃음을 지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나 돌아오고 나면 호위 대신 본래 하던 일 계속 하게 할 거니까 불러와야 될 사람, 필요한 것들도 생각해놓고 있어.” “세작 말씀이세요?” “세작이라기보다는, 정보. 소문 주워듣는 것 말고 고급인력 낭비하는 것 말고 좀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모아오는 제대로 된 정보가 필요해.” 칼리안이 자리 비우는 동안 누군가의 호위를 맡기고 돌아온 뒤에는 정보 활동을 하게 할 생각이라는 뜻임을 이해한 에일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크리티아에서 있었던 일, 세크리티아 국왕이 무슨 일을 시켜왔는지, 제가 아는 다른 정보는 없는지 하나도 안 물어보셨어요. 왜 묻지 않는지 궁금해서요.” “세크리티아 국왕의 새는 이미 죽었고. 너한테 내가 뭘 물어야 하나. 모르겠네.” “······ 저를 믿어서, 아무것도 안 묻고 이렇게 대해주신다는 말인가요?” “안 믿었으면 내 테라스에 발 디디는 순간 죽었을 텐데. 거기 아무나 밟는 곳 아니거든.” 그리고는 창 밖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켜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세크리티아에 있는 누구와 달라서 다른 사람 의심하는 취미 없어.” 의심 많은 사람에게 이제껏 시달려왔을 에일라가 실소했다. 지금까지 들은 소리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좋아요. 누굴 호위하면 되죠?” 고개를 끄덕이며 물어오는 말에, 칼리안의 얼굴에는 지금까지 보인 적 없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한동안 그렇게 웃는 얼굴로 찻잔을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대답했다. “내 생의 이유인 사람.” 생을 이어가야 함을 잊지 않도록 밝혀진 등불같은. 히나를 떠올리면서. * * * 대화는 끝났고 에일라가 밖으로 나갔다. 달이 기울고, 해가 떠올랐다. 아침이 되었다. “왕자님! 또 밤을 새셨어요? 창문은 왜 안 닫으셨어요?” 완연히 소슬해진 바람이 방 안에 가득하도록 창문을 열어 두고 소파에 앉아 밤을 새운 것을 안 얀이 또 한참동안 잔소리를 했다. 칼리안은 대사막의 겨울 바람이 불어도 하나도 안 추우니까 걱정 말라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닷바람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미안. 창문 닫는 걸 까먹고 있었어.” “정말 한 시도 눈을 못 떼게 하시는 것 아세요?” 그냥 얌전히, 서둘러 담요를 가져와 온 몸을 꽁꽁 싸매주면서 도무지 혼자 두질 못하겠다고 잔소리하는 얀을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얀이 오전 일정을 전부 취소시켰다. “그레이 브리센 후작이 있던 변경백령에 새로 부임한 이가 점심 식사 이후에 인사하러 올 텐데, 그 때까지 좀 주무세요. 어떻게 이렇게 속을 썩이시는지 모르겠네요.” 따뜻이라 하기보다는 뜨겁다 해야 할 레몬 꿀차를 가져다주며 이런 말을 하기에, 칼리안이 다시 웃음소리를 냈다. “하나도 안 예쁘니까 웃지 마세요.” 안 예쁠 리가 없는데, 하고 대답하려던 칼리안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얀을 올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미안.” 한 시도 눈을 못 떼겠다는 얀을 떼어놓고 또 도망을 갈 생각이라서 이렇게 사과를 했다. 그렇게 오전 동안 눈을 좀 붙이고, 르메인과 오랜만에 오찬을 가지고, 새로운 변경백을 만났다. 앨런을 만나 도망가서 자리를 비우는 동안 해줬으면 하는 일들을 다시 일러줬다. 키리에를 만나 플란츠의 검술 수련을 보아 주기를 한 번 더 부탁했다. 그렇게 하루가 다시 지나고 밤이 됐다. 일찍 자겠다며 얀을 내보내고 금고를 열어 얼만큼의 돈을 꺼낸 칼리안이 앨런에게 빌린 손바닥만한 가방 안에 그것을 담아 품에 잘 넣었다. 그 뒤에는 창 밖으로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어차피 지그프리드령에 들를 예정인데다 밖에서 오랫동안 지낼 생각이 없었으니 챙겨야 할 짐이 없던 까닭이다. 피곤하다며 저녁도 안 먹고 들어가더니, 4층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아무래도 일이 많기는 하나보네.” 피식 웃으며 이렇게 중얼거린 칼리안이 마굿간으로 갔다. - 탁, 탁! 레이븐이 인사를 건네듯 발을 굴렀다. 다친 뒤로 몇 번을 만나 달래주었으나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는지, 레이븐은 칼리안의 배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대며 푸르릉 소리를 냈다. “다 나았어. 괜찮아.” 그런 레이븐을 슥슥 쓰다듬어 준 칼리안이 훌쩍 뛰어 안장에 오르자, 레이븐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익숙하게 왕궁 정문을 향해 속도를 냈다. 왕궁 밖에 나가기 까지는 빠르게 움직여야 기사들이 쫓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 레이븐도 잘 알았으니까. - 다그닥, 다그닥! 그리하여 금세 정문을 지나 광장에 도달해 적당히 쫓아오던 기사들의 발걸음이 돌려졌을 때, 레이븐이 발을 멈췄다. 속도를 내린 것이 아니라 아예 제 자리에 멈춰 섰다. “······ 음.” 생각지도 못한 것을 마주한 칼리안이 실로 오랜만에 당황한 목소리를 낸 까닭이었다. 누구 의심하는 취미 없는 탓에 너무 믿었다. 한 치의 의심도 안 했다. 새하얀 로브를 입은 분홍 머리 마법사와 똑같은 옷을 입은 열 명의 마법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제복을 입은 서른 명의 기사들이 보였다. 그 옆에는 포도색 머리의 시종이 서 있었다. “애옹!” “냐오옹!” 시종의 품에 안긴 두 마리 고양이가 예쁘게 울었다. “저는 배웅하러 온 겁니다, 칼리안 왕자님. 루시와 안네도 배웅 나온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 레릭이 멋쩍게 웃는 것이 붉은 눈에 가득 담겼다. 그리고. “아무래도 내 아우님께서 순서를 잊으신 듯 하기에.” “무슨 순서 말씀이십니까.” “협상 먼저, 협박은 그 뒤에.” “······ 형님.” 그냥 소드마스터로 찾아가서 협박하지 말고, 발칸 부군단장 데리고 다니는 3왕자 칼리안으로 찾아가서 협상부터 하라고. 달빛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듯한 새하얀 제복 잘 차려입은 플란츠가 은백색의 이름 없는 말 위에 올라 있었다. 불어오는 가을 바람에 하얀 망토가 멋지게 흩날렸다. “하나 뿐인 아우님께서는 어디에도 이름을 안 올려 두셨는데. 나는 가진 게 있으니 같이 가 드려야지.” 하고, 혈혈단신으로 엘프들 찾아가서 협박하려던 동생의 짧은 여정에 동행하러 찾아온 완두콩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낮은 목소리가 칼리안의 귀를 찔러왔다. “그러라고 있는 발칸의 부군단장 직함 아니던가.” 제 손에 권력이라고는 한 톨도 안 쥐고 사는 동생이 또 혼자 사고치러 가겠다는데 별 수 있나. 권력 쥔 형님이 알아서 따라가야지. “아······.” 그런 플란츠를 한참동안 쳐다보던 칼리안이 손을 들어올렸다. 검은 후드 아래, 손바닥 밑으로 숨겨진 빨간 입술이 열리며 속삭이는 듯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걸 배운거야.” 나구나. 나였겠네. 나 말고 누구겠어. 나 밖에 더 있나. 내가 가르쳐 줬겠지. 나겠지. 그래, 내가 그랬네. 아······. 진짜 환장하겠다. < 제45장. 바다 보러(3) > ······ 티끌 같기도 하고. 저 놈 가디건에 늘상 붙어있던 안네 털 같기도 하고. 백조 무리에 낀 까마귀도 아니고 나만 까매. 나 혼자 까매. 혼자 음침한 것 같기도 하고 나쁜 짓 하다 잡힌 범인 같은 기분인데 이거 뭐야. 뭔 상황인데.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죄다 하얀 가운데, 실로 도도하리만치 홀로 새까만 칼리안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 모습을 본 레릭이 함께 서있던 다른 시종 한 명에게 눈짓을 했고 무언가를 가지고 다가온 시종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정복입니다, 칼리안 왕자님.” 왕자의 정복. 지금 로브 안에 입고 있는 검은 정장과 비슷하게 까맣지만 제대로 격식을 갖춘 옷을 본 칼리안이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아주······.” 아주 작정을 했구나. 플란츠. 차마 이 자리에서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말을 삼키며 웃던 칼리안이 정복을 받아들고 다시 웃었다. 기가 막혀서 한참을 웃다가, 하도 웃어서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을 한 채로 레이븐의 안장에 매어 놓은 까만 가죽 가방을 열어 받은 것을 욱여넣었다. 앨런에게 빌린 것 말고 칼리안의 공간과 연결된 레이븐의 가방 안에 거추장스러운 정복과 붉은 망토가 차곡차곡 잘도 들어갔다. “형님.” 가방을 닫은 칼리안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플란츠를 부른 뒤 천천히 움직였다. 조용한 발굽 소리가 레릭의 귀에 몇 번 들리다 갑자기 잠잠해졌다. 사일런트를 발현한 것이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내 정복이지만 아우님께도 맞을 듯 해서.” 물론 지금 칼리안이 궁금한 것은 그런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으나,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플란츠는 제 할 말만 했다. 그것이 답답했던 칼리안이 짧게 대꾸했다. “그것 말고요.” “같이 가려는 이유는 설명했는데. 다른 문제 있나.” “형님께서 나서야 할 일 아니라는 것 아실 테고 이유도 잘 아실 분이 왜 이러십니까. 그렇게까지 도와주고 싶으시다면 제가 대원들만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협상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권한 없이 힘만 가져간 놈의 말이 잘도 통하겠군.” 실제로 발칸을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없이 대원들만 데리고 가 보아야 아무 소용 없다는 말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처음부터 저는 제 힘만 가지고 갈 생각이었습니다. 권한 없이 힘만요. 마법사도, 기사도, 왕자의 정복도 두고, 형님도 두고, 그냥 저 혼자서요. 그렇게 다녀와도 충분히 잘 끝날 일입니다.” “잘 끝난다는 것이 유리하다는 말은 아니지 않나.” “불리하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인 것도 아닙니다.” “쉬운 길을 두고 왜 혼자 가겠다는 건데.” “혼자 가야 다른 문제 없이 해결 될 일이니까요.” “짖지 말고.” 플란츠의 입에 조소가 올라갔다. “굳이 뱀 잡는 일에 그 자리를 써먹을 생각이 없는 것 아닌가. 세크리티아 국왕과 연관된 일에 카이리스 3왕자가 가진 것들을 이용하기 싫어서.” “무슨 말씀이십니까.” “싫은건지. 아니면 미안한건지.” 이 말까지 들은 뒤에야 칼리안이 비로소 상황을 이해했다. 플란츠가 ‘하나 뿐인 아우님’ 소리까지 해가며 길을 막아선 이유를 알게 됐다. 데블란과의 일을 해결하는 것에 ‘칼리안’의 권한을 쓰는 것이 꺼려져서 이렇게 혼자 도망치듯 왕궁을 나섰다고 생각해 이 난리를 피운 것이다. 오해를 풀겠다는 듯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싫은 것도 아니고 미안한 것도 아닙니다. 제가 누구로 살겠다 마음 먹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이제 그에 대해서는 고민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럼 뭔데.” “이 자리에 대한 부채감이 아니라 이 자리에 대한 부담감을 가졌기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타국과 연관된 문제에 군대 끌고 나섰다 일 틀어지면 전쟁납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전쟁 일으킬 생각 없는 사람이고요.” “파란 머리 마법사 말고 내가 왔으니 된 것 같은데. 틀어지면 군대 데려온 부군단장 말고 발칸 대원들 호위로 끌고 온 2왕자 하면 되는 일인데 문제 될 것 있나.” “참 쉽게 말씀하시네요. 이건 왕실에도 영향을 미칠 문제라는 것은 아십니까.” 플란츠가 별 일 아니라는 듯한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전하께 설명드렸고 마나실 군단장에게는 대원 차출 허가받았고, 파란 머리 마법사와 상의 끝낸 일인데.” “형님.” “소금 좋아하는 분홍 머리 마법사 포함한 발칸 대원들한테 동행 동의 받았으니 됐고.” “형님.” “브리센 후작은 아직 정신 못차리고 있으니 왕자 둘이 밖에 있다 해서 다른 일은 못 꾸미지 않나. 란델 형님은 아직 심장이 묶여 있으니 동생 둘이 없어진다 해서 왕궁 문 닫을 생각은 못하실 듯 한데.” “형님, 좀.” “내가 이 이상 어떤 부담감을 가져야,” “플란츠.” “······ 왜.” 플란츠가 자신의 말을 자른 이를 노려봤다. “굳이 나서야 할 일 아니라는 것도 잘 아시면서 같이 가야 할 핑계 찾아 입에 올리고 있는 건 제가 아닙니다. 고집 부리지······.” “체이스처럼 취급하지 마. 짜증나니까.” 그래서 플란츠도 똑같이 말을 잘라먹었다. “얘기 한 것 같은데. 나는 전부 다 당신한테 맡겨두고 물러나 있을 생각 없다고.” 플란츠가 불꽃 담은 눈 속에 든 사람을 똑바로 마주봤다. 그 입에서 느릿한 말이 이어졌다. “살려놨고 가르쳐놨으면 제대로 써. 쉬운 길 돌아갈 생각하다 또 뒷통수 맞지 말고.” “······ 말씀 참 잘하시네요.” “내 아우님이 워낙 잘 가르쳐주신 덕분에.” 미간을 찌푸리던 칼리안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가르친 것 써먹으라 하는데 뭔 소리를 더 하겠나 싶다. 그러니 결국 이번에도 한 발을 물릴 수 밖에. “평소에도 저렇게 길게 말하면 오죽 좋을까.” 그럼에도 심기 불편한 것은 가라앉질 않아서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한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무 하나 협박하러 가는데 그게 이렇게 비장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제가 다 벌인 일이니, 알겠습니다. 원하시는대로 같이 다녀오시죠.” 허락일지 수긍일지 알 수 없지만 어찌됐건 더 이상 반대하지 않고 동행하겠노라는 소리에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형님.” 하지만 칼리안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또 뭐.” 칼리안이 손가락 하나를 펼쳐 플란츠를 가리켜보였다. 정확히 말한다면 플란츠라 하기보다는 티 하나 묻지 않은 제복을 향해 손을 뻗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리 똑똑하시니 이미 잘 아시겠지만 이동 마법진 써야 해서 짐도 참 단촐하고 요리사는 당연히 없습니다.” 구운 대구는 둘째치고 덜 익힌 스테이크도 못 먹고 맨바닥에 앉아 본 것은 딱 세 번 뿐인 플란츠의 얼굴은 하나도 못 본 척, 칼리안이 기대감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곱게 자라신 우리 형님······ 제 뒷통수 칠 생각 말고 노숙할 각오는 하고 오셨는지.” 칼리안의 새빨간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 * * 책 한 권 정도의 두께였다. 크기는 앨런의 손바닥을 세 개 쯤 합쳐놓은 정도였다. ‘선물 보낼 때가 아닌데 이것만 따로 왔어요, 후작님.’ 에우리아를 통해 받은 것이었다. 7서클의 다른 두 마법사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아봐달라는 칼리안의 부탁을 받고 리베른에 전서구를 보냈다. 그 후 도착한 선물이니 아마도 앨런의 질문에 대한 답일 터였다. “그냥 새를 쓰면 될 것을 어찌 이렇게 거창하게 구시나.” 투명한 수정판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중얼거린 앨런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날카로운 눈 속에 들어찬 여러 해묵은 것들을 그렇게 집어넣은 뒤 수정판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 우우웅······. 미세한 진동과 함께 수정판에 빛이 돌았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으나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를 만큼 어수룩한 앨런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진한 커피 향이 익숙해진 코 끝에 더 이상 아무 향기도 느껴지지 않을 때 쯤. 세워두었던 수정판 위에 커피 향기 만큼이나 익숙했던 얼굴이 그려지듯 나타났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대는 여전히 버릇이 없네.” 그러다 이렇게, 장난스러운 말이 건네졌다. 갈색이라고는 하나도 섞이지 않은 밝은 금발, 그리고 짙은 분홍빛의 눈동자를 보며, 앨런이 입매를 끌어올렸다. “갈 수록 능력은 좋아지고 나이도 늘어나니, 버릇 정도는 없어져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인사는 할 줄 알았거든.” “굳이 그런 것을 따질 사이가 아니리라 생각했지요.” 수정판 안의 얼굴이 시원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에 뵙습니다. 리베른의 국왕이시여.”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조금 길어진 머리카락을 빼면 달라진 것이 없는 앨런을 본 엘린느가 물었다. “좀 피곤해 보이는데?” “요즘 잠을 잘 이루지 못해 그렇습니다. 걱정은 마십시오.” 그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엘린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어. 그럼 이제 무슨 말을 할까. 그대가 궁금해했던 것을 바로 얘기해주고 말을 마치기에는 너무 삭막한데. 리베른에서 새로 만든 통신 마법 자랑부터 할까. 아니면 그대 나라의 과묵한 국왕에게도 그렇게 잔소리를 하는지를 물어볼까.” “새로 만든 통신 마법이 참 대단하다는 것은 지금 보고 있으니 그것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소 같기만 한 분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기도 피곤하니 그것도 되었습니다.” “흠. 그럼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이렇게 한동안 이야깃거리를 고민하던 엘린느는, 결국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가능한 늦게 전하려던 본론을 입에 올렸다. “두 마법사는 지금 마탑에 있어. 지켜봤지만 의심되는 것은 아직 못 봤고.” “전해드린대로, 그들의 힘이 대마법사에게 닿으면 막기 어려우실 겁니다. 마력탄에 불 붙지 않도록 잘 지켜보십시오. 물론 다른 고서클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인이 소드마스터의 힘을 쓰도록 만든다 하니 어느 정도 위험한 물건일지 상상도 잘 안되지만. 그만큼 주의해서 살펴볼 테니 너무 걱정 말아.” “알겠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을 주시지요.” 이렇게 말한 앨런이 수정판을 톡톡 치며 말했다. “이것을 곁에 두고 항시 살필 터이니.” “그거 비싼 거야. 그대 마차보다 더 비싸니까 그렇게 툭툭 건드리다 망가뜨리지는 마.” 앨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말이 끊겼다. 본론이 나와버렸으니 더 할 말이 없었던 탓이다. 괜스레 아쉬웠는지 혹은 다른 궁금한 것이 있었는지 몰라도, 엘린느는 대화를 마무리하지 않고 가만히 앨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앨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드님은 잘 계시는지요.” 엘린느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앨런이 삼켜낸 해묵은 것들이 엘린느의 얼굴에 잠시 올라왔다 사라진다. 대마법사에게서 아들을 앗아간 원인이 자신임을 알면서도 아들 잃은 것의 복수조차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던 왕이 소리 없는 긴 숨을 내뱉었다. 세상 그 어떤 귀한 것을 선물해도 갚을 길 없는 빚을 진 탓에 죽을 때까지 갚기만 해야 할 사람의 후회가 스치듯 비쳤다. “작은 왕관을······ 씌워놨더니.” 침묵을 이어나갈 권리도 없을 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매사 어찌나 참견이 심한지. 골치는 좀 아프지만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어.” “그래요. 더는 엇나가지 않는 듯 하니 다행한 일입니다.” “그래.” “제 걱정은 마시지요. 잘 지내고 있으니.” 그리고 앨런은 이렇게, 엘린느가 가장 궁금해하고 있을 것에 대한 답을 꺼내어 기어코 엘린느의 고개를 꺾어놨다.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앨런의 말을 받아 넘긴 엘린느가 다시 앨런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알려주어 고맙다 하면 내가 나쁜 사람인가.”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으실 분이니 상관 있겠습니까.” “하긴 그렇지. 더 나빠질 것이 없지.” 이렇게 대꾸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엘린느를 향해 앨런이 다른 말을 하나 꺼냈다. “새 아들이 하나 생겼습니다.” 엘린느가 말 없이 앨런을 바라봤다. “제 속 앓는 만큼 아비 속도 앓게 만드는 어여쁜 놈입니다. 빈 자리를 채우려 들지 않고 새 자리를 만드는 마음 깊은 아이입니다.” 세상 그 어떤 귀한 것을 보내도 거절 않고 다 받아주는 것으로 하나씩 용서해가고 있는 마법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그러니 다음에 보실 때에는 잘 지냈느냐 먼저 물어보셔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엘린느의 입가가 잠깐 흔들리다 웃음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 그래. 다음에는 그렇게 하지.” 고맙다는 말이기도 했고, 미안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것을 다 알아들은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루를 꼬박 달렸다. 급할 것은 없었으나 느긋하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왕궁을 오래 비워둘 수 없었던 까닭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식사는······.” 레릭이 걱정하는 마음으로 포장해 준 식사는 점심에 다 먹었다. 마법사들에게 보존 마법 부탁해가며 자신이 먹을 음식 싸가지고 갈 위인이 못 되는 탓에 딱 한 끼만 챙겼다. 덕분에. “꽃 장식은 전부 빼게. 고생해서 꾸밀 필요 없어. 고기는 다 바짝 익히고 향신료는 되도록 쓰지 말고. 해물은 내오지 말게. 야채 많으면 좋은데 피망은 됐어. 양파는 다 익혀서······ 아니 그냥 양파도 빼게. 빵은 호밀은 아니었으면 좋겠고 다른 것 안 넣은 그냥 흰 빵이면 되네. 아, 혹시 완두콩 있나? 완두콩 좀 팍팍 넣어주면 좋고. 완두콩 많이. 엄청 많이.” 지그프리드령의 시트렌 시에 도착하자마자 칼리안이 바빴다. 이럴 줄 알았다. 차라리 레릭을 데려올 걸 그랬다. 시장에게 두 왕자의 방문을 미리 알리고 숙식 준비를 시키는 것은 말단 기사 둘이 했다. 그 정도는 괜찮았는데 문제는 곱게 자란 저 놈의 식성이었다. 그것을 기사에게 구구절절 알려주면서 시장저의 요리사에게 일러주도록 시킬 수가 없지 않은가. “제가 사실 기사들 틈에 껴서 술 마시고 춤 추면서 놀아 본 적도 있고 그러다 주먹질도 좀 해 보고 한데서 잠도 많이 자 봤습니다만.” 플란츠의 맞은편에 앉은 칼리안이 앞에 놓인 음식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느새 사일런트를 발현한 동생 놈이 생글거리는 것을 본 플란츠가 조용히 대답했다. “내 아우님께서 또 짖으려나 본데.” “그런데 제가 누구 시종 역할은 처음 해 봅니다. 덕분에 이렇게 또 새로운 일을 해보네요. 형님.” “시끄러.” “경험도 쌓이고 화도 쌓이고. 되게 좋네요.” “시킨 적 없어.” 그래. 안 시켰다. 주는대로 먹고 되는대로 지내겠다고 했다. 그럼 뭐하냐고. 해 떨어지기 직전에 배고파진 칼리안이 신나서 잡아온 야생 닭을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 끄덕이던 희멀건한 놈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냔 말이다. 덕분에 잡은 닭 놔 주고 그냥 지그프리드령에 왔다. 노숙할 각오 했느냐고 비웃었던 기억은 그새 홀랑 까먹고 냅다 달려서 일단 왔다. “형님 그냥 여기 계시겠습니까. 제가 혼자 슝 하고 다녀오면 그게 빠를 것 같은데요.” “싫어.” 생글생글 웃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그럼 식사 하세요. 왕궁 밥과는 다르겠지만 아까 그 닭보다는 나을 겁니다. 내일부터 이런 저녁 당분간 못 드실 테니 많이 드세요.” 대꾸할 생각도 안 든 플란츠가 산더미처럼 쌓인 완두콩 샐러드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이 누구 소행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걸로 싸우기에는 좀 피곤했다. “완두콩이 엄청 많네요.” “짖지 말라고.” “안 짖었습니다. 그냥 완두콩이 많아서요. 그런데 완두콩 왜 이렇게 푹 익혔나 모르겠네요. 영 흐물흐물하네.” 야생 닭 보는 누구같은데, 이거. “너.” “네.” 짜증은 나는데 짜증을 내면 저 완두콩이 나라는 말을 알아들은 티가 나니까 말은 못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짜증이 나서. “······ 그만 좀.” 루시와 안네가 이렇게 보고싶을 줄이야. 야생 닭 볼 때도 안했던, 괜히 왔다는 생각이 물씬 차올라 미간을 찌푸리는데. - 달칵. 왕자들이 식사를 이어나가는 식당 문이 마음대로 열렸다. 방금 전까지 자리에 앉아 실없이 웃고 있던 칼리안이 문 쪽을 봤다. 그리고 플란츠는 어느새 자신의 앞에 생겨 있는 실드를 봤다. “또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시다니요. 이번에는 두 분이 함께 오셨습니까.” 이런 말과 함께 덩치 큰 이가 안으로 들어섰다. 왕자들이 있는 곳에 허락을 구하지 않고 찾아와도 될 사람이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칼리안이 반가워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그프리드 공.” 플란츠의 앞에 만들어졌던 실드가 사라졌다. 대신 칼리안의 등이 보였다. “오랜만이라 하기에는 그렇지만 반갑습니다. 혹 근처에 계셨습니까.” “네, 왕자님. 볼 일이 좀 있어서 잠시 인근에 있었습니다.” “그러셨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공에게서······.” 반가워하는 웃음 가득한 얼굴을 지우지 않고 잠시 말을 멈추었던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피 냄새가 짙은지.” 플란츠의 앞을 막아선 채 묻는 칼리안을 본 슬레이만이, 무슨 오해를 샀는지 깨닫고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빈 손을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손님이 잠시 찾아 온 탓에 마중인지 배웅인지 모를 것을 나온 길이었습니다. 오해 마십시오.” “손님이라니요.” 슬레이만이 잠시 플란츠 쪽을 보다 입을 열었다. “시오나 힐. 혹시 아십니까.” 시오나 힐. 찾고 싶던 이의 이름을 들은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 제45장. 바다 보러(4) > 자주빛의 와인을 보던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세리에의 머리색을 닮아서 독주를 물리고 와인을 즐기게 되었음을 안다. 물론 칼리안이 아니라 베른의 지식이었다. “조금 전의 일은 미안했습니다, 지그프리드 공.” 얀과 드미레아의 아버지인 슬레이만 말고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가주 슬레이만. 사적인 부분을 배제한 왕자의 입장에 섰을 때 공작인 그를 온전히는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한 사과였다. “여기에서 사흘은 더 가야 나오는 집에서 아들 애칭 딴 강아지나 쓰다듬고 있어야 할 사람이 피 냄새를 풀풀 풍기며 들이닥쳤으니 놀라셨을 법도 합니다. 게다가 듣자하니 작은 코끼리가 좀 다른 곳으로 걷기 시작한 듯 하던데, 이런 상황에서 집에 놀러 온 새끼 늑대를 마냥 반겨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실 만도 하고. 그러니 이해합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라가 아주 흥미진진하게 돌아갈 것 아닙니까.” 시원한 목소리로 대답한 슬레이만은 칼리안이 보여 준 모습이 다시 생각났는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웃음을 멈춘 슬레이만이 칼리안의 앞에 놓인 와인잔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안전하게 잘 자고 있을 새끼 늑대 내버려 두고 왕자님도 이만 한 잔 하시지 그러십니까.” “저는 술 끊었습니다.” 언젠가 플란츠에게도 했던 대답이 똑같이 나왔다. 외모와의 괴리감이 깊은 대답이겠지만 뭐 어떻겠나. 희멀건한 그 풀대가리도 술 끊었다는 소리 듣고 사는데. “이 좋은 것을 끊으셨다니 대단하십니다.” “아니었으면 아마 망나니 꼬리표는 형님이 아니라 제가 달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좋아하셨습니까.” “······ 글쎄요, 그냥 기대어 살았습니다.” 열 여섯 살 왕자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슬레이만은 비웃음 없이 고개만 주억거리다 입을 열었다. “왕자님 알맹이가 본래에는 어땠을지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한 번 쯤 직접 만나봤으면 좋았겠다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미 그 알맹이와 만나고 계시지 않습니까.” “초대왕께서 나이를 드심에 따라 시스파니안께서도 흰 머리를 만드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했던 영웅이라 하나 사람인 이상 겉모습에 구애받지 않고 살 수는 없으니 시스파니안께서 맞춰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투명한 보랏빛의 와인 한 모금을 넘겨 목을 축인 슬레이만이 말을 이었다. “왕자님도 사람이니 똑같으실 겁니다. 어떤 알맹이든 결국은 껍데기에 맞춰지는 법이니 그 대단했을 원래 알맹이가 궁금할 수 밖에요.” 칼리안은 대답 없이 작은 웃음 소리를 냈다. “어떤 분이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글쎄요. 어떤 사람이었을까.” 붉은 빛의 눈이 찻잔을 향했다. 무엇인지 잘 모를 노란 빛의 꽃이 들어간 차에서 참 좋은 향이 났다. 따뜻한 차를 마시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어쩐지 얀이 생각나서 따뜻한 차를 달라 했다. 얀 대신 술에 기대 살았고, 히나 대신 발 끝을 보고 살았고, 술에 취해 키리에에게 업힌 적은 있었지만 다친 채로 누군가에게 업힌 적 없었던 사람을 잠깐 떠올리던 칼리안이 대답했다. “내기를 곧잘 하고, 칼 잘 쓰고, 잘 지키고. 끝내 불행하지는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 참 지그프리드와 잘 어울렸겠습니다.” 슬레이만은 자세한 것 하나 없는 그 이야기가 썩 마음에 든다는 듯 또 한 번 웃음 소리를 냈다. 시장저의 옥상에 만들어진 작은 정원에는 아직 풀내음이 짙었다. 이곳이 카이리시스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고, 또 그만큼 세크리티아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찻잔에 시선을 둔 채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칼리안의 귀에 슬레이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에게 밴 피 냄새가 시오나의 것입니다.” 빈 잔에 와인 채워지는 소리가 잠시 청량하게 울렸다. 방금 채운 술잔을 금세 되비운 슬레이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왕자님. 소공작이 대문을 닫았던 날에 왕자님께 해를 입힌 이들이 대사막의 늑대였습니까.” “맞습니다.” “대사막의 전사들이 아무리 강하다 하나 왕자님을 그렇게 만들 사람은 한 명 뿐인 것으로 압니다.” “······ 시오나 힐 뿐이겠죠.” 대사막의 전사. 정확히는 대사막의 전사였던 소드마스터. “혹시 그럼 그 때 왕자님을 공격한 이가······.” “아닙니다. 저를 공격한 것은 다른 전사들이었습니다. 제온이라는 단체에 속한 이들입니다.” 이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제온에 대한 설명을 했다. 그 뒤에는 얀과 퍽 닮은 둥근 눈매가 생각에 잠겨드는 것을 보며 물었다. “시오나가 그들에게 당했습니까.” “오러에 의한 상처를 입고 다 죽어가는 채로 찾아왔습니다. 왕자님의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되는군요. 그 단체의 소행이었나 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한 슬레이만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뒤쫓던 이들은 영내로 들어오지 못한 채 도망쳤고 시오나는 어찌저찌 근 한 달에 걸쳐 살려냈습니다. 계속 제가 옆을 지켰으니 그렇게 피 냄새가 짙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혹시 아직 이곳에 있습니까.” “어제 아침에 사라졌습니다. 다 낫지 않은 몸이라 지금껏 찾아다녔는데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슬레이만이 칼리안에게 ‘손님을 마중하러 온 것인지 배웅하러 온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시오나가 다시 찾아올지, 이 땅에서 영영 사라졌는지 확신하지 못한 탓에. “제온과 연관은 있되 그들과 같은 편은 아니라는 소리겠군요. 크게 다쳤다 하니 시오나가 그 힘에 휘둘리는 것도 아니라는 뜻일 테고.” 우선은 적당히 안심할 수 있을 소식이었다. 칼리안이 걱정한 것은 소드마스터의 개죽음이 아니라 소드마스터가 체스 말로 이용당하는 일이었으니까. “혹시 쫓기고 있다면 앞으로는 어찌 될 지 알 수가 없으니 그 행방도 계속 추적을 해봐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왕자님.” 어쩐 일로 슬레이만이 앞서서 나섰다. 그것이 낯설어서 쳐다보니, 슬레이만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둔해 빠진 왕이나 입에 가시 박힌 마법사 만큼이야 아니지만 그 쪽 역시 그럭저럭 오래 된 친우입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니 제가 수소문하여 보겠습니다.” “혹시 알게 되면.” “네. 왕궁이나 수도의 공작저로 연락을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공께서도 조심하시고요. 만만한 자들이 아닙니다.” “알고 있는 소드마스터라고는 딱 셋 뿐인데 그 중 둘을 잡아버릴 뻔한 놈들 아닙니까. 방심하지 않겠습니다.” 칼리안, 테일란 카스트린, 시오나 힐. 이렇게 셋이다. 에반과 그레이는 아예 계산에도 넣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참동안 향을 음미해가며 와인을 마신 슬레이만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소공작이 저 모르게 아이 하나를 키운다 들었습니다만 도무지 말을 해주질 않아서 궁금합니다. 왕자님 혹시 아십니까.” 처벌 때문에 올해 안에는 수도에 들어오지 못할 슬레이만이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어왔다. 저도 모르게 주변에 가득한 잔디를 응시하던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브리센의 핏줄을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이 데려갔다는 이야기는 제3자를 통해 전할 내용은 아니었다. “소공작에게 직접 들으실 일인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와인잔에 보랏빛이 채워졌다. * * * 타닥, 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가 싫지 않다. 아니, 오히려 반갑다. 첫 노숙에 전부 다 불침번을 서겠다고 나서기에 계속 고집부리면 전부 다 강제로 재우겠다 말했다. 일단 칼리안은 며칠은 잠들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고 왕궁과 지그프리드령을 벗어난 이후로 왕자보다는 일행 중 가장 강한 사람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칼리안이 아직 슬립 마법에 서툴다는 사실과 아르센 뒷목의 시퍼런 멍을 함께 떠올려 본 대원들이 곧바로 침낭 안에 쏙쏙 들어가 잠에 빠져들었다. 잠잠해진 가운데 빨갛게 타오르는 불꽃을 가만히 바라보는 칼리안의 머릿속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앨런이었다. - 엘프들이 어디에 사는지는 찾으셨습니까. - 아직이요. 지난 번에 들렀던 마을과 비슷하게 숨겨 두었을 테니, 시스파니안께서 일러주신 곳까지 가면 이리저리 살펴 볼 생각입니다. - 당장 찾지 못하신다면 일단 돌아오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 제온의 일당이 인근에 있을지 모른다 하니 저도 고민을 했습니다만. 꽤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다시 수도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엘프들을 찾아갈지. 차라리 혼자 떠나온 길이면 에라 모르겠다 가던 길 마저 가자 할 텐데 딸린 짐이 너무 많았다. 그나마 발칸의 대원들은 제 목숨 하나씩은 어찌저찌 간수한다 하더라도 파피루스 새싹같은 한 놈이 아직 제 몫을 못 했으니 말이다. - 누구든 함부로 덤비지는 못하리라 생각이 들어서 빨리 끝내고 돌아가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무턱대고 덤비기에는 지금 제 일행이 너무 비범해서요. - 하긴. 비범하기로는 아마 시스테라 대륙에서 으뜸일 겁니다. 왕실의 군대, 서른 명의 기사와 열 명의 마법사. 일행 중 반의 반이 마법사인 만큼 결코 무시하지 못할 화력을 가졌다. - 그래도 혹시나 주의를 놓치지는 마십시오. 혼자 움직이시는 것과는 다른데다 플란츠 왕자님도 그 쪽에 계시니. - 네. 알겠습니다. 물론 칼리안은 파피루스 새싹의 실낱같은 목숨 정도는 충분히 건사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잘 마친 뒤였다. - 왕궁에는 별 일 없습니까? 빛을 발하는 팔찌를 소매로 가린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다. 체이스와 연결된 반지를 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양 쪽에 반지를 하나씩 끼기에는 영 불편해서 앨런이 반지를 끼고 칼리안이 팔찌를 꼈다. 왕궁 안에서 통신이 가능하도록 개조하는 것에 더는 신경쓰지 않기로 한 앨런이 알아서 기능을 바꾸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오랫동안 웃음을 터뜨렸는지 모른다. - 전하께서 또 심장을 떨굴 뻔 하셨는데 별 일은 아닙니다. -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 아드님 둘이 하루아침에 또 사라져서 그렇습니다. - 왕궁 밖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 형님께서 이미 설명을 드렸다 들었는데요. - ······ 과연 그것을 설명이라 해야 할지. 앨런의 말 끝에 든 의문이 퍽 진했다. - 왕자님이 도망칠 것 같아서 잠깐 나가 잡아오겠노라 했답니다. 그래서 잠시 외출하는 것을 허락했는데 알고 보니 발칸까지 싹 끌고 쫄랑쫄랑 따라나선 것이었으니 놀랄 만 하지 않겠습니까. - 잠시 외출······. 전하께 허락을 받은 것처럼 당당하게 말하기에 대체 무슨 말로 허락을 받아냈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 아무튼 전하는 잘 달래 두었으니 신경쓰지 마시고 할 일 모두 마치면 돌아오시지요. - 네. 고맙습니다. 어쩐지. 르메인이 호락호락하게 허락을 해줄 리 없다 여겼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거다. 좀 떨어진 곳에 자신과 비슷한 꼴로 앉아 모닥불을 들여다보고 있는 플란츠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래서야 몰래 도망친 칼리안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 - 다른 문제는 없습니까? - 에일라라는 그 아이는 한 시를 안 떨어지고 히나 옆에 잘 붙어 있습니다. 대신 왕자님 왕궁에 돌아오시면 새끼 코끼리에게 사흘 밤낮은 잔소리를 들으셔야 할 것 같으니 그건 각오하고 오시면 되겠습니다. 맑은 웃음소리가 잠시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 알겠습니다. - 그리고 리베른의 두 마법사는 별 일 없다 합니다. 아, 하고. 칼리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앨런은 늘 이렇게 중요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툭 꺼냈다. - ······ 리베른에서 연락이 왔나보군요. - 이야기는 잘 마쳤으니 염려 마십시오. 리베른의 국왕 엘린느를 떠올린 칼리안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걱정 말아라 신경쓰지 말아라 염려하지 말아라 하지만 지금 앨런이 얼마나 속을 끓이고 있을지를 잘 알고 있었다. - 제가 스승님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엘린느를 떠올릴 때 함께 생각날 이가 있을 것이 뻔했다. 이런 때 눈치 없게 아버지 소리를 꺼내놓으며 어줍잖은 위로를 하겠노라 나설 수가 없어서, 결국 칼리안은 담백한 말만 앨런에게 건넸다. - 이렇게 멀리 와서는 모닥불이나 구경하고 있네요. -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제 아들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는데 위로는 커녕 걱정만 잔뜩 끼치고 있으니 이를 어쩝니까. 앨런은 그런 미안함마저도 받지 않았다. 하고 싶은 위로 해도 된다며 이런 상황에서도 칼리안을 읽고 살폈다. 그래서 칼리안은 조용조용한 목소리를 보냈다. - 대신 좋은 술 사 갈게요. - 좋지요. 히몰리카든 시즐리누든 좋으니 한 병만 사다 주십시오. - 돌아가면 같이 마셔요······ 아버지. 아주 잠시동안 말 없던 앨런이 대답을 전해왔다. - 그래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모닥불이 따뜻한지 말이 따뜻한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칼리안은 팔찌를 한참동안 내려다봤다. 같은 이름이라 해도 지방마다 맛이 다 다를 독주를 사갈지. 지그프리드의 와인을 사갈지. 그것을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둘 다 사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자 새빨간 눈 속에 고운 웃음이 들었다. 몇 마디 말을 더 나눈 칼리안이 앨런과의 대화를 마쳤다. 그리고는 마력이 사그라들어 서서히 줄어드는 팔찌의 빛을 잠시 바라보다 모닥불로 시선을 돌렸다. 평온한 밤. 나무 타는 소리가 고요함보다 더 조용히 들려왔다. “······ 춥지는 않으십니까.” “안 추워.” 그래. 평온하다. 완두콩이 안 잔다는 문제만 빼면 말이다. “주무시죠.” “아직.” “네.” 도로 짧아진 대답에 짧게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채 똑같이 모닥불을 쳐다보는 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배는······.” “안 고파.” “네.” 애석하게도 지그프리드 공작령은 마법사의 손이 닿지 않고도 싱싱한 것이 최고라 여기는 곳이었다. 그래서 보존 마법이 걸린 먹을 것을 구하지 못했다. 하필이면 플란츠가 잘 골라온 이들 중 보존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도 없던 덕분에, 칼리안은 그냥 시트렌 시장에게 건조 식품과 비스킷만 좀 받아내 플란츠의 손에 쥐여줬다. 야생 닭은 못 먹을 게 뻔했으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놈이 먹었다. 야생 닭 말고 무려 야생 멧돼지를 먹었다. 물론 대원들 다 제쳐두고 또 혼자 신난 칼리안이 잡아 온 멧돼지였다. 딱 두 조각 먹고는 비스킷을 꺼내들긴 했지만 아무튼 인상 찌푸리지 않고 먹긴 했다. 부는 바람에 불티가 튀었다. 아마 그것조차 처음 보았을 플란츠가 바람에 흩날려 사라져가는 붉은 빛을 하염없이 눈에 담고 있었다. “안 불편하십니까.” “불편해.” 참 곱게 자라서 맨 땅에 앉는 것도 불편하고 맨 땅에 눕는 건 더 불편하고 제대로 간도 안 된 멧돼지 고기 먹는 것도 불편하고 날아드는 날벌레도 불편할 놈이, 한 번도 티를 안 냈다. 그래도 이제는 물어보면 칼리안에게는 솔직하게 대답을 해주니 이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울지 못해 웃어야 할지. 알 수가 없을 노릇이다. “불편하다는 말은 또 왜 안하십니까. 싫다는 말도 안하시더니.” 나무 둥치에 모포를 깔고 앉아있던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연두색 눈에 붉은 불이 비춰지는 것이 그리 잘 어울리지는 않는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쨌거나. 기억 속 끄트머리 어딘가의 일들을 꺼내 태워내는 듯한 저 모닥불 앞에 앉으면 속에 담은 것이 하나 쯤은 튀어나오게 마련이라. “소용 없었어서.” 플란츠가 이렇게 하나를 꺼내놨다. 싫다는 말, 불편하다는 말이 소용 없었다는 놈을 보니 덩달아 속에 담은 것을 꺼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 칼리안이 연두색에 든 불에서 눈을 떼고 자신의 발을 쳐다봤다. 그런 놈이 대체 ‘나’에게 왜 그랬느냐 묻고 싶은 것을 그 발 끝에 묻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난다 한들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하고 그 누구도 이해해서는 안될 일. 그러니 그 누구도 아닌 지금의 칼리안만은 절대로 다가서면 안 될 일임을 상기하며 다시 묻었다. “······ 불편하다 얘기하셔도 됩니다.” 결국 이렇게, 플란츠는 하나를 꺼내놓고 칼리안은 하나를 집어넣은 셈이 되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칼리안의 눈에 흙 묻은 재킷이 보였다. 망할 놈이 고양이 털 떼주던 동생만 믿고 동생 입을 까만 옷은 챙겼는데 정작 자기가 입을 다른 옷은 안챙겼단다. 아니. 챙기긴 했다. 똑같이 새하얀 제복 한 벌은 더 있단다. ······ 누군 아주 마력이 남아나는 줄 알지. [클린] 오늘 하루만 서른 번은 넘게 쓴 것 같은 마법을 다시 썼다. “넌 왜 말 안하는데.” “무엇을요.” “마법. 불편하다고.” 오늘 하루만 서른 번을 넘게 같은 마법을 쓰면서 왜 불편하다는 말을 안하는지. 굳이 이런 하얀 옷을 만들어서 괜한 고생거리를 만들었느냐는 말을 왜 안하는지. “알 것 같아서요. 왜 하필 흰색인지.” 과거의 르메인이 만들고 플란츠가 완성시킨 발칸 마법사들의 로브도, 지금의 플란츠가 만든 기사단의 제복도 왜 하필 흰색인지. 마법사들이야 늘 청결할 수 있다지만 왜 굳이 기사들의 옷도 하얗게 정했는지. “저는 묻어두려 하고 형님은 떠올리려 하고. 그래서인 것 같아서.” 그 옷에 묻을 다른 이의 생을. “······ 반말.” “같아서요.” 그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무세요.” “싫어.” “왜 싫으신데요.” “불편해.” “복습하십니까.”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올랐다. “그런데 색깔 좀 바꿔주시면 안 됩니까. 흰색 아니어도 뭐 묻은 건 티 나는데요.” “굳이 왜.” “같이 다니려니 저만 까마니까 좀 부끄러워서.” “반말.” 칼리안이 정정하지 않고 씩 웃었다. 다 하얀데 머리만 파릇한거 너 그거 되게 양파같은 줄은 아시느냐고. 입을 열면 그 말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자칫하면 이제 몽글몽글 익힌 것도 안 먹는다 할까봐. “아무튼 이제 정말 주무셔야······.” 생글거리며 꺼내놓던 말이 멈췄다. - 화악! 어느새 소름끼치는 눈빛을 한 칼리안이 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뒤로 돌아섰다. 타닥, 타닥. 눈에 띄는 것 상관 않고 피운 모닥불이 타오르는 평온한 밤. - 딸랑. 눈치 채는 것 상관 없이 소리를 내는 이의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새 자리에서 일어난 대원들과 플란츠, 그리고 손님. 그 사이에 선 칼리안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대사막의 늑대였던 소드마스터. 허리에 찬 검 손잡이 끝에서 딸랑, 하고 작은 방울 소리가 울렸다. “······ 시오나 힐.” 뾰족하고 긴 귀 끝에 채워진 은색의 작은 링이 모닥불 빛에 반짝였다. < 제45장. 바다 보러(5) > - 딸랑. 검은 머리, 빨간 눈. 너구나. - 카아아앙! 공기가 찢겨나갔다. 검붉은 검에서 섬광이 쏟아졌다. 호수 위로 하나 둘 떠오르는 불꽃같던 모닥불 불티 말고, 결코 식지 않을 용암에서 튀어오르는 듯한 불티가 비산했다. - 카아앙! 카앙! 섬뜩한 빛이 끊임없이 명멸했다. 순식간에 수 차례의 검격이 오갔다. ‘물러나 계십시오.’ 방금 전, 방울 소리가 한 번 더 울림과 동시에 들려온 칼리안의 말. 그 이후로 눈 앞에 펼쳐진 갑작스러운 광경이었다.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었다. 니들렌을 포함한 마법사들이 거대한 실드를 펼치고 기사들이 마법사를 둘러싸는 동안 이미 십수 번 이상의 섬광이 어둠을 밝히다 사라졌다. - 딸랑. - 쉬이이익! 카아앙! 칼리안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옅은 분홍 빛을 띠는 상대방의 머리카락이 간혹 흔들리듯 눈에 보이다 사라질 뿐, 어둠 속에 잠겨든 칼리안의 그림자를 식별해내기엔 마법사의 시야가 너무 좁았다. - 카강! 캉! 검은 로브가 펄럭이는 소리, 귀를 어지럽히는 방울 소리, 땅을 박차는 소리, 검이 맞부딪히는 굉음. 그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불 꺼. 실드만 유지해.” 말이 나온 직후 실드 위를 흐르며 옅은 빛을 내던 니들렌의 푸르스름한 전류가 사라졌다. 모닥불 위에 모여든 투명한 구체에서 물이 쏟아져내렸다. - 치이익! 주변을 비추던 밝음이 완전히 사라진다. 불에 타고 남은 재가 물에 잠기며 특유의 시큰한 냄새를 풍기다 서서히 지워져갔다. - 카앙! 카아앙! 어둠이 내려앉았다. 더더욱 좁아진 시야 속에 두 개의 그림자가 다시 맞붙었다. 일반인에게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어둠이 방해가 될 수 있겠으나 시오나는 어둠에 그리 구애받지 않았다. 그러니 검을 휘두르고 막는 것에 조금의 문제도 없었다. 그리고 칼리안에게 있어 어둠이란, - 카아아앙! 완전한 은신처였다. 어느새 날아온 검붉은 오러의 날이 시오나의 심장 앞에서 멈춰섰다. 곧바로 시야에서 사라진 검이 뒤에서 뻗어나와 시오나의 목을 스치듯 지나쳤다. 검의 경로를 볼 수가 없다. 공격을 마친 직후 흩어지듯 사라졌다가 어느새 어디선가 나타나 다시 찔러오는 검붉은 검은 궤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 카앙! 그럼에도 시오나는 당황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조금 전 목을 스친 검이 등 뒤에서 날아들고 있는 것을 침착하게 막았다. 시오나의 휘어진 검 끝이 칼리안의 심장을 노리고 들어갔다. - 딸랑. - 펄럭! 시오나의 검이 크게 휘둘러졌다. 그와 동시에, 달을 등진 검은 로브자락이 하늘에서 내리떨어졌다.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던 하얀 손에 어느새 검이 들렸다. - 카아아앙!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시작된 싸움. 두 검이 다시 얽혀든다. “부군단장님. 뒤로 와주십시오.” 니들렌이 입을 열었다. 실드를 펼쳐 사방을 막았다. 소드마스터의 오러는 당연히 막을 수 없겠으나 그 밖의 다른 공격은 막힐 것이다. - 카앙! 카아앙! 칼리안의 검이 시오나의 검을 막은 뒤 곧바로 반격을 가했다. 살짝 휘어 있는 검날에 미끄러진 검붉은 검이 시오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부군단장님.” 두 번째의 부름에,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보기나 해.” “네?” 주변에 다른 이가 더 있는 기척을 느꼈다면 물러나 있으라 말할 놈이 아니다.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었다면 로브 입은 채 싸울 놈이 아니다. 경계해야 할 상황이라면 일행을 두고 상대방과 따로 맞붙을 놈이 아니다. 그런 놈이 좀 더 여유있게 싸울 수 있도록 불빛을 꺼주고 나니 이제 더 할 일도 없었다. “더 할 일 없으니까 입 다물고 소드마스터 둘이 인사하는 것 보라고.” 검붉은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검은 로브자락이 바람에 섞여들었다. - 카가강! 카앙! 그렇게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어느 정도가 흘렀는지 정확히 가늠조차 안 될 시간이 지났다. 시계를 확인하지 않았으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날이 새도록 싸웠다는 것. 짙은 어둠이 걷히고 멀리 하늘이 어느 마법사 머리 색처럼 밝아져 가도록 싸움이 끝나질 않았다. 마법사들의 피로를 생각해 실드를 걷고 경계만 하도록 일러두었다가 이제 경계도 그만하라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한 플란츠의 고민이 시작되었을 때 쯤. - 딸랑, 딸랑. - 카강! 카아앙!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쇳소리가 숲을 흔들었다. 저문 달 대신 떠오르는 태양을 뒤에 둔 채로도 검붉은 검은 빛을 잃지 않았다. 둘을 지켜보던 플란츠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피 냄새.’ 조금씩 짙어지는 피 냄새 때문이었다. 상처가 모두 회복되지 않았을 소드마스터. 움직임에 방해되는 옷을 입은 소드마스터. 둘의 싸움이 호각을 이룬다. 아무리 로브를 입었다 하나 상대방은 다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보는 플란츠가 굳이 호각이라는 평을 한 이유는 단순했다. - 펄럭! 칼리안에게서 소리가 나고, 그 움직임이 흐릿하게나마 눈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시오나가 다쳐서 제 힘을 못 내고 있는 만큼 칼리안 역시 온전한 힘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 쉬이익! 카강! 카아앙! 넓게 펼쳐내듯 내뻗은 시오나의 공격을 막아낸 칼리안의 검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한 발을 물려 공격을 피한 시오나가 앞으로 달려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칼리안의 모습이 사라지자 시오나가 허리를 틀며 검을 뻗었다. 시오나가 움직임을 멈췄다. 해를 등지고 선 칼리안의 검은 그림자가 비로소 눈에 보였다. 흩어지듯 사라져가는 검붉은 검이 잔상이 되어 눈에 남았다. 떠오르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찰나와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 ······ 툭! - 딸랑! 시오나의 검 손잡이에 달려 있던 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안. 시끄러워서.”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빌헬름 관에서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 이 추운 카이리시스에 햇빛 잘 드는 곳보다 좋은 장소는 또 없을 터였다. 그런 좋은 곳에 바로 히나의 집무실이 있었다. 햇빛을 즐기러 온 루시를 따라왔을 안네가 앞발을 들어 몸에 닿으려는 손을 밀어냈다. 그 앞발을 살짝 잡아 인사하듯 흔들어 준 손이 움직이자 안네의 입에서 싫어하는 소리가 잠시 나왔다. “니우웅.” 루시의 털을 모두 빗겼으니 이제 안네 차례였다. 때문에 히나는 싫어하는 것을 살살 달래가며 빗질을 시작했다. 털 빗기를 피하려던 안네가, 의외로 시원한 기분이 든 것처럼 얌전히 있더니 오래지 않아 하품을 했다. 그렇게 빗질을 마쳤을 즈음에는 완전히 잠들어버린 안네를 두툼한 방석 위에 몸을 말고 있던 루시의 곁에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안네의 잿빛 털이 보드랍게 변한 것을 알기라도 한 것인지 기분 좋은 소리를 낸 루시가 앞발을 움직여 안네를 끌어안고 함께 졸기 시작했다. - 루시가 착해서 안네를 잘 돌봐요. 루시한테 배우는 안네도 착한 고양이가 될 것 같아요. 빠르게 써내려간 글자를 본 에일라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른 아침부터 빌헬름 관을 찾은 히나는 자신을 찾아온 두 고양이 배가 빵빵하게 부른 것을 확인하고 간식 대신 빗을 들었다. 그 후 공을 들여 고양이 빗질을 다 마치도록 에일라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였다. - 차 마실래요? “녹차는 별로예요.” 이렇게 건네진 말에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마 전에 겪어 본 비슷한 일을 떠올린 에일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 할 줄 알아요.” 베로니카에게는 버터 많은 랍스터 때문에 입을 열었고, 히나에게는 떫은 녹차 때문에 입을 열었다. - 녹차 말고 다른 것 가져올게요. 발칸의 치유사이자 자작. 그런 치유사의 호위. 그런데 차를 타오는 것은 늘 히나였다. 평민이었던 버릇을 아직 치워내지 못했거나 히나가 친절한 성격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에일라의 차가 너무 맛이 없었던 탓이다. 에일라의 차는 얀이 타오는 것들 중 실패작이라 할 수 있을 수많은 차보다도 훨씬 더 엉망이었다. 맛있는 것을 좋아한다 해서 차를 잘 타리란 법은 없었으니까. 앨런이 선물해 준, 정확히는 마법사 협회의 보물창고에서 앨런이 훔쳐와 가져다 둔 것을 칼리안이 주워다 히나의 집무실에 놓아 준 급수 장치에서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났다. 사실 앨런은 그런 것이 없더라도 물을 만들고 끓일 수 있었으니 말이다. - 말 할 수 있는 줄 몰랐어요. 보글거리는 소리 만큼이나 부드러운 필체의 말을 본 에일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특별히 말을 해야 할 일이 없어서 그랬어요.” 에일라를 데려온 아르센이 서로 이름을 알려주며 소개를 시켜줬다. 그 후 히나는 에일라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며 시간을 보냈고 에일라는 별다르게 입을 열지 않고 고갯짓으로만 대답을 했다. - 말 하기 귀찮아하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한 명이 더 있었네요. 장난스러운 말을 읽은 에일라가 살짝 웃었다. 누구를 말하는지 몰라서였다. 세작으로 일했다지만 아직 대면하지 못한 2왕자가 실제로 어떤 성격인지까지 알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히나가 살짝 식힌 찻물을 찻잔에 따른 뒤 에일라의 앞에 내려놓았다. 에일라의 시선이 은은한 향을 내는 차에 가 닿았다. 잔을 들지도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그 안을 들여다보는 에일라를 향해 히나가 다시 말을 써 보였다. - 파란색 차 신기하죠? 머리 색이랑 비슷한 것 같아서 가져다 놨어요. 제비꽃이예요. 히나의 말대로 에일라의 머리색과 썩 닮은, 푸르고 맑은 바다 빛의 차였다. 에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의 비녀 끝에 달린 하얀 구슬이 흔들리며 이른 아침의 햇살에 반짝였다. - 그거 예쁜 것 같아요. 비녀를 하고 온 모습을 처음 본 히나의 칭찬에 에일라가 순순히 입을 열었다. 말을 할 수 있음을 알았으니 말을 하게 하려는 의도임을 눈치챘지만, 악의가 담긴 것은 아니었으니까. “보여주긴 힘들어요. 예쁠지는 몰라도 안전하지는 않거든요.” 히나가 눈을 다시 동그랗게 떠 보이더니 아, 하는 입모양을 만들어냈다. - 무기? “네. 독이 들어 있어요.” 그것이 암기임을, 그리고 어떤 종류의 암기인지를 알려준 것은 에일라 나름의 신뢰 표시였다. - 비슷한 무기는 많이 봤는데, 봤던 것들 중에는 제일 예쁜 것 같네요. 그리고 히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해서 에일라를 조금 놀라게 만들었다. 티 없이 산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랬다면 안전하지 않다는 말에 바로 무기를 떠올린다거나 무기를 많이 봤었다는 말을 하지는 못할 테니까. 다시 무언가를 열심히 써내려 간 히나가 그것을 보여주며 생긋 웃었다. - 다음에는 보여 줄 수 있는 것을 하고 와 줘요. 에일라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그래도 괜찮은 곳이니까요.’ 입모양으로 이어진 말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햇살 잘 드는 소파 위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잠을 자는 곳. 독이 들지 않은 비녀를 하고 와도 괜찮은 곳. “수어 알려주세요. 배울게요.” 그런 곳에서 함께 지내게 될 사람의 말을 다 배울 때 쯤이면, 흔쾌히 구경시켜 줄 수 있을 비녀를 하고 와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칼리안이 손에 들린 방울을 건넸다. 시오나가 한동안 가만히 있다 그것을 받아들었다. 딸랑,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떨어졌던 방울이 시오나의 손바닥 위에 올려졌다. 그 후 칼리안은 기사에게 무언가를 전달받아 시오나에게 직접 건넸다. 깨끗한 붕대였다. “피냄새 심해. 일행 중에 되게 예민하신 분이 계셔서 좀 가려줬으면 좋겠는데.” 곁에 앉아 있던 플란츠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시오나는 이번에도 다른 말 없이 그것을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고맙다는 뜻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던 칼리안이 그 맞은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 “필요하면 도와주고.” “됐어.” 은색의 링이 채워진 길고 뾰족한 시오나의 귀를 보던 칼리안이 쓴 것을 삼키는 듯한 표정을 했다. 스스로 잘라냈다던 히나의 귀도 본래는 저랬으리라는 생각이 다시 든 까닭이었다. 겉옷을 벗고 속에 입은 검은색의 얇은 셔츠 위에 건네받은 붕대를 대충대충 감은 시오나가 입을 열었다. “시오나 힐.” “알아.” 시오나의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칼리안은 어깨를 으쓱여 보인 뒤 무언의 말에 대한 답을 전했다. “나는 내 입으로 내 소개를 할 필요 없는 사람이라.” 상대의 이름을 들었으니 자신의 이름을 알려줘야 할 차례임을 알았으나 칼리안은 이렇게만 말했다. 어차피 상호 안면을 트자는 것이지 정말 이름을 몰라서 주고 받는 인사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시오나가 고개를 끄덕인 뒤 겉옷을 걸쳐 입었다. 검 손잡이 끝에 떨어졌던 방울을 다시 묶기 시작하는 시오나를 보며 칼리안이 물었다. “설명해야지. 나를 왜 찾아왔는지.” “슬레이만 목을 그어놓은 놈 칼이 어떤지 구경 좀 해보려고.” “엘프라 다행이네. 인간이었으면 왕족 공격한 죄로 사형될 텐데 체포를 못 하겠어.” 시오나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이해심 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지금은 혼자가 아니기도 하고, 엘프들에게는 내가 덜 너그럽기도 하고. 그러니까 제대로 설명해줬으면 해.” 재밌다는 얼굴로 대답한 칼리안이 시오나의 금빛 눈을 쳐다봤다. “왜 왔는지.” 목을 죄는 살기가 숲을 짓눌렀다. < 제45장. 바다 보러(6) > 무지개 안으로 발을 디딘 날이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가 궁금해서 그리했었다. 세상에 서서 무지개를 바라보면 온갖 색이 다 보였으니, 무지개 속에서 세상을 보면 검은 것 없이 예쁜 색으로만 보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무지개의 끝을 찾아가 발을 디디고서는 결국 실망을 했던 그런 날이 있었다. - 쏴아아아······. 커다란 물소리가 들려오고 안개비 같은 물방울이 얼굴로 튀었다. 벼랑 끝에서 떨어져내리는 폭포수의 물보라에 무지개가 둘이나 떠 있었다. ‘그 때가 아마 지금이랑 비슷한 나이였는데.’ 정확히 어느 날이었는지 모를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려 본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물가에 선 은백색의 말이 맑고 찬 물을 마시는 동안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무지개 끝으로 발을 옮기는 플란츠를 본 탓이다. ‘이 나이대에 하는 생각들이 다 똑같지.’ 형님 너 거기 들어가봐야 실망만 할거다 하고 말을 해줄까 하던 칼리안이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놈의 이름 뜻이 뭔지, 루시의 허리는 도대체 얼마나 긴건지, 그리고 베른과 얽힌 일들. 이런 것 말고 다른 뭔가를 궁금해하는 모습을 처음 본 듯 해서 그냥 내버려뒀다. 햇빛 덜 받은 보리 싹 같은 저 놈이 실망을 하든 실망하는 대신 기억 하나를 얻든. 왕궁 안에서 쌓아 온 것들보다는 낫겠지 싶어서였다. ‘그러니까 결국은 전하께서 다 잘못하신거네.’ 애 이름을 하필이면 플란츠라고 지어놓은 것도 모자라 밖에 데리고 나다니지도 않았으면서 그 넓은 왕궁에 고양이 한 마리를 안 들여놓는 바람에 결국 저렇게나 손 많이 가는 놈을 만들어 놨으니 말이다. 심지어 이제 집에 돌아가면 저 보리 싹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을 옥수수수염도 살펴봐야 하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막내다. 아. 갑자기 술이 고프다. “내 말 안 듣고 있는 것 같은데.” “듣고 있어. 거래하자고 했잖아. 생각 중이야.” 시오나의 말에 대꾸한 칼리안이, 무지개 속에 들어가 손바닥을 펼쳐보는 플란츠로부터 시선을 뗐다. 계곡 물 속에 들어가 불을 뿜어대는 미친놈들이 보였다. “······ 대체 왜 물 속에 불을 지르려고 하는거야?” “생각 중이라며.” “생각 중이야.” 물에 들어가 불을 뿜는 이유를 한 눈에 알아 본 너도 좀 이상하지 않느냐는 시오나의 눈빛을 무시한 칼리안이, 마법사들로부터 애써 시선을 돌려 기사들 쪽을 봤다. 나무 기둥에 기대거나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쉬는 것이 보였다. 옷이야 젖겠지만 저기 불 뿜는 미친놈들이 알아서 말려 줄 테니까 그냥 되는대로 쉬는 듯 했다. 그래도 안 미친 놈들이 있으니 다행한 일이다. 기사들 없었으면 레이븐이 제일 이성적일 뻔 했다. “사실 내가 싫어하는 게 세 가지가 있거든.” 무지개 속에 들어가 있는 왕자와 물 속에서 불 쏘는 마법사들을 한 번씩 더 쳐다본 칼리안이 레이븐의 목덜미를 유난히 정성스레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엘프. 엘프랑 싸우는 거. 엘프랑 거래하는 거.”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시오나를 쳐다봤다. “그런데 나한테 칼 들이댄 엘프가 나랑 거래하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내가 좋아하겠어, 싫어하겠어.” “내가 엘프이기 이전에 대사막의 전사라는 것을 잊었나본데.” “아. 그리고 나는 대사막의 늑대랑, 대사막의 늑대가 나 따라오는 거, 대사막의 늑대가 나한테 덤비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해. 당신 혼자 참 많이 해먹는데 그럼 내가 좋아하겠어, 싫어하겠어.” 시오나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일단 자신보다 스무 살은 어린 것 같은 왕자로부터 하대를 듣는 것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신분을 떠나 아예 종족이 달랐으니 신경 쓸 부분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칼리안도 그냥 계속 말을 놨다. 먼저 칼 들고 덤빈 잘못이 있으니 이정도는 해도 된다 생각하면서. “엘프 도시가 어디 숨어있는지는 며칠이 걸리든 내가 찾으면 돼. 그리고 제온에 대해 같이 조사를 해주겠다는 두루뭉술한 약속을 대가로 내가 가진 정보와 조약돌을 달라는 건 들어주기 힘들어.” 엘프의 도시를 찾도록 도움을 주고 제온에 대한 조사 결과를 공유할 테니, 지금까지 칼리안이 알게 된 것들과 칼리안이 가진 검은 조약돌을 달라. 엘프들의 도시에서 나오는 길에 칼리안의 일행이 피운 모닥불을 발견한 시오나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칼리안을 찾아왔다고 했다. 만나고 보니 괜한 호승심이 들어 일단 싸움부터 걸었지만 아무튼 칼리안을 찾은 목적은 그랬다. 그리고 칼리안은 시오나의 입에서 ‘거래’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침 챙겨먹고 다시 발을 옮겼다. 그러다 폭포 아래로 흐르는 물을 봤고 말들도 쉬일 겸 잠시 발을 멈춘 참이었다. 칼리안이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그 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제온을 쫓는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당신은 그것도 말 안했어.” “정확히 얘기하지 못하는 건 나 역시 너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고 굳이 거래를 하자 이야기하는 것은 무력으로 빼앗고 싶지 않아서인데, 이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지 않나.” “재밌는 말을 하네, 시오나.” 작은 웃음소리가 폭포수의 소리에 가려 잘 들리지 않았다. 칼리안의 눈이 찬 기운을 머금었다. “빼앗다니. 안 그래도 아픈 것 같아서 안 죽인거야, 내가. 당신도 알면서 왜 그런 말을 해.” 시오나가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속으로 아주 조금 놀랐다. 사실 지금 칼리안은 시오나의 오러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시오나는 칼리안을 봤을 때 ‘검은 머리, 빨간 눈’이라 말했다. 칼리안을 오러가 아닌 외모로 알아봤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둘의 오러가 같거나 비슷하다는 것. 둘 다 서로의 오러가 안 보이는 상태라는 말이다. 다만, 일부러 낸 방울 소리를 듣기 전에는 칼리안도 시오나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니 시오나 역시 같은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하긴. 내가 이상한 말을 했군.” “인정이 너무 빠른데.” 그럼에도 순순히 칼리안이 자신을 살려둔 것임을 인정한 모습 때문에 의외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칼리안이 겪었던 어떤 질 나쁜 엘프는 자존심을 굽히려 하지 않았었으니까. “대사막의 문제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제온’이라는 집단이 가진 힘이 심상치 않아. 나와 연이 있는 대사막의 한 부족 족장이 그들에 대해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한 뒤에 내가 쫓던 놈들이 얼마 전에 네 부하를 공격했다가 너한테 죽었어. 네가 묻어 둔 놈들 시신을 살펴봤더니 놈들 심장이 전부 다 갈라져 있더군.” “······ 헤르츠 경을 공격했던 놈들 말인가.” 숲에서 아르센을 공격했던 이들을 죽인 뒤 앨런이 오기 전에 모두 묻었던 일이 생각났다. 앨런이 그들의 모습을 보면 칼리안보다 더 신경을 쓸 것 같아서 그렇게 했었다. 그렇게 굳이 묻은 시신을 시오나가 확인한 모양이다. “맞아. 그러다 한 달 전에 이 곳에서 제온의 또 다른 놈들을 만나서 싸웠고 하나를 죽였는데 비슷한게 나왔어. 널 만났던 애들을 기억해 냈으면 심장을 찌르진 않았을텐데 생각을 못해서 돌이 같이 부서졌어. 놈들이랑 헤어진지 한 달이 넘었는데 꼬리를 다시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고, 그렇다면 차라리 너와 정보를 공유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결국 칼리안과 같은 이유로 돌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사실 칼리안으로서는 환영할 일이다. 어차피 문제의 검은 조약돌은 이미 여러 개 가지고 있었던데다 대사막 쪽에서 조사를 한다면 조금 다른 정보가 확인될지도 모르니까. 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도 설명해.” “모르나본데 엘프들은 거짓말 안해. 어머니 나무께서 거짓말하는 걸 싫어하시거든.” 엘프 싫다 했더니 대사막 전사라 대답하고 엘프 못믿는다 했더니 엘프니까 거짓말을 안한단다. 저 필요할 때마다 왕자와 부군단장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어떤 놈이 생각난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칼리안을 쳐다보다 자신을 믿게 할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흠, 하고 생각에 잠겼던 시오나가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그것도 안 되면 역시 싸워서 뺏어야······.” “혹시 당신 칼 말고 마법도 써?” 되게 호전적인 게 어쩐지 마법사 같은데. 이런 생각에 피식 웃는 칼리안을 보며 시오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위험한 물건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 어차피 놈들 손에 다시 들어간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것 없는 일 아닌가? 그럴 바에는 함께 조사하는 것이 나을텐데.” 레이븐의 안장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생각하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알게되는 정보를 교환하자는 것까지는 그렇게 할게. 대신 돌을 넘기는 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칼리안의 손가락이 시오나의 검에 매달린 방울을 가리켜보였다. “그걸 달고 다니는 게 자신감인지 자만인지도 확신이 안 서거든. 당신이 그 돌의 힘을 이상한 방향으로 쓰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시오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덧붙여 말했다. “엘프들의 도시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별로 할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이번 일 끝날 때까지 전력도 좀 보태고. 마음에 들면 원하는 걸 줄게. 어때.” 놈들의 꼬리를 다시 잡아 따라잡은 뒤 돌을 얻어내는 것과, 앞으로 며칠간 칼리안을 따라다닌 뒤 돌을 얻어내는 것의 득실을 잠시 따져보던 시오나가 말했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좋아.” 결국 이렇게 엘프와의 두 번째 거래를 하게 된 칼리안이 중요한 문제라는 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 당신도 풀 좋아하면 네 밥은 알아서 챙겨. 난 몰라.” 시오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대사막 전사의 손에서 자라났고 대사막에는 풀이 많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은 고기 참 잘 먹는 엘프라는 말은 생략한 채였다. * * * 풀잎 스치는 소리들을 듣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뭐를.” “시오나 덕분에 왕궁에는 좀 더 빨리 돌아갈 것 아닙니까.” 어찌됐건 엘프들의 도시를 찾느라 헤매는 시간은 줄었으니 하는 말이었다. 부정 않고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멀리 앞서가는 시오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믿어 볼 만 하지 않나.”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를 쳐다봤다. 간혹 이해 못할 말을 들었을 때 짓는 표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행들 인질 삼고 협박 할 수도 있었는데 안 그랬어.” “새벽의 일 말씀이십니까.”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칸의 대원들, 혹은 플란츠를 인질 삼는 대신 대놓고 나서서 싸움부터 하고 본론을 꺼냈으니 그 정도 성격이면 그냥 믿어도 되지 않느냐는 소리다. 엘프들과 대화하러 가는 상황에 시오나가 있으면 더 유리할 텐데 그렇게 한참동안 입 씨름을 해 가며 손 잡지 않으려 한 것이 칼리안답지 않다는 말일 터였다. 그 의뭉스런 란델도, 그리고 플란츠에게도 별다른 의심 없이 손을 잡지 않았던가. “협박 못합니다. 제 울타리에 손 넣는 순간 죽을 거라서.”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참 대단한 자신감이다. “엘프라서 그랬습니다. 세상의 모든 엘프가 히나같지는 않더라고요.” “히나같은 엘프도 있다는 거잖아.” 물론 히나는 하프엘프였지만. “이젠 가르쳐주는 방법도 배우셨습니까.” 아무튼 칼리안은 방금 전 플란츠의 이야기를 두고 히나같고 시아같은 엘프들도 있으니 모든 엘프를 다 못미더워 할 필요 없다는 말로 잘 알아들었다. “알겠습니다. 편견 없이 보고 생각할게요.” “알았어.” 칼리안이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다 질문 하나를 꺼냈다. “형님은 무슨 색을 보시려고 그 안에 들어가셨습니까.” “색이라니.” “무지개요.” “아니야.” “그럼 왜 들어가셨습니까.” “확인하려고.” “무엇을 확인하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싫어.” “네.” 말 하기 싫다는 것 굳이 건드릴 생각은 없었으므로 이번에도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이 안 드는 걸 확인하려고.” 두 번 안 묻는 동생놈을 향해 플란츠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껏 확인하며 사셨던 것 아닙니까.” “모르겠어서.” 굳이 귀찮게 하루종일 지워내던 풀물을 한 번 더 지워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주변이 다 풀밭이었어도 완두콩은 완두콩색입니다. 풀물 안 들어요.” “주변이 다 풀밭이라 안 가리고 잘 짖네, 내 아우님은.” “원래 밖에서 더 잘 짖습니다.” 뒤에서 오던 니들렌이, 시도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수수께끼 같은 대화가 잘 이어지는 것을 들으며 참 알쏭달쏭한 표정이 된 것을 보지 못한 채였다. 사실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해야 맞을 것이다. 지금껏 그 화려한 브리센 속에 쌓여 살았어도 플란츠는 플란츠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말임을 이해한 건 아마 칼리안 밖에 없었을 테니, 다른 이들 표정을 살피거나 사일런트를 발현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야.” 그렇게 한 쪽은 참고 한 쪽은 짖어가며 옥신각신 길을 가려니 시오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한 곳에 선 시오나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가장 먼저 시오나의 앞으로 갔고, 칼리안을 대신해 니들렌이 플란츠의 앞으로 왔다. 시오나가 가장 먼저 숲의 어느 한 지점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일행의 앞에서 사라졌다. 이미 예전에 겪었던 일이었으니 칼리안은 주저하지 않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니들렌과 플란츠가, 그 후 대원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섰다. “아.”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이의 입에서 짧은 소리가 나왔다. 그것은 감탄사이기도, 놀라움의 표현이기도 했다. “신기하네요. 지난 번에 찾은 마을은 이렇지 않았는데, 도시는 도시군요.” 칼리안이 감상을 전했고 다른 이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가 말을 잃었다 해야 맞을 터였다. 석찬에 올려놓던 크리스털 잔이 생각난다. 마법 등불 아래 두면 이리저리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생각났다. 투명한 햇살 아래 사방으로 빛을 내는 나무가 저 먼 곳에 있었다. 카이리스 왕궁의 둘레 만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거대한 나무. 그 나무의 안과 주변에 들어선 엘프들의 도시가 눈 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 바다.” 아득할 만큼 광막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네. 결국.” 숲 속에 들어와 바다를 마주한 칼리안이 플란츠의 말에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을 전했다. “바다 보러 오긴 왔네요.” 상상 속의 무지개 속에 발을 들인 것처럼. 숲에서 딱 한 발을 나아가 전혀 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선 것처럼. 그 아름다운 모습을 한참 쳐다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저걸 어떻게 태우나.” 나무라길래, 나무인 줄 알았지. 바다고 나발이고 일단 나무가 내가 알던 그 나무가 아니잖아. 이 곳을 찾은 소기의 목적을 전혀 잊지 않은 말에 ‘편견을 버리라’ 말했던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기사들은 비장한 각오를 다잡는 얼굴로 검 손잡이를 쓸어내렸으며 니들렌을 포함한 마법사들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무리의 엘프들이 다가왔다. 제대로 잘 짖을 준비를 마친 칼리안의 붉은 입술이 짙은 호선을 그렸다. < 제46장. 왕자다(1) > 체르밀 궁의 앞에는 호수가 있다. 아르피아 궁의 후원에는 작은 개울이 있다. 아름다운 연회장인 지그프리드 관의 후원에도 개울이 흐른다. 아르피아 궁에서 흐르는 물이 지그프리드 관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뉴 관을 빙 둘러 조성된 산책로같은 나무 회랑을 지나다 보면 바로 그 개울을 건너는 징검다리를 지나야 했다. 이렇듯 카이리스 왕궁 곳곳에는 크고 작은 호수와 분수, 여러 갈래로 나뉘는 개울이 있었다. 눈을 좋아하고 비를 싫어하던 시스파니안. 좁고 답답한 것은 질색이라던 시스파니안. 이것 말고 다른 무언가를 좋아하는지 혹은 싫어하는지 그 호오를 알려주지 않은 시스파니안 덕분에 카이리스 왕궁에는 바다를 제외한 많은 자연경관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조성되어 있었다. 시스파니안이 뭘 좋아하는지 몰랐던 하츠아라가 그냥 이것저것 다 집어넣고 짓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삐약!” 덕분에 노란 생명체 하나가 신났다. 왕족이거나 왕족과의 동행이 아니라면 걸음하지 못하는 체르밀 궁의 호수나 아르피아 궁의 개울 말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세뉴 관. 그 곳의 징검다리 위에 서 있던 샛노란 새끼 오리 한 마리가 삐약삐약 소리를 냈다. “자네 거기 들어가려면 아직 멀었으니 그냥 구경이나 하게.” 알에서 깨자마자 눈에 들어온 새파란 머리의 마법사를 엄마로 삼아버린 새끼 오리 덕분에, 술 먹고 뻗었다 일어나니 내새끼 한 마리가 생겨 있는 상황을 겸허하게 잘 받아들인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바람 다 쐰 것 같은데 이만 이리 오게. 그러다 진짜 뛰어들겠네.” 아직 태어난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끼 오리가 벌써부터 징검다리 끝에 서서 물 냄새를 맡고 있는 것이 영 불안했던 아르센은 얼른 새끼 오리를 두 손으로 잡아 들었다. “삐약!” 얌전히 아르센의 손에 올라온 새끼 오리가 종알종알 소리를 냈다. - 아가 고양이도, 쑥쑥, 크는데, 오리는 더, 빨리 자라는 것, 같아요. 한가로운 점심 시간. 함께 나와 있던 히나가 신기한 얼굴로 새끼 오리를 쳐다봤다. 쳐다만 보고 있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새끼 오리가 아르센 말고는 아직 아무도 따르지 않아서다. 며칠 사이 정말 티가 날 만큼 무거워진 새끼 오리를 쳐다보면서 아르센이 흐뭇하게 웃었다. “원래 작은 것들은 하루 하루가 다른 법이라고 군단장님께서 그러셨다네.” 지금쯤 집무실 안에서 자고 있거나 식사 중인 발칸의 대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마음껏 놀고 있을 루시와 안네를 생각하던 히나가 마주 웃었다. “삐약!” “돌아다니니 배고프나? 잠깐 기다려보게. 이 엄마가 먹을 것을 줄 테니.” 에우리아가 그랬다. 새끼 새가 처음으로 눈에 담은 건 무조건 엄마라고. 그 말 잘 들은 아르센은 오리 엄마 노릇을 아주 훌륭히 해 나가고 있었다. 새끼 오리를 잠시 다시 바닥에 내려 둔 아르센이 지니고 다니던 마법사의 주머니 속에서 주섬주섬 모이 한 줌을 꺼내 오리 앞에 내밀었다. 그러다 문득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피식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왕자님께서 이런 걸 보시면 꽤 복잡한 얼굴이 되시겠군.” - 자상한, 왕자님이, 왜요? “발칸 부군단장 하라고 앉혀놨더니 한 분은 고양이 털을 묻히고 다니시고 남은 하나는 오리 모이를 가지고 다니고 있으니 말일세.” 칼리안의 기억 속에서는 악마와 같던 이들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 군대를 이끄는 두 명이 위엄 대신 달고 다니는 것이 고양이 털과 오리 모이라니.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할 일이 아닌가. - 좋아하실,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 - 군대니까요. 발, 칸, 은, 빼앗으려고 만든, 군대가, 아니잖아요. 살아있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아시게 되는 거니까, 오리 모이, 들고 다니시는 것도, 좋아하실 거예요. “자네 눈에는 그렇게 보이던가?”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 자상한 왕자님이, 마법사들을 모은 이유는, 아마 그래서일 거라고, 생각해요. 소공작님 손에, 상처가 많은 것도, 다 같을 거예요. 우리 오빠가 그랬거든요. 다른 사람 다치게 하려고, 싸운 게 아니라, 제가, 안 다치게 하려고, 싸웠어요. 물갈퀴 달린 작은 발로 뒤뚱뒤뚱 걸어 온 새끼 오리가 신나게 모이를 먹는 모습을 보던 아르센이 싱긋 웃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이해하였네. 그럼 내가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나?” 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센이 잠깐 빌헬름 관 쪽을 쳐다보다 말했다. “기사 베른 경은 자네를 지키고, 소공작께서는 정혼자를 지키고, 왕자님은 더 많은 사람들을 지키려고 힘을 배우는 것인데. 왕자님의 형님이신 부군단장 왕자님은 무엇을 지키시려는 것 같아 보이던가? 나는 그 분이 왜 그렇게 검을 배우고 마법을 배우려는지 이해가 안 되거든.” 맨날 말버릇처럼 내가 왕자다, 내가 부군단장이다 하는 플란츠 아닌가. 그 직위를 이미 힘으로 써먹고 있으면서 굳이 검을 드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후작위에 오른 뒤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배운다 하기엔 이미 그 한참 전부터 검을 배워왔었지 않았던가. - 잘은 모르지만, 좋은, 왕자님은, 저랑, 같은 이유일 거라고, 생각해요. 히나가 잠시 손을 멈추고 자신의 귀를 한 번 만졌다. 얼마나 길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 본래의 귀를 떠올리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 저는, 약한 사람이, 되기 싫었어요. 어떤 방식으로든, 이용 당하지는 않고 싶었어요. 아마, 좋은 왕자님도, 그래서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자상한 왕자님도, 그걸 알아서, 열심히 가르쳐 주시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아르센이 새끼 오리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자네는 가끔 내 스승님 같을 때가 있네.” 아르센은 히나와 대화하는 것을 퍽 좋아했다. 마법사같으면서도 마법사같지 않던, 아르센이 따라갈 수 있을 지표를 하나씩 알려주던 모습이 히나에게서 보여서였다. “삐약, 삐약!” 밥 다 먹은 새끼 오리가 아르센을 향해 다시 울었다. 손 위에 물 덩어리 하나를 만들어 그 앞에 내미는 아르센을 보던 히나가 고개를 돌렸다. 세뉴 관 후원에 마련된 여러 테이블 중 한 곳에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에우리아와 에일라의 모습이 보였다. 에우리아가 담당하고 있던 정보 조직 보스 자리를 에일라에게 위양하는 일에 대한 내용을 주고 받는 것이었다. 히나가 보는 방향을 슬쩍 살핀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의외로군. 왕자님께서 자네 호위를 저 자에게 맡기다니.” - 괜찮은 사람, 같아요. “그리 보이나?” - 네. 아니었으면, 자상한 왕자님이, 제 옆에 있게 하지, 않았을 테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괜찮은 사람, 같아요. “왕자님은 참 믿음의 기준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분일세. 저 자와 썩 좋은 관계로 만났던 것이 아니었거든.” - 그런 첫인상만 가지고, 사시는 분, 아니시잖아요. 개인적인 감정이랑, 다른 것들, 구분하시는 분이고요. 부군단장님처럼요. 갑자기 히나가 자신을 언급하자 아르센이 조금 놀라 물었다. “나는 왜?” - 오늘, 협회장님이랑, 아무 말도, 안하셨잖아요. 계란인 줄 알고, 오리알 사서 주시고, 보라색 꽃도, 사셨으면서. 이렇게 말하며 생긋 웃은 히나가 말을 이었다. - 오리는, 고양이들이 못 찾아가게, 제가 잘, 볼 테니까, 일 끝나시면, 저녁 같이 드시고, 오세요. 들키는 것 잘 하는 사람 따까리로 살다보니 똑같이 잘 들키게 되어 버린 모양이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묻지도 못하고, 아르센은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 * * 아르센은 변명을 못했다. 칼리안은 짖지를 못했다. 잘 짖으려던 계획을 미루게 된 칼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낮에는 숲 속에서 폭포를 보았는데 밤이 되니 모래사장에서 파도 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에 대해서는 그리 감명받지 못한 채였다. 크리스털 벽과 백금 기둥으로 만들어진 지그프리드 관을 펼쳐 세워두면 저런 모양이 아닐까 생각되는 아름다운 어머니 나무가 칼리안의 뒤에 서있었다. 그리고 앞에는, 그래. - 쏴아아아······. 바다가 있었다. 그렇게나 그리워하던 바다를 앞에 두었는데, 지금 칼리안은 마음껏 즐거워하질 못했다. 애초에 보고 싶던 바다는 이곳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다른 생각이 많았던 탓이다. ‘어서오십시오, 카이리스의 3왕자님.’ 달랐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칼리안의 일행을 대하는 엘프들의 태도가 참 많이 달랐다. 과거에 만났던 장로 제르만의 문제인지 아니면 이번에도 무슨 꿍꿍이가 있어 저러는 것인지 몰라도 엘프들은 칼리안을 ‘인간 대표’가 아니라 ‘카이리스의 왕자’로 예우했다. ‘대장로께서 내일 오실 예정입니다. 하루를 쉬시고 내일 바로 만나시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일행의 앞으로 다가온 엘프들의 대표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 어떻게 짖겠느냔 말이다. 또 인간의 왕이니 어쩌느니 하는 말을 하면 가만 두지 않겠노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고 나니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 곳의 엘프들은 나보다 너를 더 환영하는군.” 시오나의 말에, 칼리안은 바다 소금내 사이에 섞인 피 냄새를 느끼며 대답했다. “역시 치료를 거부당했던 건가.” “내가 여기 왜 왔었는지 너에게 얘기를 했나?” 칼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등 뒤로 보이는 어머니 나무를 가리켜보이며 입을 열었다. “엘프 도시에 갔다 나오는 길이라고는 했어. 몸에 칼자국 생긴 엘프가 엘프 도시에 찾아간 이유야 뻔하지. 그런데 여전히 다친 채로 돌아다니고 있었으면 거절당한 거겠지.” “아. 그래. 치료 받으러 왔는데 거절하더군. 나를 온전한 엘프로 보기 어렵다고 했지. 엘프들은 다른 종족을 치료하지 않으니까.” “네가 대사막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렇겠지. 거기에 더해 고기도 먹고.” 쓴웃음을 짓던 시오나가 어두운 바다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밖을 배척해가며 종족을 보호하는 게 엘프들의 생존 방식임을 알지만 기분이 좀 상해 있어서 다짜고짜 덤볐던 것 같아. 미안하군.” “됐어. 지금은 화 안 났어. 사과를 할 거면 제 때 했어야지.” 이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래. 제 때 했어야지.” 중얼거리듯 꺼내놓은 말에 시오나가 칼리안의 시선을 따라갔다. 낮에는 무지개 속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이제는 파도 앞에 서있는 왕자가 보였다. “네 형인가.” “응.” “풀을 잘먹던데.” “응······.” “그래도 제 나이에 비해서는 강해 보이는군, 근육도 좀 있고.” “······ 콩 드셔.” “아. 그래.” “응.” 잠깐의 침묵을 채우듯 파도소리가 들렸다. 시오나가 다음 말을 찾아 꺼내들었다. “그······ 검을 잘 다루는 건 왕가의 핏줄 덕인가.” “아니. 그냥 잘 배우시는 거야. 첫째 형님은 안 저러시거든.” 옥수수수염같이 좀 뭐랄까. 더 약한데 더 뻣뻣한 그런 사람도 하나 있어. 라고, 말 못할 소리 하나를 삼킨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런 칼리안을 보던 시오나가 물었다. “저쪽에게도 제때 사과 못 받은 일이 있나?” “형님에게?” 시오나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을 본 시오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도 엘프만큼 거짓말을 못하는군.”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러더니 시오나에게도 클린 마법을 써 주며 말했다. “당신 상처 벌어졌어. 내일 대장로 만나면 치료해달라고 말할 테니까 멀쩡한 척 말고 가서 쉬어.”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도록 오러로 붙들어 놓고는 있다지만 아침을 그렇게 화끈하게 시작하고 이제껏 돌아다녔으니 몸에 무리가 가지 않았을 리 없었다. “아직 괜찮으니 걱정 안해도 돼.” “내 일행들 상태 안좋아서 쉬러 들어간 것 아니야. 여기서는 당신이나 나나 이방인이니까 컨디션은 제대로 유지해. 내 짐 늘리지 말고.” 그제야 시오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간단히 대답하고 몸을 돌린 시오나에게서 ‘딸랑’ 하는 방울 소리가 났다. 한동안 그런 시오나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파도 소리가 났고, 방울 소리가 멀어졌다. 바람 소리가 났고, 플란츠는 여전히 파도 앞에 서 있었다. * * * 대장로가 있는 곳에 오른 칼리안이 창 밖을 봤다. 맑은 하늘 아래 짙푸른 바다가 발 밑에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리베른의 영역인가.” 세크리티아의 인근 바다는 저렇게 짙은 빛을 내지 않았다. 텐실은 치유력을 지닌 엘프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만약 엘프들이 어딘가에 도시를 세우고 카이리스와 연결을 해 두었다면 리베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꺼낸 말이었다. 말린 복숭아와 사과를 넣은 녹차 세 잔을 내려놓은 엘프 한 명이 밖으로 나간 뒤, 칼리안의 앞에 있던 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리베른과 대사막의 사이, 주인이 없는 땅이네.”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왜 엉뚱한 곳에 가서 살려고 해.” 찻잔을 들어 향을 맡고 한 입을 마시던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저 동생 놈이 적어도 인사는 하고 말을 할 줄 알았더니 곧장 본론을 꺼내들 줄 몰랐던 탓이다. 미처 자신의 이름도 소개하지 않은 대장로가, 검은 정복을 갖춰입고 앞에 앉아 있는 칼리안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르잔이네. 엘프들은 성을 쓰지 않으니 참고하게.”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은 채 나르잔이라 자신을 소개한 대장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는 이유를 한참 생각하던 나르잔이 플란츠 쪽을 잠시 보다 대답했다. “언제까지고 카이리스에 약자일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 “그대가 누구인지는 말해주지 않을 텐가.” 기어코 칼리안의 입으로 제 이름을 올리게 하려는 듯한 말에,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그 뒤에는 고개를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카이리스의 왕자다.” < 제46장. 왕자다(2) > 나르잔은 엘프다. 그러니 칼리안이 직접 자신을 소개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당연히 칼리안도 이를 알고 있었고, 때문에 장로 제르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언급하지 않았다. 문제는 나르잔이 단순한 엘프가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누구냐고 물었고 왕자라고 했으니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닌데 상대는 모든 엘프를 대표하는 대장로였다. 르메인도 아직 만나보지 못했던 대장로 말이다. 그런 대장로 나르잔을 앞에 둔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나르잔을 내려다보는 눈을 하더니 플란츠가 아르센에게 참 잘 꺼내놓던 말과 비슷한 소리를 했다. - 카이리스의 미친놈이다. 그것이 플란츠의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아마 카이리스 아니라 이 대륙 전체를 통틀어 칼리안만큼 제대로 미쳐있는 놈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들렸다. 짙은 은색인 듯 보이는 나르잔의 날카로운 눈이 잠시 감겨들었다 떠졌다. 곧 나르잔의 고개가 옆을 향했다. 말이 영 안통할 것 같은 셋째 왕자 말고 그나마 좀 더 차분해 보이는 둘째 왕자와 얘기를 나누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플란츠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내려놨다. 하다하다 이제는 엘프 대장로에게까지 시비를 걸고 있는 미친 동생을 대신해 플란츠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발칸 부군단장.” - 그 놈 형이다. 뭐 대충 이런 뜻이었다. 소파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나르잔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던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얘기는 나랑 해. 내 형님께서 워낙 낯을 많이 가리셔서.” “그대들은 똑같이 무례하군.” 칼리안은 그런 반응에 다른 말을 덧붙이지도 않은 채 나르잔을 쳐다보고 있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나르잔이 다시 말했다. “그대 나라의 국왕이 우리에게 어떤 대우를 했는지 기억하고 있다. 그 날의 일을 모두 잊고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예우를 했건만 어째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가. 이러니 다른 나라로 터전을 옮길 생각을 하는 것 아니겠나.” “예전 일을 잊었다고 티내기 전에 그 일이 왜 생겼는지부터 똑똑하게 따져봐야지. 왜 맘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잊어버리는 거야.” 칼리안이 손을 움직여 바닥을 가리켜보였다. “당신이 관리해야 할 엘프들이 먼저 잘못했어. 그 일을 어물쩡 넘어가려고 하는 바람에 전하께서 그런 처우를 내리셨다는 걸 빼고 말하면 우리가 엄청 나쁜 짓 한 것 같이 들리잖아. 축제 때 왕궁에 못 들어온 일 때문에 화는 나는데 장로가 나한테 저지른 결례에 대한 사과는 하기 싫고, 그래서 그냥 편한대로 억울한 일 겪었던 약자 행세나 해야겠다 싶었으면 끝까지 그렇게만 굴었어야지.” 칼리안이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와 함께 바닥을 향했던 긴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여 찻잔의 끝을 톡 건드렸다. 맑은 소리가 잠시 울리다 가라앉았을 때 서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감히 누구한테 이름을 물어.” 나르잔이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떴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찾지 못하는 듯 보여서 칼리안이 설명을 더했다. 정확히 말한다면 계속 질책했다. “당신은 엘프들이 약자라 말했어. 약자임을 자청해놓고는 내 이름을 물었어. 그러더니 예전에 뭘 잘못했는지는 잊어버린 척 우리쪽에 잘못을 다 떠넘기려고 해. 그럼 내가 화가 나겠어, 안 나겠어.” “이곳까지 와서 사과를 받으려고 할 줄은 몰랐군.” “여기까지 왔으면 당연히 사과부터 할 줄 알았지.” “세크리티아와의 일에 대해 협상을 하러 온 줄 알았는데.” “협상하러 왔는데 그럴 필요 없을 것 같다고 생각중이야.” “어째서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하나.” “협상할 기회 제 발로 걷어찼잖아.” 나르잔이 잠시 입을 다물었고 칼리안의 말은 계속됐다. “뭐가 문제인지 조용히 얘기도 좀 하고 화해도 해보려고 왔는데 괜히 왔나 싶어졌어.” 플란츠가 찻잔을 들었다. 눈을 감고 녹빛의 차에서 풍겨오는 복숭아와 사과 향에 집중하면서 잠시 고민을 했다. ‘내가 기억을 잘못 하고 있나.’ 애초부터 칼리안은 조용히 얘기도 좀 하고 화해도 해보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칼리안은 거짓말을 못하는 놈 아닌가. 그러니 고민이 되는 것이다. 내 동생에게 있어 ‘조용한 얘기’란 침묵 속의 칼질이고 ‘화해’란 안네루시아를 띄워주는 너그러운 행동, 뭐 그런 것이었던가 하고 말이다. 편견을 없애랬더니 상식도 없애버린 듯한 동생의 사고방식을 나도 배워야 할지 아니면 적당히 걸러들어서 착하고 올바른 어른으로 잘 자라야 할지를 고민하는 사이 칼리안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높은 데서 나를 내려다보고 싶은지, 나랑 눈높이 맞추고 대화하고 싶은지, 내 발 밑에 수그릴 건지. 하나만 해. 셋 다 하는 건 욕심이야. 편한대로 섞으면 어느 쪽으로 대해줘야 할지 헷갈리니까.” 자존심 챙기고 싶으면 약자 행세를 하지 말고,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하고 싶으면 외면하는 것 없이 사과부터 하고, 카이리스보다 힘없는 이들인 척 보챌 생각이라면 이름을 묻지 말라는 뜻이다. 나르잔이 웃었다. 처음에는 작은 웃음소리가 나더니 조금씩 큰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다 결국은 앞에 앉은 자가 엘프들의 대족장 나르잔인가 지그프리드의 대인배 슬레이만인가 그것이 혼돈될 만큼 크게 웃었다. “세크리티아의 국왕도 그대와 비슷한 소리를 했는데. 신기한 일이지. 둘이 여러 모로 닮은 듯 하니.”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었고 플란츠가 눈을 떴다. - 주르륵 찻잔이 기울어졌다. 하얀 옷이 녹빛으로 물들었다. * * * 이 쯤 되면 버릇이다. 더는 실수라 할 수가 없었다. 백작 아이즌 에이프린이 양성하고 드미레아가 완성시켜 발칸에 보낸 기사들과 대련을 하던 아르센이 또 검을 부쉈다. 혼자 연구하는 것은 상관 없지만 대련 중 검을 부수는 것을 자제하겠노라 했으면서 또 부숴버렸다. “미안하네, 베른 경.” 그리고 히나에게 혼이 났다. 검을 부쉈는데 히나가 화를 내는 이유는 별 것 없었다. 아르센의 실드를 내리치기가 무섭게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날아간 검의 파편 하나가 멀찍이 서 있던 죄 없는 어떤 기사의 팔등에 콕 박혔다. 머리나 심장에 콕 박히지 않은 것이 참 다행한 일이다. 덕분에 아르센은 실드와 맞닿은 철검을 부수는 것에 성공한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히나에게 혼이 났다. 루시와 안네가 우다다다 뛰어 노는 집무실에서 치료실로 오는 내내 우다다다 혼이 났다. “저는 괜찮습니다. 너무 화내지 마세요, 치유사님.” 팔에서 철철 흘린 피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 놀란 탓인지 다소 질린 얼굴의 기사가 이렇게 말하며 히나를 말렸다. 결국 히나가 짧게 숨을 내쉬었고, 아르센은 치료 다 끝나면 기사에게 탄산수 한 잔 사겠다는 말로 진심어린 사과의 뜻을 한 번 더 전한 뒤 뒷처리를 위해 돌아갔다. - 금방, 고쳐줄게요. 걱정 말아요. 이렇게 말한 히나가 기사의 팔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한여름의 태양보다는 꽃을 피우는 봄 햇살같은 황금빛이 기사의 팔을 감싸안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흐르던 피가 완전히 멎고 벌어진 상처가 조금 아물었다. 칼리안이나 플란츠와 같이 축복의 힘을 가진 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둘에 비해서는 치유 속도가 현저히 더딜 수밖에 없었다. - 며칠 더, 치료 받아야 돼요. 그 때까지는, 훈련, 받지 않도록, 전해 둘게요. 얼마 전 베로니카가 만들어 놓았던 약을 함께 챙겨주며 건네진 말에 기사가 고개를 열심히 숙여 인사를 했다. “네, 치유사님. 감사합니다.” 큰일 날 뻔 했는데 잘 살아있다는 안도감. 나도 이제 치유사님 치료 받아 본 사람이라는 뿌듯함. 치료 받을 때 겪은 따스한 느낌이 어땠는지 자랑 할 수 있다는 설렘. 그런 것 때문에 기사는 자신의 뒤로 슬며시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 그저 한껏 고양된 기분으로 치료실이 있던 복도를 돌아 코너로 들어섰을 때. - 쾅! 누군가 그의 팔을 등 뒤로 낚아채며 벽으로 밀어붙였다. 잡힌 것이 다친 팔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비명이 나오려던 것을 습관적으로 참았다. 대신, 붙들리지 않은 팔의 소매 속에서 날카로운 단검이 튀어나왔다. 기사는 잡힌 팔을 그대로 둔 채 몸을 틀어 상대방과 위치를 바꾸며 단검을 휘둘렀다. 우드득, 하고 꺾인 팔에서 좋지 않은 소리가 났으나 그 역시 일단 무시한 채였다. - 콰직! 기사를 덮쳤던 상대방이 유연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했다. 공격 대상을 잃은 단검이 허공을 스치며 벽에 박혔다. 기사는 단검을 놓고 상대방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빠르게 날아드는 주먹을 피한 상대가 몸을 낮췄다. 그리고 가볍게 바닥을 짚은 채 긴 다리를 뻗어 기사의 발목을 돌려찼다. - 퍼억! - 쿵! “윽!” 발목이 부서진 것이 아닐까 싶은 정도의 충격과 함께,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기사의 몸이 기우뚱했다. 그 사이를 놓치지 않은 상대가 다시 한 번 기사의 발목을 걷어차 기사를 바닥에 엎어뜨렸다. 무릎으로 양 손목과 허리를 사정 없이 내리눌러 제압한 상대방이 기사의 머리채를 잡아 휙 끌어올렸다. 선득한 느낌을 주는 날선 무언가가 목에 닿는 것을 느낀 기사가 눈을 내리떴다. 목을 겨누고 있는 아름다운 머리 장신구가 눈에 들어온다. 푸른 바다 빛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린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새가 있네.” 싸늘한 음성이 기사의 귓가에 닿았다. ‘아. 서로 인사하게. 저 친구는 그냥 전서구인데, 전서구도 새는 새니까 새가 맞기는 하지만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새는 아니니 걱정 안해도 되네. 열심히 훈련 잘 받고 있는 성실한 친구니 그냥 두고 서로 친하게 지내게.’ 둘이 서로를 알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뒤늦게 한 아르센이 다시 찾아와 오해를 풀어준 것은 에일라의 비녀가 기사의 목을 파고들기 직전, 그리고 기사가 입 속의 독을 씹기 직전의 일이었다. - 계단에서, 굴렀다고요? 그리고 다친 팔 치료 받고 신난 마음으로 홀랑홀랑 뛰어다니다가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다시 실려 온 기사를 본 히나가 뜨악한 얼굴을 한 것은 잠시 뒤의 일이었다. - 어떻게 구르면, 팔꿈치랑, 어깨가, 탈골되고, 발목이, 부러지는데요? 새들은 서로 얼굴을 모르지만 에일라는 일반적인 새가 아니었고 에일라의 주인인 칼리안은 ‘너 일할 곳에 네 전 직장 동료 한 명이 있다’는 말을 해 줄 만큼 세심한 인사가 아니었던 탓에 벌어진 작은 사건이 그렇게 중상자 한 명을 남기며 평화로이 마무리됐다. * * * 밤이 되면 어머니 나무는 은은한 빛을 냈다. 덕분에 한밤의 모래사장이 고운 유리가루를 품은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같은 바다인데, 결국 어딘가에서는 다 섞여 흐르는 소금물인데. 조금 많이 달라서 그런지 이토록 아름다운 밤바다가 반갑기보다는 생소하다는 기분이 더 많이 들었다. “또 여기 계십니까.” 대장로의 말을 전달받은 엘프 치유사가 시오나를 치료하는 사이 칼리안이 시오나의 곁에 있었다. 엘프들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직접 옆을 지키며 치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던 탓에 시간이 많이 지났다. 치료를 마치고 일행이 머물던 건물로 함께 돌아오던 길에 당황한 얼굴의 니들렌을 만났다. ‘부군단장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언제?’ ‘방금 전에 알았습니다. 기척이 워낙 없으셔서······ 죄송합니다.’ 안에서 든 버릇 밖에서 고쳐지겠냐만, 아무튼 플란츠가 발칸의 대원들이 호위하던 방 창문을 열고 뛰어내린 것 같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완두콩이 어디에 갔을지는 뻔한 일이라 그냥 둘까 하다가. “얘기하고 문으로 나오셨어도 막을 사람 없는데요.” 결국은 찾아와서 이렇게 말을 건넸다. 여전히 파도 앞에 서 있던 플란츠가 대답 대신 하얀 포말이 발 끝을 살짝 적시다 멀어지는 것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어제보다 더 가늘어진 바람에, 함께 고요해진 파도소리가 머무르다 떠나기를 계속했다. “귀찮을까봐. 잠시.” “잠시 나오신다 해도 알려주시고 나오는 것이 낫습니다. 뒤늦게 알면 더 황망해 하니까요.” “알았어.” 칼리안이 시선을 내려 플란츠의 무릎 언저리를 쳐다봤다. 제 손으로 쏟은 녹빛 차에 물들었던 하얀 옷을 떠올렸다. 덕분에 칼리안의 웃음이 멎었고, 대장로와 칼리안의 남은 ‘협상’은 무사히 내일로 미뤄졌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대장로의 언질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치유는 같은 엘프인 시오나에게 까지만 허락됐다. 애초에 찻물에 데인 상처를 고쳐달라 할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부탁한다 하여 해줄 리도 없거니와 플란츠의 화상은 고쳐주면서 데블란의 병은 고쳐주지 말라는 요구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던 까닭이다. 축복의 힘이 있으니 괜찮다 하면 진짜 괜찮기는 할 터였다. 펄펄 끓는 물도 아니었고. “네.” 그래서 칼리안은 더 걱정하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고 왜 그랬는지도 안 물어봤다. “여기서 계속 기다려도 못 들으십니다. 주변에 바위가 많아서 그렇게 큰 고래는 이곳까지 안 와요.” 온다고 해도 일반인 청력으로는 여기서 고래 울음소리 못 듣는다는 말도 안 했다. 그걸 몰라서 저렇게 청승떠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칼리안도 알고 있었다. “그 소리 같이 들어달라고 드린 말씀 아니었습니다.” 이지러진 달빛이 고이 올려진 먼 수평선을 보면서 꺼낸 말에도 플란츠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숨을 쉬러 올라오는 커다란 짐승을 볼 수 있을까, 가까이는 안오더라도 그래도 볼 수는 있을까 하고 한참동안 먼 곳을 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용서, 못 받는 것 알아.” 이만 돌아가자 말하려던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플란츠는 그런 칼리안 쪽을 보지 않은 채 자신의 하얀 옷을 내려다봤다. 몇 번이고 풀물이 들고 몇 번이고 지워내 결국 하얀 옷. 직접 녹차를 쏟아도 결국은 다 지워지고 남은 하얀 옷. “그럴 욕심 없어. 잊고 살 생각도 없어. 왜 아우님께서 그것까지 대신 가져가려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몫이지 당신이 감당할 일 아니야. 그러니까 지나치게 신경써주면서 애써 묻어두려는 짓 그만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눈을 내리떴다. 똑같이 발 끝을 적시고 물러나는 파도의 하얀 거품이 사그라드는 것을 똑같이 내려다봤다.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맑은 연두색 눈으로 새카맣고 새빨간 얼굴을 직시했다. “둘 다 하시는 건 욕심이라고 란델 형님께 말씀을 드렸었는데 오늘 아우님이 비슷한 말을 하기에. 똑같은 잣대를 본인에게 두느라 많이 혼란스러우신 듯 한데.”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플란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칼리안으로 살아야 하는데 나를 원망하고 욕할 권한은 없다고 생각하는 거. 내 아우님으로 살면서 내 아우님 아닌 다른 사람 눈으로 날 봐야 하는 거. 둘 다 하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하는 거 집어 치우라고. 당신 편한대로 살아. 당신은 그래도 돼.” “······ 무슨 권한으로 그걸 허락하시는지.” “내가 당신 형이니까.” 칼리안의 입에서 한숨같은 웃음소리가 났다. - 화악! 칼리안의 손이 플란츠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결국 참아내지 못한 원망을 터뜨렸다. < 제46장. 왕자다(3) > 노크 소리가 들릴 일이 없었다. 복도를 지나 집무실 앞에 다가서자 문을 열고 반갑게 맞이해주는 이가 있었다. “어서 오게, 베른 경.” 방문한 이는 히나였고 맞이한 이는 앨런이었다. 한 팔 가득 오는 무언가를 품에 안고 눈만 빼꼼히 내민 히나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 뜻밖의 물건이 퍽 무거워 보였던 탓에 앨런이 히나의 손에서 얼른 그것을 받아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 사이 히나를 따라 함께 온 에일라가 예를 보인 뒤 밖에서 문을 닫았다. 그 모습을 일별한 앨런이 히나가 들고 온 것을 보며 물었다. “카바니아 아닌가? 값이 꽤 나갈 터인데.” - 네, 맞아요. 붉은 꽃에서는 꽃 향이 아닌 단 향이 났다. 얼핏 작약을 닮았으나 크기가 훨씬 작고 그 꽃잎의 생김이 독특했다. 신비로운 꽃이 한가득 피어난 화분을 내려다보던 앨런에게 히나가 말을 이었다. - 약재인 줄 알고, 힘들게 구해왔는데, 베,로,니,카,가 찾던 것이, 아니라고 해서, 집무실에서 키우려고 했어요. 그러다, 꽃이 핀 것을, 보니까, 군단장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보석처럼 투명한 붉은 꽃잎. 그것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어여쁜 제자의 눈이 생각난 앨런이 달달한 향기 만큼이나 기분 좋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 그래도 칼리안을 보지 못한지 한참이 되어 눈앞에 꽤 어른거리는 상태였다. “마음 써주어 고맙네. 내 정성껏 잘 키워 보겠네.” 히나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따로 용건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화분을 전해주러 왔으니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앨런이 아차, 하고 얼른 일어나 차를 준비했다. 아무래도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새여서 히나는 다른 말을 하거나 에일라가 함께 들어와도 되는지 묻지 않고 그냥 잠시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청량한 향이 나는 민트차 두 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그 뒤 다시 히나의 맞은편에 앉은 앨런이 슬쩍 문 쪽을 보며 입을 열었다. “빌헬름 관의 일은 전해들었네. 문 밖에 서 있는 저 친구 생각보다 손이 맵다던데 같이 지낼 만 하던가? 모난 곳은 없고?” - 호위님이요? 네, 잘 지내고, 있어요. 많이, 친해졌어요. “혹시라도 지내다 불편한 것 있으면 얘기하게. 왕자님이 자네 잘 챙겨주라며 어찌나 성화인지 내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니.” 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건네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은 뒤 말했다. - 신기해요. 같은 잎인데, 맛도 다르고, 향도 달라요. 앨런이 타 주는 민트차는 히나가 마셔 본 그 어떤 차보다 맛이 좋았다. 향은 시원한데 따뜻한 맛이 났다. “그래도 난 이것 끓이는 것이 늘 어렵네. 커피는 무조건 진하게만 끓이고 딸기차는 무조건 연하게만 우리면 되니 늘 이 녀석이 문제 아니겠나.” 앨런이나 아르센이 마시는 커피는 무조건 진하게, 플란츠를 위한 딸기차는 무조건 연하게. 그리고 칼리안이 마시는 민트차는 무조건 맛있게. 때문에 칼리안을 위한 차가 가장 어렵다. 그런 말임을 잘 알아서, 히나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 그런데, 에일라님은, 세,크,리,티,아, 사람이에요? 안그래도 에일라가 히나와 잘 지내는지를 묻기 위해 히나를 앉혀두었던 앨런이지만 히나의 손 끝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도리어 놀란 얼굴이 됐다. 사실 히나가 눈치 챈 것이 그리 큰 일은 아니었다. 비록 칼리안과의 로젤리타 동행 때 에일라를 직접 만난 적은 없었으나 에일라의 출신지가 ‘휘트린’ 영지인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아니네. 혹시 그것 때문에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는가?” - 아니요. 호위님의 성이요.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요. 그래서, 정말 그곳에서, 온 사람인지, 아니면, 왕자님께서 지어주신, 성인지, 궁금했어요. “왕자님께서 지으신 것이라 알고 있네. 혹시 세크리티아에 그런 곳이 있나?” - 네. 있어요. 작은 숲이라고, 들었어요. 앨런이 히나 몰래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했다. 아이고, 우리 어여쁜 제자가 또 들킬 거리 하나를 만들어냈구나. 내 언제 체이스에게 연락을 해서 브리지트라는 곳의 이름을 좀 바꿔달라 해야지. 꽃 같은 내 제자가 제 사람 이름 짓는 것에 실수로 세크리티아 지명을 가져다 썼으니 이를 어쩌겠나. 그 지명을 바꿔야지, 아무렴. 앨런이 이렇게 스스로 큰 일거리 하나를 만들 계획을 짜는 사이 히나의 말이 이어졌다. - 돌아가신 엄마가, 남겨둔 편지에, 써 있었어요. 엄마랑 아빠랑, 처음 만났던, 곳이라고 했어요. 히나의 어머니. 무언가를 잘못하고 추방된 엘프였던 걸까. 그래서 카이리스도 아닌 세크리티아의 숲에서 숨어 살았던 걸까. - 이 나라에서, 오빠를 낳으면, 엘프 숲으로, 다 함께,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대요. 그래서, 엄마랑 아빠랑, 오빠랑 저랑, 다 같이, 그 숲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할 것, 같다고 했어요. 아팠대요, 우리 엄마. 좀만 기다렸으면, 제가 고쳐 줄 수 있었을텐데. 히나가 찻잔 속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저는, 엄마도 아빠도, 기억이 안 나서, 오빠한테, 맨날 그렇게 말을, 했었어요. 나중에 우리가, 대신 거기에 가서, 살자고요. 이제는 그 숲에 갈,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자상한 왕자님을, 만나기 전에는, 거의 매일같이, 그 말을 했어요. 어디 있는지 잘 모르는, 곳이어도, 분명히, 행복한 곳이 아닐까, 상상하면서요. 그래서 호위님 이름을, 들었을 때, 반가웠어요. ‘체이스에게 연락할 필요 없겠군.’ 칼리안이 왜 그 이름을 썼는지 어렴풋이 이해한 앨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래서야 체이스가 먼저 이름을 바꾸겠다 해도 나서서 말려야 할 판이다. 그래서 그냥 에일라 이름을 듣고 혹시나 의심을 하는 놈이 있으면 그 놈을 없애 버리는 쪽으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과거, 히나를 잃은 키리에가 굳이 세크리티아로 간 이유를 알게 됐다. 그렇게 키리에가 세크리티아를 찾아갔기에 베른이 키리에를 만났다. 아니었다면 칼리안은 지금까지도 키리에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으리라. 만약 앨런이 히나와 키리에 남매에게 ‘베른’이라는 성을 멋대로 지어주지 않았다면 남매의 성은 분명 ‘브리지트’가 되었을 터였다. 그 성을 왜 에일라에게 주었는지는 칼리안만 아는 또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튼 아무 생각 없이 준 성은 아니라 하니 다행한 일이다. 아들내미 속내를 이렇게 또 하나 알게 된 앨런이 히나를 보며 물었다. “그래. 그럼 이제 자네는 그곳보다 이곳에서 사는 것이 나을 것 같은가?” 히나가 고개를 들어 앨런을 쳐다봤다. 그리고 고민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군단장님. 여기는, 정말, 이상한 곳이에요. 목걸이 줄에 길고 긴 이름을 적어 놓은 고양이 두 마리가 누구에게서든 소금 안 든 닭고기를 얻어 먹고, 우르르 몰려온 동료들에게 치유사의 황금빛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자랑하는 전서구가 살고, 그 전서구한테 탄산수 가져다주는 부군단장이 오리 모이를 챙기는 그런 이상한 곳. 정말, 이상한 곳. 그런 곳에서 사는 히나가 포근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곳을, 이렇게 만든, 자상한 왕자님이, 제일, 이상한 사람이라서, 그런가봐요. 저는, 상상만 해오던, 행복한 곳보다, 이상한 것 많은 이곳이, 더 좋아요.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자네도 이상한 사람 다 됐군.” 시간을 거슬러 적국에 온 왕자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할 것 같은 비밀을 전부 들키고 다니는 곳이라 그런가. 아니면 반드시 해야 할 것 같은 복수는 안하고 전부 다 살려내려 드는 곳이라 그런가. 이런 생각을 하던 앨런이 마주 웃었다. * * * 파도에 깎인 모래 사이로 발이 파고든다. 모르는 사이 조금씩 그렇게 파묻혀갔다. 발 끝에 닿던 파도에 어느새 발등이 젖는다.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는 있습니까.” 파도는 넘실거리는데 악다문 입 사이에서는 높낮이 하나 없는 목소리만 새어나왔다. 칼리안의 그런 얼굴을 참 오랜만에 보았음에도, 플란츠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전했다. “나한테는 욕심내고 살라더니 아우님은 안 그러는 것 같아서.” “제가 왜 그러는지 모르시는 분 아니잖습니까.” “어느 한 쪽도 선택하질 못해서 결국 내 옷에 묻은 풀물이나 지워주고 있던데. 그렇게 하면 내 잘못이 아예 없던 일이 될까 믿는 것처럼. 당신 잘못은 이미 다 지워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내 잘못도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면 똑같은 눈높이로 보일까 생각한 거잖아. 그래서 묻으려던 거잖아.” 억세게 붙들린 옷깃에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은 채, 플란츠는 칼리안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 잘못은 그 왕제와 함께 다 지워진 것 같아서, 그래서. 얼룩 하나 안 묻은 흰 옷으로 되돌려가면서 그렇게 억지로 눈높이 맞춰가면서 용서도 책망도 안하고 전부 다 묻어버리려고 하면. 그게 될 것 같았나본데.” 옷깃을 붙든 손 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는 안 돼.” - 몇 명입니까. - 무슨 소리야, 갑자기? - 왕자님께서 남모르게 지운 목숨. 몇 명인지 여쭙는 겁니다. 잘못. 돌이킬 수 없는. 이미 쏟아져 흘러내린 찻물 같은 것. 데인 상처를 만들고 물집이 터져 흉터를 남기는 것. - ······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 어제 우연히 티온 백작가에 들어가시는 왕자님을 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바로 그 가문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따져 생각해보니 왕자님께 피냄새가 짙던 날마다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 잊어버려. - 그 많은 이들을 죽여 없애야 했던 이유, 무엇이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잊으라고 하지 말고 말씀해주십시오. 이해하려 노력하겠습니다. - 얘기한다고 달라지는 것 없어. 앞으로도 계속 같을 테고. 그러니 거기까지만 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후회. 아무 소용 없는. 깨진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빗물같은 것. 막으려 해도 결국 들이쳐서 온몸을 차갑게 적시는 것. - 얼마 전에 전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기사 말고 다른 것 해 볼 생각 없는지 물으시기에, 이름없는 새가 되어 살고 싶지는 않다 했습니다. 긍지 속에 살고 명예롭게 죽겠다 했습니다. 왕자님같은 기사로 살다 죽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 에일라. -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용서. 구할 수 없는. 많은 말을 담아 흘러간 강물 같은 것. 무슨 짓을 해도 이제는 보여주고 들려주지 못해 그저 침묵하는 것. - 왕제님. 푸른 솔새가······ 날개를 접었습니다. - ······ 시신은. - 텐실로 간 새들을 통해 수습하도록 이르겠습니다. - 찾아와. 여기로 데려와. 그리하여 결국 저 깊고 검은 물 속에 내몰려 홀로 침잠한. 고래의 울음. “과거로 되돌아와서. 용서 구해야 할 사람들이 전부 다 잊고 다 살아났으니까. 다른 놈 손에 죽든 말든 당신 손에 피 묻을 일 없으니까. 그러니 이제 속죄할 대상 없어졌다고 맘 편할 새끼 칼이 그딴 색이면. 그런 새끼 형 노릇 하겠다고 아등바등 안 살아, 나도.” 소금 냄새 가득한 비린내가 났다. 그 바다 비린내가 어쩐지 익숙하다는 착각이 든다. 그 바다에 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무도 모르는 피냄새에 파묻혀서 미친 새끼는, 그 피 흘렸던 놈이 살아있든 죽었든 신경쓰지 말고 속편하게 평생 속죄하면서 살아. 그게 당신 몫이야. 저 물 밖으로 빠져나와서 말라 죽지 말고 그냥 그 안에서 숨막혀 하면서 계속 살아.” 베른으로서의 생. “당신이 그 애······ 예전의 칼리안이 아니었다고 해서 자격 없다고도 생각하지 마. 내가 칼리안에게 한 짓을 용서하는 건 당신이 못해도 용서 못하는 건 당신이 할 수 있어. 해도 돼. 기억은 다 있으면서 당신은 가짜라는 생각에 억지로 못 본 척 외면하지 마. 그렇게 되면 체이스는 뭐가 되는데. 당신 예전 형까지 없어진 사람으로 만들지 마.” 그리고 옛칼리안으로서의 생. “전부 다 떠안기로 했으면 책임도 권리도 다 가져가라고. 책임질 것만 가져가지 말고 전부 다 가져가라고. 그게 당연한 일인 것 같으면 당연하게 가져가. 욕심인 것 같으면 욕심 부려. 당신은 그래도 된다고.” - 형님, 여기······ 만화경이요. 어제 정원에 두고 가셨어요. 아, 빨간색······ 싫어하시는 줄 몰랐어요. 그럼 이거 제가 가져도 돼요?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할게요. - 형님, 혹시 이 안에 뭐가 있는지 본 적 있으세요? 꼭 빨간 별이 반짝이는 것 같아요. - 형님, 그런데 그거 아세요? 우리처럼 세크리티아도 꽃으로 장례를······. 저는 저를 위한 꽃이 빨간 별이 되어 날아갔으면 좋겠어요. - 형님, 아니에요. 그냥 꺼낸 말이에요. 무슨 일 있는 것 아니에요. 만화경 안에 든 보석들 때문에요. 별이 들어있는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 일 없었어요. 아니에요. 안 오셨어요. 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로 그냥 한 말이에요. - 형님······. 밀려드는 기억에 잠겨든 고개가 떨구어진다. 비릿한 소금 냄새 사이로 다른 비린내가 났다. “그러지 말지······.” 원망을 했다. 더 참지 못한 숨을 토해냈다. 숨을 쉬었다. “내 말 하나로 갑자기 그렇게······ 그러지는 말지.” 매달리듯 붙든 하얀 손이 가늘게 떨렸다. 손바닥 위에 새겨진 긴 흉터 위에 기어이 새 상처가 났다. 힘주어 잡은 새하얀 옷깃에 핏물이 번진다. “말을 안해주면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아들어······ 형님이 말을 안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들어. 설명을 했어야지······ 설명은 해줬어야지!” 옛칼리안이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하였으나, 누구 하나 살리지 못해 아무에게도 용서를 구하지 못했던 베른이기 때문에. 끝내 용서받지 못할 형제를 끝끝내 책망만 하지는 못하여서. “왜 하필 그렇게 닮아서. 하필 왜 형님이 닮아 있어서, 나랑. 대체 당신은 왜 그렇게 나를 닮아서.” 결국은 이해하게 되어서. 그것이 지금의 칼리안이기 때문에. 결국은 이해할 수밖에 없어서. “형님······.” 욕심을 부렸다. 모르는 사이 어느새 바다에 잠긴 발등 위에 켜켜이 쌓아둔, 더는 감추지 못한 투명한 감정들이 하나씩 떨어졌다. 똑같은 소금 냄새 가득한 물 속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 파도가 가만히 밀려왔다가 가만히 멀어졌다. < 제46장. 왕자다(4) > 생각보다 많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특별히 더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하는 짓들을 봐 온 탓에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조금 더 확신을 하게 됐다. 생각보다 나이가 많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라고. 얼만큼의 시간을 거슬러 왔는지 알 수도 없고 체이스와 몇 살 차이가 나는지도 몰라서 적당히 가늠만 해 보다 그냥 고개를 돌려 달빛 바스라진 바다만 봤다. 언젠가의 이 날에 살았을 옆 나라의 왕자가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무엇을 앓고 있었을지. 그냥 적당히 가늠만 해 보다 바다만 봤다. 바다를 보면서 울음소리를 들었다. 소금내가 낯설다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들었다. 발등을 적시던 바닷물이 발목까지 차오르도록 들었다. 일렁이는 달빛이 머릿속에 새겨지도록, 이제는 그저 열 여섯인 한 사람의 울음소리를. 한참동안 들었다. “칼리안.” “네.” 그래. 결국 이렇게 바다에 와서 고래 울음을 들었다. “놔.” “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동생 하나가 생겼다. * * * 실로 아름다운 세크리티아. 칼리안은 세크리티아를 그렇게 소개했었다. “카이리스는 사실 많은 곳을 가본 것이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세크리티아에서는 어딜 가든 다 좋았던 것 같습니다.” 조금 전. 칼리안이 두 말 없이 옷깃에서 손을 떼어냄과 동시에 피냄새가 사라졌다. 옷깃을 붙든 손에 기대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탓에, 옷을 가리고 있던 까만 뒷통수가 치워지자 어느새 깨끗해진 하얀 옷만 보였다. 발목이 여전히 물에 잠겨 있으니 물 밖으로 나가서 지워도 될 텐데도 기어코 그 핏물을 지워내고는 참방참방 걸어 나가 모래사장 위에 앉는 것을 본 플란츠가 생각했다. 쟤 지금 엄청 부끄럽구나, 라고. 그래서 그냥 다른 말 없이 그 옆으로 가 앉았다. 그러다 지금 칼리안이 여전히 입고 있는 정복에 아무것도 넣어두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곤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그 뒤에는 손수건을 받아 주먹 안에 말아 쥔 칼리안이 또 두서없는 말을 꺼내놓는 것을 그냥 듣기 시작했다. 새빨간 저 눈이 원래의 빨간 눈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기다려 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다지만요.” “그렇겠지.” “아, 생각해보니 바다에 두 번째로 들어갔네요. 두 번은 안 들어갈 줄 알았는데.” “······ 그렇게 그리워하는 것 같더니.” 그리 가보고 싶어하던 바다에 들어간 건 고작 두 번 뿐이라고 했다. 그나마 발목을 적신 것이 두 번째라면 파도 근처에도 오지 않았던건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이 곳에 온 뒤로도 칼리안은 계속 멀찍이 서있기만 하고 파도 앞으로 오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왜.” “숨막혀서요.” 플란츠가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칼리안이 손을 들어 달 기우는 수평선을 가리켜보였다. “저 너머 어딘가로 배를 타고 갔던 날이 있었는데, 배 밖으로 던져졌던 걸 잊질 못해서요. 그때 체이스 왕세자님께서 같이 뛰어드는 바람에 꽤 오래 고생을 하셨었는데 그 기억이 지워지질 않아서 못 들어갔습니다.” “암살될 뻔 했다는 건가.” “아뇨.” 고개를 가로젓더니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나름대로의 시험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확인을 받았습니다.” 잠시 그 모습을 보며 칼리안의 말 뜻을 생각하던 플란츠가 기가 찬 웃음소리를 냈다. “······ 잊어. 곧 없어질테니.” “네. 잊어버려야죠. 곧 없어질 사람이니까.” “반말.” “아까는 그냥 두셨으면서.” “또.” “저희 아직 동갑인데요, 형님.” “짖지.”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발 끝으로 모래를 몇 번 밀어보다 말을 이었다. “아무튼. 세크레타를 떠나 있던 1년 동안 가능한 세크레타에서 먼 곳, 앞으로 두 번은 가보지 못할 곳들만 찾아다녔는데 다 좋았습니다.” 세크리티아에서는 왕족이 왕궁을 떠나 있어야 하는 기간이 없었다. 로젤리타와 같은 성인식도 카이리스에만 있었으니 왕궁에서 평생을 보낸 왕족이라면 수도 세크레타를 떠나 있어야 할 특별한 일이 없었다. 때문에 그것이 의외라 생각된 플란츠가 옆을 쳐다봤다. 질문을 담은 목소리 대신 파도 소리가 들렸고 바람이 불었다. “쫓겨났어요. 왕궁 밖으로. 그래서 여행을 다녔습니다.” 플란츠의 시선을 느낀 칼리안이 어깨를 으쓱이다 실소했다. 왕궁 밖으로 쫓겨났던 날에 느낀 억울함, 서러움, 어처구니 없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누가.” “체이스 왕세자님께서 왕궁에 들어오지 말라고 내쫓으셨습니다.” “왜.” 칼리안의 입에서 짧은 한숨 소리가 나왔다. “왕자에서 왕제가 되고 나서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사는 내내 가장 날 서 있던 시기가 아마 그때였을 겁니다. 오히려 그 전보다도 더요.” 잠시 파도소리를 듣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유였을지 안다. “저한테는 고양이가 없었으니까요.” “그래.” 플란츠와는 많이 다른 이유겠지만 이해는 됐다. 아마 데블란이 살아 돌아올 것 같아서였을 것이다. 살아있던 채로도 그 왕제를 지옥에 넣은 사람의 그림자는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동생이 뭘 했는지 몰랐던 체이스는 왕위에 오른 뒤 정신이 없었을 테니, 하얀 고양이도 없고 500년 된 건물 하나 쯤 아무렇지 않게 부수는 까만 고양이도 없었다면. 무너졌겠지. 이미 죽은 이가 만들어두었던 지옥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그렇게 3년을 보내고 났더니 체이스 왕세자님께서 저를 왕궁 밖으로 추방시키셨습니다.” 그 체이스가 그랬을 정도면 대체 얼마나 산산조각난 유리조각처럼 살았던 건가, 하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플란츠의 시선을 무시하고 넘긴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딱히 갈 곳이 없어서 며칠을 두고 술만 마시다가 그대로 세크레타 밖으로 나가서 1년쯤,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이곳 저곳 참 많이 다녔습니다. 그렇게 속에 담기는 것들이 많아지니 이전에 봤던 것들이 조금씩 뒤로 밀려나더군요.” 칼리안이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놓았다. “그냥, 형님께서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느새 피가 멎은 상처가 보였다. 그 뒤로 여전히 남아있는 긴 흉터를 한 번 본 칼리안은 잠시 입을 다물고 플란츠를 봤다. 확실히 플란츠는 말 하는 것을 귀찮아해서 그렇지 못하는 건 아니다. 언젠가 욕은 안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따져보니 욕도 잘 한다. 아는 욕이 두 세 개밖에 없는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필요하면 잘 돌려써가며 하긴 한다. 그래도 욕은 더 가르치지 말아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르쳐 놔봐야 그 욕 들을 사람은 칼리안밖에 없으니까. 아무튼. 말 하는 것을 귀찮아하지만 못하는 건 아닌 사람이 굳이 입 밖으로 안 꺼내놓으려 하던 것을 전부 듣고 전부 보았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모닥불 불티에서 호수 불꽃 보시는 대신 나무 갈라지는 소리도 좀 들어보시고, 무지개에 물들지 않는 것 보면서 안심하는 대신 손끝에 감기는 그 물안개가 얼마나 시원한지 느껴보시고, 들리지도 않을 소리 생각해가며 파도 끝에 서는 대신 체르밀까지 닿지 않을 바다냄새 맡으면서, 그렇게 다니세요.” - 쏴아아아······. 시원한 바람결에 파도 소리가 가득찼다. “잊지 못하시는 분인 것 알고 있으니 그렇게 조금씩만 뒤로 미뤄가면서 사세요.” 말하는 것 귀찮아하는 플란츠는 이번에도 다른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바다 속으로 잠겨 들어가듯 수평선 너머로 조금씩 사라져가는 달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독에서 깨어나고 잠들었던, 그 날에.” 연두색 눈이 끝내 감겨들었다. 그것이 누군가의 마지막 이야기임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 * * 동그란 테이블 위에 참 다채로운 색이 올려졌다. 계란과 우유를 넣은 빵은 칼리안과 플란츠 쪽에 놓였다. 잘 익은 계란 프라이도 두 개. 마찬가지로 칼리안과 플란츠 쪽에만 놓여 있었다. 외부에서 온 방문자를 위한 그들 나름의 배려였다. 그리고 그 배려는 딱 거기까지. 잘 구운 피망과 아스파라거스, 여러 종류의 버섯 볶음, 무화과와 아보카도가 가득 들어간 샌드위치, 구운 바나나, 굳이 필요할까 싶은 샐러드, 그리고 보랏빛의 포도 주스. 고기가 없다. 그래, 이해하지만 고기가 없다. 당연한 일이지만 고기가 없다. 계란과 우유로도 고맙게 생각은 하지만 고기가 없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시종이 없으니 직접 움직일 수 밖에. 테이블 위를 보고 아주 잠시 시무룩해하던 칼리안이 플란츠의 옆에 있던 오디 잼을 향해 팔을 뻗었다. 식사에 앞서 손을 씻도록 놓여 있던 투명한 물그릇 위에 띄워진 노랗고 빨간 향기로운 꽃을 내려다보던 플란츠의 눈 앞으로 칼리안의 팔이 지나갔다. 그리고 꽃이 사라진 것을 보았다. 손 씻을 물 위에 띄워진 꽃 가져다 제 앞에 두는 것에 능력 잘 낭비한 소드마스터 동생놈이 식사를 시작하는 것을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꽃 치워진 물그릇에 손을 씻은 뒤 피망만 없다면 입맛에 아주 딱 맞을 식사를 했다. “장로 제르의 일은 진심으로 미안하네.” 그 식사가 끝날 즈음, 맞은편에 앉아있던 나르잔이 이런 말을 했다. 전날 그렇게 웃음소리를 내던 모습을 보며 나르잔이 아무래도 자신의 성정을 시험해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칼리안은 크게 놀라는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크리티아로 이주하는 건 재고했으면 해.” 그리고 칼리안 나름대로의 협상을 비로소 시작했다. “포도든 밀이든, 어머니 나무의 힘 덕에 많은 득이 있다는 건 우리도 알아. 그러니 긴 말 오갈 것 없이 불편한 것 있으면 얘기해.” 남부 지방 대부분의 큰 숲에 엘프들이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고 그 숲의 나무들을 보존해주는 것을 대가로 받고 있는 일종의 세금. 바로 어머니 나무의 힘이었다. 식물 키워내는 능력 하나는 일품인 어머니 나무 덕분에, 어지간한 가뭄이나 수해에도 흉년이라 할 만큼의 농작 피해는 거의 발생되지 않았다. 메뚜기 떼가 생긴다거나 이미 다 경작한 곡물이 물에 잠긴다거나 하는 등의 일에서까지 피해가 없을 수는 없지만 농작물 자체는 언제나 훌륭히 잘 자랐다. 뿐만 아니라 카이리스에는 지진이 없었고 온천은 있되 화산이 폭발한 경우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대가를 주는 것은 아니라 하나 그런 어머니 나무가 사라지면 카이리스도 썩 편하지만은 않을 테니 전날 나르잔도 ‘이러니 이주를 생각하지’ 라는 식으로 나왔던 터였다. “불편하다 하기 보다는 좀 난처한 일은 있네.” “세크리티아 국왕과 만난 것 같던데.” 나르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몰라도 세크리티아 국왕과 닮았고, 닮았다는 말을 꽤 싫어하는 듯 했다. 순간적으로 칼리안에게서 쏟아져 나온 살기를 나르잔도 느꼈다. 둘째 왕자가 무릎에 차를 쏟아 가며 칼리안을 말린 것도 알았다. 덕분에 어제에 비해서는 상당히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된 나르잔이 대답을 했다. “엘프 치유사를 보내달라는 요구를 해 왔는데 알겠지만 우리는 동족 외에는 치료하지 않기 때문에 거절을 했었네.” “어차피 그들이랑 엘프가 관련 있던 것도 아니니 그냥 거절하고 말면 되는 일일 텐데 그게 왜 난처한 일인지 이해 안돼.” 이 말을 들은 나르잔이 잠시 뜸을 들였고 칼리안은 다른 말 없이 대답을 기다렸다. 그 사이 식사를 마친 플란츠는 말린 로즈마리와 레몬이 들어간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사실 세크리티아 쪽에도 엘프들이 사는 숲이 하나 있네. 그런데 세크리티아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엘프들이 그동안 거주해왔던 것에 대한 대가로 치유사를 보내라 요구하고 있어서 곤란한 상황이네.” 브리지트 숲일 것이다. 최근 기억해 냈던 한 숲의 이름을 떠올린 칼리안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러 이유로 추방된 엘프나 하프엘프가 있는 곳이지. 아마 그대도 알지 않을까 싶은데.” “세크리티아에 엘프 숲이 있었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 말에, 오히려 나르잔의 얼굴 위에 의문이 생겼다. 나르잔이 플란츠를 보며 물었다. “그대의 형제가 너무 어렸던 터라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혹시 그대들이나 그대들의 국왕도 사실을 모르는 것인가.” “뭐를.” 여전히 차분하지만 예의라고는 방금 마신 저 차에 같이 담아 잘 삼킨 듯한 플란츠의 낮은 목소리를 들은 나르잔이 다시 칼리안을 쳐다봤다. “브리지트 숲. 프레이야 왕비가 그 곳 출신인 것을.” 칼리안의 미간이 조금 더 찌푸려졌다. < 제46장. 왕자다(5) > 음. 그러니까. “출생의 비밀, 뭐 이런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혼잣말인듯 중얼거린 칼리안이 잠시 플란츠를 쳐다봤다. 형님 너 혹시 아는 것 있냐는 얼굴을 본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기사 플란츠가 뭔가를 알 정도였다면 칼리안도 알고 있었어야 했는데, 기억을 뒤져도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베른일 적에 키리에의 말을 떠올리며 잠시 숲을 찾아갔던 일 말고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숲 속의 엘프 마을은 물론 엘프 그림자도 못 본 채 돌아나왔던 기억만 났다. “들어본 적 없는 얘기야. 내 어머니가 하프엘프였어?” “하프엘프는 아니다. 왕비 프레이야는 엘프와 엘프 사이에서 태어났으니까." “말이 좀 이상한데. 엘프와 엘프 사이에서 태어났다면 엘프인거지 설명을 왜 그렇게······.” 톡, 톡, 톡. 말을 멈춘 칼리안의 손 끝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나르잔이 의미심장한 눈을 한 채 칼리안에게 시선을 맞춰오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까닭이다. 정확히는 프레이야를 꼭 닮은 빨간 눈을 보고 있었다. 잠시 프레이야의 초상화를 떠올려보던 칼리안이 다시 나르잔을 쳐다봤다. 아무리 르메인이 르메인이라지만 잘린 귀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막눈은 아니다. 르메인이 감춰주려 한들 그 좁은 왕궁 안에서 잘린 귀를 숨기는 것은 어렵다. 불가능하다. 그렇다는건. “설마······.” “엘프들이 가진 외형적인 특징은 아무것도 지니지 못했던데다 성장 속도는 인간과 같았다 했지.” 엘프와 엘프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뾰족한 귀를 가지지 못하고 태어나 인간과 같은 속도로 자란 프레이야. 시스파니안 외에는 지닌 이 없던 빨간 눈을 하고 태어난 프레이야. 그래서. “그래서 추방되었네. 인간의 몸과 용의 눈을 지니고 태어난 돌연변이 엘프였기 때문에.” “형편없는 짓을 했군.” 플란츠의 목소리가 들렸고 테이블을 두드리던 소리가 멈췄다. 형님 너도 내 눈 가지고 뭐라 했던 거 나 죽을 때까지 안 까먹을건데 왜 형님이 쟤들 욕하냐, 하는 얼굴로 플란츠를 한 번 쳐다본 칼리안이 나르잔을 쳐다봤다.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내 전대 대장로의 문제였지. 그 전이나 지금은 그런 이유로 동족을 내치지 않으니까.” “전대 대장로라는 그 엘프는 어디 있어.” “그 일을 포함한 다른 여러 문제들을 일으켜서 가장 강한 형벌을 받았네.” 엘프들 사이에도 규율이 있다. 저들이 말하는 가장 강한 형벌이란, 물론 처형이다. 처형된 엘프는 어머니 나무에게 돌아가지 못한다. 때문에 어머니 나무가 삶의 근원인 저들에게 있어 처형이란 인간들의 사형과는 궤를 달리하는 강력한 형벌이라는 것을 칼리안도 알았다. “내 어머니에 대해 다른 아는 것은 더 없어?” “거기까지만 알고 있네.” 손도 대지 않은 오디 잼을 괜스레 한 번 뒤적이며 생각을 정리한 칼리안이 식기를 내려놓고 나르잔을 쳐다봤다. “그래. 알았어.” 칼리안이 얌전히 넘어가자 오히려 나르잔이 이상하다는 듯 칼리안을 쳐다봤다. 플란츠는 그런 반응일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하게 차만 한 입 더 마셨다. “또 화를 내거나 한 마디 쓴 소리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미 벌 받은 놈 원망해봐야 나만 피곤하지. 여기서 추방됐다고 해서 내 어머니가 꼭 불행했으리라고도 생각 안 해.” 실리케가 그러지 않았던가. 프레이야가 칼리안을 낳은 뒤 좋아했다고. 그것이 모정이었든, 실리케와 마찬가지로 권력에 대한 욕망이었든,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 르메인에 대한 애정이었든, 혹은 또 다른 무언가든. 프레이야는 좋아했다고 했다. “만약 여기에서 계속 사셨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는 건 솔직히 의미 없는 망상이고. 그러니 됐어.”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엘프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프레이야에게 잘못을 저지른 이들은 칼리안의 손에 이미 다 죽었다. “원래 하던 얘기나 계속 해.” 이렇게, 프레이야에 대한 이야기를 끝낸 칼리안이 포도주스를 한 입 마신 뒤 내려놓으며 말했다. “세크리티아에서 브리지트 숲에 추방자들이 살았던 걸 알아내서 대가로 치유사 내놓으라 했다는 건데. 궁금한 게 있어. 너희들은 왜 세크리티아에 ‘대가’를 치르지 않았는지.” 나르잔이 대답할 말을 생각하는 사이 칼리안의 질문이 이어졌다. “엘프들은 대가 없는 도움은 절대 안 받잖아. 그런데 카이리스도 아닌 세크리티아 숲에 사는 것에 대해 왜 세크리티아 쪽으로는 아무 것도 지불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 내 어머니가 거기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곳의 존재를 모르던 것도 아닌 듯 한데.” “그들은 동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아닌가. 그들이 추방된 이유는 왕비 프레이야와는 다르네.” “죄를 짓고 추방된 엘프나 하프엘프들이라서, 모여 사는 곳이 어디인지는 파악해 뒀지만 관리를 하거나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는 소리야?” “그렇지.” 톡, 하고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짧게 두드렸다.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심기가 불편해진 것에 대한 표현이었다. “하프엘프에 대해서까지 그렇게 대하는 건 썩 마음에 드는 처신은 아닌 것 같네.” “계속 줄어드는 종족의 보존을 위해서다. 대장로라 해서 항상 마음에 드는 일만 할 수는 없으니까.” “어차피 무시하고 산 이들이면 굳이 대장로 당신이 대가를 지불할 필요는 없잖아.” “일이 틀어지면 그 곳의 엘프들을 전부 처형하겠다 하더군. 그들이 그곳에서 처형되는 것은 막고 싶네.” “완전한 동족은 아니라서 지금까지는 어디서 어떻게 살든 무시해왔지만 처형되는 건 싫다는 소리네.” 나르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엘프들의 사고방식은 도무지 공감이 어렵다. 대체 이게 무슨 2년 전 르메인이나 할 법한 말이란 말인가. 고개를 돌리니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칼리안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문득, 오래 전 귀족 회의 때 플란츠가 비웃음 소리를 낸 일이 생각났다. 그러지 말라는 얘기를 했던가 안했던가를 잠시 생각하던 칼리안의 귀에 나르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대장로로서 그들이 이 곳에서 살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나 엘프 나르잔으로서는 그들이 처형되도록 둘 수가 없었네.” 칼리안이 실소했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나 하네.” “그래서 직접 그들의 국왕을 찾아가 다른 방법으로 지불하겠다 말을 했는데 통하지 않더군.” 그랬겠지. 치유사를 부르기 위해서 간신히 찾아낸 꼬투리일텐데 무엇을 준다 한들 통했을 리가. 톡, 톡, 톡, 생각을 하기 위해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한동안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던 칼리안의 손 끝이 멈췄다. 생각을 마쳤다. “여기, 주인 없는 땅이라고 했지.” “그렇네.” “일단 알았어. 생각 좀 해 보고 내일 얘기해.” 다만 칼리안은 결정을 내리는 대신 이렇게만 말을 했다. 쓸데없는 말 안하고 얌전히 잘 앉아있던 낯가리는 플란츠가 그런 칼리안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 * * 자신의 집무실 문을 연 아리안느가 발을 멈칫했다. “······ 깜짝이야.” 이 시간에 이 곳에 있을 리 없을 사람이 있어서였다. 양 팔에 잔뜩 안아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소파로 가 앉은 아리안느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물었다. “저하가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계속 궁에 있더니.” “그냥, 심심해서.” “이상하네. 심심할 리가 없는데, 내 정혼자님이.” “정말로. 오랜만에 시간이 나서 왔어. 일 말고 그냥. 쉬고 싶어서.” 오랜만에 마주한 보라색 눈이 반가운 것을 숨기지 못한 아리안느가 웃어보였다. “그래. 쉬었다가 가.” 곧 코코넛 쿠키 몇 개와 시원한 민트차 한 잔, 그리고 크림 가득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둔 아리안느가 커피 위에 올려진 크림을 휘적휘적 저으며 물었다. “카이리스 후작 죽은 일, 세작 짓 아니지.” 그러더니 ‘혹시 이것도 일 얘기야?’ 라고 물어서 체이스를 웃게 했다. “일 얘기 아닌 걸로 쳐 줄게. 세작 짓 아니야.” 카이리스의 2왕자를 암살하려던 세크리티아 세작이 붙잡힌 일, 세작들에 의해 에반 브리센 후작이 죽고 3왕자가 크게 다친 일. 카이리스에서는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데블란으로 하여금 그 일에 대한 해명과 사과, 해결 방안을 요구했다. 꽤 오래전의 일이었으나 그동안 아리안느와 체이스가 계속 만나질 못했다. 데블란의 눈도 피해야 했고 각자 바쁜 일이 많았던 탓에 이제서야 묻는 중이었다. “칼리안 왕자인데. 새들한테 다칠만큼 약한 사람 아니잖아.” “많이 다쳤대?” “응. 많이 다쳤다고 했는데 지금은 다 나았을 거야.” 그 칼리안이 지금 다 나았을 뿐만 아니라 그 새를 못 참고 가출해서 어머니 나무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까지는 모르는 체이스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 “당신이 걱정 많았겠네.” “걱정도 됐지만 아프다는 말을 처음 한 거라서 안심이 되고. 나는 그랬어, 아리안느.” 그런 체이스를 한참 쳐다보던 아리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체이스의 앞에 놓인 민트차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당신 동생이 그렇게 한 걸음씩 가고 있는데 당신도 그렇게 해야지. 형이잖아. 그러니까 뜸들이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해. 당신 여기 왜 왔는지.” 체이스가 대답 없이 웃었다. 그 웃음이 석연치 않아서 아리안느가 다시 물으려 했을 때,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 어머니, 린 후작.” “응.” “오늘 체포될 거야.” 커피로 가져가려던 아리안느의 손이 잠시 멈췄다. 곧 아리안느가 다시 손을 뻗어 커피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당신이 못 막은거야, 안 막은거야?” “안 막았어.” “그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아리안느가 잔을 내려놨다. 그리고 체이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말해. 후작 대리인이 내일부터 뭘 하면 되는지.” 어머니가 체포되어도 체이스가 어떻게든 목숨만은 구제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기인한 태도임을 알기 때문에, 체이스는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여보인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는 그 높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속이 빈 투명한 나무 속에 엘프들이 층층이 모여 살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어찌 생각하면 퍽 괴이하다. 인간으로 따지면 세렌티의 몸 속에서 살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나. 사방이 크리스털 벽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어머니 나무의 가운데 층에 마련된 정원. 한쪽에 온갖 종류의 식물들이 심겨져 있었고, 창문이라 해야 할지 어머니 나무의 겉껍질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을 벽 너머로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 퐁당······! 정원의 분수대 옆 벤치에 앉은 칼리안이 분수대 속의 인어 조각상을 향해 조그만 오러 덩어리 하나를 던져넣었다. “상관 없지 않나. 하프여도.” 벤치 옆에 서 있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심기가 복잡해서 그런 행동을 한다고 여긴 것이다. “아, 네. 일반적인 사람이나 마찬가지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게 신경쓰이네요. 세크리티아에 계셨던 분이 어쩌다 카이리스까지 와서 왜 하필 전하같은 분을 만났는지.” 이 말을 들은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마치 숨겨온 비밀을 털어놓은 이후 아르센이 한 말을 들은 칼리안과 같은 표정이었다. ‘믿기 어려운 것이 내가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사실이 아니라 네가 형님 밑에서 일했다는 쪽이냐’ 했던 것 말이다. “······ 그래.” 다만 애석하게도 칼리안이 왜 그것에 의문을 가지는지 참 잘 이해하고 있던 탓에, 형제간의 묘한 동질감을 느낀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플란츠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칼리안에게 건넸다. 말도 없이 눈 앞에 불쑥 내밀어진 무언가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안에 든 것을 본 뒤 웃음을 터뜨렸다. 육포였다. “저 루시 아닌데요.” “대신 짖잖아.” 지그프리드령에서 챙겨준 건조 식품에 있던 육포. 생각한대로 손도 안댔는지 시장이 준비해준 모양대로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생각한대로 해. 고민하지 말고.”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여전히 서 있는 플란츠를 올려다봤다. “세크리티아 일. 뒷감당 고민하지 말고 계획한대로 하라고.” “제가 무슨 생각하는 줄은 아십니까.” “뱀을 여기로 부르려는 거잖아. 오면 치료해주겠다는 거짓말로. 주인 없는 땅이니 여기서 뭘 사냥하든 카이리스와는 엮이지 않을 테니까.” “······ 내 형님께서는 어찌나 눈치가 빠르신지.” 칼리안의 짖는 소리는 적당히 넘긴 플란츠가 칼리안의 손에 들린 육포를 가리켜보였다. “아우님은 좋아하시는 고기나 드시라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육포 쳐다보던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정말로 루시 취급을 받는 기분이 든 탓이었다. < 제47장. 제가 덫을 좀 잘 놓습니다(1) > 투명한 벽 너머로 보이는 짙푸른 바다. 새파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 황금빛 가시가 돋은 선인장과 거대한 녹빛의 잎을 가진 나무가 가득한 실내 정원. 그리고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분수. 장담하건대 시스파니안이 바다가 좋다 했으면 하츠아라는 지금 이곳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왕궁을 지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바다까지 영토를 확장시켜서 건국을 했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았다면 북문에 숲 대신 바다를 하나 만들어 놨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애석하게도 눈을 좋아하셨던 고룡 덕에, 칼리안은 이런 멋진 풍경을 열심히 눈에 담아 놓는 수밖에는 없었다. “주시니까 먹기는 하는데······.” 육포 먹으면서. “사실 저는 말린 고기보다는 구운 고기 좋아합니다.” 여전히 벤치에 앉은 채 육포 조각을 오물오물 씹어 삼킨 칼리안의 말에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그러다 그게 지금 그 많던 육포 한 자리에서 다 처먹은 놈이 할 소리인가 싶어서 결국 한 마디를 했다. “이번엔 들킬 일 없겠군.” 숨길 일도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누가 저놈을 하프엘프로 보겠느냐고. 대장로 나르잔이 초대한 오찬에 다녀온지 두 시간도 안 지났다. 대충 봐도 자신의 하루치 식사는 될 법한 육포를 식후 디저트 삼아 먹어치우지만 않았어도 그런 생각은 안했을 거다. 생각한대로 정복은 넉넉한 듯 적당히 잘 맞고 키도 늘 비슷비슷한데 이제 오러도 안 감추면서 도대체 너 먹는 건 다 어디로 가느냐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궁금증을 가까스로 집어넣은 플란츠가 꽤 정상적인 질문을 하나 꺼내들었다. “프레이야 왕비의 핏줄들은 만나 볼 생각 없는 건가.” 프레이야에게 동생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엘프라 했으니 다른 문제가 없었다면 프레이야의 부모 역시 살아 있을 것이 아닌가. “만나봐야죠. 안 그래도 어디에 있는지 대장로에게 물어볼까 했는데 걱정이 되어서 주저했습니다.” “내 아우님께서 주저하는 법도 아시나.” 지금까지 주저함 없이 살았으면 형님 너는 나 바뀐 첫날에 세상에서 없어지셨을텐데요. 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이 된 칼리안이 얌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모르지는 않습니다.” “왜 주저했는데.” “지겹게 들은 얘기 또 들을까봐요. 조금 다를지 몰라도.” 붉은 눈. 온전하지 않은 핏줄. 혼혈. 돌연변이. 지긋지긋하게 들은 말의 가짓수만 늘어날 뿐 아무 의미 없는 만남이 될까봐. “······ 알 수 없지.” “네. 만나기 전에는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하죠. 아무튼 세크리티아의 일에서 눈을 뗄 수 있게 되면, 그때 쯤 찾아서 만나 볼까 합니다.” “그래.” 대답을 한 뒤 칼리안을 지켜보던 플란츠가 남은 육포가 더 있던가 잠시 생각해보다 입을 열었다. “제온. 왜 안물어보는데.” 남은 거 없다. 다른 생각이나 더 하게 해야지. “처음 봤을 때보다는 우호적으로 나오고 있다고는 해도 역시 엘프는 엘프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래도 지금 물어볼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언제.” “그것도 우선 세크리티아 쪽 일 해결한 뒤에요. 제온과 엘프들이 친밀한 관계일 가능성도 있는데, 만약 그런 상황이라 가정했을 때 제가 제온에 관심을 가진 것을 대장로가 알면 세크리티아 일 해결할 때 제대로 돕지 않을 것 같아서요.” 칼리안이 이렇게 이야기를 일단락지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플란츠가 잠시 분수 안의 인어 조각상을 봤다. 그러다 생전 처음 보는 식물 쪽으로 걸어가 손을 뻗었다. 하얀 솜털같은 잔가시가 가득한 넓은 잎을 손 끝으로 건드려보는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바나나 나무인데 형님 그거 처음 보시죠. 그 솜털 가져다 심으면 바나나 됩니다.” “······ 더 짖으라고 준 육포 아닌데.” 안 속았다. 솔직히 잠깐 믿을 뻔 했지만 동생 놈 목소리가 평소와 다른 것 같다 여기다가 책에서 봤던 바나나 나무가 이렇게 안 생겼다는 것을 떠올렸다. 다행이다. 아무튼 거짓말은 진짜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햇빛을 가득 받아 반짝이는 잎을 몇 번 더 쓸어보던 플란츠가, 재밌다는 듯 웃고 있는 칼리안을 쳐다봤다. “거짓말 못하는 건 그런 이유인가.” “아뇨. 원래 못합니다. 하프엘프라서 못하는 것 아니고요. 키리에는 곧잘 합니다.” 왜 이렇게 예쁘게 생겼나 했더니 그건 하프엘프라서 그런 게 맞나보다고 말을 하면 당장 꺼지라고 할 게 뻔해서 그냥 집어넣었다. 그런 말 받아줄 사람은 얀과 앨런밖에 없다는 것을 칼리안도 잘 알았으니까. 더불어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기 전에는 거짓말도 곧잘 하지 않았었느냐는 말 역시 굳이 꺼내지 않은 칼리안이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 레니시타입니다.” 광장의 레니시타. 플란츠가 잠시 잎에서 손을 뗐다. 저 많은 선인장 중에 고르고 골라 손을 댄 것이 왜 하필이면 레니시타인지. 소리 없는 한숨을 쉰 칼리안이 짧은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너무 신기하게 보지는 마세요.” 사실 마법이 있으니 굳이 레니시타 잎을 깔지 않아도 될 텐데 왕실에서는 계속 그런 방법으로 형을 집행했다. 경고의 의미. 즉, 상징성을 유지하여 사람들의 머릿속에 사형에 대한 경각심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레넌 브리센을 위한 레니시타 잎이 광장에 깔렸다. 레넌을 후려쳤던 그 날처럼 팔이 저린 듯한 기분을 느낀 플란츠가, 잠시 양 주먹을 쥐었다 편 뒤 레니시타 잎에 다시 손을 대며 말했다. “이것저것 직접 보라며.” 작은 웃음소리를 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져다 심어 보세요. 바나나 자라나 안 자라나.” “그만 짖고. 물.” “네.” 여전히 플란츠의 말 하나는 참 잘 알아듣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방울 하나를 만들어 레니시타 잎 위에 올려주었다. 주먹만한 물방울이 바닥으로 흘러 떨어지는 대신 순식간에 흡수되며 사라져가는 그 모습이 꼭 모래사장 안으로 스며 없어지던 파도 거품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동안 그것을 쳐다보고 있던 플란츠의 시선이 칼리안을 향했다. “세크리티아에도 있나.” “네. 우리와 같은 용도로 쓰지는 않지만 레니시타는 자랍니다. 돌아다녔을 때 봤어요. 지그프리드령 남쪽에서도 아마 자랄 겁니다.” 고개를 끄덕여보인 플란츠가 어느새 물을 완전히 흡수한 레니시타 잎을 한 번 더 쓸어내렸다. “그래.” 그런 모습에, 칼리안은 어느새 다 아물어 원래의 흉터만 남은 손바닥을 내려다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녹음 가득한 곳에 서 있어도 지지않고 제일 파릇한 연두색을 향해서였다. 머리는 얼마나 좋은지 아직도 가늠이 잘 안되고 정신연령은 아르센과 말싸움 하는 정도에 진짜 나이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다. 그런데 가진 경험은 루시와 안네 수준이다. 그 나이의 베른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차라리 레이븐이 본 것이 더 많을 지경이니 더 말해 무엇할까. 문득, 왕궁을 벗어난 뒤로 계속 발칸의 제복을 입고 있었던 플란츠가 지금껏 한 번도 재킷을 벗거나 셔츠 단추를 풀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형님 왜 숨막혀 하셨는지 알겠네요.” 그래서 흘러나온, 또 뜬금없는 말. 플란츠가 잠시 칼리안을 쳐다보다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참동안 정원을 바라보다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켜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본 칼리안이 대답했다. “파인애플입니다. 가운데 있는 꽃이 커지면서 안에서 파인애플 나와요.” “너 또.” “진짜로요. 파인애플 땅에서 자랍니다.” 아는 건 아는 대로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오랫동안. “이건.” “제가 가덴 지방에 갔을 때 봤던 건데 이름이 기억 안나네요. 아무튼 겉은 초록색이고 속은 분홍색인 열매가 열립니다. 처음은 엄청 단데 끝맛이 텁텁해서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사실 열매보다는 줄기가 좀 특이한데, 껍질 벗기면 나오는 하얀 부분을 상처에 올려두면 지혈도 빨리 되고 상처가 곪는 것도 막아줍니다. 그때 술마시고 절벽에서 굴러내려갔다가 눈 떴더니 온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더라고요. 아, 이런 건 배우지 마시고요.” “······ 알아.” “네.” 꽤 오랫동안 플란츠는 물어보고 칼리안은 대답을 했다. * * * 마법사가 열 명, 기사가 서른 명. 그리고 소드마스터 한 명. 누가 이길지 내기를 했다. 물론 싸움 내기는 아니었다. 비슷한 수로 칼리안과 대련을 했을 때 순식간에 발칸 대원들이 다 드러누웠던 것을 니들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먼저 참지 못하고 숲 밖으로 나가 고기를 먹고 올지를 두고 내기를 했다. “······ 나갔다니.” “점심식사 마련된 테이블 한참 쳐다보다가 잠깐 다녀오겠다며 도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부군단장님.” 그리고 시오나가 졌다. 물론 엘프가 맞다. 시오나의 나이는 서른 여덟. 인간 수명의 세 배 정도를 사는 엘프다. 그렇다 해서 정신연령까지 세 배 느리게 자라는 것도 아니고, 청년기의 성장이 가장 느린 까닭인지 몰라도 지금의 외모는 20대 후반 쯤으로 보인다. 아무튼 철이 없을 나이는 절대 아니다. 그런데 나갔단다. 이곳에 온 지 고작 사흘째 되던 날 오후의 일이었다. “하.” 왕궁에서 나온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하루하루가 긴지. 그새 참 많이 자랐을 안네와 여전히 예쁠 루시가 정말 보고싶어진 플란츠가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원들은.” “모두 여기 있습니다. 힐 경 혼자 나갔습니다, 부군단장님.” 이 말에 플란츠가 미간의 주름을 하나 더 늘리며 입을 열었다. “오렌지 머리 마법사 어딨는데.” “오렌지 머리 마법사 말씀이십니까?” “케인 테스만. 어딨냐고. 여기 지금 서른 아홉 명 밖에 없잖아.” 그럴 리가 없다는 눈으로 대원들을 살피던 니들렌의 얼굴이 조금씩 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세어 봐도 한 놈이 모자랐다. “크리스털에 불 지르는 법 알 것 같다면서 방금 전에 나갔습니다, 부군단장님.” 그리고 다른 대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 아.” 잠시 이마를 짚고 있던 플란츠가 니들렌을 향해 낮은 목소리를 냈다. “잡아와.” “네, 바로 잡아오겠습니다.” 소금 넣은 것 먹는 분홍 머리 마법사가 재빨리 대답한 뒤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칼리안의 웃음이 또 터졌다. 모래사장 위를 하염없이 뛰고 있는 분홍 머리 마법사와 오렌지 머리 마법사를 보면서 한참을 웃어댔다. 체력단련이라는 명목을 가진 기합이었다. - 그래도 어머니 나무에 정말 불을 붙일 생각은 아니었다 하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칼리안 왕자. 이 말을 들은 칼리안이 또 웃었다. 플란츠가 해맑게 웃는 모습을 참 오랜만에 봤다. 그게 너무 웃겨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 네. 크리스털 잔을 가지러 나간 정도여서 다행입니다. 외부의 마법사들보다는 제어가 된다지만 무엇이든 당장 확인을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 성격까지는 붙들기가 쉽지 않네요. - 왕궁 밖에서 마법사들을 그 정도로 관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겁니다. 플란츠 왕자가 그래도 제 몫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요. 마법사들 성향이 참 다채롭지 않습니까. 두 마법사 옆에서 함께 달리고 있는 파릇파릇한 머리를 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홍색, 오렌지색, 한 다섯 겹 떼고 남은 양배추 색. - 네······ 다채롭네요. 무지개 윗부분 같기도 하고. 좀······ 마카롱 같기도 하고. - 안그래도 연락을 하려 했는데 때마침 칼리안 왕자가 먼저 연락을 했으니 신기한 일입니다. 알록달록한 색채의 향연을 잠시 보고 있으려니 체이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무슨 일이 있습니까? - 조금 전에 린 후작이 체포됐습니다. 아리안느의 어머니임을 바로 알아들은 칼리안이 침음을 냈다. - 혹시 린 후작의 사병 때문입니까. -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 아리안느가 후작의 대리인이 되면 체이스 왕세자께서 후작의 사병을 보다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거기에 더해 후작 이상은 왕궁에서 머무를 수가 있으니 아리안느를 왕궁 안에서 보호하실 수도 있을 테고요. - 아. 두 가지 이유를 칼리안 왕자가 그렇게 바로 알아내버리면 나는 조금 불안한데. 깊은 숲 속에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같은, 체이스의 목소리.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던 칼리안이 잔잔하게 웃었다. - 세크리티아 국왕도 눈치를 챌까 불안하십니까. -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 어차피 세크리티아 국왕을 유인할 미끼일테니 눈치를 채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이 말을 들은 체이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린 후작을 체포하고 후작의 사병을 포함한 모든 권한을 아리안느가 잠시 휘두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체이스는 아리안느를 왕궁으로 불러와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이런 의도 아래, 린 후작이 체포되는 것을 체이스가 묵인했음을 데블란이 눈치채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칼리안이 바로 눈치챘다. - 대외적으로 세크리티아의 국왕은 체이스 왕세자님을 더없이 아끼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앨런이 데블란을 두고 조금 엄하지만 르메인보다는 나은 사람이라 평했을 만큼, 대외적으로 데블란은 체이스를 참 잘 대해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체이스가 데블란을 직접 끌어내린다면 귀족들이 할 생각은 한 가지다. ‘그저 온화한 성정이라 알려져 있던 체이스가 알고보니 아비보다 더 냉혈한 자였구나’ 라고 말이다. 안 그래도 데블란의 폭정으로 인해 숨죽이고 있는 귀족들이 그런 체이스의 즉위를 환영할 리 없지 않은가. 전왕이 사망하고 새 왕이 즉위하는 시기에 아예 왕가의 핏줄을 새로 세우려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 그러니 보여줘야죠.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사실 체이스 왕세자님을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지, 숨김없이 드러내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데블란이 체이스를 아들이 아닌 ‘경쟁자’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귀족들에게도 들키게끔. 데블란의 칼 아래 몰래몰래 손 잡고 있던 귀족들이, 마지막 희망처럼 여기고 있던 체이스마저 데블란에게 희생된 이후의 암울한 미래를 상상하도록. 그리하여 그들이 조금 더 과감하게 체이스 쪽으로 손을 뻗어 지금의 체이스가 가지지 못한 명분과 검을 직접 만들어 쥐여주도록 하기 위한 첫 번째 계획이었다. - 네. 맞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치유사를 계속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카이리스의 국왕으로부터 질책 가득한 메시지까지 전달받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쯤이면 아버지의 마음이 많이 조급할 것 같아서, 텐실 치유사의 유입을 막고 있던 린 후작이 체포되는 것을 일단 묵인했습니다. - 이 쪽에서는 세크리티아 국왕을 엘프들의 도시로 불러낼 생각입니다. 그리 의심 많은 분이니 절대로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지만 우선 대응하는 것을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체이스가 대답 대신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카이리스의 왕궁에 보내 둔 전서구를 통해 전달된 짧은 편지였다. ‘귀족들을 등에 업을 생각이라는 걸 알아. 당신 정혼자 쪽 세력을 눈가리개로 두리라는 것도 알아. 그 이후에 어떻게 할 계획인지 나한테 알려줬으면 하는데.’ 숨기는 내용 하나 없이 적어내려간 문장. 한 끗 흐트러짐 없이 정갈하고 힘있는 칼리안의 글씨와 달리 흘려쓰는 듯하지만 유려한 가는 필기체. 언젠가도 한 번 받아보았던 플란츠의 편지였다. -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무리하고 있지 않으니 걱정 말아요, 칼리안 왕자. 이렇게 대답한 체이스의 손이 서신을 들춰냈다. 함께 동봉되어 있던 반지를 보던 체이스가 부드럽게 웃는 사이, 칼리안의 말이 들렸다. - 세크리티아의 국왕은 제 손으로 거둬내야 할 유령이기도 합니다. 필요한 도움이 있으면 꼭 얘기해주십시오. 무엇이든지요. - 알겠습니다. 이곳에 오는 내내 소매 한 번 걷지 않은 플란츠의 손목에 뭐가 있는지, 카이리스 왕궁에서 참 잘 지내고 있는 전서구가 보낸 매가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에게 무엇을 전달했는지 꿈에도 모를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야말로 새빨간 태양이 푸른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붉음과 푸름의 사이에 놓인 하늘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석양의 빛을 받아 함께 황금빛을 띠게 된 눈을 깜빡인 칼리안이 말을 더했다. - 지금 이곳에서는 해가 지는 것이 보입니다. 세크리티아의 그 작은 바다에서 해 뜨는 것을 보던 게 참 좋았는데 여기에서는 해가 뜨지 않아 조금 아쉽네요. - 순간순간을 본다면 떠오르는 해와 저무는 해가 서로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 둘 모두 한 순간 한 순간 참 아름답지만 그래도 기분이 조금 다른 것은 어쩔 수가 없으니까요. - 그럼 언젠가 이곳에 오게 되는 날. 그날에 보면 되겠네요. 칼리안 왕자. 칼리안은 지쳐 널브러진 오렌지 색 머리와 분홍색 머리 마법사, 그리고 그 곁에 선 채 둘을 채근하는 형을 보다 다시 드넓은 바다를 봤다. - 즉위식에, 가겠습니다. 떠오르는 해도 볼 겸. 그 바다에 이제는 발도 좀 담가 볼 겸. 보고싶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해 볼 겸. 안전이고 정세고 자리싸움이고 뭐고 다 필요없이 그것만은 꼭 하고 싶어서. - 형님. 욕심을 하나 더 부렸다. 그 후로 한참동안. 한참동안 체이스는 아무 말을 전해오지 않았다. - ······ 기다리고 있으마. 그리고 이렇게 대답을 했다. 정말 한참만에. < 제47장. 제가 덫을 좀 잘 놓습니다(2) > 붉은색이 세상에 내려앉는 시간. 온 사방에 가득한 석양 빛에 물든 체이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로 왕성의 문 앞에 서 있었다. “무탈히 다녀오신 듯 보여 마음이 놓입니다.” “내가 괜한 고집을 부려서 세자의 걱정을 더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반겨하는 체이스의 말에 대답을 전한 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검은 실크 드레스의 긴 소매 끝이 살며시 흔들린다. 체이스가 그 손을 마주 잡아 안으로 이끌자, 검은색의 레이스와 꽃 장식이 더해진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곧 두 사람은 따르던 이들을 멀찍이 물리고 왕궁까지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넓게 꾸며진 화원에서 풍겨오는 향기와 아름다운 분수에서 들려오는 물 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대신하고 있었다. “마음은 조금 나아지셨습니까.” 향기로운 바람인듯, 혹은 흘러내리는 물줄기인듯. 이 순간의 고요함을 담은 체이스의 목소리. 그런 소리가 실어온 물음에, 머리 장식과 이어진 검은 베일에 가려져 있던 하늘색 눈이 바닥을 향했다. “나아졌다 해야 할지, 더 깊어졌다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 그 말과 함께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체이스가 고개를 돌려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전히 그렇게 그리우십니까.” “이 왕궁에 마음 터놓을 이라고는 한 분 뿐이었던 것을요. 그리 갑자기 떠나셨으니 몇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나는 이렇게나 생각이 납니다.” “어머님께서는 좋아하셨을 겁니다. 어머니께서 이렇게 잊지 않고 계시니 말입니다.” 사망한 왕비 디에나의 무덤이 있는 곳에 마련된 별장에서 한 달을 보내고 온 후궁 루이즈가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체이스가 맞잡고 있던 루이즈의 손을 풀어 자신의 팔 위에 얹었다. 그렇게 조금 더 어머니를 가깝게 당긴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떠난 분에게 있어 기억해주는 이가 있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베른의 어머니 왕비 디에나. 그리고 체이스의 어머니 후궁 루이즈. 과거, 베른과 체이스에게 있어 둘은 똑같은 어머니였다. 둘에게 있어 형제는 똑같은 아들이었다. 두 어머니는 형제 사이가 왕위로 인해 틀어지지 않도록 키웠고 형제는 그 뜻대로 자랐다. 디에나가 죽기 전 루이즈에게 베른을 부탁했을 만큼 서로의 친분과 신뢰도 깊었다. 이번 생에서는 베른이 없었으나 둘의 관계는 같았다. 베른 대신 체이스 하나만 아들로 두었던 디에나가 사망한 뒤, 루이즈는 때때로 이렇게 디에나 곁의 별장에 다녀오곤 했다. “그러니 어머님께서도 분명 기뻐하셨을 겁니다.” “부디 전해진다면 좋겠습니다.” 체이스의 청은발이 그러하듯 루이즈의 백금발도 석양 빛에 붉게 물들었다. 붉은 빛이 감도는 머리카락과 검은 드레스를 말 없이 바라보던 체이스를 향해 루이즈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에 린 후작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었다기에는 생각 외로 왕궁이 조용하군요. 혹여 내가 잘못된 말을 들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체포된 것이 맞습니다. 소란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주어 그렇습니다.” “고된 일은 겪지 않도록 신경을 써 주세요. 아리안느의 걱정이 클까 우려되니.” “그리 하겠습니다.” 대화가 오간 뒤 잠시 발을 멈춘 루이즈가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팔짱을 끼고 있던 체이스도 자연스레 함께 그 길을 따랐다. 태양의 색을 담은 붉은 베고니아가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었다. 체이스의 팔에 얹어두었던 손을 빼고 무릎을 굽힌 루이즈가, 꽃무리 위를 손으로 쓸어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여전하십니까.” 한동안 말 없던 체이스가 눈을 내리뜨며 대답했다. “네. 여전합니다. 병세의 차도도 없고 진전도 없습니다.” “지난 번에는 세자가 보낸 약을 물리셨다 들었습니다. 이번에 왕궁을 떠나기 전에는 내가 늘 준비해드리던 수면향도 더는 올리지 말라 하셨는데······. 병환이 그대로라면 이제는 주위를 더 못미더워 하시겠군요.” “그러니 이제 되도록 독대는 피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도 더 이상 좋은 모습만 보이시려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루이즈가 조금 더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꽃을 향한 시선과 손길을 그대로 둔 채였다. “린 후작이 잡혔다면 텐실의 치유사가 찾아올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네. 전하께서 그 쪽의 일에 가장 먼저 손을 대려 하실 테니까요.” 체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루이즈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 역시 치유사들이 들어오려는 것을 암암리에 방해하던 일을 중단할 생각입니다.” “치유사를 왕궁에 들이겠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어머니. 명확한 입장을 보이고 귀족들의 앞에서 공론화시킬 생각입니다. 전하께서 왜 계속 텐실의 치유사를 세크리티아의 영토에 들이려 하는지, 모든 귀족이 있는 곳에서 묻고 답을 요구할까 합니다.” 루이즈의 손이 잠시 멈췄다. “······ 그러지 말아요.” 몸을 일으켜 세운 루이즈가 체이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물 위로 꺼내려다 세자가 다칠까 우려됩니다.” “그래야 귀족들도 알지 않겠습니까. 전하의 건강 상태와 전하께서 저를 아들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모두가 아는 일입니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귀로 전해듣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다릅니다. 소문으로만 들려오던 일들을 확신하게 되어야 귀족들도 고개를 들 겁니다.” 루이즈가 가만히 손을 뻗어 체이스의 뺨에 가져다 댔다. 한동안 그렇게 체이스의 찬 얼굴을 따스하게 매만지던 루이즈가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체이스의 손을 다시 잡으며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꺼냈다. “이 왕궁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아 내 어머니와 동생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왕비님도 세상을 등지셨으니 이제 남은 내 가족은 세자 뿐입니다.” “······ 알고 있습니다.” “부디 조심하세요.” 체이스가 조용히 팔을 뻗어 루이즈를 꼭 안았다. 그리고 작은 등을 천천히 토닥이면서 대답을 전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베고니아 향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 * *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능했다. 속내를 완전히 꿰뚫어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생각을 파악하고 다루는 것을 잘했다. 찍어 눌러야 할 상대인지 아니면 존중하거나 배려해야 할 상대인지에 따라 말하는 방법도, 표정과 눈빛도, 목소리도,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졌다. 칼리안은 늘 그랬다. 누구를 앞에 두었든 상관없이 항상 여유를 잃지 않았다. “별 것 없습니다.” 가끔 그 여유를 완전히 까먹게 만드는 파릇파릇한 한 명이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그 한 명을 앞에 두고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마법을 쓸 때에는 얍 하면 슉 하고 발현되고요.” 쏟아질 듯 모여있는 푸른 은빛의 별무리를 올려다보던 칼리안이 유난히 느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 “마력을 불어넣을 때에는 얍 하면 슝 하고 들어갑니다.” “······ 야.” 너 이 내 동생 새끼야. 이것과 같은 뜻의 한 글자를 입에 담은 플란츠가 대답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칼리안을 내려다봤다. “형님 또 뭐하시려는 건데요.” “어차피 눈치 챘으면 그냥 가르쳐달라고 하는 거잖아.” “형님.” “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플란츠의 손목 언저리를 가리켜보였다. “눈치를 챈 건 챈 거고 직접 설명을 좀 해주십사 말씀드리는 것 아닙니까. 그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그게 왜 형님 손목에도 있는지.” “반말.” “뭡니까, 그거.” “말버릇.” “대답. 이요, 형님.” 걸렸다. 아이고 여기 왕자님이신 부군단장님이 사람 잡는다 하는 얼굴로 더는 못 달리겠다 드러누운 두 마법사를 결국 더 어쩌지 못하고, 됐으니 가서 놀아라 했다. 그 뒤에는 먼저 돌아가려 발을 옮겼다. 점심나절에 먹은 육포가 뱃속에서 불어 터져서 저녁은 그냥 건너뛰고 모래사장에 한가로이 앉아있던 동생 곁을 지나쳐 갈 때. 그래. 그 때. 딱 그 때. 하필 그 때. 소매 속에 숨겨 두었던 팔찌가 빛을 발했다. 체이스가 말을 건 것이다. 하필, 딱, 그 때. 마나의 흐름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칼리안의 눈에 참으로 익숙한 빛이 플란츠의 소매 밖으로 새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덕분에 걸렸다. “밖으로 나오니 더는 답답해하지 않으시는 것까지는 이해했는데 소매 걷던 버릇까지 고치신 것이 신기하다 생각했더니.” 자신의 목 언저리에 잘 채워진 셔츠 단추를 톡 건드려보인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건 다른 이유가 있었네요.” 팔찌를 맴돌던 빛이 금세 사라졌다. 다급한 연락이 아니라는 소리다. 플란츠가 곧바로 답을 하지 않으니 연락 보내기를 멈췄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지금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설명을 요구하고는 있다지만 어차피 저 팔찌와 연결된 반지를 누가 가지고 있을지 뻔한 일이 아닌가. 애초에 급한 일이었다면 플란츠가 아닌 칼리안에게 연락을 취했을 사람임을 칼리안이 안다. 그래서 칼리안은 느긋하게 플란츠를 상대하고 있었다. “마나 모으는 것은 이제 조금씩 하고 계시니까 직접 해보시면 되겠네요. 방법은 알려드렸으니까요.” 얍 하면 슝, 하고요. 여전히 생글거리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칼리안을 향해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짖지 말고.” “대체 이건 언제 만드셨어요. 여기로 출발하던 날에 보내신 겁니까.” 아무튼 들키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저 놈이나 저 놈의 옛날 형님 덕분에 나까지 들켰다. 짜증 가득한 얼굴이 된 플란츠가 칼리안의 말을 무시하며 한 발을 옮겼다. “소금 넣은 것 먹는 분홍 머리 마법사한테 옆 나라 왕세자와 연락 취할 테니 마력 넣는 방법 알려달라 하면 참 좋은 말 나오겠군.” “형님.” “왜.” 분홍 머리 마법사가 소금 넣은 것을 먹든 말든. 그건 모르겠고 일단 니들렌이 그걸 알면 안 될 것 같다. 때문에 플란츠를 불러세운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알려드릴게요.” 져주는거다. 지는 거 아니고 져주는거다. 도와주겠다고 했고 도와달라고도 했었으니까 내가 져주는거다. “대신 세크리티아의 일에 대해 저한테 숨기는 것은 없었으면 하는데, 어려우시겠습니까.” “······ 알았어.” 곧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맞은편을 가리켜보였고 플란츠가 그 곳에 앉았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먼저 양해를 구한 칼리안이 플란츠의 팔찌에 손 끝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플란츠가 궁금해했던 것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언젠가 느낀 것처럼 따스한 바람같은 칼리안의 마력이 플란츠의 팔 주변을 감쌌다. 마력을 모아 둔 곳에서부터 어떻게 마력을 이동시켜 물건에 힘을 불어넣는지, 말을 이어가는 순서에 따라 칼리안의 마력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동안 이어진 설명을 마친 칼리안이 손을 떼며 말을 맺었다. “혼자 하기 어려우시면 얘기해주세요. 도와드리겠습니다.” “알았어.” 이렇게 대답한 플란츠가 잠시 칼리안의 눈을 들여다보다 입을 열었다. “검을 쓸 때와 다른데. 같은 마력이라며.” 플란츠의 눈이 칼리안의 손 끝을 향했다. 의미를 이해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같은 마력으로 마법도 쓰고 오러도 쓰는데 기운이 조금 다릅니다. 아마 마법과 오러를 배울 때의 제가 서로 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만 정확히는 저도 모르겠네요.” 옛칼리안의 마법. 그리고 베른의 오러. 마법을 쓸 때에는 지금의 칼리안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따스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오러는 옛칼리안의 것을 베른의 방식대로 전부 바꾼 탓에 검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 기운만으로도 이미 냉혹한 칼날과 같았다. 둘의 차이가 극명했다. “그래.” “마법 배우시는 건 재미있습니까.” 문득 칼리안이 이런 질문을 했고 고개를 들어올린 플란츠가 대답했다. “별로.” “그럼 고양이 털 떼는 마법 말고 다른 것은 더 안 배우실 겁니까.” “안 배워.” “왜 안 배우실 건지 여쭤봐도 됩니까.” “그럴 필요 없어진 것 같아서.”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를 쳐다보다 이내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얼굴이 됐다. 생각이 난 탓이다. 저 파릇파릇한 형님이 마법을 왜 배우겠다 했었는지. “그럼 검은 계속 배우실 생각이십니까.” “······ 소공작이 그러던데. 검은 무겁다고.” 많은 것을 책임지게 하는 무게감. 결국 플란츠를 발붙이게 한 그 무게가 마음에 든다는 소리일 터였다. 이제 칼리안도 땅에 발을 잘 붙인 것 같으니 굳이 배울 필요 없는 마법은 더 관심가지지 않겠지만 검은 계속 배우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네. 그럼 고양이 털 떼는 것까지만 알려드리고 제가 계속 검 가르쳐 드릴게요.” “알았어.” 그 어떤 바람이 불어도 계속 걸을 수 있도록. 많은 것을 책임지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푸른 은빛의 만화경 속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빛나는 하늘. 별빛 쏟아지는 어두운 밤. - 딸랑. 대화도 마치고 가르쳐주는 것도 마친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모래사장 끝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숲에서 사냥한 야생 닭고기 혼자 잘 구워먹고 돌아온 시오나가 특유의 가벼운 걸음걸이로 둘에게 다가왔다. “대장로가 지금 좀 와달라고 하던데.” 그러더니 대장로의 말을 칼리안에게 전했다. 하다못해 니들렌이나 기사도 아닌 시오나를 통해서, 안 그래도 내일 다시 만나 협상을 마무리 짓기로 했는데 왜 하필 이 시간에 칼리안을 다시 부르는지. “지금?” 그런 의문들이 가득한 칼리안의 얼굴을 보며 시오나가 설명을 더했다. “어머니 나무가 널 보시겠다 했다고.” 플란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발칸의 대원이 아닌 ‘엘프’ 시오나가 말을 전해야 했는지를 이해한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나무라서 호기심이 적으신가 했는데. 좀 늦는 거였네.” 시스파니안조차 현신하게 만들었던 참 특이한 체질의 왕자가 멀리 보이는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 엘프 아니야.” 엘프도 아닐 뿐더러 뒤끝도 있는 사람이라서. “내일 아침에. 갈게.” 시키는대로 안 할 거라고 대답을 했다. 시오나가 재밌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제47장. 제가 덫을 좀 잘 놓습니다(3) > 나의 비좁은 세상 속에서 오롯이 나 홀로 미치지 않았다. 지극히, 정말 지극히 객관적인 잣대를 두고 따져본 뒤 내린 결론에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 내기.” “네, 부군단장님. 어제 힐 경이 졌던 그 내기입니다.” “내기에 내 아우님을 걸었다는 건데.” 플란츠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변명이다. 그 다음으로 싫어하는 것이 회피다. 그러니 지금 와서 무엇이든 입을 열면 플란츠가 또 해맑게 웃을 것이 뻔해서 발칸의 대원들은 일단 모두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 언제나 괴로운 것은 늘 중간관리자인지라. 한 발 나선 니들렌이 입 다문 대원들의 마음을 플란츠에게 전했다. “죄송합니다, 부군단장님.” 시오나와 발칸 대원들 중에 누가 더 고기 먹는 것을 오래 참을지를 두고 내기를 했었다. 시오나가 지면 대사막의 늑대들이 어떻게 싸우는지를 가르쳐주기로 했단다. 그래. 거기까지는 괜찮다. 시오나가 이겼을 때 칼리안과 시오나의 대련을 부탁해 주겠노라 약속만 안했다면 진짜 괜찮을 뻔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오나가 제안하고 발칸의 대원들이 수락한 내기라지만 어찌됐건 발칸의 대원들이 3왕자인 내 동생을 팔았단다. 소드마스터간의 대련은 쉬이 이뤄지기 어렵다. 실전이 아니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이 없지 않느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니다. 테일란과 대련했던 슬레이만은 가슴팍이 갈라졌었다. “여기가 왕궁도 아니고. 책임질 목숨을 마흔 한 개나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내 아우님이 저 닭 잡아먹는 엘프와 다시 대련하려 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 그런데 그것을 내기로 건 것이다. 이 일을 칼리안이 알았을 때 보일 반응은 딱 두 가지다. 재밌다고 웃으면서 칼을 들거나 재밌다고 웃으면서 다 죽이려 들거나. 뭐, 결과는 비슷할 거다. 그걸 모를 발칸이 아니다. “왜 그랬냐고.” “내기에서 누가 이길지가 너무 궁금해서 내기를 받았습니다.” “······ 그런 이유로.” “정말입니다, 부군단장님.” 정말이라고 말 안해도 그게 정말이라는 것을 알아서 내가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 “정신 나갔지.” 이 말을 들은 니들렌이 살짝 웃었다. 다 미쳤다. 마법사들 미친 것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 기사들까지 물이 들었다. 미친놈들 한 가운데에 홀로 우뚝 선 플란츠가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렸다. 바로 어제 인내심 세 번을 한꺼번에 쓴 것을 기억한 덕에 오늘은 일단 넘겼다. 발칸 놈들은 원래 저런 놈들임을 알았기 때문에 인내심 한 번을 쓸 것도 없이 그냥 넘겼다. - 저런. 그새 들켰습니까. 어쩌다가. 잊는 것도 모르는 똑똑한 머릿속에 자꾸 얍이니 슉이니 하는 말이 떠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해가며 정말 힘들게 마력 불어넣기를 성공했다. 그랬더니 통신 연결이 잘 되는지 확인차 연락을 했었다던 새 좋아하는 보라색 눈 왕세자가 저딴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되어서, 아침부터 안그래도 이미 인내심 한 번을 썼다. - 조금 더 조심을 했다면 좋았을텐데요. 플란츠 왕자. 아니. 두 번을 썼다. “여하간 너무 화내지는 말지. 어쨌든 내가 졌으니 상관 없지 않겠나. 그나저나 네 동생과 대원들이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나보군.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네 동생을 팔기에 퍽 친한 줄 알았더니.” 체이스의 말을 떠올리고 있던 중 닭 잡아먹는 엘프가 옆에서 전해 온 말에, 저도 모르게 인내심 한 번이 더 깎인 플란츠의 눈매가 바뀌었다. “체력단련하러 가자!” 어제 보았던 웃음을 또 본 니들렌이 재빨리 말했고 너나 할 것 없이 모래사장이 있는 곳을 향해 후다닥 뛰어나갔다. 플란츠가 저럴 땐 먼저 나가서 매를 맞는 것이 제일 낫다는 것을 다들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래지 않아 어제는 세 명이 달리던 모래사장에서 새하얀 옷 입은 마흔 명의 군인들이 달리기를 시작했다. 멀찍이서 그 훈훈한 모습을 보던 시오나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혹시 나도 뛰어야 하나.” “······ 시끄러.”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한 플란츠가 제자리에 선 채 발칸의 대원들을 지켜봤다. 그러다 무언가 궁금한 것이 생겼다는 듯 플란츠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제는 너도 같이 뛰었다더니 오늘은 가지 않는군.” “내 아우님이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몰라서.” “무슨 짓을 저지른다니?” 칼리안이 혼자 어머니 나무를 만나러 갔다. “칼부림. 폭발.” 어머니 나무도 결국은 엘프 아닌가. 칼리안 속을 어떻게 긁어놓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칼리안이 어머니 나무 속을 어떻게 부숴버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발칸 대원들에게 벌을 주면서도 같이 뛰지는 않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 아. 그래.” 놀랍게도 플란츠의 말을 이해한 시오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멀리서 열심히 달리고 있는 이들을 똑같이 쳐다보며 말했다. “사고방식의 차이다. 인간들은 살아가지만 엘프들은 생존해야 하니까. 네 동생이 겪었다던 그 장로같이 어긋난 놈들도 있지만 대부분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인간들에게는 그것이 이기적인 모습으로 보이겠지.” 이 말을 들은 플란츠가 시오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치료 못받아서 화내지 않았던가.” “아는 것과 이해하는 건 다른 문제 아닌가.” 엘프의 이기심을 이해한다는 듯 말해놓고 결국 칼리안을 만나 화풀이를 했던 엘프가 멋쩍게 웃었다. “닭 먹는 엘프.” 그리고 플란츠가 이렇게 시오나를 불렀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시오나가 자신을 가리켜보이며 대답했다. “나 말인가?” “또 있나.” “시오나 힐.” “알아.” “어, 그래. 다행이군.” 풀 잘 먹고 콩도 먹는다지만 그래서 저런 성격인 건 아닌 것 같은 이상한 왕자가 입을 열었다. “만나본 적 있나.” “누구를?” “너희들의 어머니.” “아니. 없는데.”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 더 궁금한 것도 없다는 뜻이었으나 시오나가 굳이 입을 열어 설명을 더했다. “간혹 정령이 깨어난다는 시간에 태어나는 엘프들이 있다. 그런 엘프들은 어머니 나무를 직접 만나 긴 이름을 받는다 하더군.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엘프들은 장로 정도가 된다면 모를까 사는 동안 어머니 나무를 만날 일이 없지.” “그래.” “듣기로 어머니 나무는 많은 것을 꿰뚫어보고 계신다 하니 네가 걱정할 일은 생기지 않을 거다.” “······ 모를텐데.” 그 놈 속을 온전히 알아볼 이가 있기는 할까. 이런 생각에, 플란츠가 한 쪽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대원들 그만 뛰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무슨 일 생길지 몰라 대기중이면 체력도 아껴둬야지.” “그 정도는 소금 넣은 것 먹는 분홍 머리 마법사가 알아서 해.” 그 웃긴 호칭을 들은 시오나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사람을 왜 그렇게 부르는지 물어봐도 되나.” “분홍 머리 마법사가 둘이라서.” “이름이 있는데, 왜 굳이.” 다른 이들은 차마 묻지 못했고 칼리안은 물어 볼 필요가 없던 질문을 시오나가 했다. 아마 대원들이 근처에 있었다면 귀를 쫑긋 세웠겠으나 애석하게도 놈들은 아직 달리는 중이었다. “이름으로만 기억하면 잊어버릴까봐.” 칼리안이 만든 것들을 혹시 다 잊어버릴까봐. “음.” 우리 부군단장님 머리가 얼마나 좋으시냐면요, 하는 이야기를 지난 며칠동안 귀에서 피가 나도록 들어왔던 시오나가 입술을 다물고 잠시 고민을 했다. 그리고 플란츠의 대답이 단순한 기억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뭔 말인지 이해는 못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네 동생은 이름으로 부르던데.”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나 더 했다. 하늘도 보고, 바다 냄새도 맡고, 바람도 느끼며 주변을 둘러 본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전했다. “······ 안 잊어버릴 걸 알아서.” 루시도 안네도, 히나도. 그리고 동생 한 명도. * * * 나의 드넓은 세상 속에서 오롯이 나 홀로 미쳐갔다. 칼리안이 눈을 내리뜨며 긴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차오르는 기억 속에 다시 숨이 차서 한참동안 숨을 골랐다. “취미가······ 좋지 않은데.” 기댈 곳 없는 광막한 대지 위에 서 있었다. 그런 곳에 서서 오로지 숨을 쉬는 것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이 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상태가 됐다. - 어머니 나무의 본신이라기에 가장 높은 곳에 있을 줄 알았더니. 의외네. - 생명의 근간은 뿌리에 있는 법이 아니겠나. 지하가 있을 줄은 몰랐다. 어머니 나무를 만난다 하기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장로의 공간보다 더 높은 어딘가로 가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땅 속으로 들어왔다. 검고, 어둡고, 포근한 공간.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으나 답답하지 않았다. 대장로 나르잔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익숙한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만약 이곳부터 혼자 어머니 나무를 찾아가라 하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고, 이곳에서 당장 나가려 한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신기한데. - 어머니 나무의 부름을 그런 식으로 거절한 것이 나는 더 신기하군. - 한 밤에 대뜸 나오라고 하는 게 잘못된 거지. - 그대들은 정말 무례한 족속이네. - 너희들은 정말 이기적인 족속이고. 검고 어둡고 포근한 그 분위기에 짓눌려 입을 다물 줄 알았는데 칼리안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결국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칼리안의 말에 나르잔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 세크리티아 국왕이 정말 이 곳에 올 것이라 생각하나. - 절박함과 의심 중에 어떤 것이 이기는지에 따라 다르겠지. 세크리티아 국왕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너희들은 시간을 버는 거니까 나쁘지 않은 일인 것 같은데. - 틀린 말은 아니다만. - 물론 제일 좋은 선택지는 세크리티아에서 브리지트 숲을 다 태워버리기 전에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을 빼내는 것이겠지만. 숲의 길을 열면 도망쳐 나올 수 있을 텐데 왜 안 열어? -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 이미 어머니 나무에게 얘기를 해봤다는 소리야? - 가장 먼저 한 일이 그것이었지. 칼리안의 일행을 위해 숲의 길을 열어주었던 어머니 나무가 동족의 살 길을 막았다 했다. 그 역시 이유가 있으리라 믿는 나르잔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나르잔의 발이 멈춘 것이 느껴졌다. - 남은 이야기는 돌아온 뒤에 하지. 이런 말과 함께 나르잔의 기척이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르잔이 사라졌다기 보다는 칼리안이 다른 어딘가로 이끌렸다 해야 맞을 터였다. 언젠가 시스파니안이 머물던 언덕에 발을 디뎠던 그 때처럼. 다만 그 때와 다른 점은. “내 생이 궁금했으면 물어보지 그랬어.” 아무도 없는 곳에 선 채로 칼리안이 이렇게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살아있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 서 있었다 해야 맞을 것이다. 하늘에는 반짝이는 붉은 별이 가득했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에 붉은빛의 별이 떠 있었다. 다만 그것이 별이 아님을 안다. 작게 부수어 조각낸 여러 붉은 빛의 보석 가루임을 안다. 그래. 만화경이다. 붉은 별이 반짝이는 곳에서 시선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 본 칼리안의 입에서 바람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굳이 보여 줄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잊지 않고 살았던 것들. 잊어버릴 생각조차 없던 모습들. 언젠가 푸른 별이 내리던 밤에 칼리안의 손 끝에서 생을 다한 이가 보였다. 뚜벅, 뚜벅. 숨을 삼킨 칼리안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하나, 둘, 누구 하나 잊지 않은 이들의 시신을 지나쳐 계속 걸었다. 참 많은 이들을 지나쳐 걸었다. 귀족들이 보였다.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의 가신들이 보였다. 어린 아이가 보였고 노인이 보였다. 그 하나하나를 전부 다 똑바로 마주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계속 걸었다. 에일라가 보였다. 키리에가 보였다. 타오르는 세크레타가 보였다. 왕궁이 보였다. 무리지어 서 있는 새하얀 옷의 마법사들이 보였다. 케인이 보인다. 니들렌이 보인다. - 너의 생이 지켜낸. 아르센이 보인다. 산산이 부서지는 새하얀 검이 보인다. 한 팔을 잃은 채 저무는 이의 긴 청은발이 보인다. - 참극을 보라. 칼리안의 발이 느려졌다. 칼리안의 발이 멈췄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지 못할, 성별도 나이도 느껴지지 않을 목소리의 끝을 되뇌면서 허리를 숙였다. 다리를 굽혔다. 입고 있던 정복의 붉은 망토가 바닥에 닿는다. 평생 단 하나를 지키려 하였으나 결국 지키지 못한 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과 너무 닮은 누군가가 서 있을 첨탑을 향해 고개 돌린 채 눈 감은 이를 어루만졌다. 손 끝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참극이었나.” 재우듯 달래주듯 한참을 그저 어루만졌다. 누군가 다가온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 눈 속에 생명이라고는 조금도 담지 않은, 빛 없는 연두색 눈동자가 눈에 보였다. 그 눈을 바라봤다. 하염없이 바라봤다. 저 사람을 나는 누구로 보아야 하는가. 그것을 알지 못해서. 생명 없는 이가 생명 잃은 이를 향해 걷는다. 손에 들린 검을 내려놓는다. 잿빛 검신에 적힌 검은색의 이름이 보인다. 붉은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크게 일렁였다. 거세게 몰아쳤다. 아. 그날 왔었구나. 나를 봤었구나. “하여튼 미련한 완두콩.” 하여튼. 하여튼 미련한 형님 같으니. 전장에서 검을 버리면 어찌하려고. 고작 그 한 마디를 잊지 못해서. 칼리안의 입에 긴 웃음이 걸렸다. 홀로 미치지 못한 사람과 홀로 미쳐간 사람이 살아간 날. 그 눈물겨운 참극의 일면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보게 되어서. “······ 올려주셨네.” 숨을 쉬었다. < 제47장. 제가 덫을 좀 잘 놓습니다(4) >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여러 해에 걸쳐 어느새 몸에 밴 시종으로서의 습관은 하나 뿐인 동생을 앞에 두고도 쉬이 버려지지 않았다. “색 예쁘네. 향도 좋고.” 차를 마신 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뻔하다. 차가 정말 좋거나 그다지 할 만한 말이 없거나, 아니면 할 말을 꺼내기가 어렵거나. “달맞이꽃입니다.” 낮에는 아끼듯 접어 두었던 꽃잎을 달빛 아래 피워내는 꽃. 샛노란 그 작은 꽃으로 만든 차라는 설명에도 얀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미 알고 있던 탓이다. 칼리안이 워낙 차를 즐겨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차를 준비하는 얀이 아니던가. 독차를 물린 이후부터 칼리안의 차는 무조건 얀이 손수 준비해왔으니 말이다. 고상하게 차를 즐기게 된 이유가 그 좋아하던 술을 끊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어쨌거나 말리고 물을 부어 마실 수 있는 모든 꽃과 과일은 얀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잘 들어 있었다. “그나저나 꽃이 든 차는 오랜만이다. 왕자님께서 차를 즐기시기는 하는데 요즘에는 꽃차를 멀리하시거든. 민트를 워낙 좋아하시기도 하고.” 이제 드미레아는 확신했다. 얀이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고 왔으리라는 것을. “칼리안 왕자님께서는 아직 연락 없으십니까.” 그래서 그냥 먼저 운을 떼 줬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글동글한 청회색 눈에 시름이 한가득 들어앉았다. “레아. 왕자님이 나 까먹으셨나봐.” “오라버니 말고 엘프들 생명을 까먹고 계실 것 같은데.” “플란츠 왕자님은 레릭에게 다 말했다는데 우리 왕자님은 그냥 도망가셨어. 확인해보니까 금고 속에서 돈까지 꺼내들고 가셨는데 나한테는 말을 안하셨어.” 방금 전에 드미레아가 한 말은 안 들린 것이 분명하다. 내 정혼자가 집을 나갔는데 집 나간 내 정혼자를 내가 아니라 내 오빠가 걱정하느라 잠 못 이루고 있는 이 상황을 담담하게 잘 받아들인 드미레아가 차를 마셨다. 그 뒤에는 얀이 가져다 준 카라멜을 몇 개 쯤 집어 먹었다. 그렇게, 우리 꽃같은 왕자님이 어디 한 군데 긁혀 오시기라도 하면 나는 어쩌나, 혹시라도 그 여린 마음에 어디서 험한 말이라도 듣고 오시면 나는 어쩌나 해 가며 한참동안 우는 소리를 하던 새끼 코끼리가 좀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무탈히 오실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어디 한 군데가 긁히든 어디서 험한 말을 듣고 오든 상관 없이 오라버니는 그냥 그 상대방을 위한 안네루시아만 준비하면 된다는 말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적당히 안심만 좀 시켜 준 뒤 계속 카라멜만 집어먹었다. 입이라도 달아야 귀가 덜 쓰지 싶어서였다. 사실 돌이켜보면 그런 식으로 나가서 옆구리를 찢어먹고 오든 배에 구멍을 내고 오든 했었으니 저렇게 걱정을 하는 것도 이해가 영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너한테 얘기하고 나니 좀 낫네.” 드디어 걱정하기를 끝마친 얀이 이런 소리로 말을 맺었다. “기사 베른 경이나 2왕자님의 시종에게는 그런 말씀 안하셨습니까.” “이제 더 안 들어주려고 하더라.” “······ 아.” 얀의 저 걱정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하는 생각에 드미레아가 작게 실소했다. “아, 레아. 그런데 왕자님 얘기만 하려고 온 건 아니야.” 이 말에 드미레아가 얀을 쳐다봤고 얀이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드미레아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들고 펼친 드미레아의 눈에, 펜을 든 이를 쉬이 떠올리기 힘들 만큼 우아한 글씨가 보였다. - 사랑하는 우리 소공작에게. 슬레이만의 편지였다. 맨 윗줄을 보자마자 곧바로 편지를 다시 접은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이것을 왕궁으로 보내셨다고요.” “왕궁은 아니고 마나실 후작저로 보내셨어. 답장 꼭 달라시던데.” “차라리 제가 행보를 바꾼 것을 물으시면 무어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드미레아가 한숨을 쉬었다. “칼리안 왕자님을 돕기로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으시면서 다른 것을 궁금해하시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슬레이만은 에반과 얽힌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수도에서의 일을 맡긴 순간 수도에서 해야 할 모든 처신에 대해서도 전부 다 넘긴 셈이었던데다 아직까지 드미레아가 칼리안을 ‘옹립하겠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취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두었다. - 우리 집안에 딸이 하나 생겼다던데 내가 도통 기억이 안 나는구나. 대신, 집요하리만치 리리에를 궁금해했다. 리리에가 어느 집안의 핏줄인지 알 텐데 그것을 우려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궁금해했다. 언제 데리고 와서 보여줄 거냐, 그 애는 내 딸이냐 네 딸이냐, 내 딸이면 멍멍이 얀의 동생이 되는데 그건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어찌 해야 하나 고민하느라 내가 요즘 잠을 못 잔다. 그런데 필요한 건 없느냐, 옷을 보내줄까, 쿠키를 보내줄까, 선생을 보내줄까, 등등. “레아.” “네.” 이번에도 똑같은 내용이 적힌 편지를 다시 대충 훑어보는 드미레아를 부른 얀이 드미레아의 눈과 편지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저택의 집사도, 기사 유란과 로난시테도, 아르센도, 모두 다 리리에에 대한 일을 걱정해왔다. 때문에 얀 역시 같은 말을 할까 생각한 드미레아가 지친 표정을 한 채 얀을 쳐다봤다. “고마워.” 하지만 얀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것 아무것도 생각 안하고 어린아이 챙겨주는 사람으로 잘 커줘서 고마워. 나는 그냥 계속 여기에 있었는데.” 잠시 칼리안의 입장을 뒤로 한 채 그냥 지그프리드의 장자로,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의 동생이었던 드미레아의 오빠로서 그냥 고맙다는 말만 했다. 드미레아가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리리에는 아버지 딸 아니고 그냥 내 동생 삼을 거니까 걱정 안하셔도 된다. 호두랑 아몬드 쿠키 좋아하니까 그것이나 좀 보내시라’는 내용의 답장을 쓰기로 했다. * * * 단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걸어왔던 길. - 이제는 먼 언젠가의 이야기일 뿐이니. 정작 누군가에게는 미뤄두며 살라 하였으면서 스스로는 일순간도 잊지 않고 되새겨온 길. 그 길을 고스란히 만들어 눈앞에 보여준, 그리고 미처 보지 못했던 모습 하나를 더해준 어머니 나무의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칼리안의 입에 고요한 미소가 그려졌다. 다른 건 다 이해해도 엘프들은 역시 이해를 못 하겠어서 그냥 웃었다. “걱정을 해주려면 곱게 해 줄 것이지······.” 하늘에 떠 있던 붉은 보석 가루가 흔들렸다. 모닥불 불티처럼 붉은 불꽃이 되어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제껏 칼리안이 걸어온 저 먼 길 끝에서도 불티가 날렸다. 모두 다 태워 없애듯 저 멀리서부터 조금씩, 하지만 멈추지 않고 모두 다 작은 불꽃이 되어 하늘을 향했다. 언젠가의 베른이. 언젠가의 칼리안이. 잊지 못하던 아픈 것들이 다 그렇게 하나씩 떠올랐다. 멀리 세워진 첨탑을 다시 바라봤다. 그곳에 올라가볼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앞에 선 이의 연두색 눈을 바라봤다. 잠시 말을 건네볼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그들 역시 언젠가의 이야기였으니 이제는 그냥 두어야 함을 알아서 그리 하지 않았다. 대신 그 무엇보다 커다란 불꽃들이 첨탑에서 그리고 눈 앞에서 고요하게 떠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손을 뻗었다. 잊혀야 할 이의 남은 기억에 올려진 시나스타를 쓸어내린다. “고생······ 많았어.” 이제는 사라진 이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어루만진다. “수고했어. 잘 버텼어. 이제 다 괜찮아.” 그것이 비록 참극이었다 하더라도. 못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들이 차마 종결짓지 못한 마지막 장이었다 하더라도. 끝내 불행하지만은 않았기에 잘 살았노라고. “베른.” 위로를 보냈다. 불꽃은 별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별을 남겼다. * * * 우려했던 폭발도 없었고 칼부림도 없었다. 대신 예상하지 못했던 소식이 전해졌다. “나갔다니.” “도시 밖, 숲으로 나가셨다고 합니다. 방금 전에요.” 플란츠가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엘프 옆에 붙어 있어.” 이 말을 들은 니들렌이 ‘부군단장님께서 칼리안 왕자님 찾아 오실 때까지 대원들 데리고 힐 경 곁에서 잘 놀고 있으라는 말인지’를 물으려는데 플란츠가 저벅저벅 걸어 밖으로 나갔다. 그래서 니들렌은 자신이 생각한 의미가 맞겠거니 하고 알아서 대원들을 잘 통솔하기 시작했다. 같이 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탄산수 마시면서. 아무튼 이런 발칸을 떼어 놓은 플란츠가 자신의 말에 올랐다. 그리고 칼리안이 향했다는 숲 쪽으로 따라 나섰다.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 콰아앙! 굉음이 울리는 곳으로 향하면 될 일이니까. 엘프 도시의 경계에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울창한 숲 속에 들어서게 된 플란츠가 조금 낮아진 기온에 잠시 적응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칼리안이 간 방향을 가늠해보는데 무언가를 강하게 내리치는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큰 소리에도 크게 놀라는 것 없이 귀를 쫑긋 세우는 자신의 말을 툭툭 두드린 플란츠가 소리 난 방향으로 다가갔다. 아마도 지난 번에 무지개를 보았던 폭포로 이어지는 물길이 아닐까 생각되는 계곡이 있었고 물가의 바위 위에 칼리안이 앉아 있었다. “또 왜.” 모래사장에 하도 많이 앉아 본 탓인지 이제 큰 바위 쯤은 그냥 의자로 보이는 지경이 된 플란츠가 칼리안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앉으며 물었다. “오셨습니까.” 칼리안은 놀라지도 않았다. 올 것을 알았던 것처럼, 혹은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인사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잠시 확인해 볼 것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멀찍이 흩어진 바위 파편들을 슬쩍 쳐다 본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확인이 아니라 화풀이 같은데.” “저 그렇게 폭력적인 버릇 있는 사람 아니에요.”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흘러내려가는 물줄기를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시스파니안의 뜻을 헤아리는 것도 어려웠는데 어머니 나무는 더 하네요.” “뭐라고 했는데, 또.” “걱정되십니까.” “아니.” 곧바로 나온 대답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글생글 웃었다. “우선 대장로와는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더 이상 세크리티아 쪽으로 이주하겠다는 내용으로 우는 소리 안 하기로 했고, 치료를 받고 싶으면 대장로가 있는 곳으로 직접 오라는 서신을 데블란 쪽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답신이 오면 알려주겠다 했으니 일단은 왕궁으로 돌아가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플란츠가 잠시 칼리안을 쳐다봤다. 세크리티아 국왕이라는 호칭이 조금 바뀐 탓임을 모르지 않았으나 칼리안은 그냥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어머니 나무가 브리지트 숲 쪽으로 숲의 길을 열지 않았다 들었는데 그건 어쩐지 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숲의 길을 열지 않아야 그 일을 두고 데블란이 엘프들에게 협상을 요구하고, 결과적으로 제가 이곳까지 오게 되니까요. 특별히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어서 정말 그런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인과 관계를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퐁당, 하고. 작은 오러 덩어리 하나가 계곡 물 속으로 들어갔다. 칼리안 쪽에 두고 있던 시선을 돌리지 않은 탓에 그 모습을 보지는 못한 플란츠의 귀에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만에 하나 데블란이 그 숲에 문제를 일으키면, 늦지 않게 숲의 길을 열어서 그 곳의 거주자들을 피신시켜달라 했고 그렇게 하겠다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쪽 숲이 저한테는 조금 신경이 쓰이는 곳이라서 오지랖을 부렸어요.” “그래.” “그리고······.” 이렇게 다시 말을 이을 것 같던 칼리안이 입을 다물고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 우웅! 낮은 울림 소리와 함께 그 손 위에 작은 오러의 검이 하나 만들어졌고, 그것을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닭 먹는 엘프 말이 틀리진 않았나보군.” 많은 것을 꿰뚫어본다던 어머니 나무가 칼리안의 속을 좀 들여다 본 모양이다. 더 이상 불쾌함을 느끼지 못할, 죽음 아닌 다른 것이 생각나는 투명한 붉은 빛의 검이 눈 앞에 띄워져 있었다. “그래.” 무엇을 떨쳐내서 다시 저런 빛이 되었는지 묻지 않은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그 빛을 보다, 칼리안이 검을 다시 흩어낸 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왔나.” 오러가 변한 것을 확인하려고. “아뇨. 이건 덤으로 알게 된 일이었습니다. 다른 것을 좀 확인해보려 하다가요.” “무슨 확인.” 칼리안이 씩 웃었다. 그리고는 엘프의 숲과 연결된 곳 쪽을 가리켜보이며 입을 열었다. “엘프들은 도움 받은 것에 대해서는 꽤 철저하게 계산을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오지랖이라 해도 엘프들에게는 도움이라 생각을 했는지. 대가를 주네요.”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이 잠시 허리를 돌려 앉아있던 바위 뒤쪽으로 팔을 내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들어 플란츠에게 내밀었다. “모두 사라진 자리에 별이 남았기에. 받기로 했습니다.” 푸른 빛이 감도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린 은빛의 검이 칼리안의 손에 들려 있었다. 불에 타고 남은 별의 잔재를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바꾸어 돌려준 어머니 나무를 잠시 생각하면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형님 쓰세요.” 또, 검을 주겠단다. 생각지 못한 선물을 손에 든 플란츠의 눈이 한 곳에서 멈췄다. - 시나스타 검은 글씨 위에 저도 모르게 올려진 손가락이 한참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어디 두고 다니지 마시고요. 이번에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부탁 하나를 전해왔다. < 제47장. 제가 덫을 좀 잘 놓습니다(5) > 상관없었다. 칼리안이 굳이 엘프의 도시 밖으로 나와 멀쩡했던 바위를 부순 것은 아마도 이 검이 오러를 버티는지를, 얼마나 강한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을 터였다. 그러다 자신의 오러 색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덤으로 알게 되었으리라는 것도 잘 알아들었다. 그런데 상관없었다. 지금 손에 든 것이 얼마나 좋은 검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 상관없었다. “시나스타······.” 완연한 은색도 아닌, 그렇다고 완연한 푸른색도 아닌 빛의 검. - 어디 두고 다니지 마시고요. 이번에는. 익숙한 묵빛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있었다. 마법사의 손 끝에서 불길이 일고 기사의 손 끝에서 칼날이 이는 세상이니. 시간을 되돌리고 멀쩡하게 살아 숨쉬었던 이의 존재를 지우고 그의 영혼을 다른 곳에 옮기고. 그 이름이 전해지는 것도 막아버리는 세상이니, 그래. 가능하겠지. 별똥별이 되어 떨어지기 전의 모습. 겉도 속도 새카맣게 타버리기 전의 모습. “진짜 내 검이겠군.” 진짜, 별의 조각. 그것을 알아봤는데 무엇인들 상관있을까. “역시 형님은.” 짧은 말로 긍정을 보인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을 덧붙였다. “네. 형님께서 지니고 다니셨던 검입니다.” 플란츠가 칼리안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칼리안은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 웃고만 있었다. “······ 너.” 이제껏 단 한번도 칼리안은 과거의 플란츠를 그렇게 부른 적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지금의 플란츠와 다른 이로 보려 했고 그리 불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똑똑한 플란츠는 그것 역시 알아들었다. 바닷가에서 그 난리를 피웠다 해도 그건 결국 지금의 칼리안과 플란츠의 일이다. 그 일로 플란츠를 진짜 제 형제로 여기게 되었다 해도 과거의 플란츠와는 관련 없는 일이다. 그런데 칼리안이 과거의 플란츠를 지금과 똑같이 불렀다. 그 때의 플란츠나 붙일 법한 이름을 새겨 놓은 별빛의 검 한 자루를 가져다 주면서. 그 이유 역시 플란츠는 알아들었다. “잘도 참았군.” 봤을 것이라고. 그 날의 악몽을 눈앞에서 보고, 그 날의 플란츠를 마주하고, 그 날의 플란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결정하고. 한 술을 더 떠 그 때의 플란츠가 지니고 다녔을 검을 제 손으로 직접 챙겨와서는 이렇게 돌려주고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또 저렇게 웃고 있는 거다. 그 날의 플란츠를 봤다면 그 날의 그 왕제도 봤을 테니까. “네. 인사를, 했습니다. 저에게.” 베른에게. 옛 칼리안에게. 헤실거리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니 만약 나중에 언젠가 형님께서······.” “알아들었어.” “네.” 애초부터 플란츠는 기억도 못할 그 날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다르게 두고 보지 않았었다. 그 둘을 애써 구분한 것은 칼리안이었다. 그 일을 두고 지금의 플란츠를 원망할 수 없었으니까. 원망해서는 안 되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런 마음을 조금 바꿨다고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말해준 것이다. 언젠가 만에 하나 플란츠가 그 때의 기억을 찾는다 해도 지금과 다르게 보지 않을 테니, 그런 날이 오게 된다면 혹시라도 숨기지는 말고 얘기해달라고. 그런 말을 하려고 굳이 안에서 겪은 일을 알려준 것임을 이해한 플란츠가 칼리안의 말을 잘랐다. 굳이 입에 담고 귀로 들을 필요 없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하고싶었던 대로 태워버리고 와도 괜찮았을 텐데 정말 잘도 참으셨군, 내 아우님께서.” “테스만 경이 설명해주는 걸 들었는데도 크리스털에 불을 어떻게 붙인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제 주종은 바람이잖아요.” “파란 머리 마법사 주종은 얼음이고.” 칼리안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드는 방법이라 이해는 못해줘도 왜 그랬는지는 알겠어서. 그렇게나마 보게 된 것이 저는 조금 반갑고 좋았어서. 그래서 그냥 얌전히 나왔습니다.” 향도 좋고 맛도 좋은 차도 많지만 향도 없이 쓰기만 한 약을 건네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그러했고.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그러했듯이. “······ 알았어.” 잊히는 것이 무섭다 했던 사람에게 죽음을 기원하며 위로를 건넨 시스파니안이 떠올랐다. 스스로도 어쩌지 못해 마지막으로 남겨둔 응어리에 작별하는 법을 알려 준 어머니 나무를 욕해야 할지 아니면 칭찬해야 할지 이번에도 결정하지 못한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안 두고 다녀. 이번에는.” 대신 약속을 해줬다. “네.” 칼리안이 다시 웃었다. 새가 울고 바람이 불고 하늘에는 구름이 떠 있는 이곳이, 발 밑에는 아무도 없고 머리 위에는 붉은 별이 떠 있던 마음 속의 익숙한 길보다는 더 좋다는 것을 잘 알아서였다. * * * 처음. 하나의 생명이 눈을 떴다. 홀로 피어난 순수한 생명은 최초의 녹빛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도록 도왔다. 생을 나누어 받은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나 가지를 내고 잎을 틔웠다. 살아갈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었다. 나무는 거대해지고 굳건해졌으며 온전한 스스로의 의지를 지니게 되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게 되었다. - 너를 내가 보았다. 시간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지켜보았다. - 그리고 그저 관조하였다. 시간이 되돌아감을 기억했다. 많은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을 잊지 않았다. 거스르지도 않았다. 흐르는대로 지켜보았다. - 하지만 너는······. * * * “그래서.” 플란츠가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왜 부른 건데.” 무릎 위에 올려둔 검에 새겨진 글씨. 자신의 말에도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던 이가 직접 정했을 그 검은 글씨 위에 여전히 손을 올려 둔 플란츠가 이렇게 물었다. “어머니 나무가 저를 왜 불렀는지 얘기 한 것도 없었고, 특별한 대화 나눈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안 특별한 대화. 뭐냐고.” “정말 별 것 아닌 대화요.” 또 뭔가를 숨기려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아무리 바빠도 옛 언어로 된 단어 하나 알려주는 건 할 수 있겠지.” 아, 진짜. 바질 새싹마냥 시도때도 없이 파릇하신 형님 같으니. 쇠약해진 심장 고쳐놨더니 이제는 심장 말고 체이스에게 이름 뜻 알려달라 하겠다는 말로 협박을 해오는 플란츠를 보는 칼리안이 참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건 형님 생각해서 안 알려드리는 건데요.” “뭐든.” “그리고 왜 그런 말씀 하실 때만 말이 길어지시는 겁니까.” “필요해서.” “평소에는 왜 그렇게 짧으신데요.” “알아들으니까. 넌.” 잘못 들여놨다. 버릇을 완전히 잘못 들였다. “그래서. 뭐냐고.” 내 형님 내가 저렇게 키워놨으니 누구 탓도 못하고 이런 하소연 들어줄만한 사람이라고는 저기 앉아 계시는 참 애증하는 형님 뿐이라 어디 다른 데 말도 못하고 내 속만 계속 썩는데 그게 결국 나 때문이니 아니 이걸 어쩌나. “부탁이라 해야 할지, 조언이라 해야 할지. 그런 말 하나를 들었습니다.” 말해줘야지 어쩌긴 어쩌나. “무슨 말.” 곧바로 대답하지 않은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주었던 검을 손에 쥔 순간 들려오던 어머니 나무의 말을 떠올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 하지만 너는. 이번에는. 네가 무엇을 알게 되더라도. “무엇을 알게 되더라도······ 순응할 필요 없다 했습니다.” 순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어머니 나무가 그런 말까지 해야 할 만한 일이 무엇인지 지레 걱정할까봐 또 굳이 숨기려 든 칼리안을 향해 플란츠가 담담한 목소리를 전했다. “걱정 안 해.” “······ 왜 안하시는데요.” “순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데. 무엇이든 상관없는 것 아닌가.” 말 안 듣는 것은 이제 진짜 잘하게 된 플란츠의 대답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하긴 그렇네요.” “다른 건.” “다른 말은 더 없었습니다. 브리지트 쪽 숲의 길을 늦지 않게 여는 것 말고는요.” “그래.” 이야기를 마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플란츠의 검을 가리켜보이며 다른 말을 꺼냈다. “에반의 검을 드미레아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형님께서 쓰실 검도 그 검처럼 조금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플란츠가 지닌 두 검의 형태를 바꾸어, 평소에는 하나의 검으로 다루다가 필요할 때에는 세로로 나뉘어진 두 자루의 검으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떤지를 묻는 말이었다. 이미 완성된 검을 깎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충분히 해낼 만한 사람을 이미 알고 있으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는 일이었다. “두 자루의 검을 쓰는 것을 숨길 필요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형태의 검에 맞춰진 것이 브리센의 검술이니까요. 평소에 지니고 다니시기에도 그 쪽이 나을 테고요.” 그 말에 플란츠가 잠시 검을 내려다봤다. “남겨두고 싶은데.” 과거의 플란츠가 무슨 생각으로 정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가늠해 볼 수는 있는, 검의 이름. 그것이 검신에 적혀 있지 않나. 검을 깎아내면 글자도 반이 사라지는 것이라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리 내키지가 않았다. “저 글씨 잘 씁니다. 지워지는 부분은 제가 다시 새겨 드릴게요.” 칼리안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청은빛의 검에서 지워질 부분을 묵빛의 검에 옮겨 적어 주겠노라고. 그 말을 듣고 가만히 글씨를 바라보던 플란츠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어차피 이 이름의 절반은 칼리안의 몫일 테니까. * * * 바람이 불었다. 풀잎의 향기가 가득했고 두 마리의 말이 바닥을 밟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바뀌었다. 바다의 소금내가 느껴졌고 두 마리의 말이 바닥을 밟는 소리는 여전했다. 엘프들의 도시로 돌아왔다. “이름 지어주셔야죠.” 멀리 다시 보이는 거대한 어머니 나무를 한 번 바라본 칼리안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당분간 플란츠 대신 지니고 있기로 한 청은빛의 검을 가리켜보이며 말을 이었다. “형님 검도 이름이 있고 형님 고양이도 이름이 있고, 형님 동생 말도 이름이 있는데 형님 말만 이름이 없지 않습니까.” 플란츠가 살짝 눈을 감았다. 한 마디를 해 주고 싶은데 참는 것이다. 차라리 히나의 말은, 손으로 부를 수 있을 만한 이름 중에 히나가 가장 바라고 있을 의미가 있기라도 하지. 저 대단한 말에게 까만 것, 아니면 큰 까마귀라는 뜻의 이름이나 붙여놓은 놈이 뭐가 잘났다고 저런 소리를 하나 싶어서였다. 레이븐이 푸르릉 소리를 냈다. 지금 이름이 마음에 든다는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대충 칼리안의 말에 대답을 하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안 지었을 텐데. 그 때에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것에 의미 두고 살았을 것 같지 않아서.” 플란츠 성격에, 과거였다면 분명 저 레이븐을 타기는 했을 것이라 생각을 했다. 다만 끝까지 이름은 지어 주지 않았으리라 여겼다. 자신이 그런 것을 챙겨 가며 살았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으니까. “그래도 그 때와 지금은 다르니까요. 먼 곳까지 같이 다닐 말인데 이름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먼 곳 어디.” 예전 같았으면 저 놈이 이제 나를 탑에 데려다 놓으려나보다 하고 말았겠지만 이제는 아니지 않나. 그래서 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를 가졌느냐는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데 칼리안은 대답 대신 또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형님 혹시 제가 진짜 검에 오러 씌운 것 보신 적 있습니까. 제가 만드는 검 말고요.” “없어.” “그럼 형님 제가 오러로 바위 부수는 것 보신 적 있습니까.” “없어.” 칼리안이 생글거리는 눈으로 단도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보이는 마차 바퀴만한 바위를 향해 던졌다. “제가 시끄러운 것은 질색이라.” - 파삭. 레이븐이 푸르릉하는 것보다 작은 소리. 마른 모래 뭉치가 바스러지는 정도의 소리가 났다. 대신 바위는 조금 전 계곡에서 본 것처럼 산산이 조각나 바닥에 흩어졌다. 조금 전과 같은 굉음은 전혀 터져나오지 않았다. “제 오러 색이 바뀐 것은 새 검에 오러 둘러보면서 진작에 알았는데 어머니 나무에게 받은 검이 어느 정도 강도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프 도시 안에서 칼을 마음대로 휘둘러 볼 수는 없겠어서 나무나 좀 베어 보려고 밖으로 나갔더니,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크리티아의 새인가.” “네. 그런데 그 새가 정말로 저에게 들킨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들킨 것인지. 그건 아직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곧바로 숨기에 일단은 모르는 척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가면서 생각해보니까 그 새한테 좀 보여주면 좋겠다 싶은 것이 있더라고요.” 이런 말을 듣고서야 다시 떠올랐다. 내 동생은 한 번에 한 가지만 얻어내지 않는 지독한 놈이라는 것을. 칼리안 찾으러 나올 것이 뻔한 플란츠를 기다리거나 데리러 돌아오는 대신 그냥 칼리안이 있던 곳으로 부를 겸. 엘프 도시 밖에서 칼리안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새 한 마리의 시선도 좀 끌 겸. 거창하게 바위를 한 번 부쉈다는 소리다. “뭘 보여주려고 했는데.” “데블란을 좀 속일 만한 방법이요.” 조금씩 가까워지는 어머니 나무를 향해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그 상태로 입을 열었다. 계속 이야기 하라는 듯 플란츠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번에 바뀐 제 오러 색이 제온의 것을 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쪽에서 쓰는 힘의 색이 더 탁하기는 하지만 이런 밝은 날에는 그럭저럭 비슷해 보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다면 제가 제온과 연관이 있다고 데블란을 속여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계곡에서의 칼리안이 플란츠의 앞에 꺼내놓았던 것. 그들이 쓰던 것과 썩 비슷하다 여겨질 만한 투명한 붉은 빛의 오러. “굳이 왜.” “잠시 데블란의 시선을 좀 돌리려고요. 제온 쪽으로.”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고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제가 여기에 왔다는 것을 안 이상 데블란은 절대로 이곳에 안 올 겁니다. 엘프들과의 협약을 핑계로 저와 히나를 부르는 것은 전하의 서신이 있었으니 물건너갔고, 안전하지 않을 것이 뻔한 이곳에 올 수는 없고. 그런 와중에 체이스 형님께서는 귀족들 앞에서 데블란이 병중에 있는 것을 알리려 하실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해야 체이스 형님의 자리가 안전하니까요.” “그렇겠지.” 체이스에 대한 호칭이 바뀐 것을 눈치챘으나 플란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가 아는 데블란은 그 정도로는 못 다룹니다. 그렇게 몰리면 데블란은 분명 저에게 한 것과 똑같은 짓을 할 겁니다.” 이런 말이 곧바로 나온 탓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기 보다는 보이지 못했다 해야 맞을 일이다. “약점을 잡으려 들 것이라는 말인가.” 약점. 베른이 무엇 때문에 어떤 생을 살았는지 단 한 번도 말한 적 없었으나 플란츠는 이미 알았다. 칼리안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그런 생각을 해봤을 겁니다. 저도 뱀의 새끼였으니. 그리고 제가 하는 생각은 데블란도 똑같이 할 테고요.” 똑같은 생각을 하지만 칼리안은 실행하지 않는 것. 그리고 데블란은 실행하는 것. “아리안느든, 아니면 후궁 루이즈······ 제 어머님이든. 체이스 형님을 옥죌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용할 사람입니다.” 때문에 데블란의 시선을 잠시 돌려놓으려 한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칼리안이 이 곳에 와 있다는 것을 데블란이 안다. 새까지 따라 붙어 있던 것을 알았으니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엘프들이 치료를 해주겠다며 불러내는 것이 참 위험한 초대임은 데블란도 눈치를 챌 터였다. “그래서 시선을 잠시 돌리려고요. 제가 엘프들과 사이가 꽤 좋아보이는데 제온이 사용하는 힘까지 얻은 것으로 보여진다 하면, 이미 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의심하고 있으니 제온에 대해서도 알아보려 할 테니까요. 데블란과 제온이 손을 잡았든 말든 상관 없이.” “오랫동안 숨길 수는 없을 텐데.” “네. 그렇다고는 해도 정보를 모으는 기간이 있을 테니 한 두 달 정도는 숨겨질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 사이에 저는 데블란이 절대 생각하지 못할 일을 하나 하면 되니까요.” “무슨 일.” 칼리안이 잠시 말을 멈추고 레이븐의 안장을 톡톡 두드렸다. 그렇게 버릇처럼 생각을 정리한 칼리안의 입에서 플란츠가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 나왔다. “처음에 형님께서 세크리티아에 가겠다 하셨고 제가 말렸죠.”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형님께서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사실 제가 덫을 좀 잘 놓습니다.” 설마 그걸 내가 모를까. 이렇게 생각하는 플란츠의 귀에 다음 말이 계속 들려왔다. “그런데 제가 친 덫으로는 뱀 못잡아요.” 얘기한 것처럼, 칼리안은 뱀의 새끼였으니까. “대신 제가 생각 못한 건 데블란도 생각 못 합니다.” “······ 그래서.” “형님. 구운 대구, 혹시 정말로 드셔 볼 생각 있습니까.” 플란츠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 궁에 돌아가면 절대로 나가지 못하게 할 르메인을 또 어떻게 잘 ‘설득’해야 할지, 이번에는 다른 옷을 좀 챙겨야 되겠는데 무슨 옷을 얼마나 챙겨야 할지, 루시와 안네는 또 두고 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져든 탓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먼 곳까지 같이 가야 할 하얀 말의 이름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 제47장. 제가 덫을 좀 잘 놓습니다(6) > 시오나 옆에 붙어 있으라고는 했다. 시오나와 한 판 붙으라고는 안했다. 아무래도 말을 좀 길게 할 걸 그랬다. 어차피 왕궁 밖에 나와 있었으니 이곳까지 와서 훈련을 한다는 것은 기대도 안했다. 그래서 플란츠는 놈들이 그냥 탄산수를 자신들의 인생처럼 말아먹으며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있거나 자기들끼리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기를 했거나 알아서 잘 쉬고 있는 정도를 예상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모래 사장 위에 마흔 구의, 아니 마흔 명의 대원들이 누워, 아니 버려져 있었다. 습격당한 줄 알았다. “대련은 아닐 것 같은데. 혹시 대원들이 시오나에게 뭔가를 배우기로 했습니까.” 둘을 보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려 노력하고 있는 마흔 명을 보면서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다. 딱 봐도 그냥 적당히 한 두 대씩 맞고 쓰러진 꼴이라 부상 걱정은 하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칼리안의 질문을 받은 플란츠는 아주 잠시, 하지만 아주 깊이 고민한 뒤 대답했다. “······ 안 했어.” “네.”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으나 아무튼 칼리안은 이번에도 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들이 내기에 널 걸어서 내가 말을 못해준다는 플란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혼자서 적당히 상황을 파악했으나 발칸의 일에 대해 되도록 크게 관여하지 않으려 하던 칼리안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대체 왜 나서서 얻어맞고 다니는 거야.” 이런 혼잣말을 한 칼리안의 웃음소리가 조금씩 커지더니, 웃음이 터졌다. 터져나온 웃음이 도무지 멈추질 않았다. 좀 쉬고 오겠다며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는 칼리안의 웃음소리가 한참동안 계속 들렸다. 그런 동생을 애써 무시한 플란츠는 일단 들어가서 제대로 씻고 잘 놈은 자고 쉴 놈은 쉬라는 말로 전부 다 들여보냈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들어가’ 라고 했다. “제이아 사단장.” “네, 부군단장님.” “남아.” “네, 부군단장님.” 소금 넣은 것 먹는 분홍 머리 중간관리자 빼고. 칼리안도 플란츠도 없는 상황에서 대원들이 전부 저지경이 됐으니 니들렌은 뭐라 할 말도 없었다. 대사막의 전사가 어떻게 싸우는지를 알려달라 했지 대사막의 전사인 소드마스터가 어떻게 싸우는지를 궁금해 한 것은 아니었는데. 속았다. 엘프라는 족속들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아무튼 ‘딸랑’ 소리 여섯 번만에 마흔 명이 싹 주저앉았다. 딱 그 때 두 왕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고 시오나는 빛과 같은 속도로 자리를 피했다. 결국 오늘도 할 일 많은 중간관리자는 심심했던 소드마스터에게 툭 얻어맞은 명치의 욱신거림이 가시기도 전에 일단 고개부터 숙였다. “죄송합니다.” “됐고.” 그리고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 안 혼났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더 나아가 정말 놀랍게도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그 플란츠가 궁금한 점이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말이 너무 길어서 놀랐다. 플란츠의 질문을 끝까지 다 듣고 난 니들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려다,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부군단장님. 물어보신 것 말씀드리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 한데, 그 전에 하나만 먼저 보여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왕자의 질문에 다른 말을 꺼내는 것에도 플란츠는 별다른 얘기 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고, 곧 니들렌이 로브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이제는 익숙한 마법사들의 공간 주머니였다. 그것을 주섬주섬 여는 동안 니들렌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늘 칼리안 왕자님 기분이 좋으신 것 같네요. 평소보다 더 웃으시는 것 같습니다.” “내 아우님 오늘 안 웃었는데.” 플란츠는 이렇게 답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듣지 못한 니들렌이 플란츠를 쳐다봤으나 플란츠는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았다. 달리 더 무엇을 물어보게 할 만한 얼굴이 아니어서, 니들렌은 입을 닫고 얼른 주머니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빨리 화제를 전환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주먹만한 주머니 속에 팔꿈치까지 쑥 집어넣고 뒤적거리던 니들렌이 곧 원하는 것을 찾았다는 얼굴이 되어 손을 뺐다. 주머니 밖으로 나온 것을 본 플란츠가 미간을 살짝 굳히며 물었다. “······ 뭐야.” “소라 껍데기입니다, 부군단장님.” 옅은 모래 색을 가진 커다란 소라 껍데기. 그것을 들어 자신의 귀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해 보인 니들렌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면 파도 소리 들립니다.” 바다가 없는 카이리스에서 파도 소리 들을 방법이라며 시오나가 말해 준 것이다. 물론 알고는 있었지만 시오나 덕에 그 생각을 떠올리고 또 처음으로 직접 그 안의 소리를 들어 보게 된 니들렌이 소라 껍데기를 건넸다. “신기합니다. 부군단장님도 한 번 들어 보십시오.” 그것을 받아 든 플란츠가 니들렌이 알려준대로 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가만히 듣기 시작했다. “낮에 부군단장님 나가시고 나서 대원들이 다 같이 찾은 것 중에 제일 예쁜 겁니다. 얼마 후면 부군단장님 탄생일이라 선물로 드리려고요.” 생일 선물. 진주 말고 자개 말고, 그냥 소라 껍데기. 힘들게 구했다는 희귀 보석 말고 발칸 대원들이 한참동안 바닷가를 뒤져가며 찾아낸, 그냥 소라 껍데기. 이왕이면 대원들 다 모였을 때 드리려고 했는데 다들 부끄럼이 많아서 그냥 조용히 슥 건네달라고 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플란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래.” 그리고 한참 뒤에 이렇게 대답을 했다. 소라 껍데기 속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꺼내진 말이 ‘고맙다’는 뜻임을 알아들은 니들렌이 시원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 * * 찻잔에서는 커피 향도 안 나고 차 향도 안 났다. 그것을 조용히 내려다보는 앨런의 얼굴에 다소 복잡한 표정이 들었다. - 괜찮으시겠습니까. 앨런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걱정 가득한 질문에 칼리안이 대답했다. - 세크리티아에 형님과 함께 가기로 한 것에 대해서 말씀이십니까. - 네. 저는 그것이 우려됩니다. 플란츠 왕자님이 과거의 일과 무관하다 여기시는 것은 저도 압니다. 허나 아는 것과 와닿는 것은 늘 다른 법이니 우려가 될 수 밖에요. - 기억이 돌아와도 상관않겠다 말씀드렸습니다. 앨런이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찻잔의 모서리를 손으로 쓸기만 할 뿐, 그것을 들어올리지도 않고 잠시 칼리안의 말을 새기고 있었다. 대신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 그러니 아마 지금쯤이면 무슨 옷을 입어야 풀물이 안드는지, 그런 것만을 걱정하고 계실 것이라서. 왕자의 정복이나 발칸 부군단장의 제복 말고 풀물 안드는 그냥 제 형님 옷이요. 발칸을 거느린 왕으로 찾아갔던 세크리티아에, 이제는 그저 칼리안의 형이 되어 갈 생각을 하고 있을테니 상관없다는 이야기였다. - 그 마음가짐이 옷을 바꿔입듯 그리 쉬이 바꿔먹을 수 있을는지. 다시 악몽을 꾸실까 걱정이 되어 그럽니다. - 어차피 저도, 형님도······ 악몽은 이제 익숙하니 괜찮습니다. 서로 많이 깨워보기도 했고요. 앨런의 입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 그럼 왕자님께서는 그 곳에 가셔도 괜찮겠는지요. - 생각나는 것들이 많겠죠. 반갑고 좋지 않겠습니까. - 왕자님께서 그 자의 앞에 서는 것에 대해서를 여쭙는 겁니다. 굳이 직접 가지 않으셔도 해결 할 방법이 있을 터인데. - 인내심 모자란 제 성격에 데블란의 얼굴을 보자마자 화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이번에 하나를 배웠습니다. -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 직접 마주해야 떨쳐지는 것도 있다는 것을요. ‘떨친다’고 말하면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런 것을 하나 배웠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더 가려고 합니다. 떨쳐내려고. 찻잔 모서리 위를 맴돌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여전히 아무런 향이 나지 않는 짙은 빛의 찻물을 내려다보던 앨런이 다정한 목소리를 보냈다. - 엘프들의 어머니도 왕자님 속을 헤집어놓고 갔습니까. 잠시 아무런 대답이 없다가. - 네. 솔직한 마음이 전해졌다. - 제가 가서 그 못돼먹은 나무 혼쭐을 내어 줄까요. - 정말 그리 하실 것 같아서 해달라는 어리광도 못 부리겠네요. 이것도 나중에. 같이 술이나 마셔주세요. - 그리하지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기다려 주시겠다 하는 말이 저는 참 좋습니다. 체이스 형님도,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을 해주시고······ 이번에는 저도 돌아갈 수가 있으니. 좋네요. 잘 하지도 못하는 거짓말. 다녀오겠다던, 꼭 돌아오겠다던 거짓말. 이번에는 안 해도 되니까. 체이스를 그리 부르는 것을 들은 앨런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아무래도 칼리안이 이번에 돌아오거든 서로 나눌 말이 참 많으리라. - 조심히 돌아오십시오. - 네, 조심히 돌아갈게요. 이 말과 함께 반지의 빛이 줄어들다 사라졌다. “할아버지 새아들 왕자님이랑 얘기 다 한거야?” 한동안 그 빛의 여운을 내려다보던 앨런을 향해 베로니카가 이렇게 물었다. “그새 눈치를 채었느냐.” “할아버지 아들 생긴 거 나도 알고 엄마도 알아. 아마 아빠도 알걸.” 아직 저택에 가져가지 않아 창가에서 잘 자라고 있는 보석같은 꽃을 들여다보던 베로니카가 웃어보였다. “나도 좋아했고 엄마도 좋아했는데 아빠만큼 좋아하지는 않을 거야.” 앨런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 후에는 손 끝으로 찻잔을 톡톡 치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리 쓴 것을 어찌 다 먹으라는 것인지.” “할아버지 요즘 계속 못 자잖아. 약이라서 쓴 거니까 툴툴거리지 말고 다 마셔.” 베로니카는 꽤 엄한 얼굴을 하며 저보다 열 살쯤만 많아 보이는 앨런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짙고 짙은 갈색 빛의 차를 한참동안 내려다보던 앨런이 정말 억지로 먹는다는 얼굴을 감추지 않은 채 그것을 한 입에 쭉 마셨다. 앨런의 옆으로 와 앉은 베로니카가 한 방울도 남기지 않은 빈 잔을 확인한 뒤에 손에 들고 있던 초콜릿 상자를 꺼내들었다. 얼른 그것을 받아 하나를 입에 넣은 앨런이 찌푸려진 얼굴을 조금씩 폈다. “할아버지랑 나랑 할 일이 바뀐 거 알아? 이런 건 할아버지가 주고 내가 싫다고 해야지.” “그래도 쓴 것은 영 입맛에 맞질 않으니 어찌하겠느냐.” 머리카락 생김은 꼭 닮았으면서 입맛은 정반대인 손녀를 향해 앨런이 이렇게 또 볼멘소리를 했다. 세상에 맛있고 달고 몸에도 좋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 저리 쓴 차를 주는지. “그래도 이 정도로 넘어가 주려무나. 어여쁜 손녀가 주는 것이 아니었으면 입에도 안 댔을 터이니.” 앨런의 눈에 부드러운 웃음이 어리자 베로니카가 똑같은 얼굴을 해 보였다. “알았어. 넘어갈게.” 가까이 두었으면서도 볼 때마다 쑥쑥 자라 있는 것 같은 베로니카를 향해 앨런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느냐?” “응? 무슨 소리야?” 짐짓 모르는 척 되묻는 말에 슬쩍 웃은 앨런이 다시 말했다. “도와 줄 일이 있어 이렇게 뇌물을 가져온 줄 알았는데, 아니면 말거라.” 겉보기로는 아르센보다도 훨씬 어려보이면서 속에 든 것은 확실히 베로니카의 할아버지다. 베로니카가 자신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내 머리 위에 서 있지 말고 내려와.” 머리 꼭대기에서 말하지 말라는 귀여운 투정에 앨런이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던 베로니카가 결심한 듯 말했다. “나 마법 학교 그만 다닐래.” “그리하거라.” 베로니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유도 안 물어봐? 엄마랑 얘기해본다는 말도 안 하고 할아버지 맘대로 그냥 그래라 하고 끝이야?” “이미 얘기했으니 걱정 말고.” “엄마가 화 안 내?” “레이첼이 네가 학교를 몰래몰래 빠진 것에는 화를 낼 만 하다만 네가 하기 싫다는 것에도 화를 낼 사람은 아니지.” “그럼 엄마가 안 속상해 해?” “무엇을 속상해 하겠느냐.” “아빠가 하던 것 나도 하려고 해서.” 엄마인 레이첼 따라 마법사 되는 것 말고 아빠인 로닐 따라 약사 하겠다는 말을 한 베로니카가 잠시 앨런의 빈 찻잔을 보다 말을 이었다. “엄마가 아빠 생각할까봐 말 못했어. 엄마가 그랬거든. 잊고 살아야 산다고.” 언젠가 히나와 드미레아에게도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꺼낸 베로니카가 앨런을 쳐다봤다. 자상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앨런을 물끄러미 보던 베로니카가 작은 목소리를 냈다. “미안해, 할아버지.” 약을 볼 때마다 로닐을 떠올릴 사람이 비단 레이첼만은 아님을 아는 탓에. “그리 산다고 정말 잊힐 기억이겠느냐. 결국은 다 생각이 나고, 그저 그러려니 하고 마는 것이지.” 이렇게 말한 앨런이 팔을 뻗어 베로니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베로니카가 베실베실 웃다가, 앨런의 품을 꼭 안았다.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살거라. 아무 걱정 말고.” 토닥토닥. 앨런이 베로니카를 달래주며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 * * - 딸랑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조그만 방울 소리가 울렸다. 어쩐지 그 소리가 오늘따라 불만 가득함을 느낀 칼리안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웃지 말지. 아직도 아픈데.” “당신이 먼저 내 사람들 건드렸잖아.” 한밤. 까맣고 적막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앨런과의 대화를 마치고 멀리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이 곳이 참 한적해 보이기에 찾아왔더니 자리를 피하는 척 도망쳤던 시오나가 있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아무 말 없이 시오나에게 달려들어 대원들의 원을 풀어줬다. “성격 나쁜 왕자님이군.” “사기 치는 엘프보다는 낫지.” 이렇게 대꾸한 칼리안이 날 없는 붉은 빛 칼에 얻어맞은 목을 주물거리며 궁시렁거리는 엘프를 잠깐 쳐다보다 무언가를 살짝 던졌다. 얼결에 잡은 것을 확인한 시오나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엘프 못 믿는다더니.” “대사막의 전사니까.” “대사막의 전사도 싫다더니.” “엘프니까.” 시오나가 실소했다. 그리고 방금 칼리안에게 받은 검은 조약돌을 품에 넣었다. “이상한 곳에 안 쓰도록 조심하지.” “당신 알아서 해.” 믿는다는 의미를 담아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바람결에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작은 발소리를 낸 레이븐이 풀밭에 앉아있던 칼리안의 뒤로 다가왔다. 고개 숙인 레이븐의 턱 밑을 몇 번 쓰다듬은 칼리안이 길고 검은 두 앞다리에 기대 앉았다. 마치 레이븐의 품에 안긴 것처럼. “왕자님이 여긴 왜 혼자 올라왔나.” “바다 보러. 그리고 혼자 안 왔어. 레이븐이랑 왔지.” “그래.” “당신은 여기 왜 왔는데.” “바다 보러.” “그래.” 친한 듯 서먹한 듯 어색한 몇 마디 말이 오가자 다시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먼 바다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네 어머니를 안다.” 그렇게 조용한 가운데 시오나가 이런 말을 꺼냈다. “알겠지. 왕비신데.” “내가 대사막에 가기 전까지 함께 지냈고. 브리지트 숲에서.” “······ 그래.” 특별히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대꾸하는 말에 시오나가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런 말에 놀라기에는 내 생이 좀 비범해서.” 시오나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가 뻔해서, 칼리안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하는 칼리안을 보던 시오나가 말을 더했다. “나는 브리지트 숲에서 태어났고 프레이야는 숲으로 쫓겨났지. 열 두 살 즈음인가······ 카르테 힐, 내 스승님이었던 분 따라서 대사막으로 가기 전까지는 프레이야와 그럭저럭 친하게 지냈다. 그 후로 본 적은 없었지만.”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여서 잘 기억은 안 나도 엄청 예뻤던 건 기억이 나는군.” “그건 나도 알아. 내가 이렇게 생겼는데.”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 때문에 좀 멍한 표정을 지어보인 시오나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성격이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프레이야와 성격이 닮았을 리는 없을 것이라 말하려던 칼리안이 그냥 다른 대답을 했다. “아무튼 고마워. 알려줘서.” 처음 시오나가 칼리안에게 화풀이 삼아 공격을 하기 직전에 ‘검은 머리, 붉은 눈.’을 말했던 것이 칼리안이라는 소드마스터를 알아봤다는 뜻인지, 아니면 친구의 아들인 소드마스터를 알아봤다는 뜻인지. 프레이야가 카이리스에 온 이유를 혹시 아는지, 프레이야의 가족들은 프레이야와 함께 지냈는지. 함께 지냈다면 프레이야를 어떻게 대했는지. 내 어머니는, 그 곳에서 잘 지내셨는지. - 쏴아아아······. 꺼내지 않을 많은 질문을 고요한 파도에 쓸려 보낸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시오나가 물었다. “더 있다 올 건가.” “응. 당신 먼저 내려가.” “그러지.” 고개를 끄덕인 시오나가 가볍고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작은 방울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다 점점 멀어져 사라졌다. 대신 그만큼 규칙적인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한동안, 혹은 영영 다시 보지 못할 짙푸른 빛의 바다.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좋은 시력으로 바라보아도 다를 것 없이 그저 적막한 바다. “저게 바다라는 거야, 레이븐. 너도 잘 봐둬.” 그 적막함이 괜스레 싫어진 칼리안이 이렇게 말을 건넸다. 푸르릉 하고 레이븐이 대답을 했다. 그리고 정말로 칼리안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바다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제 저기는 다시 못 볼 지도 몰라.” 그 바다를, 칼리안이 한참동안 바라봤다. 아무것도 채근하지 않고 주인의 등을 받치고 선 레이븐의 큰 눈에도 바다가 한가득 담겼다. 그러다 문득. 레이븐의 까만 눈동자에 파란 불빛 하나가 비췄다. 레이븐이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파란 불빛 하나가 바다 위에 띄워졌다. 하나 더. 그리고 또 하나가 더. 파도 위에 넘실거리는 파란 불빛들이 늘어났다. 어둠 가득한 파도 앞에, 바다 앞에. 니들렌이 보였다. 케인이 보였다. 새하얀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보였다. 어둠 가득한 파도 위에, 바다 위에. 니들렌의 파란 불빛이 올려졌다. 케인의 파란 불빛이 올려졌다. 새하얀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의 파란 불빛이 올려졌다. 마지막 날이 언제였는지는 몰라도. 칼리안으로부터 마지막 인사를 받은 그 왕제가 떠나간 날은 오늘이라서. 다 모르겠고 너네들 그냥 다 나와서 일단 경건한 마음으로 마법 좀 쓰라는 부군단장 말 잘 들은 마법사들의 손 끝에서 만들어진 파란 불빛들이 늘어났다. 칼리안은 어떻게 만드는지도 모르는 파란 불빛이 계속 그렇게. “······ 하.” 칼리안의 입에서 짧은 소리가 나왔다. 파란 불빛이 하나 둘, 늘어난다. 작고 작은 파란 불빛들이 파도를 따라 넘실거렸다. 새하얀 망토를 걸친 희멀건한 형님이 보였다. 그 손에 올려진 파란 불꽃 하나가 붉은 눈에 비쳤다. “또 올려주시네······.” 파란 별이 바다 너머 먼 곳으로 흘러가던 밤. 칼리안이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 제48장. 히몰리카 맛있네요(1) > 고기. 엘프의 도시를 나와 그들의 경계 영역을 벗어나니 저녁 무렵이 되었다. 사냥을 해도 괜찮을 곳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칼리안이 사라지더니 오래지 않아 산만한 멧돼지 한 마리를 질질 끌며 돌아왔다. 티 하나 없이 참 해맑게 웃으면서. 그런 칼리안의 얼굴이 마치 오랜 고난과 인내의 끝에 마왕을 무찌른 용사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한 플란츠가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내가 왕자고 쟤는 내 동생이니까. 쟤도 분명히 왕자인데. “왜······.” 차마 내뱉기 어려운 십수 개의 심란한 감상을 애써 집어넣으면서. 쟤가 저러는 건 내 탓 아니다. 체이스 탓이다. 애를 쫓아낼 거면 제대로 챙겨 쫓아내야지, 대체 어떻게 했기에 애가 혼자 밖에서 닭 잡아먹고 돼지 잡아먹고 술처먹고 벼랑에서 굴러떨어지고. ······ 그러니까 애가 저렇게 되지. 구운 대구고 뭐고 뱀이고 나발이고 일단 체이스부터 만나 해야 할 말이 참 많아진 플란츠의 입에서 깊디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런 플란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법사들의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튀어나온 넓적한 불판 위에 올려진 고기가 잘도 익어갔다. 기사 한 명이 건네 주고 간 차를 손에 들고 고기 익는 것을 기다리는 칼리안은, 배에 난 구멍 때문에 하게 된 길고 긴 단식의 끝에서 마주한 식사를 대했던 날의 몇 배는 더 신이 나 있었다. 덕분에 칼리안의 입에서 작은 흥얼거림이 흘러나왔고 곁에서 그 소리를 들은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께서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를 잊으신 듯 한데.” 노래. 어차피 누가 들을 일도 없고 듣는다 하여 그것이 세크리티아의 노래임을 알 수도 없겠지만 카이리스의 왕자가 고기를 앞에 놓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좀 이상하기는 하니까. 너무 자연스럽게 베른의 버릇을 꺼내 든 칼리안이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까먹을게요.” 미련만 가득했던 그 날의 베른. 마지막 날의 베른에게 인사를 고했다. 그러고서는 어디에도 묻지 못해 혼자 조용히 가슴에 묻으려 했던 것을 플란츠가 꺼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이가 머나먼 어딘가의 바다에 닿을 수 있게 묻어줬다. 그 왕제의 마지막을 억지로 위로한 것에 대해 칼리안이 또 서러워하지 않도록. “살만해졌나 보네요. 제가.” 그렇게 띄워진 푸른 불꽃. 발칸의 대원들이 흩뿌리듯 띄운 푸른 불빛들과 플란츠가 올려 준 푸른 불꽃을 칼리안이 봤다. 다리를 접고 웅크려 잠든 레이븐에 기대 앉은 채로, 수평선 너머로 푸른 빛이 사라져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달이 기울도록. 등 뒤에서 떠오른 태양이 짙푸른 바다를 다시 비추도록. 아주 오랫동안 바다를 봤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바다 위에 올려졌던 시나스타에 대해 플란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챙겨줘 고맙다 여길 일도 못 되었고, 잘했다 칭찬할 일도 못 되었고, 쓸데 없는 짓을 했다 타박할 일도 못 되었던 까닭에.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만해졌다고, 그 말만 해 줬다. “알았어.” “네.” 악몽 안 꾸고 제자리로 다시 잘 돌아왔다는 것만 알려줬고 플란츠는 알아들었다. “닭 먹는 엘프는 간 건가.” 플란츠 역시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칼리안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지그프리드령으로 먼저 가겠다고 했습니다. 숲에서는 엘프의 발이 가장 빠르니까요.” 특별한 이유는 없을 터였다. 분명 제대로 된 고기 먹으러 먼저 갔겠지. “그래.” “그런데 하루종일 안 보인 시오나를 이제서야 찾으시네요.” “······ 생각하느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셨습니까.” “말 이름.” “정하셨습니까.”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머릿속에 세크리티아의 고대 언어 사전 하나를 펼쳐놓는 기분으로 플란츠를 봤다. 플란츠 성격에 이번에도 분명 같은 언어로 이름을 지으려 할 것 같아서였다. “······ 꽃.” 아니나 다를까. 플란츠는 이렇게 말했고 칼리안은 꽤 의외라는 얼굴이 되었다. 그 플란츠가 하필. “왜 그런 이름으로 지으려 하시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싫어.” “네.” 말해주기 싫다는데 뭘 더 묻겠나.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먼 곳에 매어 놓은 은백색의 말을 쳐다봤고, 참 잘 길들여진 그 얌전한 말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에스티나, 입니다.” “그렇게 부르면 되겠군.” 말을 꽃이라고 부르겠다니. “네.” 파릇한 풀이 꽃을 타고 다니는 것을 떠올린 레이븐의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왕자님, 식사하십시오.” 조금 전에 찾아와 차를 건네주었던 그 기사가 다시 와서 접시 하나씩을 건넸다. 조촐하게 떠나온 탓에, 그리고 마법사들의 주머니에 테이블처럼 큰 것은 들어가지 않는 탓에, 두 왕자도 결국은 손에 접시를 들고 먹게 되었다. 물론 둘 다 그런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다른 말 없이 멧돼지 고기를 먹기 시작하는 플란츠를 보면서 칼리안이 물었다. “엘프 도시에서 챙겨온 음식들은 입에 안 맞으십니까.” “아니.” “그런데 그건 안 드시고 고기 드시네요.” “대구 먹으러 가자며.” 세크리티아 가는 길은 더 멀지 않나. 그런 곳에 가는 내내 입맛에 맞는 음식들만 골라 먹을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 놈의 얼굴에 ‘아이고 우리 형님 기특하시네’ 하는 표정이 떠 있는 것을 보며 짜증난 얼굴이 되었던 플란츠가 물었다. “넌 거기 왜 가는데.” “뱀 만나러요.” “왜 만나려는 거냐고.”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아니야.” “네.” 하나도 안 믿는 얼굴을 한 칼리안이 플란츠의 검을 가리켜보였다. “세크리티아 검은 카이리스의 것보다 강합니다. 동생이 돼서 연약하신 형님만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호위 봐드려야죠.” 시종도 하고 호위도 하고. 참 잘 짖기도 하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바쁘게 사는 동생 놈이 말을 이었다. “데블란은 제가 갈 것이라고 생각 못 할 테니까요.” “가서 어쩌려고.” “이제 생각해 보려고요. 만나면 어떻게 할지.” “······ 안 마주치는 게 나을 텐데.”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아니야.” “네.” 가벼운 말투로 대답한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을 겁니다. 혼자 가는 것도 아니니.” 혹시라도 또 악몽을 꾸면, 또 깨워 주겠지. 혹시라도 또 악몽을 꾸면, 또 깨워야 하고. 대충 그런 뜻을 담은 대답임을 알아들은 것인지는 몰라도 플란츠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식기 전에 식사 마저 하십시오. 어차피 드실 생각이면 다 드시고요. 체이스 형님이 형님보다 키 큽니다.” 그리고 접시에 담긴 고기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칼리안의 마지막 말을 신경 쓴 까닭은 아니었다. * * * 어두운 밤. 잠에 들지 못했다. 체했다. “괜한 말씀을 드렸네요.” 정확히 말하자면 소화가 하나도 안됐다. 차라리 탈이 났으면 축복의 힘이 알아서 고쳐낼텐데 키 크려고 꾸역꾸역 먹어치운 고기 때문에 생긴 문제는 축복도 그냥 무시해버렸다. 니들렌이 전해 준 진한 민트차를 다 마시고 나서도 속이 답답해서, 플란츠는 레이븐과 마주 앉아 두런두런 수다를 떨고 있던 칼리안을 불러냈다. 같은 고기를 세 접시나 비우고 발칸의 대원들과 모여 앉아 과일 잼이 가득 들어간 쿠키도 잔뜩 집어먹고, 거기에 더해 말린 사과칩까지 한가득 가져다 레이븐과 나눠먹고도 지나치게 멀쩡한 칼리안은 거절 않고 일어나 플란츠를 따라 나섰다. - 우우웅! 자고로 속이 엉켰을 때에는 싸움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형제인지라. 소화는 잘 됐지만 싸움을 거절할 생각은 없던 칼리안의 손 끝에서 붉은 불꽃이 일렁였다. 붉은 오러.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나를 오러로 바꾸어 쓰기 때문에 붉은 빛을 내게 된 독특한 오러가 두 자루의 긴 검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아직 무게를 덜어내지 않았기 때문에 동시에 들고 휘두를 수 없는 자신의 두 검 중 무엇을 쓸까 고민하다 새로 얻게 된 ‘시나스타’를 뽑아 들었다. 얼핏 청량한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한기가 드는 빛의 검날이 예리한 기운을 머금었다. - 카아앙! 별빛인듯 달빛인듯. 붉고 푸른 세 자루의 검이 얽혀든다. 브리센의 검을 쓰려면 브리센의 검을 막을 줄도 알아야 하기 때문에. - 카강! 카아앙! 칼리안의 검이 만들어내는 붉은 꽃을 플란츠가 막아서고 갈라내기를 반복했다.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검을 막아낸 뒤 허리를 숙여 왼쪽에서 휘감아오는 두 번째 공격을 피했다. 그 뒤에는 발을 박차며 몸을 띄워 올려 칼리안의 어깨죽지를 향해 검을 내뻗었다. - 카가강! 캉!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는 대신, 칼리안은 적당한 속도로 플란츠의 공격들을 피하며 두 검을 하나로 모아 쥐었다. 그리고 회수되어 되돌아가는 청은빛의 검을 올려친 뒤 다시 나누어 들고 양 쪽에서 찔러 들어갔다. - 타당! 재빠르게 검을 휘둘러 양쪽 공격을 모두 막은 플란츠가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강한 힘으로 칼리안의 옆구리를 노렸다. - 쉬익! 파공음이 이어진다. 오른쪽 검을 거꾸로 들고 다가오는 공격을 막은 칼리안이 왼팔을 휘둘러 플란츠의 검을 내리쳤다. 급격하게 방향이 꺾인 검을 다잡기 위해 이를 악문 플란츠가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며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칼리안의 왼쪽 검이 공격을 막았고 오른손에 들린 검이 플란츠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 카아앙! 카앙! 숲을 울리는 메아리는 없었다. 주변에 넓게 퍼진 반투명한 막 때문이다. 대신 막 안의 두 사람에게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 카앙! 캉! 카가강! 연두색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눈빛을 마주 대하는 새빨간 눈이 찬 기운을 가득 머금었다. “······ 어깨를 찌르고 옆구리를 베는 것으로는 안 죽습니다.” 작은 미성이 플란츠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번쩍하는 느낌이 들며 하늘에서 붉은 검이 내리꽂혔다. - 카아아앙! 양 손으로 받쳐든 검을 올려 떨어지는 칼날을 막아낸 플란츠가 재빨리 발을 움직였다. 곧 플란츠가 있던 곳으로 날아오던 두 번째 검이 다시 회수되어 돌아갔다. “특히 검이 가볍다면 절대로 못 죽입니다.” 모를 리 없는 말이겠지만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지금 플란츠는 칼리안의 심장을 노린 적도 없었고 목을 찔러 들어간 적도 없었다. 계속하여 팔과 다리, 어깨와 복부만 노렸다. - 카앙! 카아앙! 두 개의 붉은 검이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날아들었다. 공격 하나를 올려친 뒤 두 번째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물리려던 플란츠를 향해, 세 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 올려친 반동에 튀어오르는 검을 없애버리고 다시 만든 칼리안이 플란츠의 심장을 노리며 달려들고 있었다. 하나는 심장으로, 하나는 목으로. 어느 것을 피하고 어느 것을 막을 것인지. - 탕! 카앙! 순간적인 계산을 끝낸 플란츠가 손잡이를 돌려잡아 검면으로 심장을 막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검을 올려쳤다. - 카아앙! 동시에 칼리안의 네 번째 공격이 곧바로 이어졌다. 가벼운 만큼 예리한 날붙이의 오싹함을 느낄 새도 없이, 어느새 목에서 따끔한 감각이 전해졌다. 눈에 보이지도 않게 뻗어 나온 다섯 번째의 검날이 플란츠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는 것을 그제야 느꼈다. 언제나와 같이 이번에도 칼리안의 검에 목이 베인 것을 깨달은 플란츠가 검을 늘어뜨렸다. 그런데 그때. - 쉬이익! 붉은 검이 플란츠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멈출 생각 없다는 듯 조금도 주저함 없이 들이닥치는 검을 본 플란츠가 내렸던 팔을 들어올렸다. “아······.” 늦었다. 막지 못한다. 칼리안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심장을 향해 깊숙이 박히는 금속의 느낌을 저도 모르게 떠올리면서, 플란츠가 한 걸음을 뒤로 물렸다. - 카가각! 그리고 쇠가 긁히듯 강제로 멈추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집어넣기 전에 마음을 먼저 놓으시면, 형님 죽습니다.” 목에 난 상처에서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 가슴 부근을 쳐다본 플란츠의 눈에 두터운 실드가 보였다. 실드 한가운데 박혀 멈춘 칼리안의 검 끝이 함께 보였다. “제대로 공격하실 수 있을 때까지 저는 대련 안 해드릴 겁니다.” 조금 딱딱해진 목소리로, 칼리안이 말했다. 그리고 등을 돌려 저벅저벅 먼저 걸어가버렸다. * * * 밝은 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자 왕성 이곳 저곳에 놓인 마법 등불이 빛났다. 후원과 별궁을 잇는 산책로의 양 옆에 늘어선 나무들이 등불의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이미 진작에 별궁으로 돌아갔어야 할 시간이었으나 루이즈는 몇 번째 그 산책로를 오가며 계속 걷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저 마음이 불안하고 시끄러워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세자가 전하께 간 지가 한 시간이 넘은 듯 한데, 왜 이리 오래 있는지.”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별 일 없을 겁니다.” 대답을 대신해 작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집무를 논할 시간도 아닌데 갑자기 부르셨다 하니 마음이 소란하구나.” “정 그리하시면 제가 한 번 다녀와 볼까요.” 멀리 본궁에 보이는 체이스의 방에 불이 켜지지 않는 것을 올려다보며 꺼내진 말에, 함께 걷던 시녀가 물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루이즈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되었다.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이 전하께 알려져서 좋을 것 없으니.” 또각또각, 루이즈의 발이 몇 걸음을 더 걷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루이즈는 고개를 올려 체이스의 방과 데블란의 집무실을 한 번씩 쳐다봤다. “전하께서 수면향을 다시 올리라 하신 것은······.” “그것은.” 잠시 말을 멈춘 루이즈가 몇 걸음을 더 걷다 입을 열었다. “지난 번에 향을 물리라 하신 일로 향을 모두 치운 탓에 남은 것이 없구나. 그 일은 내가 전하께 따로 말씀을 드릴 테니 우선 그냥 두거라.” “알겠습니다.” 시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루이즈의 시선이 또 본궁 쪽을 향했다. 불안함 마음을 가득 담은 시선의 끝. 그 곳에서 데블란의 집무실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법의 기운이 담긴 샹들리에가 가장 밝은 빛을 내고 있던 까닭이다. 작지만 화려한 세공의 샹들리에가 보랏빛 눈을 비췄다. “하실 말씀이 없다면 이만 물러가기를 허락해 주십시오.” 집무실로 불러와 앉혀둔 채 한 시간을 있었다. 서류를 살피고 일을 하다 몇 번의 기침을 내뱉기를 반복했을 뿐,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한 시간을 앉아있던 체이스의 말에도 데블란은 별다른 반응 없이 서류를 한 장 넘겼다. 그리고 기침을 했다. 밝은 등불 아래, 체이스의 두 눈이 잠시 감겼다 올라왔다. “내가.” 데블란의 입이 그제야 열렸다. “생각을 해 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생각을 했다.” 가라앉고 쉰 목소리. 하지만 누구보다 침착한 목소리. 그 소리를 비로소 들은 체이스는 데블란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앉아있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도 않았다. “무슨 생각 말씀이십니까.” “르메인의 입을 빌려 나에게 말을 건넨 이에 대해서.” 탁, 하고 넘겨보던 서류를 덮은 데블란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움직임으로 걸어와 체이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소파가 깊숙이 내려앉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든다. “우연히 찾은 나의 새를 내세워 후작을 해한 죄에서 벗어나고. 그 일을 나의 새에게 덮어씌워 나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 핑계를 만들고. 더불어 나의 숨죽임을 요구하고. 내가 쫓던 또 다른 새를 찾아내더니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제 것으로 만들고.” 톡, 톡, 톡. 깍지를 낀 채 무릎 위에 올려 둔 데블란의 손 끝이 반대편 손등 위를 천천히 두드렸다. “그래서 오랫동안 생각을 하였다.” 선왕의 눈을 고스란히 닮은 체이스의 보랏빛 눈을 바라보는 데블란의 손가락이 멈췄다. 작은 기침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정도의 소리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데블란도, 그리고 체이스도. “네가 굳이 만나러 갔던 그 아이가 어떻게. 나와. 그렇게까지 똑같은 생각을.” 톡, 톡, 톡. “······ 하는지.” 체이스가 대답 없이 데블란을 마주 바라봤다. 데블란의 손가락 끝이 반대편 손등에 긴 호선을 하나, 천천히 그려냈다. < 제48장. 히몰리카 맛있네요(2) > 고요한 보랏빛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머뭇거리지 않고 앞에 앉은 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 생각의 끝에 제가 있을 겁니다. 자신의 것과 참 많이 닮은 청은색의 짧은 머리를 스치듯 본 체이스가 자신의 것과 아주 많이 다른 짙은 갈색의 두 눈을 직시했다. 뱀의 것보다 더 소름끼치는 눈. 그 눈을 체이스는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똑바로 마주보았다. - 저라면 제 정체에 대해 깊은 의심을 하게 될 겁니다. 데블란 역시 다를 리 없으니 진실을 확인하고자 형님을 들춰보려 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곳에 오기 전 칼리안이 전해 온 말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 동요하시면 안됩니다. 저를 의심한다면 의심하게 두세요.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그냥 두세요. 섣부르게 의심을 걷어내려 하거나 속이려 하면 더 집요하게 굴 겁니다. 어차피 곧 제온과 제가 연관되었을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질 테니 그때까지는 그대로 두시면 됩니다. 아침의 하늘을 보고 그날 비가 올지 오지 않을지를 가늠해 소소한 내기를 하던 것과는 달랐다. 체스판을 앞에 두고 공방을 나누다 투닥거리던 일과도 달랐다.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 여기신다면······.” 그래서 체이스는 지금 이 자리에서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도록, 숨을 참지 않도록 온 신경을 썼다. “한 번 만나보시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데블란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속내를 예측하기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데블란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말. 그런 말을 머뭇거림 없이 꺼내는 체이스의 눈을 보았고 목소리를 들었다. 손가락 끝에 놓였던 미소가 데블란의 얼굴로 옮겨갔다. 동전 한 닢보다 많은 것이 걸려있는 예측이 오간다. 체스 말 대신 목숨을 올려둔 수 싸움이 시작되었다. “됐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그 쪽이 아니니.” 데블란은 칼리안에게로 향했던 고개를 돌렸다. 직접 만나는 것 역시 흥미가 동하는 일이지만 보다 정확한 판단이 서기까지 칼리안에 대한 관심을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그리고 이번 귀족 회의에는 참석하지 말고 쉬거라.” 귀족 회의에서 데블란의 병세와 체이스를 향한 진짜 속내를 꺼내 놓도록 만들려 했다. 그리고 데블란은 그런 생각을 이미 다 읽었다는 듯 체이스를 막았다. 기침 소리가 이어졌고, 그 틈을 타 아주 잠시 눈을 내리 뜬 채 생각을 정리한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래. 모를 리가 없지. 데블란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은 것에 대해 실망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끝날 싸움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니까. “회의에 참석치 말라는 말씀을 위해 저를 부르셨습니까.” “아니. 그보다는.” 다시 한 번 톡, 하고. 데블란의 손 끝이 손등에 닿았다. “그저 잠시 적적하여 불렀느니라.” 일국의 왕세자를, 자신의 아들을 불러다 놓고 한 시간을 기다리게 했다. 아는척 한 번을 하지 않고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은 채로 한 시간을 앉혀놨다. 그저 잠시 적적하여서.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심심해서. ‘밑바닥.’ 체이스를 밑바닥으로 내려보내려는 것이다. 무엇을 꾀한다 한들 너는 결국 내 아들이니. 아무리 벗어나려 하여도 나를 거스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리하여도 괜찮지 않겠느냐. 나는.” “네. 그리하셔도 괜찮습니다.” 자애로운 얼굴로 자신을 보는 데블란을 향해 체이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여전한 눈으로 데블란을 바라봤다. 당신의 생각대로. 나는 당신의 아들이니. “······ 아직은.” 짧은 말을 덧붙인 체이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데블란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려냈다. * * * 넓은 바다를 붙들어두는 파도 소리 같았다. 숲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바람 소리 같았다. - 쏴아아아······! 비가 내렸다. 창 밖에서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에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흔들렸다. “다행입니다. 도착하고 나서 비가 내리니.” 이 남쪽 땅에도 이제 가을을 맞이하려는 것처럼 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레릭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보다 어렸을 적의 루시나 지금의 안네는 물에 젖는 것을 퍽 싫어했다는데, 생각하기로 칼리안도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비가 내리는 것을 늘 못마땅해 했다. 혹시 그것도 바다에 잠기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그래.” 높임말도 반말도 아닌 애매한 말로 또 말을 끝낸 것을 지적하는 대신, 플란츠는 그냥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전날, 대련을 마치고 돌아간 칼리안이 그대로 잠자리에 들고 플란츠는 밤새 생각에 빠져들고. 그렇게 아침이 되어 다시 출발한 뒤 늦은 오후가 되었을 즈음 지그프리드령으로 돌아왔다. 시장저에 와 목욕을 끝내고 저녁 식사를 위해 나오니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를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창문 닫을까요. 형님 감기 걸리겠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제대로 된 고기 요리에도 칼리안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저녁 식사를 했고, 바람이 불자 이런 말만 꺼냈다. “둬.” “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고. 시종인 양 굴면서 신경을 쓰는 건 여전한데 무언가 평소와 많이 다르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미 잘 알고 있는 플란츠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안 짖네, 오늘은.” “제가 그랬습니까.” “그랬어.” 쉼없이 짖던 동생 놈이 오늘 하루 참 정중하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겠다 말하려던 칼리안이 플란츠를 보며 웃었다. “비가 오려고 그랬나보네요.” 그러더니 애먼 비 탓을 했다.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을 들은 플란츠가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벽에 기대어 둔 검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런 플란츠를 잠시 지켜보던 칼리안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고 칼리안은 소리 없이 일어나 예를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검집이 없어 적당히 천으로 감싸두었던 것. 천이 흘러내려 드러난 청은빛의 검이 반짝이고 있었다. 플란츠의 시선이 그 검에 못박힌 듯 머물렀다. 흔들리는 불빛에 검신에 길게 새겨진 검은 글씨가 함께 일렁였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전날 밤부터 내내 답답했던 것은 속이었는데 머리까지 울렁거리는 기분이 든다. - 제대로 공격하실 수 있을 때까지. 동생 놈이 왜 저러는지 모르지 않았다. 본래부터 칼리안의 심장을 노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도 이미 알았다. 키리에에게도, 드미레아에게도, 물론 칼리안에게도. 분명 심장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었다. 그런데 지난 번 대련에는 그렇게 하질 못했다. 칼리안의 경고를 듣고 나서도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못했다. ‘하필 지금.’ 하필 지금. 세크리티아에 가려고 하는 이 때에. 그래서 칼리안이 저렇게 군다는 것을 안다. 평소였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닥달하듯 말하고 행동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지금 이런 때가 아니었다면 그냥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을 놈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꽃 한 송이 놓여 있지 않은 테이블 위를 훑듯이 본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다들 왜 술을 안 마시는데. 설마 마실 줄 아는 사람이 없나?” “저희는 왕궁 돌아가면 마실 겁니다.” “너희 부군단장이 군기를 잘 잡아놨나 보군.” “다른 군기는 부군단장님께서 잡아주셨는데 술 군기는······ 여하간 오늘은 힐 경 혼자서 마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식당 옆에 위치한 보다 큰 연회장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뒤로한 채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우두커니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생각을 했다. 왜 갑자기 제대로 칼을 들지 못하는지, 칼리안은 가늠했고 플란츠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 지난 일들을 되돌려가며 기억을 정리했다. 잊는 것 잘 모르는 머릿속으로 그 이유가 될 만한 것을 찾아 하루씩 하루씩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바다 위에 올린 시나스타. 소라 껍데기. 파도 소리. 바나나 나무. 고래 울음 소리가 머릿속을 지나갔다. 무지개 속에 들어갔던 일과 모닥불 불티를 바라보던 일을 지나쳐 계속 생각을 했다. 동생 놈 손에 잡혀 푸드덕거리는 닭을 보면서 저 닭이 짐승인지 내 동생이 짐승인지 잠깐 혼돈할 뻔한 일, 이곳으로 출발하던 날 루시와 안네를 마지못해 레릭에게 맡긴 일이 떠올랐다. 반지 훔치러 3층에 내려갔다가 꽉꽉 잠긴 창문만 확인하게 된 바람에, 왕궁에서 나가기 전에 그 왕세자에게 나도 그냥 통신용품부터 하나 보내버려야 되겠다고 굳게 결심하며 4층으로 다시 올라갔던 날이 생각났다. 그렇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한참동안 생각을 하다가, ‘······ 아.’ 깨닫게 되었다. 더는 생각하는 것을 막지 않은 탓에 자신도 모르게 퍼져나간 생각이 어떤 사실 하나를 눈치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플란츠가 청은색의 검을 들고 방을 나섰다. 그 뒤에는 거리낄 것 없다는 얼굴로 시장저에 마련된 귀빈실 중 비어있지 않은 다른 한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배려심은 두 고양이에게 다 퍼주고 있는 탓에. 고양이들에게 퍼주고 그나마 남는 실낱같은 배려심은 사고치는 발칸 대원들을 칼리안의 시야에서 가려주는 일에 쓰고 있어서. “일어나.”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동생 깨우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플란츠가 칼리안을 불렀다. 잠에 들었든 아직 들지 않았든 상관 없이 문이 열림과 동시에 정신을 차렸을 칼리안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얘기.”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멀찍이 문 앞에 선 플란츠를 쳐다봤다. 의외로 성격이 급해서 할 말은 곧바로 해야 하는 사람임을 잘 안다. 그런데, 또 의외로 순해서 피곤하니 내일 아침에 얘기하자 하면 알겠다며 되돌아갈 사람이라는 것도 안다. “네.” 그래서 그냥 군말없이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란츠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칼리안과 슬레이만이 이야기를 나눴던 그 곳이었다. 지붕이 있는 티 테이블도 있었건만 플란츠는 굳이 지붕도 없고 정원도 없는 빈 곳으로 걸어가 섰다. 마뜩치 않은 얼굴로 내리는 비를 보던 칼리안이 자박자박 걸어 그 곁으로 갔다. “말씀하십시오.” 화가 난 것과는 조금 다른,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 기껏 잘 씻고 밥 잘 먹고 자다 말고 비 맞으러 나와버려서 더더욱 가라앉은 목소리. “내가 아니라 아우님 때문인데.” 밥 잘 먹고 일찌감치 잠든 사람 깨워 불러내서는 내가 아니라 너 때문이다 하는 말을 듣고 그 뜻을 알아들으면 시스파니안이다. 아무리 칼리안이라 해도 저 말은 너무 어려웠다. 다행히 스스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는지, 플란츠는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칼리안을 마주보며 설명을 더했다. “내 아우님께서 오해를 하신 듯 하다고.” “무슨 오해 말씀이십니까.” “내가 내 칼에 피 묻는 걸 꺼리게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오해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세작을 만난 즈음부터 검을 들 때마다 생각이 많아지더니 어제는 제대로 된 공격 한 번을 못하셨지 않습니까.”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고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새빨간 눈에서 시선을 돌려 곁을 바라보니 어느새 사일런트 막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데블란을 찾아가겠다 말씀하신 분께서요.” 플란츠가 가져온 검을 살짝 들어올려 보이며 대답했다. “칼 쓰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안 알려줘도 알아. 검이 무거운 것도 알아. 알면서 배우기로 한 거니까 피할 생각 없어.” 드미레아의 말대로 생과 사를 가르는 물건이다. 그것을 잊고 배운 적 없었다. 평생 이 칼에 피 묻힐 일 없이 곱게 대련이나 계속 할 것이라 착각한 적 없었다. 지키기 위해서든 아니든 결국 누군가에게는 해를 입힐 물건이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었다. “그러니까 그 세작 때문이 아니라고.” 입 안의 독을 삼킨 세작의 마지막 모습을 다시 떠올려보던 플란츠가 눈꼬리를 잠시 찌푸렸다. 며칠 잠을 설쳤을 만큼 썩 좋은 기억이 아닌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대련 중에 검을 물린 것은 분명 아니었다. 검에 피가 묻으면 또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 때문에 검을 놓을 생각 없었으니까. “아니면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러십니까.” “너. 후작저에서 뭘 봤는지 알 것 같은데.” 그날 에반의 저택에서, 칼리안이 무엇을 보고 누구를 떠올려 칼을 멈췄을지에 대해 플란츠가 눈치를 챘다. “검 집어넣기 전에 마음 놓지 말았어야 했던 건 내 아우님 아닌가.” “그날 제가 브리센 후작저에서 본 아이 때문에 형님을 떠올렸고, 같은 이유로 형님 검도 막지 못할까봐 공격을 못하셨다는 겁니까.” 플란츠가 뭘 생각했는지 이제야 감을 잡았다는 듯한 얼굴이 된 칼리안이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 했을 때 플란츠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같은 검에 같은 피 두 번 묻을까봐.” 하필이면 그 검으로, 하필이면 또 플란츠가, 하필이면 칼리안을 다시 다치게 할까봐 공격을 못했다는 소리다. 칼리안의 머릿속에 또 예전의 기억이 떠오르고 그 때와 지금을 혼돈해서 검을 놓을까봐. “아······.” 어떤 얼굴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진 칼리안이 몸을 잠깐 숙였다.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도무지 가늠이 안됐다. 고양이 한 마리가 저보다 훨씬 큰 멍멍이랑 싸우다가 멍멍이 다칠까 걱정하는 마음이 들어서 발톱 집어넣었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지 않나. 플란츠의 저런 생각이 진짜 말도 안되는 웃긴 이야기라는 것을 아는데 웃을 수가 없었다. 예전의 칼리안이 플란츠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알아서, 자신만큼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플란츠가 저런 결론을 낸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어서 웃질 못했다. “설명해드릴게요. 제가.”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몸을 일으키는 대신 고개만 들었다. 그날 칼리안이 무엇을 봤는지 반만 눈치채버려서 완전히 다른 짐작을 해버린 형의 완두콩같은 눈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말해.” “리리에입니다. 그 아이 이름.” 에반의 저택에서 보았던 아이. 지금은 드미레아가 보호하고 있는 아이를 입에 담았다. “생각하셨을 것처럼 형님과 닮기는 닮았습니다.” 체르밀 궁에 오고 몇 년 동안 칼리안은 밖으로 나온 적 없었다. 너무 어렸던 탓도 있었고 칼리안을 돌보던 시녀들이 위험하다며 내보내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테라스 밖을 봤고 그 호수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답답했다기보다는 그냥, 호수가 반짝이는 것이 문득 너무 예뻐서. 그래서 몰래 밖으로 나갔다. 아니. 나가려 했다. 체르밀 궁에 하나밖에 없는 계단까지 몰래 나갔을 때 누군가가 올라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당황한 칼리안은 내려가려던 발을 돌려 한 층을 올라갔다. 그리고 그 복도 끝에 서 있던 형을 처음으로 만났다. “색은 달랐지만 뒤로 묶은 머리며 얼굴이며 눈빛이며. 제가 처음으로 봤던 형님 모습과 많이 닮았어요. 그래서 놀라기는 했습니다. 놀란 것은 맞습니다.” 딱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복도 끝에서 나타난 리리에를 보게 되어서, 순간적으로 그 날의 기억이 튀어나와서 놀라기는 했다. 놀란 것은 맞다. “그런데 칼을 멈춘 건 그것 때문이 아니라. 물론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또 다른 이야기 하나를 꺼냈다. 다치고 난 뒤 찾았던 체이스에게는 전하지 못했던 말. 자신이 칼을 멈춘 진짜 이유를 천천히 입에 올렸다. 리리에를 보고 그 날의 플란츠를 떠올리다 딱 그만한 또 다른 어린아이를 연상하게 되었던 일을 전했다. 그 아이를 어떻게 했었는지도 함께 알렸다.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그런 일을 했는지도 이번에는 숨기지 않고 전부 다 이야기를 했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비를 맞으면서. 곁에 서 있던 플란츠를 올려다보다가 내리는 비에 눈이 감겨 다시 앞을 보면서, 굳이 숨기지 않고 얘기를 해줬다. 이번에도 플란츠는 그 말을 다 들었다. “그래서 칼을 멈췄던 겁니다. 말씀드리기 어려운 이유여서 넘어가달라 했었고요.” “······ 그래.” 그 때의 체이스나 키리에에게 하지 못했을 말일 터였다. 그러니 누군가에게는 처음 꺼내 놓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서 인상 하나 안 찌푸린 얼굴로 그냥 들었다. 들어줬다. “그런 걸 걱정하셨습니까.” 칼같이 돌아오던 답이 이번에는 없었다. 작은 소리로 웃은 칼리안이 몸을 일으켜 제대로 선 뒤 말을 이었다. “그 칼로 꼭 무언가를 베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부터 알려드리고 싶었는데 꼭 무언가를 베어야만 할지도 모를 곳에 먼저 가게 됐네요.” “알고 있어.” “만약 그래야 할 상황이 되면 생각이 앞서서 검을 먼저 내리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아. 그것도.” “그리고 저는 형님한테 두 번 죽을 사람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플란츠가 한참동안 칼리안을 쳐다봤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꺼낸 칼리안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형님 동생이, 검을 좀 잘 씁니다.” “······ 알아. 이제.” “네.” 칼리안의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어렸다. “실수하기에는 형님 너무 약하시기도 하고.” 생글거리는 동생을 본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참 오랜만에 말려 올라갔다. 이제는 반말로 짖는다. 지적한다고 해도 저 버르장머리 평생 안 고칠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형님이 돼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고. 그러니 뭘 먼저 말해줘야 하나 고민은 되는데 쉬이 하나를 먼저 짚어 줄 수가 없다. 그래서 말 대신 그냥 팔을 뻗었다. - 카아앙!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세 개의 검이 다시 맞붙었다. < 제48장. 히몰리카 맛있네요(3) > 기분이 꽤 좋아졌다. 비가 조금 잦아들어서인지 조찬에 생굴이 놓여서인지 혹은 지난 밤에 플란츠와 제대로 대련을 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지만 기분은 괜찮았다. 덕분에 칼리안은 꽤 기꺼운 마음으로 대답을 전했다. “네. 마음에 드는 제안이기는 합니다. 지그프리드 공.” 레몬즙과 올리브유, 그리고 약간의 마늘이 섞인 소스를 그 좋아하는 생굴 위에 살짝 얹어 한 입 먹은 칼리안이 맞은편에 앉은 슬레이만을 쳐다봤다. 정작 남쪽에 사는 것은 본인이면서 익히지 않은 굴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던 슬레이만은 저민 마늘을 올려 구운 가리비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시오나는, 샐러리와 양파를 넣고 쪄낸 홍합이나 삶은 새우가 들어간 샐러드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석류 소스가 올려진 스테이크에만 손을 댔다. 거듭 말하지만 엘프가 맞다. “그런데 이 내용이 공의 의견인지 아니면 시오나의 의견인지, 그건 좀 궁금하네요.” 대답은 옆에서 들려왔다. “내가 간다고 했다.” 칼리안은 로즈마리 향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양고기를 품위있게 잘라 입에 넣으며 우아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싶어 덧붙이지만 전전날에 멧돼지 잡아오던 그 왕자가 맞다. 시오나의 말이 이어졌다. “당분간 대사막 쪽과 서신도 주고 받고 너와도 정보를 나누려면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얘기를 꺼냈다. 때마침 공작저에 검술 선생도 필요하다 하니까.” “그래. 괜찮은 생각이야.” 시오나가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머무르겠다고 했다. 물론 지금 있는 공작령이 아니라 드미레아가 있는 카이리시스의 공작저를 말함이다. 제온에 대한 조사라는 목적을 숨기고자 리리에의 검술 선생 명목으로 가는 것이라지만, 만약 그곳에 머물며 누군가의 검술을 지도한다면 드미레아의 검을 더 많이 봐주게 될 터였다. 다만 시오나는 카이리스 국적도 아니었고 애초에 사람도 아니었다. 소드마스터라 하나 그것 만으로 수도에 입성하기는 어려웠으므로 누군가의 신원 보증이 필요했다. 그런데 르메인의 처벌 때문에 올해 안에 수도에 못 들어가는 슬레이만이 보증을 해줄 수가 없지 않나. 그래서 이렇게 칼리안에게 부탁을 하는 중이었다. 대신 칼리안이 공석일 때 란델이나 제온, 혹은 그레이가 별다른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왕궁도 잘 지켜주겠다는 조건을 붙였다. 드미레아의 검을 봐주는 것도, 그리고 자리를 비울 칼리안을 대신해 앨런과 함께 왕궁을 지켜봐주는 것도 칼리안으로서는 참 환영할만한 일이다. “혹시 다른 목적 더 있는 건 아니지? 내가 좀 귀한 몸이라 함부로 이름 팔면 안되거든.” 너무 귀해서 드미레아의 바나나 몇 송이에 홀라당 팔렸던 이름임을 알 리 없을 시오나가 고개를 끄덕이다 대답했다. “엘프 의심하는 버릇 좀 버리지 그래. 네가 세크리티아에 갔을 때 네 그 거대한 집에 별 일 없으려면 내가 수도에 있는 게 낫지 않겠나.” “알아. 그래서 나도 마음에 드는 제안이라고 한 거야.” 앨런이 있다지만 집 지키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으니 괜찮은 제안인 것은 맞았다. 대신 한 가지 작은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이동마법진은 내가 못 열어줘. 그거 내 권한 아니거든.” “마법진을 쓰고 있었나. 마법사들이 데려온 줄 알았더니.” “사람들 끌고 이동하는 건 내 스승님도 아직 못하시는데 그걸 어떻게 하겠어. 마법진 쓰고 있으니 같이 갈 거면 내 형님께 허락 받아 와. 수도에 머물 수 있도록 신원 보증은 내가 해 줄 테니까.” 이동 마법진 사용 인원에 엘프 한 명 추가할 권한이 없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으나 칼리안은 한 번도 그 쪽에 자신의 이름을 써본 적 없었다. 키리에가 운철을 가져오기 위해 처음으로 마법진을 썼을 때에도 앨런을 거쳤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던 마법진 사용 권한을 발칸에 넘겨주기 위함이었다. “어려울 것 없지. 알겠다.” “좋아.” 이번 일을 통해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마지막 소드마스터도 찾고 그 소드마스터가 제온에 이용당하지 않게 주변에 두고 살피면서 칼리안의 빈자리도 잘 채우게끔 할 수 있게 된 칼리안이 조금 더 좋아진 기분으로 생굴을 더 먹었다. 그리고 치즈와 함께 구운 조개 관자를 먹고 옅은 금빛이 도는 와인을 넘기던 슬레이만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혹시 인근에 괜찮은 양조장이 있습니까. 히몰리카와 시즐리누를 좀 살까 하는데.” 술 끊었다던 왕자가 갑자기 독주와 와인을 사겠다며 양조장을 찾는 것에, 무슨 까닭인지 알았다는 듯한 얼굴을 한 슬레이만이 대답했다. “굳이 양조장까지 가실 일 없이 인근에 주류 판매점이 있습니다만. 마나실 후작에게 선물하실 생각이라면 제가 준비를 해드리겠습니다.” “스승님께 선물할 것은 맞지만 구경도 좀 할 겸 잠시 다녀오려고 합니다. 오늘 중으로는 수도로 출발하기 힘들 것 같은데 계속 안에만 있기에는 조금 답답해서.” 결국 그냥 바람이나 쐬고 오겠다는 소리였다. 슬레이만이 준비해주는 술의 품질이 당연히 더 좋겠지만 앨런과 처음으로 같이 마실 것은 직접 발품을 팔아 준비하고 싶어서 적당히 핑계를 댔다. 게다가 앨런이 옆에 있으면 술이야 어떻든 그냥 무조건 좋을 테니까. * * * 어쩌다보니 플란츠는 칼리안의 표정을 거의 다 외웠다. 굳이 모든 사람의 표정을 다 외우고 사는 것은 아니었으나, 오래 전 언젠가 생에 짓눌려 당장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신나게 웃던 칼리안을 알아본 뒤에는 그냥 좀 외워놓기로 했다. 물론 그 구분의 기준을 제공해 준 것은 얀이었다. 칼리안이 웃고 있는데 얀의 표정이 괜찮았을 때와 아니었을 때를 적당히 보아가며 외워뒀다. “내 아우님께서는 나를 참 잘 사용하시는군.” “형님 뿐 아니라 사람들을 잘 써먹는 겁니다.” 그리고 칼리안은 플란츠의 표정에 거의 신경을 안썼다. 파릇파릇한지, 삶아져 있는지, 아니면 절여져 있는지. 그냥 그 정도만 대충 구분하고 말았다. 사람이 너무 세심해도 피곤하지 않겠나. 두 번째 사는 인생인데 적당히 넘겨가며 즐겁게 살아야지. 이런 칼리안의 긍정적인 마음가짐 덕분에 오늘의 플란츠는 좀 짜증이 났다. 플란츠의 얼굴이 썩 파릇파릇하지는 않았지만 삶아진 것도 아니고 절여져 있는 것도 아니라서 칼리안은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형님께서 얼마나 힘들게 만들어두신 대외 전시용 인격인데요. 그냥 묵혀두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이럴 때라도 아낌없이 써드려야죠.” 또 흥얼거리는 칼리안의 손에 들려있던 두 번째 술병이 레이븐의 안장에 매어 둔 공간 가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플란츠는 어제 하루 못 짖은 한을 풀겠다는 듯 하루 종일 짖는 동생에게 화를 내는 것도 포기한 얼굴이 됐다. 그러니까 그날 아침. 조찬을 마친 뒤 니들렌을 찾아간 칼리안은 ‘플란츠의 의견’이라며 발칸 전원에게 하루짜리 휴가를 줬다. 왕궁을 떠난 그 날부터 이미 매우 만족스러운 나날을 잘 보내고 있던 니들렌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저희가 이 이상 어떻게 더 쉬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왕자님.’ 진심어린 대답에 칼리안은 나가서 사고치지 않는 선에서 마음대로 놀아라 하고 다시 말했다.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적당히 술도 마시라고 돈까지 건네줬다. 많이 줬다. 술이 허락된 것에 대해, 칼리안의 누나 아니라 이모 뻘은 될 니들렌을 포함해 나머지 대원들이 엄청 신나했다는 사실을 플란츠는 아마 모를 거다. 물론 부군단장이 소라 껍데기를 썩 마음에 들어 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대원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도 몰랐지만. 아무튼 그렇게 발칸을 잘 챙겨준 칼리안은 방 안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완두콩을 대뜸 데리고 나왔다. 가뜩이나 광합성도 못하는 이런 날에 감기까지 걸리면 안 되니까 방수와 온도조절 마법이 걸린 검은 로브로 완두콩을 잘 덮어준 뒤 에스티나의 안장 위에 올려놨다. 그 뒤에는 레이븐에 올라 완두콩 태운 에스티나와 함께 슬레이만이 알려준 양조장으로 출발했다. ‘술 참 잘 드시는 내 형님께서 향이 좋지 않다 하시네.’ ‘술 좋아하시는 내 형님께서 색이 탁하다고 하시는데.’ ‘술에 일가견이 있는 내 형님께서 이것이 가장 좋겠다 하셨네.’ 그리고 이렇게. 플란츠가 애써 만들어 둔 ‘대외 전시용 망나니 인격’을 매우 효과적으로 써먹어가며 두 양조장에서 제일 나은 술을 한 병씩 샀다. 앨런과 함께 마시기로 한 술이라 시음은 안했어도 다년간 쌓아 온 경험을 바탕으로 잘 골라 샀으니 분명 괜찮을 터였다. 플란츠가 망나니 연기를 왜 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칼리안으로 다시 눈을 뜬 뒤부터만 따져봐도 꾹꾹 참고 플란츠에게 당해 준 일이 어디 한 둘이어야지. 그러니 그 망나니 이렇게 써먹기라도 해야 서로서로 마음이 좀 가벼워지지 않겠나. “형님이랑 같이 오니까 좋네요.” ‘착하고 예쁘고 형님 심부름도 잘 하는 꽃같은 3왕자’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고 플란츠는 깊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옛날 생각도 나고.” 이런 얘기가 덧붙는 통에 이번에도 화는 못 냈다. “다 샀으면 가.” “네.” 공작령 자체가 워낙 넓다 보니 두 곳만 들렀음에도 어느새 오후가 되었고 비가 그쳤다. 흙길 밟는 두 마리 말 위에 앉은 채로 타박 타박, 한동안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며 나선 길을 되돌아갔다. 고삐 하나를 제대로 잡지 않아도 레이븐은 알아서 길을 찾아간다. 레이븐, 저렇게 생긴 풀은 먹으면 안 돼. 레이븐, 비가 온 뒤에 고여 있는 물은 괜찮지만 맑은 날에 고인 물은 마시면 안 돼. 레이븐, 이런 길을 다닐 때에는 돌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해. 하고. 칼리안이 가끔씩 이런 저런 말을 건네면 귀를 움직이든 푸르릉 소리를 내든 고개를 들어 보이든, 대답도 잘했다. 그런 칼리안의 모습을 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너도 답답할 것 같은데.” 왕궁 안에 있을 때와 밖에 있을 때의 칼리안이 완전히 달랐다. 레이븐을 앞에 두고 도란도란 얘기하는 그런 모습을, 왕궁 안에서는 본 적 없었다. 머리 좋은 줄은 알았지만 그 머릿속에 크고 작은 날들이 저렇게 차곡차곡 잘 쌓여 있는 줄은 몰랐다. 그렇게 살아온 기억을 가지고 왕궁에 갇혀 답답하지 않았을까. 그런 궁금증이 생겼다. “앞으로 계속 왕궁 안에서 지낸다 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왜.” “질리도록 돌아다녀서 그런지 왕궁에 있다 해서 형님처럼 숨이 막히지는 않습니다. 저는 알아서 잘 도망가기도 하고······ 게다가 초대왕께서 워낙 세심하게 신경쓰신 덕분에 왕궁 안에도 숨이 트일 만한 곳 많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칼리안에게서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서 얼굴은 안 보였다. 거짓말일까, 아닐까. 이번에는 목소리로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괜한 짐 맡겼다고도 생각하지 마시고요. 그렇게 여기지 않으니까.” “알았어.” 질문을 하는 진짜 이유를 알아듣고 해주는 말. 혹시라도 왕위를 받지 않겠다 고집을 부린 것을 신경쓰지는 말라는 말. “왕궁 안에도, 숨이 트일 만한 곳 많이 있습니다. 형님.” 그리고 강조하듯. 칼리안이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했다. “······ 알았어. 안 잊어버려.” “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븐의 갈기를 삭삭 쓰다듬었다. “형님 혹시 생굴 못 드십니까.” “안 먹어봤어.” “그럼 가리비는 어떠십니까.” “안 먹어봤어.” “······ 관자는요.” “왜.” “저녁에 먹으려고요.” “싫어.” “네.” 그리고 저녁에는 그냥 고기만 먹어야 되겠다 생각을 했다. 어차피 구운 대구 먹으러 갈 테니까. 그때 가서 실컷 먹으면 되겠지. * * * 가만히 서서 눈을 내리 뜬 채 생각을 정리했다. - 저하가 얘기한 것 확인해봤는데. 저하 생각이 맞아. - ······ 흔적은. - 증거 될 만한 것들은 다 찾아서 없앴어. 테일란 경을 시킬 수는 없고 우리쪽 사람들 움직였어. 말 나갈 걱정은 안해도 돼. - 그래. 고마워. 고생했어, 아리안느. - 그런데 괜찮겠어? 데블란을 만나기 전에 아리안느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면서 한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 증거만 없으면 돼. 증거 없이 우기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걸 가장 잘 알 테니까. - 당신 동생이 카이리스 전 왕비를 몰아냈을 때에도 증거는 없었어. 그 후작을 없앴을 때에도 증거 없었어. 전하도 같을 거야. 아니, 더 할 거야. - 아버지는 당신에게까지 손을 대면 귀족들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잘 알아. 그러니 아버지가 손에 쥘 만한 내 약점이 어머니 뿐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아. 무리해서 어머니를 건드릴 생각 할 사람 아니야. - 차라리 당신 동생 쪽으로 고개를 다시 돌려놓게 하는 건 어때. 더운 바람이 지나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아니. 나를 더 경계하도록 만들어야지. - 어머니에게 손을 뻗으면 어쩌려고 당신을 더 경계하게 만들겠다는 거야. - 내 약점을 아니까 어머니는 온전히 둘 거야. 내 동생을 다루기 위해서 나를 잘 놔뒀던 것처럼. 나를 쥐고 흔들려면 어머니를 섣불리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야. 그러니 나를 더 열심히 경계하게 만들면 돼. ‘······ 아직은.’ 후원의 한 가운데에서 그렇게 잠시동안 시간을 흘려보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 또각, 또각.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단 한 번도 크게 울린 적 없던 작은 발소리에 체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비 개인 하늘이 떠오르는 색의 실크에 은사와 레이스로 장식이 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루이즈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뒤따르는 이들은 이미 저만치 물린 채 혼자 걸어왔다. “어머니.” 한가로운 오후. 비 개인 하늘이 담긴 듯한 미소를 지은 체이스가 새하얀 티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를 빼주었다. 손을 내밀어 체이스의 손을 꼭 잡은 루이즈가 자리에 앉았다. “이런 시간에 세자를 보니 기분이 좋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고작 차 한 잔을 하자며 조른 것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아무리 바쁘다 한들 내가 세자를 만날 시간 하나 내지 못할까요.” 이틀 전 데블란의 집무실에 들었던 체이스가 나오지 않아 얼마나 많이 걱정했는지, 체이스의 방에 불이 켜지는 것을 보고 한참이 더 지나서야 별궁으로 돌아갔음을 알고 있는지. 루이즈는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체이스가 그러하듯 아무것도 티내지 않고 그저 반가워하기만 했다. 그리하여도 지나는 시간이 아까운 마음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어제 잠시 아리안느를 만났어요. 린 후작의 일로 걱정이 클 텐데도 여전히 기운이 넘치는 것을 보니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모릅니다.” 왕궁의 감옥. 지하 말고 지상에 위치한 고위 귀족을 위한 감옥. 비록 갇혀 있다 하나 그래도 신변의 위험이나 불편함이 없도록 체이스가 신경을 쓰고 있었다. 더불어 데블란 역시 린 후작의 신변까지 해할 생각이 아직 없었으므로 아리안느도 그럭저럭 잘 지내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나중에 일이 해결되거든 잘 챙겨주도록 해요.”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꺼낸 루이즈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맑은 홍차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고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큼 마음 좋아지는 일이 없습니다. 서로 기댈 곳이 그렇게나 단단하니 세자도, 아리안느도, 앞으로 계속 잘 해 나갈 것이라고. 나는 그리 믿어요.” “네, 어머니. 걱정하지 않으시도록 제가 더 신경을 쓰겠습니다.”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가만히 손을 뻗어 바람에 살짝 흐트러진 루이즈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다시 뒤로 넘겼다. “어머니께서는 그저 오랫동안 지켜봐 주시기만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손을 내린 체이스가 루이즈의 손을 다시 잡았다. 하늘색의 맑은 눈을 고요하게 들여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전하의 수면향에는 이제 다른 것 넣지 말아주세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루이즈의 귓가를 울렸다. < 제48장. 히몰리카 맛있네요(4) > 체이스를 잡은 루이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연한 금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인다. 놀랄 것이라 예상을 했던 탓에, 눈동자를 움직여 주변을 살짝 살핀 체이스가 루이즈의 손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웃으세요, 어머니.”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짧은 한숨을 내쉰 루이즈가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뒤에는 찻잔에 손을 가져가려 하는 듯 보여서, 체이스는 루이즈의 손을 더 꼭 쥐며 말했다. “차는 그대로 두십시오. 손이 떨립니다.” “체이스.” 체이스가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오랜만에 이렇게 이름까지 불러주시니 참 반갑습니다.” “······ 세자는 그 일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작고, 사소한 것. 루이즈의 질문을 들은 체이스의 머릿속에 얼마 전 칼리안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 네가 없었으니 아버지가 무조건 과거와 같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신경을 썼는데, 그러다보니 생각에 밟히는 것이 하나 있더구나. - 무언가 다른 일이 있었습니까. - 별장에 다녀온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조금 달랐다. 아버지가 수면향을 올리지 말라 했다던 말은 기억에 없었거든. 그래서 알아보았더니 아무래도 어머니께서······. 곧 체이스는 자신이 알게 된 일에 대해 설명을 했다. 루이즈가 무엇을 했었는지 알게 되어 놀란 이는 비단 체이스 뿐만이 아니었다. 칼리안은 단순히 놀라움이라 칭하기에는 복잡한 감정을 드러낸 뒤 말을 이었다. - 과거와 달리 이번의 데블란은 어머님이 무엇을 주고 있었는지 알았고, 그래서 향을 올리지 말라 했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 이미 눈치를 챘다고 보아야겠지. - 어떻게 알았을까······ 혹시 어머님과 린 후작이 연관되지는 않았을까요. 과거와 가장 많이 다른 것은, 물론 저의 부재를 제외하고. 린 후작의 행보가 가장 크게 틀어졌으니 말입니다. 치유사. 과거에는 치유사를 물리는 일에 린 후작이 나서지 않았었다. - 만약 린 후작이 어머님을 도왔다면, 데블란이 린 후작을 조사할 때 어머님이 연관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수 있습니다. 그랬다면 어머님께 관심을 두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 그래. 확인해보마. 이렇게 한 번의 대화를 마친 뒤 체이스가 조용히 움직였다. 그리고 칼리안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아리안느의 어머니이기도 한 린 후작이 루이즈를 도왔다. 데블란에게 올라가는 수면향에 들어갈 독을 준비했다. 체이스가 확인한 내용을 전해들은 칼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 별장 쪽은 이미 데블란이 확인을 했을 겁니다. 린 후작을 체포했다면 아리안느조차 모르게 저택도 이미 다 뒤져봤을 테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수면향을 언급했다면 아직 증거를 찾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언젠가 칼리안이 라트란 백작에게 했던 것처럼. - 이쪽에서 먼저 움직여서 증거를 만들어주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지레 겁을 먹고 움직여 레넌과 텐실에 신물을 보내려 했던 증거를 만들어오기를 기다렸던 그 때처럼, 데블란 역시. - 그래. 나도 그리 생각한다. 만에 하나 증거를 손에 두었다 하더라도 내 유일한 약점이라 여길 어머니께 당장 다른 짓을 벌이지는 못할 테니, 아버지가 수면향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 굳이 겁을 먹을 필요는 없으리라고. - 네. 맞습니다. - 다만 걱정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너에게 관심을 두게 될까 우려되는구나. - 아마도 지금쯤이면 그 생각의 끝에 제가 있을 겁니다. 어머님 때문에라도, 저라면 제 정체에 대해 깊은 의심을 하게 될 겁니다. 칼리안을 루이즈처럼 이용할 수 있을 또 다른 패로 생각해도 좋을지, 좋지 않을지. 그것을 가늠하기 위해서. 칼리안과 체이스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그리하여 반드시 루이즈가 아니더라도 체이스를 쥐고 흔들 약점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에게 병을 안겨 준 루이즈를 굳이 살려 둘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 - 때문에 저에 대해 더 의심하지 않도록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만. 플란츠 형님은 알든 말든 신경 쓸 필요 없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시더군요. 정확히는 ‘알아서 어쩔건데’ 라고 했지만요. 수중에 넣고 언제든지 목을 비틀 수 있는 사람이어야 약점이 되는 것 아니냐면서. 지금의 칼리안은 더 이상 데블란의 아들이 아니며 언제든지 세크리티아에 검을 겨눌 수 있을 카이리스의 셋째 왕자였으니까. 칼리안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한들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위치가 아니던가. - 카이리스 왕실과 저 사이의 고리를 끊겠다며 제 정체를 전하께 알리려 한다 하더라도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저 역시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전하께만은 절대로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생각이고요. 세상 모든 이들이 칼리안을 의심한다 해도 칼리안이 직접 인정하지 않는 한 사실을 밝힐 방법이 없다는 것은 여전하다. - 그러니 동요하시면 안됩니다. 저를 의심한다면 의심하게 두세요. 지금까지 칼리안이 수도 없이 들켰던 것은 굳이 숨기지 않고 순순히 인정을 했기 때문이 아니던가. 데블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 그래. 다만 위험성이 있더라도 증거는 찾아서 없애는 편이 좋을 듯 하구나. - 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다만 분명히 형님을 주시하고 있을 테니······. - 염려 말거라. 조심하여 모두 없앨 테니. 바닷가. 그 작은 바닷가의 오두막 집. 린 후작과 루이즈가 알고 있고 체이스와 아리안느도 알고 있으나 데블란은 알지 못하는 곳. 그곳을 찾아보도록 했다. 숨죽여 움직인 아리안느가 증거를 찾았고 모두 없앴다. 앞에 앉은 루이즈를 바라보면서 증거를 없앤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여기던 체이스의 얼굴에 자조 가득한 웃음이 어렸다. ‘결국 그 누구도 순백일 수는 없는 것을.’ 베른은 체이스를 지키기 위해 그림자에 묻혔다. 루이즈는 그림자를 지워내려 손에 독을 묻혔다. 결국 그 누구도 순백이 아니었으니. 그것이 실로 우스워서.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하는데, 혹여 어려운 일일까요.” 잠시 체이스를 보던 루이즈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체이스는 여느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미소를 다시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수면향은 그저 수면향입니다. 그 안에 무엇이 더 들어 있었든, 그것은 그저 수면향이었던 것으로 해두었으니 아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빠르게 말하지 않았다. 긴장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언제나와 같이 루이즈의 눈을 바라보면서, 바람도 담기고 햇살도 담긴 듯한 그런 목소리로 루이즈를 향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고 아무것도 감당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에는, 이제부터는 제가 할 테니.” 체이스는 언제나와 같은 얼굴과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는데, 너무 많이 달랐다. “세자. 나는,” “어머니, 저는.” 여전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흘러내린 루이즈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준 체이스가 루이즈의 시선을 가로채 마주보며 말했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설명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어머니께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무엇을 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그 동안 알고 있던 체이스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애써 접어넣은 루이즈가 마른 목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전하께서 눈치를 채신 듯 하였는데 세자까지 알게 되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내가 조금 놀랐습니다.” 루이즈가 살짝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이며 계속 입을 열었다. “네. 세자의 생각이 맞습니다. 독입니다.” “굳이 이야기 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시고······.” “전하로 인해 우리가 잃은 것이 너무 많아 억울한 마음에 그리 하였습니다.” 우리. 손등 위에 올려져 있던 체이스의 손이 잠시 멈칫하는 것을 느낀 루이즈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디에나 왕비께서 시작하신 일을 내가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이번에는 루이즈를 붙든 체이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형님. 혹시 어머님께서 언제부터 아프셨는지······ 기억나십니까.’ 말을 마친 루이즈가 잔기침을 했다. 체이스의 눈이 조용히 감겨들었다. * * * 데블란은 치유사를 부르려 했다. 체이스가 막았다. 엘프들의 치유술을 알아보았으나 거절당했다. 브리지트 숲의 엘프들을 무사히 살려두는 것을 대가로 치유술을 요구했으나 이 역시 거절당했다. 때문에 같은 것을 걸고 일부 엘프의 이주와 더불어 세크리티아와 엘프간의 협약을 요구했다. 그 후 데블란은 르메인에게 서신을 보내 협약이 이루어지는 자리에 히나와 칼리안이 함께 오도록 요청을 보냈다. 그리고 르메인은, 후작이었던 에반이 사망한 일에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연관되었다는 사유로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칼리안이 직접 엘프 도시를 찾아갔다. 브리지트 숲의 엘프들이 데블란에게 해를 입지 않도록 해주겠다는 조건을 두고 세크리티아와의 협약을 맺지 않도록 무산시켰다. 그리고 대장로 나르잔으로 하여금 치유술을 받고자 한다면 어머니 나무가 있는 엘프들의 도시로 직접 방문하라는 말을 전하게 했다. 이러한 나르잔의 소식, 그리고 엘프의 도시 밖에 나왔던 칼리안이 붉은 기운 가득한 오러를 사용하더라는 소식이 데블란에게 전해졌을 즈음. “칼리안은 소공작에게 볼 일이 있어서.” 돌아왔다. 루시가 건강히 잘 지냈는지, 안네는 그 사이 얼마나 자랐는지. 이것이 가장 궁금하고 걱정됐지만 플란츠는 우선 아르피아 궁으로 먼저 왔다. 앨런이 가장 보고 싶을 칼리안이 시오나를 드미레아에게 보내고 플란츠의 두 검을 그곳의 대장장이에게 맡기기 위해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먼저 간 것처럼. “전하께서는 아직 회의가 끝나지 않아 못 나오십니다. 혼나기 전에 도망가려면 지금 가시지요.” 이런 말과 함께 연하게 우려낸 딸기차가 앞에 놓였다. 참 오랜만에 맡는 듯한 익숙한 향에, 앨런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플란츠의 눈길이 찻잔에 가 닿았다. 앨런 역시 르메인과 함께 회의에 참석은 했으나 회의고 뭐고 일단 어여쁜 제자 얼굴 보는 것이 제일 중요했던 탓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칼리안 대신 플란츠가 집무실에 들어와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다녀오신 길은 어떠셨습니까.” 하지만 앨런은 실망하지 않고 플란츠를 반겨줬다. “아우님께서 손으로 닭을 잡으시던데.” “다시 놔주었다 하였지요.” “멧돼지도 잘 잡으시고.” “두 마리나 잡아드신 것 같았습니다.” 가는 길에 한 마리, 오는 길에 한 마리.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들을 전했다. 그런 앨런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바다를 처음 봐서.” 앨런이 부드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창가에 놓인 붉은 꽃 화분에 눈을 두었다. 그것을 본 앨런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집에 가져다 심으려 하였는데 시간이 나지 않아 계속 두었습니다. 혹 불편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치우겠습니다.” 혹시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대로 두었던 화분. 앨런의 예상대로, 불편하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은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저 꽃도 향이 없나.” “없다기 보다는, 단 내가 나는 꽃입니다.” 향기 말고 단 내가 나는 꽃. “세상에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향이 나는 꽃도 있고, 나지 않는 꽃도 있고. 혹은 저리 단 내가 나는 꽃도 있으니 참 신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내가.” 그 꽃을 잠시 쳐다보며 입을 열었던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단 내 나는 꽃에서 고개를 돌려서는 자신을 위해 놓인 딸기향 나는 딸기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 따뜻한 차 한 잔을 다시 바라봤다.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왕궁 밖에도 모르는 것 투성이. 왕궁 안에도 모르던 것 투성이. “······ 재미있었어.” 내 동생의 새아빠는 말 들어주는 것을 참 잘 하는 사람이라서, 여행이 어땠는지를 물은 말에 대한 늦은 대답을 전했다. “다행입니다. 재미가 있었다 하시니.” 앨런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다시 말없이 앨런을 보던 플란츠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이번 외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다른 말을 꺼냈다. “얼굴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마법사.” 불과 며칠만에 앨런의 얼굴이 좀 수척해져 있던 까닭이다.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 이들이야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플란츠는 앨런을 꽤 오랜만에 보기도 했고, 또 워낙 기억력이 좋기도 했으니까. 다른 사람을 걱정해주는 말을 꺼내놓는 플란츠를 보면서 앨런이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왕자님 눈썰미가 어찌나 좋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일이 많아 요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하여 그런 것이니 염려 마시지요.” 별 일 아니라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플란츠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 때에는 왜 그냥 두었을까.’ 미세하게 마른 앨런의 얼굴을 알아본 것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문득 이런 의문이 들어서였다. 칼리안이 바뀌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독차를 마시고 있던 칼리안이 말라가는 이유를 눈치채지 못했었다. 칼리안이 바뀐 문제에 더 많은 신경을 썼고, 칼리안이 바뀐 일 때문에 몸이 마르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막연하게만 생각을 했었다. 게다가 칼리안의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을 즈음에는 플란츠가 조찬에 나가지 않아 칼리안을 아예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칼리안이 바뀌지 않았을 과거에는. 말라가는 것을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다른 사정이 있었을까. 아니면 독을 마시고 있었음을 알았는데도 결국 실리케를 막지 못했을까. 그도 아니라면······. 모르는 척을 했을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기억이 생기면 그것도 알 수 있게 되려나.’ 순간적으로 떠오른 여러 사념을 애써 집어넣은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곧 다시 나갈 생각인데. 그 말도 들었나.” “들었습니다. 세크리티아에 직접 가겠다 하였지요.”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해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그리고는 맡겨뒀다는 듯한 말투로 부탁 하나를 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앨런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해보다 대답을 전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니 손을 보아 놓겠습니다. 혹시 언제 출발하실 예정입니까.” “검이 다 만들어지면, 그 때 바로.” “칼리안 왕자님께서는 한 달 뒤에 출발하겠다 하였는데. 일정을 앞당기셨습니까.” “세크리티아 국왕이 내 아우님이랑 생각하는 게 똑같다며. 그래서 바로 가려는 건데.” “헌데 왕자님의 탄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축하연을 치르시고 가는 것이 낫지 않을는지요.”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물 받았으니까 됐어.” 생일 선물은 이미 받았고 생일 연회는 필요 없다. 칼리안이라면 착실하게 준비해서 한두 달 뒤에 갈 예정이었겠지만 만약 데블란이 칼리안의 방문을 예상했다면 같은 기간을 생각할 테니 그냥 바로 가겠다는 소리였다. 그런 플란츠를 보면서 앨런이 물었다. “그리 도와주시는 까닭이 궁금하였는데. 혹시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해주기 싫다 하려던 플란츠가 잠시 앨런을 봤다. “······ 매일매일이 마지막이 될 것처럼 참 열심히 살고 있잖아.” 앨런의 앞에 놓인 커피를 보다가, 창가에 놓인 꽃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넓은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 왕궁 안에도, 숨 트일 만한 곳 많이 있습니다. 칼리안을 대신해 플란츠가 영영 왕궁 안에서 살게 되더라도 너무 답답하게 여기지 말라 알려주듯이 건네진 말. “도와주면, 내 동생이 조금 덜 열심히 살아도 될 것 같아서.” 그 말을 떠올리면서 플란츠가 답을 전했다. 그 뒤에는 ‘어여쁜 내새끼한테 친구 생긴 줄은 알았는데 형님이 하나 늘었구나’ 하는 표정이 된 앨런을 보며 짜증 가득한 얼굴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마법사. 오늘은 일 빨리 끝내야 할 텐데.” “네. 그리하지요.” 칼리안이 사온 술 같이 마시려면 얼른 일하라는 말을 해준 플란츠가 더 머무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랑 안네, 빨리 보려고. < 제48장. 히몰리카 맛있네요(5) > 우애애애옹! 이라고 했다. 정말로 저렇게 울었다. 체르밀 궁에 돌아온 플란츠를 본 루시가 소파 밑으로 들어갔고 안네는 그런 루시를 따라갔다. 그러더니 루시는 정말로, 정말로 서럽게 우는 소리를 냈다. 루시는 여전한지 그리고 안네는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할 틈도 없이 말이다. “······ 잊어버린 건 아닌데.” “애오오옹!” “오랫동안 나갔다 올거라고도 했는데, 왜.” “애옹!” “니아옹!” 오랜만에 돌아온 방에서 마음 편히 목욕하는 것도 잊은 채 한참동안 소파 앞에서 루시와 안네를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서러운 울음소리 뿐이라. 내 동생 아빠만 잠깐 만난 뒤에 내 아버지 얼굴은 볼 생각도 않고 이곳으로 서둘러 돌아왔는데 두 고양이의 엉덩이만 보게 된 플란츠는 지금 서러운게 너인지 나인지 모르겠다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루시. 안네.” “애오옹!” 아무리 불러도 나올 생각을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부르고 야옹거리다 결국은 다진 소고기를 동글동글하게 만 간식을 받아 건넨 뒤에야 고개를 빠끔 내미는 두 고양이를 본 플란츠가 살짝 웃었다. 안네가 많이 자랐다. 그리 길지도 않은 기간 동안 정말 많이 자라 있었다. 먼지털이개가 생각날 만큼 풍성해진 잿빛 꼬리가 눈에 띄었다. 그렇게나 자랐어도 여전히 작은 안네를 두고, 그저 곁에 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온기를 전해주는 루시를 두고, 곧 다시 한 번 왕궁을 비워야 하는데. 어찌 해야 하나. “데리고 가시면 안 됩니다, 왕자님.” 얼마 뒤에 더 먼 길을 다녀오리라는 말을 들었던 레릭이 먼저 이런 말을 했다. 눈치가 늘더니 최소한 두 고양이를 보는 플란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읽어낼 정도는 된 모양이다. “알아.” “대신 제가 열심히 잘 돌볼게요. 걱정 마세요.” 플란츠가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엘프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도 이 이야기를 들었었다. 고양이는 데리고 나가면 안 된다고 했다. 아래층에 거주하시는 새까만 고양이는 어딜 가든 쉼없이 짖으면서 잘만 따라다니는데 루시와 안네는 그렇지 않다 하니 어쩌겠나. 잠시 있는 동안 루시도 열심히 안아주고 안네도 눈에 꼭꼭 담아가는 수 밖에. “목욕 준비 해두었으니 우선 푹 쉬세요. 내일까지는 다른 일정 없이 지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제야 겨우 다가와 발치에 몸을 부비는 고양이들을 가만가만 쓰다듬어 준 플란츠가 망토를 풀어 레릭에게 건네주며 대답했다. “알았어.” 레릭을 내보내고 난 뒤에는 옅은 빛의 비취로 만들어진 널찍한 욕조에 잠겨들듯 한참동안 목욕을 하고 나왔다. 어느 정도가 흘렀는지 따지는 것도 잊고 한참동안, 정말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목욕을 마치고 나와 다시 의복을 입는데 레릭의 손에 가디건이 아닌 재킷이 들려 있었다. 금사로 수를 놓은 남청색 재킷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쉬라더니.” “그게······.” 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재킷을 들고 있는지.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기다릴테니 얘기 전하지 말아달라 하셔서요.”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부르는 것도 아니고, 찾아왔단다. 심지어 빨리 준비하라는 말도 없이 그냥 기다렸단다. “언제 오셨는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느냐고. 그렇게 한 마디를 할까 하다 그냥 접어넣고 물었다. 타이 대신 셔츠 장식만 하나 달아 준 레릭이 재킷 입는 것을 도우며 대답했다. “삼십 분 정도 되었습니다.” “넌, 대체.” 아무리 그래도, 삼십 분이라니. 결국은 한 소리를 하게 되었다. 재킷을 입고 털 장식이 달린 하늘색 코트 하나를 더 걸친 플란츠가 밖으로 나가 후원으로 갔다. 언젠가 히나가 딸기 아이스크림을 내려놓았던 그 자리에 앉아있는 르메인이 보였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예를 올리고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사과의 말을 건네자, 르메인은 다른 말 없이 자신이 앉은 의자의 옆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곁에 앉은 플란츠를 한동안 바라보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칼리안을 잡아오는 것에 시간이 오래 걸렸구나.” “죄송합니다, 전하.” 도망가려는 칼리안 잡으러 잠깐 나갔다 오겠다던 핑계에 대한 말에 다시 한 번 사과를 해야 했다. 새하얀 입김이 인다. 도착하기 전에는 풀 냄새와 이른 낙엽 냄새가 났는데. 이 곳을 떠나 열흘 남짓을 보내는 사이, 카이리시스는 쌀쌀함을 넘어 완연한 추위가 느껴지는 계절에 접어들었다. 밖에서 오랫동안 있기에는 부담스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체르밀 궁에도 응접실이 있고 그도 아니라면 플란츠의 방으로 와도 될 것을 굳이 밖에 나와 앉아있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마차도 없이 먼 길에 불편한 것이 많았을 텐데.”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혹 대장로가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더냐.” “······ 그보다는 칼리안이.” “······ 그래.” 태어나 예절에 대해 교육받은 것이라고는 식사예절 밖에 없다는 듯 굴었던 칼리안이 생각났다. 아마 그 모습을 전해줄 수 있다면 르메인은 절대로 ‘그래’라는 말 정도로 넘기지 못했을 거다. 물론 그 옆에서 한 술을 더 떴던 플란츠의 모습까지 봤다면 당장 대장로 나르잔에게 위로를 건네는 서신이라도 써야 하나 고민을 했겠지만, 플란츠는 발칸의 부군단장으로서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적당히 알아야 할 것만 알게 된 르메인이 물었다. “세크리티아에 갈 생각이 있다 들었는데, 사실이더냐.” “네. 맞습니다.” 엘프들을 찾아갔던 것도 심장이 내려앉을 일이었는데 이제 아예 타국에 가겠단다. “우호적인 관계였다 하나, 세크리티아의 국왕과의 기류가 그리 좋지 않게 흐르고 있다. 세크리티아와의 교류를 금지시켜 두기도 하였고. 무슨 일로 가려 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네가 되도록 이 곳에 있었으면 좋겠구나.” 본래대로라면 세크리티아에 가게 되는 주체인 칼리안이 직접 르메인과 나누었어야 할 대화. 하지만 칼리안이 르메인을 대하는 것을 퍽 어려워하기도 했고 애초에 핑곗거리를 만들어 둘러대는 것은 플란츠가 더 잘하기도 했다. 때문에 르메인을 설득하는 역할은 플란츠가 맡기로 정해두기는 했었다. 그런데 르메인이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무슨 이유를 대고 그 곳에 굳이 가겠노라 허락을 받아야 할지 여전히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올해만이라도 카이리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플란츠는 내내 고민해오던 적당한 핑계 대신 이런 대답을 했다. 한 해 전. 칼리안과 손을 잡은 뒤 유난히 찬 겨울을 보냈던 플란츠가 아니던가. 헤이시아 궁이 무너지기 전까지 정말 유난스럽게도 춥고 긴 겨울을 홀로 지냈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굳이 머리가 좋은 까닭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겨질만한 시간을 보냈고, 그날들을 떠올릴만한 시기가 처음으로 다시 찾아왔다.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만 낯선 마음이 들어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번 겨울만이라도 카이리스가 아닌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대답을 했다. “······ 그런 생각을 하였더냐.” 르메인이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이유임을 알아서 고른 핑계일지. 아니면 진심일지 모를. * * * 새하얀 입김이 인다. 숲 속에 머물던 찬 공기 특유의 맑은 바람 냄새가 났다. 바다는 더웠고 코끼리들의 땅은 서늘했는데 북쪽의 숲에는 추위가 찾아왔다. “오래 떠나있지도 않았는데 겨울이 됐네요.” “네. 하루하루는 길고 나날은 짧더니 어느새 겨울이 되었습니다.” 짧디짧은 스무 여섯 해를 보내고, 길디긴 한 해를 더 보냈다. 그리고 두 번째 겨울이 왔다. “춥지는 않으신지요.” 하얀 입김을 지긋이 따라가던 은회색 눈에 머금어진 따뜻한 빛이 너무 좋아서,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나도 안 춥습니다. 주변이 온통 따뜻해서요.” 이 숲 전체가 꽁꽁 얼어붙을 한겨울이 되어도 찬 기운만 느낄 뿐 추위는 타지 않을 칼리안이 목에 꽁꽁 둘러진 머플러를 가리켜보였다. 칼리안이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는 데에 한참을 쓰고, 말 없이 나간 것을 혼내는 데에 또 한참을 쓰고, 무사히 돌아온 것을 반기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쓴 얀이 가장 오랫동안 공을 들여 감아 준 것이었다. “그래요. 춥지 않다니 되었습니다.” 바짝 마른 풀 위에 얇은 천 하나를 펼치고 앉은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곧 칼리안이 레이븐의 안장에서 큼지막한 술병 두 개와 술잔 네 개, 그리고 말린 과일이나 소시지와 같은 것들이 든 작은 바구니를 꺼내들었다. 그러더니 전혀 어색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앨런과 자신의 앞에 그것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히몰리카를 사올까 시즐리누를 사올까 하고 생각해보니 무슨 술을 좋아하시는지 모르고 있더라고요, 제가. 그래서 우선 두개 다 준비를 했습니다.” 와인잔이 두 개, 손에 쏙 들어오는 히몰리카 잔이 두 개. 그렇게 네 개의 술잔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짙은 자주빛의 와인이 든 병을 손에 들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몰랐던게 또 있나보네요.” 칼리안의 손이 조용히 움직여 와인잔 두 개를 치웠다. 그리고는 시즐리누가 담긴 병도 뒤로 물린 뒤 독하기로 이름난 히몰리카를 앨런과 자신의 앞에 한 잔씩 따랐다. 곧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을 한 칼리안이 앨런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무슨 고민을 하시는걸까.” 이 말을 들은 앨런의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냈다. “진짜 형님 한 명을 만들어 오시더니 눈썰미까지 배워오신 모양입니다.” “아, 혹시 형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네. 제 걱정을 해주고 가셨지요.” 많이 크셨네, 우리 형님. 다른 사람 걱정을 다 해주시고. 소리없이 웃은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잠을 못 주무셨습니까.” “바쁜 일이 많아 그리 되었습니다.” 칼리안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술잔 대신 말린 바나나 하나를 가져와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그 뒤에는 별 가득한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한 번을 죽고 두 번을 살다 보니 신기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한 번을 죽고 두 번을 사는 것부터가 신기한 일이기는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향기 없는 꽃도 신기하고 단 내 나는 꽃도 신기하겠지만 칼리안에게는 조금 더 신기한 일들에 대해 말을 꺼냈다.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던 아버지와, 아버지라는 사실이 아직도 잘 적응이 안되는 아버지와, 아무 수식어도 필요없을 아버지가 생기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늘 아프시다 일찍 떠난 어머니가 계셨고, 그런 어머니를 대신해 온 품으로 저를 보호해주려 하셨던 어머니가 계셨고, 기억에도 없었는데 엘프였다는 사실마저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새하얀 입김이 별밤 아래로 가만가만 퍼져나갔다. 앨런은 칼리안의 이야기를 가만가만 들어주었다. “기억에 없는 어머니는 독을 드셨고, 기억에 있는 어머니는 병을 얻어 떠나신 줄 알았더니 독에 저무셨던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살아계시는 남은 한 분의 어머니도 결국 독에 물드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기분을 뭐라 해야 할까. 신기한 것은 분명 아닌데.” 아무 말 없이 칼리안을 쳐다보던 앨런이 한숨을 내쉬었다. 수면향을 손에 쥐었던 루이즈가 그 안에 든 것에 중독되었음을 칼리안에게 전해들어 이미 알고 있던 탓이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까요. 그렇게 말하면 맞을 것 같습니다.” 입 속에 향긋한 바나나 내음이 퍼졌다. 아플 때마다 찾던 과일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유난히 달다. “디에나 왕비······ 제 친어머니께서는 본래도 몸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데블란이 루이즈 후궁님을 맞이했고, 체이스 형님이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러다 어찌저찌 제가 태어났는데. 저는 어머니가 저 때문에 그리 아프셔서 눈을 감은 것은 아니리라고 항상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형님의 어머님이 늘 말씀해주셨거든요.” “두분 다 좋은 어머니였나 봅니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아픈 것을 들키면 의심을 살 테니, 수면향에 중독된 것을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않으셔서. 본래에도 그리 아프셨던 분이 그것을 참느라 더 많이 아프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 어머니뿐만 아니라 어머님도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아픈 티를 내지 않으셨어요. 제가 눈을 감았던 날까지 숨 한 번을 편히 쉬지 못하도록 그렇게 아프셨습니다. 이제 와 알고보니 어머님도 수면향에 중독이 되셨던 것인가 봅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앨런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것을 제가 모르고 있었는데. 다행하게도 이번에는 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은 수면향을 쓰지 않으시도록 말씀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손을 쓸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아니니까요. 정말 다행히도.” 시계 없는 숲 속에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칼리안의 목소리가 드문 드문 이어졌다. “손 쓸 수 없을 때라는 것이 참 그렇습니다. 어느새 눈을 뜨면 어느새 늦어 있어요. 어머님의 병도 그랬고, 그날의······.” 칼리안의 손 끝이 유리잔 위를 매만졌다. “군사들이 그랬듯이.” 예고 없이 지나치게 빠르게 목전까지 와 닿았던 카이리스의 군사들을 떠올리면서. 무엇이 재밌는지 혹은 무엇이 신기한지 실소한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늠을 하고 계셨습니까.” 내려앉은 앨런의 목소리가 들렸고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많은 이들을 어떻게 한 순간에 움직였을까. 새들은 등을 돌리지 않았었는데. 그것을 늘 궁금해 했습니다. 그것 참 마법같은 일이 아닌가 하다가. 마법이겠구나, 하고. 가늠을 했습니다.” 카이리스의 왕궁 안에 모인 새하얀 악마들을 이끌고 일순간에 세크리티아의 국경 앞에 서는 일. 지금의 앨런은 하지 못하지만 8서클의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이라면 할 수 있는 일. “기어코 저마저 왕자님께 비수가 되었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는지.” “어찌하기는요.” 말을 마친 앨런의 눈이 바닥을 향했다. 칼리안이 웃으며 앨런을 쳐다봤다. “걱정 마시고 그 벽, 넘으셔도 됩니다. 축하드릴 일이 아닙니까.” 지난 날 자신이 무엇을 했을지 가늠하게 되어버린 바람에, 과거에 비해 훨씬 빠른 시기에 도달한 8서클의 벽 앞에서 멈춰선 채 잠을 이루지 못하던 마법사. 도무지 똑똑하지 못한 그 마법사를 향해 말한 칼리안이 긴 숨을 내쉬었다. “살려달라며 옷깃 한 번 잡은 것을 두고 건네주신 것이 너무 많아서. 늘 그것들을 어찌 다 갚아야 하나, 오랫동안 고민을 했는데 차라리 잘 된 일이 아닙니까. 그리 갚지 않고 오래오래 같이 살면서 효도만 해드리면 되니 정말 어찌나 다행인지.” 한숨이라 하기보다는 조금 긴, 숨을 쉬었다. “저랑 오래오래 같이 사셔야죠. 잠도 잘 주무시고, 건강하게요. 아버지.” 앨런의 입가에 다시 한 번 미소가 어렸다. 서로 갚지 말고 같이 살자는 말이 참으로 고맙고, 미안하여서. “그래요. 오래오래 같이 살겠습니다. 내새끼랑 같이, 오래오래.” “네. 아버지.” 아무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칼리안이 손을 뻗어 앨런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 맑고 영롱한 소리가 숲 속을 잠시 머무르다 지나갔다. 그렇게나 기대하고 기대했던 히몰리카를 쭉 들이킨 칼리안이, 함께 잔을 비운 앨런과 자신의 빈 잔을 한 번씩 쳐다봤다. “와······.” 향긋한 내음이 목을 타고 지나가는 이 기분이 도대체 얼마 만인지. 앨런과 풀어야 했던 숙제를 비로소 풀어낸 것만큼 시원한 그 느낌이 너무 반갑고 기꺼워서. “히몰리카 맛있네요, 아버지.” 오러로 술 기운 몰아내는 것도 깜빡 잊은 칼리안이 정말 어여쁘게 웃었다. 그리고, - 쿵! 잠들어버렸다. < 제49장. 정녕 아름다운(1) > 아. 세렌티시여. 제가 나중에 뵈면 한 대만 때리겠노라고 하기는 했습니다. 억울한 일들이 많은 것 같아서 그런 말을 하기는 했습니다. 했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진짜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시들시들한 완두콩같은 형님 한 분 주워다 놓고 물도 주고 해도 주고 파릇파릇하게 키우면서 착하고 어여쁘게 잘 살려고 제가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요. 아실 만한 분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좀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하······.” 히몰리카 한 잔이라뇨. 제가 술 취해서 키리에 등에 업히겠다고는 했어도 연로하신 아버지 등에 업혀오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거든요. 한 잔 들이키고 눈감았다 떴더니 아버지 등이 보여서 다시 열심히 자는 척하는 그런 기분 아십니까. 자는 척인 줄 모르실 분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계속 자는 척하는 그 기분이 어떨지, 혹시 아십니까. 이제 철도 들었으니까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랑 둘이서 바람도 쐬고 도란도란 얘기도 하면서 맛있게 마시려고 순하디 순한 우리 형님이 주섬주섬 만들어두신 인격 팔아가며 얼마나 신중하게 또 얼마나 열심히 고른 술인데요. 그런데 딱 한 잔이라뇨. 그나마 히몰리카는 맛이라도 봤죠. 시즐리누는 맛도 못 봤습니다. 아버지가 가져가셨거든요. “얀······ 나 머리가 울려······.” 그리고 시스파니안이시여. 왜, 숙취는, 안 고쳐주십니까. ······ 두 분 다 진짜 너무하시네요. * * * 사실 다녀오는 내내 잠을 못 잤다. 하루 이틀을 빼고 잠든 적 없었다. 가만히 앉아 손가락을 꼽아가며 엘프 도시에 다녀오는 기간 동안 총 몇 시간을 잤는지를 따져보던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숙취 때문이다. “아무튼 잠을 못 자서 그래.” 그래. 잠을 못 자서 히몰리카 딱 한 잔만에 쓰러지듯 잠든 것이지 절대로 술에 약해서가 아닐 거다. 히몰리카 딱 한 잔을 마신 뒤 이렇게까지 숙취에 시달리고 있는 이유는 나도 모르겠고 나는 그냥 정말 피곤해서 잠든 거다. 이렇게 애써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한 칼리안이 씩 웃었다. 그리고 ‘아이고 우리 꽃같은 왕자님께서 히몰리카 한 잔 드시고 얻은 숙취 빨리 없어져야 할 텐데’ 라는 얀의 진심어린 마음과 바나나와 꿀이 잘 섞인 주스를 몇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 마시고 잠들 정도는 아니지, 내가.” “네.” 대륙에 딱 세 명 밖에 없는 7서클 마법사 중 가장 강력하고 명망있으며 인품까지 훌륭한 최고의 대마법사 등에 내 동생이 업혀왔다 하더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내려 감고, 지난 번에는 나 말고 제 스승에게 먼저 안겨들던 내 아들이 이번에는 나 말고 제 스승과 술을 마신 뒤 그대로 뻗었다는 말을 들은 르메인이 내 아들의 습관성 가출과 눈물겨운 주량 중에 무엇을 더 걱정해야 하나 고민할 때 쯤. “전해주신 것 알아봤어요.” 애써 침착한 척 꺼낸 말에 참 무심한 대답을 전한 에일라가 종이 두 장이 묶인 자료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아무튼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성격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 에일라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칼리안이 자료를 집어들었다. “아시겠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검출되지 않는 독은 많아요. 실리케가 왕자님을 독살하려 했을 때 이용했던 타크리모사도 그랬으니까요. 말씀해주신 독도 같아요.” 칼리안은 독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일라만큼 많지 않았다. “향과 색은 당연히 없고 중독되면 폐를 망가뜨리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손으로 만져서 잘못된 것이 아니라 독을 다루는 과정에서 들이마셨기 때문에 중독된거예요. 기화한 향이 아니라 의도치 않게 독분을 흡입하게 되어서요.” “그래서, 해독은?” “불가능해요.” 예상했던 대답이지만 그래도 다른 말이 나오기를 기대했던 칼리안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래······. 해독이 되는 종류였다면 데블란이 이미 해독을 했을 테지.” 디에나가 정말 신중하게 골랐을 독. 티나지 않고 해독조차 불가능한 독.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이용해왔을, 그런 독. “그럼 혹시 히나라면 고칠 수 있을까.” “네. 베른 자작님이라면 고칠 수 있겠죠.” 루이즈를 고칠 수 있다고 한다. 칼리안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났다. 에일라를 만나기 전에 체이스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 히나라는 그 치유사는 함께 오지 말거라. - 히나의 치유술로 어머님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이번이 아닌 다음에. 그때 함께 오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루이즈의 중독 증상은 이제 시작됐다. 그리고 루이즈는 베른의 마지막 날까지 숨을 놓지 않았었다. 아직 시간이 있다는 소리다. 히나를 데리고 함께 갔다가 데블란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데블란은 눈 앞에 놓인 목표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할 테니까. - 알겠습니다. 그래서 칼리안은 데블란이 세상에서 사라진 이후에 히나를 데리고 다시 가겠노라 대답을 했다. 이번 말고 다음 번. 체이스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세크리티아를 다시 찾을 때 함께 가서 루이즈의 중독을 고치겠노라고. “그래. 고마워.”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손에 들린 종이를 태웠다. 내용은 이미 다 담았으니 혹여 이곳에라도 증거를 남길 이유가 없었다. “저도 데리고 가달라고 하면 데려가실 건가요?” 그런데 에일라가 이런 말을 했다. 칼리안이 다시 한 번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하얗고 긴 손 아래 살짝 가려진 얼굴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는 왜.” “데블란 만나러 간다면서요.” “그런데.” “나는 내 목숨 노린 놈 다른 사람이 죽이는 것 별로여서.” “그사람 참 여기저기서 미움 많이 받는구나.” 그래서 오래 사나, 하고 중얼거리던 칼리안이 작은 웃음 소리를 냈다. 아직 앳된 소년의 웃음 같다가도 참 많은 것을 겪은 이의 웃음 같기도 한 소리가 났다. “그런데 에일라. 나는 내가 시킨 것 잊어버리고 다른 데 눈 돌릴 놈한테 일 맡기는 사람 아니야.” “베른 자작에 대한 호위라면 잠시동안······.” “에일라.” 말을 끊은 칼리안의 시선이 에일라를 향했다. “새들이 얼마나 독한지 알아. 얼마나 집요한지도 알고 있고. 네가 데블란에게서 언제 도망쳤고 얼마나 오래 쫓겼는지는 몰라도 안 죽고 안 잡히려고 고생한 것도 알고 있어. 죽는 걸 직접 봐야 마음 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같이 가겠다는 말도 이해해.” 그리운 곳의 바다가 담긴 머리카락을, 두 눈을 바라봤다. “무서워서 그러는 것 알아. 나도 그랬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에일라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여전한 머리 장식이 가볍게 흔들렸다. “이번에도 여전히 잘 아시네요.” “설마 내가 네 비녀 속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고 있을까.” 불안한 만큼 몸에서 떨어뜨려놓지 못하는 독.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칼리안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사라져야 안전해 질 것 같은데. 증오하던 대상이 사라져야 살맛 날 것 같은데. 안 그래. 사람이 그런 걸로 살아지는 건 아니더라.” 데블란의 죽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것이 생각처럼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안 것은, 체이스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은 뒤였다. “수어 배우고 있다는 얘기 들었어. 그때 마음먹은 대로 흔들리지 말고 계속 배웠으면 해. 나 따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생각 하는것보다는 그 편이 나아.” 칼리안은 마지막 한 모금까지 다 마신 주스잔을 내려놓은 뒤 말을 이었다. “히나 곁에서 지내면서, 죽는 것 보면서 사는 법 말고 치료하고 살려내는 것 보면서 사는 법도 배워봤으면 좋겠어. 정답이 아닐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겪어 본 바로는 그게 나았거든.”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 거짓 아닌 말. “아직 출발까지 시간 있으니까 돌아가서 생각해봐. 그래도 안되겠으면 얼마든지 다시 와서 얘기해줘. 그 때는 다른 말 않고 데려갈게.” “······ 알겠어요. 생각해볼게요.” “그래. 고마워.”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는 있었어도 여전히 잘 믿기지는 않았었는데 정말 체이스를 많이 닮았다고, 에일라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 * * 확실히 닮았다. 아니, 맞는 것 같다. 왕궁에 돌아와서 금고를 열어본 뒤 확인해봤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확실히 맞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내 생각에······.” 두터운 잿빛 털 장식이 달린 하얀 코트를 벗어 집사장에게 건넨 칼리안이, 드미레아에게 받은 검을 살펴보다 장난기 묻은 얼굴로 웃었다. “이건 헤르츠 경이 썼나본데.” 히몰리카 한 잔에 잠든 것을 애써 부인하던 날로부터 다시 며칠이 지났다. 안네는 아주 조금 더 자랐고 날은 조금 더 많이 추워졌다. 그리고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대장장이 로튼의 손에서 새로운 검 한 자루가 완성됐다. 소식을 듣고 또 멋대로 궁을 나온 칼리안이 지금 검에 새겨진 ‘시나스타’ 라는 이름을 보던 중이었다. 정확히는 청은빛 검신 쪽에 남아있게 된 반절의 글자였지만. “그 글자를 헤르츠 백작이 썼다는 말씀이십니까.” “응. 그런 것 같아.” 카이리스에서는 자라지도 않는 꽃의 이름이 적힌 검. 그 강도는 묵빛의 검과 똑같지만 색이 완전히 다른 검. 그런 검을 맡겨야 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드미레아에게 그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얻었는지를 알려주었었다. “그럼 왕자님께서 기억하시는 시간에도 헤르츠 백작이 발칸에 있었습니까.” “있었지. 그땐 군단장이었고. 스승님이 안 계셨거든.”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드미레아는 신기할 것 없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며칠 전의 에일라도 그러더니 아무튼 둘 다 재밌는 성격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든 칼리안이 잠깐 웃었다. 곧 칼리안은 시선을 내려 손에 들린 검을 다시 살폈다. - 시나스타 윗 부분의 글자와 아랫 부분의 글자는 이어지지만 글씨체가 서로 달랐다. “재밌네.” 칼리안이 ‘내가 그래도 쟤보다는 술을 잘 마시겠지’ 하며 굳게 믿고 있는 아르센 헤르츠가 술에 잔뜩 취한 채로 급여와 자존심을 맞바꾸었던 그 다음 날. 아르센이 한 글자 한 글자 정성들여 써왔던 반성문이 생각났다. 그 봉투에 적혀있던 글씨가 검에 남겨진 글씨와 참 많이도 닮았다. 평소에는 일이 많고 바쁘다는 이유로 엉망진창 흘려 쓰더니. 플란츠가 쓸 검을 맡기면서는 정성스럽게 한 글자 한 글자를 써 준 것일까. 아니면 그 때의 아르센은 흘림체를 쓰지 않았던 것일까. 이제와서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궁금해진다. “혹시 형님 보더라도 이 글자 헤르츠 경이 쓴 거라고 얘기하지 마. 버릴라.” “알겠습니다.” 드미레아의 과묵한 성격은 재미없지만 이 검은 참 재밌어서 다시 한 번 웃음이 나왔다. 과거의 플란츠가 손에 쥐었던 별빛의 검에 아르센의 글자가 반. 그리고 지금의 플란츠가 손에 쥐게 될 묵빛의 검에 칼리안의 글자가 반. “중앙에도 날이 있습니다. 아실 테지만 조심하십시오. 베입니다.” 그 글자 위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보려니 드미레아가 이런 말을 했다. 세로로 나뉘는 검. 서로 맞닿는 면을 비스듬하게 깎아 날을 내 두어, 평상시 뿐만 아니라 반으로 나누어도 양날을 지니게끔 되어 있는 독특한 검이다. 검의 손잡이를 비틀어 반으로 나누어 보고 다시 하나로 합쳐 보기도 하며 제대로 잘 만들어졌는지 한참을 확인한 칼리안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철컥! 새로 맞추게 된 검집에 부드럽게 들어간 검이 검집과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검집을 내려다보는 칼리안을 향해 드미레아가 설명을 더했다. “깎아내고 남게 된 운철 조각을 다시 쓰기도 어렵고 버리기도 어려워서, 검집에 장식을 더했다고 합니다.” “그런 것 같네.” 하얀 바탕에 잿빛과 청은빛의 운철로 문양을 새겨넣었다. 안에 든 검에 참 잘 어울릴 모습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인을 모두 마친 칼리안이 검을 옆에 내려놓자, 따뜻한 밀크티가 담긴 잔을 들어올리던 드미레아가 나지막이 물었다. “수고비는 어떻게 치를 생각이십니까.”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겠나.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이 보내 온 두 번째 기사들이 쓸 검을 손보느라 바쁘던 대장장이가 몇 날 며칠을 두고 검 하나에 혼을 불태우도록 만들었으니 상응하는 대가가 있어야 마땅한 일 아닌가. “지난 번에 대련해주기로 한 것도 아직 다 못지키셨습니다.” 티아라 닮은 장신구 해 주는 값으로 보름동안 대련을 해주기로 했으면서 결국 딱 한 번밖에 하질 못했다. 그것을 떠올린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좀 바빠졌는데. 줄여주면 안 되나?” “안 됩니다.” 안 통한다. “시간 괜찮으면 내일부터라도 왕궁에 와. 상대해줄게.” “이틀 뒤부터 가겠습니다.” “그래, 그럼 검 값은······.” 결국 이렇게 나머지 일정을 잡힌 칼리안이 잠시 생각을 해보다 입을 열었다. “내 정혼자님한테 내가 무엇을 주어야 맞으려나······. 차라리 돈을 달라 하면 낫겠는데 나보다 풍족할테니 그건 안 되겠고.” “2왕자님께서 사용하실 검이니 2왕자님께 나누어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기다렸다는 듯 말이 나왔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드미레아가 말을 이었다. “브리센의 검술. 리리에에게도 물려주셨으면 합니다.” “검술은 알려줄 수 있어. 형님께서도 반대하지 않으실 테고. 다만.” 선뜻 대답하던 칼리안이 드미레아를 깊이 쳐다봤다. “훗날 언젠가, 국왕의 형님이신 플란츠 대공이 브리센의 가주로 사는 것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일부러 선 긋지 않으셔도 됩니다. 2왕자께서 그 자리에 가지 못하시면 어찌 되는지는 아니까요.” 이렇게 말한 드미레아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브리센의 아이를 브리센처럼 키울 생각은 저도 없습니다.” 그건 마음에 드네, 하고.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썩 괜찮은 값에 검을 하나 구했다. 이틀 뒤부터는 빚도 하나 줄이기로 했다. 그래서 기분이 참 좋았다. 좋았는데. “······ 형님.” “가자고.” 왕궁 앞에 버젓이 세워져 있는 거대한 마차. 카이리스 왕실의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진 거대한 마차. 그래. 시스파니안께서 온갖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두신 바로 그 마차. 카이리스 왕실을 대표하는 그 호사스러운 마차. 그것이 왕궁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2왕자의 말 에스티나가 서있었고, 그 위에 완두콩이 앉아있었다. 거기까지만 있었으면 그러려니 해보려고 노력이나마 했을텐데. 이상하다. 레이븐이 왜 나와있지. “어디를 가자 하시는지.” “대구 먹으러.” “지금요.” “지금.” “세크리티아에 서신 한 장 안 보내고 왕실마차 끌고요.” “그래.” “저 이틀 뒤에 소공작과 대련 약속 잡았는데요.” 외교 관계고 사전 통보고 뭐고 다 모르겠고. “내가.” 칼리안의 말에 짧게 입을 연 플란츠가, 실로 오만한 눈으로 동생을 내려다봤다. “······ 가겠다는데.” 생일 맞이로 그 좋다는 세크리티아 바다 보러 카이리스 2왕자께서 가신다는데 감히 누가 말리려 드느냐고. 열심히 만들어 둔 대외 홍보용 망나니 인격 쓰는 법 잘 배운, 하지만 알고 보면 되게 순한 형님이 고갯짓을 했다. 빨리 레이븐에 타라는 소리였다. “환장하겠네······.” 아. 세렌티시여. < 제49장. 정녕 아름다운(2) > 참 경쾌하다. 잘 정돈된 왕도 위를 걷는 레이븐의 발소리는 언제나 경쾌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경쾌하다. 당연한 일이다. “어쩐지 오늘 갑자기 레이븐의 편자를 바꾼다더니······ 이런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새 편자를 단 레이븐의 기분이 상쾌했으니 이렇게나 경쾌한 소리가 울릴 수 밖에. 차마 형님 면전에 ‘속셈’이니 ‘수작’이니 하는 소리를 꺼내지는 못한 칼리안이 깊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두 번 씩이나 동생 뒷통수를 때리십니까.” “두 번이나 속을 줄은 몰랐어서.” 똑같은 방법에 두 번을 속은 것이 더 놀랍다는 반응을 본 칼리안이 애꿎은 레이븐의 갈기를 이리저리 흐트러뜨렸다. 속았다. 플란츠의 수에 벌써 두 번이나 넘어갔다. ‘오늘은 레이븐 편자를 바꾼다고 하네요.’’ ‘그래? 아직 괜찮은 것 같았는데.’ ‘아까 레릭이 왔는데 에스티나의 편자를 바꾸러 온 장제사가 레이븐의 것도 새로 달아야 한다고 말했다기에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요. 편자도 바꾸고 목욕도 시키고 해야 하니까 공작저에는 이즐란을 타고 다녀오세요, 왕자님.’ ‘응. 알겠어.’ 그날,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가겠다는 칼리안에게 얀은 레이븐 말고 자신의 말을 타고 가라 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별 생각 없이 얀이 시키는대로 했다. 편자를 바꾼다 하는데 다른 의심할 일이 있었겠나. 그것이 장거리 여행을 떠나기 위한 속셈이었다는 것도, 레이븐이 지니고 다니는 가방에 칼리안의 개인 짐을 챙겨 넣게 할 생각에서 벌인 수작이라는 것도, 칼리안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그때까지는 얀도 몰랐다. 알았다면 그 얼굴에 뭔가 숨기고 있다는 표정이 죄 드러났을 테니까. “미리 말씀을 해주셨어도 반대하지 않았을 텐데요.” “그건 내 아우님의 옛 형님이 사실을 알게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일텐데.” 거짓말은 못하고 들키는 것은 잘한다. 그러니 칼리안에게 알렸으면 체이스가 눈치챘을테고 결국 데블란이 알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을 했단다. ······ 라는 것은 핑계고 왠지 그냥 놀린 것 같다는 기분을 떨쳐낸 칼리안이 저 멀리 보이는 공작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드미레아와 한 차례 대련을 한 뒤 에반과 싸우다 배에 구멍이 났다. 덕분에 두 번째 대련을 뒤로 미뤘다가 그대로 엘프 마을에 다녀오는 바람에 더 만나지도 못했다. 그러다 간신히 다음 약속을 잡았는데 또 깨뜨리게 생겼다. “드미레아와 그런 약속을 잡지는 말 걸 그랬습니다. 참 생각 깊으신 형님 덕분에 아무래도 돌아오면 파혼당할 것 같네요.” 플란츠가 대답 없이 피식 웃었다. 이제야 간신히 칼리안을 다시 기억해낸 것 같은 루시와 안네 얼굴도 못 보고 앨런과 제대로 된 인사도 건너 뛴 채 먼 길 가게 된 동생 놈이 애먼 말로 툴툴거리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칼리안이 공작저로 출발한 뒤 사실을 알게 되어 부랴부랴 여행 준비를 해준 얀과는 인사를 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나저나······.” 이런 것을 다행이라 여기고 있는 처지가 된 것에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쉰 칼리안이 뒤를 쳐다봤다. 뒤를 따르고 있는 키리에가 칼리안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살짝 끄덕여 가벼운 예를 받은 칼리안이 시선을 돌렸다. 키리에의 곁에 있던 에일라가 보인다. 결국 함께 오게 되었다. 그런 둘의 뒤로 기사들이 보였다. 세크리티아에서 쓸데없이 경계하는 일은 없어야 했기 때문에 서른 명만 추렸다 했다. 같은 이유로 왕실의 군대인 발칸의 기사와 마법사들은 세크리티아 행에 함께하지 못했다. 더불어 시종과 시녀는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만에 하나 발생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 전투가 불가한 인원은 일행에서 제외시켰다. 카이리스를 찾아온 체이스가 그러했듯이. 마지막으로, 기사들의 사이로 실로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는 왕실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레이븐의 고집 때문에 타지 못했던 바로 그 마차였다. “마차는 이동 마법진 앞에 세워두고 갈 생각으로 끌고 나오신 겁니까. 마법진 통과 못 할 텐데요.” “마나실 후작이 해결했는데.” 엘프 도시에서 카이리시스로 돌아온 첫날에 앨런을 만나 부탁했던 것. 온갖 방어 마법이 새겨진 저 마차가 이동 마법진을 지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앨런은 어렵지 않게 날짜 잘 맞추어 마차 개조를 해 둔 터였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계획을 짜고 있던 것인지. 실소한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풀물 안 드는 옷이나 골라 입고 가실 줄 알았는데 마차까지 준비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안 들잖아.” “흰 옷 뿐만 아니라 그 검은 옷도 안 입으실 줄 알았으니까요.” 세크리티아 땅을 밟는 플란츠라면 발칸의 제복도, 왕자의 정복도 두고 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한쪽 어깨를 감싸는 새까만 털 장식과 커다란 태슬이 더해진 붉은 망토 아래, 금사로 수놓아진 검은 코트가 보인다. 물론 그 안에는 왕자의 정복이 있을 것이다. 일부러 갖춰 입은 의복이다. 수도를 벗어나는 동안 저 모습을 본 새들이, 플란츠가 지금 어떤 입장으로 세크리티아에 가고 있는지를 데블란에게 전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러지 말라며.” “네. 기억이 들어도 신경 쓰실 필요 없다고 말씀을 드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형님 성격에 발칸 부군단장도 아니고 왕자도 아닌 채로 가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크리티아니까요.” “······ 싫으면.” “아뇨. 싫지 않습니다. 가끔 뒷통수를 노리셔서 그렇지 말은 참 잘 들어 주시는게 재밌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곱게 짖은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외성 문을 지나 이동 마법진 앞에 섰을 때 조금 더 진해졌다. - 삐약! 삐약! 자고로 뒷통수란. 주고 받아야 제 맛 아니던가. * * * 녹빛의 차에서 난꽃의 향이 났다. 요란하지도 않고 코 끝에 질리지도 않는 그 향이 참 좋아서 새로 생긴 아들에게 주었다 했더니 채 드러내어 기뻐하지도 못한 엘린느가 이번 선물에 다시 한 번 보내온 것이었다. 창밖에 부는 바람이 차가워진 만큼 차의 온기는 더해지는 법이라, 테이블 위에 놓인 난꽃 향 차에서도 모락모락 포근한 김이 올라왔다. “향이 좋군.” 조용히 그 향을 맡은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것을 보던 앨런이 손가락 하나를 자신의 찻잔 위에 톡 올렸다. 동시에 찬 기운이 찻잔을 감싸며 찻물 위에 살얼음이 어렸다. “날이 추운데 차게 마시는가.” “칼리안 왕자님께서 갈수록 찬 것을 자주 찾으는데 스승이 되어 그냥 두고 볼 수 있겠습니까. 똑같이 맞춰보아야지요. 게다가 나중에 남쪽에 가서 같이 살려면 찬 것에도 익숙해지는 편이 좋을 듯 보여 그럽니다.” “······ 내 아들인데.” “전하 아들이기 이전에 제 제자인것을요. 제가 남쪽에 좀 데려다놓고 살 수도 있는 것을 무얼 그리 보십니까.” 여지없이 핀잔을 보낸 앨런이 차갑게 변한 차를 반쯤 비워냈다. “얘기해보게.” “무엇을 얘기하라 하시는지.” “내가 또 잘못을 했으니 그리 구는 것 아닌가.” 그 좋아하는 진한 초콜릿을 잔뜩 넣고 산딸기도 한가득 올린 케이크를 한 입 크게 떠서 먹은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는 녹차를 다시 한 모금 마신 뒤, 열심히 들을 준비를 마친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특별할 것 있겠습니까. 세 왕자님 세상에 꺼내두신 것 말고는 전부 다 잘못하셨으니.” 워낙 단 것을 싫어하는 통에 케이크에는 손도 못댈 르메인이 애꿎은 차만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그리고 보기만해도 단 맛이 올라오는 케이크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말했다. “무탈히 다녀오도록 신경 쓸 테니 너무 화내지 말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로 인해 플란츠가 갑자기 여정에 나서는 바람에 호위 노릇 하겠다며 칼리안까지 함께 간 것에 마음이 쓰여 그러는 것 아닌가. 세크리티아에서 별다른 일 생기지 않도록 제대로 신경 쓰고 있을 테니 이미 아는 핀잔 또 주지 말고 걱정도 말라는 소리네.” 정확히 말하자면,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 제일 높은 곳에 앉아있는 두 아비가 제 할 일을 못해서 고생길에 오른 칼리안을 보고 있으려니 부아가 치민 상태였다 해야 할 일이다. 먼 데 있는 데블란 몫까지 합쳐서 코앞의 르메인에게 화를 내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아무튼 둘 중 한 놈이라도 제대로 아비 노릇을 했으면 이 사달까지는 안 났을 것 아닌가. “세크리티아에서 별다른 일을 꾸밀까 걱정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마시지요.” 애꿎은 케이크만 또 잔뜩 퍼서 입에 넣은 앨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 거창한 마차까지 끌고 출발한 칼리안이 또 신 귤을 까먹고 오면 어찌하나. 온통 그 생각 뿐이었다. 얼굴을 찌푸린 마법사가 한숨을 푹푹 쉬며 초콜릿 케이크를 푹푹 퍼먹고 있는 것을 조용히 보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혹시나 그 뱀같은 작자가 왕자들을 붙들어두고 이용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이 아닌지는 우려가 안 된다는 말인가.” “네. 두 왕자님이 같이 붙들려있을 일은 안 생깁니다.” 이렇게 말하던 앨런이 잠깐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을 바꾸었다. “아니지. 2왕자님만 붙들릴 일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후 앨런은 집무실에 놓인 책장 쪽을 가리켜보였다. 발칸이 있는 빌헬름 관이 그 방향에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때는 고민 마시고 저기 사는 친구들과 저를 같이 보내시면 됩니다.” “전쟁이라도 내겠다는 것인가.”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잠시 말을 멈춘 앨런이 케이크 한 입을 느긋하게 먹은 뒤 대답을 덧붙였다. “2왕자님 붙들릴 일 생겼으면 3왕자님은 이미 세상에 없다는 말이고, 그리 됐다면 그 나라 왕세자는 진작에 죽어 사라졌다는 뜻인데······ 그리 되면 굳이 복잡하게 전쟁을 할 필요가 없지요. 그냥 마음 편히 찾아가서 세크리티아를 없애놓고 2왕자님만 모셔오면 될 일이 아닙니까.” 체이스가 있으니 데블란도 두 왕자에게 허튼 짓은 못할 테고, 허튼 짓을 하려 든다 해도 칼리안이 있는 한 별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를 참 무섭게도 한다. 르메인의 시선이 잠시 찻잔에 머물렀다. 앨런의 입에서 나오는 저런 말이 조금도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정말로 이 대륙의 지도에서 세크리티아를 지워 놓을 수 있는 사람임을 안다. 리베른의 국왕도 그것을 알았기에 국서 테이안을 곧바로 처형한 것이겠지. 덕분에 리베른의 지도는 바뀌지 않았을 테고. “······ 그래. 참고하지.” 새가 날아갔는지, 작은 그림자가 스치듯이 창 밖을 지나쳤다. 그것을 쳐다보던 앨런이 물었다. “데블란에게는 서신을 보내셨습니까.” “두 왕자가 출발한 직후에 보냈네.” 평생동안 자신이 그런 뻔뻔함을 부릴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편지 내용이 생각난 르메인이 잠시 실소했다. - 내 아들이 곧 생일인데 그 나라 구경을 좀 하고 싶다 하더라. 당신이 이 서신을 받을 즈음이면 아마 국경 근처에 가 있을 텐데 만약 귀한 내 아들들을 조금이라도 속상하게 하면 발칸의 마음도 아플 테니 대문도 잘 열어주고 별 일 없이 다녀올 수 있게 도와줬으면 한다. 그래도 미리 말 못한 것이 유감스럽기는 하니 너희들과 왕래 끊기로 한 일은 취소하겠다. 이런 말을 예쁘게 잘 꾸며서 데블란에게 보냈으니까. 곧 르메인이 다시 찻잔을 들어올렸다. 나중에, 언제가 되었든 나중에 그 언젠가는 플란츠와도 함께 마셔보고 싶은 차라는 생각을 하면서. * * * 답답해진 마음에 두꺼운 코트를 벗어둔 지는 오래였다. 대신 검은 셔츠와 붉은 베스트, 그리고 검은 재킷과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붉은 기운이 비치는 천으로 만들어진 긴 망토를 둘렀다. 얀이 챙겨 두었던 망토 매듭 장식까지 키리에의 도움을 받아 착용을 했다. 여행을 하기에 적합한 복장이 아님을 안다. 애초에 복장에 신경 쓸 성격은 아니었지만 어찌됐건 오랜 길을 떠나는 이가 입을 만한 의상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왕자의 정복보다는 편하니까 됐다. “문제가 있습니까.” 키리에의 입에서 상당히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앞에 선 병사들이 잠시 자신들끼리 어떤 의견을 주고 받는 듯하다 다시 다가왔다. “카이리스 2왕자님과 3왕자님의 방문에 대한 연락은 받았습니다만.” 잠시 말을 멈춘 병사가 진중한 얼굴을 한 채 앞에 선 일행을 살폈다. 커튼이 내려진 화려한 마차. 그 바로 옆에 꼼짝도 않고 서 있는 거대한 흑마에 탄 이의 길고 검은 망토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내려앉아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검은 정장을 입은 이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앞을 바라볼 뿐. 병사들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병사는 그 모습에 시선을 오래 두지 않기 위해 빠르게 눈을 돌렸다. 3왕자. 그리고 소드마스터. 자칫 심기를 거슬러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실 안그래도 일이 복잡해질 일이 이미 하나 있었기도 했고. 일행들 확인을 마친 병사가 키리에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군인은 통과하실 수 없습니다.” “2왕자님을 말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다른······.” “아니라면 이 중에 군인은 없습니다.” 병사가 잠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리고 키리에의 뒤에 서 있는 새파란 머리 마법사를 바라봤다. “아, 나 말인가.” 물갈퀴 달린 꽤 큰 새끼 오리를 품에 안은 파란 머리 오리 엄마가 자신을 가리켜보이며 입을 열었다. “마법사, 아르센 헤르츠라네.” 그래, 너. 네가 바로 그 군인이지 않느냐고 묻는 듯한 병사들의 눈빛을 확인한 아르센이 길고 긴 소개를 덧붙였다. “급여가 다 깎인 것을 두고 군단장님께 대섰다가 아예 직위 해제된지 며칠 안 된 그냥 마법사일 뿐이니 그리 어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네.” 칼리안에 의해 일시적으로 민간인이 된 바로 다음날 들려온 레이븐 편자 교체 소식에 일단 냅다 달려 이동 마법진 앞에 와 있었던 마법사. “제 말에 틀린 것이 있습니까, 협회장님?” “아니. 없지.” 아르센 헤르츠가 싱긋 웃으며 곁에 선 보라 머리 마법사를 쳐다봤다. < 제49장. 정녕 아름다운(3) > 톡, 톡, 톡. - 사안이 급히 진행되어 당국의 이러한 사정을 귀국에 통보하는 일마저 촉박하게 이루어진 것이 실로 유감스러울 따름이오. 하여, 당국에서는 얼마 전 귀국이 벌였던 무도한 일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자 하니······. 몇 번이고 같은 내용을 읽었다. 두어 번 읽었을 때 이미 한 글자 한 글자 전부 다 머릿속에 새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을 읽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긴 서신이구나. 읽어도 읽어도 질리지를 않으니.” 노골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세크리티아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담긴 편지. 둔하기로 이름난 르메인이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재밌는 내용. 그리고 다시 한 번 전해진 소식 하나. “에일라 베르단디. 아니지. 이제는 성이 바뀌었다지. 하필이면 그 브리지트로.” 혼잣말 끝에 웃음소리가 잠시 붙었다. 보란듯이 함께하는 푸른 솔새. 이름만으로도 세작들을 물리게 한다던 에우리아 세이렌. 눈속임이라는 것을 가릴 생각조차 없다는 듯 따라붙은 ‘직위 해제 상태’의 아르센 헤르츠. 거기에 더해진 또 하나의 이름. “······ 칼리안.” 치유사를 불러내는 말을 거절하는 방법이 어찌나 나와 닮았는지. “다른 일이 바빴던 탓에 네게 동하는 흥미를 접으려 하였는데 이렇게나 나의 시선을 끌어내고 있구나. 그러니······.” 당장 목을 매달아 광장에 걸어두어도 아쉽지 않을 새 한마리를 이끌고 오든, 한낮의 사신을 데리고 오든, 그리 자신있어하는 군대의 두 번째 우두머리와 오든. “내가 감히 그 대단한 나라의 왕자들 앞길을 방해해서야 되겠느냐.” 성미 사납다는 둘째 왕자를 또 어떻게 구슬렀는지 몰라도 핑계가 참으로 좋다. 그렇게까지 하여 굳이 이곳에 오려는 이유가 궁금해졌으니 잘난 얼굴을 좀 보려면 막아서지 말아야 하겠지. “열어주거라. 전부 다, 원하는대로 데려오라 하라.” 그 칼리안이 직접 오고 있다 하니. * * * 칼리안 가라사대. 돈과 힘과 미모는 과할수록 좋다 하였으니. 미모는 타고났고 돈은 이미 과한 칼리안이 나머지 하나를 보강하기 위해 아르센을 불렀다. 여전히 의심해본 적 없는 연약한 형님 손에 뒤통수 맞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경에게 내가 줄 것이 있어서.’ ‘네, 왕자님.’ 기대에 찬 아르센의 앞에 직위 해제 통보서를 내민 칼리안이 생긋 웃었고, 내일의 완두콩에게 뒤통수 맞을 칼리안에게 뒤통수 맞은 아르센이 싱긋 웃었다. ‘이번에야말로 안네루시아 건네주시는 겁니까?’ 그러더니 대뜸 이렇게 물었다. 죽기 전에는 절대 발칸에서 내놓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아니. 죽고 나서도 빌헬름 관 계단 앞에 묻어 줄 것처럼 굴던 사람이 갑자기 직위 해제 통보를 했으니 말이다. ‘아. 그건 나중에. 반성문 먼저 열어 본 다음일테니 벌써부터 그 기대는 하지 말아요.’ ‘그럼 이건 무엇입니까.’ ‘사적인 일을 위한 권한 남용.’ 당연하겠지만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먼저 꺼낸 칼리안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실 나는 발칸에 대해 내 권한을 요구할 생각 없었습니다. 스승님과 함께 만들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시간을 거스르기 전에 보았던 군대를 베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진심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의 세력으로 삼기 위해서 만들기는 했으나 이제와 발칸의 주인 자리에 대해 욕심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경에 대해서는 내가 권한을 좀 남용해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내 따까리에 대한 권한 정도는 챙겨도 괜찮겠지. ‘세크리티아에 헤르츠 경과 같이 갔으면 합니다.’ ‘제가 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 왜. 내가 옛날 생각이라도 할까 걱정됩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그럴 것 같았으면 못 찾아가지, 나도. 내 이름자락 끝에 카이리스가 붙어있는데 누굴 데려가든 다를 것이 있을까.’ 얀 몰래 차게 식힌 민트차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 둔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군인을 데리고 국경을 넘을 수는 없을 텐데 그렇다고 경을 완전히 해고하면 발칸에 절대로 안 돌아올 것 같고. 그래서 직위만 해제했습니다. 어차피 해고든 직위 해제든 그게 사실일 거라고 세크리티아에서 믿을 리는 없으니까.’ ‘아쉽다고 말씀드리면 화내실 겁니까?’ ‘응.’ ‘직위 해제 좋습니다, 왕자님. 해고하신 것이 아니라 정말 다행입니다.’ 말마따나 해고는 아니었다. 군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에 제약이 걸리는, 소속만 발칸인 민간인이 되는 것이다. 명목상의 일이었다. ‘이 소식이 좀 퍼져야 동행하기 편할 것 같아서 미리 손을 썼습니다. 언제 출발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전에 준비를 했으면 합니다. 아마 형님 탄생일 연회 이후가 될 것 같은데 이 참에 좀 쉬어요.’ 덕분에 발칸 소속 민간인이라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아르센은 신이 났다. 잠시나마 되찾은 자유에 다시 한 번 앨런의 집무실 앞에 가서 춤추고 싶은 기분을 꾹꾹 눌러 참아야 했을 만큼 신이 났다. 딱, 하루 동안만 신이 났다. 직위 해제됐다는 소식이 퍼지기는 커녕 플란츠나 니들렌에게 통보되기도 전에 플란츠가 왕궁 정문을 나서려는 낌새를 보인 까닭이다. 칼리안을 만나러 체르밀 궁에 갔더니 보여야 할 칼리안이 없었다. 그런데 얀은 혹시라도 레이븐이 장제사를 걷어차지 않도록 지켜보러 나갔단다. 그 후 왕궁을 나서려는데 왕궁 안에 세워진 마차들 사이에 왕실 마차가 떡하니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마차를 봄과 동시에 모골이 송연해진 것은, 오랜 기간 플란츠의 옆에서 지내 온 눈물겨운 나날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플란츠가 뭘 꾸미는지 알아챈 아르센은 그 길로 새끼 오리 ‘코코’를 맡기러 마법사 협회에 갔고, 칼리안이 이번 여정의 일행으로 에우리아까지 낙점을 해 두었음을 알게 됐다. 시간은 없고 소중한 코코 맡아 줄 곳도 없으니 어쩌겠나. - 삐약! 데려가야지. “꼬맹이 대단하네.” “제가 대단한 것이 한 둘이 아니라서 뭐가 대단하다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협회장님.” 나이에 비해 대단히 능력 좋고 칼리안을 대단히 잘 따르며 폭발을 대단히 좋아하는 대단하게 미친 마법사가 이렇게 물었다. “위대한 마차에서 오리 키우는 마법사라니. 대단하잖아.”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마차 안에서 삐약거리는 소리가 났다. 국경 관문을 통과할 때를 제외하고 저 마차는 줄곧 코코의 차지였다. 일행의 맨 뒤에서 산길을 오르던 아르센이 에우리아를 보며 대답했다. “여행 내내 안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입니다만. 나중에 플란츠 왕자님께서 이 일을 두고 또 뭐라 하실지 걱정됩니다.” “타국 가는 길에 오리 데려간 정신 나간 파란 머리 마법사라고 하시겠지.” “네.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 없어서 실소한 아르센이 에우리아를 향한 말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대원들이 아니라 오리를 데려오게 된 것이 좋기는 좋습니다.” “뭐. 원래는 대원들도 오기로 했어?” “아닙니다. 오기로 했던 건 아니고 그냥······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협회장님.” 이렇게 말한 아르센이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곁에서 그 시선을 따라간 에우리아가 큰 숨을 들이킨 뒤 말했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확실히 세크리티아는 대문 막기가 쉬운 것 같아. 카이리스랑 세크리티아 사이에 난 산맥이 워낙 험하니까 이쪽 길목만 막으면 빙 돌아가야 하잖아.” 카이리스의 산보다는 험난하고 대사막의 산보다는 평탄하다. 숲이 우거졌다 하기보다는 뾰족한 바위가 높이 솟아있는 모양새의 산에 구불구불 길이 나 있었다.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모를 산길에, 그 너머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바위산이 가로막고 있으니 이 너머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는 이들이 적지.” “협회장님 세크리티아에도 오셨었습니까?” “어. 너 처음 보기 전에 국경 근처에서 일할 때였는데. 야만족 추격하면서 두 번 들어왔지. 이번까지 하면 세 번이네.” “여기까지 넘나드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세크리티아에서 국경 넘어오는 걸 허락할 정도면 꽤 강한 놈들이었나 봅니다.” “당연히 몰래 들어왔지. 허락을 해 줄 리가 있나.” “아······.” 곧 에우리아의 얼굴에 꽤 오래전의 추억을 되짚는 듯한 아련한 표정이 새겨졌다. “바질리카가 진짜 맛있었어.” “······ 네.” 히몰리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독주를 떠올린 아르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보지 말고 너도 빨리 서클 올려봐.” “그게 하란다고 되는 거면 저는 이미 8서클은 됐을 겁니다.” “높기도 하다. 8서클이나 돼서 뭐 하게. 로이그란트 이후로 근 300년 동안 나온 적도 없는데.” “7서클 완성한 때로 다시 어려지는데다 아예 늙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그게 좋아 보이나?” “어지간해선 지겹도록 오래 살 것 아닙니까. 이꼴 저꼴 다 보면서요.”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좋았으면 로이그란트도 여전히 살아있었겠죠.” “뭔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맨 정신에 취한 소리 하지말고 그냥 속 편하게 6서클만 해. 술이나 같이 먹게.” 적당히 대꾸한 에우리아가 보라색 긴 머리를 풀었다 제대로 다시 묶으며 말했다. “서클이고 뭐고 나는 그냥 국경 잘 넘어온 김에 바질리카나 실컷 마시고 가야겠다.” “저희 여기 술 마시러 온 것 아닌데요, 협회장님.” “마법사가 술 마실 자리 따져가며 마시나. 그냥 마시지.” “그건 마법사라서가 아니라 협회장님이 협회장님이라서 그러신 것 아닙니까.” “꼬맹이 카이리스에 겁대가리 놓고 왔나봐.” “아닙니다. 잘 가지고 왔습니다, 협회장님.” 아르센의 빠른 대답에 에우리아가 피식 웃었다. 공사 구분 확실한 탓에 꽃 주고 꽃 받은 일 무색하게 만드는 마법사들의 대화가 그렇게 계속 이어졌다. * * * 아직 오르지 않은 달 대신 별빛만 반짝이는 밤. 드문드문 드러난 바위들 사이로 마른 풀잎들이 흔들렸다. 이미 국경을 넘었으니 어쩌면 진작부터 도착했던 것이겠지만 바위산을 지난 뒤에야 그때부터 진짜 세크리티아가 시작되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이 바위산을 내려서면 정말 도착하는 것이다. 넓은 궁의 윗층에 형들이 사는 곳 말고, 그렇게나 지키고자 했던 바로 그 땅에. “그렇게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꼭 마른 풀잎 같았다. 잊고 살던 것들을 마주해서 그런 소리를 내는지, 앞으로 만나볼 악몽에 겁을 먹어 그런 소리를 내는지 몰라 계속 쳐다보니 웃는다. “생각나는 것들도 많고, 반갑기도 하고. 그래서 그럽니다.” 바위산을 다 오를 즈음에는 언제나 밤이 되었다. 세크리티아의 사람이든 카이리스의 사람이든 둘 모두의 사람이든. 누구나 바위산의 정상에서 밤을 맞이했다. 그 바위산의 꼭대기에서 한동안 저 먼 곳을 쳐다보던 칼리안이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목소리는 플란츠 쪽에서 흘러나왔다. “안 추워.” “네.” 뭔 소리를 할지 뻔했으니까. 생글생글 웃는 칼리안의 손에 들린 것을 물끄러미 보던 플란츠가 물었다. “뭔데.” “그때 산 술이요. 시즐리누.” “반말.” “시즐리누요. 스승님께서 챙겨주셨는지 레이븐 가방에 들어 있기에 가지고 왔습니다. 형님 여기서 술 좋아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보는 눈이라 함은 바위산 정상의 감시탑에 있는 세크리티아의 기사들을 말함이다. 그러니 ‘그리 술 좋아하는 형님’을 위해 시즐리누를 꺼내왔다는 소리다. “너. 히몰리카 한 잔······.” “아닙니다.” 조금 급한 말로 플란츠의 말을 자른 칼리안이 와인병을 찰랑찰랑 흔들어 보였다. 나는 마실건데 형님 너도 드실 거냐는 얼굴을 한 채였다. “지금 이런데서 취하자고 마실 생각 없으니 연약하신 형님 안지키고 취할까봐 걱정하지는 마시고요.” “짖지, 또.” 속 시끄러울 것이 비단 칼리안만은 아니지 않겠나. 생전 처음 와 보는 이 곳에서, 언젠가의 내가 여기서는 무슨 말을 했을지, 어디를 어떻게 공격했을지. 무슨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 소득 없을 생각 접어놓고 그냥 술이나 마시자는 말을 굳이 거절 할 이유가 있겠나. 때문에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이 건네는 잔을 받았다. “와인도 처음 드시죠.” “마셔봤는데.” “술은 안드셨다면서요.” “안마셨어. 술.” 혹시 형님 와인 냄새만 맡아도 취하시는 거냐고. 이런 표정의 칼리안을 향해 실소한 플란츠가 생애 두 번째로 손에 든 와인을 쳐다봤다. 오래 전 언젠가. 오래 전 어느날. “······ 처음으로 내가 내 어머니를 막아섰던 날에.” 실리케의 독차를 받던 칼리안이 축복의 힘을 막았던 날. 칼리안이 처음으로 실리케의 앞길을 막아섰던 날. 플란츠 역시 같았다. 처음으로 실리케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란델의 것으로 놓여 있던 와인을 비웠다. 칼리안의 속을 녹인 것이 그 안에도 있을지 모른다 여겼으니, 그것은 플란츠에게 있어 술이 아니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술 드시면 되겠네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다 전해들어 알고 있던 칼리안이 플란츠의 말을 막으며 잔을 가리켜보였다. “맛있을 겁니다, 그건.” 독이 아니니까. “그래.” 이 시간을 걱정한 마음 깊은 스승이 준비해 준 두 개의 유리잔이 청량한 소리를 냈다. 마른 풀잎의 노랫소리같은 바람소리 사이로 서로 다른 독한 기억들이 같이 흘러나가 흩어졌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와인잔이 계속 채워지고 계속 비워졌다. 믿기지 않게도 나보다 술 센 것 같은 완두콩을 보던 칼리안이 열심히 오러로 취기를 밀어내며 복잡한 얼굴을 애써 지우기를 반복하던 때. 먼 곳에서 새하얀 빛이 올랐다. 늦은 달이 떠오른다. 저 멀리 하늘에 나선 달빛이 저 멀리 일렁이는 맑은 물 위를 노닐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플란츠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께서 그 바다를 앞에 두고 무덤덤했던 이유를 알겠군.” “그렇습니까.” 떠오르는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광활한 땅. 그 끝에서 시작되는 그리운 곳. 그래. 바다였다. “이번에는 형님께도 좋은 기억만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짙은 어둠으로도 채 가려지지 않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칼리안이 작은 웃음 소리를 냈다. “정녕 아름다운 세크리티아······ 실로 아름다운 곳이니.” < 제49장. 정녕 아름다운(4) > 해가 떠오른다. 어지간한 영주성의 귀빈실보다는 나을 마차 안에서 알고 봐야 순한 왕자가 잠을 자고, 왕자가 들어갔으니 잠시 쫓겨난 새끼 오리가 파란 머리 엄마 품에서 잠을 자고, 그 엄마 맞은편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보라 머리 마법사도 잠을 잤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보라 머리 마법사를 경계하던 세작 출신 검사도 어느새 잠이 든 시간이었다. “지난 여정에서도 못 주무셨다 들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너는 왜 안 자고.” “아닙니다. 일찍 일어났습니다.” “춥지는 않았어?” “네. 세이렌 경과 헤르츠 경이 수고해준 덕분에 괜찮았습니다.” “그래.” 새벽 하늘. 이른 시간의 물기를 잔뜩 머금은 새벽 안개가 산 중턱에 걸렸다. 산 꼭대기에서 자는 사람들 춥지 않게 신경써달라 부탁해놓고는 정작 자신은 마법 범위 밖으로 나와 밤을 지새운 칼리안이 먼 곳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제는 저 아래도 보이고 바다도 보였거든.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잘 안 보이네.” “해가 다 뜨면 보일 겁니다. 그것을 기다리셨습니까.”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언젠가와 같이 엎드려 잠든 레이븐의 등에 기대 앉아있던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그리고 키리에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언제 접해도 반가운 민트 향기가 모락모락 풍겨왔다. “이렇게 앉아있으면 레이븐이 숨 쉴 때마다 나까지 같이 오르락 내리락 움직이는데 그게 좋아서 계속 앉아있었어.”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이 보고 있던 곳을 함께 바라봤다. 어둠과 옅은 햇살과 아침 안개에 잠겨든 바위산 위에 칼리안의 작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테일란 카스트린. 그 분이 내 검술 스승님이셨어. 그런 얘기를 했던가.” “네. 한 번 해주셨습니다.” “그래. 그 분이 저기 저 즈음에 방벽을 하나 더 세우자고 말씀하셨었는데 굳이 필요하지 않다 생각해서 미뤄뒀었어. 초입에 이미 방벽이 하나 있기도 했고 다른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잠시만 미루자 해놓고 결국은 세우지 못했어.” 조용한 바람에 움직이는 안개 무리를 보고 있으려니 마치 물 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저기 저 쪽이 헤이사드 변경백령인데. 그 변경백이 자금 지원을 요청했었거든.” 지금은 다른 변경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고 혼잣말을 덧붙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변경백 힘을 키워주는 것에 대해서 의견이 좀 갈렸어. 나는 반대를 했고 아리안느는 찬성을 했어. 아, 아리안느라고 능력 좋은 후작 영애인데 내 친구이기도 했고 체이스 형님의 정혼자이기도 해서 셋이 그런 의견들을 종종 나눴었거든. 아무튼 체이스 형님은 내 의견에 손을 들었어. 혹시나 변경백이 반기를 들까 걱정이 됐으니까.” “그러셨습니까.” “응. 그랬는데 이 길에 카이리스 군대가 나타난 것을 알기가 무섭게 제일 먼저 이 길목을 막으려고 했더라고. 지나오면서 봤던 그 단단한 방벽이 너무 쉽게 뚫린 것을 알았을텐데도 마법사 하나 없는 기사단 이끌고 저 아래를 막았어. 뭐······ 전멸했지. 방벽처럼, 순식간에.” 칼리안의 웃음소리가 잠시 들렸다.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야기라 한참을 웃던 칼리안이 웃음기 남은 목소리를 냈다. “그런게 좀 많이 아쉬웠었어. 방벽을 세울 걸. 변경백에게 지원을 해줄 걸.” 키리에가 말없이 손에 든 차 향을 맡았다. 딱 좋은 온도에 적당히 우러난 차에서 퍼져나오는 좋은 민트향이 조금 쓰게 느껴졌다. “그렇게 하나씩 아쉬운 걸 없애보면 하루는 더 버텼을까. 하루만 더 벌었으면 무엇이든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하루. 고작, 하루. 고작 하루라 하여도 하루가 더 있었으면 세상이 바뀌지 않았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고스란히 밤을 지샜다. 늦게 뜬 달이 하늘로 오르고 햇살이 번지도록. “······ 그런 기억으로 밤을 보내셨습니까.” “그냥 기억이 났다는 소리야. 이제와서까지 후회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이미 하루를 벌었었더라고, 나는.” 두 손으로 찻잔을 모아 쥔 칼리안이 답지 않게 후후 하고 차를 식히더니 호로록 소리까지 내며 한 모금을 마셨다. 그 뒤에는 조금씩 사라져가는 안개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텐실에 수해가 난 이후에 난민들이 많이 찾아왔어. 무작정 다 받아 줄 수가 없어서 험한 산을 무턱대고 넘어오는 난민들을 보이는 족족 일단 다 억류했어. 그런 상황도 보고 해결책도 정하려고 찾아갔는데, 그 안에 되게 눈에 띄는 놈이 하나 있더라. 비쩍 말라서는 키만 큰 놈이 여차하면 다 죽여버리겠다는 눈을 하고서. 그래서 그 놈만 데리고 일단 왕궁으로 돌아갔지.” 키리에의 얼굴에 작은 웃음이 그려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지만 참 이상하게도 옛날 얘기를 듣는 기분이 든다. “내가 그 놈 하나를 줍는 사이 체이스 형님은 난민을 다 받기로 결정했고, 세크리티아 국왕은 그렇게 하라 했어.” “텐실과 사이가 좋지 않다기에 받아주지 않았다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아니야. 세크리티아 국왕은 체이스 형님에겐 늘 관대했거든. 체이스 형님 말이었으니 전부 그리하겠다 대답을 했지. 대신 얼마 뒤에 난민들이 잠시 모여 살던 곳에 불이 크게 났는데 참 이상하게도 전부 다 죽었어. 아무도 도망을 못가고.” 추억이라 하기에는 많이 이상한 뒷이야기가 이어지자 키리에의 고개가 칼리안 쪽을 향했다. 다시 한 번 호로록, 별 것 아닌 기억을 풀어놓는 얼굴로 민트차를 마신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 소식이 왕궁에 전해진 날 밤에 내가 주워온 그 놈이 내 방에 쳐들어왔어. 칼 들고. 귀가 밝은 건 알았는데 그걸 내 방 찾아올 때 써먹을 줄은 몰랐지.”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웃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데 웃음이 나는 것은 이번에는 텐실의 난민들이 세크리티아를 찾지 않은 까닭이다. 카이리스에서 제대로 지원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리스에 찾아오는 난민이 있다면 전부 다 받았다. 과거와 달리 사형시키지 않았다. 이제는 그저 혼자만의 기억으로만 남겨지고 말았으니 웃음이 났다. “아무튼 그래서 뭔 생각으로 찾아왔느냐 했더니 내가 한 짓인지를 묻더라고. 그렇다 했지. 그때도 난 거짓말은 잘 못했고, 알려주고 그냥 죽여버리려고 했거든. 나나 그 놈이나 제정신 아니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런데 내 대답 들은 그 놈이 한 말이 참 가관이었어.” “뭐라고 했습니까.” “너네 아빠 침실이 어디냐고 물어봤어.” 결국 키리에의 입에서도 웃음소리가 났다. “진짜로. 그 칼 들고 당장 찾아갈 것처럼 굴더라고. 그러는 놈을 간신히 말려서 앞에 앉혀놨더니 그 놈이 그러더라. 앞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하라고. 칼 쓰는 법 배우는 대신 다 들어주겠다고. 듣는 건 잘 하는 놈이라고.” 잠결에 레이븐이 잠시 몸을 뒤척였다. 거대한 머리에 깔릴 뻔한 칼리안이 토닥토닥 레이븐을 다시 재우며 말을 이었다. “덕분에 살았어, 나는. 키리에. 다 들어줘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들어주던 그 놈 덕분에, 미쳤다가도 다시 어떻게든 제자리로 돌아왔노라고. 바로 그 놈이 나에게 마지막 하루를 벌어줬다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굳이 입으로 전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이번에는 어디인지 알려주실 겁니까.” “세크리티아 국왕 침실?” “네.” “그러려고 내 형님 찾아가서 같이 가겠다 말했을 것 아냐.” 왕궁 밖에서 칼리안을 기다리던 플란츠를 찾아가 같이 가겠노라 했던 키리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크레타가 있을 곳을 잠시 바라보던 칼리안이 바스락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옛날 얘기 꺼낸 건 난데 내가 졸리네.” “조금이라도 주무십시오. 제가 있겠습니다.” “그럴까······.” 제 스승 앞에서만 마음 놓고 취할 수 있을 칼리안이, 유일하게 마음 놓고 잠들 수 있게 해 주는 키리에를 옆에 두고 눈을 감았다. “어디에 있는지 알려줄게. 좋은 검도 가졌으니, 이제는 나도 좋은 꿈 꾸고 싶으니까.” 잠들기 직전에 흘러나온 말. 칼리안의 좋은 검이 칼리안이 건넨 좋은 검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무엇이 먼저일까. 가만히 선 채 그것을 생각한지 오래 지나지 않아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던 체이스가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조금씩 악화되던 기침 소리가 어느 날부터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거듭 확인했기 때문이다. 루이즈가 수면향을 올리지 않게 된 이후부터는 더 중독될 일이 없었을 테니 병의 진행속도도 늦춰진 것이리라. 게다가 이제 데블란은 물조차 함부로 마시지 않는다. 자신의 입으로 만들라 말했던 그 많은 독을 의심하느라 무엇 하나 마음 놓고 행동하지 않고 있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손대고 숨쉬는 것, 그 어떤 것도 데블란에게 있어 안전하지 않을 테니. 심지어 이제 더 이상 체이스를 집무실로 부르지 않았다. 검을 다룰 줄 아는 체이스가 밀폐된 공간에서 무엇을 할지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궁금해졌다. 당신이 병으로 죽는 것이 먼저일지, 아니면 의심의 무덤 속에 스스로 파묻혀 미쳐버리는 것이 먼저일지. 혹은 결국 참지 못한 나의 검에 당신의 피를 묻히는 것이 먼저일지. “시킬 일이 있어 불렀다.” 한 시간. 이번에도 어김없이 한 시간을 기다리게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첫날에는 집무실에 말없이 앉혀두었지만 지금은 왕실 정원의 한가운데 세워두었다는 것. 눈이 내리지 않고 날 선 바람이 불지 않는다 하나 세크레타에도 추위는 있다. 실내에서 데블란을 만나고자 챙겨 입은 재킷 하나만으로는 쌀쌀해진 바람을 막기 어렵다. 지금의 일을 어디에도 알리지 않을 데블란의 호위기사들 사이에 홀로 선 체이스의 손 끝이 새빨갛게 얼어가도록, 과할 만큼 두터운 외투를 걸친 데블란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네, 전하.” 그러니 당신은 나를 어디까지 끌어내릴 생각인지. 혹시 과거 그 언젠가에도 이렇게, 치졸함을 경계하지 않고 내 동생을 짓밟았는지. “말씀하십시오.” 한 시간 만에 나온 말에도 담담한 대답을 건넨 체이스를 향해 데블란이 말을 이었다. “생일 맞이로 굳이 이 나라의 바다를 보겠다 한 것은 2왕자인데 함께 온 이들이 전부 다 3왕자의 사람인 연유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두 왕자가 나란히 엘프 대장로 나르잔을 만나러 갔던 일은 이해를 했다. 발칸의 많은 인원이 호위를 했고, 찾아간 곳 역시 카이리스와 동맹 상태에 있는 엘프들의 도시였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세크리티아였다. “두 왕자가 그토록 숱하게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해 가며 귀족들을 쥐락펴락 해온 것은, 분명 서로 이득을 보려 그리 한 것일진대. 이번 일은 그런 면이 전혀 없지 않느냐.” 생일 맞이로 부린 고집이 핑계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아봤다. 나란히 엘프 도시에 다녀오자마자 그런 짓을 벌였으니, 그것이 무작정 세크리티아에 오기 위한 눈가리개일 뿐이라는 사실을 눈치 못채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운 뻔한 연극이다. 어차피 명분 상의 일일 테니 데블란이 그 진위를 알든 말든 칼리안도 그리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2왕자는 이번 일로 무엇을 얻을까. 오로지 위험하기만 한 여정에 2왕자는 무엇을 믿고 제 사람 하나 없이 3왕자의 명분 노릇이나 해주는 것에 동의했을까.” 문제는 그 구성원이다. 칼리안이 지금 당장 플란츠의 목을 잘라내고선 ‘르메인으로부터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데블란이 앞뒤 안 재고 일행을 공격해 플란츠가 죽었다’는 누명을 씌우기 딱 좋은 상황 아닌가. 칼리안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하고 좋은 방법이다. 자신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 데블란을 르메인의 칼 앞에 밀어넣고, 경쟁자 하나는 제 칼로 줄여놓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곳에 2왕자가 자신의 사람 하나 없이 동행했다. “그렇다면 2왕자는, 바다 구경이나 하자며 꼬여내는 말에 넘어갈 만큼 무모한가. 3왕자가 제 사람들만 데려와 호위길에 올라주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모를 만큼 멍청한가. 그도 아니라면 목숨 걸고 지켜낸 동생의 명분 역할을 스스로 꾸며 줄 만큼 미련한가.” 성미가 사납고 늘상 술을 가까이 했다는 왕자. 칼리안을 공격하려 한 실리케의 앞을 막아선, 제 손으로 제 어미를 내친 왕자. 둘 중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일까. 아니면. “모두 아니라면 혹여······ 전부 다 거짓인가.” 아직 지지 않은 붉은 베고니아 꽃무리에서 시선을 뗀 데블란이 말을 이었다. “일전에 네가 직접 만나보라 권했던 이유를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 동행인조차 이렇게나 많은 것을 숨겨두고 있는데 3왕자 본인은 얼마나 대단한 것을 감추고 있을지.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여러모로 나를 궁금하게 만들고 있으니 이 어찌 반갑지 않겠느냐.” 곧 데블란은 여유 가득한 움직임으로 주머니 속의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간을 잠시 확인한 뒤 베고니아만큼 빨갛게 언 체이스의 손 끝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반가움이 큰 만큼 나 역시 마땅한 응대를 보여야 하겠지. 그러니 네가 나가보거라. 가서, 반갑게 맞이하고 이곳까지 데려오거라.” 데블란의 말을 들은 체이스의 손 끝에 힘이 들어갔다. 체이스가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거리가 멀어 왕궁을 비우며 직접 맞이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을 보내······.” “직접. 다녀오거라. 체이스.” 데블란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왕궁에 둔 것들을 잠시 잊고 바람을 좀 쐬고 오는 것이 너에게도 큰 도움이 될 테니.” 린 후작, 아리안느, 그리고 루이즈. 그 모든 것을 네 품과도 같은 이 왕궁 안에 두었으니 잠시 자리를 비우고 나갔다 오라고. 그 사이 왕궁에 둔 것들을 신경쓰지 않도록 내가 잘 보아 줄 생각이니,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리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몸을 돌려 소리 난 방향을 바라본 데블란의 미간이 살짝 움직였다. 에우리아와 아르센의 이름에 가려져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마법사 레이첼 그레이스의 힘을 빌어 참 빠르게 찾아온 손님들이 서있었다. 지나치게 빠른 이동 속도에 대한 보고를 담은 새들은 열심히 소식을 전했고 체이스의 새들은 열심히 그 새들을 쏘아 맞췄다. 물론 쏜 것은 사람이고 꿰뚫린 것은 비둘기다. - 또각, 또각. 낯선 목소리의 뒤를 이어, 언제나 조용하던 익숙한 구두 소리가 붉은 베고니아 정원 쪽으로 다가왔다. 후궁 루이즈였다. “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 귀빈이 도착하였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해서 제가 급히 맞이했습니다.” 침착한 목소리의 루이즈가 짧은 상황 설명을 마쳤고 그 뒤로 두 명의 왕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붉은 빛의 긴 망토와 검은 정장. 똑같이 생긴 왕자의 정복을 입었으나 완벽히 다른 얼굴과 표정이 눈에 띈다. “추운 날씨에 왜 이렇게 입고 나와 계십니까. 꼭 누구에게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조금 전 그렇게나 싸늘한 목소리를 낸 이가 맞을까 싶은, 마치 베고니아 향을 담은 듯한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찌하시려고요.” 새하얗고 긴 손가락이 움직인다. 칼리안은 한쪽 어깨를 감싸는 검고 풍성한 털 장식이 달린, 베고니아보다 붉은 빛을 내는 자신의 두꺼운 망토를 풀어냈다. 그리고 체이스의 뒤로 걸어가 제 손으로 직접 망토를 덮어준 뒤 본래 서 있던 곳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 체이스 형님.” 그 어느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 붉은 베고니아 향기 짜증난다며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그 말을 들은 플란츠의 입가에 긴 호선이 그려졌다. 붉은 망토에 새겨진, 또렷한 카이리스 왕실의 문장이 잠시 바람결에 흔들렸다. < 제49장. 정녕 아름다운(5) > ‘절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칼리안은 이렇게 장담했다. 데블란은 지금 플란츠의 속내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데블란은 브리센과 비슷했다. 하지만 달랐다. 브리센은 제 형제와 제 자식을 경쟁자로 보았다. 데블란은 그렇지 않았다. 적으로 보았다. 같은 피를 가지고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보다 더 위험한 적은 없노라 여겼다. 형제를 죽이고 자식을 다스렸다. 그러니 데블란은 차라리 란델의 생각을 읽어낼지언정 플란츠의 속은 모르리라고, 칼리안은 장담했다.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레이스 경을 불렀습니다.’ ‘기다려야 하나.’ ‘아뇨. 우리보다 늦게 출발했다지만 내일 국경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합류할 수 있을 겁니다. 만나보신 적 없어서 잘 모르실텐데 그레이스 경 발이 엄청 빠르거든요.’ 갑작스러운 출발이었기 때문에 레이첼이 함께 오지 못했다. 칼리안은 앨런에게 연락을 취해 따로 오게 해달라 부탁을 했다. 앨런 마나실의 가족으로 카이리스에 찾아온 뒤 이동 마법진 구축을 위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느라 카이리스에서조차도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동 마법의 대가. ‘데블란도 그레이스 경이 누구인지 모를 테고요.’ 카이리스의 그 수많은 새들을 관리하던 것은 체이스였지 데블란이 아니었지 않나. 텐실의 신관을 가로막기 전까지만 해도 체이스는 데블란의 수족과도 같은 아들이었다. 때문에 데블란은 푸른 솔새처럼 텐실과 관련된 새들을 관리했고 카이리스의 새들은 체이스에게 넘겼다. 그리고 그런 체이스를 부렸다. ‘게다가 데블란은, 제 정체에 대해서는 궁금해하며 신경을 썼겠지만 형님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카이리스의 정보를 담당했던 저 역시 세자위에 오르기 전까지의 형님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 없었으니까요.’ ‘······ 그래.’ 물론 카이리스에도 데블란 직속의 새들이 있었다. 그들을 통해 데블란이 집중하여 경계한 것은 르메인과 발칸이었다. 아직 세자위에 오르지도 못한 세 왕자의 행보 따위는 관심에 둘 만큼 가치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한 명으로 줄어들 테니까. 아마도, 칼리안으로. ‘그러니 데블란은 형님이 왜 이곳에 왔는지, 뭘 믿고 이곳까지 왔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형제를 적으로 둔 사람. 카이리스 왕자들에 대한 정보가 적은 사람. 실리케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 누구를 위한 행동이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할 그 사람은 절대로 플란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이해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 그 마법사를 불렀다는 말인가.’ ‘네. 산을 넘은 뒤부터 그레이스 경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빠르게 당도하려고 합니다. 어차피 데블란의 뒤통수를 칠 계획이라면 도착할 때까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 나으니까요. 저 말고 형님부터 경계할 생각도, 또 다른 수를 쓸 생각도요.’ 플란츠의 생일은 칼리안에게 있어서만 좋은 핑곗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데블란에게도 마찬가지다. 이 갑작스러운 이방인들을 데블란은 어떻게든 써먹으려 할 것이다. 사고방식이 다르고 정보가 적다는 것이 생각이 짧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서둘렀다. ‘아우님의 옛 형님에게도 알려야 하지 않나.’ ‘네. 체이스 형님께도 이야기 해두었습니다. 준비하겠다 하셨습니다.’ ‘알았어.’ 그렇게 도착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데블란으로 인해 잠시 잊고 있던 것. 달빛 비춘 먼 바다를 본 뒤에야 제대로 깨달았다. 밤새도록 지켜보며 잊고 있던 것을 가슴 깊이 다시 깨닫게 되었다. 이 곳이 어디인지를. “아······.” 굳게 닫아야만 했던 외성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휘몰아치던 불길은 아직 일지 않았으며 대지를 적신 검붉은 핏물의 아린 비린내 대신 차고 맑은 바람이 스친다. 새까만 화살의 비가 내리는 대신 새하얀 구름이 흐르는 그 하늘 아래, 발 밑에 놓인 자갈 하나조차 먹먹하여 차마 밟지 못하다가. - 자박. 레이븐의 등에서 내려 간신히. 정말 간신히 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걸었다. 정녕 아름다운 세크리티아. 기억인지 추억인지 꿈인지 모를 것들이 머릿속을 채우고, 내 눈길 안 닿은 곳 없으나 더 이상 내 나라가 아닌 아름다운 땅. 차마 어디 하나 소중하지 않은 곳 없어 이곳을 내가 지키려 하였노라는 그 말 한마디조차 버거운 곳에, 눈물겹도록 많은 날을 지나쳐 비로소 왔다. 그것을 진정으로 깨달았다. 그 날의 마법사들이 서 있던 곳에서 한 걸음, 두 걸음. 그 날의 플란츠가 서 있던 곳에서 다시 한 걸음, 두 걸음. 아무 말 없이 계속 발을 옮기다, 그 날의 아르센이 서 있던 곳에서 반 걸음. 그렇게 그 날의······. - 자박. 그토록 보고싶던 첨탑을. 마지막으로 담고자 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던 모습을. 꾹꾹 내리누르듯 올려다보던 붉은 눈이 기어코 감겨들었다. 한참동안 눈을 감고 오르락 내리락, 누구보다 고요히 요동치는 숨 소리를 듣고 있던 키리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순간 칼리안의 곁에서 말을 건넬 수 있을 사람은 오로지 단 한 명, 키리에 뿐이었으니까. “내성까지 안내할 사람이 왔습니다. 그리고 세크리티아의 후궁님께서 왕궁 앞으로 마중을 오신다 합니다.” “그래.” “인사는 플란츠 왕자님께서 나누시겠다 하니, 왕자님께서는.” “아니야. 내가 할게.”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되돌아 걷기 어려움을 어찌 알았을까. 제멋대로 곁으로 다가와 선 레이븐이 머리를 내려 칼리안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괜찮아. 지금은 안 기대도 돼.” 크고 검은 다정한 짐승을 달랜 칼리안이 발 아래 머무는 기억을 한 번 더 내려다봤다. 이미 마음 속에서 한 번을 보내고 그 바다의 푸른 불꽃에 한 번을 더 띄워보냈으나 미련한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참으로 미련할만큼 질긴 탓에. 아주 잠시동안 눈을 감고 다시 한 번을 보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미련 없이 레이븐의 등에 올라 왕성으로 곧장 올라갔다. “카이리스의 2왕자이신 플란츠 룬 카이리스님, 그리고 3왕자이신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님입니다.” “반갑습니다. 후궁, 루이즈 넬라입니다. 체이스 세자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루이즈와 키리에 사이에 짧은 소개가 오가는 동안에도 일렁이지 않았다. 그리 오랜 시간을 살지 못했던 아들의 단단하지 않은 마음을 잘 다스렸다.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진정으로.” 반가움 가득한 얼굴로 루이즈를 향해 인사를 건네며 잘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정말로 괜찮았다. 마음을 다스리고 다스리고 다스려가며 괜찮았다. 괜찮았는데. ······ 당신이, 감히. * * * 단 한 번도 마주해본 적 없는 미소.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 - 그리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체이스는 알아봤고 키리에는 알아들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이해했다. ‘칼리안.’ 화났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참지 마.’ 돌았다. * * * 붉은 망토. 입을 일 없다 생각하여 준비하지 않았던 왕자의 정복. ‘플란츠 왕자님께서 오늘은 이것으로 입으라 하십니다.’ 그 날 아침 플란츠가 키리에를 통해 건넸던 붉은 망토가 바람을 머금었다. 다른 곳도 아닌 세크리티아에서 자신의 옷을 빌려 입게 할 만큼 생각 없을 리 없는 형님께서 얀을 통해 미리 받아 제 짐 속에 넣어뒀단다. 이곳에서조차 나를 카이리스의 왕자로 각인시키려는 그 행동이 참으로 형님답다 야속해해야 할지. 이곳에서조차 내가 카이리스의 왕자임을 잊지 않게 하려는 그 행동이 참으로 형님답다 웃어야 할지. 그것을 모르겠어서 알겠다는 말만 전하게 하고 두 말 없이 갖춰 입은 왕자의 정복. 그 붉은 망토가 검푸른 빛의 재킷을 감싸안았다. 체이스의 몸을 덮었다. 많은 것을 참아내라는 의미를 담아 동생을 잘 꾸며 입힌 것이 무색하게, 플란츠는 고민 않고 참지 말라 말했고 칼리안은 정말 참지 않았다. - 자박. 망토에 새겨진 카이리스 문장을 본 체이스가 놀란 눈을 감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목줄 풀린 빨간 눈의 개 한 마리가 독기 숨긴 뱀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모습과 그 목줄 가차없이 놔 버린 이의 연두색 눈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놀랐다. 플란츠의 입가에 칼리안과 썩 닮은 웃음이 들어 있었다. ‘잘 봐라. 내 동생이 얼마나 잘 짖는지.’ 이런 말이 들리는 것 같다. 낭패한 상황을 맞이했음을 안 것과는 무관하게 체이스의 눈가에 깊은 안도감이 어렸다. 체이스는 칼리안이 자신을 어떻게 불렀는지, 지금 칼리안이 벌인 행동의 뜻을 데블란이 알아들었는지, 주변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데블란은 무슨 반응을 보일지. 그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았다. 다른 생각 않고 그 망토에 남겨진 안온함에 잠시 마음을 기댔다. “반갑습니다.” 데블란의 시선이 칼리안을 향했다. 마음 감추는 것 잘 하는 사람의 눈을 보면서, 마음 감출 생각 사라진 사람이 웃음을 지었다. “그래. 반갑네.” 더없이 흥미로운 것을 앞에 둔 포식자의 눈을 한 데블란이 누구보다 온화한 표정을 그려냈다. 당신이 끌어내린 당신 아들, 카이리스 등에 업은 내가 보호하겠노라 선언해버린 칼리안이 데블란을 향해 갓 피어난 꽃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칼리안입니다. 내가.” * * * 탐색. 데블란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이리스의 왕자가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그리 가까이 지냈을 줄은 몰랐던 탓에, 다소 의외라 여겼네.” “그렇습니까.” 무례함을 꼬집어 보아야 이득 될 것이 없다. 행동만 본다면 착용하고 있던 망토를 풀어 직접 채워준 것 뿐. 지금의 일을 문제 삼으면 한 시간 동안 세자를 정원에 세워 두어 타국의 왕자가 그것을 ‘안타깝게’ 여겨야 했을 이 상황부터 알려진다. 굳이 체이스가 귀족회의에 나설 필요도 없이, 데블란이 체이스를 이제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가 낱낱이 공개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데블란은 칼리안의 무례함을 묻었다. “게다가 익숙히 여기던 아이를 그대의 곁에 두고 있으니 이를 무어라 해야 할까.” 물론 무례함을 잊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웃고 있던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에일라를 한 번 바라봤다. 그 비녀 끝에 매달린 물방울같은 구슬을 잠시 눈에 담아내며 입을 열었다. “날개를 꺾어 새장 속에 두었으니 익숙하다 여기셨을 수 있겠습니다만. 스스로 도망 온 새를 거둔 이에게 건넬 말씀이 생각나지 않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러한가. 스스로 나를 떠난 새가 그대에게 갔으니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이 맞군. 그렇다면 나는 그 새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날개 꺾은 손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새는 그저 살고자 하였을 뿐이니. 그리고······ 내가 거두었다는 말을 함께 드렸는데 미처 듣지 못하신 듯합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데블란을 향했다. “도망을 했든 날아왔든 내가 주웠든. 이제는 나의 소유이니 전하께서 이야기를 나눠보실 수 있는 이가 아니라 생각되는데. 어찌 보십니까.” “그것을 입에 담을 줄 아는 이가 나의 것에 손을 내미는구나.” “아······ 체이스 형님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남은 대답을 전했다. “잘 지니신 것이 아니라 밑바닥으로 떨구려 하시기에. 대신 붙들어드렸습니다.” 데블란이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다시 한 번 미소를 그려냈다. 곧 데블란의 눈길이 칼리안 뒤의 일행에 가 닿았다. 칼리안과 똑같은 왕자의 정복을 입고 서 있는 플란츠를 눈에 담았다. 둘의 대화를 낱낱이 듣고 있던 키리에가, 칼리안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지는 것을 본 뒤 입을 열었다. “카이리스의 2왕자이신 플란츠 룬 카이리스님입니다.” 그 뒤를 이어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세크리티아의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스스로를 소개할 필요 없는 집 주인 앞에서 제대로 된 예법을 빌어 인사를 건넸다. 완벽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로. 표정은 예의바르고 입이 그렇지 못한 놈이 하나. 입은 예의바른데 표정이 그렇지 못한 놈이 하나. 실로 재미있는 조합이 아닌가. “갑작스러운 방문이기는 하나 반가운 마음은 진솔하니, 편히 머물다 돌아가길 바라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말을 멈춘 데블란이 약한 기침을 감췄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까지 홀로 찾아왔다 돌아가는 그대의 길이 험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는구나.” “신경써주심에 감사드립니다만. 괜찮습니다.” 플란츠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데블란의 눈 앞에서 바닥을 향한 플란츠의 손 끝이 긴 호선을 그려냈다.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원하는 것을 가져오려면······ 나의 것을 먼저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와 내 동생을 향한 의심에 파묻힌 당신을. 나는 나락에 넣을 테니. < 제50장. 대외 홍보용이라(1) > 작은 손짓. 조용한 말. 그것을 보고 들은 데블란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 뒤에는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한 귀빈들을 두 번째 별관으로 안내하도록 이른 뒤 집무실로 돌아갔다. 같은 것을 마주한 체이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리고 칼리안은 웃었다. 웃음의 의미를 알아볼 얀은 이곳에 없었고 어떤 날의 칼리안이 그런 웃음을 지었는지 기억해 낸 플란츠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날 칼리안이 왕실 문양을 새긴 붉은 망토를 착용한 것도, 전 왕비 디에나가 사망한 그 추운 밤 베른이 겪은 일을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보게 되었던 것도, 덕분에 전에 없을 만큼 돌아버린 것도, 그런 상태를 눈치챈 플란츠가 차라리 ‘칼리안’의 목줄을 놓는 것으로 제 동생이 그자리에서 데블란을 죽여버리지 않도록 막은 것도, 전부 다 칼리안의 계획에는 없던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플란츠의 작은 손짓과 조용한 말, 그것 역시 칼리안의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상대의 패를 가져오려면 걸어야지. 내 것을.” 멀리 왕궁 안으로 들어서는 데블란의 등을 보던 칼리안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플란츠가 그려낸 긴 호선이 칼리안의 얼굴에 고스란히 떠올랐다. * * * 언젠가 르메인이 그랬다. 나라의 크고 작음으로 위 아래를 정해서는 안된다고. 칼리안에게 했던 말은 아니지만 플란츠에게는 그렇게 이야기를 했었다. 카이리스까지 찾아온 체이스를 혹시라도 내려다보려 하지 말고 싸우지도 말고 잘 지내라 했었다. 사실 르메인의 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 왕자 모두 모르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크리티아든 텐실이든 리베른이든. 어느 하나도 카이리스의 공국이 아닌 상대적으로 땅덩이가 좀 작은 옆 나라일 뿐 어느 면에서든 카이리스보다 낮은 위치가 아니라는 정도의 상식은 숱하게 배워왔다. 문제는 내 아들들 거기 가니까 잘 좀 챙겨달라 부탁하던 르메인이 그 상식을 잠시 잊은 듯 하다는 것에 있었다. 르메인의 편지는 보고 외워 곱씹는 재미는 있었으나 확실히 유쾌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르메인의 그런 편지를 기억하는 탓에. ‘원하는 것을 가져오려면······ 나의 것을 먼저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것이라. 존중이고 나발이고 진작부터 사람 말 하기를 집어치운 듯한 셋째 왕자가 스스로를 어떻게 부르던 그 쪽은 일단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그나마 입은 참 예의바르다 생각되던 둘째 왕자가 스스로를 데블란과 동등하게 칭하는 이런 화법이 르메인이 자식 교육을 망친 결과인지 아닌지 잠시 고민을 해야 했다. 그러다 호기심이 커졌다. 그 성품이 올바르고 품위가 남다르다 했던 것이 셋째였고 성미가 사납고 기질이 좋지 않다 했던 것이 둘째였음을 상기하게 된 까닭이었다. “재미있는 형제로구나.” 잠시 기침을 하던 데블란이 짧은 감상을 꺼내자 곁에 서 있던 시종장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입을 열었다. “항의 서신을 보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하.” “무엇에 대한 항의 서신을 말함이더냐.” “한낱 왕자들이 전하의 앞에서 스스로를 그리 칭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납니다. 이에 대하여 분명한 항의의 뜻을 밝히심이······.” “되었다. 그 나이에는 다 그리 크는 법이니.” 데블란의 대답을 들은 시종장이 잠시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열었으나 곧 다시 다물었다. 같은 이야기를 두 번 하지 않는 성격이며 한 번 정한 일을 번복하지 않는 사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저는, 전하께서도 같은 생각을 하셨으리라 여겼습니다만.’ 앞에 놓인 맑은 물 한 잔을 내려다보는 동안 데블란의 기억 속에 플란츠의 그 다음 말이 떠올랐다. 의도했다는 듯 바꾸어 강조한 호칭. 별 것 아닌 일이니 그저 불쾌한 일을 겪었다 생각하고 넘겨도 좋을 텐데 데블란은 그렇질 못했다. - 상대의 패를 가져오려면, 나의 것을 먼저 걸어야지. 플란츠가 자신을 데블란과 동등하게 본 것이 아니라 데블란의 말버릇을 고스란히 읊어준 것뿐임을, 그러니 그 입에 올렸던 ‘나’는 플란츠 스스로를 칭한 것이 아님을 알아들은 까닭이다. “실로 재미있는 형제다.” 어느 순간 갑자기 소드마스터가 되어 세크리티아 기사의 검술을 그대로 사용한다던 셋째. 데블란의 손버릇을 똑같이 그려 보이던 둘째. 데블란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정적을 상대하던 셋째. 데블란의 말버릇을 그대로 따라한 둘째. 드러내어 체이스를 챙기던 셋째.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둘째. 하나는 가짜. 하나는 진짜. “지켜 보면 곧 알게 되겠지.” 어느 쪽이 더 흥미로울지를. 어느 쪽이 정말로 ‘나’를 닮았는지를. * * * 역설. 칼날 위를 사는 세 왕자가 그나마 가장 편히 잠에 빠져들 수 있던 곳은, 역설적이게도 형제들이 모두 함께 지내는 체르밀 궁이었다. 누군가는 독이 든 차를 받고 누군가는 베개 밑에 검을 숨기고 또 누군가는 그 속에 갇혀 홀로 메말라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안전한 곳이 체르밀이었다. 마찬가지. 이 세크리티아에 방문한 이방인들에게 있어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 세크리티아 왕궁이다. 어쩌면 체르밀 궁보다 더 안전할지도 모를 일이다. 데블란은, 두 왕자는 물론이거니와 이들을 따라 온 가장 말단의 기사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누구든 어느 한 곳도 상하지 않도록 호위를 보아주고 음식에 독이 섞였는지 철저히 확인을 하도록 지시했다. 세크리티아를 찾은 카이리스의 손님 중 누구에게라도 탈이 생겨 두 왕자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르메인의 말마따나 ‘마음이 아파진’ 발칸이 허해진 마음을 좀 추슬러보려 이 땅에 발을 디디게 될 테니까. 두 나라가 서로 동등하다는 것이지 지닌 힘의 차이마저 없다는 뜻은 아니지 않나. “그다지. 걱정 안 되는데.” 그것을 참 잘 아는 똑똑한 플란츠는 두 번째 별관으로 안내 받아 오게 된 직후 별관 후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보란듯이, 마법사들은 물론 호위기사들도 대동하지 않은 채로. “이곳 국왕은 브리센이 아니지 않나.” “겁이 없다 해야 할지. 내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과하다 해야 할지.” 홀로 나와 돌아다니는 파릇한 왕자를 찾아 온 체이스가 나름의 방법으로 플란츠를 우려했다. “······ 당신 입에서 나올 말 아닌데.” “물론 나도 카이리스 왕궁에서 홀로 돌아다니기는 했습니다만 그곳의 전하께서는 내 아버지와 다르지 않습니까.” “산책 중인 왕자에게 검을 보낼 만큼 앞뒤 안가리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아서.” 이 말을 들은 체이스의 목소리가 플란츠의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제온에 심장을 맡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의외라 여겨질 만큼 꽤 조급해하는 중이라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알아. 그 동안 체이스 역시 마나 다루는 것을 배웠음을 눈치챘으나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플란츠가 아무렇지 않게 곧장 대답을 전해왔다. - 당신이 해를 입으면 전쟁은 날지언정 치유사도 오게 될 테니 그 쪽으로 마음을 먹게 될 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양국의 원만한 관계 유지가 아닌 치유사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나는 내 아우님이 알아서 살려두실텐데. 당신 아버지는 알아서 살려둘 사람 없는 것 같고. 그럼 된 일 아닌가. 위험하다 생각했으면 따라나왔겠지. 내 아우님도. 누군가 플란츠를 습격해온다면 칼리안이 데블란을 잡아낼 빌미를 줄 뿐. 플란츠는 아무 해도 입지 않으리라는 소리였다. - 내 동생을 여러모로 믿고 있는 듯 한데. 혹여 그런 생각에 미끼라도 되겠다는 심산은 하지 않길 바랍니다. - 안해. 정원에 가득한, 이 겨울에 어울리지 않을 꽃향기에 안그래도 심기가 불편한데 긴 잔소리까지 듣게 되어 짜증이 난 플란츠가 짤막한 대답을 한 뒤 한 발을 앞서 나갔다. 그러다 발을 멈추고 다시 체이스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히나 올 일 없어. 내가 당신한테 존댓말 쓰기 전까지는.” 누군가 들어도 상관 없다는 듯 꺼내진 말. 데블란이 죽기 전에는, 무슨 일이 생겨도 치유사 불러올 일은 없으리라는 말. 작게 실소한 체이스가 마주 입을 열었다. “칼리안 왕자는 어디 있습니까.” “왜.” - 아무리 그래도 함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라서. 혹여 무슨 일이 있습니까. - 없어. 아무 일도. 이런 말과 함께 체이스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플란츠에게 건넸다. “직접 돌려주고 잠시 이야기라도 나누어 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어려운가보군요. 플란츠 왕자가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칼리안이 넘겨주었던 붉은 망토였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망토를 받았다. 한동안 그런 플란츠를 보던 체이스가 다시 한 번 소리 없는 말을 건넸다. - 헌데 이곳에 정말 올 줄은 몰랐습니다. 내 동생 말고, 플란츠 왕자와 발칸의 그 마법사까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통찰로도 짚어내지 못하는 것이 있다. 플란츠도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운 칼리안의 비정상적인 속내가 그렇다. - 내 아우님이 워낙 관대하셔서. 체이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생겼다. 그것이 꼭 앨런의 얼굴을 떠오르게 하는 바람에, 인상을 찌푸린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됐고. 왜 왔는데.” “망토 주러 왔습니다.” “말고.” - 생각이 깊어질 땐 눈을 내리뜨기도 하고. 손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립니다. 테이블이 없다면 무릎이라도. - ······ 다른 건. - 내기를 좋아하고. 하나의 일에 하나의 득만 보려 하지 않습니다. 사냥감이 생기더라도 상대를 탐색해 명확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는 편이고, 차근차근 조금씩 덫으로 밀어넣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마음이 틀어지면 물어 죽이기도 잘합니다. 데블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은 플란츠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차이가 있다면 데블란의 성향이 아니라 칼리안의 특징이라는 정도랄까. “많이도 닮았군.” “네. 재밌게도. 참 많이 닮았습니다.” 이런 말을 꺼낸 체이스가 한동안 플란츠를 들여다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 위험한 일에 손을 대려는 것 같은데요. 플란츠 왕자. - 알면서 묻는 건 안 좋아하는데. - 굳이 플란츠 왕자가 나설 일 아닙니다. - 방금 전에 그 버릇 다 알려준 사람이 할 말 아니야. - 위험하다 하더라도 내 동생 돕겠다는데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만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어서 묻는 겁니다. 왜 아버지가 플란츠 왕자에게까지 관심을 쏟게 하려는지. 솔직한 대답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 내 아우님께서 잘 짖으셨으니 뒷감당 해주려고. 계획에 없던 일. 칼리안이 데블란을 죽이지 않도록 말린 대신, 칼리안에게 데블란의 관심이 지나치게 쏠리지 않게 하려고 꺼낸 행동.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말 한 마디 꺼낸 것으로 데블란의 관심도 받고 칼리안 목줄도 다시 잘 쥐게 된 플란츠를 보며 체이스가 말했다. - 나로 인해 여러모로 고생하게 되었군요. - 됐어. 당신 말고 내 동생 악몽 깨우려고 온 거니까.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전해주려 건네받았던 망토를 내려다보다 문득 입을 열었다. “심부름값.” 세상에 공짜가 어딨겠나. 플란츠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비단 칼리안만은 아니었다. 참 팍팍하게 사는 동생 놈과 동생 놈의 정혼자의 관계에서도 삶의 진리 하나를 배운 플란츠였다. “가보고 싶어하는 것 같던데.” 그런 플란츠가 가리켜보인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린 체이스가 바다에 잠겨드는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낮에는 어렵겠지만 밤이라면, 올라가 볼 수 있도록 조치를 해놓겠습니다.” “알았어.” 첨탑. 성문 앞의 한 곳에 선 칼리안이 첨탑을 하염없이 바라보기에.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을 겪었고 무엇을 보려 했을지 알 것 같아서. - 내가 같이 가보기에 오늘은 그리 좋은 날이 아닌 것 같군요. 대신, 술 창고의 독주들 중에 괜찮은 바질리카가 한 병 있으니 그것을 보내겠습니다. 키리에와 함께 가지고 올라가라 하면 칼리안이 좋아할 겁니다. - ······ 말고. 당신의 옛 동생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음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서, 플란츠는 조금 복잡한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 도수 제일 낮은거. 설마, 하고 말을 멈춘 체이스가 오늘 하루 겪은 그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 심각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 * * 작은 노크 소리. 밖에 서 있던 키리에의 노크 소리에, 가만히 눈을 내리 뜬 채 앉아있던 칼리안이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왕자님.” 그리고 키리에의 말이 이어졌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있다 몸을 일으킨 칼리안이 나지막한 대답을 전했다. “들어오시라고 해.” “네.” 곧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 뒤 다시 문이 닫혔다. 또각, 또각. 조용한 구두 소리가 칼리안의 앞까지 이어지자 가느다란 선의 옅은 베이지색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쳤다. 자신을 찾아온 것이 의외였으나 참 반가운 모습이었던 탓에, 고개를 숙여 예를 보인 칼리안의 얼굴에 고운 미소가 그려졌다. “이곳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칼리안의 물음을 들은 후궁 루이즈가 체이스를 많이 닮은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입을 열었다. “결례인 것을 알지만 오늘 일에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결례라니요. 아닙니다. 고맙다 여기실 일도 아닙니다.” 데블란을 대할 때와는 완연히 다른 얼굴과 목소리를 들은 루이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켜보이는 칼리안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칼리안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칼리안의 귀에, 속삭임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고싶었단다.” 내 아가. < 제50장. 대외 홍보용이라(2) > 놀라고, 기쁘고, 혹은 안도하고. 그리 되어야 했는데. 그저 미안했다.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왜 그동안 기다리기만 했는지,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한 그 질문들을 하나도 꺼내놓질 못하고 미안하기만 했다. 보고 싶었다 하는 그 말 때문에 내내 미안하기만 했다. 당신은 나를 내내 보고 싶어 하였는데 나는 내내 잊고 살았던 탓에. 내가 사는 것이 아팠다는 핑계로 당신이 아팠던 것도 잊고 그 짧은 안부조차 묻지 않다가 얼굴을 본 뒤에야 다시 만나게 되어 좋다 여겼던 탓에. 그것이 그리도 미안하여서. 고개를 들기가 미안하여서. 어머니. 작고 좁은 당신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한참동안 그저 미안해하였다. - 달칵. 초록빛의 단풍잎차에서는 신 맛이 난다. 빨간빛의 단풍잎차에서는 단 맛이 난다. 민트도 아니고 커피도 아닌 차. 투명에 가까울 옅은 갈색의 찻물 속에 초록색도 아니고 빨간색도 아닌 단풍잎들이 띄워져 있었다. 주황색 같기도 하고 노란색 같기도 한 지금 이 단풍잎차에서는 온갖 맛이 다 났다. 그것이 재밌다. 그것이 온전히 신 맛도 아니고 또 그렇다 해서 온전히 단 맛도 아니고 어쩐지 쓴 맛도 조금 나는 것 같아서, 재밌게도 자몽이 생각났다. 다른 이유도 없이 그냥 괜스레 생각이 났다. ‘돌아가면, 란델 형님을 좀 만나 봐야지.’ 이곳에 오느라 미뤄두게 된 란델 형님의 심장을 풀어줘야지. 완두콩같은 분만 챙기지 말고 마른 갈대 줄기같은 그 분도 이제는 좀 살펴봐야지. 돌아가면. 그래. 돌아가면. 이런 생각이 들었으니 다행이었다. 단풍잎차 때문에 자몽이 생각나고, 그것 때문에 란델이 떠올라서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자칫 이 나라 이 왕궁이 내가 머무를 곳이라 착각할 뻔했다. 새로운 형제와 새로운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이 나라 이 땅을 지나쳐 다시 내 나라로 돌아가야 함을, 아주 잠시였지만 내가 그만 잊을 뻔했다. 잠시 잊고 안주할 뻔했다. “베른.” 작디 작은 목소리가 내 발을 붙들어서. * * * 키리에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루이즈가 들어간 뒤 방 안에서 오간 이야기를 전부 들었지만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어느 날인가부터 칼리안은 키리에가 근처에 있다면 꼭 키리에가 있는 곳을 포함하여 사일런트를 펼쳤다. 다른 이들이 듣지 말아야 할 대화가 오간다 하더라도 키리에는 함께 들을 수 있도록 했다. 키리에가 그 좋은 귀로 칼리안의 대화를 훔쳐 듣는다 생각하지 않도록 그렇게 신경을 썼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칼리안은 키리에가 있는 곳까지 사일런트 막을 만들었다. 그래서 키리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다 들었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했다. 생소한 기억에 잠겨드는 꿈을 꾸게 된 지 이제 한 달 남짓이 되었다는 말도 들었지만 그 역시 듣지 못한 척했다. - 베른. 그 이름으로 칼리안을 부른 이가 있다는 것 역시 듣지 못한 척했다. 그런 말을 듣게 되리라고는 칼리안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서. 만약 알았다면 키리에가 그 말을 함께 듣도록 사일런트를 넓혀두지 않았을 것이라서. 그 이름은 체이스에게 전해들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억을 찾았음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명이 아닌가. 그러니 체이스가 아닌 누군가가 기억을 찾았음을 알게 된다면 키리에 역시 같은 것을 바라게 되리라는 사실을 칼리안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키리에가 기억을 찾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키리에가 만약 베른에 대한 기억을 찾는다면 히나에 대한 일도 정확히 알게 될텐데, 칼리안은 키리에가 그런 기억을 또 가지는 것을 바랄 사람이 아님을 키리에도 잘 알았다. 그래서 키리에는 듣지 못한 척했다. 한참이 지난 뒤 루이즈가 밖으로 나왔고 키리에는 고개를 깊숙이 숙여 오랫동안 인사를 했다. 마치 앨런이나 르메인을 보았을 때처럼. “네가 그곳에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단다. 어여쁜 동생이 함께 있다지.” “네. 그렇습니다.” “이제는 네 이름이 되었으니 저 아이를 그리 부르면 안된다는 것을 내가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구나. 세자가 그런 소식까지는 전해주질 않아서.” 카이리스에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즈음부터 돌아왔다는 루이즈의 기억. 그래도 이번에는 체이스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루이즈는 오래 앓지 않았다 했다. 키리에는 루이즈를 모르지만 루이즈는 키리에를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키리에가 베른의 곁을 떠나 있었을 리 없으니 루이즈도 키리에를 많이 보았으리라. “그래. 참으로 다행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루이즈는 칼리안과 똑같은 말을 했다. 히나가 곁에 있게 된 대신 사라진 한 사람을 계산에 넣지 못하는 칼리안의 바보같은 셈 버릇은 아마도 루이즈를 닮았나보다고, 키리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세자가 나에게 신신당부를 하였다. 이곳에 오지 말라 그렇게나 이야기를 하였는데 결국 걸음을 하게 되었구나. 다만 왕자들의 일행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고맙다 인사하러 올 일이 다시 생기지는 않을 터이니, 내가 그 아이를 그리 부르는 실수도 다시 하지 않을 터이니, 혹여 밖에서 나를 다시 보게 된다면 그리 인사하지 말거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처럼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인사를 건넬 일이 없으리라. 그러니 키리에 역시 티를 내지 말아야 했다. 루이즈를 칼리안의 모친처럼 대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했다. 곧 키리에의 주변까지 닿아 있던 사일런트가 사라졌다. 그래서 루이즈는 그 이상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처럼 지금도 잠을 설치지는 않는지, 그래서 늘 새벽에 잠들고 늦은 아침에 일어나지는 않는지, 잘 먹고 잘 웃으면서 지내왔는지, 먼곳에서의 생활이 불편치는 않았는지, 그곳의 사람들은 잘 대해주는지, 그렇게나 많은 곳에 들켰는데 탈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아프지 않고 잘 지낼 수 있겠는지. 칼리안에게 꺼내지 못한 많은 말들을 키리에에게라도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루이즈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뒤로 돌아섰다. 하지 못한 많은 말들은 나중에 하면 될 테니까. - 또각, 또각. 평정심을 되찾은 작은 구두소리가 멀어진다. - 저벅, 저벅. 누구에게도 감출 필요 없는 구두소리가 가까워진다. - 또각. 루이즈의 구두소리가 멈췄다. - 저벅. 플란츠의 구두소리가 멈췄다. 키리에가 짧은 숨을 들이켰다. 사람들 앞에서의 루이즈는 플란츠를 마주하고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할까봐. 지금이라도 루이즈를 따라가서 둘 사이에 서야 하나, 짧은 고민을 했다. - 또각, 또각. - 저벅, 저벅. 하지만 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진다. 여전히 평정심을 잃지 않은 루이즈가 조용한 발걸음으로 별관을 나갔다. 여전히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 플란츠가 별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누군가는 밖으로 나가고 누군가는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낮이 지나가고 밤이 찾아왔다. * * * 항상 이런 식이다. 도무지, 정말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스스로 가진 이해의 범위가 엘프 도시 앞바다만큼이나 넓어서인지 온 세상을 다 끌어안고도 남을 만큼 깊어서인지 몰라도 항상 이런식이다. “형님 혹시 높은 곳 무서워하십니까.” 이딴 걸 물어봤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 개념의 범위가 실로 비범하신 아우님을 둔 것을 잠시 까먹은 플란츠는 별 생각 없이 대답을 했다. “아니.” 라고. 카이리스 왕궁에서는 특별히 높은 곳이랄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엘프 도시의 대장로 나르잔이 있던 곳이 꽤 높았지 않나. 이곳에 오는 길에 바위산 정상에 올라갔을 때에도 특별히 ‘무서움’을 느껴본 적 없으니 그렇게 대답을 했다. “네.” 똑똑한 플란츠가 칼리안의 그 짧은 대답 안에 ‘잘됐다. 혼자 가면 심심하고 키리에를 데려가면 술 먹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그냥 형님 너랑 같이 가야겠다.’ 정도의 의미가 있었음을 알았다면 분명히 거짓말을 했을 거다. 높은 곳 무서워한다고. 물론 그랬다 하더라도 결과는 같았으리라는 걸 안다. 놈은 거짓말 하는 것은 못해도 알아보는 것은 참 잘 하니까. 그러니 거짓말을 했더라도 지난 번 언젠가처럼 또 로브로 돌돌 말아 그 높은 곳에 올려다 놨을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됐건 플란츠는 거짓말을 했을 거다. 나는 내 미친 동생이랑 같이 안 갈 거니까 너 혼자 가라고. “정신 나갔지.” “제가 돌아서 사는 게 하루 이틀 아닌 것 잘 아시면서 새삼스러운 말씀을 하십니까.”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란 말이다. 쟤는 어떻게 여길 오면서 나를 데려올 생각을 하느냐는 말이다. 이게 머리가 돌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일단 너도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을 못하지 않겠느냐고. 도대체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어진 안 돌은 플란츠는 그냥 첨탑의 난간으로 걸어가 먼 곳을 봤다. “얘기 들었습니다. 이 곳에 오도록 체이스 형님께 부탁해주셨다고요.” “계속 보길래.” 수도의 첨탑에 올라간다 해서 특별한 것을 보지는 못한다. 칼리안이야 새들을 부렸으니 카이리시스의 거리와 새들의 거점들 하나하나를 모두 다 외워두었다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플란츠 역시 세크레타의 지도 정도는 외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스트리샤 거리의 어느 서점이든 세크리티아와 세크레타의 지도책 정도는 구비해두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세크리티아도 마찬가지. 고작 그런 것이 기밀이라 하기에는 두 나라 모두 지나치게 오랜 세월을 이어왔지 않나. 그러니 지금 두 왕자가 첨탑 위에 올라 있는 것을 데블란이 알게 된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내일 즈음이면 왕궁 견학을 이유로 둘러보러 오게 될 테니까. “네. 그래서 같이 오자 했습니다. 혹시 형님께서도 궁금해 하시는건가 해서.” “아니야.” “아무튼 좋네요. 오랜만에 오니까.” 때문에 두 형님의 호의를 부담없이 받아 이곳에 올라온 뒤 발 아래 펼쳐진 세크리티아의 수도를 내려다보던 칼리안은 아무 걱정 없는 얼굴로 헤실헤실 웃었다. 잔뜩 찌푸려진 플란츠의 얼굴은 아예 안 보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체이스 형님과는 같이 못 옵니다. 보는 눈이 많기도 하지만 다 괜찮아지면 가기로 한 곳이 따로 있기도 해서 아무튼 여기는 함께 오기 힘듭니다. 그리고 키리에랑은 아직 올라올 마음을 못 먹겠어서.” 말을 멈추고 잠시 바람을 삼킨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못 먹겠어서요.” “아무 말 안했어.” “하실 것 같아서.” “반말.” “······ 같아서요.” 바람이 꽤 차가웠는데, 춥지는 않았다. 칼리안은 더위도 추위도 타지 않았고 플란츠는 더위도 추위도 참 잘 탔지만 괜찮았다. 이곳에 오기 전 앨런이 생일 선물이라며 건네줬던 푸른 보랏빛 망토 덕분에 추운 것을 못 느꼈다. “형님 마음대로 그런 일까지 벌여가며 데블란 시선을 나눠가져가셨는데 정작 이곳에는 저만 와보는 것도 이상하고요.” 칼리안이 손가락을 들어올려 플란츠의 눈 앞에 긴 호선을 그려보였다. 체이스가 꿰뚫어 본 것을 칼리안 역시 알아봤다. 플란츠가 누굴 따라했고, 왜 그랬는지. 요컨대 데블란을 속이기로 해놓고 이런 곳에 칼리안 혼자 올라와 청승을 떨면, 답지도 않은 남의 흉내를 낸 것이 누구인지 곧바로 들킬테니 그냥 같이 왔다는 소리다. 참 그럴싸한 핑계다. “말해. 숨기지 말고.” “저 또 무슨 말씀 드려야 합니까.” “내 아우님의 옛 어머니가 오셨던데.” “······ 아무튼 내 형님은 머리도 좋으시고, 눈치도 빠르시고.” “말을 해. 짖지 말고.” 루이즈가 왔다 간 것을 플란츠도 보았다. 자신을 쳐다보며 단 한 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다 걸어나가는 루이즈를 플란츠도 보았다. 이야기를 전해 들었든 꿈을 꾸었든 눈치를 챘든, 아무튼 루이즈가 정말로 칼리안에게 고맙다는 인사나 전하자고 찾아온 것이 아니었음은 플란츠도 안다. “제 예전 이름을 기억하시더라고요. 너무 오랜만에 그 이름을 들었는데 낯설지가 않아서, 하마터면 ‘네’ 하고 대답을 할 뻔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칼리안은 잊지 않으려고 플란츠를 데려왔다. “나는 내 아우님 이름이 칼리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참 뻔뻔하고 한결같이 이런 것을 알려줄 놈이라서 데려왔다. 참 뻔뻔하고 한결같이. 이런 곳에. “맞습니다. 칼리안.” 플란츠가 칼리안이 서 있던 곳 반대편의 첨탑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루이즈를 마주친 것을 키리에가 봤으니 칼리안도 알 터였다. 그러니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서로서로 잠깐 막힌 숨이나 좀 쉬자며 데리고 올라온 것을 안다. 정말 신경쓰지 않으니 플란츠도 신경쓰지 말라고, 그 와중에도 그것을 신경써서 하필 이곳에 이렇게 올라와 있음을 안다. 그래서 플란츠도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본인이 괜찮다 했으니 기억도 없는 곳에 붙들려와서 굳이 마음 불편해하지 말라는 뜻일테니까. “바람 많이 붑니다.” “어련히 알아서 잡아주실까.” 칼리안이 웃었다. 곧 칼리안은 맨정신에 여기 있는 것 진짜 오랜만이라는 둥 날 좋을 때에는 정말 먼 곳까지 보인다는 둥 언젠가 여기서 술 먹고 잠들었을 때 키리에도 같이 잠들어버려서 체이스한테 엄청 혼났다는 둥, 참 많은 말을 두서없이 꺼냈다. 그런 얘기를 두서없이 들어주다가,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나중에.” 칼리안의 여러 말을 잘라내고 입을 열었다. 칼리안이 왕이 되고 플란츠가 브리센에 가서 고양이를 키우고, 그렇게 심장에 걸린 약속을 지킨 뒤에 다시 돌아와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와서 살아. 여기로 다시.” “저 말씀이십니까?” 그럼 너지 나겠냐고. 내가 여기를 왜 오냐고. 피말라 죽을 일 있냐고. “파란머리 미친 마법사 손에 들려줄테니까 너 와서 살라고. 카이리스 왕궁에도 숨 돌릴 데 많은 것 나도 이제 아니까.” “싫은데요.” 말 더럽게 안들어처먹는 것도 너한테서 배운거라는 건 혹시 아느냐는 말을 꾹꾹 눌러담은 플란츠의 귀에 칼리안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그냥 쭉 개 키우면서 살 거니까 형님은 고양이나 키우십시오.” “······ 왜.” 여기에는 체이스도 있고 아리안느도 있고 루이즈도 있고 세크리티아도 있지만 거기에는 아빠도 있고 얀도 있고 손 많이 가는 두 형님도 있고 목 간당하신 아버지도 있고 카이리스가 있고. “칼리안이니까.” 하고 칼리안이 웃었다. 저놈이 또 반말한다고 해줄까 하다 그냥 뒀다. 내일 모레면 동갑 아니니까 그때까지는 너그럽게 봐주는 마음씨 넓은 형님 노릇 하려고. * * * 달이 밝고 별이 많다. - 무슨 일 있어? - 아니, 그냥. 늦은 밤이 되어 달도 밝고 별도 많고. 세크리티아에 왔고 루이즈를 만났고. 다행이라 했던 그 말이 잊히지가 않았다. 그래서인지 히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 혹시 자고 있었어, 히나? - 아니야. 나 안잤어. 키리에에게 말을 하는 것은 늘 즐겁다. 손에 들린 것을 내려놓지 않고도 말을 할 수 있고, 언제 어디서든 키리에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래서 히나는 손에 들려 있던 접시에 포크를 가져가며 말했다. - 저녁을 먹었는데도 조금 출출했는데 여기 사람들도 다들 그랬나봐. 다 같이 케이크랑 쿠키랑 먹고 있었어. 비온 뒤 햇살 비치는 창가에 어린 무지개가 생각났다. 층층이 쌓아올린 무지개색의 빵 사이사이에 달콤한 생크림이 한가득 들었다. 욕심껏 가져온 케이크를 들고 테라스로 나간 히나가, 케이크를 한가득 입에 넣으며 말했다. - 오빠. 오늘 달도 밝고 별도 많아. 정말 신기하게도 히나가 이런 말을 했다. 키리에가 생각한 것을 똑같이 말했다. 베고니아 향 가득한 정원에 서서 머리 위를 한참동안 올려다보던 키리에가 웃으며 대답했다. - 그러게. 달도 밝고 별도 많네. - 응. 반짝반짝하는게 꼭 튼튼이같아. 어······ 그래. 아무리 그래도 속으로 불러줄 때에는 다른 예쁜 이름이 있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칼리안이 생일선물로 주었던 그 대단한 말을 생각하던 키리에가 작게 웃었다. - 왜? 재밌는 일 있어? - 아니야. 그런거 없어. 그냥 좋아서. - 좋은 일 있었어? 소중하다. 문득, 히나가 너무 소중해서 웃음이 났다. 이번에는 잘 지켜줘야지. 소중하게 잘 지켜줘야지. - 별이 많아서. 반짝여서 웃었어. 히나. 하늘 위에 붉은 별이 하나, 파란 별이 하나.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참 많은 은빛 별을 보면서 키리에가 웃었다. < 제50장. 대외 홍보용이라(3) > 세상에는 참 많은 단어들이 있다. 그런데 그 많은 단어들을 가져다 두고도 채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 종종 있다. 이를테면, 온전히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완전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결국은 아직 그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뿐인 미래의 미친왕을 한 알의 순한 완두콩으로 쑥쑥 키워내고 있는 내 동생의 효과적인 육아 방법을 두 눈으로 보고 있는데 내가 바로 그 완두콩인 그런 기분 말이다. 이걸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잠깐 고민을 해보다가 관뒀다. 스스로도 하루 이틀 돌아있던 것 아니라 했으니 일단은 다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세상에 이해 안 되는 일들도 사람도 많음을 이미 잘 알고 있는데 거기에 한 명 더 추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글쎄요. 사사로운 감정으로 시간의 축을 원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플란츠 왕자가 왜 그런 일을 했을까 참 궁금하기는 합니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혹시라도 기억이 돌아오거든 나에게도 꼭 얘기해줬으면 해요. 어렵지 않다면.” 그 미친왕이 부리던 이의 손에 죽은 놈이 자신의 생각을 전하며 배려심 가득한 말을 함께 건넸다. 그랬더니, “기억 돌아오면 저를 협박해서 데려오신 건지 회유를 하신건지 그것도 꼭 알려주십시오. 저는 제가 어떻게 같이 왔는지가 제일 궁금합니다, 플란츠 왕자님.” 그 놈 죽인 바로 그 놈. 미친왕이 바로 그 놈을 부렸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저도 못미더워해서 내 짜증을 자꾸 키우는 바로 그 진짜 미친놈이 논지를 흐렸고, “마법사는 하기 싫은 일 못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자의로 가셨을 것 같습니다.” 그 놈 동생 하루라도 더 살리겠다며 대신 죽었다 했던 놈이 매우 객관적인 의견을 내어놓았으며, “그런데 나는 일이 그렇게 되도록 손 놓고 있던 저하가 이해 안돼. 새들은 뭐했어? 놀았어? 저하는 뭐했어? 잤어?” 그 놈 죽을 때 옆에 붙들려 있었다던 분이 그 놈 죽게 만든 놈 말고 그 놈을 탓했다. 이상하다. 믿기지 않게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진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쟤는 왜그랬을까, 라고. 이 상황은 또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 하는지 그것도 알 수가 없어졌다. “······ 내가 자리를 피해줘야 할 것 같은데.” 오명인지 악명인지 제대로 된 평가인지도 모를 ‘미친왕’이었던 바로 그 사람이 진심을 담아 이 토론의 마침표를 좀 찍어주기를 부탁했다. 결국 이런 얘기가 오갈 줄 알았다면 아마 안 왔을 거다. 사람이 한 끼 굶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밥 한 끼를 안 먹고 말지. “그런데 칼리안 왕자님은 왜 안 오십니까, 플란츠 왕자님?” 직위가 해제된 이후 ‘발칸 부군단장’이라는 공통점을 잠시 잃게 된 바람에, 하늘 아래 두 발 달고 걸어다니면서 언어를 구사한다는 공통점만 남게 되어서 더는 그 이상한 호칭으로 기어오르지 못하는 파란머리 미친 마법사가 화제를 돌렸다. 에우리아 세이렌과 레이첼 그레이스는 세크리티아의 마법사 협회장과의 선약으로 이 자리에 오지 못했다. 협회 소속이 아닌 탓에 이곳에 자리하고 있던 아르센의 질문에 플란츠가 눈꼬리를 살짝 찌푸렸다. “모르겠는데.”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 이유를 플란츠 역시 모른다. 모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플란츠도 묻고 싶다. 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조합에 나를 끼워놓고 내 동생 대체 어디갔냐고. “아, 칼리안 왕자는 이 자리에 못 옵니다.” 그 뒤 불참 소식이 전해졌다. 이유를 알려달라는 의미로 그 보라색 눈을 쳐다보니 조금 늦게 대답이 나왔다. “아버지를 만나고 있을 겁니다.” 이들의 대화에 참여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듯 계란 프라이의 노른자에 베이컨을 찍어 입에 넣던, 바다색 머리를 비녀로 틀어올린 검사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작은 연회장의 긴 테이블 주변에 사일런트를 발현하고 있던 파란 머리 마법사, 3왕자의 기사, 그리고 2왕자가 동시에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체이스가 마련한 조찬 자리가 선약임을 알면서 이미 참석하기로 한 중요 손님을 멋대로 불러낸, 그리하여 체이스를 또 밑바닥으로 내려놓은 국왕 데블란을 떠올리게 된 탓이다. “별 일 없을 테니 신경쓰지 말고 식사해요, 플란츠 왕자.” 이제껏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체이스가 걱정 말라는 듯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아무 걱정 없는 얼굴로 헤실거리던 전날의 칼리안이 문득 떠올라서,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누가 누굴보고 신경쓰지 말라 하는지.” 체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도 줄지 않은 자신의 접시 위를 바라보다 그냥 다시 한 번 웃어보였다. * * * 일반인과 대련할 때에는 오러로 신체를 강화하지 않는다. - 딸랑. 실력의 차이가 있으니 만에 하나 다칠 것을 염려할 필요도 없었고 몸 속에 오러가 담긴 순간 이미 일반인보다 월등한 신체 능력을 지니게 되니 일부러 신경써서 더 강화시킬 필요가 없었다. - 부우웅! - 카아아앙! 그런데, 순간 아릿해오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팔에 오러를 두를 뻔했다. - 카가강! 카앙! 아니. 둘렀어도 될 것을 그랬다. 기억에 남은 어두운 새벽, 쉴 틈을 주지 않고 쇄도해오던 그 검붉은 검보다 확실히 무거웠다. 애초에 사용하는 검술이 다르고 검도 달랐으니 검의 무게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무게감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묵직했다. ‘꽤 놀랄 거야.’ 그래. 그 말 그대로다. 정말 놀랐다. ‘만나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닌데 칼을 대어 본 적은 없었어서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인 줄 몰랐군.’ ‘기대해도 좋아. 나도 기대가 크거든. 내 검과 정혼자님 중에 누가 먼저 검의 길에 오를지도 궁금하고.’ ‘그 정도인가.’ ‘응. 어쩌면······ 아니다.’ ‘왜 말을 집어넣나.’ ‘미안. 이상한 소리 어디 가서 또 하면 내 정혼자님이 죽여버리겠다 해서 말 못하겠어. 나는 엄청 오래 살거거든.’ 이제와 누군가 검의 길에 오른다 해도 ‘칼리안’이 검의 길에 올랐던 15세보다 이르기는 힘들었다. 다만 ‘베른’이 실제로 검의 길에 올랐던 것은 21세였던 탓에, 칼리안은 그 기억을 염두에 두고 말을 하려다 집어넣은 것이었다. 어쩌면, 가장 빨리 검의 길에 오른 나이가 다시 앞당겨질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알 리 없을 시오나, 그리고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 말한 칼리안으로 인해 어중간하게 마무리되었던 대화를 떠올리는 사이, 묵직한 공격이 시오나의 눈앞으로 짓쳐들었다. - 부웅! - 카가가강! 검날이 부딪히는 굉음에 손잡이 끝에 매달린 방울의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다시 한 번 팔에 오러를 두르는 것이 나을까 고민하던 시오나가 살짝 휜 형태의 검을 다잡았다. 그것이 대련이든 실전이든, 시오나는 상대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일이 좀처럼 없는 숙련된 검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예상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실력에 놀랐기 때문이다. - 카아앙! 카강! 칼과 함께 시오나를 베어내겠다는 듯 횡으로 날아오는 검을 막아낸 시오나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팔을 뻗었다. 유연하게 이어지는 공격을 피한 드미레아가 허리를 튕기며 다시 공격을 보냈다. - 카앙! 그것을 막았다. 막았음에도, 드미레아는 칼을 회수하지 않는다. - 카가각! 또 다시 걸어오는 힘 싸움. 결국은 시오나가 검을 틀어 드미레아의 공격을 빗겨냈다. 그러자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드미레아가 시오나의 검을 올려쳤다. 그리고 빙그르르, 올라간 검에 실린 힘을 담아 한 바퀴 회전하며 시오나의 허리를 노렸다. - 부우웅! - 카앙! 자신을 향한 검을 살짝 흘려보낸 시오나가 그대로 드미레아를 향해 도약했다. 공격 후 잠시 비어있는 드미레아의 어깨 쪽을 향해 칼을 뻗었다. 딸랑, 하는 방울소리가 잠시 울리다 곧 다른 소리에 먹혀 사라진다. 빠르게 발을 놀려 공격을 피한 드미레아가 아래로 향해있던 은빛의 검을 올려쳤다. - 카아앙! 그리고 그 반동으로 내리꽂히는 자신의 검을 강제로 움직여 시오나의 옆구리를 향해 뻗어냈다. 베기 위주의 공격을 이어가던 중 갑자기 튀어나온 찌르기에, 시오나가 싱긋 웃으며 제 검을 아래로 휘둘렀다. 날카로운 소음이 이어지며 이번에도 공격이 막혔다. - 딸랑. 그리고 다시 한 번 방울소리가 울렸다. - 카가가강! 캉! 카앙! 불똥이 튀고, 두 검이 서로 긁히는 소리가 났다. 한번 더 몸을 회전시켜 무게감을 더한 베기 공격을 막은 시오나가 드미레아의 손목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드미레아가 검날을 틀어 그것을 막아내려 했을 때, 시오나의 칼날이 휘어들어왔다. 끝이 구부러진 검이 말 그대로 둥근 곡선을 그리며 찔러들어온다. 공격을 막기 위해 틀어쥔 검을 다시 똑바로 한 드미레아가 그것을 올려쳤다. - 카아앙! 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으니 분명 막은 것이 맞다. 헌데. - 사락······! 블론즈 색의 머리카락 끝이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의 휘어짐이 드미레아가 예상한 것을 벗어났고, 결국 드미레아는 목 근처의 머리카락을 내어주게 되었다. 언젠가 칼리안에게 몇 가닥인가 잘려나갔던 머리카락을 잠시 떠올리던 드미레아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한 발을 물렸다. “졌습니다.” 시오나가 씩 웃었다. 어느샌가부터 팔에 오러를 두르고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만들어 쓰는 게 제법인데, 소공작.” 키도 크고 단단한 근육도 있다. 슬레이만처럼 우락부락한 근육질이 아니라 그 붉은 눈 왕자를 태우고 다니던 검은 말의 다리 같은 늘씬한 근육이 있다. “그런 근육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힘이 좋군. 자칫 잘못하면 허리고 어깨고 다 망가질 만큼 힘을 몰아 쓰는데도 몸의 균형이 잘 잡혔고. 괜찮은 실력이야. 많이 연습하고 연구한 티가 나.” “감사합니다.” 시오나를 향해 드미레아가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저도 모르게 칼리안의 말을 다시 떠올려보던 시오나가 칼리안이 삼킨 말을 제멋대로 이었다. “어쩌면, 에반이 죽어 줄어든 시스테라 대륙의 소드마스터 수가 다시 늘어나는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 이런 대단한 칭찬을 들었음에도, 드미레아는 감사하다는 말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네. 맞습니다.”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을만큼 당연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드미레아를 본 시오나의 눈에 흥미 가득한 기색이 떠올랐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 검 끝에 푸른 열기가 피어오를 날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열의가 함께 피어올랐다. * * * 웃음을 참았다. 손 끝의 호선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냥 참았다. 칼리안의 앞에 놓인 커피. 그 의미를 알아서 그냥 웃지 않고 참았다. 대신 참지 않고 말했다. “커피를 싫어하니 마시지는 않겠습니다.” 예상했던 대답이라는 듯, 데블란은 놀라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커피라는 것이 향은 달콤하나 맛이 쓰기는 하지.” “네. 전하의 말씀처럼, 그렇습니다.” 커피같은 갈색 눈이 정원의 베고니아같은 붉은 눈을 응시했다. 데블란이 말한 것과 같이 향은 달고 맛이 쓰다는 소리일까. 데블란의 말이 향은 달고 맛이 쓰다는 소리일까. 숨겨진 의미를 잠시 가늠해보려 말 한 마디를 덧붙였다. “······ 독이 들었던 탓에 싫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고.” “그 역시 전하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대의 말 역시 그렇구나. 독이 들었어.” “그렇습니까.” 데블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칼리안의 앞에 둔 것과 똑같은 커피를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그것을 본 칼리안은 참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일까 잠시 고민을 해보다 이유를 알게 되었다. 독대. 생애 처음으로 데블란과 독대를 하고 있다. 체이스를 앞에 두고는 차 한 잔을 마시지 않고 밀폐된 곳에서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 데블란. 베른을 상대할 때에도 호위기사 없이는 절대로 독대하지 않았던 데블란. 그런 데블란과 단 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생경한 기분이 들 수밖에. 이 나라를 찾은 이방인 중 가장 위험하고 가장 의심스러운 이이기 때문에, 오히려 단 둘이 만나기에 가장 안전하다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곳에 온 플란츠가 호위 없이 혼자 산책을 나간 것과 같은 이유다. “보면 볼수록 놀랍구나.” “무엇이 놀라우십니까.” “타국의 왕자가 국왕의 면전에 독을 내밀고 있으니,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닌가.” “대단하다 여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타국의 국왕이 자식을 독에 담아 키운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된 것만큼 놀랄 일이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데블란이 참지 않고 웃음소리를 냈다. “그 독이 실로 달구나. 대화하는 재미가 있으니.”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이제는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는 이를 눈 앞에 둔 칼리안이 지금 얼마나 많은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지, 데블란이 알고는 있을까. - 참지 마. 제발 좀 알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입 속의 독을 참지 않는 대신 무엇을 참고 있는지를. “나의 새가, 아니지. 이제 그대의 새라 해야 하나. 그대의 새가······.” “에일라입니다. 새가 아니라.” “아,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그 이름 끝이 조금 달라진 탓에 잠시 잊었구나.” “브리지트 말씀이십니까. 나에게 있어 중요한 곳이라 그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중요한 곳이더냐.” 데블란의 이 질문을 들음과 동시에, 전날 플란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내 아우님이 데블란을 따로 만나게 되면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티나. 숨기면. 전부. - ······ 네. - 만나게 되면 뭐라고 짖었는지만 말해. 맞춰줄테니. - 동생이 사고치면 수습해주는 형 노릇 해주시는 겁니까. - 그래. 체이스 말은 전부 다 잘 들으며 살았고 란델 말은 전부 다 안 듣기로 했다. 그러니 중간에 낀 플란츠 말은 적당히 걸러가며 듣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나. 내 형님 가라사대 다른 사람 앞에서 이것저것 숨기느라 기죽지 말고 잘 짖으라 하셨으니, 잘 짖어야지. “내 어머니가 그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하니 나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세크리티아에서 지내오던 아이에게 성이 필요하다 하여 그 곳의 이름을 주게 되었을 뿐, 그리 특별한 이유는 아니니 관심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그것은 몰랐던 이야기구나.” “당연히 모르는 일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타국의 국왕이 나와 내 사람들에게 그렇게나 관심을 가지게 될지, 나 역시 몰랐던 것처럼.” “그것이 그대와 그대의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끝났다면 좋았을 것을. 모르던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자꾸 동하니 이를 어찌할까.” “계속 궁금해하시면 됩니다. 신기한 것이 많은 세상에 호기심을 막으려 드십니까. 내 사람들에 대해서든 나에 대해서든, 혹은 내 형제들에 대해서든. 얼마든지 궁금해하셔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잠시 말을 멈춘 칼리안이 제 앞의 커피잔을 데블란 쪽으로 살짝 밀었다. 칼리안에게 있어서는 독일 뿐인 그것을 데블란에게 건넸다. “어차피 오래도록 궁금해하지도 못할 분이신데. 잠시나마 참고 이해를 해드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와 함께, 입 속의 독도 계속 건넸다. 마치 한 마리의 뱀이 된 것처럼. < 제50장. 대외 홍보용이라(4) > 탐색. 그리고 공방. 데블란이 지키고자 하는 것. 칼리안이 빼앗고자 하는 것. 데블란이 빼앗고자 하는 것. 칼리안이 지키고자 하는 것. 빼앗으려 하는 이와 지켜내려 하는 이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래. 그렇지. 그대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지. 내가 그대를 궁금하다 여긴 만큼 그대도 그리 여겼을 테니 몰랐을 리 없지.” 데블란이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칼리안이 입매를 움직여 긴 미소를 지어보였다. “직접 만나보니 생경하구나. 그대에 대해 전해오는 말들은 지금과 참 많이 달랐었으니.” “아······ 그건 대외 홍보용이라. 아마도 많이 다를 겁니다. 전하께서 그러하듯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말을 퍽 많이 한 탓에 데블란이 기침을 했다. 칼리안은 별다른 표정 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아,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였다. 이것 참······ 진정으로 재미있는 말상대가 아닌가. 내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아쉬울 만큼 재미가 있구나.” “마음에 더 드신다 하니 그 역시 다행입니다.” 이 정도의 말에 노여움을 느낄 데블란이 아니다. 데블란이 화를 내서 물러날 칼리안이라 생각했다면 일부러라도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겠지만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 절대로 화내지 않는다. 언젠가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이 호밀쿠키를 주었을 때, 그것이 프레이야를 조롱하는 의미였다 하더라도 백작에게 흥미를 가졌으리라 생각하던 칼리안 아니던가. 데블란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데블란이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음을 칼리안도 잘 알고 있었다. “허나 큰 욕심은 버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땅에 조금 더 발을 디디고자 하는 마음이 욕심으로 보이느냐.” “욕심입니다. 전하의 발이 닿은 곳마다 피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데 그런 곳에 더 머물겠노라 하는 것을 욕심이 아닌 무엇으로 칭하겠습니까. 곁에서 보고 견디기에 버거우니 이만 발을 물리셨으면 합니다.” “아니지. 아니야. 욕심이 아니다.” “그렇다면 겁입니까.” “그렇지. 그리 부르면 썩 어울리지 않겠느냐. 본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겁도 많아서, 가진 것을 놓자니 하도 겁이 나 못하겠구나. 평생을 살아 온 곳에서 발을 떼는 일에 이리도 겁이 나는 것을 두고 어찌 할 도리가 없지 않겠느냐. 발을 떼지 않도록 노력을 좀 해 볼 수밖에.” 이렇게 말한 데블란이 기침을 넘기려 커피를 들어 마른 목을 축였다. 잠시 쉰 듯하다 곧 본래대로 돌아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나저나 미안하구나. 그대와 이야기하는 단 향에 취해 내가 잠시 하려던 말을 잊었으니.” “괜찮습니다. 독이라는 것이 본래 그런 법이니.” 만약 누군가 먼 곳에서 이들의 모습을 본다면 참으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믿어 의심치 않을 만큼, 당장 꽃이라도 한 송이 피어날 듯 온화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염려 말고 하려던 이야기 다시 하십시오. 듣겠습니다.” “그래. 해주어야지. 내 죽을 날 세고 있다 하는데 기회가 왔을 때 꺼내놓지 않았다가 늦어지지 않으려면.” “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데블란은 질문을 바로 꺼내지 못했다. 칼리안은 터져나오는 짧은 기침 몇 번을 숨기지 않고 내보이는 데블란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고단하신 듯한데 이만 자리를 물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말씀은 나중에 하셔도 될 테니.” “그럴 수야 있나. 그대 말대로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을 생인데 기회가 되었을 때 미루지 말아야지. 게다가 이제부터 물어볼 것이 나의 진짜 의문인 것을.”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데블란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의 새······ 아니지. 에일라. 그래, 에일라. 그 아이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참 많이 전해주어서 흥미를 가지고 들어 왔는데, 특히 그대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들을만 하였지. 처음에는 나의 새들에게서 심장을 멈추는 독을 구해내고 이곳 기사들의 검을 쓴다 하더니 하루 아침에 오러를 내고. 꽤 영악한 방법으로 그대의 자리를 굳혀가는 모습들이 익숙하여 흥미가 생기더구나.” “그러셨습니까.” “그대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에일라에게 들었는데. 생각해보면 그것이 참 이상하지. 왜 그 이야기를 나는 에일라에게 듣게 되었을까. 그곳에 있던 나의 새들이 참 많았는데.” 잠시 말을 멈춘 데블란이 칼리안을 바라봤다. 그것이 마치 의견을 묻는 듯 보여서, 칼리안이 가벼운 목소리로 답을 전했다. “거쳐가던 손에서 새들이 멈춘 탓이 아니겠습니까.” 원하던 대답이었던지 데블란이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지. 카이리스로 보낸 새들은 내가 지켜보지 않았으니, 나를 대신해 새들을 지켜보던 세자가 나에게 그 말들을 전하지 않았던 것이겠지. 때문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 보았다. 뜻밖에도 세자가 카이리시스로 잠시 찾아가겠노라 이야기를 하기에 그리하라 하였지. 그랬더니 그 아이가 카이리시스에 가서는 나의 새들을 참 많이 떨구어 없앴다. 그러니 그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 “체이스 형님께서 나를 참 많이 아껴주시는 탓입니다. 그 역시 특별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니지. 그것이 특별하지. 왜, 세자가, 그대를. 그리도 아끼는지.” 그리고 칼리안은 별 것 아니라는 얼굴로 답을 전했다. “누군들 나를 보면 아껴주고자 할 마음이 안 들겠습니까.” 앨런은 물론이고 얀과 키리에와 아르센을 거쳐 가까운 르메인과 저 먼 슬레이만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이들이 칼리안을 아껴주고 있지 않나. 심지어 시스파니안과 어머니 나무에게도 아낌을 받는데 체이스가 그렇게 구는 것이 특별한 일일 리 없지. 솔직하게 말해서 능력 많고 돈도 많고 정도 많고 이해심도 많은데 엄마는 엘프고 아버지는 국왕이라 핏줄마저 특별한 왕자가 이제 잘 참기까지 하니 누군들 아껴하지 않겠나. 아. 드미레아랑, 내 위층에 사시는 형님들 빼고. “단지 그 이유 뿐일까.” 칼리안의 입에 웃음이 어렸다. “굳이 이유를 더 찾아보자면 한 가지가 더 있겠습니다.” 잠시 데블란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켜보이며 말을 이었다. “나를 보면, 마치 잃어버린 동생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칼리안을 바라보던 데블란이 소파에 등을 묻었다. “잃어버린 동생이라······ 그렇다면 내가 그대를 볼 때 아들을 본 듯하다 느껴야 하는가.” “아······ 내 이름을 그리 말씀드렸는데, 벌써 잊으셨는지.”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있는 얼굴로 고개를 한 번 가로저은 칼리안이 남은 대답을 전했다.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내 아버지께서 서운해하실까 걱정이 큽니다.” 데블란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 되는 일이더냐.” “그렇습니다.” 그 역시 기분 나쁜 대답은 아니었는지 데블란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움직여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다시 소파에 기대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하나만 더 물어도 되겠느냐.” “혹여 싫다 하면 묻지 않으실 겁니까.” “그리하지는 않겠지.” “네. 물어보십시오. 대답하겠습니다.” 데블란은 잠시동안 기침을 몇 번 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세자는 그대를 그리 아끼는데.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를 그리 아끼는지. 그것이 궁금하구나.” 레이븐이요. 라고 하려다가, 오가는 대화에 숨김과 거짓 없이 임하라 했던 형님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그렇게 찾던 히나라는 치유사를 가장 아낍니다.” “그러하더냐. 그리 소중하다면 내가 그 치유사를 이 곳으로 초대해줄까 하는데. 어찌 생각하느냐.” “수고해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체이스 형님의 즉위식에 함께 하게 될 테니.” 데블란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실로 재미있는 이로구나. 이 얼마만에 가져보는 진솔한 대화인지 알 수가 없을 만큼, 그대와 이야기하는 것이 실로 즐겁다. 그러니 이를 또 어찌하나.” 기침이 나오든 말든, 숨이 막히든 말든, 진정으로 기분이 좋다는 듯한 얼굴로 웃었다. 한참이 지나서 간신히 웃음을 멈춘 데블란이 칼리안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두고 보기에 이다지도 즐거운 이를 다시 돌려보내려면 내 아쉬움이 클 것 같으니.” 그리고 비로소 독니를 꺼냈다. * * * 그래. 내가 그렇게 말을 하기는 했다. 수습, 해준다고. 그렇게 말을 하기는 했다. 수습을 해주겠다 했지 전쟁을 해주겠다 하진 않았지만. “······ 하.” 시키는대로 잘 짖었다고 방긋방긋 웃고 있는 칼리안을 보며 참으로 깊디 깊은 한숨을 쉬어보인 플란츠가 테이블을 가리켜보였다. “그래.” 알았으니 먹던 거 계속 먹으란 뜻이었다. 먹든지 처먹든지, 아무튼. “형님은 오늘 식사 하셨습니까. 또 풀만 드시네요.” 먹었다. 체했다. 오늘 점심은 커녕 아침에 체했다. 점심은 별 생각이 없어서 대충 샐러드만 집어먹고 말았다. 그러고 나니 저녁에도 특별한 생각이 없어서 그냥 샐러드와 스프만 먹고 말았다. 제대로 먹지 않고 체하기만 한 탓에 이번에도 축복의 힘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왜 체했는지 말해줄 수도 없는 일이라서, 알고 보면 순한 플란츠는 다른 말 없이 그냥 고개만 대충 끄덕여줬다. 그리고 데블란과의 독대를 끝낸 뒤 하루 종일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바람에 저녁이 되어서야 만나게 된 칼리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먹어. 계속.” “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포크와 나이프를 다시 섬세하게 놀리기 시작했다. 올리브 향이 가득한 샐러드와 하얀 빵. 소고기와 하얀 버섯을 갈아 넣은 부드러운 스프, 버터와 마늘에 구운 랍스터와 홍합들. 향 좋은 트러플이 든 크림 소스 위에 올려진 송아지 고기 스테이크. 오징어와 새우를 넣은 토마토 스튜, 그리고 레몬과 함께 자리한 생굴. 시간이 되흐르고 사람이 바뀌고 머무는 곳이 달라져도 식성 하나는 변하지 않는 법이라서. 어찌 보면 가장 입맛에 맞을 식단을 준비해 줄 수 있는 곳에서 차려 준 고기 많이 해물 많이 생굴 많이 많이 식단을 앞에 두고 침착하게 가짓수를 줄여나가는 칼리안을 한동안 쳐다보던 플란츠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이러다 저 놈 연세 알기 전에 내가 더 늙을 것 같다. 실로 복잡한 얼굴로 칼리안이 데블란에게 짖었다는 그 수많은 내용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본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파란 머리 마법사.” “······ 네, 플란츠 왕자님.” 아무 말 못할 아르센이 마지못해 대답했고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이렌 경, 그레이스 경. 불러.” 협회장님은 세이렌 경이고 그레이스 경은 그레이스 경인데 왜 저는 파란 머리 마법사입니까, 연두 머리 플란츠 왕자님. “······ 네. 플란츠, 왕자님.”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이 분명한 얼굴이 된 아르센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일어났다. 어차피 식사는 이미 진작에 끝내고 칼리안의 입 안에 우르르 들어가는 생굴들을 보던 중이라서 더 앉아있을 일도 없기는 했다. “카이리스에 연락하지 말고.” “안 합니다.” 혹시라도 저 미친 마법사가 진짜 전쟁이라도 준비해달라 말할까봐 한 마디를 덧붙인 플란츠를 보며 툴툴거리듯 대답했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 밖으로 나갔다. 그 뒤 플란츠는, 부드러운 고기를 썰어 크림 소스를 한가득 묻혀 입에 넣은 뒤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동생 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늘 느끼지만. 잘도 처먹는다. 진짜 잘도 처먹는다. 아무튼 속이 허하면 배도 허해지신다는 아우님이라는 것을 참 잘 알아서, 플란츠는 잘 짖고 와서 하루종일 방 안에 처박혀있다 참 잘 처먹는 동생을 그냥 계속 내버려뒀다. 그리고 얼마 뒤 아르센이 두 마법사를 불러왔다. 잠시 밖으로 나가 두 마법사와 대화를 나눈 플란츠가 칼리안 혼자 있던 곳에 되돌아 오니, 칼리안이 손에 들린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있었다. 드디어. “오랜만에 잘 먹었네요.” 바로 어제도 너 되게 잘 먹었던 건 다 잊었나보다. “그래.” 아주 적은 양의 와인, 귤과 라임, 그리고 탄산수를 섞은 음료를 홀짝이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봤다. “앉지도 않으시고 가지도 않으시고. 거기서 뭐하십니까.” “기다려.” “저는 왜 기다리십니까.” “나가려고.” “어디를요.” “밖에.” “왕궁 밖 말씀하는 건 아니시죠.” “맞는데.” 탄산수에 가득하던 얼음에서 짤그랑, 하는 소리가 났다. 혀를 차는 것처럼 얼음 소리를 한 번 낸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 가십니까.” “바다.” 내가 진짜 그놈의 바다 평생 안 보고 말지 형님 너 왜 자꾸 바다 타령이냐고. 이런 생각이 담긴 얼굴의 칼리안이 보다 정중한 말을 했다. “형님 혹시 사춘기 언제 끝나십니까.” 그리고 플란츠는 신경쓰지 않았다. “짖을 거면 가서 짖고. 가자고.” “거길 왜 갑니까. 지금. 곧 밤인데요.” “바다 도착할 즈음이면 생일 되겠지.” “생일이라 바다를 보셔야겠다 그런 말씀입니까. 위험할 것이 분명한데도요.”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동안 플란츠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가시죠.” 그렇게 말하고 앞서 나가는 칼리안을 보는 플란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체이스에게 그랬다. 내가 미끼 노릇은 안 한다고. 내 동생을 미끼로 던질 생각 없다는 말은 안 했다. < 제50장. 대외 홍보용이라(5) > 실리케를 몰아내는 것에 일 년이 걸렸다. 에반을 치워버리는 것에 이 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데블란은. - 톡, 톡, 톡. 세크리티아 왕궁에 도착해서 기억을 좀 되돌아보고 그리웠던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할 틈도 없이, 일단 데블란부터 만났다. 만났다기보다는 불려갔다 하는 것이 맞겠지만 아무튼 만났다. 단 한 순간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이라는 허울에 갇힌 독을 나눴다. 찬 민트차가 담긴 유리컵을 쥔 손가락이 느릿한 소리를 냈다. 아침부터 한낮까지 몸 속으로 들어간 것이라고는 지금 손에 들린 민트차 한 입, 그리고 아침에 맡은 달콤한 커피 향기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독을 잔뜩 집어먹어 그러나.” 서로간에 주고받은 독이 그렇게나 많았으니 특별히 무언가를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수 밖에.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답지 않게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고 앉은 칼리안은 팔걸이에 올려 두었던 손 끝으로 수십 수백 번 유리잔을 두드리며 생각을 했다. 왕비 디에나와 후궁 루이즈가 준비했던 독이 든 수면향은 더 이상 전달되지 않는다. 체이스의 변심과 루이즈의 배신을 알게 된 데블란은 더 이상 방심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냥 둔다면 데블란은 잔병치레나 좀 하면서 살다가 어떻게든 치료를 받을 것이다. 뱀이란 생물은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으며 그 무엇도 잊지 않으니, 그렇게 되면 데블란은 체이스와 루이즈를 향한 복수를 포기하거나 칼리안을 향한 깊은 관심을 접어버리지 않으리라. 그러니 어찌해야 하나. ‘이를 또 어찌하나. 두고 보기에 이다지도 즐거운 이를 다시 돌려보내려면 내 아쉬움이 클 것 같으니.’ ‘불필요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내가 돌아가는 것을 전하께서 보실 일이 없을 테니.’ 어찌해야 그 뱀을, 그 독을, 태워 없앨까. 카이리스의 왕자가. 세크리티아의 국왕을. 어떻게. - 톡, 톡, 톡. 본래에는 자신과 제온의 연관성을 의심하게 하기 위해서 붉은 오러까지 보여가며 연극을 했었는데 플란츠가 건넨 멋진 뒤통수에 얻어맞았다. 덕분에 루이즈가 벌인 일을 마음에 두던 데블란이 칼리안을 향해 관심을 가지게 할 시간이 좀 부족해지지 않았던가. 그래서 데블란을 앞에 두고 짖었다. 결국 데블란의 입에서 칼리안의 안전을 염려해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짖었다. 계획했던 것과는 다른 방법이겠으나 그렇게 해서 루이즈를 향한 시선을 자신에게로 묶어두었다. 그 후 긴 사유를 이어나간다. 이 순간 자신과 완벽히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상대를 먼저 죽여 없애기 위해서. “키리에.” 몇 분이 흘렀는지 혹은 몇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하지 않고 나지막이 입을 열자, 칼리안이 돌아온 뒤로 줄곧 문 앞을 지키던 키리에가 안으로 들어왔다. “헤르츠 경을 불러와줘. 조용히, 티나지 않게.” “네. 왕자님.”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인 키리에가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까지 밖을 지키고 서 있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덧붙여줄까 하던 칼리안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키리에가 다시 들어왔다. 방문이 이전보다 조금 더 오래도록 열렸다 닫혔다. 그리고 칼리안은 키리에의 조금 뒤, 정확히는 아무도 없는 문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리 와 앉아요, 헤르츠 경.” 그와 함께 허공에 걸어두었던 가림막을 걷어내듯 아르센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화 마법을 쓴 채 키리에를 따라 들어온 아르센이 인사를 건넨 뒤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티내지 않고 잘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짧게 답한 아르센이 더 이상의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차분해진 모습에, 칼리안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키리에 말로는 체이스 앞에서는 별다른 내색을 안했다더니 아무래도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그 세크리티아 왕궁에 와있다는 것에 대해서. “경의 오리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완두콩 기분은 신경 썼어도 따까리까지는 미처 챙기지 못한 칼리안이 가벼운 질문을 건넸다. 그 와중에도 차마 ‘코코’라는 이름을 입에 담지는 못했다. 직관적이면서 기억하기 쉽고 뜻도 참 좋은데 심지어 입에도 착착 붙어 어디 하나 책 잡을 것 없이 그저 좋기만 한 튼튼이같은 훌륭한 이름을 짓지는 못할 망정 코코라니. 하여간 이름 짓는 실력 하고는. “네, 왕자님. 밥도 잘 먹고 하루하루 몰라 볼 만큼 잘 크고 있습니다.” 분위기 좀 바꿔보려는 질문임을 알아들은 오리 엄마가 씩 웃으며 대답을 했다. 그 후로 몇몇 가벼운 말들을 주고 받은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내가 경에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와 달라 했습니다.” “네, 왕자님.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은, 한참 전부터 내내 손에 들고 있어 얼음이 다 녹아버린 민트차를 다시 차게 식혔다. 그리고 그것을 한 모금 마신 뒤 아르센을 향해 부탁 하나를 꺼내놓았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르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칼리안은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커피 향기와 민트 차 한 잔으로 밝은 시간을 보내고 참 많은 것을 싹싹 먹어치운 뒤, 어두운 밤이 되었을 때 사춘기 형님의 생일 타령에 못이기는 척 바다로 끌려가주기 전의 일이었다. * * * 체이스와 함께 갔던 작은 바다를 가진 않았다. 체이스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플란츠를 데리고 가는 것은 첨탑 하나로 족했으니, 굳이 그 바다에까지 플란츠와 함께 갈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그 바다는 데블란이 모르는 곳이기도 했으니 그 쪽으로 발을 옮기지는 않아야 했다. 그 바다 인근에 있는 디에나 왕비의 무덤은 나중에 들러도 될 일이니까. 에스티나에 올라 아무 말 없이 따라오는 플란츠를 잠깐 쳐다본 칼리안이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변덕이 참 심해서 그 야밤에 꼭 바다를 봐야 하겠다는 플란츠와, 그런 플란츠를 결국 말리지 못한 칼리안을 세크리티아 왕실 소유의 바다까지 안내해 줄 세크리티아의 기사들이 보였다. 아는 얼굴들이 있다. 아니, 얼굴 모르는 이가 딱 두 명 있다. 나머지 열 세 명은 모두 아는 이들이다. 최후의 최후까지 왕궁 안에 남아있던, 그리하여 베른과 함께 왕궁 밖으로 나섰던 국왕 친위대의 기사들은 아니었다. 다만 친위대가 성문 밖을 나서기 전에 먼저 그 곳에 서 있던 이들이다. “······ 나중에 엘프 대장로 나르잔과 이야기를 좀 해봐야 되겠습니다.” 기사들의 이름과 그 마지막 얼굴 하나 하나가 전부 다 떠오르는 것을 애써 지운 칼리안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내 형님께서 이렇게나 바다를 좋아하시니, 아우 된 도리로 그 좋아하시는 바다에 언제든지 가보실 수 있도록 신경을 좀 써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두운 밤. 달리지도 않고 일정한 속도로 발을 맞추어 걷는 말의 발굽 소리. 들리는 소음이라고는 오로지 그것 뿐인 탓에, 칼리안의 조용한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렸다. “내 아우님께서 왜 소용없는 일을 계획하시나.” 놀랍게도 플란츠는 ‘짖지 말라’는 말을 꽤 길게 했다. 덕분에 칼리안의 입술이 길게 올라갔다. 지금 플란츠가 어떤 식의 대화를 원하는지 눈치를 챘으니까. 아주 작은 웃음소리를 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소용이 있을지, 없을지. 시스파니안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미리미리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특히나 요즘에는 더더욱.” “선물 안 주시는 건 이해할테니 시끄러운 입이라도 좀 다물어주셨으면 좋겠는데.” “시끄럽다니, 서운하네요. 이 먼 길을 함께 와드리고 이렇게 번거로운 걸음까지 같이 걸어드리는 아우인데.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씀 계속 뱉으실 거면 돌아가지.” “아닙니다. 어차피 내딛은 걸음이니 계속 가야죠.” 생긋 웃으며 대꾸한 칼리안이 조금 더 작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 생일을 맞이하셨으니.” 세자위에서 멀어지게 되면 왕궁 안에 머물지도 못할 테니 그 좋아하는 바다나 좀 둘러보며 살 수 있게 배려해주겠다는 동생. 그리고, 세자위에 오를 것은 나인데 네가 왜 쓸데없는 계획을 세우는지 모르겠다 대답하는 형. 이렇게,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왕자들의 대화’가 일단락됐다. 그리고 기사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묵묵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또 얼마나 더 걸었을까. 짙은 소금 내음이 느껴지고 큰 물이 대지를 적시는 소리가 아주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곳입니다. 주변을 경계할테니 편히 둘러보십시오.” 이유가 있어 찾아 온 곳이라 하여도 반가운 것은 다름이 없는 까닭에. “고맙습니다.” 기사들을 이끌어온 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칼리안이 잠시 레이븐의 발을 멈추고 여러 표정이 깃든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레이븐의 고삐를 다잡았다. 오래 전 체이스를 처음 마주했던 그 날처럼, 레이븐은 파도가 잘 보이는 곳으로 당장 달려가려 했으니까. “여기서 기다려. 레이븐.” 속삭이듯 말을 전한 칼리안이 레이븐의 등에서 내렸다. 곧 칼리안이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뒤 저벅 저벅 발을 옮겼다. 플란츠가 뒤를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은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두 사람이 파도를 향해 걸어갔고, 한 사람의 발자국만 남았다. “또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 발자국의 끝에 선 칼리안이 소금 내음을 한가득 들이마시며 입을 열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을 반투명한 사일런트 막을 보던 플란츠가 대답했다. “별로.” “아닌 것 같은데.”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한 글자를 더했다. “······ 요.” 아직 완두콩 생일 안 됐다. 플란츠의 미간이 또 찌푸려지는 것을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일단 오자 하시니 왔습니다만. 데블란을 속이시려는 건지, 저를 속이시려는 건지. 형님 꿍꿍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면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나눴던 둘의 대화가 데블란에게 전해질 테고, 데블란은 믿지 않을 것이다. 마법 쓰는 칼리안이 굳이 기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개인적인 대화를 할 리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 테니까. 과연 형제 사이가 좋다 믿을지. 혹은 사이가 좋지 않다 여길지. 결국은 속고 속이기 위한 걸음이나 섣불리 예측하기는 어려울 일이다. “아니면 정말 바다가 보고싶으셨는지.” “둘 다.” 꿍꿍이가 있기는 한데 바다 보러 온 것도 맞기는 하단다. “궁금해서. 다르다기에.” 그 꿍꿍이는 안 꺼내놓을 거냐 묻는 대신, 칼리안은 그냥 고개만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다르기는 합니다. 바다 색도 다르고 생긴것도 다르고. 그곳의 바다는 많이 짙었지만 여기는 아니라서요. 정말 맑을 땐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운 그런 날도 있습니다.” “그래.” “그걸 보시려면 낮에 왔어야 하는데. 아쉽네요.” “······ 나중에.” “네. 다시 보여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속 편히 대구 드실 수 있게 되면.” 곧 칼리안이 몸을 숙이더니 서 있던 자리에 앉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따로 앉을 수 있도록 의자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여기저기 아무데나 앉고 눕고 자고 했던 베른이 없었던 탓에 왕족이 바닥에 앉는 것을 처음 보았을 기사들의 놀라움에 대해서도 그냥 신경을 껐다. “생일 선물은 준비 안했습니다. 워낙 드린 게 많아서 선물까지 드리면 갚으려고 드실 것 같아서요.” “달라고 안 했어.” “네.” “한 번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플란츠를 올려다 봤다. 한참동안 다른 말 없이 바다 이곳 저곳을 보던 플란츠가 칼리안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파도에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앉았다. “르니에리를 심으셨던데.”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쩌다보니.” “생일 선물로 드린 것 아닌데요.” “받은 사람 마음 아닌가.” 게다가 어차피 비슷한 때였지 않나. 어쩐지 이런 말을 함께 들은 것 같아 짧은 한숨을 한 번 쉰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올려 하늘을 봤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지금 나이 즈음에는 하늘을 안 봤습니다. 뭐 단 한 번도 안 봤다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의식해서 하늘을 쳐다본 적이 없었습니다.” “왜.” “못 보겠어서.” 칼리안은 말 그대로 쏟아져 내릴 듯한 은빛의 하늘을 보면서 계속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늘 한 번 못 보고 그냥 살기만 하다가 데블란이 죽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왕궁에서 쫓겨난 뒤에 갈 데가 없어서 여기 말고 다른 작은 바닷가에 갔었습니다. 얼마든지 편히 쉬고 있을만큼 있으라 했던 그런 곳이었으니 그곳에서 적당히 시간이나 좀 보내다 돌아가려고요.” 플란츠가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가 날이 하도 더워서 도저히 오두막 안에 있질 못하고 밖에 나와 누웠더니 하늘이 보였습니다. 달이 밝았고, 별이 많았고.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는데 이유도 모르게 웃음이 나서. 혼자 미친놈처럼 배를 부여잡고 웃었습니다.” “미친놈 맞지.” “아, 하긴 그렇지. 맞긴 맞네요.” 잠깐 웃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올려다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나, 싶어서. 그 뒤로 계속 그렇게 하늘을 봤습니다. 달도 보고, 별도 보고. 구름을 보다 비가 올까 안올까 체이스 형님과 내기도 곧잘 하고. 그렇게 지냈는데.” 그러고보니 그놈의 내기돈 언제 가면 다 받아내야겠다고, 저도 모르게 떠오른 결심에 또 웃음 소리를 내던 칼리안의 목소리가 파도 위에 올려졌다. 빗소리같기도 하다가 바람 소리 같기도 하던 목소리가 파도소리처럼 흘러나왔다. “고개를 숙이시더라고요. 그 날 형님께서. 그걸 봐버리는 바람에 저도 주저하질 않게 되어서. 그냥, 제가 뭔 생각인지는 신경 안 쓰고 그냥 심었습니다. 르니에리.” “모르고 살렸다더니.” “이유 모르고 그냥 살려야겠다 싶었던 건 맞는데요. 주저하지 않았다는 거지.” 실리케의 앞을 플란츠가 가로막기 전. 누군가 죽었다는 말에 고개를 숙이던 것을 보게 되어서, 실리케의 비수에 죽을 뻔한 것을 막았다고. 그래서 르니에리를 심었다고 이야기 해줬다. 그것을 심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슨 말을 누구에게 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 원수같은 놈을 내가 왜 살렸는지 당신은 혹시 아느냐는 말도 했었고,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 끝끝내 알려주지 않을 것인지도 물었었고, 뭐가됐든 나는 당신한테 미안할 일이 없다는 말도 했었고. 조금 많은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전부 다 기억이 나지는 않아서 그냥 말하지 않았다. “뭐, 아무튼.” 적당히 말을 맺은 칼리안이 품에서 작은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을 몇 번 뒤적이다 손바닥 두 개 만한 크기의 무언가를 꺼내 플란츠에게 건넸다. 생일이 됐을 것 같긴 한데 생일 선물은 아니고 그냥 자신이 쓰려던 것을 내밀었다. “뭔데.” “마력 다루실 줄 아니까요.” “선물 없다더니.” “선물 아닌데, 요.” 내년 여름까지는 또 못 꺼낼 반말을 잊지 않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준 뒤에,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저더러 여기 와서 살라고 하셨던 이유는 압니다. 옛 집도 여기 있고 옛 형님도 여기 계시고 옛 어머니도 함께 계시니 여기로 돌아오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셨을 것 같은데. 어머님이 저를 아시기에, 이미 저도 같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기 일을 해결하면 돌아가야지, 하고. 그러니 제 걱정은 안하셔도 괜찮지만······.” 플란츠가 다른 말 없이 손에 들린 수정판을 쳐다봤다. 앨런을 위해 엘린느가 보냈던 것. 르메인과 앨런이 마셨던 난꽃 향 가득한 녹차와 함께 들어있던 것. 새로 생긴 아들과 차 한잔 마시고 새로 생긴 아들이 어딜 가든 얼굴 잘 보고 지내라며 보냈던 물건을 그냥 플란츠에게 줬다. 첨탑에서 돌아온 뒤에 앨런에게 부탁을 해 두었으니, 나머지 하나는 아마 지금쯤이면. - 애옹! - 니아옹! 레릭이 가지고 있을 거다. 수정판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기가 무섭게,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도 보이기 전에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다른 말 없이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플란츠에게 칼리안이 한 마디를 더했다. “혹시라도 저에게만 돌아갈 곳이 있다 생각하실까봐 드리는 겁니다. 제가 가진 게 많기는 해도 형님이 저보다 부족한 건 없으니 부러워하지는 마시라고.” “······ 짖지.” “선물 드렸는데 반응이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선물 아니라며.” “아. 그렇네요.”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모래를 탁탁 쳐냈다. “형님 얼굴은 안 까먹을 것 같긴 하지만 혹시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 잠깐 인사나 하고 계십시오. 저는······.” 칼리안이 먼곳을 잠시 살피다 슬쩍 웃었다. 좋은 먹잇감을 찾아낸 포식자의 것과 같은 만족스러운 으르렁거림이 붉은 빛을 만든다. 멀찍이, 자신의 손 끝에 모여든 것과 언뜻 비슷해보이는 색의 또 다른 빛들을 보던 칼리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똑똑하신 형님께서 준비해주신 뒤통수 맞고 오겠습니다.” 검은 바다를 앞에 둔 검은 하늘 아래, 칼리안이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 우우웅! 붉은 빛의 잔상이 허공에 긴 빛을 내다 흩어져갔다. < 제51장. 사춘기라 그러시나(1) > 끝을 모르고 걷는 길. 끝을 향하여 걷는 길. 플란츠의 세상은 넓지 않았다. 칼리안도 물론 알고 있었지만 플란츠 스스로도 이번에 참 잘 배웠다. 바나나 나무가 자라는 씨앗이 어떻게 생겼는지나 소라 껍데기 속에 담긴 파도 소리가 어떤지도 모르고 살았다. 그러니 플란츠의 세상은 결코, 넓지 않았다. 때문에 그것 역시 몰랐다. 사람은 누구나 끝을 모르고 걷는 줄로만 알았다. 이제는 가끔씩 지나치다 또 가끔씩 생각나는 실리케처럼, 생의 마지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사는 줄 알았다. 그러다 미친놈 하나를 봤다. 그 미친놈을 왜 미쳤다 하느냐 묻는다면 달리 할 말이 없다. 미친 마법사는 사람이기를 포기한 면이 참 많아 미쳤다 하는데 그 미친놈은 미친 마법사와는 궤를 달리하는 진짜 미친놈이다. 그 미친놈은 끝을 향해 걷는다. 플란츠의 좁은 세상에서 그렇게 사는 놈은 없었다. 조금 넓어진 세상이지만 그렇게 사는 놈은 여전히 그 미친놈 하나뿐이다. - ······ 그렇게 하나씩 아쉬운 걸 없애보면 하루는 더 버텼을까. 이곳에 오기 전, 이른 새벽의 바위 산. 왕실의 마차는 레이븐이 누워있던 곳과 다른 일행들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그 마차 속에 있던 플란츠는, 드문드문 끊기기는 했지만 키리에에게 건네던 그 미친놈의 말을 듣게 됐다. 어떻게든 뭐 하나는 들키는 놈이니 그냥 못들은 척 그 말을 같이 들었다. - 하루만 더 벌었으면 무엇이든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 미친놈은, 칼리안은. 바로 그 하루를 벌려고 사는 놈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간절하게, 하루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마지막을 향해 산다. 기어코 그 끝이 와도 후회하지 않도록 끝을 준비하며 산다. 그래서 플란츠는. 이 세상에는 끝을 모르고 걷는 사람과 끝을 향해 걷는 사람이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한 명을 더 만났다. 모르지도 않지만 준비하지도 않는 사람. 끝을 피하기 위해 걷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이 우연인지, 기다림인지. 그것을 모르겠구나.” 세크리티아 왕궁 별관의 후원으로 나와 계속 걷다 보면 이름 모를 붉은 꽃이 가득한 곳을 지나 또 이름 모를 덤불이 가득한 녹빛의 정원이 나왔다. 체이스가 초대한 조찬을 마치고 답답한 속을 좀 풀기 위해 그곳까지 걸어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나중에 동생 놈을 보든 체이스를 보든 저 붉은 꽃이며 이 덤불 이름이 무엇인지 좀 물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으려니 누군가 조용히 걸어왔다. 체이스를 썩 닮은 사람. 그 왕제와도 많이 닮았다 했던 사람. 하지만 조금도 닮지 않았으리라 생각되는 사람. “생각하시기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마주치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고 기다린 것도 아니었으나 플란츠는 담담하게 대답을 했다. 냉엄한 얼굴로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인 데블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그대의 아우를 만났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혹시 알고 있느냐.” “제가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칼리안이 말하는 모습과 썩 비슷하다. 말투나 목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화법이 참 비슷하다. 그 말마따나 생각하기에 따라 의미가 확연히 바뀌는 것이다. 데블란이나 체이스가 그런 말을 종종 하듯이. 데블란을 우연히 만났다는 뜻인지, 기다렸다는 뜻인지. 데블란이 칼리안을 만난 것에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뜻인지, 관심이 없다는 뜻인지. “두 형제가 많이 다른 듯 하였는데 닮은 점도 많구나.” “닮았다는 말을 처음 듣습니다.” “의외로구나. 내가 보기에는 많이 닮기도 한 듯 한데. 실은 형제가 참 많이 다르다 하기에 어찌 함께 발을 옮기고 있나 하였는데 조금 이해가 되는구나.” “닮아서라 하기보다는, 배움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배웠느냐.” “때에 따라서 손을 잡기도 하고 등을 보이기도 해야 함을 가장 먼저 배웠습니다.” 칼리안이 ‘카이리스 왕족의 말이 없거나 짧은 것은 시스파니안을 닮았기 때문’이라 믿고 있음을 알 리 없을 플란츠가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칼리안의 말이 많은 것은 세크리티아 왕가의 특징이라고. “배운대로 행하고 있는 것일 뿐이더냐.” “배운 것을 필요한대로 행할 뿐입니다.” “무엇을 누구에게 어찌 배웠는지 궁금하구나.” 그것이 아니라면, 쉼없이 짖어대는 칼리안은 물론이고 체이스도 꽤나 시끄럽게 구는 편인데 데블란마저 이렇게 말이 많을 다른 원인이 없지 않겠나. 온 가족이 화목하게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울 환경은 아닌 듯 보이니 왕가의 특징이라 여길 수밖에. “많은 것을 형제에게 잘 배웠습니다.” 덕분에 조금 지쳐버린 플란츠가 귀찮은 기색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많은 것을 형제에게 잘 가르치지는 않고 배우기만 했느냐.” “누굴 가르칠만큼 마음이 넓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형제는 마음이 퍽 넓은가보구나.” “오지랖이 넓습니다.” 드디어 귀찮은 내색을 읽은 모양이다. 왕자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을 마지막 말에, 데블란이 웃음 소리를 냈다. 그러다 그 끝에 기침 소리가 함께 나왔다. “쉬셔야 할 것 같으니 저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잠시 데블란이 기침하는 모습을 보던 플란츠가 말했다. 칼리안은 대화하는 내내 말버릇이 좋지 않은 대신 대화를 그만하는 것에 대해 허락을 구했다. 그런데 플란츠는, 타국의 국왕에게 예의는 지키지만 대화를 마치고 물러가는 것은 제멋대로 결정하려 하고 있었다. 예법대로라면 어느 한 쪽도 정답이 아니다. “실로 재밌는 날이다. 오전에는 그대의 형제가 나를 즐겁게 하더니 지금은 또 이렇게 그대가 즐거움을 주는구나.” 당신은 즐거울지 몰라도 나는 안 즐겁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열흘 치 말은 한 것 같다. 생각해보니 어느 순간부터 말을 좀 많이 해야 하는 경우가 늘고 있었다. 그 중 태반이 데블란과 관련된 일로 동생 놈에게 꺼낸 말들이었다. “즐거움을 위해 대화를 나눌 관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전하.” “그러한가.” 불편함을 지우지 않고 대답을 하고 나니 데블란이 또 웃었다. “혹, 그대는 무엇을 걸어보았느냐. 상대의 것을 가져오기 위해 무엇을 걸어보았는지. 그것은 이 자리에서 듣고 싶구나.” 그러더니 또 말을 건다. 데블란. 짜증난다. 싫어하든 말든 양껏 짖어대는 어떤 놈의 성격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아서 더 짜증난다. “걸어본 적 없습니다.” 그 짜증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플란츠가 이렇게 답을 했다. “어째서 걸어본 적이 없었느냐.” “제 것을 걸어야 할 만큼 가치있는 것들은 이미 제 수중에 있었습니다.” “뺏을 필요가 없이 이미 다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로구나. 그렇다면 만약,” “전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이 전하의 목숨이라면.” 플란츠가 데블란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데블란이 또 말을 하기 전에 자신이 할 말을 했다. “교환하기에 마땅한 것을 걸어주십시오. 구할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데블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드디어 좀 조용해졌다. * * * 네 명. 대사막의 전사 네 명이 한꺼번에 덤볐다. 넷의 검이 똑같은 붉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칼리안의 검술을 알고 찾아온 이들이니 그 실력이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이다. 언뜻 뒤를 돌아본 칼리안이 조금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한 살 늘어나더니 철이 드셨나. 말 잘 들으시네.” 그 말대로, 플란츠는 오늘따라 동생 말을 참 잘 듣고 있었다. 이쪽 사정 신경 안 쓰고 고양이 들여다보고 있다는 소리다. “그것 참. 무관심인지 믿음인지······ 아니면 고양이가 대단한 건가.” 어쩐지 뒤통수는 조금 전이 아니라 지금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된 칼리안이 혼잣말을 내려놓으며 발을 놀렸다. 동생에 대한 관심은 원래 많지 않았을테니 그건 둘째치고, 믿음이 과한 것인지 고양이가 대단한 것인지를 조금 따져보다 믿음이 과한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고양이 두 마리 보느라 동생 죽어나가는 꼴에도 관심 안 두는 형님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다 여기기에는 조금 억울했으니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세크리티아의 기사 열다섯 명을 불러 저 멀리 계시는 형님 좀 보고 배우라 했다. 괜히 여기 싸움에 끼어들었다 어디 잘려나가지 말고, 자기 생일에 동생 기일 겹쳐두려는 저기 저 효율적이고 파릇하신 분 옆에서 고양이나 같이 보고 있으라 했다는 소리다. 저 기사들이 맘을 바꿔 덤벼든다 해도 칼리안이 갈 때까지는 적당히 버텨 줄 플란츠임을 알아서 그리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너희들 중에 기사 아닌 놈 있으면 어디 하나 분지르는 것으로는 안 끝날 테니 얌전히 잘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은 해줬다. - 카아아앙! 그렇게 웃지도 울지도 못할 마음으로 주변을 대강 정리한 칼리안은, 양쪽에서 시간차를 두고 뻗어나오는 두 자루의 검을 하나하나 쳐낸 뒤 팔을 움직였다. 그림자 속에서 휘둘러지는 칼리안의 검을 놈들이 막았다. 위에서 내리치는 공격과 옆을 베고 들어오는 공격을 막은 칼리안은 다시 몸을 감췄다. 소금기 가득한 가운데 유난히 파릇한 냄새가 날 것 같은 곳으로 놈들이 가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네 명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일단 형님이 데블란을 만났고, 왕궁 밖으로 나왔더니 제온이 찾아왔다.’ 플란츠가 칼리안을 미끼로 썼다. 이런 시점에 정말로 바다나 보러 오자고 조를 플란츠가 아니지 않나. 제 입으로 꿍꿍이가 있다 하기가 무섭게 제온의 전사들이 왔으니 저 전사들을 이끌어낸 것은 플란츠가 맞다. 문제는 그 꿍꿍이를 칼리안에게도 말을 안 했다는 거지만. 정말로 오늘을 동생의 기일로 만들 셈인가 하는 생각에 실소한 칼리안이 다시 한 번 검을 내뻗었다. ‘누구 짓이지. 데블란 짓은 아닐텐데.’ 왕궁을 나오자마자 전사들이 붙었다면 데블란과 제온이 연관되어 있다는 소리다. ······ 라고 믿게 하려는 수작이다. 물론 연관이 있을 수는 있다. 칼리안도 계속 그리 여겼다. 다만 데블란은 에반도 하지 않을 생각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 정도로 멍청했다면 지금까지 칼리안과 플란츠를 탐색하지도 않았으리라. 하다못해 일행들을 전부 죽여 없애고자 했다면 독을 쓰는 것이 낫다. 식사든 물이든 장난만 좀 쳐 두면 칼리안을 제외한 모두가 쉽게 사라질텐데 무엇하러 귀찮게 이런 짓을 벌이겠나. - 카가강! 카앙! 그렇다면 데블란이 아니라 왕자들의 갑작스러운 외출을 알 정도의 관계자. ‘혹은 데블란의 짓이 아니리라 생각할 것을 염두에 둔 진짜 데블란.’ 이렇게 무리한 일을 벌일 데블란이 아니리라 여길 것을 역으로 노려, 아예 대놓고 일을 벌였을 가능성. “궁금해 죽겠네.” 어쨌거나 궁금증 해결은 나중에. 일단은 뒤통수 맞아 심란해진 마음을 좀 달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 - 쉬이익! - 카앙! 카가강! 오러로 만들어진 단검 네 개를 날려보낸 칼리안이 발을 박찼다. 넷 중 새빨간 머리의 전사 한 명을 향해 칼리안의 가는 손가락이 움직였다. 예리하고 얇은 것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반투명한 푸른 빛이 허공을 갈랐다. 빨간 머리가 제 앞으로 날아드는 단검을 쳐냈다. 뒤이어 날아오는 길고 가느다란 것은 보지 못했다. - 쌔애액! 칼리안이 마법사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 콰직! 깨달음의 대가가 꽤 아프다. 바람의 창이 놈의 몸을 꿰뚫었다. 바람의 힘은 상처를 벌리고 헤집는다. 재빨리 몸을 피한 덕에 심장에 구멍이 생기지는 않았으나 놈의 옆구리가 주먹만한 크기로 뜯겨나갔다. 휘청이던 놈이 검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붉은 기운이 모여들며 놈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다. 칼리안이 놈에게 달려든다. 살기. 인간 이하의 짐승 같은 살기, 혹은 인간 이상의 절대자 같은 살기. 그런 살기가 빨간 머리의 온 신경을 곧추세운다. 제 앞으로 날아드는 새빨간 눈동자를 향해 놈이 검을 치켜들었다. - 카아앙! 놈이 이를 악물며 칼리안의 검을 쳐냈다. 그리고 말을 잘 듣지 않는 몸을 강제로 움직여 검을 내리그었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의 뒤에서 생성된 바람의 창이 놈을 향해 날아든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는 바람의 힘을 고스란히 담은 마력이 놈을 향해 쇄도했다. - 쌔애액! - 카앙! 놈이 창을 쳐냈다. 뒤이어 날아오는 칼리안의 검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칼리안의 모습이 사라졌다. 놈이 집중하여 주변을 살핀다. 그 사이 달려드는 셋에게 단검과 창을 날려보내 발을 막은 칼리안이 빨간 머리의 뒤에서 몸을 드러냈다. - 쉬이익!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뻗어오는 검을 느낀 빨간 머리의 전사가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울컥, 하고 놈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백사장을 적셨다. - 쌔액! 칼리안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숨 두어 번을 쉴 사이에 여섯 번의 공방이 오갔다. 어떤 것은 날아오고 어떤 것은 짓쳐든다. 놈이 몇 걸음 뒤로 움직이며 칼리안의 공격을 피해냈다. 공격 하나라도 허락한다면 그 즉시 생명의 끈이 끊일 것을 알기에 이를 악물고 피해냈다. - 카가강! 카앙! 칼리안의 발이 다시 땅을 박찼다. 그와 함께 바람의 창들이 놈을 향해 날아든다. 놈이 빠르게 검을 회전시켜 그것을 막아냈다. 아물어가는 상처가 벌어졌다. 다른 전사들이 칼리안을 향해 달려들었고, 세 개의 검을 쳐낸 칼리안은 빨간 머리 놈을 향해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빨간 머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계속하여 몸을 움직이는 통에 치료가 수월치 않았다. 뚝뚝 흘러내리는 놈의 피를 잠시 내려다 본 칼리안이 감정 없는 목소리를 냈다. “확실히 다른 놈들이 대신 치료해주지는 못하나보네. 치유사가 아니라서 그런가.” 만약 다른 세 놈이 타인에 대한 치유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빨간머리의 상처는 이미 다 나았을 테니까. 치유사가 아닌 이상은 다른 이의 상처 치료를 해주진 못함을 확인한 셈이다. 하긴 그랬으니 데블란이 굳이 치유사를 찾았겠지. 제온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다.” 한층 짙어진 살기가 놈의 발을 잡아채듯 휘몰아쳤다. “······ 그냥 없애면 되겠네.” 속삭이는 듯한 미성이 빨간 머리의 귓가에 들려왔다. 어느새 놈의 코앞에 나타난 칼리안이 붉은 검을 내질렀다. 등 뒤에서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을 느낀 놈이 반대 방향으로 돌아섰다. 눈앞의 마법과 등 뒤의 검. 무엇을 먼저 막아야 하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 쌔애액! - 타다다당! 카앙! 허리를 뒤틀듯 움직인 놈이 팔뚝만한 크기의 바람 송곳 몇 개를 쳐낸 직후 다시 몸을 돌려 칼리안의 검을 내리쳤다. 그 순간, 칼리안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사라졌다. 힘을 받아줘야 할 상대의 검이 사라지자 빨간 머리 전사의 몸이 중심을 잃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찰나의 빈틈을, - 서걱! 칼리안은 놓치지 않았다. 붉은 빛이 어둠을 가르고 번뜩인다. 놈의 목에 긴 금이 생겨났다. 그것이 곧 어찌될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칼리안은 놈의 몸이 스르르 쓰러지는 것에 시선을 더 두지 않은 채 다시 발을 띄웠다. “하나.” 몰아치는 듯한 공격에 동료 하나가 죽어나가자, 남은 세 놈이 칼리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볍게 몸을 움직인 칼리안이 두 개의 공격을 쳐내고 한 번의 공격을 피했다. 짙은 갈색 머리를 길게 땋아내린 두 번째 전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림자 속으로 죽음이 스민다. * * * 플란츠는 손에 들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플란츠의 얼굴에서 흥미가 사라진 두 고양이들은 이미 화면 저 편으로 멀어진지 오래. 레릭이 무어라 말을 하는 것을 그냥 흘려들으면서, 플란츠는 계속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들이 어떻게 갑자기 나타났다는 겁니까. 플란츠 왕자는 왜 그곳에 있고. - 이유가 중요한 것 아니니까. 왼팔에 채워진 팔찌에서 미미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칼리안 쪽을 바라보던 플란츠의 눈이 조용히 잠겨들었다. 한 명의 목이 떨어져 백사장 위를 나뒹군다. 어둠 속에서도 놈의 빨간 머리가 잘 보였다.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던 플란츠가 수정판에 불어넣고 있던 마력을 해제했다. - 오라고. 빨리. 그 잘난 기사 데리고. - ······ 알겠습니다. 어찌됐건 칼리안 혼자 싸움을 이어나가게 둘 마음은 없던 플란츠가 수정판을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 조용히 한 발을 옮겼다.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독특한 검집 안에서 더 독특한 검이 뽑혀나온다. 세크리티아의 기사들이 그런 플란츠를 경계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신경 안 쓰는 것이 나을텐데.” 방해하지도 말고 돕지도 말고, 그들은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침묵하는 기사들 사이로 플란츠가 한 발을 옮겼을 때. “수정판을 모래 바닥에 두시면 흠 생깁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절대로 반갑지 않을 얼굴이 나타났다. 딱 한 발을 옮긴 뒤 다시 멈춰선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 뭐야.” 칼리안 가라사대. 자고로 뒤통수란, 주고 받아야 제 맛 아니던가. “왕자님께서, 왕자님의 말은 진짜 안 들으면서 엄청 연약하기까지 한 둘째 형님이시자 부군단장이신 플란츠 왕자님이 왕자님 뒤통수 치실 때가 됐으니 잘 지켜보다 이상한 일 하려 하면 말려달라 하셨습니다.” 오리 엄마 복직됐다. < 제51장. 사춘기라 그러시나(2) > 엉뚱한 궁금증이 생겼었다. 이제와 깨달았다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아무튼 한 가지 느낀 것이 있다면 데블란도 참 잘 웃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웃음의 의미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아래층에 거주하시는 누구를 참 많이 떠올리게 했다. - 교환이라······ 아무래도 내가 그대의 앞에서 실수를 한 것이 있나보구나. 그래서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 그 정도로 절박하게 보여졌다니. 만약 동생 놈의 그 버릇없는 시종이 이곳에 있었다면 데블란이 웃는 것의 진의를 알아볼까, 라고. 재미가 있어 웃는 것인지. 아니면 가소롭다 여겨 웃음을 흘린 것인지. - 제가 오해한 것이라면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 아니다. 그리 여겨야 할 일이 아니니라. 내 기분이 상하지 않았는데 무엇하러 사과를 하느냐. 데블란은 이렇게 말했다. 목숨을 두고 거래를 제안했던 타국의 2왕자에게 화를 내지 않고, 웃었다. 참으로 관대하게도. - 그나저나 내 목숨과 교환하기에 마땅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어지간한 것으로는 적당한 값이 되기 어려울 터인데······ 당장에 떠오르는 것이 없구나. 이래서야 거래를 하기는 커녕 시간만 지나갈 뿐이니, 나중에라도 내가 내 목숨 연명할 방법이 궁금해지거든 그때 다시 깊이 생각을 해 보마. - 알겠습니다. 플란츠는 선선히 대답을 전했다. 그리고 그런 플란츠를 꽤 오랫동안 내려다보던 데블란은 더 이상의 말 없이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애초부터 플란츠는 데블란이 곧바로 응하리라 여기지도 않았다. 제 자식인 체이스마저 등을 돌린 것을 알게 된 마당에 정체조차 잘 모르는 타국 왕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행동할 사람이 아니까. 만약 그랬다면 칼리안을 질질 끌고 갑작스럽게 이 나라에 올 일도 없었을 거다. 플란츠를 믿느니 진작에 제온의 검은 조약돌을 심장에 심어 알아서 치료를 하든, 대장로 나르잔이 말한대로 엘프의 도시로 찾아가 치료를 받겠다 하든 했을 테니 굳이 찾아올 이유가 없지 않겠나. 다만 칼리안이 데블란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몰라도, 미쳐 날뛰느라 사춘기같은 것은 아예 눈치도 못 채고 지나쳤을 그 성격에 바른말 고운말 가득한 사람의 언어를 내뱉지 않았을 것만은 분명하다 여겼다. 때문에 칼리안에게 다시 쏠릴 데블란의 시선이나 좀 나눠 가져오면 되겠다 싶어 꺼낸 얘기였다. 그 이상의 소득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렇게 데블란이 돌아간 뒤 다시 여유롭게 산책을 마친 플란츠가 별관으로 돌아왔을 때. “처음 뵙겠습니다, 카이리스의 플란츠 왕자님.” 정말 의외의 소득을 하나 얻게 되었다. 별관을 호위하던 기사 한 명이 플란츠의 앞을 막으며 말을 건넨 것이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이 나라의 기사들은 왕족의 앞을 가로막고도 고개숙이지 않나 보군.” 상대는 플란츠를 처음 본다 했으나 플란츠는 아니었다. 유난히 특이점 없이 생긴 얼굴 때문에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 이였다. “죄송합니다.” “됐고.” 몇 달 전. 카이리스를 찾았던 체이스의 여러 호위기사들 중 스치듯 마주쳤던 한 명의 얼굴을 떠올린 플란츠가 나른하게 내리 뜬 눈으로 상대를 쳐다봤다. “말해.” 너는 데블란의 사람인가, 체이스의 사람인가. 아니면 둘 모두 아닌가. 그것을 가늠해보면서. * * * 그날 낮에 플란츠가 데블란을 만났든 말든. 카이리스에 왔던 기사 중 한 명이 플란츠를 찾아갔든 말든. “둘.” 둘을 잡았고 둘이 남았다. 갈색 머리 전사를 향해 달려들다 갑자기 방향을 바꾸며 사라진 칼리안이, 뒤에서 공격해오던 금발 전사의 심장을 순식간에 꿰뚫었다. 처음에는 집요할 만큼 한 명만 공격하더니 곧바로 싸움 방법을 바꾸는 칼리안을 본 두 명의 전사가 잠시 거리를 벌렸다. 그 틈을 타고 칼리안의 머리가 다시 돌아갔다. ‘싸움 중에 이렇게 생각이 많아서야.’ 죽을맛이다. 바로 얼마 전에도 싸우다 말고 생각 한 번 잘못했다가 배에 구멍이 나는 바람에 히나한테 엄청 혼나고 밥까지 못 먹지 않았던가. 칼리안은 그 날의 배고픔을 잊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날 플란츠의 입으로 들어가던 고기들을 잊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지만. 여하간 집중을 좀 해야 했고 잡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머리가 돌아간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대체 뭐지.’ 검을 들 필요가 있으니 주저하지 않을 뿐 결코 즐겨하지는 않는 칼리안이 아니던가. 그리고 칼리안이 제 손에 피묻히는 것을 어떻게 여기는지에 대해 앨런 다음으로 잘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이 바로 플란츠다. 그런 플란츠가 굳이 동생 뒤통수 한 번 때리겠다고 이런 상황을 계획할 만한 사람은 아니지 않나. 그러다보니 머리가 자꾸 다른 생각을 했다. - 세이렌 경이나 그레이스 경이 마법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플란츠 왕자님께서 둘에게 무슨 말을 전했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칼리안이 데블란과 대화한 내용을 전해들은 플란츠가 키리에 몰래 전달했던 이야기는 또 무엇이었을까. 플란츠는 무슨 이유로 어떻게 제온을 이끌어냈으며, 그에 대해서 칼리안에게는 왜 비밀로 해두었을까. “설마······ 진짜로 사춘기라 그러시나.” 나는 저 나이에 안 그랬던 것 같은데. - 부우웅! 찰나의 생각을 이어나가던 칼리안의 앞으로 갈색 머리 전사의 검이 날아왔다. 양날검, 혹은 검등이 매끄러운 외날검과 다르게 들쭉날쭉한 톱날이 검등을 대신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일단 찔러넣기만 하면 검에 걸리는 것이 무엇이든 같이 딸려나올 모양새에, 칼리안의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취미가 고약한데.” 작게 중얼거린 칼리안이 발을 움직였다. - 카아앙! - 타다다당, 카앙! 카가강! 허무하리만치 빠르게 허물어진 두 전사와 달리 남은 두 명의 싸움은 노련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동시에 그들 두 명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갈색 머리의 전사가 톱날이 달린 면으로 칼리안의 공격을 막은 뒤 검을 비틀어 쳐냈다. 붉은 오러의 검에 맞물린 톱날 몇 개가 부러져 나갔으나 전사는 신경쓰지 못했다. 앞을 막으면 어느새 뒤에서 칼리안의 검이 날아든다. 그것을 막기 위해 뒤로 돌면 머리 위에서 칼날이 떨어져내렸다. 그 사이사이에 단검과 마법이 날아들고 쉴 새 없는 검격이 쏟아졌다.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잔 상처가 아무는 감각을 깨우칠 시간도 없던 탓에, 갈색 머리 전사는 칼리안의 공격을 막는 것에만 온 신경을 썼다. 갈색 머리 전사가 잠시 멀어진 틈을 타, 회색 머리를 가진 또 한 명의 전사가 마력탄 하나를 꺼내 집어던졌다. 툭, 하고 모래 바닥 위에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칼리안의 신형이 사라졌다. - 콰아아앙! 어마어마한 굉음이 태풍 몰아치는 바다의 파도소리처럼 울려퍼진다. 실드를 펼치며 공격의 여파로부터 벗어난 칼리안이 아주 잠시 고개를 돌려 멀리 떨어진 바닷가 쪽을 살폈다. 아르센이 보였다. 아르센이 이쪽의 공방에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칼리안을 돕는 대신 플란츠를 막아설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나도.” 붉은 입술이 긴 호선 하나를 그려낸다. “······ 할 줄 알아. 그런 거.” 바람이 모여든다. 그 어둠의 한 가운데, 바람이 분다. - 사아아······. 마나의 소용돌이가 칼리안을 향해 모여들었다. 붉은 빛을 띠는 검은 망토가 이리저리 흩날렸다. 마법사가 마법을 시전할 시간을 주는 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지 잘 아는 두 전사가 거리를 좁혔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과 전사들 사이의 모래가 솟구쳤다. - 콰아아아! 사람의 몸집만한 바람 기둥이 한 방향으로 위협적으로 회전하며 모래를 밀어냈다. 세 개의 토네이도로 전사들의 시야를 막은 칼리안이 다시 발을 박차더니, 회전하며 용솟음치는 바람 기둥 사이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회색 머리 전사가 칼리안의 목을 노리며 검을 뻗었다. - 콰광! 그러자 회색 머리 전사의 발 밑에서 압축된 바람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모래를 흩뿌렸다. 순간적으로 뒤를 향해 몸을 날린 회색 머리 전사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두 발을 디뎠다. 토네이도인지 폭발인지 모를 힘에 휩쓸린 전사의 옷자락 끝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가볍게 실드를 펼쳐 자신이 폭발시킨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한 칼리안이 앞으로 날아드는 검을 튕겨낸 뒤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칼리안의 뒤에서 생성된 네 개의 붉은 단검이 갈색 머리 전사를 향해 날아갔다. 아직 근처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 회색 머리 전사에게서는 관심을 끈 채였다. - 쌔애액! - 타다다당! 카아앙! 정신없이 불어오는 모래바람을 뚫고 날아오는 단검 중 세 개를 피했으나 한 개가 목을 스쳤다. 따끔하는 감각에 인상을 찌푸릴 새도 없이 칼리안의 검이 날아들었다. - 쿠콰앙! 둘이 있는 곳으로 달려들던 회색 머리의 발 밑에서 또 한번 폭음이 터졌으나, 같은 공격이 올 것을 예상한 회색 머리는 이미 그곳을 벗어나 칼리안의 코앞에 도달해있었다.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첨예한 검 끝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몸을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칼리안이 서있던 자리에 회색 머리의 검격이 지나갔고, 그와 함께 가느다란 바람의 창이 회색 머리 전사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 카아앙! 캉, 카가강! - 카앙! 카강! 회색 머리가 한 발을 물리면 갈색 머리의 톱날같은 검이 칼리안을 향해 날아든다. 그것을 쳐내면 다시 한 번 회색 머리의 긴 검이 칼리안의 목을 노려왔다. - 카앙! - 쌔애액! 물리력을 담은 마력. 칼리안이 날려보낸 바람의 창이 회색 머리 전사의 검에 막혀 멀찍이 날아가 사라진다. 그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새도 없이 붉은 오러의 검이 다시 한 번 둘을 향해 달려들었다. 단 한 순간 숨 쉴 틈도 주지 않을 듯이 몰아붙이는 공격에 회색 머리의 전사가 황급히 허리를 굽혀 붉은 검을 피했다. 그러자, - 콰직! 등 뒤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상황을 파악한 회색의 머리가 아래로 수그러진다. 길게 땋아 내린 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진득하게 흘러나온 붉은 선혈이 바닥에 떨구어진 톱날 가득한 검을 덮었다. “······ 셋.” 회색 머리 전사의 목덜미 뒤로 가느다란 미성이 와 닿는다. * * * 호위기사. 데블란이 붙여 준 세크리티아의 호위기사들과 플란츠의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르센이 슬쩍 웃었다. 상대와 붙어 싸우는 것 좋아하는 마법사 아르센은, 칼리안의 붉은 검이 화려한 궤적을 수놓고 있는 저 곳에 들어가 신나서 뛰어다니다가는 모가지 잃어버리기 딱 좋을 판임을 잘 알았다. 그래서 멀찍이 플란츠의 옆에 선 채로 남은 전사들의 발이라도 묶어줘 볼까 하다 말았다. - 콰아아아! 바람의 마력이 모여드는 것을 느낀 탓이다. 오래지 않아 몇 개의 토네이도가 칼리안과 두 전사 사이에 만들어지는 것이 보였다. 오러를 남겨두고 마법을 써도 될 만큼은 여유가 있다는 소리였으니 섣불리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어설프게 돕겠다고 나섰다가 남은 놈들 중 한 명이 아르센 잡겠다고 플란츠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기라도 하면, 칼리안이 그 전사 잡는 척 아르센도 겸사겸사 잡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도 했고. - 쌔애액! 물론 가만히 있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곁으로 다가오려는 호위기사들의 발 앞에 얼음의 창 하나를 꽂아넣은 아르센이 사납게 웃으며 기사들을 봤다. “카이리스의 마법사단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다.” 그 뒤에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자기소개를 했다. 세크리티아의 기사들. 정확히는 칼리안이 얼굴을 모른다 여겼고 지금은 다른 기사들의 가장 앞에 서 있다 발을 내딛던 두 명의 기사들을 향해서였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온다면 카이리스 왕족에 대한 공격 시도로 간주하겠다.” 잘 써먹으라고 다시 돌려준 부군단장 직위의 힘을 빌어 경고성 가득한 말을 건넨 아르센을 향해,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위험할 것 없을 텐데.” “압니다. 미쳤다고 호위기사가 왕족에게 덤비겠습니까.” “그런데 왜.” 왜 굳이 세크리티아의 기사들을 협박하고 있느냐는 말에 아르센이 짧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혹시 이 상황,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부군단장님 예상대로가 맞습니까?”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 빼고.” “제온에서 나설 것도 알고 계셨습니까.” 이런 질문에 눈꼬리를 찌푸린 플란츠가, 먼곳에서 들려오는 칼리안의 전투 소리를 잠시 듣다 입을 열었다. “세이렌 경은." “협회장님 여기 안 옵니다.” “왜.” “부군단장이신 왕자님.” 제온이 올 것이라 완전히 예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대비는 해두었었다. 그런데 두 마법사를 대신해 파란 머리가 왔다. 그러더니 질문에 대한 답은 하지 않은 채 플란츠를 불렀다. “말해.” “팔찌가 빛나는 것을 봤습니다. 혹시 세크리티아의 왕세자님을 왕궁 밖으로 불러내려 이 일을 계획하신 것이라면, 오지 않으실 겁니다. 왕궁에 기사 베른 경이 남아있습니다. 세크리티아의 귀족들이 왕세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왕궁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자 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유가 무엇이든 세크리티아의 귀족들과 제온이 얽힌 것을 확인한 것으로 목적 달성한 셈 치시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기사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에도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뒤통수가 너무 아파서.” 대신 다른 곳에서 답이 들렸다. 어느새 마지막 전사의 숨을 끊어낸 칼리안이 플란츠의 뒤에 서 있었다. 아르센의 마지막 말을 칼리안도 함께 들었다. 때문에 이 순간 뭘 해야 할지, 칼리안도 잘 알았다. 뚜벅뚜벅 걸어간 칼리안이 플란츠의 앞에 섰다. 그 손 끝에 다시 붉은 빛이 모여든다. “설명.” 서늘한 검날이 플란츠의 목에 닿았다. 검날보다 더 서늘한 목소리가 칼리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목소리보다 더 서늘한 살기가 플란츠의 귓가를 울렸다. “······ 하십시오. 형님.” 붉은 검날을 타고 흘러내린 굵은 핏방울 하나가, 뚝. 모래사장 위로 떨어졌다. < 제51장. 사춘기라 그러시나(3) > 플란츠가 웃고 있었다. 칼리안은 웃지 않았다. 목을 파고든 검에는 신경쓰지 않고 웃고 있는 놈이 하나, 그런 놈 목에 칼 들이대고 안 웃는 놈이 하나. 지금 이 순간 누가 더 돌았는지 알기 어려운 두 놈이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듯한 태도로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한참이 지나도록 기사들은 둘 사이에 끼어들지 못했고 아르센은 끼어들지 않았다. - 뚝, 뚝, 뚝. 깊이 베인 상처에서 붉은 피가 검신을 따라 흘러내리다 뚝뚝 떨어졌다. 달빛 비추는 모래사장 위에 짙은 자국을 남기면서 뚝뚝 떨어졌다. 자신의 것과 똑같은 빛을 내는 핏방울을 따라 잠시 내려간 붉은 눈동자에 서로 다른 글씨가 새겨진 긴 검의 모습이 비쳤다.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일별한 칼리안의 시선이 다시 올라와 플란츠를 향했다. 설명하라는 말을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들었으니, 칼리안의 손에 들린 붉은 칼날에 숨을 붙들린 플란츠도 잘 알아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플란츠는 그 어떤 대답도 전하지 않았다. 걱정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겁이 없는 것인지 읽어내기 어려운 연두색 눈으로 칼리안을 마주 볼 뿐. 그렇게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칼리안이 주머니에 넣어 둔 회중시계의 초침 소리가 파도소리보다 더 크게 들려온다는 생각을 할 때 쯤. “내 아우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나본데.” 비로소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다만 그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설명부터. 듣겠습니다.” “아니.” 목에 닿아있던 검에 상처가 벌어지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은 플란츠가 팔에 힘을 줬다. 진작부터 뽑아들고 있던 검으로, 자신의 목에 드리워진 칼리안의 검을 매섭게 쳐냈다. - 카앙! 마른 달빛을 받은 검신의 절반이 반짝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칼리안이 건네주었던 그 검을 제대로 휘두른 것이 칼리안의 검을 쳐내는 일이었다.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길게 말아올렸다. 그리고 다시 한참 뒤,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 버릇없는 새끼.” 흘리듯 내려놓은 목소리를 뒤로한 채 저벅저벅, 검을 집어넣은 플란츠가 자리를 벗어났다. 멀찍이 널브러진 네 구의 시신에는 눈도 두지 않은 채로. 가늘게 변한 눈으로 플란츠의 뒷모습을 좇던 칼리안이 고요하게 잠겨든 목소리를 냈다. “헤르츠 경, 수정판 챙겨줘요. 기껏 구해다 드렸더니 놓고 가시네.” “알겠습니다.” “기사들 데리고 상황 정리하고 와요. 먼저 갈 테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왕궁.” “가시는 길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정리는 기사들에게 맡겨두고 함께 가겠습니다.” “더 이상 공격이 있을 것 같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하지만 왕자님. 지금,” “혼자. 조용히.” “······ 알겠습니다.” 고개만 끄덕여보인 칼리안이 발을 옮겼다. 그리고 조금 전 플란츠가 걸어간 길을 뒤따랐다. 결국 가야 할 방향이 같았으니 동행하지 않더라도 같은 길을 걷게 된다. 한 명의 발자국, 한 명의 핏자국, 그리고 두 명의 피냄새가 모래 위에 길게 이어졌다. 연극이 끝났다. * * * 언제나 평온할 것 같던 목소리 끝에 바람이 인다. “키리에.” 그 목소리가 바람 속에 길을 잃은 새의 날개짓처럼 흔들린 탓에 뒷말이 미처 이어지질 못했다. 하지만 그 끝에 무엇이 붙어있었을지 모를 리 없을 키리에가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며 답을 전했다. 플란츠가 ‘밖’으로 불러낸 사람, 체이스를 향해서였다. “죄송합니다. 비키지 못합니다.” 돌아가는 정황을, 정확히는 도대체 한 번에 몇 가지 생각을 하는지 알 수도 없을 플란츠의 속내를 전부 다 들여다보지 못한 것은 비단 칼리안 뿐만이 아니었다. 체이스의 통찰로도 플란츠가 지금 어떤 계획을 실행시키고 있는지 읽어내지 못했다. 아니. 읽어낼 정신이 없다 하는 것이 맞을 터였다. 다만 단 하나. - 당신이 카이리스에 왔을 때 같이 온 기사들. 데블란의 기사가 아니었을 것 같은데. - 그렇습니다. 그들은······. - 테일란 카스트린. 맞나. - 카스트린 경이 관리하고 있으나 정확히 말한다면 나의 기사들입니다. - 예전에는 내 아우님이 관리했겠군. - ······ 맞습니다. 그것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 세크리티아 왕실 바다. 당신 기사 데리고 당장 와. 우리 쪽의 레이첼 그레이스도 같이. - 플란츠 왕자. 설명이 필요합니다. 왜 그런 것을 묻는지. 나와 카스트린 경을 왜 부르는지. 알겠지만 나는 왕궁에서 오래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 제온의 힘을 쓰는 대사막의 전사들이 찾아왔어. 여기. 내 아우님한테. - 그들이 어떻게 갑자기 나타났다는 겁니까. 플란츠 왕자는 왜 그곳에 있고. - 이유가 중요한 것 아니니까. 오라고. 빨리. 그 잘난 기사 데리고. 플란츠는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말을 했다. 제온의 공격이 있다는 말에 곧바로 가겠다 했던 체이스의 대답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로 통신을 끊었다. 평소와 같이 말이 귀찮아서 설명을 뺀 것이 아니라 설명할 시간이 없어 하지 못했음을 안다. 그러니 당장 가야 했다. 왕궁 밖으로. “······ 키리에.” “죄송합니다.” 키리에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에 체이스의 앞을 막을 수 있었고, 체이스는 기억을 가졌기 때문에 키리에를 밀쳐내지 못했다. 무력한 가운데 동생을 잃는 기분을 가늠하는 것과 아는 것이 다른 만큼, ‘밖’에 나간 동생이 공격받고 있음을 알게 된 체이스의 심정을 키리에가 온전히 알 수는 없었기 때문에. 키리에가 베른을 위해 어떤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인지, 따라서 지금 키리에가 어떤 심정으로 뛰쳐나가지 않고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지를 체이스는 알기 때문에. “밖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체이스 왕세자님께서는 무조건 왕궁 안에 계셔야 한다는 왕자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제온의 공격을 받고 있다 하셨습니다만 지금 상황이 좋지 않거나 정말 급했다면 플란츠 왕자님이 아니라 왕자님께서 직접 체이스 왕세자님께 도움을 요청하셨을 겁니다. 그러니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서 막았고, 그래서 발을 멈췄다. “왕자님 안 죽습니다.” 지금 저 말이 체이스가 아니라 키리에 스스로를 향한 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는 체이스는 다른 대답 없이 가만히 선 채로 키리에를 바라봤다. 그때. 키리에의 심정도 체이스의 심정도 완전히 공감할 수 없을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비키거라.” 테일란. 체이스의 뒤에서 둘의 대치를 지켜보던 테일란은, 지금 정확히 무슨 일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같았으나 칼리안이 위험하고 체이스가 밖으로 나가고자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이해를 했다. 때문에 짧게 입을 열며 한 발을 앞으로 냈다. 키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테일란의 앞을 가로막았고 테일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지금 누구의 앞을 막고 있는지 아느냐.” “저는 카이리스의 3왕자이신 칼리안 왕자님께 권속된 기사입니다.” 테일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체이스 왕세자님이나 카스트린 경은 저에게 명령하실 수 없습니다.” “상관 않는다. 물러나지 않는다면 물러나게 하겠다.” 테일란의 말에 검집을 붙든 키리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든지 말든지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막겠다는 뜻이다. 일이 참 엉뚱하게 번진다. 체이스와 데블란의 일에 칼리안이 뱀 사냥을 하겠다며 참견을 하고 그 사이에 플란츠가 끼어든 일이다. 뱀을 잡겠다는 플란츠의 계획에 칼리안이 말려들었고 체이스가 흔들리고 있다. 그 결과 칼리안과 체이스의 충직한 기사들이 한 판 붙게 생겼다. 사실 한 판 붙는다 해서 키리에가 대륙의 첫번째 검인 테일란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냐만은, 문제는 키리에가 칼리안의 이름을 입에 건 이상 이것이 단순히 기사 대 기사간의 문제일수만은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에 있었다. “카스트린 경. 그만.” 결국은 체이스가 나서서 둘 사이를 막았다. 왕궁 정문 앞에서 두 기사가 싸움 일으키는 꼴을 보일 수는 없지 않겠나. 테일란은 곧바로 발을 물렸고 그것을 본 키리에가 검집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두 기사의 기싸움 덕분에 이성을 되찾은 체이스가, 칼리안에 대한 걱정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던 머릿속을 차갑게 식혔다. 물론 제온에 소속된 대사막의 전사들과 싸우고 있을 칼리안에게 대화를 걸어 집중을 흐트러뜨릴 짓을 벌일 수는 없는 일이다. 때문에 체이스는 플란츠의 이야기와 자신이 알고 있던 정황을 토대로 지금의 이 갑작스러운 상황들을 하나씩 정리해나갔다. 체이스가 밖으로 나가면 벌어지는 일. 체이스의 기사들. 그리고 제온의 공격. 자신의 발 끝을 내려다보며 한참동안 생각을 정리한 체이스가 키리에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나가지 않으마. 대신 다른 소식이 있거든 알려주려무나. 기다릴 테니.”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생각의 끝에서 무슨 결론을 냈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이렇게만 말한 체이스가 고개를 돌려 테일란을 쳐다봤다. “카스트린 경. 잠깐 이야기 좀. 확인할 것이 있어.” “네, 저하.” 짧게 대답한 테일란이 체이스의 뒤를 따라 나섰다. 한참동안 그런 둘의 뒷모습을 보던 키리에가 시선을 내렸고 검집 위에 올려 두었던 손을 뗐다. 지금쯤 칼리안의 싸움은 끝이 났을지, 칼리안은 무사할지. - 다중 특성이라 해도 결국 같은 서클이니까 헤르츠경이 세이렌 경이나 그레이스 경을 재우는 것에 문제는 없을거야. 같은 서클이라 금방 일어날 수는 있겠지만. 만약 둘이 일어나게 되면 그 뒤에는······. 아르센이 앞뒤 안 재고 재워버린 에우리아와 레이첼은 일어났을지, 그리고 에일라는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을지. 사라지지 않고 쌓여만 가는 여러 걱정거리들에 긴 한숨을 내쉰 키리에가 다시 발을 옮겼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칼리안이 일러 둔 것, 플란츠의 뒤통수에 대비한 칼리안의 계획을 마저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 * * 바다를 벗어나 작은 숲을 지나오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 다친 곳은 없는지 걱정이구나. - 무사합니다. 형님께 괜한 걱정을 끼쳐드린 것 같네요. - 아니다. 아무 일 없다면 되었다. - 혹시 왕궁 밖으로 나오지는 않으셨습니까. - 키리에 고집이 어디 보통 고집이어야지.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안에 있으니 걱정 말거라. 다각, 다각.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앞서가는 은백색의 말. 그 위에 앉은 이의 푸른 보랏빛 망토가 흔들거리는 것을 보던 칼리안이 체이스를 향해 물음을 건넸다. - 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 그래. 조용하구나. 아버지도, 귀족들도. 귀족들이라는 말에 칼리안이 잠시 숨을 들이쉬었고 체이스의 말이 이어졌다. - 정확한 이야기는 돌아와서 나누는 것이 좋겠구나. 카스트린 경과도 이야기를 좀 해봐야 해서. - 네.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체이스에게 무사함을 알리고 체이스가 무사함을 확인한 칼리안이 눈을 내렸다. 푸르릉, 하고 레이븐이 작은 소리를 냈다. “괜찮아.” 레이븐의 목덜미를 툭툭 건드리며 대답한 칼리안이 다시 앞을 봤다. 곧 레이븐의 발이 조금 빨라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에스티나의 발이 조금 느려졌다. 그렇게 두 마리의 말이 나란히 섰을 때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성급하셨습니다.” 연극에 임함에 있어 간혹 진심이 담기기도 하는 탓에, 그리고 플란츠가 칼리안을 미끼로 두고 체이스를 불러내려 했음을 확인하게 된 탓에 여전히 조금쯤 날이 서 있고 보다 많은 피로를 담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치는 덧셈 뺄셈이 아닙니다. 생각하시는대로 들어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처럼, 변수가 있으리라는 것을 모르시는 분 아니지 않습니까.”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를 묻거나 목의 상처가 좀 아물었는지를 묻는 대신 조용조용한 질책을 했다.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늘 칼리안이 세운 계획을 망친 것은 플란츠였는데 이번에는 반대였다. 플란츠가 세운 계획을 칼리안이 다 망쳐놨다. 물론 칼리안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 제멋대로 일을 진행했기 때문임을 잘 아는 플란츠는 다른 말 없이 앞만 봤다. “그리고. 상대 안가리고 검부터 뽑으시면, 형님 죽습니다.” 이 말에는 플란츠도 인상을 찌푸렸다. 멀쩡히 고양이 구경하던 사람이 검 뽑고 서 있을 일이 뭐가 있겠나. 대사막의 전사들과 싸우던 쪽으로 오려던 거겠지. 뭐, 갑자기 나타난 아르센을 그냥 이참에 없애버리고 싶어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덕분에 ‘사이 안좋은 동생 구해주러 나서는’ 꼴이 되어 버린 것을 다시 되돌려놓으려 플란츠의 피를 봤다. 사이 좋은 형제 사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을 데블란이 만에 하나 플란츠 쪽으로 손을 대보려 마음을 먹는 것보다는 목 좀 베이는 것이 낫지 싶어서였다. 화가 났던 것도 맞긴 했지만 그 이유가 더 컸다. “차라리 말씀을 하셨으면 저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봤을 텐데요.” “무슨 얘기.” 그 대답 한 번 듣기 힘들다. 덕분에 죽을 뻔 한 게 누군데. ······ 아니지. 산 건가. “데블란을 속이려 했는데 귀족들이 속았다고. 그래서 동생 목숨 간당간당한 것 구해보려고 하는데 장단 좀 맞춰주라고.” 칼리안의 말을 들은 플란츠가 다시 한 번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말 안했음에도 머리 꼭대기에 올라 있다는 표정을 한 저 놈의 새빨간 눈이 도무지 마음에 들질 않아서였다. “다 아는 것을 물으시는군.” “정원에서 어떤 기사와 이야기하시는 것은 키리에가 대충 들었습니다. 귀족들이 뭔가를 꾸미고 있고 데블란이 관심 많이 가지고 있을 저에게 손을 좀 대볼까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정도로는 알아들었는데······.” “그만 말해. 도착하면 제대로 설명 해 줄 테니까.” “네.” “그리고.” 그만 짖으라는 말은 참 많이 들었는데 그만 말하라는 말은 생소하다. “내 아우님께서 마나가 얼마나 많으신지는 몰라도. 피 냄새 지우려는 헛수고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이 말은 조금 더 생소하다. 조금 놀란 얼굴이 된 칼리안이 그만 말하라는 소리도 잊고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 벌써 그 정도도 아십니까. 마나 쓰는 것 생각보다 잘 알아보시네요.” “다물라고. 입.” “네.”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플란츠가 칼리안의 말을 다시 막았다. 그리고 에스티나의 안장에서 무언가를 꺼내 칼리안에게 집어던졌다. 얼결에 날아오는 것을 잡은 칼리안이, 손에 들린 붕대를 쳐다보고 피식 웃었다. “부족할 것 같은데. 더 없습니까.” “없어.” “네.” 굳이 기사들을 물리고 혼자 가겠다 했던 이유. 아르센이 걱정하고 레이븐이 불안해했던 이유. 다친 데 없다는 말 대신 무사하다 답하게 만든 이유. 망토에 가려진, 회색 머리 전사가 남겨 둔 허리춤의 깊고 긴 자상에 붕대를 감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탄생일, 축하드립니다.” “······ 알았어.” 사람이 축하를 해주는데 알았다는 대답은 대체 어떻게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말을 좀 해줄까 하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를 그만 둔 칼리안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안 해.” “네.” 다각거리는 두 마리의 말 발굽 소리가 길고 검은 밤을 가른다. 가야 할 방향이 같아 결국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둘의 발자국이 단단한 흙길 위에 나란히 남았다. < 제51장. 사춘기라 그러시나(4) > 마법사의 믿음이란 꽤 단단하다. 주인에 대한 일방적인 애정과도 같은 것이 기사의 충의라면 상대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 맹목적인 마음가짐이 바로 마법사의 신의, 믿음이다. 이들의 믿음을 깨뜨리는 것은 어찌보면 불가능에 가깝다. 누군가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려면 그 누군가가 사실은 믿을 만한 이가 아니었다며 스스로를 설득하고 납득해야 하는데 그 전제 자체가 믿음에 대한 배반이 되는 모순이 생기지 않나. 기사, 혹은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지를 모르거나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가겠으나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그렇지 못했다. 원인에 대한 결과를 완벽히 증명해가며 살아가는 놈들의 머리로는 그런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불가능을 한순간에 가능케 한 위대한 이가 한 명 있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강인하다던데······ 우리 꼬맹이 엄마 되더니 겁대가리를 미스릴로 포장했나봐.” 당연하겠지만, 실로 비범하기 짝이 없는 칼리안의 미친 따까리를 말함이다. 꽁꽁 얼어붙은 감자튀김을 봤을 때에도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진 않았다. 맥주 두 잔 먹여놨더니 사실은 네 잔 마셨다며 뿌듯해하는 얼굴을 마주대했을 때에도, 근 한 달을 품어 온 새하얀 계란 속에서 물갈퀴 달린 코코가 부리를 꺼냈을 때에도, 아르센을 믿는 마음을 바꿔먹은 적 없었다. 야만족 잡겠다며 카이리스의 국경을 넘나들다 웬 시퍼런 머리카락 가진 마법사를 마주쳤던 그 날 이후로 에우리아는 아르센을 믿었다. 믿음에 대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침이 오는 것을 믿는 행동에 별다른 이유가 없는 것처럼. “아니면, 꽃 주면서 간땡이를 차원이동시켰나.” 혼잣말을 하는 내내, 뭉근한 피어가 계속 에우리아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꽃 받았나보네.” 뼛속까지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그 피어를 곁에 두고도 태연하기만 한 레이첼이 대꾸했다. 그제야 혼잣말을 멈춘 에우리아가 피어를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웬일로 안 식상한 꽃 주길래 제법이다 했었는데 사는 게 식상해진 놈인 줄은 몰랐죠.” “······ 하나라도 안 식상한 게 어디야.” “돌아가서 얼굴 보기만 하면 영원히 재워 버릴까봐요. 코코도 제법 컸던데.” “그러지 말고 좀 봐줘. 경계만 했어도 그렇게 곧바로 잠들지는 않았을 텐데, 마음 놓고 있다가 바로 잠든 우리 탓도 있고. 왕자님이 시킨 일이라는데 어쩌겠어.” “칼리안 왕자님은 그냥 저희 둘 어디 안 가게 막아라, 정도로 얘기했을걸요. 꼬맹이가 제멋대로 재웠을 게 뻔해요.” 이런 말과 함께 피식 웃은 에우리아가 잠시 주변을 살폈다. ‘세크리티아 귀족들 중에 내 아우님을 노리는 놈들이 있는 것 같아서 잠깐 아우님이랑 같이 외출할 생각인데.’ ‘플란츠 왕자님이 아니라 칼리안 왕자님을 노린다는 말씀이십니까?’ ‘내, 아우님.’ ‘아······ 죄송합니다. 공격 대상으로 쉽게 생각할 분이 아니라서 말씀드렸습니다. 세크리티아에서 왜 칼리안 왕자님을 공격하려 하는지 혹시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이곳의 마법사들은 칼리안 왕자님께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대외 홍보용 인격 때문에.’ ‘네?’ 굳이 위험을 감수해가며 칼리안을 노리는 이유는 하나였다. 세크리티아 귀족들의 눈에는 칼리안보다 플란츠와 손을 잡는 것이 더 쉬워보였을 터였다.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많은 것을 빼앗긴 것으로 보였을 테니까. 플란츠가 마지막까지 손 잡고 있던 에반마저 칼리안의 손에 잘려나갔고 당시 란델과 몇 차례 만남을 가졌던 그레이가 브리센의 후계를 받았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칼리안이 플란츠에게서 ‘브리센’의 세력을 완전히 빼앗았다고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칼리안은 굳이 세크리티아의 귀족들과 손을 잡지 않더라도 어차피 왕세자위가 확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들에게 칼리안은 쓸모 없는 패다. 칼리안을 그렇게나 애지중지하는 앨런 역시 대외적으로 나서서 칼리안을 도운 적은 거의 없지 않나. 그러니 ‘친아들을 잃고도 별다른 보복을 하지 않았던’ 앨런에 대해서는 아예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칼리안이 이곳에 왔던 날 체이스에게 망토를 덮어주며 데블란에게 선전포고를 한 일에 대해서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알려진 것은 체이스가 초대한 조찬에서 데블란이 칼리안을 빼낸 일이었다. 체이스가 카이리스 왕궁에서 플란츠를 여러 차례 만난 것은 알려졌지만 카이리스에서 칼리안을 도운 일들은 귀족들에게까지 공개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므로 세크리티아의 귀족들의 눈에는 데블란과 칼리안, 체이스와 플란츠라는 묘한 구도가 그려졌으리라. ‘세크리티아 귀족들이, 제 손에 피 안묻히고 데블란을 몰아낼 계획을 하나 만든 것 같은데.’ ‘카이리스의 힘을 이용하려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칼리안 왕자님을 없애주는 대신 카이리스의 전력으로 데블란을 몰아내려고요.’ ‘아마도.’ ‘하······ 우선 알겠습니다. 그런데 세크리티아에서 칼리안 왕자님을 해칠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면 카스트린 경 정도일 텐데요. 아니면 설마, 또 제온입니까?’ ‘제온인지 아닌지 확인이 필요한데.’ ‘제온이 아니라면 어떻게 칼리안 왕자님께 덤벼 볼 생각을 하겠습니까.’ ‘세크리티아 귀족들은 그렇게 생각 못 할 텐데. 놈들은 내 아우님이 얼마나 많이 먹고 얼마나 잘 싸우는지 제대로 몰라.’ 카이리스의 귀족들도 칼리안이 어느 정도의 무력을 가졌는지 모른다. 제온에서 처음으로 칼리안을 공격했을 땐 칼리안이 죽다 살았다. 그 이후에 제온의 일원들이 에우리아와 아르센을 공격했던 날에는 칼리안과 앨런이 함께 가서 둘을 구했다. 뿐만 아니라, 칼리안이 에반과 싸운 뒤 다친 이유에 대해서는 ‘세크리티아의 세작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큰 부상을 입은 것으로 소문을 냈다. 카이리스 귀족들이 칼리안의 강함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칼리안을 차기 국왕으로 내정하는 것을 얌전히 두고 보지 않으리라 여긴 탓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칼리안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것이 제온이라 하더라도, 에반의 일에 대해 칼리안이 세작들에게 정말로 그 정도의 피해를 입었으리라 속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에반을 쉽게쉽게 상대하다 막판에 딴 생각을 해서 배에 구멍이 나버렸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긴 그렇겠군요. 그럼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놈들이 나에게 언제든지 내 아우님 노릴 기회만 엿보고 있겠다 했으니, 어차피 언젠가 덤벼올 것이라면 전력 보강할 시간 줄 필요 없이 오늘 바로 나갈 생각인데. 조용히 와서 싸우는 것 도와.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 데리고.’ 칼리안이 데블란 앞에서 참 잘 짖었다. 덕분에 데블란이 칼리안 목숨을 노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칼리안이 귀족들과 데블란 양쪽에게 위협을 받느니 차라리 지금 당장 어느 한 쪽을 맞닥뜨리고 해결하는 것이 낫겠다 여겼다. 데블란은 귀족들이 칼리안 목을 노리는 이유를 곧바로 알아 볼 사람이 아닌가. 그리 되면 데블란은 일단 칼리안보다 귀족들을 먼저 상대하려 할 터였다. ‘그럼 그레이스 경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기다렸다가 체이스 왕세자 나올 때 같이 왔으면 하는데.’ ‘세크리티아의 왕세자를 외부로 불러내시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싸움 끝난 뒤에 잠깐 오면 돼. 체이스 왕세자가 나와 내 아우님 중에 누구를 돕게 될지 모르고 있을 데블란과 귀족들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면 우리도 누구를 먼저 견제해야 할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플란츠와의 대화를 마치고 밤이 되었을 때 아르센이 찾아왔다. 플란츠의 말대로 아르센과 함께 칼리안의 뒤를 따라가 호위를 할 생각 뿐이었던 에우리아는 방심했다. 덕분에 잠들었고 깨어나니 에일라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에일라가 전해 온 칼리안의 새로운 부탁을 수행하기 위해 레이첼과 함께 이동하는 중이었다. 레이첼의 능력으로 빨라진 속도에 휙휙 바뀌는 풍경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것을 찾던 에우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브리지트 숲이라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가시는 건 맞아요? 아까부터 계속 비슷한 곳 달리는 기분인데요.” “이동 마법사한테 길 잃어버렸냐고 묻는 거야?” “아뇨. 취소.” 마법 학교 안에서야 에우리아가 교장이고 레이첼이 부교장 역할을 했으나, 레이첼의 나이가 더 많은 탓에 밖에서는 그냥 편한대로 지내기로 했다. 물론 레이첼이 학교에 부임한 첫 날에 밤새도록 히몰리카를 주고 받으며 결정한 일이다. “숲 인근에 세크리티아 병사들도 많이 있을 것 같은데, 놈들이 엘프 숲에 허튼 짓 하는지 지켜보고 방해도 좀 하려면 우리가 눈에 좀 덜 띄는 게 나으니까. 그래서 지금 빙 돌아가는 샛길로 가고 있는 거야. 길 잃은 것 아니니 걱정 마.” “네, 알겠어요. 그런데 샛길까지 알고 계시네요. 오신 적 있었어요?”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 레이첼, 미안해. 이쪽 길 아니었나봐. 계속 가면 숲이 나오기는 하는데 조금 많이 돌아가야한대. - 거 봐. 이쪽이라고 알려 준 사람, 길 잘 모르는 것 같았다니까. 한 번만 더 물어보고 가자니까 기어코 네 말 맞다고 하더니. 같은 길을 지나왔던 언젠가의 기억이 떠오른 레이첼의 입에서, 어지간해선 잘 꺼내놓지 않던 이야기가 이어졌다. “엘프들이 사는 곳에는 신기한 풀도 많고 약재로 쓸만한 것이 제법 많아. 그래서 베로니카 낳기 전에 로닐이랑 한 번 찾아갔었는데 그 때 이 길로 갔었거든. 얼마 전에는 세크리티아 왕세자가 아버지를 한 번 초청했던 적이 있어서 온 김에 잠깐 들러보기도 했고. 아, 그땐 로닐 대신 베로니카랑.” “아······ 두 분이 여기저기 많이 다니셨다 했었죠.” “응. 아버지 방랑벽이 워낙 극성스러우셔서. 나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 좋아하고 로닐도 그래서 둘이 같이 졸졸 따라다녔거든. 재밌게 살았지.” 술마시고 협박하고 싸우고 죽이는 것은 참 잘하는 에우리아였으나, 먼저 떠난 동갑내기 남편을 떠올리고 있는 새 친구를 위로하는 것에는 그리 소질이 없었다. 때문에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나 열심히 고르고 있는데 레이첼의 말이 들렸다. “그러니까 죽인다 만다 너무 쉽게 말하지 말아.” 아르센이 함부로 슬립 마법을 걸고 도망간 것에 대해 에우리아가 화를 낸 일을 떠올린 레이첼이, 대답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에우리아를 보다 고개를 돌렸다. - 길도 잘 모르면서 알려줄 줄은 몰랐지. - 그렇게 사람들 덥썩덥썩 믿고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살다가 크게 후회한다, 너. - 미안해, 레이첼. 대신 내가 돌아가면 꽃 사줄게. 오는 길에 꽃집 있던데 세크리티아 꽃 예쁘더라. - 꽃을 어디다 써. 꽃 말고 맛있는 것 사줘. - 그래, 알았어. 맛있는 것 사줄게. “농담처럼 꺼낸 말들이 나중에는 많이 아파.” * * * 고요하다. 말의 발굽 소리는 일정하고 단조로워, 집중하여 듣지 않으면 곧 귀에서 잊혀지고 만다. 거추장스러운 것은 싫어하고 시간이 흐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시계를 들고 오지 않았다. 하늘을 보고 별을 가늠하여 시간을 따져보는 방법 같은 것은 배워본 적 없었다.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할지를 물어볼까 하던 플란츠는 그냥 조용히 앞만 보며 계속 나아갔다. - 다각, 다각. 잊혀지다가도 어느새 다시 들려오다 오래지 않아 귓가에서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짙어지다 씻은 듯이 사라지고 또 서서히 짙어져가는 동생 놈의 피 냄새에 집중하기보다는 말 발굽 소리에 집중하는 것이 나았다. 칼리안이 플란츠 고집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플란츠 역시 칼리안의 고집을 모두 꺾는 것은 아니었다. 이 어둠에 핏방울 떨어진 것을 세크리티아의 기사들이 본다 해서 그것이 칼리안의 것인지 플란츠의 것인지 쉬이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때문에 그 놈의 클린 마법좀 그만 낭비하라 이야기를 두 번 더 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말을 안 들었다. 언뜻 언뜻 보이는 붕대가 축축하게 젖어들어 핏방울이 고일 즈음이면 깨끗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배어나오는 피냄새가 얼마나 빠르게 짙어지는지 역시 잘 기억하고 있는 플란츠가, 결국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 낫지 않는 것 같은데.” 더 빨라지지도, 더 느려지지도 않는 속도. 상처가 아물고 있다면 조금씩이라도 피가 멎어야 하는데 피가 배어나오고 클린 마법에 지워지는 속도가 똑같았다.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축복의 힘이 있더라도 상처가 계속 벌어지면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거짓말이다. 하다못해 칼리안이 타고 있는 말이 에스티나라면 저 말을 믿겠다. 하지만 레이븐은 남다른 말이었다. 칼리안의 상처가 움직이지 않도록 발걸음을 조심할 줄 아는 놈이 아닌가. 이런 평지를 저렇게나 조심스레 걷는 말 위에 앉은 놈의 상처가 벌어진다 한들 축복의 힘으로 고쳐지는 속도가 더 빨라야 한다. 플란츠가 아무 말 없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또 한 번 마력이 움직이고, 피 냄새가 지워졌다. “치료가 안 되고 있거나, 심하거나. 어느쪽인데.” 칼리안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 입에서 또 ‘내 형님은 어찌나 똑똑하신지’ 따위의 말이 나오기 전에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해.” “치료가 늦어지는 것뿐이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해독이 끝나면 곧 나을 것이라서요.” 해독. 플란츠가 할 말 잃어버린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 독에는 안 당한다며.” “독에 대한 면역이 있다기 보다는 몸을 보호하는 쪽이라 해야 맞을 겁니다. 상처가 좀 뜯겨나간 사이로 스몄나본데 마시고 들이쉬는 쪽보다는 몸 속에 직접 들어오는 게 좀 더 독하니까요. 어쩐지 검을 바꾸고 달려들더라니. 같이 죽자는 뜻이었나 싶네요.” 회색 머리 전사가 싸움 도중 갑자기 검을 버렸다. 그러더니 죽어 나뒹군 갈색 머리 전사의 검을 들어 칼리안을 벴다. 그리고 죽었다. 톱날이 달려있던 검. 베였다는 말보다는 속살이 뜯겨나갔다 해야 할 상처가 생겼다. 그 사이로 감각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끼던 칼리안이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돌아가면 형님 좋아하시는 딸기라도 준비해달라 해야겠습니다. 음식이 맞질 않아서 그런지 안색이 안좋으시네요.” 내 형님이 워낙 예민하셔서, 하는 말을 덧붙이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짖을 때 아닌 것 같은데.” “형님 탓 아닙니다. 전사들이 그런 수를 쓸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서. 제가 너무 믿었나 봅니다.” 농담같은 말을 건네고 잠시 고개를 돌려보던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더했다. “그러니 지금 이 일도, 형님 탓 아닙니다.”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채 가늠하기도 전에 칼리안의 손에 붉은 기운이 어렸다. 따라온 이들이 넷이 아니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 제51장. 사춘기라 그러시나(5) > 얼마만에 와 보는 바다인지 모른다. 파도 소리는 고요했고 하늘은 잠잠했다. 모래사장은 새하얀 빛을 내고 검은 하늘은 온통 은빛의 별로 가득하다. 실로 꿈결같은 모습이었으나 그 가운데 선 아르센은 선득함을 느꼈다. 네 구의 시신 상태가 모두 한결같다. 심장을 꿰뚫렸든 목을 베였든 목이 잘렸든, 막은 흔적이 없다. 자잘한 상처 외의 큰 상처는 단 하나 뿐이다. 날아오는 공격을 막을 새도 없이 일격의 치명상이 들어갔다는 소리다. 칼리안의 검술이 그러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득함을 느낀 것은 지금 죽어있는 이들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자님께서는 얼마나 더 강해지실지······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이 안되는군.” 마나를 실체화하여 사용하는 이들이 마법사다. 마나로 신체와 검을 강화시키는 이들이 소드마스터다. 그리고 칼리안은 마법사이자 소드마스터다. 마나를 오러로, 그리고 마력으로, 오러와 마력을 자유자재로 변형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덕분에 마력으로 변환한 오러를 ‘검’의 형태로 실체화하여 휘두르는 유일한 사람이 됐다. 그말인즉슨, 마나가 고갈되면 손에 쥐고 휘두를 검이 사라진다는 뜻이 된다. 때문에 칼리안은 대련 중에도 마법을 함께 사용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전의 전투에서는 거칠 것 없다는 듯 바람을 일으켜가며 검을 썼다.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검술로 상대방을 죽였다. 오러와 마력이 늘어나고 마법에 익숙해져가는 까닭이다. 본래에도 검의 길에 올랐던 사람이니 몸이 더 자라 예전의 힘을 다 발휘할 수 있게 되면 검술 역시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선득했다. 얼마나 더 강해질지 상상이 안 된 탓에, “이래서야······ 동상 만들다 들켰을 때 몸이 성할 확률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하나.” 하고. 아무튼. 아직도 동상을 포기하지 않은 이 단단히 미친 파란 머리 따까리는 지금 느낀 선득함을 멀리 있던 저 기사들에게까지 들킬 수는 없다 여겼다. 자신이야 시신들의 상태를 보고 칼리안 동상 만들다 생존할 확률이 줄었다며 선득해하지만 저 기사들은 칼리안의 강함을 경계하는 마음 때문에 선득해 할 테니까. 때문에 아르센은 시신을 더 자세히 살피는 것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 화르륵! 새하얀 모래사장 위에 짙붉은 불길이 일었다. “헤르츠 부군단장. 불을 끄십시오. 조사를 해야 합니다.” 시신을 살피던 아르센이 갑자기 화염을 일으키자 멀리 서 있던 기사들 중 한 명이 달려오며 아르센을 만류했다. 기사들을 이끌고 있는 이였다. 그가 시신 근처로 더 가까이 오기 전에 아르센이 먼저 움직였다. 텔레포트를 통해 곧바로 기사 쪽으로 이동한 아르센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미 다 죽은 이들인데 무슨 조사를 하겠나.” “카이리스의 왕자님들을 공격한 수상한 무리인데 당연히 조사를 해야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암살 시도하는 이들이 소속 밝힐 물건을 지니고 있던 것은 본 적 없네. 괜한 수고로 시간만 낭비하느니 신속하게 처리하고 왕자님들 뒤를 따라가는 것이 낫지 않겠나.” “이곳은 세크리티아입니다. 세크리티아에서 발생하는 일의 결정권은 우리 쪽에 있습니다.” “세크리티아에서는 처음부터 싸움에 관여조차 하지 않았는데 무엇에 대한 결정권이 있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군.”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한 것은 칼리안이었고 아무 참견도 하지 말도록 못을 박은 것은 플란츠였다. 두 왕자의 말을 고분고분 따른 덕분에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으나 이 일에 대해 의견을 낼 방법도 사라졌다. “저들을 조사하지 않은 것을 두고 카이리스 왕실에서 세크리티아에 문제 삼을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기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는 아르센이 이런 말로 쐐기를 박았다. 잠시간의 실랑이가 이어지는 동안 시신의 옷가지는 이미 모두 불타 사라졌다. 그 후로도 불은 꺼지지 않고 남은 것을 계속 태워나갔다. 불쾌한 냄새가 주변을 휘감아 돌자 잠시 인상을 찌푸린 기사가 아르센을 쳐다봤다. 아르센이 지금 시신 상태를 보여주지 않으려는 속셈임을 알았다. 하지만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문제 삼지 않겠다는 말, 책임지기를 바랍니다.” “말했지만 나는 발칸의 부군단장이네.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네.” 결국 기사는 이 정도로 협의를 보고 시신을 태워 없애는 것을 묵인했다. 사람의 몸은 끈질기다. 검의 흔적 하나를 태워 없애는 것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쉬고 있게. 시신이 모두 타면 그 때 가지.” 때문에 기사들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 한 뒤 주변을 둘러보던 아르센의 시선이 바닥에 닿았다. 어지러이 흩어진 핏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베인 상처에서 흩뿌려진 탓에 반원 형태로 퍼진 핏자국, 검 끝에서 떨어져내린 듯 점점이 박힌 핏자국, 시신에서 흘러나와 넓게 퍼진 핏자국. 모두 전사들의 핏자국이다. 그 광경이 낯설거나 거북하다며 거부감을 느낄 인사는 아니었던 아르센이 물끄러미 싸움의 흔적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회색 머리 전사의 시신 앞쪽에 후두둑 떨어져내린 듯한 핏자국에 아르센의 새파란 눈이 고정됐다. 핏자국과 연결된 시신이 없다. 그 피의 주인이었을 이가 걸어간 자리에 발자국 대신 핏자국만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핏자국이 이어지지 않았다. ‘역시 다치신 것이 맞았군.’ 분명 칼리안의 것이다. 피냄새는 맡지 못하지만 마나의 흐름은 읽을 수 있는 아르센이다. 기사들의 근처에 온 칼리안이 왜 그렇게 남모르게 클린 마법을 남발했는지 그 이유 역시 눈치를 채고 있었다. 예상이 맞았음을 확인한 탓에 쓴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던 아르센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쭈그리고 앉아 주변의 흔적과 칼리안의 흔적을, 정확히는 그 ‘색’의 차이를 살폈다. “이건 대체······.” 새하얀 모래사장에 아직 스며들지 않은 다른 피들은 모두 여전히 붉었다. 단 한곳, 칼리안이 서 있던 자리와 칼리안이 움직인 자리에 떨어진 것들을 빼고. 검다. 칼리안이 흘린 피의 색이 검었다. “난리 났군.” 플란츠를 데리고 혼자 돌아간 칼리안이 단순히 자상을 입은 것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바닥에 얼룩진 핏자국을 클린 마법으로 지워버린 아르센이, 불길 속 시신들의 상태를 신중하게 확인했다. 꺼지지 않은 불 속에서 검술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것을 본 아르센은 주저없이 몸을 돌렸다. [슬립] 그리고 잘 사용하지 않았던 마법을 발현했다. 아르센이 처음 이곳에 나타났을 때 긴장하며 검에 손을 올린 열세 명의 기사들과 달리, 아르센을 향해 걸어온 두 명의 기사를 향해서였다. “무슨 짓입니까!” 아르센이 갑작스런 행동을 한 이유를 알 리 없을 기사가 놀라 물었고 아르센이 입을 열어 둘러대는 말을 꺼내려 했을 때. - 다그닥, 다그닥! 더는 찾아올 이 없어야 할 곳에 한 마리 말의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새카만 몸, 오른쪽 발목만 하얀 말. 레이븐이었다. 레이븐은 아무도 태우고 있지 않은 채였다. 모래사장 위를 거침없이 달려온 레이븐이 아르센의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특별히 이번 한 번만 더 태워줄 테니 시간 낭비 말고 빨리 오르라는 눈으로 아르센을 바라봤다. 자존심이 약간 상했지만 레이븐의 눈빛을 아주 잘 이해한 아르센이 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설명은 나중에 해야겠네. 시신 소각이 끝나면 저 기사 둘 데리고 왕궁으로 돌아가게. 혹시 저들이 일어나거든 암살자들과 연관이 있는지 슬쩍 물어봐주면 더 좋고.” 그 후 아르센은 더 볼 것 없다는 듯 안장 위에 올랐고 레이븐은 곧바로 발을 박찼다. 속도를 높이는 레이븐의 위에서 잠시 무언가 잊은 것이 있다는 얼굴이 된 아르센이 재빨리 고개를 돌려 큰 소리를 냈다. “괜찮다면 내 말 좀 챙겨서 와 주게! 로로라고 하네!” 이렇게, 기사 재운 상세한 이유는 집어치우고 제 말 이름 소개시켜 줄 여유만 간신히 챙긴 파란 머리 마법사가 빠르게 멀어져갔다. * * * 스물 여섯, 아니 여덟, 아니. 서른 둘. “······ 서른 넷.” 대사막의 전사는 아니다. 세크리티아의 기사들도 아니었고 칼리안이 기억하고 있는 세작들도 아니었다. 소속도, 실력도, 정체도 모를 서른 네 명의 검사들. 다행인 것은 이곳에서 벗어나게 한 레이븐과 에스티나에게 저들이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 다행하지 않은 것은 저들 중 두 명의 검이 붉게 빛나고 있다는 것. 또 하나 다행인 것은 아는 얼굴이 없었으니 손속에 주저함이 생길 일이 없다는 것. 또 하나 다행하지 않은 것은. - 욱씬! 검을 만들 때 느껴진 심장의 통증. 처음 이 곳에서 칼리안의 몸으로 눈을 떴을 때 느꼈던 바로 그 통증이 다시 찾아왔다. 해독과 상처 치료에 이어 심장 속 서클에 담긴 마력까지 계속 남발했으니 축복의 힘이 한계점에 오른 모양이다. “형님 말씀 잘 들을 걸 그랬습니다.” 실소한 칼리안이 농담을 꺼냈다. 앞에 둘러진 실드를 쳐다본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내 아우님께서 말과 행동이 다른데.” “클린 마법에 실드 좀 쓴다고 더 힘들 것도 없습니다.” “말고.” “어쩌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까지 사이 나쁜 척 잘못하다가는 형님 죽습니다. 그러느니 참으로 연약하신 형님 살리고 저 놈들 다 죽이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마력을 또 낭비해가며 무리하고 있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고, 바닷가에서 기껏 연기를 하고 와서는 기사들 앞에 선 플란츠에게 턱하니 실드부터 씌웠으니 하는 소리이기도 했다. “생일에 겪기에는 험한 상황이긴 한데 형님께서 자처하신 일은 맞으니, 눈앞에서 피 보실 일 생긴 것은 형님 탓이라 생각하겠습니다. 대신 제 피 보신 건 형님 탓 아니니까 다른 생각 말고 기다리고 계십시오.” “알았어.” 놈들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누구든 한 명이 먼저 나서는 그 즉시 깨져버릴 침묵을 앞에 둔 칼리안이 씩 웃었다. - 우웅! 위협적인 울림과 함께 두 개의 단검이 떠올랐다. 검고 어두운 숲 속에서, 작고 작은 날붙이가 야수의 두 눈처럼 붉게 빛났다. - 쌔애액! - 콰직! 검은 숲 속을 붉은 빛줄기 두개가 가르고 지나갔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소리와 함께 두 명의 검사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것은 곧,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기도 했다. - 타앗! 단검이 만들어진 것을 눈에 담기가 무섭게 곁에 있던 둘이 죽어 나뒹굴자 검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들을 보면서도 칼리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붕대 위에 맺힌 검은 피가 옷자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무시한 채로, 이미 날아간 단검을 제 몸 대신 움직이게 했다. 둘의 생명을 끊어낸 두 개의 단검이 방향을 바꾸었다. 바람의 마력에 칼리안의 의지를 담은 작은 날붙이 두 개가 또 다른 네 명의 심장과 목을 꿰뚫는다. 여섯, 하고. 저도 모르게 죽은 이의 수를 세려던 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 욱씬! 그것이 곁에 서 있던 플란츠 때문인지 아니면 목구멍을 치받으며 넘어오는 비릿한 향 때문인지 생각하는 대신 칼리안은 그냥 생긋 웃었다. 검사들 사이에 선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 붉게 달아오른 검을 든 두 전사를 향해서였다. - 우우웅! 검사 열 넷이 죽었다. 칼리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검사들의 발이 멈췄다. 칼리안의 단검은 멈추지 않았다. 허공을 가르는 두 개의 단검에 더해 또 하나의 단검이 떠올랐다. 그리고 번개처럼 대기를 갈랐다. 심장의 통증도 잊은 칼리안은 대사막의 두 전사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계속하여 단검을 움직였다. - 쉬이익! - 콰직!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하나의 단검을 쳐낸 검사가 안도한 순간, 뒤에서 날아온 또 하나의 날붙이가 심장을 찔러왔다. 단단한 근육으로 몸을 감싸고 있든, 튼튼한 사슬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었든, 아무 소용 없었다. 단검을 막으면 검이 뚫렸고, 막지 못하면 숨이 잘려나간다. 다가오는 것을 포기한 검사 한 명이 활을 잡았다. 그의 손을 떠난 화살 하나가 플란츠의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 쌔액! - 카가각! 플란츠는 피하지 않았고, 강한 타격음을 내며 실드에 부딪힌 화살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 쉬이익! 그것이 날아온 방향으로 세 개의 단검이 모조리 궤적을 바꾸자 오래지 않아 짧은 비명 소리가 울린다. 활을 쏜 놈을 치워낸 칼리안의 고개가 아주 잠시 플란츠를 향해 돌아갔다. “저를 너무 믿으시네요.” “내 아우님께서 기다리라 하시니.” 실드에 막힐 것을 알고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플란츠가 대답의 끝을 이었다. “······ 기다려야지. 어련히 알아서 잘 살리고 계시는데.”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 죽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살리고 있다는 말이 듣기에 나쁘지 않아서. “네.” 단검이 다시 날았다. 발 밑에서 튀어오른 단검이 한 명의 생을 앗고 다음 놈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정수리 위에서 떨어져내린 단검이 옆에 선 이의 심장을 향했다. 그 모습에 뒷걸음질을 칠 겨를도 없이 어느새 심장 앞으로 단검 하나가 날아든다. 단 세 개의 단검이 어둠 속에 붉은 물결을 계속하여 만들어나갔다. 혈향이 짙어짐에 따라 놈들의 수는 착실히도 줄어들어갔다. 하지만 거기까지. - 두근! 레이븐의 등에서 뛰어내리며 허리의 상처가 비틀릴 때에도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았던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찢기는 느낌에 친숙해지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니까. 세 개의 단검이 일순간 빛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다시 한 번 단검에 마력을 불어넣고자 하였으나 통증이 이어진다. 축복의 힘에 밀린 심장이 마력 내보내기를 거부했다. - 욱씬! 스물 일곱이 죽었다. 다섯의 검사와 두 명의 전사가 남았다. 깜빡, 하고. 플란츠의 앞에 둘러져 있던 실드가 지워지듯 사라졌다. 플란츠의 눈에 날이 섰고 칼리안의 새빨간 입술에는 긴 호선이 그려졌다. “실드 없습니다. 뭔가 날아오면 피하십시오.” “······ 알았어.”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됩니다.” - 우우웅! 만들어 사용하기에 더 어려웠던 단검 대신 보다 익숙한 검 한 자루만 손에 쥐었다. 붉은 오러가 회오리치듯 일렁이며 예기를 뿜는다. “무슨 일이 생기든 어련히 알아서 잘 살려 드릴 테니.” 어찌 들으면 장난기 가득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들으면 서늘함이 감도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곱 명을 모두 앞에 둔 채로, 플란츠를 뒤에 둔 채로,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을 다시 한 번 삼켜내면서. 칼리안의 발이 비로소 움직였다. - 저벅. 그리고 그때. 숨길 것 없을 발소리가 칼리안의 옆에서 들렸다.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으나 그러든지 말든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이가 검을 잡았다. 어두운 숲을 가르고 선, 형형한 붉은 빛의 검이 하나. 별빛을 삼킨 잿빛의 검이 하나. 별빛을 담은 청은빛의 검이 하나. 두 사람의 손에 세 개의 검이 들렸다. “싫어.” 그리고 이렇게, 칼 뽑은 완두콩이 동생 말 안 듣는 소리가 이어졌다. < 제52장. 참으세요, 형님(1) > 생을 이어가는 동안 한 번 쯤은 죽음을 각오하는 날이 있다. 만약 누군가 칼리안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그 큰 눈을 멀뚱히 깜빡거리는 예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른으로 살았을 때에는 거의 매일매일이 그런 날이었고 결국 맞이한 마지막 날에도 죽음을 각오했으니 그런 날이 ‘한 번 쯤 있다’ 라고 비장하게 말할 거리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옛칼리안의 삶 역시 마찬가지였다. 얀에게조차 비밀로 해 두고 왕실 서고를 몰래 드나들며 혼자서 마법을 익히던 하루하루가 옛칼리안에게 있어서는 바람 많은 계곡 사이에 놓인 외줄 다리를 건너는 것과도 같았다. 그랬으니 지금의 칼리안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리 없지 않겠나. 그래서 칼리안은 별다른 고민 없이 죽음을 각오했다. 내가 죽을 작정을 하지 않고서 누군가의 숨을 끊어놓고 살아남을 마음을 어찌 먹을 수 있을까. 때문에 숨을 쉬듯, 혹은 눈을 깜박이거나 입 안의 침을 넘기듯 자연스럽게 각오를 했다. 그리고 말했다. 기다리고 있으라고. 살려줄 테니. - 싫어. 그런데 싫단다. 그것이 기다리라는 말에 대한 대답이 아님을, 정말 신기하게도 칼리안은 아주 잘 알아들었다. “······ 형님 지키려다 죽을 사람 아닙니다. 저 안 죽습니다.” “알아.” 확신 없는 단언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진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해보기도 어려운 동생의 말에 플란츠가 곧장 대답을 전해왔다. 누구보다 똑똑한 플란츠의 대답이니 안 죽는다는 말은 아마도 진실이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든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습관처럼 죽을 각오를 한 사람이 내뱉은 모순된 말을 진실로 만들어버리는 이상한 재주는 또 어디서 배우셨나 싶어서였다. 그 뒤, 잔뜩 긴장한 검사 다섯 명이 한 발을 다가올 정도의 짧은 시간 사이에 두 형제의 대화가 빠르게 오갔다. “형님 지금까지 누구 몸에 상처낸 건 한 번 밖에 없으신데요. 이름 제대로 부르시라 했더니 식사 하다 말고 대뜸 나이프 던지신 거요.” “······ 알아.” “그 때 저 다쳤거든요. 흉터도 아직 있고, 저 그거 죽을 때까지 안 까먹을 거거든요.” “알아.” 이런 와중에 그런 몸을 하고서도 입은 참 잘도 움직인다. 도망 갈 생각은 없는 용기인지 아니면 칼리안의 몸상태를 눈치챘는지,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서도 멀어지기는 커녕 천천히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던 칼리안이 조금 더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그 때와는 아주 많이 다를 겁니다. 다르다는 걸 죽을 때까지 못 잊어버리실 겁니다.” “알아.” 가물거리기 시작한 정신머리 덕분에 ‘레이븐도 두 가지 종류로는 말을 하는데요. 푸르륵, 푸릉, 하고요.’ 라고 잠깐 짖을 뻔한 칼리안이 큰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레이븐보다 언어구사력 부족한 취급을 받은 것은 죽을 때까지 모를 형을 향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네.” 사실 지금 몸을 움직이는 것이 썩 편하지는 않다고. 앞에 다섯 놈 잡고 나서 뒤에 있는 두 전사 잡으러 가다 말고 멈춰 설 것 같다고. 그러니 그냥 형님이 검사 다섯 놈 붙들고 있어 주면 내가 뒤에 있는 두 전사 데리고 있겠다고. 아르센이 올 테니, 잠깐만 상대하고 있으라고. 죽지 말고. 짧은 말. 많은 말이 담긴 짧은 말을 마쳤다. 그 짧은 말 안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 똑똑한 플란츠도 잘 알아들을 테니까. 칼리안이 발 끝으로 바닥을 한 번 툭 찼다. 그렇게 잠겨들어가는 몸을 한 번 깨운 뒤 다시 한 번 바닥을 박찼다. 방금 전보다 더 세게, 더 강하게. - 타앗! 짙은 어둠 속으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숨어든다. 붉은 빛을 내뿜는 검의 잔상과, 같은 빛을 가진 듯한 피냄새가 잠시 맴돌다 이내 사라졌다. 플란츠가 조금 느리게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앞에 선 다섯의 검사들이 ‘진짜 적’임을 인식했다. 지금 이 상황이 동생 혹은 발칸의 대원들을 마주하고 벌이던 가짜 전투가 아님을 제대로 인지했다. 서로 다른 색의 두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같은 별을 담았으나 완연히 다른 빛을 내는 두 개의 검이 첫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 카아아앙! 먼 곳의 포식자들이 서로를 향해 발톱을 박아넣는 소리가 포효처럼 터져나왔다. 두 번째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칼리안은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다. 강요는 물론이고 채근한 적도 없었다. 되는대로, 혹여 어렵다면 돌아가는 것도 괜찮으니 가능한 만큼만 무리하지 말고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카이리스의 이동 마법진 구축에 대한 이야기다. 레이첼은 르메인의 허락이 떨어진 곳에 마법진을 구축했다. 구축이 완료되고 난 뒤에는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같은 일을 진행하길 반복했다. 그러다보니 드넓은 카이리스의 땅 이곳저곳을 옮겨가며 일을 진행하게 됐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생겨난 뜻밖의 결과를, 엉뚱하게도 에우리아가 체험하고 있었다. 그것도 벌써 두 번째로. “제일 빠른 속도라더니 진짜 빠르네요. 꼬맹이에게 한 번 들은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빠른 줄은 몰랐어요.” “왕자님 로젤리타 때보다 훨씬 빨라졌어. 마법진 일로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까, 내가 어디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데도 시간은 아깝더라. 그러다보니 이렇게 됐어.” 레이첼 스스로가 사용할 수 있는 이동 속도 보조 마법이 엄청나게 숙련된 것이다. 칼리안은 단 한 번도 빠른 작업을 요구한 적 없었으나 느긋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레이첼의 성격 상 이동에 소모되는 시간이라도 줄여보려 하다 보니 얻게 된 성과였다. “덕분에 늦지 않게 온 것 같네요. 저렇게 우글우글 모여 있는 것을 보니 곧 뭐든 할 것 같은데.” “그러게. 그래 보이네.” “그런데 이곳 국왕은 왜 엘프 숲을 없애버리려는지 이해가 안 돼요. 보복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어차피 여기 사는 엘프들은 어머니나무의 보호를 받지 않아. 애초에 세크리티아에 어머니나무의 힘이 닿은 적도 없었지만. 숲 하나 없어지는 것 말고 세크리티아에서 피해 볼 일은 없으니 숲보다 큰 게 필요하면 저런 일을 저질러 볼 수도 있겠지.” “그럼 칼리안 왕자님은 왜 굳이 그걸 막으려 하는지, 그게 또 궁금해지는데요.” “글쎄. 그것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데블란은 이제 어떻게 행동할까. 데블란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온 뒤 칼리안은 계속 그것을 생각했다. 지금 당장 데블란이 가장 쉽게 잡을 수 있을 칼리안의 약점이 뭐가 있을까. 큰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칼리안에 대한 가벼운 경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이득을 겸사겸사 취할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브리지트 숲. 어머니가 어린 시절을 보내 칼리안에게도 소중한 곳이라 이야기했던 곳.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데블란은 잘 알아봤을 것이다. 그곳의 엘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대장로 나르잔은 그 즉시 카이리스에서 발을 빼고 다시 세크리티아와 협상을 하려 들 터였다. 그러므로 칼리안의 소중한 곳을 빼앗는 것이 목적이든, 치유사가 목적이든, 아니면 카이리스의 큰 이득 하나를 빼앗는 것으로 르메인의 재밌는 편지에 화답하는 것이 목적이든, 혹은 전부 다 얻게 되든. 데블란이 지금 바로 목표할 것은 브리지트 숲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한 생각의 결과로, 본래에는 에우리아와 에일라를 숲으로 보내려 했다. 브리지트 숲이 어디에 있는지 에일라가 모를 수는 있었지만 어쨌거나 에일라는 세크리티아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으니 그곳을 찾아가는 것에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나가려고.’ ‘어디를요.’ ‘바다.’ 그러던 중에 플란츠가 갑작스러운 고집을 부렸다. 칼리안은, 세크리티아 귀족들이 플란츠에게 접근했던 것은 알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데블란이 어떻게든 자신을 해치려 하리라는 것 역시 알았고 그 사실을 플란츠에게도 전했다. 그런데 플란츠가 갑자기 바다에 가자 하더니 에우리아와 레이첼을 불렀다. 칼리안을 제외하고 일행 중 가장 강한 에우리아, 그리고 에우리아를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는 레이첼이 필요한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혹시 누군가 칼리안을 공격해오게 할 심산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플란츠의 계획을 적당히 가늠해낸 것이다. 플란츠는 똑똑했고 칼리안은 노련했으니까. 만약 누군가에 의해 칼리안이 정말 위험에 처하고 그에 대한 소식을 체이스가 어떤 식으로든 듣게 된다면 체이스가 왕궁 안에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제일 먼저 키리에를 불러 체이스가 왕궁 밖에 나오지 못하도록 막으라는 말을 전해뒀다. 아르센에게는 에우리아와 레이첼의 발을 묶고, 왕실 바다가 있는 곳으로 뒤따라 와 플란츠의 곁을 좀 지켜보라 지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뒤에는 데블란의 계획을 막기 위해 에우리아를, 그리고 생각을 조금 바꿔 에일라 대신 레이첼을 함께 숲으로 보냈다. 레이첼도 세크리티아에 온 적이 있었음을 떠올린 까닭이기도 했고 왕궁 내부를 잘 아는 에일라의 쓸모가 따로이 생긴 까닭이기도 했다. “이유가 어떻든 시킨 일부터 해야지. 에우리아.” “네. 그래야죠.” 두 마법사가 선 곳은 숲 안쪽의 단단한 나무 위였다. 크지 않은 숲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조금씩 범위를 좁혀들어오기 시작하는 수많은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주의하라고 하신 것 잊지 말아.” “네. 아무도 안 죽이고 일처리 해본 게 너무 오래전이기는 한데 잊지는 않을게요.” “그래. 놈들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나는 슬슬 숲 뒤쪽으로 가볼게.” “네. 조심하시고요.” “알겠어.” “참. 저희 일 끝나고 한 잔 하고 들어갈까요?” “좋지, 그것도.” 가볍게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인 레이첼이 나무 아래로 텔레포트했다. 그리고 다시 말에 올라 숲의 반대편으로 달렸다. 에우리아와 각각 숲의 절반씩을 맡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발 빠른 레이첼이 에우리아를 내려놓고 숲의 반대편으로 가기로 했던 것이다. ‘왕자님께서,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이 브리지트 숲을 공격한다면 막아달라 하셨습니다. 병사들의 눈에 띄는 것은 상관 없지만 아무도 죽여서는 안 된다 하셨습니다. 죽지만 않으면 된다고도 말씀하셨으니 참고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레이첼의 기운이 금세 멀어진 것을 확인한 에우리아가 키리에가 전해 온 주의사항을 떠올렸다. 그 마지막 말이 참 마음에 든다 생각한 에우리아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 파직, 파지직! 에우리아의 양 손 끝에 마력이 집중됐다. 한 쪽 손에서 만들어진 뭉클거리는 물의 기운이 땅 속의 물줄기를 찾아나섰고 또 한 쪽 손에는 강렬한 보랏빛의 스파크가 모여든다. 그리고 잠시 후, 숲의 반대편. 먼 곳의 하늘에 갑작스런 번개의 기운이 맴도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레이첼이, 말을 타느라 찌뿌둥해진 어깨를 돌려가며 몸을 풀었다. 그 뒤 양 손바닥을 곧게 펼쳐 땅을 향해 뻗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후 모여드는 병사들과의 거리를 가늠해가며 마나의 흐름에 집중했다. 마력이 모여든다. 심장을 거쳐 팔로, 손으로 모여든 마력이 레이첼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 사아아아······. 바람이 불지 않았으나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마른 나뭇잎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지며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가지 앙상한 나무 위의 둥지에서 간밤의 단잠을 자던 새들이 놀라 날아올랐다. 나무가 흔들리고 숲이 진동했다. - 쿠구구궁······! 대지의 울음이 이어졌다. * * * 비웃었다. 지금껏 동생의 실드 안에 잠든 듯이 서 있던 왕자의 검이 강해보아야 얼마나 강하겠나.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 도자기 인형같은 그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던 이의 두 자루 검을 우습게 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콰직!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목을 가르고 심장을 토막낸 두 검을 비틀어 빼내는 그 순간에서조차 지극히 아무것도 담지 않은 연두색 눈을 보면서, 잘못된 판단에 대한 뒤늦은 후회를 해 보아야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 풀썩! 생을 잃고 쓰러지는 시신의 몸에 검이 같이 딸려가지 않도록 빠르게 회수하며 다음 대상을 골랐다. 아주 잠시동안, 생각만큼 끔찍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손 끝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그리 끔찍하지 않은 이유를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그랬다. 결국 나도 브리센의 핏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테니 동요하지 말자며 수도 없이 상상하고 다짐해왔기 때문일까. - 카앙! 카가강! 그 빠른 머리로도 깊은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 오른손에 다시 한 번 힘을 줌과 동시에 왼손에 들려있던 검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양쪽에서 날아오는 두 검사의 검격을 막았다. 손 끝에 튄 무언가의 온도가 급격히 식어내리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것 역시 생각보다 끔찍하지 않아서, 플란츠는 상대방을 향한 살기를 거두지 않고 계속 흘려보냈다. 네 전사 중 가장 뒤에 있던 놈이 발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플란츠가 두 검을 교차하여 다음 공격을 막고, 둘 중 아래 놓인 검을 빼내어 앞에 선 검사를 향해 찔렀다. 상대의 살 끝이 찢기는 것이 느껴졌으나 깊지 않다. 그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뒤로 훌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가장 끝에 선 놈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 카가강! 두 자루의 검에 아직 온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다는 말이 다루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본래부터도 검을 곧잘 다뤄왔으니 두 검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움직이는 것에도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 이유가 참 똑똑한 머리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칼리안은 설명해주지 않았다. 알려줘봐야 생각만 늘릴 테니까. - 카앙! 카아앙! 멀리 붉은 빛이 어지러이 움직이며 하나 대 둘의 싸움이 이어지는 것을 일별한 플란츠가 다시 발을 움직였다. 네 방향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피한 뒤 팔을 휘둘러 쳐냈다. 시나스타보다 무거운 검을 쓰는 탓에 채 회수하지 못해 비어있는 찰나의 틈으로 두 검을 같이 찔러넣었다. 한 번 겪어 본 감각이 손끝에 머무르고, 놈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것을 오래 확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플란츠가 검을 다시 빼들었다. 검은 색의 글씨 위에 붉은 방울이 맺히다 툭, 떨어진다. 곧바로 뒤로 돌아 다음 상대를 찾았다. - 캉! 카가강! 뻗어나오는 검을 막고 튕겨내고, 찌르고 베어내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스쳐 지나간 누군가의 검날에 베인 팔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으나 거슬려하지 않으려 애썼다. 대신 조금 더 집중하여 상대의 틈을 노렸다. 욕심부리지 않고, 한 명씩. 빈 틈은 절대로 놓치지 않으면서. 남은 셋이 자신들끼리 눈빛을 주고 받더니 잠시 한 발을 물렸다. 그 틈을 탄 플란츠가 멀리 칼리안이 있는 쪽에 시선을 두었다. 하나 대 하나. 어느새 한 놈을 잡은 모양이다. 아무튼 지독하게 미친 놈이라는 생각을 하며 두 검을 다잡았다. 그런데. - 깜빡. 멀리 보이던 두 개의 붉은 빛 중 한개가 갑자기 점멸하듯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플란츠는 잘 알았다. 자칫하면 브리센에 가서 고양이 안 키우겠다는 선언을 해도 플란츠 심장이 죄일 일이 사라진다는 소리다. “······ 하.” 앞에 선 세 놈, 저 먼 곳에 있는 한 놈. 어느 쪽을 먼저 챙길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 타앗! 플란츠가 세 명의 전사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고 달렸다. 그 언젠가의 어느 날처럼, 다만 이번에는 어머니 말고 동생이 있는 쪽으로. 뒤를 따라 달려오는 검사들의 발소리가 들렸고 당장 죽어 사라질 얼굴로 웃던 동생 놈의 눈이 플란츠를 향하는 것이 보였다. “칼리안.” 새빨간 눈이 커진다. “······ 받아.” 등 뒤의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신경 쓰지 않는다. 한 손에 든 검을 칼리안에게 집어던졌다. 그리고 다시 뒤로 돌아섰다. 가까이 다가온 세 검사의 검이 일제히 내리꽂힌다. 하나 남은 검을 들어 막았다. 둘이 막혔고 하나는 놓쳤다. 허리를 비틀어 피했다. 다시 한 번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무시했다. 팔을 움직여 휘둘렀다. 두 검을 튕겨내고 검을 틀어잡아 하나를 막았다. 검을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칼리안이 쓰던 방법을 배웠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검을 왼손으로 다시 잡았다. 플란츠의 검에 힘을 싣고 있던 놈이 지지대를 잃고 휘청인다. 놈의 심장을 꿰뚫었다. - 카아아앙! 카가강! 카앙! 플란츠의 곁에서 두 마리 맹수가 맞붙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울리며 숲이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역시 신경쓰지 않고 오른손에 다시 검을 쥐었다. 둘 중 한 놈의 명치를 찔러들어가던 플란츠의 검이 막혔다. 상대는, 검이 아니라 장갑 낀 손으로 플란츠의 검을 잡았다. 두 개의 검을 반으로 나눈 만큼 얇고 가벼운 검이었으니 그만큼 쉽게 붙들렸다. 놈이 남은 한 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붙들린 시나스타를 빼내어 막으려 했으나 녹록치 않았다. 또 하나의 검이 있었다면 그 손을 쉬이 쳐냈겠으나 그것은 지금 칼리안의 손에 들렸다. 다시 검을 놓고 피할까 했으나 또 한 놈의 검이 날아들었다. 이 순간에도, 똑똑한 머리는 순식간에 판단한 것을 알려왔다. 피할 방법이 없음을. - 쉬이익! 이런 곳에서 죽어서 결국 이 땅에 전쟁을 또 불러오게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습게도. - 서걱! 그때, 검사의 손아귀가 잘려나갔다. 비명소리가 귓가를 얼얼하게 울렸고 누군가의 손이 플란츠의 어깨를 붙들어 뒤로 물렸다. “아뇨.” 소리 없는 혼잣말에 대한 대답이 들렸다. 어느새 달려온 동생 놈이 또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이제 세 개의 검을 앞에 두게 된 칼리안의 손에서, 청은빛의 검이 불안하게 깜빡이는 오러를 다시 머금었다. 확신 없는 단언을 한 번 더 내뱉은 칼리안이 팔을 움직였다. 검사들의 검이 둘, 전사의 검이 하나. 날아든다. 칼리안이 검을 내뻗는다. 피 냄새가 짙었고 붉은 빛이 명멸했다. 네 개의 검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금속이 무언가에 긁히는 듯한 소리를 냈다. - 카가가각! 칼날이 서로 얽혀들며 내는 예리한 소음이 아니었다. 네 개의 검은 서로 얽혀들지 않았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두터운 얼음의 벽에 막힌 네 개의 검이 눈에 보였다. “······ 늦었습니다.”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왔다. < 제52장. 참으세요, 형님(2) > 왜 둘이 남았을까. 다섯을 형님한테 남겨놓고 제온의 힘을 쓰던 전사 두 놈한테 덤벼들었지, 그래. 그것까지는 정확한데. 그 때까지는 둘인 게 맞는데. 놈들 중에 하나를 죽였는데 왜 둘이 남았을까. ······아니, 다시 한 명이네. 방금 분명 둘이었는데 다시 보니 하나 맞네. 하긴 그렇지. 둘이 있었고 그 중에 하나를 죽였으니 내 앞에 선 놈이 이제 한 명이어야지. 맞는데 아까는 왜 둘이었지. 이상하네. - 깜빡. 부옇게 흐려진 시야를 닦아내려는 것처럼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제야 초점이 돌아오며 둘로 보이던 전사가 한 명으로 정확히 보였다. “아······ 하나 맞구나. 방금 죽인 놈 살아 돌아온 줄 알고 무서울 뻔했잖아.” 나같은 놈이 또 생긴 줄 알았잖아. 거듭 확인해보듯 눈을 깜빡였다. 한 명 맞다. 툭툭, 하고 발 끝으로 바닥을 몇 번 더 찼다. 검을 쥔 손에도 몇 번인가 힘을 주어 가며 잠들려는 감각을 다시 깨웠다. - 깜빡. 조금 먼 곳에서 검격을 주고 받는 다섯 명의 인영이 보인다. 혹시나 싶어 이번에도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다섯 중 하나는 완두콩일 테니 검사 중 한 명이 줄어든 것이리라. 헤르츠 경이 올 때까지 적당히 상대해가며 기다리기만 해도 될 텐데, 그게 아니면 사실 내가 너희들이랑 같은 편인 듯 하니 셋째 왕자 죽을 때까지 사이 좋게 구경이나 하자 해도 될 텐데, 하여튼 융통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서 검사 한 명을 줄여놨나보다. 기어코. “또 잔뜩 절여지셨겠네.” 기어코. - 쉬이익! 짧은 한숨을 내쉬려는데 호흡 가다듬기를 마친 전사가 달려들었다. 때문에 숨 한 번 제대로 쉴 틈도 가지지 못하고 검을 들어올렸다. - 카앙! - 카가강! 캉! 카아앙! 연이은 쇳소리가 청각을 깨웠다. 허리쪽은 여전히 감각이 없었으나 심장의 통증이 계속해서 올라와 가물거리던 정신머리를 꽉 붙들었다. 차라리 다행한 일이다. 땅을 디딘 것인지 그림자를 밟는 것인지 잘 구분하지 못하는 발을 놀려 달려드는 전사의 검을 피했다. 고집스럽게 검을 붙들어 잡고 놈을 향해 찔렀다. 바닷가에서 잡은 넷. 조금 전에 잡은 하나. 그리고 지금 앞에 선 한 놈까지, 제온에서 보낸 대사막의 전사는 총 여섯 명. “저놈들이랑은 별로 안 친했나봐. 서른 가까이 죽도록 멀뚱히 서있던걸 보니.” 궁금하기도 했고 졸음도 좀 치워야 해서 질문을 건넸다. 검사들이 다 죽어나갈 때까지 남의 집 불타는 것을 구경하는 정도의 얼굴로 꼼짝않고 있었는데 그것을 두고 어떻게 한 편이라 여기겠나. “아직 서먹한 사이였지.” 아무 말 안할 줄 알았는데, 서로 검을 맞댄 채 힘을 겨루던 놈이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서먹한 사이. 서로 다른 소속.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오늘 처음 만났거나. 고개만 끄덕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말 대신 검을 보냈고 놈이 그것을 강하게 올려쳤다. - 카아앙! 불똥이 튀었다. 재빨리 검을 회수하여 휘두르자 흰색이 드문드문 섞인 머리카락이 잘려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까부터 놈이 다시 둘로 보이더라니, 그래도 제대로 노렸다고 생각했는데 엇나간 모양이다. 울컥. 또 한 번 목구멍을 치받는 핏덩이를 습관처럼 삼켜냈다. 웃음이 났다. ‘이렇게 약해빠져서야.’ 이래서야 파슬리 새싹 줄기같은 분 연약하시다고 놀려먹지도 못하겠네. - 카아앙! 카강! 멈춰서는 순간 죽는다는 것을 안다. 때문에 끊임없이 발을 놀리고 팔을 휘둘렀다. 물론 그것은 저 놈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적어도 놈은 한 명의 적이 둘로 보일 만큼의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더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이며 놈의 빈틈을 노렸다. - 두근!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심장에서 보내오는 날카로운 느낌은 도무지, 정말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한계에 달한 심장이 무심히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윙윙 울렸다. - ······ 두근! 붉은 빛을 내뿜던 검이, 스러지듯 사라졌다. “하아······.” 눈을 깜빡였다. 먼 곳의 인영을 다시 살핀다. 셋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또, 하나를 줄여놨다. 저러다 파슬리 싹 다 시들 판이다. - 우우웅! 쥐어 짜내듯 검을 만들어냈다. 눈을 깜빡였다. 발을 움직였다. 팔을 놀렸다. “그냥 둬도 알아서 죽게 생긴 놈이 잘도 버티는군.” 전사의 말에 대답 대신 그냥 웃었다. 참 똑똑하신 어느 분이 나 안죽는다 했다 하면, 기껏 진실로 만들어 둔 확신 없던 그 말이 사실은 거짓이었노라 부정당할 것 같아서. 전사의 검을 다시 한 번 밀어냈다. 검이 다시 사라졌다. 다시 만들어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죽은 놈의 검이 부러지도록 내리치지 말걸. 검이 또 사라지려 하기에 심장의 끝을 붙들고 매달리는 기분으로 다시 웃었다. 찰나의 틈을 타 다시 한 번 플란츠 쪽을 살폈다. 그리고 더는 웃지 못했다. “대체, 왜.” 완두콩이 보였다. 그래. 보였다. 눈을 깜빡여볼까 하다가 그냥 쳐다봤다. 둘로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제대로 한 명으로 보였으니까. 그래서 그냥 쳐다봤다. 더 웃지도 못하고 쳐다봤다. 생각했던 딱 그대로 잔뜩 절여진 완두콩이 보였다. 달려오고 있었다. 왜. “칼리안.” 불렀다. 칼 든 놈들을, 그것도 셋이나 등 뒤에 주렁주렁 매달고 달릴 생각을 한 놈이 나를 불렀다. “······ 받아.” 검이 날아왔다. 검을 받았다. 아. 저 형님이 미쳤나보다. 또 미련한 짓을 한다. 멋있으라고 둘로 나뉘는 검이 아니라는 걸 잊어버렸나보다. 제 검술 실력이 반쪽짜리 검으로도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수준은 된다고 착각했나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진짜 미쳤나보다. 정말로, 미쳤나보다. 전사를 향해 발을 박찼다. 숨어들고 나타난다. 놈의 뒤에서, 앞에서, 검을 내찔렀다. 놈을 몰아세웠다. 그러다 놈이 다시 둘로 보여서 놈의 목 대신 허공을 또 찔렀다. 빌어먹을. - 카앙! 근처에 자리잡은 플란츠와 검사들이 서로의 목숨줄을 노리는 소리가 들렸다. 완두콩이 막은 소리다. 말 짧은 것을 알아듣게 되니 칼 막은 소리도 알아듣게 됐나보다.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들려야 할 곳은 이 쪽인데 그 쪽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 캉! 완두콩이 다시 막았다. 다음 공격은 피했다, 아니. 맞은 것 같다. 심하게 베였나. 찔렸나. 모르겠다. 소리 하나가 줄어들었다. 완두콩이 한 놈을 더 줄여놨나보다. 그런 걸 보면 많이 베인 건 아닌건가. 모르겠다. 심장이 또 뒤틀린다. 모르겠다. 반쪽짜리 검으로 완두콩이 얼마나 버틸까. 그것도 모르겠다. - 카아아앙! 카가강! 카앙! 본능만 남은 것처럼, 하필이면 청은색인 그 검에 오러를 두르고 살기를 내뿜었다. 정말로 발톱을 세우고 이를 드러낼 것처럼 검을 휘둘렀다. 그 와중에도, 멀쩡한 두 귀는 전사와의 칼부림 소리가 아니라 다른 곳의 소리만 골라 착실히 들려주고 있었다. 재밌는 일이다. 완두콩의 공격이 막혔다. 다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왜? 앞에 선 전사로부터 눈을 떼 소리가 들려오던 방향을 봤다. 잿빛의 검이 반대편 놈의 손아귀에 붙들려있는 것이 보인다. 훤히 다 보인다. 무슨 생각을 했고 무엇을 내려놨고 얼마나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 하는지 훤히 다 보인다. “이······.” 생각이 앞서서 검을 먼저 내리지는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미련한 완두콩.” 달렸다. 전사가 뒤따라오며 검을 휘두른다. 등에 맞았나. 모르겠다. 아픈가. 모르겠다. 달렸다. 시나스타를 붙들어 잡은 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완두콩 어깨를 붙들어 잡았다. 등 뒤로 옮겨놨다. 피 냄새가 후두둑, 짙어진다. 등 뒤가 아프다. 가르쳐 준 것 다 까먹은 미련한 놈. 망할 놈. 원수같은 형님같으니. “아뇨.” 안 죽었다. 그럼 됐다. 그건 알겠다. * * * ‘이대로 물러나기엔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플란츠 왕자님.’ 이름 모를 빨간 꽃 가득한 화원 한 구석에서, ‘옆 나라 왕자의 사정이 안쓰러워 견딜 수 없던 한 사람’이라 자신을 소개한 기사가 그렇게 입을 열었었다. 그 입에 저 꽃을 다 처넣어줄까 하다가 한 번을 참았다. 계속해보라며 고개를 까닥여 보이니 놈이 말을 이었다. ‘칼리안 왕자는 플란츠 왕자님의 모친을 살해한 사람입니다.’ 어머니의 손을 잡은 내가 죽은 채로 사는 길. 어머니의 손을 놓고 나를 뺀 모두가 사는 길. 후자를 선택한 것은 나였다. 내 어머니를 살해한 것은 칼리안이 아니라 실리케였고, 또한 실리케를 내버린 브리센이었다. 그것을 나도 알고 칼리안도 아는데 저 놈은 모른다. 몰라서 하는 말이니 이해하고 넘어갔다. 무지는 죄가 아니라 하였으니. ‘뿐만 아니라 플란츠 왕자님이 지닌 모든 것을 모조리 빼앗아 쥔 사람이 아닙니까.’ 애초부터 가진 것이 없던 나는 무엇을 뺏겼던가. 브리센을 뺏겼나. - 주변이 다 풀밭이었어도 완두콩은 완두콩색입니다. 내 아우님이 나로부터 브리센을 털어내주려 하고는 있는데 그것을 빼앗았다 봐야 하나. 그건 틀린 것 같은데. 그게 아니면 또 뭘 빼앗아 가져갔을까. 제 살을 깎아서 나에게 준 것만 많은 동생 놈이 빼앗아 가진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뺏긴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이 안났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훑을 줄 아는 브리센같은 놈들의 눈에는 그렇게도 보이는걸까 싶어 두 번을 참았다. 무지는 죄가 아니지만 브리센같은 멍청함은 죄가 되니까. ‘그래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거들어주시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세 번. 참았다. ‘언제든 상관 없으니 왕궁 밖으로 함께 나오십시오. 왕자님의 걸음에 방해가 되는 것을 저희가 대신 치워드리겠습니다.’ 바다 보러 온 기념으로 한 번을 더 참을까 하다가, 불편하고 싫으면 굳이 참지 말라고 하신 내 아우님 말씀이 생각났다. ‘기억해두지.’ 그래서 나도 더는 참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움직였다. 계획의 끝에 체이스가 있었다. 제 목숨 노려지는 일은 아무 상관 않겠지만 체이스가 왕궁 밖에 나오는 일은 반대할 것이 분명한 칼리안이 아닌가. 그래서 말을 안했다. 그래서 일이 엉망이 됐다. 전부 다 어그러졌다. 칼리안의 목숨도 덜 노려지게 할 겸 귀족들 사이에 숨어있는 의심스러운 놈들의 정체도 좀 확인해서 체이스에게 건네줄 겸 참지 않고 행동한 것의 결과가 이렇게 번질 줄 알았으면 한 번을 더 참아볼 걸 그랬다. 아니라면, 나오기 전에 그냥 칼리안에게 얘기를 할 걸 그랬다. “······ 늦었습니다.” 어쨌거나 이제는 지나간 일이 됐다.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왔다. 제 살 다 깎아 내주고 이제는 목숨까지 깎아주려는 동생 놈의 등에 생긴 긴 자상을 잠깐 보던 플란츠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얼음 방벽이 깨져나갔다. 놈들이 움직였다. 놈들의 목표는 애초부터 아르센이 아니라 칼리안이었다. 칼리안이 플란츠의 앞에 실드를 씌워놓고 플란츠의 손에 검사 한 명이 죽은 뒤부터는 구분 없이 둘 다 노렸지만 우선순위는 칼리안이었다. 때문에 검사들은 칼리안을 향해 다가왔고 전사는 아르센 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아르센의 손에 새파란 한기가 어렸다. - 쩌적! - 쌔애액! 쌔액! 전사의 발 밑이 얼어붙음과 동시에 세 개의 얼음창이 검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 콰직! 순식간에 두 명의 검사가 칼리안의 앞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로 쓰러졌다. 길고 두꺼운 얼음의 창에 몸이 꿰뚫린 채였다. 용케 얼음창을 피한 검사의 목에 긴 자상이 생긴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청은빛의 검이 자신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검사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 상태로 칼리안을 잠시 쳐다보다가 플란츠 쪽으로 눈을 돌렸다. - 퍽! 아니, 돌리려 했다. 제 죽음도 눈치채지 못한 놈의 배를 걷어차 멀찍이 쓰러뜨린 칼리안이 다시 검을 쥐었다. 발 밑이 얼어붙어 멈칫한 전사가 발에 힘을 주었다. 엉겨붙어 있던 얼음이 산산이 깨지며 반짝였고 그런 놈을 향해 네 개의 얼음창이 쏟아지듯 떨어져내렸다. - 쌔애액! - 카가가강! 전사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쏜살같이 날아드는 얼음의 창을 전부 막아낸 놈이 눈 앞의 아르센을 향해 검을 휘둘렀으나 얼음 벽에 다시 막혔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여지없이 울린다. 아르센의 손 끝이 다시 한 번 전사를 향했다. 십수 개의 얼음 쐐기가 놈을 향해 날아갔다. 서릿발같은 새하얀 기운이 놈의 몸을 휘감으려 들었다. 놈이 검을 들어올렸다. 그와 함께 칼리안의 검이 놈의 심장을 향해 휘둘러졌다. 놈은, 그 전사는, 현저히 느려진 속도로 날아드는 칼리안의 검을 비웃는 대신 신중히 쳐냈다. - 카아앙! - 카강! 캉! 발 밑의 얼음을 떨쳐내며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전사가 칼리안의 검을 막고, 올려쳤다. 그 틈을 타 긴 얼음창이 다시 날아갔으나 그 역시 막혔다. - 카앙! 카가강! 카앙! 칼리안이 발을 한 번 휘청였다. 전사가 검을 내뻗었다. 칼리안이 검을 들었다. 플란츠가 앞으로 나섰다. 칼리안이 막아섰다. - 쩌저적! 한 겨울에 꽁꽁 언 세뉴강에서 들릴 법한 소리가 났다. 단단하게 뭉친 얼음이 몸집을 부풀리는 그런 소리가 났다. 아르센이다. 전사의 검 끝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메말라 갈라진 강바닥 위에 빗물이 다시 흐르듯, 새하얀 얼음의 기운이 사방으로 가지를 넓혀가며 검을 타고 내려갔다. 아르센이 움직였다. 검사의 손이 얼어붙었다. 칼리안이 움직였다. 검을 뻗었다. 전사가 팔을 들었다. 두 검이 서로를 부술 듯이 충돌하며 굉음을 냈다. - 카아아앙! 그것이 시작이 되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전사의 단단한 검에 균열이 일었다. 오러를 담도록 만들어진 강인한 검에 잔금이 갔다. 아르센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 계속, 계속, 전사의 검에 냉기를 보냈다. 칼리안이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 놈의 검을 내리쳤다. - 쩌엉······! 버티지 못한 날붙이가 마지막 울음소리를 냈다. 부서졌다. 사방으로 비산했다. 빠르게 마력을 운용한 아르센이 플란츠에게 실드를 씌웠다. 칼리안에게는 씌우지 않았다. 방해만 될 뿐임을 안다. 전사가 한 발을 뒤로 물렸다. 주변에 널린 검을 집어들었다. 다시 달려든다. 칼리안이 손을 뻗었다. 플란츠가 제 손의 검을 마저 넘겼다. 그것을 받아들었다. 두 개의 검을 하나로 합쳤다. 온전한 시나스타를 이번에는 칼리안이 손에 들었다. 숨을 멈췄다. 발을 박찼다. 검을 뻗었다. 놈이 막았다. 신경쓰지 않는다. 그딴 검으로는, - ······ 콰직! 못 막는다. 전사가 새로 집어든 검이 그대로 부서져나갔다. 전사의 검과 그 너머의 심장과 그 안에 든 생명이 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전사의 몸이 기운다. 쓰러진다. 더는 숨 쉬지 않는다. 죽었다. 죽였다. 아니. 지켰다. 이번에는. 그건 알겠다. * * * 붉은 불길이 치솟았다. 세크리티아의 기사들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습격자들의 시신을 없애두려는 아르센의 불길이었다. 저들의 시신을 남겨둔다면 참 요긴한 협상 키가 될 것을 알고 있었으나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모두 태웠다. 언제나와 같은 이유다. 칼리안 뿐 아니라 이제는 플란츠의 대외 홍보용 실력까지 사실과 많이 달랐다는 증거를 버젓이 남겨 두면, 지금 당장은 저들이 습격했다는 사실 하나가 유리하게 쓰일지 몰라도 나중에는 아닐 테니까. - ······ 칼리안은 많이 다쳤을 테고. 플란츠 왕자는 어떻습니까. 멀쩡하진 않을 것 같은데. - 살아있어. 둘 다. 아르센으로부터 건네받은 두어 개의 붕대를 어떻게 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해보다 포기했다. 그걸 감을 여력이 됐으면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의 부축을 받을 일 없이 에스티나의 안장 위에도 혼자 잘 올라탔을 거다. 어찌됐건 체이스는 둘의 상태를 더 묻지 않았다. 둘이 함께 있었고 둘 중 누군가가 체이스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면 칼리안이 했을 것이다. 굳이 플란츠가 연락을 해왔는데 그랬다면 칼리안의 상태가 어떤지를 물어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나. - 나오지 마. - 알고 있습니다. 플란츠는 이제야 비로소 칼리안과 제대로 ‘대화’를 했다. 플란츠가 말하고 칼리안이 고갯짓을 몇 번 하다 만 것을 대화라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칼리안이 무엇을 준비해두고 나왔는지 알아들을 정도는 됐다. 그래서 플란츠는 당초 생각했던 계획을 싹 잊기로 했다. 한참 말이 없던 체이스가 다시 이야기를 전했다. - 지금 있는 곳에서 반대편으로, 숲을 지나 동쪽 길을 따라 가면 내 어머니의 별장이 있습니다. 칼리안이 다쳤다는 것을 아버지가 적당히 눈치챌 수 있고 다른 귀족들의 눈에서 물러나 있을만한 장소로는 가장 좋을 겁니다. 아리안느의 사람들이 관리하고 있으니 다른 말이 새어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고. 브리지트 숲으로 간 두 마법사가 돌아오면 키리에와 함께 보낼테니 우선은 그곳에 가 있는 것이 낫겠습니다. - 눈치 빠르군. - 누구 형인데. 그 정도를 모를 리가.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 그래. - 나는 이곳에서 할 일을 할 테니.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 알았어. 체이스와의 대화를 마친 플란츠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잊고 있던 피 냄새가 난다. 손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이제야 보인다. 그것을 한참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봤다. 전투가 끝난 뒤, 급한 마음에 자기소개도 하지 못하고 공격부터 한 아르센은 알아서 할 일을 찾아 했고 칼리안은 레이븐에 꼿꼿이 기대 서서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체이스에게 대화를 걸 마나도 사용하지 못할 만큼 상태가 엉망인 것을 아는데 티를 내질 않는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무어라 말을 하려는데 칼리안이 눈을 떴다. 그리고 에스티나의 위에 앉은 플란츠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앨런이 선물로 주었던 망토도, 하늘색의 재킷과 하얀 바지도, 그 안의 하얀 셔츠까지 전부 제 색을 잃었다. 파릇파릇하던 머리카락이 피에 젖었다. 손에 묻은 마른 피를 닦아낼 생각도 않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을지 뻔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한참동안 플란츠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마나를 움직였다. [클린] 팔찌에 마나 불어넣는 것도 못하던 놈이 마법을 썼다. 할 일 끝내고 걸어오고 있던 멀쩡한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 내버려두고 굳이 제 손으로 피를 지웠다. “너.” “아무리 그래봐야.” 칼리안이 플란츠의 말을 막았다. 그러더니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손을 들어 플란츠를 가리켜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완두콩 색깔.” 아니. 짖었다. - 쿵! 그리고 졸도했다. 또, 졸도했다. 짖기를 마치고 졸도해버렸다. 이쯤 되면 일부러 저러나 의심을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가까이 온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다급히 허리를 숙여 칼리안을 부축해 들었다. 얼굴을 숨긴 놈의 어깨가 떨리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아주 잘 보인다. “······ 웃지 마.” “노력해보겠습니다, 플란츠 왕자님.” 한 번 참은 플란츠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하늘의 별이 온통 완두콩처럼 보여서 그만 볼까 하다 그냥 계속 하늘을 봤다. 고개 숙이지 말라는 소리였으니 하늘에 뜬 완두콩들만 계속 봤다. 풀물이 들었어도 완두콩 색인 게 맞겠지. 거짓말 못하는 내 아우님께서 완두콩 색이라 하시니. 그건 맞겠지. < 제52장. 참으세요, 형님(3) > 펜델리아. 그런 이름인 것을 이제 알았다. “저기 저것. 펜델리아로 만든 약입니다.” 아르센이 가리켜보인 방향에 커다란 식물 하나가 있었다. 갈색의 반점이 있는 녹색 줄기에 끝이 살짝 갈라진 넓은 잎사귀가 붙어 있는 모양새. 본 적 있는 것이었다. 겉은 초록색이고 속은 분홍색인 열매가 열리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던 말이 생각났다. “왕자님과 대련하고 난 뒤에 쓰려고 치유사 베른 경에게 받아 두었던 겁니다. 치유사는 고사하고 치료사를 부를 수도 없는 상황이니 약이라도 쓰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 펜델리아는 처음 보시겠지만······.” “알아. 뭔지.” “플란츠 왕자님께서 그런 걸 어떻게 아십니까.” 술처먹고 절벽에서 굴러내려갔다가 눈 떠보니 온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고 했었다. 엘프의 도시에서 칼리안이 말해줬던 것을 한 글자도 잊지 않고 떠올린 플란츠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내 아우님께서 술이 과하셨던 날에 절벽에서 실족해서 붙여본 적 있다고 알려줬는데.” “······ 아.” 애석하게도 아르센은 플란츠가 애써 포장해준 말의 속뜻을 제대로 알아듣고 말았다. 세크리티아라 해서 왕족에 대한 취급이 다르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공도 되지 않은 생풀을 왕자의 몸에 붙였다면 뭔 일이 있었을지 대충 짐작이 가는 것이다. “아······ 무튼 플란츠 왕자님 쓰십시오.” “나보다는.” 경사가 크지 않은 오르막길을 걷는 에스티나의 움직임에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리며 말을 멈췄다. 통증이 밀려든 까닭이다. 에스티나도 발걸음이 험하지 않은 말이었으나 이런 길을 걸을 때조차 주인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레이븐만큼은 아니었으니까. 어느새 상처 부위의 피도 멎고 조금씩 아물어가고는 있었다. 하지만 벌어진 상처가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감각에는 친숙해지기 힘들었다. 플란츠가 잠시 숨을 고르며 날카로운 느낌을 다스리다 말을 이었다. “내 아우님에게 필요할 것 같은데.” “펜델리아는 미약한 독성이 있는 약재입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상관없지만 지금 왕자님이 쓰시면 오히려 좋지 않습니다.” 아르센이 길게 팔을 뻗어 건네 준 약병을 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기절한 채 레이븐의 위에 엎드려있는 검은 머리 미친놈 하나가 보였다. 아르센이 레이븐의 안장에 칼리안을 올려두었던 처음보다는 숨을 쉬는 것도 나아졌고 보랏빛이 돌던 입술도 조금씩 본래대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숙취는 무시하고 과한 욕심을 부려 체한 것은 풀어주지 않아도 다친 것 하나는 잘 고쳐주는 시스파니안의 축복 아니던가. 조금 전, 레이븐에 기대어 서 있던 동생 놈의 모습이 생각났다. 검에 베인 상처가 팔에 하나, 그리고 허리에 하나. 플란츠는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데 어떻게 표정 하나 찌푸리지 않고 서 있을 수가 있는지. 지독한건지. 무식한건지. 아니면 익숙한건지. 가늠이 안 된다. 짧은 한숨을 한 번 내쉰 플란츠가 달빛 아래 드러난 핏기 없는 손을 잠깐 쥐었다 폈다. 그리고 더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법사.” “네.” “그들을 마주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마법사가 얼마나 되나.” “제온 말씀이십니까. 아마 세이렌 경 정도라면 무리 없이 살아나오겠지만, 저를 포함한 나머지는 상황에 따라 다를 겁니다. 저 역시 죽을 뻔했던 것을 아시잖습니까.” 강하다. 마지막으로 죽었던 제온의 전사가 보내온 눈빛을 잊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섰고 칼리안이 막아섰기에 칼을 겨눠보지 못했으나 만약 겨누게 되었다면 살 수 있었을까. 글쎄. 아마 절대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한동안 그 생각을 이어나가던 플란츠가 다치지 않은 쪽 팔을 아르센에게 내밀었다. “줘.” “뭘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수정판.” “······ 제가 그걸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렇게 말하며 그 비싸다는 수정판을 꺼내들던 아르센은, 플란츠에게 마법사들의 가방이 없음을 상기하고 그것을 도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돌아가면 드리겠습니다.” “쓰지 말고.” “굳이 넣을 곳도 없는 커다란 수정판을 왜 지금 돌려달라하시나 했더니, 설마 제가 이걸 멋대로 쓸까봐 그러시는 겁니까?” 닳는 것 아닙니다, 하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르센을 향해 플란츠가 대꾸했다. “이미 썼잖아.” 아르센의 입이 조용히 다물렸다. 잠깐 칼리안 쪽을 보던, 정확히는 칼리안의 눈치를 보던 아르센이 속삭이듯 물었다. “수정판 쓴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마나실 후작을 부른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플란츠와 대화하는 것은 참 어렵다. 어떻게 알았는지를 물으니 또 엉뚱한 말을 했다. 아르센이 왕자들을 도우러 오기 전에 그 수정판을 가지고 레릭에게 연락해 앨런과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이미 다 알고 묻는 말임을 힘들게 이해했다. “무서워서 플란츠 왕자님 앞에서는 물도 못마시겠습니다. 물 마신 것 하나 가지고 사흘 전에 뭘 먹었는지 알아내실 것 같습니다.” 아픈 와중에도 플란츠는 아르센이 자신을 다시 ‘플란츠 왕자님’이라 부른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르센이 플란츠의 앞에서 그렇게 꼬리를 말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나. 앨런을 통해 부군단장에서 그새 또 물러나게 된 것이다. “모를 줄 알았다는 게 더 놀라운 것을 모르나.” “직위만 떨구고 왔습니다. 군인이면 여기에서 사람 못 잡습니다.” 상황 안 보고 사람 잡는 에우리아와는 달리 아르센은 상황 보고 사람 잡는 마법사였다. 그래서 싸움에 참여하기 전에 잠깐 앨런을 불러 말했다. ‘시스파니안께서 만드시고 군단장님께서 손봐주신 그 마차 우리 코코가 아주 편안하게 자알 쓰고 있습니다’ 라고. 그 말을 들은 앨런은 그 자리에서 아르센의 직위를 정성스럽게 해제시켜줬고, 아르센은 소속만 발칸인 그냥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로 얌전히 돌아왔다. “마나실 후작께서도 무슨 일이 있는 것은 눈치챈 것 같지만 이 곳에 오지는 않겠노라 했습니다. 오게 되면 화를 많이 낼 것 같다 하기에 아직은 괜찮으니 기다리시라고 해 두었습니다.” “그래.” 짧게 답한 플란츠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리막길에 들어서면서 에스티나가 한 번 더 몸을 크게 움직인 탓도 있었고 생각에 잠겨든 탓도 있었다. 그런 플란츠를 물끄러미 보던 아르센의 시선이 시나스타로 향했다. 그동안은 줄곧 검집 속에 들어있었던 탓에 보지 못했던 것을 조금 전에 봤다. 칼리안의 손에 들려있던 청은색의 검신에 적혀있던 글자를 봤다. 그것을 떠올리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과거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인성 짧은 저 왕자의 검에 새길 글씨를 그렇게 정성스레 써줬나, 하는 마음에. “상관 없지 않나.” 뜬금없이 플란츠가 이런 말을 했다. 어느새 고개를 돌린 이의 연두색 눈이 아르센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써 준 글씨였든. 무슨 일이 있었든. 이제는.” “······ 제 글씨인 줄 아셨습니까.” “대충.” 말 그대로 대충 대답한 플란츠가 눈을 감았다. 아프기도 했고 설명하기 귀찮기도 했고. 플란츠를 잠시 보던 아르센의 입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굳이 그런 이름을 아무나에게 전해주면서 새겼을 것 같지 않아서 생각해보다가. 옆에 있었을 만한 사람이 없지 않았을까.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끝까지 함께 있었다 하니 만약 누가 있었으면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아니었을까 싶던데.” 그런데 대답하지 않을 것 같던 플란츠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아르센의 글씨를 알아본 건 아니었지만 지금과 달리 제 옆에 아무도 없었을 과거의 플란츠와 끝까지 같이 있었다던 아르센에게라면 그 정도 일은 시켰으리라 여겼다. 막연한 예측이었으나 오늘 시나스타를 쳐다보는 아르센의 반응 덕에 확신을 했다. “얼마나 메마르게 살았으면 이런 사람을 곁에 두고 썼을까. 하는 생각도.” 아주 잠시 애잔한 눈으로 플란츠를 볼 뻔했던 아르센이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음에도 글씨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낸 덕에 하마터면 그냥 버릴까 깊이 고민하게 만든 검을 잠시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베인 곳의 통증 때문에 다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할 말을 뺏겨 버린 아르센이 코코 똥 씹은 표정을 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나라고 너같은 놈 옆에 있고 싶어 있었겠냐’는 말을 하면 왕족 모독죄가 성립되어서 발칸에서 잘려볼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래도 동상은 만들어보고 잘려야 마법사다운 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참고 넘기기로 한 아르센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반응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고 아르센이 볼멘소리를 냈다. “웃음이 나오십니까.” “나오는데. 왜.” “그렇게 따랐다던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이제 안 따라다니는데도요.” “상관 없는데. 그것도.” 아르센의 말 뜻을 안다. 예전에는 그나마 아르센이라도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게 나란히 서 있을 사람이 없는데 괜찮은지를 묻는 것이다. 세크리티아의 기사가 그리 말했고 칼리안도 그것을 걱정했듯이. “별로. 루시랑 안네 있는데. 왜.” 특별히 누군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다면 모를까. 단 한 번도 그것이 아쉽다 여겨본 적 없던 탓에 이런 대답을 했다. 사사건건 우는 소리하며 따라다니는 시종 하나에 매일같이 갱신하듯 더 새로운 사고를 치는 발칸만으로도 족하다. 매일 짖다 수틀리면 물려고 드는 검은 고양이 하나도 버거운 판에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 곁에 둬서 뭐하나. 머리만 아프지. 거짓 없는 대답을 한 플란츠가 앞을 쳐다봤다. 멀리, 거대한 정원을 가진 작은 궁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말보다는 새가 빠르다. 많은 일이 있었으나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던 탓에 여전히 한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즈의 별장에 도착하니 열 명 가량의 이들이 조용히 나와 셋을 맞이했다. 칼리안의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체이스의 연락이 먼저 간 모양이다. 기사들이 들것에 칼리안을 뉘여 침실로 옮겼다. 아르센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칼리안도 플란츠도 적당히 처치를 받았다. 적당한 처치라 말하는 이유는, 이곳에 있는 이들이 체이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의 하수인이라는 말은 들었으나 온전히 믿지는 못하여 그들이 준 약을 먹지도 바르지도 않은 까닭이다. 플란츠는 아르센이 가져다 준 약만 썼고 칼리안은 해독이 마저 될 때까지 그마저도 하지 못하게 했다. - 다른 더 필요하신 것은 없습니까, 플란츠 왕자님. - ······ 바나나. - 바나나, 말씀이십니까? - 많이. 그 후 칼리안이 언제 일어날지 몰라서 침대 옆에 바나나를 좀 쌓아놓게 한 뒤 칼리안이 누운 침대와 좀 떨어진 창가로 가 섰다. 칼리안이 일어나든 왕궁에서 칼리안의 사람들을 더 보내든 그 전까지는 아르센이 혼자 호위를 봐야 했으니 각자의 방에 마음 편히 들어앉아 있기가 어려웠던 탓이었다. 나도 다쳤는데 쟤가 더 많이 다쳐서 나는 제대로 못 쉬는 그런 상황이지만 어쨌거나 내가 자초한 일이 맞으니 별 불만을 가지지는 않기로 했다. - 사아아아······. 먼 곳에 바다가 보이는 실로 조용한 곳. 가장 높은 층의 그 방은 한 쪽의 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었다. 그 앞에 서서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 반짝. 푸른 빛. 넓은 정원 한 곳에서 푸른 빛이 맴돌고 있었다. 마법사의 불빛은 아닐텐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한참을 바라보니, 한쪽에서 빛나던 푸른 빛이 이내 조금씩 퍼져나가듯 늘어났다. 그렇게 오래지 않아 온 정원이 푸르게 빛나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푸르게 맴돌던 빛무리가 마치 가벼운 홀씨가 바람에 흩어지듯 퍼져나가며 하늘로 오르기 시작했으니까. 넓은 정원 한가득 누군가를 기리는 꽃만 심어 둔 이 곳에서, 달빛 아래 두 번째 피어나는 그 꽃이 푸른 빛으로 변해 떠오르고 있었다. “시나스타입니다.” 그래. 시나스타였다.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그 새를 못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놈이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왜.” “그냥. 깼습니다.”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앨런이나 키리에가 곁에 있든 아니면 체르밀의 제 방에 누워야만 제대로 잠드는 놈인 걸 모르지는 않아서,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피는.” “멎었습니다. 허리에도 감각이 돌아오고 있네요.” “그래.” 그렇게 강제로 힘을 썼음에도 착실하게 움직인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해독을 마쳤다.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등이 쑤시는 걸 보니 역시 그 때 등을 맞기는 했나보다며 실소한 칼리안이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고개를 멈추고, 잠시 숨을 참았다. “혹시 체이스 형님께서 이곳을 알려주신 겁니까.” “후궁 루이즈의 별장이라던데. 모르는 곳인가.” 칼리안이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모를리가요.” 별보다 푸른 시나스타의 빛이 아니더라도 방 안을 볼 정도는 되었다. 무늬 없는 검은 시트, 어두운 잿빛의 커튼, 광이 나지 않는 짙은 갈색의 가구들. 액자 하나, 화병 하나 놓여 있지 않은 황량한 방. 가끔씩 와서 지냈던 곳이 기억과 똑같이 꾸며져 있었다. 없어졌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 제 방인데.” 왕비 디에나의 별장. 그리고 그 안에 마련했던 베른의 방이었다. 이 시간을 살아가지 않은 베른의 흔적을 마주한 칼리안이 꽤 오래도록 웃음소리를 냈다. 체이스는 이 방을 칼리안에게 내어줄까 말까 참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다친 것이 걱정되고 혹시나 이곳을 보며 울적해하지 않을까 그것도 걱정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별장을 알려준 이유를, 굳이 이 방에 칼리안을 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웃었다. “제 이름 뜻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나 보네요.” 플란츠가 물끄러미 칼리안을 쳐다봤다. “물어보면 이제 알려줄건가.” 습관처럼 어깨를 으쓱여 보이려다 등이 욱씬거려 멈춘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뇨. 형님 이름 뜻도 안 알려드릴건데 제 예전 이름을 왜 알려드리겠습니까.” “······ 그래.” 순간적으로 짜증이 드러난 얼굴을 보며 피식 웃은 칼리안이 창 밖을 봤다. “아무튼 재밌네요.” “뭐가.” “헤르츠 경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충분히 싸웠으니 이제 쉬라고. 키리에는 멈추지 말라 하였는데, 둘이 성격도 다르고 하는 말도 어떻게 그렇게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작고, 갈라지고, 피로 가득한 음색이 이어졌다. “조금 전에 헤르츠 경이 찾아왔을 때 어찌나 반갑던지. 그렇게 헤르츠 경을 보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지난 번에도 헤르츠 경이 오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하고요. 사실 멈추지 말라는 말이 저는 참 기껍다가도 서러웠는데. 쉬라는 그 말에는 서럽다가도 기껍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이제와 플란츠에게 불만을 내어놓듯 꺼내는 말이지만, 솔직히 너무 힘들고 버거웠었어서. “그게 또 재밌어서요. 결국 이 땅에서 헤르츠 경을 두 번을 기다린 셈이 되었으니. 그런데 그 이유가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이.” “······ 그래.” 칼리안의 목소리가 조금씩 잠겨들어갔다. “그렇다고 그 일이 좋았다는 건 아닙니다.” “알아.” “그러니까 같은 일 두 번 겪지는 않을 겁니다.” “알아.” “쓸데없는 걱정 마시고 쉬세요. 형님 한 분 때문에 전쟁 날 일, 이번에는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안 둘 거니까.” “······ 반말.” “형님 때문에 이렇게 다쳤는데 그것 하나 안 봐주십니까.” 플란츠가 대답 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상처 하나 값으로 반말 한 번을 얻어낸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작게 웃었다. 푸른 빛무리가 일렁이며 칼리안의 얼굴을 비추다 하늘로 떠올랐다. 익숙한 향 가득한 침대에 다시 몸을 뉘인 칼리안이 곧 잠에 빠져들었다. 키리에도, 앨런도 없었으나 깊은 잠을 잤다. 불과 몇 시간 뒤. - 브리지트 숲에 갔던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이 전부 죽었습니다. 체이스로부터 이런 연락을 받은 플란츠가 잘 자는 동생을 깨워내기 전까지. < 제52장. 참으세요, 형님(4) > 언덕 위의 작은 궁전. 체르밀 궁보다 작지만 더 아름다운 새하얀 궁전. 죽은 왕비 디에나의 별장이었던 곳. 지금은 루이즈가 지니고 있으나 과거에는 아마도 그 왕제에게 물려졌을 곳. 멀리는 달빛에 반사된 바다가 일렁이는 것이 보이고 발 아래로는 누군가를 기리는 새하얀 꽃이 만발해있는 곳. 작년의 이 계절 즈음에 기억을 찾았다던 체이스가 만들어 두었을지, 아니라면 기억을 찾은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던 루이즈가 만들어 두었을지. 단 한 번도 발을 디딘 적 없는 자신의 방에 잠시 머무르게 된 칼리안은 이 방을 누가 꾸며놓았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편안히 쉬었다. 잠깐 일어나 잠시 웃다 조금 말하고 다시 잠든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향해 섰다. 멀리 하늘에 파란 별이 하나. 그리고 빨간 별이 하나. 그 곁에 수많은 별이 흰꽃처럼 한가득 피어난 하늘 아래로 소리 없는 푸른 빛이 별이 되어 떠오른다. 하늘로 오르는 붉은 불꽃도 보았고 바다 너머로 흘러가는 푸른 불꽃도 보았는데 별이 되어 떠오르는 하얀 꽃을 직접 볼 줄은 몰랐다. 또 처음 보는 것이 생겼다. 그것도, 그 왕제가 지냈다던 황량한 방에서. ‘아무튼 재밌네요.’ 재미가 있나. 아르센이 건네준 휴식이 한편으론 기꺼웠을 만큼 쉼없이 체이스를 지켜오던 놈이 이번에는 아르센 덕분에 숨을 붙인 채 체이스가 준비해 준 곳에서 쉬고 있다. 그 왕제가 이곳을 영영 오지 못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이곳에 다시 오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도 모두 플란츠 자신이었으니 재미보다는 차라리 우스운 상황이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아니라면 이것 역시 세렌티의 장난이려나. 덕분에 결국 잠들지 못했다. 하지 말라 했던 자책을 멋대로 또 했다 하기보다는 그냥 이런저런 기억에 잠겨 생각이 많아진 탓에 시나스타의 손잡이를 가만히 쥐고 선 채로 미동 없이 창 밖만 바라봤다. 하얀 꽃이 더이상 별이 되어 날아가지 않을 때까지, 먼 바다를 비추던 달이 하늘 너머로 몸을 숨기고 마지막까지 빛나던 별이 빛 속에 잠들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해가 떠올라 그 먼 곳의 윤슬에 눈이 부실 때까지. “왕자님과 계속 같이 다니시더니 어느새 검의 길에 오르셨습니까?” 때문에 하룻밤을 새는 정도는 애초부터 일상인지라 유일하게 상태 멀쩡한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잠깐 아침밥 먹고 오자며 방에 들어왔다가 이런 말을 했다. 뭘 믿고 그 몸으로 밤을 샜냐는 소리다. 심란해서 못 잤지 객기부리다 밤을 샌 것이 아니었다. 생일이 되기가 무섭게 달갑지 않은 일들을 너무 많이 겪게 되었던데다 잠은 못자고 몸은 아파서 짜증이 한가득이다. 때문에 플란츠가 한쪽 입술을 마음껏 끌어올리며 대꾸했다. “새 아버지가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아시면 내 아우님께서 많이 속상해 하실텐데.” 이성 잃은 칼리안 정신머리 고치는 데에는 히나만한 이가 없고, 아르센 입 다물리게 하는 방법으로는 칼리안만한 것이 없지 않나. 이유가 뭐가 됐건 앨런이 이 곳의 상황을 알도록 만들었으니 그걸 일러바치겠다는 협박으로 시끄러운 입을 막았다. 하고싶은 말 참 많은 얼굴을 하고 있던 아르센이 ‘그래도 내가 어른이니까 참는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다시 말했다. “알았으니 식사 하십시오.” “생각 없어.” “계속 그렇게 안드시면 언제까지고 저 올려다보셔야 할 텐데 괜찮으십니까?” 체이스 형님이 형님보다 키 큽니다. 했던 어느 누구의 말이 왜 함께 떠오르는지 모르겠지만. 짜증 가득한 얼굴이 되어 돌아서다가 다친 곳의 통증까지 몰려와 더 크게 인상을 쓴 플란츠가 저벅 저벅 걸어 소파에 앉았다. 정말 생각 없다는 뜻이다. 키 크려고 밥 먹었다가 체하는 일은 이제 사양하고 싶었으니까. 그 꼴을 본 아르센이 무어라 말을 하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 우우웅! 플란츠의 팔찌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얼굴을 굳히는데 아르센이 갑작스레 제 품을 뒤지더니 주머니 속에서 수정판을 꺼냈다. 플란츠의 눈초리가 저절로 칼리안을 향했다. 칼리안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에서도 플란츠의 것과 똑같은 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 브리지트 숲에 갔던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이 전부 죽었습니다. 플란츠 왕자. 플란츠를 향한 체이스의 연락. - 리베른의 마법사 한 명이 사라졌다는 연락이 왔네. 그리고 다급히 칼리안과 아르센을 찾는 앨런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그에 대해 둘 모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하던 순간 똑똑한 플란츠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 하나 더 벌어졌다. “하루 만에 이런 곳에서 다시 보니까 또 색다르게 반갑네요. 많이 다쳤어요?” 내 동생의 오랜 친구이자 내 동생의 옛 형님의 정혼자면서 나도 기억 못하고 저 분도 기억 못하지만 서로간의 깊은 은원 관계가 있다 했던 그 분이 노크도 없이 벌컥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내 안부를 묻는 상황을 마주한 플란츠가 조용하고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아픈 몸을 이끌고 칼리안이 잠들어 있는 침대로 걸어갔다.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놈이 필요했다. * * * 아무 문제 없었다. 상황 봐가며 사람 잡는 아르센 말고 상황 안 보고 사람부터 잡는 에우리아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식은 두고 잡았다. 만약 에우리아가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보내온 남의 병사를 멋대로 죽여 없앨 만큼 생각 없는 이였다면 지금의 위치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레이첼이라 하여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레이첼은 상식 뿐 아니라 상황도 보아 가며 사람 잡는 마법사에 속했다. 애초부터 공격을 위한 마법을 숙련한 것도 아니었던데다 누군가의 죽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상실이 되는지 사무칠만큼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이 브리지트 숲을 공격한다면 막아달라 하셨습니다. 아무도 죽여서는 안 된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전해진 칼리안의 말을 두 마법사가 지키는 것에는, 정말 아무 문제가 없었다. - 파직, 파지직! 플란츠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칼리안을 깨우러 가기 얼마 전의 늦은 밤, 브리지트 숲. “이 밤중에 여기까지 뭐하러 왔나?” 한 손 위에 번개를 올려 둔 에우리아가 발밑을 바라보며 질문을 건넸다. 횃불들을 하나씩 든 채 숲을 포위한 이들 중 가장 강해보이는 기사 한 명을 향해서였다. 참 효율적이고 사용도 편리한데다 누구나 구하기 쉽고 심지어 가격까지 저렴한 마법 등불을 두고, 굳이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하나씩 들고 숲을 둘러싼 병사들의 의도를 모르는 척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그래도 에우리아는 일단 방문 목적을 물었다. 비록 한 손에 살기등등한 스파크를 내뿜는 보랏빛 구체를 올려둔 채였다고는 하나 가타부타 아무 말 없이 일단 공격부터 하고 보는 마법사 성격에 이 정도면 크나큰 배려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높은 나무의 가지 위. 지지할 곳 하나 없었으나 위태로움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태도로 가지를 딛고 서서는 기세좋게 시비를 거는 에우리아의 모습에, 조금씩 다가오던 병사들의 발이 일제히 멈췄다. 그리고 곧 ‘일단정지’라는 말이 병사들의 입을 타고 양 옆으로 퍼져나갔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전진하던 병사들의 발도 모두 멈춘 것을 확인한 에우리아의 입꼬리가 가늘게 올라갔다. “누구냐.” 밝은 달을 등지고 선 탓에 실루엣만 보이는 마법사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기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모습을 보여도 되고 정체를 들켜도 되지만 제 입으로 이름을 먼저 말할 수는 없는 상황도 잘 이해한 에우리아가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을 전했다. “코코 아빠.” 한 달 동안 온 정성을 다해 품어 탄생한 소중한 내 자식이, 주량은 비루해도 꽃 취향은 안 식상한 파란 머리 마법사를 엄마로 삼았으니 별 수 있나. 남아있는 아빠 자리 꿰찰 수밖에. “제대로 된 정체를 밝히거라. 태도가 상당히 무례하구나.” “어. 미안. 나이랑 같이 예의도 말아먹은지가 오래돼서 횃불 들고 엘프 숲에 찾아온 의심스러운 놈들한테까지 꺼내 보여 줄 예의가 없어. 그리고 질문은 내가 먼저 했어. 뭐하러 왔냐니까?” 기사는 대답 대신 에우리아를 살폈다. 그 침묵이 길어지자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에우리아가 여유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하긴. 물어볼 것도 아니네. 겨울도 오고 나무는 바싹 말랐고 나뭇잎도 많이 떨어져 있으니 숲 하나 쯤은 되게 잘 타겠다. 그치.” 언뜻 달빛에 비춰지는 보라색의 긴 머리. 여자 마법사. 그리고 손에 올려진 번개. 여러 상황과 보여지는 것들을 조합해 본 기사가 낮게 읊조리듯 물었다. “에우리아 세이렌인가.” “어. 맞아. 맞으니까 빨리 횃불 끄고 가.” “······ 카이리스 왕자의 일행이 왜 타국의 일에 끼어드는가.” “몰랐는데 여기 카이리스 왕비님 고향이더라. 그래서 우리 셋째 왕자님께서 여길 곧 와보실 예정인데 불나서 다 없어져 있으면 애석하잖아.” 에우리아 세이렌이다. 한낮에도 죽은 자의 망령을 몰고 다닌다는 그 에우리아 세이렌이다. 지금 이 곳에 있는 것은 고작해야 기사 몇 명과 병사들이 전부다. 병사 대신 기사들로만 모여 있다 해도 녹록치 않을 마당이 아닌가. 때문에 기사는 입을 꾹 다물고 일단 물러나야 할지, 혹은 이대로 더 말을 나눠봐야 할지를 잠시 고민했다. “고민하지 말고 가.” 기사가 나름대로의 예의를 보여주고 있든 말든 일단 이곳에 횃불을 들고 온 이상은 고운 말로 상대해주기가 어려웠다. 저 불이 나무에 붙는 순간, 단순히 프레이야의 고향이 불타는 것 뿐 아니라 엘프의 거주구역을 둘러싼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의 외교 문제가 생기게 되니까. 한동안 기다렸음에도 기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던 에우리아의 손에 물의 마력이 모여들었다. - 우우우웅······. 뭉클거리는 기운이 순식간에 모여들며 숲의 바닥 아래 깊은 곳에서 흐르던 물을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바닥이 울렁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은 기사가 고개를 돌려 병사들에게 말했다. “물이다. 모두 나무 근처로 움직여 대비하라.” 기사의 말을 들은 병사들이 일제히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현명한 명령이었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땅 속에서 물이 솟더라도 휩쓸려가지 않고, 앞에서 전기 속성의 공격이 있더라도 나무 뒤로 피신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대응 방법이었다. 일단 횃불부터 꺼버리려던 에우리아의 마법이 예정대로 이어졌다면 그랬을 것이다. “······ 젠장.” 갑작스럽게 인근에서 감지된 마나의 기운을 느낀 에우리아가, 짧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운용하던 물의 힘을 흩어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힘을 위한 마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힘의 흐름이 갑자기 변경된 것에 주변을 흐르던 마나가 요동쳤으나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기사와 병사들은 에우리아의 시선이 자신들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과 더 이상 발 밑이 울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 모여. 살고싶으면.” 조금 큰 소리로 기사를 향해 말한 에우리아의 손이 움직였다. 사용할 일 없으리라 생각한 보랏빛의 스파크가 먼 하늘 위에서 빛을 내기 시작했고 구름이 모여들었다. - 쿠르르릉······. 달빛 가린 구름 사이에서 불안함 가득한 울림이 이어졌다. 에우리아의 소리를 듣지 못한 기사가 곁에 선 병사를 향해 나무에서 다시 떨어져 서로 흩어질 것을 명령했다. - 쩌저적! 쩌적!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기사의 명령을 받은 병사가 가까운 곳에 선 다른 병사에게 말을 전달하려 한 발을 내딛었다. - 콰아아앙! 그 순간, 굉음이 터져나오며 땅 속의 물줄기가 폭발하듯 치솟았다. 방금 달려가려던 병사의 몸을 그대로 꿰뚫어버린 물의 회오리가, 꼬리가 잘려나간 뱀의 몸부림처럼 주변을 휩쓸며 인근의 병사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에우리아의 힘이 아니었다. 가장 단단하고 높은 나무의 위에 올라 있던 탓에, 첫 번째 공격에서 의도치않게 몸을 보전한 에우리아가 급히 반대편 손을 움직였다. 거대한 마법을 준비해나가는 것과 무관하게 마력을 다시 한 번 끌어올려 땅 속의 물을 움직였다. - 쿠르르르······. 땅이 일렁이고 하늘이 울린다. 에우리아의 마력에 붙들린 또 다른 물줄기가 땅을 밀어올리고, 이런 맑은 날에 결코 볼 수 없을 마른 번개가 하늘을 밝히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 콰광! 이윽고 두터운 땅을 뚫어낸 물이 솟구쳤고 곧 커다란 두 개의 물줄기로 갈라져 양쪽으로 뻗어나갔다. 그 뒤에는, 중앙의 병사들이 이미 전멸한 탓에 양 쪽으로 나뉘어진 병사들의 앞을 각각 가로막고 드넓은 물의 장막을 펼쳐냈다. 숲의 뒤쪽으로 간 레이첼의 안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레이첼보다 현저히 약한 놈들 먼저 건사해야 할 상황이다. “쯧.” 살려주러 온 것이 아니라 안 죽이고 돌려보내려 온 길이다. 누구인지 알 수도 없는 이의 공격으로부터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을 살릴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 쉬이이익! - 콰아앙! 거대한 물의 뱀이 그대로 돌진하여 에우리아의 장막을 밀어쳤다. 옆으로 뉘인 한 줄기의 커다란 물기둥이 두 갈래, 세 갈래로 나뉘어지며 사방에서 장막을 후려쳤다. - 콰아앙! 콰앙! 물의 힘이 서로 맞부딪히는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굉음이 계속 울렸다. 상대의 물기둥이 향하는 방향 쪽으로 장막의 힘을 더해가며, 에우리아가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번개를 내리꽂을 준비는 마쳤으나 숨어든 놈을 보지 못했다. 섣부르게 저 물 위에 번개자락을 뻗어내면 기껏 살려낸 병사들 다 죽일 판이니 상대의 위치부터 확인해야 했다. 때문에 에우리아는 한 쪽의 마력으로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마법을 준비하고 또 한 쪽의 마력으로는 병사들을 보호하면서, 남은 마력의 실타래를 펼쳐 인근에 있는 또 다른 마법사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 쿠과과광! 콰아앙! 양 쪽으로 길게 늘어선 물기둥이 독사의 몸짓처럼 길게 늘어나더니 길이를 늘려 장막 위로 치솟는다. 그와 동시에 에우리아의 손이 빠르게 움직여 다시 한 번 물을 움직였다. 길이를 늘린 장막이 병사들의 머리 위를 감쌌다. 그런데 그 순간, 날카로운 파열음이 귀를 찢을 듯 터져나왔다. - 쩌적, 쩌저적! 상대를 찾아 내리꽂기만 하면 될 에우리아의 번개 소리가 아니다. 무언가가 급속히 얼어붙는 소리. 지금 막 에우리아의 장막을 내리친 물의 기둥이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나는 소리. 고개를 내민 물기둥의 끝이 긴 창과 같이 늘어나더니 수십의 얼음창으로 모습을 바꾼다. 그리고 주저없이 물의 장막을 뚫고 쏟아지듯 내리꽂혔다. - 쌔애액! - 쌔액! 쌔애애액! 비명소리가 귓가를 잠식한다. 에우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얼음 마법. 물의 힘을 이 정도로 사용해가며 얼음의 창을 만들 수 있는 물 속성의 마법사는 없다. ‘상대는 둘 이상. 혹은 나와 같은 놈.’ 에우리아와 똑같은 이중 속성의 마법사. 그런 놈이 있던가? 미간을 찌푸린 에우리아가 다시 한 번 마력을 운용했다. - 콰득! 콰드드득! 물의 장막을 회오리로 바꾸어 쏟아지는 얼음창들을 잘게 부숴버린 에우리아의 시선이 일순간 한 곳을 향해 휙 돌아갔다. 물의 기운이 어느 한 지점으로부터 뻗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 쿠구궁······! - 콰르릉! 콰지직! 찾았다. - 우우웅! 물의 장막을 없앤 에우리아가 거대한 실드를 만들어 확연히 줄어든 병사의 앞을 막았다. 카이리스의 마법사와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이 대치 중인 상황에서 병사들을 잡아 죽이는 놈이 가진 꿍꿍이가 달리 뭐가 있겠나. 횃불 든 세크리티아 놈들의 의도만큼이나 눈에 훤한 것이다. 마법사의 힘은 일반인의 것과 차원을 달리한다. 마법사에게 있어 병사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마법사는 절대적 강자이며, 병사는 마법사에 비한다면 상대적 약자에 속한다. 약자를 이유 없이 찢어발기는 마법사는 질 나쁜 놈이다. 거기에 더해 카이리스에 뒤 구린 선물을 보낼 마음을 먹고 찾아온 것이 분명한 악질적인 새끼는, - 쿠아아앙! 쾅! 콰아앙! 상황 봐 가며 살려놓을 필요가 없는 새끼다. < 제52장. 참으세요, 형님(5) > 숲은 크지 않았다. 때문에 하늘을 덮은 먹구름과 번개, 그리고 멀리 벼락이 내리치는 것까지 모두 잘 보였다. - 우르르릉······. 다만 레이첼이 있는 곳의 사정 역시 에우리아 쪽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탓에 오랫동안 집중하여 상황을 살피기가 어려웠다. 일단 정확한 것은 에우리아도 예기치 못한 상대를 만나 싸움을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상대가 마법사인 듯 하다는 것. 지면이 움직이며 발 밑이 꿈틀거리는 느낌이 났다. “저쪽 손님도 물을 쓰는 마법사인가.” 에우리아와 앨런에게 전해들은 이들. 소드마스터의 힘을 사용한다 했던 이들 다섯이 왔다. 다행인 것은 그들 전부가 대사막쪽의 전사들처럼 대단한 실력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이었고, 불행인 것은 그들 정도의 전력으로는 병사들을 순식간에 몰살시키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는 실력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레이첼이 침중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라도 생존한 이가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으나 슬프게도 살아있는 이의 기운은 느낄 수 없었다. 여러 차례 공방을 통해 병사들을 지키려 하였으나 결국 하나도 지키지 못했고 레이첼은 두 명의 검사를 죽였다. 셋이 남았다. 레이첼이 땅의 기운에 집중했다. 바닥을 밟고 움직이는 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계속하여 찾았다. - 쿠르릉······. 멀리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 소리가 점차 커진다. - 타닷! 그리고 그 사이를 빌어 사방에서 레이첼을 향해 달려드는 세 명의 발소리가 비로소 들렸다. 레이첼이 재빨리 준비해두었던 마력을 방출했다. - 쿠과앙! 전사 한 명과 검사 두 명. 그들이 디디게 될 땅이 바닥으로 쑥 꺼져내렸다. 그와 함께 주변의 흙이 떠올라 거대한 손 여러 개를 만들었다. 바닥의 움직임을 느낀 전사가 몸을 높이 띄웠다. 그에 비해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검사 두 명이 바위로 빚어진 단단한 손아귀가 검사들의 다리를 향해 뻗어나갔다. 한 명은 빠져나왔고 한 명은 그렇지 못했다. - 우드득! 뼈가 부서지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싸우지 못하게 된 이로부터 시선을 뗀 레이첼이 여전히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나머지 둘을 바라봤다. - 물컹······! 발 밑이 다시 움직였다. 높이 도약해 레이첼의 공격을 피해냈던 전사가 빠르게 방향을 바꾸어 다른 곳으로 몸을 피했다. 그보다는 눈치가 빠르지 않던 한 명의 발목이 땅 속으로 잠겨들었다. 발목에서 정강이로, 허벅지로, 갑작스레 생겨난 늪이 검사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콰악! 검사가 검을 뻗었다. 그리고 단단한 쪽의 바위에 자신의 검을 박아넣었다. 그러자, 마치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변해버린 바위가 부드럽게 검을 통과시켰다. 지지할 곳을 다시 잃게 된 검사의 몸이 서서히 머리끝까지 땅 속으로 잠겨들어갔다. 검사의 마지막 비명소리에서 애써 눈을 뗀 레이첼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바위를 녹여도, 바위를 깎아 날려보내도, 땅을 들어올리고 꺼뜨리고 작은 지진을 일으켜도, 놈은 모두 다 피했다. 재빠른 움직임으로 작은 조약돌 하나를 밟고 도약해가며 피하고 다시 달려들었다. - 휘이익! 어느새 지근거리에 도달한 전사의 검이 레이첼을 향해 휘둘러졌다. 레이첼의 눈은 전사의 것보다 빠르지 않았다. 때문에 그 움직임을 정확히 따라가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레이첼이 밟고 있던 땅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코앞에 있던 레이첼의 신형이 멀찍이로 옮겨졌다. 가만히 선 채로 전사의 검을 피해낸 레이첼이 마력을 움직였다. 전사의 주변 바위가 모두 다 떠올라 전사를 향해 쏘아져 날아갔다. - 카아아앙! 카앙! 한 두 번의 바위를 베거나 막아낸 전사가 다시 몸을 틀었다. 그리고 날아오던 바위 하나를 밟고 레이첼을 향해 검을 내찔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레이첼의 몸이 휙 멀어져서, 전사는 또 허공을 베었다. 또 어느 때는 전사가 밟고 선 바닥이 쭉 멀어진다. 레이첼의 몸이 휙 하고 움직이며 멀어졌고, 전사는 레이첼을 따라 달려들며 쉼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것을 피하고, 뾰족히 다듬은 바위를 쏘아보내고, 모래를 가득 일으켜 시야를 막아서도, 전사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고 대응하며 레이첼을 노렸다. “하아······.” 공격을 위한 마법이 많지 않았다. 왕궁에서 숲까지 오는 동안 마력의 소비도 상당했던 탓에 사용할 수 있는 마법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남은 마력으로 도망을 칠까. 하던 레이첼이 피식 웃었다. 속도의 차이가 있으니 차라리 도망을 친다면 쉬울 일인 것을 안다. 만약 그리한다면 전사의 검이 어디를 향하게 될지도 잘 알았다. - 휘이익! 전사의 검이 다시 날아든다. 내가 베로니카에게는 인사를 하고 나왔는데. 아버지한테는 말을 했었나. 순간적으로 기억을 더듬어보던 레이첼이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전사를 향해 암석의 쐐기를 날려보낸 그 순간. - 화르륵! 이곳에서는 절대 들리지 않을 소리와 함께 불덩이 하나가 전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레이첼의 암석 쐐기를 피한 뒤 검을 휘두르려던 전사가 몸을 뒤틀며 갑작스러운 불덩이를 피해냈다. - 콰앙! 땅에 처박힌 거대한 불덩이가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무슨 일인지 파악도 하기 전에 또 하나의 불이 전사를 향해 날아갔다. 두 번, 세 번, 연속하여 계속하여 전사를 몰아세웠다.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전사의 발을 레이첼이 다시 밀어냈다. 누가 왔는지 볼 겨를이 없었다. 일단은 전사 먼저. - 콰아앙! 쾅! 화염의 채찍이, 화염의 창이, 화염의 덩어리가 전사의 목숨을 끝없이 노렸다. 전사의 옷 끝이 불에 타오르고 그 눈이 짙은 살의에 휩싸였다. 전사의 몸이 높이 도약했다. 레이첼이 마력을 운용했다. 전사가 디디게 될 곳을 빠르게 계산했다. 그곳에, 멀쩡해보이는 숲의 땅 밑에 마지막 남은 힘을 모조리 쥐어짜 마법을 보냈다. - 탓! 전사가 발을 디뎠다. 겉보기로는 조금도 티나지 않던 땅 밑이 일순간에 모래가 되어 사라지며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수백의 날카로운 창이 바닥에서 솟아 있었다. 레이첼을 도우러 온 또 다른 마법사가 전사의 머리 위에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 콰아아앙! 창의 끝을 밟고 다시 몸을 띄우려 했던 전사의 몸이 폭발의 여파에 말려들었다. 커다란 힘에 밀리듯 바닥을 향해 내팽개쳐졌다. 그리고 그 바닥에는······. - 콰직! 결코 유쾌하지 않은 소리와 함께 마지막 남아있던 전사의 생명이 끊어졌다. 레이첼은 미간을 찌푸렸고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잿빛 로브의 마법사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이스 경.”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 한동안 로브를 쳐다보던 레이첼이 그제야 아는 것을 마주한 얼굴로 가늘게 웃었다. “세크리티아의 협회장님.” “세자 저하께서 잠시 가보라 하셨는데 이런 일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전날 아침 한 번을 만났던 세크리티아의 마법사 협회장, 6서클의 화염 마법사 메이린 론즈가 씩 웃었다.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레이첼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보랏빛의 번개가 하늘에서 내리떨어지기 시작했다. * * *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들어앉고 벼락이 내리친다. - 콰앙! 쾅! 병사들을 보호중인 실드와 실드 사이, 물기 가득한 숲 속에 에우리아의 머리카락과 참 비슷한 보랏빛의 번개가 줄기줄기 뻗어내려와 대지를 강타했다. 일반적인 5서클 마스터 마법사의 손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장관이 하늘과 땅을 잇는다. - 쩌저적, 쩌적! - 콰아앙! 하늘을 향해 뻗은 손은 내려 올 생각을 않고, 수십의 낙뢰가 에우리아가 바라보는 지점에 끝도 없이 떨어져내렸다.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이나 그들을 이끌던 기사가 죽어버린 바람에 남은 이들을 임시로 통솔하게 된 또 다른 기사들은 실드 건너에서 질린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 콰앙! 쾅! 콰아앙! 마지막 벼락이 떨어지고 난 뒤, 짙고 짙은 연기가 한 발 늦게 피어올랐다. 물이 가득했던 대지는 새카만 잿더미가 되었고 바위는 그을리고 깨졌으며, 아름드리 나무는 조각나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것을 확인한 에우리아가 조용히 팔을 내렸다. 에우리아가 가진 가장 강력한 공격. 치유력을 지닌 제온의 일반 병사들을 일순간에 잿더미로 만든 힘이다. 한 명이면 죽이면 되고 두 명이면 죽여버리면 된다. 실드가 있다면 깨뜨리면 되고 치유력이 있다면 심장을 태우면 된다. 그러니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는, “······ 와.” 일인 줄 알았는데. 잿더미로 변해버린 숲의 한 곳.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마법사를 보는 에우리아의 입가에 즐거운 기색 가득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앨런이 만들어내는 불의 실드와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른, 탁한 느낌이 가득한 붉은 실드. 분명 제온의 마법사였다. “······ 지나.” 구면이었다. 타오르는 불꽃같은 다홍색 머리의 여자. 에우리아에게 물의 마법을 알려준, 두 번째 스승과도 같은 6서클의 마법사가 잠시 에우리아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와 함께 강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대기를 감싼 마나가 또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파직, 파지직!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딱히 회포나 풀자며 건넨 말도 아니었던 에우리아의 손 끝에도 보랏빛의 구체가 생성되었다. - 뭉클! 에우리아가 물의 힘을 끌어냈다. 바닥에 고여있던 물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이곳저곳에 퍼져있던 물방울이 한 곳으로 모여들더니 공중으로 떠올랐다. - 지지지직! 수많은 물의 구슬 하나하나에 에우리아의 전기가 담겼다. 그리고 지나라 불린 제온의 마법사를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지나가 팔을 휘둘렀다. 차디찬 기운의 회오리바람이 한 차례 몰아쳐갔다. 에우리아가 쏘아보낸 물의 구체가 모두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투둑 투둑 떨어졌다. 허공에서 만들어진 얼음의 창이 높은 곳에 서 있는 에우리아를 향해 쏘아진다. 텔레포트로 가볍게 자리를 벗어나 공격을 피한 에우리아가 스파크 가득한 물의 창을 만들어 똑같이 되돌려보냈다. 얼려서 부서뜨릴 새도 없이 날아온 공격에 지나 역시 텔레포트를 했다. - 쿠과과광! - 파지직! 그 때를 노린 에우리아가 다시 한 번 바닥에서 물을 끌어올렸고, 지나가 내딛는 땅에 강한 전류를 흘려보냈다. 지나의 얼음창이 다시 한 번 에우리아를 향하자, 그것을 피한 에우리아의 손에서 긴 번개 줄기가 뻗어나가 지나의 실드를 내리쳤다. - 콰앙! 폭음과 함께 지나의 몸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지나의 몸이 병사들을 가린 실드의 앞에서 나타났다. 지나가 손가락 끝으로 실드를 한 번 건드린다. - 쩌적! 쩌저적! 새하얀 서리가 실드를 감싸며 얼어붙었다. 얼굴을 굳힌 에우리아가 실드를 보강한 뒤 지나를 공격했으나 지나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한 번 더 텔레포트를 운용해 인근의 나무에 올라선 지나가 에우리아를 보며 살짝 웃어보였다. 그리고 발 아래 보이는 에우리아의 실드를 향해 팔을 뻗었다. - 까드득! 카드드득! 달갑지 않은 소리가 났다. - 콰아앙! 지나의 발 밑에 모여든 물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져나왔다. 실드를 향한 공격을 막고자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그것은 붉은 실드를 때릴 뿐 공격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 휘리릭! 살얼음이 가득한 긴 채찍이 에우리아를 향해 휘둘러졌다. 실드를 펼쳐 그것을 막은 에우리아가 채찍 반대편으로 긴 번개를 보낸다. 찰나와 같은 시간에 채찍을 타고 상대방을 향해 도달한 전기 공격이 지나의 실드를 강하게 때렸다. 막혔다. 그 순간, 실드 안쪽으로 나뉘어 들어간 지나의 마력이 물을 움직였다. 바닥이 솟아오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병사들이 발 밑을 내려다보았을 때. - 콰아앙! - 쌔애액! 쌔액! 쌔애애액! 실드로 보호되지 않은 바닥을 뚫고 치솟은 지나의 물이 뾰족하게 얼어붙었다. 하나하나의 비수가 되어 하나하나의 병사들을 꿰뚫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양 쪽에 흩어져있던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일순간 들려오고 순식간에 멈췄다. 결국은 모두 죽었다.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6서클의 마법사. 그리고 5서클의 에우리아. 그 숫자 하나의 차이. 쌓아올린 마나의 차이. 지닌 마력의 차이. 고작 그 차이 때문에. “젠장.” 에우리아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 뒤질라고.” 주먹 끝에 보랏빛 스파크가 강렬한 빛을 냈다. 자신과 크게 관련은 없었으나 어쨌거나 살리지 못한 이들에 대한 미안함은 미뤄뒀다. 친분 많던 이와 목숨을 놓고 싸움을 벌이게 된 상황에 대한 혼란함은 애초부터 미뤄뒀다. 스승이었든 6서클이든 제온이든 뭐든 저새끼는 그냥 적이니까. - 파지직! 파직! 에우리아가 지나를 향해 전기의 기운 가득한 창을 만들어 보낸다. 밝은 빛에 긴 잔상이 남았다. 지나가 실드를 펼쳐 에우리아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더는 에우리아를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냉기를 끌어올렸다. 에우리아의 사방이 얼어붙기 시작한다. 끊임 없이 만들어진 물의 창이 에우리아의 손을 떠나 지나를 향해 날아갔다. 모두 다, 붉은 실드에 막혀 덧없이 흘러내렸다. 소용없는 물이 자신의 발 밑에 고여드는 것을 지나는 무시했다. 그것에 전기가 흘러도 어차피 막힐 테니까. 바람에 흔들리던 나무가 움직임을 멈췄다. 얼어붙었다. 나무가 뿌리내린 땅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낙엽도 얼어 움직임을 멈췄다. 대사막의 한 가운데 선 것처럼, 에우리아의 주변이 모두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 냉기가 빠르게 에우리아를 향해 다가왔다. “나랑 마지막 인사 할 때까지만 해도 이중 속성이 아니었는데. 그 조약돌이 꽤 유용한가봐.” “많이.” 에우리아의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지나의 발 밑이 폭발했다. “억울한데. 난 이거 하려고 꽤 고생했거든. 돌맹이 하나로 이중 속성이 될 수 있는 줄은 몰랐어서.” - 콰아아앙! 에우리아의 공격이 다시 한 번 지나를 향했다. 막혔다. ‘전기를 익히면 번개도 내리꽂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니에요? 할머니 마법 너무 시시한데.’ ‘손바닥에 전기 줄기 만든다고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더냐? 벼락이 그렇게 좋거든 서클이나 한 일곱 개 쯤 만들어 보거라.’ ‘그때까지 언제 기다려요. 늙어 죽겠다.’ 강자의 눈은 약자보다 느리다. 에우리아는 사방에서 모여드는 냉기가 언제 자신을 잠식할지 제대로 계산했다. 지나는, 자신의 밟고 선 물이 서서히 더워지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에우리아 세이렌. 5서클 마스터 마법사. ‘······ 그냥 내가 만들고 말지.’ 정확히는 물과 전기, 이중 속성의 5서클 마스터 마법사. 때문에 가능한 것. 습기 가득한 더운 구름에 전기가 충돌하면 번개가 된다. 습기 가득한 더운 구름을 불러 올 마력이 없다면, 그냥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 쩌적! 쩌저적! 에우리아의 로브가 더 이상 펄럭이지 않는다. 얼어붙기 시작했다. 에우리아는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디로 피하든 저 얼음은 에우리아를 따라와 기어코 얼려둘 테니, 실드로 몸을 보호하며 계속하여 물의 공격을 이어갔다. 물을 보낸다. 물이 흐른다. 물이 데워진다. 끓는다. 습기 가득한 더운 것이 지나가 밟고 선 땅 밑에 고여들었다. - 쿠구구궁······. 지나의 발 밑이 울기 시작했다. 지나가 고개를 숙였다. 텔레포트를 하려 했다. 농도 짙은 끈적한 물이 지나의 발을 붙들고 늘어진다. ‘마법 만드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더냐.’ ‘뭐, 안되면 마는거죠.’ 고작 물에 적셔 감전 잘 되게 하려고 리베른까지 가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재밌어 보이던 바람 마법이니 화염 마법이니 다 때려치고 재미도 없는 물의 마법을 5서클까지 수련한 것이 아니다. 살면서 대마법사 이름표 달 일은 요원한 것 같아서 그냥 속 편하게 두 개를 배웠다. 그거 하나 해보려고 그 고생을 했다. - 쿠아아앙! 쾅! 콰아앙! 벼락 꽂으려고! - 콰아아앙! 콰과광! 콰과과광! 콰광! 쾅! 초근거리에서 만들어진 벼락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발 밑에서 올라오는 수십, 수백의 벼락이 붉은 실드를 사정없이 깨뜨렸다. 그 어느때보다 두텁게 만들어진 붉은 방벽이 산산조각나 사라졌다. 맨 몸의 마법사를 향해 벼락이 꽂혔다. - 콰아아앙! 강자의 눈은 약자보다 높은 곳에 있는 탓에. 고작 5서클의 마법사가 그 강한 마법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던, 벼락이 제 발 밑에서 자신을 향해 올려꽂히게 될 줄은 몰랐던 마법사의 몸뚱이가 새카맣게 타올랐다. 심장을 향해 벼락이 들어섰다. “고작 돌맹이 하나 가지고······ 어디서 함부로 진짜에게 싸움을 걸어.” 여섯 개의 서클이 흩어진다. 타올랐다. 생명을 꺼뜨리는 굉음 사이로 에우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질라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 * * 익숙한 발소리. 익숙한 목소리. “칼리안.” 익숙한 모습의 방에서 잠이 들었고 꿈 꾸지 않는 깊은 잠을 잤다. 어느새 지척까지 발소리가 다가온 뒤에야, 낮은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을 때에야 누군가 방 안에 같이 있었음을 알았을 만큼 깊은 잠을 잤다. 숨소리 하나 크게 내지 않으며 잠을 자던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떴다. 언젠가 그곳에 누웠던 이의 연보라색 눈 대신, 붉은 루비와 같은 투명한 눈동자가 아주 잠시 주변을 살폈다. “······ 네.” 침대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자신을 부른 덜 익은 라임 알맹이같은 사람을 잠깐 올려다보던 칼리안이 짧게 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시 숨을 참았다. 등이 여전히 아프다. 허리춤의 감각이 완전히 돌아와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해독이 완료되고 피는 멎었으나 하룻밤 안에 상처가 아물기에는 상처가 크고 깊었다. 독이 강했다. 곁에 쌓여 있는 바나나를 잠깐 쳐다본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히나가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당장은 무언가를 먹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리 쪽의 상처가 좀 나으면, 그때 손을 대기로 한 칼리안이 플란츠를 올려다봤다. “잠깐.” “네. 말씀하십시오.” 여전히 인상 한 번을 찌푸리지 않아 도대체 얼마나 나은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칼리안을 잠시 보던 플란츠가 일단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칼리안과 플란츠, 그리고 아르센이 이 별장에 찾아왔을 즈음에 숲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에우리아와 레이첼이 공격을 당했으며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이 모두 사망했다는 사실. 데블란이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을 살해한 혐의로 두 마법사를 체포하기 전에 체이스가 마법사 협회를 움직였음을, 그리하여 지금 두 마법사는 협회 건물 안에 머무르게 되었음을. “······ 아.” 이야기를 모두 들은 칼리안이 짧은 소리를 냈다. 그렇게나 조심했음에도 데블란의 덫에 걸렸다. 플란츠를 찾아간 기사의 정체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칼리안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플란츠가 어떻게 움직일지를 가늠한, 똑똑하면서 칼리안보다 조금 더 노련한 데블란이 기사를 시켰다. 귀족들간에 데블란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리라 여기도록 꾸며냈다. 칼리안의 큰 전력이 숲으로 향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측했다. 제온과 손을 잡은 것인지, 제온을 부리는 것인지는 몰라도 두 마법사를 죽이기 위한 전력을 추가로 보냈다. 제 손으로 제 병사들을 전부 다 죽여가면서 이 일을 꾸몄다. “그래서······ 체이스 형님은 마법사 협회를 움직였고, 데블란에게 반한다는 뜻을 완전히 겉으로 보이게 됐네요.” 아까부터 체이스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으나 돌아오는 소리가 없었다. 칼리안이 잠시 한숨을 쉬었다. “테일란을 움직일 생각까지는 안하셔야 할 텐데.” 지금 일어난 상황을 데블란이 제대로 이용한다면 체이스의 반역을 꾸며낼 수 있다. 자신의 뒤를 이을 단 한 명의 아들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겠으나 이 일을 빌미로 체이스를 완전히 손 위에 올려놓으려 할 터였다. 체이스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모르지 않은 채로 협회를 움직였다. “어떻게 할 건데.” 플란츠가 조용히 물어왔다. 멀리 서 있는 아리안느에게 살짝 눈인사를 건네고, 아르센을 보던 칼리안이 씩 웃었다. “제가 아파서······ 움직이기가 좀.” 걷고 뛰는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칼리안의 팔찌가 빛나는 것을 보던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 스승님. 아빠, 부른다. 우리 아빠 엄청 세다. < 제52장. 참으세요, 형님(6) > 검은 나비. 검은 별을 모아둔 것 같았던, 혹은 검은 밤 하늘을 조각내 둔 것 같았던 그런 모습의 나비를 기억한다. 그것을 기억하자 시스파니안이 생각났고 시스파니안으로부터 받은 기묘한 위로가 떠올랐다. 덕분에 칼리안이 잠시 실소했다. 죽음을 기원하는 검은 나비. 그것 하나를 위로로 삼고 살던 사람이 그것 하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생각 때문에. 그 사람이 하필이면 자신을 이렇게 키워낸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뱀의 자식으로 독하게 자라오지 않았다면 카이리스의 왕자로 눈을 뜬 그 해에 이미 명을 달리 했을 것이다. 지금껏 살아남아 이 곳에 오게 된 것이 데블란 덕분이라면 덕분이다 할 수 있을 사람이 데블란을 상대하려다 덫에 걸렸으니 달리 무슨 말을 더 하겠나. “내 아우님께서 많이 편찮기는 하신가보군.”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는 칼리안을 가만히 쳐다보던 플란츠의 목소리. 플란츠가 참 오랜만에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말로 짖는 걸 못하시고 머릿속으로 짖으시는 것을 보니.” “별 생각 안했습니다.” “그 말을 믿어드리느니 레니시타의 솜털에서 바나나 자라기를 기다리겠는데.” 거짓말을 할 거면 믿기게 하던가. 딱 이런 얼굴이 되어 대꾸하는 모습을 본 칼리안이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안 하겠습니다.” 그 후 칼리안은 넓은 창문 너머 먼 곳으로 보이는 바다를 말 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방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르센과 아리안느가 보인다. 도와주러 달려왔던 아르센에게 수고했다 고맙다 한 마디를 하지 못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게 된 아리안느에게 인사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눈을 뜨자마자 플란츠가 전해주는 말을 먼저 들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둘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던 칼리안이 곧 입을 다물었다. 그들과 칼리안의 사이로 반투명한 막이 펼쳐져 있던 까닭이다. 아리안느를 온전히 믿지 못한 아르센이 칼리안과 플란츠의 주변에 사일런트를 펼쳐준 것이었다. 데블란의 수에 무슨 대응을 할지 결정하기 위한 대화가 오갈 텐데, 혹시라도 그것을 들은 아리안느가 다른 일을 벌일까 걱정한 탓이었다. “마나실 후작은.” “와 달라 말씀을 드렸으니 오늘 중으로 오실 겁니다.” “그 뒤에는.” “오시면, 반갑겠죠.” “말고.” “글쎄요. 스승님께서 오시면 무엇을 할까······ 당장 데블란 침실로 스승님을 보내드릴까요. 안 그래도 곧 키리에에게는 알려 줄 생각이었는데 스승님께서 같이 아신다 해서 크게 다를 일은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이제 다시 말로도 짖네.” 작게 웃은 칼리안이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려다 말고 아주 짧게 숨을 멈췄다. 그리고 가짜 오러가 담겼던 칼에 깊이 베인 등을 딱딱한 나무에 가져다 대는 것을 그냥 포기하고 플란츠를 쳐다봤다. “형님 사냥 잘 하십니까.” “활이라면.” “덫을 놓는 것은 보신 적 있습니까.” “없어.” 허리를 조금 더 꼿꼿이 세우고 앉은 칼리안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덫이라는 것이 조금 재밌습니다. 사슴을 잡으려면 사슴 다니는 길목에, 여우를 잡으려면 여우 다니는 길목에 덫을 놓습니다. 그런데 그 덫에 뭐가 걸릴지는 사실 알 수가 없습니다. 펼쳐둔 덫에 무엇이든 잡히기는 하는데, 사슴 다니는 길목에 놓은 덫에 여우가 걸리기도 하고, 운이 정말 좋은 날에는 사슴과 여우가 같이 걸려있기도 하니까요.” 신물을 몰래 팔고 카이리스 정보도 같이 팔려던 백작을 잡기 위해 만들었던 덫에 레넌이 걸렸던 것처럼. “데블란이 체이스 형님을 잡으려고 놓은 덫입니다. 거기에 저와 형님까지 같이 걸렸네요. 형님이나 저나 데블란의 시선을 충분히 끌어왔다 생각했는데 아직 아니었나 봅니다.” 데블란은 여전히 체이스를 끌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당장 호기심이 동하는 칼리안이나 플란츠 말고, 자신의 목숨줄 늘릴 방법을 철저하게 막고 있는 체이스부터 붙잡아놓으려는 생각을 아직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는 칼리안을 죽여버릴 마음을 먹고 플란츠에게 호기심이 동하는 척 해가며 모두를 다 속였다. 귀족들과 결탁한 체이스가, 칼리안과 두 마법사를 죽인 뒤 그 일을 데블란에게 뒤집어씌우려 한 것처럼 꾸며내려고. “체이스 형님이 형님과 손을 잡고 저를 공격한 것을 꾸며내면, 그 일을 빌미로 체이스 형님을 협박해 볼 수 있겠죠. 이번 일을 린 후작이든 누구든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귀족에게 뒤집어씌워 전부 다 목을 잘라내버리고 진심어린 사과의 뜻을 보이면 전하께서도 전쟁까지 마음을 먹지는 못하실 테고요. 형님 손에 발칸이 있으니까.” 귀족의 힘을 등에 업은 체이스가 플란츠와 힘을 합쳐 칼리안을 몰아낸다. 만약 그리 되더라도 르메인은 전쟁을 일으키지 못한다. 공범 중 한 명이 자신의 둘째아들인데다 그 아들이 발칸을 쥐고 있지 않나. 전쟁에 나선 플란츠가 세크리티아를 공격할지 자신의 아버지를 공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르메인은 조용히 넘어갈 수 밖에 없다. 전쟁이 벌어지면 힘을 얻는 것은 사병을 지닌 귀족과 군권을 지닌 이들이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 전쟁을 일으키면, 간신히 줄어든 브리센의 세력이 커지고 군대를 가진 플란츠의 힘이 늘어날 뿐이다. 데블란은 그것을 안다. 알고 있으니 칼리안을 없애버리고도 나라와 제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 계산을 했으리라 생각을 했다. 칼리안의 스승 노릇은 안 하고 군대 우두머리 자리에 앉아있는 앨런이 칼리안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데블란은 모르니까. 플란츠가 사실은 어떤 성격인지에 대해서도 데블란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때문에 데블란은 칼리안을 없애고 체이스를 손 위에 올려놓고 자신의 생명도 늘려놓을 덫 하나를 잘 만들었다. 그것에 칼리안과 플란츠가 제대로 걸려들었다. “······ 라고 생각을 했는데. 아닌 것 같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별장을 찾기 전과는 또 조금 다르게, 두 형제의 제대로 된 대화가 이어졌다. “하나만 죽는다면.” “맞습니다. 형님이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는 덫이었다면, 그런 생각으로 일을 벌인 게 맞았을 겁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잠시 눈을 내리떴다. 다리 위에 덮여있던 검은 이불을 손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한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조금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제온의 전사들과 검사들을 왜 굳이 나눠서 보냈을까. 저에게 독까지 썼다는 것은 반드시 제가 죽기를 바랐다는 것인데 왜 나눠보냈을까. 검사들이 다 죽어가도록 제온의 전사들은 왜 끼어들지 않고 있었을까. 하고요.” 긴 말을 한 탓에 목이 말라서, 칼리안이 침대 옆에 놓여있던 물컵에서 물을 따라 그대로 모두 마셨다. 물을 마셔도 괜찮은지도 몰랐지만 그 컵에 뭐가 담겼을지도 의심하지 않고 마시는 거리낌없는 태도에 플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칼리안은 그 모습에 그리 신경쓰지 않은 채 잠시 숨만 멈췄다 다시 쉬었다. “아무리 형님이 먼저 공격을 했다지만, 검사들이 형님을 곧바로 죽이려 드는 태도도 이상하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라면 저 하나에게 끝까지 달려들었어야 하는데 손을 잡으려 하는 2왕자를 너무 쉽게 버리는 패로 삼는 것이 이상했어요. 그 때라도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저나 형님이나 생각이 짧았네요.” 완두콩 색깔 타령이나 간신히 하고 그대로 졸도해버린 탓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지만 일단 칼리안은 자신들의 부주의를 탓했다. 한동안 천장의 샹들리에와 창 밖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제온.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데블란도 속은 게 있는 것 같은데.” “제온의 행동이 변수인 것은 맞는 것 같죠.” “아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다 다시 잠시 숨을 끊어 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바닷가에서 전사들이 나타났을 때 형님에게 말을 걸었다던 그 기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셨으니, 데블란이 준비한 것은 아마도······ 첫 번째로 마주쳤던 제온의 전사 네 명. 그리고 브리지트 숲에 보낸 이들이 전부였을 것 같습니다.” “내 아우님께서 얼마나 잘 무시는지 데블란이 몰랐던 것 같으니. 그렇겠지.” 여전한 멍멍이 취급에,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제가 죽어서 귀찮아질 일을 먼저 없애두려면 세이렌 경 쪽을 확실히 처리해야 하는 것이 맞으니, 브리지트 숲으로도 제온의 일원들을 보냈겠죠. 실제로 양쪽 다 죽으면 좋은 일이고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체이스 형님을 옭아맬 수단이 될 테니 상관 없다 여겼을 것 같은데.” “······ 두 번째.” “네. 검사들과 두 명의 또 다른 제온은 저 뿐만 아니라 형님까지 노렸습니다. 그것은 데블란이 보낸 이들이 아닙니다. 검사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전사들이 기다린 것을 보면 서로 온전히 같은 편도 아니고요.” 데블란은 체이스를 잡기 위한 덫을 놨다. 겸사겸사 칼리안도 함께 잡을 덫을 놨다. 그런데 누군가 끼어들었다. “이 땅에서 두 왕자가 나란히 죽으면 가장 손해보는 것은 데블란이죠.” 칼리안은 죽어도 데블란에게 큰 상관이 없지만 플란츠까지 죽으면 안 된다. 두 형제가 싸우던 중에 둘 다 죽었다는 것은, 물론 변명할 거리는 되어 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발칸을 가지고 르메인의 움직임을 묶어 둘 세력이 사라지는 것 아닌가. 플란츠까지 죽게 된다면 르메인은 발칸을 손에 쥘 것이고, 브리센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검이 날아들 때 떠올렸던 전쟁에 대한 걱정을 다시 상기한 플란츠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정말로 전쟁이 벌어질 테니까요.” 톡톡톡. 칼리안의 손 끝이 작은 소리를 냈다. “신뢰가 없군.” “그러게요. 제온을 어떻게 부렸는지는 몰라도 데블란도 뒷통수를 맞았네요.” 그렇다면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의 전쟁으로 이득을 얻게 될 이들이 누구일까. “전쟁이 일어나면 귀족들의 힘이 강해집니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의 전쟁이 일어나면 이득을 보는 것은 나머지 국가들일 테고요.” 안으로는 세크리티아의 귀족들이, 밖으로는 양국을 제외한 두 나라가 원하는 전쟁. 누군가 그 전쟁을 원하고 있다는 소리다. “대륙 모든 곳에 퍼져있는 제온이라 해도 우두머리는 있을테고, 그 자가 전쟁을 원했고, 이곳 귀족들을 회유해서 이번 일을 꾸몄다는 것이 가장 크겠네요. 한 쪽으로는 데블란과 손을 잡은 척. 또 한 쪽으로는 회유에 넘어간 귀족들을 끌어들여서. 그런데 계획이 실패한 것 같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까······.” 데블란의 덫에 걸린 것은 맞다. 데블란 역시 제온과 귀족의 덫에 걸릴 뻔했다. 데블란이 덫에 걸리지 않은 것은, 순전히 칼리안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칼리안은 데블란의 덫에, 데블란은 제온의 덫에 걸린 셈이다. “재밌네요.” 톡톡톡. “키리에와 기사들은 여전히 왕궁에 있습니까.” “감시하라고 시켰다며. 린 후작 쪽.” 그렇게 말한 플란츠의 시선이 잠시 사일런트 막의 밖을 향했다. “그래서 아우님의 새로운 수하를 시켜 데블란 몰래 데려온 것 아닌가.” 공격을 당할 것까지는 예상을 한 채로 왕궁 밖을 나섰던 칼리안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았어도 귀족들 중 다른 마음을 먹은 이들이 있으리라는 것도 예상을 했다. 제온을 움직일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만약 귀족들이 모여든다면 그 중심에 누가 있을까. 그것을 생각해보다 우선은 린 후작 쪽의 감시를 맡겼다. 체이스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체이스의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린 후작이니까. 감옥에 갇혀있다 하나 귀와 입이 닫힌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 린 후작이 허튼 일을 벌이고 있을 때를 대비해서 에일라를 보냈다. “저기요, 거기 두 왕자님들. 사람을 잡아왔으면 대접을 해줘야지 말이 왜 그렇게 길어요?” 칼리안과 플란츠가 자신을 한 번씩 쳐다본 것을 눈치챈 아리안느가 큰 소리로 질문을 건넸다. 그 모습을 본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리다 또 숨을 참았다. “세상에서 제일 태평한 인질이네요.” 만약 칼리안이 왕궁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아리안느를 붙잡아 자신의 앞으로 데려오라는 첫 명령을, 에일라는 무리 없이 수행했다. 그렇게 붙들려 온 린 후작의 딸이 자신의 배를 가리켜 보였다. 기억에 없는 오랜 친구와의 인사보다, 자신의 어머니가 이번 일의 배후로 의심 받고 있는 상황보다, 배고픈 것에 대해 먼저 해결해달라는 뜻이었다. “식사 하고 오십시오. 저는 체이스 형님과 연락이 닿으면······.” 이렇게 말하던 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플란츠 역시 같은 것을 봤다. - 칼리안 왕자님. 혹시 맞으십니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빛나는 반지. 그것을 통해 흘러들어온 것은 체이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 ······ 얘기하세요. 카스트린 경. 칼리안이 다시 숨을 참았다. * * * 겉은 달콤하고 속은 고소하다. 잘 볶은 아몬드에 얇은 초콜릿을 씌우고 굳히기를 반복한다. 손톱만한 아몬드 조각이 어느새 작은 손가락 한 마디 크기가 될 정도로 여러 번의 초콜릿을 덧입힌다. 그렇게 하면 바삭한 듯 부드럽고 아몬드의 단단함이 상하지 않은 달콤하고 고소한 초콜릿이 만들어진다. “요리사의 솜씨가 늘었습니다.” 쓴 초콜릿을 몇 겹 씌워놓아도 좋을 것을, 우유와 설탕이 가득 든 부드러운 초콜릿으로 덧씌워 만들어 낸 아몬드 초콜릿을 천천히 씹었다. 그리고 우유 거품과 시나몬 향이 가득한 커피로 입 속의 아몬드 조각을 모두 삼킨 앨런이 꽤 흐뭇한 얼굴을 했다. 자몽이 든 젤리나 좀 먹으면 모를까 여전히 그리 단 것을 왜 먹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르메인이 앨런의 앞에 서류 뭉치를 내려놓았다. 그 뒤에는 앨런이 온 뒤로 부지런히 단 것 만드는 법을 숙련해나가고 있는 요리사 대신 다른 것을 칭찬했다. “발칸이 생각보다 빠르게 정상화되는군. 갑작스레 몸집을 부풀려 혼란하지 않을까 했는데.” “괜한 걱정을 하셨습니다.” “마법사단과 기사단의 사이가 좋아지기 힘들다 여겼네.” “마법사 모아 군대 만들 생각은 하신 분께서 그런 편견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성격들이 워낙 다르다 들었으니까.” 앨런의 손가락이 방금 전까지 집어먹고 있던 아몬드 초콜릿을 향했다. “툭하면 녹아 사라지는 놈과 단단하기 짝이 없는 놈을 같이 붙여두니 저렇게나 좋은 맛이 나는데, 사람이라 하여 다를 것이 있겠는지요.” 이렇게 말한 앨런이 커피 한 모금을 더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왕실 마차에서 새끼 오리 키울 생각이나 하면서 사는 놈들이라 해도 천성이 글러먹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마법사들과, 스스로를 호밀 쿠키라 생각하는 이가 키워낸 기사들이 서로 어우러지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발칸의 마법사들은 싸움에 능한 이들이다. 한 자리에 못박힌 듯 선 채로 주문이나 좀 외려다 기사의 검에 허무하게 베여나갈 어리바리한 놈들이 아니었다. 그런 마법사 한 명과 기사 한 명을 붙여두면, 열에 아홉 이상은 마법사가 우세할 터였다.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은 그 차이를 결코 시기하지 않았다. 개인의 전력 차는 당연히 있겠지만 기동성과 숫자의 차이에서는 기사들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제대로 알았다. 그렇게 마법사와 기사의 차이를 정확히 주지시키며 키워낸 기사들이 발칸에 왔다. 기존에 있던 브리센의 기사들은 플란츠의 손 아래 정신머리가 고쳐졌다. 그랬으니 서로 어우러지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불안할 것 없이 계속 지켜보시지요. 썩 봐줄 만한 군대가 된 만큼 앞으로도 보기 좋게 잘 클 터이니.” 발칸 잘 큰 것이 다 누구 덕인지도 모르면서 괜한 걱정을 하느냐. 전하께서는 걱정하는 능력도 없는 모양이니 그냥 얌전히 지켜나 봐라. 뭐 이런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아침부터 찾아와서 초콜릿 몇 개를 집어먹더니 쓴 소리 하나 없이 말을 받아주고 있었다. 그것이 또 이상해서 앨런을 잠깐 쳐다보던 르메인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또 무슨 일이 생겼나본데.” “그리 보이십니까.” “그대는 3왕자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대하는 게 달라지는 위인이니. 이렇게 단 소리를 하는 것도 이유가 있겠지.” 앨런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식을 둘이나 남의 나라에 보내놓고도 소같이 굴 인사는 아니신 모양이니 다행입니다.” “······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전하의 모가지입니다.” “그것은 항상 걸려있는 줄 알았는데. 새삼스레 필요한 일이던가.” “새삼스레 필요할 일이 생겼습니다.” “얘기하게.” “발칸의 모든 권한을 플란츠 왕자님께 내리시지요. 플란츠 왕자님을 통솔할 권한은 전하께서 손에 쥐십시오.” 발칸의 마법사단과 기사단을 움직일 권한도, 두 부군단장을 통솔하는 권한도 본래에는 앨런이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지금 세크리티아에 있는 2왕자와 카이리스의 국왕에게 넘기겠다 말하는 것이었다. “정혼자의 아버지와 잠시 담소를 나누기 위해 소공작이 곧 올 겁니다. 저택을 찾은 귀한 손님도 소개해드리겠다 하니, 거절 말고 며칠 왕궁에 머무르게 하시면서 발칸의 기사단 검술이나 좀 보아달라 하시지요.” 지그프리드의 저택에 누가 지내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공작저에 머무르게 된 귀한 손님이 리리에 브리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시오나 힐. 칼리안과 비슷한 수준이라던 그 소드마스터를 왕궁 안에 두고, 발칸의 군단장 자리는 플란츠에게 넘기고, 플란츠를 움직일 권한을 르메인이 직접 가져야 하는 상황. 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생각에 잠겼던 르메인이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헤르츠 부군단장의 직위를 해제했던데. 그대에게도 같은 것을 해달라 청하는 것인가.” “해임을 말함입니다. 저기 저 놈들은 군단장이 잠시 없어져도 제 몫을 할 놈들이니 믿어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일시적인 해임인가 영구적인 해임인가.” “세크리티아의 지도가 바뀌어야 한다면 영구적인 해임이 되겠지요. 바라는 일은 아닙니다만.” “······ 왕자들의 안위에 문제가 생겼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전쟁이지 그대의 해임이 아니네.” “전하께서 세크리티아와 전쟁 일으키시면 아드님들 보실 일 영영 사라집니다. 그냥 겨울 한 철 못 보시는 것으로 만족하시지요.” 이렇게 답한 앨런이 시간을 확인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얘기하게.” “세자위, 지금 내려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르메인이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 * * 하얀 셔츠를 입었다. 목을 반쯤 가리는 넥칼라가 달린 검은 재킷과 검은 바지를 입었다. 금색의 자수로 수놓아진 카이리스의 문장을 잠시 바라보다가, 금색의 단추가 달린 긴 코트를 입었다. 그리고 검은 털 장식이 더해진 붉은 망토를 걸쳤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왕궁 안에서 칼리안을 맞이한 것은, 왕궁에 계속 머무르던 카이리스의 기사들과 키리에였다. 파리한 안색의 칼리안, 그에 못지 않은 플란츠가 다시 세크리티아의 왕궁으로 돌아왔다. 상황을 살피며 잠시 몸을 추스를까 하던 생각을 접고 우선 오게 되었다. “괜찮아.” 에우리아와 레이첼은 여전히 마법사 협회 안에 머무는 중이었고 아르센은 우선 아리안느와 함께 별장에 남았다. 인질 삼아 붙든 아리안느를 잠시 보호해달라는, 체이스로부터의 부탁이었다. “······ 체이스 형님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어머님은.” 이어진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왕궁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와 동시에, 세크리티아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칼리안과 플란츠, 키리에, 그리고 이들을 호위하듯 곁에 선 카이리스의 기사들을 둘러쌌다. “왕궁 안에 불온 세력의 움직임이 확인된 바, 카이리스의 왕자님 일행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모시라는 전하의 명령이십니다.” “······ 안전하게 모시려는 행동은 아닌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만, 칼리안 왕자님. 별관으로 바로 모시겠습니다.”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칼리안이 무어라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 우우웅! 왕궁 앞에 거대한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칼리안의 눈에 반가움이 스쳤고 플란츠가 한 발자국을 뒤로 물렸다. 뒤이어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붉은 빛무리가 모여들며 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스승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칼리안 왕자님.” 붉은 로브로 몸을 감싼 앨런이 조용히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넨 앨런의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왕세자 저하.” < 제52장. 참으세요, 형님(7) > 햇살이 비추는 이른 아침. - 또각, 또각. 작은 구두 소리가 넓은 창 가득한 복도를 울렸다. 보랏빛 장식이 달린 하늘색 드레스 차림의 루이즈가 말 없이 계속 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까지 흔들림 없이 걸어간 루이즈의 발이 멈췄다. 그 앞의 문을 막고 있던 호위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오늘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알고 온 길이니 우선 고하거라.” “죄송합니다.” 루이즈가 문 손잡이를 가리켜보였다. “굳이 내 손으로 열어야 하겠느냐.” “전해드린 바와 같이 오늘은······.” 그때, 문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되었다. 모시거라.” 데블란이었다. 데블란은, 루이즈나 죽은 디에나에게만은 언제나 깊은 성의와 배려를 보였다. 최근의 일이 있기 전까지는 체이스에게도 큰 흠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겉보기로 그랬다는 뜻이다. 속마음이 어땠을지는 데블란 본인만 알 수 있는 일이니까. 어찌됐건 데블란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기사는 더 이상 막지 않고 문을 열었다. 소파로 걸어와 앉은 데블란이, 안으로 들어선 루이즈가 따로이 묵례를 보이기도 전에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오랜만입니다.” “······ 네. 전하.” 부부간의 인사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서로 만나지 않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짧은 대답만 전한 루이즈가 데블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래지 않아 시종장이 들어와 차 두 잔을 내려놓고 나갔다. 말 없는 루이즈의 시선이 그 찻잔에 가 닿았다. “그래. 사담이나 나누러 나를 찾지는 않았을 텐데. 무슨일입니까.” “그만 멈추시라 말씀드리고자 왔습니다.” 루이즈가 고개를 들고 조용히 답했다. 한동안 루이즈를 보던 데블란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을 전했다. “무엇을 멈추라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벌이시는 일 전부 다, 멈춰주세요.” “나는 여전히 당신을 귀하게 여기고 내 아들을 아낍니다. 또한 내 나라를 운영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중 무엇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세자에게 누명을 주실 생각임을 압니다. 여러 거짓을 꾸며내어 얻으려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전하의······” “듣기에 좋은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꺼내놓는 이야기에 조금 더 신중했으면 합니다.” “그런 전하의 욕심 때문에 죽은 이들을, 저는 모두 지켜봤습니다. 왕비님과 제 가족을 포함해 모든 이들이 어떻게 죽고 어떻게 숨겨졌는지 보았습니다. 지난 밤에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죽었는지. 그 역시 전해들었습니다.” “루이즈.” 데블란이 루이즈를 응시했다. 하지만 루이즈는 멈추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카이리스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되고 사형된 이도, 리베른의 국서였으나 사형된 이도 전하만큼 많은 피를 묻히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는 명백한 죄인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세요.” “그만.” 데블란이 손을 들어올려 루이즈의 말을 막았다. 노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부드러운 얼굴로 루이즈를 보던 데블란이 입을 열었다. “독이 가득한 그 수면향 하나를 의심하지 않아 건강을 해쳤으니, 따져본다면 그 하나는 나의 잘못이 맞습니다. 다만 그 뿐이니 억지는 그만 부리고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아직 당신이나 세자로부터 등을 돌리고 싶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이미 등을 돌리고 계셨습니다. 전하께서 선택한 방법은 잘못되었습니다. 선택하지 말아야 할 방법들만 취하며 살아오셨습니다.” “선택이 잘못되었다 한들 어찌하겠습니까. 그 역시 생을 살아가는 한 방법인것을.” 데블란이 작은 소리를 내며 웃다 대답했다. 여전한 태도를 보던 루이즈가 조용히 손을 뻗어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그 끝을 잠시 매만지다 말했다. “그저 살기 위한 방법이 아닌, 왕으로서 살기 위한 발악이었다 말씀하셔야 맞지요. 전하께서는 지금의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운 마음에 일생을 비겁하게 사셨습니다. 차라리 저에게 제대로 벌을 내리고 전하께서도 이만 손을 놓으세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드리는 부탁입니다.” “루이즈. 나는 할 말을 모두 하였는데.” 이렇게 말한 데블란이 루이즈와 디에나 외의 이들에게는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미소를 지어보였다. “······ 알겠습니다.” 루이즈가 손에 들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 달칵.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대신 평온한 얼굴로 다른 말을 꺼냈다. “전하의 잘못을 낱낱이 기록한 자료가 있습니다. 잘 숨겼다 하셨겠으나 전하를 지켜본 왕비님과 제 기록이 남았습니다. 전하의 병세에 대해서도 함께 적어두었으며, 병을 고치기 위해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도 상세히 남겨 두었습니다. 그것을 본 귀족들은 더 이상 전하를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압니다.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으니 찾는다면 증거도 나올 것이라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나 그것을 안다 하여도 귀족들은 세자의 손을 잡지 못합니다. 세자가 누구의 편이 되어줄지를 믿지 못하여 엉뚱한 이들의 힘을 빌려오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닙니까.” 말을 멈춘 데블란이 잠시 생각을 해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라면 나의 피가 섞이지 않은 새로운 이를 왕으로 만들어야 할 터인데. 그 욕심 많은 이들이 과연 누구 하나를 왕으로 내세우겠노라 결정이나 할 수 있을까. 그들은 그렇게 움직이지 못합니다.” “괜찮습니다. 이제부터는 전하가 아닌 세자를 믿게 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만에 하나라도 저는 절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겠노라는 말도 덧붙여 두었습니다. 혹여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제 의지가 아님을 함께 써두었습니다.” 루이즈가 데블란을 바라봤다. 데블란은 말하지 않았고 루이즈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세자가 누구보다 저를 걱정하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이들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제가 전하의 손에 명을 다하면 세자와 전하는 완전히 갈라서게 되겠지요. 그 때에는 귀족들도 마음 놓고 세자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전하께서 그리 어리석다 하시는 귀족들도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전하의 죄를 무시하지 않고 전하의 병세를 알게 되고 세자를 믿기로 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하께서도 모르시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 루이즈.” “전하.” 루이즈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덫은 전하께서만 놓으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같습니다. 전하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제 것을 거는 방법은 저도 압니다. 전하께 배웠으니까요.” 데블란이 표정을 굳혔다. 루이즈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 전하의 또 다른 아들이 그러했듯이.” 왈칵. 붉은 것이 차올랐다. 루이즈와 체이스의 눈빛을 담은 드레스가 빨갛게 물들었다. * * * 세크리티아에 제온이 있다. 제온의 개입 덕분에 카이리스의 두 왕자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누가 또 언제 공격을 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탈히 잘 살아서 카이리스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세크리티아 왕궁이 아닌 별장으로 왔다. - 스승님. 잠시 이곳으로 와주셨으면 합니다. - 네. 그리하지요. 그리고 앨런을 불렀다. 언제나 그랬듯 앨런은 가타부타 묻지도 않고 칼리안의 말을 수락했다. 당연하겠지만 앨런이 오려면 발칸의 군단장 직위를 지녀서는 안 된다. 단순히 칼리안 왕자의 스승이자 카이리스의 후작이며 또한 세크리티아의 남작인 앨런 마나실로 와야 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어차피 서로간에 눈가리고 아웅인 것을 모르는 사실도 아니었으니 아르센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직위해제나 할 생각이었다. 칼리안의 생각은 그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 지금 바로 카이리스로 돌아가 주십시오. 세자 저하께서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테일란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얼굴을 보고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대신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테일란은 동요하고 있었다. - 린 영애가 들고 간 자료가 있습니다. 그것은 별장에 숨겨주시고, 잠시만. 영애와 함께 카이리스로 가주십시오. 보호를 부탁드립니다. 무언가 일이 생겼다. 고개를 든 칼리안이 사일런트 막이 여전한 것을 본 뒤 테일란의 말을 전했다. “카스트린 경입니다. 카이리스로 돌아가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리안느를 보호하면서요.” “무슨 일인데.” 칼리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테일란에게 질문했다. - 체이스 형님은 어디 계십니까. - 이곳에 저와 함께 계십니다만 지금 칼리안 왕자님과 대화하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제가 대신 말씀드립니다. - 지금 나는 운신이 어렵습니다. 무슨 일인지 정확한 설명 부탁합니다. - 귀족 세력 중 칼리안 왕자님을 공격한 이들이 있는 것 같다 하여 새들을 통해 조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마법사 협회와도 계속 연락을 취하고 계셨는데······. 익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체이스라면, 칼리안이 정확한 내용을 알려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돌아가는 정황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 후궁께서, 전하와 독대 중 음독을 하셨습니다. 손끝의 움직임이 멈췄다. 붉은 눈이 감겼다. 짧은 말이었으나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루이즈가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이해했다. 곧바로 이유를 찾아낸 머릿속을 저주하고 싶었으나 그에 상관 없이 칼리안의 머리는 착실히 움직였다. 상대방을 몰아세우려 일부러 독을 마시는 그 방법을 누구를 보며 떠올렸을지. 그것까지도. - ······ 상태는 어떠십니까. - 좋지 않습니다. 길어야 이틀에서 사흘이라 하였으니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하실 것 같습니다. 최악의 일이 벌어진다면 저하께서는 더 이상 주변을 살피지 않으실 겁니다. 저 역시 저하의 명을 기다리고 있으니 왕자님께서는 서둘러 세크레타를 벗어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칫하면 휘말리실 수 있습니다. - 잠시만. 카스트린 경.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 내가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주먹을 쥐었다. 그 손이 떨리는 것을 본 플란츠의 눈이 가늘게 변했고, 칼리안의 눈동자가 조용히 플란츠를 향했다. “히나가······ 필요합니다. 형님.” 그 말과 함께 내용을 전한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플란츠가 칼리안을 가로막았다. “지금 상황에 세크리티아 왕궁에 가면 데블란이든 제온이든 아우님을 얌전히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으실 텐데.” “막을 수 있습니다. 제가. 게다가 스승님께서도 오실 테니 이 이상 큰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고치고 나면. 그 뒤는.” 히나를 불러와 루이즈를 치료하면 그 뒤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제 몸 하나 건사 못할 상태가 되어서는 히나를 제대로 보호할 수 있는지를. 그것도, 가까이 히나를 두고 더 이상 침착하지 못할 데블란과 여전히 어디에 있을지 모를 제온을 곁에 둔 채로. “세크리티아의 상황을 잊지 않았습니다. 감안하고 움직일테니 그렇게 우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나실 후작도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처럼 꾸미고 올 것 아닌가.” “맞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왕자 둘이 아무것도 아닌 마법사들 줄줄이 끌고 뭘 얼마나 감안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감안하지 말고 대비하라는 말인데.” 힘 말고, 힘보다 더 큰 것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앨런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지내면서 습격자들에 대해 알아보고 체이스의 즉위를 돕다 돌아가는 것과, 당장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 앨런까지 동원하여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돌아가는 것은 완벽히 다른 문제였으니까. “가진 자리에 책임이 따르는 것만큼, 책임질 수 있는 자리가 가진 힘도 중요하다는 걸 가르쳐주신 분은 아우님 아니던가.” “······ 스승님께서 군단장 직함 달고 이곳에 오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엘프의 도시를 찾기 전에도 플란츠는 비슷한 말을 했었다. 물론 칼리안에게 배운 것이었으니 칼리안도 모르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자리가 높아지면 책임질 수 있을 범위도 늘어나지만 행동에 따른 여파도 커진다는 것에 있었다. 때문에 이제껏 아르센의 직위를 그렇게 멋대로 올렸다 내렸다 해가며 지내지 않았던가. “나 말고 마나실 후작이 군단장 직함을 달면 그렇게 되겠지. 내가 군단장 직위 잘 쓸 만한 자리에 오르면 되지 않나.” “형님.”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것을 되돌린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플란츠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제 알아들었다. 위협 받는 왕자를 도우러 온 제 3자 말고, 위협 받는 스스로가 높은 자리를 가지면 된다는 소리다. 관광이나 하겠다며 놀러 온 힘없는 왕자가 왕세자가 되면, 그리하여 칼리안과의 상황이 하루아침에 역전되면, 누구든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할 테니까. “아무리 란델 형님과 사이가 나쁘다지만, 너무 잊고 사시는 것 아닙니까.” 왕자 둘이 사라지고 발칸의 군단장과 부군단장이 전부 다 공석이 된다. 시오나가 잠시 왕궁의 안전을 살피겠으나 그것은 고작해야 르메인의 목숨을 보호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 그러니 만에 하나라도 세크리티아 왕궁으로 간 칼리안과 플란츠의 상황이 달라진다면 그 틈을 탄 란델이 가만히 있겠는가. 정확히는 란델과 줄이 닿아있는 그레이 브리센 후작이나 텐실을 뜻하는 소리였다. “그건 전하께서 알아서 할 일이지.” 그간 못해온 아버지 노릇 하느라 애도 쓰고 신경도 쓰고 머리도 쓰는 일은 르메인이 하면 된다. 어려울 것 없지 않나. “어차피 텐실 쪽 꿍꿍이도 알아 볼 생각인 줄 알았는데.” “이런 식은 아니었고요. 세자위는 발칸 제복과 왕자 정복 갈아입듯이 함부로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자리 아닙니다.” “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허튼 말씀 거두십시오. 자칫하면 형님 죽습니다. 왜······” “죽겠다는 게 아니라 살겠다는 거잖아.” 플란츠가 칼리안의 말을 뚝 잘라먹은 뒤 말을 이었다. “고양이 지키며 사는 것도 사는 방법이라고 내 아우님께서 얘기하셨지 않나.” “······ 그 고양이가 그 고양이는 아니었습니다만.” 플란츠가 시스파니안만 닮은 줄 알았는데 하츠아라의 피가 섞이기는 했나보다. 이성이 없는 것을 보니 알겠다. 루이즈에 대한 걱정과 커져만 가는 일을 감당해보려는 한숨이 칼리안의 입에서 길게 흘러나왔다. “형님께서 피하고자 하신 것을 굳이 하지 않으시더라도 방법은 찾을 수 있습니다.” “전쟁, 안 나게 할 거라며. 이번에는. 그럼 된 것 아닌가.” 이렇게 대꾸한 플란츠가 팔을 뻗었다. 그리고 칼리안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낚아채듯이 빼냈다. 플란츠는 그것 하나에도 제대로 대응을 못하는 칼리안을 보며 눈꼬리를 찌푸리다 앨런과 연결된 팔찌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거짓말 못하시는 아우님께서는 그만 짖고 가만히 계셨으면 좋겠는데.” 지금 짖는 것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된 칼리안을 보며 플란츠가 한쪽 입술을 쭉 끌어올렸다. “카밀론 가서 개 키우시도록 어련히 알아서 살려드릴 테니.” 칼리안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 * * 플란츠가 한 발을 뒤로 물렸다. 앨런으로부터 아주 조금, 거리를 두고 섰다. 칼리안과 앨런으로부터 만들어낸 작은 거리. 그 사이로 앨런이 허리를 살짝 숙여 예를 보인 뒤 말했다. “전하께서 세자위에 대한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오늘부터······.” “알아.” 플란츠가 잠시 칼리안을 쳐다봤다. 마뜩치 않은 얼굴로 플란츠를 보고 있던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였다. 곧 앨런이 칼리안의 곁에 다가가 보란듯이 망토를 여며주며 말을 건넸다. “몸도 성치 않으신 분께서 이렇게 추운 날에 나와계십니까.” 힘의 분산. 권력과 직위는 플란츠에게, 앨런은 칼리안에게. 이런 상황이 눈에 보이도록 하기 위한 행동이지만 그 걱정만큼은 진심이었다. 그것을 아는 칼리안이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 있기가 좀 버겁기는 하네요.” 이 말을 듣고 움직인 것은, 놀랍게도 앨런이 아닌 플란츠였다. 플란츠가 기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아우님께서 서 있기 힘드시다는데. 계속 세워 둘 셈인가.” “아무리 나라가 다르다지만 지금 자네들 일국의 세자 저하와 왕자님을 상대로 이것이 무슨 태도인가. 설마 지금껏 계속 이런 취급을 해왔는가.” 앨런이 한 소리를 더했다. 왕궁 앞에 나타난 붉은 로브의 마법사. 카이리스를 처음 찾았을 때와 달리 지금은 어둡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 특이한 머리 색이 아주 잘 보였다. 누가봐도 앨런 마나실이 아닌가. 갑작스레 등장한 대마법사로부터 질책을 들은 기사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안으로 모시겠다고 말씀을······.” “안 어디.” 플란츠가 말을 끊었다. “별관입니다, 플란츠 왕자님.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왕궁에,” “아니.” 또 말을 끊어먹은 플란츠가 기사들을 둘러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생각이 너무 짧군. 연약하신 내 아우님께서 별관까지 움직이기 힘드실테니 다른 쉴 곳이 필요할 것 같은데.” 시스파니안이시여. 축복의 힘은 역시 조금만 덜 사려깊었어야 했습니다. 아파서 말고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아요. “······ 참으세요, 형님. 저는 괜찮습니다.” 새 직위에 아주 잘 적응한 플란츠의 말에 간신히 한 손을 보태준 칼리안이 곁에 선 앨런에게 살짝 몸을 기댔다. 연기가 반, 정말로 서 있기에 힘이 들었던 탓이 반 섞인 모습에 앨런이 작게 혀를 쯧 찼다. “그리고 나는, 세자로서 이 왕궁에 다시 방문하게 되었으니 세크리티아의 국왕 전하께 인사를 드려야 되겠고. 지금 당장.” 카밀론 가기 싫다더니. 물 만난 생선이 따로 없다. 매우 오만방자해진 플란츠가 기사에게 계속 시비를 거는 사이 다시 한 번 체이스 쪽으로 연락을 시도했다. - ······ 칼리안. 그리고 비로소 답이 들렸다. 드디어 체이스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 몸은 좀 어떤지 걱정이구나. -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어머님은 어떠십니까. 체이스는 칼리안에 대한 걱정부터 꺼내놓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반갑다 말하는 대신 칼리안이 고개를 들며 말을 전했다. - 아직은 더 나빠지지 않고 있다만. 모르겠구나. - 괜찮으실 겁니다. 그러니 다른 생각 말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체이스가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안의 고개가 조금 옆으로 움직였다. 함께 왔던 카이리스의 기사들 쪽으로 눈을 둔 칼리안이 체이스를 달래듯 말했다. - 제가 왔습니다. 히나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