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이라는 것은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이 뭘 압니까』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국회청문회에서 무심코 한 말이다. 직장인, 샐러리맨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머슴이다. 나 역시 머슴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집사가 되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집사는커녕 내동댕이쳐진 머슴이 나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신의 축복을 받았다. 딱 절반의 축복을. 다 좋은데 왜 하필 막내냐고! [재벌집 막내아들] ======================================== [001] 머슴의 일생 1. “윤 실장님. 무슨 통화를 그리 오래 하세요?” 책상 위의 서류에 머리를 묻고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앞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지만, 최대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치 피곤에 쩔어 기운이 없는 것처럼. 가장 먼저 책상 끝에 맞물린 둥근 골반의 곡선이 들어왔다. 조금 위로 올라가자 잘록한 허리선이 보인다. 허리와 엉덩이를 잇는 저 예술적인 선. 캬-! 죽인다. 허리의 시작은 또 얼마나 대단한가? 분명 C컵 이상이 분명한 가슴 라인이 하얀 셔츠 위에 도드라져 있다. 저 아름답고 풍만한 가슴. 정말 딱 한 번만 쓰다듬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제 클라이맥스만 남았다. 가녀린 목과 어깨가 만나는, 통칭 어깨선. 누군가 화선지에 난을 치려거든 진짜 난을 볼 필요 없이 저 여인의 어깨선을 봐야 한다. 걸작이 나올 것이다. 마침내 내 눈에 들어오는 작고 가름한 아름다운 얼굴. 이토록 멋진 몸과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음에도 왜 연예인이 아닌 걸까? “실장님. 피곤한 척 그만하시고 빨리 3번 라인으로 전화하세요. 급히 찾으신다구요.” 조금 전 이삼 초는 천국의 시간이었지만 3번 라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응. 알았어. 금방 전화할게.” “빨리요. 급하신 모양이에요.” 다시 천국의 시간이 돌아왔다. 돌아서는 그녀의 뒤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짝살짝 드러나는 둥근 히프의 윤곽. 쭉 뻗은 탄탄한 허벅지는 타이트한 스커트를 찢어버릴 것 같았고 새하얀 종아리는 밀가루 반죽 같은 부드러운 질감을 드러냈다. 저 애와 한 번만 뒹굴어볼 수 있다면. 하지만 영원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저 애는 부회장의 비서. 평범한 비서가 아니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월세만 삼백이 넘는 주상복합에 살고 있고 페라리를 몰고 다닌다. 물론 주상복합도, 페라리도 법인에서 구입한 것이다. 임원도, 핏줄도 아닌 일개 비서에게 이런 혜택을 준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뻔했다. 부럽다. 젠장. 재벌 집 자식으로 태어나는 순간 세상의 미녀 절반을 주무를 수 있는 기회도 손에 넣은 것이다. “아차! 3번.” 급히 수화기를 들고 핫라인 3번을 눌렀다. 연결음이 끝나자마자 급하다고 한 것치고는 심드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논현동에 차 세워 놓은 거 있는데 정리 좀 해줘요.” 그리고 전화를 끊는다. 이 싸가지 밥 말아 먹은 새끼.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최 대리 지금 빨리 논현동 가서 차 어디 있는지 알아봐.” - 네. 그 넓은 논현동에서 차를 어떻게 찾을지 물어보지도 않는다. 당연하다. 이미 경찰과 구경꾼이 벌떼처럼 모여들었을 테니까. 부회장의 아들이자 회장의 손자인 이 개자식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뻔하다. 약을 빨았든, 낮술을 처먹었든 해롱해롱한 상태로 운전대를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도로변의 가게로 돌진했거나 가로수 혹은 가로등을 들이박았을 게 뻔하다. 물론 차를 내버려 둔 채 도망친 다음 내게 전화했겠지. 이런 일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니 최 대리도 척 하면 삼천리다. 사람을 치고 뺑소니 친 게 아니기만 빌어야 한다. 나는 재빨리 문자를 돌렸다. [순양그룹 윤현우입니다. 조금 전 발생한 논현동 사고는 별일 아닙니다. 잘 부탁합니다.] 각 언론사 사회부 기자들은 이 문자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안다. 사고의 경중에 따라 기자들의 주머니를 채울 돈다발의 두께만 차이 날 뿐, 그들이 목돈을 만진다는 것은 예정된 일이다. 그리고 고급 외제차의 뺑소니 사실은 논현동에서 직접 목격한 일반인들의 SNS에서만 화제만 될 뿐, 곧 사라질 것이고 언론에서는 단 한 줄도 찾지 못할 것이다. 삼십 분쯤 지나자 최 대리의 문자를 볼 수 있었다. [가구점을 들이박았습니다. 수리비 및 가구 피해보상으로 7천 요구하네요. 집행 바랍니다.] 웬수 같은 개자식. 들이박은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욱하는 지랄 같은 성질 때문에 부장급 연봉이 날아갔다. 니미, 신경 끄자. 어차피 내 돈도 아닌데 뭐. 정신없는 하루도 다 끝나간다. 오늘은 제시간에 퇴근하려나? 아내의 생일인데 이것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마누라에게 선물이라도 하나 안겨 줘야 가뜩이나 나쁜 관계가 더 심해지지 않을 건데 말이다. 하지만 내 바람대로 될 리가 없다. 기다렸다는 듯이 울리는 전화가 바로 그 증명이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수화기를 들었다. 회장님의 비서 실장 목소리가 들렸다. - 윤 실장. 사모님 쇼핑하신다니까 가서 거들어. “실장님. 백화점에서 수행할 텐데 굳이 저까지….” - 야! 뭔 말이 말아! 우리 백화점이 아니니까 그러는 거지. L 백화점 가신다잖아. 또? 어떻게 회장의 마누라라는 사람이 그룹 백화점보다 경쟁 백화점을 더 좋아하는지 미칠 노릇이다. “아. 네. 죄송합니다.” - L 백화점에 새로 입점한 이탈리아 브랜드가 있어. 거기 둘러보신다니까 미리 가서 대기해. 일반인 접근 확실하게 막고. “네. 실장님. 차질없이 진행하겠습니다.” 수화기를 던져버리고 싶다. 쇼핑백이나 들어주는 머슴이 되려고 대학교 다닌 것도 아니고, 개망나니 철부지 아들놈의 뒤처리나 하려고 스펙 쌓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업무를 거부할 용기도 없고 자존심도 없었다. 나는 솟구치는 화를 가라앉히며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사모님 도착하시기 전에 먼저 가서 대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 백화점 VIP 주차장으로 두 대의 승용차가 들어왔다. 일흔이 넘은 할머니지만 돈과 의학의 힘 그리고 본인의 엄청난 노력으로 만든 날씬한 몸매와 깨끗한 피부를 자랑한다. 투자한 돈과 노력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이 할머니는 몸에 짝 달라붙은 원피스와 부츠 차림이다. 같은 나이의 노인들이 부러워하고 본인은 자랑스러울지 모르지만 젊은 사람의 눈에는 기괴한 모습일 뿐이다. “어머, 윤 실장! 일찍 왔네?” 나는 아무 말 없이 머리만 조금 숙였다. 이 환한 미소가 잠시 후면 짜증으로 바뀔 것이라는 걸 무수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오늘 입점한 이탈리아 브랜드의 44 사이즈 옷이 조금이라도 몸에 낀다면 백화점을 발칵 뒤집어 놓을 성질머리 할머니다. 세 명의 남자경호원과 여비서가 앞장서서 들어가는 회장 부인의 뒤를 따른다. 여비서의 곁에 붙어 슬쩍 물었다. “처음 보는 친구도 있는데…. 누구야?” “쉿.” 그녀는 고개를 짧게 흔들며 눈을 찡긋했다. “아하.” 아이고, 색정광 마녀 같은 할매. 그새 남자를 또 구했다. 일흔이 넘었는데 성욕 왕성한 걸 보면 회장의 핏줄들이 여자 밝히는 건 외가 쪽을 닮은 게 분명하다. 대기 중이던 VIP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매장으로 곧바로 올라간 밝히는 사모님은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 냈다. “이것들이 일반인 출입을 그대로 놔뒀다 이거지? 내가 온다는 걸 알면서도?” 저 말은 나한테 하는 소리다. 젠장, 방금 연락받고 뛰어왔는데 정리할 시간이 어디 있다고. “금방 처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달려나가자 수행원들 역시 매장 직원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매장 매니저를 호출한 나는 소리부터 질렀다. “오늘 저분 오신다는 소식 못 들었어? 당신 제정신이야?” “그런데 누구신지…?” 매장 매니저는 잔뜩 겁먹은 표정이었다. 정장 차림의 건장한 사내들이 매장을 둘러싸고 척 봐도 돈 지랄을 할 것 같은 할머니가 도도한 모습으로 매장을 향해 걸어오니 그럴 만도 하다. “그룹 전략 본부 윤 실장이야. 저분은 순양그룹 회장 사모님이고. 일반인 출입 막으라는 지시를 내 손으로 내렸는데 몰랐다고 우기는 거야? 지금?” 이 방법은 늘 통한다. VIP에 대한 실수 한 번으로 매니저라는 직책은 날아가고 경력은 끝장난다. 평범한 일반 고객 백 명이 쓰는 돈을 단 하루 만에 쓰는 엄청난 큰손은 매장 매니저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 매장 매니저는 앞뒤 따지지 않고 머리부터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곧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매니저는 나를 순양그룹 사람이라는 생각조차 못 했다. L그룹의 고위직으로 철석같이 믿는 것이다. 결국, 동원할 수 있는 매장 직원 전부가 출입을 통제하자 우리의 사모님은 마침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부터 나는 좀 쉴 수 있다. 하지만 사모님의 여비서는 지금부터 모든 감각을 초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옷에 머무르는 사모님의 손길과 눈길, 시간을 정확히 파악해서 대령해야 하기 때문이다. 10여 분 만에 그녀의 손에는 딱 세 벌의 옷이 들려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괜찮아?” “컬러가 강렬해서….” “너 말고.” 매장 매니저의 품평을 단칼에 잘라버린 사모님은 새로 채용한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스터 김?” 김 씨 성을 가진 잘생긴 놈은 잔잔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제가 뭘 아나요? 사모님께서 걸치면 그냥 패션이죠.” 뭐? 걸치면 패션? 기가 차서 콧방귀가 나올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일흔 넘은 할망구가 강렬한 컬러의 옷을 걸치면 그게 패션이냐? 주책이지. 하지만 할망구는 젊은 남자의 칭찬에 한껏 기분이 업 됐는지 배시시 웃었다. 젊으나 늙으나 잘생긴 남자의 칭찬은 여성의 미소를 만드는 원동력이다. “한번 입어 보시죠.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그럴까?” 사모님은 젊은 놈의 권에 옷을 들고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미스터 김. 잠깐 도와줄래? 지퍼가 뻑뻑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옷 갈아입는데 남자를 불러? 여비서가 아니라?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미스터 김은 경호원이 아니라 사모님이 새롭게 장만한 장난감이라는 걸. ======================================== [002] 머슴의 일생 2. 장난감 미스터 김은 싱긋 웃으며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피팅룸에서 사모님의 애교 가득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잉, 그만해. 간지럽단 말이야.” 매장 직원들이 킥킥 대기 시작했고 여비서의 볼은 부끄러워 빨갛게 달아올랐다. 점입가경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기 시작한다. 피팅 룸에서 애교 섞인 목소리는 사라지고 더 야릇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흠… 아-! 허억…….” 얇은 배니어판으로 만든 피팅 룸이 조금 흔들리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 미친 할망구! 설마! 하지만 밝히는 할망구와 젊은 장난감 새끼가 저 좁은 피팅룸에서 떡 치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제야 왜 사모님이 갑자기 다른 그룹의 백화점을 기습적으로 방문한 이유를 알았다. 평상시라면, 명품 브랜드가 출시했다면 자택으로 부른다. 업체는 모든 옷을 차에 싣고 거대한 집의 거실에 디스플레이 하고 가운 차림의 사모님은 그 자리에서 고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오늘 백화점 매장을 직접 방문한 이유는 바로 짜릿한 순간을 보내기 위함이다. 새로 장만한 장난감 남자와 공공장소에서의 색다른 섹스를 즐기려는 음란한 생각이 불현듯 들었을 것이고, 지금 그 판타지를 현실로 옮기는 중이다. 젠장, 마누라 생일날 이런 추잡한 현장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한다니! *** 순양그룹. 연 매출은 400조에 육박하며 영업이익만 30조가 넘는다. 주식시장에 상장한 계열사의 시가총액 합계 역시 국가 예산을 훌쩍 넘는 440조7천억이며 유가증권시장에서 순양그룹이 차지하는 비중도 27% 수준이다. 자동차와 전자를 필두로 통신, 중공업, 화학, 유통, 패션, 식품 등 모든 산업 분야에 그룹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심지어 편의점, 떡볶이, 김밥집에 이르는 골목 상권까지 장악해 나가는 현시점에서, 한국 경제와 순양그룹은 공동 운명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 지 오래다. 이런 순양그룹이지만 그 출발은 금, 은 세공 기술을 배우던 가난뱅이 두 형제로부터 시작했다. 1920년대 초,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진순철, 진양철 두 형제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금은방에서 세공기술을 배우며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손재주가 뛰어난 형 진순철과 눈치 빠르고 셈이 빠른 진양철은 그야말로 환상의 콤비였다. 형 진순철은 정교한 세공이 가능할 때쯤 미량의 금가루를 빼돌렸고 동생 진양철은 그 금가루를 팔아먹는 루트를 개발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농사지을 땅을 알아보던 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만약 해방 전에 두 사람이 땅을 샀다면 아마도 오늘날의 순양그룹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평범한 농사꾼으로 한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해방과 동시에 시작한 적산(敵産) 불하(拂下)의 소식을 접한 동생 진양철은 자작농(自作農)의 꿈을 버렸다. 적산이란 해방 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떠난 재산을 뜻한다. 미 군정 및 대한민국 정부는 적산을 적당히 민간에 불하하였는데, 대표적으로는 적산가옥이다. 일본인들이 살던 집이라면 당연히 넓은 땅, 고급 가옥이었기에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진양철은 집이 아니라 창고를 불하받았다. 바로 조선미곡창고였다. 농사지어 쌀을 재배한 것이 아니라 살을 보관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무려 150만 석의 쌀을 보관한 조선미곡창고를 불하받았을 때 쌀의 재고량은 정확한 기록이 없었다. 해방이 되자 조선인들이 창고를 습격하여 쌀을 가져갔고 도망치던 일본인들도 그동안 쌀을 몰래 팔아먹은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재고 장부를 다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진양철이 노린 것은 바로 그 쌀이었다. 형제는 대한민국 정부가 쌀의 정확한 양을 파악하기 전에 재빨리 팔아 치웠고 엄청난 돈을 거머쥐었다. 그 돈으로 적산 가옥과 기업을 다시 사들였고 그것이 바로 순양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그 후로도 이문에 밝고 판단력이 빠른 동생 진양철은 미 정부의 원조금을 싼 이자로 정부로부터 빌렸고, 구호물자인 설탕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형은 불하받은 기계 회사를 기반으로 중공업의 기초를 다질 기술력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두 형제의 환상적인 콤비 플레이로 순양그룹은 급격히 성장했다. 하지만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않듯이 형제가 사이좋게 돈을 나눌 리 만무했다. 기술자와 장사꾼이 기업이라는 재산을 놓고 싸웠을 때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순양그룹의 모든 회계를 도맡아 하던 진양철은 형 진순철이 운영하던 회사의 결산을 조작했고, 군부 정권의 부정축재자 척결 대상이 되어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 후, 동생 진양철이 순양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하며 형제의 난은 끝났다. 진순철은 억울한 원한을 풀지도 못한 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자식들은 지금 어디서 사는지도 모를 만큼 잊혀진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진양철 회장은 순양그룹을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성장시켰고 7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남일녀의 자식과 12명의 손주를 남겼고 현재의 순양그룹 회장은 진양철의 장남 진영기(76세)다. 부회장은 바로 진영기의 장남 진영준(50세)이며 나는 부회장을 보필하는 미래전략기획본부의 일곱 명 실장 중 한 명이다. 나름대로 꽤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지만, 이미 눈치챘듯이 회장일가의 온갖 지저분한 일을 조용히 처리하는 소위 뒷간 청소, 똥 치우는 일이 주된 업무다. 하지만 무시하지 마시라. 비록 지금은 머슴과 다를 바 없지만 7만 순양 직원들 모두가 나의 위치와 업무를 부러워한다. 그들은 나보다 더 낮은 등급의 머슴 아니, 노예들이다. 그들은 노예로 살다 언젠가는 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쫓겨날 테지만 적어도 나는 머슴에서 집사로 승격할 기회라도 있다. 그리고 꼭 집사가 될 것이다. 비록 내가 지방대학 출신이지만, 순양그룹이 주관한 공모전에서 인력운용 방안에 관한 프레젠테이션으로 눈길을 끌었다. 순양그룹의 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 아버지는 친척들을 불러 조촐하나마 잔치를 벌였다. 지방에서 태어나 지방대학을 다녔으니 당연히 지방 사업장으로 배치받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세상에나! 거대한 순양그룹의 컨트롤 타워라고 일컬어지는 미래전략기획본부로 발령 났다. 없는 살림에 아버지는 또 한 번 잔치를 벌였다. “역시 순양그룹이야. 지방 촌놈이라도 인재를 딱 알아보잖아. 너희들도 알지? 미래전략 어쩌고 하는 곳은 바로 천하의 인재들만 모이는 곳이라고. 서울대 아니면 명함도 못 내미는 곳 아냐? 허허.” 감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아버지는 거나하게 취해 친척들을 향해 자랑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출근 첫날 알아버렸다. 왜 지방대 출신의 내가 컨트롤 타워에 들어왔는지……. 컨트롤 타워에도 청소부는 필요한 법이었다. 학벌 좋은 놈들은 자존심이 상해 버틸 수 없는 업무. 그래서 그런 일이라도 감지덕지할 놈들만 골라 뽑은 곳이 바로 미래전략기획본부 총무실이었다. 내게 떨어진 첫 업무는 바로……. “야! 잔디랑 잡초 구분도 못 해? 그리고 민들레는 꼭 뽑아. 그놈들은 순식간에 퍼진다고!” 내게 이런 호통을 내리는 자는 과장도, 실장도, 부장도 아닌 바로 회장님 저택의 정원사였다. 정원수를 다듬는 정원사는 총무팀 신입 사원 세 명에게 계속해서 잔소리를 퍼부었다. 난 정장 차림에 구두를 신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잡초를 뽑아야 했다. 결국, 입사 동기인 지방대 출신 두 명은 반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난 이를 악물었다. 몸으로 때우는 일을 벗어나 머리로 때우는 일을 맡을 때까지 고3 수험생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잡역부 역할도 마다치 않았다.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유학파 놈들이 지껄이는 영어를 완벽히 알아듣고 산더미처럼 쌓인 사업 기획서가 한눈에 들어올 때쯤 나도 머리를 쓰는 업무를 시작했다. 그제야 주변 사람들이 시선이 달라졌다. 항상 깔보던 표정 속에 경계의 눈빛을 담기 시작했다. 잘난 그들에게 없는 나만의 무기를 깨달은 것이다. 내 집처럼 드나들던 곳이 바로 회장님 일가의 집이다. 로열 패밀리 중 내 이름 윤현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들이 아쉬울 때 항상 찾는 이름이 바로 나였다. 또한, 나만큼 로열 패밀리의 감춰진 진면목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입사 8년 만에 실장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했고 입사 12년이 지난 지금, 부회장이 포장마차에서 닭똥집에 소주 한잔 걸치고 싶을 때 옆자리에 앉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측근이 되었다. 내 나이 마흔, 앞으로 10년 안에 머슴에서 집사로 탈바꿈하겠다는 내 목표는 허황한 꿈이 아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집사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왔다. “윤 실장. 출장 좀 다녀와야겠다. 갑작스럽지만 준비 좀 해.” “네. 부회장님. 그런데 제가 내용을 몰라서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몰도바.” 비자금 문제다. 아직 내 손으로 직접 돈을 만진 적은 없지만, 서류로 드러난 숫자는 훤히 꿰고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검찰에서 해외 유출자금 내사 들어갈 거야. 일주일 뒤부터 시작한다는 정보 들어왔어. 계좌 트고 전액 인출해서 지네 계좌로 옮겨.” “제가 말입니까?” 믿기지 않았다. 조용히 서류만 전달하는 게 아니고 천문학적인 돈에 내 손을 담그라고 하다니. 몰도바에 묻어둔 돈은 조 단위다. 내가 기억하는 숫자만 10억 달러에 육박한다. 1조 원이 넘는 돈이다. 이 돈을 내 명의로? “내가 마누라는 못 믿어도 현우 넌 믿잖아. 그 자금, 잠시 맡을 사람은 너뿐이야.” 부회장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 빙긋 웃었다. “왜? 그 돈 들고 튀려고? 자네 명의로 바꾸고 쬐그만한 유럽 어느 구석에 짱박히면 자넨 귀족 행세하며 살 수 있으니까?” “그럴 리가요. 농담이 과하십니다.” “아무튼, 인출한 다음 푹 쉬다가 내가 지시 내리면 버진아일랜드 내 계좌로 옮겨. 검찰 수사는 사라진 자금으로 종결 치기로 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 자네 가족한테도. 그냥 출장이라고만 해. 몰도바라는 소리는 꺼내면 안 되는 거 알지?” “물론입니다.” 부회장실을 나오자 꽃 같은 그녀가 서류봉투 하나를 전해준다. “출장에 필요한 건 그 속에 다 있어요. 아, 부럽다. 몰도바라니!” “생각 있으면 같이 갈까? 난 언제나 환영인데….” “풋. 꿈 깨시죠. 전 일등석으로는 안 돼요. 전용기라면 몰라도.” 맞다. 부회장과 함께 전용기 타고 돌아다니는 여자다. 현우야, 꿈 깨자. 다음날, 대한항공 일등석에 당당히 올라타고 몰도바로 향했다. ======================================== [003] 머슴의 일생 3. 오스트리아 빈을 경유해서 16시간의 비행을 끝내고 몰도바의 키시너우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실장님. 고생하셨습니다. 피곤하시죠?” 갑자기 등장한 두 사내. 비서실 직원이다. 터질듯한 흰 셔츠 밑에 감춰진 근육. 날카롭고 싸늘한 눈빛. 이놈들이 왜 몰도바에서 날 기다리는 걸까? 순간, 다리에 힘이 쫙 빠지며 휘청거렸다. 부회장의 말은 모두 사실이다. 딱 하나만 제외하고. 검찰 수사는 사라진 자금으로 종결 친다는 부회장의 말. 약간 바꿔야 한다. 해외 자금은 순양그룹 미래전략기획본부 윤현우 실장이 인출한 뒤 사라졌다. 그 자금은 그룹 오너 일가가 회사 돈을 빼돌린 것이 아니고 그룹 차원에서 몰도바 인프라 구축 사업에 투자할 예정이었던 자금이었고…. 블라블라블라……. 이것이 바로 검찰의 발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세간의 관심이 사라지면 아주 작은 하단 기사 하나가 뜰 것이다. 전 순양그룹 윤현우 실장, 마약 복용 과다로 사망. 프랑스 남부 해안가에서 발견한 신원 미확인 사체는 윤현우 씨로 밝혀졌다. 블라블라블라……. 나를 마중 나온 두 사내는 결국 내 심장에 칼을 꽂든, 몰도바에서 사들인 총으로 내 머리를 날릴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무려 13년이다. 13년을 개같이 일하며 충성을 다했는데 이렇게 버려지다니! 그것도 죽음으로 말이다! 부회장이라는 직책의 장남이 회장에 오르면 최소한 본부장 이상의 타이틀을 거머쥘 것으로 생각했다. 운 좋으면 계열사 부사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달콤한 꿈까지 꾸었다. 하지만 머슴이 집사가 된다는 건 결국 꿈으로 끝났다. 하인이 집사가 되는 것도 집안과 출신 성분이 받쳐줘야 했다. 머슴은 영원한 머슴이다. 조선 시대를 끝으로 신분제가 사라진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월급쟁이는 아니다. 이젠 핏줄이 아닌 학벌과 인맥이라는 새로운 신분제로 바뀌었을 뿐이다. 젠장. 머슴도 유서 깊은 학교 출신으로 태어나야 하는 이 더러운 세상. 참 좆같다. *** 두 사내의 살벌한 눈길을 받으며 호텔에 짐을 풀었다. “실장님. 내일 아침 은행 문 열 때까지 푹 주무시죠.” 비행기에서 한숨도 못 잤다. 드디어 집사 신분으로 승격했다는 감격과 꽃길로 펼쳐질 미래를 상상하느라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 호텔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 아침이면 치열하게 살았던 이 인생도 끝이라는 생각에 공포가 밀려왔다. 서너 시간을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지만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깊은 밤이다. 함께 투숙한 비서실 직원, 아니 해결사들도 깊이 잠들었을 것이다. 살아나려면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나는 지갑과 여권만 챙겨 들고 호텔방문을 열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가는 데 익숙한 한국어가 들렸다. “실장님. 어디 가십니까?” 또다시 현기증이 났다. 이놈들은 절대 나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아, 바에서 술 한잔하려고요. 시차 때문인지 영 잠이 안 오네.” “그러시죠. 저도 한잔해야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술친구 해 드릴 테니까요.” “괜찮습니다. 쉬세요. 금방 돌아올 겁니다.” 그놈을 향해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웃었을 때 그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봐요. 아저씨. 이미 눈치 갔을 텐데? 여기까지 와서 연극 하는 건 때려치우지. 머리 좋다고 소문났더구먼. 알잖아, 내일이 바로 당신 제삿날인 거?”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이야. 내 죽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직접 저놈의 입에서 들으니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도망갈 생각 말고 방에서 푹 자. 마사지 아가씨 불러줄 테니까 마사지 받고 떡이나 좆나게 쳐. 남자 인생 뭐 있어? 마지막 날 빠구리나 실컷 하는 것도 복 받은 거야. 어서 돌아가.” 노골적으로 나오니 나 역시 노골적으로 말했다. “이봐. 이야기 좀 하지? 당신들에게도 좋은 일이 될 거야.” “왜? 여기 은행 돈 찾아서 나눠 가지자고?” 이런 니미럴. 내 생각을 다 읽고 있다니. “아니. 당신들 다 가져. 내가 찾아서 전부 준다. 일조 원이 넘어. 당신들 인생이 바뀌는 거야.” “크하하. 이거 참. 점쟁이가 따로 없구만.” “뭐? 무슨 뜻이야?” “회장님이 그러시더라고. 당신이 분명 이 말 할 거라고.” 회장님이? 그럼 날 희생양으로 고른 게 부회장이 아니고 회장이란 말인가? 회장이 임신시킨 여자들을 데리고 낙태 수술 병원까지 들락거린 게 바로 나다. 일개 나가요 아가씨에게 뺨까지 맞아가며 정리한 게 바로 나다. 그가 싼 똥을 치워준 것만 생각해도 살려줘야 마땅한 거 아닌가? 사내가 멍한 내 표정을 보며 말했다. “아저씨. 일조 원? 그거 가지고 뭐해?” “당신, 일조 원이면 개인 비행기 타고 다닌다고. 차고에 수억 원짜리 스포츠카를 일렬로 세워놓고 요일별로 탈 수 있는 돈이야.” 화려한 생활을 말해도 그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이래서 머리 좋은 놈은 마지막에 헛다리 짚는 거야. 잘 들어 아저씨. 내 연봉이 이억이야. 회사에서 벤츠도 한 대 줬어. 물론 40평짜리 아파트도 줬고. 내 나이 이제 서른셋이야. 이 정도면 남부럽지 않은 사나이 인생이야. 내가 뭘 더 바랄 것 같아?” “이…. 이 멍청한 새끼….” “우리가 좀 멍청하긴 해. 하지만 삼키지 못할 떡을 넘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아.” “야 이 개새끼들아. 내가 회장님 돈을 넘봤어? 내가 뭘 잘못했어? 이건 그냥 심부름꾼 죽이는 것일 뿐이라고.” 호텔복도가 떠나갈 듯 소리쳤지만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소리치지 마! 우리도 안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우리도 머슴일 뿐이야. 쇠경받는 만큼 밥값은 해야지. 그만해라.” “회장님과 통화 한 번만 하자.” “꿈 깨라. 실장급이 어디 감히.” “그럼 당신들이 통화해. 시킨 일 끝내고 나 잠수탄다고. 남미나 동유럽 구석탱이에 짱박혀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을 거야. 제발 한 번만 도와주라.” “거참 남자 새끼가 구질구질하게. 그만하자.” 사내는 깊은 밤에 떠드는 게 귀찮은지 쐐기를 박았다. “딴생각하지 말고 쳐 자라. 부모님 생각도 해야지.” 한 단어가 비수가 되어 내 심장에 박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주저앉아버렸다. 저놈들은 인질을 잡고 있다. 그것도 확실한 인질을. 이놈들은 나의 생활을 정확히 알고 있다. 아내와는 딱히 좋은 부부 관계가 아니다. 순양그룹의 핵심 부서에 일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내 명함에 반한 여인과 결혼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내 업무의 본 모습을 알게 되자 노골적인 경멸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이가 없는 이유 역시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비록 남편과 아내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인 자리에는 웃으며 함께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집에서는 남남이나 다름없다. 단지 각자의 의무만 다할 뿐이었다. 나는 월급을 줬고 아내는 식사와 빨래, 집 안을 청소하는 아줌마와 다를 바 없었다. 우리는 차마 꺼내지 못했지만, 각자의 마음에는 이혼이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리는 사이였다. 그런 아내보다 부모님이 훨씬 더 확실한 인질이다. 몰도바에서 내가 모든 걸 뒤집어쓰고 죽지 않으면 부모님이 죽는다. 교통사고, 화재 아니면 행방불명. 더는 선택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맥빠진 내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거 봐, 내 말대로 마사지 걸 불러 떡이나 쳤으면 좋잖아? 이제는 어른 걱정에 좆도 안 서지? 긴말 않는다. 가서 자라.” *** 다음날, 시체 같은 내 모습을 보며 두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야. 기운 내라고. 일조 원 재산을 가진 부자의 몰골이 그게 뭐냐?” 이젠 되받아칠 말 한마디 할 기운도 없다. 나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은행으로 들어섰다. 가능하면 CCTV에 선명하게 잡히도록 얼굴을 이리저리 돌렸고 전자 계좌의 상징인 얇은 마스터 카드를 들고 나왔다. “고생했다. 너의 공로…. 아니 너의 목숨값은 후하게 쳐주신다고 했어. 네 가족 걱정은 마라. 부모님께는 후한 보상금을 드릴 거고 마누라는 미국으로 가서 별 탈 없이 살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실 거다.” 끝까지 헛소리다. 비리를 저지른 직원 가족에게 그런 특혜를? 내 퇴직금은 당연히 주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재산 압류 소송을 걸어 땡전 한 푼 남기지 않을 놈들이다. 남에게는 절대 인심 쓰지 않는 것이 재벌이라는 놈들의 특징이다. 열심히 일하다 재해를 입은 근로자에게 단돈 백만 원 주는 것도 아까워서 난리 치는 모습,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양쪽에서 나를 에워싼 두 놈이 이끄는 대로 한적한 바닷가로 이동했다. 이곳이 바로 내 무덤인가? 아니면 눈이 시리도록 푸른 저 바다가 내 무덤일까?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다 등을 돌리니 한 놈의 손에 들린 권총이 보였다. 모든 걸 포기했으니 담담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다. 하지만 권총을 보는 순간 생명에 대한 마지막 본능이 꿈틀거렸다. 나도 모르게 그놈의 발아래 무릎 꿇고 매달렸다. “제발, 부탁이야. 살려줘. 제발!” “너 혹시 원티드라는 영화 봤어?” “어차피 난 한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잖아. 이곳…… 아니 남미나 아프리카 오지에서 평생 짱박혀서 살게. 넌 날 죽였다고 보고하면 되잖아.” 무릎 꿇고 앉아 빌고 또 빌었지만, 저 빌어먹을 새끼는 계속 딴소리다. “안젤리나 졸리가 섹시하게 나왔던…. 그 영화 주인공은 사람을 죽일 때 꼭 이 말을 하더라고. 아이엠 쏘리.” “내가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잖아. 그냥 행방불명이면 충분하잖아! 씨발!” “그래서 나도 꼭 한번 써먹고 싶었어.” 빌어먹을 새끼는 총구를 내 머리에 겨누었다. 니기미. 죽기 전 마지막으로 들어야 하는 소리가 바로 이딴 영화 대사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I Am Sorry." 탕-! ======================================== [004] 재벌 총수의 생일 1. “으헉!” 또 같은 꿈이다. 딱 석 달 전에 있었던 일을 매일 밤 꿈으로 되풀이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두려웠던 죽음의 순간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잠에서 깨야 하다니. 와신상담도 아니고 이게 무슨 꼴인지……. 이 꿈을 평생 되풀이하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6시 10분 전. 6시에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기 전 스위치를 끄고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와 잠옷을 벗었다. 내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빠르게 샤워를 끝냈다. 교복으로 갈아입고 침실을 나섰다. 맞은편 침실에 처자는 형이라는 놈은 아직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삼십여 개의 계단을 지나 거실에 내려오니 시원한 콩나물 국 냄새가 가득했다. 주방에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부지런히 아침을 준비 중이었다. 콩나물 국은 아침 메뉴에서 빠지지 않는다. 아버지라는 놈이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퍼마시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새파란 잔디가 초여름의 햇살을 빨아들이며 반짝였다. 정원에 떨어져 있는 신문 세 부를 주워들고 조용히 이 층의 침실로 다시 돌아왔다. 경제지 하나와 종합 일간지 두 부를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신문 일 면은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데모 사진이 큼지막이 박혀 있었다. 1987년 6월 26일. 오늘도 데모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29일, 제5 공화국의 대통령이 항복 선언을 할 때까지. 광고까지 전부 읽고 신문을 고이 접었다. “도준아.” 인기척을 느꼈는지 일하는 아주머니가 우유와 커피 한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내 방문을 두드렸다. 석 달째 듣고 있는 나의 이름. 진도준. 아직 익숙하지 않다. “안 가져 오셔도 돼요. 내려가서 먹으면 되는데…….” “이그, 우유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잖아. 커피도 가져왔어. 부모님 보시면 난리 날 테니까 얼른 마셔.”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커피를 홀짝거리는 내 모습을 아주머니는 기특한 듯 지긋한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변해버린 날 무척이나 좋아한다. 철딱서니 없는 열 살짜리 꼬마. 툭하면 식탁에서 떼쓰고, 집안일 하는 어른들에게 막 대하는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부잣집 막내가 180도 변했다. 어른에게 항상 존댓말을 하며 늘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반찬 투정은커녕 주는 대로 한 그릇 뚝딱 해치우며 방 청소도 직접하고 틈틈이 집 안 청소도 도와준다. 열 살짜리 꼬마의 의젓함이 어찌 예뻐 보이지 않을까? “참, 오늘 회장님 생신인 거 알지? 저녁은 회장님댁에서 먹을 테니까 그리 알고 있어.” “네. 기억해요.” 아주머니는 싹 비운 커피잔과 우유 잔을 든 채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나갔다. 접어놓은 신문까지 챙겨 들고. 드디어 오늘이다. 진도준이라는 10살짜리 어린애가 된 뒤 딱 삼 개월 만에 순양그룹의 창업주 진양철을 만난다. 전생에서는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었지만, 오늘은 숱한 전설을 남긴 그를 직원이 아닌 막내 손자의 신분으로 한 식탁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66세의 할아버지와 10세의 손자. 몰도바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머리에 총알을 박은 채 죽음을 맞이하고 날 죽이라고 지시한 집안의 10살짜리 막내 손자로 환생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신은 내게 복수의 기회를 준 것일까? 아니면 같은 피를 나눈 가족이니 용서하라는 뜻일까? ***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아침 식탁이었다. 끊임없이 조잘대던 12살짜리 나의 형 진상준은 입도 뻥긋하지 않고 밥만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술이 덜 깬 아버지 역시 콩나물국의 국물만 조금씩 떠 먹을 뿐이었다. 그리고……. 오! 어머니.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부회장의 비서였던 그 아름다운 여인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던 나의 어머니! 공교롭게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스타 올리비아 핫세와 동갑인 나의 어머니는 한국의 올리비아 핫세로 불리며 혜성같이 등장한 스타였다. 1970년대 초, 단 한 편의 영화로 스타 반열에 오르며 트로이카 여배우 시대의 스타트를 끊었지만, 그녀의 팬이었던 한 남자의 열렬한 구애를 받아들여 결혼에 골인했고 스크린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이 행운의 주인공인 남자는 바로 나의 아버지이자 순양그룹 창업주 진양철 회장의 5남 진윤기였다. 두 사람은 세기의 결혼 주인공이었다. 이 당시 순양그룹은 계열사의 확장을 시작하며 그룹의 초석을 다지는 단계였고 특히, 순양전자가 출범함으로써 본격적인 일본 따라잡기를 시작하는 시기였다. 비록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고 스타였지만 순양그룹의 시선에는 단지 광고모델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평범한 집안의 여자다. 몇 번 데리고 놀기에는 딱이지만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광고모델은 집안이 아니라 호텔로 데리고 가야 한다. 당연히 진양철 회장은 불같이 노했고 족보에서 빼버린다고 길길이 뛰었지만, 배 속에 들어있는 생명의 씨앗 때문에 어쩔수 없었다. 여기까지는 내가 과거의 언론 기사를 통해 파악한 내용이다. 업무상 회장일가를 속속들이 파악했어야 하니까. 그리고 내 경험으로 아는 것도 있다. 이들 가족은 집안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들 가족의 일 때문에 시간을 쪼갠 적이 없다. 그룹 차원에서는 이들을 관리하지 않았다. 그저 죽은 듯 바짝 엎드려 지냈을 뿐이다. 내가 이들 부부를 대단하게 생각한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창업주인 아버지의 미움을 한몸에 받고 창업주가 죽은 후 장남이 그 자리를 승계할 때 막내 동생인 내 아버지에게는 정말 쥐꼬리만큼 지분을 상속했다. 다른 형제들이 순양그룹의 지분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똥 밭의 개처럼 싸웠지만, 이들 부부는 그 싸움에서 멀찍이 떨어져 그들만의 삶을 지켜나갔다. 물론 한국 최고의 재벌이니 쥐꼬리라고 해도 일반인은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이 부부는 욕심이 크지 않다는 사실이다. “도준아.” “네?” “왜 그렇게 놀라?” 아직 삼십 대 중반이다. 미모가 여전하다. 그런 아름다운 얼굴을 가까이서 보니 여전히 쑥스럽다. 언제쯤 익숙해질까? “아, 아니에요.” “풋. 이거, 우리 도준이가 너무 어른스러워져서 엄마가 더 놀래.” 석 달 전, 죽음에서 깨어났을 때-이보다 더 나은 표현은 아직 찾지 못했다- 30년 전의 과거로 돌아온 것도 모자라 내가 순양그룹 창업주의 막내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다시 죽을 것 만큼 놀랐다. 시간이 지나며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단지 생물학적 부모인 두 사람에게 쉽사리 친근함을 드러내는 건 불가능했다. 아버지의 나이가 지금 서른여덟이다. 전생의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다. 차마 아빠, 엄마라고 부르기도 힘들었지만, 지금은 가까스로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갑자기 변해버린 아들이다. 깍듯한 호칭과 존댓말이 어색한 열 살짜리 아들이 놀랍기도 할 것이다. “난 안 갈 거야!” 갑자기 숟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형이라는 놈의 주둥이가 댓발이나 나왔다. “진짜야. 안 갈 거라고!” 요놈은 또 왜 심통인가 생각하니 대충 짐작이 갔다. 부모님도 표정이 굳어졌지만, 야단치지 못했다. 이놈, 할아버지가 무서운 게 틀림없다. 하긴…. 다른 재벌과 정략결혼을 해야 할 아들이 한낱 여배우와 결혼하겠다고 할 때 마지못해 허락한 원인이 바로 요놈이다. 어찌 고운 눈으로 바라보겠는가?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밥상머리 예절이 이따위라는 건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난 요놈의 부모도 아니며 그 심정을 이해할만한 같은 또래도 아니다. 그리고 요놈의 버릇을 고쳐 놔야 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창업주 할아버지가 요놈 때문에 나까지 괄시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상준아. 아빠가 약속할게. 밥만먹고 빨리 돌아올거야. 괜찮지?” 아버지는 부드러운 말로, 어머니는 미안한 표정으로 큰아들을 달랬지만 요 꼬맹이는 한동안 더 칭얼거렸다. 만약 등교할 시간이 아니었다면 내가 먼저 폭빌했을 것이다. 요 새끼. 학교 다녀와서 보자. 운전기사가 모는 대우 자동차의 고급 세단 뒷좌석에서 나의 철없는 형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침울하게 앉아있었다. 우리 형제가 다닌 국민학교는, 지금은 초등학교로 바뀌었지만, 이른바 좀 사는 정도 수준의 부자와 순양그룹 같은 재벌가와 명문가라 불리는 고위관료, 법조인의 자식이 득실대는 명문 사립학교였다. 미래의 회장, 사장들과 미래의 국회의원, 장관들이 동문이며 동창이다. 이들과의 친분 정도가 얼마나 깊냐에 따라 미래가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최대한 튀지 않고 사교성을 발휘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스쿨버스 대신 자가용을 타고 통학하는 아이들은 일부러 교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 걸어왔고 ‘잘난 척하지 말라’, ‘튀지 말라’는 의식이 교사와 학생 사이에 공유했다. 하지만 이 학교의 어린 꼬맹이들도 곧 깨달을 것이다. 자신들은 태어날 때부터 돈과 권력을 물려받을 수 있는 축복받은 존재라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타인 위에서 군림하려 할 것이다. 재수 없는 놈들. 아무튼, 오늘은 학교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순양그룹 창업자와 내가 모시던 놈들의 젊고, 어린 시절의 모습이 무척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할 놈부터 마주했다. “야! 누가 맘대로 들어오라고 했어? 나가!” 오락실에서나 볼 수 있는 큼지막한 게임기가 세 대나 떡하니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고 침대 위에는 소형 게임기의 전설인 닌텐도의 패미컴이 뒹굴고 있었다. 투덜이 형은 오락실 게임기 앞에서 열심히 단추를 누르며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소리쳤다. 요놈 자식. 잘 됐다. 기회도 완벽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놈의 뒤로 다가갔다. 그놈이 앉아있는 의자를 걷어차니 바닥에 뒹굴었다. “야! 너…!” “아가리 닥쳐, 이 새끼야!.” 그놈의 명치를 지긋이 한번 밟아주니 입도 벙긋하지 못한 채 바둥거렸다. 나는 형의 머리채를 잡고 욕실로 끌고 들어갔다. *** “도준아! 손이 왜 이래?” 벌겋게 부어버린 내 손을 보고 화들짝 놀란 어머니가 소란을 피웠다. 얼음찜질과 크림을 바르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괜찮습니다. 샤워기 틀면서 실수해서…. 뜨거운 물이 조금 튀었어요.” “이게 튄 거니? 아휴, 화상 입은 거면 어떡해?” 결국, 주치의까지 급히 달려와 별일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서야 한시름 놓은 것 같았다. 내 손이 문제없다면 겁먹은 표정으로 날 보는 형 상준이도 화상을 입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긴 옷을 입은 몸에 뜨거운 샤워기로 겁을 줬으니 나보다 훨씬 경미할 것이다. 끽해봤자 사우나 열탕 수준의 온도니까……. 하지만 곱게 자란 열두 살짜리에는 공포였을 것이다. 지금껏 그 누구도 자신을 이렇게 함부로 대한 적이 없었을 테고 물리적인 폭력을 견뎌낼 만큼 정신이 여물지도 않았다. 물론 두 번, 세 번 갈수록 약발이 약해져서 대들기도 하겠지만, 어린애 하나 굴복시키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 아닌가.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여보, 당신이 직접 운전하게?” 어머니는 운전석 문을 여는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응, 술 안 마실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평창동에서 술 마시는 거 봤어?” 평창동. 내가 부모님 집보다 더 자주 들락거린 곳이다. 진양철 창업주가 죽고 장남인 진영기 회장이 차지한 집. 입사 후 첫 업무였던 잡초를 뽑은 곳이기도 하다. 그때는 정말 하찮은 머슴이었는데 지금은 주인의 핏줄이다. 마치 자수성가 후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 [005] 재벌 총수의 생일 2. 뒷좌석에 앉은 나와 형은 평창동에 도착할 때까지 아주 얌전히 있었다. 나야 감회가 새로워서 그랬고 나의 형은 내 눈치를 보느라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두 아들의 침묵에 부모님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도대체 이들 가족에게 평창동은 어떤 의미일까? *** 대지면적 1,100평 네 개의 건물. 지상 2층, 지하 2층 주차대수 50대. 담장 둘레 380m의 거대한 성. 이곳이 바로 순양그룹의 창업주이자 총수인 진양철 회장의 저택이다. 높은 담과 빼곡한 조경수는 외부의 눈길을 차단한 철옹성을 연상케 했다. 거대한 대문 옆 작은 초소에 대기 중이던 두 명의 경비원이 거수경례까지 붙이며 문을 열자 승용차는 미끄러지듯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열심히 잡초를 뽑았던 너른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고 초여름 날씨를 즐기려는 듯 이미 많은 손님들이 그 정원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중앙의 본관은 초록의 정원과 어울리는 하얀색이다. 우리 가족은 차에서 내려 본관으로 걸어갔다. 손님들은 우리 가족에게 가벼운 묵례를 보였지만 그마저도 몇 명 되지 않았다. 대부분을 우리를 힐끗 본 뒤 무시하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나는 최대한 그들을 살펴보며 누군지 기억을 더듬었지만 한 세대 전의 인물들이고 내가 기억하는 얼굴은 30년 후의 모습이라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저들 중 누가 총수의 최측근인지 알아내야 하는 숙제를 떠안은 기분이 들었다. 활짝 열어놓은 현관을 통해 거실로 들어갔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회장의 미움을 한몸에 받는 우리 가족. 어떤 일이 생길까? 정원의 손님들처럼 단 한 명도 눈길을 주지 않는 건 아닐까? 혹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완벽한 외부인취급을 받는 건 아닐까? 거실의 소파에는 이미 여덟 명이 앉아있었다. 굶주린 늑대와 여우. 바로 나의 큰아버지들과 고모, 큰어머니들과 고모부다. 순양이라는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이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아버지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탐욕의 화신들. 장남 진영기 차남 진동기 삼남 진상기 그리고 유일한 딸인 진서윤. 이들의 날카로운 눈길을 피하는 막내아들이자 나의 아버지인 진윤기. 어색한 침묵이 조금 흘렀을 때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희 왔어요.” 어머니의 허리가 90도까지 내려갔을 때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분 바르던 시절 버릇 남았어? 스타야? 왜 항상 마지막에 나타나?”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백화점 피팅룸에서 젊은 놈팽이와 떡을 치던 그 할망구다. 물론 지금은 사십 대의 나이라 아직 봐줄 만했지만 내 눈에는 30년 뒤의 모습이 어른거려 어쩔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풋. 킥킥.” 당황한 아버지가 잡은 손에 급히 힘을 주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웃어? 지금 웃은 거야?” 표독스러운 얼굴로 눈꼬리가 올라가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큰어머니.” 나는 웃음을 거두고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너 방금 웃었지? 어디서 감히…. 어른 말씀하시는데….” “그만하지? 애한테 지금 뭐하는 짓이야?” 큰아버지인 진영기가 자신의 아내를 나무랐지만, 오히려 화를 더 돋울 뿐이었다. 씩씩거리는 모양새로 봐서는 내 머리라도 쥐어박을 것 같았다. 이거, 첫 대면치고 영 엉망이다. “내 집에서 누가 큰 소리를 내는 거냐?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모두의 시선이 소리 나는 곳을 향했다. 이 층 계단 위에 서 있는 노인. 바로 순양그룹의 지배자이며 내 할아버지인 진양철 회장이었다. 철면(鐵面). 자기주장대로 꼭 하고야 마는 강철 같은 정신력이 얼굴에 드러난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다. 친형을 쫓아내고 회사를 독식한 냉정함이 드러난다고 해서 철면이라 말하는 이도 있었다. 별명이 뭐든 어차피 나는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다. 하지만 왕의 등장에 왕자들과 공주는 얼어붙었다. 자식들마저 두려워하는 사람. 물론 그 두려움의 원천은 그가 가진 돈이다. 그 돈을 물려받지 못할 때 펼쳐질 미래. 다른 형제가 가져갈 자신의 몫. 재벌가의 신분을 유지할 수 없을 때의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이 뒤엉켜 친아버지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진양철 회장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거실 한가운데 섰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황제는 우리 가족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곁눈질로 부모님을 힐끔 보니 두 분은 이미 극도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말없이 허리만 숙이며 인사했지만 진양철 회장은 막내아들 부부를 향해 차디찬 눈길만 주었을 뿐이다. 그의 시선이 형인 상준이에게 향했을 때는 마치 벌레를 보는듯한 눈빛으로 변했다. 이제 내 차례다. 또 다른 벌레 한 마리로 취급할까? 아니면…? 잔뜩 긴장한 나는 회장님의 반응에 놀라 입이 벌어졌다. “아이고, 우리 새끼. 이게 얼마 만이냐. 자주 놀러 오라는 할애비 말, 어디로 흘려들은 게냐?” 철면이 사라지고 인자한 보통의 할아버지 표정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진양철 회장이 아예 자식으로 취급하지 않는 나의 부모다. 그런데 왜 내게는 이런 자상한 모습을 보일까? 우리 부모는 그룹 관리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나는 나와 회장님의 관계를 전혀 모른다.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하고 판단할 시간도 없었다. 이미 나를 덥석 끌어안고 번쩍 들어버리는 회장이었다. “자, 내가 우리 강아지한테 줄 게 있는데 궁금하지 않니?” 젠장, 이게 어떻게 굴러가는 시추에이션인가? *** 회장이 날 데리고 간 곳은 이 층의 조그만 방, 물론 이 집의 규모에 비해 작은방일 뿐 웬만한 소형아파트 평수와 맞는 방이었다. 그 방 한가운데는 조랑말 하나가 놓여있었다. 물론 살아있는 말은 아니었다. 받침대가 있었고 받침대 위의 기둥에 박혀있는, 어찌 보면 로데오 경기의 연습용 장비처럼 보였다. 아마도 스위치를 누르면 저 조랑말이 흔들릴 것이다. 이 추측을 뒷받침하듯 받침대에서 빠져나온 전선도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안을 가득 메운 장난감들, 이 방은 손주들을 위한 방이 틀림없다. “어떠냐? 네가 말한 그 말, 이 할애비가 딱 준비해뒀지. 마음에 드느냐?” 진 회장은 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영감은 날 좋아하는 것 같다. 노친네의 마음을 짐작해 봤다. 비록 내친 자식이지만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있을까? 강철같은 마음이지만 부모의 마음도 있다. 미안한 마음은 분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좁쌀만 한 미안한 마음을 내게 쏟는 것이다. 내 형인 상준이에게 쏟는 건 불가능하다. 자식을 내친 원인 제공자를 사랑할 아량은 없으니까. 게다가 막내 손자. 내게 잘 대해주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일까? 중요한 순간이다. 회장이 내게 가진 애정의 크기가 얼마만큼 큰 것일까? 그 크기를 가늠해야 한다. 그 크기에 맞춰 어리광도 부려야 하고 필요한 만큼 내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 일단 첫 번째 테스트! 나는 플라스틱 말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진 회장을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어울리진 않지만. “전 진짜가 좋아요. 할아버지.” “뭐라?” “플라스틱 말보다는 진짜 말이 좋구요, 저기 있는 자동차 장난감보다는 씽씽 달리는 진짜 차가 좋아요. 배도 목욕탕에서 가지고 노는 게 아니라 바다 위를 떠다니는 진짜 배를 갖고 싶고요.” 조금 놀랐을 거다. 아니, 아주 많이 놀랐다. 진 회장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 화났을 때 웃고 놀랐을 때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철면은 감정을 잘 숨긴다. “진짜라…. 우리 도준이는 진짜가 무슨 뜻인지 아니?”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아니, 어떤 대답을 원할까? 망설이지 말고 대답해야 한다. 즉흥적인 것처럼. 어린애답게. “네.” “뭘까? 그게?” “할아버지 거요.” 놀란 표정으로 변한다. 이번만큼은 감정을 숨길 수 없었나 보다. “할아버지가 만드는 자동차, 배, 텔레비전은 모두 진짜잖아요. 난 그런 것들이 좋아요.” 어른은 아이의 말을 성인의 언어로 번역해서 듣는다. 내가 처음 내뱉은 진심. 할아버지는 내 말뜻을 어떻게 받아 들었을까? 놀란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변했다. “흠, 도준아.” “네. 할아버지.” “네가 말한 진짜를 가지려면 아주아주 힘든 일을 많이 해야 한단다. 죽을 만큼 무서운 일도 많이 겪을 수 있어. 하지만 가짜를 좋아하면 이런 일이 없을 거야. 그냥 즐겁고 재미있지.” 죽을 만큼? 내가 죽음을 마주했을 때, 무섭기도 했지만 억울함이 더 컸다. 순양그룹이라는 진짜배기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감수해야 가치 있는 일 아니겠는가? 내 속을 모르는 할아버지는 충고 같은 말을 계속 늘어놓았다. “진짜 말을 타고, 차를 운전하고, 배를 타고 거친 바다로 나가려면 그만한 훈련과 배움이 필요하단다.” “학교에서 말씀인가요?” “학교? 그래, 지금은 그렇구나.” “그럼 제가 몇 등 하면 진짜 말을 가질 수 있어요?” “뭐라? 으허허.” 진 회장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의 말은 바로 좋은 실적을 내면 보너스를 얼마나 받을 수 있냐는 뜻처럼 들렸을 것이 틀림없다. “말은 굉장히 비싼 동물이니까…. 어디 보자…. 좋다. 1년 동안 전 과목 수를 받으면 내년 네 생일 선물로 사주마. 어떠냐?” 역시 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긴 10살짜리 어린애에게 바라는 것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뿐이다. 조금은 과장됐지만, 나는 조금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왜? 자신 없나 보구나. 허허.” 내 표정이 귀여운지 “아뇨, 너무 쉬워서요. 학교 졸업 때까지 한 번이라도 수를 받지 못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실 줄 알았거든요. 일 년이면… 진짜 쉬워요.” 활짝 웃는 내 모습에 진 회장은 또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의 진도준은 조용하고 평범한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머리도, 체력도, 성품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이. 그것이 진도준이었으나 오랜만에 보는 막내 손자가 확 변했으니 놀랄 만도 할 것이다. “그래? 이 할애비가 기대하마. 우리 도준이가 올 수를 받는지 말이다. 하하.” 인자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손을 내밀었다. “자, 내려가자. 저녁 먹고 사촌들이랑 놀아야지.”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 [006] 재벌 총수의 생일 3. 아래층 다이닝룸으로 내려갔을 때 수많은 시선이 내게 꽂혔다. 그들은 거대한 세 개의 식탁에 나눠 앉아 있었다. 척 봐도 알 수 있는 양복장이들. 이들은 계열사 사장을 비롯한 그룹의 핵심인물들이다. 그중 몇몇 얼굴은 눈에 익었다. 30년 뒤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룹 핵심인물들은 누군가의 남편이며 자식의 아버지이자 그들 부모의 아들이지만, 아내와 자식을 향한 사랑이나 부모에 대한 효도보다 진양철 회장에 대한 충성이 우선인 놈들이다. 바로 내가 꿈에 그리던 자리에 앉은 집사, 좋게 말한다면 호위무사들이다. 진양철 회장도 그들이 보여주는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저들은 꼭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한쪽 식탁에는 애들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의 친형과 11명의 사촌이다. 특히 사촌 큰형이며, 이 집안의 장손이자, 30년 뒤 부회장의 자리에서 나를 죽음으로 내몬 진영준을 발견했을 때는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만약 내 손에 총이 있었다면 저놈을 쏴 죽여버렸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식탁에는 선택받은 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단지 진양철 회장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뿐이지만, 그것만이 이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섯의 후계자들. 그리고 그 배우자들……. 잠깐! 왜 아홉이지? 한 명이 없다. 어째서 내 어머니는 자리에 없는 걸까?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어머니는 찾을 수 없었다. 진양철 회장이 식탁에 앉자 두 요리사가 66개의 초가 꽂힌 케익을 들고 등장했다. “회장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할아버지! 생신 축하합니다!” 수많은 딸랑이들이 환한 미소와 함께 소리쳤고 회장이 초를 끄자 집안이 떠나가도록 손뼉을 쳤다. 웃지도 않고 손뼉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이는 단둘이었다. 바로 내 아버지와 형이다. 아무리 미운털이 박혔다고는 하나 어떻게 이런 풀죽은 모습을 보일까? 도대체 우리 가족은 이 집안에서 어떤 존재인가? 그 해답은 어머니를 발견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자리를 함께하지 못한다. 아니, 식탁에 앉을 틈이 없는 것이다. 남자들을 제외한 모든 여자들, 시어머니, 동서들 그리고 시누이. 이들이 틈만 나면 어머니에게 뭔가를 시키는 것이다. “동서, 국 좀 더 갖다 줘.” “막내야. 시원한 물 좀 준비해줘. 얼음 넣어서.” “올케. 빈 그릇 좀 치워.” 마치 일하는 아줌마처럼. 물론 가장 아랫사람이니 간단한 심부름은 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일 아닌가? 여기는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만 다섯이다. 집안일을 메이드까지 포함하면 열 명이 넘는다. 굳이 어머니가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대놓고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이다. 아니 구박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 모습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분노의 크기가 처음 진영준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와 다르지 않을 정도였다. 비록 어머니와 함께 생활한 지 백일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나를 향한 무한한 애정에 따뜻함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또한, 어머니를 구박하는 사람들을 향한 분노보다 못 본체 밥을 처먹는 아버지가 더욱 나를 분노케 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저 모양이니 구박과 무시는 더욱 심해졌을 게 틀림없다. 내 옆에 앉은 형 상준이는 이미 이런 광경을 숱하게 목격했겠지만, 여전히 참기 힘든가 보다. 꽉 다문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래서 할아버지 집으로 오기 싫다고 떼를 썼구나. 요놈 마음도 모르고 버릇 고친다고 혼쭐을 낸 것이 조금 미안해졌다. 참아라. 언젠가 이 집안 여자들이 어머니 앞에서 무릎 꿇는 모습을 꼭 보여주마. 결국, 어머니는 저녁을 거의 먹지도 못하고 설거지를 위해 주방으로 쫓겨나듯 가야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손주들은 두 부류로 나눠졌다. 사춘기인 중고등학생은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졌고 아직 철없는 국민학생들은 할아버지 곁으로 모여들었다. “알았다, 요놈들아. 올라가자. 허허.” 아하, 위층 놀이방은 진 회장의 허락하에 출입이 가능하군. 지독한 영감이다. 손자들에게까지 힘을 과시하며 조종하려는 총수 마인드를 버리지 않는다. 기가 찼지만 나도 이들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때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우리 도준이, 오늘 주인공이네.” 손길의 주인공은 바로 진영준이었다. 그를 확인하자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했지만 억지로 웃었다. 10년이나 차이 나는 나이 때문인지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웃고 있었다. 어린 막냇동생을 귀여워하는 큰형다운 모습이다. 그 웃음, 언제까지 가는지 두고 보자. “이건 도준이 선물이니 가장 먼저 타는 사람은 도전이다. 너희들은 그다음이야. 알아들었지?“ 진 회장은 애들에게 단단히 이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할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내 어깨를 확 미는 놈이 있었다. “비켜! 새끼야. 내가 먼저야!” 이런 존만한 새끼가. 열이 뻗치자 내 얼굴이 붉어졌다. 주먹을 쥐고 나서려 할 때 형인 상준이가 내 팔목을 잡았다. “응. 강준이 형이 먼저 타. 우린 나중에 타도 돼.” 형은 이미 잔뜩 겁먹은 표정이었다. 강준? 진강준? 익숙한 이름이다. 기억을 더듬었다. 아, 그놈이구나. 삼남 진상기의 장남. 내가 죽을 당시, 이놈은 순양통신의 전무였다. 요놈의 아버지 진상기는 승계 구도에서 패배했고 자기 아들이라도 챙겨 달라며 무릎을 꿇은 놈이다. 진강준 이놈은 어릴 때부터 성질이 더러웠다는 것을 오늘 알았다. 성인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폭행사건을 일으킨 놈이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오는 놈이라 직원 폭행은 물론이고 음식점이나 술집 종업원의 폭행사건도 부지기수였다. 난 어차피 이런 애들 장난감에는 관심 없었지만, 이놈의 모친이 손윗동서랍시고 내 어머니에게 온갖 심부름시킨 저녁 식탁이 떠올랐다. 자, 어떻게 할까? 이대로 묻어둘까? 아니면 소소한 복수라도 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소소한 복수는 꼭 해야 하고 더불어 어떤 이득을 취할까 생각하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을 뿐이다. 가능하면 오늘 우리 창업주 할아버지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보아하니 일 년에 몇 번 만나지도 않는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를 어필해야 한다. 생각을 끝내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형 상준이가 내 입에 걸린 묘한 미소를 보자 눈이 커졌다. 오늘 낮, 욕실에서 뜨거운 물을 뒤집어쓸 때의 그 미소와 같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난 형에게 눈을 찡긋 한 뒤 웃으며 사촌 형 진강준에게 다가갔다. 그놈은 내가 가까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낮은 기계음을 내는 말 위에서 카우보이 흉내를 내며 즐기고 있었다. “재밌냐?” “뭐?” 말의 흔들림에 정신없는 진강준이 흘낏 돌아봤을 때 말의 엉덩이를 힘껏 차 버렸다. 콰당-! 흔들리는 말과 진강준이 쓰러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악-!” 이런! 혹시 다리뼈라고 부러졌나? 비명소리가 날카롭다. 상관없다. 다치면서 크는 게 뼈도 더 여물어지고 좋다. 놀이방에 함께 있던 다섯 명의 어린 사촌들은 너무 놀라 입만 벌린 채 소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말에 깔린 다리의 고통 때문에 계속 비명을 질러대는 진강준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두 번 다시 내꺼 손대지 마.” 발 밖에서 계단을 뛰어오르는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비명소리에 달려온 여인들. 그들 중 한 여인이 새파랗게 질렸다. “강준아!” 쓰러진 말을 일으켜 세우고 애의 상태를 살피느라 놀이방을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단 한 사람은 꼼짝도 못 한 채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였다. 아이들이 참새처럼 짹짹거렸지만, 그녀의 귀에는 오로지 한 문장만 들렸을 것이다. 도준이가 밀었어요! 그녀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감당하기 힘들어 처연한 표정으로 나를 봤지만 난 환하게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재수 없게도 이 모습을 강준의 모친이 봐 버렸다. “이, 이 미친놈!” 짝짝-! 그녀의 손이 내 뺨을 왕복하자 어머니가 급히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불쌍한 여인. 단 한마디도 못하고 나를 보호하는 것만 생각할 뿐이다. 손윗동서의 손이 또다시 올라갔다. 아예 우리 모자를 잡으려는 듯 눈에는 독기가 철철 흘렀다. “뭐하는 짓이냐? 어디서 감히 손찌검이야!” “아, 아버님…….” 진 회장이 등장하자 놀이방은 찬물을 끼얹은 듯 잠잠해졌다. 방안을 한번 쓱 둘러본 그는 한눈에 모든 걸 파악한 듯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강준이 애미는 빨리 애를 병원으로 데려가거라.” “네, 네.“ 고통 때문에 울음과 앓는 소리가 뒤섞인 아이를 업고 몇 사람이 방을 나가자 진 회장은 남은 사람들에게도 명령했다. “모두 아래층으로 내려가. 어서.” 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도준이 넌 남고!” 그럼 그렇지. 내가 원하던 바다. 내가 어머니의 손을 놓자 그녀는 불안과 걱정으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진 회장의 차가운 눈빛에 모리를 숙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단둘만 남게 되자 진 회장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그랬더냐?” “...네.” “왜? 어찌 이런 위험한 짓을 한 게냐? 그것도 네 형에게!” “제 것인데 강준이 형이 먼저 탔습니다.” “뭐라? 고작 그것 때문에 형을 다치게 했다는 말이더냐?” 잔뜩 미간을 찌푸린 진 회장은 노기를 드러냈다. “아니에요. 형을 다치게 하려는 게 아니고 말을 부수려 한 겁니다.” 나의 예상치 못한 답변에 찌푸린 미간이 사라지며 무척이나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전 제 것을 남에게 뺏기기보다는 차라리 부숴버리고 싶었어요. 아무도 가지지 못하게…….” 나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뺏기지는 않겠다?” “네.” 숙였던 머리를 살짝 들어 진 회장의 표정을 살폈다. 성공이다. 터지려는 미소를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왕국의 지도자로서 꼭 필요한 독기를 엿봤기 때문일 것이다. 한 뼘의 영토라도 뺏기지 않으려는 독기. 바로 외부와의 전쟁에 꼭 필요한 항목이다. “네가 형을 다치게 하려는 의도가 없다고는 하나 결과는 다쳤다. 네 행동에 대한 벌은 받아야 한다.” 진 회장이 앞장서고 나는 반성하는 척 머리를 푹 숙인 채 뒤를 따랐다. 진 회장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서재였다. 서재의 문을 열 때 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곳을 드나들 수 있다니! ======================================== [007] 적극적 어필 1. 십여 년간 진양 그룹의 머슴생활을 하며 이 저택을 수없이 들락거렸지만 내게 허용된 곳은 거실과 주방이었다. 침실과 더불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서재다. 순양그룹 본사 27층의 회장실이 공식적인 집무실이지만 그룹의 모든 의사결정은 바로 이곳에서 일어난다. 이 서재는 가족과 그룹을 이끌어가는 계열사 사장 그리고 실세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나도 이제 이곳을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윤현우 실장이 아니라 손자의 신분으로 말이다. 서재에 발을 디디고 내부를 훑었다. 서재는 대회의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회장의 커다란 집무용 책상 앞에 십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회의용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이미 회장의 자식과 그룹 실세들이 앉아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다. 생일 축하도 있겠지만, 이들이 모인다면 현안을 논의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내가 놀란 것은 이 자리에 내 아버지 대신 장손인 진영준도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가 빠진 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어차피 내놓은 자식 아닌가? 하지만 진영준은 이제 겨우 스무 살. 대학생 신분이며 유학을 준비 중이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아직 어린애일 뿐이다. 그런 그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이미 후계구도를 굳혔다는 의미. 재벌가의 핏줄로 환생한 것은 신이 주신 기회였지만 이미 늦어버린 건가? 10년이라는 나이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걸까? 머리를 숙인 채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나를 모두 오해했다. 잔뜩 겁에 질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준아, 인마. 머리 들어. 남자는 형제끼리 싸우면서 크는 거야. 하하.” 진영준은 맏형의 모습을 보이려는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용히 해라! 네가 입을 열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듣기만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자신의 아버지이자 나의 큰아버지인 진영기 부회장이 소리치자 진영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진 회장은 내 손을 끌었다. “도준아.” “네. 할아버지.” “내가 일어서라고 할 때까지 내 옆에 꿇어앉아 있어. 그게 벌이다.” 이게 벌인가? 아니면 교육인가? 열 살의 진도준에게는 벌이겠지만 마흔 살의 윤현우에게는 경영수업이다. 순양이라는 제국을 만들어가는 이들이 어떤 전략을 쏟아내는지 한마디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나는 할아버지 곁에 얌전히 꿇어앉았다. “다들 생각을 말해봐. 어떻게 될 것 같아?” 나 때문에 중단된 회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 양반 뚝심이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임기 말이지만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정면돌파하지 않을까요?” “정면돌파라면?” “강경 진압 말입니다.” “이미 강경 진압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혹시 군 투입을 염두에 둔 건가?” “그렇습니다.” 뭐지? 임기 말? 진압? 군? 회사 경영이 아닌 시국에 관한 이야기인가? “다른 방향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전국에서 백만 명 이상이 모였습니다. 만약 군을 투입하면 백만이 아니라 이백만이 될지도 모릅니다.” “총칼 앞에서도 겁먹지 않는다?” “지금은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는 형국입니다. 꺼져간다면 총칼을 두려워하겠지만 군 투입은 기름을 붓는 꼴입니다. 현 정권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정권이 무너질 때를 대비하자는 거야? 내년 대통령은 야권에서 나온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다는….” 쾅-! 진 회장이 책상을 쾅 내리치자 의견을 말하던 계열사 사장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 있어? 물론 그럴 수 있지. 아닐 수도 있고. 그따위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듣자고 내가 아까운 시간 죽이며 있는 줄 알아?” “죄, 죄송합니다.” 회장의 호통 한 번에 모두 고개를 떨군다. “어느 놈 뒤에 줄 서야 하는지만 말해. 부회장!” “네. 회장님.” “너부터 말해봐. 누구야?” 부자지간이지만 공식적인 자리인 만큼 회사의 직책으로 서로를 불렀다. 부회장이라는 무게 때문인지 나의 큰아버지 진영기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십 대 중반인 진영기. 그리고 그의 아들 진영준. 내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고 살인까지 지시한 두 놈이다. 과거로 돌아온 지금, 그런 일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내가 아닐 뿐 언제든 생길 수 있는 일이다. 나는 한때 존경해마지 않았던 진영기의 대답이 궁금했다. 과연 그는 어떤 안목을 지니고 있을까? “무너질 정권이 아니고 후계자도 확실합니다. 이 정권이 들어선 지 7년 동안 데모는 끊임없었습니다. 지금은 그 정도가 좀 심한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남의 발언에 함께 자리한 차남 진동기와 삼남 진상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동의해버린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역시…….” 태자와 왕자들이 연이어 같은 의견을 말하자 대신들인 계열사 사장들도 현 정권이 유지될 것이라는 쪽으로 쏠렸다. 뭔가 이상했다. 삼일 뒤면 대통령의 긴급 발표가 나온다. 바로 항복 선언 아닌가? 국민이 이긴다. 청와대에서도 지금쯤이면 어느 정도 윤곽이 나왔을 것이다. 순양그룹 정도 되면 청와대에 꽂아놓은 빨대가 한둘이 아닐 터인데 아직 모른다는 게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때만 해도 정관계에 순양그룹 장학생이 드물었던 것일까? 이런 의문을 뒤로한 채 이들의 회의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룹 경영에 관한 내용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고 오로지 누구 뒤에 줄을 서야 하는지만 갑론을박했다. 어찌 보면 한심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시국이 어수선하지만 내가 원했던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었다. 변화에 대응하는 경영전략을 세우고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는 민주화 요구가 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예측하는, 적어도 일반 회사원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수준 높은 내용이 오고 가는 걸 기대했다. 하지만 강한 놈 뒤에 줄 서는 것에 그룹의 사활이 걸린 양 거품 물고 떠든다. 한심하기도 했고 씁쓸하기도 했다. 이것이 80년대 기업의 풍경인가? 결국, 현 정권이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엉터리 예측만 남긴 채 회의가 끝났다. “됐다. 다들 나가 봐. 그리고 귀 열고 정보 수집해.” 진 회장의 말을 끝으로 모두 서재를 빠져나갔다. “이제 일어나.” 할아버지다운 부드러운 목소리. 재빨리 일어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굳어진 다리를 조금씩 펴고 가까스로 일어나니 나를 바라보는 진 회장의 시선은 기특하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보통의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따뜻한 시선이었다. 나를 자신의 곁에 앉힌 진 회장이 입을 열었다. “장하다, 우리 도준이.” “네?” “꽤 오랜 시간이었지만 넌 단 한 번도 찡그리지도 않았고 힘든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어. 어른이었다고 해도 다리가 불편해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을 텐데……. 넌 꼿꼿하더구나.” 의견을 듣느라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느끼지도 못했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게 있다. 어찌 이리 달라진 게냐?” 원래의 진도준은 형인 상준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힘없고 구박받는 부모님 밑에서 잔뜩 주눅 든, 소극적인 모습만 보여주었을 게 틀림없다. 그런 아이가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폭력까지 서슴지 않으니 당연히 놀랐을 것이고 궁금할 것이다. 사실은 달라진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다. 뭐….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일. “제가요?” “그래. 내가 우리 도준이 본 게 설날이었나? 이제 겨우 반년 지났는데 마친 딴사람 같아서 말이야. 내 손자 맞나 싶어. 허허.” 진 회장의 눈치를 살피며 어떤 대답이 괜찮을까, 머리를 굴렸다. 적절한 대답은 하나다. “이제 더 이상 안 참으려고요.” “뭐?“ “아버지, 어머니가 계속 눈치만 보셔서 저도 참았는데요. 이젠 못 참겠어요. 화가 나서.” 젠장, 이럴 때 눈물이라도 좀 흐르면 딱인데…. 눈물이 날 리가 있나! 하지만 이런 말을 의연하게 하는 내가 더 기특했나 보다. 진 회장은 말없이 나를 끌어안았다. 지난 시절의 내 마음고생을 짐작하고 측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럴 때 다시 한 번 충격을 줘야 한다. 놀라서 까무러칠 정도의 충격을. “할아버지.” “그래, 말해 보아라. 뭐든지.“ “셋 다 친구로 만드세요.” “그게 무슨 말이냐? 셋을 친구로 만들라니?” “아까 말씀하신 거요. 다음 대통령.” “……?!” 측은하게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변했다. 벌을 줬는데 대화를 다 들었다니? 겨우 열 살짜리 어린애가. 더구나 모든 이야기를 종합해서 기특한 생각마저 만들어냈으니 놀랄 만도 했을 것이다. “대통령이면 우리나라 최고로 힘이 쎈 사람인데 누가 될지 모른 때는 그냥 다 친구로 만들면 좋지 않나요? 셋 다 대통령이 될 수 있을 만큼 힘 있는 사람인데 꼭 한 명만 친구로 만들어야 하나요?“ 나는 최대한 어린애다운 어투로 말했다. 어려운 단어 다 빼고 말이다.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 “안 되나요?“ “안 될 리가 있느냐? 친구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지. 허허.” 나를 꼭 끌어안는 진 회장은 만족스러운 웃음까지 터트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며칠 뒤 6.29 선언이 나오면 진짜 누구 뒤에 줄을 서야 하는지 슬쩍 흘리기만 해도 또 한 번 놀랠 것이다. 10살짜리 손자의 영특함에 홀딱 빠져 헤어날 수 없는 할아버지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 도준이 이제 밖에서 놀래? 할아버지는 할 일이 조금 있단다.” 나는 진 회장의 사랑스러운 눈빛을 듬뿍 받으며 서재를 나왔다. *** 서재에 홀로 남은 진 회장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수화기를 든 진 회장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네 회장님. “지금 즉시 YS, DJ에게 다섯 장씩 전달해.” - 두 사람 모두 말입니까? “그래. 현 시국에 고생 많으시니 아랫사람들 고기라도 좀 먹이시라고 말하고, 적당한 공치사도 좀 던져.” - 알겠습니다. 그럼 저쪽은…? “일단 열 장만 전해줘. 시끄러운 정국을 잘 해결하기를 바란다는 말도 잊지 말고.” -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수화기를 내려놓은 진 회장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10살짜리 손자가 이런 기특한 소리를 하다니. 너무 양극단으로만 생각했다. 자신이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라는 질문을 던지니 모두 불확실한 답을 내놓았다. 현 정권이 백기를 든다, 버틴다 같은 추측성 대답만 가까스로 한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대응 방안을 내놓으라는 질문을 던졌다면 골고루 분산해서 보험을 들라는 대답을 누군가는 했을 게 분명하다. 그 정도 머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이 대답을 10살짜리 손자가 던질 줄이야! 어째서 이런 똘똘한 모습을 이제야 발견했을까? 진 회장은 조용히 장손인 진영준을 불렀다. 앞으로 순양 그룹의 3대 회장이 될 놈의 떡잎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영준은 할아버지의 부름에 부리나케 달려왔다. 조금은 긴장한 표정을 드러내면서. “영준아.” “네. 회장님.” “어허, 지금은 네 할애비다.” “아, 네. 할아버지.” 긴장한 진영준의 얼굴이 붉어졌다.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해야 한다. 하지만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할아버지 입맛에 쏙 들기는 쉽지 않다. “넌 오늘 듣기만 했다. 하지만 생각은 했겠지? 네 답안지 한번 보자. 채점은 내가 하마.” 현 정권은 육 개월 남짓 남았다. 명백한 레임덕이기도 하지만 연일 거리에는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독재 타도 호헌철폐를 외친다. 더구나 내년에는 세계적인 행사인 올림픽도 열린다. 이 혼돈의 시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문제고 자신은 답안지를 써내야 한다. “그게… 음…….” 학교에서 짱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최루탄을 피해 달아나는 학생들을 숱하게 봤다. 경찰 병력은 언제나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힘의 차이가 압도적이다. 매일같이 데모하고 매일 해산한다. 어차피 대학생은 공권력을 이길 수 없다. 생각을 정리한 진영준은 조심스레 답안지를 채워 나갔다. “시위대는 지금이 최대치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경찰을 더 투입하면… 일부 군 병력까지 투입하면 잠잠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현 정권의 연장이다?” “네. 자연스럽게 현 대통령의 친구이며 후계자인 그분이 차기 대통령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이 할애비는 네 말을 믿고 그분에게 줄 서면 되겠구나. 그렇지?” “네?” 진영준은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할아버지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룹의 미래를 자신의 예측에 맡기겠다고 말하고 있다. 당연히 그럴 리 없다. 하지만 이건 테스트다. 가슴을 쑥 내밀며 자신감을 드러내 보였다가 예측이 틀리면 두고두고 책 잡힐 것이며 여기서 한발 물러나면 우유부단하다는 인상만 심어주게 된다. 진 회장은 난처한 표정의 손자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 [008] 적극적 어필 2. 겨우 대학생의 예측을 믿고 그룹을 움직일 리는 없다. 하지만 진 회장이 보고 싶었던 모습은 속내를 들키지 않는 의연함이었다. 불안 긴장 초조를 대번에 드러내는 맏손자의 표정을 보자 막내 손자와 단번에 비교되었다. 십 년이라는 나이 차, 국민학생과 대학생의 차이가 있음에도 그릇이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만 됐다. 나가보거라.” “아, 네.” 진영준은 고개를 푹 떨구고 서재를 나갔다. 자신의 답안지가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진양철 회장은 오늘, 자신의 가장 큰 생일 선물은 다름 아닌 막내 손자의 재발견이라는 생각이 들자 기쁘기도 했지만 조금은 안타깝기도 했다. 하필 막내일까? 저놈이 장손이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을 텐데…….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던 진양철 회장은 결심을 굳혔다.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 좋은 떡잎을 보인 막내 손자를 제대로 한번 키워보고 싶었다. 그는 좋은 떡잎의 주인인 막내아들 진윤기를 조용히 불렀다. 이 서재에 거의 발을 들이지 못한 막내아들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호출에 긴장한 모습도 보였지만 못마땅한 모습도 함께 드러냈다. 아버지인 진 회장 역시 막내아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표정이 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찌 지내느냐?“ “이것저것 소일거리나 하며 지냅니다.” 아들의 시큰둥한 대답에 진 회장의 속은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진정 그리 살 것이냐?” “새삼스럽게…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던 아버지가 갑자기 관심을 보이자 진윤기는 더욱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한심한 아들을 보자니 울화가 치밀었지만, 똘똘한 손자놈을 떠올리며 억눌렀다. “하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 보거라.”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하신 분이 바로 아버님 아닙니까?” “딴따라 짓이나 하겠다니 못하게 막은 게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어쩌겠습니까? 제가 하고 싶은 건 딴따라가 전부니….” “천한 계집 옷이나 벗기는 걸 만들고 싶다? 그게 전부다? 한심한 놈.” “제가 에로 영화 만든다고 한 적 없습니다. 전….” “그만해라. 어차피 그 이야기 하자고 널 보자고 한 건 아니다.” 아들의 입을 막은 진 회장은 긴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었다. “애들 공부는 어때?” “네?” “상준이랑 도준이 말이다. 학교 공부는 제대로 하는지 묻는 것이다.” “글쎄요. 성적을 확인하지 않습니다. 건강하게 크는 것이 최고니까요.” 단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은 막내아들이다. 그처럼 똘똘한 손주를 아예 방치한다는 말 아닌가? 아니, 그 영특함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일부터 가정교사 둘을 보내겠다. 영어 선생과 다른 과목을 가르칠 선생이다. 그렇게 알고 준비해라.” “아버님. 이제 겨우 국민학생입니다. 고등학교 가면 제가….” “그냥 시키는 대로 해라.” 진 회장은 사사건건 토를 다는 아들이 마뜩찮았지만, 이 역시 테스트의 기회가 될 것 같아 한발 물러섰다. “좋다. 그럼 애들에게 물어보기라도 해라. 애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없었던 일로 하마.” 진 회장은 막내 손자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늘 보여준 모습이라면 가정교사를 거부하지 않아야 한다. 일 년 내내 최고의 성적을 받겠다고 장담하지 않았던가? 진윤기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갑자기 관심을 보이는 아버지가 낯설었다. 도준이가 오늘 큰 사고를 쳤다고 해서 갑자기 측은하게 여길 분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또 하나,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분이 아님에도 한발 물러서는 모습도 의외였다. 큰 양보를 하신 것이다. 이런 양보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알겠습니다. 애들에게 물어보고 원한다면 아버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래. 아 참, 만약 애들이 원하는 게 더 있다면 말해.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면 도와줘야 하지 않겠냐?” 진윤기의 입술이 달싹거리기는 했지만 별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관심이 왜 시작됐는지 궁금했지만 긴 대화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돌아가겠습니다.” 진윤기는 머리를 조금 숙이고 서재를 빠져나왔다. ***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묻고 싶은 어머니였지만 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그녀 역시 침묵만 지켰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는 나와 형을 불러 앉혔다. “도준아.” “네.” “오늘 할아버지 댁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야단칠 생각은 없다. 넌 이미 벌을 받았으니까 말이다.” “죄송합니다.” 내가 머리를 숙이자 아버지의 표정이 변했다. 갑자기 어른스러워진 아들의 변화에 여전히 불편한 모습이었다. “됐다. 잘못을 알았으면 충분해. 머리 들어.” 고개를 들자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할아버지가 그러시더구나. 너희 둘 공부에 신경 쓰겠다고 하시면서 말이야. 가정교사를 보내시겠다는데… 어떡할래?” 가정교사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형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과외를 받는 사촌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충분히 봐왔을 것이다. 자유롭게 뛰어놀 나이임에도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야 하는 그 시간은 상상만 해도 짜증이 솟구칠 것이다. “상준인 싫은가 보구나. 싫으면 안 해도 된다. 괜찮아.” 괜찮다는 말에 찌푸렸던 얼굴이 확 펴졌다. “도준이는?” 가정교사 따위는 필요 없다. 끽해봤자 명문대 재학 중인 학생일게 뻔한데…. 내가 가르칠 게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진 회장의 지시. 무조건 따라야 한다. “할게요. 약속이니까.” “약속?” “네. 일 년 동안 전 과목 수를 받아야 하거든요. 할아버지와 약속했어요.” 약속이라는 말에 아버지는 놀란 표정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서재에 오랫동안 잡혀있을 때 한 약속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도준아. 아빠가 조금 전에 말했잖아.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괜찮아요. 일단은 말 잘 듣는 착한 손자가 돼야 하니까요.” “뭐, 뭐라고?” 아차차, 이런 쓸데없는 말을! “아, 착한 손자 되겠다고 할아버지와 진짜 약속했거든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사촌과 싸우지 않는다는…….” 일단을 얼버무렸지만,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아버지였다. 다행히도 더 따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내 아버지의 성격인 것 같았다. 모든 일에 무심한 아니, 오히려 심드렁한 태도.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왜 이리되었나 궁금할 지경이다. “그래. 알았다. 네가 원하니 그렇게 준비하마.” 내가 먼저 일어나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나오자 상준이도 재빨리 내 뒤를 따랐다.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상준이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준아.” “응?” “오늘 잘했어.” “뭘?” “강준이 그 새끼 울게 만든 거.” 칭찬을 입에 담는 게 부끄러운지 이 말만 남기고 후다닥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저 자식도 맺힌 게 많았나 보다. 철없는 어린애가 저 정도니 부모님은 오죽했을까? 내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지만, 어린놈의 속이라도 시원하게 해 주었으니 나쁘지는 않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형의 뒷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도 나왔다. *** “그렇게 시간 때우실 필요 없어요.” “뭐?” “그러니까… 좀 효율적으로 합시다.” 두 명의 젊은 가정교사는 효율적이라는 말에 벙찌는 표정이었다. 열 살짜리 어린애 입에서 이런 단어가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효율적이라니?” “내가 공부하는 동안 계속 멍하니 앉아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요. 그냥 매일매일 내가 해야 할 공부를 숙제로 내주세요. 그리고 다음 날 확인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 그래도 공부하다가 모르는 걸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나의 당돌함에도 최대한 부드럽게 말한다. 이게 바로 재벌가의 핏줄을 대하는 일반인의 태도다. 조금은 씁쓸하다. “그걸 한 번에 몰아서 하겠다는 거죠. 숙제 확인하고 과제 내주고…. 하루 삼십 분이면 충분하니까, 두 분 선생님도 편할 테고요.” “그렇긴 한데 그래도…….” 하루 삼십 분만 가르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을 받는다. 또한, 보수가 큰 만큼 확실한 성과를 내야 하는데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면 큰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인맥으로 이 집안에 발을 들였다. 실력 없다는 소리가 나오면 소개해준 이를 볼 면목이 서지 않는다. 고민하는 두 선생의 표정을 보니 대충 각이 나온다. “일단 제 말대로 한번 해 보시고 아니다 싶으면 말씀하세요. 그때는 원하는 대로 해 드리지요.” 한발 양보하니 두 선생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일단 널 믿어볼게. 대신 조금이라도 미흡하면 두 시간씩, 네 시간은 꼼짝 않고 공부해야 해. 알았지?” “네.” 미흡할 리가 있나? 공부의 진도는 내가 조절할 것이다. 천재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더라도 엄청 똘똘한 애라는 칭찬은 나오도록 할 것이다. 물론 할아버지 귀에 들어가도록 말이다. 첫날이니 얼굴 익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두 선생에게 과제를 내어 달라고 했다. 나이 많은 노친네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성실 아닌가? 과외 첫날부터 성실하게 공부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분명 할아버지를 감동시킬 것이다. 첫 과제는 영어 알파벳을 다 외우는 것과 산수와 국어 문제지를 푸는 것이었다. 일단은…. 숙제만 완벽하게 하는 걸로. *** “…….” 두 선생은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며 입을 열지 못했다. “잘못한 것이 있어요?” “아, 아니. 훌륭하다. 잘했어. 그런데…. 너, 예전에 영어 공부한 적 있니?” “아뇨.” “그래? 처음치고는 필체가 좀 그러네. 너무 능숙한데?” 알파벳 테스트를 끝낸 나의 필체는 성인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기에 나온 말이다. “어제 하루종일 쓰니까 그렇게 나오던데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선생님. 문제 푼 건 다 맞죠?” “어? 아, 그래. 만점이다. 잘했어.” 다른 과목을 담당하는 선생 역시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칭찬을 빼놓지 않았다. “그럼 내일까지 해야 할 숙제 내주세요.” 두 사람을 빨리 내보내고 싶었다. 나는 아직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과거의 중요한 기억들 즉, 순양그룹과 관계된 사건들과 사람들 그리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할 시간이 필요했다. 가만히 있으면 하루가 다르게 지워지는 기억이지만 되살리려고 노력하며 기록하다 보면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사실마저 떠오른다. 지난 삼 개월간 빼곡히 기록한 노트만 두 권이 넘었고 앞으로 이것은 나의 비밀무기가 될 것이다. 아무튼, 두 선생은 혀를 내두르며 돌아갔고 나는 빨리 하루가 가기를 기다렸다. 내일은 이 나라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중요한 날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게도 큰 변화가 올 것이다. ======================================== [009] 큰 변화 1. 『동지 여러분. 그리고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이제 우리나라의 장래의 문제에 대해 굳은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국민들 사이에 쌓여진 뿌리 깊은 갈등과 안목이 국가적인 위기로 나타난 이 시대적 상황에서 정치인의 진정한 사명에 대해 깊은 사색과 숱한 번뇌를 하여 왔습니다. 중략. 첫째. 여야 합의 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88년 2월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실행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며 국민의 뜻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1987년 6월 29일. 나는 이 중대한 발표를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승용차 안에서 요구르트를 빨며 들었다. 이 선언을 통해 노태우 후보는 자신의 선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통령 후보를 포함한 모든 공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고, 이후 여당인 민정당은 이 선언을 당의 공식입장으로 인정했다. 이어 전두환 ‘현직’ 대통령도 특별담화를 통해 6.29 선언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이 선언은 정부의 공식 선언이 되었다. 그와 함께 4.13 호헌조치는 철폐되었다. 이렇게 발표된 6.29 선언으로 시민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쾌거를 이룬 6월 항쟁은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으로 끝을 맺게 될 것이다. 이제 새로운 시대의 대권 레이스가 시작된다. 조금은 흥분한 마음으로 집 대문을 열었을 때 묘한 기운이 집 전체를 감돌았다. 나를 보면 항상 환한 웃음을 보이던 정원사 겸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아저씨는 굳은 표정으로 내 손을 끌었다. “도준아. 할아버지 와 계시다. 알았지?” 오호라. 이런 중대한 날에 그룹 중진들과 회의도 하지 않고 날 만나러 왔단 말인가? 착각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이 집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은 내가 유일하니까 말이다. 나는 아저씨에게 환한 웃음을 보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할아버지가 과외선생 둘을 앉혀놓고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할아버지 진 회장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쫙 벌렸다. “아이고, 기특한 내 새끼! 학교 다녀왔어?” 저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참아야 했다. 보통의 손자처럼 쪼르르 달려가 덥석 안기는 건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나는 아주 예의 바르게 머리를 숙였다. “오셨어요? 할아버지.” 하지만 피할 수 없었다. 진 회장은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늙은이가 힘도 좋다. 다행히도 어머니가 차와 과일을 준비해서 거실로 들어오셨다. 할아버지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놓았다. 어머니가 다과를 내려놓고 급히 주방으로 발걸음을 돌리자 진 회장은 급히 그녀의 발을 묶었다. “잠시 앉거라.” “네?” “내 긴히 할 말이 있어. 그리고 뭘 그리 놀라?” “아, 네. 아버님.”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시아버지가 말을 걸다니? 이런 일은 처음인 듯 그녀는 완전히 얼어붙은 채 소파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걸쳤다. “도준아. 넌 잠시 네 방에 올라가 있을래? 이 할애비는 네 엄마와 할 이야기가 좀 있구나.” 진 회장은 불편하게 앉아있는 과외선생에게도 말했다. “두 선생도 자리 좀 비켜주고. 숙제 검사라도 하라고.”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은 내 손을 잡고 이 층으로 끌었다.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 “넌 어떻게 지내느냐?” “저야 뭐 집안 살림 하는 주부니까요.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시집온 뒤로 시아버지가 처음 건네는 안부 인사다. 묻는 시아버지나 대답하는 며느리나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흠…. 내 네게 물어볼 말이 있다.” “네. 아버님.” “도준이 말이다. 보통 애들과 좀 다른 듯한데, 어떠냐?” “좀 어른스럽기는 합니다.” “올해 초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걸로 아는데…. 아니냐?” 진 회장은 며느리의 반응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빛이 날카로웠다. “네. 사실 저도 좀 당혹스러웠어요. 몇 달 전부터 갑자기 태도가 변한 건 확실한데… 좋은 쪽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좋은 쪽? 어떻게?” “차분하고 예의 바르고… 아, 공부도 확 달라졌고요.” “과외 선생들 말로는 대단히 명석하고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도 알고 있느냐?” “네. 학교 파하고 집에 오면 밤늦게까지 공부하더군요. 일찍 자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요.” 진 회장은 손자에게 뿌듯함을 느끼는 며느리의 밝은 모습에 덩달아 미소 지었다. 이런 시아버지의 표정을 처음 대하자 놀라는 기색도 보였다. “앞으로 도준이에게 신경을 좀 더 쓰거라. 그게 너에게도 좋을 것이야.” “...?” 뜻을 파악하지 못해 눈을 깜빡거리는 며느리에게 진 회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못마땅히 여기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테니 긴말 않겠다. 네가 이 집안의 제대로 된 며느리 대접 못 받는 이유 역시 알고 있을 터, 이것 역시 긴말 않겠다.” 진 회장은 고개 떨구는 며느리를 여전히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도준이가 너와 네 남편에게 주어진 마지막 희망일 게다.” “무슨 말씀이신지?” “도준이 그 녀석은 너희에게는 숙제다. 도준이를 훌륭하게 키운다면 너희 부부에게도 순양그룹의 지분을 나눠 줄 것이야.” 진 회장의 다섯 자식 중 순양그룹과 관계사의 지분을 단 한주도 가지지 못한 자식은 막내 진윤기가 유일하다. 진윤기는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이 없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진 회장의 명의며 자동차, 골프회원권 역시 회사 재산이다. 진윤기는 매달 충분히 보내주는 생활비에 의존하는 완전한 백수였다. 순양그룹의 지분을 준다는 것은 다시 자식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이 놀라운 말을 듣고도 눈만 껌뻑거리는 며느리를 보자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직 내 말뜻을 못 알아 들….” “아닙니다, 아버님.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그런데? 어찌 감사의 표정도, 기쁨도 보이지 않는 것이냐?” “전 한 번도 그룹의 지분을 바란 적이 없습니다. 도준이 아빠도 마찬가지고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뭐라?” “아버님께서 도준이에게 무엇을 발견하시고 관심을 보이시는지 저로서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의 관심이 굉장히 부담스럽습니다. 우리 부부는 도준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늘 말없이 고개도 들지 못하던 막내며느리가 이처럼 또박또박 자기 생각을 늘어놓을 줄 상상도 못 했다. 감히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짓을 하다니. 진 회장이 가장 익숙하지 않은 일이 바로 거역과 반항이다. 결국, 그의 입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주는 마지막 기회마저 차버리려 하는 게냐? 아니, 애를 잘 키우라는 내 말이 뭐가 잘못되기라도 한 것이냐?” “아버님의 뜻은 도준이가 그룹 일을 잘할 수 있도록 키우라는 말씀이신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준이는 이제 겨우 10살입니다.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성인이 된 도준이가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습니다.” 자신의 호통에 조금도 굴하지 않는 며느리를 보자 기가 막혔다. 역시 자식을 생각하는 모성은 두려움이 없는 것인가? 하지만 모성 앞에서 고개를 끄덕일 진 회장이 아니다.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결정은 내가 한다! 어디서 감히…! 내가 주는 돈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것들이 내 뜻을 거역해?” 온 집안이 쩌렁쩌렁할 정도로 소리치자 집안일 하는 사람들마저 움츠러들었다. 진 회장과 함께 온 비서들도 놀라 조용히 거실을 빠져나갔다. 집안에 대한 사적인 대화를 굳이 들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 정원으로 나가버렸다. 단둘만 남은 거실은 더욱 냉랭해졌다. “아버님께서 지원을 끊으시더라도 괜찮습니다.” “이… 이!” 진 회장은 차분하지만 단호한 며느리의 태도에 얼굴이 붉어져 갔다. “우리 부부가 애 둘 정도는 충분히 키울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참고 감내할 수 있습니다만 자식만큼은 우리 뜻대로 키우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단 하나라도 마음에 드는 점이 없는 며느리가 완강하고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더는 참지 못한 진 회장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는 대화를 계속하기 어려웠다. 호통치고 돌아가 버리려 한 진 회장은 마음먹은 대로 하지 못했다. 바로 사랑스러운 손자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처음엔 이 층에서 진 회장을 기다렸다. 어머니와의 이야기가 끝나면 분명 나를 찾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아래층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진 회장의 거친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과외 선생의 손을 뿌리치고 방을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두 분의 대화를 들으며 적잖이 놀랐다. 전혀 다른 어머니의 모습. 무서운 권력을 휘두르는 진 회장에게 조금도 굴하지 않고 소신을 밝히는 그녀의 태도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있기에는 너무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특히 할아버지가 폭발해버릴 것 같은 모습을 보였을 때 마음이 조급했다.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가 시무룩한 모습으로 위장하고 말했다. “할아버지.” 나를 발견한 진 회장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엄마를 구박하는 할아버지를 좋아하는 손자는 없다라는 진리를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화내지 마세요. 할아버지.” “아이고, 아니야. 내가 왜 화를 내? 이 할애비 목소리가 커서 그런 거야. 이리 오렴.” 나는 천천히 걸어가 어머니 옆에 앉았다. 곁에 앉지 않는 나를 바라보는 진 회장의 눈빛에 실망이 스쳤다. “도준아. 할아버지 화내신 거 아냐. 엄마랑 이야기하는 중이었어.” 어머니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스레 말했다. 설마 내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아무리 10살이라도 이 상황이 어떻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 거라는 걸 어른들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무튼, 나는 이 자리를 정리도 하고 할아버지도 흡족할 만한 말을 해야 했다. 또한 나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은 덤이다. “할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저 때문에 다투실 필요 없어요.” 두 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특히 할아버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까지 했다. “할아버지.” “그래, 도준아.” “전 어머니 말씀대로 커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어머니의 말을 따르겠다, 이 말이 큰 충격이었나 보다. 순식간에 실망했고 처연한 표정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일말의 배신감까지 느꼈는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 [010] 큰 변화 2. 이제 이 돈 많은 영감님에게 반전의 기쁨을 줄 차례다. 나는 잔잔한 미소를 보이는 어머니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어머니” “응.” “전 커서 할아버지처럼 큰 회사의 사장님이 되고 싶어요.” 이 말 한마디로 두 사람의 표정이 뒤바뀌어 벼렸다. 입술까지 떨던 진 회장의 표정은 하회탈처럼 활짝 웃었고 어머니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으허허. 역시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게지. 한 대(代) 걸러 나오는 경우도 왕왕 있으니 말이다. 암, 그렇지.” 호탕한 할아버지의 웃음에 어머니는 말을 아꼈다. 그녀는 어리지만, 갑자기 철들어 버린 아들이 두 어른의 다툼을 막기 위해 마음을 쓰는 것 같아 짠함이 밀려왔을 것이다. “어떠냐? 에미야. 너도 이제 할 말이 없겠지? 우리 도준이도 경영자가 꿈이라지 않느냐? 으하하.” 순간, 어머니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고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도 당황한 듯 웃음을 멈추고 입을 닫았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함을 견디지 못했는지 어머니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님. 차 한잔 더 갖다 드릴까요?” “그… 그래. 아, 도준이 방으로 가져오너라. 내가 우리 손자와 할 이야기가 조금 있으니…….” “네.” 어머니가 주방으로 가자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갑자기 변해버린 이 분위기의 원인을 곰곰이 생각했다. 설마? 애미라 한 단어 때문인가? 처음으로 너가 아닌 보통의 며느리 호칭으로 부른 것일까?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 어색함의 출발은 호칭 외에는 찾을 수 없다. “선생들은 이만 가도록 해요. 앞으로 우리 도준이 잘 부탁하고.” 과외 선생들이 연신 머리를 숙이고 방을 나가자 할아버지는 내 방을 한번 쓱 훑어보고 나를 침대 끝에 앉혔다. “도준아.” “네. 할아버지.” “며칠 전 네가 했던 말을 기억하니?” “네? 무슨…?” “세 친구 이야기 있잖니.” “아! 힘 있는 세 친구?” “그래. 바로 그 이야기 말이다.” 물론 기억한다. 오늘, 날 찾아온 이유도 바로 그것일 테니까. 이제 가장 흥미진진한 대권 레이스를 펼칠 일노양김(一盧兩金)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난 네 말대로 그 세 친구들에게 선물을 보냈거든. 친하게 지내려고 말이다.” “아, 그러셨어요?” 벌써 비자금을 건넸다는 말인가? 행동은 지독하게 빠른 사람이다. “그런데 이게 좀 묘하게 흘러가고 있어. 바로 오늘부터 말이야.” 정부의 일방적인 항복 선언은 예상하지 못했으니 소용돌이칠 정국을 점치기 힘들 것이다. “음… 2등, 3등이 힘을 합해서 1등을 이기려고 하고 있거든.” 잠시 뜸을 들인 할아버지는 어린 내가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기 시작했다. “싸운다고요?” “그래. 세 명이 사이좋게 지내면 좋으련만 다투기 시작했어. 그래서 내가 곤란해. 나도 이젠 딱 하나만 선택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할아버지.” “그래, 말해 보거라.” “지금 말씀하신 그 세 사람이 대통령 되려고 그러는 거죠?” “그래. 서로 반장이 되겠다는 거지.” “그럼 2등 3등이 힘을 합쳐 이기면 반장 부반장이 되는 건가요?” “아니. 나라에는 부반장은 없어. 반장만 있지.” “에이, 그럼 1등이 이기겠네요.” 아주 쉽게 결과를 예측해 버리자 진 회장의 눈이 커졌다. 과연 이 영감은 내 말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까? “뭐? 왜, 왜 그렇게 생각하지?” “부반장도 없는데 2등, 3등이 힘을 왜 합쳐요? 둘 중 한 명만 반장인데.” “힘을 합치지 않는다?” “당연하죠. 3등은 2등이랑 크게 차이 나지도 않은데 얻는 것도 없이 도와만 줄 리가 없죠. 10등, 20등… 아니 꼴찌는 1등을 도와줄 수는 있어도 3등은 절대 도와주지 않아요.” 2등 3등인 YS DJ는 평생을 정치판에서 뒹굴었다. 군부 독재의 엄청난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겨우 살아남았고 드디어 기다리던 봄이 온 것이다. 그들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든 봄이다. 또 하나,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얕보면 안 된다. 평생 그들의 뒤를 따라붙었던 투쟁의 동지라는 수식어는 권력욕 앞에서는 한없이 가볍다. 이런 사실을 충분히 간파할 수 있는 진 회장이다. 그러나 양 김이 힘을 합친다고 철석같이 믿을 때는 이런 사실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존경받는 민주화운동 지도자이자 불세출의 카리스마적 정치인인 두 사람 중 누구든지 야권 후보로 출마하면 여당 후보인 노태우를 제칠 상황이다. 이미 두 사람은 경쟁하다시피 양보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DJ는 1986년 “나는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김영삼도 “사면·복권이 이루어진다면 김대중 씨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하겠다”고 했다. 대부분의 국민은 두 사람의 선의와 양식을 믿었다. 단일화는 시간문제일 뿐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시국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대립각을 세운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 인간의 참모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진 회장이 이 사실을 놓칠 리 없다. “두 양반이 등을 돌린다라....” 미래를 장황하고 자세하게 말할 필요가 없다. 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의심. 이 씨앗만 던져주면 충분히 알아들을 인물 아닌가? 한동안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찌 이리 총명할꼬, 우리 아기.” 할아버지의 표정은 완벽한 만족, 바로 그것이었다. *** “아버지가?” “네. 지금 도준이랑 이야기하고 계세요.” “공부 확인하시러 오신 건 아닐 테고.” “그게….” 진윤기는 아내가 조심스레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자 이를 악물었다. “열 살짜리 애가 뭘 안다고! 할아버지 눈치 봐서 그렇게 대답한 거지. 그놈 눈치가 보통이야?” “오늘은 그냥 놔둬요. 아버님 기분 좀 맞춰 드리자고요.” 조금은 다른 느낌이 든 진윤기는 아내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뭔데? 당신 좀 이상해. 아버지께 한 소리 들은 거야?” “그게 아니라…….” 그녀는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시아버지가 부른 호칭. 에미야- 그 때문에 눈물이 왈칵 날 뻔했다고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튼, 오늘은 괜한 소리 말이요. 부탁이에요.” 아내의 간곡한 부탁에 진윤기는 머리를 끄덕였다. 진윤기는 손자에게 푹 빠진 아버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자신과 아내를 거들떠보지는 않았지만, 막내인 도준만은 꽤 귀여워했다. 하지만 최근의 모습은 귀여워한다는 말로 부족하다. 조금 전 아내의 말에 따르면 아예 그룹 경영에 참여하도록 키우겠다는 뜻까지 보인다. 게다가 지분까지 약속했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 회장은 자식과 손자들이 스무 살이 되면 지분을 조금씩 넘겼다. 마음에 들면 들수록 계속해서 더 넘겼고 실망할 일이 생기면 중단했다. 진윤기는 단 한 주(柱)도 받지 못했다. 앞으로도 영원히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도준이만 잘 키우면 지분을 주겠다는 건 엄청난 변화임이 틀림없다. 이때 진윤기의 생각을 끊어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왔느냐?” “아. 네. 아버지.” 진 회장은 도준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도준아. 할아버지는 이제 돌아가 보련다. 공부 열심히 하고….” “네,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진 회장은 내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고 아버지에게 눈짓했다. “넌 나 잠깐 보자.” 진윤기는 아들과 아버지를 번갈아 보다 정원으로 나갔다. 진 회장의 비서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머리를 숙였다. “본사로 갈 거니까 출발 준비해. 사장단 회의 준비시키고. 아, 핵심 계열사만 모이라고 해.” 사장단 회의라는 말에 비서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진윤기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며 멀뚱히 서 있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도준이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다. 나를 쏙 빼닮았어.” “저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어째서 그렇습니까?” 아내의 부탁을 잊지 않았기에 따지듯 묻지 않았고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소유욕도 강하고 판단도 빠르다. 특히 통찰력 하나는 기가 막히지. 어린애의 그것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말이다. 타고난 놈이야.” “도준이가 소유욕이 강해요? 잘못 보신 겁니다. 차남답지 않게 뭐든지 형에게 양보하는 놈이에요. 어른스럽기는 해도 욕심은 없어요.” “그게 바로 네가 모자란다는 증거다. 바로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어떤 애인지 모르다니. 한심한 놈 같으니…….” 발끈할 만한 말이었지만 진윤기는 참았다. 오늘은 아내의 말을 충실히 듣기로 했으니까. “혹시 그룹 경영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그건 도준이의 능력 문제지. 난 기회만 줄 뿐이야.” “아직 어린애 아닙니까?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데 너무 성급하신 거 아닐까요?” “도준이도 장래 희망이 사장이라고 했어. 물론 커 가면서 철없는 재벌 3세가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유심히 지켜보며 잘 키우라는 잔소리다.” 자식 잘 키우라는 교과서적인 말에 반박할 필요는 없다. 진윤기는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내게 보내라. 어떻게 크는지 지켜보는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구나.” 늘 삐딱하고 시큰둥했던 진윤기가 공손한 태도를 보이니 진 회장도 온화한 표정이었다. “이만 가보마.” 진 회장은 아들의 어깨를 한번 두드린 뒤 본사로 향했다. *** 사장단 회의. 순양 그룹의 진 회장은 정기적인 사장단 회의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장남인 진영기 부회장이 사장단 회의를 주관했고 진 회장은 결과만 보고받았다. 66세인 진 회장이 46세인 장남에게 그룹을 넘기기 위해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마치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종이 왕권을 이어받아 정무를 책임졌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태종이 병권은 넘겨주지 않은 것처럼 진 회장은 그룹 인사권을 넘겨주지 않은 것도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진 회장이 사장단 회의에 참석했다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안건을 다룬다는 뜻이다. 이때만 해도 순양 그룹은 총 48개 계열사를 가진, 연 매출 24조 규모였고 30년 뒤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물론 국내 1위의 최대기업이란 점은 변함없지만 말이다. 진양철 회장은 이십여 명의 핵심 계열사 사장들이 옆자리의 사람들과 수군대는 소리를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이들도 각자의 정보망이 있다. 동문들이 각계각층으로 뻗어있는 사람들이고, 살아온 시간 만큼 지인들도 많다. 온갖 정보를 흡수했을 것이고 그 정보를 취합하여 최종 결론을 내려야 한다. 물론 그 결정은 오롯이 진 회장의 몫이었다. ======================================== [011] 큰 변화 3. “확장성은 단연 YS입니다. 수도권, 경남, 호남을 싹쓸이할 수 있습니다. 여권은 대구 경북과 강원도, 수도권 일부 지역만 표를 흡수할 수 있으니 차기는 거의 확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진 회장이 가장 신뢰하는 순양 건설의 대표이사가 총대를 멘 듯 맨 먼저 의견을 냈다. “DJ는?” “물론 DJ로 단일화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는 약점이 있습니다.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리다 보니 이번에는 양보할 공산이 큽니다. 차차기를 약속받고 양보할 겁니다.” “다른 의견은 없나?” 모두 서로만 바라보며 의견일치의 신호를 보냈다. 진 회장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듯 모두가 양 김의 단일화를 철석같이 믿고 있다. 이들뿐만 아니다. 국민 중 양 김의 단일화를 믿지 않는 이가 몇이나 될까? 진 회장이 지금껏 만난 유력 인사 모두 단일화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로지 어린 손자만이 단일화를 믿지 않았다. 물론 정치적 상황과 흐름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거는 정확했다. 어린 손자는 인간의 욕심을 정확히 꿰뚫어본다. 핵심 계열사 사장들은 진 회장이 보인 웃음의 정체를 몰라 일순 긴장에 빠졌다. 흡족해서? 아니면 한심해서? 하지만 이어지는 회장님의 발언으로는 그 진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지. 모두 귀를 열고 최대한 정보를 긁어와.” 진 회장은 미소를 머금은 채 회의를 끝내버렸다. *** 이제 미뤄두었던 일을 할 때가 왔다. 아니, 미뤄뒀다기보다는 망설였고 두렵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한번은 부닥쳐야 할 일이었다. 일단 과외 선생에게 먼저 부탁했다. 고액 과외치고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이나 진배없으니 내 말을 거절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번 주 일요일 야외 수업하죠.” “야외 수업?” “네. 서해안 당진으로요.” “당진? 갑자기 웬 서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으로만 바다를 접한 곳이라고 교과서에 나와 있잖아요. 직접 보고 싶은데요?” 핑계치고는 참으로 궁색하지만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고작 하루 30분 숙제 체크하는 걸로 순양그룹 신입사원의 월급을 챙긴다. 이런 꿀 알바를 유지하려면 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그래. 가자.” “선생님 운전 가능해요? 면허증 있어요?” “어. 면허도 있고 장롱면허도 아니야.” “그럼 차는 제가 아버지에게 부탁할게요. 선생님은 야외 수업만 허락받아 주세요.” 순간 과외 선생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대학생 신분으로 중후한 외제 차 한번 운전해볼 기회가 어디 흔한가? 부모님의 허락은 쉽게 얻었다. 학교와 공부만이 전부였다고 믿으니 바다 구경 정도는 떠밀어서라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도준이 너, 솔직히 말해봐. 당진은 왜 가고 싶은 거야?” 네비도, 스마트 폰도 없는 시절이다. 전국 지도 책자를 보며 이정표를 내비게이터 삼아 천천히 운전하던 과외 선생이 운전에 익숙해졌는지 슬며시 물었다. 이미 준비해둔 대답이 있다. “사실 전학 간 친구가 있는데요. 그 친구 만나고 싶어서요.” “그래? 그럼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냐?” “사실대로 말하면 어떤 친구냐, 부모님은 뭐 하시냐, 왜 전학 갔냐…. 꼬치꼬치 물으실 거 아니에요? 귀찮기도 하고요.” “어쭈! 다 컸는데? 부모님과 대화하는 걸 귀찮게 여길 정도면?” 요놈아. 다 큰 정도가 아니라 늙어가는 중이다. 그 뒤로도 대학생과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니 어느새 당진으로 들어섰다. 아련한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30년 전의 과거. 나는 지금 그 기억이 실제 눈앞에 펼쳐지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다. 서해안 개발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풍경. 비포장도로를 오롯이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자동차의 덜컹거림. 펜션으로 가득한 해변 대신에 낚시꾼 몇 명만을 위한 만물상 같은 구멍가게, 비록 이름은 슈퍼지만. 몇 개 보이지도 않는 아파트가 오히려 생소해 보이는 내가 살던 동네에 들어서자 왈칵 눈물이 났다. 또다시 기억의 신비로움을 경험했다. 동네 어귀에 있는 이발관을 보자 어릴 적 내 헤어 스타일이 떠올랐고 미장원은 어머니의 젊을 적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게 만들었다. 학교 정문을 지날 때는 졸업 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친구들과 선생들의 얼굴까지 생생히 떠오른다. 그렇게 추억을 더듬으며 내가 자란 집으로 다가갔다. “선생님. 잠깐만 기다리실래요? 바로 저기거든요.” “근데 넌 여기 와 봤어? 어떻게 길을 잘 알어?” “친구가 몇 번이나 자세히 설명해 줬거든요.” 궁금한 것이 많은 과외 선생의 질문에 짧게 대답하고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길 건너 보이는 간판 때문에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윤 세탁소]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과연 부모님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을까? 얼떨결에 아버지라고 부르면 어떡하나? 그분에게 나는 처음 보는 어린애일 뿐인데……. 가장 큰 두려움은 따로 있었다. 혹시 전생의 나, 윤현우를 마주치면 어떡하나? 마치 영화처럼 아주 신비로운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상상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나는 크게 숨을 한번 쉬고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세탁소의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 스팀다리미의 증기 사이로 보이는 젊은 아버지와 세탁물을 정리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또 터져 버렸다. 세탁소 벽에 기대어 눈물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굳게 마음을 잡고 세탁소 문을 열었다. 낡은 문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두 분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저기…….” “응? 못 보던 애네. 세탁물 찾으러 왔어?” 뭐라고 말해야 하나? “애가 부티가 쫙 흘러. 우리 동네 애가 아닌가 봐.” 내 모습을 요리조리 살피는 어머니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자 후회가 밀려왔다. 조금 더 참을걸. 좀 더 나이 들어 어른이 됐을 때 찾아 왔다면 현실적인 도움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이제 갓 서른 후반으로 접어드는 어머니의 모습은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두 분의 얼굴에 쌓인 고생이 이제야 보인다. “너 혹시 길 잃었니? 왜 말이 없어?” 더는 감상에 젖어 있을 수 없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여기 진우 집 아닌가요? 윤진우?” 집을 잘못 찾아온 것으로 하고 나가려 했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 “진우? 아닌데?” “아, 네.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자 나는 재빨리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여보, 진우라고 알아?” “글쎄요. 현지에게 물어볼까? 학교 친구들 중에 진우라고 있는지?” 순간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현지라니? 설마? “저, 저기…. 현지가 누구예요?” “현지? 하나뿐인 우리 딸이지. 너랑 같은 또래일 텐데…. 너 여기 사는 애 아니구나. 우리 딸이 워낙 예뻐서 이 동네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하하.” 외동딸 현지.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나 윤현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도망치듯 세탁소를 빠져나왔다. 조금 더 지체했더라면 털썩 주저앉아 버렸을 것이다. *** “왜 그래? 친구 집 아니었어?” “네? 아, 아뇨. 맞는데…. 친구가 없었어요.” “그럼 더 기다리지.” “아뇨. 괜찮아요. 그냥 올라가요.” 수상쩍게 나를 바라보는 과외 선생의 눈을 피해 창밖을 내다보았다. “선생님. 저 좀 피곤한데 잠깐 자도 될까요?” “그래? 하긴 피곤할 거야. 푹 자. 집에 도착하면 깨울게.” “고맙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세탁소를 바라보다 시트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찌 된 일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환생? 회귀? 빙의? 시간여행? 이런 원인과 그 결과를 따지지도,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어차피 내가 이미 벌어진 이 기이한 결과를 바꿀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부모님과의 인연이라고는 내 기억이 전부라는 것만 남았을 뿐이다.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룸미러로 이런 내 모습을 발견한 과외 선생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속도만 올렸다. 어린 내가 흘리는 눈물이지만 이유를 묻기에는 너무 처연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 노트를 펼쳐놓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지금껏 기록한 미래의 디테일한 일들이 어쩌면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큰 변화를 가져왔다. 태어났어야 할 나 윤현우의 자리를 엉뚱하게도 외동딸이 자리 잡았다. 거창한 나비이론을 끌어다 쓸 필요도 없다. 이미 나를 좋아하는 진양철 회장의 마음만으로도 미래가 바뀔지 모르는 일이다. 미래가 바뀐다는 것은 내가 가진 강력한 무기가 무의미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젠장. 앞으로 행동과 말 그리고 계획은 더욱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미래의 큰 물줄기는 변하지 않아야 그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챙길 수 있다. 세상은 바꾸지 않되, 순양그룹만 바꿔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순양그룹의 영향력은 크기 때문이다.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지만 변하지 않은 사실이 떠올라 다시 눈물이 맺혔다. ‘나’라는 존재 윤현우는 이 세상에 없다. 내 머릿속에 각인된 원초적인 감정들만 존재한다. 이 감정 역시 조금씩 풍화되어 옅어질 것이고 그렇게 윤현우는 완벽하게 사라질 것이다. 눈가를 적신 눈물을 닦아내고 노트를 덮었다. 과거는 떠나 보내야 한다. 미래만 생각하자. 순양그룹 회장이라는 자리에 앉기 위해서 완벽한 진도준으로 살 것이다. 험난한 길이겠지만……. “헉, 잠깐.” 나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손가락을 꼽으며 기억을 떠올렸다. “영준, 해경, 경준, 수경, 태준…….” 열셋. 나까지 포함하면 진양철 회장의 손주는 정확히 열셋이다. 그런데 왜 내 기억 속의 숫자는 열둘일까? 빠진 한 명은 누구지? 서랍에서 노트를 꺼냈다. 빼곡한 기억의 기록을 다시 한 번 훑으며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일까 되짚기 시작했다. ======================================== [012] 요동치는 정국 1. 진양철 회장은 서재에 앉아 읽던 신문을 툭 내던졌다.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 걸린 채. 신문의 헤드라인은 손자가 예상했던 결과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등 돌린 양 김. 사진은 두 사람이 함께 참석한 10월 27일 고려대 민주광장에서 진행된 시국 토론회였다. 이날 토론회의 주인공인 두 사람은 단상에 나란히 앉아 있었으면서도 굳은 얼굴로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 더 심각한 일은 두 사람의 연설에서 드러난 판이한 반응이었다. 먼저 단상에 오른 김영삼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시국 상황과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해 나갈 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청중 사이에서 “우-! 우-!” 하는 야유 소리가 나왔던 것이다. 야유는 점점 더 심해져 “사퇴하라! 사퇴! 사퇴! 사퇴!” 같은 외침이 터졌고 김영삼은 정치인생 30여 년에 처음 겪는 굴욕감에 떨며 고려대 정문을 나가버렸다. 반면에 검은색 두루마기 차림의 김대중이 연설대에 올랐을 때, 토론회장은 마치 그의 개인 유세장처럼 바뀌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을 연호하는 사람들 앞에서 김대중은 상기된 표정으로 여유 있게 연설을 마쳤다. 뒤이어 지지자들에게 목말이 태워져 땅거미가 내리는 학교 앞 안암로를 행진했다. 마치 대통령 당선 축하 행진을 벌이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김대중은 외쳤다.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이 결단이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진 회장은 손자의 예측이 딱 들어 맞아 미소 짓는 것이 아니다. 사 개월 전, 현 정부가 항복 선언을 했을 때 재벌 대기업은 모두 양 김을 향해 구애를 펼쳤다. 단일화를 의심하지 않았고 둘 중 한 명이 차기 대통령이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순양그룹의 진 회장은 가장 큰 선물을 여당에 던졌고 양 김에게는 용돈 정도만 쥐여 주었다. 손자의 총명한 말을 귀담아들었기 때문이다. 힘들고 괴로울 때, 걱정이 쌓여 눈 밑이 검어질 때, 누군가 내미는 손은 반갑기 그지없다. 게다가 그 손에 엄청난 거금이 쥐어져 있으면 큰 힘이 된다. 대다수가 자신을 외면했을 때 단 한 사람, 그것도 대한민국의 가장 선두에서 경제를 이끌어가는 순양그룹만이 자신을 챙겨 준 것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진 회장의 미소는 바로 다음 5년간 누리게 될 온갖 혜택을 생각하니 저절로 나오는 반응이었다. 안락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이 좋은 기분을 만끽하려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리며 몇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세 명의 아들과 그룹 비서실, 마지막으로 한 명의 여인. 넷째이자 유일한 딸인 진서윤이었다. “넌 왜 왔어? 부르지도 않았는데?” “저도 순양의 대표이사예요. 어떻게 가만있어요?” 진서윤이 발끈하자 진 회장은 허한 웃음을 보였다. 유일한 딸이라고 오냐오냐 키웠더니 나이가 들어서도 철딱서니 없어 보인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백화점을 맡겼다. 경영에는 영 꽝인 줄 알았는데 곧잘 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최고의 품질만 먹고, 만지고, 걸치다 보니 순양 백화점을 프리미엄 백화점이라는 컨셉으로 변화시켰다. 매출은 줄어들었지만, 순이익이 증가했고 진서윤의 콧대는 한층 더 높아졌다. “일단 모두 앉아. 전쟁 난 것도 아닌데 왜 이리 호들갑이야?” “회장님. 신문 보셨습니까?” “그래.” “이거,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갑니다. 두 양반이 완전히 등을 돌릴 것 같습니다.” 부회장인 장남 진영기가 신문을 툭 던지며 다급히 말했다. “이렇게 되면 삼파전이 되는데 누가 대통령이 될지…….” “오늘 DJ가 통일민주당을 탈당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신당을 창당하고 단독 출마할 겁니다. 되돌아올 다리를 끊어버리겠다는 뜻이죠.” "JP도 내일모레 창당 선언하고 출마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신민주공화당이라네요.“ “그 양반은 왜 설치는지, 원……. 어차피 충청표 갈라 먹기밖에 못하는데.” “대통령이 세긴 세요. 한평생 민주화의 동지네, 뭐네 해도 한순간에 등 돌리는 걸 보면…….” 다들 한마디씩 하자 진 회장은 인상을 팍 구기며 책상을 두드렸다. “이것들이…! 기자야? 평론가야? 내가 네놈들 해설이나 듣자고 모이라고 한 줄 알아!” 진 회장의 호통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결론만 말해. 누구야? 누가 봉황 의자에 앉는 거야?” 이럴 때 맨 앞에 나설 수밖에 없는 사람은 역시 장남인 진영기뿐이다. “경남, 경북, 충청, 전라. 네 지역으로 나누면 경남의 인구가 가장 많습니다. 남은 건 수도권과 강원도인데 JP가 여권의 표를 빼앗을 테니 YS가 가장 유력하지 않겠습니까?” 부회장인 진영기를 시작으로 여러 의견이 나왔다. YS가 유력하고 여당의 재집권이 그 뒤를 이었다. 물론 아직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선거는 12월이고 아직 두 달이나 남았다. 추이를 살펴보면서 지켜봐도 늦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진 회장은 늦지 않은 걸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다. 누구보다 빨라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아닌가? “잘 들어. 난 이번 대선에서 백억 정도의 선거자금을 낼 생각이다.” 백억이라는 말에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회, 회장님. 너무 큽니다. 그 절반만 해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돈을 아끼는 놈의 말이다. “이번엔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양 극단이 피 터지게 싸우는 싸움 아닙니까? 잘못 전달했다가는 큰일 날 수 있습니다.” 보복이 두려운, 겁많은 놈의 말이다. 진 회장은 한술 더 떴다. “다음 주에 백억을 전달할 거다. 너희들은 백억을 누구 손에 쥐여주어야 하는지 결론을 내려.” 다음 주? 급해도 너무 급하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렇게 서두를 이유가 없지 않은가? “회, 회장님, 그건….” “다들 입 닫아!” 또다시 터지는 회장님의 호통에 모두 눈을 내리깔았다. “돈을 먹일 땐 가장 먼저 먹어야 효과가 크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토 달지 말고 빨리 움직여. 그룹의 사활을 건 도박이니까.” 이 모든 것이 바로 테스트라는 걸 모르는 자식들은 아버지가 괜한 고집을 피운다고만 생각했다. “뭐해? 회의 끝났어. 나가서 일봐.” 긴 한숨을 내쉬며 모두 서재를 빠져나갔다. “넌 왜 안 나가? 백화점 고객 중에 정치인 마누라가 한둘이야? 너도 알아봐.” 진서윤은 여전히 서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 회장의 안색을 살피다 배시시 웃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당연히 있겠지. 그래서 안 나가고 있는 것 아니냐?” 진 회장이 옅은 웃음을 보이자 진서윤은 용기백배하여 입을 열었다. “우리 그이가 내년 총선에 출마하고 싶은가 봐요.” “최 서방이?” “네. 시댁에서도 은근히 바라는 눈치고요.” “흠…….” “시댁이야 아쉬울 게 없는 법조계 집안이지만 정치 쪽으로도 슬슬 욕심내는 것 같은데…. 아버지 생각은 어떠세요?” 생각을 묻는 게 아니고 허락을 받으려는 것이다. “최 서방이 지금 몇이나 됐더라?” “마흔넷이잖아요. 내년이면 마흔다섯이고요.” 단박에 안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자 최서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시댁은 대법관 두 명과 검찰총장 한 명 그리고 판검사 십여 명을 배출한 한국 최고의 법조 집안이다. 이 엄청난 인맥은 당연히 순양그룹에 많은 도움을 줬고 사돈으로서의 가치는 차고 넘쳤다. 사위 혼자만 원하는 게 아니라 사돈댁이 원한다고 하니 쉽게 거절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명문 집안 출신의 중앙지검 특수부 부장 검사 정도라면 웬만한 정당은 환영할 조건이다. 굳이 진 회장의 허락을 받겠다는 것은 그만큼 사돈댁이 진 회장의 눈치를 본다는 의미였다. “선거 자금이야 백화점에서 나오는 캐시로 충분할 테고,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냐?”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자 진서윤은 손뼉까지 짝 치며 기뻐했다. “평범한 초선 의원을 원하지 않더라고요. 어차피 우리 순양의 사위고 명문 법조인 집안의 아들인데 전국구(現 비례대표)보다는 지역구에 나가야 하지 않겠어요?” “엄청난 배경을 등에 업고 지역구에서 승리한다면 초선이지만 당 중진 의원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계산이겠지?”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활짝 웃는 딸을 보며 진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지역구는 내가 알아보마. 그리고 최 서방에게 일러둬. 출마했다가 떨어지면 두 번 다시 내 얼굴 볼 생각은 접어야 할 게다.” 진 회장은 사위가 낙선할 경우 재계의 웃음거리가 되는 끔찍한 상황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 대통령 선거전이 격화되며 지역감정이 기승을 부렸다. 광주에서는 김영삼에게 달걀이 날아들었고, 김대중도 부산 유세 때 곤욕을 치렀다. “누구는 김일성에게 지령을 받는다더라” “누구는 숨겨놓은 딸이 있다더라” 이렇게 치졸한 흑색선전까지 나돌면서, 한때 민주화의 상징과도 같던 두 김 씨의 위상은 빠르게 추락해갔다. 그리고……. 선거를 판가름할 결정적인 비극이 발생했다.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 국제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의 보잉 707기종의 KE858편이 UAE의 아부다비 국제공항을 거쳐 서울로 오기 전의 마지막 중간 기착지인 방콕 국제공항으로 비행하던 도중, 인도양 상공에서 교신이 두절되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는 '북한 공작원 김현희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액체폭탄으로 비행기를 공중폭발한 것'으로 결론짓고 사건조사를 마쳤다. 또한 87년 12월 15일, 자살을 막기 위해 재갈을 물린 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모습이 TV 뉴스에 등장했다. 하필 이날은 바로 대선을 하루 남긴 저녁이었기에 선거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윽고 12월 17일, 조간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났다. [노태우 후보 당선 확정] 최종 득표는 노태우가 전체의 37%인 828만여 표, 김영삼이 633만여 표, 김대중이 611만여 표, 김종필이 182만여 표였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표를 합치면 55%를 넘었으나, 승리는 12·12의 주역 노태우에게 돌아갔다. 기사를 다 읽고 신문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앞으로 펼쳐질 격동의 10년, 내 나이 20살이 될 때까지 순양그룹을 집어 삼킬 밑천을 마련해야 한다. 10년 뒤면 진양철 회장이 골골거리며 병원 침대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린다.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지분을 나나 내 아버지 앞으로 옮겨놔야 큰아버지 진영기와 힘겨루기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절대 잊지 말아야 하는 사건도 막아야 한다.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하기 전 발생한 교통사고, 바로 나 진도준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 [013] 요동치는 정국 2. 윤현우로 살며 진 씨 일가의 뒷간을 청소할 때, 그룹에서 철저히 외면한 집안이라 진윤기, 진상준, 진도준은 내 리스트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3세는 모두 열두 명이라는 숫자만 기억났다. 진도준이라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은 이유를 쥐어짜듯 생각했고 마지막 한 방울이 그 단서가 되었다. 순양 가(家)의 비극적인 교통사고. 내가 이 집안의 머슴 생활을 할 때 오래된 기사를 검색하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곧바로 잊어버렸다. 어차피 관심 둘 만한 집안은 아니었으니까. 아쉬운 점은 교통사고의 자세한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확한 날짜, 시간, 장소, 원인 등을 기억해 내기 위해 몇 달 동안 머리를 쥐어짰지만 나오지 않았다. 미래가 크게 바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내가 죽음을 피한다면, 그리고 순양 그룹의 경영권을 놓고 크게 싸운다면 어떻게 될까? 또 할아버지인 진양철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도록 만든다면 미래가 많이 바뀔까? 아직까지는 이 혼란스러운 의문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매일매일 나의 행동과 그 결과를 항상 확인하며 신중히 해야 한다. 지금은 이 정도가 전부다. 오늘도 아주 치밀하고 신중한 저녁 식사를 해야 한다. 바로 할아버지와 단둘만이 갖는 자리니까 말이다. *** “우리 새끼 왔어?” “할아버지.” 젠장! 할아버지를 좋아하는 손자인 척 쪼르르 달려가는 행동. 이게 제일 힘들다. 잠깐 동안 웃으며 내 얼굴을 쪼물딱 거리던 진 회장은 나를 식탁 의자에 앉혔다. 순양 호텔 양식당의 특실. 오늘은 누구의 간섭도, 지켜보는 눈도 없이 나와 단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을 게다. 오늘 새벽 선거 결과를 초조하게 지켜보다 베팅에 성공한 결과가 나왔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앞으로 5년간, 순양 그룹은 거칠 것 없이 달려 나갈 수 있다. “진 회장의 도움, 결코 잊지 않겠소. 고맙소.” 당장 베팅의 효과를 증명이라도 하듯 선거 결과가 나오는 순간 대통령 당선자가 직접 전화를 걸어 건넨 인사말이었다. “우리 도준이, 오늘 이 할애비가 맛난 것도 사주고 갖고 싶은 장난감도 다 사주마. 어떠냐?” “제 성적 아직 말씀 안 드렸는데요?” “성적?” “네.” “아…! 그렇구나. 할애비 생일 때 우리 약속했었지?” 물론 그따위 약속은 다 잊었을 것이다. 오늘은 그 이유가 아니라 내 조언 때문이다. 한 명의 후보에게 큰 베팅을 했고 판돈을 싹쓸이한 기념이다. “그래, 약속은 지켰느냐?” “네. 전 과목 수를 받았어요. 모두 백 점 맞았으니까요.” 진 회장은 눈을 껌뻑이며 다시 물었다. “전 과목 백 점?” “네. 우리 반에서 전부 백 점 맞은 건 저뿐이에요.” “아이고, 우리 도준이… 한술 더 뜨네. 이거 어떡하나. 오늘은 너무 늦어 말을 사러 가지도 못하는데?” 내가 말 따위를 탐낼 리 있나? 말을 빙자해서 더 큰 걸 가지려 그런 거지. 내가 진짜 원하는 걸 사주려면 우리 영감님, 돈 좀 깨질 거다. “괜찮아요. 어차피 타지도 못하는데요. 겨울방학 때 말 타는 거 배우고, 그 뒤에 사 주셔도 돼요. 그런데 할아버지.” “그래.” “약속 때문이 아니면 왜…?” “아, 그게 말이다. 우리 도준이 때문에 할아버지 회사가 훨씬 더 커질 수가 있게 되었어.” 회사가 커진다. 즉, 엄청난 돈을 벌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보통의 장사치들은 돈을 투자하고 이익을 남긴다. 큰 장사치들은 정치권력에 투자하고 특혜를 챙긴다. 보통의 장사치들이 10%, 20%의 이익을 남기며 만족할 때 큰 장사치들은 몇십, 몇백 배의 이익을 보장해줄 특혜를 받아야 만족한다. 가장 큰 정치권력인 차기 대통령에게 투자했으니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 뻔하다.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저와 한 약속보다 더 큰 걸 해주실 수 있겠네요?” “더 큰 거? 아무렴. 당연히 더 크고 좋은 걸 해 줘야지. 어디 보자……. 진짜 말을 사주기로 했는데 더 큰 것이라면 뭐가 좋을까?” “제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할아버지.” “그래. 말하렴.” “말을 사면 제주도에 있는 할아버지 목장에 두실 거죠?” “그래야지. 집에서 키울 수는 없지 않느냐?” “전 매일매일 말 타고 싶은데 제주도에 두면 그게 안 되잖아요.” “그래? 그럼 어쩐다…? 진 회장이 대안을 생각할 때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호텔의 주인이라 음식도 남달랐다. 양식당이 분명한데도 초밥과 회, 불고기와 된장찌개, 스테이크가 함께 나왔고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 분명한 자장면과 각종 케익까지 차려졌다. 노인네라 한 번에 쫙 깔아버리는 한정식 스타일을 좋아하나 보다. “일단 먹고 생각해볼까?” 그래, 일단 먹자. 그것도 양껏, 맛있게. 할아버지야 핏줄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으랴? 아니나 다를까, 진 회장은 쉴 새 없이 요리를 집어삼키는 내 모습을 아주 흐뭇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도 드세요.” “오냐, 오냐. 허허.” 진 회장은 자애로운 미소를 보이며 회 몇 점을 삼켰다. “우리 도준이, 매일 말 탈 수 있게 만들려면 목장을 하나 더 장만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바로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정말요?” 입에 든 음식을 급히 삼키고 눈을 반짝이자 진 회장은 활짝 웃었다. “물론이지.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더 큰 걸 선물해 준다고. 우리 도준이가 언제든 갈 수 있는 목장을 선물하마. 어떠냐?” 오, 예스…! 라는 말이 나올뻔했다. 목표를 달성한 기쁨을 표현해야 하는데 진 회장의 손자로서 기쁨을 드러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닭살 돋지만 어쩔 수 없다.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의자에서 내려와 진 회장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 그의 품에 덥석 안겼다. “허허허, 요놈. 그리 좋으냐?” 살갑게 안기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자,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머리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목장은 어디에요? 우리 집 근처? 아니면 할아버지 집 근처?” “허허, 주택가 한가운데서 말을 키우다가는 쫓겨난다. 말똥 냄새가 장난 아니야.” “그럼요?” “서울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원당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엔 이미 목장이 있어. 그걸 매입하면 될 게다.” 이런 삑사리가! 원당에 목장이 있었던가? 절대 매입해서는 안 된다. 내가 원하는 곳은 그곳이 아니다. 조금 당황한 것이 눈에 띄었나 보다. 할아버지의 표정도 변했다. “왜? 싫으냐?” “아, 아뇨. 좋은데… 너무 멀어서요.” “멀어? 어허, 고놈 참. 까탈스럽기는…….” 나무라는 말투였으나 표정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우리 집은 강남인데…….” “서울 남쪽에는 목장이 없는데?” “만들면 되죠. 할아버지는 뭐든 빨리 만드시잖아요.” “뭐라? 만들어? 으하하.” 갑자기 터지는 웃음에 당황한 건 나였다. 좀 억지스럽다고 생각해서 조심스러웠는데 오히려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반응이었다. “도준아.” “네.“ “넌 이 할애비의 회사가 몇 갠 줄 아느냐?” 뜬금없는 질문. 48개의 계열사를 모를 리 없지만 고개를 저었다. “순양의 계열사는 모두 48개다. 그중 19개는 내 손으로 직접 만든 회사란다. 나머지는 인수했지만 말이다.” 인수? 강탈이 아니고? “내 손으로 직접 올린 회사 대부분은 사업 초창기에 만든 것이다. 즉, 처음에는 무조건 직접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애착이 생기고 더 크게 키우고 싶어 악착같아지지.” 목장은 만들면 된다는 내 말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건가? 이 양반은 이미 내게 경영수업을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환영할만한 것이지만 말이다. “난 네가 처음 가지고 싶은 것은 어렵지만 직접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10살짜리 어린애가 이해할만한 말이 아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적당할까? 눈만 껌뻑거려야 하나? 아니면 고개를 끄덕여야 하나? 나의 이런 망설임이 가장 그럴듯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내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진 회장이 입을 가볍게 식탁을 툭 치며 열었다. “좋다. 우리 도준이의 첫 발걸음은 내가 떼게 해주마.” 진 회장은 별실의 문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 누구 있나?” 문이 열리며 정장 차림의 사내가 들어왔다. “네. 회장님.” “서울과 경기도 지도 좀 가져와.” “네? 아, 알겠습니다.” 잠시 후, 비서는 도로교통지도 책자를 들고와 진 회장에게 내밀었다.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수고했어. 나가 봐.” 진 회장은 지도책을 몇 장 넘기더니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팬을 꺼내 지도의 한 지점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자, 우리 도준이 눈이 얼마나 좋은지 한번 보자.“ 그가 표시한 곳은 바로 우리 집이었다. “도준아. 그곳이 바로 네 집이다. 넌 목장을 만들고 싶은 곳에 표시를 해봐.” 미치겠다. 너무 좋아서. 정말 전국에 수십 개의 목장을 만들고 싶다. 십 년, 이십 년 뒤에 땅값이 폭등할 곳을 미리 확보해두면 앞으로 벌어질 순양그룹의 지분 싸움에서 얼마나 든든할까? 수천억, 아니 어쩌면 수조 원의 총알을 미리 장전해놓은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지금은 딱 한 곳만 선택해야 한다. 이미 내가 정해 놓은 바로 그곳을. 괜히 지도를 뒤적거리며 고민하는 척하며 적당히 시간을 때웠다. 진 회장은 이런 내 모습이 귀여운지 따뜻한 미소만 계속 보냈다. “잘 골라야 한다. 서울 시내는 당연히 안되고 경기 남부에도 도심은 피해야 하니까 말이야.” 걱정은 접어두쇼. 아주 깜짝 놀랄만한 곳을 찍어줄 테니까. 나는 호기롭게 펜을 들어 지도 한 부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기요.” 진 회장은 내가 내민 지도를 유심히 보다 미간을 찡그렸다. “흠, 여긴 네 집에서 꽤 먼 것 같은데?” “그런가요?” “지도는 한 눈에 볼 수 있지만 실측과 차이가 크다. 하긴, 아직 그걸 알아채기에는 아직 어리지.” 시무룩한 내 표정을 보자 황급히 대신 변명을 늘어놓는다. 진 회장은 지도를 다시 한 번 확인하더니 문밖에서 기다리던 비서를 불렀다. “여기 이 땅, 어떤 상태인지 한번 알아봐. 정확히 현황 파악하고.“ “네.” 비서는 지도를 챙겨 급히 나갔고 나와 할아버지는 식사를 계속했다. 땅 이야기는 잠시 접고 공부와 친구에 관한 이야기로 잠시 화제를 돌렸다. 공부야 더할 나위 없을 만큼 훌륭하지만 내 주변에는 친구가 없다. 정신이 마흔인데 어떻게 코찔찔이와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친구들과 적당히 잘 지낸다는 말로 얼버무릴 때 비서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 [014] 첫 재산 1. “그래, 어때?” “이 지역은 '남단 녹지'입니다.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있습니다.” “그리고?” “오이밭, 참외밭이 많은 전형적인 농촌 지역입니다.” “그리고?” “교통 인프라가 부실해서 접근도 어렵고 그나마 사람 사는 가장 가까운 지역은 빈곤층이 많이 삽니다. 개발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고 사료됩니다.” “흠… 그럼 목장 만드는 건 문제 없겠군.” “목장이라면 어떤…?” “말을 키우고 승마 가능한 곳 말이야.” “그건 가능합니다. 개발 제한구역일 뿐이니까 목장은 금지 대상이 아닙니다.” 진 회장은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지도를 톡톡 건드렸다.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왕 마음먹었으니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기를 중심으로 매입할 수 있는 땅을 알아봐.” “규모는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십니까?” “개발 제한 지역이라 그리 비싸지는 않겠지?” “그럴 겁니다.” “오만 평 이상.” “알겠습니다. 회장님.” 생각보다 간이 작나? 겨우 오만 평이라니? 최소 십만 평 이상을 기대했는데 아쉽다. 비서가 물러나자 진 회장은 다시 웃음을 보였다. “자, 이제 한번 두고 보자. 네가 고른 그 땅이 어떻게 변할지.” “땅이 변해요?” 알면서도 모른척해 주는 게 어린애답다. “도준아.” “네.” “지금부터 이 할애비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아, 물론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아. 그냥 잊지 않도록 노력만 하거라. 그리고 언젠가 네가 필요할 때 기억해내면 된다.” 뭐든 말씀하세요. 다 이해하니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내 생각이다. “땅은 살아있는 생물이다.”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땅이라는 생물은 신기하게도 변화에 아주 민감해. 물론 그 변화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말이다.” 조금은 뻔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실망스러웠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땅이 내게 유리하도록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땅이 꿈틀거릴 때 확실하게 변하도록 자극과 충격을 줘야 한다. 그러면 흙덩이에 불과한 땅이 금싸라기로 변하는 거야.” 결국 땅투기꾼은 두 부류다. 개발 정보를 미리 입수한 사람. 그리고 진 회장처럼 권력층과 결탁하여 개발이라는 호재를 직접 만들어 내는 사람. 정보를 입수하는 사람은 잘못된 정보를 믿고 실패할 경우도 있지만 후자는 실패가 없다. 항상 금싸라기를 퍼 올리는 것이다. “네가 선택한 땅은 지금은 흙덩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라면 이 땅을 사지 않을 거야.” “왜요?” “이 땅이 금싸라기로 변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게다. 어쩌면 살아생전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 같구나. 그러니 살 이유가 없어. 하지만 너라면 다르지.“ “전 왜 다르죠?” “20년, 30년 뒤 이 땅은 어마어마한 가치 있는 땅으로 변할 수도 있으니까. 넌 그 변화를 볼 수 있을 만큼 살 날이 많이 남았잖니. 그러니 저금한 셈 치고 가지고 있거라.” “네. 명심할게요, 할아버지.” 2, 30년을 쥐고 있어? 절대 그럴 생각이 없다. 물론 할아버지의 생각도 바뀔 것이다. 왜냐? 이 땅은 2년 뒤 신도시라는 엄청난 금싸라기로 변할 테니까. 나는 방금 분당 신도시의 노른자위 오만 평을 내 손아귀에 넣었다. 밥맛이 꿀맛이다. *** 한국이라는 국가의 인지도를 세계적으로 끌어올린 88년의 해가 솟았다. 27년 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응답하라 1988’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 그 드라마는 서민의 일상을 담았고 난 지금 돈이 넘쳐나는 부자들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것도 최상위 부자라는 재벌가에서. “안녕하세요. 고모.” “도준이네? 너 요즘 자주 본다.” 당신이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남편을 국회의원으로 만들려면 여의도로 출근해야지 왜 친정을 들락거려? “도준이는 클수록 인물이 확 피네. 엄마를 닮아가. 참, 엄마는 잘 계시지?” 국회의원 출마 준비 중인 고모부가 내 머리를 쓱 만지며 서재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저 자식은 은근히 소름 끼친다. 검사라는 직업 때문인지 늘 뭔가를 캐기 위해 눈동자를 굴린다. 특히 내 어머니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늘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하긴 저놈만 그런 게 아니다. 이 집안 사내새끼들 죄다 조금씩은 음란한 눈빛을 담고 있다. 지금 당장 현역 배우로 뛰어도 될 만큼 아름다운 어머니다. 남자들이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남자들 때문에 어머니는 손윗동서들과 시누이에게 더 큰 고통을 받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여자들의 질투가 더해져 어머니를 더욱 구박하는 것이다. 아무튼, 언젠가는 저 새끼의 눈알을 팍 뽑아버릴 것이다. ** “도준이는 여기서 살아요?” “방학이라 한 일주일 있는 거야. 그보다 넌 왜 또 왔어? 최 서방까지 데리고?” “장인어른. 제가 뭐 못 올 데를 온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별다른 일이 없는데 함께 왔으니 그런 게지.” 진 회장의 못마땅한 말투에 진서윤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버지. 별다른 일이 있으니까 이렇게 급히 왔죠.” “또 뭐?” “우리 그이 지역구가 왜 수원이에요?” 진 회장은 짜증이 확 솟구쳤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닌 게 분명하다. 수원은 순양 전자의 공장이 있는 곳이고 하청 업체가 밀집해 있다. 이 지역 인구 절반이 순양과 관계있으니 당선은 확실하다. 그래서 선정한 곳 아닌가? “장인어른. 솔직히 순양 그룹을 등에 업고 수원에서 출마하면 막대기를 세워 놓아도 당선 아니겠습니까? 제가 배지를 달아도 여의도에서 꿔다 노는 보릿자루나 거수기 밖에 못할 겁니다.” “말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사위는 딸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게 분명하다. “아버지. 초선이지만 중진의 힘을 갖는 게 아버지에게도 유리하잖아요.” “또! 또! 돌린다.” “종로에서 출마하도록 힘 좀 써 주세요.” 한국의 정치 1번지라고 불리는 곳, 종로. 초선이라도 종로에서 당선한다면 무게감이 다르다. 배경까지 감안한다면 말 그대로 중진의 중량감이다. 진 회장은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최 서방.” “네. 장인어른.” “내가 검찰총장까지 가는 길을 다 닦아 놨는데 자네가 걷어찼어. 알지?” “그 점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거 따지자는 건 아니고, 여의도로 간 뒤의 목표가 궁금해서 말일세. 꼭 종로를 원하는 진짜 이유가 뭔가?” 진서윤이 머리를 떨군 남편 대신 잽싸게 대답했다. “아버지. 정치에 들어가면 당연히 대통령이죠. 최 서방이 청와대 주인이 된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 순양이 바로 대한민국이 된다는 뜻이라고요.” 이미 대답을 짐작한 듯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나왔지만 진 회장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상대를 깔보는 듯, 한심한 듯 바라보는 눈길만 더 무거워졌을 뿐이다. “최 서방.” “네.” “까불지 마.”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반응에 두 사람은 눈만 크게 떴다. “아, 아버지.” “장인어른!” “둘 다 입 닥치고 내 말 잘 들어.” 진 회장의 싸늘한 태도에 두 사람은 입을 닫았다. 이럴 때 토를 달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종로? 지금 종로 국회의원이 누군지 알아? 내가 그 친구를 키운다고 처바른 돈은 또 얼마나 되는지 알아? 그 친구는 내 전화… 아니, 비서실 직원의 전화 한 통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내가 왜 그 친구를 버려야 하지? 사위인 자네보다 더 내 말이라면 껌뻑 죽는데?” 잘 달리는 말은 바꿔 타는 게 아니라는 정가의 격언이 있다. 이런 뜻을 모를 두 사람은 아니다. “자네도 말했지? 순양그룹이라는 간판만 어깨에 지고 있다면 막대기를 꽂아도 당선이라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네를 수원에 꽂은 거야. 딱히 선거 비용이 들지 않거든.” “자, 장인어른.” 자신에게 돈 쓰기 아깝다는 뜻이 명백하자 사위는 섭섭함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설마? 검찰총장으로 만들겠다는 장인의 뜻을 거역해서 버려지는 것일까? “아버지. 너무 하시네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남편을 무시하자 잠자코 있던 진서윤이 발끈했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이이가 그 정도 취급받을 사람은 아니잖아요! 한국 최고의 법률가 집안이에요. 우리 순양그룹 간판이 없어도 어지간한 곳에서는 가볍게 당선해요. 여야 가릴 것 없이 영입 대상 0순위라고요.” “한국 최고의 법률가 집안이라……. 자네도 그리 생각하나?” “…….” 진 회장의 비웃는 표정을 보자 자신 있게 대답하기 껄끄러웠다. “검사장 몇 명, 법원장 몇 명 배출한 집안이니 명문가다? 이거 원, 어이가 없어서.” “아빠!” 자신의 남편과 시댁을 완전히 무시하자 진서윤은 엉겁결에 결혼 전 말버릇까지 나와 버렸다. 하지만 진 회장은 오로지 사위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 부친을 검사장 자리까지 올렸어. 바로 내 힘과 내 돈으로 말이야. 자네 집안 판검사 중에 연수원 성적 탑 찍은 자가 있나? 전부 고만고만한 머리가지고 언감생심 요직을 바라볼 수나 있었다고 생각해? 사돈만 아니었다면, 내가 힘쓰지 않았다면 부장 자리도 못 앉아보고 옷 벗을 인물들이 어디서 감히…!” 진 회장의 노기가 점점 더 커 갈수록 두 사람의 머리도 점점더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자네 집안을 다 키웠어. 웬 줄 아나? 바로 우리 순양 그룹이라는 집을 지키는 충성스러운 개로 쓰려고 키운 거라고. 자네 역할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우리 집안을 지키는 개야. 검찰청에서 국회로 장소만 바뀔 뿐이야. 명심해.“ 자신의 집안을 개라고 하자 수치심과 분노로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하지만 어쩌랴? 틀린 말이 아닌데. 사위가 이를 악문 채 어깨를 들썩였지만 진 회장은 더욱 날카로운 말을 쏟아냈다. “또 하나, 대통령? 내 참, 기가 차서……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자네 머리에서 나왔을 리는 없고, 누군가? 그런 헛바람을 집어 놓은 놈이? 자네 부친인가?” 순식간에 당황한 두 사람을 보자 진 회장은 단번에 모든 걸 알아챘다. 분노를 가라앉히느라 긴 숨을 한번 쉬고 마지막 일침을 놓았다. “최 서방.” “네.” “헛바람 빼고, 쓸데없는 생각 지워. 그냥 지금처럼 내가 주는 꿀만 빨고 살아. 자네 집안 사람들에게도 꼭 전해. 헛된 욕심 부리다가는 패가망신할 거라고. 알아들었나?” “…네.” 수치심 때문에 가까스로 대답이 나왔다. 장인의 전화 한 통이면 검찰과 사법부에 몸담은 친인척들이 단번에 지방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집안의 캐시카우인 로펌도 망한다. 돈 되는 클라이언트들이야 다 순양이라는 간판을 보고 거래하는 거 아닌가. “자네는 나가 봐. 그리고 서윤이, 넌 좀 남고.” 맥빠진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사위가 나가자 진 회장의 태도가 더욱 과격해졌다. “이, 이년이…….” “아, 아버지. 그게 아니고…….” 결국, 거대한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책 한 권이 진서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더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백화점 주인으로 만족하라는 내 뜻을 거역해?” 진서윤은 이럴 때 어떡해야 하는지 잘 안다. 아버지의 분노가 지나갈 때까지 납작 엎드리는 것뿐이다. ======================================== [015] 첫 재산 2.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잘못했어요, 아버지.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능력보다 욕심이 앞서는 딸이다. 딸이라는 한계, 출가외인이라는 한계 때문에 후계 구도에서 일찌감치 떨어져 나갔지만, 호시탐탐 기회만 오기를 기다렸다. 이제 한술 더 떠서 그 기회를 만들려고 한다. 남편을 정계로 진출시키고 정치권력을 손에 넣는다. 꼭 대통령이 아니라도 좋다는 생각이 깔렸을 것이다. 정치에 입김을 불어 놓을 수 있는 위치에 서서 순양의 후계자들을 하나씩 제거하면 분명히 기회가 온다고 믿었을 것이다. 영악한 딸의 유혹에 빠진 멍청한 사위는 얼씨구나 하며 검찰에 사표를 던졌을 것이 뻔하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최선을 다해라. 백화점 경영 실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날에는 싹 갈아치울 거야. 넌 아직 완전한 주인이 아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경고에 진서윤은 무릎이 떨려 일어나지 못했다. * * * 붉게 달아오른 얼굴, 실룩거리는 입술. 서재를 나온 고모부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나가버렸다. 뭔가 심상치 않다. 거실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진 회장의 서재 문 앞으로 슬며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섭고 단호한 영감이다. 역시 철면이라는 별명이 어울린다. 딸에게는 오로지 백화점만 물려줄 생각이 확고한 듯 보였다. 그녀가 보기에는 훨씬 멍청한 오빠들이 주력 계열사에서 자리 잡아가는 걸 보면 고모 진서윤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똑같은 피를 물려받았는데 1/N을 꿈꿀 수 없으니 이런 꼼수까지 생각해 냈다. 경영 능력은 아직 판단하기 어렵지만 잔대가리는 꽤 괜찮다. 이거, 마음을 고쳐먹어야 겠다. 고모를 무릎 꿇리고 고모부의 눈알을 파버리려 했지만 한참 뒤로 미뤄도 되겠다. 일단 주류에서 밀려난 떨거지들을 내 곁에 서도록 하고 최대한 굴려 먹는 게 더 낫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려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거실의 소파에서 뒹굴거리는 척하며 곁눈질로 보니 고모 역시 고모부와 마찬가지로 힘없이 집을 떠난다. 뒤이어 나온 진 회장 때문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우리 도준이. 심심했어?” “아니에요. 책 보고 있었어요.” “그래? 좋은 습관이야. 항상 책을 가까이하거라.” “네.” 진 회장이 내 머리를 쓰다듬을 때 비서 한 명이 급히 문을 현관을 통해 거실로 들어와 머리를 꾸벅 숙이며 두툼한 서류 봉투를 건넸다. “회장님. 일전에 지시하신 건입니다.” “그래. 매입 끝났나?” “네. 등기 이전까지 다 끝냈습니다.” “수고했어. 공사는?” “내일 아침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말은 목장이 완성되는 대로 제주에서 두 마리를 먼저 옮기고 더러브렛 품종 두 마리를 주문했습니다. 6개월 뒤에 목장에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수고했어.” 비서가 머리를 꾸벅 숙이고 나가자 진 회장은 환하게 웃으며 봉투를 열었다. 두툼한 서류는 목장의 등기임이 뻔하다. 그리고 몇 장의 사진과 도면. 사진은 아랍에 주문한 말의 사진이었고 도면은 바로 목장이었다. “어떠냐? 이놈 정말 잘생기지 않았니?” 말이 잘생겼든 못생겼든 관심 없었지만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척했다. 내가 가장 궁금한 건 과연 오만 평이 전부냐는 것이었고 과연 누구 이름을 등기에 올렸나 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한참 말 사진을 구경하고 드디어 등기 서류를 펼쳤다. “도준아.” “네. 할아버지.” “이건 네가 원했던 그곳의 땅문서다. 전부 팔만 평.” 오호! 삼만 평이 더 늘었다. “저번에 할아버지께서 오만 평이라고 말씀하신 게 기억나는데요?” “요놈 자식. 숫자까지 기억하는구나. 허허.” 웃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회사 경영에서 정확한 숫자를 기억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땅 주인들이 여러 명이었는데 오만 평으로 딱 떨어지지 않더구나. 그래서 팔만 평으로 늘었다.”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팔만 평의 토지 보상금이 얼마나 될까 열심히 계산하고 있었기에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 좋으냐?”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나를 보며 진 회장도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땅 때문에 좋아했지만 그는 목장과 말 때문에 좋아하는 줄 알 것이다. 이제 확실하게 챙겨야 한다. 비록 내 명의지만 등기 서류를 진 회장이 쥐고 있다면 매매는 그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서류가 바로 보증이다.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는 말 사진을 내려놓고 등기 서류를 계속 만지작거리며 관심 있는 척 읽기 시작했다. “이놈아. 네가 그걸 본다고 아느냐?” “그래도 ‘제꺼’니까 좋아서요. 헤헤.” “뭐라? 으허허. 요놈 보게. 땅문서부터 챙긴다 이거냐?” 땅문서?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지금 160억이 넘는 적금 통장을 챙긴 것이다. 2, 3년 뒤에 만기가 돌아오는 적금 통장을. 지금 은마 아파트 31평의 시세가 겨우 7,500만 원이다. 이 아파트 200채 넘게 살 수 있는 거금이다. 그리고 이 돈은 나의 시드머니다. 진 회장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거 잊어버리면 큰일 나니까 할아버지가 보관하고 있으마.” 그가 내미는 손을 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서류는 건네지 않았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들어야 한다. 내 표정을 보고 그는 다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요놈 참, 네 것이라 뺏기기 싫다는 게냐? 허허.” 나의 이런 행동을 욕심이나 소유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고 다행히 내 할아버지는 이런 소유욕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좋다. 그럼 네가 직접 보관해라. 책상 서랍에 넣어놓고 잊어버리면 안 돼. 만약 잊어버리면 이 목장은 네 것이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참으로 고역이지만 할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그래도 160억을 선물로 줬는데 이 정도 애교는 부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 * * 일주일간 할아버지의 저택에서 한껏 재롱을 피우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굳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도준아. 너 할아버지께서 주신 거 좀 보자.” 그럼 그렇지. 너무 쉽게 내어 주더라니. 하긴, 어린애에게 등기 서류를 맡길 리가 없지. 재미있는 점은 내게 땅을 준 사실을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에게 알려준 사실이다. 신뢰가 가지 않는 아들보다는 달갑지 않은 며느리에게 조금은 안심하는 것일까? 서류봉투를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황급히 받아든 그녀는 사진과 서류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내려놓았다. 어머니의 표정에서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그동안 받던 냉대와 180도 다른 관심 그리고 선물. 비록 황무지나 다름없는 휴지조각 같은 땅이지만 최초로 회장님께서 증여한 재산이다. 기뻐하기엔 뭔가 찜찜하고 불안한 모양이다. “도준아. 이거 내가 가지고 있을게. 잊어버리지 않게 말이야.” 자고로 어릴 때 받는 용돈은 엄마가 보관하는 게 정답이다. “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당부하셨어. 목장 이야기는 다른 사촌들에게 자랑하지 말라고 말이야. 알아들었지?” “알겠어요. 염려 마세요.” 나의 진중함을 아는 어머니라 안심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머니.” “응. 왜?” “혹시…… 돈 있으세요?” 갑작스럽게 돈 이야기를 꺼내자 어머니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 “돈? 왜? 용돈 떨어졌어? 아니, 넌 용돈 안 쓰잖아.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엄마가 사줄게.” 어린애다 보니 고작 용돈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만 내가 말한 돈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아뇨. 용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 큰돈이 필요할 거예요.” “큰돈? 얼마나?” 이제 어머니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변했다. “할아버지 집에 있을 때 들은 이야기인데요. 일산이… 어디예요?” “일산? 글쎄. 엄마도 모르는데? 왜?” 예상대로 세상 물정 전혀 모르는군. 뭐, 상관없다. 어차피 기대한 건 아니니까. 착하디착한 어머니도 든든한 주머니 하나쯤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전부였다. 내가 할 일은 슬쩍 던지는 것뿐이다. “잘은 모르지만, 일산이라는 곳이 곧 도시로 변한대요. 그래서 땅값이 오른다나?” “뭐? 누가 그래? 할아버지가?” “아, 아뇨. 할아버지 회사 아저씨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내 말뜻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순진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시아버지가 보내주는 풍족한 생활비를 흥청망청 다 써버릴 만큼 골빈 여인도 아니다. 은행금리가 연 15%니 분명히 꽤 많은 돈을 모아 뒀을 것이고 그 쌈짓돈을 어떻게 이용할지는 스스로 선택할 문제다. 조금은 당황했지만, 눈을 빛내며 생각에 잠긴 어머니를 두고 내방으로 올라왔다. 침대에 털썩 몸을 던지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되새겼지만 딱히 특별한 게 없다. 너무 어리다. 이십 대였다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할 수 있었을까? 아쉬움을 뒤로하고 책을 집어 들었다.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는 데는 독서만 한 게 없다. 아니, 독서 외엔 할 게 별로 없는 시대다. 겨울방학 내내 책을 벗 삼아 보내니 새로운 시대, 제6공화국이 시작되었다. 2월 25일,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이 취임했고 곧이어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전도 시작했다. * * * 진양철 회장은 내가 상상했던 이상의 수완가였다. 특히, 가장 놀랐던 일은 바로 국회의원 선거를 순양전자의 광고판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오자 모든 지역구 후보들은 트럭을 타고 한 표를 얻기 위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 자신의 지역을 돌아다녔다. 진 회장은 88년 서울 올림픽 특수를 노려 경기 관전과 녹화에 필요한 초고가 TV와 VTR을 준비 중이었는데 시제품을 급히 만들어 모든 후보들에게 ‘임대’라는 형식을 빌려 뿌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33인치의 대형화면, 분리형 서라운드 스피커와 우퍼까지 장착해서 스테레오 음향을 지원하고, 여기에 PIP(Picture In Picture) 기능까지 갖추고 있어 처음으로 동시에 2개 채널을 볼 수 있는 TV였다. 대졸 신입사원 월급이 약 33만 원인 시절에 무려 260만 원이나 하는 초고가 TV다. 그리고 엄청난 기술인 무선 리모컨이라는 엄청난 기술력을 자랑하는 45만 원짜리 VTR. 이 두 제품이 후보들의 트럭에 올라타고 전국을 누볐다. 유권자들은 후보가 피 터지게 외치는 공약보다 전자제품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며 몰려들었다. 시제품 테스트와 광고를 한 번에 해결한 영리한 수법이었다. 선거 운동용 트럭이 한번 지나간 동네에서는 문의전화가 빗발쳤고 이 엄청난 호기심을 다룬 TV 뉴스는 광고의 마지막 방점을 찍었다. 이런 광고 효과에 비하면 고모부의 국회의원 당선은 뉴스거리도 아니었다. 순양의 사위가 순양시(市)라고까지 불리는 수원에서 떨어진다면 천재지변에 버금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일도 축하는 받아야 했다. 당선 축하연은 할아버지의 저택에서 열릴 줄 알았는데 순양호텔 그랜드 볼륨에서 개최되었다. 아무래도 중진 국회의원들까지 참석하다 보니 집은 피한 것 같았다. 국민의 대표가 재벌 집에 드나드는 모습이 언론에 잡혀 잡음이 생기는 걸 미리 방지한 것이다. 축하연이 호텔이라고 하자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호텔은 집과는 달리 가정부 취급받을 일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 [016] 보통 사람의 시대 1. 축하연은 성대하게 열렸다. 일개 초선의원의 당선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니라 바로 총수인 진 회장에게 얼굴도장을 찍고 싶은 인간들로 득실거렸다. 연회장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입구에서 환한 웃음으로 손님을 맞는 고모 진서윤에게 먼저 인사를 드렸다. “누나. 축하해. 또 한 걸음 더 올라섰네.” 아버지의 뼈있는 인사말에도 고모는 마냥 기쁜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또, 또. 넌 왜 그리 삐딱해?” 가볍게 등을 한번 툭 치고 눈짓을 보낸다. “네 매형 계시니까 인사드리고. 얌전하게 있다가 불편하면 슬쩍 빠져.” “국회의원 부인이 되더니 아량도 넓어지셨어. 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와 형 상준은 여전히 긴장한 얼굴이었다. “축하드려요. 형님.” “안녕하세요.” 어머니와 우리 형제의 인사를 받아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 상준 엄마. 나 하나만 부탁하자.” “네. 말씀하세요.” “당 지도부 중에 아주 중요한 분이 오셨는데 직접 인사 한 번만 드려줘.” 이때 아버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나, 그게 무슨 말이야? 설마 웃음이라도 팔라는 거야?” “여보!” 어머니가 아버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괜한 분란의 피해는 언제나 어머니 몫이었기에 피하고 싶은 것이다. “야! 그냥 그분이 상준 엄마 팬이었데. 그래서 아는 체 한번 하라는 거야.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 형님. 염려 마세요. 따로 인사드릴게요.” 어머니는 고모의 역정을 뒤로한 채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급히 연회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보. 별거 아닌 일에 욱하지 말아요.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한 줄 알아요?” 애처가인지 공처가인지 분간하기 힘든 아버지는 씩 웃으며 팔짱 낀 어머니의 손을 꽉 잡았다. “알았어. 얼른 한 바퀴 돌고 우린 빠져나가자고.” 어머니의 당부 때문인지, 아버지는 계속 웃으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파티의 주인공인 고모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당선 축하합니다, 매형. 어떻습니까? 검사보다 의원이 더 좋습니까? 하하.” “고마워, 처남. 아직 알 수가 있나? 그리고 부장 검사에서 초선의원으로 강등된 거지. 이제 고생길이 훤해. 하하.” 나와 상준 형이 인사하자 고모부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이거, 주변이 환해지는 이유가 바로 처남댁 때문이군요. 어떻게 나이가 들수록 더 아름다워지십니까?” “축하드려요, 고모부.” 나는 재빨리 어머니의 전신을 훑는 고모부의 눈길을 놓치지 않았다. 음침한 새끼. 써먹을 곳이 있을 것 같아 좀 친해지려 마음먹었는데 이 새끼는 당최 정이 안 간다. “아 참, 처남. 잠깐 인사 좀 할 사람이 있는데 도와줘.” “그렇지 않아도 누나한테 들었습니다. 도대체 누구길래 형님이 이렇게 눈치 봅니까?” “6공의 실세야.” “네? 6공 출범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실세가 나와요?” “노태우 대통령의 오른팔이야. 이미 황태자에 등극한 분이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목소리는 낮췄다. “상준아, 도준아. 너희들은 맛난 거 좀 먹으며 여기 잠깐 있어.” 고모부는 부모님을 데리고 조금 떨어져 있는 사람들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인파에 가려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이름이라도 들으려 했지만, 그것마저 방해꾼이 나타나 불가능했다. “어? 강준이 형.” 낯익은 이름에 돌아서니 이제 중학생이 된 삼남의 아들 진강준과 그 여동생인 진영경이 서 있었다. 진영경은 나보다 딱 한 살 많은 누나다. 나는 웃으며 손을 들었다. “누나 안녕.” 하지만 두 사람은 인사를 받지 못했다. 둘 다 나 때문에 부러진 다리가 떠올랐을 것이다. “강준이 형. 다리는 괜찮아? 목발 짚고 다녔다면서?” 난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진강준의 다리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런 내 모습에 치가 떨리는 듯 진강준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남은 다리도 한번 부러져야 균형이 맞을 텐데…. 언제가 좋을까?” 말은 부드럽게 했지만 내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잡아먹을 듯 노려보니 몇 초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을 뿐만 아니라 자리까지 피해버렸다. 역시, 겁 많은 놈이다. 오냐오냐 키운 부잣집 아들놈이 깡다구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도준아. 너 왜 자꾸 강준이 형 건드려?” 두 사람이 도망치듯 사라지자 상준 형이 잔뜩 겁먹고 긴장한 채 말했다. “형. 저 새끼한테 쫄지 마. 저 새끼 싸움 못 해. 깡도 없고. 앞으로 형도 저놈 밟아버려.” 나의 거친 말투에 상준 형은 눈만 껌뻑거렸다. 첫 번째 동맹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심지가 약하다. 이제 국민학교 6학년이니 조금 더 기다려 줘도 될성싶다. 중학생이 된 후, 혹독하게 단련시키면 되겠지, 뭐. “뭐 좀 먹었니?” 누군가에게 인사를 끝내고 돌아온 부모님은 우리 손을 꼭 잡았다. “어차피 눈도장 찍었으니 우린 가는 게 어때? 여긴 애들 먹기에는 적당한 게 없잖아.” “아버님께 인사는 드리고 가야죠.” “우린 아버지 못 봐.” “네?” 뜻 모를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축하연을 핑계로 찾아온 정치인들과 밀담을 나누시고 계실걸? 이 호텔 특실에서 말이야. 아버진 이 파티에 참석 안 하셔. 어머니가 안 오신 것만 봐도 뻔하잖아.” 누가 뭐래도 이 연회의 주인은 국회의원 당선자다. 그룹 총수는 장인일 뿐이니 연회에 얼굴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 “그럴까요, 그럼?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더없이 밝은 표정의 어머니가 다시 아버지의 팔짱을 꼈다. 두 분의 환한 표정에 상준 형도 팔짝 뛰었다. “아빠! 맥도날드. 맥도날드 가요!” 이런 젠장. 나는 순양 호텔 중식당의 딤섬을 먹고 싶었지만, 한발 늦었다. 어린애를 형으로 데리고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다. 80년대부터 치킨과 호프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1984년 KFC가 등장했다. 그리고 패스트푸드 대명사인 맥도날드가 올해 3월, 압구정 갤러리아 백화점 맞은편에 1호점 문을 열었다. 서울에 딱 하나밖에 없다 보니 압구정동에 사는 애가 아니면 접근이 어려웠다. 이미 운전기사가 몇 번 달려가서 사 왔기 때문에 그 맛을 알아버린 상준이는 틈만 나면 노래를 불렀다. “그럴까?” 아버지는 내 얼굴을 보며 확인했고 나도 애써 기쁜 표정을 지었다. 햄버거와 콜라를 싫어하는 어린이는 없어야 하니까 말이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연회장을 슬며시 빠져나올 때였다. 갑자기 아버지 앞을 가로막은 사내가 머리를 살짝 숙였다.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사내의 시선이 나를 가리키자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도준이?” “네.” “아예 애를 잡는구만. 그냥 못 찾았다고 말씀드려도 되지 않을까?” “죄송합니다. 보는 눈이 많아서 거짓 보고는 좀 곤란합니다.” 사내는 다시 머리를 꾸벅 숙였다. “아버지, 괜찮아요. 금방 다녀올게요.” “아, 이야기가 길어지실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회장님께서 집에 데려다주신다고… 먼저 돌아가셔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숫제 나만 남기고 먼저 돌아가라는 소리였다. 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할아버지께 달려가 한소리 할 것 같았다. “아버지. 맥도날드 가셔서 형이랑 맛있게 드세요. 전 여기서 저녁 먹을게요. 할아버지께 수제 햄버거 사달라고 할게요.” 내 말이 끝나자 아버지는 참담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아차 싶었다. 오해했음이 틀림없다. 내 입장에서는 진 회장과 조금이라도 더 친해지는 것이 중요했고 맥도날드 햄버거보다는 호텔 요리를 먹는 게 훨씬 더 낫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모르는 아버지에게는 부모님을 위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진 회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억지 노력하는 것으로 비쳐질 것이다. 지금의 이런 오해는 어쩔 수 없다. 내가 어린이라는 탈을 벗을 때쯤 이런 오해를 풀어주면 된다. 나는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짓고 돌아섰다. * * * 직원이 안내한 방은 상상했던 로열 스위트가 아니었다. 일반실 정도의 크기였고 침대도 없는 수수한 방. 28층은 분명 로열층인데 이런 객실이 있나? 크고 둥근 탁자 위에는 나를 위해 차려놓은 갖가지 음식이 먹음직스럽게 식욕을 자극했다. “이 방에서 저녁 먹으며 잠깐 기다려. 회장님은 일 좀 보시고 부르실 거야.” 직원이 나가자 나는 방을 한번 쓱 둘러봤다. “어라?” 꽉 막힌 줄 알았는데 한쪽 벽에 약간 열린 미닫이문이 있다. 열린 틈새로 보니 진짜 로열스위트 룸이다. 아하, 여긴 스위트룸에 딸린 별실이구만. 이미 그곳에는 의자에 앉아있는 진 회장의 뒷모습이 보였고, 그의 등에 가려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일단 굶주린 배부터 채웠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먹으며 옆방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으려 귀를 세웠다.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 그리고 북방 정책. 각하의 취임사에도 나온 말입니다. 의지가 대단하세요.“ “네. 저도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북방 정책은 바로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입니다. 특히 소련과 중국, 이 두 나라와 수교를 맺고 싶어 하십니다.” 누굴까? 대화 내용으로 보면 분명 대통령의 최측근임이 분명한데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사실 지금 이 시대는 내게 있어서 아주 오래된 과거일 뿐이며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대략적인 흐름이 전부다. “물밑작업은 당연히 박 의원께서 진행하시겠군요.” “그렇습니다. 1차는 소련입니다.” “소련이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통령의 측근이 이런 계획을 재벌 총수에게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주는 게 아니다. 분명 어떤 요구가 있을 것이고 그 대가를 준다는 뜻이다.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이제 냉전 시대는 끝났습니다. 오늘날의 외교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경제죠. 상호 이익을 극대화 하는 게 바로 최상의 외교 아니겠습니까?” “중국은 그렇다 쳐도 소련은 우리보다 경제 대국입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제 입장에서는 오히려 물건을 팔아먹고 싶은 곳이 소련입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소련의 1인당 GNP는 9,300$로 5,800$에 불과한 우리나라를 압도한다. 물론 5년 뒤에는 1/10로 폭락하지만. “각하께서 순양의 진 회장님께 모든 걸 일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 단지 각하의 의중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던진다. 정부의 큰 그림에 무조건 협조하라. 단, 협조하는 방법은 원하는 대로 맡긴다. 우리 할아버지는 여기서 어떤 대답을 할까? 누구나 채찍은 피하고 싶고 당근만 빼먹기를 원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 내 귀는 더욱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거…… 굉장한 배려에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려. 허허.” 즉답을 피하는 건가? 아니면? “우리 순양이야 저잣거리 장사치 아닙니까? 나랏일의 큰 그림을 어찌 짐작하겠습니까? 그냥 박 의원께서 알려주시면 따를 뿐이지요.” 어라? 설마 항복? 이럴 리가 없는데? 이미 순양호(號)는 정부 권력으로 뒤집을 수 있는 배가 아니다. 1위 재벌이 정권에 무릎 꿇는다면 2위, 3위 재벌도 피할 길이 없다. 재벌은 그들을 위협하는 정권에 맞서 언제든 강력한 동맹군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 집단이다. 재계 1위라는 그룹의 위상은 바로 재벌의 대표선수다. 대표선수가 쉽사리 기권할 리는 없지 않은가? ======================================== [017] 보통 사람의 시대 2. “이런! 제게 너무 큰 숙제를 주시는데요? 하하.” 박 의원이라는 놈의 호탕한 웃음소리. 한껏 기분이 좋아진 것을 드러내는 웃음이었다. “회장님께서 이렇게 통 큰 결정을 해 주시니 제 어깨가 한결 가볍습니다. 좋습니다. 제가 적절한 선에서 초안 잡겠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각오할 테니… 우리 의원님, 청와대의 불호령은 피하셔야죠. 각하께서 만족할 만한 그림을 그리십시오. 허허.” 한 발 더 물러선 양보. 과연 할아버지의 속셈이 뭘까? “이거, 이거. 제가 눈치가 어두워서…. 이제야 알아챘습니다, 그려.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이런, 나 역시 눈치가 없었다. 이만한 양보를 한 이유가 따로 있었구만! 뒷모습만 보여 알 수는 없었으나 할아버지는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염치없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작년, 민주화니 뭐니 떠들다가 이젠 노동자들까지 거리로 나오지 않습니까? 꼴뚜기가 뛰니 망둥이도 뛰는 꼴이지요. 이제 겨우 먹고살 만한데 말입니다.” “아, 그 문제 말입니까?” “네. 총파업이네, 뭐네 해서 제대로 돌아가는 공장이 없습니다. 회사 문 닫으면 당장 거리로 나앉는 건 바로 그들인데…. 이거 참…….”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노동자들도 그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지금 진 회장이 말하는 것은 이들을 막아달라는 뜻이다. “음… 그 문제는 우리에게도 최우선 과제입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취임 초기라 강경 진압은 자제하고 있습니다만 올림픽 전에 해결할 겁니다.” “몇 개월 버티는 거야 문제 되겠습니까? 단지 옳은 방향으로만 키를 잡아 주십시오.” “그 부분은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또 있습니까?” “요즘 안기부도 정신없이 바쁘겠죠?” “그 애들이야 바쁘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아! 이런, 또 눈치 없이… 하하.” 박 의원은 머리를 탁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노조가 말썽이 많은가 봅니다.” “그놈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몇 번 받았습니다.” “순양의 정보력은 안기부와 맞먹는다고 들었는데 우리 애들이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장사치의 발 빠른 직원 몇 명과 국가 정보기관을 비교하시다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안기부까지 동원해? 고작 노조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 강력한 국가 기관을 이렇게 사사로이 써먹을 수 있는 건 바로 지금까지 투자한 돈의 힘이다. 도대체 선거자금을 얼마나 건넨 것일까? “라인 서너 개 돌려보겠습니다. 결과는 곧 받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거, 큰 배려 감사드립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밀담은 끝났다. 서로 덕담을 주고받더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발소리도 멀어져갔다. 그리고.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며 진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준아, 오래 기다렸지? 밥은 많이 먹었어?” 그는 식탁의자를 당겨 내 옆 가까이 앉았다. 겨울 방학 때 보고 겨우 두 달 지났는데 진 회장은 마치 몇 년 만에 만난 듯 지난 두달간의 일을 꼬치꼬치 물었다.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이 내가 말할 수 있는 정답의 전부다. 내가 말하는 동안 진 회장은 식탁 위를 확인했다. “도준아.” “네.” “너 솔직히 말해보렴. 조금 전 저 방에서 할아버지가 하는 말 다 들었지?” 빈 접시도, 줄어든 음식도 거의 없다. 내가 밥 먹는 걸 소홀히 한 걸 대번에 눈치챈 것이다. 이번에는 다 들었다고 해야 좋아하겠지? 조금 열어놓은 미닫이문은 내가 잘 들을수 있도록 일부러 그런게 뻔하니까. 하지만 엿듣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나는 잘못이 들킨 아이의 자연스러운 행동,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떨궜다. “요놈아. 머리 들어. 사내놈이 툭하면 머리 숙이면 안 되는 거야.” 숙인 내 머리를 쓰다듬는 진 회장의 손길이 느껴졌다. 온기라고는 없는 손. 이 사람은 늙어간다. “혹시 이 할애비가 나눈 대화 전부 알아들었느냐?” 기대에 찬 눈빛이다. 지금 내가 머리를 끄덕이면? 저 기대가 기쁨으로 변할 것이지만 그럴수는 없다. 머리를 저었다. 이미 충분한 기쁨을 안겨주었다. 필요할 때 조금씩 나눠줘야 기쁨이 배가되는 법이다. 그리고 열한 살짜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정치적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약간의 선물을 주고 싶어졌다. 저 실망한 눈빛을 완전히 외면할 만큼 난 매정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긴 해요.” “호기심은 좋은 것이지. 뭐냐?” “아까 할아버지와 함께 있던 사람 대통령의 부하죠?” “부하? 그런 셈이지.” 진 회장은 내가 어떤 질문을 할까 한껏 호기심을 드러냈다. “할아버지가 왜 부하를 만나요? 우리나라의 가장 큰 회사 회장님이면 대통령을 만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진심으로 궁금했던 것이다. 아무리 6공화국의 황태자지만 순양그룹의 회장이 직접 만나야 할 급은 아니다. 이유를 듣고 싶었다. “도준아.” “네.” “너도 학교에 다니다 보면 이런저런 소문을 듣지? 누구는 참 착하더라, 누구는 새침데기더라, 누구는 싸움 잘한다더라. 안 그래?” “네. 많이 들어요.” “특히 그 소문을 전달해 주는 친구가 도준이랑 아주 친하거나 반장처럼 믿을만한 애라면 소문이 정확하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그게 바로 함정이다.” 정확한 소문의 함정. 아니, 전달자를 신뢰할 때의 함정이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믿으면 안 돼.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말이다. 아주 중요한 일일수록 더 그렇다. 항상 직접 확인해야 한다.” “그럼 직접 확인하신 거예요?” “그래. 내가 도와준 것에 대해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를 확인한 거야. 그리고… 여러 가지 겸사겸사지.” “네.”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내 모습을 찬찬히 보던 진 회장은 다시 내게 확인했다. “도준이 너, 예전에 이 할애비가 했던 말 기억하니? 중요하다고 했던 거?” 아주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지금 이 시점에 확인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거 몰라도 되지만 잊지 말아라.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기억해 내라. 맞나요?” “그래. 맞다. 마찬가지로 방금 내가 했던 말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네. 할아버지.” “그리고 하나 더. 너는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 더, 듣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 진 회장은 현 정권의 실세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다. 정부에서 그리는 큰 그림을 따르겠다는 말 역시 이런 맥락이다. 박 의원의 계획을 듣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현실적인 어려움을 호소해서 바꿔버리면 그만이다. 진 회장은 말투만 공손했을 뿐, 아랫사람에 그러하듯 박 의원에게 계획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먼저 제안하는 자가 바로 약자이며 을이다. 진 회장의 진의를 알아채자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내 미소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진 회장 역시 만족한 표정이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우리 도준이 얼굴 본 것으로 만족해야겠구나. 이 할애비가 좀 바빠서 말이야. 대신 어린이날 꼭 할아버지 집으로 오너라. 같이 놀자꾸나.” “네!” 아주 기쁜 듯 대답해야 했다. 어린이날을 싫어하는 애는 없으니까. * * * 손자를 집으로 돌려보낸 진 회장은 다시 메인 룸으로 들어갔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소파에 앉아 있던 중년 사내가 진 회장이 등장하자 벌떡 일어났다. “그냥 앉아 있어. 자네는 너무 딱딱해서 탈이야. 뭘 그리 예의를 따지나?” “아닙니다. 습관이랄까요? 하하.” “박 의원은 잘 모셨나?” “네. 아래층 특실로 모셨습니다. 분 냄새 맡으며 좀 쉬라고 신인 여가수 하나 붙여줬습니다.” “잘했어. 그 인간 여자라면 정신 못 차리지. 연회장은 어때?” “참석한 초선의원들에게 한 장씩 돌렸습니다. 그리고….” 중년 사내는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며 덧붙였다. “연회장에 배치한 모델들에게 치근덕대는 놈들도 파악했습니다. 연회 끝나는 대로 자리 마련해 주라고 지시했고요.” 돈을 좋아하는 놈과 여자를 좋아하는 놈 그리고 둘 다 좋아하는 놈을 한꺼번에 파악할 수 있는 자리다. 물론 여자를 멀리하고 돈을 거절하는 놈도 나올 것이다. 뇌물을 광범위하게 살포할 때의 장점이다. 걸러야 하는 놈의 명단이 빨리 만들어지고 집중 관리 대상이 나온다. 당선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주는 돈을 덥석 받고 여자에게 침 흘리는가? 이렇게 조심성 없는 놈들은 국회의원 한 번으로 끝이다. 두 번은 없다. 집중 관리 대상을 키우고 순한 양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들이 바로 순양의 첨병들 아닌가? “잘했어.” 오늘 일은 대충 마무리된 것 같다. 진 회장은 한결 느긋한 마음으로 찻잔을 들었다. “어때? 박 의원이 뭘 들고나올 것 같은가?” “뭘 들고 나오든 그게 중요합니까? 우리 순양은 소련의 천연가스 자원만 확보하면 됩니다.” “자신 있나?” 중년 사내는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진 회장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LNG가 속속 들어옵니다. 순양이 차린 밥상이니 독식해야죠. 자신 있습니다.” 빙긋 웃으며 대답하는 중년 사내를 바라보는 진 회장의 눈빛에는 무한한 신뢰가 담겨있었다. ======================================== [018] 보통 사람의 시대 3. 1980년부터 정부가 가정 연료의 고급화를 촉진하기 위한 가스 보급 확대계획을 수립하고 LNG 도입계획을 구체화하면서 수도권과 대도시를 중심으로 다수의 민간 도시가스사업자들이 출현했다. 1986년 10월 31일, LNG 57,300톤을 실은 배가 처음으로 평택 인수기지에 도착하면서 도시가스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도시 가정의 에너지는 연탄과 석유에서 천연가스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소련은 유럽의 천연가스를 30%나 공급할 만큼 거대한 자원 강국이다. 오죽하면 외교의 필살기가 밸브 잠근다고 협박하는 것이겠는가? 이 황당한 협박은 효과도 엄청났다. 소련이 가스관 밸브를 닫으면 유럽은 추위와 암흑에 떨어야 한다. 이런 소련 정부가 자국 천연가스의 생산, 유통, 판매를 전담하는 ‘가즈프롬(Gazprom)’을 좌지우지한다. 가즈프롬은 이사회 임원 중 절반 이상이 러시아 정부의 장·차관 등 고위직을 겸하고 있는, 국영기업이기 때문이다. 순양이 소련의 천연가스 수입에 대해 독점적 권리를 가지고 민간 도시가스사업자들에게 공급한다면, 소련 가스관의 밸브를 손에 넣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독점권만으로 엄청난 돈을 이익을 뽑아낸다. 순양은 현 정부의 북방정책에서 얻어야 할 목표는 일찌감치 세워 놓았던 것이다. “그래. 그 건은 알아서 처리하고… 그보다 학재야.” “네. 회장님.” “어떻게 생각해?” 회장의 눈짓이 별실을 슬쩍 가리켰다. “도준이 말씀이십니까?” 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학재 비서실장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떡잎은 좋습니다.” “떡잎만?” “판단은 10년 뒤에 하겠습니다. 훌륭한 떡잎이라도 태풍 한 번에 뿌리째 뽑히니까요.” “도준이 애비 이야긴가?” 진 회장은 뿌리째 뽑혀 날아간 훌륭한 떡잎이 떠올랐다. “하긴 윤기도 영국 유학 가서 변해버렸지. 꽤 쓸 만했는데 말이야.”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 하지만 이학재 비서실장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더 나쁜 의견까지 말했다. 진 회장에게 어떠한 쓴소리도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측근이기 때문이다. “예술가 기질이 넘치는 아버지와 여배우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도준이입니다. 어쩌면 급격하게 변해버릴 가능성이 가장 큰 조건을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도준이 애미는 그냥 미인이야. 얼굴로 배우가 됐다고 봐야지. 딴따라 기질은 없어.” 어떤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멈췄다. 사람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은 회장이니 옳을지도 모른다. 이학재 비서실장은 다시 도준이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회장님의 지나친 총애가 일견 이해할 만하더군요. 영특합니다.” “아까워. 너무 어려. 저놈이 장손이었다면 정말 든든했을 텐데.” 목소리에서 절절한 안타까움이 묻어날 정도였다. “회장님께서 오랫동안 건강하시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도준이 위로 사촌만 몇 명이야? 그리고 큰아버지 셋에 큰고모까지. 무리야.” 가벼운 한숨과 고개를 흔드는 모습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말해준다. 아무리 돈이 많다 하더라도 시간을 앞당길 수단은 되지 못한다. “지금처럼만 커 준다면 계열사 몇 개는 맡겨도 되지 않을까요? 맡은 회사를 크게 키운다면 그것도 복 아니겠습니까?” “몇 개 던져주면? 자식놈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어. 늑대처럼 달려들어 발기발기 찢어 나눠 가질 거야.” 귀여운 강아지가 가진 맛있는 고깃덩이를 늑대들이 보고만 있을까? 귀여운 강아지를 지켜줄 아버지가 고깃덩이에 관심이 없으니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진 회장의 세 아들과 외동딸이 어떤 인간인지 아는 이학재는 자신의 생각이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자네는 어떤가?” “네? 무슨 말씀이신지…?” “만약 10년 뒤에도 도준이가 영특함을 유지한다면 자네는 누구 편을 들겠나? 장손인 영준이? 아니면 도준이?” 이학재 비서실장은 진 회장의 의도를 명백히 알아챘다. 막내 손자에게 부족하지 않을 만큼 회사를 물려주고 싶어 한다. 그리고 어린 막내 손자의 호위무사로 자신을 지명한 것이다. “누가 되든 전 순양그룹 회장님 편을 들어야죠.” 이학재가 싱긋 미소 지으며 말하자 진 회장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태도가 좋았다. 생각과 행동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인다. 그 의지가 회장인 자신의 의자와 착착 맞아떨어졌기에 남들에게는 충성으로 보일 뿐이다. “내 뒤를 이은 회장이라는 인간이 자네보다 멍청해도 지금 나를 대하듯 모실 수 있을까?” “촉국의 제갈공명도 저능아 황제를 충심으로 모셨습니다.” “저능아니까 모신 게지. 허수아비 하나를 앞에 두고 스스로 황제 노릇을 했으니까.” “너무하신데요? 제갈공명의 충성심을 그렇게 깎아내리시다니. 하하.” 이학재가 웃음을 터트렸지만 진 회장은 웃지 않았다.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급히 웃음을 멈춘 이학재가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뭐가?” “도준이를 그 정도까지 생각하고 계시는지 몰랐습니다.” 이학재는 냉담한 얼굴, 철면이 드러난 진 회장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머리를 들지 못했다. “도준이가 괜찮은 그릇으로 성장한다면 자네가 좀 돌봐줘. 회사 서너 개를 계열 분리해서 물려주면 내 자식놈들이 뺏으려 들 거야. 그것만 막아.” “명심하겠습니다.” 그제야 진 회장이 굳을 얼굴을 펴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나보다 먼저 죽지 말라고! 술 담배 좀 줄이고, 휴가도 좀 챙겨 먹어.” “회장님 모시고 해외 출장 가는 게 휴가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학재는 아직 긴장을 풀지 못했다. 오늘의 실수가 두고두고 발목을 잡을 것 같은 불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 * * 아델 로리 블루 애드킨스(Adele Laurie Blue Adkins)라는 다소 긴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가 영국 런던 북부에 위치한 토트넘의 한부모 가정에서 태어난 1988년 5월 5일, 진양철 회장은 모든 핏줄과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아직 개장하지도 않은 서울랜드로 소풍을 갔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서울랜드의 정식 개장은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다. 개장 준비 막바지 작업으로 한창 정신없을 시기인데 우리 일가를 위해 다수의 직원이 대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작 25명이지만 순양 그룹의 스탭진과 서울랜드의 직원을 합치면 백여 명이 넘는다.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들은 진짜 이기적이다. 일가 중에 그나마 인간미가 넘치는 나의 부모님도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아예 인지하지도 못하는 것 같다. 수많은 그룹 수행원들도 대부분 가정이 있고 자식이 있을 것이다. 연령대를 보면 분명 어린이날을 손꼽아 기다린 가정의 가장도 수두룩하다. 저들은 과연 어떤 심정일까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은 있을까? 오직 나만이 저들의 심정을 안다. 비록 회장 일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지만, 저들의 머릿속에는 엄마와 단둘이 보내는 자식들 생각만 꽉 차있을 것이다. 저들이 가족에게 느끼는 죄책감과 자식들의 상처. 그 대가로 우리가 이처럼 편히 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내 눈으로 직접 보자 도저히 즐거운척할 수 없었다. “도준인 별로 재미 없나 보지?” 누군가 내 곁으로 다가와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넨다. 누구지? 어디선가 본 듯, 낯이 익다. “난 네 할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사람이야.” “계열사 사장님이신가요?” “뭐? 하하. 이거… 어쩌지? 아직 사장님은 아냐. 비서실장이지. 한참 낮은 직책이야.” 비서실장? 설마 그 양반인가? “혹시 성함이…?” “오호! 예의 바르네. 성함이라는 말도 쓸 줄 알고. 그렇지, 내가 네 이름을 아니 너도 내 이름은 알아야지. 난 그룹 비서실 실장인 이학재라고 해. 도준이 아버지가 날 형님이라고 부르거든? 그러니 넌 날 백부님이라 불러. 이름 부르지 말고. 하하.” 천천히 옮기던 발걸음을 멈췄다. 진 회장이 장남인 진영기보다 더 장남처럼 대했다던 그 사람이다. 직책은 실장이었지만 직급은 사장이었고 순양의 핵심인 전자, 자동차 사장보다 한 등급 위라고 알려졌던 인물이다. 어떤 사안이든 이학재가 거부하면 진 회장도 무조건 거부했고, 진 회장이 승인한 사안이라도 이학재가 두세 시간 독대하면 회장이 승인을 철회한다고 할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자였다. 2세 승계구도가 끝날 무렵, 그러니까 진영기가 회장에 취임하자 스스로 사직서를 던지고 은퇴해 버려 나는 이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다. 소문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첫째는 진영기 회장이 그를 붙잡았는데 구시대의 인물은 세상이 바뀌면 물러나는 게 순리라면 그룹 고문 자리까지 마다하며 스스로 그만뒀다는 훈훈한 이야기다. 두 번째는 많이 달랐다. 진영기가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이학재의 뒤를 털었다는 것이다. 그가 진양철 회장의 차명 주식을 어마어마하게 쥐고 내놓지 않자 그의 비리를 까발릴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학재 역시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도 진 씨 일가의 불법, 탈법 증거를 한가득 양손에 쥐고 순양 그룹에 불 지를 수 있다고 큰소리치자 진영기가 백기를 들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이학재가 차명 주식을 쥐고 있는지는 영원히 알 길이 없게 되었고 공식적인 발표는 엄청난 퇴직금을 품속에 넣고 물러나는 것으로 끝났다. 바로 그 전설적인 인물이 내게 백부라고 부르라 한다. “네. 백부님.” 한자한자 힘주어 백부라 불렀다. 세상이 두 쪽 나더라도 이 자를 강력한 나의 우군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넌 놀이 기구 안 타니? 어른들도 저렇게 좋아하는데 말이야.” 이학재가 가리키는 곳에 내 또래의 사촌들뿐만이 아니라 어른들까지 기웃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백부님은 좋아하지 않는 다른 어른은 안 보이시나요?” “다른 어른? 누구?” 나는 아무 말 없이 이학재가 가리킨 곳을 향해 손을 들었다. 이학재는 미간을 찌푸려가며 그곳을 한참보다 내게 시선을 돌렸다. “누구? 아무도 없잖아.” 역시…. 이 사람도 이미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자신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완벽한 집사로서 머슴과 하인을 발아래 두다 보니 자신을 주인의 신분까지 격상시켜 버린 듯 보인다. “일하는 어른들 말이에요. 안보이세요?” 순간 이학재의 눈이 커졌다. 나 역시 조마조마한 심정이다. 나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 [019] 종잣돈이라고 하기에는 1. 단지 동정심 많은 어린애로 본다면 실책이다. 회사를 경영할 때 잔혹하리만치 냉정해야 할 때가 동정심을 발휘해야 할 때보다 훨씬 많다. “으흠……. 직원들? 저 사람들이 왜?” “우리 때문에 저 아저씨들은 놀지도 못하잖아요. 어린이날인데.” 순간 이학재의 날카로운 눈빛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그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일을 할 뿐이다. 어린이날이든 일요일이든 각자 맡은 일을 하는 거지. 그리고 저들은 오늘 일하는 대신 내일 쉴 거야.” “우리만 있으니까 그런 거죠. 저 사람들은 이제 우리를 미워할지도 몰라요.” 또다시 쏟아지는 눈빛. 내가 한 말의 속뜻을 눈치챘을까? 우리가 싫어지면 순양도 싫어질 것이다. 결국, 소비자를 잃는 것이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다. “도준아.” “네. 백부님.” “널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면 네 할아버지처럼 하려무나.” 이런! 생각이 어긋났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하시는데요?” “미움을 두려움으로 바꿔버리지.” 그의 말이 내 머릿속에서 폭죽처럼 터졌다. 젠장, 난 아직 머슴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인이 되려면, 회장이 되려면 이런 자질구레한 걱정 따위는 안중에 없어야 한다. 생산성 향상, 매출 극대화, 소비자 만족 같은 하찮은 문제는 아랫것들이 걱정해야 할 문제다. 회장과 경영자는 다르다. 경영자는 회사를 살찌우지만, 재벌 회장은 돈을 버는 게 아니다. 회장은 전쟁을 한다. 미워하는 적을 무릎 꿇리고 영토를 지키고 넓히는 것이 회장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정복한 영토에서 머슴들이 농사를 지어 돈을 번다. 회장님이 원하면 가족 따위는 내팽개치고 달려 나와 꼬리를 흔들게 만들어야 한다. “회장님의 혼을 쏙 빼놓은 이유가 있구먼.” 이학재가 내 머리를 쓰다듬자 제정신이 들었다. 그를 올려다보자 환한 웃음부터 보였다. “표정 보니 내 말뜻을 알아들은 것 같은데? 애늙은이 같은 건가……?” 그나마 다행이다. 날카로운 시각을 뽐내려 했던 것은 무산되었지만 적어도 말귀는 빨리 알아듣는 머리라도 보여줬으니 손해는 아니다. 지금부터는 이학재, 이 사람을 더 알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나 내 손을 잡고 끄는 상준 형 때문에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어린이날은 어린이는 신나지만, 부모는 피곤하다. 나는 부모처럼 피곤했고 찝찝함까지 더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다음날, 진 회장과 함께 방문한 나만의 목장을 봤을 때는 그 피곤함과 찝찝함이 싹 날아갔다. 넓게 펼쳐진 푸른 대지 위에서 여유롭게 뛰어다니는 말을 보자 온몸의 짜릿함을 만끽했다. 나만의 목장은 좋았으나 큰 숙제를 안았다. 이제부터 재벌 3 세답게 승마를 배워야 한다. 무섭다, 젠장. 그러나 한 해가 저물어갈 때쯤 무서움을 사라졌고 말 타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 1988년은 참으로 대단한 한해였다. 이 해를 배경으로 드라마까지 나온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 이 말이 너무나 적합한 365일이다. 제6공화국 헌법이 효력을 발하기 시작하였으며, 직선제로 뽑은 대통령이 취임했다. 국방부는 논산훈련소의 훈련병 면회제도를 29년 만에 부활시켰고 8년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났다. 한겨레 신문이 창간했고 대통령은 남북교류 제안과 북미 관계 개선 협조를 담은 7.7선언을 발표했다. 조용필이 10집을 내놓았고 메탈리카는 네 번째 정규 앨범 ...And Justice For All을 발매했다. 국가 인지도를 세계적 수준으로 높인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놀랍게도 기적 같은 성적, 종합 4위를 달성했다. 38년 만에 여소야대 국회가 출범했으며 유신 이후 16년 만에 부활한 국정감사가 재개되었다. 제5공화국 비리를 밝히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어,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에서 청문회가 치러졌다. 정계, 재계, 언론계 등 유명 인사들이 출석하여 TV로 생중계되는 등 올림픽에 버금가는 전 국민적 화제를 낳았으며, 국회의원 중에서는 훗날 대통령으로 당선될 분께서 청문회의 스타가 되기도 했다. 그 후 11월,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이후 강원도 설악산의 백담사로 유배를 자처했다. 환율이 600원대에 진입하며 3저 호황이 정점을 찍었지만, 사람들이 끝없이 서울로 몰려들어 집값은 폭등했다. 정부는 목동 신시가지나 상계동 지역을 개발하는 등 주택 건설에 들어갔으나 치솟는 부동산 가격을 잡을 수 없었다. 이에 '주택 200만 호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산본, 중동, 평촌 등에 대규모 택지개발을 발표했으나, 집값은 안정되지 않은 채 1989의 새해가 밝았다. * * * “신도시 개발을 서두른다고 합니다.”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아, 네. 죄송합니다. 회장님.” 순양건설 홍송철 사장은 말과는 달리 좀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대통령의 신년사는 주택난 해결이 주요 메시지였다. 당연히 계획은 이미 수립되어 있다. 그 계획이 옳은지 그른지는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말이다. 계획이 있으니 당연히 실행이 뒤따라야 했고 그에 따른 회의가 이어졌다. 순양건설 홍송철 사장은 경제부총리, 청와대 경제수석 그리고 건설부 장관이 주관한 회의에 참석하고 곧바로 진 회장의 서재로 달려온 것이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먼저 서재에 도착해서 기다리던 이학재 비서실장도 조금은 흥분한 듯 보였다. 가장 활발한 건설 분야에 정부가 기름을 부어주는 꼴이다. 순양건설이 얼마나 더 커질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신도시의 물망에 오른 후보 지역은 알려주던가? “후보 정도가 아니라 확정입니다. 성남 분당지구와 일산요.” 물 한잔으로 입을 축인 홍 사장은 오늘의 회의 내용을 소상히 말했다. “……적당히 나눠 먹기 식으로 진행할 것 같습니다. 사실상 특혜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특정 기업의 독식은 막겠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홍송철 사장은 조금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해당 지역의 토지 매입은 불허 한다고…….” “미리 정보를 줬지만 땅은 사지 마라?” “네. 만약 투기 정황이 나오면 신도시 사업에서 빼버리겠다고 경고했습니다.” “그거야 늘 나오는 말 아닙니까? 어차피 다들 명의 빌려서 사재기할 텐데요.” 이학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닙니다. 오늘부터 정부의 공식 발표까지 해당 지역 토지거래를 전부 확인한답니다. 이번에는 분위기가 좀 다릅니다.” 홍 사장은 회의 때의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크게 손을 내저었다. 정부의 의지는 강력하다. “작년부터 주택문제로 워낙 물어 뜯겼잖아. 대통령도 민감할 거야. 송철아.” “네. 회장님.” “신도시 준비단 꾸리고 철저히 대비해. 그리고 땅 투기하는 놈 안 나오게 확실히 단속하고. 이번에는 청와대 보조 맞춰주자고.” “네. 회장님.” 물러가라는 진 회장의 손짓에 홍 사장은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서재를 나갔다. “회장님. 진짜 협조하실 생각이십니까? 드러나지 않게 매입할 방법은 얼마든지….” “놔둬. 푼돈 좀 먹자고 괜히 밉보일 필요 없어. 이번 신도시는 대통령 측근들 꺼야. 이 정권의 논공행상은 끝났고, 한자리 얻지 못한 놈들 돈 좀 만지게 해주려고 기업들 차단하겠다는데 괜히 끼어들 필요 없어.” “아, 그렇습니까?” “박 의원이 슬쩍 흘렸어. 대통령이 각별히 신경 쓴다고.” “그렇군요.” 올해는 몸 사려야 할 때다. 동유럽의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소련과의 수교가 머지않았다는 게 정가의 소문이다. 이런 급변의 시기는 언제나 기회가 있고 그 기회는 바로 정부가 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꼬투리가 잡히면 안 될 일이다. “참, 혹시 모르니까 준비단 꾸려지는 대로 감사팀 돌려. 혹시라도 딴짓하는 놈 나오지 못하도록 말이야.” 진 회장은 홍 사장이 놓고 간 신도시 개발 관련 서류를 건성건성 뒤적이다 손을 멈췄다. 미간을 찌푸리고 서류를 노려보는 진 회장에게 이학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문제라도…?” “아, 아닐세. 왠지 눈에 익은 곳이라서 말이야.” 진 회장은 한동안 서류의 지도를 보다 수화기를 들었다. “지난번에 매입한 목장 말이야……. 그래, 그거. 지적도 확인해서 팩스 보내.” 수화기를 내려놓는 진 회장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이거, 아무래도 집안에 돈 귀신이 단단히 붙은 놈 하나가 있는 것 같은데….” “네? 무슨 말씀이신지…?” “기다려봐. 팩스 오면 확인해 보자고.” 이학재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진 회장을 영문도 모른 채 슬쩍슬쩍 훔쳐볼 뿐이었다. 잠시 후, 가정부가 공손히 들고 온 팩스와 서류를 번갈아 보며 확인한 진 회장은 마침내 큰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원, 으하하. 기가 막히는구만.”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다. 이학재는 궁금함을 억누르며 진 회장의 설명을 기다리느라 미칠 것 같았다. “아, 자네는 모르겠구먼. 내가 우리 도준이를 위해 목장 하나 만든 건 알지?” “네. 경기도 쪽에…. 아, 설마! 혹시 분당입니까?” “그래. 이걸 한번 보게.” 이학재는 황급히 팩스와 서류를 비교하며 정확한 위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때? 그 정도면 미리 알고 찍었다는 의심이 들지 않나?” “도준이가 이곳을 찍었다는 뜻입니까? 회장님이 아니라?” “그래. 서울 빼고, 경기 남부지역에서 골라보라고 하니 그곳을 찍더군.” 지도를 유심히 보는 이학재의 머릿속은 계산기가 되어갔다. “팔만 평쯤 되는군요.” “아깝지? 팔십만 평이라면 좋았을 텐데. 허허.”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진 회장과는 달리 이학재는 아직 모르는 부분을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했다. 정부의 정식 발표 전에 이 땅에 대해서는 한점의 오류도 없어야 한다. 그 오류를 지우는 것이 바로 이학재의 의무이기도 했다. ======================================== [020] 종잣돈이라고 하기에는 2. “회장님. 이 땅, 누구 명의로 하셨습니까?” “누구긴? 도준이지. 왜? 증여세 때문에?” “회장님 표정 보니 안심이 되는군요. 하하.” “야! 그거 몇 푼이나 한다고! 내가 막내 손자에게 주는 선물인데 세금 빼먹을까 봐?” 더없이 좋아 보이는 얼굴. 단지 백배가 넘는 이익을 얻었다는 것만으로 나오는 표정이 아니다. 엄청난 보물을 발견했을 때의 표정이다. 이학재는 이번 일로 회장의 심경 변화가 엄청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명석한 판단력, 과감한 추진력, 다양한 시각, 획기적인 생각…. 이런 자질은 아주 훌륭한 경영자의 덕목이다. 하지만 12살의 어린 도준이에게서 이런 자질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다만, 잠재력 정도만 엿볼 수 있을 뿐. 진 회장이 어린 손자에게 확신하는 것은 바로 운이라는 엄청난 무기를 쥐고 있다는 것이다. 수도권 지도를 놓고 손가락질 한번 했을 뿐이다. 그 결과 백배가 넘는 이익을 번다는 것은 운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실력과 노력은 타고난 천운을 넘어설 수도, 이길 수도 없다. “이제 어쩌실 계획이십니까?” “뭘 어째?” “신도시 확정 지역이면 토지 보상금이 나올 테고, 주변 지역이면 금싸라기 땅이 될 텐데…….” “그 돈은 도준이 꺼야. 내가 다시 뺏을 수는 없지.” “뺏는다는 게 아니라 그 돈을 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도준이에게 큰 자산이 될 텐데 말입니다.” “내가? 내가 왜? 겨우 1년 만에 백배로 뻥튀기한 놈이야. 나보다 훨- 낫다.” 어림도 없다는 듯 진 회장은 손을 내저었다. “그럼…?” 설마 그 큰돈을 어린애에게 맡긴다는 생각인가? 이학재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기본만 알려주고 냅둬 보자고. 그놈 운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말이야.” 셈이 빠른 이학재는 이미 계산이 나왔다. 토지 보상금만 해도 최소 160억, 최대 200억이 넘는다. 대졸 신입사원 사천 명의 연봉에 육박한다. 물론 진 회장에게는 큰돈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단지 손자의 운을 시험하기 위해 던져버리기에는 액수가 너무 크다. 이 돈의 크기만큼 기대한다는 뜻일까? * * * 1989년 4월 27일, 여윳돈을 조금이라도 쥐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명도 빠짐없이 분당과 일산으로 달려갔다. 정부의 신도시 발표는 바로 보물 지도를 공개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누가 먼저 차지하느냐의 문제일 뿐, 땅값이 치솟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며 남은 것은 어디까지 치솟을까 하는 것이다. 신도시 조성 용지는 국가보상금이 전부지만, 택지 주변은 그 끝이 없다. 어디까지 오를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토지 보상금 때문에 땅 주인들의 불만이 집단 시위로 불붙었지만, 최하 11만 원에서 최고 70만 원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학재 비서실장은 회장의 손자를 대신해 땅을 정리했다. 그리고 거금이 든 통장을 들고 진윤기의 집을 찾았다. “윤기야. 오랜만이다.” “형님. 어쩐 일로 집에 다 오시고…….” “뭐냐? 반기는 얼굴이 아닌데?” 이학재는 진윤기와 악수를 나누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는 놈이다. 진윤기의 형제들은 자신에게 주인행세를 톡톡히 한다. 가장 정이 가는 놈이고 안타까운 놈이기도 했다. “오셨어요? 실장님?” “역시 제수씨의 미모는 여전하십니다, 그려.” 이학재는 일상적인 인사를 던지며 커피를 내려놓고 나가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제수씨도 잠시 앉으시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웃음을 거둔 이학재 때문에 두 사람은 조금 긴장한 듯 보였다. “다른 게 아니고 도준이 때문입니다.” 아들의 이름이 나오자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이학재는 두 사람이 더 놀라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좋은 일이니 놀라지 않아도 됩니다.” 두 사람을 안심시킨 후, 목장에 대한 일을 자세히 말해주자 오히려 더 놀라게 해버리는 꼴이 되었다. “뭐요? 백사십억? 맙소사! 어떻게 그런 일이…….” 진윤기는 말을 잇지 못할 만큼 놀랐지만, 그의 아내는 놀라기보다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뭐, 놀란 표정과 당황한 표정은 비슷한 법이니 이학재는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녀가 보관하고 있던 땅문서를 진 회장의 비서에게 전달했을 때 땅을 판다는 건 알았겠지만 이 정도 거금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육만 평의 보상금이야. 아직 이만 평 남아 있는데 어림잡아 백억 정도까지 오를 거다. 그 땅은 그때 처분할 계획이다.” 두 사람의 눈이 더욱 커졌다. “아무튼, 회장님께서는 가벼운 마음에 목장을 선물하셨는데 그게 막대한 거금이 되어버렸으니 아주 흡족해하신다.” “형님. 아버지는 뭐라고 하십니까?” “도준이 돈이니 도준이에게 맡긴다고 하시더라.” “그게 말이 됩니까? 이제 겨우 5학년 아닙니까? 애한테 그런 큰돈을 맡기다니요? 그냥 도로 가져가시라고 하십시오.” “여보.” 진윤기의 손목을 잡고 조용히 말리는 아내. 티 내지는 않았지만 이학재는 내심 놀랐다. 항상 차분히 존재를 드러내지 않던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이 돈에 욕심부리는 듯한 모습은 정녕 의외였다. “넌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 그냥 은행에 넣어두면 되지 않겠냐? 어차피 애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야.” 이학재는 진윤기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돈 때문에 망가진 인생을 한두 번 봤을까? 이때 뜻밖의 소리가 나왔다. 바로 진윤기의 차분한 아내에게서. “여보. 어쩌면 이 돈이 도준이가 가질 수 있는 전부가 될지도 몰라요. 지금은 아버님이 도준이를 귀여워하시지만, 아버님의 변덕 모르세요? 언제 관심 밖으로 밀려날지 몰라요.” 이학재는 그녀의 절박한 표정에서 진심을 느꼈다. 돈 욕심이 아니라 자식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보험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진윤기는 단 한 번도 아내를 이긴 적이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 * * “물론 도준이는 실감하기 어려운 큰돈이야.” 이 양반 오해하고 있군. 통장을 손에 쥐고 말없이 눈만 깜빡이는 내 모습에서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단지 올 것이 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무덤덤한 것인데. 하긴……. 상식적으로 12살의 어린애가 돈의 절대적 크기를 가늠할 리가 있나? “그럼 제 목장은 어떻게 되나요?” 첫 질문은 어린애다워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정리해야 해. 국가가 그 땅을 필요로 하니까 말이다. 거기 있는 말은 제주도로 옮겨도 되고 아니면 다른 곳에 목장을 만들어도 되고.” 이제 승마의 재미를 알아가는데… 재벌 집 아들내미 놀이는 이 정도로 끝내야겠다. 다음 단계를 위한 종잣돈은 마련됐으니 부동산 투기는 이쯤에 끝낸다. 돈을 땅에 묻어두고 느긋하게 기다릴 시간이 없다. “그 돈 어떻게 하고 싶니?” 이학재의 손가락은 내 통장을 가리켰지만. 눈에서 한 아름의 호기심이 읽혔다. 하지만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계획을 발설할 수는 없는 일. “돈은 은행에 저금하는 거랬어요.” 이 대답 역시 어린애답지 않은가? “그래. 어른이 될 때까지 은행에 넣어둬라. 안전하게.” 안전이라는 두 글자가 무섭게 다가온다. 안전을 추구하고 안락을 원하는 놈은 순양 그룹의 선장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지금 은행금리는 무려 10%. 복리로 계산하면 무섭게 불어날 것이다. 두 배는 순식간이다. 하지만 난 겨우 두 배로 만족할 바보는 아니다. 이학재는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나가버렸다. 그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통장을 다시 한 번 들여다봤다. 백사십억! 아직 이 정도의 돈이 더 들어온다. 30년 뒤의 시세라면 천억은 가뿐히 넘는 돈! “큭, 큭…….” 참았던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미친 듯이 뛰었다. 영화에서 숱하게 보며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저런 오버를? 하고 생각했었지만 이런 반응은 리얼리티였다. 침대가 내려앉을 만큼 방방 뛰는 것을 멈출 수 없을 만큼 기분 좋았다. “헉-!” 갑자기 들리는 계단 소리.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와 책상으로 달려갔다. 책을 펼쳐놓고 공부하는 척 자세를 잡았을 때 부모님이 들어왔다. “도준아. 아빠랑 이야기 좀 할까?” 분명히 돈 이야기를 꺼낼 텐데 어떻게 끌어가야 할지 조금 난감하다. 내가 성인이…. 아니, 적어도 어린애라는 딱지를 뗄 때까지 나의 장기적인 계획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부모님이 유일하다. 그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학재 백부님께 이야기는 들었지?” “네.” 나는 들고 있던 통장을 내밀었지만, 부모님은 받지 않았다. “넌 어떻게 하겠다고 했니?” “은행에 저축한다고 말씀드렸어요.” 두 분은 안심한 듯 보였다. 어쩌면 괜한 걱정만 앞섰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린애가 할 수 있는 것이 저금밖에 더 있는가? “일단은…….” 내가 내뱉은 마지막 말에 두 분의 표정이 변했다. 일단이라니? “일단은?” “왜? 뭐 사고 싶은 거라도 있니?” “아뇨. 필요한 건 어머니가 다 사주시잖아요.” “그런데 일단은 이라니?” “여보. 도준이 말, 끝까지 들어보자고. 뭘 하고 싶은지.” 아버지가 웃으며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불안해하지 말라는 다독거림이었다. 두 분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을 때 미소 지으며 입을 천천히 말했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두 분이 내 입만 바라본다. “만약…. 아니, 만약이 아니네요. 두 분은 이 돈으로 뭘 하고 싶으세요?” 내 생각보다 더 놀라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자 아차 싶었다. 좀 더 신중했어야 했나? 아니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알아갔어야 했나? 돈 때문에 흥분해서 너무 서두른 것 같았다. 단지 두 분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었을 뿐인데…….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나를 잠시 보더니 아무 말도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도준아, 아빠 화나신 거 아냐. 그냥 좀 놀라신 거야.” 화도 난 거 같은데? 좀 많이 놀라기도 하고. 뭐라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살짝 떨구자 어머니는 내 등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색함도 없애고 어머니의 걱정도 덜어드리기 위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있기도 했다. “어머니.” “그래.” “혹시…….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린 거, 어떻게 됐어요?” “응? 뭐 말이니?” “일산인가? 신도시…?” 순간 깜짝 놀라는 어머니의 표정이 말해준다. 아하! 땅 좀 샀구나. 됐다. 쌈짓돈으로 얼마나 매입했는지 모르겠지만, 비상금 이상의 목돈을 손에 쥘 것이니 든든할 것이다. 남자나 여자나 주머니가 묵직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법이다. 이걸로 어머니의 얼굴이 좀 더 밝아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 “아…. 그거? 아냐. 엄마는 그런 건 관심 없어서 그냥 흘려들었고 이미 잊었어.” “네. 그렇군요.” 애한테 땅 산 걸 늘어놓을 만큼 입 가벼운 분이 아니니 당연한 반응이라 생각했다. 아무튼, 슬쩍 떠보는 건 실패했으니 다른 방법을 써야겠다. 어떻게 해야 할까? ======================================== [021] 은밀하게, 더 큰 돈을 1. 스스로 극장이라고 부르는, 가장 좋아하는 방에서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던 진윤기는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유일한 취미인 연극과 영화. 그 취미를 위해 영화관처럼 스크린과 영사기까지 갖추고 영화 필름까지 틈틈이 모으는 진윤기였다. 그가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엿볼 수 있는 방이었다. 그의 아내는 영사기의 필름은 돌아가지만, 남편이 영화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쯤 알 수 있었다. “여보. 도준이 때문에 그래요?” “응? 아, 뭐…. 그렇지.” 아들이 통장을 내보이며 뭐든 하고 싶은 걸 말하라고 했을 때 진윤기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순간 아들보다 통장이 더 눈에 밟힌 자신을 경멸했다. “철없는 애가 좋은 뜻으로 한 말이잖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여보.” “네.” “난 화가 난 게 아냐. 쪽팔렸던 거지.” 진윤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내의 어깨를 감쌌다. “도준이가 그 말을 했을 때, 백억이 넘는 돈으로 뭐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을 때 심장이 뛰더라고. 이건 기회다! 이런 생각마저 들었어.” 진윤기는 그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어깨를 움찔했다. “내가 얼마나 한심하던지…… 아빠가 돼서 애의 저금통에 침 흘리는 꼴이라니.” “너무 큰돈이라 그런 거여요. 저도 그랬는걸요. 그 돈이라면 당신이랑 상준이, 우리 가족 다 함께 외국으로 건너가서 살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 들었어요.” 아내의 위로도 그의 구겨진 자존심과 부끄러움, 아버지로서의 자괴감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여보. 저도 궁금하긴 한데… 당신은 진짜 뭘 하고 시어요? 충분한 돈이 있다면요. 아직도 영화감독 하고 싶어요?” 진윤기는 이미 버린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탐탁지는 않았지만, 애써 화제를 돌리려는 아내의 노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니. 난 연출 감각이 없다는 걸 알아. 내가 영화를 찍는다면 정말 밋밋하게 나올걸?” “그럼 영화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어요?” “아직 많이 남아 있어. 할 수만 있다면 제작과 기획일은 하고 싶지. 특히 지금 보고 있는 소설이 너무 와 닿아.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 싶어.” 영화 이야기를 시작하니 진윤기의 눈이 빛났다. 꿈을 쫓는 소년의 눈이다. “영화는 제조업과 다를 바 없어. 제작비를 건질만큼 흥행하면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거든. 그런데 제작비를 줄이면 흥행 부담도 줄어들어.” “제작비를 어떻게 줄여요?” “지금 한국 영화는 주먹구구식으로 제작해. 거품도 많고, 중간에서 돈 빼먹는 놈들도 수두룩하고. 최소 30%는 줄일 수 있어. 참, 당신도 알잖아.” 진윤기는 한때 영화배우였던 아내와 시선을 맞췄다. “겨우 한편 찍었어요. 그런 거까지 알기에는 시간이 없었죠.” “당신도 나 아니었으면 스타가 됐을 텐데… 억울하지 않아?” “뭐야? 연기력이 발바닥이라 어차피 못 버틴다고 포기하라고 한 게 당신이에요.” 진윤기는 팔을 꼬집는 아내를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그건 사실이야. 하하. 당신은 배우보다 모델이 더 적당했어.” 아내 덕에 부끄러운 순간을 잊을 수 있었다. 진윤기는 그런 아내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 “얼마?” “토지 보상금만 140억입니다. 또, 상업용지로 쓸 수 있는 이만 평이 남았는데…… 이건 100억이 훌쩍 넘을 겁니다.” 순양 그룹의 부회장이자 진양철 회장의 장남인 진영기는 분당 신도시 지적도를 앞에 놓고 이마를 문질렀다. “그 꼬맹이 손에 140억? 은행 이자만 해도 10억이 넘네. 웬만한 대기업보다 나은데요? 이자만으로도 매년 강남 아파트 스무채를 살수 있으니까!” 아들인 진영준이 부러운 표정을 짓자 진영기 부회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자식아! 은행 이자 생각하니 부러워? 지금 그깟 푼돈이나 생각할 때냐?” 아버지의 큰 소리에 진영준은 고개를 돌렸다. “대학 4학년이나 된 놈이 아직 그 모양이야? 정신 안 차릴래?” “여보! 애한테 왜 그래요? 가뜩이나 유학 못 가서 풀죽어 있는데!” 부회장의 부부 싸움 조짐을 느낀 비서실 직원은 낮은 헛기침으로 자신이 아직 거실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김 과장.” “네.” “윤기 집, 계속 살펴. 특별한일 생기면 즉각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가 봐.” 김 과장이 조용히 뒷걸음질 치며 거실을 빠져나가자 진영기 부회장은 다시 장남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너 계속 그딴 식으로 여자나 밝히며 살래?” 여자라는 단어에 진영준은 머리를 들지 못했다. “이 새끼야! 데리고 놀 여자가 연예인밖에 없어? 세상에 이쁜 여자가 어디 한둘이야? 하필이면 테레비에 나오는 여자만 건드려? 그딴 식으로 신문에라도 나면?” 진영기는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돈과 인맥을 총동원해서 미국 명문대의 입학허가서를 받아 놨는데 철딱서니 없는 자식놈이 당대 최고 여배우를 임신시켜버렸다. 그것도 7살이나 많은 여자를. 그 여배우의 애를 지우고 입을 막는데 들어간 돈이 빌딩 한 채 값이 넘는다. 다시 돈과 인맥을 동원해서 가까스로 언론의 입을 막기는 했지만 회장인 아버지의 눈과 귀는 막을 수 없었다. - 발정 난 개새끼도 아니고 임신까지 시켜? 그런 놈이 미국 가서 공부? 집어치워! 백인, 흑인 골고루 씨를 뿌릴 놈이야. 내가 혼혈아를 증손주로 봐야겠어? 유학길은 막혔고 그룹 감사실 직원 두 명이 24시간 아들을 밀착 감시하는 지경이다. 그런 놈이 열 살이나 아래인 사촌을 부러워하니 속이 뒤집혔다. “잘 들어. 네 할아버지는 단돈 십 원이라도 그냥 주시는 분이 아니다. 어린놈한테 목장 하나 만들어줄 수도 있어. 하지만 그 명의까지 다 넘기고, 그걸 처분한 거금까지 다 준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만 좀 해요. 다 지난 일을 가지고…….” 진영기 부회장은 계속 짜증 내는 아내는 못 본 체했다. 그의 아내 박혜영도 부족함 없이 자란 여인이다. 비록 순양 그룹보다 한참 아래에 있지만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재벌가가 친정이다. 그러다 보니 항상 시아버지에게 쩔쩔매는 남편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도준이가 지금 몇 살이지? 그런 애에게 백사십억을 줬다. 이건 단순한 증여가 아냐. 열두 살 꼬맹이의 가치를 무려 백사십억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야. 만약 남은 땅도 처분하고 도준이에게 주신다면 그놈 가치는 이백억이 넘는다고!” 진영준은 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장손 아닌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모두 아버지 것이 될 것이고 결국 자신이 모든 걸 물려받는다고 믿었다. “할아버지가 너한테 땅 한 평, 통장 하나 준 적 있어? 그게 바로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네놈 가치다.” “여보. 뭐가 걱정이에요? 당신은 이미 부회장이에요. 순양은 당신 거라고요. 그리고…….” 박혜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시아버님이 몇 년이나 더 사실지… 시간은 우리 편이에요.” 진영기는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누라나 자식새끼나 진양철이라는 사람을 모른다. 지금까지 자신의 승계를 걱정한 적 없다. 막내 조카가 지금 회장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그리 큰 걱정은 않는다.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아무리 피를 나눴지만 순양 그룹의 벽돌 한 장이라도 나눠 가질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 * * 거실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 아버지의 곁에 슬며시 앉았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도준아, 괜찮아. 뭐가 죄송해? 아빠 화난 거 아니었어. 그냥 좀 놀랐을 뿐이야.”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으며 품 안으로 끌었다. “우리 도준이, 너무 빨리 큰다. 벌써 이렇게 어른스러워지면 아빠는 어떡하지?” 이런! 갑자기 이런 식으로 훅 들어오니 할 말이 없다. 자식을 키워보지 않았으니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지 짐작도 못 하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버지의 손을 힘주어 잡는 것이 전부였다. 내 손의 힘을 느꼈는지 아버지는 잔잔하게 웃었다. “그래, 도준아. 아빠에게 할 말 있으면 해.” “어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요.” “엄마가?” “네.” 조용한 어머니가 무서운 시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하니 의외라는 표정이다. “그래서 궁금했어요. 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지… 영화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엄마가 그래?” “네.”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보이던 아버지는 마음을 다잡은 듯 나를 당신 앞에 앉혔다. “아빠는 대학 3학년 때 영국으로 유학 갔었어.” 오호라! 이번에는 제대로 말할 생각인가보다. 어른이 추억을 끄집어낼 정도면 아주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난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했어. 어릴 때는 공부 잘 하라고 해서 좋은 성적 받으려고 노력했고, 유학 가라고 해서 영국으로 갔어.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었거든. 그리고 경영학을 공부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어. 순양그룹 계열사 몇 개는 맡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별다른 의심 없이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는 도련님이었다는 말인데, 언제부터 삐딱선을 탔을까? “영국 런던에는 웨스트 엔드라는 지역이 있거든. 그곳에는 수백 개의 극장에서 매일 뮤지컬과 연극을 공연해. 난 공부하다 머리 식힐 때 가끔 들렀어.” 순수했던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 아버지는 어느새 눈을 반짝였다. “거기서 셰익스피어를 봤고 싱클레어, 헤이워드, 앤더슨을 알았지. 그리고 존 오스본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윌리엄스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같은 작품이 나를 흔들었어.“ 불현듯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엔터테인먼트 판의 그 화려함에 유혹당한 게 아니라 순수한 예술에 이끌렸다. 동기가 순수하고 올바르면 다시 한 번 해볼 만하지 않은가? “그때부터 학교는 뒷전이었고 연극과 영화에 빠져들었지. 연극학교 등록하고 연출을 배우기 시작했어. 물론 영화도 함께. 하지만 네 할아버지가 아셨고 난 한국으로 잡혀 온 거야. 하하.” 아버지의 꿈은 이제 추억일 뿐일까? 추억을 다시 불 지피고 꿈을 이루게 해준다. 그리고 내 꿈을 이루도록 도움받아야 한다. 그 도움의 힌트를 방금 아버지가 주셨다. ======================================== [022] 은밀하게, 더 큰 돈을 2. “아버지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못하도록 하실 건가요?” “그럴 리가 있냐? 우리 도준이가 뭘 하든 아빠는 항상 응원하고 도와줄 거야.” “제가 할아버지보다 더 큰 회사의 사장이 되고 싶어도요?” 아버지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이거 어쩐다? 우리 도준이의 꿈이 너무 커서 아빠가 도와줄 게 없는 거 같은데?” 빈말이라도 뭐든 도와주겠다는 말 정도는 나올줄 알았는데, 한국 제1의 기업보다 더 큰 회사를 꿈꾸는 아들에게 너무 솔직한 것 아닌가? “있어요.” “뭐?” “충분히 절 도와주실 수 있어요.” 아버지는 순식간에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변했다. “어떻게? 미리 말하지만, 아빠는 회사 경영은 관심 없다. 알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많이 아시잖아요.” “내가? 아냐. 난 순양그룹 사람들 잘 몰라. 이학재 실장님 정도가 전부야. 그런데 그분은 널 도와줄 만큼 한가하신 분이 아니란다.” “조금 전 말씀하셨잖아요. 영국에서 경영학 공부하셨다고…. 같이 공부한 친구 없으세요?” 아버지는 또다시 아무런 말을 못했다. * * * “이게 누구야? 야! 진윤기! 진짜 오랜만이다.” “아이고, 아직 일 년도 안 지났다. 뭘 그리 오버야?” 고객을 만나면 항상 반가운 척해야 하는 사람의 버릇이다. 특히, 만나는 고객이 수억의 돈을 주무르는 큰손들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진윤기가 가끔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는 친구 오세현은 세계적 자산운용사인 파워쉐어즈(PowerShares)의 한국 대표다. 파워쉐어즈는 1935년에 설립됐으며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본사를 두고 있다. 전문 투자 인력만 칠천 명이 넘고 40개국에 지사를 뒀으며 운용 자산만 천이백억 달러에 이른다. 그야말로 돈의 제국이다. 오세현은 파워쉐어즈 아태지역 중 최연소 대표가 될 만큼 발군의 실력을 가진 자였다. 진윤기보다 두 살이나 위였지만 영국에서 만났을 때 주로 영어로 대화를 나눴기에 친구처럼 지낸 지 오래되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 먼저 연락했냐? 뭐, 나한테 맡길 꽁돈이라도 생겼어?” “이 자식이, 내 처지 몰라? 이 나이에 아버지한테 생활비 받아 쓰는 백수건달이 맡길 돈이 어딨어?” “그 생활비가 내 연봉의 열 배쯤 되지 않냐? 반만 쓰고 반은 맡겨라. 내가 불려줄게.” “너 같은 서민은 나 같은 재벌 2세의 씀씀이를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고.” 비꼬는 듯 말해도 기분 상하지 않은 친구. 딱 두 사람의 관계였다. “그래, 돈 없는 놈이 왜 날 찾아?” “아들놈 때문에.” “아들? 이 자식아, 아이 문제라면 학교 선생을 만나. 돈놀이하는 내가 무슨 상담을 해주리?” “그렇게 됐다. 둘째가 할아버지 같은 기업가가 되겠다고 도와 달래.” “둘째? 둘째면 도준이? 맞지? 국민학생 아냐?” “맞아. 5학년.” “이야. 그 자식 대단한데? 영재교육 시켰냐? 백수 아버지 밑에서 나올 아들이 아닌데?” 오세현은 진윤기의 어깨를 툭 치며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진윤기는 웃지 못했다. “그러게. 애가 훌쩍 커 버렸어. 어떨 때 보면 나보다 더 진중해서 그냥 받아넘기지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내가 뭘 해줄까?” “그냥 밥 같이 먹으며 너무 조급하게 진로를 정하지 말라고 조언해주면 될 거야. 경영이든 사업이든 아직 한참 미래의 일이니 지금은 실컷 놀고 즐겁게 지내라고 해줘.” “회장님 손자는 다르구만. 나는 우리 아들한테 빡세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라고 매일 닦달해야 하는데 말이야.” “부럽지? 흐흐.” 진윤기의 웃음에 오세현은 주먹을 다시 들었다. *** “돈 자랑하는 놈 재수 없고, 부모 잘 만난 새끼 밥맛 없는데 네 아버지는 달랐어. 인간이 이렇게 순수할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한 건 네 아버지가 처음이야.” “야! 애들 앞에서 그 욕 좀 안 하면 안 되겠냐?” “아, 미안. 졸부들 비위 맞춰주다가 성질 다 버려서 그래. 흐흐.” 아버지가 데려온 사람은 꽤 재미있다. 파워쉐어즈는 엄청난 곳이다. 30년 뒤에는 연간 800조를 주무르는 슈퍼 자산운용사 아닌가? 동남아 국가 하나를 거덜 내는 것쯤은 일도 아닌 투기자본이다. 그런 곳의 한국 대표라고 하기에는 좀 허술해 보이기만 하고 샤프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밥 먹는 동안 끊임없이 유쾌하게 떠들며 평범한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만 보여주었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 상준 형은 재빨리 식사를 끝내고 이 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자식, 벌써 사춘기가 왔나 보다. 요즘은 집안에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한창 그럴 때라 부모님도 슬슬 눈치 보기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갈 때쯤 아버지가 친구에게 눈짓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준아. 넌 커서 사업가가 되고 싶다고?” “네.” “할아버지 같은?” “할아버지보다 더 큰 사업가요.” “순양그룹은 한국에서 가장 큰데… 더 큰 회사라…. 욕심이 대단한데?” “욕심이 아니라 꿈인데요?” “욕심은 할아버지 닮고 꿈꾸는 건 아버지 닮은 건가?” 순간 오세현의 눈이 빛났다. “윤기야. 도준이랑 단둘이 이야기해도 되지?” 아버지가 머리를 끄덕이자 오세현이 식탁에서 일어섰다. “도준아. 아저씨한테 좋은 이야기 많이 들어.”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오세현은 내 방에 들어서자 한번 휙 둘러보더니 의자를 끌어당겼다. “어지르지도 않고 깔끔하네.” 정리 정돈이 잘 된 내 방을 보며 내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자, 도준아.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렴. 이래 봬도 이 아저씨는 꽤 성공한 사람이야.” 세계 최대의 자산운용사의 한국 대표라면 꽤 성공한 게 아니라 엄청난 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일단은 모르는 척, 첫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도 큰 회사 사장님이세요?” “응. 아주 큰 회사 사장이지. 하지만 네 할아버지와는 조금 달라. 난 부자들을 더 큰 부자로 만들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야.” “그럼 아저씨는 돈 많은 사람을 많이 만나시겠네요?” “그런 셈이지.” “그럼 그 손님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돈 벌 수 있는 이야기도 많이 듣겠네요?” “뭐? 이런……. 날카로운데? 어린애답지 않다더니 사실이구나. 하하.”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이 얼마나 가는 지 두고보자. “난 입이 무거워. 네 말대로 돈 많은 부자의 이야기를 어디 가서 나불대다가는 오래 일 못 해. 금방 소문나. 그리고 자세히 묻지도 않아.” 직업윤리이기도 하다. 부자들은 비밀이 많다. 그 비밀의 일부를 엿보더라도 입을 닫아야 업계에서 매장당하지 않는다. “그럼 제 이야기도 비밀을 지키시겠네요.” “이거, 오늘 내가 국민학생한테 놀라는 일이 많네. 넌 좀 독특하구나. 그런데 넌 내 고객이 아니야. 비밀을 지킬 이유가 없는데?” “응? 아버지가 말씀 안 하셨어요?” “뭘?” 영문을 모르는 오세현이 눈을 깜빡거렸다. “제 돈요. 지금 제 통장에 140억이 있고, 남은 땅을 팔면 백억 이상 더 들어올 텐데. 이정도면 아저씨 고객이 되지 않을까요?” 눈만 깜빡거리는 오세현이다. 평생 이보다 더 놀라는 일을 앞으로도 없을 거다. 비현실적인 말을 들으면 처음에는 헛소리로 취급한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의 신뢰도에 따라 사실임을 알고 나면 머릿속에서 아무런 생각이 없다. 그래서 입만 벌린 채 멍하니 아무 말을 못 한다. 충격이 클수록 침묵은 오래간다. 전생에서야 재벌들의 주식 증여로 미성년 부자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게다가 전생에서도 미성년 부자 대부분이 증여받은 주식 부자였고 금액도 고작 몇백억이 전부다. 지금 내가 가진 돈이 삼십 년 뒤라면 최소 천억 원의 가치가 훨씬 넘는다. 12살 꼬맹이가 가졌다고 믿기에는 비현실 그 자체다. 나는 오세현이 정신을 차리고 입만 열기를 기다렸다. 거의 오 분이 지난 다음에야 그의 더듬거리는 말이 들렸다. “배배배... 백사십억…?” “올해 안으로 백억 이상이 더 들어올 겁니다.” “전부 하, 할아버지가 주신 돈이야?” “아뇨.” “그럼?” “아저씨가 조금 전 말씀하셨잖아요. 고객에게 자세히 묻지 않으신다고.” “그, 그렇지. 맞아. 내가 괜한 걸 물었구나.” 충격이 가시지 않아 계속 더듬대는 오세현에게 통장을 내밀었다. “제 통장입니다. 확인하셔도 돼요.” 오세현이 내 통장에 찍힌 숫자를 몇 번이나 확인하는 동안 어떻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지 결정했다. 언제까지나 어린애 흉내만 내고 있을 수는 없다. 일을 진행하려면 본 모습이 조금 드러나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 “이거, 오늘 내가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오세현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친구 아들에게 좋은 이야기 해주고 싶었는데… 이거 영 그럴 마음이 안 생기네.” 자산운용가의 직업적 본능. 투자할 곳은 산더미지만 투자할 돈은 항상 부족하다. 그런 그의 눈앞에 엄청난 거금이 아른거리니 욕망이 꿈틀거릴 것이다. “네 아버지가 부탁했거든. 천천히 성장할 수 있도록 말 좀 해 달라고. 그림, 음악, 운동 같은 예체능이야 어릴 때부터 재능을 키워주면 좋지만 경영이나 사업, 돈벌이 같은 건 나이가…. 어른이 돼서 시작하는 게 정상이니까.” “뉴스에서 봤는데 미국에서 12살 때 우표를 팔아 이천 달러를 벌고 고등학생 때 신문 구독 장사로 큰돈을 번 애도 있던데요?” “장사와 사업은 달라. 아무튼, 넌 이 돈을 어떻게 할 생각이니?” “아저씨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할아버지 진 회장에게 배운 거 하나!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듣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이 돈을 어디에 쓸지 이미 결정했지만, 최고의 자산 운용가의 의견도 들어야 한다. 정보는 많을수록 더 좋은 법이니까. ======================================== [023] 은밀하게, 더 큰 돈을 3. “글쎄. 지금 당장 결정하기 어려워. 이 정도 금액이면 당연히 분산 투자해야 하고 리스크 테이킹, 평균 수익률, 엑시트 전략 등등 많은 변수를….” 이 아저씨는 지금 날 어린애로 보는 게 아니라 140억의 자산가로 보고 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오세현은 피식 웃으며 이마를 탁 쳤다. “아, 이거… 내가 너무 나갔지? 나도 모르게 흥분했네.” “괜찮아요.”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일단 네 아버지와 상의 좀….”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제 돈이니 아버지와 상의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아버지도 아저씨를 믿으시지 않나요? 그러니까 저를 맡기셨겠죠. 아닌가요?” “말도 똑 부러지게 하네. 생각해보니 그렇구나.” 오세현은 잠깐 생각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자꾸나. 일단 내가 부모님 동의서를 받는 게 먼저일 것 같다. 이 동의서는 투자 문제를 상의하는 게 아니고 네가 미성년자라서 필요한 거야. 네 돈을 우리 회사가 맡아도 된다는 허락이지.” “네.” “그리고 회사에서 운용 계획을 짜보마. 그걸 보며 다시 이야기하자. 좋지?” “하나만 더요.” “뭐, 필요한 게 있니?” “앞으로 아저씨와 저 사이의 일은 모두 비밀로 해 주세요.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돼요.” “그건 말하지 않았니? 난 철저히 비밀을 지킨다고.” “제 부모님을 포함해서요.” 오세현은 의혹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왜 부모님께 말하면 안 되는지 이유를 물어도 안 되겠지? 비밀이니까?”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후- 이거 원, 친구 아들내미 설득하려다 무시무시한 고객님만 하나 건졌구만.” 오세현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가보마. 앞으로 자주 볼 테니까 그냥 삼촌이라 불러라. 아저씨라는 호칭은 좀 멀어 보이잖니. 우린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될 텐데 말이다.” “알겠어요. 삼촌.” “사실 내가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아. 큰아버지뻘인데 삼촌이 더 정감 가서 양보한 거야. 하하.” 오세현은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내 방을 나갔다. 또 한 번 느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 아니라 운구기일(運九技一)이다. 지금의 나 진도준에게는 운이 따른다. 아버지가 투자 회사의 친구를 선택한 것은 은연중 내 돈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한데, 운 좋게도 세계적인 투자 회사를 골랐다. 만약 국내 투자사나 증권사였다면 일을 훨씬 더 복잡하게 풀어야 했을 게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를 펼치고 연필을 잡았다. 그리고 투자 계획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노트북과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가 간절할 정도로 아주 긴 계획서를 써 내려 갔다. * * * “윤기야. 나 좀 보자.” “그래, 이야기는 잘 해줬어?” 오세현은 부인과 함께 거실에 앉아 있던 진윤기를 따로 불러냈다. 정원으로 나가 오세현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뭐야? 왜 이리 심각해?” “너 왜 말 안 했냐? 140억….” “아, 그거? 괜한 돈 이야기로 네가 선입견을 가질까 봐.” “뭐, 됐고. 어떻게 된 거야?” 진윤기가 아들의 목장, 신도시 그리고 보상금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들려주자 오세현은 이마를 탁 쳤다. “천운이 따라다니는 놈이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이야기 잘했어? 너무 서둘지 말라고?” “윤기 너 현정화 알지?” “뭐야? 뜬금없이? 누구?” “거 있잖아. 86아시안게임 때 육상 금메달 딴 여자애. 라면만 먹었다는 노력파.” “이 병신아. 그건 임춘애야! 현정화는 탁구선수고.” 진윤기가 한심한 듯 바라봤지만, 오세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무튼, 그리고 작년 올림픽 때 천재 복서라고 소문났던 선수 있지? 로리존슨.” “로이존스 주니어.” “그래. 그 선수.” 계속 딴소리를 하는 오세현을 바라보던 진윤기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런 덜떨어진 놈에게 아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한 자신이 한심할 지경이다. “야! 당최 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어쩌면 도준이는 로이존스일지도 몰라.” “뭐?” “천재라고. 인마!” 아들이 어른스럽다고 생각한 것이 전부인 진윤기에게는 친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표현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만 절대 평범한 애가 아냐.” 스포츠 선수의 이름을 시작으로 천재라고 했다가 비범한 아이로 결론 내린다. 횡설수설로 들릴 뿐이다. “야! 너 혹시 엉뚱한 소리만 한 거 아냐?” 진윤기가 소리쳤지만, 오세현은 자신의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현정…. 아니, 임춘애는 노력형이지만 로이존스는 타고난 거야. 솔직히 도준이가 정확히 뭘 타도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를 두 손에 쥐고 태어났어.” 그제야 진윤기의 찌푸렸던 얼굴이 펴졌다. 도준이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 그 재능의 정체는 아직 모른다. 이것이 오세현이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넌 도준이 방에 가서 정체 모를 재능만 확인한 게 전부라는 거지?” “네가 원하는 건 좀 더 지켜본 후 생각해보기로 하자. 난 이만 가볼게.” “야!” 오세현은 진윤기가 부르는 소리를 들은 채 만 채, 급히 사라졌다. 정원에 혼자 남은 진윤기는 어처구니없었지만 하나의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재능. 과연 그 재능의 정체는 뭘까? *** “이거 보고 도장 찍어라.” “이건 또 뭐냐?” 일주일 만에 다시 나타난 오세현은 진윤기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도준이 돈을 우리 회사가 운용하는 걸 부모인 네가 동의한다는 내용이야.” “뭐? “뭘 그리 놀라? 왜? 내가 도준이 돈 빼먹을까 봐?” “그게 아니고. 그냥 예금이나 들어 두면 되지 않나 싶어서.” “염려 마라. 연 10% 금리보다 수익성 좋은 곳에만 투자할 거니까. 원금 손실 없도록 하이 리스크 상품은 피할 거야.”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의 진윤기는 동의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윤기야. 네 심정 안다.” 오세현은 타이르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준이 같은 애도 꽤 많아.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을 쓰지 않고 차곡차곡 저금하는 애들. 저금통이 빵빵해지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는 애들.” 돈 모으는 재미를 아는 애들이다. 이런 애들 전부 부자가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배곯는 일 없이 넉넉하게 산다. 쓰기보다 모으는 걸 좋아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드러난다. “물론 도준이는 좀 더 특별하지. 그러니까 내가 맡는 게 더 나아. 괜히 그 돈만 보며 점점 더 돈독 오를지도 모르니까.” “그래. 네가 잘 알아서 돈 관리하고 애도 좀 관찰해 줘.” “야! 내가 도준이 아버지냐? 뭔 관찰?” “이 자식아. 네가 말했잖아. 독특한 재능. 그거 관찰해보라고.” 진윤기는 웃으며 소리친 뒤 동의서에 도장을 꾹 찍었다. *** “이건 부모님 동의서. 그리고 이건 비밀유지 조항 합의서.” 난 동의서보다 합의서를 먼저 들었다. 비밀을 지킨다는 약속 정도면 충분했는데 서류까지 만들어 왔다. 꼼꼼하고 빈틈없다. 내 돈을 맡을 이 사람은 물론이고 나도 비밀을 지켜야 한다. 파워세어즈의 한국 대표다. 내 돈을 투자하려면 파워세어즈가 분석한 향후 돈 되는 투자처를 보여줄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내용을 어디 가서 떠벌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일개 국민학생이라면 내용을 파악할 수도 없는데 비밀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그만큼 철저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도준아. 너 그 내용이 뭔지나 알고 보는 거니?” 아차차. 너무 집중했나? 서류에 눈을 떼자 오세현의 미소 띤 얼굴이 보였다. 아주 신기하고 귀여운 애완견을 쳐다보는 듯한 눈이었다. “그냥 보는 거죠. 헤헤.” 머리를 슬쩍 긁으며 서류를 내려놓자 오세현은 한 뭉치의 서류를 더 꺼냈다. “이게 자산운용서라는 건데, 넌 봐도 모를 테니 어쩐다?” “그냥 제가 알기 쉽게 설명만 해 주세요.” “그러니까 60%는 은행예금이다. 10% 이상의 금리를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맡길 거야. 금액이 크니 은행도 혜택을 더 줄 거야. 나머지는 주식, 채권 그리고 프로젝트 파이낸싱인데….” 부동산 건설 붐이니 수익률은 은행 이자와 비교할 수 없다. 괜찮은 선택이다. 하지만 그는 좀 곤란한 표정으로 변했다. PF를 어떻게 설명할지 난감한 것이다. 도와줘야겠다. “괜찮아요. 설명 안 하셔도 돼요.” “그래. 내가 잘 알아서 할게.” “그것보다도 이거 좀 봐 주세요.” “이게 뭐야?” 내가 일주일간 정성 들여 작성한 노트를 건네자 그는 허겁지겁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 긴장되기도 하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노트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 마지막 페이지를 보고 노트를 덮은 그가 말했다. “넌…… 비밀이 많구나.” ======================================== [024] 은밀하게, 더 큰 돈을 4. “재벌 가문에는 비밀이 많으니까요.” “그 뜻이 아니지 않니?” 여전히 찡그린 미간을 풀지 않는다. “제가 좀 똑똑한 편이죠. 나이답지 않게.” “그 정도가 아닌데? 이런 걸 어떻게 알 수 있어? 네 나이에?” 오세현은 내가 준 노트를 흔들며 말했다. 이제 준비했던 시나리오를 말할 시점이다. “3년 전쯤인가? 전 처음 알았어요. 우리 가족이 완전히 무시당한다는 걸요.” 조금 쓸쓸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 가족이 무시당하는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에요.” “도준아. 그건 오해야. 아무도 네 가족을 무시하지 않아.” 몰라서 하는 소리일까? 아니면 위로랍시고 하는 말일까? 아버지의 절친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난 그의 말을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큰아버지 가족들 간에는 또 서로 경계하고 질투하는 것이 보였어요.” “눈치가 빠르구나.” “네. 그분들은 할아버지 회사를 더 많이 가지려고 그러시는 거겠죠.” “그래서 너도 할아버지 회사를 물려받고 싶은 거니?” “아뇨.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전 할아버지보다 더 큰 회사를 갖고 싶다고요.” “그게 이 노트의 대답은 아닌 것 같은데?” 오세현은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노트를 흔들었다. “이 노트의 내용을 12살짜리 애가 만들었다면 아무도 안 믿을 거다. 내용은 둘째로 치더라도 이런 걸 어떻게 알았어? 미국에 투자 회사를 설립하고 한국으로 다시 투자한다? 서울대 상과대학 애들도 이런 생각은 안 해.” 이제 대답을 잘해야 한다. 어차피 억지겠지만. “서울대 대학생들은 대기업 회장님 손자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저만큼 큰 꿈을 가지지 않았으니까요.” “뭐?” “전 지난 3년 동안 매주 할아버지 집으로 갔어요. 방학 때는 계속 할아버지 곁에 붙어있었고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고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 머리 좋거든요. 학교 시험에서 단 한 문제도 틀리지 않을 만큼.” 이 아저씨의 눈은 점점 더 커졌고 여기서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이 더 많아지면 질문도 더 많아진다. “삼촌. 이런 이야기 그만하면 안되요?” “그, 그래.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자.” “네.” “왜 외국으로 돈을 옮기려 하지?” “할아버지는 많은 돈을 외국에 보관해요. 그게 돈을 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내가 돈을 번다는 건 숨겨야 해요. 질투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큰아버지들?” “네. 이미 그분들은 할아버지가 절 예뻐하는 것도 질투하실걸요?” “그러니까 네가 돈을 벌면 그 돈을 전부 미국에 만든 회사로 보내서 숨기고 싶다는 거네.” “네.” 이제 오세현의 호기심을 지울만한 미끼를 던질 차례다. “전 늘 할아버지 곁에 있어요. 그리고 그분은 제가 곁에 있어도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죠. 할아버지가 하시는 대로만 하면 돈은 쉽게 벌 수 있을걸요?” 이제 무슨 말을 해도 놀라지 않는다. 아예 눈빛마저 빛났다. 누가 뭐래도 오세현 역시 자본주의의 최전방 투사다. 순양그룹 회장의 비밀 투자 또는 투자 계획을 미리 알아낼 루트를 발견했는데 욕심이 안 생길 수 있나? 하지만 저 기대는 조만간 실망으로 바뀔 것이다. 푼돈이나 벌자고 벌인 일이 아니다. 진 회장의 말에 기대어 버는 돈이라고 해봤자 수익률이 별로다. 물론 오세현 같은 사람에게는 엄청난 수익률이겠지만. 두세 배 뻥튀기에 만족하려면 미국에 회사를 세우는 번거로운 일 따위는 할 필요도 없다. 수십, 수백 배는 벌어야 제격이다. 나같이 미래를 훤히 아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오세현은 내려 놓은 한 뭉치의 투자 운용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이건 필요 없겠네. 순양그룹 회장님의 투자 계획이라면 이따위 계획보다는 훨씬 더 가치 있을 것 같으니까.” 서류를 챙긴 오세현은 편안한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았다. 프로의 자세였다. “연말까지는 미국에 투자 회사를 만들 수 있을 거야. 도준이 돈은 우리 회사에서 미국 본사로 들어간 다음 그 투자 회사 계좌에 넣을 거다.” “그런 건 알아서 하시면 돼요.” 내가 손을 저으며 말했지만, 오세현의 설명은 멈추지 않았다. “투자 회사의 지분은 네가 100% 소유할 거고 원할 때까지 자금은 미국에 둘게. 물론 그 회사의 운영 경비는 네 돈으로 충당할 거야.” 자산운용 책임자의 기본을 지키고 있다. 고객에게 모든 걸 숨기지 않고 설명해야 하는 의무를 행하는 것이다. “투자 수익이 나도록 빨리 돈을 벌어야 해. 아니면 돈만 까먹는다. 흐흐.” “그전에 부탁할 것이 또 있는데요.” “또? 이번엔 얼마나 날 놀라게 할 거야? 하하.” 놀라기는 하겠지만 좀 다른 느낌일 것이다. 나는 그동안 계속 생각했던 것을 차분히 설명했다. * * * 진윤기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오세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을 보자 재빨리 그를 끌어당겼다. “뭐야? 왜 그래?” “넌 진짜 아들 하나는 기똥 찬 놈을 뒀다. 부러운 새끼.” “뭐래는 거야?” “일단 앉자.” 오세현은 가방을 휙 던지고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담배 하나를 꺼내물고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않자 진윤기는 조급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빨리 말 안 해? 담배만 필 거야?” “아까 내가 말한 대로 도준이 돈을 굴릴 거야. 그런데 100억만 굴린단다.” 오세현은 투자 계획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도, 사실대로 말하지도 않았다. 비밀유지 약속 때문이 아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정반대의 성향이다. 자세히 알수록 충돌만 생길 것 같아 염려한 것이다. “100억? 전부 140억 아냐? 그럼 40억은?” “영화 제작사를 하나 만들고 싶다는데? 그 제작사의 대표이사 1순위 후보는 바로 너고.” 오세현은 후보라는 말에 힘을 주며 진도준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도 아마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입만 벌린 저 얼굴. 남에게 충격을 주고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현재 한국영화 평균제작비는 겨우 1억5천이다. 지금 한창 제작 중인 명감독 임권택의 ‘장군의 아들’이라는 영화도 엄청난 제작비를 투입했다고는 하지만 6억을 넘지 않는다. 40억이라면 최소 10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그것도 한 푼의 외부 투자를 받지 않아도 말이다. “애가 생각이 깊어. 그냥 아버지한테 돈을 주면 거절할 게 뻔하다고 무조건 영화사를 만들어 달래. 그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라도 윤기 네가 회사를 맡지 않겠냐고 하더라.” 복잡한 심경을 숨기지 못한다. 구겨진 자존심, 속 깊은 아들의 기특함, 꿈을 잡을 수 있는 기회, 아버지 진 회장의 시선. 진윤기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난 네가 잡다한 생각은 버리고 그냥 했으면 좋겠어. 어린 아들이 준 기회다. 잘 살려봐. 너도 아직 젊잖아.” 오세현이 진윤기의 어깨를 툭 치고 나가 버렸지만 진윤기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 * * 조금 상기된 듯 옅은 홍조를 띤 아버지가 조심스레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부하니?” “아, 네.” 쉽게 말을 꺼내지는 못하지만 표정을 보니 영화사를 맡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날려버리려면 내가 먼저 말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버지. 전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도 말씀하셨고 아버지도 그러셨잖아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행복이라고.”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내 의도를 모를 리 없다. 아버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좀 웃기지 않니? 아버지가 아들의 행복을 지켜줘야 하는데…….” “전 아버지에게 선물을 드렸을 뿐이에요. 아버지는 앞으로 계속 절 지켜주실 거잖아요. 변한 것도 없고 이상한 일도 아니에요.” “내가 영화 만들어서 폭삭 망하면?” “다시 백수 되시는 거죠.” 웃으며 말하는 내 모습에 아버지도 편안한 미소를 보였다. “40억은 아주 큰 돈이야. 할아버지보다 더 큰 부자가 되겠다는 네 꿈에 꼭 필요할 때가 올지도 몰라. 4억, 아니 사천만 원이 없어서 망하는 회사도 많으니까.” “아버지가 영화 잘 만들어서 사백억으로 만들어주시면 되죠.” 아이고, 전부 말아 먹어도 돼요. 그깟 40억, 없어도 그만입니다. 걱정 말고 팍 질러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순수한 어른 한 명의 꿈을 이루게 해 주는 일이 이다지도 힘들지는 몰랐다. 하지만 나를 힘껏 안는 아버지의 마음이 전해지자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 * * “뭐? 전액 인출?” - 네, 실장님. 갑작스러운 요청이라 저도 놀랐습니다. 은행 지점장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고객의 요구에 응한 것뿐인데, 그 고객이 워낙 대단한 사람이라 괜히 죄지은 듯 움찔거렸다. “언제 인출했어?” - 조금 전 전액 계좌 이체했습니다. “어디로?” - 파워세어즈라는 자산운용사입니다. 아시죠? 물론 안다. 돈 좀 굴리는 사람치고 이 이름을 모를 리 있나? “도준이 혼자 왔나? 아니면? 아버지랑 함께? - 아닙니다. 파워세어즈 사람만 왔습니다. 부모 동의서부터 구비서류를 완벽하게 준비해 왔기에……. “알았어. 혹시 새로운 사실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 네. 실장님.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학재 비서실장은 급히 직원 몇 명을 불렀다. “파워세어즈 임직원 중에서 진윤기와 관계있는 놈이 누군지 알아봐. 아니, 회장님 일가와 관계있는 놈 전부 찾아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도준이는 어린애일 뿐이고 그 아버지는 돈 욕심 없는 호인이다. 도준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은행에서 잠잘 줄 알았던 돈이 한 달도 안 돼서 빠져나가다니. 혹시 사기라도 당했다면 큰일이다. 거의 하루를 초조하게 보낸 이학재는 직원들이 파악한 내용을 보고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적어도 사기당한 건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묻어둘 사안도 아니다. 이학재는 자료를 들고 진 회장의 서재로 달려갔다. ======================================== [025] 기적 같은 투자회사 1. “누구?” “오세현이라고 파워세어즈 한국 대표입니다.” “돈놀이 하는 놈들 아냐?” “그런 셈이죠.” 진양철 회장은 책상 위에 펼쳐진 보고서 몇 장을 훑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놈, 윤기 친구야?” “네.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함께 공부한 자입니다.” 진 회장의 손에 오세현의 신상명세서가 쥐어졌다. “혹시 이놈, 딴생각 하는 거 아냐?” “아닙니다. 윤기도 그렇고……. 도준이 돈을 탐낼 심성은 아닙니다.” “돈 앞에서 심성을 따져? 자네 왜 그래? 아무리 윤기를 좋게 봤다지만 너무 물러.” 아들이 돈 욕심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건만 끝까지 의심을 버리지 않는 저 성품. 지독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학재는 싱긋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냥 은행에 넣어두고 이자나 따박따박 챙길 줄 알았는데 투자사에 맡기다니요?” “그게 수상해서 하는 말이야. 하필 윤기 친구라니?” 진 회장은 오세현이라는 놈이 순진한 아들에게 접근해서 공사치는 놈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학재야.” “네.” “이 친구 한번 만나봐.” 이학재는 진 회장이 내미는 오세현의 사진을 거머쥐었다. “알겠습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치해 놓겠습니다.” 이학재가 머리를 숙이고 서재를 나가자 진 회장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놈 보게…….”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오는 진 회장이다. 아들 진윤기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단지 철저한 경계는 나쁠 게 없다. 또한, 만약 투자를 그 어린 손자가 생각해 냈다면 기특해 죽을 지경이다. 은행 이자에 만족하지 않는 그 엄청난 욕심. 자신을 쏙 빼닮았다. * * * “이학잽니다.” “존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오세현입니다.” 두 사내는 서로의 명함을 주고받고 호텔 라운지의 널찍한 의자에 앉았다. 오세현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태도는 당당했다. 이학재가 누군가? 자타공인 순양그룹의 이인자 아닌가? 부회장인 진 회장의 장남 진영기도 이학재에게는 깍듯하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런 자신에게 조금도 위축하지 않은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오세현의 눈에는 이학재는 단지 뱀의 머리일 뿐이다. 한국에서 아무리 잘나 봤자 세계에서는 변방이다. 파워세어즈는 세계적인 제국 아닌가? 적어도 자신은 용의 꼬리다. 용의 꼬리가 뱀의 머리에게 자세를 낮출 이유는 없었다. “바쁘신 분이니 거두절미하겠습니다.” “용건은 도준이 때문이시죠? 이것부터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세현은 서류 두 장을 내밀었다. 하나는 보호자 동의서였고 나머지는 비밀유지 조항이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윤기 씨가 절 먼저 찾아왔고 비밀을 유지 요구는 도준이가 먼저 했습니다. 그러니 도준이 자금을 어디에 투자했는지 물으셔도 전 대답할 수 없습니다.” 오세현의 선공(先攻)에 이학재는 속수무책이었다. 확인해야 할 것은 많았지만 대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자에게 질문할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그냥 일어설 수도 없다. 이건 자존심 문제니까. “하나만 명심해요. 딴생각 마쇼. 장난질 치면 당신… 날려버릴 테니까.” 아주 잠깐 오세현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영업으로 다져진 마인드가 어디 가지는 않았다. 금방 미소가 피어올랐다. “부탁치고는 좀 살벌하군요.” “뭐요?” “너무 윽박지르지 마십쇼. 저희가 동네 새마을 금고도 아니고…. 순양이라는 이름 때문에 쫄지는 않습니다.” 미소가 사라진 오세현의 얼굴을 노려보며 이학재가 입을 열었다. “순양이 세계에서는 동네 구멍가게일지는 몰라도 이 나라에서만큼은 달라. 국세청, 감사원, 대검찰청 특수부 몽땅 버스에 태워 당신네 회사로 보낼 수도 있어. 명심하라고.” “똥개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는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이거군요. 명심하겠습니다, 실장님.” 순양그룹을 똥개로 부르자 이학재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럼 이만 일어날까요?” 오세현이 소파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자 이학재가 가볍게 잡았다. 아무래도 나이가 어린 오세현이 조금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그가 가볍게 머리 숙이자 이학재는 피식 웃으며 먼저 호텔을 빠져나갔다. “후- 니미, 장난 아니네. 뭐가 저리 까칠해?” 그의 뒷모습이 사라졌을 때 오세현은 긴 숨을 내쉬었다. 이학재는 호텔 입구에 대기하던 승용차에 오르자마자 카폰 수화기를 들었다. “회장님. 접니다.” - 그래, 만나 봤어? “방금 만나고 헤어졌습니다. 걱정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 그래?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진 회장의 목소리에 화색이 돌았다. “네. 강단 있던데요?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도 높고. 도준이 돈에 침 흘릴 만큼 소인배는 아닌 게 확실합니다.” - 잘됐네. 가끔 만나서 소주잔이라도 나누라고.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파워세어즈 정도면 알아둬서 손해 보지는 않을 겁니다.” 통화를 끝낸 이학재는 안락한 시트에 몸을 기댔다. 세상에는 훌륭한 인재가 모래알처럼 많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 * * 89년 8월, 소련 산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공화국에서 200만 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민주화와 독립을 요구하며 각국의 수도를 잇는 600km의 인간사슬, 즉 '발트의 길'을 만들었다. 같은 해 가을, 한국에서 한가위의 풍성함을 만끽할 때, 헝가리 정부가 서부 국경을 개방하자 동독 주민들의 대규모 탈출이 시작되었다. 바로 동구권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전 세계의 시선이 급변하는 동유럽의 변화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나는 미국으로 갈 계획을 짜느라 정신없었다. 학교 빠지는 것 정도는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힘 있고 돈 많은 부모를 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다 보니, 해외여행 자율화 이후로 수업 빼먹고 외국으로 가는 것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미국 뉴욕에 거점을 둔 투자 회사의 설립 시점이다. 내가 대주주인 투자 회사. 98%의 지분을 소유한 법인. 진 회장의 정보를 먼저 입수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오세현과 그의 동료들이 2%를 투자한 회사다. 10월 말까지는 완벽하게 끝내겠다는 오세현의 확답이 있었기에 더는 늦출 수 없다. 89년이 끝나기 전 꼭 만나야 할 사람도 있다. 부모님께 미국 여행 이야기를 꺼내자 어머니는 기뻐하셨지만, 아버지는 난색을 보였다. 영화사 설립 때문에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어 처음으로 일이라는 것을 시작한 사람이다. 사회 초년병이나 다를 바 없는 아버지는 흥분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청년의 모습이었다. 사춘기 반항아인 상준 형도 미국이라고 하니 갑자기 착하고 어리광 피우는 아들로 변해버렸다. 라면의 대명사 삼양식품이 공업용 소기름으로 면을 튀겼다는 익명의 투서가 검찰에 날아들면서 시작된 대한민국 라면 시장 사상 최대의 사건, 소위 ‘공업용 우지’ 사건이 터지던 1989년 11월 3일, 오세현과 우리 가족은 뉴욕행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에 몸을 실었다. * * * “제수씨. 좀 쉬시다가 상준이랑 관광도 하고 쇼핑도 좀 하고 계십시오. 전 도준이와 가볼 데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신지…?” “별일 아닙니다. 도준이 돈을 미국에 조금 투자했는데 잠깐 들러 보려고요. 도준이는 이쪽이 관심 많으니까 구경삼아 데려가겠습니다.” 자유의 여신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뉴욕 플라자 호텔 특실에 짐을 풀자마자 오세현은 서둘렀다.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길의 어머니와는 달리 상준 형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를 닮은 놈이다. 돈에는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백억이 넘는 돈을 가졌다는 걸 알았을 때도 부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걱정스럽게 바라보기만 했다. 집안의 추악한 돈 싸움에 내가 말려들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참, 가이드 한 명을 준비했습니다. 그 친구가 차도 마련해 놨으니 지내시는 동안 불편함 없이 모실 겁니다.” 두 사람을 남겨둔 채 우리는 호텔을 빠져나왔다. 택시를 타고 맨해튼 월스트리트로 달려갈 때 나는 창밖으로 뉴욕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변화하고 발전하는 뉴욕의 모습을 앞으로 생생히 담아둘 것이다. “건물이 좀 초라하지? 쓸데없는 곳에 비용 낭비하지 않으려고 저렴한데 구했다.” 말과는 달리 내 눈에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빌딩이다. 하긴, 세계 금융자본을 주무르는 맨해튼이라면 이 빌딩은 싼 편에 속할 것이다. 6층으로 올라가서 오세현이 멈춰선 문에는 자그마한 가판이 걸려 있었다. Miracle Investment Inc. 오세현은 유치한 이름이라고 손을 내저었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진짜 기적을 보여줄 것이기에 말이다. 사무실을 보는 순간 온몸이 짜릿했다. 나의 첫 번째 회사다. 이곳에서 순양그룹을 통째로 삼킬 거대한 괴물을 키울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 명의 삼십 대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오세현을 반겼다. “James! Wow! Long time no see!" 그들은 오세현의 영어 이름을 부르며 반가움을 드러냈다. 이들은 파워세어즈 뉴욕에서 근무하던 펀드매니저였는데 오세현이 스카웃했다. 명실상부한 최고의 기업을 나와 초라한 시작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들이 탑 클래스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류, 어쩌면 삼류일지도 모른다. 물론 파워세어즈에 몸담았다는 것은 꽤 뛰어나다는 의미지만 그 속에서는 뒤처진 부류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이미 내가 한국 최대 기업 회장의 손자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이 회사에 입금된 100억 원, 1,500만 달러를 순양그룹의 비자금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신생 회사답게 그들은 만나자마자 천오백만 달러를 어떻게 굴릴 것인가, 그리고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에서 IBM, 인텔, 리바이스, 나이키, 3M 등의 세계적인 회사 이름이 나왔고 유일한 여성 펀드매니저는 마이크로소프트를 강력하게 추천하기도 했다. Apple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하긴, 지금 애플 주식은 1달러 선에서 떠오를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까 당연하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오세현은 그들의 열기를 진정시켰고 내 돈은 미국기업에 투자하기보다는 순양의 진 회장이 주는 정보로 다시 한국으로 역투자 하는 것이라고 차분히 설명했다. 오세현의 말이 끝나자 네 명의 매니저 얼굴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겨우 그 정도 일을 하려고 파워세어즈를 그만둔 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는 척 딴청을 피우며 그들의 역량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하려 애썼다. 확실한 것 하나는 파악했다. 남자들은 안정적인 투자를, 여자는 모험을 피하지 않았다. 어쩌면 여자가 가장 뛰어난 인재인 것 같다. 한 시간가량의 난상토론이 끝나갈 때쯤 나는 오세현을 불렀다. “삼촌. 잠시만요.” “아이고 이런, 우리 도준이 심심했겠다. 미안, 일 이야기 하느라 깜빡했어.” “괜찮아요. 그런데 이것 좀 봐 주실래요?” 나는 주머니에서 메모지 한 장을 꺼내 오세현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우리 회사가 첫 번째로 투자할 곳입니다.” “뭐?!” 깜짝 놀란 오세현은 메모지를 낚아채고 황급히 펼쳤다. 네 명의 매니저들도 오세현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며 메모지로 모여들었다. 메모지를 확인한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마이클 델?” “Michael Dell?" "Dell? Dell Computer?!" ======================================== [026] 기적 같은 투자회사 2. 나는 오세현을 포함한 다섯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오세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삼촌은 아웃. 미국 사정을 너무 모른다. 한국에서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 남자 셋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머리를 흔드는 놈, 골똘히 생각을 시작하는 놈, 놀라는 놈. 가장 즉각적 반응을 보인 이는 바로 여자였다. “How… how do you know…." 나를 바라보며 더듬거리던 그녀는 오세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영어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어린애에게 말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이미 이들이 던지는 질문이 무엇인지 아는 오세현이 다급히 말했다. “도준아. 너, 델 컴퓨터는 어떻게 안거니?” 어떻게 알긴, 써 봤으니 알지. 물론, 내 입에서는 생각과 다른 말이 나갔다.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12살 때 우표를 팔아 이천 달러를 벌고 고등학생 때 신문 구독 장사로 큰돈을 번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마이클 델이잖아요.” “아…!” 오세현은 나와 나눴던 대화가 기억났는지 손가락을 딱 튕겼다. 1965년생인 마이클 델은 돈 버는 것 마저 타고 난 재능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친구 아버지가 우표수집가였는데, 우표 거래는 경매로 이루어지고 경매 중개인들의 수수료가 높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델은 우표수집가들을 찾아다니며 매매하고 싶은 우표 목록을 작성하고 중국집 서빙으로 번 돈으로 잡지에 광고까지 실었다. 경매 수수료의 거품을 걷어내고 판매자와 구매자를 직접 연결하는 방식으로 우표 판매상이 되었다. 겨우 12살의 나이에. 고등학교 때는 신문 배달을 했는데, 구독자 한 명당 인센티브를 받는 걸 알자 구독자를 찾아 나섰다. 일반적으로 신문을 구독하면 신문사를 바꾸지 않고 계속 보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사를 하면 다시 신문 구독 신청을 한다. 델은 이 현상에 주목했다. 그는 텍사스 휴스턴의 법원을 돌아다니며 최근 결혼한 사람들의 명단을 입수했고 이들을 집중 공략했다. 그해 델이 받은 인센티브는 무려 만팔천 달러였다. 고등학교 선생 연봉보다 많은 금액이었고 델은 이 돈으로 BMW 승용차를 구입했다. 유통과정의 단순화, 집중적인 마케팅. 이것은 향후 델 컴퓨터의 영업방식과 일치했다. 이런 사실은 당연히 지금은 알려지지 않았다. 마이클 델이 거부가 된 후 알려질 것이다. “그럼 넌 그 사람의 어린 시절 이야기만으로 거금을 쏟겠다는 거야?” “제 나이 때 이미 돈을 번 사람이에요. 저처럼 부자 할아버지도 없고요. 그런 사람은 당연히 큰돈을 벌지 않겠어요?” 잠깐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오세현은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델 컴퓨터, 마이클 델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져와. 지금 당장.” 모두 프로답다. 오세현이라는 보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순식간에 IBM PC AT 앞에 앉아 2메가짜리 플로피 디스크를 꽂았다. 결정하면 따른다. 불만도, 의심도 품지 않고 최선을 다할 뿐이다. 또 한 번 뿌듯함이 느껴졌다. 월급쟁이로만 살다 쫑난 인생이다. 이제 내가 주는 월급을 받는 병사들이 무려 넷이다. 인종도 피부색도 다르지만. 그들은 내 존재마저 잊고 자료 찾는 일에만 집중했다.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도 잠시,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사무실 한쪽에 있는 탕비실로 들어가 원두커피를 내렸다. 커피 향이 사무실에 퍼졌다. 다섯 잔의 커피를 쟁반에 받쳐 들고 각자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Oh, Thanks." 이들은 나의 행동이 귀여운지 내 머리를 슬쩍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직 나를 대주주이며 이 회사의 오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뭐, 몇 년 안에 충분히 알 것이다. * * * 다시 호텔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와 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가 붙었으니 시내로 나간 것 같다. 조금 피곤함을 느껴 침대에 드러누우려는데 오세현이 먼저 침대 위에 서류 더미를 휙 던졌다. 사무실에서 충분한 논의를 했음에도 마지막까지 한 번 더 검토하는 모습이다. 부끄럽다. 나는 아직 멀었다. “삼촌. 아직 확신을 못 하시는가 봐요? 아까 일하시는 분들은 다들 긍정적이던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영어 알아듣냐?” 아차차. “아, 아뇨. 그냥 표정이… 다들 웃으시길래….” “음…. 난 평생 확신이란 걸 해본 적이 없다. 늘 의심만 할 뿐이야.”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한다. 항상 의심한다.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사업이든, 프로젝트든, 투자든 백 퍼센트 확신이란 건 없어. 그런 말을 뱉는 놈은 믿지 마. 무책임한 놈이다. 의심과 불안을 최소화하는 작업. 그게 바로 일이다.” 이 아저씨,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 분명한데…. 마음을 고쳐먹었나? 이제 더는 어린애 취급하지 않겠다는 뜻일까? 아무튼, 초일류들을 상대하면서 알았다. 난 배운 게 없었다. 내가 아는 건 경험과 노력으로 알게 된 게 전부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내용은 그들만의 세계에서 공유할 뿐 외부로 빠져나오지 않았다. 난 그들이 시키는 것을 잘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을 뿐이다. 그들이 시키는 일의 진짜 이유, 그 목적을 모른다는 건 배운 게 없다는 뜻이었다. “저울을 생각해봐.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를 저울에 올려놓고 그 차이를 재는 거야. 난 좋은 결과가 나쁜 결과보다 아홉 곱절 이상 무거울 때만 시작해. 넌 너만의 기준을 정해. 몇 곱절로 할지.” 성공확률 90%라는 뜻. 상당히 높다. 자신의 돈이 아니라 고객의 돈으로 투자하는 자산운용가로서의 당연한 자세다. 나의 기준은 어떻게 정해야 할까? 이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오세현이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준아. 넌 어머니랑 여기 좀 있어.” “어디 가시게요?” “아무래도 텍사스로 가야 할 것 같다.” “직접 만나시려고요?” “그래야겠어. 실적은 좋은데 규모가 작아. 돈 폭탄을 던지려 해도 이 회사가 감당하기 힘들 거야.” 천오백만 달러를 전부 던지려 했지만 불가능하다. 작년, 델 컴퓨터는 이미 삼천만 달러를 투자받았다. 물론 이런 디테일까지 내가 기억하는 건 아니다. 회사에서 자료 놓고 사람들이 토론할 때 들은 이야기다. 혹시, 한발 늦은 것일까? 겨우 50배 정도 오르는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까? 이런 생각이 스쳤을 때 난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아직도 이렇게 나약하다니!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단지 가능성이 멀어지자마자 다른 길부터 찾는 나약함이 몸서리쳐질 만큼 부끄러웠다. “저도 갈게요.” “뭐?” “제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직접 만나고 싶어서요.” “흠…. 그러자꾸나. 천 원짜리 과자를 사도 직접 보고 사는데. 직접 본 뒤, 네 생각도 궁금하구나.” 오세현은 텍사스행 티켓과 호텔까지 단번에 예약한 다음 회사로 연락해서 델 컴퓨터와의 미팅을 준비시켰다. “삼촌. 만나는 약속 했어요? 벌써?” 분명 통화내용으로는 확정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오세현은 이미 짐을 싸고 있었다. “저쪽에서 거절한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어. 안 만나주면 회사로 쳐들어가야지. 손해 보는 건 없잖아?” 이럴 때는 전형적인 한국식 불도저 같은 모습이다. 결국, 때와 장소, 상황에 맞춰 변해야 한다. 인간은 끝을 알 수 없는 여러 모습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스포츠 구단 1위이며 미식축구의 상징 댈러스 카우보이의 홈구장이 있는 곳. 프랑스의 영토보다 25%나 더 넓은 땅. 텍사스다. 우리는 텍사스 오스틴의 버그스트롬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렌터카 사무실을 찾았다. 오세현은 렌터카 사무실에서 회사로 전화를 걸어 미팅 약속을 확인한 뒤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랐다. 델 컴퓨터 본사나 호텔로 갈 줄 알았는데 차는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삼촌.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본넬 산(Mt. Bonnell).” “네?” “여기 정상인 Covert Park에서 내려다보면 오스틴이 한눈에 다 들어와. Lake Austin을 내려다보면 숨 막히는 절경이 펼쳐지지. 놓치면 안 돼. 특히 오늘은 날씨도 좋으니까 운이 좋아.” 텍사스의 날씨는 변덕스럽기로 유명하다. 어떤 날은 뜨거운 햇볕이 온종일 내리쬐면서도 며칠 안 가서 다시 비만 내리기도 하며, 심지어는 하루에도 비가 내렸다가 맑아지는 것이 여러 번 반복되기도 한다. “가보셨어요?” “아니. 방금 공항에서. 관광 안내책자에 나와 있던데?” 자투리 시간을 적극 활용하는 빈틈없는 사람인지 아니면 미팅 약속이 불발되어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나 역시 시트에 등을 기대고 편안히 앉아 오스틴의 경치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불안하지 않았다. 오세현은 어쩐지 믿음이 갔다. 분명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미팅이 불발되면 나는 이곳 텍사스에 머물며 오세현과 미라클 인베스트먼트 직원들에게 미팅을 꼭 성사시키라고 요구할 것이다. 지금의 나는 머슴이 아니라 주인이다. 머슴의 사고에서 주인의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하지만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당당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육체도 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헉, 헉……. 사, 삼촌. 이거 계단이 몇 개나 돼요?” “그……. 글쎄. 나도 처음이라……. 헉, 헉.” 산 중턱의 주차장부터 시작되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가파른 석회암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며 우리 두 사람은 녹초가 되었다. 잠시나마 초조함을 버릴 수 있어 나쁘지는 않았다. * * * 녹초가 된 우리 두 사람은 하얏트리젠시에 짐을 풀고 침대에 드러누워 전화만 기다렸다. “도준아.” “네.” “델 컴퓨터의 투자 가능성은 낮다.” “이미 삼천만 달러를 투자받았으니까요?” 투자는 춥고 배고픈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등 따습고 배부른 자에게 투자하겠다는 것은 죽 한 그릇 더 먹이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역시, 잘 알아듣는구나. 만약 작년이었다면 델이라는 그놈이 초조하게 우리를 기다렸을 거야. 이게 타이밍이다. 적절한 시점을 잡아내는 게 투자의 전부다. 들어갈 시점, 빠져나올 시점.” “우린 지금 늦었군요.” “그렇다고 봐야지.” 팔베개하고 누워있는 오세현의 표정은 무척이나 굳어있었다. 이때 전화가 울렸다. 오세현은 벌떡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Yes, U-hum, Good, All Right이라 말하는 걸로 봐서 약속이 잡혔나 보다. “What?” 갑자기 눈이 커지며 재확인하는 오세현이다. 뭐지? 틀어졌나? 수화기를 내려놓은 오세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됐다. 만나준단다.“ 나도 모르게 손뼉을 짝! 쳤다. “그런데… 이거, 하하.” “왜 그러세요?” “따로 시간 내 줄 수는 없고 내일 점심 같이 먹으며 이야기하자는데?” “잘됐네요.” “그게… 햄버거 먹는데. 웬디스(Wendy's)로 오래.” 오세현은 어처구니없어 멍해진 내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넌 햄버거 좋아하지 않니?” 햄버거를 싫어하는 나 같은 애 늙은이도 있다. 더욱이 비즈니스 미팅이라면 늘 괜찮은 레스토랑이라는 틀에 잡혀 있다 보니 멍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 [027] 기적 같은 투자회사 3. “아, 아뇨. 좋아해요.” 햄버거가 중요한 게 아니다. 가벼운 점심과 딱 어울릴 만큼만 부담 없이 만나주겠다는 의미 아닐까? 델 컴퓨터가 점점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안락한 호텔 침실에 누웠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거절을 승낙으로 바꾸는 방법을 궁리하다 보니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다. 오후 1시, 라운드 락 거리의 웬디스 매장에 들어서자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근처에 텍사스 주립대학이 있다 보니 매장 안은 대학생들 천지였다. “젠장. 전부 비슷해 보이니 어떻게 찾는담?” 남부 특유의 분위기로 물든 매장이었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청바지와 체크 남방을 걸쳤고 생김새도 별반 차이 나지 않았기에 도저히 마이클 델을 찾을 수 없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중년의 동양 남자가 차라리 눈에 더 띄었나 보다. “Hey, Mr. Oh?" 나는 Mr. Oh라는 소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콜라 잔에 꽂은 빨대를 입에 문 젊은 청년. 만 24세의 마이클 델이었다. 27세에 최연소 세계 500대 부자, 34세에 공식재산 214억 달러를 기록하며 미국 5대 부자의 자리를 차지할 거인의 젊은 모습은 여느 대학생과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지금도 백만장자 대열에 서 있다. “Mr. Dell?" "Yes." 그는 햄버거가 든 종이봉투를 쓱 내밀더니 눈짓했다. 어디로 따라오라는 걸까? 앞장서서 매장 밖으로 나간 그는 가까운 공원으로 걸어갔다., 벤치에 털썩 앉아 씩 미소를 보였다. “여기가 낫죠? 거긴 너무 시끄러워서.” “그렇군요. 좋네요.” “그 애는…?” “아, Mr. Dell. 당신 팬이라고나 할까?” “네? 팬? 하하.” 마이클은 웃음을 터트리더니 오세현에게 손을 쓱 내밀었다. “그냥 마이크라고 부르세요.” “그러죠. 전 제임스입니다.” 마이클 델은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내 눈을 보며 찡긋했다. “자, 용건을 말씀하시죠. 전 15분 뒤 회사로 돌아가야 합니다.” 15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전부다. 오세현의 말이 빨라졌다. “우리 미러클 인베스트먼트는 당신의 회사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투자 금액과 조건은…….” 햄버거를 든 델의 손이 올라갔다. “투자는 필요 없습니다. 자금은 충분합니다.” 그의 눈빛에 살짝 짜증이 보였다. 충분한 회사의 자금, 삼천만 달러. 이미 업계에 파다하게 퍼진 이야기다. 이런 내용도 몰랐다면 투자자의 기본이 없다는 의미기 때문에 지금 델의 눈빛에는 오세현을 얕보는 기색이 분명히 보였다. 투자라면 무조건 쌍수를 벌리고 환영한다면 하수이며 아마추어다. 투자란 창업자의 지분에 물타기 효과를 가져온다. 내 지분이 줄어들거나 빚이 되기도 한다. 딱 필요한 만큼의 투자를 받는 것이 올바른 경영자의 자세다. “물론 잘 압니다. 하지만 투자 조건이 파격적이라면 재고할 여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제임스. 내 회사는 탐욕스러운 임원이 즐비한 IBM과 다릅니다. 나는 회사 확장을 위한 자금만 필요했고 완벽한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돈은… 이익을 남겨 벌어들일 겁니다. 주식을 왕창 늘여 돈을 충당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아요.” 탐욕과 멍청이라는 단어까지 썼다. 또 투자를 받는 것은 자신이 탐욕스럽고 멍청하다는 증명일 뿐이니 완벽한 거절방법이었다.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조건을 들어 보지도, 내세우지도 않고 단칼에 거절할 줄이야! 오세현은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나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오세현은 좋은 투자처 하나를 놓치는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나는 다르다. 거대한 계획의 두 번째 단추를 끼우는 일이다. 첫 번째 단추는 분당에 신도시가 들어선다는 걸 알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돈 많은 할아버지에게 갖은 아양을 떠는 것만이 내가 노력한 전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확한 보물 지도가 내 머리에 들어 있지만, 보물섬까지 나를 인도할 배의 선장이 나의 승선을 거부한다. 이제는 미래는 안다는 것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 오로지 내 힘으로 뚫어야 한다. 마이클 델이라는 선장을 설득해야 한다. 이미 나는 결심을 굳혔고 입을 열었다. “Mike. Oh, Can I call You Mike?" "Sure, Buddy." 마이클 델은 눈을 찡긋하며 미소 지었지만 오세현은 달랐다. 내 입에서 유창한 영어가 나오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기에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당신의 과거는 현재의 내 모습이며 나의 미래는 바로 당신의 지금 모습입니다.” “뭐? 꿈이 너무 큰데? 내 어린 시절은 보통과 조금 다른데?” “물론 조금 다릅니다. 아니, 아주 많이 달라요.” “어떻게 다르지?” “12살의 당신 손에는 우표 팔아 벌어들인 이천 달러가 고작이었지만, 지금 12살인 내 손에는 땅을 팔아 벌어들인 천오백만 달러가 있으니까요.” 이젠 마이클 델의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똑같지만, 이유는 달랐다. 오세현은 내 영어 때문에, 마이클 델은 내 돈 때문에. “당신이 이천 달러를 어디에 썼는지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내 돈 천오백만 달러를 어디에 쓸지 이미 정했습니다. 바로 델 컴퓨터의 대주주가 되는데 쓸 겁니다.” 말을 마쳤지만 반응이 없다. 한참 동안 공원의 소리만 주변을 맴돌았다. “도, 도준아. 너….” “삼촌. 나중에요. 지금은 더 중요한 걸 이야기해야 하잖아요.” 마이클 델은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오세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James. Your son?" "No. My… boss, maybe……." 오세현의 대답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마침내 웃음을 터트렸다. “OK. Fifteen million Dollar boy." 이름도 묻지 않고 내 돈을 언급했다. “질문 두 개만 하자.” “네.” “내가 우표 팔아 돈 번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어?” 아차차, 낭패다. 이 사람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아직 나오지 않았나? 어쩔 수 없다. 두루뭉술 넘어가는 수밖에. “무려 천오백만 달러를 투자하는 일입니다. 당신에 대한 조사 없이 움직일까요? 우리 회사는 그리 허술하지 않습니다.” “탐정까지 고용했어? 대단한데? 좋아 그럼 나머지 질문.” 만연에 미소를 띠고 있지만, 이 미소는 호의가 아니다. 호기심일 뿐이다. “내가 투자를 받지 않겠다는데 어떻게 대주주가 되지? 아직 우리 회사 이사회 구성은 내가 과반 이상의 의결권을 쥐고 있거든. 내 뜻이 절대적이야.” “내년쯤 상장하지 않을까요?” 마이클 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다. 생각만 했을 뿐이다. 내년 초, 회사 경영진과 투자자들에게 말할 생각이었고 준비할 계획이었다. 그런 자기 생각을 정확히 읽은 이가 다름 아닌 어린 동양 꼬마라니! “왜? 그렇게 생각하지?” “과일이 무르익었으니까 따야죠. 가장 탐스러울 때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회사가 상장하면…….” “시장에 나오는 주식을 무차별적으로 쓸어담을 겁니다. 천오백만 달러 정도면 순식간에 대주주가 될 것 같은데, 아닌가요? 아, 하나 더 말씀드려야겠군요. 올해 안으로 천만 달러 정도를 더 준비할 수 있습니다. 아직 엄청난 값어치의 내 땅이 남아 있거든요.” 이천오백만 달러. 내 말이 현실화되는 건 시간문제다. 이 사실을 깨달은 마이클 델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모습을 본 오세현은 급히 입을 열었다. “대주주로서 이사회의 멤버가 될 것이고 경영에 깊숙이 관여할 겁니다. 이건 당연한 요구니까요.” 딱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들었다. 언제까지 놀라고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기세를 잡았을 때 함께 공격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아는 사람이다. 놀람과 궁금함은 이미 떨쳐버린 얼굴이다. 다시 뛰어난 비즈니스맨의 표정이었다. “뭐, 어쩔 수 없죠. 주식시장을 통해 매입하던, 투자하던… 그 정도 자금이면 어차피 대주주가 되니까요. 대주주 자격이 충분하면 당연히 경영진에 합류해야죠.”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마이클 델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햄버거를 한입 깨물었다. “이거, 엄청난 부자 친구 때문에 15분을 훌쩍 넘겼네.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말이야.” 공원 벤치에서 일어난 델은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부자 친구,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대주주가 되어 있겠네? 내년이 될지 아닌지는 두고 보자고.” 오세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협상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카드는 아직 남았다. 선장이 승선을 허락할만한 카드라고 생각하지만, 결과는 아직 모르겠다. 히든은 까봐야 아는 거니까. “마이크, 주주로서의 의결권을 전부 당신에게 드릴 수도 있는데 그냥 가시게요?” 엉덩이를 툭툭 털던 손이 멈칫했다. 투자를 거부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충분한 자금이 있고 경영권을 확실히 쥐고 있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경영권이다. 가뜩이나 아직 어린 자신을 노리는 주주들이 슬슬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가? 상장 후 대량의 주식 취득자가 등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경영권 방어를 충분히 생각해서 상장하면 그 문제 역시 해결된다.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신을 제외한 대주주들의 결속이다. 반대세력이 힘을 합쳐 51%를 만든다면 창업주지만 경영권을 잃는다. 그런데 이천오백만 달러를 쏟아붓겠다는 꼬마가 의결권을 넘긴다니? 이거야말로 경영권에 철벽을 쌓을 수 있는 기회다. 잠깐 동안 나를 바라보던 델은 오세현을 향해 말했다. 미소까지 보이며. “제임스. 당신 보스의 이름이 뭐요?” “아…….”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오세현 대신 내가 대답했다. “Howard, My name is Howard Jean." “좋아, 하워드. 넌 방금 내 커피 타임까지 가졌어. 카페로 갈까? 달콤한 케익이 죽여주는 곳이야.” “카페라면 커피 맛이 더 중요하죠. 커피는 어때요?” “당연히 죽이지. 그런데 말이다. 넌 나랑 닮지 않았어.” “네?” “난 네 나이 때 커피보다 케익을 훨씬 더 좋아했거든. 하하.” 마이클 델이 웃음을 터트리며 앞장섰다. “도준아.” “네.” 델의 뒤를 따르던 오세현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넌 날 아주 놀라게 했는데… 이 모든 걸 설명해 줘야겠지?” “지금요?” “아직 저놈이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아니지. 나중에 말이다.” “어차피 설명하기 힘들어요. 그냥 천재적인 사업 감각을 타고났다고 생각하세요.” “천재라…….” 조용히 중얼거리던 오세현은 다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참, 하워드라는 이름은 언제 생각한 거야? 영어 과외 한다더니 그때 만들었니?” “아뇨. 훨씬 전에요.” 하워드라는 이름이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나도 조금은 놀랐다. 전생에서는 꿈이나 환상 같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비행사이자 공학자, 그리고 영화 제작자. 하워드 로바드 휴즈 2세(Howard Robard Hughes Jr.) 가장 미국적이었던 부자. 평생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은 다 해보거나 시도해본 사람. 부자 아버지와 영국 귀족 혈통인 어머니를 둔, 금수저. 내가 가장 꿈꿔왔던 인물이다.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와 그 아버지인 하워드 스타크 역시 하워드 휴즈를 기반으로 만들 정도다. 이런 모습이 진취적이고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미국인들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억만장자의 삶으로 보였다. 전생의 나는 이런 사람을 꿈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의 나는 이 사람과 다르지 않다. 나는 21세기의 하워드 휴즈가 될 것이다. 바로 ‘하워드 진’이라는 이름으로. ======================================== [028] 배우고 익히는데 돈 좀 써야지 1. “커피 어때? 좋지?” “네. 끝내주네요.” 작은 카페에 앉은 마이클 델은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자, 그럼 아까 하던 말 계속해 볼까? 주권을 행사하지 않겠는 말, 진심이야?” “물론입니다.” “영구히?” “제가 주식을 다시 매각할 때까지요.” 매각이라는 단어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럼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관심 없다는 뜻이구나.” “투자자의 기본이죠. 만족할만한 수익이 나면 빠져나온다. 맞죠?” 오세현을 보며 신호를 보내자 그는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그게 우리 일이지.”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물고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생각하던 마이클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아직 말하지 않은 제안이 더 남아 있겠는데?” “매각 시 인수권 말씀입니까?” 오세현이 급히 끼어들었다. 더 깊숙한 주제가 나올 게 뻔한데 내게 맡겨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제임스. 주가 차익을 원하신다면 언젠가는 전부 매각할 텐데 그 주식을 시장에 풀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엄청난 주식이 풀리면 주가는 떨어지니까요.” 오세현이 상식적인 거래조건을 말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협상의 주도권을 가져와야 했다. 삼촌, 미안! “마이크, 당신에게 우선 인수권을 드리겠습니다. 그 시점의 정확한 시장 거래가로 말이죠.” “도준아!” 화들짝 놀란 오세현의 입에서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Sorry, Mike. Just second." 그는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마이클 델에게 양해부터 구했다. "도준아. 이건 그렇게 결정할 문제가 아냐. 우선 인수권은 통상 시장 거래가 보다 높아. 경영권 방어 차원에서 본다면 거래가 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넘기는 게 일반적이야.“ 마이클 델은 다급히 설명하는 오세현을 보며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흠, 이거…. 사실인가 보군요.” “네?” “저 꼬마, 아니…… 하워드가 당신의 보스라는 말. 설마 했는데, 하하.” 웃음을 터트린 마이클 델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제임스. 보스끼리 이야기 좀 할게요. 하워드는 12년 전의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별종 같은데요? 어차피 투자 계약할 때 세부적인 건 변하기 마련이니 미리 불안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순전히 호기심이라는 뜻이었다. “하워드, 제임스 말대로 이건 내게 꽤 좋은 조건이야. 설마 진정한 의미가 뭔지도 모르고 제안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있겠습니까? 마이크, 당신이 방금 말한 대로 꽤 좋은 조건입니다. 하지만 이걸 그냥 그냥 받으시는 건 아니겠죠? 제게도 좋은 제안 하나쯤은 던져야 균형추가 맞을 것 같은데요?” “방금 말한 조건이 투자 계약서에 정확히 들어간다면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투자금은 최대한 많이 받아들이지. 어때?” “최대한은 얼마를 말하는 겁니까?” “당장 대답하는 건 무리야. 정확한 숫자는 확인해야 하니까.” 끝났다. 성공이다. 보물섬으로 향하는 배의 선장이 내 손을 잡고 배에 태웠다. 이제 보물섬으로 순탄하게 항해하는 일만 남았다. 이 배의 선장 마이클 델은 아주 뛰어난 선장이라 거친 파도는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내가 할 일은…… 없다. 갑판에서 푸른 바다나 보며 즐기는 것이 전부다. “이럴 땐 맥주 파티라도 해야 하는데 우리 대주주님께서 너무 어리시니… 커피로 오케이?” 마이클 델은 커피잔을 들었고 나도 들었다. 챙-!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쾌한 소리가 퍼져 나갔다. *** 뉴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오세현이 참았던 입을 열었다. “영어는 언제 익혔어?” “삼 년 전부터요. 할아버지께서 영어 선생님을 붙여주셨어요.” “좋은 선생이구나. 삼 년 만에 그 정도 유창한 영어로 만들어준 걸 보니.” 가볍게 머리를 끄덕인다. 재벌 대기업 집안은 어학에 대한 조기 교육이 심하다는 걸 알기에 집요하게 묻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진정한 의문을 드러내는 것은 지금부터였다. “그런데 마이클과 나눈 대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받아들일 수 없구나. 단지 영민한 애라고 생각하고 이해하려 했는데 머리에서 거부해.” 어렵사리 꺼낸 말일 테니 솔직해지기로 했다. “사실 전 30년 뒤의 미래 사람인데 다시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마흔 살 성인의 지식과 생각이 내 머리에 들어 있어요.” “장난치지 말고. SF소설은 내 취향이 아냐.” 진실의 판단은 말하는 사람이 아닌 듣는 사람의 몫이다. 진실을 믿지 않으니 듣고 싶은 말을 할 수밖에. “재미없나요? 히히.” 슬쩍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하지만 그 정도 돼야 앞뒤가 들어맞긴 하다. 경제활동을 꾸준히 한 사십 대 정도의 지적 수준이라면 의문이 없어. 하하.”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지만 이대로 끝낼 것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언젠가 한 번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우리 가족이 무시당한다는 거….” “그래. 네가 말한 적 있었지.” ”그때부터 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신문 세 부를 다 읽었어요. 1면부터 마지막까지요. 처음엔 내용을 알 수 없었지만, 사전 찾아가며 참고 읽었죠. 1년쯤 지나자 더는 사전이 필요 없더군요.“ 사전은 아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이건 사실이다. “전부?” “네. 경제면의 주식 시세까지 빠트리지 않고 보고 또 봤어요. 그리고 모든 광고 문구까지 다 읽었죠. TV 뉴스나 다큐멘터리도 거의 다 보며 전체를 하나로 엮는 걸 연습했는데…. 아마 그 덕분인 거 같아요.” “3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네.” 꽤 놀라는 기색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히 한다는 것, 이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는 걸 잘 안다. 살아온 시간만큼 이것이 어렵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대단하긴 한데…….” 속 시원한 대답은 아니다. “그만두자. 어쩌면 너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일 것 같다. 재능의 원인을 물어본다는 거 만큼 어리석은 질문이 있을까?” 잘생긴 사람에게 왜 잘생겼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잘생긴 채 태어났다고. 무의미한 질문이다. 오세현은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그래, 요즘 신문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니?” “건설요.” “건설?” “네. 광고의 90%가 아파트 분양 광고에요. 아파트 팔아서 엄청난 돈을 번다는 뜻이겠죠.” 경제면의 기사를 참고삼아 떠들어 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본 모습은 바로 광고에 있다. 30년 뒤, 경제 양극화가 화두였을 때 신문과 방송의 광고는 대출과 보험이 싹쓸이했다. 돈이 없으니 대출광고가 기승을 부렸고 노후가 불안하니 보험 광고가 판을 폈다. 지금은 아파트가 한국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런데, 삼촌. 재미있는 게 뭔지 아세요?” “뭔데?” 미소가 사라진 오세현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잔뜩 보였다. “건설 회사의 주가는 광고량에 따라가지 못해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니?” “제 생각에는…. 비자금으로 다 빼돌리는 것 같아요.” “뭐? 비자금? 넌 비자금이 무슨 뜻인지 아니?” “삼촌! 제가 그것도 모를 것 같아요? 작년 청문회 때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비자금이었어요. 너무 무시하신다.” 흩어져 있는 요소를 바탕으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통찰력이다. 통찰력은 지식의 습득을 통해 지혜를 쌓아나가야 굳어진다. 어찌 보면 물리적 시간이 필요한데, 이것을 건너뛴 것은 타고났다고밖에 볼 수 없다. 오세현은 신기한 생물을 보듯 쳐다봤고 나는 그 시선에 응답했다. “할아버지는 순양 건설 사장님과 굉장히 자주 만나시더라고요. 두 분이 이야기하시는 걸 자주 들었는데…. 주로 돈 이야기였어요. 특히 외국 은행을 자주 말씀하셨고요. 그때 알았죠. 건설 회사가 번 돈을 비자금으로 모은다는 것을요.” 비자금의 실체를 직접 보고 들은 아이. 오세현의 미심쩍은 눈빛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진짜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매의 눈길은 거두지 않을 것 같다. * * *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오세현은 호텔에 짐을 풀고 다시 회사로 달려갔다. “이제부터 난 투자 협정까지 좀 바쁠 것 같다. 조건은 협의한 그대로 하고 투자금은 최대한 끌어올려 보마. 그런데 천오백만 달러 전부는 거절할 것 같은데 남은 자금은 어떻게 하면 좋겠니?” “삼촌이 직원들과 협의하셔서 좋은 투자처 알려주세요. 그거 보고 결정하는 게 어떨까요?” “그러자.” 보고하고 결정한다. 이제 당연한 것이 되었다. 오세현은 어머니를 만나 양해를 구했다. “제수씨. 전 일이 좀 있어서 이제 동행은 어렵습니다. 괜찮으시죠?” “아, 네. 가이드 분이 워낙 신경 써 주셔서 문제없어요. 일 보세요.” 우리 가족만 남자 어머니는 호기심을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단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을 뿐이다. “텍사스는 어땠어? 날씨는 좋아?” “변덕스러운 날씨지만 지난 이틀 동안은 날씨가 좋았어요. 운 좋다고 하더라고요.” “투자 어쩌고 하는 일은?” “아, 저야 뭐… 삼촌 일하는 거 구경만 했는데 조금 지겨웠어요.” “그래. 그럼 이제부터 엄마랑 함께 좋은 거 구경하고 맛난 거 먹으며 놀다 가자. 좋지?” “네. 그런데 형은요?” “방에 가보렴. 아주 가관이다.” 거실과 쓰리룸으로 구성된 특실, 상준 형이 쓰는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가니 정말 가관이었다. 침대 위에는 수십 장의 CD와 LP 음반이 쌓여있었고 협탁에는 CD 플레이어까지 놓여 있었다. 86년, 필립스사와 기술제휴한 SKC(선경화학주식회사)에 의해 국산 콤팩트디스크가 처음 출시되었고 그해 11월 가곡으로 구성된 최초의 CD 음반이 나오기는 했지만, 아직 쉽게 볼 수 있는 상품은 아니었다. 상준 형은 국내 미발매 음반의 싹쓸이 쇼핑이 이번 여행의 목적인 것 같다. 비록 재벌가에서 내놓은 핏줄이지만 그 씀씀이는 혀를 내두를 만했다. 직장인 몇 달 치를 훌쩍 넘는 CD 플레이어를 어린애가 덜컥 사버렸다. 돈 넘치는 집안이라 돈 귀한 줄 모른다. 돈 귀한 줄 모르면 사회에서 손가락질받는 재벌 집 망나니가 될 것이 뻔하다. 요놈이 손가락질받으면 내게 불똥이 튈 수도 있으니 정신 개조를 좀 해야겠다. 상준 형은 내가 들어온 것도, 다시 나가는 것도 모른 채 헤드폰을 쓰고 음악에 빠져 있었다. 그 뒤로 삼 일간 어머니와 함께 뉴욕을 돌아다녔다. 런던의 옥스퍼드 스트리트, 파리의 샹젤리제, 밀라노의 비아몬데 나폴레옹 거리와 함께 전 세계 쇼핑 메카의 하나로 손꼽히는, 뉴욕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5th 에비뉴. 어머니는 이곳에서 꽤 많은 쇼핑을 했고 거금을 지불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충분한 생활비를 받는다고 하지만 이런 명품을 망설임 없이 잔뜩 살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분명 일산 땅을 팔았음이 틀림없다. 과연 얼마나 벌었을까? * * * “오늘 귀국했다고?” “네.” “미국에서의 행적은 알아봤어?” ”뉴욕 지사에서 확인한 결과, 관광과 쇼핑이 전부였습니다. 오세현과 도준이가 하루를 비웠는데 그 부분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두 놈이 하루를 비워?” 이학재 실장의 보고에 진 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도준이 가족만 갔다면 여행이라고 생각할 텐데 오세현이라는 놈도 함께 갔어. 이건 관광이 아냐. 출장이지.” 파워세어즈라는 자산운용사를 통해 투자처를 미국에서 알아보는 것이 분명하다. 이학재는 진 회장이 눈썹을 찌푸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돈이 미국에서 돌면 자신이 통제할 수 없어진다. 통제할 수 없는 일을 지켜보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 진 회장이다. “더 알아보겠습니다.” “정확히. 그리고 빨리.” “네.” 이학재는 다시 진 회장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더 곤란한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 회장님.” “왜? 뭔데 그리 조심스러워?” 이학재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쥐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윤기 말입니다.” “윤기가 왜?” “지금 영화제작사를 설립 중입니다.” “뭐? 영화?” “네.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아마도 내년부터 제작 착수할 겁니다. 두 편을 동시에 제작한다고…….” “설마…. 도준이 돈이야?” 진 회장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갔다. ======================================== [029] 배우고 익히는데 돈 좀 써야지 2. 이학재는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네. 40억을 줬다고 합니다.” “40억이나? 이런!” “지금 충무로에는 순양그룹이 영화판에 뛰어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초기 자금으로 좀 큰 편이라서요.” “헛소문은 헛소리로 끝나. 신경 안 써도 돼.” 진 회장은 욱신거리는 이마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손 좀 쓸까요?” “쓸 수 있어?” “제작사는 건설로 치면 시행사나 마찬가지니까요. 시공사가 없으면 영화 제작 못 합니다. 파트별로 많은 스텝을 모아야 하는 거죠.” “함께 일할 손발을 잘라버리겠다…?” “네.” “음…….” 이마를 문지르던 손이 멈췄다. “놔둬.” “예?” “망해봐야 알겠지. 인정에 끌려 돈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야.” 이학재에게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회장의 고민은 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손자만 생각하는 것이다. “도준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친아버지라 할지라도 가능성 없으면 돈 쓰는 게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거야. 인정에 흔들리지 않고 독해지는 데 40억 썼다면 수업료치고는 싼 거야.”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영화가 성공하면….” “평생 백수로 산 놈이야. 사업은 아무나 하나? 영화 제작이 그리 쉽다면 망하는 영화가 왜 생기겠어? 난다 긴다 하는 제작자, 감독이 덤벼도 망하는 영화가 수두룩한데, 무슨 수로 성공해?” 실패를 확신하는 진 회장과 달리 이학재의 생각은 달랐다. 이름없는 신인 감독이 흥행에 성공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만약 성공한다면? 못마땅한 아들이 통제권을 벗어나는 분노보다는 자신이 버린 진윤기라는 사람을 알아본 진도준이라는 손자를 더욱 사랑하고 기대를 가질 것이다. 영화가 실패하면 교훈이고 성공하면 사람 보는 눈을 확인한 셈이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진 회장은 웃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그런데 학재야.” “네. 회장님.” “영준이 내년에 졸업이지?” 갑자기 맏손자에 대해 묻자 이학준이 머뭇거렸다. 몇 살이더라? “그놈 졸업하면 독일로 보내.” “독일요? 요즘 거기 심상치 않은데 괜찮겠습니까?” 1989년 9월,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월요 시위가 기폭제가 되어 동독 전역으로 민주화 시위가 번지고 있다. 시위대를 달래기 위해 동베를린 총서기 귄터 샤보프스키는 기자회견장에서 여행 자유화 정책을 발표했다. 그런데 여기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기자회견장에서 어떤 이탈리아 기자가 "언제부터 국경 개방이 시행되느냐"라는 질문을 했고, 총서기는 국경 개방을 여행 자유화로 착각해 “지연 없이 즉시”라고 대답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독일어가 서툴렀던 이탈리아 기자는 회견 직후 여행 자유화 조치를 베를린 장벽 철거로 착각하고 본국에 급전을 보냈다. 이 소식은 미국을 건너 그날 밤 서독 텔레비전에까지 퍼져 나가 순식간에 독일인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공구가 쥐어져 있었고 베를린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베를린뿐만 아니라 독일 전역이 혼돈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동유럽 변화의 상징이야. 이럴 때 직접 보며 그 변화를 몸으로 느껴야지. 그 속에서 기회를 발견하는 게 그놈이 할 일이야.” “아직 미숙하지 않을까요? 국내에서 경험 좀 쌓는 게…….” “경험은 독일서 쌓는 게 더 나아. 세상이 휙휙 돌아가는 곳에서 굴러야 단시간에 많은 경험을 하지 않겠어?” 과연 본심일까? 이학재는 이런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 목적인지 진영준의 무능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목적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지사에 자리를 준비하겠습니다.” 만족한 표정을 보이던 진 회장은 조금은 신중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동독에 가전 공장 하나 만들까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때?” 동독이 무너진다는 걸 확신하는 진 회장은 발 빠른 모습을 보였다. 서독의 돈이 동독으로 풀리면 또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학재는 진 회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백색 가전 공장 하나 짓는 것 따위는 손가락만 까닥해도 바로 진행할 수 있다. 그 정도라면 자신이 아니라 순양전자 사장을 불러 지시했을 것이다. 다른 뜻이 숨어있다. “박 의원 만나서 협의하겠습니다.” “그래. 원하는 거 들어주고 뜯어내.” 동독의 가전 공장을 나랏돈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명목은 얼마든지 가져다 붙일 수 있다. 낙후된 동독의 지원이 가장 그럴싸하며 그 지원 방법이 바로 고용창출이 가능한 생산 공장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나랏돈을 최대한 이용해서 공장을 만들고 나중에는 순양의 자산으로 흡수하는 것. 수없이 해봤던 일이다. 나랏일을 보는 사람은 나랏돈을 아끼지 않아야 자신의 주머니가 두둑해진다. 그들의 주머니를 부풀려 주는 일은 바로 순양그룹처럼 뒤탈 없는 재벌이 가장 잘한다. * * * “투자 계약서다. 한번 봐. 네 영어 실력 한번 보자.” 오세현은 빙긋 웃으며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고 있지만, 장단을 맞춰줄 생각은 없다. “제가 이런 전문적인 내용까지는 못 읽어요. 그냥 설명해 주세요.” 눈빛에는 실망이 스쳤지만 개의치 않았다. 과거의 나도 보고할 때는 핵심만 말했다. 요점만 보고받는 것이 보스의 특권이다. “그래? 좀 어렵나?” 오세현은 계약서를 다시 들었다. “첫째, 투자 총액은 구백만 달러야.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딱 잘랐어. 이미 먼저 투자한 투자자들이 허용하는 한계치가 이 금액이야.” “주당 얼마죠?” “40센트.” 좀 놀랐다. 내 예상가는 60센트였기 때문이다. 내년 나스닥 상장 때 액면가 30센트로 상장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최소 두 배는 요구할 줄 알았다. “괜찮은 가격인가요?” 짐짓 모르는 척 확인하니 오세현은 정확히 보고하는 사람의 자세로 변했다. “델 컴퓨터는 액면가 30센트로 내년 상장 예정이야. 상장 시점의 예상가는 두 배, 시간이 지나면 등락을 거듭할 거고. 하지만 평균가는 40센트 이상이 확실해.” “그럼 좋은 조건이네요.” 마이클 델은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확보한 주식이 언젠가는 마이클 델의 손으로 들어갈 테니까. 주식을 많이 확보할수록 자신의 경영권은 더욱 공고해진다. 단지 마이클 델이 놓친 것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가파르게 상승할 주가일 뿐이다. 그 때문에 난 엄청난 돈을 거머쥘 것이다. “그래서 협상은 쉽게 끝냈어. 힘들었던 건 바로 이거야.” 오세현은 또다시 두툼한 영문 자료를 꺼냈다. “아직 남은 육백만 달러를 어디에 투자할지 후보군을 골라봤어.” 오세현은 투자 후보에 오른 기업을 잠시 설명하다 멈췄다. 투자 이유를 설명하려면 PER, PBR, PSR, WACC, 순자산가치평가, 미래순현금흐름의 기대치, 현금흐름할인법 같은 전문용어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보니, 난처한 듯 머리를 흔들었다. “음, 쉽게 설명할게. 안전한 투자 그리고 조금 모험적인 투자.” “안전한 투자는 어디에요?” “화이자(Pfizer), 존슨 앤 존스, 보스턴 사이언티픽 같은 의료분야야. 꾸준한 흑자를 내니까 주가도 안정적이고 배당도 좋은 편이지. 특히 의료는 후발 국가가 따라잡기 힘들어서 굳건하다고 볼 수 있어.” 치열한 경쟁이 멈추지 않는 제조업 분야는 주력 상품 하나가 주가를 출렁이게 한다. 하지만 의료분야는 신약이 나올 때마다 주가가 껑충 뛸 뿐 좀처럼 주저앉지 않는 철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만큼 후발 주자가 따라잡기 힘든 분야다. 안정성 만으로만 생각한다면 최고의 선택이다. “좀 위험하지만 해볼 만한 곳은 마이크로소프트야.” 마이크로소프트가 위험해? 천하의 빌 게이츠인데? 이미 IBM과 손잡고 DOS를 성공시키지 않았는가? 놀란 내 모습을 오해했나 보다. “생소하지? 사실, 나도 이런 컴퓨터 쪽은 잘 몰라.” “위험한 이유는 뭐죠?” “새로운 컴퓨터 운영체제를 계속 출시했는데 시장 반응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더라고. 정보에 의하면 내년에 세 번째 버전이 나오는데 그것까지 실패하면 어떻게 될지 판단하기 어려워. 게다가 IBM도 독자적인 운영체제를 개발해서 마이크로소프트와 결별한다는 소문도 있고.” 내년에 나오는 윈도우가 3.0이었나? 3.1이었나? 가물가물하다. 뭐, 상관없다. 어차피 한두 해의 차이일 뿐이니까. 윈도우 3.0은 가상 메모리를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멀티태스킹 능력이 대폭 강화되었고, 그래픽 카드의 성능 향상으로 인해 좀 더 미려하고 화려한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3.0을 시작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과 확장성이 무기인 IBM PC 호환 기종들은 값비싼 애플 매킨토시의 강력한 경쟁자로 급부상할 것이며, 마이크로소프트는 세계 PC 시장을 점령할 회사다. 강력한 매킨토시를 변방으로 쫓아낼 만큼. 아이팟과 아이폰으로 애플이 다시 절대 강자가 되는 시대를 살았던 나로서는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영원한 승자는 없다. “삼촌. 마이크로소프트를 추천한 사람이 누구죠?” “레이첼이야. 너도 봤지? 뉴욕 회사에서?” “아, 그 아줌마?” “뭐? 아줌마? 하하. 이제 겨우 서른인데? 레이첼이 들었다면 발끈했을 거야.” 앞으로 더 두고 봐야겠지만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최고 인재는 레이첼일 것 같았다. “자, 어떡하면 좋을까?” “삼촌 생각은 어떠세요?” “난 레이첼의 의견이 끌렸어.” 오호, 뜻밖이다.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럼에도 투자를 고려하다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감이라는 게 있어. 레이첼의 확신이 맞을 것 같다는 감. 그게 계속 끌리더라고.” 내가 신기한 듯 계속 바라보자 피식 웃음도 터트렸다. “흐흐. 물론 백업 데이터도 괜찮았어. 모험을 해볼 만한 수치야. 그리고… 네 운도 보통은 아니니까 베팅하는 게 어떨까 생각했어.” “그럼, 그렇게 해요. 전 행운을 몰고 다니니까 잘 될 거에요. 히히.” 함께 웃었지만, 오세현의 눈동자에는 기대감이 보였다. 그 기대치의 수백 배를 안겨줄 것이다. 이 양반도 2%의 지분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제 다음 단계를 시작해야 한다. “삼촌. 부탁이 하나 있어요.” “그래 말하렴.” “분당에 땅 있죠? 아직 남아 있는….” “어? 그 땅? 그거 계속 오르고 있지?” “그래요? 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거 팔아주세요.”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친다. 하루가 다르게 땅값이 뛰고 있기 때문이다. “응? 그걸 왜 팔아? 그냥 쥐고 있어. 꼭짓점 찍을 때 팔면 돼.” 몰라서 파는 게 아니다. 고작 몇십억 더 벌려고 더 중요한 것을 놓치면 안 된다. “그럼 뉴욕에 있는 회사는 놀아요?” “뭐? 아…!” 오세현이 무릎을 탁 쳤다. 천오백만 달러라는 거금은 단 두 회사에 쓸어 넣는다. 그리고 언제 회수할지 기약도 없다. 최소 몇 년은 묵혀둬야 한다. 회사의 인재 네 명이 멍하니 주식 차트만 들여다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럼 그 돈이 미라클이 운용할 자금이 되는구나.” “네. 하지만 절반만 쓰고 나머지 절반은 쥐고 계세요.” 엄밀히 말하면 난 아는 게 없다. 미래의 단편적 지식을 이용할 뿐이다. 내가 미래를 몰랐다면 델 컴퓨터와 마이크로소프트에 투자했을까? 지금 나의 지식과 실력은 레이첼이라는 여자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 남은 땅을 판 돈의 절반은 바로 내 수업료가 될 것이다. 그들이 투자를 결정하는 과정의 모든 행위가 나의 교재가 될 것이며, 파워세어즈라는 엄청난 회사의 인재인 오세현이 나의 가정교사다. 이들과 함께 세계수준의 실물 경제를 경험하고 배울 것이다. 이 정도면 그 돈을 다 날린다고 해도 아깝지 않다. ======================================== [030] 배우고 익히는데 돈 좀 써야지 3. “절반만? 나머지는 어쩌려고?” “써야 할 때가 오면 제가 알려드릴게요. 아마 할아버지가 알려주실 거에요.” “아하, 그렇군. 아직 미개봉 상태의 정보가 남아 있었어. 하하.” 호탕한 웃음 속에 빠르게 두뇌를 회전하는 그의 본 모습이 숨어있었다. 순양그룹의 내부 정보를 이용하는 투자. 단기간에 치고 빠지는 짭짤한 돈벌이. 종잣돈이 크니 짭짤함도 클 것이다. 반짝이는 눈을 한 채 오세현이 떠나자 길게 숨을 내쉬었다. 둘러대기도 참 힘들다. 진 회장의 정보로 돈 벌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성인이 되기 전 순양을 건드리는 것은 지극히 조심해야 한다. 괜한 경계심을 불러올 어리석은 짓이다. 또한, 나는 증권맨도 아니었고 월 스트리트는 구경도 못 했다. 단지 신문에 난 기사 쪼가리가 내 미래 지식의 전부다. 언제, 어떤 회사가 좋은 투자처인지 기억하는 건 몇 개 없지만 향후 30년간 무패의 신화를 만들어 나갈 가장 확실한 투자처는 따로 있다. 바로 영화다. 헐리우드에서 생산하는 수많은 영화 중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인 영화는 대부분 안다. 당장 내년 박스오피스를 점령할 사랑과 영혼, 가위손, 나 홀로 집에, 토탈리콜등이 있다. 제작 참여는 이미 늦었지만 아버지의 영화사에서 수입하면 된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 영화 투자사. 이것만으로도 난 헐리우드에서 마이다스의 손으로 불릴 것이다. ***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실장님.” “아니오. 나도 한번 뵙고 싶었어요.” 이학재는 오세현의 만나자는 연락에 조금도 지체없이 달려 나왔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도준이 재산을 처리하는데 이 건은 아무래도 알려드려야 할 것 같기에 말이죠.” “재산? 도준이 재산은 파워쉐어즈가 맡았는데 뭘 처분한다는 겁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건 돈이 아니라 땅입니다.” “땅? 분당 땅 말이오?” “네. 그걸 처분하고 싶어 합니다.” “그걸 왜?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는데?” 이학재의 눈썹이 꿈틀했다. 오세현은 이 표정이 무얼 말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의 눈치는 있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부추긴 게 아니고 도준이 뜻입니다. 저 역시 땅값은 계속 오르는 중이라 말렸습니다만 요지부동입니다.” “그깟 애가 말하는 걸 그대로 따른다? 당신 제대로 된 펀드매니저가 아니구만.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실장님.” 오세현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는 이학재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최종 결정은 당연히 전주(錢主)가 하는 겁니다. 우린 의견을 낼 뿐이지요.” “이봐요! 도준이는 겨우….” “겨우 12살이라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뭐요?” “12살짜리 어린애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웬만한 어른쯤은 쌈 싸먹을 만큼 영특하지 않던가요?” 오세현은 이학재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손을 조금 흔들었다. “이거, 이런 이야기 하려고 나온 건 아닙니다. 도준이 생각을 바꾸시려면 직접 하십시오. 도준이가 생각을 거두면 당연히 땅을 처분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요?” “순양그룹에서 그 땅을 매입할 의사가 있는지 알아보려고요. 어떠십니까?” “뭐요?” “사실, 업자들에게 슬쩍 흘리면 벌떼처럼 덤벼들 땅 아닙니까? 하지만 할아버지의 선물이었기에 좀 싸게 넘기더라도 순양그룹으로 돌려드리고 싶군요.” “그것도 도준이 생각입니까?” “아뇨. 이건 제 생각입니다. 엉뚱한 곳에 팔았다가 진 회장님이 도준이를 섭섭하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 문제는 잠시 홀딩해요. 회장님과 상의하고 알려드리죠.” 이학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텍사스에 왜 갔어요?” “이런,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대단하시네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왜 갔어요? 석유라도 산 거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내용은 컨피덴셜입니다. 몇몇 회사에 투자했고 썩 괜찮은 투자라고 말씀드리는 게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이거 참, 쓸데없는 고집은…….” 이학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봐요, 오 사장. 몸값 올리려고 이러는 거요?” “네? 무슨 말입니까?” “회장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는 도준이를 인질처럼 쥐고 있다가 언제가 기회가 오면 도준이를 이용해서 우리 순양그룹에 슬쩍 발을 들이려는 속셈 아뇨?“ 순간 할 말을 잃은 오세현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외국계 투자사야 실수 한 번에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든든한 보험 하나 들어 놓으려면 도준이를 꽉 쥐고 있겠다, 이런 생각 들만도 하죠. 안 그래요?” “음….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는군요. 그렇군요. 순양그룹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바라보는군요. 자신의 몸값을 매긴 사람들에게 몸값만큼만 주면 순양의 개가 된다.” “잘못 생각하는구만. 그건 틀렸소.” “그럴까요? 맞는 것 같은데?” “자신이 생각하는 몸값의 두 배를 주고 사는 게 우리 순양이오. 당신에게는 세배를 주지. 얼마요? 당신이 매긴 당신의 가격이…?” “이백억.”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온 숫자, 이백억. 이학재는 극도의 인내력으로 터져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삼킨 말은 바로 미친 새끼였다. 한국에서 아파트 200채를 자신의 몸값이라고 주장한다면 미친놈 소리 듣는 게 당연하다. “황당한 소리지만, 근거나 한번 들어봅시다. 돈 만지는 분이니 몸값 계산은 정확해야 할거요.” “100억을 내게 맡긴 사람을 배신하는 건데 두 배는 받아야 배신할 값어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학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번 툭 건드렸다가 본전은커녕 사람을 돈으로 환산하는 혐오스러운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이거, 싸우려고 나온 게 아닌데… 당신과 말하다 보면 이상하게 발끈해지는구려.” “이유를 모르십니까?” 이학재는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천하의 순양그룹 이학재 실장님 앞에서 고분고분하지 않으니까요.” 아주 잠깐, 눈만 깜빡거리던 이학재가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이거 쪽팔리네. 맞아요. 바로 그건 거 같아.” 이학재는 찻잔을 들어 깨끗하게 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지금처럼 도준이 잘 챙겨요. 의리도 지키고. 어쩌면 당신 몸값 이백억이 몇십 배 뛸 수도 있을 테니까.” 오세현의 눈이 반짝이자 이학재는 싱긋 미소 지었다. “눈치 빠른 분이니 내 말뜻 잘 알 거라고 믿소. 다음에는 소주나 한잔 합시다.” 혼자 남은 오세현은 멀어져가는 이학재의 뒷모습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보였다. “내 통장의 잔고가 당신 몸값의 수백 배가 될 때도 지금의 그 미소가 나오는지 두고 보자고.” *** “아버지! 이제 갓 졸업하는 애를 독일로 보내 다니오?” “할아버지. 전 아직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습니다.” 1990년 새해 벽두부터 진 회장의 장남과 장손은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지금까지 안 하던 공부를 이제 와서? 우리 장손, 이 할애비를 웃길 줄도 아는구나, 허허.”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 진영준은 입을 닫고 머리를 숙였다. “아버지. 영준이도 이제 철들었습니다. 경영 수업을 착실히 받고….” 진영기 부회장은 아들을 위해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지만, 자신을 노려보는 진 회장의 날카로운 눈길에 입을 닫았다. “경영 수업? 이보다 더 좋은 수업이 어디 있어? 유럽 전체가 들썩거릴 거야. 그 변화의 한 가운데서 긴박한 결정을 내리다 보면 저절로 눈을 뜨게 돼. 안 그래?” 진 회장이 서재에 앉아있는 그룹 핵심 인물들을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자 그들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마쳤으니 다음 주에 출발해. 나가 봐.” 진영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재를 나가려 할 때 진 회장은 손자의 뒤통수에 대고 경고를 날렸다. “일주일 동안 집구석에 처박혀 있어. 계집애들과 싸돌아다니면서 사고 치면 독일이 아니라 아프리카 지사가 네놈 보금자리가 될 거다.” 진영준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서서 머리만 꾸벅 숙이고 나갔다. 진 회장은 다시 그룹 인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새해가 밝았지만 난 89년이 끝난 게 아쉬워서 시계를 되돌리고 싶은데…. 당신들은 어때?” 진 회장이 좌중을 쓱 둘러보다 누군가의 얼굴에서 멈췄다. 자신이 대상이 아니라는 걸 알자 나머지 사람들은 안도했으나, 진 회장의 눈길에 꽂힌 사람, 조대호 순양자동차 사장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지만 진 회장의 손만 까닥했다. “앉아. 죽을죄를 진 건 아니잖아.” 조대호 사장이 엉거주춤 의자에 엉덩이를 놓자 진 회장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말을 이었다. “내가 순양 계열사 이름을 달고 있으면 무조건 1등이라야 잠이 와. 그런데 조대호.” “네. 회장님.” “순양자동차 시작할 때 내가 뭐라고 했어? 딱 2등만 하자. 기억하나?” “물론입니다. 회장님.” “그런데 작년 실적은 몇 등이지?” 조대호 사장이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 하자 진 회장은 긴 테이블을 탕 내리쳤다. “갑자기 벙어리 흉내야? 말 안 해?!” “사, 사 등입니다.” 조 사장은 다시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잠이 오냐? 새해가 밝았으니 희망찬 미래가 그려져?” “죄송합니다. 회장님.” 조 사장은 허리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지 못했다. 진 회장은 가장 가까이 앉아있는 이학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실장.” “네, 회장님.” “계열사 중에서 종업원 수가 제일 작은 곳이 어디야?” 이 말에 조대호 사장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다. “순양 포장입니다.” “포장? 그건 또 언제 만들었어?” “아, 순양 물산의 자회사입니다. 원래는 외주 줬는데 물량이 좀 늘어나서 흡수했습니다.” “흡수? 그럼 지금 사장은 순양출신 아냐?” “네.” “그럼 그 자식 자르고…. 직원은 몇 명이지?” “육백 명입니다.” 종업원 육백 명, 평택. 조대호 사장의 머릿속을 스쳐 간 단어다. 듣기 좋아 사장이지 순양자동차의 부장보다 힘없는 자리. 포장공장 사장으로 순양 물산의 담당자급과 일해야 한다. 사표 쓰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조대호” “네. 회장님.” “넌 내일부터 포장공장으로 출근해. 본드 냄새 맡으며 반성하고 있으라고.” 반성하라는 말이 복음처럼 들렸다. 다시 재기의 기회를 주시려는 걸까? 아니면 헛된 희망인가? 조 사장이 참혹한 표정으로 엉덩이를 의자에 걸치려 할 때 진 회장이 소리쳤다. “뭐야? 왜 앉아? 포장공장 사장 따위가 어딜 감히…?” 조대호 사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부리나케 서재를 빠져나갔다. 서재에서 쫓겨난다는 의미는 다시 복귀할 가능성은 제로라는 뜻이다. “부회장.” “네, 회장님.” 진영기는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놀랐다. 이 불똥이 자신에게 튈 줄이야! “자동차 맡아. 내년까지 2년 준다. 2년 안에 2등 만들어. 숫자도 딱 맞아 떨어지네.” “회, 회장님. 전 이미 여러 계열사를 총괄하기 때문에 여력이 없어서…. 재고해 주십시오.” “아, 그렇지. 우리 부회장이 여러 계열사를 총괄하느라 공사가 다망하시지.” 말하는 본새가 심상치 않다. 진영기는 괜한 반항이었나 후회가 밀려왔다. “몇 개 관리 중이지?” “여, 열아홉 개입니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서재에 모인 계열사 사장들은 진 회장의 얼굴은 감히 쳐다보지 못하지만, 귀는 활짝 열었다. 혹시라도 부회장이 관리하는 계열사를 줄여버린다면? 그 속에 자신의 회사가 포함된다면? 부회장을 건너뛰고 곧바로 진 회장과 독대할 기회가 많이 생긴다. 이것은 또 다른 기회다.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진 회장의 말에 그 기대를 접었다. 누구에게도 또 다른 기회를 주지 않았고 부회장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 뿐이었다. “스무 개를 관리할래? 아니면 하나만 관리할래?”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하나는 자동차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 [031] 급변의 시대 1. 절반 이상의 국내 시장점유율을 자랑하는 부동의 절대 강자인 대현자동차. 만년 4위였던 아진 자동차가 야무지고 단단한 소형차 프라우드를 출시해 단번에 2위의 자리를 차지했다. 미세한 차이로 2위에서 3위로 내려앉은 우성자동차는 파트너사인 미국의 GM 자동차를 등에 업고 호시탐탐 2위의 재탈환을 노리고 있다. 가까스로 3위를 유지하던 순양자동차는 업계 꼴찌가 되었다. 자존심 강한 진양철 회장이 사장 하나만 날린 것으로 이 수모를 정리한 건 많이 참은 것이다. 성질 대로라면 임원 열댓 명도 함께 날려야 했지만, 새해 벽두부터 해고 칼춤 추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임직원들의 사기도 고려해야 하는 법이니까. 장남 진영기가 머뭇머뭇하자 진 회장은 놀리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골랐어? 스무 개와 한 개, 어느 거 할래?” “자동차도! 맡겠습니다.” 유난히 ‘도’ 자에 힘주어 말한다. “하지만 회장님, 현실적으로 2년은 불가능합니다. 개발 중인 신차가 나오는 시점이 내년 연말입니다. 제가 신차 개발에 전력을 다한다 해도… 그리고 신차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그 결과는 내후년에나 나옵니다.” “부회장아.” “…네.” “자네는 지금 자동차 공장으로 빨리 가봐.” “…?” “그 공장에는 말이야, 매일 수백 대의 자동차가 쏟아져. 그거 싹 팔아치우면 2위 되는 거 아냐?” 누가 모르는가? 그게 말처럼 쉽다면 이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겠는가? 하지만 입은 다물어야 한다. 절대자의 말 아닌가? “지금 나오는 자동차 팔 생각은 안 하고 신차만 팔려고? 그게 자네 생각이야?” “아, 그건 아니고….” 진영기 부회장은 조금이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 몇 마디 보태려고 했지만 진 회장은 이미 손을 들어 서재 문을 가리켰다. “빨리 가. 직접 봐야 어떻게 할 건지 생각나겠지. 어서.” 야단치기 위해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사람이 아니다. 가라면 가야 한다. 토 달면? 포장 공장으로 쫓겨난 사장의 운명을 회장의 아들이라고 해서 피하지는 못한다. 진영기 부회장은 벌떡 일어나 머리를 조금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서재를 빠져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진 회장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그만하지. 정초부터 잔소리 듣느라 고생했다. 모두 나가서 일봐.” 모두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서재를 줄줄이 빠져나갔다. 하루살이나 다를 바 없는 계열사 사장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은 안도감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소련은 어떻게 돼가? 가망 없어?” 모두 사라진 서재에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학재에게 진 회장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에너지를 특정 기업에 몰아주기는 힘들다며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물태우네, 보통 사람이네 하지만 보통이 아니야, 그렇지?“ “이 정권의 최대 업적을 북방 외교로 정해서 가능하면 잡음 나지 않게 진행한다고…. 이해해 달랍니다.” “그래서? 가스 대신 뭘 줄 수 있다는 거야?” “말씀하신 동독 지원 말입니다. 그 지원 창구를 민간에게 맡긴다 했습니다.” “민간이라면…?” “우리 순양이죠. 가전, 식품 지원책입니다.” “식품? 그걸 어디에다가 써?” “그래서 가전 100%로 설득 중입니다. 지원 예산 전부 우리 순양 전자 현지공장 건설비용으로 돌릴 겁니다.” “그 비용은 베를린 장벽이 완전히 무너져야 나오겠지?” “그렇습니다.” “그 시점은?” “우리가 파악한 정보와 안기부에서 파악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9월이나 10월입니다.” “그럼 가을에 착공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준비하도록 하게.” “이미 건설사 직원들이 베를린 주변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발전 가능성이 높은 곳에 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헝가리 공장 설비를 동독으로 옮길 계획입니다.” “역시 이학재야. 일타양피구만.” 이미 헝가리에 진출한 가전 공장이 겨우겨우 명맥만 유지한다. 그 공장을 폐쇄하고 독일로 확장 이전하는 셈이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말이다. “아닙니다. 겨우 시작일 뿐인데요.” “일본?” “네. 동구권의 일본 가전에 대한 애정을 넘어야 합니다. 특히 히타치와 소니, 절대적 아닙니까?” 일본이라는 말에 진 회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렴한 가격대비 적당한 성능의 한국 제품. 이것이 글로벌 시장의 냉정한 평가다. 일본의 기술을 따라잡으려 노력하다 보니 이 정도까지 왔다. 하지만 순양의 제품을 갖고 싶어 안달 난 소비자는 없다. 이 차이를 극복하려 무던히도 애를 쓰지만 베를린 장벽보다 더 높은 엄청난 벽이 보인다. 아직까지는! 진 회장은 일본만 생각하면 열등감에 휩싸여 속이 끓어오른다. 그의 기분을 눈치챈 이학재가 슬며시 딴소리를 꺼냈다. “참, 일전에 말씀드린 땅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땅? 아, 도준이 땅 말이지?” “네. 파워쉐어즈 오 사장 말로는 도준이가 땅을 팔고 싶다고 말했지만, 오 사장이 해외 투자를 권유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뭐야? 그놈 믿을 만 하다면서?” “네. 이번에도 재차 확인했습니다. 괜찮은 놈이에요. 아마도 땅값 상승보다 더 낫다고 판단한 듯 싶은데….”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진 회장은 손을 내저었다. “됐어. 그냥 매입해.” “괜찮겠습니까?” “자네가 재차 확인했다면서? 오 머시기라는 놈이 사기꾼은 아니라고?” “네.” “땅값 올라봤자 몇 푼이나 한다고. 맡겨보자고. 그래도… 기특하잖아.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먼저 움직이는 모양새가 말이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세대로 매입하는 게 좋겠죠?” “물론이야. 여차하면 편법 상속이네, 뭐네 하며 말 나올 거다. 딱 시세대로 가격 쳐서 줘.” “알겠습니다.” “그리고 파워세어즈 실적 검토해봐.” “네?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시중은행에 흩어놓은 돈, 그걸 한번 맡겨보는 게 어떨까 해서. 그 돈을 도준이가 투자한 곳에 옮겨 놓으면 괜찮지 않겠어?” “음…….” 시중은행의 돈, 그건 바로 차명 계좌로 숨겨놓은 진 회장의 개인 비자금을 말한다. “채권까지 정리할까요?” “실적 확인하고 적당하다 싶으면 전부.” “네. 곧바로 조처하겠습니다.” 외국으로 옮겨 놓으면 더 안전한 건 사실이고, 도준이 돈을 추적할 수도 있다. 안전과 감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이다. 나쁘지 않다. 일본 때문에 가라앉은 기분이 조금 나아지자 진 회장은 이학재와 진짜 회의를 시작했다. 둘만의 회의를. “어떻게 생각해?” “죄송합니다. 뭘 말씀하시는 건지…?” “자동차 말이야. 그리고 영기.” “부회장이야 나름대로 잘 해내고 있지 않습니까?” “듣기 좋은 소리나 들으려고 널 내 옆에 두는 거 아니다.” “아닙니다. 솔직히 내년까지 2위로 끌어올리는 건 불가능하죠. 좀… 심하셨습니다.” “학재야.” 이런 은근한 목소리와 장난기 어른 표정이 나올 때 가장 긴장된다. 진 회장은 농담 속에 진심을 담는 인간이다. “네.” “줄 서냐?“ 신하가 태자를 대신해 의견을 내놓을 때 임금은 가장 경계한다고 했던가? 이학재는 당황하지 않고 농담처럼 웃어넘겼다. “하하,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진심? 그만큼 어렵다 이거지? 좋아. 그럼 네가 대답해봐. 2년 안에 자동차업계 2위로 올라설 수 있는 방법, 진짜 없다고 생각해?” 미소까지 보이며 말하는 진양철 회장. 하지만 이학재는 진 회장과 똑같은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여론이 좋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출혈도 클 테고요.” “가능성은?” “이 정권이 나서준다면 50%. 아니라면… 30% 이하일 겁니다.” 두 사람 모두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청와대에서 밥 한번 먹고 싶다고 날 잡아 달라고 해.” “직접 만나시겠습니까?” “경제인 만찬 정도면 그럴 듯 할거야.” “네. 준비하겠습니다.” 정말 시작할 모양이지만 이학재는 반대의견을 내지 않았다. 무모한 모험은 창업주의 권리 아닌가? 오늘부터 순양그룹의 브레인 집단을 풀 가동해야 한다. 지배 구조가 가장 취약한 아진자동차를 삼키기 위해 확보해야 할 지분은 몇 퍼센트인지, 주식 확보에 필요한 투입 비용은 얼마인지 백만 원 단위까지 따져야 하며 여론전도 준비해야 한다. 아진자동차를 공격하기 위해 경영진의 뒷조사도 시작해야 하며 최소한 아진자동차 회장과 사장은 검찰청 포토라인에 세워야 한다. 비록 무혐의로 풀려나더라도 말이다. 한창 머릿속이 복잡할 때 진 회장이 생각을 끊어버렸다. “그런데, 영기 저놈은 왜 이런 생각을 못 할까? 물건 파는 거야 사장이 할 일이지. 저놈은 지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자각을 못 해.” “그야 아직 회장님께서 건재하시니까 그런 거죠.” 진 회장은 머리를 저었다. “아냐. 패권을 놓고 다투는 영주라면 전쟁을 시작하고 영토를 넓히고 성을 쌓아야 한다는 걸 몰라. 영토 안의 일꾼들이 농사지을 땅을 넓혀야 영주 자격이 있는데… 저놈은 일꾼들을 다그쳐서 수확량만 늘리려고 하는 게 눈에 보여. 그릇이 작아.” “이제는 수성의 시대 아닐까요? 부회장도 그렇게 트레이닝 시키셨지 않습니까?” “전쟁 본능이 꿈틀거려야지! 지키랬다고 앉아만 있으면 되겠어?” 이학재는 이제부터 입 닫아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안다. 요즘 들어 부쩍 부회장을 못마땅하게 말하는 게 빈번해졌다. 그 이유가 진도준의 영향이 아닐까?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진 회장은 자식들에 대한 불만을 터트렸다. 이학재는 잔소리하는 마누라 대하듯 가끔 맞장구치는 게 전부였다. * * * 80년대가 가고 90년대가 왔다. 새로운 10년은 이천 년대를 준비하는 중요한 시기다. 진양철 회장은 정초부터 의욕을 불태웠지만, 한 달도 가지 않아 모든 것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90년 시작부터 정가가 술렁이더니 같은 달 22일, 민정당의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와 청와대 회동에서 3당 해체와 보수 연합신당 창당을 전격 합의해버렸다. 이른바 3당 합당이라는 정치적 빅딜이었다. 여소야대 국면은 한순간에 거대 여당으로 변해버렸다. 같은 해 1월 30일 오전 9시, 마포 통일민주당사에는 구백 명 가까운 대의원과 당직자들이 모여 발 디딜 틈 없었다. 이날 진행한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총재는 “얼마나 고뇌했는지 모른다”고 심경을 토로하고, “집권당 간판을 내리게 만든 것은 구국의 차원에서 내린 위대한 결단”이라고 운을 뗐다. 35분간 진행된 전당대회는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을 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한 의원과 그의 주장을 찬성하는 십여 명의 반대파를 무시하고 순식간에 합당 찬성으로 끝났다. 그리하여 2월 9일,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해버렸다. 이제 경제계는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늘어버렸다. 거대 여당을 이끌며 차기 대통령이 유력한 사람. 진양철 회장은 신문을 집어 던졌다. 이런 젠장, 보통 아닌 능구렁이를 달래 놨더니 깡다구로 뭉친 영감이 몽둥이 들고 나타나다니. 이런 심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다. 나는 신문을 주워들었다. “이 사람이죠? 늘 2등만 하는….” 나는 손을 번쩍 든 세 명의 사진 중에 흰머리의 김영삼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래, 그 2등이 반장과 손잡고 다음 반장 자리 물려받게 생겼어.” 답답한 마음이 드러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 조금 부담스럽다. “자, 똘똘한 우리 도준이의 생각 한번 들어볼까?” 역시, 이제 재미 붙였나? “네? 무슨 말씀이세요?”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니? 그 머리 하얀 사람은 고집이 여간 아니거든.” 색다른 시선과 독특한 단어 하나를 원하지만, 이번에는 어린애답게 말했다. “음…. 그냥 친하게 지내는 게 좋지 않아요?” “그게 다야?” “네.” 진 회장이 실망한 것은 얼굴에 드러났다. 어쩔 수 없다. 김영삼 대통령만큼 충격을 많이 던진 인물이 있을까? 그의 충격적인 정책은 나 혼자 알아야 한다. 김영삼 씨의 대통령 재임 기간 5년이 끝날 때쯤 순양그룹의 일부분을 차지해야 한다. 아주 알짜배기인 계열사를 말이다. ======================================== [032] 급변의 시대 2. “지난번에는 소주 한잔하자고 말씀하셔서 포장마차나 삼겹살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하.” “소주 안주로 회만 한 게 있습니까?” 오세현은 고급 일식집에서 다시 만난 이학재가 밀고 당김 없는 시원한 대답을 내놓자 술잔을 비우는 속도가 빨라질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술값은 제가 내야겠군요. 무려 240억의 거래를 성사시켰으니 수수료도 꽤 되거든요.” 분당 상업지구 이만 평을 순양건설에 넘기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자마자 도준의 통장으로 돈이 꽂혔다. “세금 문제도 우리 순양에서 다 처리했으니 한 번으로 되겠습니까?” “실장님께서 연락 주시면 언제든 달려오겠습니다. 하하.”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는 오세현에게 이학재는 술잔을 내밀었다. “더 큰 건을 드리려고 하는 어떻습니까? 관심 있습니까?” 내미는 술잔을 받는 오세현의 손이 조금 떨렸다. 더 큰 건이라면 순양그룹이다. 그는 이학재의 경고가 떠올랐다. 도준이를 이용하여 순양그룹에 발을 담그려 하는 의도. 몸값을 올리려는 생각. 이런 의심을 하는 자가 갑자기 새로운 제안이라니? 혹시 미끼일까? “제가 감당할 수 있는지 확인부터 해야겠죠?” “이천억 조금 안되는 돈입니다.” 쨍그랑- 결국, 술잔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오세현은 술잔을 떨어트린 것도 못 느꼈고 벌어진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천억. 작년 국가 예산이 22조6천억이다. 정부 예산의 1%에 육박하는, 현실성 없는 천문학적인 숫자다. 이런 그의 멍한 표정을 보는 이학재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돌았다. 조금 깔보는 듯하고 우쭐대는 느낌도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오세현은 물수건으로 황급히 주변을 정리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감당하기 어렵나 봅니다.” “어렵죠. 아, 오해 마십시오. 안 받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국내에서 그 정도 거금을 소화할 만한 투자처가 없다는 말입니다. 수없이 쪼개 분산 투자해야 하는데…….” “외국은 어떻습니까? 이를테면 도준이가 투자한 곳 말입니다. 그곳에 올라타면 될 듯한데요?” 이학재의 말에 오세현은 무릎을 탁 칠뻔했다. 원하는 것이 뭔지 알았다. “그것 역시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도준이의 자금은 파워세어즈 미국 본사를 통해 제3의 투자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도준이가 투자한 회사들은 이천억이라는 거금을 투자받을 만큼 규모가 크지 않아요.” 제3의 투자사라는 말에 이학재의 눈이 번뜩였지만,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안전하겠죠?” 이것이 물을 수 있는 최대치다. 하지만 하나는 정확히 알게 되었다. 도준의 돈은 파워세어즈라는 거대한 회사에 묻어있는 게 아니라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안전한 투자는 없습니다. 리스크를 감수하는 거죠. 도준이의 리스크는 컨트롤 가능한 범위에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오세현은 걱정 말라는 소리와 함께 넌지시 되물었다. “그 이천억 말입니다. 굳이 수익을 내지 않아도 되는 돈입니까? 원금 보전이 가장 중요하며 장기 투자에 묻어두면 안 되고, 언제든 필요할 때 찾을 수 있는 돈…. 맞습니까?” 비자금의 가장 중요한 원칙을 말하자 이학재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눈치 하나는 기막히게 빠른 놈이다. 이학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오세현은 머리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한국에 두는 것이 더 좋을 텐데요? 미국보다 훨씬 좋은 금리인 우리나라 은행이 있잖습니까?” 이학재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이천억이라는 돈을 굴려 수수료만 챙겨도 수억 원을 챙긴다. 이런 계산도 못 할 위인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은 잊은 채 고객을 위해 최선의 선택지를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제안한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놈이다. “말했다시피 이자 챙기려는 돈은 아니오. 사실 우리도 미국에서 돈 쓸데가 종종 있으니까 좀 옮기려 하고 있었어요.” 미국 비즈니스가 점점 더 커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커지는 만큼 검은돈도 점점 더 필요할 때가 많았다. “알겠습니다. 일단 검토를 거친 뒤 최종 제안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정중하고 모범적인 대답이었지만 이미 오세현의 속마음은 거절이었다. 굳이 순양그룹의 검은돈을 맡아 가슴 졸일 필요가 없다. 자신도 남부럽지 않은 상위 1%의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 * * “이걸 왜 보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지만, 뉴욕에서 보내왔어. 한번 봐.” 나는 오세현이 내미는 서류 몇 장을 재빨리 낚아챘다. “아버지 보여드리려고? 영화 수입도 가능하니까?” 나는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고 계약 관계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장 눈여겨본 작품을 보자마자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젠장, UIP 직배라니! 90년 세계 박스오피스를 점령할 영화 ‘GHOST’는 작년부터 국내 배급을 시작한 직배사 UIP의 국내 배급으로 이미 확정되어있었다. 이 영화를 아버지의 영화사가 국내 배급을 맡았다면 극장주들에게 큰소리치며 아버지가 제작한 영화를 끼워 넣을 수 있을 텐데… 아쉽다. 그런데 다시 내 눈길을 사로잡는 영화가 보였다. HOME ALONE. "삼촌. 이 영화는 제작 중이에요?“ “뭐?” 오세현은 영화 목록을 들고 잠시 보더니 서류를 뒤적였다. “이거? 이건 제작 홀딩이라고 돼 있는데? 마지막 페이지를 봐. 아니, 잠깐만.” 빼곡히 적힌 영어가 내게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는지 천천히 읽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 소규모 가족영화고… 감독도 신인, 주연도 신인… 잠깐, 주연이 어린애야, 너처럼.” 오세현은 말을 멈추고 서류의 나머지를 읽기 시작했다. “이건 빼도 되겠어.” 오세현은 서류를 책상 위에 던지며 머리를 살짝 저었다. “왜요?” “워너 브라더스에서 천사백만 달러에 제작하기로 했는데 제작비 예산이 팍 올랐어. 그래서 20세기폭스사로 넘겼고 지금 재검토 중이라는데?” “그래도 만들지 않겠어요?” “글쎄? 난 이쪽은 잘 몰라서 말이야. 하지만 제작 초기 단계부터 삐걱거리는데 잘 될 리 없잖아?” 천만에. 잘된다. 그것도 아주 잘 된다. 아직 기회가 남았다고 생각하니 다른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토털 리콜, 다이하드2 같은 대박 영화라 할지라도 한국 배급권 정도는 더 이상 성에 차지 않았다. “삼촌. 분당 땅 판 돈 미라클로 들어갔어요?” “곧. 왜?” 이미 짐작했는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했다. “이 영화에 투자할까 해서요.” 아니나 다를까, 한숨부터 내쉰다. “도준아. 주식과 영화 투자는 전혀 다른 게임이야. 주가는 떨어지면 손해를 보는 거지만 영화는 손익분기점을 넘어서지 못하면 그냥 날리는 거야. 빠져나올 타이밍이란 게 없어.” 이번에야말로 설득할 명분도 설명할 방법도 없다. 불안한 감독과 주연배우, 가족영화임에도 엄청난 제작비. 미국 메이저 영화사도 주저하는 영화에 돈을 쏟아붓는 것은 누가 봐도 자살행위다. 오세현이 굳은 얼굴로 우려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이 기회를 살려야 한다.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가 영화 투자사로서 헐리우드에 이름을 각인하는 절호의 찬스를 놓칠 수는 없다. 물론 수십 배 이익은 덤으로 따라온다. “삼촌.” “뭐라 해도 이번엔 반대다. 이건 투자가 아니야. 도박이지. 그것도 액면에서 이미 졌어.” 오세현은 말도 꺼내지 못하게 미리 막았기에 나도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앞으로 투자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을게요. 이래도 안 돼요?” “도준아!” 급기야 큰소리까지 나왔다. 이해는 한다만, 나도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땅 팔아 번 불로소득입니다. 없어도 되고, 망해도 제 돈입니다. 전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겠다고 부모님과 약속했어요. 또, 미라클에서 운용하는 돈 전부 없어져도 문제없잖아요.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가 제 할아버지니까요. 안 그래요?” 착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오세현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자수성가한 자신과 할아버지 잘 만난 나와의 거리를 깨달은 듯 보였다. 일, 이백억 정도의 거금을 잃어도 호통 한 번으로 끝나는 세계. 수천억 가치의 회사를 말아먹어도 몇 년 근신으로 용서받는 세계. 판단을 잘못하여 몇억, 아니 몇천만 원 때문에 직장을 잃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돈을 바라보는 외계인 같은 존재. 그곳이 바로 재벌 가문이다. 오세현은 테이블 위에 흩어진 서류를 주섬주섬 챙기며 일어섰다. “원하는 것은 이 영화에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이겠지?” 친근함은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말투. 나 역시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래. 원하는 대로 하지.” “아 참, 하나 더요.” “뭐지?” “한국 배급권을 확보해야죠.” “우리가 유일한 투자자일지도 모르는데 그건 문제없어. 또?”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보고하도록 하지.” 유난히 보고라는 말에 힘을 주는 것으로 봐서 화가 단단히 난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언짢은 기분도 연말 박스오피스를 보면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 * * 도준의 집을 나서는 오세현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도준이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만 했다. 아버지의 영화사가 잘못되면 할아버지에게 더욱 미움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미국 영화를 수입이라도 해서 아버지를 돕고 싶은 마음, 이해는 한다만 무모하다. “후-. 이번 손해는 타격이 크겠는걸.” 오세현은 프로다. 큰 손실의 이유가 고객의 무모한 판단 때문이라도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그 손해만큼 자신의 능력으로 메꿔야 한다는 의무감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젠장, 진 씨 집안은 골치 아픈 일만 잔뜩 안겨주는구먼.” 영화 투자로 인한 손실을 복구하려면 어쩔 수 없이 이학재가 제안한 비자금을 받아들여야 한다. 천억 정도를 일 년 동안 굴리면 가능할 것이다. 오세현은 순양그룹 본사로 차를 몰았다. *** 마이크로소프트가 Windows 3.0을 발매하자 빠르게 PC 시장을 잠식해 나갔다. 덩달아 이 회사의 주가도 빠르게 상승했다. 30센트에 상장한 델 컴퓨터도 연일 기록을 갱신하며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덕분에 내게 잔뜩 화가 나 있던 오세현도 언제 그래냐는 듯 함박웃음을 보였고 ‘HOME ALONE’에 투자한 팔백만 달러, 오십육억 정도의 손실은 몇 년만 지나면 충분히 메꿀 수 있을 거라고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반대로 한국 주가는 폭락했다. 일본에서는 거품경제를 끝장내기 위해 4월에 실시한 대출 총량규제 때문이었다.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일본 버블 경제의 정점에서 시행되는 바람에 일본 경제는 끝없는 나락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소련과의 수교로 노태우 정권의 최대 업적인 북방 외교는 정점을 찍었고 10월 3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로 분단되었던 독일이 마침내 45년 만에 통일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소련의 위성국이던 동유럽 국가들이 자본주의 체제로 대거 전향하게 되면서, 지루하게 계속되던 냉전이 사실상 이 해를 기점으로 끝났다. 이제 지구촌 전체가 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HOME ALONE이 개봉한 11월 16일부터 오세현은 한국에서 이 영화의 스코어를 초조하게 지켜본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매일같이 뉴욕으로 전화를 걸어 박스오피스를 확인하던 오세현은 1991년 새해 첫날 나를 찾아왔다. “어쩌면 넌 국민학생 중에서는 세계제일의 부자일듯싶다. 아랍 왕족 빼고.” 그가 내게 내민 종이에는 숫자가 잔뜩 적혀 있었고, 숫자의 마지막 부분에는 2억 달러라는 숫자에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 [033] 급변의 시대 3. “저 이제 중학생 돼요, 삼촌.” “뭐? 벌써?” “네. 3월이면 입학인데요?” “아직은 아니잖아. 야! 근데 넌 놀라지도 않냐? 흥행성적 안 보여? 네가 달러 가치를 모르는 애도 아니고?” 내가 별다른 반응 없이 시큰둥하자 오세현은 또다시 수상한 눈빛으로 변했다. “제작비 1,800만 달러 중에 800만 달러를 투자했으니 우리 비율은 44%. 배급사, 극장 수익 빼면 전체 수익의 절반 정도 가져오죠?” “그럴걸? 맞을 거야.” “2억 달러라면… 오늘 환율이 740원이니까 1,480억. 절반이라면 740억, 이 중 44%면 330억 정도 되겠네요. 그럼 6배 수익 아닌가요?“ 오세현은 눈만 껌뻑했다. 아저씨들은 어린애의 암산 능력에 항상 놀란다. 어려서 좋은 점은 내 두뇌가 아주 매끄럽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나 델 컴퓨터 수익률 생각하면 별것 아니잖아요?” “그, 그렇긴 하네. 그래도 1년 만에 6배면 정말 초대박이야. 그리고 2억 달러도 미국 내의 수익이야. 이제 전 세계에서 개봉할 테니까 최소 두 배 이상은 더 벌 거야.” “삼촌.” “응?” “뉴욕 미라클 직원들, 일 좀 잘하라고 하세요.” “왜? 그 친구들 밤낮없이 일해.” “열심히 말고 잘! 제가 결정한 투자 중 제일 수익률 낮은 게 여섯 배에요. 그 직원들이 운용하는 자체 투자 수익률이 얼마죠?” “그, 그건…….” “겨우 22%잖아요.” 오세현은 입을 다물었다. 입 다문 오세현을 살려준 건 바로 아버지였다. “야! 나 바쁜 거 몰라? 무슨 일이길래 오라 가라야?” 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아버지는 외투를 벗으며 말했다. 지금 아버지는 자신의 제작사에서 만든 두 편의 영화, 그 영화의 개봉관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신다고 들었다. “왜? 아직도 개봉관 못 잡았냐?” “어휴, 말도 마. 극장 전부가 설 기간 동안 비워놨어.” “뭐? 꽉 찬 게 아니고?” “설 명절에 딱 맞는 영화 기다리느라 그래.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메가 히트한 거. Home Alone. 미국영화." “그 영화가 상영관을 비워놓고 기다릴 만큼 대단한 거야?” 오세현의 장난기가 시작되었다. “가족 영화면서 코미디거든. 설 명절에 딱 어울리지. 게다가 미국에서 검증 끝났잖아. 역대 코미디 흥행 신기록 갱신 중이니까.” “그거 때문에 네 영화를 못 거는 거냐?” “Home Alone이 극장에서 내려가면 내꺼 걸어주니까.” 난감한 상황인 듯 아버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젠장, 그런데 이 영화 한국 배급사가 있다는데 어딘지 몰라. 충무로 전체가 지금 혼돈의 도가니다. 필름 쥔 놈을 만나야 날짜를 조정하든, 영화관을 잡든 할 텐데…. 돌아버리겠어.” 이 모습을 한껏 즐기던 오세현은 근엄한 목소리로 변했다. “넌 일단 나한테 큰절부터 해라.” “장난칠 시간 없다. 빨리 용건만 말해.” “내가 그 대박 영화 한국 배급자가 누군지 아는데? 아직 큰절 하고 싶은 마음 없나?” “뭐?” 오세현은 깜짝 놀란 아버지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재빠르게 서류를 낚아채고 읽어 내려가는 아버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건….” “설마 영어 다 까먹었냐? 이해 못 해?” 아버지는 서류 하단의 서명란에 인쇄된 회사 이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준 필름>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인만 하면 Home Alone은 네 거야. 싫음 관두던가.” 오세현이 서류를 다시 뺏으려 하자 아버지는 재빨리 사인한 뒤 서류를 챙겨 넣었다. 자세한 내용은 묻지도 않고 계약서부터 챙기는 걸 보면 얼마나 급한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 명절 때 그 영화 말고 아버지 영화 먼저 상영하세요.”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아버지 영화를 상영해 주는 극장에 Home Alone을 준다고 하시면 어때요? 설 명절은 최고 성수기 아닌가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오세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들 말 들어라. 넌 앞으로도 도준이 말 귀담아듣고 시키는 대로 해. 그럼 실패는 없을걸? 흐흐.” 아버지는 서류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도준아. 자세한 이야기는 이거 처리하고 하자.” 아버지는 외투를 챙겨 들고 부리나케 나가버렸다. 지금 얼마나 급한지 알 것 같았다. “아이고, 저놈…. 여전하구만.” “뭐가요?” “응? 아, 네 아버지. 저놈은 뭐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건 안 봐. 런던 유학 시절에도 괜찮은 연극 발견하면 수십, 수백 번 그것만 봤거든. 지금 저놈 머리에는 자기 영화 극장에 거는 게 전부겠지. Home Alone이 왜 우리 손에 있는지 물어보지도 않잖아.” “집중한다는 건 좋은 일이죠, 뭐.” 나는 2억 달러라는 흥행수익이 적힌 종이를 들었다. “삼촌. 올해 제작 들어가는 영화에 이 돈 전부 투자하죠. 일단 리스트 뽑고 미국 쪽 의견 들어봐요. 그리고 결정해서 진행하죠.” “전부? 도준아. 몰빵은 한 번으로 만족….” 오세현은 말꼬리를 감췄다. 고작 수익률 22%인 자신이 600%인 나에게 할 말은 아니라는 걸 떠올렸을 것이다. 충고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하는 게 어울린다. 위아래는 나이가 아니다. 결과로 나눠야 한다. “그래. 헐리우드에서 기획 중이거나 제작 들어가는 영화 리스트부터 확보하자. 미라클에서 원한다고 하면 헐리우드 제작자들이 먼저 들이밀 거야.” 오세현은 가방을 챙기고 돌아갔다. 나도 이제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공부에 좀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해야 진 회장의 기대가 저물지 않는다. 어차피 앞으로 3년간은 흥행 성공한 영화나 고르면 되는 일, 한가하다. 워낙 파도가 많은 집안이라 특별한 일만 벌어지지 않기를 빈다. * * * 설 연휴를 며칠 앞두고 가장 많은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신문에는 독특한 관점의 사설이 하나 실렸다. 「주인 없는 회사의 방만한 경영. 전문경영인 체제 대기업의 구조적 약점인가?」 『지난해 아진자동차의 경영성과는 훌륭했다. ……중략. 전문경영인 시스템을 갖춘 아진자동차는 주주에게 많은 배당을 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아진자동차의 경영진은 주주의 이익 대신 그들의 덩치를 키우는 데 급급했다. 아진기계, 아진정밀 등 새로운 계열사를 설립했고 이 회사에 아진자동차의 자금을 쏟아부었다. 누구를 위해? 당연히 경영진의 확대를 위한 것이다. 이제 수십 명의 임원이 또 탄생했다. 그들은 자신의 주머니를 채울 것인지 주주들의 주머니를 채울 것인지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그 결정은 왠지 믿음이 가지 않는 건 필자의 노파심일까?』 신문을 집어 던진 아진자동차의 송현창 회장은 인터폰을 누르고 소리쳤다. “임원 전부 모이라고 해! 홍보실 책임자도! 지금 즉시! 씩씩대며 회장실을 서성대며 몇 분이 지나자 노크 소리가 들리며 십여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여덟 명밖에 앉지 못하는 소파가 있었지만 단 한 명도 자리에 앉지 못했다. 회장님이 서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 몇몇도 신문을 들고 있었다. “이거 뭐야? 누구 짓이야?” 송 회장은 신문을 뺏어 들고 흔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지금 알아보는 중입니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 사시나무 떨듯 서 있는 남자도 보였다. 아직 흰머리가 거의 없는 걸 보면 분명 홍보실 책임자일 것이다. “요즘 대한일보에 광고 안 줘?” 회장님의 질문에 역시 그 남자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꼬박꼬박….” “그럼 돈도 주고 뒤통수 까인 거란 말이야? 이런…!” 입술을 깨물고 거친 숨만 내쉬던 송 회장이 홍보 책임자를 향해 소리 질렀다. “야! 홍보!” “넵! 회장님.” “넌 지금 당장 가서 펜대 잡은 놈들 손에 돈을 주든, 여자를 안겨주든 뭐든 해서 이놈들 원하는 게 뭔지 알아와.” 홍보 책임자는 허리를 숙인 다음 회장실을 도망치듯 달려나갔다. “회장님. 과민하신 것 같습니다. 신문쟁이들 광고 더 달라고 떼쓸 때 쓰는 수법 아닙니까?” “우리 신차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니 자기들 덕분이라고 생색내려는 겁니다. 전면광고 일주일이면 싹 바뀔겁니다.” 가까스로 용기를 낸 경영진 영감들이 송 회장의 화를 푸느라 조심스레 말했지만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이 친구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이유라면 우리 신차를 씹어야지 왜 경영진을 씹어?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그제야 모두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론도 경계는 지킨다. 뭔가 요구할 때는 상품을 때리지 사람을 때리지는 않는다. 상품은 감정이 없지만,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특히 경영진을 공격한다는 건 아예 등 돌리자는 선전포고나 다를 바가 없다. “이거 수상해. 뭔가 있어.” 회장실을 서성이던 송 회장은 경영진에게 매서운 눈길을 보냈다. “점심때까지 누구 짓인지 파악해. 다들 그 정도 정보는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경영진이 회장실을 다 빠져나가자 송 회장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젯밤 잠자리가 뒤숭숭하더니…. 불안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 * * 신문을 접어 식탁 구석에 내려놓은 진 회장은 수저를 들었다. 역시 대한일보 주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어난 자동차의 핵심 부품 생산을 위해 자회사를 설립한 것은 경영상의 당연한 수순이다. 이걸 트집 잡아 마치 전문경영인이 자기 사람을 승진시키기 위해 불필요한 계열사를 만든 것처럼 왜곡했다. 아진자동차 경영진의 부도덕함과 오너가 존재하지 않는 대기업은 안전장치가 없는 것처럼 만들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글솜씨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아침을 먹은 진 회장이 서재로 가자 역시 신문을 읽던 이학재가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이 친구야. 그냥 여기서 아침 먹어. 내가 자네와 겸상도 못 하는가?” “회장님과 겸상하면 밥이 제대로 넘어가겠습니까? 말씀만 받겠습니다.” 진 회장은 싱긋 웃는 이학재의 손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어때? 잘 뽑았지? “네. 신호탄으로는 적절하게 나왔네요.” “2차는 언제 들어가나?” “설 연휴 바로 전날, 중앙일간지 전부가 총질할 겁니다. 이번 설 차례상에서 아진자동차를 화제로 만들어야죠. 밥상에서 아진자동차를 열심히 씹어댈 정도로 만들 계획입니다.“ “국세청은 어떻게 됐어?” “조율 중입니다. 너무 심하게 털면 완전히 노출됩니다. 혹시라도 딴 곳에서 침 흘릴 수도 있고….” “죽 쒀서 개 줄 수는 없지.” 진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경영진이 흔들릴 정도? 어쨌든 목표는 송현창 회장의 사퇴니까요.” 이학재는 진 회장의 표정을 슬쩍 살피며 두툼한 책자 하나를 꺼냈다. “말씀하신 보고서입니다. 순양경제연구소에서 준비한 겁니다.” 진 회장은 보고서의 제목만 흘낏 보는 것이 전부였다. 「국내 자동차 산업의 구조재편 필요성과 정부의 지원방안」 “어때? 쓸만해?” “잘 뽑았습니다.” “거 참, 연구소는 참 애매한 놈들이야. 잘 만든 건 좋은데…. 이거 하나 만드는데 무려 8개월이 걸려?” “사안 자체가 워낙 크고 중요하니까 연구소도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 신중했습니다. 잘 나왔으니 넘어가시죠.” “넘어가지, 그럼? 내가 그 애들까지 잡을까 봐?” “요즘 많이 예민하신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큰 싸움 앞두고 있으니 자네가 더 예민한 것 같은데? 왜? 피가 끓어?” 이학재는 머리를 슬쩍 긁으며 미소 지었다. “전면전보다는 이런 기습 공격이 더 짜릿하지 않습니까?” “기습은 덩치 작은놈이 큰놈 칠 때 쓰는 건데….” “출혈이 적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조만간 전면전도 시작해야죠.” 이학재의 강렬한 눈빛에서 전의가 느껴진 진 회장이다. 처음엔 주저하고 위험을 경고하더니 싸움이 시작되자 회장인 자신보다 훨씬 더 격렬히 흥분한다. 타고난 싸움꾼임을 또다시 증명한다. 진 회장은 조금 안쓰러웠다. 이학재의 부모가 성주였다면 엄청나게 강한 군주가 됐을 텐데…. 부모가 평민이니 뛰어난 사냥개 역할이 전부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또 한 명의 싸움꾼이 떠올랐다. 그놈의 할아버지는 엄청난 영토를 소유한 성주다. 어떻게 성장할지…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고 싶었다. ======================================== [034] 내꺼야 1. 신문 챙기려 정원에 나갔을 때 정장 차림의 아버지와 마주쳤다. “어? 아버지. 어디 가세요?” “아, 오늘 개봉하잖아. 극장 가서 상황 좀 보고 들어오려고.” 마치 출근 시간을 놓쳐버린 직장인처럼 부리나케 나가버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자 웃음이 났다. 평생 일이라고 해본 적 없었던 아버지가 뒤늦게 전력을 다해 일했고 오늘 평가받는다. 극장이 이른 아침부터 시작할 리도 없지만, 집에서 서성대느니 차라리 극장 앞에서 기다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 기분, 충분히 이해한다. 거실에 앉아 세 부의 신문을 전부 다 읽었을 때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이건 기획된 거다. 모든 신문이 아진자동차를 공격하다니? 조간신문이 시작했으니 오늘 저녁 TV 뉴스에서는 이 내용을 더 부풀려 방송할게 뻔하다. 이런 일이 서너 번 반복되면 공식적인 수사에 착수할 것이고 언론은 더욱 날카롭게 아진자동차를 찔러댈 텐데…. 왜 지금인가? 91년의 일은 기억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97년부터 시작된 외환위기의 충격파가 아진자동차를 덮쳤고 98년 이후 대현이 아진을 삼켰다. 설마 이런 미래가 금이 간 것일까? 뭔가 변하기 시작한 걸까? 아니면 한 번씩 벌어지는 기업 때리기일까? 단순한 정권의 기업 길들이기의 일환인가? 신문을 접고 아침을 준비하는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우린 할아버지 댁에 언제 가요?” “내일. 왜?” “그럼 저 혼자 먼저 가도 될까요?” 아침을 준비하던 어머니의 손이 멈췄다. “왜? 무슨 일 있어? 할아버지가 먼저 오라고 하셔?” “아뇨. 이제 중학교 가면 자주 찾아뵐 수 없으니까요.” “풋-, 진짜?” 어머니는 가볍게 웃으며 머리를 살짝 저었다. “그래. 아침 먹고 먼저가. 할아버지 기분 좋게 해 드리고.” “네. 참, 어머니는 극장 안 가세요? 오늘 개봉이잖아요.” “관객이 없어 극장이 텅텅 비면? 난 떨려서 못 가겠어.” 안심하고 가보라는 말은 못했다. 아버지의 영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고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영화일 수도 있다. 나는 기회를 줬을 뿐이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걸어갈지는 그분의 선택이다. 관여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다. * * * “아이고, 우리 도준이. 볼 때마다 이렇게 훌쩍 크는구나. 좋다, 좋아. 허허.” 이젠 나를 안고 들어 올리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가 늙은것보다 내가 훨씬 빨리 자란다. “우리 아기, 할아버지는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조금만 혼자 있을래?” “네. 거실에 있을게요.” 찝찝한 기분이 계속 커진다. 연휴 직전에 터진 기사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인 서재. 가지런히 놓인 현관의 구두만 봐도 거의 열 명이다. 명절 연휴 직전까지 사람들을 묶어 놓을 만큼 야박한 할아버지가 아니다. 서재에 모여 남의 집 불구경을 할 이유도 없다. 7년 뒤에 발생할 일이 지금 일어난 걸까? 지금 저 서재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오갈까? 초조하게 기다렸다. * * * 도준의 예상과 달리 서재에서는 불구경이 한창이었다. 옆집 불구경이 아니라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이라는 요란한 이름의 다른 나라 불구경이지만. 1월 17일, 작년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몰아내기 위해 미군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토마호크 미사일을 이라크에 퍼부으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60만에 달하는 이라크군의 장비와 지휘체계를 초토화시키고 사상자를 7만 명이나 내는 동안 미군은 단 294명만 전사했다. 그중 145명은 사고사이고 실제 전투 희생은 149명이며, 이 중 35명이 아군 오인사격 희생자였다. 이런 적은 사망자를 낸 미군과 달리 이라크군의 전사자는 약 2만으로 추정되며, 부상자와 포로를 합치면 7만에 달한다.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철수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전쟁은 막바지를 향해 치달았다. “이거 언제 끝나는 거야?”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미 미국과 영국은 전후 복구사업 논의 중이라고 하더군요.” “우리나라는? 정부는 뭐래? 한 다리 걸칠 가능성이라도 보여?” 미간을 찌푸린 진 회장의 표정은 이미 기대를 접은 듯 보였다. “중동 지사와 유럽 법인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만 정부 차원의 복구사업 개입은 힘들어 보입니다.” “그럼 줄이라도 잘 서야겠구먼. 그래야 사막에 화장실 하나라도 짓고 기름 몇 방울 얻어오지. 안 그래?” 중동 특수에서 재건 사업과 오일을 확보하라는 지시다. 건설과 정유, 두 회사의 사장이 회장을 바라보며 머리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어도 되지?” “네. 회장님.” 딱히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 명절을 앞두고 쓴소리는 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곧바로 다른 안건으로 넘어갔다. “오늘 신문 다 봤지? 그게 스커드 미사일이야. 앞으로 화력 집중해서 좀 더 퍼붓고 점령군을 보낼 텐데, 각오는 돼 있겠지?” 모두 굳은 얼굴로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진자동차 인수가 올해 순양그룹 최대 사업이다. 점령군은 바로 자금을 말한다. 최대한 자금을 모은 뒤 회장의 신호가 떨어지면 차명으로 순식간에 주식을 매집한다. 일정량을 확보하고 정부가 음으로 양으로 지원할 때 번개처럼 M&A를 진행한다. 사막의 폭풍작전처럼 순식간에 끝내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모두 나가봐라. 고향 가서 차례 지내고 애들 용돈도 쥐여주고 푹 쉬라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을 바라보며 허리를 숙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더욱 건강하십시오. 회장님.” 큰절이라도 할 기세였지만 장소가 협소한 게 다행이었다. 모두 빠져나간 서재에는 이학재와 진영기 부회장만 남아 머리를 맞대었다. “얼마나 모았어?” “7.4% 매집했습니다. 차명으로 명동에 뿌려 놨으니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이학재가 조심스레 말하자 진영기는 보고서 몇 장을 내밀었다. “생산라인 조정안입니다.” “핵심은?” “화물차 라인은 매각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진 회장은 건성으로 보고서를 넘기다 책상 위에 툭 던졌다. “자신 있냐?” “네?” “아진 말이다. 주머니에 넣을 자신 있냐고?” 진영기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무리다, 자신 없다 같은 소리는 해 봤자 자신만 멍청한 놈이 된다. “회장님 말씀대로 업계 2위를 달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진 인수하고 국내 1위 자리 노려보겠습니다.” 큰소리 탕탕 치는 아들이 못 미더웠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이 가진 것 대부분을 물려받아야 할 장남인데. “그럼 지금부터는 네가 맡아. 이 실장하고 잘 상의해서 올해 안으로 아진 인수해. 만약 성공하면 자동차 지분은 전부 네게 주마.” 진영기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진 회장을 쳐다봤다. 순양자동차 지분은 어차피 지주회사가 대부분 쥐고 있다. 자동차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어 준다는 말은 지주회사의 지분을 고스란히 넘기는, 그룹 전체를 넘긴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다.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이학재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갑자기 상속을 결정해버리다니! “왜? 싫어? 아니면 자신 없는 게냐?” “아, 아닙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진 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진영기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가봐라. 실수하지 말고 잘 챙겨. 내일 일찍 오지 말고 설 당일 아침에 와서 차례만 지내고 가. 없는 시간 쪼개 써도 모자랄 판이야.” “네. 아버지.” 진영기가 나가자마자 이학재가 입을 열었다. “설날 용돈치고는 엄청나군요.” “응? 무슨 소리야?” “그룹 승계를 전격 발표하신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뭐?” 진 회장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눈이 커졌다. “아닙니까?” “내가 자동차만 준다고 했지, 순양을 준다는 소리는 안 했는데?” 이제 이학재의 말문이 막혔다. “계열사에서 보유한 자동차 주식 절반 정도만 넘기면 경영권 방어는 문제없잖아. 내가 말한 건 그 정도야. 물론 자동차만 해도 용돈치고는 크지.” “이런, 부회장의 실망이 크겠는데요?” “정말 그렇게 받아들인 거냐?”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푸하하-!” 진 회장은 책상까지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이제 영기 저놈,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겠구먼.” 진 회장의 웃음소리에 이학재는 한시름 놓았다. 순양그룹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결정이 될 후계 문제는 좀 더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 * * * “할아버지는 명절인데도 일하세요?” “어쩌겠냐? 일이 많은걸. 하지만 이제 다 끝났다.” 서재에 들어서자 할아버지는 책상 위의 신문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진자동차 기사가 보이는 걸로 봐서는 오늘 회의 주제는 분명 아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큰아버지는 기분 좋으신가 보더라고요. 막 웃으며 나가시던데….” “그래? 명절이라 그런 거겠지.” 피식거리는 표정으로 봐서는 분명 뭔가가 있었다. 나는 신문을 정리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했다. 그냥 눈에 띄었기 때문에 물어보는 척 아진자동차 기사를 확인해야 한다. “할아버지.” “응?” “여쭤볼 게 있는데요.” “그래, 말하렴.” “신문에 난….” 하지만 난 질문을 끝내지 못했다. 신문에 덮여있는 두툼한 보고서의 제목이 눈에 띄었기 때문에다. 「국내 자동차 산업의 구조재편 필요성과 정부의 지원방안」 젠장. 이 모든 일의 배후가 바로 할아버지였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 * * 명절 연휴를 앞뒀지만 아진자동차의 송현창 회장은 집무실을 떠나지 못했다. 주요 일간지 모두가 자신의 경영방식을 독재자 스타일이라며 문제 삼았고 심한 곳은 배임, 공금 회령까지 거론하며 도덕성을 문제 삼았다. 이 기사 때문에 오늘 주가는 이미 하한가를 찍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명예 훼손으로 고소하고 싶었지만 언론과 투닥거리는 건 피해야 한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휘저었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이 정도로 끝내야 한다. 더 확대 되는 건 꼭 막아야 한다. 송현창 회장은 끊임없이 전화를 돌렸다. 하지만 언론사는 제보에 의한 기사일 뿐이라고 딱 잡아뗐고 청와대는 언론에 관여하지 않겠다며 발을 뺐다. 아랫사람들도 계속 보고를 올렸지만 모두 부정적이었다. 누군가 공격을 시작했는데 적의 정체는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공격하는 이유도 불분명하다. 손꼽아 볼 수 있는 적은 대현, 우성, 순양 그리고 해외 자동차 회사다. 아진을 발판으로 한국에 진출하고 싶어하는 몇몇 회사는 분명히 존재했다. 모두 아진자동차보다 덩치가 훨씬 컸고 자금력도 압도적인, 어려운 상대뿐이다. 한겨울인데도 몸에 열이 나서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비서를 불러 히터를 끄라고 하려 할 때 인터폰이 울렸다. “회장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돌려보내! 오늘 외부인은 만나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게….” 비서의 난처한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들릴 때 회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점퍼 차림 사내의 팔을 비서진이 잡고 있었다. “이…. 이런 씨발. 뭐야? 여기가 동네 사랑방이야? 개나 소나 아무나 들어올 곳이야? 네놈들은 뭐 하고 있어? 빨리 끌어내!” 상스러운 욕까지 튀어나올 만큼 분통 터지는 순간이었다. “송 회장님. 저 기억 나지 않으십니까? 조대호입니다.” “누구? 조…? 조 사장?” 송현창 회장은 조대호의 정장 차림 모습이 떠올랐다. 순양자동차의 사장 아닌가? ======================================== [035] 내꺼야 2. “됐어. 그분은 괜찮아. 모두 나가 봐.” 비서들이 조대호 사장의 팔을 놓고 머리를 숙였다. “참, 커피 좀 준비해주고.” 송 회장은 닫히는 문을 향해 말했다. 입구에서 서성대는 조대호 사장을 소파에 앉힌 송 회장은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미안하네. 요즘 내가 정신이 없어서.” “아닙니다, 회장님. 저도 신문 읽었습니다. 불쑥 찾아온 제 불찰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지?” “2년 전, 자동차협회 만찬 모임이었습니다.” “아! 그렇지. 협회 기부금 삥 뜯길 때 봤군.” 두 사람의 굳었던 얼굴이 풀렸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 자동차 사장 자리 내준 건 들어서 알고 있네.” “포장 공장에서 소일거리 하며 지냅니다.” “포장 공장?” 한직으로 밀려났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귀양살이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송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 회장도 너무하는구만. 그룹 내의 위치도 있는데…. 심했어.” 순양자동차의 사장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것은 인생 전체를 순양에 바쳤다는 뜻이다. 회사를 망친 것도 아닌데, 자존심에 상처 입었다는 이유로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구멍가게로 내쫓다니. 송 회장은 진 회장의 지독한 모습을 또 한 번 확인했다. “그래, 갑자기 찾아온 이유는 뭔가? 아무래도 이거 때문이겠지?” 송 회장이 신문을 쥐고 흔들자 조대호 사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진 회장 짓인가?” “아마도요.” “왜? 아진자동차 삼키려고?” “그럴 지도요.” 언론사, 여의도, 청와대 모두 자신에게 등 돌릴만하다. 진 회장의 입김이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왜 갑자기 욕심낼까?” “싸워서 이기는 건 힘 들 뿐만 아니라 시간도 오래 걸리니까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길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죠.” 송 회장은 조대호 사장을 빤히 보며 물었다. “자네가 찾아온 이유는 뭔가? 귀양 간 신하가 칙서를 들고 오진 않았을 테고… 전향인가?” “봉급쟁이가 오늘 같은 날 불쑥 찾아온 이유야 뻔하지 않습니까? 취직 부탁드리려면 오늘이 가장 적합할 것 같아서요.” “경력직 사원은 뽑을 계획이 없는데…. 이거 어쩌나?” 송 회장은 신문을 부채 삼아 흔들었다. “급할 때는 사채도 땡겨 쓰는데 계획에도 없는 채용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많이 뻔뻔해졌네, 우리 조 사장. 허허.” “굶으면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없어지더군요. 부끄럽지만 말입니다.” “경력 사원은 뭔가 쓸만한 걸 쥐고 있어야 하는데, 조 사장은 뭘 가지고 있으려나?” “순양자동차 공장 시멘트를 제가 발랐습니다. 조립 라인 기술제휴 조인식도 제 손으로 사인했고요.” “그게 전부라면 실망인데? 기술자는 우리도 많아.” “진 회장의 지시로 제 손에 흙도 묻히고 피도 묻히고 똥도 묻혔습니다. 깨끗하게 다 털어 진 회장에게 다시 던지면… 순양그룹은 샤워하느라 일 년은 정신 못 차릴 겁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 조 사장, 포장 공장 본드 냄새까지 싹 씻어낼 생각인가 보군.” 조대호 사장은 두 손을 비비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이만하면 제 이력서는 마음에 드십니까?” “이력서는 좋은데 조 사장 마음에 드는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네.” “아진자동차 사장님은 회장님 오른팔이니… 부사장 정도면 감지덕지입니다. 월급은 순양자동차 사장 수준이면 만족하고요.” 송 회장이 소파에서 일어나니 조대호 사장도 벌떡 일어났다. “조 사장 고향 가나?” “조상님께 인사는 드립니다.” “그럼 고향 다녀와서 다시 이야기하지. 마음 편히 쉬다 오게.” 조대호는 허리를 숙인 뒤 웃으며 회장실을 떠났다. 홀로 남은 송현창 회장은 긴 한숨을 쉬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오랜만에 담배 하나를 물고 불을 붙였다. 생각을 좀 많이 해야 한다. “저 새끼는 옛날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끝까지 정이 안 가네.” 혼자 중얼거리던 송 회장은 비서를 통해 자동차 임원 모두를 불러 모았다. 허겁지겁 달려온 임원들은 송 회장의 설명을 듣자 처음에는 분통을 터트렸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는 의견이 분분했다. “순양이면 자금력으로 밀어붙일 겁니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주식 매입을 시작해야 합니다.” “주식 매입 자금은 어디서 구해?” “우리가 보유한 주식을 담보로 최대한 대출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행 대출과 급전 좀 융통하고 그 돈으로 주식시장 좀 흔들죠. 주가 올라가면 순양도 주춤할 겁니다.” 의견은 분분했지만 강력한 한방이 없다. 출혈 심한 싸움을 끝내고도 결과를 자신할 수도 없다. 송 회장은 임원들에게 더 어려운 문제를 던졌다. “지금 언론을 봐. 오늘은 시작일 뿐이야. 앞으로 나를 흔들걸? 내 도덕성을 문제 삼아 물고 늘어지면 검찰 소환은 안 봐도 뻔해.”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 전문경영인 시스템의 대기업 회장 정도면 먼지를 흠뻑 뒤집어쓰며 살아왔다. 검사 한 명이 입김만 후- 하고 불어도 기소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왜 말이 없어? 회사는 지켜야 하고 나 잡혀가는 건 괜찮아?” “그럴 리가요. 아닙니다, 회장님.” 임원들 모두 두 손을 내저으며 펄쩍 뛰었다. 그 모습을 본 송 회장은 피식 웃으며 또 하나의 정보를 던졌다. “자네들 진심은 충분히 알았으니 그만하면 됐어. 사실, 자네들 모이라고 한 건 다른 이유야. 조대호가 왔다 갔어. 기억하나? 순양자동차 사장이었던 놈?” “조대호가 왜…?” “자리 하나 달라더구먼. 아진자동차 부사장 정도면 땡큐라고 말이야.” 부사장. 이 자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차기 사장의 강력한 후보가 되던지, 자리만 차지하는 허수아비. 둘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 조대호가 말한 부사장은 돈이나 챙기려는 허수아비 자리다. 임원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천만다행입니다. 조대호라면 순양의 충견이었고 진 회장의 측근이었습니다. 그자는 순양의 비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겁니다. 조대호가 우리 아진 식구가 됐다는 걸 알면 순양도 함부로 못 할 겁니다.” “서로 먼지 털자고 달려들면 순양의 먼지가 우리보다 수 곱절은 더 나올 테니 철수할 겁니다.” 상대의 공격을 멈추게 할 방법이 나오자 모두 한시름 놓은 듯 보였다. 적의 공격이 멈추면 자금을 풀어 경영권을 더욱 공고히 쌓는 작업을 서두르면 된다. “방금 조대호가 순양의 충견이라고 했지? 개는 주인을 바꾸지 않아. 왜 조대호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지?” 송 회장의 말에 임원 모두는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리스군이 남기고 간 목마를 성안으로 끌고 들어간 건 다름 아닌 트로이인들이다. * * * “우리 도준이, 왜 말이 없어? “아, 아니에요.” 눈치 빠른 할아버지는 이미 내가 당황한 것을 알아챘다. “너 벌써 사춘기냐?” “네?” “이제 이 할애비한테 숨기는 것도 있어? 섭섭한데, 허허.” 나이 들면 사소한 것에도 섭섭함을 느낀다더니, 웃는 얼굴이지만 어두운 빛도 지나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슬쩍 물어나 봐야겠다. “오늘 신문에요…. 너무 요란하길래….” “아진자동차?” “네.” “왜? 뭔가 이상해?” “음…. 늘 그랬잖아요. 신문에 우리 순양그룹 이야기가 나오면 할아버지께서는 누구 짓이냐며, 꼭 찾아내라고 화를 내셨잖아요.” “그랬지. 기억하는구나.” “네.” 진 회장이 내 손을 잡아 곁에 앉혔고 천천히 가르침을 주기 시작했다. “도준아. 신문사는 뭘로 돈을 벌지?” “광고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래,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하지만 신문사는 글자를 팔아 돈을 버는 거야.” “글자? 기사요?” “그래. 넌 신문 한 면의 글자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니?” “아뇨.” “보통 오천 자 정도 된단다. 그 글자 하나하나를 돈으로 바꾼 거야.” 젠장, 질문하나 던졌다가 다 아는 사실을 한참 동안 듣게 생겼다. 하지만 새로운 사실을 듣는 양, 눈을 반짝여야 한다. “그렇군요.” “겉으로 보기에는 돈과 전혀 관계없는 기사, 예를 들면 서울의 교통체증 같은 기사는 관할 지역 도로 확충공사의 명분이 되지. 이 기사로 누가 돈을 벌까?” “도로 공사를 하는 토목회사?” “그래. 잘 아는구나. 허허.” 할아버지는 눈치 빠른 내가 기특한지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여러 가지 사례를 들며 기사의 진면목을 읽는 법을 설명했다. 언제쯤 내 궁금증을 풀어주려나? “그럼 아진자동차 기사는 누구를 위한 거죠?” “아진자동차가 크게 흔들리기를 원하는 경쟁자겠지?” “대현자동차... 아니면 할아버지?” 또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는 진 회장의 손. 나는 이 손길에서 아진자동차를 향해 총질하는 기사는 바로 할아버지의 작품이라는 걸 확신했다. 이런 제기랄. 일찌감치 침 발라 놓은 내 회사를 할아버지가 먼저 노릴 줄이야. 머릿속이 복잡하다. 할아버지 손에 들어갔다가 다시 내 손아귀에 쥘 방법은 있을까? 이게 가능하다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인데…. 잠깐! 혹시 지금 벌어지는 이 일도 분명 전생에 있었던 일인데 내가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아진은 분명히 대현자동차가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지금 할아버지가 벌인 일이 실패할 것은 뻔하다. 어떻게 흘러갈지 모를 때는 한시라도 빨리 내가 아는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 * * 돈이 넘쳐나니 조상 모시는 것도 돈으로 한다. 대한민국 며느리들이 하소연하는 명절 증후군 따위는 이 집안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요리사 서너 명, 보조 조리사 십여 명이 주방을 차지하고 차례상에 올릴 음식을 전부 만들었다. 집안사람들은 차례상을 준비하는 동안 환담을 나누다 절 몇 번 올리는 걸로 차례는 끝났다. 아침 식사는 큰 식탁 두 개로 나눠 앉았다. 회장님과 그 자식, 며느리들과 사위가 한 식탁. 그리고 손자들이 하나를 차지했다. 나는 어른들 식탁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귀를 세웠다. “참, 윤기야. 너 영화 만든 거 어제 개봉했다며? 어때? 개봉성적은?” 모두 궁금했지만 진 회장의 눈치를 보느라 묻지 못했던 것을 둘째 아들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 동기형. 나쁘지 않아. 하나는 꽉 채웠고 하나는… 절반 채웠어.” “오! 대단한데 우리 동생. 첫 작품인데 성공한 거야?” “첫날인데 뭘. 간판 내릴 때까지는 모르는 거야.” 아버지의 입에서 우는 소리가 나왔지만, 표정은 달랐다. 미소를 감출 수 없는 걸 보니 최소한 손해 볼 것 같지는 않았다. 웃기는 것은 진 회장도 내심 나쁘지는 않은 듯 별말 없이 식사만 했다. 이때 좋은 분위기를 초 치는 말이 들렸다. “동서, 나 국 좀 더 가져다줘.” 진동기의 마누라가 어머니에게 국그릇을 내밀었다. 저년은 습관적으로 어머니를 부려먹으려 한다. 진 회장이 나를 아끼는 모습을 보인 뒤로 모두 조심하기 시작했는데 저년은 끝까지 지랄이다. 아무래도 콤플렉스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강남 땅 부자 외동딸인데 얼굴이 영 엉망이다. 열등감과 질투에 사로잡혀 죽자고 달려든다. 아버지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이제 남편 노릇을 하려나 보다. 역시 남자는 바깥일을 해야 가족을 지키는 힘이 솟는다. 하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의외의 사람이 입을 열었다. “둘째 아가, 내 국 좀 더 떠 주련?” “네?” “아직 젊은 애가 귀먹었나? 국 떠 오라고!” 진 회장의 호통에 둘째 며느리는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이미 국그릇을 내밀고 있었다. 둘째는 주방으로 달려가 국을 떠 왔지만 떨리는 손 때문에 국을 흘리기까지 했다. 할아버지가 국그릇을 받고 식사를 계속하자 집 전체가 싸늘할 정도로 고요하다. 할아버지의 수저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단 한 번으로 모든 걸 정리해 버리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를 제대로 된 자식으로, 어머니를 며느리로 인정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지만, 난 할아버지의 뒤통수를 쳐야 한다. 조금, 아니 어마어마하게 미안하지만 침 발라 놓은 내 것은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할아버지, 미안. ======================================== [036] 내꺼야 3. 아침 식사 때 할아버지의 호통으로 싸늘해진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모두 할아버지의 기분을 맞춰주느라 정신없었다. 이 일의 당사자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개봉관 상황을 살펴본다는 핑계로 식사가 끝나자마자 일찌감치 빠져나갔고, 큰아버지는 바쁜 일이 있다며 가장 먼저 떠났다. 할아버지의 계획을 막으려면 먼저 그 계획의 디테일까지 알아야 한다. 서재의 책상에서 흘깃 본 보고서가 자꾸 눈에 밟혔다. 그 보고서가 바로 아진자동차를 삼키는 계획이 분명할 것 같았다. 진 회장을 중심으로 거실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 한동안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조용히 할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가 책상 위의 두툼한 보고서를 들고 바닥에 앉아 재빨리 읽어내려갔다. 목차를 봤을 때 조금 거북한 기분이 들었고 페이지를 넘길수록 거북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매 챕터의 앞부분만 읽으며 보고서의 전체 내용을 파악하고 보고서를 덮었다. 완전히 잘못 짚었다. 이 보고서는 순양의 아진자동차 흡수 전략 보고서가 아니었다. 자동차 산업 통폐합의 필요성과 그에 따른 정부 시책, 그리고 지원방안이었다. 한마디로 순양이 아진을 흡수하는 타당성과 명분을 기록한 것이었고 이 보고서대로 정부가 발표만 하면 아진자동차는 순양의 그룹사로 편입된다. 대현자동차가 아진을 흡수하면 자동차 시장의 독과점이 우려되고, 우성자동차는 GM 지분이 상당히 많으므로 외국 자동차 회사에 넘기는 인상을 준다. 결국, 순양자동차가 가장 적합한 인수자라는 이야기다. 다시 한 번 순양 아니, 재벌의 힘에 놀랐다. 재벌은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만들어 정부에 제시하고, 정부는 그 정책을 행동으로 옮긴다. 마지막으로 입법부인 국회의원들이 거수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으로 끝난다. 멀쩡한 회사 하나를 껍질도 벗기지 않고 삼키는 것이 이런 조합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순양그룹과 정부의 은밀한 밀착의 증거다. 이것이 밖으로 유출되면 정경유착 스캔들이 된다. 젠장. 타격이 너무 크다. 현 정권의 타격이야 신경 쓰지도 않지만 순양의 타격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검찰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책상 한쪽에 놓인 주간정보보고서를 집었다. 가끔 서재에서 할아버지 없을 때 잠깐씩 훔쳐보던 것이다. 아직 내게는 딱히 쓸만한 정보는 없었다. 다만 연예인 스캔들을 조사한 것만 재미 삼아 봤을 뿐이다. 이 보고서는 증권가 찌라시니, X 파일이니 하는 것과 그 성격이 같다. 정치, 경제, 사회, 연예계까지 모든 정보를 총망라한 보고서. 하지만 정보의 양과 깊이 그리고 신뢰도는 찌라시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각계각층에서 순양의 장학생들이 흘려준 정보를 순양그룹 정보팀이 정밀 검증한 것이다. 쓸만한 게 없나 파일을 넘겼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아진자동차에 뻗은 손을 떼게 할만한 소스는 없었다. 정보보고서 파일을 덮자 긴 한숨이 나왔다. 정부에서 자동차 산업 구조개편 발표를 하기 전 막아야 하는데 지금으로써는 막막하다. 이때 전혀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다른 시선으로 이 상황을 본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할아버지를 막는 게 아니라 정부를 막으면 된다. 정부가 자동차 업계는 쳐다보지도 못하게 혼을 빼놓는다면? 조금 전 봤던 정보보고서에 아주 적합한 내용이 하나 있었다. 다른 재벌이 돈 버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아 흘려보냈던 정보. 바로……. [한보그룹 - 수서지구 택지개발 용도변경의 件] 이거 아주 쓸만하다. 언론이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먹잇감, 바로 정부다. 아무리 물어뜯어도 욕하는 국민이 없다. 언론이 정부를 씹을수록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한다는 좋은 평가만 남는다. 이 역시 돈으로 직결된다. 국민이 언론을 좋아할수록 글자 한 자의 가치는 더욱 커지는 법이니까. 현 정부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흠집이 나면 순양그룹이 만든 자동차 관련 보고서는 휴짓조각이 된다.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은 정부가 나서서 자동차 산업 구조조정을 한다면 또 하나의 스캔들이 될 것이다. 자동차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절대 입에 올리지 못할 게 뻔하다. 나는 수서 택지개발 관련 정보를 팩스 기기로 재빨리 카피했다. * * * “이거, 너무 커졌는데… 괜찮으려나.” 설 연휴 직후 정보 파일을 정리해서 우리나라의 모든 언론사에 우편으로 보냈다. 며칠 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어 한보그룹의 눈치를 보나 생각했지만, 그들도 내 제보를 확인하느라 시간이 걸렸나 보다. 며칠 뒤, 세계일보가 포문을 열었고 뒤이어 전 언론사가 이 사건에 화력에 집중하여 보도하기 시작했다. 아진자동차에 대한 기사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신문 방송은 연일 수서 특혜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메인 기사로 쏟아내는 중이다. 3월이 끝나가는데도 거의 한 달째 시위가 끊이지 않는다. 88년, 자연 녹지에 불과한 수서지역 3만5000평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정부의 계획을 입수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이 땅을 모두 사들였다. 서울시의 처음 계획은 아파트를 지어 무주택 서민들에게 분양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정태수 회장의 전방위 로비로 '특정조합에 대한 특혜 불가'라는 방침을 5개월 만에 뒤엎고 택지 공급을 결정했다. 서울시는 장병조 청와대 문화체육비서관의 압력으로 방침을 변경했다고 실토했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국회의원들도 한보의 뒷돈을 받아 서울시를 압박한 사실까지 나왔다. 청와대 비서관이 몸통으로 지목됐지만, 그가 깃털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언론과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대의 화실은 청와대를 향했고 6공화국 최대의 스캔들로 커지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자동차에 눈 돌릴 정신머리는 없을 것 같긴 한데….” 내 생각처럼 청와대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고 노태우 정권의 레임덕이 시작되었다. *** “당분간 청와대와의 연락은 자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식 매집도 보류했습니다.” 이학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책상을 톡톡 치는 진 회장의 눈치만 살폈다. 그렇게 준비했는데 의외의 곳에서 불똥이 튈 줄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학재야.” “네. 회장님.” “쉽게 사그라질 불길은 아니지?” “그럴 것 같습니다. 대검 중수부에서 전방위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여의도 의원 여섯을 시작으로 서울시, 청와대 비서관들까지 출두 요청을 했습니다.” “한보 정 회장은?” “이미 출국금지 상태입니다. 그룹 차원에서 변호인단 꾸리느라 뛰어다닌답니다.” “검사장급 구하러 다니겠구먼.” 진 회장은 한심하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통령 임기는 24개월이라는 말이 있다. 첫해 2년은 뭐든지 밀고 나갈 힘이 있지만, 나머지 3년은 꾸준한 내리막이다. 이제 임기가 2년밖에 남지 않은 시기에 이 정도 스캔들이면 대통령의 힘은 다 잃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제 권력은 여당 총재에게로 급격히 이동할 것이다. 다음 총선이 딱 1년 남았다. 당 총재가 공천권까지 쥐고 있으니 청와대는 식물 정권으로 전락하는 건 불 보듯 뻔하다. 그런 청와대는 자동차 산업의 개편을 추진할 수도, 추진하지도 못한다. “이번 정권에서는 땅 투기는 하지 말자고 그렇게 말했는데… 쯧쯧.” “정 회장 땅 욕심이야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 욕심이 우리 계획까지 망칠 줄 몰랐지만…….” “현직 검사장들한테 알려. 괜히 정태수 변호한답시고 사표 내면 우리 순양은 인연 끊는다고 경고해.” “알겠습니다.” 이학재도 이런 식으로라도 화풀이하려는 진 회장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정 회장의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진 회장은 잠자코 곁에 앉아 있던 조대호 사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송 회장은 어때? 잔치 벌이지 않았나?” “비슷합니다. 저한테 채용하지 않겠다고 통보하며 웃더군요.” “고생했다. 조 사장.”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송구합니다.” 조대호 사장이 머리를 숙였다. “4월 정기 인사 때 다시 자동차로 복귀해. 신차 개발 차질없이 준비해야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떨구었던 머리를 드니 환한 조 사장의 얼굴이 보였다. “학재야. 아진자동차 주식 사들인다고 돈 좀 깨졌지?” “괜찮습니다. 아진 송 회장 두들겨 맞을 때 주가가 폭락했지 않습니까? 그때 매입한 물량으로 물타기 했습니다. 지금 다시 팔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손 털고 빠져.” 진 회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순양경제연구소에서 만든 전략 보고서를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 * * 영국 밴드 퀸의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로 사망한 91년이 지나가자 서태지가 92년을 휩쓸었다. 또한, 서태지보다 더한 인기를 얻게 될 김영삼 씨가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양 김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듯 김대중 씨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92년은 저물어갔다. TV를 통해 이 모습을 보던 오세현은 TV를 끄고 아쉬운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쪽은 물러나고 한쪽은 시작하고. 참 대단하구만.” “우리도 이제 시작해야죠.” “뭘 시작해?” 오세현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변했다. 그간 나 때문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내년엔 묻어둔 돈을 좀 움직이려고요.” “돈? 미라클에 있는 돈?” “네.” “어디에? 어떻게?” 나는 손을 들어 오세현의 입을 막았고 생각해둔 계획을 조심스레 꺼냈다. “삼촌. 이제 저랑 동업하시죠.” “뭐?” “파워세어즈 그만두시고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에 올인하시라고요. 어차피 2%나 되는 주주시고, 우리도 돈 많이 벌었으니 고액 연봉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않겠어요?” 처음은 충격, 그다음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전혀 달랐다. 내 제안이 끝나자마자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싫은데?” “네? 왜요?” “주식의 98% 보유자가 독단적인 투자를 결정하고 그 결과는 항상 성공이었는데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안 그래?” ‘첫 제안은 무조건 거절하라’라는 닳고 닳은 협상 테크닉을 쓰는 게 아니다. 완벽한 거절이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제안을 해야 스카웃을 할 수 있다. “한국에 지사도 만들 겁니다. 이제 자금의 일부는 한국에 두고 운용할 생각이에요. 또… 할아버지 비자금 있죠?” “그래.” “전 델 컴퓨터에 투자한 돈만 굴릴 테니까 할아버지 비자금과 나머지 돈은 삼촌이 운용하시고요. 삼촌을 허수아비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오세현은 내 제안보다 델 컴퓨터에 묻어둔 돈을 굴린다는 말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뭐? 그 돈을 빼려고?” “네. 내년 초에 뺄 생각입니다.” “미쳤어? 델은 최고 수익률을 매일 갱신하는 골든 덕이야. 그걸 왜?”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제가 말씀드린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참, 오해하지는 마세요. 제안하는 게 아니라 부탁드리는 겁니다.” 차분한 내 말투 때문인지 오세현은 흥분을 가라앉히느라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몇 분간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을 때 협상가의 자세로 돌아왔다. “내가 필요한 것을 정리해서 다시 말할게. 그거 보며 다시 이야기하자.” 뭐가 됐든 다 들어줄 생각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오세현 같은 어른이다. 나를 더 이상 어린애 취급을 하지 않으면서도 똑똑하고, 경험 많고, 결정적으로 전 세계 어딜 가든 꿀리지 않는 경력을 보유한 사람.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날 대신할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협상 과정도 중요한 법이다. 그가 요구하는 내용을 검토하는 척하며 받아들여야 그도 만족감을 느낀다. 협상은 좋은 조건보다 원하는 것을 다 얻었다는 만족감이 우선이다. “도준아, 델 컴퓨터의 자금은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래?” “일본에 투자할 생각입니다.” 일본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세차게 머리를 흔든다. “안돼! 몰라서 그래? 일본 경제는 지금 침몰 중이야. 너도 신문 보잖아. 거품이 터지며 최고의 위기를 맞은 게 일본이라고.” 나 역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삼촌. 최고의 기회는 항상 최고의 위기 속에 있습니다. 잘 아시면서…….” “그건 성공한 놈들 이야기고! 위기 속에서 기회를 잡은 놈은 백만 명 중에 하나다. 모두 그 위기 속에 빠져 죽었어.” “삼촌. 제가 그 백만명중의 한 명이라는 생각은 안 드세요?” ======================================== [037] 욕심내지 말자 1. 뉴욕의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가 백 퍼센트 출자한 한국 투자사를 설립하고 오세현은 미국과 한국, 두 법인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이제 대주주인 나와 전문경영인 오세현은 미묘한 관계가 되었다.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은 듯했지만, 내 의견을 듣고 즉석에서 반대하는 일이 없어졌다. 좀 더 귀를 기울였고 나와 반대되는 의견을 낼 때는 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타당성 있는 의견이었다. 특히 내가 델 컴퓨터 주식을 전량 매각하겠다고 했을 때 흥분하지 않고 주가 추이 그래프부터 보여주며 말했다. “지난주 주가가 47달러야. 상장 이후 단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그야말로 다이아몬드급이라고. 60달러 넘어가면 그때 다시 검토하는 게 어때?” “거품은 없다고 생각하세요?” “당연히 있지. 하지만 거품도 주가의 구성 요소야. 내가 60달러라고 이야기 하는 건 그 거품이 꺼지는 시기가 바로 60을 찍었을 때야. 사람들이 거품을 의심하는 단계거든. 그때 엑시트해도 늦지 않아.” 주가를 분석하는 눈이 날카롭다. 나야 주식 투자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 거품이니 뭐니 알 도리가 없다. 마이클 델이라는 개인에 관해서 관심을 두다 보니 델 컴퓨터의 주가를 잘 알 뿐이다. 49달러까지 치솟던 주가가 10달러로 폭락하고 다시 60달러까지 치고 올라갔고 그 수준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잘 아는 이유가 이것이다. 하지만 오세현은 60달러라는 수치를 예측했다. 굉장한 사람이다. “삼촌. 우리는 백배 이상의 수익을 냈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욕심 더 부릴 이유도 없고.” “네 말대로 욕심부리지 않으려면 델 컴퓨터 팔고 안정적인 곳에 투자하면 돼. 코카콜라, 하인즈 등등. 안 그래?” “그건 너무 안정적이죠. 투자사가 할 일은 아닙니다. 개인이 해야지.” 이제 균형도 잘 잡는 삼촌이다. 한숨 한번 쉬고 한 발 뒤로 물러선다. “일본이라고 했지? 봐 둔 데는 있니?” “좀 알아봐 주시겠어요? 괜찮은 곳 있는지?” 내 입으로 말하기 전에 오세현이 찾아내는 곳도 보고 싶었다. 어쩌면 나보다 더 훌륭한 회사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그럼 내가 리스트 뽑아 올 테니까 다시 논의하자. 미국보다 더 좋은 곳 없으면 생각 바꿀 거지?” “물론이에요. 가장 좋은 곳에 투자하는 건 기본이잖아요.” 나 역시 한발 물러서는 척했다. 꼭 필요한 사람이니 이 정도 비위는 맞춰줘야 하지 않겠는가? * * * “할아버지 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십시오.” “됐다. 큰 절은 무슨…. 좀 어른스러워진 것 같은데, 어떠냐? 많이 배웠냐?” 독일에서 몇 년 만에 돌아온 진영준의 큰절은 마다한 진 회장은 매서운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매주 올라오는 지사 보고서로 진영준의 생활이 빠짐없이 확인했다. 드문드문 만취하도록 술 마신 적은 있지만, 딱히 사고랄 것은 없었다. “독일 갈 필요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뭐라?” 진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진영준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우리 전자제품은 없어서 못 팝니다. 생산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요. 유럽 유통사들이 선금 넣고 대기할 정돕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 할아버지 덕분이었니까 할아버지 밑에서 직접 배우는 게 더 빠를 것 같더군요.” “그게 내 덕분이다?” “편의 기능은 다 빼고 필수 기능만 넣어 싼 가격으로 공중 살포해 버리니까 동유럽은 물론 서유럽까지 열광합니다. 이게 다 할아버지 전략 아닙니까?” 진영준은 진 회장 곁에 앉으며 머리를 꾸벅 숙였다.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여자 멀리하니까 머리가 좀 깨끗해진 것 같구나.” “술도 안 마셨습니다. 아주 가끔 와인 좀 마신 게 전부에요.” 진영준은 할아버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발견하고 안도했다. 이 정도면 자신을 불신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돌린 것 같았다. 이제 귀양살이를 끝내고 싶었다. 한국에서 순양그룹 맏손자라는 명함은 무소불위의 힘을 가졌지만, 독일은 짤 없다. 순양이라는 이름을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안다 한들 그게 전부다. 교포 사회에서나 통하는 게 전부였다. 하루라도 빨리 이 땅에서 황태자처럼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기대를 무참히 꺾어버렸다. “그래. 절제하며 지내는 거 지사장들이 다 칭찬하더라. 딱 서른까지만 지금처럼 열심히 해. 그런 다음 돌아와서 요직에 앉아.” 벌떡 일어나 너무하신 거 아니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유럽에서 배운 인내심 덕분에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네. 할아버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진영준은 이렇게 새해 인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 집 앞에서 퉤 하고 침을 한번 뱉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른까지는 유럽에 처박혀 있으랍니다.“ “그래서? 넌 혹시 발끈 한 거 아니지?” “아이고, 아버지. 저도 이제 철부지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다고 하고 나왔어요.” “잘했다.” 진영기 부회장은 아들의 어깨를 한번 두들겼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앉은 자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너희들도 성인이니까 내 말 명심해. 할아버지는 분명 너희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실 거다.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소문이 들리면 그건 너희뿐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까지 불똥이 튀는 거야.” 장녀인 혜경과 막내인 경준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상속 순위가 한참 뒤인 자신까지 할아버지 눈에 들 이유는 없다. 지금 아버지가 하는 말은 이 집 장남인 진영준을 위해 사고 치지 말라는 소리라는 걸 충분히 안다. 아버지 말대로 성인이니까 말이다. “혜경이 넌 다음 달에 대학 졸업하면 괜찮은 놈 소개 시켜줄 테니 결혼 서둘러. 그리고 유학을 가던….” “아빠! 요즘 누가 졸업하자마자 결혼해요? 몇 년 더 있다가….” “내 말 끝까지 들어!” 진영기의 호통에 두 자식의 삐죽 나왔던 입이 쏙 들어갔다. “너희가 한 거라고는 할아버지 핏줄이라는 거 뿐이다. 그 덕분에 하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다 누리며 사는 거야. 만약 할아버지가 너희를 버리면 지금 사는 수준의 절반도 누리지 못한다.” “아버지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작년부터 할아버지가 변한 거 모르지? 사람은 늙어갈수록 생각이 바뀐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장남이 떠오르고 먹을 게 있으면 막내 주고 싶은 게 늙은 부모 마음이다. 지금 할아버지의 애정은 바로 너희들 막내 삼촌과 도준이 가족에게 쏠리고 있어.” 모두 어느 정도 분위기는 짐작한다. 진 회장이 그 바쁜 와중에 막내 삼촌이 만든 영화를 챙겨본다는 이야기까지 들렸다. “할아버지 연세를 생각해. 살면 얼마나 사시겠니? 그때까지만 사고 치지 말고 할아버지 자주 찾아뵙거라. 순양그룹이 이 아버지 손에 들어오면 너희들 하고 싶은대로 살아도 돼. 알아들었어?”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지내는 거랑 결혼이 무슨 상관있어요?” 혜경이 발끈해서 소리치자 진영기는 답답한 듯 고함이 터져버렸다. “우리 집안에서 연애결혼 한 사람 누가 있어? 윤기 삼촌 봐! 십 년 넘게 버린 자식 취급받으며 살았어. 그게 원하는 결혼의 대가다. 네가 결혼을 네 마음대로 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짐 싸서 나가!” 진혜경은 아버지의 호통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진영기는 자식들 모두 머리를 떨구고 눈치를 보자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요즘 불안해서 잠을 잘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작년 아진자동차 인수가 불발로 끝나자 아버지 진 회장이 돌변했기 때문이다. 그룹의 굵직한 사안이 자신도 모르는 채 진행되기 일쑤였으며 자신이 전결 처리하던 계열사 현안도 마지막은 회장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룹 내에서 후계 구도가 바뀔 거라는 이야기가 솔솔 번지기 시작했고 계열사 사장들도 자신을 건너뛰고 직접 회장에게 보고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버지가 변한 건 확실하다. 그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한다. 단 한 번도 경계하지 않았던, 아니 존재조차 미약했던 조카 하나가 집안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진영기는 자기 자식들 때문에 순양그룹의 주인이 되지 못할 바에는 자식을 버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이미 굳혔다. * * * “숨은 보석을 하나 발견했는데 만만하지가 않아.” 오세현이 내미는 리스트에는 단 하나의 회사만 올라 있었다. “작년 매출액이 천억 엔, 우리 돈으로 팔천억 가까이 돼.” “그럼 이미 다 자란 거위 아닌가요?” “이 회사는 IT 산업과 그 궤가 같아. IT 산업이 성장할수록 이 회사도 커지거든. 앞으로 더 커질거야.” 92년, 마이크로소프트가 내놓은 윈도우 3.1이 일본 컴퓨터업계를 평정했다. 또한 MS Office 같은 소프트웨어 역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일본의 소프트웨어시장 규모는 대략 한국의 스무 배다. 인구는 두 배가 좀 넘을 뿐이지만 저작권 인식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 판매권을 가진 소프트뱅크는 순식간에 대형 기업으로 커버린 것이다. ‘사실 저도 소프트뱅크를 생각하고 말씀드린 겁니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 생각과 일치하는데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 과는 주인이 짊어지고 공은 아랫사람에게 돌리는 게 참다운 주인의 미덕 아니겠는가? “만만하지 않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회사가 궤도에 올랐으니 굳이 투자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거야. 이 회사 창업자…. 아 참, 이 사람 재일교포 3세야.” “저도 알아요. 신문에 한 번 났어요. 성공한 교포들 특집 기사에서요. 좀 괴짜라고 하던데.” “그래? 아무튼, 일본에서 성공 신화를 쓰다 보니 투자자들이 많이 몰렸어. 그런데 아쉬울 게 없으니 전부 거절했다고 하더구나.” “델 컴퓨터와 똑같은 경우네요.” 이처럼 되는 집은 찾아오는 사람이 돈을 싸 들고 오고, 안되는 집은 찾아오는 사람 모두가 빌려 간 돈 내놓으라고 한다. “아니. 이쪽이 훨씬 더 고자세야. 사장이 워낙 자신감에 넘쳐서 말이야.” “혹시 상장 예정입니까?” 인터넷 기사 쪼가리로 본 게 전부라 정확한 시점은 전혀 모른다. 하지만 상장할 때 백배는 가뿐히 넘겼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글쎄, 그런 말은 없던데?” “그럼 아직 기회는 남아있군요.” “문제는 설득인데…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아.” 지금까지 투자를 실패한 사람들은 나와 다르다. 그들은 소프트웨어 유통사가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더라도 주가가 폭등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다. “삼촌.” “응.” “할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한 적 있어요.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가격이 있다. 단, 사람마다 생각하는 가격은 다 다르다.” “뭐, 대단한 말씀 같지는 않은데? 그 흔한 물도 판매하겠다잖아.”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생수를 판매한 것은 88 서울올림픽 때다. 당시 정부는 올림픽 기간 중 외국 선수들 때문에 생수 판매를 허용했다가, 올림픽이 끝난 뒤 금지했다. 정부는 생수 시판이 자칫 돈 있는 사람은 생수를 사 먹고 돈 없는 사람은 수돗물을 마시게 돼 국민들 사이 위화감의 조성을 우려했고 지하수 고갈과 환경오염 등의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며 생수 판매를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수 업자들은 생수 판매 허용을 줄기차게 요구하며 현재 헌법재판소에 제소한 상태다. “그러니까요. 소프트뱅크의 주식도 상품이잖아요. 분명히 팔 겁니다. 돈만 많이 주면요.” 내 말에 오세현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럼 넌 얼마까지 줄 수 있다고 생각해?” “삼촌 생각은 어떠신데요?” 그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손바닥을 내밀었다. “다섯 배. 이 정도면 상장 후 초기 탄력으로 30% 정도의 차익은 남길 수 있을 거야.” “다섯 배로는 그쪽에서 관심 두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무리라는 이야기야. 다섯 배까지 제안한 투자자는 많을 테니까. 역으로 생각하면 이 이상은 투자 가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럼 소프트뱅크 사장은 다섯 배 이상주면 팔지도 모르겠네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 말에 오세현이 빙긋 웃었다. “그럴지도. 넌 몇 배까지 생각하는데?” “몇 배수로 팔지는 소프트뱅크 사장에게 물어보죠.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제안하면서요. 그 사장님, 얼마나 괴짜인지 확인 하고 싶거든요.” 큰 욕심 부리지 않는다. 딱 두 배만 남겨 먹자. ======================================== [038] 욕심내지 말자 2. “미국?” “그렇습니다. 뉴욕 맨해튼에 본사가 있죠.” “선생님은 한국 사람이시고요?” 만 36세의 젊은 손정의, 일본 이름 손 마사요시는 영어와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는 중년의 한국 남자 오세현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우리 투자사의 자본은 한국입니다만, 주로 미국 기업과 헐리우드 영화에 투자합니다.” “그럼 만약 투자하신다면 달러를…?” “그거야 사장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할 수 있죠.” “그런데 우리 소프트뱅크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우리 회사도 마이크로소프트의 주식을 꽤 많이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기마다 항상 경영보고서를 받죠. 갑자기 일본 실적이 도드라져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 협상할 때 공통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은 꽤 좋은 카드다. 낯선 사람이 아니라 지인과 관계자가 됨으로써 경계심이 묽어지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미국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아뇨. 한국에서 왔습니다.” “다행이군요.” 살짝 비웃는 듯한 미소. 오세현은 부정적인 반응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가까운 곳에서 오셨으니 제가 덜 미안하군요. 이미 팩스로 알려드렸다시피 지금은 외부 투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직접 왔죠. 손 대표님을 설득하러요.” “음…. 글로 보셔서 제 생각을 정확히 전달 못 한 것 같아 죄송스럽군요. 어떤 조건이라도 투자는 받지 않습니다. 이 생각은 변하지….” “열 배 드리죠.” 느닷없이 조건을 던져 버리는 오세현 때문에 손정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게다가 열 배라는 파격적인 제안. 하지만 오세현은 독약을 삼키는 심정으로 말을 뱉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주워 담고 싶은 말이었다. ‘애가 뭔 놈의 배포가 이리 큰지… 핏줄은 못 속이나.’ # # # “도박은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들죠. 아닙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학교에서 짤짤이라도 하는 거야?” 도박에 이성 잃은 놈을 이 순양그룹에서 수없이 봐왔다. 수백억을 날리고 그 돈을 메꾸려고 회삿돈을 빼돌린다. 횡령으로 검찰 수사망에 걸리면 외국으로 피신해서 다시 카지노를 들락거린다. 순양그룹에서 검찰을 달래고 나면 도박 빚만 잔뜩 진 채 귀국하는 일을 되풀이한다. 이 집안 놈들은 마약은 끊어도 도박은 끊지 못한다. 돈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에는 동전 들고 다니는 애 없어요. 만 원짜리 이하도 안 들고 다녀요. 카드는 기본이고요.” “그래? 역시 있는 집 놈들은 다르구만. 그렇다 치고, 도박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소프트뱅크 사장하고 포커라도 치려고?” “네. 레이스 한번 해보죠.” “레이스?” “소프트뱅크 주식 매입가를 열 배부터 레이스 하는 겁니다.” “뭐? 아, 아니다. 계속해봐.” 깜짝 놀란 오세현의 얼굴을 오랜만에 본다. “그다음부터 다섯 배를 계속 더하는 겁니다. 열다섯, 스무 배, 스물다섯 배…. 단, 언제든 멈출 수 있다는 걸 미리 알려줘야죠. 그리고 멈추면 협상은 그 자리에서 끝낸다는 것도요. 되돌릴 수는 없다…. 이게 도박 아닐까요?” “그 손정의라는 놈, 후달리겠는데? 으하하.” 오세현은 무릎을 탁 치며 크게 웃었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럴듯한데, 목적을 잊어서는 안 돼. 만약 스무 배에 그자가 오케이 한다면 우린 손해 본다. 아니, 열 배만 해도 손해 볼지도 몰라. 우린 투자 이익이 목적이지 소프트뱅크 인수가 목적이 아냐.” “전 오십 배까지 레이스 할 생각인데요?” 열 배라는 말에는 놀랐지만 오십 배라는 말에는 놀라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표정만 보일 뿐이었다.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델 컴퓨터는 이미 백배가 넘었습니다. 소프트뱅크 주식도 백배가 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소프트뱅크는 제조사가 아냐. 유통사일 뿐이야. 백배? 돈을 전부 잃을 수도 있어.” “상대를 도박판에 앉히고 우리만 빠질 수는 없죠. 혼자 치는 포커는 없지 않습니까? 끝은 봐야죠.” 오세현은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박 운은 네가 강하니까 이 레이스 한번 해보지. 판돈은 내가 키워보마. 그런데 도준아.” “네.” “도박의 끝은 패가망신이다. 명심해라.” 담담한 목소리. 투자사 대표이사가 아니라 아버지의 절친 모습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겁니다.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요.” 오세현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 # # “지,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열다섯 배 드리겠습니다. 아, 한가지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가 이 의자에서 일어서면 뒤는 돌아보지 않을 겁니다. 또한, 제안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십 배!” 느긋한 오세현과 달리 손정의의 손끝이 떨렸다. “스물다섯 배.” “자, 잠깐만요!” 오세현은 판 돈 넉넉한 사람이 레이스를 이끄는 방법 정도는 안다. 상대가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는 것도 안다. 쉴틈없이 몰아붙여야 패를 덮고 항복한다. “서른 배.” “…….” 바로 이때 상대의 떨리는 손이 멈췄다. 게임의 규칙을 깨닫자 평정을 되찾았다. 역시 보통이 아니다. 저 평정의 의미를 알기 힘들었다. 오세현의 판돈을 가늠하고 있는 건지, 진심으로 투자를 원하지 않는 것인지…. 어떤 것일까? “서른다섯 배.” 역시 침묵이다. 오세현은 의자 곁에 내려놓았던 서류가방을 집어 들었다. 블러핑이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오세현은 레이스는 계속되었고 손정의는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두고 보자는 마음인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십 배.” “……콜.” 얼굴에 드러났나? 마지막 베팅 순간을 정확히 알아차렸다. 레이스가 끝나자 손정의의 표정에는 승자의 거만함이 드러났다. 졌다. 쪽팔리지만……. 하지만 오세현에게는 아직 끝난 판이 아니었다. 이제 판돈을 키울 차례다. “오십 배에 몇 주를 주시겠습니까?” “그 부분은 내부 회의를 거쳐서….” “마흔다섯 배.” “뭐요? 이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눈치 빠른 사람이니 새로운 판이 시작되었고 순식간에 게임의 룰을 알아챘다. “마흔 배.” “백만 주. 더 이상은….” 이제 오세현이 상대의 판돈을 읽어내야 한다. 투자 배수가 줄어드니 주식의 양을 늘려야 오십 배의 차익을 건질 수 있다는 걸 모를 사람이 아니다. 두 사람은 재빨리 계산을 시작했다. 몇 주를 넘겨야 최대 차익을 남기는가? 하지만 이 판을 이끌어가는 건 오세현이었다. 손정의는 이미 잉여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다시 베팅했다. “서른다섯 배.” “오백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가라앉았으니 마지막 베팅이다. 이제 레이스를 멈춰야 했다. 이것은 자존심 싸움이 아니라 협상일 뿐이니까 말이다. “……콜.” 도박이 끝나자 두 사람 모두 동시에 긴 숨을 내쉬었다. 긴장했던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오세현이 손을 내밀었지만, 마주 잡는 손이 나오지 않았다. “오백만 주는 지금 당장 무리입니다. 최소 이백만 주는 증자해야 가능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지금에 와서 판을 깨자는 소리는 아닌 듯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해결하자는 의미였다. “좋습니다. 이백만 주는 증자, 삼백만 주는 인수. 그렇게 결론 내죠.” 그제야 손정의도 손을 내밀며 활짝 웃었다. 액면가 150엔의 주식을 5,250엔에 팔았다. 두 번의 밀고 당김으로 250억 엔을 벌어들인 것이다. 웃음을 참기 힘든 건 당연했다.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미라클 인베스트먼트는 제게 생소한데… 자금력이 상당한가 봅니다.” “그런 편이죠. 지금 당장 현금으로 굴릴 수 있는 돈이 천억엔 이상이니까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손정의를 앞에 두고 오세현은 이미 계약서 초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 * * “서른다섯 배, 오백만 주로 계약했다. 이제 네 운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염려 마세요. 잘 될 거에요.” “그런데 진짜 델 주식 다 처분할 거니?” 설득은 포기한 듯 보였고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느낌이다. 승승장구하는 주식을 팔고 그 돈의 일부를 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가격으로 고작 소프트웨어 유통사의 주식을 매입한다. 누가 보더라도 미친 짓이지만, 이 짓으로 조 단위의 돈을 번 놈이 눈앞에 있다. “백배 벌었는데 붙잡고 있을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델 주식 처분하고 소프트뱅크 주식 매입 후, 남은 돈은 삼촌이 만지세요. 저도 내년이면 고등학생입니다. 3년간은 공부만 하려고요.” “학생 입에서 공부한다는 소리가 이렇게 어색한 건 네가 처음이다. 흐흐.” 피식 웃음을 터트리던 오세현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항상 전교 1등인 네가 서울대 가고 싶어 하는 건 뻔할 테고, 전공은? 아무래도 경영학과나 경제학과겠지?” “아뇨. 전 법대 갈 건데요?” “법대?” “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오세현은 눈을 깜빡거렸다. 충분히 돈을 벌었으니 판검사나 하며 탱자탱자 살 놈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우리나라 최고 기업가인 할아버지와 영국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삼촌이 제 곁에 있는데 대학에서 뭘 배우겠어요?” “그럼 법대는? 거기서는 뭘 배우려고? 설마 판검사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죠. 그냥 보여주는 거죠.” “뭘 보여줘?” “재벌 3세치고는 공부 잘한다는 거요. 아직 재벌 집에서 서울대 간 사람은 있어도 법대 갈만한 성적 낸 사람은 없잖아요.” 법대를 희망하는 진짜 이유를 짐작한 듯 오세현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진 회장에게 눈도장 한 번 더 찍으려는 의도라고 생각한 것이다. 특별히 부연설명은 하지 않았다. 굳이 알릴 이유도 없다. “그렇구나. 자, 그럼 델은? 언제 매각하는 게 좋을까?” “지금 거래가가 47달러에서 49달러 왔다 갔다 하죠?” “그래.” “그럼 그 선에서 다 넘기죠.” “알았어. 그리고 지금 환율이 달러당 111엔이야. 2억3천만 달러는 소프트뱅크에 넣고 나머지는 네 말대로 내가 관리하마. 됐지?” 이제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다. 미국에서 보내주는 영화 제작 리스트를 보며 투자 여부만 결정하는 게 전부다. 공부에 전념하여 꼭 서울대 법대를 갈 것이다. 한국 고위 관료의 상당수가 여기 출신이다. 이 학교를 나오지 않은 진 회장은 이들을 수족처럼 움직인다. 바로 돈의 힘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끈끈한 줄은 바로 학맥, 그중에서도 대학이다. 나는 한 손에는 돈을, 다른 한 손에는 동문이라는 줄을 쥐고 관료들을 수족처럼 부릴 것이다. 그래야 그들은 스스로를 수족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 돕는 동문이라 생각할 것이다. 이 미묘한 차이가 바로 돈으로 사람을 부리는 진영기 부회장보다 내가 조금 더 앞서나가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공부에 전념하겠다는 내 계획은 잠시 중단해야 했다. 뜨거운 나날이 계속되던 한여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신문을 펼쳤을 때 모든 헤드라인이 마치 복사라도 한 듯 똑같았다. [세계 반도체업계 “초비상”] 눈이 번쩍 뜨였다. 올해 들어 반도체수출이 상반기 중 단일품목으로 최대인 20억 달러를 넘어서는 등, 단군 이래 최대호황을 누리고 있는데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 [039] 행운도 몰려다니네? 1. 몹시 다급한 상황임을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진 회장이 직접 본사로 달려가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이학재를 비롯한 순양전자, 순양물산의 사장과 임원. 그리고 일본 오사카 지사장까지 첫 비행기를 타고 회의실에서 대기 중이었다. 대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진 회장이 나타나자 모두 벌떡 일어났지만 진 회장은 손을 내저었다. “그냥 앉아. 예의 차릴 정신 남았어?” 진 회장이 상석에 털썩 주저앉자 오사카 지부장이 입을 열었다. “화재가 크게 났습니다. 에히메(愛媛?) 공장 수지 플랜트가 폭발하는 바람에… 생산은 불가능합니다.” “현지조사단은 오늘 첫 비행기로 출발했습니다. 상공자원부도 내일 출발한다고 합니다.” 순양전자 사장의 보고가 뒤를 이었다. “현재 확보한 재고는 사 개월 치입니다. 만약 넉 달 뒤에 생산 재개가 안 된다면 우리 생산 라인도….” “에히메 공장 정상가동은 내년이나 되어야 가능합니다.” 오사카 지사장이 진 회장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스미토모에서 다른 2개의 자사 공장의 생산품목을 긴급 전환한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아마 수급문제는 해결 될 것 같습니다.” “아마? 같습니다?” 진 회장의 이마에 핏줄이 툭툭 튀어나왔다. “스미토모 바로 옆에 있는 놈이 추측이나 하고 있어? 너 뭐하는 놈이야!” 오사카 지사장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지금은 추측이 전부일 뿐이다. 괜히 자신 있게 말했다가 잘못됐을 때 그 책임을 짊어질 자신이 없다. 올해 매출목표 10조, 영업이익 1조5천억,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 이 무시무시한 숫자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진 회장뿐이다. “공장은 절대 서면 안 돼! 야! 손훈재!” “네 회장님.” “미국 거 확보해와.” 순양물산 사장 손훈재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렵사리 힘든 말을 꺼내야 했다. “미국 다우케미컬은 이미 인텔과 독점 계약을 맺었습니다. 물량확보는 불가능합니다.” “국내 기업도 에폭시 패키징을 생산한다고 들었습니다. 아쉬운 대로 그쪽 물량 전부 확보하면 생산라인이 멈추는 사태는 막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학재 실장이 순양전자 사장을 향해 물었지만, 부정적인 대답만 돌아왔다. “국내산은 1메가 이하에만 사용 가능합니다. 주력인 4메가에 사용하기에는 품질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모두 안된다,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진 회장은 화를 터트리지 않았다. 에폭시수지는 스미토모의 독점 시장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닦달해 봤자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스미토모는 일본은 재벌 해체 이후에도 살아남은 미쓰비시, 미쓰이와 더불어 3대 재벌집단 중의 하나다. 대외 인지도는 가장 낮지만, 생각지도 못한 기업들이 많다. 화학이 주력이며 전기, 상사, 보험 등의 금융업에도 진출해 있다. 또한, 신문과 맥주로 유명한 아사히 그룹을 준 계열사로 거느릴 정도로 거대하다. 버블 경제의 붕괴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일본이지만 90년대의 일본 경제는 한국과 비교할 수 없다. 한국의 항공, 조선, 전기, 전자, 자동차 전체매출이 일본 미쓰비시 매출에 불과하다. 에폭시수지는 반도체 조립 때 칩을 둘러싸는 몰딩의 소재로, 반도체 전체 원료 가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재료다.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재료라는 게 문제다. 세계 에폭시시장에서 스미토모사의 점유율은 1% 남짓이지만 반도체에 사용하는 고급 에폭시수지는 세계 공급량의 60%를 점하고 있다. 또한, 국내 반도체 생산 공장은 스미토모 화학의 의존도가 무려 95%다. 수조 원대의 한국 반도체 산업이 전체 물량이라고 해봤자 불과 이백억 정도밖에 되지 않는 스미토모에 발목을 잡힌 것이다. “결국 스미토모가 재빨리 생산 라인을 변경해야 우리가 살아남는 것이구만. 우리는 두 손 모아 비는 게 전부고….” 호떡집에 불난 것보다 더 호들갑을 떨었지만 진 회장을 비롯한 순양의 핵심 인사들은 스미토모의 대책 발표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 * * 신문 기사를 보자마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순양그룹에 입사한 후 연수받을 때의 교육내용, 바로 순양전자의 발전사였다. 지금 지금 내가 들고 있는, 모델명 SY-700이라는 휴대폰. 순양전자의 두 번째 휴대폰이면서 최초로 들고 다닐만한 무게 100g대의 전화기. 93년, 이 휴대전화가 나왔다는 걸 설명할 때 잠깐 언급했던 스미토모 화학의 폭발사고. 별것 아닌 일 일지도 모르지만 자꾸 마음에 걸렸다. 바로 독점이라는 단어 때문에. 오죽하면 정부에서도 『반도체 장비와 주요소재의 해외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우리나라 반도체업종의 취약성이 노출된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을까? 기업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유혹적인 단어, 독점. 게다가 전자산업의 쌀이라는 반도체를 쥐고 흔들만한 힘을 가진 독점이다. 이 독점의 힘을 내 손에 쥘 수만 있다면 앞으로 순양전자의 향방에 큰 힘을 발휘할 텐데…. 대상이 너무 크다. 순양과 비교하기 힘든 거대한 스미토모 그룹이 아닌가? 내가 돈은 좀 있지만, 그 돈으로는 어찌해볼 방법이 없다. 그러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미련이 사라지지 않았다. 거의 한 달 동안 신문 기사와 방송을 챙겨보며 사태 추이를 살펴볼 때 에폭시 공장의 폭발 사고 따위와는 비교하기도 힘든 사건이 터져버렸다. 이번에는 멀리 외국이 아닌 바로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청와대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8월 12일 저녁 7시. 모든 TV 방송은 정규방송을 중단한 채 대통령의 긴급 담화 발표를 생중계하기 시작했다. 『저는 이 순간 엄숙한 마음으로 헌법 제76조 1항의 규정에 의거하여,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표합니다.』 독특한 경상도 사투리 억양에는 평상시와 다른 힘이 느껴졌고 표정에서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취임하자마자 ‘하나회’라는 군부 세력을 숙청하더니 6월에는 공직자 재산 공개라는 폭탄을 던져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고위공무원들이 스스로 사표를 던지게 만들었다. 이제 차명으로 숨겨놓은 검은돈마저 끌어내겠다는 선언을 한다. 젠장, 금융실명제 발표가 올해였던가? 김영삼 정부 시절의 성과인 것은 알았지만 그게 올해라는 건 기억해 내지 못했다. 만약 기억했다면 진 회장에게 넌지시 알려줌으로써 더한 사랑을 받았을 텐데…. 아쉽다. 할아버지가 충격으로 쓰러지지나 않았는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 * * 대통령의 담화를 승용차에서 듣던 이학재는 기사에게 소리쳤다. “회장님댁으로 빨리 차 돌려, 어서!” 불법 유턴을 망설이지 않는 기사가 속도를 높일 때 이학재는 품속의 수첩을 꺼내 들었다. 빼곡히 적힌 이름과 금액. 모두 차명계좌다. 어쩌면 이 수첩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을지도 모른다.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금융실명제도 있었지만, 취임하고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단행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경제부총리에게 진 회장이 직접 물은 적도 있었다. “각하의 의지는 분명합니다. 분명 금융실명제는 실시합니다. 하지만 올해는 아니에요. 은행과 증시가 출렁이면 정권이 감당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철저히 준비하는 데만 올해는 지나갈겁니다.” 타당한 대답이었기에 서두르지 않았다. 다만 미리 준비하는 차원에서 조금씩 해외로 빼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진 회장의 불호령을 생각하니 한숨이 끊이지 않는다. 서재 문을 열자 이미 진 회장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황 총리. 이렇게 내 뒤통수를 쳐? 당신이 지금 그 자리에 앉은 게 누구 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학재를 발견한 진 회장은 손을 까닥하며 의자를 가리키고는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 새끼들 전부 몰랐다고 딱 잡아떼. 쓸모없는 놈들.” “경제수석은 통화해 보셨습니까?” “조금 전에. 지금 사표 내고 청와대 나왔단다.” “네?” “자기도 방송 보고 알았다는구먼. 허 참, 기가 차서.” 대통령이 경제수석비서관도 모르게 경제 정책을 추진하다니. 이정도면 국무총리가 몰랐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진 회장은 안경을 쓰고 이학재를 바라보며 물었다. “얼마야? 전부?” “푼돈 제외하고 6천억입니다.” “그것밖에 안 돼?” “아닙니다. 이미 해외로 옮긴 돈도 상당합니다.” 진 회장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보이자 이학재는 계속해서 보고했다. “3천억은 믿을만한 사람들이라 안심해도 될….” “내일 당장 찾아. 시간 지나면 그놈들 마음 바뀐다. 삼 대가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돈이야. 본인 아니면 찾지도 못해. 돈 앞에 믿을 놈은 없어.” “네. 그럼 전부 현금 인출해서 창고에 보관하겠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세탁해서 외국으로 송금하고요.” 일단 반은 건졌다. “이천억은 익명계좌, 차명계좌인데 익명은 존재하지도 않은 사람이니….” “차명은?” “사망자도 있고 행불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순양 직원들 이름으로 만든 것도 상당합니다.” “직원들 이름으로 된 건 찾을 수 있지 않나?” “가능합니다.” 순양 직원들이야 문제없다. 신분증 싹 거둬서 은행에 던져주면 알아서 현금으로 준비해 놓을 것이다. 혹시라도 눈치챈 직원이 있다면 직접 불러서 으름장 한 번이면 끝난다. 회장 비서실장이라는 권위에 눌려 찍소리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천억은 오세현에게 맡겨놨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오세현? 아, 도준이 돈 관리한다는 그놈?” “네. 내일 만나서 달러로 챙겨놓겠습니다.” 웬만큼은 회수 가능하다고 하니 진 회장도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그럼 찾기 힘든 건 얼마나 될까?” “말씀드렸듯이 예금주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계좌들입니다. 못해도 오, 육백억은 될 겁니다.” 여차하면 은행 금고에서 영원히 잠잘 돈이다. “제가 은행장들 한 번 만나보고 대책을 강구하겠습니다.” 이학재가 조심스레 말했지만 진 회장은 머리를 저었다. “아냐. 괜히 소문낼 필요 없어. 다른 그룹 회장들, 분명히 먼저 나설 거야. 좀 더 지켜보자고.” 진 회장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어쩌면 그 돈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 * * 다음날 증시는 폭락했고 예금을 찾으러 온 사람들 때문에 은행은 아수라장이었다. 현금은 턱없이 부족했고 금값이 폭등했다. 이학재는 비서실 직원들을 동원해 영업시간 전, 시중은행을 돌며 현금을 확보하고 나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리고 여의도로 달려가 오세현을 만났다. 오세현 역시 증시 폭락 때문에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다들 전쟁 중이군요.” “우린 그나마 낫습니다. 괜찮은 전리품이 뭐 있나 확인하고 있거든요.” 웃으며 반기는 오세현은 이학재가 나타난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린 피해가 큽니다. 서로 바쁘니 용건만 말하죠. 미국에 묻어둔 돈, 찾았으면 합니다.” “그러시죠. 투자 성적이 좋으니 피해입으신 거 조금은 만회하실 겁니다.” 오세현은 컴퓨터를 두들기더니 투자 현황을 한눈에 볼수 있도록 내용을 프린트했다. “오늘 중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연동 계좌로 쏴 드리죠. 40개가 넘었죠? 입금 계좌가?” “아, 그 계좌는 못 씁니다. 이쪽으로 보내주시죠.” 오세현은 이학재가 내미는 십여 개의 계좌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실장님.” “네.” “금융실명제 모르십니까?”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닙니까? 천억이 어떤 성격의 돈인지 모르지는 않죠?” “잘 압니다만 투자자는 40명입니다. 우리도 금융실명제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 돈은 그 사람들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엉뚱한 사람에게 돈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미국 계좌를 들고 온거 아닙니까? 그 돈은 미국에서 처리합시다.” 오세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헛기침까지 했다. “저 감옥 갑니다. 연방법에 걸리면 백년은 감옥에서 못나와요.” 이학재는 머리가 쭈뼛 섰다. 40개의 계좌는 익명이다. 예금주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오세현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어쩌면 임자 없는 천억 원이 미라클에서 영원히 잠잘 것 같았다. ======================================== [040] 행운도 몰려다니네? 2. “지금, 방법이 없다는 뜻으로 말한 거요?” 안정을 되찾은 이학재의 말투가 조금 변했다.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했다. “그 방법을 제가 찾아야 하는 건 아니죠. 원 투자자의 연동 계좌로 돈을 보내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입니다. 그 계좌에서 돈을 찾는 건 실장님 일이고요. 아닙니까?” “지금 에프엠대로 하자는 거요? 천억이라는 돈이 정상이 아닌 거 몰랐소?” “저처럼 돈 만지는 사람은 돈에 묻은 때까지 확인하지 않습니다. 그저 불릴 뿐입니다.” 입씨름하는 게 지겨워진 오세현은 짧은 말로 대화를 끝내버렸다. “처음 투자자의 계좌만 주십시오. 한 시간 안에 전부 쏴 드리겠습니다. 외환 계좌라면 달러로 꽂아드리죠.” 더 할 말 없다는 걸 보여주듯 오세현은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 회의실에 덩그러니 혼자 앉은 이학재는 휴대폰을 꺼내 들며 밖으로 나갔다. “지금 여의도 미라클 인베스트먼트라는 회사 털어. 미국에 본사가 있으니 그쪽도 털고. 자본금, 회사 구성원, 주주 명단, 투자처까지 전부 싹 털어봐.” 이학재는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국세청으로 전화를 넣었다. “청장님. 순양 이학잽니다.” 국세청장에게 회사 내역을 부탁하고 다시 진 회장에게 달려갔다. 아무래도 진 회장에게는 사실대로 털어놓고 지시를 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미라클은 진도준과 깊은 연관이 있을 테니까. * * * “스미토모 폭발 때문에 머리 아프시겠네요. 괜찮으세요?” “아이고, 우리 도준이. 그래도 너밖에 없구나. 손주 놈들 모두 이 할애비 돈만 빼먹으려고 하는데 우리 도준이만 나와 회사까지 걱정해주는구나.” 나만 중학생이고 3세들 대부분이 성인이다. 특히 이놈의 집구석 애들은 고등학생만 되어도 돈 먹는 하마나 다름없다. 고등학교부터 유럽이나 미국으로 일찌감치 유학길을 떠난 놈들은 학비부터 생활비까지, 웬만한 계열사 사장의 연봉을 써제낀다. “우리 도준이, 이제 한 학기만 지나면 고등학교 가야지?” “네.” “네 아버지랑 이야기는 했니? 학교는 알아보고 있어?” “아뇨. 그냥 일반 고등학교 가려고요. 유학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진 회장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런, 네 애비는 신경 쓰지도 않는구나. 내 이럴 줄 알았다.” 형인 상준이도 유학 가지 않았다. 물론 돈 있고 힘 있는 고위층 자제들만 간다는 명문 사립고에 입학했지만. 이때도 할아버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 그전에도 신경 쓰지 않았던가? 부모들이 알아서 진학문제는 책임졌나? “할아버지.” “아무 말 말아라. 내가 스위스 명문학교를 알아볼 테니까. 세계 최고의 학교에 보내주마.” “아뇨. 그게 아니고요. 전 그냥 서울대 가려고요.” “뭐라? 서울대?” 서울대라는 말에 할아버지의 표정이 달라졌다. “네. 우리나라에서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잖아요. 가장 점수 높은 곳은 법대 아니면 의대…. 하지만 전 문과 갈 거니까 법대 가려고요.” “버, 법대? 너 설마 판검사가 목표인 게냐?” 할아버지는 놀람 반, 걱정 반인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나의 꿈을 확인했다. “에이, 설마요? 제 꿈은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기업 경영자가 제 목표에요.” “그런데 왜 법대를 간다는 게냐?” 다소 안도한 표정, 이제 호기심만 남은 눈빛이 나를 향했다. “할아버지 어디 가셔서 자랑하시라고요. 대기업 자제들이 서울대 법대 갈 만큼 공부 잘한 사람은 없잖아요?” 이 황당한 대답에 할아버지는 할 말을 잃은 듯 멍한 눈빛으로 변해버렸다. 전경련 모임 때 대현 그룹 회장이 얼마나 자랑했던가? 맏손자가 서울대 입학했다는 사실이 전경련 모임의 주제가 돼버린 하루였다. 어떤 꼼수를 써서 입학했는지 다 아는 마당에 그의 자랑을 계속 듣고 있자니 배알이 꼴려 돌아버릴 지경까지 갔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비서실은 물론이고 서울대 출입기자와 경제부 기사 십여 명을 동원해 서울대에 투입했다고 한다. 이들이 대학 당국자를 붙잡고 밀착 조사한 후, 6시 마감 직전 가장 경쟁률 낮은 학과를 골랐고 접수창구가 문을 닫기 직전 원서를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들어간 곳이 동양철학인지, 동양사학인지 하는 곳이었다. 물론 서울대에서 커트라인이 가장 낮은 학과라 하더라도 수준 이상의 성적은 얻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정상적인 방법이었다면 절대 서울대 문턱을 넘지 못했을 것이고 대부분이 진학하는 Y, K 대학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벌 회장이라 하더라도 할아버지의 마음은 매한가지다 보니 손자 자랑이 일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그 지겨운 자랑을 말이다. 그런데 서울대 법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진심이냐? 나 때문에 서울대 법대를 지원한다는 게냐?” “당연하죠. 판검사 할 것도 아닌데 제가 왜 법대를 지원하겠어요?” 할아버지의 지금 표정은 진정 처음 보는 모습이다. 철면이라는 사람의 표정이 이처럼 변화무쌍할 줄이야. “돈을 벌어 내 재산을 불려주는 놈은 많아도 기쁨을 주는 사람은 없었는데, 우리 막내는 이 할애비를 기쁘다 못해 감동하게 만드는구나.” 여차하면 눈물까지 보일 기세였다. “오냐. 서울대 법대에 입학만 하거라. 네놈 입학선물은 뭐든 다 해주마. 허허. 그럼, 그럼. 떡하니 입학하고 외국 명문대로 유학 가면 되지, 암. 어차피 고등학교 때 유학 가는 놈들이야 우리나라 명문대 갈 자신 없는 놈들 아니더냐.” 그 말 꼭 기억하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흔한 외제 차 정도가 아니라 순양 그룹 회장님의 힘, 그것이 내가 원하는 입학선물이다. “내가 널 보자고 한 건 딴 것 때문이 아니라 네 돈 때문이다. 뭐 좀 확인할 게 있어.” 감정을 추스른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추며 예상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오세현은 어제 이학재가 찾아온 이야기를 내게 소상히 말해주었고 곧 내게 확인할 것 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내 돈은 핑계고 비자금이 잘 있나 확인하려는 것이 틀림없다. “네. 말씀하세요, 할아버지.” “지금 네 돈 전부 미라클 뭐시기라는 투자회사에 묻어둔 걸로 알고 있다.” “네. 맞아요.” “그리고 그 회사의 대표가 바로 오세현이고.” 먼저 선수를 치는 게 낫겠다 싶어 서둘러 말했다. “아, 오해는 마세요. 세현 삼촌이 파워쉐어즈 그만둘 때 제게 말했어요.” “그럼 넌 미라클이라는 곳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느냐?” “전부는 아니지만 제 돈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는지는 알아요.” “그래? 어찌 됐느냐? 돈은 좀 벌었어?” 이 와중에 호기심까지 드러낸다. 대단한 양반이다. “은행이자보다는 훨씬 낫다고 하더군요.” 구백만 달러를 델 컴퓨터에 투자해서 십일억 달러까지 불렸다. 현재 환율 800원으로 환산해도 8천8백억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주식도 네 배까지 뛰었다. 내년 소프트뱅크가 상장하면 투자금 2억3천만 달러의 투자금은 세 배가 될 것이다. 영화에 투자한 돈은 매년 두 배로 덩치를 불리고 있다. 내가 대학을 입학할 때쯤이면 2조 원은 가볍게 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사실을 말할 수는 없다. 정보를 터트리는 시점은 따로 있는 법이다. 가장 충격적이고 효과적인 때. 바로 그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음… 매년 10퍼센트 이상은 불렸다는 말이렷다.” “네. 평균 20퍼센트는 될 겁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왜 그러시는지…….” “아, 아니다. 난 오세현과 너와의 관계가 끈끈한지 확인하고 싶어서 말이다. 큰돈을 맡은 사람이니 중요하지 않으냐?”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분이시고 제게도 가족 같아요. 그리고…. 저 말고도 수십 명의 투자자가 있는데 그분들 투자금이 훨씬 크다고 들었어요.” 이정도만 흘려줘도 눈치 빠른 분이니 알아듣지 않을까? “그래? 또 있어? 누군지는 알고?” “아뇨. 그렇지만 투자 금액은 말씀하셨어요. 한꺼번에 천억 원 정도가 들어왔다고…. 그 때문에 회사 옮길 결심을 했다고 들었어요.” “천억 원?” “네.” “그렇구나.” 천억 원은 고스란히 잠자고 있다는 걸 확인하자 다소 안심하는 표정이다. “도준아. 이 할애비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니?” “물론이죠. 말씀하세요.” “오세현이가 투자금을 수상하게 쓴다고 생각하면 즉시 이 할애비에게 말해줄 수 있겠니? 적지 않은 돈이니 조금 걱정되는구나.” “음, 그럴 리는 없을 건데…… 아무튼 그럴게요. 수상하거나 제가 잘 모를 땐 바로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래. 허허.” 그제야 할아버지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비자금을 되찾을 방법이 나올 때까지 안전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기쁜 표정이 새어 나왔다. 무려 천억 원이다. 비록 회사에 묶여있는 돈이지만 회사 차원에서는 언제든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땡큐! 잘 쓸게요. *** “당분간 돈은 문제없어. 미국 쪽은 알아봤어?” “네.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주주 구성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비상장 회사고 미국이라서 말입니다. 한국 법인은 껍데기뿐입니다.” “껍데기?” “네. 형식만 법인이지 출장소 수준입니다. 한국으로 투자하는 돈도 미국 본사에서 직접 투자하는 형식입니다.”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회사가 내 돈을 쥐고 있다, 이 말이로구만.”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학재는 참담한 마음으로 머리를 떨구었다. 회사의 경영 실패로 천억 원 정도가 날아가는 건 문제없다. 어차피 회삿돈이니까. 하지만 이 돈은 온전히 회장의 개인 재산이다. 법인에서 천억 원을 안전하게 빼돌리는 것은 수조 원대의 사업을 성공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시간은 벌어놨으니 방법만 찾아.” 단호한 회장의 목소리에 이학재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네. 회장님!” “됐어. 앉아.” 다시 의자에 앉은 이학재는 보고서 한 장을 꺼냈다. “일본 지사의 긴급 연락입니다. 스미토모가 의외의 결정을 할 것 같습니다.” 보고서를 훑어본 진 회장도 의외라는 듯 눈이 커졌다. “반도체용 에폭시 생산 라인을 폐쇄?” “네. 독점적 위치라고는 하지만 이,삼백억 정도의 매출이 고작이고 항상 폭발의 위험까지 감수하느니 폐쇄해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건 더 큰 문제 아닌가?” “폐쇄 전 기술 이전을 해버린다고 합니다. 미련이 없어 보입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폭발사고 나면 다른 생산 라인까지 타격 입고, 보험금은 천정부지로 치솟으니까. 에폭시수지 팔아서 번 돈으로 보험금 내기도 버거울 거야.”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진 회장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거 보면 일본 놈들도 참 착해. 우리 같으면 가격을 열 배로 올려버릴 텐데 말이야.” “일본에서 그랬다가는 거래하는 기업들로부터 손가락질받으니까요. 그놈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일 아닙니까. 독과점 기업 제재도 있고.” “덕분에 우리도 편했지.” 이학재는 진 회장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천안에 괜찮은 에폭시수지 회사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금을 대고 이 회사가 스미토모의 기술을 전수 받으면 어떨까 합니다.” “우리 걸로 하자?” “네. 리스크는 피하고 반도체용 에폭시를 우리 손에 넣는 셈이니까요. 필요할 때 무기로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너무 티 나지 않나?” “우리 재고를 충분히 확보한 뒤, 생산라인을 쾅- 하고….” “어쩔 수 없는 사고로 위장한다?” “빈번한 일이니까요. 흐흐.” 이학재의 음산한 웃음에 진 회장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꽤 달콤한 이야기다. ======================================== [041] 행운도 몰려다니네? 3. “그런데 스미토모가 에폭시 제조 기술을 우리에게 넘길까? NEC, 히타치, 도시바 같은 경쟁 업체가 가만있겠어? 칼자루를 넘기는 것과 다름없잖나.” 진 회장이 현실적인 문제를 거론하자 이학재는 싱긋 웃으며 묘책 하나를 내놓았다. “천안에 있는 화학 회사와 순양의 연결고리는 없습니다. 바로 미라클에 잠들어 있는 돈으로 그 회사를 인수하면 되니까요.” 방금 이학재는 금융실명제 때문에 어쩌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천억 원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책상을 탕 두들기는 진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진행해. 즉시.” 진 회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학재는 즉시 오세현과 불러냈다. * * * “이 실장님. 설마 같은 이야기 반복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다른 이야기요. 투자 좀 해야겠소.” 이학재의 여유 있는 미소를 보자 오세현은 뜨끔했다. 설마 돈을 회수할 방법을 찾았다는 말인가? “투자라니요?” “오 대표. 혹시 우리 돈으로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것까지 안된다는 말은 못하겠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순양그룹의 이름이 아니라 미라클이라는 이름으로 투자하는 겁니다. 맞죠?” “당연해. 물론이요. 대신 투자하는 회사에 대한 영향력은 순양의 것이오. 이정도는 해줄 수 있겠죠?“ “혹시 임원급 한 명을 파견하시고 경영권을 행사하시겠다는 뜻입니까?” “당연히.” “그렇군요. 그럼 그 회사…. 이름이 뭡니까?” “유진케미컬이라는 회사요. 천안에 있지.” “그 회사와 세부 내용 조율하시고 알려주십시오. 바로 돈을 쏘겠습니다.” 오랜만에 두 사람은 언성을 높이지 않고 미팅을 끝냈다. 내가 할아버지 서재의 보고서를 보고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스미토모 화학이 왜 계속 마음에 걸리는지 알았다. 절정의 순간에 한번은 써먹을 수 있는 폭탄이다. 하지만 이 폭탄을 할아버지가 먼저 가로채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라클 때문에 나도 한 다리 걸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 할아버지의 감탄을 이끌어 내는 기회도 얻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서재로 들어오실 때까지 보고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응? 도준아. 지금 뭘 보는 게냐?” 후다닥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는 내 모습에 할아버지도 깜짝 놀란 듯했다. “아, 그게….” “또 서류를 훔쳐 본 게냐?” 또?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는 뜻인가? “이 녀석아. 뭘 그리 놀라?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미소 띤 표정을 보니 화를 내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머리를 긁었다. "죄송해요." “괜찮아. 오히려 기특하더구나. 회사 일에 이토록 관심을 쏟는 놈은 너밖에 없어.” 할아버지는 어깨를 다독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어떠냐? 무슨 내용인지 알 것 같으냐?” 일부러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내 대답을 다그쳤다. “괜찮다니까. 말해봐. 넌 스미토모에 관심을 보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스미토모가 생산을 중단하고 기술을 넘기는데 할아버지께서 그 기술을 사겠다는 거 맞죠? 조그만 중소기업 하나를 앞세워서요.” “그래.” “할아버지라면 이 기술을 직접적인 경쟁 관계가 아니더라도 일본 기업으로 넘기시겠어요?” “뭐라고?” “찝찝하지 않으세요? 반도체는 일본이 앞서가고 한국이 바짝 추격 중입니다. 이제 기업 간의 문제가 아니죠. 국가 간의 경쟁입니다.” “일본은 한국에 넘기지 않는다?” “스미토모 화학 회장님은 일본 전자 기업 사장들과 종종 밥 먹지 않겠어요? 할아버지도 다른 그룹 회장님과 식사하시잖아요. 그때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실 거고요.” 할아버지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그 사람들이 한국으로 핵심 기술이 넘어가는 걸 말릴 것 같아요. 제 생각이지만.” “그래서?” 여기까지만 말한다면 그럭저럭 쓸만한 놈이다. 늘 그렇지만, 비판으로 끝내면 안 된다.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저라면 대만 화학 회사를 앞세우겠어요. 우리나라 회사가 아니라…….” “대만?” “대만은 한국이나 일본의 협력국가니까요.” 대만은 반도체 산업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국가다. 바로 파운더리와 패키징이라는 주요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이 반도체 설계부터 생산까지 전체를 아우른다면 대만은 파운더리, 즉 수탁생산에 집중했다. 그 결과 전 세계 65%에 이르는 파운더리 시장을 장악했고 반도체 강국이 되었다. “경쟁국이 아닌 상생국을 택한다?” “저라면요.”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다. 이미 할아버지가 전화 수화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실장과 전자 사장. 그리고 물산에서 대만 담당하는 놈 빨리 오라고 해.” 수화기를 내려놓은 할아버지의 눈에는 나를 향한 애정이 넘쳐 흘렀다. “도준이는 반도체에 대해 잘 아는구나.” “신문과 방송에서 워낙 떠들어 대서 혼자 공부 좀 했어요.”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두 배의 애정이 담겨 있었다. * * * 내가 다니게 된 고등학교는 상준 형이 다니는 곳이었다. 소위 잘나가는 집안의 자식들이 넘쳐나는 사립학교다. 성골 계급의 재벌 집안 놈들과 진골 계급의 고위 관료 자식들. 이를테면 5선 이상의 중진급 국회의원이나 당 대표, 총리나 장관 이상의 집안 놈들을 진골이라고 불렀다. 그 뒤를 이은 6두품으로는 판검사나 변호사가 수두룩한 집안의 자식들이나 언론사 사장 핏줄도 있었다. 가장 아래 등급은 오너가 아닌 월급쟁이 자제들이었다. 계열사 사장을 비롯한 주요 직책의 임원급 정도. 하지만 교사들이 대하는 태도에 조금 차이가 있을 뿐 학생들 사이의 위화감은 크지 않았다. 이성에 눈뜨기 시작한 나이답게 외모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특별할 게 없는 상준 형이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이유는 미녀 여배우였던 어머니 유전자를 잔뜩 물려받은 덕분이었다. 그에 못지않은 관심의 대상은 신입생인 나였다.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았으니 나의 잘생김은 상준 형에 못지않았지만, 여학생을 대하는 태도와 성적은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접근하는 여학생 하나하나 잘 대해주는 형과는 달리 나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공부도 바쁘고 일도 바빴다. 애들 연애 놀이에 투자할 시간은 단 1초도 없었다. “정말 정리할 거니?” “작년 델 컴퓨터를 생각해보세요. 49달러에 처분하고 나자 주가가 어떻게 됐어요? 10달러 선으로 곤두박질쳤고 일 년이 지난 지금에야 조금씩 회복하잖아요. 소프트뱅크는 더할 겁니다. 지금은 유통사일 뿐이니까요.” “그래도 소프트뱅크는 사업 영역을 계속 확대하고 있잖아. 그 부분의 잠재적 가치는?” 오세현 이제 나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항상 의견을 교환하고 내 뜻에 따른다. 대주주와 전문경영인 관계 때문이 아니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없는 내 투자 감각을 존중한다. “일본에서 M&A는 부정적 인식이 더 커요. 소프트뱅크가 M&A를 계속할수록 주가는 떨어질 겁니다. M&A의 성과는 한참 뒤에나 나올 테니까요. 손정의 사장, 그분은 멀리 봅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인내심이 없죠. 눈앞만 봅니다.” 94년 7월, 소프트뱅크는 주식 공개에 성공했다. 주당 18,900엔. 최고가로 상장했다. 상장 후 소프트뱅크는 단번에 2000억 엔이라는 거금을 쥐게 됐다. 손정의 사장은 곧바로 공격적인 M&A를 천명하며 그의 눈은 전 세계로 향했다. 나의 투자금 2억3천만 달러는 8억5천만 달러가 되었고 일 년 만에 6억2천만 달러를 벌었다. 소프트뱅크의 거품이 빠지기 전에 나는 철수했고 공격적인 투자는 멈췄다. 고등학교 3년간은 공부에 매진했다. 취미 삼아 간간이 헐리우드 영화에 투자하는 정도가 전부였고, 모두가 우려하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타이타닉>에 투자하는 정도가 모험이라면 모험이었다. 물을 배경으로 하는 블록버스터는 항상 실패한다는 헐리우드의 통설과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캐빈 코스트너 주연의 블록버스터 <워터월드>가 폭삭 망했기 때문에 타이타닉은 투자자 모집에 곤란을 겪었다. 덕분에 영화 제작사인 20세기폭스사는 미라클의 거액 투자를 환영했고 큰 잡음 없이 투자 계약을 성사시켰다. * * * 매우 다행스럽게도 상준 형은 큰 사고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럴듯한 대학에 들어갈 성적은 당연히 못 받았으니 서둘러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새지 않겠냐만은 집안의 관심과 기대는 손톱만큼도 받지 않다 보니 상준 형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곳-아마도 음악일 것이다-에 몰래 진학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이제 순양그룹 3세 중 유일한 고3인 내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과연 처음으로 서울대 합격생이 나올 것인가? 일부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일부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내 성적을 지켜보고 있었고 기대를 하고 나를 지켜보는 이는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전부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선언을 보며 시작한 고3 수험생 시절은 1996년 11월 13일 끝났다. 잘사는 집, 못 사는 집 할 것 없이 평등하게,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가 간절히 기도하며 보내는 하루. 바로 수능일이었다. 어머니는 수험장인 학교 앞에서 시험이 끝나도록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할아버지는 수능 끝나는 시간을 체크 하느라 온종일 비서를 들볶았다. 자신 있게 시험지를 받아든 나는 처음부터 멘붕에 빠져버렸다. 순식간에 문제를 풀어나갈 줄 알았는데 첫 문제부터 막히다니. 그나마 위안을 얻은 건 교실 곳곳에서 들리는 앓는 소리였다. 전체적인 난이도 때문이라면 다행이지만 자신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시험에 집중했다. 보통의 가정에서 학원 보내는 정도가 아닌 수백 배의 돈을 쏟아부으면 고용한 일대일 가정교사가 몇 명이던가? 엄청난 투자에 걸맞게 엄청난 성적을 받아야 체면이 서는데…. 젠장, 쉽지 않을 것 같다. 시험장을 나서자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안았다. “힘들었지?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 “도준아. 표정 풀어. 뉴스에도 나왔어. 올해 수능 역대 최악의 난이도라고 하더라. 너무 걱정 마.” 아버지가 속보를 알려주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많이 바라지는 말자. 큰소리친 것만큼만 나오면 된다. 서울대 법대 갈 정도의 성적만 나오기를 빌었다. * * * “우리 막내가 말이야, 전국 39등이라네? 응? 아니, 전교가 아니라 전국! 이과 빼고 문과만 보면 전국 10등이고. 수능 시험이 400점 만점 맞지? 367점이야, 367점. 전국 1등이랑 딱 6점 차이야. 그 정도면 뭐, 컨디션 차이 아니겠어? 으하하.” 진 회장은 수능점수 발표 하루 전에 이미 결과가 적힌 메모를 전달받았다. 점수를 확인하자마자 손자에게 연락해야 했지만, 그보다 먼저 이 사실을 알려야 할, 중요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대현 그룹 회장이었다. “서울대 법대 정도는 돼야 공부 좀 하는구나, 하는 소리 들을 자격이 있지. 그리고 우리 손자야 서울대가 눈에 차겠냐고. 하버드나 옥스퍼드 중에 골라서 가겠지. 참, 장학금은 없는 집 자식들 주고 등록금 전부 내야 하는데…. 공부를 잘하니까 주는 장학금 안 받을 수도 없고…. 이거 참, 난처하긴 해.” 진 회장은 통화를 끝내자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중공업 분야에서 대현 그룹을 누르고 매출 1위를 달성했을 때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승리감을 만끽했다. “자, 보자…. 또 누구 염장을 확 질러야 하나…?” 휴대전화에 저장한 번호를 넘기며 십여 곳과 통화를 한 뒤 갑자기 생각난 듯 그룹홍보실 담당 임원을 호출했다. “자네 이거 한번 봐봐.” 메모를 건네받은 임원은 머리를 팍 숙이며 소리쳤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축하는 됐고, 이거 슬쩍 흘려. 내일 기자들이 우리 도준이 사진 좀 찍도록 만들어 봐.” “네?” “이 친구가 왜 이리 눈치가 없어? 뭘 놀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해? 대그룹 회장 핏줄들은 돈으로, 빽으로 명문 사립대 간다고 쑥덕거리잖아. 이정도 수능 성적을 돈으로 살 수 있어? 빽으로 얻을 수 있냐고? 앞으로 그런 소리 안 나오게 한번 잘 만져봐.” “아, 네. 잘 알겠습니다. 회장님.” 홍보 담당 임원이 나가자 진 회장은 한참 동안 미소를 지우지 못하다 갑자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도준이를 유학 보내면 최소 5년은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곁에 두고 싶었다. 영원히. ======================================== [042] 일단 워밍업부터 1. 12월 7일, 유난히 일찍 눈이 떠졌다. 이미 할아버지가 점수를 알려줬지만, 긴장은 남아 있었다. 아침 신문을 주우러 나갔을 때 대문 앞이 시끄러웠다. 조용한 주택가라 이런 소란은 처음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자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마이크가 얼굴을 가렸다. “진도준 씨?” “진도준 학생? 맞죠?” 12월이라 아침 6시는 어두웠고 터지는 플래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대문을 닫았다. 무슨 일일까? 잠옷 차림의 아버지가 정원으로 내려와 하품하며 내 등을 툭 쳤다. “너 인터뷰 하겠다고 왔어.” “아니, 수능이면 전국 수석을 취재해야지 왜 나를…?” “몰라서 물어? 평범한 수석과 순양 그룹 손자의 고득점. 게다가 아버지는 영화 제작사 사장, 어머니는 아직 미모를 잃지 않은 왕년의 여배우. 어느 게 더 화제가 될까?” 아버지는 피식 웃으며 대문을 가리켰다. “방금 네 할아버지가 전화하셨다. 할아버지 기분 한번 맞춰줘라. 자랑하고 싶으신 거야.” 아이고, 우리 영감님. 손자 자랑하고픈 마음은 돈이 많으나 적으나 한결같은 건가? “인터뷰 간단히 해줘. 참, 인터뷰할 때 훌륭한 부모님 덕분이라는 말도 빼먹지 말고.” “아버지. 제가 공부하는데 딱히 도움 주신 건 기억에 없는데요?” “자식에 대한 과도한 기대 때문에 스트레스 준 일도 없고 잔소리도 안 했어. 적당한 방임은 부모로서의 최고 덕목이다. 잊지 마라. 흐흐.” 영화 몇 편 성공하고 충무로에서 무시 못 할 제작사 사장이 되니까 아버지의 숨은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능청스럽고 늘 여유 있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 드문드문 드러내는 유머 감각도 발군이다. 아들을 자식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대하는 서구적인 마인드도 있었다. 서재는 이미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어머니는 기자들을 위해 차와 다과까지 준비했다. “도준아. 교복으로 갈아입어. 그게 어울리겠다.” 어머니까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인터뷰 준비를 끝내자 어머니가 기자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TV 방송 기자는 카메라맨까지 함께 왔지만, 영상의 힘을 잘 아는 아버지가 조율하기 시작했다. “카메라는 끕시다. 자료 화면은 사진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30초 이하로 나갈 텐데?” “그래도 한두 컷은 나가야….” “말은 사라지지만, 영상은 영원히 남죠. 우리 애의 발목 잡는 일은 안 하고 싶군요.” “진 사장님, 발목 잡을 일이 뭐 있다고 그러십니까?” TV 뉴스 기자가 웃으며 말했지만,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 말대로 합시다. 카메라 꺼요.” 카메라를 끄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직설적인 질문이 쏟아졌다. “도준 학생도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습니다’라고 하실 건가요?” “그럴 리가요. 우리나라 최고 부자의 손자가 교과서만 팠을까요?” 다소 도전적인 대답에 몇몇 기자들의 입이 찢어졌다. 모범생 답안 같은 인터뷰는 기자들도 지겹다. “그럼…?” “과목별로 족집게 선생들…. 일 년 내내 일대일 과외 했어요. 쓴 돈만 해도 기자님들 십 년 치 연봉이 날아갔을걸요?” “…….” 너무 노골적인가? 기자들이 질문을 잇지 못하자 지켜보던 아버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낄낄거렸다. “어디에 지원할 생각인가요?” 다시 평범한 질문, 정석대로 밟는 걸 보니 초보 기자 같다. “법대 지원할 겁니다.” “오, 판검사가 목표인가요?” “네.” 이때 한 기자가 다시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법대를 지원하는 이유가 혹시 순양 그룹 후계구도에서 제외 됐기 때문인가요?” 기자는 아주 잠깐, 내 표정을 살피고 질문을 이어갔다. “위로 큰 아버지들이 계시고 사촌 형들도 많고…. 순양 가의 막내니까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건가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오히려 잘됐다. 이 인터뷰를 보게 될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하면 된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글쎄요, 제 부모님은 자유롭게 사시는 분이죠. 순양 그룹과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시잖아요. 그래서인지 저도 순양 그룹을 염두에 둔 적은 없었습니다.” “법조인이 된다면 순양 그룹과 관계없는 길을 걸을 것인지, 아니면 순양 그룹을 측면지원할 것인지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더 이상은 안 된다. 이 정도까지가 딱 적당하다. 말이 많아지면 해석도 분분해진다.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 생각조차 해본 적 없어요. 그런데 수능 수석은 누굽니까?” “아, 제주도 학생인데….” “이과에요? 문과에요?” “이과요.” “그 학생, 나처럼 족집게 과외도 안 쓰고 수석 할 정도면 진짜 천재거나 무지막지한 노력파겠네요. 아, 어쩌면 둘 다?” “진도준 학생. 혹시 유학 계획은….” 이쯤에서 끝내고 싶었다. 어차피 이들이 써야 할 기사는 정해져 있다. “저기 기자님들. 취재는 제주도 가셔서 하고 내 기사는 대충 할아버지 입맛에 맞게 쓰세요. 보니까 딱 견적 나오는데요? 광고 땡겨오라고 데스크에서 보낸 거 맞죠?” 어처구니가 없는지 기자들은 할 말을 잃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고 참고서, 문제지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시면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킥킥대며 지켜보던 아버지가 나섰다. “자자, 그만 끝냅시다. 아 참, 사진은 충분히 찍으셨죠? 우리 아들 사진… 신문과 방송에 처음 나가는 건데, 이왕이면 가장 잘 나온 걸로 부탁합니다. 그럼.” 아버지가 기자들을 정리할 때, 이 층 내방으로 올라와 학교 갈 준비를 시작했다.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할아버지다. “네, 할아버지.” - 도준아. 인터뷰 잘 끝났니? “방금 끝냈습니다.” - 그럼 할애비 집으로 오렴. “네. 학교 끝나고….” - 아니다. 아침 먹고 바로 오너라. 학교에는 내가 전화 넣어뒀다. 안 가도 돼. 설마 사람들 모아놓고 날 자랑하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소름 끼치듯 쪽팔릴 텐데, 걱정이다. * * * “아이고, 내 새끼! 한번 안아보자.” 두 팔을 활짝 벌린 할아버지만 보였다. 걱정하던 일은 없었다. “고생했다. 그리고 장하다.” 할아버지는 내 등을 토닥거리며 서재로 끌고 갔다.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할아버지는 뭐가 그리 급한지 내 진로부터 말했다. “그래, 학교는 어디로 가고 싶니? 미국? 유럽?” “아직 생각해본 적 없어요. 천천히 알아봐도 되지 않겠어요?” 설마 졸업하자마자 외국으로 보내려는 걸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된다. 전생과 다름없는 미래가 펼쳐진다면 몇 년 안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신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외국으로 갈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그래, 그간 공부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한 일 년 정도 대학 다니며 좀 쉬면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급히 서두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 눈치를 슬쩍 보며 어렵게 입을 여신다. “네 꿈은 여전하지? 바뀐 건 아니지?” 딱 적당할 때 적절한 질문을 던지시니 다행이었다. 오히려 내가 확인하고 싶은 순간이다. “음,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처럼 사업을 하고 싶기도 하고, 아버지처럼 영화도 만들어보고 싶은 적도 있고… 판검사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해요.” 갑자기 확 굳어진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나를 경영에 참여시키려는 의지가 보였다. “도준아.” “네.” “사내란 말이다. 밥벌이를 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영화? 그걸 밥벌이로 생각하는 놈이 있더냐? 다 지가 좋아서 하는 거다. 운 좋게 그걸로 부자가 되는 놈도 있겠지. 하지만 근본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게 말씀하시니 조금 우습기도 하다. “하기 싫고 힘들어도 남자는 돈을 벌어야 한다. 그게 전부다.” “…네.” “이 할애비는 말이다. 네가 이 할애비가 일군 순양에서 일했으면 좋겠다. 더 크게 키우고 더 많이 만들어서 지금의 수십, 수백 배의 순양그룹이 되는걸 보고 눈을 감고 싶구나.” 이런, 너무 노골적이다. 설마 이런 속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특히 큰아버지에게 말하면 큰일이다. “할아버지.” “오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막내아들이 누군지 아세요?” 엉뚱한 질문에 할아버지는 눈만 껌뻑거렸다. “이성계의 계비(繼妃) 신덕왕후 강씨의 차남 이방석입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게야? 느닷없이 역사 이야기는 왜 꺼내? 할애비 학교 못 다닌 거 몰라? 으허허.” “이성계는 정비(正妃)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 아들 여섯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함께 전장을 누비고 공을 세운 장성한 아들 전부를 무시하고 11살에 불과한 어린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웃음이 멈췄고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변했다. “그 이방석이라는 놈은 배다른 형인 태종 이방원의 칼에 죽었지. 왕자의 난, 맞느냐?” “그렇습니다.” 괜한 말을 꺼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다. 할아버지의 지나친 애정이나 조급한 내 마음이 드러났다가는 일을 망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진도준이 스물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것을. 찌를 듯 나를 쳐다보던 할아버지의 날카로운 눈빛이 다시 온화하게 변했다. “매주 금요일, 이 서재에 그룹 핵심 인사들이 모인다. 그룹의 현안을 놓고 가장 깊은 대화를 하고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자리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넌 앞으로 매주 토요일 아침 식사는 이 할애비와 함께 하도록 하자.” 토요일마다 그룹의 중요한 결정을 내게 알려준다는 뜻이다. 마냥 좋다고 할 필요는 없다. 체크, 리체크, 더블체크. 모든 일의 기본 아닌가? 할아버지의 진의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야 한다. “할아버지. 전 아직 어립니다. 할아버지께서 회사 일을 가르치신다고 해도 못 알아들을 거예요.” “욕심 많은 놈에게 겸손한 말은 어울리지 않아. 네게 뭔가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야. 네 싹수는 이미 확인했으니 큰 욕심을 담을 만한 그릇인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허허.” 할아버지, 아니 진 회장의 웃음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기특한 손자에 대한 애정과 거대한 유산을 상속하는 것은 별개라는 뜻이다. 앞으로 매주 토요일은 할아버지가 아닌, 진 회장의 모습을 보게 될 것 같았다. “이걸 한번 보고 토요일에 답안지를 제출해라. 수능 성적만큼 잘 나오는지 한번 보마.” 꽤 두꺼운 서류 뭉치를 내게 툭 던졌다. “일 년 정도는 푹 쉬도록 하고 싶었는데… 우리 도준이 여전히 공부해야 하는구나. 허허.” 할아버지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일어섰다. “나가자. 내가 보여줄 것이 있어.” 본관 밖, 별관 옆의 차고로 가자 십여 대의 수입차가 보였다. 나이가 몇인데 차를 좋아하는지……. 노인네의 취미치고는 참 돈 많이 드는 취미다. “못 보던 차가 있네요. 또 사셨어요?” “못 보던 차가 몇 대지?” “세 대요. 할아버지. 이제 스포츠카는 그만 타세요. 위험해요.” 할아버지는 외투 주머니에서 자동차 열쇠 세 개를 꺼냈다. “내가 주는 선물이야. 네 덕분에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갔어. 그리고 새해 전경련 회의 때, 다른 회장 놈들 앞에서 큰소릴 칠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와. 이정도 선물은 받아야지, 암.” 어린애였다면 기뻐 날뛰었을 텐데… 독일, 이탈리아 스포츠카를 봐도 덤덤했다. 하지만 무표정하게 있을 수는 없는 일, 나는 자동차 열쇠를 받지 않았다. “할아버지 선물은 숙제 끝내고 받을게요. 숙제 만점 받을 때마다 하나씩 주세요.” 열쇠를 쥔 할아버지의 손이 멈칫하더니 이내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 [043] 일단 워밍업부터 2. 「한도제철의 경쟁력과 중장기 경영전망에 관한 연구」 1. 재무구조 극히 취약. 2. 지나친 외부 차입에 따른 과다한 금융비용. 3. 대규모 적자 확실. 4. 국민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무모한 투자 5. 한도제철의 생존 및 발전을 위해서는 포항제철의 협력이 불가피. 6. 결론. 한도제철은 물론 그룹 전체적으로 취약한 재무구조와 그룹 전체 매출 1조3억 원(내부거래 제외 시 5천9백억 원) 규모로 4조3천억 원이라는 막대한 투자자금을 감당하기에는 규모 면에서 무리이고, 부동산 매각에 따른 자기 자금 조달은 부동산의 규모 및 현재 시장 상황을 고려해보면 현실감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며, 금융기관 차입도 정책적인 배려 없이는 어려움이 뒤따를 것으로 사료됨. 두꺼운 보고서를 정리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95년 기준으로 계열사 13개, 재계서열 18위임에도 실질적인 그룹 매출이 고작 4천억에 불과하다. 한도그룹, 특히 한도제철은 그야말로 빚으로 쌓아 올린 모래성이었다. 이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은 한 달 남짓 남았다. 순양그룹에서 이런 보고서가 나왔다는 것은 한도제철의 부도는 이미 재계에서 예견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한도제철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진 회장이 내게 이 보고서를 던져준 이유는 뭘까? 한도제철의 부도 이후를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부도난 한도제철을 인수하려는 것일까? 후자일 가능성이 분명하다. 순양중공업, 순양기계 그리고 순양자동차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욕심낼만하다. 단, 헐값에 인수한다면. 순양그룹의 사내유보금을 생각한다면 부도난 회사 하나를 인수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다. 더욱이 순양의 로비 능력이라면 인수 조건에 수조 원의 부채탕감을 집어넣는 것쯤은 큰일도 아니다. 핵심 관계자 열 명, 그들에게 각 10억. 100억이면 수조 원의 손실을 국민의 혈세로 땜질하는 일, 어디 한두 번이던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한도제철의 외부 차입금 중 1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쪽 핫머니다. 환율 800원인 지금이야 이자 지급이나 원금 상환에 큰 무리가 없지만 1년 뒤에는 지불 불가다. 한도제철은 독개구리다. 삼키는 순간 서서히 독이 퍼질 것이고 해독제를 구하지 못하면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다. 해독제는 바로 달러, 거액의 달러다. 해독제는 내 손에 있으니 누가 삼키던 구해줄 수 있다. 결정해야 할 문제는 누가 삼키게 할건지, 치료비는 얼마나 청구할지만 남았다. 쉬운 결정이다. 나는 순양그룹의 계열사 몇 개를 치료비로 청구하고 싶으니까 할아버지가 독개구리를 삼키고 싶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 * * “생산규모 연간 800,000M/T, 회장 및 그 일족이 34.65%의 주식을 소유,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1989년부터 건설 부문의 손실로 부채비율 300% 초과, 차입금 의존도 50% 초과한 상태. 채권단은 회생불능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채권회수 시작했지?” “네. 사실 일 년 전에 시작했어야 할 일인데… 뇌물을 얼마나 처먹였는지 채권단은 꼼짝도 안 했습니다.” 금요일 오전 7시부터 시작된 회의의 주제는 한도제철이 전부였다. “총부채는 얼마야?” “3조6,870억입니다. 미국 쪽 10억 달러를 제외하고요.” 진 회장은 이학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실장.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이야, 이건 말이 안 돼. 그깟 제철소 하나 올리는데 뭔 돈을 그렇게 많이 땡겨 쓸 수가 있어?” “미국 뉴코어사를 기준으로 본다면 1조6천억이면 뒤집어씁니다. 물론 값싼 부지, 철강경기의 불황을 이용한 낮은 설비 도입가, 턴키 베이스가 아닌 자체 엔지니어링에 의한 적정설비의 최저가 구입 등으로 우리와 환경이 다르다 해도 최소 1조 원 이상은 어디론가 새어나갔다고 봐야죠.” 비용을 부풀리고 그 돈을 내부자거래로 빼먹는 거야 재벌집단의 주특기지만 한도그룹은 해먹어도 너무 해먹었다. 그룹 전체매출의 절반 이상이 내부거래라니! 이건 편법이 아니라 무식한 강도질이나 다름없다. 저절로 찌푸려진 표정을 바로 한 진 회장은 질문을 이어갔다. “부채 탕감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까?” “일단 금융기관의 부채를 자산관리공사가 매입하도록 만들고, 이때 2조 정도 탕감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린 자산관리공사의 채권을 절반 가격에 매입하고요. 8천억이면 될 겁니다.” “달러는 안 되겠지?” “네. 대신 상환연장은 가능합니다. 정부가 지불보증을 서줄 테니까요.” “YS… 깐깐한데 될까?” “한도제철은 한도그룹 주력사입니다. 어차피 한도그룹이 공중분해 되는데 그 파장은 최소화해야죠. 승인할 겁니다.” 진 회장의 머리가 계산을 시작했다. 10억 달러면 8천억, 전체금액은 1조 6천억이다. 피 같은 돈 1조6천억을 지불하고 인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인수할 때 순양의 자금을 일시적으로 쓸 수는 있으나 곧바로 회수해야 한다. “한도그룹 찢어질 때 우리가 챙겨야 하는 건 뭐가 있어? 돈 될만한 거 말이야.” “한도제철의 부산 철근공장 부지 10만 평 중 물류기지를 제외한 8만 평입니다. 채권단이 손을 못 대도록 하고 그 부지에 아파트를 올려 분양하면 웬만큼은 확보할 수 있습니다.” “또?” “장지동 토지 4만 평, 개포동 토지 1만 평입니다. 하지만 이 땅은 한도제철의 소유가 아니라 한도건설 소유입니다.” 서재 회의에 참석한 그룹 핵심 인사들의 머리는 부지런히 돌아갔다. 한도제철을 거저먹으려는 회장의 의도를 모두 읽었기 때문이다. “회장님.” 여태껏 한마디도 하지 않던 순양자동차의 조대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대현 그룹도 노리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진 회장의 숨 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서재는 적막에 휩싸였다. 어느새 붉어진 안색의 진 회장이 이를 악물었다. “언제 알았어?” “아침에 연락받았습니다. 대현자동차의 납품업자가 슬쩍 귀띔했습니다. 룸싸롱에서 접대하는데 횡설수설하더랍니다.” “이런, 육시럴…….” 이미 대현 그룹은 경쟁자가 아니다. 한도제철을 이미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는 진 회장에게는 자신의 회사를 강탈하려는 비적 떼일 뿐이다. “대현 놈들 뭐 하는지부터 알아와. 인수 전략은 그 뒤에 다시 짠다.” 회의는 끝났다. 전력을 다해 비적 떼부터 막아야 했다. 모두 일어나서 주섬주섬 서류를 챙길 때 진영기 부회장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도준이 인터뷰 기사 보셨습니까?” 부회장의 말에 계열사 사장들은 깜빡했던 인사를 빠트리지 않았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정말 대단하더군요.” “도준 군이 전국구일 줄 몰랐습니다. 축하합니다.” 굳었던 진 회장의 표정이 확 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나도 그놈이 그 정도 성적을 낼 줄은 몰랐어. 대단하지?” “그런데 아버지. 도준이는 정말 서울대 법대 지원합니까?” “왜? 떨어질까 봐?” “그 성적으로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아끼시니까 당연히 경영학이나 경제학 전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윤기 피를 물려받은 놈이다. 제 놈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걸 어떻게 막아?” “제가 윤기 만나서 설득 한번 해 볼까요?” “놔둬라. 집안에서 검찰총장 하나쯤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계속 눈치를 살피는 진영기에게 진 회장은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처럼 손을 슬쩍 내저었다. 이로써 이방원의 경계심은 한층 옅어질 것이다. “참, 영준이 지금 어디 있어?” “작년부터 런던에서 근무합니다. 파이낸스 실무 익히고 있을 겁니다.” “들어오라고 해.” “런던 정리하고 말입니까?” 진영기 부회장은 아들의 유배생활이 끝나는 건가 싶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 이번 한도제철 인수전에 참여시켜. 그리고 결혼도 해야지. 내년 봄에 식 올리자.” “네. 철저히 준비하겠습니다.” 이방원은 이제 방심하게 될 것이다. *** “숙제가 너무 어려웠느냐?” “……네.” 풀죽은 듯 대답하니 할아버지는 한층 더 호기심을 드러냈다. “숙제가 뭔지는 알고?” “한도제철이 망하면 순양그룹이 인수한다, 아닌가요?” 할아버지의 미소가 호기심을 덮었다. “왜 그 회사가 망한다고 생각했지?” “보고서의 내용이 한도제철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었어요.” “순양이 인수한다고 생각한 이유는?” “인수에 관심 없다면 부도 이후, 철강업계의 변화가 순양그룹에 미치는 영향 등을 더 자세히 다뤘겠죠. 옆집에 불났을 때 중요한 건 우리 집으로 옮겨붙느냐 아니냐지, 왜 불이 났느냐, 불난 집에 값비싼 물건이 있느냐는 따지지 않으니까요.” “옳지. 바로 그거야.” 진 회장이 무릎을 탁 쳤다. “그런데 해답은 못 찾겠어요.” “뭐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했느냐?” “대현그룹의 무릎을 꿇리는 방법요. 그것만 찾아냈으면 스포츠카 열쇠 하나는 오늘 받았을 텐데 말이죠.” 아쉬운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할아버지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런데, 표정이 왜 저러지? 너무 앞서 나갔나? 깜짝 놀란 할아버지의 속내가 완전히 드러났다. “대, 대현이 왜 인수전에 뛰어든다고 생각한 게냐?” “쇳덩이 만지는 기업이라면 포항제철, 순양, 대현, 아진, 삼미, 동국. 이 중에서 한도제철을 인수할 만큼 덩치 큰 곳은 셋, 하지만 포항제철은 한도에 관심 가질 이유가 없고 남은 건 우리랑 대현뿐이잖아요.“ “덩치 크다고 무조건 덤벼들지는 않아. 명확한 이유가….” “에이, 할아버지가 관심 가지셨는데 대현 회장님이라고 가만히 있을까…….” 구체적인 데이터를 들이밀며 대현도 한도제철을 원한다고 말해야 해답이 되지만, 지금은 감각적인 대답이 제격이다. “순양보다 한참 앞서가던 중공업 분야의 1위 자리까지 내줬으니 이 기회를 그냥 보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자존심 때문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회사를 인수하는 경영자는 없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두드려보는 것 정도는 하지 않겠어요?” 할아버지는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으허허. 그렇지. 그놈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위험을 무릅쓸 인간이지.” 나는 기분 좋은 웃음이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며시 물었다. “그런데 이 회사 인수하려면 엄청난 돈이 드는 거 아닌가요? 부채만 해도 몇조 원이던데…?” 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할아버지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도준아. '다른 사람의 돈‘을 영어로 해봐라.” “다른 사람의 돈? Other People's Money?" "그래. 그것이 바로 사업이다. 내 돈이 아닌 다른 사람의 돈으로 경영하는 것. 그런데 우리나라 재벌은 조금 다르다.“ “어떻게요?” “영어 단어 뜻대로 People, 바로 국민의 돈을 이용하는 거지.” 국민의 돈, 세금을 말하는 것인가? “부실기업을 인수할 때 채권단에게 부채 탕감을 요구하고, 그렇게 빵꾸 난 돈은 세금으로 메꾼다. 이것이 그룹의 덩치를 키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리고 늘 통한다.” 수조 원의 공적자금을 쌈짓돈인 양 생각한다.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다. 애초에 부정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재벌의 본질은 알고 있었지만, 할아버지 입을 통해 직접 들으니 소름이 쫙 돋았다. 얼어붙은 내 어깨를 두드리는 할아버지는 승리자의 표정이었다. “참, 도준아. 당분간 네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은 진심인 걸로 하자. 알았지?” * * * 96년, 올해의 마지막 날.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모든 가족이 순양호텔에 모였다. 좋은 결과로 한해를 끝낸 나를 축하하는 자리였고 오랜 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한 진영준을 환영하는 자리였다. “이야, 우리 막내. 사고 단단히 쳤더구나. 인터뷰 봤어. 축하한다.” “아, 영준이 형. 고마워요. 그리고 저도 축하드려요. 귀국하신 거.” 그가 내미는 손을 잡는 내 손은 가늘게 떨렸다. “미래의 검찰총장님, 나중에 내 편법 상속은 네게 맡길게. 잘 처리해줘. 흐흐.” 그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일 때 온몸이 가늘게 떨렸다. ======================================== [044] 일단 워밍업부터 3. “검찰총장은 순양의 회장님이 될 형이 키워야죠. 난 기업 인수 합병 전문 변호사 하라던데요?” “M&A? 누가?" "할아버지요.“ 웃음을 참는 진영준의 볼이 실룩거렸다. “정말?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 “네. 자세하게 말씀하시지는 않았는데… 제가 법대 간다니까 판검사보다는 변호사가 낫겠다고 하시면서요.” “그래서, 넌? 도준이 너도 변호사가 좋아?” 반짝이는 눈빛, 기대 가득한 얼굴. 저 눈빛과 저 얼굴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피를 나눈 사람들 중에서 가장 쓸만한 사촌 동생. 진 회장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며 국가 공인 시험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한 검증된 머리. 게다가 경쟁자일지도 모르는 나를 수족이나 측근으로 만드는 일석이조의 한 수. 이놈이 원하는 대답을 지금 당장 해 줄 수도 있지만 원하는 것을 쉽게 쥐여줄 수는 없는 법. “아직 모르겠어요. 사실 판사는 별로 흥미 없고…. 검사나 변호사가 더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한데…. 뭐, 법대 가서 천천히 생각해볼래요.” “그래, 인생 길다. 천천히 생각해. 이제 겨우 고등학교 졸업하는데 성급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어. 깨알 같은 법전 보기 싫으면 이 형한테 말해. 순양 그룹에서 제일 편한 자리 하나 만들어 줄 테니까. 하하.” 많이 늘었다, 진영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여유를 드러내는 내공까지 생겼다. 오랜 외국 생활을 참고 견디더니 조금은 성숙해진 걸까? “그게 제일 좋을 것 같은데요? 이제 공부라면 지긋지긋한데. 흐흐.” “그래? 좋아. 이 형이 우리 범생이 동생 즐겁게 해줘야겠다. 오늘 자리 끝나면 내 옆에 딱 붙어있어. 세상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인생이 얼마나 즐거운 건지 차근차근 가르쳐주지.” 진영준은 내 등을 두드리더니 눈을 찡긋하고는 사라졌다. 그래, 즐겁게 살아라. 좋은 세상 실컷 즐겨라. 바로 그 좋은 인생의 추억이 네가 앞으로 가지게 될 전부가 될 테니까. 굳은 내 얼굴을 억지로 부드럽게 해야 했다. 고모부다. “이야, 이 무식한 놈아! 어떻게 했길래 그 점수가 나와? 응?” “우리 애들도 도준이 너 공부한 거 반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고모는 아쉬운 표정이었다. 고모의 세 아들이 어디서 공부하더라? 대학 이름은 고사하고 그 나라 이름도 모르겠다. “이제 처가에도 내 직속후배가 생겼어. 도준아, 공부하다가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이 고모부에게 말하렴. 내가 도와줄게.” “직속후배? 당신이 서울대 나왔어요? 서울대 정문도 구경 못 했으면서!” “내가 대학 말했어? 사법연수원 말한 거지!” 고모가 대학 콤플렉스를 자극하자 고모부가 발끈했지만, 본전도 못 찾을 말이었다. “그래, 잘됐네. 도준아. 앞으로 고모부를 과외 선생으로 모셔. 어차피 선거도 떨어져서 지금 놀고 계시거든!” 고모부를 째려보는 고모의 눈에서 불꽃이 일자 고모부는 입을 닫았다. 4월에 치러진 1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고모부는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야심과 욕심을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도 망각한 채 서울 지역구에 출사표를 던졌다. 여당에서는 야당의 강세지역을 적선하듯 던져줬고 할아버지는 노발대발하셨다. 여당에서도 포기한 지역, 할아버지의 외면을 무릅쓰고 전력을 다했지만, 예상했던 결과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할아버지 몰래 고모가 백화점 돈을 빼돌려 퍼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고모부. 다음에도 서울에서 도전하실 겁니까?” “물론이야. 2선 의원으로 끝낼 수는 없지. 3선 국회의원 하고 나서 내각으로 들어가야지.” 이 사람의 꿈이 이루어졌을 때 나이를 계산해보니 환갑을 훌쩍 넘긴다. 고모부의 맥시멈은 장관까지다. “도준아.” 갑자기 나를 부르는 고모부의 은근한 목소리. 더 듣지 않아도 뻔하다. “지금 할아버지는 너 때문에 완전 기분 좋으시잖아. 곧 보궐선거가 있는데….” “아하, 네.” “응?”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자 고모까지 놀란 눈이 되었다. “보궐선거에서 다시 의원 배지 다셔야죠. 선거자금 지원 부탁드려볼게요.” 두 사람의 입이 귀에 걸렸다. “역시 똑똑해. 척하면 착이구나. 하하.” 지금 한술 더 떠서 낚아볼까? “만약 할아버지께서 선거자금 지원 안 하시면 저라도 도와드려야죠. 고모부는 제 직속선배시잖아요.” 귀에 걸렸던 입이 벌어졌다. “네, 네가? 무슨 돈으로?” “기억 안 나세요? 예전에 분당 목장 판 돈 있잖아요. 그거 손도 안 대고 은행에 그냥 있는데요? 이자도 꽤 많이 붙었을 거예요.” ”아…!“ 삐끼가 필요할 시점이 다가온다. 신뢰도는 바닥이고 쓰레기만 모여있다고 평가받는 국회 의사당이지만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정책은 바로 그곳에서 결정한다. 고모부는 필히 국회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서 내 손을 들어줄 의원들을 모집하는 삐끼가 되어야 한다. “도, 도준아.” 감격에 마지않는 고모부가 두 팔을 활짝 벌렸지만, 저놈 품에 안길 생각은 없다. 삐끼는 사장 앞에서 허리를 숙여야지 어딜 감히…! * * * 연말 모임이 끝날 때쯤 진영준과 그의 친동생 진경준이 내 손을 잡고 조용히 호텔을 빠져나갔다. 진경준은 나보다 다섯 살 위다. 지금 미국에서 휴학 중인데 학교보다 한인타운에서 발견하기 쉬웠다. 진 회장이 세상을 떠나고 부회장인 진영기가 실권을 장악할 때까지 미국에 있을 것이다. “어디 가려고요?” “그냥 따라와. 숙부님께도 오늘 너랑 가볍게 한잔 마신다고 말씀드렸어.” 진경준도 눈을 찡긋하며 미소를 보냈다. “너 아직 아다지? 이 형은 고등학교 입학식 날 아다 깼는데. 오늘 우리 도준이 어른 되는 날인가? 흐흐.” 몸은 아다지만 정신은 걸레다, 이 자식아. 생각과 다르게 조금 긴장되기 시작했다. 여자라……. 머리는 마누라 샤워 물소리만 들어도 겁이 덜컥 나는 중년인데 몸은 여자 종아리만 봐도 아랫도리가 뻐근하다. 이 기묘한 불균형. 오늘은 마음을 풀고 균형을 한번 맞춰보고 싶은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진영준은 수입 세단을 몰고 양평으로 달렸다. 나는 한 번도 와 보지 못한 곳이다. 양평 별장은 진영기 부회장의 소유로 그 집 식구들만 이용한다. 물론 이 별장의 등기부 등본을 보면 분명 순양 계열사 중의 한 곳이 명목상의 주인일 것은 분명하지만. “도준이 넌 여기 처음이지?” “네.” “여긴 내 친구나 사촌 남자들만 가끔 모이는 곳이다. 아버지도 거의 안 오셔.” “너도 혼자 놀고 싶을 땐 여기서 놀아. 한적하니 좋아.” 두 형제는 이미 흥분한 듯 목소리도 높았고 웃음도 사라지지 않았다. 별장 현관에 서 있던 젊은 사내 하나가 달려와 차 문을 열고 허리를 숙였다. “애들 다 왔어?” “네. 그런데 저….” “왜?” “정희선 양은 오늘 못 온다고…. 갑자기 야간 촬영 들어간다면서….” 짝-!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진영준의 손이 올라갔다. 젊은 사내가 비틀거리자 이번에는 발이 올라갔다. “이 새끼야. 오늘 중요한 날이라고 했지? 그년 머리채를 잡고 끌고 오든, 납치하든 무조건 데려왔어야지!” “아오! 오늘 그 잘난 계집애 벗은 몸매 한번 볼까 싶어 미국에서 날아왔는데 글러 버린 거야?” 진경준까지 인상을 찌푸리며 땅을 퍽하고 찼다. 지금 최고 시청률 기록을 경신 중인 주말드라마의 떠오르는 샛별 정희선. 그 여배우의 이름이 나와서 놀라야 했지만 지금 내 눈앞에 벌어지는 일 때문에 놀람보다는 분노가 앞섰다. 마치 과거의 내 모습을 연극무대에서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맞을 때의 아픔보다 이깟 일이나 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 수치 그리고 분노. 지금 발길질을 당하는 저 사내는 일자리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느낄 것이다.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한 먼 과거의 느낌이 바로 지금 생생하게 살아났다. “에이, 씨팔! 지금 뭐하자는 거야!”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쥔 채 소리 지르자 진영준의 발길이 멈췄다. “오늘 나 축하해주려고 여기 온 거 아냐? 니기미, 기분 확 잡치네. 나 그냥 돌아가?” 형제는 생각지도 못했던 내 모습에 잠시 얼빠진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경험 많고 나이 많은 진영준이 재빨리 돌아왔다. “이야, 역시! 이 형이 깜빡했어. 우리 도준이도 한 성격하지? 야! 경준아. 기억 안 나? 자기 장난감 건드렸다고 강준이 다리를 그냥 확!” 진영준은 두 손을 들어 확 꺾으며 실실 웃었다. “너 오늘 도준이 덕분에 몸 성한 줄 알아. 가 봐. 내일 오후에 와서 저 애들 반납하고.” 힘겹게 몸을 일으킨 젊은 사내가 머리를 꾸벅 숙이고 자신의 승용차 문을 열었을 때 내가 말했다. “이봐요. 차에서 좀 기다려요. 난 오래 못 있어. 조금만 놀다가 가야 하니까 나 좀 태워줘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올라탔다. “왜? 내일 오후까지 느긋하게 놀다 같이 가자.” 진경준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고 진영준은 손을 들어 젊은 사내를 가리켰다. “저 자식, 차에서 새우잠 자야겠구만. 도준이도 이 안에 들어가면 나오고 싶지 않을 게 뻔한데. 으하하.”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방금 내가 널 따라 이곳까지 온 걸 하늘에 감사드린다. 진영준의 충실한 머슴 하나를 내 사람으로 만들 기회가 생겼으니. “어머, 오빠! 이게 얼마 만이야?” 대여섯 명의 젊은 여자들이 두 사촌 형에게 우르르 달려와 매달렸다. 특히, 두 명은 TV 드라마와 음악 프로그램에 자주 봤던 얼굴의 주인공이며 순양 그룹 제품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광고모델이다. “미친년. 런던까지 날아와 한방에서 뒹군 지 한 달도 안 지났다. 얼마 만이긴? 한 달 만이지.” “그건 외국이고. 한국에서 얼굴 본 건 일 년 넘었잖아.” 투정인지, 애교인지…. 아니면 영업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영준의 팔짱을 서로 끼려고 경쟁이 치열했다. “오늘은 내가 아니고 우리 막내한테 잘 보여야 할 거다. 미래의 검찰총장님이시니까 너희들 전부 성매매로 잡아갈지도 몰라. 흐흐.” “내년이면 서울대 법대생 되실 몸이다. 그러니까 아직 고등학생이다 이 말이지. 너희들이 우리 동생 먹으면 미성년자 성매매야. 아 참, 아직 아다거든? 총각 딱지 떼게 해주면… 또 모르지. 검찰총장님 애첩이 될 수도 있고. 으하하.” 진경준 역시 이미 많은 경험을 해봤는지 품에 안긴 여자애들의 가슴을 주무르는 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자자, 일단 한잔하자.” 이미 식탁에서 술과 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소주, 위스키, 맥주, 와인이 즐비한 식탁에 안자마자 진영준은 내게 맥주잔을 건넸다. “약한 거부터 시작하자.” 그가 건네는 술잔을 받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오호! 고삐리가 술 잘 마시는데?” 조금은 놀란 듯 나라 바라보는 진영준에게 잔을 내밀었다. 진경준은 술보다 여자가 급했는지 두 명의 여자를 데리고 이 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영준 형. 내가 검사가 되든, 변호사가 되든 형한테 어떤 존재가 됐으면 좋겠어?” 술 몇 잔을 마시고 조금 진지한 어투로 말하자 진영준은 싱긋 웃었다. 저놈 눈에는 내가 어른 흉내 내려는 고3으로 보일 것이다. “할아버지 곁에는 이학재가 있고 우리 아버지도 두 명의 이학재 같은 놈을 데리고 있지. 그런데 도준아, 그놈들은 다 남이야. 우린 형제고. 비록 사촌이지만 사촌도 형제다.” “형제끼리?” “바로 그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내가 유럽 지사 생활하면서 딱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아무리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보여도 아랫것들은 절대 속마음을 열지 않아. 각자 딴생각을 한다고.” 저 자식은 사람을 믿지 않는 자신의 성격을 남 탓으로 돌린다. “뭐, 이해는 해. 돈 주는 놈과 받는 놈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깊은 골이 있으니까. 하지만 형제는 다르지.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고 나눠 가지는 사이니까.” 원래의 진도준이라면 저 말을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윤현우로서 저 말이 새빨간 거짓인 것도 안다. 나누기 싫어 친동생인 진경준을 감옥에 보낸 일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 ======================================== [045] 사냥 시작 1. “도준아.” “예.” 진영준은 술기운에 붉어진 내 얼굴을 살피며,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 형제들 중에 사람 구실 할 놈은 너뿐이다. 다른 놈들은 싹수가 노래. 나이 들고 철들어도 회사 맡아 굴릴 능력은 없다고 봐.”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사촌들의 모습은 진영준의 20대 때와 다르지 않다. 지금 진영준의 모습에서도 싹수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귀국하자마자 연예인들과 놀고, 조금 전 광고 모델이 했던 말을 생각해 보면 외국 생활할 때 아예 불러서 놀았다는 뜻 아닌가. “솔직히 난 네가 사시를 패스하든, 검사가 되든 상관없어. 내 옆에서 그 좋은 머리로 함께 해보자. 넌 순양그룹의 넘버 2가 되는 거야.” 나에 대한 경계심 때문일까? 아니면 진짜 믿을만한 오른팔을 구하려는 것일까?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오빠가 머리까지 좋아? 그럼 오빠는 오늘부터 내 애인이야.” 예쁘장하게 생긴 애가 내 옆에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이 여자애 때문에 대화가 끊어져 버렸다. “너, 눈치 빠르네. 잘 해봐. 우리 동생이 너 마음에 들어 하면 넌 진짜 제대로 된 스폰 하나 잡은 거야. 고3인 그 애 재산이 수백억이라고. 하하.” 수백억이라는 말에 여자의 눈이 빛났고 진영준은 내 어깨를 툭 치고 이 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여자 두 명의 허리를 감싼 채…. “세상 참 불공평하다. 재벌 3세에 머리도 좋아. 잘생긴 얼굴에 키도 크고. 이건 뭐, 완벽한 이상형이네.” “당신도 예쁘게 태어났잖아. 그것 때문에 여기 있는 거고.” 내 허리를 감싼 그녀의 손을 풀며 말했다. “하나만 물어보자. 우리 형이랑 어떻게 아는 거야?” “내가 누군지 보다 그게 더 궁금해?” “연예인이겠지. 아니면 지망생이거나. 빨리 묻는 말에나 대답해봐.” “이 바닥 좁아. 좀 뜬 애 한 명 알면 그다음부터는 소개지, 뭐. 번호 따고 만나고 또 소개받고. 그렇게 좀만 지나면 핸드폰에 여자 연예인 이름으로 꽉 채우는 거야. 단 돈이 받쳐줘야겠지만.”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지는 거로 봐서 진영준은 따로 채홍사가 필요 없어 보였다. 아직 젊어서 그런가? “그리고 나 지망생 아냐. 곧 데뷔해. 앨범도 준비 중이고.” “가수?” “응. 너 H.O.T 알지? 올여름에 데뷔한 애들.” “그래. 알아.” “그런 컨셉이야. 대신 나처럼 귀여운 여자들이 멤버지.” 걸그룹인가? 그렇다면 설마…? “너 몇 살이야?” “열일곱.” 맙소사! 고삐리 아닌가? “정신 차려. 이런 데 따라 다니지 말고…. 자신을 소중히 해.” “……?”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면 날 빤히 보는 여자애를 보자 아차 싶었다. 이 무슨 아재의 오지랖인가? 괜한 소리 때문에 머쓱해진 속내를 숨기고 싶어 식탁에서 일어났다. “빈방 많아 보이니까 푹 자고 쉬다 가. 방문은 꼭 잠그고.”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밖으로 나와 버렸다. 다행이다. 만약 저 애가 성인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쌀쌀한 겨울 공기를 들이마시니 정신이 맑아졌다. 시동을 건 채 운전석에서 졸고 있는 사내를 보자 마음이 짠하다. 어쩌면 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 따뜻한 집을 놔두고 이 무슨 생고생인가? 먹고 사는 게 이렇게 힘들다. 보조석 문을 열고 앉으니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깜빡 졸았습니다.” “괜찮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아이고, 아닙니다. 그런데 뒷좌석에 편히 앉으시죠.” “제가 상전도 아니고 상관도 아닌데 뒷좌석은 불편합니다. 그냥 가시죠.” 차가 출발하고 한동안은 침묵만 흘렀다. 운전하는 사내가 불편한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라디오라도 들으시겠습니까? 도련님.” “괜찮습니다. 그보다 도련님이라니요? 닭살입니다.” 예의 있게 말하자 사내는 의외라는 듯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룹 전략실에 근무하십니까?” “네, 어떻게 아셨어요?” “회장님이신 할아버지와 자주 이야기 나눕니다. 그래서 기획실이 두 파트로 나뉜 것도 잘 알죠. 진짜 그룹 전략을 짜는 명문대 출신의 인재들로 구성한 파트. 그리고….” 곁눈질로 보니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이 조금 떨렸다. “우리 집 철없는 새끼들 잔심부름도 하고 똥 산 거 치우기도 하는 형님처럼 후진 대학 나온 사람들로 구성한 파트. 형님은 후자 소속이겠죠.” 핸들의 잡은 그의 손등에 핏줄이 툭툭 솟았다. 꽉 다문 입술도 떨렸다. 수치심, 모멸감. 저 기분 잘 안다. “형님은 일류대 나와서 전략 짜는 놈들보다 훨씬 더 운이 좋아요.” “내, 내가…?” “회장님 연세 생각해 보세요. 곧 팔순입니다. 살면 얼마나 살겠어요? 회장님 돌아가시면 우리 큰아버지들 셋, 고모까지 넷입니다. 순양그룹 찢어먹으려고 눈이 시뻘게질 겁니다. 부회장님은 독식하려고 칼춤 출 거고요.” 수치, 모멸 같은 감정이 사라진 얼굴에 경악만 가득했다. “그때 형님이 아는 이 집안사람들의 비밀, 그거 아주 값비싸게 팔 수 있을 겁니다. 일류대 나와 사무실에서 전략 짜는 새끼들이 평생 벌어도 못 벌 돈을 한방에 쥐는 거죠.” “너…. 너 뭐야? 무슨 말 하는 거야?” “도련님이라는 호칭은 닭살 돋는데… 반말은 열 받네요. 조심합시다.” 나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알아들었으려나? “저 피곤한데 눈 좀 붙이겠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깨워주세요. 형.님!” 그는 아무 말 없이 차의 속도만 높였다. * * * 1997년 1월 22일, 한도그룹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을 비롯하여 산업, 외환, 조흥은행의 은행장 네 명은 꼬박 하루 동안 한도그룹 정 회장을 설득했다. “회장님. 이런 식이면 다 죽습니다. 정부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특혜시비를 우려합니다.” “이미 지난 18일부터 1백50억 원에 달하는 어음도 못 막으셨지 않습니까? 사실상 부도상태라고요! 아직 현실을 모르시겠습니까?” “8백50개의 하청, 협력업체도 생각하십시오. 십만 명이 넘는 가장이 길바닥에 나앉습니다.” “회장님 일가의 경영권만 포기하십시오. 그럼 청와대도 허락할 겁니다. 한도를 지원할 명분이 생기니까요. 정부도 한도의 부도를 막고 싶어 합니다. 경영권만 포기하시면 긴급 자금지원은 물론이고 은행 공동으로 자금관리도 해주겠습니다.” 정 회장은 은행장들의 간절한 심정을 외면하며 남의 집 이야기처럼 뒷등으로 흘렸다. “제일은행이 1조1천2백억, 산업은행은 8천9백억, 조흥은행 5천억, 외환은행도 4천5백억. 이게 내가 빌린 돈이요. 맞소?” 최 회장은 부도 당사자 임에도 은행장들보다 한결 느긋한 표정이었다. Too Big to Fail, 바로 대마불사의 규칙을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한도그룹이 쓰러지면 은행은 수조 원의 부실채권을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수조 원을 또 한 번 밀어주는 건 가능해도 날아간 수조 원은 되찾기 힘들다. 최 회장은 은행이 공멸을 선택할 거라는 생각은 단 일초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 회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다음날인 23일, 서해안 당진에 제철소를 짓던 한도제철이 쓰러졌다. 정치권과 은행의 결단이 최 회장을 목을 쳐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여신관리기준 9위, 자산 기준 14위, 국내 계열사만도 22개에 달하는 한도 그룹은 공중분해 될 처지에 놓이게 됐다. 주거래은행들도 흔들렸고 그 밖에 70여 개 금융기관도 위험에 빠졌다. 이제 치명상 입은 먹잇감을 노리는 야수들이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한도 사태에 따른 전경련 긴급회의라는 명목으로 모인 재벌 총수들은 재계 1, 2위를 다투는 순양과 대현이 한도를 탐낸다는 걸 알자 일찌감치 패를 덮고 포커판에서 빠져버렸다. “내가 얼마 전에 공장에서 일하는 애들 연수원 만들려고 폐교를 하나 샀거든? 그런데 횡재했지 뭐야. 폐교 담벼락을 따라 자란 나무들이 엄청 비싼 거였어. 폐교 매입 금액의 두 배가 훌쩍 넘더라고.” 대현 그룹 주영일 회장은 담배 한 개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부도난 한도제철과 곧 부도날 한도건설은 폐교나 다름없다. 채권을 탕감하고 헐값에 매입하면 고가의 나무들이 따라온다. 두 회사 소유의 알짜배기 땅. 이 땅이 바로 나무다. “거 참, 신경 쓰이게 왜 담배를 조물딱거려? 피라고!” “난 이렇게 담배를 눈앞에 두고 참아야 금연 성공해. 진 회장도 담배 끊은 지 얼마 안 됐지? 참으라고. 눈앞에 담배가 있어도 피고 싶지 않을 때가 바로 금연 성공이야.” 주 회장은 담배 한 개비를 진 회장의 눈앞에 흔들었다. 한도제철 인수전에서 빠지라는 뜻이다. 진 회장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담배를 낚아채고 입에 물었다. “불 없나?” 진 회장이 손을 내밀었을 때 주 회장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불도 들고 다녀야 유혹이 더 강해지지. 반쪽짜리 유혹 참는 거야 누가 못해?” 진 회장은 곁에 대기하던 이학재 실장에게 손을 내밀자 그는 공손하게 라이터를 건넸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담배에 불을 붙인 진 회장은 길게 한 모금을 빨았다. 오랜만에 들이마신 담배 연기 때문에 어지러운지 머리를 의자에 대고 한동안 눈 감고 있었다. “주 회장. 내가 몸 상하는 거 때문에 금연 한 줄 아나? 늙으니 노인 냄새가 짙어져서 담배 끊은 거야. 건강? 그런 거 챙기려 했으면 운동선수 했지, 장사 시작 안 했어.” 주 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한도제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진 회장의 선언이다. 순양그룹에 손해를 끼치더라도 인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까지 보여준다. “계산 끝냈을 텐데? 원화 1조와 달러 10억은 줘야 제철소 용광로 구경할 수 있어. 뒤따라올 한도건설도 1조 원은 줘야 하고. 순양이 우리 대현 레이스에 따라붙으면 은행 배만 불려주는 꼴인데?” “손 떨리면 빠지시던지.” 진 회장이 이죽거리자 주 회장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오랜만에 좋은 일 한번 하지, 뭐. 은행이 튼튼하면 나라 경제도 좋잖아?” 사람 속 긁는 데는 따라올 자가 없다. 얼마 전, 손자 수능 성적으로 속을 뒤집어 놓더니 이젠 돈 지랄로 속을 긁는다. 주영일 회장은 진 회장의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슬쩍 빼서 한 모금 빨았다. 자신도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행동이다. 불꽃 튀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룹에 도움이 될 회사를 싸게 인수한다는 목적 위에 자존심까지 더해졌다. 돈 많은 사람이 돈에서 밀려 판을 접는 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도 없다. 주 회장은 입안에 모래를 한 줌 머금은 느낌이었다. 1조 원으로 생각했던 인수 금액이 두 배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 * * “회장님. 좀 심하셨습니다. 주 회장, 단단히 준비할 텐데요?” “그래 보였어?” “네. 이 악문 모습을 보니 2조 이상도 쓸 것 같습니다.” “으허허허. 그 친구 성깔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이학재의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진 회장은 웃음까지 터트렸다.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정부에서 부도 여파를 줄이기 위해 채권단을 독촉합니다. 한도제철 입찰, 곧바로 시작할 겁니다. 1조 원과 10억 달러는 마련해 뒀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대현은?” “작년, 오일머니가 잔뜩 들어왔습니다. 어차피 비가격 요소는 비슷하니까 높은 금액 써내는 쪽이 이깁니다. 자금력에서는 우리가 밀릴 겁니다.” 진 회장은 달리는 차의 창문을 내렸다. 얼어붙은 찬 바람이 차 속으로 밀려들었다. “규칙이 하나뿐인 게임이 있나? 게임의 룰은 여러 가지야. 반칙도, 오심도 게임의 일부고.” “혹시 다른 방도가 있으십니까?” “채권심사단 구성되면 자리 한 번 만들어. 고생할 사람들인데 밥 한번 사야지.” 채권단에 돈 봉투를 돌리는 건 대현도 할 수 있다. 이학재는 진 회장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046] 사냥 시작 2. 진 회장은 서류 한 장을 손에 들고 흔들었다. “이거 정확한 수치야? 2조3천7백억?” 본사 회의실에 모인 한도제철 인수팀은 아주 잠깐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진영기 부회장이 대표로 대답하자 진 회장은 다시 한 번 숫자를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한도제철 가치가 이 정도라면 대현그룹은 분명 이 금액으로 입찰할 거다. 그리고 대현은 이미 철강의 노하우가 쌓여있는 곳이니 우리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을 건 뻔하고. 그럼 우린 얼마를 적어야 할까?”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한다. 입찰 금액은 한도제철을 먹겠다는 회장님의 의지와 비례한다. 의지가 강하다는 것은 알지만, 수치로 환산하지 못한다. 회장님 본인도 환산하기 어려운 것이 분명한데 어찌 대답할까? 하지만 진 회장의 시선 때문에 대답을 피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진영준 부장. 어떻게 생각해?” “1조8천억입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이 나오자 진 회장도 조금 놀라는 듯 보였다. “왜?” “이 금액이 현재 우리 순양이 제시할 수 있는 맥시멈이니까요.” “그럼 보나 마나 대현이 이기는데?” “빚내서 인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한도제철의 가치와 우리 자금 여력은 정확합니다. 돈 싸움으로 흘러가면 안 됩니다.” “공개입찰인데 돈 말고 뭐로 싸우지?” “한도제철을 인수했을 때 가장 시너지효과가 발생하는 기업이 바로 우리 순양이라는 걸 내세웠으면 합니다. 대현은 이미 제철을 가지고 있으니 그 효과가 미미한 편입니다.” 꽤나 그럴싸한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말은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다. “그럼 우리가 인수했을 때 진 부장이 말한 그 시너지 효과를 보고서로 만들어봐. 심사단이 감동할 정도로 훌륭하게. 일주일 준다.” “...네.” 자신 없는 대답이지만 맹탕은 아니다. 서른 넘어가니 제 몫은 할 것처럼 보인다. 회장은 다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또? 1조8천억이 전부야? 다른 의견 없어?” “2조5천억.” 홍송철 건설 사장은 대수롭지 않게 툭 던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하자 진 회장도 호기심을 드러냈다. “근거는?” “채권단의 눈에는 대현과 순양은 차이가 없습니다. 누구 손에 들어가던 정부도 수긍합니다. 공정성에서 잡음이 나지 않으려면 더 높은 금액을 써내야 하는 건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영기 부회장과 진영준의 얼굴이 붉으락 거렸다. 힘겹게 준비한 내용을 홍 사장은 ‘효과 없음’으로 간단히 치부해버렸다. “부족한 돈은 어디서 끌고 와?” “순양 건설에서 확보한 아파트 부지가 있습니다. 일단 그 땅을 담보로 7천억 대출은 가능합니다.” 위험한 다리의 절반은 건넜다. 돈 준비는 가능하니까 말이다. “그럼 7천억 대출은 무슨 돈으로 갚아? 대출 쫙 깔아놓은 땅에다 아파트 지어서 팔 수는 없는 노릇이잖나.” “그건 건설에서 깔끔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회장님.” 진 회장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가장 바람직한 대답이었다. 당면한 문제는 해결하고 과정은 생략한다. 혹시라도 불법, 탈법적인 일이 있더라도 혼자 책임질 뿐 회장에게는 불똥이 튀지 않는다. 회장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거짓말할 필요조차 없다. 사실이니까 말이다. 역시 신뢰할만하다. “홍 사장은 나 몰래 빼돌린 돈이 상당하나 봐. 7천억이 뉘 집 강아지 이름도 아닌데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면 말이야. 허허.” 두 사람을 제외하고 회의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진영기 부자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홍송철 사장은 부회장인 자신의 편에 설 생각이 없다는걸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 * “예상대로 대현은 2조3천억을 생각한답니다.” “대현답다. 꼼수는 안 부리는 사람이지. 주 회장은…….” 진 회장과 이학재 두 사람은 서재에 모여 인수의향서를 검토하는 중이다. “그런데 회장님, 정말 2조5천억을 투자하실 생각이십니까?” “왜? 내키지 않아?” “한동안 그룹 자금 운용이 삐거덕거릴 겁니다.” “너무 겁주지 마라. 다 생각이 있으니까.” 진 회장의 여유 있는 태도가 께름칙한지 이학재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자, 우리 도준이는 어떻게 생각하니? 정말 돈 말고는 방법이 없을까?” 나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에 담긴 기대를 만족하게 할 수 없다. 저 음흉한 속을 누가 알랴? “힌트 좀 주실래요? 도저히 모르겠어요.” 이학재 실장이 하고 싶은 말을 내가 대신하자 할아버지는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웃었다. “나무 한 그루를 팔아도 잘 키울 사람에게 팔고 싶지, 도끼질해서 땔감으로 팔아먹을 사람에게 팔고 싶지는 않은 게 사람 마음이다.” 이학재도, 나도 눈이 커졌다. “회장님. 대현이 한도제철을 되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대현 주 회장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나무 키워 파는 사람만 그렇게 생각하면 되지. 안 그래?” “아하.” 이학재는 그제야 진 회장의 계획을 알 수 있었다. 심사단과 식사자리 한번 마련하라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도준아. 이 정도면 힌트가 됐느냐?” “네. 만약 대현이 인수하면 한도제철 소유의 땅에 아파트를 지어서 팔고 제철소 설비는 외국에 팔아 버린다. 한도제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철강에 처음 진출하는 우리 순양은 한도제철 정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거 아닙니까?” “그렇지. 이거, 힌트를 너무 많이 줬구나.” 이 방법이 과연 먹힐까? 대현도 막강한 인맥을 거느렸다. 설사 그들의 목적이 되파는 것이라 해도 그들을 지지할 사람도 차고 넘칠 것이다. “그럼 할아버지께서는 인수 자금을 얼마나 생각하세요?” “나? 1조 원 플러스 10억 달러. 더 쓰고 싶어도 돈이 없어. 허허.” “회, 회장님. 차이가 너무 큽니다. 5천억이나…!” 이학재는 사색이 되었지만, 할아버지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떡밥이나 잘 뿌려놔. 낚시는 내가 한다.” 떡밥을 광범위하게 뿌리는 가장 좋은 도구는 바로 언론이다. 신문과 방송은 산업의 쌀이라는 철강 산업은 꼭 살려야 한다면서 떠들어대며 심사단을 압박한다. 하지만……. 아이고, 쪼잔한 우리 영감님. 5천억 차이면 좀 위험한데…. 굳어있는 내 얼굴을 보자 할아버지는 슬쩍 웃었다. “도준아. 두 눈 뜨고 이 할애비가 어떻게 하는지 잘 지켜보거라. 지난 수십 년간 내가 키운 공무원 놈들을 어떻게 써먹는지도 잘 봐.” 마냥 지켜볼 수는 없다. 순양 그룹이 꼭 이겨야 한다. 그래서 그동안 모아둔 돼지 저금통의 배를 갈라야 한다. 무리해서 빚까지 내면 더 좋다. 현금 유동성이 바닥을 길 때 외환위기라는 쓰나미를 맞아야 내가 가진 달러가 더욱 빛을 발할 테니까 말이다. “도준이는 이만 가보거라. 내일 입학식이지?” “아, 네.” “총장하고 학장에게 전화 넣어 뒀다. 가끔 학교 가서 될성싶은 놈들에게 소주 한 잔씩 사줘라. 고비 때마다 널 도와주도록 만들어 놔.” “네. 할아버지.” “참, 밖에 네 잔심부름 할 놈 하나가 대기 중이야. 똘똘한 놈으로 골랐으니 쓸 만 할 게다.” 벌써? 조금 놀랐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앞으로 수족처럼 움직일 사람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서재를 나오자 젊은 사내 한 명이 머리를 꾸벅 숙이며 공손히 명함을 내밀었다. “그룹 전략실 대리 김윤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세요. 몇 년 차에요?” “네? 아, 4년 차입니다.” 4년이나 버텼으면 꽤 버텼다. 인내심이 강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살거나, 둘 중 하나인데…. 할아버지가 신경 써서 골랐을 테니까 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댁으로 가실 거죠?” 김 대리는 현관에 서 있는 중형차로 달려가 뒷문을 열었다. 잠시 망설였으나 그냥 뒷좌석에 올랐다. 김윤석이 누구 사람인지 아직 모른다. 자연스럽게 행동할 때다. 아직은. “김 대리님.” “네.” 차가 시내로 접어들었을 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가 대리님을 배정했습니까? 부회장님이신가요?” “아닙니다. 이학재 실장님이십니다.” 이 실장이라……. “보고서는 누구에게 제출합니까? 전략팀장? 아니면…….” 내 질문에 다소 놀란 듯 룸미러로 나를 힐끗 쳐다본다. “내 행동 하나하나 보고할 것 아닙니까? 다 아는 사실인데 뭘 그리 놀라세요?” “죄, 죄송합니다. 그런 질문은 처음이라서….” “이전에는 누구 담당하셨습니까?” “전 영빈관 담당이었습니다. 회장님 가족분을 모시는 건 처음입니다.” 룸미러로 내 눈치를 슬쩍 살피던 김 대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실장님께서 직접 보고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혹시 제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눈치 빠른 자다. 어차피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할 테지만 저 질문 하나로 나를 방심하게 만든다. “아뇨. 사실대로 보고하세요. 저는 김 대리님의 업무지만 이 실장님은 상관이시니 상관 말을 따라야죠.”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또 한 번 내 얼굴을 슬쩍 살핀다. 저자의 선택을 두고 보면 어떤 남자인지 알 것이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내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며 말했다. “학교는 대중교통 이용할 테니까 매일 오실 필요 없습니다. 일 있으면 연락 드리죠.” 당황한 김 대리를 못 본 체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아직은 거리를 둬야 한다. *** “삼촌. 우리도 한도제철 인수전에 뛰어들까요?” “아서라. 우리가 노는 물이 아니다.” 오세현은 거론할 가치도 없다는 듯 쳐다보지도 않았다. “너무 칼같이 자르지 마시고요. 제 말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거 인수해서 네가 경영할 거야? 아니잖아. 어차피 쫙쫙 찢어서 팔아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곧 입찰 들어갈 텐데 되팔 곳 찾는 데만 1년은 걸릴 거다. 물론 되팔게 될 거라는 보장도 못 해.” “삼촌 말씀 다 맞아요. 제 말은 인수전을 좀 뜨겁게 달궈볼까 하는 겁니다.” 그제야 내 눈을 마주치며 안경을 벗었다. “또 무슨 꿍꿍이야? 이미 순양과 대현, 양자대결 아냐?” “할아버지를 좀 도와주고 싶거든요. 순양이 꼭 한도제철을 먹었으면 합니다.” 짧은 숨을 내쉰 오세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주주님께서 원하시니 월급쟁이 사장은 따를 수밖에. 뭘 하고 싶은 거냐?” “먼저 인수의향서를 제출하고 기업 사냥꾼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야죠. 기업을 분해해서 외국에 팔아먹는 걸 매국 행위로 생각하도록 말이죠.” “그게 순양 그룹에 도움이 된다?” “네. 할아버지 전략이거든요.” “인수 금액은?” “2조 5천억.” “그게 최고가가 될 것 같은데?” 어차피 인수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아니까 놀라지도 않는다. “혹시 모르니까 부채 전액 탕감이라는 조건을 걸어두마. 그래야 만에 하나 우리가 덜컥 인수자가 되는 일은 없을테니까 말이다. 잘못 풀리면 네 돈 전부 여기에 꼬나 박는다. 흐흐.” * * * 『미국계 투자 자본인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가 한도제철 인수전에 뛰어들었습니다. 아예 2조5천억 원이라는 인수금액을 밝히며 강한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라클 인베스트먼트 오세현 대표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수많은 기업이 등장하고 사라집니다. 한도제철 역시 그중 하나일 뿐이고요. 영원히 지켜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도제철의 정확한 가치를 파악했고 인수를 자신하고 있습니다.” “만약 인수자로 선정된다면 한도제철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우리는 투자자일 뿐, 경영자가 아닙니다. 제철 공장은 원하는 기업에 넘길 것이며 회사가 보유한 토지는 건설 회사에 되팔 것입니다.” “그 말씀은 투기자본이라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투기라는 말을 거북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도제철 채권단인 은행은 가장 높은 가격의 입찰자를 선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부실 채권을 줄여야죠. 은행도 위험해 질 수 있는 단계 아닙니까?” TV를 보던 진 회장은 리모컨을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저 새끼 당장 잡아와. 어디서 감히 내가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질이야!” 이학재 실장은 황급히 여의도로 달려갔다. ======================================== [047] 특기 살리기 “당신…! 그냥 찔러본 건 아닐 테고, 인수의향서는 왜 넣은 거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소리치는 이학재.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 오세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열탕과 냉탕이었다. “거, 이제 연세도 드실 만큼 드신 분이… 성질 좀 죽이십쇼.” “말 돌리지 말고!” “내 방송 보고 이러는 거면 인터뷰 다시 잘 보고 성질 내십쇼.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도움되려고 애쓰는 거 보고 궁리한 거요.” “뭐라?” “돌아가셔서 주판 다시 튕겨보세요. 이득 본 겁니다. 아, 물론 돈은 좀 더 써야겠죠. 하지만 심사단 설득할 때 훨씬 유리할 겁니다.” 이학재는 멍한 얼굴로 오세현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전 바빠서 이만…. 채권단 미팅이 있어서요.” 사무실을 나가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정신을 차린 이학재는 전화 꺼내 들었다. “미라클 오세현이가 방송 나온 거 찾아와. 회장님댁으로 돌아갈 때 다시 한 번 봐야겠어.” 이학재는 자동차 뒷자리에 앉아 묵직한 노트북의 무게를 무릎으로 느끼며 인터뷰 영상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도움을 주는 내용이 뭔지 알기까지 그리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 회장과 오세현을 따로 떼어 놓으면 뜬금없이 끼어든 경쟁자지만, 진 회장의 의도를 파악한 오세현이 끼어든 것이라면 여론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단단히 한다. 노트북을 덮은 이학재는 어이없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허허, 이거 참. 졸지에 앞뒤 없는 삼돌이 됐네.” 그의 실소가 해답을 찾아낸 웃음이라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 운전기사는 차의 속도를 높여 진 회장의 집으로 달렸다. 헛기침을 한번 하고 서재로 들어서자 진 회장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회장님.” “학재야. 이거 마냥 화만 낼 일은 아닌 것 같다. 괜찮은 불쏘시개가 될 것 같기도 하고…….” “네. 오 대표의 의도 역시 땔감이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뭐? 그자가 직접 말했어?” “그렇습니다. 도준이가 회장님 돕겠다고 만든 두 사람의 합작품이라고 합니다.” 진 회장은 손자의 이름이 나오자 입이 떡 벌어졌지만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으허허허. 세상에나…. 모두 시뻘건 눈으로 내 돈 빼먹기 바쁜데 손자놈은 날 도와주려고 미국 투자사까지 동원해? 이런 기특한 놈이 있나!” 이학재는 진 회장의 웃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장작이 활활 타오를 때 밥을 지어야 한다. 때를 놓치면 재만 남는다. 할 일이 많다. “내일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비난 기사를 일제히 터트릴 생각입니다. 오로지 돈만 생각하는 기업 사냥꾼, 투기자본의 위험성, 국부 유출 같은 자극적인 단어로 도배해야죠.” “그리고?” “각 방송사 토론 프로그램마다 우리 사람을 내보낼 생각입니다. 경제학 교수 대여섯 명 섭외해서 동일한 논조를 강조하면서….” “대현이라는 이름도 슬쩍 끼워 넣는다?” “네. 이미 충분한 제철소를 확보한 대현 그룹인데, 굳이 인수하겠다는 것은 한도제철의 토지를 노리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실제 노리는 것은 아파트 지어 팔아먹겠다는 속셈 아닌가…? 이 정도만 던져 놓으면 자연스럽게 한 묶음으로 치부될 겁니다.” 진 회장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바로 그거야! 이거 참, 타이밍이 절묘하구먼. 처음부터 대현을 까기가 좀 그랬는데 오세현이가 포문도 열어주고 기회까지 주는구먼. 주 회장, 뒤통수가 얼얼하겠어. 허허.” “하지만 문제도 있습니다. 인수 가격을 조금 올려야 합니다.” 돈 때문인지 진 회장은 웃음을 그쳤다. “거, 오세현 그놈은 왜 쓸데없는 소리까지 해버린 거야?” 2조5천억.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가 공개해버린 인수금액. 이 금액은 절대치가 되어 두고두고 순양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게다가 대현 그룹까지 2조3천억을 써내면 2조 원 밑으로 써내기는 힘들어진다. 특혜시비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2조 원 이상은 써야 채권단의 명분도 선다.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해외 투기자본이라는 걸 강조하려면 돈질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효과가 크니까요. 진짜 입찰자라면 그런 말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일단 최종 입찰 때까지 분위기 좀 보자고.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2조 원에 맞추고.” “네. 그럼 전 홍보팀 불러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수고 좀 해.” 혼자 남은 진 회장은 날아갈 것 같은 가벼운 마음이었다. 늘그막에 똘똘한 손자 하나가 주는 즐거움 덕분에 10년은 젊어진 느낌이었다. * * * 재벌순위 26위, 그룹 총자산 2조5천3백78억 원, 매출 1조4천9백25억 원의 삼미그룹이 겨우 11억1천9백만 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3월 19일, 최종부도처리 됐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것을 모르는 대한민국은 경제 위기보다 두 전직 대통령의 재판에 눈과 귀가 쏠려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둘 다 관심 없었다. 내가 신경 쓰는 것은 내일 있을 신입생 환영회였다. 입학식 이후 두어 번 수업에 들어갔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수능 인터뷰 때문인지 모두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고 끼리끼리 모여 쑥덕거릴 뿐, 내게 말을 거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선배들 몇몇은 강의실로 찾아와 내 모습을 구경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환영회에 가서 동기, 선배들과 말이라도 터야 나아질 것 같았다. 어차피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작은 이벤트 하나를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다음날, 오후 늦게 학교에 도착해서 두어 시간 강의를 듣고 6시부터 시작하는 환영회 장소인 학생회관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법학과 학생 수는 400명에 육박하지만, 참석자는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매년 사법고시 합격자의 절반이 서울대다. 입학과 동시에 사법고시 하나만 바라보고 달리는 놈들이다 보니 학교 행사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놈은 드물었다. 이벤트 준비를 좀 과하게 했나? 식당 구석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으니 주변 애들이 또 힐끔거린다. 내가 참석한 것이 의외였나 보다. 테이블 위에는 소주와 맥주, 음료수 몇 병이 보였고 가스버너위에는 냄비와 불판이 놓여 있었다.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으려나 보다. 소란스럽게 떠드는 곳은 선배, 어색함이 흐르는 곳은 신입생이었다. 내 머릿속에 재벌 3세의 기억만 있었더라면 이런 곳에 와서 어색하게 앉아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묻고 싶을 때 누군가 마이크를 잡았다. “모두 반갑습니다. 저는 95학번…….” 3학년인 과 대표의 소개와 교수들의 인사말이 끝나자 신입생들의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출신 고등학교와 선배와 동기들에게 각인할 수 있는 자신의 특징이나 별명 같은 것을 말하며 마이크를 넘겼다. 이때만 해도 좋은 시절이다. 신입생 대부분이 지방 출신이다. 서울 강남 부잣집 자식들이 명문대까지 독식하는 세상이 아니라, 개천에서 용 나고 지방 고등학교에서 상위권 성적이면 충분히 명문대에 진학 가능한, 그럭저럭 평등한 세상이다. 아직까지는. 내 차례가 돌아와 일어서서 마이크를 잡으니 학생 식당 전체가 얼어붙은 듯, 수군거림이 멈췄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다음 과 대표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님. 조금 길게 말해도 될까요?” “응? 아… 그, 그래.” “감사합니다.” 또 한 번 머리를 숙였다. “이미 저를 아시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운 좋게도 부자 할아버지를 둔 진도준입니다. 덕분에 쉽게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일부는 웃음을 지었고 일부는 무표정했다. 단지 돈이 많다고 해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저는 동기들, 선배님들과 스스럼없이 친해지고 싶은데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제 특기를 한번 살려볼까 합니다.” 특기를 살린다는 말에 모두 호기심을 확 드러냈다. “선배님. 학교 동기들과 선배님들에게 조그마한 선물을 주는 것도 뇌물죄에 해당합니까?”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과 대표는 화들짝 놀랐지만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건 아니야. 뇌물은 대가성이 있느냐 없느냐인데 이 경우, 선배나 동기가 줄 수 있는 대가는 우정이라는 추상적인 무형의 대가뿐이거든.” “그렇군요. 그럼 교수님께 값비싼 선물을 드린다면 뇌물죄가 성립합니까?” 교수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한 교수가 소리쳤다. “아쉽지만 성립해. 교수는 학점이라는 무기를 쥐고 있거든. 학점은 추상적인 게 아니라서 말이야. 하하.” “다행입니다.” 식당 안에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이제 학생들도 선물이라는 단어 때문에 기대에 찬 눈빛으로 변했다. 나는 웃으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모두 또 한 번 놀랐다. 재벌 3세면 당연히 휴대전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대학 신입생이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는 건 아직 낯선 시절이기 때문이다. 재빨리 삐삐 번호를 누르고 기다렸다. 식당 입구에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상자가 가득 쌓인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특기는 할아버지께 배운 겁니다. 선물로 환심을 사는 것. 그리고 선물은 항상 기대 이상의 것을 준비할 것.” 사내들이 상자 하나씩 학생들에게 전하자 모두 비명 같은 탄성을 내질렀다. “이건 다음 달에 출시할 순양 노트북입니다. 펜티엄 MMX급이고 인텔 칩을 장착했습니다. 램은 128메가, 하드 용량은 무려 6기가입니다. 8배속 CD-ROM도 달려있….” 내 설명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노트북 박스를 뜯기 바빴고 교수들까지 구경 하느라 정신없었다. 할 수 없이 마이크를 내려놓고 이 흥분의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 # # “뭐? 신형 노트북 200개?” “네.” “이놈아. 그게 얼만 줄 아느냐?” “판매가가 대략 3백만 원대니까 6억쯤 되겠네요.” “그걸 애들에게 나눠준다고? 단지 환심 좀 사려고?” 할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나를 흘겼다. “환심도 사고, 내 편으로 만들고… 또 엄청난 광고도 하고요.” “뭐라? 광고?”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 집합소, 서울대 법대생이 들고 다니는 노트북. 학교 안에 소문이 쫙 퍼질 겁니다. 직장인만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대학생도 가질 수 있는 노트북이라는 이미지가 박히는 거죠.” 할아버지는 내 의도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만으로 광고가 되긴 힘들다. 어차피 학교 안에서만….” “후속타를 쳐야죠.” “후속타?” “개발이 늦어져서 신학기 타이밍을 놓쳤잖아요. 대학생 특별 할인, 아카데미 이벤트를 하는 거죠. 서울대를 배경으로 광고도 좀 찍고요.” 할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이미 서울대의 상징인 정문이 드러나는 광고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결정타를 날렸다. “아까우시면 제 돈으로 살게요. 6억 정도는 제게 푼돈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이놈이! 이 할애비를 쪼잔한 사람으로 만들어?” 눈을 한번 부라리더니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런데 도준아. 왜 200대뿐이냐? 법학과 전부 400명쯤 되는 거 아니야?” “신입생 환영회 참석은 절반 정도라고 들었어요. 참석한 사람만 줘야죠.” “그건 왜지?” “차등이죠. 참석한 사람, 불참한 사람. 똑같을 순 없으니까요. 불참한 놈들은 이마를 치며 후회하게 만들어야죠. 보상은 늘 날 따르는 사람만 얻을 수 있다는 걸 확실하게 심어줄 겁니다.” 할아버지는 무릎을 탁 쳤다. “바로 그거야! 말을 움직이려면 채찍보다 당근이 효과적이야. 으허허.” * * * 신입생 환영회는 역대 어느 때보다 흥겹게 흘러갔다. 행여나 노트북을 잃어버릴까 봐 술을 절제하는 것도 느껴졌다. 그리고 김윤석 대리는 내게 조용히 다가와 메모를 건넸다. 내 선물을 거부한 놈들의 명단이었다. 이들은 한 번쯤 눈여겨 볼만하다. ======================================== [048] 선택권 없는 집안 1. 학교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4월이라 봄기운이 완연했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다. 학교 정문에서 강의실까지 걸어갈 때 꽤 많은 동기, 선배들과 인사를 나눴고 함께 강의실까지 걸어가는 학생도 생겼다. 강의실에서도 내게 먼저 말을 붙이는 애들도 많다. “야, 도준아. 노트북 완전 작살이야. 끝내줘. 근데 그거 가지고 논다고 공부를 안 한다. 흐흐.” “그게 숨은 목적이야. 경쟁자에 장난감 하나 던져주고 공부 못하게 만드는 거.” 이런 말로 그들의 찝찝함을 덜어주는 게 내가 할 일이다. “노트북 쓰니까 이제 펜을 안 써. 전부 워드다.” “아, 그거 역시 목적이었어. 리포트 쓰면 파일 줘. 살짝 만져서 그냥 제출하면 되거든. 흐흐.” 실없는 농담을 하며 강의실을 훑었다.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하지 않아 노트북을 받지 못한 놈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그 시선 속에 한 번 더 노트북을 뿌리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도 읽혔다. 5월 축제 때 한 번 더 뿌려도 좋을 듯싶었다. 그리고 메모 속의 몇몇도 보였다. 강의가 끝나고 잠깐 쉬는 동안 자판기 커피를 뽑는 놈에게 다가갔다. 이놈은 어떤 마음으로 대현 그룹 대졸 초임의 두 배가 넘는 300만 원의 유혹을 거절했을까? 자판기에 백 원짜리 하나를 넣고 커피를 뽑았다. “넌 노트북 안 가져갔다면서? 깜빡한 거야?” 종이컵은 든 그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씨발, 왜? 그거 덥석 받고 감사합니다, 이런 말 듣고 싶어서?” 뭔가 특별한 말이 나올 걸 기다렸는데 괜한 기대였다. 뻔한 자존심이 이유였다. “뭐, 딱히 그런 생각은 없었는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하는 내 모습에 더 화가 났나 보다. 점점 더 가시가 돋친 말이 쏟아졌다. “돈 자랑은 안 해도 너 재벌 3세라는 거 알아. 그런데 이제는 하다 하다 대학 동문한테도 돈 지랄이야?” “그러면 너는 선배가 구내식당 천오백 원짜리 밥 한 그릇 사줘도 거절하니? 돈 자랑이라고?” 난 주머니에서 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꺼냈다. “동기가 백 원짜리 자판기 커피 한잔 뽑아주는 것도 돈 지랄이야?” “이 새끼야! 그게 노트북이랑 같아?” “같아.” “뭐?” 어린 노무 시키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귀엽기까지 하다. 하긴, 이때 아니면 언제 자존심을 지키겠는가? 세상에 나가서 이리 깨지고 저리 치이고 하다 보면 자존심이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같다고. 넌 일, 십, 백, 천, 만! 이런 식으로 숫자를 세겠지만 난 억, 십억, 백억, 천억! 이런 단위만 생각해. 일억 밑으로는 그냥 잔돈이야.” 손에 든 종이컵을 휴지통에 던졌다. “노트북과 자판기 커피…. 차이 없어. 재벌 3세한테는.” 시뻘게진 얼굴을 보니 너무 심했나 싶었지만 밟을 땐 확실하게 밟아줘야 한다. 쳐다보지도 못하게. “넌 길바닥에 백 원짜리 하나가 떨어져 있으면 냉큼 줍겠지? 커피 한 잔이 공짜로 생기는데? 그럴 땐 자존심이 없어지고 학생회관에 떨어진 삼백만 원짜리는 주울 때만 자존심이 생겨? 그런 게 자존심이라면 참 쓸모없다. 그렇지 않아?” 일그러진 얼굴을 확인하고 돌아섰다. 다른 놈들 대부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실망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쓸만한 놈도 있었다. “이봐, 진도준.” 나를 빤히 보며 실실 웃는 놈. 시골에서 농사꾼 집안 출신이 분명한 듯 새까만 얼굴이 얼핏 보면 예비역 같다. “선배가 뇌물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거 뇌물 맞아, 인마.” “그게 왜 뇌물이 되지?” “원래 뇌물은 선불이야. 청탁 들어주고 받는 건 추가로 주는 감사의 선물이지.” “넌 공무원도 아니고, 내가 청탁한 것도 없는데?” “뇌물을 꼭 청탁하기 직전에 주냐? 미리미리 몇 년 전부터 뿌리는 경우도 많아. 몇 년 뒤면 난 검찰청 공무원이 될 테니까 제대로 뇌물인 거지. 네 할아버지한테 배운 거냐?” “아니. 난 우리 집안 막내라서 할아버지가 뭘 가르쳐주거나 하지 않아. 그런 일은 큰집 사촌 형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야.” “그럼 넌 순양 그룹에서 완전히 열외야?” “그렇다고 봐야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회장님 막내아들인 우리 아버지도 일찌감치 열외됐거든. 그래서 지금 영화 만드시잖아.” “그럼 넌 무늬만 재벌 3세네?”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예비역처럼 생긴 놈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니기미. 챙길걸.” “풋-.”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이놈 이거, 재미있다. “야! 지금이라도 주면 안 되냐? 늦었어?” 받을 생각도 없는 놈이 괜히 손을 내민다. 적을 만들지 않는 타입이다. 나이답지 않다. “너 혹시 재수나 삼수했어?” 실실 웃던 놈이 웃음을 거두고 굳은 표정으로 변했다. “나이 들어 보인다는 뉘앙스 풍기지 마라. 역린 건드리는 거다, 그거.” “노트북 주면 한 번 봐주냐?” “다음에. 지금은 처음이니까 봐줄게.” 담배꽁초를 비벼끄고 도서관으로 들어가 버리는 등을 향해 소리쳤다. “대답은 하고 가. 너 몇 살이냐?” * * * “서민영은 누구야?” “이야, 학교도 잘 안 나오는 놈이 언제 또 찍었어?” “뭔 소리야?” “뭔 소리긴? 그만한 애 보기 드물잖아. 너, 그 애 이쁜 거 소문 듣고 물어본 거 아냐?” 이놈들이 예쁘다고 하는 말은 믿을만한 게 아니다. 공부만 팠던 놈들이라 여자 보는 눈이 엉망이고 예쁘다는 기준이 굉장히 낮은 놈들만 모여 있기 때문이다. “실없는 소리 말고. 누구야?” “기다려봐. 강의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갑자기 사라지면 그 애가 나타난 거니까.” 몇 분 지나지 않아 이놈 말이 사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서민영이 나타나자 거짓말처럼 강의실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고 모든 눈이 서민영을 향했다. 제법인데? 저 정도면 남자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을 만하다. 키가 좀 작은 게 흠이었지만, 화장기 하나 없는 맨 얼굴이 저 정도면 아버지가 캐스팅할까 생각할만한 수준이다. “어때? 내 말 맞지?” “너 눈 높네.” “넌 저 애 건드리지 마라. 우리 서민도 기회가 있어야지. 재벌 3세면 연예인 사귈 수 있잖아. 내 말 잘 새겨둬. 네가 저 애 사귀면 우리 학교 남자 전부를 적으로 돌리는 거야.” “걱정 접어둬. 우리 집에 매일같이 여배우 들락거려. 나 눈 높다. 그런데 저 애, 환영회 때 못 본 거 같은데?” “얼굴만 비추고 금방 갔어. 네가 노트북 돌릴 때 난리 났잖아. 그때 슬그머니 사라졌어.” 강의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 학교를 빠져나가는 서민영의 앞에 섰다. 갑자기 나타난 나 때문에 조금 놀랐지만 이내 차분해졌다. “뭐지? 나한테 볼일 있어?” 표정을 보니 내가 누군지는 아는 것 같다. “응. 간단한 질문 하나만 하려고. 신입생 환영회 때 내가 돌린 노트북 안 가져갔던데,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될까?” 서민영은 피식 웃으며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너 비행기 운전할 줄 알아?” “뭐?” “비행기 몰 줄 아냐고?” “당연히 못 하지.” “그럼 비행기 줘도 무용지물이지?“ “말장난은 그만하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 높은 수능 점수 받은 애가 눈치는 없네.” 계속 웃음을 지우지 않는 걸 보면 자존심 때문에 기분 나빠서 거절한 건 아닌 게 확실했다. “나 컴맹이야.” “응?” “그거 나한테는 비행기나 다름없어. 쓰지도 못하는 거 받아서 뭐해?” 이런 이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어이가 없어 서민영의 얼굴만 바라볼 뿐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때 그녀의 입에서 또 의외의 말이 나왔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심장 떨린다.” * * * 계속되는 대기업 부도 때문에 서재는 연일 회의의 연속이었다. 오늘도 마라톤 회의를 끝낸 진 회장이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쉬려할 때,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인터폰이 울렸다. - 회장님. 서초동 윤 사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지금 나간다.” 진 회장은 날아갈 것 같은 걸음으로 거실로 나갔다. “윤 사장. 오래 기다렸지? 내가 깜빡했다.” “아니에요, 회장님.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쁘신 분인데 기다려야 하는 건 당연하죠.” 거실에서 진 회장을 기다렸던 사람은 마치 여고 교장 선생 같은 인상의 중년 여인이었다. “그래, 쓸만한 애는 좀 찾았나?” 윤 사장이라고 불리는 여인은 서류 가방에서 파일 세 개를 꺼내 진 회장 앞에 늘어놓았다. “특별히 신경 썼어요. 앞으로 순양 그룹의 선장이 되실 분이데….” “어허! 그 입!” “어머, 내가 주책이지. 죄송합니다. 회장님.” 윤 사장은 황급히 머리를 숙이고 첫 번째 파일을 펼쳤다. “대일은행장 막내딸이에요. 스물일곱이고 프린스턴에서 학업 마쳤고 현재 보스턴 뱅크 홍콩 지사에서 근무하는 재원이죠.” 두 번째 파일도 펼쳤다. “한성일보 회장의 맏손녀예요. 나이는 스물여섯…….” 세 여자의 소개가 끝나자 진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먼. 날 잡도록 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셋 다 보면 되지. 왜? 안돼?” “아, 아니에요. 빠른 시일 내에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알아. 쇼핑하듯 연달아 봤다는 소리 나오지 않도록 입조심시킬 테니까 염려 마.” 윤 사장은 환한 표정으로 가방에서 또 하나의 파일을 꺼냈다. “회장님. 이번 건은 정말 힘겹게 찾은 거예요. 너무 어려 아직 젖살 통통한 애들이라….” “어허, 엄살은! 발품 판 거마비는 두둑이 줄 테니까 딴소리 말고 이야기해봐.” 두둑히 준다는 소리가 듣고 싶었는지 마담 뚜의 입이 찢어졌다. “이번에 헌법재판관에 임명된 분 외동딸이에요.” “헌법재판관? 그래 봤자 판사 아냐?” “법관 집안이에요. 작년에 돌아가신 대법원장님 아시죠? 그분 손녀죠.” “아, 그 양반! 법관 임기 끝나면 변호사질 안 한다는 그 집안 딸내미구먼.” “네. 그 집안사람들 모이는 곳이 바로 대법원이고 검찰청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존경받는 법조계 명문가라고 할 수 있죠.” “대쪽 집안이라는 건 잘 알아. 애는 어때?” “그야말로 원석이죠. 이만한 애 찾기 힘들 거에요.” 여자에 대한 과도한 칭찬이 거슬린 진 회장이 버럭 소리 질렀다. “우리 애하고 견줄만해? 전국 단위로 성적 나온 애야. 서울대 법대생이라고. 게다가 인물은? 요즘 잘 나간다는 그 잘생긴, 누구야? 장….” “장동건?” “그래. 그놈하고 견주어도 손색없는 이목구비 아니냐고?” “잘 알죠. 그래서 빠지지 않을만한 애 찾았다구요. 이 애도 서울대 법대 입학했어요.” “뭐? 그럼…?” “네. 같은 과 동기죠. 아주 자연스레 맺을 수 있어요.” “흠…….” 나쁘지 않다. 아니, 괜찮은 편이다. 법조계의 원로 집안이며 사회적으로 존경받는다. 변호사 개업은 하지 않지만, 대학 강단을 거쳐 법무부 장관 같은 내각에 몸담기도 한다. 총리도 배출했던가? “그런데 나이도 어린데 맞선 보라고 하기에는 좀 거북하지 않나?” “호호, 회장님. 요즘 어린 후계자들은 호텔 커피숍 같은 데서 선보는 거 딱 질색해요.” “그럼?” “자연스럽게 서로 얼굴 익히게 만드는 게 제 역할이죠. 선본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스무드 하게 만날 겁니다. 진짜 연애하는 것처럼요.” “오호라.” “회장님 허락하시면 진행할게요. 어떠세요?” “저쪽 집안은 생각 있고?” “당연하죠. 대 순양 가의 며느리 자리를 누가 마다하겠어요?” “좋군. 진행해요.” 회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윤 사장은 활짝 웃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회장님. 혼기 꽉 찬 손자들도 많은데 막내부터 챙기세요?” “큰놈들이야 지 부모들이 챙기겠지. 우리 막내 장가가는 거 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서두르는 거야.” 뚜쟁이 윤 사장은 꼭 그것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회장의 유별난 사랑을 받는 손자, 어쩌면 이변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049] 선택권 없는 집안 2. “너 내일 하루 비워놔.” “네? 내일 한도제철 입찰서류 최종 점검하기로 했습니다.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한도제철보다 더 크고 중요한 걸 인수할 수도 있다. 한도제철은 순양 그룹 회사가 되겠지만 이건 온전히 네 회사가 될 수도 있어.” 진영준은 아버지가 순양과 자신을 구분 짓자 어떤 의미인지 알아챘다. “선 보는 겁니까?” “그래. 내일 점심, 저녁 그리고 그사이에 차 한잔 마셔라.” “네? 설마 하루에 셋이나요?” “결혼 전에 얼굴은 봐야 하지 않겠냐? 누구를 고르든 네게 도움될 게다.” “할아버지 지시입니까?” “셋을 고른 건 할아버지야. 그리고 난 대일은행장 딸내미가 마음에 든다. 너도 좋아할 게다.”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합니다. 애완견 교배할 상대 구하는 것도 아니고 하루 만에 결정하는 건 좀….” “쓸데없는 소리. 말했지? 결혼 전 얼굴 보는 거라고. 살 맞대고 살다 보면 정도 붙는다.” 진영준은 씁쓸하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어차피 스스로가 선택할 수 없는 결혼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게 아니라 순양 그룹을 지배하는 데 필요한 사람과 사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대일은행이 좋으십니까?” “대일은행은 지금 당장 써먹을 데가 있다. 네 할아버지가 살면 얼마나 사시겠어?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네 삼촌들이 가만있겠냐? 계열사 몇 개 챙기려고 이빨 세우고 덤벼들 거다. 그때를 대비해서 지금부터라도 더 많은 주식을 확보해야 해. 돈 많이 든다.” “결국, 며느리를 구하는 게 아니고 거액 대출에 필요한 담보를 구하시는 거군요.” “어차피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하는 것, 그게 결혼이다. 서민들 최고의 신붓감이 누군지 알아? 교사야.” 진영기는 막무가내로 소리치지 않았다. 후보가 무려 셋이다. 아들 진영준이 혹시라도 은행장 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낭패다. 살살 구슬려야 했다. “공무원이니까 월급 따박따박 나오지, 퇴직하면 연금 나오지, 방학도 있으니 얼마나 좋아? 남자 놈들 지 인생 편하려고 여교사 선호하는 거다. 다들 계산이 앞선다.” “은행장 딸은 아버지가 선호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순양을 전부 차지하면 그게 어디로 가겠어? 다 네 것이다.” “아버지처럼 저도 동생 있습니다.” 동생에게 하나라도 뺏기지 않으려 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진영준의 미래 모습이다. “그때는 너도 네 아들을 은행장 딸과 결혼시키렴. 하하.” 아버지는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지만, 진영준에게는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자신도 곧 아버지처럼 동생을 견제해야 할 때가 다가올 것이다. 다행인 것은 여동생 남동생 단 둘뿐이라는 것. 쉬운 싸움이 될 것 같았다. * * * “홍콩에서 근무하신다고요?” “네.” 진영준의 눈썹이 꿈틀했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버지가 은행장이라는 게 전부인 여자. 명품을 걸쳤고, 억대의 쥬얼리가 번쩍이고, 청담동에서 만진 머릿결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인 여자. 그룹 사옥에 가득한 수많은 여직원들 틈에 있으면 전혀 드러나지 않을 만큼 평범하고 고만고만한 외모다. 그런 여자가 감히 순양 그룹의 후계자인 자신을 시큰둥하니 바라보며 귀찮은 듯 대답한다. 예전 같았으면 싸대기 한 대 날리고 일어섰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철부지가 아니다. “메뉴 고르시죠. 점심이니까 가볍게 할까요? 여긴 파니니가 일품입니다.”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친절히 메뉴판을 건넸지만, 그녀는 메뉴판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테이블 옆에 서 있는 홀 매니저를 보며 말했다. “커피나 한 잔 주세요.” 진영준은 들고 있던 메뉴판으로 이년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홀 매니저가 자신을 바라보자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 “난 됐어.” 그녀는 이미 굳어버린 진영준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 홍콩에서 남자친구와 한집에 살아요.” “동거?” “그렇죠. 그러니까….” “내가 찬 걸로 하지. 됐나?” 진영준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기 커피는 별로야. 그냥 가. 참, 밥은 먹고 헤어진 걸로 하자고. 당신 아버지에게 오늘 맞선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이 말도 빠트리지 말고 꼭 하라고.” 진영준은 입술을 꽉 깨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순양호텔 레스토랑을 나왔다. 세 시에 두 번째 여자와 만나기로 했으니 두 시간 반이나 남았다. 어떻게 시간을 때울까 생각하다 휴대전화를 꺼냈다. “응. 난데 지금 빨리 택시 타고 순양호텔로 와. 오빠 시간 남는다.” 진영준은 일 년 내내 집처럼 쓰고 있는 특실로 올라갔다. 간만에 몸 풀 생각을 하니 은행장 딸년이 고맙기까지 했다. * * * 격렬한 섹스로 성욕을 전부 털어버려서인지 오후에 만날 때는 맞선녀의 외모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재계 순위 40위권에서 간당간당하는 재벌기업 회장 조카라는 여성은 손만 내밀면 내일이라도 결혼할 것처럼 행동했다. 적당히 맞춰주고 보낸 후 마지막 상대를 기다렸다. “홍소영이에요.” 마지막 상대인 한성일보 회장의 맏손녀를 만났을 때 얼른 저녁부터 주문했다. 점심을 제대로 못 먹어서인지 허기가 심했기 때문이다. 국내 언론사 중 가장 발행 부수가 많은 곳. 일찌감치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하며 선두를 지키는 신문사. 어찌 보면 맞선남이 최대 광고주인 고객이다. 하지만 홍소영은 순양 그룹의 후계자인 진영준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들거나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진영준은 음식을 기다리며 홍소영이라는 여자를 찬찬히 살폈다. 피나는 노력으로 관리한 몸, 돈으로 치장한 화려함이 돋보인다. 좀 사납게 생긴 인상이 흠이었으나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은 된다. 진영준이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이런저런 대화를 시작했지만 귀담아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여자도 억지로 끌려 나온 것처럼 보이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아버지가 원했던 여자는 가망 없고, 나머지는 여자 쪽에서 거절했다고 하면 당분간 결혼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아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식사를 끝내자 홍소영은 커피로 입을 축이더니 노골적인 말을 쏟아냈다. “어차피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갈 시간은 건너뛸 테니까 제가 생각하는 결혼 조건만 말해도 되죠?” “그러세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여자, 황당한 조건을 내걸어 파토내려 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사생활은 터치 안 할게요. 진영준 씨 소문은 이미 다 들었고…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는 건 당연하니 여자는 못 끊으실 것 아니에요?” “네?” 진영준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쏟을 뻔했다. 이 정도까지 황당한 소리를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연예인을 데리고 놀던, 모델과 딴 살림을 차리던 신경 안 쓴다고요. 첩질이든 엔조이든 너무 소문내지 말고 은밀히 하면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죠. 단…!” 홍소영의 눈꼬리가 올라가니 더 사납게 보였다. “딴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면 그날로 이혼합니다. 당연히 무지막지한 위자료도 청구할 테고요. 이해했죠?” “애는 안된다?” “당신과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만 진영준 씨 당신 후계자가 되는 겁니다. 설마 이런 기본도 지키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죠?” 분명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비상식적인 행동은 확실하다. 진영준은 호기심이 잔뜩 생겨버려 대화의 끝을 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럼 당신은요? 내가 밖에서 딴 여자랑 놀아나도 현모양처 놀이만 하겠다는 겁니까?” 홍소영은 표정을 풀고 살짝 웃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전 성욕이 약한 편이에요.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그때는 내가 알아서 하죠.” “혹시 딴 남자와 즐긴다는 말…?” “안 되나요?” “이거… 당황스럽네요. 솔직한 건지, 화끈한 건지…. 그런데 홍소영 씨. 왜 나와 결혼하려고 하죠?” 홍소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착각하시네요. 꼭 당신이 아니라도 돼요. 물론 재계 1위인 순양 그룹이라 호감이 더 가는 건 사실이지만….” “다른 집안이라도 상관없다?” “우리 집안과 비교해 봤을 때 아래만 아니면 돼요.” 홍소영은 짧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정략결혼이죠? 말 그대로 정치상의 책략이고 이익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계약이니까 서로 필요한 것만 취하면 되죠. 굳이 정상적인 가정 만들겠다고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럼 당신의 목적은 뭡니까?” “난 누구에게도 머리 숙이며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남편 될 사람부터 회장으로 만들어야 하고 내 자식도 회장으로 만들어야겠죠.” 진영준은 철저히 계산적인 이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특히 얼마든지 밖에서 다른 여자와 즐겨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 같은 대범함이 더할 수 없는 장점으로 느껴졌다. * * * “뭐? 동거?” “그 여자가 싫어서 거짓말하는 거 아닙니다. 직접 확인하셔도 됩니다. 홍콩 지사에서 조사하면 하루면 나올 겁니다.” 진영기 부회장은 곧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행장님. 부족한 제 아들놈 때문에 따님께서 불편했나 봅니다. 사과 말씀 올립니다.” 진영기의 표정은 활활 타올랐지만, 말투는 부드러웠다. “아, 글쎄….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내세웠다고 해서요.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이미 동거 중이라는, 있을 수 없는 거짓말까지 했다지 뭡니까? 아무쪼록 이번 일로 서로 불편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진 부회장은 진영준을 쏘아보며 말했다. “동거 문제는 은행장이 해결할 테고, 넌 결혼 준비나 해. 설마 여자의 과거를 문제 삼을 속셈은 아니겠지? 네놈 과거와 비교하면 이 여자의 동거는 흠도 아니다.” “아버지. 제가 결혼 안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한성일보 손녀, 마음에 듭니다.” “뭐? 한성일보?” “네. 생각해 보십시오. 은행장이야 정권 바뀌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임시직 아닙니까? 하지만 한성일보는 정권마저 바꿀 힘이 있습니다.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꼭 필요하다면 경준이를 쓰셔도 되고요.” ”음…….“ 진영기는 둘째 아들의 나이를 떠올렸다. 스물여섯. 어린 나이는 아니다. “올해는 바쁘겠구나. 경준이 장가보내기 전에 혜경이부터 치워야 하니까 말이다.” 일 년에 혼사를 세 번이나 치러야 한다. 정말 바쁘다. * * * “김 대리님. 이 두 사람 조사 좀 해봐요.” 김윤석 대리는 내가 주는 쪽지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룹 정보팀에게 의뢰해도 될까요? 아니면…?” “혼자 파악할 수 있겠어요?" “기초적인 사항만 파악해도 된다면 제 선에서 가능합니다.” “그럼 그렇게 해 주세요.” 꾸벅 머리를 숙이고 돌아서려던 김 대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내용, 이학재 실장님 보고서에는 제외할까요?” 나를 떠보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내게만 충성한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건 김 대리님이 판단하실 문제죠. 저한테 일일이 확인할 필요 없습니다.” 충성은 강요나 부탁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온전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어야 한다. 김윤석 대리가 내 곁에 머문 건 짧은 시간이다. 아직은 두고 볼 일이다. 절대 빠져서는 안 될 수업이 있어 서둘러 학교로 갔다. “이번 학기 과제는 새로운 방법으로 대체해볼까 생각 중인데…….” 교수는 이미 준비한 인쇄물을 돌렸다. “나눠준 건 사회적으로 논란의 여지를 준 사건들이다. 특히 헌법적 가치와 상충한다는 의견이 많았던 거야. 그 사건들을 깊이 파고들어 새로운 견해를 내놓도록. 기간은 학기 말까지다.” 헌법 개론 수업일 뿐이다. 이런 방식은 고학년이나 가능하지 신입생에게는 버겁다. “일 학년인 여러분은 혼자 진행하는 건 어려울 테니 다섯 명씩 조를 짜서 진행한다. 맨 마지막 장에 조별 명단이 있다. 해당 조원들끼리 잘 해보라고. 자 수업 시작하자.”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재빨리 인쇄물을 넘겼다. 내 이름을 찾으니 눈에 익은 이름도 보였다. 서민영.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강의실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서민영의 눈과 마주쳤다. ======================================== [050] 선택권 없는 집안 3. 「한도제철 매각에 입찰 제안서를 제출한 곳은 순양그룹, 대현 그룹 그리고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입니다. 이 세 곳이 제출한 가격, 비가격 요소를 종합한 결과 한도제철 인수 대상자는….」 TV 속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2조1천6백억에 입찰한 순양그룹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렇지!” “휴-” “다행입니다. 회장님.” 대현 그룹 회장실에 모인 사람들은 만연에 웃음을 띠며 주영일 회장의 표정을 살폈다. 주 회장 역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계획대로 되긴 했는데…. 진 회장, 이 영감 쪼잔한 건 참 한결 같구만. 그냥 2조3천억 적지 그걸 또 끝 단위에서 빼먹네.” “그래도 꽤 많이 끌어 올렸지 않습니까? 회장님께서 치고 들어가지 않았다면 8천억 플러스 10억 달러로 한도제철을 먹었을 겁니다.” 아쉬운 소리도 오고 갔지만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 순양그룹의 곳간은 텅 비었다. “한도제철도 괜찮은 매물이었지?” “그렇습니다. 순양도 손해 본 건 아닙니다. 어차피 철강 사업에 뛰어들 텐데 한도제철이면 쉽게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말이야, 그 미라클 그놈은 뭐야? 덕분에 우리까지 악당이 돼 버렸잖아.” “덕분에 심사단에게 우리를 배제할 명분을 안겨줬으니 더 수월했죠.” 주 회장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조사는 하고 있나?” “네. 표면적으로는 특이한 점이 없습니다. IT, 영화 쪽 투자와 일본에도 돈을 뿌립니다. 광범위한데…. 투자자의 정체가 가려져 있습니다.” “그 투자자가 누군지 빨리 파악해야 해. 단순 사모펀드라면 괜찮은데, 대표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게 영 찜찜해서 말이지.” “서두르겠습니다.” “자, 그럼 본 게임 시작해야지?” 주 회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꺼운 파일이 회의 참석자들 앞에 놓였다. “91년, 그때 누군가 수서 비리를 제보하지 않았다면 아진자동차는 순양자동차에 흡수되었을 것입니다.” “순양도 운이 없었지. 하필이면 그때 그런 일이 터지다니.” 대현 그룹은 그 누군가가 바로 순양의 핏줄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순양 진 회장이 전략을 잘 짰습니다. 「국내 자동차 산업의 구조재편 필요성과 정부의 지원방안」 바로 이 보고서입니다.” 주영일 회장은 보고서를 힐끗 쳐다보고는 바로 내려놓았다. “정권 말기이기는 하지만 우리 대현에게 마지막 선물은 줄 겁니다. 한도, 삼미, 진로, 삼립. 무려 네 그룹이 부도났습니다. 대기업의 방만한 경영에 책임을 묻겠다고 하면 여론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참 잔인한 봄이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한국 경제의 적신호를 알리는 경보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보고는 주 회장을 더욱 기쁘게 했다. “아진은 재계 4위입니다. 바로 무리한 사세 확장의 결과죠. 91년 그때보다 내부 사정은 더 엉망입니다. 정권에게 명분을 준겁니다.” “우리가 은행을 압박하지 않더라도 아진자동차의 주거래 은행이 대출금 회수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흐흐흐.” 주 회장의 짧은 웃음이 그의 심정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진 회장, 그 영감탱이… 미치고 팔딱 뛰겠구먼. 그렇게 탐내던 아진자동차를 자기가 만든 전략으로 내가 털도 안 벗기고 꿀꺽 삼키는 모습을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으려면… 화병 나서 쓰러질지도 모르겠는걸.” “그렇죠. 적금 들어 차곡차곡 모은 돈, 제철소 하나 인수한다고 탈탈 털어먹었으니…. 흐흐.” 대현 그룹 회장실은 비웃는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내일부터 바로 시작해. 신문쟁이들하고 방송쟁이들 불러서 술 먹이고 돈 쥐여줘. 여자도 붙여주고. 대대적으로 아진자동차를 흔들어서 완전히 자빠트리라고. 주워 담기 쉽게. 으하하.” 언론이 터트린 기사 때문에 아진자동차가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을 때쯤, 주영일 회장은 청와대 경제수석, 국회의 기획재정위원회 그리고 아진자동차와 오랫동안 거래한 금융기관을 차례차례 만날 것이다. 살아있는 소 한 마리를 부위별로 해체하는 건 아랫사람들의 몫이다. 그 고기를 만찬 식탁에 올리는 주방장의 역할은 정치권이 맡아줄 것이다. 주영일 회장은 그들에게 두둑한 밥값만 지불하면 된다. * * *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이고, 홍 회장. 못 본 사이 팍 늙어버렸어. 홍 회장 보니 내가 위안이 돼. 나만 늙는 건 아니구먼. 허허.” “무슨 말씀이십니까? 회장님께서는 아직 정정하십니다. 저야 이미 지팡이 신세 아닙니까?” 한성일보 홍 회장은 손에 든 지팡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자자, 앉읍시다. 노친네 둘이 서 있으니 젊은 사람 전부 벌서고 있잖소.” 호텔 스위트룸 거실을 가족 만남의 장소로 급히 개조하고 양가 집안 어른들이 상견례를 시작했다. 외부 사람의 눈길을 피하는 가장 좋은 장소다. 결혼식 전까지 소문나면 안 된다. 행여나 파혼이라도 하게 되면 두 집안 모두 망신살만 뻗치기 때문이다. 진 회장은 눈을 내리깔고 얌전하게 앉아 있는 홍 회장의 손녀부터 훑었다.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배운 게 하나 있다. 첫인상은 약간의 오차만 있을 뿐 그 사람의 성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진 회장의 눈에 비친 홍소영은 강한 여자였다. 전문가가 만진 화장으로도 감출 수 없는 각진 턱, 짙은 눈썹 그리고 조금도 긴장하지 않아 떨림 없는 몸가짐. ‘망나니 손자놈, 휘어잡고 길들일 만 하겠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걸 느낀 홍소영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회장님. 홍소영입니다.” ‘눈치도 쓸만하네.’ “허허, 뭘 그리 딱딱해? 손주며느리는 시할아버지에게 응석도 부리고 애교도 떨어야 맛이지. 마음 편히 가져.” 진 회장의 최종 승인이 떨어졌다. 이제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다. 홍소영의 부친인 한성일보 사장의 표정이 더할 수 없이 밝아졌다. “부족한 여식을 예쁘게 봐 주셔서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식탁은 빠르게 요리로 채워졌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했지만 모두 조금씩 맛보는 정도만 입에 넣을 뿐 배불리 먹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이야기꽃만 피웠다. “이번 한도제철 인수, 축하드립니다.” “아닐세. 내가 축하받을 일 있나? 이번 일은 전부 부회장과 우리 영준이가 맡아서 처리한걸세.” 진 회장이 아들에게 슬쩍 눈길을 던지자 진영기가 입을 열었다. “우리 영준이가 처음으로 그룹에서 맡은 큰일이었는데, 그럭저럭 한몫하더군요.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진영기는 아들을 슬쩍 띄웠다. “그렇군요. 한동안 외국에서 경영수업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이런 큰 프로젝트를 맡아 착실하게 후계자 수업을 받는군요. 하하.” 마치 맞장구치듯 홍 사장은 사위가 될 진영준을 향해 공치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홍소영은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후계자 수업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아버지 입에서 나왔을 때 이 자리의 지배자인 늙은 진 회장의 눈썹이 꿈틀하는 모습을. 식사가 끝날 때쯤 홍 회장은 진 회장에게 슬며시 눈짓했다. 진 회장은 손자, 손녀의 상견례에 할아버지들은 빠지자는 뜻인 줄 알았다. 하지만 홍 회장은 거실 옆 침실로 조용히 들어갔다. 이들의 눈치를 살피던 호텔 매니저는 곧바로 차를 준비해서 대령했다. “회장님. 요즘 이상한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무슨…?” “정확히 6년 전과 판박이에요. 아진자동차를 중심으로 기삿거리가 쌓입니다.” “6년 전이라면…….” 진 회장이 눈을 부릅뜨며 찻잔을 탕- 하고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설마 아진자동차를 노리는 놈이 나타났다는 뜻인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그때와 너무 흡사해서 말입니다.” “한성일보도 기사 터트릴 준비 하고 있는가?” “일단 데스크를 다 막아뒀습니다. 아무래도 회장님께서 직접 확인하셔야 할 듯싶어서요.” 목은 바짝 타들어 가는데도 떨리는 손끝 때문에 차를 마실 수 없었다. “밖에 누구 없나? 생수 한 통만 가져오너라!” 직원 한 명이 쟁반에 받쳐 든 크리스털 컵을 들고 들어오자 진 회장은 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집어 던졌다. “이것들이 말귀를 못 알아먹어! 잔 말고 통! 생수통을 가져오란 말이다!” 진 회장의 호통에 거실에서 들리던 대화 소리가 멈췄다. 또 다른 직원이 재빨리 작은 생수통을 가져오자 숨도 쉬지 않고 들이켰다. “홍 회장. 기사 내는 건 좀 미뤄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이거, 혼사도 치르지 않았는데 사돈댁에 부탁부터 해서 면목이 없소이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회장님. 당연히 그리해야죠.” “그리고 기사 소스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도 좀 알아봐 주고.” “기자들 땀 좀 흘리겠습니다, 그려.” 지금은 사돈끼리의 대화가 아니었다. 광고주와 신문사 사주의 대화다. “다음 주에 삼사일 정도 전면 광고 좀 때려 주시게나. 한도제철 이름을 순양제철로 바꾸고 새롭게 태어난다… 뭐 이런 내용으로.” “염려 마십시오. 깨끗하게 비워놓겠습니다.” “그럼 믿고 먼저 일어나겠네. 나도 땀 좀 흘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으이.” 진 회장이 자리를 뜨자 홍 회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대현 그룹의 발목을 잡아당기면 사돈댁도 며느리가 될 자신의 맏손녀를 잘 보살펴 줄 것이다. * * * “삼촌. 여의도에 찌라시 도는 것 없습니까? 아진자동차요.” “넌 학교 안 가? 어떻게 나보다 먼저 이곳으로 출근하냐?” “삼촌은 신문 안 보세요? 나라가 휘청합니다. 학교 가서 법률책 들여다볼 틈이 어디 있습니까?” 오세현의 표정이 조금 굳어지며 내 앞에 앉았다. “왜? 동남아 외환위기가 마음에 걸려? 아니면 이 기회에 네가 미국에 쌓아둔 달러로 휴지나 다름없는 동남아 화폐를 싹 긁어볼 생각이냐?” “휴지를 달러로 사는 바보짓을 왜 합니까?” “흠, 외환위기가 마음에 걸린다는 뜻이구나.” 이제 슬쩍 힌트를 줘도 될 시기다. 어떻게 받아들일까? “동남아는 지옥이나 다름없고 한국은 4월까지 대기업 네 개가 자빠졌습니다. 그런데 우린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며 자화자찬에 빠졌어요. 태풍을 대비해서 나쁠 게 있습니까?” “오지도 않을 태풍을 준비하는데도 돈은 드니까.” “아뇨. 태풍이 오는데 딴 데 정신이 팔려서 그렇습니다.” “대통령 선거?” “네. 표를 얻으려고 프로농구를 시작했고 엄마들 표를 얻으려고 만화가들을 체포했어요. 지금 우리나라가 제정신인 것 같아요?” “넌 태풍을 확신하는구나.” “삼촌도 께름칙하시잖아요. 지금.” 오세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 세계 금융의 흐름을 늘 주시하는 사람이다. 태풍의 전조를 모를 리 없다. “대현이 아진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 아진은 지금 현금 보유량이 바닥이야. 힘 있는 놈 몇이 모여서 목 조르면 사망이다.” 천만다행이다. 역사는 변하지 않았다. 6년 전 할아버지가 아진자동차를 삼키려는 걸 막았기 때문에 역사는 바뀌지 않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은 역사를 바꿔야 한다. 대현그룹이 아진자동차를 흡수하는 역사를 미라클 인베스트먼트라는 외국계 투자회사가 아진자동차를 인수하는 역사로 바꿀 것이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 야! 너 진짜 조별 과제 안 할 거야? 아니, 그것보다 너 출석미달로 유급할지도 몰라, 인마. “유급하면 좋지 뭐. 대학생활 몇 년 더 하는데.” - 그걸 말이라고! 좋아. 너 유급하는 건 그렇다 쳐. 조별 과제는? 우리끼리 해? “고함치지 말고 잘 들어. 내가 기회를 줄 때 잘 해봐.” - 뭐? 뭔 헛소리야? “서민영이 그 애 우리 조지? 키 크고, 잘생기고, 공부 잘하고, 돈도 많은 내가 꼬박꼬박 참석하면 너한테 기회가 갈 것 같아?” 휴대전화에서는 침묵만 흘렀다. “갈까?” - 응? 아, 아니다. 우리끼리 알아서 할 테니까 과제는 걱정 마. 근데 출석은 신경 써라. 내가 땜빵하는 것도…. 들뜬 동기 놈의 목소리를 들으며 휴대폰을 닫았다. ======================================== [051] 비밀을 털어놓을 때 1. “서민영은 누구야?” “같은 과 학생이에요.” “그게 다냐?” 능글맞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치는 삼촌은 로맨스에 목마른, 영락없는 아저씨였다. “대학 신입생이면 여자친구 만드는 데 집중해라. 네가 조금 전에 말했지? 잘생겨, 돈 많아, 머리 좋아, 뭐가 부족한데? 여자가 줄을 설 거다.” “줄 서면 뭐합니까? 만날 시간이 없는데.” “인생 별거 없다. 사랑, 여자가 전부야. 돈? 그거 사랑 없는 여자를 만나기 딱 좋은 간판이다.” 내 말은 듣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만 한다. “돈 만지는 직업으로 성공하신 삼촌께서 하실만한 조언은 아닌데요?” 삼촌은 눈을 크게 뜨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너 아직 모르는 거냐?” “네? 무슨 말씀이세요?” “내 일, 내 직업은 정확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합법적인 도박을 하는 거지, 돈을 버는 게 아냐. 뭐… 너 때문에 재미가 많이 없어졌지만. 승률 백 퍼센트의 도박은 흥미가 없어지거든.” “그럼 도박꾼의 감으로 말씀 한번 해보세요. 대현 그룹이 판돈인 아진자동차를 먹을까요?” 화제를 슬쩍 바꿨다. 서민영에 관해 꼬치꼬치 캐묻는 걸 피하기에는 적절한 타이밍이다. “아마도.” “어째서요?” “삼박자가 딱 떨어지잖아. 칩 많고, 운이 따르고, 패가 좋고.” 칩이 많다는 건 안다. 2조 원 이상 쌓아뒀으니까. 그런데 운과 패는 뭘까? “운은 도박판의 기세다. 계속 잃다가 딸 것 같은 순간이 다가오는 거야. 깔린 판돈이 많았을 때 승운이 다가와야 운이 좋은 거지. 아진이라는 큼직한 판돈이 깔려있잖아.” “패가 좋은 건 왜죠?“ “대기업의 잇따른 부도 때문에 아진자동차가 부도난다고 해서 새롭지도 않아. 그리고 부도난 회사는 누군가가 빨리 인수해서 충격을 줄여주기를 원하거든. 마지막으로 한도제철 인수에 실패한 대현이잖아. 정부에서도 하나쯤은 줘도 특혜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거야.” “삼촌은 아진자동차의 부도를 확신하는군요.” “대현 그룹이 설계했잖아? 은행권은 아진보다는 대현을 좋아하지. 또, 이 정권 막차에 올라탄 정치권 인사들은 대현이 나눠주는 떡고물 때문에라도 아진자동차 목을 조를걸? 두고 봐.” 대단한 사람이다. 이때만 해도 아진자동차의 부도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은행도 한몫한다는 점이었다. 아진자동차가 부도나면 은행으로서도 큰 타격일 텐데 앞장설 수 있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공적 자금의 투입이다. 공적 자금, 어떤 개새끼가 만든 단어인지 모르겠지만, 정확히 말하면 혈세 투입이다. 국민의 돈을 조금씩 강탈해서 부실기업을 살리지만 살아난 기업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다. 어떤 특정인의 소유물이 된다. 그 특정인이 내가 될 수도 있다. 먼저 먹는 놈이 임자 아닌가?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대학생 놀이는 사절이다. “삼촌, 그렇다면 우리가 아진자동차를 먹을까요?” “응? 뭐?” 분명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듯 보인다. “우리도 삼박자가 딱 맞아 떨어지잖아요. 미국에 쌓아둔 칩은 넘쳐나고, 제가 천운을 타고났다는 건 잘 아실 테니까 두말하면 입만 아프고, 패는 대현 그룹만 해당하는 건 아니니까 우리 패로 만들어 버리면 되고. 어떻습니까?” 오세현의 표정은 나를 정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걸 말해준다. 자동차 업계 2위, 한때 재계 4위까지 찍었고 지금은 순위가 좀 떨어진 8위인 회사를 먹겠다는 말하는 대학 신입생이 정상으로 보일 리 있겠는가? * * * “이거 표절 아냐? 저작권 위반은 어디에 고소하면 되냐?” 진 회장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웃는 이는 없었다. 6년 전 엄청난 노력과 비용을 들여 만든 보고서라는 이름의 전략. 지금 대현 그룹 주 회장이 그 전략을 똑같이 쓰고 있다. “훼방 좀 놓을까요?” 회장이 농담했다고 맞장구치는 말이 아니었다. 조대호 순양자동차 사장의 표정은 딱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보다 먼저 주 회장 속셈을 알아야지. 뭐야? 자동차 업계구조 조정이야? 아니면 부도야?” “주 회장은 업계 구조조정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아진의 부도를 원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이라면 독과점이라는 독소 조항이 발목을 잡습니다. 하지만 부도라면…….” 이학재 실장은 진 회장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아진 정도의 규모가 부도나면 재빨리 수습해야 합니다. 인수협상자 선정을 서두를 텐데….” “그렇지! 우리가 뛰어들 수도 있으니까 미리 우리 밥숟가락을 치워버린 게지. 내가 한도제철 인수에 열을 올릴 때부터 준비한 게 틀림없어.” 채권단이 인수대상자를 선정해도 손 빨며 구경만 해야 한다. 순양그룹은 돈이 없다. 진 회장은 패배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 한도제철을 간절히 원했고 손에 넣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대현의 주 회장이 그린 그림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도제철 인수전에서 승리하고 약 올리는 전화는 하지 않았다는 정도? 하지만 뛰어난 장사치인 진 회장은 이런 감정에만 젖어 있지는 않았다. “좋아, 하나만 더 짚어보자. 대현이 아진을 인수하면 우리는? 우리는 어떻게 될까?” “시장 점유율이 급속히 떨어질 겁니다.” 조대호 사장이 침울하게 말했다. 자동차의 경쟁력은 누가 뭐라 해도 생산량이다. 두 회사가 한몸이 되어 동일한 부품을 공유하고 겹치는 생산라인을 정리하면 비용 측면에서의 경쟁에서 따라가기 힘들다. “조대호.” “네. 회장님.” “자네는 훼방 놓아야 할 이유가 크구먼.” 남의 일인 양 말해도 진 회장의 의중이 드러났다. “우리 모두 조 사장의 아이디어 한 번 들어보자. 조 사장.” “네.” “내일 이 시간까지 대책 꾸려서 와.” 회의를 끝낸다는 말이 떨어지자 모두 서둘러 서재에서 빠져나갔다. 조대호 사장만의 숙제가 아니다. 모두의 숙제다. 두 사람만 남자 이학재가 급히 입을 열었다. “회장님. 주식….” “알아.” 차명으로 매집한 아진자동차의 주식 7%. 부도나면 대현이 인수하더라도 감자(減資)는 피할 수 없다. “그게 제일 참을 수 없어. 주영일이 때문에 손해 볼 수는 없잖아.” “빨리 처분할까요?” “처분? 넌 싸울 생각이 없단 말이지?” “부도는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왜?” 진 회장이 입술을 깨물며 화를 감추지 않았지만, 이학재 실장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우리가 만든 계획이었으니까요. 6년 전, 수서 비리사건이 터지지만 않았어도 아진자동차는 우리가 흡수했을 겁니다. 그만큼 완벽한 계획이었어요.” 반박할 말이 없다. “지금 그 정도 큰 사건이 터지지 않는 한 계획대로 진행될 겁니다.” 서재는 한동안 침묵만 맴돌았다. “그걸로 한번 흔들어 볼까? 이대로 나 죽었소 하며 가만있을 수는 없잖아.” “주식으로 말입니까?” “그래.” 3% 이상을 소유한 주주는 임원해임청구권, 임시주총 소집청구권, 검사인선임청구권을 가진다. 회사로 쳐들어가 책상을 뒤엎을 힘이 있다. “하지만 깨알같이 흩어져 있습니다. 한곳으로 모으려면 내세울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적당한 놈이 있잖아. 오세현이.” “아…!” 이학재는 진 회장의 순발력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이미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인데 두뇌는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한번 만나봐. 아진 주식 던져주고 우리 대리인으로 내세워봐. 그리고 우리가 맡겨놓은 비자금도 있잖아. 그거 회수할 기회도 되고.” 미라클에 잠자고 있는 천억 원의 비자금을 아진자동차 주식 7%와 맞교환한다. 일거양득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진 회장의 순발력이 이학재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 * * “7퍼센트나?” “그렇습니다. 우리가 차명으로 보유한 거요.” “그걸 천억원에 사달라는 말이시죠?” 이학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달라는 게 아니라 바꾼다는 뜻이오. 우리가 맡겨놓은 돈 천억 원, 그걸 다시 가져오는 방법으로 아진자동차 주식을 주는 거고.” “그건 좀 곤란한데요.” “뭐요?” 머리를 살짝 흔드는 오세현의 모습 때문에 결국 큰소리가 터져버렸다. “이봐! 그게 무슨 말이야? 곤란하다니? 차명이라 당신 돈으로 착각하는 거야? 아니면 임자 없는 돈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천만에요. 이름표 없는 돈이지만 순양그룹 돈이라는 건 변함없습니다. 설마 절 그 정도 양아치로 보신 겁니까?” “지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신을 양아치로 만들어 버리자 오세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섭섭합니다, 하하.” “농담할 생각 없으니까 빨리 말해요. 왜 안된다는 거요?” “미라클 인베스트먼트는 주주도 있고 투자자도 있습니다. 아진자동차가 부도난다는 소문이 이 바닥에 파다합니다. 그런데 그 회사 주식을 사요?” 오세현은 머리를 크게 흔들었다. “망해가는 회사의 주식을 거액을 주고 산다? 이건 배임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주주나 투자자가 고소하면 전 철창행입니다.” “뭐요?” “그리고 이 실장님.” 오세현은 씩씩거리는 이학재를 날카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전 순양 직원이 아닙니다. 서류상으로만 따져보더라도 우리 미라클과 순양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단지 도준이 때문에 제가 편의를 봐 드리는 겁니다.” 그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다. “그런데 뭐라고요? 대주주 권리를 행사해서 아진자동차를 조사하고 이 상황을 흔들어라? 뭐든 날로 먹으시려고 하는 건 습관입니까? 버릇입니까?” 오세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진자동차 주식 매입은 좀 더 그럴싸한 방법을 찾아오세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 돈 천억, 날로 삼킬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일 때문에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마십시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윤기나 도준이가 뭐라 하던 순양과의 관계 끊습니다.” 돌아선 오세현의 표정은 말할 수 없이 굳었다.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니다. 도준이가 말한 아진자동차의 인수, 어쩌면 길이 보이는 듯했다. 만약 이 일이 이루어진다면 지금까지 앉았던 도박판 중에서 가장 큰 판이다.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끝이 짜릿하다. * * * “이번에는 대현이야?” “확인했습니다. 우리 거래은행의 행장들을 차례차례 접촉했다고 합니다. 대출금 회수 압박이 심해진 건 그 때문입니다.” “이런….” 송현창 회장은 이를 악물었다. 28개의 계열사 전체의 누적 적자가 고작 3천8백억에 불과하다. 특히 주력인 아진자동차는 작년에도 흑자를 기록했다. 이런 수치가 아니라고 해도 순양그룹이나 대현그룹이 호시탐탐 아진자동차를 노리는 것만 봐도 얼마나 괜찮은 회사인지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회사를 늑대들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기업 건전성이니, 재무제표의 숫자를 나열하며 은행장들을 만나는 건 무의미했다. 지금은 정치권과 협상할 때다. “지금 여당에서 경선 중이지?” “네.” “확실해? 이회창 그 양반?” “이변이 없는 한 확정입니다.” “그 양반에게 줄 한번 대봐.” 송 회장의 말에 참모진 모두가 한결같은 반응을 보였다. “대쪽이라고 소문난 분입니다. 지금 벌어지는 대기업 부도마저도 각 기업이 책임질 문제라면서 발을 빼는데…. 도움이 디겠습니까?” “그건 아직 자신을 판사라고 착각해서 하는 말이야. 이번 경선 치르면서 법복의 흔적은 다 지우고 정치인이 됐을 거다. 그리고 난 아직 깨끗한 정치인이 있다고 생각지 않아.” 깨끗한 정치인. 이 말은 향기로운 쓰레기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라고 생각하는 송현창 회장이다. ======================================== [052] 비밀을 털어놓을 때 2. “아이고, 바쁘신 분들을 모이라고 해서 참으로 죄송합니다, 그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회장님.” 진 회장이 일식집 별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세 명의 은행장들이 우르르 일어섰다. “자자, 앉읍시다.” 은행장들이 공손한 자세로 자리 잡자 요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요즘 아진 송 회장이 세 분을 자주 모신다고 하던데… 어떻습니까?” 젓가락을 들던 은행장들은 멈칫하며 다시 내려놓았다. 이렇게 틈도 없이 시작할 줄은 몰랐다. “저희들보다 여의도를 더 자주 가시는 편이지요.” “다음 정권에 줄을 대려고 바쁘게 움직이시는 것 같습니다.” “그다지 실효는 없지요. 그분에게도 대권행보에 도움될 일은 아니니까요.” 진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회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제야 은행장들도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대세는 바뀌지 않는다?” 세 은행장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진 회장의 이야기가 다 끝날 때까지 밥 먹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혹시 회장님께서 저희에게 당부하실 말씀이라도…?” “송 회장이 짠해 보여서 말이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너무 다그치지 않았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죄송합니다. 우리도 입장이 있는지라…. 빨리 처리하라는 경제 관료들의 압박이 심합니다.” “주 회장이 떡밥을 잔뜩 부렸나 보군. 청와대까지 움직이는 걸 보면 말이지.” 경제 관료라고 돌려서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장 정확히 아는 진 회장 아닌가? “혹시 회장님께서도 아진자동차를 염두에 두셨습니까?” 은행은 괜히 고래 싸움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 싸움은 두 그룹이 하고 은행은 그 결과에 따르면 된다. 지금 파악해야 할 요점은 뒤늦게라도 순양그룹이 밥숟가락을 들고 덤벼드느냐 아니냐를 파악하는 것이다. “밥상머리에서 긴 이야기는 관두지. 하나만 부탁합시다. 최대한 미뤄주시오. 못 버틸 정도가 되면 내게 알려주고.” 은행장 셋은 서로 눈치를 보다 머리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해 줘야 마음 편히 밥 먹을 수 있다. 원하는 대답을 얻은 진 회장은 활짝 웃었다. “자자, 듭시다. 오늘은 유난히 회가 싱싱한 것 같으이, 허허.” * * * “어제 이학재 실장을 만났다. 네 할아버지, 화가 단단히 나신 것 같더구나.” “대현 그룹 때문이죠?” “그래. 아진 자동차 주식 7퍼센트를 가지고 계시는데 그걸로 판을 한번 흔들고 싶으신가봐. 나를 앞세워서 말이다.” “어떻게요?” “우리 미라클에 진 회장님 비자금 천억 원 있지? 그걸로 주식을 사서 대주주의 권리를 내세우라고 하더라.” “당연히 거절하셨겠죠? 폭락 중인 주식을 매입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요.” 오세현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읽었다. 거절하고 끝난 이야기를 다시 꺼낼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삼촌,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네요?” 오세현은 헛기침을 조금 하더니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진자동차를 갖고 싶다는 말, 진심이냐.” “네.” “매출액이 14조 원이 넘는 거대기업집단이다. 모회사인 아진자동차를 인수하면 아진그룹을 인수한다는 뜻이야.” 오세현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아진을 인수하면 어쩔 생각이냐?” “삼촌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28개의 전 계열사를 정리해야지. 버릴 건 버리고 무게 달아서 고철값 받고, 쓸만한 건 원가에 넘기고.” “값나가는 건 비싸게 팔고?”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더 주는 놈에게 파는 거야.” 이건 갬블러의 정답일 뿐이다. “이성적이 아니라면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오세현은 얼굴마저 조금 붉어졌다. “제대로 한번 살려보는 거야. 상한 부분 싹 도려낸 뒤 빨간약 좀 발라주고, 영양제 주사 놓고.” “그런 다음에는요?” “그게….” 이제 아쉬운 표정으로 변했다. 그만큼 복잡한 심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까지야. 대기업을 두 손에 올려놓고 경영할 자신은 없다. 하고 싶긴 한데 능력 밖이야.” “그럼 거기까지 가 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다음은 그때 가서 천천히 생각해보고요.” “그보다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인수전에 뛰어든다 해도 승률이 낮다. 아니, 없다고 보는 게 정확할 거다.” “그런데 왜 갑자기 흥미를 보이세요? 승률 낮은 판에 앉을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세현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네 할아버지가 가진 아진자동차 주식 7%가 우리 손에 들어오면 그걸 이용해서 아진자동차의 속살을 낱낱이 드려다 볼 수 있잖아. 그리고….” “그리고 뭐가 더 있죠?” “네 할아버지인 진 회장님.” 역시! 순양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어렵다. “아진자동차의 인수금액은 네 돈으로 충당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판돈만으로 가능한 판이 아니라는 건 너도 알잖아. 심사단, 채권단 그리고 정치권에 입김을 불어 넣을 힘이 필요한데…. 대현 그룹과 맞먹는 곳은 순양밖에 더 있어?” 나를 바라보는 오세현의 눈빛. 장난감을 사 달라는 어린아이의 눈빛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삼촌도 찬성하신 겁니다.” 결정을 내리고 나니 오세현은 오히려 차분해 보인다. 28개의 계열사, 5만 명이 넘는 임직원, 14조 원의 매출액. 이긴 놈이 다 먹는 거대한 판돈이다. 총알 대신 돈을, 피 흘리는 사상자 대신 수만 명의 밥줄이 끊길 전쟁에 나서는 군인이라면 흥분보다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난 이학재 실장을 만나지. 넌….” “순양그룹 진양철 회장님을 만나겠습니다.” 마주 보는 우리 두 사람은 미소로 악수를 대신했다. * * * “실장님은 저한테 크게 한턱 쏘셔야 할 겁니다.” “나야 언제나 오 대표에게 크게 한턱 쏘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화나게 만든 거 아니오?”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하긴…. 먼저 만나자고 자청했으니 기대해 보겠소.” 이학재는 회장의 지시 사항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만나서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런 차에, 먼저 만나자고 하니 한달음에 뛰어왔고, 긍정적인 말부터 꺼내니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가 우리 미라클의 주주와 투자자들을 설득했습니다. 돈의 성격을 설명했고 한국에서 순양그룹의 위상도 자세히 설명했지요.” “혹시 아진자동차 주식을…?” “네. 주식 전부를 인수하고 주주의 권리를 보여줘도 괜찮다는 승인을 받아냈습니다.” 일단은 좋은 이야기부터 던졌다.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다. 기본 아닌가? 오세현은 표정이 확 밝아진 이학재 실장을 바라보며 난처한 듯 머리를 슬쩍 긁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이건 양보 못 할 조건이라 실장님께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어차피 돈을 쥐고 있는 건 이쪽이다. 이름표 없는 돈이라고 해서 그냥 던져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세현은 한 푼이라도 더 건지고, 더 버는 게 본능인 사람이다. 이런 기회를 잘 살리면 또다시 거금이 들어온다. “느낌이 쎄- 한데요? 특히 양보 못 할이라는 게 영…….” “인수금액을 결정할 때, 현실성을 감안하라고 합니다. 망해가는 기업의 주식을, 어쩌면 휴지 조각이 될지도 모르는 주식을 천억이나 투자하는 건 반대하더군요.” 이학재는 우선순위를 생각했다. 첫째는 아진자동차의 내부를 훤히 들여다보고 대현 그룹의 인수를 방해할 건수를 찾는 게 첫째다. 비자금을 찾는 건 두 번째. 아진자동차의 주가는 하루가 다르게 폭락한다. 어쩌면 주식을 쥐고 있다가 이것마저 휴지 조각이 되면 더 큰 손실을 입는다. “원하는 금액은?” “절반, 오백억입니다.” 이학재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받아들이지. 하지만 시간을 좀 줘요.” “시간이라고 하시면?” “회장님께 보고하고 설득할 시간 말이오.” “아이고, 그 정도는 당연히 기다려야죠. 하지만 서두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여의도에 도는 소문은 상상 이상으로 나쁩니다. 마치 내일이라도 아진이 부도날 것 같다니까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 시간은 넉넉해요. 모자라는 시간은 우리 순양이 만들 테니까 말이오.” 순양이라는 말에 드러나는 자부심, 아니 거만함이 보였다. “요즘 아진의 송 회장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합디다. 우리 회장님께서 이미 몇 군데 전화를 넣었어요. 송 회장의 부탁을 심사숙고해달라고. 그의 부탁을 거절할 시기는 아마 우리 회장님께서 정하실 거요.” “그러시다면 뭐, 아무튼 서둘러주십시오. 우리 투자자들 마음 바뀌기 전에 말입니다.” 오세현은 마지막 블러핑을 잊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 그것이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다. * * * “이 녀석아. 학교는 왜 안 가는 게냐? 총장이 전화까지 하더라.” “입학이 목적이지 졸업이 목적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지금까지 공부만 했는데 저도 좀 놀아야죠.” “뭐라? 놀아? 이놈이 이제 이 할애비한테 거짓말까지 하는 거냐? 네놈이 아침 일찍 학교 대신 여의도로 등교하는 걸 모를 줄 알았더냐?” 오호라! 김윤석 대리의 보고 내용이 할아버지까지 올라가는구나. 이학재 실장이 중간에서 자를 줄 알았는데…. 숨기는 게 없는 사람인가? “전 그게 노는 거예요.” “출석 일수 모자라면 유급된다길래 우리 순양의 장학재단을 통해 돈까지 찔러줬어, 이놈아. 어째 등록금보다 네놈 출석비가 더 드냐?” 아, 정말 돌아버리겠다. 대학을 6, 7년 정도 다닐 생각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가 훼방을 놓고 있다니. 1학기가 끝나면 휴학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올해 하반기부터 내년 상반기까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까 말이다. “장학금 기부는 좋은 일이죠.” 씁쓸한 내 표정에 할아버지는 웃으며 슬쩍 찔러본다. “그런데, 여의도 사무실에서 온종일 뭐하는 게냐? 오세현인가 하는 놈에게서 뭔가 배우는 게냐?” “그런 셈이죠. 지금은 아진자동차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뭐라? 아진?”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심사가 일치한다. “네. 아무리 봐도 곧 부도 날 것 같던데요?” 할아버지는 잔뜩 흥미 있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일단 금융권이 돌아섰고, 작년 우성자동차의 선전으로 아진자동차는 판매가 저조했죠. 당연히 유동성 자금이 다 말라버렸을 테고…. 대현 그룹이 목조르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럼 부도나면 어떻게 될까?” “재빨리 누군가가 낚아채겠죠. 한도제철을 할아버지께서 낚아채신 것처럼요.” 할아버지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경영에 참여하는 맏손자 진영준도 이런 의견을 보고받았을지는 몰라도 스스로 생각해내지는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80점짜리 답이로구나.” “왜 만점이 아니에요?” “누가 낚아채는지 맞춰야 백 점이지.” “그건 아직 아무도 모르니까요.”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니? 대현 그룹이 목을 조른다고.” “헛물만 켜다가 본전도 못 찾고 물먹은 일이 어디 한두 번 있었어요?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장담하기 어렵죠.” 할아버지의 미소가 사라지며 질문이 이어졌다. “그럴까? 아진자동차가 매물로 나와도 살 사람이 없어.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건 너도 알지?” “네. 동남아에서 시작된 외환 위기 말씀이죠?” “그래. 우리도 몸 사려야 할 게다. 벌써 재벌 몇 개가 쓰러졌잖아. 그래서 모두 돈이 없거나 아끼고 있어. 아진은 우리 순양과 대현 정도가 돼야 구매력이 있는데…. 난 이미 돈을 써버렸거든.” “아직 수면 아래서 몸을 숨기고 있는 곳도 있지 않겠어요? 이를테면 저 말이에요.” “글쎄, 그런 곳이 있을… 뭐? 방금 뭐라고 했어?” 조심스럽게 말할 걸 싶었다.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할아버지의 턱이 부르르 떨렸다. 이러다 쓰러지면 큰일인데, 너무 경솔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이놈아. 이 할애비는 멀쩡하다. 그보다 조금 전 했던 말을 다시 해보거라. 뭐라 했느냐?” “그러니까 제가 아진그룹을 인수할 수도 있다고요. 잘못 들으신 거 아니에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예 뒷목까지 잡으셨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할아버지는 손을 내 저으며 물잔을 들고 들이키기 시작했다. ======================================== [053] 비밀을 털어놓을 때 3. 물을 마시는 할아버지를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우황청심환이라도….” “시끄럽다, 이놈아. 내가 그깟 환이나 먹어야 할 만큼 심력이 약한 줄 아느냐?” “너무 놀라시길래….” 할아버지는 손을 세차게 흔들고 긴 숨을 내뱉었다. “도준아.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혹시 네 입학선물로 자동차가 아니라 아진자동차를 달라는 뜻은 아니지?” “아닙니다. 제 돈으로 제가 인수한다는 뜻입니다.” “네 돈이라…. 도대체 넌 아진 인수가를 얼마로 생각하길래 그렇게 자신하느냐?”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쓰지만, 평상시와 다르게 말의 속도가 빨랐다. “만약 할아버지께서 인수하신다면 얼마를 적으실 건가요?” 내가 넌지시 인수가를 되묻자 할아버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음…. 글쎄다. 나라면… 응? 요놈 보게나? 으허허.” 갑자기 터지는 웃음. 완벽하게 평정을 되찾으셨고 내 질문의 숨은 뜻도 알아채셨다. 상대의 생각을 먼저 듣는 자리. 그것이 바로 지배자의 특권이라는 가르침이 생각났을 것이다. “요놈아. 지금은 네놈이 먼저 말해야 한다. 아직까지는 내가 네놈 머리 위에 있어. 어디서 은근슬쩍 꼼수를 부리느냐? 허허.” “일단은 1조5천억으로 예상합니다. 변수가 있을 테고 아진자동차의 상태를 진단해야 정확히 알 것 같습니다.” “으음….”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뭘? 액수 때문에?” 내 입에서 처음 나온 숫자다. 내가 보유한 전체 금액은 아니지만, 인수가를 1조5천억이라고 말한 순간, 내 돈은 그 이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금액이 적절한가에 대한 고민만 있을 뿐, 내 돈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대범한 것인가? 침착한 것인가? 아니면 1조5천억이라는 돈은 이분에게는 크지 않기 때문에 많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걸까? “왜? 네가 그렇게 많은 돈을 어떻게 가졌을까 놀라야 하니? 아니면 잘했다는 칭찬이 듣고 싶은 거냐?” “칭찬은 나중이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현금보유량만 따진다면 제가 순양그룹 전체보다 많습니다. 개인이 재계 1위 그룹을 앞섰으니 놀라실 줄 알았죠.” 할아버지의 눈빛이 변했다. “요 녀석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아진을 인수하겠다는 놈이라면 그 이상은 쥐고 있어야지.” 바로 귀여운 손자를 바라보는 눈빛이다. “놀라는 건 네가 인수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 충분히 놀랐다. 이젠 궁금할 뿐이지 놀랄 일은 없지 싶다. 그리고 궁금증을 푸는 게 급한 일은 아니잖느냐. 호기심은 우선 대상이 아니다. 지금은 아진자동차다.” “그럼 제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무려 1조원이 넘는데요?” “네가 제정신이면 헛소리할 리가 없지 않으냐?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앞에 두고 말이다.” 호기심은 우선 대상이 아니다는 말에 무릎을 탁 치고 싶었다. 가장 강렬한 유혹이지만 우선은 아니다. 엄청난 숫자의 사람이 매일같이 새로운 일을 벌이는 곳이 바로 순양이다. 그 정점에 서서 당면한 수많은 문제를 다룰 때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호기심은 항상 뒤로 미뤄야 하는 게 정석이다. 나도 호기심이 아닌 필요한 질문을 던졌다. “할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인수금액은 얼마입니까?” “모른다.” “네?” 단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머리를 저어버린다. 왠지 억울하기도 했다. 주거니 받거니가 없는 대화는 상하관계의 증거다. “인수할 생각이 없었으니 알아보지 않았다. 6년 전에야 조목조목 따졌으나 지금과는 차이가 많이 나겠지.” “도와주실 거죠?” “생각 중이다.“ 조심스레 물었으나 역시나 명쾌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네가 왜 아진자동차를 인수하려는지, 네가 인수했을 때 과연 순양에 도움이 될지 생각 중이란 뜻이다.” 할아버지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펴봐도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입을 닫고 조용히 기다렸다. 어떤 생각을 하는 걸까? 손자를 끔찍이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생각일까? 아니면 자신이 일군 순양그룹을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회장의 생각일까? 두 생각이 일치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직은 결과를 알기 힘들다. “좋다. 이렇게 한번 해보자.”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던 할아버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외면하지는 않겠지? “아진자동차 오너인 내 손자 도준이와 순양자동차 오너인 이 할애비가 의기투합해서 두 회사를 합병하는 자리라고 치자.” 내 생각을, 내 계획을 이미 읽고 있는 걸까? 아진자동차는 순양자동차를 흡수하기 위한 발판일 뿐이라는 내 생각을 들킨 것 같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머뭇거렸다. 할아버지는 내 반응을 기다리는 듯 잠시 말을 끊었으나 당황한 내 표정을 보며 씨익 웃었다. “두 회사의 합병 비율에 대한 네 의견을 듣고 싶은데, 어떠냐?” 한참을 고민하다 문뜩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은 할아버지의 질문에 고분고분 대답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할아버지의 진심을 알기 위해서라도. “왜 합병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합병하지 않으면? 네 능력으로 아진자동차를 지킬 수나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쩌면 일 년 안에 대현 그룹에 먹힐걸? 아니, 경영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미소는 얕잡아보는 비웃음 같았다. 하지만 여유를 드러낼 수 있었다. 나도 복안 정도는 가지고 있다. “경영에 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까분다. 믿는 구석이 있는 게냐?” “그렇습니다.” “오호!” 조금의 비웃음도, 깔보는 기색이 아닌 순수한 감탄이었다. 갖고 싶은 마음만 앞선 게 아니라 대책까지 세워 놓은 내가 기특한 것이 틀림없다. “회사를 이끌어갈 여력이 있다면 합병이 무산 될 수도 있겠는데?” “그러니까 너무 자신하지 않으시는 게….” “또 까분다.” 할아버지는 나의 자신 있는 말을 싹둑 자르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는 제안은 없다. 저울이 안 맞으면 맞추면 된다. 합병 비율을 말해 보거라. 내가 저울에 얼마나 더 올려야 될까?” “1 : 0.2” “이런 날강도 같은 놈!” 입에서 나온 말과는 다르게 놀란 표정이며 웃음을 참는다. “시장 점유율, 브랜드 가치, 신차 개발 능력, 기술력 등을 생각하면 순양자동차는 아진자동차의 20% 수준밖에 안 됩니다. 이건 자동차 전문가들의 의견이지 제 사견이 아닙니다.”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게냐? 그건 순전히 자동차 부분만 따로 떼서 하는 말이고, 숨은 가치도 반영해야지. 주가가 말해주지 않느냐?” 순양자동차의 주가는 아진자동차의 두 배가 넘는다. 그 이유는 바로 순양자동차가 쥐고 있는 순양그룹 계열사 지분 때문이다. 순양자동차를 지배하는 순간 순양그룹의 절반을 지배한다. “그 숨은 가치라는 것도 고스란히 저울에 올리실 생각이십니까?” “너 하는 거 봐서. 허허.” 협상은 할아버지의 기분 좋은 웃음으로 끝났다. 협상이라는 이름으로 할아버지는 의연 중 속내를 조금 드러냈고 나는 많은 비밀을 털어놓았다. 순양그룹을 탐내는 나의 비밀과 그룹을 물려줄 여지가 있다는 할아버지의 마음. 속 시원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도준아.” “네.” “대현그룹 주 회장 그 친구, 이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을 거다. 반면에 나는 전혀 준비한 게 없어. 그 영감이 내 손발을 묶어 버렸거든.”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 회장은 널 변수일 뿐이지 경쟁상대는 아니라고 판단할 거다.” “상대가 방심하는 건 좋은 일이죠.” “큰소리치는 건 좋은데, 근거는 있어야지. 한번 들어보자. 우리 막내가 얼마나 똘똘한지 내가 점수 한번 매겨 볼란다.” 나는 아진자동차 인수 방법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 방법 속에 순양그룹 회장의 힘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채권단은 대출 회수 압박을 미루지 말고 더 서둘러야 합니다. 아진자동차의 부도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이제 보니 내가 대현그룹이 아니라 우리 손주 계획을 훼방 놓고 있었구먼. 채권단 만나서 비싼 회까지 먹여가며 시간을 벌고 있었으니 말이다. 허허.” 호탕하게 웃는 걸 보니 내 계획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점수는 어떻게 나왔어요? 할아버지.” “정답이 아니니까 만점은 못 주겠지만 주관식이라 빵점도 아니다. 그리고 지금 현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인 것 같구나. 좋다, 좋아!” 연신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는 할아버지를 보가 마음이 놓였다. “자, 이제 내 호기심을 풀어야겠다. 그 많은 돈, 순양그룹 자금 보유량보다 더 많은 돈이 어디서 났어?” “분당 목장 판 돈을 해외 IT업체에 투자했는데 주가가 폭등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입니다.” “백배 이상으로 불린 걸 보니 오세현인가 하는 놈이 감은 좋네.” 백배가 아니라 수백 배라는 것도, 오세현이 아니라 나였다는 것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국민학생이었던 내가 투자를 주도했다는 말을 했다가는 늙은 우리 할아버지, 정말 쓰러질지 모른다. “제가 운이 좋았죠.” “너는 미라클인가 하는 투자회사에서 어떤 위치냐? 혹시…?” “제가 최대주주입니다. 98%의 지분입니다.” “그, 그럼 오세현은?” “대표이사죠. 할아버지도 많이 데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문경연인.” 우황청심환을 준비했어야 했다. 놀라시는 모습이 불안하기 그지없다. “그럼 넌 내 돈 천억 원이 네 회사에 잠자고 있는 것도 알겠네?” “그 돈도 많이 불려놨습니다. 아진자동차 주식 7% 주시면 투자 수익까지 몽땅 돌려드리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연하지 요놈아. 어디서 피 같은 내 돈을 꿀꺽하려고!” “이런, 전 할아버지께서 그 돈 제 입학선물로 그냥 쓰라고 하시기를 기대했는데…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웃으며 말했지만, 할아버지는 웃지 않았다. “천억 원짜리 섬을 선물로 사달라면 사주마. 천억 원짜리 전용 비행기를 사 달라고 하면 그것도 사주마. 하지만 돈은 그냥 주는 게 아니다.” “돈은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기 때문에요?” “바로 그거다. 앞으로 너도 아랫사람이 일을 잘했을 때 돈은 조금만 줘라. 룸살롱에 데려가서 몇백만 원어치 술을 사주더라도 돈으로 주면 안 된다. 술 마시는 놈이 이 술값 돈으로 주지, 이런 생각을 갖도록 말이다.” “희망 고문이군요. 일을 더 잘하면 그 술값만큼 돈으로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줌으로써 말이죠.” “아이고, 똘똘한 내 새끼. 척하면 착이로구나.” 똘똘한 게 아니다. 겪어봤기 때문에, 절실히 느껴봤기 때문에 안다. 수백만 원을 하룻밤 술값으로 쓰고 법인 카드를 긁었다. 여자 문제 잘 처리했다고 모터쇼에 나온 레이싱 걸을 하룻밤 보상으로 안겨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여자의 화대가 오백이 넘었다. 장모님 병원비 이백만 원 부족하다고 마누라가 바가지 긁던 그 다음 날에 받은 보상이다. 술값, 화대…. 그 돈이 전부 내 것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얼마나 했던가? “도준아.” 갑자기 은근하게 부르는 할아버지 때문에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났다. “네. 할아버지.” “아진자동차를 네 손에 넣을 때까지 아무도 모르게 하거라. 넌 철저히 숨고, 오세현이만 드러나도록 해.” “그럴 생각입니다. 할아버지께서도….” “당연하다. 이학재 실장도 모를 거다.” 서로 만족한 웃음을 웃을 때 할아버지는 한층 더 은근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도준아.” “네.” “네 재산 전부 얼마나 있느냐? 아진자동차를 인수하고 나면 얼마나 남지?” 호기심 가득한 저 얼굴.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의 지갑, 함부로 열어보면 안 되죠. 아, 현금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빌려는 드릴게요.” 할아버지는 벌떡 일어서 내게 다가와 내 어깨를 감쌌다. “장하다, 내 새끼. 다 컸구나.” ======================================== [054] Win-Win 1. “뭔 소리야? 오백억이라니? 주식 다 던져주고 천억 받아오기로 했잖아.” “아진 주가가 폭락하니까….” “됐고, 다 달라 그래. 내 돈 달라는데 뭔 말이 많아?” 진 회장의 일갈에 이학재는 입을 닫았다. 여러 이유를 들어 어려움을 호소하며 회장을 설득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아랫사람은 설득이라 생각하지만, 윗사람은 변명으로 여길 뿐이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빨리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똘똘한 애들 좀 추려. 주총 끝내고 아진자동차 회계장부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놈들로 구성해.” “이미 준비해뒀습니다. 임시주총 때 분명 대현 그룹에서도 총회꾼을 보낼 겁니다. 그것 역시 대비책을 강구하겠습니다.” 진 회장이 만족스럽다는 듯 머리를 끄덕일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순양자동차 사장과 임원들이 문을 열었다. “6년 전, 아진자동차 자료 만들 때처럼 고생 한번 더해야겠다.”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기도 전에 회장의 폭탄선언을 듣자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회장님. 설마 아진자동차를 인수할 계획이십니까?” “이미 아시겠지만 우린 자금 여력이 없습니다. 인수금 지불을 미룬다 하더라도….” 임원들은 회장님이 무모한 선택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부터 앞섰다. “아니. 우리가 인수하는 게 아니라 대현으로 굴러 들어가는 걸 막는 것뿐이다.” “대현을 막으면 누가 인수하는 겁니까? 설마 우성자동차를 생각하시는지…?” “우성은 미국 자본이 많습니다. 가능성이 없습니다.” 난처한 표정의 임원들을 보며 진 회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희들이 아는 걸 내가 모를까?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시키는 일이나 확실히 해. 일주일 준다.” 일주일이라는 소리에 순양자동차 경영진은 조금도 지체 없이 벌떡 일어났다. 1초도 낭비할 시간이 없을 만큼 촉박했다. “다들 알겠지만, 노파심에서 말하는데… 이 일, 밖으로 새어나가면 줄초상 날 거다. 그리고 조대호야.” “네. 회장님.” “송현창 회장한테 막걸리 한 사발 마시자고 해라. 내가 할 말 있다고.” 조대호 사장은 의문을 품었으나 머리를 숙였다. 두 회장이 만나 할 이야기가 있을까? 있다면 어떤 내용일까? 서재에 있던 사람들의 공통된 의문이었다. * * * 나를 바라보는 오세현의 눈빛에 담긴 기대, 다행히 그 기대를 충족할만한 대답을 들고 있다. “할아버지와 이야기는 잘 됐어?” “네. 풀 서포트 해주실 겁니다. 주식 넘겨받고 곧바로 관계자들 미팅하시면 됩니다.” “하시면? 넌 빠진다는 말이야?” “빠져야죠. 제가 나타난다는 게 우습지 않겠습니까? 누가 보더라도 전 신뢰도 제로인 애잖아요.” “그게 전부야? 다른 이유는 없어?” “재벌가는 보는 눈이 많습니다.” 내부의 적도 많습니다. 그들의 눈길은 피해야죠. 이 말은 하지 않았다. 아직 최종 목표를 말할 때는 아니다. “음, 하긴…. 네가 나선다면 입 달린 사람 전부 네 할아버지 돈이라고 생각하겠지.” “이제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아진자동차 최종 부도나기 전에 현황 파악을 끝내야 하니까요.” “나도 우리 회사 회계사들 전부 준비해뒀다. 이미 공개된 자료는 검토 중이야.” 오세현의 흥분이 전염됐는지 나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과연 아진자동차라는 거대 기업을 내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내 능력 밖의 일을 벌인 건 아닐까? 이미 벌어들인 수조 원의 돈. 그 돈이면 황제 못지않은 인생을 즐길 수 있다는 유혹이 단 하루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밤 꾸는 그 악몽이 나를 다잡는다. 그리고…. 꼭 악몽 때문만은 아니다. 전생에서 그렇게 꿈꿔왔던 인생, 마르지 않는 샘 같은 돈으로 즐거움과 쾌락을 좇는 삶보다는 매시간 치열하게 쟁취하는 삶이 더 목마르다. 차례차례 적을 제거하고 나만의 성을 쌓아가는 인생. 그 끝을 한번 보고 싶다. 어쩌면 허무함만이 기다리는 끝일지라도. “야, 무슨 생각 하는 거야? 갑자기 왜 말이 없어?” “아,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게 생각나서요. 주식 인수할 때 할아버지 비자금 천억 다 내주세요.” “뭐? 야! 겨우 반으로 깎았는데 그걸 왜 다 줘?” 발끈할만하다. 한두 푼도 아니고 오백억이라는 거금을 굳혔는데 말 한마디로 다시 잃어버리게 생겼으니. “죄송한데 어쩔 수 없어요. 제가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절 위해서 할아버지가 가진 힘 다 쓰시겠다는데 저도 다 드려야죠.” “너 혹시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대주주라는 말 않았어? 네가 소유주라는 말 빠트린 거야?” “아뇨. 했죠. 그걸 말하지 않고 어떻게 도움을 청해요?” “그런데도 전부 다 달라고 하셨다고? 오백억을 합법적으로 상속할 좋은 기회인데도?” “그런 식으로 비자금을 넘겨줄 분이었다면 순양그룹은 이미 큰아버지 손에 들어갔을 겁니다.” “어이구. 이런 독한 놈들을 봤나? 있는 놈들이 더 하다더니….” 어처구니없어 무심결에 뱉은 말이지만 실수했다는 걸 알아챈 오세현이 급히 말을 멈췄다. 자신이 말한 놈들이 바로 우리 집안이기 때문이다. “그러게요. 그런 독한 놈들 틈에서 제가 살아남아야 합니다.” 오세현은 씁쓸히 미소 짓는 내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 * * “갑자기 말을 바꾸시면 어떡합니까? “이거 원, 쪽팔려서… 오 대표 보기 민망합니다.” “이유가 뭡니까? 한 입으로 두말하실 분은 아니신데.” ”월급쟁이가 말 바꾼 이유가 뭐겠어요? 위에서 까라니까 가는 겁니다.“ “이런, 이런. 하하.” 오세현은 이학재의 솔직함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죄송합니다. 실장님의 이런 모습… 너무 의외라서요. 이제 실장님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지금까지는 어떻게 보셨다는 말입니까?” 오세현은 뒷목을 슬슬 긁으며 웃었다. “터미네이터…….” “뭐요? 으하하.” 이학재는 오래전 봤던 영화를 떠올리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그렇게 생각한 거요?” “터미네이터는 오로지 임무 완수만 생각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거 아닙니까? 감정이 개입하지 않아요.” “그 정도였소?” “지금까지는.” “그럼 이제 기계가 아니라 인간으로 보이는 게요?“ “아직은 좀 부족한데… 아, 적당한 단어가 있습니다. 순양전자의 광고 카피죠? 휴먼테크.” 농담을 쏟아내는 오세현의 반응에 이학재는 예상보다 쉽게 문제가 풀릴 것 같아 한결 가벼워졌다. “자, 내 편의 한번 봐주겠습니까? 그럼 그에 걸맞은 보답 꼭 하도록 하죠.” “전 말로 하는 약속을 믿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소? 각서라도 써야 합니까?” “예외도 있으니까… 한번 믿어보겠습니다.” 이학재는 오세현이 의외로 쉽게 받아들이자 오히려 의심마저 들었다. 그의 눈빛으로 알아차린 오세현은 혀를 찼다. “좀 믿으며 삽시다. 저처럼요.” 웃으며 말하는 오세현에게 이학재는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고맙소. 내가 날 믿는 사람의 뒤통수를 수없이 쳤지만 오 대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뒤통수 치기 전에 최소한 경고는 하죠.” 내미는 손을 잡는 오세현은 기가 막혔다. 이게 이 사람이 사는 방식인가 싶어 측은한 마음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자, 그럼 임시주총부터 준비합시다. 필요한 건 우리 순양이 다 준비할 테니 오 대표는….” “제가 할 일은 이미 다 준비했습니다. 번개처럼 해치우죠.”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 * * 진 회장의 저택에서 두 대의 승용차가 조용히 빠져나와 북한산으로 향했다. 앞선 승합차에는 경호원들이, 뒤따르는 세단에는 진 회장이 타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남을 위해 움직인 적이 없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세상 끝까지 달려가지만, 남을 위한 일이라면 서재로 불러들였다. 오늘은 손자를 위해 처음으로 몸을 낮춘 것이다. 진 회장은 며칠 전 손자 도준과의 대화를 생각하며 연신 벙긋거렸다. # # # “송현창 회장,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냐니?” “이를테면 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이나 자질 같은 것 말입니다.” “팔이 짧다.” “손 닿는 곳이 몇 개 안 된다는 뜻인가요?” 진 회장은 손자를 따스하게 바라봤다. 겨우 스무 살에 불과한 놈이 어찌 이리 말귀를 잘 알아듣는지 신기할 뿐이다. 이십 대와 칠십 대의 언어는 다르다. 오래 산 세월만큼 쌓인, 듣고 보고 경험한 것이 언어에 묻어 나온다. 그 낱말들을 이용해서 가장 적절한 비유와 표현을 한다. 그걸 찰떡같이 알아듣는 어린 손자의 영민함이 기가 막힐 정도다. “자동차 하나와 자동차에 필요한 회사 너댓 개가 그 친구의 한계야.” “그 이유는 뭘까요?” “성공한 자의 자부심이 자만으로 바뀌고 고집으로 변해버렸어.” “다른 이의 의견을 듣지 않는군요.” “옳지. 바로 그거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을 무시하는 거야. 네까짓 게 뭔데? 나만큼 성공했어? 네가 나보다 더 똑똑하다면 왜 내 밑에서 일하지? 이런 생각을 지우지 못한 거야.” “설마 그 정도일까요? 한 고조 유방(劉邦)이 한신(韓信) 같은 장수를 거느렸던 것만 생각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교훈 아닙니까?” “나도 그렇다.” “네?” 진 회장은 고개를 갸웃하는 손자를 보며 말했다. “나도 이 실장이나 계열사 사장들이 내 의견을 반대하면 욱하는 게 올라와. 사람이니까. 하지만 꾹 참고 견디는 거야. 이유를 아느냐?” “할아버지를 위해서 하는 말이어서요?” “그래. 내 것인 순양그룹을 더 키우고 더 많은 돈을 벌게 해주려고 하는 충언 아니냐? 하지만 송 회장은 다르다. 아진그룹은 송 회장 것이 아냐. 겨우 아진자동차 주식 2%만 쥐고 있지. 노조가 14%를 쥐고 있는데도 말이다.” “아진그룹이 자기 소유라는 인식이 없으니까….” “그렇지. 남의 것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굴려보고 싶은 거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더라도 말이야.” 진 회장은 말귀를 쏙쏙 알아듣는 손자가 기특할 뿐이었다. “참, 그런데 송 회장은 왜? 그게 아진자동차 인수와 관련 있니?” “아, 네. 사실 아진자동차를 인수 후에 어떻게 할까 생각해봤는데요.” 진 회장은 손자가 내놓는 말을 한 자도 빠트리지 않고 주의 깊게 들었다. 손자의 말이 끝났을 때 집무용 책상을 탁하고 두드릴 만큼 감탄했다. “그거 참 절묘하다. 어찌 그리 기특한 생각을 했을꼬!”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송 회장을 한번 만나서 이 계획을 알려주고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하는 게 어떨까 해서요.” “오냐. 아진그룹을 우리 손자가 가지겠다는데 그 정도 수고도 못 하겠느냐? 염려 말거라. 허허.” # # # “아이고, 송 회장. 이거 사람 잡으려고 작정했나? 하필이면 이런 곳인가?” “회장님께서 막걸리 한 사발 하자고 하셨으니…. 여기 막걸리가 일품입니다.” “건강 자랑하려고 여기로 정한 건 아니고?” 진 회장은 등산로 초입에 자리 잡은 작은 파전집을 휘휘 둘러보며 투덜거렸다. 이미 손을 썼는지 가게 안은 텅 비었다. 등산복 차림의 송현창 회장은 이미 등산을 끝낸 듯 물수건을 여러 장 쌓아 놓고 있었다. “바로 아래까지 차 들어옵니다. 고작 백여 미터 남짓 걸으셨을 텐데, 운동 좀 하시고 건강도 챙기셔야죠. 남의 물건 뺏는 재미만 찾지 마시고 말입니다.” “이제 그럴 힘도, 마음도 없어. 너무 타박하지 말게.” 뼈있는 송현장 회장의 말을 슬쩍 흘려버린 진 회장은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송 회장.” “말씀하십시오.” “내 미리 경고 하나 하지.” 물수건으로 목을 닦던 송 회장의 손이 멈칫했다. “여기 막걸리 맛없으면 술상 엎어버리고 갈 걸세.” 어떤 제안을, 무슨 협상을 할지 모르지만 반대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복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송현창 회장은 물수건을 내려놓고 막걸리 뚜껑을 돌렸다. “혼자 마시는 술, 익숙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순양그룹이라고 해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는 대답이었다. ======================================== [055] Win-Win 2. “아이고, 그놈의 독불장군 옹고집. 나이가 들어도 변함없구먼.” 진 회장이 혀를 차며 막걸리 사발을 내밀자 송현창은 두 손으로 술을 따랐다. “혹시 돈이라도 꿔 주실 생각으로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 “내가 돈이 어디 있어? 철근 산다고 홀라당 다 썼어. 나 빈털터리야.” “이런, 오늘 술값도 제가 내게 생겼군요.” “빚에 시달리는 사람보다 빈털터리지만 빚 없는 내 주머니 사정이 더 좋지 않겠나. 오늘은 내가 내지.” 한동안 농담 같은 말들을 주고받다가 진 회장이 먼저 본론으로 들어갔다. “부도는 피할 수 없을 걸세. 내가 여기저기 알아보니 대선전에 정리하겠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야.” “대현 그룹, 참 대단하더이다. 대현의 그물망이 얼마나 튼튼한지… 구멍 하나 찾지 못했습니다.” 정관계에 줄을 안 댄 대기업이 있을까마는 송 회장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아진그룹이 잡고 있던 줄이 얼마나 허약한지 확인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헛고생했네, 그려. 송 회장 자네가 만난 사람들 전부 대현 돈으로 집 사고 자식 공부시켰어. 하지만 내 그물이 좀 더 촘촘해. 더 질기고.” 뭔가 암시를 주는 말이다. 송현창 회장의 눈빛이 달라졌다. “하시고 싶은 말씀, 하시죠.” “어차피 맞을 부도… 빨리 맞고 새 출발 하는 건 어떤가?” 새 출발의 뜻이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빚잔치하고 차근차근 갚아나가는 성실함이 아니라 한 번에 털어내는 편법을 말한다. 송현창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대현 주 회장은 이미 밑그림을 그렸을 테지? 부채 탕감 좀 받고, 아진그룹 계열사 몇 개 정리하고… 지금 주식은 대부분 소각한 다음에 대현 자금 투입해서 아진을 홀라당 먹을 계획이겠지.” “경험담이십니까? 잘 아시네요.” “6년 전 내가 직접 세웠던 계획이니까. 대현 주 회장이 지금 6년 전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중이고.” “그 계획, 실패한 거 아닙니까? 안심해도 되겠네.” “두 번이나 운 좋을 수는 없네. 이번엔 대기업 줄도산만 있을 뿐, 정권을 뒤흔들만한 비리는 없잖나. 성공 요인이 더 많은 거지.” “막걸리 값은 회장님이 계산하십시오. 빚더미에 앉을 내가 계산하려니까 좀 억울하네요.” 이미 어느 정도 포기했지만, 진 회장이 기정사실인 양 말하니 더욱 참담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진 회장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송 회장이 계산하게. 회장직 계속 유지하게 해줄 테니까.” 위로 삼아 헛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바로 재계를 흔드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빈털터리라고 말씀하신 건 회장님이십니다.” “내 돈만 돈인가? 돈에는 이름표가 없어.” 잠시 진 회장을 바라보던 송현창 회장은 주방을 향해 외쳤다. “옥천 댁! 여기 파전하고 막걸리 좀 더 주소.” 파전집 아주머니가 막걸리와 파전을 테이블 위에 놓고 물러가자 송 회장은 진 회장의 막걸리 사발에 담긴 술을 바닥에 버렸다. “새잔 받으시죠.” 진 회장은 피식 웃으며 막걸리 사발을 내밀었다. “방도가 있으십니까?” “그냥 부도내게.” 송 회장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부도 이후의 상황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요?” “주영일 회장이 이미 손을 써 뒀으니 채권단은 자구책 마련하면 살려주겠다고 속삭일걸세. 적극 협조하게. 8개만 남기고 다 정리해. 매각할만한 곳은 나도 알아봐 줌세.” “그리고요?” “인수전이 시작되겠지.” “인수의향서는 내는 곳은 대현이 유일할 겁니다.” “그 인수의향서에 조건을 내걸걸세. 부채 탕감. 주식 소각 또는 감자.” “그렇겠죠.” “나쁠 것 있나? 송 회장, 자네가 무리하게 당겨 쓴 부채를 국민 세금으로 메꿔주고 주식 줄어든다는 건 개미들, 노조가 쥐고 있던 주식 줄어드는 건데.” 여기까지는 좋다. 곰팡이 핀 곳을 싹 도려내고 영양제 주사 맞아가며 체질을 바꿀 수 있다. 바로 국민의 세금으로! “그리고 대현에 넘기라는 말씀이십니까?” 질문하는 송 회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대현이 먹을 수도 있고 의외의 제삼자가 먹을 수도 있고.” “그 삼자가 바로 순양입니까?” “말했잖나. 난 빈털터리야. 새치기 들어올 놈이 있어. 자네도 알지? 미라클 인베스트먼트라고, 외국 자본이야.” “미라클? 설마 한도제철 입찰 때 명함 내밀었던 그…?“ “그래 그곳이야.” 진 회장은 막걸리 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행여나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아. 나랑 전혀 관계없는 곳이야. 완전한 미국 투자사고 거기 사장이 내 막내 아들이랑 유학 동기야. 그래서 내게 전달을 부탁한 것뿐이라고.” 송현창은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회장님께서 남의 말이나 전달하는 메신저라고요? 누가 그 말을….” “믿게. 나도 자동차 살리려고 필사적이니까.” “네?” “대현자동차가 아진자동차를 인수하면 순양자동차는 철수해야 해. 압사당할 게 뻔하니까.” 송현창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확인해 봐.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가 생긴 지 거의 10년이 다 돼가. 내가 이 이 상황을 예견해서 그때부터 준비했다는 건 말이 안 되고, 또 굳이 남을 앞세울 필요 있겠나? 돈만 있다면 직접 인수전에 뛰어드는 게 정상 아닌가?” “좋습니다. 그럼 그 미라클이라는 곳이 원하는 건 뭡니까?” “돈놀이하는 놈들이 원하는 게 뭐겠나? 적은 돈으로 아진을 차지하고 제대로 키워서 비싸게 팔아먹는 거지.” “그쪽에서 제 회장직을 보장한다는 겁니까?” “어차피 경영할 만한 사람은 없으니까.” 송현창은 막걸리 한 사발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리 길지는 않겠군요.” “봉급쟁이 사장은 정년퇴직이라는 걸 해야 하니까. 대통령도 5년이 전부야.” “저도 5년은 보장한다는 뜻입니까?” “아마도.” “5년 뒤 회사가 정상화 되고 마라클이 주식을 매각할 때 회장님이 인수할 수도 있겠군요.” “아이고, 내가 얼마나 산다고? 5년 뒤? 관심도 없네.” 진 회장은 파전 한 점을 입에 넣고 젓가락을 놓았다. “미라클은 이미 주식을 좀 쥐고 있어. 임시주총을 소집할걸세. 그들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주총을 원만하게 진행하면 되겠지?” 할 말은 다 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 회장. 내 한마디만 더 해도 되나?” “말씀하십시오.” 송현창 회장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집 막걸리, 별로야. 파전은 그럭저럭이고. 등산 끝내고 배고플 때 먹어서 맛있게 느낀 거지.” 순간 송 회장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죠. 배고플 때는 뭐든 맛있는 법입니다.” “잘 아네. 허허.” 이미 대답한 셈이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는 것을 당사자인 송현창 회장이 가장 잘 느끼고 있을 것이다. “대현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될걸세. 자네를 무능하고 욕심 많은 노인으로 만들 테고, 자네를 소환할 거야. 검찰청 앞 포토존에 세우려고 검찰을 압박하겠지?” “회장님께서 만든 그 계획에 있는 겁니까?” “국민의 공분을 사고 부도나면 동정의 여지가 없잖나. 이때 전문가의 탈을 쓴 대현이 구세주처럼 나타나면 반대가 없거든.” 진 회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찰은 내가 막을 테니까 걱정 말고…. 허나, 기사는 좀 나올 거야.” 송현창 개인의 이미지가 나빠지면 회장직을 유지하도록 하려는 손자의 계획에 방해되기 때문이지 결코 손 회장을 걱정해서 호의를 베푸는 건 아니다. 송현창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임시주총은 요구는 중단하십시오. 괜히 대현에서 경계만 합니다. 주총에서 감사를 요구하실 생각 아닙니까? 그럴 필요 없을 만큼 회사 내부를 오픈하겠습니다. 필요한 만큼 충분히 보고 입찰에서 이기라고 전해주십시오.” “그러지. 허허.” 진 회장은 만족한 웃음을 터트리고 주점을 나갔다. 술값은 내지 않고……. * * * 긴급 회계감사라는 명목으로 수십 명의 전문가가 아진그룹 본사 대 회의실을 점령했다. 그들은 수천억의 대출금이 유령 회사로 빠져나가 주식 시장에 잠자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자동차 공장 근로자 수의 세 배가 넘는 목장갑을 하루가 멀다 하고 매입한 흔적도 발견했다. 자동차와 전혀 상관없는 아진 건설은 숫제 비자금 창구로 쓰려고 만든 회사였다.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에서 차출된 회계전문가들은 순양그룹 감사팀에서 나온 회계사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단 하나의 숫자에서 수천억의 비자금을 발견했고 자동차 부품 하나에서 공장에서 벌어지는 비리를 찾아냈다. 특히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한 비리도 발견했다. 7mm 육각볼트를 납품하는 회사는 관리자가 아닌 조립 라인의 근로자들에게 뇌물을 주기적으로 상납했고 근로자들은 다른 협력업체에서 납품하는 6mm짜리 대신 7mm짜리만 자동차에 쑤셔 박았다. 이 건이 바로 3년 전 벌어졌던 대대적인 리콜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리 잘 압니까? 검찰 금융조사부 출신이요?” “당신네들은 전부 외국물 먹었죠?” “그렇소만.” 궁금함을 참지 못한 미라클 회계사가 물었을 때 순양그룹 감사팀 직원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한 비웃음이었다. “아진 애들은 아마추어요. 해먹는 방법이 거칠어. 세련되지 못해.” “한국에서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지. 놀랍죠? 이런 부정이 난무하는 한국이 급속하게 발전했다는 것이?” “뇌물과 횡령, 이게 바로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지. 크하하.” 아진 자동차의 숨겨진 십 원짜리 하나까지 수면으로 드러날 때 대현 그룹은 긴급 비상회의의 연속이었다. “검찰은? 이 새끼들은 왜 잠잠해?” “정황증거만으로 소환하기는 곤란하다고 합니다.” “참고인 소환이잖아! 그게 뭐 어렵다고?” “그게… 일반인이면 모르되 꽤 비중 있는 인물이라 대검에서 신중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비중은 무슨 얼어 죽을…. 그럼 언론은? 왜 이리 강도가 약해? 연예인 마약 사건처럼 짱짱하게 때리라는 말 안 했어?” 갈수록 언성이 높아지는 주영일 회장 앞에서, 회의 참석자들의 목소리는 갈수록 기어들어갔다. “회, 회장님. 아무래도 누군가가 아진을 비호하는 듯합니다. 신문사마다 기사를 내기는 하는데 조금 껄끄러운 기색을….” “그렇습니다. 특히 한성일보의 영향력이 제일 큰 건 잘 아실 텐데….” “그래서? 한성일보에 광고 안 줬어? 기업 광고 도배하라고 하지 않았어?” “했습니다. 했는데… 아예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거, 뭐야? 순양이랑 사돈 맺는다는 소문이 사실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아진자동차를 우리가 흡수하면 가장 큰 타격은 바로 순양이 입을 테니까요.” “이런, 젠장! 하필 이 타이밍에! 진 회장도 그래. 손자까지 팔아 나팔수를 만들어?”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주 회장 역시 언론사 사주 집안과 사돈 관계 아닌가? 하긴, 대부분 승계 순위가 한참 떨어지는 손자가 언론사에 팔려가는 게 관례라는 걸 고려하면 순양은 정도가 심했다. 장손 아닌가? 한참을 씩씩대던 주 회장의 숨결이 가라앉자 대현자동차 사장이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회장님. 이미 대세는 기울었습니다. 주거래 은행에서 다음 주에 결정할 겁니다.” “확실해?” “네. 명동 사채업자들도 등 돌렸기 때문에 급전을 융통할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대현자동차 사장의 장담처럼 아진자동차는 부실기업의 연쇄적 부도사태를 막기 위해 정부가 주도하여 1997년 4월 21일 제정한 금융기관 협약인 ‘부도유예협약’ 대상이 되었다. 아진자동차는 협약대상이 되기 위해 경영권 포기각서, 임금 및 인원 감축에 관한 노조동의서, 자금관리단 파견 동의서 등을 제출했다. 이제 부도유예 기간인 2개월 동안 아진자동차는 숨어 있는 비자금을 빼돌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을 은밀히 지휘하는 사람은 바로 아진의 송현창 회장, 미라클의 오세현 그리고 순양의 진양철 회장이다. ======================================== [056] Win-Win 3. 처음 서재에 발을 디딜 때 쫄지 않겠다는 다짐은 소용없었다. 오세현의 손끝이 떨리는 걸 보니 긴장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삼촌. 할아버지 뒤의 순양그룹을 보지 말고, 할아버지만 봐요. 그럼 편하실 겁니다.” 오세현은 내 등을 툭 치고 엄지를 척- 하고 들었다. “가자.” 서재에 들어서자 할아버지는 안경을 벗으며 벌떡 일어섰다. “반갑네. 자네가 오세현인가?” “네. 회장님. 영광입니다.” 오세현이 허리를 숙이자 할아버지는 손을 저었다. “자자, 앉게. 편하게 앉아.” 할아버지는 날카로운 눈으로 오세현의 모습을 샅샅이 훑었다. “올해 몇인가?” “쉰입니다.” “아직 한창때로구먼.” “도준이 덕분에 다시 젊어진 듯합니다.” 어쭈? 아부까지? 오세현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었다. “자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우리 도준이 돈을 무려 백배나 키워줬다고? 대단한 능력이야. 허허.” 순간 오세현이 의아한 눈빛을 나를 쏘아봤을 때 머리를 짧게 흔들었다. “아, 그건…. 운이 좋았습니다. 다행히 원금을 까먹지 않아서 늘 안도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 겸손은. 그 능력을 나를 위해 써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네.” “과찬이십니다.” 한동안 오세현을 치켜세운 할아버지는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게 건질 수 있는 돈이라고 들었네만.” “그렇습니다. 총 이천칠백억입니다. 부도유예협약 기간이 끝나면 법정관리 들어갈 게 뻔한데, 그 전에 빼돌려야 합니다. 만약 들킨다면 아진 송 회장은 물론이고 다수의 임원들 구속은 피하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 돈세탁해달라는 건가?” “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음…….” 할아버지는 서류를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 그 돈은 아진자동차 임원들 은퇴자금으로 챙겨줘야 할 것 같은데요?” 조심스레 말했지만, 할아버지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놈들 노후를 네가 왜 걱정해?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자기들 노후 준비는 착실하게 해 놨을 게다.” 할아버지는 오세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놈들 중 감방 가는 놈도 있나?” “구색 맞추기로 서너 명은 보내야 하지 않겠냐는 송 회장의 의견입니다. 은행 채권단에게도 그 정도선에서 마무리하자는 제안을 던졌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눈빛이 어둡다. 그동안 무수히 봐왔던 눈빛, 바로 탐욕이었다. “오 대표. 이 돈을 미국 미라클에 모아두면 어떻겠나?” “전부 말입니까?” “왜? 안돼?” “안될 건 없지만, 다시 빼낼 방법이…….” “이 돈을 전부 아진자동차에 재투자하면 되지 않겠나? 그리고 그 돈 먹으려는 놈들에게 월급이든, 보너스든, 특별 인센티브든 정당하게 지급하면 문제없을 것 같은데?” 오세현은 입을 떡 하니 벌렸다. 이천칠백억을 다 쓰려면 연봉이나 보너스를 얼마로 책정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가장 합법적인 방법이긴 하다. 난 할아버지가 이 돈을 절대 주지 않을 방법을 찾아냈다고 확신했다. 조금 전 보여주었던 눈빛, 욕심이 한가득 묻어난 눈빛이 바로 본심이다. “하지만 저들이 원하는 건 일시불입니다. 대부분 사직서 내고 떠나야 하니 한몫 달라는 거죠.” 오세현은 아직 할아버지를 잘 모르니 저런 소리를 한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할아버지는 역시 오세현을 좀 딱하다는 듯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네는 투자자가 제격인가 봐. 경영은 어울리지 않겠군.” 삼촌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는 걸 보자 웃음이 터질뻔했다. “줘야 할 돈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안 주려고 미루는 판에 주지 않아도 될 돈을 왜 미리 줘?” 이런 억지를 너무나 당연한 듯 말하자 오세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몰라 당황한 게 눈에 보였다. “이 돈 미리 다 챙겨주면? 그 순간부터 남남이야. 어쩌면 적에게 딱 붙어서 자네를 공격할지도 몰라. 그들 눈에는 자신들의 성이었던 아진자동차를 뺏어간 악당이 바로 자네거든.” “아…….” 숫자만 상대하던 오세현은 갈대처럼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사람의 비겁한 이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돈이 바로 채찍이고 당근이야. 쥐고 있게. 그리고 길들일 때 하나씩 빼서 줘. 선심 쓰듯이 말이야. 참, 자네도 내 돈 천억을 쥐고 이학재 실장을 오라 가라 했잖나? 그게 돈의 힘이야.” “아닙니다, 회장님. 오해십니다. 그건 법적으로 불가능해서….” 당황한 오세현이 급히 변명 같은 말을 쏟아냈을 때 할아버지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오 대표, 자네를 탓하는 게 아냐. 예를 든거지. 잘 지켜보라고. 이 돈 이천칠백억이 아진자동차에 재투자 됐다는 걸 알면 아진 놈들, 자네 발가락이라도 핥을걸?” 이 정도까지 노골적일 줄 몰랐을 것이다. 오세현은 충격이 큰 듯 할아버지의 말이 끝났음에도 입을 열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진면목을 좀 더 보여주고 싶었다. 앞으로 자주 봐야 할 사이 아닌가? “할아버지.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죠? 사실은 돈을 안 주려고 생각하시잖아요.” 내가 씩 웃으며 말하자 할아버지도 웃음을 터트렸다. “예끼, 이놈아. 이 할애비를 돈 떼먹는 파렴치한으로 만드는 게냐? 허허.” 그의 시선이 다시 오세현으로 향했다. “자네는 어떤가? 그 돈 다 주고 싶은가? 아니면 생색만 내고 싶은가?” “그럴 수만 있다면 당연히 안줍니다.” “그렇지. 세상에 주지 않아도 될 돈을 주는 사람은 없어.” 할아버지는 다시 내게 눈길을 던졌다. “거봐라. 나만 나쁜 놈은 아닌 게야. 허허.” 잠깐 동안 기분 좋은 웃음을 즐기던 할아버지는 서류를 내밀었다. “자네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송 회장을 설득하게. 아진이 꿍쳐둔 돈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법정관리 들어가기 전에 깨끗하게 빨아서 미라클 금고에 넣어주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감사는 무슨, 내 새끼 위해서 하는 일인데.” 나와 오세현이 일어나자 할아버지는 날 가리키며 머리를 저었다. “넌 좀 더 있거라. 할 말이 있다.” “그럼 전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오세현이 먼저 떠나자 할아버지는 웃음을 거뒀다. “너, 휴학계 냈다면서?” 어차피 알게 될 일, 비밀로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너무 빠르다. 아침에 휴학계를 내고 곧장 이리로 왔는데. “네. 오늘 제출했습니다.” “왜?” “아시면서 그러세요? 큰일 시작했는데 학교 다닐 시간이….” “이놈아. 누가 학교 꼬박꼬박 다니랬어? 적만 두고 있어도 돼. 휴학계는 찢어버리라고 했다." “할아버지.”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안다.” “네?” “대학생 신분을 유지하며 친척들 눈길을 피하고 싶은 게 아니냐?” “…….” 훤히 꿰뚫어보는 할아버지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어차피 부딪혀야 할 문제야. 뒤로 미룰 수 없어. 싸워야 할 때 싸워야 하고 손잡을 때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때가 왔을 때 네가 학생이라는 것은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칼자루를 쥔 분은 할아버지 아니세요?” 다소 노골적인 말이었지만 더는 미루지도 덮어두지도 못할 문제다. 할아버지가 먼저 시작한 말이다. “이놈아. 순양그룹이 동네 슈퍼냐? 내 칼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많다. 중요한 핵심 계열사 사장 몇 놈이 나서서 네 큰아버지 손을 들어주면 순양그룹은 그날로 둘로 쪼개진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건 알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그룹 승계가 시작될 때 순양의 임원들은 대학생 딱지를 달고 있는 나는 어린애로 볼 것이다. 승계를 시작한다는 것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뜻이고 권력은 순식간에 큰아버지에게로 몰릴 것이다.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뜻에 따르겠습니다.” 조용히 머리를 숙인 다음 서재를 빠져나올 때 참으려 해도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할아버지의 마음은 이미 내게 기울었다는 걸 또 한 번 확인했기 때문이다. * * * “여의도로 가요.” 나를 기다리던 김 대리는 운전대를 잡고 속도를 올렸다. 룸미러로 내 눈치를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저기,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만, 괜찮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제 착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누군가 꼬리를 붙인 것 같습니다.” 모토로라 스타택(StarTAC)을 만지작거리던 내 손이 굳어버렸다. “언제부터요?” “글쎄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단지 제가 눈치챈 건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말씀해보세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차는 항상 따라붙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동선만 계속 파악하는 것 같은데…….” 김 대리는 분명 영빈관에서 근무했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미행을 눈치챌만한 교육을 받았을 리가 없다. 어떻게 알았을까? 룸미러로 나를 보던 김 대리는 미심쩍어하는 내 눈과 마주치자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아, 신 팀장님께서 주의 주셨습니다. 요즘 이상하리만치 미행이 많다고요.” “신 팀장?” “아, 우리 전략1팀 팀장님입니다.” “미행 말입니다. 기자 아닐까요?” 가십거리만 캐고 다니는 주간지 기자들에게 재벌 3세는 먹잇감이라 미행은 흔한 일이다. 연예인과 함께 호텔로 들어가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은 수백, 수천만 원짜리 수표나 다름없다. “아침부터 따라다니는 기자는 없습니다.” 설마? 큰아버지가 붙인 놈들인가? 불안한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나 보다. 김 대리가 조심스레 말했다. “신 팀장께서 누구 짓인지 확인 중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붙은 것 같은데 바쁘지 않으시면 확인 좀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간만에 드라이브 좀 하죠.” “안전벨트 매십시오. 좀 밟겠습니다.” 자동차는 강변북로를 지나 자유로를 향해 달렸다. * * * “삼남 진상기와 사남 진윤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진상기는 큰형인 진영기 옆에 딱 붙어서 꼬리만 흔드니까요. 진윤기는 영화계에서 입지를 굳혔습니다. 그룹은 아예 관심 밖입니다.” “그럼 둘째인 진동기가 문제라는 건가?” “네. 실적만 놓고 본다면 진동기가 훨씬 좋습니다. 중화학 분야를 국내 탑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이니까요. 그리고 계열사 사장과 임원들의 평판도 좋고요.” “후계 순위에서는 밀리지만 신하들의 평판을 등에 업었다?” “그런 셈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화학, 중공업 부문은 진동기가 맡을 가능성이 큽니다.” 프로젝터가 돌아가는 어두운 회의실에는 순양그룹 가계도에 각자의 특징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외동딸인 진서윤은 어때?” “욕심은 많으나 여자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중론입니다. 백화점, 골프장, 호텔 그리고 문화재단을 차지할 것 같습니다.” “흥! 누구 마음대로.” “소영아! 잠자코 들어.” 한성일보 홍 회장이 콧방귀를 끼는 손녀에게 눈을 흘기자 홍소영은 입을 닫았다. “계속해.” “네. 그런데 조사를 시작하고 나서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손자인 진도준입니다.” “진도준? 막내?” 홍 씨 일가 사람들은 의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네. 사남 진윤기의 차남이죠.” “그 애가 왜? 서울대 법대 다니는 책벌레 아냐?” “한 학기 동안 등교한 날은 손에 꼽습니다.” “그럼?” “매일 여의도로 출근하다시피 합니다. 진 회장님 댁도 자주 들르고요.” “여의도?” “네. 아무래도 외국계 투자사인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조사한 바로는 개인 재산이 꽤 된다고 합니다.” “얼마나?” “못해도 수백억, 많게는 천억 원에 육박하지 않을까 합니다.” 천억이라는 말에 홍 씨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대학 신입생이 천억이라니? ======================================== [057] Win-Win 4. “서, 설마 진 회장이 증여한 돈이야? 그 어린놈에게?” 진 회장은 손자, 손녀들이 성인이 되면 주식이나 현금을 조금씩 증여한다는 건 일반인도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핏줄마저 돈으로 조종한다며 욕하는 이도 있고, 능력이 보이지 않으면 증여를 중단하니 현명하다고 칭송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런 진 회장이 이미 수백억 이상을 증여했다고 하니 모두 놀랄 수밖에. “증여는 맞는데 보통과 다릅니다. 10년 전, 진도준을 위해 목장 하나를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목장의 위치가 지금의 분당 신도시였습니다.” “아….” “운이 좋았죠. 몇천만 원 땅이 백억 원대로 뛰었으니까요.”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 회장 정도면 손자를 위한 몇천만 원 정도의 선물은 특별한 애정의 증거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돈을 맡긴 곳이 바로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였습니다. 이 투자사의 대표 오세현은 진도준의 아버지와 유학 동기입니다.” “또 다른 게 있나? 지금까지 보고한 내용만으로는 단지 운 좋은 아이라는 게 전부야.” “특이한 점은 손주들 중 유일하게 서재를 들락거린다는 점입니다. 방학 때는 아예 진 회장의 집에서 지냈고요. 애정이 특별하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한 애정이라…….” “그렇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 아들인 진윤기를 오랫동안 버린 자식 취급을 했으니 미안한 마음이 있었고 그것이 손자인 진도준에게 쏠렸다. 둘째는 엄청난 운이 따르는 아이라는 것. 진 회장은 인터뷰에서 가끔 말했습니다. 금전운을 양손에 쥔 사람은 못 이긴다고 말입니다.” “할아버지가 막내를 특별하게 보는 건 흔한 일 아닌가?” 홍 회장이 애써 의미를 희석하려 했을 때 홍소영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어째서냐?” “서재는 영준 씨도 함부로 들어가기 힘든 곳이라고 들었어요. 거긴 보통 서재가 아닙니다. 바로 순양그룹의 컨트롤 타워에요. 다른 손자들은 그냥 거실에서 만나요. 그런데 서재에서 독대? 이건 순양그룹 회장실에서 독대한다는 말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진영기 부회장도 독대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항상 이학재 비서실장과 함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까지 진 회장과 언제라도 독대 가능한 인물은 이학재 실장이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누구 하나 입 여는 사람이 없었다. 최소한으로 보더라도 진도준을 향한 진 회장의 애정 각별하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처음 침묵을 깬 사람은 홍소영의 부친인 홍 사장이었다. “그 진도준이라는 애, 여자나 유흥은 어때? 한창때니까 흥청망청할 만도 한데….” 아직 사고 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이제 성인이니 재벌 집안 젊은 놈들이 빼먹지 않고 거치는 술, 여자에 취한다면 진 회장의 애정도 사그라질 것이다. “아직은 모범생 그 자체입니다. 사실 유흥 쪽으로 빠지기는 쉽지 않다고 봅니다. 그쪽으로 끌고 들어갈 만한 친구가 없어요. 3세들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사립고에서 진도준은 공부만 하는 바람에 친구가 없습니다.” “그놈이 흥청망청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잠자코 있던 홍 회장이 불편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여의도 투자사를 들락거린다는 건 어리지만 돈 불리는 재미를 안다는 거야. 돈 버는 것 이상으로 재미있는 건 없어. 적당히 즐길지는 몰라도 푹 빠지지는 않을 거야.” 홍 회장은 회의실을 쓱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특이하긴 하나 너무 정신 팔지 말아. 진 회장 나이를 생각하면 손자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다. 차남인 진동기와 딸내미 진서윤만 잘 체크해. 이것들은 늑대다. 호랑이가 죽으면 곧바로 이빨을 드러낼 거야.” 홍 회장은 방금 브리핑한 남자를 향해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진도준인가 하는 꼬맹이도 지켜봐. 어쩌면 진 회장의 고급 정보를 이용해서 주식 놀이를 할지도 모르니까.” “네. 회장님.” “그리고 소영아.” “네, 할아버지.” “네 신랑 될 그놈에게 슬쩍 한번 확인해봐. 집안에서 진도준이라는 놈이 어떤 위치인지.” “알겠어요.” 홍소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홍 회장은 모두를 보며 말했다. “이런 기회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진 회장의 모든 것이 진영준의 손에 들어올 때까지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마.” * * * 자유로를 지나 통일전망대까지 달렸다. 김윤석 대리와 전망대 휴게실로 들어가 꼬리 붙은 차량을 살펴보며 커피를 마셨다. “어떻습니까? 따라왔어요?” “네. 역시나 차에서 내리지는 않는군요.” “미행 확실합니까?” “회장님댁에서 봤던 그 차량입니다. 확실해요.” 사람을 풀어 집안을 감시할 정도라면 큰아버지가 제일 유력하다. 슬슬 그룹 장악을 위한 시동을 건 것일까? “혹시 큰아버지 댁 사람들, 그러니까 영준이 형이나 경준이 형도 미행 붙었습니까?” “그것까지는 모릅니다. 확인해 볼까요?” “그래요. 부탁 좀 합시다.” 저쪽에서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준비를 해야 한다. 아직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일, 바로 궂은일을 해줄 수족 같은 사람을 마련하는 것이다. 눈앞의 김윤석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김 대리는 내가 힐끔거리는 것을 눈치챘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도련님.” “거, 도련님은 무슨…….” “그럼 뭐라고 불러야…?” 젠장, 마땅한 호칭이 없다. 그냥 도준 씨라고 부르기도 좀 그렇고 도준아라고 부르면 말을 놓는 게 정상이다. 반말은 피해야 한다. 말은 상하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확실한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네요. 일단은 도련님이라고 합시다.” “네. 도련님. 다른 게 아니고 필요하신 일이 있으면 절 시키십시오.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여의도 가는 게 전분데, 이러다가 저 짤릴 것 같습니다.” 짤릴 리야 있겠는가만은 불안하기는 할 것이다. 전략팀의 다른 직원들은 온갖 궂은일은 물론이고 담배심부름까지 하느라 24시간 대기한다. 그에 비하면 김윤석은 꿀 보직이나 다름없다. 하루 한 시간이 일 하는 시간의 전부니까 말이다. “제가 짜르라고 하지 않는 이상 그럴 일 없습니다. 저, 잠시만. 화장실 좀.” 화장실을 들른 후에 휴게실 입구의 ATM에서 돈을 좀 찾았다. 천만 원 정도면 되려나? 돈 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자 김윤석 대리의 눈을 휘둥그레졌다. “이, 이건…….” “필요할 때 쓰세요. 자, 갑시다.” “도, 도련님!” 당황한 김 대리를 남겨두고 휴게실을 나오자 그는 봉투를 챙겨 들고 허겁지겁 내 뒤를 따랐다. 핸들을 잡고 시동까지 걸었지만 김 대리는 출발하지 못했다. “도련님. 이 돈으로 제가 뭘 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셔야죠?” 잘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손이 아쉽다. 괜찮은 손을 구하기보다 있는 손이라도 키워야겠다. “김 대리님.” “네.”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학력 좋고 머리 좋은 사람들, 순양에 입사하려고 줄 서 있어요.” 핸들을 잡은 그의 손이 움찔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우리는 선택하는 사람이고 줄 서 있는 그들은 선택받으려 아등바등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대학 나온 머리 좋은 사람들을 이겨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거, 괜히 돌려 말하려다 엉뚱한 소리만 하게 생겼다. 직설적으로 가야겠다. “순양에 입사한 뒤로 뭘 할지 한 번이라도 스스로 결정한 적 있습니까?” “…….” “김 대리님도 자신의 결정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 첫 번째가 바로 무슨 일을 할지 선택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할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위해 필요한 사람을 선택하세요. 제가 드린 돈은 필요한 사람의 환심을 얻기 위한 도구입니다.” 김 대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 영수증은 필요 없습니다.” 그는 백미러로 나를 힐끔 보더니 악셀을 밟았다. 질문이 없는 걸 보니 알아들었나 보다. * * * 예상대로 부도유예 기간이 끝나자 아진그룹은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송현창 회장은 그 와중에 회사를 뺏기지 않으려는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았는지 화의 신청까지 했지만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 세우지 못했다. “아진 특수강만큼은 꼭 살려야 합니다.” “무슨 소립니까? 가장 적자 폭이 큰 곳이 바로 특수강입니다. 이걸 어떻게 살려요?” “아진 특수강은 자동차 독자플랫폼과 엔진의 개발을 위해 설립한 겁니다. 국내 철강사들은 수요가 적다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요. 이거 정리하면 여전히 수입에 의존해야 합니다.” 14개의 계열사를 정리했고, 아진그룹 계열사 전 노조가 무분규, 임금동결 선언했다. 뼈를 깎는 자구책을 보여줬지만, 채권단은 무자비한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것 보세요, 송 회장님. 지금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합니다. 한국 자동차 산업의 미래? 그런 건 대현자동차에 맡기세요. 빚더미에 앉은 아진특수강의 분리 매각은 아진자동차를 살리기 위한 핵심 자구책이란 말이오!” 법정관리가 경영권을 뺏긴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한 송현창 회장은 미라클이 인수하기만을 빌 뿐이었다. “송 회장님. 본격적인 인수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확실한 이미지를 구축해야 합니다. 회장님은 자동차 전문가입니다. 다만 다른 재벌 대기업을 견제하기 위해 무리수를 좀 두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났다. 자동차만 맡는다면 문제없다. 이걸로 언론 방향을 바꿀 겁니다.” 오세현은 남은 시간 동안 송현창 회장이 나가야 할 길을 조목조목 짚어나갔다. “그전에, 오 대표. 이미 쫓겨난 우리 식구들 챙겨주는 건 어떻게 됐나? 비자금은 이미 미라클 인베스트먼트로 들어간 걸로 알고 있는데?” 오세현은 한심하기도 했고 일견 이해하기도 했다. 함께 어깨를 감싸고 여기까지 온 동지들이 쫓겨났으니 그들을 돌봐 주고 싶은 맏형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선순위가 틀렸다. “송 회장님.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전리품을 나눠 갖는 건 승리한 후에 생각할 문제죠.” “그들은 이미 전쟁에 끼어들 여지도 없어. 후방으로 이송된 부상자란 말일세.” “다리 잘린 부상병은 상처를 보여주며 적에 대한 적개심을 더 키워야죠. 그들에게 전하십시오. 전리품을 얻고 싶으면 성과를 보이라고 하십시오.” 송 회장은 당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오 대표. 인수전에서 패한다면 비자금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내가 잘못 이해한 건가?” “아뇨.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미라클이 아진자동차를 인수하지 못한다면 비자금 이천칠백억은 전쟁 비용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단호한 오세현의 결론에 송현창은 할 말을 잃었다. 다급한 상황이다 보니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 5년간 아진자동차의 대표이사로서 얻는 이익과 비교하기 어려운 돈, 그 돈이 지금 사라지려 하고 있다. “이보게, 오 대표.” 오세현은 손을 들어 송현창의 입을 막았다. “돈 잔치를 원하세요? 그럼 제가 아니, 우리 미라클이 아진자동차의 지배주주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세요. 그리고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데…. 돈세탁은 완벽합니다. 혹시라도 쫓겨난 노친네들이 딴생각을 못 하게 단도리 잘하십시오.” 오세현은 마지막 경고를 남기고 일어섰다. “길어봤자 두 달입니다. 지금 채권단은 하루라도 빨리 대현으로 넘기려고 온갖 수단을 다 다 써요. 회장님 개인 재산을 털어서라도 자동차 전문가라는 이미지 구축을 서두르세요.” ======================================== [058] 싸움이냐, 스포츠냐? 한 길만 걸었습니다. 한 길만 걸어야 했습니다. 한 길만 걷겠습니다. - 아진자동차 한국 최초의 승합차. 한국 최초의 소형 SUV 한국 최초의 경차. 한국 최초의 OOO 아진 자동차의 길입니다. 한성일보에 실린 전면 광고를 뚫어지게 쳐다본 주영일 회장은 신문을 내동댕이쳤다. “이거 뭐야? 송현창이가 왜 이러는 거야?” 회의실은 살벌한 긴장감만 맴돌았다. 누군가 나서서 저 광고에 대해 그럴듯한 해명을 해야 한다. “마지막 발버둥입니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그럴 듯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주 회장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고 언성은 더 높아졌다. “그래? 그런데 왜 내 눈에는 발버둥으로 보이지 않지? 고도로 기획한 일을 차근차근 진행하는 것처럼 보이냐는 말이다!” 주 회장은 내동댕이친 신문을 다시 주워들었다. “여기 동그라미 세 개 보이지? 땡땡땡! 이 안에 뭐가 들어갈 것 같아? 앞으로 나올 신차라는 거 아냐? 그것도 한국 최초의! 계속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잖아. 모르겠어?” 회의실은 또다시 냉랭한 칼바람이 불었다. 모두 서로의 눈치만 볼 때 누군가 침묵을 깨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회장님.” “뭐야?” “정보팀에서 좀 수상한 루머를 포착했습니다만….” 모두의 시선이 입을 연 자에게 쏠렸다. 새로운 정보가 오늘 자 전면 광고를 속 시원하게 해명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눈길이었다. “아진 인수전에 우리 대현 외에도 뛰어들 곳이 있다는 루머를 포착했습니다. 신뢰도는 말씀드릴 수준도 안 되는 찌라시입니다.” “어디야? 그게?” “투자사 하나가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기다린다는 소문입니다.” “투자사?” “네. 미라클 인베스트먼트라고...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한도제철 인수전 때 손 담근 곳입니다.” 주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억 못 할 이름이 아니다. “그놈들이 또?” 외국계 투자사이면서 끊임없이 한국기업 사냥에 열을 올리는 곳. 단순히 루머라고 치부하기에는 찜찜하다. “네. 하지만 채권단이 인수가격을 높이기 위해 뿌린 루머일 수도 있습니다. 단독 입찰보다는 경쟁이 붙어야 유리하니까요.” “이 자식아! 그걸 지금 보고하면 어떡하냐고!” “네?” 또다시 떨어지는 주 회장의 불호령에 보고자는 눈만 깜빡거렸다. 단순 루머일 뿐인데 왜 이리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지 회의에 참석한 모든 중역들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채권단과 정부는 이미 협의 한 거 몰라? 다 끝난 이야기야! 지금에 와서 불붙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그런데 경쟁을 붙여? 연말 대선 전에 아진자동차 넘긴다는 게 그들 약속이야. 괜히 어렵게 만들 이유가 없어.” 주 회장은 초조한지 의자에서 일어나 서성거렸다. 한도제철 인수전에도 이놈이 껴들어 초를 친 게 아직도 생생하다. 한도제철이 보유한 알짜배기 땅, 그걸 못 먹어서 아직 이가 갈리는데 또 끼어들다니. 대선이 몇 달 남지 않았다. 이번에는 단 하나의 돌발 변수를 남겨둬서는 안 된다. 서성거리던 주 회장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놈들 회사로 간다. 단순한 헛소문인지, 사실인지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다.” * * * “대, 대표님. 손님이 찾아 왔습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비서가 뛰어들었다. 그녀는 마치 괴물이라도 본 듯, 눈이 찢어질 만큼 커져 있었다. “누구길래? 왜 그리 호들갑이야?” “그게 대현그룹 회장님이라….” “뭐?” 나와 오세현 두 사람은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우리도 호들갑 떤 비서의 반응과 다를 바 없었다. “자,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해.” 우리 둘은 다급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다 테이블 위에 흩어진 서류부터 정리했다. “삼촌, 전 옆 회의실에 있을게요. 참, 인터폰 켜 놓으세요. 무슨 대화 하는지 저도 들어야겠습니다.” “그래. 혹시라도 네 얼굴 알면 낭패다. 넌 방송에 얼굴 좀 팔렸잖아.”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대표이사실의 문을 열고 조용히 나왔다.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는 대현 그룹 회장의 눈길을 피하며 복도 끝의 회의실로 들어가 황급히 전화기의 스피커를 켰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오세현이 머리를 숙이자 주영일 회장은 손부터 내밀었다. “불쑥 찾아온 불청객을 이리 환대해 주시니 고맙소이다. 실례가 아니었으면 합니다.” “한국에서 회장님을 불청객으로 대할 곳은 없을 겁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오세현이 명함을 건네자 주 회장과 함께 온 중년 사내가 명함을 받아 들고 자신의 명함을 건네려 했지만 주 회장이 손을 저었다. “불쑥 찾아온 주제에 비서 명함을 드릴 수는 없지.” 주 회장은 주머니에서 직접 명함을 꺼내 건넸다. 대현 그룹 주영일. 그리고 휴대전화 번호가 전부인 명함. 오세현은 주영일 회장과 직통전화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주요인물이 되었다. 순양그룹 진 회장의 번호도 알고 있으니 어쩌면 열 손가락 안에 들지도 몰랐다. “누추하지만 앉으시죠.” 오세현이 자리를 권하자 주 회장은 슬쩍 웃음을 보였다. “아진자동차를 넘보는 회사가 누추할 리가 있겠소? 겸손하시군.” 오세현의 손이 멈칫했으나 이내 평온을 찾았다. 명성이 짓눌릴 이유가 없다. 지금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아진자동차를 차지하기 위해 같은 자격으로 패를 돌리고 있다. 차이라고는 가진 판돈이 다를 뿐이지만 그 역시 일방적으로 밀릴 만큼 큰 차이도 아니다. “이거, 소문이 빠른 겁니까? 아니면 대현그룹의 정보력이 뛰어난 겁니까?” 주 회장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사실이라 하더라도 숨길 줄 알았는데 이처럼 당당하다니. 쓸데없는 눈치 싸움을 건너뛰니 훨씬 편해졌다. “자네는 좀 나가 있게. 아무래도 단둘만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네.” “네. 회장님.” 함께 온 중년 사내는 허리를 숙이고 조용히 물러났다. “숨기지 않으니 이야기가 빠르겠어.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원하는 게 뭐요?” “그야 당연히 아진자동차를 원하죠. 다른 물건 나온 게 또 있습니까?” “아진을 먹는다 치고 말이요. 그다음은? 크게 사서 잘게 나눠 팔 생각인지, 아니면 살찌워서 웃돈 더 얹어 팔 생각인지 묻는 거외다.” “한성일보에 실린 오늘 자 광고 보셨습니까?” 오세현이 신문을 주워들자 주 회장은 손을 휘휘 저었다. “봤소. 두 번 보고 싶지는 않고.” “전 이 광고가 참 마음에 듭니다. 땡땡땡 안에 들어갈 자동차. 직접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지는 광고 아닙니까?” 주 회장은 오세현의 집무용 탁자 위의 모니터를 향해 눈짓했다. “주가 그래프만 보던 눈으로 차를? 꿈이 야무지군.” “꿈을 현실로 만들 만큼 돈이 있으니까요. 돈이 좋긴 좋아요. 흐흐.” 이를 앙다물었는지 주 회장의 턱이 꿈틀거렸다. 감히 자신 앞에서 이렇듯 대 놓고 비웃는 웃음을 보이다니. “잡소리는 거두고 원하는 걸 말씀해 보시게. 투자 회사 아닌가? 투자하고 거두고… 이게 본래의 목적일 테니 얼마의 차액을 원하는지만 말하면 쓸데없는 싸움을 피할 수 있지 않겠소?” “그러니까 싸움판에서 빠지는 대가를 주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소. 괜히 가격만 올리는 싸움, 번거롭기만 하지. 좋은 기회 아니오?” 오세현은 큰 싸움에 뛰어들고 나서야 한국의 재벌 대기업의 참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싸워서 쟁취하는 게 아니라 아예 싸움 자체를 없애버린다. 주 회장의 표정으로 봐서는 천억을 불러도 받아들일 것 같다. 그래 봤자 단독 입찰이니 입찰 서류에 천억 원을 낮게 적으면 그만이다. “이거, 단단히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우리 투자자들도 돈은 충분히 있습니다. 지금은 유희를 원하시죠. 다들 자동차 매니아들이시라 자동차 제조사를 원하는 것뿐입니다.” 장난감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장난감 회사를 산다. 이런 황당한 소리가 뜻하는 것은 하나다. 협상은 없다. “외국의 투기자본 때문에 국부(國富)가 유출된다는 기사 한 줄이면 발붙일 곳 없을 텐데요? 한국 사람, 애국심만큼은 누구 못지않습니다.” “입찰 가격을 보면 누가 더 애국하는지 한국 사람 모두가 알 겁니다.” 돈으로 밀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경고다. 주 회장은 미라클의 의지를 확실히 알았다. 꿈이니, 자동차 매니아니 하는 헛소리에 가려질 의지가 아니었다. 주 회장이 끙- 하는 얕은 신음을 내며 일어서려 할 때 오세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꼭 받아야 할 전화라….” 주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었다. “편히 통화 하시게.” 주 회장은 오세현이 사무실 구석에서 낮은 목소리로 통화하는 사람이 누굴까 궁금했다. 자신 같은 거물과 중요한 대화를 나누는 도중 꼭 통화해야 할 사람이라면? 짧은 통화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온 오세현은 숨기는 것이 없었다. “제 비서가 회장님이 오셨다는 걸 우리 회사의 주요 투자자에게 알렸나 봅니다.” “오 대표의 물주란 말이요?” “네. 그런 셈이죠.” “그래, 중요한 지시라도 내렸소?” 오세현은 뒷머리를 슬쩍 긁으며 난처한 웃음을 보였다. “워낙 직설적이고 효율을 중시하는 분이시라…….” “뭐요? 말하고 싶은 게?” 주 회장의 얼굴에 한 가닥 기대가 서렸다. 혹시 경쟁을 피하고 싶어 하는 걸 아닐까? “히든 빼고 다 까는 게 어떠냐고… 공적자금으로 메꿀 수 있는 건 다 채우고 인수가격만으로 경쟁하는 게 서로 이익이 아닐까 하는 의견입니다. 윈-윈이죠. 누가 이기든 간에 데미지가 적은 방법이니까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비가격 요소 중 채권단에게 요구할 사항은 단합하고 입찰 가격만으로 붙어보자는 제안. 주 회장은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제안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할 수 있을까? “다짜고짜 사무실로 쳐들어와 입찰경쟁에서 빠져주면 돈으로 보상하겠다고 말씀하신 분은 회장님이십니다. 먼저 편법을 제안하셨으니 저도 말씀드리는 거죠. 싸울 때 규칙을 정하면 스포츠가 됩니다. 품격이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주 회장은 능글능글 웃으며 말하는 오세현을 노려보다 소파에서 일어났다. “재미있는 친구구먼.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싸움 한번 하겠어. 품격? 대현이라는 이름은 품격으로 만든 게 아냐. 진흙탕을 뒹굴며 싸워서 세운 이름이라는 걸 똑똑히 새겨주지. 기대하라고.” 오세현은 문을 박차고 나가는 주 회장의 뒷모습을 보며 괜한 말을 한 게 아닌가 걱정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인터폰으로 확인하고 잽싸게 대표실로 달려갔다. “야! 이거 잘못 건드린 거 아냐?” 내 얼굴을 보자마자 삼촌은 불안한 듯 소리쳤다. “왜요? 험악했습니까?” “너도 들었잖아? 아니, 표정을 봤어야 해. 노친네 얼굴에 투지가 철철 흐르더라. 섬뜩하던데?” 잘못 생각했나? 그럴 리가? “삼촌도 제 생각이 별로였어요?” “아니. 적절했어. 그러니까 바로 제안했지. 입찰 들어갈 때 양측의 부채탕감 요구가 똑같다면 채권단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그리고 채권단은 분명 엄청난 부채탕감을 대현 그룹에 보장했을 거야.” 오세현은 내 얼굴을 슬쩍 보더니 피식 웃었다. “너도 재벌가 사람 맞구나.”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저 재벌 3세 아닙니까?” “시건방도 안 떨고 안하무인도 아니고 공부도 착실하게 해서 자꾸 잊어. 그런데 부채탕감을 그 짧은 순간에 생각해낸 걸 보니 대단하다 싶어서.” 씁쓸하게 웃는 오세현을 보며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참았다. 진심을 보여주는 건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앞으로 오랫동안 함께하며 나랏돈을 제 돈처럼 쓰지 않는 유일한 재벌이라는 것을 보여주면 될 일이다. “자, 서류 수정하죠. 부채탕감 예상액을 두 배로 산정하고 다시 계산해요.” “뭐? 야! 너 주 회장 말 못 들었….” “들었어요. 그냥 무시해도 됩니다.” 오세현의 우려는 하등 쓸모없는 걱정이다. 주영일 회장이 발끈해서 내뱉은 말일뿐이다. 진흙탕? 싸움? 다 옛날이야기다. 지금의 주영일 회장은 뼛속까지 재벌이다. 단합해서 돈 아끼자는 제안을 거절하는 재벌은 없다. ======================================== [059] 싸움이냐, 스포츠냐? 2. “회장님. 이 제안은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끄응.“ 꽉 다문 입과 찌푸린 미간은 주 회장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말해주지만 그룹 주요인물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잘 차린 밥상을 회장이 성질에 못 이겨 걷어차 버리는 참사는 막아야 한다. 아진자동차를 먹기 위해 그간 들인 정성을 생각하면, 기본적 사항에 대한 단합은 꼭 필요하다. 아진자동차의 부채 3조2천8백억, 아진 계열사 부채 1조5천8백억 탕감. 그리고 나머지 부채 2조5천2백억은 출자로 전환. 무려 7조3천8백을 탕감하는 파격적인 조건. 은행 채권단과 경제부 관료들이 이 조건을 받아들일 때까지 퍼부은 돈, 마신 술, 붙여준 여자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또한, 아직 확답은 듣지 못했지만 은연중에 머리를 끄덕인 인수가격, 1조2천억 원. 아진그룹의 썩어 문드러진 걸 다 도려내고 상처에 약 바르고, 때까지 싹 씻어낸 후 맛있게 먹는 비용이 고작 1조2천억이다. 이렇게 끝내주는 만찬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런데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에서 부채탕감 부분을 건드리기 시작하면 만찬용 요리를 다시 해야 할 판이다. 인수가격이야 1, 2천억 더 써내면 되지만 부채탕감을 재협상할 수는 없다. 대현 그룹 사람들은 미라클의 단합 제안이 고맙기까지 했다. “어렵게 이끌어낸 협상이었습니다. 부채탕감 조건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됩니다.” 간절함이 잔뜩 서려 있는 얼굴을 보자 주 회장도 마냥 성질만 부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놈, 돈 많아? 몇조 원을 써낼 만큼 돈은 있냐고?” “미라클이 우리 대현의 자금 여력을 모르듯이 우리 역시 파악하기 힘듭니다. 전부 미국 자본 아닙니까? 하지만….” “하지만 뭐?” “미주 법인에서 조사한 바로는 실탄은 충분할 거라는 예상입니다. 미국 헐리우드에서 소문난 큰손이랍니다. 지금까지 히트한 영화 중에 미라클 돈이 들어가지 않은 영화가 없을 만큼 말입니다.” 주 회장은 헐리우드 영화라면 치가 떨렸다.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쥐라기 공원〉이 개봉했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영화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영화 1편의 흥행수입이 자동차 1백50만 대를 수출하는 것과 맞먹는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다. 아무리 무식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수익만으로 전혀 다른 두 산업을 비교한다는 말인가? 덕분에 한국 자동차의 대표주자 격인 대현 그룹은 마치 한참 뒤떨어진 사업에 몰두하는 구시대의 상징 같은 딱지를 붙였다. “정말 중요한 점은 따로 있습니다. 미라클이 투자한 영화 중에서 단 한편도 실패한 영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투자 감각이 보통 아닙니다. 이런 놈이라면 돈질에서 밀릴 싸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저쪽에서 손을 내밀 때 마지못해 잡아주는 것도 출혈을 피하는 방법이라고 회장님께서 늘 말씀하셨잖습니까?” “먼저 내민 손이라…….” 주 회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소리 지르며 호통치지 않는 것으로 단합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뜻을 대신한 것이다. * * * 한성일보의 전면 광고를 훑어본 진 회장은 만족스러운 듯 신문을 내려놓았다. “마지막이 좋아. 뭔가 기대를 주거든.” “순양기획에서 만든 거 맞아요?” “그래.” “송현창 회장도 인터뷰 많이 하던데, 할아버지께서 자리 만든 거죠?” “그건 아니다. 송 회장이 직접 뛰는 거야. 오 대표가 채찍을 단단히 휘둘렀다고 하더니 송 회장 그자도 마음이 바쁜 거지.” 할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주영일이가 왔다 갔다고?” “네. 인수전에서 빠지면 보상하겠다고 하더군요.” “으허허. 그 영감탱이, 갈 길은 바쁜데 뒷다리 잡고 늘어질 놈이 나타나니 마음이 급했구먼. 그 어려운 발걸음까지 옮기다니. 그래, 뭐라고 했느냐?” “인수가격만으로 품격있게 경쟁하자고 했습니다. 정부가 주는 혜택은 다 챙기자고요. 괜히 제 살 깎아 먹기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뭐라고 하디?” “까불지 말라던데요?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고….” “크허허. 그 친구 약이 바짝 올랐나 보구먼.” 할아버지는 아주 재미있는 게임을 즐기는 모습으로 웃음만 계속 터트렸다. “힌트 좀 주세요. 주 회장이 어떻게 나올 것 같아요?” “너도 이미 짐작하잖아. 나라면 그 제안을 거절했을까 생각해 봤겠지?” “네.” “그래서? 답은?” “받아들이실 겁니다. 부채탕감 액수는 이미 상수니까요. 새로운 변수를 넣고 싶지 않으시겠죠.” “바로 맞췄다. 사업하는 놈에게 제일 두려운 일이 바로 변수다. 내가 아산만 공사할 때, 서해안의 그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공사 기일이 한없이 늘어졌어. 후딱 해치우고 끝내려 했던 공사가 질질 늘어지고, 매일 깨지는 돈은 전부 빚이라서 미쳐버리겠더구나.” 또 나왔다. 과거의 추억. 그냥 핵심과 요점만 딱 말해주면 얼마나 편한가? 하지만 이 양반도 늙어버린 사람이다. 현재의 시간 절반 이상을 추억으로 살아간다. 이럴 때는 가만히 입 닫고 들어주는 게 효도다. “변덕스러운 날씨, 그게 생각지 못한 변수였지. 돈으로 날씨를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다. 마찬가지다. 주 회장은 지금 돈으로 변수를 사고 싶을 거야. 그런데 돈 안 들이고 변수의 절반을 제거할 수 있는데 왜 거절해?” 됐다. 두 회장은 같은 사람이다. 이제 주 회장이 단합을 받아들인다는 연락을 줄 때까지 기다리면 될 일이다. “그런데 도준아.” “네.” “이제 우리가… 아니, 네가 가진 패는 다 썼다. 주 회장은 아직 패를 쓴 적도 없어.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할 게다.” “언론을 통해서겠죠?”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론은 물론이고 채권단과 인수 심사단을 설득할 거다. 대현 그룹이 그동안 보살펴준 정부, 국회, 청와대 놈들도 압력을 행사할 테고.” 할아버지 말투가 어째 좀 수상하다. “도움은 더 이상 없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주고 싶어도 못 준다.” “네? 그게 무슨…?” “송현창 회장 구속되는 거 막았다. 그것만으로도 날 아진자동차에 눈독 들인 게 아닌가 의심하는 눈치였는데…. 송 회장 구속이 인수에 더 유리하니까 그놈들 잠잠해졌어. 그냥 동정심이라고 생각한 게야.”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나랏일 하는 공무원들, 난처하게 만들면 되겠냐? 그간 수족처럼 일해준 놈들이다. 내가 오른손 잡고 당기고, 주 회장이 왼손 잡고 당기면? 그 친구들 찢어진다.” 표정은 조금도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님은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짐작을 못 하겠다. “돈 들여 키워 놓은 친구들을 찢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아진자동차와 대현자동차가 한몸이 되는 걸 가장 피하고 싶은 분이다. 필요한 때가 오면 말려도 나설 분이니 굳이 매달릴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오세현 대표와 잘 해보겠습니다.” 할아버지는 도와 달라고 떼쓰지 않는 게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미소를 되찾았다. “너, 오세현이와 친하다지?” “네.” “어떠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지금까지는요. 아버지도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고 하셨어요. 돈 만지는 직업이지만 돈 때문에 배신할 사람은 아니라고요.” “그래?” 얼굴에 번지는 음흉한 웃음. 이 노친네는 또 무슨 생각일까? “도준아. 네가 가까이 둬야 할 사람은 두 부류다. 하나는 오세현처럼 믿고 일을 맡길만한 사람.” “그리고요?” “너를 위해 희생을 감수할만한 사람.” 희생이라……. 나를 위해 희생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그런 사람들은 네가 빛이 나면 스스로 모여든다. 일부러 구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 골똘히 생각하는 내 모습을 보며 할아버지는 웃음을 거두고 일어섰다. “가자. 손님들 올 시간이다. 참, 옷 갈아입어. 위층에 준비해 뒀다.” “설마 턱시도는 아니겠죠? 흐흐.” * * * 약혼식은 할아버지 저택의 영빈관에서 열렸다. 사촌들 대부분은 외국 유학 중이라 몇 명 되지도 않았고 반면에 상대측 집안사람들은 꽤 많이 모였다. 떠들썩한 약혼식은 피하라는 할아버지의 요청 때문인지 한성일보 기자는 보이지 않았고 기념 촬영할 사진사 두엇만 플래시를 터트리며 바삐 움직였다. 진영준은 마누라 될 여자와 꽤 다정해 보였다. 내가 알기로 두 번째 만날 때가 양가 상견례였고 그 뒤로 두어 번 만나게 전부라던데, 참 이해하기 어려운 별종들이다. 돈이 많으니 정도 쉽게 드나? 팔짱을 낀 두 사람은 약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드렸고 한성일보 집안사람들은 유력한 후계자인 진영준에게 눈도장을 찍으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최대 광고주와 그 광고로 먹고사는 언론사. 두 집안의 서열은 나이나 촌수가 아니라 완벽한 갑과 을의 서열이었다. “어머! 역시 듣던 대로 잘생기셨어! 영준 씨 집안 최고의 꽃미남이라더니….” “형님. 약혼 축하합니다.” 내 곁으로 다가온 두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도준아. 넌 처음이지? 인사드려라.” “축하해요. 형수님. 진도준입니다.” “고마워요, 도준 도련님.” 인사 외에는 딱히 할 말도 없다. 일 초라도 빨리 다른 사람에게 인사하러 떠나기를 빌었는데, 젠장. 저 멀리서 진영기 부회장이 손을 들어 진영준을 부른다. “소영 씨. 잠깐만요. 도준이 넌 형수님과 이야기 좀 하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어색해서 돌아버릴 것 같은 상황이었는데, 어라? 이 여자, 사납게 생긴 거와는 다르게 싹싹하다. “도준 도련님은 모든 여자의 이상형 같아요.” “제가요?” “그럼요. 키 크고 잘생겼지, 0.1% 안에 들어가는 뛰어난 머리. 게다가 모두가 선망하는 재벌가의 막내잖아요.” “막내라는 게 선망의 조건이 됩니까?” “당연하죠. 그룹을 물려받을 일도 없고, 경영에 참여할 필요도 없고, 물려주는 돈을 펑펑 쓰며 인생을 즐기면 되잖아요.”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럴듯한데요?” “도준 도련님은 영화 일 하시는 작은아버님처럼 그룹 경영 신경 안 쓰고 하고 싶은 거 맘껏 할 수도 있으니까 얼마나 좋아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뭔가 께름칙하다. 이 여자,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지만 진심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문제는 돈이겠네요. 제 차례까지 돌아올 돈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하.” “에이, 집안 어른들께서 한결같이 말씀하시던데요? 진 회장님께서 가장 이뻐하는 손자라고. 넉넉히 주시겠죠.” “그럴 리가요? 할아버지는 손자가 성인이 되면 주식도 좀 주고 돈도 좀 나눠주시는데 제게는 스포츠카만 주셨어요. 면허증도 없는데.” “더 큰 걸 주시려고 그러시겠죠. 그리고 모범생 스타일이라 돈도 거의 안 쓰신다고 들었는데….” “에고, 누가 그래요? 없어서 못 쓰는 겁니다. 있으면 펑펑 쓰죠.” 내 돈 씀씀이를 알면 이렇게 서 있지도 못할 거다. 이 여자야. 입 모양은 웃지만, 눈은 웃지 않는다. 이 여자는 지금 탐색 중이다. 어느 정도 이해할만하다. 누가 뭐라 해도 순양그룹의 맏며느리가 될 사람 아닌가? 하루빨리 곳간 열쇠를 틀어쥐고 안주인 행세를 하고 싶을 것이다. 곳간에 쌓인 쌀 한 톨 나눠주기 싫은 마음은 충분히 알겠는데 너무 어리다. 스물여섯이던가? 욕심을 감추고 발톱을 숨기는 인내를 배워야 했는데 거대 언론사의 공주였으니 그럴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요? 그럼 앞으로 도련님 용돈은 제가 책임질게요. 그리고 영준 씨한테도 말해놓으면 주머니가 넉넉해질 거에요. 호호.” “정말요? 그럼 완전 땡큐죠. 앞으로 형수님께 잘 보여야겠네. 하하.” 억지웃음을 보이려니 불편해서 견디기 힘들었다. “형수님. 저 잠깐만요. 화장실 좀.” 머리를 약간 숙이자 형수 될 여자도 웃으며 눈인사를 한다. 자리를 벗어나니 불편했던 속이 편해졌다. 홍소영은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진도준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꼬맹이가 보통 아니네. 여의도 증권가를 매일 들락거리는 놈이 돈이 없다고?” ======================================== [060] 싸움이냐, 스포츠냐? 3 “이야기 좀 해봤습니까? 감상이 어때요?” 뾰로통한 홍소영의 곁으로 진영준이 다가왔다. “예의는 바르네요.” “그게 전부?” “부잣집 도련님 티가 안 나요. 원래 그랬어요?” “그렇죠. 저놈 어릴 때는 내어 논 집안이었으니까요. 늘 기죽어 지냈으니…….” “그렇군요. 아무튼, 속을 드러내지 않는 애 같은데….” “괜찮아요. 도준이는 내가 오른팔로 쓸 생각이니까 경계할 필요 없을 겁니다.” 진영준은 팔을 쓱 내밀었다. “갑시다. 아직 인사드릴 분이 많이 남았어요.” 내민 팔에 팔짱을 낀 홍소영은 진도준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지만, 약혼자의 말처럼 오른팔이 되어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다. “참, 내가 넉넉한 용돈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괜찮죠?” “큰형수가 사촌 막내에게 용돈 주는 거야 자연스럽죠.” 진영준은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홍소영은 생각은 좀 달랐다. 돈을 쓰는 것만큼 그 사람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건 없다고 믿었다. * * * 화장실을 들렀을 때 기다렸다는 듯 곁에 붙는 사람이 있었다. “도련님.” “김 대리님. 오늘은 그냥 쉬시라고 했잖습니까? 집안 행산데 나오실 필요 없었어요.” 웃으며 말했지만, 김윤석 대리는 조금 굳어 있었다. “혹시 시간 되십니까?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의 표정을 보고 딴소리는 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는 조심스러움과 경계심이 보였기 때문이다. “제 차 아시죠? 차고에 있습니다. 거기 계세요. 저도 바로 가겠습니다.” 김윤석 대리가 조용히 사라지고 영빈관을 한번 둘러본 뒤 차고로 이동했다. 빽빽이 들어선 차 사이에서 내 차에 오르니 운전석에 앉은 김 대리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입니까?”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신 팀장이 설명하실 겁니다.” “신 팀장?” “네. 우리 전략팀장이신데…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기억 안 나시는지…?” “아…….” 이때 뒷좌석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슬쩍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신석호 팀장입니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기억나지 않았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런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었던가요?” “기억 못 하시는군요. 양평 별장에서 한번 뵀습니다. 새벽에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렸지요.” “아…! 그분이시구나.” 진영준에게 발길질 당했던 그자다. 그때 미끼를 던졌는데 별다른 반응이 없어 기억에서 지워버린 사람이다. “시간이 없으니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전 소위 말하는 3세들 전담팀입니다.” 팀장이니 전체를 아우르지는 못한다. 아마도 3세들 중에서도 한국에 있는 놈들만 관리할 것이다. 외국 유학 중인 사촌들은 해당 국가의 지사에서 관리한다. “한 달 전쯤부터 누군가 미행을 시작했습니다.” “전부요?” “네. 그놈들은 행적을 전부 파악하는 건 아니고 동선만 파악합니다.” “혹시 그 속에 영준 형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네.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미행하더군요.” 큰아버지가 아들까지 체크하는 건가? 그건 좀 과하다. 큰아버지가 아니라면 누굴까? “혹시 누구 짓인지 파악하셨습니까?” “아뇨. 우리 팀 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역추적할 만큼 전문가들도 아니고요.” 하긴, 수행비서 역할이 전부인 팀원들이니 누구를 추적한다는 것은 무리다. 나는 신 팀장을 잠시 바라보다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런데 왜 제게 이런 걸 알려주시는 겁니까? 절차대로라면….” “절차는 압니다. 전략실 실장님께 보고드리고, 이학재 비서실장님께 보고가 올라가겠죠. 그리고 정보팀이나 순양시큐리티의 요원들이 움직이고요.” “잘 아시네요. 그런데 왜?” 신석호 팀장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으나 이내 입을 열었다. “부끄럽지만 줄을 잡고 싶어서입니다.” “줄?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 줄 말입니까?” “네. 우리 전략팀은… 미래도 없고 기댈 곳도 없습니다. 일 년 버티는 애들이 드물 정도니까요.” “팀장님처럼 몇 년을 버텨도 빛이 보이지 않고….” 신석호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번졌다. “그런데 왜 저죠? 전 회사에 말 한마디 못하는 막내입니다. 그룹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요. 그런 내가 줄이 되겠습니까?” “제게 손을 내미셨지 않습니까?” 그날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나 보다. 그런데 미끼를 무는데 걸린 시간이 너무 길다. 판단이 느려서일까? 아니면 신중한 것일까? 이 사람의 속을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잡아요? 솔직히, 저 말고 손을 내민 사람이 없죠? 제가 유일한 줄이라 그런 겁니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졌지만 조금도 지체 없이 입을 연다. “유일한 손이지만 믿음직스럽기 때문에 잡습니다. 신뢰가 가지 않는 손이었다면 콧방귀를 끼며 무시했을 겁니다. 진 회장님 손자 중에 도련님만큼 자기관리 철저하고, 성실하며, 헛짓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략팀 전원 신 팀장님을 따릅니까?”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 팀은 물갈이가 잦습니다. 허드렛일이다 보니 그만두는 사람이 많아서요. 그래서 오랫동안 함께할 사람만 선택했습니다. 김윤석 대리도 그중 하나고요.” 두 사람의 눈빛을 받아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할 수 있는데 뿌리칠 이유는 없다. 단지 이들이 지금까지 와는 다르게 꼭 필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게 중요했다. “신 팀장님 그리고 김 대리님. 내 말 잘 들어요.” 내가 입을 열자 두 사람은 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빛냈다. “내가 먼저 내민 손을 두 사람이 잡은 게 아닙니다. 전략팀이 내게 지붕이 되어 달라고 간청한 것이고 내가 승낙한 겁니다. 아시겠어요?” 같은 결과를 낳는 말이지만 선후가 다르다. 이 차이를 빨리 캐치한 신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입니다.” “쉽게 대답하지 마세요. 내가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잡은 게 아닙니다. 이 차이는 아주 커요.” “잘 압니다. 도련님은 언제든 우리를 커버하는 지붕을 걷어버릴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눈칫밥을 오랫동안 먹어서일까? 아니면 머리 회전이 빠른 것일까? “도련님의 기대치만큼, 정한 선만큼 따라가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줄은 끊으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너무나 간절한 눈이었기에 이들의 기대를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다. 좀 더 현실적인 마음가짐이 일하는데 더 효과적이다. “오해하지 마세요. 충성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건 거래일 뿐입니다. 전략팀은 내게 필요한 것을 대신하고 난 그 대가를 지불합니다. 밝은 미래가 그 대가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어요.” “그 이유가 아직 순양그룹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입니까?” “아뇨. 전 아직 두 분께 큰 기대도 없고 신뢰도 없어요. 그러니까 거래일 뿐입니다. 내게서 더 이상의 무엇을 원한다면 나를 바꿀만한 뭔가를 보여주세요. 그러면 됩니다.” 나는 지금껏 누군가의 충성을 받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멍청하고 덜떨어진 놈의 충성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는 건 잘 안다. 두 사람은 내게서 원하는 대답은 못 들었지만, 기회를 잡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듯 표정이 좀 밝아졌다. 이들이 어느 정도인지 당장 테스트할 기회도 있다. “김 대리.” 이제 ‘님’이라는 존대는 생략했다. 이들은 이제 내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첫 직원이다. “네.” “내일부터 난 택시 타고 다닐 테니까 내 뒤를 따라다니는 놈들 뒤에 붙으세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요. 오래 걸려도 좋습니다.” “네.” “그리고 신 팀장.” “네.” “앞으로 전략팀 보고자료 내게 먼저 보내세요. 내가 빨간 줄 치는 건 윗선으로 보고하면 안 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끝내기 전 나는 작은 보상을 하나 안겨주었다. “돈 걱정 말고 활동비 아끼지 말고 쓰세요. 개인적으로 돈이 필요할 때도 주저 없이 말씀하시고요. 돈 때문에 고민하는 일은 없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역시 사람의 모든 근심·걱정은 돈에서 출발한다. 두 사람의 표정이 더할 수 없이 밝다. 가끔은 사촌 약혼식이 도움된다. 오늘 꽤 많은 것을 건졌다. 경계해야 할 여자를 발견했고 아쉬운 대로 나를 대신할 눈과 손도 생겼다. * * * 아진자동차 매각이 결정되는 순간에도 대기업은 무너지고 있었다. 소주의 대명사 진로 그룹이 화의신청을 했고, 식빵의 얼굴 삼립식품도 부도났다. 국내 4대 대형 백화점 중 하나인 미도파백화점의 모기업인 대농도 쓰러졌고, 김응룡 감독과 선동열의 해태도 부도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위험신호가 선명하게 번쩍이는 데도 대선 주자들은 청와대에 들어가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었고 대현 그룹은 덩치를 키우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들은 반격을 시작했다. 대현은 참고 기다리다 우리가 아진그룹의 인수 의향서를 제출하자마자 모든 언론을 통해 국부 유출과 외국 투기자본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웠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공세였기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결정타를 날릴 기회는 단 한 번이다. 꾹 참았다가 단 한 번으로 역전시켜야 한다. 매각 심사가 시작되기 전 여론을 한방에 움직이고 심사단의 마음을 바꿀 회심의 카드는 아직 우리 손에 있다. 하지만 계획은 계획일 뿐이다. 모든 일이 생각대로 풀린다면 인생이 얼마나 편할까? 『아진그룹 인수 의향서를 제출한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에 대한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자금 출처가 바로 일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아진자동차가 일본 자동차 업계의 한국 진출 교두보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첫 꼭지로 나온 TV 뉴스가 나오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네. 저도 봤습니다.” - 반박 기자회견이라도 해야겠다. 이건 치명타야. 반일 감정 건드리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오세현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드러났다. 국익이니, 국부 유출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게 반일 아닌가? “저 뉴스 근거는 있답니까? 대 놓고 소설 쓰는 건 아닐 텐데요?” - 소프트 뱅크야. 소프트 뱅크는 상장기업이고 일본에서도 주목받는 회사니까 우리가 투자했었다는 사실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을 거다. “정정 보도 요구하는 건 의미 없겠죠?” - 내년이나 돼야 결과 나올걸? “후속 보도가 어떻게 될지 하루만 지켜보죠. 반박 기자회견은 그다음 결정하고요.” - 혹시 진 회장님 힘을…. “어렵습니다. 지금 판을 주도하는 건 대현이니까요.” 이 정도 일에 손을 벌릴 수는 없다. 도움의 손을 내밀 때는 순양 그룹 정도가 판돈으로 깔렸을 때다. 전화 너머 오세현의 실망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삼촌, 후속 보도가 계속 쏟아지면 송 회장과 함께 나서죠. 아진그룹 노조 간부들도 배경으로 깔고요.” - 야, 그건 마지막 히든인데... “히든까지 기다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깝시다.” 통화를 끝내자 소름이 끼쳤다. 한국 재벌, 진짜 무섭다. 명색이 공영방송의 뉴스가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재벌 그룹이 써주는 대로 공중파로 쏘아 올릴 줄이야. 더 무서운 건 이런 일이 이틀 동안 쉬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미라클 인베스트먼트는 기자회견을 준비했지만, 대현에게 반격의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것 같아 찝찝함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런 식의 개싸움에 능숙한 대현 아닌가? * * * “일본 자금 유입설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 미라클 인베스트먼트는 일본에 투자한 사실이 있습니다만, 단기 투자였고 수익을 올린 뒤 철수했습니다. 오히려 일본 엔화를 벌어들인 겁니다.” “하지만 그 벌어들인 엔화는 여전히 미국 자본으로 남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엔화를 지금 아진자동차를 살리는데 쏟아붓는 겁니다.” 부모 죽인 원수도 아닌데 언론 기자들은 오세현을 거칠게 물어뜯었다. ======================================== [061] 싸움이냐, 스포츠냐? 4 “수익이 목적인 투자사가 자동차 회사를 인수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투자금 회수는 물론, 이익을 얻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텐데요?” “투자가 꼭 단기만 있는 건 아닙니다.” “부실경영으로 부도난 회사, 어쩌면 투자금을 한 푼도 회수하지 못할 위험도 큽니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가 혹시 일본 자동차 업계의 대리인으로 나선 것 때문입니까?” “도대체 일본 자동차 업계라는 말을 누가 먼저 시작했습니까? 기자님은 그 정보를 어디서 얻었습니까?” 참다못한 오세현이 발끈하자 곁에 앉은 송현창 회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일본 자동차 업계의 움직임은 제가 잘 압니다. 아진자동차는 일본 회사와 기술 협력했으니까요. 단언컨대 일본은 없습니다.” 회견장의 모든 카메라가 송현창 회장을 향했다. “그럼 송 회장님께 질문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나오신 걸 보면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아진그룹 인수를 지지한다고 봐도 무방합니까?” “그렇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아진그룹 전체 임직원이 지지합니다.” 송 회장의 뒤에 서 있는 노조 간부 십여 명이 허리를 숙였다. “아진그룹 전체 노조는 미라클이 인수할 경우 흑자를 달성할 때까지 임금 동결 및 무분규를 이 자리에서 약속합니다. 전 노조원의 결의입니다.” 노조위원장도 마이크를 잡고 거들었다.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오세현 대표는 두 가지를 약속했습니다. 소유와 경영의 확실한 분리 그리고 단 한 명의 해고자 없이 아진자동차의 정상화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약속입니다. 필요하다면 과감한 투자도 아끼지 않겠다는 확답도 있었습니다.” “고용승계는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아진그룹 부도의 당사자들이 계속 경영한다는 말 아닙니까? 적어도 경영진인 임원급 이상은 책임지고 모두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닐까요?” 회견장 맨 뒤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기자가 아니라 대현 그룹 직원들이 질문하는 분위기 아닌가? 그들의 눈에 미라클은 갑자기 나타나서 고춧가루 뿌리는 훼방꾼일 뿐이다. “아진자동차의 부도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 요인이 훨씬 큽니다. 아진 특수강은 장기간 투자해야 할 필수 분야였고, 아시다시피…. 아진자동차는 흑자였습니다.” 침착한 오세현도 기자들의 편향적인 질문에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공격적인 자세로 변했다. “이 자리에 계신 경제부 기자님들께 도리어 묻고 싶습니다. 왜 갑자기 모든 금융권이 대출을 중지하고 채권회수를 시작했을까요? 아진자동차 보다 훨씬 더 경영성적이 나쁜 기업도 많습니다. 왜 아진만 자금 압박을 시작한 걸까요?” “오 대표님은 아진의 부도를 누군가 기획했다는 뜻입니까? 그럼 배후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걸 밝혀내는 게 언론인의 사명 아닙니까? 왜 아진그룹 사태가 일어났는지 취재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절대 싸우지 말아야 할 상대가 대한민국 기자인데 그들을 도발하다니! 악의적인 기자를 상대한 적이 없으니 자꾸 발목이 잡힌다. 다행히 송현창 회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런 일은 충분히 경험한 노련한 사람이니 다소 마음이 놓였다. “아직 심사 전입니다. 오늘 회견은 일본 자본 개입이 없다는 걸 알리는 자리입니다.” 차분한 송 회장의 목소리가 회견장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두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업은 이익만 추구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바로 국민의 생활을 지탱하는 일터입니다. 대현 그룹은 아진에 몸담은 국민의 절반 이상을 거리로 쫓아낼 겁니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꼭 필요한 메시지를 통해 국민 여론을 건드려야 했다. 그 메시지가 송 회장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의 관록과 경륜 때문인지 기자들도 함부로 말을 끊지 못했다. “또한, 대현이 아진자동차을 인수하면 국내 자동차 시장 70%에 육박하는 장악력을 가집니다. 독과점 기업이 이윤만 추구하면 국민의 선택은 사라집니다. 대현이 수익을 위해 등급별 단 한 대만 생산한다면? 외국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무차별 할인을 진행하고 그 손해를 국내시장에서 보전하려 한다면?” 국민을 거론했고 소비자의 권리를 거론했다. 이 메시지가 여론만 공평하게 만들면 된다. 다행히 대선 정국이라 정부도 여론에 민감하다. 공평한 여론만 조성되면 가격 요소만으로 경쟁한다. 돈 싸움에서 밀리지 않을 자신은 있다. “일본 자본이라는 유언비어로 본질을 흐리면 안 됩니다. 아진그룹에는 이미 많은 공적 자금이 투입됐습니다. 공적 자금으로 재벌 대기업의 덩치만 키우는 것과 경영과 소유가 분리된 국민 기업으로 재탄생하는 것. 이것이 고려되어야 할 본질입니다.” 송 회장의 마무리 발언으로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했다. 그러나……. 역시 타이밍이 문제다. 인수 심사 하루 전에 이 회견을 했어야 했다. 대현 그룹이 반격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게 핵심이었는데…. 급해서 히든카드를 먼저 까버리니 대현은 여유 있게 조목조목 따져가며 되받아쳤다. 이틀 뒤, 대현자동차 사장이 직접 출현한 기자회견은 우리의 히든카드를 눌러버리는 확실한 패였다. 『세계자동차 시장은 글로벌 탑 텐만 살아남는, 규모의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대현자동차의 매출 구조는 이미 수출이 내수를 넘어선 지 오래됐습니다.』 『아진자동차와 대현자동차가 한몸이 된다면 공동 디자인, 부품 조달의 일원화, 판매망 통합 등으로 획기적인 경쟁력을 갖습니다. 소비자들은 당연히 더 싼 가격으로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습니다.』 『물론 최소한의 구조조정은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회사 없는 근로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조금만 더 멀리 보시길 기대합니다. 대현자동차가 국제 경쟁력을 갖추고 글로벌 탑 텐 안에 들 때까지 엄청난 고용창출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TV를 껐다. 한숨만 나왔다. 오세현도 마찬가지였다. 기운이 다 빠진 표정으로 연신 한숨만 쉰다. “증권가는 어때요?” “대현자동차 주가는 변동 없어.” “효과가 미미한 겁니까?” “아니. 두 세력이 부딪히니까 그런 거야. 아진자동차 인수가 악재라고 생각하는 놈들, 반대로 호재라고 생각하는 놈들. 거의 반반이야.” 젠장. 결국, 두 세력 모두 아진그룹은 대현으로 넘어간다는 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결과 아닌가? “세상에. 일본을 끌어들이다니! 반일 감정은 국대 축구에서만 구경했는데 우리가 당할 줄이야.” “삼촌. 카드 없습니까? 하나만 꺼내보세요. 불씨는 제가 살리겠습니다.” “없다. 이제 심사까지 일주일도 안 남았어. 카드가 있다손 치더라도 불씨 살릴 시간도 없어.” 포기하지 말자는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몇 년 전 할아버지가 아진자동차를 인수하려고 할 때 방해하지 말걸 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정말 재벌 무섭다. 아무리 광고주라고 하지만 어떻게 신문 방송을 제 마음대로 움직이냐?” “재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언론이 돈맛을 알았기 때문이죠. 술 먹은 펜대와 돈 삼킨 카메라 아닙니까?” 오세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어린놈이 뭔 말을 그렇게 하냐? 사회 원로 같아 보여.” “제 말이 아니라 할아버지 말이에요. 입에 달고 사시죠. 불리한 일이 생기면 언론부터 틀어막으니까요.” “대현도 그렇게 했겠지?” “안 봐도 비디오죠. 어마어마하게 쏟아부었을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일본까지 끌어들인걸 보면요.” 오세현은 지금 포기하기에는 많이 아쉬운지 이를 갈며 말했다. “니미, 부채 탕감 내역을 확 까발려 버릴까? 7조 원을 공적 자금으로 메꾼다는 걸 알면 대현자동차 불매운동까지 벌어질 거 같지 않냐?” 웃음이 터질 뻔 했다. 오죽 분했으면 저런 말까지 할까? “삼촌.” “왜?” “삼촌이 그거 터트리면 미국으로 망명해야 할걸요? 국민 세금으로 틀어막는 건 정부가 결정했어요. 삼촌이 정부에 총질해 대면 한국에서 발붙이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태어나기 전의 일까지 탈탈 털릴 겁니다.” 오늘 하루는 모든 걸 다 털고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았다. 대현의 반격에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맑은 정신을 되찾는 게 급선무다. “삼촌. 오늘은 다 잊고 술이나 퍼마시죠.” “뭐? 술?” 오세현은 귀를 의심하듯 나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요? 저도 이제 성인인데 술 마시면 안 됩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술은 마실 줄 아냐? 마셔본 적은 있어?” 몸이 망가지도록 마신 적이 어디 한두 번일까? 매일 터지는 사고 수습하느라 마신 술값 모았으면 아파트 몇 채다. 물론 법인카드였지만. “아버지가 말술인데 그 핏줄이 어디 가겠어요? 잘됐네요. 오늘 내 주량 테스트도 해 봐야겠어요.” 이건 진심이다. “그리고 술은 어른에게 배우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삼촌이 제대로 한번 가르쳐 주세요.” 오세현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다. 오늘 우리 대주주님, 술버릇 한번 구경하자. 참, 대주주와 대표이사의 회식이니까 경비 처리한다. 됐지?”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이걸로 마시죠. 한도가 무제한이라고 하니 삼촌이 아시는 가장 비싼 곳으로 가요. 여자 나오는 곳으로요. 흐흐.” 오세현은 여자라는 말보다 카드가 더 궁금했나 보다. 내 손에서 카드를 채 가더니 유심히 살폈다. “이거 뭐야? 한성일보 법인카드 아냐? 이걸 왜 네가 쥐고 있어?” “미래의 형수가 한성일보 딸인데 용돈으로 쓰라고 주더군요. 재벌 3세의 체면이 걸린 일입니다. 마음먹고 써제끼면 이 정도다……. 한성일보 딸의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긁을 겁니다.” 오세현은 상의를 걸쳤다. “가자. 한성일보 잉크값, 거덜 나게 만들어보자.” * * * 역삼동 사대천왕이라는 텐프로 중 한 곳에 들어갔다. “어머, 오 사장님. 이게 얼마 만이에요? 발길 뜸하시길래 어디 딴 살림 차린 줄 알았어요.” 호들갑을 떨며 반기는 마담이 나를 슬쩍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누구? 설마 연예인 키우세요? 매니지먼트 사업까지?” “쓸데없는 소리. 내 조카야. 오늘 주도를 가르치려고 데려왔어. 애들 출근했지? T/C 제대로 줄 테니까 엄선해서 넷만 넣어.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일어설 거야. 갈 데 많아!” 마담 언니의 수다를 잠재우고 곧바로 룸으로 직행했다. 아가씨 넷을 데리고 룸으로 들어온 마담은 오세현의 옆에 찰싹 들러붙어 또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에이스 넷. 방송국에서도 이만한 애들 못 찾아요.” 틀린 말이 아니다. 꽉 끼는 짧은 원피스에 드러난 몸매와 얼굴은 흠잡을 곳 없었다. 방송 카메라에 맞지 않을 비율일 뿐, 이 정모 미모는 텐프로에서도 드물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전문직종 아닌가? 나처럼 젊은 애가 이런 곳에 들락거린다는 의미는 단 하나다. 강남 졸부 아들. “어때? 마음에 들어?” 오세현은 아주 흡족한 듯 활짝 웃고 있었다. “앉히죠.”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사인이 보내자 아가씨들은 재빨리 자리 잡았고 마담은 또 너스레를 떨었다. “오 사장님. 에이스 넷 차지하려면 평범한 술은….” “하트브라더스 32년산 두 병 넣어. 됐지?” 면세점 가격이 60만 원이다. 업소용 가격은 얼마일까? 룸 안의 다섯 여자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 난 이런 궁상맞은 생각 중이었다. 내 양쪽에 앉은 두 여자가 팔짱을 꽉 낀 채 온갖 찬사와 아양을 늘어놓을 때 술이 들어왔다. “폭탄주부터 한번 돌릴까? 센 거 한 방 맞아야 잔 펀치가 덜 아프지. 얘들아! 돌려!” 아가씨들은 비싼 위스키를 맥주와 뒤섞었다. 두 병으로 끝나지 않을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넘치도록 부으며 술을 아끼지 않았다. “자, 모두 잔 들어. 첫 잔은 다 비워야 예의다.” 처음부터 달리다니! 오세현에게 술을 배우면 안 될 것 같다. 맥주의 짜릿함과 위스키의 향기기 목을 달구고 뱃속을 후끈하게 만든다. “어쭈! 좀 마시는데? 좋아. 한 번 더!” 내 옆의 아가씨가 폭탄주를 제조할 때 한마디 던졌다. “양주 조금만 넣어요. 그 독한 걸 반반 섞으면 어떡해?” “우리 잘생긴 젊은 오빠 뭘 모르는구나. 퀄리티 좋은 양주는 반 이상 넣어도 괜찮아요. 더 잘 넘어간다니깐.” 기가 차서 원. 매상 올리려고 별의별 이유를 갖다 붙인다. “우리 귀여운 오빠. 짠!” 두 아가씨가 술잔을 내밀었을 때 별안간 한 단어가 내 머리를 때렸다. 반반! ======================================== [062] 악당이 사는 세상 1. “모두 스톱! 조용!” 내게 술잔을 내밀었던 두 여자는 물론이고 삼촌 곁에서 시시덕 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왜 그래요? 설마 비싼 양주 많이 섞는다고…?” 내 모습에 뭔가 알아챈 오세현도 외쳤다. “모두 입 닫아!” 열 개의 눈이 내게 쏠렸지만, 나의 두 눈은 테이블 위의 폭탄주에 꽂혔다. 그렇게 한참을 물방울이 맺힌 잔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파편처럼 흩어진 아이디어를 하나로 모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아이디어지만 전체 그림은 꽤 좋다. 뚫린 구멍은 일개미들이 성실히 메꿔줄 것이다. 아쉬운 것은 시간,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그 안에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젠장, 항상 시간이 문제다. 뭘 좀 제대로 할라치면 시간이 촉박하다. 아슬아슬해야만 머리가 돌아가는 걸까? 진 회장은 어떨까? 대현 그룹 주 회장은 또 어떨까? 정점에 올라선 두 사람도 궁지에 몰렸을 때만 돌파구를 찾을까? 아니면 궁지에 몰릴 여지를 처음부터 만들지 않을까? “도준아. 생각 끝났으면 말해볼래? 뭐냐? 설마 까지 않은 히든카드가 한 장 더 있어?” 참다못한 오세현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히든이 있긴 한데 제 패가 아닙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한성일보 법인카드를 꺼냈다. “삼촌. 제가 반전 패 한 장을 더 얻을 때까지 여기서 쉬세요.” 그리고 아가씨들을 향해 말했다. “양주 맥주 반반씩 타는 폭탄주가 술맛 나겠냐? 그냥 알코올이지? 매상 올리고 싶으면 그냥 버려. 하트브라더스 32년산 한 박스 갖다놓고 마셔도 돼. 이 카드, 한도가 무제한이야.” “거봐. 물주는 저 사장님이 아니고 이 오빠 맞잖아!” 내 곁에 앉아 있던 한 아가씨가 보란 듯이 말했다. “삼촌. 저 지금 다녀올 데가 있습니다. 밖에 대기하는 기사에게 전화 넣으세요. 제가 삼촌 차 좀 쓰겠습니다.” “그, 그래.” “내일 연락 드릴게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삼촌에게 눈 한 번 찡긋하고 룸을 빠져나왔다. * * * “밤늦게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아니다. 아직 잠들지 않았어. 그런데 너, 술 마셨냐?” “네. 많이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파자마 차림의 할아버지는 다소 굳은 표정으로 내 어깨를 한번 툭 쳤다. “들어가자. 가서 이야기하자꾸나.” 서재로 발길을 옮기던 할아버지는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영주댁. 꿀물 한잔 진하게 타서 가져와.” 서재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자마자 할아버지의 거친 목소리가 울렸다. “어떠냐? 싸움에 진 기분이?” “완전히 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네가 놓은 한수한수 전부 다 죽었어. 되살리는 건 불가능해.” 전화 몇 통만 돌리면 채권단과 인수심사위원장의 결정을 받아볼 수 있는 분이다. 승패는 결정 났다.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다. 이런 말도….” “그럼 개소리는 어디서 주워들어 가지고? 쯧쯧.” 한심한 듯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린다. “다 끝난 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멍청한 짓을 그만둬라. 차라리 패인을 분석하고 다음을 준비하는 게 더 현명하다. 사내는 물러나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는 말도 있어.” “아진자동차가 대현으로 넘어가면 순양자동차도 타격이 클 텐데요? 괜찮으세요?” “그건 내가 걱정할 문제다. 그리고… 여차하면 철수하면 돼.” 철수? 설마 최악의 상황까지 이미 염두에 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업계 1위가 아니면 견디지 못하는 분이 2위로 목표로 삼을 만큼 애착을 가진 사업 분야가 아닌가? 다소 굳은 할아버지의 표정에서는 속마음을 읽기 힘들었다. “그보다 싸움에서 졌을 때는 뭔가 배운 게 있어야 한다. 네놈 실책이 뭔지 생각해봤어?” “대기업의 영향력이 크다는 건 알았지만, 체득한 건 아니었습니다. 막연한 추측이었을 뿐입니다.” “상대의 주먹이 세다는 건 맞아봐야 알지. 또?” “조급한 마음에 적절한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그리고 또?” “대현의 꼼꼼함과 세밀함을 몰랐습니다. 설마 일본 투자건까지 찾아낼 줄 몰랐습니다.” “그게 전부냐?” “무슨 짓이든 못하는 게 없는 무자비함을 몰랐습니다. 일본 투자 내역을 일본 자본으로 둔갑시키는 거짓말도 서슴지 않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그제야 할아버지의 굳은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네가 말한 그 전부를 넌 할 수 있을까?” “결국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더 꼼꼼해야 하고, 무자비해야 하며, 뻔뻔한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어야 대기업을 일군다면… 그렇게 해야죠.” “지금 그 마음, 그 결심… 절대 잊으면 안 된다.” “네.” 듣고 싶은 대답을 들은 것인지 할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자, 그럼 이 시간에 왜 찾아왔는지 말해보렴. 술주정이나 할 놈은 아니라고 믿는다.” “말씀드린 대로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그래? 네가 뭘 또 가졌길래? 내 말 허투루 들은 게냐? 이미 다 알아보고 말한 게다.” 아까처럼 굳은 게 아니라 호기심이 묻어난 표정이다. “저의 마지막 패는 할아버지가 쥐고 계십니다. 전 그 패를 가지고 싶습니다.” “내가? 내가 뭘 가져?” 할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단어 하나에도 힘주어 말했다. “언제 철수할지도 모르는 순양자동차입니다.” “뭐라?” 대단한 양반이다. 조금은 놀랄 법도 한데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다시 확인하는 정도의 반응이라니. 오히려 내가 당황하게 생겼지만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나는 영주댁이 가져다준 꿀물 사발을 가리켰다. “숙취를 달래는 건 꿀도 아니고 물도 아닙니다. 꿀과 물을 섞으면 또 다른 효능이 나오죠. 아진자동차와 순양자동차 두 회사의 합병 발표는 전세를 단숨에 역전 시킬 겁니다.” 여전히 말없이 나를 노려보는 눈이 매섭다. 지금은 막내 손자를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순양그룹의 회장 눈빛이다. “일전에 제게 말씀하신 거 기억하세요? 합병 비율에 대해서 말입니다.” “말했지. 당연히 기억한다.” “바로 그 합병을 앞당기고 싶습니다.” “도준아.” “네.“ 조금은 온화한 눈빛이지만 여전히 ‘철면’의 모습이다. “라면 하나를 제 돈으로 사 들고 온 손주가 기특해서 물을 끓여줬다. 라면 다 먹었으면 끝내야지. 라면에 말아 먹을 밥까지 내놓으라고 투정부리면 안 되겠지?” “옛말에 손자 입에 들어가는 밥알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던데, 고작 라면에 밥 한 공기 말아먹겠다는 손자입니다. 아까우십니까?” “배 터지겠다, 이놈아. 욕심이 과하다.” 왜? 이제 와서? 분명 두 자동차 회사의 합병으로 순양그룹의 지분을 물려줄 것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그때는 분명 진심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 갑자기 태도가 싹 변한 것일까? 변심일까? 시험일까? “할아버지. 욕심은 어떤 종류든, 그 크기가 어떻든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중간하게 욕심 내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어차피 세상의 손가락이 저를 향하는데 말입니다.” 진 회장의 의중이 뭔지 헤아릴 필요가 없다. 지금은 내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내 욕심의 크기, 내 의지의 굳건함이 전달되었기를……. 할아버지는 여전히 철면을 지우지 않았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넌 뭘 가졌는데?” “네?” “합병은 네가 가진 것과 내가 가진 걸 하나로 합치는 거다. 난 순양자동차를 가지고 있지만 넌? 아진자동차를 가졌느냐?” “합병 발표는 반전의 기회가 될 겁니다. 과정은 앞뒤가 뒤바뀌지만 같은 결과 아닙니까? 결국, 아진자동차는 내 손에 들어옵니다.” “일전에 내가 말한 합병은 단지 가능성만 알아보는 가벼운 것일 수 있다. 내가 합병을 원치 않을 수도 있다는 건 생각 못 했느냐?” “농담을 진담으로, 꿈을 현실로 바꾸는 게 일이고 협상 아닙니까? 세상에 타협하지 못할 협상은 없습니다. 저울이 안 맞으면 맞춰야죠. 합병 발표를 우선하는 대가로 저울에 더 올리겠습니다.” “어쭈? 세게 나오는데? 허허.” 드디어 웃으셨다. 내 대답이 흡족하신 걸까? “좋다. 합병 발표를 심사 전에 터트린다고 치자. 그걸로 전세가 역전된다는 보장은 없다.” “아닙니다. 합병 발표만으로 두 개의 강력한 압박 수단이 생깁니다.” “하나는 대현 그룹보다 우위에 있는 순양 그룹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겠지? 이제 언론, 정부, 채권단, 심사단 모두가 미라클이 아니라 순양과 대현을 저울에 올려놓고 바라볼 테니까. 그럼 남은 하나는 뭘까?” “균형, 견제, 공정함으로 포장된 안심입니다.” “안심?” “네. 미라클이라는 투자사가 주는, 투기라는 불건전한 이미지가 씻은 듯 사라질 겁니다.” 내 설명을 끝으로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할아버지의 모습은 선택과 결단을 내리기 전의 모습이 분명하다. “순양자동차는 계열사 지분이 꽤 쥐고 있다. 알고 있겠지?” “아진자동차도 남은 아진그룹 계열사 여덟 개의 지분 대부분을 쥐고 있습니다.” “저울이 안 맞아.” “합병 비율을 조절하면 얼추 맞출 수 있습니다.” “안됐지만 그 정도로는 솔깃한 마음이 들지 않는데?” 지독한 영감쟁이. 내 욕심이 과하다고? 당신 발끝에도 못 미친다. 아니, 정말 순양자동차를 내게 줄 마음이 없는 건가? 아니면 아직 시험이 끝나지 않은 걸까? “순양자동차가 쥐고 있는 계열사 주식을 전부 걷어 가시고 자동차만 저울에 올려놓으십시오. 그럼 제가 더 무거울 겁니다.” “순양자동차를 계열분리 하자는 게야?” “아진자동차를 비롯한 여덟 개의 계열사. 그리고 순양자동차. 또 다른 자동차 전문 대기업이 탄생하는 겁니다.” “주인 자리는 네가 앉고?” “비켜드릴까요?” “양보할 마음도 없는 놈이! 입에 발린 소리는 꺼내지도 말어. 이눔아!” 웃음을 보일 수밖에 없다. 내가 양보하고 할아버지가 그 자리에 앉는 건 괜찮다. 하지만 그 뒤를 이를 자가 나 아닌 큰아버지일 수도 있다. 그건 참지 못할 일이다. 나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표정에는 더 이상을 원하는 간절함이 있다. 그게 뭔지 찾아내야 이 협상은 성공적으로 끝난다. 어쩌면 합병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원하시는 해답일 수도 있다. 할아버지 신분이 아니라 재벌 회장이 원하는 것은 뭘까? 혹시…? “순양자동차를 완전하게 계열 분리하여 아진자동차와 합병한다는 발표부터 서두르죠. 순양자동차는 보유한 순양 계열사 주식 때문에 그 주가가 높습니다. 계열분리 발표만으로 주가는 곤두박질 칠 겁니다.” 할아버지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더욱 빛났다. “주가가 바닥을 치면 제가 차명으로 집중적으로 매입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진 그룹을 인수하고 합병한 뒤 여러 이유를 들어 계열분리는 없었던 일로 하는 거죠. 순양그룹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은 물론 아진그룹 전체를 순양 그룹에 흡수할 수 있습니다.” “그럼 피해 보는 개미 투자자들이 많을 텐데?” “큰 마차가 움직이면 바퀴에 깔리는 개미도 있는 법입니다. 그걸 일일이 피하며 갈 수는 없죠.” 할아버지의 입가에 잠깐 걸렸다 사라지는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네놈이 매입한 순양자동차 주식 때문에 넌 순양의 대주주 중 한 명이 되는데?” “손쉬운 증여 아닐까요? 주가가 오르면 돈도 벌고, 세금도 내지 않고.” “으하하하!” 탕탕탕- 마침내 할아버지는 책상을 두드리며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합격인가? “이런 당돌한 놈! 어린 것이 벌써 악당이 다 됐구나.” 다행이다. 합격이다. ======================================== [063] 악당이 사는 세상 2.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웃음을 거둔 할아버지는 수화기를 들었다. “학재야. 지금 당장 조대호 데리고 집으로 와.” 수화기를 내려놓은 할아버지는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손가락질받는 게 나다. 휠체어 타고 서울지검 검찰청 출두만 네 번, 두 번이나 유죄 받았다. 나 대신 감옥 간 계열사 사장만 여덟이야.” 그 두 번의 유죄는 모두 집행유예로 끝났고 감옥 간 계열사 사장 모두 대통령 사면 명단에 들어간 건 왜 말씀하시지 않을까? “그 손가락질은 자식들이 커가면서 분산되기 시작했어. 이제 영준이까지 나눠 받는다.” 할아버지는 손을 들어 밖을 가리켰다. 국민과 서로 손가락질하며 싸운다는 뜻일까? 한쪽은 질투와 분노로, 한쪽은 경멸과 무시로. “너도 곧… 아니, 이미 받고 있을지도 모르지. 네가 엄청난 수능 성적을 받고 인터뷰했을 때 사람들은 수군댔을 거다. 수천만 원짜리 족집게 과외받았을 거라고. 돈 지랄해서 서울대 갔다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욕을 했을 거다. 재벌 3세가 왜 법대 가냐고? 너 때문에 꼭 가야 할 누군가는 떨어졌다고 말이다.” 여론에 신경 쓰지 않는 분이지만 빠짐없이 보고서가 올라오니 동향은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싫든 좋든 넌 이미 악당의 가문에서 태어난 거고 뭘 해도 금수저 물고 난 놈이라고 네 성과를 헐뜯을 게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가면 쓴 악당도 많다. 그리고 그 가면에 속는 사람은 더 많다. 앞으로 세상은 변한다. 한 사람의 이미지가, PI(personal identity) 관리가 꽤 중요한 변수가 될 세상이다. 난 많은 가면을 준비해야 한다. “자, 넌 이만 가 보거라. 곧 이 실장과 조 사장이 도착할 게야. 참, 합병 발표 기자 회견은 순양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조대호 사장이 나설 거다.” 내가 아진을 인수한다는 사실인 숨겨야 한다. 할아버지도 잘 안다. 두 회사 합병의 주역이 나라는 것을 알면 이빨 숨긴 친척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저도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할아버지께 허리를 숙이니 내 등을 두드리며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순양자동차에 얼마나 많은 것을 얹어 주실까? 아니면 나를 이용해 아진그룹을 통째로 삼키려는 것일까? * * * “아진그룹을 흡수할 생각이다.” “네?” 한밤중에 급히 달려온 두 사람은 진 회장이 인사 대신 뱉은 첫 마디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닌 밤에 홍두깨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회장님. 이미 대현으로 기울었습니다. 지금 준비하기에는 시간도 없고…… 무엇보다도 자금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다 끝난 판에 뛰어든다는 건 좀….” 진 회장은 한 손을 들어 두 사람의 입을 막았다. “우린 발만 담그는 거다. 그 발은 바로 조대호, 너야.” “네?” 조 사장은 진 회장의 뜻을 헤아리려고 애썼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미라클이 아진그룹을 인수하면 순양자동차는 아진자동차와 합병한다. 이게 자네가 할 일이야.” “하, 합병…?” “우리 그룹에서 순양자동차만 싹 들어내서 아진자동차와 합친다. 두 자동차 회사는 새 출발을 할 테고 그 자동차 회사의 첫 대표이사는 바로 조대호, 자네야.” 조 사장은 말문이 막혔고 이학재 실장은 진 회장의 계획을 파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회장님. 두 회사의 합병 비율을 어떻게 조절하든 1대 주주는 바로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가 될 겁니다. 미라클의 지배주주가 바로 합병한 회사를 지배합니다.” 이학재 실장이 조심스레 말하자 진 회장의 입꼬리가 올리기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미라클의 오세현이가 손을 내밀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도 닭 쫓던 개가 된다는 걸 모를 리 없잖아. 새로운 자동차 전문기업을 탄생시키고 우리 순양으로 넘기겠다는군. 곱게 포장해서 말이야. 허허.” “그럼 미라클은요?” “어차피 돈놀이하는 놈들이잖아. 포장지값 두둑하니 챙겨주기로 했다.” “당연히 후불이겠지요? 그리고 오 년, 아니 십 년 정도의 할부로 말입니다.” 그룹 자금 사정에 가장 민감한 이학재가 재빨리 확인했다. “꼬랑지 내리는 개가 안 되려면 별수 있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했어. 염려 말아.” 그제야 안심한 이학재 실장과는 달리 조대호 사장은 여전히 밝은 표정을 짓지 못했다. “저, 회장님. 그럼 아진의 송현창 회장은…?” “야박하게 당장 내쫓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리고 그자가 있어야 아진그룹 노조가 잠자코 있을 게야. 지난 기자 회견 때 그놈들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어? 무분규, 임금동결이라고 말이야. 얼마나 좋아? 닥치고 일만 하겠다는데?” “적당한 자리는 생각해 두셨습니까?” “아진그룹 회장 명함은 그대로 둬야지. 자넨 자동차부터 확실하게 손에 넣어. 육 개월 안에 송현창이 수족들 싹 청소하고 삼 년 안에 나머지 계열사 임원 자리도 우리 사람으로 채우면 돼.” 점령군이 되어서 영지를 평정하는 시간, 3년. 평정할 때 잡음이 들리거나 속도가 늦어지면 자신의 퇴출이 더 빠를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조대호 사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마음을 다잡았다. 만년 꼴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양자동차의 대표이사 자리,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또 기회가 온다. “합병 발표는 심사 하루 전으로 잡아. 대현에서 두손놓고 우리 회견을 멍하니 지켜보도록 말이야. 허허.” 진 회장은 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한도제철보다 훨씬 먹음직스러운 아진을 대현 주 회장이 삼킬 것 같아 속이 쓰렸는데, 다 차린 밥상을 홀라당 뺏길 때의 주 회장을 생각하니 유쾌하고 상쾌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이왕 모였으니 술이나 한잔할까? 축배 든다고 생각하고?” 나이 먹어도 남자는 남자다. 이학재는 이미 휴대전화를 꺼냈다.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래. 난 옷 갈아입고 내려오지. 허허.” * * * “아이고, 머리야.” “엄청 비싼 술 아니었어요?” “아무리 좋은 술이라고 해도 양은 못 이긴다. 너무 달렸어.” 관자놀이를 계속 누르며 물만 들이켜지만, 오세현의 눈빛에는 기대가 보였다. “그래, 건진 건 있어? 남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그 패… 챙겨왔냐?” “네.” 오세현은 입가에 가져간 컵을 탕 내려놓았다. “노친네 손에 든 패, 우리에게 던졌습니다.” “진 회장님?” “네. 순양자동차도 우리 손에 들어오는 엄청난 패죠. 하하.” “뭐? 순양?” 순양자동차는 두통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최고의 숙취해소제였다. 나는 어젯밤 할아버지와 나눈 협상을 자세히 말했고 오세현은 주의 깊게 들었다. “결국, 네게 순양자동차를 물려주겠다는 의사를 드러내신 거네?” “아뇨.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 그렇게 호락호락하신 분이 아니에요.” “왜? 자동차 뚝 떼서 아진그룹에 붙여주면 그건 네꺼잖아.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가 네꺼라는 걸 아시잖아?” ”합병 비율이 남아있죠. 그때 할아버지께서 양보하지 않으면 주인이 바뀝니다.“ “또 무슨 소리야? 합병을 받아들이신 건….” 내 할아버지인 진 회장의 본 모습을 오세현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의 욕심은 핏줄보다 우선한다. 그 정도 욕심이 없는 분이라면 순양그룹을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삼촌. 할아버지는요, 내 것과 할아버지 것을 섞는 김에 물려 주실 분이 아니에요. 전부 다 가진 다음에 조금 나눠주실 분입니다.” 내가 가진 맥주를 뺏은 다음 할아버지가 가진 양주를 섞어 잔을 내밀 분이다. 그 술잔을 하사하고 난 무릎 꿇고 감사히 받는다. 이것이 할아버지가 원하는 그림이다. “그럼 합병 비율도 끝낸 거야? 벌써?” “아직요. 그건 우리가 아진을 인수한 다음 논의해야죠. 그 문제도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인수대상자 선정이 끝나고 합병절차를 밟을 때쯤이면 추운 겨울이 다가올 것이다. 사상 유례없는 혹독한 겨울이다. 대한민국 전체가 꽁꽁 얼어붙고 얼어 죽는 국민이 무수히 속출하지만 모두 속수무책으로 넋 놓고 바라만 봐야 하는 겨울. 순양도, 대현도, 정부도 땔감이 없어 발만 동동 굴릴 때쯤이면 할아버지도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술잔을 하사할 것이고 할아버지는 감사히 그 잔을 받아야 한다. “삼촌은 일단 송현창 회장을 만나세요. 합병 계획을 알리시고… 딴소리하면….” “그래. 딴소리 못 하도록 단단히 일러두마. 어차피 그 양반은 몇 년 더 생명 연장하는 것만 남았는데 링거를 꽂든, 호흡기를 차던 마찬가지라는 걸 모를 리 없을 거다.” 오세현이 외투를 걸칠 때 중요한 문제를 꺼냈다. “삼촌. 차명으로 주식 매입할 수 있죠?” “차명?” “네. 순양자동차 주가, 곤두박질칠 겁니다. 주가를 떠받치던 순양그룹 계열사 지분을 전부 털어버린다는 발표도 같이할 테니까요.” “완전한 계열분리라… 그렇군. 하지만 상황이 변함없다면 다시 회복 할 테고?” “미리 준비 좀 해두죠. 바닥 찍으면 싹 매입할 수 있도록요.” “그래. 남대문, 명동 한 바퀴 돌지 뭐. 이 기회에 나도 재미 좀 봐야겠다.” 역시 증권가에서 커온 본성은 여전하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누구나 참가 가능한 합법적 카지노인 주식시장. 잃고 따고를 반복하지만 다음 패가 뭐가 나올지 아는 사람은 일확천금을 얻는다. 패를 보지 못하는 사람 중 눈치 빠른 사람은 조금만 잃고, 판단 느린 사람은 많이 잃을 것이다. “참, 이거 가져가. 한성일보 카드 잘 섰다.” “뿌리 좀 뽑았습니까?” “명색이 대 한성일보 아니냐. 잔뿌리 하나 뽑은 정도겠지. 흐흐.” 잔뿌리면 어떠랴? 속 시커먼 형수가 놀랄 정도면 된다. * * * “순양자동차는 완전한 계열분리로 독립된 기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진자동차와 합병하여 자동차 전문기업의 면모를 갖추는데 한 축을 담당하겠습니다.” 기자 회견이 있기 전부터 이미 특종이라는 이름으로 속보가 떴다. 회견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모든 언론사가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송현창 회장, 오세현 대표, 조대호 사장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이로써 우리 미라클 인베스트먼트는 단지 투기자본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국 자동차 산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데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럼 세 회사의 역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진그룹의 주축인 자동차는 조대호 사장님께서, 그리고 송현창 회장님은 그룹 전체를 총괄하실 겁니다. 우리 미라클은 주주로서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단지 감사팀을 신설하여 그룹 전체의 감사 직무만 수행할 겁니다.” “순양의 지분을 다 덜어낸다 하더라도 조대호 사장님께서는 순양그룹의 공신 아닙니까? 이건 마치 순양그룹이 아진그룹을 인수하는 모양새로 보이는데요?” 조대호 사장은 웃으며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제 고향이 순양그룹인 건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순양그룹은 이제 수많은 주주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또한 두 회사의 합병 후 순양그룹이 보유한 주식은 차례차례 매각할 계획입니다.” “인수가 확정되고 합병이 이루어지면 그룹 이름도 바꿀 것입니다. 아진도, 순양도 아닌 전혀 새로운 이름. 미래를 향하는 전문 자동차 기업으로 완전히 탈바꿈하겠습니다.” 송현창 회장의 마지막 말로 쐐기를 박았다. 기자 회견이 한창일 때 순양의 진 회장은 몇 시간째 전화통을 붙잡고 씨름 중이었다. “이봐라, 최 수석. 우리나라도 한우물만 파는 기업 있으면 좋잖나. 내가 알토란 같은 자동차를 던졌어. 되찾아올 생각 없으니까 현명한 판단 하게.” “김 행장. 내가 뒷배를 봐주는데, 아진그룹은 이제 멀쩡해. 내일 심사 후딱 해치우고 나랑 같이 저녁이나 하세.” “윤 장관. 청와대 수석한테도 이미 언질 줬어. 긴급보고서 곱게 만들어서 제출하게. 대통령 재가는 바로 떨어질 거야.” 기자 회견을 보며 온몸을 부르르 떠는 사람도 있었다. “이,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대현의 주영일 회장은 자신이 보고 있는 TV가 순양전자 제품이라는 것이 치가 떨렸다. ======================================== [064] 악당이 사는 세상 3. 리모컨을 TV를 향해 던졌지만, 모니터는 멀쩡했다. TV까지 자신을 얕잡아보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내 눈앞에 순양이라는 이름 안 보이도록 해라.” 회의실의 사장과 임원들은 주머니에 들어있는 순양전자의 휴대전화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꺼놓은 게 다행이다. “이걸 아무도 몰랐던 거야? 송현창이, 오세현이 한테 사람 붙여놓지 않았어?” “어젯밤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눈뜬장님이야? 안 보이긴 뭐가 안 보여!” 누군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지만 되돌아온 것은 주 회장의 호통뿐이었다. “세 놈이 모여 저런 합의를 끌어내는 데까지 전화 몇 통으로 가능해? 만나도 수십 번을 만났겠다. 당신들,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야?” 한참을 씩씩대던 주 회장은 마냥 성질만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흥분을 가라앉혔다. “저놈들 기습공격을 몰랐던 것은 여기까지다. 이제 어떻게 해야 만회할 수 있을지 각자 말해봐.” 쉽게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매장에 흘러나온 물건 하나 사는 게 아니다. 최고가를 불러 낙찰받는 것이라면 얼마나 쉬울까? 1조로도 부족할 것 같으면 2조, 3조를 써내면 된다. 하지만 입찰서류에는 엄연히 ‘비가격 요소’라는 아주 중요한 항목이 들어있다. 특히, 아진그룹 같은 재계 상위권 그룹의 인수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의 연장이다. 청와대, 경제부처, 국회의 지지를 등에 업어야 가능하다. 순양과 아진의 합병은 명분도 그럴싸하고, 보기도 좋다. 대현이 삼키면 수만 명이 직장을 잃는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아닌가? 내일모레면 대선이다. 수만의 실업자 양성이 여권 후보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겠는가? “눈뜬장님도 모자라서 이젠 꿀 먹은 벙어리야? 왜 말이 없어?” 대회의실을 한번 쓱 둘러본 주영일 회장은 눈을 내리깐 사장들을 보며 허탈한 웃음만 지었다. “지금부터 두 시간 준다. 뒤집을 수 있는 모든 방안을 찾아내. 사돈의 팔촌까지 다 동원해서라도 전방위 로비를 시작하라고. 9급 공무원이든, 은행 평사원이든 가리지 말고 압력 넣어.” 주 회장도 휴대폰을 꺼내 들며 회의실을 나섰다. 일단 청와대부터! * * * “아버지.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일단 앉아라. 차라도 한잔 할텨?” 진 회장은 다짜고짜 서재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소리치는 큰아들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동차를 버리다니요?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진영기 부회장은 꼭 하고 싶은 말은 참느라 이마에는 핏대가 툭툭 불거져 나왔다. 만년 꼴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동차, 적자에 허덕이는 자동차 따위는 버려도 된다. 하지만 그룹의 이런 중요한 결정을 TV를 통해 알아야 하다니! 창업주의 장남이며 그룹의 부회장이다. 나이라도 어리다면 할 말 없지만, 이미 오십 대 중반이다. 언제까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당해야 하나? “아쉬운 게 없으니 던졌지. 자동차가 안고 있는 적자, 전부 얹어서 저쪽으로 함께 던지며 싹 털어내고….” “아버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아버지 때문에 진영기는 마침내 폭발해 버렸다. 참아야 할 말을 참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제게 단 한마디 언질도 없으셨습니까? 그룹 계열사를 정리하는 주요한 사안인데 TV를 보고 알아야 합니까? 제가 고작 그 정도입니까? 부회장이라는 명함이 부끄러워 어디 가서 말이라도 하겠습니까?” 목청을 높이며 씩씩거리는 장남을 진 회장은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조대호 사장은 지금까지 모든 결재서류를 제게 들고 왔습니다. 그런 자가 순양자동차 합병이라는 엄청난 일을 직접 발표했어요. 그동안 제 결재를 받으며 얼마나 웃었을까 생각하면… 절 허수아비로 생각했을 거 아닙니까?” 아들의 언성이 높아질수록 진 회장의 표정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만약 진영기가 흥분을 조금만 가라앉혔다면 진 회장의 변화를 감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 터져버린 감정은 그의 시야마저 흐릿하게 만들어 버렸다. “계속할 거냐? 아직 남았어?” “네?” 차디찬 진 회장의 목소리가 귀를 후비니 그제야 아차 싶었다. 너무 나갔다. “섭섭한 것, 화난 것 다 풀었으면 다음으로 넘어가야지.” “……?” 진영기는 다음이라는 것이 뭔지 떠오르지 않았다. “뭐냐? 화내는 게 전부야?” 피식 웃는 웃음은 비웃음이 명백하다. 꽉 쥔 진영기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아버지!” “작작 좀 해라, 이놈아!” 진 회장이 책상을 탕 내리치자 진영기의 주먹이 스르르 풀렸다. “뭐? 부회장이라는 명함이 부끄러워? 그리고, 뭐라? 허수아비?” “아, 아버지…….” “순양 그룹 부회장이라는 명함이 부끄러우면 버려라. 네가 부끄럽게 생각하는 그 명함, 대한민국 전 국민이 주우려고 아귀처럼 싸울 거다. 네놈이 한 거라고는 내 장남으로 태어난 게 전부야. 운 좋게 얻은 명함이니 그 가치를 모르는 게지.”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긴! 네 나이 마흔 넘어 부회장이라는 명함을 받았어. 내 아들이 아니었다면? 바닥에서 빡빡 기어올라 그 명함 차지했다면, 부끄럽다는 생각은 단 일 초도 하지 않을 거다. 아니…. 이사 명함이라도 손에 쥘 수 있었을 성 싶어?” 진영기는 차마 대꾸하지는 못했지만 극심한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네가 한 말 중에 하나는 그럴싸하다. 허수아비, 그보다 더 적당한 말은 없을 듯싶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너무해? 내가? 네 스스로 허수아비처럼 행동하지 않느냐? 바로 지금도 말이야.” 진 회장은 참담한 표정의 장남이 조금은 안쓰러웠는지 다소 누그러든 목소리로 변했다. “영기야, 네가 TV를 통해 그 사실을 알았을 때 화가 치밀어오르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언론을 통해 나가버렸어. 돌이킬 수 없다는 건 잘 알 게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다가올지, 추가적으로 준비해야 할 일은 뭔지, 합병으로 우리 순양이 취해야 할 진짜 이득은 뭔지를 생각했어야지. 그게 부회장이 해야 할 일이다.” 낮은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하는 진 회장의 모습은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 부족한 아들을 가르치려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영기야.” “네.” 푹 숙인 머리를 들지 못하는 진영기에게 다가간 진 회장은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넌 남들의 십 분의 일만 해도 저 자리가 네 것이 된다.” 진 회장이 가리키는 손끝에는 집무용 의자가 있었다. “조급하게 굴지 말고 순양의 미래만 생각하고 더 키우고 지키는 것에만 혼신의 힘을 다해라. 그게 네가 할 전부다.” 여전히 머리 숙인 아들을 보며 칠순이 넘은 나이에 다 큰 아들을 다독거리는 자신에게 한심함을 느끼는 진 회장이었다. * * * “이틀 전이었습니다.” “확실해?” “네. 그날 저녁 오세현이의 차에 진도준이 타고 있었고, 곧이어 이학재 실장과 조대호 사장이 도착했습니다. 진도준은 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 떠났습니다.” 순양그룹의 중공업과 화학 계열을 총괄하는 진동기 사장은 측근들의 보고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형님은 분명 그 자리에 없었다는 말이지?” “네. TV 발표 직후 회장님댁으로 달려간 건 확인했습니다.” “따로 들은 건 없고?” “서재에서 큰소리가 좀 났는데 정확한 내용까지는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아냐, 도청장치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것까지 어떻게 파악해? 괜찮아.” “정말 도청장치라도 달아 놓고 싶습니다.” “꿈도 꾸지 마. 우리 영감이 얼마나 조심성 많은지 몰라? 삼 일에 한 번꼴로 시큐리티 직원이 들락거리며 서재를 조사한다고. 들키면 끝장이야.” 측근 중 한 명이 아쉬운 듯 말하자 진동기 사장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보나 마나지. 형님 성격에 영감 앞에서 징징댔을 거야. 그거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분 아니야. 하하.”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자 또 한 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사장님. 오세현이 먼저 합병을 제안한 것이 틀림없는데 회장님은 왜 쉽게 받아들이셨을까요? 그것도 단 하루 만에 전격적으로 말이죠.” “처음부터 아버지가 짜놓은 각본일 수도 있어. 한도제철 인수 때부터 오세현이가 슬슬 나대기 시작했잖아. 미라클은 우리 영감의 숨겨놓은 금고일지도 몰라.” 회전의자를 조금씩 움직이던 진동기에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질문이 날아왔다. “사장님. 그럼 진도준 그 꼬맹이가 회장님의 금고지기란 말씀이십니까?” “금고지기는 오세현이겠지. 아마도 도준이는 오세현이에게 일을 배우는 중일 수도 있고.” “아무튼 대단한 놈입니다. 3세 중에 그 정도 회장님의 총애를 받는다는 건 정말….” “그놈 나이가 서른만 넘었어도 날 위협할 놈이다. 그놈이 막내라는 게 다행이고 첫째인 영준이가 멍청한 것도 다행이지.” 조금씩 움직이던 회전의자를 멈추고 진영기는 책상에 바짝 다가앉았다. “도준이를 계속 주시해. 이미 오세현과 우리 영감 사이를 오가며 메신저 역할까지 한다. 이번 합병 사실도 그놈은 벌써부터 알았을 거야. 최악의 경우…….” 진동기 사장이 말을 멈추자 측근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후계자리를…?” “아니. 그건 아닌 게 확실해. 영감이 그놈 어릴 때부터 귀여워했지만, 법대 가는 걸 막지 않았어. 고놈 성적이면 서울대 상대 수석도 떼놓은 당상이야. 그런데 법대야. 왜 그랬을까?” 진동기의 질문에 모두 눈만 껌뻑였다. 측근이지만 세밀한 집안 사정까지 어떻게 알 수 있으랴? “변호사나 검사가 필요하면 돈 주고 사면 돼. 도준이 그놈도 학교 제대로 안 다닌다며? 아버지가 원했던 건 자랑할 꽃이 필요했던 거야. 똑똑한 내 손자, 이 정도까지 공부 잘한다는 자랑.” “아….” “도준이에게 기대하시는 건 딱 그 정도야. 집안의 모양새를 빛나게 해줄 광택제. 그 애한테 그룹 맡기려고 했으면 분명 경영학과 보냈겠지. 업계 용어라도 배워야 할 것 아냐.” “그런데 왜 미라클 오세현이에게 맡겼을까요? 단지 장식품인데?” “쓸 만하니까. 재능을 발견했을 수도 있어. 돈 굴리는 재능, 돈 불리는 재능. 어쩌면 순양그룹의 금융 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겠지. 순양생명, 순양화재, 순양캐피탈 그리고 카드까지.” 측근들의 표정이 굳어지자 진동기는 머리를 살짝 저었다. “미리부터 걱정하지 마. 어차피 이 싸움은 단 한 번에, 번개처럼 끝나. 지금은 실수하지 않고 차근차근 평판만 쌓으면 돼. 괜히 나서면 쪽박 깨는 거야. 한성일보처럼 말이야. 흐흐.” 진동기의 웃음에 측근들의 얼굴도 풀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직 혼사도 치르지 않았는데 미행이라니요?” “우리 집안 장손하고 결혼한다니까 좆도 모르면서 흥분한 거지. 고작 광고나 받아먹는 지들 주제도 모르고.” “회장님께 이 사실을 슬쩍 흘릴까요?” “나도 아는 걸 아버지가 모를까? 놔둬.” 진동기 사장은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지금 순양자동차 주가 떨어지지?” “네. 눈치 빠른 놈들은 이미 손 털고 빠집니다.” “바닥 칠 때쯤 싹 거둬와. 계열분리는 없어. 아버지는 공들여 키우는 걸 남에게 던질 분이 아니다. 다시 제자리 찾으면 주가도 오르고 그룹 지배력도 생길 거야. 실수하지 말고 잘 챙겨 놔.” “네. 사장님.” 측근들이 일어서자 진동기 사장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참, 조대호 사장하고 저녁 자리 빨리 만들어. 그간 고생만 하고 떠나는데 밥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말도 빠트리지 말고.” 차남 진동기는 바닥부터 다져나가는 자신의 길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켜나갔다. ======================================== [065] 악당이 사는 세상 4. “도준아. 내가 들은 게 좀 있는데…. 네게 확인 좀 해야겠다.” “네. 말씀하세요.” 이 자식은 오늘따라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표정이다. 갑자기 밥 사준다고 불러내고는 무슨 소리를 지껄이려는 걸까? “순양자동차 합병 건, 넌 미리 알고 있었냐?” 어떻게 이놈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까? 이미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내 표정을 본 진영준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럴 땐 정공법이다. “네. 발표 하루 전에 알았어요. 왜요?” “어떻게?” “삼촌이… 아니, 미라클 오세현 대표가 할아버지께 제안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합병 조건까지 상세하게 만든 제안서도 줬고요.” “그걸 왜 너한테 부탁해? 직접 만나면 될 일인데?” “영준 형. 대현 그룹에서 오세현 대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중이었어요. 오 대표가 할아버지를 만나러 갔다면 대현이 먼저 알았을 겁니다.” 답답한 소리 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정도면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려나? 그런데 이놈은 어떻게 알았을까? 큰아버지가 아니라 이놈이 내 뒤에 꼬리를 붙인 걸까? “그게 전부야?” “그럼? 또 뭐가 있어야 해요?” “내 말뜻 몰라? 넌 이번 일에 왔다 갔다 서류 전달한 게 전부냐고?” 이 자식, 갑자기 왜 이럴까? 지 애비가 순양의 주인이 되는 걸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고 행운을 쥐고 태어난 축복을 당연히 받아들인 놈인데 이런 경계심을 보이다니. 설마 그 한성일보 딸래미가 부추긴 걸까? 정말 그 여자랑 결혼이라도 하는 걸까? 진영준의 젊은 시절을 전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언론사 집안과 결혼한 적은 없다. 이놈 마누라는 말 잘 듣는 순양 계열사 사장의 딸이었다. 뭔가 달라지는 걸까? “야! 진도준. 너 똑바로 말 안 해?” “놀래라, 소리는 왜 질러요?” 이놈 고함 소리 때문에 과거의 생각은 끊어야 했다. 똑바로 말해 줄 수는 없고… 어떤 말을 해 줘야 할까? “사실, 할아버지와 오세현 대표 사이에 오간 비밀계약이 있긴 한데 그건 말 못해요. 나도 어쩔 수 없이 알게 된 사실이고, 공식 발표전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거든요.” “누구에게도? 내가 그냥 누구 정도야? 남이냐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걸 겨우 참는 듯 보였다. 황태자라고 생각하니 발끈하는 것이 당연하다. 좀 더 열 받게 해볼까? “누구 맞아요.” “뭐?” “영준 형은 지금 그 어떤 권한이 없어요. 모르세요?” “야!” “어쩌라고요? 할아버지와 오세현 대표의 계약이고 아무도 몰라요. 큰아버지는 물론이고 이학재 실장도 모르는 두 분 만의 비밀계약인데. 형님이 그분들보다 권한이 있다고 생각해요?”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면 짜증 섞인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저 버릇, 서른일 때도 못 고쳤으면 앞으로도 못 고친다. 전생과 다른 마누라를 얻는 걸 보면 뭔가 바뀐 것 같기도 한데 저놈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한바탕 짜증 내고 나면 속 보이는 달콤한 소리로 꼬드기는 패턴, 지금도 그대로겠지? “너 인마.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 안 나?” “무슨…? 아, 수능 끝나고 별장에서?” “그래.” 역시나, 한결같다. “기억해요. 형님이 말씀하셨죠? 오른팔이 되라고.” “그거 그냥 던진 말 아니다. 나 내년이면 이사 달아. 네가 대학 졸업하면 상무나 전무쯤 되겠지. 그때 내 옆에 자리 만들어 놓을 테니까….” 나는 손을 들어 진영준이 주절대는 입을 막았다. “영준 형. 저 이제 어린애 아닙니다. 가능성 희박한 미래의 약속만 철석같이 믿을 멍청이도 아니고요.” “뭐?” “이번 합병 발표, 큰아버지도 모르게 진행됐어요. 그룹 부회장이신데도 말이죠.”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모르시겠어요? 큰아버지의 후계구도는 아직 미완성이라는 겁니다. 할아버지가 조금만 변덕 부리면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뜻 아니겠어요?” 진영준은 후계구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나를 다그친다. “그래서? 내 오른팔 거부하는 이유가 그거야? 할아버지 곁에 딱 붙어서 기회를 찾는 거야? 엉? 너도 나랑, 아니 우리 아버지와 경쟁하겠다는 거야? 나 원, 기가 차서.” “형님. 너무 인상 쓰지 마세요. 제 입장에서는 그냥 구경하는 재미가 전부에요. 어차피 막내아들의 막내아들, 순양그룹은 저랑 인연 없으니까 욕심내지도 않아요.” “진심이냐?” “물론이죠. 그리고… 솔직히 제가 아쉬울 게 뭐가 있어요? 제 자랑 같지만 마음먹고 딱 이 년 정도만 공부하면 사법시험 패스, 자신 있어요. 알잖아요? 저 공부 잘하는 거.“ “그래서?” “검사나 판사질 하면서 큰소리 땅땅 치며 인생 즐기는 거죠. 사회적으로 대우받지, 돈 걱정 없지. 그리고 아시죠? 우리 아버지 지금 영화계에서 잘나가는 거? 손만 뻗으면 예쁜 여배우들이 내 손에 들어와요. 재벌 3세인 판검사, 영화사 사장 아들. 이 타이틀 거부할 여자가 몇 명이나 있겠어요?” 진영준의 눈빛이 야릇하게 반짝인다. 병신 새끼. 어쩌면 저놈이 원하는 인생이 바로 내가 말한 한량 같은 삶일 것이다. “그래서 순양그룹 이인자 자리를 걷어차겠다?” “누가 걷어찬다고 했어요? 진짜 일인자가 제안한다면 한번 해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 영준 형은 일인자가 아니잖아요.” “내가 일인자가 되면 널 내 곁에 안 둘 수도 있어. 우린 사촌이 많다. 그리고 네 손에 순양그룹의 지분 단 한 주도 못 가게 막을지도 몰라.” 자존심을 벅벅 긁으니 되지도 않은 협박까지 한다. “말했죠? 아쉬울 것 없다고. 지금 우리 집이 가진 것만 잘 지켜도 남부럽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야겠다. 저놈의 속도 긁었고, 우리 집은 욕심 없다는 것도 충분히 어필했다. “솔직히 재벌 집안의 막내라는 거, 차라리 마음 편해요. 제 형인 상준 형도 지금 대학 때려치우고 뉴욕에서 아트 스쿨 다니잖아요. 가능성 없는 일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불신과 불안의 씨앗만 심어주면 끝이다. “형님. 제가 딱 한 말씀만 드릴게요.” 뭔가 중요한 말을 한다는 걸 짐작했는지 저놈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둘째, 셋째 큰아버지 그리고 고모, 고모부. 다들 욕심 많습니다.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순양그룹이 통째로 형님댁으로 넘어가는 걸 두 손 놓고 보고 있을 분들이 아니에요.” “그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냐? 어차피 아버지가 다 처리하실 거야. 우리 집도 놀고만 있는 거 아니다.” 자신 있게 말했지만, 싱긋 웃는 내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너 혹시… 네가 아는 비밀계약이라는 게 후계구도와 관련 있는 거냐?”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야!” “또, 또. 형님. 거, 소리 지르는 거 좀!” “아, 미… 미안. 도준아. 말 좀 해봐. 나, 이 집안 장손이야. 멍 때리고 당할 수는 없잖아.” “형님. 원래 왕권은 장자 그리고 장손이 승계해야 나라가 평안해집니다. 차남이나 삼남이 물려받으면 늘 피의 숙청이 뒤따르죠. 그래서 전 큰아버지, 형님 순으로 순양그룹 회장 자리에 앉는 걸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집에 피해가 없을 것 같으니까요.” “다, 당연하지!” 좀 띄워주니 굳었던 얼굴이 활짝 펴진다. 아랫사람일 때는 몰랐는데 나란히 서서 바라보니 본 모습이 보인다. 무겁고 강한 모습을 십여 년간 봐 왔는데 그건 전부 부회장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무게였다. 본 모습은 고작 이 정도다. “순양자동차 합병으로 순양자동차가 보유했던 계열사 주식이 다른 계열사로 흘러들어 가겠죠. 바로 그 계열사는 그룹에서 중요한 회사가 됩니다. 맞죠?” “그렇지.” “그 회사를 큰아버지가 아닌 다른 분이 차지한다면요? 그룹이 쪼개질지도 모릅니다.” “그게 비밀 계약서의 내용이냐?”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뭐 대단한 것이라고 비밀이겠는가? “제가 본 계약서는 제목이 전부에요. <그룹 지배구조 재구성방안> 이겁니다.” “지배구조 재구성?” “네.” 순양그룹의 지배구조는 계열사 간 순환 출자와 기관, 금융권까지 끼어들어 그 누구도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수많은 전문가가 하루도 빠짐없이 주식 시장을 들여다보며 매일 보완할 만큼 복잡하다. 우리 집안이 보유한 주식이 워낙 소량이라 이런 복잡한 구조가 아니면 지배력은 순식간에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전 형님께 최대한 도움을 드렸어요. 이제 지키는 건 큰아버지와 형님께서 할 일입니다.” 처음과 달리 흐뭇한 모습으로 나를 보는 진영준에게 미소를 보였다. “이제 밥 시키죠. 배고픈데.” “어, 그래.” 종업원을 부르는 진영준을 보며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했다. 순양자동차 때문에 저마다 숨겨왔던 발톱이 조금은 드러날 것이다. 누구의 발톱이 가장 날카로운지 지켜볼 일이다. * * * 사흘에 걸친 심사가 끝나고 아진그룹 인수 대상자로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가 선정되자 순양그룹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경로가 복잡할 뿐 아진그룹을 단돈 만 원 한 장 쓰지 않고 인수한 셈이다. 『……단, 인수 제안서에 분명히 밝혔듯이 순양자동차와 아진자동차의 합병이 우선입니다. 두 회사의 합병 절차를 완료하는 시점에 인수 대상자 선정의 효력이 발생하는 바임을 밝힙니다.』 오세현은 뉴스 발표를 보고도 웃지 않았다. 마치 순양그룹이 아진그룹을 인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일 것이다. “삼촌. 괜찮아요. 우리가 들러리 선 것 아닙니다. 순양자동차가 들러리죠.” “글쎄다. 이런 M&A 바닥에서는 힘센 놈에게 끌려가게 되어있어. 이제 주도권은 순양으로 넘어간 거야.” 알토란 같이 모은 달러가 순양그룹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모양이다. “참, 인수대금 지불은 언제죠?” “합병 이후 즉시. 1조2천억이니 10억 달러는 옮겨야 해.” “빨리도 내년이겠네요?” “그건 네 할아버지에게 물어봐야겠지? 합병 절차 서두르면 연말일 수도 있어.” 오세현은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며 현재 자산 내역을 체크했다. “전부해서 32억 달러니까… 지금 환율이 1,100원이니… 3조5천억 조금 넘구만.” “묶여있는 돈은 어느 정도 돼요?” “6억 달러. 네 말대로 올해는 신규투자 없이 현금으로 보관만 했어. 6억 달러도 내년이면 다 회수할 거야.” 이 정도면 선방했다. 기억을 쥐어짜서 투자한 돈이 백배 이상이 되어 돌아왔다. 나 같이 머슴살이하던 놈이 아니라 미국 월 스트리트에서 날고 기던 펀드 매니저가 환생한다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도 조금 했다. 그런 자라면 세계 최고의 갑부 자리를 단숨에 차지하지 않을까? “일단 10억 달러는 옮겨 놓을게. 언제든 지급할 수 있도록 말이야.” 나는 황급히 손을 내 저었다. “아뇨. 놔두세요. 어차피 연말 넘겨야 하니까요.” 오세현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며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너 혹시….” “네? 뭐가요?” “너도 감 잡았어? 지금 환율 상승이 좀 이상한 거?” “다들 불안해하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거 아닐까요? 한 달 새 250원이 뛰었는데요? 달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느낌 안 드세요?” “연말쯤이면 안정을 찾지 않겠어?” 눈치 못 챌 사람이 아닌데 괜한 질문을 한다. 다들 저런 생각이다. 대기업의 줄도산과 대선이라는 큰바람 때문에 태풍이 다가오는 걸 감추려 한다. “환율이 뛰는 것과 달러가 빠져나가는 건 다르죠. 달러가 빠져나가면 원화 수십조를 쥐고 있어도 무용지물이란 뜻 아닐까요? 무인도에서는 현찰 백억보다는 빵 한 상자가 더 가치 있습니다.”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할 빵…. 달러라는 말이지?” 머리를 끄덕이자 오세현은 침통한 표정으로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환율 변동 그래프가 심상치 않다. ======================================== [066] 발톱의 길이 1 오세현은 메일을 몇 군데 보냈다. 해외의 단기 투자자들의 동향을 체크하면 환율 상승이 일시적 현상인지 아닌지 예측할 자료가 될 것이다. “도준아. 환율이 계속 오르면? 달러로 인수대금을 지불할 생각이냐?” “협상해야죠.” “무슨 협상?” “아진 그룹 인수대금을 달러로 지불하는 조건으로 팍 깎으려고요.” 오세현은 이마를 탁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그렇지! 금덩이 쥐고 있으면 뭐해? 빠져 죽게 생겼는데. 금덩이 던지고 구명조끼 받아야지.” 기축통화인 달러는 사람으로 비유하면 피와 같다. 피가 돌지 않으면 사람은 죽기 마련이다. 수혈할 피주머니를 들고 있는 자는 쓰러진 자의 주머니에 든 황금 덩이를 마음껏 빼내 올 수 있다. 돈 만지는 오세현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국내 외환 보유고가 바닥을 길 때쯤이면 도준이 넌 구세주가 될 것 같은데?” “제가 아니죠.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대표이신 삼촌이죠.” 놀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잔잔히 웃는다. “왜? 아직 어린애라서 나서기 싫다는 거냐? 아니면 숨은 뜻이 있어 네 존재를 드러내기 꺼리는 거야?” 이미 많은 것을 짐작한다는 말, 오히려 날 당황하게 만든다. “내가 조 단위의 돈을 들고 있으면 세상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불법 증여, 편법 상속 등등. 세상이 시끄러워질 겁니다.” “그리고 널 보는 수많은 경계의 눈을 피할 수도 없을 것이고 말이지.” “그런 면도 있긴 하죠.” 정확한 말이 오가지 않아도 서로의 뜻은 이미 교환했다. 나는 차분한 눈빛으로 오세현의 대답을 기다렸고 오세현은 빙긋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지금은 네 적토마가 되어주마. 원하는 대로 고삐를 틀고, 채찍을 휘두르렴. 하지만 시간은 많지 않아. 내 나이 쉰이다. 길면 5년이야. 그 뒤는 네가 직접 달리던, 날 대신할 말을 구하던 해야 할 거다.” “뭡니까? 쉰다섯에 은퇴하신다는 뜻이세요? 한창 나이 아닙니까? 너무 빠른데요?” “쉰다섯이면 딱 적당해. 은퇴하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일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아. 돈 쓸 시간 부족하면 억울하지 않겠어? 하하.” 5년.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을 차지할 수 있을까? 늙은 말은 목장에서 쉬게 하고 새 말을 구해야 하나? “친조카보다 더 조카 같은 너라서 5년인 거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은퇴하고 한적한 섬으로 떠나고 싶다고.” 아예 대못을 박는다. 적토마 역할의 연장은 없다. * * * “사실이냐?” “네. 도준이가 직접 봤답니다.” 진영기 부회장은 아들이 알려준 정보를 듣자 피가 거꾸로 쏟는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어깨까지 두드리며 서재의 의자를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룹 지배구조를 바꾸려 하다니? 장남인 자신에게까지 숨기며 진행하면서 달콤한 말을 귓가에 속삭인 아버지. 진영기 부회장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아들이 보고 있다. 냉정을 되찾아야 할 이유다. 진영기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뭐, 자동차가 계열 분리되면 한번은 치러야 할 홍역이야. 전체 틀이 흔들리기는 하겠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자동차가 쥐고 있던 지분이 움직이면….” “어허! 괜찮다지 않느냐. 내가 알아서 하마. 넌 한도제철… 아니 순양제철 정상화에 매진하면 돼.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할아버지께 네 능력을 보여드려야 한다.” “알겠습니다.” 아들이 머리를 숙이고 나가자 진영기는 급히 전화를 꺼내 들었다. “기획실 전원, 회의실로 모이라고 해.” 진 회장이 이상한 결론을 내리기 전 재빨리 움직여야 했다. * * * “아이고, 이거. 바쁘신 분을 번거롭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이제부터 바빠질 것 같긴 합니다만 사장님과 밥 한 그릇 먹을 짬은 내야죠. 허허.” 진동기 사장은 조대호 사장이 별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 환하게 웃으며 맞이했다. “그런데 전 아직 헷갈리기만 합니다. 아진과 순양이 합치면 누가 더 이익인지… 물론 아버지께서 어련히 잘하셨겠지만 말입니다.” “그러게요. 저도 너무 급작스레 진행되는 거라 얼떨떨합니다.” 진동기는 조대호 사장의 표정 하나 말 한마디 놓치지 않으려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계열 분리되면 조 사장님은 이제 순양과 인연이 없어지는데 많이 섭섭하시겠습니다.” 조대호 사장은 웃으며 말하는 진동기를 보며 입꼬리가 약간 올라갔다. “진심이십니까? 아니면 절 떠보려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전자라면 실망이 큽니다만.” 역시.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순양이 아진을 삼킨 것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떠보다니요? 그냥 혹시나 해서 드린 말입니다.” “진 사장님.” “네.” “회장님을 30년 넘게 모셨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제가 회장님께 반기를 든 적이 딱 한 번 있는데 그게 뭔지 아십니까?” 웃음기가 싹 사라진 조대호 사장의 표정 때문에 진동기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정유 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중동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 터져 원유 수급이 비상이었죠. 회장님과 전 텍사스로 날아갔습니다. 급한 대로 텍사스 원유를 계약하기 위해서였죠.” 갑자기 옛날 고생담을 꺼내는 건 진심을 드러내는 조짐이다. 이 이야기가 끝날 때쯤 조대호 사장은 진동기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할 것이다. “끝도 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스테이크 하우스에 들어갔는데 날은 덥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입맛이 없었죠. 회장님은 스테이크 하나만 시켜 나눠 먹자고 하셨습니다. 그곳은 가장 작은 스테이크가 무려 600g이나 됐거든요.” “미국 남부 스테이크는 양으로 먹는 거죠. 하하.” “전 반대했습니다. 각자 한 접시씩 먹자고 말입니다.” “설마 그게 유일한 반기였다는…?” “네.” “이런…. 설마 지금 농담하시는… 아!” 조대호 사장이 과거의 추억을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동기는 조 사장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나누는 걸 반대한다. 고기 한 덩이도 나눠 먹는걸 싫어하는데 그룹을 쪼개는 건 찬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 사장님께서는 나누는 걸 싫어하시지만 전 버리는 걸 싫어합니다. 너무 많아 먹지도 못하면 결국 버리지 않습니까?” 진동기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설득까지는 아니더라도, 받아들이지는 않을지라도, 이해는 시켜야 한다. “먹을 만큼만 주문한 아버지가 현명한 것 같은데요?” “진 사장님.” “네.” “결과를 물어보지 않으시네요.” “무슨…?” “결국 회장님과 저, 꾸역꾸역 다 먹었습니다. 많아 보였지만 다 먹게 되더군요. 시도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입니다. 600g… 생각보다 많지 않습디다.” 진동기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고리타분한 창업 공신들. 그래 봤자 월급 받는 게 고작인 놈들이 순양그룹을 마치 집안의 가보인 양 애지중지한다. 마차의 주인이 바뀔 때는 마부도 바꾸고 말도 바꾼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마차가 상할까 끝없이 걱정하는, 천성이 마부인 사람들. 그런데 마차를 차지하려면 마부가 절실히 필요하다. “조 사장님. 먹성이 좋으시군요.” “이제는 그만큼 못 먹습니다. 나이 먹으니 양도 많이 줄더군요.” “그렇군요. 전 아직 먹성이 줄지 않은 걸 보면 나이를 덜 먹은 것 같습니다. 스테이크 600g 정도는 남기지 않고 다 먹어지더군요. 레어로.” 나누지 않고 전부를 차지하겠다는 진동기의 뜻을 충분히 알아들은 조대호 사장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기야.”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자 진동기는 등골이 서늘했다. “네. 형님.” 진동기가 회사 일을 시작하기 전 진 회장의 수족들이 집안을 들락거렸다. 누구는 삼촌이라고 불렀고 누구는 아저씨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조대호 사장은 꼭 형이라고 부르라며 용돈을 듬뿍 쥐여주던 사람이었다. “진영기 부회장은 네 친형이다. 그리고 장남이야. 네가 가질 수 없어.” “형님. 영기 형님은 무능합니다. 모르십니까?” “유능한 네가 곁에서 도와주면 되지 않겠냐?” “제 곁에서 영기 형님이 도와주는 것은 왜 안 됩니까?” “무능한 사람이 유능한 사람을 도와줄 수는 없는 일이지. 쓸모없거든.” “형님!” “그림이 안 나오잖냐. 형이 동생을 수발든다? 불가능해. 쫓겨나겠지.” “계열사 몇 개 정리해서 영기 형에게 줄 겁니다. 그리고 음으로 양으로 챙겨드리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순양자동차의 행방만 점쳐보려고 만든 자리였지만 엎질러진 물이다. 서로 속을 드러냈으니 끝을 봐야 한다. “대진그룹, 청마그룹 그리고 자성그룹. 지금은 흔적도 없다. 그게 다 형제들 싸움으로 찢어지고 갈라져서 그런 거야. 장남이 독식하면 살아남지만, 동생들이 뺏으려고 날뛰기 시작하면 피만 흘리고 사라진다.” “집안 말아먹은 장남도 많습니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음성이었지만 조대호 사장은 쓴웃음만 지었다. “나야 순양그룹의 소작농에 불과하지만, 순양을 비옥하게 만든 데는 내 공이 적지 않다고 자부한다. 그런 땅이 갈가리 찢어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제가 더 기름진 땅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거친 땅을 개간해서 더 넓고 광대한 평야로 만들 자신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형님께서 보고 싶은 모습 아닙니까?” 자신감 넘치는 진동기의 모습을 조대호 사장은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조대호 사장이 다시 입을 열 때 그의 어투는 처음으로 돌아왔다. “진 사장님. 아버님이신 회장님을 얼마나 아십니까?” “네?” “회장님은 후계자를 미리 정해두고 키우실 분이 아닙니다. 꿈도 꾸지 마십시오.” 처음 듣는 소리에 진동기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다. 후계자가 없다? “아마도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끝없이 점수를 매기며 비교하실 분입니다. 어쩌면 마지막 유언에 순양그룹을 가질 후계자를 발표하실 겁니다.” “설마요? 승계를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천문학적인 세금을 내야 합니다. 그걸 잊으실 분이 아닙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자린고비가 바로 아버지라는 걸 진동기는 잘 안다. “세금보다 순양의 미래를 더 걱정하시니까요.” 조대호 사장의 말을 듣고 있자니 진동기는 화가 치밀었다. “그럼 조 사장님께서 지금까지 하신 말씀은 뭡니까? 마치 영기 형님이 모든 걸 다 물려받는 것처럼….” “그건 제 생각이고 마음입니다. 회장님의 의중이 아니라 제 생각을 물으신 것 아닙니까?”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화를 가라앉혀야 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 최종 결정에는 조대호 같은 공신들의 의견이 크게 한몫을 하기 때문이다. 진동기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잔을 들었다. “아직 경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조대호 사장도 웃으며 잔을 들었다. 평생 소작농을 했고 순양이라는 마차의 마부석에만 앉았다. 마차 내부는 구경도 못 했지만 고삐를 쥔 사람이다. 뜬구름 잡는 소리만 했지만 눈치 빠른 진동기는 알아들었을 것이다. 고삐 쥔 마부의 힘을 무시하지 말라는 경고. 마차의 주인이 바뀐다고 해서 마부를 갈아치울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다. 마차의 주인을 결정할 때 마부들의 단합된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진 회장의 자식들도 알아야 한다. ======================================== [067] 발톱의 길이 2 진동기는 차가 멈추자 창밖의 높은 빌딩을 올려다봤다. “여기 맞아?” “네. 사장님.” “이 자식, 돈 좀 벌었나 보네.” “제작뿐만 아니라 곧 배급까지 한답니다. 충무로 파워맨이죠.” 보조석에 앉은 비서가 설명을 늘어놓자 진동기는 손을 내저었다. “됐다. 그래 봤자 몇 푼이나 번다고? 어차피 취미생활인데.” 비서는 차에서 내린 진동기의 뒤를 따르려 했지만 멈춰야 했다. “대기해. 혼자 간다.” 영화사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부터 보였다. 입구에 안내 데스크가 없는 회사는 처음이라 당황했고, 잠시 사무실 입구에서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네?” “어디서 오셨는지…?” “아, 사장님 좀 만나러 왔소.” 바삐 움직이던 직원 한 명이 어색하게 서 있는 진동기에게 조금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어디 회사에서 오셨냐고요?” “진윤기 사장, 형이오. 친형.” “아, 네. 따라오시죠.” “허허, 거 참.” 진동기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젊은 직원의 뒤를 따랐다. 사장의 친형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딱히 공손하지가 않다. 게다가 사장실이 아닌 조그만 회의실 같은 곳에 안내하자 속이 끓어 올랐다. “이봐. 여긴 뭐야? 사장 만나러 왔다고 했잖아. 내가 형이라고!” “사장님은 지금 회의 중이시라서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메모 넣겠습니다.” 젊은 직원은 진동기가 더 말할 새도 없이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이런 대접은 처음이라 속이 부글부글했지만 그것도 잠시, 조금 지나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를 제외하고 누구를 기다린 적이 없었다. 항상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왔고 그들을 기다리게 했다. 그들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알 것 같을 때, 벌컥 문이 열렸다. “형님. 이거…. 어쩐 일이세요? 여기까지 다 오고.” “이 자식이, 내가 못 올 데를 왔냐? 뭘 그리 놀래?” 진동기는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하이고, 근 10년 동안 한 번도 안 오셨으니 하는 말이지.” 내민 손을 잡는 진윤기의 말에 진동기는 깜짝 놀랐다. “뭐? 벌써 그렇게 됐어? 10년이나?” “뭐, 됐고. 제 방으로 가요.” 사장실에 들어서자 진동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돈 많이 벌었다면서 이 꼴이 뭐냐?” 순양그룹의 말단 이사보다 작은 방. 집무용 탁자도 평사원과 비슷하다. 가뜩이나 작은 방에 온갖 서류가 너저분하게 쌓여 있으니 흡사 창고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다 헛소문이야. 이 바닥에서 돈 많이 벌어봤자 형님 회사 부서 하나만도 못해.” “야! 내가 도저히 못 참겠다. 내일 사람 보낼 테니까 사장실 넓혀놔. 좀 그럴듯하게 꾸미고 살아.” 진윤기는 짜증 섞인 형의 말이 호의라는 걸 안다. “형님. 좀 잘나가는 영화사는 사장실 좋아요. 회사 인테리어도 삐까번쩍하고.” “그런데 넌 왜 궁상이냐?” “빚 갚아야지.” “뭐? 빚?” 진동기가 소스라치게 놀라자 진윤기는 손을 내저었다. “사채 땡겨 쓴 거 아니니까 놀라지 말고. 이일 시작할 때, 자본금 도준이가 준거잖아. 목장 팔아서…. 몰랐어?” “아, 그렇지. 기억나네.” “그건 갚아야지. 아버지가 어린애 코 묻은 돈 빼먹었는데 다시 채워줘야 하지 않겠어?” “듣고 보니 그러네. 말아먹은 것도 아니고 잘 벌면 갚아야지. 이자 듬뿍 얹어서. 하하.” “자자, 그런 이야기 그만하고. 용건 꺼내 놓으세요. 뭔 바람이 분 거야?” 진윤기가 담배를 내밀자 진동기는 하나를 빼 물었다. 몇 모금 연기를 들이마시고 길게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넌 이 길 계속 갈 거지?” “응? 뭔 뜻이유?” “영화판에서 끝장 볼 거냐고 묻는 거다.” 이번에는 진윤기가 한동안 담배를 연기만 내뿜었다. “회사 쪽은 쳐다보지도 마라?” “그래. 너도…. 네 자식도…….” 진동기의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진윤기는 다시 담배만 피워댔다. 그 모습에 진동기의 인상도 구겨졌다. “설마 너도 욕심을 숨겼던 거냐?” “너도? 그럼 욕심을 숨긴 사람이 또 있습니까?” “너 빼고 전부 아니겠어?” “그런가? 제 눈에는 모두 욕심을 질질 흘리고 다니던데요?” “말 돌리지 말고. 욕심, 있었던 게냐?” 진동기의 재촉에 진윤기는 담배를 비벼끄며 말했다. “지금까지 애비 노릇 못했는데 한번은 할 생각이거든.” “도준이를 말하는 거냐?” “그놈이 할아버지 같은 기업가가 꿈이랍니다. 아, 오해는 사절.” 진윤기는 형이 뭔가 말하려는 걸 손을 들어 막으며 말을 이었다. “순양그룹 계열사 몇 개 먹겠다고 설칠 만큼 작은 그릇 아니야. 제 손으로 뭔가 이루고 싶어 해. 난 최선을 다해 도울 거야.” “그게 회사랑 무슨 관계지?” “비록 겉도는 막내아들이지만, 나도 순양그룹 회장님 핏줄이야. 주는 걸 사양하지 않을 거고, 안 준다면 내 몫은 내가 챙겨야지. 부족하지 않을 만큼.” “부족하지 않은 네 몫이라…….” 막내 동생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진동기는 놀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갑자기 이러는 걸 보니 큰형님과 뭔 일이 있었겠네. 뭡니까?” 다시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보이는 진윤기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순양자동차 때문에 지분 변동이 심한가 봐요?” “그런 거 아니다.” 진동기는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넌 지금처럼 빠져 있어. 그리고 날 응원해라. 내가 이기면 부족하지 않을 만큼, 도준이 꿈을 이룰 밑천은 내가 준비하마.” “큰형이 이기면?” “애비 노릇 하려면 큰형님이랑 싸워야 할 게다.” 사장실을 나가려던 진동기는 몸을 돌려 마지막 경고의 말을 던졌다. “큰 욕심은 부리지 마라. 하나뿐인 남동생, 잃고 싶지 않다.” “뭔 소리야? 셋째 형도 있는데.” “상기 그놈은 내 동생 아닌 지 오래됐다. 그놈은 큰형 동생일 뿐이야. 명심해. 너라도 내 동생으로 남아라.” 진동기의 씁쓸한 표정이 진윤기의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근데 이건 무슨 영화야? Titanic?” 진동기는 사장실 출입문에 걸린 포스터를 가리켰다. “아, 그거 우리 회사가 내년 초에 배급할 거야. 지금 극장 잡고 있어.” “표 안 팔리면 말해. 왕창 사줄 테니까.” “말이라도 고맙수. 흐흐.” * * * “누나? 매형?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진윤기는 밤 9시가 넘어서 갑자기 방문한 두 사람을 보며 오늘 낮, 집안에 대단한 일이 있었는데 놓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낮에는 형, 밤에는 누나라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꽉 찬 일정표로 움직이는 인간들이다. 또, 뜻밖의 방문이 자연스러울 만큼 왕래가 잦은 가족도 아니다. 특히 백화점 사장, 정치인인 두 사람은 뚜렷한 목적 없이 동생 집을 늦은 시간에 오지 않는다. “뭐 그리 사무적이야? 동생 집에 올 수도 있지.”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미안. 일단 앉아. 매형도요.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아니면 술?” “아니. 물이나 한 잔 줘.” 지친 모습의 매형은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올케는 안 보이네? 어디 갔어?” “미국 간 지 좀 됐어. 상준이 지내는 거 돌봐준다고.” 일하는 아주머니가 물잔을 내려놓자 진서윤이 웃으며 말했다. “됐으니까 들어가 쉬어요. 중요한 이야기라….” 아주머니가 물러나자 진윤기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이 뭔 날이긴 한가 봐. 다들 표정이 안 좋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다들이라니?” “아, 아냐. 회사일 때문에. 그래, 무슨 일이야? 두 분이 나란히 오신 걸 보면 물 한 잔 마시는 게 볼일은 아닌 것 같고.” 진서윤은 동생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돈 좀 융통해줄 수 있어?” “뭐? 돈?” 어처구니가 없었다. 백화점 사장이 고작 영화사 사장에게 돈을 빌려달라니? 백화점 하루 매출이면 영화 한 편의 수익 아닌가? 진윤기의 표정에서 그의 속내를 읽은 진서윤이 황급히 말했다. “아버지가 한도제철 인수할 때 캐시 싹 긁어가셨고 지금은 백화점 돈을 다 묶어 버렸어. 입출금 내역 매일 보고 중이야.” “왜? 누나 사고 쳤어?” “아냐! 이이 때문에 그래.” 진서윤은 곁에 앉아 한숨만 내쉬는 남편을 흘겼다. “내년 서울시장에 도전하겠다고 하니까 자금줄을 막아버리신 거야. 백화점 돈, 손도 못 대.” “서울시장?” 돈 빌려 달라는 말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너 올해 접속인가 접촉인가 그거 대박 쳤다면서? 돈 좀 만졌을 거 아냐?” “한국 영화 대박 친다고 해서 몇 푼이나 번다고? 입장료 얼만지 알아? 육천 원이야, 육천 원. 관객 67만이야. 다해도 40억이 전부라고. 극장이 떼가고, 배급사 떼가고, 제작비 떼고…. 얼마 남았을 것 같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다니! 황금 덩이 위의 세계에서만 지내니 현실을 모른다. 흥행 수익을 듣자 두 사람은 또 한 번 한숨을 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처남. 못들은 걸로 해줘.” 현관문을 나서는 두 사람을 보며 진윤기는 혀를 차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대문을 나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했다. 진서윤이 휴대전화를 꺼냈을 때 택시 한 대가 들어왔다. “어? 고모?” 부부는 돈 많은 조카의 얼굴을 보며 활짝 웃었다. * * * “네? 서울시장?” “왜? 너 이 고모부 무시하냐?” 무시할만한데 티 낼 수는 없는 일, 호텔 로비 라운지가 환하도록 웃어줬다. 갑자기 나타나 내 팔을 끌고 차 한잔 마시자 더니 결국 돈 이야기인가? “그럴 리가요. 의외라서 그런 거죠.” “어차피 여당이 이겨. 당의 후보만 되면 게임 끝이야.” 과연 그럴까? 정권이 바뀌면 여당 야당이 뒤바뀐다. 역량보다 욕심이 앞서니 자꾸 가망성 없는 일에 매달린다. “할아버지께 말씀드리…….” 할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두 사람의 입에서 약속이나 한 듯 한숨이 나왔다. “야단만 맞으셨군요.” 고모가 머리를 끄덕였다. “음…….” 백화점 돈은 꽁꽁 묶였을 테니 내게 쪼르르 달려온 건가? 내년 대통령은 DJ가 분명한데 서울시장이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혹시 선거 자금 때문에요?” 돈이라고 하니 두 사람의 눈이 반짝인다. “그래. 당 대표와 중진들에게 돌릴 돈만 있으면 돼. 당 후보로 낙점만 받으면….” “할아버지 전화 한 통이면 절대 그럴 일 없을 텐데요?” “그건 내가 막을 거야. 내가 알아서 할게.” 고모는 자신 있다는 듯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런데 얼마나 들어요? 저, 그렇게 많은 돈은 없어요.” 처음부터 거절하는 건 하수라 했던가? 아직 반년 넘게 시간이 남았다. 갈고리를 꿴 채 끌고 다니며 필요할 때 빼버리면 된다. “얼마나 가지고 있어?” 고모부의 반짝이는 눈. “글쎄요. 투자처에 묶인 돈이라 확인해야 해요. 잘 아시잖아요. 주식, 채권 시세는 매일 바뀌는 거. 그리고 선거전까지 묶인 돈을 현금화할 수 있는지도 확인해야 하고요.” 다소 실망한 고모부의 눈. 하지만 기대를 버리지 않은 눈빛이다. “그럼 확인 좀 해봐. 나도 필요자금 뽑아볼게.” 수백 명의 국회의원 중 한 명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을 서울시장이 되면 가능한 걸까? 이 부부가 원하는 것이 뭘까? 고모가 맡은 계열사의 완전한 독립? 아니면 정치계의 거물이 되어 순양을 압박하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계획? 뭐든 좋다. 덩치 큰 순양그룹보다는 잘게 쪼개진 회사를 하나씩 점령하는 게 더 쉬우니까 말이다. “고모부 서울시장 되시면 우리 아버지께 공유지 큰 거 하나 뚝 떼주시죠.” “공유지? 땅 말이냐?” “네.” “왜? 빌딩 하나 올리게?” “아뇨. 큼지막한 극장 하나 짓게요.” 나는 순진하게 웃으며 두 사람의 깜빡이는 눈을 바라보았다. ======================================== [068] 발톱의 길이 3 “극장?” “네.” “도준아. 극장보다 고층 빌딩이 낫지 않니? 위치만 좋으면 월세만으로 웬만한 회사보다 나을걸?” 못 말리는 우리 고모. 벌써 남편이 서울시장이라도 된 듯 오지랖 넓은 이야기까지 꺼낸다. “아뇨. 일반 극장과 좀 다른 컨셉으로요. 새로운 극장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 중이에요.” 멀티플렉스라고 아실랑가 모르겠네. 어차피 이해 못 할 말이니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다. “어휴. 윤기는 정말 자식 복 터졌어. 아버지 하고 싶은 일 하라고 시업 자금 대줘, 그것도 모자라 회사 키우라고 새로운 사업까지 구상해줘…. 부럽다, 정말.” “그러게. 우리 자식은 셋이나 되는데 부모 돈 쓰고 노느라 허구한 날 외박이니…. 쯧쯧.” 자식 복 없는 두 사람의 신세 한탄을 계속 듣기에는 곤혹스럽다. “고모. 제가 할아버지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 볼까요?” “뭘? 아, 안돼!” 펄쩍 뛰는 고모에게 살짝 웃음을 날려주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왜 반대하는지 정확히 알아야죠. 그래야 마음을 돌리시도록 설득할 수 있잖아요.” “안돼. 하지 마.” 고모가 또 펄쩍 뛴다. 아무래도 고모부를 정치 거물로 만들려는 이유가 바로 할아버지의 반대편에 설 때를 대비한 포석일 것 같다. “네네, 알았어요. 할아버지께는 비밀.”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댔다. “고모부께서는 여당에 뿌릴 돈 금액 확인하시고, 전 동원할 수 있는 자금 확인할게요.” 고모와 고모부는 내 손 하나씩을 잡고 구세주를 보는 눈빛으로 변했다. 어쩌면 서울시장으로 만들어 줘도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 * * “도준아. 너 나 잠깐 보자.” “아, 좀 늦었죠? 혼자 계신 데 죄송해요. 일찍 일찍 다닐게요.” “다 큰 사내놈 귀가시간까지 챙길 만큼 고리타분한 아버지 아니다.” 엄숙한 표정의 아버지를 보는 건 참 오랜만이다. 지난 10년간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을 잃지 않았… 아니, 딱히 힘든 건 없었나? 아들 잘 둔 덕분에 승승장구했으니 말이다. 고모가 와서 무슨 헛소리를 했는지 한번 들어봐야겠다. 하지만 아버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오늘 낮에 동기 큰아버지가 다녀갔다. 밤에는 고모가. 두 분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지만, 결론은 같았어.” “같은 결론…?” 아버지는 살짝 미소 지었다. “어떤 이야기인지 보다 결론이 더 궁금한가 보구나.” “과정은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역시. 보통과 다르네, 우리 아들.” 부드러운 음성과 달리 아버지의 미소는 이미 사라졌다. “술 한잔 할까? 좀 터놓고 이야기할 때가 온 것 같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미 일어서서 술병이 가득한 장식장 앞에 서서 술을 골랐다. 두 개의 잔에 술을 조금 따른 아버지는 한잔을 내게 건넸다. “건배할까?” 두 손으로 잔을 받자 아버지의 미소가 되살아났다. “뭘 위해서 건배할까?” “글쎄요. 내년에 개봉할 타이타닉의 흥행 성공?” 아버지는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나 말고 너.” “저요? 저는 그다지….” 어깨를 으쓱하며 아버지를 살폈다. 뭔가 색다른 모습이다. “음…. 그럼 내가 말할 테니까 하나 골라봐. 3조 원이 넘는 재산, 아진그룹의 인수, 헐리우드를 쥐락펴락하는 투자사 그리고 순양그룹 회장님의 무한한 애정. 어느 게 가장 마음에 들어?”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이미 내 안색은 시뻘게졌다 다시 하얗게 변했다. 이런, 입 가벼운 삼촌이! 아니, 내가 어리석었나? 젊은 시절, 머나먼 이국땅에서 서로를 의지하면 다진 우정이다. 절친 아들의 비밀을 친구에게 10년간 말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 “지금 네 표정이 바로 내가 세현이에게 네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표정이야. 하하.”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처럼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며 술잔을 꺾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참 이상하지? 분명 내 아들인데 날 조금도 닮지 않았어. 난 나의 예술적, 미적 감각에 자부심을 느끼는데 넌 그 흔한 대중음악, 팝송조차 듣지 않더구나. 반대로 돈 계산을 내게 참 지겨운 일인데 우리 아들은 기적 같은 발군의 투자 감각을 타고났어. 어떻게 이 정도까지 다를까?” 나는 내 손에 든 술잔을 한 번에 비웠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켜야 한마디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아. 천천히 심호흡이라도 하렴. 아니, 한잔 더 마실래? 하하.” 아버지는 웃으며 내 술잔에 술을 채웠다. “처음에야 어마어마하게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기까지 하더라. 돈을 많이 번 것이 자랑스럽다는 게 아니고 그런 엄청난 재능이 자랑스러웠어.”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미리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던데? 중학생이 이백억 원대의 돈을 주무르고 유창한 영어로 협상한다? 내가 그걸 믿었을 것 같아?” 아버지는 내 표정을 살피며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지나간 일은 내가 박수를 보내마. 솔직히 끝내줘! 멋지다.” 아버지는 가볍게 손바닥을 몇 번 부딪혔다. “이제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해 보자. 네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건 뭐지?” “글쎄요. “아직 구체적인 목표나 계획은 없어요. 당장 다가오는 것을 검토하는 데 급급해요.” “혹시 넌 순양그룹을 차지하고 싶으냐?” 진심을 말할까? 그리고 도움을 청해볼까? 아주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이직은 이르다. 한 명이 알면 모두가 아는 건 시간문제다. “그건 제 꿈에 다가서는 수단이나 도구일 뿐이지 목표는 아니에요.” “그래? 그럼 우리 아들 꿈은 뭘까?” “순양그룹을 능가하는 초일류 거대기업…? 그런 기업을 만들려면 처음부터 만들어야 할 회사도 필요할 거고 순양그룹의 계열사 중에 괜찮은 건 사야겠죠. 물론 다른 대기업의 계열사도 필요하고요. 꼭 순양으로 한정할 수는 없어요.” “사?” “네.” “야! 순양그룹이 구멍가게야? 동네 슈퍼냐? 그걸 산다고?” “아버지. 할아버지가 순양그룹을 물려주시는 건 제가 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냥 재벌가에 태어난 놈이 억세게 운 좋다는 소리밖에 더 듣겠어요?” “그래서 산다? 순양의 알짜배기 회사들을?” “알짜배기라는 게 확실하다면요. 뭐, 아직은 꿈이죠, 뭐.” 조금은 그럴싸하게 들렸을까? 아버지의 형제와 조카들 전부가 내 발아래에서 줄 서려고 버둥대는 머슴으로 만들려는 본심은 드러나지 않았을까? 다소 놀란 모습이지만 내 본심은 드러나지 않은 것 같다. 놀란 모습 속에 기특하게 여기는 마음이 엿보였다. 잔에 남은 술을 깨끗이 비운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 마음이라면 내가 딱히 해줄 게 없을 것 같네. 괜히 고민했어. 하하.” “무슨 고민요?” “난 네 꿈을 이루는데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고민했거든. 필요하다면 회장 아들 중 한 명이 가진 법적 권리라도 내세워 볼까 했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아들의 권리? 소파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내 어깨를 한번 툭 치며 미소 지었다. “아무튼, 고맙다. 가족 간에 금이 가더라도 형님들과 싸워야 하나, 아니면 계열사 몇 개 또는 현금이나 주식을 요구하며 협상할까… 생각 많이 했어.” 가만?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카든데? “얼굴 붉히는 싸움도 싫고 자존심 상하는 협상도 싫었는데 네가 필요 없다니, 뭐…. 밤늦었다. 난 올라가서 자야겠어. 너도 자.” 아버지는 휙 돌아서서 이 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아버지. 그건 아니죠. 잠깐만요. 이야기 좀 더 해요. 네?” 나는 이 층으로 올라가는 아버지를 졸졸 뒤따르며 아버지를 불렀다. 오늘만큼 간절히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 * * 두 자동차 회사의 합병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을 때 주차장을 꽉 메운 십여 대의 검은 세단을 발견했다. 이건 그룹의 주요 인사들이 다 모였다는 뜻이다. 거실에서 서재의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회의 내용은 이미 짐작하고 있다. 언론은 연일 심상치 않은 환율을 보도했고 단기 외화 자본을 도입하여 장기대출로 자금을 운용하는 종합금융사의 행태가 위험하다는 경고를 계속했다. 하지만 이런 경고를 무시하는 정부의 발표도 잇달았다. 한국은 산업구조가 튼튼하고 무역수지 흑자가 누적되고 있는 상황을 거론하며 그 유명한 ‘경제 펀더멘탈’ 타령이었다. 경제 부총리의 이 유명한 레토릭은 눈앞에 닥친 위기를 외면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위기를 피부로 느끼는 넥타이 전사들은 달랐다. 이미 늦었다는 것을 실감했고 다가올 태풍이 약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바로 서재에 모인 사람들처럼 말이다. # # # “그룹으로 유입되는 외환은 단돈 1달러, 1엔, 1마르크도 쓰면 안 됩니다. 해외 결제가 임박한 핫머니부터 정리해야 하고요.” “은행에서는 달러를 풀 생각조차 없는 것 같습니다. 꽉 틀어쥐고 있어요.” “환율 상승 때문에 수출 환차익은 좋습니다만, 원화로 바꾸는 건 홀딩 중입니다.” 계열사 사장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부총리와 연락하신 적 있으십니까?” 진 회장의 곁에 앉은 이학재 실장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넌? 넌 통화한 적 없어?” “제 전화를 피하더군요.” “자네 전화가 내 전화라는 걸 모를 리 없는 놈이다. 이 새끼 지금 경제인들 전화 피해는 게 분명해.” 진 회장의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룹 내, 남는 돈 다 끌어모으면 얼마나 있어?” “연말까지 핫머니 결제하면 4천억 조금 넘습니다. 당연히 외환은 바닥이고요.” “한도제철 인수 때 뭉텅이 돈이 나갔고 인수 후 지금까지 계속 돈 들어갑니다.” 진 회장은 계열사 사장들을 향해 소리쳤다. “줄 돈 주지 말고 받을 돈 지금 당장 받아와. 그리고 가진 돈 전부 달러로 바꿔.”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영 시답지 않았다. “시세보다 더 쳐준다고 해도 먹히지 않습니다. 달러 없다고 다들 우는 소리만 돌아옵니다.” 위기가 보통이 아닌 건 확실했다. 회장의 호통에도 주눅 든 사람이 없다. 불가능한 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다른 대책을 세워야 살아남기 때문이다. “곧 특이점이 올 겁니다. 달러당 이천 원, 아니 삼천 원까지 환율이 올라도 달러가 부족해서 못 구할지도 모릅니다.” 서재는 적막만 감돌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동남아를 덮친 금융위기라는 쓰나미가 한국까지 덮칠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쓰나미를 막을 방법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이때 이학재 실장이 입을 열었다. 그는 구명보트가 어디 있는지 깨달았다. “회장님. 아진그룹 말입니다.” “왜? 그놈들 비밀 창고에 달러라도 쌓아뒀데?” “아뇨, 그게 아니라 인수대금 있잖습니까? 1조2천억 원.” 진 회장은 의자 등받이에 기댔던 상체를 벌떡 세웠다. “그렇지! 그거 미라클 자금이지? 빳빳한 달러로 가지고 있겠지?” “네. 그 달러 우리가 받고, 1조2천억 원화를 내주면 됩니다. 부족한 돈이야 은행 대출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달러가 없을 뿐 원화는 넘쳐나니까요.” 서재의 모든 사람들 얼굴이 환해졌다. 미라클의 달러는 구명보트 정도가 아니다. 쓰나미를 피해 배를 안전하게 지켜줄 항구 수준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라클이 보유한 달러를 순양 채권을 발행해서 모두 거둬들이면 됩니다.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연간 수익률보다 이자를 더 준다면 가능할 겁니다.” “이 실장님. 그쪽도 우리나라의 위기를 느낄 겁니다. 환율이 두 배로 뛰면 환차익만으로 두 배를 버는데 채권 이자 정도로 만족하겠습니까?” 순양생명 사장이 현실적인 문제점을 짚었다. “1조2천억은 환율 시세대로 줘야죠. 전 여유 달러에 대한 채권 이자를 말씀드린 겁니다.” 곧이어 서재가 시끄러워졌다. 일말의 가능성을 찾으니 그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려는 생각들이 오고 갔다. 이때 진 회장의 웃음이 터져버렸다. “으하하! 모두 그만해. 그 문제는 내가 처리할 수 있어.” 모두의 시선이 진 회장을 향했다. “내가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주인장이랑 아주 친하거든. 흐흐흐.” ======================================== [069] 첫 싸움 1 이학재 실장은 진 회장의 웃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회장님. 오세현 대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자는 그의 회사가 가진 달러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 겁니다.” “이 실장. 오세현이가 주인이야?” “네?” “내가 말했지? 주.인.장. 이랑 친하다고. 오세현이는 그냥 마름이잖아.” 마름은 지주의 대리인일 뿐, 당연히 지주는 따로 있다. 주주와 투자자가 바로 주인이다. “회장님. 설마…?” 차마 누구도 말하지는 못했지만, 서재의 모든 이들은 미라클이 혹시 진 회장의 회사인지 확인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뭐야? 그 눈빛들은? 오해하지 말라고. 내 돈 아냐. 그 정도 달러를 내가 어떻게 모아? 당신네들이 일을 열심히 안 해서 내 주머니가 텅텅 비었는데. 아냐?”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두 엉거주춤할 때 진 회장이 책상을 탕 두들겼다. “됐어. 모두 나가 봐. 내 지시사항 절대 빠트리지 말고 철저히 챙겨.” 이학재 실장은 잠시 회장과 눈이 마주쳤지만 가볍게 끄덕이는 고개가 자신도 포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서재를 나오는 이학재는 그때까지 사라지지 않은 진 회장의 미소를 확인했다. # # # 분위기가 색다르다. 위기 때문에 대책 회의를 했다면 잔뜩 얼어붙은 표정이어야 하는데 꽤 밝은 얼굴이다. 역시 재계 1위의 순양그룹이라 자금력이 탄탄해서일까? 이학재 실장이 마지막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서재로 들어갔다. “아이고, 주인장 오셨소? 허허.” “네?” 주인장? 내가? 설마 오늘 긴급회의에서 날 후계자로 지목한 것일까? 절대 그런 일 없었겠지만 괜한 상상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우리 손자, 미라클 주인장 아니신가? 오늘은 할아버지, 손자로 만나는 거 아니다. 두 주인끼리 중요한 이야기 한번 해보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섭게…….” “어디서 엄살이냐? 얼굴에 다 쓰여있다. 재미있어 죽겠다고.” 내 표정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표정이 바로 그렇다. 협상은 긴장과 초조함의 미학이다. 재미는 이미 협상의 여지가 없을 만큼 우위에 선 사람의 몫이다. 할아버지와 나, 두 사람 모두 우위에 서 있는 게 아닌 건 틀림없으니 우리 둘 다 히든카드가 있다는 소린데… 내 카드는 알지만, 할아버지의 카드는 모른다. 도대체 뭘까? 외환 위기가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어째서 이런 여유를 보일까? “그런데 중요한 이야기는 뭔가요? 두 자동차 회사 합병 지분 비율 말씀하시려고요?” “아, 그것도 있었네. 그건 나중에 하자. 더 중요한 게 있거든.” 더 중요한 게 뭘까? 정말 순양그룹 승계문제일까? 하지만 나만의 행복한 상상은 짧게 끝났다. “너 아진그룹 인수대금 준비했냐?” “준비랄게 뭐 있나요? 해외 계좌에서 국내 계좌로 옮기면 되는데요.” “당연히 달러겠네?” 달러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 할아버지의 눈이 반짝이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렇군. 외환 위기를 대비한 달러 확보. 순양그룹과 할아버지에게는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네. 미국 은행에 있으니까 달러죠.” “그거 내가 바꿔주마. 1조 2천억. 맞지?” “네.” “지금 환율이 1,200원쯤 하니까, 보자……. 딱 10억 달러네?” “네. 맞습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옮기자.” “싫습니다.” “뭐?” “복잡하잖아요. 그냥 채권단 은행에 주면 되는데 뭐하러 이리저리 돌려요?” 생긋 웃는 내 모습을 할아버지는 기가 찬 듯 쳐다보기 시작했다. “너 혹시…?” “네. 저도 눈 있고 귀 있습니다. 달러가 계속 오르는 중이죠. 어차피 순양, 아진 자동차의 합병이 마무리돼야 채권단이 인수 승인서에 사인 합니다. 대금 지급은 그 이후고요. 제 입장에서는 천천히 지불하는 게 이익이죠.” 노친네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게 좀 귀엽기까지 했지만 살아온 인생의 결이 다르다. 순식간에 차분해지며 옅은 웃음까지 보인다. “그렇지. 그렇게 나와야 내 손자지. 암, 이제야 좀 재미있어지는구나. 허허.” 재빨리 머리를 굴려야 할 시간을 웃음으로 번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 그리고 이어지는 제안. “1,500원 쳐주마. 어떠냐?” “조금 더 쓰시죠.” “이런 날강도 같은 놈. 좋다. 1,600원.” “어림도 없습니다.” “이놈아. 네가 지금 모은 그 달러, 내가 사준 목장 팔아서 살붙이고 옷 입힌 돈 아니냐. 그걸 잊은 게냐?” “그건 거래였죠. 전 어린 시절 내내 열심히 공부해서 전 과목 백 점 맞아 할아버지께 기쁨을 드렸고 그 보답으로 목장을 받았습니다. 목장 구입하는 데 몇천만 원 쓰신 걸로 아는데, 몇천만 원으로 그 정도 기쁨을 샀다면 합당한 거래였어요. 할아버지에게 몇천만 원은 일반서민으로 친다면 몇만 원 아닙니까?” “햐-! 고거 참 독한 놈이로세. 그걸 다 기억하느냐?” 할아버지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십 년 전 일을 들춰내신 건 할아버지세요.” “이거, 내가 말린 것 같은데…. 좋다. 얼마 쳐줄까? 네가 말해 보아라.” “황금보다 귀하신 몸이 될 달러를 휴지 쪼가리가 될 원화로 사시려니까 저울이 안 맞죠. 저울추에 다른 걸 올리세요.” “뭐라? 휴지?” 지금껏 옅은 미소를 잃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표정이 싹 변했다. “환율이 얼마나 뛸 거라고 생각하길래 휴지라고 하는 게냐?” “달러가 없어서 못 구하시니까 제게 이런 말씀하신 거 아니세요? 돈 주고도 못 산다면 그 돈이 휴지죠 뭐. 돈의 역할을 못 하는 원화, 휴지 아닐까요?” 할아버지는 표정을 풀지 못하고 책상을 톡톡 치기 시작했다. 너무 심했나? 할아버지의 근심이 느껴지자 마음이 약해진다. 적당한 수준에서 달러 지원을 좀 해드려야 하나? 이, 이런…. 지금 무슨 생각을? 두 번 다시 오기 힘든 이 기회를 그깟 정 때문에 버릴 수는 없다. 이를 악물었다. 마침내 할아버지가 조용히 말했다. “이 나라에 달러가 없다는 건 어떻게 알았느냐?” “언론이죠.” “뭐? 언론?” “네. 온갖 위험신호가 언론에서 쏟아지잖아요. 알만한 사람은 다들 대책 세우려고 하겠지만… 이미 늦은 것도 알겠죠.” “언론은 자극적인 걸 좋아하지. 좀 과장된 면이 크다.” 리스크를 피부로 느끼면서도 저런 말을 한다는 건 내 머릿속을 알고 싶은 거다. “할아버지. 진실은… 이를테면 시집 같은 겁니다.” “시집?” “네. 늘 새로운 시집이 출판되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시집을 읽지 않잖아요. 하지만 많은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선문답처럼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대답은 나이 드신 분들이 좋아한다. “맞는 말이다. 진실은 힘이 세지만 못 읽거나 외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 머리를 끄덕인 할아버지는 미소를 되찾았다. “좋다. 그럼 내가 저울에 뭘 올려야 균형이 맞을까?” 먼저 대답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물에 빠진 건 순양그룹이고 구명조끼는 내 손에 들어있다. 물이 가슴을 넘어 코밑까지 차오를 때, 충분한 공포를 느꼈을 때, 그리고 주머니에 든 황금 덩이를 던지기 시작할 때 구명조끼를 건네면 된다. “합병 비율 협상을 테이블에 올려놓을게요. 원샷으로 정리할까요?” “합병 비율?” 이 단어 속에 들어있는 두 개의 뜻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곧바로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실 분이다. “이, 이런…. 요놈 보게나. 아주 뱃속이 시커먼 놈이었구나!” ‘철면’이라는 별명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간이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합병할 때 순양그룹의 지분을 순양자동차에 듬뿍 올리고 합병 비율은 내게 유리하게. 이 두 가지를 정확히 이해하신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뱃속 시커멓다는 표현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커먼 게 아니고 협상 테이블에 꺼낼 수 있는 합리적인 요구라고 생각하는데요?” “고놈 참, 말은 참기름 바른 듯 번드르르 하지만 욕심이 맞다.” 말 속에 숨은 본질을 내 앞에 들이밀어 버리니, 너저분한 변명은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세상에 욕심 없는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남의 욕심 달래가며 내 욕심 채우는 게 장사고 사업 아니겠습니까?” “오호!” “그리고 욕심이란 게 어차피 욕먹을 짓인데 이왕 욕먹는 거 큰 욕심 부리겠습니다.” 할아버지 입술이 실룩거린다. 어떤 말이 나올까. “넌 참 효자, 아니 효손이다. 허허.” “당연하죠. 지금껏 기쁨만 드렸지 않습니까? 어릴 때는 공부로 즐겁게 해 드렸고 다 커서는 꼭 필요한 돈까지 준비했으니까요. 이만한 손자, 어디 가서 찾기 힘듭니다.”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조금 능글맞게 말했지만, 할아버지는 오히려 웃음을 거둬버렸다. “그렇기도 하다만 넌 더 큰 걸 내게 줬다.” “……?” “순양이 계열사를 거느리고 그룹이 되는 순간부터 내게 맞서는 놈이 없었어. 전부 굽신거리며 내 것을 얻어가려 했을 뿐이다. 철저히 준비한 다음 두 주먹 불끈 쥐고 내 것을 빼앗겠다고 덤비는 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더구나.” 설마? 칠순이 넘은 나이에 다시 불타오르는 걸까? 그것도 손자를 상대로? “내가 인심 좋게 내 것을 나눠주기는 할망정 뺏기지는 않는다.” “할아버지. 설마 더 큰 것이라는 게…. 그건 아니겠죠?” “맞다. 다 죽어가던 불씨 한번 살려 볼 생각이다. 한번 해보자꾸나. 누가 이기는지.” “할아버지! 전 피를 이은 손자라고요!” “그러니까 더 재미있지 않겠느냐? 할애비와 손자의 싸움. 이거, 말하고 나니 조금 민망하기는 한데…. 뭐 어때? 재미있는데. 으허허.” 진담인지 농담인지 아리송하지만, 기분 좋게 막 퍼주는 일은 물 건너갔다. 어차피 그 정도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자, 달러 많이 쥔 주인장아. 제안은 내가 먼저 하마.” “...네.” 최대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손자의 슬픈 표정도 할아버지에게는 치명적인 무기가 된다. “합병 비율, 순양자동차에 얹어줄 계열사 지분은 내가 정하고 넌 그냥 받아들여라. 어쩌면 내가 주는 게 네가 싸워서 얻는 것보다 훨씬 많을 수 있다. 난 네 할아버지 아니냐? 손자한테 야박한 할아버지는 없는 법이다. 어떠냐?” 젠장, 이 영감에게는 치명적인 무기 따위는 없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듯이 전 효손입니다.” “그 말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렷다?” “효손은 할아버지의 기쁨을 없애지 않습니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그렇지.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놈은 사내가 아니지. 첫 제안은 거절하는 게 당연하다.” “두 번째 제안도 있으십니까?” “있기는 한데 제안은 아니다. 보통 이런 건 협박이라고 하지. 협박을 받으면 첫 제안을 왜 거절했을까 후회하게 될 게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무슨 협박일까? 협박당할 일은 아직 없다. “내 제안을 거절했으니 순양자동차와 아진자동차의 합병은 없을 게야. 내일 아침, 조대호 사장이 기자 회견을 할 거다. 아진그룹 인수대상자인 미라클에서 상식을 벗어난 요구가 많아 합병은 무산이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 뭐 이 정도?” 이 양반은 아직 외환 위기의 크기를 정확히 모른다.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질 곳은 기업뿐만이 아니다. 은행 역시 마찬가지다. 대마불사를 너무 믿는 건가? 은행만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금융기관 중 하나인 고려증권 부도가 뭘 의미하는지 눈치챌 만도 한데 말이다. 긴장이 확 풀렸다. “협박치고는 좀 약한데요?” 이제 할아버지의 당황하는 표정을 감상할 차례다. ======================================== [070] 첫 싸움 2 “약해? 아진그룹 인수, 물 건너가도 상관없어?”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간 할아버지의 표정.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조금 화난 표정이다. 협박이 먹히지 않았을 때 이런 표정인가? “설마 너, 아진그룹 인수를 가볍게 생각했던 게냐?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관둘 생각이었어?” 아하, 쉽게 포기하는 모습으로 비췄나 보다. 우리 할아버지,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포기였지. “그럴 리가요. 합병이 무산되면 제가 아진그룹을 인수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나 봐요?” “인수의 첫 번째 조건이다.” “상황은 변합니다. 지금은 그야말로 ‘비상상황’이죠.”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네?” “나의 영향력이 바로 그것이다. 합병 깨버리고 채권단, 은행, 청와대, 국회에 전화 한번 돌리면 인수 결정은 없었던 일이 될 게다. 그리고 다시 입찰하겠지? 그럼 대현그룹 주 회장이 내게 술 한잔 대접하겠다고 연락할 거다.” 부총리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는 정부의 공식 발표가 며칠이나 남았나? 11월 말이 분명한데. 이 발표를 직접 봐야 대(大) 순양그룹 회장님의 영향력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실 텐데 말이다. “할아버지.” “왜? 이제 떨리기 시작하니?” “정부가 110억 달러를 외환시장에 퍼부었는데 환율은 여전히 폭등합니다. 블룸버그 기사 보셨죠? 우리나라 가용 외환 보유고가 겨우 20억 달러에 불과하답니다. 강경식 부총리가 우방국에 돈 빌려달라는 소리를 TV에 대놓고 했어요.” “외환 위기 때문에 내 힘이 줄어들었다는 뜻이냐?” “아뇨. 줄어든 게 아니죠. 없어졌어요.” “뭐라?” 오늘, 할아버지의 가장 놀란 표정을 지금 봤다. “제 살길 찾기에도 힘겨운 시간들이 이어질 겁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전화가 먹힐까요? 할아버지께서는 지금의 비상상황을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아무런 말도 못한다. 협박은 내가 할 차례다. “뭐, 할아버지 영향력이 먹혀 재입찰한다면 제게는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그 누구도 입찰에 응하지 않고 미라클 단독 입찰이 될 테니까요. 인수자금 1억2천을 8천억으로 써도 채권단은 제게 큰절 할 것 같지 않습니까?” 할아버지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말도 못한다. “대현그룹 주 회장님, 지금쯤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겁니다. 아진에 1조2천억 쏟아붓고 현금이 없다면 꽤 곤란했을 테니까요.” “도준아.” “할아버지, 잠깐만요. 제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할게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마음속 한켠에는 분명, 지금의 비상상황이 곧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아니, 바램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그런 일 없습니다. 팩트만 잘 보셔도 우리나라가 이 위기를 절대 피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아실 겁니다.” 무너져야 할 것이 무너지지 않으면 불안하다. 진 회장뿐만 아니라 모두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도의 경제 규모가 쉽게 쓰러질 리가 없다는 막연한 믿음. 이 믿음이 바로 불안을 억누르고 있다. 하지만 지금, 할아버지의 표정이 변했다. 믿음을 버린 것이다. “네 확신은 흔들리지 않아?” “그렇습니다. 엄청난 일이 터집니다. 그것도 며칠 남지 않았고요.” “그 말은 우리 순양그룹이 네가 가진 10억 달러가 꼭 필요하다는 뜻이겠지?” “우리나라 외환 보유고가 겨우 20억 달러입니다. 전 절반인 10억 달러를 들고 있고요. 그 달러가 한국으로 들어오는 순간 모든 은행과 기업이 미라클 사무실로 달려올 겁니다.” “그때 내가 널 만나려면 번호표라도 들고 있어야 하겠구나.” “할아버지는 0번이죠. 바로 지금, 저와 만나고 계시지 않습니까?”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할아버지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내가 이학재부터 불러서 아주 혼쭐을 내고 우리 손자랑 다시 이야기해야겠구나.”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처음 봤다. 이럴 때 보면 참 대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린 손자의 말이라도 귀담아들을 줄 아는 재벌 회장님, 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곱게 물러서도록 빠져 줄 수는 없는 일이다. “할아버지. 이젠 제가 재미없습니다.” “뭐라? 이놈이 달러 좀 있다고 할애비를 놀려?” “진담입니다. 전 아진그룹 인수는 후딱 해치워야 합니다. 앞으로 할 일이 많습니다. 손에 쥔 달러 흔들어 가며 쇼핑카트에 주워 담을 기업도 찾아봐야 하고 가격 협상도 해야 합니다.” 두 번째 보여주는 당황한 표정. 왠지 모를 뿌듯함이 피어올랐다. 내게는 경이적이고 전설적인 존재였던 순양그룹 창업주였다. 그런 사람을 잠시나마 이겼다는 작은 희열이기도 했다. “너…. 너, 도대체 달러를 얼마나 쥐고 있는 것이냐?” “지갑을 다 보여드릴 수는 없지만 우성자동차도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정도는 될 겁니다.” “우, 우성이라고 했어? 참말이냐?” “네. 아진, 우성 두 자동차 회사를 묶을 겁니다. 순양자동차까지 얹으면 대현자동차와 비슷한 체급이 되지 않을까요?” 의자를 뒤로 빼며 일어섰다. “싹 묶어서 순양자동차 간판 달아드릴게요. 이건 효손으로서의 조부님께 드리는 또 하나의 선물입니다.” 할아버지는 타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제안 기다리겠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회의하셔서 알아보시고… 빠른 결론 부탁드립니다. 대기자가 늘어나기 전에 말입니다.” “협박치고는 좀 약하다.” 서재를 나가는 내 발을 붙잡는 말이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건 네가 했던 말이었지? 완전히 개소리는 아니로구나.” “물러나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건 할아버지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지요.” “그거 완전히 개소리구나. 허허.” 호탕한 할아버지의 웃음에 어이없는 한숨만 나왔다. * * * 진 회장은 손자가 서재를 나가자마자 전화를 들었다. “학재야. 지금 당장 집으로 와. 전자, 생명, 자동차, 물산, 건설 사장도 다 데리고. 빨리!” 수화기를 내려놓은 진 회장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서재를 서성거렸다. 손자가 말한 위기. 자신도 그 위기를 느꼈다. 하지만 크기와 깊이가 다르다. 외환 고갈의 일시적 어려움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럴 때마다 정부는 미국, 유럽, 일본으로부터 달러를 빌리거나 통화스와프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손자는 이번만큼은 다르다고 말한다. 경제 대국이 돈을 빌려주지도 화폐를 교환하지도 않는다. 정말 20억 달러가 외환의 전부라면 음식은 많은데 물이 없다는 소리와 같다. 배고파 죽는 게 아니라 목이 타서 죽는 것이다. 똑. 똑. “회장님.” 노크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물산과 전자! 전 부서에 알려. 오늘부터 수출대금 들어오는 대로 달러로 쥐고 있고, 결제할 돈은 대출받아서 줘. 그리고 건설.” “네. 회장님.” “해외 프로젝트는 10%, 아니 20% 싸게 입찰해. 대신 계약금이든, 중도금이든 하루라도 빨리 받아. 그리고 생명.” “아, 네. 회장님.” “해외 금융상품에 투자한 돈 전부 회수해. 위약금 얼마라도 좋아. 전부 해지해서 달러 확보해.” “회, 회장님, 그건 손실이 너무 큽니다. 경영수지가….” “입 닥치고 전부 회수해. 손해 보는 건 고객들에게 다 떠넘기면 되잖아.” 회장이 왜 이러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나 정도가 심하다. 마치 부도나기 직전, 현금 확보해서 야반도주라도 계획한 사람처럼 보인다. “회장님. 좀 진정하시고….” 이학재가 조심스레 말하자 진 회장은 말을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전 계열사의 외환은 철저히 통제 중입니다.” 진 회장은 세차게 손을 저었다. “철저한 준비로는 부족해. 팔다리 하나쯤은 날아간다는 각오로 대비하라고. 알아들었어?” “회장님, 혹시 미라클 오너와 말씀해 보셨습니까?” “누구?” “10억 달러를 쥐고 있는 미라클 말입니다.” “그래.” 진 회장이 머리를 끄덕이자 모두 안색이 검게 변했다. 이야기가 틀어진 게 틀림없다. 10억 달러라는 든든한 동아줄은 내려오지 않는다. “그쪽에서 거절했습니까?” “내가… 6.25 난리 통에도 돈을 번 놈이다. 전쟁도 무섭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은 무섭다.” 엉뚱한 대답. 천둥 번개가 쳐도 꿈쩍하지 않은 분이 오죽하면 저럴까 싶었다. “달러 쥔 놈은 더해. 내 앞에서 눈도 깜박하지 않고 협박까지 하더라. 나보다 더 독한 놈은 처음이다.” 진 회장을 가장 곁에서 지켜본 이학재는 믿을 수 없었다. 세상에 진양철보다 더 독한 인간이 존재하다니. “대호야.” “네. 회장님.” “자동차가 보유한 계열사 지분은 어느 정도야?” “항상 12%를 유지합니다.” “학재야. 경영권 방어의 한계선까지 간다면 자동차 보유 지분을 몇 퍼센트까지 올릴 수 있지?” 조대호 사장은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지만, 이학재 실장의 입에서는 곧바로 숫자가 나왔다. “17%까지 올려도 됩니다. 그 이상은 순양생명의 지분을 건드리기 때문에 그룹 전체 지분 구조를 재조정해야 합니다.” “그럴 시간 없다. 딱 준비하고 있다가 내가 신호하면 옮겨.” “네. 회장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철옹성 같았던 순양그룹에 먹구름이 끼었고 균열이 시작됨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 * * 1997년 11월 19일,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으로 임명된 임창열은 ‘IMF에 가지 않고 현재의 위기를 해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이틀 뒤인 21일 밤 10시. IMF의 요구사항이라며 국제수지 개선, 통화가치 안정, 무역자유화, 자본시장 개방, 기업경영 투명성 제고를 곁들인 구제금융신청을 긴급 기자 회견을 빌어 발표했고 다음 날, 김영삼 대통령 구제금융 신청에 관한 대국민 특별 담화문 발표했다. IMF의 시작이었다. 한국 국가신용등급은 하락했고 종합주가지수 400선이 무너졌다. 9개의 종금사가 영업정지 명령을 받았으며 한라그룹이 부도났다. 그리고…. 미라클 인베스트먼트 사무실과 오세현의 휴대전화는 불이 났다. “아, 글쎄. 행장님! 합병부터 끝내야 인수대금을 쏴 드릴 것 아닙니까? 계약서 잘 보십시오. 협상 시한은 내년 2월까지입니다. 아직 한참 남았어요. 그리고 왜 달러로 지불합니까? 1조2천억, 세종대왕님으로 드릴 테니 그리 아십시오!” 오세현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제일은행입니까?” “그래. 난리다, 난리. 하루에도 열두 번은 징징댄다.” “파격적인 제안이라도 하면서 징징대야 생각이라도 해볼 텐데.” “그러게 말이다. 행장씩이나 하는 놈이 애도 아니고. 에잉-!” 오세현은 한심하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근데, 넌 어떻게 돼가? 진 회장님은 여전히 계산 중이냐?” “네. 손자라고 대충 얹어줄 생각은 없으신가 봐요. 지독해.” “달리 재벌이겠냐? 너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잖아. 할아버지꺼 조금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머리 굴리면서….” 오세현은 피식 웃으며 내 곁에 다가왔다. 아주 친근한 표정으로. “그런데 도준아. 환율이 더 오르면, 만약 이천 원 찍으면 어떻게 되냐?” “완전 땡큐죠. 3조 원이 5조 원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넌 5조 원의 자산가야. 그것도 나이 스물에 말이다. 기분이 어때?” 어깨를 으쓱하며 내 어깨를 슬쩍 밀친다. “바람 넣지 마세요. 저도 그 돈 들고 유럽에서 귀족 놀이 하고 싶어 미치겠다고요.” “하면 되잖아.” “삼촌. 돈만 많은 유럽 귀족과 나라를 주물럭거리는 한국 재벌 회장. 어느 게 더 좋아요?” 오세현은 입맛을 다시며 물러나 앉았다. “아이고, 재미없는 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전 한국 재벌 회장님 되고 삼촌은 유럽 귀족처럼 은퇴 생활 즐기도록 해드릴게요.” IMF로 온 나라가 초상집 분위기지만 우리 두 사람은 즐거운 상상을 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 [071] 첫 싸움 3 이학재 실장이 회장실 문을 열었고 누군가가 들어섰다. 접견용 소파에 앉아 있던 진 회장은 문이 열릴 때 일어서려다가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총리가 심부름꾼을 보내? 많이 컸구먼.” 진 회장의 불편한 한마디에 천천히 걸어 들어오던 심부름꾼은 잽싸게 옆자리로 달려와 허리를 굽혔다. “오해십니다, 회장님.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보는 눈이 많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과의 말씀 전하라고 제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래, 알았으니 얼른 자리에 앉게.” 김성수 차관은 연신 머리를 숙이며 소파에 앉았다. “내가 총리를 왜 만나자고 했는지 이유는 알고 왔겠지?” “물론입니다. 회장님.” “IMF가 555억 달러 지원을 승인했다고 들었어. 깡디신지 깡다군지 하는 놈이 어제 약속했다면서?” 김성수 차관은 대답은커녕 눈만 깜빡거렸다. “너… 모르지?” “회장님. 그, 그게 아니라 어떻게 아셨는지 해서요. 어제, 아니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인데….” “내 눈과 귀가 누군지 묻지 말고 대답이나 해. 맞아?” “네. 그렇습니다.” “1차로 얼마 들어와?” “56억 달러입니다. 바로 수혈하기로 했습니다. “그 돈, 어디에 쓸 건지 모르겠지만 15억 달러는 순양그룹이 좀 쓰자. 괜찮지?” 김성수 차관은 난처한 모습으로 두 손을 공손히 무릎 위에 놓았다. “회장님. 그건 좀…. 일단 시중은행에 풀기로 했습니다. 수출업체들이 신용장 들고 장사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들 돈줄부터 풀어줘야 줄도산을 막을 수 있습니다.” “구멍가게부터 살리고 본다?” “네.” “나가.” “회, 회장님.” 김 차관은 소파 끝자락에 간신히 엉덩이만 걸친 채 식은땀을 흘렸다. “날 바보로 아나? 선거날이 며칠 안 남았지? 재벌 밀어준다고 하면 우수수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니까 중소기업 살린다는 발표부터 하고 보자는 속셈인 거 모를 거 같아?” “아, 아닙니다.”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선거 자금 아쉬울 때는 내 주머니 털어가고, 내가 아쉬울 때는 딴 놈 주머니를 채워줘? 그거 누구 계산법이냐?” 진 회장이 정곡을 찌르자 김성수 차관은 다시 꿀 먹은 벙어리였다. “김 차관. 그럼 2차 수혈은 언제요?” 가만히 지켜만 보던 이학재가 난처한 김성수를 살려주듯 물었다. “12월 말입니다. 크리스마스 직후에 말입니다.” “금액은?” “20억 달러요.” 진 회장은 소파 손잡이를 탕-하고 내리쳤다. “그거라도 줘. 됐지?” 마치 할 이야기는 다 끝냈다는 듯 진 회장은 몸을 일으켰다. “회장님.” “왜? 아직 할 말 남았나?” “제가 그걸 어떻게 약속드립니까?” “그럼 왜 왔어? 총리한테 그 정도 권한은 받은 줄로 아니까 내가 자네 상대해줬어. 권한 없는 놈이 지금까지 내 앞에서 떠들었다면, 자네 공무원 인생 끝이라는 것만 알아둬. 잘 생각해서 입 열어.” 공무원이 가장 자존심이 상하고 모멸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권한 없는 놈. 권한으로 인간의 등급이 매겨지는 조직에서 권한이 없다는 말은 상대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회장님. 제 선에서 약속할 사안이 아닙니다. 총리님도… 아니, 대통령도 약속 못 합니다. 대선에서 여당이 승리하고 정권을 계승해야 가능한 일 아닙니까? 만약 야당이 정권을 쥐게 되면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이기라고! 당신네들 이기라고 돈 줬잖아. 그 돈을 뿌리고도 못 이기면? 눈감고 무조건 1번 찍는 사람이 절반인데 그걸 못 이겨?” 선거전은 접전에서 변화가 없다. 그 누구도 당락을 점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 될 뿐이다. 대답 못 하고 몸 둘 바 모르는 김성수 차관은 도움을 요청하듯 이학재 실장에 눈길을 돌렸다. 이학재 실장이 머리를 약간 끄덕이자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네. 회장님. 꼭 이겨서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아부 떨지 말고 가. 20억 달러 잘 챙겨서 내 주머니에 넣어.” 김성수 차관이 연신 허리를 굽히며 조용히 물러나자 진 회장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총리가 몸 사리는 걸 보면 게임 끝났구먼.” “정보팀 보고는 박빙이지만, 야당이 조금 앞선다고 합니다.” “산통 깨는 그 양반은? 만나봤어?” “네.” “뭐래?” “절대 사퇴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립니다.” “고춧가루 진하게 뿌리는구먼. 3번으로 나와서 1번 표 빼앗아 봤자 안된다는 걸 왜 모르지? 그런다고 다음에 기회가 오는 것도 아닌데. 바보 아냐?” “선거유세 뽕 맞고 제정신인 사람은 없죠. 지지자들 보면 자기가 대통령 된다는 확신이 드니까요.” 두 사람은 한심한 눈빛을 교환했다. “참, 김 차관 저놈에게 좀 챙겨주지 그래?” “그렇지 않아도 자동차 트렁크에 한 상자 넣어 줬습니다.” “잘했어. 왔다 갔다 욕만 얻어먹고 다니는데 생기는 거라도 좀 있어야 기운 나지.” 회장실 분위기가 좀 차분해지자 이학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회장님. 미라클 오너가 누군지 알려주실 수 없으십니까? 제가 한번 만나서 협조요청 해보겠습니다.” “됐어. 그쪽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넌 야당 캠프 한번 방문해. 박카스 몇 병 돌리고 언질만 해줘. 우리한테 20억 달러를 우선 지원하면 전경련이 차기 정권에 적극 협조한다고 말이야.” 이학재는 머리 한번 숙이고 회장실을 나갔다. 회장실에 혼자 남은 진 회장은 책상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17.7%라…….” 순양자동차에 얹어줄 수 있는 최대치의 지분이다. 17.7%의 영향력. 10억 달러를 받는 것도 아니고 단지 환전만 해주는 조건으로 주는 것이다. 물론 합병 뒤에 다시 순양그룹으로 집어넣겠다고 말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도 이미 안다. 손에 든 것은 주머니에 넣을 놈이지 되돌려 줄 놈이 아니다. 아깝지는 않았다. 다섯의 자식에게 골고루 나눠준다면 20%는 줘도 된다. 아들을 건너뛰고 손자에게 주는 것이지만, 자격은 차고 넘치는 손자니까 말이다. 하지만 진 회장의 마음 한쪽을 무겁게 짓누르는 걱정을 떨쳐낼 수 없었다. 손자를 보면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순간이 적지 않았다. 한 번 손에 들어온 것은 뺏기지 않으려 하고 남의 것을 뺏는 즐거움을 안다. 17.7%는 끝이 아니라 단지 시작이 분명하다. 핏줄보다 계산이 앞서는 성정을 타고난 손자가 순양그룹을 노린다면 나머지 자식들과 손자들은 알거지가 되어 쫓겨날 것 같다. 물론 순양그룹을 더욱 크고 웅장한 성으로 만들겠지만,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자격은 절대 나눠주지 않을 손자다. 진 회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지 애비 챙기는 거 보면 속정도 깊은 놈이지.”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줄 정도로 생각도 깊다. 걱정은 떨쳐 버려야 한다. 아들 걱정보다는 그룹 걱정을 먼저 해야 할 상황 아닌가? 뺏기더라도 남이 아닌 손자가 약탈자라는 걸 위안으로 삼고 싶었다. * * * “자, 이게 그나마 건실한 놈들이야. 이 위기만 잘 넘기면 문제없을 거야.” 오세현이 내미는 리스트를 받아 들고 이름부터 살폈다. “회계상으로만 본다면 어느 게 제일 가능성이 높을까요?” “당연히 리스트 탑에 올려놓은 거. 기술력이 좋아서 이익률이 높아. 덩치로 먹겠다는 생각은 아니지?” “네. 당연하죠.” 리스트 탑에 있는 이름, 대아건설! 도급순위 5위. 마음 같아서는 대현 건설을 먹고 싶지만, IMF 위기를 구조조정으로 견딜 수 있는 재계 2위라 일찌감치 마음 접었다. “자동차와 건설이라…. 좀 어울리기도 해. 흐흐.” “건설은 대기업으로 가는 첫걸음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대아건설이 무너질까? 사내 유보금도 좀 있고 외국에서 수주한 건도 많아.” “삼촌은 아직 제 말을 못 믿으세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 위기를 자력으로 헤쳐나갈 곳은 순양, 대현이 전부라니까요. 나머지는 바람 앞 등불입니다.” “그렇다 해도 대아건설은 정부지원 조금만 받으면 버틴다니까!” 오세현의 부정적인 의견에 반박하지 않았다. 이 정도 건실한 회사가 아니면 탐낼 이유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내 욕심을 애써 드러낼 필요도 없다. 1997년 IMF 이후의 대한민국은 약육강식의 시대가 펼쳐진다. 지금까지는 육식동물이 몸을 숨기기 어려운 초원에서 초식동물과 공존하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몇 안 되는 육식동물이 무자비한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하는 정글의 시대다. 그곳의 제왕이 되기로 마음먹은 이상 거칠 것 없는 행동만 남았다. “두고 보자고요.” 이 말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아버지와 합병 문제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여의도 사무실을 나와 승용차에 올랐다. “김 대리. 회장님댁으로 가요.” “넵.” 김윤석 대리는 속도를 올렸다. 기름값 폭등으로 교통량이 많이 줄어 운전하기에는 더 편했다. “도련님. 그동안 파악한 내용과 신석호 팀장이 끌어모은 정보로는 한성일보 측에서 꼬리를 붙였습니다.” “한성일보라면 사돈 될 집안?” “네.” “확실해요?” 어이없는 결과다. 내부의 적만 생각했는데 벌써부터 침 흘리는 외부자가 나타나다니.“ “사실 좀 더 일찍 파악했는데 회장님 사돈댁이 될지도 몰라 조심하느라 보고가 늦은 겁니다.” “그래요?” “게다가 이미 회장님도 아신다고 합니다. 정보팀과 시큐리티에서 회장님께 보고했는데 모른척하라는 지시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저희도 확신을 가졌고요.” 이미 파악했지만 모른 척이라! 무슨 속셈일까? 한성일보 따위는 아무리 꼼지락거려도 신경 쓸 필요도 없을 만큼 하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사돈댁이라 조심하는 걸까? 이런 사소한 할아버지의 결정 하나하나를 배워야 한다. 사소한 것을 모아 판단하고 활용하는 법, 그것이 전략이고 전술이다. 할아버지에게 슬쩍슬쩍 던져봐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승용차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리기 전 한성일보 법인카드를 꺼냈다. “이걸로 오늘 전략팀 직원들 회식하세요. 돈 걱정 말고 룸빵까지 시원하게 쏘세요.”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 * * “어떠냐? 그 정도면 충분할 게다.” 종이 한 장에 빼곡히 적힌 숫자들. 바로 순양그룹 계열사 지분이다. 마지막 합계 17.7이라는 숫자. 순양그룹의 17.7%와 아진그룹 8개 회사를 하나로 만든다. 그리고 하나 된 회사는 내 것이다. 왜 17.7%인지, 이유와 근거는 묻지 않았다. 물어야 할 질문은 딱 하나다. “할아버지. 이 숫자는 거래입니까? 상속입니까?” 눈썹이 꿈틀했지만, 곧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이놈아! 네놈의 욕심은 그 끝이 어디냐? 허허허.” 한참을 호탕하게 웃던 할아버지의 웃음이 멈췄을 때, 대답을 들었다. 원하던 대답을. “거래다. 상속? 내가 왜 네놈에게 상속해? 난 내 자식들에게만 줄 거다. 넌 네놈 부모한테 받아라.” “제 아버지는 할아버지처럼 재벌이 아니라서 기대하기가 좀….” “그건 네놈 복이고. 으허허.” 어쩌면 아버지에게도 조금 나눠줄 것 같은 뉘앙스다. 그것도 땡큐. “두 번째지만 마지막 제안이다. 빨리 도장 찍고 10억 달러 넘겨.” 할아버지의 번뜩이는 눈빛을 보니 급하긴 급한가 보다. 한 번 더 밀고 당기며 협상할 생각은 버렸다. 여기서 딴말을 꺼내면 마음이 상한다. 넓은 호수도 작은 돌 하나에 파문이 인다. 두꺼운 애정도 한 번의 섭섭함에 금이 가는 살얼음이다. 얼음을 깨는 실수는 없어야 한다. “네. 환율 1,600원으로 10억 달러 준비하겠습니다.” 시원스레 대답하니 오히려 놀란 눈치였다. “뭘 그리 놀라세요? 전 언제나 할아버지 편이었어요. 이렇게 양보하시는데 더 욕심부리지 않을 겁니다.” 할아버지의 기쁜 표정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음흉한 표정이다. “또 무슨 속셈이냐? 내가 네놈의 감언이설에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해 보이더냐?” 눈치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영감님이다. ======================================== [072] 쇼핑 카트 1 “협상은 이미 끝났습니다. 오늘 8일 자 환율 1,342원. 그걸 1,600원으로 해주셨는데 속셈이 있을 리 있겠어요?” “이천 원이 넘을 수도 있어. 네 돈 십억 달러가 내 손에 들어올 때쯤이면 넌 엄청난 손해를 보는 거야.” “환율이 정말 이천 원까지 오를까요?” 순양 경제연구소의 예측능력 한번 확인해야겠다. 정말 똑똑한 인재가 다 모였다는 소문이 맞을까? “2,200원까지 오를 가능성 90% 이상. 이게 연구소 박사들의 예측이다. 늘 맞는 건 아니지만, 가끔 맞을 때도 있어.” 할아버지는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왜? 이천 원까지 오른다고 생각하니 아깝냐?” “저도 한번 말씀 드린 적 있잖아요. 이천 원 넘을 거라고. 그렇지만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전 손자 아닙니까? 할아버지께 손해 본다는 생각할 만큼 쪼잔한 놈 아닙니다.” “쪼잔한 놈이 아닌 건 안다. 그렇다고 손해 볼 놈도 아니지. 뭐냐? 추가 조건이?” 눈치 빠른 사람에게 시치미 떼는 건 괜한 경계심만 불러일으킨다. 말 나온 김에 해치워야겠다. “두 가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그렇지. 좋다. 말해 보거라. 네놈이 손해 본 걸 메꿔줄 만큼이 되는지 아니면 더 큰 이득을 챙겨갈지 한 번 보자꾸나.” 호기심을 드러내는 할아버지 앞에 준비해온 지도를 꺼냈다. “이건 서울 지도 아니냐.” “네. 여기 붉은색 동그라미 친 곳을 한번 보십시오.” 십여 군데의 위치를 꼼꼼히 살펴보던 할아버지는 고개를 들었다. “여긴 뭐지?” “서울시 소유 공유지입니다.” “공유지?” “네. 전 이 땅을 싸게 매입하고 싶습니다.” “음…. 서울 시장에게 압력을 넣어 달라는 부탁이냐?” “아닙니다. 이제 겨우 임기 6개월 남은 시장입니다. 차기 시장에게 부탁, 아니 요구해야죠.” 요구라는 말에 할아버지의 눈이 번뜩였다. “너 혹시 네 고모부를 염두에 두었느냐?” “그렇습니다.” “안돼.”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지도를 밀쳤다. “고모부는 선거 자금은 제가 대겠습니다. 고모부가 서울시장이 되면 공유지를 매각하고, 할아버지께서는 이 공유지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매각 압박만 해주시면 됩니다. 어쩌면 국회의원 압박은 필요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완강한 거부를 못 들은 척하며 할 말을 계속했다. “글쎄, 안된다고 하지 않느냐?” “명분은 좋습니다. 국가 경제 위기 속에서 서울시도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비업무용 토지를 전부 매각한다면 반대 여론은 없을 겁니다.” “어허! 그놈 참!” “반대하시는 이유,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놈은 진가가 아니라 최가다. 이 정도면 충분한 반대 이유 아니냐?” 역시, 핏줄은 남자의 피를 의미한다. 딸의 피는 가문의 영역에서 벗어난다. 나는 못 알아들은 척 엉뚱한 소리를 했다. “서울시장은 순양그룹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최 서방이 정치하려는 건, 지 마누라 머리에서 나온 거다. 그놈은 마누라 꼭두각시에 불과해.” 고모 최서윤은 딸이라는 핸디캡을 정치적 힘으로 커버하려는 속셈이다. 한국의 정치인 중 진 회장에게 맞서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지 않아도, 돋보기로 보지 않아도, 순양그룹의 온갖 탈법, 편법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 눈을 감고 못 본 척한다. 누군가가 이 사실을 거론해도 곧바로 묻힌다. 만약 힘 있는 정치인이 스피커에 대고 떠들기 시작하면 곤란한 일이 자꾸 생길 건 불보듯 뻔하다. 고모가 그 힘을 이용해서 딸이지만 아들만큼 순양의 지분을 요구하거나 더 이상을 받아내려 하는 것을 잘 안다. “할아버지.“ “그만 하래두!” “고모부를 순양그룹의 꼭두각시로 만들 생각은 왜 안 하십니까?” “뭐?” “서울시장 의자에 앉을 때까지 온갖 오물과 먼지가 묻을 겁니다. 그걸 쥐고 있으면 꼭두각시 아닙니까?” “그 오물, 먼지는 순양에서 나오는 거다. 터트리면 순양도 다쳐.” “그 먼지, 오물 제가 뒤집어쓰겠습니다. 그래서 고모부 멱살을 꽉 틀어쥐고 있을 테니까 할아버지께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놈 보게나. 돈은 내가 대는데 생색은 네가 내겠다고? 예끼! 이놈아.” 할아버지는 어이가 없는지 콧방귀를 낀다. “아닙니다. 돈도 제가 대겠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도 필요할 때 가끔 써먹으십시오.” “뭐라? 돈도 네가 대고? 그럼 그냥 밀어주거라. 내 허락이 필요 없지 않느냐?” “할아버지께서 여당 대표에게 전화 한 통만 하시면 후보 지명도 못 받는데요?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딱 두 번, 8년만 서울시 청사 주인 행세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 기간 안에 필요한 거 다 챙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열심히 머리 굴리는 소리가 다 들린다. 이윽고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두 번째는 뭐냐?” “허락하시는 겁니까?” “아직 아니다. 두 번째부터 말해.” “대아건설(大亞建設)로 정부지원금이 흘러들어 가는 것을 막아주십시오.” “뭐시라? 대아건설?” 생뚱맞게 튀어나온 이름 때문에 할아버지의 눈이 커졌다. “공유지 받아 주차장 할 생각 없습니다. 그 땅 위에 뭔가 올려야죠. 그러려면 작은 건설회사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대아라면 도급순위 5위다. 그게 구멍가겐 줄 아느냐?” “할아버지. 저 아진그룹과 순양자동차의 주인입니다. 거기 비하면 대아는 구멍가게죠.” 갑자기 할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허락인가? “네 이 녀석, 진심이구나.” “네?” “너 스스로 회사를 일군다고 떠든 거 말이다. 순양건설 뚝 떼어 달라고 떼쓰는 소리가 아니라 대아를 인수할 생각이라니…….” “혹시 떼쓰면 주실 생각이셨어요?” 농담처럼 웃으며 말하자 할아버지는 또 묘한 표정으로 변했다. “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뭐, 어차피 무의미하게 됐다. 넌 대아를 인수하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아니다. 속지 말자. 저건 날 약 올리려 하는 말이다. 속으로 몇 번이나 되풀이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대아건설이라…….” “네. 지금의 이 외환 위기를 벗어날 기업은 없습니다. 분명 대아건설도 달러에 목마를 텐데 정부지원금만 끊으면 부도납니다. 그때 제가 주워 담겠습니다.” “대아, 좋은 기업이지. 수혈 몇 봉지만 해주면 멀쩡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세현 대표와 직원들이 며칠 동안 파고들어 엄선한 회사니까요.” “그러니까 대아와 최 서방의 서울시장은 한 묶음이구나.” “네. 제가 피를 공급하고 고모부가 거름이 되면 활짝 필 겁니다.” “최 서방의 선거와 순양의 연결고리는 전혀 없으니 문제도 없고?” “그렇습니다.” 할아버지는 깊은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버릇,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도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기다렸다. “그렇게 대아건설을 활짝 꽃피운 다음….” “당연히 순양의 이름을 달겠습니다.” “그거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이구나. 순양 계열사 늘이는 건 이 집안에서 나 말고는 너뿐이다. 허허.” 느낌이 좋지 않다. 저 웃음,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다. “둘 다 생각 좀 해보마. 아무튼, 우리 계약은 끝난 거 맞지?” “네.” “그럼 돌아가서 서둘러. 그룹 사장들까지 동요한다. 10억 달러가 빨리 들어와야 좀 진정할 게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더 보채지 않고 물러났다. 혹시 모르니 고모를 만나 단단히 일러둬야겠다. # # # 진 회장은 서재를 나가는 손자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참았던 충격을 가라앉히고 싶어 서재를 서성거렸다. 나라의 경제위기 극복에 협조하는 서울시장이, 재원마련 방편으로 공유지를 매각한다는 명분이 좋다. 그 시장을 제 손으로 만들고 땅을 차지한 후, 그 땅을 돈뭉치로 만들 수단인 건설사를 인수한다. 그림이 너무 좋다. 이 좋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환율 폭등이 뻔한데도 몇천억쯤 포기하는 배포도 있다. 몇천억 이상의 돈을 뽑아낼 자신이 있다는 소리 아닌가? 손자의 설명을 듣는 순간 즉석에서 승낙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눌렀다. 쉽게 힘을 빌려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또 한 번 무서움을 느꼈다. 저놈은 귀엽고 잘생긴 얼굴 아래, 가장 포악한 맹수의 기질을 숨긴 놈이다. 아진그룹에, 대아건설에, 순양의 이름을 달겠다는 달콤한 말, 속으면 안 된다. 순양자동차를, 순양건설을 뺏어갈 놈이 확실하다. 자신의 것을 얻어가려는 자식놈들보다 뺏어가려는 손자가 훨씬 기특하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 * * “뭐? 말했다고?” “네.” “도준아! 내가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니? 아빠가 아시면 산통 다 깨지는 거야. 절대 허락할 리 없어. 클났네. 이젠 우리 다 죽었어.” 고모는 정말 죽을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고 고모부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고모. 좀 진정하세요. 괜찮다니까요.” “뭐가 괜찮아!” “여보. 좀 진정하고 도준이 말 들어봅시다. 생각이 있으니까 말했겠지. 안 그래?” 마누라 장단에 놀아나는 놈이니 생각이 모자란다. 서울시장 될 생각에 기대 가득한 표정만 짓고 있다. “할아버지께서 생각해보신다고 했어요. 무조건 반대하시는 게 아니에요.” 고모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솔직히 두 분 다 할아버지가 반대하시는 이유는 아시죠?” “왜? 네게 무슨 말씀 하시디?” “고모부 선거 자금이 순양에서 흘러들어 가는 게 찝찝하신가 봐요. 정치 스캔들이 터지면 큰 문제가 되니까요.” 고모는 내게서 뭔가를 캐내려는 듯 내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피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씀드렸죠. 선거 자금은 다른 곳에서 구하면 되니까 모른 척만 하시라고요.” “또?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 “그래도 정치에 몸담으셨는데 서울시장 정도는 하시고 정계에서 은퇴하면 보기 좋지 않겠냐는 말씀만 드렸어요.” “뭐? 시장으로 끝내? 말도 안 되는 소리!” 멍청한 새끼. 말귀를 못 알아들어! “여보! 눈앞의 산부터 넘는 게 더 중요해. 가만 좀 있어 봐!” 고모의 눈치가 훨씬 낫다. “도준아. 만약 아버지가 허락하시고 모른척해 주시면? 선거 자금은 가능해?” “얼마나 들어요?” 나는 순진한 척 눈을 깜빡거렸다. “특별당비 30억 내고 당 중진들에게 50억쯤 뿌리고…. 선거운동 자금으로 삼백억 정도 써야 해. 넉넉잡고 사백억?” 고모부는 기다렸다는 듯 숫자를 줄줄 읊었다. 사백억이 뉘 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정말 현실감각 없는 놈이다. 적어도 상세한 내역은 이미 뽑아놓고 기다려야 하지 않는가? “우와! 엄청나네요.” 눈을 크게 뜨고 소스라치게 놀란 척하니 고모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왜 놀래? 그 정도 없어?” “많이 부족하죠. 그리고 아버지 극장 지을 돈도 빼놔야 하고요.” 잠자코 있던 고모가 입을 열었다. “내가 150억 정도는 준비할 수 있어. 넌 250억만 마련하면 돼. 가능해?” “네. 그 정도는 가능해요.” 두 사람의 표정은 그냥 보기 민망할 정도로 우습다.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어린애 같은 얼굴이다. “내가 한 번에 150억을 뺄 수는 없어. 일단 내년 초에 특별당비를 납부해야 하니까… 30억부터 준비 좀 해줘.” 이것이 현실감각 없는 재벌집 사람들의 뇌 구조인가? 겨우 스무 살짜리 조카에게 수십억, 수백억을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정말 이들에게 돈의 단위는 억부터 시작하는 건가? “네 빨리 준비할게요. 참, 그전에 계약서부터 써야죠?” “뭐? 계약서? 무슨 계약서?”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눈만 쳐다본다. “영수증도 못 받는 돈인데 계약서라도 있어야죠. 안 그래요?” 나도 덩달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주 보기 시작했다. ======================================== [073] 쇼핑 카트 2 “도준아. 네가 아직 어려서 이쪽 일 모르는구나. 선거자금 주면서 계약서 쓰는 사람은 없어.” “아하, 우리 도준이는 투자사만 거래하니까 그런 생각 했구나. 이 돈은 전부 사라지는 돈이야. 재테크가 아니야.” 이 사람들은 아직 날 돈 많은 어린애로 보는 건가? “아차차, 제가 자세히 설명해야 하는데 깜빡했어요.” 나는 이마를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잠깐만요. 자세하게 설명할 분이 계세요.” 나는 거실 소파에서 일어나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외쳤다. “삼촌! 내려오세요.” 고모, 고모부 두 사람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집안의 막내에게는 삼촌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없지 않은가? # # # “땅? 공유지?” “네. 내년 지방선거 끝나고 순식간에 싹 챙길 생각입니다.” “네 고모부를 서울시장으로 만든다고?” “제가 만드나요? 고모부가 싸워야죠.” 오세현은 내키지 않는 심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정치에 얽히고 오래가는 놈 못 봤다. 정치인 임기 끝나면 구린 거, 냄새나는 거 탈탈 털어서 보복하는 놈들이 정치인 아니냐? 몰라서 그래?” “정치권력 끼지 않고 성장한 기업도 없습니다. 한국에서 정치권 밖에서 사업하면 대기업으로 못 크죠.” “그래서? 땅 받아서 뭐하려고?” “대규모 공사 한번 해야죠. 흐흐.” “갈수록 태산이로구만. 뭐? 공사?” “제가 뭐 때문에 건설사에 관심 뒀겠어요? 다 이거 때문이죠.” 할아버지 앞에 펼쳤던 지도를 꺼냈다. “가장 알짜배기는 바로 여깁니다.” 난 힘차게 지도 한 곳에 빨간 핀을 꽂았다. “여길 한번 개발해 보겠습니다.” “여기 어디야?” 노안이 온 오세현은 쓰고 있던 안경을 머리 위로 올리고 지도를 유심히 살폈다. “마포? 상암동?” “네. 이미 택지지구 개발에 지정됐잖아요.” “야, 야. 접어라. 다 끝난 걸 뭐하러?” 올해 여름, 마포구 상암동의 구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과 인근의 저개발 부락촌, 연탄공장, 유휴지를 '상암택지개발지구'로 지정하고 개발을 발표했다. 이때 난 건설사 없이 이권 사업에 끼어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느꼈다. 어차피 지금 상암 택지개발에 참여한 업체는 다들 손 떼기 바쁘다. 나라가 부도 상태나 다름없는데 아파트를 지으면 뭐하나? 입주할 사람이 없는데. 모두 이런 심정이었다. “택지지구 근처에 아직 공유지 엄청나게 많아요. 그거 개발해야죠.” “이미 아파트 물량 쳐내는 건 불가능해. 부동산 폭락 안 보여? 이 지경인데 아파트를 또?” 오세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 난 웃었다. “위기는 준비된 자와 만났을 때 기회가 됩니다. 우리나라 최대의 위기에서 나만큼 준비된 사람은 없잖아요.” “하여간, 어디서 주워들은 소리는 많아요. 이번엔 아니다. 아파트는 당분간 끝났어. 이 위기 지나가면 아파트에 손대.” “누가 아파트라고 했어요?” “뭐?” “아파트는 관심 없습니다. 택지 분양은 이미 끝났고 그쪽 건설사들은 한숨만 쉬라고 하세요. 전 다른 컨셉으로 개발할 겁니다.” 오세현은 한숨까지 내쉬며 말했다. 어차피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 그 새로운 컨셉은 뭔데?” “DMC." "참 내, 이젠 방송국이냐? 왜? 아예 MBC 방송국 그냥 사!“ 오세현은 어처구니없어 말하기도 귀찮은 표정이었다. “방송국이 아니고 DMC라니까요. Digital Media City라는 뜻입니다.” “그건 또 뭐냐?” 이제야 표정을 펴고 관심을 좀 보인다. 디지털이라는 단어, 그리고 미디어라는 단어는 미래지향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자료 드릴 테니까 한번 보세요. 그리고 상암동에 월드컵 주 경기장을 만들어야죠. 2002년, 얼마 안 남았어요.” 96년, FIFA는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를 결정했다. 한국 대표팀이 4강까지 진출하리라고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에는 호프집에서 TV를 보며 대한민국을 외쳤지만, 이번엔 VIP석에서 내 눈으로 직접 볼 생각이다. “City라면 도시잖아. 너무 황당한 거 아냐? 월드컵 경기장은 그럴싸하긴 해.” “DMC도 그럴듯하게 만들 겁니다.” # # # “처음 뵙겠습니다. 진 사장님, 최 의원님. 오세현입니다.” 고모와 고모부는 오세현이 내민 명함과 얼굴을 번갈아 보며 화들짝 놀랐다. 미라클 인베스트먼트 대표. 이것이 명함의 힘이다. 아진그룹을 인수한 투자사. 조 단위의 돈을 움직이는 자 아닌가? “아, 안녕하세요. 도준아. 네 돈을 운용하는 투자사도 미라클이라더니 그 회사가 바로 여기?” 고모는 명함을 살짝 흔들었다. “네. 맞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그럼 말씀 나누세요. 전 이 층에 올라가 있을게요.” 내가 자리를 비켜준다고 하자 고모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미래의 서울시장님께 투자하고 비즈니스까지 생각하신 분입니다. 믿을 만하신 분이니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시기도 하니까요. 그럼 전 이만….” 세 분에게 머리를 숙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오세현은 내 계획을 충분히 알고 있으니 문제없을 것이다. # # # “이런 말 해서 좀 그렇긴 한데, 도대체 선거자금은 누구 돈이죠? 도준이 돈인가요? 아니면 미라클? 오 대표 개인 돈?” 날카롭게 눈꼬리가 올라간 진서윤은 조카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계약서라는 단어가 나왔고 비즈니스라는 말도 나왔다. 돈을 부탁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돈의 출처는 도준이죠. 하지만 전 도준이 돈을 성실하게 운용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 나서게 되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하지만 이건 집안일입니다. 좀… 거북하군요.” “의외네요.” “네?” “순양그룹 일가에서 집안일이 있었던가요? 모든 게 다 비즈니스 아닙니까?” 싸늘한 진서윤과 달리 오세현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집안 식탁에 오른 쏘세지 반찬 하나 더 먹겠다고 싸우고, 아버지 어깨 좀 주물러 드리고 용돈 타 쓰면 그건 집안일이죠. 하지만 아침밥 먹으며 반찬 대신 계열사 하나 더 먹겠다고 싸우고, 아버지 어깨 주무르면 지주회사 주식 수천억이 왔다 갔다 하는 집안 아닙니까? 이런 게 비즈니스가 아니면요?” 한껏 비꼬는 말이었지만 진서윤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싸늘한 냉기가 사라졌다. “어린 조카 눈치 보느라 짜증 났었는데, 차라리 더 좋군요. 비즈니스니까 굽신거릴 이유도 없죠?” “물론입니다. 진 사장님. 같은 눈높이에서 제안하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부족한 부분이 나오면 언제든 지적해 주십시오.” “시원시원하시군요. 그럼 시작하죠.” 오세현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필요한 자금은 얼마로 생각하십니까?” “400억이에요.” “그중 직접 충당하실 수 있는 금액은요?” “없어요.” 다시 나타나는 싸늘함. 이번에는 오세현이 당황했다. “네? 도준이 이야기로는 진 사장님 개인 자금에서 일부 충당한다고….” “그건 집안 식구끼리 이야기죠. 비즈니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우리 그이가 서울시장이 돼서 오 대표에게 줄 특혜의 값어치가 400억이 넘을 텐데 굳이 내 돈을 써야 하나요?” 오세현은 잊었던 부자들의 습성을 떠올렸다. 자신을 위해서는 돈의 소중함 따위는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지만, 남의 돈이 눈앞에 보일 때는 지갑을 닫는 지독함이다. “그렇죠. 이거, 제가 깜빡했습니다.” 오세현은 머리를 슬쩍 긁고 서울시 지도와 두꺼운 제안서를 꺼냈다. “이미 아시겠지만, 공유지 불하입니다. 지도에 표시한 총 29군데의 공유지 매각 발표를 하시면 됩니다. 풍전등화 신세인 국가 재정을 위해 전부 매각한다면 반대 여론은 없을 겁니다.” 29곳이라고 하자 두 사람의 눈을 동그랗게 떴고 진서윤은 소리 질렀다. “이봐요! 땅장사만 해도 수천억을 벌겠네. 말이 되는….” “아, 오해하지 마시고요. 미라클이 전부 매입한다는 게 아닙니다. 우린 마포 상암동, 대치동 그리고 내곡동 일대. 이 세 곳만 받을 겁니다. 전부 다 풀어야 특혜 의혹이 없죠. 나머지는 미래의 서울시장님께서 적당히 선정하시면 됩니다.” 부부는 눈을 마주치며 머리를 끄덕였다. “자, 그리고 이걸 한번 보십시오.” 오세현은 제안서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상암 DMC 프로젝트>라는 큼지막한 표제가 눈에 띄었다. “이 프로젝트 자체를 선거 공약에 넣으십시오. 꽤 큰 호응을 얻을 겁니다.” 진서윤과 최 의원은 한참 동안 DMC에 대한 설명을 듣자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상암동에 방송, 프로덕션 등 미디어 컨텐츠 관련 기업을 유치한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사실 마포가 입지는 좋아요. 광화문, 강남, 여의도까지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라는 게 미래지향적이지 않습니까? 일 년만 지나면 새천년의 시대, 뉴 밀레니엄입니다. 좋은 공약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세현은 제안서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아…! 이게 있었네.” 진서윤은 축구 경기장 사진을 발견하자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바로 월드컵 경기장이 화룡점정입니다. 하하.” 오세현은 두 사람의 밝은 표정을 확인하고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공유지 개발 건만 잘 관리하셔도 서울시장 재선 때 선거비용은 문제없을 겁니다.” 재선이라는 말에 최 의원은 입이 찢어질 만큼 헤벌레 웃었다. “어떠십니까? 제 제안이 흡족하신지요?” “공유지 세 곳이면 충분하다는 거 사실이죠?” 진서윤이 재차 확인하자 오세현은 기다렸다는 듯 서류 몇 장을 꺼냈다. “불신과 의심을 한 방에 날려버릴 마법의 종이입니다. 바로 계약서죠. 물론 비밀 계약서입니다.” 서류는 금액과 날짜만 비어 있을 뿐, 지금까지 오세현이 말한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오 대표. 그냥 우리를 믿으면 안 될까? 이건 불법 선거자금을 전달했다는 증거잖아요. 이런 걸 어떻게 남겨?” “진 사장님. 전 이미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시작한 일입니다. 바로 부군의 낙선입니다. 400억을 허공에 날릴 위험도 감수하는데 증거라니요?” 진서윤이 여전히 껄끄러운 표정을 지우지 않자 오세현이 쐐기를 박아버렸다. “솔직히 도준이 가족이라 반대하지 않는 겁니다. 정말 손쉬운 방법도 마다하고요. 내년 6월 서울시장 당선자에게 400억 내밀고 이 전략을 알려주는 게 더 확실한 투자죠.” 오세현이 제안서를 흔들며 말하자 권력욕에 젖은 남편이 펄쩍 뛰었다. “여보. 받아들이자고. 믿을 만한 분이잖아. 윤기 처남 절친이고 장인어른과 자동차로 연결된 분이잖아. 설마 뒤통수 치겠어?” “그렇습니다. 제가 이 계약서로 딴 마음 먹는다면 진 회장님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특수부 검사 수십 명이 절 털기 시작할 겁니다. 저도 순양그룹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아요.”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던 진서윤이 마침내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 서로의 신뢰를 위해 계약서는 필요하겠군요.” 오세현은 금액과 날짜를 서류에 채워 넣었다. “자, 그럼 다 끝났죠?” “네. 시원시원한 결정, 감사합니다.” 오세현은 두 사람에게 깍듯이 머리를 숙였다. “오 대표. 그럼 돈은 내일이라도 가능한가?” 최 의원은 다급한 듯 서둘렀다. “아뇨. 적어도 사흘은 걸릴 겁니다. 몇 바퀴 돌려서 세탁도 해야 하고 신권이 아니라 구권을 구해야 하니까요.” 철저한 준비에 믿음이 깊어지는 두 사람이었다. “두 분께서도 사흘 안에 예선 통과는 하셔야겠죠?” “예선이라니?” “진 회장님의 허락 말입니다. 그분의 출마 허락이 없는 한, 자금집행은 없습니다. 선거자금 400억을 전화 몇 통으로 휴짓조각으로 만드실 분 아닙니까?” 오세현의 약간은 무시하는 듯한 눈빛. 그 눈빛을 받은 두 사람은 진 회장의 성난 얼굴을 떠올리며 인상을 팍 구겼다. ======================================== [074] 쇼핑 카트 3 “네가 이 계약서를 언제, 어떻게 써먹을지 모르지만 내가 은퇴하고 외국으로 간 다음에 써라. 감옥 가기 싫다.” 두 사람이 떠나자 오세현은 계약서를 내게 건넸다. “이 계약서는 공개 못 하죠.” “사악한 놈. 폭탄은 쥐고 있을 때 위력을 발휘한다는 걸 벌써 아는 거야?” “아뇨. 이건 할아버지께 드리려고요.” “야! 미쳤어? 그걸 주면? 진 회장이 내 멱살을 잡는 셈이잖아.” “삼촌, 할아버지는 전문 경영인에게는 관심 없어요. 항상 주인의 목줄을 쥐는 분이에요. 이 계약서는 바로 고모부 아니, 고모가 딴생각을 못 하도록 만드는 스위치로 쓰실 겁니다.” 놀란 오세현을 안심시키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려야 했다. “고모부가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확신하실 때 서울시장 출마를 허락하실 겁니다.” “진 회장님, 진짜 지독하구나. 자식도 못 믿는다니.” “자신은 누구도 믿지 않으면서 타인은 자신을 믿도록 만들었으니 그 자리에 앉았죠. 아마도 할아버지는 저도 믿지 않을걸요?” “이왕 말 나온 거 하나 물어보자.” 오세현은 소파에 기댔던 몸을 세우며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17.7%. 이게 네가 가진 순양그룹 지배 지분이다. 최소한 80%는 손에 넣어야 순양그룹 회장실 주인이 될 수 있을 거야. 뭐, 80%라고 해봤자 그룹 전체 주식으로 따지면 10%도 안 되겠지만…. 어쨌든. 진 회장님이 네게 어느 정도까지 물려주실 것 같냐?” “머리는 전부! 마음은 nothing." "뭐?" “순양그룹 경영자로는 나만 한 사람이 없다는 걸 할아버지도 모르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원래 가진 그 심성은 오로지 자신밖에 모르시는 분이에요. 그 누구에게도 자기 것을 주기 싫은 거죠. 돌아가실 때 순양그룹을 관속에 함께 묻을 수 있다면 그러시고도 남을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 양반 욕심을 묻는 게 아니야. 현실적인 생각은 어떠냐는 거지.” “저도 모르겠어요. 이성과 감성이 싸우면 늘 이성이 이기는 건 아니니까요.” “모른다?” “네. 하지만 상관없어요. 할아버지가 물려주는 지분은 그냥 보너스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보너스치고는 꽤 많을 테지만. 욕심내지는 않지만 뛰어난 능력의 손자. 준다고 해도 관심 없어 보이는 유일한 핏줄, 나는 이것이 보너스를 가장 두둑하게 받아내는 길이라는 걸 믿고 있다. “아무튼, 이 계약서는 큰 역할을 할 겁니다.” 1단계는 넘었다. 이제 2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삼촌. 32억 달러 중에 10억 달러는 순양에서 바꾸고 남은 22억 달러 있잖습니까?” 오세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왜? 그걸 쓰게?” “값나갈 때 바꿔야죠. 아무튼, 그거 빼고 나면 미국 미라클의 운용 자금은 어떻게 됩니까?” “4, 5억 달러쯤 남을 거야. 그중에 네 돈은 얼마 없어. 일반 투자자들 돈이니까.” “그러니까 내 돈을 전부 빼더라도 미국 미라클이 할 일은 남아 있는 거 맞죠?” “당연하지. 그 애들도 능력 있어. 마냥 놀고먹는 놈들이 아냐. 물론 네 돈 다 빼 오면 충격은 좀 받겠지만. 그런데 그 돈 어디 쓸려고?” “귀한 달러니까 귀하게 써야죠. 대통령 선거 끝나자마자요.” “뭐?” “정권은 분명히 바뀔 테니까 대선 승리의 선물로 주려고요.” 가끔씩 놀라는 삼촌의 표정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바로 지금처럼. “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야? 재벌 흉내는 그만둬!” “그 흉내는 삼촌이 내셔야죠.” “야!” “너무 놀라지 마세요. 생각보다 별거 아니니까.” 오세현의 다양한 표정으로 즐기는 건 이쯤에서 끝내고 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삼촌. 미디어시티를 만들면 뭐합니까? 그 도시로 이주 오는 국민이 없는데?” “이민자?” “네. 미디어 시티에 어울릴만한 이름값 하는 기업을 유치해야죠. 이를테면 방송국 말입니다.” 오세현을 머리를 싸매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갈수록 황당한 소리만 해대니까 말이다. “야! 방송국이 가당키나 해? 그 규모가...” “공중파도 있지만, 케이블도 있습니다. 차근차근 해야죠.” 케이블이라는 말에 조금 누그러진다. 케이블 방송 규모는 천차만별이라 가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DMC 프로젝트는 정부 차원에서도 나쁘지 않아요. 새로운 인프라 구축은 고용 효과뿐만 아니라 경제 활성화에도 도움 되니까요. 새 정부의 사업으로 그럴싸합니다.” “그렇다고 22억 달러나 되는 돈을 덥석 안겨준다는 거냐? 미친 짓이야.” “내 돈을 왜 정부에 줘요? 달러 바꿔 달라는 소리죠.” “아…!” 입에서 감탄사가 나오는 걸 보니 모든 퍼즐을 다 맞췄나 보다. “그럼 서울시 공유지도….” “네. 전부 한 묶음 패키지라니까요. 달러가 부족한 한국에 22억 달러를 들고 들어온 투자사가 거대한 방송-미디어 인프라 조성에 투자하는 그림. 이건 두 손 벌려 환영할 겁니다.” “정부와 서울시가 손잡고 사업을 펼치면…. 어쩌면 정부 예산까지 받아낼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렇게 된다면 더 바랄 나위도 없죠.” 오세현은 한동안 말없이 내 얼굴만 쳐다보았다. “넌 네 할아버지 복제품이냐?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어? 가능성은 둘째 치더라도 정말 스케일이 남다르네.” “아뇨. 이건 다 효심에서 비롯된 겁니다.” “뭔 헛소리냐? 효심?” “DMC를 거대한 미디어 제국으로 만들어서 아버지께 드리려고요.” 이젠 오세현의 놀란 표정이 지겹다. “함께 공부하셨으니 아실 것 아닙니까? 우리 아버지, 훌륭한 경영자 자질이 충만하신 분이라는 거요. 지금 영화사 이끌어 가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고요.” “그, 그래서 윤기를 위해 준비한 거라고?” “네. 영화, 방송 컨텐츠 제작, 케이블 방송사. 더 나아가 인터넷 사업까지. 순양 회장님 아들이고 제 아버지신데 이 정도는 거느려야 체면이 서죠.” 규모가 커서 놀란 것인지, 아들 잘 둔 친구가 부러워서인지 모르지만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리고 미국 미라클은 메이저 영화사와 관계도 깊지 않습니까? 잘만 연결하면 세계적인 미디어 기업이 탄생할지도 모르죠.” “윤기, 이 자식 지금 어디 있어? 빨리 만나서 술 사라고 해야겠다.” 오세현의 표정은 부러움이었다. “그 전에 DMC 사업 계획서를 좀 더 마사지 하세요. 디테일까지 꼼꼼하게. 정부에서도 무릎을 탁 치게 만들어야죠.” “그, 그렇지. 우리 직원들뿐만 아니라 다른 전문가들도 붙여야겠다. 입이 쩍 벌어지게 꾸며야지. 윤기를 위해서도 말이다.” 이 양반 5년 뒤에 은퇴할 수 있을까? 표정을 보니 어렵지 싶다. 규모가 크면 클수록 이렇게 열정을 드러내는 걸 보면 말이다. * * * “결국, 이런 걸 받아냈느냐?” “네.” 할아버지는 계약서를 꼼꼼하게 다 읽고 난 후 안경을 벗었다. “이 정도면 고모부가 서울시장이 되더라도 할아버지 말씀을 거역하지 못할 겁니다. 공개하는 순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정치 인생은 물론 법정에 설 테니까요.” “네가 원하는 건 공유지 몇 평이 전부고?” “나머지는 할아버지께서 가지세요. 이 계약서 쓸 때 보니까 고모도 대단하시던데요?” “네 고모가?” “네. 순식간에 공유지의 가치를 파악하시더라고요. 선거자금 좀 밀어주는 대가로 공유지 전부를 받는 건 꿈도 꾸지 말라고…. 하하.” 할아버지는 슬쩍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럼 내가 다 받아서 너한테 좀 줄까?” “아뇨. 아파트 올려서 돈 버는 건 제 취향이 아니에요.” 분명 ‘다 받아’라고 말씀하셨다. 됐다! 허락했다. “그런데 도준아. 이건 좀 무모한 짓 같은데…. 최 서방이 선거에 나와도 꼭 이긴다는 보장은 없어.” “이제 당선 가능성이 높아졌죠. 할아버지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니까요.” “하여간…. 네 녀석 눈치는 따라갈 수가 없구나. 허허.” 고모부의 상대로 누가 될지 모르지만 조금 불쌍하다. 순양그룹 정보팀에서 그 사람의 과거를 탈탈 털 것이고 그때 나온 먼지는 고스란히 모든 언론사에서 터트리면 버틸 재간이 없다. “좋다. 우리 손자가 이렇게 큰돈을 써서 서울시장을 내 손에 넣어줬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지. 시장 선거 때 나도 힘을 조금 보태주마.”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할 때 욕이 터져 나올 뻔했다. ‘서울시장을 내 손에 넣어줬는데’ 손자가 만든 결과물마저 냉큼 가져간다는, 참으로 뻔뻔한 말 아닌가? 선거에서 떨어질 사람보다 고모부가 더 걱정된다. 시장 자리에 앉아 할아버지의 꼭두각시가 될 게 뻔하다. 이런 생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드러났나 보다. 할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요놈 보게나. 뭔가 섭섭한 표정인데?” “아, 아닙니다.” “섭섭하게 생각 마라. 나도 선물 하나쯤은 주마. 혹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봐.” 조금 망설였다. 선거 후에 말해야 하는데……. 아니, 어쩌면 선거 결과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니 상관없나? “모레 투표일인데 결과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갑자기 뭔 소리냐? 선거는 왜?” 이럴 땐 먼저 치고 나가는 게 정석이다. “전 야당이 이길 것 같아서요. 정권이 바뀌지 않겠습니까?” “3번으로 나온 자가 사퇴한다면 여당 압승이다.” “기대하십니까?” “아니. 으허허.” 선거판이 재미있는지 할아버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슬아슬하게 야당이 이길 거다. 3번 후보가 꽤 많은 표를 뺏어갈 거야.” 한국에서 보수의 힘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선거였다. 나라 경제를 한 번에 말아먹었지만, 표를 갈라치기 하지 않으면 여전히 강력한 지지를 얻는 여당이다. 언제나 1번 찍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 다음 정권의 이인자는 누구입니까?” “JP와 손잡았으니 JP겠지." 뻔한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다. 과거의 나는 ‘정치는 쓰레기’라며 전혀 관심 없었던 20대였기에 정보가 없다. “아뇨. 신규 사업하나 할 생각인데 그 인허가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진짜 이인자 말입니다.” “뭐? 신규사업? 그게 뭔데?” 할아버지는 호기심을 잔뜩 드러냈다. “비밀입니다. 아직 완전한 계획도 아니고요. 하지만 선거 끝나고 정권 인수단계에서 어느 정도 약속을 받고 싶어서요.” “비밀?” “지금은요. 섣불리 말씀드렸다가 망치면 제가 쪽팔리잖아요.” “정권의 힘을 빌려야 하는 사업이라…. 꽤 큰가 보구나.” 할아버지의 눈빛이 달라졌다. 무슨 생각일까? “조심해라. 정치하는 놈들이 개입하면 변수가 많아진다. 그놈들의 이해관계는 우리보다 훨씬 복잡해. 그놈들은 도와주기 때문에 대가를 바라는 놈들이 아냐. 고춧가루 팍 뿌려서 망치지 않게 해주는 대가를 바라는 놈들이다.” 조언을 해주시는 걸까? 아니면……. “계획서가 정확하게 나오면 먼저 상의드릴게요. 그때 한번 판단해 주세요. 할아버지께서 말리시면 그만두겠습니다.” 이것이 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일까? “네 돈으로 네가 벌이는 사업인데 허락받고 자시고가 어디 있어? 실패하더라도 한번 해 봐. 좋은 공부가 될 거다.” 저 눈빛과 말씀 속에 숨겨진 할아버지의 마음은 여전히 모르겠다. * * * 12월 19일 아침. JP의 자민련과 손잡고 민자당 계열의 박태준까지 합류한 기호 2번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결과가 전 채널을 통해 발표되었다. 앞으로 ‘피닉제’라는 별호를 갖게 될 기호 3번이 무려 오백만 표에 가까운 득표를 함으로써 1번의 기세가 무너졌지만, 당락의 표 차이는 겨우 사십만 표에 불과했다. 피닉제의 독자 출마가 아니었다면 DJ는 결코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던 결과가 바뀌지 않은 것을 안도하며 학교로 갔다. 학장님이 신신당부 한, 적어도 시험은 치라는 말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기말시험마저 치지 않으면 아무리 순양그룹의 손자라도 학사경고는 피하지 못할 거라는 약간의 협박이기도 했다. 학교 분위기는 우울하기만 했다. 많은 4학년들은 IMF의 직격탄을 맞은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 [075] 칼 바람은 불어오고 1 “야…. 이거 귀하신 분도 시험은 어쩔 수 없나 보네?” “그러게.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만 칼같이 학교 오는 거 봐.” 수차례 통화했고, 이름과 얼굴을 아는 동기 몇몇이 나를 발견하자 아는체하며 모여들었다. “학사 경고받으면 좆 돼. 난 페널티가 무시무시하거든.” “페널티? 무슨 페널티?” “학교생활 더듬더듬하면 우리 할아버지가 주식 안 준다고. 큰일 나는 거야.” “주… 주식?” “그래. 학점 빵구보다 더 무서운 주식. 흐흐.” 농담이라는 걸 명확하게 알려주기 위해 웃음까지 웃었지만, 이놈들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나 보다. 웃음기 없는 얼굴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F 학점 하나에 수억 날아가는 거야?” “아니지. 수십, 수백억 아냐? 회장님 지분이라면 지주사 지분 아니겠어?” 아이고, 애새끼들…. 이걸 또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일반인에게 재벌은 판타지 같은 존재일까? 현실성 없는 이야기일수록 더 믿는 듯하다. “야! 그만! 시험 끝나고 이야기하자.” 주변의 동기들을 쫓아내고 책을 펼쳤다. 목차를 쭉 훑으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엉뚱한 답을 쓰게 될 건 뻔하지만, 논리의 일관성만 갖추고 쓰면 된다. 그리고 백지만 아니면 된다. 적당히 답안지를 채우면 C나 D 학점은 받을 것이다. 나 때문에 순양 장학재단에서 받는 장학금이 얼만데? 시험 첫날이 끝나자 애들 몇몇이 또 몰려왔다. “도준아. 맥주나 한잔 할래?” “내일 시험은? 포기했냐?” “간단히 한 잔만 하는 거지.” 서울대도 별수 없다. 내가 다녔던, 소위 듣보잡 대학에서나 시험 기간에도 술 처먹는 애들이 있는줄 알았는데 명문대라는 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아까 말했지? 내겐 주식이 달려있다고! 시험 끝나고 종강파티 때 한잔하자. 내가 쏠게. 됐지?” 내가 쏜다는 말에 요놈들 눈빛이 변했다. “야야! 너무 기대하지 마라. 딴 거 없어. 소주나 맥주 말하는 거다.” “주종은 둘 중 하나지만 양은 무제한 아냐?” 기다렸다는 듯, 한 놈이 되묻는다. 아차, 이놈들 이제 1학년이지. 돈 걱정 없이 양껏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할 나이다. “그래. 무제한이다, 인마. 흐흐.” * * * 요 새끼들. 아예 뽕을 뽑으려고 작정한 것 같다. 기말시험이 끝나고 애들에게 끌려간 곳은 바로 학교 앞 제일 큰 호프집이었다. 이미 빈 좌석이 없을 만큼 꽉 찼고 드문드문 선배들도 보였다. 그나마 나와 격의 없이 말을 나누는 애들이 같은 테이블에 앉았기 때문에 어색함은 많이 줄어들었다. “자자, 우리도 주문하자. 도준아. 뭐 먹을래?” “야! 도준이가 이런 데 와봤겠냐? 그냥 알아서 시켜.” 이런 곳? 수도 없이 다녔다. 돈이 없어 마음 놓고 안주를 시키지 못한 적이 한두 번이던가? 그때를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이왕 사는 거 먹고 싶어도 못 먹었던 것, 그걸 요놈들에게 먹여야겠다. 손을 들어 아르바이트생을 급히 불렀다. “다른 테이블에서 술 시켰어요?” “네. 삼천으로 통일해서 시켰는데요?” “그거 취소하고 병맥주로 쫙 깔아요.” “네?” “뭐?” 알바보다 동기 놈들이 더 놀란다. “간만의 술자린데 쏠 때는 확실하게 쏴야지. 쪼잔하다는 소리는 들을 수 없잖아.” 슬쩍 웃으며 말하자 같은 테이블의 놈들 입이 찢어졌다. “야! 도준이가 병맥 쏜 데!” 한 놈이 벌떡 일어나 외치자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곧이어 터지는 함성. 그래. 돈 없는 어린놈들에게 병맥주만 한 고급술이 있을까? “도준아. 카프리 마셔도 돼?” 누군가 크게 외쳤다. 카프리? 아…. 그 노란색, 밀러 짝퉁 같은 느낌의 눈으로 마시는 맥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카프리도 병맥주잖아. 뭐든 마셔.” 기분 좋은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약간의 사치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젊은 시절. 가끔은 이들과 어울리며 이런 소박한 즐거움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참, 안주 시켜야지.” 난 메뉴판을 들고 안주 리스트를 쭉 훑었다. 오케이. 눈에 띄는 음식 사진이 몇 있다.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요!” 알바가 총알 같이 달려왔다. “일단 카프리 여덟 병 줘요.” 같은 테이블에서 눈만 깜빡거리는 애들을 무시하고 다시 메뉴판을 들어 안주를 짚어 나갔다. “안주는… 보자…… 쏘야 하나, 골뱅이 무침에 소면 사리…. 아, 노가리도 하나.” 메뉴판을 덮자 알바가 받아적은 메모지를 확인했다. “카프리 여덟 병, 쏘야, 골뱅이, 노가리. 맞죠?” “네. 아, 잠깐만요. 혹시 마른멸치와 고추장, 서비스됩니까?” “네. 물론입니다.” 넋 놓고 있던 동기 중 한 놈이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외쳤다. “치킨도 시켜!” “오케이. 양념? 후라이드?” “후, 후라이드.” 알바가 고개를 까닥하고 돌아가자 애들이 참았던 입을 열었다. “뭐냐? 너도 이런데 다녀? 잘 아네?” “재벌 3세가 호프집이라니! 그림이 안 나오잖아, 인마!” 갑자기 궁금해졌다. 또 다른 재벌 3세인 내 사촌들도 호프집을 다녔을까? 소주 집에서 오뎅탕 국물 하나 시켜놓고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을까? “자주 다닌다. 가족끼리 투다리 가서 고치 먹기도 하고, 사촌들하고 찌게 하나 앞에 두고 소주도 마셔. 우린 뭐, 매일 호텔 레스토랑이나 비싼 전문 레스토랑만 다니는 줄 알아?” 동기 놈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집에서 밥 먹을 때도 매끼 12첩 수라상 같은 거 안 먹어. 그냥 국, 찌개, 반찬 놓고 밥 먹는다고. 별다른 거 없어.” 근본이 서민인 내가 서민 코스프레 하는 것쯤이야 쉽다. 이 기회에 재벌 3세 이미지도 세탁하니 일거양득이었다. 맥주를 빠르게 비워나가고 병맥주를 몇 병 더 시켰을 때 선배 몇 명이 슬며시 다가왔다. 나야 누군지 모르니 눈만 깜빡거릴 때 동기 놈들이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이거 졸업할 선배가 꼽사리 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선배님.” 4학년이라고 말하니 나도 벌떡 일어났다. 졸업반이 종강했다고 돌아다니는 걸로 봐서는 취업을 준비하는 게 틀림없다. 판검사가 목표라면 365일 법전에 묻혀 사는 게 정상이다. “자리 좀 빌리자. 잠깐이면 돼.” 표정을 보니 심상치 않다. 대충 짐작 가는 일이다. “도준아. 뭐 좀 물어보려고 일부러 들렀다. 괜찮지?” “네. 선배님. 말씀하십시오.” 선배들은 긴 한숨과 함께 맥주를 들이켰다. “사실 우리 셋은 금융사에 취직했는데 한 곳은 부도, 다른 두 곳은 합격 취소 통지서를 받았어. 올해 신입 사원 채용은 불가하다면서….” 어떡하나. 급여가 쎈 곳이라 골라서 들어갔을 텐데 졸지에 백수로 졸업하게 생겼다. 차라리 대기업이었다면 월급은 좀 적어도 최소한 백수는 면했을 텐데. “아, 오해는 말아. 너한테 취직 부탁하는 건 아니니까.” 선배들은 씁쓸한 내 표정이 그렇게 비췄는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IMF. 이거 어떻게 될 것 같냐? 넌 우리보다는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지 않아? 아무래도 주변에 고급 정보가 많이 돌아다닐 테니까.” “어쩔 수 없이 취업 재수해야 하는데…. 솔직히 일 년 뒤에도 계속 이 모양이면 노선 바꾸려고. 사시를 준비하든 행시를 준비하든 해야겠지.” 선배들의 질문 때문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모두 귀를 쫑긋하고 내 입만 바라본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진실을 알려야 하나? 아니면 위로를 건네야 할까. 대학 졸업반이라고 해도 사회에서는 어린애나 마찬가지다. 학교 안에서야 예비역이네 뭐네 하며 어른 흉내를 내지만 학교를 벗어나면 핏덩이에 불과한 철부지일 뿐이다. 이런 애들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말해줘도 그 깊숙한 진실을 피부로 느낄까?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선배들의 간절한 눈빛을 철없는 어린애로 무시하기 힘들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취업은 포기하시고 사시나 행시 준비하십시오. 공부라면 한 가닥 하시지 않습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빨리 시작하시죠.” 혹시나 했던 대답이 나오지 않자 선배들의 얼굴에 실망이 묻어났다. “내년에도 IMF 때문에 취업이 어렵다는 거냐?” 내년? 앞으로 영원히 어렵다. 갈수록 더 힘들어지는 게 취업이다. 서울대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취업은 고사하고 지금 다니는 사람들도 다 짤릴 겁니다. 기업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으로 해고의 칼바람이 불겠죠.” “해… 해고?” “네. 웬만한 대기업도 최소 30% 이상 정리할 겁니다. IMF 위기라는 건 단순히 유동성 자금 부족이 아니에요. 우리나라가 경제적인 부도 상태라는 겁니다.” 선배들의 침묵이 호프집 전체로 퍼져나갔다. 떠들썩하게 울리던 소리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제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사라졌어요. 기업은 언제든 직원을 자를 수 있고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나올 겁니다.” “비정규직? 그게 뭐야?” 이 시대에 등장한 생소한 개념인 비정규직.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때 홀을 왔다 갔다 하는 알바가 눈에 띄었다. 난 손가락으로 알바를 가리켰다. “저 알바생, 소득세 갑근세 같은 세금 뗄까요?” “아니겠지?” “퇴직금은요?” “알바가 퇴직금이 어디 있어?” 선배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럼 사장님이 내일이라도 그만두라고 하면 어떡해요?” “그만둬야겠지? “그게 바로 비정규직입니다. 이런 장사 집에서만 쓰는 게 아니라 대기업에서도 이런 형태로 고용하는 거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정규직이라는 말이 한국을 지배하는 시대가 머지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실감하지 못한다. 지금 이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전부 설마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주변의 동기들에게 말했다. “국가 부도를 벗어나고 경제가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야. 고시 준비가 아니라 취업을 생각한다면 군대부터 다녀와. 적어도 졸업을 늦출 수는 있잖아? 소나기는 피하고 봐야지.” 하지만 워낙 침울한 분위기라 꽤 멀리까지 내 말이 들렸나 보다. 많은 애들이 고개를 갸웃한다. 1학년이 겨우 끝난 애들에게는 피부에 와 닿지 않을 이야기가 맞다. 하지만 내년부터 진정한 칼바람이 불고 주변 사람들이 IMF의 피해자가 되면 소나기는 피해야 한다는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내 속에 잠자던 아재 본능 때문일까? 걱정과 잔소리가 길어졌다. 그 때문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회복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다행히 4학년 선배들이 좀 낫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든다. 고마워.” “아닙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으로 말한 것일 수도 있어요. 주변에 회사 운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으니까요.” “우리도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준비해야지. 이제 졸업이니까.” 선배들은 씁쓸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이거 우리 때문에 분위기 엉망이네. 미안하다. 자, 한잔하자!” “너희들은 아직 시간 많이 남았어. 소나기 피할 시간 충분하고 준비할 시간 많아. 걱정 말고 오늘은 퍼마시라고. 하하.” 억지웃음일지라도 분위기 반전에 도움이 됐다. 게다가 1학년이라 아직은 현실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애들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문이 벌컥 열리며 찬바람을 몰고 들어오는 사람 때문이었다. 두꺼운 오리털 파카 차림에, 털모자와 목도리로 눈만 드러났지만, 남자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는 호프집을 쓱 둘러보더니 성큼성큼 내 자리로 다가왔다. 목도리를 풀자 예쁜 얼굴이 보였다. “진도준. 오랜만이다, 너.” 누군지 알겠다. 신입생 환영회 때 돌린 노트북을 가져가지 않은 애다. 그런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입안에서 맴도는 이름, 뭐였더라? 내 표정을 본 여자애는 어이가 없는지 혀를 찼다. “너 내 이름 까먹었지?” 나는 얼떨결에 머리를 끄덕이는 실수를 저질러버렸다. ======================================== [076] 칼 바람은 불어오고 2 “이야, 역시 직진 서민영! 거침없구나.” 같은 테이블의 선배가 서민영을 올려다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맞다! 서민영. 이 애 이름이었지. 가만, 그런데 직진은 또 뭐지? “선배님, 잠깐 앉아도 되죠?” 의자를 끌어당겨 슬그머니 합석한다. 역시 남자 놈들은 어쩔 수 없다. 예쁘장한 여자가 끼어드니 모두 헤벌쭉하며 자리까지 만들어준다. 남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여자의 미모라는 말이 맞다. “한잔 할래?” 선배가 잔을 내밀자 서민영은 두 손으로 받고 잔을 조금 기울였다. “반 잔만 주세요. 다시 도서관 가야 해요.” “오! 역시 사시 준비생이라 다르네. 종강도, 방학도 없이 직진한다 이거지? 그런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있어?” 또 나왔다. 직진! 사시를 향해 달려가는 준비생들을 직진이라고 하나보다. “선배님들. 제가 보기에는 선배님들도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행정고시라면 2년 정도 준비하면 가능할 텐데요? 사시는… 아무도 장담 못 하는 문제니까 각자 판단하시겠지만.” 응? 이 애, 갑자기 무슨 말이지? 설마 IMF 이야기인가? “야! 서민영! 너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바쁘신 선배님들이 도준이에게 그거 확인하려고 여기 오신 거 맞잖아요? 기업들 상황이 어떤가, 이 끔찍한 외환위기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아닌가요?” 어쭈? 제법인데? 공부 머리가 좋아 법대에 들어왔고, 선배들 말을 들어보니 오로지 법관을 향해 공부만 파는 모범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선배들이 이 자리에 모인 이유를 재빨리 알아내는 눈치도 있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안다. 검사가 된다 해도 실적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지금은 서울대 간판도 통하지 않는데요. 바깥은 칼바람이 분다고 졸업생 전부 울상입니다. 그리고 그 칼바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나마 우린 다행이죠. 법 공부라도 했으니 공무원 시험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니까요.” 선배들은 나와 똑같은 말을 한 서민영과 나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니네 둘, 혹시 사귀냐? 데이트하면서 한국 경제문제 같은 걸 토론도 막 하고 그래?” 한 선배가 농담처럼 말하자 옆자리의 동기 놈들이 소리쳤다. “그건 아니지! 아니, 그럼 안되지. 도준이 얘는 지구인이 아니야. 에어리언과 우리 민영이가 사귈 리는 없잖아.” “야! 민영아. 넌 아니라면서? 힘자랑 하는 놈 재수 없고, 돈 자랑하는 놈 밥맛이라면서? 도준이 이놈은 돈, 힘, 둘 다 있다고. 정신 차려.” “진도준. 넌 니네 세계로 가. 다른 재벌 집 무남독녀, 아니면 연예인…. 이런 여자 만나야지.” 이거, 아무래도 농담 같지가 않다. 동기 놈들 눈에 불꽃이 튄다. 서민영은 잔을 싹 비우고 입술을 쓱 훔쳤다. “니네들 왜 오버냐? 나 입학하고 도준이 본 게 오늘이 세 번째야. 사귀긴 누가…?” “그렇지? 하긴, 물리적인 시간도 없고 기회도 없구나. 도준이는 학교를 안 오고 민영인 학교 도서관과 강의실만 오가니 사귀는 건 불가능이지, 암.” 놈들의 눈에서 불똥이 사라졌다. 애들 말하는 게 우습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은 다른 경우에 쓰는 말이지만, 내 경우도 그렇다. 연애 감정이 말라버린 중년의 정신이다 보니 이런 애들 신경전은 귀엽게만 보인다. 가끔 내 몸속의 남성 호르몬이 날뛰지만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그 호르몬을 억누른다. “됐다. 얼굴 봤으니 난 가볼게.” 서민영은 목도리를 두르며 일어섰다. “그리고 도준이 넌 나 잠깐 보자. 할 이야기가 좀 있어.” “나? 왜?” 깜짝 놀랄뻔한 것을 잘 넘겼다. 무슨 애가 앞뒤 없이 갑자기 쑥 들어오는지. 조금 전 당황했던 선배들이 이해가 된다. “내가 좀 따질 게 있어서 그래.” “야. 서민영! 딴 생각하는 거 아니지?” 무표정한 서민영에게 동기 한 명이 소리 질렀지만, 표정은 변함없었다. “쫌! 까불래?” 귀엽기도 해서 별말 없이 서민영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으…. 춥다. 뭔데? 뭘 따져?” “내가 지금 진짜 쪽팔림을 무릅쓰고 하는 말이니까 잘 생각해서 대답해.” “그래.” 어린 애의 장단을 맞춰주려니 좀 시큰둥하게 대답했고 서민영은 이런 내 기분을 느꼈는지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뭐야? 얼른 말해봐.” “난 졸업 전에 사시 패스가 목표이자 의무거든.” “목표는 이해하는데 의무는 또 뭐야?” “우리 집은 전부 법조인이야. 게다가 대부분 법대 졸업 전 패스했어. 졸업 전에 패스 못 하면 가족 전부가 갈구기 시작하거든. 그래서 무조건 패스해야 해.” 김윤석 대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검사장, 법원장이 흔한 가족이었던가? 그런데 대부분 졸업 전 패스라니… 의외다. “그래서 고3보다 더 빡세거든? 솔직히 시간이 없어.” “무슨 시간?” “너랑 데이트할 시간.” “뭐?” 요즘 애들 다 이러나? 솔직한 건가, 당돌한 건가? “너 좋아한다는 고백인데 반응이 고작 그거야?” “힘자랑, 돈 자랑하는 놈 싫다면서? 난 둘 다 있는데?” “대신 잘생겼잖아.” “뭐?” “넌 반응이 딱 하나뿐이구나. 뭐?” 내 말투를 흉내 내고는 짧게 한숨을 쉰다. “우리 할머니가 그러시더라구. 남자는 인물이 제일 중요하다고. 남자가 잘생겼으면 화나는 일이 생겨도 용서가 된다나?” “그래서? 할머니 말씀 따르려고?” “아니, 나도 백퍼 동의하니까. 내가 남자 외모에 많이 약해.”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자 서민영도 배시시 웃는다. 귀엽긴 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암튼 나도 시간 없고 너도 학교 잘 안 오니까, 자주는 아니고 한 달에 한두 번쯤 밥 같이 먹는 걸로 퉁 치자.” “뭘 퉁 쳐?” “우리 데이트.” 이번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공부라는 한우물만 파서 남녀가 밀당하는 법을 아예 모르는 건가? 아니면 너무 솔직한 걸까? 대답을 못 하고 있으니 그녀가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잘 생각해서 대답해. 솔직한 게 좋긴 하지만, 거절하면 원한 품을 거야. 여자가 원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만 난 좀 달라.” “어떻게 다른데?” “검사가 돼서 네 명의의 계좌 싹 털 거야. 불법 증여 흔적이 나오기만 하면 넌 수갑 차고 취조실에서 날 보게 될걸?” “그거 지금 쪽팔리니까 나 웃으라고 농담한 거냐?” “별로야? 안 웃겨? 이 멘트 준비한다고 서너 시간 고민했는데….” 서민영은 또다시 날 빤히 보기 시작했다. 예쁜 여자의 눈길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심장 떨린다.” 내 말을 이해 못 했는지 눈만 깜빡거리다 마침내 환히 웃는다. 이럴 땐 좀 늦군. “내 번호 알지?” 서민영은 머리를 힘차게 끄덕였다. “전화해. 차 보낼 테니까.” “차? 무슨 차?” “너 데리러 갈 승용차. 잊었어? 나 재벌 3세야. 우리 데이트가 평범하진 않을 거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 나 들어간다.” 서민영의 어깨를 슬쩍 치고 돌아설 때 그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이거 비밀이야! 애들이 물어보면 조별 과제 빼먹은 거 따졌다고 해.” 나는 웃으며 손을 슬쩍 들어주고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자리로 돌아오자 남학생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뭐냐? 무슨 말 하디?” “뭐긴? 조별 과제 할 때 땡땡이친 거 가지고 한참….” 이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서민영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나 오늘부터 진도준이랑 사귀기로 했다!” 이 말만 크게 외치고 그녀의 얼굴이 사라졌다. 저, 저런! 도대체 저 애의 사고 회로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방금 제 입으로 비밀로 하자고 말하지 않았던가? 1분도 지나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내 얼굴에 죽일 듯이 쏘아보는 남학생들의 눈길이 꽂혔다. “으하하. 역시 직진이야. 민영이답다.” 선배 한 명이 배를 잡고 웃었다. 아…! 직진이 무슨 뜻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 * * “호텔, 백화점, 리조트, 골프장. 이 정도면 결코 적은 게 아니다. 다른 그룹들을 봐. 백화점이나 골프장 한두 개가 전부야. 그게 딸이 가져가는 몫이다.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정치하는 거예요. 부족한 걸 권력으로 메꾸고 싶으니까요.” “부족? 허, 참.” 진 회장은 진서윤의 욕심에 할 말을 잃었다. 외동딸이라 너무 오냐오냐 귀엽게만 키운 자신의 잘못도 크기 때문이다. 최 의원은 진 회장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염려하시는 부분은 없을 겁니다. 회사 쪽은 쳐다보지 않고 정치에서 크겠습니다.” 마누라 치마폭에 쌓여 꼼짝도 못 하는 놈이 험악한 정치판에서 크겠다고 큰소리치니 더 한심해 보였다. 진 회장은 사위를 무시하고 딸만 쳐다보며 말했다. “야당이 정권을 차지했다. 여야가 바뀐 거야. 야당 후보로 나서서 선거에서 이기기 쉽지 않다.” “저는 정권을 차지한 야당보다 아버지가 더 두렵거든요.” 배시시 웃는 딸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나이 먹은 딸이지만 진 회장의 눈에는 여전히 귀여운 외동딸이었다. 하지만 자를 건 자르고 지킬 건 지켜야 한다. 더욱이 똘똘한 손자가 만들어준 아킬레스건까지 손에 넣지 않았던가. “모두 들어와!” 진 회장이 서재 밖을 향해 외치자 삼, 사십대로 보이는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진 회장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한 다음 회의 테이블의 한자리를 차지하며 앉았다. 진서윤의 표정이 점점 더 환해졌다. 그녀는 이들의 정체를 잘 안다. 선거 때마다 대기업을 옹호하는 후보 곁에서 전략을 짜내는 사람들이다. 소속은 순양경제연구소지만 경제보다 정치판을 읽는데 탁월한 사람들이다. 정치는 생물이라 시시각각 변한다. 그 변화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전략을 수정하며, 유권자의 변화를 정확히 캐치하는 식견을 보유한 능력자들이다. 이들은 계열사 사장급의 엄청난 연봉을 받으며 오로지 선거만 책임지는 그림자들이었다. “오늘부터 이 친구들이 최 서방을 도울 거다. 이왕 나서기로 한 거 꼭 이겨야지.” 뭐가 뭔지 모르는 남편에게 진서윤이 눈짓하자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꼭 이겨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진 회장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며 사위에게 말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물론입니다. 장인어른께서는 제가 친아버지와 다를 바 없으신 분입니다. 어떻게 딴생각을 하겠습니까?” 진 회장은 사위의 달달한 말에 웃음을 흘리며 서류 파일 두 개를 그의 눈앞에 툭 던졌다. “이건…?” 최 의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진서윤은 재빨리 파일을 낚아채고 펼쳤다. “하나는 서울시 정무 부시장과 서울시 산하기관의 기관장으로 쓸만한 사람 명단이다. 특히 도시기반시설본부, 시설관리공단, 주택도시공사에 앉을 인물은 특별히 골랐어.” “아, 아버지.” 당황한 진서윤이 진 회장을 쳐다봤지만, 그 눈길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선거 때 자네 공약에 써먹을 만한 거 몇 줄 적었다. 언제 발표할지는 저 친구들이 알려줄 거야.” 숫제 진 회장의 사람들로 서울시를 장악하겠다는 뜻 아닌가? 공약도 서울시장의 생각이 아니라 순양그룹을 위한 공약이다. 자신을 완전히 꼭두각시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자, 장인어른. 저도 챙겨줘야 할 사람이 있고 우리 당에서도 사람을 추천할 겁니다. 그 사람들도….” “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염려 말게. 서울시의 공무원 자리보다는 순양그룹 사옥으로 출근하는 걸 더 좋아할 거야.” 이권을 쥔 자리는 진 회장 사람이 앉고 그 대가로 월급 듬뿍 주는 자리를 내주겠다는 말에 최 의원은 입을 닫았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아내가 보내는 눈빛 때문에 참아야 했다. 지금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야 할 시기라는 걸 최 의원도 잘 안다. 반격은 권력을 손에 쥔 다음이다. ======================================== [077] 칼 바람은 불어오고 3 “인수위원장 이종철. 정권 초기에는 이 사람이 주도해 나갈 거라고 합니다. 초대 비서실장이 유력하다네요.” “이종철? 이 양반은 DJ 사람도 아닌데? JP 쪽이야.” 오세현은 진 회장이 일러준 차기 정권의 이인자 이름을 듣자 믿기 힘든 표정이었다. “정보력으로 본다면 할아버지가 더 정확하지 않겠어요? 의심은 버리세요.” “하긴, 순양그룹이 파악했는데 어련하겠냐?” “만나봐야겠죠?” “진 회장님께서 줄을 놔 주신데?” “그동안 제가 해드린 게 얼만데요? 그리고 우리 미라클은 순양의 대주주에요. 그 정도는 당연히 해 주시죠.” 대통령 당선인이나 인수위원장은 취임식 때까지 거동을 조심한다. 특정인을 만난다면 곧바로 언론에 노출되고 꼬투리가 잡히기 때문이다. 비밀 회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을 가진 사람만 가능한데, 진 회장 정도면 미팅 제안을 거절하기 힘든 사람이다. “좋았어. 이제 큰물에서 한번 놀아보자. 흐흐.” “이제부터 함께 만나죠. 제가 정장 입고 삼촌 곁에서면 수행비서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뭐냐? 날 못 믿는다는 소리는 아니지?” 직접 만나겠다는 소리에 놀란 듯 보였으나 이내 농담을 건넨다. “정치하는 놈들은 말을 두루뭉술하게 하니까요. 정확한 해석을 위해서는 함께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혹시 널 알아보지 않을까? 순양 회장의 손자라면 상대가 조심할지도 몰라.” “저 유명인사 아닙니다. 작년 수능 끝나고 TV에 잠깐 얼굴 나온 게 전분데 기억 못 하죠.” 정권의 인수위원장이라면 가십에 불과한 방송을 볼 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현실을 얼마나 정확히 아느냐 하는 것이다. 32억 달러 중 10억 달러는 순양그룹에서 바꿨고, 남은 22억 달러의 가치를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꼭 알고 싶었다. 만약 달러의 가치를 평가절하한다면 그는 현실감각 없는 정치꾼일 뿐이다. 이종철은 과연 차기 정권의 이인자일까? 아니면 문고리를 잡고 문만 여는 역할의 허수아비일까? * * * “이야, 이 자식. 이렇게 입으니 슈트 빨 죽이는데?” “전 뭘 입어도 옷 빨 삽니다. 모르셨어요?” “하여튼, 겸손이란 게 없어요.” 오세현은 내 등을 툭 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 호텔은 정치인들 안방이군요.” “청와대, 정부종합청사 바로 앞이고 여의도 가깝고…. 이만한 곳이 없지.” “주차장에서 객실로 직행이니까 눈에 띌 염려가 없어서 더 그런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뭔 놈의 비밀 회동이 그렇게 많은지. 음흉한 새끼들.” 우리 둘은 정치인을 싸잡아 씹으며 약속 장소로 올라갔다. 객실을 가볍게 노크하니 TV에서 봤던 익숙한 얼굴이 문을 열었다. “오세현 대표님?” “네.” “들어오시죠.” 객실에는 서너 명의 인수위원들이 대화를 나누다 우리가 들어서자 입을 닫았다. “자, 그럼 그렇게 진행하고 먼저 돌아가. 난 이분과 나눌 이야기가 좀 있으니까.” 인수위원들은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객실을 빠져나갔다. “어서 오세요. 이종철입니다.” “오세현입니다. 바쁘실 텐데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휘청거리는 아진그룹을 구제해 주신 분 아닙니까?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예상과 다른 태도다. 육사 16기 졸업생이며 5공화국 시절 중앙정보국을 거쳐 민정당 의원을 역임했다. 이 정도 경력이면 겸손과 거리가 멀고 거만과 가까워야 하는데 아주 깍듯한 말투다. 처세술이 좋은 건지 타고난 성품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거기 젊은 분은…?” “아, 제 스텝입니다. 혹시나 해서 먼저 말씀드리는데 저와 이 친구 사이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오늘 위원장님과 나누는 대화, 어차피 이 친구에게 다 말할 생각이니 동석을 부탁드립니다.” “그러시죠. 그다지 숨겨야 할 이야기는 없을 텐데, 괜한 걱정이십니다. 허허.” 나는 이종철에게 머리를 꾸벅 숙이고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 사람도 내게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순양 회장님 말씀으로는 좋은 소식을 전할 분이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바쁘신 것 맞군요. 바로 본론부터 꺼내시다니.” “아차, 이거 실례했어요. 일단 앉읍시다.” 이종철 위원장은 객실 중앙의 응접 소파로 우리를 안내했다.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뉴욕 본사에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이 22억 달러쯤 있습니다. 전 그 돈을 한국으로 가져올 생각입니다.” “조건이 있겠죠?” 22억 달러라는 말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분명 처음 듣는 숫자가 분명할 텐데, 침착한 걸까? 아니면 22억 달러의 가치를 모르는 걸까? “네. 위원장님을 뵙자고 한 이유도 그 조건을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오세현이 준비한 파일을 건넸지만, 이종철은 제목만 흘낏 보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투자사가 건설에 손대려는 이유가 뭘까요? 금융과 공구리는 별로 어울리는 모습이 아닙니다만.” “그 계획서는 공구리 사업이 아닙니다. 일부 들어가 있지만, 별개의 사업이죠.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립니다.” “긍정적이면 달러를 한국에 쏟아붓겠다는 뜻?” “네.” “쏟아붓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그 돈은 다시 미국으로 가져가겠죠?” 웃으며 말하지만, 호의는 아니다. 미국 투자사라는 것이 이 사람에게 선입견을 준 게 분명했다. 검은 머리 외국인이 한국의 부를 외국으로 유출하는 수단으로 미라클을 노려보는 것이다. “뻔한 수순 아닙니까? 아마 아진그룹 미래도 이것에서 벗어날 수 없겠죠? 정상화한 다음 쪼개서 팔고 이익은 미국으로. 아닙니까?” “아닙니다. 위원장님. 그 반대입니다.” 내가 입을 열자 이종철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반대?” “네. 우리 미라클은 미국에서 번 돈을 한국으로 가져오는 일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회사는 델 컴퓨터, 마이크로소프트, 헐리우드 영화, 일본의 소프트뱅크에 투자해서 많은 이익을 남겼고, 그렇게 번 돈으로 아진그룹을 인수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수출역군입니다.” “젊은 친구가 말장난이 심하군. 수출역군이라니?” 6, 70년대를 살아온 사람에게 수출역군이라는 단어는 자부심과 긍지의 상징이다.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동력이 바로 수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적 자원이 전부이고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작 돈놀이하는 놈의 입에서 드높은 긍지의 단어를 입에 담으니 처음으로 불쾌한 심정을 보이는 것이다. “수출은 바로 달러를 벌어들이는 행위 아닙니까? 우리는 상품을 팔지 않을 뿐 외화를 번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보일지도. 하지만 앞으로는?” 이 아저씨도 참…. 의심이 깊다. 정보국 출신이라 그런가? “위원장님. 돈만 벌려고 생각했다면 환율 차이만 챙겨도 두 배가 넘습니다. 제가 드린 그 계획서가 현실이 된다 해도 두 배의 이익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오세현이 핵심을 찌르자 그제서야 파일을 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내용을 싹 훑은 이종철은 파일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한국 미디어 산업의 메카를 만들겠다는 계획 같은데…. 나쁘지 않군요.” 이종철의 태도가 변했다. 갑자기 호의적인 음성이다. “22억 달러 전부를 미디어 산업에 투자할 계획입니까?” “아닙니다. 그중 일부만 투자합니다. 사실….” 오세현은 잠깐 뜸을 들이며 이종철의 눈치를 살폈다. “다양한 분야에 투자할 생각입니다. 미국 투자사는 현지인들에 맡기고 전 우리나라에서 경영자로 거듭날 생각입니다만.” “혹시 IT는 어떻습니까?” 이종철이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델,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뱅크에 투자해서 막대한 이익을 보셨다면 그쪽에 밝은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한 오세현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IT 투자는 전부 내가 주도한 일 아닌가? 난 이 질문이 나왔을 때 쾌재를 불렀다. IMF 사태로 침체에 빠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하여 국민의 정부는 IT 관련 벤처기업을 육성하는 데 힘을 쏟아붓지 않았던가? 게다가 문화 융성이라는 화두까지 던진 정부다. 미라클에서 미국 투자회사라는 간판만 거둬내면 미디어시티는 그야말로 이 정부의 핵심 과제와 맞아떨어진다. “IT는 중소기업 육성에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실리콘밸리에서 출발한 벤처기업들이 현재 버블이라는 우려를 자아낼 만큼 급성장했고요. 정부 차원에서 핸들을 한번 돌리면 훌륭한 성과가 나올 겁니다.” 공무원과 정치인에게는 듣고 싶은 대답만 해주면 된다. 지금 이종철이 원하는 대답은 IT의 밝은 미래다. “역시 이쪽은 젊은 사람들이 잘 아는 분야구먼. 명쾌하네.” 이종철은 밝은 표정으로 오세현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IT 쪽 투자도 고려해보시겠습니까?” 삼촌이 무조건 받아들이기 전에 내가 먼저 대답했다. “위원장님. 우리 미라클은 IT 투자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확 변했다. 삼촌은 당황한 표정으로, 이종철은 불쾌한 표정으로. 정권 핵심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니 그럴 만도 했다. “IT 벤처는 오로지 획기적인 아이디어와 기술력이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라야 합니다. 특정한 사적 자본이 개입하면 아이디어와 기술만 빼먹을 것입니다. 벤처 창업자들의 젊음을 자본가에게 뺏기면 안 되겠죠.” 나의 색다른 의견에 이종철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럼 산업 주체는 정부여야 한다?” “네. 정부 차원에서 젊은 벤처 기업가가 탄생할 수 있도록 좋은 화단만 마련해 주시고 지켜보는 것이 가장 좋을 듯싶습니다.” “화단이라면…?” “IT 인프라의 구축. 그리고 가만히 지켜보시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실리콘 밸리가 이런 방식으로 커왔으니까요.” 이종철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부의 신 동력 사업을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아직 없다는 게 느껴졌다. 이제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다. 정부 출범 이후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늦어지면 안 되니 IT와 미디어시티에 대한 결론은 빨리 날 것 같다. “좋은 의견 잘 들었습니다. 이 계획서는 충분히 검토하고 연락드리죠. 그리고 22억 달러에 대한 투자 계획을 좀 소상히 알려주시겠습니까? 정부 차원에서 적극 검토하겠습니다.”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 이건 엄청난 제안이다. 인수위원장이 적극 검토한다는 것은 승인한다의 다른 표현일뿐이다. 오세현은 이종철이 내미는 손을 공손히 잡았다. 하지만 이종철은 내게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이런 게 서열을 각인시키는 방법인가? 호텔을 빠져나올 때 오세현의 입이 찢어질 만큼 웃고 있었다. 22억 달러만 가져오면 정부가 밀어주겠다는 확답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종철은 아닌척했지만, 달러를 절실히 원한 것이다. 우리가 이뻐서 밀어줄 리 있겠는가? “참, 너 아까 했던 말, 진심이냐?” “무슨 말요?” “IT 쪽 투자 안 한다는 거 말이다.” “네. 진심인데요?” “왜? 정부 차원에서 육성한다면 노다지야. 그렇지 않아도 우리에게 노크하는 벤처기업 꽤 있어.”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오세현을 바라보았다. “삼촌. 우린 대현자동차와 자웅을 겨루는 회사의 주인입니다. 벤처라는 게 어린 애들 코 묻은 돈 벌려고 아등바등하는 곳 아닙니까? 우린 빅리그에서 놀아야죠.” “너무 만만하게 보는 거 아냐? 규모 커지면 무시할 수준 아니다.” “삼촌, 몇 년 전 반도체 활황일 때 순양전자 영업이익이 얼만 줄 아세요? 무려 2조 원이었어요. 벤처가 아무리 커봤자 순양전자 발끝에도 못 미쳐요.” 20년 뒤에나 겨우 1, 2조의 매출을 올리는 IT 기업에 눈 돌릴 틈이 없다. 수백조의 기업이 나를 향해 손짓하는데 말이다. ======================================== [078] 누군가에게는 암울한 새해 1 “푼돈 귀한 줄 알아야 돈 모은다. 그리고 혹시 또 아냐? 야후의 제리 양 같은 놈이 등장할지?” 꽤 많은 벤처들이 미라클의 문을 두드리나 보다. 미국 IT 붐이 한국에서 재현되기를 희망하는 삼촌의 속마음도 보였다. “그럼 삼촌이 마음 가는 곳에 조금씩만 투자하세요. 반찬값이라도 벌겠죠, 뭐.” 가만있자, 돈 될만한 회사는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창고 같은 곳에서 창립 멤버들이 모여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을 것이다. 기억나는 것 중 지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작년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넥슨의 바람의 나라와 올해 봄부터 시작한 NC소프트의 리니지 정도가 전부다. 벤처 열풍에 편승해 단기간에 치고 빠지지 않는다면 다른 회사에 투자하는 건 돈만 날리게 될 텐데. 어쩌나? “도준아. 착각하지 마.” “네?” “정권의 실세를 만나고 수십억 달러, 수조 원의 돈을 만지니까 재벌 회장이라도 된 것 같냐?” “삼촌.” “입 다물고 들어.” 10년 동안 오세현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굳은 표정과 나를 노려보는 눈빛에는 경멸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네 할아버지 진 회장은 조 단위의 사업만 직접 관리하겠지. 정권의 실세들과 밥 먹으며 수천억짜리 이권을 챙기기도 하고. 그게 재벌 회장들이 하는 일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이리 화를 내는가? “하지만 그들은 반찬값을 벌어오는 수만 명의 머슴을 거느리고 있다. 그 머슴들이 한 푼 두 푼 벌어온 돈으로 제철소도 인수하고 중국에 공장도 짓는 거다.” 아,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것 같았다. “머슴이 없으면 주인도 없고 소작농이 없으면 지주도 없다. 백성이 없으면 왕도 없는 법이야. 그런데 넌? 머슴도, 소작농도, 백성도 없어. 돈 좀 쥐고 있다는 게 전부다. 그런데 벌써 재벌 회장 흉내 내는 거냐?” 입 다물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머슴이었던 내가 10년 만에 재벌 흉내를 내게 될 줄이야. 오세현의 따끔한 일침이 아니더라도 나 자신을 쥐어박고 싶었다. 내가 이런 시건방을 떨게 될 줄이야. “반찬값? 수십억, 수백억을 벌어들일 수도 있어. 그게 반찬값이냐?”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오세현은 재빨리 사과하는 내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듯했지만,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말귀는 빨리 알아들어서 좋네. 알았으면 됐다.” 조금은 겸연쩍은 표정의 오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떤 곳에 투자할까?” “네? 그냥 삼촌이 정하시는 게….” “아니다. 방향은 내가 정할 수도 있지만 투자 판단이나 감은 네가 더 좋아. 그냥 말해봐. 끌리는 거 없어?” “그럼 온라인 게임 쪽 두 군데에 각 10억씩 넣고 나머지는 삼촌이 결정하세요.” “게임이라….” 오세현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전부 100억만 쓰자. 두 곳은 네 말대로 게임. 나머지는 최대 10억 이하로 해서 내가 분산 투자하마.” “그래요. 하나만 터져도 본전치기는 하겠죠?” “방금 들었잖아. 차기 정부에서 IT 육성한다는데 하나만 터지겠어?” 환하게 웃는 오세현의 표정이 참 보기 좋았다. 이런 고마운 사람이 오 년 뒤에 은퇴한다니 아쉽다. 퇴직금은 정말 넉넉하게 챙겨드려야겠다. * * * 97년 겨울은 정말 춥다.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지 않은 유일한 겨울이었다. 12월을 사흘 남겨두고 올해의 마지막 전쟁을 치르기 위해 또 한 번 정장을 입었다. “명함 나왔다. 챙겨라.” 아무래도 사람들을 만나려 하니 명함 없이는 안될 것 같았다. 고심 끝에 미라클 미국 본사에서 파견 나온 직원으로 위장했다. 본사에서 투자 시스템을 관리하는 젊은 재미교포 2세. 본사에서 파견 나올 만큼 현재의 한국이 위험하다는 위협하는 효과도 있다. 하워드 진이라고 찍힌 영어 이름을 보니 델 컴퓨터에 투자하러 텍사스로 날아갔던 8년 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다. “첫 명함이 나오면 왠지 뿌듯하지. 다 큰 거 같기도 하고. 흐흐.” “그런가요? 좀 기분이 묘하긴 하네요.” “그 기분 나중에 만끽하고 빨리 출발하자. 채권단 인간들 눈이 빠져라 기다리겠다.” 우리는 아진그룹 주 채권단이 기다리는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오늘을 위해 오세현과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세웠다. 바로 인수가격을 무자비하게 후려치기 위함이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지 않겠는가? # # # 은행 세 곳의 본부장급 임원과 그들을 보좌하는 직원들이 커다란 회의실에서 초조한 모습으로 우리 두 사람을 맞이했다. 좋은 패가 들어왔을 때만 포커페이스가 필요한 건 아니다. 판돈이 말라가고 똥 패가 들어왔을 때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은행을 주축으로 구성된 채권단은 노름판에 앉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였다. 표정, 말투, 행동에서 이미 후달린다는 걸 조금도 숨기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란 돈을 쥐고, 언제나 큰소리치고 대접받던 슈퍼 갑인 은행에서 편안하게 지내던 사람들이다. 단 한 번도 이런 칼바람을 맞은 적이 없으니 발가벗은 채 추위에 벌벌 떠는 것이다. 대표와 함께 온 젊은 내가 생뚱맞았는지 의아한 눈빛이었지만, 관심은 금방 사그러 들었다. 오세현 대표가 있으니 내가 누구든 관심 없을 것이다. “순양자동차와의 합병 논의는 완전히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인수절차에 들어가는 게 어떻습니까?” 숨돌릴 틈도 없이 안자마자 재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재촉은 오로지 오세현에게만 향했다. “아직 합의서에 사인하지 않았습니다. 순양그룹이 지분 조정 중이라서요.” “그게 언제쯤이면 끝나겠습니까?” “순양그룹에 던져야 할 질문을 왜 우리에게 하십니까?” 오세현과 나는 느긋하게 커피잔을 들며,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외투 한 벌 값으로 얼마를 부를까 생각 중이었다. “순양그룹 진 회장님께도 언질을 주시더군요. 이미 합의는 끝났고 남은 건 절차뿐이라고 말입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죠.” 커피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입을 열자 저들의 시선이 쏠렸다. “실례지만 이분은 누구…?” “아, 미국 본사에서 급히 불러들였습니다. 이번 인수 합병 건을 맡아 지휘하고 있습니다.” 오세현이 나를 띄워주자 채권단 사람들은 좀 놀라는 기색이었다, 너무 어려 보이지 않는가? 은행 측 사람 두어 명이 명함을 꺼내 들고 내게 슬쩍 내밀었다. 내 직책이나 직급이 궁금한 것이겠지. 또한, 이놈들은 내가 이 자리에 끼어들 만한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나도 그제야 명함을 돌렸고 그들은 내 명함을 보자 수긍했다. 미국이야 새파란 놈들이 월가를 주무르지 않는가? 나는 채권단을 향해 가볍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하워드?” 채권단 사람들은 내 이름을 되뇌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교포 2세라 영어 이름을 씁니다. 양해 바랍니다.” “그렇군요. 하려던 말씀 계속하세요.” “네. 본사의 투자 심사단은 지금 이 인수 건에 대해서 정밀 재검토 중입니다.” 일단 미끼 하나를 던지자 예상했던 반응이 쏟아졌다. “뭐요? 재검토?” “아니, 지금에 와서 재검토라니. 그게 무슨…!” 소스라치게 놀란 채권단 사람들의 타는 듯한 눈빛이 오세현을 향했다. 미끼는 내가 던졌지만, 이들은 본능적으로 계속 사장만 바라본다. 은행은 머슴은 상대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내가 몇 번이나 만류했지만… 아시다시피 미국 애들은 시스템을 따를 뿐 사장 말을 잘 안 듣거든요.” 오세현은 어깨를 으쓱한 다음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회사 시스템상 저도 이 친구 눈치는 좀 봅니다. 우리 미라클의 미국 투자자들 의견을 쥐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친구 말, 끝까지 한번 들어보세요.” 나는 오세현이 깔아주는 멍석 위에서 판소리 한 자락을 뽑기 시작했다. “처음 시나리오는 이랬습니다. 아진자동차를 갖고 싶어 하는 순양그룹, 하지만 그들은 한도제철을 인수하느라 가진 돈을 다 써버렸죠. 그때 우리 미라클이 등장한 겁니다. 아진그룹을 잠깐 들고 있다가 순양그룹이 돈을 모으면 아주 비싸게 팔 생각이었죠. 여기까지는 다들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채권단 사람들은 불편한 표정이었다. 미라클의 목적이 돈이라는 걸 알자 원하는 걸 얻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 외환 위기가 터질 줄이야. 인수금액 1조2천억. 환율이 800원 하던 시절이면 15억 달러, 1,800원인 지금은 고작 6억7천 달러. 만약 2,500원까지 오르면? 4억8천만 달러!” 환율을 거론하자 채권단 사람들은 창백한 안색으로 궁핍한 말을 쏟아냈다. “IMF 원조가 시작됐어요. 벌써 20억 달러가 들어왔으니 2,500원까지 오르지 않아요. 이제 2천 원 밑으로 떨어질 테고 곧 안정화 될겁….” “555억 달러를 약속했는데 겨우 20억 달러 들어왔어요. 정권이 바뀌었으니 새 정권과 다시 협상하려 들겠죠. 5백억 달러…. 언제 들어올지 기약 없습니다. 내년이면 3천 원까지 오를지도.” 채권단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데 내일모레면 98년이죠. 여러분들은 올해 결산 맞춰야 하는데, 장부 들여다보면 답이 안 나올 겁니다. 새 정부 들어서면, 아마도 은행 통폐합을 시작할 텐데…. 생존하려면 우리 미라클이 쥔 달러가 해 바뀌기 전에 은행으로 들어가야겠죠?” 수출 기업은 달러를 벌어들이지만, 수입 기업은 달러가 필요하다. 지금 달러를 쥐면 이런 기업 전부가 몰려든다. 외국은행이 내미는 달러 결제 요구도 쌓여있다. 이런 경제 위기 속에서는 항상 대형 은행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차기 정부는 올해 실적을 바탕으로 분명 통폐합을 서두를 것이다. “그런데 우리 미라클 입장에서는 한국이 불안합니다. 다시 떠오르지 못한다면? 한국 경제가 동남아 수준으로 추락한다면?” “그,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우린 ‘우선 인수협상자’지만, 그 자격을 포기하고 싶군요.” “뭐, 뭐요?” “저희는 빠지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진그룹 인수를 포기하면 대현그룹이 나설 것 아닙니까? 그쪽과 협상하십시오.” 대현그룹이 나설 리가 있나? 그곳도 발등에 떨어진 불 끄느라 정신없는데? “아이고, 저 쳐다보지 마십시오. 돈의 주인인 미국 투자자들이 한국을 불안하게 생각하는데 어쩌겠습니까?” 오세현은 쏟아지는 채권단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척 너스레를 떨었다. 이 중에서 눈치 빠른 놈이 있다면 뭘 해야 하는지 알 것이다. 현금은 씨가 말랐고, 덩치도 크고 팔리지도 않는 악성 재고 하나가 떡하니 자리 잡고 속을 썩인다. 반값이든, 떨이든 빨리 처리하는 게 상책이다. 이 간단한 원칙은 구멍가게든, 대기업이든 그리고 은행이든 똑같이 적용된다. “미국 투자자들의 마음을 돌리세요. 우리 대한민국이 그 정도로 허약하지 않습니다. 경제 규모 면에서나 경쟁력에서나….” 은행 임원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을 때 나는 조금 비웃는 태도로 말했다. “외환 위기가 터지기 전, 한국 정부가 했던 말이군요. 아닙니까?” 그들은 입을 닫았다. 똑같은 변명 외에는 그리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때 오세현이 슬며시 끼어들어 불을 지폈다. “대승적인 결단을 내리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네? 결단이라니요?” 오세현은 거만한 눈빛으로 엄지와 새끼손가락으로 전화 모양을 만들어 까닥거렸다. “행장님들께 전화하세요. 결단을 내리는 사람은 행장님이니까요.” 임원도 머슴이다. 이제 주인장이 나서야 할 때다. ======================================== [079] 누군가에게는 암울한 새해 2 처음에는 오세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뭣들 하세요? 얼른 전화하시라니까요.” 한 번 더 재촉하자 채권단 임원들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협상을 깨고 빠지겠다는 말은 재협상하자는 의미였고, 새로운 협상은 채권단의 수장인 은행장이 결정해야 할 만큼 인수 금액을 깎겠다는 뜻이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나와 오세현은 임원들이 통화를 끝낼 때까지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다급한 목소리로 차례차례 통화를 끝낸 임원들은 회의실 구석에 모여 수군거렸다. 각자의 상관이 말한 것을 서로 교환하고 결론을 내리려는 것이다. “내일, 30일 오후 네 시까지 인수대금 전액 지급 가능한 조건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세 임원은 은행장들의 일치된 의견을 말했다. “인수 금액 8천억. 환율 2,000원 기준으로 4억 달러. 받아들이시면 오늘이라도 지정 계좌로 4억 달러 입금합니다. 그리고 내일, 다시 만든 협약서에 서명하는 걸로 하죠.” 나는 기다렸다는 듯,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오늘 오후까지 연락 없으시면 미라클은 경제위기로 인하여 눈물을 머금고 아진그룹 인수를 포기한다는 발표가 내일 오전 중으로 나올 겁니다.” 내 말이 끝나자 오세현은 경고를 빼먹지 않고 재빨리 말했다. “이제부터 바쁘실 테니 저희는 돌아가겠습니다.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모두가 말도 안 되는 조건이라고 생각한다는 게 보일 정도로 채권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우리는 그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회의실 문을 열고 나와 버렸다. “괜찮을까? 환율이야 이미 2,000원을 찍었으니 수긍한다고 쳐도 무려 40%나 후려친 건 좀 부담스러워.” “이미 다 끝난 이야기 아닙니까? 왜 또 그러세요?” “저 사람들 표정 보니까 심장이 철렁해서 그래.” 채권단을 만나기 전 오세현과 인수 금액 조정에 대해 심하게 부딪혔으나, 내 고집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막상 저들의 반응을 보니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8천억이라는 숫자를 내 마음대로 정한 게 아니다. 과거 대현자동차가 아진그룹을 인수했을 때의 금액이 바로 8천억이다.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된 대현그룹은 무려 이 년이나 협상을 질질 끌면서 1조2천억을 8천억으로 만들었다. 회사의 가치가 더 떨어진 게 아니라 한국의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나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년 뒤보다 지금 상황이 더 좋지 않다는 걸 믿었다. 제 몸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들이 바로 정점에 선 인간들 아닌가? 은행장들은 그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4억 달러를 간절히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에 도움될만한 제안을 한다면 내 불안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오세현은 여의도로 돌아갔고 난 할아버지 댁으로 달려갔다. * * * “이놈 보게나! 칼만 안 들었지, 강도나 다름없구나. 8천억이라니.” “협상하는 강도는 없습니다.” “궁지에 몰린 쥐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게 바로 칼이다, 이놈아. 허허.” 할아버지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적절한 순간에 새로운 카드를 꺼낸 것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은 건 잘했다. 궁지에 몰린 쥐라도 시간을 주면 꼭 빠져나가더라고.” “해 넘기면 무용지물이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할아버지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쐐기를 박아달라는 것이겠지?” “…네.”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르다. “어떤 쐐기를 박아줄까?” “순양그룹 고문 자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제가 드리겠습니다.” “못된 건 빨리 배우는구나. 허허.” 모두 당신에게 배운 겁니다. 당신이 아들에게 가르쳤고 그 아들이 당신 손자에게 가르친 겁니다. 난 곁에서 주워들은 것뿐입니다. 이 말 대신 씁쓸한 미소로 대신했다. “얼마를 줄 생각이냐?” “오 년간 20억을 준다면 만족하지 않을까요?” “주 채권 은행이 몇 개였더라? “세 곳입니다.” “그럼 60억이구먼. 넉넉하게 주는구나.” “순양의 이름이 걸려 있으니까요. 인심 잃으면 안 되죠.” “아까울 정도로 많기는 하지만… 네 덕분에 내가 생색 좀 내겠구나. 허허.” 할아버지는 웃으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걸 한번 보거라.” 종이는 매각과 합병대상 은행 리스트가 적힌 금융권 구조조정안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두 은행은 바로 아진그룹 채권단이었고 그들은 매각 대상이었다. “이걸 어떻게 써먹을까 생각했는데 우리 도준이를 위해 쓰는구나.” 이 시점에 금융권 구조조정안이 나온 것은 차기 정부 인수위가 주도했다는 뜻이다. 인수위 구성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할아버지 책상 위에 놓인다. 순양그룹의 촉수가 얼마나 촘촘하게 뻗어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혹시 이 리스트, 은행도 입수했을까요?” “그 정도로 흔한 정보라면 내게 보고하지도 않는다. 대현그룹 정도만 알고 있을 게야.” “정말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겠네요.” “네게 운이 따른다는 뜻이겠지. 곧 백수 신세라는 걸 알면 덥석 물게다. 어쩌면 부리나케 달려와서 고맙다고 머리 숙일지도 몰라.” 순양그룹 고문 자리는 제안이 아니라 동아줄이 돼 버렸다. 아쉽다. 이 정보를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반값으로 후려치는 건데. “도준아.” “네.” “순양도 내년 초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안을 발표할 생각이다.” 역시. 10억 달러 정도로는 수습이 힘든 모양이다. 지금껏 자회사를 매각한 적은 있지만, 계열사를 정리한 적은 없었다. 몇 개나 정리하려나. “힘든 결정을 하셔야겠군요.” “어찌 보면 잘된 게지. 돈만 깨 먹거나 경쟁력 잃어가는 부서를 한데 모아 싹 정리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은 부당해고니 뭐니 하며 시끄럽게 구는 놈들도 없을 게다.” 깜박했다. IMF는 살아남는 기업들에게는 최고의 기회였다는 것을. 그리고 상위 대기업의 독식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는 것을. 굳은 내 표정을 본 할아버지는 착각했나 보다. 엉뚱한 말을 한다. “괜찮대도 그러네. 그룹 체질 개선에 도움이 될지언정 아까운 살을 잘라내는 일은 없다. 너무 염려 말거라.” “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이럴 땐 모른 체 듣고 싶은 말을 하면 된다. 그러면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을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그리고 이번 기회에 내가 미뤘던 일을 할 생각이다.” “……?” “네 나이 스무 살이 넘었으니 선물을 줘야지. 네게 그룹 지분을 좀 주마. 이번 구조조정안에 슬쩍 집어넣을 테니 네가 싸게 집어가거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표정에 드러났나 보다. “이놈아, 순양자동차를 꿀꺽한 놈이 그깟 지분 몇 쪼가리에 그리 기쁘냐? 허허.” 할아버지는 낄낄대며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건 지금 네게 주는 선물이고. 쐐기부터 박자.” 곧이어 특유의 목소리로 통화를 시작했다. “아이고, 김 행장. 요즘 힘든 일 많다고 들었는데…….” * * * “…물론입니다, 행장님. 저도 떠벌리고 다닐 생각 없습니다. 사실 사적 계약 아닙니까? 굳이 알릴 필요는 없죠.” 오세현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통화를 끝냈다. 날이 어두워지도록 전화가 없자 일이 틀어진 건 아닌가 걱정했지만 저녁이 됐을 때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저들의 추가 조건은 언론 발표를 미뤄 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날 밤, 나와 삼촌은 축배를 들었고 저물어가는 97년을 아쉬워하며 송년회도 열었다. 삼촌의 단골인 바로 그 집에서. 하지만 자정까지 술은 많이 먹지 않았다. 자정이 되었을 때 삼촌은 미국 뉴욕 미라클로 전화했고, 4억 달러가 채권단 계좌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아진그룹의 주거래 은행의 행장실에서 변경한 조건으로 만든 인수계약서를 십여 명의 변호사들이 검토했고 오후에는 그 계약서에 서명할 수 있었다. 은행 임원들은 술 냄새 풀풀 풍기는 오세현을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은행장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노후가 보장된 든든한 보험을 든 놈들은 아쉬울 게 하나 없는 연말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장면을 구석에 서서 지켜보던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늘은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자동차 회사의 주인이 되는 날이다. * * * 1998년 새해 첫날, 할아버지 저택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위기가 계속되고 순양그룹도 구조조정을 준비하니 계열사 사장들은 각자 살아남기 위해 모두 할아버지께 눈도장을 찍으려 모여들었다. 외국에서 유학 중이던 사촌들도 빠짐없이 참석해서 어른들께 차례차례 큰절을 올렸다. “상준이 너는 음악 공부한다고?” “…네” 2년 만에 귀국한 상준 형은 딴따라를 싫어하는 할아버지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예상했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수 되려고?” “아, 아닙니다. 프로듀싱 공부하고 있습니다.” “프로듀싱?” “네. 가수들 음반을 제작하는….” “이놈아. 나도 그쯤은 안다. 늙은이라 무시하는 게냐?” 상준 형은 떨구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할아버지의 음성이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제 마음대로 공부를 바꿨는데….” “하고 싶은 걸 잘하면 되는 게지. 네 애비를 잘 보고 배워.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영화사 사장이라고 들었다. 맞냐?” 할아버지의 시선을 받은 아버지는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아직 멀었어요.” “모자란 놈 같으니. 그깟 쥐꼬리만 한 영화판에서 10년이 지나도록 뭘 한 게냐?” “올해는 최고의 영화사 자리에 올라서겠습니다. 너무 구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나타난 미소를 보며 함께 웃었다. “상준아.” “네. 할아버지.” “넌 네 애비처럼 빌빌대지 말어. 하는 공부 재빨리 해치우고 10년 뒤에는 그 바닥 최고가 되어야 한다.” 공식적인 허락이 떨어지자 상준 형의 표정은 더없이 밝아졌다. “네. 할아버지. 꼭 최고가 되겠습니다.” 마지막 차례인 내가 큰절을 올렸을 때는 별다른 말씀이 없었다. 다만 흐뭇한 표정으로 머리만 가볍게 끄덕였다. “올해는 많이 어려울 테니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해. 순양이 흔들리는 건 절대 용서 못 한다.” 할아버지는 모두에게 엄한 경고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영준이 결혼을 서두르기로 큰 애랑 상의했다. 정기 인사 전에 혼인하고 영준이는 순양물산 임원으로 발령낼 생각이다.” 진영준은 입이 찢어지라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할아... 아니, 회장님.” 이렇게 가족 모임은 끝났고 아랫사람들의 눈도장 찍는 순서가 돌아왔다. 서재에서 할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틀리기 시작했을 때 우리 가족은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상준 형까지 인정받으니 진정한 순양 가문의 일원이 된 것 같았다. * * * 새해 TV를 장식한 첫 뉴스는 바로 두 은행의 매각 결정 소식이었다. 1929년 조선저축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대표적인 은행과 1959년 지방은행으로 창립하여 전국은행으로 성장한 은행이었다. 뉴스가 더욱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두 은행 모두 ‘해외매각 우선 대상’으로 지정한 것이다. 은행은 국가의 부(富)를 모아두는 곳이라는 인식이 크다 보니 국민적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IMF가 긴급구제금융 투입한다고 했을 때 고마웠던 마음은 사라졌다. 달러를 원조한 것도 아니고 고작 빌려주는 조건으로 은행을 가져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뉴스를 지켜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나였을 것이다.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기록한 노트를 몇 번이나 살폈지만, 이 사실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긴, 한창 노는데 정신이 팔렸던 대학 시절이니 경제뉴스를 챙겨 봤을 리가 없었다. 알았더라면 은행을 인수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과 지금이라도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재벌 대기업이 그토록 원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은행. 그런 은행을 가진다면 커다란 날개를 얻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두 은행의 인수 가격은 얼마나 될까? 수조 원? 아니 수십조? 사흘 전, 거대 자동차 회사의 주인이 된 기쁨은 벌써 사라졌다. 내 눈앞에 나타난 새로운 먹잇감. 오로지 그 먹잇감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흔들었다. ======================================== [080] 누군가에게는 암울한 새해 3 새해에도 경제가 무너지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1월 14일, 나산그룹이 부도나고 뒤를 이어 재계 순위 31위인 극동건설의 화의신청이 이어졌다. ‘건설 5인방’으로 불리며 업계를 주도한 극동건설은 증권사까지 인수해 풍부한 자금 조달 능력을 갖추고 사세를 확장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아버렸다. 극동건설과 성격이 비슷한 대아건설도 사실상 부도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뭐 들은 거 없어?” 오세현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왜요? 대아건설 버틸 것 같아요?” “소문 믿지 마. 오늘내일 쓰러진다는 말만 돈 지 한 달이 넘었어. 아무래도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명줄이 질기네.” “극동건설보다 자금 사정이 더 좋지 않다면서요? 어떻게 버티죠?” “내 말이! 동남아 진출하고 그쪽 금융위기로 박살 났을 때 자금줄 꽉 막혔다고 했는데 희한하게 버텨.” “대아건설 사장이 모아놓은 돈이 많은가…?” “우리나라 기업주 중에 사재 털어서 회사 살리는 놈 봤냐? 망할 때 되면 회삿돈 빼돌리는데 더 급급….” 오세현은 하던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쳐다봤다. “야, 이거 혹시 진짜 작업하는 거 아냐?” “그게 가능하겠어요? 안팎이 이 모양인데 어떻게 회사 자산을 빼돌려요?” “돌려막기. 건설사니까 땅이 꽤 있을 거거든? 그거 급 처분하면서 어음만 막는 거야. 직원들 월급 삼 개월 넘게 안 줬다고 했어. 급한 어음만 막고 알맹이 빼먹는 거지. 부도날 때까지 그 짓 하면 주머니 두둑해질 거야.” “삼촌 그건 형사 처벌까지 가잖아요.” “이 새끼들 돈 챙겨서 한국 바이바이할 생각이야. 구제금융이든 뭐든 받아서 회사 살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게 확실해.” 야반도주다. 일반인과의 차이라면 한몫 챙긴 돈의 크기가 삼대는 떵떵거리고 먹고살 만한 거금이라는 것뿐. 내 머릿속에서 대아건설 외에 다른 건설사 이름이 쭉 지나갔다. 알맹이 전부 빼먹고 쭉정이만 남은 건설사를 인수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 상위 건설사 중에 계열사 없이 건설만 집중한 곳은 대아건설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다른 건설사는 계열사까지 뭉쳐 있어 건설사만 따로 떼서 인수하기가 쉽지 않다. 찌푸린 나와 다르게 오세현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요 새끼들. 잘 걸렸어.” “무슨 방법이 있으세요?” “주총 열고 배임 횡령으로 싹 쳐넣고 그 자리 차지하자. 더 수월하지 싶다.” 머릿속이 번쩍 했다. 대아건설 주식은 지금 바닥에 착 붙어 있다. 5%만 사들이면 곧바로 주총까지 간다. 부도 후에 채권단 협상보다는 회사를 주워 먹고 살리는 게 더 쉬운 길일 수도 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작업 들어가자. 어때?” “좋습니다. 삼촌은 역시.” 내가 엄지를 척 들자 오세현은 수화기를 들며 말했다. “네가 재벌 회장 되면 다 내 덕분인 줄 알아라.” 오세현은 직원들에게 대아건설 지분 매입을 지시한 다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참, 네 사촌 형 결혼식이 언제더라?” “모레요. 가족만 참석. 재벌답게 은밀하게 하죠.” * * * 결혼식은 진 회장의 저택에서 열렸다. 어려운 시절이니만큼 최소한의 하객만 초대했고 언론도 단신 기사만 나갔다. 진 회장의 부탁과 한성일보의 힘으로 저택 주변에 기자들이 진을 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최소한의 인원이라고 하지만 양가 모두 보통 집안이 아닌지라 이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로 북적댔다. “네 덕분에 순양그룹 회장님 집을 구경하다니. 가문의 영광이다, 얘.” “있는 집 자식들이라 그런지 다 잘생겨 보여.” “이 집안 막내가 스물하나라고 했지? 그러니까 아무나 잡아도 결혼할 수 있네?” “꿈 깨, 이년아. 다 정략결혼 대상자들이거든!”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홍소영 곁에서 신부 친구들은 수다가 한창이었다. 항상 침착했던 홍소영도 오늘만큼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신혼집은 어디야? 청담동? 한남동? 빌라야? 아님 아파트야?” “평창동 시댁이다. 시집살이 시작이야.” 신혼을 시댁에서 시작한다는 홍소영의 말에 친구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재벌가는 여전히 조선 시대를 사는구나.” “넌 바보야? 나가서 살라고 해도 악착같이 붙어 있어야지. 왕국 밖에서 사는 왕자 봤어?” “순양그룹 부회장님이 시댁이야. 밥을 하겠어? 빨래를 하겠어? 청소하겠어? 아침저녁 식탁에 앉아 방긋방긋 웃기만 하면 되는 시집살이야. 할만하지, 뭐.” 홍소영과 어울릴 정도의 친구라면 부족함 없는 부잣집 딸들이지만 차원이 다른 집안, 게다가 후계가 확실한 장남에게 시집가는 그녀에게 모두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다. 장남이라면 질색하는 여자들이지만, 그 재산에 따라 확 달라지는 속마음을 숨기지 못할 때 진영준은 결혼식장으로 꾸며진 영빈관에서 하객들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하객들이라고 해도 가족을 제외하면 계열사 핵심 인사 몇 명과 한성일보의 주요 인물이 전부다 보다 그리 바쁘지 않았다. 몰려온 친구들이 널따란 정원 한구석으로 진영준을 끌고가 담배를 내밀었다. 억지웃음을 지으며 악수와 인사만 하다, 눈치 보지 않고 담배를 무니 살 것 같았다. “영준이가 장가가다니. 이제 우린 누가 이끌어주나?” “이 새끼, 아직 그 소리냐? 결혼은 그냥 요식행위야. 우리 영준이는 앞으로도 우리랑 같이 놀 거야. 맞지?” 몇 모금의 담배 연기를 내뿜은 진영준은 친구들의 뒤통수를 갈겼다. “시끄러! 새끼들아. 유부남 새끼들이 총각처럼 씨불이고 지랄이야. 내가 가장 늦장가 가는데 헛소리는.” “아쉬워서 그러지. 우리 친구들 중에 결혼하고 나서 마누라 눈치 보는 놈이 한둘이야? 넌 그러지 말라고 하는 소리잖아.” “병신아. 그건 그 새끼들 처갓집이 더 잘사니까 그런 거지. 영준이는 해당 안 되니까 괜찮다고.” “됐고. 나 결혼하고 나면 꼼짝 말아야. 영감탱이가 본격적으로 회사일 하라신다. 마누라 눈치는 안 봐도 영감 눈치는 봐야 하는 게 우리 처지 아니냐? 적당히 놀아야지.” “그럼 그렇지. 우리 영준이가 어디 가겠냐? 오케이. 감 잡았어. 흐흐.” “난 다시 가 볼란다. 신혼 여행 다녀와서 한잔하자.” 진영준은 담배를 비벼껐다. “참, 신혼 여행은 어디로 가냐?” “프라하. 그리고 넌 나 잠깐 보자.” 진영준은 친구 한 명과 다시 영빈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그 애 있지?” “누구? 아… 한양대 연극영화과?” “그래. 드라마 조연인지 뭔지 그 계집애.” “왜? 밤새워 놀았는데 부족해? 신혼 여행 갈 때 끼고 가려고? 흐흐.” 진영준의 친구는 음흉한 웃음을 짓다 입을 떡 벌렸다. “야! 진짜? 너 돌았냐?” “새꺄. 조용히 해.” 진영준은 주위를 휙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 마음을 놓았다. “이틀 뒤에 비행기 태워서 보내. 호텔 알려줄 테니까 네가 예약하고 한국에서 연락책 좀 해라.” “역시 진영준. 진짜 대단하다. 흐흐.” “이럴 때 아니면 주변 시선 의식하지 않고 언제 놀겠어? 신혼 여행만 열흘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마누라랍시고 단둘이 열흘을 어떻게 지내? 이틀 정도 같이 지내면 답답해서 돌아버릴 거야. 나도 좀 즐겨야지.” “너 그 애 진짜 마음에 들었나 보네?” “그만한 몸매 찾기 힘들다. 당분간 그 애는 내 꺼야. 내가 드라마 주연자리 꿰차게 해준다고 해. 그 애도 우리 회사 TV 광고 하나만 찍으면 단박에 주목받는다는 걸 알 거 아냐?” 진영준의 친구는 씩 웃으며 말했다. “오케이. 맡겨둬. 내가 싸악- 테이블 세팅해줄 테니까 넌 마음껏 먹기만 해. 결혼 축의금이라고 생각하고. 흐흐.” 진영준은 일주일 이상 어젯밤의 그녀와 즐길 생각을 하니 최대한 빨리 신혼 여행을 떠나고 싶어 좀이 쑤셨다. 결혼하는 손자놈이 헛지랄 할 생각에 부풀어 있을 때 진 회장은 영빈관의 하객들 자리를 돌며 인사를 ‘받고’ 있었다. 식탁에 앉은 사람들은 진 회장이 나타나면 벌떡 일어나 축하를 건넸고 진 회장은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회장님. 아니, 사돈. 여기 영빈관은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기에는 좀 화려하군요. 허허.” 한성일보 홍 회장은 만연에 웃음을 띠며 진 회장에게 다가왔다. “아이고, 사돈. 금이야 옥이야 키운 손녀딸. 우리 집안에서 편안해야 할 텐데 내가 괜히 조심스럽소이다. 허허.”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자리 좀 옮길까요?” 진 회장은 수행 비서에게 눈짓하고 영빈관 별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별실에는 티 테이블과 안락한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자, 앉읍시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차 한 모금을 마신 진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홍 회장.” “네. 말씀하십시오.” “이제 한 식구가 됐으니 그만두시게.” 진 회장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홍 회장을 바라보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 떼는 모습이 아니라 진 회장의 말뜻을 진심으로 모르는 모습이었다. “이런 눈치로 어떻게 글쟁이 짓을 하며 밥 벌어 먹었을꼬. 쯧쯧.” 진 회장은 가볍게 혀를 찼다. “우리 식구들 뒤에 애들 붙여 놓은 거 말이야. 그거 그만 두라고.” “사, 사돈.” 주름살 가득한 홍 회장의 얼굴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딸이 시집가는데, 할아버지 입장에서 사돈 집안 사람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고 싶은 거라고 생각하겠네. 지금까지는 말이야.” “그, 그게 아니라….” “그냥 입 닥치고 내 말 듣게.” 험한 말을 들었지만,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나이도 더 많고 관계도 더 높은 사람이다. 정략결혼은 서로가 필요해서 맺어지지만, 여전히 상하관계는 남아있다. 한쪽이 간절히 원하는 결혼이라면 사돈끼리 동등한 관계는 불가능하다. “손녀딸 하나 슬쩍 집어넣은 게 뭐 대단 한 일인 양 흥분하지 마. 어린 애가 똘망똘망하니 당차 보여서 내 마음에 든 것뿐이야. 그게 전부라고.” 진 회장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우리 영준이가 아직 철딱서니가 없어. 나이 서른인데도 아직까지 애처럼 노는 걸 좋아해. 술도 좋아하고 계집질도 좋아하지. 허술하다 싶어 남편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기 쉽다고 생각했는지 지는 몰라도….“ “아, 아닙니다. 회장님. 절대 그런 생각은….” 어느새 호칭도 사돈에서 회장님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런데 우리 애는 그래도 돼. 내 손자니까. 세상에 있는 허물 전부 다 뒤집어쓰고 살아도 상관없어. 바로 내 손자니까 말이야! 세상 손가락질이 아무리 심해도 우리 집 문턱도 못 넘어!” 진 회장의 언성이 점점 더 높아졌다. “우리 애를 허수아비로 세워놓고 처가에서 순양그룹을 만져보겠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아직 안 늦었어. 손녀딸, 소박맞은 며느리 꼴 만들지 않으려면 그 생각 싹 지우게.” 진 회장은 의자에서 일어났지만, 홍 회장은 다리가 떨려 일어서지도 못했다. “혼사 치렀다고 다 끝난 거 아닐세. 사위랍시고 우리 애를 오라 가라 하지 마. 처갓집 식구들과 만나는 일도 없을 게야. 손녀 보고 싶으면 그 애만 불러. 영준이가 자네 집안사람 얼굴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만난다면 그건 일이야. 광고 나눠줄 때만 만나는 게야. 홍 씨 성을 가진 사람 누구라도 우리 순양의 이름이 걸린 건물에는 발 디딜 수 없어.” 별실을 나서는 진 회장의 마지막 경고가 홍 회장의 귀에 꽂혔다. “한성일보 펜대는 순양그룹 돈의 힘으로 꺾어버릴 수 있어. 내 말 가볍게 듣지 말게.” 진 회장이 나간 별실에서 홍 회장은 한참을 혼자 앉아 있었다. ======================================== [081] 목적을 위한 도구 1 쿵쾅거리는 심장이 가라앉고 후들거리던 다리가 진정됐을 때 홍 회장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가 별실을 나설 때의 표정은 들어왔을 때와 다름없이 웃음이 만연했다. 표정관리가 아니다. 진심으로 우러나는 웃음이었다. 홍 회장은 혼자 별실에 앉아 있을 때 떠오른 것은 바로 외척의 씨를 말린 임금, 태종 이방원이었다. 이방원은 자신의 처가인 여흥 민씨 네 명의 처남을 깡그리 다 죽이고,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를 폐서인하여 쫓아냈다. 또한, 세종을 태자로 책봉한 뒤에는 세종의 처가인 청송 심씨마저 씨를 말려버렸다. 하지만 멸문한 가문은 모두 왕이 될 후계자의 외척이다. 사돈인 홍 씨 일가를 멀리한다는 것은 바로 진영준을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진 회장의 내심을 드러낸 것과 다르지 않다. 노인에게 남은 날은 많지 않다. 자신에게도, 진 회장에게도. 하지만 젊은이의 앞날은 아직 창창하다. 홍소영에게도, 진영준에게도. 순양그룹에 남의 손때가 묻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지만, 시간은 진 회장의 편이 아니다. 진양철 회장만 사라지면 한성일보는 자연스럽게 순양그룹의 한 축이 될 것임을 느끼자, 홍 회장은 조금 전의 수모는 모두 잊고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결혼식은 순조롭게 끝났다. 두 사람은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신혼 여행을 떠났고 한성일보 가족과 하객들도 서둘러 진 회장의 저택에서 사라졌다. 남은 진 회장의 가족들은 영빈관에서 떠들썩한 술자리를 가지며 3세의 첫 번째 결혼식을 자축했다. 이제 본격적인 3세들의 혼인이 이어질 것이다. 외손자까지 포함한 13명의 손자를 앞에 두고 진 회장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 중에 맞선보고 결혼할 생각 없으면 지금 말해라. 내가 빼주마.” 진 회장의 말에 표정이 밝아진 사람도 있었지만 나서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진 회장의 말이 진심이라 해도 부모들은 다르다. 조금이라도 권력과 돈 있는 집안과 연을 맺고 싶어 하니 자식들은 부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도 없어? 좋아. 그렇다면 혜경이와 수경이는 올해 안에 시집갈 준비 해라. 서른 되기 전에 결혼해야지. 노처녀 소리는 들을 수 없지 않느냐?” 연애결혼하겠다는 손주가 없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의 머리에는 이미 결혼 후보 리스트가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잔칫날이니 머리 아픈 건 다 잊고 실컷 먹고 마셔. 난 이만 들어가서 좀 쉬어야겠다.” 진 회장은 본관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가족들은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이 혼주인 진영기에게 축하주를 건넸다. 진윤기가 담배 하나를 물며 화장실에 갔을 때 누군가 다가왔다. “사장님.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다른 분들 눈을 피해 조용히 오라고 전하셨습니다.” “어디 계시죠?” “서재에 계십니다.” 서재라……. 자식 얼굴 보자고 부르는 게 아니다. 서재라면 회사 일이다. 진윤기가 서재를 마지막으로 들어간 건 이십여 년 전, 유학지를 선택할 때였다. 이십 년 만에 공적일 일로 자신을 찾으니 갑자기 긴장되었다. 술기운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 찬물로 얼굴을 씻었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긴장을 풀었다. 아들 덕에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기대는 항상 실망을 안겨준다는 걸 인생을 통해 배웠다. 특히 아버지는 실망을 넘어 절망까지 안겨준 사람이다. 진윤기는 마음을 비우고 서재로 향했다. 진 회장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앞에 두고 한동안 막내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이….” “하는 일은 괜찮다고 했는데 사실이냐?” “네. 외환위기의 타격을 덜 받는 곳입니다.” “그래도 영화 투자자를 끌어모으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 “쉽지는 않지만, 우는소리 하기에는 미안할 지경 아닙니까? 다른 분야는 쉽다, 어렵다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니까요.”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진윤기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며 슬쩍 웃었다. “괜히 떠보지 마십시오. 이젠 아버지 말씀에 말려들 만큼 어리지 않다니까요. 하하.” “어쭈!” 진 회장도 아들의 당돌한 말에 기분 상한 건 아닌 듯 미소 지었다.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은데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간단히 말하마. 순양의료재단과 순양인력개발원을 네게 주마.” 진윤기의 미소가 사라졌다. 순양의료재단이 거느리는 병원은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곳이다. 어마어마한 병원 부지 탓에 재산세만 10억 이상을 납부한다.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는 셈이다. 그런데 순양인력개발원은 감이 오지 않았다. 비록 독립된 법인이지만 하는 일이라고는 고졸, 대졸 신입사원 연수, 신임 간부, 임원 연수 등 각종 교육 및 그룹 차원에서 진행하는 인력개발 조직일 뿐이다. 물론 독립된 주식회사로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외부의 인사 컨설팅과 교육 프로그램을 돌려 수익을 내기는 하지만 그 액수로는 적자를 면치 못한다. 그나마 순양 그룹의 교육을 담당하기에 계열사로부터 교육비를 받아 겨우 이익을 내는 곳이다. 기업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았다. 진윤기는 이런 걸 왜 물려주려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표정이 왜 그러냐? 부족한 게냐?” “많이 부족합니다.” 아버지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했다. 기대가 없으니 주는 대로 받으면 된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아들이다. “뭐라?” 아들의 이런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진 회장은 눈을 부릅떴다. “회사 쪽은 쳐다보지도 않더니, 막상 포기하려니 욕심나는 게냐?” “그렇습니다. 저도 아버지 노릇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노릇? 도준이를 말하는 거냐?” 진윤기는 고개만 끄덕였다. 진 회장은 그런 아들을 한심한 듯 쳐다보며 말했다. “아비 노릇 제대로 하려면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부터 길러, 이놈아.” “네?” “도준이에게 물어봐라. 내가 주는 병원과 인력개발원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그 녀석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진윤기는 아버지 진 회장이 말한 그 가치를 몰라 눈만 껌뻑거렸다. “내가 주는 거 잘 간수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도준이에게 넘겨 줘라. 그리고 도준이는 내가 따로 좀 챙겨 줄 거다. 물론 그냥 주는 건 아니고 싸게 팔 생각이지만….” “팔다니요? 손자에게까지 돈 받을 생각이십니까?” 챙겨준다는 말이 무색하다. 손자에게 장사를 하다니? 가장 귀여워하는 손자가 분명한데 잘못 생각했나? 아니면 도준이는 벌써 할아버지와 거래할 만큼 당당한 입장이란 말인가? 진윤기가 못마땅한 표정을 보였지만 진 회장은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 이런 이야기는 네놈보다 도준이가 훨씬 잘 알아들으니까 말이다.” 진 회장은 할 말은 다 끝냈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진윤기가 서재를 나서려 할 때 한마디 잊지 않았다. “보는 눈도 많고 듣는 귀도 많다. 당분간 너만 아는 게 좋을 듯싶다.” 진윤기는 돌아서서 꾸벅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깜빡 잊었던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 * *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 앞에서부터 홍소영은 순양그룹의 힘과 위상을 실감했다. 허니문 리무진에서 내린 다음 비행기에 탑승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VIP는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꼈다. 한성일보 역시 대단한 집안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일등석에 탔을 때 또 한 번 놀랐다. 자신과 진영준이 유일한 승객이었다. “영준 씨. 혹시 이거 전세기에요?” “아뇨. 퍼스트와 비즈니스석만 전세 냈어요. 비즈니스석은 우리 수행비서 여섯이 차지하고요.” 자신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누리지 못하는 호화로운 생활이다. 홍소영은 네 명의 스튜어디스가 단둘을 위해 서비스하는 비행기 안에서 자신이 한국 제일의 재벌가 일원이 된 것을 실감했다. 진영준이 미모의 스튜어디스에게 자꾸 눈길을 주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홍소영은 기내식을 먹은 후 진영준을 향해 말했다. “식사 끝났으면 이것 좀 볼래요?” 진영준은 홍소영이 건네는 파일을 펼쳤다. “이건 뭡니까?” “일단 보세요.” 홍소영이 자신만만하게 건넨 파일을 살펴보던 진영준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 자신과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 전체의 행적이 고스란히 나와 있다. 이 정도 세세한 내용을 만들려면 거의 24시간 밀착 감시를 해야 가능하다. “예상했던 대로 가장 눈여겨봐야 할 사람은 진동기 사장님과 진도준이에요. 진동기 사장님은 계열사 임원들과 빈번히 만나고 특히 진도준은 이제 마라클 인베스트먼트 사장과 함께 다니며 본격적으로….” “이년이 미쳤나…….” 이를 앙다물고 뱉은 말이라 낮게 깔렸지만, 홍소영은 또렷이 들었다. 년! “여, 영준 씨.” 진영준이 서류 파일을 벅벅 찢는 모습을 보며 홍소영은 새파랗게 질렸다. “막내가 뭐 하는지 대충 알아보는 거 아니었어? 아예 우리 집안 사람들 전부 미행한 거야?” “그, 그게…….” “넌 네가 뭐라고 생각해? 어디서 감히 안주인 행세야? 엉? 씨발, 기분 더럽네. 이거.” 진영준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나오자 대기하던 스튜어디스들이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VIP의 사적인 모습은 보지 않아야 후환이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남에게 머리 숙이는 일 없도록 해준다. 대신 내 사생활도 간섭하지 않기로 했지? 이 말은 우리 가족 전부 해당되는 거야. 감히 우리 집안 어른들까지 감시해?” 진영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신문 나부랭이 계집이 우리 집안에 들어왔으면 감지덕지하며 찌그러져 살아. 내 뒤를 이을 사내 하나 낳는 게 네가 해야 할 일의 전부야. 내 허락 없이 한 번만 더 이따위 주제넘은 짓거리를 하면 평생 뒷방 신세 면하지 못할 거다. 명심해.” 진영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소름이 돋았다. “야! 최 비서!” 진영준이 소리치자 비즈니스석에서 사내 한 명이 칸막이 커튼을 젖히며 달려왔다. “네. 이사님.” “도착하면 따로 지낼 거니까 내가 묵을 호텔부터 하나 잡아. 그리고 저년 잘 감시해. 쇼핑 정도는 하게 해주고 뻘짓 못하도록 확실히 막아. 알아들었어?” “네. 이사님.” 비서가 물러가자 진영준은 홍소영의 반대편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안대를 차고 시트를 한껏 젖힌 진영준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 정도였다. 처음엔 화가 솟구쳤지만, 차라리 잘됐다. 열흘간의 신혼 여행을 완전히 자유롭게 지낼 핑곗거리로 이만한 것이 없다. 생각할수록 괘씸했지만, 꿩 먹고 알 먹고다. 결혼 첫날부터 마누라 될 여자의 기를 팍 죽여 놓았고, 어제 만난 몸매 죽이는 어린애와 실컷 놀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삼일 뒤에 부르려 했지만 생각을 바꿨다. 도착하자마자 불러도 되겠다. 진영준의 이런 생각도 모른 체 홍소영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신랑을 지켜봐야만 했다. 단 한 번도 남에게 머리를 숙인 적 없는 집안의 후계자가 어떤 인간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핏줄을 나누지 않은 사람은 저 집안의 가전제품과 다를 바 없다. 그 쓰임새에 맞게 사용하는 도구일 뿐이다. 홍소영은 오늘 백년가약을 맺은 남편에게 자신이 쓸모 있음을 끝없이 증명해야 하는 신세라는 걸 알았다. 그것도 절대 남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언젠가 그녀의 손에 들어올 순양그룹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 [082] 목적을 위한 도구 2 “음…….” “뭐야? 넌 쌍수 들고 환영할 거라고 할아버지께서 그러시던데, 너도 모르는 거야?” 아버지는 내 표정을 샅샅이 훑으며 숨은 의미를 파악하려 하셨다. “아, 아뇨. 그것보다는 뭔가를 싸게 팔겠다고 하신 거요. 뭘 주시려는지 짐작을 못 하겠어요.” “그럼 아는 거부터 말해주면 안 될까? 난 궁금해 죽을 것 같아.” “제 생각에는 사람을 주신 것 같아요.” “사람?” “네. 순양 병원은 VIP 고객이 많기로 소문났잖아요. 고위 관료, 정치인은 자신의 건강상태가 새 나가는 걸 조심하니까, 비밀 유지가 완벽한 순양 병원을 찾잖아요. 그리고 연예인도 많고요.” “아…!” 낮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이제 특진을 원하거나 특별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은 전부 아버지께 연락하겠죠. 자연스럽게 인맥을 쌓을 수 있잖아요. 아버지는 영화 제작할 때 감독이나 주연배우를 순양 병원에서 캐어할 수 있고요.” “그럼 인력개발원은? 그것도 사람이야?” “물론이죠. 승진 대상 전부가 개발원 연수원에서 교육받잖아요. 개발원의 교육 평가가 승진을 보장하지는 못해도 승진 탈락에는 막대한 영향을 미치니까요.” 순양그룹의 인력관리가 철저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른 기업처럼 연수원은 잠깐 쉬어가는, 심지어 어떤 곳은 휴가나 다름없다며 교육받는 동안 예비군의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하지만 순양 연수원은 엄청난 교육시간, 세미나, 토론, 시험, 평가로 이루어진, 마치 사법연수원과 비슷할 정도로 빈틈없는 곳이었다. “그룹 핵심에 다가가려는 사람 전부가 개발원을 거치니까…” “개발원 대표이신 아버지에게 잘 봐달라는 전화가 빗발칠 것이고 그게 전부 네트워크가 되겠죠.” “그러니까 그룹 외부, 내부 인맥을 골고루 쌓겠구나.” “네. 늦게 시작한 만큼 속성으로 아버지 사람으로 만들라는 배려죠.” “내가 아니고 네 사람 만들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조용히 말하면서도 신기한 듯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챌 수가 있지? 병원이나 연수원을 인맥과 연결하는 네 할아버지나 그걸 단번에 파악한 넌 또… 정말 할 말이 없다.” 순양그룹에서 월급 받아본 사람은 연수원의 잠재력을 잘 안다. 별것 아닌 대리 진급을 위해 이 층 침대가 두 개 들어간 4인실에서 무려 열흘간 밤잠을 설친다. 나이 지긋한 중년 부장들은 더하다. 2인실에 들어가 이 주간의 악마 같은 스케줄을 소화해야 한다. 체력이 버텨내지 못하면 임원 진급이 물 건너가니 악으로, 깡으로 견디는 것이다. 견딘다고 해서 끝난 건 아니다. 인력개발원의 최종 평가가 C 이하라면 임원은 물 건너가고 정년까지 만년 부장을 할 건지, 사표 내고 떠나야 할지를 정해야 한다. 이럴 때 만약 개발원 이사장이 전화 한 통만 넣어준다면? 하다못해 연수원장의 은밀한 지시만 있다면 임원 자리에 한걸음 성큼 다가설 수 있다. 인력개발원의 가치를 아무리 낮게 잡는다 하더라도 순양그룹의 주요 자리를 차지할 임원 후보들과 술 한잔 나눌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요직이다. 이 모든 건 오로지 순양에서 월급 받는 사람만 안다. 급여 통장에 찍힌 숫자에 한숨지어본 적 없는 아버지가 이런 사실을 알 도리는 없는 게 당연하다. “관심이 없으셔서 그런 거겠죠. 그런데 혹시 인력개발원 지분구조 알 수 있을까요? 보유 자산도요.” “현황을 좀 알아보라?” “네. 단지 인맥 네트워크뿐만은 아닌 거 같아서요. 그게 전부였다면 당분간 비밀로 하라는 말씀은 안 하셨을 거예요. 큰아버지들이 알면 반발할지도 모르는 뭔가가 있지 않겠어요?” “비밀로 하라는 말씀 속에 또 비밀이 있다?” “할아버지는 비밀이 많으신 분이잖아요. 흐흐.” 아버지는 내 웃음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넌 어찌 된 게 나보다 할아버지를 더 닮았냐?” “재능은 가끔 대를 건너뛰기도 하니까요.” 아버지는 또 한 번 한숨 쉬고 일어났다. “아버지 노릇 제대로 한번 하는 것도 쉽지 않구만.” * * * “결혼식은 어땠어?” “제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요, 뭘. 그보다 어떻게 됐어요?” 결혼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대아건설이다. “재벌들 정략결혼은 늘 호기심의 대상이잖냐.” “두어 번 얼굴 보고 하는 결혼, 그게 결혼인가요? 계약이지.” “오, 그럼 넌 정략결혼 안 할 거야? 재벌 3세와 평범하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캔디랑 결혼하는 순정만화 주인공?” “꼭 필요한 여자와 하겠죠. 그게 뭐가 됐든. 삼촌, 왜 자꾸 딴소리 하세요? 대아건설 주식은요?” “자식아. 원래 나이 들면 젊은 애들 연애나 결혼이 궁금한 거야. 우린 끝났으니까.” 오세현은 빙긋 웃으며 주식 현황 메모를 꺼냈다. “이 새끼들 당황했나 봐. 5% 매입하고 대주주 신고 들어가자마자 연락 왔어. 한번 만나자고 말이야.” 증권시장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바닥에 착 붙어 움직이지 않는 장에서 곧 부도날 게 뻔한 회사의 주식을 순식간에 매입하니 회사 측에서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휴지나 다름없는 주식을 매입한 자가 아진그룹을 삼킨 거대한 투자사 미라클이니 잔뜩 겁먹을 것이다. 지은 죄가 많다면 말이다. “만나야죠?” “물론이지.” “저쪽에서 어떻게 나올까요?” 오세현은 눈을 찡긋했다. “나한테 맡겨둬. 내가 지금까지 투자질 하면서 회삿돈 빼먹고 튀는 새끼 한둘 봤겠냐? 나한테 걸린 그런 놈들, 지금 뭐하는 줄 알아?” “감방에 모여 있거나, 전과자 신세겠네요?” “빙고!” 오세현은 손가락을 딱! 튕기며 가방을 들었다. “자, 가자. 한판 해야지.” * * * 영등포의 대아건설 본관은 바깥 겨울 날씨보다 더 스산했다. 건물 안의 직원들은 월급도 나오지 않는 회사에 칼 출근해서 자리만 지킨다. 회사가 곧 망한다는 걸 모를 리 없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희망 한 자락에 회사로 출근하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이 건물이 아니면 갈 곳이 없다. 밀린 월급도 발걸음을 재촉한다. 혹시나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머리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수백 번도 더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헛된 희망이 이 건물의 직원들을 고문하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다. 또 하나의 가족. 20년 뒤에는 이런 개소리를 믿는 사람은 없지만, 지금은 아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의 끄트머리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저 사람들 어떻게 될까요?” “네가 구세주가 되어야지. 밀린 월급도 주고 힘내라고 특별 보너스도 주고. 안 그래?” 오세현은 내 등을 한번 툭 치고 대아건설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어서 오십시오. 대아건설 전무 강무진입니다.” “오세현입니다.” 어쭈, 이것들 봐라. 사장실에 주인은 없고 집사가 앉아있다? 수작 부리려고 단단히 준비했나? “사실 당황했습니다. 갑자기 우리 대아의 주식을 사들이시다니요. 미라클 인베스트먼트 같은 대형 투자사가 관심 가질만한 회사가 아닌 듯한데…. 이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투자 회사가 주식을 매입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죠. 돈 되니까요.” 강무진 전무는 바짝 마른 입술을 슬쩍 훔쳤다. “이거 원, 어떤 면에서 돈 된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신문 안 보세요? 뉴스는요? 쓰러져가는 대아건설에 발 담그시면 손해 보실지도 모릅니다.” “요즘 누가 주식에 투자합니까? 깡통 차기 딱 좋은데요. 돈은 은행에 넣어야죠. 이자율이 꽤 높습니다.” 강무진 전무 옆에 앉은 중년 사내가 거들었다. “당신 직급 전무보다 높아?” 오세현이 인상을 팍 쓰며 대뜸 반말을 내뱉었다. “네? 뭐… 뭐요?” “대주주님 말씀 중이시다. 이 자리 대가리 아니면 빠져. 5%가 넘는 주식을 보유한 대주주를 불러놓고 대표이사도 아닌 전무와 말 섞는 것도 짜증 나는데 어디서 감히 끼어들어! 주주가 무슨 말인지 몰라? 이 회사 주인이야. 주인 맞이하는 자세부터 글러 먹었구만.”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지만 강무진 전무는 화를 내기는커녕 벌떡 일어서서 허리를 굽혔다. “이해해 주십시오. 사장님께서는 지금 회사를 살리기 위해 자금 구하러 뛰어다니십니다. 일개 상호신용금고 대리까지 만나십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강 전무의 눈짓에 중년 사내도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알면 다들 자리 좀 비켜주지? 조용히 이야기 좀 하고 싶으니까.” 강 전무가 사장실 소파에 앉아있는 사내들에게 턱짓하자 모두 머리를 숙이고 우르르 빠져나갔다. “자, 이제 말씀하시죠. 우리 회사 주식을 갑자기 사들이시는지 말입니다.” 강 전무는 미소까지 보이며 여유를 되찾았다. “그보다 먼저 왜 나를 보자고 했는지부터 말하는 게 순서 같은데…?” 오세현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항상 예의 바르고 유머를 잃지 않으려 썰렁한 농담을 입에 달고 사는 분인데 무례하고 공격적이다. 짐작건대 대아건설 경영진이 분명 회삿돈을 빼돌린다고 확신하기 때문일 것이다. 약점 있는 놈에게는 강하게 나간다. 내 주변에 이빨, 발톱 숨긴 사람이 수두룩하니 약점 잡힐 일은 꼭 피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바로 저 강 전무 꼴이 될 것이다. “오 대표님을 뵙자고 한 것이 바로 그 이유를 묻고자 함이지요. 분명 원하는 것이 있을 듯합니다.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십시오. 주주가 원하는 일을 경청하는 게 경영진의 본분이니까요.” 기름칠한 혀에서 나오는 청산유수와 같은 말이다. 능글능글한 표정, 쉬지 않고 움직이는 눈동자.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미 말했을 텐데요? 돈 벌려고 합니다. 그게 투자자 아닌가요?” “그러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주식을 매수가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매도 해야 할 텐데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좋은 가격으로 다시 사 줄 것 같은데… 아닙니까?” 오세현은 빙긋 웃으며 강 전무의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 그렇군요.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강 전무도 오세현의 웃음에 화답하며 한술 더 떴다. “그럼 우리가 한번 알아봐 드릴까요? 아직 대아건설의 회생을 믿는 사람도 꽤 많습니다. 그분들은 우리 회사 주식을 다량 매집하려 준비 중이시죠.” “그런 수고까지 해 주신다면 오늘 이곳에 온 보람이 있군요. 혹시 빨리 찾아주실 수 있습니까?” “최대한 서둘러 보겠습니다.” 결국 이놈들은 자신의 계획을 우리가 망치기 전에 재빨리 다시 거둬갈 것이다. 아니면 차일피일 미루면서 시간을 벌던지. “할 말은 끝난 것 같으니까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오세현이 소파에서 일어서자 강 전무도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주주님께서 만족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최대한 빨리 적당한 분을 찾아 오 대표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네. 빠른 조치 부탁합니다. 내일까지요.” 강 전무는 맞잡은 손을 턱 놓아 버렸다. “오 대표님. 내일까지는 좀 어렵습니다.” 오세현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강 전무는 당황했지만, 그의 변명 따위는 더 듣지도 않았다. “모레 아침 임시 주주총회를 요구할 겁니다. 주총을 막으시려면 서두르세요. 그럼 이만…….” 오세현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서둘러 대아건설을 빠져나왔다. 빌딩밖에 대기 중이던 승용차에 올라타자마자 오세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확실하네. 이 새끼들.” “내일 바로 덮치죠. 회계장부 열람권 주장하고 대아건설 자산부터 확인해야겠어요.” 오세현은 나를 보며 혀를 슬쩍 내밀었다. “역시 빨라. 다 배웠다 이거지?” “아이고, 하산하기에는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사부님.” 한바탕 웃고 나서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 [083] 목적을 위한 도구 3 “아, 난데. 우리 심사역 몽땅 모이라고 해. 그리고 삼정회계법인에 전화해서 회계사 싹 긁어모아서 보내달라고 하고. 실물 조사팀도 전원 대기시켜. 10분 뒤에 회의한다.” 오세현이 내일을 위해 사람들을 모을 때 난 할아버지께 전화했다. “할아버지 지금 바로 찾아 뵈도 될까요? 급히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대아건설에서 딴 생각할 때를 대비해야 한다. 그들이 음흉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때 그 발걸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뿐이다. 여의도에서 오세현이 내리고 승용차는 마포대교를 달렸다. 헐레벌떡 할아버지 서재로 들어가니 웃으며 맞이해 주신다. “아이고, 이놈아. 숨넘어가겠다. 왜? IMF가 또 터졌다더냐?” “IMF가 또 터지면 전 뛰지 않고 날아다닐 텐데요?” 아직 18억 달러가 남아있다. 외환 위기가 더 심할수록 그 가치가 올라가니 날아다닐밖에. “어디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서재에서 꼭 기다리라고 한 걸 보니 그럼 내 도움이 필요한 게로구나.” “네. 절실히 필요합니다.” “읊어봐. 들어보고 얼마나 받을지 생각해 보게.” 말끝마다 돈이지만, 항상 더 많은 것을 돌려준다. 손자에게 베푸는 것은 늘 넉넉한 분 아닌가? “대아건설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올해 마포 DMC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꼭 필요한 회사이기도 하고요.” “서론이 길다. 아는 건 빼고 본론만.” “그 회사 오너와 경영진이 쓰러져가는 회사에서 마지막 남은 골수까지 빼먹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 전에 치고 들어가서 점령할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땡잡았구나, 이놈! 허허.” 할아버지는 책상을 탕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팔십이 다 돼가는 시간을 살며 수많은 경험을 한 분이다 보니, 척하면 착이다. 벌써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훤히 꿰뚫은 것처럼 보였다. “대아건설 사장이 누구더라? 강…?” “강무성 사장입니다. 동생인 강무진이 전무더군요.” “전무? 벌써 만나봤느냐?” “네. 조금 전에 확인하고 왔습니다.” “확인해보니 그놈들이 돈 빼돌린다고 확신이 들더냐?” “네. 미라클이 대아의 주식 5%를 확보하자마자 연락 오더군요. 그리고 되사겠다고 했습니다.” “5%?” 할아버지는 눈을 치켜들었다. “그런 식으로 골수 빼먹는 데 한 숟갈 걸치는 승냥이 같은 놈들이 증권가에는 많다고 들었는데, 오세현이의 생각이로구나.” 5%의 주식으로 회사를 휘젓는 일은 쓰러져가는 회사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멀쩡한 회사의 주식을 확보하고 소위 진상 대주주가 되어 다시 비싼 값에 되파는 놈들도 종종 있다. 다만, 멀쩡한 회사는 5%의 주식을 확보하는데 드는 비용이 엄청나니 평범한 승냥이들은 감히 시도조차 못 하는 것이다. “네. 극동건설이 쓰러지자 대아건설 주가는 폭락하기 시작했고 부도설도 돕니다. 큰돈 들이지 않고 쉽게 확보했죠.” “그놈들 식겁하겠는데? 내일이라도 임시주총 열자고 요구하면 간이 철렁할 게다.” “주총보다는 내일 그쪽 장부 뒤지고 골수 빼먹은 증거를 확보할 생각입니다.” “이런, 아예 감옥에 처넣을 생각이냐?” “네. 이미 빼돌린 회사 자산 전부 회수해야죠. 그다음에 회사 청소 말끔하게 하고 새 출발 하면 모양새 좀 나오지 않겠습니까?” “음…. 싸게 먹겠는데?” 할아버지는 이미 계산을 끝내신게 확실하다. “강무성 사장 일가가 쥐고 있는 주식도 꽤 될 거다. 그걸 손에 넣어야 경영권을 확보할 텐데?” “횡령한 현금이나 현물을 추징금으로 내고 강무성 사장 일가가 쥔 주식을 대아건설 소유로 만들면 경영권 확보를 위한 주식 수가 그리 크지 않을 겁니다. 회사 소유의 주식은….” “대표이사가 주권을 행사하니까.” “그렇죠.” 할아버지는 얽혀있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느라 잠깐 말이 없었다. 이윽고, “갈 길이 먼데 시간은 없구나. 그렇지? 적어도 6월까지는 대아건설 인수부터 정상화를 모두 끝내야 서울시장이 될 네 고모부와 함께 마포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으니까.” “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바로 그 시간입니다.” “시간은 돈으로도 못 살 만큼 귀한 것인데…?” “삽니다. 인간의 수명은 못 사더라도 인간의 인생 정도는 충분히 살 수 있는 게 돈 아닙니까?” “진심이냐?” “순양그룹 십만 명 임직원의 인생, 월급이라는 돈으로 사셨잖습니까?” “이놈이 또 이 할애비를 뜨끔하게 만드는구나. 흐흐.” 전혀 뜨끔하지 않은 표정. 단지 작은 웃음만 보일 뿐이다. “일단 강무성이 일가족 전부 출국금지부터 해야겠구나. 이미 해외로 빼돌린 돈도 일을 터, 법무부에 수사 지시도 내리고.” 수사 지시를 내려? 요청이 아니라? 지시라는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다. “물론 가능하시겠지요?” “네놈 하는 거 봐서.” 나는 벌떡 일어나 할아버지 등 뒤로 갔다. 어깨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는 안 되겠죠? 일단 출국금지만이라도 부탁드릴게요.” “으허허. 시원하게 주물러봐라.” 할아버지는 수화기를 들었다. “김 고검장. 많이 바쁘신가?” 다행이다. 서울고등검찰청이다. 어깨를 조금 주물러드리는 것만으로 출국금지 부탁을 들어주셨다. “…그러니까 말일세. 나라 경제가 이 지경인데 제 주머니 채운다고 망해가는 회사 링게르까지 빼먹는 건 용서할 수 없지 않겠나……. 아니, 아니. 일단 해외로 도망가는 거부터 막고……. 그렇지, 그렇지. 내가 좀 더 알아보고 알려줌세. 조만간 한번 놀러 와. 밥 한 그릇 같이하자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할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웃었다. “이 정도면 만족하냐?” “감사합니다.” 어깨를 주무르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빨리 진행하려면 내일 회계자료 열람할 때 확실한 증거 하나라도 챙겨. 그걸로 경영진 배임 횡령 걸어서 고소·고발 접수하고. 그럼 국세청, 검찰 움직여서 한 번에 휘몰아치면 저쪽에서 항복할 거야.” “항복?” 항복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다. 할아버지의 항복은 어떤 의미일까?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안마를 멈추게 하고 자리에 앉혔다. “도준아.” “네.” “대아건설을 인수하려는 목적이 정확하게 뭐냐?” “올해 DMC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거기까지만 하자.” “네?” “그 뒤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는 말이다.” 눈앞의 가까운 목표만 바라보며 지금 즉시 해야 할 일만 선정한다. 급할수록 장기적인 목표 보다는 단기적인 목표에 집중하자는 말씀이다. “자, 6월 지방선거 끝나고 네 고모부랑 일을 진행하려면 늦어도 올 상반기 안에 대아건설을 장악해야 한다. 그렇지?” “그렇겠죠.” “검찰이 움직이고 증거를 확보한 뒤, 배임 횡령으로 공판을 시작한다면? 그놈들 주머니에 든 돈을 추징한다든가 압류하고 회사로 귀속시키려면 몇 년 걸릴 게다. 그 사이, 대아는 부도가 날 테고 채권단은 처리문제를 놓고 고심하겠지. 빨라도 2년 뒤, 네 손에 들어올 거다.” 역시 문제는 시간이다. 시간을 단축하려 할아버지께 손을 내밀었다. 지금 그 해답을 주신다. “그럼 할아버지의 항복은 다른 뜻이군요.” “그래. 살길을 마련해 주고 빨리 처리하거라.” “살길이라면…?” “검찰수사, 국세청 조사는 협박용으로만 써야지. 2년 뒤 알거지가 되고 가족 전부가 옥살이를 할 건지, 지금 전부 다 내놓고 밥 굶지 않을 만큼 챙겨서 외국으로 도피할 것인지 선택하도록 만들어라.” 온몸에 전기가 관통한 것처럼 짜릿했다. 처음 항복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라는 숨어있는 의미 정도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진짜 충격받은 건 바로 검찰 수사의 완급까지 조정하는 힘이다. 검찰을 마치 내 칼처럼 쓴다. 칼집에서 빼고 싶을 때, 그리고 다시 넣고 싶을 때…. 원할 때 수사를 시작하고 원할 때 멈춘다. 국세청을 포함해서……. 할아버지의 이런 힘은 순양그룹의 돈과 주식으로 만든 게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것이다. 공직자들에게 돈을 안겼고 그 돈의 대가로 공직자는 양심을 팔았다. 양심을 파는 순간 다시 할아버지에게 약점이 잡혔고…. 이것이 계속 돌고 돌아 순양의 힘이 된 것이다. 내가 가진 수조 원의 돈을 지금 다 뿌린다 해도 할아버지의 힘을 가질 수 없다. 수조 원이라는 돈은 아마도 할아버지가 뿌린 돈의 몇 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차이를 메운 건 바로 세월이다. 조금 전 시간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뱉은 말이 얼마나 경솔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마치 전기 충격처럼 말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항복은 제가 받을 테니 할아버지께서는 검찰과 국세청을 계속 움직여 주시겠습니까?” “네놈 하는 거 봐서.” “잘하겠습니다.” 머리를 꾸벅 숙이며 살살 녹는 말투로 말하니 할아버지는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말로 때우지 마라.” “그럼 원하시는 걸 한번 말씀해보시지요. 귀담아듣겠습니다. 흐흐.” 농담처럼 대답했지만, 할아버지는 진지한 표정을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을 때, 의외의 요구를 하셨다. “네가 대아건설을 인수하면 경영진 대부분이 공석이지? 다들 푼돈 받고 쫓겨날 게 뻔하니까. 그렇지?” “네.” “내가 사람을 보내마. 그 자리에 앉혀라.” 쉽게 대답하기 힘든 요구다. 경영진을 할아버지의 사람으로 꽉 채운다면 대아건설은 누구의 것인가? 대표이사를 비롯한 주요의사결정을 내리는 임원 모두가 할아버지의 사람이라면 대아건설은 순양건설의 자회사일 뿐이다. 내가 머뭇거리자 할아버지가 물었다. “어차피 넌 사람이 없지 않으냐? 내 사람을 안 쓴다면 염두에 둔 사람이라도 있는 게야?” “이미 쓰러진 동아건설, 극동건설 등에는 사람 많습니다. 그리고 대아건설에서 부장급을 대거 이사로 승진시키려고 했죠.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좋을 겁니다.” “오, 거기까지 생각했더냐?” “괜찮은 생각입니까?” “괜찮아? 당연히 안 괜찮지. 흐흐.” 명백하게 비웃는 웃음이다. “건설사 임원이라면 반 깡패야. 공사판 현장 소장부터 거친 노가다 놈들을 다루고, 사막 모래 폭풍을 견뎠어. 철거민을 싹 밀어버리는 강단도 있다고. 점심때마다 막걸리 마시며 현장 지휘한 놈들인데…. 그런 놈들을 섞어서 자리에 앉히면? 허구한 날 싸움박질만 할걸?” 건설사 출신이 거칠다는 것은 이미 알지만, 임원 이상이면 정치적으로 변할 것이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나? 할아버지는 당황한 나를 아예 재미있는 장난감처럼 바라본다. “고민되지? 내가 주는 잔이 독약인지, 보약인지 구분이 안 가지? 할아버지의 사람으로 꽉 채운 회사, 순양그룹에 홀라당 뺏기는건 아닌지 걱정부터 앞서지? 흐흐.” “아, 아니에요. 말씀드렸잖아요. 대아건설은 순양그룹에 드린다고요.” “옛끼, 이놈아. 그 말을 믿으라고? 욕심 시커먼 네놈이? 허허.” 황급히 손을 내저었지만, 내 속을 다 들여다 보는 할아버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시간도 없고, 힘도 없고, 사람도 없고…. 가진 건 돈밖에 없는 네 녀석이 내 요구를 거절한다면 대아건설도, 디엠씨인지 뭔지도 다 사라질 텐데 무슨 고민이 그리하느냐? 안 그러냐?” 맞는 말이다, 고민은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을 때나 하는 사치다. 그리고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의 일관성 있는 공통점을 믿어야 한다. 사람. 또 사람을 주신 것일지도 모른다. 대아건설을 장악할 반 깡패 임원들. 그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라는 숨은 뜻이 아닐까? ======================================== [084] 나쁜 놈, 지독한 놈 1 “회계 감사는 안됩니다. 오세현 대표 측 사람이 앉을 겁니다.” “곳간 열쇠는 쥐고 있겠다? 흐흐. 계산기만 두들기던 놈들이 곳간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젠장, 불안하게 왜 이러시나? “도준아.” “네.” “건설사 인간들 삥땅 치는 것 하나만큼은 예술의 경지에 이른 놈이다. 일용직 잡부 수백 명을 가라로 넣었다 뺐다 하는 것쯤은 눈감고도 해치운다. 오세현이 모르게 매일 천만 원 정도 빼먹는 건 일도 아닐걸?” 나를 놀리려 재미 삼아 하는 말씀이 아니다. 경고 아니면 충고인데…. 뭘까? “그뿐인 줄 아느냐? 수백, 수천만 원짜리 원목을 몇만 원짜리 나무로 슬쩍 바꿔치기하면? 오세현이나 그 직원이 원목 구분은 할 줄 알아? 철근 중량 빼먹기도 하고 심지어 함바집 반찬값도 빼돌린다. 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눈탱이 맞을걸?” “살 떨리게 왜 이러세요?” “아직도 모르겠느냐? 이 할애비의 뜻을?” 할아버지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아내며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뜻을 찾아내야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는다. “흙탕물에 몸을 담궈야 진짜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대한민국 기업비리의 온상이 바로 건설사다. 담합비리, 조합장 비리, 공사비 뻥튀기, 하도급 비리 등등. 그 흐름을 전부 파악하라는 충고라고 결론지었다. “건설사 임원들을 네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다면 머슴 다루는 건 다 배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럼 그놈들이 알아서 네가 필요한 돈을 만들어 올 거다. 출처 불분명한 돈을 써야 할 때, 건설사만큼 든든한 곳도 없다.” 절반만 맞췄다. 흙탕물을 몸에 묻히는 대신 비자금 창구를 확보하라는 뜻이다. 그래도 기특한 눈빛을 보내오니 다행이다 싶었다. “내일 결산 열람한다고 했지?” “네.” “순양건설 감사팀 보내주마. 함께 데리고 가거라. 오세현이 밑의 회계사 나부랭이들과는 비교도 안 될 거다. 영수증, 세금 계산서만 대충 훑어도 다 잡아낼 놈들이야.”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이 정도까지 도와주시는데 대아건설을 통째로 삼키지 못한다면 나의 무능을 탓해야 한다. “감사 인사는 나중에 해야 할 걸?” “네?” “이 모든 게 전부 순양그룹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할애비한테 뒤통수 맞고 징징대지나 말어. 흐흐.” 아, 진짜. 끝까지 들었다 놨다 하는구만. 실실 웃는 할아버지를 보니 한숨만 나왔다. * * * “도준아. 이분들은 누구…?” 오세현은 나와 함께 온 시커먼 남자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순양건설 회계 감사팀 직원분들입니다. 건설사 시멘트 품번까지 다 외우시는 분들입니다. 영수증 서너 장이면 돈 빼돌린 거 곧바로 추적 가능하니 내일 검찰에 제출할 자료는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인지 오세현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거, 오늘 저녁엔 거하게 한잔 빨아야겠군요. 잘 부탁합니다.” “맡겨 두십시오. 업무시간 끝나기 전, 껍질까지 홀라당 벗기겠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감사팀 직원을 보니 든든했다. 서너 대의 승합차에 나눠타고 대아건설로 달려갈 때 마치 기습 공격하는 특수부대원 같은 기분이 들어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대아건설 빌딩 문을 열고 들어가며 오세현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이고, 강 전무님. 어떻게… 우리 주식 비싸게 살 고객은 찾으셨습니까?” - 아, 오 대표님. 우리가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 알려드릴 겁니다. “이런, 제가 말씀을 잘못 드렸나요? 아니면 잘못 알아들으셨나? 오늘 밤까지가 아니라 오늘 아침까지였는데… 그러니까… 땡! 이 소리는…? 우리 거래는 없었던 일이 됐다는 말이죠.” - 뭐, 뭐요?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 아니. 일단 만납시다. 만나서 다시 차분하게…. “그럽시다. 지금 대아건설 빌딩 로비니까 10분 안에 얼굴 보며 마저 이야기합시다.” 오세현은 휴대전화를 든 채 내게 눈짓했고 나는 로비의 안내데스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회의실이 몇 층입니까?” “시, 십일 층입니다.” 정장 차림의 남자 수십 명이 로비를 점령하니 안내데스크의 여직원은 잔뜩 겁먹은 듯 더듬거렸다. 내가 11층이라고 수신호를 보내자 오세현은 휴대전화에 대고 말했다. “지금 11층 대회의실로 갑니다. 거기서 얼굴 보죠.” 휴대폰의 플립을 닫고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1층에 멈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강무진 전무가 씩씩 대며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오 대표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떻게 하룻밤 동안 구매자를 구해요? 오늘 중으로 해결해 드린다니까요!” “전무 자리에 앉으신 분이 아직 감이 안 오시나? 끝났습니다. 이제 주주의 권리부터 챙길 생각입니다.” 오세현의 바로 곁에 서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제14조. 감사보고서 등의 비치·공시, 5항. 회사의 주주 또는 채권자는 영업시간 내에 언제든지 서류를 열람할 수 있으며, 회사가 정한 비용을 지급하고 그 서류의 교부를 청구할 수 있다.” 건조한 음성이 끝나자 오세현이 싱긋 웃었다. “들으셨죠? 작년, 재작년 결산 자료와 증빙서류 2년 치 전부 이 회의실로 가져오세요. 주주 입장에서 경영진의 능력에 의구심이 생겨서 말입니다. 도대체 회사를 어떻게 굴렸기에 이 지경이 됐는지 한번 봐야겠습니다.” 강무진 전무는 자신을 외면한 채 회의실로 줄줄이 들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어야 했다. “전무님. 이러고 있을 시간 있습니까? 주주가 요구하는 서류, 빨리 가져오세요. 여기서 일 더 크게 벌어지길 원치 않는다면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일침을 놓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 # # “형님! 그놈들이….” 강무진 전무가 대아건설 사장실 문을 벌컥 열고 뛰어 들어왔다. “뭐야? 무슨 일이길래 이리 호들갑이냐?” 강무성 사장은 새파랗게 질린 동생을 보자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미라클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외부감사를 하겠다고 이미 대회의실을 점령했어요!” “무슨 소리야, 그게! 어제 만나서 잘 해결했다고 하지 않았어?” “주식을 되팔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뒤통수 칠 줄이야….”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강무성 사장은 동생에게 소리를 빽 지르고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송 대표. 난데…. 뭐? 거기도 들이닥쳤다고? 이런 제기랄!” 강무성 사장은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회계사 사무실에도 몰려왔단다.” “네? 이 개새끼가…….” 강무성 사장은 사장실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왜 이러는 거야? 진짜 외부감사 해보겠다는 거야?” “형님. 혹시 주식가격 높이려는 수작 아닐까요?” “뭐?” “그렇지 않습니까? 어제의 그놈 눈빛, 표정. 아직 생생합니다. 쓸데없이 이런 일을 벌일 놈이 아닙니다. 분명 목적은 돈입니다. 증권맨 아닙니까?” “이게 다 쇼다?” “틀림없습니다. 외부감사로 그놈이 얻게 될 이익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떡하자는 거야? 결론은 뭐야?” 강 사장이 소리를 꽥 질렀다. 분초를 다투며 살얼음판을 걷는데 프로나 다름없는 투자사 놈들이 회사를 샅샅이 뒤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행여나 이 소식이 채권단으로 들어가면 그쪽에서도 감사하겠다고 덤빌지 모른다. “제가 오세현이를 데려오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쇼부치고 돌려보내죠.” 선뜻 내키지 않는 듯 강 사장이 망설이자 동생아 또 한 번 재촉했다. “형님.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습니다.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끝내야 합니다.” “이 자식아! 네 입으로 별일 아니라고 말한 지 하루도 안 지났다. 이 자리에서 쇼부? 그러다 다 망치면?” “그럼 이대로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주주 권리를 내세우며 깽판 치기 전에….” “됐다. 그만하고 빨리 데려와. 젠장, 온갖 거머리가 다 달라 붙는구만.” # # # “무슨 소리 하십니까? 대표이사님이 하실 말씀 있으면 여기로 오세요. 그리고 시간 끌지 말고 빨리 결산 자료 가져오시죠.” “오 대표님. 긴히 말씀드릴 게 있으니까 청하는 것 아닙니까? 너무 까다롭게 그러지 마시고….” 강 전무의 애처로운 표정을 보니 웃음이 날뻔했다. 오세현이 말한 것처럼 전무씩이나 돼서 저렇게 감을 못 잡아서야……. “전무님. 우리 미라클이 보유한 주식을 비싸게 매입하겠다는 걸 전하시려는 거 압니다만, 이미 늦었다고 우리 대표님이 말씀하셨죠? 헛수고 마시고 자료 가져오시죠. 10분 기다립니다.” 새파랗게 젊은 내가 경고처럼 말하자 강 전무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때라는 걸 안다. 아무 말 못 하고 오세현의 눈치만 계속 살필 때 다시 한 번 재촉했다. “10분 내 우리가 요구한 자료를 이 회의실에 가져오지 않는다면, 다음 행동으로 들어갑니다. 지금 우리 변호사가 법원에서 대기 중입니다. 주주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한다면 대아건설 경영진의 직무정지 가처분신청을 하기 위해 제 전화를 기다리는 중이죠.” 역시 말보다는 법이 강하다. 변호사, 법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강 전무는 사색이 되었다. 이때 순양건설에서 합류한 감사팀 직원이 소리쳤다. “니기미, 딱 보니까 견적 나오네. 구린데 좆나게 많구만. 이봐요, 전무님. 우리도 뭔가를 손에 넣어야 쇼부 칠 거 아뇨? 반나절만 보면 우리가 보유한 주식의 적정 가격이 나올 것 같은데… 아닙니까?” 입에서는 험한 말이 나오지만, 표정은 웃는다. 심지어 찡긋하는 눈까지. 주식을 되파는 가격을 올리기 위한 요식행위일 뿐이라는 뜻이 숨어있다. 강 전무는 여전히 주저한다. 우리의 진의가 진짜 요식행위인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 참, 판단 느리네. 시끄럽게 분란 일으키면? 우리한테 득 될 게 뭐 있겠어요? 아직도 머리 안 돌아가? 안 되겠구만. 거 변호사한테 전화 때리쇼. 싹 뒤집어 버리자고!” “오케이. 기다려요! 진즉 그리 말했으면 될걸….” 강 전무는 손을 슬쩍 들어 우리 입을 막고 재빨리 회의실을 떠났다. 여의도 사내들이 순양건설 사내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자 그들은 겸연쩍게 웃었다. “저놈들이 썩었으면 우리도 적당히 때 묻은 척 하는 거죠. 이 바닥은 웬만한 건 다 뒷돈으로 무마할 수 있거든요.” “왜 이렇게 된 겁니까? 건설판이요?” 내가 궁금해서 묻자 그들은 머리를 슬쩍 긁었다. “빠듯한 공기(工事期日) 때문이죠. 정해진 날짜까지 완공하는 게 지상 과제 아닙니까? 불법 따지고, 편법 따지고 할 겨를이 없는 거죠. 돈으로 메꿀 수 있으면 막아야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원리, 원칙 따질 겨를이 없는 겁니다. 그게 굳어져 관행이 되고 이 바닥 사람들 습성이 된 겁니다.” 여의도 사내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한쪽은 오로지 숫자만 상대하던 사람, 한쪽은 거친 남자들을 상대하던 사람이다.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묘한 조합을 보며 사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때 강무진 전무가 회의실로 돌아왔다. “자, 다 가져 왔습니다. 주주의 권리 실컷 누리시고 협상할 생각이 들면 언제든 사장실로 찾아오십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강 전무의 뒤를 따라 들어온 대아건설 직원들은 카트 하나씩을 밀고 들어왔고 그 카트 위에는 서류 박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서류 더미에 파묻히게 하는 전략, 미드 법정 물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기가 차서 한숨을 내쉬자 순양 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요즘도 이런 쌍팔년도 방법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 [085] 나쁜 놈, 지독한 놈 2 순양 감사팀은 상의를 벗었다. “자, 우리가 분류해서 드릴 테니 그것만 보세요.” 이들은 박스를 까고 재빨리 서류를 훑기 시작했다. “참, 작년 결산 서류부터 찾으시고 확인하세요. 우린 다른 걸 볼 테니까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의도 회계사들이 다른 박스를 열어 결산서부터 찾기 시작했다. 순양 감사팀은 서류 파일의 제목만 훑으며 빠르게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찾고자 하는 증거가 뭔지 확실히 아는 듯 보였다. 순양그룹 감사팀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룹 내에서는 검찰보다 더 무섭다고 알려진 조직 아닌가? 검찰은 영장이 필요하지만, 감사팀은 영장 없이 모든 조사가 가능하다. 감사 대상자의 계좌 공개까지 요구해도 따를 수밖에 없다. 싫다면 사표를 써야 하니까. 사표 쓴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사표를 쓰는 순간 비리를 저질렀다고 확신하고 곧바로 검찰 수사를 의뢰한다. 차라리 감사팀 수사에 협조하고 적당한 선에서 합의하는 게 인생을 덜 피곤하게 만드는 최선의 방법이다. 나는 오너 일가가 사고 친 것을 뒤처리하는 보직이다 보니 단 한 번도 감사팀을 만난 적이 없었다. 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니 거대 기업 집단을 지배하려면 온갖 조직이 다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확실하게 내 사람들로만 채워야 하는 조직이다. 이런 생각이 스쳐 갈 때 갑자기 여의도 맨과 순양맨이 머리를 맞대고 서로 확인한 서류와 자료를 대조하기 시작했다. “오 대표님 이거 한번 보시죠.” 오세현은 안경을 고쳐 쓰고 복잡한 서류를 세세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환치기 같은데요. 게다가 마지막 송금한 돈은 아예 국내로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환율로 장난치고 달러까지 빼돌린 거네?” “확실하죠?” 순양 감사팀 직원도 거들었다. “원자재 수입으로 가장해서 돈을 빼돌리고 그걸로 환치기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환율이 출렁거리니까 제대로 해먹은 거죠.” “원자재 수입 자체가 구라다?” “네. 여기 송장을 보면 샹들리에 같은 고급 인테리어 자제를 수입했는데… 이 정도 금액이면 컨테이너 6개 이상이 필요해요. 부피가 워낙 커서 그렇거든요. 그런데 달랑 1개만 쓴 걸로 나와 있습니다. 이 새끼들, 세관까지 구워삶은 겁니다.” “확실해요?” “인보이스(invoice) 리스트에 나와 있는 품목은 우리가 수백 번도 더 넘게 만져본 상품입니다. 우리 집 밥그릇 숫자나 가격은 몰라도 이 품목들 가격, 크기 등 훤히 알아요. 확실하니까 이걸로 칩시다.” 자신만만한 순양 감사팀의 태도에 오세현은 머리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럼 쇼부 치러 가볼까?” “그전에 전화부터 하고요.” 나는 휴대전화를 들어 법원에서 대기 중인 변호사에게 대아건설 경영진의 업무정지 가처분신청과 횡령, 외국환관리법 위반에 대해 고소 고발을 진행을 지시했고 할아버지께도 이 사실을 알렸다. “대단하신 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대박 하나 건졌습니다. 이 정도면 칼자루는 제 손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 거 봐라, 그놈들이 진짜 일꾼이야. “법원에 서류 제출했습니다. 이제….” - 검사장과 통화하마. 오늘 중으로 압수수색영장 들고 갈게다. 통화를 끝내고 오세현과 함께 사장실로 올라갔다. * * * “충분히 검토할 시간은 지나지 않았는데, 눈알 빠지게 서류 보는 게 귀찮아지셨습니까?” 강 씨 형제의 얼굴엔 안도의 빛이 보였다. 말 그대로 뭔가 발견하기에는 짧은 시간이다. 여의도 투자사 나부랭이들이 자신들이 숨겨놓은 것을 두 시간 만에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참 내,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으니 회사 꼴이 이 모양이지. 우리가 두 시간 만에 손 털고 나올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뉘신가? 말버릇 없는 분은?” 강무성 사장이 나를 노려보며 싱긋 웃었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제 소개도 안 하고 입을 열었네요. 방금 대아건설 경영진과 오너 일가 전부를 검찰에 고발한 사람입니다. 이 정도면 예의 차리고 대화 나눌 사이는 아니겠죠?” “뭐!” “뭐요?” 두 사람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믿기지 않은 표정이었다. “검찰에 빨대 서너 개쯤은 꽂아 놓으셨을 테니,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시면 되겠네요.” 오세현이 넋 놓고 있는 두 사람에게 눈짓을 보내자 동생 강무진 전무가 황급히 휴대전화를 꺼내며 밖으로 나갔다. “다, 당신들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불난 집에 기름을 부어? 같이 망하자는 거야? 회사 망하면 당신들 주식도 휴지야!” 강무성 사장은 우리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벌써 저렇게 무너지면 어떡하나? “커피라도 마시며 차분히 이야기하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겠군요." 오세현과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강무진 전무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혀, 형님. 서부지검 금융조사부가 영장 쳤답니다. 순식간에 진행되는 거로 봐서는 누가 압력을….” 강 전무는 말을 끊고 우리를 노려봤다. “아진그룹 인수하고 순양자동차까지 삼키니까 우리에게도 빨대라는 게 생기더군요. 서로 돕겠다고 어찌나 난리 치는지…. 참, 강 사장님. 공무원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우릴 도와주는것도 떡값 줘야 합니까? 경험 있으실 테니 힌트 좀...” 오세현은 두 사람의 속을 긁었다. 나는 꼭 알려줘야 할 사실도 말했다. “일가족 전부와 경영진 한 명도 빠짐없이 출국금지 상태일 겁니다. 비행기 타고 야반도주할 생각은 접고 순순히 조사에 응하세요.” 사장실 문을 열고 나설 때 오세현은 그들에게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줬다. “자, 검찰 취조실이 무섭고 힘들어 쇼부 칠 생각 있으면 연락하쇼. 내 번호 알죠? 괜히 검사 앞에서 줄줄 불면 좆됩니다.” *** 진 회장의 서재에 모인 여덟 명 중 셋은 이 서재를 처음 구경하는 중이다. 순양 본관의 회장실이야 직접 보고를 위해 몇 번 들어갔지만 큰 상징성은 없다. 하지만 회장님의 자택 서재에 들어왔다는 것은 1군으로의 승급을 의미한다. 이미 세 명의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했다. “여기 막내가 누구지?” “네, 회장님. 건설 지원본부 김경식 이사입니다.” 홍송철 건설 사장이 소개하자 김 이사는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언제 이사 달았지?” “작년 봄 정기인사 때 임원 승진했습니다, 회장님.” “일 년 만에 또 승진하겠군. 운이 좋아. 허허.” 이사에서 상무로? 그것도 일 년 만에? 홍송철 사장과 이학재 실장을 제외한 서재의 모든 눈길이 김경식 이사에게 향했다. 저놈이 혹시 회장님과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었던 건가? 하는 눈빛이었으나 당사자인 김 이사도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놀란 표정이었다. 모두의 의문은 회장만이 풀어줄 수 있다. “이 실장. 설명해 주게.” “네. 회장님.” 이학재 실장은 간략한 조직도 한 장을 꺼냈다. “여러분들은 곧 다른 회사로 자리를 옮길 겁니다. 물론 지금 순양건설보다 더 좋은 대우와 직급 또한 한두 단계 오릅니다.” 직급이 뛰고 월급이 오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회사를 옮기다니? 설상가상, 계열사가 아닌 자회사라면 명백한 좌천 아닌가? “백재진 전무님께서는 대표이사 사장으로, 정광태 상무는 부사장, 그리고…….” 6명의 이름이 순서대로 나왔고 마지막은 김경식 이사였다. “김 이사는 경영관리 본부장 상무로 보직 이동될 겁니다.” 모두 이학재의 입만 바라보았다. 과연 어디일까? 순양건설과 비슷한 급의 계열사라면 영전이지만 아니라면? 그런데 좌천에 불과한 인사 명령이라면 굳이 회장님의 서재에서 발표할 필요가 없다. 이 사실에 그들은 희망을 걸었다. “여러분들의 새 직장은 바로 대아건설입니다.” 대아라는 이름에 실망보다 의문이 몰려들었다. 곧 망할 회사 아닌가? 게다가 순양그룹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이 서재에서 절대 나올 이름이 아니다. “어째서 대아건설인지 궁금하시겠지만….” “됐어. 내가 설명하지. 그래야 안심할 것 같은 표정이잖아. 허허.” 진 회장은 웃음을 머금으며 당황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아건설은 곧 미라클이 차지할 거다. 미라클 알지?” “아진그룹을 인수하고, 순양자동차와 합병한….” “그래 바로 그 투자사지. 지금 작업 중인데 늦어도 두세 달 안에 대아건설 대주주가 될 거야.” “부도설이 파다한데….” “부도나기 전에 차지하고 정상으로 끌어올릴 거야. 그런데 다들 많이 불안한 모양이구먼. 내 말을 끊다니 말이야. 하긴, 오죽하면….”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두어 명이 급히 머리를 숙였고 진 회장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럴 수도 있지. 아무튼, 자네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해. 최대한 빨리 대아건설을 정상으로 만드는 거야.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때까지 전력을 다해주기 바라네.” “네. 회장님.” 우렁차게 대답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아직 한줄기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회사를 일으켜 세워야 할 사람들이 불안에 떨면 되겠는가? 진 회장은 그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 말을 이어갔다. “대아건설이 정상화 되면 2년 안에 순양그룹 계열사가 될걸세. 순양건설과 합병하는 게 아냐. 자네들이 열심히 키워 놨는데 합치면 자리도 줄어드니까 말이야. 그룹 내 또 하나의 건설사가 될 게야.”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에 이들의 불안이 사라졌다. “하나뿐인 사장 자리를 홍송철이가 꽉 물고 안 놓잖아? 이 기회를 잘 살려봐.” 홍 사장이 웃자 다른 이들도 긴장을 풀고 미소 지었다. “회장님, 외람되지만 미라클과 우리 순양그룹은 어떤 관계입니까? 혹시 미라클은 회장님이 세우신 투자사인 건 아닌지….” 홍 사장은 순양자동차를 아진그룹에 넘겼을 때부터 궁금했지만 참아왔던 질문을 조심스레 던졌다. 자동차는 합병이지만, 이번 건은 아예 사람을 차출해서 지원하는 모양새 아닌가? 보통의 관계가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미라클이 내 거라면 얼마나 좋겠나? 현금이 짱짱하다고 소문났잖아.” “그럼…?” 이학재도 차마 캐묻지 못하고 참아왔다. 혹시 오늘 그 해답을 들을 수 있을까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내가 자네들만큼 믿는 사람이 미라클의 대주주야. 그 사람 자본으로 만들어진 회사라고 생각해도 무방해.” 아주 잠깐이지만, 이학재의 눈썹이 꿈틀했다. 드디어 퍼즐이 맞춰졌고 미라클의 정체를 파악한 것이다. 글로벌 투자사인 파워쉐어즈에서 잘나가던 오세현이 진도준의 분당 목장 매매 대금을 관리한다고 했다. 곧이어 파워세어즈를 그만두고 미라클이라는 투자사를 미국에 설립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아진그룹을 인수하고, 순양에 달러를 지원했으며, 대아건설을 삼킬 만큼 어마어마한 자금을 확보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돈의 주인은 바로 진도준. 이제 겨우 대학생인 이 집안의 막내가 개인 자산으로만 본다면 진 회장보다 더 부자일 가능성도 있다. 진도준의 땅 판 돈, 시드머니로 오세현이 이만큼 불린 것이다. 진 회장이 순양의 핵심 인사만큼 믿고, 미라클이 국내 기업을 사냥하는데 아낌없는 지원까지 할 만한 사람. 진 회장은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측근들을 보내 도와줄 사람이 아니다. 진도준이 틀림없다. 이학재는 그가 받은 충격을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 [086] 나쁜 놈, 지독한 놈 3 ‘이거, 재미있어지겠는걸? 아니, 아예 지각변동이 생기는 건가?’ 이학재 실장의 머리에서는 지금까지 진 회장이 지시한 일들이 마구 춤을 췄다. 특히 최근에 지시한 일, 바로 의료재단과 인력개발원을 막내 아들인 진윤기에게 넘기는 작업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상속은 아들이 아니라 손자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딱히 큰돈을 벌어들이는 계열사도 아니고 그룹 통제가 가능한 주식을 보유한 곳도 아니다. 왜 하필…? 이유가 뭘까? “다행이군요. 미라클 같이 자금력 튼튼한 곳이 회장님의 굳건한 동맹군이니. 아마 이 위기도 기회가 될 듯싶습니다.” 이학재는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 때문에 다시 현안에 집중했다. “대아의 주식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는지 미라클의 유동자금 현황을 알아야 합니다.” 이학재 실장은 서류 몇 장을 꺼내 진 회장 앞에 쭉 펼쳤다. “이건 대아건설 주주 현황입니다. 강무성 사장 일가가 23%, 임원들이 7% 보유하고 있습니다. 거래 은행들이 20%, 기타 기관과 큰손 투자자들이 35%, 마지막으로 개미들이 10%입니다. 5%는 미라클이 이미 확보했고요.” “거래시장에 돌고 있는 10%는 쉽게 긁어모을 수 있겠네?” “그렇습니다. 전부 부도나기 전에 한 푼이라도 건지려고 매도 물량만 잔뜩 쌓여 있으니까요.” 진 회장은 서재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때? 이럴 때 재테크 좀 하지? 개미들 주식 싹 거둬들였다가 정상화 뒤에 다시 팔면 꽤 짭짤할 거야.” 경영권 확보에 도움도 되고 부가적인 수입도 생기는 일거양득이다. 서재에 모인 사람들은 입이 찢어지려는 걸 참아야 했다. “은행과 기관은 미라클이 주식을 확보하면 우호적일 테고…. 강 사장 일가 주식을 챙기는 것만 남았군요.” 홍 사장이 조심스레 말하자 진 회장은 껄껄대며 웃었다. “그건 미라클이 할 일이지. 우린 측면 지원만 하다가 자네들이 가서 대아건설을 점령하라고. 허허.” 이학재 실장은 대아의 진정한 주인이 누군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진진할 것 같았다. * * * “그냥 전부 다 까고 선처를 바라는 게 이 상황에서는 최선입니다. 아시죠?” “…….” 강무성 사장은 서부지검 취조실에서 새파란 검사의 비아냥을 이 악물고 들어야 했다. “우리 검사들… 박봉에 과중한 업무, 야근에 시달리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당신 회사에서 가져온 서류가 2톤 트럭 두 대라고 하네요. 그걸 어떻게 다 봅니까? 세금 낭비죠.” “이건 부당한 기획 수사야. 우리 회사가 망하기만을 기다리는 경쟁사의 음모라고.” “음모는 무슨! 여기 당신이 결제한 증거까지 떡하니 있는데! 그리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오늘내일 자빠질 회사 아뇨? 누가 경쟁자라는 거요? 내 참, 웃기지도 않아요. 낄낄.” 강 사장은 검사가 휙 던지는 서류 파일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환치기 내용이야 자신이 결재한 것 아닌가? “기억 안 나. 난 결제한 기억이 없어.” 심문하던 검사는 한숨을 한 번 쉬고 강 사장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더는 존댓말을 하지 않았다. “기억이 안 나? 그럼 기억나게 해줘?” “뭐… 뭐야? 이놈이 어디서 감히!” 아들뻘도 안돼 보이는 새파란 놈이 반말을 찍찍거리자 강무성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검사는 의자에서 일어나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 놓고 강 사장이 앉은 의자를 툭툭 찼다. “씨발놈아.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데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고 돈을 빼돌리는 것도 모자라, 해외로 튈 생각만 하는 너 같은 새끼는 재판 없이 사형시켜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 없어. 이 친일파 같은 새끼야!” 의자가 넘어가도록 발길질을 해대니 강 사장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그 순간 서류 파일을 집어 든 검사가 강 사장의 머리를 갈겨버렸다. “너 이 새끼! 지금 무슨 짓이야? 강압 폭력을 써? 부장 불러와! 이 자식아!” 강 사장이 모멸감에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오히려 기름을 부어버린 꼴이었다. “부장? 부장님을 만나고 싶어? 좋아. 만나게 해주지. 그 전에 이왕 강압 폭력 검사로 징계받을 거, 확실하게 만져준다. 내가 오늘 니 다리 한 짝 뽀개지 않으면 내 성을 간다. 각오해, 이 새끼야.” 강무성 사장이 온갖 수모를 다 당할 때 달콤한 말로 회유하는 검사도 있었다. “임원이라고 해도 봉급쟁이 아닙니까? 뭐하러 같이 불구덩이에 몸을 던져요?” “검사님. 전 진짜 모르는 일입니다.” “어허, 이 양반아. 당신 결재 도장이 떡 하니 찍혔는데 뭘 몰라? 그리고 내 말 잘 들어요. 요즘 달러가 없어 나라가 망하게 생겼어. 그런데 환율 뛰었다고 그걸 빼돌려? 이건 빼도 박도 못해. 그냥 외환관리법 정도가 아냐.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 판사도 최고형 때릴걸? 안 그러면 국민들한테 맞아 죽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으름장인지, 협박인지, 회유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머뭇거리자 검사는 표정을 싹 바꿨다. “떡 만지면 떡고물도 좀 묻었을 테고, 서류 가라로 꾸미고 환치기할 때 당신도 재미 좀 봤지? 그거까지 싹 털어서 추징금 왕창 물릴까? 챙겨놓은 돈은 고사하고 아예 알거지로 만들어줘? 앙!” “거, 검사님. 그게 아니라….” 또한, 오로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 절대 죄가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아는 걸 전부 털어놓는 아랫사람도 많았다. “검사님. 제가 고급 인테리어 자재 수입 담당자라니까요. 수입 품목 내역, 제가 전부 줄줄이 꿰고 있어요. 수입 서류 이거, 전부 가라예요. 샘플용 몇 개만 들어온 게 전부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대아는 플랜트, 대형빌딩 전문 아닙니까? 아파트 올린 거라고는 서민 아파트 몇 단지가 전부에요. 이런 수입 인테리어 자재를 어디에 쓰겠어요?” “사무용 빌딩에도 쓰지 않나? 요즘 고급 빌딩 많잖아.” “그건 로비에만 쓰죠. 그리고 각 층마다 전부 깡통으로 분양하죠. 인테리어는 입주사가 알아서 할 문제 아닙니까?” “외국 송금은? 은행 서류에 당신 주민등록증 사본이 붙어 있는데?” “검사님. 그럼 은행 송금을 사장이 직접 합니까? 저 같은 말단 직원이 서류 만드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럼 이거 한번 봐봐. 이게 전부야? 아니면 더 있어?” 담당 직원은 검사가 슬쩍 내미는 서류 파일을 열어 보지도 않았다. “이런거 서너 박스는 더 있습니다. 제가 작년 가을부터 아예 은행에서 살았다니까요.” 검사는 쉬운 놈을 만나 오늘은 칼퇴근이 가능할 것 같아 웃음이 났다. 강무성 사장은 취조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중년 사내를 보자 돌아가신 부모님을 본 듯 눈물까지 글썽였다. “이 부장. 이 무심한 사람아, 어째서 이제야 오는가?” “이런, 강 사장님. 그런데 얼굴이 왜….” 강 사장의 양 볼은 풍선처럼 붉게 퉁퉁 부어 있었다. 강 사장이 젖은 눈으로 젊은 검사를 노려보자 부장검사는 구둣발로 평검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 새끼가! 이분이 누구신지 몰라? 어디서 함부로 잡범 대할 때 버릇을…. 나가! 이 새끼야.” 평검사가 연신 머리를 숙이고 취조실을 나가자 강 사장은 부장검사의 손을 덮석 잡았다. “이 부장. 나 좀 살려주게. 내 그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네.” “자자, 일단 앉읍시다.” 꽉 잡은 손을 슬며시 뿌리치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일단, 보고는 다 받았습니다. 기록도 다 훑었고요. 그런데….” 불길한 단어다. 그런데. “뭐, 잡다한 이야기는 집어치우겠습니다. 미라클이 대아건설을 처음 찾아온 게 닷새 전이죠?” “그렇다네. 이게 말이 되는가? 군사 독재 시절도 아니고 문민정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러니까요. 문민정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겨우 닷새 만에?” 되묻는 이 부장의 표정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이 모든 게 청와대 지시란 말인가?” 이 부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퇴임식이 며칠이나 남았다고. 청와대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럼? 누구란 말인가?” “사장님은 지금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설마 차기 정권에서 날…?” “아뇨. 지금 우리나라는 달러 푸는 놈이 왕입니다. 깡드쉬 알죠? IMF 총재. 그 새끼가 겨우 20억 달러 풀고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합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가 달러를 쥐고 정권인수위와 협상 중이랍니다. 망해가는 대아건설 차지하는 조건으로 달러를 풀겠다고요. 사장님은 재수 없게 그놈들 먹잇감이 된 겁니다. 아시겠어요?” 눈앞이 흐려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 인수라고 하면 망한 회사가 대상이다. 망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는 건 다른 목적도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사장님이 돈 빼돌린 증거가 너무 확실해요. 임원들, 직원들 증언과 명백한 증거인 서류가 넘쳐나요. 손 쓸 방법이 없습니다.” 강 사장은 손쓸 방법이 없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럼 기소한다는 뜻인가? 나를?” “피하고 싶으면 어디에 줄을 대야 할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 부장검사는 강 사장의 휴대전화를 탁자 위에 쓱 내밀고 일어섰다. “빨리 결정하십시오. 참고인에서 피의자로 둔갑하는 거, 금방입니다.” 취조실에 혼자 남은 강 사장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 * * “사장님에게 이보다 더 좋은 조건 있습니까?”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의 강 사장은 내 말을 듣는 건지 아닌지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협상은 해야 한다. “먹고살 돈 챙겨줘, 외국으로 야반도주 안 해도 되니 언제든 귀국해도 되고. 아니, 아예 고향인 한국에 쭉 눌러앉아도 되죠.” 건너편 테이블에서는 두 명의 수사관이 강무성 사장을 감시하며 설렁탕과 수육을 맛있게 먹고 있는 데 반해, 강 사장은 음식을 앞에 두고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자식들 생각은 안 합니까? 애들 이름으로 옮긴 돈, 어차피 불법 증여라 손도 못 대요. 직원들이 전부 증언한 거 아시죠? 자녀분들 단 한 번도 출근한 적 없다고. 월급으로 나간 돈도 불법 증여니 다시 회사로 환수할 겁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빼돌린 회사 돈, 한 푼도 빠짐없이 가져오세요. 그럼 사장님 일가가 가진 주식을 우리가 매입하겠습니다. 그 돈이면 노후 걱정은 없을 겁니다.” “검찰 수사는?” “당연히 수사 종결입니다.” 식사를 제대로 못 해서인지 초췌하고 훨씬 늙어 보였다. 그의 이런 모습에도 일말의 동정심도 일지 않았다. 회사의 창업자라면 승객과 선원을 먼저 구출하고 자신은 그 배와 운명을 같이하는 타이타닉호의 선장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는가? 혼자만 살겠다고 배의 값비싼 장비부터 빼돌리는 놈은 동정보다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맞다. “그만 일어나자. 취조실에서 유치장, 유치장에서 구치소, 그다음 교도소 담장을 봐야 결정하실 것 같다.” 망설이는 강 사장에게 오세현이 쏘아붙이자 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오. 오 대표. 내 그리하리다. 약속만 잘 지켜주시오.” “진즉에 그럴 것이지.” 오세현은 손을 들어 식당 아주머니를 불렀다. “식사 끝났으니까 그릇 좀 치워 주세요.” 말끔한 식탁에 노트 하나를 올렸다. “쭉 써보세요. 당신과 당신 일가족이 보유한 재산, 그리고 차명으로 빼돌린 해외 계좌. 혹시 집 앞마당에 파묻어 놓은 금덩이라도 있으면 그것도 다 까요. 나중에 까지 않은 돈이 십 원이라도 나오면 당신 장례식을 감방에서 치를 때까지 콩밥 먹게 해줄 테니까 각오하쇼.” 굳은 표정으로 단호히 말하는 오세현 앞에서 강무성 사장은 힘없이 펜을 들었다. ======================================== [087] 나쁜 놈, 지독한 놈 4 승용차에 오르자마자 오세현은 노트를 펼쳤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되게 아까운가 보지? 눈물까지 흘렸네. 기가 차서 원.” 노트 군데군데 번진 눈물 자국. 악착같이 긁어모은 돈이 이렇게 빠져나간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원통해서 피를 대신해서 흘린 눈물일 것이다. “전부 얼마에요?” “대충 보니 팔백억은 되겠는데?” “그럼 절반 잡고, 최소한 천오백억이겠군요.” “난 최소 이천억이라고 봐. 팔백억은 작년부터 챙긴 돈일 테고…. 평생을 빼돌렸을 거 아냐?” 큰 도둑, 작은 도둑. 차이만 있을 뿐 세상은 도둑놈 천지다. “전부 찾아야 하는데….” 오세현의 자신 없는 말에 내가 힘을 넣어줬다. “찾아야죠.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영감탱이, 남은 인생을 돈으로 바꿔야 한다는 걸 알게 해주면 됩니다.” 상대의 약점을 쥐고 돈을 뱉어내게 쥐어짜는 모습,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진영기도 그랬고, 진영준도 그랬다. 물론 두 사람 다 진양철 회장에게 배운 수법이겠지만. “일단 주식부터 확보하죠.” “젠장, 저런 쓰레기 같은 놈이 주식 판 돈으로 노후를 만끽한다고 생각하니 피가 확 솟네.”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주식 대금도 전부 회사에 들어오도록 할 겁니다.” “그게 가능해?” 오세현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숫제 알거지로 만든다는 뜻 아닌가? “이래서 부모, 아니 할아버지 잘 만나야 하는 겁니다. 법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분을 할아버지로 둔 덕분에 제가 큰소리치죠. 흐흐.” 사는 게 참 우습다.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주는 세상. 가진 놈에게 세상은 놀이터고 없는 놈에게는 지옥이라는 말이 새삼 와 닿는다. * * * “자, 서로 인사 하지. 이쪽이 바로 미라클 인베스트먼트 오세현 대표. 여기 잘 생긴 놈은 내 막내 손자. 처음 보는 사람도 있지?” 널찍한 별채가 보기 좋은 한정식 집에서 대아건설을 맡게 될 사람들과 처음으로 만났다. 이미 어떻게 내 소개를 해야 할지 입을 맞췄기 때문에 홀가분하게 인사할 수도 있었다. “이 녀석은 돈 보는 눈이 밝아. 그래서 우리 오 대표 밑에서 투자를 배우고 있지. 나중에 자네들 돈도 맡겨 보라고 몇 배로 불려줄 거야.” “아, 서울대 법대 다니는 영재군요.” 역시 뛰어난 아랫사람들이다. 어떤 말이 윗사람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정확히 안다. “그래. 자네들도 신문 봤구만. 허허.” “뛰어난 영재니 뭘 해도 잘하는군요.” 나에 대한 폭풍칭찬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서야 겨우 밥숟가락을 들 수 있었다. “오 대표. 진행은 잘 되어가나?” “네. 강무성 일가 소유의 주식 매입은 계약서 도장만 찍으면 됩니다. 주식 대금은 분할해서 주기로 했고요.” “분할?” “네. 강 사장이 빼돌린 회삿돈을 회수할 때마다 주식 대금을 주기로 했습니다. 언제 마음 바뀔지 모르니까요.” “그런데 계약서 도장은 왜 아직인가?” “주거래 은행들과 협상할 일이 남았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은행과의 협상이 결렬되면 대아건설은 포기할 생각입니다.” 포기라는 말에 사람들은 낮게 수군거렸지만, 할아버지는 무릎을 탁 쳤다. “당연히 그래야지. 줄 거 다 챙겨주고 어떻게 사업하나? 부채도 탕감하고 이자도 면제받아. 그래야 쓰러져 가는 회사를 되살릴 것 아닌가?” 역시 우리 할아버지! 단번에 전후를 다 파악해버린다. “자자, 대아건설 인수는 변수가 아냐. 확정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자네들을 불렀지. 오 대표, 설명하게.” 오세현은 제본 파일을 꺼내 대아건설의 경영진이 될 사람들에 돌렸다. “이것이 새로운 대아건설의 첫 번째 프로젝트가 될 것입니다.” 그가 나눠준 파일은 바로 DMC 프로젝트였다. “자세히 듣고 준비 철저히 해. 대 역사(役事)가 될 거야. 그리고 도준이는 나 좀 보자.”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별실을 나섰다. 별실 주변은 작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었고 나와 할아버지는 그 정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강 사장 그놈, 빼돌린 재산 순순히 내놓더냐?” “스스로 밝힌 게 팔백억입니다. 그리고 지금 순양 감사팀과 여의도 회계사들이 검찰과 대아건설 직원들 도움을 받으며 지난 10년간을 샅샅이 살피고 있습니다. 더 나오지 싶습니다.” “주식을 넘겨받으면 돈을 줄 생각이냐? 만만치 않은 금액일 텐데?” “어차피 횡령한 사실은 드러났습니다. 실형을 피하는 조건으로 주식 대금을 회사로 귀속할 생각입니다.” “허허. 강 사장, 그놈 쪽박 차겠구나.” “도저히 용서가 안 됩니다.” “뭐가 우리 도준이를 이렇게 화나게 했을꼬?”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만약 직원들 밀린 월급이라도 챙겨줬다면 먹고 살만큼은 줬을 겁니다. 이천 명이 넘는 직원들이 삼 개월 넘게 손가락만 빨았어요. 요즘 은행 대출이 꽉 막혀 있으니 생활비라도 하려고 사채 끌어쓴 직원도 많습니다. 그들이 느낀 절망을 강무성 사장도 느껴봐야죠.” 할아버지는 천천히 옮기던 발걸음을 멈췄다. “거 참, 모를 일일세. 네가 어찌 월급쟁이들 마음을 다 헤아릴꼬?” 저도 한때는 월급쟁이였으니까요. 급여 통장을 스치고 사라지는 월급이 한 달만 끊기면, 가정은 먹구름이 끼고 빚이라는 수렁에 빠지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마음과 달리 다른 말이 입에서 나왔다. “처음 대아건설에 갔을 때 직원들의 그늘진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내 등을 두드렸다. “그래. 그 마음 잊지 말아라. 어떤 일이 있어도 직원들 밥은 먹여야 한다. 굶는 것만큼 서러운 일은 없는 법이다.” 할아버지에게 이런 모습이 숨어있었나? 산업 현장에서 사망한 노동자도 비용으로 생각하는 냉혈한으로 알려진 분 아닌가? 그런 분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 상상도 못 했다. “밥 굶고 배고프면 배신하거나 변절하는 게 인간이다. 당장 대아만 봐도 알 수 있지? 전표 치던 직원들 전부가 강 사장이 꿍쳐둔 돈 찾겠다고 나서지 않느냐?” 아, 역시. 직원들 밥 굶겨서는 안 된다는 말은 전혀 다른 뜻이었다. “널 배신할 놈은 딱 두 종류다. 너무 배가 고파서 버틸 수 없는 놈. 그리고 먹어도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는 놈. 전자는 끼니 챙겨주지 못한 네 잘못이고 후자도 사람 볼 줄 모르는 네 탓이다. 명심해라.” 동정심이 아닌 경계심이다. 할아버지는 보통의 사람과는 출발점이 다른 분이다. * * * 1998년 2월 25일, 대한민국 대통령이 취임했다. 취임 연설을 하는 그의 목소리는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에게는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할 수 있는 외환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나라가 파산할지도 모를 위기에 우리는 당면해 있습니다. 막대한 부채를 안고 매일같이 밀려오는 만기외채를 막는 데 급급하고 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잘못은 지도층들이 저질러 놓고 고통은 죄 없는 국민들이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의 취임사가 바로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군요.” TV를 끄며 오세현이 말했다.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이신지…?” “죄 없는 대아건설 직원들 말입니다. 채권단 여러분께서 조금만 인정을 베풀어 주시면 그들은 거리로 쫓겨나지 않을 겁니다.” 은행의 임원들은 오세현을 조심스레 살폈다. 은행의 골칫거리인 대아건설을 살리겠다고 등장한 이가 바로 아진그룹을 인수한 외국계 투자사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빛에는 기대와 우려가 섞여 있었다. “어떤 인정을 원하십니까?” “먼저 이걸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채권단 사람들은 우리가 내민 조직도를 유심히 살폈다. 대표이사부터 감사역까지, 이십여 명의 명단을 보던 채권단은 분명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보였다. “이건 좀 의외군요.” “조직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는 순양그룹과 꽤 밀접한 관계입니다. 이 정도면 돈만 만지던 투자사 사람들이 어떻게 건설사를 경영할지, 품었던 의구심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까?” “인정합니다. 경영진은 훌륭합니다.” 오세현이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보이자 채권단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에게 바라는 점을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시죠.” “이미 짐작하시지 않습니까? 첫 번째로 대출 상환은 최소 1년 이상 연장해 주십사 하는 겁니다.” “그리고요?” 이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대출 연장은 문제없어 보인다. 회사가 망하면 전부 회수할 수 없는 악성 손실이니 손해 볼 게 없다. “두 번째는 연체 이자 감면, 부채 탕감. 그리고 귀 은행들이 보유하신 대아 건설 지분의 의결권을 우리에게 맡기시는 겁니다.” 이자와 부채에 대해서는 의례적으로 나오는 조건이니 짐작했을 터이다. 하지만 의결권은 의외였나 보다. “주식은 채무자의 경영에 대해 견제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데 그걸 가져가시겠다?” “대아건설처럼 병든 놈을 견제할 게 뭐 있습니까? 힘을 되찾으면 의결권도 돌려드리겠습니다.” “그 문제는 상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혹시 또 있습니까?” 오세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할 말은 다 끝냈다는 제스처를 취했을 때 내가 입을 열었다. “새해가 밝자마자 정부가 발표한 것 기억하십니까?” 엉뚱한 소리를 꺼내자 은행 임원들보다 오세현이 더 놀란 듯 보였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저러나 하는 걱정스러운 눈빛이다. “글쎄요. 워낙 많은 발표가 있어서….” “시중 은행 두 곳을 매각하겠다고 한 거 말입니다.” “아, 물론입니다. 금융권에서는 엄청난 충격이었으니까요.” “재무 건전성으로 보면 성동은행은 충분히 회생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죠. 사실 성동은행보다 더 위험한 곳도 많습니다. 성동은행이 규모가 좀 작다 보니 매각 대상에 오른 것이죠.” “정부는 해외매각을 추진하고 있으니 좋은 기회 아닐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들에게는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다. 아니, 다른 은행에 눈 돌릴 여유가 없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 “무리 미라클 인베스트먼트 말입니다. 본사가 뉴욕에 있는 엄연한 외국 투자사입니다.”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내 말뜻을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오세현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온몸으로 드러낸다.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뒤를 이어 은행 임원들의 눈이 커졌다. “설마 성동은행을 인수할 생각이십니까?” “우리를 이용하라는 말씀이죠. 우리가 인수하고 여러분에게 넘기겠습니다. 아니면 우리 미라클과 컨소시엄을 구성해도 좋고요.” “그, 그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으니 대답도 못 하고 더듬거리기만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우리 대표님의 제안, 빠른 시일 내 답변을 들었으면 합니다.” 나는 오세현에게 눈짓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나 은행을 나오자마자 오세현이 소리쳤다. “야! 넌 갑자기 뭔 소리야? 은행을 인수하자니?” “삼촌. 눈앞에 고래가 보이면 다른 물고기는 전부 피라미로 보이는 법입니다.” “뭐야?” “성동은행 인수를 제안했으니 우리의 요구 사항은 정말 하찮게 느껴질 거라는 뜻입니다. 하찮은 요구쯤은 쉽게 들어주지 않겠어요?” 오세현이 이마를 탁 쳤다. “이야, 이 자식. 수 쓰는 거 하나는 정말 진 회장님 뺨친다. 그거 정말 좋은 작전이다. 하하.” 시원하게 웃는 오세현을 보며 나도 싱긋 웃었다. 성동은행 인수 제안이 진심이란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 [088] 딴 살림의 주인은? 1 진영기 부회장은 결재판에 끼워진 인사 발령을 보며 두 손만 부들부들 떨었다. 계열사 사장급 인사는 아직 아버지의 결정을 따라야 하지만 건설 임원들이 일괄 사퇴하며 자신에게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건 자존심 상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사람들 오늘 출근했나?” “회사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럼?” “….” 긴장한 비서가 머뭇거리자 진영기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음성을 낮췄다. “파악한 거 있으면 보고해. 괜찮아.” “홍송철 사장이 회장님의 지시를 받은 걸로 보입니다. 백재진 전무를 비롯한 사람 차출하는 것은 홍 사장의 재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또?” “차출된 사람은 여의도 미라클 인베스트먼트 사무실로 출근합니다.” “미라클이면 오세현이, 그놈?” “네. 순양자동차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아무래도 미라클은 회장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미라클이 우리에게 10억 달러를 빌려줬잖아. 그때부터 단순한 협력관계가 시작된 것일 수도 있어.” 비서가 말한 밀접한 이라는 뜻은 미라클을 회장의 사금고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진영기는 머리를 저었다. 아버지가 만약 사금고를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세상에 드러낼 분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더 아는 거 없어?”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당분간 입 다물고 지내라고 하셔서 자세히 밝힐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차라리 부회장님께서 한번 만나보시면 어떨까 하는데요?” “전부 아버지 사람인데, 내가 물어본다고 말할 놈들이 아냐.” “김경식 이사는 어떻습니까? 회장님의 사람으로 보기에는 많이 어리죠.” “김경식이?” “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임원 달면 붕 뜬 것 같은 기분이고, 줄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데… 부회장님께서 부르시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올 겁니다.” “음….” 얼굴도 가물가물한 놈이다. 이사가 마지막 직책이 될 그렇고 그런 놈이니 자신이 부르면 감격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저녁이나 먹자고 해. 조용하게.” 처음 인사 파일을 봤을 때 아버지에게 달려가 따지고 싶었지만 이젠 참을 줄 안다. 오십 중반의 나이라면 자기 몫 챙기는 건 자력뿐이라는 것도 안다. * * * “마음껏 들게. 이거, 승진 축하가 너무 늦어버렸군. 이사 달자마자 퇴직이라니.” 김경식 이사가 한달음에 달려왔다는 건 순양을 떠나지 않았다는 증거며, 건설 임원들은 일괄 사퇴는 단순한 서류상 절차일 뿐이다.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급히 준비하느라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아냐, 아냐. 밖에서 일하든, 안에서 일하든 순양 사람 아닌가?” 진영기는 김경식 이사의 표정을 살피며 술을 따랐다. “어때? 오세현 대표와 일하는 건 힘들지 않나?” “괜찮습니다. 외국에서 지낸 시간이 오랜 분이라 격의 없는 분이더군요.” 김경식이가 자신을 경계하지 않는 건 확실했다. 하긴 회장의 장남이며 부회장이지 않은가?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모두 알고, 격려차 식사 자리를 만든 걸로 생각할 것이다. “그 말은 일의 진척이 빠르다는 뜻인가?” “네. 대아건설 인수도 임박했고, 디지털미디어시티 프로젝트는 컨셉이 명확하고, 세부 계획이 잘 빠졌더군요. 공사기일과 총비용 산정도 상반기 중에 끝낼 수 있습니다.” 대아건설 인수? 디지털 뭐? 시티?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쓰는데 더욱 충격적인 이름이 나와버렸다. “참, 도준이…. 아니, 진도준 실장도 대단하던데요? 일을 배운다기보다는 리드해 나간다는 느낌이 들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하하.”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가 분명한데, 정리되지 않았다. 진도준? 진영기는 충격을 감추려 술 한잔을 재빨리 들이켰다. 술잔을 탁 내려놓고 회 한 점을 씹고 나서 입을 열었다. “아차차, 도준이도 있었지? 그런데 실장이라니? 그건 처음 듣는데?” “모르셨습니까? 뭐, 별거 아닙니다. 오 대표가 데리고 다닐 때 적당히 소개하려고 그냥 명함만 판 거죠.” 일을 배우고, 데리고 다닌다. 진영기의 머릿속에 붉은 경고등이 켜졌다. “우리 막내 조카가 오 대표 밑에서 일 배운다는 건 처음 들었는데… 거기서 뭘 배운다고?” “아, 이런…. 제가 괜한 말을….” “아니야. 다들 바쁘다 보니 조카가 뭐 하는지 관심 쏟을 시간도 없었는데…. 괜찮아. 편하게 말해봐.” “회장님 말씀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짐작하겠던데요? 투자와 M&A 전문가가 목표인 듯 보였습니다.” “오세현 대표처럼?” “네.” 경고음이 사라져 갔다. 순양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투자와 M&A를 지휘한다면 순양의 장수일 뿐이지 왕권을 노릴 자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거 참, 검사 조카 하나쯤 있었으면 했는데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허허.” 일단 한시름 놓은 진영기 부회장은 김경식을 슬쩍 떠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네 생각을 한번 듣고 싶은데…….” “네. 말씀하십시오. 부회장님.” “대아 건설이 그 프로젝트를 원활히 진행하겠나? 규모가 크다고 들었거든.” “크죠. 어마어마하….” 김경식은 순간 입을 닫아버렸다. 여느 건설사나 프로젝트를 입 밖에 내는 건 금기사항 아닌가? 마누라도 모르게 진행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어투로 보아하니 부회장도 내용을 모르는 듯 보였다. 김경식의 난처한 표정을 보자 진영기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어마어마한 건 나도 알아. 그러니 물어보는 거지. 나도 아버지께 얼핏 들었지만, 외부에서 벌이는 프로젝트라 신경을 못 썼어.” “아, 그렇군요. 염려 마십시오. 말씀드렸다시피 차질없이 진행 중입니다. 수조 원대의 사업인데 한 치의 실수라도 있으면 안 되죠.” 진영기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충격이었지만 내색 없이 머리만 끄덕였다. 수조 원대라니? 나라 곳곳에서 기업들이 픽픽 쓰러지는데 어떻게 수조 원대의 사업을 진행한다는 말인가? 설상가상 이런 거대 프로젝트가 있다면 당연히 순양건설이 차지해야지 왜 밖으로 빼돌린다는 말인가? 의문이 가시지 않았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여기서 더 캐묻다 보면 저 어리숙해 보이는 이사 나부랭이도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눈치챌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야, 그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끝나더라도 다시 순양과 합치는 건 어렵지 않겠나? 엄연히 미라클이 인수한 것이니 말이야.” “그, 그렇습니까? 회장님 말씀은 좀 다르시던데….” “상황은 늘 변하니까 하는 말일세.”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넌 게 아닌가 걱정하는 김경식 이사의 표정을 보니 이 자가 아는 건 여기까지가 전부인 게 확실하다. 진영기는 김경식의 술잔을 채워주며 이것저것 물어봤으나, 더는 나오는 게 없었다. 이 의문에 속 시원히 말해줄 사람은 역시, 아버지뿐이다. * * * “형님. 어쩐 일로 내 방에…. 부르면 내가 갈 텐데요.” 진동기 사장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진영기를 보자 적잖이 놀랐다. 정확히 열다섯 걸음이면 서로의 집무실을 방문할 수 있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견제가 일상화되면서 형제지만 얼굴 보는 것도 불편한 두 사람이었다. “상의할 일이 좀 있는데, 왜 불편하냐?” “아, 아뇨. 일단 앉으시죠.” 서로 마주 보며 소파에 앉자 어색함은 더욱 커졌다. 진영기는 눈을 들어 집무실을 한번 쓱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온 것 같은데 변한 게 없구나. 책상이나 소파는 좀 갈지 그랬냐? 너무 낡았어.” 진영기는 소파 팔걸이의 가죽이 갈라진 부분을 손으로 문질렀다. “제가 사장으로 승진했을 때 책상은 아버지가, 이 소파는 형님이 사주신 것 아닙니까? 함부로 바꿀 수 없죠.” “그랬나? 기억도 안 나는군.” 비서가 가져온 차를 마시며 또 한 번 침묵이 찾아왔다. 결국,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동생이었다. 형님이 어려운 발걸음을 한 것만큼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려는 게 분명하니 협조하는 게 도리 아닌가? “형님. 인사차 들른 건 아닐 텐데…. 할 말 있으면 편히 해요.” “그래, 툭 터놓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왔다. 넌 이번 순양건설 임원들이 일괄 사퇴한 건 알고 있어?” “네. 그것 때문에 회사가 시끌시끌하지 않습니까?” “이유도 아는 건지 묻는 거다.” “나도 소문으로만 들은 거라 정확히는….” “미라클 오세현이와 관련 있는 것도?” “네. 여의도로 전부 출근한다더군요.” 동생 역시 눈과 귀가 되어주는 파수꾼이 많다. 그렇다면 대아건설 인수를 위한 것이라는 걸 이미 알 것이다.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와 오세현이는 아버지와 어떤 관계인지 짚어봐야 하지 않겠냐?” “왜요? 신경 쓰입니까?” 진영기는 살짝 웃으며 말하는 진동기를 보자 욱하는 뭔가가 또 올라왔다. 두 살 위의 형이며 이 집안의 장남인 자신을 깔보는 듯한 태도. 바로 저런 태도가 자꾸 벽을 만든다. “넌? 안 쓰여?” “아직까지는.” “왜?” “윤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서요. 아버지가 도준이를 워낙 귀여워하시니까 윤기까지 좋게 보이실 테고. 윤기도 이제 제 밥벌이는 잘하니까요. 막내 아들이니 뭔가 물려주고 싶은 거 아닐까요?” “그게 미라클이다?” “오세현이가 윤기 친구라고 들었습니다. 그쪽에 아버지가 돈을 좀 투자하셨고… 이것저것 코치해주며 키워서 윤기 몫으로 주실 생각이겠죠.” 진동기는 찻잔을 들어 입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순양그룹에서 몇 개 떼주면 형님이나 저나 다시 뺏어올 게 뻔하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닐까요? 하하.” “그 때문에 자동차도 떼주고 건설사도 하나 더 키우고? 윤기 몫으로 너무 많다는 생각이 안 들어?” “대아건설 말씀이시죠?” 역시, 동생도 대아건설 인수를 알고 있다. “그걸 알고도 천하태평이냐?” “대아건설 규모는 우리 순양건설에 비해 절반입니다. 순양건설 쪼개서 주는 것도 아니고요. 관계사 하나 늘이는 건데 태평해도 되죠.” “넌 대아건설이 올해 벌이는 첫 사업이 뭔지 모르는구나. 안다면 절대 그런 소리 못할걸?” 진동기는 말을 못했다. 형의 말대로 첫 사업이 뭔지 아직 파악 못 했기 때문이다. 진영기는 눈만 크게 뜨고 입 다문 동생을 보니 괜히 우쭐해졌다. 뭐든 다 아는 척,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빛이 계속 거슬렸는데 지금은 동생이 자신의 눈치만 살핀다. 하지만 매달려 묻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벌어지는 일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까닭이다. ‘밥맛 없는 새끼.’ 저 잘난 척을 어떻게 손봐야 할까! “뭔지 궁금한데 자존심 때문에 물어보는 게 내키지 않구나. 흐흐.” 한 번쯤 비웃어주니 기분이 나아졌다. 기 싸움은 여기까지! 지금은 자식들 몰래 아버지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지 알아내는 게 더 중요하다. “대아가 손대려는 게 수조 원대 사업이다. 그게 성공하면 순양건설과 어깨를 나란히 할지도 몰라. 그런 노다지를 왜 남에게 준건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냐?” “지금 조 단위의 프로젝트라고 하신 겁니까?” 진영기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질문은 동생이 해야 할 차례다. “잘못 아는 거 아닙니까? 나라 전체에 돈이라고는 씨가 말랐는데 어떻게 수조 원대의 사업을? 불가능합니다.” 진동기는 머리를 흔들었다. “게다가 부도 위기에 놓인 대아건설입니다. 그럴 돈이 있다면 부채부터 갚아야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그런데 비상식을 상식으로 바꾸는 일은 바로 아버지의 특기 아니냐? 이 모든 그림을 그리고 지휘하는 사람이 아버지라면?” 진동기는 또 말문이 막혔다. “구색갖추기 같았던 자동차를 윤기에게 물려주는 거야 그렇다 쳐. 그런데 수조 원대의 사업을 밀어준다? 이것도 윤기에게 주는 선물처럼 보여?” 진영기 부회장은 입을 꾹 다문 동생을 보며 자신과 똑같은 위기감을 느끼기를 원했다. 그래야 내민 손을 잡을 테니까 말이다. ======================================== [089] 딴 살림의 주인은? 2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거요?” 답답하고 짜증 나는 건 진동기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공손하고 예의 바르던 말투가 조금 거칠어졌다. “순양이라는 밥그릇 싸움은 너와 나, 둘이면 충분하지 않아? 만약 우리도 모르는 누군가가 또 이 싸움에 끼어들 준비를 하는 거라면? 그것도 아버지가 숟가락, 젓가락 다 챙겨준 놈이라면? 찝찝하잖아.”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결론만.” “아버지께 물어보자. 숟가락, 젓가락 챙겨주는 놈이 누군지. 왜 챙겨주는지.” “형은 항상 그게 문제였어. 몰라? 문제만 생기면 쪼르르 달려가서 징징대는 아들, 지겹지도 않아?” 진동기는 젊었을 때처럼 형에게 존대를 하지 않았다. 동생에게 심한 말을 들었지만, 진영기의 기분은 나빠지지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경쟁자가 아닌 친동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 혼자 가서 징징대면 그렇지. 하지만 너랑 나 둘이 가면? 징징대지 않고 사업 현황을 알려달라고 하고, 우리도 도움 주겠다고 한다면? 대아건설 인수와 엄청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모두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하면? 이건 징징대는 게 아니라 일 이야기가 된다. 아닌가?” 진동기는 형의 말대로 행동했을 때 아버지의 반응을 추측했고 그 결과가 나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철저한 준비는 해야 한다. 준비가 부족하면 아버지에게 꾸지람만 잔뜩 먹을 게 뻔하다. “징징대는 게 안되려면 확실하게 알고 가야겠지? 간만에 형제끼리 툭 털어놓는 게 어때? 서로 아는 걸 말이야.” 진동기가 정보 교환을 제안하자 진영기는 손을 들어 동생을 가리켰다. “너부터?” “그래야겠지. 첫째, 윤기는 아냐. 윤기랑 이야기한 적 있어. 윤기가 원하는 건 하나야. 지 아들내미 도준이를 위해 그놈도 욕심이 생겼어. 도준이에게 뭔가 남겨주고 싶어 해.” “윤기가? 의외네.” “윤기도 아버지니까. 하지만 내게 속마음을 털어놨어. 순양그룹을 욕심냈다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어. 섭섭하지 않을 만큼 챙겨 달라는 뜻이겠지.” 진동기는 막내가 밥그릇 싸움 준비의 가능성을 제외하고 오히려 다른 가능성을 말했다. “아버지가 도준이를 끔찍이 여기고 도준이도 할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놈이니… 내 생각엔 차라리 도준이가 유력하지 않을까?” 동생의 말에 진영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도준이의 미래는 이미 정했어.” “어떻게?” “도준이는 금융전문가로 키울 것 같더라. 투자와 M&A 전문가로 말이야.” “확실해?” “그래. 오세현이 밑에서 착실히 수업하고 있어.”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닫았다. 진윤기나 도준이를 제외하면 마땅히 떠오르는 대상이 없다. 셋째인 진상기는 일찌감치 빠졌고 여동생은 끼어들 여지도 없다. 설마 숨겨놓은 자식이라도 있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자 두 사람을 머리를 저었다. 더 늦기 전에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아버지의 불호령은 각오해야겠지만 말이다. * * * “이보게, 장남 그리고 차남.” 진 회장은 두 아들의 얼굴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칼을 든 놈인지 장미꽃을 든 놈인지 분간 정도는 할 줄 알아야 순양의 후계자라고 떠들고 다닐 자격이 있는 거 아닌가?” 아버지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나오자 두 아들은 당혹스러웠다. “카, 칼을 들었다니요?” “기억 못 하느냐? 불과 서너 달 전이다. 10억 달러 들고 와서 우리나라 돈으로 바꿔주며 환전 수수료로 챙겨간 게 순양자동차다. 자동차가 쥐고 있던 그룹 주식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이런 날강도는 내 평생 본 적이 없어.” 두 아들은 입을 떡 벌렸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이 아닌가? “정말 미라클은 아버지와 관계가 없습니까?” “왜? 강도질 당한 내가 화내지 않아서?” “아뇨. 관계가 없다면 너무 부당한 거래 아닙니까? 왜 그같은 조건을 받아들이셨습니까?” “안 받아들이면?” 진 회장의 찌를듯한 눈빛에 질문했던 차남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좀 더 침착해야 했다. 해외 핫머니 결제가 매일 수십만 달러에서 수백만 달러였던 시기였다. 보름 아니, 열흘도 견디기 힘든 자금 사정이었고 자신도 1차 부도는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절망하지 않았던가? 더한 조건이라 해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말이 헛나갔습니다.” “위기만 넘기면 어려울 때를 쉽게 망각하는 게 평범한 인간이지.” ‘평범한’이라는 말이 가슴을 찔렀다. 순양을 물려받을 자가 평범해서야 되겠는가? “그럼 미라클은 우리 순양을 강탈한 놈이로군요.” “자동차와 그룹 주식 좀 주고 IMF 위기를 넘겼어. 너무 억울해 하지는 마라.” 하지만 두 아들의 의문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 순양자동차 사장을 비롯한 임직원을 다 보내지 않았습니까? 사람마저 뺏긴 건 아닐 텐데요?” “대아건설 인수도 그렇습니다. 칼 든 강도라면 도와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두 아들의 의문에 진 회장은 혀를 찼다. “내게 따지기 전에 내 생각을 헤아려 보는 건 어때? 그리고 네놈들이 내 결정을 따지는 것도 좀 우습지 않나? 쯧쯧.” 두 아들은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오해 마십시오. 아버지. 따지는 게 아닙니다. 헤아리기 힘들어 여쭤보는 겁니다.” “거 뭐냐? 전쟁 때 거대한 목마 세워놓고… 그 안에 군사들 숨어있었던….” “트로이 목마 말씀이십니까?” “그래. 트로이의 목마.” “그럼 우리 순양 사람들을 함께 보낸 게…?” “물론이다. 되찾아 와야 않겠느냐?” 두 아들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아버지의 계획을 모두 듣자 이 순간 자신들은 오십 넘은 나이에 징징대는 아들일 뿐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위기를 넘긴 것에 안도만 할 뿐 되찾을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조금은 골칫덩이인 자동차가 없어져서 홀가분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의문이 완전하게 풀린 건 아니다. 대아건설도 남아있고 진도준도 남아있다. 차마 묻지 못할 뿐이다. 두 아들의 모습을 보며 진 회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미라클은 지금 나를 이용한다. 내 힘과 인맥을 이용해서 대아건설을 삼킬 거고 큰 프로젝트도 진행할 거다. 엄청나게 성장할 거야.” 진동기는 눈을 빛내며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모든 의문이 풀렸지만, 괜히 아는체하기는 싫었다. 건너편에 앉아있는 형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미리 답을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커진 대아건설은 아진그룹으로 들어갈 테고, 그때 우리는 아진그룹을 흡수해야 한다. 자동차를 뺏겼지만, 아진그룹과 대아건설을 이자로 생각하고 받아와야지. 안 그러냐?” 그제야 진영기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금까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희미했지만, 이제는 전체 그림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아마도 너희가 그 일을 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진영기는 힘차게 대답했지만, 진동기는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아직 말하지 않는 마음을 헤아리는 중이다. 항상 전부를 말하는 듯하면서도 뭔가를 숨기는 분 아닌가? 아직 뭔가가 더 남아있고 그것을 말해야 한다. 이윽고 진동기가 입을 열었다. “아진그룹도, 대아건설도 되찾아야 하지만 주인은 순양이 아닙니다.” “뭐라?” 아들의 의외의 말에 진 회장의 눈빛이 달라졌다. 하지만 진동기는 차분함을 잊지 않고 말했다. “자동차도 확실하게 계열 분리됐으니 차제에 윤기에게 주는 게 어떨까 합니다. 물론 아진그룹을 뺏는 게 먼저겠죠.” “윤기?” 진영기 역시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도준이겠죠. 솔직히 우리 자식들 중에 도준이 만큼 영특한 애도 없지 않습니까? 윤기가 욕심이 없다 보니 도준이에게 기회를 주지 못한 것 같아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진영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건 대놓고 자기 아들이자 이 집안의 장손인 진영준을 뭉개는 말 아닌가? 하지만 아버지 앞이니 입술만 깨물 뿐 큰소리는 내지도 못했다. “도준이라….” 진 회장은 두 아들의 표정을 번갈아 살폈다. 화를 참는 놈, 애써 마음 쓰는 척 하는 놈. 이래서 사람은 한번 높아진 눈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가 보다. 진영기는 장남이라 남다른 애정이 있었고, 진동기는 차남이지만 깊은 속을 감추고 조용히 일 처리 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도준이를 챙겨주자는 차남의 말을 들으니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감춰야 했다. 누가 누구를 챙겨주자는 건가? 새파란 조카가 곶감 빼먹듯 회사를 가져가도 눈 뜨고 당할 위인들 주제에 말이다. “동기야.” “네.” “내 것을 네 것인 양 선심 쓰는 버르장머리는 어디서 배워먹었냐?” 아버지의 목소리가 조금 거칠어지자 진동기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도준이 자질이 아까워서 그만….” “됐다. 너희 둘, 듣고 싶은 말 다 들었을 테니 이만 나가봐라. 내 말 명심하고 뺏긴 거 어떻게 찾아올지 궁리나 해.” “네.” 두 아들이 일어설 때 잊었던 하나를 덧붙였다. “이달 말일, 아진그룹 제2의 창업을 선포한다. 너희 둘도 참석해서 오세현이를 축하해주고, 객지에서 고생할 조대호 사장 격려하는 것도 잊지 마. 그리고 우리 순양자동차가 남의 손에 넘어가는 걸 똑똑히 봐둬라. 알았어?” 두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혼자 남은 진 회장은 긴 한숨과 함께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늑대 같은 자식놈들에게서 손자놈 지키는 일도 쉬운 게 아니구먼. 늘그막에 거짓말을 달고 살다니….” * * * 아진그룹의 제2 창업 선포식과 계열사 대표이사들의 취임식이 벌어질 그룹 사옥의 대강당은 활기보다는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사망 직전 수혈받아 이제 겨우 중환자 상태를 벗어났기에 아직 생존의 기쁨을 누리기에는 이른 감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현창 회장은 계열사 사장들이 자리한 무대로 올랐다. 「임직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오늘을 빛내주시기 위해 귀한 걸음을 해주신 귀빈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때 우리 아진을 위기에 빠트린 제가 다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송 회장은 감회가 새로운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간의 어려움을 같이한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했고 미래를 향한 비전도 제시했다. 「기업가치가 지속적으로 증대되는 기업, 유형과 무형의 가치가 최고인 기업, 구성원의 만족도와 사회 공헌도가 최고인 기업, 단기적 외형성장을 넘어 축적된 내재가치를 바탕으로 미래의 무한성장을 향해 질주하는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미래를 꿈꾸고 준비하는 열정으로 불가능에 도전하고, 창의적 사고와 불굴의 의지로 꿈을 실현하는 영원한 청년 기업. 이것이 우리 모두가 되찾아야 할 모습입니다.」 회장 취임사가 끝나고 합병한 자동차의 대표이사인 조대호 사장도 취임사를 이어갔다. 송 회장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취임사 끝 무렵에 조 사장은 손을 들어 무대 벽면을 메운 커다란 플래카드를 가리켰다. “오늘부터 아진과 순양이라는 과거의 이름은 버립니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난 이름 H.W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 * “도준아. 계속 비밀로 할거냐?” 그룹 회장실에서 TV를 통해 느긋하게 행사를 지켜보던 오세현은 화면에 나타난 HW라는 이름을 보자 다시 물었다. “글로벌 시대 아닙니까? 한글은 떼고 영어로 가야죠.” “누가 뭐래?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고?” “뜻은 지금부터 천천히 생각해서 그럴싸하게 갖다 붙여야죠. 그냥 보기 좋잖습니까? 하하.” 계속 터지는 웃음, 오늘은 참을 수 없었다. HW 그룹. 이 얼마나 보기 좋은가? ======================================== [090] 딴 살림의 주인은? 3 “그럴싸하게? 벌써 기자들이 묻고 있다고. 보도자료 돌릴 때 뭐라고 할 거야?” “최고의 이미지 코디네이터 회사와 계약할 겁니다. 전문가들이 저 이니셜에 맞춰 만들어 내겠죠.” “뭐? 코디네이터?” “네. 앞으로 우리 회사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책임지고 관리할 회사죠. 그리고 송 회장님이나 계열사 대표이사들도 이미지 메이킹 하고요.” “메이킹은 또 뭐냐? 야! 우리가 배우 키우냐? 연예인 키워?” “21세기는 이미지로 먹고사는 시대가 될 겁니다. 기업 이미지가 곧 매출로 직결되고요. 아무튼! 오늘은 고민하지 마시고 즐기세요. 좋은 날 아닙니까?” TV에서는 조대호 사장의 취임사가 끝나고 각 계열사 사장의 소개가 이어졌다. 이제 리셉션이 시작될 시간이다. “삼촌. 가서 얼굴 비추셔야죠. 명실상부한 이 그룹 지배자 아닙니까?” “넌? 인사 안 할 거야?” “귀찮은 일에 말릴 것 같아서요. 큰아버지들 와 계신 거 얼핏 봤어요. 전 그냥 빠질랍니다.” 그들에게서 받게 될 불편한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오늘은 좀 특별한 날 아닌가? 아진, 아니… HW 그룹 사옥을 빠져나왔다. 빌딩에는 아직 아진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곧 바뀔 것이다. 자축이라도 해야 할 날이지만, 적당한 아부도 떨어야 하는 날이다. 생색내기 좋아하는 할아버지를 잊으면 안 된다. 자고로 강직한 충언을 하고 죽은 사람은 많지만, 아부 떨다 죽은 사람은 없지 않은가? “실장님. 어디로 모실까요?” 김윤식 대리가 차 문을 열었다. “회장님댁으로 가죠.” “네.” “참, 가다가 슈퍼 있으면 진로소주 한 병만 사다 주세요.” “소주요? 술은 잘 드시지도 않으시면서….” “오늘 같은 날은 한잔해야죠.” 마음껏 마시고 취하고 싶을 만큼 감격스럽고 뿌듯하지만 이제 첫발을 내디딘 것뿐이니 오늘은 한 잔만 마셔야겠다. 축하주는 가볍게. 성공주는 잔뜩. * * * “응? 왜 벌써 왔어? 지금쯤 연회가 한창일 텐데?”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할아버지는 뉴스를 보고 계셨다. 아진그룹 제2 창업식은 꽤나 큰 뉴스거리다. 쉬지 않고 흘러나온다. “할아버지 덕분에 제가 아진그룹 주인이 됐는데 어떻게 혼자 즐기겠습니까? 할아버지와 축하주 한잔 나누려고 왔습니다.” 검은 비닐봉지에서 소주병을 꺼냈다. “뭐냐? 왜 하필 재수 없게 망한 회사 술을 가져왔어?” 할아버지는 빨간 라벨의 진로 소주병을 보자 미간을 찌푸렸다. “70년 역사가 담긴 술 아닙니까? 진로 창업주인 장학엽 사장도 고작 소주 브랜드 하나가 70년을 버틸 줄 몰랐을 겁니다. 그리고 회사는 망했지만, 이 제품은 여전히 팔리지 않습니까? 진로 소주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주인은 바뀔 수 있어도 사라지지 않을 제품이라…. 그건 마음에 드는구나. 허허. 좋다, 한잔 따라 봐라.” 진로소주가 바로 순양의 미래라는 걸 말하고 싶은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채신 걸까? 아, 좀 다르구나. 핏줄을 이어받았으니 주인이 바뀌는 것은 아닌가? “축하한다. 우리 손자. 장하다. 내가 네 나이에 가진 거라고는 금붙이 몇 개가 전부였는데, 넌 내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가진 걸 스물에 쥐었구나.” “그거야 할아버지께서는 저같이 열 살 때 널찍한 목장을 선물한 할아버지를 두시지 못했으니까요. 고맙습니다. 전부 할아버지 덕분입니다.” 할아버지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대한민국 재벌 손자 중에 열 살 때 몇천만 원짜리 목장 가진 놈은 수두룩해. 그놈들 나이가 지금 스물이고, 서른이다. 받은 거 까먹은 놈은 많아도 천 배, 만 배 불린 놈은 너밖에 없을 거야. 지금 네가 가진 건 할아버지를 잘 둬서가 아니다. 네 힘으로 만든 거야. 자랑해도 돼. 허허.” 할아버지는 내 잔에 소주를 채우고 살짝 부딪혔다. 우리 둘은 단숨에 술잔을 꺾었다. “이 술, 참 많이도 마셨는데 이젠 그 맛이 안 나는구나.” 나도 그렇다. 소주와 삼겹살을 얼마나 마셨는가? 하지만 그 맛이 아니다. 아예 소주 첫 잔의 짜릿함이 기억나지도 않았다. 나와 할아버지는 아주 잠깐이지만 회상에 잠기느라 말없이 빨간 소주 라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좀 우스운 모습이다. 노인과 젊은 놈이 같은 색의 추억에 잠기다니. 추억에서 깨어난 할아버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아건설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느냐?” “은행과의 협상은 조금씩 양보해서 무리 없게 진행 중이며, 실무진이 구체적인 금액을 계산 중입니다. 그리고 강무성 사장이 빼돌린 돈은 발견하는 대로 회수 절차를 진행 중입니다.” “검찰이 수고하는구먼.” “수고비는 넉넉하게 쥐여줬습니다.” 할아버지는 내 안색을 살폈다. “그런데 강 사장 그자가 주식 매각 대금은 절대 안 내놓겠다고 버티나 보구나.” “네. 자식, 손자 전부 공금 횡령으로 구속하겠다고 해도 요지부동이네요. 돈…. 참 무섭습니다.” 기가 찬 내 모습을 보며 할아버지는 정색하며 말했다. “아니다. 잘못된 생각이다.” “네?” “그 주식 매각 대금은 강 사장이 가진 마지막 무기다. 아직 무기를 휘두를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거야. 딱 한 번 휘두를 수 있으니까, 좀 더 결정적일 때 휘두를 거다.” 여기서 휘두른다는 말은 주식 매각 대금마저 포기한다는 뜻이다. “설마요? 강 사장에게 아직 기회가 남았을 리가…?” “그 일가족이 전부 구속되고 유죄 받으면 주식대금은 아마도 추징금으로 다 날아가겠지?”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기회가 남아있습니까?” “대신 너도 그 돈을 만지지 못한다. 국고로 들어가니까 말이다.” 아직 할아버지가 말하는 의도를 모르겠다. 주식 매각 대금을 대아건설로 돌려준다면 강 사장 본인을 물론 전 가족의 구속을 피한다. 하지만 계속 버티면 주식 매각 대금은 국고로, 가족들은 구속이다. 누가 보더라고 후자보다 전자가 현명한 선택이다. 기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내 얼굴에 드러난 의문을 보며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넌 지금 쓸데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돈을 날려버리려는 거다. 아니냐? 장사꾼을 마음을 잊어버렸어.” “쓸데없는 감정이라뇨? 그런 거 없습니다. 저도 오로지 돈만 생각합니다. 그 돈이면 대아건설 정상화에 엄청난 도움이 되니까요. 그래서 할아버지의 힘을 이용해서 강 사장을 협박하고 회유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구구절절 떠들어 댔지만, 할아버지는 딱 한 단어로 내 감정을 설명했다. “정의.” “네?” “넌 지금 정의라는 감정 때문에 분노하는 거다. 직원들 월급도 주지 않으면서 망해가는 회사의 돈을 빼돌리고, 그 돈으로 언젠가는 떵떵거리고 살게 될 강 사장 일가를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거지. 그런 놈은 알거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하지 않니?” 변명할 말이 없어 얼굴만 붉어졌다. 참 희한한 세상이다. 정의라는 말이 어색하고 불의에 분노하는 것이 쓸데없는 감정이 돼버렸다. 이 집안에서만 그런 건지, 세상이 그런 건지 그 경계는 모호하지만. “강 사장은 말이다, 널 장사꾼으로 보고 있어. 그러니까 네가 단 한 푼이라도 더 건지기 위해 다른 제안을 할 거라고 믿고 기다리는 거야. 버티면 넌 한 푼도 건지지 못하니까. 그리고 두 번째 제안 없는 거래는 없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강 사장의 의도를 정확히 내게 말했다. “장사꾼이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건 좀 웃기지 않니? 남이 어떻게 살던, 무슨 생각을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그놈 주머니에 든 돈을 네 주머니에 한 푼이라도 더 옮기는 게 장사꾼이지.” 한동안 대답도, 대꾸도 못 한 채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강무성 사장에게 가졌던 내 감정은 과거의 경험 때문이다. 과거의 내 모습을 대아건설 직원에게서 봤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 보렴. 강 사장 그놈 주머니의 돈을 나누자고 제안하면? 얼마를 남겨준다고 하면 그놈이 네 제안을 받아들일지도 말이야.” “그러니까 돈도 좀 남겨주고 강 사장 일가 구속도 피하게 해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놈이 주식대금의 절반을 회사에 주겠다고 하면 반성의 기색이 역력하니 집행유예로 나오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 시나리오도 좋고.” 여전히 주저하는 나를 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행여나 딴생각은 말아.” “딴 생각이라니요?” “돈을 먼저 챙기고 강 사장은 나중에 응징하겠다는 그런 생각 말이야. 다시 말하지만, 돈만 생각해라. 강 사장이 네게 위협이 되지 않는 한 그쪽은 쳐다보지도 말어.” 눈치 하나는 정말…. “뭐, 어찌 됐던 대아건설도 네 손안에 들어갔으니 강 사장 돈을 찾아오는 건 보너스 정도겠지. 이 할애비가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줬다. 선택은 네가 해야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장사꾼답게 결정하겠습니다.” 일 이야기는 이 정도로 끝냈다. 할아버지는 다시 술잔에 술을 채우고 내가 가진 것을 축하했고 나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한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 * * “안양구치소로 갑시다.” “네? 갑자기 거긴 왜…?” “남의 주머니 속에 든 돈, 내 주머니로 옮기려면 못 갈 데가 있겠습니까?” 김윤석 대리는 여전히 머리를 갸웃거리며 핸들을 잡았다. 진정 돈도 챙기고 파렴치한 놈도 알거지로 만들 방법은 없을까?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안양이었다. 꼴에 사회 특권층이라고 널찍한 면회실까지 배정받았다. “어떻게…. 구치소 짬밥은 입에 맞으십니까?” “미라클 같은 듣도 보도 못한 회사를 무시한 대가라 생각하니 그럭저럭 먹을 만 하더구먼.” 아직 여유가 보였다. 할아버지 말씀처럼 아직 휘두를 칼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면회시간 길지 않으니 우리 오 대표님 말씀만 전하겠습니다.” 강 사장은 눈을 감으며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사장님께서 얻게 될 주식대금 전부를 대아건설로 넣으시던지, 아니면 아예 주식을 회사에 주시든지 하시면….” “당신네가 원하는 건 아니까 앞은 자르고 뒤만 말하지?” “검찰 수사는 여기까지 자르고, 집행유예로 나오실 겁니다. 그럼 대아건설 고문 자리를 드린답니다. 고문 월급은 아주 두둑하게 챙겨드릴 수도 있다는군요. 앞으로 협조만 잘하신다면 말입니다.” 강무성 사장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던지는 제안은 보너스가 숨어있다. “망해가는 회사의 골수까지 빨아먹은 파렴치한. 그 굴레는 벗을 겁니다. 모든 것은 오해였고 회사를 위한 일을 하다 보니 먼지가 좀 묻었다, 그런 선의를 알기에 고문으로 영입한다. 이렇게 언론이 예쁘게 포장해서 터트려 줄 겁니다.” 명예. 나이 들면 이름값에 연연한다. 돈만 생각하는 장사꾼이지만 들고 다니는 명함의 무게를 잘 안다. 대아건설 고문이라는 명함은 그리 무겁지 않지만, 횡령 전과자보다는 낫다. 또한, 강무성도 장사꾼이다. 나와 극단으로 치달으면 돈도 명예도 다 떨군다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음…. 오 대표 그 친구, 꼼꼼하구먼. 내가 가질 돈을 회사 경비로 처리하겠다? 너무 쪼잔하지 않나?” 고문으로 영입해서 가져가는 돈은 전부 급여다. 주식대금 전부를 챙기고 일부분만 급여로 준다면 크게 나쁠 것 없다. 그리고 대아건설의 숨은 역사까지 잘 아는 사람 아닌가? 뭐라도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에이, 통 큰 장사꾼이 어디 있습니까? 큰돈 척척 기부하는 장사꾼도 꼼꼼하게 계산하고 내놓잖아요. 세금 대신 생색내는 용도로 쓰는 게 기부금이죠.” “고문 월급치고는 꽤 많이 줘야 할 텐데?” “대신 고문님도 갑근세 많이 내실 겁니다.” “성실하게 납세하는 것 또한 국민의 의무지.” 그가 미소 짓는 걸 보니 연봉 협상만 남았다. “그럼 고문 위촉 계약서 준비하겠습니다.”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강 사장은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하네.” ======================================== [091] 파종 시기 1 “강무성이를 우리 고문으로?” “네.” 오세현의 찌푸린 표정이 그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기업 고문이라는 자리가 단지 구색갖추기 자리로 전락한 지 오래지만, 비리를 저지른 전임 대표이사가 앉을 만큼 만만한 곳은 아니다. “주식을 전부 토해낸다고 하니 강 사장은 고문 급여만이 가질 수 있는 전부죠. 뭐, 급여는 좀 많이 줘야겠지만.” “그 조건을 받아들인 건 확실해?” “일가족 전체가 옥살이를 면치 못하고, 주식대금 전부를 추징금으로 뺏길 판이니 수락한 겁니다. 국고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나눠 가지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거죠.” “얼마나 줄 생각이냐?” “강 사장이 원하는 금액은 주식대금의 30%입니다. 10년에 걸쳐 받겠다고 하더군요.” 30%라는 말을 듣자 오세현의 찌푸린 얼굴이 확 펴졌다. 최소 절반 정도를 예상했나 보다. “뭐, 그 정도면 선방이긴 한데…. 그래도 대아건설 사장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아가겠는데?” “처음에는요.” “처음?” “네. 두어 달은 약속한 대로 주고, 그다음부터 확 줄일 생각입니다.” 오세현은 다시 찌푸린 표정이 되었다. “그건 또 무슨 꿍꿍이야?” “그놈도 월급 못 받을 때의 처참한 기분을 느껴야죠.” 오세현이 고개를 확 꺾으며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으하하. 이런 잔인한 놈을 봤나!” 눈가에 이슬이 맺힐 만큼 한참을 웃고 나서야 똑바로 앉았다. “처음 두어 달은 주고, 회사 자금 사정이 안 좋으니 급여를 깎겠다?” “아니죠. 지급을 뒤로 미루는 거죠. 계약서대로 급여는 다 줘야 합니다만.” “언제 제대로 다 챙겨줄지, 밀린 월급은 언제 줄지는 너도 모르겠네?” “나라가 어렵습니다. 대아건설이 흑자를 달성할 때까지 모두 허리띠는 졸라매야죠. 흐흐.” “강 사장, 그 양반 미치고 팔딱 뛰겠구먼. 안 주는 게 아니라 못 주니까 말이야.” “잘 알겠죠. 그자가 대아건설 직원들에게 계속 해왔던 말 아닙니까? 밀린 월급은 형편 풀리는 대로 꼭 주겠다고요.” 오세현은 싱글싱글 웃으며 내 눈을 바라봤다. “이건 전략이냐? 복수냐?” “네?” “얄미운 그놈. 너도 한번 당해봐라, 뭐 이런 거냐? 아니면 주식을 챙기는 방법으로 머리 쓴 거냐?” “둘 다죠. 흐흐” “강 사장이 소송하면 어쩌려고?” “고통만 더해질 뿐이죠. 법정 싸움을 질질 끌 겁니다. 몇 년이나 질질 끌면 제풀에 지치겠죠. 그리고 소송 중에는 급여도 못 받습니다.” “옥살이는 피했는데 월급 못 받는 노후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 인간 고통받는 거, 나도 즐겁게 지켜봐 주마.” “아 참, 삼촌.” “응, 왜?” “급여 팍 깎을 때 잊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 “회사가 정상화 될 때까지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부탁 말입니다.” “절대 잊지 않으마. 하하.” 우리 둘은 아주 작은 정의를 실현한 것 같아 한동안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참, 그리고 제가 이스라엘을 잠시 다녀올까 합니다.” “뭐? 이스라엘? 갑자기 거긴 왜?” 웃음 대신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뀐 오세현이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생뚱맞은 곳 아닌가? 이스라엘. “잠깐 가서 강의 하나 듣고 오려고요. 꽤 훌륭한 교수님이 계시거든요.” 오세현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마저 지었다. “강의? 네가? 바로 옆에 있는 네가 다니는 대학도 안 가는 놈이?” “아, 이 강의는 법학이 아닙니다. 제게는 좀 어려운 이공계 강의거든요.” “강의 듣고 뭔가 배우고 오는 건 아닐 테고….” “미래를 위한 씨앗은 미리미리 파종해야죠.” “언제쯤 싹이 돋을까?” “솔직히 파종 시기를 놓친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그래서 확답은 못 드리겠어요.” 이건 사실이다. 경제지 특집 기사의 기억을 노트에 기록했지만, 정확한 시기는 없었다. 단지 90년대 말이라는 시기만 적혀 있었다. 바다 건너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늦었다면 이스라엘 여행을 하는 셈이고 늦지 않았다면 제대로 된 파종을 하는 것이다. * * * “이, 이스라엘요?” “네. 왜 놀랍니까? 혹시 여권 없어요?” 김윤석 대리는 뒤통수를 긁으며 머뭇거렸다. “여권 빨리 만드시고 항공편이랑 호텔 예약하세요. 일주일 정도 지낼 겁니다.” “네. 실장님.”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으로 가게 될 김윤석은 우리 집 거실을 급히 뛰어나가다 다시 돌아왔다. “실장님. 항공권은 어떤 걸로…?” “김 대리, 이번에 퍼스트 클래스 구경 한번 하세요.” 이번에는 날 듯이 달려갔다. * * * 학생들은 개학해서 학교로 달려갈 때 난 이스라엘로 날아갔다. 한국에서 이스라엘 텔아비브까지 비행시간만 14시간이 넘는다. 중동은 위험하니 그 상공을 피해 둘러가니 서너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이다. “실장님. 저 애들은 일등석 손님은 이름을 다 외우네요.” 김 대리는 스튜어디스를 훔쳐보며 말했다. “이스라엘 왕복 시간이 대충 24시간입니다. 이 자릿값이 칠백만 원 넘죠? 하루 만에 칠백 주는 손님이라면 전 그 사람 족보까지 다 외울 용의도 있습니다.” “아….” “저 언니들이 주는 서비스 즐겨요. 다 우리 돈입니다. 먹고 싶은 거 막 주문하고 술도 한잔합시다. 긴 시간이니 한잔하고 눈도 좀 붙이고요.” 와인 몇 잔이 들어가고 김 대리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실장님. 진영준 부장 말입니다.” “영준이 형요?” “네. 순양건설 상무로 발령 났습니다. 전자 임원으로 가고 싶어 난리 쳤는데 진영기 부회장님이 무시하고 쫓아 보냈습니다.” “대아건설로 임원진이 싹 빠져나갔으니 빈자리는 많겠죠. 전무 정도 줘도 될 텐데 야박하네.” “들리는 말로는 건설이면 나쁜 자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꿀 보직도 아니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김 대리 생각은요? 순양전자 이사와 순양건설 상무, 어디가 더 힘 있는 자리 같습니까?” “그, 글쎄요. 아무래도 주력인 전자 이사 자리가 더 끗발 날리지 않을까요?” 김 대리는 자신 없는 목소리는 말했다. 잔소리를 한번 해야 할 때다. 경각심이 없으면 느슨해 지는 게 보통 사람의 습성 아닌가? “운전하고, 심부름하고, 회사 변동사항 알려주는 데 필요한 사람의 조건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그 정도는 수만 명의 순양 직원 중에 아무나 시켜도 가능합니다.” 김 대리는 손에든 와인잔을 슬며시 내려놓았고 등받이에 한껏 기댔던 상체도 슬며시 바로 세웠다. 질책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이 정도 눈치가 없다면 그건 심각한 수준이긴 하다. “말했죠? 신 팀장이나 김 대리, 나와 거래 관계라고요. 거래 관계를 뛰어넘어 신뢰의 관계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 “벌어진 상황만 보고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을 판단하세요.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 일로 인해 앞으로 어떤 것이 변하고 어떤 일이 생길까? 이런 김 대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아, 네.” “김 대리의 판단과 생각 옳을 때, 그리고 그런 것들이 쌓여 나가야 신뢰가 쌓이는 겁니다. 거래처는 언제든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뢰를 대신할 만한 건 없죠.” “꼭 기억하겠습니다.” 단단히 굳어버린 김 대리를 보자 피식 웃음이 났다. “아니, 그렇다고 채점하겠다는 건 아니니까 그런 표정은 그만두세요. 하하.” “아닙니다. 제가 심부름꾼 마인드를 버리지 못했어요. 충고, 아니 경고…. 감사합니다.” 지금 김 대리가 뱉은 말이 꼭 지켜지기를 빌었다. 결심하는 보통의 사람은 많지만,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자, 눈 좀 붙입시다. 아직 한참 남았어요.” 비행기는 밤하늘을 가르며 서쪽으로 날아갔다. * * *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에서 15km 떨어져 있는 로드 시에 자리 잡은 벤 구리온 국제공항, 14시간 만에 도착했다. 김 대리와 함께 수화물을 카트에 싣고 공항을 빠져나왔고, 김 대리는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공항 안내소에서 영어로 뭔가 묻기도 했다. 택시 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하는 데 의사소통도 문제 없어 보였다. 저 정도면 그동안 맹탕 놀지는 않았나 보다. 하야콘 거리의 쉐라톤 호텔에 도착하고 객실에 짐을 풀었다.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김 대리는 내 눈치를 살폈다. “네. 좋네요.” 빈말이 아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시원한 지중해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고생했습니다. 오늘은 좀 일찍 쉬도록 하죠. 다리가 뻐근하군요.” 이미 현지 시각으로 10시가 다 되어간다. 퍼스트 클래스의 괜찮은 기내식을 먹어서인지 배고프지도 않았다. “혹시 출출하면 룸서비스라도 시켜 먹어요. 눈치 보지 말고.” “네. 그럼 쉬십시오.” 혼자 남은 나는 과연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람과 기분 좋은 악수를 나눌수 있을까 생각하며 잠에 빠졌다. * * * 호텔 조식을 맛있게 먹는 김 대리는 좀 들떠 보였다. 처음 밟는 이국땅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이니 그럴 만도 했다. “김 대리. 내가 여기서 일을 끝마칠 때까지는 자유롭게 지내요. 가이드라도 하나 붙여서 관광해도 됩니다.” “아이고,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실장님 보필하겠습니다.” “아뇨. 딱히 보필할 일도 없어요. 여기 대학을 돌아보는 게 전부입니다. 제 옷차림 보세요. 그냥 학생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후드티에 청바지. 그리고 배낭 하나. 누가 봐도 학생이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내일 아침까지 자유행동 합시다. 하하.” 아침을 끝내고 나는 곧바로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으로 갔다. 이 학교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며 총리 4명, 노벨상 수상자 8명을 배출한 세계적인 명문 대학이다. 탁월한 연구 성과가 많기로 유명한 히브리 대학은 대학 소유의 기술 센터에 7,000개 이상의 특허가 등록되어 있고 특별히 아인슈타인이 히브리 대학 설립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린 곳도 바로 이 기술 센터였다. 안내 데스크의 직원에게 다가가 조금은 황당한 질문을 던져야 했다. “Excuse me." "Good Morning." 환하게 웃으며 응대하는 직원을 보자 다소 긴장이 풀렸다. “교수님 한 분을 찾고 있는데 성함을 모릅니다. MIT에서 연구하신 분인데….” 데스크의 여직원은 살짝 웃었다. “MIT에서 연구한 경력 있는 교수님은… 백 명이 넘어요.” 젠장, 세계적인 명문 대학이라는 걸 자랑할 빌미를 줬다. “음, 그분들 중에 인공지능과 인지과학 분야에서 훌륭한 성과를 내신 분인데, 찾을 수 있을까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직원이 모니터를 들여다볼 때 한 가지 사실이 더 기억났다. “제가 찾는 분은 30대 후반입니다.” 나를 흘낏 보더니 다시 모니터를 향했다. 그녀는 메모지에 뭔가를 휘갈겼다. “아마 이분이실 거예요. 지금은 강의시간이네요. 이건 강의실, 이건 교수님 연구실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안내 직원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메모지에는 대문자로 또박또박 적힌 이름이 보였다. 메모를 보자 어렴풋이 기억나는 듯했지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만약 이 사람이 아니라면 이스라엘의 공과대학을 대 뒤져야 할 판이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빌며 이름을 중얼거렸다. “암논 샤슈아(Amnon Shashua)” 그리고 알려준 강의실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조용히 뒷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지만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 없이 수업에 열중하는 학생들의 뒷머리만 보였고 교단의 교수 역시 분필을 들고 칠판에 뭔가를 빼곡히 적는 중이었다. 슬쩍 강의실 구석의 자리를 차지했다. 역시 이공계는 적응하기 어렵다. 칠판에 적힌 것 중 단 하나의 수식도 모르겠다. 그냥 조용히 암논 사슈아 교수의 모습만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 [092] 파종 시기 2 “Professor! Professor Shashua." 강의가 끝나자 앞문으로 나가는 교수를 급히 따라갔다. 이 젊은 교수가 과연 그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으니 좀 난감함도 없진 않았다. “무슨 일이죠? 혹시 뒤늦게 들어온 학생인가?” “늦게 들어간 건 맞는데 학생은 아닙니다.” 샤수아 교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위아래로 나를 살폈다. “이거, 실례했어요. 그럼 나를 찾은 용건이…?” “질문 하나만 먼저 하겠습니다. 혹시 요즘 상대표준 편차를 이용한 광학 분야 연구를 진행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는 걸 보니 이미 공개된 연구인가보다.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이 교수가 내가 찾는 그분이 맞는 것 같긴 한데…. 벌써 연구 결과를 상업화하는 일이 상당히 진척된 건 아닐까? 이미 끼어들 자리가 없다면 이스라엘까지 날아온 건 완전 헛발질이 되어 버린다. 미래를 조금 안다는 것이 만능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저 평가된 주식을 왕창 사버리면 주가가 갑자기 급등해버려 다른 투자 기관의 주목을 받는다. 단기 투자는 사실상 어렵다. 차라리 멀리 보고 수년을 기다리며 주식을 조금씩 사들이는 게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 방식은 좀 답답하다. 주식 보유가 일정량을 넘어 대주주가 되면 이 또한 주목받기에 십상이다. 제일 좋은 건 창업하기 전 친분을 쌓고 엔젤 투자자가 되는 거다. 물론 이것도 정보를 빠삭하게 줄줄 외우고 있어야 가능하지만. 아무튼, 아직 늦지 않았기를 간절히 빌며 말했다. “좀 긴 이야기가 될듯한데,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명함을 꺼내 건네니 의외의 눈빛을 보냈다. “Miracle Investment?"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저 표정과 눈빛은 아직 비즈니스로 접근한 사람이 없거나 준비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네. 명함에 홈페이지 URL도 있으니 확인해 보시고 미팅을 가져도 좋습니다만….” 샤슈아 교수는 명함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두 시간 뒤, 기술 센터의 내 연구실에서 보죠. 괜찮죠?” “감사합니다. 그럼 곧 다시 뵙겠습니다.” 내가 머리를 꾸벅 숙이자 그는 손을 슬쩍 들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두 시간 동안 학교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여유가 있으니 급히 오느라 놓쳤던 것도 보였다. 학교 정문 옆에 치워놓은 바리케이드와 검문소가 눈에 띄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중동 테러의 위협이 감지되면 검문검색이 상당하다고 한다. 방문객뿐만이 아니라 학생과 교수마저 샅샅이 수색할 정도라고 하니 화약고라는 말이 실감 났다. 히브리 대학교의 고고학과는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하더니 교내의 박물관도 수준 이상이었다. 하지만 이 학교 최고의 자랑거리는 뭐니뭐니해도 아인슈타인이다. 유대계 출신인 아인슈타인은 1955년에 사망하기 전 그가 설립을 주도했던 히브리 대학교에 자신의 지적 재산권을 유산으로 남겼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아인슈타인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형식적으로만 소유하고 있었을 뿐이지 실제로 상업화를 위한 노력은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베르리 힐이라는 지적 재산권 전문가를 에이전트로 고용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상업화가 진행됐다. 이 대학교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이름이나 이미지를 마케팅했고 이것을 사용하는 각종 이벤트나 광고에 대해서 사용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수입이 한해 150만 달러가 넘는다. 사람의 이미지도 돈으로 바꿔버리는 장사꾼이 신성한 상아탑에도 침투해 있으니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다. 학교를 한 바퀴 돌고 기술 센터로 향했다. 샤슈아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서니 서너 명의 사람들이 컴퓨터 모니터에 머리를 박고 뭔가를 하고 있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이쪽으로 오시죠.” 샤슈아 교수는 나를 데리고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였고, 책상과 의자마다 프린트한 논문과 온갖 카메라 렌즈가 쌓여있어 앉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보조 의자 하나를 들고 와 그의 책상 옆에 놓더니 손을 가리켰다. "앉으시죠.“ 불편하지만 어쩌겠는가? 미래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실 분인데. “헐리우드의 마법사께서 수학 공식이나 붙잡고 씨름하는 저를 왜 만나고 싶어 하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헐리우드의 마법사? 설마 미국 미라클의 별명인 건가? 아니면 이런 제목으로 나간 기사라도 읽은 걸까? “헐리우드는 우리 투자 대상의 일부일 뿐입니다. 새로운 기술, 포텐셜 강한 신생 기업에도 늘 관심을 기울입니다.” “혹시 코그니텐스(CogniTens)에 관심 있으신가요?” “네? 코크니텐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 교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더라도 놀라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데.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들키지 말아야 한다. 나는 급히 수습에 들어갔다. “죄송하지만 설명 좀 부탁합니다.” 그는 실망한 기색이 조금 비치며 말했다. “코크니텐스는 금속 부품이나 조립품의 정밀도를 측정할 수 있는 3차원 광측정 솔루션입니다. 이 솔루션의 이름이자 회사명이기도 하죠.”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상관없다. 창업한 아이템마다 히트친 천재 교수 아닌가? “회사는 언제 설립하셨습니까?” “1995년에 스타트 했죠.” “그 회사도 제 리스트에 추가하겠습니다.” “추가?” “네. 제가 교수님을 찾아뵌 이유는 카메라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최소한의 오차범위 내에서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기술에 관심 있어서입니다.” 샤슈아 교수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걸 어떻게…?” “인공지능과 컴퓨터 비전시스템에 대한 논문을 읽었습니다. 아, 제가 읽은 건 아니고요. 우리 회사 스텝이 발견했고 전 대략적인 컨셉만 이해하는 수준입니다.” 혹시나 해서 재빨리 선을 그었다. 깊이 있는 질문과 토론으로 이어지는 건 막아야 했다. 무식이 뽀록나면 안된다. “그 컨셉이 바다를 건널 만큼 대단하다고 생각합니까?” 교수의 눈이 반짝였다. “그 기술을 어디에 적용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겠죠. 교수님께서는 이미 생각하시고 계신 분야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미스터 진의 생각도 궁금하군요.” 교수의 눈을 보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이 기술로 딴생각을 한다면 방향을 바꿔줘야 하고, 이미 옳은 방향으로 생각한다면 나와 의기투합하는데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자동차의 눈입니다.” 샤슈아 교수의 눈이 자동차의 라이트처럼 커졌다. “교수님의 기술이 적용된 차를 생각해 봤습니다. 소형 카메라가 자동차 주변의 정보를 긁어모아 최소한의 오차범위 내에서 운전자에게 알려준다면? 외부와의 접촉 전에 경고음을 울릴 수 있죠. 차 뒤범퍼에 장착한 카메라가 실내 모니터로 고스란히 보여준다면? 후진하거나 주차할 때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습니다.” “전방 카메라가 앞차와의 거리를 정확히 계산한다면 충돌 사고가 획기적으로 줄어들고, 교통신호를 인식하면 자동 브레이킹도 가능하죠.” 교수는 어느새 자기 생각을 떠들기 시작했다. “차선 인식도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겁니다. 그럼 차선 이탈도 막죠.” “아날로그 데이터를 디지털로 변환하면 자동차 시스템에 녹여 낼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교수님께서 원하시는 최종목표는 바로….” “자동차가 스스로 움직이는, 자율주행!” 신나게 떠드는 교수를 보자 흐뭇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교수님. 자율주행의 진정한 목표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아니, 자율주행이 목표죠. 목표의 목표라니요?” “전 교통사고 제로가 바로 자율주행의 진정한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샤슈아 교수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말이다. 그리고 먹혔다. 그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을 때 나온 말은 감탄이었다. “그렇군요. 전 거기까지 생각 못 했습니다.”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교수님도 충분히 생각하셨을 겁니다.” 자율주행의 궁극적 목표가 교통사고 제로라고 말한 게 이 양반인지 구글 회장인지 잘 모르겠지만, 결과는 만족스럽다.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라 넓은 시야를 가진 젊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본론?” “네. 제가 바다를 건너온 목적 말입니다.” “설마 컨셉과 기초 이론이 전부인데 투자한다는 뜻입니까?” “투자 조건은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놀라시면 안 됩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샤슈아 교수가 말했다. “자, 잠시만요. 자율주행의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SF 영화에서나 등장한 겁니다. 물론 이론상 가능하기는 하나 언제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특히, 과연 인간이 컴퓨터 칩에게 핸들을 맡길지도 의문입니다. 생명과 직결된 일이니까요.” 스스로 믿지 못하고 확신도 없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대가 너무 빨리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뢰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도 알았다. 투자받아야 할 사람이 투자자의 시선처럼 부정적인 면을 먼저 말하지 않는가. “꿈같은 일을 현실로 만드는 것만큼 환상적인 게 있을까요? 우리 회사 이름을 보세요. 바로 미라클입니다.”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는 샤슈아 교수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 놀라게 했으면 여지를 남겨두는 게 낫다. “전 쉐라톤에 묵고 있습니다. 투자 조건 등을 신중히 생각하시고, 생각이 정리되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참, 코크니텐스도 포함입니다. 그럼….” 샤슈아 교수에게는 갑작스럽고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난 상황이다. 인사를 건네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아, 실례했습니다. 쉐라톤…. 연락드리겠습니다. 미스터 진.” 그가 내민 손을 잡았을 때 힘이 느껴졌다. 손을 꽉 잡는다는 건 놓지 않겠다는 의미 아닌가? 9부 능선은 이미 넘은 것 같다. 그가 어떤 제안을 하더라도 다 받아들일 용의가 있으니까 말이다. * * * 예루살렘 시내를 구경이나 할까 하다가 그냥 호텔로 직행했다. 귀한 사람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한가한 생각은 말아야 한다. 그가 나를 찾아올 때까지 호텔에 머물며 기다리는 게 올바른 행동이다. 호텔에 들어서자 로비라운지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김윤석 대리가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일은 다 보셨습니까?” “아니, 지금 여기서 뭐 하세요?” “실장님 기다렸죠.” 우직한 건지, 융통성이 없는 건지. 아니면 비행기에서 들은 한소리가 마음에 걸려 이러는 건가? “아, 저도 오전에는 시내 구경 했습니다. 그런데 어딜 가나 검문도 많고 총 든 군인이 어슬렁거려서 영 관광할 마음이 안 생겨서 그냥 들어 왔어요.” 피식 웃음이 났다. 가끔 군인이 보이기도 했지만, 시내 구경할 마음이 사라질 만큼은 아니다. 보스가 일하는데 놀러 다니는 게 찝찝할 뿐이다. “어차피 김 대리가 할 일은 없어요. 이번이 아니면 언제 이 나라 다시 올지 모릅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구경 다녀요. 그리고 오늘 일 잘 풀리면 내일 돌아갈 겁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넉넉하게 잡은 겁니다.” 김 대리의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이 재미있다. “전 방으로 올라가서 좀 쉴 겁니다. 그냥 나갔다 와요.” 여전히 망설이는 김 대리를 두고 프런트로 걸어갔다. 명함을 주며 찾는 사람이 나타나면 놓치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제 발 뻗고 마음 편히 쉬어야겠다. 늦어도 저녁에는 자율주행 핵심 기술을 보유한, 자산가치 10조가 넘는 회사의 대주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093] 힘든 싸움 1 “우선 빠른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아뇨. 이건 기회니까 제가 놓치면 안 되죠. 기회를 주셨으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샤슈아 교수는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서 나타났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하룻밤을 참고 넘기기 힘든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늦은 시간이라 밤을 즐기는 투숙객들은 대부분 바에서 한잔 걸치고 있다 보니 로비라운지는 한적하기만 했다. “제 제안에 대한 대답이 어떨지 궁금합니다.” 샤슈아 교수는 상의 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게 초기 창업 비용입니다. 그리고 투자에 따른 지분 구조 제안을 간략히 메모했습니다.” 재빨리 종이에 적힌 숫자를 보자 웃음이 터질 뻔했다. 95년에 창업했다는 코그니텐스의 규모가 어떤지 충분히 짐작할 숫자들이다. 우리나라 벤처 기업과 다른 점도 확연히 다가왔다. 우리나라 벤처는 최대한 많은 돈을 끌어내기 위해 애쓴 흔적이 곳곳에 보이지만, 이 한 장의 종이에는 어떻게 하면 돈을 아낄까 고심한 흔적이 묻어있었다. 그만큼 최소한의 비용을 제시했고, 내게는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적은 돈이었다. 종이를 접어 테이블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교수님.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교수님의 연구가 현실화될 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샤슈아 교수는 머리를 끄덕이며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그의 태도에는 조금의 가식도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 꼭 필요한 것을 갖췄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다. “기술센터 협력은 어떤 형태로 이뤄지죠? 여기 보면 대학 기술센터에 3.7%의 지분을 준다고 돼 있는데…?” “아, 통상 학교가 제공한 장비와 실험실에 대한 비용 측면이 강하죠. 기타 도서관 서적 같은 잡다한 것도 포함이고요.” 샤슈아 교수는 내가 지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학교에 대한 설명을 보탰다. “우리 대학에서는 창업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기도 불확실한 연구지만 이미 20만 달러 이상의 기자재를 지원할 정도니까요. 3.7%는 결코 많은 것이 아닙니다.” “아, 오해 마십시오. 학교를 탓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학교의 지원 규모를 알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 때까지 필요한 1차 펀딩은 70만 달러, 상용화가 가능할 때까지 필요한 2차 금액은 150만 달러. 맞습니까?” “네.” 혹시나 내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조금은 긴장한 샤슈아 교수는 내 입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미라클의 지분은 35%.” “부족합니까?” “아닙니다. 합리적이시네요. 진심입니다.” 샤슈아 교수는 긴장을 풀고 환한 미소를 보였다. 딜이 성사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첫 제안은 거절하는 게 맞다. 그 제안이 합리적이든, 아니든 말이다. “교수님.” “네.” “이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비합리적일 수도 있지만, 끝까지 들어주시겠습니까?” “아, 네.” 미소가 사라진 교수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대학 기술센터에 40만 달러를 주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학교 측이 제공한 기자재도 학교 소유로 그냥 놔두겠습니다. 이로써 학교 측에 빚진 건 없으니 3.7% 지분은 줄 필요가 없겠죠? 더 줘야 합니까?” 머리만 저을 뿐 입은 열지 못한다. 두 번째 제안은 파격적일수록 효과가 크다. 지금 샤슈야 교수가 충격받은 것처럼. “그리고 1차 펀딩은 700만 달러로 올리겠습니다. 필요한 장비, 가장 어드밴스 된 것으로 부족함 없이 다 마련하시고 인력 역시 필요한 만큼 전부 끌어모아 쓰십시오. 미국 MIT 박사급이라도 괜찮습니다.” “미, 미스터 진!” 첫 번째 충격이 사라지기 전 두 번째 충격을 받으면 이렇게 말을 더듬는다. “상용화를 위한 2차 펀딩은 그때 가서 결정하죠. 오해는 마십시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150만 달러를 안 쓰겠다는 게 아니라 1,500만 달러로 할지, 더 필요할지 몰라서 결정을 미루는 것뿐입니다.” 어쩌면 날 미친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투자 건이 헛짓으로 끝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필요한 금액의 열 배.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원하는 금액의 열 배, 아니 백배라도 던질 기세를 읽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딱 한 가지다. 이미 시장에서 그 성공 가능성을 인정받았거나, 이미 성공한 사업을 더 크게 키우는 타이밍이거나. 하지만 샤슈아 교수는 소설로 치자면 Chapter 1의 첫 줄을 적었을 뿐이다. 앞으로 이 소설을 완결할지, 잘 팔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난 미친놈이 아니다. 샤슈아 교수가 이 아이템으로 창업하면 곧바로 밝은 혜안을 가진 러시아 투자자가 곧바로 천만 달러를 쏘며 막대한 지분을 확보한다. 내가 미리 손을 써 놓으면 숟가락 들고 와서 밥상에 끼어들 여지도 없을 것이다. “미스터 진, 솔직히 믿기 힘든 제안입니다. 제가 예산을 좀 타이트하게 잡은 건 사실이지만 무려 10배의 금액을….” “아직 제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당황한 샤슈아 교수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그의 입을 막았다. “대신 미라클의 지분은 60%로 설정하고 싶습니다.” 60%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교수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아직 내 제안은 끝나지 않았다. “단지 보유만 할 뿐입니다. 모든 의결권은 교수님께 드릴 것이며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 흔한 감사도 파견하지 않을 테니 투자금을 어떻게 쓰던 별도의 보고서도 필요 없어요. 오직 비즈니스 성공만 생각하십시오.” 내 이야기를 끝내며 깍지를 꼈다. 이제 샤슈아 교수의 마지막 대답을 들을 차례다. 하지만 입을 열지 못한다. 눈만 깜빡거리며 내 얼굴만 보고 있었다. “교수님?” “아,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들어본 투자 조건 중 가장 황당한 소리라서…. 이건 거의 도박 아닙니까?” 투자자를 믿지 못하는 저 눈빛, 많이 황당한가 보다. “첫 카드가 에이스라면 올인 정도는 무리 없을 만큼 칩이 많으니까요.” 신중한 건지, 의심이 많은 것인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참, 코그니텐스도 투자할 생각입니다만, 100만 달러 정도면 되겠습니까? 지분은 현재의 자본금 비율에 맞추겠습니다.” 구구절절 더 말하는 것은 그만두고 화제를 옮겼다. “100만 달러면 코그니텐스의 지분 80%입니다. 그건 좀 곤란하군요.” “그럼 50 아니, 49%로 하죠. 기타 조건은 이미 말씀드린 조건과 똑같이 하고요.” 난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 “또 생각해보셔야 하겠군요. 제 조건을 받아들이시면 내일 중으로 투자 계약서 만들어서 드리겠습니다. 검토하고 날인 하시면 곧바로 지정 계좌에 투자금 전액 입금하고요.” 이야기가 끝났다는 걸 눈치챈 샤슈아 교수도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파격적인 제안은 잘 들었습니다. 이처럼 좋은 조건을 듣고 고민하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는데 현실이 돼버렸군요.” “복권에 당첨되면 믿기지 않는 법이죠. 당첨금이 높을수록 말입니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교수님의 연구는 제게 복권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하.” * * * 벌어놓은 돈이 많아서인지 오세현은 시시콜콜 캐묻지 않았다. 단지 “천만 달러 미만이면 선방했네.”라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투자 조건의 큰 줄기만 말해주고 통화를 끝냈다. 미라클에서 계약서를 만들어 메일로 보내면 여기서의 일은 끝이다. 이번 일은 정말 장기적인 투자가 될 것이다. 다만 샤슈아 교수의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을 이용하여 한국에서 아진자동차의 점유율을 높이고 해외에서 첨단 시스템이 부족한, 뒤떨어진 자동차가 안 되는데 기여하기를 바랄 뿐이다. 복권 당첨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다음날, 샤슈아 교수는 오전 중에 호텔로 달려왔다. “이런 기적 같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신께서 말씀하시더군요.” 그는 유대인답게 신의 계시를 언급했다. 나는 살짝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정말 신께서 말씀하셨습니까? 아니면 냉철한 이성의 계산 결과입니까?” “사실, 과학자답게 정확한 계산이 먼저죠. 하하.” 환하게 웃는 그에게 투자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 초안입니다.” 계약서를 꼼꼼하게 읽은 샤슈아 교수는 밝은 얼굴이었다. “군더더기 없어 좋군요. 하지만 변호사와 다시 한 번 체크하고 싶습니다만.” “당연히 그러셔야죠. 그리고 사명(社名)은 공란으로 해 놨습니다. 직접 써넣으시라고요.” “아, 그렇지 않아도 회사 이름을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모빌아이(Mobileye)라고 네이밍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까지는 바뀐 건 없다. 이름이 같다. “아주 좋군요. 추구하는 바가 뭔지 정확히 알겠습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한껏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100억 달러가 넘는 든든한 보험을 들었다. 만기가 되어 큰돈을 만질지, 그 전에 보험을 깨고 다른 용도로 쓸지는 두고 볼 일이다. * * * 한국으로 돌아오니 나를 기다리던 사람은 오세현이 아니었다. 그는 대아건설을 HW 그룹과 섞는 작업 하느라 내가 이스라엘까지 가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전혀 관심 없었다. 공항에서 곧바로 달려간 곳은 다름 아닌 할아버지 서재였다. “이놈아. 그 위험한 곳을 왜 갔어?” 할아버지의 눈에는 걱정과 노기가 한가득이었다. “요즘은 괜찮습니다. 거기가 늘 전쟁만 하는 곳은 아니에요.” 할아버지는 무사한 나를 보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화하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일하는데 괜한 방해만 될까 봐 말이다.” “전화하셔도 됐을 텐데요. 그냥 바람 좀 쐬고 왔을 뿐입니다.” “네놈이 바람이나 쐬러 지구 반대편까지? 뭔지 묻지 않을 테니 그런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은 관둬라.” 피식 웃는 할아버지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내가 급하게 널 보려고 한 건 그것 때문은 아니다.” 때마침 서재 문을 열고 고모와 고모부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 도준이도 와 있었네?” 고모는 환히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모두 앉아. 내가 알려줄 게 하나 있으니까.” 할아버지가 우리 모두를 호출했다는 건 곧 있을 지방선거 때문이 분명하다. “최 서방.” “네. 장인어른.” “자네 서울시장 공천은 문제없지?” “그렇습니다. 우리가 야당으로 전락했고 과거 정부의 인기는 폭락했으니 도전장을 던지는 사람이 없더군요. 순조롭습니다.” 서울시장으로 가는 첫 단추를 끼웠으니 두 사람의 표정이 좋은 것은 당연했다. “찬물을 끼얹는 것 같지만 알아둬야 할 게 있어. 여당은 서울시장 후보로 고경열이를 낙점한 것 같다.” 이 방에서 멀쩡한 얼굴은 나 혼자였다. 제2회 전국동시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당선한 여당 후보 고경열. 아, 물론 전생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는 소속정당이 없는 관료 출신이다. 그것도 신망이 두터운 행정가다. 좌우 정치색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영입했으니 야당으로서는 엄청난 강적을 만난 셈이다. 고모부의 안색은 이미 흙빛으로 변했고 고모는 입술을 깨물었다. “흐흐, 도준아, 넌 헛돈 날린 것 같은데?” “그보다 할아버지. 아직 뉴스에 나오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고경열이가 아침에 문안 인사차 전화 왔더라. 그리고 여당에서 자신을 영입하려는데 어떻게 할까 물어보더라고.” “네? 그 사람이 왜 할아버지께 허락을 구해요?” “내 돈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간 놈이 내 사위와 한판 붙는데 당연히 허락받아야지. 내가 끼어들지 않겠다는 대답도 듣고 싶었을 테고. 허허.” 저 웃음. 지금 할아버지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 [094] 힘든 싸움 2 “자, 장인어른.” 고모부의 낯빛이 시커멓게 변했다. 고경열이라면 때 묻은 여의도 인간이 아니다. 공무원 외길 인생을 걸어온 인물은 국회의원에 비해 깨끗하고 신선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여당 프리미엄까지 안고 있다.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고모부의 승리를 점치는 게 쉽지 않다. “뭘 그리 놀라? 누가 나오든지 이길 자신이 없어?” “그게 아니고, 예상 못 한 인물이라….” 고모부가 차마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자 고모가 발끈 소리 질렀다. “아버지. 그냥 한마디만 해 줬으면 되잖아요. 우리 사위가 출마하는데 꼭 맞서야겠냐? 이 한마디면 고경열 그 사람이 나서지 않을 거 아니에요?” “그놈 막으면 다 끝나? 그놈 뒤에 더 무서운 놈이 등장하면? 그놈도 내가 막아주고? 이런, 한심하긴…. 꽃길만 걸을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때려치우는 게 나아.” 할아버지의 메시지는 고모나 고모부를 향한 게 아니다. 손발이 되어줄 공직자를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내게 말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나를 시험하는 방법중 하나일까? 이십 대 애송이가 치러야 시험 치고는 너무 무겁지 않은가? “최 서방.” “네. 장인어른.” “가서 당직자들과 협의해봐. 지방선거 중에 가장 큰 자리가 서울시장인데 두손놓고 있지는 않을 거 아닌가? 빨리 대책을 세우라고!” 두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나가고 다시 둘만 남자 할아버지는 혀를 찼다. “쯧쯧, 오냐오냐 자란 놈들은 조금만 버거우면 우는소리부터 한다니까. 나나 최씨 집안이나 애를 잘못 키웠어.” “버거우면 누구나 울고 싶죠. 그걸 입 밖으로 내느냐 안 내느냐의 차이만 있는 거 아니겠어요?” “버거울 때 주먹 쥐고 투지가 타올라야 제대로 된 놈이지. 울긴 왜 울어?” 할아버지는 내가 고모부의 편을 들어준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어떠냐? 넌 고경열이가 어떤 인물인지 아는 건 있어?” 당연히 잘 안다. 그가 서울시장 재임 시절 어떤 성과를 냈는지, 그리고 어떤 실수를 했는지 항상 뉴스에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모른척해야 한다. “이름도 처음 듣습니다.” “외교부 출신이다. 미국 대사까지 지냈고 정부 요직을 두루두루 거쳤지. 나이는 좀 있지만, 그건 안정감으로 포장할 테고 큰 먼지는 나오지 않을 게야.” “고모부는 먼지가 많습니까?” “순양그룹 사위가 먼지 묻을 일이 뭐가 있겠어? 장인이 순양 그룹 회장이고 마누라가 백화점 사장인데 돈 들고 뇌물 주겠다는 놈이 있다면 그놈이 미친놈이지.” “그럼 상대할 만하겠는데요?” “재벌 사위라는 게 문제지. IMF가 재벌 때문이라고 연일 언론에서 떠들어대는데,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곱게 보지 않을 게 아니냐?” 젊을 때 정치에 무심했던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고경열이 시장이 됐을 때 누가 상대였는지, 어떤 선거였는지 단 하나도 기억에 없다. “할아버지는 고모부를 도울 생각이 없으신가 봐요?” “나? 내가 왜? 난 아쉬울 게 없어. 고경열이가 시장이 된다 해도 내 부탁을 거절할 놈도 아니고, 최 서방이 되더라도 마찬가지고. 양손에 꽃패 든 셈이지. 허허.” 웃으며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에는 즐거워하는 마음이 확 드러났다. “넌 낭패로구나. 미디어 시티? 그거 만들어서 대아건설 회생 동력을 쓸 생각이었지?” “겸사 겸사죠.” “네 고모부가 지면 그 사업, 힘들어지겠어.” “그러니까 꼭 이겨야죠. 그런 대형 사업이 없으면 대아건설은 정말 골칫거리가 되거든요. 돈 먹는 아귀가 될 겁니다.” “거 참, 난처하구나. 그쪽에 우리 순양 사람을 잔뜩 보냈는데, 그놈들 밥 굶게 생겼어.” 이 정도면 장난이 분명하다. 대아건설이든, 아진그룹이든 전부 순양이라는 간판만 없을 뿐 한 가족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나 몰라라 할 리가 없다. 지금 내 반응을 확인하고 싶은 게다. 도와 달라고 매달리면 나 역시 고모나 고모부와 다를 바 없다. 할아버지 말씀처럼 주먹 불끈 쥐고 싸우는 투지를 보여줘야 한다. “고경열 씨도 사람인데 찌르면 비명소리 나오는 약점이 한두 개는 있겠죠. 그곳만 찾아내면 승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모부가 재벌 사위라는 게 약점이지만 반대로 장점이 될 수도 있고요.” “어떻게?” “재벌 사위라는 게 장점이죠. 돈 넘치는 사람이니 적어도 세금 빼먹는 비리는 저지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할아버지를 좀 팔며 다녀도 되고요.” “날 팔아?” “네. 순양그룹 회장님께서 서울시를 위해 많은 사업을 벌일 거라고 약속하면 되죠. 아파트도 짓고요.” “내가 왜 서울에서 사업을 벌여?” “말만 그렇게 하는 거죠. 정치인 공약이라는 게 공수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며 찍어주지 않습니까?” 할아버지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럴싸하긴 해도 필승전략은 아니라는 걸 알겠지?” “이런 걸 차곡차곡 쌓아가며 싸우는 게 선거 아니겠어요?” 웃음이 번지는 걸 보니 안심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징징대지는 않으니까. “할아버지. 딱 하나만 알려주십시오.”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말했다. “뭘?” “고경열 씨와 담판을 지으려면 누구를 징검다리로 할지 말입니다.” “징검다리? 측근 말이냐?” “네. 그자와 한 번쯤은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할아버지는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냐?” “글쎄요. 만약 고모부보다 뜻이 통한다면 말을 갈아타도 되는 거 아닐까요?” “넌 이미 고모부에게 큰돈을 투자하지 않았더냐? 말을 갈아탄다는 건 그 돈을 포기해야 하는데?” “400억의 수십, 수백 배를 벌 수 있는 사업이 걸려 있습니다. 400억을 버리는 게 아니고 사천억을 버는 겁니다.” “앞만 보고 뒤에 떨어지는 걸 줍지 않는다는 건 좋은 생각인데…. 가능성이 있을까?” 고경열이가 그 정도로 심지 굳은, 흔들리지 않는 인물인가? “네 고모부가 미디어 시티를 공약에 넣고 떠들고 다닐 거야. 그런데 당선된 고경열이가 패자의 공약을 실행에 옮긴다고?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물론 옳은 말이다. 그러니 말을 갈아탄다는 건 둘러대는 말일 뿐이다. 고경열이는 꼭 떨어져야 한다. “그러니까 만나 보고 싶은 거죠. 뜻이 통한다면 선거기간 동안 디지털 미디어시티를 씹거나 헐뜯지 않을 거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내 생각이 마뜩잖은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괜한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무튼 좋다. 내가 한번 줄을 놔 보마. 그런데 말이다. 난 네가 아무래도 악수(惡手)를 놓을 듯하구나.” “조심하겠습니다. 분위가 봐서 힘들 것 같으면 그냥 인사만 드리고 끝낼게요.” 보통인사가 아닌 큰 인사를 드리고 끝장을 보면 된다. * * * “경보시스템?” “네. 정보만 전달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죠. 그 정보를 판단하고 위험할 때는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자동차가?” “네.” “그러니까 이 모빌아이라는 이스라엘 회사가 그런 장치를 만든다는 거야?” “지금은 시작 단계지만 언젠가는요.” “거기다 백억이 넘는 돈을 줬다고? 아이고야….” 긴 한숨을 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믿기 힘든가 보다. 자동차기 신호를 보내다니? “삼촌. 그냥 제 판단과 감을 믿으세요. 이건 됩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어요.” “뭔데?” “여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고경열 씨가 나선답니다. 우리 고모부와 싸우면….” “백 퍼센트 진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냐? 아직 발표는 없는 걸로 아는데?” “할아버지 정보망이죠. 확실합니다.” “순양그룹 정보망은 한국의 CIA라고 하더니. 역시!” “감탄할 때가 아닙니다. 여차하면 DMC가 날아갈지도 몰라요.” “그 양반은 엘리트 코스를 밟았어. 사무관으로 시작해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올라왔지. 관운이 좋아. 운 좋은 놈을 어떻게 이겨?” “자식들 군 문제는 없습니까?” “글쎄? 한번 알아볼까? 관직을 오래 했으니 아는 기자들 좀 돌려보면 나올 것 같긴 해. 좀 기다려 봐.” 오세현은 곧바로 전화 통화를 시작했다. 거의 한 시간 이상 이리저리 알아보고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나. 대한민국 휴전선은 서민들이 지킨다니까.” “면제?” “본인도 면제, 형님도 면제, 아들 하나는 방위. 둘은 면제. 신의 자식들이구만.” 내가 손뼉을 짝 치며 좋아하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고종사촌들은? 남자만 셋 아냐? 그놈들도 다 면제 아냐?” “큰 형이 스물여덟인가? 둘째 형은 스물여섯. 막내는 나보다 두 살 많고. 아직 군대 갈 나이 아니죠. 다 유학 중이니까요.” “됐네. 군대로 밀고 가면 되겠네.” 군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만능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선거 운동 기간 전부터 사실상의 선거전이 시작되었다. 여당은 서울시장의 후보가 고경열이라는 것을 재빨리 흘렸고 야당도 고모부가 유력한 후보임을 알렸다. 고경열의 유일한 약점은 군 면제였고 고모부의 약점은 재벌 사위라는 것이었다. 양측이 서로를 헐뜯으며 개싸움을 벌일 때 할아버지가 내게 한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고경열의 오른팔이며 시장선거를 도맡아 지휘할 최고의 실세. 그리고 고경열이 시장에 되면 정무 부시장 자리를 차지할 사람이라고 했다. 서울시 정무부시장은 육천여만 원의 연봉 이외에 연간 1억여 원의 판공비를 쓴다. 서울시청 앞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고 상당히 넓은, 초록색 카펫이 깔린 2층 집무실을 갖는다. 또한 4명의 비서진을 거느리며, 기사가 딸린 그랜저 승용차도 제공 받는다. 확실한 오른팔만 이 자리의 주인이다. 공식 선거일을 며칠 앞둔 5월 12일. 걸그룹의 시조새, 이효리의 핑클이 MBC 음악캠프에서 R&B 발라드곡 BLUE RAIN으로 데뷔하는 걸 확인하고 광화문의 일식집으로 갔다. 먼저 자리를 잡고 고경열의 오른팔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약속 시각보다 30분 정도 늦게 나타난 오른팔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40대 후반 아니면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피곤에 쩔었는지 얼굴이 흙빛이었다. 어린놈이 자리 잡고 있는 걸 보자 흙빛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도준입니다.” 그는 온통 영어로 떡칠한 내 명함을 받자 이리저리 살폈다. “혹시 유학파? 아니면 재미교포?” “어쩌다 보니 외국계 투자사에서 일하지만 둘 다 아닙니다.” “거절하기 힘든 분의 말씀이라 나오긴 했네만, 아진그룹을 인수한 회사 사람일 줄 몰랐는데….”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능한 한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아, 이거 실례했소. 김관혁이오.” 그가 내민 명함도 직함으로 떡칠한 것이었다. “워낙 바쁘신 분이라 끼니 챙겨 드시기도 힘들 것 같아 간단히 요기라도 할 수 있도록 미리 주문해뒀습니다. 실례가 아니었으면 합니다.” 어린놈이 나이답지 않은 정중한 말투다 보니 그의 구겨진 표정도 조금은 펴진 것 같다. “실례는 무슨, 지금은 라면도 감지덕지해서…. 일단 배 좀 채웁시다.” 김관혁은 젓가락을 들고 생선회를 입으로 쑤셔 넣었다. 술잔을 채워주자 손을 저었다. “아직 일정이 빡빡해. 술은 사양.” 아무 말 없이 배를 채우고 나서야 젓가락을 놓고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입맛에 맞으신지…?” “배만 부르면 됐지 뭐. 아무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전부 거절합니다. 특히 우리 후보님을 한번 뵙게 해 달라는 건 절대 불가하니 그리 알아요. 자…. 이래도 할 이야기가 남았어요?” 그놈 참. 성질 급한 놈이네. 아니, 내가 어려서 무시하는 건가? 내가 윗사람 모시는 데는 이골이 났다. 당신 귀를 솔깃하게 해줄 테니 기대하라고. “제가 뵙고 싶었던 분은 후보님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손가락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가리키니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 [095] 힘든 싸움 3 “나를?” “그렇습니다. 고경열 후보님은 만날 생각도 없었고 앞으로도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김관혁의 입꼬리를 살짝 올라갔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민원은 나를 통해서만 넣어도 충분하다? 외국계 투자사치고 한국 정치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아는구먼. 청탁은 당사자를 만나지 않는 게 핵심이지.” 원하는 것을 권력을 쥔 자에게 손쉽게 전달하는 사람. 이래서 실세라는 게 생긴다. 실세는 누군가의 청탁을 받아 해결해준다. 물론 청탁을 해결하는 힘은 권력을 쥔 자만이 가졌지만, 그 권력을 쥔 자는 실세의 말에 따른다. 권좌에 오른 자와 그가 믿는 오른팔. 과연 누가 권력자인지 경계가 흐릿하다. “오해십니다. 전 고경열 후보님께 민원 넣을 일이 없어요.” “사업하는 분이 민원 넣을 일도 없는데 나를 만날 필요가 있을까? 아, 내가 너무 단칼에 잘라서 말조심하는 거요?” “아닙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김 본부장님을 뵙는 게 목적입니다.” 김관혁은 술 한잔 하고 싶은 것을 참고 대신 물잔을 집어 들었다. “그 목적이 뭔지 한번 들어봅시다. 비싼 밥값으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제가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여쭙습니다. 혹시 이인자가 일인자의 뒤를 계승한 사례가 있습니까?” 또 한 번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인자가 바로 자신임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인자는 늘 이인자로 생을 마감하더군요. 물론 전두환의 친구 노태우 씨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전두환이 만들어준 건 아니죠. 직선제로 바꿔 진흙탕 싸움에 밀어 넣었고, 양 김 분열 때문에 당선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투가 조금씩 거칠어진다. 어차피 쌍소리들을 각오는 했다. “권력자의 오른팔은 조금씩 밑으로 내려가다가 결국 꼬리가 되더군요. 마지막은 권력자의 몸통에서 잘려나가는 운명이고요.” “계속해봐.” 감관혁의 인상이 더욱 험악하다. “이인자니, 오른팔이니 하는 말이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대중이 그런 인물을 높여 부르기 위해 만든 게 아닙니다. 바로 일인자나 몸통이 부하직원을 수족처럼, 그리고 충성을 끌어내기 위해 만든 겁니다. 한껏 치켜세워주고 실컷 부려먹다 버려도 원망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레토릭에 불과합니다.” 감정 이입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가 믿는 사람은 너뿐이다, 함께 가자, 같이 가자……. 이 얼마나 달콤한가? 이런 달달함에 취해서 스스로 머슴살이를 자청하고,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대신 뒤집어쓰는 것도 충성의 일부이며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지금 내 앞에 앉아 딱딱하게 굳은 김관혁도 그런 착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분명하다. 그걸 일깨워주기만 하면 된다. 깨닫게 하는 건 말로 하는 게 아니지만, 처음에는 말로 시동을 걸어야 한다. “사실은 본부장님께서 고경열 후보의 인생을 양손에 쥐고 계신 셈이죠. 앞으로 시작될 그분의 정치인생은 김 본부장님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것 아닙니까?” “젊은 친구가 음흉하구만. 이 자리를 주선한 분이 소개해줄 만큼 말이야.” 어느새 말을 놓기 시작했다. 고경열을 대신한 자리가 아니니 그를 위해 격식을 차릴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다. “빙빙 에둘러 말하는 건 그만하고, 내가 목적이라면 결론만 말하지?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 “김관혁 본부장님의 남은 인생을 제가 사고 싶습니다.” “뭐라고?” “서울시장을 거쳐 청와대로 들어갈 가능성이 조금 있는 분의 오른팔. 물론 서울시장 자리에 오르는 것도 불확실하고 청와대까지 가는 길은 더욱 험난하겠죠. 게다가 본부장님께서 그 자리를 물려받는 건… 제가 보기엔 가능성 제로에 수렴하고… 가능성 희박한 권력을 노리기보다는 아주 비싼 값에 본부장님의 미래를 제게 파시는 게 어떠냐는 말씀입니다.” “이…. 이 자가…!” 황당해서인지 아니면 모욕당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아, 본부장님의 자녀까지 책임지겠습니다. 자녀분이 하고 싶은 건 전부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만약 놀고먹는 인생을 원한다면 그것마저 책임질 생각입니다.” 자식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게 우리 부모님들 아닌가? 김관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성공이다. “오해는 마십시오. 뭐 대단한 걸 바라지 않습니다. 딱 한 마디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 한마디 때문에 난 고경열 후보님과 결별하게 될 테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고 후보님께서 진정으로 본부장님을 오른팔로 생각하신다면 말 한마디의 실수 때문에 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어쩌면 진정한 오른팔인지, 단순한 머슴인지 시험해 볼 기회이기도 합니다.” 의심과 불신의 씨앗이 그의 마음 한구석에 숨어 있었다면 꽃을 피울 것이고 없었다면 이제부터라도 씨앗이 발아할 것이다. “고경열 후보가 시장 선거에서 낙선할만한 말 한마디만 마치 실수인 양 흘리십시오. 그 대가로 200억을 드리겠습니다. 돈은 깨끗하게 세탁해서 원하시는 곳에 넣겠습니다. 스위스도 좋고 버진 아일랜드도 괜찮습니다.” 김관혁이 입을 열기 전에 제안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추가로 우리 미라클의 임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외국에서 살고 싶으시면 나라 이름만 말씀하세요. 거기에 지사를 만들어 모시겠습니다. 물론 임원의 혜택은 고스란히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거래든 항상 가격이 문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금액을 던져야 흔들린다. 권력가와 줄 대는 가장 쉬운 방법이 그 집안의 경조사 때 1억 원의 부조금을 주면 된다고 들었다. 진영준이 했던 말이다. 부담되면 돌려주기 위해, 아니면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꼭 만나게 된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모시던 고경열을 배신하는 금액 200억. 그 돈이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특별당비 수십억만 내면 비례대표로 국회의원 배지까지 노려볼 수 있는 금액이다. 누군가의 오른팔에서 누군가를 오른팔로 만들 수 있는 기회까지 노려볼만하다. 김관혁의 흔들리는 눈을 놓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대답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고민할 시간 정도는 줘야 한다. “이 자리의 주선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분을 믿으십시오. 제가 헛소리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말씀을 하셔도 밖으로 새 나가지 않을 겁니다.” 나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내일 이 시간까지 연락 없으시면 전 다른 분을 알아볼 겁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고경열 후보의 취약한 부분을 떠들어 댈 겁니다. 장롱 안에 깊숙이 숨겨둔 금붙이를 꺼내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하는 시대에 200억이면 영혼까지 팔겠다고 나설 사람은 많습니다.” 충격 때문인지 고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김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에게 머리를 숙이고 일식집을 빠져나왔다. * * * “그런데 김관혁을 소개한 사람은 누구죠? 그 사람은 할아버지소개로 나온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어요.” “김관혁…?” 할아버지 역시 모른다. “그 친구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냥 내가 아는 사람에게 고경열이 최측근을 좀 보내라고 했어. 내 이름은 밝히지 말라고 했다. 그래야 그놈이 오해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순양그룹 회장님의 특사로 오해하는 걸 피하기 위한 방법이다. 덕분에 내가 진가라는 것과 순양을 연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어? 말을 갈아탈 수 있다고 언질 줬냐? 선거 후원이라도 해주겠다고 미끼를 던졌어?” “아뇨. 모시는 고경열이를 배신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내가 뒤를 봐주겠으니 인생 경로를 확 바꾸라고 제안한 셈입니다.” 할아버지께 어제 김관혁과 나눈 대화를 소상히 말씀드렸다. 어떻게 평가하실까? 이야기가 다 끝나자 한동안 나를 찬찬히 살펴보다 장탄식을 내뱉었다. “후- 내가 널 아직 손자로만 생각했구나. 내 생각을 뛰어넘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네가 그 김 머시기를 통해 고경열을 독대할 줄 알았는데…. 그놈에게 판돈을 밀어주다니…….” “머슴이 배신하면 무섭거든요. 측근이 등 돌리면 확실하게 무너집니다.” “고경열이를 마음대로 주무르면 되는 일인데 왜 아랫사람을 들쑤신 거지?” 이제는 내 선택의 잘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라 내 판단을 궁금해하시는 것 같다. “고경열 씨는 할아버지 세대와 어울리는 사람이죠. 만약 제 제안을 받아들이고 나와 손잡는다고 해도, 내가 선거자금을 건넨다 해도 그 사람은 제게 고마워하지 않을 겁니다. DMC 사업을 추진해도 내게 은혜를 베푼다고 생각하겠죠. 주고받는 위치가 다릅니다.” 돈 얻어다 쓰는 놈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관계는 거절이다. “하지만 고모부나 김관혁이 같은 사람은 뭘 하든지 제가 베푼 은혜에 보답한다는 생각으로 일할 겁니다. 할아버지 전화 한 통에 움직이는 사람들…. 그분들은 할아버지 앞에서 허리를 숙이지 않습니까?” “이놈. 사람을 사면서 늙은 세대는 차별하려 드는 게냐? 허허.” 웃음을 터트리는 할아버지는 대단히 만족한 듯 보인다.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오늘 김관혁 씨가 제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아니면 그냥 오른팔로 만족하고 무시할까요?” “글쎄다. 네가 던진 200억이라는 미끼가 너무 먹음직스러워서 마지막까지 고민할 게다. 어쩌면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다른 행동을 할 수도 있고.” “다른 행동이라니요?” 할아버지는 잔잔한 미소로 내 대답을 피했다. 무슨 의미일까? * * * 오늘 하루, 집중하기 어려웠다. 선거대책 본부에서 회의를 주재하는 위치임에도 건성건성 뛰어넘었다. “그만하지. 오늘 컨디션이 영 엉망이야. 언론 동향 꾸준히 살피고 여론조사 한번 돌려봐. 재벌 사위와 군 면제, 어떤 게 더 부정적인지.” 김관혁 선거본부장은 이 상태로는 아무 일도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 줄 사람은 역시 그분 뿐이다. “참, 지금 후보님 어디 계시지?” “원내대표와 미팅을 끝내고 지금 이쪽으로 오시는 중입니다.” “도착하시면 곧바로 알려줘. 보고드릴 일이 있으니까.” 김관혁은 혼자 남은 회의실에서 의자에 상체를 묻고 눈을 감았다. 이 모든 게 어제 자신을 흔들어 놓은 젊은 애송이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애송이의 제안 때문이다. 한마디로 줄이면 200억으로 인생을 리스타트 하라는 뜻이며 정치적으로 회생 불가능하더라도 투자사의 임원 자리를 보장해준다는 유혹이다. 이 유혹은 절대 헛소리가 아니다. 전직 장관님은 헛소리할 놈을 소개할 분이 아니니까 말이다. “본부장님. 후보님 도착하셨습니다.” 김관혁은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회의실을 나섰다. 그리고 고 후보의 집무실 문을 가볍게 두드리고 들어갔다. “가신 일은 잘됐습니까?” “젠장, 아쉬울 때 날 불러 놓고, 이제 와서 길들이려 장난질 친다고.” 고경열은 재킷을 신경질적으로 소파에 휙 집어 던졌다. “원내대표가 왜…?” “서울 지역구 의원들이 해당 지역에서 점조직을 움직이려면 돈이 필요하니 선거자금 일부를 그놈들에게 주겠다고 ‘통보’하더라. 빌어먹을.” 표정과 말투만 봐도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럴 때 기름 붓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럴 때 기름을 부어야 한다. 그래야 진심이 나오고 본 모습이 드러난다. “저기, 후보님.” “응. 왜?” “이런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제가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집안일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때라는 걸 몰라? 안돼! 집안일이면 좀 미뤄.” 고경열은 표정을 확 구기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 [096] 힘든 싸움 4 “거 참, 알만한 친구가 갑자기 왜 그래? 여기서 집안 챙겨가며 일하는 사람 어딨어? 나도 호텔 생활한 지 2주가 넘은 거, 잘 알잖아. 애들 얼굴도 가물가물해.” 감관혁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고경열의 입에서 딱 한 마디만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기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참, 서울 지역구 의원들이랑 지역 위원장들과 식사 자리 한 번 만들어. 돈까지 뿌리는데 생색 한번은 내야 할 거 아냐.” “알겠습니다.” 기다리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김관혁은 머리를 숙이고 돌아섰다. “참, 김 본부장.” “네.” 김관혁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섰다. 그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상황이 좋지 않으니 경황이 없어 묻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제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이 나올 차례다. “지난주 지지율 여론조사 결과는 나왔어?” “아, 네.” 기대했던 말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오차범위 내에서 후보님이 앞서고 있습니다. 계속 격차가 벌어지는 추세니까 다음 주에는 좀 더 나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조금이나마 기분 좋은 소식을 들으니 고경열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 수고했다. 나가 봐.” 다시 머리를 숙이는 김관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문밖으로 나오자 한숨부터 나왔다.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은 단 하나였다. ‘무슨 일인데?’ 분명히 말했다. 일주일이라고……. 지금처럼 일분일초가 아까운 시기에 선거를 지휘할 사람이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운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라도 안다. 지금까지 자신의 가정과 집안일 보다 윗사람의 개인사까지 챙긴 최측근 아닌가? 그렇다면 처음 나와야 할 말은 바로 무슨 일인지부터 물어봐야 했다. 이 한마디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은가?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십 년 넘게 모시면서 단 한 번도 아쉬운 소리를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가? 내게 개인적인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모시던 윗사람을 시험했다는 죄책감도 사라졌다. 그 자리에 섭섭함과 실망이 밀려들었다. 이 소소한 시험 하나로 섣부른 판단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하루가 지나고 내일 아침이면 달라질지 모른다. “김 본부장. 아니, 관혁아. 어제는 내가 정신이 없어서…. 무슨 일이야?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거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사흘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고경열의 입을 통해 듣고 싶은 말이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미 잊어버린 게 분명하다. “씨발. 겨우 이 정도였나….”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다. 겨우 간단한 질문 하나로 십 년을 따라다니며 모신 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다니. 아니, 돈 200억에 자신을 팔아버리는 변명거리를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이 뱉은 욕설의 대상은 고경열이며 김관혁 자신이다. 둘 다, 욕을 먹어도 싸다. * * * 슬슬 딴 사람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주일이 넘도록 연락이 없다. 200억이라는 선금과 높은 연봉을 보장하는 임원 자리도 거들떠보지 않는 끈끈한 관계. 그리고 충성심. 존중해줄 만하다. 김관혁이 흔들리지 않는 충심을 가진 것인지, 고경열이 충성을 다할만한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신뢰는 종이처럼 약했다. 물 한 방울만으로 찢어지는 종이처럼 김관혁의 신뢰는 무너졌다. 다시 만났을 때 그의 모습은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 “미라클이 순양그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게 사실이요?”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가 순양자동차를 흡수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기업 간의 관계 말고. 오너 일가와 말이요. 이 모든 게 사위를 서울시장으로 만들려는 목적이요?” 이제부터 주는 떡밥만 먹고 미끼만 챙기는 바보짓은 하지 않겠다는 건가? 전후 사정을 전부 알고 싶어 한다. “그것과는 관계없습니다. 순양그룹 사위를 선거에서 승리하도록 만들려고 했다면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칠 이유가 없는 게 순양그룹의 힘 아닙니까?” 김관혁은 머리를 끄덕였다. 정치판에서 밥 먹은 지 10년이다. 지금껏 순양의 정치 비자금 덕을 본 사람들이라면 순양이 원하는 사람을 서울시장에 앉힐 것이다. 이렇게 내부 사람까지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쯤 잘 안다. “좋아. 그럼 이제 툭 터놓고 이야기 좀 합시다. 왜 순양의 사위를 서울시장에 앉히려는 거요?” “기업 비밀이라 외부자에겐 말할 수 없습니다.” 김관혁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외부자? 난 지금 배신자가 될 생각인데 그쪽에서도 외부자라고 하면 난 어느 편에 있는 거지? 발붙일 곳도 없나?” “우리 돈을 받고 고경열 후보가 낙선하는 순간 내부자가 됩니다. 그때까지만 경계인으로 사십시오.” 쓴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젠장, 배신자가 이런 거였나? 되돌아갈 다리가 확실하게 무너져야 배신자로 인정받는 건가? 이 짓도 못할 짓이구만.” 이 사람이 처참한 심정을 조금을 만져줘야겠다. “본부장님. 외람되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 “동료를, 그리고 친구와의 신의를 져버리는 것은 배신이라고 부를 만 합니다.” “윗사람과의 신의를 저버리는 건 배신이 아니다?” “거래 관계만 끝나는 겁니다. 정말 고경열 후보와 신뢰로 똘똘 뭉친 관계였습니까? 본부장님은 진정으로 바라는 거 하나 없이 그분을 모셨습니까?” 김관혁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술잔만 들었다. “현대는 왕조시대도 아니고 봉건시대도 아닙니다. 이제 충성은 사라져야 할 덕목입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개처럼 부리는데 충성은 무슨…. 아랫사람은 개가 아닙니다. 서로 존중해야죠.” 김관혁이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다. “그만해요. 조금도 위로가 안 되니까. 난 그저 속물이었던 것뿐이야.” “대다수 사람들이 속물입니다. 불행하게도 속물이지만 돈도 못 챙기는 속물들이죠.” “그나마 난 낫다는 거요? 거금을 챙기니까?” “돈도 챙기고 원하는 것에 도전할 기회도 있잖습니까? 누구누구의 오른팔이 아니라 국회의원 도전하세요. 우리 미라클이 적극 돕겠습니다.” “국회의원이라….” “16대 총선이 2년 남았습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또 지역구든 비례대표든 준비할 돈과 시간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죄책감을 술로 씻어내려 듯 한동안 술만 마셨다. 소주 두 병이 바닥을 보일 때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위스든 어디든 빨리 돈 옮겨요. 그리고 선거 이틀 전에 내가 연락하면 기자들 대기 시키고. 큰 거 한방 터트려 줄 테니까.” “네. 돈에 대해서는 염려 마십시오. 전 신뢰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본부장님 뒤통수 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거래가 성사되었지만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마음 편히 악수를 나눌 만큼 그의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였다. * * * 선거를 2주 남겨 놓은 상황에서 지지율은 10% 격차로 벌어졌다. 후보자들의 공약이나 정책보다는 이미지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 깨끗한 공직자와 IMF 주범인 재벌가의 사위라는 것은 지지율을 좁힐 수 없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아버지. 제발 손 좀 써 주세요. 이러다가는 선거운동도 필요 없어요.” 야당 지도부도 이번에는 그냥 포기하고 다음을 노려보자는 말까지 나오자 진서윤은 진 회장에게 매달리는 것만이 유일한 것이었다. “이미 늦었다. 내가 모든 유권자에게 돈 봉투라도 돌리라는 말이냐? 선거의 마지막 힘은 바로 후보의 능력이다. 네 남편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걸 어쩌겠느냐?” 진 회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딸을 나무랐다. “제가 시장 아줌마들, 그 지저분한 손을 잡은 것만 수천 번이라고요! 이런 짓까지 했는데… 떨어지면 억울해서 못살아요.” 뭐든 쉽게 손에 넣은 딸. 나이가 쉰인데도 아직 철부지 같은 소리만 하고 있다. “네 남편 선거는 끝까지 네가 책임져. 그 선거자금은 어린 조카 돈이다. 두 배, 세배로 돌려주지는 못해도 이자라도 듬뿍 쳐서 줘야 하지 않겠냐?” 진 회장은 사백억이라는 돈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 딸에게 따끔하게 쏘아붙였다. “미라클 오세현이를 만만하게 보지 마라. 미국 투자자들 돈으로 아진을 인수하고 대아건설까지 삼켰다. 보통이 아니야. 그런 자의 손에 계약서가 있어.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성의 없는 선거전이나 포기한 모습을 보여줬다가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제야 진서윤도 돈의 출처를 떠올렸다. 그리고 계약서도. 딸의 당황한 표정을 보자 진 회장은 혀를 찼다. “쯧쯧, 돈 무서운 줄 모르더니 이제야 기억나느냐? 이럴 시간에 빨리 오세현이를 만나서 다독여주는 게 나을 게다.” 진서윤은 황급히 백을 챙겨 들고 서재 밖으로 달려나갔다. * * * “대표님이 그토록 신경 써 주셨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지지율 격차가 계속 벌어지기만 하고….” 진서윤은 최대한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뭐죠? 아직 열흘이나 남았는데 포기?” “추세라는 게 있어요. 이걸 뒤집으려면 대형타가 하나 터져야 하는데 이미 나올 건 다 나왔어요.” “그래요? 음…….” 오세현은 표정 관리 하느라 애를 써야 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는 재벌가의 딸이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우습고, 이미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사실을 어떤 식으로 비싸게 팔아먹을까 궁리하는 것도 내보이지 않아야 했다. “그러니까 절대 못 이긴다는 말씀입니까?” “안타깝지만 그래요.” “제가 역전 시켜 볼까요?” “…?” 진서윤은 오세현의 진의를 알아듣지 못해 눈만 껌뻑거렸다. “방금 말씀하셨죠? 대형타 하나 터져야 한다고. 제가 그거 터트려 드릴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대형타라뇨?” “제가 회사돈 400억을 쏟아붓고 순순히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혹시 진 사장님과 최 후보님은 남의 돈이라고 편히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상황이 이래서 죄송할 따름이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감추려는지 고개를 들지 못한다. 아버지인 진 회장 외에 고개 숙인 적이 없었던 여인이다. 지금 얼마나 큰 모멸감을 느낄까? “상황이 이러니 제가 나서겠다는 겁니다. 전 돈 잃는 짓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오세현은 찻잔을 내려놓고 결론을 지어버렸다. “진다는 생각 따위는 버리시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세요. 역전의 발판은 제가 만듭니다. 선거 이틀 전까지 큰 변화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슬쩍 눈치를 살피니 진서윤은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한다. “이것까지 다 포함해서 우리의 공로를 기억하셔야 할 겁니다. 그 보답은 톡톡히 받아낼 테니까요.” “뭐든 말씀만 하세요. 원하시는 대로 다 할게요.” “그 말씀, 꼭 기억하세요.” 매섭게 노려보는 오세현을 보며 진서윤은 머리를 세차게 끄덕였다. * * * “삼촌. 연락 왔습니다.” “그래? 어디래?” “오늘 저녁 8시부터 여의도 일식집 ‘다미’ 4호 룸에 기자들 풀라고 합니다. 아마 김관혁은 3호 아니면 5호실에 들어가겠죠.” “오케이. 특종을 확 풀어야 하니 중앙일간지 전부 불러모아야겠지?” 오세현은 이미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대여섯 명의 기자와 통화를 끝낸 오세현은 조금 긴장한 듯 보였다. “과연 이백억의 가치를 할까?” 오세현은 추가로 들어가는 이백억에 대해서는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다. 주식 투자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니 400억을 잃는 거 보다는 더 쏟아붓고 성공하는 것이 올바른 투자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가 걱정하는 건 제대로 된 물타기 여부일 뿐이다. “고모부가 낙선하면 돈은 꼭 회수할 겁니다. 김관혁도 알겠죠. 오늘이 인생 리셋하고 새 출발 하던지, 쪽박 차고 정치인생 끝나든지…. 중요한 갈림길이라는 것을요.” ======================================== [097] 피할 수 없는 운명 1 “칸막이 이거 조립식이잖아. 이거 뜯고 우리가 가지고 온 걸로 빨리 바꿉시다.” 오세현은 이미 작업자와 새로운 칸막이까지 준비하고 일식집 사장에게 돈 봉투를 찔러 넣었다. “볼일 끝나면 원상태로 바꿔줍니다. 됐죠?” 두꺼운 봉투의 손맛을 느낀 사장은 환하게 웃었다. “아이고, 사장님. 당연히 편의 봐 드려야죠.” “그런데 오늘 8시 예약한 방 있죠? 3호 아니면 5호일 텐데.” “어? 맞습니다. 5호실 예약한 분이 계세요. 5호실이 좀 넓거든요.” “오케이.” 대여섯 명의 작업자들은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칸막이를 교체했고 술잔 부딪히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을 확인했다. 4호실은 오세현과 기자들이, 3호실은 나 혼자 차지하고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 대표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거 먹으면 체하는 거 아닙니까?” 다섯 명의 기자들은 자리마다 하나씩 놓인 봉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박 기자. 그냥 넣어 둬. 용돈이야, 용돈. 윗사람이 주는 용돈 가지고 시비 걸 놈이 어디 있어? 대통령도 가끔 지갑 던져주잖아. 새삼스럽게 왜 그래?” 오세현이 너스레를 떨자 기자들은 웃으며 봉투를 집어넣고 자리에 앉았다. “하나만 부탁하자. 대아 건설 미래가 암울하다는 둥, 책임져야 할 사람이 모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는 둥, 험담 좀 그만하자. 내 입장도 좀 이해해줘. 썩은 데를 도려내려면 그놈들이 필요하다고.” “역시. 이거 쥐약 맞네요. 흐흐.” “또, 또 그런다! 부탁은 이게 전부야. 자, 한잔합시다.” 소주 몇 순배가 돌자 기자들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괜찮은 소스라도 건지려고 입은 조심하고 귀는 활짝 열었다. 이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옆방이 시끄러워졌다. “자자, 오늘 허리띠 풀고 마음껏 마셔. 모레 투표가 끝나면 우리 고경열 후보님이 고경열 서울시장님이 되는 거다. 하하.” 옆방에서 들리는 고경열이라는 이름에 기자들 모두 입을 닫았다. 경제부 기자들이지만 고경열이 바로 지지율 1위 후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누구지? 지지자들인가?” “혹시 선거운동원?” “쉿. 저 목소리 귀에 익어. 조용히 해봐.” 행여나 옆방에 들릴까 봐 기자들은 들릴 듯 말듯 속삭이기 시작했다. “에이, 왜 이러시나. 술맛 떨어지게. 신경 끄고 마시자고” “대표님, 조용. 잠시만요. 확인만 좀 합시다.” 오세현은 기자들에게 술잔을 돌렸지만 이미 기자들의 관심은 옆방으로 쏠렸다. 오세현은 슬며시 웃으며 이런 기자들을 말없이 지켜보기 시작했다. 옆방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딱 하루 남은 내일,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라고 오늘 회식하는 거다. 선거 끝나면 너희들 고생의 대가는 내가 절대 잊지 않으마.” “이제 본부장님은 부시장 되시는 거 확실하죠?” 부시장이라는 말에 기자들은 큰 숨을 들이쉬었다. 옆방 사람들은 선거운동의 핵심인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예 소형 녹음기까지 주섬주섬 꺼내는 기자도 있었다. “야! 이것들이 나 김관혁을 뭘로 보는 거야? 내가 그깟 자리에 연연하는 것으로 보여?” 김관혁이라는 이름이 들리자 기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했다. 어쩌면 특종이 나올지도 모른다. “아이고, 아닙니다. 본부장님이야 다음 시장 자리 물려받으셔야죠. 하하.” “뭐? 물려받아?” 김관혁의 거친 목소리가 나오자 옆방은 일순 조용해졌다. “내가 우리 고 후보, 시장으로 만든 거다. 물려받기는 뭘 물려받아? 이제 날 여의도로 꼭 보내야 할 사람이 바로 고 후보야. 그 양반 냄새는 내가 전부 지워줬는데?” “그럼 그 의혹이 사실입니까?” “무슨 의혹?” “군 면제 말입니다.” “이 친구, 순진한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고경열 후보 정도의 고위 관료가 애를 군대 보내겠어? 군대는 우리 같은 평민 자식들이나 가는 거다.” 오세현의 눈에 비친 기자들은 모두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고경열 후보의 최대 약점이었던 군 면제. 그 적나라한 내용이 옆방에서 들려오기를 모두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 전해질 정도다. “자식새끼 셋을 군대 안 보내려고 무슨 짓을 했는데? 내가 직접 만든 가짜 진단서만 수십 장이야. 그런데 그 양반도 참 재수가 없긴 해. 외교부에 일하면서도 하나같이 한국에서 애를 다 낳거든. 미국에 근무할 때 애 낳았으면 미국 국적으로 군대 안 갔을 텐데, 흐흐.” “아니죠. 미국 국적이었으면 서울시장 후보로 나올 때 오히려 자진 입대해야 했을걸요?” “듣고 보니 그러네. 하여간 운 좋은 양반이야. 하하.” 이미 기자들은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이 정도면 특종 중의 특종이다. 물론 데스크의 결정이 남았지만 말이다. 이 사실이 신문에 실리면 시장 자리의 주인이 바뀐다. 이제 서울시장은 언론이 결정할 수 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언론이 아니다. “그런데 왜 셋째 아들은 면제가 아니고 방위 갔습니까?” “마누라 때문이지 뭐.” “네? 고 후보님 부인요?” “그래. 지 새끼가 아니거든.” 이번에는 오세현마저 입을 떡 벌렸다. 혼외자라는 말 아닌가? “고 후보가 혼자 일본에서 근무할 때였을 거야. 남자 혼자 외국에서 몇 년 지내는데 여자 없이 되겠어? 외교부 여직원이랑 바람났지.” 기자들은 행여나 숨소리라도 들릴까 봐 손으로 입까지 막았다. “고 후보도 어쩔 수 없었지. 사모님이 그 애를 호적에 넣어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그냥 군대 보낸 거야. 방위로 뺀다고 손쓰지도 않았어. 그냥 그놈 시력이 엄청 나빠서 정상적으로 방위 간 거야.” 기자들은 이런 초대박 특종을 쥐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 한사람이라도 일어서면 전부 따라나설 기세였다. 이때 오세현은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행여나 옆방에 들릴까 봐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 잠깐만. 최 기자, 박 기자. 좀 진정해.” “왜 그러세요? 이게 지금 진정할 일입니까?” 기자들 역시 잔뜩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이거 터트리지 말자. 이거 내일 터지면 선거 하루 앞두고 뒤집히는 거 확실하잖아.” “당연하죠. 우리나라에서 절대 용납 안 되는 두 가지를 전부 건드린 겁니다. 자식 군대 보낸 부모들 표, 싹 빠져나가고…. 불륜에 혼외자라면 절반의 여성 표가 전부 등 돌린다고 봐야죠. 게임 끝났어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역량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고 후보가 재벌 사위 최 후보보다는 훨씬 낫잖아. 이런 사소한 개인 문제로 넘어지기엔 아까운 사람이야. 그냥 묻어 두자고.” “기자가 그런 거 따지면 어떻게 팬대 놀립니까? 알릴 게 있으면 알리고 선택은 유권자가 하도록 해야죠.” 오세현은 아껴둔 마지막 펀치를 날리기 위해 물 한잔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뭐야? 설마 특종 터트리고 고 후보 대신 최 후보 당선되면 떨어질 떡고물 때문에 그러는 거야?” “네?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기자들 전부 표정을 구겼다. 떡고물이라니? “그렇잖아. 이 가사 나가면 최 후보 당선의 일등 공신은 바로 첫 특종 터트린 언론사가 분명한데 순양그룹이 가만있겠어? 광고를 그냥 막, 확실하게 밀어줄 거 아냐? 어쩌면 일 년 치 광고 한방에 들어올걸? 아냐?” 순진한 놈들. 설명을 들어야 이 기사의 가치가 얼마짜린지 알아채는 건가? 오세현은 데스크를 설득할 근거까지 말해준 셈이다. 눈치 빠른 기자 하나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벌떡 일어섰다. “오 대표님. 다음에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먼저 갑니다.” 이 한 명을 시작으로 다른 기자 전부도 앞다퉈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오세현도 자리를 털고 건너편으로 옮겼다. “기자들 다 갔죠?” “그래. 네 말대로 광고 힌트 줬더니 미친 듯이 달려가더라.” “영업사원이 따로 없다니까요. 흐흐.” 내가 술 한잔을 따르지 오세현은 단숨에 들이켰다. “너도 다 들었지?” “네. 다 들으라는 듯 저렇게 크게 떠드는데 못 들을 리 없죠.” “근데…. 사실일까?” “혼외자요?” 오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게 아니죠. 저게 내일 터져버리면 수습할 시간이 없다는 게 중요하죠. 선거 끝나면 사실 여부를 따지지도 않으니까요.” “참 모질다. 측근이라는 게 말이야.” “카이사르도 부르투스의 칼이 가장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측근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저격할 수 있는 사람이죠.” 나도 씁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 한잔을 마셨다. “이제 저 친구, 어떡하지?” “한번 지켜보죠. 배신자의 딱지를 떼고 화려하게 부활할지, 이대로 사라질지 말입니다. 부활하면 우리가 확실하게 키워주면 됩니다.” 비싼 회가 입안에서 녹지 않고 목의 가시처럼 자꾸 걸렸다. 내게 득이 되는 배신이라도 지켜보는 것은 마음 편하지 않았다. * * * “기기… 김 본부장은? 김관혁이 어디 있어?” 고경열 후보는 머리를 푹 숙인 보좌진들과 선거 참모들 앞에서 소리쳤다. “핸드폰이 꺼져 있어서…….” “사실이야? 어제 너희들과 술 마실 때 나온 소리야?” “그, 그게 확실하지 않습니다. 군 면제 건이 부각되지 않고 잘 넘어갔다. 뭐, 이 정도 이야기가 전부였는데…….” 어제 함께 술을 마신 보좌진 한 명이 변명처럼 말했지만 자신 없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이 기사의 소스다. 아침 뉴스부터 조간신문까지 전부 자식 군 면제와 혼외자 기사뿐이다. 도덕성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으니 해보나 마나 한 싸움이다. 긴급히 돌린 여론조사에서 이미 10% 이상 뒤진다. 하지만 선거를 책임진 본부장이 나타나지 않으니 모두 우왕좌왕할 뿐 대책이 나오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고경열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며 김관혁이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머리를 숙이고 있던 참모진의 뺨을 때리고 정강이를 걷어차며 고함질렀다. “어떤 새끼야! 누가 흘린 거냐고! 이 십새끼들아!” 갑자기 떨어진 날벼락에 모두 신음 소리만 낼뿐이었다. “죄송합니다. 후보님. 모두 제 책임입니다. 오랜만에 마신 술 때문에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을 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사무실 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은 김관혁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은 배신자가 아니다. 단지 취중에 말실수했을 뿐이며 배신자는 머리 숙인 채 서 있는 놈들 중에 따로 있다. 순식간에 이 상황을 정리해버린 김관혁을 보며 고경열 후보가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직 기회는 남았나? 방법 있어?” “긴급 기자회견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중으로 언론사 정정보도를 요청하겠습니다.” 고경열은 의자에 더욱 몸을 묻고 손을 내저었다. “다 나가 봐. 수습할 거 있으면 빨리 움직여.” 김관혁은 고 후보의 방을 나오자마자 소리쳤다. “누구야? 어떤 놈이 흘렸어?” 김관혁의 번뜩이는 눈빛에 모두 서로를 힐끔거리며 눈치만 살폈다. 미치고 펄쩍 뛸 상황 아닌가? 만취 상태로 귀가해서 폭 잠든 게 전부다. 아침에 눈을 뜨니 이런 날벼락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뿐이다. “좋아. 일단 내일 선거 끝나고 보자. 오늘까지는 배신자 없는 걸로 간주한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마. 알아들었어?” “넵!” 사람들이 흩어지고 혼자 남은 김관혁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밤새워 고민했다. 후회는 털끝만큼도 없었고 어떤 행동을 할지에 대한 고민이다. 단 한마디만 있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단지 부리는 사람 중의 한 명이 아니다. 이 말을 하고 그가 분통을 터트리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미래가 창창하지 않은가? 배신자라는 낙인을 안고 여의도로 입성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김관혁은 끝까지 충신 흉내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 [098] 피할 수 없는 운명 2 진 회장은 특종이랍시고 하루종일 고경열 후보를 때리는 뉴스를 보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TV를 껐다. 깜깜이 선거운동 기간이라 일반인은 알지 못하지만 진 회장의 책상 위에는 여론조사 결과가 놓여 있었다. 선거 전문가들은 7% 차이로 자신의 사위가 무난히 당선한다고 알려왔다. 투표를 하루 앞둔 시점에서 이 정도 폭격이면 누구라도 견딜 재간이 없다. 당사자인 고경열 후보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즉각 음해성 보도를 중단하라고 촉구했지만, 상대인 사위의 캠프에서는 친자확인 절차부터 시작하라고 엄포를 놨다. 이 일은 분명 내부자의 제보다. 그동안 은밀하게 탐사한 언론사가 있었다면 단독 특종이어야 할 텐데 중앙 일간지 전부가 일제히 포문을 연 것은 누군가의 확실한 제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허 참, 고경열이의 오른팔을 회유하다니. 이놈이 무슨 농간을 부렸기에….” 진 회장은 정치판에 인생을 던진 놈을 여럿 봐 왔다. 권력이 주는 달콤함에 취하면 돈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 물론 돈에 휘둘리는 놈들도 많지만 이런 놈들의 한계는 뻔하다. 큰 꿈을 가진 놈들은 권력을 손에 넣는 데 필요한 돈만 취하고, 하수는 권력을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한다. 고경열의 오른팔 정도면 필시 큰 꿈을 꾸는 놈이 분명하다. 돈에 흔들릴 놈은 아닐 텐데…. 진 회장은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만나야 할 사람을 서재로 부르기 싫었다.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직접 움직이고 싶었다. 서재를 나오니 대기하던 비서 하나가 쪼르르 달려왔다. “차 준비해라. 좀 나가야겠다.” “회사로 가시겠습니까?” “알 거 없고, 빨리 대기시켜.” “넵.” 밖으로 달려나가는 비서는 이미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기사를 호출했다. 본관 입구에 대기 중인 승용차의 뒷문을 열고 대기하던 비서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회장님은 뭔가 못마땅한지 미간을 찌푸리고 계셨다. “이건 뭐냐?” “네?” “이 차는 뭐냐고?” 진 회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어찌할 줄 모르는 젊은 비서를 보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젊은 놈이 왜 이리 둔할까? “내가 순양자동차 뺏긴 지 오래 됐다. 이 차를 내가 왜 타?” 비서보다 기사의 눈치가 빨랐다. 재빨리 덩치 큰 순양 차를 빼고 진 회장이 가장 만족해하는 독일 세단을 대령했다. 보조석에 앉으려는 비서를 내쫓고 기사와 단둘만 출발했다. 물론 허겁지겁 뒤를 따라올 것이지만 말이다. “여의도로 가자. 오세현이 회사로.” 거리 곳곳에는 후보들의 선거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시끄러운 확성기 소리와 어지럽게 나붙은 현수막과 포스터. 한나절도 남지 않은 황금 같은 시간이라 그들은 마지막 힘을 짜내고 있다. * * * “회장님!” “할아버지!” 마포 상암동의 지도를 펼쳐놓고 구획 검토를 하는 도중이었다. 대아건설 담당자들도 함께 하다 보니 할아버지의 등장에 모두 벌떡 일어섰다. 할아버지가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까지 청하자 모두 감격스러운 표정마저 보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회장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던 순양건설의 직원이었으니 당연한 행동이다. “바쁜가 보구나.” “그렇긴 하지만 회장님께 차 한잔 대답할 시간은 있습니다.” 오세현은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자네들은 잠시만 자리 좀 비켜줄 수 있겠나?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지.” “네, 물론입니다. 회장님.” 건설사 직원들이 물러나자 할아버지는 근엄한 표정을 싹 지우며 환히 웃었다. “오 대표도 이제 풍채가 달라졌구먼. 회장님 냄새가 나. 허허.” “아이고, 아닙니다. 요즘 운동을 아예 못해서 체중만 불었어요.” “몸무게 말하는 게 아니라 태도를 말하는 걸세.” 오세현은 가볍게 정담 몇 마디를 나누다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신지? 여기까지 직접 발걸음을 옮기신 걸 보면 보통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오늘 뉴스, 두 사람 작품인가?” 선거에 관한 일이다. 나와 오세현은 눈을 마주쳤고 내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결국, 네 말대로 됐구나. 어떻게 회유했느냐?” “김관혁은 이인자나 오른팔로 만족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를 밟고 기회를 만들 만큼 그 사람 욕망이 컸을 뿐입니다.” “회장님. 혹시 선거 결과 예측 자료라도 받으셨습니까?” 오세현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오 대표도 받았을 거 아닌가?” “회장님 정보 라인은 제 라인과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7% 차이라고 하더구먼.”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순양그룹에서 돌린 여론조사라면 이보다 더 정확한 예측은 없을 것이다. “우리 조사는 10%라고 나왔습니다. 둘 다 승리를 점쳤으니 이변이 없는 한 고모부가 이겼네요.” “몇 시간 남았다고 이변이 생기겠느냐? 문제없을 게다.” 할아버지는 걱정 말라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네가 진행하려는 그 프로젝트도 5부 능선을 넘었구나.” 겨우 5부 능선? 서울시 자체 사업이니 7부 능선은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당황한 내 표정을 본 할아버지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놈아. 밥상 차린 놈과 먹는 놈이 꼭 같더냐? 두고 보거라. 이제 숟가락 들고 덤비는 놈이 한둘은 아닐게다. 그놈들은 제 밥그릇 못 챙기면 밥상 엎으려고 날뛸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건설바닥을 잘 모르니 할아버지의 경고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 정도로 거칠게 나올까? “오 대표 그리고 도준아.” “네.” 우리 둘은 할아버지의 입만 쳐다보기 시작했다. 은근한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는 걸로 봐서 예까지 찾아온 목적을 말할 것 같았다. “마포 미디어 시티 공사건, 내게 맡기는 게 어떠냐?” 쿵- 하는 소리가 머리에서 울렸다. 아직 정확한 의미를 잡아내지는 못했지만, 할아버지의 말씀은 내가 차린 밥상에 가장 먼저 숟가락을 들이미는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오세현도 마찬가지였다. 입술을 꽉 다물며 얕은 침음만 흘렸다. “왜 그런 표정이지? 마음에 들지 않나?” “회장님. 맡으시겠다는 게 정확히 어떤 뜻인지요?” 오세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말 그대로지. 서울시와 계약하는 주체는 바로 순양건설이라는 의미야. 물론 대아건설도 큰 역할을 담당하는 건 당연하고.” “그러니까 순양이 맡고 대아는 하청을 주시겠다는 뜻…. 맞습니까?” “에잉,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하청이라니? 이럴 때는 협력이라고 하는걸세.” 할아버지의 진의를 파악하자 믿어지지 않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욕심 많은 영감이라고 해도 아끼는 손자가 수백억을 써가며 만든 기회를 날로 먹으려 들다니? “할아버지. 진담이세요?” “이놈아. 내가 사업을 앞에 두고 농담하더냐?” 할아버지는 내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말하지 않았더냐? 두 사람이 이 일을 끌어가기에는 버겁다고 말이다. 건설사들이 픽픽 스러지는 시국이다. 살아남은 놈들은 이런 호재를 가만두고 보지 않을 거다. 어찌 보면 국책 사업으로도 생각할 수 있지 않으냐?” “그러니까 우리 힘만으로는 이 프로젝트를 차지하기 힘들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그럼 할아버지께서 도와주시면 되잖아요. 굳이 전부 가져가셔야 합니까?” “도와주는 정도가 아닐걸? 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이 사업은 갈가리 찢어질 거다. 네가 차지하는 건 2할도 힘들다. 아니면 건설사 카르텔들이 이 판을 엎어버리고 내년이나 내후년에 판을 새로 짤 거다. 물론 그때는 대아건설이 끼어들 틈도 없을 거다.” “저기 회장님.” 굳게 다문 오세현의 입술이 열렸다. “대아건설 임원 대부분이 순양 출신입니다. 전 이것으로 충분한 협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굳이 순양건설이 주체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거 참, 젊은 사람들이 왜 말귀를 못 알아듣나? 내가 힘쓰는 게 도와주는 정도가 아니라는 말일세. 나 아니면 차지하기 힘든 사업이라면 당연히 내가 주체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걸까? 대아 건설 아니, HW그룹 전체를 순양과 별개로 보지 않으시는 분이 이런 욕심을 내다니? 정말 돈 되는, 큰돈이 되는 사업이라면 혈육도 생각하지 않는 걸까? 이것이 재벌 회장의 습성인가? 한동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기만 했다. 오세현은 가급적 할아버지의 비위를 긁지 않으려 애쓰며 도움만을 요청했고 할아버지는 점잖은 말로 사업을 도맡아 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할아버지.” 큰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 할아버지가 나를 테스트하는 건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지금은 내 의지를 보여주는 것만이 최선이다. 설령 이것으로 할아버지가 나를 괘씸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쩔수 없다. 눈치만 보다가는 나도 큰아버지나 고모와 다를 바 없다. “순양그룹 간판을 단 회사가 차츰 늘어나고 어는 순간부터는 할아버지께 부탁하는 사람만 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서재에서 나오실 필요가 없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직접 어려운 걸음까지 하시며 이곳에 계십니다.” 순간 할아버지의 눈썹이 꿈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나도 가끔은 이렇게 밖으로 나온다. 날씨도 좋지 않으냐? 허허.” “그럴까요? 마음이 급하신 건 아니고요?” “내가 급할 게 뭐가 있다고…?” “고모부가 시장에 취임하는 순간 전 이 사업을 몰아붙일 겁니다. 지금 이 사업에 뛰어들 만큼 준비한 회사는 우리가 유일하죠. 다른 회사들이 숟가락 들 틈도 주지 않을 겁니다.” “그게 과연 뜻대로….” “할아버지께서도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차지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는 것을 잘 아시니까 이렇게 달려오신 거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눈을 깜박거리기만 할뿐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건설 분야는 잘 모르니까 할아버지의 도움은 절실합니다. 하지만 통째로 넘겨드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축이 되고 순양건설은 믿음직한 협력업체가 되는 것, 이게 최대치의 양보입니다.” 단호한 내 모습에 할아버지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삼키지 못할 먹이를 탐내다가는 입만 찢어진다. 네 능력을 너무 과신하다가는 큰코다칠 것이다.” “어린애는 다치면서 크는 거 아닐까요? 한번 해보겠습니다.” “방금 넌 이 할애비를 적으로 돌린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느냐?” 무시무시한 말을 던지는 할아버지를 보며 겁먹지 않은 티를 내려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위압감이 장난 아니다. “적이라니요? 아닙니다. 여전히 순양 건설은 이 일에서 최고의 파트너라고 생각합니다.” “시끄럽다. 내 뜻에 맞서면 적이나 다름없다!” 할아버지는 버럭 소리 지르며 일어섰다. “내일 투표 끝날 때까지 잘 생각해서 다시 이야기하거라. 오 대표도 잘 생각해. 이 판, 나 없이는 쉽지 않을 게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리는 할아버지를 보며 오세현은 한숨을 뿜었다. “휴-. 도대체 왜 저러시는 거야? 정말 돈 앞에서는 핏줄도, 손자도 없는 거냐?” “저도 모르겠어요. 설마 날 이용하신 건 아닐 텐데….” “어떡할 거냐? 항복해? 아니면 이대로 밀고 나가?” “쪽팔리게 지금 와서 굽힐 수는 없잖아요?” 쪽팔림을 무릅쓰고라도 굽혀야 하나? 이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 * * “이제 때가 되었나…….” “네?” 진 회장이 중얼거리자 기사는 뒤를 잠깐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야. 운전이나 해.” “아, 네. 회장님.” 당돌한 녀석이다. 젊을 때의 자신을 보는 듯 자신감도 넘치고 당찬 모습도 보인다. “자네 말이야.” “네.” “모레 아침 좀 일찍 오게.” “어디로 모실까요?” “군산에 갈 생각이니 차도 한번 정비하고. 참, 비서 놈들에게 말하지도 마. 조용히 다녀올 생각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운전기사는 룸미러로 진 회장의 눈치를 슬쩍 보며 대답했다. ======================================== [099] 피할 수 없는 운명 3 “모레 새벽에 군산을 다녀오신다고 합니다.” “군산? 확실해?” “네. 비서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다녀온다고….” “혼자 가시는 거야?”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진 회장의 운전기사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군산 가신다는 건 언제 말씀하셨어?” “여의도 다녀오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여의도라면 오세현?” “네. 오세현 씨 만나고 오실 때였습니다.” “혹시 그 자리에 도준이도 있었어?” “그것까지는 잘…. 전 밖에서 대기했습니다.” “알았어. 나가 봐.” 운전기사는 툭 던져준 봉투를 줍고 조용히 물러났다. 기사가 물러나자 한참을 서성이다 마침내 전화기를 들었다. 그 사람은 두 명에게 이 사실을 조용히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연락받은 두 사람은 진도준이라는 이름에 화들짝 놀랐고 이 정보를 알려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 * * 대한민국 출구 조사의 시초는 1995년 제1회 전국동시 지방선거였다. MBC와 한국갤럽이 전화 여론조사를 토대로 6시 15분경에 예측결과를 발표했고 15개 광역단체장 당선자를 전부 맞췄다. 특이하게도 사전출구 조사는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 결과는 비교적 정확하게 맞히고, 국회의원 총선 때만 되면 빗나가기로 유명하다. 6월 4일 선거 당일은 그 전날까지의 소란스러운 선거운동과 대조적으로 조용했다. 오늘 가장 속 타는 사람은 아마도 진서윤일 것이다. 남편의 시장 당선을 위해 평상시라면 꿈도 꾸지 못할 별의별 일도 다 했다. 매일 같이 험한 일을 하고 나면 남편에게 그 스트레스를 풀었지만, 막상 선거 당일이 되자 더 심한 일을 하지 못한 것이 후회로 밀려왔다. 고경열의 아내가 동네 목욕탕에서 아줌마들 등도 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이가 없어 콧방귀를 꼈지만, 지금이라면 전신 때밀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후에는 선거 사무실에서 출구 조사를 기다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남편은 당선을 믿어 의심치 않은 듯 선거 운동원들과 당직자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다.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지 진서윤은 인상을 찌푸렸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는 태도를 기대했는데 남편은 항상 마지막에 풀어져 버린다. 기대는 앞서고 포기는 빠르다. 앞으로 함께 큰일을 치러야 하는데 한숨부터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 자리라 잔소리도 못 하고 온화한 미소만 짓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후보님. 지금 시작합니다.” 선거 운동원의 외침에 모두 TV만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6시 15분. 화면에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고 0이라는 숫자가 끝나자 한 사람의 이름이 나타났다. 『기호 2번 최창제 42.1%』 순간 와- 하는 함성이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진서윤은 깍지 낀 두 손에 힘을 주며 눈을 감았다. 드디어 첫 고개는 넘었다. * * * “축하합니다. 고모부.” - 도준아. 내가 절대 네 공은 잊지 않으마. 앞으로 계속 손발 맞춰 잘 해보자. “고모부께서 어련히 잘 챙겨 주시려고요? 저야 뭐 서울시장이 제 고모부라는 것에 만족합니다. 하하.” 그래도 은혜는 잊지 않는 사람이다. TV에 출구 조사 결과가 나오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감사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 정도면 뻔뻔하지는 않다. 물론 다음 선거를 위해 든든한 자금줄을 챙기는 측면도 없진 않았겠지만. 고모부는 오세현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거 자금을 밀어준 계약서까지 있으니 설설 기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서울시장 당선자의 공치사를 들었지만, 오세현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젠장, 이겼는데도 즐겁지가 않아.” 오세현은 신경질적으로 TV를 껐다. “어쩔 거냐? 할아버지 시키는 대로 할래? 아니면 한번 들이받을래?” “한 번 더 꼬셔볼게요. 아양 떨고 아부 떨고…. 그래도 안 먹히면 들이받고요.” “건설사 임원들에게 넌지시 이야기하니까 꼬리 내리더라.” “그 사람들이야 할아버지 수족들인데요, 뭐.” 오세현은 긴 한숨을 토하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우리가 당한 거 같다. 진 회장을 믿었기 때문에 손 내밀었는데, 아예 대아건설을 통째로 넘겨주게 생겼어. 실수다.” “그때는 그게 최고의 선택이었으니까요. 순양건설 사람들 아니었으면 이 정도까지 장악하는 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 사람들 덕분에 숨겨둔 비자금을 회수했고 불필요한 사업에서 손 뗄 수 있었다. 알짜 사업부서를 남겨뒀고 비용만 깨 먹는 부서를 깨끗하게 도려냈다. 초기 세팅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다. “삼촌. 다 지나간 과거, 복기는 해도 후회는 하지 맙시다. 최악의 경우 DMC 프로젝트 다 넘기고 대아건설도 순양에 붙여 버리면 되죠. 손해 보는 거는 수업료라고 생각하죠. 이렇게 배워 나가는 거죠.” “네가 뭔가를 배웠다면 나도 괜찮아. 근데 이건 뒤통수 처 맞은 게 전부다.” “배운 거도 있죠. 누구도 믿지 마라. 흐흐.”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직 할아버지를 믿고 있다. DMC가 아무리 거대한 사업이라고 해도 털도 뽑지 않고 통째로 손자 손에서 뺏어갈 만큼 탐욕이 넘실대는 분은 아니다. 어쩌면 이 사업을 성공시키고 난 후, 내게 다시 돌려주려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좋게 생각한다면 말이다. “선거 결과는 출구 조사랑 다르지 않을 것 같고…. 전 할아버지 만나러 가 볼게요. 특별한 일 있으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일어섰다. 열심히 차린 밥상, 할아버지께 바치는 최초의 손자가 될 것 같다. * * * “고모부와 통화는 했느냐?” “네. 조사 결과 나오고 곧바로 연락 오더군요.” “곧바로? 얼마 만에?” “대략 30분 정도?” 할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결과 나오자 네 고모부는 1분도 지나지 않아 내게 연락했어. 전부 내 덕분이라고 고마워하더구나.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말이다. 허허.”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 재빨리 감사의 인사를 드린 것이다. 하고자 마음먹었다면 고모부를 떨어지게 하는 것쯤 식은 죽 먹기였으니까 말이다. 물에 빠트리는 건 단 한 사람의 힘으로도 가능하지만, 구조하는 데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듯, 달리는데 태클 거는 사람이 빠져주는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 하는 게 맞다. 특히 태클 거는 사람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할아버지.” “오냐.” “이미 충분히 겁먹었거든요? 고모부도 할아버지 뜻대로 움직인다는 거, 말씀하지 않으셔도 잘 알아요.” “눈치는 빠르구나. 그럼 내 말대로 할 테냐?” “제 생각을 말씀드리기 전에 하나만 여쭤볼게요.” “그래, 말하렴.” “정말 마포 프로젝트가 탐나시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으신 겁니까?” 나도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솔직하게 물어보는 것만이 유일했다. “다른 뜻? 다른 뜻 뭐?”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거 봐라. 복잡하게 생각하니 답이 안 나오지. 다른 뜻 없다. IMF 때문에 우리 순양도 돈의 씨가 말랐어. 뭐든 닥치는 대로 해야 한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손자의 밥그릇을 뺐습니까?” “너는?” “네?” 할아버지는 턱을 괴고 재미있는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넌 10억 달러 빌려주며… 아니, 빌려준 게 아니지. 원화로 바꿔가며 자동차 회사를 꿀꺽하지 않았느냐? 환율 좀 편의 봐줬다고 해도 무지막지한 강탈 아니냐?”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설마 그때 일을 잊지 않고 되갚아 주려는 것인가? “할아버지!” “이놈아. 귀 떨어지겠다.” “진심이세요?” “그럼? 진심이고 말고. 자동차에, 그룹 지배 지분에… 손해가 막심했어. 이번에 보충 좀 해야겠다.”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달러의 힘을 이용해서 나는 많은 것을 차지했다. 물론 할아버지의 큰 양보와 배려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기도 했다. 이번에는 할아버지 차례다. 할아버지가 지닌 영향력, 건설업계에서는 아마추어에 불과한 나와 오세현의 약점. 이런 걸 이용해서 큰 돈벌이를 챙기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너무 억울해하지 말아. 순양건설이 사업 주체가 되더라도 네게 두둑이 챙겨 주마.” “두둑이 라는 게 어느 정도입니까?” “흠, 보자…. 대아건설이 빚도 좀 갚고 밀린 급여도 정산할 수 있도록 말이다.” “구체적으로요.” “최소 전체 공사의 30% 이상은 대아가 맡도록 하마.” 이미 전체 규모의 윤곽은 나왔다. 30%라면 떼돈은 아니더라도 두둑하다고 말할 만하다. 할아버지 입에서 단번에 적당한 수치가 나온 걸 보면 대아건설 임원들은 수시로 할아버지께 보고하는 게 틀림없다. 배신감은 들었지만, 그들을 쫓아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순양건설을 차지할 때 꼭 필요한 사람들이니까. “더 이상은 주지 않으실 거죠?” “욕심 그만 부려라. 30%라면 충분하다는 것쯤 알 거 아니냐?” 여기서 물러서면 아버지가 만들어 나갈 미디어 제국이 물거품이 된다.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니 30%가 충분하더라도 제안을 받을 수 없다. 내려다보는 듯한 할아버지의 눈빛을 보며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할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만….” “그 말 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서 말하는 게 좋을 게다.” 손을 들어 내 말을 끊은 할아버지는 단호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물러서기에는 너무 늦었다. “어제부터 계속 생각했습니다만 바뀌지 않더군요. 이번 일은 양보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제 결정이 할아버지와 맞선다 하더라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심이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나를 노려보는 할아버지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느낌이다. 온몸에서 피가 쫙 빠져나가는 듯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DMC에서 단 한 푼도 얻지 못해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원망하지도 않겠습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건 전부 할아버지 덕분이니까요.” “그 말도 진심이냐?” “네. 하지만… 전부 뺏긴다면 며칠 정도는 할아버지께 연락 드리지 않아도 이해하세요. 조금은 삐질 것 같거든요. 흐흐.” 억지로라도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가오는 살려야 사내답게 보이지 않겠는가? “그것참, 협박치고는 조금 쪼잔해 보인다. 안부 전화도 하지 않겠다는 게냐? 허허.” “네. 하지만 일주일은 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할아버지의 웃음에 긴장이 풀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고모와 고모부부터 단도리 쳐야 한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도준아.” “네.”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오너라. 나와 싸우기 전에 바람이나 쐬러 가자꾸나.” 이건 또 무슨 속셈일까? 영문을 몰라 문만 깜빡거리는 나를 보며 할아버지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 * * 진영기 부회장은 복잡한 도면이 연상되는 도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마를 문질렀다. “현재는 내가 최대 지분인가?” “회장님을 제외하면 그렇습니다.” “우호지분을 확보하면? 내가 아버지와 맞설 수 있나?” “어렵습니다. 회장님 지분을 승계하지 못하면 경영권 확보는 불가능합니다.” 머리까지 흔드는 걸 보면 아예 불가능하다는 걸 말해준다. 진영기 부회장은 곁에 서서 보고 하는 두 변호사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 만약에 말이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면 지분구조가 어떻게 되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두 변호사의 얼굴은 하얗게 변해버렸다. ======================================== [100] 피할 수 없는 운명 4 “이 친구들이! 왜 그리 놀라? 아버님 연세를 생각해봐. 내일 당장 돌아가신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 아직 승계 작업이 덜 끝났어. 그런 변고에 대비책도 없고….” 변호사들은 표정을 바꿨다.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면 안 된다. 장남이자 부회장 아닌가? “회장님 지분은 사모님께서 23%, 자녀분들은 15%가량 균등 상속입니다. 이 상태로라면….” “유언장은? 효력 있는 유언장은 없나?” “알 수 없습니다. 일단 그룹 변호인단 중에 별도의 유언장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일입니다. 회장님의 개인 변호사 중에 있을지도요.” “그런데 부회장님. 제 생각이지만 별도의 유언장은 없을 겁니다. 그룹 지분이라면 상속세가 어마어마합니다. 그거 피하자고 지금까지 작업했는데…. 개인 유언장이 존재한다면 그룹 지분을 제외한 회장님 사재가 전부일 겁니다. 땅이나 집, 소장품 정도요.” 편법 상속이 아니면 수천억, 어쩌면 조 단위의 세금을 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대부분의 재벌가는 살아있을 때 편법 증여로 경영권을 승계한다. 진 회장이 상속세를 제대로 낼 만큼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 별도의 유언장은 없다고 보고, 균등 상속하면? 경영권은 어떻게 되지?” “복잡해집니다. 어떻게 뭉치느냐에 따라 회장실의 주인이 바뀔 겁니다.” “어머니가 내 편을 들면?” “정확한 계산이 필요합니다만…. 아 참, 셋째인 진상기 사장은 부회장님 사람 아닙니까? 사모님과 진상기 사장만 회장님 곁에 선다면 문제없습니다.” 희망적인 분석을 듣자 진영기 부회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괜찮기는 한데…. 그래도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에 승계 작업 끝내는게 제일 좋겠지.” 이때 변호사 한 명이 이마를 탁 치며 입을 열었다. “아, 한가지 변수가 있습니다. 순양자동차를 넘길 때 지분 17% 정도가 함께 넘어갔습니다.” “아차차. 그게 있었지. 젠장.” 밝아진 얼굴을 다시 찌푸렸다. “미국 자본이니 큰 변수는 아니겠지?” “미라클 오세현과 진윤기 사장이 친하다고 들었는데….” 변호사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윤기는 영화판이라 집안싸움에는 관심없어. 괜찮을 거야.” 진영기 부회장은 막내 동생을 떠올리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관심 밖의 동생이 큰 변수로 떠올랐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알았으니까 나가 봐.” 변호사들이 머리를 숙이고 나가자 참았던 울화가 터져버렸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털끝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던 막내가 갑자기 칼자루를 쥔 셈이다. 더욱이 한 자루 뿐이었던 칼이 두자루로 변하기 직전이다. 생각만 해도 털끝이 곤두선다. # # # 진동기 사장은 아주 가끔 술 마실 때나 피던 담배를 물었다. 사장실은 통유리라 담배 연기를 환기 시키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지금의 이 착잡한 심정을 달래 주는 것은 담배가 유일하다. 길게 내뿜은 담배 연기 속에 여러 얼굴이 스쳐 갔다. 가장 오래 연기를 붙든 건 바로 아버지의 얼굴이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종잡을 수 없는 행동, 예측할 수 없는 변덕. 사람 속을 긁어버리는 심술. 도대체 언제까지 당신이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어차피 빈손으로 가야 할 길인데, 집안의 온갖 분란을 일으킬 불씨마저 던지려 한다. “막내가 참…….” 두 막내가 다크호스로 떠오를 줄은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막내 동생 진윤기, 막내 조카 진도준. 아끼는 그들이 싸움판에 끼어들지 않기만을 빌었다. 이 싸움은 장남과 차남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혹시 생각 짧은 형님이 사고나 치지 않을까 그게 더 걱정이다. * * * 시끄럽게 울어대는 핸드폰 벨 소리에 잠을 깼다. 눈이 잘 떠지지 않는 걸로 봐서는 아직 이른 아침이 분명한데 누굴까? “여, 여보세요?” - 이놈아. 아침 일찍 오라고 하지 않았더냐? 아직 자는 게냐? “아, 할아버지.” 시각을 확인하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지금은 새벽이잖아요. 아침이 아니라고요.” - 시끄럽다. 빨리 씻고 오너라. 차 막히기 전에 출발해야 한다. 어제 등 돌린 분치고는 목소리가 너무 해맑다. 마치 소풍 가기 전날의 어린아이 같지 않은가? 눈치를 봐야 할 처지니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빨리 샤워하고 밖으로 나갔다. 동네 주민 모두가 운전기사까지 부리는 고급 주택가에 택시가 다닐 리 만무하다. 택시가 다니는 큰길까지 가려니 한숨부터 났다. “실장님!” 갑자기 등 뒤에서 자동차 라이트가 깜빡거렸고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휴-. 안 늦었네요. 다행입니다.” 김윤석 대리가 차에서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뭡니까? 오늘은 그냥 쉬라고 했잖아요.” “그럴 수 있나요? 회장님께서 아침 일찍 부르셨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렇다고 이 새벽에 와요?” 김 대리는 슬쩍 목덜미를 긁으며 웃었다. “혹시나 해서 신 팀장님께 물어보니까 회장님 기준으로 이른 아침이면 새벽 4시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택시도 없을 것 같아 모시러 왔습니다.” 이스라엘을 다녀온 후로 많이 변했다.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인 성실을 앞세운다. 내 배려를 아랑곳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나를 보필하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애틋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이거, 덕분에 편하게 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할아버지께서 빨리 오라고 닦달하셨거든요.” “새벽이라 20분이면 갑니다.” 처음엔 어두워서 알아채지 못했다. 늘 타고 다니던 순양자동차가 아니다. “이 차는 뭐죠?” “아, 어제 차 바꿔서 왔습니다. 회장님댁에 실장님 차 다섯 대나 있잖습니까? 좋은 거 놔두고 순양 차만 타셔서…. 제가 실수 한 겁니까?” 순양자동차를 제외하면 전부 부담스러운 차다. 움직일 때는 괜찮은데 뒷좌석에서 내릴 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아뇨. 괜찮아요. 있는 차 쓰죠 뭐. 앞으로 번갈아 가며 탑시다. 하하.” 김 대리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 난 웃으며 큰 덩치의 BMW 7xx의 뒷좌석에 앉았다. 김 대리의 말처럼 20분도 걸리지 않아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다. “수고했어요. 오늘은 그냥 퇴근해요. 더는 일이 없을 것 같으니까.” 머리를 꾸벅 숙이는 김윤석 대리를 뒤로하고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할아버지는 이미 현관까지 나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새벽 공기가 시원하니 좋지? 어여 가자.” 여전히 행선지를 말씀하시지 않지만 물어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곧 알게 될 것이다. 할아버지와 나란히 뒷좌석에 나란히 앉자 차는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뻥 뚫린 도로를 달리자 순식간에 서울을 벗어났다. 서서히 형태를 갖춰가는 서해안 고속도로에 올라서는 걸 보니 충남이나 전라도로 가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입을 다문 채 창밖만 바라보고 계셨다. 희뿌연 여명이 밝아올 때쯤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도준아.” “네.” “지금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 않니?” “궁금해서 미칠 것 같죠.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근엄하게 계시니 여쭤보지 못했어요.” 할아버지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내 무릎에 손을 올렸다. “지금 가는 곳은 순양그룹이 시작된 곳이지. 바로 군산이다.” 군산 그리고 순양그룹이 시작된 곳. 곧바로 기억이 되살아났다. 시험공부 하듯 외웠던 순양그룹의 역사. 바로 조선미곡창이 있었던 곳이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떠난 재산인 적산. 그중 알짜라고 불리던 조선미곡창을 불하받아 쌀을 빼돌렸고, 그 쌀 판 돈을 종잣돈으로 지금의 순양그룹을 일궜다. “조선미곡창이 아직 남아 있나요?” 할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가 조선미곡창을 어찌 아느냐?” “잡지에도 많이 났고 할아버지 인터뷰에서도 종종 말씀하셨잖아요. 순양그룹 직원들은 다 아는데 손자인 제가 모르면 안 되죠.” “어허, 넌 이렇게 또 내 점수를 따는구나. 손자가 십여 명이지만 이 할애비 돈만 빼먹을 줄 알지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아는 놈은 너밖에 없을 게다.” 내가 정상적인 손자였다면 나 역시 관심 없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인생이 궁금한 손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전쟁 때 미군들이 쓴다고 그 창고를 뺏어갔어. 한참 뒤에 되찾았지.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변했어. 의미 있는 일이다 싶어 내가 나라에 기증했다. 덕분에 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깨끗하게 보존하는 게지.” “역사박물관이라면 혹시 할아버지 이야기도 나와 있나요?” “천부당만부당이지. 내가 도둑질한 것을 기록으로 남겨둬서야 하겠느냐? 허허.” “아, 그때 쌀을 빼돌려서….” 할아버지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알았다. 작은 도둑질은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받고 처벌받지만 큰 도둑질은 아무런 탈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왜 그런지 아느냐?” “너무 크면 건드리기 힘들어서요?” “그런 점도 없진 않지만, 진짜 큰 도둑놈들이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도둑질한 돈 일부를 상납하면 그들이 눈 감아 주기 때문이지.” 정경유착의 시작인가? “그럼 그때 빼돌린 쌀도…?” “그래. 힘 있는 사람들과 나눠 가졌지. 그 돈으로 공장을 세우고 회사를 만들었다.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세어 볼 틈도 없었다.” 조금 상기된 채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할아버지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 보였다. “그때는 버는 돈 전부를 쏟아부어 회사를 늘였다. 순양 이름을 단 공장이 늘어나고, 건물이 많아지자 이제는 뺏기지 않고 지키는 것이 전부다. 재미없는 일이지.” “큰할아버지와 결별하신 건 순양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까?” 나는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철면이라는 할아버지, 그는 형제까지 찌른 사람 아닌가?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니다. 살아남으려고 그랬다.” 놀라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생존하기 위해 형제를 배신한 건 거리낄 것 없다고 여기시는 건가?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 부자들을 두드려 패기 시작했어. 그때 형님은 지금으로 치면 공장장이었다. 회사 경영은 몰랐지. 어차피 순양은 정권의 타겟이었어. 나 아니면 형님, 둘 중 한 명은 정권의 회초리를 맞아야 했다.” 자동차는 공사 중인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접어들었고 할아버지는 창문을 조금 열어 시원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내가 잡혀가면 순양은 다른 놈들 손에 들어가는 게 불 보듯 뻔하니 독하게 마음먹었어. 형님을 팔아넘겼다.”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 전부를 갖기 위해 배신한 건지… 무엇이 진실일까? 더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호기심일 뿐, 진실을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너는 어떠냐?” “네?” “너도 네 것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팔아넘길 수 있는지 묻는 게다.” 진심을 말해야 할지, 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을 해야 할지, 쉽게 대답하기 힘들다. 지나다니는 차 한 대 없지만 사거리 신호 대기 때문에 멈춰선 차 실내는 엔진의 공회전 소리만 나지막이 들렸다. “저는….” 이번에는 잔머리 굴리지 않기로 했다.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고 할아버지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부와아아앙-! 요란한 자동차 굉음 소리가 들렸고 순식간에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콰- 콰쾅-! 내 몸은 할아버지를 덮었고 깨진 유리 파편이 쏟아지는 걸 느끼며 정신을 잃어갔다. ======================================== [101] 날라리 환자 1 꺼져가는 의식의 끝자락을 잡을 때 머릿속은 억울함만 가득했다. 진짜 진도준이 죽은 해를 정확히 기억 못 한 것, 스무 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그리고 두 번째 생을 사는 기적을 겨우 십 년으로 끝내버리는 신의 계획에 화가 났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또 있었다. 이제 겨우 긴 싸움 시작할 채비를 갖추었는데 시작도 하지 못했고, 계좌에 쌓여 있는 내 돈을 생각하니 더 억울해서 죽을 것 같다. 아니, 이미 죽어가고 있나? 마지막으로 진 씨 일가를 내 앞에 무릎 꿇리지 못한 것이 가장 분했다. 젠장. 어떻게 생겨 먹은 인생이 이따위냐? 두 번의 죽음 모두가 객사인 것도 모자라 억울하고 분한 기억만 안고 가야 한다니. # # # “정신이 듭니까?”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 밝은 빛. 귓가에서 들리는 손가락 튕김이 만들어내는 딱딱거리는 소리. 안 죽고 살았나? 아니면 큰 수술이라도 끝내고 아직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걸까? 하지만 몸이 덜컹거리는 걸 느꼈다. 게다가 뿌연 시야에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바로 TV나 영화에서 보던 모습이었다. 구급차인가? “하… 할아….” 알려야 했다. 순양그룹 회장의 정체를 밝히면 조금이라도 더 신경 쓰지 않을까? “아… 말씀 마…세요. …괜찮….” 귓가에서 윙윙대기만 할 뿐 명확히 들리지 않았다. 괜찮다는 뜻일까? “수… 순양… 그룹…….” “네? 순양그룹요?” “회, 회장님… 입니다.” 다시 정신을 잃었다. “야! 방금 순양그룹 회장이라고 말한 거 맞지?” “네. 그 노인,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구급요원은 서로를 바라보다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거기 환자 상태 어때?” - 한가하다, 너! 끊어, 새끼야.“ “그 노인네 순양그룹 회장님 같아. 잘 확인해봐.” -헉! 전화기에서 숨 멎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짜증이 터져 나왔다. - 맞다. TV에서 봤던 그 얼굴이다. 젠장. 이거 보통 일이 아닌데…. “내가 병원에 연락 때릴 테니까 상태 잘 살펴. 잘못되면 우리 인생도 조지는 거야.” 안타까움, 불안, 걱정, 두려움이 가득한 구급차들이 충남 공주의료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 밖에서 대기하던 의료진들은 구급차에 실려 온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자 모두 낭패의 기색이 역력했다. “호흡도 희미하고 출혈이 심합니다. 가슴 아래가 다 으스러진 것 같습니다. 골반도….” “알았어요. 자, 빨리 뛰어.” 의사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의료진들은 수술실로 사력을 다해 뛰었다. 수술실로 달려가지 않은 병원 직원은 구급대원에게 말했다. “뒤따라오는 환자들 상태는요?” “두 명은 양호하고 두 명은 그보다는 나쁩니다. 하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고요.” “알았어요. 고생했습니다.” 방금 수술실로 들어간 중상자만 구하면 된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부터 나왔다. * *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눈부신 형광등 불빛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안 죽었다. 아니, 의외로 멀쩡한 듯 느껴졌다. 어찌 된 일일까?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느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교통사고라는 것밖에는. 형광등의 밝은 불빛이 익숙해졌을 때 가장 먼저 내 몸을 훑었다. 링거 하나가 대롱거리며 걸려 있는 게 전부다. 몸 곳곳이 쓰라렸는데 파스처럼 큰 밴드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아, 정신 들었어요?” 호감을 잔뜩 드러내는 환한 미소의 간호사가 이마와 팔목, 목덜미를 만졌다. 곧이어 흰 가운의 의사가 나타나 손전등을 눈에 대며 말했다. “제 손가락만 보며 눈동자를 움직이세요.” 움직이는 의사의 손가락을 손으로 툭 쳐냈다. “할아버지는요? 많이 다치셨습니까? 상태는요?” “됐네. 멀쩡한 것 같은데?” 의사는 손전등을 끄고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함께 실려 오신 분이 자네 할아버지신가?” “네.” “그분도 괜찮으시다네. 곧 깨어나실 것 같긴 해. 이 사고 당사자 다섯 분 중에 한 명만 수술 중이야. 너무 염려 말아요.” 다섯? 도대체 몇 대가 사고 난 걸까? 궁금증은 뒤로하고 해야 할 일부터 처리해야 한다. “선생님, 우리 할아버지, 순양그룹 회장님입니다. 병원이 시끄러워지기 전에 조치부터 부탁합니다.” “조치?” “네.” 의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순양그룹 회장이면? 어쩌라고? 경미한 교통사고 난 게 뭐 대단한 거라고 특별대우 받으려고 해? 경찰도 불러야 하고 사고 경위도 파악해야 해. 여긴 지방 국립의료원이라 VIP 특실 같은 것도 없어.” 의사는 내 말을 오해한 것 같다. 사회 특권층이 특별대우를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했나 보다. “VIP 대접 바라는 게 아닙니다. 깨어나시면 저부터 찾으실 테니 제가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 아닙니다. 어차피 막을 수 없을 테니까…. 아무튼 감사합니다. 선생님.” 의사가 간호사에게 눈짓하자 간호사들은 커튼을 걷고 침대를 움직였다. “일단 검사부터 할게요.” “보호자 연락처 좀 주세요. 사고 사실을 알려야….” 간호사들이 연이어 입을 열었다. “그건 지금 곤란합니다. 일단 할아버지부터 좀 만납시다.” 교통사고 사실을 집안에 알리는 건 할아버지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보통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할아버지의 교통사고는 우리나라 주식시장을 출렁이게 하는 영향력이 있다. 공식적인 발표가 아니면 새어 나가면 안 된다. “고집도 참…. 알았어요. 검사 끝나면 바로 같은 병실에 보내드리죠.” * * * 진 회장은 정신이 들자마자 자신의 팔에 꽂힌 수액을 만지작거리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아, 아가씨 전화기 좀….” “어머, 할아버지. 깨어나셨네. 잠깐만요. 선생님 불러….” “앵앵대지 말고 빨리 핸드폰 좀 줘. 어서!” 하지만 간호사는 진 회장의 말을 무시하고 방긋 웃었다. “지금은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CT 찍었는데 괜찮으시다니까 조금 쉬시면….” “거 참, 어서!” 벼락같은 호통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뒷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순양그룹 회장님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 회장은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는지 한참을 끙끙대다 버튼을 눌렀고 잘못 걸렸다는 퉁명스러운 대답을 몇 번 듣고 나서야 원하는 사람과 연결되었다. # # # “네. 회장님.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아침 일찍 걸려온 전화가 회장님일 줄 몰랐다. 게다가 교통사고라니. 식은땀이 쫙 흘렀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다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 진 회장과 통화를 끝낸 이학재 실장은 곧바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순양 시큐리티 직원 중에 최고 베테랑 스무 명 뽑아서 지금 당장 충남 공주의료원으로 보내. 내가 먼저 가 있을 테니 내 지시 따르라고 말해놓고!” “공주의료원 원장 찾아서 내 핸드폰으로 전화 연결해, 빨리!”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지시 사항도 처리했다. “청장님. 순양 이학재 실장입니다.” 경찰청장에게 몇 가지 부탁을 끝내고 대기 중인 차에 올랐다. “지금 공주의료원으로 빨리 가야 해. 한강 다리 건너기 전에 경찰 호위 붙을 거야. 최대한 속도 올려.” 한남동을 빠져나와 반포대교 진입로가 보일 때 네 대의 오토바이가 앞장서며 사이렌을 울리기 시작했다. * * * 공주의료원의 유 원장은 아침도 거른 채 병원으로 달려갔다. 한평생 지방에서 조용히 살던 그에게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를 정도의 유별난 아침이다. 순양그룹 실세라는 사람과 통화할 날이 올 줄이야! 그보다 더한 것은 통화 내용이었다. 한국 제일의 부자라는 순양그룹 진양철 회장이 자신의 병원 응급실에 실려 오다니. 유 원장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지금 수술실에 들어간 사람들을 빼고 오늘 아침 사고를 처리한 모든 의료진을 한자리에 소집했다. “모두 입단속 철저히 해. 이 사실이 밖으로 나가면 병원은 아수라장이 된다. 기자들 몰려올 테고 방송국 카메라까지 등장할지 몰라. 순양그룹 측에서 절대 비밀 유지를 부탁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리 알고. 모두 알아들었으리라 믿는다.” 직원들 입막음을 단단히 하고 곧바로 병실로 달려갔다. “회장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요?” 진 회장은 깍듯이 인사하는 유 원장을 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이거, 아침부터 소란스럽게 해서 미안허이. 내 몸 상태야 의사 선생님들이 괜찮다고 하니 괜찮겠지. 그보다 부탁 좀 함세.” “네. 말씀하십시오.” “병원 식구들에게 입단속은 단단히 하셨고?” “네. 철저히 함구하도록 조치했습니다.” “고맙네. 그리고 좀 있으면 우리 직원들과 내 자식놈들이 달려올 걸세.” “벌써 연락하셨습니까? 저희가 연락드려야 하는데….” “아니야. 손 멀쩡하고 입 멀쩡한데 누가 하던 무슨 상관인가?” “네. 그리고 손자분도 크게 다친 데는 없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몇 가지 검사 중인데 끝나고 바로 이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도 들었네. 그보다 말이야, 무리한 부탁인 줄 알지만 나와 내 손자, 중환자실로 좀 보내주게.” “네?” “사정은 나중에 듣고 우리 두 사람도 크게 다친 걸로 하자고. 수술도 했고 결과는 지켜봐야 한다, 뭐 그런 식으로.” 진 회장은 허허 웃으며 눈을 찡긋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아마 가장 먼저 달려오는 사람은 우리 이학재 실장일걸세.” “아, 네. 저도 그분 전화 받았습니다.” “그래. 자세한 사정은 그 친구가 잘 설명할 테니 내 말대로 좀 해 주게나. 내가 충분히 보답할 테니 부탁함세.” “아닙니다. 보답이라니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마우이. 참, 이 실장 오면 그 친구만 몰래 병실로 들여보내 주게나.” “네. 회장님.” 유 원장은 왜 이러한 부탁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이 난리가 조용하고 원만하게 끝나고 다시 조용한 일상으로 빨리 돌아가기만을 빌 뿐이다. * * * “할아버지!” “아이구, 내 새끼. 괜찮으냐?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좀 긁힌 게 전부예요. 저보다 할아버지는 어떠세요?” “의사가 괜찮다고 하더구나. 네 녀석 멀쩡한 거 보니 다행이다 싶다. 허허.”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았고, 내 볼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여긴 중환자실인데 왜…?” “며칠만이라도 조용히 좀 지내자꾸나. 그리고 내가 따로 조치해 놨으니 사고는 잊어라.” “하지만 심한 중상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기사님이면 어떡하죠?” “흥분하지 말아. 몸 상한다. 내가 다 알아서 하마. 수술 중이라고 하니 기다리자.” “네.” 참으로 천만다행이다. 내가 살아남았고 할아버지도 멀쩡하시다. 신은 내게 준 기회를 거두어 가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눈빛만 주고받았다. 사고 때 내가 할아버지를 보호하려 감쌌던 게 기억났다. 그 행동은 조금도 계산하지 않은 본능이었다. 난 순양을 차지하기 위해 기특한 손자 행세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끝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분은 나의 친할아버지이며 나는 친손자다. 그 이상은 없다. 지금에야 내 마음을 알았다.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참을 때 병실 노크 소리가 들리며 병원장이 들어왔다. “쉬시는 데 방해가 됐는지요?” “아닐세. 들어오게.” 병원장은 우리 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피 묻은 신분증과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지금 수술 중인 분의 지갑을 찾았습니다. 그 속에 있던 건데…. 혹시 아시나 해서 가져왔습니다.” 나는 피 묻은 명함에 적힌 이름을 보고 얼어붙었다. 사고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순양그룹 전략실 대리 김윤석」 ======================================== [102] 날라리 환자 2 이 자가 왜? 퇴근해서 집에서 편히 쉬고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수술대에 누워있다는 말인가? “누구냐? 아는 사람이야?” 놀란 나를 보며 할아버지는 내 손에 들린 명함을 낚아챘다. “뭐냐? 우리 직원이었던 게냐?” “아, 네. 제 전담 수행직원입니다. 오늘 새벽에 절 데려다줬어요. 퇴근하라고 했는데….” 말하다 보니 상황이 그려졌다. 김 대리는 내 말을 무시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성실함을 지킨 것이다. 내가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나를 수행한다는 직무를 다했다. 그렇다고 몸까지, 아니 목숨까지 던질 줄이야? 할아버지는 이 상황을 단번에 이해한 듯 병원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친구 살 수 있소?”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의사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다. 사람의 목숨을 놓고 장담하지 않아야 하는 게 의사 아닌가? “꼭 살려주시게. 어쩌면 우리 생명의 은인인 것 같으니….” “네. 회장님.” “혹시 내 말이 기분 상하더라도 오해는 마시게. 필요하다면 순양 의료원으로 옮기는 게 어떨까 하는데?” “지금은 무리입니다. 일단 수술을 끝내고 상태를 봐야 합니다. 자그마한 충격에도 쇼크가 올 수 있습니다. 엠뷸런스는 물론이고 헬기도 위험하니까요.” “좋아요. 그 판단은 병원장에게 맡기지. 하지만 뭐든 괜찮으니 필요한 거 있으면 주저 말고 말씀하시게. 의료진이든, 장비든 말일세.” “네. 수술 끝나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병원장이 물러나자 할아버지는 나를 위로했다. “네 녀석은 인복도 좋구나. 이런 자를 만나다니.” 위로하려고 말씀하시지만 와 닿지는 않았다. 나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사람, 현실감이 없었다. “나 대신 옥살이 한 놈은 많아도 목숨까지 내놓은 놈은 없었는데…. 넌 이 빚을 어떻게 갚아 할지 고민이겠구나.” “그 빚, 저만 진 게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구나. 나도 이 친구에게 단단히 빚졌구나. 허허.” 할아버지는 피 묻은 명함을 다시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좀 주무십시오. 적어도 수술 끝마칠 때까지는 할아버지나 저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 좀 쉬자꾸나.” 할아버지는 눈을 감았지만 나는 편히 쉴 수 없었다. 혹시라도 김윤석 대리가 수술실에서 살아나오지 못한다면 갚을 길 없는 빚을 영원히 지고 살아야 한다. 마음 한구석이 묵직하다. * * * 공주시에 접어든 이학재는 잠시 차를 세웠다. 앞서가던 경찰을 불러 그들의 도움에 감사했고 적절한 보답도 했다. 그리고 병원보다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공주경찰서로 가자.” 경찰서에 도착한 이학재는 성큼성큼 청장실로 들어갔다. 이학재의 명함을 받은 서장은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청장님 연락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도착하실 줄 몰랐습니다.” “워낙 다급해서 말이죠. 좀 세게 밟았습니다.” “현장에 출동했던 애들 입은 단단히 막아 뒀습니다. 그 점은 안심해도 될 겁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상황은 파악하셨습니까?” “현장 조사는 좀 더 해야겠지만 교통계 고참들 의견은 이렇습니다.” 경찰 서장은 A4 용지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피드 마크를 확인하니 회장님 차는 신호 대기였습니다. 그런데 교차로 좌측에서 트럭이 직진하다, 핸들을 꺾었는지 모르겠지만, 회장님 차로 돌진한 겁니다.” “그렇다면 회장님은 크게 다쳤을 것 같은데….” “그렇죠. 그런데 이때 회장님 후방에 차 한 대가 더 있었습니다. 그게 BMW였는데… 트럭과 회장님 승용차 충돌 전에 트럭을 그냥 쾅하고 들이받았어요. 아스팔트에 BMW의 급출발을 알 수 있는 타이어 자국이 선명합니다. 그 덕분에 트럭의 방향 틀어졌고….” 이해하기 힘든 표정의 이학재를 보자 서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장님 수행 비서 차량이라고 짐작했는데 아닙니까?” “혹시 BMW 운전자는…?” “중상이죠. 아무리 안전한 독일 차라고 해도 8톤 트럭을 그대로 갖다 박았는데 멀쩡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회장님 승용차는 2차 충돌이군요.” “네. 그나저나 순양 회장님 수행 비서들은 정말 대단하군요. 주군을 위해 목숨까지 초개(草芥)처럼 던지다니요. 감동했습니다.” “혹시 그 사람 신분이나 이름 파악했습니까?” “네. 지갑이 나왔습니다. 잠깐만요. 어디 적어뒀는데….” 서장은 책상 위에서 메모지 한 장을 들고 왔다. “전략실 김윤석 대리라고, 아십니까?” 당연히 모른다. 전략실이라는 부서의 역할만 잘 안다. 이건 천천히 알아보면 되고…. “혹시 트럭 운전사는…?” “그자도 부상이 심해서 치료 중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형사 하나 붙여뒀습니다. 어디로 내빼지는 못합니다.” 서장은 이학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께름칙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뇨. 이른 아침이니 밤새워 운전한 트럭 기사가 졸았겠죠. 그런 일 많지 않습니까?” “저희도 일단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조사는 더 해봐야….” “서장님.” “네.” 이학재는 손짓으로 서장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보다 먼저 트럭과 운전기사 정보 좀 주시겠습니까?” 서장은 사고 보고서를 내밀었다. “트럭 넘버와 기사 신상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조사는 좀 더….” “청장님이 다시 연락하실 겁니다. 그냥 덮어주세요.” “네?” “아시다시피 회장님의 사고는 여러 분야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피해자는 우리 직원이니 문제없을 겁니다.” 청장님의 지시고 순양그룹의 부탁이다. 더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귀찮은 일 하나 줄인 게 어딘가? “아이고, 순양그룹이 하는 일인데 어지간하겠습니까? 편할 대로 하십시오.” 여기서 해야 할 일은 끝났다. 이제 병원으로 가서 그쪽 입 막고 눈 막는 일만 남았다. * * * 병원장의 안내를 받아 이학재 실장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실장님.” 혹시 주무시는 할아버지가 깨어날까 싶어 목소리를 낮췄다. 이 실장은 침대를 힐끗 보더니 내 곁으로 다가왔다. “넌 좀 어때? 괜찮냐? 검사는 다 받았고?” “네. CT 찍었는데 큰 이상 없습니다.” “다행이다. 회장님도 괜찮으시지?” “네.” 이 실장은 여전히 할아버지 침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참, 김윤석이라고 아니?” “네. 제 수행원입니다. 전략실요.” “역시 그렇군. 그런데 이 친구가 왜 따라붙었지?” 조금은 미심쩍어하는 표정이다. 내가 김 대리의 마음을 되짚어 보며 설명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 충정이 대단하네. 덕분에 너도, 회장님도 목숨을 건진 것 같아.” “그렇습니까? 저도 그렇지 않을까 짐작만 하고 있었습니다.” “맞아. 이 친구가 달려오는 트럭을 들이받았어. 그 때문에 진로가 확 바뀌어서 멀쩡한 거야.” “왔나? 깨우지 그랬어.” 할아버지가 상체를 일으켰다. “회장님, 그냥 누워 계십시오.” 이 실장이 급히 달려가 부축했고 난 침대 등받이를 세웠다. “도준아. 옆방에 좀 가 있거라. 할애비는 이 실장과 할 이야기가 좀 있다.” “네.” 나는 조용히 병실을 나오며 문을 꼭 닫았다. “그래 조치는 다 취했나?” “네. 이곳 서장에게 사고 자체를 지우라고 했습니다. 원장 만나서 사고 내용이 새어 나가지 않게 다시 한 번 일러뒀고요.” “사고 내용은? 들은 게 있어?” 이학재는 경찰서장과 나눴던 내용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트럭 기사 뒷조사는 이미 지시했습니다. 파다 보면 뭔가 나올 겁니다.” “왜? 뭔가 있을 것 같나?” 진 회장이 눈을 빛내며 묻자 이학재는 조금 당황했다. “만약을 생각해야 하니까요. 회장님께서도 의구심을 지울 수 없으니 아직 가족분들에게 연락하지 않으신 거 아닙니까?” “내가 군산으로 간다는 건 아는 사람이 없다. 단순한 졸음운전일 수도 있어.” “트럭 기사가 깨어나면 확인해보겠습니다.” 짧게 대답하는 이학재는 승낙을 바라는 것 같았다. 진 회장은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잡음 나지 않게 조용히 처리해.” “네. 그런데 가족분들에게는 언제 연락할까요?” “일단은 기다려봐. 어차피 소문은 날 것이야. 병원에 사람이 한둘인가? 자네가 적당히 둘러대. 온천에 휴양한다고 해도 좋고.” “알겠습니다.” 이학재는 진 회장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회장님, 도준이를 데리고 군산으로 가시려고 했던 건 바로 그 뜻입니까?” 군산의 조선미곡창. 순양그룹이 출발점, 그리고 그곳에는 비밀이 있다. 아는 사람이 열 명도 채 안 되는 비밀의 장소. 박물관으로 변했지만, 그곳 지하실 역시 박물관이다. 진양철 회장의 개인 박물관이지만. 회장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그의 기억을 자극하는 사소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장소다. 그의 인생 역정을 차분히 돌아볼 수 있는 기억의 박물관. 그곳에서 장남 진영기와 차남 진동기는 각자 순양의 후계자 작위를 받았다. 오늘 진도준은 세 번째 작위를 받을뻔한 것이다. “그래. 왜? 도준이가 부족해 보여?” “아, 아닙니다. 어리지만 출중하다는 건 잘 압니다.” 이학재는 진도준의 비밀을 알고 있다. 수백억을 수조 원으로 만든 놈 아닌가? 재주도 놀랍지만 그걸 비밀로 하는 치밀함이 더 놀라울 정도다. “이미 두 아드님이 다녀갔고, 도준이는 세 번째입니까? 아니면….” 말끝을 흐렸다. 아들들을 지우고 손자로 방향을 틀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입에 담기에는 거북한 말이다. “그냥 세 번째라고 해 두자. 아직은….” “네. 회장님 뜻, 잘 알겠습니다.” 이학재가 고개를 숙이자 진 회장은 피식 웃었다. “아들놈들은 순양그룹을 잘 이끌어 달라는 말에 날 듯이 기뻐했어. 도준이 저놈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는데 못 본 게 아쉽구만.” “진중한 성격이니 담담한 표정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손사래 치며 거절했을 수도 있어.” “네? 설마요?” 순양그룹 후계자를 거절한다? 돈에 욕심 없든지, 겁먹었던지 둘 중 하나지만 진도준은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저놈이 얼마나 음흉한데?” 진 회장은 아예 낄낄대며 웃었다. “이제 갓 스물 넘은 놈이 목숨 던져가며 충성하는 부하까지 만들었다. 학재 넌 나 대신 죽을 수 있냐?” “이제는 못합니다. 나 죽기만 기다리는 마누라와 자식놈이 셋입니다. 내 돈 펑펑 쓰고 싶어 안달이지요. 억울해서 어떻게 죽겠습니까? 흐흐.” 진 회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도 나이 많이 먹었구나. 죽는 거 무서워하는 걸 보니 말이야. 허허허.” “섭섭하지 않으십니까?” “나 대신 옥살이 삼 년 한 네게? 내가 말은 안 해서 그렇지 늘 고맙게 생각한다는 거만 알아둬.” “말 대신 돈을 챙겨 주셨으니 회장님 마음은 잘 압니다. 하하.” 자신 앞에서 스스럼없이 말하는 이학재를 보니 새삼 세월이 많이 지났음을 느꼈다. 이제 자신의 시대는 저물었다. 다음 시대는 누구 손에 들어가는지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았다.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유 원장이 들어왔다. “실장님. 사람들이 찾아와서 실장님을 찾습니다.” “아, 바로 나가겠습니다.” 이 실장은 일어서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시큐리티 요원들 좀 불렀습니다. 전 나가서 일 보겠습니다. 좀 쉬십시오.” * * * 의료원 정문부터 중환자실로 통하는 입구 그리고 진 회장의 병실까지 정장 입은 사내들이 늘어섰다. 이들은 이학재 실장의 지시만 따를 것이다. 즉, 이 실장의 허락 없이는 가족도 진 회장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요원들의 철저한 장벽 안에서 난 오랜만에 푹 쉴 수 있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이놈아. 맥주 한잔쯤이야 괜찮지 않냐?” “할아버지. 우리 생명의 은인이 지금 생사를 건 수술 중입니다. 최소한 수술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기도하는 심정으로 기다려야죠. 술은 무슨!” 또 하나의 사실을 알았다. 건강한 노인이 병실 침대에 누우면 먹고 싶은 게 많아진다는 것을. ======================================== [103] 날라리 환자 3 불만 가득한 할아버지의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못들은 채 하며 수술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김윤석 대리가 수술대에 누운 지 16시간이 지났을 때 병원장과 수술 집도의가 밝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회장님. 방금 수술 끝났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입니다.” 성공적이라는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할아버지도 손뼉을 짝 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행이구먼. 정말 고생했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집도의의 손을 꽉 잡았을 때 그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갔고, 몰려오는 피곤 때문인지 손을 덜덜 떠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김윤석 씨는 회복실로 옮겼습니다. 다행히 내장 손상은 적어 회복은 빠를 것 같습니다. 경과를 지켜보다 면회 가능할 때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집도의는 겸손을, 병원장은 생색을. 역할은 분명하다. “내가 감사의 표시는 따로 하지. 피곤하실 텐데 어서 가서 푹 쉬어요.” “참, 회장님. 환자 보호자 연락은 따로 취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미 조치했을 거외다. 지금쯤 가족이 이쪽으로 오고 있을 거요.” 두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병실을 나가자 나는 큰 숨을 내뱉었다. “참으로 다행이지 않으냐?” “네. 정말 평생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갈 뻔했습니다.” “평생은 아닐 게다. 허허.” “네?” “은혜는 쉬이 잊고 원한은 오래 가는 게야. 인간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친구가 급하다고 해서 빌려주고 못 받은 돈은 평생 잊지 않지만, 다 써버린 빌린 돈은 언제, 누구에게 빌렸는지 기억도 안 나는 법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혜를 잊지 않도록 그 기억을 끝까지 간직하려고 애쓰는 것 또한 인간 아닌가? 할아버지는 심각한 이야기를 그만두고 다시 술타령을 시작했다. “이제 술 한잔해도 되겠지? 어떠냐?” “네. 수술 성공 축하주 마셔야죠. 뭐 드시고 싶으세요?” 할아버지는 입맛을 다시며 아주 잠깐 생각하시더니 가볍게 손뼉을 쳤다. “우리 오늘 먹은 게 없구나. 든든한 걸로 먹자. 닭백숙하고 동동주 한잔할까?” “병원에서는 젖은 닭이 아니라 튀긴 닭이 제격이죠.” “통닭?” 할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늙은 분이니 기름기 넘치는 것이 내키지 않으신가 보다. “그럼 백숙이랑 치킨 둘 다 먹죠. 대신 술은 가볍게 맥주 한 캔 하는 걸로 하시죠. 동동주는 너무 무겁습니다.” 병실 밖을 지키는 직원에게 배달을 부탁했다. 백숙 때문인지 한참 후에나 음식이 도착했다. 밤 10시가 넘었는데 어디서 백숙을 구해오는지, 대단한 사람들이다. 병실로 가져온 치킨을 본 할아버지는 눈만 껌뻑거렸다. “이게 뭐냐? 뭔 통닭이 거무죽죽해?” “간장 양념 치킨입니다. 혹시 처음 보세요?” “뭔 놈의 닭에 이런 장난질을. 간장에 닭을 빠트린 게냐?” “이거 별미에요. 맛이라도 보시겠어요?” 할아버지는 내키지 않은 듯 손을 내저었다. “됐다. 너나 실컷 먹어라. 난 젖은 닭 먹을란다.” 캔 맥주로 건배하고 각자의 닭의 뜯기 시작했다. 하지만 짭짤한 내음이 병실에 퍼지자 할아버지는 결국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거 하나 줘봐라. 냄새가 참….” 닭 날개 하나를 웃으며 내밀었다.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호기심으로 지켜봤지만 역시나였다. 짭조름한 맛이 혀를 자극하자 표정이 변했다. 건강을 생각해서 자극적인 음식을 피했으니 지금의 맛은 새로운 세계일 것이다. “도준아.” “네.” “바꿔먹자.” 역시. 맥주 한 잔 뒤의 치킨 맛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할아버지의 표정은 이미 어린애처럼 변해 있었다.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세요. 소화 잘 안 돼요.” 양념치킨을 내밀자 백숙 그릇이 내 앞으로 왔다. 역시. 백숙과 맥주는 조합이 별로다. * * * “아픈 척 그만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지? 누가 시켰나?” “다, 당신들은 누구요?” “피해자 가족이다. 왜?” “서, 설마…. 도도, 돌아가셨습니까?” 트럭 운전사는 정장 차림의 사내 셋이 풍기는 압박 때문에 사색이 되었다. “아직 몰라. 그보다 듣고 싶은 말이 있어. 트럭으로 들이받으라고 시킨 사람 있지?” “아, 아닙니다. 정말 사고였어요. 밤샘 운전하다 깜빡 졸은 것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믿고 안 믿고는 우리가 판단해. 사실대로만 말하면 여기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끝나고,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다 싶으면 당신 인생이 끝나.” 트럭 기사는 갑자기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털썩 꿇었다. “제발 선처를 부탁합니다. 요즘 일거리가 너무 없어 빈 차로 올라와야 했습니다. 기름값도 안 빠지는 일이라 울화통이 터저 저녁 먹으며 딱 소주 반병 마셨습니다. 취기가 올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트럭 기사는 아예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이 광경을 말없이 지켜만 보던 이학재 실장은 슬그머니 빠져나오며 뒤따라 오던 비서에게 말했다. “끝까지 족쳐봐. 뭐라도 건지면 즉시 보고하고.” “네. 실장님.” 눈물까지 보이는 트럭 기사의 말은 그럴 듯했으나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저놈의 말은 좀 어색하다. “참, 사고 낸 놈이 피해자의 상태를 처음 확인할 때 죽었습니까? 많이 다치셨습니까? 이렇게 묻지 않나? 돌아가셨습니까? 이렇게 묻나?” “음…. 글쎄요. 위압감을 느끼니까 저절로 존대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래? 알았어. 가서 일봐.” 허리 숙이는 비서를 뒤로하고 이학재는 진 회장의 병실로 올라갔다. “식구들이 왔다고?” “네. 김윤석 대리의 아내와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걱정 덜어드리고, 가까운 곳에 좋은 숙소 하나 마련해 드리지?” “호텔 하나 잡아뒀습니다. 그리고 병실 하나도 비워뒀고요. 또 옆에서 잔심부름해줄 직원 한 명도 붙여줬습니다.” “잘했어.” 진 회장은 이학재 실장의 세세한 조치가 만족스러운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회장님.” “응.” “아직 제가 회장님 현황을 알리지 않았는데, 차라리 사고 내용을 알리는 게 어떨까 합니다.” 진 회장은 이학재의 의중을 알아챘다. “반응을 살피고 싶다?” “네. 분명 누군가는 움직일 겁니다. 만약 사고사가 아니라 계획이었다면요.” “자네는 이것이 단순한 사고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구먼.”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도 중환자실로 옮기신 이유가 의심 아니었습니까?” 머리 숙인 이학재를 보며 진 회장은 나지막이 한숨을 흘렸다. “자네 장단에 춤을 춰 보지. 그렇게 해. 덕분에 몇 주는 여기서 쉬게 생겼네.” “도준이에게도 말하겠습니다. 눈치 빠른 애니까 알아들을 겁니다.” “그래. 아무튼, 난 여기서 푹 쉴 테니 자네가 우리 애들 병실로 들어오는 건 잘 막아야 해.” “네. 회장님 쉬시는 데 불편함 없도록 처리하겠습니다.” * * * 병원으로 가장 먼저 달려온 건 도준의 부친인 진윤기였다.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가 가장 빨리 움직이는 건 어쩔 수 없다. “형님!” 사색이 된 진윤기는 중환자 병실을 막아선 이학재를 발견하고 크게 부르며 뛰어왔다. “도준이는요? 괜찮습니까? 크게 다친 겁니까?” “진정해. 도준이는 괜찮아. 지금 회복 중이라니까 안심하고 기다려.” “그럼 아버지는요? 아버지도 괜찮으시겠죠?” 이학재가 대답하기 난처한 모습을 보이자 진윤기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윤기야! 이 실장!” 뒤이어 달려온 두 사람은 바로 진영기 부회장과 차남 진동기 사장이었다. 이학재는 병원이 소란스러워지는 걸 막기 위해 회장의 아들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오늘 사고와 그간 처리한 일들을 자세히 이야기해주자 진윤기가 소리쳤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애를 데리고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군산의 의미를 모르는 진윤기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윤기야.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큰형이 소리를 빽 지르자 진윤기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은 아버지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 “회장님은 지금 수술 끝내고 회복실에 계십니다. 의사 말로는 하루 정도 지나야 결과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학재는 두 아들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을 빛냈다. “촌구석 병원에서 이러고 있을 수 없어. 옮기자. 순양 의료원, 아니 최고 의사들 전부 부르고….” “부회장님. 지금은 지켜봐야 합니다. 약간의 충격이라도 받으면 위험해요. 좀 더 두고 보다가 괜찮을 때 서울로 모실 겁니다.” “그럼 이대로 손가락 빨면서 기다려야 해?” 흥분한 진영기와 달리 진동기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 실장님. 의사 소견은 어떻습니까? 뭐라고 해요?” “그들도 장담은 못 하더군요. 48시간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세 아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탄식만 내뱉었다. 이학재의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그들의 표정과 손가락 움직임까지 하나하나 살폈다. “이 실장. 연락받았으면 왜 즉각 보고하지 않았지? 도대체 이게 뭐야? 자식인 우리가 한나절 지나서 안다는 게 말이 돼?” 진영기 부회장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지만, 이학재는 차분함을 잊지 않았다. “회장님 지시 사항입니다. 회장님 신변에 변고가 생겼을 때의 행동 지침을 따랐을 뿐입니다. 섭섭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부회장은 깍듯이 머리 숙이는 이학재에게 뭐라 할 말이 없어 침만 꿀꺽 삼켰다. 아버지 지시라는데 어쩔 것인가? “참, 도준이는?”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건지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진동기 사장이 동생을 향해 물었다. “도준이는 괜찮습니다. 회복 중이라네요.”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전 상황 체크 좀 해야겠습니다. 보고할 상황이 발생하면 즉각 보고하겠습니다.” 유난히 보고라는 말에 힘을 준 이학재는 병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진영기 부회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노려볼 뿐이다. * * * 진 회장 병실을 다시 찾았을 때 문 앞을 지키던 직원이 말했다. “실장님. 회장님은 지금 안 계십니다.” “뭐? 어디 가셨어?” “재검사할 게 있다고…. 따라오십시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학재는 직원의 뒤를 쫓았고 도착한 곳은 MRI 검사실이었다. “아, 실장님.” 원장이 이학재를 발견하자 복도로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아닙니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고요. CT 결과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다시 한 번 체크하는 겁니다. 회장님도 흔쾌히 승낙하셔서 말이죠.” “큰일은 아니라는 거죠?” “그렇습니다. 만에 하나라는 게 있어 명확히 하려는 것뿐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이 실장을 향해 병원장은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가족분들이 도착한 것 같던데요?” “제가 차단할 테니 병원은 조용할 겁니다. 아, 혹시 회장님 상태를 확인하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만 해 주십시오.” “네. 회장님도 말씀하셨으니 믿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추후에 문제만 생기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이때 검사를 끝낸 진 회장이 걸어 나왔다. “애들 왔다면서?” “네. 모두 걱정이 많습니다.” “그렇겠지. 걱정하는 이유는 제각각이겠지만.” 진 회장이 피식 웃자 이학재는 주변에 귀가 많음을 상기시키듯 눈짓을 보냈다. “가자. 병실에서 이야기해.” “네.” 돌아서는 두 사람을 향해 병원장이 말했다. “결과 나오는 대로 곧 찾아뵙겠습니다.” 진 회장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 [104] 진짜 환자 1 “형님.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진동기는 진영기 부회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나도 묻고 싶은 게 좀 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진윤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들. 여기까지 와서 꼭 이러셔야 합니까? 그만 좀 하시죠.”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다.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둬라.” 진동기는 동생의 어깨를 툭 치고 작은 공원처럼 꾸며진 휴게소로 걸어갔다. 서늘한 밤바람과 듣기 좋은 풀벌레 울음소리가 두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형님, 상기는요?” “유럽 출장 중이다. 아직 연락하지는 않았어. 아버지 상태가 심각해지면 알려야지.” “형님도 알고 계시죠? 저한테만 연락 왔을 리는 없고….” “그래. 들었다. 도준이 데리고 군산 가시는 길이었다는 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생각이 궁금한 거냐? 아니면 네 생각을 말하고 싶은 거냐?” “내 생각이 궁금하기나 한 거요?” “아니. 네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아니까 궁금한 건 없어.” 진영기의 서늘한 눈빛에 진동기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넌 지금 내가 사고 친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지? 지분 승계 작업 없이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돌아가시면 내가 가장 유리하니까 말이다. 도준이 같은 애와 푸닥거리할 일도 없고.” “형님이 가장 유리할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닌가? 지분 구조 다시 파악하려면 반년은 걸릴 텐데?” “난 장남이야. 아버지 돌아가시면 내가 맏상주다. 신문에, 뉴스에 내 얼굴만 나올걸? 누구나 생각할 거야. 당연히 내가 회장이 될 거라고 말이야. 그럼 주주들도, 기관도 당연히 내 편을 들어줄 테고.” 진동기의 얼굴이 구겨졌다. 없는 집 장남은 짐만 지지만, 있는 집 장남은 저런 프리미엄을 안고 있다. 초상집에 문상 오는 힘 있는 사람 모두가 맏상주를 찾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한다. 그룹 임원들도 그런 모습을 보고 나면 대세가 누군지 판단할 것이다. 장남은 확실하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그래서요? 정말 엄청난 짓을 한 거요?” 어렵게 묻고 싶었던 말이 쉽게 나왔다. 판을 깐 건 형님이니까. 진영기는 코웃음을 치며 동생을 흘겨보기 시작했다. “내 대답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말 돌리지 마쇼.” “아버지가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면 안타깝고 슬프기도 하겠지만, 나로서는 나쁠 것도 없어. 그게 내 대답이다.” 하긴, 아무리 멍청해도 이렇듯 허술하게 사고 칠 정도는 아니다. 우연이 겹친 사고라고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이긴 하다. “도준이는 어쩔 거요?” “신경 쓰여?”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고.” “알아서 해. 네 특기 살려봐. 자기 사람 만드는 거 잘하잖아.” 진동기는 형의 틱틱거리는 말투가 거슬렸지만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한 가지만 약속하쇼. 애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착한 척하지 마라, 인마. 도준이가 위협으로 다가오면 먼저 손 쓰는 건 내가 아니라 네가 먼저일 거다.” 굳은 얼굴로 말을 쏟아낸 진영기는 동생의 불룩한 상의 주머니를 가리켰다. “힘들게 끊은 담배, 다시 시작한 걸 보니 초조한가 보구나. 흐흐.” 진동기는 주머니의 담배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 * * 밖에서 아버지가 초조하게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할아버지의 장단에 맞춰 기다리는 게 내게도 나쁜 일은 아니다. 계속 신경이 쓰여 마음이 편치 않을 때 할아버지는 같은 것을 묻고 또 물었다. “저 애 이름이 뭐라고?” “옥주현요.” “눈 땡그란 저 애는?” “성유리.” “흠.” 할아버지는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거 참, 생각할 게 뭐 있습니까? 당연히 이효리라니까요. 얼굴, 몸매 전부 우월하잖아요. 다른 애들 압도하는 비주얼이라니까요.” “그런데 보기는 참 민망하구나. 다 큰 애들이 유치원 재롱잔치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저게 뭐하는 짓인지….” 초록, 핑크색 옷을 입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보다. 걸그룹이 섹시와 청순이라는, 상반되지만 가장 잘 먹히는 컨셉으로 이십 년 넘게 우려먹는다는 걸 말씀드리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궁금하다. “좋다. 결정했어.” “누구예요?” “난 옥주현으로 할란다.” 할아버지는 실망한 내 표정을 보며 껄껄대며 웃었다. “왜? 여자 보는 눈이 낮아 보이느냐?” 데뷔 초의 멤버들은 아직 카메라 마사지를 거의 받지 못하다 보니 후광 효과가 없었다. 게다가 메인 보컬인 옥주현은 큰 울림통을 가지고 있다. 다른 멤버에 비해 눈길이 덜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놈아. TV에 나오는 모습과 실제 모습은 판이하게 달라. 내가 우리나라 미녀란 미녀는 다 만나봤어. 척 보면 견적 나온다.” 하긴, 할아버지가 만나자고 할 때 거절할 미녀가 몇이나 될까? 하지만 이건 다른 문제다. “그냥 할아버지는 옛날 분이라 미녀의 기준이 다른 거라고 치죠. 헤헤.” “어쭈? 못 믿겠다 이거냐? 좋다. 직접 보면 네놈도 이 할애비 말이 옳다는 걸 알게 될 거다.” 할아버지는 전화 수화기를 들려고 했다. “할아버지! 믿을 테니까 수화기 내려놓으세요.” 너무 놀라 전화기를 잡았다. “지금 여기로 부르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밖에서는 우리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몇인 줄 아세요?” “아차, 그렇구먼.” 할아버지는 아쉬운 듯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내가 서울에 올라가면 저 애들 꼭 부르마. 같이 밥이라도 먹으며 찬찬히 살펴보자꾸나. 네 녀석도 이 할애비의 심미안에 감탄할 게야. 으허허.” 할아버지는 정말 모든 걸 잊고 휴가를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루에 올라오는 주요 안건만 수십 개다. 매일같이 결정의 연속인 시간을 보내시던 할아버지가 걸그룹 멤버 중 누가 더 괜찮은지 결정하는 즐거운 고민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 편할까? 앞으로 최소한 일주일 이상을 이런 한가한 시간을 보내야 하니 할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늘 중요한 결정을 하는 할아버지의 운명은 잠시도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노크 소리와 함께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오는 병원장과 의사 한 명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 보였다. 나만의 착각이 아니다. 할아버지도 병원장의 얼굴을 보더니 대번에 미소가 사라졌다. “뭐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겐가? 혹시 김윤석 그 친구 상태가 더 나빠졌나?” “아, 아닙니다. 회장님.” 당황하는 병원장은 슬며시 동행한 의사에게 눈길을 보냈다. “김윤석 씨는 예상보다 훨씬 빠른 회복을 보입니다. 바이오 시그널만 보면 곧 의식을 회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안색이 안 좋으신가?” 외과의는 짧은 숨을 내쉬고 천천히 말했다. 행여나 자신의 말을 오해할까 싶어 아주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회장님의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처음 사고를 당하셨을 때 외상에 집중하다가 놓친 것이라 명확히 하기 위해 재검한 것인데… 아주 작은 종양을 발견했습니다.” “종양? 암이라는 말입니까?” 깜짝 놀란 내가 되물었을 때 할아버지는 침착하게 나를 진정시켰다. “도준아. 의사 선생 말씀 아직 안 끝났다.” “죄송합니다.” 머리를 가볍게 숙이자 의사가 말을 이었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크기로 봐서 초기인 것 같습니다. 수술로 완전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안색이 안 좋으신가?” “종양이 발생한 부위가 뇌입니다. 상당히 민감하죠.” 뇌종양이라는 말에 침착하게 듣던 할아버지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나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과거의 진짜 진도준이 왜 죽었는지는 여전히 알 길이 없다. 내가 아는 정보라고는 사고사가 전부이다. 이것은 아직 진행형이다. 내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사고를 당해 죽을 수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뇌종양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전생의 순양그룹 창업주 진양철은 78세의 일기로 사망한다. 바로 내년이다. 내 기억으로는 병사(病死)였다. 혹시 뇌종양으로 사망한 건 아닐까? 몇 시간의 전의 교통사고는 할아버지의 운명을 바꾼 건 아닐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는 가정하에서 말이다. “현재 전이의 흔적은 나오지 않았지만, 종양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악성인지 양성인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천만다행이죠. 일찍 발견했으니까요.” “내가 한 달 전쯤 종합검진을 받았지만, 종양은 없었다고 들었네.” 의사는 종양의 크기와 한 달이라는 시간을 맞춰보느라 잠시 생각에 잠긴듯했다. “음…. 그렇다면 악성일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수술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럼 준비하시게. 난 언제든 가능하니까 말일세.” 종양이 무슨 사마귀쯤으로 생각하시는 건가?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신다. 이런 할아버지의 반응에 당황한 건 오히려 의사들이었다. “여기서 말입니까?” “그래. 왜 문제 있나?” 병원장은 황급히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여긴 지방 국립의료원이라 아무래도 시설이 좀 떨어집니다. 완벽한 케어는 어렵습니다.” “또한 순양그룹 회장님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의료원은 아직 VIP 환자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면 실수가 나오거든요.” 원장과 함께 온 외과의도 현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순양그룹 회장이 수술이 잘못되어 변고라도 생기면 엄청난 변호인단이 이끄는 의료 과실 소송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방 의료원에서 이런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버겁다. 결국 병원을 옮겨야 한다. 할아버지는 두 의사를 잠깐 번갈아 보더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마음 편히 쉬려고 했는데 그것마저도 안되는구먼. 할 수 없지. 그럼 우리나라 최고의 의사는 누군가? 내가 저놈 장가가는 거 보고 죽으려면 오래 살아야 하거든.”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할아버지를 보니 마음이 아려왔다. “간단한 수술이라고 하잖습니까? 너무 염려 마세요.” 이런 식으로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최고의 외과의는 누가 뭐래도 명인대학병원의 장준혁 교수입니다. 그분이라면 악성이라고 해도 재발의 위험 없이 완벽한 수술을 하실 겁니다.” 순양의료원의 의사가 아님에도 눈치 보지 않고 말한다. 그만큼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는 뛰어난 의사라는 뜻이다. “알겠네.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 이 실장과 하면 될걸세.” 원장과 외과의가 물러나자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네가 복덩이는 복덩인가 보다. 여러 번 나를 구하는구나.” “네? 제가요?” “네 충복이 우리를 구했고, 넌 사고 날 때 나를 꼭 끌어안고 보호했지 않느냐? 그리고 이 사고 덕분에 하마터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갈 내 병을 미리 막을 수 있으니 얼마나 행운이냐? 허허.” 뭐든 나 때문에 운 좋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우리 할아버지,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다. “아니에요. 할아버지께서 오래 사실 운명인 거죠. 수술은 성공할 겁니다.” “그래야지. 아직 실물도 못 봤는데 실패하면 안 되지.” 실물? 설마…? “할아버지. 핑클 진짜 부르실 거예요?” “당연하지. 내가 네 녀석 여자 보는 눈을 키워놔야 하지 않겠느냐? 그게 이 할애비의 마지막 가르침일 것이다. 으허허.” 원장에게 연락받은 이학재 실장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호탕한 할아버지의 웃음과 내 미소를 발견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이 돼버렸다. ======================================== [105] 진짜 환자 2 “회장님. 혹시 검사 결과를 못 들으셨습니까?” “응? 들었지. 방금 왔다 갔어.” “그런데…?” 뇌종양 수술이라는데 왜 웃으시냐고 물을 수는 없는 일, 말끝을 흐리는 게 전부였다. “간단한 수술이라는데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 조기 발견이라고 하니 축하하는 게 맞지.” “그, 그렇긴 하죠.” “이 실장. 괜찮으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 자, 지금부터 대책을 세워보자고.” 할아버지는 아직 어벙벙한 표정의 이학재 실장을 가까이 앉혔다. “여기 의사가 명인대학병원 장준혁 교수를 추천하더군. 만나서 수술 날짜 잡자.” “네. 제가 직접 만나겠습니다.” “그리고 밖에 있는 애들에게는 추가 수술하는 걸로 말해두고.” “추가수술이라고 하면 많이 놀랄 텐데요?” “놀라고 당황하면 실수가 나오는 법이지.” 할아버지가 말하는 실수라는 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허겁지겁 주식 매입을 서두르는 누군가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도준이 넌 예서 더 있도록 해라. 그래도 우리 은인인 김윤석이가 깨어나는 건 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죠. 알겠습니다.” 할아버지가 서울로 올라가면 큰아버지들은 함께 갈 테니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멀쩡한 내 상태에 대한 적절한 변명거리도 만들어야겠다. * * * 강남 순양호텔 27층은 진서윤이 집보다 더 자주 잠을 자는 공간이다. 오세현은 구둣발 아래의 감촉부터 다른 두툼한 카페트의 쿠션을 느끼며 직원의 안내에 따라 객실로 향했다. 밤늦은 시간에 만나자고 하는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당부할 말도 있어 순순히 호텔까지 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몇 번이나 탄성을 내질렀던 그런 로열 스위트와는 전혀 다른 인테리어에 깜짝 놀랐다. 보통의 로열 스위트보다 더 화려해서가 아니다. 얼핏 보면 소박하고 심플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예술품의 경지에 오른 수억 원대의 가구와 소품들로 꽉 차있었다. 10억 원에 달하는 알리기에로 보에티의 작품이 정면에 걸려 있고 마리아 퍼게티의 2억 원대 탁자를 협탁으로 쓰고 있었다. 또한, 천장에 매달린 작은 모빌 장식품은 알렉산더 캘더의 30억 원대 예술품이었다. 이 객실을 장식하는 예술품 가치만 따져도 몇백억은 족히 나갈 것이다. 오세현이 입을 다물지 못할 때 원피스 차림의 진서윤이 침실에서 나오며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오셨어요? 늦은 시간인데…. 실례가 아니었으면 합니다.” “아닙니다. 아직 자정 전인데요. 그런데 최 시장님은요? 당선 축하 인사라도 드려야 하는데….” “서울시 인선 구성하느라 당과 미팅 중이에요. 오 대표님 노고는 우리가 충분히 압니다. 제가 대신 감사드릴게요.” 오세현은 진서윤이 권하는 거실의 소파에 앉으려다 엉덩이를 주춤했다. 수억짜리 가죽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려니 부담감이 확 밀려왔기 때문이다. “늦은 시간인데 어디 외출하십니까?” 그녀는 화장까지 했고 원피스는 집에서 걸치는 편한 옷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연락받았어요.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셨다는군요. 교통사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갑자기 전해 들은 소식이기도 하지만, 이런 사고 소식을 전하는 진서윤의 표정이 사소한 접촉사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회장님은 괜찮으신지…?” “수술 끝나고 중환자실로 옮겼다고 했어요. 어차피 빨리 달려가도 만나지 못하는 걸요, 뭐.” 세상에.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떠오르는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아버지가 혼수상태라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이런 냉정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제가 호들갑을 떨어야 하나요?” 오세현의 표정에서 그의 심정을 다 읽은 듯 진서윤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호들갑이 회장님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건 아니니까요.” “우리가 이렇게 살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슬픔보다 걱정이 앞서요. 전 아직 순양 지분 챙겨 놓은 게 거의 없거든요.” “진 씨 가문에 태어난 것 자체가 보통의 생활이나 감정은 지워야 하겠죠. 이해합니다.” “역시, 말이 잘 통하시네요.” 진서윤은 와인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일 때 오세현이 말했다. “평상시 모습이시니 이런 말씀드리는 게 좀 편하군요. 진 회장님께서 마포의 DMC 프로젝트를 욕심내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양보하라고 하시더군요.” “아버지가요?” 진서윤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네. 도준이에게 그런 의사를 전달하셨습니다.” “큭큭.” 진서윤은 웃음을 참느라 애썼지만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왜 웃으시는지? 이미 짐작하신 겁니까?” “아, 아뇨. 죄송해요. 호호.” 그녀는 마침내 웃음을 참지 못했고 한동안 깔깔대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오 대표님이 쓸데없는 걱정 하신 걸 생각하니 재미있어서요.” “쓸데없는 걱정이라니요?” “아버지는 그럴 생각 없으세요. 손자를 후계자로 만들 생각까지 하시는데 그 애 손에 쥔 걸 빼앗겠어요? 걱정 마세요.” 이 객실 곳곳에 걸린 엄청난 예술품에 놀랐고, 혼수상태의 아버지를 전혀 걱정하지 않는 딸에게 놀랐지만, 도준이를 후계자로 만든다는 말보다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오세현은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 난 곳이 충남 공주에요. 물론 도준이도 함께요.” “네? 도준이요? 그럼 도준이도 많이 다쳤습니까?” 깜짝 놀란 오세현이 벌떡 일어서자 진서윤은 얼굴을 찌푸렸다. “오 대표님. 그런 인간적인 모습은 나중에 보이세요. 지금은 이야기 나눌 시간도 부족해요.” 그녀는 오세현이 진정하기를 기다리지 못했다. “아버지와 도준이가 이대로 영영 일어나지 못한다면 오 대표님은 어떡하시겠어요?”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보자 보자 하니까….” “흥분하지 마세요. 전 지금 제안을 드리려는 겁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오세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도준이지만 많이 다쳤는지 걱정이 앞선다. 이것이 사람의 본성 아닌가? 아버지가 다쳤다는데 딸이라는 년은 제안이니 뭐니 하며 엉뚱한 소리를 해대니 밀려드는 짜증을 참을 수 없었다. “선장 잃은 순양 호라는 거대한 범선의 새 선장 자리를 나누자는 제안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진서윤은 오세현의 인간적인 반응에는 관심 없는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그룹 지분 승계 작업 없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저와 윤기가 각각 11%의 지분을 물려받아요. 합해서 22%죠. 물론 전체 지배 지분으로 계산하면 15%? 어쩌면 그 아래일 수도 있죠. 이미 큰오빠 둘이 조금 보유하고 있으니까요.” 이 와중에 지분 계산이라니. 도준이 말대로 이 여인이 알맹이고 남편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런데 순양자동차, 이젠 HW 자동차죠. 그 회사에는 지배 지분 17%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 합치면 적어도 30%는 되죠. 30%면 그룹 회장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충분한 기반은 가졌다고 봐야 해요.” “그래서요? 계속해 보세요.” 지분에 관심 생긴 건 아니다. 이 여인이 어디까지 가는지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절 도와주시고 제가 순양 호의 선장이 되면 괜찮은 계열사 10개 이상 드리겠습니다. 그 회사를 HW 그룹에 붙이면 오 대표님은 우리나라 재계 서열 20위 안에 드는 대기업 총수가 되시는 겁니다.” “맞장구 쳐 드리죠. 계산 잘못하셨습니다.” “네? 무슨 뜻인가요?” 갑자기 확 변한 오세현의 태도에 진서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기는 제 친굽니다. 혈육의 정도 별로 없는 누나보다는 저랑 더 가깝죠. 우리 둘이 손잡으면 진 사장님 지분은 하잘것없는 수준이에요. 반대가 돼야죠. 저나 윤기가 순양호의 선장이 되는 걸 도우세요. 괜찮은 계열사 10개, 아니 15개 드리죠. 이게 정확한 계산입니다.” 당황한 진서윤은 말을 못했다. 손에 쥔 지분으로 봐서는 오세현의 계산이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를 끄덕일 수는 없는 일! “역시 보통이 아니시네. 그렇게 나오시니 제가 숨겨둔 히든을 까야겠네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우리 엄마도 꽤 많은 지분을 상속받아요. 그걸 윤기에게 보탤 리는 없죠. 지금도 얼굴 쳐다보는 것조차 꺼리시니까요.” 막내를 없는 아들로 취급하던 진 회장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건 알고 있다. 그 이유가 진도준 때문이라는 것도 안다. 진 회장의 자리가 워낙 커서 잊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직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가?’ 오세현은 머리를 흔들었다. 현실성 없는 남의 집안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진도준을 이야기해야 한다. “아까 하던 말씀이나 마저 하세요. 도준이가 후계자라니요?” “그런 게 있어요. 아마도 교통사고 때문에 그 같잖은 의식은 진행하지 않았겠지만, 아버지는 도준이를 유일한 후계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후계자 중의 한 명으로 인정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진서윤은 눈꼬리를 치켜들었다. 경멸의 느낌마저 드는 모습이다. “도준이가 후계자 중의 한 명이 되면 더 강력해요. 도준이도 최소 10% 이상의 지분을 확보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도준이, 저 그리고 오 대표님이 손을 잡고 순양을 차지할 수 있어요. 전리품을 나눠 갖는 건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고요.” “도준이가 후계자 중의 한 명이 된다면 더더욱 진 사장님과 손잡을 필요 없는데요? 지분이 없잖습니까?” “이제 겨우 이십 대인 도준이가 순양을 물려받아요? 받아도 못 지킵니다. 왜냐하면 순양의 진짜 힘을 가지지 못하니까요.” 진정한 힘. 그게 뭔지 오세현도 잘 안다. 바로 나라를 주무르는 힘의 원동력이다. “순양의 엄청난 인맥 말이군요.” “눈치도 빠르셔. 맞아요. 아버지 전화 한 통이면 총리가 달려옵니다. 그 전화, 이십 대가 하면 총리가 달려올까요?” “회장님의 공식적인 발표나 인정이 없는 한, 진 사장님 전화에 달려올 총리도 없을 것 같은데요?” 오세현의 손은 그녀를 향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아직 이 나라는 여성에게 머리 숙이는 일은 드물다. 더는 밍기적거리기 힘든 오세현은 테이블을 가볍게 탕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관심사가 달라서 이야기를 더 할 수 없군요. 전 순양 호의 선장이 누군지 보다 도준이가 걱정되어서 빨리 가야겠습니다.” “어차피 저도 내려가니까 함께 가시죠. 차 속에서 이야기를 더 해도 되잖아요?” “아뇨. 전 따로 가겠습니다. 관심 없는 이야기를 계속 나누는 건 고역입니다.” 단호히 거절하는 오세현에게 조금은 화난 듯 진서윤의 표정이 일그러질 때 누군가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뭐? 서울?” “네.” 진서윤은 눈을 크게 뜨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혼자 가셔야겠습니다. 아버지는 서울로 옮기신다는군요. 아, 도준이는 공주의료원에 있으니 빨리 가보세요.” 진 회장이 서울로 온다는 게 어떤 뜻인지 알아채기 힘들었다. 상태가 더 나빠져서 오는 걸까? 호전돼서 오는 걸까? “오 대표님. 조만간 다시 만나고 싶어요. 마포 DMC는 이제 큰 이슈가 아닙니다. 순양그룹은 이제 태풍의 한가운데에 서 있어요. 제 말뜻 잘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진 회장이 위독하다는 뜻이다. 오세현은 도준이가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몸부림치느니 혼자만의 길을 가도록 설득하겠다는 생각도 굳혔다. 진도준은 순양그룹보다 더 큰 배의 선장이 될 자질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 [106] 진짜 환자 3 “도준아!” 멀쩡한 아들내미가 크게 다친 거로 알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는 이미 눈물까지 글썽였다. 혹시라도 내 몸에 이상이 있을까 싶어 끌어안지도 못하고 손만 덥석 잡는다. 아, 참으로 난감하다. 내가 먼저 확 끌어안아야 하나? 쑥스러워서 차마 그러진 못했다. “아버지. 괜찮습니다. 찰과상과 타박상이 전부에요.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정말이지? 어디 심하게 다친 데는 없지?”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검사했는데 아무 이상 없답니다. 그러니 걱정은 그만 하세요.” 이상 없다는 소리에 아버지는 나를 끌어안았다. 쑥스럽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아버지 등을 살짝 두드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의심스러운 정황은 싹 빼고 그간 벌어졌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단순한 교통사고. 그리고 수행하던 김윤석 대리가 하필 할아버지 차 옆에 있다가 변고를 당했다고만 말했다. 주군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조선 시대에나 있을법한 충성 미담은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관계의 포장일 뿐이다. 시답잖은 돈으로 사람 위에 군림하는 부모 형제의 행태에 질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 김윤석 씨는? 괜찮으시냐?” “네.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나고 회복도 빠르다고 합니다. 그분도 걱정 마세요.” 한 명을 달래놓으니까 또 한 명이 달려왔다. “도준아!” 오세현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을 때, 내 몸이 멀쩡하다는 걸 또 재방송해야 하는 게 더 힘들 것 같다. 힘든 재방송이 끝나자 오세현은 나와 아버지를 번갈아 보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들은 게 있는데…. 윤기 너도 알아야 할 것 같다.” “뭔데?” “도대체 공주는 왜 온 거냐, 도준아?” “이 자식아, 차근차근 말해.” 아버지는 나와 아버지 사이에서 두서없이 말하는 오세현에게 눈을 흘겼다. “군산 가는 길이었습니다. 군산의 조선미곡창에….” 새벽부터 움직인 이유와 조선미곡창이 가진 의미를 말하자 오세현이 무릎을 탁 쳤다. “그렇군. 그 같잖은 의식이라는 것이 바로 조선미곡창이었구먼.” “야! 넌 뭔 헛소리를 하는 거냐?” “어이구, 아버지 눈 밖에 난 아들은 뭐가 뭔지 모르겠지? 잘 들어. 회장님은 네 아들 도준이를 순양그룹 후계자로 생각하신다고. 단독 후보는 아니지만 말이다.” “뭐?” 아버지는 여전히 영문을 몰라 소리쳤지만, 난 모든 퍼즐을 맞췄다. 역시! 단순한 박물관도 아니었고 그냥 바람 쐬는 것도 아니었다. 난 세 번째 후계자다. 두 큰아버지 다음이 바로 나다. 별로 놀라지 않은 나를 보며 오세현은 미소 지었다. “이 음흉한 자식 좀 보게. 기다렸던 소식을 듣는 놈 같지 않아? 아니, 이미 예상한 것 같기도 해. 하하하.” 오세현의 웃음도 놀란 아버지를 진정시키는 데는 효과가 없었다. 아버지가 우리 대화에 참여하는 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삼촌,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 고모가 좀 보자고 하더구나. 나도 DMC 건을 이야기하려고 겸사겸사 만났는데… 사고 지점이 충남 공주라는 데서 이미 무슨 일인지 아는 것 같았어.” 오세현은 아버지를 힐끗 보고 웃었다. “네 아버지는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는가 보다. 흐흐.” “나도 알아.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 “뭐?” “네?” 역전이었다. 아버지는 얼굴을 조금 찌푸리며 말했고 우리는 놀란 채 입만 벌렸다. “영기 형, 동기 형 둘은 그곳에서 후계자에 임명됐어. 말 그대로 유치한 의식이지. 순양그룹의 역사, 당신의 역사를 보며 아버지는 말씀하시지. 이 역사를 네가 이어가라. 하하.” “너, 넌 어떻게 알아? 설마 너도…?” 오세현이 더듬거리며 물었을 때 아버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큰형이 다녀와서 자랑스럽게 말하더라. 오늘부로 내가 아버지의 후계가 됐다면서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근데? 왜 기대하지 말라는 거야? 도준이도 상속자라는 뜻이잖아. 어쩌면 순양의 1/3을 받을지도….” 자신 없는 오세현의 말에 아버지는 머리를 저었다. “지금 순양의 지분을 봐. 큰형님이나 작은 형님 둘 다 10% 미만의 지분을 물려받았어. 후계자로 임명한 지 거의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모르겠어?” 아버지의 질문은 나를 향한 것이었다. “도준아. 네 할아버지는 말이다. 어마어마한 욕심을 가졌어. 보통의 인간은 상상도 못 할 크기의 욕심이야. 당신이 가진 걸 남에게 주는 일은 끔찍이도 싫어하시는 거야. 자식이라고 예외는 아냐.” 일견 수긍할 면도 있지만, 꼭 맞다고 할 수는 없다. 아버지가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내가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다르다. 상속자는 정했으나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믿음직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이 순양의 역사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 불안한 것이다. 할아버지의 욕심은 아버지 말대로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그 욕심보다 더 큰 바람도 있다. 바로 순양의 번영이다. 큰아버지 두 분이 왜 20년 가까이 겨우 10% 미만에 불과한 상속자가 됐을까? 바로 순양의 번영을 기대하기에는 10% 미만의 기대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이유라고 믿는다. “아버지. 기대가 없으면 뭐든 감사하기 마련입니다.” “무슨 뜻이지?” “제가 순양의 후계자 운명은 아닌가 보죠. 보세요. 하늘이 거부하는 것처럼 사고 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상속 지분이 쥐꼬리만 하더라도 고마울 뿐이죠.” 웃으며 말하는 내 모습을 보며 두 분은 완전히 다른 표정을 보였다. 순양을 노리는 내 본 모습을 잘 아는 오세현은 겸손한 척 내숭을 떠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고, 욕심내지 않은 나는 보는 아버지는 기특한 듯 머리를 끄덕였다. * * * 명인대학 병원 VIP 병실은 호텔을 연상할 만큼 호화롭다. 비록 사립대지만 의대만큼은 명문이라고 알려진 대학이니 돈 많은 환자들이 줄을 이었고, 그들은 특별한 대접을 받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VIP 병실은 그에 걸맞은 모습이며 호텔 특실보다 더 비싼 요금을 받는다. 진 회장은 비밀리에 이 병실로 들어왔고 병원장이 그를 직접 맞이했다. “원장 우용길입니다.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회장님.” “영광은 무슨…. 내 머릿속을 들여다볼 사람인데 잘 봐주시오.” “회장님 머릿속은 제가 아니고 우리 장 교수가 자세히 볼 겁니다. 기업 정보는 보지 못하지만, 종양은 그 뿌리까지 확인하고 깔끔하게 제거할 겁니다. 하하.” 우용길 원장 곁에 서 있던 장준혁 교수는 허리를 숙였다. “공주의료원에서 보낸 CT는 다 확인했습니다. 발견하기 어려운 건데 그쪽에 굉장한 분이 계셨네요. 운이 좋으셨습니다.” “내가 원래 운이 좋다오. 그런데 하나만 물어봄세.”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그 몹쓸 종양이 언제부터 내 머리에 자리 잡았다고 보는가?” “조직 검사하기 전에는 뭐라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기에 단지 크기만으로 짐작하는 건….” “장 교수 짐작이나 생각만 말하면 돼. 따지자고 하는 말은 아니니까 말일세.” 곤란한 듯 잠깐 주저했지만, 조심스레 말할 수밖에 없다. 단순한 질문이지 않은가? “한 달은 넘었고 두 달은 지나지 않았습니다.” “….” 진 회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학재 실장이 입을 열었다. “수술 후 재발은 없겠죠?” “책임지고 깔끔하게 제거하겠습니다. 수술 후유증도 최소한으로 해서 회장님께서 빠른 시일 내 집무실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우이. 혹시 순양 의료원도 싫지 않다면 원장 없을 때 내게 슬쩍 알려주게. 외과 과장으로 모시지. 으허허.” 느닷없는 진 회장의 인재 헌팅에 원장과 장 교수는 당황해서 입을 열지 못했다. “우리 장 교수가 최고의 외과의라고 소문났더구먼. 알다시피 난 1등 주의자야. 최고 외과의가 대학병원에 있으면 안 되지. 내가 국내 최고의 대우를 해 줌세. 물론 명인 의대에는 기부금도 주고. 사람 뺏어 오면서 입 싹 닦는 그런 철면피는 아니라오.” 감정을 감추려 해도 힘든 게 좋은 소식이나 나쁜 소식이다. 장준혁 교수는 외과 과장, 최고의 대우라는 말에 터지려는 미소를 막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고, 우용길 원장은 스타급 외과의인 장 교수가 병원을 옮기면 VIP 고객들이 전부 빠져나갈 것을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진 회장의 기부금으로는 빠져나가는 돈은 메꿀 수 있겠지만, 무너지는 명성은 바로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뭐, 천천히 생각하시게.” 미소 띤 진 회장에게 두 사람은 허리를 숙이고 병실을 나갔다. 단둘만 남자 이학재가 입을 열었다. “회장님.” “그래.” “사장들과 임원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벌써 소문났어?” “아닙니다. 외부에 교통사고가 알려진 건 아니고….” “자식놈들이 들쑤셨구만.” “네. 각 회사가 보유한 다른 계열사의 주식 현황을 파악하느라 모두 미친 듯이 날뜁니다.” “이번 기회에 정확히 알 수 있겠네. 두 아들놈 뒤에 줄 선 사장들이 누구누군지 말이야.” 진 회장의 수술이 끝나면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 같았다. 진 회장이 원하는 것은 후계자인 두 아들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사장이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충성해야 앞으로 진 회장이 지명하는 후계자에게도 그 충성이 전달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혹시 외부 투자자에게도 손을 뻗친 놈이 있나?” “아직은 없습니다. 외부에 알려지는 건 아무래도 조심하기 마련이죠.” 이학재는 또 한 번 진 회장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두 아드님은 이번 사고와 무관한 것 같습니다.” “어째서?” “두 분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뭐라고 하디? 내가 빨리 죽기를 바라던가?” “아닙니다. 적어도 회장님께서 이 상태로 돌아가시면 후계 구도가 흔들린다는 걸 두 분 다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룹 지배구조가 살얼음판이라는 걸 아는 걸 보면 아예 돌대가리는 아니네. 그건 다행이다. 흐흐.” “의심스러운 상황이긴 하나, 우연한 사고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건 좀 더 확인해 보면 될 테고, 그보다 이 실장.” “네.” “저 장준혁 교수라는 자의 뒤를 좀 캐봐.” 이학재는 진 회장의 생각을 금방 알아챘다. 조금 전 장준혁 교수의 스카우트 제의는 농담이 아닌 것이다. “뒷조사해서 약한 고리가 뭔지 알아봐. 돈으로 움직이지 않을 정도의 의리 있는 놈이라면 약점이라도 찔러서라도 데리고 와서 순양 의료원에 앉혀.” “표정을 보아하니 돈과 자리라면 잽싸게 우리 순양 품으로 올 것 같은데요?” “그렇게 보이긴 해. 하지만 저런 놈은 다른 곳에서 더 큰돈과 더 높은 자리를 주면 우리 품으로 달려온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날아가 버릴 놈이야. 품고 있으려면 빠져나갈 수 없게 칼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지.” “네. 싹 뒤져서 먼지 좀 찾아내겠습니다.” 이학재 실장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리고 저녁에 순양 의료원 원장 좀 데리고 와.” “원장을요?” “그래. 확인할 게 있어.” “혹시 종양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래. 지방 의료원에서도 찾아낸 종양을 순양 의료원에서 발견 못 했다면 전부 모가지 날려야지.” “네, 회장님. 조용히 불러오겠습니다.” 진 회장의 딱딱한 표정은 그뿐만이 아닌 것 같았지만, 이학재 실장은 군말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 [107] 깨어난 환자 1 그날 저녁, 순양 의료원의 병원장은 갑자기 방문한 이학재 실장의 설명을 들었을 때 온몸의 기운이 쫙 빠졌다. 회장님의 뇌종양을 놓쳤다는 것은 순양 의료원 수뇌부가 전부 짐 싸서 집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실책이다. “아무튼, 회장님의 종양은 함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지난달 정기 검진하셨다고요?” “아, 네.” “그 자료 전부 챙기십시오. 확인도 해야 합니다.” 병원장은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검진자료를 챙겨 들었을 때 그 자료 속에 뇌종양의 흔적이 하나도 없기를 바라며 명인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진 회장의 병실 문을 열었을 때, 그가 본 진 회장의 표정은 밝았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심스레 권했다. “회장님. 지금이라도 순양 의료원으로 옮기시는 게 어떻습니까? 우리 외과도 장준혁 교수 정도의 실력자가 많습니다.” “이 친구야. 내가 우리 의료원을 못 믿어서 여기 온줄 아나? 의료계에서 하도 장준혁, 장준혁 노래를 부르길래 스카우트하려고 온 거야. 기다려 봐. 내가 그 친구를 자네 품에 넣어줄 테니 잘 쓰라고. 허허.” 이 미소와 이 웃음에 속으면 안 된다. 병원장은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진 회장의 칼날을 대비해야 했다. “그런데 말일세, 종양은 어떻게 된 건가? 한 달 전에만 해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역시, 책임을 묻는다. 여기서 실수하면 끝이다. 명인대학병원으로 올 때 순양 의료원의 의사들은 끊임없이 문자를 보냈다. 아무리 확인해도 종양은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들이었다. 그들의 실력을 믿는 수밖에 없다. “말씀드리기는 송구합니다만 한 달 전에 종양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급성 종양인 듯합니다. 아직 CT를 확인하지 못했으니 뭐라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종합검진 때는 분명히 없었다는 말이지?” “네. 회장님. 수십 명의 닥터들이 철저하게 검사하고 확인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결백을 주장하는 죄인 같은 모습을 보이자 진 회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이 사람아. 내가 뭐라 그랬나? 이건 그냥 확인하는 것뿐이야. 거 참, 괜히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군.” “죄, 죄송합니다.” 거듭 머리를 숙였지만 이미 늦었다. 회장님의 심기는 뒤틀려버렸다. 당연히 축객령이 떨어졌다. “이만 가보게. 난 좀 쉬어야겠어. 아 참. 내가 이곳에서 수술한다는 사실은 자네만 알고 있게. 무슨 말인지 잘 알겠지?” “아, 네. 회장님.” 의료원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돌아가고 이학재 실장은 장준혁 교수를 데리고 병실을 찾았다. “오, 장 교수. 나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느라 번거롭지?” “아닙니다. 회장님. 담당의가 꼭 해야 할 일입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래, 혹시 확인했나?” “네.” 장준혁 교수는 두꺼운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순양 의료원의 검사 결과는 다 확인했습니다만 뭐라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전 종양을 찾기 위해 들여다봤고, 순양 의료원 선생들은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했을 겁니다. 보는 방법이 다르죠.” 같은 의사로서 변명을 대신해 주는 것인지, 사실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채기 힘들다. “음…. 그렇기도 하겠구먼.” “네. 저 역시도 종양의 존재를 몰랐다면 이상 없음이라는 판단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있긴 하나?” “네. 한 달 전이지만 아주 미세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변이는 한 달 전부터 시작됐다고 봐야 합니다.” 진 회장이 가볍게 머리만 끄덕이고 별다른 말이 없자 장 교수는 조심스레 의견을 더 내놓았다. “혹시 이 일로 순양 의료원 의사들을 질책하시는 건 아니시길 바랍니다. 그들의 실수도, 무능도 아닙니다.” 순간 진 회장의 날카로운 눈길이 장준혁 교수의 미간에 꽂혔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우리 식구 일이니까 말이야.” 매서운 눈길과 불편한 표정에 장 교수는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그가 다시 머리를 들었을 때 진 회장은 어느새 온화한 표정이었다. “그건 그렇고…. 어때? 생각해봤나?” “네? 아, 아직…. 일단 가족과 상의도 해야 하고 명인대와의 인연도 고려해야 해서….” 머리를 슬쩍 긁는 모습을 보며 진 회장은 피식 웃음을 보였다. “몸값 올리려고 그럴 필요 없어. 이미 말했잖나?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고. 그리고 사내대장부 앞길은 혼자 가는 법이야. 누구에게 물어본다는 겐가?” 장준혁 교수는 진 회장의 말을 새겨듣는 듯한 표정을 보이다 다시 머리를 숙였다. “좋은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늦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여유를 보이는 장 교수가 물러가자 진 회장은 이학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해? 고의는 아닌 것 같지?” “장 교수 말에 따르면 실수도 아니지 않습니까? 누구라도 발견하기 어려웠다고 하니까요.” “그런 셈이긴 한데….” 진 회장의 의심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뇌종양을 숨긴 병원, 때맞춰 일어난 교통사고.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각본대로 일어나는 것 같다. 막연한 의심이긴 하지만 쉽사리 떨쳐내지 못한다. 이학재는 진 회장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옆에서 보는 자신도 아직 안개가 잔뜩 낀 의심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까 말이다. 의심이 지워지지 않으면 뒤를 쫓아야 하는 법, 두 사람의 의견은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하자. 원장에게 사람 좀 붙여놔.” “이미 조치했습니다. 어디 가서 나불대지는 않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입조심 하는지 감시하는 게 아니다. 누구와 접촉하는지 알아내려는 것이다. “그래, 그리고 두어 달 뒤에 이사회 열어서 해임해버려.” “자르라는 말씀이십니까?” 진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 찝찝해. 잘라.” “알겠습니다.” 단지 찝찝하다는 이유로 사람을 내치는 게 아니다. 의심쩍은 놈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틀 뒤. 진 회장은 종양 제거를 위해 수술대에 누웠고 신의 손이라는 장준혁 교수는 너무나 손쉽게 수술을 마쳤다. 이쯤 되니 더는 언론에 숨길 수 없었고 그룹 홍보실은 보도 자료를 돌려야 했다. 사실대로 알리지 않은 건 당연한 일, ‘뇌’라는 단어는 빼고 간단한 종양 제거 수술이었으며 건강에는 전혀 이상 없다는 걸 강조했다. 최대 광고주가 제공하는 보도 자료니 단어 하나 틀리지 않으려 노력했을 뿐 취재는 없었다. 괜히 병원을 서성거리며 진 회장 일가를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다.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던 자식들은 끝내 진 회장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는 절대 만나지 못한다는 이학재의 싸늘한 말을 듣는 게 전부였다. 진 회장에게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엉뚱한 짓을 하는 자식이 없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그는 병실에 누워있을 것이다. * * * 김윤석 대리는 수술이 끝난 지 열흘이 지났을 때 정신이 돌아왔다. 연락은 받았지만, 일단은 기다렸다. 나보다 수십, 수백 배나 가슴 졸였던 가족이 있다. 그들의 만남이 우선이고 그들의 울음이 웃음으로 바뀔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예의다. 다시 이틀의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가족이 없는 시간에 맞춰 김윤석 대리의 병실을 찾았다. 병실에 들어서자 깁스와 붕대로 온몸을 감싼 김 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감사합니다.” 머리 숙인 내게서 나온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김윤석 대리는 나를 향해 빙긋 웃을 뿐 다른 말은 없었다. “이틀 전에 깨어나신 걸 알았습니다. 곧바로 달려오고 싶었으나 가족과 시간 나누시라고 일부러 찾지 않았습니다. 이해하세요.” 여전히 미소만 보여 조금 불안해졌다. “혹시 말하는 데 지장 있습니까?” “아닙니다. 단어가 조금 헷갈리지만 괜찮습니다.” “궁금한 게 참 많지만, 천천히 물어보겠습니다. 당분간 안정을 취하세요.” 내가 꼭 쥐었던 그의 손을 놓자 웃으며 말했다. “실장님. 말씀하셔도 됩니다. 열흘이나 쉬었더니 입이 근질거리고 좀이 쑤셔요. 흐흐.” 나는 다시 그의 곁에 앉았다. “그럼 사고 당일의 이야기 좀 해 주시겠어요? 기억나는 대로요.” 그는 아직 온전한 정신이 아니다. 내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 근질거리는 입을 마음껏 열도록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전 회장님 수행 비서 차량이 뒤따르는 줄 알았는데 달랑 한 대만 움직이더군요. 실장님께서 퇴근하라고 하셨지만, 새벽에 퇴근하는 것도 모양 빠지는 것 같고….” 그의 얼굴에 겸연쩍은 미소가 어리더니 얼굴마저 약간 붉혔다. “사실 차를 바꿨잖습니까? 새 차 길들일 겸, 그리고 한번 밟아보고 싶기도 해서 따라갔죠. 새벽이니 도로는 뻥 뚫려 있을 게 뻔하니까요.” 나를 수행하기 위해 따라나선 게 아니다. 사심도 약간 들어있어 표정이 변한 것이다. “그랬군요. 차를 바꾼 게 여러모로 천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큰 사고가 났는데도 목숨은 건졌으니 말입니다.” 그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이번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실장님.” “네.” “사고 말입니다. 솔직히 제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트럭 달려오다 방향 튼 게 아니에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기다려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그렇게 보였습니다.” 사고가 아니라 사고로 위장한 것인가? 마음속에 숨어있던 께름칙함이 고개를 들었다. 누굴까? 이 의문은 두 개의 질문이다. 범인은 누구며 목표는 누군가? 할아버지도 이런 께름칙함 때문에 멀쩡하다는 걸 숨긴 건 아닐까? 의문을 뒤로하고 김 대리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참 어색합니다만 오해하지 마세요. 따지는 것도, 추궁하는 것도, 더욱이 의도를 의심하는 것도 아닙니다.” 잠깐 숨을 들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째서 희생하셨습니까?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 살아난 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가 몸빵 한답시고 트럭 들이받은 거요?” “네.” “음…. 일단은 차를 믿었습니다. BMW 7시리즈 세단이면 설마 죽기야 하겠냐는 생각이 있었고….” 내가 듣고자 하는 대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김 대리도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 짧은 순간에 나름대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이건 최고의 거래를 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다! 이런 생각 말입니다.” “거래? 아…!” “기억나시죠? 저와 신 팀장이 처음 실장님 사람이 되겠다고 했을 때 말씀하신 거 말입니다.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거래일 뿐이다. 실장님은 우리에게 풍족한 돈을 줄 것이고 우린 돈 받는 대신 뭔가를 제공해야 한다.” “네. 기억납니다.” 충성은 마음만 있으면 되지만 거래는 머리도 있어야 한다. 실력과 능력이 없다면 거래는 늘 깨지기 마련이다. 이들의 자기계발 동기부여를 위해 던진 말이었는데 이런 방식으로 풀어낼 줄은 몰랐다. “제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뒤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이 거래는 얼마짜리일까? 제가 거래 계약서 한쪽에 실장님의 생명, 인생을 적었는데 남은 곳에는 얼마를 적어야 거래가 성사될까?” 김 대리는 눈을 빛내며 내 얼굴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제 실장님께서 빈 곳에 적으십시오. 실장님의 목숨, 인생과 교환할만한 합당한 것을 말입니다. 흐흐.” 저 웃음 속에 담긴 여유. 당당한 말투. 절대 충성하는 머슴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사람, 단번에 커버렸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면 이렇게 되는 걸까? ======================================== [108] 깨어난 환자 2 나도 활짝 미소 지었다. 웃음에는 웃음으로 화답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가? 그리고 김윤석 대리는 더 이상 내 수행원이 아니다. 당당한 거래자 되어 버렸다. “어떤 걸 원합니까? 일시불로 받으실래요? 아니면 평생 할부로 받으실래요?” 내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을까? “네? 아, 이런…. 으흐흐.” 김 대리는 붕대를 칭칭 감은 상태라 웃는 것인지 찡그리는 건지 분간은 힘들었지만, 눈을 보니 알 수 있었다. “할부로 할랍니다. 적금은 회장님께 받으면 되니까요.” 아, 할아버지도 있었지. 난 이마를 탁 쳤다. 김윤석은 내 속뜻을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깜빡 잊고 있었던 것까지 계산에 포함했다. 뭐지? 사고 때문에 두뇌 회전까지 빨라졌나? “천천히 생각하십시오. 제가 일시불로 드린다면 김 대리 팔자가 서너 번은 바뀔 만큼 큰돈을 준다는 뜻이거든요.” “아뇨. 이미 결정했습니다. 할부로 받겠습니다.” 전혀 망설이지도, 고민하지도 않는다. 뭐지? 주관까지 확고한 사람으로 변한 건가? “진심입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아직 펑펑 돈 쓰는 재미를 모르거든요. 하지만 그 재미는 금방 시들해진다는 것쯤은 압니다. 실장님과 함께한다면 돈 쓰는 재미보다 더 큰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고마운 말이기는 하나 이것만으로는 내 사람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김 대리.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했던 말은 아직 유효합니다.” “무슨 말씀 말입니까?” “전 실력 없으면 제 곁에 두지 않습니다. 제 생명을 구해주신 건 그 무엇으로도 보답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압니다. 단지 돈이 있으니 돈으로 마음을 표시할 뿐입니다. 하지만 함께 걸어간다는 건 다른 의미입니다.” 김 대리는 내 말을 이해했는지 재빨리 말했다. “실장님과 함께할만한 실력과 능력을 갖춰나가겠습니다. 부족하다고 느끼실 때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물러나겠습니다.” 나는 손가락 세 개를 내밀었다. “세 번까지는 넘어가겠습니다. 아무리 큰 실수를 하더라도, 일을 망치더라도, 세 번의 기회는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네 번째 큰 실수를 저지르면 우리 인연은 끝입니다.” “그 세 번의 기회를 쓸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단단한 의지와 확고한 결의까지 보여준다. 이 사람, 하드웨어가 좋아 보인다. 학벌이라는 소프트웨어로 자신을 무장했지만, 성능이 따라가지 못하는 허당을 숱하게 보아왔다. 지식으로 극복하기 힘든 어려운 일을 당면했을 때 좌절하고 포기하는 놈이 어디 한둘인가? 비록 학력과 스펙은 떨어지지만 타고난 근성과 끈기로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보여주는 강인한 자, 나는 그런 사람이 좋다. 나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자, 이제 서울로 올라갑시다. 순양 의료원, 아니 명인대로 가야겠군요. 순양 의료원은 빨대가 많을 게 뻔하니…. 아무튼 완벽한 컨디션을 찾을 때까지 치료도 하고 재활도 합시다.” * * * 할아버지는 나를 보자 붕대를 동여맨 머리를 쓱 만졌다. “대현그룹 주 회장은 그룹 매출이나 주가보다 내 풍성한 머리를 가장 부러워했는데, 이제 날 보면 고소하다고 웃을 거다.”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날 때 더 풍성해진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만나지 마세요.” 할아버지는 내 손을 유심히 살펴보다 입이 쫙 찢어졌다. “그거 사온 게냐?” “술은 안됩니다. 그래서 치킨만 사 왔어요.” “냉큼 올려놓거라. 그 간장 양념이 왜 그리 생각나는지….” 순식간에 닭 한 마리가 뼈만 남기고 사라졌다. 맥주 한 잔이 아쉽다며 계속 투덜거리면서. “이 뼈는 네가 잘 치워라. 잔소리하는 놈들이 뭐 그리 많은지. 에잉.” “하도 조르셔서 사오기는 했지만, 퇴원하실 때까지 이게 마지막입니다.” “네놈도 잔소리냐? 됐다.” 할아버지는 시원하게 트림 한 번 하더니 물을 들이켰다. “그 친구도 깨어났다고?” “네. 고비는 다 넘겼고 이제 재활치료만 남았습니다.” “젊으니까 잘해내겠지?” “그래야죠.” “뭐…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고?” 흘낏 쳐다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주위에서 뭐라 해도 의심을 거두지 않은 분이니 내가 의심을 몇 줌 더 얹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컨디션도 아니고 해서요.” “왜? 아직 말이 어눌하더냐?” “아닙니다. 정신도 멀쩡하고 언어 장애도 없습니다.” 어차피 직접 만나보실 것 아닌가? 김 대리는 내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전달할 것이고 흑막 뒤에 누군가 있다면 할아버지는 꼭 잡아낼 것이다. “그럼 됐다. 나도 한번 만나서 고맙다는 말은 해야 하지 않겠냐? 우리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말이다.” 감사의 인사만 할까? 아니면 뭔가를 확인하실까? “그래야겠죠.” “그나저나 넌 어떡할래? 퇴원할 생각이냐?” “이미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제가 크게 다치진 않았다는 걸 아시니 병원에 뒹굴뒹굴한다는 게 더 이상합니다. 퇴원해야죠.” “음…. 윤기 그놈은 어디 가서 거짓말할 놈은 못되니 네가 병원에 누워있는 건 우습겠다. 그래라.” “네. 자주 오겠습니다.” “내가 중환자 행세를 하는데 네가 들락거리는 건 아닌 것 같다. 전화 통화나 하자.” “네.” 조금은 실망했다. 군산으로 날 데리고 갔던 목적을 지금이라도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설마 마음이 변한 건 아니겠지? * * * 진 회장은 김윤석 대리의 병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그의 프로필을 받아 쭉 훑었다. 자식들 뒷수발이나 하라고 뽑은 삼류다. 순양이라는 이름과 월급봉투의 두께 때문에 스스로 몸종을 자처하는 놈들이다. 게다가 입사 처음에는 영빈관 청소나 하던 놈인 거로 봐서는 삼류 중에서도 아래라는 이야기다. “이놈, 대단한 도박을 성공한 셈이구먼.” 서울대를 나오고 그룹에서 승승장구한 계열사 사장이 평생 벌고 모아도 가지지 못할 돈을 한 번의 도박으로 거머쥘 수 있게 생겼다.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일까? 호기심을 한껏 안고 김윤석 대리의 병실 문을 열었다. “회, 회장님.” 깜짝 놀란 김윤석 대리는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아직 깁스한 팔다리 때문에 버둥거리기만 했다. “아, 그대로 누워있게. 병원에서는 많이 다친 환자가 제일 어른이야. 괜히 이 늙은이 때문에 그럴 필요 없네.” 진 회장은 김윤석 대리 곁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늙은이 목숨 살리자고 젊은 목숨 던지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고마우이.” “아, 아닙니다. 회장님. 저보다 더 훌륭한 젊은이도 있었지 않습니까? 너무 마음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가? 내가 아니고 우리 도준이 때문에 그리한 건가? 허허.” “꼬, 꼭 그렇다기보다는….” 진 회장은 농담이라고 던졌지만, 말단 직원에게는 불편하고 어려울 뿐이다. 김 대리의 안색이 붉어졌다. “아냐. 고마워서 그래. 내 목숨 살린 거보다는 내 손자 구해준 게 더 고맙다네.” 진 회장은 잡은 손을 톡톡 치며 인자한 표정을 보이는 것으로 김 대리를 좀 더 편하게 만들었다. 편한 자리를 만들어야 진심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이 늙은이가 자네에게 큰 보답을 하고 싶은데… 말해보게 뭐든 들어줌세.” 목숨까지 각오한 이놈의 배포와 그릇을 보고 싶었다. 한 나라의 가장 큰 부자가 원하는 걸 물었다. 말하는 대로 다 들어줄 힘이 있는 사람이다. 김 대리가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진 회장은 기본적인 건 먼저 말해 버렸다. “집이나 애들 학비 같은 건 말할 필요 없어. 이미 강남 아파트로 이사했고 자네 자식들 교육은 전부 책임지겠네. 등록금은 물론이고 학원비 전부 줄 테니까 자네 자식들 공부는 여한 없이 시키도록 해.” 누구나 첫손가락으로 꼽는 가정의 안정은 꺼내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집과 자식 문제를 해결했으니 이제 삼류 인생이 뻔한 놈의 욕심을 보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아닐세.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조금 의외이기는 했다. 여전히 담담한 표정만 보인다. 진 회장은 대답을 재촉했다. “생명의 은인한테 돈만 입에 담아 나도 부끄럽네. 하지만 내가 자네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돈밖에 없으니 어쩌겠나?” “돈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 집 걱정, 자식 교육 걱정이 전부 아니겠습니까? 회장님께서 그 걱정을 덜어주셨는데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진 회장은 의외의 대답에 조금 놀랐고 당황했다. 수십억, 수백억을 달라고 해도 줬을 것이다. 침대에 누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김윤석 역시 그 사실을 안다. 그런데 원하는 게 없다? 지금은 인생 역전이 일어나는 순간이고 기회인데 그걸 차버려? 그 순간 김윤석 대리의 눈이 반짝이는 걸 놓치지 않았다. “허허, 거 참…. 세상에는 욕심 많은 놈 천지구먼.” 진 회장이 김 대리의 마음을 읽은 건 확실했다. 그의 얼굴은 홍시처럼 물들었고 입가에는 작은 미소마저 보였다. “돈밖에 없는 늙은이에게 돈이 싫다? 난감하구먼.” “회장님. 사실 저도 뭘 원하는지 제 마음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이 친구가! 나도 아는 걸 자네가 모른다고 하면 어쩌라고?” “사실입니다.” 진 회장은 한동안 김 대리를 내려다보다 아예 침대 곁의 의자에 앉았다. 이야기가 꽤 길어질 것 같다. “사람에게 평생 동안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겠지?” “네.” “자네는 벌써 두 번을 놓쳤네.” 김 대리는 지금이 바로 첫 번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벌써 두 번이나 놓치다니? 의미를 몰라 진 회장의 입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부모를 잘 만나는 거야. 있는 집 자식으로 태어나면 이미 꿈의 절반을 이룬 거나 다름없어. 자기만 잘하면 되니까. 자네 부모 돈 많은가?” “아닙니다.” “그럼 한번 놓쳤고, 두 번째는 뭔지 아는가?” “혹시 대학… 입니까?” 조심스레 묻자 진 회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옛날과는 많이 다른 세상이야. 이 시대는 바로 그 같잖은 대학이 기회야. 이 나라의 인맥은 대학에서 이뤄지네. 고향? 고등학교? 이딴 게 아냐. 대학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가장 좋은 장소이며 그 사람의 배경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는 곳이지.” 삼류대 출신의 김 대리가 이를 악물었다. 첫 번째 기회는 운이지만 두 번째 기회는 스스로의 노력이다. 자신은 그 노력을 하지 않았다. “서울대 떨어진 놈을 서울대에 갖다 놓으면 졸업하지 못할 것 같은가? 지방 국립대 학생은 따라가지 못할 만큼 서울대 공부가 어려울 것 같은가?” 진 회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럼 성공하지는 못하더라고 최소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네.” “전 이제 단 한 번 남았다는 뜻입니까?” “아니. 그 한번이 바로 지금이라는 뜻이야. 어떤가? 부모 잘 만난 놈도, 서울대 나와 앞날이 창창한 놈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돈을 주겠네. 이 정도면 만족하는가?” 이를 악물었던 김 대리가 돈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밑밥을 이만큼 던졌는데도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이 친구 보게. 사실이었구먼.” “네?” “내가 아니라 우리 도준이를 구하려고 뛰어들었다는 말, 그거 진심이었구먼.” “전 진도준 실장님을 모시는 사람이니까요.” 얼굴 붉힌 김 대리는 결국 머리를 끄덕였다. ======================================== [109] 깨어난 환자 3 “내 손자에게 자네 인생을 걸겠다…? 이게 자네가 원하는 건가?” “진도준 실장에게 제 인생을 의탁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과 함께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왜?” “네?” “뭐냐고? 하나뿐인 목숨까지 걸어가며 우리 도준이와 함께하고 싶은 이유가 뭐냐는 말일세?” 노려보는 진 회장의 눈 속에는 불꽃이 튀었다. 그 위압감에 김윤석은 움찔했다. 실수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진 회장이 가장 아끼는 손자다. 자신을 손자의 목숨을 구해준 걸 가지고 평생 붙어먹을 생각이나 하는 놈으로 오해한 건 아닐까? “저도 앞에 서고 싶습니다.” “뭐라?” “전 항상 그림자처럼 남의 눈에 띄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런 제 역할이 부끄럽습니다. 조금 전 제가 원하는 걸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저 자신을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고 당당히 앞에 서고 싶습니다.” “주제도 모르는 놈이 감히!” 앙다문 이 사이로 진 회장의 분노가 새어 나왔다. 김윤석은 설마 이런 반응이 나올 줄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손자를 잘 보필하라는 말이라도 들을 줄 알았는데… 진 회장의 분노만 자아냈으니 모든 기회가 다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너 같은 놈은 우리 도준이의 발목만 잡을 뿐이다. 일 머리 하나 없는 놈이 그 알량한 몸 한번 던진 걸로 우리 손자에게 찰거머리같이 딱 붙어 피나 빨아먹을 생각부터 해?” “회, 회장님. 그런 생각은 단 한시라도 해본 적 없습니다. 진도준 실장의 발목 잡을 일이 생긴다면 차라리 제 발목을 끊고 물러날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거동을 막는 깁스만 아니었다면 무릎이라도 꿇었을 것이다.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서 이런 결의를 말하는 처지가 억울할 뿐이었다. “시끄럽다. 네놈은 지금 이 순간, 세 번째 기회마저 네 손을 걷어차 버렸다. 너 같은 놈은 늘 그렇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 하는 어리석은 놈.” 진 회장은 벌떡 일어났고 분노를 터트릴 데가 없어 애꿎은 의자를 걷어차 버렸다. “이미 준 것은 다시 거두지 않으마. 네놈 몸뚱아리가 걸을 수 있게 되면 당장 쫓아버릴 것이야. 두 번 다시 도준이 주위를 알짱거린다면 알량한 네 목숨은 내가 뺏어버릴 것이다.” 협박에 가까운 경고도 잊지 않고 소리쳤다. “회, 회장님.” 김윤석은 병실을 나가는 진 회장의 다리라도 붙잡고 진심을 보이고 싶었으나 꼼짝할 수 없으니 뒷모습만 보는 게 전부였다. * * * “병원에 들락거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게 어제였어요. 혹시 양념치킨 때문에 전화하신 거라면 절대 안 됩니다.” 할아버지는 아침부터 전화해서 빨리 달려오라고 성화셨다. - 시끄럽다. 오라면 냉큼 올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수술한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울렸다. 재빨리 병원으로 달려가니 굳은 표정의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준아.” “네.” “네 녀석의 개가 되고 싶어 하는 놈이 있던데, 너도 알고 있느냐?” 느닷없이 던지는 질문에 당황했지만, 누구를 말하는지는 알았다. “김윤석 대리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놈.” “어제 만나셨군요.” “거금을 준다 해도 거절하더니 네 옆에 서고 싶다고 그러더구나. 혹시 너도 허락한 일이냐?” 실수한 걸까? 아직 새카맣게 어린놈이 벌써부터 사람이나 끌어모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건가? “조건부로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말이 왔는지는 모르지만, 시치미 떼기에는 이미 늦었다. “조건?” “네. 그자가 내 일을 망치더라도 세 번은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세 번이 넘으면?” “내쳐야죠. 제 목숨을 구했으니 세 번의 기회를 준 겁니다. 그 정도면 빚은 갚은 거 아닐까요?” “음….” 한동안 말이 없던 할아버지가 다시 말문을 열었을 때는 완전히 엉뚱한 말씀을 하셨다. “넌 개의 미덕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개요?” “그래. 사람들이 좋아하는 개 말이다.” “주인에게 충성하는 거 아닐까요? 충견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개 외에 충이라는 단어를 붙이지는 않으니까요.” “틀렸다.” 틀렸다니? 충성이 개의 미덕이 아니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충성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충성은 조건이 붙는다. 바로 올바름이다. 주인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충성이다. 그래서 주인에게 쓴소리도 마다치 않는 것이다. 주인이 올바르지 않은 길로 갈 때 앞을 가로막는 것도 충이며 방향을 트는 것도 충이다.” “올바르지 않아도 따르는 것, 그것도 충성 아닙니까? 맹목적인 충성이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그건 간신이고.” 어렵다. 충성이 아닌 개의 미덕이라…. 설마 사랑은 아니겠지? “개의 미덕은 헌신이다.” 아…!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희생도 마다치 않는 것. 충성과 다른 점은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그놈이 네게 헌신하리라 보느냐?”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자신 있게 대답했을 때 할아버지는 가벼운 조소를 보였다. “이유는?” “자신의 진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긴 설명은 필요 없다. 중요한 단어 한둘만으로도 대부분 꿰뚫어 보는 분 아닌가? “하지만 그놈은 이미 실수를 저질렀다.” “할아버지께요?” 머리를 끄덕인 할아버지가 말했다. “너를 섬기고 싶다는 걸 내게 말했다. 개가 주인을 정할 때 다른 사람에게 허락을 구하느냐? 그놈은 너보다 내가 더 위에 있다는 걸 염두에 둔 것이다.” 사소하다면 한없이 사소한 것이다. 내 할아버지며 그룹 회장님이니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 정도 사소한 것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함이 심하다 싶었지만, 다시 생각했다. 그냥 직원 하나 뽑는 게 아니다. 수족이 될 사람이다. 한치의 부족함이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실수한 게 있습니까?” “개가 되겠다는 놈이 스스로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개가 자존감이 있더냐? 두들겨 패는 주인이라 할지라도 손만 내밀면 마냥 꼬리를 흔드는 짐승이 개 아니더냐?” 두 번째 실수다. 이번에는 무슨 말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옆에 서고 싶다고 했을 것이다. “세 번째도 있습니까?” 할아버지는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버렸다. “넌 아직도 기회를 주고 싶은 게야?” “약속했으니까요. 아랫사람에게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아랫사람의 미덕이 헌신이라면 윗사람의 미덕은 신의다. 내가 진영기나 진영준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놈은 많이 부족하다.” “훈련이 부족할 뿐, 사람이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부족함이 없는 인재가 널린 곳이 순양이다. 넌 거기서 고르기만 해도 돼.” “인연이 없습니다. 그들은 출세를 보장하면 언제든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이 없잖습니까?” 내 고집을 본 할아버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따라오너라. 그놈이 순식간에 세 번째 실수하는 걸 보여주마.” 김윤석의 병실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할아버지는 확신에 차 있었다. “똑똑히 봐둬. 그자가 누구를 더 두려워하고 누구의 눈치를 살피는지 말이다.” 지금 무엇을 확인하려는지 알겠다. 김윤석 대리가 내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면 내 옆의 할아버지 눈치는 보지 않아야 한다.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헌신하는 충견이라면 그 시선은 오로지 주인에게로만 향해야 한다. 하지만 쉬운 일일까? 어쨌든 순양그룹 회장이다. 현재의 고용주이며 나보다 훨씬 어른이다. 나보다 더 눈길을 보내며 눈치 보는 건 당연하다. 병실 앞에서는 조금 긴장되기도 했다. 내가 아직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걸까? 아니면 사람 고르는 기준이 할아버지와 다른 걸까? 할아버지는 쾅- 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상체를 기댄 채 침대에 누워있던 김윤석 대리는 갑자기 나타난 우리 두 사람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난 그의 눈과 입만 바라보았다. 저 눈은 누구를 향하고 있으며, 누구에게 입을 열까? 일어설 수 없으니 허리를 숙일 수도 없고 목을 움직일 수 없으니 고개를 숙일 수도 없다. 그는 오로지 눈으로만 인사할 뿐이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실장님. 죄송합니다.” 그가 입 밖으로 던진 첫마디 때문에 할아버지의 눈썹이 꿈틀했다. “실장님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제가 많이 부족해서 실망만 안겨드렸습니다.” 할아버지를 흘낏 보니 놀란 것 같았다. 당연히 회장님, 회장님 하며 오해를 풀려고 변명을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깔끔하게 선을 그을 줄 예상 밖이었을 것이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포기가 빠르군요.” “제가 주제를 몰랐습니다. 그걸 깨달았을 뿐입니다. 우연히 몸을 써서 실장님을 구했지만, 그걸로 더 큰 걸 얻으려는 욕심도 있었습니다.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기회가 오면 잡는 거고, 잡은 기회를 이용해서 욕심도 채우는 거죠.” “전 능력이 부족하고 실력도 바닥입니다. 단지 욕심만 앞섰던 것 같습니다.” 김윤석은 그제야 할아버지에게 눈길을 돌렸다. “회장님께서 제 분수를 일깨워주셨습니다. 그 점은 감사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는 김윤석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는 뒷짐 진 채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눌지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도준아.” “네.” “넌 좀 나가 있거라.”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나뿐만 아니라 김윤석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내 긴히 이놈과 이야기 좀 해야겠다. 어서!” * * * “진심이냐?” 손자가 병실을 나가자마자 던진 진 회장의 질문이었다. “네 목숨까지 던졌는데 건진 거라고는 아파트 한 채와 자식 교육 걱정을 덜어버리는 게 전부다. 억울하지 않느냐?” “짧지만 화려한 꿈을 꾼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김윤석은 진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진 회장은 그의 눈에서 한 조각의 사심은 없는지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좋다. 네가 순순히 포기하니 기특한 점도 없진 않구나. 네가 풍족하게 먹고사는 데 지장 없도록 충분한 돈을 주겠다. 생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게다.” “아닙니다. 전 아직 젊습니다. 회장님이 주시는 돈으로 무위도식하며 인생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괜히 폼 잡지 말아. 주는 돈 받고 편히 살아. 인생을 날로 먹을 기회니까 말이야.” 김윤석은 진 회장의 말에 피식 웃음까지 보였다. “제 꿈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인생을 날로 먹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진도준 실장을 보며 내가 얼마나 멍청하고 덜떨어진 놈인지 깨달았습니다.” “도준이가 왜?” “제 소속이 전략실입니다. 진도준 실장의 사촌들이 어떤 생활 하는지 어렴풋이 듣습니다. 아무리 써제껴도 마르지 않는 돈, 결제 한계가 없는 카드. 누가 보더라도 화려하고 부러운 삶을 삽니다.” “그런데?” “진도준 실장도 같은 재벌 3세입니다만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헛되이 보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침 7시면 여의도로 출근합니다. 사무실 근처의 평범한 밥집에서 끼니를 대충 때우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갑니다. 뭘 하는지는 모르지만요.” 김윤석은 한참 어린 진도준을 마치 존경하는 상사를 묘사하듯 말했다. “회장님께서 제게 큰돈을 주신다면 전 진도준 실장처럼 살 자신이 없습니다. 펑펑 쓰면서 제 인생을 낭비하겠죠.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진도준의 곁에 서고 싶다, 함께하고 싶다는 말은 인생을 치열하게 살겠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이었다. ======================================== [110] 내 자리는 어디? 1 “자네가 아무리 열심히 살겠다고 외쳐봐야 들어주는 사람은 없어. 세상에는 열심히 살지만 먹고사는데 빠듯한 사람이 천지야. 그렇게 고생만 하며 인생을 낭비하고 싶나?” “고생이라도 하는 게 놀고먹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돈을 받지 않겠다는 말의 진심이 느껴졌다. “도준이는 네게 세 번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고 들었다. 오죽 못났으면 그랬겠냐?”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울 뿐입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진 회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조금 전 왜 내게 부탁하지 않았느냐? 내 말 한마디면 넌 도준이의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넌 그 기회마저 차버렸어.” “회장님 말씀 중에 틀린 게 없었습니다. 전 진도준 실장의 발목만 잡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발목만 잡는 놈을 데리고 있다면 그건 동정심 아니겠습니까? 이제 그런 신세는 그만하고 싶습니다.” “주제 파악을 빨리하는 거로 봐서는 제법 쓸만하구나. 좋다. 내 너를 내치지는 않으마. 어디 적당한 자리 알아봐 줄 테니 회사에서 계속 일하거라.” 온정을 베푸는 말이었음에도 김윤석은 쓴웃음만 지었다. “방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동정은 그만두십시오.” “평안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지. 알겠다.” 인사치레라도 한 번 더 제안할 법도 하건만, 진 회장은 냉정히 돌아섰다. “아 참, 내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딴 이야기만 했구먼.”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자네가 막아 낸 트럭, 사고라고 생각하는가?” 김윤석은 조금도 지체 없이 답했다. “그건 이미 진도준 실장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진 회장은 김윤석의 대답에 어이가 없었다. 손자에게 말했으니 그쪽에서 들어라. 이 뜻 아닌가? 헛기침을 한번 하고 병실 문을 열었다. “뒤끝 있는 놈이로고. 허허.” * * * VIP 병실은 방음도 좋다. 병실 밖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 가나 엿들었지만 웅얼거리는 소리만 낮게 흘러나왔다. 할아버지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고는 다시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대화 나누셨습니까?” “넌 알 거 없다. 참…!”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저놈에 네게 사고에 대해 말했다는데 뭐라 하더냐?” 사고라……. 김 대리가 할아버지께는 입을 닫았다. 이 또한 좋은 태도다. 은밀한 비밀과 정보를 누군가에게 전하는 권하는 내게 있다는 뜻이며 김 대리 자신은 입을 닫는다는 의미 아닌가? “스스로 확신하기 어려워서 말을 아끼는 것입니다. 사고가 아닐 가능성을 말하더군요.” “사고가 아니다?” “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트럭이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답니다.” 할아버지의 미간이 좁혀졌다. “음….” “기억일뿐입니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 “됐다. 내가 알아서 하마.” 더 깊은 이야기는 꺼리시는 것도 이해할만하다. 사고가 아니라면 가족이 관계된 것이 유력하니까 말이다. 어색한 느낌을 지우기 위해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보다 김윤석 대리는요? 그냥 이대로 끝내야 합니까?” “그것도 내가 알아서 하마. 내가 저놈 사람 구실 하도록 만들어 볼 테니까 기다려. 가능성이 안 보이면 어차피 네 곁에서 민폐만 끼칠 거다.” “할아버지께서요?” “그래. 하나는 쓸 만 하더구나.” “그게 뭐죠?” “존경심.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따르는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저놈은 널 존경한다.” 할아버지는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필요한 기본은 얼추 갖춘 것 같으니까 일을 배워야지. 만약 일 머리가 없다면 기본이 된 놈이든, 조건을 충족한 놈이든 말짱 황이다.” 김윤석은 운 좋은 사람이다. 순양그룹 회장님이 직접 낙점한 이상 단기간에 훌쩍 성장할 기회를 얻었다. 몸과 정신은 많이 고달프겠지만. * * * 일요일 이른 아침, 진영기 부회장의 별장으로 속속 고급 세단이 들어왔다. 승용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골프 칠 옷차림이었지만 이곳은 골프장이 아닌 별장이다. 서로 악수를 나누며 별장으로 사라질 때 그들의 표정은 화창한 날씨에 걸맞지 않게 굳어있었다. 손님과 다르게 진영기 부회장만은 환히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합니다. 요즘 워낙 보는 눈이 많아서 말이죠. 하하.” 한 명씩 일일이 손을 꼭 잡은 뒤 널찍한 식탁으로 안내했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식탁을 꽉 채우자 진영기 부회장은 수저를 들었다. “이곳은 물이 좋아서 그런지 밥맛이 다릅니다. 자, 듭시다.” 천천히 아침을 먹으며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말씀드린 건 확인하셨습니까?” 진영기는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그릇만 내려다보고 말했지만 누가 대답해야 하는지는 명확했다. “명인대 병원 여기저기 쑤셨습니다. 수술은 성공했고 퇴원하셔도 될 만큼 건강하시다고 합니다.” “수술이 뭐였죠?” “악성 뇌종양 제거 수술이었습니다.” 악성 뇌종양이라는 말이 나오자 식탁은 달그락거리는 소리마저 멈췄다. 진영기 부회장도 손발이 많다. 수술이 끝났을 때 가장 먼저 결과를 들은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그가 이 식탁에서 수술 이야기를 다시 꺼낸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병원장님.” “네.” “악성 뇌종양이 재발할 가능성은 어떻습니까?” 순양의료원 원장은 혀로 입술을 훔쳤다. “뇌라는 곳은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그리고 악성 종양은 늘 재발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악성이라고 하죠.” “아버님의 경우 재발 가능성은 얼마나 됩니까?” “나이 많은 노인의 경우 항상 50% 이상 재발했습니다. 확률이 절반밖에 안 되는 이유는… 재발전 노환으로 사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식탁의 사람들 중, 진 부회장과 병원장이 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지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순양의 창업주 진양철 회장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원장님께서 계속 신경 써야겠군요. 회장님, 오래 사셔야 합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대답을 들었을 때 진영기는 머리를 들었다. “원장님의 건강 비결은 소식(小食)이군요. 벌써 다 드셨습니까?” “네? 아….” 병원장은 수저를 내려놓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확 구겨졌지만 어쩌겠는가? 준비한 쇼의 오프닝 담당일 뿐이니 본 공연이 시작되기 전 무대를 내려가는 게 당연하다. 병원장이 사라지자 진영기 부회장은 젓가락을 깨작거리며 말했다. “군산의 조선미곡창 박물관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 순양의 사장님들이야 다 아시겠죠?” 계열사 사장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얼마 전, 우리 회장님께서는 손자까지 그곳에 데리고 가셨답니다. 다 내가 부족한 탓이지요.” 조용하던 식탁에 탄성 소리까지 들렸다. 진영기가 말한 손자가 누군지 모두 짐작할 수 있었고 그 의미까지 알기 때문이다. 또 한 명의 후계자가 등장했다. 두 아들의 팽팽한 구도가 깨지고 세 조각으로 나뉜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회장님…. 그런데 그룹은 더 짙은 안개만 자욱합니다. 가뜩이나 경영상태도 악화 일로에 있는데 말입니다.” 계열사 대표이사들은 오늘의 아침 식사 초대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듣게 될 것 같았다. “제가 여러분을 모신 건 짙은 안개를 싹 걷어내고 불확실한 미래를 좀더 명확하게 만들고 싶어서입니다.” “저기, 부회장님. 혹시 후계 구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라면 우리들은 회장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가장 겁 많은 자의 말이다. 혹시라도 이 모임이 새 나가면 진 회장의 눈 밖에 나기 때문이다. “후계 구도를 말할 겁니다.” 진영기는 겁에 질린 사장을 노려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제 겨우 스물하나인 애가 그룹의 1/3을, 어쩌면 절반을. 아니 전부를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의 빗나간 애정 때문에 말입니다. 이런 위험을 사장단과 논의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부회장님. 우리야 그룹 전반에 대해 논의를 하기에는 부족한…. 주력 계열사도 아니고….” “계열사마다 매출도 다르고 규모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잖습니까? 모든 계열사는 그룹 지분을 골고루 쥐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맡고 계신 회사도 다른 회사의 주식이 꽤 있을 텐데요? 안 그렇습니까? 순양전기 사장님?” 계열사들은 서로의 주식을 쥐고 있다. 진양철 회장이 그룹 전체 지분의 1.65%로 그룹을 지배하는 마법의 이름, 순환출자다. “회사의 경영자는 대표이사입니다. 공식적인 회사 서류의 최종 결재는 대표이사입니다. 법률상 회장, 부회장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아닙니까?” “법률보다는 실질적인 권한이 더 중요합니다. 비공개 서류에는 회장님의 결재를 받지 않습니까?” 순양전기 사장은 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저었지만, 진영기 부회장은 싱긋 웃을 뿐이었다. “그 권한이 여러분께 있다는 걸 실감 나게 해드릴까요?” 부회장은 식탁 근처에 서 있던 사내에게 눈짓했다. 그 사내는 서류 파일을 꺼내 각 계열사 사장들에게 한 장씩 돌리기 시작했다. “그 서류에는 여러분이 맡은 회사가 보유한 주식 현황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알려주지 않아도 잘 아는 내용이다. 하지만 서류는 단순히 주식 현황만 나와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서류는 바로 계약서였다. “여러분의 법인 인감만 찍으면 됩니다. 그럼 여러분 회사가 보유한 주식이 전부 순양정밀기계로 모입니다. 순양정밀기계가 모두 사들일 겁니다.” 당연히 순양정밀기계의 최대 주주는 진영기 부회장이다. 비 상장 기업이며 규모도 크지 않은 회사다. “어떻습니까? 회사가 보유한 자산을 매각하는 것은 대표이사의 권한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가진 권한을 실감하십니까?” 몇 숟가락 뜨지 않은 아침밥이 체하는 것 같았다. 에어컨은 끊임없이 찬 바람을 내뿜었지만, 식은땀까지 흘리는 사장도 있다. 여기 모인 십여 명의 계열사가 가진 그룹 주식을 전부 한곳으로 모아버리면? 모두 바쁘게 머리를 굴렸지만 복합한 지배 구조가 어떻게 변할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순양정밀기계 주식회사가 그룹을 뒤흔들 만큼 힘을 가진다는 것쯤은 안다. “부, 부회장님. 이 계약서에 결재하는 건 월권입니다. 우리 목이 서너 개가 있어도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비주류 계열사 사장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룹 간판인 순양전자 사장이라도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사장들의 떨리는 시선이 진영기 부회장의 얼굴에 꽂혔을 때,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이거 참. 벌써부터 그런 눈으로 보면 어떡합니까? 전 여러분이 가진 힘만 알려드린 겁니다. 지금 당장 넘기라는 게 아니에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회장 놀이한답시고 깝죽댈 때, 그룹을 쪼개서 들고 나가겠다고 앙탈을 부릴 때, 여러분이 가진 합법적인 힘을 쓰시라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모두 한숨을 쉬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군림하는 회장에게 반기 드는 미친 짓은 미래의 일이 되었다. “이거 제 말이 길어지는 바람에 찌개와 국이 다 식었습니다. 다시 준비할 테니 맛있게 드시고 가시기 바랍니다.” 진영기는 사람들이 뭐라 말하기 전에 재빨리 일어나 식탁을 벗어났다. 고민은 저들의 몫이다. 고민이 길어지면 당근과 채찍으로 결정을 강요하면 될 일이다. 계열사 사장은 달리는 말과 다를 바 없다. ======================================== [111] 내 자리는 어디? 2 “아버지. 제가 도준이를 한번 만날까 합니다.” “네가?” “네. 그놈 속셈을 알아보고 일찌감치 포기하도록 설득하겠습니다.” 진영기는 미심쩍은 얼굴로 아들을 살폈다. “괜한 짓 하지 마. 군산 가는 길에서 사고 났다. 아직 전해 들은 말이 없을 수도 있어. 그럼 네가 정보만 주는 꼴이 된다.” “그러니까 속마음을 떠본다는 거 아닙니까? 도준이는 이미 상당한 돈을 모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놀고먹어도 될 놈이에요. 그룹 일에는 관심이 없을 수도 있는데 괜히 할아버지 혼자 주네 마네 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럴싸한 소리에 진영기의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그래요. 영준 씨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아버님.” 곁에서 차를 따르던 홍소영도 슬쩍 끼어들었다. 진영기 부회장은 가끔 이런 식으로 끼어드는 며느리가 거슬렸으나, 한 번씩 기특한 소리를 할 때도 있어 내버려 두고 있었다. 아직 시댁 분위기를 모르는 것도 너그러운 시아버지 모습을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째서 그러냐?” “요즘 미라클 명함을 들고 다닌다고 들었어요. 투자를 배우려면 굳이 명함 들고 다닐 이유가 없죠. 사무실에서 모니터만 들여다봐도 충분하니까요.” 홍소영은 시아버지가 넌지시 관심을 보이자 신나게 떠들었다. “오세현 대표가 비서처럼 데리고 다닌다는데, 분명 기업 M&A를 배우는 겁니다. 법대 진학한 것도 M&A의 필수 분야가 법이기 때문이겠죠. 도준 도련님의 관심사는 그룹이 아닐 거에요.” 일견 그럴듯하게 들렸다. 하지만 관심을 버리기에는 순양이라는 이름이 주는 유혹이 너무 크다. “영준아. 도준이가 포기하도록 설득한다고 했는데, 가능하리라 생각해?” “그놈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계열사 물려받는 것보다 순양그룹 이인자가 되는 게 어떠냐고요.” “뭐? 이인자?” “네. 도준이 똘똘하지 않습니까? 참모로서 딱이죠.” “그래서? 뭐라 하더냐?” “그땐 어려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어요. 그런데 아버지. 원래 막내라는 애들이 어려움을 스스로 헤쳐 나가기보다는 큰 나무 그늘에서 안락하게 지내는 걸 좋아합니다.” 아들이 겉멋 잔뜩 든 비유까지 들며 이야기하는 게 못마땅했지만 속을 떠보고, 더 나아가 회유까지 할 수 있다면 나쁠 것이 없다. 어쨌든 집안에서 가장 공부 잘하고 성실한 놈 아닌가? 참모로 쓸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래. 한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교통사고 당했는데 안부 인사 겸해서 말이다.” “네. 맡겨두십시오.” “너무 앞서가지 말고 적당히 떠보는 선에서 끝내.” 급한 성격의 아들에게 한 번 더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기 영준 씨….” 시아버지가 이 층으로 올라가자 홍소영은 재빨리 남편을 향했다. “왜?” 진영준은 조심스레 자신을 부르는 아내를 매섭게 노려보며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려면 그만둬. 도준이는 나 혼자 만나도 돼. 말했지? 일 년은 쥐죽은 듯 엎드려 있으라고. 조금 전에도 그래. 왜 아버지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어? 건방지게!” 차를 가져 왔으면 조용히 내려놓고 가면 된다. 그런데 은근슬쩍 소파에 궁둥이를 붙이고 결국 참견한 아내가 못마땅해 죽을 지경이었다. 홍소영은 입술을 깨물었으나 대꾸는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세운 결혼 조건에 아내의 말을 귀담아들어 주는 남편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 * * “형님.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시고….” - 회사로 와라. 저녁이나 같이하자. 진영준, 이놈이 갑자기 왜? 신혼 여행 다녀와서 친척 집 돌며 인사한 게 전부다. 하긴, 우리 아버지나 몰랐지 친척 모두 군산행의 의미를 알았을 테니까 지금 집안의 시선이 전부 내게 쏠려 있을 것이다. 진영준은 내게서 뭘 알아내려는 것일까? 술이나 한잔하며 회포를 풀자는 말에 순순히 응했다. 나도 이놈에게 전할 말이 있다. 순양 본관으로 가서 전화하자 진영준은 전용 엘리베이터로 내려왔다. 저 엘리베이터는 20층 이상만 움직인다. 그룹 총괄본부, 계열사 사장급 이상의 집무실이 모여 있는 곳. 저 엘리베이터를 탔다는 것은 진영기 부회장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버지에게 교육이라도 받았나? “도준아!” 진영준은 손을 번쩍 들어 나를 불렀다. “너 차 가지고 왔어?” “아뇨. 택시 타고 왔는데요.” “궁상 그만 떨고 좀 즐기면서 살아, 인마.” 진영준은 내 등을 한번 툭 치고 본관 입구로 나갔다. 서너 명의 사람이 대기하고 있다 차 문을 열어준다. “출발해.” 이미 기사는 행선지를 아는 듯 부드럽게 출발했다. “형님. 설마 별장 가는 건 아니죠? 너무 멀어요.” “별장은 주말에나 가야지. 나도 내일 출근이다. 멀리 못 가.” 차는 논현동 고급 빌라가 즐비한 곳으로 접어들었다. “여기 식당이 있어요?” “사람 많은 곳에서 어떻게 밥 먹냐? 오늘은 허리띠 풀고 편하게 먹자.” 빌라를 막은 커다란 철문은 차 넘버를 확인한 경비가 부리나케 달려 나와 활짝 열었고 차는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왔다. “여긴 어딥니까?” 창밖을 보며 두리번거리자 내 옆구리를 꾹 찔렀다. “어디긴 어디야? 도심 속의 별장이지.” 낄낄대는 진영준을 따라 빌라로 들어갔다. 복층 구조의 빌라인지 한 층이 대단히 높았고 큰 평수가 분명했다. 연예인들이 사나? 평범해 보이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억 소리가 절로 나며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일본풍의 작은 정원, 벽돌로 만든 연못까지 있었고 심지어 작은 분수에서는 물을 쏘아댄다. 실내의 정원이라니! 큰 평수라는 건 짐작했지만, 이상하리만치 넓다. 두 개를 털어서 하나로 만든 건가? 아니면 세 개? “오셨습니까? 요리는 어떻게, 지금 바로 준비할까요?” 유니폼 차림의 두 여자가 공손히 묻는다. 이들도 순양그룹 직원일까? “어. 빨리 내와.” 화려한 식탁에 앉아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일 층 중앙의 커다란 응접세트 그리고 한쪽 벽면에는 혼자서도 술을 마실 수 있는 Bar가 꾸며져 있다. 이미 한 명의 바텐더가 대기 중이다. 그리고 주방. 두 명의 셰프가 열심히 요리를 준비한다. 이 층에 보이는 문은 분명 침실일 테고…. “뭘 그리 두리번거려?” “여기 몇 평짜립니까? 이렇게 큰 빌라는 처음이라서요.” “몰라. 대충 백 평 넘는 거 두 개 뚫었어. 혼자 밥도 먹고 가볍게 한잔하면서 사업 구상하기 딱 좋을 것 같아 만들었지. 괜찮아 보여?” 괜찮아 보이긴, 개뿔! 사업구상 좋아하시네. 주방은 고급 레스토랑을 옮겨놨고 여자 데리고 갈만한 분위기 좋은 바도 만들었다. 딱 봐도 용도가 나온다. 보안이 철저한 고급빌라촌이니 여자 불러 놀기에 최적화된 곳이다. 분명 회삿돈으로 이 빌라를 구매했고, 인테리어 비용은 회사 경비로 떨었을 것이지만 공금 횡령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샐러리맨이 밥 먹듯 야근하며 벌어들인 돈을 이딴 식으로 처바르다니. 씁쓸하고 짜증 났지만, 티 내지 않고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신혼이신데 저녁은 형수님이 차려주시는 거 드셔야 하지 않나요?” “네 형수, 결혼하고 주방에서 일하는 거 한번 못 봤다. 우리 집 며느리들이 밥 차리는 거 봤어?” 진영준은 살짝 구운 고기를 씹으며 피식 웃었다. 우리 어머니는 지금도 미국에서 장남 밥 챙겨주시고 한국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빠짐없이 식사를 준비하셨다. 네놈 집구석이 콩가루라 그런 거다. “그렇네요. 밥은 아주머니들이 챙겨주시죠. 하하.” 쓰잘대기 없는 농담이나 하며 식사를 끝내자 셰프는 안줏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출장 나온 요리사들일까? 아니면 이곳의 전속일까? “간만에 우리 진하게 한잔하자. 내가 요즘 많이 바빠서 동생들을 통 못 챙겼다. 가벼운 칵테일부터 시작할까?” 바가 아니라 널찍한 소파로 옮겼다. 바텐더는 정성 들여 칵테일을 만들었고 유니폼 여자들이 부지런히 술잔을 날랐다. 칵테일 두세 잔을 마시며 근황을 슬쩍 물었다. “건설에 계시죠?” “그래. 어서 시멘트 냄새나는 곳을 벗어나야 하는데 쉽지 않네.”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당연히 물산이나 전자지. 그룹 핵심이잖아.” “에이, 형님이야 어차피 후계자 아닙니까? 수련 기간 지나면 그쪽으로 가겠죠.” 은근슬쩍 후계자라는 말을 흘리니 요놈의 눈빛이 달라졌다. 입술도 조금 올라간 것처럼 보인다. “영감님이 너무 오래 살아. 오십 넘은 우리 아버지가 아직 ‘부’ 자도 못 떼고 얼굴마담이나 하잖아.” “이제 회장 타이틀 물려주시겠죠. 곧 팔순이시잖아요.” 살살 녹는 달콤한 말을 던져주니 술잔 비우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래, 술에 취해야 속내를 털어놓지. “아차, 내가 깜박했다. 너 몸은 괜찮냐? 사고 후유증은 없어?” 빨리도 물어본다. 어차피 관심도 없으면서. “네. 생각보다 큰 사고는 아니었어요. 할아버지야 노쇠하시니까 충격이 크셨지만 전 타박상 정도?” “가벼워서 천만다행이다. 병원에 꽤 오래 있어서 큰 사고 난 줄 알았어.” “병원에서 괜한 호들갑을 떤 거죠. 그리고… 아시지 않습니까? 이학재 실장님요. 이럴 때 우리 가족들 앞에서 존재감 내세우려고 쇼 한번 한 거죠. 직원들 데리고 와서 차단하고, 무슨 비밀 작전하듯 서울로 옮기고…. 언론 통제해서 사고 소식 안 나오게 하고.” “언론에 안 나온 건 잘한 거야. 주가 떨어져 봐. 난리 난다.” 이학재 실장은 우리 집안에서 참 불편한 사람이다. 가족보다 몇 배의 시간을 할아버지와 단둘이 보낸다. 그룹의 비밀과 전체 현황을 가장 잘 파악한 사람이며 그의 말 한마디에 큰아버지들이 애써 키운 수족들이 잘려나간다. 지금은 이들의 편에서 이학재를 씹는 척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진영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참, 할아버지는 어떠시냐? 수술은 문제없이 잘 끝났다고 들었는데?” “저도 공주의료원 뒤로는 못 뵀어요. 전 거기서 곧바로 퇴원했거든요.” “그래? 음….” 진영준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내 눈치를 슬쩍 보며 말했다. “그런데 공주는 왜 간 거냐? 아, 이거…. 물어봐도 되나? 할아버지와 너만의 비밀인가?” “왜요? 형님도 할아버지와 형님만의 비밀이 있습니까?” 은근슬쩍 되받아치자 이놈,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나? 내가 그런 게 어딨어? 할아버지, 나 싫어하잖아.” 뭔가 있나? 아니면 불려가서 호되게 야단맞은 게 전부인가? “요즘도 그래요?” “몰라. 나 결혼 뒤에 할아버지 얼굴 한번 못 봤다. 우리 아버지가 당분간 일에 집중하라고 하더라. 그러면 할아버지도 날 다시 평가하실 거라나?” 말끝을 흐리더니 다시 묻는다. “아무튼, 뭐냐? 생뚱맞게 공주라니?” “글쎄요. 저도 몰라요. 갑자기 부르시더니 군산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순양그룹이 시작된 곳이라며….” “조선미곡창인가 하는 그 창고?” “네. 나이 드시니까 추억만 떠오르나 보죠.” “다른 특별한 일은 없었고?” 이 자식, 내가 후계자 지명을 받았는지 아닌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가보다. “특별한 게 있어야 하나요? 군산이 뭔가 특별한 장소에요?” “아니. 그냥 물어보는 거지 뭐.” 꼬치꼬치 캐묻는 걸 보니 이놈도 군산 미곡창의 숨은 의미를 아는 게 틀림없다. 서로 뻔히 아는 걸 둘 다 모른척하다 보니 잠깐 침묵이 흘렀다. ======================================== [112] 우린 가족이잖아 1 어색한 침묵은 진영준이 깨트렸다. “아 참, 상준이는? 상준인 미국서 음악 공부 잘한데?” “좋아하는 공부니까 알아서 하겠죠. 그런데 영준이 형.” “응.” “혹시 제게 뭔가 할 말 있는 거 아니에요? 있으면 말하세요. 괜히 딴말하니까 영 불편한데요?” 술도 마셨으니 취한 척, 조금은 대담하게 물었다. “응? 하하. 이거, 역시 넌 눈치 하나 끝내준다.” 어색한 웃음을 터트리더니 목소리를 착 가라앉히고 은근하게 말한다. “너 나랑 일해볼 생각 없냐?” “네? 형님이랑요?”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후계자가 되기 전 나를 회유하려 한다. “그래. 내가 이사 명함 박고 일해보니까 너만 한 사람 찾기 힘들더라.” “제가 어떤데요?” “뭐?” 진영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대뜸 칭찬 같은 말만 해버렸으니 말문이 막혔을 게다. 회사에서 ‘너만 한 사람 없어’ 라고 말하면 직원들은 황송해 하고 좋아 죽는 모습만 봤으니 내게도 통한다고 생각했을까? 회사 직원들이야 오너 일가의 말이니 무조건 좋아할 수밖에. 장차 회장이 될 유력한 사람이 인정했으니 누구라도 감격스럽게 받아들인다. “그, 그야…. 인마. 꼭 구체적인 게 있어야 하냐? 느낌이지. 내 밑에서 일하는 애들도 학벌 좋고 스펙 좋아. 그런데 딱 꼬집어 말하기에는 그렇지만 뭔가 아쉬워.” “저도 그럴 겁니다. 마음에 쏙 드는 아랫사람이 어디 있나요? 겉만 보면 좋아 보이지만 포장지를 까면 늘 아쉽죠.” 슬쩍 겸손을 떨어봤다. “이 자식. 나랑 함께 일할 생각 없구나.” 웃음기가 섞인 말투지만 눈은 아니다. 매섭게 노려본다. “꼭 그렇다기보다는 나랑 안 맞아요.” “뭐? 내가 너랑 안 맞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게 영 어색해. 그냥 혼자 하는 게 좋아요. 공부도 혼자 하고 일도 혼자 하고.” “그래서 투자 회사에서 경험 쌓는 거야?” “네. 투자라는 게 그렇잖아요. 데이터 보고, 정보 취합해서 혼자 결정하고. 다른 사람들과 맞춰가며 하는 게 아니니까요. 이게 적성인가 봐요.” “음…. 투자라.” 그룹에 관심 없다는 뜻을 비쳤다. 어떻게 나올까? 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만큼 순진한 놈은 아니다. 앞으로 몇 번 더 떠보려 할 것이다. “야. 듣고 보니까 더 탐난다.” “엥? 왜요?” “내가 그런 거에 약하잖아. 기획, 분석. 난 사람 관리 하는 건 편하고 잘하는데 숫자에 약해.” 그걸 말이라고! 숫자에 약하고 기획도 못 하며 분석도 엉망이라면 일 못 한다는 소리밖에 더 되는가? 사람 관리가 편해? 회장의 장손인데 누구나 설설 길 테고 말 잘 들을 거다.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감추고 웃음을 보였다. “흐흐. 왜 그래요? 우리나라에서 똑똑한 사람 다 모아놓고 부리면서.” “아니라니까! 겉만 번드르르하지 맹탕이 많아.” 괜히 심각한 표정을 짓는 진영준을 보며 슬슬 첫 번째 미끼를 던졌다. 이걸 물면 두 번째 진짜 미끼를 던질 것이다. “영준이 형.” “응.” “만약, 이건 진짜 만약입니다.” “그래. 말해.” 진영준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가 투자일 하다 아니다 싶으면 다른 일 해야 하는데…. 결국 그룹 일밖에 없긴 하잖아요.” “그렇지.” “형님이 같이 일하자는 건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넌 내게 이학재 실장이 되는 거야.” “그룹 총괄일 맡으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사실 이학재 실장보다 더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될 거야. 이 실장이야 생판 남이고, 막말로 월급쟁이잖아. 하지만 넌 오너 가족이고 내 동생이잖아. 계열사 사장들도 시기나 질투, 반발 같은 건 나오지 않을걸? 안 그래?” 이학재는 끝없이 계열사 주요 임원들과 반목한다. 같은 사장급이지만 이학재 실장보다 나이가 많고 훨씬 일찍 할아버지와 인연을 맺은 사람도 많다. 그들은 순양을 그룹으로 키운 공신이라는 자부심도 있다. 더 늦게 합류한 이학재가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니 사이가 좋을 리 만무하다. “우리 3세들이 그룹을 맡으면 넌 진짜 이인자가 되는 거야. 창업주인 할아버지가 아끼는 손자였는데 누가 네게 불만을 품겠어? 안 그래?” “음….” 술잔을 들고 잠시 고민하는 시늉을 하니 진영준은 애가 닳았는지 더 달콤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딱 버티고 중심 잡아서 너한테 힘을 몰아줄게. 솔직히 투자라는 거, 결국 돈놀이하는 거잖아. 그거보다는 순양을 글로벌한 기업으로 키우는 게 더 재미있지 않겠냐? 스케일이 다르잖아.” “그래 봤자 나도 월급쟁이 아닙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형님이랑 제가 피를 나눴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순양그룹 주식 한 주 없는데요?” “….” 그룹 지분을 거론하니 갑자기 입을 닫는다. 자신이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민감한 부분이다. 어차피 지분 확보가 곧 순양그룹 계승자를 결정하는 것 아닌가? “형님. 저 투자일 배웁니다. 전 부동산 투기꾼도 아니고 오로지 기업 주식 투자에 집중하는데…. 이 일 배우면 가장 먼저 지분의 중요성을 깨달아요. 주식은 바로 주인의 상징이며 오너의 신분증입니다.” 대답할 말을 생각하는지 진영준은 여전히 말을 못했다. “왜 말씀이 없으세요? 조금 전 저한테 그러셨죠? 오너 가족이라고. 아닌가요?” “응? 아, 아냐. 당연히 가족이지.” “사촌이니까 그룹 지분은 나눠주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나는 짐짓 화난 채 술잔을 탕 하고 내려놓았다. “뭡니까? 함께하자, 같이 일하자 해 놓고서는 결국 날 월급쟁이로 부려먹겠다는 심산이었습니까?” “야! 새끼가…. 말을 왜 그딴 식으로 해. 인마!” “그렇잖아요? 식구네, 가족이네 해도 직원이랑 뭐가 달라요?” “넌 내가 그런 양아치로 보이냐? 엉?” 갑자기 큰소리치는 걸 보니 대꾸할 말을 떠올린 게 틀림없다. “내가 인마, 지금 너처럼 주식쪼가리 하나 없으니 뭐라 말할 건덕지가 없어 그런 거야. 지금 우리가 말하는 건 먼 미래의 이야기다. 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에게 그룹 승계하고, 다시 내가 받으려면 최소 10년, 아니 15년은 걸릴 거다. 15년 뒤의 일을 어떻게 장담하겠냐? 안 그래?” 이놈이 날 100% 믿지는 않겠지만, 내가 그룹의 지분 욕심 하나 없는 순진한 놈처럼 굴면 안 된다. 적당히 욕심부려야 내 말을 더 믿을 것이다. “그럼 15년 뒤에나 내 손에 들어올 지분을 기다리라는 말입니까? 그거 믿고 형님 밑에서 일하라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야! 밑이라니, 인마. 오른팔이지 어떻게 밑이냐? 그리고 네가 진짜 생각 있으면 내가 약속한다. 당연히 지분 나눠줘야지. 주머니가 든든해야 힘이 나는 건 당연하잖아.” 내 말꼬리를 잡고 되레 큰소리친다. 그리고 잡은 기회를 발판 삼아 다시 내 생각을 읽으려 했다. “좋다. 툭 까놓고 말해. 얼마나 원하냐?”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한다. 내가 그룹 경영권에 욕심 없다고 생각할 만큼만 불러야 한다. 이놈에게 가장 적당한 숫자는 무엇일까? 괜히 생각하는 척, 즉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형님이 앞으로 갖게 될 순양그룹 지분의 25%.” 이 자식, 미묘한 표정이다. 애매하긴 할 거다. 많은 것도 아니고 적은 것도 아니고. 하지만 한심하다. 어차피 먼 미래의 일 아닌가? 단지 날 떠보는 중이며 줄 생각도 없을 테니, 이럴 땐 지체 없이 콜을 외쳐야 했다. 우물쭈물 대답을 못 하는 것은 속 좁은 것과 욕심 많은 속내만 드러내는 것 아닌가? 갑자기 옛 생각이 나 웃음이 터질뻔했다. “자기 로또 1등 당첨되면 나 얼마 줄 거야?” 내가 로또 번호를 고르느라 고민할 때 아내가 물었다. 어차피 꽝인 거 아내의 기분이라도 좋도록 곧바로 전부 준다고 했어야 했다. 만약 기적처럼 1등이 됐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숨기면 되는 일이다. 그때 내 모습이 바로 저랬다. 우물쭈물. 그 대가는 바로 부부싸움으로 번졌고 냉랭한 아내의 표정을 일주일이나 봐야 했다. 저놈에게 내가 그룹을 탐내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말했다. “내가 가질 25%는 형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영원한 우호지분이 될 겁니다. 그리고 형님이 경영에서 물러나고 형님 아들, 즉 내 조카가 계승할 때 싸게 넘기죠. 하하.” 이렇게까지 기분을 맞춰주고 양보하는 척 했는데 망설인다면 상대할 가치도 없는 바보다. “생기지도 않은 애에게 무슨…. 25%는 지분은 네 아들놈, 즉 내 조카한테 줘라. 하하.” 할아버지가 이 모습을 보면 기가 차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새파란 어린 손자 두 놈이 형님 아우 하며 주고받는 꼴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을까? “좀 쑥스럽군요. 아직 제가 어떻게 할지 결정도 못 했는데….” “괜찮아. 이건 네 인생의 플랜 B가 될 거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잘 안 풀리면 오늘 이 약속을 기억해. 나도 잊지 않으마.” 이럴 때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 그래야 두 번째 미끼를 자연스럽게 던질 수 있다. “고맙습니다. 형님. 솔직히 형님이 저를 이 정도까지 생각해 주실지 몰랐습니다.” “야야. 관둬라. 우리 사이에 무슨…!” 진영준은 한껏 호기로운 모습으로 술잔을 싹 비우고 내게 내밀었다. “아직 한참 뒤의 일이지만 중요한 건 너 하고 내가 통했다는 거다. 서로 밀어주고 땡겨주면서 순양그룹 끝내주게 한번 만들어보자.” “네, 형님. 제가 그룹 일 하게 되면 항상 형님 편에 서겠습니다.” 나도 꽉 찬 술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이제 떡밥을 한번 뿌려볼까? “형님. 그런데 돈 좀 있습니까?” “돈? 왜? 필요해?” “아, 아닙니다. 제가 돈 쓸데가 어디 있나요?” “그런데?” “제가 진심으로 형님 편이라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호기심이 드러나는 눈빛, 진영준은 가까이 다가앉았다. “뭔데?”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오세현 대표가 고모부 시장 선거자금을 많이 지원했어요.” “뭐? 진짜?” “네. 처음에 고모가 내게 찾아와서 선거자금 좀 보태달라고 했는데 내 돈이야 전부 미라클에 묶여 있잖습니까? 그래서 오 대표를 소개해줬어요.” “고모가 오세현이와 거래했구만. 뭐 준다고 했는지 알아?” “그게 핵심이죠. 흐흐.” 내 웃음에 진영준은 손뼉을 짝 쳤다. “잠시 들어가 좀 쉬지? 필요하면 다시 부를 테니까.” 우리 술자리를 도와주던 사람들이 모두 이 층으로 올라가자 진영준은 본격적인 관심을 드러냈다. “뭐야? 설마 미디어 시티 그거야? 고모부 공약에 들어가 있던거? 설마 그거 때문에 대아건설 인수한 거야?” “네. ” 공사판 함바집 밥 좀 먹더니 눈치가 좋아졌나? 대번에 알아챈다. 하지만 규모가 다르다는 걸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순양건설 임원들, 대거 대아로 옮겼잖습니까? 할아버지와 오 대표는 협조 관계고요. 그런데 두 분이 정보를 꽁꽁 숨겨놨어요.” “무슨 정보?” “위치요. 미디어 시티가 어디에 들어서는지는 아직 발표 안 했어요. 뭐…. 워낙 크다 보니 입단속 하는 건 이해하지만…….” 슬쩍 표정을 보니 입을 떡 벌린 채 눈만 껌뻑거린다. 경제위기 속의 대규모 프로젝트. 정부도 적극 지원할 건 뻔한 일, 이런 프로젝트의 숨은 정보라면? “너 위치 아는구나!” 난 싱긋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 [113] 우린 가족이잖아 2 “고모부는 서울시장의 첫 사업으로 디지털 미디어시티를 발표할 겁니다. 아시겠지만….” “발표만으로 땅값 폭등이지.” 진영준은 이미 욕심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했다. “발표, 허가, 사업자 선정 등등. 단계별로 껑충 뛰니까….” “여윳돈 묻어 두기 딱이죠. ” “어디냐? 거기가?” “마포 상암동 일대입니다.” “상암동?” 진영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포는 알아도 상암동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네. 그런데 상암동은 국유지 아니면 시유지(市有地)가 대부분입니다.” “뭐야? 그럼 허당이잖아.” “아뇨. 상암동에서 좁은 길 하나만 건너면 은평구 수색동입니다.” “수색동이면…?” “네. 거저주워 올 수 있습니다. 엄청 싸요. 동심원효과 아시죠?” “야! 내가 그걸 모르겠냐? 명색이 건설사 임원인데. 중심 지역 땅값 오르면 주변 지역도 덩달아 오르는 거잖아.” “네. 그런데 제가 본 서류에는 상암동과 그 일대라고 했으니 수색 지역도 포함될 겁니다. 고모부는 시장이니까 마포구, 은평구 두 지역의 지지를 얻을 기횐데 놓칠 리가 없죠. 분명 미디어시티는 상암동과 수색동을 걸칠 겁니다.” “길 하나를 두고….” “왕복 2차선의 좁은 길입니다. 그냥 한 덩어리죠.” 더 말하는 건 입만 아프다. 이미 진영준은 돈다발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상상에 잠겼다. “수색 쪽 땅 조금만 매입하면 되겠네. 용돈은 건지겠지?” “그럼요. 그런데 형님. 너무 무리하지 말고 여윳돈만 던지세요. 수색동 어디까지 프로젝트에 포함될지 모르니까요.” 나중을 대비해서 조금 발을 뺐다. 어차피 이놈에게는 들리지 않을 테지만. “도준아. 불확실할 때는 확률을 확 높이는 거다.” 그렇지. 기다리던 반응이다. “최소한 동심원효과는 보니까 왕창 사 두면 돼. 그럼 큰돈, 어중간한 돈, 손해 보는 돈도 생기지만 결과는 이득이다. 그러니까 최대한 많이 사 둬야 해.” “그래도 리스크도 커지잖습니까?” “그걸 감수할 돈이 있으면 질러도 돼. 총알이 많으면 절대 안 지는 게임이야. 흐흐.” 한 수 가르치는 듯한 말투. 이럴 땐 감탄 정도는 해주는 게 예의다. 서로 달콤한 말을 주고받으며 머리와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으니 남은 건 하나다. 진영준은 방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불러내 간단한 안주를 준비시켰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이 밤을 즐겁게 해줄 사람도 불렀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고 진영준은 재빨리 달려가 문을 열었다. “오빠―!” 비명에 가까운 애교 섞인 소리를 지르며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애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아, 저 애들을 보니 떠오르는 얼굴과 이름이 있었다. 서민영. 언제 봤더라? 한… 삼 개월 정도 지났나? 따로 만나 밥 한 번 먹은 게 전부였나? 이거, 연락 좀 해야겠다. 보기보다 한 성격 하던데…. 역시 연애는 힘들고 피곤하다. 이렇게 뜨문뜨문 연락하는데도 신경 쓰이다니 말이다. * * * “너도 이젠 알겠지? 아버지가 어떤 생각인지?” 진윤기는 갑자기 집으로 찾아온 형 진동기 때문에 놀랐다. 하지만 그가 조심스레 끄집어낸 문제는 집으로 직접 찾아올 만큼 민감하기도 했다. “형님.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실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도 이제 늙으신 겁니다. 그러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한테 선물 주는 기분으로 군산행을 결정하셨을 테고요.” 진윤기는 사고 이후, 형제들의 달라진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는 당사자는 아니지만 자기 생각이 옳다고 확신했다. 이것은 변덕스러운 아버지의 유희일 뿐이다. 그룹 후계자를 지명하는 유희라니. 기가 차다. 하지만 두 번째 지명자였던 진동기의 생각은 달랐다. 후계 지명은 알게 모르게 퍼져 나가고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다. 특히 그룹 내 메인 스트림에 올라탔거나 올라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지명자 주변에 몰려든다. 진도준은 아직 어리다. 다루기 쉽다고 착각하는, 속이 시커먼 사람들이 몰려들면 내키지 않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 바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고 적들의 쳐내는 일 말이다. “원인이 뭐가 됐든 결과가 중요한 게 회사잖아. 도준이는 어리니까, 대신 너한테 사람들이 몰려들 거다. 어떡할래?” 진동기는 차분하게 동생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한테 묻지 말고 형님 의견이나 들어봅시다. 어차피 내 생각 궁금한 것도 아니고 형님 계획 말하려고 온 것 아닙니까?” 눈치 빠른 동생을 보니 예전 한량 생활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어릴 때 똘똘하던 그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한 번 말한 적 있지? 그냥 내 동생 해라.” “무조건 강요만 하지 말고 방법을 말하세요. 영원히 좋은 동생 되어줄 테니까요.” “뭐?” “만약 도준이 꿈이 순양그룹 회장이면 어떡하실 겁니까? 조카 상대로 싸울 거예요? 그럼 난 형님 동생 못 합니다. 내 아들 아버지 할랍니다.” “헛된 꿈일 뿐이다. 그러니까 네가 나서서 말려야지.” “아들 꿈 말리는 아버지 역할은 못 합니다.” 진동기는 동생의 확고한 결심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형님이 방법을 만드세요. 순양그룹 회장 자리는 하납니다. 싸움은 큰형님하고만 하세요. 도준이의 조건 없는 양보나, 힘으로 누를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고요. 사업하시는 분 아닙니까? 서로 만족할 만한 방법을 가지고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동생의 마음이 고스란히 와 닿았다. 아들이 유산 싸움에 말려드는 꼴은 보기 싫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이 둘을 만족하는 거래. 동생은 그것을 원한다. 자기 사업을 하더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지워야 하는 것이 첫 번째라는 것도 안다. 진동기 자신은 감정을 못 이겨 동생에게 달려왔는데 말이다. 사업가답게 풀자. 진동기는 마음을 다잡았다. “좋다. 그럼 내가 도준이와 이야기하마. 그게 문제 해결의 첫 단추겠지?”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괜찮죠?” “물론이다.” 진동기는 갑자기 넥타이를 풀었다. “도준이 올 때까지 술이나 한잔할까?” “아침부터?” 진윤기는 갑자기 태도를 확 바꾸는 형에게 놀랐으나 곧바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유가 어떻든 간에 형제끼리 술잔을 나누는 것도 오랜만 아닌가? “독한 거? 아니면 순한 거?” “순한 거 하자. 이젠 몸이 못 견뎌. 그리고 도준이랑 이야기해야 하는데 맑은 정신 아니면 밀릴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흐흐.” 간단히 마시기로 했지만, 순식간에 와인 한 병을 다 비웠다. * * * 간만의 숙취가 꽤 오래간다. 쿡쿡 쑤시는 머리를 문지르며 현관문을 열자 거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 큰아버지. 오셨어요?” “이놈아. 어제 외박했다면서? 벌써부터 그러고 다니면 어쩌려고?” 순서대로 등장하는구나. 장남과 차남이 이렇게 나를 찾는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술 깨지 않은 게 찝찝했지만, 테이블에 놓인 와인 병을 발견했다. 다행이다. 내 입에서 나는 술 냄새를 두 분은 눈치채지 못할 것 같다. “외박이라고 해서 뻘짓하고 다니는 건 아니에요. 하하.” “너도 여기 앉아. 큰아버지가 주는 술잔 받아라.” 좋은 일이 있을 리 없는 두 분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것이 의외였지만, 적어도 웃으며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웃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도 있다면 좋으련만. “도준아.” “네.” 큰아버지는 잔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너, 순양그룹의 회장이 되고 싶으냐? 대(代)를 건너뛰는 무리수도 감내할 만큼…?” “형님!” 에둘러 말하지 않고 곧바로 껍질을 까버리는 큰아버지의 말에 아버지는 놀라 소리 질렀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다. 효율을 강조하는 합리적인 생각, 곁가지 많은 절차를 싫어하며 모든 걸 간소화하는, 건조한 성격으로 소문난 분 아닌가? 욕심만 많은 장남과의 승계 싸움에서 왜 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다. “괜찮아. 도준이가 다른 조카 놈들처럼 철부지도 아니고, 어린애로 취급해서 윽박지르는 것도 아냐. 사회인이나 다름없는 도준이의 계획을 듣고 싶은 거다. 이놈의 생각을 모르면 이야기의 진전은 없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큰아버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 분은 어느새 웃음을 지웠고 취기까지 날려버린 듯 보였다. 이분의 기질과 성정을 잘 아니 나도 껍질은 벗겨버리고 알맹이만 전달했다. “군산이 어떤 의미인지도 잘 압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잘 압니다.” 두 분의 대화를 막고 내 의견을 던지자 눈길이 꽂혔다. “전 할아버지가 주시는 걸 모두 받을 생각입니다. 그래서 다시 되팔아야죠. 더 비싸게 사겠다는 분께 말입니다.” “팔겠다? 네 목표는 돈이냐?” “상품값을 꼭 돈으로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글쎄요. 아직 상품이 없으니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제 손에 물건이 들어왔을 때 결정해야겠죠.” 더는 질문이 이어지지 않았다. 이 정도 대답이면 충분히 내 생각을 알아챌 사람이다. 내 대답이 진실이냐 아니냐는 모르겠지만. 대화가 끊어진 자리에 침묵이 자리 잡았다. 난 내 앞의 와인 잔만 바라봤고 두 분은 와인을 들이켰다. 다시 빈 병이 뒹굴 때 큰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신중하기도 하구나. 영리하기도 하고.” 아버지는 여전히 침묵만 지켰다. “넌 저울 양쪽에 두 큰아버지를 올려놓고 무게를 맞춘다는 뜻이겠지? 팽팽한 긴장감을 이기지 못해 먼저 비명을 지르는 사람의 편에 서면 물건값은 폭등할 테고.” “그 과정이 귀찮아서 처음부터 세일할 수도 있겠지요.” “퍽이나 그리하겠다. 하하.” 이 아저씨, 안 속네. 큰아버지는 잔에 남은 술을 싹 비우고 일어섰다. “우리 집안에서 제일 난놈은 도준이인 게 확실하구나. 가장 막내라는 핸디캡만 없었다면 3대 회장은 너였을 거다.” 2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차기 회장 자리를 절대 뺏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말이다. 큰아버지가 벗어 두었던 상의를 걸치자 아버지가 말했다. “가시게요?” “알 거 다 알았으니 가야지. 도준이가 장사를 시작할 때, 내가 첫 손님이 되려면 어영부영할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큰아버지는 내 등을 쓰다듬었다. “이대로만 커라. 재벌 흉내나 내는 네 사촌 형들 본받지 말고.” 칭찬을 들었으니 인사는 해야 한다. “감사합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큰아버지.” 술기운 때문에 얼굴은 붉었지만, 내 말뜻을 이해했다는 듯 눈은 반짝였다. 쉬운 상대는 되지 않을 만큼 훌륭하게 성장하겠다는 내 말뜻을. 큰아버지가 나가자 아버지는 날 다시 앉히고 말했다. “순양의 회장 자리, 탐나지만 포기한 거야?” “지금은요.” “나중에는 변할 수도 있다는 거냐?” “할아버지께서 내게 무엇을, 얼마나 주시느냐에 달렸겠죠.” “음…….” 아버지는 새 술병을 따며 웃음을 흘렸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부모 노릇은 할 테니까.” * * * “또 어떤 놈이 내 욕을 하는 게야? 에잉.” 진 회장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투덜거렸다. “그래, 두 아들놈이 껄떡거렸다고?” “네.” 이학재 실장은 진 회장의 곁에 앉아 붕대 감은 머리를 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뭔 짓을 하디?” “진영기 부회장은 마이너한 계열사 사장들과 조찬 모임을 가졌습니다.” 주력 계열사가 아니면 전부 공채 출신 사장들이다. 요놈들이 모여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걸까? ======================================== [114] 우린 가족이잖아 3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아직 모르고?” “뻔히 짐작할 수 있는데 굳이 한 명 한 명 불러 물어볼 필요 있을까요? 괜한 경계심만 불러일으켜서 부회장이 더 조심하고 은밀하게 움직이면 관찰하는 게 어려워집니다.” “네 짐작 한번 들어보자.” “그 계열사가 보유한 그룹 지분으로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요구했겠죠. 그럼 회장이 됐을 때 일등공신으로 대우해주겠다. 이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진 회장은 큰아들의 꿍꿍이가 거슬리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또? 딴짓은 그게 전부야?” “아들인 진영준 상무를 시켜 도준이를 만나게 했습니다. 진동기 사장은 직접 만났고요.” “동기가?” “네. 윤기 집으로 찾아가서 술 한잔했습니다.” 고요한 호수처럼 평온을 유지하는 둘째까지 나서다니! 파장이 크긴 하다. “도준이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모두 난리 치는구먼.” “아마도 캐스팅 보트가 도준이 손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을 겁니다.” “어리석은 놈들 같으니. 지들이 잘하면 아무 문제 없을 텐데, 그걸 모르니….” 이학재는 혀를 차는 진 회장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느 정도 생각하십니까? 도준이가 진짜 캐스팅 보트를 쥘 만큼 많이 생각하십니까?” “자네 생각은?” “그룹이 쪼개질 위험은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놈에게 다 주라는 뜻 같은데…. 도준이는 거기 포함 안 된다는 말이야?” “물리적인 나이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진 회장도 머리를 끄덕였다. 집안에만 전쟁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집 밖에도 사방에 적이 깔려 있다. “학재야. 캐스팅 보트를 쥔 놈이 그걸 흔들면 나머지 두 놈은 눈치를 보겠지?” “그렇겠죠.” “그럼 가장 힘센 놈은 누굴까? 흔드는 놈일까? 눈치 보는 놈일까?” 이학재는 이런 심각한 문제를 웃으며 말하는 진 회장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경영권을 흔들 정도의 힘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유산을 남겨주겠다는 뜻일까? “진심이십니까?” “뭐가?” “도준이가 시소 한가운데 앉아 힘의 균형을 맞추도록 할 생각이십니까?” 진 회장은 이학재의 직접적인 질문에 대답을 피했다. 아직 자신의 심장과 머리가 일치하지 않는다. 결정은 뒤로 미뤄야 하지만 시작은 서둘러야 한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나이 아닌가? “일단 지배 지분 뻥튀기할 방안부터 만들어봐. 그리고 내 지분 옮기는 방법도 찾고.” 이학재는 놀라기도 하고 할 말도 많았지만, 머리만 끄덕였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방법만 찾는 것이지 실행하는 건 아니다. 의견은 회장이 실행하라고 할 때 다시 말씀드리면 될 터, 말을 아꼈다. “그리고 사고 조사는 계속하고 있나?” “네. 트럭 기사에게는 사람을 붙여 뒀습니다. 24시간 철저히 마킹하니까 배후가 있으면 드러날 겁니다.” 생각하기 싫은 일을 떠올리니 표정이 안 좋아졌다. 이학재는 진 회장의 굳을 얼굴을 보며, 한 가지 더 보고할 것을 꺼내지 않았다. 바로 회장님의 운전기사에 대한 것이었다. 진 회장의 말을 빌리자면 그날 군산 일정을 미리 안 사람은 기사가 유일하다. 회장의 넓은 저택 귀퉁이 별채에서 기거하니 미행은 필요하지 않으므로 그의 뒤를 캐는 중이다. 이미 순양 장학생인 서울중앙지검 검사가 그의 계좌를 뒤졌다. 특이한 점이 없어 기사의 가족과 친척까지 확대하는 중이며 별채에는 도청 장치까지 설치하고 감시 중이다. 뭔가 나오면 보고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어쨌거나 회장님은 환자 아닌가? * * * “좀 알아봤어?” “네. 마포 상암동은 거래할 만한 개인 사유지가 별로 없습니다.” “별로 없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정확하게 알아보라고 했잖아!” 버럭 소리 지르는 진영준 앞에서 두 명의 과장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아예 없습니다.” “아예 없다니? 상암동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거야?” “이미 누군가 싹 쓸어 갔습니다. 등기부 등본도 확인했습니다. 지난 4월, 5월경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진영준은 그 누군가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세현과 고모, 그리고 정치권에 몸담은 놈들이 뻔하다. 잔뜩 찌푸린 진영준을 보며 보고하던 과장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싹 쓸어 갔다고는 하지만 물량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럼 수색동은? 거기도 다 쓸어 갔어?” “아뇨. 그쪽은 거래가 거의 없었습니다. 상무님께서 원하는 만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진영준은 과장이 내미는 두꺼운 서류 뭉치를 받았다. “수색동 현황입니다. 지시하시면 곧바로 매입 작업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나가봐.” 혼자 남은 진영준은 이리저리 전화를 돌려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순양건설 상무가 된 후, 지금처럼 바쁜 건 처음이다. 잠시 후 비서가 회의실에 모두 모였다고 알려주자 부리나케 달려갔다. “은행에 알아봤어?” “네. 상무님의 무담보 신용대출은 20억까지 가능합니다.” “겨우?” 예상보다 적은 액수에 진영준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점당 한계 금액이 있다 보니 그렇답니다.” 자금 담당 부장은 준비한 몇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상무님 소유의 자재 납품 회사 두 곳은 각각 200억, 160억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조건이….” “뭔데?” “형식적이지만 상무님 사재를 담보로 요구합니다.” 진영준은 순간 열이 뻗쳤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성질부릴 시간이 없다. “그렇게 해. 그리고 순양건설에서 내 자재 회사로 선금 좀 땡겨. 100억 정도.” 회의에 참석한 모두의 표정이 변했다. “사, 상무님, 그 정도 자금을 옮기려면 대표이사님 결재가….” “작년 IMF 터지고 나서 아파트, 상가 등 미분양 물량이 많습니다. 회사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데 100억이나 빼낸다면….” 여기저기서 어려움을 호소하자 마침내 진영준이 폭발해버렸다.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홍송철 사장에게 양해를 구할 테니까 주라면 줘. 선조치, 후보고! 몰라? 그 돈으로 땅 매입하고 매입한 땅을 담보로 대출 왕창 땡길거야. 문제 되면 선금 받은 거 다시 되돌려 준다고! 됐어?” 책상까지 탕탕 치며 소리 지르자 모두 입을 닫았다. 일견 그럴싸하나 믿을 수 없다. 순양건설 돈을 빌려서 땅을 사고 그 땅을 담보로 대출받으면 돌려주기는커녕 다시 땅에 쏟아부을 놈이다. 어쩌겠는가? 이런 놈이라도 주인집 손자 아닌가? 정신 바짝 차리고 줄을 잘 서야 한다. “모두 딴소리 말고 철저하게 서류 준비해. 내가 다시 지시하면 하루 만에 전부 처리할 수 있도록 말이야. 알았어?” “네!” 모두 머리를 숙이자 진영준은 기분이 좀 풀렸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른 계열사에서 조금씩 더 모아야 한다. 최소 천억 정도는 때려 박아야 목돈 만지는 기분이 날 것이다. ‘아…. 젠장. 은행장 딸과 결혼하는 건데. 이럴 때 대출 팍팍 땡기면 얼마나 좋아?’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그래도 마누라에게 넌지시 말은 해볼 것이다. 처가도 꿍쳐 놓은 돈이 많다고 소문났지 않은가? 넉넉하게 총알 준비하고 진도준의 연락을 기다려야 한다. * * * “청와대, 국회 모두 조율 끝났습니다. 서울의 건설 경기 살리는 데 도움도 되고, 문화 정책의 일환이라는 명분도 있으니 호응이 좋더군요.” “다행입니다. 시장님. 발표는 아무래도 7월 1일 취임식 때 하시겠네요?” “아닙니다. 공식적인 발표 없이 공고만 낼 생각입니다. 그래야 대아건설과 수의 계약(隨意契約) 진행이 유리하니까요. 물론 아주 일부 정도는 입찰공고를 낼 생각입니다.” 오세현과 고모부는 손발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 대표. 내가 아직 우리 장인어른을 못 만났어요. 혹시라도 순양건설이 끼어들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시죠?” 고모부는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후계자 후보에 올랐는데 내 밥그릇을 할아버지가 뺏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아직 모른다. 내심 놀랐지만 모른 체했다. 고모가 고모부에게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은 게 틀림없다. 흔들리는 내 눈빛을 보며 오세현이 선수를 쳤다. “네. 진 회장님 심사가 뒤틀리면 이 프로젝트 자체를 무산시킬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도준이가 필요합니다. 하하.” 나를 보는 두 사람의 눈빛에 기대가 잔뜩 서려 있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 할아버지는 병원에 계시니까 이것까지 욕심내시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튼….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우리 도준이 힘 좀 빌리자.” 고모부는 웃으며 내 손을 살짝 잡았다. “도준아. 내가 오 대표와 할 이야기가 좀 있으니 잠시 자리 좀 비켜줄래?” “최 시장님. 이 일에 도준이가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는 없습니다. 시발점이 바로 도준이 아닙니까? 그리고 어차피 제가 다 이야기해줄 겁니다. 그냥 말씀하세요.” 오세현은 슬쩍 일어서려는 나를 다시 앉혔다. “아, 그렇군요. 이거…. 괜히 도준이에게 미안한데?” 어색한 미소의 고모부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보내자 조심스럽게 그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제 임기가 2002년 6월까지입니다. 아시겠지만 그해 말은 대선입니다.” 대선! 역시나! 고모부의 욕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바람을 잔뜩 집어넣은 건 고모가 틀림없다. “혹시 대선 출마를 꿈꾸십니까?” 오세현은 기가 찼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게 역력히 보였다. “이제 양 김 시대도 끝나갑니다. 대한민국도 좀 젊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검사 출신, 국회의원, 서울시장을 역임했으니 대선에 나가더라도 자격이 부족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겁니다.” “아, 그건 당연하죠. 충분한 자격 있으십니다. 허나….” “허나, 뭐죠?” 고모부는 오세현의 입만 쳐다보기 시작했다. “서울시장까지는 괜찮지만 재벌가의 사위라는 게 좀…. 대통령과 재벌이 한 식구라면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부정적인 견해에 고모부가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앞으로 4년이나 남았습니다. 그 4년간 기념비적인 업적 하나만 만들면 됩니다. 내가 아들도 아니고 사위니까 충분히 재벌 이미지를 희석할 수 있어요.” “좋습니다. 그 문제는 뒤로하고 제게 하시고 싶은 말은 뭐죠? 그냥 대선 출마 계획을 알려주시려는 건 아닌 듯한데….” 오세현도 능구렁이다. 고모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뻔히 알면서 직접 불편한 말을 꼭 하게 만든다. 설마 녹음이라도 하는 건가? “재벌가 사람이라는 걸 털어내려면, 대선 때 순양그룹 돈은 절대 받으면 안 됩니다. 대선 자금이 한두 푼도 아니고….” “그 자금을 미라클에서 책임져달라는 뜻입니까?” “아, 전부 다 책임져달라는 부탁은 아닙니다. 사실 제 대선 가도의 가장 큰 장애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재벌들이죠. 만약 제가 청와대에 들어가면 순양그룹이 날개를 달 거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순양의 제외한 다른 재벌가의 돈은 받을 생각입니다. 제가 적이 아니라는 걸 알려줘야죠.” 지금 고모부가 하는 말 전부가 고모의 머리에서 나온 게 틀림없다. 할아버지에게 약점 잡힐 일이 없어야 순양을 향해 칼을 겨눌 수 있으니까 말이다. 대통령의 힘으로 오빠들을 다 쳐내면 순양그룹은 저절로 고모 손아귀에 들어간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아주 좋은 기회임을 알았다. 물론 대통령은 나중 이야기다. 지금은 서울시장으로서 꼭 할 일이 있다. 내 계획을 들으면 고모부는 물론 고모까지 좋아할 것이다. “고모부. 재벌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깨끗하게 털어드릴까요?” 생뚱맞은 소리에 고모부가 화들짝 놀랐다. ======================================== [115] 가볍게 잽부터 1 “뭐? 그게 무슨 뜻이야? 진짜 방법이 있어?” “가장 손쉬운 방법이 있습니다만 쉽지는 않죠. 손에 피를 묻혀야 하니까요.” 피라는 단어에 고모부는 아주 자신만만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검찰청 칼잡이 출신 아니냐. 피 묻히는 걸 두려워할 사람이 아니다.” “도준아. 괜히 이상한 생각이라면 그만둬.” 오세현이 불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내 장단을 맞추려는지 아니면 진심인지 분간하기 힘들지만 무시했다. 지금은 고모와 고모부를 슬슬 부추겨야 한다. 욕심에 눈먼 놈이야말로 이용해먹기 딱 좋지 않은가? “할아버지가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 상처 좀 입어도 순양그룹에 피해가 없는 사람, 평소의 행실을 생각하면 당해도 싸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 한 명 골라보세요.” 순양그룹이 입을 데미지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2세는 피해야 한다. 남은 것은 3세. 사회적 인식도 손가락질하는 재벌 3세 아닌가? “그 조건이라면 영준이뿐이다. 요즘이야 결혼하고 조심하지만, 그동안 가장 집안 망신시킨 놈이잖아. 연예인 스캔들에, 음주운전, 폭행…. 사고란 사고는 다쳤으니, 원.” “그럼 영준이 형이 피 흘리면 되겠네요. 순양그룹의 장손이자 서울시장의 조카지만 정의로운 서울, 공정한 서울을 세우기 위해서는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뭐 이런 식이겠죠?” 고모부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차라리 친조카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었다면 고민은 없었을 것이다. 처가 식구를 건드리는 건, 잘못하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매일같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 아닌가? 이 일을 결정할 수 있는 건 고모부가 아니라 고모다. “그, 그런데 괜찮을까? 아니, 방법이 있을까? 요즘 영준이는 별다른 사고도 안 치고 착실하잖아. 그렇다고 사생활을 건들 수도 없고 말이야. 그놈이 연예인 끼고 음주운전 하다가 폭행 사고를 쳐도 서울시장이 뭐라 말할 수는 없어.” “방법은 고모부님이 생각해보셔야죠. 전 고모부님께서 가족 중 한 명의 목을 벤다면, 재벌가의 사위라는 핸디캡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핸디캡 극복을 넘어 칭송받을 일이지만 여전히 말을 못 한다. 이 양반과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 계략을 논의할 사람은 역시 고모다. 고모부는 한참 뒤에나 입을 열었다. “그 부분은 내가 좀 더 생각해보마. 그보다 오 대표. 어떻습니까?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오세현은 최 사장의 기대에 찬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몇 번 헛기침했다. “아시다시피 전 투자자입니다. 투자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공통점은 하나예요. 바로 숨은 가치를 찾아내는 겁니다. 4년 뒤, 제가 최 시장님의 가치를 발견하면 말씀하지 않아도 투자합니다.” “그때쯤이면 늦을 수도 있어요.” 오세현은 4년 뒤에나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던졌고, 고모부는 선점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반응이다. 내 생각은?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고모부 수준의 사람이 뒤집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 정도다. * * * “어서 와, 우리 조카. 어째 넌 클수록 엄마 닮아 가? 귀여워 죽겠어.” 고모는 내 엉덩이를 툭 건드리더니 술잔을 내밀었다. “마실래?” 내가 머리를 젓자 고모는 피식 웃었다. “몸 상한 데는 없다고 들었는데, 아냐?” “아뇨. 술맛도 모르는데 비싼 술 마시면 아깝잖아요.” “별걸 다 따져. 아무튼 앉자.” 여전히 호텔에서 생활하지만, 남편이 시장이니 이 생활도 끝이다. 기자들 눈에라도 띄면 입방아에 오르니 이젠 집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너 고모부에게 재미있는 소리를 했더구나.” “아, 그거요? 고모부가 재벌 사위 딱지를 떼고 싶어 하시길래 그냥 말씀드린 건데요?” “너, 은근히 음흉하다? 네 고모부 귀 얇은 거 알고 그랬니?” “무슨 말씀이세요?” “시치미 떼기는. 왜? 아빠가, 아니 아버지가 널 3번 타자로 지명하니까 너도 욕심이 생겨?” 전부 난리구나. 내 손에 단 10%의 그룹 지분만 들어와도 든든한 지원자가 될 테니까 모두 날 끌어들이려 두 눈이 시뻘겋다. “고모도 날 그렇게 보세요?” “고모도? 이런, 오빠들이 벌써 다녀갔구나.” 고모는 입술을 한 번 씹었다. “네.” “뭐라고 했는지 말해볼래?” “다른 사람 말은 중요한 게 아니고 고모 생각이 궁금한데요?” “난 아직 가진 게 없거든. 그래서 생각도 없어. 오 대표가 그러더라고. 쥐뿔도 가진 게 없으면 판에 끼어들지도 못한다고.” “그럼 왜 보자고 하셨어요? 전 큰아버지들처럼 고모도 제게 뭔가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나도 귀가 좀 얇아. 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방을 메웠다. “우리 3번 타자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내가 판돈 마련하고 나서 말이야. 그보다 읍참마속은 가능해?” “감당할 수 있어요? 그럼 아이디어를 짜내볼게요.” “영준이?”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너 영준이 싫어하는구나. 왜지?” “그냥 잘난 척하는 게 꼴 보기 싫어서요. 단지 먼저 태어난 게 전분데 자기가 잘난 줄 알잖아요. 그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사람을 아래에 두려고 해서….” “그 애가 그렇긴 하지.” 고모는 잠깐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영준이가 혼이 좀 나도 아버지는 크게 노여워하지는 않으실 거야. 내가 감당할게.” 어떤 일을 저질러도 단지 혼나는 것으로 끝난다고 믿는다. 이 집안 사람들은 준엄한 법의 심판을 걱정하지 않는다. 다 피해 갈 수 있으니까. 대신 할아버지의 심판을 두려워할 뿐이다. 고모는 진영준이 손자니까, 장손이니까 꾸중 듣고 혼나는 정도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과연 그 정도로 마무리가 될까? “그럼 전 고모만 믿고 시작합니다.” “뭘?” “고모부께 말씀드리세요. 디지털 미디어시티 사업 공고할 때 지역 단어 하나만 추가하라고요.” “단어?” “네. 상암동만 알리지 마시고 상암동 그리고 수색동 일부라고요.” “수색동?” “네. 그다음은 제가 생각해 놓은 게 있으니까 염려 마시고요.” 고모는 내 얼굴을 보며 미소를 보였다. “생각을 짜내는 게 아니라 이미 생각해뒀구나.” “전부는 아니고요. 대충 얼개만.” “이러니 아버지가 네게 푹 빠졌지.” “그냥 막내라 그러시는 거죠.” 겸손을 떨어봤지만 소용없었다. 고모도 큰아버지들과 다르지 않은 눈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도준아.” “네.” “내가 힘이 생겼을 때, 네가 가지게 될 걸 내게 보태면 절반을 주마. 잘 생각해보렴. 아마 오빠들은 절반의 절반도 안 줄 거야.” “고모의 힘은 뭐죠?” “네 고모부가 봉황이 새겨진 의자에 앉는 거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순양그룹을 어찌할 수는 없을 텐데요?” “국세청, 국정원, 검찰, 감사원, 공정거래위원회. 이런 힘 있는 기관을 손에 쥐는 거야. 네 말대로 순양그룹은 어찌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사람은 어찌할 수 있단다.” “사람이라고 하면 큰아버지들이겠네요.” “오빠들 손에 묻은 먼지, 진흙을 전부 털면 나만 남을걸? 주주들도 나 외에 선택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 거야.” 고모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도 주주로서 내 편을 들어줘. 그럼 절반을 줄게.” 한 명은 이인자로 만들어주겠다. 또 한 명은 비싸게 사겠다. 마지막 한 명은 절반을 주겠다……. 참 다양한 제안이다. 가만, 한 명이 더 있는데? 아, 셋째인 진상기는 맏형의 따까리지. “고모. 10년 뒤의 일이 될 것 같은데 천천히 하시죠. 그리고 할아버지가 변덕 한 번 부리면 난 그냥 막내로 끝날지도 몰라요.” 엄살 한번 부려보니 고모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그럼 서둘러야겠네? 아버지 변덕 부리시기 전에.” * * * 고모부는 취임식에서 대통령 흉내를 냈다. 현재의 경제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서울시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것이며 재정 적자를 최소화하여 서울 시민들의 무거운 어깨를 가볍게 해주겠다며 큰소리쳤다. 그리고 사전에 약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울시 소유의 공유지를 200% 활용하여 경제 활성화의 기초를 다지겠다고 공언했다. 이미 눈치 빠른 건설업자들은 지금의 불황을 깨트리는 신호탄이라는 걸 알아채고 문턱이 닳도록 시장실을 드나들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기회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 기회는 내가 쥐고 있다. “이놈아. 절반도 안 준다고?” “정말 너무하십니다. 절반이나 드리면 전 뭐 먹고 살라고요? 순양건설이야 이거 아니더라도 버티지만, 우리 대아건설은 이거 없으면 그냥 망해요. 이거 하나 보고 쏟아부은 돈이 얼만지 아시잖아요.” 이제 붕대를 풀고 군밤 장수나 쓸법한 비니를… 아니 지금 시대는 그냥 빵모자라고 부르지. 아무튼 할아버지는 촌스러운 모습으로 투덜거렸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대현그룹이 네 고모부를 푹 삶았다는 소문도 들려. 자칫 잘못하다가는 뒤통수 맞는다.” “그거 막아주신다고 큰소리치셨으니 할아버지께서 해결해주셔야죠. 30% 드리겠습니다.” “건설로 돈 버는 것만 말하지 마라. 네놈이나 오세현이가 그냥 있을 놈이 아니잖아? 솔직히 말해. 상암동과 그 주변 땅, 아도쳤지?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벌 텐데?” “아뇨. 땅 투기는 안 했습니다. 시장이 고모부 아닙니까? 오 대표가 아버지랑 친군데 개발 정보 미리 빼돌렸다는 오해는 없어야죠. 게다가 대아건설 인수하고 첫 사업인데…. 불미스러운 일은 애초에 막았습니다.” “그건 잘했구나. 허허.” 할아버지는 무릎을 탁 치며 웃었다. “좋다. 30%로 퉁 치자. 대신 넌 내게 빚 하나를 진 거다. 20%나 깎아줬으니까 말이다.” 이건 협상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머릿속에는 협상이 아니라 양보였고 빚진 것으로 각인되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재벌의 기본이다. * * * “다른 계열사에서는 얼마나 빌렸어?” “200억 정도입니다.” “그것밖에 안 줘?” “계열사 사장들 모르게 처리하다 보니 모두 난처하답니다. 이 돈도 정말 목 내놓고 준 겁니다.” “새끼들이…. 간덩이가 이렇게 잘아서야 어디에 쓸까? 내가 책임진다는데도 이 정도니. 쯧쯧.” 680억. 진영준은 목표액에 한참 모자라는 돈을 생각하니 짜증이 솟구쳤다. 큰 욕심 내지 않고 다섯 배만 튕기려고 생각했는데, 많이 아쉬웠다. “용역들 불러서 수색동 싹쓸이해. 소문 안 나게 조심하고. 소문나면 거지 같은 새끼들 집 안 판다고 개길 거다.”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단군 이래 가장 어려운 시기 아닙니까? 시세도 바닥이니 조금만 더 쳐준다면 팔 겁니다.” “마지막까지 개기는 놈은 시세의 두 배까지는 줘. 시끄럽지 않게 진행하는 게 이 일의 핵심이다.” “네. 상무님.” 진영준은 여전히 아쉬움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런 호재를 만나는 게 어디 쉬운가? 마음 같아서는 명동 사채시장에서 확 땡기고 싶을 정도였지만 참았다. 소문 빠른 바닥이라 여차하면 아버지나 할아버지 귀에 들어간다. “삼천억이라…….” 곧 들어올 돈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돈. 아는 놈은 진도준이 유일하다. 그놈에게 한몫 떼어주면 좋아라 할 것이고 자신의 곁에 착 붙어 다니게 될 것이다. 돈도 벌고, 아버지가 우려하는 진도준도 손에 넣으니 꿩 먹고 알 먹고다. ======================================== [116] 가볍게 잽부터 2 하지만 꿩 먹고 알 먹는 일이 순탄할 리가 있나? 수색동 땅 매입이 한창일 때, 진영준은 아버지 진영기 부회장의 호출에 마시던 술잔을 던지고 집으로 달려갔다. 얼음장처럼 냉랭한 아버지의 표정을 보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만큼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재빨리 머리를 굴려 최근에 실수한 게 없는지 되새겼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불길한 징조는 거실에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있는 마누라였다. 설마 아버지에게 잦은 외박을 하소연한 건 아니겠지? 그 정도 철딱서니 없는 마누라는 아니다.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사생활 터치는 절대 없을 거라고 말이다. “너 요즘 뭐 하고 다니냐?” 착 가라앉은 목소리, 이건 좀 심각하다. 화나시면 큰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분인데….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왜 그러시는지…?” “네가 땅 사러 돌아다닌다는 말이 들리던데, 맞아?” 순간 진영준의 머릿속에는 이 일과 관련된 놈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떤 새끼가 입을 나불댔을까? “왜 대답 못 해? 맞아? 아니면 헛소문이냐?” “아, 아버지. 일단 제가 설명부터 하겠습니다.” “설명? 오호라. 그러니까 근거 없는 헛소문은 아니라는 이야기지?” 진영준은 결혼한 것을 지금 이 순간만큼 축복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결혼 전이었다면 일단 싸대기 한 방 날리고 대화를 시작했을 것이다. 며느리가 지켜보니 부르르 떨리는 아버지의 손은 날아오지 않았다. “좋다. 설명부터 해봐라. 그럴싸한지는 들어보고 이 애비가 판단하마.” “제가 도준이 만나서 이야기를 잘 풀었다고 말씀드렸죠?” “그래. 그놈이 너한테 호감을 잔뜩 드러냈다고? 의기투합도 했고.” “네. 거기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진영준은 그날 밤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소상히 되풀이했다. 지난번에는 쏙 빼먹었던 디지털미디어시티와 땅 이야기를 덧붙인 게 차이였다. 설명이 모두 끝나자 진영기 부회장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보였다. “그러니까 네 설명대로라면 도준이가 지껄인 것만 믿고 땅에다 돈을 붓고 있다는 말인데, 맞아?” “아닙니다. 저도 확인하고 움직였습니다. 고모부가 취임 때 했던 말, 그리고 도준이가 다시 한 번 알려줬고요. 마지막으로 서울시 공무원에게 재차 확인했습니다. 개발은 확실하다고요” 진영기 부회장은 갑자기 며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새아가, 넌 이 사실을 언제 알았어?” “네? 홍소영은 시아버지의 이렇게 화난 표정은 처음이다. 몰랐다고 시치미를 떼기에는 이미 늦었다. 자신의 안색이 이미 창백하다는 건 거울이 없어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도 돈 마련해서 땅 샀어?” “…네.” “저놈 말 믿고?” 시아버지가 가리키는 손끝에 남편이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네. 그렇지만 저도 확인했어요, 아버님.” “친정 기자들 돌렸냐? 기자들이 확인해줬어?” “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요. 마포 상암동, 은평구 수색동. 이 두 곳으로 확정 났데요. 조금씩 땅값이 오르고 있어요.” “넌 돈이 어디서 났어? 친정집에서 빌렸니?” “…네.” 그냥 받았지 빌린 건 아니지만,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친정도 알겠구나. 그럼 사돈댁에서도 땅을 엄청나게 사들였을 테고.”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시아버지의 말이 틀림없다는 것쯤 모를 리 없으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시댁에서 돈 빼돌려 친정에 갖다 바친 것과 뭐가 다를까? 정보가 곧 돈이 되는 시대니까 말이다. “너희 둘, 참… 천생연분이다. 쯧쯧.” 진영준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한심한 눈길을 느끼자 억눌렀던 반발심이 튀어나왔다. “아버지. 정확한 정보 맞습니다. 그리고… 개발 정보로 돈 버는 일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왜 역정 내시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이놈이…. 그래도!” 짝―! 참았던 진영기 부회장의 손이 올라갔다. 결혼까지 한 어른이기에 손찌검만은 말아야지 하는 결심도 멍청한 아들놈에게는 소용없었다. “이 자식아. 네가 무슨 돈으로 땅을 샀어? 사재를 담보로 대출받은 거야 네놈 거니까 다 날리든 말든 상관 않겠다. 이 정도 선에서 끝냈다면 모른 체 지나갔을 거야.” 진영준은 눈을 감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젠장, 다 들켰구만.’ “넌 회사 돈까지… 계열사 수십 군데에서 골고루 빼먹었지? 건설에서는 아예 선금으로 땡겼고? 그게 제정신으로 할 짓이냐!” 진영기 부회장은 목소리는 차마 높이지 못했다. 이 집안 사람들 전부 회사 돈을 쌈짓돈처럼 꺼내 쓴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신만 해도 수십, 수백 번 그 짓을 했고 지금도 반복한다. 하지만 아들놈의 경우는 다르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빼먹어야 하는데 파악한 돈만 해도 수백억이다. 자칫 잘못되어 그 돈이 날아가면, 최악의 경우 횡령이다. 하지만 고개 숙인 아들의 표정은 진영기 부회장을 속을 뒤집어버렸다. 삐죽이 튀어나온 주둥아리가 이놈의 심정을 말해준다. 땅값은 오르고 있고 매매 차익으로 메꾸면 되는데 뭐가 문제냐고 말이다. “잘 들어. 내가 아는 걸 네 할아버지가 모르겠어? 그런데 왜 아무 말 없으신지, 넌 모르지?” “하, 할아버지도요?” 아버지보다 할아버지를 더 무서워하는 아들을 보자 자존심이 상했지만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실권을 쥔 자를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끝이 좋으면 문제 삼지 않으시는 분이다. 과정이 지저분한 것쯤 눈감아주시는 분 아니냐?” 아들놈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보니 투기는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가득해 보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더는 말 않겠다. 하지만 끝이 좋지 않을 때 내게 와서 살려달라고 빌지 마라. 네가 책임져야 한다.” “염려 마십시오. 화려한 엔딩이 틀림없으니까요.” 가슴을 탕 치며 자신감을 내비치는 아들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 * * ‘새서울타운발전구상’ 일명 디지털미디어시티 프로젝트는 서울시에서 조용하게 발표했지만, 건설업계의 반응은 더할 수 없이 시끄럽고 뜨거웠다. 무려 17만 평의 대지 위에 빼곡히 들어설 대형 빌딩을 세우는 일이다. 향후 10년 이상 멈추지 않을 건설 현장. 공교롭게도 순양의 회장님 사위가 칼자루를 쥐고 있으니 건설업계는 함부로 명함을 내밀지 못했다. 그나마 대현건설 정도가 한자리 차지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며 여론전을 펼쳤을 뿐이다. “내가 뇌수술까지 했는데 병문안 한 번 오지 않더니 돈 되는 일이라니까 밥 먹자고 연락해?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닌가?” “영감탱이가 명줄도 길어. 수술실에서 콱 뒈져야 했는데, 아쉽구먼. 허허.” “나 먼저 가면? 혼자 남은 세월을 외로워서 어찌 견디려고? 나라도 있어야 심심치 않지. 허허.” 진 회장이 잔을 내밀자 대현그룹 주영일 회장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술 마셔도 되나?” “주 회장 마시는 거 구경하는 거로 만족해야지. 이 꼴이잖나?” “그냥 쓰고 계시게. 흉한 거 보면 술맛 떨어져.” 진 회장이 모자를 벗으며 수술 자국을 보여주려 하자 주 회장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그나저나 그 교통사고 말일세. 진범은 잡았나?”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주 회장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귀도 밝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나?” 진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경찰까지 입을 막았지만, 대현의 정보력은 피하지 못했다. “그냥 뚝 떼서 골고루 나눠주게. 그게 속 편하이.” 주 회장은 못 들은 척하며 엉뚱한 소리를 했지만, 못 알아들을 리 없는 진 회장이다. 자신이 자식을 의심하듯 주 회장은 이미 그 사고의 원인을 짐작한 듯 보였다. “그래서 전부 쪼개버렸나?” 주영일 회장은 이미 대현그룹 상속 절차를 거의 끝마쳤다. 자식들의 태어난 순서와 능력을 고려해서 큰 무리 없이 계열 분리를 한 것이다. 물론 대현이라는 이름은 유지하지만. “내가 아들놈이 좀 많은가?” “자랑이다! 한배만 탔어야지. 뭔 여자를 그리 밝혔나?” 주 회장은 아들이 일곱이었다. 그 일곱의 아들은 모두 세 여자에게서 얻은 것이기도 하다. “없이 살다가 갑자기 돈이 생기니 여자도 생기더라고. 허허.” 주 회장은 겸연쩍은 웃음을 보였지만 부끄러운 기색은 아니다. “한 놈에게 밀어주는 게 맞아. 나눠주면 당신이 저승으로 떠난 뒤에 결국 다 갖겠다고 싸울 게 뻔해. 아버지 마음 편하자고 자식들이 서로 칼질하게 만든 셈이야.” 진 회장이 못마땅한 듯 핀잔을 줬지만 주 회장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건 지들 문제지. 내가 저승에서 내려다볼 것도 아닌데 싸우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고약한 늙은이. 에잉.” 주 회장은 술을, 진 회장은 회를 집으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깬 건 진 회장이었다. “우리 사위가 진행하는 거, 눈독 들이지 말게. 그건 우리 몫이 아니야.” “그럼? 자네도 빠진 겐가?” “그래. 정권의 눈치도 봐야지. 이번엔 고만고만한 회사들 차례야. 우리야 그거 없어도 먹고살지만, 그 프로젝트로 기사회생할 회사들이 줄을 섰어. 그들이 가져갈 거야. 청와대도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러니 쉽게 허락이 떨어진 것이고.” 주 회장은 아쉬운 표정으로 술잔을 비웠다. “이거 원, 떨어지는 떡고물이라도 주우려면 자네 허락을 받아야겠네그려.” “알면 껄떡대지 말고 잠자코 기다려. 내가 적당히 챙겨줄 테니까 소란 떨지 말고.” 진 회장이 선심 쓰듯 말하자 주 회장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보였다. “오늘 술값은 내가 내지.” “당연히 그래야지.” 주 회장은 진 회장의 표정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네 사위 말일세. 서울시장 4년 하고 나서 대선 출마한다는 소문이 자자해. 자네가 밀어주는 건가?” “대선은 무슨! 그놈은 제 마누라 꼭두각시야. 마누라 없으면 끼니도 못 챙겨 먹을 위인이 언감생심 청와대는!”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투표는 국민이 하는데. 언론 좀 타고 인기 올라가면 헛된 꿈도 아니야.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면 가능성이 꽤 높아.” 진 회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걸세. 시장놀이 4년으로 그놈 정치 인생은 끝낼 걸세. 그런데 우리 주 회장님이 왜 남의 집안일에 관심을 보이실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지. 순양그룹 사위가 대통령이 되면 큰일 아닌가? 우리 대현그룹 조지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못 하니까 말일세.” “흐흐. 그놈이 대통령이 되면 대현은 두 번째야. 첫 번째는 바로 순양이 될 걸세.” “역시 그렇구먼. 자네 딸도 욕심이 보통 아니네.” “하나뿐인 딸이라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그래. 욕심이 너무 커.” “그러니까 얼른 쪼개서 나눠 주라니까!” 주 회장의 핀잔에 진 회장은 쓴웃음만 지었다. “객쩍은 소리 그만하고 일어나세.” “아이고. 몸도 성치 않은 노인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구만. 먼저 가시게. 난 여기서 만날 사람이 또 있어.” “가진 거 자식들에게 다 줬으면 그냥 뒷방 늙은이로 지내. 나대지 말고.” “살아 있으니 일은 해야 하지 않은가? 밥값은 해야지.” 주 회장은 방을 나서는 진 회장의 등을 한 번 쓸어내렸다. “늙어서 아프면 서러워. 몸 잘 챙기게.” 진 회장은 덕담을 건네는 주 회장을 힐끗 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진 회장이 떠난 것을 확인한 주영일 회장은 지금까지 진 회장과 식사했던 옆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이고, 바쁘신 최 시장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소이다. 미안합니다.” 최창제 서울시장은 주 회장이 인사를 건넸음에도 굳은 얼굴을 한 채 꼼짝하지 않았다. ======================================== [117] 가볍게 잽부터 3 주 회장은 최 시장의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밤낮없이 공무 수행하느라 끼니도 못 챙길 텐데, 오늘은 제대로 된 거 한번 먹어봅시다.” 끼니라는 단어에 유난히 힘주어 말하자 최 시장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비꼬는 것이거나, 도발하는 것이거나, 둘 중 하나다. “회덮밥이면 족합니다. 여기서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요.” “아이고, 이런! 내가 큰 결례를 범했구려.” 내숭 떠는 주 회장의 모습도 께름칙하다. 최 시장은 예의를 던져버렸다. “회장님. 외람되지만 제게 하시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하십시오.” “이런, 오해는 마시게. 당선 축하 인사차 만나자고 한 게 전부요.” 주 회장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럼 축하 인사 받은 걸로 하겠습니다만, 상암동은 포기하십시오. 이미 장인어른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순양과 대현 같은 대기업 배제 원칙은 꼭 지킬 겁니다.” 최 시장은 옆방에서 나눴던 대화를 이미 다 들었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주 회장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아닐세. 위태로운 건설사들 되살리자는 좋은 정책인데 따라야지. 내 뜻을 곡해하지 마시게. 이건 진심이라오.” “그럼 회장님 진심만 받겠습니다. 식사는 다음으로 미루죠. 전 이만….” 최 시장이 엉덩이를 일으키자 주 회장이 손을 뻗어 다시 앉혔다. “이 사람아. 큰일 하겠다는 사람이 이렇게 급해서야 되겠나? 잠시 앉게.” ‘큰일’이라는 말이 최 시장의 발목을 잡았다. 다시 엉거주춤 궁둥이를 붙였다. “최 시장도 이미 알겠지만, 처가살이 그거 보통 힘든 일이 아니네. 마누라 눈치 보는 거야 우리나라 남자들 전부가 겪는 거지만 장인, 장모 눈치까지 보며…. 심지어 조카 눈치까지 보며 살아야 하잖나.” “회장님. 제 자존심 긁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서울시 인허가 문제 하나만으로도 대현그룹 발목 잡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이쿠, 무서워라. 처가에서는 눈치만 보고 밖에 나오면 큰소리치는 것 또한 처가살이하는 남정네들의 공통점이지. 허허.” “주 회장님!” 최 시장은 마치 약 올리는 듯한 웃음에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내가 처가살이 면하도록 도와줌세. 우리 최 시장, 청와대 가는 길에 꽃가마까지 대령하지. 어떤가?” 난데없는 주 회장의 제안에 최 시장은 말문이 막혔다. 청와대라니? 주 회장은 멍한 최 시장을 앞에 두고 말을 이었다. “이미 최 시장 장인은 선을 그었어. 아시지 않는가? 청와대 가는 꽃길은커녕 재 뿌리고 돌이라도 쌓아 막을 인간 아닌가?” 주 회장은 미소를 슬쩍 지었다. “자기 핏줄에게도 가진 것 주기 싫어서 미적대는 양반 아닌가? 하물며 사위…? 잘되는 꼴을 못 볼 사람이지.” “회장님께서 왜 제게 이런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신을 가다듬은 최 시장이 가까스로 입을 뗐다. “나야 늘 사람에게 투자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이 정권이 끝나면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봐야 해. 민주화니 독재니, 양 김 시대니 하는 거 없이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겠지. 어쩌면 서울시장이 가장 선두일지도 모르고.” “회장님 넷째 아드님도 정치가 아닙니까? 3선 의원.” “그놈은 안 돼. 우리 자동차 공장 지역에서 깃발 꽂고 선거하는 놈이야. 그 지역구에서라면 5선, 10선도 무난하지만, 그게 끝이야. 더 큰 정치인은 불가능하지.” 주 회장의 아들은 의원 배지 달고 거수기 노릇이나 하며 지낸다. 같은 당 식구로서 주 회장의 말이 한 치도 틀림이 없음을 잘 안다. “전 순양그룹 사람입니다.” “정치하는 사람이 뿌리가 어디 있나?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거지. 누구라도 밀어주고, 끌어주고, 품어주면 그곳이 뿌리 아니겠나.” “…….” “그리고 서울시장도, 대통령도 큰 가슴이야. 순양도, 대현도 한꺼번에 품을 수 있네.” “동시에 두 그룹의 힘이 될 수도 있다?” 주 회장은 최 시장의 의문에 정확한 답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를 보고 싱긋 웃으며 엉뚱한 소리를 시작했다. “내가 조언 하나만 해도 되겠나?” “귀담아듣겠습니다.” “내가 마누라만 셋이야. 둘은 호적에 올렸고 한 명은 못 올렸지.” “공공연한 비밀 아닙니까? 그리고 회장님 세대야 이 처, 삼 첩이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하는 말일세. 지금도 옛날과 다를 바 없으이. 이혼하고 재혼하는 게 흠이 아닐세. 호적에 여편네 이름 두셋 정도 올리는 게 뭐 대수라고!” 최 시장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친정 믿고 큰소리치는 진서윤이 몸서리쳐질 때도 가끔 있었지만, 지금까지 잘 지내왔다. 더구나 자식 셋이 다 장성했다. 힘든 시절 다 지났는데 결혼 생활을 깰 이유가 없다. “이런, 그건 너무 나가셨어요. 전 제 아내와 헤어질 생각이 없습니다.” “누가 지금 당장 헤어지랬나? 필요한 만큼 같이 살다가 큰소리칠 만한 때가 오면 기회를 줘보라고. 고분고분 말 잘 들으면 계속 살아도 나쁠 건 없지. 사실 자네가 서울시장이 된 그 순간부터 이미 칼자루는 자네 손에 있다고 봐야지.” 마누라에게 눈치 없다고 워낙 구박받다 보니 느는 건 눈치였다. 주 회장이 어떤 길을 제시하는지 확실하게 알아버렸다. 진서윤은 자신이 아니면 순양그룹은커녕 백화점 하나 손에 넣기 힘들다. 마누라가 아무리 뒤에서 컨트롤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서울시장이며, 대권을 꿈꿀 수 있다.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마누라가 자신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마누라를 이용해서 순양을 뺏으라는 말이다. 그리고 대현그룹과 손을 잡자는 의미도 있다. 두 그룹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한국에서 두 그룹 동시에 여러 특혜를 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대통령이라면 말이다. 주 회장의 스폰서 제의가 싫지만은 않았다. 장인어른이 아른거렸지만 마치 바람피우는 것같이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회덮밥 나오려면 아직 멀었습니까? 갑자기 시장기가 확 도는군요.” 최 시장은 주 회장을 향해 환히 웃었다. * * * “지금까지 얼마나 끌어모았어요?” “글쎄, 개발구상 공표 후 투기꾼들이 미친 듯이 모여드니 영준이 것만 딱 골라내기 힘들어.” 남편이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진서윤은 눈꼬리가 올라갔지만 크게 숨 한 번 쉬고 참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천만 시민의 수장이 되고 나서 예전처럼 고분고분한 맛이 사라졌다. 그만큼 함부로 대하기 어려워진 남편이었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어쩐지 진짜 남자가 된 것 같기도 했다. “고모. 얼마나 사 모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저한테 투덜거렸어요. 시세의 두 배까지만 매입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급등하는 바람에 네 배, 다섯 배까지 줬다고 말이죠. 다 쏟아부은 건 확실합니다.” “그럼 지금 취소해버리면…?” “타격이 엄청날 겁니다. 회복하기 어렵죠.” 잠자코 듣고 있던 고모부는 탁자를 툭 쳤다. “좋아. 이제 터트리자.” “여보. 가만있어 보세요. 전체 규모를 파악한 뒤에….” “아냐. 내가 생각해 둔 게 있어. 처음부터 영준이를 두들기면 당신이나 나나 많이 곤란해져.” 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내 목표는 진영준이 완전히 할아버지의 눈 밖에 나는 것이다. 그런데 목표를 바꿔버리다니. “여보! 당신이 직접 진영준을 거론해야 재벌가의 사위라는 꼬리표를 떼요.” “당연히 그렇게 할 거야. 하지만 처음부터 그럴 필요는 없어. 처음 총질은 다른 곳에서 하고 난 총 맞고 쓰러진 영준이를 한 번 밟아주면 되는 거야.” 갈수록 태산이다. 고모가 시키는 대로만 하던 돌쇠 같았던 사람이 스스로 계략을 세우다니. 갑자기 변한 게 서울시장이라는 타이틀 때문일까? “내가 검사 생활만 몇 년인데? 기획 수사할 때는 외곽부터 치는 거야. 대놓고 훅 들어가면 표적 수사라는 오해만 받아. 이건 내게 맡겨.” 자신감 넘치는 고모부를 보자 께름칙하다.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총잡이는 국세청이 될 테고 칼잡이는 검찰이야. 난 전리품만 주울 테니까 지켜보라고.” * * * “…이 참담한 심정과 마음 깊숙이 피어나는 분노를 참을 길 없습니다. 국난(國難)이나 다름없는 IMF를 극복하고자 서민들은 장롱 깊숙이 보관한 돌 반지까지 꺼냈습니다. 그런데 부자들은 금값이 오르니까 금을 사 모으고, 값 떨어진 땅, 주식, 건물을 마치 쇼핑하듯 쓸어 담고 있습니다.” 고모부의 긴급 기자회견은 TV로 생중계 중이었다. 회견문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그 내용이 뭔지 알 것 같은 표정이다. 그의 얼굴은 분노 그 자체였다. “건설 경기를 부양하고, 어려운 시기일수록 힘을 잃지 않도록 문화를 촉진하려는 사업이었습니다. 그래서 국민의 자산이나 다름없는 공유지까지 내놓았습니다. 더 이상 부당 이익이나 취하려는 부동산 투기는 절대 묵과할 수 없습니다.” 발표문을 내려놓은 고모부는 카메라를 응시했다. 방송사 역시 고모부의 얼굴을 확 끌어당겼다. “서울시는 투기 현황을 조사했고 은평구 수색동에 엄청난 투기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또한 ‘새서울타운발전구상’ 안을 재검토했습니다.” 고모부는 물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이제 마지막 폭탄을 터트릴 것이다. “재검토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새서울타운’ 선정 지역 중 은평구 수색동은 제외합니다. 마포구 상암동으로 한정할 것이며 그 규모도 축소합니다. 부동산 투기꾼에게는 단 십 원의 이익도 돌아가지 않도록 철저히 규제할 것입니다.” 수색동에 땅을 매입한 사람들은 큰 손해를 본다는 말이다. 초기에 싸게 매입한 사람들은 손해는 보지 않겠지만 되파는 일은 어려워졌다. 개발 제외 구역이니 사겠다는 사람이 자취를 감출 것이기 때문이다. 총잡이 칼잡이가 왜 등장할지도 알겠다. 서울시장이 나서서 투기 과열이라고 격분했으니 두 사정 기관에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나라에 돈이 없어 이 난리를 치는데 누구는 땅 투기를 일삼으니 국민 여론 등쌀에 못 이겨 곧바로 수사에 착수할 것이다. “저 양반, 시장 되더니 포스 좔좔이네.” “검사 출신이잖아요. 타겟 정하고 작살낼 때 고모부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거죠.” 뜻밖의 고모부 모습에 오세현은 짧은 휘파람까지 불었다. “머리 좋아. 손에 피 안 묻히고 진영준이를 잡잖아. 진 회장도 괘씸하게 생각 못 할걸.” “갑자기 확 변한 것 같죠?” “저게 본모습일 수도….” “그럴까요?” 오세현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저 친구 이제 질주할걸? 어쩌면 폭주로 보일 정도로 말이야.” “마누라에게 주눅 들어 살던 게 터져 나오는 겁니까?” “그렇지. 자기 생각, 소신, 의견은 입 밖에도 못 내다가 스스로의 힘으로 시장이 됐잖아. 이건 마누라가 아무리 지원했다 해도 최 시장의 능력이야. 그러니 자신감이 넘칠 테고.” “이제 클났네. 흐흐.” 오세현은 내 웃음의 의미를 단번에 알았다. “저 집, 이제 매일 부부 싸움이야. 참, 네 고모 호텔 생활 접고 집으로 들어갔지?” “네. 싸움을 피하지도 못해요.” 서울시장 부부의 가정에 불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신혼부부가 먼저 시작하겠지만. * * * 홍소영은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친정에서 준 50억을 전부 쏟아부었지만 최 시장의 발표 직후 반 토막 났다. 앞으로 더 떨어지면 얼마나 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 큰 문제는 친정이 쏟아부은 돈이다. 정확한 액수는 말하지 않았지만, 초상집 분위기라는 것만 전해 들었다. 그녀의 원망과 분노는 바로 시고모인 진서윤으로 향했다. 서울시장은 진서윤이 조종하는 꼭두각시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 [118] 가볍게 잽부터 4 “아가씨. 부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침실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올 것이 왔다. 정신을 차리고 아래층 거실로 내려가니 술이 덜 깬 것처럼 보이는 남편이 머리를 떨구고 있는 모습부터 보였다. “꼬락서니 하고는. 쯧쯧.” 진영기 부회장은 혀를 한 번 차고는 다시 냉랭한 표정으로 변했다. “새아가. 너도 술 마셨어? 아직 술이 덜 깬 거냐?” “아, 아니에요. 아버님. 몸이 좀 무거워서….” “아침도 거를 만큼 안 좋은 게냐?” 뻔히 사정을 알면서 자꾸 캐묻는 시아버지가 얄미웠지만 한마디도 못하고 머리만 숙였다. “새아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허투루 듣지 말고 친정에 알려야 한다.” “…네.”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두려웠지만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시아버지의 표정과 말투는 엄중했다. “넌 땅을 산 적이 없다. 알겠지?” “네?” “네 명의로 땅을 얼마나 샀던지 간에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 친정아버지, 아니 친정 식구 중 누군가가 너도 모르게 땅을 산 거야. 넌 네 명의를 빌려주겠다고 말한 적도 없어. 한마디로 넌 이번 일에는 조금도 관계하지 않은 거다. 알아들었느냐?” “아, 아버님. 그… 그게….” 불가능한 소리다. 홍소영은 직접 부동산업자들의 귀한 대접을 받으며 수색동을 누비지 않았던가? 언론사 집안의 딸이다. 부동산 사무실 몇 군데만 돌면 자신이 직접 땅을 확인하고 샀다는 사실은 신입 기자라도 놓칠 리 없다는 걸 잘 안다. “아직 내 말을 이해 못 했느냐? 순양가의 맏며느리가 시집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땅 투기라고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어? 집안 망신을 네가 다 시킬 셈이냐?” 시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아니, 명령했다. “만약 너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는 기사 한 줄이라도 나는 날에는 너뿐만 아니라 네 친정도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야.” “네.” 방법은 나중에 생각하더라도 일단은 고분고분 대답할 수밖에. “그리고 우리 장남.” “예. 아버지.” “고개 들어라. 그래야 내가 뺨이라도 때리지. 다 큰 자식 뒤통수 때리는 건 좀 그렇지 않니? 가뜩이나 나쁜 머리, 더 나빠지면 안 되잖아.” 진영준은 쌍욕이 터지려는 걸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지만, 아버지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모습에 용기를 낸 진영준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네가? 어떻게?” 입꼬리가 올라간 아버지의 얼굴, 자신을 비웃는 게 확실하다. 하지만 지금은 최대한 아버지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제 이름으로 산 땅은 얼마 안 됩니다. 대부분 법인 명의로 매입했으니까요. 그리고 제 명의의 땅, 매입가로 법인에 넘기고요.” “그리고?” “잠잠해질 때까지 놔둬야죠.” “놔두면? 하루가 다르게 땅값은 떨어지는데?” “어차피 지금은 거래가 없습니다. 팔겠다고 내놔도 아무도 안 사요.” “아무도 안 사는 땅, 넌 몇 배나 더 주고 샀지?” 자꾸 비꼬는 아버지의 말은 못 들은 척했다. “상암동 개발이 시작되면 그 땅도 제자리를 찾을 겁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둔 곳입니다. 무조건 올라요. 그때 되팔면 손해는 없습니다.” “그렇구나. 언젠가는 돈 버는구나. 개발 기간이 10년이니까… 10년 뒤쯤 말이지. 이놈아! 그걸 말이라고!” 참고 참았던 진영기 부회장의 팔이 올라가려는 찰나 홍소영이 급히 입을 열었다. “아, 아버님. 고모부 아니… 고모님 만나서 해결하겠습니다.” “당신은 잠자코 있어!” 진영준이 소리를 빽 질렀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이런, 우리 새아가를 내가 깜빡 잊고 있었구나. 그래, 좋은 방안이 있으면 한번 말해보거라. 어서.” “고모부께서 공식적인 회견을 하셨지만, 추가적인 절차를 잠깐만 홀딩하시면 됩니다. 그동안 제가 강남 업자들에게 루머를 뿌릴게요. 투기 과열을 식히기 위한 숨 고르기 일뿐, 계획대로 추진한다고 말이에요. 그럼 순식간에 팔아치울 수 있어요.” 홍소영은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모르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오호라. 인제 보니 우리 며느리 머리가 보통 아니구나. 그럼 묘책을 순식간에 생각해내다니 말이다.” 홍소영은 시아버지의 표정을 보며 남편이 왜 자신의 입을 막으려 했는지 알았다. 얼굴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은 그가 얼마나 화났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경멸의 눈빛도 놓치지 않았다. 급하다 보니 잠시 잊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한 번 뱉은 말을 두 번 되풀이하는 것이라는 걸. “새아가. 넌 지금 당장 이 층으로 올라가서 짐을 싸라.” “네?” “짐 싸서 친정으로 가. 이번 일에 네 흔적 말끔히 지울 때까지 돌아오지 마. 알아들었어?” “네!” 홍소영은 도망치듯 이 층으로 올라갔다. 진영기 부회장은 혼자 남은 아들의 머리통이라도 갈기고 싶었지만 참았다. 못난 자식이 사고 친 것은 아비가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 * * * 불안하다. 각본대로 움직이던 고모부가 계획에도 없던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결과는 똑같다고 말했지만, 자칫 잘못하면 아무런 소득도 없이 한바탕 소란으로만 끝날 것 같아 불안하다. 진영준을 엿 먹이는 건 어쩌면 고모부 손에 달린 것일 수도 있다. 비선이 있던, 실세가 있던, 권력을 쥔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힘을 지닌다. 당분간은 고모부의 움직임을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나도 또 다른 내 계획을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 이번엔 좀 어려운 일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계획은 알고 있는 미래를 이용하는 것도, 상대와 싸우는 것도 아니다. 큰 욕심 없는 사람에게 욕망을 심어줘야 한다. 설득은 상대의 선의를 자극하는 것보다 욕망을 건드리는 게 훨씬 쉽다. 욕심 없는 사람은 마음을 건드릴 실낱같은 구멍이 없다. 그렇기에 욕망의 불씨를 자극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큰 욕심 없는 사람은 지금 나를 보며 웃고 있다. “우리 아들 심각한 얼굴을 보니 조금 떨린다야. 뭐냐? 그 진지한 표정은?” “보통은 이럴 때 웃으며 말해야 하는데 잘 안 되네요.” “좋은 일이면 웃어야지. 왜 못 웃어?” “좋기도 하지만 큰일이거든요.” “큰일?” “네. 십 년, 이십 년 뒤에 완성할 큰 퍼즐의 첫 조각을 맞추는 일입니다. 퍼즐 조각도, 퍼즐을 장식할 액자도 준비했는데 퍼즐 맞출 사람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 이야기를 내게 하는 걸 보니 사람을 구해달라는 말 같은데?” “네.” “그럼 어떤 일인지 들어보자. 내가 적당한 인물 있는지 물색해보마.” “아버지도 아시죠? 고모부가 발표한 새서울타운 일명 디지털미디어시티요.” “그래. 세현이와 네가 시작한 일이잖니.” “그렇죠. 전 그 프로젝트를 단순한 건설 사업으로 본 게 아닙니다.” “그럼? 또 다른 게 있어?” “이름대로예요. 미디어시티를 건설할 겁니다.” 아버지는 언뜻 이해하지 못했는지 미간을 찌푸리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렇군. 껍데기뿐만 아니라 알맹이도 원하는 거였구나.” 껍데기는 건물이고 알맹이는 바로 미디어 기업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 같다. “네. 이제 시대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갑니다. 그게 뉴밀레니엄의 상징이기도 하고요. 통신망과 전자제품의 발전 속도는 이 시대 사람들의 상상 이상으로 빠릅니다. 전 상암동을 거대한 미디어 기업으로 꽉 채우고 싶습니다.” 그간의 내 모습 때문인지 허무맹랑한 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신 듯하다. 오히려 호기심을 드러낸다. “영화사, 독립 프로덕션, 음반사, 기획사 등등. 미디어 관련 기업은 많아. 하지만 이 바닥은 철저한 분업이야. 전부 다 주무르는 건 불가능해.” “과연 그럴까요?”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됩니다. 당장 순양그룹만 보세요. 전자부터 식품까지 한 묶음입니다. 지금까지 미디어 시장이 찢어진 채 성장한 건 그만큼 규모가 작았기 때문이지 불가능해서가 아닙니다.” 내 말이 억지처럼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전부 주무르는 집안의 아들 아닌가? “시장을 보세요. 시청률 60%의 드라마가 줄을 이어 나오고 250만 장 이상 팔리는 음반이 쏟아집니다. 타이타닉은 관객 500만이 넘어갈 추세고요. 앞으로 천만 관객 넘기는 영화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지금 시장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는 중이에요.” 현업에 있는 아버지니까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다만 퍼즐이 너무 크다. 100피스, 200피스짜리라면 고민하지 않겠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2,000피스, 3,000피스가 넘는 크기다. 이제 10,000피스짜리를 이야기할 차례다. “영화, 방송, 음악뿐만이 아닙니다. 전 채널 사업도 생각합니다.” “채널? 설마 방송사 말이냐?” “네.” 어이가 없는지 입을 벌린 채 말을 잊은 아버지를 보자 아차 싶었다.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지금은 방송이나 채널이라고 말하면 공중파만 생각하는 시대다. 케이블 방송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오해하지 마시고요. 공중파 아닙니다. 케이블 방송사부터 시작해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시작은 소박하게 해야죠.” “이놈아. 소박하다니? 케이블 방송 사업이 쉬운 줄 알아? 사업 신청부터 허가도 쉽지 않다. 그리고 지금 케이블 방송은 대부분 적자야.” “그러니까 소박하죠. 적자에 허덕이는 방송사를 인수만 하면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인수한다고?” “네. 이미 매물로 나온 게 있지 않습니까?” “DCN?” 1995년 3월 출범한 영화전문채널이다. 무료 영화 채널임에도 외화 확보를 위해 무모한 출혈을 계속하다 보니 처절한 적자에 허덕인다. 게다가 멀티플렉스 영화관 사업까지 진출한 지금, 외환 위기에 휘말려 회사 사정은 부도 직전이다. 워낙 큰 대기업들이 쓰러지니 언론의 관심 대상이 아닐 뿐, 업계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영화야 아버지의 전문 분야 아닙니까? 외화도 문제없이 수급할 수 있습니다. 미국 미라클 인베스트먼트는 헐리우드의 큰 투자자입니다. 한국 판권은 쉽게 확보할 수 있어요. 어떻습니까? 딱 맞지 않습니까?” 채널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콘텐츠 확보가 가능하니 갑자기 현실성 있는 계획으로 둔갑해버렸다. 인수 자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자금에 대한 걱정은 없었을 것이다. 아들이 엄청난 부자라는 걸 이미 아니까 말이다. “영화로 시작해서 차근차근 채널을 늘려 나갈 생각입니다. 드라마, 음악, 게임….” “게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아버지는 생뚱맞은 단어가 나오자 반응을 보였다. 아차차, 이건 천천히 말씀드려도 되는데…. 말하다 보니 사심이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애니메이션 채널 투니버스의 최고 시청률은 작년부터 시작한 ‘플러스게임’이라는 코너더군요. 애들이 아니라 어른도 본다고 합니다.” 내년부터 시작할 스타 리그의 전신 99 프로게이머 코리아 오픈은 게임 방송의 포문을 열 것이다. 그 전에 게임 채널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임요환, 이윤열, 홍진호, 기욤 패트리 같은 친구들을 불러서 스타크래프트를 한판 할 수 있다. 물론 판판이 깨지겠지만, 바둑에도 있지 않은가? 지도 대국이라고. 할아버지도 조훈현 국수(國手)를 초대해 가끔 지도 대국을 둔다고 했다. 사람이 일만 하며 살 수는 없다. 가끔 게임도 하면서 머리를 식혀야 한다. 실력이 좀 늘면 2:2 팀플도 좀 하면서 말이다. “너 왜 실실 웃냐?” “아, 아닙니다.” ======================================== [119] 철부지와 백년손님 1 취미 생활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나 보다.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다시 비즈니스로 돌아와야 했다. “드라마나 게임은 나중 일이고, 우선은 말씀드렸다시피 영화입니다. 무료는 물론 유료 영화 채널도 확보할 생각입니다. 그다음 점차 늘려 가야죠.” “케이블 방송이라….” 아버지는 아직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없으니 찬성도, 반대도 못 한다. “아버지, 케이블 채널이 공중파의 영역을 뺏어오는 건 먼 미래가 아닙니다. 미국을 보세요.” USA, TNT, FX, MTV, Syfy 같은 베이직 케이블은 물론 유료 케이블 채널의 대명사인 HBO를 필두로 Showtime, Starz같은 유료 채널도 성행이다. 특히 미국은 공중파 프로그램의 재방송 외에도 오리지널 시리즈를 자체 제작한다. 이 시리즈는 2000년 이후 골든 글로브와 에미상을 휩쓸기 시작할 것이다. 케이블 채널이 엔터테인먼트 부문을 주도해 나가는 곳이 미국이다. “글쎄다. 과연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될까? 공중파 세 곳에서 쏟아내는 컨텐츠만 해도 넘쳐나는데?” “특색 있는 프로그램, 웰메이드 드라마로 승부해야죠. 맛집은 위치가 후미진 곳에 있어도 손님이 알아서 찾아옵니다. 채널 사업의 관건은 결국 양질의 컨텐츠 아니겠습니까?” “이론적으로야 그렇지만….” “이제 열리기 시작하는 시장입니다. 우리가 의존하고 따라야 하는 것은 결국 이론뿐입니다.” 아버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눈치 없는 분이지만 이 정도까지 입 아프게 말했다면 누구를 생각하는지 알아챌 법도 하다. 하지만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대답이 들려왔다. “도준아. 네가 말한 그 계획이 가능하다고 말하며 맡겨보라고, 잘해낼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놈이 없진 않을 게다. 하지만 그런 놈 대부분이 사기꾼이다. 이 바닥은 사기꾼이 넘쳐 나니까 말이야.” “그럼 적당한 사람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버지는 머리를 끄덕였다. “웬만한 사업가 아니면 조직 구성하는 것도 벅차. 최소 10년 잡고 적자 폭을 줄이며 버틸 만한 사람이 나와야 해. 처음부터 떼돈 버니 뭐니 하는 놈 역시 사기꾼이다.” 어쩌면 좋을까? 사기꾼이 아니면서,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보며, 10년 만에 충무로 파워맨 순위 1위에 오른 사람이지만 아들의 속셈도 읽지 못한다. “역시 믿을 만한 분은 제가 생각했던 그분밖에 없군요.” “뭐야? 이미 생각해 둔 사람이 있으면서 내게 물은 거냐?” “네. 아무리 생각해도 전 1순위 후보로 그분밖에 생각 안 나서요. 혹시 아버지가 다른 분 있으신가 해서 여쭤본 겁니다.” “그 사람이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이냐? 설마, 오세현이는 아니겠지?” “세현 삼촌은 지금 일만으로도 벅차요. 제가 생각한 분은 영국에서 제대로 경영, 경제를 배웠고 미디어 분야에 10년 일했으며 지금 충무로를 꽉 잡고 계시죠.” 이 정도면 알아채야 정상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정상이었다. 크게 뜬 눈을 깜빡거리지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정확히 앞으로 10년 동안 돈을 쏟아부을 생각입니다. 적자는 이미 각오했고요. 10년 뒤에 완성할 미디어 제국만 생각합니다. 충분히 뿌리고 10년 뒤부터 거둘 겁니다. 참, DCN은 멀티플렉스를 준비 중이었습니다. 인수하면 그것도 시작할 겁니다.” 양질의 컨텐츠를 생산하고 그 컨텐츠를 소비할 공간과 채널을 확보한다. 퍼즐 그림은 단순하지만 크기가 크다. 그리고 퍼즐은 그림이 단순할수록 맞추기 힘들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표정도, 대답도 미묘하다. 분명 하고 싶은 욕심은 보이는데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는 건가? 아니면 아들의 돈을, 그것도 엄청난 돈을 날려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까? 나 역시 성공하리라는 자신은 없다. 한국을 지배하는 미디어 그룹을 만드는데 내가 가진 돈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또한, 아버지의 역량이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돈은 또 벌면 되고 실패는 또 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어차피 미디어 제국은 나의 첫 번째 목표가 아니다. 이것은 순양가의 큰아버지들이나 사촌들은 절대 경험하지 못하는, 우리 가족만의 기쁨을 위한 것이다. 할아버지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서 허덕이는 건 나 혼자면 충분하다. 우리 가족은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는 기쁨을 만끽하게 하고 싶다. 아무튼, 아버지의 부족한 자신감을 채워줄 동기를 만들어야겠다. “아버지가 못 하시겠다면 할 수 없죠. 전 딴 사람을 물색해볼게요. 어떤 일이 있어도, 돈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이 계획은 꼭 시작할 겁니다.” 아들이 딴 놈에게 뻔히 사기당하는 꼴을 지켜볼 아버지가 있을까? “도, 도준아. 서둘지는 말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함께할 사람이 있는지, 재능 있는 사람들이 동참할지도 알아봐야 해. 누가 뭐래도 미디어는 재기 넘치는 사람들이 돈보다 더 중요하거든.” “네. 상암동에 첫 삽 뜨는 건 아직 멀었습니다. 공사 시작할 때 DCN 인수하고 시작할 거니까 천천히 그리고 신중히 생각하세요.” 붉게 상기된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흐뭇하기도 하다. 나보다 더 열정 넘치는 젊은 사람처럼 보인다. * * * “영준이가 계열사 돈을 좀 끌어다 썼습니다.” “그건 나도 들어서 알고…. 그 돈을 다 날렸나 보지?” “죄송합니다. 제가 아이를 잘못 가르쳤습니다.” 진 회장은 고개 숙인 장남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뿜었다. “부전자전인 게지.” 진영기는 치욕스럽기까지 했지만 진 회장은 전혀 다른 뜻이었다. “자식 교육 엉망인 건 네가 날 닮아서 그런 거 아니겠느냐?” 어떻게 말하든 질책하는 건 맞다. “그런데 말이다. 영준이 그놈이 돈벌이에 혈안인 놈은 아니지 않느냐? 왜 갑자기 부동산을 질렀을까?” 진영기가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자 진 회장이 말했다. “내가 그 개발 지역을 몰라서 가만있었겠느냐? 나라도 어수선하고 최 서방이 벌이는 첫 사업인데 괜한 구설에 오르내릴까 봐 조심했던 게야. 그런데 난데없이 영준이가 왜?” “사실은 개발 정보를 먼저 입수했습니다.” “그래? 혹시 최 서방이 알려준 게냐? 아니면 서윤이가?” 진영기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여동생이 도준이를 통해 영준이를 꼬드긴 게 확실하다. 그리고 최 서방이 뒤통수를 쳤고.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아버지 앞에서 여동생에게 당했다는 소리를 할 수 없지 않은가? “아닙니다. 도준이가 우연히 개발 계획서를 본 모양인데…. 둘이서 술 한잔하다 그 이야기가 나왔나 봅니다. 영준이는 도준이 말을 단서로 삼아 이리저리 알아봤고요.” “도준이가?” 진 회장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진영기는 아차 싶었다. 마치 아끼는 손자를 모함하는 모양새가 나와버렸기 때문이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을 겁니다. 원인은 영준이 욕심 때문입니다.” 황급히 변명하자 진 회장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지나간 일, 따져서 뭐하겠느냐? 앞으로가 문제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진 회장은 또 자신감을 드러내는 장남이 못 미더웠다. 이건 쉽게 풀릴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영기야.” “네.” “여동생한테 당하는 장남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진영기는 자신이 우려했던 바로 그 말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제가 잘 처리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일 없을 겁니다.” “그래. 나가봐라.” 진영기는 별다른 질책 없이 잘 끝냈다는 안도감에 밝은 표정으로 서재를 나갔다. 문 닫는 소리가 나자마자 진 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쩌면 좋을까. 저 나이가 되도록 누가 화살을 겨누고 있는지 짐작도 못 하다니. 어이그.” 진 회장은 도준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누가 시나리오를 썼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손자가 슬슬 발톱까지 드러내는 것 같아 놀랍기도 했다. 그리고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도준이가 시나리오를 썼다면 이 정도에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아직 클라이맥스는 나오지 않은 게 분명했다. 진 회장 자신도 이 시나리오 끝을 모르니 불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 * * “형님, 아니 선배…. 아, 시장님.” “됐다.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 새삼스럽게….” 서울시장실을 찾은 사내들은 조금은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래, 좀 알아봤어?” “네. 형님 기자회견 하시자마자 지검에서 땅 매입자 파악하느라 난리였습니다.” “진영준이 그 새끼 맞지?” “네. 역시 재벌 3세는 다르더군요. 이건 그냥 싹쓸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개인 명의는 아니고 진영준이 대주주로 있는 법인 두 곳입니다.” “자금 출처는?” “당연히 순양그룹이죠.” 최 시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걸렸어. 그렇지?” “그런데 지검에서는 쉬쉬합니다. 더 파면 분명 배임이나 횡령 혐의 걸 수 있는데 순양 이름이 나오자마자 덮었어요.” “그 새끼들이야 전부 순양 장학생이니까. 떡값 받은 거 보답해야지.” 떡값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사내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형님. 우리도 형님 통해서 순양 돈 받아 썼어요. 우리 손으로 깔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까는 건 내가 한다. 너희들은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거야. 그리고 걱정은 접어 둬. 우리 장인어른, 절대 떡값 준 거 떠벌릴 사람 아니다. 너희들 떡값을 끊어버리는 선으로 정리할 거야. 잘 알잖아. 순양 돈 받아서 탈 난 사람 없다는 거.” 안심시켜도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다. 끊어질 떡값 때문이다. “이 자식들아! 내가 다 채워줄 테니까 표정 풀어.” “감사합니다. 형님.”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으며 머리를 꾸벅 숙였다. “이번에 둘 다 잡는다. 진영준이를 잡고 그놈을 덮어준 놈도 잡아야지. 그리고 그 자리에 너희들이 들어가라.” “형님이 말씀하시는 그놈은 바로 검사장입니다. 힘들어요. 그냥 진영준으로 끝내시는 게….” “너, 서울시장을 물로 보냐?” “아니, 그게 아니고요.” “잘 들어. 시장이 마이크 잡으면 전 언론, 방송이 스피커 역할을 해줘. 지금 검찰, 법무부는 여당 쪽 라인이잖아. 내가 우리 야당과 발맞춰서 철저한 수사, 특검을 요구할 거다. 내 조카 놈은 변호사 사서 횡령이 아니라 업무용 토지 매입으로 빠져나갈 거야.” “그럼 딱히 시끄럽게 할 의미가….” “목표는 은폐, 부실 수사를 일삼은 검찰, 바로 여당 라인을 걷어내는 거다. 시장 임기 끝나고 다음 대선 때 검찰이 전적으로 날 서포트할 기반을 만드는 게 핵심이야.” “아…!” “그 기반이 바로 너희들 아니냐? 대검, 중앙지검은 너희들 라인으로 확실히 장악해야지. 흐흐.” “역시. 대권 도전입니까?” 최 시장의 검찰 후배들은 은근히 떠도는 소문을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듣자 화색이 돌았다. 최초의 검찰 출신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기도 하다. 가능성이 낮은 것도 아니다. “그래. 나의 대권 도전 첫발은 바로 처갓집을 밟고 검찰 애들 쳐내는 것부터야. 기대하라고.” “그 첫발은 언제가 될지 기대됩니다.” “기대하라고. 다음 주에 터트릴 테니까.” 최 시장은 등받이에 몸을 한껏 기댔다. 그 모습은 눈치 보는 처가살이 사위가 아니라 거만한 검사, 당당한 남편의 태도였다. ======================================== [120] 철부지와 백년손님 2 서울시청사 브리핑룸은 카메라와 기자들로 득실거렸다. 이미 소문이 한 바퀴 돌았다. 서울시장이 중대 발표를 할 것이며 그 내용은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충격적이라는 것이다. 기자들이 정보를 주고받느라 웅성거릴 때 최창제 시장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채, 원고 몇 장을 들고 단상에 올랐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질 때 최 시장은 마이크 높이를 맞추고 입을 열었다. “전 오늘 서울시민과 국민 여러분께 사죄하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비록 제 자신이 몰랐다고 하더라도 제 가족이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 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한 걸음 옆으로 나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기자들은 오늘 회견이 최고의 특종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최 시장의 가족이야 그냥저냥 한 법무법인이지만 처가는 바로 순양그룹 아닌가? 최 시장이 기자회견까지 열 정도면 순양그룹 문제가 틀림없다. “며칠 전, 과열된 부동산 투기를 막고자 바로 이 자리에서 수정 계획안을 발표했습니다. 그 시각 이후, 부동산 취득 과정에 불법적인 정황이 있다는 수많은 제보가 잇따랐고 서울시는 그 모든 제보 자료를 검찰로 넘겼습니다.” 최 시장은 카메라를 향해 조금 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껏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는 그 어떤 징후도 없었으며 오히려 수상한 사람들이 수색동으로 몰려들어 거래 내역 삭제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두 손 놓은 검찰, 증거를 인멸하는….”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푹 숙이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한참을 그 상태로 가만히 있던 최 시장은 머리를 들었다.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가족은 두 곳입니다. 처음 공직에 몸담았던 검찰, 그리고 처가인 순양그룹입니다. 부동산 투기를 조장한 곳은 처가이며 그 사실을 알고도 방조한 곳은 바로 검찰입니다. 서울시장으로서 더는 묵과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전 국회에 요구합니다. 검찰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국회가 움직여주십시오.” 기자들의 표정이 안 좋아지며 웅성거렸다. “뭐야? 여기서 국회가 왜 나와?” “특검이라도 하자는 거야? 부동산 투기로? 오버 아냐?” “선수 치는 거지. 행여나 자기가 정보를 흘린 게 아니냐는 오해를 피하려고.” “선 긋기야. 순양그룹과 자신은 별개의 존재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야.” “니기미, 최 시장 쇼하는데 우리가 들러리 서는구먼.” “기삿거리는 되잖아. 순양그룹과 검찰, 뭔가 있어 보이지 않아? 장단 좀 맞춰주자고. 흐흐.” 기자들의 시큰둥한 반응을 눈으로 확인한 최 시장은 재빨리 회견을 끝마쳤다. 자신의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했고 만족할 만하다. * * * “저 새끼가 돌았나…!” TV를 보던 진영기 부회장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하지만 그가 전화를 한 곳은 최 시장이 아니었다. “서윤아. 너 지금 당장 회사로 와.” ― 오빠. 다짜고짜 왜 그래? 나도 바빠. 그냥 전화로 이야기하면 안 돼? “너 지금 최 서방 이 자식이 무슨 짓을 한 줄이나 알고 있어?” ― 말조심하자. 이 자식이 뭐야? 오빠 매제야. “시끄럿! 네가 시킨 거지? 야! 내 아들 엿 먹였으면 됐지, 그걸 끄집어내서 일을 크게 만들어? 감당할 수 있어?” ― 뭐야? 유치하게. 지금 협박하는 거야? 앙칼진 여동생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협박? 아니. 경고하는 거다. 여기서 멈춰.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네 서방도 성치 않을 거다.” 거칠게 전화를 끊은 진영기 부회장은 또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난데, 오늘 서울시장 관련 기사… 후속보도는 꼭 막아. 일회성 기사로 끝내지 않으면 순양과 등진다는 걸 확실하게 못 박아.” 매일같이 터져 나오는 사건 사고가 어디 한둘인가? 이삼 일만 지나면 서울시장의 회견 따위야 먼 과거의 잊힌 일이 될 것이다. 이제 한 군데만 더 전화하면 급한 불은 끈다. 그런데 그쪽이 더 급한 것 같다. 진영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 지검장.” ― 부회장님. 오늘 최 시장 회견 뭡니까? 애들이 보다가 황당해서 달려왔는데…. “신경 끄세요. 언론 한번 타려고 그러는 겁니다. 정치인들이야 다 그렇지 뭐.” ― 그게 좀 어렵습니다. 민정수석이 방금 연락했습니다. 문화 강국이라는 정부 시책과 관련 있는 사업인데 잡음 섞이면 곤란하다고 말입니다. 한 줌의 의혹도 없이 말끔하게 정리해달라고 합니다. 전화기를 든 진영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일이 커진 것 같다. 청와대까지…. “참 내, 다들 왜 이래? 땅 좀 산 거 가지고 호들갑은! 그리고 돈을 번 것도 아니고 손해가 막심해. 적당히 좀 합시다.” ― 부회장님. 우리 처지도 좀…. “아, 알았데도요. 청와대와 이야기할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요.” 통화를 끝낸 진영기 부회장은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민정수석이라…. 자신의 말빨이 먹히지 않고, 다이렉트가 아니라 몇 다리 건너야 통하는 곳이다. 특히 정권이 바뀐 뒤는 더욱 그렇다. 아버지라면 단번에 연결하겠지만, 이번 일은 아버지께 쪼르르 달려가서는 절대 안 된다. 정말 일이 커져버린다. 안 좋은 쪽으로. * * * “잘하는 짓이다. 이젠 조카까지 팔아먹어?” 할아버지는 화난 표정이 아니었다. 한심한 표정으로 고모를 노려본다. “아버지. 이번엔 어쩔 수 없었다고요. 영준이가 사들인 땅이 무려 수만 평이에요. 이 사실이 알려지면 우리 그이가 위험하다고요. 개발 계획을 빼돌려 부동산 투기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어요. 이거야말로 청문회, 특검감이라고요. 그이를 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발끈한 고모가 합당한 이유를 들어 변명했지만, 할아버지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게 아니지. 영준이 꼬드겨서 땅 사게 만들고, 최 서방은 그걸 터트려서 정의로운 서울시장 흉내 낸 것 아니냐?” “아버지!” “시끄럽다. 너도 멍청한 건 마찬가지야. 최 서방은 너도 속였어. 그놈 목표는 영준이가 아니라 검찰이란 걸 아직도 모르겠느냐?” 나도 몰랐다. 고모부가 기자회견을 하기 전까지는. 설마 검찰을 물고 늘어질 줄이야…. 생각보다 훨씬 음흉한 양반이었다. “그럼 어떡해요? 개발 시작 전에 다 털고 가려면 검찰 수사 종결이라는 확답을 받아 둬야 하잖아요.” “꼴에 서방이라고 편들기는…. 쯧쯧.” 입술을 깨물고 있는 고모를 보니 알 것 같다. 고모도 남편의 뒤통수에 얼얼하다는 것을. “그리고 도준이 너!” “네. 할아버지.” “내가 널 잘못 본 것 같다.” 아직 할아버지의 속내를 모르니 장단을 맞추든, 춤을 추든 해야 한다. 일단 고개를 팍 숙였다. “알량한 정보 좀 미리 안다고 그걸 자랑질해? 중요한 정보는 부모에게도 알려서는 안 되는 것이야. 그거 자랑질해서 네가 얻는 게 뭐 있다고!” “죄송합니다.” 한바탕 호통을 친 할아버지는 다시 고모를 향해 말했다. “최 서방이 검찰을 도발했으니 그쪽에서도 가만있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네 오빠도 이를 갈고 덤빌 테고…. 감당할 수 있는 일을 했어야지.” 고모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진영준을 고발하는 것까지만 했어야 했다. 집안의 장조카에게 상처 입히는 정도면 순양이라는 이름을 벗을 수 있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고모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난감할 것이다. 고모가 할아버지의 눈치를 슬쩍 보다 짧은 한숨을 쉰다. 할아버지가 고모의 눈길을 외면하고 있었다. “다 큰 자식들이 싸우는 거, 오랜만에 구경하는구나. 너희들끼리 싸우는 거야 상관하지 않겠다만은 만약 회사에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면 누구라도 요절을 낼 것이다. 명심해.” 할아버지의 엄한 눈길 한 번에 고모는 조용히 일어섰다. 나도 엉덩이를 일으켰지만 다시 주저앉아야 했다. “도준이 넌 남아!” 서재를 나가는 고모는 내게 간절한 눈길을 보냈다. 잘 해결해달라는 부탁일 것이다. “무슨 짓이냐?” “네?” “검찰을 왜 건드려?” “아, 아닙니다.” 이런, 오해하고 계신다. 보아하니 내가 양쪽 다 물 먹이려는 수작을 부린 걸로 생각하시는 게 분명하다. “전 고모부가 순양의 사위라는 딱지를 떼고 싶어 하시길래 적당히 흠집 내는 선에서 끝내는 방법만 말씀드렸습니다.” “그게 영준이고?” “네. 그냥 은평구 수색지구를 개발에서 제외해버리면 마무리됐을 텐데…. 검찰에 총질할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얼씨구. 이젠 내게 감추지도 않는구나.” 할아버지는 어이가 없는지 가벼운 헛웃음까지 보였다. “다 꿰뚫으신 거 아닙니까? 숨겨서 뭐 하게요?” 이럴 땐 당당하게 나가는 게 맞다. 내 계략이었다는 걸 숨기면 오히려 섭섭해하실 것이다. 친한 사람끼리는 비밀이 없어야 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이젠 어찌할 셈이냐?” “제가 끼어들 틈이 있겠습니까? 서로 알아서 하시겠죠. 드잡이질을 하던, 악수하고 화해하든 말입니다.” 할아버지의 눈빛이 변했다. 미묘한 변화였지만 분명 실망의 눈빛이었다. “넌 네 고모부가 네 손아귀에 있다고 생각하겠지? 400억 선거 자금 지원에 대한 계약서가 있으니 말이다.” “곡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건 보험 같은 거죠.” “뭐가 됐든, 고삐를 쥐고 있으니 문제없다고 생각한 거 아니냐?” “어느 정도는요.” “안됐구나. 고삐 쥔 망아지 새끼가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죽게 생겼으니. 흐흐.” 즐거운 웃음이 아니다. 비웃음이다. 그런데…. 죽다니? 설마 할아버지가 선수를 치시는 걸까? “하, 할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 좀….” 난 처음으로 굽신대기 시작했다. 앞으로 고모부를 잘 키워서 쓸모 있는 종마로 만들어야 하는데 할아버지가 훼방을 놓으면 불가능하다. “네 고모부가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 있어.” “검찰 말입니까? 그쪽 출신이라 만만하게 본 걸까요?” “아니다. 사돈댁이야.” “네? 사돈…?” “영준이 처 말이다. 네 사촌 형수.” “아…!” 잊고 있었다. 한국 언론 재벌이라고 할 수 있는 한성일보가 홍소영의 친정이지. “들리는 소문에 네 형수도 꽤 질렀고 사돈댁도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서 땅에다 묻었다고 하더구나. 사돈댁 손해는 이만저만한 게 아닐 게다. 그 원인 제공자는 바로 네 고모부고.” 아차차! 생각도 못 했다. 최대 언론사가 이를 갈며 4년간 서울시장을 물어뜯기 시작하면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죽을 지경에 빠진다. 대권은커녕 시장 재선에 나와도 떨어질 판이다. “신문쟁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게 우리 같은 기업이다. 돈줄 아니냐.” “하지만 절대 밀리면 안 되는 곳이 정치죠.” “그렇지. 제대로 갑질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야. 정치인이 무서워하는 언론사니까 기업이 광고를 주는 게다. 한성일보가 서울시장한테 물 먹었다는 소문이 나면? 힘없는 신문사라는 낙인이 찍히는 게지. 그런 망신이 어디 있겠어?” 할아버지는 난처해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으허허. 아이고, 우리 막둥이. 혼자 똑똑한 척은 다 하다가 된통 당했구나. 이 일을 어이할꼬! 고모부마저 마부로 부리려다 돈만 날리게 생겼으니. 허허.” 날 놀려먹는 할아버지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한성일보가 작정하고 미디어시티를 씹기 시작하면 여론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눈치를 보니 할아버지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실 게 뻔하고….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 [121] 철부지와 백년손님 3 “도준아.” “네.” “넌 이 할애비가 참 고약하다고 생각하느냐?”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자식 놈들이 싸우는 거 말리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부추기고, 손자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는데 즐거워하니 말이다.” “음…. 그럼 면이 없지는 않죠. 흐흐.” 진지하게 말씀하셨지만, 농담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더 무거워지는 건 피하고 싶다. “너도 네 속셈을 숨기지 않는 걸 보니 군산행의 의미를 알았나 보구나.” “네. 두 분 큰아버지와 고모가 절 끌어들이려 애쓰시는 게 분명하니까요.” “싸워서 이기는 놈이 갖는 거다. 주는 대로 받아 가는 놈치고, 받은 거 제대로 지키는 놈 못 봤어. 해방되고 50년 넘게 흐르는 동안 사라진 기업이 몇인 줄 아니? 그게 다 거저 받아서 그런 게다.” “저도 그 싸움에 끼어들 건지 아닌지 궁금하신 것 같군요.” 할아버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니다. 내가 네게 얼마를 더 줘야 할지 궁금한 게다. 이미 넌 오래전부터 싸움판에 들어왔지 않으냐.” 여기서 잠깐, 따질 건 따져야 한다. 철저히 계산하시는 분인데 셈이 틀리면 안 된다. “할아버지. 더 준다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전 받은 게 없는데요?” “뭐라? 어허, 이놈 보게? 순양자동차 가져갈 때, 지분 17%나 더 얹어준 걸 벌써 잊었어?” “아니죠. 그건 제가 급전 빌려드리고 이자로 받은 거죠. 말 그대로 달러 이자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잠시 눈만 깜빡거리더니 버럭 소리 질렀다. “에라이, 날도둑 같은 놈아. 뭣이 어째? 허허.” “그리고 할아버지. 절대 잊으시면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또 있어?” “네. 제가 생명을 구해드린 거 말입니다. 사고 났을 때요.” “요놈 보게나. 사고 났을 때도 멀쩡했던 놈이 생색은!” 흐뭇한 미소도 잠시, 할아버지는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도준아.” “네.” “우는 놈에게 떡 하나 더 주는 법이다.” 갑자기 생뚱맞은 소리, 왜 이러실까? “부족한 자식 놈을 보다 널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 도준이는 좀 덜 줘도 잘해내겠지. 똑같이 주면 자식 놈들이 손자와 자웅을 겨룰 기회조차 없을 게 뻔해. 이런 생각 말이다.” 할아버지의 마음, 이해한다. 핏줄은 한 다리가 무서운 법이다. 나는 다리 하나를 건너서 만난 핏줄이지만 큰아버지들이야 한울타리에서 만난 핏줄 아닌가? 혈육의 정 때문이라는 말을 차마 못 하고, 능력으로 포장해버려야 하는 자존심도 이해한다. “그럼 내일부터는 저도 우는소리도 하고 부족한 모습도 보여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오늘까지는 잘난 손자 노릇 할게요.” “어떻게?” “할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순양그룹은 할아버지 꺼 아닙니까?” 자식보다 순양그룹을 더 아끼는 마음. 내가 기대할 곳은 바로 그 마음이다. * * * “이거, 역풍 제대로 맞겠는데?” “사설은 더 섬뜩합니다. 단어 하나하나가 전부 비수로 날아들어요. 지금 고모부는 안절부절못할 겁니다.” 오세현은 신문을 탁자 위에 휙 던져버렸다. “왜 쓸데없이 오버해 가지고…. 이러다 DMC마저 역풍 맞는 거 아냐?” “좀 그렇죠? 땅 투기는 쏙 빼고 DMC 자체를 비리의 온상으로 부각시키네요. 입찰 방식이 아니라 수의 계약 한다는 게 약점이니까요.” “야! 너, 강 건너 불구경하듯 말할래? 한성일보 말려야 하지 않겠어? 오늘은 한성일보뿐이지만 내일이면 모든 신문사가 다 받아쓸걸?” “제가 뾰족한 방법이 있나요? 혹시 할아버지를 생각하신다면 그 생각 접으세요. 관여하지 않으시겠다고 일찌감치 선을 그었어요.” “이러다가 정말 DMC까지 무산되는 거 아냐?” 오세현은 걱정 한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순양건설이 최소 30%를 먹는 사업인데 할아버지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어요. 고모부를 두들겨 패는 거야 구경만 하시겠지만, 사업까지 건드리면 한성일보가 작살나요.” “그럼 다행이고.” 오세현의 걱정거리는 덜었지만 내 고민은 남아 있다. 고모부를 어찌해야 할까? 마누라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던, 조금은 모자라 보이던 사람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취임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할아버지는 고모부의 이런 경박한 본모습을 알고 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정치하는 걸 그토록 반대했던 걸까? 일단은 고모를 만나야겠다. 철딱서니 없는 남편 길들이는 건 마누라가 제격이다. “삼촌. 고모부가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고모 만나서 상의하는 게 어떨까요?” “그래. 불안해서 안 되겠다. DMC가 궤도에 오를 때까지 제발 잠자코 있도록 단단히 일러 두자.” 우리가 가방을 챙겨 일어나려 할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오세현이! 이 개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어디서 수작질이야? 감히!” 문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리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무성이었다. “느닷없이 뭐요? 그리고 말조심하쇼. 새끼라니!” “내 방을 왜 뺐어? 출근하니까 공사 중이더구만. 내게 말 한마디 없이 무슨 짓이야?” “아, 그거? 낙하산 하나 들어온다고 해서. 전직 차관인데 우리 사업에 아주 큰 도움이 될 분이요. 전망 좋은 방 하나 빼줘야 하는데, 어떡하겠소? 자리가 없는데?” “뭐야? 이 새끼들이…. 내가 모를 줄 알아? 지난달부터 월급도 안 들어오고, 차도 사라지고, 이젠 방도 빼? 날 쫓아내려는 수작 아니냐고!” 방방 뛰는 강무성과 달리 오세현은 피식 웃으며 여유로웠다. “잘 아네. 그 정도 눈치면 그냥 사표 내고 집구석에 처박혀 있지 뭐 하러 여기까지 와?” “야!” “뭐? 험한 소리 나오기 전에 말조심해.” 오세현이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오자 강무성은 주먹 쥔 두 손만 부르르 떨었다. 삼촌도 참 독한 사람이다. 적어도 6개월 정도는 놔둘 줄 알았는데 딱 석 달 만에 쫓아낸다. 그것도 집무실을 빼는 수모까지 줘 가며 말이다. 강무성이 저질렀던 악행을 고스란히 되돌려준다. 하루아침에 책상을 뺀 뒤 직원을 자르고, 밀린 월급은 나 몰라라 하며 회사 돈이나 빼돌렸던 사장이 직원의 억울한 심정을 고스란히 느끼도록 한 것이다. 이 흥미진진한 광경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다. “내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내 손에는 계약서가 있어. 소송 걸면 당신네들 위약금까지 물어야 한다고. 내가 5년 치 월급에, 위약금까지 챙길 테니까 두고 보라고.” 강무성은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흔들었다. 작정하고 왔나 보다. 계약서까지 챙겨 온 걸 보면 말이다. “아이고, 그러세요? 마음대로 하세요. 법 참 좋아하네. 그 법이 아직 당신 편인 줄 알아?” “뭐라?” “이 양반이! 아직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이 안 돼?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당신 쫓아낼 것 같아? 계약서가 살아 있는데?” 강무성은 그제서야 우리 손에 계약서를 무용지물로 만들 무기가 있다는 걸 감 잡은 것 같았다. “대아건설 재무팀장이랑 총무과장은 기억력이 좋더구먼. 꼼꼼하게 기록도 다 해놓고.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준 자료만 서너 박스야. 그걸 검찰에 줄까 말까 고민 중인데, 어떡할까?” 강무성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우리 손에 든 박스가 뭔지 생각하지만, 자신이 기억도 못 하는 숱한 비리가 한둘이 아니다. 기억을 못 하니 대꾸도 못 한다. “당신이 소송 들어가는 순간 검찰이 당신 변호사 비용의 출처부터 캘걸? 아직 추징금 많이 남았지? 가진 돈 한 푼도 없다고 말했는데 소송 비용은 어디서 났는지 검사님들이 궁금해할 거야.” 월급쟁이를 개처럼 취급하던 놈의 창백한 안색을 보니 속이 좀 시원하다. 잠자코 있기에는 입이 근질근질했다. “영감님. 말년에 옥살이하기 싫으면 조용히 사직서 내고 가쇼. 집 근처 노인정에 가서 바둑이나 두며 살라고. 조금이라도 뭔가 하려고 꼼지락거리는 순간, 검찰청에서 육개장 먹게 해줄 테니까.” “이,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나를 노려보는 강무성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잘 들어요. 내가 양자 철자 쓰시는 분의 손자야. 우리 조부님께서 손자를 끔찍이 생각하셔. 밖에서 이 새끼 저 새끼 욕 들었다는 거 아시면 몽둥이 들고 달려오실 분이니까 말조심하쇼.” “양자 철자?” “이런, 내 명함 잃어버렸구만. 나 진가요.” “진… 양… 철? 진양철?” 강무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 설마…. 순양그룹 진양철?”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거, 말조심합시다. 내 조부님이 당신 친구도 아니고 말이오.”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강무성을 남겨 두고 일어섰다. “삼촌, 우리 먼저 나가죠. 이 분은 여기서 사직서 쓰고 나가려면 시간 좀 걸리겠어요.” “그, 그럴까?” 오세현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 우리는 결국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강무성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야. 너 웬일이냐?” “뭐가요?” 밖으로 나오자마자 오세현은 놀란 듯 말했다. “한 번도 족보 내세우며 잘난 척하지 않던 놈이 회장님 손자라는 걸 내세워서 말이야. 무슨 바람이 불었어?” “저 양반 무릎을 꺾어놔야 할 것 같아서요. 지금은 우리 손의 자료 때문에 한 걸음 물러서겠지만, 돌아서면 무슨 꿍꿍이를 부릴지 모릅니다. 아예 한번 해보자고 덤빌 엄두도 안 나게 주저앉혀야 뒤가 편하죠.” “이럴 때 보면 넌 네 아버지 안 닮았어. 독한 건 할아버지 판박이구먼.” 오세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닙니다. 독한 놈한테는 아버지도 독한 모습 보이세요. 친구라면서… 잘 모르시는구나.” * * * 고모는 호텔에서 백화점으로 집무실을 옮겼다. 호텔의 럭셔리한 이미지는 정치인에게 하등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미 호텔 집무실과 차이 없는 인테리어로 치장한 게 눈에 띄었다. “여보! 도대체 왜 그래요? 여기서 그만둬요. 검찰이랑 싸워서 뭘 얻겠다고요!” 수화기에 대고 날카롭게 소리치던 고모는 우리를 발견하자 전화를 끝냈다. “아, 오 대표. 왔어요? 도준이도 별일 없지?” 애써 웃는 고모를 보니 고모부가 또 뭔가 사고 칠 준비를 한다는 게 느껴졌다. “별일 많아요. 아시면서.” “뭘?” “할아버지요. 그날 고모 먼저 가시고 전 할아버지께 몇 시간 동안 야단맞았다고요.” “너 설마…?” “제가 바본가요? 고모 이야기는 안 했어요. 그냥 어쩌다 나온 소리라고 둘러댔어요.” “그래. 고생했다.” 고모는 내 등을 쓰다듬었다. “일단 앉으시죠. 우리 그이 때문에 오 대표님 마음 쓰시게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마무리나 잘해야죠.” 백화점 유니폼을 차려입은, 예쁘장하게 생긴 직원이 찻잔을 내려놓고 나가자 오세현이 슬쩍 입을 열었다. “본의 아니게 통화 내용을 들었습니다. 혹시 또 문제 생겼습니까?” “그, 그게….” 오세현은 난처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고모에게 미소 지었다. “진 사장님. 이미 한배를 탄 사람입니다. 문제는 같이 해결해야죠.” “그이가 중앙지검을 방문하겠다고 하네요. 미진한 검찰 수사를 항의하는 차원에서요. 이거 또 입방아에 오를 것 같아요.” “네? 이런….” 오세현뿐만 아니다. 나도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검찰에 괜한 시비를 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검찰에게 화해의 신호를 보내도 모자랄 판에 무슨 삽질인가? 우리 세 사람은 동시에 이마를 감싸 쥐었다. ======================================== [122] 철부지와 백년손님 4 “고모. 혹시 고모부 곁에 사람 두지 않았어요?” “응? 무슨 사람?” 남편을 너무 무시한다. 오빠들에게는 사람 하나씩 다 붙여 놓고 무슨 일 하는지 감시하면서―물론 반대로 감시도 당하겠지만―남편에게 사람을 붙여 놓지 않았다니. “시장 비서나 수행원 중에 한 명 정도는 고모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의원 시절부터 데리고 다닌 사람들 아닙니까?” “아….” 고모는 남편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방심한 대가를 지금 치른다. 나까지 포함해서, 젠장. “진 사장님. 아무래도 최 시장 주변에 변화가 있을 겁니다. 서울시 1년 예산이 올해 처음으로 10조 원을 넘었어요. 이런 엄청난 돈을 주무르는데 파리가 꼬이지 않겠습니까?” 이십 년 뒤면 세 배쯤 되던가? 지금이나 20년 뒤나 사는 건 별다를 게 없는데 세금만 오르는 것 같다. “그럼 우리 그이에게 바람 넣는 사람이 있다는 뜻인가요?” “그럴 가능성이 크죠.” 고모는 오세현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당연하다. 미친 파리가 아니면 검찰과 싸우라고 바람 넣을 놈이 어디 있는가? 고모부의 지금 행동은 분명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고모와 오세현 두 사람이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을 지켜봤지만, 나누는 대화는 귓등으로 흘렸다. 누굴까? 돈줄이기도 하고 대선에 꼭 필요한 사람인 마누라까지 무시할 정도면 파리 정도가 아니라 독수리가 착 붙었다고 봐야 한다. 그가 누군지 정체를 알기 전까지는 옆에서 잔소리해봐야 무용지물이다. “고모.” “응.” 두 사람은 대화를 멈추고 내게 시선을 돌렸다. “고모부 측근 중에 고모가 부릴 만한 사람 있을까요? 떠오르는 사람 없어요?” “글쎄, 내가 신경을 안 써서….” “사람들 풀어서 알아보세요. 고모부는 학벌, 검찰 인맥을 많이 따지는 분이니까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 찾으세요.” 고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뜻을 단번에 알아차릴 눈치 빠른 여인이다. “그리고 이제 잔소리 그만두시고요. 그동안 참았던 거 폭발하는 거 같습니다. 아무도 못 말려요.” “참아? 뭘 참아?” 마누라는 재벌 집 딸이든, 평범한 사람이든 공통점이 하나 있다. 부부 사이에서는 남편보다 아내가 훨씬 더 인내하고 많이 참고 산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참다못한 오세현이 입을 열었다. “진 사장님. 처가살이하는 남자는 어깨도 못 펴고 삽니다. 최 시장이 변호사였지만 사건 수임도 없이 백수 생활하지 않았습니까? 본가도 순양그룹 덕분에 먹고 살았고요. 진 사장님이 무슨 말을 하든 머리 끄덕이며 살지 않았습니까? 자존심 숨겨 가면서 산 겁니다.” 마치 자기 일인 양 거품 물고 말했지만, 와 닿지 않은 것 같다. 더 이야기해봤자 소용없으니 오세현은 한숨만 내쉬었다. 고모와 상의하는 건 이 정도로 끝내야 했다. 딱 봐도 통제 불능인 상태 아닌가? 고모부 폭주의 원인 제공자가 누군지 알기 전까지는 두 손 놓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 * * “이거 참,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 오세현이 어이가 없는지 혀를 찰 때, 난 내 눈이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거냐?” 주요 일간지를 탁자에 쭉 늘어놓고 비교해봐도 내 눈이 잘못되지는 않았다. 한성일보를 필두로 모든 신문이 최창제 시장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는 중이었다. 순양가의 사위이면서 집안 사람의 투기 정황을 터트린 용기는, 일반인은 엄두도 못 내는 엄청난 각오가 필요한 것이라며 보는 이가 부끄러울 정도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검찰의 수사를 촉구하는 내용도 있었다. 그 어떤 불법적인 정황이 없음에도 검찰을 자극할 정도로 신문들은 철저히 서울시장 편이었다. “야, 이거 혹시 네 할아버지가 힘쓴 거 아니냐?” “절대 그럴 리 없어요.” 한번 뱉은 말을 쉽사리 바꿀 분이 아니다. 그런데 한성일보까지 고모부를 빨아재끼다니! 납득이 안 된다. 어제의 공격이 맛보기였다면 오늘이야말로 대대적인 공세를 펴는 타이밍 아닌가? “삼촌. 우리 고모부, 대단한 스폰서 하나 잡은 것 같은데요?” 언론이 정치인에게 무릎 꿇는 부끄러운 모습은, 힘에 눌리거나 돈에 밀린 경우뿐이다. 서울시장은 대형 언론사가 두려워할 자리가 아닌 만큼 돈에 밀린 게 틀림없다. “스폰서?” “네. 모든 중앙 일간지에 광고 도배를 약속할 만한, 엄청난 스폰서요.” “가만 보자…….” 이 정도 재력 있는 스폰서라면 두 부류다. 재벌, 아니면 건설업자. 부동산 분양은 신문 광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재벌 대기업의 신제품은 전면 광고를 메워주고, 분양 광고는 구석구석 비어 있는 면을 빼곡히 채워준다. 서울시장에게 토지의 용도 변경쯤은 식은 죽 먹기 아닌가? “그렇군. 든든한 물주를 잡았으니 마누라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지. 이 양반, 처가살이 탈피했구만.” 나는 신문을 모두 내던졌다. 고모부의 경박함에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이런 자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든든한 파트너로 삼겠다고 했던 나의 좁은 식견에 화가 났다. 시장 자리에 앉은 지 얼마나 됐다고 스폰서나 구하고 다니다니! 씩씩대는 내 모습을 오세현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는 걸 그도 느꼈을 것이다. “죄송해요, 삼촌. 이런 모습 보여서.” “아니다. 사람 잘못 본 건 너나 나나 똑같아.” “우린 DMC 챙긴 걸로 만족해야겠어요. 고모부와 함께하다가는 무슨 불똥이 튈지 모르겠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쫓아다니는 놈은 가망 없어. 누가 스폰서인지 모르지만, 그자에게 이용당하다가 끝날 게 분명해.” 의견 일치를 봤으니 훌훌 털어냈다. 이제 고모부는 우리의 조력자가 아니다. * * * 진동기 사장은 머리를 푹 숙인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고, 온갖 헛지랄만 하고 다니는 이들을 아버지가 어떻게 처리할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진 회장은 가장 멀리 앉아 있는, 고개 숙인 손자를 불렀다. “영준아.” “네.” “날린 돈이 얼마냐?” “그, 그게 얼마 안 됩니다.” “얼마야!” “유, 육백억 조금 넘습니다.” 진영준은 할아버지의 고함 소리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넌 해결 못 하지?” 머리 숙인 진영준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술을 굳게 닫았다. 이번엔 자숙의 시간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유배지는 어딜까 생각할 뿐이다. 아무쪼록 유럽이나 미국이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고. “동기야.” “네. 아버지.” “넌 거제도에 아파트 한 채 알아봐라. 순양중공업 소유의 사택 좀 있지?” “네.” “오늘 그 아파트 도배하고 장판도 새로 갈아라. 필요한 가전제품도 좀 채워 놓고. 내일부터 네 장조카가 지낼 곳이니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하, 할아버지.” 진영준은 사색이 되어 다급하게 진 회장을 불렀지만, 진영기 부회장의 날카로운 눈길이 꽂히자 다시 입을 닫았다. “조선소 자재 창고 담당 직급이 뭐야?” “과장입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진동기가 재빨리 대답했다. 창고 책임자 직급이 뭔지 모르지만, 내일부터는 무조건 과장이다. “명함도 하나 파줘.” “네.” 진 회장은 다시 장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손자, 뭐 하누? 빨리 가서 이삿짐 싸야지?” 진영준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진영기 부회장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빨리 나가! 거제도 내려가서 별도의 지시 있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마!” 구원해줄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진영준은 머리를 떨군 채 나갔다. “동기야.” “네.” “방금 네 형이 말한 별도의 지시는 네가 내려라. 저놈 하는 거 봐서 인간 됐다 싶을 때 올려. 그리고 장남.” “네.” 진영기 부회장은 자기 아들 인생이 어쩌면 오늘부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자네 아들이 사고 친 거 자네가 수습해. 어쩌면 검찰 수사가 진행될지도 몰라. 행여나 배임, 횡령 증거가 나오면 영준이는 감옥 간다. 아들내미 옥살이시키지 않으려면 완벽하게 수습해야 할 게다.” “…네.” 진 회장은 긴 한숨을 한 번 내뿜었다. 하나는 끝냈다. “서윤아.” “네, 네.” 화들짝 놀란 진서윤은 머리를 들어 진 회장의 입만 바라보았다. 어떤 처분이 떨어질지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넌 최 서방이랑 이혼해라.” 진 회장의 폭탄 같은 말에 자식들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 진서윤은 입만 벙긋거릴 뿐 아예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놈이 순양 사위라는 딱지를 이렇게 떼고 싶어 하니 소원 들어주자. 너랑 이혼하면 만사가 해결되지 않으냐?” “아, 아버지. 어떻게 그런 말을…? 제가 이혼녀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게 괜찮으세요?” 아주 근본적인 섭섭함 때문에 눈물이 나려고 할 때 진 회장의 폭탄선언은 멈추지 않았다. “이혼하면 백화점, 호텔, 콘도, 골프장을 네 앞으로 해주마. 완전히 계열 분리해서 그 누구도 뺏어 가지 못하게 단도리하마. 어떠냐?” “아, 아버지!” 이번에 두 아들이 소리쳤다. 여동생의 이혼보다 현금 동원력 짱짱한 알짜배기 계열사가 떨어져 나가는 걸 염려한다. “강요는 않으마. 딸자식 이혼을 종용하는 아비는 되기 싫다. 선택은 서윤이 네가 해라.” 서재는 냉랭한 냉기만 감돌았다. “내가 지금까지 잘못 생각했다. 능력 있는 놈을 끌어줘서 순양을 맡기려 했는데… 이젠 아니다. 무능력한 놈을 내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앞으로 사고 치는 놈, 실수하는 놈은 전부 섬으로 보내버릴 것이야. 서울 땅 밟으려면 호적에서 지워야 할 게다.” 모두 마른침만 삼켰다. 본격적인 후계 레이스를 선언한 셈이다. 나이를 생각해서인가?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게 틀림없다. 이제 밀려나지 않으려면 단 한 번의 사소한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 * * “미국?” “네. 아마 올해는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해야 할 일이 좀 많아요.” 아버지와 오세현의 놀란 눈길이 내게로 향했다. “가서 상준이 형이랑 어머니도 뵙고요, 미국 미라클에서 일도 좀 배우고 오겠습니다.” 내 표정을 본 오세현은 아버지에게 눈짓했다. 복잡한 심경을 식힐 겸 좀 쉬다 오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세현의 눈짓을 보지 못했다. “네가 미국에서 해야 할 일이 뭐가 있어? 여기에 벌인 일도 적지 않잖아?” “그건 삼촌이 잘 알아서 하실 겁니다. 그렇죠? 삼촌?” “그래. DMC는 내게 맡겨라. 차질 없이 진행하마.” 오세현은 아버지의 옆구리를 푹 찌르며 머리를 끄덕였다. 눈치 없는 아버지, 그제야 덩달아 머리를 끄덕였다. 조금 쉬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오늘 신문에 난 기사 한 꼭지가 날 흔들어 놓았다. 미국인의 인터뷰 번역판이지만, 그 미국인은 빌 게이츠다. 인터뷰어는 빌 게이츠에게 가장 두려운 게 뭔지 물었고 빌 게이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이 순간, 허름한 차고(garage)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는 이십 대 어린애들.” 빌 게이츠도, 스티브 잡스도 차고에서 시작했다. 난 제2의 빌 게이츠도, 스티브 잡스도 찾아야 한다. 다행히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보다는 쉽다. 회사나 사람의 이름은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 [123] 벤처 정신 1 배웅하겠다는 아버지를 겨우 말리고 공항에 도착하자, 생각지도 못한 오세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 하러 여기까지 나오세요?” “아쉬워서, 인마. 삼 일 뒤면 신차 발표회 아니냐? 신차 출시라도 보고 가면 좀 좋아?” “아니에요. 제가 보나, 안 보나 달라질 건 없는데요, 뭐.” “그래도 HW 이름을 달고 나오는 첫 차 아니냐?” 이미 아진자동차 시절부터 준비하던 미니밴이 나오는 것뿐이다. 내가 자동차 회사를 인수한 목적과는 상관없는, 관성으로 진행되는 일이다. 특별할 것도 없다. 인수한 이유를 밝히고 그 이유가 바로 HW 자동차의 슬로건이 되는 건 뉴밀레니엄으로 접어들 때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자동차 회사로 거듭나는 게 시선도 끌고 상징성도 있다. “일단은 좀 빠져 있는 게 좋을 듯싶어서요. 대주주라고 참견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고요. 삼촌도 신차 발표회는 안 가시는 게 어떨까요? 당분간 전문가들에게 맡겨 두시죠. 아진, 순양의 전문가들 아닙니까?” “싫다. 구경 갈란다. 가끔씩 등장해서 그놈들 긴장 타게 만드는 것도 필요해.” 투자자, 아니 주주의 역할은 나보다 훨씬 더 잘 아시는 분이니 더는 말하지 않았다. “참, 아버지랑 말씀 나눠보셨습니까?” “DMC?” “네.” “너한테도 확답 안 했는데 나한테 하겠어?” “마음을 털어놓는 건 아들보다 친구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눈치 하나는.” 오세현은 웃음을 보이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조금만 더 기다려봐. 하고자 하는 의욕은 상당한데 현실적인 가능성을 걱정해서 더 신중한 거야.” “적어도 올해 말까지는 시작해야 한다고 슬쩍 말씀드려주세요. 준비 끝내고 빌딩 들어서면 곧바로 입주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버지가 자리 잡으면 뒤따라 들어올 사람도 많아질 겁니다.” “여기는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보고 와. 그쪽에 미리 이야기해뒀으니까 불편한 건 없을 게다.” 머리 식히러 간다고 했지만 이미 아니라는 걸 안다. “네. 쉬엄쉬엄할게요.” 걱정하는 오세현을 돌려보내고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 * “도준아!” 입국장에서 반갑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 1년 만에 보는 상준 형은 많이 달라졌다. 음악 한답시고 요란한 복장에 형형색색으로 염색했던 머리는 온데간데없고 청바지와 셔츠가 전부인 평범한 모습이었다. “뭐야? 음악 때려치웠어? 너무 범생이 같은데?” “그래. 집어쳤다. 흐흐.” 머쓱하게 웃는 모습은 농담이 아니란 걸 말해준다. “진짜?”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고 빨리 가자. 어머니가 너 먹이려고 잔칫상을 준비 중이야. 억지로라도 다 먹어.” 어머니와 형이 사는 아파트에 들어가자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어머니는 뭔가 착각하신 것 같다. 외국에 살다 귀국한 게 아니라 한국에서 뉴욕으로 온 거다. 그런데 식탁에는 찌개를 비롯한 한국 음식이 한가득이었다. 큰아들 챙긴다고 작은아들에게 손수 밥상 차려주지 못한 걸 미안해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식탁이다. 형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이 마음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 남김없이 싹 비우고 찢어질 듯한 배를 쓰다듬었다. 만 하루를 먹고 자기만 했다. 시차에 적응했을 때 상준 형과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뭐야? 진짜 음악은 포기한 거야?” “그래.” “왜?” “내가 지난 2년간 깨달은 건 딱 하나야. 난 주연도, 조연도 아닌 그냥 관객이었어. 엑스트라 자격으로도 무대에 오를 수 없더라고.” “가능성도 없어?” 만지작거리는 술잔에 술을 따르자 상준 형은 씁쓸하게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뉴욕 길거리에서 고물 기타 들고 노래 부르는 놈들이 나보다 나아.” “형은 원래 가수가 꿈이 아니잖아. 프로듀싱 아니었어?” “그러니까. 가수라는 악기를 통해 음악을 뽑아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거야. 내가 음악 듣는 귀는 좀 있어. 그게 전부였던 거지.” “그럼 지금은 뭐 해?” “아무것도 안 해. 그냥 여기서 빈둥거리는 게 전부야.” 재능 없음을 한탄하는 청년이 한둘이겠느냐마는 고개 숙인 친형의 모습은 애잔하다. “뭐 어때? 실컷 빈둥거리다 보면 끝이 보이겠지.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한계를 깨닫는 데 2년 걸렸으니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데도 2년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어?” 상준 형은 날 보며 피식 웃었다. “우린 순서를 바꿔서 태어났어야 해. 그게 더 어울려.” * * * “Wow! Howard. Look at You! What a gorgeous!” 못 본 지 한 삼 년 정도 지났나? 나이는 더 들었지만, 한층 더 세련된 자태를 보이는 레이첼 아리에프(Rachel Arieff)는 특유의 과장된 모습을 보이며 나를 끌어안았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멋있을 겁니까?” 레이첼은 내 칭찬에 한껏 입을 벌리며 웃었다. 젠장. 왜 이런 멘트는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에게만 나올까? 한 달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민영이에게는 뭐 먹을까? 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데 말이다. “제임스가 그러던데? 너 요즘 머리 복잡한 일이 많으니까 되도록이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렇다고 바쁜 사람 붙잡고 놀 수는 없잖아요. 머리 녹슬지 않을 정도만 하죠.” 최대 주주이며 20억 달러가 넘는, 가장 많은 자금을 굴리는 큰손이지만 10살 때부터 봐왔기 때문일까? 레이첼은 큰누나 같은 모습으로 날 대했다. “좋아. 그럼 현황만 간단히 브리핑할까?” “그 전에 식사부터 끝내죠.” 맨해튼의 레스토랑에서 샐러드와 프렌치프라이로 점심을 때우고 미라클 인베스트먼트 본사로 향했다. 아마도 영원히 월스트리트는 적응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곳은 인간과 완전히 다른 종(種)이 사는 곳이다. 헐리우드도 그렇지만. 돈에 대한 관념이 다르다. 엄청나게 벌고 엄청나게 쓴다. 내 상식으로는 전혀 쓸모없어 보이지만 이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요소들이 가득하다. 사무실 복도에 잔뜩 걸린 그림, 곳곳에 자리 잡은 화병과 꽃만 해도 그렇다. 저 그림들은 진품이며 유명 갤러리에 매월 엄청난 금액의 대여료를 지불하고 사무실의 품격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된다. 화병 역시 유명 작가의 작품이며, 꽃은 전문가가 매일 아침 바꾸며 관리한다. 이 모든 것에 엄청난 비용을 탕진한다. 언뜻 생각하면 미친 짓이지만 이곳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 이유는 바로 고객들 때문이다. 넘쳐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미국 상류층들. 그들의 입맛에 맞춰주기 위해 시작한 것이 이젠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상류층에게 전염된 것이다. 아, 비슷한 종류의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고모다. 고모는 이런 미국 상류층을 고스란히 따라 하는 것이다. 레이첼을 따라 들어간 회의실에는 간단한 브리핑을 위한 게 아니라 아주 상세하고 빈틈없는 보고를 위해 빔프로젝터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역시, 누가 뭐래도 난 이들의 생사를 쥐고 있으니 허투루 할 리가 없다. 지금까지의 투자와 앞으로의 투자 계획을 듣고 난 후, 입을 열었다. “앞으로 닷컴 기업에 직접적인 투자는 금지합니다. 아무리 장밋빛 미래가 보이더라도 그들을 믿으면 안 됩니다. 물론 당신들의 직감도 믿어서는 안 되고, 데이터도 믿지 마세요.” 회의실에 앉아 있던 십여 명의 매니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세계의 돈이 모이는 곳은 바로 미국 실리콘 밸리 아닌가? 그곳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월스트리트에서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누군가 이견을 내려 움찔했을 때 레이첼이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자 모두 움츠러들었다. “기업에 직접 투자하면 엑시트가 시점을 우리가 결정할 수 없어요. 게임에 말려들면 안 된다는 거, 걸음마 때 배우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게임을 주도해야 합니다. 직접 투자는 닷컴 창업자의 게임입니다. 우린 나스닥에서만 게임합니다.” “상장 전에 직접 투자해서 높은 수익 올리는 게 하워드의 능력 아니었어? 이젠 조심하는 거야?” 모두를 대신해서 레이첼이 질문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닷컴 버블이 터져서 엄청난 돈이 허공에 사라지는 걸 아이러니하게도 인터넷으로 봤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실체가 없는 뭔가를 좋은 말로 포장해서 사람을 현혹한 뒤, 스스로 돈을 내게 하는 것을 뭐라고 하죠?” “fraud?” “그렇죠. 사기…. 그걸 요즘은 다르게 불러요.” 모두의 시선이 내 입으로 향했다. “벤처 정신.” 회의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단 1센트라도 좋습니다. 실제 매출이 일어나는 회사, 실적이 좋지 않더라도 구체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IT 기업에 투자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아마존 같은 곳 말입니다.” 대부분 아마존의 존재 정도만 아는 듯 보였다. 하지만 디테일에 강한 친구도 있었다. “아마존이라면 온라인 서점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마존닷컴.” 디테일에 강한 친구는 머리를 흔들었다. “1994년 창업한 아마존을 말하는 거라면 투자 가치는 제로에 수렴해요. 작년 그 회사의 상장가가 주당 18달러였지만 거래 첫날 1.96달러로 폭락한 채 마감했습니다.” “어떻게 그리 잘 알죠?” 내가 놀라서 물었을 때 디테일에 강한 친구는 한숨을 토해내며 머리를 들지 못했고 회의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이 광경에 나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마나 손해 봤어요?” 웃음을 겨우 멈추고 묻자 레이첼이 손바닥을 쭉 펼쳤다. “5천 달러?” 레이첼은 아주 조금 머리를 흔들었다. “5만?” 레이첼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두 가능성 없다며 뜯어말렸는데 저 친구는 결국 자기 돈으로 투자했어. 손해도 결국 자기가 안았지. 킥킥.” “아깝네요. 나라면 그 열 배, 아니 백 배는 투자했을 텐데.” 지금도 늦지 않았다. 아직 주가는 그대로니까. 내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아챈 레이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워드, 진심이야?” “물론이죠. 아마존은 주문을 받고 책을 배달합니다. 아주 작게나마 매출이 발생하고요. 단순한 컨셉이지만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닷컴과 달라요. 서비스 컨셉은 단순하고 쉽게 이해 가능한 회사가 진짜입니다. 나머지는 버블일 뿐이죠.” 왜 모두가 막대한 수업료를 내고 나서야 이 간단한 원칙을 깨달을까? “이 시간 이후로 닷컴 기업에 직접 투자한 돈은 전부 회수하세요. 적당한 핑계 대시고 조금 손해 보는 것도 감수하세요. 그리고 나스닥에 상장한 기업의 주식에만 투자합니다. 이게 첫 번째 규칙입니다.” “두 번째도 있어?” 레이첼은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내가 보여준 결과를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이다. “두 번째는 나스닥이 아무리 폭풍 성장하더라도 2000년 1/4분기에 완전히 철수합니다.” “이유는?” “그때쯤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되니까요.” “벤처가 바로 사기라는 거?” “그렇죠.” 미국 나스닥 종합지수는 5천까지 치솟은 다음 완전히 폭락한다. 바로 뉴밀레니엄의 선물이다.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매니저들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워드. 투자자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불붙은 닷컴 기업 투자에 우리만 쏙 빠진다면 투자금을 거둬 갈걸요? 다른 투자사도 많으니까요.” “그럼 확실하게 못 박고 투자하세요. 고객이 원하기 때문에 투자하는 거라고요. 우린 분명하게 그 위험을 노티스하는 걸 잊지 말고요.” 모두 어이없는 눈빛을 주고받을 때 이들의 실력을 보고 싶었다. “자, 옥석을 한번 가려봅시다. 수천 개가 넘는 회사 중에 미래의 마이크로소프트가 나올지 누가 알겠어요?” ======================================== [124] 벤처 정신 2 커피 잔을 앞에 두고 레이첼은 내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난 그녀의 눈을 피하며 사무실을 둘러봤다. 미국 법인 총괄이며 가장 큰돈을 주무르는 미라클의 주역답게 호사스러움은 극에 달했다.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이곳의 문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절약과 궁상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모호하기도 하다. “하워드. 솔직하게 말해봐. 미국에 왜 왔어?” “보셨잖아요. 닷컴 기업에 대한 지나친 낙관을 경고하려고 왔죠.” “정말 그것뿐이야?” 내가 뭘 하는지 놓치지 않으려 매의 눈으로 관찰하는 그녀지만 지금은 좀 집요하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뭐죠? 솔직하게 말해봐요.” 움찔하는 것도 순간,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다. “이거, 이거. 못 당하겠어. 하하.” “제안입니까? 부탁입니까? 아니면 당부예요?” “제안이지.” “편하게 말해보세요.” “우리 LA 갈까?” 이번엔 내가 움찔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캘리포니아로 갈 생각이라는 걸. “뭐야? 너도 설마 LA?” “비슷한데 아니에요. 전 샌프란시스코를 생각 중이었어요.” “샌프란시스코? 어디?” “스탠퍼드대학요.” “좋은 대학이지.” 레이첼은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유학 준비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너처럼 엄청난 비즈니스 천재들을 많이 배출한 학교니까 어울리기도 해.” 앞으로 줄줄이 쏟아져 나올 젊은 억만장자들이 휴학계를 내고 창업을 준비하는 곳. GAP, 나이키, 빅토리아 시크릿, 야후, 휴렛팩커드, Dolby 그리고 썬마이크로시스템즈 등등의 창업자를 이미 배출한 곳. 내가 이곳에서 공부할 리가 있나? 휴학계를 낸 놈들이나 내려고 생각하는 놈을 만나려는 거지. 그보다 LA가 더 궁금하다. “그런데 LA는 왜요? 영화 때문에?” “응. 다음 달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 시사회가 있거든. 우리야 뭐 늘 초대받으니까. 드림웍스 창립 때부터 네가 말한 대로 모든 영화에 투자했잖아. 거의 파트너 같은 관계야.” “단지 그것뿐이면 내키지 않는데요?” 지겹다.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몇 번 봤고 그 후로 TV에서 틈만 나면 틀어 대는 영화 아닌가? 스무 번 이상 본 것 같다. 레이첼은 살짝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드림웍스에서 시그널을 보내왔어.” “시그널?” “응. 우리 미라클의 자금이 한국이라는 것을 알자 아시아 배급권을 놓고 베팅해보지 않겠느냐는 거야.” “혹시 투자를 원하는 겁니까?” “바로 그거야.” 1994년, 스티븐 스필버그, 제프리 캐천버그 그리고 데이비드 게펜이 드림웍스를 만들 때 충분한 기회가 있었지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영화는 각각 독립된 형태로 존재한다. 나 같은 경우 돈 벌만 한 영화만 골라서 투자하면 되지, 굳이 영화제작사에 돈 쏟아부을 이유가 없다. 스필버그라고 해서 항상 홈런 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아시아 배급권이라면 아버지에게 큰 무기가 된다. 드림웍스의 파트너라는 이름값만으로도 한국 영화판의 공룡이 될 수 있다. 꽤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조건은 오간 게 있어요?” “드림웍스가 10억 달러로 시작했는데 5억 달러로 지분 25%와 아시아 배급권을 넘긴다는 게 1차 제안이야.” “대답은 하셨어요?” “아니, 긍정적인 검토. 이 정도만 했어.” 협상은 시작도 않았다는 뜻이다. 미라클이 관심을 보인다면 드림웍스도 검토하고 따지기 시작할 것이다. 과연 아시아 배급을 원활하고 효과적으로 운용할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려 들 게 뻔하다. “스필버그의 이름값이 있는데…. 지금까지 협상한 아시아 기업이 없을 리 없을 테고.” “많았지. 일본, 한국, 홍콩. 심지어 중국까지.” 레이첼은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드림웍스가 원하는 또 하나가 바로 커뮤니케이션이야.” 그녀가 말하려는 게 뭔지 더 빨리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대화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 제작비 대신 원가라고 했을 테고, 수익률이니, 비용, 효율, 경영 합리화 같은 소리만 떠들어 댔군요.” “그래. 바로 그거야.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고 한탄하더라.” 그녀는 손뼉을 짝 치며 또 웃었다. “주연 배우에게 쓸데없는 돈을 쓰고 매일 파티를 벌이며 흥청거리는 게 그들 눈에는 비효율적인 낭비로 보이겠지. 엔터테인먼트의 기본을 모르는 소리잖아. 그 바닥 사람들은 본능적인 욕망에 충실함으로써 에너지를 얻는다는 게 이해하기 쉬운 건 아니지만.” 내가 머리를 끄덕이자 그녀는 눈을 반짝였다. “어때? 관심 있어?” “전 관심 없는데 어마어마하게 침 흘릴 만한 사람이 있긴 해요.” “누구?” “제 아버지죠.” “아…! 영화 제작자시지?” “네. 이렇게 하죠. 드림웍스 1차 제안은 받아들일게요. 대신 협상 테이블에 앉을 사람은 제가 아니라 아버지로 하죠. 아버지가 아시아 배급에 관심 없거나 자신 없으시다고 하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미팅 스케줄 잡자.” 레이첼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통화를 시작했고 나도 아버지께 전화해 지금 당장 LA로 날아오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드림웍스보다 거장들과의 만남만으로도 흥분에 휩싸인 것 같았다. 우리 두 사람이 통화를 끝냈을 때 난 레이첼이게 은밀한 부탁을 했다. “이번 LA행은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외국에서 다 같이 지내는 특별한 시간이에요. 잊지 못할 추억이 되도록 준비해줄 수 있어요? 비용은 상관없으니까.”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정말 비용은 신경 안 쓸 거야?”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 * *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누가 봐도 운전기사가 분명한 제복 차람의 두 남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게이트 밖에 대기하던 팬텀 롤스로이스 리무진 앞으로 안내했고 문도 열어주었다. 나도 좀 놀랐지만, 어머니와 상준 형은 아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호텔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예요. 우리가 머무르는 동안 언제라도 쓸 수 있으니 너무 놀라시면 안 돼요.” 레이첼의 설명이 더 놀라웠다. 도대체 얼마짜리 방을 예약했길래 이런 서비스가 무상이란 말일까? 어머니와 형이 같은 차를 타고, 나와 레이첼이 한 대를 차지했을 때 다급하게 물었다. “레이첼. 호텔이 어디죠? 스위트(suite)는 확실할 테고 숙박비는 얼마예요?” “만육천 달러.” “마…. 만육천? 설마…?” “맞아. 하룻밤 가격이야. 호호.” 젠장. 놀라면 안 되는데 이미 늦었다. 명색이 재벌 3세에다가 한국 이십 대 중 최고의 자산가가 바로 나다. 또 이 정도 호사스러움은 우리 집안 사람들에게는 일상이나 다름없다. 내가 좀 많이 놀랐나 보다. 레이첼도 오해를 막기 위해 급히 입을 열었다. “나도 처음이라 놀라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야. 난 500달러 이상을 숙박비로 쓴 적이 없거든.” 놀라는 것은 이쯤에서 끝내야 하는데 머릿속에서 이미 계산기를 두드리니 멈출 수 없었다. 객실을 세 개 잡았으니 하룻밤에 사만팔천 달러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롤스로이스는 매끄럽게 LA 시내로 달려갔다. 돌이킬 수 없다는 듯이. 리츠칼튼 프레지덴셜 스위트는 두 개의 침실과 개인 서재, 전용 주방은 물론 로스앤젤레스 야경이 보이는 옥상 인피니티 수영장이 딸려 있었다. 호화로운 스팀 사우나는 기본이다. 또한. 개인 집사, 트레이너, 치료사, 와인 저장고, 전용 피트니스 센터, 헬기 서비스까지 제공했다. 입이 떡 벌어지는 호사스러움은 엄청난 비용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었다. 그날 밤, 늦게 도착한 아버지의 반응도 별다르지 않았다. 단지 나를 향해 엄지를 척 내민 것은 의외였지만. “아들 덕분에 호화판 신혼여행 기분 좀 내게 생겼네. 너희는 지금부터 24시간 우리 찾지 마라.” 아버지는 어머니 허리에 팔을 감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도대체 넌 얼마나 벌어들인 거야?” 같은 객실을 쓰는 형이 놀란 얼굴로 물었을 때, 난 침실 문을 열며 대답했다. “이번에 파산할 것 같아.” * * * 이틀간, 처음으로 모든 걸 잊고 가족과 좋은 시간을 보냈다. 상준 형은 때때로 아버지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미래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레이첼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 시사회를 참석한 뒤, 드림웍스의 세 거장과 구체적인 미팅 스케줄을 확정했다. “너 진짜 괜찮아?” “제가 손해 보는 짓은 절대 안 합니다. 돈 걱정 하지 마시고 제가 말씀드린 계획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만 판단하십시오.” “레이첼이 언질 줬어. 5억 달러가 필요한 딜인데…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의문이야.” “꿈을 돈으로 환산하지 마십시오. 돈으로 살 수 있다면 꿈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요? 돈은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도구는 원래 쓰고 버리는 게 맞습니다. 돈 쓰세요. 하하.” 아버지는 아무 말 못 하고 한동안 물끄러미 날 보기만 하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내가 냉혹한 재벌 회장의 아들인 줄 알았는데, 현명한 재벌 아들의 아버지였구나.” 쑥스럽고 닭살 돋는 아버지의 고마운 마음을 받고 스탠퍼드로 향했다. LA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 대학에서 배출한, 그리고 앞으로 배출할 기업가들의 회사를 다 합치면 한국이라는 한 국가보다 높은 경제력이다. 보통 실리콘 밸리와 가까운 곳에 있다 보니 스탠퍼드 졸업생이나 휴학생이 실리콘 밸리로 달려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대학이 졸업생들의 창업을 적극 지원하다 보니 벤처 붐이 일었고, 이들이 모여 창업을 준비하고 회사를 세우다 보니 학교 주변으로 실리콘 밸리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스탠퍼드 대학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도서관이었다. 이곳에서부터 추적을 시작해야 한다. 도서관 인덱스를 보며 논문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최근 논문이어야 하고 알고리즘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솔직히 쉽게 찾을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 3년간, 알고리즘을 주제로 쏟아낸 논문만 천 편이 넘었다. 지금 미국 대학생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극명히 드러내는 결과였다. 정확한 기억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두뇌 속 깊숙이 잠자고 있는 어렴풋한 기억을 꺼내야 한다. 야후의 창업자인 제리 양처럼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투덜거리며 논문을 계속 뒤졌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The Anatomy of a Large―Scale Hypertextual Web Search Engine」이라는 다소 긴 제목의 논문을 발견했다. Web Search Engine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다음은 논문의 저자인 「Sergey Brin and Lawrence Page」라는 이름이 보였다. 컴퓨터공학과라……. 젠장, 까마득한 기억이라 살아나지 않는다. 이놈들이 맞나? 어쩔 수 없다. 찬찬히 읽어보며 힌트를 얻어야겠다. 전문용어로 뒤범벅일 게 분명한 공학도 논문을 읽으려니 눈앞이 캄캄했지만, 첫 줄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만세를 불렀다. 도서관 사서가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눈을 부라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마운 놈들. 이들은 논문의 초록(抄錄, Abstract)에 내가 찾던 단어를 써 놓았다. 반갑다. 구글! ======================================== [125] 벤처 정신 3 도서관을 뛰쳐나오자 광활한 캠퍼스가 펼쳐졌다. 젠장, 또 욕이 튀어나오려고 한다. 뭔 놈의 대학교가 이렇게 무식할 정도로 클까? 논문 찾는 시간보다 컴퓨터공학과 사무실을 찾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면적이 3,310헥타르인 스탠퍼드 캠퍼스는 3,388헥타르인 송파구와 비슷한 크기다. 송파구에서 이정표 하나에 의지한 채 사무실을 찾아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기부자의 이름을 딴 건물이 많다 보니 십여 개의 건물이 같은 이름일 때도 있고 학생들에게 물어볼 때마다 다른 방향으로 알려준다. 두 놈을 만나면 하루라도 빨리 구글맵부터 만들라고 독촉해야 할 것 같다. 겨우 찾은 컴퓨터공학과 사무실에서 두 사람의 행방을 물었을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 기숙사에서 지냈는데 실리콘 밸리로 옮겼어요.” 한발 늦었나? 벌써 투자받아 창업한 걸까? 정말 구글이 간절하다. 이럴 때 검색해보면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새삼 두 사람이 만든 구글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다. “혹시 주소 알려줄 수 있어요?” 사무실 직원이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기 전 재빨리 명함을 꺼냈다. 투자사라고 하면 언제나 대환영인 스탠퍼드 아닌가? 직원은 내가 명함을 꺼낸 것보다 더 빠르게 메모지에 주소를 적어 나갔다. 메모를 손에 쥐고 총알같이 밖으로 나와 교내 셔틀을 타고 대학교를 빠져나왔다. 택시를 잡아 20분 거리의 실리콘 밸리로 달려갔다. 알려준 주소에 도착했을 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곳은 한적한 주택가였기 때문이다. 요놈들. 아직 차고를 벗어나지 못했구나. 조심스레 다가가 차고 안을 슬쩍 훔쳐봤다. 서너 개의 책상과 컴퓨터, 여기저기 뒹구는 음료수 캔과 피자 박스. 다행이다 싶었다. 초라한 행색을 보니 아직 큰 투자는 없는 게 확실하다. 닫힌 차고 앞에 쪼그리고 앉아 두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차고 창업이라면 그 속에서 먹고 자는 게 당연한데 어딜 싸돌아다니는 건지….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 픽업트럭 한 대가 차고 앞에 섰다. 젊은 두 남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다가왔다. “너 뭐야? 남의 사무실 앞에서 뭐 하는 거지?”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이름을 확인하자 그들의 표정은 더 험악해졌다. 내가 정장 차림의 나이 든 중년이었다면 곧바로 굽신거렸을 것이다. 자신들을 구제할 투자자라는 걸 직감했을 테니까. “당신, 누구야? 무슨 일이지?” “아직 안 보여? 두 사람 다 눈이 나쁘네.” “뭐가?” “내 등에 쫙 펼쳐진 날개 말이야. 일명 천사의 날개라고도 하지.” 이래도 못 알아먹는다면 그냥 외골수 공학도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보다는 나은 눈치가 있었다. “서, 설마?” 들고 있던 맥주 팩을 떨어트렸다. 그토록 염원에 마지않던 기회가 왔지만 믿기 힘들 것이다. 자신들보다 어린 동양인이 엔젤 투자자일 줄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언제까지 놀라기만 할 건데? 들어가자고. 온종일 돌아다녔더니 목이 말라. 그 맥주 하나 정도는 대접해주겠지?” * * * “여긴 아는 분 차고야. 인텔에서 일하시고.” 맥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일 때 두 사람은 내 눈치를 슬쩍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 정체가 뭐야? 정말 투자자 맞아?” 이야기를 쉽게 풀어 가기 위해서는 나를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어린 나이, 동양인이라는 선입견 없이 말이다. 맥주 캔을 입에 대고 곰곰이 생각하다 아주 손쉬운 방법이 떠올랐다. 나를 경외와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게 만들 최고의 방법이다. “잠깐만. 저 전화기 스피커 되지?” 책상 위의 전화기를 가리키자 두 사람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전화 한 통만 쓰자.” 휴대전화를 꺼내 연락처를 살피며 원하는 이름을 찾았다. 스피커를 켜고 바로 그 번호를 눌렀다. 한참 신호음이 울리다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 마이클입니다. “마이클. 잘 지내시죠? 저 하워드예요. 하워드 진.” ― 와우! 하워드. 이게 얼마 만이야? 혹시 미국이야? 반가움을 숨길 수 없는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네. 지금 캘리포니아에 있어요. 여기서 일 끝내고 시간 되면 찾아뵙죠. 그 전에 부탁할 게 좀 있는데….” ― 뭐든 말해. “이 통화를 듣고 있는 두 사람이 있어요. 제가 투자하고 싶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계속 절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중이라서요.” ― 으하하. 이런, 이런. 하워드가 찾아낸 사람이라면 나도 당장 투자하고 싶은데? 귀를 쫑긋 세우고 통화를 듣던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인사해. 미스터 마이클 델이니까.” “델…? 델! 바로 그 델?”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스피커에 대고 말했다. “마이클. 편하게 통화해요. 전 잠시 빠져 있을게요.” 황당한 표정의 두 사람을 남겨 두고 차고를 빠져나왔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레이첼과 아버지에게 오늘 돌아가지 못한다고 알렸다. 젠장. 그 엄청난 리츠칼튼 호텔 스위트를 놔두고 오늘 밤은 실리콘 밸리의 모텔에서 자게 생겼다. 돈 아까워 죽을 것만 같다. 삼십 분쯤 흘렀을 때 두 사람은 나를 불렀다. 원하는 정보는 다 얻은 것 같았다. 난 아직 끊지 않은 전화에 대고 말했다. “마이클, 이번에 꽤 오래 미국에 있을 거니까 다시 연락할게요.” ― 오케이. 언제든 전화해. 시간 없으면 내가 캘리포니아로 날아갈 테니까. 통화를 끝냈을 때 두 사람의 표정과 눈빛은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진리처럼 받아들일 것이다. “저, 정말 열 살 때 델 컴퓨터에 구백만 달러를 투자했어?” “응.” “주주로서의 권리 전부 포기하고 전적으로 창업자에게 맡기고? 구백만 달러인데도?” “들었을 거 아냐. 마이클이 거짓말했다고 생각해?” “아, 아니…. 믿어지지 않아서.” “사실이니까 믿어.” “네가…. 아니. 하워드라고 했지? 하워드 진.” “그래.” “마이클은 네가 우리를 찾아냈다는 건 우리 비즈니스가 성공한다는 확실한 사인이라고 했어. 자신도 투자하고 싶다고 하던걸?” 두 사람의 볼이 붉은 건 맥주 때문이 아니라 흥분 때문이다. 돈 걱정 없이 사업을 벌일 수 있다는 건 행운이며 축복이다. 억만장자 마이클 델이 투자한다면 앞으로 돈 걱정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 아닌가? “마이클 델은 잊어버려. 그 사람은 이미 성공한 억만장자야. 자신의 성공 비결을 당신들에게 강요할걸? 델 컴퓨터는 근본적으로 구글과 달라. 델은 온라인을 이용할 뿐 본질은 유통업이잖아.” “그렇지만….”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열 살 때 구백만 달러를 투자했어. 지금 내 자산이 마이클 델보다 적을 것 같아?” 두 사람은 크게 휘파람을 불며 머리를 흔들었다. “하워드. 참, 하워드라고 불러도 돼?” “물론.” “먼저 하나 물어보자. 왜 우리야?” “뭐?” “이곳 실리콘 밸리에는 메마른 대지를 적셔줄 단비 같은 돈을 기다리는 벤처가 수도 없이 많아. 왜 우리지?” 갑자기 짠! 등장하는 백기사는 동화 속에나 있는 일, 이런 의심 아니, 호기심은 당연하다. 하지만 십 년 뒤 당신들의 미래를 안다고 대답할 수도 없는 일. 나는 프린트한 논문을 휙 던졌다. “이게 아주 그럴싸했거든.” 한눈에 자신들의 논문이라는 걸 파악한 두 사람이지만 아직 의구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난 야후를 싫어해. 검색 결과가 완전 거지 같아서 말이야.” “우리가 야후를 넘어설 거라고 생각해?” “내게 물어볼 필요 있을까? 그게 목표 아냐? 사용자가 원하는 최적의 결과를 보여주는 검색 엔진. 아냐?” 머리를 끄덕이는 두 사람을 보며 손뼉을 한 번 쳤다. “자. 이제 구체적인 이야기 좀 하자고. 지금 가장 절실한 건 뭐지? 괜찮은 사무실? 함께 일할 직원?” “서버!” 질문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이미 우리 검색 엔진은 오픈했어. 스탠퍼드는 물론이고 실리콘 밸리 사람들이 사용 중이야. 인덱스도 꽤 많이 쌓였고. 지금 쓰는 서버는 바로 저거야.” 그들은 차고 구석에 놓인 PC 두어 대를 가리켰다. “회선도 부족하고 최적화된 퍼포먼스를 내기에는 역부족인 사양이거든.” “만족할 만한 서버를 구축하는데 드는 비용은 이미 뽑아봤을 것 같은데?” “물론이야.” 너저분한 책상 위를 뒤지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말리며 다시 의자에 앉혔다. “한 번에 다 하자고. 서버 증설하고, 그럴싸한 사무실로 옮겨. 그리고 필요한 직원도 뽑아. 참, 차도 바꿔. 렉서스 정도면 되겠지? 덜덜거리는 픽업트럭 타고 다니다가 사고라도 나면 투자한 돈 회수가 불가능하니까.” 입을 떡 벌린 두 사람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행운을 잡은 저 표정. 난 저들의 엔젤이다. 풍족한 생활을 하며 개발에만 전념하도록 해주고 싶었다. 이들은 한국의 몇몇 쓰레기 같은 벤처 회사와 다르다. 매출 하나 없이 투자받은 돈을 펑펑 쓰는 사기꾼에 불과한 놈들이 어디 한둘인가? 하지만 이들은 목표가 다르다. 이들은 제2의 빌 게이츠와 제리 양을 꿈꾼다. 수백억 투자금에 침 흘리는 게 아니라 수조원의 주식 부자를 꿈꾸며 이 차고에서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세상을 목표로 한다. “자, 얼마면 될까?” 천재 공학도들 아닌가? 핑핑 돌아가는 머리로 계산한 다음 조심스레 숫자를 꺼냈다. “십오만 아니, 이십만 달러면 충분할 것 같아.” 두 눈을 깜빡이며 한껏 내 눈치를 살핀다. 이십만 달러라면 리츠칼튼에서 우리 가족이 겨우 닷새를 묵는 비용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 엄청난 사치를 누리고 있다. 다시 한 번 돈 아까워 죽을 것 같다. “됐어. 일단 백만 달러 투자할 테니까 그걸로 성과를 보여줘. 그다음 투자는 천만 단위로 할 거야. 각오 단단히 해.” 두 젊은 놈은 미친 듯한 괴성을 지르며 내게 덤벼들었다. 나를 번쩍 들고 차고를 한 바퀴 돌고 나서야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이 엄청난 행운의 흥분을 만끽한 다음 캔 맥주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미 수많은 선배가 성공을 향해 걸어갔던 길을 안다. 내가 주는 돈이 공짜가 아님을 알고 그들이 앞으로 거머쥘 부를 나누는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저기, 하워드. 이제 구체적인 조건을 듣고 싶은데? 아, 물론 파격적인 투자자라는 건 이미 마이클 델을 통해 들었어. 하지만 계약서는 필요하니까 말이야.” 어떤 조건을 내걸어야 할까? 참 무의미한 이야기다. 수백조의 기업가치를 지금 하나하나 따지며 더 먹겠다고 덤비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끔찍하다. 알량한 미래의 결과를 안다고 해서 세상을 바꿔버릴 두 사람을 컨트롤하겠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개인적 욕망과 사적 목표에 매달리는 나는 이들에 비해 아주 부족한 사람에 불과하다. 이들은 세상을 바꾸고 나는 순양그룹의 미래만 바꾸면 된다. 더 큰 욕망에 사로잡히다가는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가 사라질 수도 있다. 내가 아는 미래가 바뀌지 않을 만큼만 움직이고 욕심내자. 딱 이 정도까지만……. 더는 안 된다. 나는 아직 자신들의 가치를 모르는 두 젊은이 앞에서 마음을 다잡았다. “Don't be evil.” 내 결심을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 ======================================== [126] 잽 다음은 스트레이트 1 “뭐?” “방금 뭐라고 했어?” 정확히 알아듣지 못한 두 사람에게 웃음만 보냈다. “당신 둘, 운 좋다고. 내가 이번엔 정말 욕심 버렸거든.” 영문을 몰라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주저하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자,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두 사람은 내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내가 순차적으로 3,000만 달러까지 투자할게. 그 뒤에 또 투자가 필요하다면 이미 회사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거나 돈을 다 까먹었거나, 둘 중 하나 아니겠어?” 후자는 망했다는 뜻의 다른 말이다. 구글이 망했다면 뭔가 틀어진 것이지 이들의 알고리즘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규모가 커져 추가 투자가 필요하다면 나 아니더라도 많은 투자자가 몰려들 거야. 그들의 펀딩을 받아. 좋은 조건으로.” “잠깐, 하워드. 궁금한 게 있는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봐 줄래?” 처음 3,000만 달러라는 숫자를 들었을 때의 놀람은 이미 사라졌다. 이해하기 힘든 의구심이 든 것이다. “언제든지. 이야기해봐.” 둘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규모가 커져 추가 펀딩이 필요하다면 회사가 좋아졌다는 말인데 왜 투자를 멈추지? 돈은 충분하다고 하지 않았나?” “돈은 여러 곳에서 받아. 그들은 투자에 많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 아니겠어? 실리콘 밸리의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목격한 산증인들이지. 추가 펀딩은 바로 그들의 조언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뜻이다. 옆에서 잔소리하는 사람들을 멀리하지 마. 주옥같은 말을 쏟아낼 사람들이니까.” 설마 이런 말을 들을 줄 몰랐을 거다. 엔지니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투자자들의 간섭이니까. “하지만 당신 두 사람의 가치관도 버리지 마. 목표는 회사가 커짐에 따라 조금씩 변하겠지만, 가치관이 흔들릴 만한 일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 “좋아, 그럼 후자의 경우에는? 우리 비즈니스가 망했을 때 투자금 회수를 위한 조건도 있어?” “그때는 다시 시작하고 성공할 때까지 내가 돈을 쏟아부을 거야. 1억, 10억 달러라도 필요하다면 전부. 어때? 대답이 됐어?” 아주 훌륭한 대답이었나 보다. 두 사람의 표정엔 감동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하워드, 넌 우리 구글이 곡 성공할 거라고 진심으로 믿는구나.” ‘모르는 소리 하지 마. 구글이 꼭 성공해야 4차 산업 혁명이 시작되는 거야.’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밖으로 던지지는 못하고 머리만 끄덕였다. “너의 마음은 충분히 알았어. 하지만 투자를 추상적인 믿음만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제 구체적인 넘버를 말해줄래?” 아직 두 사람의 이름이 조금 헷갈린다. 둘 다 짙은 갈색 머리라 생김새로 구분할 수밖에 없다. 좀 더 잘생긴 놈이 러시아계 세르게이던가? “좋아, 세르게이. 이미 알겠지만 난 의결권을 가질 생각은 없어. 내가 가질 지분만큼의 의결권은 두 사람이 공동으로 행사하도록 하지. 그리고 앞으로 투자할 3,000만 달러의 대가로 두 사람의 평균 지분을 원해.” 평균이라는 말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뭐야? 설마 너희 둘은 영원히 똑같이 나누자… 뭐 이런 맹세라도 한 건 아니겠지? 애도 아니고?” 창업자도 쫓겨나는 곳이 미국이다. 공동 창업자도 각자의 여건에 따라 언제든 지분 차이가 확 벌어질 수도 있다. 이곳은 자본주의 천국 아닌가? 다행히 그런 유치한 맹세는 없었던 것 같다. 평균 대신에 공동이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출발은 우리 셋이 똑같은 지분으로 하자는 거지?” “그렇지. 두 사람은 머리를, 나는 돈을. 공평한 것 같은데?” 두 사람은 손을 내저었다. “공평한 게 아니라 하워드 네가 손해 보는 거야. 그 정도 투자라면 50%를 요구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멍청한 거지.” “맞아. 아예 3,000만 달러에 우리를 사겠다고 해도 무리한 요구는 아니야.” “됐네. 그럼 앞으로도 내 지분을 보장해줘. 유상 증자든, 무상 증자든. 늘 두 사람 지분의 평균을 유지하는 걸로 말이야.” 세르게이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그 마음 바뀌기 전에 거래 끝내자.” “내일 계약서 만들어 줄 테니까 검토해. 그리고 백만 달러도 함께.” 나는 웃으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들이 꿈꾸는 인터넷 세상을 들으며 맥주를 마셨다. 아직 구글 어스, 맵, 번역,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인공지능, 자율주행 같은 자신들이 만들어나갈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았다.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뒤를 이어 등장할 여러 천재의 서비스와 융합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새벽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 뉴욕 사무실과 한국 사무실, 그리고 내 개인 전화야. 필요할 때 언제든 연락해.” 두 사람은 내 명함을 받아 든 채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너 한국인이었어?” “왜? 일본이라고 생각했나?” “아니. 진이라는 성을 쓰길래 홍콩으로 생각했어.” 오늘 밤 잠 못 이룰 두 사람을 차고에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근처 모텔까지 데려다주겠다는 호의를 거절했다. 천천히 걸으며 서늘한 밤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 등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헤이! 너 정말 스무 살 맞아?” * * * 계약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구글 창업자 두 사람은 백만 불짜리 수표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서로의 뺨까지 때리기 시작했다. “너 이번엔 좀 잘못 본 거 아냐?” 아침부터 계약서 챙기고, 수표 준비해서 실리콘 밸리의 주택가 차고로 날아온 레이첼은 아무래도 못 미덥다는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덤 앤 더머 같은 모습을 보이는 저들이 마이크로소프트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세계 최고의 시가총액을 자랑하는 기업의 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날 믿어요. 이번엔 단순히 주식으로 돈 버는 수준이 아니에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주역이 우리 눈앞에서 저런 우스운 모습을 보이는 순간이니까요.” 내가 아무리 엄청난 소리를 해도 레이첼은 머리를 흔들며 한숨만 쉬었다. “닷컴 기업에서 발 빼라고 말한 게 너잖아. 얘네들은 달라?” “말씀드렸죠? 2000년이면 닷컴기업 줄줄이 무너진다고요. 이 애들은 거품 빠진 실리콘 밸리의 알짜배기입니다. 앞으로 잘 보세요. 지금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놈들이 진짜입니다. 사기꾼들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실력자들이니까요.” 그래도 한숨을 멈추지 못하던 그녀가 책상을 탕 치며 소리 질렀다. “You Guys! 그 수표는 진짜니까 그만 살펴봐. 그보다 계약서부터 확인하고 사인해. 너희들 노는 모습 지켜볼 만큼 한가한 사람 아니거든!” “아, 죄송합니다.” 세르게이와 래리는 황급히 수표를 서랍 속에 넣고 계약서를 어디론가 팩스로 보냈다. “이봐요! 계약서 내용은 제삼자가 보면 안 되는 건 기본이야. 어디로 보내는 거죠?” 레이첼이 놀라 물었을 때 두 사람은 씩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염려 마세요. 학교 창업지원센터의 변호사예요. 우리가 별도의 법률회사와 계약하기 전까지 모든 걸 체크하는 변호사들이니까요. 비밀유지사항은 이 변호사들이 더 잘 알아요.” 역시 스탠퍼드다. 학생들의 창업을 위해 부족함 없는 지원을 뒷받침한다. 레이첼은 내 손을 잡고 차고 밖으로 나왔다. “하워드. 회의 때 말한 아마존 닷컴 말이야. 거긴 왜 투자 안 해? 너도 거긴 유망하다고 말했잖아. 차라리 그쪽이 더 확실해 보이던데?” “물론 그 회사도 잠재가치가 어마어마하죠.” “그런데?” “주가 상승으로 돈 버는 것보다 저런 천재들과 관계를 맺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어차피 아마존의 사업구조는 내게 별 도움이 안 돼요.” “그럼 이제 투자 수익은 포기하는 거야?” 레이첼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을 때 머리를 저었다. “돈 벌기 위해서라면 투자를 꼭 주식에만 할 필요 있나요? 더 좋은 곳도 많아요.” “뭐가 있지?” “닷컴 버블이 터지면 돈이 어디로 쏠릴지 생각해보세요. 월스트리트의 악마 같은 놈들이 돈을 잠재울 리는 없잖아요.” “닷컴 다음 목표?” 레이첼이 머리를 갸웃거릴 때 차고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당장 사인할게요. 학교 변호사가 실리콘밸리 계약서 수백 건을 봤지만 이런 파격적인 계약서는 처음이라는데요? 무조건 사인하라고 성화예요.” “우리 하워드가 원래 통이 무지하게 커. 당신들은 진짜 천사를 만난 거예요.” 구글의 첫 투자자가 된 기념으로 파티할 시간도 없었다. “빨리 돌아가자. 지금쯤 네 아버님이 드림웍스와 미팅을 끝냈을 거야. 결과가 궁금해서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어.” 레이첼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드, 드림웍스?” “하워드! 넌 헐리우드에도 투자해?” 나는 두 사람을 향해 한껏 뻐기며 말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꼭 봐. 내가 35% 투자한 영화야. 하하.” 레이첼도 한 마디 더 보탰다. “삼천만 달러 받고 나서 소문내봐. 미라클이 투자했다고 하면 돈 짊어지고 덤벼들 투자사들이 줄을 설 거야. 우린 월스트리트에서 불패신화의 상징이거든.” * * * LA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산타모니카 해변으로 갔다. 호텔이 제공하는 롤스로이스를 타고. “갑자기 왜 바닷가예요? 더워 죽겠는데….” “조용히 대화 좀 하자. 물어볼 게 많다.” 시원한 맥주 한 병씩 들고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드림웍스랑 이야기는 잘하셨어요?” “분위기는 좋았어. 그쪽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런데 왜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 있을까? “혹시 드림웍스에서 무리한 걸 요구했습니까?” “무리? 글쎄. 당연한 걸 요구했는데 나한테는 무리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지.” “어떤…?” “중동 지역을 제외한 아시아 배급망을 구축하라는 거야.” “그렇군요. 당연한 요구네요.” 영화의 절반은 유통업이다. 돈만 준다고 해서 덜렁 배급권을 넘길 만큼 드림웍스의 세 거장이 바보는 아니다. “아시아 배급권에 들어가는 돈만 5억 달러라고 들었어. 그런데 제대로 된 배급망 구축하고 2차 플랫폼 사업까지 확장하려면 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 문제는 자칫 잘못하면 그 돈을 홀라당 날려 먹는다는 거지.” 아마도 아버지는 투자자가 아들이 아니었다면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투자자는 항상 잃어버릴 리스크를 안고 사는 게 숙명이니까. 하지만 아들 돈을 날려 먹은 아버지라는 불명예는 아버지 돈을 날려 먹은 멍청한 아들보다 더한 것이다. 이 두려움이 아버지의 발목을 잡는다. “성공할 자신 없으면 그만두셔도 되요. 하지만 투자자가 아들이라서 못 하겠다는 생각은 버리세요. 돈에는 이름표가 없습니다. 제 돈이니 더 신중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요.” “꽤 큰돈이 들어갈 게다.” “저 아직 돈 많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벌어들일 거고요. 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 돈은 큰일을 위해 준비하는 거잖아. 순양그룹을 차지하려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족할걸?” 이런, 너무 노골적으로 나오니 조금 뜨끔하긴 하다. 왜 이야기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렇구나. 증권시장의 주식을 깡그리 매수한다고 해서 경영권을 뺏어올 지배구조가 아니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뺏어야 한다. 뺏어 올 때 필요한 최소한의 무기가 바로 돈이다. ======================================== [127] 잽 다음은 스트레이트 2 “제가 돈으로 아버지가 원하시는 걸 갖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그 돈, 날리지 않으려면….” “자신감부터 가지세요. 한국 최고의 영화사를 만드신 분 아닙니까? 잘 해내실 겁니다.” 아버지의 형제들은 근거 없는 자신감만으로 수백억을 날려 먹는데 유일하게 투자한 돈 이상을 벌어들이고 회사를 키운 분이다. 자신감만 붙으면 작은 규모를 벗어나 큰 단위의 사업도 잘해낼 것이다.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던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그럼 난 뭘 해주면 될까? 물론 성공한다는 가정하에.” “힘을 가지세요. 그리고 그 힘을 제게 나눠주시면 됩니다.” “힘? 뭔가 착각하는 거 아냐? 끽 해봤자 영화야. 어쩌면 드라마까지 만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제작자, 배급자에 불과한 내가 무슨 힘을 가지겠어?” 미래는 돈이나 물리적, 법적 권력만 힘을 가지는 게 아니다.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많으면 그 사람은 권력자다. 민심이 천심이고 여론을 움직이는 자가 권력이다. 그 힘은 큰 스피커에서 나온다. 아버지는 충분히 문화 권력을 쥘 수 있다. 그때가 머지않았고, 아버지는 아직 젊다. 10년 뒤 나를 지원해줄 든든한 버팀목의 역할은 충분할 것이다. “세상일은 모르는 거 아니겠어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입니다.” 물끄러미 나를 보던 아버지는 맥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네가 순양그룹만 포기하면 우리 가족은 참 여유롭게 살 텐데. 넌 괜찮은 투자 회사 운영하고, 난 영화나 만들고.” “포기하기를 바라십니까?” “아니. 그냥 아비의 바람 같은 거야. 아들이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 하지만 원하지 않는 삶을 강요하고픈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어.” 아버지는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육식동물에게 풀이나 뜯어 먹으며 살라고 하면 죽은 몸이잖아. 사나운 맹수로 태어났으니 상대를 잡아먹으면서 살아.” “그럼 아버지는요? 초식동물입니까?” “지금까지는 목초지의 젖소처럼 살았지. 하지만 이제 야생 물소처럼 살아야겠다.” “야생 물소는 웬만한 육식동물도 이기는데요?” “아들 때문에라도 체질개선 해야 하지 않겠어? 하하.”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켜는 아버지를 보니 의문이 생겼다. 포식자의 피를 이어받은 아버지는 과연 진짜 초식동물일까? * * * 미친 척하고 리츠칼튼에서 일주일을 지냈다. 돈이 얼마가 깨지든 잊어버렸고 부모님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만 신경 썼다. 앞으로 이런 시간을 언제 또 가질지 모른다. 이 순간만큼은 평화롭게 풀이나 뜯는 초식동물처럼 지내고 싶었다. 일주일 후 아버지는 준비할 일이 한둘이 아니라고 엄살을 부리며 한국으로 돌아갔다. 재미있는 건 상준 형도 함께 비행기를 탄 것이다. 어차피 빈둥거리는 거 외화 쓸 일 뭐가 있냐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이다. 나는 뉴욕으로 돌아와서 닷컴 기업에 투자한 자금의 회수를 챙겼고 안정적이며 장기적인 투자종목을 골랐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인 파생상품에 대해 회사의 전문가들에게 설명 들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발표했고, 박세리의 LPGA 경기를 직접 보며 응원했다. 박찬호의 경기도 보고 싶었지만,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아 TV 시청으로 만족해야 했다. 9월 4일. 구글이라는 기업이 정식으로 출범하는 역사적인 날, 두 천재와 함께 엄청난 파티를 즐기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매서운 찬 바람이 성큼 다가온 겨울을 알려줄 때, 마이클 델을 만났다. 이제는 레드 오션이 되어버린 PC 시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마이클을 보자 새삼 대단하게 보였다. 앞으로도 20년 이상 굳건히 버티는 저력을 보여줄 사람 아닌가? 곧 크리스마스 시즌이라는 걸 알려주는 트리가 모습을 드러낼 때쯤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서 나를 가장 반겨준 건 부모님도, 할아버지도 아닌 고모 진서윤이었다. 집에 들어갔을 때 눈물범벅인 고모를 아버지와 어머니가 달래고 있었다.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당장에라도 미국으로 가려는 걸 오 대표가 막아서 못 갔어.” 짐을 풀기도 전에 고모는 나를 앉히고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신데 이러세요?” 고모는 내가 뉴욕으로 떠날 때쯤 할아버지가 초강수를 둔 사실을 구구절절 이야기했다. 어찌 됐던 한 가지 목표는 달성했다. 진영준이 거제도로 쫓겨갔으니 말이다. 할아버지의 분노가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그런데 이혼이라니? 고모부를 길들이려는 것인지 진심인지 파악하기 애매하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딸자식의 이혼을 종용하는 부모가 있을까? “고모.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할아버지께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은데…….” “너라면 아버지를 좀 구슬릴 수 있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 말은 귀를 기울이신다고.” 보다 못한 아버지도 입을 열었다. “누나, 그럼 매형은? 매형도 이 사실을 알아?” “아직 말도 못 꺼냈어. 이혼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 차갑게만 보였던 고모도 평범한 아줌마의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을 것이다. 오빠들은 가족이 아니라 경쟁자이며 서로 칼을 겨눈 관계니까. 만약 나와 단둘이 만났다면 달랐을 것이다. 평정심을 유지한 채 문제를 말하고 상의하는 모습을 보였겠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는 순간 숨겨뒀던 일면이 나온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경쟁자가 아닌 유일한 가족이니까. “참, 검찰은 어떻게 됐어요? 아직 서로 날 세우는 중입니까?” “아니. 담당 부장 검사 자리 옮기는 수준으로 마무리했어. 그것도 네 할아버지가 나서서 정리한 거야.” 눈물을 닦는 고모를 보며 아버지가 내게 눈짓했다. 난 아버지를 따라 조용히 정원으로 나왔다. “넌 껴들지 마.” “네?” “아직 세현이와 통화 못 했지? 세현이가 이리저리 알아봤는데 네 고모부가 대현 그룹 손에 놀아나는 것 같다고 하더라.” “대현요?” “그래. 한성일보가 재까닥 돌아선 게 대현의 요청이었다고 했어. 그럼 뻔한 거 아니겠어?” 고모부의 새로운 스폰서가 대현 그룹이었다니? “네 할아버지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어. 그러니까 이혼이라는 초강수를 두신 거야. 대현이라면 재계의 유일한 경쟁자 아니냐? 이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야. 네가 이 문제를 입에 담는 순간 그 분노가 네게도 전염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네. 전 입 닫고 모른 체하겠습니다. 아버지가 고모 좀 달래주세요. 전 제 방으로 올라가겠습니다.” 다시 거실로 들어가서 망가진 고모에게 말했다. “고모. 내일 제가 찾아뵐게요. 그때 다시 이야기해요.” 고모나 고모부를 위해 뭔가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하지만 꽤 괜찮은 사업인 백화점과 호텔의 계열 분리는 생각해볼 문제다.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딸에게 이 회사들을 떼어 줄 생각을 하신 걸까? 길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골프장 정도면 몰라도 백화점과 호텔의 계열 분리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미줄처럼 엮인 지배구조를 벗어나려면 엄청난 양의 주식을 매입해야 한다. 할아버지와 가족이 쥐고 있는 주식이 3%도 안 된다. 계열 분리하려면 각 계열사가 보유한 주식을 다시 사들여야 하는데 이런 곳에 돈 쓸 분이 아니다. 만약 진심이라면 이혼을 하든, 하지 않든 고모 몫으로 떼어줄 테지만 말이다. 내 방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했다. 이 기회에 백화점과 호텔을 내 손에 넣어버릴까? * * * 다음 날 아침, 백화점에서 만난 고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도도한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어제 추한 모습을 보였지? 술을 좀 마셨더니 취했나 봐.” “전 어제의 고모가 좋은데요?” “쓸데없는 소리를….” 고모는 잔잔하게 웃었다.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고모의 표정을 보니 내게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하다. 나 역시 할 말이 있고. 누가, 어떻게 꺼낼지 타이밍 문제다. 당연히 아쉬운 게 많은 고모가 헛기침 몇 번 하고 입을 열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뭘요?” “내숭은 그만 떨자. 네가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이미 늦었어. 넌 네 아버지를 대신해서 순양의 일부를 물려받을 거야. 네가 얼마나 잘하냐에 따라 크기가 달라질 뿐이지만.” 뭘까? 도와 달라는 걸까? 아니면 손잡자는 걸까? “부인 안 해요. 이미 저도 짐작하고 있어요.” 조금 난감한 표정을 보이며 말하자 고모의 눈이 반짝였다. “어차피 이건 어른들의 싸움이야. 네가 얼마를 물려받든, 네 큰아버지들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네 걸 뺏으려 들 거야. 운 좋다면 비싸게 사들일 거고.” “고모는요?” “나? 난 아직 가진 게 없어. 그래서 고민이다.” “백화점, 호텔, 콘도, 골프장. 이 정도면 적은 게 아닌데요?” 고모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더러 이혼하라고?” “선택은 고모의 몫이죠. 남편이냐? 순양이냐. 하지만 고모는 남편 때문에 순양을 포기하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네 생각에 따라 빠른 선택을 할 수 있지.” “네?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가지게 될 것과 내가 가지게 될 것을 지키기 위해, 아니 더 큰 걸 가지기 위해 우리 힘을 합치는 게 어떨까?” 마음이 급하구나. 맏손자를 유배 보내고 사위를 내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후계를 정하려는 발 빠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이다. 고모도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영토를 확보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힘을 합치면 어떻게 되죠? 구체적으로요.” 내가 관심을 보이자 고모는 재빨리 내 곁에 앉았다. “우리가 앞으로 가질 모든 것의 절반. 그렇게 나누자. 난 우리 힘이 되어줄 사람들을 모을게. 순양그룹 힘의 절반은 계열사 사장들을 비롯한 임원들이 쥐고 있어. 신하 없이는 군주도 없어. 잘 알지?” 난 한동안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할아버지가 주시는 것부터 챙기세요. 한 번에 큰 걸 가지려 하지 마시고 야금야금. 그게 올바른 순서입니다.” 고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혼하라는 거야? 지금?” “고모가 칼자루를 쥐어야죠. 이렇게 끌려다니다가는 아무것도 못 해요.” “이혼이 어떻게 칼자루가 돼?” “이혼이 아니라 이혼 서류요. 고모부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어 보세요. 당장 고모 발밑에 납작 엎드릴걸요? 정치인으로서 순양의 사위라는 건 약점이지만, 그렇다고 순양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세요.” 고모는 눈을 깜빡이며 생각하더니 나지막한 탄성을 흘렸다. “아! 그렇구나. 이혼 서류는 양쪽에 써먹을 수 있는 칼자루가 되는 셈이구나.” 머리가 꽤 돌아가는 아줌마다. 하나를 말하니 둘을 알아챈다. “네. 그 서류 한 장으로 백화점, 호텔, 콘도, 골프장을 챙기시고 서울시장도 다시 손에 넣을 수 있잖아요.” 고모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넌 어쩜 이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 이러니 아버지가 널 끔찍하게 아끼시지.” 고모의 칭찬에 난 씁쓸하게 웃었다. “머리 잘 돌아가는 건 큰 도움이 안 돼요.” “그게 무슨 말이야? 도움이 안 되다니?” “비상한 머리를 가진 자가 제왕이 된 적 있나요? 제왕의 오른팔이 될 뿐이에요. 한 고조 곁의 장량, 촉 황제 곁에는 공명이 있었고 이성계에게는 정도전이 있었죠. 결국 전 누군가의 오른팔이 될 뿐이에요.” 내 말의 숨은 뜻을 충분히 알아들을 만큼 고모는 눈치가 빠르다. ======================================== [128] 잽 다음은 스트레이트 3 “너무 겸손한 말 아냐? 넌 그 이상이야. 우리 조카, 왜 이리 자신감이 없어?” 고모는 더할 수 없는 친근함을 보이며 내 등을 쓰다듬었다. “넌 아직 어려. 벌써부터 그렇게 네 한계를 정하지 않아도 돼. 아무튼 이 이야기는 뒤로 미루자. 그보다 이혼 서류 있잖아. 그걸 어떻게 쓰면 좋겠어?” “할아버지께는….” “그건 알아. 이혼장 들이밀고 챙길 건 챙기라는 거지?” “네. 그런데 하나 더 얹어 달라고 하세요.” “하나 더? 뭘?” “순양 유통요. 지금 하이퍼마켓(Hypermarket)을 준비 중이지 않나요?” “하이퍼? 아, 대형할인점 말이구나.” “네. 그쪽에 엄청난 자금이 쏠렸어요. 게다가 순양 유통은 비상장 회사니까 거기를 모기업으로 하세요. 백화점, 호텔 지분도 그쪽에 넘기고요. 그럼 고모는 그룹에서 현찰장사 하는 건 다 손에 넣었다고 봐야죠. 그룹 은행이나 다름없는.” “그것까지 주실까?” 자금순환이 가장 활발한 계열사를 다 먹는다고 생각하자 고모는 흥분에 휩싸였다. “어차피 백화점이나 대형할인점이나 똑같은 구조 아닌가요? 취급 상품의 격만 다를 뿐이죠. 고모는 이미 백화점을 훌륭하게 경영한 성과도 있고, 이혼까지 하는데 그 정도는 얻어야죠. 순양 유통을 모기업으로 해서 완전히 계열 분리하세요. 그럼 기반은 확보했다고 볼 수 있잖아요.” 고모는 꿀꺽 군침을 삼켰다. “유통을 모기업으로 만들면 난 유통 주식만 쥐면 되고, 나머지는 회사 돈으로 주식을 옮기면 깔끔하게 마무리되겠네?” “네. 어차피 주머니만 옮기는 거니까 돈 들어갈 일 없이 계열 분리할 수 있어요. 일거양득?” 고모는 나를 확 끌어안았다. “공명인지 장량인지 아무리 똑똑해도 우리 조카 발끝에도 못 미칠 거야.” 거북해서 고모를 슬쩍 떼어냈다. “고모는 할아버지부터 만나보세요. 전 고모부를… 아니, 오 대표님이 고모부를 만날 겁니다. 먼저 겁을 좀 줄 테니까 고모가 결정타를 날리세요.” “겁을 줘? 어떻게?” “고모의 남편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야죠. 오 대표님이 남의 속을 긁는 데는 타고나신 분이거든요.” * * * “최 시장님. 이 바닥에 소문 다 퍼졌어요. 양손에 꽃패 쥐고 이권장사 제대로 벌일 생각이시라는 거.” “뭐요? 누가 그래?” “요즘 대현 주 회장과 수시로 독대한다면서요?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이미 태도가 다르다. 최 시장은 권력의 본질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한 줌의 권력 앞에 수백 배의 돈이 줄 서는, 힘의 균형을 경험했다. 장인의 돈이 권력을 움직이는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장인인 진 회장은 수천, 수만 배의 돈을 저울추에 올려놓은 것뿐이다. 오세현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최 시장의 눈길에 슬슬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주 회장은 내년에 시작할 뉴타운 건설 때문에 만난 것뿐이요. 아, 이번엔 오 대표도 빠져줘야겠어요. 이미 DMC로 우리 계산은 끝났으니까. 그렇죠?” “그 뉴타운, 대현 건설과 수의계약 하면 말 많을 겁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말아요. 우리 HW는 아파트에는 관심 없어요.” “HW? 아, 대아건설도 이름 바꿨지. 이젠 HW 그룹 총수신가?” “총수는 아진의 송현창 회장님이 하시죠. 저야 지주 회사 대표일 뿐이고요.” “족보는 이제 다 알았고, 용건만 말해요. 난 또 뉴타운에 밥숟가락 올려달라고 부탁하러 온 줄 알았는데….” 오세현은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제가 순양그룹 딱지 떼라고 한 건 재벌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지우라고 한 겁니다. 순양에서 대현 그룹으로 갈아타라고 한 게 아니고요.” “주제넘은 소리나 하려면 그만 끝냅시다. 내 앞가림은 내가 하리다.”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도 않는다. 자신이 엄청난 강자라고 생각한다. 숨기지도, 참지도, 감추지도 않는 게 권력자의 특권이니까. “아직도 모른다면 가망 없군요. 이봐요. 최 시장. 당신은 그냥 주 회장의 장난감일 뿐이요. 잠시 가지고 놀다 싫증 나면 버리는 그런 장난감 말이요.” “뭐야? 어디서 감히 그딴 소리를!” 소파 손잡이를 잡은 손이 부르르 떨렸지만, 오세현은 멈추지 않았다. “그냥 재미 삼아 당신한테 바람 잔뜩 넣어서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거요. 바로 당신 장인인 진 회장 열 받으라고. 그게 전부야. 넘치게 가졌고 저물어가는, 인생이 심심한 심통 맞은 영감들 장난일 뿐이라고.” “입 닫아!” “진 회장이 당신을 버리면 대현 회장도 심드렁해서 당신 버려. 주 회장이 그깟 아파트 재개발하는 데 관심이라도 있을 것 같아?” 최 시장은 표정을 싸늘하게 바꿨다. 더는 흥분한 모습이 아니었다. “버려? 누가 누굴 버려? 진 회장이 사람 두 번 버리는 재주도 있나?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디서 함부로 나불대?” “뭐요?” “진 회장은 이미 날 버렸어. 서울시장 출마한 그 순간에 말이야. 장인과 사위라는 법적 고리만 있을 뿐 이미 그 영감과 나는 남남이야.” 오세현은 최 시장이 이토록 어긋난 길을 가는 이유를 완전히 알았다. 이런 마음이라면 절대 되돌릴 수 없다. 더 큰 충격을 받기 전에는…. “마음에서 지우는 게 한 번이고…. 방금 말했죠? 법적 고리는 남았다고. 그럼 그 고리마저 끊으면 두 번 버리는 셈이네. 그거 끊어지면 당신은 정말 끝이야. 순양 장학생들이 그 고리 때문에 참고 있는 거 몰라요?” 최 시장의 안색이 변했다. 설마 그런 일이? “그 고리 끊어지는 순간 여의도부터 서초동까지 당신 사냥하겠다는 놈들이 우르르 몰려들 거요. 이제 이 방으로 돈 싸 들고 오는 업자 대신 화살만 날아들걸?” 오세현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 정도면 충분한 사전 경고는 날린 셈이다. “최 시장 당신 때문에 나까지 불똥 튈까 봐 걱정돼서 찾아온 겁니다. 죽으려고 용쓰는데 말릴 방법이 없네. 갈 때는 혼자 조용히 가쇼. 불똥 튀면 나도 가만있지는 않을 거요.” 멍한 얼굴의 최 시장을 남겨두고 오세현은 시청을 빠져나왔다.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 좀 더 빼먹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 * * “이게 뭐냐?” 진 회장은 진서윤이 내미는 파일을 열었다. “이혼 서류예요. 협의이혼요.” “빨리도 가져온다. 그깟 덜떨어진 사내 하나 정리하는데 무슨 고민이 이리 긴 게냐?” “아버지! 제가 아들만 셋이에요. 아이들 생각은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다 큰 자식 눈치 볼게 뭐 있누? 그리고 그놈들이 부모가 뭐 하는지 신경이나 쓴다던? 엄마 백화점 명품 가져가서 계집애들에게 안기는 것만 신경 쓰는 최가 놈 자식 아니냐.” “아버지!” 진서윤이 소리를 버럭 지르자 진 회장은 피식 실소를 흘리며 서류를 찬찬히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날짜가 없어? 내일이라도 당장 도장 받아서 처리해.” “서울시장 임기 끝나는 날 처리할게요. 현직 시장이 이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해봐요. 신문 방송이 떠들어댈 게 뻔한데 집안 망신이잖아요. 애들도 그렇고.” 이혼 서류를 툭 던진 진 회장은 딸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하지 마. 그놈은 전자 공장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한 것도 감지덕지한 놈이다. 내가 네게 주는 모든 걸 그놈이 나눠 가진다고 생각하면 열불 나서 못 참겠다.” 진서윤은 아버지의 말에 담긴 진심을 읽자 용기가 샘솟았다.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저도 이제 신물 나니까요. 멍청한 사내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하는 짓 보니 가망 없어요. 이제 애들이나 바라보며 살 생각이에요.” “지 애비 닮은 놈들 아니냐?” 진서윤은 아버지지만 진절머리가 났다. 딸의 몸에선 난 손자지만 최 씨라는 이유만으로 단 한 번도 살갑게 대한 적이 없었다. “절 닮았어요. 아버지가 관심 두지 않아서 모르시는 거예요.” “알았다. 뭔 앙탈이냐?” 진서윤은 한결 부드러워진 아버지의 태도를 보며 남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 남자와 결혼시킨 것도 아버지였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 사실 때문에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그럼 이제 약속하신 대로 계열 분리 진행해 주실 거죠?” 진 회장은 나이 오십인 딸이 어린애처럼 눈을 반짝이며 빤히 쳐다보자 애잔한 마음이 일어날 정도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철없이 늙어버렸을까? 언제까지나 품 안에 품고 키운 자신의 잘못이 제일 크다는 것이 아려왔다. “알았다. 주식 확보하고 처리하는데 시간은 좀 걸릴 게다. 네가 이혼장에 최 서방 도장 받아오면 바로 시작하마.” “그런데 아버지. 저기….” “또 뭐가 남았어?” “백화점과 같은 계열이니까 유통도 함께 묶어서 줘요.” 진서윤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진 회장은 그녀가 뭘 원하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순양 유통이 내년부터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는 거 알고 하는 소리냐?” “….” 진서윤이 주저하자 진 회장은 손을 내저었다. “욕심 그만 부려. 네가 만질 만한 게 아니다.” “제가 백화점 맡고 경영실적 좋아진 거 알고 계시잖아요. 판매하는 상품의 질만 다를 뿐 대형할인점은 백화점이랑 그 구조가 똑같아요. 저… 잘할 자신 있어요.” “그것까지 묶으려면 복잡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냐. 순양 유통 주식을 백화점에 넘기려면 이건 합병 수준….” “아니에요. 유통을 모회사로 만들면 돼요. 백화점, 호텔의 지배 지분을 유통으로 넘기고 제가 유통지분을 쥐면 한결 수월해요. 유통이 비상장 기업이니까 경영권 방어하기도 어렵지 않고요. 부족하면 유상 증자하면 되잖아요.” 딸의 말을 허투루 흘릴 수 없었다. 쉽고, 세금 피하고, 경영권 방어에도 유리하다. 게다가 같은 카테고리 사업이니 함께 묶어도 편법 상속이라는 의심을 피할 수 있다. 진 회장은 놀란 눈으로 딸을 보며 말했다. “그런 머리도 돌아가는 게냐? 허허, 참.” “제가 오빠들보다 훨씬 낫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어요? 절 좀 믿어보세요.” 진서윤은 진 회장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목표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어 날아갈 것 같았다. * * * “인감 찍어요. 당신 사정을 생각해서 다음 선거 끝나고 법원에 제출할 생각이니까 고맙게 생각해요. 그렇다고 꼭 재선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여, 여보. 이게….” “우리나라 공직자 중에 이혼남은 없어요. 이혼은 선거에 치명적이니까 선거 끝나고 법적인 절차 밟을게요. 대신 지금부터는 별거 상태로 하죠. 이달 안으로 짐 싸서 나가요.” 이혼 서류를 든 최 시장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럴 수가! 며칠 전 오세현이 경고처럼 한 말이 현실로 다가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위자료니 뭐니 꿈도 꾸지 말아요. 나랑 결혼하면서 당신이 가져온 건 그 몸뚱아리뿐이잖아요. 이 집도 내 명의고, 결혼 생활 동안 당신은 단돈 십 원짜리 하나 들고 온 적 없으니까 치사하게 위자료 가지고 싸우지는 않겠죠?” 몽둥이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다. 아내가 하는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귓가에서 윙윙거릴 뿐이었다. “여, 여보. 아니 서윤아. 갑자기 왜 이래? 나이 오십 넘어서 이혼이라니? 우리가 이혼할 이유가 어디 있어?” “이유? 몰라서 물어요? 내가 왜 이러는지?” 최 시장은 매섭고 차가운 눈빛의 아내를 보자 까마득한 과거가 떠올랐다. 재벌 딸과 처음 만났던,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주눅이 들어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그 순간. 바로 맞선 본 그날의 기억이었다. ======================================== [129] 잽 다음은 스트레이트 4 진서윤은 남편의 태도와 몸짓 그리고 말투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고 연애할 때와 신혼 시절의 남편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공주를 모시는 시종이나 다를 바 없던 행동. 짜증을 내고 변덕을 부려도 항상 기분을 맞춰주던 남편. 그런 남자가 결혼을 하고, 한 침대를 쓰고, 살을 섞고, 애를 낳자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공주가 아니라 자신의 출세를 위한 최고의 사다리 역할을 요구했고, 진서윤 역시 남편을 출세시켜 순양그룹을 차지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했다. 서로 기댈 수 있는 도구였다면 천생연분이었겠지만, 이미 글렀다. 진서윤은 조카인 진도준과 손을 잡는 방법을 택했고, 남편인 최창제 시장은 대현에도 발을 걸치는 양다리를 택했다. 어긋난 것을 다시 끼워 맞추지 못한다면, 떼어내면 되는 일이다.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했어. 그게 우리를 위한 최선의 길이었는데…. 당신은 그 알량한 권력에 취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거야. 혼자 잘나서 서울 시장이 된 것 같아요?” “여보. 오해야. 그게 아니라고! 난 선택지를 좀 넓히려고….” “웃기지 말아요. 선거 자금 400억 구해 온 것은 나고, 고경열 후보 혼외자를 터트린 건 오세현 대표였어요. 알기나 해?” “뭐? 그런….” “당신은 운이 따른다고 생각했죠? 세상에 그런 운은 없어요. 알게 모르게 다 누군가 움직여서 결과가 나오는 거야. 더 길게 말하기도 싫으니까 그만 끝내요. 자꾸 귀찮게 하면 내일 당장 이혼소장 접수할 테니까 그리 알아요. 마지막 호의, 줄 때 받아.” 진서윤은 남편을 침실에 남겨두고 집을 나왔다. 남편이 짐을 싸서 떠날 때까지 호텔에서 지낼 생각을 하니 오히려 홀가분하다. 홀로 남은 최 시장은 망연자실한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자신이 순양그룹에서 버림받은 사실은 아마도 순양 정보팀에서 흘릴 것이고 서울시장이 별거를 시작했다는 소문은 고급 찌라시를 통해 돌 것이다. 본가가 운영하는 법무법인은 대부분 순양 그룹과 관계된 일이 메인이었으니 밥줄 끊기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시장 재선은 물 건너갔다. 당이 뒷배 하나 없는 자신을 재공천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최 시장도 안다. 이 모든 걸 막으려면 이혼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을. * * * “괜찮은 생각 아냐? 계열 분리도 쉽고, 한 덩어리로 묶는 일도 쉽고.” “완전히 주실 생각이시라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진 사장이 생각해 낸 것이라고요?” “그래. 그 애가 제 꺼 챙기는 데는 머리가 좀 돌아가. 허허.” 이학재는 진 회장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가 아는 진서윤은 이런 생각을 짜낼 리가 없다. 그룹을 전부 원하는 그 시커먼 욕심 때문에 자꾸 실수를 저지르고 중요한 걸 놓치는 여자다. 이런 식이면 계열사 몇 개 먹고 완전한 결별이다. 더는 순양이 아니게 된다. 갑자기 과욕을 버리고 현실적으로 변한 이유가 뭘까? 진 회장은 생각에 잠긴 이학재를 보며 혀를 찼다. “쯧쯧. 또 딴생각하는구먼. 그만해. 이번엔 나도 생각을 굳혔으니까. 그거 떼주고 출가외인으로 생각할란다.” “회장님. 하나가 더 있습니다.” “뭐가 또 있어?” “간단한 지배구조는 뺏어오기도 쉽습니다. 순양유통 지분만 확보해버리면 끝이니까요.” “역시 우리 학재야.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진 회장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다시 뺏어올 생각도 있으십니까?” “하는 거 봐서. 만약 대형할인점 성적까지 좋다면 굳이 준 걸 되돌릴 생각은 없어.” 사람 문제다. 그리고 진 회장의 의지 문제다. 내년부터 시작할 대형할인점 사업에 좋은 인재를 대거 투입하면 좋은 성적이 나올 확률이 높다. 좋은 인재를 쏙 빼고 회사만 떼어 준다면 진서윤은 실패한다. 과연 진 회장의 진심은 뭘까?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순양유통을 모회사로 하는 데까지만 작업해놔. 서윤이에게 넘겨주는 건 그 애가 약속 지킨다는 확신이 들 때 진행할 수 있도록.” “최 시장과 이혼하는 거 말입니까?” “그래.” “위장 이혼도 있습니다. 아, 오해는 마십시오. 제가 꼭 이혼을 바라는 것처럼 들리네요. 허 참.” 당황한 이학재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야. 나도 어느 정도는 의심하고 있어. 몇 달 동안 질질 끌다가 갑자기 결정한 것도 찜찜하고.” “두 사람…. 좀 지켜볼까요?” 주변에 사람을 풀어 정확히 확인하겠다는 뜻이다. 이 의미를 모를 리 없는 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주시해봐. 이상한 모습 나오면 즉각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이학재가 일어서려 할 때 진 회장은 문득 생각난 걸 물었다. “그 친구는 어때? 데리고 다닌 지 일주일 됐나?” “네? 누구…? 아, 김윤석 말씀이십니까?” “그래.” “일단 이것저것 시켜보고 있습니다만….” “왜? 예상대로 별로야?” “기대 이상으로 장점이 많이 보이더군요. 우직하고 성실하고 입도 무겁고요. 그런데 영민하지가 않습니다.” “머리 나빠?” 이학재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데리고 쓰기에는 믿을 만하나 큰일 맡기기에는 한참 부족합니다.” “돌쇠 스타일도 나름 쓸 곳이 많긴 하지.” “네. 딱 그 정도입니다.” 손자가 처음 낙점한 측근치고는 많이 아쉽다. 정에 이끌려 사람을 골랐지만, 씀씀이는 구별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지 걱정되기도 한다. “좀 가르쳐봐. 싹수 보이는지도 계속 확인하고. 그리고 쓸 만한 애 하나 찾아봐. 도준이 수행할 놈으로.” “알겠습니다.” * * * DMC 입주사 문제로 아버지와 상의하기 위해 오세현과 내가 집으로 갔을 때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부부가 쌍으로 와서 징징대다니?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만만한가? 아니면 부탁할 데가 여기밖에 없나? 아무래도 후자가 맞을 것 같다. “처남.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나? 자네 누이 좀 말려주게. 이건 오해라고.” “형님. 일단 진정하시고….” 사색이 된 고모부는 하소연하는 걸 1차 목표로 삼은 것 같다. 계속해서 영문을 모르겠다며 잘못한 게 있으면 바로잡을 테니 고모를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며 매달렸다. 아버지도 지쳐버렸는지 결국 팔짱을 낀 채 고모부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고모부가 잠잠해지자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형님. 저도 누나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부부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군요.” 이때 고모부는 현관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오세현을 발견하고 재빨리 달려왔다. “오 대표. 당신은 뭔가 알고 있죠? 일전에 내게 조심하라고 말하지 않았소? 어떻게 그 말 하자마자 이런 일이 생기는 게요?” 또다시 이성 잃은 남자의 징징거림에 불과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시장님. 이건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문제입니다. 상황 파악이 안 됩니까?” “뭐요?” “부인을 찾아 설득할 게 아니라 순양그룹 회장님을 찾으셔야죠. 순양에 등 돌리고 대현과 악수한 결과 아닙니까?” 고모부라고 이 사실을 모르겠는가? 단지 손쉬운 상대를 찾아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 때문이다. 할아버지보다 고모와 대화하고, 설득하는 게 더 쉽다고 생각하니 아버지에게 창구 역할을 부탁하는 것이다. 답답한 노릇이다. 쉬운 길은 누구라도 갈 수 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더라도 문제의 핵심에 바로 접근해야 해결책을 찾는다. “공적인 문제를 사적으로 보복하는 것도 문제 아니오. 도대체 장인어른은 해도 해도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모르고 결혼하셨습니까?” “응?” 차분히 듣던 아버지의 표정이 험악하다. 비록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부모 험담은 듣기 힘든 법이다. “매형. 말은 똑바로 합시다. 우리 아버지가 성격 좋고 인자하신 분이라서 결혼했어요? 순양그룹 총수니까 결혼한 거잖습니까? 그럼 너무하던, 지독하던 입 다물어요! 매형이 우리 아버지 욕할 수 있는 순간은 순양그룹이 망해서 더는 재벌 총수가 아닐 때뿐이란 말입니다.” 아버지의 순하고 얌전한 모습만 봐 왔던 고모부는 말문이 막혔다. 돈 보고 결혼했으니 나머지는 감내하라는 소리가 틀린 말도 아니다. “시장님. 이건 공적 문제라는 거 인정하신다면 저와 이야기합시다. 윤기야. 넌 진정하고.” 오세현이 불쑥 끼어들며 아버지에게 눈짓을 보냈다. 아버지는 굳게 다문 입술로 아무 말 없이 이 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 모습을 고모부는 지켜보기만 할 뿐 붙잡지도 못했다. “시장님. 먼저 진 회장님의 노여움부터 풀어야 합니다. 부인과 이야기하는 건 그 뒤에 할 일입니다. 솔직히 인정하시잖습니까?” “이혼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장인어른이 날 만나주겠소?” 난 우는소리 하는 고모부를 향해 말했다. “손을 뿌리치는 유권자와 악수한 분 아닙니까? 무슨 수를 써서든 만나셔야죠.” 고모부의 이혼을 막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어차피 인연은 여기까지다. 다만 끝내기 전, 하나라도 더 건지면 좋은 것 아닌가? 못 건지면 말고, 어차피 본전이다. “선물 하나 준비해서 만나러 가십시오. 적어도 할아버지 서재까지는 들어갈 수 있잖아요.” “선물?” “네. 그럼 빈손으로 가시려고요?” “아, 그건 아니고. 장인어른께 어떤 선물을 드려야 할지 감이 안 와서 말이야.” 난감한 표정의 고모부에게 오세현이 힌트를 주기 시작했다. 아니, 약을 뿌리는 건가? “시장님. 오락가락하시면 안 됩니다. 진 회장이 다시 사위로 받아줄 만한 대단한 걸 하나 준비하세요.” 대단한 선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는 고모부를 보며 나도 머리를 굴렸다. 오세현은 분명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을 텐데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고모부. 물 한잔 갖다 드릴까요?” 오세현에게 눈짓하고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도 슬며시 내 뒤를 따랐다. “뭡니까? 쓸 만한 게 있어요?” 컵에 물을 따르며 나지막이 묻자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우리도 아파트 공사 한번 해야지. 그쪽은 경험이 없잖아.” 오세현은 눈을 한 번 찡긋하고 재빨리 돌아갔다. “도준아, 오 대표, 뭐 좋은 생각 없어요? 두 사람은 장인과 자주 만나니까 나보다 나을 거 아니오?” “시장님. 먼저 주 회장과 인연 끊겠다는 걸 확실히 보여 드리세요. 그게 우선입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얼마나 받아 처먹었는지 안 봐도 알 것 같다. 고모부의 표정을 확인한 오세현이 혀를 차며 말했다. “시장님. 이런 모습 보이시면 저도 더는 할 말 없습니다. 어차피 저는 득 될 것도 없는데 힘 빼기 싫군요. 그냥 알아서 하십쇼. 전 윤기와 일 이야기를 해야 돼서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자, 잠시만.” 고모부는 일어서는 오세현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정말 그렇게 하면 장인어른 기분이 풀리겠소?” “제가 어떻게 장담합니까? 그냥 제 생각이 그렇다는 거죠. 전 바빠서 이만.” 잡은 손을 뿌리치고 이 층으로 올라가는 오세현의 뒷모습을 보며 고모부는 크게 한숨만 내쉬었다. 내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아무래도 눈치가 없으니 오세현의 뜻을 읽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고모부.” “응, 도준아. 네 생각 좀 들어보자.” “할아버지께서 가장 격노하신 게….” “그래. 말해봐. 뭐냐?” “서울시 내년 사업계획에 뉴타운 개발이 들어 있다면서요? 그걸 한마디도 안 하고 대현 그룹과 은밀하게 진행한 게 치명타였어요. 소문에 서재를 뒤집어엎으셨다고…….” 파랗게 질린 고모부의 얼굴색을 보니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게 틀림없다. 약 치는 건 여기까지. 이제 어떤 선택을 할지 재미있게 구경하는 일만 남았다. ======================================== [130] 한 조각의 파이 1 “고모부는 가셨어?” “네.” 이 층 서재로 올라가니 두 분은 DMC 지도와 업체 리스트를 놓고 한창 논의 중이었다. “윤곽은 좀 나왔어요?” “콘진, 영진위, 방통위 같은 정부 기관이나 단체는 전부 입주하니까 문제없어. 남은 건 충무로 영화사들과 독립 프로덕션의 입주야.” 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전망은 어둡지 않아 보였다 “날 따라올 회사가 많으니까 충무로는 걱정하지 않아. 진짜 문제는 방송사들이지.” “어차피 공중파는 정부 정책의 문제아냐? 개별 스튜디오 이전은 발표했으니 괜찮을 것 같은데?” “정권은 5년마다 바뀌니까. 신사옥 올릴 때까지는 장담할 수 없어.” 두 분의 걱정을 이해는 한다만 그만 걱정하라는 말을 꺼낼 수도 없다. 케이블도 늘어나고 종합편성채널도 생기면 플랫폼은 넘쳐 날 테니 나만 느긋한 심정이다.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몇 년에 걸쳐 완성해 나갈 곳이니 미디어 기업들도 몇 년에 걸쳐 천천히 들어올 겁니다. 그보다 아버지. DCN 인수는 생각해보셨습니까?” “영화 수급에 문제없으니 운영의 어려움은 없어. 하지만 여전히 수익은….” “말씀드렸듯이 수익은 당분간 생각하지 말죠. 이미 자금은 충분합니다. 튼튼한 씨앗만 뿌린다고 생각하세요.” 아버지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오세현은 달랐다. 그는 미국에 그리고 한국에 쌓아둔 돈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다. “야. 줄 때 받아. 그깟 케이블 방송사 하나가 아무리 돈 깨 먹어도 한강 물 몇 사발 줄어드는 거다.” 하나? 천만에. 좀 세게 나가야지. 시작부터 인재를 싹 쓸어올 만한 기반을 닦는 거다. “몇 사발에서 몇 대야로 바꾸죠. 영화, 드라마, 게임, 엔터테인먼트 채널. 시작은 이렇게 하시죠.” “뭐? 네 개나?” “아버지라면 영화 컨텐츠 수급은 문제없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 기회에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도 제작해 보시고요. 절반은 직접 제작하시고 절반은 공중파 재방 돌리면 충분하죠.” 불안해서 주저하는 아버지를 벼랑으로 밀어버리면 어쩔 수 없이 추진력을 발휘할 것이다. 아버지의 잠자는 포텐셜을 전부 끌어올려야 한다. “아시아 영화 유통망 구축하랴, 영화사 운영하랴, 케이블까지 굴리려면 바쁘시겠어요.” 내 말뜻을 알아들은 오세현이 힘을 보태는 걸 잊지 않았다. “나도 그 바닥 인재들 좀 찾아보마. 이번에 미디어 회사 제대로 된 거 하나 만들어보자.”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흥분과 불안, 그 상반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우리 둘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1999년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과 새천년의 희망이 뒤섞인 세기말의 감정의 고스란히 드러나는 해였다. 우리 집안도 다르지 않았다. 새해 첫날 모인 가족들의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세요.” 모두 모여 서로 인사를 나누지만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눈치 없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진영준은 아직 유배가 풀리지 않았고, 이 집의 유일한 사위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지 오지 않았다. 시누이인 고모를 바라보는 큰어머니들의 눈빛에는 깨소금이 줄줄 흘렀고 큰아버지들은 경계심을 보였다. 진 회장이 딸에게 이혼의 대가를 듬뿍 안겨줄 것이라는 소문이 그룹 내에서 돌기 시작했고, 이미 계열분리 절차를 시작했다는 구체적인 정황도 드러났다. 여동생이 가져가는 것이 혼수 정도라면 웃어줄 수 있을 텐데 아예 기둥 하나를 뽑아가는 셈이니 남자 형제들의 표정이 좋을 리 없다. 떡국 먹는 식탁에서까지 냉기가 싸늘하자 할아버지는 몇 술 들지도 않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대충 배 채웠으면 너희들은 서재로 좀 오너라. 이렇게 밥 먹다가는 모두 체증 걸리겠다.” 진 회장이 일어서자 자식들도 벌떡 일어섰다. 이거, 오늘 폭탄이 떨어질 게 틀림없다. # # # 진 회장은 서재에 모인 자식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내가 중대 발표를 할 생각이다. 모두 잘 듣고 불만이 있더라도 토 달지 마라. 이건 내가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론이니까 말이다.” 진서윤은 오빠들에게 긴장한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지만 어쩔 수 없이 자꾸만 마른침을 삼켰다. 드디어 보따리 하나 챙기는 날이다. 그 보따리에 순양유통이 들어있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먼저, 윤기야.” “네.” 진윤기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자 모두 의외라는 듯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예상을 깨고 막내가 한몫 챙기는 걸 경계하는 것이다. “이미 알겠지만 넌 올해부터 공식적으로 순양 의료원 이사장이며 순양인력개발원 원장이다. 법적인 절차는 이미 끝냈다. 언론 발표하면 곧바로 취임하도록 해라.” 다들 알고 있는 내용이라 안도했지만, 완전히 마음 놓지는 못했다. 이어질 말씀 중에 더는 나오지 않아야 한다. “의료원은 네 가족 먹고사는 데 지장 없을 만큼 수익이 나는 곳이다. 엉뚱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문제없을 것이야.” 모두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병원이 전부라는 선언인 셈이니까. “인력개발원은 각 계열사에서 부족하지 않을 만큼 돈을 줄 거니까 잘 운영하도록 해. 거기서 돈 벌 생각은 말아. 적자 나지 않을 만큼만 굴려.” 진윤기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머리만 끄덕였다. 머릿속에 병원이나 연수원이 들어올 만한 빈 공간이 없었다. 아버지가 준 선물보다 거대 미디어 회사라는, 아들이 준 숙제만 생각해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난 네게 더는 물려줄 생각이 없는데…. 어떠냐? 만족하냐?” 모두 진윤기의 입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부족하다고 말씀드리면 더 주실 겁니까?” 당돌한 질문에 모두 놀랐지만 진 회장만 코웃음 쳤다. “아니. 택도 없다.” “그럼 만족하냐고 묻지 않으셔야죠.” 진 회장은 막내아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언제 저렇게 당당해졌는지 기특하기까지 했다. “징징 대지 않는 걸 보니 불만은 있어도 욕심은 내지 않을 생각이구먼. 됐다. 넌 나 아니더라도 잘난 아들 둔 덕분에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살 거 아니냐? 이 중에서 네가 제일 낫다.” 막내인 진윤기 몫이 확실하게 정해지자 다시 긴장이 감돌았다. 이번에는 누구 차례일까? “백화점, 호텔, 콘도, 골프장은 순양유통으로 묶어서 완전히 계열분리 할 생각이다. 지배 지분 순환고리는 끊고 지분 주고받을 때 발생하는 가치 차이는 채권으로 전환해서 완전히 정리한다.” 진서윤은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걸 참아야 했다. 분명히 들었다. 순양유통이 모회사가 된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 “이건 서윤이, 네 몫이다.” “아버지. 고마워요.” 진서윤이 고개를 살짝 숙이자 진 회장은 손을 까닥거렸다. “마냥 고마워할 일은 아닐 수도 있다.” “네?” “유통으로 묶는 과정에 빚을 많이 졌어. 넌 빨리 돈 벌어서 순양그룹에 갚아야 한다. 계열분리 했으니 봐주는 거 없어.” 부채야 기업의 숙명 아닌가? 진서윤은 빚이 얼마 든 신경 쓰지도 않았다. 아무리 많다고 한들 이자 감당 못 하랴? “영기, 동기야.” “네. 아버님.” 두 아들의 대답에는 힘이 없었다. 방금 가문의 기둥뿌리 하나가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원금하고 이자는 확실히 챙겨. 여동생이라고 봐주고, 안면 부딪히는 임원들이 부탁한다고 편의 봐주다가는 돈 못 받는다. 받을 돈 못 받는 건 너희 책임이다. 명심해라.” 진서윤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심술 맞은 영감탱이. 끝까지 뭔가로 코 꿰놓는다. 게다가 오빠들이 채권자라니? 사채업자보다 더 심하게 꼬투리를 잡을 게 뻔하다. 이자가 조금이라도 밀리면 현찰 대신 주식 내놓으라고 난리 칠 놈들 아닌가? “학재야.” 진 회장이 슬쩍 턱짓하자 이학재는 서류 몇 장을 돌렸다. “각 계열사의 채권 현황입니다. 98년 기준입니다. 당장 이달 말 갚아야 할 이자를 계열사별로 정리했습니다.” 진서윤은 서류의 숫자를 보자 입이 떡 벌어졌다. 놀란 딸의 모습을 본 진 회장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돈 빨리 안 갚으면 네 오빠들이 백화점과 호텔에 빨간 딱지 붙여서 네 꺼 홀라당 뺏어갈지도 몰라. 장사 잘해서 빚쟁이는 얼씬도 못 하게 해.” 진 회장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서류만 뚫어지게 보는 진서윤을 무시하고 둘째 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동기야.” “네.” “넌 올해부터 부회장이다.” 감격스럽거나 고맙지는 않았다. 형인 진영기 부회장을 보면 안다. 호칭만 부회장일 뿐이다. “중공업, 건설, 화학 분야 계열사는 네가 맡아서 뜻대로 해보거라. 여태껏 그럭저럭 굴려 왔으니 어렵지 않을 게다.” 역시나! 요란하지만 아무 내용 없다. 진동기는 불만을 터트리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진 회장은 차남의 표정에서 속내를 읽고 피식 웃었다.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건 마지막 순서다. “그리고 영기야.” “네.” 진영기 부회장은 별 기대 없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영기 넌 지금처럼 전자 계열과 물산을 책임지는 거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 진영기는 별다른 표정 없이 머리만 끄덕였다. 진 회장은 두 아들을 보며 아직 남은 결정 사항을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 두 사람은 진정한 부회장 노릇 해야 할 게다. 앞으로 계열사 사장들은 내 얼굴 볼일 없어. 뭐든 너희들 전결로 진행해.” 모든 권한을 넘겼음에도 장남과 차남, 둘 다 표정이 밝지 않다. 대단한 것처럼 말해도 진영기 부회장에게는 어차피 자신이 ‘명목상’ 책임지고 있던 계열사가 전부다. 결정권에 좀 더 힘을 실어주겠다는 것 정도를 선심 쓰듯 던져준 것이다. 몇 개를 더 얹어줘도 시원찮을 판에 겨우 현상유지라니! 차남인 진동기 사장은 조바심만 커졌다. 중공업, 건설, 화학을 다 합쳐도 전자 계열 규모의 60% 정도다. 확정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것을 기대라도 할 텐데, 무 자르듯 잘라버렸으니 더 많을 것을 가질 기회조차 사라진 것 같다. 진 회장의 그룹 승계 계획은 두 아들의 불만만 커지게 만들었다. “노파심에서 말해둔다. 계열사 사장들이 너희를 못 미더워서 내게 찾아오는 일 없도록 해. 그런 일이 생기면 그 계열사는 아예 전문경영인 체제로 바꿔 버릴 테니까. 무슨 소린지 알아들었지?” 준거라도 언제든 뺏을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두 아들은 단 한 순간도 방심 못 하게 하는 아버지의 지독함에 이를 갈았다. 반대로 셋째인 진상기는 빨갛게 상기된 표정으로 모든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아직 진 회장 입에서 나오지 않은 계열사가 많다. 바로 금융 부분이다. 순양생명, 순양해상화재보험, 순양증권, 순양카드 그리고 작년에 출범한 순양자산운용까지. 순양그룹의 숨겨진 대들보이며 막강한 자금력으로 구원투수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또 하나의 주력이다. 이건 자신이 맡는 게 분명하다. 이정도면 형님들과 비교해도 꿀릴 게 없는 ‘공평한’ 분배다. “상기야.” “네.” “넌 학교법인과 복지문화 재단, 연구소 같은 비영리 법인 전부 관리해. 계열사 지분도 꽤 쥐고 있으니까 간수 잘하고. 참, 미술관은 남겨뒀다. 네 어미 취미생활은 하도록 놔둬야지. 미술품 보며 유럽 귀족 흉내 내는 거 말이다.” 이 무슨 황당한 소린가? 아예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 [131] 한 조각의 파이 2 진 회장은 한술 더 떴다. 마치 약 올리는 것처럼. “참! 프로구단도 네가 직접 챙기거라.” “아, 아버지.” “왜?” 매섭게 노려보는 진 회장을 보자 진상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불만이야? 잡다구리한 재단이나 던져줘서?” “아, 아닙니다.” 진상기는 큰형의 눈짓에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자신은 진영기 부회장과 한배를 타기로 일찌감치 결정하지 않았던가? 큰형이 자신을 재단 일이나 보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다. 큰형이 모두를 대신해서 조심스레 질문을 꺼냈다. “아버지. 그럼 금융 쪽은 누가…?” “일단은 내가 계속 보려고. 왜? 하루라도 빨리 날 뒷방 늙은이로 쫓아내고 싶냐?”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닙니다.” 진영기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뭐…. 그것도 쪼개서 나누고 싶었는데 지분 관계 정리하려면 엄청나게 복잡해서 시간이 필요하다는구나.” 진 회장이 변명처럼 그럴싸한 이유를 말했지만, 서재의 모든 이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룹의 금융계열 주인은 이 방에 없다. 밖에서 어른들에게 재롱이나 피우는 음흉한 막내 놈이 주인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올해부터 내가 쪼개준 대로 지분 정리 시작할 거다. 그거 다 끝나면 금융도 쪼갤 거야. 조바심 부리지 말고 기다려.” 과연 저 말이 사실일까? 자식들은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순양자산운용 정도는 집안 막내에게 줘도 괜찮다. 하지만 나머지는 안 된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다. 그 시간 안에 그룹의 돈줄이 엉뚱한 놈에게 흘러가는 걸 막아야 한다. 세 아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오늘 사장단과 임원들은 새해 인사 못 오게 했어. 그놈들, 지금쯤 너희들 집 앞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게다. 가서 용돈이나 좀 쥐여 주도록 해.” 다섯의 자식들이 줄지어 서재를 빠져나가고 이학재와 단둘만 남자 진 회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들은 줘도 불만이야.” “온전히 받은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그렇겠죠.” “앉아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면 안 되지. 이제 영역 표시를 확실히 해 뒀으니 욕심나면 뺏어야지.” 이학재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룹 쪼개는 건 원치 않으시군요.” “우리나라 기업은 뭉쳐야 겨우 버텨.” “네?” 갑자기 생뚱맞은 소리를 툭 던지는 진 회장이다. “하나하나 놓고 보면 별거 아냐. 순양전자만 보더라도 그래. 반도체, 백색가전, 휴대폰.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니까 버티면서 올라가는 거야. 반도체 아니었으면 가전 부분 문 닫았을 거야.” “중공업이 순양조선의 경쟁력을 키워준 것처럼요?” “그렇지. 생명 없었어 봐? 자금줄 막혀 문 닫았을 회사가 수두룩하잖아.” 그럼 딱 하나 정해서 전부 다 줘 버리지 왜 이런 게임이나 하십니까? 이학재는 이 질문을 수도 없이 던졌다. 단지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뿐. 좀 더 젊은 진양철 회장이었다면 이미 누군가를 낙점했을지도 모르지만, 노인이 되어버린 지금, 생각이 많아졌을 게다. 자식들 모두에게 순양그룹을 주고 싶겠지만 나누든, 몰아주든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생각이 많은 만큼 결정을 뒤로 미룬다. 그리고 오늘, 새로운 변수 하나가 등장했다. 바로 묵묵히 순양을 키우고 지켜온 가신들. 그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이미 얻은 것도 잃을지 모른다. * * * 가족들 모두 급히 진 회장의 저택을 떠나느라 부산을 떨었다. 며느리들과 손자들은 영문을 모른 채 쫓기듯 밖으로 나왔다. 각자 본관 현관 앞에 대기 중인 승용차에 올라탈 때 진영기는 동생을 불렀다. “윤기야. 나 좀 보자.” 한적한 장소로 옮기자 진영기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너 혹시 아버지와 미리 이야기한 거 있어?” “무슨 이야기 말씀입니까?” “금융 계열사 말이다.” “아뇨. 계열분리 이야기는 저도 오늘 처음입니다. 뭐…. 특별할 것도 아니지만요. 아, 누나는 좀 의외였어요.” “사실이야?” “형님. 말 돌리지 말고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거 혹시 도준이 몫으로 떼 놓은 거 아냐?” 진영기가 날카롭게 동생의 표정을 훑을 때 진윤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뭐?” “도준이가 어린 나이지만 이미 발군의 투자 감각을 보여줬지 않습니까? 순양의 금융을 맡기에는 이보다 더 적합한 사람 찾기 힘들 텐데요?” “야!” 진영기는 동생의 덤덤한 모습에 버럭 소리 질렀다. “지금 이게 통장 하나 물려주는 거야?” “통장이든, 금융사든 어차피 돈입니다. 크기의 차이가 적합성을 해치지는 않죠.” “이건 적합하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잖아. 순양생명이 쥐고 있는 계열사 지분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하는 소리냐?” “물산도 그 정도 쥐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순양정밀기계도 꽤 많은 그룹 주식을 쥐고 있고요. 어차피 지분을 따져가며 쪼갠 것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계열군으로 묶은 거 아닙니까?” 진영기 부회장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말대답하는 진윤기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분 많은 금융사가 굴러 들어오니 너도 순양그룹 한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거야? 지금까지 죽어지내더니 아들 내세워서 발톱을 드러내는 거냐?” 진윤기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 꺼 아닙니다. 전 병원과 연수원이 전부예요. 아버지 말씀 들으셨지….” “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넌 지금 이제 갓 스물 넘은 자식 놈과 널 따로 봐 달라고 하는 거야?” “봐 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형님. 아버지께서 금융을 제게 주신다고 했으면 전 양보합니다. 솔직히 관심도 없고요. 하지만 내 아들에게 물려주신다면 형님께 양보하라는 소리 못합니다. 부모가 돼서 변변한 밥그릇 하나 준 적 없습니다. 그런데 물려받은 밥그릇을 깰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여전히 차분한 동생을 보며 진영기도 숨을 가다듬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아버지가 앞으로 사시면 얼마나 사실 것 같아? 도준이가 이십 대 중반에 금융사 맡으면?” 솔직히 진윤기도 좋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아무리 똑똑한 아들이라도 연륜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순양그룹 계열 분리된 상태에서 도준이가 올라서면 아귀 같은 여의도 놈들이 작전 들어갈 거다.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거대 보험사를 서로 차지하려고 말이다. 넌 아들 지킬 자신 있어?” 진윤기는 물끄러미 큰형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 꼴이 참 우습지 않아요? 김칫국부터 마시는 꼬락서니잖아.” “윤기야!” 진윤기는 진영기의 외침을 무시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차피 좋은 소리는 나오지 않을 게 뻔하다. 새해 첫날부터 해답 없는 말싸움을 길게 하고 싶지 않았다. # # #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친척들처럼 우리 가족도 밖으로 나왔다. 차를 타려고 할 때 심각한 표정의 큰아버지가 아버지를 불렀고 우린 아버지를 기다렸다. 이때 현관 한쪽에 대기하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김 대리.” “아, 실장님.” 김윤석 대리는 반가운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몸은 어때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 “괜찮습니다. 근육이 다 빠져서 약골이 됐지만, 몸 관리 계속하니까 곧 예전처럼 될 겁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허벅지를 툭툭 치는 모습을 보니 애잔함이 밀려왔다. 아파도 쉴 수 없는, 움직일 기력만 있다면 일해야 하는 생활…. 잘 안다. “그런데 연락이라도 좀 하지 그랬어요? 이학재 실장 밑에 배치됐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께 들었잖아요.” “그게…. 실장님께는 절대 연락하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졌거든요.” 김 대리는 머리를 슬쩍 긁으며 말했다. 싹수를 가늠해 보겠다는 할아버지는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해버렸다. 이학재 실장이라니…? 처음에는 며칠이나 버틸 수나 있을까 걱정했는데 잘렸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밝은 모습을 보니 그럭저럭 버틸 만한 것 같다. “어때요? 할 만합니까?” “좋습니다.” 김 대리는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과장된 모습이 아니어서 보기 좋았다. “정점에 있는 분이 어떻게 사는지 조금 엿본 것 같습니다.” “그분은 어떻게 사는데요?” “제 눈에는 마술 같은 일을 한다고나 할까요?” “그래요?” “네. 회장님 지시 한 마디가 그룹 전체에 골고루 퍼지도록 하시는데… 굉장히 섬세하게 조율하십니다. 사장단이나 임원들을 살살 달래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고요.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말하는 김 대리의 얼굴엔 존경과 감탄이 내비쳤다. “많이 배우겠군요.” “아직 멀었습니다. 배우는 데도 깜냥이 돼야죠. 뭐가 뭔지 파악하는 것도 급급하다니까요.” “유심히 듣고 자세히 보면 언젠가는 보일 겁니다.” 단순한 격려의 말이 아니다. 경험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때 등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준아!” 돌아보니 상준 형이 손짓하고 있었다. “또 봅시다. 김 대리가 내게 돌아올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머리 숙여 인사하는 김 대리를 두고 승용차 쪽으로 달려갔다. * * * 새해 첫날부터 진영기, 진동기 형제의 집은 사장단 회의를 방불케 하는 신년회가 치러졌다. 이제 회장의 자식이 아닌 명실상부한 부회장이며 해당 계열사 사장의 인사권을 쥔 권력자가 돼버렸다. 진서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집 앞에서 대기하는 사장들과 임원들을 보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들의 태도와 눈빛은 바로 어제와 확연히 달랐다. 회장님의 딸이란 혈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재 서류를 내밀던 거만한 자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행여 발소리가 크게 울릴까 봐 뒤꿈치마저 들고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 앉으세요. 새해 인사는 생략하기로 하죠. 그보다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 하니까요.” 진서윤은 가장 먼저 부채 현황부터 쫙 돌렸다. “그게 우리의 빚입니다. 당장 이달부터 본가에 엄청난 이자를 지급해야 해요. 모두 머리 맞대고 자금 운용 계획을 세우세요.” 숫자를 보자마자 모두 미간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IMF의 직격탄을 맞은 사업군인데, 앞으로 상당한 자금 압박에 시달릴 것을 직감한 듯 보였다. 진서윤은 그들의 난감한 표정을 못 본 체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첫 번째 인사부터 발표합니다. 서초백화점 사장님.” “네.” “명동백화점 사장으로 보직 변경합니다. 그리고 명동백화점 사장님은 순양유통 대표이사로 임명합니다. 올해 출범할 대형 할인점 체인 사업 성공하는데 전력을 기울이세요.” “네. 알겠습니다.” 모기업이 될 순양유통에 최측근을 앉혀야 하는 건 자명한 일 아닌가? 순양유통 사장 역시 이미 예견한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순양유통 사장님은 서초백화점 사장으로 임명합니다. 업무인수인계 차질 없도록 신경 쓰세요.” “네.” 대가리들 배치만 해 놓으면 손발로 부릴 사람들은 저절로 각자의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나이 들고 닳고 닳은 사장들이 꼼짝을 못하는 걸 보니 아버지가 단단히 일러둔 게 틀림없다. 오늘 아버지의 발표는 자식들을 떠보거나 시험하는 것이 아닌 게 확실하다. 정말 그룹을 쪼개버렸다는 확신이 섰다. 그렇다면 그룹의 금융 부분은 정말 새파란 진도준이 차지하는 걸까? 진서윤은 조카에게 한 약속이 떠올랐다. 공평하게 절반이라……. ======================================== [132] 한 조각의 파이 3 집이 좁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의료재단 이사진들이 새로운 이사장에게 새해 인사하러 온 건 이해한다. 아, 지방 의료원 다섯 곳의 원장들까지도 이해한다. 그런데 과장들은 좀 심했다. 지방에서 상경한 과장들까지 합치니 백여 명에 육박한다. 진료과목이 서른 개가 넘으니 병원의 중요한 과장들은 전부 달려왔다고 봐야 한다. 출세에 관심 없는 의사들만 오지 않았다. 아버지도 당황한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좀 있으면 영화계 사람들도 올 텐데… 그럼 아수라장이 될 게 뻔하다. 그렇다고 문전 박대할 수는 없는 일, 나는 재빨리 고모에게 전화했다. “고모. 강남 호텔 연회장 하나 급히 비워줄 수 없어요? 백 명 정도…. 약 삼십 분 뒤에 도착하고요. 식사와 술도 준비해야 하는데….” - 누구 부탁인데 안 되겠어? 염려 마. 세팅해 놓을 테니까. 고모의 경쾌한 콧소리가 울렸다. “아버지. 이사진들과 원장들은 집 안으로 들이셔서 인사하세요. 의사들은 호텔에서 식사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다들 동문이거나 선후배 사이니까 술이라도 한잔하도록요.” “그, 그래. 잘했다.” 이럴 때 또 써먹는다. 과거에 얼마나 많은 의전을 치렀는가?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도 매끄럽게 진행해야 했다. 그때의 순발력이 아직 죽지 않았다. 의사들이 싹 빠져나가자 한숨 돌린 아버지는 손님들을 접대했다. 내가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도 잊지 않으셨다. 재빨리 원장들을 불러 VIP 환자와 병원당 딱 20개만 있는 VVIP 병실의 비밀 환자를 확인했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빨리 찾아가 직접 새해 인사를 드려야 할 사람들이 아닌가? 아플 때 찾아와 안부 챙기는 사람은 항상 고마운 법이다. 뒤이어 찾아온 영화계 인사들 때문에 새해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다. 재단 이사들과 병원장들은 스크린에서나 봤던 스타들에게 명함을 돌리며 안면을 트자 횡재한 표정으로 변했고, 조금이라도 몸이 아프면 언제든 찾아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오후까지 한바탕 손님을 치르자 우리 가족만 남았다. 술기운이 조금 남아있는 아버지는 조용히 나를 불러 정원으로 나갔다. “찬 바람 쐬니 술이 확 깨는구나.” “술기운이 다 날아가야 할 만큼 중요한 말씀 하시려고요?” 아버지는 나를 쓱 보시더니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자식이, 눈치 하나는 정말….” 아버지는 오늘 서재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떠오른 사람은 고모였다. 약속한 대로 지분의 절반을 내놓을까? 그리고 내 관심을 확 끄는 하나의 단어. “금융 부분요?” “그래. 네 생각은 어떠냐? 할아버지께서 네게 금융 부분을 줄 거라고 생각해?” “네.” 자신 있게 대답했다. 사족을 덧붙여서. “큰아버지들의 방해만 없다면 자연스럽게 넘기실 겁니다. 하지만 계열사 지분 관계 정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죠? 그 안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는 일 아니겠어요?” “무슨 뜻이냐?” “고모만 확실하게 챙긴 겁니다. 큰아버지 두 분은 인사권만 확보했고요. 하지만 할아버지의 변덕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니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차디찬 겨울 공기를 들이켜며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뭐든 혼자 하려 하지 말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이야기해라. 여차하면 내가 형님들 멱살이라도 잡으마.” “큰아버지들께서 아버지 멱살 잡을 일이 먼저 생길 거 같은데요? 하하.” 그전에 고모부터 시작하고……. * * * 새해 둘째 날, 최창제 시장은 서재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조용히 문들 두드렸다. 응답이 없었지만,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이고. 어서 오시게, 최 시장. 번거롭게 새해 인사까지 올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허허.” 잔뜩 긴장한 최 시장은 자신을 향해 환히 웃으며 내미는 진 회장의 거친 손을 얼떨결에 잡았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호칭, 최 서방이 아닌 최 시장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일찍 왔어야 했는데 제가 많이 늦었습니다.” “공무 바쁘신 분인데 뭘 그리 신경 쓰나? 괜찮네.” 최 시장은 진 회장의 말투에서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깨달았다. 자신은 순양의 사위가 아니라 서울시장일 뿐이다. 최 시장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서재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장인어른.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잠시 권력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진 회장은 납작 엎드린 최 시장을 물끄러미 보다 낮지만 단호한 한마디만 던졌다. “끝났어. 그만 일어나게.” 끝났어…! 진 회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돌이킬 수 없다. 이건 불변이다. 최 시장은 계속 엎드린 채 굳어버렸다. 그는 진 회장의 사위라는 명함은 없어졌지만, 정치인 최창제의 명함은 버릴 수가 없었다. 이 명함을 유지하려면 진 회장과 깔끔한 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저 노인이 마음먹으면 자신의 인생이 지옥으로 변해버린다. “용서해주십시오!” 기회를 달라는 소리는 소용없지만, 용서를 바라는 마음은 꼭 전달해야 했다. 최 시장은 진도준이 알려준 대로 들고 온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이것으로 용서받아야 한다. “대현 그룹과 약속했던 뉴타운 계획은 백지화했습니다. 만약 장인어른께서 기회를 주시면 새로운 뉴타운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최 시장은 진 회장이 원하는 장소와 규모로 만들어 상납하겠다는 뜻이 제대로 전달되기를 빌었다. “그만 일어서라니까.” 최 시장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의자에 앉았다. “할 말이 뭔가? 이 늙은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본론만 짧게 말해.” “시키는 대로 뭐든 하겠습니다.” “그런다고 바뀌는 건 없을 텐데?” “시키는 대로 뭐든 하겠습니다.” “이혼은 진행할 걸세. 서윤이가 마지못해 내 뜻을 따르는 게 아냐. 그 애가 결정한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자네는 우리 집안에 발붙일 수 없다는 뜻이야. “시키는 대로 뭐든 하겠습니다.” “허허, 그 사람 참….” 고개를 숙인 채 미친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최 시장을 보며 진 회장은 피식 웃었다. 근본이 자잘하다. 순양의 힘이 아무리 크다 해도 이럴 때일수록 사내답게 독기 품고 덤비는 놈이 큰 과일을 따 먹는다. 수박 한 덩이가 딸기 몇 개보다 낫지 않은가? 진 회장은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이자 동시에 경고의 말을 남겼다. “자네가 20년 넘게 이 집안사람으로 지내며 보고 들은 거 전부 잊게. 철저히 남이 되는 거야. 그러면 나도 자네를 남으로 대할 걸세.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는가?” 최 시장에게는 완전히 남이라는 말이 이처럼 반갑게 들릴 수 없었다. 섭섭함도, 분노도, 기대도 없는 게 남이다. 자신이 입만 다물면 최소한 앞길을 가로막지는 않겠다는 뜻 아닌가? 괜히 남의 인생에 끼어드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아직 서울시장이다. 임기도 많이 남았다. 그 안에 정치적 기반을 굳건히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모두 잊겠습니다.” “잘 알아들으니 다행이네. 그만 가시게. 이제 우리는 다시 볼 일 없을 걸세.” “장인… 아니, 회장님. 전 아직 서울시장입니다. 서울시장으로서 회장님과 만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그리 시건방지게 하시는가? 청와대가 불러도 당선 직후 딱 한 번 얼굴 비추는 게 전부야. 내가 그리 한가해 보이나? 서울시장 따위를 직접 만나게? 일 이야기 하고 싶으면 어디를 접촉해야 하는지 잘 알 텐데?” 사안 하나하나 다르다. 주로 순양건설 기획실이나 그룹 전략실 본부장급을 만날 수 있다. 서울시장은 순양그룹 전무나 부사장이 한계다. “아, 죄송합니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나가보게.” 최 시장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지막 부탁이다. “그리고…. 혹시 옛정을 생각해주신다면….” “남이라는 말 잊었나? 우리 사이에 과거는 없네.” 차디차게 말을 끊어버리는 진 회장을 보자 마지막 한 가닥의 기대도 사라졌다. 집안의 대들보인 법무법인은 이제 문 닫아야 한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풍족한 수입원 하나가 사라진다. 집안 전체가 매달렸던 곳이 무너지면 자신만이 유일한 희망이요 등대다. 집안 전체를 먹여 살리려면 참 많은 일을 벌여야 하고 해야 한다. 이미 풍요로운 생활에 익숙한 집안사람들. 그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하게 하려면 정말 빡세게 돈을 벌어야 한다. * * * “아버지께 이야기 들었어요. 축하해요, 고모. 순양백화점 그룹의 회장님이 되셨네요. 하하.” “축하합니다. 진 사장님. 아니, 이젠 회장님으로 불러야 하나요?” 고모는 환히 웃으며 나와 오세현 대표를 반겼다. 이제 고모부의 사정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지 다시 호텔 생활을 시작했다. 여전히 화려한 여인이다. “어휴, 회장이라뇨? 그런 말씀 마세요, 부담스럽습니다. 아무튼 고마워요, 다 오 대표님 덕분이죠.” “무슨 말씀을요? 제가 한 게 뭐 있다고….” “아니에요. 우리 도준이, 오 대표님께 배워서 이렇게 훌륭하게 컸잖아요. 전 도준이만 믿고 있어요.” 내 엉덩이를 툭툭 건드리며 널찍한 소파에 자리 잡았다. 중앙 상석에 앉은 자세가 이미 달라졌다. 한결 더 거만하고 도도했다. “제가 꼭 뵙자고 한 건. 함께 일 좀 하자는 제안 드리려고요. 꼭 좀 함께했으면 합니다.” 오세현은 내 눈과 마주친 후 머리를 끄덕였다. “순양백화점 그룹과 함께 일하는 건 제게도 큰 기회죠.” 고모는 두툼한 서류철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한번 봐 주세요. 계열 분리하면서 우리 백화점 그룹이 순양그룹에 갚아야 할 빚이에요. 우리 임원들은 대형할인점 체인이 영업이익을 낼 때까지 감당하기 버겁다는 의견을 내놓았어요.” 재빨리 서류를 낚아챈 오세현은 한참을 들여다본 뒤 긴 한숨부터 쉰다. “체인점 부지 확보와 건설비용이 만만치 않네요. 호텔과 백화점 예상 매출 목표는 좀 과하고요.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이 정도 매출이 나오기를 바란다는 건 좀….” 위에서 찍어 누르니 아랫사람들은 과도한 숫자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백화점, 호텔이 매출을 내지 못하면 빚은 더 늘어나고 이자는 감당할 수 없다. 고모는 오세현의 부정적인 평가는 이미 예상한 듯 표정이 변하지는 않았다. “내년까지 할인점 네 곳 오픈은 무리수 아닐까요? 자금 부담만 가중될 텐데.” “제가 맡은 뒤 벌이는 첫 사업이에요. 대형마트 체인 사업을 연기할 수는 없죠. 이건 그룹 내에서의 능력 문제니까요. 연기하거나 포기한다는 말이 조금이라도 나오면 계열 분리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될 겁니다. 안 돼요.” 오세현과 고모가 현실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난 고모의 본심을 발견했다. 고모는 채권자를 바꾸고 싶은 것이다. 순양그룹 벽돌 한 장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장남과 자신만이 회장 그릇이라 자부하는 둘째 오빠는 호시탐탐 여동생의 몫을 다시 뺏어가려고 발톱 드러낸다. 고모는 발톱을 피해 제삼자인 미라클을 원한다. 그리고 조심스레 본심을 슬쩍 드러냈다. “그래서 제가 오 대표님께 제안 드리려고 하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대형할인점 체인 공사…. 대아건설이 좀 맡아 주면 안 될까요?” 오, 이런 아이디어까지 짜내다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확실한 영역을 굳히려는 각오가 엿보인다. ======================================== [133] 세기말의 마지막 발악 1 오세현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미 부지 매입과 매장 건설비용을 확인했다. 수익률을 계산하려면 건설사 임직원들 손에 맡겨야 한다. “맡는 거야 뭐 어렵겠습니까? 오히려 머리 숙여 감사드려도 모자라죠. 하지만 그냥 주시는 건 아닐 것 같고.” 오세현은 날카롭게 고모의 얼굴을 살폈다. 당당하지 못한 표정을 확인한 그는 서서히 자세가 변해갔다. 이 자리에서 누가 우위에 서 있는지 보여주려는 모양이다. “혹시 모르실지도 몰라 말씀드리는데 그 비용, 후한 편입니다. 계열 분리 전에 설정한 금액이라…. 일종의 일감 몰아주기, 내부거래죠.” “그러니까 더 수상한데요? 이 좋은 걸 왜…?” 모르는척하며 계속 따져 묻는다. 고모 입에서 듣고 싶은 단어가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숨통 좀 틔워 주세요. 자금 압박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 방법밖에 없어요.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외상으로 하자, 이 말씀이군요.” 결국, 부탁이라는 말을 끝까지 듣고야 만다. “영업 개시일부터 이자까지 포함해서 결제할게요. 분할로….” 고모는 되지도 않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계약 끝난 상태 아닙니까? 순양건설과?” “그건 제가 처리할 수 있어요. 돈으로 족쇄 채워 놨으면서 계약까지 묶어둔 건 항의할 생각이니까요. 게다가 내부거래용 계약이니 문제없어요.” 나라면 절대 신규 사업을 벌이지 않는다. 타이밍이 절묘하다. 대형 마트가 자리 잡고 겨우 본전치기라도 할 때쯤이면 또 하나의 위기가 닥치니까 말이다. 경기가 조금 되살아날 기미가 보이니 고모의 머리에는 지금 장밋빛 미래가 그려질 것이다. 몇 년 후를 아는 건 나뿐이다. “어차피 결정 요인은 하나죠. 외상 거래니만큼 담보를 얼마나 받아둬야 하느냐? 아닙니까?” 고모의 얼굴이 좋지 않다. “이런, 전 오 대표님과의 신뢰 관계를 믿었는데… 담보라니 좀 당황스럽군요.” “친구와 은행, 동시에 돈을 빌리면 보통 은행 돈부터 갚습니다. 신뢰란 그런 것이죠. 내게 유리한 쪽으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내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면 배신당했다고 화를 내기도 하죠. 신뢰요? 돈 앞에서 쉽게 무너집니다.” 단호한 오세현 앞에서 고모는 할 말을 잃었다. “삼촌. 빨리 일 시작하죠? 이 서류, 검토하는 게 어떨까요?” 내 눈짓에 오세현은 서류를 챙겼다. “서로 섭섭하지 않을 만큼 적정선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럼….” 뒷일은 내게 맡겼다. 오세현이 호텔 방을 나가자마자 고모는 울화통이 터져버렸다. “저 작자, 도대체 뭐야? 내가 밀어준다는데 저따위 태도로 나와!” “고모 약점이 뭔지 아니까요.” “뭐라고?” “경리 장부만 흘낏 봐도 회사 사정 싹 꿰뚫는 분입니다. 고모가 할아버지께 백화점 지분 전부 받기도 전에 다시 뺏긴다는 걸 알아채신 겁니다. 아쉬울 게 없으니 저렇게 뻣뻣하게 나오는 거죠.” 고모는 소파 손잡이를 꽉 잡았다. “그렇게 절망적이니?” “백화점이나 유통 자금 담당 임원은 알 겁니다. 단지 어려워서 솔직한 말을 못할 뿐이죠.” “망할 영감탱이….” 할아버지를 욕하는 것이 거슬렸지만, 이해는 한다. 독립하라며 한 재산 뚝 떼어줬는데 포장지를 열어보니 빚더미였으니 말이다. “고모. 아직 모르겠어요?” “뭘?” 신경질적인 고모를 달래듯 차분하게 말했다. “이건 할아버지의 시험이에요. 이걸 무사히 넘기면 백화점 그룹을 그날로 고모 손에 들어올 겁니다. 고모가 맡은 사업의 본질은 유통이니 경기에 민감하고 자금 회전이 관건 아닙니까? 그걸 테스트하는 게 틀림없어요.” 눈치 빠른 고모는 내 말뜻을 정확히 이해했다. 한동안 고민하더니 내 의견을 물었다. 난 고모의 욕심을 확인하고 싶었다. “저라면 대형 마트 계획을 좀 미루고….” “아까도 말했잖아. 그건 안 돼.” “그럼 과감한 정리를 시작해야죠.” “정리?” “네. 골프장 몇 개 처분하고, 수익 낮은 콘도도 정리합니다. 백화점과 호텔은 상징이니까 그대로 놔두고요.” 내가 말하는 동안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걸 보니 전혀 정리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긴, 살림살이 쪼그라들면 모양새가 확 빠지니 꺼리는 건 당연하다. “당분간 자산 정리하는 건 안 돼. 그거 역시 능력 부족으로 비칠 거야.” 아니다. 아주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경영이다. 현금이 쪼들릴 때는 뭐라도 팔아서 자금 구하는 게 우선이다. 할아버지도 높게 평가할 사항이다. “고모는 미라클에서 돈을 끌어오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게 가장 간단해. Simple is best. 알지?” 이 상황에 끌어다 쓰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고모 생각은 변함없었다. “도준아. 오 대표에게 말 좀 잘해줘. 내가 잘되는 게 너도 잘되는 거잖아. 우린 한배를 탄 동업자 아니니.” 고모의 욕심은 확인했고, 이제 믿음을 확인할 때다. 고맙게도 먼저 언급까지 했으니 말이다. “고모.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지난번 약속 아직 유효합니까? 한배를 탔다는 게 그 뜻인가요?” 당황한 고모가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이럴 줄 알았다. “괜찮아요. 이해해요.” 내가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자 고모는 더 당황했다. “이해? 뭘 이해해?” “고모는 늦어도 올해 안으로 계열 분리하고 실질적인 주인이 되겠지만 전 불확실하니까요. 금융 계열을 제가 받는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다시 말해 고모는 현금, 전 어음이니까요.” “그, 그렇지? 아, 오해는 마. 싫다는 건 아냐. 네 말처럼 우리 둘의 상속이 깔끔하게 끝났을 때는 당연히 손을 잡는 거야. 단지 아직 확정된 건 없어서 섣불리 확답하기가 좀 그래.” 고모의 마음은 충분히 알았다. 어차피 진심으로 나와 손잡을 생각은 없었다. 날 이용할 생각이 전부였을 것이다. 나야 이 여인의 욕심에 불만 지르면 된다. 백화점 계열만으로 만족할 여인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고모, 잘 생각하세요.” “뭘?” “만약 제가 순양의 금융 계열을 가진다면 제 마음도 변할지 몰라요. 순양생명만 하더라도 고모가 가진 전부보다 더 가치 있으니까요. 그때 제 손은 큰아버지에게 향할 수도 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내 말에 고모는 또 당황했지만 무시하고 일어섰다. “아무튼, 오 대표에게는 부탁해볼게요. 이건 별개의 문제니까요.” * * * 고모의 제안을 받고 난 뒤 한 달이 지나서야 윤곽이 나왔다. 회계사들이 모여 순양유통 계열이 짊어진 빚과 자금 흐름을 검토한 내용을 정리한 내용만 한 뭉치였다. “대형 마트 공사는 지금 HW 건설에서 아직 분석 중이야. 소요 자금은 고사하고 우리 손이 부족해서 못한다고 우는 소리부터 나오더라. DMC에 모든 리소스를 쏟아부어야 할 판이니까.” “하도급 회사 알아보죠.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일손 부족해서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보다 고모가 필요한 자금은 어느 정도예요?” 오세현은 머리부터 흔들었다. “지금 당장 사천억은 수혈해야 해. 안 그러면 이자 감당이 안 된다고. 백화점, 호텔이 버는 돈 전부 이자로 나갈 판이야. 한 달 매출만 꼬꾸라져도 연체가 시작될걸?” “할아버지가 좀 심했네요.” “더 확인할 것도 없어. 이건 유산 상속이 아니라 빚 상속이야. 계열사 빚을 잔뜩 얹어서 보냈어.” “하지만 제게는 기회죠.” “왜? 백화점 삼키려고?” “돈 주고도 못 사는 게 순양그룹 지배 지분입니다. 자기들 울타리 안에서만 돌리는 주식 아닙니까?” “네가 순양에 집착만 하지 않는다면 그 돈으로 더 좋은 회사를…. 아니다. 관두자. 원래 꿈이라는 건 합리적인 사고로 계산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지금은 비합리적이지만 순양그룹 총수 자리에 앉으면 모든 게 합리적으로 바뀝니다. 그 자리는 돈의 상징이 아니라 모든 권력의 상징이니까요.” 빌 게이츠는 국가 권력기관의 감시를 받지만 진양철 회장은 국가 권력기관을 줄 세운다. 욕망을 충족하기에는 우리 할아버지 자리가 더 적합하다. “그 권력을 쥐고 뭘 하고 싶은데?” “그건 내 손에 쥔 다음에 생각하려고요. 일단 사천억 지원하죠.” 할아버지께 10억 달러를 주고 바꾼 원화 1조 6천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백화점 그룹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지탱하는 건 전혀 문제없는 돈이다. “담보는 당연히 주식이겠지?” “그렇죠. 모회사인 순양유통의 주식을 받아야죠. 주식 가치부터 계산해야겠지만 우리 고모, 머리 아플 겁니다. 흐흐.” 즐거운 웃음이 터져 나올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손님 오셨는데요?” 비서가 전해준 명함을 본 오세현의 눈이 커졌다. “어? 이 친구는…? 들어오라고 해요.” 자리를 비켜주려 슬쩍 일어나려 하자 오세현이 손짓했다. “괜찮아. 그냥 있어. 인사 나눠도 될 만한 사람이니까.” 문을 연고 들어온 사내는 오세현을 향해 머리를 꾸벅 숙였다.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이야… 이게 누구야? 이상수! 요즘 잘나가는 벤처 사업가께서 여긴 어쩐 일로….” 잘나가는 40대 초반의 벤처 사업가치고는 행색이 추레했다. 셔츠 옷깃과 소매 끝은 때가 새까맣게 끼었고 부스스한 머리, 까칠한 수염까지. 흡사 도망자 같은 모습이다. 악수하던 오세현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근데 너, 꼴이 왜 이래? 사업 잘 안되냐?” “아닙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옷 갈아입고 온다는 걸 깜박했어요. 죄송합니다.” “아냐. 바쁘면 좋지 뭐. 그것도 너무 잘나가서 바쁜 건데….” 이상수의 눈길이 나를 향했다. “아, 인사해. 나랑 같이 일하는 친구야. 아주 대단한 인재라고나 할까? 하하.” 이상수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도준입니다.”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혹시 순양그룹…?” “아, 네.” 어떻게 알았을까? 오세현도 조금 놀라는 기색인 걸 보니 나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군요. 아직 대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이 친구는 날라리 학생이야. 학교보다는 여기서 나랑 죽 때리는 시간이 더 많아. 하하.” 오세현이 웃으며 말했지만, 그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저도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순양그룹에서 걸출한 인재가 나타났다고요.” “소문이 돌아?” 나도 오세현도 깜짝 놀랐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미 내가 전면에 나선 적이 몇 번 있으니 소문이 돌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네. 심지어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실질 소유주가 순양그룹이고 손자인 진도준 씨가 관리한다는 말까지 은밀하게 돌아다닙니다.” 순양자동차 인수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묵직한 계열사를 쉽게 넘길 분이 아니라는 건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헛소문이야. 나야 그런 소문 돌면 나쁠 것 없지만….” 고개를 끄덕인 이상수가 명함을 꺼냈다.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 대표이사 이상수.」 아, 바로 그 사람이다. 골드뱅크와 더불어 한국 벤처 사업의 현실을 보여준 산증인. 아니 미래의 산증인이 될 사람. ‘광고를 보면 현금을 준다.’는 아이디어로 1990년대 후반 벤처기업의 대표 주자로 각광받았던 골드뱅크가 작년 10월 코스닥에서 최초의 벤처 바람을 일으켰다면 뉴 데이터는 가장 강력한 태풍을 만든 기업이다. 골드뱅크는 현재 액면가 500원짜리가 만 원이 넘는 거래가로 치솟았다. 묻지마 투자의 장본인이다. 주가 상승으로 떼돈을 거머쥔 골드뱅크는 지금 신용금고, 프로농구단 등을 인수하겠다며 어슬렁거린다. 어차피 내년엔 쪽박 차겠지만. 이상수는 골드뱅크보다 더 기대받는 기업의 대표다. 그런 그가 왜 이리 초라한 몰골로 나타났을까? ======================================== [134] 세기말의 마지막 발악 2 “자, 서로 인사했으니 앉자. 넌 커피라도 좀 마실래? 아님 국산차?” “물이나 좀 주십시오. 목이 타네요.” 이상수는 꽉 조인 넥타이를 풀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눈치를 보니 일어나야겠다. 아무래도 가벼운 이야기나 하려고 온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전 이만….” “도준아. 잠깐.” 오세현은 자리를 피하려는 나를 급히 막으며 이상수를 향해 물었다. “상수야. 너 개인적인 이야기 하러 온 거냐? 아니면 회사 일이냐?” “네? 아, 겸사겸사….” “정확히 말해. 갑자기 연락도 없이 사무실로 달려온 거 보면 급한 일 같은데, 아냐?” “그런데 왜 그걸 물으시는지…?” “일 이야기면 이 친구도 함께 있어야 하니까 묻는 거다.” 이상수는 이채를 띠며 조금 주저하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일 이야기입니다. 다만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되는….” “그거라면 염려 말아. 나보다 더 입 무겁다. 도준이, 넌 앉아.” 다시 자리에 앉으며 이상수를 유심히 살폈다. 94년, 팩스기기 없이 PC를 통해 팩스를 송부할 수 있는 통신소프트웨어와 PC 통신 에뮬레이터를 내놓은 이후 엄청난 투자유치에 성공했고 곧 상장할 회사의 사장이다. 그런데 여의도에서 최고로 주목받으며, 곧 돈방석에 앉을 벤처 사업가가 급히 달려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 한다. 무슨 일일까? “사실 우리 회사가 여름쯤에 상장할 계획입니다.” “오! 축하해. 이젠 돈방석에 앉는 일만 남았구만. 아쉽네. 나도 돈 좀 태울걸.” 오세현이 그의 등을 두드리며 축하하자 이상수는 씁쓸한 표정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배님은 투자 거절하셨으면서. 흐흐.” “서울대와 카이스트 출신들이 모여 만든 회사가 투자자 걱정이나 했겠어? 돈 보따리 싸 들고 온 사람들 줄 세워놓고 골라가며 받았을 거 아냐?” 이상수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슬쩍 긁었다. 어차피 이 바닥도 그들만의 리그가 벌어지는 곳이다. 비주류가 돈 자랑하며 투자한답시고 깝죽대다가는 비웃음만 산다. “사실 난 투자하고 싶었지만, 이놈이 말려서 관뒀어.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미라클은 초기 온라인게임 회사 몇 군데만 하고 벤처 기업 투자는 아예 없어.” 이상수는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왜 벤처를 멀리하셨죠?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어차피 벤처는 중소기업 아닙니까? 미라클 정도의 규모가 푼돈 좀 벌겠다고 그 바닥에 들어가는 건 민폐죠. 아진그룹과 대아건설을 인수한 미라클입니다. 상도의는 지켜야죠.” 좀 거만하게 말했다. 사실 난 이 사람이 싫다. 좋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회사를 키워나갔다면 훌륭한 기업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일확천금에 눈이 멀어 상장이 뭐니 하다 쪽박 차지 않았는가? 그 때문에 피해 본 일반 개미 투자자도 수십만 명이다.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이 말이다. “그런가요? 하지만 순양전자는 우리에게 러브콜을 했습니다만.” 내 말투가 기분 좀 나빴나 보다. 샐쭉한 표정으로 즉시 되받아친다. “거봐. 우리 미라클은 순양그룹과 아무 연관이 없다니까!” 싸늘한 느낌을 감지한 오세현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자, 투자자 넘쳐나고 곧 상장하고. 좋은 일만 줄줄이 기다리는데, 우리 후배 고민이 뭘까?” “사실 좀 두렵습니다.” 의외의 말에 우리 둘은 깜짝 놀랐다. 잔칫집 분위기일 텐데 두렵다니? “우리 회사는 아직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유료화 모델을 모색 중이고 그림도 어느 정도 나올 것 같고….” “벤처 상장이야 가능성이 핵심이잖아. 적자 상태에서 상장하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한두 곳도 아니잖아.” 사실이다. 쥐꼬리만큼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기업들이 작년 말부터 줄줄이 상장하고 있다. 게다가 주가는 열 배 스무 배 뛰는 건 기본이다. “우린 그런 기업들과 좀 다릅니다. 반짝하고 사라질 수준은 아니라고 자부합니다.” 이상수의 빛나는 눈을 보자 뭔가 이상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닌가? “사실 전 흑자 전환 이후 상장을 하고 싶은데 투자자들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상장하라고 성화가 이만저만 아니고요.” 이런 속사정이 있었나? 떠밀린 상장이란 말인가? “그럼 버텨. 너 후배 둘과 창업했지? 아직 경영권 지분 유지하는 거 아냐?” “그게….” “뭐야? 벌써?” 정말 상장이 멀지 않았나 보다. 창업자들의 지분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걸 보면 말이다. “제가 지금 25%를 갖고 있고 함께 시작했던 후배 둘은 이미 엑시트했어요.” “뭐? 걔들이 핵심 개발자 아냐? 그 애들이 빠지면 어떡해?” “투자자들에게 주식만 넘기고 회사에 남아 있어요. 개발은 문제없습니다.” “그럼 투자자들 설득해. 더 기다려 달라고. 그럼 더 큰 이익을 볼 거라고….” “요지부동이에요. 늦어도 8월엔 상장 추진하겠답니다.” 이상수는 오세현을 흘깃 바라봤다. 눈치 빠른 오세현은 이걸 놓치지 않았다. “뭐야? 진짜 속사정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정말 이런 경우도 있습니까? 창업자가 아직 멀었다고 하는데 투자자들이 나서서….” “많아.” 오세현은 딱 잘라 말했다. “지금 시장이 불붙었는데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거야. 네 회사 정도면 빗맞아도 열 배야. 기업의 미래? 그딴 거 신경 쓰는 투자자가 어디 있어? 상장 미뤘다가 시장 죽어버리면? 나라도 상장하자고 졸랐을걸?” “조르는 게 아니라 협박 수준인데요?” “뭐?” “자꾸 반대하면 절 탈탈 털겠답니다. 먼지 하나라도 나오면 옥살이시키겠다고 윽박지르면서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원인은 하나뿐이다. “혹시 조폭 자금 받으셨습니까?” 내가 조심스레 묻자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천만에요.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투자자를 가려서 받았습니다.” “먼지는 좀 있으시고요?” “털면 나오죠. 초창기에 투자금 받아서 좀 흥청망청했습니다.” “그거야 안 그런 사람이 없으니까….”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밤잠 설쳐가며 일했는데 뭉칫돈이 들어온다. 당연히 보상심리가 작동해서 죄의식도 못 느끼고 돈을 뿌린다. 벤처 시장의 ABC 아닌가? “협박까지 할 정도의 투자자라…. 이거 안 좋은데….” 오세현이 미간을 찌푸리자 이상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감 잡히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선배님은 이 바닥 전설 아닙니까? 웬만한 일은 다 겪으셨을 텐데….” “대단한 놈들이 붙었어. 대표이사 협박까지 서슴지 않을 놈이라면 초단기 자본이 들어온다는 징조야. 네 회사 상장하면 곧바로 작전 세력이 들러붙는다. 확실해.” 두 사람의 대화를 듣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우리나라 주식 시장의 깨지지 않는, 반년 만에 600배를 기록한 신화,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의 비밀을 알아버렸다. 내년 4월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다. 정권을 뺏긴 지금의 야당이 이를 갈며 반격을 노리고, 정권 후반기를 안정적으로 끌고 가려는 여당도 사활을 걸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피 터지는 싸움이 될 것이다. 치열한 전투는 든든한 총알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법. 올해의 코스닥 과열은 바로 이들의 부추김이 큰 몫을 차지한 게 틀림없다. “넌 이미 호랑이 등에 올랐다고 봐야 해. 솔직히 말해봐. 회사 돈 얼마나 썼어?” 이상수는 조금 주저하더니 머리를 숙였다. “십억 좀 넘습니다.” “발도 못 빼겠구먼. 고소하면 실형이야.” 이상수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순서만 변하는 거야. 그냥 편하게 생각해. 상장하면 또 자금이 들어오잖아. 그 돈으로 고급 인력 잔뜩 영입해서 정상적인 기업으로 키우라고. 네 사업 아이템이 거품은 아니잖아? 열심히 해서 흑자로 만들면 되지 않겠어?” “작전 세력 붙었다면서요? 그런데도 상장하라고요?” “주가 폭등했다고 팔고 손 털 건 아니잖아? 넌 그냥 사업에만 매진하면 돼.” 이런 당연한 소리는 이 남자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로 보인다. “저기, 선배님. 아 참.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우린 대학 동문이네. 편히 불러요, 후배님.” 이상수의 표정이 다소나마 밝아졌다. “선배님께서 아직 말씀하시지 않은 게 있어 보입니다. 저 때문이라면 제가 자리 비켜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어차피 알게 될 것 같은데요, 뭘.” 그는 오세현의 표정을 슬쩍 살폈고 오세현은 당연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선배님께서 우리 회사에 투자 좀 해 주시면 어떨까…. 사실 이런 부탁 드리려 왔습니다.” “뭐? 내가?” “네. 개인 자격도 좋고, 회사 차원도 좋습니다. 사실 지금 자본금 늘리려고 유상, 무상 증자를 논의 중입니다. 그럼 이놈들 지분이 더 늘어납니다. 차라리 선배님이 대주주가 되어 주시면 작전 세력도 포기하지 않겠습니까?” 물타기라도 해서 기존 투자자의 힘을 막아버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선배님 손해 보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제 지분 전부 선배님께 드려도 상관없어요. 상장 뒤로 미루고 정상적인 길을 밟겠습니다. 전 닷컴 버블에 사라지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늦은 것 같은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뭐라 말하려는 내 입을 막은 건 오세현이었다. 아주 짧게 눈을 깜빡인 다음 급히 입을 열었다. “한번 생각해보마. 쉽게 결정 내릴 문제는 아냐. 우리도 입출금 통장에 돈을 쌓아두고 있는 건 아니니까. 융통할 돈이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우리 투자자들의 의견도 무시하지 못해.” 이상수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했다. 미라클 정도의 규모라면 백억, 이백억 정도는 지갑에서 돈 빼듯 할 수 있다는 건 여의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건 완곡한 거절의 뜻이 분명하다. “선배님. 혹시 조건이 부족하다면 말씀하십시오. 원하시는 대로 어떻게든 맞추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제 주식 전부 양도하겠습니다. 단지 절 전문경영인으로만 해주시면 됩니다. 흑자 전환하고 비전을 보여 드린 뒤 다시 평가받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걸 고려해서 판단할게. 지금 당장 확답하는 건 어렵잖아. 네가 얼마나 급한지는 잘 알았으니까 더는 말하지 않아도 돼.” 이상수는 힘겹게 일어섰다. 저 모습을 보니 아마도 믿을 만한 투자자들을 전부 만나고 다니는 게 틀림없다. 이곳이 마지막 남은 곳일 수도 있다. 이제 달리는 호랑이 등에서 내리는 일은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아니 절망하는 것이다. 이상수가 돌아가자 오세현은 곧바로 여기저기 전화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정보를 수집하더니 그의 한숨은 더 깊어져 갔다. “된통 걸린 거죠?” “그런 거 같다.” “회사 돈 쓴 거까지 쥐고 흔들 정도면 검찰도 움직이는 힘이 배후 아닙니까?” “넌 누구라고 생각하냐?” “여의도 서쪽 끝에 있는 놈들이겠죠.” 오세현은 머리를 끄덕였다. “유력하다는구나.” “투자할 생각은 있으세요?” “상수도 알아. 우리가 투자한다 해도 기존 투자자들이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 힘겹게 잔칫상 차렸는데 숟가락 들고 끼어드는 놈을 보고만 있겠어?” “뭐라도 해 보려고 저러고 다니는 거다?” “그렇지. 이제 세력들 움직이는 대로 끌려다니는 게 전부야.” “안타깝네요. 온갖 개고생은 다 하고 감방까지 가다니. 쯧쯧.” “뭐? 감방? 저 애가 감옥을 왜 가?” 아차차……. 이런 실수를……. ======================================== [135] 세기말의 마지막 발악 3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길을 받으며 재빨리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이미 정해진 미래를 추측하듯 말하는 게 가장 그럴듯할 것 같다. “삼촌. 가만히 생각해보면 피할 수 없는 일 아니에요?” “어째서?” “정치권 놈들이 붙어 작전 들어가면 낮게 잡아도 백 배는 뛸 거 아닙니까?” “백 배까지? 너무 높게 잡았다.” 아니, 낮게 불렀다. 그럼에도 믿지 못한다. 하긴 500원짜리가 30만 원까지 오른다는 걸 상식적으로 이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도 반년 만에. “지금 열 배 오십 배까지 오른 벤처 회사도 많습니다. 막차일 수도 있는데 한몫 땡겨야죠. 백 배가 무리한 예측은 아닐 겁니다.” “좋아. 그렇다 치고, 그래서?” “주가가 오른다고 돈을 버는 건 아니죠. 팔아서 통장에 돈 들어와야 버는 거 아닙니까? 그럼 누가 살까요? 백 배나 오른 주식을?”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네. 뭔지도 모르고 덩달아 달리기 시작하는 개미들이겠죠. 그리고 많은 사람이 대박은커녕 쪽박 찰 테고요.” “주식 하다 쪽박 찬 사람들이 한둘이야? 그게 상수가 감옥 갈 이유라도 돼?” “네.” “뭐야?” 개인의 투자 실패 때문에 대표이사가 감옥 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한다. “선거철 아닙니까? 성난 사람들을 달래야죠. 하지만 화살이 향해야 할 과녁이 없어요. 그럼 만들어서라도 쏘게 합니다. IT 기업 활성화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건 현 정부가 견인한 겁니다.” “이, 이런…….” 오세현도 내가 말하는 시나리오의 끝을 알아챘다. “작전 세력을 건드려 봐야 모르고 따라간 개미들 잘못도 탓해야 할 테고…. 만만한 놈 하나를 아주 개쌍놈으로 만들어서 씹어야죠.” “돈 잃은 개미들의 분노가 이상수를 향하겠구만.” “이미 회사 돈 횡령한 증거 확보한 것부터 수상하지 않아요? 아주 보기 좋게 만들 겁니다. 성실한 사람들의 피와 땀을 끌어모아 흥청망청 놀아난 비도덕한 대표이사. 이 사람의 구속으로 상황 종료.” 설명을 끝내고 오세현의 표정을 살폈다. 조금의 의심도 없다. 앞으로 일어날 현실이 가장 그럴듯한 시나리오라는 내 생각이 맞았다. 물론 상상할 수도 없는 비현실적인 일도 일어나지만. 여기서 비현실적인 것은 딱 하나, 주가의 폭등뿐이다. 돈 해먹으려고 작정한 놈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한다. 그들은 무자비하며 끝없는 욕심을 숨기지 않고 분출한다. 직원 45명의 IT 기업일 뿐이다. 이런 회사를 재계서열 6위인 한진그룹의 8개 상장사 시가총액 합친 것보다 3,000억 원이 더 많고, 16위 동부그룹의 6개 상장사 시가총액을 합친 것의 4배로 만들었다. 상식 밖의 일. 이것이 큰 도둑놈들이 저지르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을 상상조차 못 하니 사기인지, 사실인지 판단조차 못 한다. 아무 말 못 하는 오세현에게 슬쩍 물었다. “어떡하실래요? 도와주실 겁니까? 아니면 관심 끊어버리실 겁니까?” “모르겠다. 젠장.” 오세현은 소파 깊숙이 상체를 묻었다. 한동안 침묵만 흘렀다. 오세현과 이상수의 친분이 얼마나 깊은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그에게 관심 없다. 그가 감옥에 가든, 떼돈을 벌든…. 어차피 내게는 푼돈 들고 장난치는 놈들일 뿐이다. 가만, 조 단위의 돈이 움직이니 푼돈은 아니구나. 갑자기 흥미가 솟는다. 돈 때문은 아니고…. 어떤 놈들이길래 조 단위의 시나리오를 짰는지 궁금할 뿐이다. 이때, 잠자코 있던 오세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도 들어갈까? 판돈 크게 해서 한번 흔들어?” 우리 삼촌, 무슨 생각일까?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한 오세현이 하나하나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넌 예상 주가가 얼마야?” “공모가는 주당 1,500원. 삼촌 말대로 액면가 500원의 백 배면 오만 원이죠.” “작전 들어간다면 단기로 치고 빠질 테니까 길게 잡고 육 개월. 천오백에 사서 오만에 판다. 반년 만에 서른 배가 넘는다면 해볼 만하지. 다만 규모가 너무 작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고. 그래도 이만한 종목 구하기 쉽지 않다.” 너무도 진지하게 말해서 오히려 내가 주저하게 된다. “그런데 삼촌. 왜 갑자기 들어갈 생각 하신 겁니까? 아끼는 후배를 위해 판을 흔드시려고요?” “응? 뭐가?” “판돈 크게 해서 흔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러니까. 크게 들어가서 크게 먹고 나오는 거지. 주식판에서 작전주를 미리 알아낸다는 건 상대방 패를 보며 고스톱 치는 거야. 상수 회사가 작전주라는 걸 알았잖아. 이젠 식은 죽 먹기지.” 이거 뭔가 이상하다. “단순히 투자 수익이 크니까 들어간다는 뜻입니까?” “응. 다른 게 있어야 해?” 오히려 반문하는 오세현에게 말문이 막혔다. 사색이 되어서 도와달라는 후배를 보고도 투자 이익만 생각하다니. “그런 게 아니라요. 이 사장이 삼촌께 도움을 청했으니까….” “이미 말했잖아. 우리가 대주주가 되어서 상장을 연기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도와줄 방법이 없어.” 오세현은 머리를 슬쩍 긁었다. “그렇다고 남의 잔칫상이니 보고만 있기에는 아깝잖아. 잔칫날 미리 알려줬고, 높은 담장 안으로 들어갈 방법까지 알고 있는데?” “깔아놓은 판이니까 들어가자?” “이건 대단한 정보야. 정보 쥔 놈이 투기판에 안 들어가면 여의도 떠나야지.” 할 말을 잃었다. 타고난 건지, 습관이 된 건지 모르겠지만 완벽한 투기꾼이다. 또 한 번 놀랐다. 프로는 정상(頂上)이 없다.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가도 더 높은 곳만 바라본다. “제가 말려도 삼촌은 들어가겠군요.” “당연! 개인으로 들어간다. 싫으면 넌 빠지고.” 평상시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변했다. 후배인 이상수 문제는 개입할 여지가 없으니 싹 잊어버리고 중요한 정보를 얻은 꾼의 모습만 살짝 비쳤다. 나도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단순히 짧은 시간에 돈을 버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게 삼촌과 다른 점이다. * * * “사천억이면 어느 정도 숨통은 트겠죠?” “아슬아슬하군요. 하지만 말씀대로 간신히 숨은 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계산한 내용을 들이밀자 순양유통의 자금 담당 상무는 엄살을 부렸지만, 그의 표정은 더할 수 없이 환해졌다. “역시…. 지금 우리나라 돈줄은 오로지 미라클이라는 말을 명동에서 심심치 않게 들었습니다. 다 이유가 있군요. 당사자인 우리보다 더 치밀하게 계산하시니… 이거 부끄럽습니다.” 겸손이지만 무능하다는 말처럼 들리자 고모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당장 동원할 수 있겠죠?” 고모의 바짝 마른 입술을 보니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가는지 알 것 같다. 단 두 달이 지났을 뿐인데 백화점과 호텔이 벌어들인 수익을 전부 다 가져갔다. 입점한 업체들에게 줘야 할 돈도 미뤄가면서 말이다. “물론입니다. 계약서에 유통, 호텔, 백화점의 법인 인감과 진서윤 사장님의 인감만 찍으면 사천억은 즉시 계열사로 쫙 뿌려질 겁니다.” 오세현의 미소에 고모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달 전 사천억의 담보로 요구한 주식을 확인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 정도로 화를 냈지만, 자금 압박에 시달리자 서둘러 다시 찾았다. 회사를 맡자마자 이자도 못 낸다는 소리가 진 회장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정말 날강도가 따로 없군요. 어떻게 고작 사천억으로 순양유통 주식의 30%를 가져갈 수가 있죠?” 계약서에 도장 찍고 끝내기 전에 꼭 한마디 더 보태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만큼 분한 마음이라는 걸 드러낸다. “아직 진 사장님의 손에 들어오지도 않는 주식입니다. 미래의 재산을 담보로 돈 빌려주는 곳은 우리뿐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천억이 전부는 아니죠. 제1호 대형 할인점 공사대금 천삼백억도 포함된 겁니다. 우린 모험을, 진 사장님은 조금 비싼 담보를 맡기는 거니까 공평합니다.” 그냥 한번 던져보는 고모의 불평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합리적이라는 것을 어필한다. 이래야 두 번 다시 쓸데없는 소리를 듣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회의실을 차지한 많은 임원들은 눈만 내리깔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무언의 동의다. 고모는 입술을 깨물고 임원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두꺼운 서류에 빠짐없이 인감을 찍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보자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이제 순양유통은 내 것이다! 유통과 연결된 백화점, 호텔, 콘도, 골프장까지. 이것들이 완전히 내 손에 들어오면 미라클 직원들에게 보너스로 회원권을 쫙 나눠줘야겠다. 너무 김칫국인가? 아니다. 정해진 수순이다. 2003년 카드 대란이 오고 소비가 꽁꽁 얼어붙었을 때 차지하려던 계획을 이상수 사장 때문에 훨씬 앞당기게 되었다. 새천년이 시작되기 전, 모두 내 것이 된다. 이 회의실에서 막힌 자금줄이 풀렸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임원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도 많은 임원들이 진서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고 좋아할 것이다. * * * “뭐라? 돈을 갚아?” “네. 순양생명과 화재보험을 제외하고 두 부회장이 맡은 계열사 채권을 상당 부분 정리했습니다.” “그 애가 돈이 어디서 나서? 회사 굴리기에도 버거울 텐데?” “미라클에서 빌려줬답니다. 서윤이가 도준이에게 부탁했고 오 대표는 도준이의 말에 따랐다고 합니다.” 진 회장의 입에서 ‘그 돈은 바로 도준이 꺼다.’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학재는 미라클이 바로 진도준의 소유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진 회장은 아직 이학재가 눈치챈 것을 모른다. 이학재는 진 회장이 가장 궁금해할 것을 말했다. “담보는 주식입니다. 만약 서윤이가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유통을 비롯한 계열사가 미라클로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설마? 전부 다 담보 잡았어?” “아뇨. 일단은 30%입니다.” “일단은? 무슨 뜻이야?” “돈은 한번 빌리기 시작하면 계속 손을 내미는 법 아니겠습니까? 가장 손쉽게 회사를 굴리는 방법인데…. 한 번으로 끝낼까요? 서윤이는 자금이 막힐 때마다 곶감 빼 먹듯이 주식을 던져주고 돈을 빌릴 겁니다.” “앞으로도 그럴까? 급한 불은 껐잖아. 그리고 순양경제연구소 보고서도 나쁘지 않던데?” 정확 예측으로 소문난 연구소에서 만든 극비 보고서는 1998년의 -6.9%라는 최악의 경제성장률을 비웃기라도 하듯 +9.5% 성장이라는 극단적인 숫자를 내놓았다. 물론 외부 발표용 자료에는 여전히 마이너스지만. “서윤이는 또 빌릴 겁니다. 회장님께서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걸 보고 싶으셨겠지만, 서윤이는 아주 쉬운 방법을 택했어요.” 이학재의 말에서 묻어나는 뉘앙스가 묘했다. 안타까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예상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누가 어려움을 극복해?” “네?” 이학재는 진 회장의 비웃는 듯 바라보는 눈길을 마주 보지 못했다. “서윤이와 극복이라는 단어가 어울리기나 해? 어림없는 소리.” “그럼…?” “경영 체질을 확 바꿔야 겨우 버틸 수 있는 상황으로 밀어 넣었어. 서윤이가 조금이라도 어려움을 타개할 머리가 있었다면 콘도, 골프장부터 처분했을 거다. 물론 대형 마트는 뒤로 미뤘겠지.” 경영의 기본이다. 이 쉬운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딸이 조금은 안타깝기도 하다. ======================================== [136] 세기말의 마지막 발악 4 “그 애는 어려움 없이 나이만 먹었어. 힘들지 않을 때야 그럭저럭 해내겠지만, 회사가 위기에 내몰리면 우왕좌왕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신경질 내는 게 그 애가 할 수 있는 전부야.” 이렇게 부정적이면서 왜? 이학재는 진 회장의 의도를 짐작했다. “혹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도록 만드신 겁니까?” “그래. 휘청거리면 누군가 뺏어갈 거 아냐. 그때 괜찮은 사내놈 하나 물색해서 평범한 주부로 만들 생각이었어. 재혼이 싫다면 장학 재단 하나 주고 바깥일 계속하도록 하던지.” “그 누군가가 어처구니없게도 오세현이군요.” 이학재는 진 회장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아주 작은 미소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보자 진도준이 차지하는 걸 기뻐한다고 확신했다. “오세현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다시 돈 주고 사 오면 돼. 명동 사채시장으로 넘기지 않은 게 어디야?” 진 회장이 흐뭇한 미소를 숨기며 안심하고 있을 때 두 명의 부회장은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보고에 망연자실했다. * * * “어서 와. 차나 한잔하자.” “차는 됐고. 서윤이 때문에?” “그래. 너도 들었구나.” 순양그룹 본관 27층은 진영기, 진동기 두 명의 부회장과 그룹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그룹전략본부가 차지하고 있다. 진동기가 부회장으로 승진할 때 한 층을 완전히 갈아엎고 만든 것이다. 중앙에 회장실도 있지만 진 회장이 출근을 거의 하지 않으니 두 사람을 위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진동기는 형의 호출에 진영기 부회장실을 찾은 것이다. 바로 그 일 때문에. “형만 그쪽에 사람 심어둔 거 아냐. 나도 그 정도 정보는 전해줄 사람 있어.” “그럼 오세현이라는 것도 알겠네.” “물론.” “그 멍청한 년이 결국 사고 쳤어. 돈은 들어왔어?” “형이랑 다를 바 없어. 대부분 갚았어.” “고년이 대형 마트 공사 계약도 파기하자고 했다면서?” “정식 공문은 아직. 통화만 했어.” 상황을 확인한 두 사람은 누구랄 것도 없이 동시에 담배를 꺼내 물었다. 주식을 팔아치운 게 아니다.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배 지분을 담보로 맡기는 바보 같은 짓은 절대 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오세현과의 특별한 관계를 믿었을 것이다. 동생 진윤기의 절친이니 부채와 이자만 갚아나간다면 회사를 뺏기지는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담배 연기만 들이켜며 말을 못 하는 것은 자신들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나눠줬다고 하더라도 계열 분리를 보고만 있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기회가 오고, 때가 오면 곧바로 원상복귀 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철새가 날아가 버리듯 기회와 때가 사라졌다. “동기야.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오세현이 말이다.” “듣고 있어. 말해.” “그놈 아무래도 아버지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 않냐?” “오세현이가 아버지와?” “그래. 미라클에 순양자동차 넘긴 거 봐. 아무리 IMF 때문에 달러가 급하다 해도 너무 많이 줬어. 자동차와 그룹 지분 17%까지. 이건 좀 과해.” “아버지의 지시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도준이 몫으로 하나씩 넘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번 백화점도 그렇고. 오세현이가 제정신이라면 있지도 않은 주식을 담보로 맡을까? 아버지가 안 주면? 담보고 뭐고 없이 사천억만 날린 거잖아.” “아버지에게 유통 주식을 전부 넘긴다는 확답이라도 받았다?” “그래. 그리고 아버지는 유통 전부를 도준이에게 줄 생각인 거지. 나중에 금융 부분까지 포함해서.” 진동기는 형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계획이라면 되돌릴 방법이 없다. 그러니까 오세현과 아버지를 연관 지어 생각하는 건 무의미할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쩌려고? 아버지 뜻인데 방법 있어? 도준이 손에 들어가는 걸 우린 멍하니 보고 있는 게 전부야.” “막아야지 왜 보고만 있어? 난 그 애새끼가 순양을 야금야금 파먹는 꼴 못 본다.” “막아? 어떻게? 지난번처럼 차로 확 밀어버리게? 이번엔 트럭 한 대로는 안 될걸?” 진동기는 형을 슬쩍 도발했다. 아니… 어쩌면 희망 사항을 말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다르게 진영기는 아주 침착한 모습으로 진동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난 너라고 생각했는데, 아냐? 가장 초조한 사람은 1등이 아니라 2등이거든. 따라잡기도 버거운데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니까 말이야.” 진영기는 동생보다 한술 더 떴다. “널 따라잡기 전에 다시 트라이해봐. 아버지든, 도준이든.” “나, 가도 되지?” 진동기는 피식 비웃으며 일어섰다. “너 회사 여유 자금 얼마나 있어?” 진동기는 종잡을 수 없는 형의 질문에 얼굴을 찌푸렸다. “오세현이는 여의도 맨이다. 서윤이가 맡긴 담보 우리가 사자. 사천억이라고 했으니 우리가 오천억 부르면 되지 않겠어? 천억 더 주고 가져오는 거다. 만약 그 자식이 안 넘긴다면…. 그놈은 아버지 지시대로 움직이는 거다.” 간만에 형이 괜찮은 생각을 짜냈다. 오백억 정도는 충분히 융통할 수 있다. “형이 던져 봐. 오세현이 받으면 오백억 준비하지.” “우리 오랜만에 의기투합하는 것 같다?” 진영기가 동생을 향해 웃었지만, 동생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형이 생각 못 한 것도 있어.” “잘난 우리 동생,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오세현이가 도준이 대리인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뭐?” 진영기는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어쩌면 미라클이 도준이 회사일 수도 있어. 오세현이는 전문경영인이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나도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요즘 들어 자꾸 이 생각이 들어. 형도 곰곰이 생각해봐. 도준이가 미라클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면 웬만한 건 다 맞아 떨어져. 아버지가 그놈에게 순양을 물려주지 못해 안달인 이유부터 말이야.” “설마…. 진담이냐? 지나치다.” “나도 믿고 싶지 않지만, 아귀가 맞아떨어져. 10억 달러 수혈하면서 자동차만 넘기면 될 일 아냐? 오세현이 외국 자본 들고 들어왔다면 주식까지 왜 줬겠어? 그것도 환전이 전부였는데.” 진영기도 그 부분이 가장 이상했다. 아무리 급해도 주식까지는…. “금융계열을 도준이에게 준다는 것도 그래. 이제 겨우 스물둘이야. 도대체 도준이가 뭘 보여 줬길래?” 황당한 소리로 들었지만, 자꾸 그럴싸해진다. “가능성을 열어 두자고. 먼저 백화점부터 찾아오고 나서.” 공통이 적이 나타나면 원수도 힘을 합친다. 어쩌면 어린 조카 때문에 으르렁대던 형제가 손을 잡을 수도 있다. * * * 봄을 알리는 3월, 하나로통신이 국내 최초 상용 ADSL 기반의 인터넷 서비스를 개시하자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PC방이 동네 오락실을 압사시킬 정도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제 동전 넣고 버튼을 눌러대는 것 대신, 마우스와 키보드를 두드리며 스타크래프트와 MMORPG라는 온라인 세상으로 사람들은 빠져들었다. 마침내 소규모 오프라인 대회 중 하나인 ‘한국프로게임리그’가 시작되었고, 아버지가 제공한 DCN 스튜디오에서 세계 최초의 게임 중계방송이 케이블을 타고 흘렀다. 아버지는 이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어 혀를 찼지만, 시청률을 보고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영화보다 더 높은 시청률이 나온 것이다. 이 시청률을 주의 깊게 본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게임은 하는 것이지만 보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높은 시청률은 돈이 된다. 아버지 주변에 게임 관련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고속 인터넷 서비스는 벤처 기업에도 불을 붙였다. 인터넷 통신이 주종인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는 대대적인 언론플레이를 하며 또 한 번 세간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전문가들은 이 회사를 띄우는 방법을 알았고 회사가 뜨는 만큼 주식도 띄울 것이다. “얼마나 넣을 거야?” “회사는 30억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요? 회사 규모가 작으니 더 쏟아붓기에는 부담입니다. 티 나지 않을 정도만 하죠.” 오세현은 순식간에 계산을 마쳤다. “상장가 1,500원이면 200만 주. 오만 원일 때 팔아치우면 천억을 쥐는 거네.” “고모에게 빌려준 돈, 일부는 세이브하겠네요.” 일부가 아니다. 난 20만 원일 때 팔 생각이다. 그럼 정확히 사천억. 딱 맞아떨어진다. 오세현의 눈이 더욱 반짝였다. “넌 개인 투자는 할 생각이 없어?” “티 안 나게 하죠. 3억?” “5억 어때?” “그러죠. 뭐.” 오세현이 5억이 얼마로 불어날지 행복한 고민할 때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어? 큰아버지?” “도준아. 잘 지내지?” 셋째인 진상기가 갑자기 찾아왔다. 재단이나 관리할 사람이 여긴 왜 왔을까? 이런 의문은 금방 사라졌다. 진영기 부회장의 메신저로 온 게 틀림없다. “두 분은 처음이시죠? 셋째 큰아버지인 진상기 이사장님. 여긴 오세현 대표님.” 두 사람은 명함을 교환하며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어색함은 인사 후에도 계속되었다. 사무실을 두리번거리기만 하는 진상기를 향해 오세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떤 용무로 오셨는지요?” “아, 부탁드릴 일이 좀 있습니다.” “큰아버지. 편히 말씀하세요.” 나까지 나서서 용건을 묻자 큰아버지는 헛기침부터 했다. “흠, 흠. 오 대표. 내 동생 친구니까 편히 말하겠소.” “네. 그러십시오.” “딴 게 아니라 우리 여동생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들었는데 그걸 좀 바로잡아야겠어요.” 오세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리 가족을 비웃는 듯해서 괜히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실수를 바로잡는다? 그건 개인적인 문제 같은데…. 제가 도움이 될까요?” “오 대표만이 도와줄 수 있어요.” 진상기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본론을 꺼냈다. “담보로 설정한 주식은 우리가 되사겠소.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애가 너무 성급하게 집안 재산을 넘긴 거요. 알다시피 돈 부족한 집안도 아닌데 말입니다.” “저야 장사꾼 아닙니까? 타당한 가격이라면 뭐든 못 팔겠습니까?” 긍정적인 답변으로 착각한 큰아버지는 표정이 환했다. “역시 말이 통하는 분이시구나. 좋습니다, 좋아요. 그럼 가격을 말씀하세요. 허허.” “먼저 사겠다고 하신 분은 이사장님 아닙니까?” “아차차, 그렇지.” 진상기는 오세현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기 시작했다. 심부름 왔으면 심부름만 하면 된다. 아무런 재량이 없는 심부름꾼이 지금처럼 눈치 본다는 건 괜한 짓이다. “우리 걸 되사는 거니 조금 더 얹어서… 사천오백억 드리리다.” “제가 타당한 가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부족합니까?” “네. 아주 많이요.” 오세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자 지금껏 한껏 여유를 부리던 큰아버지는 당황한 듯 보였다. “이거, 아주 큰 장사를 하시려나 봅니다.” “네. 우린 뭘 사든지 간에 최소 열 배는 남겨 먹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렇지 않다면 시작도 안 했습니다.” “뭐, 뭐요? 열 배?” 당황을 넘어 황당한 표정의 큰아버지에게 오세현은 쐐기를 박았다. “네고할 생각은 마십시오. 열 배에서 단돈 일 원도 에누리 없습니다.” 이 정도면 눈치 없는 큰아버지도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 없다. “그거 꿀꺽 삼켜봤자 소화 못 시켜요. 순양을 노리다가는 탈 납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 [137] 세기말의 마지막 발악 5 “삼키긴 뭘 삼켜요? 우린 순양백화점 그룹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생각입니다. 앞으로 꽤 많은 수익을 창출할 좋은 거래처니까요.” 오세현은 순식간에 힘을 뺀 눈빛으로 변했다. “그 수익이 사조 원이라고? 말이 안 되잖아!” 진상기는 여전히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 “손에 쥐는 캐시만 생각하지 말고요. 우린 HW 그룹이라는 기업 집단의 대주주라는 걸 잊지 마세요. 진서윤 사장님이 앞으로 진행할 사업에 우리가 참여하는 겁니다. 그 가치를 다 합쳐서 열 배라고 말한 겁니다. 이미 우리 전문가들이 계산까지 끝냈어요. 거래 깨자고 말한 게 아닙니다.”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투자를 업으로 삼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노름꾼이다. 노름꾼은 사기도 곧잘 친다. 그럴듯하지만 지금 막 쏟아내는 헛소리일 뿐이다. 큰아버지는 반박하고 싶으나 전문가의 계산이라는 말이 주는 권위에 아무 말 못 했다. “이사장님. 순양그룹 지분 빠져나가는 게 께름칙하시다면 진서윤 사장이 사업 잘해서 빚 갚으면 됩니다. 아니면 제게 더 나은 제안을 하십시오. 채권을 넘기겠습니다.” “더 나은 제안이라니?” “우리 HW 그룹이 순양의 중장기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큰돈을 벌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야, 뭐….” 청소용역까지 자회사를 만들어 밖으로 빠져나가는 돈을 막은 순양그룹이 중장기 프로젝트에 우리를 끼워 넣을 리가 없다. 확고한 거절이라는 것을 확인한 큰아버지는 더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다. “오 대표의 뜻은 잘 알았소. 내 돌아가서 상의해 보리다.” 차디찬 눈빛만 던지고 일어서는 큰아버지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언제 집으로 한번 와라. 저녁이나 먹자.” “네. 곧 찾아뵙겠습니다.” 진상기가 거칠게 문을 닫고 사무실을 나가자 오세현은 비웃음을 보였다. “너희 집, 정말 장난 아니구나. 단 하나라도 뺏기지 않으려는 욕심 봐라.” “핏줄이 어디 가겠습니까?” 대충 얼버무렸지만, 욕심 때문에 저러는 건 아니다. 할아버지의 허락만 떨어지면 언제든 되찾아갈 방법은 많다. 저들의 시커먼 속내는 뭘까? * * * “그 새끼, 장사치 아냐. 꿈쩍도 안 해.” “천억을 얹어준다고 해도?” “돈 말고 사업거리를 달래. 우리한테 빨대 꼽고 한 십 년 우려먹을 생각인 거야.” “오세현이가 직접 그렇게 말했어?” “그렇다니까. 도준이도 옆에서 똑똑히 들었어.” “그놈은 뭐라고 했어?” “아무 말 없던데? 그냥 가만히 있었어.” 오세현은 단기간에 엄청난 돈을 벌 기회마저 차버렸다. 다른 이유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들려도 치고 빠지는 일이 주업인 여의도 놈들의 모습과 다르다. 진영기 부회장은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오세현이 아버지인 진 회장의 수족이든, 어린 조카의 동업자든 판단은 뒤로 미뤄도 된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백화점 그룹을 엉뚱한 놈이 가져가는 것부터 막아야 했다. 그는 진동기를 찾았다. 강력한 적이지만 이 일을 하는 동안은 힘을 합쳐야 한다. 결승전에서 만날 때까지 들러붙은 파리 새끼들부터 처리하는 게 맞다. 진영기, 진동기 형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순양호텔로 달려갔다. “어머, 오빠들이 웬일이야? 그것도 함께? 사이좋아 보이네.” 진서윤은 나란히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며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재산도 갈랐고, 순양그룹과 연결된 것도 없다. 핏줄만 나눴을 뿐 더는 눈치 볼 까닭이 없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다. “회사 날려 먹고 속이 편한가 봐? 얼굴 좋네.” 진영기가 못마땅한 소리를 냈지만, 진서윤은 들은 체 만 체 했다. “속 긁으려면 그만둬. 이제 그럴 때는 지났잖아?” 두 오빠는 집무실로 꾸민 스위트를 둘러보며 중앙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긁으러 온 게 아니고 도대체 어쩌려는지 알아보러 왔다. 속 시원하게 이야기나 좀 해봐.” 진동기가 차분하게 말했지만, 진서윤은 여전히 귀찮은 표정이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뭐가 그리 궁금해?” “오세현이 말이다. 네가 생각하는 만큼 믿을 수 있는 놈 아니다.” “내가 그 사람을 믿는다고 생각해? 이건 거래야. 믿기는 뭘 믿어?” “단순한 채권, 채무? 그깟 이자 좀 챙기려고 오세현이가 너한테 돈 빌려준 것 같아? 천억도 거절한 놈인데?” “뭐? 천억? 무슨 말이야?”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은 진서윤은 한동안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이제 알겠니? 건물 담보 잡아놓고 이자, 원금 상환 독촉하다가 건물 삼키는 사채업자 흉내 내는 거다. 넌 거기에 당한 거고.” “1호 대형 마트 공사도 곧 들어가지? 그 공사 대금은?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태산인데 감당하겠어?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전부 다 뺏긴다고.” 두 오빠가 불길한 소리를 마구 해대자 진서윤의 닫혔던 입이 열렸다. “그래서?” “뭐? 아직 감 못 잡았어?” “그러니까 내가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는 소리야?” “알아들었네.” 진영기 부회장이 한심하다는 듯 툭 던지자 진서윤은 생끗 웃었다. “아니지, 그 반대지. 호랑이 아가리에서 빠져나와 늑대 만난 거야. 운은 내가 더 좋지 않아?” 자신들을 호랑이 아가리로 표현하자 발끈했지만, 뒤를 이은 진서윤의 말 때문에 아무 소리 하지 못했다. “오세현이가 신경 쓰이면 착한 우리 오빠들이 호랑이가 아니라 토끼라는 걸 보여주면 돼. 오세현이에게 천억 얹어준다고 했지? 여동생에게는 높은 이자 물려 놓고 생판 남에게는 천문학적인 돈을 줘? 어이가 없네, 진짜.” 진서윤은 두 오빠에게 최고의 선택지를 말했다. 물론 자신의 입장에서 말이다. “내가 회사 뺏길 것 같아 두려우면 돈으로 막아. 사천억에 천억 더 얹어서 오천억 빌려줘. 이자는 은행의 절반 수준으로. 돈 벌어서 천천히 갚을게. 그럼 우리 오빠들 걱정할 일이 없잖아?” 구구절절 옳은 소리지만 두 오빠는 헛기침만 할 뿐이다. 진서윤의 말대로 했다가는 백화점 그룹을 다시 찾아올 방법이 없다. 불경기가 지나가고 경제가 좀 살아나면 굳히기에 들어갈 것이고 빌린 돈은 순식간에 갚아버릴 것이다. 완벽한 계열 분리가 끝나는 순간 진영기, 진동기는 백화점과 호텔의 VVIP 고객으로 등록될 뿐 더 이상은 기대할 수 없다. 오빠들이 입을 닫고 아무 말 못 하자 진서윤은 비웃음만 흘렸다. “나이 오십인 외동딸 먹고살라고 아버지가 준 거야. 그렇게 탐나? 왜? 밤마다 올케들이 백화점 가져오라고 바가지 긁어? 그냥 쇼핑이나 하라고 해. 내가 신상 나올 때마다 잔뜩 할인해줄 테니까 돈 걱정 말고. 알았어?” 형제는 여동생에게 된통 당한 뒤 호텔을 나왔다. “빌어먹을 년.” 진영기가 뱉은 욕설을 못 들은 척하며 진동기가 말했다. “어차피 저 애는 계속 실수를 저지를 거야. 분명히 기회는 와. 좀 더 기다려보자.” * * * 도시를 태울 듯한 불볕더위가 한창인 무렵, 우성그룹의 금융채권단은 우성그룹과 재무구조개선 수정약정을 체결했다. 이것은 곧 있을 워크아웃의 신호에 지나지 않았고 재계는 그야말로 충격에 휩싸였다. 우성은 IMF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 세계를 상대로 공격적인 인수전을 벌였다. 그 결과 98년에는 외국 현지법인만 400여 개에 이르렀고 경제위기로 휘청거린 순양그룹을 제치고 재계서열 2위까지 뛰어올랐다. 그러나 경기침체의 장기화와 세계 시장의 위축으로 우성그룹의 입지는 크게 흔들렸고, 개발도상국 위주로 사세를 확대하다 보니 부진을 벗어나지 못했다. 외형확대에 초점을 맞추었으니 정부가 요구했던 구조조정에는 소극적이었다. 규모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금난이 가중되던 우성은 알짜자산인 호텔까지 매각했으나 1999년 3월에는 이미 부채 비율을 무려 400%를 훨씬 넘은 상태여서 수습이 어려운 지경이었다. 7월, 우성은 초고강도 구조조정안을 발표하였으나 채권단은 이를 반려했고 8월, 채권단의 압력이 시작된 것이다. 채권단과 우성그룹의 수정약정 뉴스를 보며 할아버지는 혀를 찼다. “우성그룹은 사실상 해체군요.” “그래. 우성 회장이 사재 다 털어놓고 경영권도 포기하겠다고 했지만 감당할 수준이 아니지.” “덩치 큰 물소가 쓰러졌으니 살점 뜯어먹으려고 다들 덤비겠어요.” “넌? 탐나는 부위가 없어? 너 돈 많잖아. 아직 원화로 1조 원 정도 쥐고 있지?” “남의 통장 함부로 들여다보시면 안 됩니다. 그거 범죄예요. 흐흐.” “통장 안 봐도 통밥으로 나온다, 이놈아. 아직 이 할애비 머리 녹슨 거 아니다.” 할아버지는 우성그룹 계열사 검토를 끝마친 것 같다. “제 돈을 쓸 곳이 있습니까?” “우성해양조선. 그거 하나는 쓸 만하다. 이걸 한번 봐.” 할아버지는 자료 파일 하나를 테이블에 툭 던졌다. “볼 줄 알지? 그 정도면 네놈 회사 구색 갖추는데 쓸 만할 게다.” 1999년, 우리나라는 수주잔량에서 일본을 2만 CGT(표준화물선 환산톤수)가량 앞서기 시작하며 호황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우성해양조선은 우성그룹 계열사가 아니었다면 엄청난 경영성과를 낼 우량기업이다. 서류파일은 해양조선, 우성상사 그리고 우성증권은 인수할 가치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구색 맞출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돈보다 사람이 부족해요. 인수해도 경영할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은 내가 빌려주마.” “순양중공업 사람들요?” “다른 곳에도 인재는 많아. 돈이 없어 걱정이지 사람 없어 걱정이겠느냐?” “글쎄요. 아직 인수한 회사도 이곳저곳 물 새는 곳 막느라 힘듭니다. 그 회사들부터 챙겨야 해서….” 나를 노려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에 다른 뜻이 숨어있다는 걸 알았다. “돈 빌려드려요?” “아니다. 순양이 인수하는 건 어려워. 우리도 구조조정 한다고 소문냈는데 또 회사를 인수한다면, 그것도 엄청난 덩치의 회사를 인수한다면 정부가 가만있지 않을 거다. 우성그룹 채권단도 우리와 선 그을 거고.” “그러니까 우성이 탐나긴 하는데 현실적으로 감시하는 눈이 너무 많다? 그리고 자금 사정도 여의치 않고. 맞습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네가 바지사장 노릇 좀 해라. 잠잠해지면 내가 다시 가져오마.” 할아버지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았다. 우성해양조선을 미라클이 인수하고 적당한 때가 오면 순양그룹에 넘기는 것이다. 순양중공업이 조선업을 맡고 있지만, 업계 1위는 아니다. 대현 조선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순양과 우성이 합치면 대현은 2위로 밀려난다. 할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것 같지만 얽힌 문제가 좀 있다. 시기가 문제다. 한두 달 안에 정리될 문제도 아니고 최소 몇 년 뒤의 일인데…. 순양중공업은 둘째인 진동기 부회장이 맡았다. 만약 우성해양조선을 순양으로 넘길 때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칼자루는 진동기 부회장이 쥐게 된다. 고심하는 내 모습을 본 할아버지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내키지 않으면 그만둬도 된다. 괜찮아.” 아주 인자한 표정이지만 괜찮을 리가 없다. 이미 모든 검토를 다 끝내고 결정한 상태에서 말을 꺼내는 분이다. 우성해양조선을 가지기로 마음을 굳혔을 텐데… 뭔가 이상하다. “정말 안 해도 될….”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또 서류파일 하나를 툭 던졌다. 그것은 바로 미라클과 순양백화점의 계약서 사본이었다. 계약서를 보자마자 눈을 들어 할아버지 얼굴을 보니 웃음이 한가득이었다. 물론 그 웃음은 한 수 아래인 나를 완전히 내려다보는 비웃음이었지만. “…리가 없죠.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뜻대로 할게요.” 재빨리 머리를 끄덕였다. “도준아.” “네.” “난 네가 참 좋다.” “저도 잘 알아요.”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척하면 다 알아듣는 네가 좋다는 말이다. 허허.” 아끼는 손자지만 협박도 서슴지 않는 저 단호한 할아버지가 나도 참 좋다. ======================================== [138] 세기말의 마지막 발악 6 “너 뉴스 봤어?” “네. 우성그룹 말이죠?” “그래. 주 채권단이 연락 왔다. 혹시 인수할 의향 있는지….” 오세현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민하는 와중에 이런 말이 먼저 나오다니! 설마? “아니. 계열사 중에서 고르라고 하더라. 지금 자금 여력이 있는 곳은 외국계 투자사뿐이니까.” “업계 평판은 어떻습니까? 쓸 만한 계열사가 있기나 한 겁니까? 분식회계니 뭐니 해서 전부 부실 덩어리라고 하던데요.” 짐짓 모르는 척 부정적인 의견부터 말하자 오세현도 머리를 끄덕였다. “드러난 부채만 3조야. 모든 계열사가 빚더미라는 뜻이지. 인수할 만한 건 없어.” “단 하나도?” “우성해양조선은 이미 수주한 양이 상당하다고 들었어. 그나마 가장 나은 거 같은데….” “삼촌. 혹시 채권단에서 뭔가 달콤한 제안을 던졌습니까?” “너 어떻게 알았어? 귀신이 따로 없구먼.” 놀라는 오세현을 보자 할아버지의 치밀함이 더 돋보였다. 이미 채권단에 언질을 줬고 우리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 “부채탕감을 약속했어. 우리가 관심 있으면 만나서 협상 좀 하자더라고. 절대 손해 볼 일 없도록 해줄 테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나와 달래.” “맞습니다. 손해 볼 일 없을 겁니다.” “뭔 일 있었구먼.” 이미 벌어진 일이라는 걸 알아챈 오세현은 짧은 한숨을 쉬며 내 입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실….” 할아버지와 나눴던 대화를 빠짐없이 들려주자 오세현도 눈치챘다. “네 고모와의 계약서를 들이밀어? 햐! 진짜 무서운 양반이네.” “더 깊은 뜻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우리가 나서서 총대 메고 가져와야 합니다.” “그냥 해보는 위협 아냐? 한번 개겨볼까?” “할아버지는 그 계약서 보고도 아무 말씀 없으셨어요. 여차하면 백화점 그룹이 우리 손에 들어온다는 걸 모를 리 없으신 분이…. 개겨도 별일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계약서 툭 던진 건 완전한 협박이잖아.” 협박 맞다. 백화점 그룹을 우리 손에 넣으려면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이 바로 할아버지가 모든 지분을 순양유통에 올려서 고모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만약 이 지분 승계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미라클은 무담보로 사천억을 빌려줬고, 전액 후불로 대형 마트 공사까지 해주는, 아주 멍청한 호구 짓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애교 같은 협박일 뿐이다. “할아버지는 부탁을 그런 방식으로 하신 겁니다. 우리가 백화점 그룹을 차지하는 걸 모른 척한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받은 게 있으니까 부탁은 들어드려야죠.” “우리가 아니라 너다. 말은 똑바로 하자, 인마.” “그럼 말을 바꾸겠습니다. 백화점은 제가 차지할게요. 삼촌은 우성해양건설을 인수한 다음 순양그룹에 팔 때 엄청난 매매이익을 남기시면 되잖습니까?” “그 이익을 전부 나 주려고?” 농담인 걸 알지만 진지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대표이사 특별 보너스로 전부 가져가십시오.”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걸 내 표정을 보면 알 것이다. 이미 오세현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오세현이 딱 5년만 일하고 은퇴한다고 선언한 것이 언제였던가? 이 일을 마무리하려면 은퇴 시점을 뒤로 미뤄야 한다. 조금이라도 오세현을 더 붙잡아 두기 위해서는 돈이 아깝지 않다. “자자, 그만 감동하시고 더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죠.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 상장이 일주일도 안 남았습니다. 그쵸?” “아, 그…. 그래. 그건 이미 준비 끝마쳤어. 선수들 대기하고 있다. 거래 첫날부터 조금씩 사들일 거다. 열흘 안에 우리 자금만큼 주식 들어온다.” “작전 세력은 언제 들어올까요?” “처음엔 들어오지 않아. 어차피 상장빨이라는 게 있어서 놔둬도 주가는 오르거든. 빨리 들어와도 3주 뒤야. 우린 그 전에 주식 확보하고 있다가 매도 시점만 결정하면 돼.” 오세현은 내 표정을 보며 슬며시 말했다. 어느새 놀란 표정은 사라졌다. “너 정말 인수 건 내게 맡길 거냐?” “네. 어차피 우리 둘째 큰아버지와 협상해야 합니다. 중공업 부문은 그분 소관이니까요. 껄끄러운 상대 아닙니까?” “흠….” 뭔가 숨기는 게 있는지 확인하는 눈빛을 피하며 일어섰다. “전 할아버지 뵈러 갑니다. 우성 인수를 진행하겠다는 말씀은 드려야죠.” “야! 어딜 가? 내 이야기 안 끝났다.” 소리치는 오세현을 남겨두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 * “왜? 싫어? 내키지 않아?” “아, 아닙니다. 단지 좀 의외라서요.” “의외? 싸고 좋은 물건 나왔을 땐 재빨리 낚아채는 게 의외야? 당연한 거지.” 진동기는 아버지 진 회장의 호출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리고 우성해양조선을 챙기라는 말을 듣자 더할 수 없이 기뻤다. 중공업 건설 부분을 맡기고 승계작업을 진행하는 것까지 확인했다. 이번엔 떠보기도 아니고 간 보기도 아니다. 그런데 조선을 두 배로 키워주겠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그만큼 자신을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 지금 우리 처지에 우성조선을 인수한다면 지금 진행 중인 구조조정의 진의를 의심할 겁니다.” 구조조정이라는 명목하에 승계작업을 진행 중이다. 눈엣가시 같은 노조도 이 기회에 박살 낼 참이다. 그룹 전체가 어려우니 사람 자르는 것은 당연했고 사회적 공감대도 형성되었다. 이 절호의 찬스를 우성조선 인수로 날려버릴 수는 없다. 그룹 사정 어렵다면서 엄청난 돈이 필요한 인수를 진행하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타를 내세울 거다. 대타가 인수하고 세상이 잠잠해지면 받아 오면 돼.” 진동기는 불현듯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 대타가 혹시 미라클입니까?” “잘 아는구나. 지금 그 정도 자금을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외국계 투자사뿐이다. 미라클은 우리와 밀접한 관계도 있으니 적당하지 않겠냐?” 진짜 묻고 싶었다, 그리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 밀접한 관계가 어떤 것인지? 하지만 섣불리 물었다가는 호통만 돌아올 게 뻔했다. “그쪽에서 협조해준다고 했습니까?” “그래. 괜찮은 회사 싸게 인수하고 몇 년 뒤 비싸게 팔아먹는 게 오세현이 같은 친구 특기 아니냐? 거절 못 한다. 인수도 내가 적극 도와줄 테니까 말이다.” “그럼 제가 오세현을 만나겠습니다. 이름만 빌리는 일이니 인수부터 직접 챙기겠습니다.”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다.” “네?” “오세현이 말이다. 네가 직접 나서서 챙기는 걸 고맙습니다, 잘해봅시다, 할 놈이 아니라고.”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씀이신지 충분히 알아들은 진동기다. 하지만 지금이 바로 그 밀접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기 때문에 모른척하며 아버지 눈치를 살폈다. “대타를 해 주겠다고 했지 심부름하겠다고 한 건 아니다. 대타가 타석에서 홈런 치는 일도 왕왕 있지 않아? 순순히 네 말 들을 놈이 아냐.” “우성조선을 인수하고 돈 냄새를 맡으면 순순히 넘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진동기는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잘못 생각한 건가? 미라클은 아버지의 회사가 아닌가? 아버지의 숨은 회사라면 심부름만으로 만족하지, 홈런을 노리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해야 할 대답은 하나다. “문제 생기지 않도록, 오세현이 딴생각을 못 하도록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믿어도 되겠지? LNG선을 선도해 가려면 우성해양조선은 꼭 필요한 회사다. 절대 놓치면 안 돼.” “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차질 없도록 하겠습니다.” 당당한 둘째 아들을 보며 진 회장은 잔잔한 웃음을 띠었다. “동기야. 너도 불만이 없진 않겠지만, 이것이 최선이라는 것은 명심해야 한다.” 진동기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앞으로 기회가 있을 거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회사를 키워 나가다 보면 어느새 지금의 순양그룹만큼 커져 있을 게다. 난 너와 네 형이 가진 걸 두 배로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 아버지가 전에 없이 따뜻한 말씀을 꺼냈지만, 진동기는 절반 정도만 믿었다. 위로의 말이나 달래는 말이 나올 때면 항상 뭔가를 숨기고 있다.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니다. 아무리 나이 먹어도 절대 변하지 않을 아버지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항상 원하는 대답을 해야 하는 것도 잘 안다. “네. 기대하시는 만큼 해내겠습니다.” 진동기는 꾸벅 머리를 숙이고 서재를 나갔다. “아이고, 힘들다. 다 큰 아들놈들 달래가며 일 시켜 먹으려니 죽겠구먼.” * * * “잘 부탁합니다, 오 대표님. 우리 순양그룹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안건이라는 것은 이미 아시겠죠?” “제가 뭐 할 게 있겠습니까? 이미 진 회장님께서 다 조율해 놓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조율한 대로 쉽게 진행된다면 좋겠습니다만…. 어디 일이란 게 그렇습니까? 여기저기서 발목 잡는 놈들이 나오기 마련이죠.” 오세현은 스쳐 가듯 인사만 몇 번 나눈 진동기를 자세히 살폈다. 셋 중에 가장 낫다는 진도준의 평가를 확인하는 자리다. 거만하지 않은 첫인상부터 조용조용한 말투까지,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진중한 사람이라는 것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순양이 점찍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놈들이나 발목 잡겠다고 덤벼들겠죠. 아무튼, 부회장님께서 잘 이끌어주십시오.” 의외다. 건방이 하늘을 찌른다고 투덜대던 동생 진상기의 말과는 전혀 다른 겸손한 모습 아닌가? 각자의 첫인상을 확인하자 둘 사이의 기류는 한결 따뜻해졌다. 진동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우리 막내 조카를 데리고 다니며 가르친다고 들었는데, 어떻습니까? 우리 도준이.” “음….” 오세현은 잠시 뜸을 들였다. 아무래도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들려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타고난 겜블러죠. 아버지인 윤기와는 정반대라고나 할까요?” “겜블러?” “네. 촉 좋고, 과감하고, 배짱 두둑하고, 지를 때와 물러날 때를 정확히 파악하고…. 무엇보다도 판세를 읽는 능력이 뛰어나죠.” “그러니까 여의도 증권맨이나 투자가로서 적격이라는 칭찬이군요.” “정확합니다. 요즘은 아예 저보다 더 낫죠. 이젠 혼자 포커판에 들어갑니다.” 진동기는 슬쩍 웃었다. “말씀하신 겜블러의 자질이 꼭 포커판에서만 유효한 게 아니죠.” “네?” “그런 자질은 경영자에게 요구하는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보통은 넘는다. 도준이는 투자회사 밖으로 나가지 않은 놈이라는 뜻이었는데…. 오세현의 의도는 어긋나 버렸다. “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군요. 그런데 부회장님. 설마 어린 조카를 경계하는 건 아니시겠죠?” 자존심을 슬쩍 긁었지만 이마저도 먹히지 않았다. 진동기는 여전히 머리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순양의 차기 회장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3대 회장은 도준이가 분명합니다. 저야 제 몫을 단단히 챙겨서 도준이가 넘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게 전부죠. 그래야 내 자식들도 밥은 굶지 않을 거 아닙니까? 하하.” 겸연쩍은 웃음까지 보이는 진동기를 보자 오세현은 도준이가 사람을 정확히 봤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사람은 이미 도준이를 자신의 경쟁 상대로 생각하며 움직인다는 것도 확신했다. “자, 그럼 채권단의 제안서부터 확인할까요? 어떻게…? 부회장님이 직접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믿을 만한 임원에게 맡기실 겁니까?” “함께 봅시다. 아버지께서 당부하신 만큼 직접 챙겨야죠. 조선업계의 판도를 바꾸는 일인데 직원에게 맡긴다는 건 안 되겠죠?” 탐색하며 오세현의 그릇을 가늠할 좋은 기회를 진동기가 놓칠 리 없다. ======================================== [139] 돈 많은 개미 1 “큰아버지 직접 보시니까 어때요?” “진동기 부회장?” “네.” “뭐, 특별할 게 있나? 그냥 재벌 2세지, 뭐.” “단지 그 정도?” “재벌 2세는 다 거기서 거기야. 어릴 때부터 귀족처럼 살아서 특별해 보이지만, 까 보면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아. 단지….” 오세현은 눈을 깜빡거리며 기억을 떠올렸다. “태도가 좀 다르긴 해. 신중하고 겸손한척하고. 그런 게 특별해 보이지.” “너무 야박한 평가 아니에요?” “정확한 평가지. 보통 사람이라는 게 폄하하는 게 아니야. 좀 똑똑한 사람, 그저 그런 사람도 다 보통 사람이니까. 진동기 부회장은 좀 똑똑한 보통 사람이야. 하지만 재벌 2세라는 옷을 입고 있으니 특별해 보일 뿐이지. 나도 보통 사람인데 뭐.” 미라클의 투자 수익이 상위권이다 보니 돈 좀 굴리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재벌 축에 들어가는 고객도 많았고 그들을 위해 전담반도 운영한다. 오세현은 그들과 비교하여 큰아버지를 평가했다. “특별한 놈은 너뿐이야. 아, 네 아버지도 좀 특별하고. 정반대의 기준이지만.” 내가 특별한 건 재벌 3세라는 옷을 입어서 그렇다. 옷 속의 나는 미래를 조금 아는 평범한 보통 사람이다. 아, 독하게 이 악물고 덤비는 점은 좀 특별하긴 하다. “큰아버지와 손발 맞추는 게 어렵지는 않아요? 그분 탐색전이 장난 아니실 텐데?” “나보다 네 살 위던데 계속 존대야. 편하게 말씀하라고 몇 번 권했는데도 태도를 안 바꾸는 거야. 그건 좀 신선했어. 그쪽 부류들은 다들 아래로 보잖아.” 형 동생 하지 않는 이상 편안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공식적인 일 이야기가 전부다. 탐색은 없다는 뜻인데… 좀 의외다. “참, 그 양반은 대놓고 널 경쟁자라고 하던데?” “그래요?” “진영기 부회장은 널 찍어 누르려 한다고 했지? 그런데 이 양반은 널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모양이더라. 장남과 차남의 차이인가?” “성격 차이겠죠. 좀 더 두고 보죠.” 이때 매니저 한 명이 보고서를 들고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 보고서는 바로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에 주가 현황이었다. 1,480원으로 상장한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의 주가는 쭉쭉 치고 올라갔다. 순식간에 만 원을 넘겼을 때 열 배인 만오천 원까지 금방 올라갈 것처럼 보였지만 만 원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증권가는 이 정도 주가면 성공이라는 평판이 자자했고 상장빨이 끝나는 대로 오, 육천 원대에 안착할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이제 주식 팔고 나가는 놈들이 속출하면 다시 작전 붙을 거야. 오만 원대까지 등락을 거듭할 거고 그때마다 손해 본 사람들은 주가가 오르면 땅을 치며 후회하다 다시 매입하고, 또 떨어지면 허겁지겁 팔아 치우며 계속 손해 볼 거야.” 개미투자자들의 특징이다. 오르면 팔고 떨어지면 사는 게 아니라 떨어지면 팔고 오르면 사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투자를 계속한다. 오세현 같은 전문가들은 개미투자자들의 정반대 패턴으로 사고팔고를 되풀이하며 그 와중에도 매매 차익을 남기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런 전문가들도 주가가 오만 원 이상으로 치솟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 고모가 등장하기를 목이 빠지라 기다렸다. 이상수 사장이 말한 대로 순양전자가 투자한다면 그 정보를 분명 사전에 입수할 것이다. 이런 고급 정보를 듣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다. 가뜩이나 자금부족에 시달리는데 공돈이나 다름없는 돈벌이의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아직 순양전자의 투자가 확정되지 않은 걸까? * * * “확실해?” “네.” “오빠가 결정한 거야?” “아닐 겁니다. 겨우 200억 투자하는데 부회장님까지 결재가 올라가겠습니까? 작년에 적극적인 벤처 투자 지시만 내리셨고 그 뒤부터는 실무진이 진행하죠. 전체 투자 금액만 결재하셨을 겁니다.” 진서윤은 경영관리 상무가 전해주는 정보에 귀가 솔깃했다. “그런데 임 상무, 순양전자는 사내 벤처팀만 투자하는 거 아니었나? 어떻게 외부 기업까지 투자해?” “저도 자세한 내막은 잘 모릅니다. 단지 지금 이 정보를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차명으로 주식 끌어모은다고 난리도 아닙니다.” 임 상무는 끊임없이 눈알을 굴렸다. 그가 진서윤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는 건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순양전자의 투자가 확실한지 진서윤을 통해 알아보는 것이고, 만약 투자가 실제 일어날 경우 이 정보를 먼저 알아냈다는 자신의 정보력과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투자 발표 날짜는 알아냈어?” “그게 좀….” “왜?” 진서윤은 눈알만 계속 굴리는 임 상무를 노려보며 혹시 모를 꿍꿍이를 파악하느라 신경을 집중했다. “날짜를 정한 게 아니고 주가에 맞춰 발표한다고 합니다. 이만 원대를 찍었을 때 발표한다고….” “이만 원? 지금은 얼마야?” “만 원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벌써 손 털고 나가는 사람도 있는데….” “임 상무!” “넵!” 매서운 목소리에 임 상무는 저도 모르게 부동자세를 취했다. “알아 오려면 확실히 알아 와야지! 뭐야, 이게? 부족한 회사 자금 충당하자고 꺼낸 말 아냐? 만약 잘못되면 더 큰일만 생기잖아. 이렇게 멍청한 소리만 해대면 내가 당신 믿을 수 있겠어?” “죄, 죄송합니다. 사장님.” “이틀 줍니다. 정확히 파악하세요. 만약 어정쩡한 모습만 보인다면 임 상무에 대한 내 생각을 다시 할 겁니다. 명심해요. 임원은 1년짜리 임시직일 뿐이니까.” 임 상무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는 듯 머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진서윤은 두 숫자에 집중하며 머리를 굴렸다. 주가가 이만 원에 진입하면 순양전자가 투자한다. 이 말은 주가는 무조건 이만 원까지는 오른다는 뜻이다. 게다가 순양전자의 투자가 알려지면 주가는 또 폭등한다. 최소한 두 배. 즉, 사만 원까지는 문제없다는 의미다. “네 배라…….” 이 기회를 놓친다면 바보다. 하지만 빠듯한 자금 사정을 생각하면 신중, 또 신중해야 한다. 그녀는 핸드백을 챙겨 들고 인터폰을 눌렀다. “차 대기시켜. 여의도로 갈 거야.” * * * 사무실에 들이닥친 고모는 인사도 생략한 채 다짜고짜 회사 이름부터 들먹였다. 급하긴 급한가 보다.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 이 회사가 요즘 핫하다면서요?” 오세현은 생끗 웃는 진서윤을 보며 어이가 없는지 헛기침까지 했다. “오 대표님 혹시 모르시고 계셨어요? 그렇다면 실망인데요?” “진 사장님. 핫한 종목은 늘 있었습니다. 그 회사도 그중 하나고요.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 “이번 건은 특별한데 정보가 늦으시군요.” 고모는 오세현과 나를 번갈아 보며 기다렸다. 우리가 뭔가를 내놓아야 그녀가 가진 것을 풀겠다는 모습이다. 하지만 오세현은 굳은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진 사장님, 분명히 당부하는데 찌라시에 속지 마십시오. 지금 사오백짜리 찌라시 받아보실 텐데, 그거 믿으면 큰일 납니다.” “오 대표. 찌라시 아니에요. 다른 곳에서 흘러나온….” “아무리 정확한 정보라고 해도 절대 주식 투자할 생각은 마십시오. 사장님 사재도 담보로 잡혀있고 회사 주식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괜히 회사 돈에 손대시면 정말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냥 경영에만 집중하세요. 이건 채권자로서 말씀드리는 게 아니고 투자 전문가이자 긴밀한 관계자로서 드리는 말입니다.” 말리는 오세현이 고맙기 그지없다. 말리는 사람이 많을수록, 자기 생각을 더 굳게 확신하는 게 철없는 재벌 2세들의 특징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고모는 발끈하며 목소리가 올라갔다. “오 대표. 지금 착각하는 거 아니에요? 오 대표는 채권자일 뿐이에요. 주주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회사 자금을 잠시 사용하는 게 불법은 아니잖아요?” “손실이 발생하면 어쩌려고요? 메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사실 확인하려고 온 거잖아요. 이렇게 다짜고짜 화만 낼 게 아니라구요!” 말이 통하지 않는 고모를 보며 오세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 이럴 게 아니라 서로 의견을 한번 교환하는 게 어떨까요? 팩트부터 체크하면 고모도 생각을 달리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오세현의 눈치를 살피며 말하자 고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때요? 오 대표님. 도준이 생각이 좋지 않아요? 제가 먼저 알려드리죠. 순양전자에서 곧 200억 투자합니다. 주가는 또 오를 거예요. 이걸 아는데 가만있기에는 좀 그렇지 않아요?” “진 사장님. 우리도 이미 그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투자자라는 건 현찰이 통장에 꽂힐 때까지는 절대 믿을 수 없어요. 투자 계약서 사인까지 한 경우에도 어그러지는 일은 이 바닥에서 다반사라니까요.” 오세현은 멋모르는 초보자를 설득하듯 말했지만, 고모는 콧방귀만 꼈다. “오 대표, 참 답답하네요. 저도 투자 계약서에 사인하고 캔슬한 적 많아요. 그 정도 기본은 저도 알아요. 그러니까 자신 있게 말하는 겁니다. 200억, 투자해요. 순양전자에서 200억이면 휴대전화 디자인 용역비 수준인데 뭘 망설이겠어요?” 이미 원하는 대답만 들으려 이곳에 왔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줘야 한다.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주가가 이만 원일 때 순양전자의 투자를 공시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최소 이만 원까지는 오른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투자 공시가 뜨면 곧바로 두 배. 내 말이 틀려요?” “지금 만 원에 사서 사만 원에 팔고 싶다, 이 말이죠?”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말만 골라서 하는 고모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그럼 진행하시면 되지 왜 저한테 알려주시는 겁니까?” “일말의 불안감 해소…? 그런 이유죠.” 오세현은 짧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 사장님. 지금까지 주식 투자한 적 많죠?” “그럼요. 절 아마추어 개미투자자로 보시면 큰 실수하시는 겁니다.” “그렇지는 않아요. 그런데, 지금까지 부족한 돈을 쥐어짜서 투자한 적 있습니까? 투자 실패가 큰 후폭풍을 몰고 올 만큼요.” 고모는 씩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아니까 그 정도만 하세요. 벼랑 끝에서는 도박하지 마라, 돈이 아니라 목숨을 잃는다. 이 말 아닌가요?” 절박한 심정으로 주식 차트를 바라보면 돈을 따든, 잃든 이성을 잃어버린다. 잃으면 말할 것도 없고, 돈을 따면 그 돈 전부를 잃을 때까지 도박판을 떠나지 못한다. “아시니까 두 번 말하지 않겠습니다. 사만 원일 때 전부 파세요. 제가 할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오세현은 두말하기 귀찮다는 듯 탁 뱉었다. “사만 원이라는 거죠? 오랜만에 의견 일치군요. 저도 그 정도 생각했어요. 호호.” “네. 다행이군요, 하지만 명심하세요. 여긴 대단한 작전 세력이 붙었습니다. 주가가 더 오른다고 해서 따라가다가는 언제 폭락할지 모릅니다. 사만 원이라고 해도 네 배 아닙니까? 더는 욕심부리지 마세요.” “저도 그 정도까지만 생각했다니까요. 잔소리 그만 하세요.” 고모는 마침내 원하는 말을 들었다. 오세현 같은 전문가에게 자기 판단이 옳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계열사 돈을 전부 끌어모아서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 주식을 사 모을 것이다. 그리고 네 배의 이익을 얻고 나면 흥분에 휩싸일 것이고 오세현의 당부는 까맣게 잊어버릴 게 틀림없다. 그렇게 번 돈을 또 올인할 것인지 잠시 망설이겠지만, 다시 춤추는 주가를 보면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절대 이기지 못한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막다른 길로 달려갈 것이다. ======================================== [140 ] 돈 많은 개미 2 주가가 육천 원까지 빠지자 진서윤은 입술이 타들어 갔다. 그녀는 불안과 초조를 전부 임 상무에게 퍼부었다. “사장님, 틀림없습니다. 이미 투자는 손훈재 전자 사장의 결재까지 떨어졌어요. 지분참여 시 주당 가격을 조율 중이라고 합니다. 이제 주가는 다시 오릅니다. 조금만 진득하게 기다려보시지요.” 이 상무의 장담대로 육천 원까지 떨어졌던 주가는 갑자기 반등하여 순식간에 다시 일만 원을 찍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치 터보 엔진의 추진력을 얻은 듯 연일 상한가를 때리며 마침내 이만 원 고지를 넘었다. 하지만 주가가 이만 원을 찍자 기다렸다는 듯이 매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며 사흘 연속 하락세를 보였다. 출렁이는 주가에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과 탄식을 내뱉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99년 하반기의 증시는 오로지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의 출렁이는 주가가 태풍의 눈이었다. 때마침 이상수 대표이사의 긴급 기자회견도 열렸다. 며칠 전부터 증권 관련 사이트에는 ‘손정의의 소프트뱅크가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에 투자한다.’ ‘야후와 손잡고 나스닥에 상장한다.’는 등의 루머가 떠다녔기 때문에 중대 발표가 분명했다. 이상수 대표이사는 기자들의 플래시 빛을 피해 눈을 천장으로 향했다. 회견장이 잠잠해지자 마이크 앞에서 간단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현안 문제점의 타개책과 향후 비전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가 계속되자 기자들은 점점 인상을 찌푸렸다. 긴급 기자회견이라는 이름이 부끄럽게 평범한 내용만 계속될 뿐이니 제대로 된 기삿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상수 대표이사는 계속 시계를 힐끔힐끔 쳐다보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프레젠테이션을 끝마쳤다. “지겨운 시간은 끝났습니다. 지금쯤은 발표해도 되겠네요.” 그가 화제를 돌리자 기자들은 다시 집중했다.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는 글로벌 브랜드를 육성하기 위해 순양그룹과 제휴하기로 했습니다….” 순양전자가 아니라 그룹이라는 이름을 썼다. 발표의 파괴력을 한층 더 키우기 위해서였다. 순양전자의 지분참여 형태의 제휴 계약은 이날 11시. ‘만일의 사태’에 대비, 안전한 시간대까지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고 기자들도 일일이 신원을 확인한 후에 간담회장에 입장시켰다. 오늘 아침 증시가 열리자마자 쏟아진 매물은 작전 세력이 쓸어 담았을 것이다. 단 몇 시간 만에 주가는 다시 폭등했고 오전 거래에서 주식을 내다 판 개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기자회견 뉴스를 들어야만 했다. 순양의 지분참여 발표가 끝나자마자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 사장은 난처한 질문에 대해서는 말끝을 흐리거나 비보도를 전제로 답했다. 이 회견을 뉴스 속보로 확인한 오세현은 급히 몇 군데 전화를 돌리더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상수 사장 도망칠 궁리를 하다 악수를 뒀어. 저러면 안 되는데… 허, 참.” “왜 그러세요?” “자신의 주식 100만 주를 순양전자에 넘겼어. 이제 이 사장 지분은 10% 정도야. 순양전자가 2대 주주가 됐고.” 창업자이며 대표이사가 주식을 팔았다. 여전히 최대주주이긴 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이것이 빌미를 제공할 것이다. 현금 챙기고 빠져나갈 계획을 미리 세웠다는 의심을 피할 길이 없다. “200억이라는 현금이 생겼으니 유상증자라도 하지 않을까요? 자본금 늘리려면 그 수밖에 없는데?” “그렇겠지. 아마도 100억 정도는 유상증자에 넣을 거야. 그래도 100억은 챙긴 거지.” 오세현은 후배를 걱정하고 나는 고모를 걱정했다. 이제 폭증하는 주가에 취해 우리의 당부를 잊을지도 모른다. 사만 원일 때 팔아서 네 배의 이익을 꼭 남겨야 한다. 그래야 도박의 짜릿함을 맛볼 것이고 승리에 취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다. 그때부터는 내버려 두기만 하면 저절로 무너진다. 과연 얼마나 큰 돈을 잃고 쓰러질까? * * * “도준아. 정말 팔아야 해? 바보짓 아냐?” “파세요. 오 대표의 감각은 거의 틀리지 않는다니까요.” “계속 오르잖아.” 고모는 못 미더운 눈으로 신문을 내 눈앞에 내밀었다. “주가가 떨어질 때는 한순간에 매도 물량이 쏟아집니다. 잘 아시잖아요. 아차 하는 순간에 타이밍 놓치면 되돌릴 수 없어요. 충분히 벌었잖아요.” 고모는 조용히 나만 불러냈다. 오세현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내 입에서도 똑같은 소리가 나오자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너도 팔았어? 전부?” 대답을 잘해야 한다. 자고로 사람이란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픈 족속이 아닌가? “우린 이미 다 처분했어요. 3만8천 원쯤에서요. 25배 남겼으니 충분하죠, 뭐.” 물론 아직 쥐고 있다. “뭐? 스, 스물다섯 배?” 입을 떡 벌린 채 말을 더듬는 고모에게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네. 우린 상장 시점에 샀으니까요. 천오백 원이었나?” “야! 왜 나한테는 미리 말 안 했어?” “회사가 진행하는 일이니까 저도 몰랐어요. 투자회사야 늘 주식 시장만 보니까 상장 시점을 놓치지 않은 거죠.” “회사가 샀다고 해도 네 투자금도 포함되어 있을 거 아냐?” “저 이제 얼마 없어요. 고모부 선거자금으로 다 들어갔고 그 대가로 받은 상암동 땅은 아직 그대로니까요. 한 5억 정도 들어간 걸로 알고 있어요.” 어차피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고모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25배라는 숫자만 남은 것이 뻔하다. “고모. 용돈 벌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어요. 지금은 미련 두지 말고 다 파세요.” 지금 내가 하는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욕을 먹을지 짐작도 못 하겠다. 고모의 불같은 성격을 생각하면 멱살 잡히는 건 각오해야 한다. 고모는 회사 돈을 임시로 ‘유용’하는 처지라 더는 모험할 수 없었다. 결국, 사만 원이 조금 넘었을 때 모두 팔아치웠다는 연락만 받았다. 얼마나 투자했는지, 수익은 얼마인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 고모는 설득했지만, 더 힘든 산이 앞을 버틴다. 오세현은 어이가 없는지 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십오만 원? 그게 네 예측이야?” “황당하죠?” “아는구나. 다행이다. 난 네가 미친 줄 알았거든.” “그런데 삼촌. 잘 생각해 보세요.” “뭘?” “내가 미친 것 같은 소리를 할 때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죠?” “그래서 내가 가만히 있는 거야. 아니었다면 널 병원으로 데리고 갔던지 아니면 누가 네게 그런 헛소리를 했는지 잡으러 다녔을 거다.” 어차피 내 고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테고, 미친 소리 같지만 어쩌면 또 한 번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난 정리할 거야. 내 개인으로 투자한 거 말이야.” 예상보다 쉽게 받아들이는 오세현에게 웃으며 말했다. “후회하실 텐데요? 흐흐.” * * * 만약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에 평범한 투자자들이나 그 어떤 작전 세력도 붙지 않았다면 주가는 어땠을까? 벤처 광풍이긴 했지만, 어차피 끝물이라는 것은 여의도 사람이면 누구나 감지하고 있었다. 이만 원? 사만 원? 어쩌면 이 정도가 최대치 아니었을까? 주가가 오만 원의 고지를 간당간당하며 넘지 못할 때 추진력에 불을 지필 호재가 나왔다. 미국 상장을 목표로 추진 중인 새로운 사업모델을 이상수 대표가 직접 발표한 것이다. 언론 역시 한 패거리였다. 이상수 대표가 발표한 ‘VoIP(Voice over Internet Protocol)’라는 기술을 실용화한 상품 ‘다이얼패드’를 띄우느라 엄청난 지면을 할애했다. 그저 코스닥 열풍에 편승해 까닭도 없이 주가가 치솟는 ‘무늬만 벤처’들에 비하면 월등히 차이 나는 기술력이라며 치켜세우기 바빴다. 단기간 회원 50만 가입이라며 떠들어 댔지만, 가입자가 늘어날수록 수익은 점점 나빠진다는 건 철저히 숨겼다. 50만 가입자 상당수는 소비성향이 낮은 대학생이라 다이얼패드의 광고 프로모션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견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주춤하던 주가도 단숨에 치고 올라가며 10만 원을 찍었을 때 오세현은 하얗게 질렸다. “모두 미쳤어. 이제 시총이 조 단위야. 300억 매출에 적자 나는 회사의 주가가 이 정도라는 건 미쳐 돌아간다는 거 외엔 설명할 방법이 없어.” “지금 주식 사 모으는 사람들 중에 그런 거 따지는 사람 있을까요? 이 광풍에 낙오하면 병신이라는 말이 파다합니다.” “이건 한 번에 폭락해. 전부 휴지 쪼가리가 된다고. 당장 내일일 수도 있어.” 오세현은 주가가 오르면 오를수록 불안에 떨며 주식을 빨리 처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촌. 제 예측이 틀렸다고 해도 회사 자금 30억. 내 개인 돈 5억 날리는 게 전부 아닙니까? 미라클이 30억 정도 날린다고 쳐도 티 안 나요. 내 돈도 마찬가지고요. 끝까지 한번 지켜보자고요.” 사실이었다. 만약 돌발 변수로 인해 지금 당장 꼬꾸라져도 아쉬울 것도 아까울 것도 없었다. 단지 내가 걱정하는 것은 우리 고모가 이 판에 다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단기간에 네 배라는 돈맛을 봤는데 가만있기에는 돈이 너무 많다. 수백억 정도는 평범한 사람들의 지갑 속에 든 돈처럼 생각하는 특이한 부류 아닌가? * * * 진도준의 말만 믿고 사만 원에 전부 팔아치우자 주가가 약 올리듯이 또 한 번 폭등했다. 진서윤은 분통이 터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주가는 계속 상승 국면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진서윤은 다시 사들이기 시작했다. 자금을 조달하는 임 상무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말이다. 한 번의 선택과 결정으로 큰돈이 들어오는 맛을 알아버린 노름꾼은 마누라까지 잡히고 패를 돌린다. 진서윤도 예외는 아니었다. 네 배가 아니라 25배도 가능한 도박판. 그녀는 백화점에 입점한 업체들에게 결재해야 할 돈을 어음으로 막았다. 11개의 백화점과 호텔에서 들어오는 현금 중에 꼭 지급해야 할 돈을 제외하고 모두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에 쏟아부은 것이다. 길어봤자 두 달이면 끝날 것이라 생각하고. 게다가 명동 사채 시장의 선수들에게 많은 수수료를 지급하고 차명으로 거래를 텄다. 수익을 전부 비자금으로 할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백억으로 꽤 많이 확보할 수 있었지만 십만 원이 넘어가자 손에 쥔 물량이 팍 줄었다. 물론 주가는 계속 뛰었지만, 너무 많은 돈을 ‘유용’하자 불안이 엄습했다. 곁에서 불안을 부추기는 임 상무의 걱정도 한몫했다. “사장님. 이대로 가다가는 소문을 막을 수 없습니다. 경영악화로 어음이 부도날지도 모른다는 악소문까지 돕니다.” “무시해요. 소문을 확인할 때쯤이면 끝나요.” “그렇지만….” 진서윤은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다. “지금 실업률이 얼만지 알아? 우리 백화점은 최소한의 구조조정으로 끝냈어. 순양의 다른 계열사처럼, 아니 대현 그룹이나 정일 그룹처럼 절반 이상 해고해야 정신 차릴 거야?” “죄, 죄송합니다.” “입단속 확실하게 해요. 만약 소문을 못 막으면 진짜 구조조정이 어떤 것인지 보게 될 겁니다. 입점 업체 절반 이상을 물갈이해 버리고 호텔 직원 중 매니저급부터 임시직으로 바꿔버릴 테니까. 알아들었어요?” 소리치며 윽박지르는 진서윤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이쯤에서 멈추고 싶었지만, 주가 변동차트만 보면 마음이 바뀐다. 꾸준히 오르는 그래프의 기울기를 보면 한 달 백화점 수익이 일주일 만에 나온다는 게 눈에 보였다. 불안한 그녀는 마음을 편히 해줄 사람들을 불렀다. 안심하고 잠을 청할 수 있는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을. ======================================== [141] 돈 많은 개미 3 “참으로 송구스럽지만… 주가를 예측한다는 건 이미 불가능합니다. 그냥 추이를 보며 문제가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면 빠져나오는 것, 이것이 최선입니다.” “그렇습니다. 주가를 평가할 기업 데이터는 이미 무용지물입니다. 지금 주가는 오로지 미래에 대한 낙관을 베이스로 쌓았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개미 투자자들의 욕망도 한몫하고요.” 얼떨결에 불려 온 사람들은 진서윤의 눈치를 살피며 보고했지만 뭐 하나 속 시원하거나 명쾌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순양증권의 최고 인재들이라고 들었는데, 영 시원찮네.” 진서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무시하자 순양증권에서 내로라하는, 잘나가는 인재들은 발끈한 마음을 억눌렀다. 오너 일가의 사장 아닌가? “죄송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국 증시가 시작된 뒤로 처음 보는 기현상이니까요.” “그러니까 어디까지 올라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 맞죠?” “그렇습니다.” “순양전자 상황은 어때요? 200억 투자했으니 지금쯤 뭔가 액션이 나올 법한데…?” “순양전자는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습니다. 어차피 IT 사업부에서 여기저기 투자한 곳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주가 상승으로 인한 매매 차익보다는 관계사로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음….” 방향을 제시하는 등대 같은 답을 얻으려 했지만, 망망대해라는 말만 나오니 진서윤의 고민이 깊어졌다. 하지만 망망대해가 끝나면 엘도라도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은가? “저기, 사장님. 혹시 얼마나 투자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알 거 없고. 지금은 주가 오르는 만큼 조금씩 더 매수하는 중이에요. 주가가 좀 빠지면 그만큼 매도하고.” “기본에 충실하시네요.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증권사 매니저들의 긍정적인 평가가 조금은 불안을 없애준다. “오늘 나와 만난 건 비밀로 해 주세요. 만약 그룹 내에 이 사실이 새어 나가면 여러분의 가벼운 입을 의심하겠습니다. 내가 마음먹으면 여러분이 이 땅에 발붙일 곳은 없습니다. 그 정도 힘은 있습니다. 아시겠죠?” 순양증권 매니저들은 입에 지퍼를 채웠다. 진 회장의 딸에게 그 정도 힘이 있다는 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녀가 순양증권의 매니저들을 은밀히 모은 건 투자 자문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줄 말이 듣고 싶어서였고 원하는 것을 얻었다. “저거 가져가서 안사람에게 줘요. 어떤 취향인지 몰라서 브랜드별로 준비했으니까 마음에 드는 거 서너 개씩 챙겨 가요.”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가방이 쇼핑백에 들어있었다. 분명 서너 개라고 했다. 증권사 매니저들은 한 번에 모두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이런 횡재는 언제나 반가운 일이다. * * * 가을바람이 겨울바람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 고모는 조용히 나를 찾았다. 그녀의 첫마디를 듣자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발을 담갔다는 것을 알았다. “도준아. 오 대표에게 이자 지급 조금만 연기해 달라고 부탁 좀 해줄래? 경기가 엉망이라 백화점 매출이 확 줄었어. 식품관만 근근이 꾸려나가는 실정이야.” “그 정도까지 나빠졌어요?”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우는소리를 늘어놓았다. “호텔 공실은 70%가 넘어. 사람들이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백화점에 장 보러 오는 거야. 백화점인지 시장인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라고.” 그럴싸한 거짓말을 들으며 한번 확인해 볼까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자칫 말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간다. 이미 이십만 원을 훌쩍 넘었다. 지금 고모가 주식을 몽땅 처분하면 떼돈을 만질 것이고 백화점 그룹은 내 손에서 멀어진다.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주식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죄송해요. 고모.” “응? 뭐가?” “고모가 그 주식을 사만 원에 팔지만 않았더라면 한꺼번에 문제가 잘 해결됐을 텐데 말이죠.” “응? 아…! 그거. 뭐, 괜찮아. 어차피 나랑 주식은 어울리지 않는데 뭐. 그리고 네 배의 수익을 올렸잖아. 그 정도로 만족해야지.” 얼버무리는 모습이 어색하지만 모른 체하며 말을 이었다. “삼십만 원은 족히 넘어갈 것 같던데…. 정말 어마어마하죠?” “뭐? 삼십만 원?”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 미묘하다. 입꼬리에 아주 잠깐 머문 미소, 그 미소가 모든 걸 말해준다. 아무쪼록 백화점 그룹이 휘청할 정도로 질렀기를…. “네. 하지만 비행기 추락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자세히 말 좀 해봐.” “에이, 남의 집 파티나 다름없는데 이야기하면 뭐 해요? 우린 주식 하나 없는데….” “그, 그렇지만…. 그냥 궁금하잖니. 나도 한때는 대주주였는데.” 지금도 대주주임이 분명하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이 말해준다. “그러니까 삼십만 원 정도까지 오를 수도 있다는 게 여의도의 평가래요. 그런데 뭔가 이상 있는 비행기가 고도만 올리는 형국이랄까? 위태로우니 언제 추락할지 모르잖아요.” “위험하다는 말이구나.” “하지만 마지막 타이밍만 잘 잡는다면 그야말로 떼돈이 굴러 들어오니까 사람들이 버티는 거라고 하더군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잘 아시죠?” “물론이야.” “고모.” 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응.” “혹시라도 지금 들어가는 짓은 하지 마세요. 아시죠? 비행기 추락.” 손을 들어 추락하는 비행기 모습을 보여주자 고모는 웃음을 터트렸다. “얘가 날 뭘로 보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럼 돌아가서 오 대표에게 말씀드려 볼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정 무시하고 돈만 밝히는 분은 아니니까요.” 내 입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자 고모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잘 부탁해, 우리 조카. 이 고모가 신세 진 건 확실하게 갚는다. 알지?” “신세랄 게 뭐 있나요? 우린 가족인데.” 좋은 말만 하고 돌아섰다. 우린 가족이다. 그리고 가족은 늘 문젯거리를 만든다. 고모가 사무실로 쓰는 객실을 나오자 문 앞에서 기다리던 중년의 사내가 다가왔다. 어딘지 낯이 익은데…. “저기… 진 실장님. 혹시 저 기억나십니까?” 아, 이 양반…. 미라클이 고모에게 돈을 빌려줄 때 함께 있었던 그 사람 아닌가? 자금담당 상무던가? “혹시 임 상무님?” “네. 맞습니다. 기억하시는군요.” 그가 머리를 꾸벅 숙였다. “진 사장님 뵙고 나오는 길이십니까?” “네.” 임 상무의 초조한 표정을 보자 이 사람이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참, 상무님. 커피 한 잔 주시겠습니까? 고모는 뭐가 그리 바쁜지 할 말만 하고 내쫓더라고요.” “아, 그러시죠. 제 방으로 가실까요?” 그는 기쁜 듯이 날 데리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임 상무가 주는 커피를 홀짝거릴 때 그는 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사장님과 무슨 말씀 나누셨는지… 제가 알면 안 되는 내용입니까?” “아뇨. 임 상무님은 자금담당 임원이시니 상관없습니다. 고모는 미라클에 지급할 이자와 상환금을 한두 달 정도 사정 봐달라고 하시더군요. 불경기라 백화점과 호텔 상황이 영 좋지 않다면서요.” “그렇군요. 그 정도만 해도 숨통이 좀 틔겠는데….” 길게 한숨까지 내쉬었다. 얼마나 돈에 쪼들리는지 낯빛이 시커멓다. “그 정도로 어렵습니까?” “그게…….” 흙빛의 얼굴과 말을 잇지 못하는 걸 보니 주식에 묶인 돈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짐작했다. 이쯤에서 도박 한번 해볼까? “주식에 얼마나 꼬라박았어요? 상무님 표정 보니 어마어마할 것 같은데. 아닙니까?” 최소 천억은 박은 것 같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진 사장님께서 말씀하셨습니까?” “그걸 말해야 압니까? 회사 주식까지 담보 잡은 곳에 이자를 못 줄 정도면 뻔하죠. 경영권이 흔들릴 지경 아닙니까?” “역시 눈치 빠르시네요.” “솔직히 말씀 좀 해보세요. 제가 비밀은 지켜 드리겠습니다. 제 입장도 정말 난처합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고모 사정 나 몰라라 할 수도 없고 오세현 대표님은 친삼촌이나 다름없는데…. 이거 참.” 난처한 표정으로 슬쩍 던지자 임 상무는 다급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실장님. 지금 이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분은 회장님뿐입니다. 실장님은 진 회장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가셔서 말씀 좀 해 주세요. 불안해서 미쳐버릴 지경입니다.” “정말 천억 넘습니까?” “지금까지 들어간 자금이 천사백억입니다. 주가가 오만 원일 때부터 이십만 원 때까지…. 끊임없이 매입했어요.”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고 아주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요? 천사백억?” “쉿. 소리 좀 낮추십시오.” 조심스러워 하는 임 상무에게 재빨리 되물었다. “오만에서 이십만? 그럼 지금 팔면 손해는 안 보겠군요.” “당연하죠. 적어도 세 배는 될 겁니다.” “아니, 고모도 참 무모하네. 주식도 잘 모르면서 왜 뻐팅기고 쥐고 있답니까?” “순양증권 사람들 때문이죠. 이 사람들이 매도 시점 알려 주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더 오를 것 같다면서 자꾸 부추기잖습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여기서 순양증권이 왜 나와? 의아한 내 표정을 보며 임 상무는 왜 순양증권 사람들이 등장했는지 그간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순양증권 사람들이 고모 옆에 붙어서 코치한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 친구들, 베테랑이라고 하던데…. 무모하리만큼 공격적인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얻었다. 고모가 정보를 알려주고 가이드를 제시하는 사람을 구했을 줄이야. 만약 이들이 적절한 매도 타이밍을 알려준다면 내 계획은 무너지고 고모는 큰돈을 쥐게 된다. 조바심이 난다. “사실 제가 그 친구들을 따로 만나서 이야기했습니다. 진 사장님께 지금이 매도 타이밍이라고 강력히 권하라고요.” “그런데요? 말을 안 듣습니까?” “이야기 들어보니까 그 친구들도 난처해서 죽으려 하더군요. 만약 매도한 뒤에 주가가 계속 오르면….” “고모가 가만있지 않겠군요.” “그렇습니다. 그걸 두려워합니다.” 그냥 넘어갈 성격이 아니다. 심하면 강력한 인사 조처 같은 보복까지 할 여자다. 진짜 문제는 그들의 인생이 아니다. 그 정도로 신경 써서 고모를 관리한다면 고모가 큰돈을 만지고 게임이 끝나버릴 수도 있다. 공든 탑이 무너질 것 같아 입술이 타들어 간다. “그 사람들이 누군지 알려주십시오. 제가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임 상무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무래도 제가 정리를 좀 해야겠어요. 여차하면 엄청난 손실을 볼 텐데…. 이거 원, 불안해서 가만있을 수 없군요.” “제 심정은 오죽하겠습니까? 아니, 진 사장님도 마찬가지이실 겁니다. 얼굴 타들어 가는 거 보셨죠? 이러다 무슨 일 나겠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걱정하는 임 상무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혹시라도 회장님께 보고하고 도움 청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마세요. 고모는 핏줄이라 별 탈 없이 넘어가겠지만, 백화점, 호텔 임원들은 전부 옷 벗어야 합니다.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임원은 용서치 않는 분입니다.” 임 상무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일입니다.” 걱정만 하는 임 상무를 뒤로하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순양증권의 훼방꾼 놈들. 참으로 운 좋은 훼방꾼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해서 인생역전 할 테니 억세게 운도 좋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걸렸다. 이놈들 인생을 통째로 사서 고모를 벼랑으로 밀어버리는 일을 시켜야겠다. ======================================== [142] 일단 하나는 먹었고 1 사무실을 찾아온 세 명의 사내는 눈길 둘 곳이 없어 사무실을 두리번거렸다. 미라클이라는 이름 때문에 달려왔지만 왜 미팅을 요청했는지는 아직 모르니 호기심도 엿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진도준입니다.” 명함을 건네자 셋 중 한 명의 눈빛이 달라졌다. “혹시 회장님의…?” “맞습니다. 바로 그 진도준입니다. 하하.” 이들이 어디까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3세라는 것만으로도 긴장하는 모습이다. 총수의 핏줄이 연이어 자기들을 찾으니, 이것이 기회인지, 위기인지 열심히 궁리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그런데 어떤 일로 저희를 보자고 하셨는지요?” 난 호기심 가득한 그들의 눈을 보며 입을 뗐다. “줄 서실 생각 있으면 제 곁에 서시라는 말을 드리고 싶어서요.” 노골적인 말에 이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입 무거우신 분들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준비했던 서류를 그들에게 내밀었다. “제가 원하는 조건 하나만 들어주신다면 그 서류는 바로 효력을 발휘합니다. 일단 검토해보시죠.”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은 서류에 얼굴을 박았다. 단 한 글자도 빼먹지 않고 꼼꼼하게 서류를 살핀 그들은 얼굴 근육이 실룩거렸다. 환호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참는 게 분명하다. “마음에 드십니까?” 표정을 가다듬은 그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라클이라면 현재 최고의 투자사입니다. 미국 본사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이런 파격적인 조건으로 스카우트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신다고 했으니 이런 놀랄 만한 제안을 왜 하시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원하는 조건 한 가지가 뭔지 말입니다.” 연봉 10억, 인센티브 별도. 실적과 관계없이 최소 5년 이상 고용 보장. 이들은 5년만 일하면 남들이 평생 일해도 가질 수 없는 돈을 손에 넣는다. 알지 못하는 한 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제 고모인 진서윤 사장님께 조언하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아, 너무 놀라지 마세요. 비밀인 것은 잘 아니까요.” 세 사람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진서윤이 떠올랐을 것이다. 이 바닥에 발을 못 붙이게 하겠다고 했던 경고. 그 비밀이 새어 나갔다. “뭐, 거의 협박이더구먼요. 하지만 이 회사는 우리 고모 힘이 미치지 못합니다. 또한 고모는 여러분께 제가 제안한 조건만큼 여러분의 미래를 책임지지도 않고요.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조건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실장님께 줄을 서든 진 사장님 눈치를 보든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조건은 간단합니다. 진서윤 사장님이 보유한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 주식을 끝까지 못 팔게 하시면 됩니다.” “못 팔게…?” “그렇습니다. 그 회사의 주주로 영원히 남게 해 달라는 겁니다.” 이들도 여의도 짬밥을 십여 년간 먹었다. 지금 그 회사의 주가는 살얼음판이라는 걸 잘 안다. 당장 폭락해도 이상할 게 없는 주식. 그 주식을 영원히 쥐고 있게 하라는 건 어마어마한 손실을 본다는 뜻이다. 줄 선다는 게 지급이나 사내 정치급이 아니다. 아예 총수 일가의 사람에게 줄 서는 것이다. 이들의 표정이 더욱 굳어버렸다. 진서윤에게 거짓말을 하고 배신하라는 뜻 아닌가? “뭘 그리 놀라세요? 주식으로 손해 본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여러분 고객 중에서도 여러분의 말만 믿고 있다가 손해 보고, 쫄딱 망한 사람도 많을 텐데요?” “그렇다고 떨어질 게 뻔한 주식을 계속 쥐고 있으라고 조언한다는 건 좀….” “친하세요?” “네?” “진서윤 사장님이랑 친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분 안 지가 얼마나 됐습니까? 제가 알기로 한 번 만난 게 전부라고 들었는데.” 배신이라는 말을 쓰기에도 어색하다. 단지 힘 있는 자에 멱살 잡힌 게 전부인 관계에 배신이니 뭐할 건덕지도 없다. “매일매일 피 말리는 전쟁터 같은 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치고는 사태 파악도 늦고 판단이 엉성하군요. 혹시 부족한 능력을 겨우겨우 감추며 지낸 겁니까?” 자존심을 확 긁으니 이들의 발끈한 심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하지만 회장의 핏줄이니 아무 말 못 하고 씩씩거리기만 한다. “이건 누굴 선택해야 인생이 풀리는지 고민할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를 선택해야 인생 꼬이는 걸 막을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할 문제라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이들도 내 말뜻을 알아챘다. 조카가 고모를 사지에 밀어 넣는다고 말했다. 여기서 거절하면 조카가 칼을 든다. 결국 방패막이가 가능한 사람을 골라야 하는데 난 방패 역할뿐만 아니라 돈다발로 된 카펫까지 깔아주겠다고 했으니 어느 쪽에 줄 서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이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말이다. “충분히 이해했습니다만 어떻게 보장하실 겁니까?” “뭘 보장해요?” “진서윤 사장님이 우리를 쫓아냈을 때 이 계약서대로 우리를 채용한다는 보장 말입니다.” “주식을 안 팔고 꾹 쥐고 있게 만드는 건 약속할 수 있고?” 피식 터진 내 비웃음에 곧바로 카운터펀치가 날아왔다. “우린 고객이 주식으로 돈 벌게는 못 해도, 망하게는 할 수 있습니다. 잘 아신다고 생각했는데요?” 약속은 확실히 지킨다는 뜻이고 내 곁에 서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제 내가 확신을 줘야 한다. “사실 나도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 주식 삼십만 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5년 치 연봉쯤은 아무것도 아니죠.” “삼, 삼십만…!” 지금 주가가 이십만 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이것만 해도 육백억이다. 이들 셋의 5년 치 연봉이라고 해도 겨우 백오십억,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빈말은 아니다. “주가 얼마일 때 사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상장했을 때 5억 질렀습니다.” 나지막한 탄성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상장가 수준으로 매수하셨다는 건데…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꾹 쥐고 계셨는지? 등락 폭이 엄청났는데…. 떨어질 때 흔들릴 법도 하지 않습니까?” 놀란 그들에게 사실을 말할 수는 없고, 이들의 기를 팍 꺾어놓는 대답을 던졌다. “다 날려도 고작 오억. 리스크를 조금만 인내하면 수십, 수백억을 버는데 흔들릴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들에게서 못마땅한 표정과 부러움이 한 번에 드러났다. 오억 원이라는 거금 앞에 고작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가진 자들의 여유. 그 여유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가지는 부자. 아니꼽지만 부럽다는 걸 부인하기 어려울 거다. 이제 이야기를 끝내야 할 시점이다. 마지막은 나 역시 고모와 다를 바 없이 위협으로 끝냈다. “제가 말한 대로 잘 끝내주기를 바랍니다. 일이 잘못되면 제가 진서윤 사장님보다 더 악랄한 놈이라는 걸 아시게 될 테니까요.” 굳은 표정으로 내 협박을 가만히 듣던 그들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왜 진 사장님을 수렁으로 미는 겁니까?” “자잘한 가족 간의 다툼이라고 해두죠.” 자잘하다는 표현치고는 좀 잔인한 면도 있나? * * * 주가가 25만 원을 찍었을 때 모조리 팔아치웠다. 물론 한 번에 매도 주문을 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회사 투자금 30억은 5천억이 되었고, 나의 개인 투자금 5억은 800억으로 불어났다. 오세현은 겨우 160억을 벌었지만, 단 한 번도 후회하거나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주식은 파는 그 순간 잊어버린다는 진정한 프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혼자 있을 때 기회 놓친 걸 아까워하며 분통을 터트렸지는 모르는 일이다. 주가는 일주일 정도 삼십만 원 코앞에서 안간힘을 썼지만 넘지 못했다. 물론 장중 최고가로 잠시 그 선을 넘은 적도 있지만, 유지는 불가능했다. 그 일주일이 지나자 비행기가 추락하듯 하한가를 찍기 시작했다. 다가올 새천년의 기쁨 속에 들떠 있어야 할 여의도는 온통 잿빛이었다. 그 한가운데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가 무너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불과 3개월여 만에 70배 가까이 급등하면서 증권사 지점에서는 ‘모든 주식을 무조건 팔고 뉴 데이터를 사달라.’는 열풍이 불어닥쳤다. 이에 따라 145.50에 불과했던 코스닥 종합지수는 3개월 만에 266.00으로 82.8%나 급등했다. “닭(코스닥)이 소(거래소)를 잡아먹었다.”는 말까지 유행할 정도로. 주가가 30만 원이 넘었을 때는 코스닥지수도 292.55까지 올라 300 돌파는 문제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주가가 15만 원으로 급락한 뒤 이렇다 할 반등 시도도 못 한 채 다시 만 원대에 안착했다. ‘노다지’가 ‘휴지 조각’으로 변한 셈이다. 차세대 기술이라며 칭찬하던 언론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허황한 아이디어일 뿐이었다며 혹평했고 ‘벤처가 벤처답지 않고 극복해야 할 재벌을 닮았기 때문’이라며 회사 자체를 씹어대기 시작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한국의 빌 게이츠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이상수 사장을 희대의 사기꾼으로 묘사하며 그가 자주 다니던 룸살롱 아가씨의 인터뷰까지 지면에 실었다. 수십만 명이 알뜰히 모은 돈을 다 날리고 울부짖으니 그들의 분노에 바칠 제물을 준비하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주가라는 걸 누구나 알았지만, 모두가 한탕주의에 빠져 외면한 사실을 준엄히 꾸짖는 언론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패배한 탐욕은 절망을, 절망은 분노를, 분노는 터트릴 대상을 찾아 헤맨다. 진서윤도 똑같은 순서를 밟았다. 천사백억이 백억도 안 되는 금액으로 줄어들자 절망했다. 해를 넘기기 전에 지급해야 할 돈이 천사백억이다. 더는 버틸 수 없다. 해를 넘기게 되면 백화점 입점 업체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심할 경우 고소·고발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녀는 이 절망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임 상무! 이놈들은 언제 오는 거야? 내가 빨리 데려오라는 말, 못 알아들어?” “사, 사장님, 진정하시고….” “내가 지금 진정하게 됐어? 뭐 하냐고!” “연락이 안 됩니다. 전화도 받지 않고 출근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순양증권의 그 셋뿐만이 아니다.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가 무너진 후, 잠수 탄 여의도 사람은 한 트럭이 넘는다. “이놈들을 그냥…! 사람 풀어서 잡아와. 경찰청에 연락하든, 검찰에 부탁하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잡아오라고!” 임 상무는 집기까지 집어 던지는 진서윤을 멍하니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순양그룹의 힘으로 세 놈을 찾아내는 거야 뭐가 어렵겠느냐마는 이미 날아가 버린 돈이다.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은 펑크 난 돈을 어떻게 메우느냐를 궁리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진 회장을 찾아가거나 아니면 미라클의 오세현을 만나 필요한 돈을 구하는 게 최우선 순위 아닌가? 이렇게 히스테리만 부릴 때가 아니다. 진서윤은 임 상무의 처연한 시선을 느끼자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그녀도 바보는 아니다. 지금 당장 천억 원대의 돈을 구할 곳은 단 한 곳뿐이다. 오세현에게는 말도 꺼내지 못한다. 빚쟁이에게 돈을 더 빌려 달라고 하다가는 담보까지 날아가 버린다. 이럴 때도 역시 피를 나눈 가족뿐이다. “차 준비해. 평창동으로 간다. 지금 당장!” 인터폰을 향해 말하는 진서윤을 보자 임 상무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쉬었다. 다행이다. 모시는 사장이 완전히 정신 나간 건 아닌 것 같다. 진 회장에게 천사백억 정도는 푼돈이다. 진서윤이 무릎 꿇고 싹싹 빌고, 심한 꾸지람 한 번이면 차용증을 대신할 수 있다. 급한 불을 끄는 건 바로 혈육의 정이다. ======================================== [143] 일단 하나는 먹었고 2 “얼마라고?” “그게…. 처, 천사백억요.” “그 돈을 주식으로 홀라당 말아먹었다?” 진 회장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백화점 쥐여 줬더니 입점 업주들에게 줘야 할 돈을 주식에 꼬라박아? 제정신이냐?” “죄송해요, 아버지. 경영 자금 압박이 심해서 방법을 찾다 보니…….” “참 쉽게 산다. 경영 자금이 여의도에 굴러다니더냐?” “아버지. 순양전자도 투자한 회사라고요. 그래서 믿고….” 진서윤은 매섭게 노려보는 아버지의 눈빛에 변명을 멈췄다. 몇 발짝만 더 나갔다가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쫓겨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넌 이미 순양그룹과 별개가 아니냐? 남의 회사 뒤나 쫓아가는 게 가당키나 해?” “이렇게 몇 개월 만에 무너질 회사에 이백억이나 투자한 순양전자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투자 잘못한 건 저나 순양전자나 차이가 없다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왜 왔어? 남의 회사 트집이나 잡으려고?” 진서윤은 진 회장의 화난 표정에 아차 싶었다. 지금은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이다. “딱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돼요? 이 고비만 넘기면….” “오세현이에게 또 손 내밀면 만사 해결 아니냐? 내가 뭘 도와줘?” “안 돼요. 오 대표에게 더는 빌릴 수 없어요.” 기겁하는 딸을 보며 진 회장은 서랍 속에서 서류 뭉치 하나를 꺼내 툭 던졌다. “네가 원하는 대로 계열 분리까지 다 끝냈다. 이제 순양이라는 이름 떼더라도 상관없어. 주식 한 주 섞이지 않은, 완전히 별개의 회사야. 내가 도와주면 순양 돈을 횡령한 셈이 된다. 늙은 애비가 구속되는 꼴이라도 보고 싶은 게냐?” 진서윤은 서류 파일을 펼치지도 못한 채 파랗게 질려버렸다. “아, 아버지. 지금 이러시면 안 돼요. 지금 백화점 그룹이 제 손에 들어오면 큰일 나요. 이거 다시 되돌려야 한다고요!” “주식으로 돈만 날린 게 아니구먼. 정신도 날렸어. 네가 그렇게 원하던 걸 줬는데… 거절해?” “그게 아니고요….” “이거…. 애처로워서 어쩌나, 우리 딸. 남편도 버렸는데 회사도 버리려고?” “아니, 그게 아니고 잠시만 뒤로 미뤄 달라는 부탁이라고요.” “제정신이냐? 이거 네게 물려준다고 깨진 돈이 얼만 줄 알아? 그걸 다 날려버리라고? 도대체 넌 어떻게 생겨먹은 게야!” 진 회장이 화를 터트리자 진서윤은 눈만 질끈 감았다. 복잡한 채무관계부터 구멍 난 돈 천사백억, 새천년 첫 사업으로 오픈하는 대형 마트까지. 산재한 일 전부가 꼬여도 너무 꼬였다. 그런데 진서윤이 까마득히 잊고 있던 사실이 진 회장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런데 너, 주식 투자는 누구 명의로 진행했어? 혹시 차명이었냐?” 몰라서 묻는 건 아니다. 누구나 차명으로 회사 돈을 ‘유용’하지 않는가? 이건 확인하는 것이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세요?” “빨리 대답이나 해! 맞아?” “네.” “미치겠구먼.” 진 회장은 머리를 의자에 기댔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딸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진 회장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진서윤은 이럴 땐 아무 말 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안다. 그녀는 진 회장의 얼굴만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서윤아.” “네. 아버지.” 한참 만에 입술을 뗀 진 회장은 부드럽게 딸을 불렀다. “네가 가장 믿는 사람이 임 상무냐?” “네. 곳간 열쇠를 맡겨도 될 만한 사람이에요.” “그자도 널 충심으로 따르고?” “아마도요. 그런데 아버지, 왜 그러세요? 불안하게….”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진 회장은 속 시원한 대답은 피했다. “됐다.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 넌 돌아가서 회사나 챙기거라.” 알아서 하마. 이 말이 구원의 빛처럼 다가왔다. “아버지. 정말 고마워요. 저 정말 잘할게요. 그리고 천사백억…. 일 년 안에 다 정리하도록 노력할 거고요.” “무슨 소리냐? 천사백억이라니?” “네? 알아서 다 해주신다고…?” 모녀는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향해 물었다. 진 회장이 어긋난 의미를 먼저 알아챘다. “돈은 네가 해결할 문제다. 아직도 그따위 소리나 하는 게냐? 회사를 쪼갠 이상 일과 돈은 네 몫이다. 전부 말아먹더라도 내게 와서 손 벌리지 말아!” “아, 아버지.” “내가 해결하는 건 네가 구속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도록 막겠다는 뜻이다. 딸이라고는 딸랑 너 하나뿐인데 옥살이하는 건 애비로서 못 보겠으니 말이다.” “옥살이라니요? 그게 무슨…?” “넌 알 바 없다. 그만 돌아가. 지금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어서!” 진서윤은 아버지의 호통에 영문도 모른 채 물러나야 했다. 돈 걱정 가득 안고 돌아가는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 * * “그래 전부 알아봤어?” “네. 명동에서 몇 바퀴 돌린 겁니다. 총 16명의 이름으로 분산했더군요.” “끙―” 진 회장은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돈은 어떻게 뺐어?” “회사에서 대표이사들로, 그다음 명동입니다.” “서윤이 손때는 묻었고?” “없습니다.” “그건 다행이구먼.” 이학재 실장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염려하실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조심한 것 같습니다.” “자네가 하루 만에 파악했는데 검찰은? 반나절이면 돈 흐름 전부 파악해.” 머리를 흔드는 진 회장을 보며 이학재는 그의 걱정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생각했다. “아무리 심각한 사태라도 주식 매입한 사람까지 조사하겠습니까?” “5조가 넘는 돈이 증발했다. 그 5조가 재벌 돈도 아니고 세금도 아니야. 애 업고 증권사를 들락거린, 반찬값이나 벌려는 아줌마들 돈이라고. 수백만 명의 분노가 하늘을 찔러. 이거 제대로 정리 못 하면 정권마저 흔들린다. 희생양을 정할 때까지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해.” 진 회장은 이 일을 단순한 주식 폭락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뉴 데이터인지 뭔지 그놈 주가가 한창일 때 순양전자가 보유한 주식을 내다 팔려고 하는 걸 내가 막았어. 열 배의 이익이라고 영기 그놈이 와서 입에 거품을 물더라.” “이렇게 될 줄 아셨습니까?” “썩어빠진 정치하는 놈들이 붙어서 작업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그걸 모를까? 차라리 돈 이백억 날리는 게 낫다 싶더라고. 만약 그때 팔았어 봐. 이 난리의 주연이 우리 순양전자라고 할 게야.” “이젠 피해자니까 그런 일은 없겠군요.” 팔순이 가까운 나이에 어떻게 저런 판단력이 살아있는지…. 참 대단하다 싶었다. “이미 검찰과 금융위가 수사한다고 칼을 빼 들었어. 작전 세력부터 색출할 텐데, 서윤이 이름 나오지 않게 조치해.” “네. 회장님. 그런데 명동 놈들 입에서 서윤이 이름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임 상무 그자가 자금 총괄이라고 하니 그놈 뒤를 털어봐. 백화점과 호텔 돈을 십여 년 만졌으니 떡고물 많이 묻었을 게다. 그거 못 본 척해주는 조건으로 이거 책임지게 해야지.” 혹시라도 모를 일을 대비해 대신 옥살이할 놈은 이미 정했다. 진서윤의 죄를 다 뒤집어쓰고 순순히 검찰청으로 걸어가게 만드는 건 이학재가 할 일이다. “이 건은 그렇게 정리하겠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어떻게 할까요? 자칫 잘못하면 경영권을 뺏길 수도 있습니다.” 미라클과의 계약서는 분명 심각한 수준이다. 이 일을 빌미로 채권을 주장하며 담보를 가져가 버릴지도 모른다. 이미 그 담보는 진서윤의 손으로 들어갔다. 오세현이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뺏어버릴 수 있다. “무너지는 것은 언제나 한꺼번에 무너진다. 무너질 때까지 참고 기다리다 한꺼번에 무너진다. 탑을 바라보면 무언가 무너져야 할 것이 무너지지 않아 불안하다.” 진 회장의 입에서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구절. 이학재는 어디서 들어본 듯해서 머리를 갸웃했다. “시(詩) 아닙니까?” “그래. 탑(塔)이라는 시야.” “불안하셨습니까?” “회사는 건재할 게야. 무너질 탑은 바로 자식이지.” 이미 경영권 방어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하지만 탑이 무너지는 걸 기다린 건 아닐까? 아니, 불안한 탑이 무너지는 걸 일부러 지켜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무너질 불안한 탑 대신 ‘가장 안정된 자세로 비바람에 천 년을 견딜’ 새로운 탑을 원했던 건 아닐까? 이학재는 의문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탑이 누군지 그는 정확히 안다. * * * “자,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고모 말입니까?” “그래. 이상수 사장 덕분에 오천억이 넘는 돈이 들어왔어. 네 고모 회사 차지하는 데 썼던 돈, 단번에 번 거잖아.” 오세현은 ‘빌려줬던’이라는 단어 대신에 ‘차지하는’이라는 단어를 썼다. 내 목적이 뭔지 정확히 안다는 뜻이다. “네 할아버지가 도와준 게 확실하다. 딱 때맞춰 그룹 분리 작업을 끝마친 거 보면 말이다.” “도와준 게 아니라 제게 주신 거겠죠.” “줬다고 하기에는 모자란 감이 없지 않아. 우리가 담보로 잡은 주식은 30%에 불과해. 아직 진서윤 사장이 35%를 쥐고 있다.” “고모가 사고 친 돈이 천사백억입니다. 그 돈으로 25%를 더 가져와야죠.” “순순히 줄까?” “회사 돈 천사백억을 주식 투자로 날렸어요. 죄질이 악랄합니다. 이거 묻어주는 것까지 환산해야죠.” 30%의 주식을 가진 대주주가 대표이사의 횡령을 눈감아준다. 물론 횡령한 돈 천사백억도 메꿔주고. 이정도면 고모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총대는 내가 메고? 또 악역을 해야 하는 거야?” “아뇨. 이번엔 제가 나서겠습니다. 누가 백화점 그룹의 진정한 주인인지 정확히 알려줘야죠.” 의외라는 듯한 표정의 오세현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머쓱해졌다. 폼 잡으려 한 말이 아닌데 왠지 손발이 오글거린다. “네 고모가 많이 놀라는 건 그렇다 치고, 집안사람들이 너에 대한 경계심이 더 커지겠는걸? 괜찮겠냐?” “고모가 입을 다물 겁니다. 아직 욕심을 버리지 못했으니 당분간 제 곁에 바짝 붙어 다닐 겁니다.” “고모를 수족처럼 부리겠다? 너도 참 독하다.” “예전에 한 번 말씀하셨죠? 우리 집안 내력입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하하.” “그런데 헐레벌떡 달려와야 할 네 고모는 무슨 배짱으로 잠자코 있는 거지? 우리가 먼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건가? 여전히 공주님 흉내네.” 오세현이 투덜거리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기다리던 고모는 아니었다. “오 대표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진 실장님 좀 도와주세요!” 갑자기 들이닥친 이는 바로 임 상무였다. “뭡니까? 또 무슨 일이 터진 겁니까?” 황당하기도 하고, 고모가 무슨 엉뚱한 일이라도 저질렀는지 겁이 나기도 했다. “수, 순양에서 절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제가 전부 뒤집어쓰게 생겼다고요. 제발 좀 구해주십쇼!” 희생양이라는 말만 들어도 모든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횡령은 무거운 죄다. 오세현도 짐작 못 할 사람은 아니지만 임 상무를 달래가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학재 실장이 다녀갔습니다. 제 실수를 샅샅이 뒤져 죄를 따지는데…. 전 정말 억울합니다.” 이학재까지 등장했다면 실수가 아니라 임 상무가 저지른 위법 행위를 샅샅이 찾아냈다는 뜻이다. 이학재는 절대 허술한 사람이 아니다. 임 상무는 미라클과 고모의 계약 내용을 훤히 하는 사람이다. 순양의 협박에서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백화점 그룹의 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미라클밖에 없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우리의 본색을 몰라 저지른 실수다. 순양이라는 호랑이를 피해 늑대 굴로 들어온 여우. 이것이 바로 임 상무의 운명이다. ======================================== [144] 일단 하나는 먹었고 3 “뭐가 그리 억울하세요?” “네?” “이학재 실장이 찾아낸 죄나 실수 중에 없던 사실을 꾸며낸 것이 있습니까?” “그… 그게….” 임 상무는 버벅거릴 뿐 확실한 부인을 못 한다. “우리가 상무님을 도우려면 모든 걸 다 알아야 합니다. 실수가 뭔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전 정말 큰 문제를 저지르지….” “아뇨. 상무님 말고요.” “네?” “상무님 목에 이학재 실장이 칼이 들이댔는데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우리도 칼을 빼 들고 상대의 목을 겨눠야죠. 바로 진서윤 사장 말입니다. 어차피 이학재 실장은 진서윤 사장의 대리일 뿐이니까요.” 임 상무는 내가 고모를 공격하자고 하니 믿을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오세현은 입 닫고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이 판은 내가 나서겠다고 했으니 완전히 빠지겠다는 의사를 보여준다. “진 실장님. 진심이십니까?” “상무님도 이미 짐작하셨으니 이리로 달려오신 것 아닙니까? 고모의 자리를 미라클이 차지할 수도 있다는 짐작. 맞죠?” “그, 그렇습니다.” “그럼 전부 다 말씀해주세요. 고모가 주식 투자로 홀라당 날려 먹은 천사백억. 그 돈의 출처와 자금 흐름. 그걸로 고모의 목에 칼을 겨눠야죠. 그럼 둘 다 칼을 내려놓자는 제안을 이학재 실장이 먼저 할 겁니다.” 임 상무는 오세현을 흘낏 쳐다봤지만, 어깨만 으쓱할 뿐 여전히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임 상무가 주저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한다. 혈육으로 엮인 관계 아닌가? 조카가 고모의 약점을 쥐고 칼을 겨누기보다는 생판 남인 자신을 매장하려는 속셈이 아닐까 의심이 먼저 들 것이다. 주저하는 그를 보며 말했다. “고모를 모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증명할 수 있는 팩트만 말씀하세요. 괜히 부풀려 봤자 역으로 당합니다. 팩트가 임 상무님이 쓸 수 있는 칼이 될지 안 될지는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조심스레 말을 꺼내기 시작한 임 상무는 차츰 목소리를 높여갔다. 천사백억의 출처가 전부 다 나왔을 때는 아예 귀청이 따갑도록 소리 질렀다. “완전히 미친 거라고요! 아무리 줄 돈 안 주고 버티는 게 부자들의 습성이라지만 이건 정도를 넘었어요. 내일모레면 입점 업체들 전부 머리에 띠 두르고 백화점 입구에서 농성 부릴 겁니다.” “그러니까 천사백억이 빠져나가서 명동으로 흘러들어 가는 동안 진서윤 사장의 손을 거친 건 아니라는 거죠?” “그렇습니다. 회사 계좌에서 유령 회사로, 그다음 명동으로 흘러들어 간 겁니다.” “유령 회사 대표는 누굽니까?” “말 그대로 유령입니다. 행불자 명의로 만든 회사죠. 꽤 오래되었습니다.” “비자금 창구군요.” “네. 이런저런 명목으로 세금계산서 발행해서 호텔과 백화점 돈을 빼먹었죠.” “그 회사만 조사해도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나오는 셈이군요.” “네. 진 사장님은 꼼짝 못할 겁니다.” “돈 만지는 분이 셈이 느리시네.”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내 눈을 보며 임 상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령 회사로 돈을 쏜 건 대표이사들입니다. 각 백화점 사장들, 호텔 사장들. 이 사람들이 돈을 빼돌린 증거 아닙니까? 거기에 고모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요? 그 유령 회사는 진 사장님의 지갑이라는 걸?” “누구나 다 알지만 법원은요? 검찰은요? 법정증거주의. 모르세요? 유령 회사가 고모의 지갑이었다는 걸 서류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증언도 증겁니다. 대표이사들, 임원들 전부 증인이에요.” “바로 그겁니다.” 내가 무릎을 탁 치며 머리를 끄덕이자 임 상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무님이 그분들 전부 증언할 수 있게 설득하세요. 그럼 나머지는 제가 맡겠습니다.” 모시는 주인을 배신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주인을 받아들인다. “문제 터지면 그 대표이사님들 전부 상무님과 같은 처지라는 걸 알려주세요. 어차피 증발한 천사백억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 합니다. 상무님 혼자 순순히 독박 쓰면 조용히 넘어가겠지만….” “제가 어떻게 가만있겠습니까? 절대 혼자 죽을 생각 없습니다.” “그럼 시끄러워질 테고 호텔이나 백화점 대표이사들에게 불똥이 튑니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상무님을 가리킨다면요?”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임 상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잘 안다. 충성하는 주인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이 드문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들의 손끝이 진서윤 사장으로 향해야 합니다. 설득하세요. 꼭!” 아직 두려움에 떨림이 멈추지 않은 임 상무의 두 손을 꼭 잡았다. * * * “대표님. 선택하셔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임 상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내가 진 회장님께 입은 은혜가 얼만데 그따위 소리를 하는 거야?” “살고 봐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이 친구야! 자네가 이러면 안 되지. 진서윤 사장이 자네를 얼마나 신뢰하나? 그런데 배신하자고?” 순양백화점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선임이라고 할 수 있는 강남점 대표이사는 임 상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표님. 진 사장님은 지금 자기가 사고 친 걸 제 어깨에 올리려고 합니다. 무려 천사백억이에요. 제가 이걸로 감옥 가면 십 년은 옥살이해야 합니다. 제가 부귀영화 누리자고 이런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옥살이 10년이라는 말이 강남점 대표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욕할 수도 손가락질할 수도 없는 말이다. 10년이면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바깥세상 공기를 마실 것 아닌가? 임 상무는 강남점 대표의 표정을 살피며 때를 놓치지 않았다. “대표님. 저 솔직하게 말씀드리는데요…. 혼자는 절대 안 죽습니다.” “뭐?” “모든 순양백화점, 호텔 장부는 제 손을 다 거쳤습니다. 그간 빼돌린 비자금 내역, 내 손에 있어요. 그거 터트리면 백화점 그룹 임원들은 물론 사장급 전부 줄소환입니다.” “이 작자가! 보자 보자 하니까!” 노골적인 협박에 큰 소리가 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임 상무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대표님. 이건 새로운 변화의 기회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 진서윤 사장의 그늘에서 벗어날 기회 말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대표님도 그 자리에 계셨지 않습니까? 계약서 말입니다.” “미라클?” “네. 아시다시피 미라클은 투자사일 뿐입니다. 그들이 지금 벼르고 있는데 이 기회를 놓치겠습니까? 그 회사가 최대주주 자리에 오르면 우리 백화점 그룹은 그야말로 소유와 경영이 완벽하게 분리된 이상적인 모습을 갖춥니다.” “투자사니까 전문경영인 체제로 간다?” “투자사가 소유한 회사 중에 전문경영인 체제가 아닌 곳 있습니까? 우린 이미 순양그룹에서 떨어져 나왔습니다. 진 회장님도 어쩔 수 없다는 뜻입니다.” 월급쟁이 사장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전횡을 일삼는 오너 일가의 지배를 벗어나 완전한 독립 사업체를 스스로 경영한다는 건 협박보다 더 솔깃한 유혹이었다. * * * 대형 할인마트 1호점이 개장을 준비하느라 막바지 공사에 여념이 없을 때, 1호점과 나란히 서 있는 빌딩으로 들어갔다. 20층짜리 빌딩이 아직은 한산했지만, 곧 발 디딜 틈 없는 곳으로 바뀔 것이다. 이곳이 바로 순양유통의 본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대회의실에 들어서자 신품 가구 냄새와 희미한 페인트 냄새가 기분을 들뜨게 했다. 음료를 마시며 바깥 풍경을 보고 있을 때, 윤기 나는 새하얀 모피로 몸을 감싼 고모가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조금은 딱딱하고 건조하게 인사를 건네자 고모는 회의실을 두리번거렸다. “오 대표는? 아직 안 왔어? 아니면 화장실?” “오 대표는 오늘 안 오십니다. 제가 그분을 대신해서 온 거니까 저와 이야기 나누시면 됩니다.” 고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천만다행이다. 쉽게 풀리겠네? 우리 조카랑 쉽고 편하게 이야기하면 된다, 이거지?” 대답 대신 조용한 미소만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도준아, 오 대표가 뭐래?” “채권에 대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수 있는지 확인부터 해야겠습니다. 이미 주식으로 큰 피해를 봤다는 건 이 바닥에서 소문이 자자하니 감출 생각 마시고요.” “너무 그러지 마. 괜히 긴장되잖아.” 고모는 최대한 여유를 보이면서 냉랭한 분위기를 풀려고 애를 썼지만, 받아줄 생각은 없다. “힘들죠? 채무 이행은 고사하고 당장 메꿔야 하는 돈이 천억 넘을 텐데…. 어쩌시렵니까?” “그래. 이왕 말 나왔으니 내가 부탁 좀 하자.” “부탁요?” “응. 돈 조금만 더 빌려줘. 천오백억. 이 돈 역시 주식을 담보로 맡길게. 이자도 종전과 같은 조건으로. 오 대표에게 말 좀 잘해줘.” 고모는 여전히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마냥 원하는 것만 늘어놓는다. “그 말은 원금 상환과 이자 지급이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됩니까?” “얘가 무슨 말을 그리 험악하게 하니? 불가능이 아니잖아. 조금 더 미뤄 달라는 거지.” “고모. 정확하게 말씀하세요. 며칠 남지 않은 올해 안으로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높아진 내 목소리에 다른 낌새를 차린 고모는 그제야 긴장한 듯 목소리가 떨렸다. “도, 도준아…….” “불가능하다는 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는 테이블 위에 계약서 사본을 올려놓았다. “계약서대로 유통, 백화점, 호텔 등 담보 설정된 주식은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소유로 이전신고 시작하겠습니다. 이의 없으시죠?” “도준아! 너 왜 이래?” “소리치지 마세요. 귀 안 먹었습니다.” “오세현 그놈이 이러라고 시켰어? 내 회사 차지하려고?”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 눈앞에 닥치자 고모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계속 나왔다. “달러 가지고 순양자동차도 헐값에 가져가더니 이젠 나야? 날강도 같은 새끼. 내가 순순히 당할 거라고 생각해? 어림도 없어. 너 빨리 가서 그 새끼한테 전해. 순양그룹을 우습게 본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해준다고. 어서!” 악다구니 쓰는 고모의 모습은 여느 중년 여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동안 우아하고 고상했던 귀족 흉내는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내가 전할 것 같습니까? 아니, 전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신 차리세요. 지금 이게 악쓰고 떼쓴다고 해결되리라 생각하십니까? 고모가 가졌던 백화점 그룹은 바로 오늘! 고모 손을 떠납니다. 비록 회사지만 꽤 애정을 쏟아부었을 텐데… 눈물을 보이는 게 정상입니다.” 평상시 살갑게 구는 조카는 온데간데없고 완벽한 오세현의 대리인 같은 모습에 고모의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 “도, 도준아.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오 대표 설득하자. 네가 조금만 도와주면….” “고모.” “응.” “오세현 대표를 왜 설득해요? 그분은 딱히 백화점에 관심도 없는데?” “뭐?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니?” 내 입꼬리에 걸린 웃음이 비웃음이라는 걸 언제쯤 알아챌까? “순양유통을 비롯한 백화점 그룹 전부가 고모 손을 떠나면 누구 손에 들어갈 것 같습니까? 오세현? 천만에요.” “……?” 고모는 눈을 깜박이며 내 입만 바라본다. 이제 저 얼굴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바뀔 것이다. “전부 다 제가 가질 겁니다. 아시겠어요? 자동차에 이어 백화점 그룹도 제 손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리고 전 고모 사정 따위는 봐 드릴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어요.” 충격이 크면 현실감이 떨어지나? 아직 내 말의 의미를 모른다. ======================================== [145] 일단 하나는 먹었고 4 “도, 도준아….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 한참 만에 입을 연 고모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제 말 그대롭니다. 오세현 대표는 이 일에 관심 없어요. 계약서대로 이행하는 건 오로지 제 뜻입니다.” “그러니까 네 뜻이 도대체 뭐냐고? 진심이야? 내 회사를 네가…?” “제가 헛소리한 적 있습니까? 내년부터 순양유통의 주인은 제가 될 겁니다. 물론 유통 산하의 백화점, 호텔, 골프장, 콘도 할인마트 체인. 이 모든 것을 다 가진다는 뜻입니다. 이제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확실히 이해되십니까?” 확실하게 이해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퍼즐은 스스로 맞춰야 한다. 퍼즐 조각 자체를 만져본 적 없으니 어떤 그림인지 알 도리가 없다. 정물화라면 쉽게 이해하겠지만, 이 그림은 추상화다. 이해하는 데 한참 걸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단 하나의 사실은 깨달았다. “너… 너 이 자식, 설마 날… 배신한 거야? 날 이용했어?” “언제 우리가 같은 편이었던 적이 있던가요? 우리 집안 사람들은 항상 서로를 경계하며 살지 않나요? 배신, 이용…. 이런 단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고모가 날 동업자라고 여긴 적 한 번도 없는 것처럼요. 단지 이용하려고만 했죠.” “어린놈의 새끼가, 감히 날 농락해? 가만…. 너 이 자식…. 주식 투자도 다 네놈 계략이었던 거야?” “네 배나 벌었을 때 팔라고 한 건 접니다. 잊었어요? 다 팔았다고 했고, 저도 모르게 다시 사 모은 건 고모 아니었나요?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야!” 놀람도, 경악도, 혼돈도 사라졌다. 아니 버렸다, 단지 분노만 남겨두고 내게 쏟아내려 한다. 이 사람의 분노를 내가 다 받아내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런 자비로운 마음도 없다. “소리 그만 지르시고 마음 가라앉히세요. 지금 백화점 그룹의 향방을 결정하는 순간입니다. 순양유통의 대주주로서 진서윤 사장님을 그 자리에 계속 앉혀 둘 것인지 말 것인지,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냉정하게 이성을 찾는 모습을 보여주셔도 모자랄 판입니다.” “야 이 자식아. 계약서대로 해! 그래 봤자 30%야. 대주주? 인정해주지. 하지만 미라클은…. 아니, 너는 아무것도 못 해. 주주는 나눠주는 배당금이나 챙겨.” 고모는 화려한 모피코트를 휘날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 이 건물에서 당장 나가! 넌 자격 없어. 일 년에 한 번 주주총회 자리나 지켜!” “앉으세요. 대주주 말씀 아직 안 끝났습니다.” “뭐야?” 시뻘건 핏발이 고모의 흰자위를 다 덮었다. “말씀하셨다시피 30% 지분의 대주주로서 주식 투자로 회사 돈을 날려 먹은 고모를 배임 횡령으로 고소할 생각입니다.” 고소라는 말이 화살처럼 꽂혔는지 고모는 입을 떡 벌렸다. “대주주가 몸을 움직이면 대표이사나 임원 물갈이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죠. 특히 고모처럼 회사 시스템에도 없이 회사를 주물럭거리며 손해를 끼치고 돈이나 빼돌리는 사람은 하루빨리 사라져야죠.” 정신을 차린 고모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비웃었다. “할아버지가 그건 안 가르쳐주디? 우리가 왜 회사 시스템에 없는 사람인지? 바로 이런 때를 위해 그런 거야. 지배는 하되 책임질 일이 없는 존재. 그게 바로 우리야.” “그런 건 배우지 않아도 압니다. 저뿐만이 아니죠. 전 국민이 알아요.” “알아도 어쩔 수 없으니 보고만 있는 게지. 너도 그 국민과 다를 바 없어. 어떻게 할 수도 없을걸? 네 말대로, 대주주님께서는 대표이사나 임원이나 갈아치워. 그놈들이 다 책임져야 하니까.” “과연 그럴까요?” 난 휴대전화를 꺼내 단축번호를 눌렀다. “네. 접니다. 모두 들어오시죠. 해명해야 할 시점 같습니다.” “뭐, 뭐야? 누구랑 통화한 거야?” “책임질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인지 들어봐야죠. 고모를 대신해서 책임질 생각이 있는지, 아니면 있지도 않은 죄 뒤집어쓰기보다는 저 살자고 고모를 향해 하나같이 손가락을 가리킬지.” 회의실 바깥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리자 고모의 시선은 문을 향했다. “그들이 동시에 고모를 지목하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아, 그런 걸 배신이라고 하죠.” 이때 회의실 문이 활짝 열리며 임 상무를 비롯한 백화점, 호텔 대표이사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그들은 고모의 시선을 피한 채 대회의실 의자에 자리 잡았다. “쓸데없는 인사말은 건너뛰죠. 여기 계신 분들은 이미 미라클과의 계약서 내용을 잘 아실 테니까요.” 회의실 상석에 앉은 고모의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진서윤 사장님이 잃어버린 천사백억, 이 돈의 출처는 바로 여러분이 책임진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진서윤 사장님께서는 여러분의 충심을 굳건히 믿고 계시더군요. 그 돈에 대한 책임은 여러분이 안고 가신다고요. 맞습니까?” 단 한 명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을 뜻합니다. 여러분께서 책임지실 겁니까!” 테이블을 탕 치며 소리치자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임 상무였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나이 먹고 노후를 감옥에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한 명이 시작하자 나머지 모두도 고모에게 머리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만 던졌다. “다, 당신들….” 이미 사색이 된 고모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한평생 순양그룹에 몸담고 충성을 바친 사람들이기에 더 믿고 싶지 않은 거다. “누… 누가 감옥 간다고 그래? 우리 순양을 못 믿어? 저놈이 아무리 난리 쳐도 문제는 없어요.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집행유예로 끝나.” 임 상무가 모두를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 집행유예로 끝날 정도면 사장님은 무혐의 받으시겠군요. 아니면 기소유예? 뭐가 두려우십니까?” “임 상무!” 고모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임 상무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볼 뿐이다. “임원들이나 대표이사 먼지까지 털어서 약점 잡으시려는 생각은 그만두세요. 혹시 단 한 명이라도 조사 대상에 오르면 제가 직접 고모를 고소할 것이고, 이분들 전부 증인이 될 겁니다.” 나의 마지막 경고를 끝으로 불편한 침묵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자신들이 가진 주사위를 던졌으니 결과만 기다린다. 그 결과를 알려줄 딜러는 나밖에 없었다. “여러분들은 회사의 향방이 어디로 흘러가든, 지금의 위치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서로 칼을 겨누는 형국이니 함부로 휘두르지 못하지요. 안심하시고 돌아가십시오.” 이들은 허겁지겁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숨 막힐 듯한 자리를 벗어나는 그들의 뒷모습은 큰 짐을 내려놓은 듯 가벼워 보였다. 텅 빈 회의실에 남은 고모는 정신이 반쯤 나간 듯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 이제 상황은 잘 아셨을 테고…. 현실적인 문제를 이야기해봅시다. 며칠 뒤에 돌아올 천사백 어음, 어떻게 막으실 겁니까? 할아버지는 계열 분리가 끝난 회사에 돈 던질 분이 아니시니 막을 방법은 없을 겁니다. 아, 큰아버지들이 계시긴 하지만…. 관둡시다. 저보다 더 독한 분들인데.” 내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알기 힘들 정도로 그녀는 무표정하기만 했다. 슬슬 짜증이 솟구쳤지만, 고모가 판단 가능할 정도까지 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래야 준비한 계약서의 글자라도 읽을 것 아닌가? 천장을 향하던 시선이 나를 향했을 때 그녀는 이성을 되찾은 듯 보였다. “고모. 지금부터 제가 손을 내밀 겁니다. 그 손을 잡으시면 우리는 한배를 탄 동지가 될 거예요. 전 자기 살자고 충실한 사람의 뒤통수치는 고모와 다릅니다.” “내가 네 밑에서…? 감히 그딴 개소리를 내게?” “오세현 대표를 보세요. 그분이 제 밑의 사람으로 보입니까? 동등해 보이지 않던가요?” 눈만 깜빡거리는 고모는 내 말의 의미를 알아채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그, 그럼…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실질적인 대표이사가 너란 말이냐?” “그보다 좀 더 크게 보세요. 95% 이상의 주식을 가진 대주주이며 이 회사가 운용하는 자금의 70% 이상이 제 돈입니다. 실질적인 대표이사는 오세현 대표가 맞죠. 전 전문경영인을 머슴이나 아랫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유만 할 뿐, 경영은 온전히 맡기죠.” 막대한 펀드까지 내 돈이라는 걸 알려주자 회사를 뺏어버리겠다고 말했을 때보다 더 놀랐다. “이제 제 눈을 다시 보고 결정하세요. 아진그룹을 인수하고, 순양자동차를 먹은 게 제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2년 전 제가 대학교 신입생 때였어요. 이런 나를 진짜 적으로 삼고 싶으세요? 아니면 동지로 하고 싶으세요?” “도, 도대체 넌…?” “제 손잡으세요. 고모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 못 이깁니다. 차라리 제 손잡고 재벌가의 일원으로 누릴 수 있는 삶을 계속하세요. 큰아버지들은 절대 이런 기회를 고모에게 안 줍니다. 아시죠?” “이 사실을 아버지도 아시니? 네 할아버지 말이야.” “유일하게 제 본래의 모습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자동차를 순순히 내어주신 겁니다. 아시겠어요? 할아버지가 절 총애해서 밀어주는 게 아니라 우리 집안에서 유일하게 순양그룹을 믿고 맡길 만하기 때문에 총애하시는 겁니다.” “서, 설마…. 벌써?” 말을 잇지 못했지만, 그녀가 알고 싶은 건 뻔했다. “할아버지도 손자보다는 아들을 더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금융 부분 정도만 주시는 거고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이미 짐작하시고 계실 겁니다. 언젠가는 제가 전부 다 차지한다는 것을요.” 고모의 머릿속에서 추상화의 본모습이 슬슬 그려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표현하기 힘들었던 안갯속의 그림자가 실체를 드러내니 충격을 넘어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였다. 어쩌면 포기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밧줄 하나를 내려주면 고모와의 지루한 싸움은 끝난다. “전 숨김없이 모든 걸 말했으니 고모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제 손을 거부하시면 감옥에서 십 년은 썩게 만들어드리죠. 천사백억의 횡령 사실이 새천년의 첫 뉴스가 될 겁니다.” 그녀가 단 하나의 사실만 알기를 바랐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할아버지가 고모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고모보다 더 사랑하는 순양그룹을 지탱할 유일한 사람이 나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 “내가 네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되지?” “절 대신해서 백화점 그룹을 이끌게 해드리죠. 오세현 대표가 절 대신해서 미라클을 이끌 듯이 말입니다.” “지, 지금처럼?” “임원 인사는 제가 최종 결정합니다. 지금처럼 회사 자금을 마음대로 쓰지 못할 거고요. 아, 호화로운 생활은 영위하게 해드리죠. 특별한 실수만 없다면.” 동아줄에 꿀을 좀 발라 놓는 것도 빠른 선택을 도와주는 방법이다. “내가 뭘 해야 하지?” 이제 계약서 글자 정도는 읽을 수 있을 만큼 정신이 든 것처럼 보인다. 난 준비한 서류를 내밀었다. “핵심만 말씀드리죠. 고모가 보유한 순양유통 주식 중 일부를 천사백억에 사겠습니다. 그럼 제가 55%의 최대 주주가 됩니다.” 딴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거부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안다. 1차 부도 그리고 배임 횡령. 마지막으로 법정 구속. 실룩거리는 얼굴의 고모에게 펜을 내밀었다. “제 손을 잡으세요. 그럼 진양철 회장의 딸로서 누릴 수 있는 건 하나도 잃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떨리는 손이 펜 끝을 잡았다. ======================================== [146] 일단 하나는 먹었고 5 영토싸움이 끝나면 가장 먼저 황제에게 보고를 올려야 하는 게 절차며 예의다.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에게 이런 소식을 듣는 것만큼 배신감 느끼는 일도 없다. 영토싸움의 결과를 조용히 듣던 할아버지는 보고가 끝나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 고모는 어떠냐? 충격이 심할 텐데?” “잘 버팁니다. 말씀드린 대로 고모의 생활은 변함없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고. 고생했다.” 고생했다는 말이 참으로 고맙게 들렸지만, 아무래도 할아버지의 긴 한숨이 마음에 걸렸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마음 쓰시게 해서….” “아니다. 이제 안심하겠구나. 계열에서 분리하고 나서 계속 불안 불안 했다. 뭔 일이 터지지나 않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심해도 되겠지. 네 녀석이 손에 쥔 거 까먹을 놈은 아니니 말이다.” “더 키우고, 더 탄탄하게 만들겠습니다.” 내 표정을 슬쩍 보던 할아버지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하나만 묻자. 그 주식 말이다. 네가 덫을 놓은 게냐? 서윤이가 걸려서 허우적대도록?”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고모도 그중 한 명입니다. 차이라면 일반인은 적금 깨서 들어왔고 고모는 천문학적인 회사 돈을 들고 들어간 것뿐입니다.” “네가 슬쩍 불을 붙인 건 아니고?” “아닙니다. 전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뿐입니다. 운이 좋았죠.” 딱히 믿는 눈치가 아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가 어떤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 당부의 말도 하신다. 아니, 부탁인가? “도준아.” “네.” “네가 나를 닮지 않았으면 하는 게 하나 있다.” “할아버지께서 염려하시는 게 뭔지 압니다. 그런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테니 걱정은 거두셔도 됩니다.” “그래, 고맙구나.” 유일한 형제마저 잔혹하게 내쳐버린 분이다. 형제의 자식인 조카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소식도 모른다. 아, 우리는 모르지만, 혹시 할아버지는 그들의 근황을 전부 파악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게는 형제보다 더 먼, 한 다리 건넌 친척. 얼마든지 내쳐버릴 수 있는 관계. 고모, 혹은 큰아버지. 할아버지는 내가 당신의 자식을 냉혹하게 대하는 게 두려운 것이다. 핏줄에 대한 걱정을 덜어낸 할아버지는 회사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물건 파는 건 지금껏 네가 했던 것과 많이 다르다. 특히 소비재는 더 그렇다. 자신 있느냐?” “지주는 마름을 잘 관리하고 마름은 소작농을 잘 관리하면 소출량은 많아집니다. 가끔 소작농들 불러다가 고기 좀 먹이는 게 제가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보다는 비옥한 땅을 찾아 사들이는 게 더 중요합니다.” 조심스레 자신감을 피력하자 할아버지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깔보는 듯, 비웃는 듯한 묘한 웃음이다. “서윤이가 기대 이상으로 백화점과 호텔은 잘 굴렸어. 이유가 뭔지 아느냐?” “제 생각에는… 고모가 바로 VIP 고객의 본질을 꿰뚫은 것 같습니다. 고모는 그들보다 한 단계 위의 사람이니까요.” “그래. 네 고모는 돈 많은 자들을 상대했다. 자연스럽게 고객을 정확히 아는 거지. 그래서 간혹 쓸 만한 말을 툭툭 던졌고 임직원들은 그걸 완벽하게 실행한 게야. 너도 그런 게 필요하다.” “전 괜찮습니다. 고모는 앞으로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니까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할아버지는 알 것이다. 고모를 폐족처럼 단번에 내치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를 유지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또 다른 의미를 말했다. “네 녀석이 딴 놈들과 다르게 돈 쓰는 재미를 모르는 건 나도 기특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안목이라는 게 있다. 물건을 보는 안목. 그건 자꾸 보고, 접하고, 써보면서 키우는 거다.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한 허영이 아니라 진짜 가치를 보는 눈. 그걸 키워봐라.”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꼭 백화점이나 호텔 경영만을 위해 필요한 건 아니군요.” “넌 젊지 않으냐? 살날도 많이 남았는데…. 인생을 풍성하게 만드는 유용한 도구가 될 게다.” “명심하겠습니다.” 오늘만큼은 최대한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순간일 테니까. 미덥지 못한 딸과 신뢰할 수 있는 손자 사이를 오가는 복잡한 순간이니 내가 그 마음을 달래야 한다. “저기, 할아버지.” “됐다. 난 지금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서 눈물 나려는 걸 겨우 참고 있는 거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고생했다. 촌구석에 있는 땅 몇 평만으로 아진그룹을 손에 넣고 순양자동차를 흡수했다. 이젠 백화점과 호텔까지. 넌 모르겠지만, 아니 아무도 모르겠지만 넌 지금 재계 순위 17위의 대기업 총수 자리에 오른 거다.” “전부 할아버지께서 필요할 때마다 선물을 주셔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제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닙니다.” 17위나? 아, IMF 여파로 다들 형편이 팍 쪼그라들었지. 나야 뭐, 털 거 다 털어내고 알짜배기만 챙겼으니… 빈집에 슬쩍 들어간 셈인가? “어울리지 않게 겸손은. 대현그룹 회장이 돈으로, 회사로 장손을 얼마나 밀어줬는데? 그거 홀라당 다 까먹고 지금 유럽 지사에서 반백수로 지낸다. 도와준다고 아무나 하나?” 할아버지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 등 뒤에 서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대로만 가거라. 천천히, 한 걸음씩. 조용하고 은밀하게. 알겠니?” “네. 다치는 사람 나오지 않도록 더 조심하고 챙기겠습니다.” 난 내 어깨에 올린 할아버지 손을 꼭 잡았다. “그래 주면 고맙고.” * * * “결국 해냈구나. 축하해.” “전부 삼촌 덕분이죠. 고맙습니다.” “그 덕분이라는 거, 말로만 퉁 치려고 하면 안 된다. 화끈하게 갚아.” “일단 이거부터 먼저 처리해주시고요.” 난 고모와 사인한 계약서를 내밀었다. “회사 돈 천사백억, 해 넘기기 전에 채워주시고 고모 명의 주식 전부 미라클로 옮겨주세요. 서둘러서.” “야!” “하나 더, 이건 전국 순양골프장 임원 전용 VIP 회원권. 원하는 시간에 언제든 티오프(Tee-off) 가능하고, 경비는 회사에서 자동 결제. 그리고 이건 호텔 및 콘도 회원권. 딱 열 장만 발행한 건데 골프장 회원권보다 더 높은 그레이드입니다. 로열 스위트까지 적용. 어떻습니까?” “이 정도로 퉁?” “일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단에서 백 단까지 이어질 겁니다.” “우리 마누라가 날 이뻐하겠구만. 흐흐.” 오세현은 내가 내민 봉투를 챙겨 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 그럼 우리 대주주님께서 지시하신 일을 처리하러 가볼까?” 오세현은 서류 몇 가지와 이 일을 맡을 직원들을 호출한 다음 외투를 챙겨 입었다.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던 그는 걸음을 멈추더니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툭 던졌다. “고생했다.” * * * 돌아올 어음을 전부 막고 주식 이전까지 끝낸 다음 나는 다시 고모를 만났다. 그녀는 며칠 사이에 살이 쫙 빠졌고 얼굴은 반쪽이 되어버렸다. “자, 이제 날 어떻게 할 셈이야? 약속 지킬 거야? 아니면 쫓아낼 거냐?” “당연히 지킵니다. 저 그렇게 얄팍한 놈 아니에요.” 그녀의 눈매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고모는 지금처럼 하시면 됩니다. 차이는 단 하나. 고모는 정식 부회장이 될 것이며 회사 시스템 속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소유는 제가 하지만 지배는 여전히 고모가 하십시오. 대신 책임도 함께 지시는 겁니다.” “부회장? 회장은 바로 너고?” “아뇨. 말씀드렸다시피 전 소유만 합니다. 소유와 경영은 완전히 분리합니다. 전 실적만 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회장은 공석입니다. 거긴 고모가 앉을 수도, 다른 사람이 앉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백화점이나 호텔 대표이사 중 발군의 실적을 내는 사람이 앉을 수도 있겠죠.” “실적 나쁘면 나 자르겠네?” “물론입니다. 경영자는 실적이 전붑니다. 매출과 이익 그리고 비전. 이것만 볼 겁니다.” 단호한 내 태도에 고모는 많이 긴장하는 모습이다. “호텔 스위트는 계속 내 사무실로…….” “안 됩니다. 순양유통 사옥에 부회장실 만들어 놨습니다. 출근하시고 일하세요. 대신 그 스위트를 집처럼 쓰시는 건 그대로 두겠습니다.” 반은 줬다. 이제 부족한 게 뭔지 배워 나가야 한다. 배우는 게 있다면 잡은 손을 뿌리치지 않을 것이고 여전히 철딱서니 없는 재벌 집 아줌마에서 변함이 없다면 그냥 적당한 부자 아줌마 신세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조금은 달라졌다. 더 달라고 떼쓰지 않는다. “고모.” “응.” “이미 짐작했겠지만 전 순양그룹의 회장 자리를 향해 계속 달릴 겁니다. 절 도와주고 제 곁에 계속 계신다면 순양그룹의 유일한 부회장이 될 겁니다. 그 자리는 비워 두겠습니다.” “영원히 네 아랫사람이 되라?” 비웃는 듯한 말투는 여전히 고치지 못했다. “하나씩 하세요.” “뭘 하나씩 해? 아직 내게 남은 게 있어? 허울 좋은 백화점 그룹 부회장 직함으로 평생 썩겠지.” “갈 길이 멉니다. 시간도 꽤 오래 걸리겠지요. 그동안 준비하십시오.” “뭘 준비해?” 고모는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밟고 올라설 준비요. 제가 앞에서 칼을 휘두르며 큰아버지들을 제거하고 사촌 형들을 처리하는 동안 내 목을 칠 준비를 철저히 하시면…. 기회는 많을 겁니다.” “네가 앞길 막은 사람들 다 치우면 난 너만 넘으면 된다? 소 등에 올라탄 쥐새끼처럼?” “그렇죠. 하지만 쉽진 않을 겁니다. 아시겠지만 저… 보통 아니거든요.” 희망은 잔인하다. 불가능이란 걸 알지만 희망 때문에 온갖 고난을 견디며 힘들게 기다린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는 온갖 재앙이 가득 들어 있었지만 가장 큰 재앙은 바로 희망이다. 희망 때문에 상자 속의 온갖 재앙을 고스란히 겪어야 한다. 지금 고모의 눈빛에는 한 가닥 기대와 희망이 스쳐 갔다. 앞으로 내 곁에서 오지 않을 희망을 안고 끌려다니게 될 것이다. * * * “여러분들은 지금처럼 회사의 발전을 위해 힘써주시면 됩니다.” 순양유통 사옥에 모인 대표이사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난 미라클의 대리인이지만, 그들 눈에는 또 한 명의 총수 일가 핏줄로 보일 뿐이다. 그 이유는 바로 진서윤이 부회장으로서 여전히 자신들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오해를 풀어야 한다. “여러분의 인사권은 미라클이 쥐고 있습니다. 진서윤 부회장은 인사에 대해 그 어떤 영향력을 갖지 못합니다.” “인사권 없는 부회장이라면 허수아비 아닙니까? 왜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합니까?” 누군가 불만을 드러냈고 난 다시 합당한 대답을 해야 했다. “그분은 순양그룹 진 회장님이 아끼는 유일한 딸입니다. 야박하게 대하기보다는 여러분께서 잘 살펴주십시오. 그게 앞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경영에 꽤 많은 도움이 되는 건 사실 아닙니까? 그분의 인맥으로 유지하는 백화점과 호텔 VIP가 수백 명은 넘으니까요.” 회사 내에서 고모의 역할을 이해하자 이들의 불만은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표정이 말해준다. 이제 이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나를 따르도록 해야 한다. “미라클은 앞으로도 소유만 합니다. 경영은 여러분의 몫이고, 아직 백화점 그룹의 회장 자리는 공석입니다. 그 자리는 누구나 앉을 수 있습니다. 바로 훌륭한 경영 성과를 내는 분을 위해 비워 둔 겁니다.” 더 위로 오를 가능성, 그 희망 때문에 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 [147] 새천년의 시작 1 “그리고 이 회사의 회장이라는 자리는 다른 재벌 총수처럼 회사의 조직에도 없고, 시스템에도 빠져 있는 제왕적 회장이 아닙니다. 각 백화점과 호텔, 대형 할인점의 대표이사 인사권과 전체 사업 방향을 제시하는 권한을 드릴 겁니다.” “그렇다면 미라클은 회장의 임명에만 관여하겠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소유와 경영의 완전한 분리입니다.” 사장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차례차례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전에 진서윤 부회장과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지난번 그 일로 인해 지금 그분과 우리의 관계가 상당히 껄끄럽습니다.” 만약 책임을 대표이사에게 넘길 때 증언하겠다는 단합은 분명 고모에게는 항명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 “엄연히 부회장입니다. 회장 선임이 있기 전까지 그분의 지시를 따라야 하고요.”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슬쩍 웃으며 말하자 이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열린 마음으로 진서윤 부회장을 대하십시오. 그분이 하는 말, 의견, 지시 중에 필요한 것만 취하시고 나머지는 버리셔도 된다는 뜻입니다.” “그럼 부딪힐 일이 많을 텐데요?” “교통정리는 항상 해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열린 마음으로 함께 일합시다.” 난 함께 일할 사람을 둘러보며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절 순양그룹 사람이고 생각하시면 큰 실수 하시는 겁니다. 우리 유통 그룹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순양그룹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일쯤 서슴지 않고 할 겁니다. 전 미라클의 사람이지, 순양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과연 이들이 순양그룹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을 수 있을까? * * * “이 자식이 슬슬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어. 서윤이, 이 바보 같은 년이 주식으로 다 날려먹었다고.” “나도 들었어. 아버지가 주머니에 넣기 쉽게 잘 포장해 놓으니까 미라클이 더 쉽게 가져간 거지. 지배구조가 복잡했다면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경영지원본부에서 알려주더라. 우리 그룹에서 빌려 간 자투리 돈까지 전부 갚았다고. 이제 서윤이 건 완벽하게 떨어져 나갔다고 봐야 해.” 초조한 듯 서성대는 진영기와는 달리 진동기는 별일 아닌 것처럼 태연한 표정이었다. “덕분에 자금 부족한 거 많이 채웠으니 됐지 뭐.” “야! 넌 아무렇지도 않아?” 진영기가 태연한 동생을 향해 소리 질렀다. “백화점, 호텔, 마트, 콘도, 골프장. 건물 올리고 땅 사면 되는 사업이야. 기술이 필요해, 기계가 필요해? 부동산과 사람. 이게 전부야. 뭐가 아쉬워서?” “무슨 말이야? 그게?” “형이랑 나랑 투자해서 부동산 매입하고, 호텔 올리고 순양이라는 이름 달면 끝나. 사람? 그거야 서윤이 밑에 사람들 다 데려오면 되고.” 딱 하나만 시작하면 된다는 게 진동기의 생각이었다. 호텔이든 백화점이든 하나로 시작해 인재를 싹 빼버리고, 미라클로 넘어간 회사를 흔들면 큰 싸움 없이 무너질 것이다. 순양이라는 이름이 주는 힘, 이 힘을 못 쓰게 하는 순간 스스로 백기를 든다는 게 진동기의 생각이다. “참, 너 우성해양조선 인수 때문에 오세현이 자주 보지? 이번 건에 관해 이야기한 거 있어?” “그래서 하는 말이야. 오세현은 지금 환상에 젖어 있어.” “무슨 환상?” “재벌 총수가 될 수 있다는 환상. 미라클의 자금은 미국에 의존하고, 미국 놈들은 IMF라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회사를 사들인 오세현을 전적으로 신뢰해. 그러니까 자기가 총수놀이를 해도 미국 투자자들이 아무 말 하지 않을 거라는 거지.” “정신 나간 놈이구먼.” “아니. 환상을 현실로 만들 능력도 있어.” “뭐?” 진영기의 마음 한구석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거북함이 동생의 말 때문에 고개를 들었다. “잊었어? 순양자동차가 가진 17%의 그룹 지분? 만약 도준이가 우리 순양의 금융 부분을 차지하고, 순양자동차의 17% 지분을 순양 계열사와 몇 대와 맞바꾸면? 못해도 재계 서열 5위 안에 들어갈걸?” 저 말은 바로 두 형제가 가진 것의 합친 규모와 맞먹는다는 뜻이며 순양의 절반을 뺏긴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소름이 쫙 돋았다. “백화점과 호텔을 무너뜨려야 하는 게 먼 나중의 일이 아니구나.” “그래. 딱 하나만 자빠뜨리면 떨어져 나간 순양 맨들이 우리에게 달려올 거야. 그게 바로 오세현에게 보내는 경고가 될 것이고.” 항상 서로를 견제하던 형제는 외부의 적 때문에 당분간 떼려야 뗄 수 없는 형제의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 * * 99년은 90년대를 마감하는 시기이자 2000년을 앞두고 새천년에 대한 기대가 컸던 해였다. 특히 작년에 경험했던 -6.9%라는 최악의 경제성장률을 비웃기라도 하듯 +9.5%로 단번에 극복했기에 새해는 더욱 나아지리라는 기대가 팽배했다. 그리고 이 해는 새천년의 기대와 함께 Y2K에 대한 공포가 지배했다. 그러나 막상 2000년 1월 1일이 밝아오면서 우려하였던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은행은 야근을 불사하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고 정부기관과 대기업도 마찬가지였다. 새해가 밝았을 때 밤새 긴장했던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허탈하게 퇴근했다. 그렇게 21세기가 시작되었다. 올해는 친척 그 누구도 할아버지 댁으로 가지 않았다. 밀려올 손님들을 대비해서 아침부터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순양유통과 계열사 임원들은 오세현과 진서윤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시골로 내려간다는 오세현의 통보에 모두 고모 집으로 향했다. 나는 누가 들락거리는지도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북새통 같은 집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평창동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댁이 조용할 때 긴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새천년 첫날이니만큼 큰절을 올리고 거실에 자리 잡았다. “할머니는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여전히 유럽에서 팔자 좋은 귀족 행세하며 지낸다는구나.” “영국에 계시지 않았어요?” “그림 몇 점 사고 제네바 별장으로 옮겼단다. 뭘 하고 다니는지 원.” 할아버지의 표정이 좋지 않아 더는 묻지 않았다. 혼인한 지 6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어찌 된 셈인지 갈수록 사이가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조 사장은 아직인가 봅니다.” “그 친구도 자손들 세배는 받아야지. 느긋하게 오라고 했다.” 많은 일을 손에서 놓아버린 탓인지 할아버지는 유유자적한 모습마저 보였다. “그런데 생뚱맞게 자동차냐? 자동차는 아진과 순양의 구조조정이 끝나지 않았느냐? 조대호와 송현창 회장이 일 처리를 잘했다고 재계의 칭찬이 자자한데 어쩌려고?” “변화를 좀 주고 싶습니다.” “변화?” “네. 어차피 대현자동차를 뛰어넘는 일이 힘들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아닙니까? 그럼 세계를 보고 달려야죠.” “이놈아. 대현도 밖에 나가면 마이너야. 대현도 못 잡는데 세계는 무슨?” 할아버지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생산량과 판매량이 전부는 아니죠. 올림픽 종목은 다양합니다.” “허허, 그놈 참. 여전히 입만 살아가지고….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사랑받는 자동차 기업으로 변신해야죠.” “뭐라? 사랑?” 할아버지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놈아. 연애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이 사랑 타령은?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그 사랑과 이 사랑이 같은 겁니까? 아시면서 그러세요?” “이왕 말 나온 거 하나 물어보자.” “네.” 곁으로 바짝 다가앉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하다. 뭘까? “너 사귄다는 그 애 말이다. 자주 만나기는 하니?” “민영이요? 아뇨. 한 달에 두어 번 만나서 밥 먹고 맥주 한잔하는 게 전부예요. 저도 바쁘지만, 그 애도 마찬가지니까요. 사시 준비하느라….” 아닌 게 아니라 민영이는 절간에라도 들어가야겠다고 했다. 졸업 전 합격은 그녀의 지상과제인 듯, 압박감에 시달려 밥만 후다닥 먹고 도서관으로 돌아갈 정도였다. “이놈아. 한 달에 두어 번 만나서 밥 먹는 게 사귀는 거냐? 그냥 친구도 그보다는 더 자주 보겠다.” “급할 거 있나요? 이러다 멀어지면 그냥 학교 동기로 남겠죠.” 잠깐! 그런데…. “할아버지. 제가 누구 만난다고 말씀드린 적 있었어요? 그런 말은 한 기억이 없는데…?” “뭐? 아, 아니지. 말했지. 어찌 젊은 애가 이 할애비보다 기억 못하는 게냐!” 버럭 소리까지 지른다. 왜 이러시는지 알 것 같아 더는 말하지 않았다. 내 뒤에 항상 누군가를 붙여 놓으신 게 틀림없다. 분명 좋은 뜻일 테니까. 나는 괜찮은데 당황한 할아버지가 오히려 변명을 더 하려고 하셨을 때 구세주가 등장했다. “많이 늦었습니다. 회장님.” 조대호 사장이 한 손에 보자기 하나를 쥐고 거실로 들어온 것이다. “아닐세. 자식들 인사받기도 바쁠 텐데 새해 첫날부터 불러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장성한 자식 놈들 인사가 어디 인삽니까? 부담이지. 오히려 핑계도 되고 좋습니다. 하하.” 조 사장이 손에 쥔 새해 선물을 슬며시 내려놓을 때 허리를 숙였다. “새해 더 건강하십시오. 조 사장님.” “아, 도준이도 와 있었네?” 조대호 사장은 내 등을 가볍게 툭 치며 허리를 세웠다. “앉으십시오. 큰절 올리겠습니다.” “관둬라.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그런 티까지 내야겠냐? 참, 그런데 넌 혼자 웬일이냐?” “이 친구야. 자넬 호출한 사람이 바로 이놈이라고. 나이 먹으니 눈치가 없구먼. 허허.” “아, 그렇습니까? 이거 긴장되는군요. 최대 주주님의 호출이라니. 허허.” 조 사장의 입에서 주주라는 말이 나왔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양반은 이미 내가 미라클의 실질적인 오너라는 걸 알고 있었나? 놀란 내 표정을 본 조대호 사장은 조금 난처한 표정이었다. “이거, 내가 안다는 걸 숨겨야 했나?” 이때 할아버지는 내 등을 치며 말했다. “괜찮아. 입이 천근인 분이다. 순양자동차를 그리 쉽게 내어 주는데, 전후 사정은 알아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네. 놀라긴 했지만 꼭 숨겨야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조 사장님.” “아니야. 보는 눈이 많으니 그렇게 해야겠지. 아진그룹이 스무 살짜리 대학생에게 넘어갔다는 게 알려졌어 봐. 세상이 발칵 뒤집혔을 거야. 그걸 누가 믿어? 게다가 그 대학생이 순양그룹 3세. 특혜니 편법 증여니 하며 시끄러웠을 거야. 현명한 판단이었어.” 사실을 숨긴 것을 전혀 다른 각도로 해석한다. 난 단지 큰아버지들의 눈길을 피한 것뿐인데 말이다. “자자, 서재로 들어가서 조용히 이야기하지. 이놈이 자네에 할 말이 많은가 봐.” * * * “회사의 색깔을 바꾸고 싶다?” “네.” “어려운 거 할 생각이구나.” 조대호 사장은 놀라거나 궁금함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이미 내가 하려는 일이 뭔지 짐작한다는 의미다. “이제 겨우 정상 궤도가 눈앞에 보여. 보인다고 해도 들어가는 건 쉽지 않아. 여기서 다른 가지를 치게 되면 궤도에 못 오를 수도 있다.” 조 사장은 경영 실적의 숫자가 머릿속에서 팽팽 돌 것이다. 그 숫자에서 다른 가지로 뻗어 나갈 때 필요한 숫자는 아무리 쥐어짜도 나오지 않으니 부정적인 말부터 나온다. “일단 돈 걱정은 나중에 하시죠.” “일단? 좋아. 그럼 그 색깔이 어떤 색인지 들어볼 수 있겠지? 빨간색인지, 파란색인지…….” 할아버지가 웃으며 슬쩍 거들었다. “사랑받는 기업으로 만들고 싶단다.” “사랑요?” 조 사장의 반응도 할아버지와 다를 바 없다. 조금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이 전부다. ======================================== [148] 새천년의 시작 2 역시 나이 든 사람들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색 바랜 추억일 뿐인가? “많이 팔리지는 않아도 고유의 아이덴티티가 있는 갖고 싶은 차, 특색 있는 차. 그런 차도 만들어내는 기업입니다. 첫눈에 반할 사랑도 좋고, 천천히 달아오르는 사랑도 좋겠죠.” “갖고 싶은 차라…….” “96년이었던가요? 아진자동차는 영국 로터스의 생산 라인과 설계를 인수해서 2인승 오픈카를 판매했죠. 수제 소량 생산에 맞춰 설계되었기 때문에 대량 생산도 안 되는 차를 말입니다.” 내가 말하는 차를 떠올렸는지 조대호 사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연간 1만 대 생산 기준으로 생산 원가만 3천만 원이었다. 이익을 남기지 않고 팔아도 부가세, 특소세 등을 더하면 인수가격만 4천만 원짜리 차로 변한다. 풀옵션 중형차가 1천5백만 원이면 살 수 있고 심지어 플래그쉽 세단이 4천만 원대에 불과하다. 아진자동차 송 회장은 결국 세금 포함 2천만 원 후반대로 판매가를 정했고 팔면 팔수록 손해나는 엄청난 짓을 벌였다. “잘 알아. 그 차, 내 손으로 단종시켰으니까.” “네. 수익성을 생각하면 제정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그런 스포츠카를 생산하자는 말이야?” 아직 한참 어린 내 나이를 생각하면 왜 이런 말을 꺼냈는지 이해한다는 표정이다. 자동차 회사의 어린 오너가 스포츠카를 갖고 싶어 한다. 바로 자기 회사에서. 조대호 사장은 딱 그 정도로 내 의도를 이해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회사를 가지고 노는 장난감으로 생각하는 어린 오너의 특징 아닌가? 조 사장은 나도 아직 어리다는 생각부터 들었을 것이다. “손해 보며 팔 차를 왜 만들겠습니까?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전 아직 면허증도 없습니다. 스포츠카 같은 건 관심도 없고요. 가장 좋아하는 차는 BMW 7시리즈입니다. 목숨을 구해준 차라서요.” “그럼 특색 있는 차라는 게 뭘 말하는 거지?” “직장 여성이 할부로 구입할 수 있는 경차, 30대 남자가 3년 할부로 지를 수 있는 쿠페. 중년 남자가 세컨 카로 사고 싶은 픽업트럭. 이런 걸 말합니다.” 조 사장은 여전히 찌푸린 미간을 펴지 않았다. “경차도, 쿠페도 이미 많이 나왔어. 픽업은 우리나라에선 안 먹히고.” “갖고 싶지 않은 차들이죠.” “뭐?” “빈티 나고 없어 보이는 경차, 예쁘고 폼도 나지 않은 쿠페. 영업용 화물차로 보이는 픽업트럭. 이런 차를 누가 사고 싶겠습니까?” 할아버지와 조 사장은 그제야 내 말뜻을 이해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정적이라는 걸 감추지 않았다. “그런 차는 아무리 갖고 싶게 만들어도 몇 대 팔리지 않아. 어쨌든 팔리는 차는 패밀리 카야. 그 외의 차는 절대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해. 너도 이젠 알잖아? 자동차는 대량 생산이 가능해야 하는 설비 산업이라는 걸.” “생산 라인을 투 트랙으로 한다면 손익분기점까지 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불가능합니까?” “패밀리 카와 사랑받는 차? 이렇게?” “네.” “돈 벌 생각이 없구나.” “앞으로 10년간 적자라도 좋습니다. 10년 뒤부터는 달라질 겁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토요타와 폭스바겐, 두 회사의 판매량은 절대 앞지를 수 없다. 이 두 회사가 줄곧 패밀리 세단만 만들었다면 절대 왕좌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다양하고 특색 있는, 도전적인 차를 끝없이 개발하고 소수의 매니아를 외면하지 않는 기업 마인드가 그들의 주력 차종인 코롤라와 골프를 탑에 올려놓은 것이다. 대현자동차는 21세기 글로벌 탑5에 들겠다는 포부를 밝혔고 분명 달성할 것이다. 하지만 대현은 여전히 가성비 때문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미지 외에는 갖지 못한다. 자동차는 꿈을 꾸게 만들어야 한다. 그 차를 운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 사랑받는 것이다. “으허허.” 듣고만 계시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던 조대호 사장도 이마를 탁 치며 덩달아 웃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때 웃음을 그친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내가 순양자동차를 시작할 때 했던 말을 너도 똑같이 하는구나. 허허.” “그러게나 말입니다. 회장님께서도 그러셨죠. 10년은 돈 못 벌어도 좋다. 필요하다면 입던 빤스까지 팔아서라도 돈을 대주겠다.” “아, 정말요?” “그래. 그런데 딱 일 년 지나고 결산 나오자마자 내게 그러셨지. 이대로 가다간 내 목이 위험하다고. 빨리 적자 면하라고 말이다. 하하.” 젠장. 내 진심이 이렇게 왜곡되는구나. “괜찮아. 도준이 넌 회장님과 다를 거라고 믿어주지. 흐흐.” “이 친구가! 그건 농담이었어. 진심이었다면 내가 자네를 그 자리에 계속 앉혔겠나?” 두 어르신의 과거 회상을 계속 들을 수는 없는 일, 슬며시 끼어들었다. “사장님. 제 의도는 아시겠죠?” “너 돈 많다고 회장님께서 어마어마하게 자랑하시던데…. 감당할 수 있겠어? 사랑받는 자동차의 첫 번째 조건은 바로 디자인이다. 남자에게 차는 바로 여자와 똑같아. 예쁜 미인은 기본이다.” “최고의 디자이너를 영입하겠습니다. 크리스 뱅글도 좋고 피터 슈라이어라도 데리고 올 수 있습니다. 원하는 디자이너 말씀만 하세요.” BMW와 아우디의 디자이너 이름까지 거론하자 조 사장은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다시 미소 지었다. “회장님.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은데요? 덕분에 전 10년간은 실적 걱정 없이 월급 챙겨 먹게 생겼습니다.” “속지 마. 누구 핏줄인데? 흐흐.” 할아버지는 가볍게 웃은 뒤, 진지하게 물었다. “자동차 회사가 돈 까먹기 시작하면 감당하기 힘들다. 네가 투자로 모은 돈 다 날릴 수도 있어.” “10년 정도 투자할 돈은 있습니다. 중국을 포함해서요.” “뭐? 중국?” 두 분은 또 한 번 놀랐지만, 그 반응은 조금 달랐다. 특히 조 사장은 신기한 광경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현그룹에 스파이라도 심어 둔 거냐?” “네?” “대현이 슬슬 중국 쪽으로 눈을 돌린다고 들었다. 2005년 정도에 현지 생산을 목표로 한다고 했지만,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고 하더라.” “이미 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우린 하루라도 서둘러야 합니다.” 폭스바겐은 이미 1984년부터 중국에 상륙했다. 상하이자동차와 합작으로 상하이 따쭝(上海大衆)을 설립했고 상하이를 중심으로 중국 남부지방을 집중 공략했다. 91년, 다시 중국 제일 기차와 합작하여 북부지방의 공략에 나섰고 99년, 중국 시장 점유율이 60%에 육박할 정도로 시장을 먹어버렸다. “중국 시장은 1백5십만 대 수준이다. 중국 부자들의 럭셔리 자동차를 제외하면….” 서두르지 않았으면 하는 조 사장의 심정이 드러났다. 합작회사만 허가하는 중국이라 중국 진출은 기술 이전이 필수다. 가장 찜찜한 부분이다. “폭발적인 성장세가 시작될 것이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자자, 그건 도준이 뜻에 따르는 게 좋을 듯해.” 갑자기 의견을 툭 던지는 할아버지 때문에 조대호 사장은 놀란 듯했다. 순양자동차와 아진이 합병한 뒤 단 한 번도 경영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또한, 갑자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조 사장 때문에 할아버지도 놀란 듯하다. “어쭈? 이 친구 보게. 이젠 내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겠다는 겐가?” “이 자리에서 회장님은 어드바이저시니까요. 꼭 따라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훌륭한 조언이라면 따를 생각입니다만.” “봤지? 이 친구가 이래. 지금 도준이 네게 시위하는 거다. 사랑받는 회사든, 중국 진출이든 스스로 납득할 수 없다면 시작도 하지 않을 위인이라고.” 할아버지 뭔가 즐거운 재미를 발견한 어린애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잘 보라고. 전 세계의 돈이 중국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어. 세계의 공장? 이 말 진짜 무서운 거다. 인건비 싸다고 우리 순양 공장도 어마어마하게 들어갔잖아.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건 바로 노동이다. 그 노동의 장소가 공장이고.” “부가 쌓이니 쓸 곳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중국에 굴뚝 올라가는 속도가 더 빨라진다. 그만큼 경제도 급성장하겠지? 그리고 쌓인 부를 과시하는 첫 번째 방법이 바로 자동차다.” “통장에 돈이 쌓이면 자동차로 눈이 돌아가는 게 바로 남자의 습성이죠.” 조 사장이 머리를 끄덕이며 내게 시선을 돌렸다. “돈이 많이 들 거다. 시간, 퀄리티, 돈. 이 세 가지는 항상 반대편에 서 있다. 시간을 줄이고 퀄리티를 높이려면 엄청난 초기 자금이 필요해. 괜찮으냐?” “금액을 예측하실 수 있을까요? 지금?” “중국은 무조건 5:5 투자 시스템이니…. 최소 2억5천 달러 이상? 그 정도면 초기 생산 규모가 10만 대 정도는 될 거다.”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네요. 이렇게 하죠. 초기 투자 5억 달러를 베이스로 사업 추진합시다. 서두르는 비용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곧바로 두 배의 숫자를 부르니 조대호 사장은 입을 떡 벌렸다. “거봐. 이놈 이거, 돈 엄청 많다고 말했잖아.” 할아버지는 놀란 조 사장을 향해 즐거운 듯 손뼉까지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 * * “이혼한… 아니, 아직은 아니네. 아무튼 몇 년 뒤에 이혼할 마누라가 만나자고 하니 기분이 묘하더라.” “좋아 보이네.” “당신도 여전히 관리 잘하는군. 누가 오십 넘은 아줌마라고 볼까?” “그런 칭찬 자주 좀 하지. 왜? 당신 여자가 아니니까 색달라 보여?” “여전히 따갑네. 그만두자. 용건은?” 최창제 시장은 진서윤의 차나 한잔하자는 연락에 내심 반가웠고 혹시나 하는 기대도 있었다. 예정된 이혼을 취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손잡자고.” “진심이야?” “오해는 마. 당신이랑 다시 한 침대 쓸 생각은 없으니까. 부부가 아닌 진짜 동업자. 어때?” “뭐지? 날 떠난 대가는 충분히 받지 않았나? 나랑 손잡는 거 당신 아버지가 알면 도로 다 뺏길 텐데?” “안 뺏겨. 아니 뺏을 수가 없어.” “당신 아버지가 그 정도 안전장치 없이 당신에게 물려줬을까?” “안전장치든 뭐든 다 소용없다니까. 내 손에 없는 걸 어떻게 뺏어 가?” “뭐? 무슨 뜻이야?” “말한 그대로야. 이제 내가 가진 건 아무것도 없어. 그렇게만 알아 둬.” 최창제 시장은 진서윤이 구구절절 말하지 않는 걸 보며 짐작했다. 자존심이 강한 여자다. 진 회장에게 받은 건 전부 사라졌고 남은 건 순양 그룹의 딸이라는 간판만 남았다.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하기 싫으면 됐어. 그런데 나와 다시 손잡고 하고 싶은 게 뭐지? 여전해?” “당연하지. 더 나이 먹고 할머니 되기 전에 평창동 서재에 앉아봐야겠어.” “당신 손에 쥔 거 아무것도 없다면서? 평창동까지 어떻게 갈래?” “집 앞까지는 누구 뒤만 따라가면 돼. 그런데 대문에서 서재까지 가는 길이 어렵네. 그때 당신이 그 누구를 정리해주면 쉬울 것 같은데.” “당신 앞길 터주는 게 누구야?” “당신도 잘 아는 사람. 당신 선거 자금 준비한 그 애.” “도준이? 정말 도준이?” 진서윤은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대며 놀란 최 시장을 진정시켰다. “도준이든 누구든, 당신이 마지막에 정리하려면 힘이 있어야 해. 서울 시장 정도로는 안 되니까 준비 잘해야 해. 내가 아직 개인 재산은 좀 있으니까 알거지가 되더라도 밀어줄게.” “전처 쌈짓돈까지 손대긴 싫은데….” 괜한 너스레를 떠는 최 시장을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됐어. 당신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야. 내숭은 무슨….” 최창제는 진서윤 앞에 놓인 빈 잔에 물을 따랐다. ======================================== [149] 질러 쇼 1 최 시장은 진서윤의 눈치를 보며 슬쩍 물었다. “정말 도준이가 당신 앞길을 정리해준다고 믿어?” 그녀는 이런 남편을 향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잘 들어요. 오세현이는 바로 도준이가 고용한 바지사장이야.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실질적 소유주가 도준이란 이야기지. 그러니까 미라클이 사들인 아진그룹, 순양자동차, 대아건설까지 전부 도준이 거야. 당신도 알지? 순양자동차에 순양그룹 지배 지분이 무려 17%나 있다는 거?” 최 시장에게는 도저히 믿기 힘든 소리였다. 아직 대학생 아닌가? “더 기가 차는 게 뭔지 알아? 그 모든 걸 아버지 도움 없이 다 이룩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아버지가 도준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 자동차 넘길 때 지분 얹어준 걸 나도 이해할 정도니까.” “도, 도대체 그놈은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날 때부터 제 할아버지 피를 고스란히 다 받은 건가?” 받아들이기 힘든 소리에 어처구니가 없을 때 그의 머리를 스치는 뭔가가 있었다. “당신 혹시 장인어른께 받은 거 전부 도준이에게 다 뺏긴 거 아냐?” 굳이 정확한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진서윤의 표정이 사실임을 말해준다. “세상에.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그 짧은 시간에….” 진서윤은 연거푸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순양그룹의 부채를 안고 계열 분리를 시작했고 미라클의 돈을 끌어 쓴 점, 마지막으로 잘못된 주식 투자까지. 지나간 이야기를 다 들었을 때 최 시장은 분노를 터트렸다. 작정하고 어린 손자에게 백화점 그룹을 차지할 빈틈을 만들어준 진 회장과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주식을 이용한 진도준, 그리고 그 함정에 놀아난 진서윤이 그 대상이었다. “그만해요. 돌이킬 수 없으니. 이제 당신도 내 처지를 정확히 알았겠죠? 어쩌면 내가 당신에게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어. 다 털어먹고 이러는 게 부끄럽기도 하지만….” “됐어. 그만해.” 최 시장은 슬며시 진서윤의 손을 잡았다. “물려준 건 다 잃었지만, 대단한 칼잡이 하나 얻었잖아.” “오빠들을 다 정리해줄 칼잡이죠.” “그래. 내가 그 칼잡이 명줄을 자를 만한 뭔가만 얻으면 순양은 당신, 아니 우리 손에 들어오니 어쩌면 더 잘된 일일 수도 있어.” “당신은 여전히 긍정적이네요. 그게 늘 마음에 들지 않아 짜증 났는데 오늘은 좀 달라. 듣기 좋네.” 진서윤도 동업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말한 최 시장의 손을 꼭 잡았다. “좋아. 그놈이 오빠들을 다 밟고 올라설 때까지 곁에 딱 붙어 있을게. 일단 백화점과 호텔 등을 내게 일임하도록 능력을 보여줄 테니까 당신도 시장 재선 후 대권을 노려. 이제 아버지 힘은 기댈 수 없으니까 정말 잘해야 해.” “그래. 꼭 재선 시장이 될 테니까 염려 마.” “참,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절대 오빠들에게 도준이의 정체를 밝히면 안 돼. 이미 조금은 미심쩍어하는 눈치지만 설마설마할 거야. 너무 황당한 소리라서.” “당연하지. 형님들이 칼잡이를 경계하면 이 일은 다 틀어져. 행여나 당신도 은연중에 말이 새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고.” 진서윤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최 시장의 애틋한 눈길을 확인했다. 어려울 때 서로를 보듬어주는 것이 부부였던가? 이 간단한 진리를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알게 되다니. “가끔 호텔에 들러. 저녁이나 같이 먹게. 도준이 그놈이 통은 커. 내가 여전히 스위트룸에서 지내도록 배려해줬어요. 어딘지는 알지?” * * * “보고서는 봤습니다. 대책은 세웠습니까?” “준비 중이야. 그런데 너무 서두르는 것 같은데? 인천 국제공항은 내년 3월에 개항이야. 아직 사업자 선정 계획도 안 나왔는데 우리가 먼저 움직인다는 게 좀….”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기 전 미리 조율을 끝내는 게 할아버지의 방식이죠. 모르십니까?” 고모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유통 그룹 전반에 걸친 큰 사업에 대한 최종 보고는 항상 고모를 통해 들었다. 마름이 힘이 세면 소작농이 지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름의 눈치를 본다. 지주는 항상 마름의 무릎을 꿇려야 한다. 그래야 소작농들도 진짜 주인이 누군지 머리에 새겨 넣는다. “인천공항의 규모는 이미 잘 아실 겁니다. 우리가 면세점을 놓쳐서는 안 돼요. 게다가 인천공항 개항에 맞춰 서울 시내에 적어도 세 곳 이상 면세점을 허가해준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 순양을 빼지는 않을 건데? 항상 빅3에 들어가니까 말이야.” 고모는 아직 우리가 기득권을 쥐고 있는 줄 안다. 이 착각을 깨지 않는 한 부회장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는 건 힘들 것이다. “고모.” “응.” “이미 주주 변동은 정부도 잘 알고 있어요. 우리는 순양그룹과 전혀 별개라는 걸 아는데…. 그놈들이 우리 눈치 보겠어요? 할아버지는 분명 우리를 위해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예전 같으면 고모 생각처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길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할아버지의 부탁이 없으면 안 움직여요.” 여전히 불만에 찬 표정이지만 더는 닦달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바뀐 처지를 피부로 느끼기에는 공주처럼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다. “내가 재정경제부와 관세청 관계자를 만나 약 좀 치겠습니다. 고모는 면세점 입점 서류를 완벽하게 체크하세요.” “내가? 서류를?” “그럼 누가 최종 결재합니까? 고모가 부회장입니다.” 즉각적인 대답 없이 나를 노려보던 고모가 인상을 풀고 부드럽게 말했다. “도준아. 넌 아직 나를 잘 모르는구나?” “압니다. 서류 같은 거 본 적 없죠? 하지만 경영을 하시려면 서류는 무조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완벽하게 이해해야 하고요. 제가 회계장부까지 이해하라는 말씀은 안 드리겠지만 다른 보고서나 계획서는 꼭 보셔야 해요.” “알아. 열심히 보도록 할게.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나를 더 유용하고 적절하게 써먹으라는 뜻이야.” “고모의 인맥을 활용할 계획은 있습니다. 아직 때가 아니어서….” “아니. 내가 가장 잘하는 건 인맥 동원이 아니다.” “그럼요?” “쇼핑을 리드하는 거야.” “쇼핑을 리드? 무슨 뜻이죠?”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다. 고모가 쇼핑을 리드하다니? 쇼핑 아니, 패션 트렌드는 디자이너들과 연예인이 주도하는 게 아니었나? “마케팅 비용 10억만 결재해.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는지 봐.” “10억?” “야! 너 그런 눈으로 볼래?” 고모는 웃으며 내 등짝을 찰싹 쳤다. “아야! 뭐가요?” “내가 또 헛돈 쓰는 거 아닌가 하는 눈빛이잖아.” 왜 이렇게 싹싹한 걸까? 조금 이상하다. 그게 더 의심스럽다. 하지만 위태로운 부회장 자리에 며칠이나 앉았다고 장난을 칠까? 분명 회사 돈을 어떻게 해볼 생각은 아니다. 더욱이 겨우 10억 아닌가? “좋습니다. 쇼핑을 리드하는 게 어떤 건지 한 수 알려주세요. 레슨비라고 생각하고 10억 집행하겠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고모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오케이. 지금부터 내가 하는 걸 하나도 빼놓지 말고 잘 봐 둬.” * * * 며칠 뒤 고모는 나를 호텔로 불렀다. 고모가 묵고 있는 객실에는 패션 화보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게 다 뭡니까?” “올해 S/S 시즌 트렌드를 볼 수 있는 패션쇼 화보집이야. 파리의 오뜨꾸뛰르, 쁘레따뽀르떼 그리고 밀라노, 뉴욕, 런던에서 열리는 4대 컬렉션에 나왔던 건데…. 난 매년 1월 패션 위크에 참석했지만, 올해는 못 갔어. 이유는 너도 알지?” 회사에서 쫓겨난 셈이니 한가하게 패션쇼나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팔릴 만한 걸 골라내는 거야. 그게 이 사업의 첫 번째라고.” 이미 화보집의 상품에 많은 체크 자국이 있었다. 어떤 기준인지 모르지만 다양한 표식이 눈에 띄었다. “너도 봐. 남자니까 패션에 관심 없다고 하면 백화점, 호텔 경영은 어려워진다.” “고모. 그런데 이건 뭐예요? 옷이 아닌데?” 고모는 내가 내민 화보집을 흘깃 보며 말했다. “침구야. 커튼, 시트 같은 거. 그것도 중요해.”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계, 구두, 화장품처럼 백화점의 주요 품목 화보도 꽤 많았다. 한마디로 백화점 명품 매장을 온전히 호텔 객실로 가져온 것이다. “어때? 쓸 만한 물건 좀 보여?” “다 좋아 보이는데요?” “그렇지 대부분 좋지. 어마어마하게 비싼 명품들이니까. 싼 거도 웬만한 부장 월급이고 비싼 건 연봉이니까.” 물론 몇 년 치 연봉으로도 못 사는 것도 많을 것이다. “잘 들어. 비싸다고 다 좋은 게 아냐. 그게 눈으로만 봤을 때 좋아 보이는 것. 그리고 몸에 착용했거나 집안에 들여놓았을 때 좋아 보이는 게 있어. 넌 어떤 걸 고를래?” “당연히 쓸 때 좋아야죠.” “하지만 눈으로 볼 때는 별로일 텐데? 선뜻 손이 가겠어?” 손이 가지 않으면 구매 자체가 일어나지 않고 쓸 때 좋지 않으면 재구매가 없다. 애매하다. 내가 머리만 갸웃거리며 대답을 못 하자 고모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우월감이다. “안목이야. 일반 서민들 매장은 가격대로 구성하지만, 명품은 가격이 중요하지 않아. 오로지 안목만으로 고객을 붙잡아야 한다고.” 다시 등장한 단어, 안목. 난 정말 안목이 없는 걸까? 고모는 대기하던 직원들을 전부 불렀다. “파리에 연락해서 이거 전부 보내라고 해.” 고모의 눈짓에 직원들은 화보집을 전부 챙겼다. “네, 부회장님. 세팅은 예전처럼 그 업체에 맡길까요?” “그래. 이번엔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 해. 중요한 프로젝트가 걸려 있다고 말하고.” “알겠습니다.” 화보집을 챙긴 직원이 빠져나가자 다음 차례 직원이 샘플을 쫙 늘어놓았다. 초대장이다. 고모는 한 번 쓱 훑어보고 몇 장을 집어 꼼꼼히 살폈다. “이걸로 준비해.” 그중 한 장을 휙 던지니 직원이 공손히 받아 들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직원은 레스토랑 메뉴판 같은 걸 내밀었다. 고모는 요리 리스트를 하나하나 보며 또다시 체크해 나갔다. “이렇게 코스 준비하라고 하고 뤽상브룩, 거기 쉐프 예약해. 식기도 그 친구에게 맡겨. 애가 감각 있더라고.”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직원들이 다 빠져나가고 단둘만 남자 고모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간만에 즐겁네. 역시 좋은 물건 구경하는 건 피곤해도 기분을 업 시켜. 호호.” 고모는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도준아. 방금 내가 뭘 했는지 알 것 같아?” “일단 고모의 안목으로 상품성 있는 명품 샘플을 요청했겠죠. 딱 거기까지 알 것 같습니다.” 실망한 고모의 눈빛. “어이없다. 어떻게 그거뿐이지? 아, 올케가 명품 쇼핑을 거의 안 하지? 검소한 여자니까.” 설마 지금 내 어머니를 무시하는 건가? 매서운 내 눈초리에 고모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오해하지 마. 나쁜 뜻 아니니까. 네 엄마처럼 타고난 아름다운 여자는 검소한 차림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야. 동네 시장 만 원짜리 원피스를 걸쳐도 명품으로 보이니까 말이야.” “알았으니까 나머지를 설명해봐요. 설마 저 샘플, 전부 사는 거 아니죠? 저거 산다고 10억이나 꼬라박을 수는 없어요.” “내가 바보야? 저걸 다 사게? 내가 쓰는 마케팅 비용 10억은 권력과 돈이 넘치는 한국 여자 100명을 사는 거야. 그 여자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우리 순양백화점과 호텔을 찬양하게 만드는 비용. 그게 10억이라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고모의 모습을 오랜만에 본다. 이것이 고모가 가장 잘하는 것일까? 부자들의 마음을 사는 일? ======================================== [150] 질러 쇼 2 “일단 전체 흐름부터 설명해주세요. 내가 개념을 좀 잡게.” “오케이. 일단 올해 S/S 시즌 상품 중에 주력이 될 만한 것들을 골라. 셀렉팅이 끝나면 디스플레이할 샘플을 요청하지.” “거기까진 이해했어요.” 고모는 좀 들떠 보였다. 앞으로 진행할 일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행이 자기 뜻대로 움직일 것이라는 확신마저 한다. 일할 때 가장 신 나고 즐거운 순간이다. “샘플이 도착하면 디스플레이를 생각해야 해.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동선을 짜고, 연결 구매가 가능하도록 구성해야겠지?” “연결 구매?” “그래. 모자를 사면 어울리는 귀걸이를 갖고 싶고 귀걸이를 사면 목걸이에 눈이 가. 예쁜 목걸이를 사면 목이 파인 원피스를, 그리고 원피스에 어울리는 하이힐을. 이런 걸 말하는 거야.” “마네킹에 다 걸쳐 놓으면 되는 일 아닌가요?” “그건 기성품이나 그렇게 하는 거지. 우리 VIP 년들은 까다로워. 자기가 직접 하나하나 골라야 해. 마네킹은 마치 강요당하는 기분을 느끼거든.” “까다롭네요. 진짜.” 타고난 성격이 까다로워서가 아니다. 넘쳐나는 돈이 인격에 뽐뿌질을 한다. 난 특별한 존재라고! “나랑 나란히 선 년들만 그래.” 고모와 견줄 만한 여자라면 재벌가의 여인들이 뻔하다. 그녀들은 고모가 추천하는 세팅을 절대 받아들일 리가 없다. 자존심 싸움이니까. “그쪽은 집으로 찾아가는 거죠?” “그래. 약속한 날짜에 가서 그 고객의 취향에 맞춰 디스플레이하면 그 년들이 고르는 거지. 고객으로서는 그들이 베스트라고 할 수 있어. 다들 같은 걸 몇 개씩 사니까. 집에 놔두고 유럽 별장이나 뉴욕 아파트에도 놔두거든. 여행 갈 때 은근히 들고 다니기 귀찮다니까.” 여기까지도 안다. “아, 이번에 네가 가볼래? 그래. 그게 좋겠다.” 갑자기 고모가 손뼉을 짝 치며 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한 바퀴 빙 돌면서 내 모습을 다시 확인한 뒤 활짝 웃었다. “순양 회장님의 손자, 게다가 영화배우와 제작사 사장의 아들. 스타 뺨치는 외모의 젊은 3세. 이건 대박이다.” “내가 왜 가요?” “넌 가서 인사만 해. 나머지는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거야. 그 여자들 너 보면 가만히 못 있어. 잘생기고 젊은 3세가 곁에서 딱 지켜보는데 우물쭈물할 것 같아? 어마어마하게 사들일 거야. 그것만이 네게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거잖아.” 내가 미끼인 것 같아 불편했지만, 그들과 안면도 트고 매출도 올린다. 책임진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러죠, 뭐.” “의외다. 순순히 한다고 하고….” “매출 올려야죠. 기록 한번 세워봅시다. 하하.”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버리자 고모의 눈빛이 변했다. 조카 중에 웃음을 팔아 가며 매출 올리려는 놈은 단 한 명도 없다. 일 자체도 싫어하는데 굽신거리기까지 해야 한다면 모두 소리를 빽 지르며 거절할 것이다. 굽신거리는 것을 마다치 않는 내가 달리 보였을 것이다. “자, 그렇게 1차 끝내면요?” “아까 내가 말한 뤽상브룩 세프가 누군지 알아?” “아뇨. 저도 그게 궁금했어요.” “파리 뤽상브룩 거리에 있는 레스토랑이야. 유명한 세프지. 그 사람이 스탭들 데리고 온다. 전세기 타고.” “저, 전세기?” “그래. 그 전세기에 식재료 전부 싣고 오는 거다. 그리고 호텔 연회장에서 신상품 디스플레이해 놓고 초대장 받은 100명을 모으는 거다.” 100명을 위한 만찬, 그리고 값비싼 명품 전시회. 이런 거였나? “특히 테이블, 식탁보, 의자, 접시, 포크 나이프 전부 공수한 걸로 다 채우거든. 그것 역시 상품 디스플레이지.” “그 100명은 누굽니까?” “집이 좁은 부자.” “네? 부자가 어떻게 집이 좁아요?” “수십 벌의 옷과 잡화를 디스플레이 못 하는 크기의 거실과 집이거든. 그리고 재벌가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고모의 제안을 아주 주의하여 듣고 받아들인다는 거죠? 워너비니까?” “바로 그거야. 호텔 연회장의 디스플레이는 내 취향이거든? 그걸 내가 직접 설명하면 웬만해서는 다 듣지.” “그리고 또 다른 효과도 있어.” “뭐죠?” “질투와 경쟁.” 무섭다. 여자들이란. 쇼핑에도 팽팽한 기 싸움을 하는구나. “100명이 서로를 쳐다보며 견제하는 거야. 여기서는 많이 예약하는 사람이 최종 승자야. 경매장의 분위기와 흡사하지.” 갑자기 오싹한 느낌이다. 이건 아예 무한경쟁을 유도하는 것 아닌가? “너도 시간 되면 와서 한번 봐. 지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의 그 살벌하고 광기 어린 모습을. 그게 쇼핑을 통해서 확 드러나는 거야.” 꼭 봐야겠다. 원초적인 욕망이 드러난 장면 아닌가? “좋아요. 꼭 가서 보죠. 그런데 고모. 이건 그냥 물건 파는 방법의 하나일 뿐이잖습니까? 이게 어떻게 쇼핑을 리드하는 게 돼요?” “그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곳이 부티크니까 디자이너들에게 영향을 주거든. 다들 VIP 고객이잖아. 취향을 맞춰줄 수밖에 없어. 그게 다시 아래로 퍼지고.” 이런 곳에서도 낙수 효과를 보는 건가? 아니, 동심원 효과인가? “그럼 면세점과는 어떻게 연결 짓습니까? 중요한 건 우리가 인천공항 그리고 서울 시내 면세점에 선정되는 거라는 걸 잘 아시죠?” “물론이야. 내가 고른 100여 명이 어떤 사람들인데? 전부 각 분야에서 한 가닥 힘 좀 쓴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야. 이번 이벤트 끝나고 예약한 상품 집으로 전해줄 때 슬쩍 언질 주는 거지. 그게 모이면 엄청난 힘이 될 거다.” 가장 큰 권력은 베갯머리에서 부탁하는 거라더니…. “도준아.” “네.” 고모가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동안 넌 너무 이쪽을 무시했어. 천박해 보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 천박한 것들이 이 나라의 힘을 쥐고 있다. 너도 나처럼 그들과 관계를 맺어야 해. 그래서 그 힘을 써야지.” 갑자기 고모가 왜 이럴까? 내가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불리해질 게 뻔한데 말이다. 고모는 수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날 보며 피식 웃었다. “경계하지 마. 네가 그랬잖아, 목적지에 갈 때까지 우리 둘은 동맹이라고.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난 네 말을 따르기로 했어. 내가 너의 본모습을 오빠들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게 바로 그 증거야.” 아직 포기하지 않았나? 하지만 난 크게 경계하는 것 없다. 마이크 타이슨이 말하지 않았나? 한 방 맞기 전까지는 누구나 다 그럴듯한 전력이 있다고. 고모가 그 어떤 계략을 짜든 마지막에는 알 것이다. 그냥 백화점과 호텔을 전전하며 호화로운 생활이라도 유지하는 게 건질 수 있는 전부라는 걸 말이다. * * * 5년 전 800에 불과했던 미국 나스닥 종합지수가 2000년이 시작되었을 때 4,800을 돌파했다. 생명이 다하기 전의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태우는 것이다. 마치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의 주가처럼.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의도의 촉 좋은 증권맨들은 한국에도 불어닥칠 닷컴 버블이 꺼질 것을 예상했고 마지막 한탕을 위해 살벌하게 돈을 끌어모았다. 바이코리아 펀드, 박현주 펀드 등의 애국 마케팅 등으로 시중의 자금들이 전부 IT 기술주에 쏠렸고 테마주 쏠림 현상이 발생했다. 이미 거품 터진 벤처 때문에 돈을 날린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지만, 누구나 그렇듯 자신은 안전할 것이고 큰돈을 벌게 될 거라는 희망을 품은 사람은 여전히 넘쳐났다. 칼날 위를 걷는 아슬아슬한 형국이었지만 오늘 내가 찾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딴 세상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한국 경제가 휘청이든, 롤러코스터를 타든 늘 구름 위에서 포근하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한다. “어때? 끝내주지 않아? 완전 화보지?” 100% 수작업으로 만들며 기간만 6주가 걸리는 정장. 한 벌의 정장을 위해 10시간 동안 한 땀 한 땀 3천 개 이상의 스티치가 들어가고, 재킷 하나를 만드는 동안 42번 이상의 다림질 등 186번의 제작 과정이 이뤄져야 한다 이 때문에 기성복 제작 기간에 비해 30배 이상의 노력과 시간이 들지만, 가격은 50배에서 100배 이상인 남성 정장. 고모와 백화점 최고 MD는 나를 위해 3대 나폴리 슈트인 체사레 아톨리니(Cesare Attolini), 브리오니(Brioni) 그리고 키톤(Kiton)을 준비했다. “패션의 완성은 모델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아요. 어쩜 이리 세 브랜드 모두 잘 어울리실까?” 당분간 나와 함께 움직일 직원들은 고모에게 장단을 맞추느라 호들갑을 떨었다. “오늘 두 집을 방문할 텐데 도준이 넌 안면만 터. 그리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돼. 나머지는 이 애들이 다 알아서 할 거야.” 딱히 긴장되지도, 걱정하지도 않았다. 오늘 방문하는 곳은 백화점이나 쇼핑몰이 없는 재벌가다. 그리고 재계 순위도 순양보다 한참 떨어지니 굳이 잘 보이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 고모 말대로 인사를 나누는 게 목적이다. 그들과 비즈니스로 관계를 맺을 때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접근하기 유리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일성그룹 사모님과 며느님들 그리고 따님들입니다. 그렇게 까탈스럽지는 않아서 불편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남자 고객은 없습니까?” “물론 있어요.” 함께 가는 직원이 생긋 웃었다. “오로지 여직원만 남성 고객을 상대합니다. 아시겠지만….” “남자 직원이 가면 유독 갑질하려고 하죠?” “네. 아마도 우월감을 드러내고 싶은가 봐요.” “영장류는 원래 계급 사회를 구성해요. 인간도 짐승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지, 뭐.” “네?” “아, 아니에요.” 고개를 갸웃하는 직원을 무시하고 자동차 시트에 몸을 기댔다. 일성그룹이라…. 나중에 대통령과 사돈이 되는 집안이었지? 잘해 두면 대통령 직통라인이 또 하나 생기는 거다. 순양의 회장쯤 되면 새로운 파이프를 꽂을 필요도 없겠지만, 그 전까지는 쓸모 있다. 정점에 오른다는 건 이런 잡다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자동차는 한남동으로 향했다. 일성그룹 자택에 들어서자 시원하게 펼쳐진 잔디부터 눈에 띄었다. 웅장한 맛 없는 깔끔한 정원. 집주인의 성격을 드러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일하는 사람들이 먼저 나왔고 안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함께 온 백화점 직원들이 곱게 포장한 상품들을 하나하나 꺼내며 거실에 늘어놓을 때도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만요, 실장님. 실장님이 직접 오셨다는 걸 넌지시….” 직원 한 명이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접근해서 내 신분을 밝히려 할 때, 그를 끌어당겼다. “그냥 놔두세요. 이 사람들 평상시 모습을 보고 싶네요.” 분명 까탈스럽지는 않다고 했는데 그것과 예의 없음은 별개였다. 집안일 보는 사람들은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수고한다며 물 한 잔 주지 않는 야박한 인심을 보였다. 한 시간 넘게 공들여 디스플레이를 끝내자 누군가 이 층으로 올라가 알렸다. 그렇지만 곧바로 나타나지도 않았다. 다시 이십여 분이 흘러서야 수군거리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할머니 하나, 중년 여인 셋, 젊은 여자 둘. 그녀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함께 온 직원들은 아무 말 없이 허리를 숙였다. 내가 가볍게 머리만 까닥하자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내게 꽂혔다. 십여 명이 허리를 펴지 않았으니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내가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녀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가볍게 미소 지으니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재밌는 젊은이가 왔네.” ======================================== [151] 질러 쇼 3 할머니의 말이 신호인 양 직원들이 허리를 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까탈스럽지 않다는 게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직원들은 부동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했다. 일성그룹 여인들은 전시한 상품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자기들끼리 평가를 주고받았다. 직원을 불러 이것저것 묻지도 않았고, 옷을 입어본다거나 몸에 걸치는 법이 없었다. 아주 마음에 들었을 경우에만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고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뭔가 묻는 게 전부였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구나. 십여 분쯤 지났을 때 다시 머리를 스친 명언이었다. 벌서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계속 서 있어야 한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몸이 힘든 건 둘째 치고 지겨워서 죽을 것 같았다. 결국, 하품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고 내 입이 찢어지는 걸 젊은 여자애에게 딱 걸려버렸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손을 까닥거렸다. 내 곁에 서 있던 직원이 달려가려 하자 손가락을 들어 나를 찍었다. 고객이 부르면…. 특히 VIP 고객이 부르면 총알처럼 달려가야 하는 게 본분 아닌가? “네.” “이거 어때요?” 그녀는 내가 곁에 가자마자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쁘네요.” 순간 수군거리던 여인들이 입을 닫고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우리 직원들은 당황한 듯 어찌할 줄 모르는 게 뻔히 보였다. 아, 실수했구나. “아주 잘 어울리겠습니다.” 이젠 모두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님 말씀 맞네요. 젊은이가 재미있네요.” 모두 웃음기를 보이자 여직원이 달려왔다. 그녀도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스털링 실버, 길이 36인치, 지름 19mm, 간편하고 쉽게 착용할 수 있는 디자인입니다. 뉴욕 여성들의 정신을 떠오르게 하는 우아하면서도 세련되고 대담한 디자인이 특징이죠. 이번 컬렉션은 도시 뉴욕이 지닌 파워와 감각, 그리고 뉴욕 거리의 에너지를 구현합니다. 또한, 연속적이고 자연스러운 라인의 세련된 설계가 돋보이는 하드웨어 특유의 실용주의 디자인을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숨도 쉬지 않고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는 제품에 대한 설명, 이 자리에서 나만 빼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게 생각한 건 이것과 비슷한 목걸이가 몇 개 더 있다는 것이다. 그놈이 그놈인 목걸이를 두고 물 흐르듯 설명한다는 것은 상품의 특징을 전부 외웠다는 것이다. 이 거실에 놓인 수십 개 아니, 어쩌면 백 개가 넘는 상품, 그리고 회사 브로셔에 나와 있는 각각의 설명을 정확히 외운다는 건 드라마 대사 외우는 배우와 다르지 않다. 나만 놀라고 있다. 직원의 암기력 그리고 저런 추상적인 말을 던지는데도 모두 머리를 끄덕인다는 것. 놀란 내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결국 사모님께서 불편한 한마디를 던졌다. “뭐지?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래? 혹시 얘들, 무슨 문제라도 있어?” 사모님은 전시한 상품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며칠 전 직접 전세기로 날아온 작품입니다.” 당황한 직원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망칠 것 같아 입 닫고 있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제가 처음이라 많이 서툽니다.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처음? 그럼 진 사장이 생짜 풋내기를 보냈다는 건가? 감히?” 실수는 용서해도 무시는 용서 못 하는 게 이 바닥 사람 아닌가? 나는 재빨리 직원에게 눈짓했다. “아, 사모님. 진도준 실장은 진 사장님 조카입니다. 앞으로 이 일을 책임질 분이라 함께 오셨습니다.” 신분을 밝히니 여인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놀란 기색을 감추느라 애쓰는 게 역력히 보였다.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제가 철저히 교육받고 왔어야 했는데 시간이 좀 부족했습니다.” 이번에는 허리까지 숙였다. “진 사장 조카라면 회장님 손자시군. 그래, 몇째인가?” 회장 사모님인 할머니가 온순한 표정으로 물었다. “막내입니다.” “막내라….” 아쉬운 기색이 사모님의 얼굴을 스쳤다. “혹시 서울대 법대 입학했다던…. 전국 10위 안에 든 수재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그분이신가…?” 며느리처럼 보이는 중년 여인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다 옛날이야깁니다. 이제는 학교도 잘 안 가서 머리가 다 굳었어요. 조금 전에 들은 작품 설명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군요. 이해 불능이었습니다. 하하.” 슬쩍 너스레를 떠니 젊은 여자 둘도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지만, 할머니가 흘겨보자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렇군. 사실 나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던데, 뭐…. 그게 중요한가? 예쁘고 갖고 싶으면 되는 게지.” 사모님은 슬쩍 웃으며 상품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이 플로피햇은 두 개 준비하고…. 이 향수 몇 개 챙겨 줘요. 난 이 정도면 됐어. 너희들도 골라.” 가장 먼저 쇼핑을 끝낸 회장 사모님은 내 곁으로 와 손을 덥석 잡았다. “나머지는 저 애들에게 맡기고 재미있는 젊은 친구는 나랑 차나 한잔할까?” 여러 사람의 시선을 본체만체하며 거실 구석의 소파로 나를 끌고 갔다. “그래, 지금 몇 학년인가?” “올해가 마지막입니다.” “그렇군. 백화점 일을 하기로 한 건가?” “아직 정해진 건 없습니다. 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서울대 졸업장이 필요했던 건가? 졸업하고 유학?” 꼬치꼬치 묻는 건 뭐가 궁금해서일까? 내가 순양그룹의 후계 구도 안에 포함된 건지, 아니면 적당히 유산 좀 받고 떨어져 나갈 떨거지인지 확인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혹시라도 연을 맺어볼까 타진하는 중인가?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당신 손녀는 미래의 대통령 며느리가 될 테니까요. 말하지는 못해도 얼굴에 티가 났나 보다. “왜 그렇게 웃지?” “아, 실례했습니다. 아까 사모님께서 사신 모자 때문에요.” 이렇게 둘러대는 수밖에. 그리고 이 사모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는 테스트이기도 하다. “모자? 플로피햇?” “네. 그 챙 넓은 모자 말입니다.” “그게 왜 웃기지?” “사모님께서 그 모자를 썼을 때 어떤 모습인지 상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모습이 웃을 정도로 엉망인가?” “엉망까지는 아니지만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솔직히요.” 감히 큰 사모님께 꼴이 우습다고 말했으니, 이 대화를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기겁했을 것이다. 하지만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입꼬리만 조금 올라갔다. 내가 순양의 사람이라 그런 것인지, 이 할머니가 원래 대범한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자네는 백화점 일 오늘부로 그만두는 게 좋겠네.” 의외의 반응이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나처럼 키 작은 할망구가 저 플로피햇을 쓰면 모자에 가려 아무것도 못 본다는 것쯤 나도 알아.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저걸 쓰고 외출할 생각도 없어.” “그런데 두 개나 사셨지 않습니까?” “갖고 싶으니까.” “네?” 갖고 싶다. 당연한 대답인데 해답은 되지 못한다. “늙어도 여자라는 건 알겠지? 그런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면 백화점에서 일하는 건 그만둬야지. 안 그래?” 키 작은 할머니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공부 머리는 좋다고 하니 일머리도 좋겠지. 하지만 여자는 전혀 모르는 헛똑똑이구먼. 쯧쯧.” 그녀는 아직 물건을 고르는 여인들을 향해 말했다. “대충 고르고 이분들 돌려보내. 기다리시느라 진 다 빠지겠다.” “아, 네. 어머님.” “할머니. 피곤하시면 먼저 올라가서 쉬세요.” 손녀가 아직 한참 남았다는 걸 은근히 말하자 그녀는 머리를 저으며 이 층 계단에 올라섰다. “기다리시는 만큼 듬뿍 사드려라. 일당은 벌어야 하지 않겠니.” “꺅-!” 마음껏 사라는 말에 손녀들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저기, 사모님.” 나는 계단 위를 향해 급해 외쳤다. “혹시 오드리 헵번이 그 마음입니까?” 생뚱맞은 소리에 모두 날 쳐다봤지만, 사모님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계단을 밟는 발걸음을 멈추고 한마디 툭 던졌다. “언제 짬 나면 한번 놀러 오게. 차 한 잔 대접함세.” 그녀는 이 말만 남기고 늙은 나이가 무색하게 재빠른 걸음으로 올라가 버렸다. 내 곁으로 다가온 직원이 슬쩍 귓속말을 건넸다. “실장님 덕분에 오늘 구매 예약은 예상치를 훨씬 웃돌 겁니다. 축하드려요.” * * * 두 번째 방문한 곳은 KC그룹이었다. 재계 서열 14위. 석유화학이 주력인 곳이다. 현재의 회장은 이 집안 사위다. 창업자가 딸 하나만 달랑 남겨 놓아 거의 데릴사위처럼 집안에 들여놓은 운 좋은 사내가 회장인 것이다. 하지만 모두 알고는 있지만, 결코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도 있다. 바로 그 외동딸이 KC그룹 진짜 회장이라는 것을. KC는 부부의 성씨 이니셜이 틀림없지만, 한국 케미컬이라는 이름의 이니셜이라고 강조했다.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백화점 직원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버렸다. 집보다는 외부 활동이 훨씬 많은 이 집안의 가장, 바로 회장 부인이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란 직원 한 명이 귓속말로 내게 속삭였다. “우리도 처음 뵙습니다. 보통은 절대 이런 쇼핑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거든요.” 어찌 된 일인지 대번에 감 잡았다. 정확한 경로는 모르겠지만, 이 사모님은 일성그룹으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순양그룹의 막내가 직접 방문한다는 사실을. 어떤 놈인지 호기심도 일어나고, 쓸 만한 놈이면 손녀 중에 누군가와 짝이라도 맺게 해주면 금상첨화 아닌가? 그룹 안주인은 대장부 기질이 다분했다. 우리를 한 번 쓱 훑어보더니 곧바로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자네가 진도준인가? 진 사장의 조카?” “그렇습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명함을 꺼내 두 손으로 공손히 전하려 하자 다짜고짜 고갯짓을 했다. “장사는 직원들에게 맡기고 자네는 나와 차나 한잔하지. 아니다…. 혹시 술 하는가? 나는 낮술도 마다치 않아.” 일성그룹 안주인과 똑같았다. 사람 없는 곳으로 나를 끌고 가서 앉혀 놓고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고 내가 어떤 사내인지 탐색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대화를 끝내고 왔을 때 직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한가득했다. 저 웃음은 바로 매출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말해준다. “이거…. 올해 S/S 시즌 실적은 실장님 덕분에 예약만으로 전부 채울 것 같습니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그 후로 몇 곳의 재벌 집을 방문했지만 같은 일을 반복했다. 심지어 회장 본인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덕분에 두 가지 성과를 얻었다. 웬만한 대기업에 내 이름을 알렸고, 언제든 전화해서 차 한잔 나눌 수 있는 친분도 쌓았다. 그리고 매출은 정점을 찍었다. 직원들은 F/W 시즌에도 나와 함께하기를 원했다. 매출도 좋고 돈 많은 재벌가의 갑질도 없이 아주 편한 영업을 끝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 이놈아! 넌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왜 갑자기 너랑 선보고 싶다는 집안이 줄을 잇는 게냐?” 기쁜 듯이 소리치는 할아버지의 전화도 몇 번 받았다. 그 정도로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순양그룹과 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방문 판매나 다름없는 특급 VVIP 영업이 끝나고 이제 진서윤 부회장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왔다. 100여 명의 VIP들이 마치 파티라도 하듯 화려한 옷차림으로 호텔에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탑클래스의 여배우도 몇 명 보였다. 이 사람들이 프랑스 요리사와 스텝이 준비한 요리를 즐길 때 고모는 막바지 점검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은 꽤 충격이었다. 일도 좀 하는걸? 우리 고모. ======================================== [152] 질러 쇼 4 초대받은 고객들은 줄 이어 나오는 코스요리를 즐겼다. 저들의 입에 들어가는 것, 사용하는 접시, 식기 그리고 테이블과 테이블 보. 이 모두가 전세기에 실려 프랑스에서 날아온 것임을 그들도 안다. 일 년에 딱 두 번 하는 행사이니 그들은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모든 것을 유심히 살피며 긴 식사 시간을 가졌다. “식기나 접시도 주문합니까?” “당연하지. 마음에 드는 거 발견하면 우리 직원 호출해서 주문해.” 연회장을 둘러보니 이미 몇몇 직원이 고객 곁에서 뭔가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도 보였다. 세상의 선택은 아닐지라도 순양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만 구매할 수 있는 명품들. 이 명품은 앞으로도 백화점 매장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초대받은 자신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걸칠 수 없다는 걸 안다. 이런 특별함 때문에 초대장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순양의 초대장을 받았다는 것은 한국 최상층이라는 증표나 다름없다. 이런 전략을 구사한 고모도 보통은 넘는다. 긴 만찬이 끝나자 연회장의 불은 꺼졌고 정면에 젊고 잘생긴 사내 한 명이 등장했다. 그는 오늘 이 연회장에 전시된 여러 브랜드의 특징과 장점 그리고 희소성을 설명할 것이고, 수많은 브랜드를 한자리에 모은 이유인 통합 컨셉을 알려줄 것이다. “아름다움을 향한 집착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안에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순양의 방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정면 스크린에는 S/S 컬렉션의 런웨이를 편집한 영상이 흐르기 시작했다. “빈티지한 감성의 와이드 라펠 하프 캔버스 헤리티지 라인부터 클래식한 핏과 어깨가 강조된 시뇨리아 라인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소재를 사용한 7가지 실루엣의 라인업을 선보입니다.” 여전히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단어로 나열한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모두 천천히 일어나 본격적인 쇼핑을 시작했다. 인사를 나누고 아는 사람끼리 어울려서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저 여인네들의 눈웃음과 미소 속에는 불꽃 튀는 눈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상대보다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는 걸 과시하는 방법으로 돈을 쓰는 것이다. 깜깜이 쇼핑이다. 전시된 명품에는 가격표가 없다. 지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예약하는 블라우스가 수백만 원짜리일 수도 있고, 여름에 해변에서 쓸 슬리퍼가 백만 원을 훌쩍 넘을 수도 있다. 웬만큼 자신 없다면 쥬얼리는 건드리지도 못한다. 마음에 들어 사고 싶어도 가격을 물어본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는 일이다. “이거 얼마죠?”라고 묻는 순간 주변의 시선이 쏟아진다. 그 시선에는 명품을 돈으로 환산하는 천박함에 대한 경멸, 가격까지 물어봐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 왜 이곳에 왔냐는 듯 바라보는 무시가 담겨 있다. 이 속에는 고모의 또 다른 전략이 숨어 있었다. 이백여 개의 상품 중에 많게는 10%, 적게는 5%의 아주 값싼 상품이 섞여 있다. 몇만 원짜리 손지갑, 십여만 원에 불과한 하이힐…. 순양의 컬렉션은 단지 비싼 상품만으로 구성한 게 아니다. 가격을 떠나 진정한 명품으로 구성한 것이라는 걸 드러낸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자리에서 가격을 물어본다는 것은 가치를 돈으로만 생각하는 천박한 행동이라고 여긴다. 고모는 연회장을 날카로운 눈으로 샅샅이 지켜보다 갑자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순히 눈인사만 주고받으며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연회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고모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이거 준비해줘요.”라며 예약 속도가 빨라졌다. 눈도장을 찍어둬야 F/W 시즌에도 초대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런 엄청난 효과를 불러일으킨 고모는 내게 눈짓하며 재빨리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이 정도면 됐어. 자리를 더 지키면 값 떨어진다. 가자.” 신비주의 같은 전략인가? 이렇게 끝내버리면 좀 아쉽다. 백여 명의 고객 중 안면을 터놓으면 도움될 만한 집도 분명히 많을 텐데. 이런 내 생각을 눈치챈 고모가 말했다. “저 사람들 인사는 나중으로 미뤄. 어차피 감사 인사드리기 위해 한 바퀴 돌아야 하는데 쓸 만한 집안은 내가 리스트 업 해줄게. 면세점 허가에 힘이 돼줄 거야.” “저한테 인맥 넓힐 기회를 많이 주시는군요.” “오해하지 마.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니까.” “오빠보다는 조카가 더 편하다는 계산입니까?” “아니, 넌 오빠들보다 더 여유가 있어.” “여유?” “그래. 자신감이라고나 할까? 만약 큰오빠나 작은오빠였다면 이미 날 지방 골프장으로 쫓아냈을 거야. 경영에는 아예 손도 못 담그게 했겠지.” 고모는 날 보며 빙긋 웃었다. “하지만 넌 자리를 계속 지키게 해줬고 네가 경쟁자를 다 물리치는 동안 내가 와신상담해도 좋다고까지 했어. 난 그럴 생각이고.” “내 인맥을 넓히는 게 큰아버지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할 거라는 생각이시군요.” “당연하지. 너도 큰아버지들을 조심해. 살아온 세월만큼 인맥도 쌓이는 법이야. 할아버지가 지금은 네 방어막을 해주지만…. 두고 봐.” 고모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날부터 국세청, 금감원이 미라클을 덮칠 거다. 물론 미국 본사까지 털어 먹으려고 온갖 연줄을 다 동원할걸?” “그때를 대비해서 지금부터 방어막이 돼줄 만한 사람을 알아둬야 한다?” “그래. 네가 무너지면 나도 귀양 신세를 면치 못할 테니까 말이야. 그래서 이건 날 위한 거라는 거다.” 희망은 좋은 것이다.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좋은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희망보다는 계획이 더 좋다. * * * “1억 이하는 다음 시즌부터 초대장 돌리지 마.” “네.” 예약 현황을 보고받은 고모는 칼같이 잘라버렸다. 1억 이하라는 것은 쥬얼리 종류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는 뜻이다. 패션의 마지막은 보석이다. 천만 원짜리 드레스를 걸쳤으면 몸에 걸친 보석은 1억은 훌쩍 넘겨야 구색이 맞다. 보석을 구매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돈이 부족하다는 걸 알려주는 셈이다. 앞으로 VVIP로 대접할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니 초대장 명단에서 빼버리는 것이다. “잠깐만, 그 리스트 잠시 줘봐요.” 밖으로 나가려던 직원은 황급히 명단을 내밀었다. 난 1억 이하의 고객 리스트를 찬찬히 보며 그들의 예약 구매 내역과 남편의 직업, 그 집안 사람들의 인적 사항까지 꼼꼼히 살피며 필요한 내용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거기 적힌 대로 준비해주고 방문 가능한 일자 스케줄 잡아서 내게 알려줘요.” 내가 전한 리스트를 쥔 직원이 고모의 눈치를 슬쩍 볼 때 소리쳤다. “내 지시를 부회장님 지시처럼 생각해야 직장 생활 계속할 수 있습니다. 아직 그 정도 눈치도 없습니까?” “아, 네. 죄… 죄송합니다.” 황급히 허리 숙인 직원이 나가려 할 때 고모는 손을 들어 그를 세웠다. 그리고 호기심에 찬 눈으로 내게 물었다. “이제 직원들 군기도 잡는 거야? 하긴… 그럴 때가 됐지. 그런데 뭘 전해준 거야? 이 메모는?” “다음에도 계속 초대장을 줘야 할 사람들 체크해서 준 겁니다. 구매 수준보다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죠.” “그래서 메모는 뭔데?” “제가 직접 찾아갈 때 전달할 선물 목록입니다.” 고모는 리스트의 메모를 찬찬히 살피며 펜을 들어 뭔가 덧붙이거나, 찍찍 그어버리고 다시 끄적이기도 했다. “이거 수정한 대로 준비해요. 그리고 진도준 실장 말대로 스케줄 확실하게 픽스하고. 진 실장 괜한 헛걸음하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또 한 번 허리 숙인 직원이 나가자 고모는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었다. “우리 도준이는 배우는 것도 빠르네. 선물 리스트가 꽤 적절해.”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여성 옷에는 목걸이, 남성 옷에는 시계. 필요한 걸 주는 거죠. 그런데 뭘 고친 겁니까?” “목걸이와 시계 브랜드만 수정했어. 구매한 옷과 어울릴 만한 걸로.” 나보다 더 나은 점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걸까? 아니면 좀 더 싼 걸로 바꾸기 위한 변명일까? “그런데 그 사람들은 왜 챙겨주려는 거지? 그렇게 힘쓸 만한 사람들은 아닌데?” “공무원들이니까요. 공무원은 큰 실수만 없다면 올라갈 일만 남았습니다. 5년, 10년 뒤를 생각하면 괜찮은 장기 투자 종목이죠.” 초대장을 받을 정도라면 단순한 고위 공무원이라서가 아니다. 깜깜이 쇼핑을 즐길 만한 재력이 뒷받침하는 집안이다. 배경과 능력 있는 공무원은 최소한 정상 근처까지는 간다. “이런 투자가 아니더라도 공무원은 순양 말을 잘 듣는 고양이야. 불필요한 데 돈 쓰는 거다. 오늘 추가한 선물만 해도 3억이야.” “참, 그 돈은 제가 채워 넣죠. 앞으로 회사 돈 펑크 나는 건 절대 안 되니까요.” “괜찮아. 이 정도는….” “고모가 말했죠? 언제든 국세청이나 금감원이 덮칠지 모른다고요. 그 대상이 우리 순양유통일 수도 있습니다. 조심해야죠.” “미리 준비한다…?” “네. 지금 중앙 고위 관료들이 큰아버지들과 좋은 관계라면 5년 뒤는 우리와 좋은 관계의 사람들로 채워야죠.” 고모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빠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는 생각은 아직 못 한 것 같다. “고모. 큰아버지들은 저보다 더 가까운 관계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순양 이름을 단 유통 관련 계열사가 다 빠져나갔습니다. 유산 배분이니 포기하고 넘어가실 분들입니까?” 고모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이걸 다시 뺏으려고 작업 들어올 겁니다. 조심하지 않고 방심하면 한 방에 당해요. 고모가 왜 유통을 제 손에 고스란히 넘겼는지 생각해보세요. 몇천억 때문에 놓친 겁니다.” “야! 그만해. 속 쓰리다.” 웃으며 말하지만 웃음은 길지 않았다. “두 번 속 쓰릴 수는 없는 일이죠. 미리미리 우리를 지켜줄 방어막을 준비해야죠.” 아마 이번 F/W 시즌의 초대장은 두 번에 걸쳐 발송될 것이다. 전통적인 고객들 그리고 우리에게 방어막을 자처할 사람들, 이렇게 나눠서 말이다. * * * “혹시 진도준 실장님?” “네, 사모님. 그날 인사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아니에요. 그 복잡한 연회장에서 어떻게 일일이 인사하나요. 마음 쓰지 않아도 돼요.” 사람 좋아 보이는 아줌마가 웃으며 반겼다. 이미 내가 누군지 아는 눈치다. 땅 투기로 일약 갑부가 된 아버지를 둔 이 아줌마는 현재 정책국장이라는 자리에 오른, 쓸모가 많은 남자를 남편으로 두었다. 직원들은 몇 개의 상자를 조심스레 거실에 내려놓은 후 멋들어진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예약하신 것과 맞는지 확인 부탁합니다.” 재빨리 청구서를 살펴보는 아줌마의 눈이 조금 커졌다. 오늘에야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알았고, 그녀의 계획보다 훨씬 많이 나왔음을 짐작할 수 있는 표정이다. 땅 투기로 재벌 못지않은 부자 아버지를 둔 그녀지만 뱁새는 뱁새일 뿐 황새는 되지 못했다. 속이 쓰릴 것이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작은 상자 두 개를 내밀었다. “이건…?” “부군 되시는 분의 정장을 구매하셨죠? 이건 그 정장에 어울릴 만한 시계입니다. 작은 성의니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공짜라면 뭐든 기분이 좋다. 특히 그 공짜 선물이 그녀가 구매한 옷보다 두 배 정도 비쌀 경우 그 기분은 수십 배 좋아진다. “어머, 이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그녀는 이미 이 시계의 가격이 얼마인지 안다. 살짝 찌푸렸던 미간이 확 펴지며 입이 귀에 걸렸다. “나랏일 보시는 분이니 주변에 눈이 많으실 테고… 가끔 기분 전환하실 때 쓰시라고 가져왔습니다.” 상자 안에는 가격표와 품질보증서 그리고 영수증까지 들어 있다. 영수증의 의미도 알 것이다. 뇌물이 아니라 구매한 것으로 둔갑시켰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뜻이다. 이 아줌마의 만족스러운 웃음은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겠다는 계약서나 다름없다. 이런 계약을 수십 명과 하느라 바쁜 날을 보냈다. ======================================== [153] 주거니 받거니 1 “동기야. 소문 들었냐?” “도준이?” “그래.” “여인네들 사이에서 들썩거리기는 하더라. 인물 훤칠하고, 예의 바르고, 망나니짓한 적 없고, 서울대 떡하니 들어간 최고의 사윗감이라면서….” 진동기는 저녁이나 먹자는 형님의 전화가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큰조카인 영준이 문제로 만나자고 하니 냉정히 거절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백화점 VIP 대상으로 하는 S/S 시즌 컬렉션이 역대 최고의 매출을 올렸다고 업계가 뒤집힐 지경이야. 대현 백화점은 시작할 엄두도 못 낸다고 울상이야. “그게 다 도준이 때문이다?” “그래. 딸 가진 재벌가 안주인들은 그 자식에게 잘 보이려고 돈을 물 쓰듯 썼다고 하더라.” 진동기는 여자들이나 열광하는 이런 대화나 계속 나눌 생각은 없었다. “영준이 때문에 보자고 하더니 계속 도준이 이야기만 할 거야?” “도준이 문제는 의견을 나눠야 하니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먼저 하는 거야.” “영준이는?” “내가 부탁하는 거니 빨리 끝난다.” “그럼 빠른 거부터 하지?” “좋아. 우리 영준이…. 그만하면 유배 생활 오래 했다. 풀어줘라.” “유배?” 진동기는 코웃음부터 쳤다. “혼자 수시로 서울 들락거렸어. 서울에 와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형님이 더 잘 아실 테고…. 거제도에서는? 작년 슈퍼모델 입상자 다섯인가 여섯인가 거제도에 불러다가 직원들 모아 놓고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괜한 행사 벌였지? 그 뒤의 일은 잘 알잖아? 그거 아버지 귀에 안 들어가도록 막는다고 고생한 사람이 바로 형님이잖수.” “그래서? 계속 묶어 두려고?” “내가 풀어주면? 우리 조카 서울 와서 사고라도 치면 나도 곤란해져.” “그놈 풀어줘야 며느리도 풀려나지. 이건 며느리 때문에 부탁하는 거다.” 순간 진동기의 얼굴이 환해졌다. “뭐야? 애라도 들어선 거야? 임신?” 하지만 진영기 부회장은 씁쓸한 표정이었다. “그랬다면 내가 부탁하겠냐? 요구했겠지.” “그럼?” “아는지 모르겠지만, 곧 이상수 구속 수사할 거다.” “이상수? 누구지?” “뉴 테이터 테크놀러지 사장.”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나라를 뒤흔들어버린 회사, 기억났다. “아…. 그런데 그 사람은 왜?” “순식간에 수조 원이 증발했어. 애 업고 길바닥에 나앉은 사람도 부지기수고.” “미친 것들. 돈에 환장해서 전세금까지 털어먹으니 그렇지. 그렇다고 주가 폭락한 회사 사장을 구속해?” 진동기는 한심한 듯 혀를 찼다. “낼모레면 선거다. 여당도 표 관리해야지. 아니, 여야 모두 관리하려다 보니 그놈 잡아넣는 거야. 희대의 사기꾼 개새끼 하나는 만들어야 돈 날린 놈들 울분을 가라앉히지.”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이야기가 왜 나와?” “그놈 조사할 때 몇 명 더 끼워 넣을까 생각 중이야.” “누구를?” “오세현이 그리고 도준이랑 우리 하나뿐인 여동생까지.” “뭐?” 진동기는 형의 미소를 보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 하자는 짓일까? 어차피 별다른 소득도 얻지 못하고 유야무야될 게 뻔한데…. “슬쩍 한번 쳐보자고. 뭐가 나오는지. 혹시 알아? 미국 돈줄이 누군지, 흔적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더 좋고.” “그게 가능하기나 할 것 같아? 우리 뉴욕지사 애들이 몇 달 동안 뒤져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어.” “그러니까 혹시라고 했잖아. 또 있어. 언론이 서윤이가 회사 돈을 마음대로 주무른 걸 터트리고, 그 애가 검찰청을 들락거리면 면세점 선정에도 불리할걸?” “면세점? 인천공항?” “그래. 거기에 엄청 공들이고 있는데…. 어떻게 돌파하는지 실력 한번 보자고.” 슬며시 웃는 형님을 보며 진동기는 여전히 내켜 하지 않았다. “검찰이 움직이면 아버지가 가만있을까? 그 애들 참고인 조사 명단에만 올려도 검사장이 직접 전화해서 보고할걸?” “그래서?” “뭐? 무슨 뜻인지 몰라? 검찰이 안 움직일 거라고.” “보고한다고 검찰이 덮어? 못 덮어.” “무슨 소리야?” “한성일보가 터트릴 거거든.” 가볍게 한번 두드려보는 것치고 너무 크게 벌인다. 언론까지 나서면 수습도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후―. 지금 상황 알지? 그룹 지분 이동 중이야. 그것도 막바지라고. 조금만 지나면 우리 손에 들어올 순양그룹인데 왜 분란을 일으키려고 해?” “네 말대로 조금만 지나면 우리 손에 들어오니까.” “말장난하지 마.” “내가 명동이랑 여의도에 사람 좀 풀어서 알아봤어. 아버지가 아무리 화나셔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지금 상황을 말하자면 고속 질주하는 자동차야. 급브레이크 밟으면 대형 사고 나.” “자신 있나 보군.” “없었으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진동기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형님이 알아서 하쇼. 난 빠질 테니까. 대신 영준이는 서울로 보내줄게. 사표 받고 보낼 테니까 형님께서 적당히 자리 만들어줘.” “그래. 그 정도면 된다.” “아무튼, 난 한성일보든 뭐든 모르는 일로 할 테니까 알아서 해. 난 영준이를 서울로 올리는 것만 책임진 거야.” 발을 뺀 진동기가 사라지자 진영기 부회장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얍삽한 새끼. 혼자 독야청청한다 이거지?” * * * 이상수에 대한 의혹이 가득한 기사가 넘쳐나고 벤처 신화가 허상이었다는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세현의 말대로 누군가 희생양으로 삼기 위한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선거가 코앞이니까. 기사의 강도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다. 의혹이 확신으로 확신이 구체적인 사실로 변하면서 이상수의 사생활까지 낱낱이 알려졌다. 어느새 희대의 사기꾼으로 변했지만 그를 수사하는 검찰은 횡령으로 가닥을 잡았다. 사기 혐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검찰도 수를 낸 것이다. 천하의 둘도 없는 사기꾼 이상수, 그리고 그 사기에 대한민국이 놀아났다는 언론의 결론. 그 마지막은 바로 배임 횡령 혐의로 기소. 이 이상한 흐름을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책임을 지고 감옥 갈 사람만 나오면 되는 일이다. “이거 좀 이상한데요?” “뭐가?” “이 기사 한번 보시죠.” 오세현은 내가 내민 신문을 낚아챘다. 특정 기사를 한참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대놓고 공격하네.” “그렇게 보이죠? 누가 봐도 고모 아닙니까?” “대한민국의 대표적 기업 창업주의 딸, 백화점을 맡아 경영, 그런데 유령 회사를 통해 주식 투자… 엄청난 손해… 알 만한 사람은 전부 눈치채겠구먼.”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한성일보니까 짐작 갑니다. 어떻습니까?” “진영기 부회장?” “네.” 오세현은 신문을 집어 던졌다. “오빠가 여동생까지 팔아먹는 거냐?” “백화점을 그냥 넘겨줄 분이 아니죠. 앞으로 틈만 있으면 흔들어 댈 겁니다.” “진서윤 사장, 아니 부회장이지. 어떻게? 그냥 놔둘 수는 없잖아.” “막아야죠. 고모가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는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입니다. 면세점 허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좋아. 다른 신문사에 심층 기사 나가지 않도록 손부터 쓰자.” “네. 전 고모 좀 만나고 올게요.” * * * 고모는 이미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당장 그만둬. 오빠도 저금통으로 쓰는 페이퍼 컴퍼니 몇 개 있는 거 내가 모를 것 같아? 그거 터트리고 함께 개망신당해볼까?” 나를 발견한 고모는 흘깃 쳐다보며 손짓했지만, 수화기를 내려놓지는 않았다. “돈으로 물어뜯으면 오빠 상처가 훨씬 더 심해. 누구 입에서 비명 소리가 먼저 나오는지 한번 두고 보자고!”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고모는 한동안 씩씩대기만 했다. 난 물 한 잔을 따라 잔을 내밀었다. “큰아버지?” 고모는 물을 들이켜며 머리를 조금 끄덕였다. “기사 보고 왔어?” “네. 너무 염려 마세요. 우리 쪽에서 다른 신문사의 스피커 틀어막는 중입니다. 한성일보 혼자 떠들다 그만둘 겁니다.” 고모는 안심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아. 한성일보가 토스하면 검찰이 스파이크 때려야 끝나.” “우리도 수비수는 꽤 동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 고모가 포토라인에 서는 건 꼭 피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나도 나름대로 선이 있어.” 입술을 깨문 고모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큰아버지의 페이퍼 컴퍼니에 대해 아는 거 있으세요?” “아는 건 있지만, 증거는 없어. 뭐…. 흔적을 손에 쥐려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오빠가 이렇게 나오니 나도 가만있을 수는 없지.” “방법이 있습니까?” “서로 갈라선 남매일 때는 모른 척해줬지만, 칼을 겨눈다면 나도 칼 뽑아 써야 하지 않겠어?” 고모 입에 걸린 작은 미소를 보자 그 칼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검찰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인물, 최창제 시장인가? 두 사람이 아직 긴한 관계를 끊지 않은 건가? 이젠 걱정보다 흥미가 앞섰다. 집안 사람들끼리 치고받다 보면 쓸 만한 칼자루 몇 개는 떨어트리지 않을까? 하지만…. 나도 이 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잠시 깜빡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일깨워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급한 연락에 아버지 사무실로 달려가니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거 한번 봐. 무슨 일인지 짐작 가니?” 아버지가 내민 서류는 참고인 출석요구서였다. 어쭈! 요것 봐라! 고모가 아니라 내가 타깃이었나? 아니면 미라클? “아버지, 잠시만요.” 곧바로 오세현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의 불만이 휴대폰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확실하다. 그물 한번 던지고 여러 마리 잡겠다는 속셈이 분명했다. “집안일 보시는 아주머니가 놀라서 연락하더라. 그래서 네 엄마 보기 전에 이리로 가져왔어.” “잘하셨어요.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별거 아냐? 소환장인데?” “참고인 출석 아닙니까? 안 가도 상관없습니다.” 아버지가 이 정도로 안심하기 어려운 건 당연하다. 아들 일 아닌가? “무슨 일인지 빠짐없이 말해. 혼자 어떻게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까 어물쩍 둘러댈 생각 말고!” “저도 확인해봐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습니다. 아마도 세현 삼촌께서 알아보실 테니까 그때 확인하시죠.” “그래?” 표정 보니 순순히 넘어가는 건 다 틀렸다. “가자. 네 말대로 그 자식에게 물어보자.” 아버지는 날 데리고 여의도로 달렸다. * * * 내가 힘들게 눈짓, 손짓하며 입을 막으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 잘난 진영기 부회장님께서 한성일보에 불씨 던졌고 검찰에게 미끼 줬어. 백화점 뺏고 싶어 난리 치는 거야.” “뭐?” “진 회장님 이선으로 물러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뜯는 거 봐라. 대단하다, 진짜.” 오세현은 오히려 담임에게 일러바치는 반장처럼 신나게 떠들어 댔다. “확실해? 큰형이 시작한 거야?” “심증이야. 이런 거에 물증이 어딨어? 큰형 아니면 둘째 형이 뻔한데…. 누구겠어? 이렇게 치고 들어오는 건 둘째 형 스타일은 아니지 않나?” 아버지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이… 씨발…!” 그도 역시 큰아버지의 짓이라는 걸 확신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흥분을 좀 가라앉히세요. 이건 그냥 한번 찔러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고모나 제게 약간의 겁을 주는 정도로 끝날 겁니다.” 소용없었다. 부모란 새끼를 위협하는 놈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이성적으로 따지지 않는 것이 진리다. “검찰이든 뭐든 넌 움직이지 마. 출석 거부하고 기다려.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아버지는 말릴 틈도 없이 나가버렸다. “삼촌! 그걸 아버지에게 다 말씀하시면 어떡합니까?” 내가 버럭 소리 질러도 오세현은 싱긋 웃기만 할 뿐이다. ======================================== [154] 주거니 받거니 2 “뭐 어때? 이럴 때는 우리 편이 많은 수록 좋은 거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고. 이번 기회에 진영기 부회장 끗발이 얼마나 좋은지 가늠해보는 것도 좋잖아? 아 참, 행여나 네 할아버지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말아. 플라이급 싸움에 헤비급 끼어들면 판 다 깨진다. 흐흐.” 투자와 기업 인수·합병에 익숙한 오세현은 명확한 적이 나타났을 때 불타오르는, 익숙한 기분을 만끽하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이 판에 아버지까지 끼어들게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형제끼리 주고받을 말도 있을 거야. 어쩌면 윤기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있을 테고. 냅둬 보자.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더 따져봐야 바뀔 게 없다. 삼촌 말대로 냅둬 보는 수밖에. “그런데 우리는요? 참고인으로 남부지검 구경 한번 합니까?” “넌 무시해. 나 혼자 출두할 생각이다. 도대체 뭘 노리는지 확실히 알아봐야지. 단, 은밀하게. 기자, 카메라 없는 조건으로….” “듣는 귀는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닙니까? 저도 가서 뭐라 하는지 들어보겠습니다. 선배들에게 인사도 드리고요.” “아, 너도 그쪽 출신이지? 그럼 분위기나 한번 파악해볼래?” 이처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별것 아니다. 우리는 국세청이 덤벼도 크게 털릴 게 없다. 미라클은 미국 회계 기준으로 운영하기 때문이다. 자잘한 위반쯤은 벌금 좀 내면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수준이고 고모가 날린 천사백억도 투명하게 처리했다. 고모의 유통 주식을 매입한 게 전부다. 그 돈으로 구멍 난 자금을 어떻게 메웠는지는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검찰이 두드려봤자 헛발질로 끝날 것이다. “그러니까요. 검사님들이 원하는 게 뭔지 한번 알아봅시다.” * * * 아들의 예상과 달리 진윤기는 곧바로 큰형에게 달려가지 않았다. 대신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한동안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김 대표. 희은이랑 태현이 데리고 빨리 사무실로 좀 와줘. 긴히 할 이야기가 좀 있다.” “최 팀장. 지금 당장 봉 감독 찾아서 끌고 와. 그리고 윤동건이 스케줄 확인하고 그 친구도 빨리. 급하다.” 많은 통화를 끝낸 진윤기는 사무실을 서성거렸다. 집안싸움 하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할 생각이었다. 한국 영화계의 큰손이니 대형 매니지먼트사 대표와 톱스타라 하더라도 지체 없이 달려왔다. “아이고, 형님. 무슨 일이시길래 그리 급하십니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중년의 사내는 괜한 너스레를 떨었고 그의 뒤를 따라 남녀 한 쌍이 팔짱을 낀 채 들어왔다. 지금 가장 핫한 충무로의 두 사람은 진윤기를 향해 머리를 꾸벅 숙였다. “사장님. 혹시 우리 더블 캐스팅인가요? 아직 충무로에 도는 시나리오는 없던데요?” “미안, 영화 때문에 부른 거 아니다.” 진윤기는 기대 가득한 두 배우의 눈을 보며 사과부터 했다. 김 대표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항상 차분한 진윤기 사장이 이렇게 당황해하는 모습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형님. 뭔지 모르겠지만 뜸 들이지 말고 시원하게 말씀하십쇼.” “내가 진짜 어려운 부탁 좀 하자.” “네. 뭐든 말씀하십쇼. 우리 희은이, 태현이를 스타로 만들어주셨는데 어떤 부탁이든 들어드려야죠.” 세 사람은 진윤기의 입만 쳐다보기 시작했다. “두 사람, 결혼할 거냐?” “네? 갑자기 그건 왜…?” 두 배우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뭐, 상관없겠지. 아무튼, 두 사람 열애설 터트리자. 내일 당장…. 아니, 오늘이라도 좋아.” “형님!” 가장 놀란 사람은 당사자가 아닌 김 대표였다. 지금 물밀 듯이 들어오는 CF, 드라마 캐스팅이 허공에 날아가는 소리다. 하지만 즉각적인 거절은 피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더 들어보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겠지만, 눈앞의 진윤기는 격이 다른 사람이다. 영화계를 쥐락펴락하기도 했지만, 그의 배경은 바로 순양그룹이다. 순양이라는 이름은 모든 위험과 손해를 감수할 만한 힘을 준다. 김 대표는 순식간에 계산을 끝냈다. “이거, 제가 너무 놀라서 큰소리를… 죄송합니다.” 김 대표는 머리를 꾸벅 숙인 다음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됐네. 결혼은 나중 일이고 두 사람 비밀 연애하는 거 힘들잖아. 그냥 발표하자.” “대표님!”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하는 김 대표를 향해 두 톱스타는 깜짝 놀라 소리 질렀고 그런 두 사람을 향해 김 대표는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너희 두 사람, 이 자리까지 단번에 오른 게 다 우리 형님 덕분인 거 잊었냐? 이럴 때 도와드려야 얼굴에 분칠하는 것들 믿으면 안 된다는 소리가 없어져. 아냐?” “김 대표. 너무 그러지 마. 당사자는 힘든 결정이야.” 진윤기는 다시 두 사람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희은아, 태현아. 부탁 좀 하자. 내가 꼭 보답한다. 나 한번 도와주라.” “아… 진 사장님. 왜 이러십니까? 머리 드세요. 알겠습니다. 뭐든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태현은 벌떡 일어나 진윤기를 바로 세웠다. “희은아. 언젠가는 터질 일이니까 좀 앞당긴다고 생각하자. 괜찮지?” “오빠만 괜찮으면 나야 뭐….” 두 사람도 받아들이자 진윤기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마워. 내가 좀 급해서 그러니까 발표 서둘러줘. 늦어도 내일 아침 신문 톱기사로 나가게 김 대표가 힘 좀….” “형님. 염려 마십시오. 신문, 방송, 인터넷까지 두 사람 이야기로 도배하겠습니다.” 김 대표는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 # # “아, 뭔데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해요? 시나리오 작업 망치면 전부 형님 탓으로 돌릴 겁니다.” 이번에는 부스스한 머리의 사내가 불만을 터트리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진윤기는 그의 손을 끌며 소파에 앉혔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내 이야기만 들어. 다 듣고 대답해. 그 대답도 무조건 예스야. 알아들었지?” “형님. 이건 또 무슨 컨셉이유? 마피아 두목 흉내….” “입 닫고. 지금 쓰는 시나리오 영화 제작 확정이다. 내가 안 봐도 돼. 오케이?” 봉 감독은 눈만 깜빡거렸다. 시나리오도 안 보고 영화화 결정? 시놉시스 나온 게 전부다. 아직 트리트먼트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엄살을 떨었지만, 시나리오 작업은 들어가지도 못한 상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게다가 자신은 입봉작을 관객 10만으로 시원하게 말아 드신 신인 감독 아닌가? 그런 자신을 상대로 확정이라니? “예, 예쓰!” 저절로 대답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한석규, 송강호, 설경구, 최민식, 안성기, 박중훈을 다 때려 넣어도 좋아. 이 사람들 개런티도 달라는 대로 다 줘.” 봉 감독은 도저히 믿기 힘든 표정만 지을 뿐, 예스라는 대답도 못 했다. “대신 딱 일주일 뒤에 제작 발표회 한다. 준비는 내가 할 테니까 넌 주연 배우를 꼭 그 자리에 데리고 와야 해.” “네? 그런 억지가…. 뭡니까? 제 영화 자빠진 겁니까?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봉 감독은 자신을 바라보는 진윤기의 눈을 보자 입을 닫았다. 진지함을 넘어 간절함이 줄줄이 새어 나왔다. “너한테만 맡기는 거 아니다. 나도 전화 돌리던지, 직접 만나든지 할 거다. 하지만 배우가 감독 보지, 제작자 보고 승낙하지 않는 건 너도 알잖아? 네가 직접 설득해야 한다.” “일주일이라고 하셨죠?” “그래.” 봉 감독은 소파에서 일어나 진윤기의 집무용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도 종이 위에 배우의 이름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 섭외할 생각입니다. 형님이 먼저 연락부터 해 놓으세요. 설득은 제가 하겠습니다.” 명단을 받아 든 진윤기는 곧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빨리 가봐. 참, 제작부장에게 말해 놨으니 같이 움직여. 난 전화부터 돌릴 테니까.” 봉 감독은 더 이상 빠를 수 없을 만큼 재빨리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그도 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부족한지 안다. 하지만 믿는 영화사의 대표가 이렇게 간절할 정도면 얼마나 긴급한 일인지도 잘 안다. # # # “최기영 감독 말입니까?” “그래.” 잘생긴 윤동건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진윤기 사장이 불렀을 때 들뜬 마음으로 매니저도 없이 혼자 달려왔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것 같아서였고 돈 때문에 매니저가 먼저 선을 긋는 우를 범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TV에서는 스타지만 영화판에서는 그만한 위치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영화에 굶주렸다. 또래의 후배들이 스크린에서 치고 나갈 때 그는 드라마와 CF로 더 많은 돈을 버는 걸로 위안 삼았지만, 영화와 드라마는 격이 다르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TV 스타는 부러움의 눈길을 받지만, 은막의 스타는 존경의 눈길을 받는다. 돈은 충분히 있으니 존경의 대상이 되고 싶었다. “알겠지만 최기영 감독은 항상 논란을 가져오는 감독이다. 네가 최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는 것부터 파격이라고 할 거야.” “사장님. 단지 화제를 모으는 방법으로 절….” “오해하지 마.” 진윤기는 손부터 내저었다. “최 감독이 먼저 물어봤어. 솔직히… 내가 뭉개고 있었고.” “최 감독님이 먼저요?” “응. 그런데 최 감독 영화가 많이 어둡잖아. 네 이미지랑 좀 안 맞아서 뭉갰어. 그리고….” “그리고? 뭡니까? 말씀해보세요.” “자네가 이거 맡으면 당분간 CF나 드라마는 꿈도 못 꿀 거야. 많이 잔인하거든.” 윤동건은 더 묻지도 못하고 입을 닫았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자신에 물어야 한다. 진윤기는 윤동건의 표정을 살피며 툭 던지듯 말했다. “거절해도 돼. 나도 그리 내키지는 않으니까.”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그래. 부담 갖지 말고. 하지만 스케줄 때문에 답은 빨리 줘야 해.” “시간이 얼마나 있습니까?” “열흘. 참, 시나리오는 사무실로 보낼 테니까 같이 의논해보라고.” 윤동건이 나가자 진윤기는 긴 한숨을 쉬었다. 저런 스타는 돈으로 안 된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드려야 일이 성사된다. 한껏 버티다가 보름쯤 지나면 승낙할 것이다. 세 개의 기사. 최소한 한 달은 인터넷을 시끄럽게 할 것이다. 한성일보가 아무리 떠들어도 이기지 못한다. 아니, 한성일보도 이 가십거리를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큰형님의 계획이 뭐든지 간에 일단 허물어트리고 만나야 한다. 소리만 치고 따지기만 하는 동생이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힘이 있다는 걸 과시하고 만나야 한다. 그래야 대화나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 * * * “이놈들이 온갖 지랄들을 다 하는구먼. 에잉.” 진 회장은 훑어보던 신문을 한쪽으로 휙― 하고 치워버렸다. 두 톱스타의 열애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는 공식 기자회견. 이 기사는 모든 언론이 크게 다뤘고 덕분에 진서윤의 횡령에 대한 후속보도는 나오지 않았다. 한성일보도 바보가 아니다. 지금 열심히 후속보도를 내보내 봤자 거들떠볼 사람이 없다는 걸 그들도 안다. 재벌들이 회사 돈을 빼먹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 “그러니까 큰놈이 시작했고 밑에 동생들이 반격하는 중이라는 거지?” “네. 회장님.” 이학재 실장이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동부지검에서 진영기 부회장의 뒷조사를 은밀히 시작했다고 합니다.” “동부지검이면 최 시장 고향이지?” “네. 진서윤 사장이 부탁했나 봅니다.” “이놈들 좀 보게! 집안싸움에 검찰을 끌어들여?” 진 회장은 혀를 차며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우리 집구석이 이 모양일세. 내가 검찰총장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구먼.” “아, 아닙니다. 회장님. 별말씀을….” 검찰총장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 [155] 주거니 받거니 3 “그래, 수사는 진행 중인가?” “참고인 정도로 출석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주저 말고 말씀하시게. 왜? 곤란한 게 있나?” “생뚱맞게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까지 건드렸습니다. 소문에는 회장님과 긴밀한 관계라고 들어서 말입니다.” “긴밀은 무슨. 내 회사를 차례차례 훔쳐가는 놈들인데. 허허.” 총장은 진 회장의 웃음 속에 적의가 전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쪽은 털어봐야 나올 게 없을 테고, 어떤가? 내 딸내미가 사고 친 건? 수습하기 곤란한가?” “아닙니다. 어쨌든 따님은 큰돈을 잃은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과정이야 어찌 됐든 회사 돈은 원상태로 돌아왔고요. 주주들이 나서지 않는 한 크게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진서윤은 개인 재산인 주식을 팔아서 그 돈을 메꿔 놓았다. 주주들이 나설 이유도 없고 대주주는 어차피 미라클이다. “그렇다면 우리 총장께서 별다른 하명을 내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동부지검과 남부지검이 서로 칼을 겨누며 대리전쟁이라도 하는 겐가?” “같은 회사 다니는 동료들인데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각자 밝혀낸 사실만 확인하고 결론을 내겠죠. 서로 논의할 겁니다.” “그럼 우리 총장도 크게 신경 쓸 이유가 없구먼.” “사실…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확인하고 싶습니다, 회장님.” “말씀하시게.” “미라클이라는 투자회사 말입니다. 정말 회장님과 관계없는 곳입니까?” “그게 왜 걸리는 거지?” 진 회장은 검찰총장을 뻔히 보며 되물었다. “아진그룹, 순양자동차, 대아건설…. 이제는 순양백화점 그룹까지 차례차례 삼키고 있습니다. 지분 변동을 보면 순양의 지분을 꽤 많이 쥐고 있는 셈이지요. 회장님의 묵인 없이 가능한 일이 아니지요.” “자동차야 IMF 때 핫머니 결제할 달러가 없어 팔아먹은 거고, 백화점이야 멍청한 딸내미가 사고 치는 바람에 뺏긴 거지. 묵인이니 뭐니 하는 건 없다네.” 검찰총장은 조금 더 딱딱한 어조가 되었다. “혹시 정보를 받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금감원에서 미라클을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외국 자본이 분명한데 그 색깔이 애매하니까요. 투기 자본인지 건실한 자본인지….” “돈은 그냥 돈이지 색깔이 어디 있나? 별 쓰잘데기 없는 짓은 그만하라고 해.” “IMF 때 한몫 단단히 챙기고 빠져나간 투기 자본입니다. 경계하는 게 당연하죠.” 진 회장은 슬며시 미소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그놈들 잘 아는데 투기 자본 아니야. 잘 생각해봐. 달러 들고 와서 망해가는 회사 인수하고 직원들 밀린 월급까지 다 챙겨줬어. 투기꾼들이 그런 일 할 것 같은가?” “그럼 금감원이 조사를 시작해도 별문제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진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이미 시작했구먼.” “네. 미국 연방국세청에도 협조 요청 공문을 보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쪽도 참 지랄들 하는구먼. 허허.” 진 회장의 헛웃음을 조용히 바라보던 검찰총장이 슬며시 일어났다. “회장님 의중은 잘 알았습니다. 조용히 지켜보다 특별한 일이 생기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요. 번거롭게 해서 송구하네.” “아닙니다, 회장님. 그럼….” 검찰총장이 허리를 숙이고 물러나자 진 회장은 굳게 닫힌 서재 문을 노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놈, 영기한테 얼마나 받아 처먹었어?” 이학재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왔다 갔다 하는 쌈짓돈까지는 파악하기 힘듭니다.” “금감원은?” “진영기 부회장이 이리저리 들쑤셨다는 건 확인했습니다.” “아이고, 나이도 먹을 만치 먹은 놈이 뭔 놈의 겁이 그리 많은지…. 쯧쯧.” 큰아들을 생각하며 혀를 차는 진 회장을 보며 이학재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상대가 보통 무섭습니까? 단 한순간도 방심하기 힘든 상댑니다. 저였더라도 다 크기 전에 싹을 잘라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무서운 놈을 마주쳤을 때 서둘면 지는 거다. 기회를 엿보는 게 정석이지. 아무튼 금감원장과 총장은 이번 총선 끝나면 물러나도록 만들어. 영기한테 휘둘릴 정도면 너무 가볍다.” “생색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총선 자금 넉넉하게 주고 언질만 줘 놔.” 일선에서 물러난 것처럼 보여도 생강은 생강이다. 보통 매운 게 아니다. 진 회장의 눈 밖에 나지 않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진 회장의 곁에 서든지 아니면 그 누구의 곁에도 서지 않는 것이다. “그럼 도준이는 이대로 놔두실 생각이십니까? 진영기 부회장이 물고 늘어지면 한 번은 검찰 소환에 응해야 할 겁니다.” “그놈이 이 자리를 노린다면 앞으로 수도 없이 들락거릴 곳인데 미리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진 회장은 자신의 큼지막한 가죽 의자를 툭툭 치며 말했다. “법대생인데… 출근이 아니라 출두를 먼저 하다니. 하하.” 이학재의 농담에 굳은 진 회장의 표정도 좀 풀어졌다. * * * “보통 아니지? 우리 막내?” “그러게. 나도 좀 놀랐어. 처음엔 우연의 일치인가 생각했는데 한 달 만에 세 건이 연이어 터지니 윤기 작품이란 걸 알 것 같더군.” “백화점 오너의 비리를 연예 기사로 덮을 생각은 어떻게 했을까?” “사람들이 열광하잖아. 기업주 돈 빼먹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이젠 식상하지.” 두 형제는 분통을 터트리기보다는 허탈한 웃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동생의 역습이 참으로 기발했기 때문이다. “부담 줄었다고 검찰은 좋아하더라. 처음 한성일보가 터트려서 수사할 명분은 줬으니 됐고, 쳐다보는 눈이 많으면 거북한 건 사실이니까. 이제 조용하게 처리하는 게 쉬워졌다면서.” 어차피 변한 건 없으니 진영기도 마음 편했다. 괜히 순양이라는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건 자신에게도 마이너스 요인이다. “그런데 동부지검이 형님 뒷조사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사실이야?” “서윤이가 지 남편한테 부탁한 거야. 동부지검엔 최 서방 인맥이 요직 다 차지했잖아.” “이거…. 형 혼자 고생하니까 괜히 내가 미안하잖아. 내가 뭐 도울 건 없어?” “할 마음 없는 거 아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네 밑에 줄 서 있는 놈들에게 압력이나 좀 넣어. 이번에 미라클 제대로 한번 털어보게.” “좋아.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총선 전에 해치우자고.” 형제가 조카 하나를 털어먹기 위해 굳건히 손을 잡았을 때 나는 남부지검으로 출두했다. 검찰도 꽤나 많이 신경 써줬다. 지하주차장에서 곧바로 7층 금융조사2부 710호로 직행했다. 내가 어려운 건 아닐 테고 할아버지 눈이 무서워서 그랬을 것이다. “취조실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검사님?” “참고인 진술 몇 개만 받으면 되는데요, 뭐. 왜요? 혹시 취조실까지 가서 진술해야 할 만큼 중요한 게 있습니까?” “뭐가 중요한지 제가 알아야죠? 혹시 중요한 질문 하시면 제가 아는 범위에서 성심껏 알려드리겠습니다.” 이강식 검사는 새파랗게 어린놈이 한 치의 긴장도 보이지 않은 채 따박따박 말꼬리를 잡자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세상 참 좋아졌어. 예전 같으면 벽 앞에 세워 놓고 반성의 시간부터 가지게 했을 텐데…. 그럼 대화가 술술 풀리거든.” 초장부터 힘자랑? 하긴. 족보도 없고, 돈 많은 장인도 없고, 머리 하나에 기대어 여기까지 빡빡 기어서 올라왔는데 눈앞에 서울대 족보에, 재벌 할아버지에, 외모도 축복받은 놈이 떡하니 앉아 있으니 누구라도 세상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친하게 지내려면 싸우고 나서 화해하는 게 제일이라던데. 한번 긁어볼까? “검사님. 컴플렉스 있으세요?” “뭐?” “참고인으로 불러 놓고 대뜸 범죄자 취급하고 힘자랑부터 하는 걸 보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드네요.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을 쥐신 분이 왜 이리 날카로우실까…?” “야!” 검사실에 딸린 작은 회의실이 떠나가라 소리치는 검사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이강식 검사님. 목소리 낮추세요. 소리친다고 해서 다음 달 청주지검으로 내려가야 하는 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 이번에는 고함은 지르지 못한 채 눈만 크게 뜬다. “뭘 놀라십니까? 대한민국 검사 인사 발령이 국가 기밀도 아닌데. 아 참, 음주단속에 걸린 돈 많은 친구 슬쩍 빼주고 용돈 조금 받은 건 검사들끼리만 아는 비밀인가? 그것도 비밀이 아니긴 하죠. 그 때문에 지방 내려가야 하니까.” “이… 이…!” 앙다문 이 사이로 신음만 흘러나왔다. 자신의 치부를 훤히 아는 참고인.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을 테니까 대응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수사는 검찰의 권한이지만 조사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검사님의 공권력으로 내 뒷조사한 것과 내가 가진 돈의 힘으로 검사님 뒷조사한 거 비교하면 서류 두께는 내 것이 두세 배쯤 두꺼울 겁니다. 괜한 힘 빼지 마시고 간단히 끝냅시다. 어차피 나에게서는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았을 텐데.” 이강식 검사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검찰청 안에서 칼을 쥔 이는 항상 검사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는 칼이 두 자루다. 내가 쥔 칼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다는 걸 깨닫자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훤히 보였다. 이 모습은 바로 검사 이강식이 아니라 인간 이강식의 모습인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하는 건 당연하지만 얼마나 빨리 떨쳐버리느냐가 관건이다. 이 검사는 나를 한참 노려보다 호흡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철딱서니 없는 어린놈인 줄 알았는데 재벌 손자 무섭네. 앞으로 검찰청 자주 들락거리겠구먼.” “반대로 말한 거 아닙니까?” “철없는 놈들이 사고 치는 건 약식 기소로 끝나. 넌 사고 쳐도 큰 사고 치겠는데? 예를 들면 천사백억 원의 횡령 같은 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할 말 없으시면 저 가도 되죠?” 엉덩이를 들썩이자 이 검사는 내 어깨를 눌렀다. “진서윤이 회사 자금을 주머니 속의 돈처럼 빼 쓴 정황이 잡혔어. 그리고 주머니에 다시 돈을 채워 놓을 때 순양유통 주식이 미라클이라는 회사로 싹 넘어갔고. 우연이라고 말하지만. 난 안 믿으니까.” “우연일 리가 있나요? 회사 돈 빼 썼고 그 돈 메꾸려고 주식 판 거죠.” 순순히 원하는 대답을 해주자 이강식 검사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회사 돈을 유령 회사로 옮겼고 다시 갚았어요. 그 돈을 유용한 몇 개월 치 이자는 넣지 않았을 테니 과태료 때리면 끝나겠군요. 원하는 대답 했으니까 가보겠습니다.” 내 어깨에 올라간 손을 툭 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털어도 비듬 몇 개 떨어지는 게 전부인 억지 수사, 상대는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재벌 가문. 여차하면 칼날이 되돌아올 수도 있는 일이니 지방으로 내려갈 비주류 검사에게 맡기고 대충 시늉만 내도록 했겠죠. 조사 부탁한 놈이 보통 거물이 아니니까.” “그만하지!” “문제 생기면 그 검사가 뒤집어쓸 테니 족보 있는 놈들의 안전에는 문제없고.” 눈을 부릅뜬 이강식 검사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운 좋으시네, 우리 이강식 검사님.” 이 검사는 내 눈과 명함을 번갈아 보기만 할 뿐 손을 내밀지 않았다. “받으세요. 족보 대신 굵은 동아줄 하나를 잡았다 생각하세요. 앞으로 몇천억대의 큰 사고 칠 거물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명함입니다.” 여전히 손을 내밀지 않았지만, 그 눈빛은 달랐다. 자존심 지키느라 애쓴다. 나는 명함을 그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필요할 때 찾아오세요. 난 진영기 부회장 같은 사람과 많이 다르다는 걸 알려줄 테니까요.” 처음엔 이런 잔챙이부터 시작한다. 잔챙이가 누구와 함께 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156] 주거니 받거니 4 “어땠어? 눈치 좀 봐?” “센 척하는 게 그 사람들 특징 아닙니까? 삼촌은요?” “형식적인 질문으로 끝내더라. 진영기 부회장 부탁이니 시늉만 내는 티가 팍 풍기더라고.” “그럼 고모만 남았네요.” 오세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진서윤 부회장을 먹잇감으로 뜯는 척하는데…. 이거 아무래도 훼이크 같아.” “훼이크라뇨?” “진영기 부회장이 노리는 건 여동생이 아니라 조카다.” “나?” “그래. 배경인 미라클을 들여다보고 싶은 거지.” “순양자동차와 유통 그룹의 진짜 주인이 난지 아닌지가 궁금한 거군요.” “그렇지.” “그렇다면 지금쯤 금감원이 바쁘게 움직일 것 같은데….” “그건 내가 알아보마. 뉴욕에도 조심하라고 일러둘 테니 별일 없을 게다. 멀쩡한 회사를 증거도 없이 조사하지는 못해.” 걱정을 완전히 걷어내지 못한 표정이다. 공권력이 꼭 증거를 확보한 다음 움직이는 건 아니다. 의심과 정황만으로 수사를 시작할 수 있다. 어차피 한 번은 거친 바람을 맞아야 할 것 같았다. 대신 큰아버지도 흙먼지 정도는 뒤집어써야 속이 풀릴 것 같다. 오세현도 조금의 위협을 느꼈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준아. 네 할아버지한테 부탁해서….” “안 됩니다. 할아버지가 실망하실 일을 제가 하면 안 되죠.” “실망이라니?” “싸우다 한 대 처맞고 집에 와서 큰형 데리고 나가는 꼴 아닙니까? 그런 부탁을 하는 순간, 할아버지는 눈을 내리깔고 절 쳐다보실걸요? 집안싸움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결과만 보실 겁니다.” 오세현이라고 줄이 없겠는가? 아니, HW 그룹의 고위직들은 전부 나름대로 검찰 쪽에 줄을 댈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인맥 위에 군림하는 것이 바로 순양이다. 순양그룹의 장남, 진영기 부회장을 털어보자고 말하면 모두 몸을 사릴 것은 뻔하다. 주류를 쥐고 흔드는 힘 앞에 기대할 것은 비주류들의 단합된 힘뿐이다. 정면 승부는 어렵지만, 게릴라전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이강식 검사라고 했던가? 악착같이 살아남아 서울에서 근무하는 걸 보면 근성은 있어 보였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내가 준 명함빨이 식기 전에 연락할 텐데…. 소심한 놈인가? * * * “일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진 실장님.” “아닙니다. 공무 보시는데 실례라니요. 그리고 저도 무례했습니다. 그냥 서로 퉁 치는 거로 하고 잊읍시다.” “그런데 여긴…?” 이강식 검사는 실내를 휘휘 둘러보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아, 얼마 전에 구입했습니다. 주변의 눈을 피하고 싶을 때 마땅한 장소가 없더군요. 좀 좁죠? 불편해서 어떡하나 이거….” “좁다뇨? 제 아파트보다 큰 거 같은데요.” 여의도에 있는 대형 평수 오피스텔은 여러모로 쓸모 있겠다 싶어 하나 장만했다. 철저한 보안과 완벽한 사생활 보호를 홍보했기에 내 눈에 띄었다. 어쩌면 여의도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지은 건물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그런데 침대나 생활 가구가 없는 걸 보니 여기서 생활하시는 건 아닌가 보군요.” “네. 그냥 카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참, 커피 드릴까요?” “아, 그럼 한 잔 부탁합니다.” 커피 머신으로 커피를 뽑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참 대단하시더군요. 아직 대학생 신분인데…. 재벌가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까? 어릴 때부터 경영 수업을 받아서 일찍 시작하는 건가요?” “아닌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재벌 3세는 사고만 치지 않아도 효자 소리 듣습니다. 전 금수저치고는 좀 성실합니다. 좀 특이하죠?” “많이 특이하시더군요. 큰아버지들이 한껏 경계할 만큼.” 이강식은 나와 함께하는 것이 진심이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 배후를 슬쩍 털어놓았다. “진행 상황은 어떻습니까? 슬슬 닫아야 할 것 같은데….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게 없죠?” “실장님과 오세현 대표님은 현황 파악만으로 끝내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남은 건 진서윤 부회장님뿐입니다.” 그 정도로 멈추는 걸 보면 검찰은 훼이크라는 게 확실하다. “우리 고모, 참고인 출석 요구하셨습니까?” “아직입니다. 페이퍼 컴퍼니의 자금 입출 내역을 조사하고 있는데, 제 소관이 아니라서 자세히는 모릅니다.” 머리를 슬쩍 긁는 거로 봐서는 지금은 자신이 그다지 쓸모없다는 걸 아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이든 도구든 쓰는 사람 손에 달린 것 아니겠는가? “이강식 검사님.” “네.” “남부지검에서 이 검사님과 아주 친한 분은 몇이나 될까요?” “친한 사람이라….” 함께 나를 도와줄 검사가 몇이냐는 질문이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것 같다. “몇 있습니다.” “이 검사님과 그분들의 목표는 검찰총장입니까? 아니면 큰 사건 터트리고 여의도로 점프하는 겁니까?” “목표라….” 이강식 검사는 쓴웃음만 보였다. 저 웃음의 의미도 안다.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연수원을 거쳐 검사가 됐을 때, 출세를 생각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 하지만 이리저리 치이며 살다 보면 꿈은 사라지고 현실만 바라본다. 부장검사라도 거쳐 연고지에 변호사 개업이 가장 현실적인 목표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 목표 바꾸면 안 되겠습니까?” “목표를 바꾸라니요?” “이건 어떻습니까? 거액 연봉의 변호사.” 이 검사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거액이라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재벌 3세는 단위가 다를 것 같습니다만.” “검사장이나 고검장을 지낸 분이 변호사를 시작할 때, 첫해의 수임료. 이 정도면 거액 아닙니까?” 전관예우를 생각하면 최소 50억이 넘는다. 그의 눈이 더욱 빛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내 계좌를 탈탈 털었다.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 주식으로 번 돈만 8백억이 넘는다. 그 돈은 아직 입출금 통장에 들어 있으니 돈에 대한 의심은 없을 것이다. “그 정도 연봉을 받으려면 험한 일도 마다치 않아야겠군요.” “험하고 위험한 일을 할수록 승진도 빠릅니다. 칼잡이는 칼을 휘둘러야 빛이 나고, 사냥개는 거칠게 물어뜯어야 함부로 대하지 못하거든요. 고분고분하면 호구 됩니다. 지금의 이 검사님처럼.” 자존심을 슬쩍 긁었지만, 입술만 깨물 뿐 화를 내지 않는다. 용기가 없어 고분고분했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안락한 미래만 보장된다면 찌르고 물어뜯는 것쯤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검사 아닌가? “칼을 써야 할 대상이 누굽니까?” “아실 텐데요?” “순양의 진영기 부회장. 맞습니까?” “네. 하지만 물어뜯지는 않아도 됩니다. 그분도 주머니 속에 페이퍼 컴퍼니가 몇 개 들어 있습니다. 그거 조사하는 정도? 그 정도면 충분해요.” “가능하면 은밀하게?” “쓸 만한 자료 몇 개면 됩니다. 찌르는 건 제가 하죠.” 이강식 검사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전 한 달 뒤 청주로 내려갑니다.” 인사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소리다. 내게 부탁한다는 건 내 요구를 들어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 달이면 아직 시간 많이 남았군요. 그 안에 쓸 만한 자료 찾아서 주세요. 그럼 남부지검에 남을 겁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 기한은 한 달. 이강식 검사는 남은 커피를 쭉 마시고 일어섰다. “시간이 촉박하니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참, 저와 함께 움직일 동료들을 데리고 일간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래요. 그때는 여기가 아니라 분위기 좋은 곳에서 술이라도 하죠.” 아직은 설익었지만, 사냥에 필요한 기본은 갖췄다. 남부지검에 비주류가 몇이나 되려나? 그리고 그중에 쓸 만한 칼잡이는 몇이나 될까? * * * “감사합니다, 아버지.” “고생했다.” 진영기 부회장은 얼굴이 많이 그을린 아들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작은아버지께 인사는 드렸고?” “네. 서울 도착하자마자 찾아뵀습니다.” “잘했다. 이삿짐은 옮겼고?” “필요한 것만 챙기고 가구는 직원들 나눠 줬습니다. 거제도 내려갈 때 산 거라 두 번 다시 쳐다보기도 싫더군요.” “그럼 내일부터 출근하거라. 전자 전략실에 자리 마련해 뒀다. 휴대전화 Brand Identity 구축이 지상과제니까 많이 배우고 제대로 준비해.” 진영기가 아들의 밝은 표정을 보며 덩달아 마음이 풀렸을 때 비서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부회장님, 손님 찾아오셨는데요.” “기다리라고 해!” 진영기는 표정을 구기며 소리쳤다. 오랜만에 아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니 절대 방해하지 말라고 미리 당부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기다리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남자는 다름 아닌 진윤기였다. “아, 작은아버지.” 진영준이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지만, 진윤기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랜만의 부자 상봉을 방해해서 미안한데, 좀 나가 있을래?” “야! 너 왜 그래?” 진영기는 동생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지만, 진윤기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다. 너도 들어 두면 나쁘지 않겠다. 앉자.” 진윤기는 소파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며 진영준을 향해 손을 까닥거렸다. “큰형. 내가 왜 왔는지는 잘 알 테고, 여기서 멈추자. 남부지검이든 대검이든 지금 당장 연락해서 전부 덮으라고 해.” 진영준만 영문을 몰라 두 어른의 눈치를 보며 몸을 움츠렸다. “우리 막내, 많이 컸네. 자세부터 달라. 이제 사장님 태가 물씬 풍기는구나.” 진영기 부회장은 시건방진 막냇동생의 태도에 울화가 치밀었지만, 아들 앞이라 최대한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사돈댁이 언론사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걸 가족에게 써먹는 건 좀 비겁하지 않아? 검찰도 그래.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나뿐일걸? 누가 먼지 많은지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너도 보통은 아니던데? 연예계 가십거리로 싹 막았잖아. 좀 놀랬다. 흐흐.” “그거? 시작일 뿐이야. 다시 말하지만 지금 멈추지 않으면 우리 큰형,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이거 괜히 해보는 소리 아니야.” 동생의 경고에 진영기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나를? 가능하다고 생각해? 영화사 나부랭이 좀 만지며 사장 소리 들으니까 마치 거물이라도 된 거 같아? 까부는 건 여기까지다.” “삼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좀 진정하시고….”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야 할 진영준이 끼어들자 진윤기는 조카를 노려보며 말했다.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하얏트 특실을 빌렸더구나. 무려 6개월간 장기 투숙으로 예약했던데, 그 방에는 누가 묵게 되지? 아나운서? 걸그룹? 아니면…? 아. 요즘 네가 푹 빠져 지내는 이경희?” 순간 진영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그 애 조심해야 할 거다. 차세대 청순가련이라고 떠들어 대지만 고등학교 때 가출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닳고 닳은 애야. 그 애 데리고 있는 매니지먼트사도 위험해. 조폭 출신이 사장이거든. 아 참, 그 애 마약에도 손댄 적 있는데 아는지 모르겠다. 혹시 너도 같이하니?” 진윤기의 입에서 엄청난 소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조심해라. 어쩌면 호텔 방에 몰카 설치해 놓고 너랑 떡 치는 거 전부 촬영해 놨을 수도 있어.” “사…. 삼촌.” 진영준은 아버지가 들어서는 안 될 말까지 나오자 안절부절못하며 더듬기 시작했다. “신인 여배우에게서 뽑을 수 있는 돈은 얼마 안 돼. 지금쯤 그 조폭 사장은 너한테서 어느 정도 거금을 뽑아낼지 상상하며 웃고 있을 거다.” “그만해! 이 새끼야!” 참다못한 진영기가 소리쳤지만, 이미 전쟁을 시작한 동생은 거칠 것이 없었다. ======================================== [157] 주거니 받거니 5 “아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8월부터 엔터테인먼트 채널 하나를 열어. 영화, 드라마도 보여주지만 연예가 중계 같은 연예 정보 프로그램도 하거든. 거기 첫 소식을 방탕한 재벌 3세 시리즈로 할 생각이야. 영준이랑 경준이. 친형제가 나란히 등장하면 시청률은 보자…….” 진윤기는 잠시 뜸을 들이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장담하는데 모래시계보다 높을걸?” “겨…. 경준이? 그 애가 왜?” 진영기는 유학 간 막내아들의 이름까지 나오자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공부 끝마칠 때가 돼서 어떤 자리를 마련해주나 생각 중이었는데…. “몰랐어? 그놈 LA에서 동거 중이야. 종주인이라고, 홍콩 배우지. 나이가… 아무튼 연상이야.” LA지사에서는 별다른 보고가 없었다. 성적은 그럭저럭이지만 큰 사고 없이 잘 다닌다는 보고만 이어졌다. 그런 애가 동거라니? 게다가 홍콩 여자? 진영기 부회장은 뒷골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 엔터테인먼트 채널 운영하기 위해 기자만 서른 명 뽑았어. 전부 파파라치급 베테랑이거든. 딱 한 달 만에 이 정도 파악한 거야. 앞으로 심층 취재 들어가면 더 어마어마한 기사도 나올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형.님?”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는 것이 더 위협적이었다. “너 지금 나 협박하냐?” 이를 악문 진영기 부회장이 노려봤지만, 진윤기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유산 싸움? 좋아. 하지 말라는 게 아냐. 옛날 같으면 나라를 삼키는 것과 비슷한 규모인데 어떻게 안 싸우겠어? 하지만 자식을 건드리면 안 되지. 그리고 밖으로 새어 나가서도 안 되고. 아직 정정한 아버지가 지켜보시잖아.” 진윤기는 이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안싸움을 전 국민이 지켜보도록 생중계하는 건 아버지 돌아가시면 시작해. 다시 경고하는데, 우리 도준이가 또 검찰청 설렁탕을 먹게 되면 기자 삼십 명 전부 형님 뒤만 쫓아다닐 거야.”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는 막냇동생을 보며 진영기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얌전해 보였던 저 막내의 몸속에도 자신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음을.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도 떠올랐다. “너! 저놈 말이 사실이냐?”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흙빛으로 변해버린 얼굴이 대답이다. “이런 멍청한 자식!” 짝―! 더는 참지 못하고 손이 올라갔다.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며 엉거주춤한 자식 놈을 내버려 둔 채 진영기는 씩씩거리며 수화기를 들었다. “비서실, 전략실, 감사실…. 아! 경영지원본부장. 전부!” 진영준은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아버지를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볼 뿐 용서를 구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아버지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가 그만큼 살벌했기 때문이다. 5분도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부회장실의 광경을 보자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망나니 아들을 보자 저 새끼가 또 사고 쳤구나 하는 표정들이다. “전략!” “네. 부회장님.” “잘 들어. 이 시간부터 저놈에게 둘 붙여. 기사 하나, 가드 하나. 힘깨나 쓰는 놈으로! 24시간 감시하고 집과 회사 외에는 그 어디도 못 가게 해. 저놈이 딴 곳으로 새면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막아. 하찮은 카페라도 들르면 전략실 전부 모가지야. 알아들어?” “넵.” “나가 봐.” 전략실장은 진 부회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재빨리 빠져나갔다. “감사실!” “네.” “작년… 아니 재작년부터 저놈이 돈 쓴 거 전부 찾아내. 껌 한 통 산 거까지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특히 뭉텅이 현금 쓴 게 있으면 꼭 밝혀. 알았어?” “네.” 감사실장은 나가라는 소리를 하기도 전에 도망쳐 버렸다. “강 전무.” 경영지원본부장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부동자세를 취했다. “영준이가 쓰는 카드 전부 정지시켜. 저놈 명의로 된 통장 동결시키고, 저놈이 꿍쳐 둔 비자금도 다 찾아서 가져와. 아무튼 저 자식 주머니에 돈 10원이라도 나오면 넌 모가지다. 월급 통장은 내게 가져오고. 거 뭐냐? 온라인인지 뭔지 하는 거래도 다 막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어?” “돈을 쓰지 못하게 막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집에서 밥 먹고 구내식당에서 밥 먹으면 돼. 저놈 입에 들어가는 밥알도 아깝다. 젠장.” 마지막으로 남은 비서실장은 어떤 엄중한 명령이 떨어질지 사뭇 기대감까지 들었다. 이 정도 혹독한 조치는 처음이다. “전자 가서 내 말 똑똑히 전해. 진영준이는 내 아들이 아니다. 단순한 경력 사원일 뿐이다. 일 제대로 안 하거나 능력을 보이지 못하면 그날부로 수원 공장으로 쫓아버려도 좋다. 이해했어?” “네. 부회장님.” 진영기는 아들을 향해 소리쳤다. “인마! 그 계집애 이름이 뭐라고?” “네? 아…. 겨, 경희. 이경희예요.” 가까스로 이름만 말하고 다시 고개를 떨궜다. “들었지? 여자 탤런트라고 하는데 그년과 그년 매니지먼트 회사 싹 털어.” “조사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비서실장이 조심스레 묻자 진영기는 다시 언성을 높였다. “털어서 묻어버리라고! 계집년은 마약쟁이고 소속사 사장은 조폭이라니까 털면 뭐든 나올 거야. 감방 보내서 몇 년 푹 썩게 만들어. 알았어?” “네. 부회장님.” “저 자식 데리고 나가서 전자에 던져줘.” 모두가 나간 텅 빈 방에서 진영기 부회장은 한숨만 계속 쉬는 게 전부였다. 한숨이 잦아들 때쯤 진 부회장은 수화기를 들었다. “LA 지사장, 지금 당장 아프리카 같은 데로 발령 내려. 뭐? 이 새끼야!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까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깡촌으로 보내라고!” 또 울화가 치미니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았다. “지금 당장 경준이 멱살 잡아끌고 데리고 와. 무조건 오늘 비행기 태워. 공항에서 딴 데로 새지 못하게 확실히 가드치고!” 진영기 부회장은 자식 두 놈을 요절낼 생각이었다. * * * “진영기? 순양의 그 진영기?” “네.” 형사부의 배재환 부장검사는 소주잔을 채워주는 이강식 검사의 입에서 나온 이름 때문에 술잔을 들지 못했다. “미쳤구나. 왜? 지방으로 쫓겨 가니까 마지막으로 분탕질해야 속이 시원하것어? 건드리긴 누굴 건드려?” “요리 재료도 이미 받았습니다. 이걸 한번 보시죠.” “이건 뭐야?” 배재환은 이강식이 내민 서류 파일을 펼쳤다. “이 회사가 뭔데?” “진영기 부회장 저금통입니다. 쿠션만 먹는 내부거래부터 비자금 창구로 쓰죠. 해외 지사는 완벽한 offshore company고요.” “오프… 뭐?” “역외회사, 조세피난처에 설립되는 일반적인 회사를 말합니다.” “이 새끼야! 금융부라고 잘난 척하냐? 그냥 유령 회사라고 해!” “아무튼, 그 회사 리스트라고요. 명확한 대상이 있으니 수사도 쉽습니다.” “그럼? 그동안 어려워서 못했어? 재료가 부실해서 수사 안 했어? 커버치는 놈이 한둘이 아니니까 못한 거잖아! 건드려도 될 놈이 있고 안 될 놈이 따로 있다. 몰라서 그래?” “우린 조사만 하면 됩니다. 건드리는 건 그쪽에서 할 테고요. 어떻습니까?” “우리라는 말 함부로 쓰는 거 아니다.” 배 부장은 서류파일을 휙 던져버렸다. “이런 뻘짓하려는 이유부터 말해봐. 무슨 일이야?”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이강식 검사는 진도준과 나눴던 이야기를 최대한 자세히 늘어놓았고, 특히 그가 미래를 확실히 보장한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양념 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최소 오십억은 약속했습니다. 변호사 생활 딱 일 년만 하면 보험금 타는 겁니다.” “이 자식이 허파에 바람 단단히 들었구먼. 너 돌았냐? 어떤 미친놈이 조사 좀 해줬다고 그런 거금을 주고 미래까지 보장해줘?” “부장님께서 재벌을 모르시니 그런 겁니다. 솔직히 저, 이제 알았습니다. 족보 따져가며 지들끼리 밀어주고 당겨주는 거… 그거 전부 이런 돈줄을 지들 울타리 안에 가둬 두려고 그런 겁니다.” 재벌 관련된 사건을 덮고, 증거를 인멸하고 심지어 기소유예 같은 극단적인 방법까지 써서 보호하는 검사들. 자칫 잘못하면 검사 옷을 벗는 것은 물론이고 심하면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 건 바로 수십억의 연봉을 약속받고 재벌 대기업의 법무팀으로 옮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부장님. 우리 솔직해집시다. 어차피 부장검사가 끝 아닙니까? 운 좋아도 차장검삽니다. 검사장 윗급으로 비주류가 단 한 번이라도 올라간 적 있습니까? 어차피 고향에서 개업하는 게 우리의 마지막 아닙니까?” “그래서? 이제 겨우 대학 졸업반인 어린놈을 스폰으로 삼아 노후대책 세우자는 거냐? 이 새끼 이거, 정신 나갔구먼.” “직접 만나보시면 되잖습니까? 만나보시면 생각 바뀌실 겁니다. 어리지만 보통 놈이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부장님께서 NO 하시면 저도 미련 없이 청주 내려가서 짱박혀 지내겠습니다.” 배재환 부장은 이강식의 간절한 눈빛을 보며 말없이 술만 마셨다. * * * “몇이나 됩니까?” “남부지검엔 대여섯 있습니다. 경기도까지 넓혀야 숫자가 좀 되죠.” “300명, 50명, 그 외. 맞습니까?” 정확한 비율을 듣자 배재환 부장은 조금 놀랐지만 내가 그쪽 줄이라는 걸 기억해낸 것 같다. “그렇죠. 검찰과 사법부 고위직은 서울대 출신 300명. 고려대 출신 50명. 그리고 나머지 몇 명으로 짜여 있죠. 잘 아시네요.” “신입생 때 선배들이 자랑스럽게 말하더군요. 쪽팔리는 줄도 모르고.” “뭐가 쪽팔릴까요? 동문인데…?” “원래 좆도 아닌 놈이 집안 팔고, 선배 팔고, 출신 팝니다. 자신을 믿는 놈이면 그딴 걸 입에 담지 않습니다.” 배재환 부장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아주 보기 드문 재벌 3세인 내가 조금은 신선했을 것이다. “검찰에 사람 만들려면 주류를 건드려도 될 듯한데…. 한국에서 대학 동문보다 더 끈끈한 관계가 있을까요? 진도준 씨가 마음먹고 접근하면 쉽게 친분을 쌓을 수 있을 겁니다.” “검찰 주류라고 하면 소위 말하는 정치검사들 아닙니까? 그자들이 동문 챙기는 건 다름 아닌 돈 때문입니다. 필요할 때 돈으로 사면 되는 일인데…. 굳이 지금일 필요가 없습니다.” “진도준 씨보다 더 돈 많은 사람이 그들의 줄이기 때문인가요? 이를테면 진영기 부회장 같은 사람?” “잘 아시네요. 제가 부회장님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걸 알면 알아서 제 곁에 붙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비주류부터 시작하겠다?” 이 양반 보게? 앞뒤가 뭔지, 위아래가 누군지 아직 모른다. 간을 봐도 내가 보고, 맛을 봐도 내가 먼저다. “배 부장님.” “네.” “제 할아버지인 순양 회장님도 단지 조사만 부탁한 검사에게 미래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검사가 가진 힘으로 할아버지를 보호해줘야 장밋빛 미래를 안겨줍니다. 전…. 이강식 검사에게 들으셨겠지만, 단지 내가 필요한 증거 좀 찾아달라는 것만으로 미래를 약속했습니다.” “…….” 하나하나 따지자 배 부장은 꿀 먹은 벙어리 흉내를 낸다. “이 정도 조건이면 거저먹는 장사 아닙니까? 이 오피스텔에 문 열고 들어왔다는 건 물건 팔겠다는 뜻일 테고 물건값 후하게 쳐준다고 했으니 계산 끝냅시다. 검사를 프로라고 부른다면서요? 그럼 프로페셔널하게 거래 틉시다.” 검사인 척하는 놈은 필요 없다. 철저한 장사치 같은 놈이 필요하다. 장사치는 이문 남는 거래처에는 절대 등 돌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 [158] 양날의 검 1 “거래라…….” “돈과 권력. 이 두 개를 교환하는 상거래는 빈번하지 않습니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죠.” 배재환 부장검사는 한동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슬쩍 웃으며 말했다. “이 검사가 그러더군요. 보통의 금수저와는 상당히 다르다고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습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뻔뻔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더구나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리도록 하는 재능이 있군요.” “나눠주는 사람은 뻔뻔해도 됩니다. 어차피 제 금수저에 붙은 밥알 떼 먹으려는 사람은 앞으로 계속 나타날 게 뻔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가진 권력을 팔려는 소매상은 많다. 무려 2천 명이나 있지 않은가? “이거…… 사람 부끄럽게 만드는 재주도 상당하시고. 알겠습니다. 제대로 된 상품 만들어서 팔러 오겠습니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 사람이군. 믿음, 신뢰, 의리…. 이따위보다는 서로 만족하는 거래가 훨씬 더 장기간 관계를 유지할 원동력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다. “제가 급해요. 한 달 이내 좋은 거 들고 오시기 바랍니다. 값은 톡톡히 쳐드릴 테니까요.” “이강식 검사가 더 급한 것 같습디다. 급한 놈이 샘 파겠죠.” “아, 첫 거래니 제가 선불로 계산하겠습니다. 청주 발령 없었던 일로 만들어준다고 전하세요. 더 힘내서 좋은 결과 기대한다는 것도 덧붙여서 말입니다.” 배 부장은 기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숙였다. “이 검사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인사는 제가 해야죠.” “네?” “부장님께서 말씀하신 대여섯 명 중 한 명은 옷 벗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갈 수 있습니다. 적당한 사람 있습니까?” “옷을 벗다니요?” 배 부장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만약의 경우까지 생각한 겁니다. 검사질하는 것보다 돈이 더 급한 사람이면 됩니다. 총대 메고 나서줄 사람요. 대신 변호사 자격으로 우리 미라클 법무팀에서 채용하겠습니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그를 향해 한 줌 남은 걱정까지 털어주었다. “최악의 경우 변호사 자격 박탈당해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법 공부하신 분들이니 원천 기술은 어디 가겠습니까? 회사는 법 지식이 필요하지 자격증이 필요한 건 아니거든요.”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이시군요.” “말씀드렸다시피 만약을 대비한 겁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변호사 개업을 생각하는 친구가 있다면 대환영일 테니까요.” 10년 변호사질해서 벌 수 있는 돈을 일 년 만에 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첫 거래니 손발 한번 제대로 맞춰봅시다.” 배 부장은 내가 내미는 손을 힘껏 잡았다. * * * “검찰은 찔러보기가 맞았어. 진짜는 금감원이야.” “그쪽에서 뭔 짓을 하는지 파악하셨어요?” “우리 회사는 물론 너랑 나, 개인 거래까지 뒤진다고 하더라. 한국 미라클 설립할 때 들어온 자금 역추적을 시작했고.” 오세현은 툭 던지듯 말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이 어투에서 드러났다. “문제 삼을 만한 게 있긴 한 겁니까?” “그간 우리가 움직인 돈이 조 단위야. 부스러기만 긁어모아도 몇백억은 나올걸? 우리는 절세라고 이름 붙이지만 그놈들 보기에는 탈세야. 법 해석 문제니까. 정황 나오면 국세청이 들이닥칠 거다.” “살짝 떨리긴 하네요.” “최악의 경우 세금 내고 과징금 물면 된다. 그 정도 돈은 있으니까 괜찮아. 흐흐.” “이건 돈 문제가 아니라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굳은 내 표정을 보며 오세현은 웃음을 거두었다. “어디까지 해볼 생각이냐?” “칼 뽑았으면 한 번은 찔러야죠. 무 정도 자르고 칼집에 넣을 생각은 없습니다.” 더욱 심각한 표정이다. 화해할 생각이 없다는 건 순양그룹과 미라클이 싸운다는 의미다. 과연 철옹성 같은 순양을 찌를 수 있을까? 도리어 이쪽이 상처 입는 건 아닐까? 이런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표정이다. “최악에는 과징금 좀 내면 된다고 삼촌이 말씀하셨잖습니까? 돈으로 막을 수 있으면 싸게 먹히는 거죠. 물러설 필요 없습니다.” 내 결심을 확인한 오세현은 크게 숨 쉬는 것 한 번으로 물러났다. “칼은 준비하고 있지?” “네. 남부지검 금융조사부에 이강식 검사라고 있습니다. 이 친구가 곧 청주로 내려가야 하는데 인사 명령 취소할 수 있겠습니까?” “그 친구가 우리 칼잡이야?” “그런 셈이죠. 검찰청 내부의 낭인들을 모아서 우리 힘이 되겠답니다.” “그 정도야 문제없지. 남부지검이 요직도 아니고.” “그럼 됐습니다. 우리 낭인들이 얼마나 날카로운 칼을 들고 올지 조금 기다려보죠.” 그리고 한 달이 지나기 전, 우리의 칼잡이는 쓸 만한 무기를 들고 왔다. * * * “내부 거래나 일감 몰아주기는 기삿거리도 안 돼서 인력을 투입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해외 컴퍼니를 집중 추적했는데……. 이런 게 나왔어요.” 오세현은 이강식 검사가 내미는 자료를 덥석 낚아챘다. 숫자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꼼꼼히 챙겨본 오세현은 낮은 휘파람까지 불었다. 제대로 된 증거라는 뜻이다. “이거 남부지검 금융조사부 대단하군요. 이걸 찾아내다니!” “비자금 빼돌리는 건 누구나 다 하고, 그 파장이 큽니다. 어차피 터트리기도 힘들고 해서…. 환치기만 파고들었는데 제대로 건졌습니다.” “미국의 도움 없이는 힘들었을 텐데요?” “법무부 연수 프로그램에 운 좋게 참여한 적 있습니다. 서울대 출신에게 주는 혜택 같은 건데, 구색 맞추기로 저같이 족보 없는 놈도 한둘 끼워 넣죠. 그때 친하게 지낸 교포 3세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도와줬습니다.” “뭡니까? 그게?” 서류를 가리키며 묻자 오세현은 환히 웃었다. “달러 빼돌린 거. 미국과 연동한 계좌에서 빠져나간 돈이야.” “얼마나 되죠?” 이강식은 확신에 찬 모습으로 말했다. “200억이 넘습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건 미국서 빠져나간 그 돈을 어디에 썼는지 자료가 없어요. 이런 경우는 보통 도박이죠.” “도박?” “네. 이건 오너 일가만이 가능한데…. 혹시 진영기 부회장이 도박을 즐깁니까?” 이강식은 내게서 새로운 단서라도 얻으려는지 눈을 반짝였다. 도박이라…. 누군지 안다. 마약보다 더 끊기 힘든 게 도박 아닌가? 평생 도박으로 끝없이 사고 친 사람, 바로 큰어머니다. 박혜영. 부족함 없는 재벌가에 태어나서 더 큰 재벌가로 시집왔다. 주체할 수 없는 돈으로 뭐든 제 것으로 만들고 끝없는 과시욕을 분출하는 여인. 가진 욕망을 마음껏 분출하며 사는, 어찌 보면 부러운 인간. 남자, 도박 그리고 쇼핑. 그녀의 인생에서 뺄래야 뺄 수 없는 것들이다. “해외 계좌 출금 시기와 큰어머니 출국 시점을 비교해보세요.” “진영기 부회장의 아내?”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입을 쫙 벌렸다. 재벌가의 맏며느리가 거액 원정 도박에 빠졌다는 건 불법 여부를 따지기 전, 도덕적 지탄 대상이다. “우리도 정치 흉내 한번 냅시다. 언론에 먼저 흘리고 여론이 시끄러워지면 검찰에서 발표합니다. 그럼 언론이 다시 받아쓰고.” “받아줄 언론이 있을까요? 순양에 밉보이면 광고 다 떨어지는데?” 힘의 크기는 밖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내부자보다 더 정확히 안다. 이 검사는 검찰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언론이 무시하는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다. 특히 재벌이 엮인 사건은 더욱 그랬다. “그만큼 우리가 채워주면 됩니다. 우리도 건설, 자동차, 백화점 마트 다 있어요.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머리를 흔들었다. 뻔한 결과를 예측하기 때문이다. “그 정도가 끝일 겁니다. 참고인 소환도 어렵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아마도 서면 질의로 마무리하고 무혐의 처리 날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설령 큰어머니가 진짜 결백하다 해도 믿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팔자 좋은 재벌가의 안주인이 원정 도박했다는 건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진실이 됩니다.” 상처를 주는 게 목적이다. 내 손에도 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전에 삼촌이 큰아버지 한번 만나보세요. 이쯤에서 접으면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을 거라고 넌지시 말씀해보세요.” “만약 접으면? 금감원이 조사하는 걸 중단하면 우리도 멈추는 거냐?” “아뇨. 우린 계속 직진합니다. 처음이니까 매섭다는 걸 보여줘야죠. 안 그러면 또 이런 일이 반복될 겁니다.” 손뼉이라도 치며 동의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오세현의 굳은 얼굴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우리에게 겨눈 칼을 내리겠다는데…. 우리도 칼을 내리면 여기 검사님도 난처한 일을 피할 수도 있어.” 몰라서 하는 소리다. 절대 칼을 거두지 않는다. 뭔가를 쥘 때까지 멈출 사람이 아니다. 손에 쥔 걸 터트리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우리도 칼을 쥐고 있다는 걸 뼛속까지 알아야 멈출 사람이다. “우리 집안 사람들, 믿지 마세요. 삼촌은 제 아버지만 아시니까 말랑하게 보시는 겁니다. 모두 ‘철면’입니다. 할아버지만 그런 게 아니라고요.” 그리고 우리가 가진 진짜 무기가 뭔지도 똑똑히 알려줘야 한다. 큰아버지가 우리를 압박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힘을 과시하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의 진짜 무기를 뺏으려 하는 것이기도 하다. * * * “어려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아니요. 우리 귀여운 막내 조카 데리고 가르치는 스승인데 언제든 환영합니다.” “그럼 그냥 귀엽게 봐주시는 것으로 끝내시지요.” “무슨 말입니까?” “도준이 경계하느라 저까지 불똥 튀게는 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아, 그거? 허허. 이거 참…. 오해하셨구먼.” “이런, 실망입니다. 설마 발뺌하시는 겁니까?” “발뺌은 무슨…. 아니요. 난 오 대표에게 감정 없어요. 도준이를 경계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뭡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 하면?” “순양자동차가 내 것까지 가져가서 그거 돌려받으려고 이리저리 궁리하는 거뿐이요.” 오세현에게 진영기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원하는 것은 숨긴다는 협상의 첫 번째 원칙 따위는 완전히 무시한다. “자동차? 순양자동차가 보유한 그룹 주식 말하는 겁니까?”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는 진영기를 보며 진도준의 말이 떠올랐다. ― 우리의 진정한 칼을 휘둘러버리세요. 오세현은 칼을 휘두를 시점을 기다렸다. “그게 왜 부회장님 겁니까? 진 회장님으로부터 정당하게 매입한 겁니다.” “잠시 주인이 바뀐 거지. 아니, 난리통에 맡겨둔 거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어요. 그 왜… IMF를 환란(換亂)이라고 하지 않았소? 외국환 난리.” 진도준의 말이 떠올랐다. 이 사람들은 ‘철면피’다. 비상식적인 말을 이렇게 쉽게 내뱉다니. “보관료는 톡톡히 치를 테니까 넘기세요. 여차하면 시세대로 쳐줄 수도 있어. 손해 보는 장사 아닐 겁니다.” “거절하면요?” “오 대표는 돈 만지는 사람치고는 셈이 느리구먼. 쥐고 있어도 순양그룹을 어찌하진 못해. 머리 아픈 일만 만드는 그 주식을 쥐고 있느니 필요한 걸로 바꿔요.” “머리 아픈 일이라는 게 바로 지금처럼 공권력을 움직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됩니까?” “남부지검, 금감원은 양반이지. 더 지독한 놈들이 덤빌 텐데?” “더 지독한이라……. 대검 중수부와 국세청의 연합이겠군요.” “하나 더. 언론의 집중포화.” 득의양양한 진영기 부회장을 보며 오세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이 고. 무 서 워 라.” ======================================== [159] 양날의 검 2 한 자씩 힘주어 말하며 전혀 겁먹은 게 아니라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진영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니 실수라는 걸 하죠. 우리처럼 크게 움직이는 기업은 그 실수가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국세청 같은 곳에서 그 실수를 물고 늘어지면 말입니다. 어찌 무섭지 않겠습니까?” 진영기는 뻔뻔하게 말하는 오세현을 한동안 바라보다 슬쩍 미소 지었다. “윤기 친구는 전부 고만고만한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어. 윤기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고…. 다들 보통이 아냐.”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진영기는 순양의 부회장답게 여유를 보였다. “좋아. 주식 쪼가리 같은 소소한 건 넘어가고, 크게 크게 가자고. 미라클이 먹은 회사 전부를 들고 순양의 우산 아래로 들어오시게. 원하는 건 뭐든 지불할 용의가 있어.” “함부로 큰소리치는 거 아닙니다. 우리 HW 그룹의 기업가치가 얼만지나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거만 떠는 진영기를 참고 보기 힘들어 한마디 톡 쏘았지만 들은 체 만 체였다. “오 대표야 그런 쪽 전문가 아니신가? M&A 하자고. 냉정하게 기업가치 평가해서 그 결과대로 다 주겠네.” “큰 이야기는 작은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 하시죠. 금감원이 우리 미라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거, 멈춰주십시오. 그럼 저도 이쯤에서 끝낼 수 있습니다.” “뭘 끝낸다는 건가?” “우리라고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어서 여기저기 좀 알아봤습니다. 환치기를 좀 하셨더군요.” 진영기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그게 뭐 대수라고. 우리나라 기업에서 그 정도는 경미한 위반이야. 오 대표도 운전하다 보면 가끔 불법 유턴하지 않나? 그 정도라고.” “불법 유턴이야 저도 가끔 합니다. 하지만 만취 상태에서 그러지는 않죠. 이건 음주운전 플러스 중앙선 위반이니까요.” “음주? 그게 무슨 말이지?” “환치기 한 달러가 도박장으로 흘러들어 갔으니까요. 지금 누군지 확인하는 중입니다. 아, 그 계좌는 순양 계열사니까 모른다고 발뺌하시기 어려울 겁니다.” 오세현은 진영기 부회장에게 마누라 이름을 말하지 않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도박장이라는 단어에 보이는 반응이 궁금해서였는데 예상과는 많이 다르다. 자기 마누라가 그 대상이란 걸 안다면 보일 반응이 아니다. 마치 처음 듣는 듯, 아니면 도박이라는 단어를 못 들은 듯 무표정했다. “오늘 중으로 제 귀에 한 가지 소식이 들려야 합니다. 금감원의 공식적인 조사와 수사 종결. 그 소식이 들리지 않으면 내일 음주운전자의 불법 유턴 뉴스가 좍 깔릴 겁니다.” “방금 도박이라고 했나? 해외 원정 도박?” “네. 그게 바로 음주운전에 해당하는 핵심이지요. 그리고 운전자가 누군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죠?”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은 진영기에게 오세현은 명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일어섰다. “제 핸드폰 번호입니다. 오늘까지예요. 기억하십시오.” 부회장실을 나서는 오세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양반, 마누라가 도박에 빠진 걸 모르나?” * * * 혼자 남은 진영기 부회장은 오세현이 남긴 말을 곰곰이 생각했지만, 사태 파악이 힘들었다. 문제는 환치기 계좌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빼돌린 달러는 미국뿐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사용 중이다. 별장이나 호화 주택을 산다거나 돈 될 만한 곳에 땅이나 건물을 사두기도 한다. 물론 개인적인 유흥을 위해서 쓰기도 하지만 도박이라니! 오세현이 큰소리칠 만큼이라면 룰렛 몇 번, 슬롯머신 좀 당기는 재미 수준이 아니라는 이야긴데…. 설마 하는 걱정부터 앞섰다. “최 부장 불러. 외환계좌 전부 뽑아서 가져오라고 해.” 인터폰에 대고 소리친 후 방 안을 서성거렸다. 최 부장이 두툼한 서류 파일을 들고 들어왔을 때 진영기는 소리부터 꽥 질렀다.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닌 밤에 홍두깨 내밀 듯한 소리에 최 부장은 화들짝 놀랐다. “계좌에서 돈 빠져나간 거 중에 수상한 거 없었어? 내게 보고하지 않은 거 말이야.” 최 부장의 놀란 표정에서 실수했음을 알았다. 특별한 건수가 아니면 따로 보고받은 적이 없었다. “다시, 큰돈 빠져나간 거 중에서 이상한 거 없어? 자네 기준으로?” 평생 숫자만 바라보며 산 사람답게 쉽게 알아들었다. 최 부장은 서류 파일을 재빨리 넘기다 몇 장을 뽑아 건넸다. “이건 뭐야?” “사모님께서 사용하신 목록입니다. 그중, 하이라이트 친 게 부회장님께서 찾으시는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사모님께 여쭤봤을 때 몰라도 된다고 하셔서….” 진영기 부회장은 재빨리 마지막 합계 숫자만 확인했을 때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 삼백억?” 최 부장은 부회장의 태도에 어찌할 바를 몰라 엉거주춤할 뿐 더 할 말이 없었다. 단지 놀란 모습에서 사고가 나도 대단히 큰 사고가 났다는 것만 짐작했다. “이거 확실해? 내 마누라가 쓴 거야?” “네. 주로 미국에서 인출하셨고 모로코에서도 가끔 쓰셨습니다.” 미간을 찌푸린 진영기 부회장이 손을 까닥거리자 최 부장은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오늘 부회장의 집에서 곡소리 난다는 것을 짐작했고, 친한 동료들에게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결재를 미루라는 친절한 문자까지 날렸다. 진영기는 음주운전에 불법 유턴까지 저지른 마누라에 대한 분노보다 오세현의 경고가 먼저 떠올랐다. 그는 급하게 비서실장을 부른 다음 조치를 취했다. “전략홍보실에 단단히 일러둬. 앞으로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기사를 한 줄이라도 싣는 언론사가 나오면 내가 직접 문책한다고 경고해.” 집안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직감한 비서실장은 부리나케 회의를 소집하고 달려 나갔다. 회사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막아야 칼바람이 부는 걸 막을 수 있다. 다시 홀로 남은 진영기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오세현, 이 새끼…….” 그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오세현이 신흥 재벌 흉내를 내봤자 대한민국은 순양의 손아귀에 있다. 언론사 어디라도 순양의 허락 없이 기사 쓰는 놈이 없다는 걸 단단히 알게 해줄 셈이다. * * * 순양의 힘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음 날 조간신문과 TV 뉴스에는 도박이라든지, 해외 계좌, 외화 유출이라는 단어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진영기는 언론사의 상황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마음을 놓았다. 이제 이따위 협박을 일삼은 오세현에게 피눈물을 흘리도록 해야 한다. 감히 어디서…! 그는 금감원의 수사를 독촉했다. 쓸 만한 단서 하나만 나오면 곧바로 국세청을 동원해서 미라클을 탈탈 털어버릴 것이다. 비명 소리 지르며 살려달라고 할 때 다시 M&A 협상에 들어가면 된다. 다소나마 근심을 덜어낸 진영기는 집안 단속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빌어먹을 여편네와 말썽 많은 아들 새끼를 분질러버리기 전, 지금의 편안한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임원들을 불러 술자리를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쓸 만한 여인들을 포함한 술자리를 즐길 때 급하게 달려온 비서실장의 표정을 보며 뭔가 잘못 흘러간다는 걸 직감했다. “뭐야?” “부회장님. 이걸 한번….” 비서실장이 내민 종이는 인터넷 기사를 프린트한 것이었고 기사 첫 문장을 읽자마자 얼굴을 구겼다. 『망국 도박판』 ―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인물. ― 라스베이거스 유명 카지노에서 수백만 달러의 도박을 즐기는 모습이 포착. ― 재벌 총수 일가의 호화판 쇼핑. ― 라스베이거스 현지 호텔 카지노들이 한국인 도박 호스트를 고용해 한국인 단골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 ― 일부 카지노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면 S그룹 맏며느리 P씨가 미국 현지 카지노에서 탕진한 금액만 한국 돈으로 수백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 ― 3일 동안 300만 달러를 탕진하고 지사의 외환계좌에서 인출한 비자금으로 충당. ― 현지 카지노들은 일부 고객에게 자가용 비행기를 보내 주는 사례도 있으며 스위트룸과 골프장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을 확인. “미국 현지 시각으로 오늘 아침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코리아 타임 저널’이라고 가장 영향력 있는 한인 언론입니다.” “이게 방금 터진 거라고?” “네. S그룹 P씨라고 한다면….” “나도 알아, 이 새끼야! 확인 안 해도 돼!” “죄, 죄송합니다.” 비서실장은 허리를 숙인 채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자리를 함께한 임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식탁을 바라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싸늘한 냉기가 술자리에 내려앉자 진영기 부회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뭣들 해?” 임원들은 숙였던 머리를 번쩍 들었다. “이미 무슨 일인지 다 알 거 아냐? 여기서 계속 술 마시며 탱자탱자하고 싶어? 대책 세워야지?” “아! 네. 죄송합니다.” 임원들이 우르르 일어설 때 진 부회장은 경고를 잊지 않았다. “이 기사 미국에서 끝내야 해. 한국으로 절대 넘어오면 안 된다. 그리고 미주 법인 법인장들 전부 귀국시켜서 대기 발령 내. 이 새끼들은 돈을 어디에다 쓰는 거야? 이런 기사도 못 막고!” 함께한 여인들도 떠나간 텅 빈 술자리에서 진영기 부회장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오세현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졌다. * * * “대작할 술친구가 없으실 분은 아니고….” 오세현은 진영기의 맞은편에 앉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조간신문 몇 개를 구워삶았나?” “일단은 두 군데 정도?” “일단?” “모레쯤이면 모든 언론사가 기사화할 겁니다. 아, 한성일보는 빠지겠군요.” 진영기는 오세현의 잔에 술을 채웠다. “끝까지 해보자고?” “피차일반 아닙니까? 시작은 부회장님이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진영기의 이마에 핏줄이 툭툭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믿는 구석이 없다면 오세현 정도로는 절대 못 할 행동이다. 뭘까? “이거… 이젠 나도 멈추기 힘들어지네. 오 대표에게 밟혔다는 소문이 돌면 전경련 모임에도 못 나가거든.” “사업하시는 분이 체면 때문에 손해 보는 일 하시면 되겠습니까?” “오 대표가 아직 구멍가게를 벗어나지 못해서 그런 말을 쉽게 하는 거야. 지금 회사 규모보다 서너 배쯤 커지면 체면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진영기는 술잔을 싹 비우고 일어났다. “국세청이 터는 정도로 망하지는 않겠지? 회사 잘 챙기라고. 언젠가 순양그룹의 일원이 될 테니까.” “제 걱정은 그만하시고 술값이나 계산하고 가십쇼. 저 돈 없어요.” 진영기는 여전히 너스레를 떠는 오세현을 한 번 노려보고 사라졌다. “흥분하면 눈에 뵈는 게 없는 타입이군. 같은 피를 물려받았는데 다 제각각인 거 보면 참….” 오세현은 진도준을 떠올리며 테이블 위의 접시를 하나하나 비워 나가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진영기 부회장의 배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 * 대회의실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은 진영기 부회장이 나타나지 않기를 빌었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부회장은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손에 든 신문을 휙 던졌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기사 나는 걸 알고도 못 막아? 당신들 마누라 일이 아니니까 나 몰라라 한 거 아냐?” 앞으로 최소한 한 시간 이상은 부회장이 쏟아내는 거친 말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한다. 그게 이들이 받는 월급의 가치다. 하지만 한 시간은커녕 1분도 더 이어가지 못했다. 비서실 직원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회의실로 뛰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 [160] 양날의 검 3 “부, 부회장님. 잠시만!” 진영기는 물론 십여 명의 임원 눈길이 쏟아졌지만 뛰어 들어온 비서실의 어린 직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리모컨을 들어 회의실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대형 TV를 켰다. 「…사회 지도층 인사 십여 명의 주기적인 해외 원정 도박을 수사 중이며, 이미 입증 가능한 구체적인 증거도 포착했습니다. 특히 대기업과 연계하여 외국환관리법까지 위반한 사례가 드러난 이상, 해당 기업의 수사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뭐야, 저건?” “조금 전 남부지검에서 시작한 특별 기자회견입니다. 이 기사와 관련 있습니다.” 비서실 직원은 회의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조간신문을 가리켰다. 「특히 이번 원정 도박은 통상의 원정지였던 마카오나 필리핀이 아니라 미국, 모로코였다는 것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마카오나 필리핀은 패키지 투어로 위장하여 단체로 움직였지만, 지금 수사 대상에 오른 라스베이거스, 모로코는 개개인이 움직였고 도박 금액은 수억 원에서 수백억 원대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곧이어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순양이라는 이름이 계속 거론되었다. 순양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진영기의 안색이 붉어지더니 마침내 직원이 들고 있던 리모컨을 뺏어 TV를 향해 던져버렸다.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 전부 삭제하고 저거 당장 중단시켜. 그리고 저 새끼 옷 벗겨! 이 모두가 오보였다는 게 내일 뉴스에 나오지 않으면 전부 모가지야. 알아들었어? 빨리 튀어!” 회의실의 사람들은 더 큰 짐을 안게 됐다는 걱정보다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에 번개처럼 사라졌다. “오세현이, 이 새끼가 진짜…!” 혼자 남은 진영기는 한참을 씩씩대다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오늘 당장 중앙지검과 국세청 움직여. 미라클 압수 수색하고 오세현이 빤스까지 탈탈 털어! 어서.” 이젠 정말로 멈출 수 없다. 도박 정도로 마누라가 구속되고 실형을 받을 일도 없다. 설령 완벽한 증거가 나온다 하더라도 초범이니 벌금형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 앞섰다. 하지만 국세청이 삽 들고 파고들면 쉽게 끝나지 않는다. 어찌 됐던 이 싸움의 최종 승자는 자신이다. * * * “이강식! 이 새끼가…! 너 돌았어? 미쳤어?” 퍽―! 이강식은 비명을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지만, 손은 정강이를 만지고 있었다. 남부지검 차장검사의 구둣발이 멈추지 않고 정강이를 두들겼다. “넌 인마, 뭐 한 거야? 애 하나 간수 못 해서 이런 대형 사고를 쳐? 나 옷 벗기고 진급하고 싶어 미치겠어?” 차장의 화실이 자신에게 쏟아지자 금융조사부 부장은 두 눈을 감고 옅은 한숨만 거푸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차장님.” “지랄들 한다. 이제 어떻게 수습할래? 순양 변호인단 수십 명은 몰려올 거다. 그중에 검사장 출신이 10명은 넘을 거라는 데 내 명패 건다.” 남부지검 차장검사는 자개 장식의 명패를 들고 흔들었다. 그걸로 머리를 내려치지는 않을까 겁이 날 지경이었다. “이강식!” “넵. 차장님.” “전임 총장님 임기 몇 개월 채운지 알아?” “8개월입니다.” “그래, 법이 정한 2년 중에 겨우 8개월 하고 옷 벗었다. 그게 순양 회장이 난리 쳐서 그랬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어. 그런데 일개 평검사가 그 집 맏며느리를 건드려? 너 때문에 몇 명이 옷 벗을 것 같아? 너 포함해서!” “…….” 이강식은 머리만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질책이었지만 직접 들으니 입안이 쓰다. 일개 기업가에게 검찰 전체가 벌벌 떨다니…. “검사장님 대검에 불려 가셨어. 너 때문에, 새꺄!” 차장검사가 뒤통수를 후려갈겼을 때 이강식은 머리를 들었다. “계좌 확보했고 박혜영 출국 기록과 대조 끝났습니다. 라스베이거스 CCTV 기록은 한인 언론사에서 확보하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 아줌마는 빼도 박도 못해요. 순양그룹 환치기까지 한 번에 엮을 수 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눈 안 깔아?” 차장검사는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며 항변하는 이강식을 향해 소리쳤다. “너 왜 이래? 증거가 없어 그쪽 인간들 못 잡아넣었어? 휠체어 한 번 타면 끝나는 게 그놈들이다. 오히려 면죄부 주는 꼴인 거 몰라? 아줌마 도박 때문에 환치기까지 날려버릴 셈이야?” 재벌의 위법 사실은 증거를 모아 묵혀두어야 한다. 그리고 여론이 시끄러워 기회가 왔을 때 한 번에 터트려야 실형을 끌어낼 수 있다. 어차피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사면으로 풀려나겠지만. 딱 거기까지가 검찰의 역할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공명심에 눈이 먼 일개 평검사의 일탈로 끝내셔도 됩니다.” 이강식은 품속의 봉투를 꺼냈다. 사직서였다. “씨발 놈이…! 끝까지 가오는 살리겠다?” 차장검사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이강식을 노려보며 말했다. “쫓겨난 정의로운 검사, 그 끝이 뭔지 잘 알지? 전생에 나라를 구한 놈이면 여의도 금배지. 아니면 동네 이혼 변호사. 넌 나라 구할 놈은 아니니까 동네 변호사로 인생 종 치는 거다.” 이강식은 자신을 무시하는 차장검사를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1년 뒤면 날 부러워하게 될 겁니다.’ * * * “이강식 검사가 총대 멨네요.” “그러게. 부장검사가 총대 멜 줄 알았는데. 검사질도 할 만큼 했고, 애들에게 돈도 많이 들어갈 테고. 딱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욕심에 나이가 있나요? 돈 급한 사람이 나선 거겠죠.” 나 역시 의외였기도 했고 조금 아쉽기도 했다. 배 부장 정도가 나서주면 좀 더 중량감 있는 그림이 그려졌을 텐데. “이제 네 큰아버지는 어떻게 할까?” “성질만 지랄 맞은 사람인지 뚝심 있는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겠죠. 이 회견을 덮는 데만 신경 쓴다면 간이 콩알만 하다는 증거일 테고, 이왕 터져버린 거 수습보다 우리를 공격하는 데 집중한다면 배짱 좋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 또한 성질머리 지랄 맞다는 뜻이겠지.” 오세현은 큰아버지가 어떤 결정을 할지 확신하는 것 같았다. 국세청이 덤비는 건 기정사실이고 그 시기만 궁금한 게 분명했다. “내일?” “준비하는 데 시간 걸리니까 내일, 아니 모레쯤?” 하지만 우리의 추측은 틀렸다. 큰아버지의 능력인지 순양그룹의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공무원을 동원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 대표님. 국세청과 검찰이 들이닥쳤습니다.” 직원 하나가 사색이 된 채, 노크도 없이 뛰어 들어와 소리쳤다. “빠르네. 진영기 부회장.” “그러네요. 이 정도로 결단이 빠른지 몰랐어요.” “그냥 성질이 급해서 욱한 거야. 욱해서 물불 안 가리는 거지. 너도 핏줄이라 좋게만 생각하는 거냐?” 여유 있게 찻잔을 드는 오세현을 보며 직원은 안달 난 모습이었다. “대표님! 지금 이럴 때가….” “야! 소리 좀 지르지 마. 귀 안 먹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오세현이 손가락을 내밀었다. “10분이면 되겠냐?” “삼촌은 말이 좀 많으니까 20분 하죠.” “그래.” 오세현은 휴대전화를 들었고 직원에게 지시했다. “나가서 그 사람들 좀 막아. 엘리베이터 끄고 비상구 계단 문도 잠가버려. 국세청이든 검찰이든 이 방까지 오는 데 딱 20분 걸리게만 해. 그럼 된다.” “네. 대표님.” 뭔지 모르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았다. 직원도 전화를 꺼내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오세현은 닫힌 문을 확인하고 느긋하게 번호를 눌렀다. “진영기 부회장님. 오세현입니다.” ― 먼저 전화할 정도면 급한 일 터졌나 보네. 흐흐. “생각보다 행동력 있으시군요. 기자회견 끝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 공무 집행하는 공무원들이니 예의 바르게 대해요. 직원들 시켜서 몸으로 막고, 자료 파기하는 짓 따위는 하지 말고.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정확히 20분 안에 모두 철수할 테니까요.” ― 철수? 누구 힘 있는 분한테 부탁이라도 했나? 혹시 도준이 시켜 우리 아버지께 매달리기라도 한 건가? “제가 애도 아니고…. 고자질 같은 건 안 합니다. 지금 제 회사에 들이닥친 공무원들 철수는 바로 진영기 부회장, 당신이 지시할 테니까요.” ―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부회장님. 전 지금 진동기 부회장을 만나러 갈 겁니다.” ― 동기? 푸핫! 겨우 생각해낸 구원자가 고작 동기야? “말 끊지 마시고 잘 들으시라니까요. 빈손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제 손에는 양도 계약서가 있습니다.” ― 양도? “네. 바로 순양자동차가 보유한 순양그룹 주식 17%를 전부 넘긴다는 계약서죠.” ― 뭐, 뭐야? “두 분이 그룹 지배권을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시지 않습니까? 17% 정도면 결정타는 되지 않더라도 균형은 무너질 겁니다.” ― 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야 뭐 나중에 진동기 부회장이 순양그룹을 손에 넣을 때 쓸 만한 계열사 서너 개만 얻으면 그만입니다.” ― 야! 오세현! “말조심하세요! 내가 당신 부하도 아닌데 함부로 이름 부르는 거 아닙니다.” 오세현은 전화기 든 손을 바꾸며 말을 이어 갔다. “제가 가진 순양그룹 지분이 제 손에 남아 있느냐, 아니면 진동기 부회장 손에 들어가느냐는 이 통화가 끝날 때 결정할 겁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 자, 잠깐! “만약 국세청 공무원이 내 방에 한 발짝이라도 디딘다면 진동기 부회장의 그룹 지배 영향력은 17% 늘어날 겁니다. 바로 오늘 말입니다.” * * * 진영기 부회장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17%의 주식을 넘기라고 했을 때, 아니 순양그룹과 HW 그룹의 통합까지 이야기한 것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올 줄 몰랐다. 동생인 진동기와 자신의 지분 구조는 그룹 분리와 다르다. 경계선이 모호한, 서로 관장하는 기업의 성격만 규정 지었을 뿐 계열사의 소유가 분명한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이야 아버지인 진 회장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노려보고 있으니 형제가 각자의 영역에만 충실하지, 진 회장이 사라지면 언제든 침범할 수 있다. 이때 17%는 엄청난 힘을 뜻하는 숫자다. 정신 차린 진영기는 급히 입을 열었다. “그거 내게 넘겨. 그럼 두 번 다시 국세청과 검찰 만날 일 없을 거다. 참, 쓸 만한 계열사 서너 개라고 했나? 내가 몇 개 더 얹어주지. 지분의 가격은 비싸게 쳐줌세.” ― 내가 속도 없는 놈으로 보입니까? 먼저 시비 걸고 이렇게 찔러대는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줄 만큼 너그러운 사람 아닙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십쇼. 지분 들고 있을까요? 아니면 진동기 부회장에게 넘길까요? 진영기 부회장은 입술이 타들어 갔다. ―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국세청 공무원 친구들, 아래층은 건너뛰고 곧바로 내 방으로 달려올 모양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 친구들이 내 방문을 여는 순간 통화 끊습니다. “기다려.” 진영기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전화를 끊었다. 오세현이라면 허튼 허풍을 떨 사람이 아니다. 이놈이 주식을 들고 가면 동생은 얼씨구나 하며 두 팔 벌려 반길 것이다. 진영기는 힘없이 인터폰을 눌렀다. “국세청장 연결해서 지금 당장 철수하라고 해. 빨리.” ― 철수라면 어디를…? “야! 몰라서 물어? 미라클 말이야. 미라클!” 소리를 꽥 지른 진영기는 힘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 [161] 슬림하고 타이트하게 1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마누라의 거액 도박과 불법 환치기 사실만 세상에 까발린 셈이다. 수습을 해야 하는데…. 검찰이 문제다. 조용히 덮어줄 것인지 아니면 정식 수사를 시작하여 자신의 해외 비자금 내역까지 탈탈 털어낼지 모르는 일이다. 마누라 도박이야 세상의 손가락질 좀 받으면 곧 사라질 테지만 알토란 같이 차곡차곡 모은 비자금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 만약 해외 부동산 내역까지 언론에 노출되면 세상은 손가락질로만 끝내지 않는다. 여차하면 특검으로까지 번질 일, 무조건 막아야 한다. 최대한 빨리 모든 걸 지워야 한다. “경영지원, 기획실, 전략실, 홍보, 비서실 전원 집합.” 진영기는 무거운 발을 끌며 회의실로 향했다. “보고해봐.” 부회장의 기운 없는 말투가 회의실 공기를 더욱 무겁게 했다. “검찰도 체면이 있는지라 일개 평검사의 섣부른 판단으로 치부하는 건 곤란하다고 합니다. 한인 신문에서 떠들어 댔고, 국내 일간지도 기사화했는데….” 보고자는 부회장의 표정을 다시 확인하고 조심스레 말했다. “원정 도박 관련해서 참고인 출두까지는 불가피하다고….” “검찰청 포토라인에 한 번 서달라는 말이야?” “네. 우리가 언론을 막아주면 약속 기소 후 벌금형으로 마무리 짓겠답니다.” “좋아. 홍보팀 어떻게 됐어?” 진 부회장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한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그냥 앉아서 해. 발표장도 아니잖아.” 진영기가 손을 내젓자 홍보실 책임자는 엉거주춤 의자에 앉았다. “인터넷 기사는 다 내리겠다고 했지만, 후속 보도는 어쩔 수 없다면서 한두 번 정도는 기사 싣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협상 중입니다. 꼭 막겠습니다.” 진영기는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언론만 막으면 검찰도 해결하기 쉬워진다. 마누라가 전국적으로 망신살을 뻗쳤다. 지금 심정으로는 감옥에라도 처넣고 싶다. “기자들이든 데스크든 돈 아끼지 마. 원하는 대로 쑤셔 넣어주라고. 대신 원정 도박 기사는 보이지 않도록 해.” “네. 부회장님.” 이제 가장 힘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해와 계좌와 환치기. 이건 절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놈의 IMF 극복이라는 국가적 과제 때문에 달러 빼돌리는 것은 대역죄와 다르지 않다. 대역죄는 구족을 멸해야 할 만큼 중죄, 이미 대검 중수부가 움직인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최 부장.” “네. 부회장님.” “50만 달러짜리 계좌 하나 터서 검찰에 던져주고… 그걸로 끝내자고 해.” “네.” 이 정도로 끝날 수 없다는 걸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다 안다. 부회장의 입에서 50만 달러가 나온 건 그 정도 금액을 어깨에 짊어지고 책임지라는 말이다. 집행유예로 마무리해줄 것이고 최소 두 단계 승진에 특별 보너스 십억 정도는 받을 것이다. 모두 눈치 보기 시작했다. 진영기는 회의실을 한 번 쓱 둘러본 뒤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를 툭 던지고 일어났다. “잠깐 출장 다녀올 사람은 잘 상의해서 정해. 장기 출장은 아니니까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 알지?” * * * 이학재의 보고가 끝나자 진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꼬리 말은 게 영기다?” “그렇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미라클 본사까지 들어간 국세청 직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습니다. 진영기 부회장이 급히 연락했다고 합니다.” “멍청한 놈. 공무원 자존심은 지켜줘야 하는 법이거늘.” 아무리 시키는 대로 하는 공무원이지만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 하는 상황을 좋게 보지만은 않는다. 특히 그 명령이 조직의 수장이 아니라 대기업에서 떨어졌다는 걸 알면 공무원이라는 자긍심마저 무너진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양치기 소년과 다를 바 없다. 앞으로 정부 조직에 대한 입김이 점점 더 옅어진다. “검찰 기자회견은? 진짜 수사한 거야? 아니면 미라클의 부탁이야?” “처음엔 부회장의 지시로 움직였는데 변절한 겁니다. 미라클에서 더 큰 선물을 안긴 거겠죠.” “연락은 해봤어?” “네. 남부지검장이 난처해하더군요. 없던 일로 덮기에는 좀 힘들다고 말입니다.” 잠깐 고민하던 진 회장은 짜증이 솟구쳤는지 혀를 찼다. “일선에서 물러났으면 신경 쓰지 않아야 하는데…. 이거 참.” 그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고 말했다. “범위만 확실하게 지켜달라고 해. 순양까지 불통 튀면 곤란해.” “네.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뭔데 또 표정이 그래?” “최 시장이 동부지검을 통해 뭔가 하나를 건진 것 같습니다.” “최 서방이?” “네. 어떻게 할까요?” “최 시장은 놔둬. 가족 일이니 지들끼리 해결하겠지. 아이고. 이 나이에 아직 애들 싸움이나 말려야 한다니…. 원.” 진 회장은 힘겹게 수화기를 들었다. * * * “내가 왜 너희들을 불렀는지 다들 알고 있겠지?” 진영기는 긴장했고 진서윤은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차남인 진동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부끄러워서 집 밖으로 못 나가. 적당히들 좀 하지?” “아버지. 큰오빠가 시작한 일이에요. 제가 감옥 가게 생겼는데….” “그래서? 남이나 다름없는 최 서방에게 오빠 뒷조사하라고 했어? 그게 할 짓이냐?” 진영기가 여동생을 죽일 듯 노려봤을 때 진 회장이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모두 줄 닿는데 전부 연락해서 다 정리해라. 조용히 잠재워.” “아버지. 전 관계없는 일….” “시끄럽다. 너도 똑같아. 발은 담그지 않았지만 네 형 뒤에 숨어 있었던 거 아니냐? 그러니 영준이도 서울로 올렸지. 내가 말했을 텐데? 그놈 인간 만들기 전에는 서울 땅 못 밟게 하라고?” 진동기가 슬쩍 끼어들며 자신은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걸 드러내려 했지만, 돌아오는 건 호통뿐이었다. “대체로 차남이 이기적이고 잔대가리 잘 굴린다는 거 알지만, 네놈은 도가 지나쳐. 나설 땐 직접 나서고 빠질 땐 확실하게 선을 그어. 얍삽하게 행동하다가는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법이다.” 노골적인 질책에 진동기는 아버지의 눈을 피했다. “대답 안 해? 너도 있는 힘껏 이번 사태 잠잠하게 만드는 데 전력을 기울이라고!” “네. 알겠습니다.” 진 회장의 호통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대답했다. “신문 보고 뉴스 보기가 겁난다. 더는 나오지 않도록 해. 사흘이 지나도 순양이라는 이름이 언론에 거론된다면 모두 각오해. 임원들까지 다 동원해서라도 잠재워.” 매서운 진 회장의 눈이 딸을 향했다. “최 시장도 멈추라고 해. 그놈이 너의 마지막 끈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잡으려면 굵은 동아줄을 잡아야지 그런 얇은 줄을 잡아서 어따 써?” “…….” “그놈은 당에서도 불편해해.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정치가 되겠어? 그놈에게 다음은 없다.” 진서윤이 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자 진 회장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네가 그놈 중단시키지 않으면 내가 하마. 그놈이 대현그룹에서 받아 처먹은 돈이 얼마나 되는지 전 국민이 알게 해줄까?” “아, 아뇨. 오늘 정리할게요.” 세 자식의 확답을 듣자 긴 한숨을 쉰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계속될 것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계열사 정리만 끝나면 진정으로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진 회장은 마지막으로 자식들에게 당부의 말을 시작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들어. 내가 백화점과 호텔 등을 서윤이에게 물려준 이유가 있다.” 진서윤이 눈을 반짝이며 귀를 세웠다. “내가 순양을 시작할 때 내 머리에는 산업보국(産業報國), 산업을 일으켜 나라에 보답한다는 말이 전부였다. 기업이란 물건을 생산하고 그걸 파는 게 당연한 의무처럼 여겼지. 지금은 흔하디흔한 물건이라도 그때는 귀해서 쓰지도 못했다.” 올바른 시작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진 회장은 아직 그때의 마음을 잊지 않았다. 지키지는 않지만…. “호텔이나 백화점은 그냥 돈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아. 산업보국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지. 그래서 떼어준 거다. 하지만 그걸 일 년도 지키지 못해서 홀라당 날려먹었어. 서윤이가 바보라서 그랬겠냐?” 진 회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순양이 강자라는 생각은 버려. 저 바깥에는 승냥이 떼처럼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는 놈들이 수두룩하다. 바늘구멍 같은 틈이 보이면 바로 덤벼드는 거야. 단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낳는다.” 마지막 당부라고 생각하는지 전에 없이 감정적인 모습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순양자동차나 미라클도 마찬가지다. IMF는 국가의 방파제를 무너뜨렸어. 난 순양을 지켜야 했고. 그래서 공짜나 다름없는 돈으로 넘겨준 게다. 그렇지 않았으면 해외에서 무너지기 시작해서 본사까지 흔들렸을 거야.” 진 회장은 두 아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 둘은 자동차를 되찾아 와야 한다. 지금 순양자동차는 아진자동차와 합병해서 두 배 이상으로 커졌다. 쉽지 않겠지만, 꼭 찾아와야 한다.” 듣고만 있던 진동기가 입을 열었다. 우성그룹도 망한 지금 두 회사가 합병한 자동차는 대현에 맞설 유일한 자동차 회사다. 그도 내심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혹시 오세현 대표와 다른 약속이 있었습니까?” “약속이라니?” “언젠가는 다시 넘긴다는, 뭐 그런….” “없다.” 짧은 대답에 진동기의 얼굴 근육이 실룩였다. 아버지가 뭐라고 말하든, 거저 넘겨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자를 만만히 보면 안 된다. 돈만 많이 주면 회사를 넘길 거라는 착각도 하지 마. 단지 몇 년 만에 재계 순위권에 진입한 놈이다.” 진 회장은 진동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넌 우성해양조선 인수 때문에 오세현이를 자주 만나지?” “네.” “그 기회를 잘 살려봐. 그놈이 원하는 게 뭔지 파악해. 그게 우선이다.” “알겠습니다.” 진 회장은 두 아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말했다. “너희들이 제왕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되찾지 못해. 너희가 승냥이 떼가 되어야 찾아올 수 있어. 바늘구멍만 한 틈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도 필요하고 기회가 왔을 때 단숨에 목줄을 끊어버리는 힘도 필요하다.” * * * “잘 지내셨어요? 건강은 괜찮으신 거죠?” “네 녀석 때문에 제명에 못 살겠다. 좀 살살하거라.” “저야 뭐…. 안 죽으려고 발버둥 치는 게 전붑니다. 하하.” “오늘 네 백부들 불러 정리하라고 일러뒀다. 너도 더는 크게 벌이지 말어. 순양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할아버지가 호출했을 때 짐작했다. 더는 말 나오지 않도록 정리하는 단계니 내게도 당부하는 걸 잊을 리 없다. “저야 뭐, 다행이죠. 더 할 밑천도 없습니다.” “그래. 대신 내가 선물 하나 주마. 몇 군데 일러뒀으니 인천공항 면세점 허가는 문제없을 거다. 서울 도심 면세점도 함께 말이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어차피 허가는 떨어졌을 거야. 신청 기업 중에 우리만 한 데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냥 못질 한 번 더 했을 뿐이다.” “그 못질이 간절할 만큼 불안했습니다. 검찰이 고모를 조사할지도 몰랐으니까요. 그게 감점 요인이 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래.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고. 아무튼, 네게는 좋은 공부가 됐을 것 같은데…. 어떠냐?” “일단 생각대로 됐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 생기지 않게 하는 게 목표였으니까요.” “그래서? 목표는 이루었어? 이제 네 큰아버지가 쓸데없이 널 찌르는 일은 없을 것 같으냐?” “네. 할아버지께서 주신 무기를 적절히 써먹었습니다.” “내가 준 무기? 그게 뭐냐?” “자동차가 보유한 순양그룹 지분 17%요.” “뭐…?” “그걸 동기 백부께 던져버리겠다고 하니 직빵으로 먹히던데요?” 할아버지는 내 말을 이해하느라 잠깐 눈을 깜빡이더니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 [162] 슬림하고 타이트하게 2 “이런 사악한 놈을 봤나. 으허허.” “할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손에 쥔 걸 가장 효과적으로 써먹는 것?” “그래, 알면 됐다. 너무 자주 써먹지 않도록 해. 약발 떨어진다.” “두 백부님이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약발 떨어질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과연 그럴까?” 할아버지는 잔잔히 웃었다. “내가 네놈이 얕보는 두 백부에게 단단히 일러두었어. 형제가 힘을 합쳐 순양자동차를 꼭 되찾으라고 말이다. 그놈들도 마냥 욕심만 부리지는 않아. 더 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일시적으로나마 손을 잡을 수도 있다. 형제니까 더 쉽게 잡을지도 몰라.” “자동차를요?” “그래. 힘없으면 뺏기는 게 세상 이치지. 안 그러냐?” 이런 고약한 노인네! 밖으로 번지는 싸움은 철저히 막지만, 안에서만 벌어지는 싸움은 기꺼이 반기며 심지어 틈만 보이면 싸움을 부추긴다. 모르긴 몰라도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The Winner Takes It All일 것이다. “준비 단단히 하고 있겠습니다.” “그래야 할 게다. 네가 무기로 휘두르는 그 17% 지분도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어. 왜 그런지 아느냐?” “순양그룹의 규모가 커지면 됩니다. 규모가 커질수록 미라클이 가진 지분은 하잘것없어지니까요.” “잘 아는구나. 사실 이미 16%대로 떨어졌다. 경기가 좀 살아난 뒤 자본을 늘린 계열사가 꽤 되거든. 따라잡을 수 있겠냐?” “뒤처지지 않게 노력해야죠. 그래야 할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거 아닙니까?” “내 기대만?” “제 욕심도 채울 생각입니다만, 이번에 알았습니다. 결코, 쉽지는 않겠구나….” 씁쓸한 내 표정을 본 할아버지는 눈을 반짝였다. “왜 그리 생각하지?” “큰아버지의 살아온 세월을 망각했습니다. 그 세월만큼 탄탄하게 다져놓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 가진 힘. 제가 큰아버지와 동등한 힘을 가지려면 앞으로 20년은 걸리겠죠. 아니, 어쩌면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큰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장남, 전 가장 멀리 떨어진 서열의 막내. 힘 있는 사람들 눈에 제가 들어오겠습니까?” 할아버지는 무릎을 탁 치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게 진정한 순양의 힘이다.” “네.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실감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번에 확실히 체험했습니다.” “너 혼자 하려면 50년은 걸릴걸? 영기의 힘 절반 이상은 내가 물려준 것이니까. 내가 준 거에 20년의 세월을 보탠 것이다.” 난 할아버지에게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 “제게도 좀 주실 생각이신 거죠?” “공평한 싸움을 하려면 주긴 줘야겠지. 하지만 한 가지는 명심해라. 내가 주더라도 네 것이 되는 건 아니다.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지.” “사람이니까 분실할 염려는 없겠네요.” “뭐라? 분실? 이런…. 으허허.” 할아버지는 책상까지 치며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께서 주시기만 한다면 잃어버리지 않고 간수 잘하겠습니다. 어차피 돈으로 산 사람들 아닙니까? 그들의 힘을 누구보다도 비싸게 사용료 지불하고 쓰겠습니다.” “처음만 그렇다.” “네?” “처음엔 돈이지만 나중엔 더 필요한 게 생길 게다.” “그게 뭘까요?” “말해준다고 아는 게 아니다. 그건 네가 파악하고 채워줘야 하는 거야.” “쉽지 않군요.” “사람이니까 그렇다. 사람이니까 복잡하고 어려운 게다. 사람의 욕망은 감히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제각각이거든. 그 어려운 걸 해줘야 네 사람이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맑은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곧 지분 상속 절차가 끝난다. 두 놈이 나눠 가질 텐데, 성장세로 봐서는 전자를 중심으로 한 영기 큰아버지가 조금 더 많이 가져가는 모양새가 될 거다.” “그렇군요.” “남은 건 금융 부분인데 지금 그룹 지분을 조정 중이다.” 마른침을 삼켰다. 이 말을 꺼낸다는 것은 내게 준다는 의미인데…. 지분 조정 중이라는 말이 걸렸다. “금융 계열사들이 알짜배기인 건 너도 잘 알지?” 특히 순양생명은 현금흐름이 준수하다 보니 부동산 또한 엄청 많이 가진 거물급 기업 중 하나다. 회사에 쌓여 있는 현금으로 부동산을 마구 사들여 엄청난 임대수입까지 올리니 그룹의 은행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또한 순양전자 주식 7%를 쥔 대주주 회사이기도 하다. “네. 그룹 지배의 중추 역할을 하는 계열사 중 하나 아닙니까?” “넌 그걸 어떻게 하고 싶어?” “주시려고요?” “만약에라는 말을 빼먹었구나. 허허.” “순양생명을 중심에 놓고 확장에 힘쓰겠습니다. 또 하나의 거대 기업집단이 될 때까지요.” “네 큰아버지들이 가진 순양 계열사가 아니라 밖으로 키운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순양 계열사도 확장의 대상일 뿐, 제게 있어서 전부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정답이기를 바랐다. 한계 없이 회사를 늘려 나가는 것, 이것이 재벌들의 궁극적인 목표 아닌가? 수성보다는 확장을 꿈꾸는 핏줄. 마음이 가야 한다. 그래야 주식 한 주라도 더 얻어낼 수 있다. “네 녀석은 항상 교과서 같은 답변만 술술 늘어놓는단 말이야. 그걸 또 결과로 보여주니 딱히 흠잡을 곳도 없고.” “난처하십니까?” “뭐가?” “제게 금융 부분을 물려주시려니 큰아버지들이 반발할 게 뻔하니까요.” “네 큰아버지들만 반발하는 게 아니다. 금융 계열사 임원들 전부가 들고 일어날걸? 손자뻘에게 머리를 숙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분들 원하는 걸 채워주는 게 제가 할 일이군요. 맡겨주시면 반발은커녕 환영 일색으로 바꿔놓겠습니다.” “거참, 큰소리 탕탕 치는 놈일수록 별 볼 일 없는데 네 녀석은 그것도 믿음이 가니….” 할아버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금융 계열사는 네게 맡길 거다. 지금 절차 진행 중이니 준비 잘하고.” 예상했던 일이지만 이렇게 확답을 들으니 하늘을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께름칙한 부분도 없진 않았다. 금융 계열사가 보유한 그룹 지분이 얼마나 되는지 말씀하시지 않았다. 적어도 30%는 될 터인데…. 그렇다면 자동차가 가진 16%와 합치면 절반에 육박한다. 이걸 모를 리 없는 할아버지 아닌가? 지분 조정이라는 게 아마도 보유 주식 비율을 낮추는 작업일 것이다. 얼마나 남겨놓으시려나? “이놈아. 무슨 생각 하길래 고맙다는 말도 안 하는 게냐?” “아,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또 하나의 그룹사를 만들어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까지 숙였다. 최소 20%만 남겨 두기를 빌었다. 자동차와 함께 30%만 넘으면 삼각 구도가 만들어진다. 딱 10년, 아니 5년만 저울추 중앙에서 줄타기하며 조금씩 갉아먹으면 절반을 가져올 테고, 그 뒤 10년의 세월이 흐르면 전부 내 것으로 만들 자신이 있다. 지금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계신 할아버지가 앉은 저 의자. 저 자리의 주인이 되는 데까지 15년이면 충분하다. * * * 가족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보니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 도박으로 기백억을 날려먹은 마누라, 여자 연예인 가랑이 사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장남, 정신 차린 줄 알았던 차남은 몰래 동거부터 시작했다. 서른을 넘긴 딸년은 시집갈 생각도 않고 유럽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할머니 곁에 꼭 붙어 얌전하게 지내는 것이다. 하지만 재벌가에서 노처녀라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어디 하자 있는 거 아니냐는 소문이 재계에 쫙 퍼진 지경이다. 마지막으로 무슨 꿍꿍이인지 속을 알 수 없는 며느리. 남편이 허구한 날 외박을 일삼아도 바가지는커녕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진영기 부회장은 끓어오르는 속을 누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오늘부터 집 밖으로 못 나가. 일 년간 외출 금지야. 명심해.” “여보! 지금 무슨…. 내가 어린애야?” “그 입 닫아. 내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말하는지 알면 엎드려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여보 그래도….” “닥쳐! 감방에서 몇 년 썩게 만들어줘? 도박에 빠져 기백억을 날린 정신 나간 미친년이라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어줄까?” 이 집의 안주인인 박혜영은 눈을 내리깔았다. 자식들 보는 앞에서 이 무슨 망신인가? 이미 며느리와 두 아들은 입만 떡 벌린 채 엄청난 짓을 저지른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찰청 출두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준다. 서면 조사로 끝낸다는 뜻이라고. 그러니 집구석에 처박혀서 숨도 쉬지 말고 살아. 집 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나가면 처갓집부터 박살 내버릴 테니까. 알아들어?” 남편의 고성에 박혜영은 머리만 끄덕였다. “당신 집안 어른들 만났어. 당신이 저지른 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말하니까 모두 황당해하며 머리도 못 들더라. 그분들도 다 늙은 딸년 못된 버릇을 고쳐달라고 부탁했어. 그러니 친정에서 돈 타 쓰는 건 앞으로 없을 거야.” 돈줄을 다 막아버린 남편에게 대들고 싶었지만, 서릿발 같은 모습에 냉가슴만 앓았다. “경준이 넌 학교고 뭐고 다 때려치워. 혼인하고 일 배워.” “아… 아버지.” “토 달지 마. 네놈이 데리고 살던 그 홍콩 여배우는 정리했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거다. 네 혼처도 이미 정했고 이야기 다 끝냈다. 세광그룹 여식이야. 인물도 반반하고 공부도 할 만큼 했다고 들었어. 딴소리하면 너도 네 형 꼬라지로 만들어준다.” 진경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형의 사정은 이미 잘 안다. 주머니에 만 원짜리 한 장, 카드 하나 없이 집과 회사만 오가며 끔찍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상상도 하기 싫은 생활이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니? 조선 시대도 아니고. 진경준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은 엎드려 있어야 한다. 아버지의 화가 좀 풀리면 그때 매달리는 게 현명한 짓이다. “이제 이 집구석 돈줄은 다 끊었다. 전부 밥 먹고 숨 쉬는 거 빼고는 아무것도 하지 마. 사람 같은 모습을 보이기 전에는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다.” 진영기는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는 며느리에게 말했다. “새아가, 너도 명심해. 친정에서 돈 십 원이라도 타 쓰면 그날부터 한성일보 광고는 다 끊어버릴 거다. 사돈댁과 원수지간이 되는 건 전적으로 너한테 달려 있다. 알아들었겠지?” “네. 아버님.” 홍소영은 재깍 대답했다.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한마디라도 대꾸했다가는 쫓아낼 기세 아닌가? “앞으로 너희들 수행원은 내게 모든 걸 보고할 거야. 어디에서 뭘 하는지, 밥 먹을 때 반찬은 몇 개였는지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말이다. 똥 누고 오줌 눌 때만 혼자 있을 수 있어. 만약 수행원에게 한마디라도 싫은 소리 하면 외출 금지다.” 진영기 부회장은 고개 숙인 가족들을 내려다보며 말을 뱉었다. “화목한 가족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제발 사람 구실 좀 하며 살자.” 진영기가 이 말만 남기고 이 층으로 휙 하니 올라가 버리자 모두 한숨을 내쉬며 흩어졌다. 홍소영은 가족들이 제각기 방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재빨리 시아버지의 서재를 향해 달려갔다. 위기가 기회라는 건 큰일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이런 가족 일에도 해당한다. 이 가족이 보통 가족인가? 이 집안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이 나라의 경제를 움직이지 않는가? ======================================== [163] 슬림하고 타이트하게 3 “아직 할 말 남았냐?” 조용히 서재 문을 열고 들어오는 며느리를 보며 진영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감히 시아버지인 자신의 결정에 불만을 드러내려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홍소영은 시아버지의 표정을 보자 급히 말했다. “아버님의 결정에 불만 있는 게 아니에요. 전적으로 따르겠어요.” “그런데?” “부탁드릴 게 좀 있어서….” “게 앉거라.” 홍소영은 맞은편 의자에 살며시 앉았다. “그래, 부탁할 게 뭐냐?” “친정인 한성일보에서 고모님 비자금과 미라클의 관계를 계속 취재하도록 허락해주세요.” “뭐?” “유령 회사로 들어간 자금까지 파악했다고 들었어요. 조금만 더하면 미라클까지 덩굴째 엮여 나올 텐데…. 이대로 접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어처구니없는 말이었지만 일견 기특하기도 했다. 가족 전체가 사고나 치고 돌아다니는데, 그나마 전투를 멈추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식구다. 홍소영은 대답 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시아버지의 눈길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받아냈다. 이때 그의 입에서 의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식으로 뒤를 탈탈 턴 우리 식구가 몇이나 되지?” “네?” “야단치는 거 아니니까 놀라지 말고. 대답해. 몇이냐?” “아… 아버님. 전….” “넌 아는 게 없다?” “…네.” 귓불까지 빨개진 며느리의 모습에 진영기는 실소가 흘러나왔다. 공주처럼 있는 집에서 귀하게 자란 애치고 공격적이다. 단지 욕심만 앞서서 설치는 철부지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며느리가 아니라 딸이었다면, 아들이었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했을까 생각했다. “넌 내일 친정으로 가서 그간 조사한 자료 전부 가지고 와라. 우리 가족에 대한 조사도, 미라클에 대한 조사도 전부 말이다.” “아버님. 시댁 가족은 저도 잘….” “그래. 넌 모른다는 거 믿어주마. 아무튼 자료는 있을 게다. 전부 다 가져와라. 책임을 묻거나 하지는 않으마. 네가 제안한 건 그 자료를 다 보고 다시 논의해보자.” 홍소영의 표정이 환해졌다. 다시 논의해보자…. 시아버지가 분명히 말했다. 논의라고. 자기 생각을 계속해서 듣겠다는 뜻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네. 내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나가서 쉬어라.” 허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려던 홍소영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저기, 아버님.” “왜? 아직 남은 게 있어?” “영준 씨 말이에요. 좀 풀어주시면 어떨까 해서요.” “뭐? 풀어주라고?” “네. 영준 씨 지갑 묶어 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에요. 영준 씨는 얼굴이 명함이고 이름이 신용카드잖아요. 그이는 돈 없다고 해서 버릇 고쳐지지 않아요. 더 은밀하게 숨기겠죠. 일 년이든 십 년이든 외상 긋고 다닐 거예요.” “차라리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드러나도록 하자?” “네.” 진영기는 황당해서 더는 말하기 힘들었다. 어찌 됐던 남편이 여자 만나고 돌아다니는 거 묵인하자는 뜻 아닌가? “진심이냐?” “네. 전 영준 씨가 평범한 남자처럼 사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요. 한국 최고의 재벌 3세. 주변 날파리들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어요.” 여자치고는 통이 크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째서 이런 모습을 이제야 발견한 걸까. “생각해보마. 오늘은 그만하고 나가봐.” 홍소영이 다시 머리를 숙였다. “참, 넌 언제쯤 손자를 안겨줄 생각이냐?” 대답하기 힘든 질문에 홍소영은 머리만 숙인 채 서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시아버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애를 낳아야 진정한 순양의 가족이 된다. 명심해. 자식은 우리 핏줄과 연결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명석하니 무슨 말인지 알겠지?” 홍소영에게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지금은 며느리일 뿐이다. 아직 순양의 가족이 아니다. 가족은 바뀌지 않지만, 며느리는 언제든 쫓겨날 수 있다. 시아버지의 마음을 안 며느리는 허리를 숙였다. “빨리 손주를 안겨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 * “정말? 회장님이 직접 말씀하셨어?” “네. 지금 승계 작업 진행 중입니다.” “이야,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축하해.” “다 삼촌 덕분이죠. 삼촌이 계시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절대 못 왔을 겁니다.” 공치사를 건네며 슬쩍 표정을 살폈다. 편안하고 환히 웃는 얼굴. 내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다. 새롭게 도전하려는 열망이 드러나길 바랐다. 본격적인 큰 전투를 앞둔 장수의 표정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오세현의 얼굴은 모든 걸 다 이룬 성취한 자의 모습이다. 언젠가 했던 말, 5년만 더 일하고 은퇴한다고 했던가? 순양의 삼분지 일을 가졌으니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혹시라도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어떡해야 하나? “아니까 다행이다. 흐흐. 보통 성공한 놈은 다 지가 잘나서 그런 줄 안다니까.” 웃음을 터트리는 오세현을 보며 생각에 잠겼을 때 그는 종이를 꺼내 회사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자, 보자. 순양생명, 순양화재, 순양증권, 순양카드가 주력이지? 어떡할 거냐? 경영진은 진 회장 사람 그대로 놔둘 거냐? 야! 뭐야? 왜 멍때리고 있어?” “아, 아닙니다. 뭐라고 하셨죠?” 걱정은 조금 뒤로 미루자. 돌연 은퇴하실 분은 아니니까. “경영진 말이야. 어떻게 구성할 거냐고? 기존 경영진 전부 정리해야 할 거 아냐?” “너무 성급하신 거 아닙니까? 아직 멀었습니다.” “인사는 한 번에 정리해야 해.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 정리하는 거 봤지? 장성 수십 명을 일주일 만에 다 날렸어. 그게 사람 물갈이 방법의 정석이야. 살생부 미리 만들어 뒀다가 넘어오는 순간 확 쳐야 해. 어수선할 때 정리해야 뒷말도 적다.” “그렇다고 회사 받자마자 칼바람 부는 게 좀…. 사기가 팍 떨어질 텐데….” “그럼? 찔끔찔끔 계속 자를 거야? 그게 회사 사기에는 더 악영향을 미쳐. 칼바람이 계속되는 거보다는 딱 한 번으로 끝내는 게 좋아.” 또 사람이 문제다. 자르기는 쉽지만 채우는 게 어렵다. 그 빈자리는 어떻게 채우나? 내 걱정을 눈치챈 오세현이 방법을 알려준다. “사람 걱정은 하지 마. 인재는 많아. 웃대가리들 싹 정리하고 밑에서 올려. 낙하산 말고 말이야. 승진시키는 거지. 회사 사기는 하늘을 찌를 거다.” “그럼 할아버지께 여쭤봐야겠군요. 옥석을 골라내려면.” 오세현이 머리를 흔든다. “물론 진 회장님 의견도 중요하지만, 꼭 따를 필요는 없어. 진 회장님이야 능력과 관계없이 오랫동안 고생한 사람들을 좋게 볼 테니까.” 단순히 곁에 오랫동안 있었다는 이유로 임원 승진한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공신을 다 쳐내고 새 인물을 앉히면 그들은 내게 충성할 것이 틀림없다. 이래서 세대교체는 꼭 필요한 것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참, 삼촌. 카드사 좀 유심히 봐 주세요.” “카드사?” “네. 거기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카드를 왜? 올해부터 법 개정돼서 실적이 천장을 뚫는데? 가장 잘나가는 회사는 천천히 정리해야 해. 위기감만 불러일으켜.” “아뇨. 폭풍우가 불기 전에 노아의 방주처럼 대비해야 합니다. 지금 상황은 너무 위태위태해요. 일정한 소득도 없는 사람에게 카드를 남발하지 않습니까?” 오세현은 잠시 동안 말을 잊고 날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기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날카로운 감이라고 생각하는 내 느낌을 믿는 걸까? 물론 느낌은 아니지만. “금융 사고는 항상 그렇게 터지지. 부실 대출. 카드 역시 대출의 일종이니까 네 말이 그럴듯하다.” “부실 대출로 이어지는 금융대란, 이건 계속 반복하지만, 사람들은 잘 깨닫지 못하죠.” 경기부양을 위해 소비를 끌어올려야 했다. 그런데 그 소비를 국민의 카드빚으로 쌓아 올렸으니 무너지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 언론에서 떠들어 대는 경기 회복 조짐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핏빛으로 물드는 것도 머지않았다. 모두 무너지고 순양카드만 살아남으면 전리품을 챙길 수 있다. 국내 최고의 카드사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좋아. 그건 내가 따로 조사해보마. 이런 건 언론 기사가 아니라 필드에서 샅샅이 뒤져야 해. 카드 발급 현황을 정밀 진단하면 결론을 유추할 수 있을 거다.” “역시 믿을 분은 삼촌뿐입니다.” “시끄럽다. 네가 순양의 금융 계열사 주인이 되는 순간 믿을 만하고 쓸 만한 사람이 부지기수로 나타날 거다. 불안해하지 마. 말했지? 세상에는 인재가 많아.” 불안하다. 이분도 슬슬 준비하고 있구나. 물리적인 내 나이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이제부터 내 곁에는 내가 믿고 따르며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믿고 따르며 의지하는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과연 내가 그 사람들을 이끌 수 있을까?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질 때, 그 사람들의 선두에 서서 승리를 이끌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리려 환히 웃었다. “불안하긴요. 근거 없는 자신감, 그게 제가 자랑하는 장점 아닙니까? 하하.” * * * 이학재 실장은 사무실로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매서운 눈빛을 쏘아 댔다. “말씀드렸죠? 아직 진행 중인 상황이라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다고 말입니다. 아실 만한 분들이 왜 이러십니까?” “이게 자세히 말하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나?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만 말하면 되는데. 정말 우리 금융 계열사를 그 애가 물려받는 거야? 지금 대학생이라면서?” “후계 구도는 이미 끝났고 남은 건 금융 부분인데 더는 숨기기도 힘들지 않습니까? 저도 처음엔 막내아들인 윤기가 받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난데없이 손자라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원….” 평상시 같으면 그룹의 실세인 이학재에게 이처럼 반발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하지만 이학재의 엄중한 모습에도 누구 하나 물러설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회장님 지시사항입니다. 그걸 뒤집자는 말입니까?” “사실이구먼. 허어, 참.” “이 실장. 자네라면 이걸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나? 핏덩어리에 불과한 그 애가 그룹의 돈줄을 꽉 쥐고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데?” 금융 계열사 사장들과 임원 대여섯 명은 허탈한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이학재 실장도 이들의 마음을 짐작하기에 힘으로 눌러 반발을 잠재우지 못했다. 지금 필요한 건 회사가 요동치지 않도록 달래는 것이다. “회장님 못 믿으십니까? 항상 현명한 판단을 하셨고 한 치의 틀림도 없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장 전무, 자네가 이러면 안 되지.” 이학재는 몰려온 사람 중 40대 후반의, 가장 어려 보이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자네 동기들 전부 부장 아냐? 심할 경우 과장도 있어. 그런 자네가 최연소 이사 타이틀 차지하고 상무 건너뛰고 전무까지 올랐어. 그게 회장님 판단이었잖아. 지금 그 판단에 딴지 거는 사람 있어?” 장도형 전무는 이 실장의 눈길을 피했다. 자신은 순양그룹 초고속 승진의 상징이다. 차기 순양생명 대표이사 자리를 넘보며 최연소 사장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쥘 야심을 숨긴 적도 없다. 이 자리에서 나이나 서열을 따지는 건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이 실장, 장 전무와는 경우가 다르지. 이 친구야 실력을 증명하며 여기 올라온 사람 아닌가? 단지 핏줄이라는 이유로 뭐 하는지도 모르는 어린애와 비교하지 말게.” “회장님이 은거해 계시니 우리가 직접 쳐들어가 따지는 건 참았어. 하지만 이건 그냥 받아들일 수 없네. 회장님 만나야겠어.” 이학재는 끊임없는 불만을 들으며 서서히 표정이 변했다. 아예 옅은 미소까지 보였다. ======================================== [164] 슬림하고 타이트하게 4 “좋습니다. 저도 머리 아파 죽을 지경이니 회장님께 말씀드리죠. 직접 만나서 따지세요.” 이학재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금융 계열사 사장들은 움찔했지만, 발을 빼지는 않았다. 그만큼 이번 일은 참고 넘어가기 힘든 것이다. “일정 잡아서 알려주게. 이 실장에게는 피해 없도록 잘 말씀드리겠네.” 그들이 사무실을 떠나자 이학재는 수화기를 들었다. “…회장님. 심각한 수준이니 한번 만나서 타이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네….” 통화를 끝낸 이학재는 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자신은 배석하지 못할 게 분명한데…. “우리 돈 많은 꼬맹이가 저 능구렁이들을 어떻게 다룰지… 흥미롭구먼.” 결과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차피 진 회장이라는 거목이 뒤를 받쳐준다. 계열사 사장들도 진 회장을 넘어설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대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의 존재감을 내세우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존재감은 무시할 수준도 아니다. 누가 뭐라 해도 이들은 공신 아닌가? * * * “아이고, 이 사람들아…. 나 죽었나, 살아 있나 확인하러 온 게지?”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적적하실까 봐 말동무나 하러 온 겁니다.” “회장님의 정정한 모습을 뵈니 마음이 놓입니다.” 생명, 화재, 증권, 카드 등 네 곳의 계열사 사장이 차례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자 진 회장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의 등을 두드렸다. “자자, 앉지. 늙은이들이 한참 투덜거릴 것 같으니 앉아서 말하게. 힘들 텐데. 허허.” 단순한 문안 인사차 들른 게 아니니 본론부터 꺼내라는 말이다. “그래, 인사 문제로 불만이 많다고 들었는데 다 털어놔 봐. 내가 요즘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 어떤 헛소리도 다 들어줄 용의가 있거든.” 진 회장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네 명의 계열사 대표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헛소리라니!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헛소리는 진 회장이 하고 있다. 일개 대학생에게 주당 가치가 70만 원에 육박하는 회사를 맡기는 게 헛짓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 엄청난 고가의 주식을 무려 500만 주나 쥐고 있다. 계열사 사장부터 임원, 몇몇 직원들까지 골고루. 이들이 가진 지분은 25%. 만약 이 주식을 손자가 넘겨받지 못하면 금융사 지배는 불가능하다. 이 차명주식을 지금 회장의 대학생 손자에게 넘겨야 한다. 임원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하면 승계 절차는 삐걱거릴 것이고 최악의 경우 이 은밀한 승계 작업이 밖으로 새어 나갈 수도 있다. 실명 거래 위반은 애교 수준이다. 수천억의 상속세를 물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다. 진 회장도 이 사실을 잘 안다. 그러니 자신들의 의견을 어느 정도까지는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회장님. 도준이는 아직 학생입니다. 졸업하고 입사한 뒤 실무 경험 몇 년 쌓고 경영진에 합류해도 절대 늦지 않습니다.” 순양생명 양우찬 사장이 스타트를 끊었다. 이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진 회장을 보필한 사람이며 나이와 회사 규모로 봐서 충분히 대표 자격을 갖췄다. “그렇습니다.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승계 작업을 조금 미루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 사람들아. 내가 그 몇 년을 더 산다고 어떻게 장담하나? 난 내일 죽어도 호상이라고 문상객들이 웃으며 밥 먹을 거야.” “그럴 리가요. 아직 이렇게 정정하신데….” “그러니까 내 손자 도준이가 몇 년 동안 훈련하고 그 뒤에 경영에 참여해도 괜찮은 거 아니냐? 이런 말이지?” “그렇습니다. 주요 보직으로 최대한 빨리 돌리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뺑뺑이 돌려. 하지만 그거랑 승계 작업 진행은 상관없는 일 아닌가?” 진 회장이 별것 아니라는 듯 순순히 수긍했지만, 사장들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기업 지배권을 확보하고 진 회장의 입김이 통하지 않으면 진도준이 월급쟁이에 불과한 경영진 밑에서 버틸 리가 없다. 대주주 기업 오너로서 권리를 행사할 게 뻔하고, 그 권리 행사의 첫 번째는 바로 자신들 같은 구세대를 정리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들이 진 회장의 의도를 정확히 알지만 반발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들 자리보전이 가장 큰 이유다. “회장님. 대주주를 아래에 두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 사례도 없고요.” 바로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양우찬 사장은 진도준이 금융 계열사를 물려받으면 곧바로 사직서를 내겠다는 뜻을 이렇게 돌려서 말했다. “그렇구만. 이거… 내가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서 월급쟁이들의 마음을 잘 모르네. 허허.” 진 회장의 웃음이 거실을 채웠지만, 분위기는 더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저 웃음 뒤에 어떤 말이 나올까? 계열사 사장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회장의 입만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때, 웃음을 그친 진 회장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행동을 보였다. 전화 수화기를 든 것이다. “도준이야? 그래, 할애비다. 너 지금 냉큼 이리로 달려오너라. 내가 우리 손자한테 회사 몇 개 물려주는 걸 못 참는 사람들이 좀 있어. 그래, 그래. 아예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 할애비를 핍박하는구나. 어서 와서 이 할애비 좀 살려다오.” 수화기를 놓자마자 사장들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회장님. 핍박이라니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우린 회사를 위해 의견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괜찮네. 내가 설마 이십 년 넘게 생사고락을 함께한 자네들을 욕보이겠나? 그런 거 아니야.” 진 회장은 평상시와 다른 모습이었다. “자네들이 한번 만나보게. 그래! 이건 면접 같은 거라고 볼 수 있네. 나도 어린놈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게 잘하는 건지 아닌지 불안할 때가 있었어. 자네들 눈으로 확인하고 미흡하다 싶으면 잘 타일러봐. 어린놈 하나 구슬리는 게 뭐가 어렵겠나? 그리고 우리 도준이가 어른들 말을 무시하는 그런 멍청이는 아니라네. 허허.” 사장들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절대 이런 식으로 타협할 분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 * * “뭐야? 왜 그래?” “할아버지 전환데요. 지금 금융 부분 계열사 사장들이 몰려와서 절 보이콧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답니다.” 오세현은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으하하. 하여튼, 계산 빠른 영감들이라니까. 세대교체 당할까 봐 벌벌 떠는구만.” “저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딜?” “그 영감님들 한번 만나보라고 하시네요.” “엉? 그림이 이상하잖아. 경영진이 대주주님 심사하겠다는 거야, 뭐야?” “아닙니다. 대주주가 경영진을 갈아 치워버릴지 말지 판단하는 자리가 될 겁니다.” 난 눈을 부릅뜬 오세현에게 여유를 보이며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할아버지의 서재에 들어서니 네 명의 눈길이 꽂히는 걸 느꼈다. 명절 때나 할아버지 생신 때 스쳐 가듯 몇 번 본 사람들이라 누가 누군지는 정확히 안다. 또한, 넷 모두를 상대할 필요도 없다. 대가리를 꺾으면 몸통이든, 다리든 쓰러지게 마련이다. 순양생명 양우찬 사장. 저 늙은이를 꺾고 부족하면 고인규 순양증권 사장 정도만 조지면 더는 시끄러운 불평불만이 쏟아지지 않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일단은 예의 바르게 머리를 꾸벅 숙였다. “그, 그래.” 자리 배치가 참 묘하다. 상석에는 할아버지가,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네 명의 대표이사와 내가 마주 앉았다. 사장단의 신입 사원 면접 같기도 하고, 한 명의 면접관이 넷을 동시에 보는 모습이기도 하다. “자자, 거두절미하고 편안하게 말하라고. 난 입 닫고 듣기만 할 걸세.” 할아버지는 재미있는 드라마라도 보는 듯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가 눈을 말똥말똥 뜬 채 네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자 그들의 불편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누가 먼저 입을 뗄지 서로 눈치를 보다 가장 노련한 양우찬 사장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도준아. 넌 금융 쪽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에서 일도 좀 배웠다고?” “네.” 짧게 대답했다. 불필요한 질문에 구구절절 길게 대답할 필요는 없다. 곧 처지가 바뀔 테니까 말이다. “그래,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어디야? 주식? 펀드? 아니면 파생상품?” “아뇨. 그건 실무자들이 할 일이죠. 전 경영에 관심 있습니다. 장기투자도 흥미롭고. 기업 분석해서 매입하고 다시 쪼개 파는 M&A도 재미있더군요.” 이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린놈의 잘난 척으로? 아니면 그릇이 다르다고? “그렇구나. 그렇다면 네가 굴리는 자금 규모가 상당하겠는데?” 돈 자랑하러 나온 게 아니니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적당히 둘러대면 된다. “제가 직접 굴리는 게 아니라 회사가 굴리는 거 아닙니까? 전 자금 운용 시스템을 눈여겨볼 뿐입니다.” 나이 많은 분들이니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게 껄끄럽긴 할 것이다. 아직 경험이 일천하다는 걸 내게 심어줘야 하지만 실무를 건너뛰어 버리니 뭐로 꼬투리를 잡아야 하나 고민도 될 것이다. “에이, 재미없구먼. 양 사장, 고 사장.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라고. 도준이가 금융 계열사를 손에 쥐고 흔들지… 아니면 경영은 자네들에게 맡기고 회장입네, 부회장입네 하며 술이나 퍼마시고, 여자나 꼬시러 다닐지를 물어봐야지. 아닌가?” 자꾸 이야기가 겉돌자 잠자코 있던 할아버지가 나섰다. “회, 회장님.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도준이야 성실하기로 소문났는데….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잘들 아는구먼. 그러니까 도준이는 회사를 쥐고 흔들 게 뻔하고, 대신 어떤 방향인지 궁금하다 이거 아닌가? 맞지?” 할아버지의 짓궂은 질문에 모두 겸연쩍은 듯 헛기침만 쏟아낸다. “도준아. 이분들이 궁금해하는 거, 속 시원히 말씀드려라. 너 같은 어린 꼬맹이가 거대 금융사를 맡아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걱정이 태산이야. 그 걱정을 덜어드려라.” 할아버지가 사장들을 쳐다보고 웃으며 말하자 그들의 헛기침은 더욱 잦아졌다. “전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이상적인 기업 형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금융사 경영에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사장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매일 회사에서 어린놈에게 머리 숙여 가며 보고서를 올릴 일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주주로서의 권리. 즉, 대표이사 임명과 임원 선임 정도에만 제 의견을 말할 뿐입니다. 실적만 좋다면 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겁니다.” 이제 사장들은 두 팔 벌려 나를 반길 기색이다. 경영에 참여하겠다는 어쭙잖은 놈보다 참견 없이 실적만 챙긴다는 어린놈이 훨씬 편하지 않은가?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걱정이 사라지셨습니까?” 그들의 끄덕이는 머리와 입가에 번진 미소가 내 질문의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양 사장님. 장도형 전무는 너무 파격적인 승진을 하셨던데, 적절하다고 보십니까?” “물론이야. 그 친구는 순양생명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가 분명해. 그간 보여준 능력과 실적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라네. 그렇기 때문에 회장님께서 엄청난 파격 인사를 단행했고.” “그렇군요. 오늘 함께 오시지 않았어요?” “오늘은 우리 사장단만 왔네. 왜 그러나?” 이들은 내가 갑자기 장 전무에게 관심을 보이자 의구심을 드러냈다. “아, 제가 그룹 계열사를 맡으면 장도형 전무님을 금융 계열사 총괄 부회장으로 임명할 생각이라서요. 그분께 전권을 일임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총괄 부회장이 되고, 전권을 휘두른다는 말보다 더한 충격이었나 보다. 나이 많은 능구렁이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런! 외통수구먼. 으허허.” 조용한 서재에 할아버지의 웃음만 터져 나왔다. ======================================== [165] 슬림하고 타이트하게 5 외통수. 이처럼 적합한 단어가 없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걸 대환영한 사장단 아닌가? 대신 오너를 대신해 경영을 책임질 사람을 고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대리인이 외부인도 아니고 자신들도 인정하는 대단한 인재. 장도형 전무. 이것마저 반대한다면 지금껏 회사를 걱정한다고 떠들어 댄 그들의 말은 전부 입에 발린 소리에 불과하다. 회사를 걱정한 게 아니라 자신들의 자리를 걱정했을 뿐이다. 장도형 전무를 반대한다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양우찬 사장의 입장이 난처할 뿐만 아니라 파격 승진을 허락한 진 회장을 바보로 만드는 일이다. 만약 찬성한다면? 바로 오늘까지 아랫사람으로 부리던 부하직원을 상사로 모셔야 한다. 아무 말 말고 사표 던지는 게 모양새가 좋다. 차라리 내가 총괄이라면 그만두지 않을 명분이라도 있다. 오너 일가이며 대주주니까 말이다. “왜들 그런 표정이십니까? 장도형 전무는 자격이 없습니까? 믿을 만한 분이 아닌가요?” 누가, 어떤 대답을 할까? 네 사람과 한 번씩 눈길을 주고받았지만 쉽게 말하는 이 없었다. 이들은 할아버지의 눈치를 본다. 지시를 기다리는 것인지, 도움을 청하는 것인지 모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이들의 눈을 외면했고 오히려 대답을 재촉해버렸다. “뭐지? 대주주의 질문을 무시한 건가? 경영의 문제가 아니라 인사 문제니 주주로서 응당 물을 수 있는 수준 아닌가?” “그… 그렇습니다만, 너무 파격적이라….” 고인규 증권 사장이 겨우 대답했지만, 이건 또 걸려든 것이나 다름없다. “40대 후반에 전무라는 것도 파격 아닙니까? 파격적 인사라는 건 처음만 그렇습니다. 파! 격! 일정한 격식을 깨뜨림. 이미 깨져 버렸으니 연공서열을 무시한 인사 발령 자체가 격식이며 형식이 돼버린 겁니다.” 고인규 사장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번 더 밀어붙였다. “선진 금융사, 글로벌스탠다드라고 말할 수 있는 서구 기업 중 나이나 입사순으로 승진하는 곳 있습니까?” 금융은 철저히 서구의 비즈니스 영역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피부 하얀 놈들이 만든 사업 아닌가? 그들이 이 영역을 이끌어가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 “IMF 구제 조건이 바로 금융시장 개방입니다. 외국자본은 물밀 듯이 몰려드는데 그 자본과 경쟁하거나, 이용하거나 흡수하려면 그들의 방식으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 장도형 전무라는 사람을 그 상징으로 생각했고 우리 순양은 이미 글로벌 경쟁에 뛰어들 준비를 끝마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들의 표정을 보니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군요.”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했지만 매서운 질타로 여겨졌으니 누구 하나 내 눈길을 받아내는 이가 없다. “이거, 내가 봐도 자네들이 첫 번째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겠어. 도준이의 질문에 한 치의 의문도 남지 않을 만한 완벽한 보고서를 만들어야 할 것 같지 않아? 외국자본의 대응. 그렇지?” “즈…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양우찬 사장이 가까스로 대답했을 때 난 머리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제가 준비한 게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함께 논의하는 게 나을 겁니다. 아, 제가 거북하시면 전 빠져도 됩니다. 금융사 경영진 모두 모여 충분히 논의하시고 최종 결과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자네가 준비했다고?” 내가 준비한 건 맞지만, 사실대로 말해줄 필요는 없다. 좀 더 무게를 싣고 압박을 가하려면 권위를 빌려야 한다. “아뇨. 미라클 인베스트먼트 미국 본사에서 준비한 겁니다. 순양의 금융사 분석하는 데만 몇 개월 걸렸습니다. 도움 되실 겁니다.” 사장들은 난감한 표정이지만 할아버지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게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구나. 미국에서 우릴 분석해?” “할아버지는 이해하시기가 좀 어려울 수도 있어요.” “뭐라? 이눔이!” 큰 줄기의 회사 정책만 짚어내는 할아버지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디테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좋다. 그럼 이 친구들에게 말해봐. 나는 몰라도 이 친구들은 알겠지. 안 그러냐?” 지금껏 실실 웃으며 구경만 하던 할아버지는 웃음을 거두며 사장단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양 사장님.” “응?”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니 조금 우습기도 했다. “순양생명의 자금을 여기저기 투자하실 텐데 국내 은행의 금융상품도 꽤 있죠?” “그, 그렇지.” 난처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로 변했다. 명색이 생보사의 대표이사니 회사에서 투자한 상품 하나하나를 다 파악하고 있을 리 없다. 혹시나 내가 투자 상품에 대해 질문하면 회장님 앞에서 개망신당하는 건 기정사실 아닌가? “그 상품에서 보통 설명하는 건 실적, 예상 수익률. 안전도 등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금융상품에 투자했을 때 내 돈이 어디로 흘러들어 가는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투자한 상품이 무엇으로 이뤄졌는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채권, 주식, 현물 투자… 딱 정한 곳에….” 할아버지는 모른 척 기다리지 못했다. “아닙니다. 요즘은 좀 더 복잡합니다. 채권도 굉장히 다양한 종류를 묶어서 상품으로 만들죠. 예를 들면 플로리다 주의 주택 담보 대출의 채권과 영국 기업의 회사채, 멕시코 국채를 섞습니다.” “복잡해 보이지만 어차피 채권 아니냐.” “그렇다면 머리 아플 일도 없죠. 아닙니다. 여기도 다른 것이 섞여 들어갑니다. 바로 이 채권 묶음의 회수율에 베팅한 파생상품까지 들어가죠.” “도준아.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내가 그런 상품의 디테일을 모르기 때문에 사장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게냐?” 역시, 양 사장은 눈치도 빠르고 순발력도 좋다. 더 세세한 이야기가 나올까 봐 내 말을 자르고 버럭 소리까지 질렀다. 이쯤 되면 체면도 세워주고 장단도 맞춰주는 게 좋다. 앞으로도 계속 얼굴 봐야 하는 사람인데 사소한 일로 틀어지면 나만 곤란해진다. 아직 내 앞의 사장님들은 확보한 세력이 꽤 크다. “아뇨. 그걸 어찌 다 알겠습니까? 그걸 정확히 꿰고 있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애널리스트죠. 투자 책임자인 애널리스트가 상품의 디테일을 모른다면 해고 대상이지 임원은 몰라도 됩니다.” “그럼 자네가 생각하는 임원의 책무는 뭐지? 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책무가 한두 가지겠습니까마는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발밑에 차오르는 물이 어디쯤에서 멈출지 정확히 판단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눈치 빠른 건 양 사장뿐만이 아니다. 모두 내 말을 알아들을 눈치는 있다. “코밑까지만 물이 찬다면 다행이겠지만 머리까지 물에 잠긴다면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민섭 순양카드 사장님?” 갑자기 표적이 된 이민섭 사장은 영문을 모른 채 화들짝 놀랐다. 지금 불붙은 카드 사업이다. 판만 깔아놓으면 캐시가 쏟아져 들어오는, 그야말로 노다지 사업 아닌가? 실적도 천장을 뚫고 하늘에 맞닿으려는 듯 치고 오르는 중이다. 물이 찬다는 건 리스크를 말하는 건데 이곳에서 자신이 그 대상이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그게 날 향한 경고인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이거 참. 허허.” 기분이 많이 상한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카드 사업은 기본적으로 대출업입니다. 대출의 핵심은 회수 여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소득 없는 주부가 3백,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는 대학생이 2백을 신용이라는 이름으로 매달 현금서비스를 받습니다. 소득이 확실한 직장인들이 지금 카드 돌려막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당장 순양카드 직원에게 물어보세요. 카드 돌려막기 하지 않는 사원이 몇이나 될 것 같아요?” 이민섭 사장은 입술만 깨물었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습관적으로 카드를 긁고 습관적으로 월급을 때려 박는다. 연체료를 물고, 카드 돌려막기를 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다 보니 당연한 패턴이 된 것이다. 빚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카드 쓰는 사람은 물론이고 카드 회사마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물이 차오르는 흔적이다?” 할아버지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판단을 하는 게 임원이며 경영진 아니겠습니까? 빚내서 카드 긁는 게 물이 차오르는 것인지, 한국 경제를 살리는 생명수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할아버지의 표정이 바로 서재의 모습이다. 딱딱하고 차디찬 서재에서는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 침묵은 할아버지가 깼다. 다시 서재는 훈풍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떤가? 자네들 생각은?” “네?” “아직 도준이가 몇 년 동안 회사 여기저기 뺑뺑이 돌며 실무를 익혀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말일세.” 이건 또 무슨 소리? 아하, 소위 말하는 경영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구나. “잠깐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양해를 구하니 할아버지가 머리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의 질문에 대답을 주저하는 사람들은 내가 노려보자 움찔했다. 앞으로 자신의 생사여탈을 마음대로 할 윗사람을 교육시킨다고 했으니 첫걸음부터 삐걱거린 것이다. “주주가 해당 기업의 교육까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만.” “아, 그… 그건….” “경영에 깊숙이 관여할 경우를 생각해서 제안한 것이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할 생각이란 걸 알았다면 그런 말은 꺼내지도 않았을 거야.” “그, 그렇지. 우린 도준이 자네가 당연히 경영 일선에 설 거라고 예상했거든. 그래서 한 말이니 오해는 말게.” 당황한 사장들이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더듬거렸다. “아뇨. 오해 아닙니다. 전 벤치에 앉아 지켜보다 필요하다면 선수로 뛸 생각도 있습니다. 그럼 그때 회사 부서를 돌며 실무를 익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돌한 질문에 조금씩은 당황한 모습을 보였지만 노련함은 살아 있었다. 양우찬 사장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때 봐서 스스로 결정하는 게 낫겠지? 오늘 보니까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필요하다면 먼저 뺑뺑이 돌겠다고 나서겠는걸? 허허.” 가장 적절한 대답이다. 나를 재단하거나 판단하는 걸 내게 맡긴다. 띄워주는 말이기도 하고 책임을 피하는 대답이기도 하다. “자, 이 정도면 내 손자에 대해 충분한 판단을 할 만큼 알았다고 보는데, 더 할 말 있나?” 모두 입을 닫고 가볍게 머리만 저었다. 자신들은 세대교체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 무리수를 뒀지만 이젠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워졌으니 밝게 대답하지도 못한다. 이런 모습을 눈살 찌푸리며 보던 할아버지는 손을 슬쩍 내저었다. “그만 가서 일들 봐. 회사 비우는 시간이 길면 불안한 건 자네들일 테니. 어여 가.” 네 명의 사장은 서재를 빠져나가며 모두 내 눈과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옅은 미소를 보이는 거로 봐서 나와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 “도준아. 진정이냐? 일개 전무를 최고 자리에 앉힌다는 거 말이다.” 단둘만 남게 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처음 던진 질문은 바로 인사 문제였다. “면접은 보고 결정해야겠죠. 하지만 장도형 전무의 평판이 좋더라고요. 양 사장의 말처럼 순양의 미래를 짊어질 만한 자질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게 여의도에서 도는 소문이냐?” “네.” “흠…….” “왜 그러십니까?” 할아버지는 긴 한숨 끝에 말했다. 부탁인지, 당부인지 모호한 태도였다. ======================================== [166] 쌍방 면접 1 “네게 맞는 새 사람을 쓴다는 건 꼭 필요하지만, 오래된 사람 괄시는 안 된다. 물러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아름답게 해줘야지. 모욕감을 느끼게 하면 큰일이야.”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들의 끝을 염려하는 마음이었다. 첫 대면이라 내가 좀 과하게 나간 면이 없지 않았기에 할아버지의 마음을 편히 해드리고 싶었다. “저분들의 자리는 당분간 그대로 놔두겠습니다. 충분한 역량을 보인다면 굳이 교체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다.” “네?” “시점의 문제일 뿐, 저 친구들은 다 정리해야지. 시대가 바뀌었다는 걸 전 직원이 알도록 해야 한다. 내 시대가 아니라 네 시대가 왔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건 대가리를 치는 거야.” 역시. 사람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저 친구들을 정리할 때 생길 수 있는 부정적인 효과를 최소화해야 한다. 그래도 순양의 충신들이었어. 저들이 냉혹하게 잘려 나가는 모습을 자신의 미래로 생각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배신감을 느끼는 놈은 꼭 배신한다. 이유를 아느냐?” “자신의 배신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요?” “바로 그거다.” 할아버지는 나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마지막까지 흠잡을 데 없다면 섭섭하지 않을 만큼 대우해주고, 문제 삼아도 모두 수긍할 만한 흠이 나온다면 냉혹하게 정리해. 저들의 남은 순양 생활은 회사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좋든 나쁘든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도대체 우리 할아버지는 단 한 줌의 측은지심도 옛정도 없는 걸까? 순양생명 양우찬 사장은 삼십 년 넘게 고락을 같이한 분인데도 그를 배려하는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나도 이렇게 되는 걸까? “참, 장도형 전무는 제가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어떻게 할 건지는 그 뒤에 결정하도록 하죠.” “정 전무는 내가 잘 모르는 놈이긴 한데, 평판이 좋긴 하더라. 참! 만만한 놈은 아닐 거야.” “그 나이에 순양에서 전무까지 올랐으니 오죽하겠습니까?” “너랑 죽이 잘 맞는다면 괜찮은 조합이 나오겠어. 허허.” 잘 맞아야 한다. 장도형 전무는 부사장까지 올라가지만, 결국 미끄러지는 사람이다. 진영기가 회장 자리를 차지하고 물갈이를 시작했을 때 장도형의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기업 운영 방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영기에게 순양의 금융 계열사는 단지 지배 지분을 보관하는 곳이며 필요할 때마다 돈을 빼 쓰는 저금통일 뿐이었다. 그런 회사를 전 세계 금융 네트워크의 거점으로 삼아 글로벌하게 키우고 싶어 하는 장도형이 진영기와 어울리는 건 불가능했다. 진영기는 자기 생각에 순응하는 자를 대표이사로 승진시켰고 장도형은 토사구팽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아는 숨은 이야기지만 확인은 해야 한다. 장도형 전무가 나랑 잘 맞는 사람일까? 정말 글로벌 기업으로 키울 만한 능력은 있을까? * * * “이거, 좀 기괴한 느낌인데요? 진 실장님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데…. 아 참, 실장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네. 그게 저도 편합니다, 전무님.” 크기는 아파트만 하지만 가구라고는 편안한 소파 세트와 테이블이 전부인 텅 빈 오피스텔. 이곳에 문을 열고 들어온 장도형 전무의 첫마디는 기괴하다는 것과 나와 어울리는 곳이 아니다였다. 뭐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까?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커피? 차?” “혹시 캔맥주 있으면 가볍게 목이나 축이죠.” 냉장고에서 캔맥주 두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양 사장님이 호되게 당했다고 웃으며 말씀하시던데 사실입니까?” 장도형 전무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호되게 당했으면 아랫사람에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자존심 강한 분일 텐데.” 요것 봐라. 이 자식, 그날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아내기 위해 떠본 거 아닌가? “하하. 그럼 저 겁주시려고 농담처럼 하신 말씀이었군요. 전 또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괜히 바보 같은 모습만 보였습니다.” 슬쩍 넘어가려는 듯 캔맥주 한 모금을 삼켰다. “그런데 왜 절 보자고 하셨는지…?” “여쭤볼 게 좀 있어서요. 이미 아시겠지만, 순양그룹 금융 부분은 제가 물려받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제 큰아버지들과 다릅니다. 회사 내에서 큼지막한 직책을 맡아 경영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의외군요.” 장도형 전무는 손에 든 캔맥주를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세웠다. “빌딩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밖에서는 절대 파악하지 못합니다. 결산 자료가 전부가 아니에요. 빌딩 로비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공기의 기운, 오가는 사원들의 표정, 사무실의 웅성거리는 소리. 이런 것들이 바로 회사의 참모습입니다.” “그런가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가 어떤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회장, 부회장 같은 큼지막한 직책은 회사 시스템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직책을 이마에 달고 빌딩 로비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모두 허리를 90도로 숙이죠.” “전 그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좀 올드하지 않아요? 조폭도 아니고….” “모르셔서 그런 겁니다.” “뭘 말입니까?” “월급쟁이들의 속물근성 말입니다.” “속물?” 이 사람 좀 독특하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만만하지 않다는 것이 이런 면을 말한 것인가? “그룹 오너 일가 사람들에게 깍듯이… 말씀하신 것처럼 조폭 두목 대하듯 머리 숙이는 월급쟁이 99%는 회장과 말 한마디 못 하고 회사를 떠납니다.” “그렇겠죠.” “그 사람들이 그걸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회장이 직접 다가와 악수라도 한 번 해주면 모든 게 달라지죠. 자신은 그 99%가 아니라 특별하다. 이런 환상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직책을 원하지 않는다는 건 매년 실적만 체크하고, 실적이 형편없을 때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을 갈아치우겠다는 뜻 아닙니까?” “정확합니다.” “그건 서구식이죠. 시스템을 서구식으로 한다고 해서 선진 경영이 되는 건 아닙니다. 사람도 서구식 시스템에 적합해야 하는데 아직 우리나라는 주인과 하인, 주군과 충신…. 이런 사고가 뼛속 깊숙이 박혀 있어요.” “지금 21세기라는 거 모르십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조금 놀란 건 사실이다. 장도형 전무, 정말 독특하다. 나도 잘 안다. 스스로 선을 정해서 그 위는 쳐다보지도, 꿈도 꾸지 않는 보통 사람의 뼛속에 박혀 있는 노예근성. 가장 큰 포부를 지닌 사람마저 대표이사가 끝이다. 회장까지 노린다는 꿈은 미친놈 취급받는다. 하지만 창업자도 아니고 아무것도 한 것 없고, 능력마저 없는 2세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당연하게 생각한다. 회사를 대기업으로 키운 자신은 창업자 가문의 충복이라고 생각하는 게 한계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인정하고 분석까지 하는 사람은 처음이다. 자존심이 없나? “다시 묻습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하는 일 없더라도 가장 위에 앉아라도 있으시라는 뜻입니다.” “그럴 필요 있을까요? 계열사마다 훌륭한 사장님이 계신데?” “그 훌륭한 사장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분들도 옳든, 그르든 지시를 받아 움직였던 사람들입니다. 평생. 머슴이죠. 시키는 대로 일해야 마음이 편합니다. 시키는 대로 일한다는 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책임이라는 거… 생각보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거죠. 어떨 땐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장도형 전무의 눈이 반짝였다. “잘 아시는 분이 단지 주주 자격만 쥐고 뒤로 물러서시겠다? 나이 때문입니까?” “외적으로는 나이, 내적으로는 몸을 좀 사려야 하는 처지라서요.” 이 말의 뜻을 저 사람은 알아들었을까? “아…….” 표정은 이해한 것 같기도 한데. 장도형 전무는 맥주를 시원하게 한 모금 한 뒤, 목소리를 낮췄다. “많이 치열한가 보죠?” “아무래도 좀 그렇죠. 아파트 한 채 물려받는 집안이 아니니까요.” 장도형 전무는 머리를 끄덕이며 낮게 읊조렸다. “진 실장님은 아무래도 집안에서 죠스 같은 존재로 보이는군요.” “죠스? 영화 말인가요? 상어?” “네.” “어째서 그렇죠? 설마 제가 모든 걸 먹어치우는 무시무시한 존재라고 생각하시 건 아니겠죠?” “그건 아니고…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 바다 밑에 뭔가 있다는 건 알지만 정확한 정체를 모릅니다. 크기도 모르고 공격성도 모르죠. 하지만 존재한다는 건 정확히 압니다. 언젠가는 공격할 거라는 것도 알죠. 그게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날 견제한다?” “사실 죠스도 무서울 겁니다. 물 위의 존재가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요. 실장님은 그보다 좀 더 심하겠죠. 순양 핵심 계열사를 차지하는 순간 집안 어른들이 공격할 테니까요. 이거…. 저 같은 사람은 그런 종류의 압박을 짐작할 수 없으니 뭐라 말하기 그렇군요.” 이 사람, 뭔가 알고 있나? 아니면 누구나 짐작하는 그 수준 정도만 아는 걸까? 죠스. 적절한 비유다. 하지만 내 이빨의 크기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뭘 말입니까?” “제가 장도형 전무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힘든 일이 많아지실 겁니다. 누군가는 위협하고 누군가는 회유하려 들 테고. 아무튼, 별의별 일이 다 생길 겁니다.” “그 별의별 일을 상황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만.”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고 입꼬리도 올라갔다. 안색도 조금 붉어졌다. 이 사람은 흥분한 걸 애써 감추려 하지 않는다. 싸움을 즐기는 전투적인 타입인가? “깊게 생각하는 편이 아니시네요. 제가 신뢰라는 말만 했지 아직 구체적인 제안은 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덥석 받아들이시다니.” “받아들인 적 없습니다. 전 어떤 권한을 제안하실지 들어보고 결정할 생각이었어요.” 싱긋 웃는 표정을 보니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노예근성이 없다. 지금까지 말한 서구식 시스템에 적합한 인물이다. 하지만 순양에서는 그런 시스템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답답해하거나 바꾸려고 노력한 것도 아니다. 그랬다면 초고속 승진은 불가능했을 거다. 이자는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방법을 찾고 있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할까요?” “네?” “서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면접 아니겠어요? 결정은 천천히 시간 두고 하죠.” “동등하지는 않습니다. 진 실장님은 선택하는 존재, 난 선택받아야만 하는 처지. 확연히 다르죠.” “하하. 선택받아야 하는 처지치고는 너무 당당하고 여유가 보이는데요? 아쉬울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 척한 거죠. 상당히 떨고 있습니다.” 솔직한 건지, 능글맞은 건지는 조금 헷갈린다. 후자 쪽일 것 같은데…. “장 전무님은 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선택할 것 같습니다. 순양생명 미래의 대표이사라고 다들 칭송하지 않습니까?” “진영기 부회장님, 진동기 부회장님보다 전 실장님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저요?” “네.” “왜 그럴까요? 아…! 제가 아직 어리니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뭐 이런 겁니까?” “천만에요. 제 손에서 놀아날 사람이었다면 진 회장님께서 핵심 계열사를 물려주실 리가 만무하죠. 아직 어린 나이지만 벌써 회장님의 낙점을 받을 만큼 뛰어난 사람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장도형 전무가 눈치 빠른 것은 인정해야겠다. 그리고 뭔가가 더 있어 보이기도 하다. 그게 뭘까? 어쩌면 오늘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다. ======================================== [167] 쌍방 면접 2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단지 그것 때문에 큰아버지보다 제가 더 낫다?” “또 있습니다. 저 역시 여의도 바닥에 지인이 꽤 많습니다. 그들 중 몇몇이 그러더군요. 진도준은 미라클의 미래다. 진도준이 미라클에서 전권을 휘두를 자리에 올라가면 한국 금융시장은 그의 손에서 놀아날지도 모른다.” “누가 그따위 헛소리를 하고 다니던가요?” “겸손하시네요. 하하.” 장도형은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제 지인이 여의도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예일 유학 시절의 친구들이 월가에 많이 있죠. 그들이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에는 미라클 보이가 있다고 하더군요. 투자의 천재. 특히 스타트 업 기업의 가치를 정확히 알아보는 혜안을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단 한 번의 실패 없는 투자자…. 이름이 ‘하워드 진’이라고 하더군요.” 장 전무는 반짝이는 눈으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미라클 보이, 바로 실장님 아니십니까?” “아닌데요.” 반짝이는 그의 눈을 보며 주저 없이 곧바로 대답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제가 미국 미라클의 투자자이긴 합니다. 어릴 때 목장 판 돈을 오세현 대표가 미국에 묻어 뒀죠. 그게 꽤 많이 불어났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그런 말이 도는 것 같은데, 투자의 귀재는 아닙니다.” “그럼 하워드 진이 실장님이라는 건 맞습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미국 본사 사람들이 절 하워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게 전부죠. 그러니까 절 너무 높이 추켜세우지는 마세요. 그리고 저를 투자의 귀재니 뭐니 착각해서 저와 함께하겠다는 생각도 접으시고요.” “아직 그 어떤 결심도 한 건 없습니다. 단지 두 부회장님보다 실장님이 우리 금융 계열을 맡게 된 걸 다행으로 여길 뿐이죠.” “그럼 절 보호하고 지켜주셔야 할 겁니다. 두 부회장님께서 호시탐탐… 아니, 노골적으로 절 밀어내고 금융 계열사를 차지하려고 혈안이 돼 있을 테니까요.” 장도형 전무는 이제야 ‘누군가는 위협하고 누군가는 회유하려 할 것’이라는 내 말의 정확한 뜻을 이해한 것 같았다. “이거 선택을 잘못하면 태풍의 눈에 들어가게 되는군요.” “이미 들어왔습니다.” “그게 바로 제 대답입니다. 이제 선택하는 자의 결론만 기다리겠습니다.” 눈치 빠른 아저씨다. 지금에 와서 나와 같은 길을 가지 않겠다고 말하면 당장 내가 칼을 빼 든다. 내 손길을 기다리지 않고 선택의 문을 열어 두었다면 이처럼 오랜 시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고 내 처지에 대해 꺼내지도 않았다. 장도형은 처음부터 자신의 선택지를 나로 정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그에게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주어야 한다. “생명, 화재. 증권, 카드. 이 계열사를 한눈에 파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계하세요. 그래서 제 손에 회사가 들어오는 날 번개처럼 그 설계대로 해치울 겁니다. 가능합니까?” “제가 알기로는 승계 작업이 이 개월쯤 남았다고 들었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훌륭하게 처리하시리라 믿습니다.” “실장님.” “네.” “전 사람에게 충성 같은 거 못 합니다. 제가 양우찬 사장님께 알랑방귀를 뀌며 아부했던 이유는 제 출세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의구심이 든다. 이 사람은 혹시 내 뒷조사를 철저히 한 건 아닐까? 충성보다는 정확한 거래가 훨씬 더 오래가고 믿음 준다는 내 생각을 어디선가 들은 게 아닐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두 달 뒤, 전무님은 순양그룹 통틀어 최고 연봉을 받는 순양전자 대표이사와 똑같은 대우를 받을 겁니다. 단, 제가 말했던 설계가 아주 잘 나왔다면 말이죠.” 장 전무는 입을 떡 벌린 채 감사의 인사는커녕 대답도 못 했다. “직책은 그때 가서 생각해봅시다. 처음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할까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설계를 보며 결정해야겠어요. 괜찮죠?” “무, 물론입니다. 이미 파격적인 제안을 주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 인사는 제 지시를 훌륭하게 해냈을 때 하세요. 아직은 미정인 겁니다.” 일부러 지시라는 말에 힘을 줬다. 하지만 장 전무는 조금도 불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합니다. 실적 없는 보상은 저도 원하지 않습니다.” 장도형 전무는 깨끗이 비운 캔맥주를 찌그러트리며 일어섰다. “할 일 많으니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네. 긴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우리는 굳은 악수를 나눴다. “그런데 전무님. 마지막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네. 실장님.” “전 한참 어린놈에 불과한데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장 전무는 마주 잡은 손에 힘을 불끈 주며 대답했다. “전 제 눈앞의 기적을 믿거든요. 하하.” * * * 승계 작업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조마조마했지만 할아버지께 달려가는 짓은 하지 않았다. 과연 그룹 지배 지분의 몇 %를 얹어 주실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0%만 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무슨 생각해?” “아, 아냐.” “어휴…. 나 축하하러 나온 자리에서 딴생각에 빠진 남자 친구를 멋있다고 생각하는 미친 애는 나뿐일 거야.” “그걸 또 말하는 게 더 미친 거야. 넌 속마음 숨기는 법부터 좀 배워.” “내 유일한 장점이야, 솔직한 거. 장점을 왜 숨겨?” “또 있어. 얼굴 예쁜 것도 장점이야.” “입에 발린 소리라는 거 알아도 기분은 좋네. 흐흐.” 서민영은 배시시 웃으며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니라 더한 개고생이 남았지?” “응. 사법연수원 1년 차는 죽었다고 봐야지. 사시는 예선, 연수원이 본선이라는 말도 있잖아.” “종종 놀러 갈게.” “기대는 안 한다마는…. 믿어볼게.” 여전히 밝은 모습의 그녀를 보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다. 내가 부잣집의 평범한 20대 젊은 놈이었다면 이 애와 함께 즐거운 청춘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즐거운 청춘 따위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시간은 미친 듯이 빠르게 흘러가고 순양의 지배 구조는 점점 복잡해진다. 바로 지금, 재학 중 사법시험 합격이라는 그 어려운 과제를 해낸 서민영을 축하해주러 나왔지만, 머릿속은 지분 구조만 꽉 차 있다. “참. 너 말고 합격한 애가 또 있다면서?” “응. 올해 재학 중 합격은 딱 둘이야. 나랑 김지훈. 알지?” “김지훈? 누구지?” “거 있잖아. 예비군 아저씨처럼 생긴 애.” “아…. 그래.” 내가 머리를 끄덕이자 서민영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지훈이 그 애, 빠른인 거 알아?” “빠른? 우리보다 한 살 어려?” “응. 대박 아냐?” 나보다 십 년은 늙어 보이는 놈이…. 어이가 없다. 이름은 또 얼마나 세련됐는가? 하지만 그놈은 어린이에서 바로 아저씨로 변한 보기 드문 놈이었구나. “그놈은 어디 지망이야? 검사?” “아마도.” “넌 판사지?” “응. 수도권 발령받으려면 미친 듯이 공부해서 연수원 성적 잘 받아야 해. 생각만 해도 돌아버릴 것 같아.” 긴 한숨을 뱉는 민영이를 보며 기분을 좀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기쁜 날 아닌가? 난 준비해 온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거 뭐야? 축하 선물이야?” “응. 판사 되면 이거 들고 다녀. 서류 가방이다.” 그녀는 황급히 쇼핑백을 뒤졌다. “우와…. 이쁘다…….” 한참 동안 가방을 이리저리 살피던 그녀가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에르메니… 질? 길? 이거 어떻게 읽어?”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 “너 이런 거 잘 아는구나. 역시 재벌이라 틀려.” 입이 찢어진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래 봬도 내가 백화점 주주야. 그 정도는 알아야지.” 이런 걸 내가 알 리가 있나? 고모에게 부탁해서 골랐다. 고모는 눈은 최고 아닌가? 다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건 또 뭐야?” “가방은 나중에 쓸 거고, 이건 곧 써야 하는 거.” 서민영은 선물 상자를 열며 눈을 빛냈다. “혹시나 해서 먼저 주는 거야. 너 연수원 들어가면 부모님께서 분명히 준비해주실 거잖아. 미리 말씀드려. 필요 없다고.” 서민영은 두 개의 열쇠를 손가락에 걸고 흔들며 말했다. “난 아직 면허증 없어.” “연수원 들어가기 전에 따. 일산서 서울 왔다 갔다 할 때 운전해야지.” “이건 마스터키 같은데?” 그녀는 또 하나의 키를 내밀었다. “응. 연수원 근처에 오피스텔 하나 얻었어. 괜히 기숙사에서 지낸다고 하지 마. 고생도 고생이고 남자 새끼들 득실거리는데….” “불안해?” 불안하기야 하겠냐마는 오늘이라도 기분 맞춰주는 게 예의 아니겠는가? “당연하지. 넌 거울도 안 보냐?” “불안한 걸로 따지면 나보다 더할까?” “너 나 몰라? 불안하긴 뭐가 불안해?” 그녀도 내 말을 수긍하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집과 사무실만 오가는 내 일상은 웬만한 직장인보다 훨씬 바쁘다는 걸 잘 안다. “백화점 직원들에게 네 취향을 말해줬어. 그 사람들이 필요한 가구는 다 채워놓았으니까 언제든 들어가서 써. 참, 디지털 도어니까 번호 세팅 다시 하고.” “네 생일로 맞춰놓을게.” “나 마음대로 불쑥 들이닥쳐도 되는 거야? 흐흐.” “그땐 각오하고 들이닥쳐.” “무슨 각오?” “내가 확 덮쳐버릴지도 모르니까 각오하라고!” 서민영은 참…… 솔직하다. * * * 12월의 찬바람도 매섭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지 않으니 몸에서 뜨거운 열만 계속 나오는 것 같다. 내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결재판. 그 위에 놓인 두꺼운 서류들. 이 서류들 맨 아래에는 진도준이라는 이름과 서명란이 긴장을 풀지 못하게 했다. “이놈아. 그냥 찍어. 뭘 그리 유심히 살피는 게냐?” “아…. 네.” “숫자 챙겨 보지 마. 지분 구조는 워낙 복잡해서 한 번에 계산 못 한다. 도장 다 찍으면 내가 알려주마. 싫음 안 찍어도 되고.” “아닙니다.” 가장 위에 놓인 서류 몇 장에 내 인감을 찍었다. 일종의 세리머니. 곁에서 대기하던 직원에게 도장을 넘겨주니 서류 더미와 내 도장을 들고 조용히 서재를 빠져나갔다. 나 대신 저 두꺼운 서류에 인감을 찍을 것이다. “궁금하지?” 할아버지는 선물 포장지를 못 풀어서 궁금해하는 나를 보며 계속 웃기만 했다. “금융 주력사 4개와 고만고만한 자회사 몇 개 묶었다. 보너스로 그룹 지분도 섞어 넣었고.” 그러니까 얼마나 넣었냐고요! 소리치고 싶은 걸 억지로 누르며 차분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네 녀석이 순양그룹에 큰소리치는 건 딱 십분지 일이다.” 겨우 10%. 내 얼굴을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간 실망을 할아버지는 놓치지 않았다. “왜? 부족한 게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놈 보게. 충분합니다가 아니라 괜찮습니다? 욕심은….” “정말이에요. 충분해요.” “대신 그 계열사들이 가진 자산은 그룹에서 가장 많다. 알지?” 많으면 뭐 하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바로 순양그룹의 지배 지분인데. 온갖 비상장 회사들이 다 쥐고 있지 않은가? “네가 자신 있게 말하지 않았더냐? 그 계열사와 미라클이 가진 HW 그룹을 기반으로 또 하나의 순양그룹을 만들겠다고.” “꼭 그리하겠습니다.” 시원하게 대답했을 때 할아버지는 몸을 일으켜 내 곁에 앉았다. “도준아.” “네.” “이 할애비가 어떤 심정으로 이렇게 했는지 이해하지?” 애잔한 할아버지의 눈을 보니 섭섭한 마음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네. 잘 알아요.” 절묘한 숫자 10%. 두 분의 큰아버지가 내가 가진 지분을 차지하기 위해 위험한 도박을 시도하기엔 적고, 나를 무시하기에는 큰 숫자. 나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당기려 다정하게 대할 만한 숫자다. 날 위험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 안배한 할아버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난 주름 가득한 할아버지의 두 손을 꼭 잡았다. ======================================== [168] 독립 1 “10%?” “네. 부회장님. 주력 계열사 네 곳, 그리고 여섯 개의 관계사를 승계했습니다. 지배 지분은 순양생명이 쥐고 있습니다.” 진영기 부회장은 일단 한시름 놨다. 핏줄 중에 그 정도로 애정을 보인 적이 없어 노심초사했지만, 그간 아버지가 보인 애정을 생각하면 의외다. “지분 관계 정확하게 뽑은 자료입니다. 한번 검토해보시죠.” 진영기는 비서가 공손히 내미는 서류 몇 장을 재빨리 낚아챘다. 진영기 36% 진동기 33% 미라클 16% 진도준 10% “나머지 5%는 임원이야?” “그렇습니다. 전부 34명인데 은퇴하신 분이 21명, 현직 13명입니다. 세부 명단은 뒤에 있습니다.” 진영기 부회장은 명단을 쭉 훑어본 후, 얼굴을 찌푸렸다. “니기미…. 전부 아버지 수족이구먼.” “네. 그 주식을 되찾아 올 수 있는 분은 회장님뿐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공로를 인정해서 나눠 준 것이기 때문에 되찾아 오실 생각은 없으실 겁니다.” “지금 당장 이 사람들 접촉…. 아니다. 좀 더 지켜보자. 괜히 들쑤셨다가는 아버지 귀에 들어가.” “그렇습니다. 아직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움직이셔도 될 듯합니다.” 비서는 서둘지 않는 진영기를 보며 안심한 표정이었다. 어제 일어난 일이다. 5%의 주식을 쥐고 있는 임원들에게 오늘 당장 전화라도 한 통 하면 곧바로 진 회장의 귀에 들어간다. 분명 경박한 놈이라고 오지게 욕만 얻어먹을 게 뻔한 일 아닌가? “동기 움직임 잘 감시해. 사람 더 붙이고, 누구 만나는지 한 명도 빼먹지 말고 보고하도록.” “네. 부회장님.” 진영기는 진도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꼬맹이가 가진 주식을 뺏을 필요가 없다. 자신의 충실한 개로 만들면 된다. 개는 주인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앞으로 항상 인자한 큰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며 천천히 내 사람으로 만든다.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10%의 지분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말이다. * * * “내가 필요한 건 눈에 드러난 지분 구조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순양그룹 주식이 이것밖에 없어?” 진동기 부회장은 비서실장이 내민 서류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그룹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외부기관이나 개인을 전부 파악하라고. 그놈들이 똘똘 뭉치면 순양그룹에서 진씨 성을 가진 놈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쫓겨난다는 거 몰라?” “부, 부회장님. 그건….” 비서실장은 예민해진 진동기 부회장의 억지를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어차피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 주주들 아닌가? 순양그룹 주요 계열사 주식을 어마어마하게 가진 은행, 투자기관, 공공기관은 그룹 내부 경영권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기관들이 순양그룹의 주식을 보유하는 이유는 은행 예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분산 투자의 한 부분으로 대기업 주식에 돈을 묻어 둘 뿐,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주식을 확보한 건 아니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특히 오랫동안 주식을 보유한 개인은 재산의 일부로 생각할 뿐 경영에 참여하기 위해 주권을 행사한 적이 없다. 지금 변수는 임원들이 가진 지분과 미라클 그리고 진도준이 전부다. “왜? 파악 불가능하다고 우는소리라도 하려고?” “아, 아닙니다.” “잘 들어. 분명히 차명으로 분산한 주식이 존재해. 넌 아직 내 아버지를 모르겠어?” 진동기는 비서실장을 죽일 듯 노려봤지만, 그 시선은 사실 그의 아버지를 향한 것이었다. 진 회장의 권력욕은 보통의 인간들이 꿈꿀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생명의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그 권력을 내려놓을 사람이 아니다. 분명 회심의 일격을 먹일 수 있는 마지막 한 줌은 손에서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 한 줌을 기관이나 개인에게 숨겨놓았다. “부회장님. 솔직히 기관들은 회장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 겁니다. 아직까지는요. 하지만 그놈들은 권력의 이동을 귀신처럼 알아챕니다. 부회장님께서 힘을 키워 나가면 자연스럽게 부회장님을 지지할 겁니다.” 진동기는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눈길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흥분한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비서실장의 긴장한 표정을 보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고맙다.” “송구합니다.” 비서실장은 진동기 부회장의 한마디에 담겨 있는 그의 진심을 느꼈다. “그래도 개인 주주는 파악해야겠지?” “네. 특히 장기 보유자 명단은 꼭 파악하겠습니다.” “그래. 아 참, 차명으로 된 놈들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행방을 찾기 힘든 놈들, 이를테면….” “거주지 불명, 이민자, 장기 외국 체류자들을 중심으로 파악하겠습니다.” “그래. 꼭 찾아내.” “넵. 그리고 부회장님. 적어도 안전장치는 해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전장치?” “네. 조카인 진도준과 미라클 말입니다. 제 생각엔 이 두 주주의 연결 고리는 동생이신 진윤기 사장님입니다. 그분과 좋은 관계만 유지한다면….” “53%! 내가 순양그룹의 주인이지.” “그렇습니다. 그룹의 향방은 진윤기 사장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남에게 칼자루 맡길 수는 없지 않겠나? 내 회사들의 자금을 총동원해서 시장에 흩어져 있는 지분을 사들이는 것도 추진해봐.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겠어.”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이 허리를 숙이고 나가자, 진동기는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일단 동생의 심중부터 파악해야 한다. * * * 진상기 이사장은 연거푸 담배만 피워댔다. 진양철 회장의 셋째며 엄연한 아들이다. 허접스러운 계열사 몇 개라도 안겨줬다면 이 정도 모멸감은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특별히 잘못한 적도 없고 사고 친 적도 없다. 아이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자기 아들과 딸은 이 집안 누구보다도 얌전하다. 흔하디흔한 음주운전 한 번 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그런 자신을 철저히 배제하고 이제 겨우 어린애 티를 벗기 시작하는 조카에서 주력 계열사 네 곳을 안겨주다니! 이상하게도 이 분노가 조카와 아버지로 향하지 않았다. 진상기의 분노는 큰형인 진영기를 향했다. “씨발, 내가 따가리 노릇을 너무 오래 했어.” 그 때문에 존재감이 없어졌다. 아버지와 대화할 일도 없다. 큰형님이 도맡아 했으니까. 아버지 서재에 들어갈 일도 없었다. 아버지가 찾은 적도 없다. 그 결과가 바로 돈 안 되는 재단 이사장 자리다. 처음 이사장이 되었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재단 보유 재산을 샅샅이 뒤졌다. 보물찾기하듯. 아버지가 주식을 숨겨놓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애들 줘야 할 코 묻은 장학금이 전부였다. 진상기 이사장은 당연히 받아야 할 자신의 권리를 형에게서 얻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대학 시절이 끝났다. 기말고사를 끝내고 아버지가 신신당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차를 몰았다. “시험 끝났다고 친구들이랑 어울려 놀고 싶은 마음은 안다. 하지만 연말연시를 늘 같이 지낼 수 없을 만큼 바쁘잖아. 너도, 나도……. 그러니 오늘 저녁만이라도 우리 가족끼리 오붓하게 하자.” 종강 파티를 함께 즐길 만한 친구가 없다는 걸 모르시지 않을 텐데 꼭 시간 내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하신 거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저녁 식사 장소는 상암동의 한 빌딩이었고 그곳 최상층은 꽤 그럴싸하게 꾸민 퓨전 레스토랑이었다. “시험 잘 쳤냐?” 상준 형은 웃으며 나를 반겼다. “낙제만 안 하면 되지 뭐.” “수고했다. 이제 졸업만 남았네.” 어머니는 내 등을 토닥이며 자리를 내어주었다. 가장 늦게 도착한 아버지는 오랜만에 다 모인 가족의 모습 때문인지 환하게 웃었다. “여보. 여기 어때? 분위기 괜찮지 않아?” “좋은데요? 그런데 왜 손님이 한 명도 없어요? 좀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장사가 안 되나?” “흐흐. 크리스마스이브가 오픈이야. 아직 정식 영업이 아니라서 그래.” “혹시…?”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버지는 어머니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상암동 관계자들 중요한 미팅 장소가 없는 것 같아서 준비했어. 당신 이름으로.” “네?” “여기 총괄 매니저가 유능한 사람이야. 거금 주고 스카우트했으니까 당신은 가끔 얼굴만 비춰주라고. 이제 애들 다 컸는데 소일거리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오! 우리 아버지, 로맨틱한데? “축하해요. 엄마.” 상준 형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어머니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밝게 변했다. “자자, 식사부터 하자고. 이곳 대표 메뉴라 할 만한 것들부터 맛보고 다들 품평해봐. 주방장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제대로 공부한 분이니까 괜찮을 거야.” 요리를 먹는 동안 아버지는 내가 순양의 금융 계열사를 물려받은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분명 어머니 때문일 것이다. 우리 가족은 순양그룹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머물기를 간절히 원하는 분 아닌가? 이제 내가 태풍의 눈이 됐다는 걸 알면 밤잠을 설치실 것이다. 가장 심각한 내용을 꺼내지 않았으니 가족 간의 대화는 그 여느 때보다 온화하고 화목한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아버지. 혹시 이 건물 통째로 쓰실 겁니까?” “응?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모를 수 있나? 빌딩 로비 안내판에 붙은 회사 이름이 전부 아버지의 회사였다. 게다가 빌딩 이름은 ‘현(HYUN)’. 바로 어머니 이름 이서현의 현 자가 아닌가? “아버지. 글자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겁니다.” 상준 형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하하. 오세현이 다리 잡고 늘어졌었지. 싸게 빌렸다.” “지주회사 시스템으로 바꾸십니까?” “그래. <현홀딩스>라고 이름 지었어. 내년에 시작할 거야.” 아버지는 다정스레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이름 붙은 건물 보니까 어때?” 손발이 오글거린다. 쉰 넘은 나이에 이런 유치한……. 난 아무래도 어머니 피를 더 많이 받았나 보다. 소녀처럼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한숨을 쉬신다. “애들 앞에서…. 그 정도만 해요.” 어머니의 매서운 눈길에 아버지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제작사, 기획사, 케이블 방송 등 전부 이곳으로 모으려고. 강남에 흩어져 있는 회사도 같이. 그래야 관리하기 편하겠더라고.” 일부러 내 졸업 시기를 맞춘 것 같다. 아버지 편하시도록 상암동에 집이나 한 채 지을까 생각할 때 생각이 통했는지 아버지는 예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이제 도준이도 졸업하니까 내년부터 너희 둘은 집에서 나가는 게 어때? 다 큰 놈들 밥해줘야 하는 내 마누라를 보니 속이 아프다. 그만 부려먹고 독립해라.” “여, 여보!” 화들짝 놀란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류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언제까지 우리가 끼고 있을 수는 없어. 때가 되면 부모 둥지 떠나는 게 이치에 맞아. 먹고사는 걱정이야 이놈들 문제고 우리는 이제 신혼 때처럼 재미나게 살자고.” 더 이상 반가울 수 없을 만큼 기쁜 명령이다. “우리 집도 줄이고 적당한 아파트로 이사하고 싶은데 방문하는 손님들 때문에 그건 힘들고….” “순양호텔 객실 하나 비워놓을 테니까 가끔 들러서 신혼 기분 만끽하세요. 제 독립 기념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이야, 우리 아들 통 큰데? 기꺼이 잘 써주마. 하하.” 호탕한 아버지의 웃음에도 함께 웃지 못하는 상준 형은 머리를 숙인 채 음식만 꾸역꾸역 집어넣고 있었다. “상준아. 머리 들어. 죄졌어?” 죄인이나 다를 바 없는 심정일 것이다. 동생은 벌써 엄청난 돈을 주물럭거리며 부모님의 자랑거리가 됐는데 형인 자신은 천덕꾸러기 신세 아닌가? ======================================== [169] 독립 2 “죄송해요.” “괜찮다니까. 회사 그만둔 게 네 책임만은 아냐. 내가 조심하라고 했는데, 어쩌겠냐? 다들 눈치 보느라 그랬다는데.” 무슨 내용인지 몰라 눈치 보는 사람은 어머니뿐만 아니다. 나도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아, 별일 아니다.” 별일 아니라고 했지만, 내용은 좀 우습기까지 한 일이었다. 어차피 나는 아버지의 미디어 회사에 관심도 없으니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상준 형을 끌어들였다. 음악에 관심도 많고 예술을 사랑하는 피는 상준 형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이쪽도 나름대로 빡센 곳 아닌가? 바닥부터 차근차근 익히는 게 정석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상준 형을 엄하게 굴리라고 지시했지만, 지시대로 움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을 배우기는커녕 모두 눈치만 보며 왕자 대접하기에 하루 종일 구경꾼처럼 서성대기만 하다 퇴근했다. 출근해서 일하지 못하고 하루를 때우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대기 발령받은 사람만 안다. 아직 머리를 들지 못하는 상준 형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다. 좋아하는 음악 공부하며 재능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절망했을까? 일터에 나가 멍 때리다 하루를 마감했을 때 얼마나 참담했을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복에 겨운 소리지만 다들 자기 상황이 가장 힘든 법이다. 풀 죽은 형의 모습을 보니 짠한 마음이 솟았다. “아버지, 어머니. 저 잠시 형이랑 이야기 좀 할게요. 괜찮죠?” 난 깜짝 놀라 머리를 든 형을 향해 눈짓하고 구석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형. 이런 건 어때?” “뭐가?” “요즘 가수 기획사가 대세잖아. SM엔터테인먼트 상장한 거 알지?” “너 거기 투자했어?” 상준 형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아니. 엔터주는 답 안 나와. 규모도 작고. 거긴 그쪽 계통 사람들이나 투자하는 거지. 앞으로 10년쯤 지나야 가치를 인정받을 거야.” 연예인이 귀족처럼 행세하는 세상. 모든 청소년이 꿈꾸는 직업. 짝퉁 걸그룹이 오로지 섹시함만을 내세워 대학 축제에 행사 뛰는 게 이상하지 않은 시대.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대를 이어 물려주고 재벌 2세처럼 연예인 2세라는 단어가 자연스러운, 참으로 요지경 같은 세상. 그런 세상이 올 때쯤이면 엔터주는 급등한다. 아직은 아니지만.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고. 형도 그쪽으로 한번 해볼래?” “기획사? 내가? 어림도 없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형을 보니 뒤통수라도 한 대 갈기고 싶었지만 참았다. “음악 좋아하잖아. 물론 좋아한다고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하는 영상보다는 음악이 낫지 않을까?” “도준아. 마음 써주는 건 고마운데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냐. 일단 매니지먼트에 대해 내가 아는 게 없다고. 신인 발굴하는 거, 교육시키는 거…. 방송 데뷔 성사시키고…. 불가능해.” 이 대답은 조금 기특하기까지 했다. 능력도 안 되는 놈이 얼씨구나 하고 시작한다고 말했다면 내가 멈췄을지도 모르겠다. “배워.” “뭐?” “일을 배워야지. 설마 내가 회사를 차려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 그게 아니라…….” “형이 한번 골라봐. 꼭 취직하고 싶은 곳. 아직 성공하지도 않았고 가수도 몇 없는 작은 곳. 하지만 형이 보기엔 가능성이 엿보이는 그런 회사 말이야. 거기 취직하라고.” “그러니까 회사부터 골라라?” “진짜 빡빡 기고 일 배워. 가수 차도 운전하고 생리대 심부름도 해. 성질 더러운 아이돌한테 쪼인트도 까이고.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 “우리 집안 팔지 말고 형 이름만으로 취직해. 외국 유학 다녀온 스펙도 있잖아. 형은 월급 적어도 괜찮잖아? 매달려서라도 취직하라고.” 과연 그 정도의 의욕이 있을까? 하지만 바닥을 건너뛰겠다는 안일한 생각이라면 차라리 평생 백수로 사는 게 낫다. 생활비와 용돈이야 충분히 줄 수 있다. “그러다 자신감 생겼을 때 말해. 회사 차려줄게. SM보다 더 크게 키울 자신과 능력만 내게 보여줘. 그럼 돈이 얼마가 들든 형에게 투자할 테니까. 어때?” “생각 좀 해볼게.” 이 자식이 장난하나? 고생은 싫고 성공만 원하는 재벌 3세 흉내라도 내겠다는 건가? 일그러진 내 표정을 본 상준 형은 급히 입을 열었다. “야! 빡빡 기는 거 때문에 생각해보겠다는 거 아냐. 일 배우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그런데 내가 엔터 회사를 키울 수나 있을지, 경영할 그릇은 되는지부터 생각해보려고. 부모님 돈도 아니고 동생이 준 돈을 홀라당 날려먹는, 그런 병신 짓은 피해야 하잖아.” 오호라, 이런 기특한 소리까지 할 줄이야! “생각하지 마.” “뭐?” “일단은 그냥 배워. 배우다 보면 자신감도 붙을 것이고 능력도 생기는 거야. 그 분야를 모르면서 생각만으로 결정하는 게 더 병신 짓이다. 그렇지 않아?”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못 하던 상준 형은 잠깐의 침묵 뒤에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 말하지 마. 그럼 어디선가 또 말이 샌다. 이제 누구누구의 아들, 누구누구의 손자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 들어서도 안 되고.” “그래. 형이랑 나만의 비밀로 하자. 됐지?” 몇 번 실패해도 밀어줘야 가족이다. 상준 형이 고른 회사에 몇십억 투자해주고 제대로 일 배우도록 부탁해야겠다. 정말 로드매니저만 하다 몇 년 까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 * * “기분이 어떠냐? 나이 스물넷에 계열사… 몇 개나 되냐? 열 개 넘어?” “HW 그룹 9개, 순양금융사 4개. 주력만 그렇고 자회사는 몇 갠지 저도 헷갈리네요.” “어쭈? 너무 척하는 거 아냐? 흐흐.”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단둘이 맥주 한잔을 마셨다. “할아버지도 그렇고, 세현 삼촌도 그렇고…. 회사 쪼개서 여기저기 붙이는 데는 귀신이더군요. 솔직히 자회사는 신경 쓸 여력도 없습니다.” “또 잘난 척은. 야! 나도 회사 많아. 하지만 조그만 제작 스튜디오까지 신경 쓰며 관리한다고. 신경 써야지.” “아버지.” 슬쩍 웃으며 나지막이 아버지를 불렀다. “왜?” “사이즈가 다르지 않습니까? 국내 제1의 생보사, 한국 점유율 32%의 자동차 회사. 도급 순위 6위의 건설사. 더 말할까요?” “됐다. 자식이…. 끝까지 잘난 척은, 흐흐.” 물려받았든, 편법을 썼든, 아버지는 아직 어린 아들이 거대한 기업을 일궜다는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몸에 딱 맞지 않는 옷은 탈이 나는 법, 아버지의 웃음은 묘한 여운이 남았다. “네 큰아버지들은? 연락 온 적 없어?” “아직까지는…. 아마 아버지께 연락하지 않을까요? 대주주인 저와 미라클, 양쪽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여길 테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 내가 어떻게 해줄까?” “제가 학업 끝마칠 때까지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응? 학업? 그게 무슨 소리지? 내년 2월이면 졸업인데? 두어 달 남았는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거냐?” “아뇨. 대학원 갈 생각입니다.” 아버지는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학교도 잘 안 가던 놈이 대학원은 무슨? 왜?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공부해볼 생각이야? 아니면 회계학이라도?” “그건 아니고요.” 난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할아버지 연세가 만만치 않잖아요. 졸업하면 곧바로 영장 나올 테고, 군대 가야 하는데 그동안 할아버지께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합니까? 살아계시는 동안은 군대 미루고 곁을 지키고 싶어서요.” “군대?” 아버지의 얼굴은 더 황당한 표정으로 변했다. “너 군대 가? 그룹에서 조치했을 텐데…?” “네? 무슨 조치요?” “잠깐만 있어 봐.” 아버지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 형님, 저 윤깁니다. 네, 네. 잘 지내시죠?”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일상적인 안부 인사를 한참 나눴다. “여쭤볼 게 있는데요. 우리 도준이 군대 문제 어떻게 됐습니까? 네. 네. 아……. 그때 그 사고? 네…. 그렇군요. 아, 아뇨. 연락을 못 받아서요. 네…. 네. 아무튼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형님. 일간 한번 뵙죠. 소주나 한잔…. 하하하.” 통화를 끝낸 아버지는 빙긋 웃었다. “그럼 그렇지. 연락하는 걸 깜빡했구만.” “누구와 통화하셨어요?” “응? 아…! 이학재 실장님. 너 군대 문제 어떻게 됐나 해서….” 설마?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상준 형은 물론이고 사촌 형들 모두 군대 간 놈이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봐도 방위조차 없었으니 모두 면제였던 게 확실했다. 나도 당연히 면제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졸업하지 않았고 휴학한 적도 없으니 알 수 없었다. 영장 나오면 처리하는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더욱이 할아버지와 나를 떨어트려놓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군대 가는 것이니, 큰아버지들이 장난이라도 치지 않을까 걱정했다. 대학원은 만에 하나를 대비한 꼼수였는데…. “너 면제 판정 받아놨어. 넌 좀 쉬웠다더라. 예전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진단서를 끊어 처리했다고…. 그러니까 영장 나오는 거 연기하려고 대학원 갈 필요는 없어졌어.” “그렇군요.” 아무렇지 않은 듯 머리를 끄덕였다. “혹시 군 문제 아니라도 공부 더 할 생각 있어? 외국 유학이라도 가볼래?” “아뇨. 공부는 성공을 위해서든, 공부 자체를 좋아하든 둘 중 하나 때문에 하는 건데…. 전 둘 다 아니잖아요. 성공했고, 공부는 하기 싫고.” “그럼 다시! 내가 어떻게 해줄까? 형님들이 날 들볶을 때?” “당분간은 관망하겠다고 하시죠.” “지금은 그래야겠지?” “네.” 아버지는 남은 맥주를 싹 비웠다.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참, 상준 형 있잖습니까?” “응? 상준이?” “네. 혼자 어떻게 해보겠다고 했으니 당분간 취직 알아보지 마시고 놔두세요. 형도 성인이니까요.” 물끄러미 날 보던 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전생에 나라를 서너 번은 구한 게 틀림없어. 이런 복덩이 아들을 두다니 말이야. 그래, 모른 체하마.” 나는 별다른 말 없이 아버지를 향해 미소만 지었다. 아버지가 나라를 구한 게 아니고 전생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아들을 둔 겁니다. 덕분에 아버지는 행운이 얻어걸린 셈이라고요. * * * 월드컵 개최를 코앞에 둔 한국 축구 대표팀은 시드니 올림픽 조별리그 탈락, 아시안컵 3위의 성적을 기록하는 등 성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침내 허정무 감독은 쫓겨났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대한민국에 5-0의 참패를 안겼던 거스 히딩크가 2001년 1월 1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공식 취임했다. “축구 좋아하십니까?” “보통이죠, 뭐. 국대 경기만 좀 보는 수준? 그게 전부예요.” 장도형 전무는 히딩크 감독의 취임식 인터뷰를 보며 흥미를 보였지만, 결과를 알았을 때 스포츠만큼 재미없는 게 있을까? 맥 빠지는 걸로 치면 영화 스포일러보다 더하다. 내가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자 장도형은 화제를 돌렸다. “새해 첫날인데 집에 계시지 왜 이곳에 계십니까?” “임원들이 인사하러 올 것 같아서요.” “받으시면 되죠.” “아이고, 그거 엄청 불편합니다. 자식 같은 놈에게 문안 인사를 하는 것도 힘들겠지만, 아버지뻘이신 분들에게 인사받는 건 더 고역입니다.” “그럼 전 아버지뻘이 아니라서 편하신가요? 새해 첫날 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전무님께 힘을 실어드리기 위함이죠.” “네?” “내일 회사 가서 슬쩍 흘리세요. 새해 첫날 저랑 독대했다고.” “아…!” 힘을 실어준다는 뜻을 이해하자 장 전무는 슬쩍 웃음을 보였다. 그가 바라는 것, 바로 새로운 실세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 [170] 헤쳐모여 1 “전무님. 순양그룹의 실세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이학재 비서실장이죠. 그야말로 회장님의 오른팔 아닙니까?” “그럼 어떡해야 실세가 될까요?” “신뢰 아니겠습니까?” “신뢰?” “네. 권력자의 절대적인 신뢰. 그걸 다른 사람들도 아는 거죠.” 실세, 매력적인 단어다. 절대 권력자의 곁에서 또 하나의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 가끔 혹은 종종 모시는 사람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를 때도 있다. 하지만 신뢰만으로 실세가 되는 건 아니다. “전무님. 제 생각에 실세란 이렇습니다. 권력자를 언제라도 만날 수 있고, 만나서 아무 이야기나 할 수 있고, 한 이야기 대부분이 권력자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중에 단 하나라도 빠지면 실세가 아닙니다. 자, 이학재 실장이 실세 맞습니까?” 장도형 전무는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짧게 한숨 쉬었다. “엄격하시군요. 심하다 싶을 만큼….”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네?” “순양그룹 모두가 이학재 실장은 실세라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중요한 건 실세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아…! 그렇군요. 모두가 실세라고 생각한다면….” 장도형 전무는 그제야 무릎을 탁 쳤다. “오늘 이런 자리가 장 전무님 운신의 폭을 넓혀줄 겁니다. 충분히 이용해보세요.” 장 전무는 머리를 끄덕이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하십니까? 혹시 회장님께 특별한 가르침이라도 받으시는 겁니까?” “글쎄요. 그냥 눈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면 모두가 스승이라는 말도 있지요. 하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자 장 전무도 기가 차는지 실소를 보인다. “자, 농담은 이만하고 서류 검토부터 합시다.” “아, 네.” 장 전무는 준비해 온 계획서를 펼쳤다. 반도체 회로 설계도 같은 복잡한 계획서였다. “계열사 전산 시스템부터 통합해야 합니다. 그 시스템으로 일일 현황까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계열사 현금 흐름을 한눈에 파악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문제는 여유 자금 분석입니다. 운용 기간을 정확히 알아야 돈을 굴릴 수 있는 거 아시죠?” “네. 참…. 자금은 자사주 매입으로 쓰실 거죠?” “그렇습니다. 지금 지분 구조가 불안정한 거 아시죠? 두 부회장님이 우리 계열사 주식 쓸어 모으면 증권과 카드는 단숨에 뺏깁니다. 물론 할아버지께서 지켜보시니 드러내놓고 사들이지는 않지만 분명 물밑에서 매집합니다.” “계열사가 보유한 부동산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갈 생각입니다. 차후 땅값 오르는 걸 생각하면 아깝긴 하지만….” “괜찮아요. 땅은 다시 살 수 있지만, 큰아버지 손에 들어간 주식은 영영 못 찾습니다. 아깝다 생각 말고 주식으로 바꾸세요.” “네. 그런데 실장님.” “말씀하세요.” “순양카드 말입니다. 지난번 계열사 사장단 미팅 때 리스크 조짐이 보인다고 하셨다는데…. 맞습니까?” “네. 어떻게 아십니까?” “이민섭 사장이 회사로 돌아와서 노발대발했습니다.” 장 전무는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고자질 같아 찝찝한 모양이다. “어린놈의 새끼가 할아버지를 등에 업고 잘난 척했다?” “뭐, 비슷합니다.” 난처한지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대답한다. “제 의견은 아실 테고, 전무님 의견도 한번 들어볼까요? 어떻습니까? 카드,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용카드라는 게 기본적으로 돈놀이 아닙니까? 시중금리보다 높은 이자놀이 하는 건데 회수율만 신경 쓰면 사업 자체를 부정하는 꼴입니다. 어느 정도는 회수 불가하다는 걸 감안해야 합니다. 채권이 늘어날수록 회수 불가금액도 커지지만 대신 벌어들이는 이자나 수수료도 더 커집니다. 이 밸런스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역시. 설마 하던 위험은 갑자기 닥친다. IMF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3년이면 망각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다. 쓰나미처럼 덮칠 카드 대란은 아직 아무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렇군요. 이거, 내가 사과라도 해야겠는데요?” “네?” “아닙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자사주 매입은 증권에 집중하세요. 카드는 굳이 손대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카드사가 보유한 다른 계열사 지분은 조금씩 순양생명으로 옮기세요.” 장도형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셨군요.” “제가 고집이 좀 셉니다.” “그럼 카드사 정책을 손대야 합니다.” “아뇨. 놔두세요.” 만신창이가 될 카드사에 큰아버지가 돈을 쏟아붓게 하려면 누군가 도발해야 하는데 이민섭 사장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미끼라도 하나 던져야 하나? 장도형 전무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생각에 잠긴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렇게 합시다.” “네.” 내 생각을 정리하고 통할 만한 계책이 떠올랐을 때 장 전무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변했다. “전무님은 이민섭 사장에게 넌지시 흘리세요. 진도준이는 사람과 부딪히며 상대하는 걸 좀 꺼려하는 것 같다. 그래서 모니터만 들여다봐도 되는 투자를 좋아하더라.” 장 전무는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카드사에 대한 견해가 다르고, 그놈은 너무 부정적이라 카드사를 귀찮은 혹처럼 여기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뭐… 이런 식으로….” “실장님의 지금까지 행적을 보면 사실이든 아니든 그럴 듯하게 보입니다.” “그렇죠? 상대가 믿게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만약 이민섭 사장이 이 사실을 믿으면 어떻게 움직일까요?” “글쎄요. 제가 이 사장의 입장이라면 분통을 터트릴 것 같은데요?” “왜 그렇죠?” “지금 카드사의 실적은 엄청나게 좋은 축에 속합니다. 그런데 오너가 귀찮은 서자 취급하면 기분이 좋을 리 없겠죠.” “그렇겠죠? 더구나 그 오너라는 놈이 새파란 놈이면 자존심이 팍 상할 겁니다. 그럼 누군가를 찾아갈 텐데… 우리 할아버지는 아닌 게 확실하죠? 회장님의 결정에 감히 반발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장 전무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내 의중을 알아차린 것 같다. “시, 실장님. 설마?”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가장 힘 있는 사람은 바로 진영기 부회장이죠.” “카드사를 팔아버릴 생각이십니까?” “파는 건 아니고 교환입니다. 큰아버지의 계열사 중에 괜찮은 놈 하나 골라 바꾸는 거죠.” “실장님. 지금 카드사의 실적을 생각하면….” “아깝습니까?” “당연하죠.” “아까운 회사니까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겠죠. 자, 진영기 부회장의 계열사 중에 비슷한 놈 하나를 찾아보세요. 조금 부족해도 됩니다. 아무튼 큰아버지가 이득 봤다는 기분이 들 만한 회사면 돼요.” 장도형 전무의 표정에는 아까워 죽겠다는 심정이 확연히 드러났고 그 표정을 보니 이 거래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확신도 들었다. 또한 현금을 뽑아내는 회사는 그룹을 차지하기 위한 주식 확보에 큰 도움이 된다. 탐낼 만하다. “조금 전 말씀드렸던, 카드사가 쥐고 있는 계열사 주식 옮기는 건 빨리 진행하시고요.” “생각 굳히신 겁니까?” “네. 하지만 너무 아까워 마세요. 전 제 손에 한번 들어온 거 절대 남의 손에 들어가는 일 없도록 합니다. 돈이든, 회사든, 사람이든….” 마지막으로 말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아차린 장도형 전무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내 손 떠난 카드사는 곧 다시 들어올 겁니다. 아니, 꼭 찾아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말씀해주실 수 없을까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냥 지켜보세요.” * * * “뭐? 그놈이 그딴 식으로 말했다고?” “네. 솔직히 전 진도준이 보통 애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냥 제 생각만 옳다고 믿는 고집불통이었습니다. 전형적인 재벌 3세더라고요.” “도대체 그놈은 무슨 근거로 우리가 부실하다고 믿는 거야?” “그러니까요. 어디서 책 두어 권 보고 떠들어대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젠장!” 이민섭 사장은 새해 첫 출근부터 기분 더러운 말을 전해 듣자 절로 욕이 쏟아져 나왔다. “장 전무. 그 새끼 어떻게 해야 해? 가만 보니까 그놈이 자네를 심복으로 삼을 생각인 것 같던데?” “임원 중에 제가 만만한 거겠죠. 나이로 고른 겁니다. 계열사 사장님들이야 부친인 진윤기 사장보다 나이가 많지 않습니까? 이래라저래라 말하기 곤란해서 그렇겠죠.” 사장실 안을 서성이던 이민섭은 장 전무를 보며 말했다. “애 비위 맞춰주느라 고생했다. 나가봐.”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알아서 해. 가봐.” “네. 그럼.” 장도형이 사라지자 이민섭 사장은 수화기를 들었다. “진영기 부회장님 스케줄 확인해. 시간 비면 내가 뵙고 싶다고 전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 사장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 * * “인사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아니에요. 이렇게 찾아와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지.” 진영기 부회장은 허리를 숙인 이민섭 사장을 일으켜 세웠다. “모두 자기 주인 찾아가서 인사하기 바쁜데 옆집 사람 신경 쓸 여유가 있을 리 없지. 괜찮으니 마음 쓰지 말아요.” 소파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간단히 새해 덕담을 나누었다. “저기, 부회장님.” “네.” “혹시 이대로 가만 계실 겁니까?” “응? 무슨 뜻입니까?” “그러니까 금융 계열사를 어린 조카가 가져가는 걸 놔두실 생각이신지 궁금합니다.” “이런, 정초부터 뭐 이리 무거운 이야기를 하시는 겐가? 허허.” 입은 웃지만 눈은 반짝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사실 확인이 먼저다. “우리 이 사장님, 내 조카에게 구박이라도 받으셨소?” 이민섭 사장은 장도형 전무에게 전해들은 내용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조금 더 격앙된 톤이라는 게 다를 뿐, 더하거나 빼지도 않고 최대한 사실대로 전달하려는 노력도 잊지 않았다. “음….” 이야기를 다 들은 진영기는 머릿속이 바빠졌다. 어쩌면 기회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조카가 카드사를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네. 어디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마도 우리 부친 때문일 거요.” “네? 회장님 말씀이십니까?” 진영기는 머리를 끄덕였다. “카드 사업을 내켜하지 않으셨거든. 이자놀이 사업이라고 머리를 흔드셨어. 세상이 변해 신용카드가 필수품이 돼버렸으니 마지못해 시작하신 거요. 도준이는 분명 그 영향을 받았을 테고….” “아….” 이민섭 사장은 처음 진도준이 부실 어쩌고저쩌고, 회수율 어쩌고저쩌고 힐 때 증권가에서 배운 지식을 써먹는 줄 알았다. 하지만 겨우 현찰을 최고로 치는 구세대의 영향이라는 걸 알자 더욱 화가 치밀었다. “혹시 더 해줄 말은 없어요? 우리 도준이에 대해서?” 이민섭 사장은 진영기 부회장의 관심이 이처럼 반가울 수 없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그동안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도준이가 꽤 영특한 아이고 경영자 자질이 충분한 줄 알았는데….” “잘못 알았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 책임 경영, 대주주인 자신은 전문 경영인의 평가가 전부라고 말한 게 서구식 사고에 젖었다고 여겼거든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냥 귀찮은 겁니다.” “귀찮다고요?” “네.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갓 대학 졸업한 어린애입니다. 게다가 막내. 우리 같은 어른들과 함께 부대낀다는 게 달갑겠습니까? 더욱이 그 애는 모니터만 바라보며 주식투자만 배웠습니다.” 이민섭 사장은 장도형에게 들었던 말과 자신의 희망 사항을 섞어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냈다. 진영기 부회장이 관심 있게 들어주자 더욱 사실이라 믿고 싶었다. ======================================== [171] 헤쳐모여 2 “장도형 전무가 그러더군요. 숫자만 보던 사람은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한다고. 도준이는 논리적 사고에 트레이닝 된 아이 아닙니까? 법대, 주식 차트, 금융 투자. 당연히 채권으로 굴러가는 카드사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겁니다.” “채권 자체가 불확실하긴 하지. 더욱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사업일 때 더!” 진영기 부회장은 이민섭 사장을 유심히 보며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졌다. “앞으로 험난하겠구먼.” “부회장님. 이대로 보고만 있으실….” “그만.” 진영기는 이민섭 사장의 입을 막았다. “아버님 뜻입니다. 그분의 뜻으로 이렇게 나눈 지 겨우 두어 달 지났어요. 벌써부터 잡음이 나면 안 됩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뜻. 이민섭 사장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현업에 있다 보니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그룹 후계 구도 완성했지만, 언론부터 막은 아버님입니다. 조용히 넘어가기를 원하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순양그룹이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는 걸 피해야 합니다.” “네.” 이민섭 사장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신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같은 빌딩에 있는데 종종 놀러 오세요. 차나 한잔하며 세상 사는 이야기나 나눕시다. 지분 쪼갰다고 관계까지 쪼개서야 되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부회장님께서 내치는 게 아니라면 우리들이야 언제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이민섭은 우리라는 단어에 더욱 힘주어 말했다. 이 의미를 눈치채지 못할 진영기도 아니었다. 이민섭 사장이 연신 허리를 숙이고 떠나자, 진영기는 즉시 비서실장을 호출했다. 그는 이민섭이 했던 말을 간추렸고 비서실장 백준혁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다. “어떻게 생각해?” “장도형 전무부터 만나봐야 할 것 같은데요?” “장도형이를? 왜?” “그자가 했던 말입니다. 도준이의 뜻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죠. 장 전무도 야심 많은 자 아닙니까? 뭔가 꿍꿍이가 있어 이민섭 사장에게 흘린 걸 수도 있습니다.” “장 전무 그놈이 왜 이런 짓을 하지?” “일을 너무 잘하거든요. 하하.” “뭐?” “장도형 전무는 그 자리가 끝입니다. 절대 대표이사 자리에 오르지 못해요. 순양생명의 모든 금융상품전략은 장도형의 머리에서 나옵니다. 그런 자를 승진시키면 실무에서 손을 떼게 되는데….” “에이스 투수는 어깨가 망가질 때까지 마운드에 올려야지.” “그렇습니다. 장도형은 순양생명의 제1선발이니까요.” 진영기는 순양생명과 장도형 그리고 순양카드에 대해 생각했지만, 곧 생각을 멈추고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을 선택했다. 지시. 머리 잘 굴리고 깊은 생각을 잘하는 아랫사람에게 원하는 것을 지시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진영기가 해야 할 일이다. “장도형이를 한번 만나봐. 그놈이 뭘 원하는지 확인하고 내 손에 뭘 안겨줄 수 있는지도 확인해.”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 * * “이민섭 사장이?” “네. 새해 첫날인 어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진영기 부회장님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준이는?” “장도형 전무만 만났습니다.” “장도형이면 생명?” “네.” “노친네들이 저항을 시작한 건가? 새해가 되자마자?” “현실적으로 다가왔겠죠. 새해 인사를 아들, 아니 손자뻘에게 가야 하니까요.” “영감님들의 자존심 굽힌 인사도 거절하고 가장 젊은 장도형이만 만났다? 우리 똘똘한 조카가 어른들 모시는 방법이 아직 서툴구만.” 진동기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부회장님. 뭔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진동기 앞에 앉아 있는 세 명의 남자. 그들은 진동기가 중공업 부문을 승계받은 후 새롭게 구성한 비서진이었다. 한 명의 머리보다 여럿의 머리가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거라는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서였다. “뭐가 수상하지?” “이민섭 사장 정도라면 불만이 있으면 회장님께 뛰어가야 하지 않습니까? 진영기 부회장이라니요?” “아버님께 가서 뭐라고 하지? 애새끼랑 일 못 하겠다고 배라도 쨀까? 그 양반들도 기댈 데가 없어 그런 거야. 형님과 나를 두고 잠깐 고민했겠지. 결과는 형님이었고.” “부회장님. 이민섭 사장이 단지 불만만 털어놓았겠습니까?” 비서진들은 앞다퉈 질문과 의견을 쏟아냈다. 새롭게 시작한 만큼 자기가 더 똑똑하다는 걸 드러내고 싶어 안달인 모습이다. 사람이 평등할 수 없다. 세 명은 같은 직급, 같은 연봉을 받지만, 누군가는 떨어져 나갈 것이고 누군가는 앞서갈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불만 외에 뭐가 있지?”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손길을 내밀어달라고 요청하며 뭔가 제안했겠죠. 마냥 매달리는 것만 할 만큼 아마추어는 아니니까요.” “흥미 있는 건 카드사 사장이 나섰다는 겁니다. 금융 계열사의 수장은 누가 뭐래도 순양생명 아니겠습니까?” 그룹 사옥에는 수많은 눈이 있다. 그 눈들은 누군가를 대신해서 관찰하고 즉각 알려주는 눈들이다. 새해 첫 출근에서 두 사람이 만난 건 이미 빌딩 전체에 퍼질 것이며 곧바로 후계자 문제로 수군댈 것이 뻔하다. “의문만 제시하려고 모인 건 아니겠지? 그래서 결론은?” 세 사내는 눈빛을 교환했다. 합의를 보는 건지 눈치를 보는 건지 알기 힘든 눈빛이었다. “장도형 전무를 만나보겠습니다.” “장 전무를?” “네. 장 전무도 순양생명입니다. 그가 이민섭 사장을 만난 게 자연스럽지는 않죠.” “유일하게 도준이의 생각을 엿본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가 도준이에게 카드사에 대한 계획을 뭔가 들었으니 곧바로 이민섭 사장에게 달려갔겠죠.” “장 전무가 아는 게 뭔지 확인하겠다?” “네. 진영기 부회장님이 아는 건 우리도 알아야 하니까요.” 진동기는 이런 상황이 올 것이라는 건 예견했지만, 너무 빨리 와버려 입안이 쓰다. 두 어른이 어린 조카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한다니…. “그래. 조용히 접촉해봐. 소문 안 나게 조심하고.” “네. 주의하겠습니다.” 진동기는 비서진이 빠져나간 다음 고민에 빠졌다. 동생인 윤기를 한번 만나봐야 하나? 아니면 조카를? * * * “두 형제분의 눈치 싸움이 참…. 이민섭 사장은 진영기 부회장만 만났는데 진동기 부회장 측이 먼저 접근하더군요.” “같은 빌딩 안에서 얼굴도 안 마주치며 지내는데, 심어놓은 눈들이 얼마나 많길래…. 흐흐.” “눈이라니요?” “장 전무님. 순양 본사 임원 층에 여직원이 몇인지 아시죠? 그 여직원들 월급이 얼만지는 모르겠지만, 통장에 꽂히는 돈은 월급의 열 배는 될 겁니다.” “그럼 제 비서도…?” “장 전무님께서 따로 챙겨 주는 건 없죠?” “가끔 야근할 때 택시비 정도는 쥐여주죠.” “그런데 그 여비서 핸드백이 뭔지 아십니까?” “글쎄요. 관심이 없어서….” “그룹 핵심 임원들이 모여 있는 본관 20층 이상에 근무하는 여직원들을 유심히 한번 보십시오. 그녀들의 핸드백, 옷, 액세서리 같은 거요. 한 달 월급을 훌쩍 넘는 걸 가진 애들은 조심하시고요.” 퇴근 후 항상 자신의 책상을 정리한 여직원이다. 그간 자신이 남긴 메모, 업무 관련 서류 등을 전부 누군가에게 보고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자, 그건 이 정도로 넘어가고…. 우리 둘째 큰아버지 쪽에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처음엔 근황만 묻더군요. 대수롭지 않은 안부처럼. 그러다 결국 실장님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좀 버거워하신다고요. 흐흐.” 장도형 전무는 이런 음모의 짜릿한 맛을 느꼈는지 연신 재미있다는 미소를 보였다. “딱 카드사 하나만 언급하기에는 뭔가 앞뒤 안 맞는 것 같아 증권사 외에는 애정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더니 눈빛이 달라지더군요.” “그룹 지분을 순양생명이 잔뜩 쥐고 있으니 그런 거겠죠. 꼭 알려줘야 할 건…?” “특히 원치도 않는 카드사 때문에 굉장히 고민한다고 넌지시 흘렸습니다. 차라리 중공업 계열사 한두 개 물려줬으면 미라클의 HW 그룹에 팔아먹을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더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장도형은 서류도 꺼냈다. “이건 진동기 부회장님의 중공업 부문 계열사 목록입니다. 그중에 카드사와 교환할 만한 회사는 하이라이트 해놨어요. 기업가치만 따졌을 때 카드사와 동등하거나 조금 못 미치는 놈들입니다.” 오세현과 함께 이 목록을 놓고 논의해야겠다. HW 그룹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회사를 고르고 협상을 준비해야 한다. “진영기 부회장 측은 잠잠합니까?” “백준혁 실장이 다녀갔습니다.” 진영기 큰아버지의 오른팔, 백준혁 실장. 할아버지 댁에서 몇 번 얼굴만 스치고 지나간 인물. 뭐…. 천천히 알아 가면 되겠지. “뭐라고 그럽디까?” “꼬맹이 밑에서 재롱 피우지 말고 원하는 걸 말하라고 하더군요.” 에둘러 가는 사람이 아니었나? 이렇게 노골적으로 찔러 대는 사람이 참모로 일한다는 건 좀 의외다.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백 실장은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 했을까요?” “제 욕심의 크기를 듣고 싶어 했겠죠. 거기에 맞춰 뭔가를 제안하려 했을 테니까요. 그 대신 실장님이 가진 걸 가장 손쉽게 뺏는 데 제가 앞장서야겠죠.” 나도 궁금하다. 이 사람의 욕심은 어느 정도일까? “어떻게 대답하실 생각입니까?” “그걸 실장님과 논의하고 싶습니다만….”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이 사람, 이제 실세로 보여지는 것 외에 내가 줄 수 있는 진짜를 듣고 싶어 한다. 아직 장도형 전무와 나는 계약서 초안만 있을 뿐 서로 웃으며 사인할 만한 최종 계약서가 나오지 않았다. “순양 금융그룹 회장.” “네?” “장 전무님 명함에 찍힐 직책인데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부사장, 사장이 아니다. 회장이라는 건 아예 대형 계열사 전부를 맡긴다는 뜻 아닌가? 그는 당연히 내가 그 직책을 맡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말했던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진심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을 것이다. 단지 어린 나이 때문에 한발 물러서 있을 뿐 언제라도 전면에 나설 것이라고 믿고 있다. 재벌가 중에 뒤로 물러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실장님. 진심이십니까?” “그 정도 보상도 없이 어린 저와 함께할 생각이셨습니까? 그렇다면 저와 함께하겠다는 전무님의 마음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받는 것 없이 함께 어려움을 헤치고 걸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이미 순양그룹 최고 대우를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지금은 그 정도로 만족하시겠죠. 하지만 충분한 돈을 가지면 더 높은 것을 원하기 마련이죠. 권력이든, 이상이든 말입니다.” 장도형 전무는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 나를 보며 말했다. “뭡니까?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어서 말입니다.” “제게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미라클 보이라고? 흐흐.” 여전히 놀란 장도형에게 경고의 말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회장이라는 직책을 언제 얻게 될지, 또 얼마나 유지할지는 전적으로 전무님께 달려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제 기준에 못 미친다면 회장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건 물론이고 임원 계약에 따라 즉시 해고합니다.” “영원히 함께하자 같은 건 없군요.” 이젠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happily ever after를 원하세요? 그럼 당장 제주도 가셔서 전원주택 하나 사고 당근이나 키우며 사시는 게 나을 겁니다.” “동화 같은 스토리는 꿈도 꾸지 마라…. 또 한 번 놀랍니다. 하하.” “만족하셨습니까?” “거절하면 제가 병신이죠.” 장도형은 벌떡 일어났다. “백준혁 실장을 다시 만나겠습니다. 어떻게 말할지 방금 결론 내렸습니다.” 더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장도형 전무는 이제 실력으로 보여줘야 한다. ======================================== [172] 헤쳐모여 3 “우리 가족은 이제 새해 첫날에 모이기도 어렵네요.” “가족보다 일 때문에 모이는 게 우선이 돼버렸어.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버려야지. 윤기 너도 마찬가지잖아.” “형님께 드리는 새해 첫인사를 집이 아닌 사무실에서 해야 하다니.” 떡국 대신 커피와 치즈 케익을 앞에 둔 형제는 눈을 마주치며 씁쓸하게 웃었다. “윤기야, 미안한데 내가 커피와 치즈 케익 사 들고 네 사무실로 온 건 새해 인사나 나누려는 게 아니다. 이것도 일 때문에 왔어. 일이 없었다면 너랑 나 언제 얼굴 볼지 몰랐을 거야.”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명절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찾아뵙는 게 예의잖아. 나도 이제 인사받는다고 첫날 다 보내고 보시다시피….” 진윤기는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를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이런 네 모습이 보기 좋다. 형제가 너무 바빠 자주 못 보면 어때? 이렇게 일 때문에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럼 그 일이 뭔지 이야기해볼까? 나보다 훨씬 바쁜 부회장님이잖아. 흐흐.” 진윤기는 형님이 사온 케익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너 요즘 도준이와 자주 대화 나누니?” “그 일이 혹시 도준이 문제야?” “그래.” 진윤기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날 메신저로 쓸 생각 하지 마. 난 도준이가 내게 도움을 청할 때까지는 절대 끼어들지 않을 거니까.” “내 말을 전하라는 게 아냐. 도준이가 내게 할 말이 있을 거다. 그걸 전해달라는 거야.” “도준이가?” “그래. 그룹에서 들리는 말로 도준이가 좀 힘겨워한다고 해.” “뭐?” “아버지가 도준이에게 억지로 회사를 떠맡겼다는 생각은 안 해봤지?” 진윤기의 주름진 이마가 펴졌다. 이젠 미소까지 보인다. “형님도 이젠 눈치챘잖아. 도준이 욕심이 어마어마하다는걸. 아냐? 그런 애가 회사를 버거워해? 어림없지.” “욕심 많다고 해서 불필요한 것까지 가지고 싶진 않아. 도준이는 순양그룹의 지분을 원했지 회사를 원한 건 아닐걸? 회사에 앉아 있는 노친네들을 매일 봐야 하는 건 고역이다. 나도 힘든데.” 부인하기 힘든 말이다. 공짜로 굴러 들어온 회사를 가지는 건 쉽고 즐겁지만, 그 회사를 경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도준이가 그래? 힘들다고?” “글쎄, 그걸 확인해보라고. 나도 몇 다리 건너 들은 말이니까.” “힘들다고 하면? 형이 가져가려고?”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네가 그랬어. 도준이를 위해 비싸게 팔겠다고. 난 그 약속 지킬 용의가 있어.” 진동기는 조금도 흥분하지 않은 채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비싸게 사줄 건데?” “물건 보고 이야기해야겠지?” “확인해볼게. 괜히 떠보는 게 아니길 빌어. 그랬다가는 앞으로 협상 대상에서 제외할 거니까.” “이런 이야기 하는 거 많이 망설였다. 조카가 가진 걸 눈독 들이는 사람으로 비칠까 봐. 그러니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라. 금융 계열사는 나도 꼭 필요해서 어렵게 말 꺼내는 거다.” 목돈이 뭉텅이로 움직이는 중공업 계열이니 간간이 유동성 자금 문제가 발생한다. 이럴 때 캐시를 채워줄 은행 같은 금융사는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다. “좋아. 불순한 의도가 없는 비즈니스. 그렇게 생각할게.” 볼일 끝낸 진동기가 케익을 집으며 웃었다. “형제끼리 일 때문에 만나는 거, 나쁘지 않네. 흐흐.” “일 끝내고 소주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진윤기도 형을 향해 환히 미소 지었다. * * * “큰아버지가요?” “그래. 날 찾아왔더라. 무슨 일 있는 게야?” 좀 더 간절한 건 진동기 부회장인가? 아니면 전해 들은 말을 믿지 않기에 직접 확인하려는 것일까? 역시, 좀 더 신중한 분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버지까지 이용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있기는 한데, 그냥 모른 척하세요.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내게 말하기로 약속한 것 같은데?” “어려움이 아니니까요. 큰아버지께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가 봅니다.” “아니라던데? 그룹 내에 네가 힘들어한다는 소문이 들린다고 하더라.” “소문이 사실일 때가 몇 번이나 있었습니까? 온갖 소문이 난무하는 곳이니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아버지는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더니 슬쩍 웃음을 보였다. “소문 퍼지기를 원한 것 같구먼. 알았다. 모른 척하마.” 이번 일은 장도형 전무가 깔끔하게 처리해야 한다. 순양카드라는 양질의 상품을 싸게 처분하는 거다. 이런 손쉬운 일도 버벅댄다면 그가 순양 금융 그룹을 맡을 자격이 없다는 증거일 뿐이다. * * * “카드를 넘긴다고?” “네. 대신 뭘 가져오는 게 HW 그룹에 도움 될까요?” “순양전자.” 오세현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삼촌. 설마 나 웃으라고 하는 말이에요?” “HW에 도움 되는 건 그것뿐이다.” “카드 주고 받아 오는 겁니다. 우리 큰아버지가 바보예요? 전자를 주게?” “카드를 던지는 넌? 바보 아냐?” 어마어마한 수수료와 이자 놀이하는 회사를 던지는 것도 멍청한 짓이다. 지금 시점에서는. “그 정도로 잔소리는 끝내실 거죠?” “어쩌겠냐? 또 믿어보는 수밖에.” 오세현은 짧은 한숨 한 번 내뱉는 것으로 더는 말하지 않았다. “양쪽에 오퍼를 냈으면 경매 붙여. 만 원 한 장이라도 더 쳐주는 쪽에 넘겨.” “회사 하나 챙겨 오려고 했는데 급한 건 없나 보죠?” “필요한 게 있으면 우리가 만드는 게 낫겠지. 차라리 순양그룹 지분은 어때?”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지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받아들일 리가 없다. 이때 벼락처럼 무언가가 내 머리를 때렸다. 왜 이리 안일한가? 무조건 내가 이기는 싸움이라고 해서 절박함마저 잊고 있다니? 진짜 필요한 건 순양그룹 지배지분이다. 계열사 한두 개 뺏는 게 내 목적이 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카드를 미끼로 지배지분을 가져와야 한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하고 머리를 쥐어짜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네요. 카드 주고 지분 챙겨야겠어요.” 갑자기 달라진 말에 오세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너 진짜 네 큰아버지들을 바보로 보는 거냐? 가뜩이나 간당간당한 지분 구조인 거 몰라? 단 한 주도 내놓지 않는다고.” “아뇨. 궁지에 몰리면 주식을 내놓습니다. 고모 보세요. 천사백억에 백화점 그룹을 내놓았어요.” “그건 특수한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으로 만들어야죠. 내가 너무 조급하게 생각했습니다.” 누가 더 욕심 많은지 확인해야겠다. 드러내놓고 순양그룹의 주인 행세를 하는 장남인지, 차분하고 신중하지만, 순양그룹을 이끌어 나갈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차남인지 두고 보면 알 것이다. 어쨌든 욕심 많은 사람이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 * * “네? 교환이 아니고 팔아버린다고요?” “그렇습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만 원 한 장이라도 더 주는 쪽에 넘기라고요.” “돈이 급한 건 아니라고 말씀하신 분은 바로 실장님이십니다.” 화폐를 찍어내듯 돈을 벌어들이는 곳이 카드사다. 미래가치를 생각한다면 인수자금은 천문학적인 숫자가 될 것이다. 순양그룹이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 해도 그 정도 현금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다. 거래 자체가 불발될 가능성이 더 크다. “한번 말했다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건 어리석은 고집일 뿐입니다. 생각과 계획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대체 얼마에 넘기시려고 그러십니까?” “글쎄요. 그 판단은 전무님께서 해보세요. 전 전무님의 판단에 따르겠습니다.” 또 테스트인가 싶어 장도형의 얼굴이 굳어졌다. “판매가를 정하라는 게 아닙니다. 경매 시작가를 정하는 겁니다.” “경매요?” “네. 두 부회장님께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줄 생각입니다. 경매만큼 남자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게 드물지 않습니까? 게다가 경매 진행자가 어린 조카라면 아랫도리가 불끈 솟아오를 겁니다.” “직접 나서시게요?” 장도형은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한 내 모습에 많이 놀란 것 같다. “저도 곧 졸업입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기념으로 두 부회장님과 팽팽한 기 싸움 한번 해보고 싶군요. 두 분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하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은 장도형 앞에서 큰 웃음을 터트렸다. “자, 경매는 시끌벅적해야 맛 아니겠습니까? 전무님은 언론에 슬쩍 흘리십시오. 순양그룹은 신용카드 사업에서 철수한다, 순양그룹에서 완전히 계열 분리를 한 다음 공개 입찰을 통해 회사를 팔아버릴 것 같다고 말입니다.” 일을 너무 크게 벌인다는 생각 때문에 이미 장도형은 사색이 되었다. “뭘 그리 놀라세요? 아직 절 믿지 않는 겁니까? 이미 말했을 텐데요? 전 제 손에 들어온 걸 절대 남에게 뺏기지 않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잠시 맡겨 두는 것뿐입니다.” 하긴, 십 년 이상 곁에서 지켜본 오세현도 항상 불안에 떠는데 겨우 두어 달 나를 지켜본 장도형은 오죽할까? 거품 물고 쓰러지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 * * 『순양그룹이 신용카드 사업에서 철수할 조짐이다. 익명의 관계자는 순양카드를 계열 분리하고 공개적인 매각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까지 불리는 카드 사업의 철수가 어떤 전략의 일환인지 밝히지는 않았으나, 아직 신용카드 사업에 진출하지 못한 대현그룹이 인수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이, 이런 미친 새끼가…!” 이민섭 사장은 조간 경제면에 난 기사를 읽다 분통을 터트렸다.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죄 없는 신문만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진영기 부회장님께 지금 즉시 내가 만나잖다고 전해. 모든 스케줄 취소하더라도 날 만나야 한다고 말해. 긴급 상황이다.” 이민섭은 수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회신을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진영기 부회장의 집무실 문을 열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 사장 출근이 제일 늦네. 당사자 주제에 말이야.” 이민섭 사장은 자신을 노려보는 진영기 부회장의 눈길에 움찔하며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기사 보고 너무 놀라 정신을 가다듬느라….” “뭘 그리 놀라요? 농담이요, 농담. 얼른 이리 와 앉아요.” 엉거주춤 자리 잡고 나서야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진동기 부회장과 백준혁 실장, 양우찬 생명 사장과 고인규 증권 사장까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자, 모두 신문은 읽었을 테고….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지 한번 논의해봅시다.” 진영기 부회장이 운을 뗐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양우찬 사장이 수습책이 아니라 의문을 제기했을 뿐이다. “이 기사, 사실일까요? 기자 놈이 어디서 헛소리를 주워들은 게 아닌지부터 확인해야….” “양 사장님 감이 많이 죽으셨네. 이건 우리 쪽에서 흘린 겁니다. 목표물도 정확해요. 바로 나와 형님에게 던지는 제안서라고요.” 진동기 부회장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제안서라니요?” 양우찬 사장은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순양카드를 비싸게 사라. 아니면 대현그룹에 팔아버리겠다…. 아시겠어요? 우리 똘똘한 조카가 무슨 생각인지?” 진동기가 소리치자 양우찬 사장은 얼굴을 붉힌 채 머리를 숙였다. 설마 그 꼬맹이가 이런 짓을 할 줄이야…. “이민섭 사장님. 어떻게 생각합니까?” “네?” 진영기 부회장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민섭은 화들짝 놀랐다. 그 모습을 본 진영기는 분통을 터트렸다. ======================================== [173] 폭탄 살 사람? 1 “당신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대표이사라는 놈이 자기 회사 매각설이 나도는데 눈만 뒤룩뒤룩 굴려? 그게 사장으로서 할 행동이냐고!” “죄, 죄송합니다.” 연신 머리를 숙이는 이민섭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던 진영기 부회장은 백준혁 실장에게 말했다. “자네는 지금 언론부터 막아. 인터넷 기사 다 내리고 앞으로 이 기사를 확대 재생산하는 곳이 없도록 확실히 정리해.” “네. 부회장님.” 백준혁 실장은 즉시 일어나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을 터, 빨리 움직일수록 일이 수월해진다. “이민섭 사장님.” 진동기는 형과 다르게 차분함을 유지했다. “백 실장 달려 나가는 거 보시면서 뭔가 떠오르는 거 없으십니까?” “네? 무슨…?” 이민섭 사장은 불안한 눈빛으로 진동기 부회장을 조심스레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라면 지금 당장 순양카드 매각설은 사실무근이라고 기자회견이라도 할 것 같은데…. 사장님은 여유 있으시네요.” “주가 곤두박질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수습해요! 뭐 합니까?” 두 부회장의 질타에 이민섭 사장도 허둥지둥 달려 나갔다. 순양생명의 양우찬 사장과 증권의 고인규 사장은 두 부회장의 날카로운 서선 때문에 불안한 마음으로 자리를 지켜야 했다. “양 사장님. 고 사장님.” “네.” “네.” 두 사람의 시선은 진동기 부회장을 향했다. “순양카드를 매각한다고 가정한다면 두 회사가 가진 지분만 확보하면 됩니까?” “순양전자와 순양중공업이 우리 생명의 지분을 조금 가지고 있죠? 그러니까 매수자가 누구냐에 따라 좀 달라질 겁니다.” “현재 증시를 기준으로 최소 금액을 산정해보세요. 또한, 지난 삼 개월간의 주가를 기준으로 맥시멈도 뽑아보시고요.” “동기야. 너…!” “형님. 도준이는 분명히 팔아버릴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카드사가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이런 결정을 그놈 혼자 했을 것 같습니까? 분명히 미라클의 오세현이와 상의했을 겁니다. 카드사를 매각하고 그 매각 대금을 다른 곳에 투자하거나, 미라클이 꼭 필요한 회사를 인수하기 위한 자금으로 쓸 겁니다.” 진동기의 의견에 모두 난처한 듯 신음을 냈다. 한동안의 침묵 뒤에 진영기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인수 금액을 산정해주시고, 양 사장님.” “네.” “장도형 전무 그놈을 만나보십시오. 그래서 왜 이 지경까지 왔는지, 도준이 생각은 정확히 뭔지 꼭 알아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자, 어린 조카 사고 친 거 수습 때문에 고생 좀 하시겠습니다.” 두 사장도 수습을 위해 빠져나가자 형제만 남았다. 진동기 부회장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형을 향해 슬쩍 흔들었다. “안 끊었어?” “다시 펴.” “왜?” “그렇게 됐어. 괜찮지?” 진영기 부회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휙 저었다. 진동기가 담배에 불을 붙이자 진영기는 인터폰을 눌렀다. “재떨이 하나 가지고 와.” 진동기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 얌전히 사고 한 번 안 친 도준이잖아. 그 흔한 여자 문제도 없던 놈이 밀린 거 한꺼번에 쳐버리네.” “여자나 술하고 비교도 안 될 만큼 대차게 친 거지. 회사를 팔아먹으려 들다니.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어쩔 거야? 보고만 있을 리는 없고. 인수할 거야?” “넌?” “계산기 좀 두드려보고. 카드를 인수할 만큼 자금 사정이 좋은 건 아니니까.” “넌 빠져. 내가 정리할게.” 형의 명령 같은 말에 기분이 상한 진동기는 담배를 비벼 껐다. “조카가 흘린 물건이야. 수지타산이 맞으면 내가 빠질 이유가 없어.” “우리가 갈라서면 도준이 그놈에게 좋은 일만 해주는 거다.” “우리만 노리고 있다고 생각해? 대현그룹은 물론이고 아직 카드 사업에 진출하지 못한 놈들이 벌 떼처럼 덤벼들걸? 금융권에서도 눈치 볼 테고. 이거…. 우리가 합의 본다고 끝날 싸움 아니야.” 진동기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의지를 보이고 일어섰다. 빨리 계산기 두드린 다음 태풍의 핵인 도준이를 구슬릴 생각이었다. 그에게는 아직 호의적인 진윤기가 있다. 진영기 부회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동생의 뒷모습을 한참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 * 진 회장은 한참 동안 뒷목을 잡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이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이학재 실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주치의 부르겠습니다.” “놔둬. 몸이 아픈 게 아니라 골치가 아픈 거다.” 진 회장은 냉수를 들이켠 후, 의자에 바로 앉았다. “이거 그놈이 흘린 거야? 아니면 기자들이 소설 쓴 거야?” “흘린 겁니다. 장도형 전무가 어젯밤 몇몇 기자들과 술자리를 함께했더군요. 틀림없습니다.” “장 전무 그놈이 도준이를 부추긴 걸까?” “그럴 리가요. 도준이가 어떤 애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장도형이는 이미 도준이 꼭두각시 노릇 하고 있을 겁니다.” “하긴…. 누가 그놈을 꼬드겨? 남 꼬시는 데 일가견 있는 놈은 도준이지.” 그렇기에 더욱 뒷골이 땡기는 것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실망도 끼친 적 없이 잘 커온 손자다. 이런 짓 하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불러다 물어보기가 쉽지 않다. 물려줬다는 건 더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 노릇 하는 건 혼란만 부추긴다. 삐거덕거리더라도 새로운 왕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 맞다. “어떡할까요?” “뭘 어떡해?” “더 늦기 전에 카드사 지분을 재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학재를 바라보는 진 회장의 눈빛이 한심한 눈빛으로 변했다. “그렇게 쉽게 재조정할 수 있다면 승계 작업 잘못한 거 아냐?” “아닙니다. 도준이의 인감을 아직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주식 전부는 아니더라도 극히 일부만 옮겨도 매각은 불가능합니다.” 진 회장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풋―! 이 친구, 이직까지 도준이를 잘 모르는구먼.” “네?” “동사무소 가서 확인해봐. 도준이 그놈이 자네가 쥐고 있는 인감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놈으로 알았어? 바꿔도 벌써 바꿨을 게야.” “서, 설마…?” 이학재는 혀를 차는 진 회장 앞에서 입을 떡 벌렸다. “그놈…. 꼼꼼하다. 제 것을 남에게 맡길 놈도, 넘길 놈도 아니야. 그러니 내가 이상한 게다. 손에 쥐여준 알짜 회사를 받자마자 팔아버리려 하다니…. 이상해.” 연신 고개를 갸웃하는 진 회장에게 이학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대현그룹과 빅딜이라도 한 걸까요?” “대현이?” “네. 신문기사에 보면 대현이 반길 거라고 했습니다. 그건 틀린 말이 아니거든요. 순양카드를 넘기겠다면 대현이 총알 잔뜩 들고 덤벼들 겁니다.” “대현은 아니야. 염려 놓게.” “그렇게만 생각하실 게 아닙니다, 회장님. 도준이는 미라클까지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대현자동차의 자회사 하나를 미끼로 내걸면 카드를 넘기는 것도 자연스럽….” “아니라고. 대현 주 회장, 그 영감쟁이가 오늘내일하는 거 몰라? 이젠 사람도 못 알아본다고 하더라고. 그 영감 저승 가면? 자식 놈들의 본격적인 상속 싸움이 벌어질 텐데 총알을 왜 엉뚱한데 쓰겠어? 대현 자사주 매입하는 데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에….” “아…….” 이학재는 무릎이라도 탁 치고 싶었다. 2세들의 재산 싸움. 그 집이나 이 집이나 다르지 않다. 어찌 보면 대현그룹이 더 심할 것이다. 대현은 자식뿐만이 아니라 창업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주영일 회장의 형제들과 조카들도 수두룩하다.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인생을 걸고 만들어온 대현그룹이다. 하나라도 더 가지는 방법은 오직 지분 확보뿐이다. 어마어마한 총알이 필요하니 바깥으로 눈 돌릴 여유가 없다. 외부로 넘어갈 위험이 없으니 이학재는 한시름 놓았다. “회장님. 도준이 불러 점심이라도 하시지요. 슬쩍 물어보는 거야 어떻겠습니까? 경영에 참견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조심스럽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밥 한 끼 먹는 거야 뭐….” 진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화기를 들었다. “도준이냐? 냉큼 집으로 오너라. 아, 아니다. 오랜만이니 밖에서 만나자꾸나. 날씨가 쌀쌀하니 뜨뜻한 국물 있는 걸로 점심이나 함께하는 게 어떠냐?” * * * “어떠냐? 이 집 순대국 맛은 30년이 넘도록 그대로야. 이렇게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건 참 좋은 게야. 그렇지 않니?” “네. 맛있네요.” 분명 기사를 보셨을 텐데 계속 딴소리만 하신다. “어린 애들이야 이 깊은 맛을 알 리가 없지.” “맛있다니까요. 맛집은 애나 어른이나 다 좋아해요.” “거참, 왜 버럭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냐?”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30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순양그룹을 지킬 테니까요.” “참이냐?” 보통의 노인처럼 국물을 떠 마시며 연신 시원타라는 소리를 내시던 할아버지는 수저를 탁 내려놓았다. “네. 더 커지면 커졌지 줄어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솔직히 지금 불안하시죠?” “뭐라?” “요놈이 진짜 카드사를 팔아먹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죠.” “기사는 소설이냐?” 할아버지의 음성이 더없이 낮았다. “아닙니다. 제가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미 아실 겁니다.” “누구? 네 큰아버지들?” “그렇습니다.” 할아버지는 다시 젓가락을 들고 깍두기를 입안에 넣었다. “잘 익었네, 고놈. 허허.” 깍두기를 삼킨 할아버지는 어느새 온화한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난 사채업이나 다름없는 카드라는 게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사채로 번 돈이든 수수료로 번 돈이든 돈에는 이름표가 없다는 걸 명심해. 그 돈이 네 목을 죌 수도 있어. 내가 듣기로 카드사가 벌어들이는 돈이 꽤 많다고 했어.” “돈 많이 버는 회사니까 큰아버지도 비싸게 사주겠죠. 안 그렇습니까?” 할아버지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놈 속을 통 알 수 없으니…. 에잉.” “집 나간 소가 암소 여러 마리 몰고 들어올 겁니다.” “잡혀 먹히고 뼈만 남아버려라. 네놈 골탕 좀 먹게. 허허.” 그럴 리가. 집 나간 소는 순양그룹 지분이라는 보물 상자를 수레에 싣고 돌아올 것이다. * * * “이래도 지켜만 볼 거냐?” 진동기는 동생의 책상 위로 신문을 툭 던졌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또 왜 이러는데?” 진윤기는 신문을 펼치며 형의 얼굴이 굳은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순양카드 매각설이라는 활자를 발견하자 그의 얼굴도 굳어버렸다. “이거 사실이야? 아니면 소설이야?” “도준이가 흘리고 다니는 거다. 모르겠어?” “도준이가 왜?” “그건 도준이에게 물어봐야지. 그리고 도준이 대답을 내게 알려주고.” “무슨 소리야? 좀 알아듣게 말해봐!” 평상시의 침착한 모습과 다르게 격앙된 동생을 보자 진동기는 움찔했으나 동생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것으로 생각했다. “도준이가 아무리 잘난 놈이라고 해도 애는 애다. 카드 사업은 어느 정도 리스크를 안고 가야 하니 불안한 게지. 그래서 넘겨버리려는 거야.” “기사대로라면 대현?” 진윤기는 신문을 높이 들었다. “아니. 나와 영기 형에게 보내는 메시지 아닐까? 우리가 비싸게 사주지 않으면 딴 데 넘겨버리겠다는 협박까지 곁들여서.” 진윤기는 신문을 움켜쥔 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입을 열었을 때는 의외의 말이 나왔다. “좋아. 내가 도준이를 만나볼게. 그리고 그놈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든 다 알려주지. 형은 오늘 저녁 어때? 시간 나?” “뭐?” “아니, 무조건 시간 내줘. 저녁 먹으며 술 한잔하자.” “야! 갑자기 그게….” 진윤기는 손을 들어 진동기의 입을 막고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영기 형. 바쁜 거 알지만 저녁에 시간 좀 내. 카드사 문제, 내가 정리할 테니까 꼭 와. 물론 동기 형도 함께야. 순양호텔 일식당 예약해놓는다. 8시.” 통화를 끝낸 진윤기는 진동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형도 들었지? 8시다. 늦지 마.” 일방적이지만 어쩔 수 없다. 빠질 수도 없고 늦어서도 안 된다.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형과 동생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 저녁때 보자.” 진동기가 휙 하니 나가버리자 진윤기는 긴장이 풀리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역시 연기는 배우가 해야 하는구먼. 생각보다 어렵네.” 아들이 써준 시나리오대로 대사를 읊었다. 개봉은 오늘 저녁 8시. 흥행이 되려나…. ======================================== [174] 폭탄 살 사람? 2 “회사에서 보면 되는데 굳이 왜….” “여긴 어디… 입니까? 미라클 본사 같은데… 요?” 어정쩡한 말투, 두리번거리는 눈. 가볍게 떨리는 손끝. 회의실로 들어오는 세 사내의 모습에서 그들이 긴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업주의 손자이며 최대주주, 자신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기는 하지만 딱히 나서지 않은 나를 어떻게 대할지 확신하지 못한 모습이다. “일단 앉으세요. 맞습니다. 미라클 본사지만 여긴 제가 주로 혼자 일하는 곳이죠. 직원 서너 명이 전부입니다.” 엉거주춤 자리에 앉는 그들에게 먼저 불편한 말투부터 바꿔주었다. “예전처럼 편히 말씀하세요. 대주주지만 회사에서 맡은 직책도 없고 지금에 와서 존댓말 듣는 건 제가 더 불편합니다.” “그래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편히 말한다고 해서 위치가 변하는 건 아니니까요.” 위치가 변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인사권은 내가 쥐고 있다는 뜻이며 내가 상사라는 의미였다. 세 명 사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가 급히 보자고 한 건 다른 일 때문이 아닙니다.” 테이블 위로 신문을 던지니 그들의 굳은 얼굴이 벌겋게 변해버렸다. “기사는 다들 보셨죠?” “그래. 그렇지 않아도 이것 때문에….” “잠시만요. 제가 먼저 말씀드려도 될까요?” 양우찬 사장은 입을 닫고 머리를 끄덕였다. “이민섭 사장님.” “응?” 화들짝 놀라며 눈이 동그래졌다. “기자회견 잘 봤습니다.” “그래? 봤어?” “네. 점심시간 뉴스에 나오더군요. 그런데 이 기사를 전면 부인하셨더군요. 뭐라고 그랬더라…? 아, 기자의 소설 같은 이야기 때문에 주가가 떨어지면 안 된다, 맞습니까?” “그, 그래.” “그런데 어떻게 소설이라고 확신하셨죠?” “그야 당연히… 실적 좋은 순양 계열사를 매각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주식회사의 매각은 대주주들이 보유한 주식을 파는 겁니다. 주주가 바뀌는 거죠. 그렇다면 이 기사를 보시고 나서 즉각 내게 물어봐야 하는 게 순서 아닙니까?” “…….” 눈길을 피하며 대답을 못 한다.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두 명도 이미 내 마음을 읽었는지 슬슬 엉뚱한 곳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양우찬 사장님과 고인규 사장님.” 이름까지 부르자 더는 내 눈길을 피하지 못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두 분께 여쭙겠습니다. 순양카드에 관계된 기사가 났는데 왜 엉뚱한 회사 사람들과 만나 상의하십니까? 여러분께서 오늘 아침 일찍 만난 두 부회장님은 우리 회사 일에 조금도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 그건….” “아, 두 부회장님께서는 제 큰아버지니까 제가 조언을 구하면 그때 적당한 덕담이나 툭 던질 수 있겠네요. 하지만 그게 전부 아닙니까?” 모두 입을 닫고 헛기침만 연신 해댔다. 할 말도 없을 테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이제 슬슬 어린애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다. 영감님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어쩌겠는가? 문제만 생기면 큰아버지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사람들이니 자업자득이다. “그렇게 행동하신 건 절 인정 못 하겠다, 뭐 이런 뜻입니까?” “도, 도준아. 그게 아니고….” 양우찬 사장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제가 더 이상 어떻게 양보합니까? 사장님들 체면 생각해서 그 어떤 인사 발령도 하지 않았고, 경영에는 손 담그지 않겠다고 했잖습니까? 그럼 대주주 자격은 인정해야지요. 아닙니까?” 모두 얼굴만 붉힌 채 머리를 들지 못했다. 좀 약한가? 더 심하게 해야 하나? “솔직히 제가 마음만 먹으면 그깟 회사 서너 개는 손가락질 몇 번이면 굴러갑니다. 끽 해봤자 보험 아줌마들 관리하는 게 전부고, 카드 왕창 발급해서 수수료 떼먹기와 이자나 챙기는 사업 아닙니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노친네들 눈썹이 움찔했고, 이마에 주름이 가득 잡혔다. “제가 카드사를 정리하려는 이유도 투자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 화재, 증권은 고객의 돈을 빨아들이지만, 카드는 우리 돈을 고객에게 빌려주는 거 아닙니까? 그 돈, 제가 굴리면 수십 배는 더 벌어요. 아시겠습니까? 제가 어떤 사람인지?” 이민섭 사장의 인내심이 극에 달한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만 더 하면 다 팽개치고 나가버릴까? “사장님들이야 인생을 순양그룹에 바쳤으니 순양그룹이 대단해 보이겠지만 우물 안 개구리예요. 미국 보세요. 지난 10년간 유례없는 초호황기를 맞았습니다. 다우존스 지수는 5배나 뛰었다고요. 순양은 5배 성장했어요?” 좀 억지인가? 주가지수와 기업 성장률을 비교한다는 게? 하지만 뭐 어떠랴? 어차피 지금은 억지 부리며 잘난 척하는 어린놈 코스프레 중인데. “핸드폰 팔고, 세탁기 팔아서 번 돈? 월 스트리트에서 며칠만 굴리면 그 돈 벌어요. 세상은 금융이 지배하는데 아직도 생산이네, 수출이네 하며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거 보면……. 솔직히 같잖습니다.” 결국 참다못한 양우찬 사장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다 때려치우고 투자 회사나 하자는 거냐?” “그러고 싶지만,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거라 당분간은 쥐고 있어야죠. 아, 순양증권은 앞으로 투자 전문 회사로 바꿔버릴 생각이니 남겨 둬야겠네.” 최대한 건방 떨며 거만한 표정을 짓자 마침내 이민섭 사장이 폭발해버렸다. “어린놈의 새끼가 뭘 안다고 쫑알쫑알…! 이놈아.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시멘트 공구리 쳐 가며 공장 세웠다. 그 공장 덕분에 너 같은 애새끼가 회장 흉내 내는 거다!” “추억이나 붙잡고 그때가 좋았네 뭐네 하시려면 은퇴하시고 고향으로 내려가세요. 시간은 늘 미래로 향합니다. 과거로 역행하지 않아요.” 곧바로 되받아치자 이민섭 사장은 온몸을 부르르 떨 뿐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다. “제 할 말은 끝났습니다. 카드사는 정리할 것이고 나머지 회사도 수익률 낮으면 언제든 정리합니다. 수익률 기준은 제 개인 투자 수익률입니다. 원하시면 언제든 제 수익률 공개하겠습니다. 이런 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선택지는 하나뿐입니다. 여러분께서 좋아하시는 제 큰아버지 회사로 옮기세요. 그 전에 사표 쓰시고요.” 사표 쓰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내 손으로 직접 사장 자리에 앉힌 게 아니니 날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 얼굴을 보면 열 살배기 어린애의 모습이 떠오를 텐데 어떻게 내 뒤에 설 수 있겠는가? 내 손으로 대표이사를 선임해야 한다. 그래야 직장 생활에서 정점을 찍은 그 감격의 순간이 나와 겹친다. 내게는 이런 기억을 간직한 임원이 필요하다. “할 이야기 다 했으니 이만 나가보세요. 전 할 일이 많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두 우르르 일어나 나가버렸다. 저들이 참았던 분노는 쾅― 하는 문 닫는 소리에 모두 드러났다. 이제 큰아버지들에게 쪼르르 달려가 내가 했던 말을 더 부풀려서 할 테고, 큰아버지들이 그 이야기를 기준으로 나를 판단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 * * 순양호텔 일식당 앞에 서 있는 팻말을 보며 진동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금일 내부 수리로 인해 휴업합니다. 고객님들께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보나 마나 진영기 부회장의 짓일 것이다. 일반인과 한자리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특권의식으로 가득 찬 장남이다. 태어날 때부터 순양의 창업자 장남이었으니 스스로를 선택받은 자로 규정하고 모든 것이 특별해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나지 못한다. 진동기는 머리를 저으며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부회장님. 자리는 이쪽에 마련해 뒀습니다.” “아직 아무도 안 왔어?” “네.” 딴 사람들의 지각을 자신의 잘못인 양 머리를 들지 못하는 직원을 보자 짜증이 솟구쳤다. “가서 시원한 맥주부터 한잔 가져와. 자리는 창가로 옮길 테니까.” 진동기는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정원이 가장 잘 보이는 창가에 자리 잡았다. 직원이 가져온 차디찬 맥주를 한 모금 마시니 속이 좀 가라앉았다. 입구 쪽이 소란스럽더니 진영기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 혼자야? 윤기는?” “아직. 오겠지, 뭐. 앉아.” “이 자식은 뭐 하는 거야? 일찍 일찍 안 움직이고!” 진영기 역시 짜증을 내더니 손을 들었다. 직원이 쪼르르 달려와 허리를 숙였다. “나도 맥주 좀 가져다주고, 음식 내와. 먹으면서 기다릴 테니까.” “네. 부회장님.” 코스 요리가 하나둘 나왔지만, 두 사람은 음식에는 수저도 대지 않고 한동안 말없이 맥주만 홀짝거렸다. 이윽고 진영기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윤기 이 자식, 뭐 하는 거야? 30분이나 지났는데.” “우리에게 시간을 주는 건지도 모르지.” “시간이라니?” “먼저 협상할 시간.” 진영기는 입으로 가져가던 맥주잔을 탕 내려놓고 묘한 미소를 보였다. 비웃는 것처럼. “손 떼. 너나 나나 서로 안방 들여다보듯 회사 사정 뻔히 아는데…. 넌 카드 인수할 자금 없잖아.” “쌈짓돈이라는 게 있잖수.” “욕심 때문에 무리하지 마. 어차피 카드사가 꼭 필요한 계열사도 아니잖아.” “그건 피차 마찬가지 아냐? 떼돈 버는 순양전자가 있는데 돈놀이하는 회사 가져가서 뭐 하려고?” “필요한 이유는 너랑 다르지 않아. 그렇지 않아?” 순양의 계열사 하나라도 더 늘리려는 목적, 세부적인 건 다를 수 있지만 큰 목적은 보여주기뿐이다.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계열사 숫자. 누가 더 많이 가지느냐가 바로 위상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부에서 순양을 바라볼 때 두 형제 중 누가 우위에 있느냐는 바로 크기로 평가할 것이다. 매출, 영업 이익, 계열사 수 등등. 기업이 외형을 불리려 노력하는 것이나 계열사를 늘리려는 두 형제의 노력이나 다를 바 없다. 진영기 부회장은 이미 순양카드의 기업가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회사를 지배하기 위한 지분도 파악했고 그에 걸맞은 자금도 충분하다. 어린 조카가 미친 짓만 하지 않는다면 순양카드는 분명히 손에 들어온다.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볼 때 다시 입구 쪽이 소란스러웠다. “누가 이따위로 영업하랬어요? “그게 아니고….” “그거든, 저거든! 여기 일일 매상이 얼만 줄 몰라? 하루 쉬면 그 돈이 하늘에서 떨어져?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일하는 거요?”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부회장님 지시라 저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부회장? 진서윤 부회장님?” “아, 아닙니다. 진영기 부회장님께서….” “뭐?” 저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데 들리지 않을 리 없다. 진영기 부회장은 얼굴을 팍 구겼다. 게다가 저 목소리는 기다리던 동생의 목소리가 아니다. “형님. 저거… 도준이 아뇨?” “뭘 물어봐? 껑충하게 큰 키만 봐도 딱 알겠구만. 근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 “그러게. 저놈이 왜 와?” 진동기가 휴대전화를 꺼냈을 때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문자가 떴다. 『직접 담판 지으세요. 순양 계열사는 내 것이 아니고 도준이 꺼니까. 너무 심하게 닦달해서 애 울리지 말고, 살살 타일러서…. 그럼 이만.』 황당한 진동기가 진윤기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그의 조카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테이블 곁으로 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큰아버지. 아버지가 갑자기 연락하셔서 부리나케 달려왔습니다.” 두 사람은 꾸벅 머리를 숙이는 조카를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카를 앞에 두고 회사를 넘겨라, 팔아라, 할 생각하니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 [175] 폭탄 살 사람? 3 진영기 부회장은 진도준의 얼굴을 보자마자 오늘 낮, 금융사 사장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증권가 매니저?” “그렇습니다. 딱 그 정도입니다. 그쪽으로는 상당한 소질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 여의도 증권가에서도 진도준이 뭘 찍었느냐가 초미의 관심사라고….” “급히 날 찾은 이유가 도준이 칭찬 늘어놓으려는 거 아니잖소. 그래서요?” “아, 죄송합니다.” 진도준에게 상처 입은 자존심을 안고, 진영기 부회장에게 달려온 세 명의 사장은 오늘 겪었던 수모를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도준이는 경영보다는 차라리 회사를 판 돈으로 투자에 쏟아붓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맞소?” “그렇습니다. 열심히 회사를 키워서 돈을 버는 것보다 주식투자가 훨씬 쉽고, 빠르고,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뭐요? 주식투자에 빠진 사람은 도박 중독과 유사하다던데…. 혹시 도준이가 그런 거요?” 주식투자는 도박이 아닌 건강한 투자라고 주장하지만, 경쟁, 모방, 열중, 우연의 요소가 적당히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사람이 병적으로 집중하는 매력. 즉, 도박의 얼굴이 공존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거기다 지금까지 진도준이 보여준 모습, 대학생이지만 젊음을 즐기기보다 모든 생활이 주식투자 위주로 꾸려져 있었고, 취미는 차트 분석이고, 특기는 종목 발굴이다. 이 정도면 중독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아닌가? “아,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도준이가 카드사를 빨리 매각하려는 이유가 바로 도박 자금 마련일 수도 있겠군요.”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한다. 세 명의 사장은 오늘 진도준에게 들었던 폭언이 한낱 도박 중독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철저히 무시할 수 있다는 것에 오히려 위안을 얻었다. “아버님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기절초풍하시겠구먼.” 진영기는 이 사실에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어정쩡한 심정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도박에 환장한 어린놈의 본모습을 몰라본 아버지에게 화내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횡재도 없다. 돈만 듬뿍 안겨준다면 그룹의 지분을 잔뜩 쥐고 있는 순양생명과 증권까지 넘겨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 * “많이 기다리셨죠? 혹시 아버지한테 연락 못 받으셨습니까?” 두 분의 표정을 살피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가장 우려하는 것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것이었지만 이분들도 사업가였다. 불쾌한 기색은 분명하지만, 거래를 앞두고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방금 문자 받았다. 너랑 직접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는구나.” “문자?” 진영기는 후다닥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했다. 그의 표정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이 자식은 연락 주려면 빨리 주던지…. 에이.” 폴더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은 큰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넌 체면을 좀 지켜. 여기 일하는 애들하고 왜 언성을 높이는 거야?” “그…. 그게….” 뒷머리를 긁으며 얼버무리자 큰아버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변했다. “그 매상 내가 챙겨주마. 됐지?” “아, 아닙니다. 큰아버지. 전 큰아버지 지시 사항인 줄 모르고….” “형도 그 정도만 해요.” 진동기 부회장이 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급히 오느라고 고생했다. 저녁 챙겨 먹어.” 그래도 둘째가 더 영리하다. 본심은 숨기고 윽박지르기보다 챙겨주는 척한다. “네. 큰아버지께서 먼저 드십시오. 아직 첫술도 뜨지 않으신 것 같은데.” “그래 먹자. 형님도 좀 드세요.” 한동안 말없이 먹기만 했다. 내가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아버지의 일방적인 통보에도 이렇게 달려 나온 걸 보면 두 사람은 지금 입안이 바짝 마르고 음식 맛도 모를 것이다. 가끔 내 술잔에 술을 채워주는 것 외에는 상갓집 분위기와 다르지 않았다. 누가 가장 목이 마를까? “도준아.” 역시, 우리 첫째 큰아버지. 성급한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네.” “들리는 소문이 사실이냐? 카드사를 정리한다는 거 말이다.” “아직 생각 중입니다. 아, 오해는 마십시오. 큰아버지. 결론 내리기 전에 상의드리려고 했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라는 걸 잘 아는지 구겨진 얼굴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네 할아버지가 주신 걸 쉽게 버리는 거 아니다. 쥐고 있어.” 진동기 부회장이 날 보며 타이르듯 말했지만, 진심이 아닌 것쯤 한눈에 알 수 있다. 저 탐욕에 젖은 반짝이는 눈빛이 말해준다. “그렇지 않아도 할아버지께서 절 부르셨어요.” 두 사람은 동시에 수저를 탁― 하고 내려놓았다. “뭐라고 하시더냐?” “이왕 물려준 거 더 간섭하지 않으시겠다고…. 누구에게 팔던 알아서 하라고 하셨어요.” 누구에게! 이 말은 두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조카가 가진 것을 뺏든, 싸게 사든 괜찮다는 뜻 아닌가? “그래서? 넌 뭐라고 말씀드렸어?” “순양카드를 팔아 훨씬 더 큰돈을 벌겠다고 했습니다. 1조가 넘는 돈이 들어오면 지금 순양증권의 수익률의 몇 배는 벌어들일 자신 있습니다. 하하.” 이때는 최대한 거만하게 웃어줘야 한다. 하지만 두 분 큰아버지는 내 웃음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귀를 울린 숫자, 1조 원. 장도형 전무가 뽑아준 자료에 따르면 최저가는 1조2천억이었다. 이 금액이면 해외 금융사들도 거품 물고 덤벼들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 큰아버지들 역시 머릿속에는 하나의 숫자가 있을 것이다. 바로 순양카드의 맥시멈 가치. 그 숫자가 넘어가면 절대 인수하지 말라는 참모진들의 당부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을 게 뻔하다. “진심인 게로구나.” 진동기 부회장이 곁눈으로 흘깃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 미국은 부동산을 베이스로 한 금융상품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투자한다면 몇 년 안에 두 배로 만드는 건 문제 없어요. 신용카드 수수료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조금 과장해서 그렇지 꼭 틀린 말은 아니다. 두 배까지는 아니고 6, 70%는 가능한 수익률이다. 한껏 잘난 척하며 투자를 말했지만 두 사람은 나를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다. 프랜시스 언더우드가 말하길 “권력 대신 돈을 선택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실수다. 돈은 10년 후 허물어지는 새러소타의 현대건축물과 같다. 하지만 권력은 반세기를 지탱하는 오랜 석조 건축물과도 같은 것이다.”라고. 내 할아버지는 순양그룹을 이용하여 돈으로 권력을 샀고 한 세대를 지나 순양그룹은 권력이 되었다. 난 돈을 좇는 멍청이이고 두 분 큰아버지는 내가 버린 권력의 한 조각을 주우려는 현명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구나. 우리야 주식투자니, 펀드니 하는 걸 잘 모르니…. 이미 구세대가 돼버렸어. 허허.” 진동기 부회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큰형님에게 눈짓했다. 일단은 어린애 장단이라도 맞춰주라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 조카, 대단한데? 두 배라니. 허허.” 싸게 먹으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까지 하는 걸 보면 장사치는 장사치다. 급한 성격의 장사치가 먼저 본심을 드러냈다. “도준아.” “네.” “너 혹시 순양카드를 대현그룹에 넘길 생각이었니?” “아뇨. 정한 건 없습니다. 오세현 대표와 상의했는데…. 참, 아시죠?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대표.” 두 사람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분 말씀이 농협에서 관심을 보인다고 하더군요. 다양한 카드 구성, 확실한 전산망 등을 고려하면 우리 순양카드 인수가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두 분 큰아버지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농협이라면 충분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조건만 맞다면 순식간에 채갈 것이기 때문이다. “도준아. 아무리 그래도 순양의 이름을 다른 곳에 넘기는 건 옳지 않아. 회사 하나하나에 할아버지의 숨결이 스며든 건데…. 너도 잘 알잖니.” 내가 할아버지에 약하다는 걸 아니 감성을 건드리시겠다? “아, 아직 결론 내린 것도 아닙니다. 서두를 사안도 아니고요.” 속이 좀 탈 것이다. 서두르면 다른 곳으로 넘어갈 위험이 있고, 서두르지 않다가 내 마음이 변해버리면 카드사 인수가 물 건너 가버린다. 특히 둘째 큰아버지는 카드사 인수가 절박하다. 현금 유동성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카드사를 가져오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제 침착한 진동기 부회장이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도준아. 차라리 우리에게 넘기는 게 어떠냐? 값은 후하게 쳐주마.” “우리? 우리라니? 회사가 조립식 장난감은 아니잖아. 쪼개자는 거냐?” “형님. 쪼개자는 게 아니라 공동 인수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가만히 보자 보자 하니까 노는 꼴이 아주 가관이구먼.” 진영기 부회장의 인내는 여기까지였다. “도준아. 허튼소리 그만하고 순양카드는 이 큰아버지에게 넘겨라. 너도 경영하기 힘들어하니, 내가 후하게 쳐주마.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낸다. 됐지?” “저, 저기… 큰아버지. 그게….” “시끄럽다. 아무리 철부지라고 해도 그렇지, 순양의 이름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아야지! 부끄럽지도 않아?” 서슬 퍼런 그의 기세에 맞장구는 쳐주는 게 맞지 않을까? “죄, 죄송합니다. 큰아버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빨리 둘째 큰아버지가 나서야 할 텐데, 왜 이리 미적거리시나? “형님. 그런 식으로 윽박지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도준이가 뭘 알겠습니까? 그래도 현명한 아이니 잘 타이르면 됩니다. 도준아.” “네.” “너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고 또 순양의 금융 부분 대주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일이 얼마나 큰 건인지 잘 알 거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딱 하나만 약속해라.” “네. 어떤 약속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두 분의 눈치를 보며 잔뜩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순양카드를 정리한다고 해도 순양의 이름을 지워서는 안 된다. 할아버지께서 널 얼마나 이뻐하시니? 그걸 생각해서라도 우리 말을 들어야 한다.” “그 말씀은…. 두 분께 매각하라는 뜻이겠지요?” “두 분은 무슨! 나한테 넘겨.” “형님. 쫌! 억지 부리는 건 그만합시다.” “동기야! 네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몰라? 1조라고, 1조! 이 돈을 만들 수나 있어? 철강이든 기계든 네 계열사를 팔아야 가능한 금액이라는 걸 알 거 아냐!” 충분히 무르익었으려나? “저기, 큰아버지.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1조가 아닙니다.” “뭐?” “1조가 넘는다고 말씀드렸는데….” 눈이 휘둥그레진 두 사람을 향해 일단 한숨부터 쉬고 말했다.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겠습니다. 미라클과 순양카드에서 산정한 최소 밸류에이션(valuation, 기업가치평가)은 1조2천억입니다. 전 1조4천억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요. 이 정도만 주신다면 순양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두 분 큰아버지께 넘기겠습니다.” 1조4천억이라는 숫자는 진동기 부회장을 충분히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가 이 돈을 만들기 위해서는 계열사를 정리하지 않는 한, 회사 지분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금융권은 대출 대신에 직접 순양카드를 인수하려고 나설 것이다. 아니, 그보다 앞서 담보능력이 되는지도 짚어봐야 한다. 진동기 부회장의 표정을 확인한 진영기 부회장은 이미 승기를 잡은 듯 의기양양했다. “좋다. 나 역시 분석은 해야 하지만 도준이 너의 조건에 최대한 맞춰주마. 이제 실무진들 불러서 협상하면 되겠지?” 이 정도 말까지 나왔는데도 둘째 큰아버지가 입을 열지 못하는 걸 보니 자금 여력이 정말 좋지 않나 보다. 하지만 쉽게 끝나는 싸움은 재미없다. 피도 좀 흘려야 제맛이다. “그럼 매각 대금은 3년 만기 채권으로 하겠습니다. 가족인데 이 정도 편의는 봐드려야죠. 저야 뭐 돈이 급한 건 아니니까요. 곧바로 실무진에게 세부 사항 준비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채권이라는 말을 던지자마자 두 분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3년 만기 채권. 외상 거래다. ‘외상이라면 소라도 잡아먹는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 [176] 폭탄 살 사람? 4 “자, 잠시만. 도준아. 너 방금 뭐라고 했어? 3년짜리 채권이라고 한 거 확실하지?” 진동기 부회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반면에 진영기 부회장은 너무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못 했다. “네. 대신 매각 대금은 1조4천억으로 하겠습니다. 아 참,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은행 부채가 4천억 이상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부채 안고 9천억 조금 넘을 겁니다.” “9천억?” 진동기 부회장의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숫자 계산이 아니다. 3년 뒤 9천억을 갚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이미 안중에 없다. 1년 뒤도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세상은 휙휙 돌아간다. 하물며 3년 뒤의 회사 상황을 어떻게 정확히 추정할 수 있을까?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1조에 가까운 채권을 발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만 계산 중일 것이다. 반면에 다잡은 승기를 놓쳐버린 진영기 부회장은 할 말을 찾느라 전전긍긍이었다. 하지만 가족이라 편의를 봐주겠다는데 외상 거래 불가를 외칠 수도 없는 일, 자꾸 동생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기뻐하는 한 사람과 전전긍긍하는 또 한 사람의 표정을 보니 우습기도 하다. 남은 시간이 3년인 시한폭탄을 서로 가져가려 눈치를 보는 꼴이라니. 천천히 오는 변화는 적응할 수 있다. 가랑비 몇 방울이 떨어지면 폭우가 오기 전에 비를 피할 시간이 있지만,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는 고스란히 맞아야 한다. 하지만 위험은 항상 갑자기 닥치며 혼자 오는 법이 없다. 위험은 두 가지 이상이 함께 움직인다. 강풍을 동반한 소낙비처럼. 태풍을 동반한 쓰나미처럼. 3년 뒤 카드 대란이 소낙비라면 만기가 돌아오는 1조 원가량의 채권은 강풍이 될 수도 있고 쓰나미가 될 수도 있다. 카드 대란으로 채권회수가 불가능해지고 회사의 자금이 씨가 말라갈 때, 1조 원이라는 채권은 핵폭탄을 맞는 것이나 다름없다. 누가 이 폭탄을 가져갈지 궁금하다. 자금력이 풍부한 순양전자라면 강풍과 소낙비를 견딜 수도 있다. 하지만 순양중공업이라면? 3년 뒤의 중공업 시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쉽게 버텨낼 수는 없을 것이다. 시한폭탄의 효과를 보려면 진동기 부회장이 카드사를 인수하는 게 훨씬 좋긴 한데…. “도준아! 제정신이야? 3년짜리 채권이라니? 카드사를 매각하는 순간 수익이 끊어지는 거다. 당장 자금 압박에 시달릴 수도 있어.” 진영기 부회장이 황급히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형님. 헛소리 좀 그만하쇼. 도준이가 맡은 계열사는 전부 화폐 찍는 은행이나 다를 바 없어요. 자금 압박은 무슨…!” 진동기 부회장은 형님을 향해 눈을 부라린 다음 내게 말했다. 분명한 확답을 받으려는 것이다. “도준아. 카드사를 1조4천억으로 평가한 것은 다른 계열사 지분을 싹 뺐다는 뜻이지?” “그렇습니다. 관계 자회사 서너 개를 제외하고 핵심 계열사 주식은 다 옮길 겁니다. 순양생명이나 순양증권 지분까지 포함하면 3조에 육박하니까요.” “좋아. 그리고 매각 대금 전부 3년 만기 채권으로 받겠다는 거 맞지?” “네, 큰아버지. 우린 가족이니까요.” 둘째 큰아버지에게 환한 미소를 보냈다. 그는 내 미소에 화답이라도 하듯 술을 따랐다. “그래. 일단 그 정도로 끝내자. 자세한 이야기는 실무자들이 해야겠지. 그리고 형님.” “뭐냐?” “조카 보는 앞에서 언성 높이지 맙시다. 식사 끝내고 우리 둘이 따로 이야기 좀 하시죠. 어떻습니까?” 진동기의 간절한 눈빛, 조카 앞에서 체통을 잃지 않으려는 마지막 자존심. 이 눈빛을 진영기 부회장도 거절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수저를 들었다. “일단 먹자. 그리도 도준아.” “네. 큰아버지.” 진영기 부회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인자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네 어깨에 짊어진 회사가 무겁니?” “조금은요. 그래도 제가 잘 아는 분야라서 다행이죠. 만약 제조업이었다면…. 어휴,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공장에, 노동자에, 노조에….”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오세현 대표 보면 알 수 있어요. 아진그룹, 순양자동차, 대아건설…. 이 회사들 챙기느라 정신없더군요. 그나마 사장들과 임원들이 제 회사처럼 챙기니까 버티죠. 저였다면 못 버텼을 겁니다. 그 임원들이 어린 저를 인정하겠어요?” 큰아버지들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해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다. 사람 상대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직 지시나 명령 내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놈. 그 맛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경영 상황이 나빠지면 내 멘탈이 흔들릴 것이고 그때는 어떻게든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 앞으로 어렵거나 힘든 일 생기면 언제든 우리에게 말하렴. 적극 도와주마.”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 척한다. 가증스럽게…. “네. 감사합니다.” 폭탄은 매물로 내놨고, 서로 사겠다고 다투는 모습까지 봤으니 할 일은 끝났다. 이제 경쟁을 붙여 1조4천억 이상을 뜯어내면 되는데…. 매각 대금을 너무 올리면 첫째 큰아버지가 유리하다. 가족인데 경쟁은 동등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자나 듬뿍 뜯어낼까?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기 싸움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코스 요리와 디저트까지 먹고 나니 이만 일어나야 했다. “그럼 저 먼저 일어날까요? 두 분은 더 말씀 나누실 거죠?” “아, 그래. 먼저 가렴. 수고했다.” 두 분에게 허리를 숙이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조금 아쉽다. 경영이나 지배보다는 승부에 집착하는 모습을 더 보여주고,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돈벌이를 좋아하는 단순한 모습을 부각하고 싶었다.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경계심을 희석할 수 있었을 텐데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 * * “어떻게 생각해?” “뭘?” “도준이 말이유. 저놈 오늘 진심이었을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저놈이 본모습을 숨겼든, 고작 저 정도 놈이든 변하는 건 없어. 도준이가 가진 회사, 지분, 다 가져와야 하니까.” 진영기는 술을 삼키며 속마음을 드러냈다. 어차피 동생도 자신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잘 안다. 재미있는 일이다. 모두에게 진심을 속이지만 가장 강력한 경쟁자니까 숨겨야 할 것이 없다니 말이다. 진동기는 술을 홀짝이면서 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심을 드러냈다. “형님. 순양카드 꼭 가져야겠수? 그룹 지분도 없다고 하잖아.” “자식이, 꼭 아쉬울 때만 그런 표정이지?” “형님!” “그만해. 지금 와서 서로 사정 봐줘 가며 챙기는 우애 좋은 형제 흉내 내면 뭐하냐?” “그래서? 회사 하나 놓고 경매라도 붙자고? 우리가 싸우면 도준이만 좋아지는 거, 알잖소?” “안 싸우면? 너 좋아지는 거는 괜찮고? 돈지랄할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포기해.” “도대체 이유가 뭐요? 카드사가 현금 돌리기 좋다고는 하지만 형님은 전자만으로도 충분하잖아. 그리고 소비재 관련 회사도 많아 현금 아쉬울 건 없는데 왜 욕심내는 거요? 그냥 나 엿 먹으라고?” “뭐? 엿 먹어? 이 자식아! 엿 먹은 건 나야! 난 이미 아버지한테 엿 먹었다고. 빌어먹을.” 쨍강―! 진영기는 술잔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내가 철들기도 전부터 아버지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했다고. 영기야, 앞으로 넌 순양의 선장이 될 거다. 내 모든 걸 네게 줄 테니 넌 더 웅장한 순양을 만들어야 한다.” 진영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수십 년을 그 말을 믿고 살았는데…. 내 나이 곧 환갑이다. 이 나이에 받은 게 절반도 안 돼. 무슨 말인 줄 알아? 네가 가진 거든, 어린 조카 새끼가 가진 거든, 전부 내 꺼라고! 내가 내 것을 돈 주고 사야 하는 지금 이 상황이 지랄 맞은 거야! 이래도 내가 너 엿 먹이는 거라고 생각해?” 진영기가 불같이 화를 냈지만, 진동기의 눈빛은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았다. 조금 안쓰럽기까지 했다. 장남이란 저런 것인가?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막중한 중압감을 느끼지만 대신 부모의 모든 것은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는 존재가 장남인가? “형 생각은 잘 알았어. 그럼 나도 생각을 고쳐먹어야겠어.” “무슨 생각을 어떻게 고쳐먹어?” “아주 잠시, 각자 맡은 계열사를 더 키우고 더 늘려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필요하다면 서로 바꿔가며…. 거 있잖아, 선의의 경쟁 같은 거. 그런 걸 생각했는데…. 역시 안 되겠어. 그냥 지분 싸움하자고. 누구 하나 자빠져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할 때까지.” 진동기는 입을 닦은 냅킨을 식탁에 툭 던지며 일어섰다. “순양카드는 내가 가져갈 거야. 형도 아버지에게 배웠겠지? ‘돈으로 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꼭 가지려는 의지다. 그럼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다.’ 난 이 말을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어. 그리고 사실이더라고.” 진영기는 진동기가 떠나간 빈 의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개 같은 새끼…. 끝까지 잘난 척은.” * * * 순양그룹 본관에 들어서자 장도형 전무가 황급히 달려왔다. “미리 연락을 좀 주시죠. 하루 만에 정리하느라 많이 부족해서….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책상, 의자, 컴퓨터, 회의용 테이블만 있으면 됩니다.” “하하, 그게 더 어렵죠. 미니멀리즘 추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까다로운데요?” “전 미니멀리즘이 아니라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됩니다.” 본관 입구에서 전용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갈 때 많은 사람들이 도열해서 허리를 숙였다. 이 모습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전무님. 앞으로 이런 거 시키지 마십쇼. 제가 싫어하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오늘만 이럴 겁니다. 적어도 실장님 얼굴을 알아놔야 할 사람들이거든요. 인사는 천천히 나누시더라도 말입니다.” 전용 엘리베이터는 단둘만 탔다.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지시한 건 어떻게 됐습니까?” “대표이사 네 분은 이미 실장님 방에서 대기 중입니다. 그리고 직원들은 각 사장실 앞에서 대기 중입니다. 실장님 들어가시면 곧바로 시작할 겁니다.” “네. 번개처럼 해치우죠.” “문제없습니다.” 24층에 준비한 내 방으로 처음 들어갔다. 응접 소파에 앉아 있던 네 명의 대표이사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일단 방을 한번 둘러보니 누구 솜씨인지 알 것 같았다.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가구로 꽉 찬 방. 고모가 준비한 것이 틀림없다. “모두 편히 앉으세요.” 상석에 앉자 장도형 전무가 내 곁에 섰다. “이민섭 사장님.” “네.” “카드사는 매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장님은 오늘부로 해임합니다.” 이민섭 사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을 때, 딴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덧붙였다. “진영기, 진동기 부회장님께 말씀드리니 인수하시겠다고 하시더군요. 이민섭 사장님의 재선임은 그분들께 달려 있습니다.” 일그러졌던 이 사장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밝아졌다. 바본가? 큰아버지가 다시 사장 자리에 앉힐 리가 없지 않은가? 큰아버지 곁에 줄 서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난 큰아버지를 위해 내 손으로 잘랐을 뿐이다. “그리고 양우찬 사장님. 고인규 사장님.” “네.” “두 분도 해임합니다.” 두 사장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얼어붙었다. ======================================== [177] 봄은 왔지만 1 “저보다 큰아버지를 더 따르시니 그분께 가십시오. 자리 하나쯤은 만들어주시겠지요.” “자, 잠시만. 지금 그게….” 양우찬 사장이 급히 입을 열었지만 난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제 실감 나십니까? 누가 인사권자인지?” 두 사람은 노려보는 내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경고합니다. 이 방을 떠나는 순간부터 순양그룹에서 있었던 모든 일은 잊으십시오. 인생을 돌아보며 추억을 회상하는 건 머리로만 하시고 입으로 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단 한 줄이라도 활자로 보게 되면 여러분들의 과거를 샅샅이 뒤질 겁니다.” 순양그룹 계열사 사장까지 올랐다면 온몸이 먼지투성이다. 심할 경우 진흙도 많이 나온다. 입조심하지 않으면 자신이 수사 대상이 되는 건 시간문제고 피의자 신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잘 안다. 순양그룹의 힘이라면 지검 검사 몇 명을 동원하는 것쯤 식은 죽 먹기 아닌가? 검사가 뒤를 털기 시작하면 말년이 꼬인다는 것쯤 모를 리 없다. 세 사람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윤호일 순양화재 사장만이 긴장 때문에 몸을 빳빳이 세우고 굳어 있었다. “자, 세 분 사장님. 마지막 순양그룹의 흔적을 지우겠습니다. 휴대전화 꺼내세요.” 이들은 잠시 주춤하더니 긴 한숨을 내뿜었다. 임원으로 승진하는 순간 휴대전화를 나눠준다. 업무용으로 쓰라고 주는 거지만 대부분 공사 구분을 하지 않고 사적인 통화도 많이 한다. 하지만 회사 비품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세 사람은 미적거리며 휴대전화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사적인 통화 내용까지 들여다볼 생각은 없습니다. 공적인 업무 부문만 확인하고 전화는 폐기할 생각입니다.” 장도형 전무가 굳은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챙겼다. “하실 이야기가 많으실지 모르지만 조금 아끼십시오. 미안하지만 전 단 한마디도 들어줄 기분이 아닙니다.” 내 말을 신호로 장도형 전무가 입을 열었다. “각 사장실의 물건은 감사팀이 챙기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확인하고 개인 물품은 댁으로 보내드릴 겁니다. 그리고 본관 현관 앞에 승용차가 대기 중입니다. 사장님들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모실 겁니다. 그럼.” 장도형 전무는 기계적으로 말을 마친 후 문을 열었다. 명백히 나가달라는 의미였다. 세 사람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말은 아꼈다. 좋지 않게 갈라서며 악담을 퍼부을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고 아마추어도 아니다. 오늘은 이렇게 헤어지더라도 언제 다시 웃으며 악수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대로 백수처럼 지낼 리 없다. 분명 이들을 초빙하는 곳이 있을 것이며 고문, 사외이사, 감사라는 자리에 앉을지도 모른다. 이들을 채용하는 곳은 순양그룹과 관계 맺기를 원하며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웃으며 악수해야 한다. 나와 악수할 생각은 없겠지만, 드잡이질할 마음은 더더욱 없음이 분명하다. 세 사람이 나가자 장 전무가 문을 닫고 소파 한쪽에 조용히 앉았다. “윤호일 순양화재 사장님.” “네.” 윤 사장은 그제야 머리를 들고 내 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순양화재는 비상장 기업이며 지분 75%는 순양생명이 쥐고 있습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방금 떠난 세 분과 행동을 같이하실 생각이신지, 아니면 순양화재의 모회사인 순양생명을 맡아 한껏 능력을 발휘하실 것인지 말입니다.” 난감할 것이다. 좋아서 펄쩍 뛰고 싶은데 방금 이 방을 나간 사람들과의 친분을 생각하면 왠지 배신자 같은 느낌이 들 것이고, 그렇다고 거절할 만큼 의리가 쌓인 관계는 아니다. 이럴 때는 내가 머리를 끄덕일 명분을 줘야 한다. “부탁합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지금은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순양금융그룹의 핵심은 누가 뭐라 해도 순양생명 아닙니까? 윤 사장님 외에는 마땅한 분이 없습니다.” 간곡히 부탁하는 말까지 들었고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윤호일 사장은 마치 구국의 결단을 내린 애국지사 같은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지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실망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흔쾌히 승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호일 순양생명 사장님.” 장도형 전무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대회의실로 가시죠. 금융 부분 임원 전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 윤 사장님. 함께 가시죠. 임원들에게 발표하겠습니다.” 우리 셋은 웃으며 대회의실로 향했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서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다. 조금 떨렸지만, 어깨를 펴고 최대한 당당한 자세를 유지한 채 상석으로 향했다. 좌우로 장도형과 윤 사장이 자리 잡자 모두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진도준입니다.” 내 앞의 마이크를 가까이 당기며 첫인사를 건넸다. 임원들은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긴장한 표정, 시큰둥한 표정 그리고 주댕이가 나온 놈도 보였다. “조금 전, 대표이사 세 분이 순양을 떠났습니다.” 그 세 명이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 것이다. 내 옆에 윤 사장이 있으니 말이다. 한순간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이 웅성거림은 누군가의 분노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변해버릴 환경에 기대를, 누군가는 우려를 드러내는 것이다. 내가 다시 입을 열자 술렁거림이 사라졌다. “첫 번째 인사에 불만 있으신 분은 언제든 회사를 떠나셔도 됩니다. 하지만 회사에 남겠다고 마음 굳히신 분은 이 하나를 명심하십시오.” 다시 좌중을 훑어보니 이들의 초조함이 느껴졌다. “앞으로 펼쳐질 일들에 대해서 어린애처럼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냉혹한 대가를 감당하셔야 할 겁니다. 임원이시지 않습니까? 경영진의 일원이라는 자각을 해야 합니다. 왜냐? 전 경영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순양금융그룹에서 그 어떤 직책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누구 핏줄인데 가만있을까? 모두 이런 표정이다. “이렇게 임원분들을 한자리에 모시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겁니다. 딱 한 번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인사의 원칙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임원도 월급쟁이다 보니 인사 원칙에는 모두 귀를 쫑긋 세운다. “우려하시는 낙하산 인사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내부 승진을 기본으로 하겠습니다. 오늘 윤호일 사장님께서 순양생명의 대표이사가 되셨습니다. 아직 세 회사의 대표이사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그곳의 대표이사는 현재 차석의 자리에 계신 임원이 오르시게 될 겁니다.” 이 말의 뜻은 대규모 승진 인사를 단행한다는 것이다. 모두 한 계단씩 오르게 되니 회의실 공기는 순식간에 따뜻해졌다. “그리고 순양금융그룹 총괄 전략실을 신설할 것이며 장도형 전무님이 책임질 겁니다. 직급은 부사장입니다.” 장도형 전무와 눈을 맞추자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새로운 대표이사님 그리고 장도형 부사장님, 마지막으로 임원 여러분께서 회사를 잘 이끌어가기 바랍니다. 전 분기별 실적만 보고받는 것이 전부일 겁니다. 다만….” 결정적인 한마디를 남겨 두고 잠시 뜸을 들였다. 임원들의 귀가 쏠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분기별 실적을 바탕으로 항상 보직과 직책을 바꾸겠습니다. 냉혹하리만치 실용주의를 따를 거니까 각오를 다져주시기 바랍니다.” 더 말하면 군더더기일 뿐이다. 이제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일만 남았다. 장도형 부사장과 함께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커피 한잔을 마시며 긴장을 풀었다. “뒤처리는 부사장님께서 잘해주십시오.” “네. 오늘 중으로 모두 인사 발령 내겠습니다.” “그리고 두 부회장님 비서진과 말씀드린 대로 카드사 매각을 조율하셔야 합니다.” 장도형 부사장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정말 채권으로 협의하셨습니까? 너무 후한 조건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경쟁이 안 됩니다. 중공업 부문에서는 1조 원을 지금 당장 조달할 여력이 없어요.” “알겠습니다. 마지막 푸념이었습니다. 채권으로 하신 걸 보면 진동기 부회장님 쪽으로 생각하시는 듯한데 맞습니까?” 한쪽은 수류탄이 되고 한쪽은 핵폭탄이 된다. 이왕이면 핵폭탄이 낫지 않은가? 어차피 한 명만 살아남을 전쟁인데. “그렇습니다. 이왕이면…. 하하.”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1/4분기 끝나는 대로 하위 실적 임원 10명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부사장님…. 손에 피 좀 묻히세요.” “10명씩이나요?” 봄이 되자마자 피바람이 분다. 그 충격이 작지 않다는 걸 아니 장도형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한두 명으로 겁이나 먹겠습니까? 전 직원이 충격에 빠질 정도는 돼야 피 묻히는 보람이라도 있죠. 대신 실적 좋은 상위 10개 팀에는 보너스를 듬뿍 안겨주십시오. 한쪽은 칼바람, 한쪽은 봄바람. 모두 회사가 변했다는 걸 체감할 겁니다.” “네. 10명의 임원이 날아가는 충격을 상쇄할 만큼 보너스를 지급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말귀도 빨리 알아듣고 고집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이런 점이 장도형의 장점 같다. “괜찮습니다. 앞으로 그런 건 알아서 하셔도 됩니다. 일일이 허락받으려 하지 마시고요.” “재량권을 주시면 돌려드리지 않을 겁니다. 흐흐.” 이 와중에 농담까지. 배짱이 좋은 건가? 아니면 천성인가? “앞으로 더 큰 재량권을 드릴 텐데 놀라지나 마세요.” “기대하겠습니다. 흐흐.”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 많으신 분을 붙잡고 시간 낭비하는 건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여의도로 가십니까?” “아뇨. 학교에 잠시 가봐야 합니다. 저 혼자 졸업사진 촬영을 안 했다고 연락 왔어요.” “졸업? 아, 다음 주죠?” 장도형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네. 왜 그러시죠?” “그게… 대학생이라는 걸 잊었습니다. 오늘 회의실에서 말씀하시는 거 보니까 사회생활 몇 년은 하신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이 양반아, 십 년 넘게 했다.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말 듣는 자리라는 것이 차이지만. “아무튼, 축하합니다. 졸업식장에 꽃다발이라도 들고 갈까요?” 꽃다발이라는 소리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이고, 그렇지 않아도 돌아버리겠어요. 부모님까지는 문제없는데 할아버지가 오십니다. 상상해보세요.” “아…. 정말… 부담되시겠어요.” 장도형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안쓰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진짜, 미치도록 부담스럽다. * * * “할 만해? 벌써 2주가 넘었지?” “내 얼굴을 한번 봐. 볼이 숟가락으로 파먹어 버린 것 같지 않아?” 조금 과장한 표현이지만, 20일도 지나지 않아 눈이 퀭했다. 서민영은 2월 1일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후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다. 정신없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얼굴이 상할 만큼 혹독한 시간을 보내는지는 짐작 못 했다. “산삼 몇 뿌리 보내줄까?” “옥살이나 다름없는데 산삼으로 돼? 면회나 자주 와.” “그래. 노력해볼게.” “참, 너 순양그룹 금융 계열사 맡았다면서? 소문 돌더라.” “맡기는 뭘, 거기서 일 배우는 거야. 나도 이제 고생길에 접어들었지. 일 못하면 거제도로 유배 가는 게 우리 집안 전통이다.” “가기만 해! 내가 머리끄덩이 끌고 오피스텔에 감금해버릴 테니까!” 이때 법대 강당 입구가 소란스러웠다.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와 통로를 확보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셨다. 유별난 우리 할아버지께서…. ======================================== [178] 봄은 왔지만 2 후광효과, 카리스마, 경외심, 존경심, 어쩌면 부자에 대한 원초적인 선망…? 그 실체가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강당으로 걸어 들어오는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친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얼떨결에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드린다. 하필이면 부모님과 형 그리고 고모가 할아버지 뒤를 따랐다. 아버지는 조금 찌푸린 표정이었고 어머니는 난감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확 드러났다. 고모는 그런 시선을 아주 자연스럽게 즐기며 몸에 걸친 값비싼 모피 코드를 과시하는 중이었다. “민영아.” “응?” “도망가.” “뭐?” 너무 늦었다. 나와 서민영을 발견한 할아버지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을 보여주며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왔다. “이놈아. 할애비를 봤으면 잽싸게 달려올 것이지 뭐 하는 게냐?” 호통은 나를 향했지만, 시선은 이미 서민영에게 향했다. 생쥐를 낚아채려는 독수리 같은 눈으로 그녀를 한 번 쓱 훑더니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쁘장하게 생겼구나. 아버지와는 딴판이로고. 어머니가 미인이시겠구먼.” “네?” 긴장한 서민영은 인사를 먼저 드려야 한다는 걸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할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야 했다. “아니다. 참, 아가는 이름이 뭔고?” “아, 서민영입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좀 이상하다. 이미 알고 계셨나? “할아버지. 민영이 부모님을 아세요? 아니, 처음부터 알고 계셨어요?” “네 녀석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를 줄 알았더냐? 네놈 점심 메뉴까지 훤하다, 이놈아.” 뭔가 이상하다. 내 뒤를 따라다니며 조사했다는 뜻인데, 그럴 리는 없고…. 도대체 어떻게 아셨을까? 더 묻고 싶었지만, 우리 주변을 빙 둘러싼 가족들의 축하 인사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졸업 축하한다. 공부는 뒷전이더니 용케 하는구나.” 아버지가 어깨를 두드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때 고모가 톡 쏜다. “용케는 무슨, 학교에서 알아서 처신한 거지.” “쯧! 넌 그 조동아리 조심 좀 안 할래?” 할아버지의 한마디에 고모는 입을 닫았고 그녀의 관심은 곧 서민영에게 쏠렸다. “도준이 여자 친구?” “아, 네. 일단은 그런 셈이에요. 서민영입니다.” 그녀는 고모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머리를 꾸벅 숙였다. “일단은은 또 뭐야?” 가만 놔두면 질문 공세만 이어질 것 같아 내가 나섰다. “이쪽은 제 여자 친구 서민영입니다. 동기고, 작년에 사시 패스해서 지금 사법연수원에서 연수 중이에요. 졸업식 끝나고 다시 들어가야 합니다.” “오호! 대단하네. 재학 중 합격이구나. 사시 패스도 더불어 축하한다.” 가족들은 그녀를 보며 놀랐고 모두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이때 서민영의 곁으로 슬며시 다가온 중년 남자가 할아버지께 머리를 숙였다. “아이고, 서 판사. 이거 참 오랜만일세. 춘부장께서는 안 오셨는가? 어찌 보이지 않어?” “네. 거동이 불편하셔서 걸음을 못 했습니다. 회장님 오시는 줄 알았다면 억지로 나오셨을 텐데, 아쉽습니다.” 뭐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던가? 하긴, 법조인만 십여 명인 집안이니 인사 정도는 나눴을지도 모르겠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서 판사 부친께서는 대법원장이셨어.”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자 모두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나왔다. “그 양반이 우리 순양그룹에 추징금 200억을 때렸지. 내가 직접 만나서 보신탕까지 대접하며 봐달라고 했는데 얄짤없더라고. 허허.” “회, 회장님…….” 당황한 서 판사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을 때, 서민영이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 사람들이 오해하겠어요. 공직자 매수는 범죄거든요.” “매수? 넌 아직 네 할아버지를 잘 모르는구나.” “네?” “보신탕 먹은 다음 날 사람 시켜서 만사천 원 넣은 봉투를 갖다 주더구나. 내가 말은 안 했지만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니?” “할아버지가 왜 화를 내세요? 그게 당연한 거지.” 내가 슬쩍 끼어들었다. 주변에 듣는 귀가 한둘이 아니다. 가능하면 이 이야기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강당의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도 부담스럽다. “보신탕 특은 만칠천 원이야. 삼천 원 덜 넣었어. 그때 나는 보통, 대법원장은 분명히 특을 먹었다고.” 농담도 참 아슬아슬하게 하신다. 다행히 헐레벌떡 뛰어온 총장 때문에 대법관 매수 시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회장님. 총장실에 들를 것으로 생각했는데, 바로 이곳으로 오셨군요.” “손자 놈 학사모 쓴 거 보러 왔지, 총장 얼굴 보러 온 거 아니네.” “여전하시네요. 하하. 아무튼, 감사 인사가 늦었습니다.” “인사? 무슨 인사?” “기숙사 건립 말입니다. 저도 조금 전 보고받았습니다.” 내가 입학할 때 꽤 많은 장학금을 기부한 걸로 아는데 기숙사 건립까지? 총장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진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4년간 학교도 제대로 안 다닌 날라리를 무사히 졸업시켜주는 값으로 생각하게. 인사치레 받자고 한 거 아닐세.” 할아버지는 나를 노려보다 씩 웃었다. “사실 그거 내 돈으로 하는 거 아닐세. 아는지 모르겠지만, 대아건설에서 기부하는 거야. 나중에 오세현 대표에게 전화나 한 통 넣어주게.” “아, 그렇습니까?” 대아건설이면 내 돈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떡 벌리자 할아버지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거 또한 장사다. 잘 알아 둬라.” 할아버지는 총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이만 가보겠네. 수고하시게.” “왜 벌써 가십니까? 졸업식은 보고 가셔야죠.” “아니야. 손자 놈 학사모 쓴 거 봤으니 됐어. 내가 있어 봐야 괜한 소란스러운 일만 더 생기지 않겠는가? 저것 좀 보게. 벌써 파리가 꼬이기 시작했네그려.” 아니나 다를까 강당 입구에는 이미 기자들이 진을 치기 시작했고 순양그룹 회장에게 눈도장이라도 찍으려는 사람들이 경호원들의 제재를 뚫으려 기를 썼다. 거의 집 안에서 나오지 않고 은둔하고 계시니 기자들에게 이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손자가 졸업생이니 분명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넌 나 좀 보자.” 할아버지는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고것 참 심지가 대차구나. 괜찮은 애다.” “누구요? 민영이?” “그래. 내 앞에서 눈빛 흔들리지 않은 애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제 할애비를 많이 닮았어. 인연 끊지 말고 만나봐. 네게 도움 될 게다.” “할아버지. 우린 심지 굳은 판사보다 조금 얍삽한 판사가 더 필요하지 않나요? 흐흐.” “예끼 이놈아. 자고로 안사람은 심지가 굳건해야 한다. 그래야 어려운 일 당해도 집안은 조용한 법이다.” 내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릴 수나 있을까? 누가 됐든 내 아내가 되면 본의 아니게 힘겨운 싸움에 휘말린다. 뻔히 알면서 그 싸움에 끌어들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졸업식 끝나면 뭐 할 거냐? 친구들이랑 술 한잔하는 게냐?” “아뇨. 사진 좀 찍고 바로 회사로 가야 합니다. 인사이동도 있고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요.” “인사이동? 내 새끼들 목을 전부 쳐버린 거 말이냐?” 미리 언질도 드리지 않고 세 명의 사장을 해임한 걸 야단치시는가 했는데 표정을 보니 아니다. 계속 웃고 계시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아니다. 네 사람 안 될 것 같은 놈들은 빨리 도려내야지. 잘했다.” 걸음을 멈춘 할아버지가 내 등을 쓰다듬었다. “인사에 너무 깊게 개입하지 않는 것도 좋지만, 마름에게 모두 맡기는 것도 위험하다. 봉급쟁이들은 그들만의 네트워크가 있어. 그 네트워크가 굳건해지는 건 위험해.” 장도형 부사장을 말하는 거다. 내가 오세현에게 기댔듯이 장도형에게 기대는 걸 우려하시는 것이 틀림없다. “조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끔 브레이크 거는 걸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잔소리는 그만하마.” “바쁜 일 끝내고 찾아뵙겠습니다.” “이놈아, 늘 바쁜데 언제 끝나기를 기다려? 시간 만들어서 와.” “흐흐. 네. 졸업식 끝나고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경호원들이 부리나케 강당 밖으로 달려 나가 기자들을 막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난감하다. 졸업식 끝나고 우리 가족을 둘러쌀 기자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근거렸다. * * * “이건 할아버지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졸업장 아니냐?” “네.” “됐다. 그깟 졸업장이 뭐 대수라고.” 할아버지는 내 예상과 다르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관심도 없었다. 서울대 법대를 들어갔을 때 보여주셨던 것과 너무 큰 차이가 난다. “이놈아. 서울대 법대가 어떤 곳이냐?” “네?” “들어가는 건 하늘의 별 따기지만 졸업이야 쉽지 않으냐? 네 동기들 중에 졸업장 못 받은 놈이 몇이나 되더냐?” 자퇴한 놈은 몇 있긴 하지만 공부를 따라가지 못해 퇴학당한 이는 없다. “정말 가치 있는 건 바로 이거다.” 할아버지는 서랍에서 작은 액자 하나를 꺼냈다. “그건…?” “그래, 네 녀석의 합격 통지서다. 이게 개나 소나 다 졸업하는 그 대학의 졸업장보다 수천수만 배는 더 가치 있는 거야. 난 이걸로 족해.” 합격 통지서를 다시 서랍 속에 넣은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었다. “넌 내게 선물은 이미 충분히 줬다. 남은 선물은 순양 간판을 단 회사를 늘려가는 것뿐이야. 알아들었겠지?” “네. 두 배, 세 배 키우겠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는 꼭 볼 수 있도록 해다오.” 지금 당장에라도 가능하다. HW 그룹의 간판을 순양으로 바꿔 달면 되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할아버지도 그걸 바라고 하신 말씀인지도 모른다. “네.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분명히 보실 겁니다.” “네 녀석은 말귀를 잘 알아들어서 좋아, 허허.” 역시. 그것이다. 할아버지가 주신 게 있으니 약속은 꼭 지켜야겠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슬슬 준비해야 한다. “그럼 이제 내 차롄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졸업 선물 말이다. 이젠 너도 사람이 필요할 때가 온 것 같다.” 할아버지는 수화기를 들었다. “들어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수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사십 대로 보이는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보자마자 어떤 자인지 알았다. “인사드려라. 우병준 상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진도준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우병준입니다.” 메마른 어조, 무표정한 얼굴. 순양시큐리티 사람이 분명했다. 그가 내민 명함을 받아들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단축번호에 우 상무 번호 저장해 둬.” “아, 네.” 우병준 상무는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나를 잠시 보더니 사무적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편의상 실장님으로 부르겠습니다. 괜찮습니까?” “아…. 네.” “앞으로 실장님 차는 우리 직원이 운전할 겁니다. 이미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그리고 경호팀은 네 명입니다. 순양그룹 본관, 여의도 미라클 사무실에 계실 때는 건물 입구에서 항시 대기할 것이며, 실장님께서 귀가하실 때까지 밀착 경호할 것입니다. 별도의 승용차로 움직이니까 신경 쓰이지는 않을 겁니다.” 빠르게 말을 마친 우병준 상무는 할아버지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앞으로 고생 좀 하게.” “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는 건조하게 말을 끝낸 후 서재를 나갔다. “누군지 알겠지?” “네. 순양시큐리티 사람 아닙니까?” “맞다. 앞으로 너를 위해 일할 팀을 구성했다. 우 상무가 책임질 것이고 대략 4, 50명으로 구성했을 거다.” 경호 정도 하는 데 4, 50명이 필요하지는 않다. 교대 근무한다고 해도 10명이면 충분하다. 그제야 이들의 진짜 임무가 뭔지 알았다. ======================================== [179] 봄은 왔지만 3 말이 좋아 경호원 또는 보안요원이지, 실상은 양성화된 월급쟁이 조폭과 다르지 않다. 물론 진짜 조폭 출신은 아니다. 대부분 경호원 출신이거나 군인 출신으로 구성되었지만, 경호 업무를 제외하면 그들이 하는 일은 불법적인 것도 상당하다. 내가 저들에게 경호 업무 외에 다른 일을 지시할 경우가 생길까? “뭘 그리 놀래?” “아닙니다. 인원이 너무 많아서요.” “부족하다고 더 늘릴 생각이나 하지 말어.” 할아버지의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니 불법의 유혹은 대단한 것 같다. 법보다 가까운 건 주먹이라고 했던가? 문제가 생겼을 때 말 한마디면 은밀하고 깔끔하게 해결된다. 50명의 잘 훈련된 무력 집단이 곁에 있는데 그들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은 오죽하겠는가? “우 상무는 앞으로 네 지시를 가장 우선시할 거다. 24시간 항상 전화를 받을 거니까 필요할 때 언제든 연락해라.” “무슨 일이든지 다 처리합니까?”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다 처리할 거다. 하지만 한 가지는 잊지 마라. 저 친구들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은 시키지 않는 게 좋아.” “이를테면 여자 뒤처리하는 거라든지, 음주운전, 뺑소니 같은 자질구레한 일 말씀입니까?” “넌 그런 쪽은 얼씬도 하지 않으면서 무슨 소리야? 설사 그렇다 해도 그 일은 전략실 애들이 정리하잖냐?” 잘 알지만, 갑자기 과거의 기억이 너무 생생하게 떠올라 그냥 한번 말해본 거다. “그러니까요. 도대체 우 상무에게 어떤 일을 맡기게 될지 짐작도 안 갑니다.” “그럼 좋고. 네가 우 상무에게 전화 걸 일 없다면 일 잘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도준아.” “네.” “넌 안전 운전하고 있는데 웬 정신 나간 놈이 뒤에서 네 차를 꽉 들이받으면? 넌 어쩔래?” “보험회사 부르고 경찰에 알려야죠.” “그래. 우 상무는 바로 그런 존재가 되는 거다. 보험회사.” “적어도 억울하게 손해 볼 일은 막아준다는 뜻이군요.” “그뿐만이 아냐. 잘 쓰면 누군가를 억울해서 돌아버리게 만들 수도 있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하는 할아버지, 역시 악당이다. “그런데 할아버지.” “왜? 아직 묻고 싶은 게 남았어?” “우병준 상무… 어디까지 믿을 수 있습니까?” 할아버지는 조금의 생각도,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추악한 비밀을 이야기해도 혼자만 알고 죽을 사람이다. 대답이 됐어?” “그렇군요. 잘 알겠어요. 유용하게 사용하겠습니다.” “그리고 너도 준비해야 할 게 있다.” “네. 말씀하십시오.” “그룹을 쪼개는 바람에 변호인단도 쪼개야 한다. 어떡할까? 내가 몇 놈 보내줄까?” 그룹 변호인단이면 할아버지의 장학금을 받으며 판검사를 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법조인의 양심을 버려가며 할아버지를 위해 일하고 사표를 던진 후 그룹에 합류한 돈벌레일 뿐이다. 그런 놈들치고 실력 뛰어난 놈은 못 봤다. 그러니 변호인단은 그룹 내부의 일을 주로 할 뿐, 큼지막한 사건이 터지면 결국 대형 법무법인에 맡긴다. 내 돈을 먹은 장학생도 아니니 그놈들은 큰아버지들의 세작(細作)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해만 끼칠 놈들이지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아닙니다. 명색이 한국 최고 명문 법대 졸업생입니다. 변호인단은 제가 알아서 꾸리겠습니다.” “그래. 그건 알아서 하렴.” 할아버지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말씀 없었다. “됐다. 이제 가보거라. 할 일도 많을 텐데….” “아닙니다. 오늘은 시간 많아요. 큰 졸업 선물 주셨는데 선물만 받고 사라지는 건 예의가 아니죠.” “그래? 그럼 술이라도 한잔할까?” “건강 생각하셔야죠. 차 준비시키겠습니다.” “이놈아. 오늘은 네 졸업이다. 축하주 한잔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냐?” “그럼 와인 한 잔만 드세요. 딱 한 잔입니다.” 하지만 한 잔은 한 병이 되었고 새벽까지 수다를 떨다 집으로 돌아왔다. * * * 장도형 부사장은 세 명의 인사 카드를 내밀었다. 증권, 화재 그리고 카드의 사장 자리에 앉을 사람의 과거가 아주 자세히 기록된 것이었다. 가장 먼저 카드사를 맡을 후보의 명세부터 살폈다. “어차피 오래 못 갈 회사라는 건 다 알 텐데, 이분이 사장 자리에 앉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더욱 신중하게 엄선했습니다. 분위기가 뒤숭숭할 때 확실히 다잡을 수 있는 분입니다.” 내 눈치를 슬쩍 보는 걸 보니 뭔가 숨기는 게 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네트워크인가? “카드사를 매각하면 이분을 저쪽에서 받을까요? 매각 계약 체결하는 날이 이분 백수 되는 날 아닙니까?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서 매각 후 이분께 순양생명의 부사장으로 보직 이동하는 것을 약속해드렸습니다. 그러자 흔쾌히 수락하시더군요. 매각 시점까지 최대한 회사 가치를 올리겠다고 노력하겠답니다.” 그림이 그려졌다. 장도형 부사장은 자신과 긴밀한 관계자를 골랐을 것이고 선심 쓰듯 자리를 제안했을 것이다. 최종 자리는 순양생명의 부사장이니 확실한 승진 보장 아닌가? 이런 인사를 단행함으로써 자신의 파워도 그룹 전체에 입증하는 셈이니 일거양득이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제동을 한번 걸어볼까? 장도형의 들뜬 마음을 한번 꾹 눌러야겠다. “그건 안 됩니다.” “네?” “임원들은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대표이사는 마지막 자리라는 걸 늘 명심하도록 말이죠. 카드의 사장에서 생명의 부사장으로 이동하는 건 사실상 승진입니다. 우리 회사에서 순양생명의 위상은 순양전자나 다름없으니까요.” “시, 실장님, 그렇게 되면 순양카드 대표이사 발령이 바로 해임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모두 발령 내는 순간 사표 낼 겁니다.” “잘됐네요.” “네?” “임원 중에 정리해야 할 사람들을 차례로 발령 내세요. 별다른 고생 없이 그들의 사표를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합니까?” 장도형 부사장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순양카드 사장 자리는 바로 기요틴이 되는 셈이군요. 우리에게 해가 될 임원들을 전부 정리한 다음 장 부사장님이 매각을 지휘하십시오.” “제가요?” “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바로 카드사 매각 아닙니까? 왜요? 자신 없으세요?” “아, 아닙니다. 제가 맡겠습니다.” 뜨끔했으려나? 조금이라도 잔대가리를 굴리면 오늘같이 낭패를 겪게 해줄 것이다. 몇 번만 이런 일침을 반복하면 늘 조심하는 게 습관처럼 굳어질 것이고 그때부터 풀어주도록 하자. “그리고 순양증권 사장 후보 말입니다. 왜 전무를 고르셨죠? 부사장도 있는데?” “아, 그 부사장은 순양물산에서 잔뼈가 굵었습니다. 아무래도 진영기 부회장님과 관계가 깊지 않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임원 대부분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어요? 큰아버지들이 관리하는 계열사를 한 번씩은 거쳤는데?” “…….” “낙하산이 없다는 건 제가 천명하지 않았습니까? 그분 경력을 보면 성공으로 이끈 사업이나 프로젝트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공을 많이 세우신 분을 이런 식으로 모욕을 주면 안 되죠. 이 정도 실력자라면 증권사를 맡겨도 충분합니다. 부사장을 대표이사로 승진시키세요.” “네. 알겠습니다.” 풀 죽은 장도형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이 정도면 고삐는 충분히 죄었으려나? * * * 봄기운이 스며드는 3월이 시작되었을 때 상준 형은 완전히 집을 나갔다. 어머니는 변변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한 상준 형을 계속 걱정했지만, 아버지는 조금도 걱정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머니에게 다짐받는 것에 열심이었다. “다 큰 사내자식 걱정하지 마. 뭘 해도 먹고는 살아. 괜히 돈 보내주고 그런 짓 하면 절대 안 돼. 꼭이야!” 하지만 상준 형은 이미 취직했다고 내게 귀띔했다. 취직 사실을 부모님께 알리면 냉정한 척하는 아버지가 몰래 알아볼 것이고, 그러다 말이 새어 나가면 또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것을 걱정했기에 입을 다문 것이다. “집은 구했어? 내가 오피스텔 하나 준비해준다니까!” “괜찮아. 회사 녹음 스튜디오 근처에 원룸 빌라 구했어. 나쁘지 않아.” “회사는 어때? 괜찮아?” “신생 회사라 위태위태하지. 하지만 이 기획사 사장은 음악을 잘 알아. 그래서 날 뽑은 거고. 뉴욕에서 프로듀싱과 사운드 엔지니어링 공부했다니까 되게 좋아하더라고.” “음악 잘 아는 것과 사업은 달라.” “방향도 좋아. 반짝하는 아이돌 빨아먹고 버리는 것보다 확― 뜨진 않더라도 오래 팔리는 뮤지션을 양성하는 게 목표야. 나한테 맞아.” “그래. 형이 잘 판단했겠지. 참, 회사 이름은 뭐야?” “타임 뮤직. 시간이 가도 생명력이 살아 있는 음악을 추구한다고 지었다더라.” “그래. 집 나갔다고 연락 끊지 말고 종종 전화하자.” 상준 형은 기가 차다는 듯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나 잘해, 인마. 어떻게 형이 전화하는데 비서가 받어? 전화할 때도 미리 스케줄 잡아야 해?” “아, 미안…. 이제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땐 좀 바빠서.” “어련하시겠어? 나 간다.” 멀리 사라지는 형을 배웅하고 집으로 들어가니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넌 언제 독립해?” “곧 나갈 겁니다. 지금 인테리어 공사 중이라서요. 끝나는 대로….” “실내장식? 집 어디에 구했는데?” “서초동 주상복합 하나 샀습니다.” “혹시 펜트하우스 어쩌고 하는 그런 거야?” “어떻게 아셨어요?” “진짜?” 아버지는 눈을 크게 뜨고 혹시나 하는 모습으로 캐묻기 시작했다. “설마 백 평 넘는 초호화 펜트하우스는 아니겠지? 집 안에 홈바도 있고 일본식 미니 정원도 꾸미고…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그런 거?” 이번엔 도리어 내가 놀랐다. “제 뒷조사하셨어요? 어떻게 정확히 아세요? 아, 바는 없어요. 하지만 옥상 일부분을 마당처럼 쓸 수 있어서 정원으로 꾸미는 중인데….” 이제 어머니도 합세했다. 막내가 독립해서 떠나는 아쉬움도 잊은 채 집에 대한 궁금증만 드러낸다. “몇 평이야? 백 평?” “집은 120평이고 옥상 정원은 70평이에요. 원래 방이 네 개 있었는데 전부 털어서 원룸으로 꾸미느라 예상보다 많이 늦어졌어요. 자재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게 좀 있고.” “수입자재 말하는 거냐?” “네. 이 집에서 오래 살 생각이라 신경 좀 썼어요. 인테리어는 미국에 의뢰했고 정원은 일본 업자거든요.” 아버지의 표정이 환해졌다.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물어보지도 않으시더니 갑자기 손뼉을 짝 쳤다. “잘됐다. 딱 들어봐도 초호화판 럭셔리 원룸이구나. 맞지?” “네? 아, 네. 그런 셈이죠.” “공사 언제 끝나냐? 내가 좀 봐도 되겠지?” “그럼요. 그렇지 않아도 공사 끝나면 아버지, 어머니 초대해서 보여드릴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아들이 좋은 집에 살아서가 아니다.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다. “아…. 딴 게 아니고 드라마 찍을 때 꼭 그런 집 나오는 씬이 있더라고. 워낙 재벌 아들 이야기를 많이 찍으니까 말이야. 앞으로 종종 빌리자. 세트장이 아니라 실제 집이니 생생한 현장감도 살고, 세트장 지을 돈도 세이브하잖아.” 그럼 그렇지. 수상해도 한참 수상했다. “안 됩니다.” “뭐?” 난 아버지의 시선을 무시하고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도어락 비번은 어머니만 알려드릴 테니 혼자 오세요.” 난 힘든 하루를 끝내고 혼자만의 안락함을 즐기고 싶다. ======================================== [180] 봄은 왔지만 4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조금 망설였다. 이 일이 그에게 적합한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은밀한 일은 그가 하는 일의 가장 기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휴대전화의 단축키를 누르자 신호가 울렸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 네, 실장님. 우병준입니다. 여전히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우 상무님. 진도준입니다.” ― 네. 말씀하십시오. “부탁이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 부탁이 아니라 지시입니다, 실장님. “그렇군요. 그럼 지시하겠습니다. 강남에 타임 뮤직이라는 연예기획사가 있습니다. 가수를 양성하는 곳이죠. ― 네. “이 회사 사장과 회사 재정 상태를 조사해주십시오.” ― 특히 어떤 부분을 조사해야 합니까? “연예기획사라는 곳은 워낙 사기꾼이 많아서요. 연예인 스폰서 장사나 하는 곳인지, 아니면 투자자를 꼬셔서 돈이나 챙기는 놈인지, 혹시 전과자는 아닌지 조사하시면 됩니다.” 돈 많은 사람 중 어떻게든 연예인과 관계를 맺어보려는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연예기획사 사장 중에는 이런 멍청한 부자를 꼬드겨 투자를 끌어내는 일만 집중하는 양아치도 많다. 어쩌다 호구 하나 걸리면 신인 걸 그룹이라며 그럴싸하게 포장한 젊은 여자를 소개해주고 음반이나 뮤직비디오 제작비를 왕창 뜯어내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상준 형이 일하는 곳이 이런 곳이라면 빨리 빼내 와야 한다. ― 더 지시하실 일은 없으십니까? “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 알겠습니다. 나흘 정도 걸릴 겁니다. 통화를 끝내자 안도의 한숨부터 나왔다. 언제쯤 우 상무의 메마른 목소리가 익숙해질까? 나흘보다 하루 앞당긴 사흘째 우병준 상무와 회사 근처의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특별히 조사할 이유를 못 찾았는데, 알고 보니 형님이신 진상준 씨가 취직한 곳이더군요.” “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알아본 겁니다.”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 사기꾼도 아니고 양아치도 아닙니다.” “회사 재정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 부분은 실장님께서 전문가시니 한번 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그 회사와 사장 개인의 지난 5년 치 금융거래 내역을 뽑아왔습니다.” 서류 두어 장을 보자마자 헛웃음이 났다. 규모가 작은 건 이미 알았지만, 수입도 바닥이고 지출도 바닥이다. 전형적인 자기만족 사업체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생업으로 삼고 적게 벌어 적게 쓰면서 행복한 인생이라 위안하는 아마추어, 딱 그 정도 회사다. “평판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신인들의 가능성을 잘 파악하고 그에 맞는 음악 작업을 한다더군요.” 그렇다면 벌써 성공했어야 한다. 아직 아이돌이 판치는 세상은 오지 않았다. 많은 아이돌이나 걸 그룹이 성공했지만, 그 숫자만큼 솔로들도 강세다. 그렇다면 이유는 딱 하나…. “이 회사, 언더그라운드 위주로 굴러가는군요.” 우병준의 표정이 조금 변했지만 금방 원래의 무덤덤한 얼굴로 돌아왔다. “네. 언더그라운드의 정확한 뜻은 모르겠으나 비인기 장르만 찾아다닌다고 알려졌습니다.” 이 정도면 알아야 할 건 다 알았다. 서류를 챙기니 우병준이 물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수고하셨어요.” “별말씀을.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벌떡 일어나 머리를 약간 숙였다. 걸음을 옮기려던 우 상무는 깜박한 것이 떠올랐나 보다. “아, 새로운 직원들은 어떻습니까? 불편하신 점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아닙니다. 모두 과묵해서 마음에 듭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카페를 나가는 우병준의 넓은 등을 보자 짧은 한숨이 나왔다. 저 사람과 언제쯤 웃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 * * 타임 뮤직 조환규 사장은 아주 오랜만에 꺼내 입은 정장이 영 어색한지 자꾸 어깨를 움직였다. 긴장을 풀려 해도 파르르 떨리는 손끝은 어떻게 해도 멈추지 않았다. “오세현 대표님을 뵈러 왔습니다. 약속은 이미….” “혹시 타임 뮤직 사장님이신가요?” 회사 입구의 여직원은 메모장을 슬쩍 보며 확인했다.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조환규 사장은 바짝 긴장한 채 호화로운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대표이사실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중년의 사내가 환히 웃으며 그를 반겼다. “처음 뵙겠습니다. 조환귭니다.” “오세현이에요.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가죽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니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먼저 연락한 쪽은 미라클인데 왜 자신이 더 긴장하는지…. 조환규 사장은 이 불안을 떨쳐버리려면 궁금한 것부터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 대표님. 솔직히 어안이 벙벙합니다. 전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가 어마어마한 투자회사라는 건 대표님과 통화 후 인터넷 검색으로 알았거든요.” “이런, 연예기획사를 운영하시는 분이 투자사를 모른다?” 오세현 대표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 투자 같은 건 저랑 관계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요.” “투자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건 아닙니까?” 뭐라 할 말이 없을 만큼 정곡을 찔렸다. 조환규가 입을 닫아버리자 오세현은 웃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씀드릴 테니 잘 들으세요.” “네.” “우리 미라클이 타임 뮤직에 투자할 겁니다.” “네? 우리 회사요?” “그렇습니다. 투자 조건은 그쪽 업계 룰에 맞추도록 하죠. 그러니까 조 사장님은 주변 기획사를 한 바퀴 돌면서 보편적인 투자 조건을 알아놓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우리가 제시한 조건이 그쪽 업계 룰에 맞는지 아닌지는 확인하셔야 하니까요. 아시겠습니까?” “아, 네.” “1차 투자금은 20억입니다.” “이, 이십억…?” 조환규 사장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믿어지지 않는 거액. 그리고 또 하나의 의심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왜? “네. 작습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20억보다는 1차라는 말에 더 집중하셔야죠. 결과가 좋으면 200억이라도 투자할 수 있으니까요.” 조환규 사장은 지난밤 꾸었던 꿈을 떠올리려 애썼다. 기억은 안 나지만 돼지 농장이 나왔거나 용이 여의주를 품고 하늘로 승천하는 꿈이었던 게 틀림없다. “제가 제시하는 별도의 조건은 딱 하나뿐입니다.” 조환규는 정신을 차리고 오세현의 입에서 흘러나올 조건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투자금 20억으로 인디밴드니, 언더그라운드 가수 먹여 살리는 건 절대 안 됩니다. 그건 지금처럼 사장님께서 알아서 하시고요.” “그, 그럼?” “신인 걸그룹 하나 키우는데 5억에서 10억 든다고 하더군요. 맞습니까?” “저도 잘…. 하지만 많은 돈이 깨진다고 들었습니다.” “20억으로 2개 팀을 키우세요. 걸그룹이야 당장에라도 행사 뛰면 푼돈은 버니까요. 맞죠? 그러니까 돈 될 만한 신인을 키우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전 그쪽으로 사업을 넓힐 생각은 없습니다. 제 비전과 다릅니다.” 계속 더듬거리기만 하던 조 사장이 똑 부러지게 대답하자 오세현의 얼굴이 굳어졌고 정중하던 말투도 변하기 시작했다. “조 사장님.” “네.” “생각 좀 하고 대답하지? 당신 지금 땡잡은 거야. 길 가다가 금덩이 주운 거라고!” 조환규는 매섭게 노려보는 오세현의 눈빛에 또다시 긴장이 몰려왔다. “그 금덩이로 사업 잘해서 돈 많이 벌어. 그리고 그 돈으로 당신이 좋아하는 인디밴드나 언더 뮤지션 양성하면 되잖아. 취미 생활과 사업은 분리할 줄 알아야지. 안 그래?” 취미. 조 사장은 자신의 사업을 단지 취미 정도로 여기니 울컥했지만, 미라클이라는 회사 규모로 본다면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우리 미라클 미국 본사는 영화에 엄청난 투자를 해요. 알고 있어요?” “아, 아뇨.” “주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투자하는데 독립영화나 예술영화에도 투자 많이 해요. 이쪽은 투자하는 돈 본전은커녕 대부분 다 날리지. 그런데 왜 꾸준히 투자하는 줄 알아요?” “…….” “그래야 영화 전체가 발전하거든. 독립영화에 나왔던 신인 배우, 예술영화 찍던 젊은 감독. 이런 사람들이 상업영화로 흘러들어 가. 이게 자꾸 도니까 헐리우드가 발전하는 거요.” 오세현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좀 알아보니까 조 사장님 평판이 좋더군요. 안목 있다고. 그 안목으로 상업성과 스타성 함께 갖춘 애들을 발굴해요. 그리고 아이돌이든, 걸그룹이든, 발라드 가수든 스타로 키우라고. 돈 얼마든지 밀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렇게 키운 스타가 버는 돈으로 예술 하시면 되지 않겠어? 이게 그렇게 어려운 계산인가?” 조환규 사장은 한참 동안 말을 못 했다. 그가 침묵을 지키는 동안 오세현도 입을 다문 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조환규가 입을 열었다.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왜 제게 투자하시는 겁니까? 강남에 아이돌 키우는 기획사는 널리고 널렸습니다. 그런 곳에 투자하시면 될 일인데, 전혀 다른 방향을 추구하는 우리 회사를 고른 이유가 궁금하군요.” “말했잖소. 당신 땡잡은 거라고.” “그러니까 왜 제가 땡잡게 됐습니까?” “당신 회사에 신입 하나 뽑았죠? 진상준이라고.” “네. 유학파 출신….” “그 애가 내 절친 아들이요.” “아…!” 지난밤 꿈 때문이 아니었다. 여의주를 문 용은 바로 신입 PD였다. “없는 살림에 유학까지 보냈는데 가만 보니까 본전은커녕 궁상맞은 인생을 예약한 거나 다름없더군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놈도 사장님처럼 하고 싶은 일 한다고 하니, 뜯어말리지는 못하겠고.” “그래서 투자하시는 겁니까? 친구 아들 때문에?” “이유가 중요합니까? 눈앞에 온 절호의 기회를 버릴 만큼?” “그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조 사장님께서는 이유보다 앞으로 어떻게 사업을 키워 나갈지 생각하시는 게 우선입니다.” 조환규는 또 한참 생각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투자를 받아들이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오세현의 분통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발로 뻥 차버리는 멍청한 사장 밑에 내 친구의 아들을 그냥 둘 것 같소? 멱살을 잡아서라도 끌고 나올 거요. 차라리 내가 회사를 차리는 게 더 낫지!” 진심이었다. 지금이라도 상준이 멱살을 잡고 이런 회사에서 끌고 나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오세현이었다. 아마추어들이란…! 홀로 일어서겠다는 상준이의 마음이 기특해서, 그런 형을 적극 돕고 싶다는 도준이의 마음이 갸륵해서, 별생각 없이 사는 조 사장 같은 사람에게 귀한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참, 하나 더.” 오세현의 호통에 머리를 숙이고 있던 조환규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내가 투자한다는 건 상준이에게는 절대 비밀이요. 그 애가 이 사실을 알면 당장 사표 던질지도 몰라요. 상준이 자존심 하나는 재벌 집 도련님과 맞먹거든.” 생각을 굳힌 듯 조환규 사장이 벌떡 일어났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이 기회를 헛되이 날려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타임 뮤직은 우리 회사 전문가들이 딱 붙어 관리해줄 겁니다. 조 사장님은 재능 있는 신인들 발굴하고 좋은 음악 만드는 데 전념할 수 있을 겁니다. 믿고 맡겨보세요.” “네.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연신 머리를 숙이고 떠나는 조 사장을 보며 오세현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쯧쯧. 도준이 이놈은 완전 소년 가장이구만. 아버지에, 형에. 지지리도 복 없는 놈.” 오세현은 진도준이 한국 최고 부자의 손자로 태어난 복은 잠시 잊고 있었다. ======================================== [181] 거인이 떠난 자리 1 “이야기는 잘 끝났습니까?” “아무래도 쌩돈 20억 날리는 거 아닌지 몰라. 애가 영 더듬해.” 오세현은 삐죽이 나온 입술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드러냈다. “수업료 톡톡히 물었다고 생각하죠, 뭐.” “수업료 한번 거창하구먼. 그래서? 그 뒤는 어쩌려고?” “제가 도와주는 건 거기까지죠. 그래도 안 되면 상준 형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지낼 겁니다.” 자립 비용 20억이면 할 만큼 한 거다. 오세현도 안심하는 눈치였다. 가망 없는 일에 핏줄이랍시고 돈 쏟아붓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이때 비서가 쾅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대, 대표님,” “뭐야? 왜 그래?” 심상치 않은 일인 것 같아 예의를 따지지도 않았다. 비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한쪽에 놓인 리모컨을 들고 TV를 켰다. TV에는 긴급 속보가 흘러나왔다. 『주영일 대현 그룹 명예회장이 지난밤 오후 10시 서울 대현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 고인의 직접적인 사인은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이며 마지막까지 의식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 주영일 전 회장은 지난해 5월, 경영퇴진을 발표한 이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집과 서울 대현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아왔고, 8월부터는 심한 관절염 증세로 거동이 불편해 주로 병원에만 머물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TV만 쳐다보고 있었다. 『고 주영일 전 회장의 장례는 5일 가족장으로 치러지지만, 전경련 등 경제 5단체가 모두 장례에 참여해 실질적으로는 경제인장(葬) 성격이 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경련 측은 ‘경제인장으로 할 수도 있지만, 대현 측의 여건을 감안해 가족장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밝히면서 ‘그러나 고인이 전경련 회장직을 10년간이나 수행해 왔고 한국 경제에 기여한 점을 생각하면 전 경제인이 장례에 참석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분향소는 국내외 대현그룹 사업장에도 마련될 예정이며 장례 비용이나 절차는 장남인 주태식 대현자동차 회장이 모두 관장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TV 방송국들은 주영일 회장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아예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오세현은 곧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대현 그룹 주가 실시간 체크하고, 10분마다 보고해.” 어차피 대현그룹 주가는 떨어지겠지만 한두 달 뒤쯤이면 다시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다. 이미 한국 대기업은 회장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수준을 벗어났다. 회장은 오로지 승계작업에만 집중할 뿐이고 기업은 임직원에 의해 잘 굴러간다. “이야, 앞으로 재미있어지겠는걸?” “다이내믹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이미 계열사 나누기는 끝난 거 아닙니까?” 왕자의 난이라고 불릴 만큼 상속 싸움이 치열해질 앞날을 모르지는 않지만, 슬쩍 한번 떠봤다. “돈 싸움에 끝이 어디 있어? 부친 때문에 입 다물고 있던 아들들이 본격적으로 나설 거다. 게다가 자식은 좀 많아? 아들만 여덟이야. 또 있지. 주 회장 동생들. 창업주나 다름없는 그들이 가만히 있겠어? 그 양반들도 자식에게 한 몫 뚝 떼주고 싶어 난리 칠 게 뻔한데.” 몇 년 전부터 계열분리를 준비해왔던 대현 그룹은 자동차그룹이 분리된 이후 중공업계열, 증권 등 금융 부문, 전자, 그리고 건설 부문 등 5개 주력 사업 중심으로 쪼개졌다. 하지만 순환 출자구조라는 기업 지배의 방법 때문에 완벽한 분리는 불가능했고 우리 순양그룹과 마찬가지로 언제든 서로를 상처 낼 수 있는 칼날을 쥐고 있었다. “그나저나 삼촌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조문 가셔야죠?” “근조 화환이나 보내지 뭐. 나야 고인 생전에 인연도 없는데.” “아진자동차를 두고 진하게 싸운 분 아닙니까? 없다고 할 수는 없죠.” “난 됐다. 어차피 송현창 회장이 HW 그룹을 대표해서 갈 테니까…. 그만하면 예의 차린 거다. 그보다 넌? 진 회장님이야 분명히 가실 텐데 모시고 안가?” “글쎄요. 할아버지께서 함께 가자고 하면 가고, 아니면 저도 빠져야죠. 그곳에 끼기에는 아직 짬밥이 부족합니다.” 함께 갔으면 좋겠다. 그쪽 집안도 3세들이 득실댄다. 그들 중 경영에 발을 담근 사람도 있고 준비 중인 사람도 있다. 함께 손잡고 공동 투자할 수도 있고, 사업을 두고 경쟁할 수도 있다. 이럴 때 대현 그룹과 안면이라도 익히면 나쁘지 않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3일이 지났지만, 할아버지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 * * “갈 사람들은 다 갔어?” “네. 청와대 수석들, 장관급들은 첫날 다녀갔습니다. 그룹 총수들도 대부분 조문했고요.” “우리 애들은?” “진영기, 진동기 부회장은 첫날 다녀갔습니다만, 진상기 이사장은 여전히 두문불출입니다.” 진 회장은 계속 한숨만 쉬었다. “언제 들를 생각이십니까?” 이학재 실장이 조심스레 묻자 진 회장의 한숨도 멈췄다. “발인 전날 가보자고. 그때쯤이면 그 자식놈들도 눈물이 말랐을 거 아닌가? 그놈들 표정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 “굳이 그러실 필요가…?” 이학재는 진 회장의 의중을 몰라 슬쩍 운을 뗐다. “죽고 나면 못 보지 않나. 내가 죽고 나면 내 자식놈들이 무슨 표정을 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꿍꿍이인지 난 모르잖아.” “그럼 그 모습을 보시려고?” “그래. 그놈들이나 내 자식놈들이나 다를 바 없어. 다 똑같은 놈들이야. 제 손으로 돈이라고는 벌어본 적이 없지만, 돈이 부족한 적도 없었던 놈들. 죽고 나면 못 볼 광경, 살아서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게야.” “어떻게 같겠습니까? 대현은 워낙 잘게 쪼개야 하니 2세들의 불만이 터지기 직전이지만, 순양은 큼지막하게 양분하지 않았습니까? 다를 겁니다.” “됐네, 이 사람아. 뭘 위로까지 하려고 해? 크든 작든 다 똑같아. 사람 욕심이 끝이 있나? 참, 나중에 내 무덤에 와서 이야기나 들려줘.” “네?” “나야 눈 감으면 끝이지만 자네는 우리 자식들 싸우는 꼴 똑똑히 볼 거 아닌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소상하게 말일세. 허허.” 이학재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농담처럼 말하지만, 진심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조금은 무례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이학재는 진 회장의 진심이 궁금했다. 진 회장은 잠깐 동안 대답 없이 이학재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의외의 말이 쏟아졌다. “그야 자네 맘이지.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는가? 단지 부탁 한 가지 한다면… 너무 욕심부리지는 말게.” “네?” “됐어. 내가 죽고 이 세상에 없으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진 회장의 마음을 더 듣고 싶었으나 꼬치꼬치 물을 수는 없는 일, 이학재 실장도 입을 다물었다. “참, 도준이도 데려갈 테니까 그리 알게.” “네. 혹시 발인까지 보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야지. 내가 세상에서 가장 꼴 보기 싫은 영감이 죽었는데 하룻밤 같이 지내는 게 힘들 리가 있겠나? 땅속에 묻히러 떠나는 것도 내 눈으로 꼭 봐야지.” “알겠습니다. 대현 측에 미리 알려주겠습니다.” * * * 성북동의 사찰로 향하는 차 속에서 할아버지는 평소와 다르게 말씀을 거의 하지 않으셨다. 나이 들면 양기가 입으로 올라서 끊임없이 수다 떠는 게 노인의 특징이라고 말씀하실 만큼 말이 많으셨던 분이었는데…. 참다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 회장님 댁도 보통 큰 게 아닌데 왜 사찰을 장례식장으로 한 거죠?” “산 사람 뜻에 따르는 거야. 주 회장 할망구가 맺혔던 한을 푸는 거지.” “네?” “평생 집 밖으로 쫓아내고 싶었던 서방이었거든. 주영일 그 영감은 밖으로만 돌았어. 여자를 너무 좋아해서 말이야. 호적에 오른 자식 여덟 중에 배다른 자식이 셋이나 섞여 있다는 소문도 있잖아.” “그거 사실입니까?”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모르지. 가끔 만나 밥 먹을 때 내가 몇 번이나 물었는데 절대 아니라고 딱 잡아떼더구나. 그건 그 가족들만 아는 비밀인 게야.” 할아버지의 굳었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호적에 올리지 않은 자식도 꽤 많을걸? 여자가 자식 낳으면 한 재산 뚝 떼줘서 외국으로 보낸 게 한두 번이라야 말이지.” 그 여자들과 자식들도 지금쯤이면 주 회장이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았을 테고,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느라 분주할 것이다. 앞으로 유산 상속 소송과 친자 확인 소송이 줄을 잇고 대현 그룹은 이 추문을 막느라 언론에 돈을 뿌리기도 할 것이다. 물론 대현 그룹에 발붙인 혼외자는 단 한 명도 없지만 모두 두둑하게 합의금을 챙길 것이고 다시 외국으로 사라진다. 이런 생각에 웃음이 났지만, 꾹 참고 할아버지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서방이 죽었으니 한풀이하는 게지. 마지막 닷새만이라도 집안에 발을 못 붙이게 한 거야.” 주 회장의 부인은 팔순에 가깝다고 들었다. 여자는 나이 들어도 여자다. 평생의 한을 이렇듯 잔인하게 풀어버리니 말이다. 내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곁눈질하자 할아버지의 눈빛도 변했다. “이놈이! 무슨 생각하는 게냐?” “아, 아니에요.” “아니긴! 네놈 얼굴에 훤히 다 써 있다. 날 주영일 그 영감이랑 같이 보는 게냐?” “아니라니까요. 그냥….” “그냥, 뭐?” 할아버지는 얼굴에 남아있던 마지막 미소를 지우더니 조금은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아는 한, 배다른 자식은 없어. 남자가 조심해야 할 세 곳을 항상 조심하며 살았어. 그게 뭔지는 알지?” 머리를 끄덕였다. 입과 주먹과 거시기 아닌가? “그런데 ‘아는 한’이라니요? 모르는 게 있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아이 가졌다는 걸 내게 알리지 않은 여자가 없다고는 장담 못 하지 않겠냐?” 갑자기 할아버지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이런…. 다 큰 자식과도 나누지 않은 이야기를 손자랑 하게 될 줄이야. 허허허.” “제가 또 할아버지와 은근히 통하는 게 있으니까요. 흐흐.”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툭 쥐어박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도준아.” “네.” “혹시 말이다. 내가 죽고 나서 내 자식이라고 나타나는 놈이 있으면 철저하게 친자 확인을 해 보거라.” “그리고요?” “네 큰아버지들은 무조건 쫓아내려 할 거다. 또 그래야 하고. 그런 애가 순양에 발을 담그는 일은 없어야 해. 하지만 사는 꼴이 거지 같으면 네가 적당히 돌봐줘라. 사람답게 살도록 말이다.” “네. 부족함 없도록 보살피겠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늘 이 사이에 낀 것 같은 찝찝함을 네가 씻어주는구나. 허허.”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사찰에 도착했다. 사찰 입구에는 대한민국 모든 기자가 다 모여들었나 싶을 정도로 수많은 기자가 기다리고 있었고 입구를 지나는 모든 차량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대현 그룹 직원들이 입구를 막고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으니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자동차 번호판이라도 찍는 게 전부였다. 차량 조회를 하면 누가 다녀갔는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도준아.” “네.” “유리창 내려.” “네?” “빨리.” “할아버지.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댈 겁니다.” “그러라고 창문을 여는 거다. 어서.” 운전하는 기사가 놀라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창문을 내렸다. 이미 할아버지 쪽 창문이 완전히 열렸기에 더는 주저하기 어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차 안까지 카메라가 들어와 무작정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사찰 입구를 통과하자 겨우 한시름 놓을 정도였다. “할아버지 갑자기 왜 그러셨어요?” “흐흐. 내일이면 네 얼굴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날 거다.” ======================================== [182] 거인이 떠난 자리 2 내 얼굴이 신문에? 하긴, 순양그룹 회장님과 동승한 젊은 청년. 아들이 아니라 손자와 함께했다는 사실도 충분한 기삿거리가 된다. 그러니까 왜 노출을 원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승용차는 이미 멈춰 섰고 대기 중이던 직원이 문을 열었기 때문에 기회를 놓쳐버렸다. 차에서 내린 할아버지는 인상을 찌푸렸다. 육개장 냄새가 경내를 진동했기 때문이다. “참 심술궂은 영감이로고. 풀만 먹는 스님들 침 고이게 고깃국이라니. 허허.” 이때 머리 희끗희끗한 주태식 대현자동차 회장이 달려와 허리를 숙였다. “힘든 걸음 하셨습니다. 회장님.” “차 타고 편히 왔네. 괜찮으이.” 할아버지는 주태식 회장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환중이시라는 소식을 듣고도 뵙지 못해 늘 마음에 걸렸는데 먼 길 가시는 분 마지막은 봐야지. 가세나.” 장남 주 회장이 앞장서고 우리는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할아버지를 알아본 사람들이 벌떡 일어서서 머리를 숙였다. 경내로 들어가니 십여 명의 자식들이 쭉 서 있었다. 과거엔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던 집안의 사람들, 그들이 바로 내 눈앞에 서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길, 바로 동류의 사람을 보는 눈빛이다. 엄청나게 많은 꽃으로 둘러싸인 영정, 한 끗발 날리는 수많은 조문객, 끝없이 늘어선 화환. 이런 것 때문에 조금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펴졌다. 할아버지께서 향을 피우며 작별인사하는 것을 멀찍이 떨어져 지켜봤다. 하지만 향을 피운 할아버지가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다른 조문객들은 할아버지 때문에 밖에서 기다렸고 상제들도 감히 말릴 수 없어 할아버지 눈치만 보기 시작했다. 5분쯤 지났을 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할아버지께 다가갔다. “할아버지….” “…응? 아.” 할아버지는 쭉 도열한 상제들에게 다가갔다. “이거, 결례를 범했네. 내가 부친과 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 기회가 지금뿐이라서 말일세.” “아닙니다. 회장님. 괜찮습니다.” 맏상제인 주태식 회장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주 회장의 눈짓에 기다리던 직원 두 명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회장님, 이쪽으로 오시죠.” “그전에…. 인사드려라, 도준아.”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끌었다. “내 손자일세. 노년에 내 말동무 해주는 효손이지.”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이거였나? 나를 이 자리에 데려오고, 승용차 창문까지 열어 기자들에게 나를 노출했다. 그리고 대현 그룹 회장들에게 나를 소개한다. 내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순양의 막내 손자가 홀로 총수를 모신다. 게다가 지금까지 쉬쉬했지만, 순양의 금융부문을 물려받은 다크호스. 언론이 떠들어 댈 것이고 대현 그룹 회장들도 나를 눈여겨보기 시작할 것이다. 어떤 놈이길래 저 어린 나이에 순양그룹의 알짜 금융사를 물려받았는지. 나를 보는 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내 움직임 하나하나가 힘을 받는다. 오늘 이 장례식장에서 난 화려한 데뷔를 한 것이다. “뭐하냐? 인사드리지 않고?” “아, 네.” 난 주영일 회장의 자식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가장 먼저 악수를 청한 건 주태식 회장이었다. “세대교체의 선두에 섰다는 그 손자군요.” “주식 장사 좀 하는 게 전부인 놈일세.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시게.” 맏상제가 대표로 인사했으니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또 하나의 손이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소문으로만 듣던 분이군요. 주광식입니다.” 주영일 회장의 육 남 주광식. 대현투자증권과 투자신탁을 필두로 한 금융 계열사를 전부 물려받은 자. 나와 같은 처지다. “진도준입니다.” 마주 잡은 그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고 나를 보며 살짝 미소 짓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 * * 육개장 국물만 한 모금 마신 할아버지는 수저를 놓았다. “좀 더 드시지요?” “괜찮다. 시장하지 않구나. 오늘 밤은 예서 보내야 하니 너나 든든히 챙겨 먹어.” “그래도….” “괜찮다니까. 시장하면 그때 한 그릇 하면 돼.” 난 재빨리 육개장 그릇을 비웠다. “도준아.” “네.” “저놈들 모습을 한번 봐라.”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곳에는 주영일 회장의 자식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대는 광경이 들어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슬픔이라고는 단 한 줌도 보이지 않지?” “며칠 지났으니 그렇겠지요. 하루종일 울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뭐야? 악수 한 번 했다고 좋게 보는 거냐? 저놈들은 지금 춘추전국시대 왕들과 다르지 않다. 대현이라는 제국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서로 힘을 합칠까, 말까 고민 중인 거다.” “그럼 순양그룹은 삼국시대인가요?” 농담처럼 슬쩍 말했지만, 할아버지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도준아.” “네.” “서양 놈들은 전쟁 중이라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상대를 겨누던 총을 내려놓는다면서?” “꼭 그렇지는 않아요. 딱 한 번 있었던 일일 뿐입니다.” 크리스마스 정전(停戰), Christmas Truce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인 191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영국과 독일이 벨기에의 이프르에서 맺은 정전이다. 참호에서 대치 중이던 독일군의 한 병사가 크리스마스 캐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불렀다. 이를 들은 영국 군사들이 환호하자 독일군들이 참호 위에 촛불과 전등으로 장식된 작은 크리스마스트리들을 올려놓기 시작했고,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작은 촛불을 들고 참호 위로 올라갔다. 독일군이 노래를 다 끝마친 후 독일군 장교가 나와 영국군 하사와 악수를 하여 정전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양쪽의 군인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1915년 이후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 일이 되었다. “한 번이든 두 번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네.” “아무리 치열한 삼국시대 전쟁 중이라도, 내 장례 중에는 정전하거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참… 할 말 없게 만든다. 이 자리에서 저런 당부를 들을 줄이야. 대답하기 힘들었지만, 약속하고 싶었다. “네. 사십구재 동안 큰 소리 나오지 않도록 제가 말리겠습니다. 큰아버지들은 물론이고 제 사촌들까지 입도 뻥긋 못하게 막겠습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그리 가능해 보이지는 않지만, 네놈 큰소리치는 건 마음에 쏙 든다. 허허.” 표정이 밝아진 할아버지는 주 회장 자식들을 계속 주시했다. 마치 그들의 행동, 표정 등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새겨 넣으려는 듯 보일 정도로. “거 봐라, 내 말 맞지?” “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건 이미 먼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어. 장례식장에서 비즈니스 하려고 모두 바쁘잖냐? 특히 욕심 많은 놈은 더 바쁜 법이지. 저놈이 여섯째던가?” 할아버지는 내 등 뒤를 향해 턱짓했다. 뒤를 돌아보니 내게 악수를 청했던 사내, 주광식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황급히 일어나 머리를 조금 숙이니 그는 내 어깨를 어루만졌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수저를 들지 않으신 것 같은데….” “괜찮네. 초상집은 배고프면 언제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곳이니 좋은 거 아니겠나?” 할아버지는 조금 웃으며 주광식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데리고 가게. 뒷방 늙은이한테 볼 일은 없을 테고, 계열사를 손에 쥔 애한테 용무가 있겠지?”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주광식이 머리를 숙였지만, 할아버지는 손을 내저었다. “아닐세. 내 손자 대신 내 앞자리에 앉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이 이곳에도 줄 서 있지 않은가? 내가 심심할 틈은 없을 거야.” 할아버지의 말처럼 장례식장 조문객들은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듯 보였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재빨리 달려와 앉으려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게 훤히 보인다. “그럼 실례를 무릅쓰겠습니다.” 주광식은 할아버지께 다시 머리를 숙이고 나를 향했다. “진도준 씨.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정중한 그의 말투에 할아버지가 버럭 소리 질렀다. “이 친구야. 내가 자네 부친과 호형호제할 만큼 가까운 걸 모르는가? 조카 같은 놈에게 씨가 뭔가? 씨가?” “하하, 이거 졸지에 출중한 조카 하나 생긴 셈이군요.” 주광식은 머리를 슬쩍 긁으며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조카님. 나랑 커피 한잔 할까? 긴히 할 이야기가 좀 있는데…. 들어 둬서 나쁘진 않을 거야.” 나보다 먼저 할아버지께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여섯째지?” “네.” “판박이구먼. 성격 급한 거, 할 일 뒤로 미루지 못하는 거. 에잉!” “하하, 맞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닮았다고 말들 하더군요.” 할아버지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게 말했다. “가 봐라. 오늘 생긴 숙부 말씀 잘 들어봐.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나는 조용히 주광식을 따라나섰다. * * * “진도준 씨. 회장님 말씀은 괘념치 마십시오. 전 이미 진도준 씨를 경영인으로 보니까요.” “아닙니다. 편히 대하십시오. 제가 부족하지 않다면 숙부님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오, 나야 대환영이지. 잘생긴 인물만큼 성격도 좋으시네. 하하.” 주광식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내 등을 툭 쳤다. “그래, 우리 조카님은 어떻게 진 회장님의 눈에 들어서 그 나이에 순양의 금융을 손에 쥐게 되었을까?” “막내라 챙겨주신 걸 겁니다. 제 아버지가 막내아들이니까 애틋한 뭔가가 있으셨겠죠?” “아들에게 못 해준 걸 손자에게 대신 전해준다? 음….” 아버지가 한동안 집안의 구박을 받은 건 재계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짐작만 할 뿐입니다.” “그런 손자가 할아버지께서 어렵게 물려준 계열사를 팔아먹는다? 이건 좀 심한 거 아냐?” 이런, 너무 노골적이며 성급하다. 만나자마자 속을 드러내다니. 조용히 따로 불러낸 이유를 알았다. 대현 그룹의 여섯 째 아들은 순양 카드 매각 정보를 입수했고, 카드사가 없으니 침을 흘리는 중이다. 하지만 인수할 만큼 현금이 충분하지 않을 텐데…. “능력 안 되면 쥐고 있어 봤자 결국 잃어버리거나 뺏기죠. 제 주제를 알고 하는 행동이기에 할아버지께서도 별말씀 없으셨습니다.” “그것보다는 내키지 않았던 사업 아닐까? 돌아가신 내 아버지도 카드 사업은 끔찍이 여기시더라고. 옛날 분들에게 카드 사업은 외상장사, 고리대금업…. 이런 인식이 강하니까.” “매각을 반대하지 않으신 이유 중에 그것도 한몫했죠.” “그래서? 진척은 있나?” 참 고마운 숙부다. 내 손에 카드 한 장을 더 쥐여 주려고 이렇게 애를 쓰다니 말이다. 주는 카드를 거절할 이유는 없다. “일단 같은 식구니까 두 분 큰아버지께 제안서를 받아볼 생각입니다.” “에이, 그건 매각이 아니잖아. 계열사 지분 정리지.” “현금 받고 파는 건 매각이 맞죠. 깔끔하게 계열 분리해서 비싸게 팔 생각입니다만.” “금액은 나왔어? 대충 계산기 두드려 보니 1조 2천억에서 1조 4천억 사이가 될 것 같던데.” 돈 만지는 사람이니 셈은 무지하게 빠르구나. “세상에 원가대로 파는 장사꾼이 어디 있습니까? 발품 판 경비도 보태고 이문도 남겨야 하죠.” “뭐라? 크하하.” 주광식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조카님, 보통 아니신데? 윗사람 제치고 앞서 달리는 이유가 있었구먼. 그래서 판매가는 얼마지? 솔직하게. 숙질의 인연을 맺었느니 할인도 좋고.” 그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 [183] 거인이 떠난 자리 3 여유 있는 척 해 봤자 당신은 아니야. 들러리만 서고, 허탕만 칠 텐데…. 좀 미안하기도 하다. “숙질의 인연을 맺었느니 조카한테 용돈 주신다 생각하고 후하게 주십시오.” “오, 팔 생각은 있고? 가족도 아닌 내게?” “장사에 핏줄이 어디 있습니까? 비싸게 팔 수 있으면 피부색도 가리지 않습니다.” 난 주광식의 표정을 살피며 약한 곳을 슬쩍 찔러 봤다. “그런데 우리 카드사를 인수하실 자금은 충분하시고요?” “조카님, 장사치가 손님 주머니 걱정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돈만 확실하게 받으면 된다?” “그렇지. 외상만 아니라면 그 돈이 어디서 나오든 신경 쓸 이유는 없으니까.” “못 나올 수도 있으니 걱정돼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 조카님은 왜 그렇게 생각하지?” 주광식이 뭔가 캐내려는 듯 내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어디까지 알려줘야 하나? 장남인 주태식 회장이 자동차를 밑천으로 무자비하게 세를 불린다는 걸 말해도 될까? 형제들은 가진 회사를 차례차례 뺏기고 난 뒤 먹고 살 만큼, 적선하듯 던져준 계열사 한두 개만 남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아니, 지금은 말해봤자 믿지도 않을 것이다. 주 씨 가문의 모든 형제는 자신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현 그룹의 총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모두 알지 않습니까? 앞으로 총알 대신 돈으로 전쟁을 시작한다는 거 말입니다.” “전쟁이라….” “이미 말하기 좋아하는 언론들은 떠들어대던데요? 왕자의 난이 시작됐다고?” “내가 다른 곳으로 눈 돌릴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는구먼. 흐흐.” 주광식의 씁쓸한 미소가 알려준다. 이 사람은 목적이 다르다. 대현의 전부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가진 것을 확실히 지키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린 게 아닐까? 재미있게 흘러간다. 본래의 주광식은 무리한 대현그룹 주식 매입으로 물려받은 금융계열사 전부를 조각조각 쪼개 날려 먹었다. 그 후, 이리저리 부유하던 대현의 금융사들은 대부분 다른 대기업에 편입되었고 대현자동차가 새로이 출범한 금융계열사만 남는다. 만약 주광식이 더는 욕심 내지 않고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것에만 전념한다면 미래는 어떻게 바뀔까? “순양카드를 인수할 만큼 자금의 여유가 있다면, 전쟁에서 발 뺀다는 의미 같은데…. 맞습니까?” “이거, 오늘 처음 만난 조카님에게 내 속을 다 들키게 생겼구먼. 눈치 하나는 정말 발군이야. 진 회장님의 총애를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지.” 주광식은 나를 향해 빙그레 웃고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상제의 도리가 아니니 이만 하지. 하지만 분명히 난 제안한 거야. 순양카드 인수대상에 나도 포함하는 거 절대 잊으면 안 돼. 오케이?” 거절하지 못하고 얼떨결에 잡은 내 손을 조금 과장되게 흔들었다. 그 순간, 아주 작지만, 이상한 이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단순하지 않다. 더 복잡한 것이 숨어있다. 이런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이마를 조금 찡그렸지만 주광식은 보지 못했다. 주변을 살피며 돌아섰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계신 곳으로 돌아가니, 말 한번 나눠보고 싶어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은 줄어든 것 같지 않았다. 자리를 피해 줘야 하나, 아니면 할아버지 주변의 사람들을 쫓아버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던 사람은 나를 발견하자 슬며시 일어섰다. “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내가 다시 자리를 비울 때까지는 할아버지를 알현할 기회가 없으니 뒤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사람들은 모두 실망했을 것이다. “그래, 뭐라고 하더냐?” “순양카드 인수대상에 자기를 끼워달라고 하더군요.” “주광식이가? 진짜 그 말을 했어?” “네.” “그래서 넌? 뭐라고 했지?” “제 대답은 듣지도 않고 가버렸습니다.” “그래? 그럼 넌 어떠냐? 주광식 그놈이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넘길 생각이냐?” 할아버지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손을 살짝 저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순양의 간판을 늘리면 늘였지 줄일 생각은 없습니다. 순양카드는 두 분 큰아버지 중 한 분이 가지게 될 겁니다.” “허허, 주광식이가 헛물만 켜는구나.” 안심한 할아버지의 웃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분도 목적은 달성한 것 같습니다.” “응? 그게 무슨 뜻이지?” “순양카드를 인수할 생각은 없을 겁니다. 그런 척하기 위해 절 이용했을 수도 있어요.” “척하다니?” “주광식 회장이 순양카드 인수전에 뛰어들었다는 소문이 나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위장전술이라고나 할까?” “위장? 왜? 그놈이 널 흔들어 봐야 얻을 게 없지 않으냐?” “절 흔드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분의 형님들을, 특히 주태식 회장을 안심시키려는 거 아니겠습니까?” 잠시 눈을 깜박거리던 할아버지는 혀를 찼다. “그것참, 이놈들 집구석도 잘 돌아간다. 쯧쯧.” 가진 자산을 모두 바깥의 회사를 인수하기 위해 쏟아붓는다. 대현 내부 싸움에 발을 담그지 않겠다는 시그널이라는 걸 할아버지도 금방 알아차렸다. “너도 참, 어찌 그리 눈치가 빠르냐? 그걸 어떻게 알아챈 거야?” “주변에 보는 눈이 쫙 깔렸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절 찾아와서 불러냈어요. 좀 과장된 악수까지…. 이건 광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죠. 대현의 금융부문 회장이 순양의 금융계열사 후계자를 만났다. 이 사실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란 걸 테죠.” “그렇지. 은밀히 뜻을 전달하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순양카드를 인수한다는 건 대현 그룹의 다른 계열사 지분을 사들일 생각이 없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로 주태식 회장을 안심시킬 수 있을까?” “완벽한 위장전술은 아닐지라도 한숨 돌릴 시간은 벌 겁니다. 분명히 저와의 협상을 질질 끌 겁니다. 소문은 요란하게 낼 테죠. 그 사이에 물밑으로는 대현그룹 지배 지분을 확보하며 힘을 키워 나갈 겁니다.” 할아버지는 초상집에 어울리지 않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손자 혜안을 한 번 볼까?” “무슨…?” “과연 누가 실질적인 대현그룹의 회장이 될까? 지금처럼 쪼개진 대현이 아니고 말이야.” “할아버지께서는 다시 합쳐진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강물은 흘러가는 동안 좀 갈라지기도 하고 굽이치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바다에서 합친다. 시간문제일 뿐이야.” “지금 상황은 대현자동차가 가장 유력해 보입니다. 규모도 가장 크고 대현의 상징성도 있으니까요.” “건설도, 조선도 대현의 상징 아니냐?” “장남이라는 상징성도 큰 무기가 되니까요. 지금 보십시오.” 내 손이 빈소를 가리켰다. 주태식 회장이 수행원을 잔뜩 거느리고 온 국회의장을 공손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이건 가족장입니다. 이곳을 찾은 귀빈을 영접하는 사람은 장남입니다. 귀빈들에게 자신이 후계자라는 걸 단단히 못 박아 두는 게 경제인장이 아니라 가족장을 치르는 진짜 이유인 거죠.” 사실 주영일 회장 정도라면 가족장이 아니라 경제인장이 격에 맞다. 경제인장으로 결정했다면 먼저 전경련,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그리고 한국경영자총협회 등의 경제 5단체에서 장례위원회를 발족한다. 이 장례위원회가 장례 전체를 총괄하게 되고, 언론은 장례위원회와 위원장의 행보와 발표에만 귀와 촉각을 곤두세운다. 고인의 위상은 올라가겠지만, 장남은 주목받지 못한다. 주태식 회장은 분명 이런 계산까지 염두에 두고 가족장으로 밀어붙인 것이 틀림없다. 할아버지는 얼이 빠진 것처럼 내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넌 도대체 어떻게 생긴 놈인 게냐?” “네?” “이놈아. 돌아가신 아버지를 가족끼리 보내드리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도 있어. 모든 걸 그런 치밀한 계산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건….” “할아버지. 내일이 발인입니다. 오늘이 돌아가신 부친과 마지막으로 함께 보내는 밤이라고요. 그런데 처음 보는 절 불러내서 위장전술이나 쓰는 아들입니다. 전 저들에게 그런 순수한 마음이 눈곱만큼이라도 남아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을 조금 단호히 말씀드리니 할아버지는 잠깐 말을 잊으셨다. 아마도 주영일 회장의 장례와 당신을 장례가 겹쳐 보였을 것이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 나왔다. “넌 어떻게 할 생각이냐?” “네? 뭘 말입니까?” “내 장례식 말이다. 가족장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사회장이라도 해서 장남인 네 큰아버지의 힘을 깎아 먹을 거냐?” “그건 집안 어른들이 결정하겠죠. 집안 서열 가장 아래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 결정에 따르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네 뜻이 뭐든 어른들 시키는 대로만 한다고? 그게 네 뜻과 달라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타당하기까지 하다. 장례는 자식의 몫이지, 손자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이 들수록 어린애처럼 변한다고 했던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수수방관하겠다는 말에 화도 나고 섭섭하기도 했나 보다. “몸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해도 마음은 제 뜻대로 하겠습니다.” “뭐라? 어디서 말장난을? 좋다, 네 녀석 마음은 뭐냐?”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우리들의 대화를 엿듣는 모습이다. 다행히 할아버지도, 나도 목청을 높이지는 않았고,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 주변 가까이 자리 잡은 조문객은 없었다. “할아버지 묘소는 용인에 있는 순양 음악당 공원이지요. 명당자리라고 할아버지께서 직접 고르셨으니까 그 누구도 바꾸지는 못할 겁니다.” “그게 어떻다는 말이냐?” “3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아침 문안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움막이라도 짓고 삼년상이라도 하고 싶으나 할아버지께서 주신 계열사를 방치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침 문안 인사로 대신하겠습니다.” 분명 감동하시었을 텐데, 티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신다. “하여튼 귀에 착착 달라붙는 그 달달한 소리는 기막히게 하는구나. 평소에 연습이라도 하는 게냐?” 할아버지는 심통 맞은 노인네마냥 삐죽이 입을 내밀었지만, 눈매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참 내, 제 진심을 그런 식으로 받으신다 이겁니까?” “시끄럽다.” 괜히 버럭 소리를 한번 지르시고 나서야 차분한 목소리로 변했다. “네 녀석은 내가 가고 나면 일 안 하고 놀 생각이더냐? 일분일초가 아쉬운 놈이 매일 아침 3년은 무슨… 가끔 생각나면 들러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해주고 돌아가.” 평상시에는 세상을 떠나면 완전한 무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셨던 분이다. 그런 할아버지였지만 당신이 잠든 곳을 잊지 말고 자주 찾아 주기를 원하는 걸 보면, 외로움을 두려워하시는 것 같았다. “이만 일어서자. 몸이 마음 같지 않구나.” “돌아가시게요?” “주 회장 심심하지 않도록 하룻밤 보내고 싶었는데….” “네. 집에서 쉬십시오. 젊은 저도 밤샘은 힘듭니다.” “그래야겠다. 내일 다시 와서 저 영감 가는 길, 배웅이나 하련다.”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키니 곳곳에서 사람들이 달려왔다. 대부분 사람들을 못 본 체 했고 맏상제인 주태식 회장과 그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건넸다. “내일 보세나. 이젠 친구 마지막도 지키지 못할 만큼 늙어버렸네. 허허.” “아닙니다, 회장님. 와 주신 것만 해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 명 한 명 악수를 나누던 할아버지는 육 남인 주광식 회장의 손을 잡고 그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 꺼 손대지마.”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할아버지의 느닷없는 공세에 주광식 회장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 [184] 성질 죽이자 1 “자네 선친께서도 내 꺼는 손대지 않았어. 다른 놈들 꺼를 놓고 싸우기는 했지만, 서로가 가진 건 욕심내지도, 탐내지도 않았어.” “회, 회장님…….” 더듬거리기도 하고 얼굴도 붉어진 주광식이었지만, 그의 눈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어린 내 손자가 가진 거라고 해서 순양의 이름이 지워진 건 아니야. 경고하는데 순양카드에 손끝 하나라도 대면 힘없는 노인네 강단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될 걸세. 명심해.” “회장님, 일단 고정하시고….” 장남인 주태식 회장이 나섰지만, 할아버지는 요지부동이었다. “빈소니까 큰소리 내지 못한 걸 다행으로 여기게.” 주태식의 화살이 동생을 향했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엉?” “오해십니다, 형님. 그냥 회사 근황이나 물어본 게 전부입니다.” 곤혹스러워하는 주광식을 보며 할아버지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돌아선 할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잠깐 스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가자, 앞장서거라.” “네.” 빈소를 나오니 수행원들이 이미 승용차의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 아직 기자들 많나?” “네. 더 불었습니다.” “그래? 잘됐구나. 기자들 사진 잘 찍도록 창문 다 내리도록 해.” “할아버지! 이미 충분합니다.” 미치겠다. 적당한 수준이라는 걸 모르시는 분이다. 마음먹은 일이라면 최대한 크고 화끈하게 끝을 보려는 저 성품은 여전하다. “세상에 충분한 건 없다. 가다가 멈추니 그런 것이지. 만족이란 포기를 아주 그럴싸하게 포장한 말일 뿐이다. 명심해.” 뭐…. 할 말 없게 만드는 것도 여전하다. 난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차에 올랐다. 사찰 입구가 보이자 할아버지는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웃어, 이놈아. 네 사진이 내일 전국을 도배할 건데 그 잘생긴 얼굴 찌푸린 채로 나갈 거냐?” “초상집 나가면서 환하게 웃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가? 아무튼 좋은 인상 주도록 노력해보라고.” 귀가 멍멍할 정도의 셔터 소리를 한참 들은 뒤에야 사찰에서 멀어졌다. “그런데 할아버지.” “왜?” 난 차의 속도가 올라갔을 때 눈치를 보며 입을 뗐다. “주광식 회장에게 왜 그러셨어요? 혹시 도와주신 겁니까?” “내가 누굴 도와?” “주광식 회장이죠.” “그놈을 왜?” “그러게요. 할아버지께서 그런 말씀 안 하셔도 순양카드가 대현으로 넘어갈 일도 없는데…. 주광식 회장이 딴생각 없다는 걸 주태식 회장에게 알려준 꼴 아닙니까?” “바로 봤다.” “그러니까, 왜요? 어차피 알게 될 텐데…. 그냥 못 박는 것 이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할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이놈아. 무슨 구체적인 목적이 있어야만 행동하는 건 아니잖느냐? 그냥 그러고 싶었다. 주광식이를 도와주면 대현그룹이 더 시끄러워질 테니까 말이다. 난 저놈 집구석이 조용한 걸 못 참겠더라고. 허허.” 어떤 순간이든 기회가 닿을 때마다 경쟁자를 흔들어놓는다. 목표가 없을지라도 본능적으로. 가진 것 대부분을 물려주고 일선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하다. 우리 할아버지. * * * 다음 날, 주 회장의 발인에 모시고 가기 위해 해 뜨기도 전 할아버지 댁으로 달려갔다. 할아버지는 이미 조간신문을 구해 기사를 샅샅이 살피고 계셨다. “어떠냐? 꽤 그럴듯하게 나왔지?” 신문 1면은 여전히 고 주영일 회장의 장례 기사였고 주변 기사로 나의 이야기도 실렸다. 「순양그룹의 새로운 다크호스?」 「만 24세의 젊은 후계자, 진도준. 순양그룹의 금융을 짊어지는가?」 「한국 20대 부자 순위 1위의 진도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다.」 이 정도 기사는 양반이었다. 스포츠 신문은 주영일 회장의 기사가 아니라 내 사진을 큼지막하게 박고 1면을 도배했다. 그것도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모든 것을 가진 남자. 돈, 외모, 두뇌.」 「수능 전국 10위의 성적, 서울대 법대 졸업, 재계에 화려하게 데뷔.」 「재계의 거물 진양철 순양그룹 회장과 한국 대표 미인 이서현 씨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0.001%의 남자, 진도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한국 최고의 신랑감 1순위, 진도준」 기자 놈들은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손발이 오그라드는 문장을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쓸 수 있을까? “내가 어제 단단히 일러뒀거든. 우리 손자 사진 제대로 싣지 않으면 광고 싹 끊어버리겠다고. 흐흐. 이놈들… 약발 제대로 받았구먼.” 약발이 아니고 협박이겠죠. 광고 끊는다는 건 밥줄 끊는다는 소리니까요.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이미 내 표정을 보고 눈치채신 것 같다. “광고는 무기야. 무기를 손에 쥐고 쓰지 않는다는 건 바보 같은 짓 아니냐?” “전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러세요? 흐흐.” “네 얼굴이 말하니까 그러는 거다.” 이때 이학재 실장이 서재로 들어왔다. “출발하셔야 합니다. 회장님.” 나를 발견한 그는 신문을 가리켰다. “실물이 더 나은데, 아깝다. 그치?” “저 정도 나온 것도 감지덕지죠. 오늘은 실장님도 가십니까?” “그래. 오늘은 내가 모시마. 넌 안 가도 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니다. 오늘은 내가 긴한 약속이 있어. 그러니 넌 빠지는 게 나아.” 출발할 채비를 마친 할아버지도 손을 내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세요.” 이럴 것 같았으면 미리 알려주시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말하지는 않았다. 삼년상을 치르겠다는 말까지 했는데 아침 문안 인사라고 생각하면 불평할 수 없는 일이다. 할아버지가 출발하고 난 곧바로 순양 본관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지만 이미 많은 직원들이 빠른 걸음으로 건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실장님. 오늘은 정문으로 들어가지 마시고 지하주차장의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는 게 어떨까요?” 핸들을 잡은 순양시큐리티 직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기사 때문에 그런 거죠?” “네. 이제 실장님 얼굴을 모르는 직원은 없을 겁니다. 불편하실 것 같은데….” “그럽시다. 순양 직원들 눈에는 부모 잘 만난, 밥맛없는 새끼 아니겠어요?” “아니 꼭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나도 내 사촌들을 보면 그런 생각 드는데 일반인들은 오죽하겠습니까? 내가 뭘 하든 전부 돈으로 쌓은 계단으로 편하게 정상에 오른 놈일 뿐입니다.” 운전대를 잡은 직원은 싱긋 웃으며 지하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 * *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아, 그보다 축하드… 릴 일인가요?” 전용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장도형 부사장은 웃으며 신문에 나온 내 사진을 가리켰다. “쪽팔려 죽겠습니다. 그만하세요. 흐흐.” “이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 힘들어지겠습니다.” “그건 상관없어요. 일하는 데 도움만 된다면 TV 예능 프로그램이라도 나갈 생각입니다.”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도움이 크죠. 얼굴이 바로 명함이니까요. 그리고 이번 기사는 진 회장님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핏줄이라는 뉘앙스가 강해요. 앞으로 누굴 만나더라도 순양의 계승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24층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주광식 회장이 절 불러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장도형 부사장에게 어제 장례식장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니 그의 눈이 커졌다. “그럼 또 한 명의 입찰자가 나타난 거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닌가요?” “그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분 목적이 뭐든지 간에 충분히 이용할 만한 점이 있지 않을까요?” 장도형은 머리를 약간 갸우뚱했다. “카드사는 그룹 내에서 소화하기로 결정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요.” “아…. 페이스메이커로 이용하자는 뜻이군요.” “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두 분 부회장님께서 손이라도 잡게 되면 낭패니까요. 큰아버지들이 외부의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만약 주광식 회장이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어쩌시려고요?” “주 회장은 아주 좋은 조건의 계약서를 우리 눈앞에 흔들지는 모르지만 절대 도장 안 찍습니다. 인수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어요. 그 점을 잘 알고 써먹어야 합니다.” 장도형은 약간 허탈한 표정으로 가방을 뒤적이며 서류 몇 장을 꺼냈다. “이거, 새로운 선수가 등장했으니 지금까지 룰은 무용지물이 되었네요.” “그건…?” “진동기 부회장 측의 제안입니다.” “특이한 점이 있습니까?” “이제 시작이니까 아주 평범한 내용일 뿐입니다. 이 평범함에 우리가 특별함을 더해 카운터를 날려야겠죠.” “복잡한 건 뺍시다. 최종 인수가격, 이자율 그리고 담보. 담보는 순양중공업과 순양건설의 주식. 모자라는 금액은 순양중공업의 전환사채 발행으로 대신하겠다고 하십시오.” 장도형은 아쉬운 듯 끙 하는 낮은 신음을 냈다. “카운터가 아니라 가져가기 쉽게 포장까지 해주는 꼴인데….” “말했죠? 절 믿으시라고. 좋은 조건을 내거는 만큼 인수가격과 이자율을 높이면 됩니다.” “그래 봤자 그 돈이 지금 들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아시죠?” 장도형이 왜 자꾸 우려를 드러내는지 안다. 기업 경영이라는 항해를 할 때 언제 폭풍우를 만날지 모른다. 항상 위기를 대비해야 하는데 가장 훌륭한 대비책 하나가 사라지니까 불안한 것이다. 그는 지금 이인자 아닌가? 경영부실의 책임을 첫 번째로 져야 한다. 물론 모든 책임은 내게 있지만, 난 순양금융그룹의 주인. 쫓겨나는 건 주인이 아니라 마름이다. 게다가 그는 순식간에 임원 목을 쳐버리는 내 모습을 봤다. 자신이라고 해서 그 꼴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장담 못 한다. 늘 불안에 떨며 경영 일선에 서는 건 지옥이나 다름없다. 제대로 그를 부려먹으려면 불안에서 건져내야 했다. “부사장님.” “네.” “우리 금융그룹 자금 흐름은 매일 아침 제가 받죠?” “네. 제가 항상 메일로 보내드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난 회사 자금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합니다. 오차가 없다면 말이죠.” “오차 없어요, 정확합니다.” “그럼 자금 상황이 나빠지면 제가 돈을 구해 옵니다. 순양카드가 빠져 구멍 난 자금은 전부 제가 채워놓을 겁니다. 염려 마세요.” 장도형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실장님 능력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실장님의 말씀만 믿고 안심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못 믿겠다는 뜻이군요. 하하.” “웃을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투자의 귀재라 해도 한계가 있죠. 어떻게 개인이 국내 굴지의 카드사의 영업 이익을 커버한다는 말입니까? 차라리 미라클의 자금이라면 안심입니다만….” “남의 투자사 돈을 함부로 빼내 올 수는 없죠.” “그러니까요.” 치밀한 건가? 겁이 많은 건가? 젊은 나이에 갑자기 부사장으로 승진하니 더 조심스러워진 것 같다. “작년 순양카드 순이익이 1,250억 정도죠?” “네.” “불안하면 지금이라도 말하세요. 회사 통장에 2천억 넣을 테니까. 이러면 안심하겠습니까?” 장도형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훨씬 굳어졌지만,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잠깐 아무 말 없었다. “허언하실 분은 아니니까 안심입니다. 저도 돈 부족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내 눈은 못 믿어도 내가 가진 재산은 믿는다. 하긴, 그것이 더 이성적인 판단이다. 돈은 거짓말을 못 하는 확실한 숫자 아닌가? “이야―! 우리 막내, 하루아침에 슈퍼스타가 됐는데도 여전히 성실해.” 노크도 없이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은 몇 안 된다. 진영준도 그중 한 명이다. 순양의 적통이니까 말이다. ======================================== [185] 성질 죽이자 2 “아, 형님.” 진영준이 문앞에서 짝다리 한 채 빙긋 웃고 있다. 내 기사 때문에 온 건 아닐 테고, 심부름꾼 역할인가? 아니면 혼자 또 나대는 걸까? “기사 보니 네 생각이 나서 와봤다. 마침 있었네.” 장도형 부사장은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뒤 서류를 주섬주섬 챙겼다. “앉으십시오. 전 볼일 끝났으니까 두 분께서 담소라도 나누세요.” 진영준은 별다른 양해도 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에게 장도형은 보이지 않거나 완전히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다. “오늘 주 회장님 발인인데 넌 안 갔어?” “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가셨어. 전경련 회원사 오너들 대부분 참석한다고 하더라.” “그렇군요.” 이런저런 설명 없이 짧게 대답하는 게 진영준이가 빨리 본론을 꺼내도록 하는 지름길이다. 무덤덤한 내 표정과 말투 때문인지 진영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더러운 성질 대로라면 분명 이때쯤 큰 소리가 터져 나와야 하는데 눈살 한 번으로 끝내는 걸 보면 원하는 게 있다. “그런데 너… 어제 대현 주광식 회장과 뭔가 은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던데, 맞아?” 벌써 모두의 귀에 들어갔나? 이렇게 빨리 내 행적이 돈다는 건 주광식이 흘렸거나 아니면 할아버지나 내 뒤에 꼬리가 붙었다는 뜻인데…. “네. 잠깐요.” “무슨 대화였는지 말해줄 수 있냐?” “별 내용 없었습니다.” 시큰둥한 태도에 답답한지 먼저 카드라는 말을 꺼냈다. “너 설마 순양카드를 대현으로 넘길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형님.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시죠?” “어제 주광식 그 사람이 순양카드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면서?”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그 엄청난 주 회장의 장례식이야. 보는 눈이 몇 개였겠어? 이미 소문 다 퍼졌다.” “눈이 귀를 대신할 수는 없을 텐데요? 대화 내용까지 어떻게 들었을까요?” “어째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투로 들린다?” “시비는 무슨, 내가 그럴 필요가 있겠어요?” 내 말속에 숨은 뜻 정도는 충분히 알아차릴 눈치는 있다. 순양의 한 축을 맡은 나와 아버지 덕분에 겨우 임원 자리에 앉은 당신은 이미 격이 다른 위치다. 시비를 거는 건 동등한 경쟁자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상대를 도발할 필요는 없다. 이 의미를 알아챈 진영준은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지만, 분통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참을 놈이 아닌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심부름을 끝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일 것이다. “그래? 그럼 됐고.” “형님. 된 게 아니고 말씀은 해 주셔야죠.” “뭐? 소문이라고 했잖아.” “그런 소문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소문 날까 봐 할아버지께서 대현 가족에게 단단히 경고까지 했어요. 순양 계열사는 절대 외부로 넘기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할아버지께서?” “네.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말 돌리지 말고.” 잠시 입술을 깨물며 주저하던 진영준은 다시 거만을 떨며 말했다. “좋아. 본론만 하자. 카드사 우리한테 넘겨. 작은아버지 말고.” “조건부터 말해야죠. 한두 푼 하는 구멍가게 아닙니다. 딸린 식구가 몇이고 일 년에 벌어들이는 돈이 얼만데요?” “작은아버지보다 10% 더 얹어준다. 그게 우리 입장이다.” 돈 지랄로 가시겠다? 머리 짜낸 생각이 겨우 이정도라면 한심할 뿐이다. “10%면 천억 원대 아닙니까?” “큰돈이지.” “형님. 제가 돈이 아쉬운 놈으로 보입니까? 순양의 금융부문이 자금 부족해서 회사를 팔아치우는 거 아닙니다. 카드사 영업 구조가 마음에 안 들어서 파는 것뿐이죠.” “그래서? 돈 더 주는 건 무의미하다?” “원하는 걸 얻으려면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아는 게 우선 아닐까요?” “그래서? 넌 뭘 원하는데?” “모릅니다.” “야!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지금 장난치냐? 계열사 몇 개 받았다고 눈에 뵈는 게 없어? 어디서 건방을 떨어?” 본심이 나왔다. 건방. 상대의 뜻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틀어가기 위해 머리도 숙이고 발이라도 주물러 주는 게 거래다. 상대의 뜻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다르면 건방이라고 말하는 진영준. 물론 이 사람은 그래도 된다. 자신을 대신해서 머리를 숙이고 발이라도 주물러 줄 사람은 많으니까. 하지만 진영준은 자신이 진영기 부회장을 대신한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이런 진영준의 본성이 내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실이니까요. 딱히 원하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더 좋은 거 아니겠어요?” “말장난하지 말고! 뭐냐?” “잘 생각해봐요. 백화점에서 쇼핑할 때 꼭 필요한 것만 삽니까? 돈 많을 땐 팍 꽂히는 물건 있으면 그냥 사잖습니까? 충동구매라고 하죠. 비싸게 파는 건 기본입니다.”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놈 때문에 내가 답답해서 안 되겠다. 하나 정도는 가르쳐 줘도 되겠지. “진동기 부회장님도 돈 싸움에서 밀릴 분 아닙니다. 자꾸 가격만 올리지 말고 제 마음에 쏙 드는 거 하나 제안하세요. 고객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세심한 기술… 순양전자 가전제품의 광고 문구잖아요.” 진영준은 이를 앙다문 채 말을 아꼈다. 내 마음을 확 끌어당길 뭔가를 생각하지만, 돈이 최고라고 여기는 그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카드사 매각이라는 카드 한 장으로 두 부회장을 동시에 엿먹일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진영준은 입을 꾹 다문 채 일어섰다. 아버지에게 쪼르르 달려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도준아.” “네.” “난 아직 예전에 내가 말했던 걸 잊지 않았어.” “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걸 보면 잊었나 봅니다.” “널 순양그룹의 이인자로 만들어주겠다는 거. 이제 기억나냐?” “아, 그거요? 푸훗.”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형님. 먼저 일인자가 되세요. 그래야 그 말이 무게를 갖습니다.” “내가 일인자가 되면 넌 필요 없어. 날 일인자로 만들어 줘야 네가 이인자가 되는 거야.” “전 지금이라도 둘째 큰아버지를 일인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럼 순양그룹의 이인자는 바로 제가 될 거예요. 지금 당장 말이죠.” 저울의 중심을 바꿔 버릴 수 있는 힘. 이게 나의 강력한 무기라는 걸 다시 한 번 일깨워 줘야 하나? “부지런히 달려오세요. 그래도 제 앞에 설까 말까 할 겁니다.” 진영준의 안색은 이미 터져버릴 듯이 붉었다. 그래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걸 보니 성질 많이 죽었다. 철이 좀 들었구나. * * * “빈소를 찾은 조문객 모두에게 이런 인사를 하십니까?” “그럴 수는 없지. 우리 조카님이야 워낙 특별해서 이렇게 특별하게 모신 거야. 왜? 불편해?” “특별해도 너무 특별해서요. 저도 식당 하나 통째로 빌린 적은 많지만, 피자집을 빌린 적은 없거든요.” 테이블이 열 개도 채 안 되는 작은 피자 전문점이라니. 주광식 회장 정도의 나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피자라는 건 대외비야. 사실 좀 쪽팔리거든. 하하.” “이상하긴 한데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 조카님 나이에서나 그렇지. 내 나이에 피자 좋아한다면 전부 어린애 입맛이라 놀려.” 하지만 주문한 피자가 나왔을 때, 놀리기 어려울 만큼 근사한 맛을 내는 피자 때문에 대화도 중단하고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이 집 정말 끝내주는군요. 제가 피자, 파스타 같은 기름기 있는 음식 싫어하는데….” “좋지? 내가 아끼는 몇 안 되는 맛집이야.” “숨은 맛집까지 공개하시니 기대가 큽니다.” “응? 무슨 기대?” “숨은 속내 말입니다. 아니, 계획이라고 하죠. 속내는 왠지 음흉한 뉘앙스가 강하니까요.” 티슈로 입술에 묻은 기름기를 닦던 주광식이 빙그레 웃었다. “이야…. 나도 조카님 같은 아들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샤프하기가 아주… 명불허전이구먼.” “은밀하게 이런 장소에서 만난다면 누구라도 눈치챕니다.” “좋아. 조카님 앞이라 발가벗지는 못하겠고 빤스만 남겨두고 다 벗어주지.” 주광식 회장은 직접 가져온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순양카드 인수 의향이 있다는 걸 동네방네 소문낸 사람이 바로 나야.” “그럴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럼 인수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도 짐작했겠네.” “물론이죠. 제 할아버지도 아시니까 회장님을 위해 그런 쇼도 하신 거고요.” “날 위해서? 아니지. 말은 똑바로 하자고.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 그러신 거지.” “그렇군요.” “어때? 내가 인수전에 뛰어든다니까 가격은 좀 올랐어?” “아직까지는 눈치 싸움이 한창입니다. 그럼 회장님 형제분들은 어떻습니까? 속아주던가요?” 주광식 회장의 미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굳은 표정이 대신했다. “수 싸움을 잘 읽는구나. 맞아, 조금은 방심하는 눈치가 보여.” “완전히 위장하기에는 한참 모자라는가 봅니다.” “의심이 체질인 사람들 아닌가? 물론 자네나 나도 그렇고.” “그러니까 말씀하시죠. 이 단계는 뭡니까? 제가 어떻게 도와 드려야 할까요?” “으하하하!” 갑자기 큰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까지 절레절레 흔들면서. “너무 뛰어난 모습을 자꾸 보이면 내가 경계하게 되잖아. 그래도 괜찮아? 우린 늘 경쟁하고 견제해야 하는 사이라는 거, 잊었나 보군.” “아뇨. 전 대현그룹과 경쟁할 생각 없습니다. 그건 먼 미래의 일이죠. 제 경쟁 상대는 회장님이 아니라 자제분들이 될 겁니다. 2세는 2세끼리, 3세는 3세와 싸워야죠. 전 조카뻘 아닙니까? 잘 좀 도와주십시오.” “아이고, 우리 자식들이나 좀 살살 다뤄주게. 내가 이런 부탁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다.” 주광식 회장은 와인 한 잔을 쭉 들이켜고 내 잔도 채웠다. “그럼 용건을 말하지. 순양생명 자회사 중에 보험조사 전문업체인 순양특종상해손해사정이라고 있지?” “네.” 뭐지?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 작은 회사 아닌가? 이 회사의 이름이 주 회장 입에서 나오다니? 눈치 빠른 건 나뿐만이 아니다. 내 표정을 본 그가 살짝 미소 지었다. “눈여겨볼 회사는 아니니까 그 회사의 자산을 잘 모르겠구먼.” “사실 그렇습니다. 특이한 점이 있나요?” “그 회사는 세 개의 회사를 통합한 거야. DH커뮤니케이션, LWS. 전부 보험 쪽인데….” “DH라는 이니셜로 봐서는 대현그룹 방계회사였군요.” “맞아.” 실수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내가 모르고 있었다니! 그리고 이 사실을 아무도 보고 하지 않았다니! 회사로 돌아가면 한 따가리 해야겠다. “그 회사에 대현자동차 주식이 2%나 있어.” 표정 관리를 못 할 정도로 놀랐다. 이건 꼭 보고받아야 할 주요 사안이다. 한 따까리 정도로 끝낼 일이 아니다. “너무 놀라지 마. 그렇게 된 게 불과 며칠 전이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며칠 전에 대현자동차가 부품회사 하나를 사들였어. 합병한 거야. 그 회사가 가진 특허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부품회사 주식이 대현자동차 주식으로 변해버린 거군요.” “그래. 아직 공식적인 발표가 없었으니 자네 회사 사람들도 모르는 거야.” 이런 운 좋은 일이 터지다니. 이번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가만히 앉아서 얼마를 번 걸까? “그 주식, 가지고 싶다. 이 말씀입니까?” “아주 후하게 쳐주지. 됐나?” “글쎄요. 생각 좀 해봐야겠는데….” 주광식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조카님에게는 단지 돈일 뿐이야. 내게는….” “아주 중요한 핵심 자산이 될 테죠. 그러니까 돈으로 사실 생각 마십시오.” “돈이 아니면? 뭐로?” “물물교환하시죠.” “뭐?” “대현자동차 주식 2% 드리겠습니다. 순양전자 주식 2% 주십시오.” 오늘 주가로 따지면 스무 배쯤 차이 날 텐데. 주광식 회장의 실력 좀 보자. 흐흐. ======================================== [186] 성질 죽이자 3 탕-! “이, 이봐! 갑자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주광식 회장은 잔이 깨질 만큼 세차게 내려놓으며 소리를 질렀다. “순양전자 주식 2%? 주가 차이가 얼만지 모르고 하는 소리야? 아니, 가격은 둘째치고 2%나 되는 주식을 내가 어떻게 긁어모아?” “순양전자의 어제 종가가 22만7천 원, 대현자동차 2만1천 원인 건 압니다. ” “알면서 그따위 헛소리야? 무려 10배의 차이라고!” 이 아저씨, 아직 멀었다. 물건의 가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기꺼이 거래하는 가격을 우리는 흔히 ‘시중가’라고 부른다. 하지만 한 개인에게 특별한 의미와 가치가 더해진 물건이라면, 시중가로 가격을 매기는 건 멍청한 짓이다. 시중가 5백만 원에 불과한, 그리 귀하지 않은 도자기를 10배의 돈을 주고 사들인 사람도 있다. 단지 그의 선조가 남긴 유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주가라는 것은 시중가일 뿐이다. 내가 순양그룹을 차지할 수 있다면 거래가의 10배, 아니 100배라도 순양전자의 주식을 사들일 용의가 있다. “숙부님. 하나만 묻겠습니다.” 그는 말없이 거친 숨을 진정시켰다. “순양전자와 대현자동차, 어느 회사를 원하십니까?” “…….” 아무 말 못 하는 걸 보니 단번에 알아들었다. 대현그룹을 차지하려는 그에게 대현자동차의 주식은 내가 순양그룹을 차지하는데 필요한 순양전자 주식과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 일반인에게는 스무 배의 차이가 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에게 주력 회사의 주식이란 그룹 회장 자리에 오르기 위한 계단이다. “조카님. 내가 순양카드를 인수한다는 소문이 큰 도움이 됐을 텐데?” 할 말이 없으니 생색내겠다는 건가? “숙부님께서 위장 전술로 쓰신 거죠.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겁니다.” “퉁 치자는 말이구먼, 좋아. 하지만 스무 배는 너무했어.” “형님이신 주태식 회장님은 어떨까요? 스무 배가 비싸다고 하실까요?” 생각할 필요도 없다. 경영권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가격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주광식이 더 잘 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순양전자 지분 2%를 구하려면 증권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주식 전부를 싹쓸이해야 해. 이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바는 아니겠지?” 이런, 예상보다 쪼잔하다. 이럴 때는 방법이 어떻든 간에 구해주겠다고 먼저 대답하는 게 맞다. 그런 다음 구할 방법을 함께 찾아가야 한다. 하지만 주광식 회장은 계속해서 부정적인 말만 쏟아 놓는다. 어쩔 수 없이 내가 해결 방법을 제시해야 하나? “급할 필요 있습니까?” “응? 무슨 뜻이지?” “2%의 대현자동차 주식은 제가 잘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당장 필요하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내 뜻을 알아들었는지 굳었던 얼굴이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필요할 때 넘기겠다?” “역습을 하시려면 많은 준비를 하셔야 할 테고, 무기는 숨길수록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군. 서두를 필요가 없어.” “마찬가지로 순양전자 주식도 천천히 모으세요. 서로 필요할 때 바꾸면 됩니다.” “우리 조카, 장사 잘하네. 스무 배나 남겨 먹다니!” “귀한 무기를 돈으로 바꿀 생각은 없으니 그리 남는 장사는 아닙니다. 하하.” 우리는 와인잔을 살짝 부딪치며 거래 성사를 축하했다. “그런데 우리 조카님은 순양그룹을 차지할 자신은 있어?” “일단은 목표입니다. 자신? 글쎄요. 지금으로서는 그 가능성이 굉장히 낮죠.” “대범하다고 해야 하나? 그 욕망을 이렇게 막 드러내도 돼?” “다른 분들은 욕망이 아니라 과욕쯤으로 여기니까 괜찮습니다.”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능력이 받쳐주면 욕심은 목표가 되는 건데….” “과찬이십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나는 어때?” “네?”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조카님이 보기에 말일세. 내가 대현의 주인이 될 것 같은가?” 언감생심, 미안하지만 당신은 변방으로 쫓겨나. 장남인 주태식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대현자동차를 글로벌 탑5까지 키우는 사람이다. 단순하고 무식하다는 세간의 평가가 맞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장점이 있다. 수만 명 대현자동차 직원들을 벼랑 끝까지 밀어붙여 마침내 생산량 기준 세계 5위의 기업을 만들 사람이다. 그런 대현자동차를 등에 업고 결국 쪼개진 대현을 전부 되찾는다. 난 내 앞에서 밝게 웃는 주광식을 위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미래가 조금이라도 변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어째서? 가망이 없어 보이나?” “정확히 아는 게 없으니까요. 숙부님 그리고 형제분들이 어떤 사람인지, 현재의 지분구조는 어떤지, 레이스에 참여한 분들의 의지는 어느 정도인지…. 데이터가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정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투자한 경험 때문인가? 참 이성적이구먼.” 주광식은 바닥이 보이는 와인을 말끔히 비웠다. “하나는 명확하지? 나와 조카님은 서로를 돕는 관계라는 것. 아닌가?” “돕기보다는 우호적이라는 게 더 적합하지 않나요?” “끝까지 냉정하군. 조부님을 많이 닮았어. 좋아, 적이 아닌 것만 해도 큰 수확이지. 하하.”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는 그를 보자 조금은 안쓰럽다. 정확한 시점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수백억 원대의 횡령 사실을 주태식 회장이 까발렸고 그 때문에 몇 년 옥살이한다. 그리고 계열사 하나 정도를 건졌는지, 무일푼으로 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목표가 있고 욕망을 불태우는 주광식 회장의 절정기는 안타깝게도 짧다. * * * “명분을 주십시오.” “명분?” “네. 제가 경매 붙여 가격이나 올리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남도 아니고…. 인수금액은 적정 기업가치 정도면 만족합니다.” 분명히 반가운 말일 텐데 진동기 부회장은 표정의 변화가 없다. 세상에 공짜 밥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다. “왜? 입찰가가 높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자신 있으십니까?” “뭐?” “순양전자의 사내 유보금은 어마어마합니다. 제가 장담하지만, 큰아버지는 순양카드의 가치보다 훨씬 높은 돈을 제시할 겁니다. 절대 못 이기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순양카드를 내게 넘기겠다는 생각을 굳힌 거지?” “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무서워서요.” “무서워? 뭐가?” 뜻밖의 대답에 진동기의 눈빛이 달라졌다. “장남이니까 순양그룹은 당신 것이라고 늘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카드사를 가져가면 그 생각은 더욱 굳어질 테고, 종국에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제가 물려받은 회사 전부를 가져가실 겁니다.” “형님께 힘을 실어주는 것 같아 두렵다?” “네.” 진동기 부회장은 내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 슬쩍 미소 지었다. “나는? 순양 가의 두 아들이 그룹을 놓고 크게 한판 벌일 것이라는 걸 세상 사람들도 다 알아.” “제가 잘못 봤을 수도 있지만, 차이가 있더군요. 한 분은 순양그룹을 소유하려 들고, 한 분은 경영하려는 의지가 보입니다. 전 안전한 쪽을 선택하는 것뿐입니다.” “경영이라….” “아닙니까?” “잘 못 봤다. 나도 순양그룹을 손아귀에 넣고 싶어. 형님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 “솔직하시네요.” “하지만 다른 점도 있어. 적어도 난 대기업 총수라는 자리를 아주 무겁게 생각하니까. 고작 중공업 계열만 짊어진 지금도 두렵다.” 이 사람이 순양그룹을 차지했다면 내 과거가 달라졌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보며 쓴웃음이 날뻔했다. 오십보백보다. 명심하자. 이들에게 조금의 호감도 품어서는 안된다. 언젠가 전부 축출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키워서 잡아먹을 돼지에게 정을 주는 건 미련한 짓이다. “그렇다고 다 내려놓으실 건 아니잖습니까?” “당연해. 그럴 수는 없지.” “그럼 결론 났군요. 제가 카드사를 넘길 만한 명분만 주시면 힘을 실어드리겠습니다. 만약 명분이 약하다면 두 분 큰아버지가 아닌 제삼자에게 아주 비싸게 팔겠습니다. 이미 선수도 등장했으니 말입니다.” “대현 말이냐?” “네.” “그쪽으로 넘기면 할아버지께서 널 미워하실지도 몰라.” “아주 잠깐입니다. 전 할아버지 마음 돌리는 법을 잘 압니다.” “진즉에 알았다. 네가 가장 위험한 놈이라는걸.” 진동기 부회장은 허탈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뭘 해도 명분은 없어. 가장 좋은 명분은 이 집안의 장남에게 계열사를 넘기는 거지. 차라리 돈으로 하자.” “돈으로 안 되실 겁니다.” “아니, 돼.” “어떻게 말입니까?” 진짜 궁금하다. 중공업 계열의 유동성 자금이 취약해서 카드사를 원하는 게 아닌가? 현금 동원력은 순양전자가 월등하다. 절대 이길 수 없다. “적정가가 1조4천억이라고 했지?” “네.” “3년 만기 채권이고?” “두 번 확인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한번 뱉은 말은 꼭 지킵니다.” “거기에 1천억을 더 얹어주마. 그건 외상이 아니라 인수 조인식 하는 날 바로 현금으로 주마. 어떠냐?” 이 양반, 머리가 둔한가? 아니면 진정한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둔한 걸까? 동생이 현금 1천억을 제시했다면 형님은 곧바로 2천억을 배팅할 사람이다. 진영기 부회장은 절대 돈으로 밀리지 않는다.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1천억은 뭡니까?” “오, 역시 우리 도준이다. 평범한 1천억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어? 하하.” 큰아버지는 한바탕 시원하게 웃은 뒤에 설명했다. “꼬리표도 없고 출처도 없는 돈. 어디에 쓰더라도 절대 탈이 안 나는 돈.” 비자금이구나. 탈이 안 난다는 건 말끔하게 세탁한 돈이라는 뜻 아닌가? 뇌물로 쓰더라도 계좌 역추적이 불가능해서 딱 잡아떼기만 하면 되는 돈이다. “형님은 절대 개인 재산을 내놓지 않아. 순양카드를 인수하기 위해 2조 원을 쓰더라도 회삿돈이지. 너도 네 주머니에 얼마가 들어오든 함부로 쓰기 힘들어. 국세청 애들…. 무섭다.” “이런 차이가 있군요.” “응?” “두 분 큰아버지 사이에 말입니다. 1천억을 모으려면 수조 원의 회사 자금을 굴리고 또 굴려서 아주 힘들게 장만하셨을 텐데…. 그걸 턱 하니 내놓으시다니.” “내가 상대적으로 욕심은 좀 덜해.” 욕심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급하냐의 문제다. 쌈짓돈까지 꺼내야 할 만큼 급하다는 말인데…. 진동기 부회장이 맡은 중공업 계열의 경영 상황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겠다. “아무튼…. 앞으로 너도 태그 뗀 돈이 필요할 때가 올 거다. 그때는 미라클에 묻어둔 네 돈은 무용지물이야. 완벽하게 세탁한 돈이라야만 돼.” 그런 돈이라면 차고 넘친다. 미국 미라클에 묻어둔 내 돈을 네덜란드 시골에 존재하는 수많은 페이퍼 컴퍼니에 투자한 다음 손실처리 해버리고, 다시 스위스 어느 곳에다 묻어두면 비자금이 완성된다. 하지만 무시하고 뿌리치기 힘든 제안이었다. 카드 대란으로 현금이 씨가 마르면 내게 준 비자금 천억 원이 아쉬워 발을 동동 굴릴 테니까 말이다. “큰아버지. 생각할 시간을 조금 주시겠어요? 사나흘 정도만요.” “물론이다. 오세현에게 비자금 천억 원의 가치를 확인해 보는 것도 좋겠지. 그자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할 거다.” 진동기 부회장은 자신만만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자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웃음이 났다. 일타삼피란 이런 경우를 말하는 걸까? 폭탄도 터트리고 쌈짓돈도 뺏았는다. 마지막으로 그가 넘길 비자금 천억 원을 역추적하면 그의 비리 장부까지 내 손에 쥐게 되니 일타삼피가 확실하다. 진영기 부회장도 동시에 엿 먹여야 하는데 조금 아쉽다. ======================================== [187] 성질 죽이자 4 “숙부님. 두 달이나 끌었으니 이제 끝내도 되겠죠?” “이 정도면 괜찮았어. 고마워. 덕분에 과도기는 잘 넘겼다.” 주 회장의 죽음 이후 형제들의 날카로운 신경전, 이 시기를 잘 넘겼다는 뜻이다. “그럼 아쉽게 거래가 불발됐다는 보도자료 돌려주시겠어요?” “그래야겠지. 그런데 조카님.” “네.” “순양카드는 누구 손에 들어가는 건가?” “집안에서 도는 것뿐입니다. 숙부님께서 관심 가질만한 일이 아니죠.” 잔뜩 호기심을 드러낸 주광식 회장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이 사람의 관심은 누가 순양카드의 주인이 되느냐가 아니다. 아직도 이해하기 힘든 일, 바로 수익 높은 회사를 외상으로 파는 것이다. 어차피 설명하기도 불가능하니 처음부터 말을 자른 것이다. “그렇지. 내 코가 석 잔데 남의 집 살림 옮기는 것까지 챙길 필요는 없지. 흐흐.” 주광식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살짝 웃었다. “내일 언론에서 빅딜이 무산 되었다고 떠들어 댈 거야. 그리고 추가보도도 있을 텐데…. 잘 보라고.” “추가보도? 그게 뭐죠?” “궁금해도 참어. 내일이면 알게 될 텐데. 흐흐.” 주광식은 묘한 웃음만 남기고 일어섰다. 다음날, 신문보다 인터넷이 더 빨랐다. 「명일그룹의 프라임카드, 대현그룹으로 넘어가나?」 「순양카드 인수전에 뛰어든 대현그룹, 양동작전이었나? 순양카드 대신 명일 프라임카드 선택!」 「두 그룹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인수는 확실시… 극적 매각 대금 타결….」 「업계 최하위의 명일 프라임카드, 대현그룹 품에서 비상(飛上)?」 “푸하하. 이거 대박인데….”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형님들의 매서운 감시의 눈길을 피하려고 위장한 것이 아니다. 명일의 프라임카드를 싸게 인수하려고 두 개의 낚싯대를 던진 것이다. 이용당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로 이용했을 뿐이다. 하지만 좀 안쓰럽다. 대한민국의 인재란 인재는 다 끌어모은 대현그룹이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은 일반인과 다르지 않다. 판만 깔아 놓으면 갈퀴로 돈을 끌어모으는 사업. 틀린 말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렇듯, 잠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른다. 바닥에 가라앉았을 때 대현이 인수한 프라임카드까지 끌어오는 걸 계획에 넣어야겠다. 순양과 대현의 카드사업을 합치면 업계 1위가 될 테려나…? 그 전에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부터 해결하고! * * * 큰아버지인 진영기 부회장은 자존심이 어마어마하다. 막내 조카와 밀고 당기는 협상은 도저히 못 하니 계속해서 자식을 내세우는가 보다. 문제는 그 자식이 그리 훌륭한 협상가가 아닌 게 실수다. “잡소리 집어치우고 액수나 불러! 1조4천억에 2천억 더 얹어준다고 하잖아. 어차피 대현도 네 뒤통수치고 빠졌잖아. 아무리 채권이라지만 작은아버지는 이 돈 준비 못 한다.” “형님. 남의 집 곳간에 쌓인 금은보화 신경 쓰지 마시고요. 결론은 들었으니 생각 좀 하겠습니다.” “이게 지금 생각할 거리나 있어? 무려 2천억이라고!” 진영준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소리쳤다. “진동기 부회장님을 무시하시는군요. 2천억 정도는 충분히 감당하십니다.” “뭐? 정말 2천억을 제안했어?” “아무리 가족이지만 상도의는 지켜야죠. 다른 측의 협상 정보를 알려드릴 수는 없어요.” “야!” 마음대로 안 되면 소리부터 지르는 저 성질, 십 년 정도 지나면 좀 나아지려나? “생각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금융 계열사 사장님들 의견도 들어봐야 하고…. 특히 카드사 임원들의 생각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야? 네가 결정하면 그놈들은 따르는 거다. 그게 우리야! 선택하고 결정하는 건 우리 몫이고 그 뒤를 맡아 정리하는 게 바로 그놈들 의무라고!” “귀 안 먹었으니 소리 좀 그만 질러요. 아무튼, 전 생각도 해야겠고 의견도 들어야겠습니다.” 그렇게 돌려보낸 진영준은 그 뒤로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서는 소리도 지르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친근한 말로 달래기도 했다. 여기서 진동기와 진영기 두 분 큰아버지의 큰 차이를 알았다. 한쪽은 오로지 밀어붙이기만 할 뿐이다. 도박으로 치자면 올인 스타일. 끝없이 돈으로 밀어붙여 상대가 나가떨어지도록 한다. 다른 한쪽은 상대가 쥔 패가 뭔지 궁리한다. 그리고 상대가 가장 혹할만한 카드를 들고 와서 제시하는 것이다. 순양의 선장으로는 진동기 부회장이 어울린다. 더 신중하고, 잔꾀도 부릴 줄 안다. 자신이 아끼는 것을 거래를 위해 턱 내놓는 배포도 있다. 그러니 이 사람부터 넘어트려야 한다. 더 큰 힘을 갖기 전에 말이다. * * * “우리 카드사의 6천억 부채는 순양중공업과 순양건설이 나눠서 가져가기로 은행과 협의 끝났습니다.” “채권은 순양중공업 100%죠?” “네. 총 8천억의 채권을 발행할 것이고 2003년 하반기까지입니다.” “순차적으로?” “네. 2003년 9월, 10월은 3천억, 11월은 2천억 만기입니다. 그리고 금리는 6% 고정으로 협의했습니다. 현재 시중금리가 4.25%인 걸 생각하면 그리 과하지 않아요.” 장도형 부사장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자격이 있었다면 자신이 순양카드를 인수하고 싶었을 만큼 후한 조건이다. 장도형은 나와 진동기 부회장 사이에 뭔가 이면 계약이 있는지 끊임없이 호기심을 드러냈지만, 비자금 1천억에 대한 것을 털어놓을 만큼 가깝지 않아 모른 체 무시했다. “됐습니다. 가족이니 그리 까다롭게 굴지 않았습니다. 대신 조인서 준비는 차질 없도록 준비하십시오. 내용은 굉장히 까다롭게 해야 합니다. 놓치는 부분이 없도록 말입니다.” “네. 그런데 실장님.” “네.” “담보 설정 말입니다. 저쪽에서는 자꾸 중공업뿐만이 아니고 건설까지 끼워 넣으려 합니다.” “자사주 8천억이니 현업의 대표이사로서는 굉장한 부담이겠죠. 이해는 합니다.” 갑자기 늘어나는 부채는 기업 가치를 확 떨어트린다. 그 결과는 곧바로 주가에 반영되는 게 당연한 일. 주가 관리는 대표이사의 책임 아닌가? 하지만 나로서는 계열사 지분을 많이 쥐고 있는 중공업 주식이 더 간절하다. “카드사 인수 때문에 늘어나는 부채니 악재는 아닐 겁니다. 현재 카드사 실적을 보면 오히려 호재예요. 그걸 강조하시고 물러서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마지막 조율을 지시한 뒤, 집으로 향했다. 1천억 비자금에 대해 오세현과 밀담을 나누기 위해서다. 왜 하필 집인지……. 혼자 사는 총각 집을 굳이 봐야겠다는 오세현이 귀찮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집 자랑을 얼마나 해 댔으면 그럴까 싶기도 했다. “이야, 이건 뭐… 운동장이네, 운동장.” “체육관이죠. 운동장급은 아닙니다.” “그게 그거지, 인마.” 오세현은 내 어깨를 툭 치고 보물찾기라도 하는 듯 집안을 샅샅이 훑었다. “일단 여자의 흔적은 안 보이는구먼. 속옷이라도 하나 뒹굴 줄 알았는데.” “그런데 왜 그런 눈빛이세요? 저 건전합니다.” “이게 건전한 거냐? 메마른 거지. 도대체 뭐가 부실하길래 허구한 날 독수공방이냐?” 오세현은 혀를 끌끌 차며 마지막 점검이라도 하듯 휙 둘러보다 눈을 빛냈다. “저건 뭐냐? 어째 낯이 익다.” 그는 구석에 세워진 물건을 가리켰다. “아실 텐데요? 마사지 침대 아닙니까?” “뭐? 마사지?” 야릇하게 빛나는 그의 눈을 보자 한숨부터 나왔다. “도대체 무슨 생각하시는 겁니까? 중년 아재 아니라고 할까 봐….” “그러니까 저게 왜 집 안에 있느냐고?” “퍼스널 트레이너와 스포츠 마사지 전문가를 불렀어요. 저도 몸 생각해야죠. 온종일 컴퓨터 모니터 아니면 서류만 보는데…. 운동해야죠. 이틀에 한 번 홈 트레이닝 합니다.” “그게 전부냐? 마사지…. 혹시 여자냐?” “당연하죠. 우락부락한 남자 손이 내 몸을 주무르는 거, 상상만 해도 징그럽거든요. 아무튼 이상한 상상 접으세요. 트레이너도 함께 있으니까요.” 오세현은 여자라는 말 뒤부터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이야, 이건 정말 끝내주는구나. 작품인데?” 그는 옥상 정원의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반응은 당연하다. 아버지도 그랬고 어머니도 그랬다. 나 역시 완성된 정원을 보는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으니까. “시간 나실 때 가끔 오십시오. 여기서 술 한 잔 하는 것도 제법 운치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절로 술 생각이 난다. 아예 지금 가볍게 한잔할까?” “그러시죠. 선물 받은 와인 몇 병 있습니다.” 우린 옥상 정원의 작은 정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준비는 다 돼가?” “네. 세부 사항 조율만 남았어요. 이달 안에 끝낼 수 있습니다.” “그 비자금 천억은?” “말레이시아 연방 직할의 라부안에 있다더군요. 가서 계좌 옮겨야 합니다.” “자금 출처는 더듬어 볼 수 있겠어?” “그것 때문에요. 그까짓 천억이 급한 건 아니니까. 진동기 부회장님 멱줄 잡자는 건데….” 오세현은 술로 입술을 축였다. “검은돈 덥석 받았다가는 나중에 공범이 될 수도 있어. 혹시라도 모르니까 출처까지 확인하고, 넘겨받는 즉시 몇 바퀴 돌려서 연결고리 끊어야 해.” “역추적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네가 힌트는 얻어야 해. 보나 마나 건설에서 빼낸 돈일 거야. 건설이야 뭐 비자금 창구니까.” “조성한 시점 말이죠?” “그래. 라부안 돈세탁 은행들 입 무거워. 그쪽 두드려 봐야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계좌번호, 비번 입력된 Authority 카드 주면 돈 내주고 기존 계좌 삭제해 버려. 언제 돈이 모였는지 파악 못 해.” “그럼 제가 큰아버지께 힌트라도 얻어오면 가능하고요?” “해 봐야지. 순양건설 재무이사 목이라도 비틀어볼까?” 비자금이 건설에서 빠져나온 돈이라면 그 내용을 훤히 아는 사람은 재무이사이거나 부장, 혹은 총무부장이다. 큰아버지가 은행 왔다 갔다 했을 리는 만무하니까.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의 목을 비튼다. 어쩌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뭔 생각 하냐? 좋은 생각 있어?” “아, 아닙니다. 비자금 계좌 받으러 갈 때 슬쩍 한번 떠볼게요. 뭐라도 건져야죠.” “그래. 누가 뭐라 해도 네 큰아버지 진동기는 이번에 땡잡은 거니까 기분 좋을 것이다. 슬쩍 한번 캐내 봐.” “네. 한번 두드려 보죠.” 어쩌면 방법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때 내 눈치를 슬쩍 살피던 오세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내년에 지방선거 있다. 알지?” “네.” “진서윤 씨 남편…. 어쩔 거냐?” “왜요? 삼촌께 연락 왔어요?” 오세현은 조금 짜증나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또 도전하겠다는데….” “돈… 요구합니까?” “응.” “제가 알아서 할게요. 삼촌은 제게 미루세요.” “괜찮겠냐?” 오세현의 눈빛에 걱정이 가득하다. 그 걱정의 이유도 안다. 상암 DMC 때 고모부가 큰 역할을 했다. 그걸 빌미로 돈을 요구하는 모양인데, 이번엔 헛다리 짚었다. “출마도 당에서 공천받는 게 우선입니다. 이번엔 공천 못 받습니다.” “응? 왜?” “그냥 두고 보십시오. 고모부가 상대하기 어려운 거물이 등장하니까요. 제가 밀어준다는 생색 팍팍 내고 좋은 관계 유지 하자고 할 테니까 걱정 마십시오.” “그러니까 그 거물이 누구냐고?” “작년 8월 15일 광복절 사면 대상을 잘 보십시오. 그중 한 명입니다.” 오세현은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깜빡였다. 곧 기억해낼 것이다.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그자를. ======================================== [188] 착하게 살아야지 1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좀 쑥스럽구나.”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큰아버지.” “나도 귀는 있어. 형님이 2천억을 더 얹어준다고 했다면서?” “네. 하지만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순양의 장자는 정말 위협적이더군요.” 진동기가 쓴 미소를 지었다. “일견 포악스러워 보이지만, 그게 큰 조직을 이끌어갈 때는 장점으로 변할 수도 있어. 형님은 그걸 잘 이용하는 거야. 지금까지 통했으니까.” “제게는 통하지 않은 거군요.” “넌 아랫사람이 아니니까. 물론 촌수로 따지면 까마득하지만… 동등한 선상에 있다는 걸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야. 그게 네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왔고.” 이런 걸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는 건가? 그냥 둘러댄 말인데 수긍까지 하고 설명을 덧붙이는 걸 보니 진영기 부회장의 성정이 상상 이상인가 보다. “자, 그럼 가장 중요한 계약서 조항부터 처리해야겠지?” “비자금 말입니까?” “그래.” 큰아버지는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고 서류 봉투 하나를 쓱 내밀었다. “그 속에 필요한 건 다 들어있다. 라부안에 가서 네 계좌 하나 트고 옮기면 끝난다.” “온라인 뱅킹 같은 건 안 되는 거죠? 흐흐.” “농담이라면 딱히 우습지 않아. 그쪽은 아날로그야.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지.” “그럼 직접 방문하지 않으면 절대 손댈 수 없는 돈이군요.” “지금 네 손에 든 것이 없다면 라부안에 가 봤자 은행으로 들어가지도 못해. 간수 잘하라고.” 나는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말했다. “큰아버지.” “응.” “보너스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보너스?” “네. 이런 물고기 요리보다 아예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물고기 요리는 봉투 속의 물건이다. “흐흐. 그렇지. 역시 빨리 배우는군.” 비자금을 만드는 방법, 난 그걸 물었고 큰아버지는 웃음으로 답했다. “너 같은 경우는 좀 힘들 거다. 금융 기업이라는 게 구조가 복잡하지 않거든. 옆으로든, 아래든 가지치기할 만큼 관계사를 둘 수도 없고.” “임원들도 지나가는 말로 그러더군요. 전산망이 발전할수록 점점 더 투명해진다고. 이러다가는 회사 내부를 국세청이 훤히 들여다볼 때가 머지않았다면서요.” “도준아. 비자금에 눈독 들이지 말고 네 돈을 만드는 데 집중해라.” 나를 위해서 하는 조언일까? 아니면 돈맛에 빠져들게 하려는 속셈일까? 뭐, 지금은 좋게 해석하자.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법인인 회사가 벌어들인 돈을 네 돈으로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어마어마한 월급을 받으면 된다. 또는 연말 배당금을 챙겨도 되고. 결국, 세금 안 내고 돈 챙기는 걸 말하는 것이다. “그건 조금씩, 차근차근해나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맞어. 넌 아직 젊잖아.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조금씩 준비하도록 해.” “그럼 이것도 그런 식으로 만든 겁니까?” 봉투를 슬쩍 흔들었다. “아니. 법적 테두리 안에서 만든 돈이라면 우리나라 은행에 당당하게 내 이름으로 넣어 뒀겠지.” “그럼…?” “법의 테두리 밖에서 만든 거야. 그것도 한 번에 만든 돈이지. 그러니까 명찰 없이 외국의 구석진 섬에 묻어둔 거야.” “그게 가능하군요.” “평상시에는 불가능해. 큰바람이 불어 모두가 휘청거릴 때, 그래서 누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감시하기도 버거울 때 가능한 거다.” 큰바람이 불 때라…. 그렇군. IMF 태풍이 몰아칠 때 만든 것이구나. 어떤 방법을 쓴 것일까? “쉽지 않겠군요. 외부의 충격도 필요하고 타이밍도 맞아야 하고….” “시나리오도 잘 써야지. 하하.” “큰아버지께서 직접 시나리오를 쓰신 겁니까?” “난 제작자지. 시나리오야 똑똑한 인재들이 머리 맞대고 만들잖아.” 머리 맞댄 인재들이 재무팀일까? 기획실일까? “믿을만한 인재들을 한데 모은 기획실의 또 다른 역할이군요.” “기획실이 보는 숫자와 재무팀이 보는 숫자는 달라. 너도 곧 알게 될 거다.” 재무팀에서 작업했다는 말이다. 일단 필요한 걸 다 얻었을 때 때마침 큰아버지도 입을 닫았다. 너무 많은 걸 떠벌렸다고 생각했나 보다. 내가 비자금을 전해 받은 한통속이 되었기에 이 정도 정보를 말했을 것이다. 아니었다면 결코 함부로 입을 놀릴 분이 아니다. “그럼 빨리 말레이시아 라부안에 다녀오너라. 그래야 인수 건을 마무리하지.” “네. 내일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큰아버지는 내 등을 툭 치며 웃었다. 당분간 나와 연합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2003년까지 연합 전선을 맺은 건 사실이니 나도 그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냈다. * * * “전화로 지시하셔도 됩니다. 굳이 번거롭게….” “번거롭습니까? 절 만나는 게?” “아닙니다. 실장님 번거로우실까 봐 드리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내용은 직접 얼굴 맞대고 이야기해야 하고, 기록을 남겨야 할 정도로 중요하면 문서로도 남겨야죠. 하지만 우 상무님께서 하시는 일은 문서로 남길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러니 꼭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짧은 미소가 우병준 상무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우 상무를 보며 궁금한 한 가지를 물었다. “이곳은 처음이실 텐데 실내를 둘러보지도 않으시는군요.” 여의도 오피스텔에 처음 방문한 사람은 작은 테이블 하나와 의자 서너 개만 달랑 있는 내부를 희한하다는 듯 휘휘 둘러보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우병준 상무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서 아주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주변으로는 단 한 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알고 있었습니다. 은밀한 이야기를 나눌 곳이 필요해서 준비하신 걸로 압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실 텐데요?” “네.”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니 말문이 막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건지, 불필요한 것에는 아예 호기심을 갖지 않는 건지…. 나도 이 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은 접어야겠다. “이거, 쓸데없는 질문이었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여전히 건조한 음성이다. “제가 필요한 건 누군가의 약점입니다.” “그 누구가 누굴까요?” “97년, 98년 IMF 때 순양건설 재무팀장, 재무이사를 지낸 분들입니다.” “어느 정도의 약점이 필요한 겁니까?” “진동기 부회장과 관련된 자료를 넘길 만큼?” “그 정도라면 치명적인 약점이 필요한 거군요.” 진동기라는 이름 때문인지 그의 눈가가 조금 떨렸다. “어렵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조금 주저하는 그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편히 말씀하세요.” “실장님은 괜찮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이런 일은 시작하는 순간 서로 상처 입을 때까지 주거니 받거니 하게 됩니다. 제가 그쪽을 조사하는 것처럼 진동기 부회장 측에서도 실장님의 뒤를 캘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진동기 부회장을 터는 일이 찝찝한 게 아니다. 역으로 내가 당할지도 모르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혹시 순양건설 재무 쪽 관련자 조사하실 때 모습을 드러내시는 겁니까?” “아뇨. 말 그대로 뒷조사입니다. 문제는 재무 쪽 사람의 약점을 들고 진동기 부회장과 관련된 뭔가를 요구할 거 아닙니까? 그게 제가 될 수도 있고 실장님이 직접 하실 수도 있는데…. 결국 진동기 부회장 측에서 알게 되겠죠.” “그럼 진동기 부회장이 내 뒤를 탈탈 털어버릴 것이라는 거죠?” “그렇습니다.” “저쪽에서 일하시는 분들, 잘 아십니까?” 두 분 큰아버지 최측근에도 우병준 상무 같은 존재가 분명히 있다. 어쩌면 우 상무와 끈끈한 관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모릅니다. 우리 일이라는 게 철저한 칸막이가 없다면 말이 새어나갈 수 있기 때문에 서로 어떤 사람인지 알기 힘든 구조입니다. 하지만 저쪽 직원들은 실장님의 과거 10년을 일주일이면 낱낱이 알아낼 실력자들이라는 건 잘 압니다.” “우 상무님은 제 10년 치 과거를 파악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저 역시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일주일 뒤에 제 10년 치 과거를 보고 싶습니다. 가능하시죠?” 이 사람도 상상하기 어려운 지시를 내리면 놀라기도 하는구나. 처음으로 우 상무가 놀라는 모습을 보니 조금 우쭐한 기분도 들었다. “진심이십니까?” “네. 상무님에게는 농담을 해도 반응이 없으니 재미없거든요. 그래서 농담은 하지 않기로 일찌감치 마음먹었습니다.” “그럼 열흘을 주십시오. 이왕 하는 거 철저히 조사하는 게 더 도움되지 않겠습니까?” 자신을 테스트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예상치 못한 의욕을 불태운다. “그러죠. 이거, 기대되는군요.” “그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엔 옅은 미소까지 보인다. 스스로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모시는, 그리고 꽤 긴 세월을 모셔야 하는 사람의 과거를 조사하는 게 일상적이지는 않은 일이다. “자, 그럼 본론으로 다시. 아까 말씀드린 일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팀장과 이사 두 사람이니 각각 열흘씩, 이십 일이면 됩니다. 조사하다 시간이 더 필요하면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부터 먼저 하시고 그다음 두 사람 조사에 착수하십시오.” “네. 실장님.” “그리고 진동기 부회장의 반격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조사 내용을 쥐고 있을 뿐 까발리거나 협박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칼집 속의 칼이 위협적인 법이죠. 잘 아시는군요.” “그 정도는 배웠습니다. 흐흐.” 웃으며 일어섰다. 바쁘게 움직여야 할 사람을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내일부터 말레이시아 출장 갑니다. 딱 열흘 뒤에 돌아올 테니 그때 다시 뵙죠.” “네. 준비하고 기다리겠습니다.” 또 미소 짓는다. 이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병준 상무, 이 양반의 뒤도 한번 털어보고 싶다. 내가 지시하면 받아들이려나? * * * “칼리프 알 토르틀리에(Khalifah Al Tortelier)?" 내가 넘겨준 서류와 CD 그리고 카드를 유심히 보던 오세현은 머리를 갸웃하며 은행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랍계 은행인데 혹시 아십니까?” “아니. 이런 은행이 한두 개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런데 내일 간다고?” “네.” “내가 이 은행이 어떤 곳인지 알아볼 여유는 좀 두지 그랬어?” “알아봐 주십시오. 열흘 동안 있을 겁니다.” “응? 오래 있네?” “간만에 휴가 좀 즐기려고요.” “휴가? 설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고?” 오세현의 미심쩍은 눈빛이 내 얼굴을 쓱 훑었다. “꿍꿍이는 무슨. 정말이에요. 코타키나발루 리조트 예약해 뒀어요. 거기서 일주일 이상 푹 쉬고 라부안은 마지막에 들렀다 올 생각이에요.” “그래? 잘 생각했다. 떡 본 김에 제사도 지내야지.” 오세현은 웃으며 서류 몇 장을 꺼냈다. “돈 찾으면 이쪽으로 옮겨.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은행이다. 왔다 갔다 하기 귀찮으면 믿을만한 친구 붙여줄 테니까 돈 찾은 다음 그 친구에게 맡겨도 되고.” “필요 없습니다. 몇 가지 확인만 하고 끝낼 테니까요.” “응? 무슨 말이야?” “돈 찾을 생각 없어요. 그 계좌에 그대로 묻어둘 겁니다. 어차피 돈 쓸 곳도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진동기 부회장 계좌에 그대로 놔둬?” “네. 큰아버지 말로는 그 서류, CD, 카드 없으면 아무도 못 찾는다고 하니 놔둬도 됩니다.” “그렇다고 돈을 묻어놔? 라부안 은행들은 이자도 안 준다고. 보관만 해주는 은행이야.” “이자 챙기자고 큰아버지와 연결된 계좌를 삭제할 필요는 없죠. 이것만큼 중요한 증거가 있을까요?” “증거? 무슨 증… 야! 너 혹시…?” 깜짝 놀라는 오세현의 표정을 보니 이제야 눈치챘나 보다. 천억 원의 탈세, 아니 더 큰 범죄일 수도 있을 것이다. 횡령 같은. 그 증거가 내 손에 있는데, 없애는 건 바보짓이다. ======================================== [189] 착하게 살아야지 2 “생각하시는 그거 맞습니다. 급하지도 않은 돈 천억을 굴리는 것과 언젠가 확실한 무기가 되는 해외 계좌. 길게 생각할 것도 없죠. 쥐고 있는 게 맞습니다.” “그게 무기가 될까?” “네. 큰아버지 말씀으로는 돈을 인출하거나 옮기는 순간 구 계좌는 삭제된다고 하더군요. 남겨 둬야 필요할 때 써먹습니다.” “단지 계좌만으로는 무기로 써먹지 못할 텐데?” “조치해 뒀습니다. 나중에 말씀드리죠.” 오세현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말로는 이자 운운했지만 천억을 증시에 굴린다면 얼마나 큰 수익을 거둘지 계산하기 때문이다. “삼촌. 곧 어마어마한 기회가 옵니다. 천억 정도는 푼돈으로 여겨질 만큼 말이죠.”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때가 되면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천억 묻어두는 걸 아쉬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하.” 이런 일을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닌 오세현이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그래. 그 어마어마한 기회를 기다려 볼게. 참, 내일 몇 시 비행기냐?” “아무 때나 가면 됩니다. 항공기 하나 빌렸거든요.” “뭐?” “뭘 그리 놀라세요? 나한테는 택시비 수준 아닙니까? 이왕 쉬러 가는 거 궁상떨지 않을 겁니다.” * * * 항상 과묵하게 조용히 내 곁을 지키던 순양시큐리티 직원들도 유명한 해외 휴양지와 전세기라는 것에 들떠 보였다. 내색하지 않고 참으려 무던히 애를 쓰지만, 그들은 눈은 계속 웃었고 입가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영종도 신공항은 아직 제1, 2 활주로와 여객터미널 그리고 화물터미널이 전부였지만, 김포공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깔끔한 청사가 이용객을 반겼다. 이미 연락받은 항공사 직원이 우리 짐을 모두 챙겼고 전세기 고객 전용 게이트로 안내했지만 난 일반 게이트를 이용하겠다고 고집부렸다. “볼일이 있어 그러는 거니 신경 쓰지 마세요. 볼일 끝나고 전화하겠습니다. 그때 오세요.” 여기까지 와서 사업장을 둘러보지 않는다는 건 직무유기다. 당황한 항공사 직원을 돌려보내고 천천히 출국장으로 나갔다. 처음으로 VVIP의 호사를 누려보나 기대했던 경호팀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지만, 조용히 내 뒤를 따르며 좌우를 살폈다. 나, 젠장, 조금 쪽팔린다. 경호팀 복장을 미리 말하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관광객 차림으로 오라고 해야 했는데…. 나 혼자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쳤는데 내 주위를 시커먼 정장 차림 사내 여섯이 둘러싸고 있으니 공항의 모든 시선이 쏠렸다. 출국 심사를 끝내고 그들을 불러모았다. “이러면 내가 볼일을 못 보니까 좀 떨어집시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만일의….” “출국 심사까지 끝냈습니다. 국가 기관에서 소지품 검사 다 했고 몸에 붙은 쇠붙이까지 체크했어요. 아무 일 없을 테니까 내 말대로 해요.” 총구를 바닥으로 향한 국제공항경찰대 요원들이 주변을 돌아다닌다. 그들의 모습을 본 경호팀은 헛기침하며 물러섰다. “자자, 흩어져서 쇼핑이라도 해요. 여기 널린 게 면세점입니다. 제가 다 처리해줄 테니까 카드로 막 긁으세요. 명품 시계든 핸드백이든 마음 놓고 질러요.” “아,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이들의 급여가 평범한 순양그룹 직원의 몇 배가 넘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기백짜리 명품을 카드로 긁기에는 부담스럽다는 것도 안다. “특별 인센티브라고 생각하고 쓰세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경호팀을 떼놓고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향한 곳은 바로 순양백화점에서 운영하는 순양면세점이었다. 값비싼 명품관은 찾을 필요가 없다. 그 화려하고 럭셔리한 매장은 카드 한도나 잔고가 빵빵하지 않는다면 발을 디디기도 부담스럽다. 그러니 명품 매장을 자연스럽게 둘러보는 고객은 언제라도 카드 긁을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원단과 재봉질 값이라고 해봤자 만원이면 뒤집어쓸 손가방 하나를 기십만 원, 심지어 기백만 원에 파는 곳이니 당연히 친절하다. 진가는 바로 몇만 원 혹은 십여만 원의 적은 돈으로 쇼핑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잡화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가격도 물어보고 제품을 착용하기도 하며 뭔가 고쳐야 할 점을 찾아봤지만, 드라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나같이 친절했고 부담스러울 만큼 자세한 설명도 곁들였다. 아무래도 불시 점검이라는 것을 하기에는 시기가 맞지 않은 듯하다. 신공항을 오픈한 지 겨우 석 달, 소위 군기가 바짝 든 상태 아닌가? 흠이라면 과잉친절? 이 정도가 전부였다. 면세점을 나오니 경호원 둘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쇼핑하시라니까. 왜 지켜보고 있어요?” “번갈아 가며 쇼핑하면 됩니다. 실장님을 혼자 둘 수는 없습니다.” “그럼 전 공항 라운지에 가 있을 테니 두 분도 쇼핑 실컷 하고 오세요. 다 모이면 출발합시다.”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경호원의 급한 연락에 달려온 항공사 직원은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로 안내했다. “죄송합니다. 전세기 이용 고객님을 위한 별도의 라운지는 준비 못 했습니다.” “괜찮아요. 전세기 타는 사람이 공항에서 시간 때우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 네. 바로 그렇습니다. 보통은 출국 심사 끝나면 곧바로 탑승하시니까 라운지가 필요 없거든요. 아무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공사 라운지에서 잡지를 뒤적거리며 시간을 때우는데 몇몇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주영일 회장의 장례 이후, 언론에 얼굴이 팔려서인지 날 알아보는 사람이 부쩍 는 것 같다. 아버지 말로는 인터뷰를 연결해 달라는 잡지사가 꽤 많이 있다고 들었다. 팔릴만한 상품성을 몽땅 가진 사람이라나? 오죽하면 영화사에서 톱 여배우 섭외할 때 영화사 사장 아들이 진도준이라는 것을 은근히 팔고 다닌다고 했다. 호기심과 기대를 자극하니 꽤 먹힌다는 말까지 들었다. 다행히 경호팀의 눈치 하나는 비상했다. 내가 오래 기다리는 일 없도록 십여 분만에 쇼핑백 몇 개를 들고 나타났다. 그들과 함께 리무진을 타고 활주로에 도착하니 28인승 글로벌 익스프레스 XRS 기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걸프스트림 G550과 함께 가장 인기 있는 개인 제트기종이다. 개인이 주문할 때는 보통 15인승 이하로 만들고 각종 편의시설을 집어넣는 게 상식이지만 이 항공기는 그야말로 비즈니스를 위한 공용이다 보니 특기할 만한 편의시설은 없었다. 전용기 하나를 사? 말어? 이런 고민을 했고 산다면 어떻게 인테리어를 꾸밀까 상상했다. 경호팀 요원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전용기에 당구대를 설치하면 당구를 칠 수 있다, 없다로 계속 논쟁을 벌였다. 그러는 사이 전세기는 빠르게 말레이시아로 날아갔다. 코타키나발루 국제공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건설한 군사 공항이었다. 세계대전이 끝나갈 때쯤 연합군의 포격으로 엉망이 됐지만, 민간 항공사들이 인수하여 1957년 말레이시아 제2 공항으로 우뚝 섰다. 그래 봤자 3.7Km 활주로의 작은 공항이지만. 공항에는 이미 예약한 리조트 직원들이 리무진을 대기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룻밤 숙박비가 8천 달러가 넘는 프라이빗 빌라를 세 채나 예약한 특급 고객이니 이 정도 서비스는 당연했다. 비행기 안에서는 긴장을 풀고 조잘대던 경호팀은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태도가 변했다. 본래의 과묵한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여기선 좀 풀어져도 됩니다. 쉬러 온 거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 숙소는 외곽에 경비까지 서는 안전한 장소예요. 이번 일주일은 넥타이 풀고 푹 쉬다 간다고 생각해요.” “이 정도면 긴장 많이 푼 겁니다. 너무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실장님,” 항상 내가 타는 차의 보조석을 차지하는 요원. 문성훈 과장이던가? 내 경호팀의 책임자인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해 못 하신 것 같은데….” “네?” “전 휴일도 없고 휴가도 없어요. 이미 겪어봤지 않습니까? 제 경호팀을 맡은 후로 쉬는 날 있었어요? 중간중간 교대로 하루씩 쉬는 게 전부 아니었나요?” “괜찮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앞으로 몇 년을 휴가 못 갈지 모릅니다. 특히 문 과장님은 더 그렇죠?” “…….” 다른 이는 교대근무라도 하지만 문 과장은 책임자라 그럴 수도 없었다. “여기 리조트에 머무는 일주일을 마지막 휴가라 생각하고 쉬세요. 술 마셔도 괜찮으니까…. 아니 꼭 취하도록 마시고 쓰러져 자도록 해요. 하하.” 내 말이 진심이라는 걸 느낀 그들은 꼿꼿이 세웠던 등을 리무진 시트에 슬며시 기댔다. 전용 비치를 보유한 리조트에서 바라보는 에메랄드빛 바다는 속이 뻥 뚫릴 만큼 절경이었다. 경호 팀원들도 굽이굽이 도는 해안도로를 따라 프라이빗 빌라로 가는 길에 모두 탄성을 계속 지르며 소풍 나온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 * * “문 과장님부터 말해봐요. 뭐하시던 분이었어요? 순양 입사 전에요?” 전용 풀사이드에서 호텔 직원들은 열심히 고기를 굽고 우린 맥주를 마시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술도 한잔 했겠다, 평소 궁금했던 이들의 과거를 슬쩍 묻자 서로 눈치만 보며 주저하기만 했다. “실장님. 좀 난처한데….” “왜요? 부하직원들이 다 듣고 있어서요?” “아닙니다. 우린 서로를 잘 압니다. 물론 이놈들도 꼭 숨겨야 할 이야기는 털어놓지 않았겠지만요.” “아이고, 과장님. 우린 숨긴 거 없습니다.” 젊은 경호원이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기록으로 남은 건 말했겠지. 흐흐.” 문 과장은 맥주를 입에 탁 털어 넣고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실장님. 이 애들은 모두 운동한 놈들입니다. 체육 특기생이나 국가대표가 꿈이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꿈을 접고 직업군인이나 경찰 특채를 노리던 애들이죠.” “그럼 경호 업무는…?” “순양시큐리티에서 배운 겁니다. 2년 정도 교육받죠.” “문 과장님도 운동…?” “네. 전 국가대표 상비군이었습니다. 2군이죠. 1군으로 올라갈 기회를 잡지 못해 관뒀고요.” 난 이 친구들이 조폭 출신이 아니었나 늘 궁금했었지만, 혹시나 하고 상상했던 것과는 좀 다르다. “그럼 우병준 상무도 같은 길을 걸었던 분입니까?” “아뇨.” 문 과장은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사실 우리도 상무님이 무슨 일을 하신 분인지 모릅니다. 그냥 소문이 전부죠.” “어떤 소문입니까?” “안기부 출신이라는 둥, 해외 용병생활 오래 했다는 둥…. 심지어 미국 FBI 출신이라는 소문도 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더군요. 영어 발음이 그냥 콩글리시예요. 하하.” 이들은 리조트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며 과거를 이야기한다. 우병준 상무는 어떤 상황이 되어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까? “이야, 저거 정말 끝내주네!” “뭐?” “저기 배 말이야. 요트.” “저런 데서 낚시하면 끝내주는데….” “야! 저게 고깃배냐? 호화 요트라고. 저런 곳에서는 파티하는 거다.” “파티도 하고 낚시도 하면 되지 뭐.” 어둠이 내린 바다에는 요트 한 척이 샹들리에 불빛처럼 빛을 쏘아대고 있었다. “메가 요트네.” “네?” 이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전체 선박 길이가 24m가 넘는 대형요트를 메가 요트라고 해요.” “혹시 요트도 가지고 계십니까? 잘 아시네요.” “아뇨. 요트 산업은 이탈리아가 강한데, 그쪽에도 투자했거든요. 전 보고서 보고 알았죠. 세상은 슈퍼리치가 더욱 늘어나니 요트 수요도 늘거든요. 전망이 밝은 사업분야죠.” 몇몇이 실망한 눈빛이다. 재벌 3세쯤 되면 요트 하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우리 내일 저거 빌릴까? 이왕 노는 거 낚시도 하고, 파티도 하고. 괜찮죠?” 나이와 상관없이 여섯의 사내는 입을 떡 벌렸다. ======================================== [190] 착하게 살아야지 3 손을 들자 대기하던 컨시어지가 달려왔다. 귓속말을 건네는 순간 그의 눈이 커졌지만, 곧바로 미소를 머금었다. 컨시어지가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달려 나가자, 경호원들의 눈이 빛났다. “뭐래요?” “확인하고 알려준다는데 문제없을 거라네요. 기다려 봅시다.” 경호원들이 환호성을 질렀지만, 곧 실망으로 바뀔 것이다. 파티도 놀아본 놈들이 잘하는 거다. 나랑 이 사람들이 요트에서 파티한다고 해봤자 지금과 달라지는 게 없다. 단지 장소만 바뀌는 게 전부다. 배를 천천히 이동하며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잠시 후, 컨시어지가 달려와 웃으며 서류 한 장을 내밀었고 대충 훑어본 뒤 호기롭게 사인했다. “됐습니다. 내일 아침 식사는 요트에서 합시다.” 입이 찢어질 만큼 좋아하는 경호원들 중에 누군가 아주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실장님. 저런 호화요트를 빌리는 데 얼마쯤 주는 겁니까?” “응? 아, 가격 안 봤는데요? 24시간 렌트한다는 내용만 확인했어요.” 돈이 많아지고 나서 달라진 점은 바로 확인하는 숫자가 다르다는 것이다. 돈이 없을 때는 쓰는 돈이 얼마인지 꼬박꼬박 확인했지만, 가늠하기 힘들 만큼 돈이 많을 때는 늘어나는 수입만 확인한다. 가격을 확인하고 쓸까 말까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떤 서비스인지 확인하는 일이 전부가 되어버렸다. “그럼 먼저 일어날게요. 내일 봅시다. 내 눈치 보지 말고 실컷 마시고 드세요.” 나의 새로운 면을 확인하고 놀란 경호팀을 남겨 놓고 빌라로 들어갔다. 욕실의 자쿠지에 몸을 푹 담그고 피로를 풀고 싶었다. * * * “정말 낚시하게요?” “네. 요트에 낚시 도구 전부 있다던데요?” 어젯밤까지만 해도 낚시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던 문 과장은 호화요트에서 하는 낚시 손맛은 분명 특별할 거라며 들떠 있었다. 선착장에 도착하자 작은 모터보트가 우리를 기다렸다. “어머, 안녕하세요?” “아침 일찍 어딜 가세요?” 우리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네 명의 여인들, 다름 아닌 전세기 승무원들이었다. 전세기의 특성상 기장과 승무원들은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곳에 머문다. 물론 그들의 체류 경비 역시 요금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저들은 프라이빗 빌라가 아니라 일반 객실에 투숙하지만. “일찍 일어나셨네요?” 슬쩍 인사를 건네자 곧바로 그녀들은 가까이 달려왔다. “네. 아침 바닷가 풍경이 너무 좋아서요. 그리고 이곳은 우리도 처음이라….” 코타키나발루는 한국인에게 익숙한 곳이 아니다. 한국 국적기는 아직 직항노선이 개설되지 않았고 쿠알라룸푸르 또는 싱가포르에서 다시 2시간 넘게 비행기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실장님께서 저기 보이는 저걸 ‘통째로’ 빌리셨거든요.” 경호원 한 명이 잽싸게 끼어들어 바다에 떠 있는 요트를 가리켰다. 그녀들은 경호원이 기대했던 바로 그 반응을 보였다. “우와! 정말요?” “진짜 좋으시겠다. 저 요트에는 풀장까지 딸려 있다고 들었는데….” 부러워하는 승무원들보다 더 간절한 눈빛의 경호원들을 보자 웃음이 났다. 육체는 나보다 나이 많지만, 이들은 30대 아닌가? 한창인 나이다. “같이 가실래요? 우리밖에 없어 넉넉합니다만.” 같이 가자는 한마디가 남녀 모두에게 이 정도로 큰 기쁨을 선사할 줄이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희들 바로 준비해서 나올게요.” 부리나케 숙소로 달려가는 그녀들도, 기다리는 경호원들도 괴성을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는 듯했다. “몇 명은 먼저 갑시다.” 먼저 보트에 올랐다. 저 여인들까지 한 번에 타기엔 모터보트는 작았다. 늘씬한 네 명의 여인들까지 합세하면 선상파티 느낌이 좀 나려나? * * * 문 과장은 상어라도 잡을 기세로 늘어놓은 낚싯대만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난 선교(船橋,bridge)에서 선장과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웃고 떠드는 젊은 남녀를 구경했다. 요트는 천천히 움직였고, 그 속도에 맞춰 숨어 있던 해변의 풍광이 드러났다. “캡틴, 저긴 뭡니까?” “어디…? 아하.” 선장은 내 손이 가리키는 바닷가를 확인했다. “괜찮은 해변인데 사람 한 명 안 보여서 그러시죠?” “네. 제 숙소 전용 비치보다 훨씬 괜찮은데요?” “그렇지 않아도 저기에 리조트가 들어섭니다. 이야기 나온 지는 꽤 됐는데 이상하게 진척이 없군요.” “흠….” 야자수가 만들어내는 시원한 그늘, 하얀 모래사장과 얕은 바다. 정말 리조트나 호텔이 어울리는 최적의 장소였다. “저기 가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하선 준비할까요?”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즐거운 것 같으니 나 혼자 가볼랍니다. 음료수와 피크닉 블랭킷이나 좀 챙겨주세요.” “네. 그럼 이걸 가져가십시오.” 선장은 무전기 하나를 내 주머니에 쑥 찔러 넣었다. “쉬시다 지겨우시면 알려주세요. 즉시 모시러 가겠습니다.” 큰 해변의 모래에 오로지 나 혼자만의 발자국을 남기니 나쁘지 않았다.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거닐다 넓은 야자수 그늘 아래 자리 잡았다. 따뜻한 모래의 기온을 느끼며 누워 있으니 시원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매만진다. 천국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정말 개운한 상태로 잠에서 깼을 때 눈앞에 절경이 펼쳐져 있었다. 코타키나발루는 적도가 가까운 곳이라 날씨가 변덕스럽지 않고 사시사철 깨끗한 하늘과 주홍빛 노을을 볼 수 있어 ‘황홀한 석양의 섬’으로도 불리며, 이곳 바닷가에서 보는 낙조는 그리스 산토리니, 남태평양 피지와 함께 세계 3대 낙조로 꼽힌다. 아름다운 광경에 취해 멍하니 있을 때 문 과장이 옆으로 다가왔다. “푹 주무셨습니까?” “아, 네.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요. 여기서 바비큐 먹으며 맥주 마시려고 전부 내렸습니다. 혹시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잘 잤어요. 그런데 물고기는 좀 잡았습니까?” 문 과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들이 국적을 알아보나 봅니다. 요트 승무원 놈들은 던지면 무는데 제 것만 살살 피하더라고요.” “그래도 이런 멋진 해넘이를 보는 것이 낚시보다 더 좋지 않습니까?”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실장님 덕분에 구경합니다. 감사합니다.” 요리를 준비하는 리조트 직원마저 바다를 향해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은 수십, 수백 번을 봤을 법한 광경이지만 아름다움은 늘 새로운 감동을 전해주는 법이다. 하늘과 바다의 붉은빛이 사라지고 다시 바비큐 파티가 시작되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아름다운 여성이 넷씩이나 있으니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야릇한 긴장과 흥분이 주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딱 그 정도일 뿐 좀 더 진득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여성은 넷, 남자는 더 많다. 젊은 놈들이라 분명 눈치 싸움이 치열할 것 같았는데 그런 모습은 발견하지 못했다. 딱 그 정도 선에서 멈췄고 진도 나가는 듯한 행동은 그 누구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기묘한 분위기가 연출된 이유는 다시 리조트로 돌아왔을 때 알았다.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경호원들은 조금의 미련도 보이지 않고 곧바로 승합차에 올랐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그럼 귀국하는 날 비행기에 뵙죠.” 경호원들이 아쉬워하는 여자들에게 던진 말이었다. 내가 놀란 것만큼이나 여자들도 황당해하는 표정이었지만 승합차 문은 닫혔고 미련 없이 출발했다. “가서 더 놀다 와요. 난 괜찮으니까.” 하지만 단 한 명의 경호원도 내 말을 반기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닙니다. 충분히 놀았습니다. 더는 문제가 생길 소지가 다분합니다. 특히 여자는 말입니다.” “순양그룹 이름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럴 때 조심해야죠.” 문 과장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실장님이 일탈하시는 건 괜찮습니다. 우리가 모든 걸 차단하고 한마디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할 테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일탈하면 안 됩니다. 그건 실장님께 누를 끼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두 팔 벌려 안길 준비가 된 미녀를 거부할 정도로 훈련된 사람들이니 웬만한 유혹에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참, 쿠알라룸푸르 현지법인에 연락해서 내일 아침 첫 비행기로 법인장 좀 오라고 하세요.” “네? 갑자기 그쪽은 왜…?” “확인할 게 생겼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빌라에 도착했을 때 더는 술판을 벌이지 않았다. 첫날 충분히 마신 걸로 만족하는지 모두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 * 아침 첫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쿠알라룸푸르 법인장은 잔뜩 긴장한 채 머리를 숙였다. “갑자기 불러서 죄송합니다. 바쁘실 텐데….” “아닙니다. 오신다는 연락을 주셨으면 응당 제가 준비했을 텐데요.” “공적일 일로 온 게 아닌데 의전을 기대할 수 있나요? 마음 쓰지 마십시오.” 나는 법인장과 단둘이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 나누시죠.” “아, 네.” 그는 조심스레 포크를 들었다. 복잡한 심경일 것이다. 순양그룹의 강력한 다크호스라고 언론에서 떠들지 않았던가? 그런 나와 독대한다는 건 라인 탄다는 오해도 살 수 있다. 더욱이 자칫 잘못하다가는 소속인 순양물산을 맡은 진영기 부회장의 눈 밖에 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만나자는 내 요청을 거부할 수도 없는 일. 속이 바짝 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뵙자고 한 건 딴 게 아니라 좀 알아봐 주십사 해서요.” “네. 뭘 알아봐야 할까요?” “여기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꽤 긴 해변이 나옵니다. 모래도 멋지고 주변 경관도 운치 있더군요.” “아, 그렇습니까? 하긴 이곳에는 그런 해변이 즐비하긴 합니다.” “제가 본 곳은 탁월해요. 어제 요트를 빌려 이 부근을 한 바퀴 돌았는데 그곳만 한 해변이 없더군요.” “요트요? 아, 그럼 아직 미개발 지역이군요.” “네. 하지만 선장 말로는 리조트가 들어선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진척이 없다고 합니다.” “아…. 여긴 그런 곳이 꽤 있습니다. 계획부터 개발 완공까지 걸리는 시간 동안, 투자를 지속적으로 끌어낼 만한 기획력이 부족한 놈들이 막 덤비거든요. 비록 쿠알라룸푸르가 국제적인 도시지만, 누가 뭐래도 말레이시아는 아직 후진적 요소가 많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좀 알아봐 주십시오. 그 해변을 제가 사서 집이라도 한 채 올려놓고 싶어서요.” 법인장은 들고 있던 포크를 멈칫했다. “네? 집 한 채요?” “네. 문제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전 리조트 건설을 생각하시는 줄 알고….” “아이고, 그런 사업에는 관심 없어요. 해변을 통째로 사서 별장 하나 지어 놓으면 괜찮다 싶더군요. 해변 접근이 어려우니 완전히 사적인 공간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흐흐.” 말귀를 알아먹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돈 많은 재벌 3세 놈이 그림 같은 곳에 집을 짓고 흥청망청 주색잡기 하기 딱 좋은 공간을 원한다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 정도 해변에 별장 하나만 짓는 건 좀 아쉬운데요? 차라리 본격적인 리조트 개발이 어떨까요? 물론 별장도 함께….” “아뇨. 말했다시피 번거로운 사업에는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말씀하신 내용으로 보면 해변이 꽤 크다고 생각되는데…. 땅 매입비만 해도 수백억은 필요할 것 같거든요.” “천억까지 생각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처, 천억?” 알량한 바닷가 별장 하나에 천억이라니?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법인장의 생각은 고스란히 두 분 큰아버지에게 전해질 것이다. ======================================== [191] 착하게 살아야지 4 특히 진동기 부회장은 자신이 전해준 비자금 천억 원으로 긴 해변을 사서 별장을 지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비자금 천억을 인출했다고 믿도록 하는 것이다. “왜요? 천억으로도 부족합니까?” “아… 아뇨. 집 한 채에 천억인데…. 충분하죠.” “그럼 해변 매입부터 별장 짓는 데까지 책임지고 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한데….” 법인장은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아시겠지만 해외 지사나 법인은 업무 내용을 본사에 알려야 합니다.” “그러세요. 이건 숨길 일도 아니니까요. 아참, 비용도 당연히 청구하십시오.” “아이고,아닙니다. 비용이랄 게 뭐 있습니까? 이것저것 알아보는 게 전부인데요.” 법인장은 화들짝 놀라 손을 저었다. 나도, 저 사람도 서로 원하는 건 얻었다. 나는 어디선가 천억 원이 생겼다는 소문을 원했고,법인장은 날 만났다는 걸 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고맙습니다. 일 다 끝내면 제가 톡톡히 한턱내겠습니다. 하하.” “그럼 식사 후 우리 문 과장과 함께 내가 점찍어 둔 해변을 한번 둘러보세요. 그리고 별장짓는 데 필요한 인력이 있다면 즉시 알려주세요. 제가 사람을 보내드릴 테니까요.” “네. 진척 상황을 수시로 연락하겠습니다.” 필요한 용무를 끝내자 법인장은 마음 편히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동남아 사정은 좀 어떻습니까?” “97년 금융 위기 이후 계속 침체 상태입니다. 조금씩 회복 기미가 보이지만 우리나라와는 차이가 큽니다.” “우리가 빨리 회복했죠?” “비교할 대상이 없죠. 아무튼, 엄청난 민족이라는 건 틀림 없습니 다.” 법인장은 내 눈치를 슬쩍 보며 말했다. “그런데 금융그룹을 맡으신 소감이랄까, 느낌이랄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별거 없습니다. 전 경륜이 부족하니까 가능한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겠지만,질문은 나의 영역이다. 법인장은 내 질문에 충실히 대답하는 게 그가 할 일이고. “법인장님 친정은 어디죠? 물산? 전자?” 여기서 친정이란 주요 경력을 쌓은 곳을 말한다. “아,저는 순양생명입니다. 보험 리스크 운용팀에 있다가 싱가포르 발령 때 물산으로 옮겼습니다.” 아시아금융의 거점인 싱가포르에서 거래 규모도 보잘 것 없는 말레이시아로? 이 친구, 실적이 엉망이었거나 큰 사고 하나 치고 수습하지 못한 게 틀림 없다. 호시탐탐 재기를 노리고 있으니,나를 만난 게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본사와 줄도 잘 이어 놔야지,줄도 잘 서야지,나를 어떻게라도 이용해야지… 참 복잡한 심경이겠다. “아,생명! 그러시군요. 이거 반갑네요. 하하.” 이 정도 친근함을 표시했으면 법인장도 만족하려나? “준비 끝났습니다. 출발하실까요?” 우리 식탁을 살펴보던 문 과장이 슥 나타나 법인장에게 말했다. 문 과장의 절제된 행동과 위압적인 체격 그리고 예사롭지 않은 눈빛 때문인지 법인장은 마치 상관을 대하듯 긴장했다. “네,넵. 식사끝났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법인장은 앞장서는 문과장을 따라나섰다. 자,1차 목표는 달성했고 이제 진짜 사업을 시작하자. 곧바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一 푹 쉬고 있어? 초호화판 휴가를 즐기는 기분은 어때? 오세현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네. 덕분에 잘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아주 괜찮은 휴양지가 될 만한 장소를 발견했는데 검토 한번 해야겠습니다.” - 휴양지? “네. 리조트나 호텔 부지로 딱입니다. 사람들 좀 보내서 확인하고 싶은데요?” - 쉬러 갔으면 쉬는 데 집중해. 일은 무슨…! “그러기에는 낙조가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 그 광경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네요.” - 그래? 감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너 같은 놈이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정말 괜찮은 곳인가본데? “대아건설과 순양호텔,리조트 사업부 사람들 추려서 보내세요. 직접 확인하고 사업성 괜찮게 나오면 곧바로 추진하게요.” - 그래. 위치 정확하게 확인해서 메일로 보내. 답사팀 꾸려서 시작해보자. 말 나온 지 한참 된 리조트 공사가 시작도 못했다고 했다. 그 이유가 사업성이 부족하다면 포기해야겠지만 투자 때문이라면 충분히 끼어들수 있다. 별장 대신 리조트를 갖는 게 경제적으로나 외형적인 면에서 월등히 낫지 않은가? * * * 먹고, 마시고,자고. 일주일을 이렇게 보내니 백수가 왜 하루가 짧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일주일이 하루처럼 휙 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일주일 동안 물고기 한 마리 낚지 못한 문 과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만족한 표정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이곳 리조트에서 200여 킬로미터만 가면 라부안 섬이다. 라부안은 말레이시아 연방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유일한 직할구다. 라부안은 원래 브루나이의 술탄 통치 구역이었으나 1846년 브루나이의 술탄이 영국에 이 섬을 넘겼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이 지배했고 그 후,다시 영국을 거쳐 말레이시아의 연방 직할구가 되었다. 이곳이 역외금융센터이자 자유무역지대가 된 것은 10년 전쯤이었다. 그리고 그 10년간 이곳에 모인 세계 각국의 검은돈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리무진과 페리를 이용하여 라부안에 도착한 뒤 문 과장에게 은밀히 말했다. “내가 은행으로 들어가면 주변을 눈여겨보세요. 분명 누군가가 절 지켜볼 겁니다.” “그자를 찾으면 어떡할까요? 잡아서 족쳐볼까요?” “아닙니다. 그냥 뒤만 따르세요. 그자의 행선지만 파악하면 됩니다. 분명 순양 직원일 겁니다.” “아,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문 과장은 무슨 의미인지 감 잡은 표정을 지었다. 은행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무전 수신기를 귀에 꽂은 키 큰 사내가 내 앞을 막아섰다. “May I help you, Sir?" 그에게 Authority 카드를 내밀자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각각 문이 달린 칸막이 창구에 앉자 맞은편의 중년 여인이 웃으며 반겼다. “먼저 계좌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증서 주시겠어요?” 계좌 서류와 CD를 건네자 키패드를 내밀었다. “패스워드 입력 부탁합니다.” 18자리의 암호를 입력하고 기다리자 그녀는 웃으며 OK 사인을 보냈다. “감사합니다. 확인 끝났습니다.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잔고 금액부터 확인할까요?” “물론입니다. 선생님.” 그녀는 잔고 확인서를 프린트한 전표를 내밀었다. USD 89,877,100 “오늘 자 한국 환율이 어떻게 되죠?” “잠시만요.” 그녀는 메모지에 급히 숫자를 적어 건네준다. 1297.7 1,166억이다. 잔고를 확인하려 이 먼 곳을 온 게 아니다. 목적은 따로 있다. 난 창구 건너편에 앉아 계속 환한 미소를 짓는 아줌마에게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기웃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선생님.” “좀 큰 문제군요.” “네?” “이 계좌를 물려주신 분에게 들은 잔고와 꽤 많이 차이 나는 금액이군요.” “그럴 리가요? 입출금이 거의 없는 계좌입니다. 착오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과 신용이 우리 은행의….” “됐고, 입출금 내역 한번 봅시다. 숫자가 다르니 누군가는 착각이나 실수가 있었을 거 아닙니까? 이 은행은 아니라고 하니,이번엔 내가 확인해보죠.” “아,네.” 그녀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고 출금 내역은 깨끗한 대신 두 번의 입금 기록만 있는 전표를 출력했다. 내 예상이 맞았다. 97년 11월,그리고 98년 1월. 5백만 달러가 넘는 돈이 영국의 잉글랜드 허치슨 은행과 미국 맨해튼-차일드 뱅크로부터 각각 들어왔다. 달러가 없어 나라가 망할 판국에 천만 달러가 넘는 돈을 해먹었다니. 둘째 큰아버지도 어지간한 악당이다. 이제 확인해야 할 것은 천만 달러를 해먹은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흠….” “딱 2회인 거래입니다. 여기서 실수가 일어날 리는 없어 보이네요.” 거만한 표정의 그녀가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난 머리를 슬쩍 긁으며 끄덕였다. “그렇군요. 기억에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기록보다는 기억이 더 정확하지 않으니까요.”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입금 명세서를 챙겨 일어났다. “더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다. 곧 이 돈이 필요할 것 같아 확인차 들른 것이거든요.” “아, 네. 그럼 필요하실 때 언제든 다시 찾아주십시오. 선생님.” “네. 고맙습니다. 그럼….” 미국과 영국의 송금은행 계좌 역시 차명일 확률은 높지만,금액과 날짜, 입금 은행까지 확인했으니 절반은 건졌다. 은행을 나서서 천천히 걸었다. 내 모습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면 정확히 확인할 충분한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리무진으로 돌아오니 문 과장이 새카맣게 선팅한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 있습니까?” “네. 두 명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놈이 같은 일행이 아닌 듯합니다.” 문 과장의 표정이 살짝 어두웠다. “아는 사람인가 보군요.” “…네. 시큐리티 직원입니다.” “어디 소속인지도 아시죠?” 조금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한 명은 진동기 부회장님을 모시는 팀원입니다. 그런데 한 명은 모르겠습니다. 분명 낯이 익은데….” “천천히 생각하십시오. 우리 식구 중 한 명 아니겠습니까?” “어떡할까요? 두 사람 다 쫓을까요?” “신분 확인한 쪽은 내버려 두고 한쪽만 확인하세요. 집 떠난 집안 막내를 이처럼 걱정해주는 가족이 누군지는 알아야 하니까요. 그래야 감사 인사라도 올리죠.” “알겠습니다.” 누굴까? 진영기 부회장 측일까? 여기 말고는 짐작할 만한곳이 없다. “그럼 우리 먼저 이동하겠습니다. 계속 이 자리에 있으면 의심할 테니까요.” “네. 출발합시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게 자연스럽겠죠. 참, 요원들 연락은…?” “다들 로밍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휴가의 마지막 날은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 * * “뭐? 호텔?” 문 과장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통화를 계속했다. 해외에서 쓰는 휴대전화의 통화 딜레이 때문에 짜중이 나는가 보다. “끝까지 붙어. 그 새끼 오늘 실장님을 확인했으니까 분명히 체크아웃 할 거야. 아,그놈 출국하려면 어차피 우리가 있는 이 공항으로 오겠구먼.” 통화를 끝냈을 때 내가 말했다. “그놈이 시큐리티 직원이니까 그냥 놔두죠. 한국에서 확인해도 되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습니다. 제 기억이 틀렸다면요? 시큐리티 직원이 아니거나,이미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곳 소속일 수도 있으니까요.” 오,이 정도까지 철저하다니. 조금 감탄했지만, 걱정도 된다. 큰아버지를 돕는 수행원들도 이렇게 철저하지 않을까? 일 잘하는 두 팀이 격돌하면 아무래도 경험 많은 쪽이 유리할 텐데. 기다려보자. 오늘 그 결과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행의 성공과 실패가 내 사람의 실력을 가늠할 잣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실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증거로 문 과장이 점점 더 초조함을 드러냈다. “저,잠시만.” 문 과장은 휴대전화를 들고 사라졌다 한참뒤에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가면 영어 공부부터 시켜야겠습니다.” 난처한 표정의 문 과장을 보자 놓쳤다는 걸 알았다. “호텔로 사라진 뒤 나오지 않는답니다. 프런트 직원에 짧은 영어로 물었지만….” “확인해줄 리가 없죠. 투숙객의 정보를 아무에게나 말하지는 않으니까요. 됐습니다. 그냥 돌아오라고 하세요.” “죄송합니다. 그놈 얼굴을 확인했으니 한국에서 꼭 찾아내겠습니다.” “그래야겠죠? 어디 식구인지 짐작하는데도 못 찾아내면 우병준 상무가 내게 큰소리친 것이 전부 허풍일 뿐이라는 말이니까요.” 굳은 내 얼굴을 보는 문 과장의 이마에 식은 땀이 맺혔다. ======================================== [192] 증거 확보 1 “애들이 일을 그르쳤다고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실장님.” “계획했던 게 아니고 갑자기 발생한 일이라 대응하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외국 아닙니까? 언어 문제도 있었어요.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우병준 상무의 굳은 표정을 보니 내가 더 불편했다. “큰일 아니니 문 과장에게 맡겨 두십시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그럼 제가 과거에 그르친 일은 뭐가 있었는지,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한번 볼까요?” 별것 아닌 걸 알지만,손바닥에 땀이 찼다. 우병준은 살짝 웃으며 작은 수첩을 품에서 꺼내 들었다. “실장님은 참 재미없는 분이시더군요.” 특별한 게 없었다는 말이겠지? “사촌분들은 사춘기로 넘어가면 참 기발한 사고를 많이 쳤는데 실장님은 학업에만 충실… 아니,전념하셨더군요.” “대학 때는 일에만 전념했으니 딱히 뭔가 나온 게 없다는 소리로 들립니다만.” “너무 자신하지 마십시오.” 우병준은 슬쩍 웃으며 수첩을 넘겼다. “숨은 계좌 추적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국내 계좌야 전부 오픈돼 있고 차명은 전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참,엄청난 부자시더군요." 오,이 사람이 웃음을? 숨은 계좌까지 찾아냈다면 저런 웃음을 보였을까? “전 차명으로 숨겨놓은 돈은 없는데요? 전부 정당하게 번 돈이라 감출 게 없다고 보면 됩니다.” “그럴까요? 전 미국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가 가장 의심스럽습니다만,그쪽은 제 역량으로 추적하기 어려워서 포기했습니다.” “설마요? 미국입니다. 금융 관련 불법이 적발되면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합니다. 구린 돈은 없습니다.” “그럼 합법적인 돈이겠죠. 얼마나 되느냐 하는 문제는 남아 있지만….아무튼,한국 재벌가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취약한 부분은 없습니다. 이런 일로 누군가에게 약점 잡힐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누군가에게 약점 잡힐 만한 다른 일은 있다는 뜻입니까?” “아주 약간 부도덕한 일은 있지만,약점으로 잡힐 만한 건 없었습니다. 정말 잘 숨겼든 아니면 애초에 자제하며 지냈다는 뜻인데….” “우 상무님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합니까?” “전자가 아닐까요? 넘치도록 많은 돈을 가진 피 끓는 이십 대. 본능을 자제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전 여자 친구가 있습니다. 아실텐데요?” “사법연수원에서 살인적인 수업 일정을 소화 중인 미래의 판사님 말씀입니까?” “네.”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것도 힘든 상태 아닌가요? 자신 있게 여자 친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더 이상할지경입니다.” 대답하는 우병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서렸다. “뭔가 찾으셨나 보군요, 약간의 부도덕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죠?” “강남 상록회관 뒤,마우이라는 텐프로가 있더군요.” “푸하하!” 당황한 걸 감추는 방법 중 웃음이 제일이다. “그걸 찾아내셨습니까? 대단하시네요.” “오기가 솟더군요.” “네?”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원들을 엄청 족쳤는데도 못 찾아내더군요. 그래서 방법을 바꿔봤어요.” “어떻게요?” “실장님과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하시는 분의 뒤를 밟았습니다.” “오세현 대표님?” 우병준은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분 단골집이더군요. 접대할 일 있으면 항상 그곳을 이용하시고….” “이런,그러니까 나도 분명히 본능을 참지 않고 몰래 즐기는 구석이 있을 거라는 걸 확신하고 드러날 때까지 조사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런 쪽으로 실장님을 안내할 분은 오세현 대표가 유일하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제 판단이 옳았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은밀하게 즐기셨더군요.” “그걸로는 약점 잡혀 휘둘릴 일은없다?” “네. 제가 털어서 나온 먼지가 고작 이 정도뿐입니다. 단언하는데 다른 누구도 이 이상은 힘들 겁니다.” 내 약점을 찾아내서 봉합하는 게 이번 일의 목적이 아니다. 내가 큰아버지의 약점을 찾아 공격할 때 반격할 거리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이로써 반격은 있을 수 없다는 게 확실하다. 그리고 또 하나, 우병준 상무의 능력을 확인하는 일이었는데…. 좀 애매하긴 하다. 마우이라는 곳을 찾아낸 건 놀랍지만 그리 탁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 이제 다음 일에 착수하시죠" “이미 시작했습니다. 순양건설에서 그 당시 경영지원본부에서 일했던 핵심 인사 셋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아낸 것도 참고하십시오. 97년 12월,98년 1월. 이때 담당자였던 사람을 집중하시면 될 겁니다.” 우병준 상무의 눈빛이 번뜩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계좌에 흔적이 있더군요. 그걸 알아낸 겁니다.” “혹시 말레이시아에서…?” “네.” “그렇군요. 역시 휴가가 아니었군요.” “휴가 맞습니다. 알아낸 건 덤이고요.” 수첩을 품에 넣은 우병준이 일어섰다. “열흘 뒤 1차 보고 드리겠습니다. 미진한 부분이 있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요.” “급한 건 아니니까 너무 서두르지는 마십시오.” “빨리 그리고 정확히 처리하는 게 맞죠. 서두른다고 핵심을 놓치는 일,없도록 하겠습니다.” 결과는 이미 알고 있다. 천억 원대의 회사 자금을 빼돌렸다. 증거만 확보하면 되는 일…. 아니,증인을 확보하고 그 증인이 증거를 가져다줄 것이다. 진동기 부회장의 약점을 언제쯤 써먹어야 할까? *** 정확히 열흘이 지나고 우병준 상무와 여의도 오피스텔에서 마주 앉았다. 우 상무가 내민 자료에는 두 명 의이름이 적혀 있었다. 전무 임종윤. 부장 정규환. “IMF 때 많은 사람을 정리해고 했지만 두 사람은 승진했습니다. 이사에서 전무로,팀장에서 부장으로.” “그렇군요. 힘들 때는 지원부서부터 깨끗하게 밀어버리는 게 상식인데….” 생산과 영업은 제조업의 두 기둥이기 때문에 정리의 후순위지만,만만한 게 홍어 좆이라고… 관리,재무,총무. 이 세 부서는 적자에 허덕이거나 경영 위기가 닥치면 정리해고 1순위에 오른다. 그런데 차고 넘치는 지원부서의 이사와 팀장이 IMF라는 대위기 속에서 승진이라니? 특히 임종윤은 이사에서 전무로 두 단계나 뛰었다. 엄청난 신임을 받거나 몹시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뜻이다. “이 두 사람 외에는 눈에 띄는 이가 없었습니다.” “뭔가 나왔습니까?” “건설 바닥이야 원래 모래와 시멘트로 범벅인 곳 아닙니까? 두 사람에게 묻은 먼지만 털어도 집 한 채는 지을 수 있을 겁니다.” 우병준은 자료 파일 몇 장을 넘겼다. “임종윤 전무는 아예 인력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순양건설의 아파트 공사 현장에 일용직을 공급하는데…. “가라로 사람 수를 부풀렸겠군요.” “돈 빼먹는 수법 아닙니까? 그런데 이놈은 좀 심했어요. 임 전무 형님이 사장으로 있는데,연간 수십억을 챙길 정도니까요.” 수억이 아니라 수십억? 이건 큰아버지의 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 순양건설의 비자금 창구라고 보는 게 맞겠는데요?” “그렇습니다만 떡이 크면 떡고물도 많이 묻는 법 아니겠습니까?” “큰아버지도 모르게 빼돌리는 게 많다는 말이군요.” “네. 연간 삼사억 정도까지는 부회장님도 눈감아줄 겁니다. 하지만 작년에 챙긴 돈이 십억입니다.” 십억? 이건 눈감아줄 수준이 아니다. 회사도 무언의 룰이 있다. 담당 과장이 밥 한 끼,술 한잔 얻어먹는 정도는 눈감아준다. 부장이 명절 때 갈비 세트 받는 것 정도는 당연하다. 임원이 골프 접대받는 것은 일상이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임종윤 전무가 이 정도로 간 크게 돈을 빼먹는 건 진동기 부회장의 신임을 믿는 게 아니라 약점을 믿는 것이다. 부회장의 비리를 아는 자신을 쉽게 내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 어리석은 자다. 우리 집안 사람들이 얼마나 독하고 무서운지 모른다. “임종윤 전무는 곧 끝장나겠군요. 좋습니다. 그럼 정규환 부장은 어떻습니까?” “이 친구는 금괴가 든 보물 상자를 주웠다는 농담이 돌 정도로 인생이 확 변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인생 역전?” 로또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내년부터 시작이던가? 그러니 로또 맞아 일확천금이 생긴 건 아니다. “네. 98년부터 변했더군요. 와이프랑 애를 미국으로 보냈고 애들은 보스턴의 명문 사립학교에 다닙니다. 보통의 기러기 아빠는 아파트를 정리하고 오피스텔로 기어들어 가는데 정 부장은 주상 복합으로 옮겼습니다. 차도 바꾸고요.” “부회장님이 단단히 한몫 챙겨줬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뭔가 구린 일을 했고,그 입막음 용이라고 볼 수 있네요.” 문제는 그가 구린 일을 했다고 해도 약점이 될 수 없다. 큰아버지의 지시를 따른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정 부장의 먼지는 뭡니까?” “목돈이 들어와도 생활을 바꾸지 않는 게 옳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는 같은 부서 사람들마저 수군거릴 정도로 흥청망청했어요. 당연히 더 큰 사고도 쳤죠.” 우병준 상무는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차며 서류 사이에 끼워져 있던 사진을 내밀었다. “같은 층에 근무하는 여직원입니다.” “불륜?” “네. 마누라,애를 보내고 가장 먼저 한 짓이 바로 곱상한 여직원 꼬신 겁니다. 값비싼 주얼리 선물,호텔 레스토랑의 근사한 디너. 수입 중형 세단. 그리고 빠른 승진이 증명한 능력.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어린애의 눈에는 모든 게 다 멋져 보이는 법이죠.” “이건 좀 치명적이네요.” “네. 아내가 알면 이혼,귀책사유가 남자의 불륜이니 재산의 절반이 날아가고 양육비까지. 횡령보다 더 무서운 약점입니다.” 우 상무는 내 눈치를 슬쩍 살피며말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십니까?”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수고는요. 아닙니다. 그나저나 이제 이 먼지 뭉치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먼지를 침대 밑으로 슬쩍 밀어놓고 못 본 척해줘야죠. 단 그 대가는 먼저 받고.” 우병준은 염려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직접 그들을 만나 협박하실 생각이라면 제게 맡기시는 게….” “협박이라뇨? 그건 제게도 위험한 일입니다. 전 제안을 던질 뿐입니다. 대부의 명대사 아시죠?” “거절할 수 없는 제안.” “그렇습니다.” “말장난이죠. 영화에서는 그 제안이 바로 협박이었습니다만.” “전 다릅니다. 이자들의 욕망에 불을 지필 만한 제안을 던질 것이고 그들은 얼씨구나 하고 받을 겁니다. 자신의 약점을 쥐고도 협박하지 않으니 고마워하며 절 은인으로 생각할 겁니다.” “어떤 제안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현재 두 사람은 돈의 맛을 알아버렸어요. 이제는 멈출 수 없을 겁니다. 전 그 맛 좋은 돈을 듬뿍 안겨줄 생각입니다.” 잠깐 생각에 잠긴 우병준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주제넘지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욕망을 채워주고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공포에 빠져 스스로 필요한 것을 내놓게 하십시오. 욕망보다 공포가 더 큰 힘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던 걸까? 이것이 이 사람의 방식인가? 두려움을 무기로 원하는 것을 얻는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돈은 더 큰돈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놈들의 욕망을 다 채워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 상무님.” “네, “공포는 극복할 수 있지만,욕망은 극복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이 두 사람은 욕망 때문에 자멸할 겁니다.전 돈으로 원하는 것을 얻고,두 사람은 내 돈 때문에 자멸의 속도만 높일 뿐이죠.” 다시 생각에 빠진 우병준은 마침내싱긋 웃었다. “이솝우화가 생각나는군요. 외투를 벗기는 건 결국 햇빛이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좀 다르죠. 외투를 벗기는 게 아니라 안락한 인생을 벗겨버릴 테니까요.” 웃는 그를 마주 보며 나도 슬쩍웃었다. 오늘 이 사람과 조금은 가까워졌으려나? ======================================== [193] 증거 확보 2 “네. 정규환입니다.”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고민하던 정 부장은 모르는 번호를 보며 머리를 갸우뚱했다. -갑자기 전화 드린 점 양해 구합니다. 여긴 헤드헌팅 기업인 Spencer Stuart입니다. 들어보셨는지모르겠네요. “네? 헤드헌팅요?” 정규환 부장은 목소리를 낮추며 급히 사무실을 나와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스펜서 스튜어트는 50여 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는 다국적 인서치 기업입니다. 정규환 부장님의 명성이 워낙 자자해서 이렇게 연락드리게 됐습니다. 복도를 걸을 때 전화에서는 회사 자랑과 자신을 부추기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저기요. 전 회사 옮길 생각이 없는데…. -중요한 건 자신의 가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현재 정 부장님께서 순양건설의 최고 인재라는 걸 잘 압니다만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으시는지는 미지수 아닐까요? “아,전 충분히 만족합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현재 순양그룹 부장 평균 연봉이 5천,상여금 6백 프로. 이 정도 수준을 만족하신다면 부장님께서는 본인의 가치를 50% 깎으신 겁니다. 귀가 번쩍 띄었다. 50%?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자신은 이 회사에서 월급으로 환산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 아닌가? 일시불로 받은 특별보너스가 얼만데? 다른 부장이 평생 받을 월급을 전부 챙겼다. “관심은 고맙지만 별로 생각 없습니다. 그럼 이만….” - 잠시만요,부장님. 전화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터뷰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꼭 회사를 옮기는 것도 아니고 단지 부장님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확인하고 말이죠. 물론 최종 결정을 하시기 전에는 모든 게 컨피덴셜입니다. 절대 외부로 소문나지 않으니 그 부분은 염려 마시고요. 회사를 옮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호기심이 슬슬 일었다. 사실 조금 으쓱한 기분도 들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회사,그 회사가 생각하는 자신의 가치. 정말 두배 이상의 돈을 주는 걸까? “인터뷰는 어떻게 진행됩니까?” -아주 간단해요. 부장님께서 가능한 시간대에 편하신 장소,예컨대 카페나 커피숍 같은 곳에서 아주 짧게 할 겁니다. 망설이던 정규환은 짧은 말로 여지를 남겨 뒀다. “제가 다시 연락드리죠. 업무 시간이라 더는 통화할 수 없군요.” 정규환 부장은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나 보자 하는 생각을 굳혔다. * * * "HW 건설이면 예전 대아건설 아닙니까?” “맞아요. 아무튼,귀한 시간 내줘서 고맙습니다.” 정규환이 받은 명함에는 HR 관리부 이사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다. “요즘은 인사부 대신 HR을 많이쓰는군요.” “미국물 먹어서 그렇죠,뭐. 휴먼 리소스(Human Resource)의 중요성이 기업의 화두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정 부장님 같은 분을 이렇게 청하는 것이고요.” 정규환은 자신을 치켜세우는 소리가 싫지는 않았다. “아시겠지만 우리 건설이 상암동 DMC 이후로 급성장했습니다. 10년 넘은 대규모 사업 아닙니까? 사람은 한없이 부족하고 필요한 인재는 드물고. 그래서 헤드헌팅 업체에 의뢰하니 대번에 정 부장님을 추천하더라고요.” HW 건설이면 그럴 만하다. 불황이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지만, HW는 DMC 하나만으로도 10년 먹거리를 마련한 회사 아닌가? “갑자기 성장하는 회사가 그렇듯이 우리도 재무 쪽이 엉망입니다. 버는 돈이 많으니 씀씀이가 헤퍼요. 그러다 이번에 된통 작살났습니다.” “작살나다니요?” “우리 회사 지배주주가 바로 투자전문 회사 아닙니까?” “아,그렇죠. 미라클….” “미국 본사에서 회계 감사를 실시했는데….” HW 건설 이사는 머리를 절레절레흔들었다. “회사가 발칵 뒤집어질 정도로 질타하더군요. 허튼 데 쓴 돈의 내용을 조목조목 따지며 전부 형사 고발하겠다는 말까지 나왔으니.” 정규환 부장은 나올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미국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장부를 확인하는 회사다. 이런 곳이라면 자신이 감당할 능력이 안 된다. 두 배, 아니 열 배의 연봉을 준다고 해도 옮길 수 없는 회사다. 자신의 몸값이나 확인하러 나온 자리였지만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이사님. 죄송하지만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시간만 뺏은 꼴이 돼버렸군요. 사과드립니다.” 정규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갑자기 이러시면…. 우리 회사의 구체적인 제안이라도 듣고….” “아닙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온 제 불찰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연신 머리를 숙인 정규환은 도망치듯 카페를 빠져나왔다. HW 건설의 이사가 그런 그의 뒷모습을 황당한 듯 바라보고 있을 때누군가 다가왔다. “이사님. 저 자식 왜 저럽니까?” “몰라. 갑자기 놀라서 도망치네. 그보다 어떻게 됐어? 잘 찍었어?” “네. 이사님과 저놈,투 샷으로 아주 깔끔하게 나왔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됐어. 사진이나 갖다 줘. 그런데 니미,내가 왜 팔자에도 없는 배우 흉내를 내야 하는 거냐?” “가라면 까야죠. 위에서 시키는데…, 두 사람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남은 커피를 들이켰다. * * * “너 회사 관두냐?”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무님.” “시치미 떼지 말고 솔직히 말해. 여차하면 내가 너 잘라버린다!” 임종윤 전무의 호통에 정규환 부장은 아차 싶었다. 들키지 않으려 회사와 멀리 떨어진 노원구까지 가서 만나지 않았던가? “전무님. 혹시 제가 HW 건설 사람 만난 것 때문에 이러신다면 오해십니다. 그쪽에서 하도 졸라대서 차 한 잔 마신 게 전부입니다.” “그럼 이게 조작은 아니네?” 임종윤 전무는 사진 몇 장을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정규환은 자신과 HW의 인사 담당이사가 환히 웃으며 마주 보는 사진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하게 먼저 털어놓은 게 다행이다 싶었다. 이 정도 확실한 증거까지 손에 쥐고 있을 줄이야. “만났습니다. 하지만 연락 그만하라고 못 박으려 그런 겁니다. 믿어주십시오!” 애타게 말하면서도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들기 시작했다. 이 사진은 어디서 났을까? 혹시 줄곧 자신을 미행하며 행적을 전부 체크하는 중이었을까? “이 자식이! 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넌 이러면 안 되지. 안 그래?” 주고받은 두 사람의 눈빛에 숨은 말,말하지 않아도 안다. 부회장의 어두운 비밀을 공유하는 두 사람은 하늘이 무너져도 회사를 떠나면 안 된다. 나가라고 하기 전까지. 정규환 부장은 호기심 때문에 가볍게 저지른 일이 큰 실수라는 걸 알았다. “당연하지요. 그러니까 귀찮게 오는 전화를 끊어버리려고 만난 거라고요. 별 이야기도 없었습니다. 스카우트 제의는 제게 소용없다는 말만 던지고 왔어요.”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않는 듯한 임 전무의 눈빛 때문에 불안함이 밀려들었다. “그런데 전무님. 이 사진은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인사팀에서 주더라. 누가 투서한 모양이다.” “전무님. 설마 오해하시는 건 아니시죠? 전 정말 순양건설에 뼈를 묻을 겁니다.” “미친 새끼. 뼈 묻을 놈이 경쟁사 인사부 임원을 만나서 차를 마셔? 네가 생각이 있는 놈이냐?” 정 부장은 진짜 궁금한 점을 슬쩍던졌다. “전무님,혹시 사장님이나 부회장님께서 이 사진을 보셨습니까? 혹시 오해하시면 어떡하죠?” “오해? 이 새끼,진짜 똥오줌을 못 가리는 자식이구먼. 야 인마,내가 네 말을 믿을 거라는 그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네가 돈 더 준 다니까 회사 옮길 생각이 있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임 전무의 호통에 정 부장의 안색이 시커렇게 변했다. “나가 봐. 앞으로 조금이라도 허튼 짓하다 걸리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거야.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해줄테니 각오해. 나가,이 자식아!” 정규환은 머리를 폭 숙이고 임 전무의 방에서 힘없이 걸어 나왔다. 사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던졌다. 호기심 때문에 모든 걸 망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비밀을 공유한다는 건 동지와 적의 갈림길에 선 칼날과도 같다. 양극단만 있을 뿐 제3의 선택지는 없다. 지금까지 자신은 회사 최고위층의 확실한 동지였으나 의심이 짙어 가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사소한 실수 때문에 이런 불안감에 시달리니 스트레스가 머리를 짓눌렀다. 띠링! 이때 들려온 문자 알림음. 또 발신자가 누군지 모를 번호로부터 문자가 왔다. [메일 확인하세요.] 사내 메일함을 급히 열었을 때 눈을 의심했다. 요즘 인생의 봄날을 되찾게 해준 어린 여직원과의 데이트 모습이 고스란히 메일에 들어 있었다. 함께 웃으며 밥 먹는 모습,팔짱 끼고 호텔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사진. 결정적으로 차 안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는 모습까지. 정 부장은 더 볼 것도 없이 메일을 통째로 삭제했다. 이건 경고 아니면 협박,둘 중 하나다. 부회장 쪽에 보낸 메일이라면 경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보냈다면 협박. 경고라면 딴 생각 말라는 뜻이고 협박이라면 불륜을 터트리기 전에 뭔가 요구해 올 것이다. 그리고 휴대전화가 울렸다. 방금 문자를 보낸 그 번호다. 메일은 바로 협박이다. 정규환 부장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의 플립을 열었다. “당신 누구야?” 一메일 보낸 사람이죠. 아시면서. “뭐 하는 놈이냐고!” 큰 소리 때문에 사무실 사람들의 시선에 자신에게 쏠리자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너 이 새끼 누구야? 메일은 네가 보냈지?” - 긴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으니 만나시죠. 시간과 장소는 문자로 보냅니다. 참,바람맞히면 메일의 그 사진 순양건설 전 직원이 볼 겁니다. 물론 미국에 있는 가족들도. 그럼. 띠링! 통화가 끊어지자마자 또다시 문자 신호음이 울렸다. * * * “다,당신은?” “절 아십니까? 정 부장님?” 오피스텔의 현관문을 열어주자 턱이 빠질 듯 입을 다물지 못하는 정규환 부장이 서 있었다. “지…. 진도준… 씨?” “맞습니다. 들어오세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냥 돌아가실 건 아니죠?” 멍하니 서 있는 그를 내버려 두고 거실의 소파로 돌아왔다. 돌아가 버릴까 하며 망설이는 것 같지는 않고,놀란 가슴을 진정하면 들어오겠지. 몇십 초 지나자 현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온 정 부장이 내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긴장 푸세요. 정 부장 당신을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요.” 정 부장은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내 눈치만 자꾸 살폈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으니 혼란스럽기만 할 것이다. “두 배의 연봉과 엄청난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말을 듣고 오케이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죠. 제안이라도 들었다면 마음이 변했으려나요?” “그,그럼 그… 건설이… 바로…?” “네. 쉽게 푸는 방법도 있는데 왜 그리 어렵게 가려 합니까? 뭐, 이렇게 됐으니 제가 다시 제안하죠.” “자,잠깐만요. 지금 이게 무슨….” “참 내. 그렇게 급하니까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자꾸 놓치는 겁니다. 지금은요,정규환 부장님. 입 딱 닫고 내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듣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눈을 부라리며 그에게 옥박지르자 화들짝 놀란 눈으로 머리만 끄덕였다. ======================================== [194] 증거 확보 3 나는 사진 몇 장을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어때요? 죽이죠? 이 정도면 절경이라고 부를 만하지 않습니까?” 자라 보고 놀란 놈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딱 그 꼴이다. 사진을 던지자마자 후다닥 집어 들었다. 하지만 새하얀 모래사장과 수평선으로 넘어가는 붉은 태양이 그려내는 빛을 확인하자 정 부장은 안도의 한숨부터 내쉰다. “머, 멋지네요.”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라는 곳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휴양지죠.” “그런데 왜 이 사진을 제게 보여주시는지…?” “그곳에서 5년 정도 푹 쉬면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저 말입니까?” 황당한 표정으로 변한 정규환 부장 이 사진과 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 다. “올해 하반기쯤 그곳에 근사한 리조트 하나를 올릴 겁니다. 설계부터 오픈까지 삼사 년 걸릴 테고 정상 궤도에 오르려면 넉넉잡고 5년은 필요하지 않겠어요? 거기에 가서 주특기인 자금 관리나 하며 지내라는 말입니다.” 눈만 뒤룩뒤룩 굴리는 그에게 달콤한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이다. “은밀하게 전 재산을 처분해서 깊숙이 숨겨 두세요.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에 맡겨 둬도 됩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잘 보관하겠습니다. 투자 수익도 은행보다 훨씬 짭짤할 겁니다.” “설마 도피하라는 말씀입니까?” 그의 질문은 무시하고 내 말만 계속했다. “리조트 오픈 전까지 호텔에서 지내도 좋고, 멋진 빌라 하나 빌려 지내도 좋습니다. 아 참, 그곳은 365일 비키니 미녀가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지금 만나는 여직원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미녀들이죠. 리조트 최고 책임자라고 하면 그런 미녀가 먼저 유혹할걸요?” 자유분방한 배낭족들이 호화로운 리조트에서 공짜로 지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영화에도 자주 나오지 않는가? “물론 외국에서 근무하는 것이니까 충분한 특별 수당이 지급됩니다. 앞으로 받게 될 두 배의 연봉은 고스란히 저축하는 셈이죠. 이런 좋은 제안을 듣지도 않고 가버렸으니 내가 그 메일을 보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겁먹은 눈빛은 사라졌고 당황해서 붉게 변한 안색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특히 영문을 몰라 찌푸렸던 미간은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하게 펴졌다. 세계적인 휴양지, 리조트, 책임자, 비키니 미녀, 특별 수당, 두 배의 연봉. 이런 달콤한 단어가 그의 머리를 휘젓고 있을 것이다. “제게 이런 말씀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경쟁사의 인사 담당자를 만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불신의 눈길을 받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특별한 게 아니죠. 경쟁사가 사람 빼 가는 일이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말이죠. 그런데 왜 유독 당신에게는 특별한 눈길이 쏟아질까요?” 절대 자기 입으로 대답하지 않을 질문이다. “어차피 부장님은 언제든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놈으로 찍혔습니다. 부회장님의 특별 비자금을 처리한 사람이니 사표 쓰고 곱게 보내주지는 않겠죠? 잘 알겠지만, 순양그룹은 이런 쪽으로는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습니다.” “비, 비자금이라니요? 전 모르는 일….” “시간 낭비는 딱 질색입니다. 시치미 떼는 건 마누라 앞에서나 해요. 바람핀 적 없다고!” 불륜을 언급하니 다시 얼굴이 붉어지며 입을 닫았다. “IMF 때 부회장이 챙긴 돈 1천억, 그 엄청난 위기에서 어떻게 그 돈을 빼돌렸는지 당신은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자, 잠깐만요. 1천억이라니? 아니에요. 전 단지 5백 억짜리 페이퍼 컴퍼니를 매각….” 오호라,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 회사를 순양건설에 팔아먹었구나. “그 페이퍼 컴퍼니는 곧바로 손실 처리 했겠군요. IMF를 맞았으니 부실 자산 처리한다는 명분도 서고.” 실수를 깨달은 정 부장은 대꾸도 없었다. 이 친구는 5백 억짜리만 아는 걸 보니 나머지 5백억은 임종윤 전무가 아는 내용일 것이다. “내게 그 페이퍼 컴퍼니로 장난친 서류만 가져와요. 그럼 당신의 신변은 내가 지켜주죠. 물론 리조트 제안도 유효합니다.” 말이 없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지만, 어느 쪽에 붙을지는 자명한 일이다. 챙겨주는 쪽, 의심하는 쪽.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하나 여쭤봅시다.” “말씀하세요.” “진동기 부회장님은 큰아버지 아닙니까? 그분의 약점을 왜 후벼 파려고 합니까?” 이것도 호기심인가? 아니면 배신할 명분을 찾는 것일까? “내가 순양카드를 부회장님께 넘긴다는 거 알죠?” “네. 매각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왜 매각하겠습니까?” “네?” “연간 수천억의 순익이 나는 회삽니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나 다를 바 없는데 내가 왜 팔겠어요? 그것도 외상으로?” “깊은 내막을 월급쟁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강탈하는 겁니다. 조카 회사를 공짜나 다름없이 뺏는 큰아버지죠. 나도 반격할 거리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 부장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씨발, 용코로 걸렸네.” 정확한 표현이다. 제대로 걸린 신세다. 그래서 위험한 일에 손을 담 글 때는 퇴로를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지 않으려면 도망가야죠. 코타키나발루로 튀세요. 거긴 안락하고 평화롭고 안전합니다.” “내가 서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쩌려고 했습니까?” “보험증서 안 챙기는 월급쟁이는 없죠. 그 정도 머리도 돌아가지 않는 사람이면 부회장님 일에 가담하는 것도 불가능하죠.” “금수저치고 많이 아시는군.” 자신도 가진 게 있다고 믿는지 말투가 점점 거칠게 변해갔다. “까불지 마. 이 새끼야! 니 인생 지옥으로 빠트리는 건 일도 아냐. 푼돈 좀 받고 인생 성공한 것처럼 까부는 새끼 여럿 봤어. 그 새끼들 중에 말년까지 까불며 산 놈이 몇이 나 될 것 같아?” 초장에 기를 확 죽여놔야 한다. 이 놈이 부회장에게 충성한답시고 달려가면 큰일이다. “막장 인생으로 빠질 놈을 천국 같은 휴양지에서 지내게 해주는 은인이 바로 나야. 어디서 개겨?” “부, 부회장 비자금 서류… 내가 가지고 있다고!” “지랄하네. 넌 반밖에 모르지? 너 말고도 또 있어. 그놈한테 내가 너한테 제안한 조건의 열 배를 제시하면 얼씨구나 하며 내 발가락이라도 핥을 걸? 그럼 넌? 부회장을 배신한 바람핀 남편일 뿐이야. 당신 마누라 성격 좋아? 불륜 정도는 눈감아줘?” 정규환 부장은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알았는지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뭐 해?” “네?, , “빨리 가서 서류 가져와. 내 호의는 오늘까지야. 지금 서류 가져오면 코타키나발루 리조트 책임자는 여전히 당신이야. 빨리!” 정 부장은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니 쓴웃음이 났다. 내가 틀렸다. 아니, 절반만 틀렸다. 욕망에 불을 지피는 것도 공포를 곁들이면 빨리 타오른다. 아니. 공포가 우선인가? 협박을 받아들이는 촉진제로 욕망이 효과적인 것일까? * * * “이거야?” “네. 동유럽에서 자원 개발 관련 유령 회사를 만들어 순양건설에 팔았습니다. 곧바로 부실 자산을 떨어 버렸고요. 전형적인 수법이죠.” 기가 차는 건 이 수법이 10년 뒤에도 횡횅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빈번하게 일어나는데도 잡히는 놈은 거의 없다. 큰 도둑은 늘 법망을 피한다. “아직 5백억이 남았지?” “동유럽 유령 회사 매각 대금은 영국에서 입금했어요. 남은 건 미국에서 입금했으니 유령 회사는 아마도 남미쯤 될 것 같습니다.” “남미도 자원일까?” “아마도요.” 오세현은 어이가 없는지 서류를 툭 던졌다. “미국이라면 종신형이야.” “여기선 3년에 집행유예죠.” “젠장. 그래도 네 큰아버지 중에 진동기 부회장이 좀 낫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온 나라가 금융위기로 휘청거리는데 그걸 돈 빼먹을 찬스로 생각하다니. 재벌들은 참 한결 같다.” “한결같으니까 내게 유리하죠. 진영기 부회장이라고 이런 짓 안 했겠습니까?” 오세현의 구겨진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그놈은? 정말 휴양지에서 탱자탱자 하며 살도록 놔둘 거야?” “머슴 아닙니까?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제가 벌줄 수는 없습니다. 대신 안빈낙도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겁니다. 빡세게 부려야죠.” “말 나온 김에 정확히 하자. 리조트, 진행할 거야?” “현지 조사단 결과대로 하겠습니다. 사업 타당성 있다는 결론이면 진행하고 아니라면 별장이나 하나 올리죠. 삼촌도 가끔 쓰시도록요.” “말만 들어도 좋다.” 그제야 슬쩍 미소 짓는다. “이제 어찌할 거냐? 남은 5백억도 찾아낼 거냐?” “네. 아마도 임종윤 전무가 처리했을 겁니다. 그 대가로 인력회사 운영권을 하나 받았으니까 확실합니다.” “임원 정도 되면 웬만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아. 알지?” “네. 이번에 절실히 느꼈습니다. Mutual Benefit을 내세워 원만한 거래로 원하는 걸 얻으려 했는데…. 가끔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 더 빠르다는 걸 봤으니까요. 임 전무에게는 힘으로 해볼 생각입니다.” “이번엔 내 역할은 없어? 정 부장 건에는 내가 HW 건설 임원 동원했잖아.” “힘으로 누를 겁니다. 괜찮습니다.” “무슨 힘? 그 임 전무란 놈은 진 동기 부회장 측근이다. 너 정도는 어린애로 볼걸?” “삼촌. 순양그룹 임원이 가장 무서워하는 힘이 뭐겠습니까?” “뭐긴, 두 부회장님이시지.” “아닙니다.” “그럼?” “회장님이죠. 둘도 아닌 한 명 아닙니까?” “너 설마 진 회장님을 끌어들일 생각이냐?” 오세현은 입을 떡 벌렸다. “아뇨. 이름만 슬쩍 쓰려고요. 이런 일에 할아버지를 끌어들일 수는 없죠.” ***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려운 걸음이실 텐데.” “아닙니다. 순양의 세 기둥 중 한 분 아닙니까? 비록 가장 짧고 가늘지만요.” 어쭈? 슬쩍 가시 돋친 소리도 할 줄 알고. 짬밥 좀 먹었다 이 말이 지? “아이고, 기둥은 무슨…. 과찬이십니다. 잠시 맡아 두고 있는 꼴이랄까요? 가지고 있기에는 제 능력 밖이라 버겁습니다.” 일단 겸손을 떨었다. “맡아 둔다? 무슨 뜻이죠?” “아실 텐데요? 순양카드를 곧 넘기지 않습니까? 다른 금융사도 곧 그 길을 따라갈 겁니다.” 임 전무의 눈이 반짝인다. “혹시 세금 문제 때문에 쿠션 돌리기를 하신다는 말입니까?” “저야 뭐 아나요? 다 할아버지 의중에 달린 거죠.” “진 회장님?” “네.” 역시 할아버지는 아직 절대적인 존재다. 거론하는 것만으로 임 전무의 앉은 자세가 달라진다. 꼬고 있던 다리를 슬며시 바로 했다. “그럼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는 것도 진 회장님 전언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이 자리에 나와야 하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습니다만.” “아닙니다. 제가 할아버지께 보고를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하다 전무님과 먼저 이야기 나누는 게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보고라니요?” “이번에 좀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임 전무님과 관련이 있더군요.” “제가요?” “네. 순양건설 일용직 근로자를 한 회사가 아도 쳤더군요. 그런데 그게 임 전무님의 가족 회사라….” 임 전무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시죠? 할아버지 정책? 돈 되는 자리는 2년마다 사람을 바꾸죠. 어차피 뒷돈 받는 걸 막을 수 없으니 돌아가며 용돈이라도 벌라는 의미잖습니까?” 하청업체를 책임지는 구매부, 자재부, 물류 등의 꿀 보직은 2년 이상 버틴 임원이 없다. 적당히 챙기고 빠지라는 할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무님의 가족 회사는 지금 3년 넘게 독점인데….” “이봐요.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이따위 소리를 하는 거요? 이건 전부 부회장님 지시로….” 당황한 게 확연히 드러난다. 목청부터 높인다. “진동기 부회장님이 일 년에 십억씩 해먹어도 좋다고 하셨습니까?” 이젠 큰소리 대신 입을 다물었다. ======================================== [195] 증거 확보 4 “머리만 들이밀면 몸통도 쓱 들어오는 게 자연스럽죠. 1, 2억이 10억으로 변하는 것이 순식간이었을 겁니다.” 임종윤 전무는 사색이 된 얼굴로 입술을 떨었다. 조금만 더, 이번 한 번만. 이런 마음으로 시작했을 테지만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으니 조금씩 더 대범해진다. 3, 4억을 더 해먹으며 액수만큼 간은 더 커졌고, 결국 열 배의 금액으로 불어났을 것이다. 이 상태로 일 년 뒤면 얼마까지 불어날까? “부회장님도 분명히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왜 잠자코 계시는지 이해할 수 없긴 한데….” “이, 이봐요. 호, 혹시 부회장님께서 뭔가 말씀하신 거요?” 임 전무의 표정을 보니 진동기 부회장도 용납하기 어려운 금액을 해먹었다는 게 확실했다. “말씀이 없으시니 더 무서운 거 아닐까요? 주의나 경고를 하지 않으신다는 건 이미 적절한 조치를 준비하신다는 뜻일 수도 있고요.” “조치?” “설마 몰라서 그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시는 겁니까?” 미지에 대한 공포가 가장 두렵다. 지금 임 전무의 머릿속에는 온갖 상상이 난무할 것이다. “순양에서 밥 먹은 지 꽤 오래되셨을 텐데…. 우리 가족들이 어떻게 일을 처리하시는지 모르십니까?” 꽃보직 2년간 노후 대책도 마련하고 아파트도 두어 채 이상 장만한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진 회장이 설정한 허용 범위를 벗어나면 철저한 징벌을 피할 수 없다. 회사가 허용하는 범위를 벗어난 자들, 대부분 임원이었다. 그들의 과거가 들춰지고 사생활이 드러난다. 이 일을 도맡아 하는 자는 다름 아닌 검찰청 내의 순양 장학생들이다. 가족과 친척 명의로 숨겨 놓은 계좌가 드러나고 몰래 사 놓은 땅과 상가 문서가 책상 위에 놓인다. 법적 책임을 피하려면 모든 걸 토해내고 낙향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만약 회사의 비리를 꼬투리 잡아 협상이라도 할라치면 가족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진 회장의 처리방법이었다. 두려움이 스쳐 가는 듯 몸을 살짝 떠는 임 전무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생각하는 내막을 말씀드릴까요? 전무님은 아마도 진동기 부회장님의 은밀한 부분을 알고 계십니다. 인력 공급 회사는 입막음용이거나 노고를 치하하는 프라이즈였겠죠.” 이미 아는 사실을 모른 척하려니 답답하기도 했다. “그런데 입막음용이라면 거금을 척 내놓고 끝내버리는 게 우리 큰아버지 성격입니다. 그러니 분명 자자손손 해먹으라고 만들어준 회사가 분명하죠.” 마지막으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임종윤 전무님. 큰아버지를 위해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괜한 억측은 그만두시오.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형님의 인력회사가 과도한 이익을 남겼다면 부회장님께 직접 말씀드리고 바로잡으면 될 일! 이따위 헛소리는 그만 듣겠소.” 저 말대로 큰아버지께 쪼르르 달려간다면 큰일이다. 나가려는 발목을 잡아야 했다. “이 아저씨 아직 감을 못 잡으셨나?” “뭐라? 이봐! 말조심해!” 도발적인 말투는 임 전무의 발걸음을 막았다. “지금 부회장님이 문제가 아니란 겁니다. 우리 할아버지…. 그러니까 회장님께서 그룹 감사를 시작하실 생각입니다. 이학재 실장님은 이미 특별 감사팀을 꾸리기 시작했고요. 아시겠습니까? 그 첫 번째 감사 대상은 바로 순양건설입니다. 건설이 첫 번째인 이유도 잘 아시겠죠?” 외부 감사가 아니다.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특출한 인간들이 회사를 뒤져본다는 뜻이다. 또한, 온갖 비리의 온상인 건설사부터 터는 건 당연하다. “전무님의 인력회사는 진동기 부회장님께도 타격이 클 겁니다. 이런 회사를 몇 년이나 묵인했다? 할아버지께서 노발대발하실 텐데요?” “이봐요. 진도준 씨.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요? 여기 푹 찔렀다, 저기 푹 찔렀다…. 원하는 걸 말하라고! 그래야…….” 복잡하게 말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걸 드디어 임 전무가 감 잡았다. “정리하고 도망치세요. 유럽? 미국? 호주? 어디든 좋습니다. 내가 준비해드리죠.” “뭐, 뭐요?” “임 전무님은 어차피 전무에서 끝 아닙니까? 설마 순양건설의 사장 자리까지 노리시는 건 아니겠죠? 그 자리는 공구리 치며 노가다 판에서 빡빡 구른 경력자만 올라갑니다. 장부나 뒤적거리던 전무님은 경영지원본부장이라는 지금 그 자리가 끝입니다. 아시죠?” 현장 출신이 아니면 건설사 사장이 될 수 없다는 불문율은 잘 아는 사람이다. “인력회사 꾸리는 것도 앞으로 몇 년 안 남았어요. 순양 떠나는 날 그 회사도 문 닫아야 하니까요. 그냥 퇴직일을 몇 년 앞당긴다 생각하시고 돈이나 챙기세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큰아버지의 비자금을 만들기 위해 간 크게 한탕 할 때도 이랬을 것이다. 무려 500억의 돈을 존재하지도 않는 회사에 갖다 바쳤다. 일이 잘못되면 소극적인 가담자인 자신도 형사처분을 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과감한 선택을 했고 그 결과로 돈방석에 앉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내가 주는 또 한 번의 기회. 대신 뭔가를 버려야 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직감으로 알 것이다. “장부만 이십 년째 들여다보신 분이 셈이 느리시네.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하십니까? 십 초만 생각해도 답 나오는구먼.” 임 전무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동안 내 입은 바짝 말라갔다. 혹시나 이 양반이 진동기 부회장과의 의리를 더 중요시 여긴다면? 그래서 나와 나눈 대화를 고스란히 알려준다면? 할아버지의 사내 감사 때문에 부회장이 다치는 걸 온몸으로 방어하려 한다면? 모든 게 틀어진다. 하지만 진동기 부회장이 마련해준 인력회사를 이용해 10억이나 해먹은 임종윤 전무의 과욕과 이미 돈벌이에 혈안이 된 그의 욕망을 믿었다. “진도준 씨. 절실히 필요한 것이 있구먼. 말해봐요. 뭐요?” “계산 끝났습니까?” “당신이 원하는 걸 들어야 계산이 끝날 것 같은데?” 한결 여유를 보이는 임 전무였다. 지금부터는 나의 경고가 아니라 제안을 들을 차례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IMF 때 유령 회사를 하나 샀죠? 아마도 남미에 있는 회사일 겁니다. 서류만 존재하는 회사를 500억이나 줬을 테고 나라가 혼돈에 빠졌을 때 손실처리 했을 겁니다. 난 그 거래 내역 전부가 필요합니다.” 오늘 만난 이후로 가장 놀란 임 전무의 얼굴을 봤다. 저 표정 다음에 어떤 말이 나올까? “그럼 인력회사 건을 묻어주실 수 있습니까?” 다행히 계산이 빠르다. 내가 할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건 그룹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고, 임 전무도 예외는 아니다. 이미 그의 말투가 공손하게 변했다. “어차피 감사팀에서 찾아낼 테니 묻어줄 수는 없어요. 하지만 문제 삼지 않게 해줄 수는 있습니다.” 문제 삼지 않는다, 검찰을 이용해서 형사사건으로 키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 인력회사는 어떻게 정리하는 게 좋을까요?” “처분하세요. 그 누구도 회사를 들여다보지 못할 힘 있는 곳으로 말입니다.” “건설을 모르는군요. 인력회사는 사무실 하나 달랑 있습니다. 어차피 연줄로 운영하는 곳…. 누가 삽니까?” “HW 건설에서 매입하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매입 대금은 20억, 퇴직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HW…? 아, 대아건설 말이군요.” “그리고 진동기 부회장님이 임 전무님을 잊어버릴 정도의 시간…. 한 5년 정도 외국에서 지내세요. 물론 돈도 많으니 완전히 은퇴해서 놀아도 되고요.” 아직 주저하는 모습이 남아 있었다. 20억이라는 거금이 손에 들어온다 해도 진동기 부회장의 손길을 피하지 못한다면 다 써보지도 못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전무님이 한국을 뜬다면 그 흔적을 지워드리겠습니다. 5년간 철저하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풍광 좋은 외국에서 푹 쉬면 됩니다.” “이유가 뭡니까?” “무슨 이유요?” “진동기 부회장님의 약점을 손에 쥐려는 이유 말입니다.” “아는 게 많으면 그만큼 위험해진다는 걸 아직도 모르세요? 지금 당신 모습을 보세요. 부회장님의 비밀을 아니까 이런 꼴을 당하는 겁니다.” 그가 다시 입을 닫았다. 어떤 결론을 내릴지 생각하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진 회장의 감사. 그것을 피하고 배신한 진동기 부회장의 손길을 피하는 것. 돈은 그다음이다. “대아, 아니… HW 건설의 해외 프로젝트가 있는 곳의 취업 비자를 만들어주십시오. 인력회사 정리, 20억 퇴직금 수령 그리고 제가 외국에서 자리 잡았을 때 자료를 넘기겠습니다.” “자료 먼저.” “그건 안 되죠.” 칼자루를 쥐었다고 착각하는 사람에게는 칼날의 날카로움을 보여줘야 한다. “지금 당장 자료부터.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긴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 헛짓한 겁니다. 귀한 시간만 날리기 싫지만 어쩌겠습니까? 마지막 톱니가 어긋났는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 아직 모르겠군요. 정규환 부장이 이미 유럽의 유령 회사 자료를 넘겼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폭탄은 많을수록 좋은지라 전무님 자료도 구하려는 것뿐입니다.” “저, 정 부장이…?” “지금쯤 태평양 바다 위를 날고 있을 겁니다. 그 친구도 대략 5년 이상 외국에서 지내죠.” “그, 그럴 리가…?” “브라티슬라바 자원개발 유한 회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아닙니까? 정 부장이 넘겨준 자료 젤 위에 적힌 회사 이름이던데…. 이래도 못 믿겠어요?” 슬로바키아의 유령 회사 이름이다.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은 단 셋뿐.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이제 칼자루가 자신의 손에 없다는 걸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고생한 대가로 돈 좀 만지게 해준 큰아버지 몰래 10억을 빼돌린 사람을 내가 믿을 것 같습니까? 나중에 20억이 적니, 부족하니 하는 딴소리는 피하고 싶군요. 머리 굴리지 말고 자료 가져와요. 한 달 안에 호주 시드니에서 지내도록 만들어줄 테니까요.” * * *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흠…. 꼭 그만둘 필요는 없지 않나? 내가 임 전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이러나?” 진동기 부회장은 고개를 푹 숙인 임종윤 전무를 이리저리 살피며 낮고 차분한 음성으로 달랬다. “잘 압니다. 그러니 그만둬야죠. 저도 염치는 있습니다.” “살다 보면 돈 필요할 때가 있는 거고, 그러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괜찮네.” “아닙니다. 부회장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몹쓸 짓을 저질렀습니다. 곰곰이 생각을 좀 했는데, 이러다가는 제가 어떤 짓까지 할지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그리고….” 임종윤은 부회장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만, 눈빛은 날카롭다. “가족뿐만이 아니라 친척들까지 미쳐가고 있습니다. 무슨 꿀단지라도 되는 양 어떡하던 한 다리 걸쳐 돈 챙기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더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말입니다.” 집안까지 거론하자 진동기 부회장의 얼굴에 한 줄기 경멸의 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런 꼴을 참 많이도 봤다. 없이 사는 놈들이 모여 사는 집안은 성공한 한 명만 나타나면 거머리처럼 들러붙는다. 이때부터는 가족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다. 어떻게 하든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더 빼먹으려 아귀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처음에는 그런 친척들에게 성공을 과시하듯 도움을 주지만 그것이 바로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발을 담근 일이라는 걸 곧 깨닫는다. 그리고 아귀가 사는 지옥이 펼쳐진다. ======================================== [196] 증거 확보 5 진동기 부회장은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뭘 하려고?” “애들도 다 커서 더는 돈 들어갈 일도 없습니다. 마누라 데리고 당분간 동남아 여행이나 하며 지내려고요. 어차피 한국에 있으면 핏줄들 등쌀에 견딜 수도 없습니다. 한 3년 뒤에 돌아오면 집구석도 잠잠해지지 않겠습니까?” 임 전무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제가 과욕을 부린 돈은 전부 제자리에 두고 바로잡겠습니다.” 진동기 부회장이 빙긋 웃었다. “됐네. 임 전무 고생한 거 내가 모르는 바도 아니니 그냥 퇴직금이라 생각하고 마음 편히 써. 내가 이러는 이유는 잘 알겠지?” 순양에 몸담으며 있었던 모든 일을 싹 잊으라는 뜻이다. 덕분에 돈은 굳었다. “물론입니다. 그저 부회장님께는 감사의 마음뿐입니다.” 임종윤은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왜 이러나? 사람 쑥스럽게….” 진동기 부회장이 손사래를 쳤다. “그건 그렇고 정규환이는 어떻게 된 일인가? 갑자기 사표 던지고 사라지다니?” “아, 그렇지 않아도 그걸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임 전무는 짐짓 난처한 듯 머리를 슬쩍 긁었다. “그 친구가 바람이 나서….” “뭐라? 바람?” “네. 같이 근무하는 젊은 여직원인데…. 집에서 알아버렸습니다. 그거 무마한다고 가족들이 있는 미국으로 일단 떴습니다. 그 전에 제게 찾아왔습니다. 얼굴을 들 수 없어 회사는 다니지 못하겠다고 하더군요. 남녀 모두 이 회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 소리지요.” “어이그.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진동기 부회장은 경멸스러운 표정을 또 한 번 지었고 이번에는 숨기지도 않았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확실하게 단도리했습니다. 그 친구도 함부로 입 놀렸다가는 큰일 난다는 걸 잘 아니 조용히 지낼 겁니다.” “그래야 할 거야. 임 전무가 다시 한 번 단단히 못 박아 둬. 어린 년이랑 바람이나 피는 놈은 내가 영 믿을 수 없어.” “알겠습니다. 확실하게 입단속 시키겠습니다.” “이거 원, 섭섭하긴 한데…. 어쩌겠나? 집안 문제니 더는 말리지도 못하겠고.”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닙니다. 부회장님께는 종종 안부 인사 올리겠습니다. 편하신 시간에는 직접 찾아뵙기도 할 겁니다. 문전박대만 말아주십시오. 하하.” “그래, 그래. 우리가 어떤 인연인데? 종종 놀러 와서 말동무나 되어주게.” “네 부회장님. 그간 감사했습니다.”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부회장실을 나서는 임종윤 전무의 입가에는 개운한 웃음이 번졌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진동기 부회장의 표정은 굳어갔다. 임 전무가 문을 닫자마자 그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임종윤 따라붙어. 그리고 그놈 계좌 살펴서 입출금 확인해봐. 그래. 친인척 전부 뒤져. 참, 정규환이 지금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그놈이랑 바람난 년도 조사해봐.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영 개운하지 않다. 하필 같은 일에 써먹은 두 놈이 동시에 회사를 떠나는지…. 우연일까? *** 은밀하게 한 짓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큰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혹시나 두 사람과 접촉한 사실을 눈치채지나 않았는지 계속 눈치를 보게 된다. 하지만 큰아버지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웃음이 가득했다. 이 순간이 지나면 순양의 핵심 계열사 하나를 더 거느리게 된다. 회장 자리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느낌이 든 것일까? “너도 참 치밀하구나. 순양카드가 쥔 다른 계열사 주식도 좀 섞여 있으면 좀 좋으냐? 단 한 주도 없더구나.” “할아버지가 주신 건데 잘 보관해야죠. 순양카드 넘기는 것만으로도 이미 할아버지 꾸중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카드사를 넘기듯 내가 절실히 필요할 때 주식을 넘길 수는 있겠지?”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큰아버지가 부담스러웠지만, 흔쾌히 머리를 끄덕였다. “제가 보관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 겁니다. 각자 가는 길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믿든 안 믿든 기대에 찬 저 눈빛을 매몰차게 튕겨버리지는 않았다. 이때 장도형 부사장과 큰아버지의 측근들이 몇 개의 결재판을 들고 들어 왔다. “서류는 완벽합니다. 이제 두 분께서 사인하시면 모든 절차가 끝납니다.” 큰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내용 확인도 없이 사인했고 난 꼼꼼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글자 하나 빼먹지 않고 읽었다. 사인을 끝내자 큰아버지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이유가 어떻든, 고맙다는 말은 해야겠다. 덕분에 한결 수월한 자금 운용이 가능하게 됐다.” “별말씀을요. 거래일 뿐입니다.” 겸양을 떨자 큰아버지는 눈짓으로 사람들을 내보냈다. “라부안은 잘 다녀온 게냐?” 은밀한 거래에 관해 물어보는 큰아버지에게 웃음부터 보였다. “잘 쉬다 왔어요. 물론 그 이상한 은행도 구경했고요.” “네가 쉬다 온 곳이 코타키나발루였던가?” “네.” “그곳에 리조트를 올릴 생각이라고?” “확정 지은 건 아니고요. 지금 사전 조사 중입니다. 그리 나쁘지 않다면 진행할 생각입니다." 큰아버지는 웃으며 나를 툭 쳤다. “그 돈으로?” “네. 제 개인 소유로 해 두고 싶어서요. 법인화하면 이것저것 걸리는 게 많지 않겠어요? 개인 소유라면 우리 식구들 마음 놓고 쉴 수 있고 가끔씩 임원들에게 혜택도 줄 수 있으니….” “그거 좋은 생각이다.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돈이니 외국에 그대로 재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참, 순양금융그룹 계열사와 미리 계약서를 만들어 둬라. 임직원 복지 정책으로 그 리조트를 사용하는 내용으로 말이다.” “아, 그런 방법이 있군요.” “직원들 복리후생은 국세청에서도 까다롭게 굴지 않아. 여유 자금 만드는 데 도움 될 게다.” 참 꼼꼼하다. 해외여행을 포상받을 수 있는 직원이 일 년에 몇이나 된다고? 그 경비까지 빼먹는 이 디테일이 개인 재산을 늘리는 방법인가 싶어 헛웃음 이 났다. “그렇군요.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습니다.” “내가 말레이시아 고위 관료들과 줄이 닿아. 그쪽에 정밀기계 부품공장 세우면서 가까워진 놈들이지. 네 리조트 공사 손쉽게 해줄 테니까 우리 순양건설에 맡겨. 멋지게 올려주마.” 대충 맞장구쳐주니 아껴 두었던 속내를 꺼냈다. 조카에게까지 영업하는 이런 노력이 대단하기는 하나, 나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멀쩡한 내 회사를 놔두고 왜 남에게 맡긴다는 말인가? “이런, 어쩌죠? 이미 오세현 대표와 이야기를 끝내버렸어요. HW건설에서 사람까지 파견했는데….” “파견 조사 정도야 큰일도 아닌데, 뭐. 적당한 비용 지불하고 본 공사는 순양이 하면 돼.” 여전히 막무가내인 큰아버지께 완곡히 거절하려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음…. 그럼 조사 끝나고 나서 다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지금은 뭐라고 확답드리기가 좀 곤란하네요" “그래. 아무튼, 항상 순양을 우선으로 생각해라. 외부로 돈이 빠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 만든 게 그룹 아니겠니?” “네. 제가 아직 서툴러서…. 명심하겠습니다.” 날카롭던 그의 눈빛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이 양반 혹시 뭔가 눈치챈 걸까? *** “지금부터 순양중공업과 순양건설의 무기명 회사채를 은밀히 사들이세요. 단, 2003년 상반기에 만기가 돌아오는 것만 사야 합니다.” 펀드매니저들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반대 의견을 내지는 못했다. 채권보다 훨씬 수익성 좋은 투자처가 많이 있지만, 지금까지 투자 성적으로만 본다면 내 선택을 반대할 명분도 구실도 없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금액은 어느 정도로 할까요?” “그보다 먼저 매입할 수 있는 양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이겠죠?” “아, 네. 죄송합니다.” “오늘 중으로 보고서 볼 수 있도록 해주세요.” 이제 준비는 다 끝났다. 순양중공업 주식도 야금야금 사들이지만 대주주 요건 때문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무기명 채권은 얼마든지 확보가 가능하다. 자금이 말려 피가 빠져나가는 심정일 때 채권 만기까지 돌아오면…? 진동기 부회장이 어떻게 대처할지 정말 궁금하다. 딱 2년 뒤 내 손에 들어오는 그룹 지배 지분이 얼마나 더 늘어날까? “또 무슨 꿍꿍이길래 그런 표정이냐?”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오세현이 피식 웃었다. “꿍꿍이는 무슨…. 아닙니다.” “말레이시아 파견 나간 직원들이 1차 보고서를 보냈다. 볼래?” 오세현이 툭 던진 얇은 파일을 펼쳤다. 절반의 긍정과 절반의 부정적 의견이 섞여 있다. “입지나 경관은 정말 좋은데 직항로가 없는 게 흠이다. 우리나라 여행객을 기본으로 깔고 가야 수익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게 그놈들 의견이야.” 싱가포르나 쿠알라룸푸르를 경유하는 것이 현재의 문제점이지만 찾는 사람이 많으면 일주일 2회 정도의 직항은 언제든 열린다. “사람이 몰리면 직항로도 개설하겠죠. 항공사도 바보가 아닌데요.” “어떻게 모을 건데? 여행사와 특약이라도 맺으려고? 그것도 사람이 몰린 다음에나 가능한 거야.” “광고하면 되죠. 코타키나발루의 아름다운 해변과 낙조를 보는 순간 모두 꿈꾸는 휴양지가 될 겁니다.” “광고까지 쏟아부으려고? 여행사 차릴래?” “방법이 있어요. 우리나라 미디어의 거물을 아버지로 뒀습니다. 붐업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죠.” “뭐? 제작비를 네가 댄다고?” “네. 좋은 영화나 드라마 있으면 알려주세요. 내년에 방송 예정인 건 지금쯤 시나리오 작업할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갑자기 왜 그러지? 나야 뭐 대환영이지만. 흐흐.” 아버지는 내 의도가 그리 궁금한 것 같지 않았다. 제작자가 투자하겠다는 사람의 꿍꿍이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으니까. “대신 해외 로케이션을 꼭 넣어야 합니다.” “코타키나발루?” “네. 아시네요.” “리조트 올린다면서? 오세현이가 막 자랑하더라. 거기 특실은 자기 꺼라면서.” “아버지도 언제든 환영입니다.” “그건 가족 일이니 나중에 이야기 하고, 조건은 그게 다냐?” “네. 대신 그림 잘 나오게 해주셔야 합니다.” “휴양지 로케이션인데 당연히 그림 잘 나와야지. 몇 작품이나 할래?” “원하시는 만큼 몇 개라도 꽂아드리죠.” 자신 있게 대답하자 아버지는 또 다시 빙그레 웃었다. “좋아. 감독들하고 상의해서 최대한 많이 노출할 수 있는 작품을 골라보마. 또 없어?” “네?” “또 해줄 건 없냐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더 효과적인 방법도 있다는 걸 떠올렸다. “혹시 예능프로그램 하나 만들 생각 있으세요?” “예능? 버라이어티 쇼 말이냐?” “네. 여행 컨셉으로 하나 하시죠.” “이놈 보게. 방송이 광고냐? 대놓고 하게?” “광고를 위한 수단 아닙니까? 케이블 방송은 심의 제제 수위도 낮아서 요즘 PPL이 한창이던데요?” “그야 그렇지만 너무 노골적인 건 피해야지.” “여행지는 배경 아닙니까? 상품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거기 좋아?” 무슨 뜻인지 감 잡았다. “그림 나옵니다. 제가 감탄했다면 말 다 한 거 아닙니까?” “그 정도야?” 당신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던 아버지다. 예술과 감성으로 똘똘 뭉친 부모를 건너뛰고 메마른 할아버지의 피만 쏙 이어받았다고 핀잔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 내가 감탄할 정도라면 보통의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할 그림이 나온다는 뜻이다. “사전 답사를 한번 가야겠구먼. 참, 그 경비도 대줄 거지?” “여행 버라이어티 출연진 보고요. 탑 연예인이면 사전 답사 때 항공권도 퍼스트 클래스로 준비해드리죠. 어때요?” ‘꽃보다 할배’ 같은 대박 프로그램만 나온다면 항공사가 먼저 직항로를 개설할 것이다. 참, 나영석 PD는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 [197] Never Forget. 1 뜨거운 여름이 한풀 꺾이던 8월 23일, 정부가 IMF 구제금융 195억 달러를 전액 상환하면서 IMF 관리 체제가 종료되었다. 정부는 한국의 위기는 완전히 끝났다며 그간 국민이 겪은 고통과 노고를 다시 한 번 위로했고 정부의 자축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는 끝났지만, 한국은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평생직장 개념은 사라졌고 삶은 돈의 무게로 바뀌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고 소비는 생활이 아니라 부의 과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사치품이라는 단어보다는 어느새 명품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구조조정이 고용 불안정, 비정규직, 소득 불평등을 증가시켜 노동소득은 급격히 위축됐다. 부의 불평등도가 높아짐에 따라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시작되었다. 빈자들의 소비 위축으로 내수가 부진하게 된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대규모 유동자본이 형성됐다. 수백조 원에 이르는 대규모 유동자본은 IT 붐의 붕괴 이후 주식시장에서 부동산으로 이동해 전국적 차원의 부동산 투기 광풍을 불렀다. 물론 현재의 부동산 광풍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긴 하다. 미국발 초저금리 정책은 시장에 유동성을 과다 공급하였고, 이러한 유동성이 부동산시장에 흘러 들어가 거품이 발생한 것도 그 요인 중 하나다. 하지만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결과는 참혹하다. 이제 집 한 채 갖는 것조차 포기해야 하는 세대가 등장한 것이니까 말이다. 사실 방송에서 떠들어 대는 IMF 극복 특집프로그램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앞으로 정확히 19일 뒤에 벌어질 일 때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모니터를 가득 메운 미국, 일본, 한국의 주식 차트와 현황판도 다 부질없어 보였고 끝없는 망설임과 갈팡질팡하는 마음만이 전부였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은 내 손이 주저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타인의 비극이 주는 기회를 이용하는 것은 정당한가? 어차피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되는 타인의 비극이다. 누군가는…. 아니, 투자라는 세계에 몸을 담근 수십, 수백만의 인간들 중 누군가는 이 비극 때문에 돈을 벌 것이며 더 많은 누군가는 돈을 잃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세계에 몸을 담고 있다. 둘 중 어느 한쪽에는 서야 한다. 그렇다고 잃는 쪽에 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내가 돈을 잃는다는 건 일부러 잃는 쪽에 걸어 들어가는 짓 아닌가? 이미 어느 쪽에 서야 할지 결정을 내렸지만, 타인의 비극을 이용하여 떼돈을 버는 파렴치한은 피하고 싶었다. 결국, 얼마의 돈을 버느냐 하는 문제다. 내가 나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수준까지는 가고 싶지 않았다. 씨발, 이럴 때 두 눈 질끈 감고 확 지르는 게 할아버지 스타일인데…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 마음을 다잡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풋 옵션의 행사 가격올 확인한 뒤, 키보드의 숫자를 눌렀다. 엄청난 금액을 찍어봤자 노름판의 배율만 흩트린다. 누구도 주의 깊게 보지 않을 적당한 금액을 선택하고 주문을 넣었다. 이 숫자가 어떻게 변할까? 과거의 나는 주식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2001년 9월 12일의 주가조차 모른다. 아는 거라고는 큰 폭락이 있다는 것뿐. 그저 평범한 상식이 전부다. 열 배? 스무 배? 몇 배나 될까? 머리를 흔들었다. 벌써 들어올 돈을 생각하다니…. 컴퓨터를 리셋한 후 해외 투자 모드로 로그인했다. 일본을 선택한 후 조금 전보다는 더 높은 숫자를 입력했다. 다시 리셋했다. 미국 증시와 금융상품, 파생상품이 반짝이며 나를 반겼지만, 망설임은 더욱 커졌다. 그냥 컴퓨터를 꼈다. 여긴 방어만 하자.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 * * 9월 11일 화요일. S.E.S와 신화가 차례로 인기 가요의 정상을 밟았을 때 비극이 일어났다. 한국 시각 저녁 9시, 하루 일과를 끝낸 샐러리맨들이 삼겹살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거나, 마른오징어를 씹고 맥주를 들이켜며 피로를 푸는 시간이었다. 같은 날 아침 미국, 7시 59분에 아메리칸 항공 11편은 탑승자 92명을 태우고 평소와 다름없이 이륙했다. 단지 15분이 지난 뒤 보스턴의 관제소에서는 아메리칸 항공 11편 (AA11)과 교신을 시도하지만, AA11 편은 10분이 넘도록 응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관제사는 “우리는 비행기들을 납치했다. 가만히 있으면 무사할 것이다. 공항으로 회항하고 있다.”는 교신을 듣는다. 그리고 AA11 편은 뉴욕 상공의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오전 8시 13분, 로건 국제공항 동부 관제탑은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의 이륙을 허가했다. 그리고 30분 후, 납치범들은 기장과 부기장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조종간을 잡았다. 출근을 서두르는 뉴요커들의 발길이 분주한 아침 8시 46분, 갑자기 한 대의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에 충돌했다. 레이더에서 사라진 아메리칸 항공 11편이었다. 북쪽 건물이 불타는 모습이 방송을 통해서 전 세계에 거의 생방송으로 중계되던 중인 9시 3분,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방송 카메라가 전부 건물을 향해 있는 상태에서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은 시속 872킬로미터의 속도로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에 충돌했다. * * * 이날 난 하루 종일 사무실을 지켰다. 모두가 퇴근한 뒤에도 TV를 켜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결국, 역사는 흐트러짐 없이 똑바로 흘러갔고 밤 10시가 넘자 모든 방송사에서 긴급 속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속보를 보자 마음이 쓰라렸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집에서 편히 TV를 보며 쉬던 사람도, 여의도 술집에서 한잔하던 사람도 모두 회사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컴퓨터를 스위치를 눌렀고 모니터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물론 CNN 속보도 놓치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각 미라클의 매니저 이상은 모두 출근한 것이 틀림없다. 인터폰을 눌렀다. “팀장 이상 모두 회의실로.” 천천히 몸을 일으켜 회의실로 갔다. 술 마시다 달려온 사람이 많은지 회의실은 비릿한 술 냄새가 진동했다. “모두 속보를 확인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시간에 회사로 달려왔겠죠.” 이미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일 초가 아쉬운 순간에 회의실로 모이라고 한 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룰 하나를 ‘지시’합니다. 만약 내 지시를 어기는 사람이 있다면 해고합니다. 명심하세요.” 이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오세현이 뛰어 들어왔다. “야! 뉴스 봤어?” 소리치던 오세현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회의실의 침묵이 대답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오 대표님. 혹시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아주 정중하고 사무적인 내 말투가 어떤 의미인지 눈치챌 사람이다. “아니. 하던 이야기 계속해.” “네. 그럼.” 다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 지시는 아주 단순합니다. 내일 아침 증시가 열리더라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행동하십시오. 다시 말해 조금 전 이 사태를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매도 주문은 없습니다.” “헉! 실장님! 그게…!” “안 됩니다. 증시 폭락은 뻔합니다. 최대한의 물량을 신속히 팔아치워야 합니다.” 예상했던 대로 반발이 심했다. 실적으로 인센티브가 결정되는 사람들이다. 계약서에 적힌 연봉보다 몇 배의 인센티브를 가져가니 오늘 내 결정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모두 조용! 지금부터 진도준 실장의 말을 끊는 놈은 이 자리에서 잘라버릴 거야! 끝까지 듣고 진 실장의 지시를 무조건 따라!” 오세현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니 회의실은 냉랭한 기운만 감돌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한쪽 눈을 찡긋했다. “만약 매도를 원하는 고객의 요청이 있을 때는 원하는 대로 해주십시오. 하지만 임의로 팔아치워서는 안됩니다. 특히 우리 자본이 보유한 주식은 꼭 쥐고 있어야 합니다.” 굳은 표정의 직원들은 머리를 숙인 채 불만을 속으로 삭이는 듯했다. “특히 우량주의 경우, 장 마감 전에 계속 사들이십시오. 분명 하한가를 찍을 테니 망설이면 안 됩니다.” 더 이상 말하면 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이며 잔소리가 될 뿐이다. “뭘 염려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며칠 지나기 전에 증시는 원상태로 돌아옵니다. 남들이 들썩인다고 우리까지 부화뇌동할 필요는 없어요. 이상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 제 자리로 달려갔다. 새로운 속보를 확인해야 한다. 이들은 내일까지 자리를 뜨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빠져나간 회의실에는 나와 오세현, 단둘만 남았다. “너 미친 거 아니지?” “아주 정상입니다.” “그럼 됐다.” 오세현은 긴 하품을 하며 몸을 돌렸다. “고생해. 난 퇴근한다. 내일 보자.” “끝입니까? 더 하실 말씀은 없으세요?” “네가 잘 판단했겠지. 난 미국에 전화할 데가 많아. 위로와 유감을 전해야지. 참, 너도 레이첼에게는 전화 한 통화 해줘라. 월드트레이드센터에 레이첼 지인이 많이 근무하잖아.” “네. 전 이삼일 뒤에 할 생각입니다. 지금 제 위로가 들리겠어요?” “그러든지. 아무튼, 고생했다.” 오세현이 사라진 텅 빈 회의실에서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다시 일어섰다.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의도를 나와 순양증권으로 달려갔다. * * * 미라클에서 했던 지시를 똑같이 말하자, 순양증권 대표이사와 장도형 부사장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집니다. 제 말을 따라주세요.” “실장님. 뉴스 보셨겠지만 이건 테러입니다. 미국이 가만있겠어요? 전쟁이라도 불사할 겁니다.” “어디랑요?” “네?” “어디와 전쟁한다는 말입니까?” “그야… 테러 집단 아니겠어요?” “일개 테러 집단과 전쟁을 벌이면 미국이 패배할 확률은?” 장도형은 대답을 못 했다. “너무 충격적인 일이라 큰 파문이 일어나는 건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냉정히 보십시오. 미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놔둘 미국 정부도 아니고요. 오히려 테러 집단 공격을 시작하면 주가는 금방 회복할 겁니다.” “실장님. 미국 증시를 확인한 뒤 결정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듣고만 있던 순양증권 사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분간 미국 중시는 폐장입니다. 최소 4, 5일은 열리지 않을 테니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폐장…?” “월가는 미국 경제의 기둥입니다. 폭풍우는 피하는 게 맞습니다.” “흠…. 장 부사장.” “네. 사장님.” “실장님의 의견에 따르도록 하세나. 투자에 관한 한 자네나 나보다는 몇 단계 위의 고수 아닌가?” 사장은 역시 나이만큼 노련하다. 아주 짧게 의견을 냈지만 속으로는 만세 삼창이라도 하고 있을 것이다. 엄청난 충격파를 내가 앞장서서 막은 셈이다. 잘못될 가능성이 큰 시기에 오너 가족이자 대주주인 내가 모든 걸 책임지겠다고 하니 얼마나 반가울까? * * * 여의도로 돌아와서 밤을 꼬박 새우며 CNN 속보만 계속 확인했다. 나뿐만이 아니다. 어젯밤은 여의도뿐 만이 아니라 대형 빌딩의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이 사태가 어떻게 번질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니 모두 사무실을 지키며 새로운 사태를 대비하는 것이다. 하루 종일 초조한 마음으로 증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12일 폐장 시간까지 전 세계 증시는 폭락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하루였다. 직원들은 긴 한숨과 함께 삼삼오오 모여 사우나로 달려갔다. 앞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나긴 전투를 위해 잠깐의 휴식은 필요하다. 난 오늘 증시의 마감을 확인하기에 앞서 며칠 전 나 혼자 벌였던 은밀한 작업의 결과부터 확인했다. 조금은 떨리는 손끝으로 오늘 행사한 풋 옵션의 결과를 모니터에 띄웠을 때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빼곡히 적힌 숫자와 그 숫자 사이에 찍힌 콤마.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 [198] Never Forget. 2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믿기 힘들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일일이 한 자리씩 세어 봤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의자에 몸을 묻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장중 폭락은 틀림없고 풋옵션으로 큰 수익이 생긴다는 건 짐작했다. 지금 모니터에 보이는 숫자는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단 하나 틀린 점이 있다면 수익률이다. 상상을, 예측을 초월한 수익률. 현황을 파악하기 전에 일본 주식 현황으로 재접속했다. 또 한 번 확인한 빼곡히 적힌 숫자와 그 숫자 사이에 찍힌 콤마. 우리나라 증시보다 더 큰 숫자. 그야말로 떼돈을 벌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주식시장에서 내가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건 누군가 엄청난 돈을 잃었다는 뜻이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오늘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을 확인했다. 9.11 테러 여파로 개장시간이 3시간 늦추었으나 종합 주가지수 12% 급락, 하한가 종목이 621개에 이르렀고 코스피 200지수 역시 7.96포인트 하락했다. 코스닥 역시 11.59% 급락. 지금의 가격변동제한폭이 12%인 걸 생각하면 전 종목이 하한가를 찍었다는 뜻이다. 이 같은 양대 시장 주가폭락으로 이날 하루만 거래소에서 23조4천억 원, 코스닥시장에서 4조3천억 원 등 모두 27조7천억 원의 시가총액이 날아갔다. 오늘 쪽박 찬 개미 투자자들의 곡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오늘 하루 동안 가장 큰 곡소리가 울리는 곳은 다름 아닌 증권사들이었다. 개인과는 달리 매도포지션으로 수익을 올리던 증권사들이 풋옵션으로 엄청난 손실을 본 것이 확실했다. 내가 거래를 막은 순양증권은 예외지만. 순양증권 사장은 지금쯤 가슴을 쓸어내리며 내게 감사하는 마음을 어떻게 전할까 고민 중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풋옵션으로 오늘 큰돈을 번 극소수의 사람이 나타났고 내일의 증시 또한 폭락이 예상되니 투자자들은 풋옵션 매수에 나섰다. 12일 하루 동안 무려 21만 건이 넘는 엄청난 규모였다. 하지만 막차를 타거나 뒤차를 탄 사람은 늘 그렇듯 쪽박이다. 앞으로 2, 3일간 큰돈을 날리고 우는 사람들이 속출할 것이다. 도박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 * * 나흘간 폐장했던 미국 증시가 다시 열렸을 때 뉴욕의 레이첼에게 전화를 걸었다. 충분히 잘 대응하리라 믿었기에 투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설사 좀 실수하면 어떠랴?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 아닌가? 미국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니 당사국인 만큼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그녀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한 다음 전화한 목적을 꺼냈다. “레이첼, 거기 내 계좌에서 1억 달러를 꺼내 기부하세요. 뉴욕 미라클 인베스트먼트 이름으로요.” - 뭐? 1억 달러나? “네. 돈은 충분하잖아요. 구호작업도 좋고 메모리얼 사업에 기부해도 좋겠죠. 어디에 기부할지는 레이첼이 판단하고요.” 비극을 돈으로 되돌릴 수는 없으나 치유에는 도움을 줄 수 있다.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마음의 짐을 조금 더는 방법이기도 했다. 2001년은 IT 붐 붕괴 후였었기에 그 이전부터 금리 인하는 지속하였지만, 911사태의 충격을 완하기 위해 미국 FRB의 그린스펀은 금리 인하를 더욱더 빠르게 진행했다. 결국, 지속적인 금리 인하는 기준금리 6.5%에서 1년 만에 1.75%까지 떨어졌고 추가로 하락시키면서 1%대에 완전히 굳어졌다. 낮은 금리는 다시 주식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폭락했던 시장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번 일로 두 개의 큰 변화가 찾아왔다. 첫 번째는 미라클 내에서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엄연히 대표이사인 오세현이 있음에도 마치 명예 회장인 듯 대했고, 오세현 역시 웬만하면 업무지시를 거의 내리지 않았다. 대신 나만 바빠지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있을 때는 수시로 직원들이 몰려들었고 외부에 있을 때 휴대전화는 불이 났다. “왜 안 하세요? 이렇게 두 손 놓고 계실 겁니까?” “왜? 나한테 대표이사 월급 주는 게 아깝냐?” “수상해서 그럽니다.” “뭐가 수상해?” “설마 벌써부터 은퇴 준비하시는 건 아니죠?” “이놈아. 은퇴 준비는 벌써 시작했다. 타이밍만 보는 거야.” “삼촌, 이제 겨우 오십 대 중반 아닙니까? 남들은 일 못해서 안달인데….” “그건 남들이고! 난 다르잖냐. 누구 덕분에 떼돈을 모아뒀는데 늙어서까지 일하는 건 억울하지.” “은퇴하기에는 아직 젊으십니다.” “일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아. 흐흐.” 낄낄대며 웃는 모습을 보니 어느 정도는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사실 미라클은 오세현이 없어도 문제없다. 지금껏 오세현이 해왔던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HW 그룹의 관리다. 아직 은퇴를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은 이 일을 내가 맡을 시기를 조율한다는 뜻일 게다. 그 시기가 최대한 늦기만을 바랄 뿐이다. 두 번째 변화는 10월 7일 시작되었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은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시작했다. 파키스탄의 수도 카불을 비롯한 주요 군사거점 및 대도시들에 대규모 총 공습을 시작했고 단 하루 만에 아프간의 방공망과 통신망, 공군세력은 소멸했다. 21세기 최초의 전쟁이며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전 세계 언론은 이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기사를 일제히 쏟아냈고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면 전쟁 기사 다음이 문제였다.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지 한 달, 승자는 순양증권?」 「모든 증권사가 엄청난 손실에 허덕일 때 순양증권만이 고공 행진. 주가 폭등.」 「순양 금융 그룹의 젊은 지휘자, 능력을 검증받다.」 「2세를 제친 3세, 진양철 회장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다.」 또다시 내 사진이 언론을 도배해버렸다.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사람들은 그 급격한 변화를 어떻게 견디는지 궁금할 정도다. 인터뷰 요청이 줄을 이었고 회사 로비에 기자들이 죽치기 시작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잠복하는 기자들까지 나타나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실장님. 인터뷰 좀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장도형 부사장은 은근히 재촉했다. “부사장님. 밖에 죽치고 있는 기자들 중에 경제 용어 훤히 꿰는 기자가 있겠어요? 전부 독자들 호기심을 긁어 돈 벌려는 속셈입니다.” “누가 모릅니까? 그런데 지금 순양증권이 견인차 역할을 합니다. 금융뿐만이 아니라 다른 계열사 주가까지 끌어 올리고 있습니다. 이때 결정타 한번 때려주면 좋지 않습니까?” “제가 인터뷰한다고 주가가 오르겠어요?” “오릅니다. 이미 홍보실에서 기사표제까지 생각해뒀습니다. 한국의 조지 소로스, 이십 대의 신화.” 젠장, 닭살이 확 돋는다. “지금도 우리 증권사를 이용하는 고객이 몰려듭니다. 이 기사가 나가면 몇 배 늘어나는 건 일도 아니죠. 올해는 최고의 경영실적이 나올 겁니다.” 주가와 영업에 큰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장도형 부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종이 한 장을 쓱 내밀었다. “인터뷰 스케줄입니다. 일간지, 경제지, 주간잡지 그리고 월간지 하나. 딱 네 군데만 선정했습니다.” “네? 네 군데나요?” 일정표를 보니 월간지는 시사도 경제도 아닌 미용실에서나 볼법한 잡지였다. “이건 뭡니까? 아줌마 잡지가 왜 여기에…?” “홍보실에서 꼭 해야 한다고 끼워 넣었습니다. 알고 보니 중요한 잡지더군요. 저도 놀랐습니다.” 장도형은 의외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강남에 돈푼깨나 있는 아줌마들이 꼭 챙겨보는 잡지랍니다. 보통 몇억에서 많게는 몇십억까지 돈을 주식에 묻어두는 부류라 인터뷰 기사만 잘 나오면 전부 순양증권으로 갈아탈 거라면서….” 얕보던 여성 잡지가 이런 막강한 힘을 가졌다니! 새삼 놀랐다. “알겠습니다. 이왕 하는 거 잘해야겠네요.” 허락이 떨어지자 홍보팀 직원이 몰려왔다. 그들은 인터뷰 언론사에 배포할 사진부터 찍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잠시만. 사진 여기서 찍을 거죠?” “네. 집무실을 배경으로 쓸 겁니다.” “그럼 여기 치장 좀 합시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죠.” 난 곧바로 백화점에 연락했다. 고모가 보내준 인테리어 전문가와 코디네이터들은 중앙지와 경제지에 어울릴법한 컨셉과 여성지에 어울릴 컨셉, 두 개로 나눠 집무실을 꾸몄고 각각에 어울리는 정장으로 코디했다.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최종 결과물인 사진을 보자 역시 전문가의 손길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사진을 쫙 깔아 놓으니 화보집이나 다름없다. 연이은 인터뷰는 역시나였다. 경제지마저 내 개인적인 모습을 긁어가려고 신변잡기에 불과한 질문을 던져댔고 네 곳의 인터뷰 중 쓸만한 질문은 딱 하나였다. “911테러가 터진 뒤, 순양증권의 움직임을 잘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죠?”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상시와 다름없었습니다. 주가가 폭락하니 우량주를 중심으로 매입했어요. 그 덕분에 엄청난 수익을 올렸죠.” 이 질문은 경제지 기자가 아니라 중앙일간지 기자가 던진 것이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주가가 끝없이 폭락하면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을 텐데 말입니다.” “과한 욕심을 버렸기에 가능했습니다.” “네? 욕심을 버려요? 그럼 다른 증권사들은 욕심을 부렸다는 뜻입니까?” “원래 출렁이는 장에서 큰돈이 오고 가는 법입니다. 당연히 ‘실적’에 대한 욕심이 앞서겠죠. 우리 순양증권은 그 욕심을 버렸습니다. 워낙 큰 사건이라 고객의 돈을 지키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고객의 돈을 지킨다는 회사의 뜻은 원금 손실을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돈의 주인은 고객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한 립서비스가 됐으려나? * * * 1998년 20조 원을 넘긴 순양전자 매출은 불과 2년만인 2000년 34조 원대로 급격히 불어났으나 IT 버블이 꺼진 올해는 32조 원대로 감소했다. 영업 이익은 2조 원대로, 7조 원대였던 작년의 30%미만으로 줄었으나 여전히 국내 최고 기업의 위용을 자랑했다. 내가 가진 금융그룹이 아무리 좋은 실적을 내도 진영기 부회장의 전자 하나에도 못 미친다. 911테러 때문에 내 개인 재산은 또 한 번 크게 뻥튀기가 일어났지만, 돈은 직접적인 화력이 아니라 보조 수단일 뿐이다. 계열사를 흔들어 핵심 자산을 내놓게 만들어야 하는데 순양전자는 철옹성을 보였다. 저 철옹성을 직접 공략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성안의 위태로운 의자에 앉아있는 왕을 흔들어서 굴러떨어지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의자를 흔드는 역할은 내가 아니라 바로 왕의 동생인 진동기 부회장이 맡아야 한다. 한 해가 저물어가니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일주일 뒤면 새해가 밝아온다. 지자체장 선거가 있고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이 나라를 뒤흔들 월드컵도 있다. 그리고 제16대 대통령 선거도 치러진다. 셋 다 나와 큰 상관이다. 내가 HW 그룹의 핵심 경영진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것이 2002년의 큰 숙제일 뿐이다. ======================================== [199] 전면으로 한발씩 1 유럽연합에서 유로화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2002년, 나의 첫 행보는 아진자동차와 순양자동차의 연구소를 하나로 합친 HW 자동차 연구소였다. 내 뜻이 반영된 첫차의 프로토타입을 보기 위해 송현창 회장과 조대호 자동차 사장, 오세현 대표와 함께 아침 일찍 방문했다. 연구소 전시장에는 디자인센터장과 디자이너들, 그리고 연구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렸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아담한 자동차 한 대도 반짝이는 광택을 자랑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M21-1 미니 21세기의 첫 미니 자동차라는 의미의 프로젝트명이 적힌 이름표까지 달고 있었다. 신차를 보는 순간 내 머리에서 85점이라는 점수가 매겨졌다. 이 숫자가 얼굴에 드러났는지 디자인센터장과 수석 연구원 두 사람은 경영진 곁에 착 달라붙어 설명을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둥근 디자인을 선택했습니다. 경차다 보니 안정감을 주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뒤쪽으로 갈수록 실루엣과 캐릭터라인이 치켜 올라가는 공격적인 디자인입니다. 긴장감이 있고, 역동적인 형상입니다." "낮은 포지션을 선택함으로써 노면에 밀착되어 달리는 듯 한 느낌의 순수한 드라이빙의 즐거움도 추구했습니다." "이렇게 작은 사이즈의 귀여운 차가 예상외로 짜릿하게 달리니 그 격차에서 오는 즐거움도 클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난 그들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자동차를 살피기 시작했다. 배기량 796cc, 자동 4단, 2인승 쿠페. 첫눈에 반할만한 디자인, 이것이 내가 요구했던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자동차는 첫눈에 반할 만큼은 아니지만 귀엽고 예쁘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충분했다. 실내까지 꼼꼼히 확인했을 때 개발진들의 설명은 끝났고 다른 이들도 차를 살피기 시작했다. "컨버터블 버전은 도저히 안 되겠습니까?" 수석 연구원 곁에서 조용히 물었을 때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유럽 안정성 기준을 통과하려면 제조원가의 압박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채산성이 나오지 않아 설계단계에서 제외했습니다." 채산성 따위는 생각하지도 말고 멋진 신차를 만들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지만, 뼛속까지 박혀있는 실적에 대한 압박을 피하지 못했나 보다. 아쉬워서 가벼운 한숨만 나왔다. 모두 자동차를 살피고 나자 개발진들은 한층 더 긴장한 표정이었다. 이제 회사의 경영자들이 평가를 내릴 차례다. 이들의 입에서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말이 나오는 순간 지금까지 고생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악몽 같은 시간이 기다린다. 가을에 출고할 수 있도록 타임라인이 짜여있다. 오늘 엎고 다시라는 말이 떨어지면 그야말로 살인적인 일정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모두의 시선에 송현창 회장에게 꽂혔다. 누가 뭐래도 아진자동차를 국내 2위까지 끌어올린 자동차의 산증인 아닌가? 또한, 혁신적인 자동차 개발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 사람이다. 한국 최초로 엄청난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2인승 컨버터블 스포츠카를 출시할 정도로 앞서나간 사람이기도 하다. 비록 조립이 전부였지만.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뽑았네. 모두 고생했어." 송현창 회장은 긴장이 탁 풀린 개발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들의 고생을 위로했다. "모두 수고했어. 오늘은 개발진 전부 지금 퇴근해서 식구들 얼굴이라도 보라고. 내일부터 어떤 고생이 기다릴지 모르니까." 조대호 사장은 평가를 아꼈지만, 그 역시 이들의 노력을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자, 우리는 차나 한잔 하면서 이야기 좀 하시죠." 조 사장은 송 회장을 포함한 우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연구소 내의 접견실에서 찻잔을 앞에 두고 모두 말을 아꼈다. 특히 송현창 회장이 아무 말 없이 차만 홀짝이자 조 사장은 다급했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회장님. 솔직한 의견 듣고 싶습니다만…." "응? 아까 했던 말 진심인데?"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지자 조 사장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렇습니까?" "우리나라에 경차가 몇 대나 있나? 저 정도면 훌륭하지 않나?" "2인승이라는 게 약점이 될듯한데…." "약점 없는 차가 어디 있어? 그리고 4인 가족은 경차를 좀 멀리하잖나? 애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니 말이야. 경차는 서브카면서 어차피 2인용이야." 송 회장은 진심으로 만족한 듯 보였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말로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제 내 의견 따위는 생각하지 마. 난 이미 저물어가는 석양 아닌가? 진즉에 자리를 털고 나갔어야 하는 늙은이야." "아닙니다. 아직…." 송현창 회장은 손을 저어 조 사장의 말을 막았다. "재계 공식 모임에서 그나마 얼굴마담이라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어 자리를 지켰네. 하지만 대현 주 회장님도 세상을 떠나시고, 순양의 진 회장님도 이선으로 물러나지 않았나? 내 역할이 끝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야." 송현창 회장은 갑자기 찻잔을 싹 비우고 벌떡 일어섰다. "내 의견 무시하고 자네들 생각이나 정리하게. 난 먼저 올라가겠네." "회, 회장님." 송 회장의 돌발 행동에 우리 모두가 당황했다. "괜찮아. 앉아서 마저 이야기 나누게. 늙은이는 자리를 피해줘야 할 때를 알아야 어른 대접 받는다네. 난 자네들에게 어른 대접 받고 싶으이. 허허." 송현창 회장은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기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구소를 떠나 버렸다. 갑작스러운 선언에 모두 놀랐지만 이대로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는 일. 남은 자들은 일을 해야 한다. "자. 이제 솔직하게 의견을 나눠볼까요?" 조 사장은 오세현을 먼저 쳐다봤다. 그의 시선을 받은 오세현은 어깨만 으쓱할 뿐이다. "제가 뭐 압니까? 난 크고 널찍하고 트렁크에 골프백만 넉넉히 들어가면 좋은 차라고 생각하는 평범한 중년입니다. 경차의 평가는 전문가이신 조 사장님 의견이 제일 중요하죠." 한 발 빼는 오세현 대신 내 의견을 물었다. "도준이 넌 어떻게 생각해?" "제가 원하던 바로 그 차입니다. 100%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저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디자인 잘 빠지고, 적당한 안정성을 갖춘 저렴한 차?" "네. 중산층 부모가 대학 졸업반 자녀에게 사줄 수 있는 차. 사회초년생이 3년 할부로 충분히 유지할 수 있는 차. 타고 다닐 때 좀 세련돼 보일 뿐, 없어 보이지 않는 차. 이게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저 신차는 어느 정도 제 생각에 부합하고요." 평범한 사람이 생각하는 수준, 난 그 수준에서 의견을 내놓았다. "자동차를 성능 따져가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출력, 파워, 제로백, 밸런스…. 까다롭게 차를 고르는 매니아들보다 출퇴근과 주말 나들이 정도가 대부분 아닙니까?" "차만 보면 그렇지. 나도 네 생각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뭔가 다른 생각을 하시는군요." "그래. 정보에 의하면 일본 다이하츠에서 600cc급 경차가 나온다. 2인승 컨버터블이야." 다이하츠 코펜? 그게 올해 나오던가? "국내는 그렇다 치더라도 해외에서는 그런 차와 경쟁해야 한다. 부끄럽지만 아직 우리 한국 차는 싼 맛에 사는 차야. 그런데 방금 본 저 신차는 가격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져. 국내 경차 시장만 생각하고 양산에 돌입할 수는 없잖냐?" "HW 자동차 전체 순익률을 제로로 맞추면 어떻습니까? 그래도 경쟁력이 떨어질까요?" "뭐?" "M21-1이죠? 프로젝트명이?" "그래." "그러니까 M21-1은 손해 보면서 팔아도 됩니다. 다른 차종에서 이익이 나니까요. 즉, 돈 벌 생각 포기하고 생산 대수를 늘리는 것에만 집중해도 가격 경쟁력이 떨어질까요?" 조대호 사장은 잠시 생각하며 뜸을 들였다. "생산 규모 확대에 따르는 이익만 생각하자?" "네. 삼촌, 대주주로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이익 없는 회사 경영을?" 슬쩍 오세현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는 재빨리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상관없다. 하지만 이익이 안 나면 주가는 계속 떨어진다는 것은 염두에 둬." "중장기 전략입니다. 어차피 우리가 자동차 주가를 지탱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와 오세현의 의견이 일치했음에도 조대호 사장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기업 경영의 지표는 주가다. 주가가 떨어지면 좋은 경영이라고 볼 수 없고 그 일차적인 책임은 당연히 대표이사가 져야 한다. 회사의 주인인 대주주가 문제없다고 말해도 떨어지는 주가를 보고 있으면 금방 마음이 바뀌는 게 바로 주주들 아닌가? "조 사장님." "어? 응…." 딴생각에 빠져 있는 그에게 내 목표를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 천천히, 제대로 된 자동차 기업을 만드는데 십 년, 이십 년이면 어떤가? "우리와 대현자동차의 격차가 얼마나 됩니까?" "출고 대수 기준으로는 65%지만 매출로 따지면 대현의 절반에도 못 미쳐. 49%…." 이익률 높은 고급 차의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대로 된 방향이라면 이쁘장한 경차 생산보다는 럭셔리한 중형 세단으로 가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이미 고백했듯이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의 위치는 값싼 자동차다. 중형 세단으로 방향을 잡으면 글로벌은 물론이고 대현을 이길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다. "이익 포기하고 격차를 줄이는 데만 치중해도 저 신차가 가격 경쟁력이 없습니까?" "진심이냐?" "네."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내 의중을 확인하는 조대호 사장을 향해 오세현이 말했다. "조 사장님. 한번 해 봅시다. 자동차로 돈 못 벌면 어떻습니까? 이놈이 순양 금융그룹에서 돈 벌어다가 우리한테 갖다 주겠죠. 임직원들 월급 안 밀리고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생산 라인 증설할 정도의 수준으로 맞춰보자고요. 그럼 대현을 누를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역시 눈치 빠른 삼촌이다. 목표를 정확히 설정하면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는다. 대주주는 흑자보다 규모를 목표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주가가 아무리 떨어져도 목표를 향해 한발씩 나가면 경영진의 교체는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올해 나온다는 그 다이하츠 경차보다 좋은 평가를 못 받아도 괜찮습니다만, 최소한 그 차 다음의 대안이 될 수는 있겠습니까?" "아니." 조 사장은 잠깐의 생각도 없이 곧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대현과의 기술 격차도 한참이야. 하물며 일본? 어림없어. 아마 마지막 선택지로 고를 거야. 미안하지만 그게 우리 위치다." 혹독한 자기 평가가 온몸을 찔렀다. 다시 현실에 맞춰 물었다. "그럼 우리나라 경차 시장에서는 어떨까요?" "경차 시장 점유율 50% 이상. 이건 내가 해내야 하는 일이지. 맡겨둬. 내년까지 달성한다. 원가에 팔면서 이 정도도 못한다면 대표이사 경질 감이야. 내 자리를 걸고 약속하마." 이번엔 대단한 자신감을 보여준다. 이렇게 보니 믿음직하다. "그럼 10월에 출시, 6월에 신차 발표를 목표로 서둘러 주십시오." "6월? 왜 하필 6월이지? 프랑크푸르트 모터쇼는 5월, 파리는 10월이야. 난 파리 모터쇼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씀하셨다시피 글로벌 시장보다 내수 공략이 우선 아닙니까? 6월에는 월드컵이 열립니다. 절호의 찬스죠." 월드컵이란 말에 조 사장은 물론이고 오세현마저 얼굴을 찌푸렸다. "야! 우리나라에서 열려도 어차피 남의 잔치야. 예선 토너먼트가 끝인데 왜 하필 월드컵이냐?" 오세현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이번에는 다를 것 같던데요? 홈그라운드 이점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좋은 성적 내면 축제 분위기일 테고, 그 분위기에 편승하면 효과는 말할 것도 없죠." 이거 참…. 아무도 믿지 못할 말이니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 [200] 전면으로 한발씩 2 “월드컵이라….” 조대호 사장은 눈을 깜빡이더니 손뼉을 가볍게 쳤다. “나쁘지 않아. 우린 공식 스폰서가 아니니까 광고 기회가 없어. 월드컵 시즌에는 외신 기자들도 대거 몰려오니까 잘 활용하면 엄청난 광고효과를 볼 것 같기도 해.” “잘하면! 이건 좀 무의미한 소리 아닐까요? 월드컵이 아니더라도 뭐든 잘하면 좋은 거죠.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게 잘하는 것일까? 이거 아닙니까?” 오세현은 여전히 미덥지 못한 표정이었다. “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내 입으로 쏠렸다. “대형 이벤트 한번 하시죠.” “이벤트?” “네. 우리나라 대표팀이 1승 할 때마다 추첨을 통해 신차 100대를 뿌리는 겁니다.” “뭐?” “한국전을 경기장에서 직접 관람한 사람들 중에 고르면 됩니다. 좌석 번호를….” “자, 잠깐만. 100대나 뿌리는 것은 좀 심해. 보통 이런 대형 이슈에 기댄 이벤트는 10대 정도가 적당해.” 조 사장은 펄쩍 뛰었다. 이벤트치고는 좀 과하다. 신차를 출시하면 돈 들어갈 곳이 한두 개가 아니다. 모든 방송, 언론사는 물론이고 인터넷에도 돈을 쏟아부어야 한다. 특집 기사도 줄줄이 부탁해야 하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모델료도 감당해야 한다. “100대로 끝난다고 보십니까?” “응? 무슨 뜻이야, 그게?” “단 1승으로 끝난다고 보세요?” “목표가 16강 진출 아니냐? 그러니까 1승은 할 것 같은데?” 오세현이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전 더한 것도 생각하는데요? 8강 진출하면 500대 뿌리고 4강 진출하면 1,000대 뿌릴 생각입니다.” 두 사람은 8강, 4강이라는 말에 피식 웃었다. 특히 조대호 사장은 아예 비웃는 듯한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정말 네 말대로 4강에 올라가서 1,000대를 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 천만 원대의 경차 1,000대면 백억 원이면 뒤집어써. 그 돈으로 기적 같은 순간에 우리 신차를 광고한다는 건 엄청난 효과지. 하지만 1승에 100대 뿌리는 건 10대 뿌리는 것과 효과 면에서 큰 차이 없다.” “그 기적 같은 순간에 기대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습니까? 대표팀이 1승을 더할 때마다 신차 광고효과는 몇 배씩 뛰는 겁니다.” 조 사장은 내 의견에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1승 정도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 10억 정도의 효과는 충분히 뽑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또 다른 의견 있어?” 분명 기대 없이 지나가는 투로 물었겠지만, 꼭 관철해야 할 의견은 아직 남아 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이번 대표 선수 중에 박지성이라고 있어요.” “누구?” “일본 프로팀에서 뛴 선순데 이번에 발탁됐습니다. 그 선수와 계약하십시오. 그리고 히딩크 감독도 계약하시고요.” 구겨진 두 사람의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신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말해. 홍보로 말아먹으려고 작정했냐?” 조대호 사장은 평생을 모신 진 회장의 손자인 내게 차마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오세현을 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같은 심정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말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 이거 참….” “네? 오 대표님. 갑자기 그게 무슨…?” “제가 이놈의 황당한 소리를 10년 동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늘 결과가 좋았어요. 그러니 이젠 아무리 황당한 소리를 들어도 그냥 다릅니다. 어쩌겠어요? 결과가 말해주는데?” 미소 짓는 오세현을 보며 조 사장은 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사안이 크면 클수록 이놈 말은 더 잘 맞아떨어지거든요. 그러니 조 사장님께서도 한번 믿어보십시오.” 내 말보다 오세현의 말이 더 황당하게 들렸는지 조대호 사장은 긴 한숨만 쉬었다. “참, 히딩크 감독은 1년, 박지성 선수는 5년 이상 장기 계약하십시오. 모델료도 최상급으로 주시고요.” “뭐…. 그 고집이 할아버지를 닮았으면 더 말해봤자 꺾을 것 같지는 않고…. 할아버지만큼 감이 좋기를 바랄 뿐이야.” “전 확신하는데요? 월드컵이 끝나면 두 사람은 우리나라 최고의 국보급 스타로 발돋움할 겁니다. 그래서 순양생명과도 광고계약을 추진할 생각인데요?” “걱정 마세요. 이놈 촉은 진 회장님도 못 따라갈 겁니다.” 낄낄대며 웃는 오세현을 보던 조 사장은 머리를 푹 숙였다. * * * 디지털 위성방송 서비스와 HD 방송이 기지개를 켤 무렵, 히딩크가 이끄는 대표팀은 남미와 유럽의 전지훈련 평가전에서 그리 좋지 않은 결과만 보여주었다. 조대호 사장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내가 먼저 홍보 전략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난 이미 월드컵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다. 결과를 안다는 건 흥미도 함께 사라지니까 말이다. 그리고 지금, 짜증 나게도 흥미 없는 일 때문에 시달리고 있다. “고모부. 시장은 포기하시고 2년 뒤 총선이나 도전해보시죠.” “아냐. 총선은 시기가 애매해. 정치가에게 한 달은 일반인의 일 년이야. 2년 뒤면 내 존재감이 흐릿해진다고.” 최창제 시장은 연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내게 매달렸다. 이미 오세현은 시원하게 퇴짜를 놓았기 때문에 나 외에는 기댈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할아버지의 엄포가 먹혔기에 그 누구도 최창제 시장의 돈줄이 되려고 나서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공천은 받을 수 있으십니까?”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1위 자리를 지키는 분이 있더군요. 이변이 없는 한 고모부께서 후보로 나가는 방법은 없어 보였습니다.” “도, 도준아.” “고모부, 제 말부터 들어주세요.” “그, 그래.” 고모부는 마지막 돈줄인 내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재빨리 입을 닫았다. “저도 이제 얼굴이 팔렸습니다. 순양의 금융계열사가 제 손에 있어요. 승산 없는 도박에 베팅하는 건 회사도 위험에 빠트립니다.” 패자의 후원자를 가만히 두고 볼 승자는 없다. 혹시라도 고모부와 감정이 상할 정도까지 심한 경쟁을 한다면 차기 서울시장은 나를 압박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어 후원자가 되겠다고 나서야 묵은 악감정이 없어진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정치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건 금물이다. 지금은 할아버지의 연줄만으로도 충분하다. “승산이 없다니?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다. 당내 분위기는 달라.” “저도 눈 있고, 귀 있습니다. 전화 한 통이면 여의도에서 일어나는 일쯤은 리포트로 받아볼 수 있어요. 괜한 미련 두지 마세요.” 입술을 깨무는 고모부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이 사람도 자신이 벼랑 끝에 섰다는 걸 안다. 궁지에 몰린 쥐는 위험하다. “차라리 차기 총선을 준비하세요. 그리고 지금 당에서 적극 지원하는 서울시장 후보와 괜히 싸울 생각 마시고요.” “그놈에게 알랑방귀라도 뀌란 말이냐?” “아뇨. 정치의 바람은 어떻게 불지 모릅니다. 누구누구 사람이라는 낙인은 피하셔야죠. 그렇다고 누구누구 사람이 아니라는 낙인도 피해야 합니다. 그냥 대인배처럼 차기 서울시장 후보 자리를 양보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마지막 남은 자금줄은 나밖에 없다. 내가 선거자금을 대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걸 잘 아니 더는 고집 피우지 못했다. “약속합니다. 보기 좋은 모양새로 후보 양보하시면 제가 2년 뒤 총선 자금은 문제없도록 해드리죠. 물론 공천도 약속드리겠습니다.” “공천까지?” “네. 할아버지 전화 한 통이면 문제없는 거 아닙니까? 제가 할아버지를 꼭 설득할 테니 믿어보십시오.” 고모부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이왕이면 우리 당 텃밭에서 공천받을 수 있도록 힘써주면 좋겠는데….” ‘그건 당신이 쓸모 있을지 없을지 판단한 뒤에 결정할 문제죠.’라는 말 대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여전히 아쉬워하는 그에게 선물 하나를 던져줬다. “참, 총선 전까지 우리 순양생명 사외 이사라도 하시죠. 사무실도 하나 마련해드릴 테니 가끔 나오셔서 법률 자문도 좀 해주시고요.” 만약 매일 출근하라고 했다면 먼저 거절했을 것이다. 서울시장까지 지낸 정치인이라면 이름만 올려놓고 매달 천만 원 정도 타박타박 월급 주며 모시려는 사람이 줄 서 있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서울시장을 역임한 사람의 인맥은 어디든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돈줄은 많을수록 좋으니 내 제안을 활짝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래도 될까? 아, 법률 자문이야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지. 검사 출신 아니냐? 하하.” 최창제의 웃는 모습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이 사람의 마지막 남은 생명력은 내가 마지막으로 빨아먹을 때까지만 유효하다. * * * 「태극전사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HW 자동차. 딱 한 줄, 이 문장 외에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는 검은 바탕의 전면 광고. 5월 31일 월드컵 개막식 아침, 이 광고가 모든 일간지를 뒤덮었다. 광고를 자세히 보지 않으면 검은 바탕에 아주 희미한 자동차 실루엣이 있다는 것을 찾아내기 힘들 정도였다. 아무도 신차 광고라고 생각하지 않을, 단지 국가대표를 응원하는 정도라고 여길 만큼 평범한 광고다. 중앙 일간지 전부를 확인하니 마음이 놓였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아주 잘 나왔다. 이 광고는 앞으로 계속될 광고의 신호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날, 대한민국이 4강에 진출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변이 일어났다.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 열린 개막전은 부상한 지네딘 지단을 제외한 지난 월드컵의 우승팀 프랑스가 대회 새내기인 세네갈을 상대로 0―1 패배하였다. 이때만 해도 프랑스가 조별 예선에서 탈락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6월 4일. 우리나라의 첫 번째 경기가 부산 아시아드 주 경기장에서 열렸다. 이날 아침의 광고는 지난번과 조금 달랐다. 검은 바탕은 똑같았지만 흐릿한 실루엣이 조금 더 선명하게 나왔다. 누가 보더라도 자동차 루프 라인이라는 것을 알 정도였다. 그리고 선명하게 인쇄된 광고 문구. 「대한민국 대표팀의 월드컵 첫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HW 자동차는 이 기쁨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추첨을 통해 100분께 HW 자동차의 뉴 모델 100대를 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참고해주십시오.」 곧바로 HW 자동차 홈페이지에 접속했으나, 접속 폭주로 서버가 다운됐는지 들어가지도 못했다. 다시 인터넷을 뒤졌다. 이미 각종 커뮤니티의 화제는 단연 HW 자동차 광고였다. 예언이냐? 아니냐? 단순한 시선 끌기로 도발한 것이다. 혹시 ‘진심으로 기원합니다.’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로 인쇄를 잘못한 건 아닐까? 반응은 예상대로였고 월드컵에 편승한 모든 광고를 눌렀다. 타사의 광고는 온라인상에서 전혀 눈길을 끌지 못했다. 순양전자는 첫 승리를 할 경우 개인당 최대 30만 원 이내로 상금을 지급하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대현자동차는 예선 3경기 중 한 경기라도 이기면 고객 2천2백 명에게 각각 22만 원을 지급하는 총 5억 원의 상금 이벤트를 개최했다. 물론 이들의 이벤트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복잡한 조건이 걸려 있었다. 우리만이 조건 없이 100대를 나눠주는 것이다. 그것도 천만 원짜리 자동차를. 놀라기에는 아직 이르다. 다음 광고가 나오면 한국은 물론 세계가 뒤집어질 것이다. ======================================== [201] 전면으로 한발씩 3 HW 그룹 사옥의 가장 넓은 방을 쓰는 조대호 사장은 하루아침에 10년은 늙어 보였다. 밀려드는 전화를 더 이상 소화하지 못하고 차단할 정도였다.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조 사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대성공이긴 하다. 미친 짓이지만.”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 이깁니다. 안심하세요.” “내가 축구는 잘 모르지만, 폴란드가 유럽에 붙은 국가라는 건 안다. 우리가 월드컵에서 유럽 국가를 이겨?” “전력상 분명히 이깁니다.” 조대호 사장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자, 오늘은 괜찮아. 지더라도 우리 회사가 승리를 염원하는 진심을 담았다고 말하면 되니까. 그런데 다음은? 미국전은 어떻게 할 거야? 홍보팀은 지금 전쟁터나 다름없어. 예견한 거냐고 확인하는 기자들 전화를 소화도 못 해.” “그만큼 엄청난 광고효과를 봤다는 증거 아닙니까? 전쟁터면 어때요? 홍보팀 직원들도 오랜만에 일 좀 하겠네. 흐흐.” “웃을 일이 아니야. 기대치를 한층 올려놨으니 다음 경기 광고는 정말 신중해야 해.”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조 사장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사장님. 우린 도박꾼이 아닙니다. 못 맞췄다고 욕할 사람이 더러 나오겠지만 중요한 건 광고효과의 극대화입니다. 오늘만 해도 우리 자동차 말고는 아무도 눈길을 못 끌었어요. 수억씩 돈을 퍼붓는데도 누구 하나 관심 가지는 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조 사장은 이미 내 말이 들어오지 않는가 보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말만 계속했다. “이젠 멈출 수 없다. 알지? 다음 광고도 예측해야 해. 물론 오늘 예측이 틀리면 욕만 얻어먹을 거다.” “다음 광고 문구도 정했습니다.” “뭐야? 이겨? 져?” 답답한 와중에도 호기심은 감추지 못한다. “멋진 경기를 보여주신 대표팀께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뭐? 이제 한발 빼는 거야? 이럼 약한데?” “예측해도 문제, 한발 빼도 문제…. 이런 겁니까? 하하.” “흠….” 조대호 사장은 잠시 눈을 깜빡이며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혹시 비긴다고 생각하는 거야?” 대답을 잘해야 한다. 점쟁이 노릇은 사양이다. “이기든 지든, 비기든. 다 어울리는 문구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비긴다면 아주 적절한 표현이겠어.” 그건 6월 10일 결론이 나올 것이다. “아무튼, 오늘 8시 반, 우리 회사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경기를 볼 거다. 경기 결과 보고 다음 광고 문구를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자. 괜찮지?” “네. 오늘 지면 다음 문구는 무조건 바꿔야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월드컵 최초의 1승을 거두자 두 사람의 영웅이 탄생했다. 황선홍과 유상철 선수가 그들이었다. 영웅은 아니지만, 화제의 주인공도 등장했다. 바로 승리를 예견한 오늘 아침의 광고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예언이 맞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고 어쩌다 소 뒷걸음질로 쥐를 잡았다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소 뒷걸음질로 쥐 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며 이것도 실력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던 대로 실루엣만 보인 자동차가 어떤 차인지 관심이 쏟아졌다. 루프 라인으로 봐서는 날렵한 스포츠카가 아니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만큼 사람들은 평범한 세단이 아닌 특이한 자동차가 등장하기를 기다린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실 흐릿한 실루엣만으로는 어떤 차인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사람은 원하는 것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평범한 실루엣을 스포츠카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만큼 평범한 세단에 질렸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다음 경기에서 HW 자동차가 어떤 예언을 하느냐가 월드컵보다 더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 * * 「멋진 경기를 보여주신 대표팀께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HW 자동차는 오늘도 역시 기쁨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추첨을 통해 100분께 HW 자동차의 뉴 모델 <이스퀼로> 100대를 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참고해주십시오.」 한국과 미국의 경기가 벌어지는 6월 10일 월요일의 광고였다. 이젠 실루엣 정도가 아니라 흐릿하지만 2도어 쿠페라는 걸 확실히 인지할 수 있는 형상이 지면에 등장했다. 새롭게 출시하는 차가 스포츠형 쿠페라는 사실에 열광하는 사람도 꽤 있었지만, 결과를 말하기 애매한 문구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패배로 받아들이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경기 시작 전에 초 친다고 비난하는 여론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 결과가 1:1 무승부가 되자 여론은 180도 변해버렸다. ‘멋진 경기를 보여주신 대표팀께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라는 문구가 너무도 적절한 결과다. 이제 HW 자동차에 앉아 있는 점쟁이가 누군지 알고 싶어 하는 문의 전화로 홍보팀은 정신줄을 놓을 지경이었고 홈페이지 서버는 여전히 복구 중이었다. 기대했던 외신도 조금씩 흥미를 드러냈다. 펠레의 저주와 비교하며 우리의 광고를 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경기의 광고에는 어떤 예측을 보여줄까 기대한다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6월 14일 금요일, 포르투갈과의 경기만 남은 조별 예선전의 광고는 그야말로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축! 한국 대표팀 16강 진출!」 「HW 자동차는 오늘도 어김없이 <이스퀼로> 100대를 쏩니다!」 홍보팀은 전화 코드를 전부 뽑아놓고 멍하니 앉아 있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조대호 사장은 어젯밤 “내일 이기면 인천 경기장으로 가서 추첨 행사에 참석한다. 지면 네가 가서 추첨해라. 나도 이젠 모르겠다.”라는 말만 남기고 연락 두절 상태다. 승리를 간절히 원하지만, 포르투갈을 이긴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과 나만 빼고 말이다. 예정된 미래는 문제없이 굴러갔다. 월드컵 첫 승리만 해도 축제 분위기인데 16강 본선 진출이라니! 거리는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넘쳐났고 호프집은 사상 최대의 매출을 올리며 사장님들의 가슴을 벅차게 했다. 그들은 왜 월드컵은 4년에 한 번만 열리는지 FIFA를 원망했다. 처음 두 경기 때는 보여주지도 않던 추첨을 이제 생중계로 잠시 보여주기 시작했다. 조대호 사장은 한껏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기자들은 마이크를 갖다 대기 바빴다. “한 말씀만 해주시죠. 도대체 어떻게 승패를 딱딱 맞추십니까?” “전문 분석가들을 동원하신 겁니까? 아니면 소문대로 용한 점쟁이라도 있는 겁니까?” 조 사장은 웃음을 잃지 않고 손을 저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우리 회사는 단지 국민의 염원을 광고에 쓴 것뿐입니다. 첫 승을 간절히 원했고, 멋진 경기를 보고 싶었으며, 16강 진출이라는 꿈을 국민과 함께 꾼 것입니다. 그게 전부예요. 점쟁이 같은 건 없습니다. 하하.” TV로 생중계되는 걸 아는지 기자들의 질문에 가장 적절한 대답을 하고 사라졌다. “영감님, 역시 노련하네…. 흐흐.” 더 지켜볼 것도 없다. 이번 한일월드컵의 진정한 승자는 바로 HW 자동차다. 대현자동차는 이번 월드컵의 공식 후원사로서 FIFA에 스폰서 비용만 약 천억 원을 썼다. 그리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수조 원에 달하는 홍보 효과를 누릴 것이라고 자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월드컵 로고를 사용하지 못했을 뿐, 대현자동차 이상의 홍보 효과를 누렸다. 이미 외신도 정확히 들어맞는 우리의 예견을 계속 보도했으니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신차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 * * “이번엔 뭐야? 또 8강 진출 축하야?” “그것보다도 이길 것 같아? 이탈리아인데?” 조대호 사장, 오세현 대표, 그리고 홍보팀 직원들은 내 입만 바라봤다. 나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뜸을 들였다. 점쟁이 흉내를 내면 안 된다. 가장 적절한 광고 문구를 뽑아내야 한다. “AGAIN 1966. 우리는 확신합니다.” “뭐?” “뭐?” 수첩을 들고 내 말을 기다리던 홍보팀 직원들도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1966년 월드컵에서 북한과 이탈리아가 맞대결을 했어요. 이때 북한이 1―0으로 이겼고요. 그때를 재현하자는 뜻입니다.” “뭐? 북한?” 나이 지긋한 조대호 사장은 북한이라는 말이 떨어지자 거부감부터 보였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이건 공식 서포터즈인 붉은 악마가 쓸 구호라고 하더군요.” “진짜?” “네. 초대형 플래카드를 준비할 겁니다.” “넌 어떻게 알았어? 붉은 악마는 매 경기 구호를 비밀로 한다던데?” 오세현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둘러댈 말은 얼마든지 있었다. “순양그룹 정보력을 무시하세요? 이 정도는 한 시간이면 알아냅니다.” “아, 그걸 깜빡했네.” 난 불만에 찬 조 사장에게 말했다. “어차피 AGAIN 1966은 경기장 안을 가득 메울 겁니다, 우리가 조금 빨리 쓰는 건데 효과도 좋죠. 서포터즈가 한 번 더 광고해주는 모양새가 나오니까요.” 효과 좋다는 말에 그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런데…. 우리가 이겨요? 아니면 져요?” 수첩을 들고 있던 홍보팀 직원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제 직원들도 예언이 맞는지 안 맞는지 궁금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광고 문구 보세요. 우린 승리를 확신한다. 이겁니다.” “야! 애매하게 말하지 말고, 어떻게 될 것 같아?” “승패 맞추자고 시작한 거 아닙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광고와 결과가 대충 맞아떨어졌어요. 그게 중요하죠. 조 사장님께서 인터뷰 때 말씀하셨죠? 그게 중요한 겁니다.” 오세현의 호기심을 못 들은 척하며 다시 홍보팀에게 말했다. “이번엔 500대로 올리죠. 우리가 승리를 확신한다는 걸 돈으로 보여주자고요.” “솔직히 천 대를 걸어도 반대할 마음 없어. 내가 지금껏 자동차 만지며 살아왔지만, 이번만큼 신 나는 일은 처음이다. 이럴 땐 확 질러야 해. 그래야 타오르는 불이 꺼지지 않아.” 조 사장은 500대 경품을 조금도 반대하지 않았다. “참, 6월 29일 서울광장 사용신청 하세요. 그날 우리 신차 <이스퀼로>를 처음으로 선보일 겁니다. 당첨자들에게 직접 나눠주는 건 가을이겠지만 우리 차를 먼저 보여줘야 할 타이밍이에요.” 누구도 우리 대표팀이 4강까지 오른다는 생각은 못 한다. 6월 29일은 3, 4위전 경기다. 우리들의 월드컵은 그 전에 끝날 거라고 생각할 테니 서울광장 사용신고서는 받아들여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홍보팀.” 나와 눈이 마주친 홍보팀 직원들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 입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신문사들 전부 통보하세요. 우리가 받아들일 만큼 광고비를 할인하지 않으면 광고 뺀다고요.” “네? 그게 무슨…?” 모두 월드컵에 편승해서 광고를 실으려 안달이니 사상 최대로 치솟은 광고비다. 그걸 깎자고? 모두 황당한 눈빛으로 변했다. “우리의 예언성 광고는 이제 광고가 아니라 특종이에요. 지하철 신문 가판대 보셨죠? 우리 광고를 내세우면 진열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특종을 제공하는데 광고비까지 받는 거예요. 장담하는데 무가지는 광고 뺀다고 하면 공짜로 실어줄 겁니다. 중앙 일간지는 분명 할인해줄 테고요. 홍보팀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홍보팀 직원들은 내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이건 업무 지시며 꼭 해내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힘찬 그들의 대답을 끝으로 회의를 끝냈다. 그리고…. 6월 18일, 대전에서 벌어진 이탈리아전은 안정환의 골든 골로 끝났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딱 두 개뿐이었다. 대표팀은 언제까지 승리할 것이냐? 그리고 HW 자동차가 광고를 빌려 발표하는 예언이 언제까지 들어맞을 것인가? ======================================== [202] 전면으로 한발씩 4 「Hurray! World Big 4」 4강 진출을 예언한 광고 그리고 1,000대의 자동차 선물, 확연히 드러난 신차의 모습. 광고가 나가자 4강 진출에 대한 이야기가 반, 신차에 대한 이야기가 나머지 반이었다. 900cc급 경차라는 게 밝혀지자 실망하는 사람도 꽤 많이 있었지만, 일반인들은 손 닿을 수 있는 가시거리의 저렴한 가격에 열광했다. 22일 저녁, 믿기 힘든 대표팀의 4강 진출 확정에 대한민국 전체가 들썩였다. 토요일 주말 저녁이다 보니 밤을 잊은 젊은이들은 새벽까지 거리를 활보하며 승리를 즐겼다. 그 시간. 3일 뒤면 열릴 4강전에 대해 어떤 전략을 취할 것인지 얘기하고자 모두 모였다. 조대호 사장은 물론이고 홍보팀, 마케팅팀, 전략실 임원까지 모두 흥분에 휩싸인 채 최고의 기획을 뽑아내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만약 결승에 진출하는 기적만 나온다면 어떤 이벤트로 시선을 확 끌어야 할지 앞다퉈 의견을 내놓았다. 이래서 흐름을 탄다는 게 무서운 것이다. 연승 행진을 계속하니 4강전 상대가 전통의 강호 독일이라는 것도 잊고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긴,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을 꺾은 것도 기적이다. 3번의 기적이 연속으로 나오면 4번째도 기대하는 게 사람의 심리 아닌가? “도준이 생각은 어때? 대대적으로 해야 할까?” 조 사장이 냉정을 잃지 않고 내게 의견을 물었다. 지금까지 엄청난 효과를 본 원인이 바로 나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하죠.” “뭐?” “이번 월드컵에서 비용 대비 몇백 배의 효과를 뽑았습니다. 더 해봤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어요. 이미 관심은 준결승전에서 이기느냐, 만약 이긴다면 결승에서 누구와 맞붙을 것이냐로 모아졌습니다. 우리가 또 한 번 예언 같은 광고를 한다 하더라도 리스크만 커집니다.” “리스크?” 십여 개의 의아한 눈빛이 내게 쏠렸다. “지금 여러분들은 이기는 게 당연한 듯 말씀하시죠? 아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럼 우리 광고가 승리를 예견한다 해도 별다른 임팩트를 주지 못해요. 그런데 진다는 예언은 할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만약 4강에서 진다면 그 책임은 대표팀이 아니라 바로 우리 HW 자동차가 다 짊어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패배를 예언한 적이 없다. 조별 예선의 유일한 무승부 한 게임만이 아쉬운 광고였지만 토너먼트 진출이라는 좋은 결과를 맞았으니 화살을 맞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린 예언자가 아닙니다. 패배를 예언하고 그 예언이 정확하게 들어맞으면 좋은 홍보 전략입니까? 불길한 예언인데? 잘 생각해보세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지금이 가장 조심해야 할 때라는 걸 모두 인식한 것 같다. 전 국민이 승리의 기쁨에 도취해 있을 때 이 자리의 우리들은 그 국민을 대상으로 장사를 해야 하는 처지라는 것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네 의견은 결승 진출 실패?” 모두 입조심할 때 나를 아주 만만하게 생각하는 오세현이 웃으며 물었다. 경직된 회의 분위기를 풀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온 것도 기적이에요. 독일을 이길 정도라면 기적이니, 새로 쓰는 신화라느니 하는 말이 필요 없죠. 전 진다는 데 한 표 겁니다.” “그럼 패배를 가정하고 전략을 짜야겠구먼.” 조대호 사장도 조심스레 말했다. “관심을 끌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전략 아닐까요?” 다시 회의실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홍보팀과 마케팅팀은 섣불리 의견을 말하는 것보다 충분히 생각한 뒤 입을 여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어쩌면 호기심을 자극해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전략으로서는 좋은 것 같습니다.” “익숙한 것이 사라질 때 호기심은 극에 달하죠. 매 경기마다 등장했던 우리 광고가 없다면 그것만으로도 화제가 될 겁니다. 과연 준결승전의 결과가 어떻길래 광고를 싣지 않았나 하고요.” 그 뒤로도 많은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이젠 이들 같은 전문가가 맡아야 할 시점이다. 난 마지막 의견을 내놓고 일어섰다. “이젠 4강전 결과에 상관없이 두 경기 남았습니다, 이기면 결승전, 지면 3, 4위전. 29일 서울시청 광장 사용신고를 끝마쳤습니다.” “가만, 그날은 3, 4위전 아냐? 넌 확실히 진다고 생각하는구나!” 오세현이 경기 일정을 확인하고 소리쳤다. “어차피 결승전은 일본입니다. 만약 결승에 올라간다면 사전 축제를 즐긴다고 생각했어요.” 일단 시치미를 뗐다. “이제 순위와 상관없습니다. 여기까지 온 대표팀에게는 칭찬과 후원이 쏟아지겠죠?” “그래 봤자 최고 인기 스타 두 사람은 우리와 계약했어. 하하.” 히딩크 감독과 박지성 선수, 두 사람과 광고 계약을 일찌감치 끝낸 조대호 사장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선수를 제외한 나머지 스탭진에게 감사를 전합시다. 그들에게 신차를 선물하기에는 좀 없어 보이죠? 경차니까요. 대신 HW의 중형 세단을 선물하는 건 어떨까요?” “스탭진이라면…?” “코치진, 테크니컬 코디네이터, 물리치료사, 체력 담당 트레이너, 비디오 분석관, 장비 담당, 통역, 언론 담당관 등등…. 꽤 많은 인원입니다. 이들은 음지에서 묵묵히 일했어요. 아무도 관심 두지 않을 때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 어떨까 싶은데요?” “그거 괜찮은데요? 세심한 배려…. 훈훈하잖습니까?” “제 의견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해당 부서의 전문가들께서 잘 풀어 나가시기를….” * * * 25일 아침, 우리의 광고가 보이지 않자 의견이 분분했지만, 오늘의 운세가 빠진 허전한 신문 같다는 평가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시작한 준결승전은 독일의 승리로 끝났다. HW 자동차의 광고가 없을 때부터 짐작했다는 댓글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지만 4강 진출이라는 신화를 만든 대표팀에 대한 칭찬과 감사의 의견이 가장 많았다. 우리 직원들이 어떻게 풀어 나가나 지켜보니 다음 날 26일,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써 내려간 대표팀께 감사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거스 히딩크 감독님부터 대표팀의 먹거리를 챙겨주신 조리사님까지 우리 HW 자동차가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광고문구 아래에는 중형 세단 사진이 큼지막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누구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지만, 그날 저녁 뉴스는 백여 대의 자동차 행렬로 시작했다. 이 자동차 행렬의 목적지는 파주 NFC였다. 비록 감독과 선수들은 뉴스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코칭스태프부터 파주 NFC의 경비 아저씨까지 모두 나타나 자동차 키를 받는 모습이 몇 분간 이어졌다. 아주 고맙게도 파주 센터의 식당 아주머니 몇 분이 눈물까지 흘려주셨고 뉴스 카메라맨은 이 광경을 놓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성공적인 사전 마케팅이다. 컨셉카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출품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한국과 해외에 충분히 선보였다. 이미 해외 딜러들의 관심도 폭발하여 정식 출시 시기를 앞당겨달라는 요청이 밀려들고 있다고 들었다. 이제 3, 4위 결정전 저녁, 서울 광장에서 <이스퀼로>를 직접 선보이는 이벤트만 성공리에 끝나면 한 달에 걸친 프로모션은 끝이다. 터키를 상대로 이겼으면 참 좋으련만, 아쉽다. 29일 토요일, 저녁 8시부터 대구 구장에서 펼쳐질 경기를 대형 스크린으로 보기 위해 오후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하철 시청역에서 내린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시청 광장을 빙 둘러싼 십여 대의 작은 쿠페, 바로 <이스퀼로>였다. “괜찮습니다. 마음껏 보세요. 실내도 확인하고 시트에도 앉아보세요.” 십여 명의 도우미들이 구경하는 사람들을 안내하거나 팸플릿을 나눠주기도 했다. 우리만의 모터쇼가 열린 것이다. 인기 가수들의 공연으로 시청 광장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엄청난 인파 때문에 전시 차량을 철수하는 것도 힘이 들 정도였다. 시청 광장의 통제를 맡은 경찰의 도움으로 겨우 철수를 끝냈을 때, HW 자동차의 홍보팀과 마케팅팀 직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주 오랜만에 집으로 향했다. 월드컵과 함께한 한 달 동안의 프로모션이 성공리에 끝났음을 뿌듯해하면서. * * * 브라질의 우승으로 끝난 2002 월드컵은 많은 것을 남긴 국제적 행사였다. FIFA 위원인 정치인 한 명이 대선 후보급으로 급성장했으며, 한국에서는 비주류인 록밴드 하나가 국민가수 반열에 올라버렸다. 외국인 축구 감독은 당장 대선에 출마하면 대통령 당선은 문제없다는 농담이 돌 정도로 국민 영웅이 되었으며, 월드컵 이전에는 무명에 가까웠던 젊은 선수 몇 명은 해외 구단에서 러브콜을 보내는 스타덤에 올랐다. 몸값이 오른 사람이 있다면 추락한 사람도 있다. “스폰서 비용만 1억 달러, 국내 이벤트 비용 사백억 원, 맞나?” 질문인지 질타인지 구분하기 힘든 대현자동차 주태식 회장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뭐야? 왜 아무도 대답이 없어?” “마, 맞습니다.” “그런데? 돈은 그렇게 처발랐는데 왜 아진과 순양 같은 떨거지 집합소인 HW가 이렇게 떴지? 그놈들은 수천억, 수조 원이라도 퍼부었나?” “그, 그게 광고 때문에…….” “광고? 무슨 광고?” 몰라서 되풀이하는 하는 게 아니다. 경기 결과를 귀신 들린 무당처럼 딱딱 맞춘 HW 자동차의 광고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아, 노스트라다무스도 울고 갈 그 광고?” 임원들이 꿀 먹은 벙어리마냥 대답하지 않자 주태식 회장이 스스로 대답했다. “내가 아무리 공부 안 하고 탱자탱자 놀았다지만, 그 광고는 지독히 머리 굴린 거지 예언이 아니라는 것쯤은 읽을 수 있어. 조대호 인터뷰 안 봤어?” “회장님.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정말 무당이라도 데리고 있지 않으면 그런 광고 못 합니다. 월드컵 아닙니까? 매일 아침 그날 경기 결과를 맞혀버리는데 그걸 어떻게 누릅니까?” 주태식 회장에게 말대답하는 놈 덕분에 임원들은 속이 다 후련했다. 저놈이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모두가 하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놈이 저런 시건방진 행동을 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주태식 회장이 가장 아끼는 장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무당 한 놈 데리고 와? 미아리 갈까?” “아뇨. 미아리가 아니라 HW 자동차로 가야죠.” “뭐?” “이번 광고 기획한 놈, 그놈을 데리고 와야죠. 회장님 말씀대로 예언과 국민의 마음 사이를 절묘하게 줄타기했던 그 광고문구 만든 놈. 그놈을 데려와야죠.” 주태식 회장의 장남은 아주 괜찮은 생각임을 확신한 듯한 것 거만한 표정이었다. “좋다. 그럼 그 광고 기획한 놈을 네가 데려올 수 있겠지?” “맡겨만 주십시오. 그리고 넉넉한 예산도요. 돈을 아가리에 처넣어서라도 데리고 오겠습니다.” 아들이 가슴이라도 탕탕 칠 기세로 자신 있게 말했을 때 주태식 회장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보였다. 임원들은 뭔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걸 직감했다. 저 미소 뒤에는 손에 잡히는 건 뭐든 집어 던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아무것도 던지지 않았다. 아들이라 봐주는 건가? “돈을 아가리에? 그런다고 그놈이 올까? 만만치 않을 텐데?” “네?” “우리나라 이십 대 이하 최고 부자라던데? 알려진 개인 재산만 천억 원이 넘고 우리나라 최고 금융사 서너 개를 물려받은 차세대 최고 경영자. 그런 놈을 네가 데리고 오려면 얼마를 아가리에 처넣어야 할까? 1조 원? 2조 원?” “서, 설마 그놈이…?” 주 회장의 장남은 당황해서 입을 떡 벌렸다. ======================================== [203] 전면으로 한발씩 5 “그래, 그놈이 바로 그놈이다. 순양그룹에서 제일 잘난 놈. 너 같은 놈들 한 트럭을 줘도 진 회장이 바꾸지 않을 똘똘한 3세. 그놈 작품이라는데 그래도 데려올 수 있어?” “혹시 진도준 그놈이 이 광고를 기획했다는 뜻입니까?” “그 집안에 똘똘한 3세가 또 있어? 다들 너처럼 개폼만 잡는 등신만 득실거리잖아?” 주태식 회장이 비아냥거리자 그의 아들은 시선을 돌려버렸다. 모처럼 괜찮은 의견이라고 생각했는데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느니만 못하게 됐다. “그놈들 신차는 어때? 의견 말해봐. 솔직하게.” 주태식 회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임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나간 일도 중요하지만 당장 닥쳐올 일도 걱정이었다. 그가 보기에도 HW의 새로운 경차는 꽤 잘빠졌기 때문이다. “아직 출고가가 나오지 않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만, 2인승이라는 게 발목을 잡을 겁니다. 한국 사정상 4인승을 선호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껏 경차의 주 소비층은 ‘애 엄마’입니다. 어린 자녀를 조수석에 태운다? 타깃층을 잘못 해석한 겁니다.” “해외 시장을 메인 타깃으로 삼았다면 그야말로 실수한 겁니다. 일본 소형차 메이커와의 경쟁에서 버티기 힘듭니다.” 자동차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임원들의 의견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다. 가격, 효율 등을 생각하면 그리 잘못된 생각도 아니다. 하지만 생산 설비를 늘리고 대량 생산과 코스트 다운에 치중했던 전대 회장의 측근들은 세상이 변해간다는 걸 체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난 그 깜찍하게 생긴 차를 사고 싶을까?” 주태식 회장은 그들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손가락 하나 겨우 들어가는 구멍이 거대한 댐을 무너뜨려요. 균열이 시작되면 이미 늦어. 그런데 내가 보기엔 저놈들의 작은 쿠페는 손가락 정도가 아니라 주먹만 한 구멍을 뚫을 것 같단 말이지.” 단지 임원들을 깨기 위해 한번 해보는 말이 아니다. 처음 그 모습을 지면을 통해 봤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가격, 성능, A/S 같은 외부 요인은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거… 먹히겠는걸. 이런 느낌이 먼저였다. “참, 안일하구먼. 우리 대현의 중심 댐인 자동차가 구멍 난 채 달린다는 걸 나만 걱정하는 겐가?” 주 회장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임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대책을 강구하겠습니다. 회장님.”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말부터 던진 후 눈치를 살폈다. 이 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다. “HW 신차는 10월 초순 출시 계획입니다. 우리의 신차 출시가 11월이지만 한 달 앞당기겠습니다.” “우리 신차? 그거 경차 아냐?” “맞습니다. 프로젝트명 ‘클릭’입니다. 5인승이니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오호라, 그거 딱이구먼. 젊은 애들이 좋아할 만한 2인승 쿠페와 ‘애 엄마’가 좋아하는 4도어. 좋아 제대로 한판 붙여보자고.” 순간 주태식 회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임원들이 그의 표정을 보고 한시름 놓았을 때 주 회장의 입에서는 폭탄 같은 경고가 터져 나왔다. “3개월. 출시 후 딱 3개월 뒤의 결과로 인사조치 합니다. 시기도 아주 적당하네. 내년 1월이니까 말이야. 그때 우리가 HW보다 뒤쳐졌다면 이 자리 임원님들 전부 옷 벗을 각오하세요. 분명히 말했습니다.” 결국 주 회장이 원하는 것은 물갈이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고, 불만을 가질 수 없는 인사. 실적으로 평가하겠다는 말에 반대할 임원은 없다. 어차피 계약직이니까. 게다가 경쟁사와의 한판 승부에서 이기면 되는 일이다. 자동차 전체 실적을 따지겠다는 것도 아니다. 지면 물러난다. 간단한 규칙, 마치 월드컵 토너먼트 같다. 회의실에는 적막이 흘렀다. “자, 대책을 강구하면 내게 가져와 봐요. 어떤 전략인지 한번 보자고.” 주태식 회장은 회의를 끝냈다. 오늘 취임식을 끝낸 새로운 서울시장과 차 한잔할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 * * 정말 어색하다. 도대체 나를 이 자리에 부른 큰아버지의 속셈을 모르겠다. 순양호텔 레스토랑에 모인 네 남자. 두 분의 큰아버지, 나 그리고 이학재 실장. 이 조합으로 뭘 하자는 건지…. “이번에 네가 순양자동차에 큰 도움을 줬다고 들었어. 잘했다.” “아닙니다. 광고문구 짤 때 의견 낸 게 전분데요, 뭐.” 진동기 부회장은 아직 순양자동차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걸까? 화제가 된 HW 자동차를 너무나 당연한 듯 뿌듯하게 생각한다. 저 태도는 할아버지 정도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이다. “그 덕분에 순양전자 핸드폰 프로모션은 기사 한 줄 안 나왔다. 너무 튀지 말어. 이런 국가적인 큰 행사는 계열사가 골고루 올라타서 함께 가야 하는 거야. 허허.” 진영기 부회장은 아예 계열사 전체를 관장하는 회장님 같은 풍모를 보여준다. 이 양반들이 지금 뭐 하자는 걸까? 이학재 실장 앞이라고 속 넓은 척하는 건가?? “울타리를 벗어난 순양자동차지만 잘됐으니 좋은 거죠. 순양자동차가 남의 집 식구가 됐어도 도준이는 몇 다리 걸친 주주 아닙니까? 실낱같은 인연은 아직 남아 있다고 봐야죠.”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웃고 있지. 만약 딴 놈이 날 물 먹였다면 내가 이렇게 웃고 있겠어? 작살냈지.” 진영기 부회장은 날 바라보며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언제든 날 작살낼 수 있다는 엄포인가? “자자, 식사 다 끝났으면 어떻게 할 건지 결론 내자고.” “돈 많은 형님께서 책임져주시면 되겠네요.” “그럼 날 회장으로 추대하던가? 그럼 내가 이번 대선 책임지지.” 대선? 혹시 이번 대선의 대비책을 세우는 자린가? “회장 하세요. 아버지께서도 별말 없으실걸요? 호칭 바꾸고 명패 바꾸고 명함 바꾸면 끝 아닙니까? 쉽잖아요?” “그래, 싹 바꾸지. 대신 회장에 어울리는 지분은 가져야겠지? 우리 동생이 15%, 똘똘한 조카가 5%. 이렇게 나한테 넘기면 내 지분이 56%. 좋네. 회장 해도 되겠구먼.” 두 사람의 날 선 대화를 듣던 이학재 실장은 슬쩍 웃으며 서류 파일을 꺼냈다. “지금 현황입니다. 두 분의 판단대로 집행하시랍니다.” “아버지가?” “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그 사람 임기보다 당신의 목숨이 더 짧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청와대 주인은 두 분께서 잘 모셔야 할 거라고….” 농담 같은 이학재의 말에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할아버지 건강에 무슨 일 있는 건 아닐까? “도준이 너도 파일 봐. 넌 촉이 좋잖아. 한번 예측해보라고.” 이미 두 분 큰아버지는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중이었다. 난 파일을 펼치고 읽는 시늉만 하다 다시 덮었다. 누가 되든 재벌은 영원한 것 아닌가? “응? 왜 덮어? 벌써 촉이 온 거야?” 이학재의 날카로운 눈빛이 거북했지만, 어깨만 으쓱했다. “제가 뭐 봐도 아나요? 여야 후보가 팽팽한데….” “그럼 결과는 어떻게 될 것 같아?” “아직 5개월 넘게 남았습니다. 정치 평론가들이 말하지 않습니까? 선거 3개월이면 조선왕조 오백 년이라고요.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요동칠지 아무도 모를 겁니다.” 두 분 큰아버지들도 파일을 덮었다. 서류는 아무런 답을 끌어낼 수 없다는 결론을 주장하는 셈이다. “도준이 말이 맞다. 이런 건 무의미하지.” 진영기 부회장은 서류 파일을 한쪽으로 쓱 밀어버렸다. “관행대로 가자. 7:3 이렇게 전달하자고.” 7:3? 내가 머리를 갸웃하자 이학재가 말했다. “차기 정권에 보험 드는 거다. 너도 모르지는 않겠지?” “그럼 7은 여당입니까?” “아니. 이번엔 야당이다. 처음 있는 일이야.” 아, 보수당이 야당이 된 게 이번이 처음이구나. “그런데 이런 이야기까지 도준이가 들을 필요 있나? 이 실장이 실수한 거 같어.” 진영기 부회장이 슬쩍 이 실장에게 핀잔을 줬지만, 그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회장님 지시니까요. 도준이도 어엿한 금융그룹 대표입니다. 순양에서 책임져야 할 부분은 마땅히 책임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대선에서 순양의 이름으로 돈을 건네는 사람, 정계에서는 그 사람이 바로 순양의 선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진동기 부회장이 돈 없다고 엄살을 떨었지만, 그 역시 거금을 건네고 싶을 것이다. 단, 자신의 이름으로. 난 내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창의적인 방법인 ‘차떼기’의 오명에 내 이름을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진영기 부회장이 운은 뗐다. 말없이 앉아 있다가 때가 되면 슬쩍 빠져나가는 게 상책이다. “형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물론 도준이도 아버지가 지목한 순양의 한 축이 맞아요. 하지만 이런 은밀한 일에 깊숙이 개입하는 건 아직 멀었습니다.” 진동기 부회장까지 거들어준다. 물론 이들이 나를 생각해서 멀찍이 떨어지라는 건 아니다. 어차피 이 나라 권력의 핵심에 다가서는 일이다. 내가 벌써부터 그런 권력자와 연을 맺는 게 껄끄러울 뿐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 도준아.” “네.” 진영기 부회장이 은근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버지가 널 이 자리에 참석시키라고 한 뜻은 알겠지?” “네. 그룹 이름으로 하는 일이니 저도 일부분은 책임져야 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맞다. 너도 알다시피 올해 대선에 우리 순양이 보험금을 내는 거야. 넌 보험금 일부를 책임지면 돼.” “그런데 큰아버지. 문제는 제가 돈을 마련하는 방법을 아직….” “그건 내가 정리해주마.” 진동기 부회장이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 “대략 2, 30억 정도 준비하면 될 게다. 안 그렇습니까?” 진동기 부회장이 동의를 구하는 듯 형님을 바라보자 진영기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처리해줄 테니 넌 내게 맡기면 돼.” “네. 감사합니다. 큰아버지.” 머리를 꾸벅 숙인 다음 슬며시 의자를 뒤로 밀었다. “그럼 연락 주십시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래. 그만 가봐.” 호텔을 나와 차에 올랐다. “할아버지 댁으로 갑시다.” * * * “뭐? 내가 죽으면 매일 아침 내 무덤에 찾아와 문안 인사를 하겠다고? 살아 있을 때나 잘해, 이눔아.” “죄송합니다. 지난달에는 너무 정신없어서요. 앞으로 자주 오겠습니다.” “일없다. 바쁠 때 짬을 내는 게 정성이지, 한가할 때 짬 내는 게 뭐 어렵다고?” 내 얼굴을 보자마자 버럭 소리를 지르셨지만, 얼굴은 웃고 계셨다. 마음이 아프다. 못 뵌 지 고작 한 달인데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시는 게 눈에 보인다. “거참, 뭘 드시길래 목청만 더 좋아지십니까? 팔다리는 자꾸 가늘어지고… 뭡니까? 식단 좀 바꾸세요. 단백질 위주로 드시라니까요.” “딴소리는…!” 할아버지는 내 등짝을 한 대 쳤다. “어쨌든 지난달에 재미 좀 봤더구나. 잘했다.” “조대호 사장님이 잘하신 겁니다. 저야 뭐 어시스트 정도죠.” “어울리지 않게 겸손은. 조대호가 몇 번이나 전화 왔다. 네 덕분에 수천억 광고 효과를 봤다고 칭찬이 자자하더라. 외국 딜러들 반응도 폭발적이라고 입이 찢어졌어. 돈으로는 절대 얻지 못할 결과를 네가 해낸 거다.” 눈치가 빠른 것인지, 솔직 담백한 건지, 아직 조 사장의 캐릭터를 잡기 힘들다. “대선 자금 때문에 온 거냐?” “아뇨. 얼굴 뵈려고 왔습니다.” “시간 보니까 너 먼저 빠져나왔구나. 왜? 그놈들이 너는 빠지라고 하디?” “제가 부담스러워서요. 대선 자금은 큰아버지들께서 결정하시고 전 일부만 책임지기로 하고 나왔어요.” “왜? 권력이 없어도 돈 벌 자신이 있어서?” “아,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어색해서….” “도준아.” “네.” “돈을 힘으로 바꾸는 일이다. 한낱 숫자에 불과한 돈이 금력(金力)이라는 이름으로 변하는 게야. 네게 꼭 필요한 것 아니냐?” 할아버지는 어느새 웃음을 거뒀다. ======================================== [204 ] 입지 확보 1 “꼭 필요하지만, 이번은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뭐가 멀었어?” “정치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 말입니다. 고모부까지 시장 자리에서 내려왔으니 이제 현역 정치인은 아무도 모릅니다. 돈이 아니라 금력이 필요할 때 그들과 만나겠습니다.” “쯧쯧, 아직도 어린애라고 생각하는 게냐?”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네가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넌 이미 3세라는 딱지를 뗐어. 순양의 금융 부분을 맡은 어엿한 후계자라고. 몇 번이나 언론을 탄 네놈을 어린애로 여길 사람은 없다.” 이런, 오해하셨다. 그 이유가 아닌데……. “재계 순위 바닥을 기는 기업도 알게 모르게 선거 캠프와 줄을 닿으려 여기저기 찔러본다. 너만 빠진다는 건…… 득 보려고 하는 게 아니야. 손해 보는 건 피해야 하지 않겠느냐?” 자세히 말할 수도 없으니 머리를 끄덕였다. “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양쪽 캠프 인사를 만나보겠습니다.” “똥통에 발을 담그는 게 빨리 온 것뿐이다. 적당히 예의 차려 주고 안면 익혀 두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이야기 하려고 온 거 아닙니다. 어떻게 지내시나 인사드리러 온 건데…….” “욕심도 많다. 허허.” “네?” “우리가 평범한 조손 간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더냐? 손자가 할아버지 건강을 걱정하고 할아버지는 손자가 잘 지내고 있는지 마음 졸이는……. 그런 건 일찌감치 포기해야지. 우린 그저 만날 때마다 회사 걱정이나 하는 거다. 허허.” 농담이 아니란 것을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며 알았다. 할아버지께 효도하는 방법은 안부를 묻고 건강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일 이야기를 하며 아직 경영자의 면모가 펄펄 뛰고 있음을 느끼시도록 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럼 다른 이야기 해 볼까요?” “응? 무슨……?” “대현자동차가 단단히 벼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신차가 나올 때 그쪽에서도 준비한 신차로 맞불을 놓으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어요. 된통 붙을 것 같습니다.” “네가 질 거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정 지으셨다. “그런가요?” “너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을 텐데? 대중성 없는 스포츠 타입으로 무난한 4인승을 어떻게 이겨?” “그래도 누르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드는데 방법이 없을까요?” “나 심심하지 않게 해주려고 마음 쓰는 거냐?” 이 영감님, 눈치 하나는…….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이러겠습니까?” “됐다. 네 녀석이 했던 말을 내가 잊었을 성 싶어? 건망증이 심해지긴 했지만, 회사 일은 잊어먹지 않아. 잘 팔리는 차가 아니라 제대로 된 차, 보는 순간 갖고 싶은 차. 그게 목적이라고 하지 않았어? 멀리 보고 한 걸음씩 간다면서?” 나도 잊어버린 걸 이 정도까지 기억하시는 걸 보니 건강 걱정은 괜히 했나 싶었다. “어차피 판매량 싸움에서는 못 이겨. 하지만…….” “화제성에서는 밀리면 안 되겠죠?” “그래. 대현이든 우리 순양이든 두 회사 모두 경차로는 돈 못 벌잖아.” 순양이 아니라 HW라고 정정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선물로 주신 회사니 할아버지께는 영원한 순양의 계열사여야 한다. “대현에서 경차의 위치는 구색 갖추기일 뿐이야. 넌 그 이상으로 보지?” “네. 순양자동차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첫 출발이라고 봅니다.” “그래. 그럼 그 경차가 주전은 아니지만, 조연…… 아니 이번 월드컵에서 붉은 악만가 뭔가 하는 그놈들 있지? 외신에서 보도까지 했잖아.” “네.” “그런 놈으로 만들어 보라고. 월드컵은 끝났어도 그 붉은 티셔츠는 여전히 팔리잖아.” 내 생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팔순이 훌쩍 넘은 할아버지지만 감각 하나는 젊은 마케터 못지않다. 괜한 걱정이었나? * * * “20억이면 부담이냐?” “부담이지만 어떡하겠습니까? 할당은 채워야죠.” “그래. 1차로 150억 건네기로 했다. 네가 20억은 해줘야 대충 구색이 맞는 것 같아서 그렇게 정했다.” 대충 20억이라는 할당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것 같다. 내가 가진 10%의 순양그룹 지분, 그만큼 나눈 것이다. “그런데 큰아버지.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전 회사에서 비자금을 만드는 방법을…….” “있는 놈이 더 한다더니, 네가 딱 그 짝이구나. 하하.” 진동기 부회장은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보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찾은 돈이 천억일 텐데? 20억이면 겨우 2%야. 그것도 못 빼?” “아, 그 돈은 한 바퀴 더 돌려야 한다고 해서요. 지금쯤 남미 어디쯤 있을 겁니다.” “오세현이가 그래?” “네.” “이런, 저쪽에 전해야 할 돈은 급한데…….” 내 돈이 전달된 흔적이 있으면 안 된다. 이 불법 선거자금은 언젠가 밝혀질 것이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분명 큰아버지 두 분은 임원 중 누군가를 골라 그 책임을 뒤집어씌울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다. 계열사를 맡은 지 이제 겨우 2년 남짓, 충성보다는 어린놈 밑에서 일해야 하는 불만이 더 크다. 날 대신해서 검찰청에 출두할 만큼 충성심을 쌓을 시간이 부족했다. 아직은 스스로 나를 지켜야 한다. 조금이라도 흠집이 생기면 안 된다. “순양증권에서 이삼일 작업하면 20억쯤은 쉽게 모을 텐데, 한번 해볼래?” 장 마감 직전 몇 퍼센트 높은 가격으로 주식을 사겠다는 주문을 잔뜩 내어 종가를 끌어 올린다. 이유는 모르지만, 주가가 오르니 개미 투자자가 덤벼들고, 그렇게 주가가 오르면 차익을 꿀꺽한다. 이 작업을 한 달만 하면 수백억 정도는 쉽게 챙기고 손해는 개미 투자자가 다 뒤집어쓴다. 이삼일의 작업이라는 것은 이걸 말한다. 이상하리만치 반짝이는 진동기 부회장의 눈을 보자 섬뜩하기까지 했다. “아, 그렇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면 되겠군요.” 선거 자금도 불법이지만 그 자금의 출처가 더 문제다. 있는 놈이 더하다고, 개인 재산이 수천억이지만 절대 자기 주머니를 뒤지는 법이 없다. 꼭 회사 돈을 빼내 전달한다. 정치 자금이 수사의 대상이 되면 검찰은 정치라던가, 대선이라는 단어는 슬며시 감추고 배임, 횡령으로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재벌 대기업의 적당한 머슴 한 명이 자진 출두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진동기 부회장은 하루라도 빨리 내 손톱 밑에 지울 수 없는 때가 잔뜩 꼈으면 하는 걸까? “자금 준비하면 전달은 어떻게 할까요?”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하나 적어 쓱 내밀었다. “이 친구에게 전하면 돼. 뒤는 내가 처리하마.” 자리에서 일어서니 그가 슬며시 웃었다. “도준아.” “네.” “이 세계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아니, 안쓰럽다고 해야 하나? 하하.” 아직은 아니다. 똥물 뒤집어쓰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 한다. * * * “완전히 차단해야 합니다. 절대 나를 추적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장을 받아든 우병준 상무는 만 원짜리 다발이 가득한 스포츠 백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저게 다 돈입니까?” “네. 20억입니다.” “만약 검찰에서 수사를 시작한다면 전달자를 추적하지는 않아요. 돈의 흐름을 추적합니다. 회사 계좌와 실장님 개인 계좌를 싹 뒤져서 20억이라는 숫자를 맞춰 볼 겁니다. 심부름꾼이야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그쪽으로는 못 찾아낼 돈입니다. 미국 계좌에서 몇 쿠션 먹은 돈이거든요. 제 흔적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 내가 이 사람에 대해 잘 모르는 것처럼, 우병준 상무 역시 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할아버지가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으셨나 보다. “개인 돈인가 봅니다?” “네. 회사 돈은 건드리면 안 되죠. 급한 일도 아니고 큰돈도 아니니까요.” “20억이 큰돈이 아니다……? 이거, 제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돈이 많으신 것 같군요.” “궁금하십니까?” 웃으며 묻자 그도 슬며시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단지 제 월급 못 받을 일은 없겠다 싶어 안심입니다.” 이런 농담까지 하는 걸 보니 내가 좀 편해졌나? “사람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배달꾼은 전혀 다른 곳에서 나온 돈으로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우병준은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말씀하세요.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이 돈, 오피스텔까지 누가 배달한 겁니까?” 꼼꼼하긴 하다. 그것까지 체크하다니. “믿을만한 분이 보내신 겁니다. 괜찮아요.” “그 믿을만한 분이 직접 들고 오신 건 아니죠?” “네.” “앞으로 이런 일은 우리 애들에게 시키십시오. 믿을만한 분과 그분의 직원은 다릅니다. 언제든 입을 열 수 있으니까요.” “명심하죠.” 이런 조심성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 사람만 특출한 걸까? 큰아버지들 곁에서 일하는 순양시큐리티 직원들도 이정도 신중함은 기본인 걸까? 궁금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우 상무는 직원들을 불러 가방을 옮겼다. “끝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우병준 상무가 나가자 긴장이 탁 풀렸다. 저 사람은 믿음직하지만, 왠지 좀 불편하다. 하루 날 잡고 술이라도 진탕 먹여야겠다. 가로막고 있는 벽을 그대로 남겨둔 채 내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 *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 대선은 정말 뜨겁다. 엎치락뒤치락은 물론이고 온갖 이슈가 터져 나오며 양 진영을 흔들었다. 자식의 군 면제, 월드컵 4강 신화를 등에 업은 다크호스의 등장, 여전히 판을 치는 색깔론, 자당 후보를 흔들기 시작하는 여당의원들 등등. 신차의 정식 출시를 앞두고 조대호 사장마저 흔들릴 정도였다. “뉴스가 정치뿐이야. 우리 차를 광고해도 누가 관심이나 둘까 싶다.” “우리 타깃이 정치에 관심 없는 젊은 층이라는 게 다행이죠.” “정치도 문제지만 대현도 문제야. 아예 우리 밟아 죽이려고 작정하고 덤빈다는 소식이야.” “그쪽에서도 경차 나온다면서요?” “그래. 이름이 <클릭>이란다. 우리보다 300만 원 이상 싸게 나온다는데…….” “삼백?” 출시가격이 6백만 원 후반대라는 뜻이다. 경차 한 대 팔아서 남는 게 뭐 있다고 저 가격에 판다는 걸까? 손해 볼 각오하고 출시하는 거다. 우리를 밟아 죽이려고 한다는 조대호 사장의 말이 엄살은 아니다. 잠깐 흔들렸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사장님. 우리 경쟁심을 버리죠.” “응? 무슨 말이냐?” “많이 팔려고 만든 차도 아니고, 돈 남기려고 개발한 차도 아니지 않습니까? 처음 계획한 대로 내년까지 7천 대 판매라는 목표만 생각하시죠.” “현장에서는 그것도 달성하기 어렵다고 징징대니까 하는 말이야. 경쟁차종이 저렇게 후려치면 아무래도 밀리기 마련이거든. 그리고…….” 표정이 굳은 걸로 봐서는 약점이 또 있다. “생각보다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 “문제가 될 만큼?” “아니. 소비자의 기대치만큼 안 나오는 거지.” 조 사장은 한숨을 쉬었다. “생긴 건 미친 듯한 출력으로 쌩쌩 달릴 것 같지만, 어차피 경차 아니냐? ‘스포츠 룩’이라는 걸 소비자들은 자꾸 망각하거든.” “그만큼 디자인이 잘 빠졌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래. 디자인을 못 따라가는 퍼포먼스. 우리나라에서는 용서가 될지 모르지만, 외국에서는 곤란해. 쟁쟁한 차종이 한둘이 아니라서 말이야.” 뭐니뭐니해도 기술력의 문제다. 역사가 짧은 회사가 전통의 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선택의 폭이 넓은 외국 소비자들은 우리 역사가 짧은 것까지 고려하지 않는다. 걱정 가득한 조대호 사장의 표정을 보며 한 가지 결심했다. 역사가 짧으면 특별 과외라도 받아 그 격차를 줄이면 되지 않을까? “사장님. 회사 하나 사버릴까요?” “응? 회사를 사다니?” “유럽이나 일본 회사요. 슈퍼카 잘 만드는 회사를 사서 그 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들죠.” “슈퍼카 제조사가 장난감 회사냐? 마음 내키면 사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려던 조 사장이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입을 떡 벌렸다. “농담이 아니구나! 정말 사려고?” ======================================== [205] 입지 확보 2 “산다기보다는 기술 이전을 목적으로 투자하는 거죠. 만약 인수가 가능하다면 사업성을 검토한 후 인수 여부를 결정하고요.” “기술을 빼먹기 위해 회사를 인수한다…. 드문 일은 아니지만…. 거참, 그런 대범한 생각을 하다니.” 독일 BMW그룹은 1994년 영국 로버그룹의 미니와 로버, 랜드로버 브랜드를, 1998년에는 영국 럭셔리 브랜드인 롤스로이스를 인수했다. 그러나 2000년에 로버와 랜드로버를 미국 포드사에 매각해 현재 BMW와 미니, 롤스로이스 등 3개 브랜드만 유지하고 있다. BMW가 랜드로버 브랜드를 보유한 기간은 단 6년. 로버그룹의 본거지인 영국에서는 연일 반대집회가 일어났을 정도로 저항이 거셌다. 랜드로버를 인수해 SUV 기술을 활용해서 BMW X5를 만든 후 이용 가치가 떨어지자 팔아치웠기 때문이다. 물론 포드사가 인수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기술을 모두 빼먹고 나면 어딘가에 되팔 것이다. “지름길 아니겠습니까? 송현창 회장님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신 분이죠. 큰 차이는 없습니다.” “큰 차이가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지. 송 회장의 과감한 투자는 전부 실패로 돌아갔으니까 말이야.” “차이가 있습니다. 같은 생각이지만 사람은 다르니까요.” “너니까? 투자의 귀재?” 머리를 흔들었다. 이건 투자의 문제가 아니라 경영의 문제다. “아뇨. 메인스트림이 다르잖습니까? 아진 사람들이 아니라 순양 사람들이 주축이니까요.” “그런가?”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 애나 어른이나 칭찬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순양자동차가 3위니, 4위니 해도 실적은 좋았습니다. 자동차 기업 중 가장 후발 주자였지만, 대현 같은 놈들의 등쌀을 견디면서 그 실적을 냈어요. 사람이 다릅니다.” “부담 팍 주는구먼. 허허.” 슬쩍 웃음을 흘리던 조대호 사장은 다시 진지하게 물었다. “투자든, 인수든…. 돈은 있어?”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닙니다. 계속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어요. 한 단계 더 오르려면 엄청난 자극이 필요합니다. 그 자극은 뛰어난 기술력의 외국 자동차사와의 협업이겠죠. 적당한 기업 물색하십시오. 돈 걱정은 마시고요. 어떡하든지 마련해보겠습니다.” 나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참, 오해는 마십시오. 제가 자동차광이라서 괜한 돈지랄 하려는 거 아닙니다. 아시죠? 전 장롱면허라는 거? 지금도 기사 따로 둡니다.” “재벌 3세의 취미 생활이 아니라는 건 알아. 좋다. 지금부터 한번 알아보마. 슈퍼카 생산업체는 아니라고 봐. 우린 풀 파워의 고성능 자동차를 생산하는 건 아니니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기술을 보유한 회사들부터 조사할 거다.” “네. 그 역시 사장님께 전적으로 일임하겠습니다.” 전문가의 영역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필요는 없다. 할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은 사람이다. 돈을 어떻게 써야 효율적인지 아주 잘 배웠을 분이다. * * * 대현자동차가 정확히 3일 앞섰다. 신문, TV, 잡지, 인터넷 등 광고할 수 있는 모든 매체에 그들의 경차 <클릭>으로 도배했다. 버스 광고까지 손댄 건 아마도 이번이 처음일 게다. “손해 많이 보겠는걸?” 오세현 대표가 TV 광고를 보며 실실 웃음을 흘렸다. “새싹은 짓밟아야 맛이죠. 우리 <이스퀼로>의 열풍을 차단하려는 겁니다.” “가격과 4인승이라는 걸 너무 강조하잖아.” “정석대로 가는 거죠. 정확한 타기팅.” “어때? 해볼 만하겠어?” “신경은 쓰이지만, 애초부터 포지셔닝이 달라요. 우린 신규 시장 창출이 목적입니다.” 오세현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 그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아, 그렇지. 투자받으려고 안간힘 쓰는 벤처 애들이 프레젠테이션할 때 많이 쓰는 단어지. 포지셔닝, 타기팅, 신시장 개척. 그런데 너도 잘 알지?” “전부 실속 없었죠. 하지만 전 투자받으려고 안달 난 벤처 사장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입에 발린 소리 할 필요 없어요.” “그래? 두고 보자. 흐흐.” “저기요, 삼촌. 아니, HW 자동차 최대주주 투자사의 대표님. 이렇게 불구경하듯이 하실 겁니까?” “이보세요, 진짜 주주님. 전 당신의 충실한 대리인일 뿐이랍니다.” 이렇게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다 다시 TV에 집중했다. “자, 한번 보자. 첫 번째 우리 광고가 어떻게 나오는지.” “뉴스입니다. 돈은 꽤 들었지만. 흐흐.” 9시 메인 뉴스의 첫 꼭지는 이색적인 이벤트부터 다뤘다. 「오늘 HW 자동차는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거스 히딩크 감독, 박지성 선수와 함께 또 한 번 붉은 악마의 함성을 재현했습니다.」 앵커의 오프닝에 이어 공장의 거대한 야적장을 항공 촬영한 광경이 TV 화면으로 흘러나왔다. 천여 대의 붉은 <이스퀼로>가 나란히 대기하고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천여 명의 군중이 화면에 잡혔다. 「월드컵 기간에 당첨된 서포터즈 모두 각자의 자동차 앞에 섰습니다. 특히, HW 자동차는 당첨자가 부담해야 할 제세공과금 22%를 전액 선납했으며, 등록 절차까지 완벽히 처리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첨자들은 그야말로 영화처럼 자동차 키를 받고 떠나면 됩니다.」 카메라는 일렬로 서있는 천여 명의 사람들과 히딩크 감독, 박지성 선수를 쭉 훑으며 기나긴 행렬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 이제 출발하는가 봅니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대전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붉은 악마가 붉은 <이스퀼로>를 타고 공장을 빠져나가는군요,」 앵커의 멘트를 듣고 있던 오세현이 낄낄대며 웃었다. “야, 도대체 얼마를 먹였길래 광고보다 더하냐? 확실하게 빨아주는구먼,” “마케팅비 쓴 겁니다. TV 광고 좀 넉넉하게 잡아주고, 보도국에 봉투 쫙 돌렸죠. 이건 할 만하니까 저렇게 해주는 겁니다. 대현이라고 보도국에 봉투 안 돌렸겠어요? 다만 이슈가 없으니 뉴스에 나올 방법이 없는 거죠.” “시청률 25%짜리 광고를 1분이나 해줬네. 돈 쓸 만해.” “차는 어떻습니까?” “이쁘다. 내가 해줄 칭찬은 이게 전부야. 내 취향은 아니거든.”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필 여부가 가능한지 확인도 했다. “내일 공고 좀 띄우세요.” “공고?” “네. 미라클 직원이 <이스퀼로>를 구매하면 무조건 15% DC 들어갑니다. 무상 A/S 기간도 1년 연장. 어떻습니까?” “그 정도면 좀 팔리겠지? 여기에도 고액 연봉 못 받는 보조 직원들도 꽤 있으니까.” “그럼 고액 연봉 받는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을 거다?” “야! 여기 애들은 트렁크에 골프백 안 들어가면 절대 안 사.” “운전 보조석에 세울 수는 있는데도요? 세컨카로 구매하지 않을까요?” “세컨카로 독일제 사는 놈들이다. 큰 기대 하지 마.” * * * 초대박을 꿈꾸지 않았지만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일선 영업 사원들도 돌아버리겠다고 난리다. 문의 전화는 엄청난데 실제 계약하러 오는 사람이 많지 않아. 이러다 7천 대 목표 못 채울 수도 있겠어.” 조대호 사장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천만 원에 가까운 돈이 적은 건 아니지. 어쩌면 이건 돈 좀 있는 애들의 장난감이 될 소지가 커.” 오세현은 명단이 프린트된 종이를 휙 던졌다. “내 예상은 틀렸어. 미라클 직원들은 폭발적인 반응이야. 그놈들에게는 ‘천만 원도 안 하는 차’니까.” 백 명에 가까운 명단. “우리 회사는 연봉이 좀 세잖아. 일반 직원들 특히 미혼은 전부 신청했어. 매니저급도 많이 신청하고. 마누라가 타는 국산 2,000cc급 세단 처분하고 이거 산단다. 임원들은 자식에게 주는 선물이고.” “결국, 갖고 싶지만 돈이 부담이라는 결론이네요. 할부를 48개월까지 할 걸 그랬나?” 조 사장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안 돼. 36개월이 한계야. 금융비용 생각 안 해?” 불쏘시개 한 방이면 뭔가 확 달라질 것 같은데 그 불쏘시개가 뭔지 갑자기 와 닿았다. “결국 조금 부족한 돈이군요. 아주 애매한 간격으로 우리 차를 사는 게 부담이다, 맞습니까?” “그래.” 조 사장은 다짐을 받으려는 듯 나를 노려보며 똑똑히 말했다. “더는 가격 못 깎아줘. 남는 것 없이 파는 거야. 손해는 못 봐.” 잘못 읽었다. 더 싸게 팔자는 건 아니다. “카드 할부 어떻습니까?” “뭐?” “뭐? 카드?”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순양, 대현. 지금 이 카드사들 아주 공격적이죠? 둘 다 주인이 바뀐 지 얼마 안 됐잖아요. 카드로 몇십만 원 긁는 것보다 한 방에 천만 원입니다. 혹하지 않을까요?” 이번엔 둘 다 대답이 없었다. 카드사와 협의만 되면 물꼬가 트일 것으로 예상하지만, 카드사 입장에서는 리스크가 좀 크다. 하지만 미친 듯이 경쟁하는 순간 아닌가? 경쟁에 불붙었을 때는 이만한 호재가 없다. 순식간에 고객 확보가 가능한 사안이다. 나중에야 신용카드로 차를 사는 게 흔한 일이지만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오로지 자동차사와 캐피털사의 할부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기회에 복합 카드 금융을 슬쩍 끼워 넣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한번 해볼까?” 조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건 오세현 역시 받아들인다는 거다. 오세현이 먼저 말하지 않은 건 경영의 책임은 조대호 사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두 분께서는 저쪽에서 받아들일 만한 금융 프로그램 만들어주세요. 카드사의 오너 두 분과 사전 미팅부터 하겠습니다.” 다행히 둘 다 아는 사람이다. 한 사람은 큰아버지, 한 사람은 숙부라고 부르는 사람 아닌가? 더욱 재미있는 건, 카드사는 내년에 박살 난다는 것이다. 난 그들에게 더 큰 폭탄 몇 개를 얹히는 것이다. 더욱 헤어 나오기 어려울 만큼 말이다. * * * “자동차를 카드로?” “네. 사실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물건 살 때 할부로 사는 것 아닙니까? 금액이 큰 게 다르긴 해도… 그 한도를 정하는 건 카드사니까요. 삼백만 원짜리 명품백을 사는 것과 뭐가 다르죠?” 대현금융의 주광식 회장은 흥미를 가지고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자사 할부는 36개월이 전부예요. 카드는 48개월, 60개월 해도 문제없지 않습니까?” “흠…. 그럴듯해.” “금리를 촘촘하게 따져서 상품 하나 만드시죠? 우리 <이스퀼로>를 시험 삼아 한번 해보시고, 괜찮으면 차종을 확대해 나가는 방향으로….” “우리 조카님, 순양자동차랑 깊은 관계가 있나 보군. 이렇게 먼저 찾아와서 영업하려는 걸 보니 말이야.” 날카로운 그의 눈빛이 내 얼굴을 찔렀다. “제가 미라클과도 좀 엮여 있고 순양은 할아버지 꺼 아닙니까?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죠.” “단지 그게 전부?” “뒷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눈앞의 비즈니스부터요.” “안달 난 우리 조카님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한데? 나도 이래저래 이야기는 들었어. 고전을 면치 못한다고?” “그게 다 숙부님의 형님이신 자동차 회장님 때문입니다. 덤핑도 이런 덤핑이 없어요. 팔면 팔수록 손해 볼걸요?” “경차 팔아서 보는 손해쯤이야 플래그십 몇 대 팔면 반까이해. 대현자동차는 스펙트럼이 넓어. 흐흐.” “그러니까 손해만 보고 이미지를 확 깎아먹으면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주광식 회장은 아주 잠깐 대답을 못 하다가 웃음부터 터트렸다. “으하하, 형님의 일그러진 얼굴을 구경하겠구먼.” “카드사 할부 상품만 나오면 곧바로 역전입니다. 우리 회사의 분석은 그래요.” 주광식은 웃음이 잦아들 때쯤 새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알짜배기 36개월까지는 순양캐피털에서 먹고 길게 늘어지는 48개월만 내가? 그건 안 되고… 순양캐피털 프로그램을 중단하면 생각해보지.” “콜.” 일 초도 생각하지 않고 대답하는 날 보는 그의 눈이 커졌다. ======================================== [206] 입지 확보 3 “고민해야 할 문제는 아니니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순양캐피털의 금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차를 판다? 남을 돕기 위해 자기 회사 수익을 포기하는 건 생각해야 하고,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 아닌가?” 주광식 회장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따지고 들었다. “말씀드렸다시피 남은 아니죠. 오세현 대표님은 제게 금융 전반에 대해 가르쳐주신 스승님 같은 존재고 순양자동차는… 할아버지 유산이니까요.” 슬쩍 눈치를 보며 엄살까지 떨었다. “돈 놓고 돈 먹기가 쉽지…. 어휴, 물건 파는 건 정말 못 할 짓이네요.” “이거 큰일이네.” “네?”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주광식 회장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금융 사업을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 조카님이 내 경쟁자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서 말이야.” “경쟁이라니요? 이렇게 적극 협력하는데요.” “좋아. 협조라니 일단 믿어보지. 그리고 나도 신세 진 게 있는데 나 몰라라 하지는 않아.” 카드사를 인수할 때 나를 이용해서 양다리 전략을 쓴 걸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나도 카드 할부 프로그램을 시뮬 돌려봐야지. 수익 없고 리스크만 있다면 없었던 일이 될 거야.” “그럴 리가요. 대현자동차가 지금껏 할부로 팔아먹은 자동차가 몇 대일 것 같습니까?” “뭐, 그건 그렇지. 이건 단지 돌다리 두들겨보는 거야. 우리 조카님도 막상 닥치면 시뮬레이션할 거잖아.” 카드 수수료와 할부 이자.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카드대란이라는 리스크만 없다면. 난 이자가 머뭇거리기 전에 쐐기를 박았다. “네. 당연히 그러셔야죠. 그런데 하나만 기억하세요.” “뭘?” “대현자동차가 할부 장사로 번 이자 수익이 얼만지 말입니다. 잘만 하면 그거 전부 카드사로 땡겨 올 수 있습니다.” 주태식 회장이 관리하는 자동차 할부 프로그램. 거기서 벌어들이는 수익을 뺏어올 수 있다는 건 경쟁 관계인 주광식 회장에게는 아주 큰 유혹이다. “이거 참 큰일이네.” “또 뭐가 말입니까?” “우리 조카님이 내 약점을 너무 잘 알아. 하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거죠.” “이거 원, 진씨 조카가 주씨 조카보다 훨씬 마음에 드니 어떡하나.” “지금처럼 숙부님과 계속해서 협력 관계를 유지한다면 친조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서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활짝 웃었다. # # # “원래 그런 거야. 필요 없다고 버리고 나면 꼭 쓸데가 생기는 법이지. 하하.” 진동기 부회장은 정말 재미있는 광경이라도 본 듯 폭소를 터트렸다. “그러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쥐고 있었을 겁니다. 자동차 할부 프로그램을 신용카드와 연계할 생각은 못 했거든요.” 아쉬운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누구 생각이냐? 이것도 네 아이디어?” “아뇨. 오세현 대표 생각이에요. 순양자동차 판매 부진의 가장 큰 원인은 소비자들의 금융 비용 부담이라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HW라는 말 대신 순양이라는 이름을 썼다. 조금이라도 더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다. “순양캐피털은? 이미 그쪽에서 할부 프로그램을 돌리고 있잖아?” “36개월이 맥시멈이라서요. 금리를 좀 더 올리고 연장할 생각까지 해봤는데, 캐피털 임원들의 반대가 심하네요. 타사와 비교해서 괜히 금리만 높다는 인상을 심어준다고.” “그렇지. 소비자들은 이것저것 꼼꼼히 안 따져. 할부 기간이 늘어난 만큼 금리가 오른다는 생각은 못 하고 가장 높은 금리만 따지고 나서 비싸네, 마네 하지.” 부지런히 머리 굴리는 진동기 부회장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대현카드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하네요. 특히 순양캐피털이 이번 신차에 대한 할부 프로그램을 중단하겠다는 뜻을 비쳤거든요.” “뭐? 그걸 왜 양보해? 자동차 금융 수익이 캐피털의 핵심인데?” 대현을 먼저 찾아간 것보다 순양캐피털의 이익을 버렸다는 게 더 충격이었나 보다.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어쩌겠습니까? 이럴 때 서로 도와줘야죠. 오 대표가 제게는 좀 각별한 분 아닙니까? 그리고 알짜만 남겨 두고 부담만 카드사에 넘기는 모양새는 피해야죠.” 자신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걸 알아채자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카드 구매 프로그램은 할부이자를 더 높여도 될 것 같아?” 어느새 수익을 더 높이기 위해 꼼수까지 생각한다. “현행 이자율만 해도 더 높으니까요. 그러니까 36개월 이내는 이자율을 할인해준다는 프로모션도 가능합니다. 큰아버지 말씀대로 소비자들은 결과만 보니까요.” “흠….” 복잡한 계산을 시작하는 큰아버지를 보니, 이 정도면 내 일은 끝났다는 걸 알았다. 이제 구체적인 숫자를 보고 최종 판단할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튼 순양자동차에서 제안서를 보낼 겁니다. 그거 검토해보시고 결정하세요.” 물꼬는 터줬다. 이제 HW 자동차와 카드사 실무진이 협상할 차례다. 난 순양캐피털의 유능한 인재들을 추려 HW 자동차로 보냈다. 그들이 최상의 조합을 만들어내면 전세 역전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 * * 이미 곳곳에서 징후가 나타났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제 터질 일만 남았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멈추기가 힘든 것이다. 현금서비스로 돌려막기 하는 사용자나, 신규 고객을 확보하고 그들이 긁어대는 카드의 수수료를 포기하지 못하는 카드사나 매한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천만 원대의 자동차를 카드로 긁는 순간 들어올 수수료와 할부 이자를 포기하지 않았다. “계약 체결했다. 카드 수수료가 좀 부담이기는 하지만 대신 판매량 증가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어.” 이제 카드사 두 곳이 대대적인 광고를 시작할 것이다. 덕분에 우리 <이스퀼로>도 덩달아 광고하는 셈이 되어버렸다. “잘됐네요. 큰아버지는 직접 만나셨다고요?” “그래.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아쉬운 쪽이 우리니까 인사차 들렀다.” “별말씀 없으셨습니까?” 조대호 사장은 싱긋 웃었다. “그 양반, HW 자동차가 마치 자기 것인 양 이야기하더라. 미팅하는 내내 순양자동차, 순양자동차 하는데…. 내가 좀 거북할 지경이었어.” “설마 업무 지시까지 하신 건 아니겠죠? 회장님처럼? 흐흐.” 순식간에 찌푸린 조 사장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되삼켰다. “엥? 설마가 사람 잡았습니까?” “솔직히 어이가 없었어. 컨셉 자체가 문제였다는 둥, 해외 경쟁력을 생각하면 나오지 말아야 할 차라는 둥…. 나중에는 차기 프로젝트까지 설명하더라. 준중형 라인업을 보강해야 한다면서….” 화난 듯한 조대호 사장의 모습에서 우리를 뛰쳐나온 맹수는 두 번 다시 가두기 어렵다는 걸 느꼈다. 순양과 아진이 합병한 후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회사를 이끌었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맛본 최초의 대기업 대표이사일 수도 있다. 이따금 할아버지께 회사 현황을 보고했을 테지만, 별다른 지시는 받지 않았다. 오로지 자기 뜻대로 회사를 끌어왔고 회사 돈을 빼먹으려는 오너 가족의 검은 지시도 받지 않았다. 그가 순양에 몸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HW 자동차의 대표이사로 지낸 기간만큼 경영자로서의 자부심을 느낀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카드 할부 프로그램 계약만 아니었다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라고 따끔하게 말했을 텐데, 어쩌겠냐? 아쉬운 건 나니까 머리만 끄덕이는 척했다.” 역시 장사할 때는 간과 쓸개는 깨끗이 빨아 집에 널어 두고 나와야 한다. 더럽고 아니꼽더라도 머리 숙이는 건 일선 영업 사원이나 사장이 똑같다. 하지만 그 결과가 좋으니 충분히 참고 견딘 보람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세 회사 모두 큰 성과를 거둔 거래였다. 2인승 쿠페를 구매하기에 조금 부담되는 젊은 층도 카드를 긁는 것은 익숙하다. 게다가 포인트까지 쌓을 수 있다는 유혹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최초의 신용카드를 이용한 자동차 할부 구매 프로그램은 순양, 대현 카드사의 신규 고객 유치에 불을 붙였다. 또한, 자동차 매장으로 쏟아졌던 문의 전화는 카드사로 몰렸다. 매월 갚아 나가야 할 금액을 확인한 사람들은 카드를 손에 쥐고 매장으로 달려왔다. “이거 먹혔어. 7천 대 목표를 상향조정 해야 할 것 같다. 하하.” “예상치는 어느 정도입니까?” “최소 만 대 이상. 내부적으로 1만2천 대까지 올려보려고 해.” “카드 수수료 때문에 수익은 좀 나빠지겠죠?” “전체 손익은 초기 7천 대 목표 때와 비슷할 거야. 하지만 생산량이 늘었으니 원가 부문에서 좀 더 세이브될 테고.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잖아.” 평범하고 무난하지 않아도, 좀 튀더라도 소비자의 감성을 건드리면 구매욕이 생긴다. HW 자동차는 천편일률적인 차만 생산하는 대현과 다르다. 무엇보다도 젊은 신규 고객층의 첫 차가 HW 자동차라는 것이다. 이제 그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든든한 소비자층을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다. “늘어난 고객층은 어디서 유입된 건지 파악할 수 있어요?” “대부분 대현이지. 재미있는 건 대현의 경차 <클릭>을 사려던 사람이 아니고 준중형에서 넘어온 거야. 중형 세단 구매층은 흔들리지 않지만 1,500cc급은 조금 더 싸고 예쁘기까지 한 우리 걸 놓고 저울질하기 시작했거든.” 조대호 사장은 갑자기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이거, 대현 주태식 회장의 고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클릭>은 손해 보며 팔지, 준중형 판매는 줄어들지… 짜증 부리겠어.” “우리 광고가 본격적으로 나가기 시작하면 더 열 받겠는데요?” “현재 가장 비싼 몸값의 두 스포츠 스타가 우리와 독점 계약이니 미치고 환장할걸? 내가 장담하는데, 이번에 대현자동차 임원 싹 물갈이된다. 흐흐.” “탐나는 분 있으세요? 개인적인 친분을 빼고 말이에요.” 내 말의 의미를 단번에 눈치챈 조 사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딱 한 명 있다. 마케팅 출신인데 그 사람은 주태식 회장이 자동차 회장으로 취임한 뒤부터 찬밥 신세였거든. 이번에 정리 대상 1호야.” “마케팅이라면 딱히 탐날 이유가 없는데… 뭔가 특별한 점이 있겠군요.” “그 사람은 세계적인 주요 랠리에 대현이 참가하는 걸 처음 기획한 사람이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그만큼 랠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어. 대현은 성적이 잘 나오지 않으니까 주태식 회장의 관심 밖이야.” 조 사장은 날 보며 다시 확인했다. “유럽 스포츠카 회사를 인수하면 랠리에 나가야 하지 않겠어? 기술력 확보하면 성과를 봐야지.” “대현의 해고 1순위가 우리의 영입 1호가 되겠군요.” * * * 2002년은 정말 재미있는 한 해였다. 과거의 월드컵과 선거는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고 난 철저한 구경꾼 중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국가적인 큼지막한 일의 일원이었으며 아주 깊숙이 관여했다. 비록 결과는 변하지 않았지만…. 대통령 선거 전날 밤 여당 후보 단일화는 금 가고 새벽까지 속보가 계속 쏟아졌다. 위기감을 느낀 지지자들이 집결했을 수도 있고 원래부터 후보의 힘이었는지 모르지만, 12월 19일 파란만장한 인생의 주인공이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지금껏 우리나라를 지배하던 딱 맞물린 톱니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재벌과 언론, 언론과 정치. 이런 구조의 톱니바퀴에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국민’이 끼어든 것이다. 한국의 뉴 밀레니엄은 바로 이 순간 시작했다. ======================================== [207] 입지 확보 4 2003년 3월 14일 아침, 여의도 산은캐피털 빌딩에서 나온 금융감독위원회 정책1국장은 흐린 날씨만큼이나 수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SK 글로벌의 분식회계 사건을 조사 중이던 그는 금융시장 전체를 흔들 만한 문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SK 그룹의 채권이 포함된 펀드를 현미경 들여다보듯 낱낱이 조사했고 펀드의 규모에 비해 환매요청 규모가 광범위한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카드채라는 걸 발견한 것이다. 카드채는 신용카드사가 고객이 사용한 카드 대금을 대신 결제하기 위해 빌리는 단기자금이다. 신용카드 자체가 부채로 이루어진 연결 고리다. 이미 2002년 후반기부터 과당 경쟁과 신용불량자 급증으로 금감위가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자산을 근거로 한 채권이 많았기에 채권의 만기 연장에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판단했을 뿐이다. 하지만 북핵 문제가 터지면서 해외 단기차입이 중단됐고, SK 글로벌의 분식회계 사건으로 금융시장 불안은 걷잡을 수 없는 위기를 맞이했다. 카드채 규모가 50조 정도로 알려져 있었으나, 금감위의 조사 결과 90조가 넘자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금융당국은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재경부 차관 주재로 금융정책 협의회를 열었다. 긴급한 회의는 밤을 넘겼고 3월 17일, 신용카드사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날 대책은 신용카드사의 강도 높은 자구노력 및 수지개선 대책을 전제로 신용카드 규제를 일부 완화해 자금조달을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카드사의 강도 높은 자구노력이었다. 이 자구(自救)라는 말 속에는 회사 돈을 쏟아부어서라도 부채를 줄이라는 압력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재벌 일가는 회사보다 자신들의 재산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카드사의 부실을 막기 위해 회사 돈과 정부 지원자금은 쓸망정 사재를 털어낼 사람은 없으니 사태 악화는 불 보듯 뻔했다. “단기채는?” “계열사 여유 자금으로 겨우 메꾸고 있습니다만, 며칠 버티지 못합니다.” “임시방편으로 현금서비스와 카드 사용 한도를 줄여놓긴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달이면 현금서비스는 중단해야 합니다. 현금이 부족합니다.” 진동기 부회장은 이마를 문질렀다. 땀 나는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중공업을 맡다 보니 장기적인 경기 흐름에 따른 시장의 변화는 감지할 능력은 있었다. 하지만 카드사 같은 금융회사에서 하루하루 돈을 굴려야 하는 상황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계열사 자금을 좀 더 끌어와야 합니다. 아니면 다음 달에 큰 문제가….” “안 돼. 카드로 돌려막기 하는 놈들 돈 빌려주자고 건실한 우리 계열사까지 자금난에 밀어 넣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현금서비스가 중단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양카드 사용이 중지되면 카드사 주가는 물론 순양그룹 전체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임원들이 걱정을 늘어놓자 진동기 부회장은 이마를 문지르던 손을 멈췄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오늘 회의 안건이 내게 위험을 경고하는 겁니까? 그 위험을 돌파할 대책을 마련하자고 모인 것 아닙니까?” 단기 외채니 카드채니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어차피 빚이다. 빚을 졌고 그 빚을 갚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빚을 청산하는 건 돈을 갚는 길뿐이다. 임원들은 그 빚을 갚기 위해 돈을 짜내는 중이지만, 더는 방법이 없으니 경고 외엔 꺼낼 말이 없는 것이다. 급한 불을 끄는 방법이 없지는 않다. 진동기 부회장이 여기저기 숨겨놓은 돈을 꺼내면 된다. 못해도 수천억은 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 말은 꺼내지 못한다. 진동기 부회장은 입을 다문 임원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도준이…. 아니, 순양생명의 채권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에게도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보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3천억 상환이 두 달 남았습니다. 이건 꼭 만기 연장해야 합니다. 솔직히 상환은 불가능합니다.” 예상했던 대로 가장 극단적인 선택만 남았다. 이때 회의실 구석에서 한 임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회장님. 이제는 정부가 말한 자구책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하지 싶습니다.” “뭐?” “카드사 자본금을 늘려야 합니다. 안정성을 담보하지 않는 한 모든 대책은 임시방편일 뿐, 언젠가는 카드 사용 중지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다른 임원들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순양카드는 계열사 지분이 없다. 자본금을 늘려봤자 그룹 지배력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런 기업의 자본금을 늘리느니 순양중공업의 자본금을 늘려 진동기 부회장의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중공업의 자금을 카드사에 빌려주고 급한 불을 끄는 것이 진동기 부회장이 원하는 대답이며 생각이기도 하다. 하지만 눈치 없는 그 임원은 부회장의 대답을 재촉했다. “순양그룹이라는 이름이 주는 믿음이 있습니다. 순양카드의 자본금 확충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이봐, 그 이야기는 나중에….” 곁에 앉은 임원이 눈짓을 주며 말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래? 얼마나 필요하지? 자네 생각을 말해봐.” “4천억입니다.” “그 돈이면 문제없나?” “네. 급한 불을 끄는 것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자금 운용이 가능합니다. 4배수 증자는 충분히 가능하니….” “액면가 5천 원짜리를 2만 원에 뿌리자?” “순양그룹이니까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자본금 1천억과 자본잉여금 3천억, 총 4천억이면 이 난관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임원들은 긴장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말하고 싶었던 의견이 공개적으로 회의실 탁자에 올라오니 속이 다 후련했다. “하지만 부회장님, 순양생명의 채권 8천억은 꼭 연장해야 합니다. 4천억 이상 들어온다고 해도 순양생명의 채권은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눈치 없는 놈은 끝까지 눈치 없다. 진동기 부회장의 표정을 조금이라도 읽었다면 마지막 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자, 밑바닥까지 다 뒤집어놨으니 더 할 이야기는 없어 보이는데…. 회의 끝마칠까요?” 진동기 부회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나왔다. 모두 엉거주춤 회의실에 남아 있을 때 그의 목소리가 회의실 안에 꽂혔다. “카드 사장은 나 좀 봅시다.” 순양카드 사장은 단거리 선수마냥 회의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성큼성큼 걷는 진동기 부회장 곁에 가까스로 다가갔을 때 차디찬 목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는 내일부터 안 봤으면 해요. 그리고 순양생명 채권은 내가 어떻게 해볼 테니까 나머지는 사장인 당신이 해결해.” 저 새끼가 누군지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안다. 자본금 1천억이 늘어나면 30% 이하로 떨어지는 지분이며, 순양카드의 지배는 물 건너간다. 재벌가의 오너들은 경영권을 잃느니 회사를 버린다. 지주가 마름으로 전락하는 꼴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족속들 아닌가? “네. 부회장님.” 순양카드 사장은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순양그룹 최초로 부도가 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불명예 퇴임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 * *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라던가,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은 즐겨라>라는 광고가 얼마나 어처구니없었는지 이젠 모두 알았겠죠?” “알아도 까먹는다. 모든 걸 기억한다면 이런 사기꾼 같은 놈들이 한국에 남아 있겠어?” 오세현은 시니컬한 미소를 보였다. “자, 이젠 솔직히 말해봐. 이런 사태를 직감했어?” 직감이 아니라 내 눈으로 목격한 일이죠. 하지만 대답은 달리했다. “부채가 자꾸 늘어가는 사업입니다. 이 정도 사태는 아니지만,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 일이 버겁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어찌 됐든 그 덕분에 품 안의 폭탄은 없어졌네. 천운이다.” “폭탄이 사라지면 다시 가져올 생각입니다.” “괜찮을까?” “카드사는 돈 먼저 빌려주고 이자 챙기는 은행이나 다름없어요. 카드 발급과 한도를 신중히만 했다면 땅 짚고 헤엄치기 사업 아닙니까?” 은행은 대출을 원하는 고객을 낱낱이 조사하고 담보를 확보한 후에 돈을 빌려준다. 카드사가 은행처럼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대출 기간이 한 달이기 때문이며 소액이기 때문이다. 처음 카드 발급 때 고객의 신용도와 소득만 잘 따진다면 손실의 위험성은 급격히 떨어진다. 이런 장사를 왜 마다하겠는가? “순양카드를 되찾는 게 쉽진 않을걸?”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떨어지는 주가에 맞춰 주식을 매집해야죠. 그리고 전 거액의 채권자 아닙니까? 방법은 많습니다.” 카드사만 되찾는 건 쉽다. 어려운 건 일거양득이다. 진동기 부회장이 형님인 진영기 부회장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독한 짓을 한 번 해야 하는데… 어려운 건 아니다. 그리고 그날은 곧바로 찾아왔다. 그만큼 카드사에 떨어진 불똥이 뜨겁다는 의미였다. “큰아버지. 그건 곤란합니다. 제 코가 석 자라서요.” “뭐?” 진동기 부회장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카드대란으로 돈줄이 막혔어요. 생명, 화재… 전부 아우성입니다. 저도 지금 단기차입을 알아보고 있을 정도로 심각해요. 오죽하면 아버지 병원에서 돈을 빌렸겠습니까?” 99년, 48조에 불과하던 현금 대출이 작년 말 기준으로 268조까지 치솟았다. 카드사가 신용 한도를 낮추자마자 300만 명의 신용불량자가 쏟아졌다. 이미 한국 경제는 동맥경화에 걸려버렸다. 아무런 문제 없다고 큰소리칠 기업은 별로 남지 않았다.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던 보험료가 반 토막 날 지경입니다. 큰아버지께서 그 채권을 정리해주지 않으시면 덩달아 우리도 큰일 난다고요.” 전에 없이 엄살을 떨며 두툼한 서류를 툭 던졌다. “한번 보십시오. 자금 계획이 다 무너지니까 계열사 전부가 경색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린 돈장사하는 게 전부 아닙니까? 큰아버지께서는 중공업 계열이니 우리보다는 더 자금 사정이 좋으실 텐데요?” “말도 마라. 다른 계열사 쌈짓돈까지 탈탈 털어서 카드에 꼬라박고 있어. 이러다 거덜 나겠다.” 큰아버지의 엄살도 보통 아니다. 아니, 이건 엄살이 아닌가? “아무튼, 조금만 더 지켜보시죠. 정부가 자금 지원을 할지도 모르고….” “아니, 정부 지원은 없어.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터진 일이다. 그것도 카드 긁으며 흥청망청한 대가야. 도덕적 해이를 비판하는 여론을 무시하고 강행할 배짱은 없다.” 이런, 똑똑한데? 채권 만기 막바지까지 미뤄 두면 진짜 뒤통수를 칠 수 있는데 미리미리 대비하는 조심성이 보인다. “그럼 이대로 계실 겁니까? 큰아버지께서 우리 채권을 해결해주시지 않으면 전 못 버팁니다. 그간 채권 이자마저 제대로 챙겨주시지 않아도 그냥 넘어갔어요. 이 정도가 한계입니다.” 진동기 부회장은 난감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 표정을 보며 슬며시 말했다. “차라리 외부에서 돈을 좀 빌리는 건 어떻습니까?” “도준아. 돈 빌릴 데가 있었으면 내가 조카인 네게 아쉬운 소리를 할 것 같아? 은행도 카드 때문에 휘청휘청한다고.” “아무리 힘들어도 부자 3대 간다고 했습니다. 몇천억쯤은 쉽게 빌려줄 곳이 있지 않습니까?” 갑자기 진동기 부회장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디? 그만한 자금력 있는 곳이 있어? 설마 명동 사채꾼들 말하는 건 아니겠지?” “명동까지 가면 갈 데까지 간 거죠. 거기 말고요…. 큰아버지 계시지 않습니까?” 손가락을 들어 위로 슬쩍 찔렀다. “큰? 형님!?” 진동기 부회장은 대번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 [208] 입지 확보 5 “네. 순양전자, 물산 등, 캐시 빨아들이는 회사가 수두룩하잖습니까? 쌓아 둔 사내유보금도 처치 곤란이라고 소문났는데.” 이미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도준이 너, 지금 순진한 척하는 거냐? 아니면 날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거냐?” 그의 안색이 불꽃처럼 붉게 타올랐다. “큰아버지. 지금 형제의 힘겨루기를 할 때가 아닙니다. 카드사가 정상적으로 흐르려면 조 단위의 돈이 필요한 거 아시죠? 정부 발표 보셨잖습니까? 부실 금액만 90조라고 합니다. 그 속에 순양카드의 부실이 몇 퍼센트나 될까요? 더 큰불 나기 전에 진화 작업 시작하셔야 합니다.” “넌 네 큰아버지를 몰라서 그따위 소리를 하는 게냐? 내 형님이 나를 위해서 회사 유보금을 단돈 십 원이라도 빌려줄 것 같아? 내가 몰락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잘 압니다. 두 분께서 지금 힘겨루기 중이라는 걸 전 국민이 다 아는데 제가 모를까요? 그러니까 돈 빌려달라고 부탁하지 마십시오.” “부탁 안 하면? 뺐을까? 훔치기라도 해?” “아뇨. 돈 빌려달라고 협박하십시오.” “뭐?” 붉은 안색으로 입을 떡 벌리는 진동기 부회장을 보며 가려운 곳을 슬쩍 긁었다. “순양카드는 이번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부도날 수밖에 없습니다. 큰아버지께서도 말씀하셨죠? 정부 지원은 기대하기 어렵다고요. 그럼 자체적인 해결만이 남았는데 이건 복잡한 사안이 아닙니다. 돈으로 메워야 해요. 돈 없으면 부도죠.” “그래서? 부도낼까?” “부도낸다고 하십시오. 카드가 부도나면 카드사에 돈 빌려준 중공업, 건설 등 순양그룹의 핵심 계열사가 흔들립니다.” 진동기의 눈빛이 먼저 흔들렸다. 그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장남보다 부족한 차남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계열사 주가는 오를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다. 하지만 폭락이라도 하는 날엔 외부 기관 투자자나 임원들의 차디찬 시선을 감당해야 한다. 더 위험한 것은 그룹 전체 주가다. “저도 충분히 파악했습니다. 두 분 큰아버지께서 가진 그룹 지배지분, 제가 가진 10%. 이건 교묘하게 섞여 있습니다. 외부에서 보기엔 완전히 계열사를 분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 한 명의 주식이 외부로 빠져나가면 지배력이 약해지죠.” 내부 거래는 문제없지만, 우리 셋의 주식이 외부로 나가는 순간 전체 지분 비율이 바뀌기 시작한다. “순양카드의 부도를 막으려면 중공업과 건설 등 핵심 계열사의 주식을 파는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십시오.” “내가 팔지 않는다는 걸 너도 알지? 마찬가지로 형님도 알아. 우린 순양그룹을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아.”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경고라고 했죠? 협박은 말로 하는 게 아닙니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정말 주식을 팔아치울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말입니다.” “행동이라니?” “현금서비스 중단하십시오.” “야!” 서비스 회사가 서비스를 중단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다. 깜짝 놀라 버럭 소리를 지르는 큰아버지에게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일시적이니까요. 순양카드의 서비스가 중단되면 그 시점부터 주가가 떨어집니다. 카드만 떨어질까요? 아니죠. 그룹 전체의 주가가 떨어집니다. 그게 협박이죠.” 진동기 부회장이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보였다. “딱 두 번만 서비스 중단 사태가 발생하면 모두의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순양카드가 부도날지도 모른다고 느낄 겁니다.”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형님이 움직인다…?” “울며 겨자 먹기 아니겠습니까?” 갑자기 큰아버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보였다. “넌?” “네?” “네 금융 계열사의 주가도 하락할 텐데? 가뜩이나 순양생명 자금난이 심해진다면서? 너도 내 형님이나 다를 바 없는 처지다. 넌 지금 내게 네 목을 조르는 방법을 알려준 셈이야.” 큰아버지의 미소가 더 커졌다. “아이고, 그렇네요. 이런 멍청한 짓을…. 하하.” 터져버린 내 웃음 때문에 큰아버지의 미소가 사라졌다. “딴 속셈이 있구나.” “두 분 큰아버님과 저의 차이점을 아직 모르십니까? 전 순양의 금융 계열사 앞날이 흐릿하다면 전부 정리해버릴 수 있습니다.” “뭐?” “제가 계열사를 꼭 지키고자 생각했다면 카드사를 큰아버지께 넘겼겠습니까?” 진동기 부회장은 눈을 실룩거리며 아무 말도 못 했다. “계열사 자산가치를 냉정히 평가하고 회사가 나락으로 더 떨어지기 전에 조각조각 내서 가장 비싼 값에 팔아버리면 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자 그가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 자식아! 네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회사를 그따위로 가볍게 생각해? 힘들 때 버티고 버텨서 지금의 순양그룹을 만들었다. 어렵다고 팔고, 힘들다고 넘겼다면 지금의 순양이라는 이름이 가당키나 해?” “시대가 변했습니다. 언제까지 과거의 방법으로 순양의 이름을 지킬 수는 없죠.” “뭐야?” “카드 대란 이거, 만만하게 보시면 안 됩니다. 내수가 확 죽었어요. 그리고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럴 때 목을 죄어오는 계열사를 쥐고 있느니 싹 정리하는 게 낫습니다. 그리고 경기가 정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인수하면 되죠.” “회사가 구멍가게야! 힘들 때 팔고 형편 풀리면 다시 사고?” “제게는 다를 바 없습니다. 기업 M&A가 복잡하고 어려워 보여도 상품을 사고파는 본질은 똑같지요. 어려운 순양생명을 팔고 나중에 좋은 생보사를 사서 간판을 바꿔 달면 됩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회사 될걸요?” 기가 차서 입을 열지 못하는 큰아버지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제 선택을 탓하지 마십시오. 이건 큰아버지 때문입니다. 우리의 채권 8천억을 만기 때 주시면 회사를 사고팔고 할 필요도 없어요. 그룹을 위험하게 만든 건 큰아버지의 순양카드입니다.” 자기 책임이라는 걸 아는 큰아버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복잡할 것이다. 내가 순양그룹에 손톱만큼의 미련도 없어야 할 수 있는 말을 들었다. 내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이것 역시 돈을 갚지 않으면 순양의 금융 부문은 사라질 것이라는 협박인지, 파악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복잡한 생각은 오래 할수록 안개 속을 헤매는 법, 그가 내 마음을 더 읽어내기 전에 일어섰다. # # # 진동기 부회장은 진도준이 떠난 빈자리를 한참 동안 노려보다 중얼거렸다. “저놈의 검은 속을 알면서도 속아주는 척…. 아니, 저놈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하나…….” 어린 조카에게 끌려다녀야 하는 자신이 한심한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 * 『오늘 자정을 기점으로 순양카드 현금서비스가 중지되었습니다. 일시 사용 중지된 K카드 이후로 두 번째 카드사의 서비스 중단입니다. 순양카드 측은 조속한 서비스 재개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아직 순양그룹 측의 공식적인 발표는 없습니다.』 TV 저녁 뉴스가 흘러나오는 곳은 한동안 비어 있었지만 늘 깨끗이 관리한 순양그룹 회장실이었다. 순양의 두 부회장 중 누구도 회장 의자에는 차마 앉지 못했다. 대신 나란히 소파에 앉아 벽에 걸린 그들의 아버지 초상화를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 어떡할래? 저 뉴스대로 곧 해결할 수 있어?” “아니. 못 해.” “지랄한다. 자랑이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고 부친의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초상화 감상을 주고받는 것처럼. “도준이한테 줘야 할 돈, 카드사 굴려야 할 돈, 모두 1조3, 4천억이야. 그걸 어디서 구해? 이미 까먹은 돈은 빼고 계산해도 그 정도 나와.” “조카한테 된통 당했구나. 꼬시다. 흐흐.” “된통 당한 건 아니고…. 한 일 년 정도는 재미 좀 봤어. 그리고 이런 사태가 터질 걸 도준이가 예측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나간 거 아닐까?” “너무 딱 들어맞으니까 하는 소리다.” 진영기 부회장도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소름 끼치도록 정확히 예견한 듯 카드사를 팔아치운 조카라면 상대하기가 버거울 정도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지만 이건 우연일 뿐이야. 그보다는 오늘이 가기 전에 6백억을 구해야 해. 그래야 내일부터 정상적인 서비스가 가능해.” “돈 빌려달라고?” “그랬으면 해.” “뻔뻔하기는….” 진영기는 동생이 이렇듯 뻔뻔한 이유를 안다. 순양카드의 현금서비스가 중단된 오늘 순양 계열사 전체 주가가 내려갔다. 철옹성 같던 순양도 무너질 수 있다는 불신이 퍼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불신은 순양의 힘을 깎아 먹는다. “내가 안 빌려주면 순양카드는 그냥 플라스틱 쪼가리가 되는 거야?” “그보다 더하지. 부도나는 건 시간문제야.” “막아. 엄살 부리지 말고.” “엄살 아냐. 정말 돈이 씨가 말랐어.” 진동기는 고개를 돌려 형님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카드를 버리는 거야. 빚투성이인 회사 하나 버리는 건 괜찮은데 문제는… 도준이야.” “도준이?” “그래. 담보로 맡겨놓은 중공업, 건설 주식. 그게 도준이 손에 들어간다고.” “그건 네 문제지, 내 문제가 아냐.” 어차피 그룹 지배지분의 이동이다. 그 지분이 동생 손에 있으나 조카 손에 있으나 진영기의 입장에서는 차이가 없다. “곧 우리 형님에게도 불똥이 튈 거야. 그때는 우리의 문제지.” “무슨 소리야, 그게?” “8천억이라는 돈을 순양생명에 갚지 않으면 그놈은 가진 주식 전부 팔아버리고 손 떼겠다고 하더라. 싹 정리하고 나중에 봄날이 오면 그때 다시 산다나? 그놈다운 생각이지.” “뭐? 주식을 전부 팔아?” 그제야 진영기도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친 새끼, 그걸 말이라고!” “그놈이 미쳐? 아냐. 우리 가족 중에 제일 똘똘한 놈이야. 알잖아. 이런 협박이 우리에게 먹힌다는 것도 아니까 말이야. 그놈은 돈 돌려받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진영기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계산했다. 조카가 가진 10%, 8천억의 담보라면 진동기의 주식 33% 중 최소한 7% 이상이다. 순식간에 17%의 주식이 빠져나간다. 이 주식이 만약 미라클로 들어간다면 그룹 지배지분의 33%를 미라클이 쥔다. 곧바로 순양그룹의 2대 주주로 등극한다. 우호지분을 확보한다면 미라클이 순양을 삼켜버릴 수도 있다. 진영기는 진동기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협박이 누구로부터 나왔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조카의 협박일까? 아니면 조카의 이름을 빌려 동생이 하는 협박일까? 누구로부터 나왔건, 이건 제대로 된 협박이다. 하지만 협박에 굴복하기에는 자존심이 센 진영기다. 협박을 거래로 바꾸고 싶었다. “1조5천억 주지. 대신….” “도준이가 담보로 가진 중공업과 건설 주식을 내놓으라?” “우리 아우, 눈치는 정말…. 나이 먹어도 녹슬지 않구먼.” 진영기는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안 돼. 7%나 되는 주식을 넘기면 저 초상화 밑에 앉아볼 기회조차 넘기는 거야. 차라리 함께 죽자고.” “독한 새끼….” 진영기는 아버지의 초상화를 가리키는 동생을 보며 혀를 찼다. “넌 이럴 때 보면 똑똑한 것 같지만, 허술한 면이 있어.” “내가?” “그래. 네 말대로라면 내가 1조5천억을 들고 도준이에게 찾아가면 그놈은 담보로 가진 중공업과 건설의 주식을 냉큼 던질 것 같은데? 순양카드가 부도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고…. 너 빼고 나와 도준이가 이 방에서 거래한다면 너 어쩔래?” 진영기의 말에 진동기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생각지도 못한 역습이었다. ======================================== [209] 다면기 1 “내가 왜 순양카드가 망하는 걸 막아야 하지? 1조 원이 넘는 거금을 써서 그깟 수수료나 챙기는 회사를 살리느니 그룹 지분 7%를 가지는 게 훨씬 이익 아냐?” 진동기는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룹을 삼키는 게 목적이라면 백배 나은 방법이다. “네가 당황하는 모습도 참 오랜만에 본다. 네 모습을 보니 내가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게 확실한가 본데?” 자신을 향해 빙글빙글 웃는 형님을 보며 정신을 다잡았다. “그것참, 무서운 놈이야.” “놈? 나한테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내가 친형에게 쌍소리 할 정도로 막돼먹은 놈은 아니지. 도준이 말이야.” “도준이?” “그래. 내게 큰 힌트를 줬거든.” 여유를 되찾은 진동기도 미소 지었다. “도준이만 주식을 싹 팔아치울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나도 그룹 지분을 싹 팔아버릴 수 있어.” “푸하하. 네가 주식을 팔아?” 진영기 부회장은 웃음을 멈추지 않고 손을 들어 초상화를 가리켰다. “저 초상화 아래의 의자, 저걸 포기한다고? 네가?” “기어서도 못 갈 것 같으면 포기해야지.” “차라리 조금이라도 그럴듯한 이유를 말하고 돈 달라고 해. 사지가 다 잘려 나가도 저 자리에 기어갈 놈이 무슨….” “형님이 아직 모르는 게 있어.” “그만해라.” “사람은 긍정보다 부정의 힘이 더 강해. 내가 저 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보다 남이 저 자리에 못 앉게 하려는 마음이 더 커. 내가 가진 주식을 몽땅 팔아버리면 순양그룹의 회장 자리는 아무도 못 앉지. 계열사 지배력이 사라지면 순양은 공중분해니까 회장이라는 직책이 없어지거든.” 엄청난 발언이지만 진영기 부회장은 여전히 웃기만 했다. 동생은 절대 순양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 그렇게 하던지.” 진영기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넌 여기 회장실에서 푹 쉬다가 가. 앞으로 이 방에 들어올 일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하.” 웃으며 회장실을 나가는 진영기의 뒷모습을 모며 진동기는 이를 악물었다. 협박은 말로 하는 게 아니라는 진도준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 * * “같은 건물에 있으면서 얼굴 보기 참 어렵구나. 넌 뭐가 그리 바뻐?” “죄송합니다, 큰아버지. 제가 찾아뵈어야 하는데….” “됐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앉아.” 진영기 부회장의 얼굴을 보니 내게 아쉬운 소리를 할 분위기다. 잘 보여주지 않았던 환한 웃음이 그 증거다. “내가 보자고 한 이유는 알겠지? 지금 좀 심각하다.” “네. 카드 대란 때문 아닙니까?” “하루면 해결한다고 큰소리치더니만 지금 3일째 현금 서비스 중지다. 이미 가맹점 대부분이 순양카드를 거부해. 그런데 네 큰아버지는 두 손 놓고 있다.” “네. 연일 뉴스를 장식하니…. 심지어 고의 부도를 의심하는 언론까지 나왔습니다.” “부도는 무슨, 그럴 놈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저라면 부도냅니다.” “뭐?” “제가 순양카드를 넘길 때 그룹 지분을 싹 빼고 드렸거든요. 순양카드는 완전히 계열분리 된 독립 회사입니다. 카드사는 사람과 돈이 전부인 회사, 사라져도 중공업 부문 계열사에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지저분한 먼지 전부를 올려버린 다음 부도 처리하면 묵은 때까지 씻어버리니 얼마나 좋습니까?” 진영기 부회장은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너라면 그러겠지. 하지만 동기는 그러지 못해. 순양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너와는 질적으로 달라. 계열사를 그리 쉽게 버리지 않아.” “정말 그렇게 믿으십니까?” “당연해.” “그럼 순양카드 주식을 사 모으십시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순양카드 주가가 연일 하한가를 찍습니다. 곧 휴지 쪼가리가 될 것처럼요. 만약 부도 안 나고 다시 정상화가 된다면 엄청난 차익을 볼 것 아닙니까?” 순간 당황한 기색이 옅게 비쳤다. “큰아버지, 지금 망설이셨죠? 그게 바로 진짜 마음입니다. 큰아버지께서도 사실은 순양카드가 부도날지 모른다고 걱정하시는 거죠.” “흠….” 진영기 부회장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카드는 좀 더 지켜보고 결론 내자. 그보다 내가 널 보자고 한 이유는 따로 있다.” “말씀하십시오.” “네가 카드사를 동기에게 넘기고 담보로 잡은 주식, 그걸 내가 살까 하는데… 어때?” 결국, 이 말이 나왔구나. 일단은 미루고…. “아직은 뭐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만기는 6월 말입니다. 두 달 뒤에 전액 상환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럴 일 없다. 내 자금이 아니면 동기는 이 위기를 못 벗어나.” “주식을 담보로 금융권에서 어떻게든 구해 올 수도 있으니까요. 상도의상 그때까지는 기다려야죠.” 이로써 확실해졌다. 진영기 부회장은 순양카드의 어두운 미래는 관심 없다. 다만 순양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만을 바란다. 그는 내 손의 담보, 그것을 원한다. 진동기 부회장은 담보만 되찾기를 원할 뿐이다. 지금쯤 머리 아픈 카드사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할 마음은 없다. 다만 부도만 피하고 명맥만 유지하면 만족할 것이다. 애초에 카드사를 인수하기 전의 상태, 딱 그때로 돌아가고 싶을 게 뻔하다. 난 둘 다를 원한다. 진영기 부회장은 물끄러미 날 쳐다보며 말했다. “채권이 얼마더라?” “8천억입니다.” “두 배를 주마. 그 채권 내게 팔아.” “네?” “넌 이쪽 전문 아니냐? 채권도 상품이다. 언제든 사고팔 수 있는 거 아니니?” “그렇긴 합니다만….” 걸려들었다. “내가 주식을 사겠다는 게 아니라 채권을 사겠다는 거야. 만약 동기가 그 돈을 갚으면 난 8천억을 손해 본다. 넌 무조건 남는 장사고. 그렇지?” “계산상 그렇죠.” “그럼 뭘 망설이지? 설마 너 순양그룹 지배 지분을 확보해서 이 큰아버지를 누르고 회장이 되고 싶은 거냐?” 참으로 직진하는 사람이다. 채권으로 내 속셈을 확인까지 하려 한다. “그럴 리가요. 금융사 몇 개 받은 것도 버겁습니다.” “그럼 당장 넘겨. 채권 장사해서 두 배 벌어.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안 그래?” 숨 한 번 쉴 짧은 시간, 계획, 계산을 끝내야 한다. 절반은 예상했던 일이지만 지분 확보를 위해 계열사 하나쯤은 날려버릴 만큼 과감할 줄이야…. 하지만 난 천재가 아니었다. 숨 한 번 쉬는 동안 떠오른 것은 시간을 더 벌자는 것뿐이다.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내일 나 만나서 거절하려면 지금 해라. 그래야 네 시커먼 속셈을 하루라도 빨리 아니까 말이다.”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적의, 이것 역시 피해야 한다. “큰아버지,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말씀을…. 긍정적인 답변을 위해 계약 조건을 좀 알아봐야 할 시간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진짜지? 하루 이상 끌면 네가 딴마음 먹고 있다고 생각할 거다.” 이렇게 밀어붙이는 모습은 할아버지 판박이다.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직까지는 이 양반과 척을 지면 안 된다. * * * “금융감독위원장을 만나고 싶습니다. 순양그룹의 금융부문을 책임진 저라면 독대할 수 있겠죠?” “가,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장도형 부사장은 내 요구에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이유는 묻지 말고요. 오늘 저녁을 같이하고 싶다고 전하세요. 참, 고민거리를 내가 해결해줄 수도 있다는 걸 넌지시 흘리시고요.” “아, 알겠습니다. 즉시 연락해보겠습니다.” “아니, 연락이 아니라 약속 잡으세요. 꼭!” 소리 지르는 날 보던 장도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얼마나 긴급하고 중요한지 알아챌 정도였다. “네. 저녁 시간 비워 놓으십시오.” 장도형은 휴대전화를 꺼내 들며 방을 나갔다. 할아버지 전화 한 통이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아쉬울 때마다 기댈 수는 없다. 대통령이 아니라면 내가 직접 그들에게 연락해야 한다. 그들도 내 요청을 거절하기는 힘들 것이다. 최소한 난 순양그룹의 진양철 회장의 후광을 안고 있다. * * * “급히 연락드렸음에도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용한 일식집 별실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사람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금감위 원장과 국장이 함께 들어왔다. 뉴스에 얼굴을 비치던 정책1국장이다.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신다니 안 나올 수 있나요? 기대하겠습니다.” 영양가 없는 소리나 한다면 곧바로 일어서겠다는 뜻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쁘신 두 분이니 바로 용건을 꺼내도 되겠습니까?” 음식이 나오기 전, 바로 말했다. 저 두 사람보다 내가 더 시간이 부족하다. “물론입니다. 오히려 제가 먼저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1국장이 반기며 머리를 끄덕였다. “순양카드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진동기 부회장의 심부름입니까?” 위원장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아닙니다.” “그럼 제 말을 전해주세요. 순양카드는 이 정도로 망가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다른 카드사에 비해 건실합니다. 당장 4천억 정도만 투입하면 급한 불 끕니다. 그런데 서비스를 중단한 건 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협박으로 보입니다.” “1조 원을 수혈해도 살아남기 힘든 카드사도 있어요. 그런 곳도 자구책을 마련하고자 안간힘을 쓰는데 순양카드는 아예 두 손 놓고 나 몰라라 하는 것 아닙니까? 순양그룹의 현금 동원력이면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거, 잘 압니다.” 이미 두 사람은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정부에 대한 협박이라는 건 어떤 의미죠?” “몰라서 그러세요? 공적자금 수혈을 요구하는 것 아닙니까?” 공무원들이라 그런가, 정보가 늦다. 집안싸움이 한창이라는 걸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걸까? “순양카드가 처음에는 바로 진도준 씨, 당신 소유였기 때문에 시간 낸 겁니다. 도대체 진 부회장이 원하는 게 뭐요?” 1국장의 노골적인 질문, 이 양반…. 화가 단단히 났나 보다. “진동기 부회장님이 원하는 건 저도 모릅니다.” “뭐요? 지금 우리와 농담하자는 거요?” “아뇨. 제가 그분의 머리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대신 제가 뭘 원하는지는 정확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이 사람이…!” 1국장이 버럭 하려는 순간 위원장이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말해봐요. 들어나 봅시다.” 차분한 위원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순양카드 사용을 금지해주십시오. 어차피 사실상 사용 불가한 카드 아닙니까? 영업정지 명령이면 충분합니다.” “뭐, 뭐요?” “네. 카드 업계 최초로 부도날 겁니다.” “지금 불난 데 기름 부으라고? 가뜩이나 카드 업계 전체가….” “끝까지 들어봐. 입 다물고.” 위원장의 따끔한 말에 1국장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고, 아직 재계 총수들과 청와대 만찬도 못 했는데 이런 사태를 맞으셨으니 좀 당황스러우실 겁니다. 그래서 지금 재계 압박의 강도를 논의 중이실 텐데…. 솔직히 재벌들은 웬만해서는 눈도 꿈쩍 안 합니다.” 1국장은 눈만 껌뻑했고 위원장은 살짝 미소 지었다. 재벌 3세 입에서 은근히 재벌을 까는 말이 나왔으니 별일이다 싶었을 것이다. “순양카드 영업정지라는 조치는 새로운 정부의 강력한 메시지가 될 겁니다. 이 정도 초강력 제재라면 재벌들도 앗! 뜨거라! 하겠죠? 자구책을 좀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진행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순양카드는 부도입니다. 자구책이고 뭐고 더는 기회가 없어요. 순양카드 부도는 그 충격이 너무 크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위원장은 내 의도를 읽어내려는 듯 내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 충격, 제가 전부 흡수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난 환한 미소를 머금고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 [210] 다면기 2 “지금 그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설명해주실 수 있겠죠? 흡수라는 단어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두 사람이 내 입만 바라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순양카드가 부도나면 말씀하신 대로 국민에게는 엄청난 충격일 겁니다. 혼란스럽기도 하겠죠. 아마 가맹점들은 다른 카드도 받지 않을 겁니다. 카드로 결제한 돈을 못 받을 수도 있다고 여길 테니까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카드사의 연쇄 부도를 염려한다면 단기채가 돌아가지 않아요. 자금 순환이 완전히 멈춰버립니다.” 1국장은 카드 경제 이면의 위험까지 덧붙였다. “잘 압니다. 하지만 새 정부 출범 이후 재계에 보내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요? 무려 순양그룹인데 말입니다.” “충격을 완전히 흡수한다면 그렇겠죠.” 위원장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는 내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다. “순양카드를 즉시 인수할 기업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인수요?” “네.” “지금 카드사는 웃돈을 얹어줘도 가져갈 곳이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1국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손을 크게 내저었다. “진도준 씨.” 위원장은 다시 차분히 나를 불렀다. “네, 말씀하십시오. 위원장님.” “당신이 순양그룹의 일원이니 솔직하게 터놓겠습니다.” 그는 긴 한숨을 쉬며 조심스레 말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나서서 순양그룹 계열사 하나의 부도 원인을 제공하면 우리 금감위에 엄청난 공격이 쏟아질 겁니다. 언론과 정부 기관에는 순양그룹을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거든요.” 순양 장학생이 얼마나 많으면 금감위의 수장이 두려워할 정도일까? “재빨리 사태를 수습해버리면 비난의 화살도 줄어들 겁니다. 그 정도에 흔들려서는 안 되겠죠? 갓 출범한 정부의 첫 기 싸움인데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도준 씨 조부님의 힘을 잘 아실 텐데요?” “그럼 그 부분을 제가 막아드리면 진행하시겠습니까?” “재빠른 수습이 가능하다면 논의해볼 수는 있습니다.” 순양카드를 날려버리는 정부, 그리고 충격이 퍼지기 전에 인수자를 찾아 순양카드를 정상화시킨다면? 어쩌면 카드 사태를 빨리 안정시킬 수 있다. 압박과 해결을 동시에 풀어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원하시는 타임라인을 제시해주십시오. 순양카드 최종 부도일에 맞춰 곧바로 인수해버릴 수 있다는 걸 고려하시고요.” “진도준 씨가 인수하실 겁니까? 이를테면 순양생명 말입니다.” “전 아닙니다.” 내 대답에 두 사람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들의 생각에는 나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부도난 순양카드를 인수할 곳은 없다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모두 카드사 때문에 머리를 감싸 쥐는데 부도난 카드사를 누가 인수할 거라고 생각해요?” 1국장이 다그치듯 말했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난 휴대전화를 꺼냈다. “들어오시죠. 대표님.” 짧은 통화를 끝내며 살짝 미소 지었다. “한국 경제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부도난 회사를 구제하신 분입니다.” 이때 문이 열리며 오세현 대표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오세현을 보며 놀랐지만 믿음직한 구원투수를 보는 듯했다. “이거, 오늘 저녁 자리가 꽤 길어지겠군요.” 위원장이 웃으며 오세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 # # “아시다시피… 비록 미라클이 외국 자본이지만, 소유와 경영을 철저히 분리한 모범적인 투자사 아닙니까?” “예상외였습니다. 아진그룹을 인수하고 곧 갈가리 찢어 매각하리라 예상했는데…. 지금처럼 키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맥주 몇 잔을 마신 위원장은 자화자찬에 가까운 오세현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럴 겁니다. 만약 순양카드를 인수한다면 미국의 선진 기법을 도입하고 부실 없이 투명하고 건실하게 탈바꿈하겠습니다. 우린 오너 일가의 전횡이 없지 않습니까?” 오세현이 괜한 너스레를 떨며 위원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럼 인수자가 미라클 투자입니까?” 1국장이 조심스레 묻자 오세현은 마시던 맥주 잔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뇨. 미국 미라클의 자회사인데… 별도 법인이 될 겁니다. 우리 미라클을 경계하는 힘 센 재벌들의 눈총이 따가워서 말입니다.”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네. 편히 말씀하십시오, 국장님.” “이 어려운 시기에 카드사를 인수하려는 이유가 뭔지…. 솔직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자동차입니다. HW의 신차, 잘 아시죠? 우리 <이스퀼로>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우리 딸내미도 그 차를 샀어요. 제가 보증까지 섰습니다. 하하.” 이번에는 위원장이 맞장구를 쳤다. “네. 그 차의 신용판매를 처음에는 순양캐피털이 맡았고 지금은 카드사들이 합니다. 그런데 지금 꼴을 보세요. 우리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카드사 때문에 판매가 급락했습니다.” “흠….” 두 사람은 이해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금융도 직접 손대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HW 그룹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라클 모두 일치된 의견입니다. 솔직히 우리 미라클의 전문 분야가 금융 아닙니까? 한국 어디와 비교해도 잘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오세현은 두 사람을 번갈아 살피며 조심스레 요구 조건을 꺼냈다. “만약 진행하신다면 최대한 빨리 끝내버리고 싶습니다.” “서둘러달라는 뜻입니까?” “네. 하루하루 떨어지는 판매 추이를 보면 열불이 나서 참기 힘듭니다. 전 최소한 올해 상반기전에 순양카드를 인수하고 싶습니다. 아니, 만약 순양이 어렵다면 다른 카드사도 괜찮아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서요.” 수상한 낌새를 차릴지 몰라 순양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타겟은 순양카드다. 자구책도 없고, 개선의 노력도 없으며, 고객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영업 형태. 순양이라는 이름만 믿고 까부는 모양새니 정부가 본때를 보여줄 수도 있다. “좋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 어떤 대답도 못 드립니다만 관련 부서와 상의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 우리의 결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위원장은 웃으며 말했고 1국장은 조용히 필요한 것을 요구했다. “오 대표님께서는 순양카드의 인수 조건과 인수 후 경영방침에 대한 자료를 준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금융위의 속마음이 보였다. 순식간에 해치우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누가 보더라도 반대할 명분이 없을 정도의 준비. 오세현에게 자료를 먼저 요구한 것은 자신들이 직접 수정하거나 보강해야 할 부분을 체크하겠다는 뜻이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상반기 중에 모든 걸 완료하고 싶습니다.” “확답은 곤란합니다만, 말씀드렸듯이 긍정적인 검토를 빨리 끝내겠습니다.” 웃는 얼굴로 식사 자리를 끝냈다. 금융위의 두 사람이 먼저 나가자 오세현이 긴 한숨을 쉬었다. “괜찮겠냐? 부실투성이의 카드사를 인수해도?” “멀리 보고 시작하는 일입니다. 몇 년 고생하면 정상화될 테고 효자 노릇 톡톡히 할 겁니다. 그리고 손해 보는 돈은 큰아버지가 충당해주신다네요.” “큰아버지? 누구? 진동기 부회장?” “아뇨. 진영기 부회장님요.” “뭐? 그 양반이 왜?” “지분 확보라는 욕심에 눈이 멀었으니까요. 무려 8천억이라는 웃돈을 주고 순양카드 인수 채권을 가져가겠답니다.” “미… 미친…. 돈이 썩어나는구나.” “진짜 썩어나니까 가능한 일이죠.” 그제야 오세현은 모든 퍼즐을 맞췄는지 이마를 탁 쳤다. “만기 전에 순양카드를 인수하고, 부채를 갚아버리면…?” “네. 8천억이라는 거금이 공짜로 들어오고, 카드사도 우리 손에, 지분도 우리 손에.” “처음부터 계획한 거야?” “계획한 건 맞는데 공짜 돈 8천억은 계획에 없었습니다.” “미치겠네, 흐흐. 카드사가 아무리 부실이라도 8천억 꽁돈이 들어오면 땅 짚고 헤엄치기 아니냐?” “당장 서비스 재개를 위해서 필요한 돈이 4천억이니까 문제없습니다.” “이건 뭐, 임도 보고 뽕도 따고 덤으로 4천억이라….” “아직 좋아하기는 이릅니다. 정부가 결단을 내려줘야 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내일 진영기 부회장님께 채권을 넘겨야 합니다. 내일까지 넘기지 않으면 절 순양그룹 회장 자리를 노리는 놈으로 간주하고 가만히 지켜보지 않겠다고 하시더군요.” “내일? 그럼 순양카드를 못 먹으면…? 이런!” “임도 보고 뽕도 따는 게 아니라 말짱 도루묵이죠. 본전치기로 끝납니다.” 갑자기 오세현이 벌떡 일어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가자, 금융위에 줘야 할 자료부터 만들어야지.” * * * “그렇지. 두 배 남는 장사를 않는다면 말이 안 되지.” 진영기 부회장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반겼다. “솔직히 제가 좀 죄송스럽죠.” “죄송? 아니야. 괜찮다. 식구끼리 주고받는 돈인데 뭐가 죄송해?” “둘째 큰아버지께 말입니다. 먼저 말씀드려야 하는데 차마 꺼내지 못했어요.” “됐다. 너보다는 내가 말하는 게 더 편할 거다. 불편한 소리는 내가 하마.” “네.” 큰아버지는 굳은 내 표정을 보며 어깨를 툭 쳤다. “괜찮다니까. 그보다 계약서부터 빨리 준비하자.” “표준 계약서가 있으니 제가 내일 아침까지 준비해서 가져오겠습니다. 변호사 검토는….” “검토는 무슨, 빨리 만들어서 와라. 내가 도장 쾅 찍고 바로 입금하마.” “네.” 부회장실을 나왔을 때, 불안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어젯밤 금융위 사람들을 만났으니 아무리 늦어도 아침에는 할아버지의 전화가 와야 했다. 그게 정상이다. 아무리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다고 하나 공무원은 그대로다. 그들이 순양카드를 회의 안건에 올렸다면 누군가는 할아버지께 쪼르르 달려가 보고하고, 의견을 묻고, 허락을 받을 것이다. 이 계획이 내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 역시 보고했을 테니 할아버지께서 날 찾으셔야 한다. 그런데 휴대전화는 울리지 않으니 불안하기 짝이 없다. 혹시 순양의 계열사가 부도나는 걸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시는 걸까? 불안 요소는 한시라도 빨리 제거하는 게 낫다. 채권을 넘기는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에 말이다. 부회장실에서 곧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 * * “왜? 내가 훼방이라도 놓을까 봐 그리 초조한 얼굴이냐?” 역시 모든 걸 다 알고 계신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순양이라는 이름에 오점을 남기는 셈입니다.” “이놈 보게. 다 저질러 놓고 인제 와서 내 눈치를 살피는 게야?” “죄송합니다. 일이 갑자기 진행되다 보니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런 건 번갯불에 콩 볶듯 해야지. 됐다.” 별일 아닌 듯 말씀하시니 한시름 놓았다. 그리고 할아버지 눈치를 슬쩍 보며 말했다. “누가 연락 왔었습니까?” “청와대 경제수석이라는 놈이 날이 밝자마자 전화 왔더구나. 금융위원장의 제안이라면서. 최초 제안자는 너라는 걸 몇 번이나 말하더라. 그놈도 눈치챈 거지. 이건 집안싸움이라는 걸 말이다.” “청와대가 우리 집안싸움에 껴들기는 거북했을 텐데요?” “그놈들에게도 좋은 건수거든. 네가 말했다면서? 대기업에 일침을 가할 절호의 기회라고.” “네.” “정권 잡은 지 이제 겨우 두 달이다. 한창 인기 있을 때, 그리고 언론도 허니문이니 뭐니 하며 눈치 살필 때, 힘자랑하고 싶겠지. 네가 그 기회를 만들어준 셈이니 얼마나 좋아하겠냐? 타이밍은 정말 잘 잡았다.” 칭찬인지 평가인지 좀 애매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다. “그런데 도준아.” “네.” “만신창이가 된 카드사를 네가 되살릴 자신은 있는 게냐?” 가장 중요한 질문을 빼먹지 않으시는 걸 보니 아직 정정하시다. “자신 없으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버려.” 할아버지의 명쾌한 대답을 들으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 [211] 다면기 3 “돈놀이의 끝은 돈을 떼이고 패가망신하거나, 돈을 벌어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면하지 못한다고 내가 몇 번이나 그놈들에게 말했어.” 여전히 신용카드 사업을 마땅치 않게 여기신다. 화폐 대신 신용카드가 자리 잡아가는 시대의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긴, 지갑을 직접 들고 다니며 돈을 써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못 하실 것이다. 필요한 건 말 한마디면 비서들이 알아서 챙기니 돈이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렸다고 해도 믿어야 할 판이다. 어쩌면 카드사였기 때문에 부도나는 걸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른 제조업 계열사였다면 불호령이 떨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패가망신 일보 직전입니다만 제가 부수고 새롭게 쌓겠습니다. 튼튼하게요.” “당연히 그래야지.” “네?” “시절 좋을 때 비싸게 팔았다가 망할 때 되산다면 바보짓이지. 다른 비전이 있으니 그리할 것 아니냐?” “맞습니다. 앞으로 카드 사업이 순양의 금융 부문에 큰 역할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눈치를 슬쩍 보자 할아버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놈 보게. 그게 다가 아니구먼. 뭐냐?” “사실은….” 금융위를 급히 만난 이유, 카드사 담보 문제 그리고 진영기 부회장과의 거래 등, 단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내 이야기가 끝나도 할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한참을 기다리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응? 뭐가 말이냐?” “말씀이 없으셔서요.” “욕심에 눈이 멀면 얼마나 멍청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아들놈이 한심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어. 허허.” 한심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 할아버지께 말했다. “아닙니다. 만약 그룹 지배 지분 7%를 확보할 수 있다면 저 역시 그 정도 돈은 생각하지도 않고 던졌을 겁니다.” “멍청하다는 건 그런 말이 아니다. 어째서 너처럼 생각하지 않았느냐 하는 거지. 수혈해도 되살아날지 아닐지 모르는 순양카드를 중심에 놓고 생각했어야 한다. 영기 그놈은 오로지 주식만 바라보고 있지 않으냐?” 두 번의 인생을 살지 않는 다음에야 누구나 나처럼 생각하는 건 불가능하다. 4년 뒤 벌어질 카드 대란을 예측할 천재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 “전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제게는 천운이 따르지 않습니까?” “겸손은 됐다. 넌 네 큰아버지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욕심만 앞서면 지도를 눈앞에 들이대도 길을 잃는다. 명심해라. 순양의 회장이 되려는 이유가 오로지 회장이 되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이유뿐이라면 절대 이 서재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워낙 높은 자리이다 보니 욕심이 앞서는 것 아닙니까? 전 큰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표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이 자리를 오래 못 지켜.” 아뇨, 지킵니다. 수만 명의 순양 직원들이 자리를 더욱 공고히 만들어줍니다. 물려받은 순양그룹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만이 목적인 진영기도 서재를 지켰고 아마 손자인 진영준도 지켰을 겁니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었다. 대신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전화 몇 통 넣어줄까?” 금방 온화한 표정으로 변한 할아버지가 말했다. “어떤 전화 말입니까?” “똥덩어리인 순양카드, 깔끔하게 치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이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고위 관계자들이 할아버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혹시 부채를 덜어달라는 압력으로 느껴지지나 않을까? 새 정권의 눈치를 봐야 하는 그들에게 괜한 부담만 주는 건 아닐까? 아니, 아예 반대로 받아들인다면?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그냥 강력한 조치를 취할 거라는 중간발표만 빨리 해달라고….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것참, 뭘 그리 잔머리를 굴리느냐?” 할아버지는 수화기를 들었다. “경제수석에게 민원 하나 넣고 싶다고 해. 급한 민원이니 오후에 차나 한잔하면서 말이야. 그래, 청와대에서 가까운 명동에서 보잖다고 전해.” 할아버지는 전화를 끊고 날 향해 눈을 찡긋했다. 명동이면 강북 순양호텔이다. 나도 재빨리 휴대전화를 꺼냈다. “조용히 대화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빨리 준비하세요. 출입이 눈에 띄지 않도록 동선 확보해 놓고요.” 전화를 끊고 할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오후에 만나실 테니 저랑 점심 하시겠습니까? 호텔에 준비시켜 놓겠습니다.” “내가 왜 만나? 볼일은 네놈이 봐야 하는데.” “네?” “가서 만나. 어떻게 할지는 네가 알아서 하고.” 이런 기회를! 가장 적절한 도움이 아닌가?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쉽지는 않을 거다. 너만 민원 넣는 거 아니다.” “가장 먼저 민원 넣는 건 저니까, 일단은 유리하지요.” 정부 발표가 나오면 진동기 부회장도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다. 영업 정지라는 극단의 조치를 막으려 연줄을 총동원할 것이고 그 연줄 속에는 분명 경제수석도 포함될 것이 뻔하다. “그래. 단 하루 만에 이렇듯 많은 일을 벌였고 앞으로도 많은 일이 벌어질 테니 먼저 출발하는 놈이 유리하지. 암.”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앞둔 할아버지는 계속 웃음을 지었다. “그럼 여기서 할아버지와 점심을 함께 먹고 출발하겠습니다.” * * * “실례를 범했습니다.” “별말씀을요, 진도준 씨. 당사자를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게 더 빠르죠.” 청와대 경제수석은 환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미는 손을 잡자 그의 힘이 느껴졌다. “사실 진 회장님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면 오히려 불편하죠. 툭 터놓고 편하게 말하기도 어려우니까요. 진도준 씨는 속마음을 에둘러 말하지는 않겠죠? 하하.”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좋은 인상으로 호감을 준다. 갓 들어선 정권이니 이런 태도가 가능한 것이다. “숨기는 게 없다면 이야기도 빨리 끝나겠군요. 한창 바쁘신 분 오래 잡고 있으면 결례니까요.”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나저나 실물이 훨씬 잘생겼군요. 순양그룹의 일원이 아니었다면 연예인을 해도 성공하셨을 것 같습니다.” “원래 제 꿈은 잘생긴 법조인이었습니다. 할아버지 뜻에 따라 이러고 있지만 말입니다.” “재능이 꼭 꿈을 따라가지는 않죠. 타고난 겜블러 같으니 어차피 이쪽 길로 걸었을 것 같습니다.” 겜블러라…. 이미 내 조사를 끝냈구나. 하긴, 순양카드를 부도내자고 말한 게 나였으니 나부터 탈탈 털었음이 틀림없다. “그럼 이번에 제가 내민 패는 어떻습니까? 승산이 있어 보입니까?” “글쎄요. 히든카드를 한번 보여주시죠. 그래야 승패를 점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툭 터놓고 말하자더니 선문답 흉내를 낸다. 누가 정치하는 놈 아니랄까 봐. “순양카드 외에 자빠지는 카드 회사 하나 더 살려드리죠.” “뭐요?” “정부 차원에서 공적 자금 투입은 없을 테니까 순양카드가 부도나면 두어 개는 더 버티지 못할 테죠. 그중에 하나는 살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세요.” 경제수석은 잠깐 눈을 깜빡하더니 머리를 갸우뚱했다. “거참, 이해하기 어렵네요. 부실덩어리 카드사를 두 개나 떠안으면 부담이 보통은 아닐 텐데, 괜찮겠습니까?” “감당할 수 있으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자금력은 상상을 초월하죠. 이번에는 미국 자본이 들어온다고 하니 좋지 않습니까?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모양새가 나오니까요. 외국 자본으로 한국의 망한 회사를 살린다.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히든카드가 좀 세군요.” 살포시 보이는 미소가 그의 마음을 보여준다. “히든이 하나 더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경제수석은 머리를 끄덕였다. “두 번째 카드사로 대현그룹이 어떨까요?”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지고 눈을 크게 떴다. “대현카드 말입니까?” “이미 그쪽도 오늘내일합니다. 링거 꽂고 겨우 버티는 중이죠. 대현자동차의 도움을 일절 받지 못하니 돈 나올 곳도 없을 겁니다.” “순양과 대현이라… 이거 살 떨립니다.” 말과는 다르게 약간 흥분한 모습이다. 세상에 뭔가 보여주고 싶을 때 아닌가? 새로운 정권의 힘과 권위, 그것이 한국을 양분하는 재벌을 조지는 모습으로 보여진다면? 그림은 아주 좋다. “두 곳만 손대면 대기업들은 알아서 길 겁니다. 다음 차례가 되지 않으려면 부실을 빨리 걷어내고 정상화에 최선을 다하겠죠.” “그럴듯하긴 한데, 말했다시피 살 떨려서 원….” 이 사람이 이렇게 엄살떠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혹시 언론이 떠들어 댈까 봐 그러십니까?” “당연하죠. 허니문 기간이라 살살 긁는 정도가 전부인데, 정부가 신문사의 광고주를 두들겨 패면 그들이 가만있겠어요? 대형 광고주인 순양과 대현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를 물어뜯기 시작할 겁니다. 허니문이 비터문(Bitter Moon)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입니다.” “겁먹지 마십시오. 그런 일 없을 겁니다.” “네?” 난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일 때 잠시 뜸을 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최대 광고주는 순양, 대현그룹이 아닙니다. 순양전자와 대현자동차죠. 이 회사들의 주인은 카드사의 주인을 아주 싫어합니다. 이유는… 잘 아시죠?” “아…!” 경제수석은 긴 한숨을 쉬었지만, 표정은 확연히 밝아졌다. “모든 언론사가 청와대를 칭찬하지는 않겠지만 침묵할 겁니다. 가장 시끄러운 한성일보도 바로 순양전자와 사돈 간이니 쓴소리 한 번 정도로 끝낼 거니까 걱정은 접어 두십시오.” 경제수석은 등받이에 기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한참을 석상처럼 꼼작도 하지 않던 그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진도준 씨, 당신은 이 일로 얻는 게 뭡니까? 물론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건 알지만, 그것만으로 집안 계열사를 망하게 하는 데 앞장서는 건 당최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건 이미 금융위원장님과 미팅할 때 말씀드렸습니다만.” “복잡한 집안 문제라고 하신 것 말입니까?” “네.” “그렇다면 전 오늘 나눴던 이야기는 없었던 일로 할 수밖에 없어요.” 갑자기 왜 딴소리를 꺼내지?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 텐데? “청와대, 아니 정부의 힘을 집안 문제 푸는 데 쓸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 일을 쓸모 있게 하려면 그 집안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말해줘야 합니다. 제가 이용당한다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말입니다.” 결국, 빤스 안까지 들여다봐야 움직이겠다는 말인데… 빤스 안은 지린내가 진동해야 한다. 그룹 지분을 움켜쥐겠다는 고차원적인 것보다는 좀 더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게 그럴 듯하다. “제가 뛰어난 겜블러가 된 건 가려진 패를 미리 다 봐 뒀기 때문입니다. 타짜들은 그렇다지요? 48장의 화투패의 순서를 다 안다고 하더군요.” “돈 때문입니까?” 눈치 빠른 자다. “네. 전 수석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신다면 내일부터 순양카드와 대현카드의 주식을 사 모을 생각입니다. 특히 순양카드는 이미 액면가보다 더 떨어졌으니, 다시 정상화가 됐을 때는 족히 10배의 수익은 문제없을 겁니다.” “캬! 무섭네, 우리 후배님.” 참, 이 양반도 우리 학교 출신이었지. 그런데 왜 갑자기 학벌을 거론할까? “도대체 얼마나 챙길 생각이실까?” “밑천이 워낙 많아서 얼마나 챙길지는 저도 모릅니다.” 난 경제수석의 웃는 얼굴을 보며 슬쩍 한마디를 던졌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선배님. 어차피 전 범생이라 돈 쓸 일도 없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 [212] 다면기 4 “진도준 씨, 괜히 재벌 총수 흉내 내지 마세요.” 불쾌한 기분을 감추려고 애쓰지만, 얼굴색이 변했다. 그는 아직 타락한 정치인이 아니다. “재벌 총수는 저처럼 직접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서 처리하는 아랫사람이 많습니다. 저처럼 직접 돈 이야기를 꺼내면 그건 호의입니다. 이를테면 용돈 같은 거죠. 용돈 주며 대가를 바라지는 않으니까요.” “돈에 이름표를 붙이지 마세요. 돈의 크기가 바로 이름입니다. 크면 뇌물, 적으면 용돈. 아닙니까?” “크기는 상대적인 건데…. 뭐, 이런 걸로 입씨름하려는 건 아닙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내게는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 수준의 돈이 누군가에게는 팔자 고칠 돈이 될 수 있다. 저 사람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경제수석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사과받겠다고 한 말은 아닙니다. 단지, 서로 조심하자는 의미였어요. 아무튼, 잘 알았습니다.” “긍정적인 답변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아뇨. 지금은 뭐라 말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일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 정도 대답은 충분치 않다. 난 확답을 들어야 한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난 현금 8천억만 챙기고 나머지를 다 잃는다. 카드사, 지분…. 그깟 돈 몇천억 챙기자고 3년을 준비한 게 아니다. “수석님.” “네.”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일? 제가 그거 확인하자고 수석님 만나는 거 아닙니다. 시도해볼 만한 일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은 방안이죠. 전 그걸 위해 금융위부터 미라클 인베스트먼트 오세현 대표까지 만나 설득했습니다.” 난 경제수석과 달리 불쾌한 기분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이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맞댄 위기 아닙니까? 전 그 위기를 정면 돌파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드렸어요. 더불어 정권의 힘을 과시할 찬스까지. 그런데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돌변한 내 태도에 당황한 경제수석은 뭐라 말하려 했지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렇게 미적거리는 건 미라클도 못마땅하게 생각할 겁니다. 망해 가는 회사를 인수하는 리스크가 큰 비즈니스예요. 미라클 마음 바뀌기 전에 먼저 서둘러야 하는 게 정부 아닙니까?” “이봐요, 진도준 씨. 차분히….” 당황한 그를 보며 벌떡 일어났다. “한 시간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확답 없으시면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하, 한 시간?” “대통령 수석 비서관 아니십니까? 관련 부처 장관 부르시고 대통령님께 직보하십시오.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을 더 끈다는 건 현 정권의 추진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이 의심은 이번 일을 제대로 해치우지 못할 것이라는 불신을 키울 겁니다. 그럼 저부터 없었던 일로 할 겁니다. 그럼.” 그에게 머리를 공손히 숙인 다음 돌아섰다. 몰아세울 때는 틈을 주면 안 된다. * * * 한 시간이 일 년 같았다. 확신은 있었으나 몸 사리는 공무원의 습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어 계속 서성거렸다. “거참, 정신 사납다. 좀 앉아.” 오세현은 느긋했다. 이번 일이 잘못되어도 8천억이라는 돈을 챙기니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고 나를 다독였다. 하지만 내게는 7%, 할아버지 서재에 딱 7%만큼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니 8천억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일이다. “걱정하지 마. 이번 건은 시나리오가 좋아. 아무도 악역이 없고 손해 보는 놈이 없어. 우리만 빼고.” “우리요?” “그래. 네가 카드 사업이 앞으로 비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하는 거야. 만약 카드 사업 분야가 계속 이 상태라면 엄청난 손실을 입을 거야.” “삼촌.” “응.” “지금 지갑에 현찰 얼마나 있어요?” “뭐? 갑자기 그건 왜?” “한번 보세요. 지폐보다 카드가 더 많죠? 혹시 몰라 비상금으로 들고 다니는 자기앞 수표 빼고 나면 카드뿐이죠? 그게 바로 카드 사업의 비전입니다.” 오세현이 지갑을 뒤적일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경제수석과 헤어진 지 딱 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네, 수석님.” ― 방금 회의 끝마쳤고, 이 계획은 추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전화기에서 지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전 지금 미라클의 오세현 대표와 함께 있습니다. 곧바로 전달하겠습니다.” ― 그리고 상반기 안에 인수 절차를 끝내고 싶다고 금융위에 말씀하셨다고요? “네. 문제 있습니까?” ― 아뇨. 더 빨리 처리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겁니다. 충격파를 줄이려면 전광석화처럼, 이것이 우리의 최종 결론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다. “타임 스케줄을 주시면 거기에 맞추겠습니다. 지금부터 한 달 안에 처리한다고 해도 문제없습니다. 인수 자금은 이미 준비했다고 들었습니다.” ― 잘됐군요.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석님. 그리고 좀 전의 무례도 사과드립니다.” ― 별말씀을요. 일인데요. 하하.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 곧 정부 발표가 있을 겁니다. 그게 바로 신호탄이니 손발 잘 맞춰봅시다. 통화를 끝내고 오세현을 향해 웃었다. “됐습니다.” 오세현은 손뼉을 짝 치고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이건 뭐, 투자 없이 전리품만 챙기는구나. 네 큰아버지 둘은 졸지에 호구 됐고.” “첫째 큰아버지가 제일 황당할 겁니다. 딱 두 달 만에 8천억을 날려버렸으니까요. 하하.” 그 거만한 표정이 어떻게 바뀔지 정말 궁금했다. * * * “부회장님.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도 강력한 자구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심상치 않아요.” “현금서비스 중단한 지 많이 지났습니다. 금융권의 항의도 만만치 않습니다.” 부회장실에 모인 카드사 임원 몇몇은 식은땀을 흘리며 진동기 부회장에게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들도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에 더는 눈치 볼 수 없었다. “서비스 중단은 이제 소비자들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물품 구매에만 사용한다면서요? 이대로 좀 더 버팁시다. 한 방에 모든 걸 다 해결할 테니.” 임원들에 비해 여유는 보였지만 진동기 부회장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듯 퀭한 눈빛이었다. “부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비서 한 명 뛰어 들어왔다. 그는 노크도 하지 않은 것쯤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TV부터 켰다. “뭐야?” 임원 한 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지만, TV 화면을 보자 그도 입을 떡 벌리며 아무 말도 못 했다. TV에는 아침드라마가 한창이었지만 하단에는 속보 문자가 흘렀다. <긴급속보 : 정부, 순양카드 영업 정지 결정. 4월 xx일 자정 기점으로 순양카드 사용 불가.> 이틀 뒤다. 카드 회사의 유일한 상품인 신용카드가 단순한 플라스틱으로 변하는 시간이 단 이틀 남았다. 이미 임원들의 휴대전화는 시끄럽게 울어 댔다. 진동기 부회장의 전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임원들은 시끄럽게 울어 대는 전화를 무시하고 오로지 진동기 부회장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모, 모두 나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 그, 그리고 언론 통제도 시작하고. 빨리….” 하얗게 질린 얼굴, 소리치지도 못하고 더듬거리는 걸 보면 그 충격이 얼마니 큰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임원들은 자리를 박차며 달려 나갔고 진동기 부회장은 머리를 푹 숙인 채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숨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그도 몸을 일으켰다. 일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 마지막 패를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의 집무실로 향하는 진동기 부회장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어서 와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진영기 부회장도 TV에서 긴급히 다루는 속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 순양카드 영업 정지는 새 정부의 가장 강력한 조치로 알려졌습니다. 이로써 카드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그간 카드사의 고강도 자구책을 요구했지만, 순양카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재계는 카드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기 위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경고로 받아들였습니다.』 『순양그룹은 이번 정부 조치에 대한 공식적인 대응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진영기 부회장은 TV를 껐다. “이번 정부, 간뎅이가 보통 아니지?” “이거 형이 장난친 거 아니지?” “나 이번 정부와 안 친해. 아니, 친하다 해도 이건 아니지. 분명히 말하는데 난 관계없어.” 진영기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틀 남았어. 어쩔 셈이냐?” “회사를 날려버릴 수는 없잖아. 살려야지. 그러니까 4천억 긴급 지원해줘.” “내가? 나 돈 없어.” 동생을 바라보는 진영기의 눈빛은 이미 승리자였다. “내가 낭떠러지에 서게 되면 무슨 짓을 할지 이미 다 말했을 텐데?” “아, 그룹 지배 지분 처분한다는 거?” 진영기가 콧방귀를 뀌자 진동기는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왜 이렇게 여유 있을까? “처분해서 막을 수 있으면 막아야지. 그게 기업을 책임진 총수의 역할이잖아.” “형님!” 진영기는 소리치는 동생에게 서류 파일 하나를 툭 던졌다. “뭐든 타이밍이 중요한 거야. 네 협박은 이미 시효가 지났어. 그거 한번 봐.” 진동기는 황급히 파일을 펼쳤다. “이…… 이게…….” “며칠 전에 사인했다. 이제 넌 내게 8천억을 빚진 거야. 순양카드가 무너지면 내 손에 7%의 지분이 더 들어와. 내가 널 도와줘야 할 이유가 없어진 거야. 아니…. 솔직히 빨리 망하라고 빌고 싶을 정도라니까. 이번 정부가 이처럼 고마울 수 없어. 이럴 줄 알았으면 선거자금 몇십억 더 얹어주지 못한 게 후회되더라.” 진동기는 떨리는 손에 쥔 계약서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도준이, 이 자식이…!” “괜히 어린 조카 원망하지 마. 그놈도 네 눈치 많이 보더라. 하지만 어쩌겠어? 받을 돈 8천억이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내 담보가 고작 8천억으로 보여?” “돈으로도 못 사는 주식이란 걸 그놈도 알아. 하지만 이제 명확해졌지? 도준이 그놈은 그룹 지배력보다 돈을 더 좋아한다는 걸? 어린놈이지만 계산이 빨라. 순양을 차지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거지.” 의구심이 드는 진동기였다. 어린 조카지만 야심은 이 자리의 두 사람보다 더 크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지분만큼은 쥐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잘못 읽은 걸까? “이제 내 지분이 43%야. 8%만 더 있으면 순양그룹 회장실에 내 이름을 붙인다. 진짜 시간문제일 뿐이지. 임원들 설득하고 도준이나 오세현이에게 그룹 계열사 몇 개 떼 주면 끝난다.” 사색이 되어 아무 말 못 하는 동생에게 진영기가 놀리듯 말했다. “아, 네 지분 그냥 넘길래? 그럼 부회장이라는 자리와 지금 가진 계열사 그대로 맡겨 두지. 네가 경영 감각 좋다는 건 내가 잘 알거든. 그리고 우린 피를 나눈 형제잖아. 누가 뭐래도 모르는 놈들보다는 가족이 낫지.” 진동기는 이죽거리는 형의 말을 더 듣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는 그 어떤 해결책도 나오지 않는다는 판단이 섰다. 이제 자신을 낭떠러지에서 건져낼 사람은 오로지 아버지뿐이다. 진동기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할 때 진영기의 독한 목소리가 그의 등을 찔렀다. “한성일보의 내일 자 헤드라인을 잘 봐.” “뭐?” “언론이 눈치만 봐왔던 순양그룹을 마음껏 씹어도 된다는 시그널을 보낼 거야. 그럼 넌 한순간에 파렴치한 경영자가 될걸? 이제 아무도 널 만나주지 않을 거다. 못 빠져나와.” 방금 핏줄이 어쩌고저쩌고했던 놈의 입에서 저딴 소리나 하다니. 진동기 부회장은 이를 악문 채 문을 박차고 나왔다. ======================================== [213] 망연자실 1 “그래서? 네놈 지분을 누가 가져갔다고?” “형님입니다.” “다행이네.” 진동기 부회장은 마치 구경꾼처럼 말하는 진 회장에게 얼떨결에 소리 질렀다. “아버지!” “이놈아!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히 생각해라. 엉뚱한 놈이 순양 지분을 가져갔으면 어쩔 뻔했어?” 아버지에게는 왼쪽 오른쪽 주머니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진동기는 아버지의 생각을 바꿔야 했다. “아직 되찾을 시간은 충분합니다.” “시간은 충분한데 돈이 부족하다?” “네.” “그래서? 너, 설마 그 부족한 돈을 내게 달라는 건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아버지. 딱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나 돈 없다.” 아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진 회장은 발걸음을 옮겼다. 정원을 산책하는 아버지의 꽁무니를 쫓는 진동기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마지막 동아줄이 끊어지려 한다. “내가 그룹지분 정리할 때 뭐라고 했니? 모두 말아먹어도 관여하지 않는다고 했지?” 진동기는 입이 달싹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지분 말고 돈! 돈은 아직 물려주지 않았다. 바다 건너 저 멀리 어딘가에 수조 원의 돈이 잠자고 있다는 건 걸음마 뗀 어린애도 다 아는 사실, 그중 일부만 꺼내 주면 해결된다. 하지만 해외 비자금까지 입에 올리는 것은 금기 사항이다. 돈 달라고 칭얼대는 철부지 같은 모습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 아버지.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돈 달라는 소리는 안 할 테니 제발 은행에 전화라도 좀 해주십시오.” “은행? 탈탈 털어봐라. 내 돈….” “그게 아니고요. 대출이라도 알선해 주십시오.” 발걸음을 옮기던 진 회장이 휙 돌아서며 소리 질렀다. “어림도 없다. 지금 대한민국 은행장들 모가지가 간당간당해. 정권이 눈을 부릅뜨고 그놈들을 조사하는데 부당 대출이 가당키나 해? 네놈은 담보도 없지 않으냐?” 거절의 변명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어떡하다 지분을 뺏겼는지 물어보지도 않으셨다. 이미 내막을 다 아신다는 뜻. 진동기는 현기증을 느꼈다. 진 회장은 참혹히 일그러진 아들을 불렀다. “동기야.” “…네.” “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려웠던 적이 없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회사에서 일했다. 젊을 때야 회사 왔다 갔다 하며 갖은 똥폼을 다 잡았지만 철들고부터 일재미를 알았다. 그 뒤로 어찌 어려운 적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어려움이 아니라 위기다. 그것도 순양그룹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위기. “아버지. 제가 아무리 아버지께서 깔아 놓은 꽃길만 걸었다 해도 어떻게 힘든 일 한 번 없었겠습니까?” “목숨이 간당간당하는 위험 말이다.” 바로 지금이 그렇습니다. 알면서 물어보십니까? 이것 역시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목숨 같은 그룹지분을 뺏겼다. 형님이 과반수의 지분을 확보하면 자신은 순양그룹 사옥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시체처럼 숨죽이고 살아야 한다. 진 회장은 입을 다물고 있는 아들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지금 이 고비를 네 힘으로 넘겨. 그럼 네 형인 영기가 흔들릴 거다.”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위기를 넘길 방법이 없다. 진동기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가진 것 전부 던지는 일이다. “이 위기를 넘기려면 제가 가진 나머지 그룹지분 전부를 담보로 돈을 빌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든지. 지금 네가 가진 것 중에 쓸 만한 건 그것뿐이지?” 진 회장이 단 일 초도 생각하지 않고 말하자 진동기는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버림받았다. 아버지는 자신을 버렸다. 계열사 지분을 담보로 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룹 지배 지분을 담보로 맡긴다는 말이지만 아버지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순양의 지배력이 은행 담보로 들어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자신의 지분이 은행으로 들어가는 순간 아버지는 그 지분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물려줄 것이다. 그 누군가는 형님 아니면 조카. 이제 마지막 남은 수단도 막혀버렸다. 진동기는 아무 말 없이 머리만 꾸벅 숙이고 발걸음을 돌렸다. 진 회장은 힘없이 축 늘어진 차남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칼을 들고 찌르는 놈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아비에게 공갈이나 치다니. 쯧쯧.” * * * 작년 12월에 준공한 정부중앙청사 별관 회의실은 몇몇 관계자 외에는 출입을 엄중히 제한했다. 바로 오늘 새로 출범한 정부의 결단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만약 오늘 회의 결과가 좋지 않다면 앞으로 5년, 아니 영원히 실패한 정책 사례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회라고 생각하는 재계는 정부의 미숙한 대응으로 건실한 기업을 무너뜨렸다고 떠들며 반격할 것이다. 앞으로 그 어떤 견제나 제재조치는 불가능해진다. 이 사실을 잘 아는 정부 측 회의 참석자, 즉 재정경제부 차관, 청와대 경제수석, 금융감독원 1국장은 비장한 표정이었다. 이들 못지않게 긴장한 중년 사내들도 있었다. 그들은 순양카드의 채권자들이다. 순양카드의 단기 유동자금을 책임졌던 금융사와 투자사의 임원들은 빨리 발을 빼지 못한 한 박자 늦은 행동을 후회하며 이 자리에 불려 나왔다. 정부의 강압적 제재가 이어지면 그들의 채권은 휴지 조각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닥 희망을 담은 눈빛을 회의 참석자 한 명에게 보냈다. 이 회의실에서 유일하게 긴장하지 않은 사람, 마치 담소나 나누려는 듯한 표정의 사내. 바로 미라클의 오세현 대표였다. 부실기업을 인수하여 정상 궤도에 올리는 재계의 구세주 아닌가?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바로 정부의 밑그림이 뭔지 알 수 있는 힌트였다. “먼저 어려운 걸음 해주신 여러분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아무쪼록 오늘 회의가 유의미하게 끝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순양카드의 영업정지 시각이 18시간 남았습니다. 가장 좋은 결과는 영업정지 처분을 취소하는 것이며 차선은 영업정지 기간의 최소화입니다. 그리고…. 최악은 폐업입니다.” 정부 측 인사들의 말이 끝나자마자 순양카드 채권자들이 불만을 늘어놓았다. “우리의 묶인 자금에 대한 해결책은 마련되어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실 이런 긴급 조치는 발표 전에 최소한 우리에게 먼저 알려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너무 황당해서, 원.” 이들의 불만을 잠자코 듣던 금융위 정책 1국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채업자도 돈 빌려줄 때 확실한 회수 방안을 준비합니다. 그런 여기 계신 분들…. 한국을 대표하는 은행이면서 순양이라는 이름만 믿고 단기채를 사들인 거 아닙니까?” 정책 1국장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자 금융권 임원들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어쩌면 오늘의 대책 속에 채권 회수 방안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일반인에게 돈 천만 원 빌려줄 때는 담보니, 보증인이니 하며 확실한 회수 방안을 세우면서, 수백억은 신용만으로 빌려준 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정부가 돈 받으러 다니는 해결사 양아치 역할까지 해야 합니까?” 정부의 확실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말이었다. 여차하면 순양카드 사태로 빚어지는 손해는 금융권이 고스란히 떠안고 가야 한다. 갑자기 모두 입을 다물고 공손히 눈을 내리깔았다. 금융사 임원들은 처분만 기다리는 모습으로 태도가 변했다. 정부는 금융권의 인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자자, 험악한 말은 앞으로도 할 시간이 많습니다. 일단 시작은 희망적인 것부터 거론하죠.” 청와대 경제수석은 오세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 모이신 분들이 18시간 안에 정해야 하는 건 정확히 두 가지입니다. 첫째가 카드 사용금액의 결제가 불가능한, 악성 소비자들을 어떻게 하느냐, 두 번째가 여기 계신 금융권 관계자분들은 회수율 몇 퍼센트 정도면 만족하느냐? 이거 아니겠습니까?” 오세현은 금융권 임원들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단기채 전부를 책임져 달라고 하신다면 전 일어서겠습니다. 조금 전 정책국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양의 이름만 믿고 돈을 던진 여러분들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책임이 바로 회수율이죠.” 오세현은 뜸을 잠깐 들인 뒤 싱긋 웃었다. “잘 생각해서 말씀하세요. 밀고 당기는 협상은 없습니다.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다는 걸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순양카드 인수를 거절하면 현재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순양카드의 단기채권은 휴지가 됩니다. 이런 참사를 막으시려면 제 마음을 움직이세요.” 예전 같으면 콧방귀 뀌고 개무시해도 되는 발언이다. 하지만 모두 침을 꿀꺽 삼키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5년 전 IMF가 명확한 사례를 남겼다. 바로 철옹성이라 여겼던 은행도 외부 입김에 따라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다는 것. 물론 지금의 순양카드 단기채 정도로 은행이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도 첩첩산중이다. 부실 카드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은행이 아닌 투자사 역시 마찬가지다. 부실 카드사가 번호표를 들고 그들을 기다린다. 투자자들이 이미 자금을 빼고 있다. 그들을 안심시켜야 하는 것이 이 회의에 참석한 임원들의 의무다. 모두 다 알고 있다. 휴지 조각을 들고 있느니 얼마라도 건져야 한다는 것을. 침묵하던 그들이 입을 열었다. “오 대표님. 그 전에 하나 확인하겠습니다.” “네. 뭐든지 말씀하세요.” “그런 말씀을 한다는 건 순양카드의 경영권을 확보하셨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됩니까?” “오늘 회의의 결과를 보고 결정할 겁니다. 제가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온다면 내일 주식시장에 쏟아져 나온 순양카드 매도물량을 전부 사들입니다. 그럼 40% 지분 확보로 제1대 주주가 되죠. 그리고 금융권이 쥐고 있는 지분을 합치면 곧바로 경영권을 확보합니다.” 오세현은 회의 참석자 모두를 바라보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한 가지 더, 만약 성과가 좋다면 흔들리는 대현카드도 인수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의 결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제 채권 회수율을 정하는 기준이 변했다. 만약 미라클이 대현카드까지 인수한다면 휴지가 될지도 모르는 채권 일부를 더 건진다. “그 결정을 위해 잠시 자리 좀 비우는 실례를 양해 바랍니다.” 금융권 임원들은 가볍게 머리를 숙인 다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가자마자 경제수석은 비록 낮은 음성이었지만 참았던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오 대표님. 사실입니까?” “뭐 말입니까?” “아직 순양카드의 주식을 매입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건 약속과 다른데요?” 그의 안색은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졌다. 청와대는 순양카드의 영업정지를 원하지 않는다. 오늘 채권 문제를 정리하면 18시간 뒤 영업정지 대신 순양카드 사태를 해결했다고 발표할 생각이었다. 위기를 아주 원만하게 해결한 정부라는 평가가 절실한 집권 초기 아닌가? 오늘 회의의 전제는 바로 미라클이 순양카드를 인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경영권은 쥐지도 못한 미라클이라면 이 회의에 참석할 자격도 없다. “이미 42% 확보했습니다.” “아…!” “미라클이 이미 순양카드를 인수했다면 저 사람들은 배 째라고 나올 겁니다.” 오세현이 회의실 밖을 가리켰다. “전 인수한 카드사의 정상화에 최선을 다할 테지만, 저 혼자 손해를 다 안을 수는 없어요. 흥청망청 돈을 쏟아부은 저들도 책임져야죠. 그리고 책임은 말입니다, 수석님.” 경제수석을 바라보는 오세현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책임은 도덕적으로 지는 게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지는 거죠. 돈이 깨져야 반성하고 책임감을 느낍니다.” ======================================== [214] 망연자실 2 냉정한 오세현의 말에 공무원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경제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건 금융권만이 아니다. 흥청망청 카드를 긁어 댄 일반 소비자들도 마찬가지다. “오 대표님. 그럼 카드 연체자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정부가 부채 탕감해줄 겁니까?” “아뇨. 아직 계획 없습니다. 생활 부채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이건 카드라서요. 도덕성 해이 등의 여론 질타가 무섭습니다.” “정부가 관여하지 않겠다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청와대 경제수석은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만약 오세현이 무리한 회수를 시도한다면 이 역시 부담이다. “혹시 악성 채권을 팔아버릴 생각이십니까? 그런 쪽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말입니다.” 그런 쪽 전문은 소위 ‘신용정보’라는 이름의 회사들이다. 이들은 카드사, 시중은행, 상호저축은행, 할부금융사들이 회수를 포기한 악성 채권을 평균 30%에서 10%의 금액으로 사들인다. 그런 다음 채권추심을 전문적으로 하는 직원들을 동원해서 사채업자 버금가는 수준으로 채무자들을 압박해 돈을 받아낸다. 지금은 이런 신용정보 회사들의 전성기다. 신용불량자가 300만 명에 육박하고 이미 카드사들이 손실로 처리한 대손상각 규모만 해도 4조 원에 달하며, 앞으로도 2조 원을 웃도는 규모의 금액이 손실 처리될 것이다. 1억 원 미만인 개인 신용불량자의 연체 금액은 모두 44조7천억 원에 달하며 저축은행과 할부금융사의 연체 금액만 4조 원이 넘었다. 2003년의 대한민국은 연체공화국이다. “당연하죠. 순양카드 채권추심 직원들만으로는 해결 못 합니다. 전 이번 딜에서 단돈 만 원도 손해 볼 생각 없어요. 지금 밖에서 수군대는 저들의 대답에 맞춰 악성 채권을 팔아버릴 생각입니다.” 단기채를 쥐고 있는 금융권이 회수율 30%로 결정하면 연체금액 전부를 30%에 팔아버릴 것이라는 뜻이다. “괜한 승리감에 빠지지 말아요. 순양카드는 시작일 뿐입니다. 8개의 카드사 전부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신용불량자들과 목숨 걸고 싸우는 중이라고요. 현 정부가 과감한 결단을 했다면 끝까지 그 결의를 보여줘야 합니다.” 오세현은 공무원들의 당황한 표정을 보며 말했다. “다음 선거 생각해서 연체자들 구제 정책이라도 폈다가는 수십조의 연체금을 책임지라고 승냥이 떼처럼 달려들 겁니다. 저를 포함한 카드사와 금융기관도 그 승냥이로 돌변합니다.” 공무원들이 입을 열지 못할 때 금융권 관계자들이 회의실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들의 굳은 표정을 보며 오세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결과를 말씀하시기 전에 이것 하나는 알아두세요.” 회의실 모두의 시선이 오세현을 향했다. “순양카드 인수가 결정되는 순간, 전 악성 연체 금액 전부를 신용정보회사에 넘길 겁니다. 그리고 그 신용정보회사는 여러분들께서 소개해 주시기를 바라고요.” 순간 금융권 임원들의 눈빛이 변했다. 탐욕이 스며든 것이다. 알게 모르게, 은행들은 신용정보회사를 가지고 있다. 전직 임원들이 만들고 은행에서 잘린 직원들을 추심원으로 고용한다. 이런 회사에 현직 임원들도 투자해서 아주 짭짤한 돈벌이를 하는 것이다. 회수만 잘한다면, 은행의 손실은 곧 신용정보회사의 이익이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오 대표님. 우리 결정은 바로 이렇습니다.” 그들은 반으로 접은 메모지 한 장을 오세현에게 건넸다. “만약 추심 관련해서 저희와 협상하신다면 조금 더 신경 쓰겠습니다.” 오세현은 메모지를 확인하고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계약서 준비하십시오.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죠? 그 안에 전부 해치우겠습니다.” 오세현이 벌떡 일어나자 정책 1국장이 말했다. “뭡니까? 회수율은 어떻게 정한 건지 말씀해 주셔야죠.” “국장님. 이건 기업 간의 기밀입니다. 말씀드릴 필요도 없고 아실 필요도 없어요. 그리고 정부 측은 하나만 다짐받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오세현이 쏘아붙이자 1국장은 머쓱한 모습이었다. “48시간 이내에 순양카드의 모든 서비스를 정상화하겠습니다. 이거면 된 거 아닐까요?” 회의실을 빠져나가려던 오세현은 머리를 툭 치며 돌아섰다. “아차차, 깜박한 게 있습니다.” 그는 청와대 경제수석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제가 이번 순양카드를 어떻게 정리하는지 잘 보시고 흡족하다 싶으면 대현카드도 한번 맡겨주십시오.” 경제수석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오세현의 행동을 보며 그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가늠하느라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 * * * 진동기 부회장은 눈앞에 놓인 서류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는 망연자실, 아무 말 못 했다. “굳이 주주총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사실 변하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 부회장님과 순양카드는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다는 것뿐이니까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은 오세현의 목소리였다. 승자의 거만함도, 회사를 뺏어 가는 미안함도 들어 있지 않은, 마치 서류의 숫자처럼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왜 내게 이걸 들고 온 거요? 내게 말할 필요도 없잖소. 대주주 변동 신고만 하면 될 일인데….” “몇 가지 협의하려고 합니다.” “협의? 순양카드와 연결 고리가 없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소?” “딱 하나 남은 게 있죠. 바로 순양이라는 이름입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곧 순양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바로 갑시다. 원하는 게 뭐요?” “저랑 손잡는 게 어떻습니까?” “뭐요?” 의자에 기대고 있던 진동기 부회장의 상체가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인가? “아시다시피 미라클은 그룹의 지배지분 16%를 쥐고 있습니다. 아…. 물론 다시 확인해봐야겠죠. 그간 두 분 부회장님께서 지분 구조를 어떻게 수정했는지 전 모르니까요. 하지만 최소 15% 이상은 될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래서요?” “순양카드는 완전히 계열분리 된 상태입니다. 만약 그룹 사옥에서 나가라고 한다면 이삿짐을 싸야 하죠. 이름도 쓰지 말라고 하면 바꿔야 하고요.” “이름도 바꾸고 싶지 않고 이사도 하기 싫다?” “네. 그냥 여기 눌러앉고 싶습니다. 회사 직원들도 변화는 두려워하니까요. 순양이라는 이름도 그대로고 출근하는 직장의 위치도 변하지 않으면 안심할 겁니다. 사실 백성들이야 왕이 누가 되든 무슨 상관입니까? 먹고사는 게 변함없다면 대주주가 누구든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진동기 부회장의 눈이 반짝였다. “그 말씀은 경영진의 변화도 없다는 뜻입니까?” “대대적인 물갈이는 없도록 하려고요. 이번 카드 사태를 안일하게 바라본 멍청한 몇몇은 칼질할 생각입니다만….” 대주주만 바뀐다. 만약 진동기 부회장이 순양카드를 쥐고 있었다 하더라도 어차피 이번 사태를 책임질 경영진 몇몇은 날려버렸을 것이다. “그럼 나와 손잡자는 뜻은 뭡니까?” “이번 일로 부회장님 지분 7%가 형님이신 진영기 부회장 손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룹 내 지지 기반이 많이 흔들리실 텐데 제가 흔들리지 않도록 받쳐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미라클이 쥐고 있는 16%로 날 지켜주시겠다?” “16%가 아니죠. 이제 23%가 됩니다. 담보로 맡겨 놓은 지분은 찾아올 테니까요.” 진동기 부회장은 눈을 질근 감았다. 회사도 지분도 함께 날렸고, 눈앞의 저놈이 둘 다 주워 먹는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자신은 26%, 미라클은 23%…. 이제 자신과 대등한 위치까지 올라왔다. 진동기는 한참 동안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이건 단순히 이름 유지하고 이사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다. 미라클이 자신을 밀어준다면 단번에 49%의 지분을 확보한 것이다. 반수 이상까지는 단 2%. 그 정도는 임원 몇몇만 끌어들이면 된다. 단숨에 전세 역전이다. 그리고 조카도 있지 않은가? 진도준의 10%가 자신의 편에 선다면 당장에라도 형님을 쫓아내 버릴 수 있다. “이봐요, 오 대표. 그 지분의 의결권 나한테 넘겨요. 지분 달라는 소리 아닙니다. 의결권만 내게….” 진동기는 웃으며 손을 드는 오세현 때문에 입을 닫아야 했다. 명백한 거절의 의미다. “제가 손을 잡자고 한 것은 다른 뜻입니다. 부회장님의 지금 위치를 지켜드리는 것만 도와주겠다는 의미예요. 우리가 손을 잡으면 진영기 부회장이 그룹 전체를 손안에 쥐고 흔드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습니까?” 초조해진 진동기가 간곡한 부탁처럼 말했다. “오 대표. 솔직히 경영자로서 우리 형님은 자격 미달 아닙니까? 그간 말아먹은 회사가 몇 개인지나 아시오? 쉬쉬해서 그렇지 열 개를 훌쩍 넘겨요.” 진영기 부회장은 한때 손만 대면 망한다고 해서 ‘망한다스의 손’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그나마 나이 들고 나서는 새로운 회사를 만들지도 않았고 늘리지도 않았다. 건실한 회사를 잘 지키는 것만 생각하라는 진 회장의 엄명 때문이었다. “부회장님. 제게 그런 말은 소용없습니다. 전 과거의 진영기 부회장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또는 무모했는지는 관심 없어요. 현재만 봅니다.” 오세현 매달리는 진동기를 냉정히 뿌리쳤다. “현재의 경영지표를 잘 보세요. 어디 하나 흠잡을 때 없어요. 순양전자는 막대한 돈을 벌어들입니다.” “그거야 시황이 좋아서 그런 거 아니요? 그 자리에 허수아비를 앉혀 놔도 그 실적은 나와요!” 진동기는 위기가 기회라는 진 회장의 말이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이 기회를 잡기만 하면 전세 역전이기에 필사적이었다. “전 허수아비 같은 진영기 부회장이 더 좋습니다.” “뭐요?” “부회장님이라면 순양전자의 막대한 영업이익을 기반으로 분명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했을 겁니다. 그게 바로 능력 있는 경영자가 할 일이니까요. 끝없는 팽창과 확장, 이것이 재벌 대기업의 궁극적인 목적 아닙니까?” “그런데 왜?” “전 주주입니다. 모험보다는 안정이 우선이죠. 불확실한 성장보다는 안정된 배당금이 더 좋습니다.” “오 대표….” “그만하시죠. 제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보다 제가 말씀드린 걸 받아들이실지 아닌지만 대답해 주십시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오세현은 힘없이 머리만 끄덕이는 진동기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럼 순양카드 경영진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십시오. 전 이만….” 진동기 부회장은 일어서려는 오세현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오 대표. 손을 잡았으니 묻는 겁니다. 미라클에서 우리 도준이의 위치는 어떻게 됩니까? 혹시…?” 차마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혹시 1대 주주냐는 질문을 하기에는 결과가 두려웠다. “도준이요? 음…. 꽤 많은 자금을 투자했고 지분도 만만치 않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요.” 오세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혹시 조카를 경계하시는 것이라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도준이는 추구하는 바가 달라요. 목표도 다르고.” “그놈 목표가 뭡니까?” “글쎄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순양그룹 회장보다는 더 원대한 목표를 가졌을 겁니다. 하하.” 종잡을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오세현은 나가버렸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진동기는 몸을 일으켰다. 형님에게 쫓겨날지도 모르는 위기는 넘겼다. 이제 기회를 잡아야 한다. 기회가 없다면 절망하겠지만, 구체적인 기회가 존재한다. 방금 밖으로 나간 저놈이 기회다. 저놈만 아군으로 끌어들이면 순양그룹을 통째로 뒤흔들어버릴 수 있다. 진동기는 기회가 지시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순양카드 사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215] 망연자실 3 「재계를 바짝 긴장시켰던 순양카드 사태가 원만히 해결됐습니다. 정부, 금융권 그리고 순양카드 관계자들이 꼬박 하루 동안 마라톤 회의를 거쳐 극적으로 타결했다고 재경부가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두 달 넘게 멈췄던 순양카드의 모든 서비스가 오늘 자정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이럴 수가. 저건 또 뭐야?” 진영기 부회장은 순양카드의 정상화 속보가 뜨자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속보가 끝나자마자 인터폰을 눌렀다. “백 실장 빨리 들어오라고 해!”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부회장실을 서성거리던 진영기 부회장은 헐레벌떡 달려온 백 실장에게 소리쳤다. “이 새끼야! 저거 어떻게 된 거야?” 그의 손가락이 TV를 가리키자 백 실장은 황급히 대답했다. “지금 알아보고 있습니다.” 짝―! 있는 힘껏 휘두른 진영기 부회장의 손바닥으로 뺨을 맞은 백 실장은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몸을 휘청거렸다. “지금 알아봐? 벌써 터진 일인데 여태 뭐 한 거야?” “죄,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빨리 안 튀어? 청와대든, 재경부든 빨리 확인해!” 머리를 꾸벅 숙이고 나가는 백 실장을 노려보던 진영기는 가장 가까운 곳에 이 모든 것을 설명해줄 사람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는 재빨리 동생에게 달려갔다. <부회장 진동기> 문에 붙은 이 팻말이 오늘처럼 꼴 보기 싫은 적도 드물었다. “동기야!”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잔뜩 찌푸린 얼굴의 진동기가 기가 차다는 듯 한마디 툭 던졌다. “노크 좀 하지?” “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뭐가?” “순양카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떻게 막았어?” “어째 좀 이상하게 들리는데? 영업정지 먹고 망하기를 기다렸어? 정상화됐으면 축하한다, 수고했다, 고생했다…. 뭐, 이런 말부터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닐까?” 형님은 노려보는 동생의 시선을 무시하며 계속 큰소리만 냈다. “뻘 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말해!” “꽉 막힌 유동자금 뚫어주고 부채 전부 정리한 다음 서비스를 정상으로 돌렸어.” “어떻게? 너 혹시 지분 다 팔았어?” 진영기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만약 그룹 지배지분이 외부로 빠져나갔다면 또 한 번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순양의 지분으로 감히 순양그룹을 먹겠다는 놈은 없다. 한국에서 가장 값비싼 지분, 그것이 순양의 지배지분이다. 비싼 만큼 대가를 주면 동생이 쥐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쉽게 자신이 확보할 수 있다. “아니. 돈 많은 놈이 순양카드 인수했다. 이제 내 손을 떠났어.” 진동기는 지분을 팔지 않았다는 자신의 말에 실망하는 형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주가가 천 원 밑으로 떨어졌어. 시장에 쏟아져 나온 물량 전부 확보하고, 기관 투자자들 지분까지 전부 거둬들였더라고. 무려 42% 지분을 쥐고 있으니 인수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진영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후회가 밀려왔다. 폭락한 주식을 사서 순양카드를 좀 살려달라고 동생이 말했을 때 콧방귀를 꼈다. 가만히 놔두면 망할 회사, 뭐 때문에 돈까지 써 가며 살려준다는 말인가? 망해야 그룹 지배지분을 더 확보할 수 있는데…. 하지만 휴지 조각이 돼버린 주식을 사들여 인수했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회사를 망하게 만들었어야 했다. 회사를 흥하게 하는 것도, 망하게 하는 것도 직접 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진영기 부회장은 그 순간 이 생각을 못 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네가 가진 순양카드 지분도 다 넘겼어?” “아니. 중공업과 건설이 가진 순양카드 지분은 그대로야. 이제 주가가 오를 텐데 왜 팔아? 다시 예전 수준으로 회복되면 그때 팔아야지. 나도 어느 정도 본전은 챙겨야 하지 않겠어?” “누구야? 어떤 놈한테 팔았어?” “말은 똑바로 하자. 난 팔아치운 게 아니라고 했지? 그놈이 지분을 확보했을 뿐이지.” “엎어 치든 메치든! 그러니까 그놈이 누구냐고?” 갑자기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 찾으셨습니까? 진영기가 등을 돌리자 실실 웃는 오세현이 보였다. “아, 오셨습니까?” 진동기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반겼다. “네. 이거… 본의 아니게 두 분이 나누시는 대화를 다 들어버렸습니다.” “문을 닫지도 않고 큰소리를 질렀으니 일부러 피하지 않는 한 다 들을 수밖에 없죠. 괜찮습니다. 우리 잘못인데요.” 진동기는 아직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진영기를 노려봤다. “서, 설마 당신이야?” “네. 순양카드 최대주주의 대리인 오세현입니다.” 오세현이 가볍게 머리를 숙이자 진영기는 더욱 할 말을 잃었다. 순양카드의 새 주인이 오세현이라는 것은 순양카드가 정상이 되었다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다. 오세현은 아쉬운 것도 없고 순양의 힘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결정적으로 그는 순양의 것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놈이다. “난 오 대표와 일이 좀 있으니 더 할 이야기가 있으면 나중에 해.” 진영기가 방을 나가는 두 사람의 등만 멍하니 바라볼 때 오세현이 갑자기 휙 돌아섰다. “참, 진영기 부회장님. 채무 상환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는데 순양카드 임원들과의 미팅 끝나고 찾아봬도 되겠습니까?” “뭐? 상환?” “네. 아마 3번에 나눠 상환하기로 되어 있죠? 전 한 번에 정리했으면 합니다만.” 진영기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채권 담보로 사들인 지분, 무려 두 배의 돈으로 사들인 그 지분이 빠져나가는 것을 직감했다. “자자, 그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하시고 임원들부터 만납시다. 그 양반들, 지금쯤 살생부 명단에 자기 이름 들어가 있을까 봐 벌벌 떨고 있을 거요. 죽든, 살든 빨리 결과를 알려줘야 오늘 밤 발 뻗고 잘 거 아닙니까?” 진동기 부회장은 실실 웃으며 오세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마치 친구끼리 어깨동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 * * “당신이 순양카드를?” “네. 액면가 이하로 떨어진 주식을 쓸어 담았죠.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여의도가 제 홈그라운드 아닙니까?” 진영기 부회장실을 찾은 오세현은 잔뜩 찌푸린 그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참아야 했다. 이번이 순양을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 기회가 빠그러 들었으니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찌푸린 얼굴로 드러내는 것만 해도 많이 참는 듯 보인다. “도대체 왜?” “네?” “왜 부실 카드사를 노렸냐고? 그거 정상화가 쉬울 것 같아? 신용불량자가 3백만 명이야. 재기 불가능이라고!” “그렇습니까? 전 3백만 명을 제외한 나머지 숫자가 더 커 보이는데요?” “북극에 냉장고라도 팔겠다는 생각인가? 컨설팅 강사 따위가 만든 그럴듯한 말을 따르는 아마추어는 아니잖아?” 현재 상태는 진영기의 말이 맞다. 카드 사업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처럼 미래가 암울하다. 하지만 그의 말에 일일이 맞장구치거나, 반론할 생각은 없었다. 이 자리는 대화가 아니라 통보를 위한 자리일 뿐이다. “부회장님. 경영은 각자 알아서 합시다. 남의 회사에 감 뇌라 배 놔라 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부회장님과 저 사이에는 단 하나의 주제만 있습니다. 채권과 채무.” 진영기 부회장은 저 되바라진 새끼를 언제 한번 꼭 손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어디서 감히 눈을 똑바로 뜨고! “부회장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채권 만기일에 상환하든 한 번에 정리하든 말입니다.” “돈 많구먼.” “네. 썩어납니다. 만족할 만한 대답이 됐습니까?” 오세현이 시큰둥하게 쏘아붙이자 진영기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순양의 간판인 자신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얕보는 듯한 저 표정, 아니…. 경멸의 빛이 더 강했다. 진영기는 폭발하려는 마음을 억눌렀다. 조금 전 동생인 진동기와 저놈의 다정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약 저놈의 어깨에 손을 올린 게 동생이 아니라 자신이었다면? 이건 또다시 시도해볼 만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동생인 진동기를 쫓아내고 그 자리에 저놈을 앉힐 수도 있다. 사람 하나 바꾼 차이지만 그 결과는 어마어마하다. 순양그룹 내부는 물론이고 전 국민이 생각할 것이다. 바로 진 회장의 장남 진영기가 그룹을 물려받았다고 말이다. 그 순간 순양그룹의 유일한 회장은 바로 자신이다. 오세현이 아무리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어도 그는 단지 전문경영인 취급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의 이름은 진으로 시작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숨을 가다듬은 진영기는 괜히 투덜거리듯 내뱉었다. “젠장! 도준이 놈만 노래 부르겠군.” 두어 달 만에 무려 팔천억을 챙겼다. 오세현도 잘 안다. “사정은 들었습니다. 무려 두 배나 주고 사셨다고요?” “돈이 썩어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말 나온 김에 제안하지. 내가 가진 담보, 그러니까 지분 말일세. 그거 내가 다시….” “아뇨. 팔 생각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거론하지 마시죠.”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잘라버리는 버릇없는 모습을 또 봤지만, 진영기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범하게 넘겼다. 생각을 바꾸니 행동도 달라진다. “그럼 지분 말고 오 대표 당신을 사는 건 어떤가?” “무슨 말입니까?” “돌려 말하는 건 내 성질에 안 맞아.” 진영기는 긴 숨을 한 번 쉬고 말을 이었다. “미라클이 쥔 지분이 무려 16%야. 만약… 아니, 만약이 아니지. 내 동생 동기의 담보지분 7%도 오 대표 손에 들어가는 건 확실하니 이제 23%나 돼.” “아시겠지만 소유와 경영을 확실히 분리하는 게 제 철학입니다. 순양그룹의 경영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테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대신 연말에 배당금이나 두둑이 주시면 됩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오 대표의 지분은 일반 계열사의 지분이 아니라 바로 순양그룹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지분이란 말일세.” “주식회사의 모든 지분은 회사를 쥐락펴락할 수 있습니다. 큰 차이는 없다고 보는데요?” 자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는 놈이 능청을 떤다. 진영기는 또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차이가 커. 순양그룹의 25%를 주지. 매출, 이익, 규모, 브랜드 등을 고려해서 자네가 골라.” “25%?” “그래. 계열사를 말하는 거네. 자네가 원하는 계열사를 자네 손에 맡김세.” “전 투자사의 대표입니다. 형식적인 순양의 전문경영인은 사양하지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 아냐. 말 그대로 다 맡긴다고. 지금 내 동생이 하는 것처럼 말이야. 계열사의 인사권은 물론이고 경영 방식, 사업 방향 등등, 모든 걸 일임하겠네. 어떤가?” 오세현은 진영기의 속셈이 뭔지 알았지만 이럴 때는 놀란 반응을 보이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진심이십니까?” “회사를 놓고 농담할 만큼 한가하지 않아.” “후회하실지도 모릅니다.” 오세현의 대답이 애매하긴 하지만 받아들일 가능성이 엿보였다. “가진 만큼 주겠다는데 후회는 무슨….” “제가 M&A 전문가라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순양 계열사 25%를 낱낱이 쪼갠 다음 싹 팔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귀찮게 경영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뜨끔한 말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정말로 모든 계열사를 다 팔아 치운다 해도 다시 키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회장 자리를 차지할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진영기는 대범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준 걸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아. 팔아버리든, 거덜 내든 오 대표 원하는 대로 하는 거지.” 시원한 진영기의 대답에 오세현도 미소 지었다. “이것 참, 형제분이라 그런가, 정말 똑같군요.” “응? 뭐가?” “진동기 부회장도 똑같은 제안을 하더군요. 표현 방법은 다르지만 두 분이 원하는 건 이거 아닙니까? 나랑 손잡고 내 형제 한 놈을 순양에서 몰아내자! 하하.” 오세현이 시원한 웃음을 터트릴 때 진영기 부회장은 화를 내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웃음을 듣기만 할 뿐이었다. ======================================== [216] 망연자실 4 “동기가 날 쫓아내려 했다고?” “표현은 달랐다고 말했습니다. 방금 부회장님께서도 동생을 쫓아낸다는 말씀은 안 했듯이요.” 오세현은 진영기의 표정이 확 변한 걸 보자 어이가 없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 않은가? 서로 한 놈을 찍어내고 어서 빨리 회장 자리에 취임하고 싶어 안달 났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그래서? 뭐라고 했어?” “두 분께 드리는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관심 없으니 배당금만 두둑이 주십시오.” 딱딱하게 굳어버린 진영기의 얼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쉽긴 했지만, 동생의 곁에 서서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순양그룹의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그 말 꼭 지켜.” “물론입니다. 전 지금 이 상태의 순양그룹이 가장 좋습니다.” 그냥 흘려듣기에는 찜찜한 대답이었다. ‘지금의 순양’이라니? “이 상태라는 건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내 동생 건드리지 말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건드릴 생각이었습니까?” 오세현은 빙그레 웃으며 진영기를 바라봤다. 이 사람은 정확한 현실이 뭔지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 미라클의 힘과 자신의 선택을 도구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영원히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왕좌가 두 개인 왕국은 없으니까.” “이 나라는 왕조가 아닙니다. 견제와 균형으로 조화를 이루는 민주국가죠.” “순양은 나라가 아냐! 개인이 일궈낸 사적 소유물이라고!” “개인이 아니라 주주의 소유물이죠. 아무튼, 이런 입씨름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이미 오세현의 얼굴에는 미소가 보이지 않았다. “전 두 형제분이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경쟁하는 순양그룹을 원합니다. 진동기 부회장을 하루빨리 쫓아내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제가 영향력 있는 주주로서 버티는 동안은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이봐! 오 대표!” “미라클의 지분과 담보로 맡겨놓은 지분이면 새로운 순양의 선장을 내 마음대로 고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끌어내릴 수는 있습니다. 제 손을 잡는 사람이 부회장님이 말씀하신 그 하나뿐인 왕좌에 앉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세현은 진영기 부회장의 표정을 살폈다. 아직 감을 못 잡았나? “양팔 저울의 균형을 언제든지 깰 수 있는 저울추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균형을 깨고 싶지 않은 저울추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오세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경고가 됐으려나? “아 참, 채권 말입니다.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계약서대로 상환하겠습니다. 이자는… 조금 더 쳐드리겠습니다. 속이 많이 쓰리실 텐데.” 진영기는 오세현이 나가자 손에 잡히는 뭔가를 들고 문을 향해 던졌다. 툭 하는 소리만 나며 떨어진 건 볼펜이었다. 팔천억을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렸다니…. 손톱이 살을 파고들 만큼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 * * 진동기 부회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진영기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 끝났어. 우리 둘은 깨춤 춘 게 전부고 오세현이 전부 쓸어 담았어. 아, 도준이도 한몫 챙겼지?” “나 약 올릴 처지가 아닐 텐데?” “용건이나 말하슈. 상처에 서로 소금 뿌리지 맙시다.” “소금 뿌린 건 너다. 아무튼, 오세현이 저놈을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냐?” “왜? 오세현이만 없으면 나 쫓아내려고?” “그래.” 노골적인 진영기를 향한 진동기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꿈 깨. 오세현이가 순순히 물러날 것 같아?” “동기야.” 진영기는 나지막이 동생을 불렀다. “순양에서 우리 핏줄 아닌 놈은 들어내고 다시 시작하자. 지금 우리 모습을 봐. 이제 오세현이의 눈치만 보게 생겼어. 저놈이 너랑 붙어서 내 등에 칼을 찌르는 건 아닌지….” “아니면 형님과 손잡고 날 갈아버리는 건 아닌지….” 두 사람 다 지금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다. 진동기가 찌푸린 표정을 풀며 말했다. “방법이 없어. 그놈은 지분만 쥐고 아무것도 안 하잖아. 순양 밖에서 우리를 노려보며 균형만 잡고 있는데 어떻게 해?” “그러니까 넋 놓고 있지 말고 방법을 찾아야지. 내가 약속한다. 오세현이 쫓아낼 때 동기 네 지분을 다시 30% 이상으로 맞추마.” 형님의 말에 진동기의 눈이 반짝였다. “진심이야?” “물론. 그렇지 않으면 네가 내 손을 잡을 리 없잖아.”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 집안싸움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깜냥도 안 되는 이상한 종자가 끼어드는 건 두 형제의 자존심 문제였다. “하는 김에 하나 더, 도준이 놈 지분도 정리해야 해.” 진동기가 진도준을 거론하자 진영기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도준이?” “응. 그놈이 쥔 10%가 오세현이에게 간다고 생각해봐. 단숨에 2대 주주가 된다고. 게다가 미라클의 자금력으로 주식을 쓸어 담기 시작하면 1대 주주로 올라서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야.” 진영기는 동생의 걱정을 한 귀로 흘려버렸다. “너무 앞서지 마. 정부 기관이나 은행이 쥐고 있는 지분은 언제나 우리 편이야. 그걸 쓸어 담지 못하면 영원히 1대 주주는 못 돼.” 진영기는 자신만만하게 장담했다. 그는 순양그룹의 힘을 믿었다. “참, 그보다 도준이 말이야. 네 말대로 그놈이 오세현이와 붙을 가능성은 어때?” “무시하기 힘들어. 오세현은 윤기랑 친구잖아. 만약 오세현이가 윤기 허파에 바람을 슬슬 집어넣고, 윤기가 도준이를 설득하면?” 진동기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린 진영기는 의자 손잡이를 탕 쳤다. “좋아. 그럼 도준이부터 단도리 치자. 딴생각 못 하게.” “그보다는 도준이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어떻게?” “지분 재조정할 때 10% 더 얹어주는 거지. 그럼 진짜 우리 핏줄만 남게 되니까 더 그럴싸하잖아.” 진영기의 표정이 밝아졌다. 조카에게 10% 더 줬다가 천천히 되찾아 오는 게 오세현을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 * “네 녀석이 영악한 것인지, 내 아들 녀석이 멍청한 건지…. 쯧쯧.” “운이 따라주는 놈을 이길 방법은 없으니까요.” 할아버지는 정원에 내리쬐는 여름 햇살 때문인지 아니면 속절없이 당해버린 두 아들이 한심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눈살을 찌푸렸다. “카드사를 되찾고, 지분도 챙겼고 덤으로 팔천억이라는 거금도 홀라당 먹었어. 이게 운으로 돌리기에는 좀 억지스럽지.” “카드 대란이라는 호재가 있었으니까요. 운입니다.” “난 말이야, 네 녀석이 이 카드 대란 사태까지 예측한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 금융 쪽으로 훤한 네놈이 가만히 앉아서 수수료와 이자를 꼬박꼬박 챙기는 사업을 포기하는 게 이상하긴 했거든.” “불안함은 느꼈지만, 카드 부실이 이 정도까지 터질 줄 몰랐습니다.” “크게 터진 건 운이겠지. 하지만 나머지는 과욕이 빚어낸 결과다. 현찰 장사 하고 싶어 앞뒤 못 가린 네 둘째 큰아버지나, 지분 확보하고 싶어 팔천억이나 웃돈을 준 첫째 큰아버지나 다 똑같은 놈이야.” 따가운 햇볕을 피하려 챙 넓은 모자를 눌러쓴 할아버지는 천천히 일어섰다. “좀 걷자꾸나. 운동이랍시고 이렇게 걷는 걸 빼먹지 말라고 의사가 그랬어. 허허.” 난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지팡이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이제 어찌할 거냐? 네가 가진 지분만큼 계열사를 떼 달라고 할 참이냐?” “아닙니다. 전 이미 할아버지께서 주신 금융 부분이 있습니다. 그 정도면 30% 지분에 걸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별다른 건 없어?” “네. 둘째 큰아버지의 영향력이 좀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분만큼 중공업 계열을 이끌어갈 사람도 없으니까요.” “음흉한 놈, 흐흐. 동기 목에 튼튼한 개 목줄 하나를 딱 걸어 뒀구나.” 하나가 아니다. 천억 원에 이르는 비자금 내역까지 내 손에 있으니 개 줄과 채찍, 두 개나 있다. “그럼 팔천억의 꽁돈이 생겼는데 그건 어디에 쓸 거냐? 투자할 생각이냐?” “아뇨. 일단은 그냥 쥐고 있을 겁니다. 금융위에 슬쩍 던져놓은 말이 있는데….” “대현카드 말이냐?” “네. 언제든 신호만 주면 제가 인수하겠다고 했으니 그들도 마음 편히 대현을 압박할 수 있을 겁니다. 정부 시책에 맞게 고강도 자구책이 나오지 않으면 순양카드와 같은 꼴을 당할 겁니다.” “허허, 거참. 나도 너만큼은 아니었는데… 날강도 같은 놈.” 낄낄대며 웃던 할아버지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도준아.” “네.” “만약 세상에 단 두 개뿐인 큼지막한 다이아몬드가 있다면 넌 어떻게 할 테냐?” “네?” 갑자기 왜 고승 선문답 흉내를 내시나? “둘 다 살 거냐? 아니면 하나만 살 테냐?” 지금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다이아몬드는 바로 카드회사다. 순양과 대현. “둘 다 삽니다.” 하나는 이미 가졌고 대현을 인수하겠다고 했으니 둘 다 사겠다는 대답을 해야 한다. “하나만 사서 두 개 전부 사는 효과를 누리는 방법은 생각해봤느냐?” 이제 선문답이 아니다. 대현카드를 인수하지 않고 인수했을 때의 효과를 다 누리는 방법을 알려주시려는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도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입을 닫고 있으니 할아버지는 실망한 눈초리로 흘겨보신다. “이놈 이거 잘못 봤구먼. 이렇게 물렁해서야, 원….” “제가 좀 착하긴 하죠?” 내 농담에 웃지 않으시는 걸 보니 진심인가 보다. “정답이 뭔지 그냥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세상에 딱 두 개뿐인 다이아몬드의 가치, 그걸 하나에 온전히 옮기면 된다. 이제 알겠느냐?” “하나에…?” “그래. 하나만 가지고 나머지 하나는 깊은 바다에 빠트려 버리든지 부숴버리든지 하면 어떻게 될까?” “하나 남은 다이아몬드의 가격이 두 배로 뛰는군요.” “문제는 네 것이 아닌 다이아몬드를 어떻게 부숴버리냐는 거지. 그런데 지금은? 정부가 나서서 작살내겠다고 칼을 갈지 않느냐? 이런 기회가 왔는데 대현카드를 인수하겠다고 쓸데없이 돈을 왜 써?” “회사는 다이아몬드가 아닙니다. 딱 두 개 존재하는 보석도 아니고요.” “신용카드 회사 중에 은행 카드를 빼면 대현과 순양, 둘밖에 더 있어? 세상과 경쟁하려 하지 마. 시선의 스펙트럼을 좀 줄여봐. 그럼 더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다.” 넓은 시야를 줄여 단 하나만을 선명하게 본다. 좋은 말씀이다. “대현카드가 부도나면 그 충격파가 좀 클 겁니다. 금융권의 손실이 크면 시중 유동자금이 곧바로 경색….” “그걸 왜 네가 신경 써?” “네?” “내가 말랑하다고 말한 게 바로 이런 것이다. 네놈이 왜 오지랖질을 하고 자빠졌어? 시중 유동자금의 문제가 생기면? 너 돈 없어? 우리나라에서 너보다 현찰 많이 쥔 놈이 있더냐?” 이번엔 충고가 아니라 따끔하게 나무라시는 거다. “시중에 유동자금이 말라 사막처럼 변해버린다면 네놈은 춤이라도 춰야 할 만큼 좋은 거 아니냐?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를 쥐고 있으니 네 돈의 가치는 더욱 올라갈 게야.” “그 돈을 유용하게 쓸 기회는 더 많아질 테죠.” “잘 아는 놈이 그래? 혹시 알아? 쓸 만한 기업이 그 덕분에 자빠질지? 자빠진 놈을 날름 주워 먹을 놈은 너뿐이다. 어떠냐? 시선을 좁히면 더 나은 게 보이지?” 우리 할아버지…. 절대 치매 따위는 걸리지 않을 것이다. 팔순 넘은 노인네 총기(聰氣)가 젊은 나를 찜 쪄 먹을 정도 아닌가? “할아버지.” “왜?” “제가 할아버지와 경쟁하는 게 아니라는 걸 하늘에 감사드립니다.” “시끄럽다. 아부질은 또 어디서 배워 가지고….” 버럭 소리 질렀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쉽지는 않을 게다. 대현그룹도 여기저기 뿌려놓은 친구가 많아. 최악의 사태로 빠지지 않을 만큼 방어해주는 고위 관료가 나타날 거야.” “그 관료들을 설득하면 되겠죠.” “하여튼…. 이런 건 또 빨리 배우지? 영악한 놈. 흐흐.” ======================================== [217] 앞물결 1 진영기 부회장의 호출을 받자마자 달려갔다. 오세현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으니 모두 계산기를 두드렸을 것이다. 출혈이 얼마나 되는지, 지분 구조 변동이 정확히 어떻게 됐는지 지금도 파악하는 중일 게 뻔한데…. 설마 얹어준 웃돈 다시 뱉으라고 소리치지는 않겠지? 부회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첫째 큰아버지는 환히 웃으며 나를 반겼다. “어서 와, 도준아.” 돈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이럴 때는 내가 먼저 선수를 치는 게 낫다. “큰아버지. 죄송합니다.” 머리를 푹 숙이자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큰아버지는 나를 바로 세웠다. “아니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역시, 곧 죽어도 가오 떨어지는 말은 절대 못 하는 사람이지. 줬던 돈을 다시 달라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도의상 적당한 프리미엄 정도만 빼고 다 돌려드려야 하는데….” 슬쩍 눈치를 보니 큰아버지의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기대감이 슬슬 오를 것이다. 억지로 뜯어내는 건 가오 상하는 일이지만 준다는데야 마다할 리가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어요. 돈 들어오자마자 생명, 화재, 캐피털에서 단기채 갚느라 다 써버렸다고 하더군요. 지금 외국 자본이 싹 빠져나가서 어쩔 수 없었다고….” 큰아버지의 눈빛에 실망이 잔뜩 서렸지만,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온다. “도움 됐다니 그나마 다행이구나. 급한 불 끄는데 회사 구분하면 쓰나? 가족인데 서로 편의 봐주는 거지. 괜찮아.” 가족인데 급전 좀 빌려달라는 동생을 매정하게 뿌리친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만 난 당연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엉덩이를 소파에 걸치자 큰아버지는 나를 호출한 진짜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널 부른 건 다른 게 아니라 지분 구조 때문이다.” 지분? 오세현 대표에게 두 분 모두 손을 뻗쳤고 진동기 부회장만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최소한 그는 현재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대주주인 오세현을 포섭하는 데 실패했으니 내가 가진 10%라도 아쉬운 대로 끌어들이려는 걸까? “일단은 내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 “네.” “네 둘째 큰아버지와 상의를 좀 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지금 이 상태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 끝까지 들을 수밖에 없다. 뭐가 안 된다는 건가? “우리 집안 기둥을 좀벌레가 갉아먹고 있다.” “오세현 대표 말입니까?” “그래. 지금 정확한 수치를 뽑아내고 있는데 대충 계산해도 23%의 지분은 넘을 것 같아.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끝까지 듣자. 무슨 꿍꿍이일까? “그놈이 혹시라도 딴생각을 품으면 우리가 난처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딴생각이라면…?” “오세현이 임시주주총회를 요청하면 순양의 모든 계열사가 주총을 열어야 해. 게다가 그놈은 금융 전문가, 만약 우리 순양그룹의 전체 회계장부를 들여다보겠다고 하면?” 국세청이 순양그룹을 털겠다고 덤벼드는 것이 더 낫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살살 다뤄주기를 부탁할 수도 있고, 언론을 동원해서 대기업 죽이기라는 여론을 조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주주가 덤벼들면 내부 문제로 바뀌어버린다. 두 손 놓고 오세현의 현미경 조사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한다. 아마도 임원이나 대표이사 여럿이 고소당할 것이 뻔하다. “그런 일 없도록 제가 미리 부탁하겠습니다.” 큰아버지는 손을 내저었다. “네게 그런 일 시키려고 이런 말 하는 거 아니다. 어차피 임시방편일 뿐이야. 그리고 이건 네게도 큰일이다. 친한 사이라고 해서 방심할 때가 아니야.” “저도요?” “그래.” 나의 유일한 약점, 나도 잘 안다. 그리고 집안사람 모두가 안다. 심지어 전 국민이 안다. 바로 상속세다. 기업가치 십조 원이 넘어가는 금융그룹을 물려받았지만, 상속세는 빌딩 하나 물려받은 사람보다 더 적게 냈다. 모두 분통을 터트릴 만 했지만, 이런 재벌들의 행태에 이미 익숙해졌는지 씨발, 니미, 좆같네 등의 욕설 한 번으로 다 잊어버린다. 사는 세상이 다르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딴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분통 터트릴 일도 없다. 다른 세상은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법이니까. 그리고 불법이라기보다는 편법이라는 표현을 쓴다. 하나하나 따지면 불법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편법이라는 말로 어물쩍 넘어가는 것이다. “설마 오 대표님이…. 에이, 아니에요.” 웃으며 세차게 손을 내저었지만, 목적이 다르니 큰아버지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친분이 깊다고 해서 시험할 생각 하지 말어. 오세현이 지금까지 투자한 돈을 생각해봐. 어쩌면 그자는 외국 자본을 등에 업고 순양그룹을 노리고 있을 수도 있어.” 방향은 엉뚱한 곳을 향하지만, 위기를 느끼는 건 정확하다. “큰아버지. 좀 과잉 반응이신 것 같은데요? 오 대표는 아버지와 절친입니다. 그리고 순양을 넘보기에는 너무 미약하고요.” “그래서 네게 다짐을 받아야겠다.” “다짐요?” “그래. 만약 오세현이가 네 아버지와 네게 접근해서 허황한 소리를 늘어놓으면 어쩔 셈이냐? 그자와 네가 손을 잡으면 단번에 2대 주주야. 충분히 헛된 꿈을 꿀 수 있다.” 큰아버지는 곁눈질로 날 흘깃 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지배지분을 손 좀 볼 생각이다. 그리 알고 너도 협조하도록 해라. 그게 다짐이다.” 여기 또 다른 과욕을 보고 있다. 아니, 이번에는 불안인가? 계열사 지분을 옮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공정위가 우리 순양의 순환출자 구조를 살피다 포기했다는 소문이 돈 적도 있다. 전문가들이 구조를 살피는 것도 버거운데 구조를 바꾼다? “쉽지 않을 텐데요? 순환출자로 묶인 지분을 완전히 이동해야 하는 겁니다. 다른 계열사 지분은 회사 자산인데 이동하려면 서로 사고팔아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대표이사 배임 행위까지….”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나도 잘 안다. 단번에 해치우는 건 불가능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진행할 거다.” 지금은 무조건 찬성하는 수밖에 없다. 지분 구조를 바꾼다는 게 사실일 수도 있고 나를 시험해보는 것일 수도 있다. 괜한 반대는 의심만 짙어진다. 두 큰아버지의 의심이 잠시도 멈춘 적이 없다는 것쯤은 잘 안다. “알겠습니다. 제 의결권이 필요할 때 언제든 알려주십시오.” 망설임 없는 대답에 큰아버지는 만족한 웃음을 보였다. “그래. 너도 내 의견을 받아들이니 내 마음이 한결 가볍구나. 허허.” 큰아버지의 웃음이 억지스럽게 보였다. 내 미소도 억지스럽게 보이려나? 순양 본관을 나와 일단 집으로 향했다. 생각할 게 많아졌다. * * * 그룹의 지분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바로 이학재 비서실장. 내가 궁금한 것은 이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지분 이동이 가능할까 하는 것과 진영기 부회장이 이학재 실장과 논의를 거쳤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이 이 문제를 이야기했다면 지분 이동은 확실하게 진행된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실까? 복잡한 여러 변수를 놓고 생각하려면 하나하나를 정확히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전화를 걸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얼굴 마주하며 안부를 묻는 사람,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전화 통화 하는 사람,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 일 끝마치고 집으로 오라고 하자 그는 흔쾌히 달려왔다. “어쩐 일로 먼저 전화를 다 주시고….” 김윤석 대리는 캔맥주 몇 개와 과자가 든 편의점 비닐백을 들고 웃으며 들어왔다. “어쩐 일이긴요? 그냥 얼굴이나 보자고 부른 게 아니란 건 잘 알면서. 하하.” 잠깐 웃음을 나눈 뒤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요즘 특이한 일은 없었습니까?” “없죠. 회장님이 은퇴하신 것이나 진배없으니… 비서실 전체가 한가합니다.” 김윤석 대리는 비서실에 완전히 적응한 듯 여유가 넘쳤다. “요즘도 이학재 실장을 수행합니까?” “네. 여전히 가방모찌이긴 한데, 그나마 좀 편하게 대해주십니다.” “최근에 이학재 실장이 두 부회장과 만난 적은 없습니까?” 김윤석 대리는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제가 퇴근한 뒤에 만났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낮에 만난 적은 없습니다.” “특별한 지시도 없었고요? 이를테면 그룹 지분 현황 문제라든가…?” “전혀요. 말씀드렸다시피 정말 한가해졌습니다. 두 부회장님이야 이학재 실장과 거리 두기를 한 지 오래됐어요.” 두 분 큰아버지는 할아버지 최측근의 사람까지 물려받을 생각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키운 새로운 비서실장을 이학재처럼 만들고 싶어 한다. 김윤석 대리는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진영기 부회장께서 지주회사를 바꾸겠다고 하시더군요. 이게 날 떠보려는 것인지 진짜 실행에 옮기려는지는 불확실합니다.” 김윤석은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니 교육을 잘 받은 것처럼 보인다. “지분 문제라면 이학재 실장을 거치지 않고는 힘들죠. 지분만 담당하는 법무팀을 꽉 쥐고 있으니까요.” “은밀하게 자체적으로 진행한다면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단지 시간이 오래 걸릴 뿐.” 김윤석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드리는 게 좀 조심스럽지만, 지분 이동을 부회장님이 직접 하려면… 진 회장님이 안 계셔야 가능할 겁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아직 이학재 실장의 빨대가 많은가 봐요?” “네. 계열사마다 이학재 실장의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들은 매일 이 실장님에게 보고서를 올리고 이 실장님은 곧바로 회장님께 보고하니까요.” 김윤석은 맥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이 사실을 보고해버릴까요?” “이 실장에게요? 어떻게 알게 됐냐고 물으면 어쩌려고요?” “에이, 제가 누구 사람인지 이학재 실장님도 아는데요, 뭐…. 소스야 말 안 해도 알 겁니다.” “아뇨. 그냥 놔둡시다. 당장 실행에 옮기는 건 힘드니 아직 여유가 좀 있어요.” 큰아버지도 분명히 말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진행한다고. 김윤석의 말처럼 계획을 세웠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단숨에 처리할 모양이다. 물론 그 전에 이학재 실장부터 정리해야겠지만. “참, 하나 물어봅시다.” “네.” “이학재 실장은 무슨 생각입니까? 할아버지가 은퇴하셨는데 언제까지 그 자리를 지킬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 때문에 요즘 머릿속이 복잡하신지 저녁에 술 드시는 횟수가 늘었어요. 회장님과 함께 은퇴하기에는 아직 나이가….” “첫째 큰아버지와 비슷한 연배니 10년은 더 일해도 되죠.” 하지만 이학재는 이제 그룹에서 계륵이 되어버린 사람이다. “김 대리.” “네.” “이학재 실장이 원하는 게 있을까? 아니, 할아버지가 안 계셔도 순양에 계속 남고 싶을까요?” 김윤석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진 회장님이 영원히 회장님이기를 바랄 겁니다.” 영원한 이인자이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김 대리. 요즘 이학재 실장님이 술을 즐겨 마신다고 했죠?” “네. 우리 수행원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만의 시간을 자주 가지십니다.” 김윤석은 내 뜻을 읽었는지 물어보지도 않은 것을 말했다. “강남에 ‘상(象)’이라는 조용한 바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 단골이죠.” “그럼 다음에 그곳을 들르면 곧바로 제게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김윤석은 빙그레 웃었다. 이제 자신의 역할이 빛을 발할 것 같은 기대감이 보이는 웃음이었다. ======================================== [218] 앞물결 2 “여깁니까?” “네.” “순양그룹 이인자의 단골집이라고 하기에는 좀 초라하군요.” “외관만 그렇습니다.” 김윤석 대리의 연락을 받고 달려간 곳은 서초동의 좁은 골목이었다. <象>이라는 간판 하나만 덩그러니 매달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도 좁은 곳이었다. “실내는 그리 크진 않지만 인테리어는 보통 고급이 아니에요. 게다가 술값도 웬만한 룸살롱 뒤통수 칠 만큼 비싸고요.” 술값이 비싸다는 건 아무나 들락거리지 못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조용히 만나는 데 돈 많이 드는 사람이군요. 수고했습니다.” 김윤석이 머리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예전처럼 마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를 매섭게 노려보는 몇 명의 순양시큐리티 직원들의 눈총이 따가울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여니 조끼에 나비넥타이를 한 젊은 남자가 허리를 푹 숙이다 말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린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젊은 놈이라 그럴 것이다. “이학재 실장님 안에 계시죠?” 젊은 놈의 표정이 환해진다. “아, 일행이시군요. 이쪽으로 오시죠. 모시겠습니다.” 종업원을 따라가며 실내를 이리저리 살펴보니 김윤석의 말은 사실이었다. 돈 없는 사람은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듯, 온통 황금빛으로 치장했다. 이학재 실장은 바에 앉아 있었다. 바 건너편에는 젊었을 때는 대단한 미인이었을 법한 중년 여인이 웃으며 그의 말 상대를 해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는 젊은 여인이 없었다. 오로지 술만 마시고 딴생각은 들지 않도록 평범한 중년 여인 몇 명만 보일 뿐이다. 이학재 실장에게 다가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실장님.” “응? 어? 도준아!” 입으로 가져가던 잔을 떨굴 만큼 놀라는 모습이다. 그런 그를 향해 머리를 꾸벅 숙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여긴 어떻게…. 아… 김윤석이가 말했구먼.” “네.” “일단 앉아라. 아, 딱 봐도 할 말이 많아 보이니 편한 자리로 옮길까?” 스탠드 의자를 빼려던 이학재는 중년 여인에게 눈짓하고 일어섰다. 조금 전 그 젊은 놈이 쪼르르 달려와 문 대신 커튼이 달린 반대편의 작은 룸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다시 테이블을 세팅하자 이학재 실장은 술병을 들었다. “한잔할래?” 나는 조용히 잔을 들었다. 술을 따르던 그가 말했다. “안 하던 짓을 하는 거 보니…. 무슨 심각한 문제라도 터졌어?” “금융 계열사를 맡는 순간부터 심각했죠.” “엄살은…. 그 정도면 잘하고 있는 거야. 임원들에게 대부분 맡겼다면서?” “네.” “큰 건은 네가 다 결정하고?” “그렇지도 않습니다. 전 매일 변동 사항이나 큰 이슈만 보고받아요.” 이학재는 야릇한 미소를 보이며 자신의 잔에 술을 다 채운 후 잔을 들었다. 나도 재빨리 잔을 들어 살짝 부딪혔다. “그래, 이렇게 불쑥 찾아온 용건이 뭐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잔을 내려놓은 이학재는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아무튼, 넌 가끔 건방진 모습을 드러내. 그거 좋은 거 아니다.” “그래도 제 사촌들보다는 훨씬 예의 바르지 않습니까?” “네 사촌은 멍청한데 싸가지까지 없는 거고.” 순간 우리 둘은 눈을 마주쳤고 동시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말해, 뭐야?” 난 침을 꿀꺽 삼키고 조용히 말했다. “제 편이 좀 되어주십사 부탁드리려고 실례를 무릅썼습니다.” “네 편?” “네.” 편이라는 단어는 나이 들수록 복잡해진다. 어릴 때의 같은 편이란 대등한 관계의 친구가 그 뜻의 전부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갈수록 적이더라도 공통의 이익을 위해 같은 편이 될 수도 있다. 설사 같은 편이라 하더라도 대등한 관계가 아닌, 상하 관계가 대부분이다. 누구는 비서라는 이름으로, 누구는 직원이라는 이름으로, 심지어 경호원이라는 이름도 같은 편이다. 이학재의 삐뚤어진 입꼬리가 말해준다. 그는 내 말을 오해했다. 오해는 이 술자리가 끝나면 다 풀릴 것이니 굳이 부연할 필요는 없었다. “한국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네 편인데 뭐가 아쉬워? 이젠 사람 욕심까지 생긴 거냐?” “제가 할아버지 품을 나왔으니 이젠 제 편이 아닙니다. 응원석의 서포터즈 정도죠.” “아니야. 회장님은 언제라도 다시 운동장으로 뛰어들 수 있어. 이건 지분 문제가 아니다. 그분이 주식 하나 없다고 해도 모두 회장님 뒤에 줄을 설 거다. 순양의 임원 전부는 회장님 편이지.” “혹시 실장님의 희망 사항 아닐까요?” “뭐?!” 제대로 찔렀나? 훨씬 붉어진 얼굴이 꼭 술 때문은 아닐 것이다. “할아버지는 앞으로도 계속 지켜만 보실 겁니다. 순양 호라는 배가 침몰해도 나서지 않으실 거예요.” “어, 어떻게 해서 그리 확신하는 게냐?” “이번 순양카드 사태를 보며 확신이 섰습니다. 둘째 큰아버지인 진동기 부회장의 지분이 확 줄었습니다. 형제 두 분이 균형을 맞춰 가며 그룹을 이끌라는 할아버지의 그림이 깨졌죠. 그래도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게다가….” 술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순양카드가 남의 손으로 들어갔습니다. 아, 물론 신용카드 사업을 마땅찮게 여기셨지만 순양의 이름이 떨어지는 건 절대 못 참는 분 아닙니까? 그런데도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하셨어요. 완전히 은퇴를 굳히신 겁니다.” 다시 평정을 되찾은 이학재는 내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점점 변해 갔다. 내 생각과 반대로…. 옅은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회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흘러가니 가만있는 거지. 그분이 당신의 뜻에 반하는 결과를 보고만 있을 것 같아?” “계열사 하나가 날아가고, 둘째 아들의 지분이 7%나 허공으로 날아갔는데…. 그게 할아버지가 원하는 결과였다고요?” “물론. 카드 회사도, 지분도 가장 아끼는 손자에게 흘러들어 갔으니 얼마나 뿌듯하실까? 조금도 도와주지 않았는데 가장 어린 손자가 혼자만의 힘으로 늑대 같은 큰아버지를 한 방 먹였어. 아마 춤이라도 추셨을걸?” 이학재 실장에게서 보고 싶었던 표정이 내 얼굴에 나타났을 것이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설마 모든 걸 다 알고 있나? 너무 놀라 한마디 대꾸도 못 하고 눈만 깜빡였다. “뭘 그리 놀라?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아, 회장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검은 커튼 뒤에서 순양그룹을 조금씩 손에 넣는 미지의 인물. 넌 이런 걸 원했나? 좀 유치하지 않니? 하하.” 시치미 떼고 아닌 척할 때는 이미 지났다. 이 사람은 나와 미라클의 관계를 안다. “언제 아셨습니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묻자 이학재 실장은 손을 슬쩍 내저었다. “질문이 틀렸어. 언제 알아냈는가는 중요한 게 아니겠지?” 질문을 바꿨다. “얼마나 아십니까?” “뉴욕의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최대 주주…. 아니, 유일한 주주이며 이 회사 투자금이 대부분 네 돈이라는 것, 한국 미라클은 뉴욕 미라클의 자회사니 이것 역시 네 회사겠지? 그럼 HW 그룹도, 순양자동차도, 순양카드도 네 것이고 미라클이 가진 순양그룹 지배지분도 네 것이나 다름없지. 보자…. 33% 맞지?” 해외 투자금과 내 재산을 제외하고는 다 안다. “순양그룹의 2대 주주, HW 그룹의 총수, 해외 투자사가 보유한 막대한 돈. 이런 네가 내게 쪼르르 달려와서 도와달라, 같이 편이 돼달라 하는 것은 좀 우습다. 그렇지?” 이 사람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이학재 실장은 술이 좀 취했다는 것이다. 만약 또렷한 정신이었다면 자신이 내 모든 걸 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이자의 속내를 후벼 파야겠다. “미국 미라클까지 확인하려면 시간이 꽤 걸렸겠군요.” “그래. 내 인맥을 총동원했다.” 난 그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엄청나게. 회장님 도움 없이 이뤄낸 것 아니냐? 회사 이름대로 경이적이지. 기적이나 다름없어.” 이학재는 한 잔을 깨끗이 비운 후 잔을 내밀었다. “네 능력으로 보면 순양그룹을 전부 차지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은데, 뭐가 아쉬워?” “순양은 철옹성이니까요.” 이학재는 머리를 저었다. “그렇지도 않아. 특히 진영기 그자는 미덥지 못해. 조만간 큰 사고 하나 칠 거다.” “만약 사고 치지 않으면요? 두 분 큰아버지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 조심하기만 하면 철옹성입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학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넌 왜 순양그룹에 집착하지? 내 능력이라면 차라리 HW 그룹에 전력을 다해. 10년, 20년 만 지나면 순양에 버금가는 그룹이 되지 않을까? 아니, 지금이라도 네가 가진 순양의 지분으로 계열사 십여 개를 계열분리 해서 HW에 붙여. 그럼 단번에 재계 3위 안에는 들 거다. 20대 재벌 총수. 역사를 다시 쓰는 거야.” 틀린 말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재계 순위 놀이나 하려고 다시 환생한 건 아니지 않은가? “실장님.” “그래. 말해봐.” “덩치를 키운다고 해서 모든 기업이 순양처럼 되는 건 아니죠. 우성그룹 보십시오. 한때 재계 1위까지 찍은 대기업이지만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분식회계나 빚으로 덩치만 부풀린 우성과 널 비교하는 건 틀렸어. 모르긴 몰라도 HW가 순양보다 더 건실할걸? 넌 적어도 회사 돈을 빼먹지는 않을 테니까.” “HW를 아무리 탄탄하게 키워도 순양을 따라잡을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역사가 없으니까요.” “역사?” “네. 50년이 넘는 순양의 역사, 그 역사책 속에 기록된 사람들. 그게 바로 순양입니다.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죠.” 이학재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욕심은 회장님 못지않구먼. 역사를 써 내려 갈 생각은 없다는 말이지?” “네. 그냥 그 역사를 가져버리는 게 가장 안전하니까요.” “불가능하다고 보지는 않아. 너라면 성공할 거야.” “그게 벌써 막혔습니다.” 이학재의 눈썹이 꿈틀했다. “막혀? 뭐가?” “두 분 큰아버지가 지배지분을 재조정하려고 합니다. 지주회사들도 바꾸고 비율도 조정하겠죠. 미라클의 지분을 휴지로 만드는 작업이죠. 또한, 제게 의결권도 요구했습니다. 반대하지 말라는 거죠.” “미쳤어!” 재조정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소리 질렀다. “지배지분은 순양그룹 계열사 전체 지분의 5%에 불과해. 겨우 5%로 그룹을 지배하는 거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잘못되면 순환출자구조가 무너져. 단번에 순양의 주인이 바뀔 거다.” “신중하게, 천천히 진행한다고 합니다.” 눈치 빠른 이학재는 내 말뜻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회장님 돌아가시면 다시 판을 짠다?” “네.” “맘대로 하라고 해. 회장님이 안 계신 순양그룹은 내 관심 밖이야. 찢어먹든, 말아먹든 자식 놈들 마음이지 뭐.” “은퇴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날 경계하는 자식 놈들과 함께 일해? 부회장들도 지들이 키운 새끼가 있어. 아, 어쩌면 지분 재조정이라는 게 날 쫓아내려는 방편일 수도 있겠구먼. 내가 짜 놓은 판을 그대로 가져가면 내 눈치를 봐야 하니까. 허허, 참.”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도 실장님을 지금처럼 모시겠습니다.” “그게 네가 말한 네 편이라는 거냐? 사양한다. 아들뻘 되는 놈의 비서질이나 하며 늙어갈 생각은 없다.” 불쾌한 기분인지 잔을 들어 한 번에 싹 비웠다. “비서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전 순양그룹 회장실의 주인을 말씀드린 겁니다.” 이학재는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감추기 위해 술잔을 꽉 움켜쥐었다. ======================================== [219] 앞물결 3 “그런 눈빛은 좀 거북합니다. 의심을 거두세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그의 눈빛을 보며 웃었다. 이건 진심이다. “순양그룹 2대 회장은 이학재 실장님이, 3대 회장은 제가. 어떻습니까?” 여전히 대답은 않고 나를 노려보는 눈빛만 더 강해졌다. “실장님은 은퇴하시기에는 너무 젊고, 다른 일 하시기에는 능력이 너무 넘치시죠. 약속드립니다. 원하시는 만큼 순양그룹 회장실에서 지내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내가 허튼소리나 지껄이는 놈이 아닌 걸 안다. 느닷없는 내 제안이 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입을 열지 않았고 나도 조용히 술잔만 기울였다. 새로운 술병이 들어왔을 때 이학재 실장은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넌 참 영리해. 그리고 사악한 새끼다.” “네? 제가요?” “그래. 사악한 걸로 보자면 회장님보다 더하다. 마음속 깊숙이 꽁꽁 덮어 놓은 욕망을 살살 긁어 사람을 움직이려고? 그거 좋은 방법 아니다. 숨겨 놓은 욕망이 고개를 들면 지키려고 애썼던 것을 버려야 하거든. 그럼 자신을 경멸하게 돼.” “욕망을 드러내는 게 뭐가 부끄럽습니까? 드러낸 욕망을 채우지도 못하고, 벌거벗은 모습만 보여주는 결과가 부끄럽죠.” “뻔뻔한 놈.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그런데…. 실장님께서 지키고 싶은 게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의리지.” “의리? 할아버지에 대한…?” “그래. 회장님께서는 당신의 유산을 핏줄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어 하시니까. 내 역할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훌륭히 해냈지.” 사실일까? 단 한 번도 다른 생각은 없었던 걸까? 아니, 방금 고백했다. 감춰 둔 욕망이 있었다고 말이다. “그럼 마음속 깊숙이 꽁꽁 덮어 놓은 욕망은요? 순양의 회장 자리였습니까?” “글쎄다. 다른 뭔가가 분명 있었는데 구체적이지 않았어. 네 녀석이 구체적인 그림을 보여준거야.” 아주 편안한 태도, 내 제안을 받아들인 건가? 아니면 술자리에서 떠들어 대는 지나가는 말로 생각하는 것일까? 아무튼, 진심을 내게 말한 것만으로도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그림은 아주 좋지? 내가 피 흘리며 두 부회장을 숙청한 다음 회장 자리에 앉고, 몇 년 뒤면 네가 앉겠지? 어차피 40대는 되어야 회장의 연륜이 묻어나니까. 가만 보자…. 십몇 년 남았구먼.” “오해십니다. 실장님을 제 칼로 쓸 생각은 없어요. 오히려 제가 실장님의 칼 역할이지 않겠습니까?” 그의 표정만 봐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정말 술자리 잡담으로 끝낼 생각일까? “내가 널 영리하다고 한 건 바로 그 공백을 메우는 수단으로 날 선택한 거야. 네 주변의 어른들은 순양그룹 회장 자리에 관심 없지? 네 아버지는 원하는 인생을 찾았고, 오세현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순양과 연결 고리가 없어.” 이미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술주정뱅이처럼 자기 할 말만 계속한다. “내가 그룹 전반을 주물렀으니 모두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할 테지. 이방원이가 이성계의 차남인 이방과를 왕으로 내세운 거랑 다를 바 없지 않아? 넌 나이가 찰 때까지 내게 맡기는 게 차이라면 차이겠지.” “절 굉장히 사악한 놈으로 보시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전 실장님께서 원하신다면 자제분을 순양의 요직에 앉을 수 있도록 챙길 겁니다. 부회장이란 직책으로 주력 계열사를 맡길 수도 있어요.” 자식 이야기가 나오자 이학재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놈아. 순양이 북한이냐? 대를 이어 충성하게?” “억지스러운 말로 들립니다. 제가 전문경영인 체제를 원한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사악한 놈. 내 아들놈들이 딴 일에 빠져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 놈이. 허허, 참.” 이학재 실장은 계속 웃음을 터트리며 내 술잔을 채웠다. “그거 마시고 일어나라. 이 정도면 네 말 전부 들어준 것 같은데, 더 할 말 남았어?” 이 양반의 진심 어린 대답을 듣는 건 뒤로 미뤄야겠다. 적어도 나를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건 확인했으니까. 미라클과 나의 관계를 잘 알면서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내가 두 큰아버지의 파이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걸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완전히 내 편도 아니지만, 최소한 나의 반대편에 설 생각은 없어 보인다.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참, 술은 그만 드십시오. 많이 드셨습니다.” “까불지 말고. 나가 봐.” 손을 휘휘 젓는 이학재에게 머리를 숙이고 일어섰다. 급하게 마신 탓인지 내 몸도 휘청했다. * * * “그리고는 아무 대답도 없어?” “네. 며칠이나 지났는데 모른 체합니다. 할아버지 댁에 문안 인사드리러 가서 몇 번 스쳤는데도 말입니다. 눈도 마주치지 않아요.” “그 양반이라면 신중하게 생각할 테지. 사실 잘 모르겠다. 나라면 회장님 수발 몇 년 더 하다가 돌아가시면 나도 은퇴해버릴 거니까. 네 말을 들어보면 그 양반은 나랑은 좀 다른 것 같기도 해.” 오세현은 며칠 전 있었던 일을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을 뿐 내가 한 일에 잘했다, 못했다 평가는 없었다. “그런데 참 대단하긴 하다. 미국까지 다 뒤져서 네 비밀을 알아버렸다니.”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었다는 건 제게 우호적이라는 시그널이겠죠?” “이학재 실장의 처지에서는 당연하지. 자식 같은 놈이 더 편하지 자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들들이 편하겠어?” 오세현은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 양반이 네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그래야 네 지분을 지킬 수 있어.” “네. 사실 지주 회사를 바꾸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더라고요. 새롭게 지분 구조를 짜고 거기에 맞춰 계열사 사장들에게 지시만 하면 끝나니까.” “그래. 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야 계열사 사장들이 회장님의 승인 여부를 먼저 따지며 눈치 보겠지만, 돌아가시면 왕자들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지.” “이학재 실장은 그걸 막을 수 있겠죠?” “지금의 순환출자구조를 짠 게 그 양반이라면서?” “네.” “그럼 막을 수 있을 거야. 여차하면 구조 자체에 큰 구멍을 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을 수도 있으니까.” 불안을 떨쳐버리려니 자꾸 좋은 쪽 이야기만 한다. 아예 정반대의 선택도 가능하다. 이학재 실장이 큰아버지들을 돕고 그에 걸맞은 보상을 원한다면? 나와 손잡으면 그 보상은 미래의 일이지만 큰아버지와 손잡은 지금 당장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복잡한 경우의 수가 머릿속을 휘저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대표님. 손님이….” 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쑥 들어오는 사내, 다름 아닌 이학재 실장이었다. “실장님!” “불쑥 찾아와서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어.” “아닙니다.” 오세현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실장님.” “그러네요. 꽤 오래됐죠?”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오 대표는 얼굴이 좋네. 편하신가 봐?” “이놈 덕분에 팔자 폈으니까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한량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게 전부니 뱃살만 늘었어요.” 오세현은 너스레를 떨며 뱃살을 꾹 움켜쥐었다. “더는 욕심 부리지 않을 모양이로구먼. 여기가 끝인가?” 눈치 하나는 발군이다. 이학재 실장은 오세현의 너스레가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웃음을 거둔 오세현이 천천히 말했다. “떠날 타이밍만 보고 있습니다. 도준이 때문에 번 돈을 어떻게 하면 다 쓸까 고민입니다.” “그렇게 안 봤는데 내가 실수했어. 윤기 친구라서 그런가, 욕심이 없군요.” “욕심이 없다뇨? 잘못 보셨습니다. 제 재산이 얼만지 알면 그런 말씀 못 하실 텐데요?” “그런 의미가 아닌 줄 알면서…. 뭐, 그렇다고 칩시다.” 이 정도면 인사는 충분하다. 누가 먼저 본론을 꺼내느냐만 남았다. “실장님. 우리 도준이 좀 도와주십시오. 솔직히 실장님도 두 부회장보다야 도준이가 월등하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이놈 순양그룹 회장으로 만들어주시고 은퇴하십시오. 제가 풍광 좋은 곳에 자리 잡아 놓겠습니다. 후회하시지 않을 만큼 말입니다.” 마치 막걸리 한잔 걸친 아저씨의 넉살을 보는 듯했다. 오세현은 심각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분위를 만들어버렸다. “순양그룹의 미래를 생각해도 도준이가 제격입니다. 다른 재벌가 양아치들과는 차원이 달라요. 회사 돈을 곶감 빼먹듯 빼먹을 놈도 아니고, 전문경영인 시스템을 정확히 적용합니다.” “회사 돈을 빼먹지 않는 건 돈이 워낙 많아서 그런 거겠지?” 이학재 실장이 내게 눈길을 주며 말하자 오세현이 나서서 대답했다. “세금 다 낸 깨끗한 돈만 해도 조 단위예요. 회사 돈은 푼돈일 뿐입니다.” 조 단위라는 말에 이학재의 눈이 번뜩였다. 미라클의 구조는 파악했지만 내 재산은 파악하지 못했으니 놀랄 만할 것이다. “도준아.” “네.” 저절로 허리가 펴지며 자세를 바로 했다. 이 사람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더라도 마음을 드러내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네 지분은 내가 지켜주마.” 됐다. 적어도 큰아버지들의 장난질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내 손에는 수십 개의 서류 박스가 있어. 그 속에는 지금까지 지분을 관리했던 과거가 전부 들어 있다. 물론 먼지까지 전부.” 불법 행위의 증거, 그걸 다 가졌다는 뜻이다. 혹시 이 양반, 줄곧 딴생각을 했던가? “오해는 말아. 회장님을 배신할 생각으로 보관한 건 아니다. 회장님이 돌아가시고 가마솥에 들어가는 사냥개 꼴을 당하지 않으려 그리한 거다. 순양에 인생을 바쳤어. 명예로운 마지막은 누릴 자격이 있다.” “물론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학재 실장은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다. “네가 두 부회장을 몰아내는 데 내가 거들지는 못해. 이건 회장님과 나의 의리다. 마찬가지로 두 부회장이 널 몰아내려고 장난치는 것도 막을 거다.” 이학재 실장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단번에 들이켰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됐겠지?” 응? 이게 전부? 다른 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지 않을 작정인가? “역시 술은 조심해야 해. 술 먹고 무심결에 내뱉은 말을 책임지려니 힘들구먼.” 이학재 실장은 웃으며 일어섰다. “벌써 가시게요? 식사라도 하면서 좀 더 이야기 나누시죠?” 일어서는 그를 잡았지만, 소용없었다. “더 할 이야기가 남았어? 네가 원하는 대답을 들었으니 된 거 아닐까?” “다른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뭐? 아, 날 순양그룹의 2대 회장으로 앉힌다는 거?” 낯 뜨거워 얼굴이 붉어졌다. “그건 그 정도의 힘을 네가 가졌을 때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 갈 길이 천 리야. 우물에서 숭늉 찾는 건 멍청한 짓이지.” 사람의 마음은 한결같지 않다. 이학재 실장은 내가 회장을 선임할 수 있는 힘을 갖췄을 때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걸 말한 것이다. “앞으로 지켜보마. 네가 두 큰아버지를 어떻게 상대하는지 보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아. 흐흐.” 이학재 실장은 문을 열고 나가려 하다 돌아섰다. “참, 김윤석이 말이다.” “네.” “이제 데리고 가. 가르칠 만큼 가르쳤으니 곁에 두고 쓰기엔 부족함이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머리를 꾸벅 숙이자 다시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쓸 만한 놈, 그 이상은 아냐. 중요한 일 맡기기에는 많이 부족해.”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실장님.” 이학재는 손을 한 번 쓱 올리더니 곧바로 나가버렸다. “우하! 저 양반도 정말 보통 아니구먼.” 문 닫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오세현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은 공정한 판만 깔아줄 테니 싸움은 당사자가 직접 해라 이거지?”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이제 두 부회장이 손잡고 날 몰아내는 건 힘들어졌으니 말이다. 삼각 구도를 계속 유지하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 [220] 앞물결 4 오세현은 아쉬움이 남는 말만 남기고 떠난 이학재 실장에게 실망한 듯 보였지만 나는 아니다. “지금은 이 정도 대답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만족하는 모양이네?” “네. 오늘 보니 이학재 실장은 저랑 비슷합니다.” “이 실장이 너와? 어째서?” 오세현 물었다. “욕심을 쉽게 드러내지 않잖습니까? 순양그룹 회장 자리를 준다고 했어요. 순양을 가지지는 못해도 지배는 가능한 자리죠. 그 자리를 약속받으려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 봤자 월급쟁이 회장이라는 건 변함없지.” “아뇨. 이미 제가 HW 그룹의 주인이라는 것도 압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HW 그룹 경영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 것도 알고요. 월급쟁이인 건 맞지만, 전권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지배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죠.” “그래도 많이 부족하지. 월급쟁이는 실적에 따라 목이 휙휙 날아가니까….” “하나 더 있죠. 제가 HW 계열사 사장들에게 단 한 번도 이익이니 매출이니 하는 걸로 뭐라 한 적이 없다는 걸 압니다. 실적 때문에 쫓겨날 일은 없다는 걸 모르겠습니까?” “그렇긴 하네. 넌 두 부회장처럼 돈 챙기는 데 혈안이 된 것도 아니고…. 오히려 회사가 어려워지면 언제든 네 돈으로 긴급수혈도 해주잖아. 솔직히 날로 먹는 건데 왜 요구하지 않았을까?” “말로 하는 약속 따위는 믿지 않는 거죠. 이학재 실장님이 지분 구조를 지켜주겠다는 것도, 내가 순양 회장 자리를 주겠다는 것도 지금은 말뿐이니까요.” “정확한 거래만 하자?” “그런 것 같습니다. 큰아버지들이 지분 조정을 시도할 때 이 거래는 효력을 발생합니다. 막아주고, 자리 주고.” 오세현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의외의 말이 나왔다. “그럼 이제 나와도 거래 한번 하자.” “네? 그게 무슨…?” “내 퇴직금 말이야. 내가 대표이사직을 꽤 오래 했잖아. 만만치 않은 금액일걸?” 퇴직금이 어마어마하니 적당한 선에서 네고하자는 말이 아니다. 슬슬 은퇴하겠다는 뜻을 전하는 것이다. 지분을 지키는 것이 확실해지자 내가 자리 잡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이번엔 내가 입을 열지 못했다. 언젠가 마주해야 할 일이었고 늘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았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퇴직금 정산을 따따블로 하겠습니다. 몇 년 뒤에 다시 이야기하시지요.” “눈치 빠른 놈이 딴소리는…. 이만하면 내가 할 만큼은 했어. 원래 내 꿈이 나이 오십에 은퇴하고, 동남아 휴양지에서 골프나 치고 맛있는 거 먹으며 남은 인생 즐기는 거야.” “십 년 더 하시기로 결심한 거 아닙니까?”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오세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6년이나 더 했으면 충분히 오래 했어. 대신 어마어마한 돈을 더 벌었으니 억울하지는 않아. 흐흐.” 맞다. 충분히 벌었고, 충분히 나를 배려해줬다. “그리고 두 번째 꿈은 저절로 이룬 것 같다.” “혹시 코타키나발루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작년에 오픈했잖아. 거기 방갈로 하나 줘.” 휴양지에서 골프나 치고 맛있는 거 먹으며 살기에는 이보다 적합한 곳이 없을 정도다. 아마 작년부터 계속 이 말을 꺼낼 시기만 봐왔던 것 같았다. 카드 사태가 아니었다면 코타키나발루 리조트가 완공됐을 때 말했을 것이다. “방갈로가 아니라 단독 빌라겠죠. 설계할 때 삼촌이 고급빌라 몇 채를 구겨 넣었지 않습니까? 그거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 마블 하우스?” “네.” “역시 눈치 빠르네, 흐흐.” 마블 하우스는 18세기 미국의 대부호 밴더빌트(William K. Vanderbilt)의 여름 별장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밴더빌트는 당시 미대륙의 해운과 철도를 손아귀에 넣어 미국 재무부 재정의 절반에 육박하는 부를 쌓아 올렸다. 1892년 완성된 마블 하우스는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으로 장식해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처럼 꾸몄다. 하얀 대리석 외관에 내부는 노란빛과 분홍빛의 대리석을 이용했기에 마블 하우스라고 부르는 것이다. 오세현은 최상위 부자 고객을 위해 십여 채의 화려한 빌라도 준비하자고 했고 나도 동의했다. 난 꼭 부자들을 위한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며 아낌없이 지지하고 도와준 사람들을 위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그거 한 채 줄려고?” “삼촌 지낼 곳인데 방갈로로 되겠습니까? 빌라 정도는 돼야죠.” “그거 퇴직금이냐? 아니면 약 치는 거냐?” “약이라니요?” “그 빌라 줄 테니까 몇 년 더 일해라, 뭐 이런 거 아냐?” 오세현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난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이 거래는 내가 손해를 많이 볼 생각이다. “삼촌 꿈을 미끼로 거래할 생각은 없습니다.” “네가 고집부리지 않으니 내 마음이 편하다.” 떼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쩌겠는가?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각자의 인생을 써내려 가는 중에 내가 잠시 끼어든 것뿐이다. 그들의 인생에서 나의 퇴장을 원한다면 당연히 빠져줘야 한다. “사표처리는 언제 할까요?” “올겨울 크리스마스는 코타키나발루 마블 하우스에서 지내련다. 그 전에 정리할 건 빨리 정리하자.” “알겠습니다. 참, 아예 이사하실 생각입니까?” “그 정도는 아니고, 왔다 갔다 해야지. 가끔 와서 네놈이 개고생하는 걸 바라보는 재미를 놓칠 수야 없지 않겠어?” 농담이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오세현도 굳은 내 표정을 보더니 태도를 슬쩍 바꿔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송현창 회장도 올해를 끝으로 은퇴하실 거다.” “삼촌이 그 자리에 앉으시면 딱인데 말이죠.” “미련 버려.” 오세현은 손을 한 번 휙 저으며 말을 이었다. “회장 자리에 앉을 사람 그리고 순양카드를 맡을 사람이 가장 급해. 지금 카드 사장은 경질해야 하니까 말이야.” “사실 이학재 실장이 선금을 요구했다면 HW 그룹 회장 자리를 맡겼을 겁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물 건너갔으니…. 적당한 사람 찾을 때까지 당분간 공석이죠.” “카드는 생각해둔 사람이 있어?” “대현카드를 인수하면 그 사장을 앉히려고 했습니다. 합병할 때, 흡수당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려면 그쪽 사장이 제격이죠. 대현카드 직원들 사기 문제도 있고.” “인수는 가능해?” “순양카드 보더니 앗 뜨거라 한 것 같습니다. 고강도 자구책을 연일 발표하고 있으니 정부도 한 발 뒤로 물러섰어요. 조금 더 지켜보는 방향으로 결론 내린 것 같습니다.” “인수 자금은 넉넉하고?” “급한 불을 끄려면 6천억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큰아버지가 주신 8천억이 있으니 문제없습니다.” “그래. 아무튼, 넌 내년에 미라클 대표이사로 취임할 준비 해라. 회사 내에 내 자리를 원하는 놈은 많지만 맡길 만한 사람은 없어.” “네.” 맥 빠진 내 목소리에 오세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등을 툭 쳤다. “엄살 부리지 마. 넌 앞으로도 잘해낼 거다.” “섭섭해서 그럽니다.” “그럼 퇴직금으로 네 섭섭한 마음을 표시해봐. 흐흐.” “마블 하우스로 만족 못 하시겠어요?” “뭐야? 집 한 채로 끝이라고? 계산 새로 하자 이거야?” 이런 쓸데없는 농담으로 오세현의 은퇴를 확정했다. 꿈을 이룬 사람이 떠나는데도 축하의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 * * 매년 똑같은 가을이 찾아왔지만, 올해는 특별했다.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인 9월 12일 저녁 8시경, 초강력 태풍인 ‘매미’가 경남 통영을 덮쳤다. 한반도를 강타한 매미는 다음 날인 13일 새벽 2시쯤 동해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겨우 6시간 조금 넘게 경남과 동해에 머물렀지만, 자연의 힘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4조 7,800억 원의 재산 피해와 만여 명의 이재민, 그리고 130여 명의 인명 피해를 남기며 한반도를 할퀴고 지나갔다. 13일 날이 밝자마자 난 오세현의 전화를 받고 HW 그룹 사옥으로 달려갔다. 순양금융그룹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난 위기보다 기회를 택했다. 계열사 대표이사들과 임원들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옅은 미소를 보이는 이도 있었다. 태풍이 파괴한 자리는 사람이 다시 채워야 한다. 바로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HW 건설이 진행 중인 공사도 일단 멈췄고 정확한 피해액 조사와 대책 마련을 지시했습니다.” “인명 피해는?” “천만다행스럽게도 우리 직원들의 인명 피해가 없습니다. 야간작업 중이던 직원 몇몇은 부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 없다고 합니다.” 송현창 회장이 가장 먼저 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마지막이 사고로 얼룩지는 일은 없어졌기 때문이다. “부상자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섭섭지 않을 정도의 충분한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해.” “네. 회장님.” HW 건설 사장이 대답하자 송현창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머지 일은 여러분들이 알아서 진행해요.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소?” 송 회장은 오세현을 보며 눈을 찡긋했다. “그럼 회장님 먼저 들어가십시오. 나중에 정리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고는 무슨,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대책이나 잘 세워요.” 송현창 회장은 오세현의 어깨에 손을 슬쩍 올리고는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이미 계열사 임원들 모두 그의 은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지 모두 고개 숙여 인사만 할 뿐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 태풍으로 공적시설 피해액은 분명 조 단위가 넘을 겁니다. 정부도 지금 긴급 예산 편성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니… 말 꺼내기는 조심스럽지만 이건 우리 건설업계의 기회입니다.” 우리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건설사가 피해 복구와 재건을 위해 쏟아부을 조 단위의 돈을 차지하기 위해 지금 이 시각 우리처럼 열띤 회의에 빠져 있을 게 틀림없다. 카드대란으로 빚어진 불경기에 이것만큼의 호재도 드물다. 우리의 대회의실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선수를 치기 위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온갖 의견이 쏟아져 나왔고 우리의 역량으로 어디까지 가능한지 의견이 분분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오세현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가이드라인을 정해주지 않으면 오늘 회의 안 끝난다.” “제가 정해요?” “그럼 누가 정해?” 오세현은 턱짓으로 나를 회의 한가운데 밀어 넣었다. “모두 잠시만. 우리 방향을 좀 바꿔 보는 건 어떨까요?” 손을 슬쩍 들어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지주회사인 미라클의 이인자이며 순양의 핏줄인 내 존재를 아무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저도 엄청난 기회가 왔다는 걸 모르지는 않습니다만, 이건 비극입니다. 비극을 돈벌이 기회로 이용하는 것보다 다른 기회로 이용합시다.” “다른 기회? 어떤 거?” 내 이야기를 끌어가기 위해 오세현이 거들었다. “그룹 이미지 제고 말입니다.” “어떻게?” “공공 건설 부분이니 입찰 방식으로 진행할 테니까 우린 최저가 경쟁에서 빠지고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겁니다. 이를테면 우리 이익 전체를 이재민을 위해 쓰겠다….” “이익을 성금으로 내자는 말입니까?” “아뇨. 성금은 흔해서 눈에 띄지 않습니다. 건설사답게 건설로 돌려주는 겁니다. 아파트를 지어 집 잃은 수재민에게 나눠 준다… 뭐, 이런 방식이죠.” “실장님. 당장 살 집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언제 아파트 올려서 나눠 준다는 말입니까?” 누군가 현실성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저 자식은 잘라야겠다. 문제를 제기하기 전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부터 생각했다면 저런 말은 꺼내지도 못했을 텐데. “수재민들이 아파트 올리는 동안 지낼 집을 사서 나눠 주면 되죠. 우리가 수재민 전체를 책임질 것도 아니니 수천 채를 살 필요는 없어요. 우리가 부담할 수 있을 만큼 집을 사면 됩니다.” 이때 또 다른 누군가가 테이블을 툭 쳤다. “비업무용 부동산을 매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네요.” 저 사람은 승진이다. 내 말의 숨은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 ======================================== [221] 들켜야 한다 1 “비업무용 부동산 매입만을 위해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이런 방법도 있지 않겠나 하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적어도 우리 HW 그룹은 이런 국가적인 재난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 게 아니라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이미지를 주도록 합시다. 정부와 국민 모두에게 말입니다.” 내 의견을 듣던 건설 사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룹의 주인인 미라클에게 확답을 받고 싶은 것이다. “오 대표님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정말 이익을 포기하실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오세현은 머리를 끄덕였다. “단,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죠. 우리가 포기하는 이익 이상 HW 그룹의 위상을 높여야 하는 겁니다. 수백, 수천억이 될지도 모르는 이익과 맞먹는 효과. 그게 핵심입니다.” 건설 사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익을 사회 환원으로 돌린다면 입찰에서도 매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 게다가 기자를 모아놓고 생색내는 건 바로 대표이사인 자신 아닌가? “손해 보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내시기 바랍니다. 그게 당장의 이익보다 더 많을 것을 가져다줄 겁니다.” 오세현이 내게 눈짓하며 일어섰다. “결과 나오는 대로 알려주십시오.” 우리가 일어나자 건설을 제외한 다른 계열사 임원들도 일어섰다. 계획을 원점에서 다시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난 회의실을 나와 자동차의 조대호 사장을 기다렸다. “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나도 네 아이디어 좀 빌려야겠다. 내 방으로 가자. 오 대표, 시간 좀 있지?” 조대호 사장이 오세현을 바라보자 그는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저놈이랑 말씀하십시오. 저야 있으나 마나입니다. 흐흐.” 오세현은 행여나 붙잡힐까 발걸음을 재촉했다. “뭐야? 저 친구 왜 저래?”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조대호 사장의 팔을 잡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차 한잔을 마시며 태풍의 피해를 보도하는 뉴스를 확인했다. 언론의 속보 경쟁 탓인지 이미 3조 원이니 4조 원이니 하는 피해 금액이 간간이 흘러나왔다. “오늘 회의에서 네가 말한 걸 생각해보면 우리 자동차도 가만있을 수는 없겠지?” “네. 대현자동차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어떻게?” “일단 우리 <이스퀼로> 구매한 경남과 강원 지역 고객 모두에게 전화를 돌리십시오.” “그다음은?” “무상으로 점검과 수리를 실시하는 겁니다. 괜찮다고 말하는 고객도 빠짐없이 말입니다. 잘 챙겨준다는 생각에 우리를 고맙게 여길 겁니다.” “점검 정도야 부담 없으니 괜찮아. 하지만 무상 수리는 비용이 많아 든다. 아무리 무상 A/S 기간이라지만 천재지변은 해당 없잖아.” 조대호 사장도 비용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히 짚고 넘어갈 생각인가 보다. 내게 확답을 듣고 싶어 한다. “전 더한 것도 생각합니다.” “더한 거?” “네. 폐차 지경에 이른 침수 차량은 전부 수거하고 새 차를 나눠 주십시오.” “야!” 펄쩍 뛰는 조 사장을 웃으며 진정시켰다. “별것 아닙니다. 이스퀼로야 베스트셀링이 아니니 판매차량 대수가 얼마 안 됩니다. 게다가 경남, 강원 지역입니다. 아시다시피 판매는 대부분 수도권에서 일어났어요. 몇 대 안 될 겁니다.” 잠깐 머리를 굴리던 조 사장은 인터폰을 눌렀다. “지역별 <이스퀼로> 판매 현황 가져와.” 비서가 관련 서류를 가져오고 확인하는 동안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조 사장은 꼼꼼하게 확인한 뒤 안도의 숨을 쉬었다. “좋아. 해보자. 그 전에 보도자료 좀 뿌리고. 이거 뉴스에 나가면 난리 날 거다. 흐흐.” “아뇨. 우리가 먼저 언론에 자료를 돌리면 안 됩니다.” “뭐? 이런 걸 몰래 한다고?” “네. 몰래 해야죠. 은밀하게.” “말도 안 돼! 무상 교환까지 해주는 일이다. 몇십억은 족히 깨져. 최소한 그 금액 정도의 홍보 효과는 봐야지. 오 대표도 말하지 않았냐? 손해 보는 비용은 그룹 이미지 제고로 돌려받는다고.” “사장님. 그게….” 몇십억의 돈이 날려버린다고 생각하니 말할 틈을 안 준다. “안 돼. 이건 떠들어야 하는 거다. 우리가 종교인이냐?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게?” “그럴 리가요. 선행은 모두가 알도록 해야죠.” “그런데 왜 보도자료를 돌리지 말라는 게냐?” “사장님. 선행은 알리는 게 아니라 들켜야 하는 겁니다.” “뭐?” 정확한 뜻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깜박였다. “요즘은 비밀이 없어요. 인터넷이 모든 걸 다 까발리는 시대 아닙니까? 새 정권의 대통령도 인터넷 때문에 선거에서 이겼다고 공공연히 말합니다.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무상 교체 대상자들이 흥분해서 홍보해 줄 겁니다.” “아…….” “우린 오로지 친절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럼 우리의 선행은 들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론도 분명 더 크게 보도해 줄 것이고요. 보도자료 돌리고 떠들어 달라고 부탁할 때 맨입으로 되겠습니까? 보도자료보다 인터넷의 화제를 더 크게 보도하는 게 요즘 언론입니다.” 조 사장은 허탈한 웃음까지 보이며 말했다. “이거, 이거…. 나이 먹으니 세상 돌아가는 걸 못 따라가겠어.” “건설이야 우리 의도를 알려야 입찰에서 좋은 결과를 얻겠지만, 자동차는 다르죠. 알리는 것보다 들키는 게 훨씬 더 진정성이 있어 보이고 더 부풀려 퍼져 나갈 겁니다.” “그래. 알리지 않고 들킨다, 내가 이걸 기준으로 준비하마.” 만족스러운 표정의 조 사장은 갑자기 기억난 듯 말했다. “참, 오 대표는 왜 저래? 무슨 일 있냐?” “그게 사실은….” 난 오세현과 나눴던 이야기를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의 은퇴 결심을 들은 조대호 사장은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니! 남자 오십이면 이제 일 좀 하는 나이 아냐? 환갑 넘은 나도 은퇴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그 친구 제정신이야? 그 좋은 머리를 왜 썩히려고 해?” “어쩌겠습니까? 항상 꿈꿔왔던 일이라고 하니 붙잡는다고 될 일이 아니죠.” 조 사장은 조금 전보다 더 난처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거 큰일이야. 송현창 회장님도 올해를 끝으로 은퇴하신다고 사장단에게 공언했는데…. 난 오세현 대표를 우리 그룹의 차기 회장으로 생각했다고. 자격은 충분하잖아?” “사장님 혼자만의 생각이십니까? 아니면 사장단 전체의…?” “사장단 전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오히려 우린 송 회장님과 오 대표가 말을 맞췄다고 생각했다고.” “그럼 어떡하면 좋을까요?” “뭐? 송 회장 후임?” “네. 혹시 사장님께서 생각 있으시면….” 슬쩍 떠보니…. 아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부터 내저었다. “난 안 돼.” “부족함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아냐. 넌 네 할아버지인 진 회장님의 안목을 믿지?” “네.” 갑자기 왜 할아버지를 거론할까? “그분이 진단하셨어. 난 한 우물만 팔 놈이지 강물을 다스릴 놈은 못 된다고. 그래서 자동차에 던져 놓고 크게 간섭하지 않으셨어. 회장 자리는 언감생심이다. 딴 사람 구해.” 딴 사람이 없으니 문제다. 우리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문 채 태풍 피해 소식을 전하는 TV만 쳐다보기 시작했다. * * * 순양 본관으로 달려오니 모두 침통한 표정으로 회의 중이었다. 지불해야 할 보험금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근거리는 건 당연하다. 특히 순양화재 사장의 표정이 가장 심각했다. 태풍, 호우, 홍수, 강풍, 지진 등으로 입은 손해를 보상하는 보험 상품인 풍수해보험을 책임지기 때문이다. 뒤늦게 회의에 참석한 나를 보며 그들은 더욱 긴장했지만 별다른 의견은 내지 않았다. 다만 한 푼이라도 보험금 지급을 아끼라는 말은 삼갔다. 대신 피해당한 사람들의 빈정 상하는 일 없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말로 그들의 압박을 덜어주고 회의실을 먼저 빠져나왔다. 장도형 부사장은 내 눈길을 받고 조용히 나를 뒤따랐다. 내 방에서 마주한 장도형 부사장에게 말했다. “회의실에서 했던 말은 빈말이 아닙니다. 그러니 괜한 억측 하지 말라고 전하세요.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보험금 안 주려는 짓은 하면 안 됩니다.” “네. 단단히 못 박아두겠습니다.” “그리고 순양금융 그룹 이름으로 성금 좀 내세요.” “그렇지 않아도 준비할 생각이었습니다. 벌써부터 방송 3사와 신문사들의 전화가 빗발칩니다.” 이것도 경쟁이다. 재해 성금 모금이 언론사들의 사세를 과시하는 경쟁으로 흘러가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골고루 나눠 줘야 뒷말이 없다. 하지만 나누는 순간 금액이 분산되니 기업 입장에서는 좋은 선택은 아니다. “그런데 실장님. 우리 단독으로 내실 겁니까? 순양그룹 이름으로도 성금을 내야 할 텐데요?” “금융그룹 이름으로 먼저 내 버리세요. 그럼 각자 알아서 하겠죠. 그룹 전체로 내면 우린 묻힙니다. 순양전자만 돋보일 게 뻔한데 그런 바보짓은 피해야죠.” “진영기 부회장님이 노발대발하실 텐데…….”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걱정 말고 질러버려요.” “네. 그럼 언론사별로 어떻게….” “언론사는 빼버리세요. 우린 재해대책본부에 내도록 합시다. 큰 거 한 방이 작은 거 몇 개보다 더 돋보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얼마 정도 할까요?” “50억이면 충분하겠죠?” 조금 놀라는 눈치였지만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대현그룹 전체가 낸 성금이 30억이니 기업 규모로 따지면 엄청난 금액이다. “넘치도록 충분한 금액이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지시 사항은 없으십니까?” “혹시 믿을 만한 기자 있습니까?” “기자요?” “네. 섣불리 펜대 놀리지 않고 글빨도 좀 괜찮은 그런 기자 말입니다.” “홍보팀에 알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는지?” “제가 개인으로 성금을 내려고 하는데 익명으로 처리해 주세요.” 눈치 빠른 장도형 부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미담 하나 만드실 생각이군요.” “네.” “익명으로 내고 며칠 뒤, 그 믿을 만한 기자가 터트리고. 맞습니까?” “정확합니다. 하하.” “그런데 실장님. 미담이 기사가 되려면 금액이 좀 커야 하는데… 얼마나 내시려고요?” “5백억이면 기삿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 오백억요?” 눈이 휘둥그레진 그를 보며 한마디 더 보탰다. “부족합니까? 천억으로 올릴까요?” “아, 아닙니다. 너무 많아서 그러죠.” “지금 부사장님의 모습처럼 누구나 입이 떡 벌어져야 효과 봅니다. 어설픈 금액은 되려 생색만 낸다고 욕먹어요. 지를 때는 예상치 금액에 0을 하나 더 붙여야 효과가 폭발합니다.” “효과 정도가 아닌데요? 이 기사가 나가면 태풍 기사를 뒤덮을 정도입니다.”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죠. 이십 대가 할아버지 잘 만나서 재벌 회장 놀이 한다는 말이 안 나오도록 만들어야죠. 소위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존경할 만한 기업인. 이 이미지로 싹 바꿔 놓아야 합니다.” 후일 치열하게 벌어질 후계 싸움에서 보이지 않는 국민의 지지.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정부기관과 은행도 순양그룹의 대주주다. 그들도 언젠가는 셋 중 누구 한 명의 편에 서야 할 때가 온다. 그때 그들은 국민 여론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들 아닌가? “이미지 바뀌는 정도가 아니겠는데요? 칭송이 자자할 것 같습니다.” “그럼 더 좋고요.” “이 성금도 재해대책본부에 내는 거죠?” “그렇습니다. 언론사 한 곳을 밀어줬다가는 다른 곳에서 기사를 받아쓰겠습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도리어 씹어댈지도 모르는데….” “알겠습니다. 제대로 미담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장도형 부사장은 마치 비밀스러운 임무라도 맡은 듯 흥미를 감추지 못했다. ======================================== [222] 들켜야 한다 2 또한, 장도형 부사장은 미묘한 말도 슬쩍 던졌다. “이거 참, 조금 전 그 난리를 치며 회의한 것이 조금 허탈해지는군요.” “무슨 뜻입니까?” “아, 그렇지 않습니까? 순양화재나 순양생명이 이번 태풍으로 지급해야 할 보험금이 5, 6십억쯤 될 겁니다.” 어라? 이 친구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그런데요?” “회사 성금으로 50억, 실장님 개인으로 5백억. 이 금액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 아닙니까?” “그러니까 푼돈 가지고 임원들이 모여 대책회의 한 것이 쓸모없는 짓으로 보인다, 이 말입니까?” 웃음기 사라진 내 표정을 보자 장도형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장도형 부사장님.” “네, 네.” “제가 지금까지 회사 돈에 손댄 적 있습니까?” “네? 아, 아닙니다.” “전 순양금융그룹의 지배 주주 역할에 충실합니다. 공적인 직책도 없어요. 그래서 월급도 가져가지 않고 계열사 법인카드 한 장 들고 다니지 않아요. 알고 계시죠?” “네. 물론입니다.” “그리고 순양의 지분을 제외한 내 재산 중에 단돈 십 원이라도 순양그룹에서 나온 거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그가 황급히 머리 숙여 사과했지만, 이쯤에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기회 될 때마다 보여 줘야 한다. 조금이라도 착각하거나 방심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지금껏 경영 실적에 대해 입도 뻥긋 안 했습니다. 오늘도 분명히 말했죠? 보험금을 주네 안 주네 하며 실랑이 벌이지 말고 넉넉하게 쥐여주라고.” “…….” “제가 이렇게 행동하는 건 바로 회사의 임직원들에게 당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손가락질받는 재벌들의 행태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장도형은 얼굴을 붉힌 채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런데 오히려 장 부사장님이 사재와 회사 돈을 구분하지 못하니 어이가 없군요. 어떻게…. 회사 돈을 내 쌈짓돈으로 쓰고 소유와 경영의 일체화로 바꿀까요?” “죄송합니다. 무심결에 그만…. 무례를 범했습니다.” 벌떡 일어나 허리까지 접으니 이쯤에서 끝내야겠다. “앉으세요. 잘 아시는 분이 그러시니 제가 더 당혹스럽군요. 더는 거론하지 않을 테니 혹시라도 잘못된 생각을 가진 임원이 있다면 제 뜻을 단단히 못 박아 두십시오.” “알겠습니다.” 언제까지나 좋은 사람 흉내나 내며 있을 수는 없다. 서서히 모두가 날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 * * 조대호 사장은 확실히 일 처리가 빠르고 잘한다. 불과 이틀 사이에 HW 자동차의 서비스를 칭찬하는 글이 인터넷 이곳저곳에 등장하더니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이런 확산 속도는 자연스럽지 않다. 홍보 대행사를 사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최초의 무상 차량 교체를 받은 소비자가 칭찬과 감사를 담은 장문의 글과 사진을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리자 확산 속도에 불이 붙었다. 이처럼 빠른 속도로 번진 건 <이스퀼로> 구매자들이 온라인에 익숙한 젊은 30대가 주류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온라인에 등장했던 <이스퀼로>의 혹평과 조롱이 점점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모양만 스포츠, 성능은 경차라며 당연한 사실을 마치 결함인 양 씹어대던 ‘세력’들은 <이스퀼로>와 HW 자동차 옹호 세력의 공격에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들어가고 뒤를 이어 차량을 인도받은 사람들이 등장하자 결국 공중파도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저녁 9시 메인 뉴스의 첫 꼭지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비중 있게 다뤘다. “이야, 이건 뭐…. 손 안 대고 코 푼다더니, 월드컵 광고 때보다 더 큰 홍보 효과잖아. 메인 뉴스에서 칭찬해대니 주가가 곧바로 수직 상승이네.” 조대호 사장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판매 현황은 어떻습니까?” “문의는 폭주, 실판매는 소폭 상승. 그런데 다른 차종이 덕을 많이 봐. <이스퀼로>는 아무래도 범용성이 떨어지니까 신뢰라는 효과가 그쪽으로 옮긴 거지.” “다행이네요.” “문제는 다른 차종의 침수차 주인들이 전화질을 한다는 거지. 몇 년 굴린 차를 바꿔 달라고 난리다. 허허.” “기회다 싶겠죠. 찔러보고 떼쓰는 데 돈 드는 건 아니니까요.” 어디에서나 꼭 있다. 억지 부리며 진상 떠는 사람들. “이 호재를 놓치면 안 되니까 신차 개발을 서두르고 있어. 최대한 일정 앞당겨서 내년에는 출시하려고.” “네. 사장님께서 어련히 잘하시겠습니까?” 조대호 사장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지난번에 나눴던 그거 본격적으로 진행할까 해. 외국 자동차사 인수 문제 말이야.” “언제든지 시작하세요. 돈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조대호 사장의 미소가 함박웃음으로 변했다. “개발진에서 추린 회사다. 이미 초기 접촉도 하는 중이고. 한번 봐.” 조대호 사장은 종이 몇 장을 쓱 내밀었다. 자동차 회사의 이름과 회사 개요가 담겨 있는 서류였다. “란치아, 알파로메오, 파가니…. 이건 이탈리아 메이커네요.” “그래. 마음 같아서는 람보르기니나 페라리, 포르쉐를 갖고 싶지만, 그놈들이 넘길 리도 없고. 그나마 가시거리에 있는 회사라고 하더라.” “알파로메오는 저도 한 대 있어요. 스파이더라고 2인승요. 쬐그만 게 더럽게 비싸더라고요.” “뭐? 네가 2인승을? 난 네가 차에는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면허 따고부터는 계속 모았어요. 이것저것 타 봐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의견이라도 내죠. 그러니까 자동차광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 느끼는 점을 알고 싶었거든요.” “너 방금 이것저것이라고 했지? 몇 대나 모았어?” 조대호 사장은 호기심을 확 드러냈다. “열세 대? 열네 대? 그쯤요. 페라리, 부가티, 람보르기니, 포르쉐, 애스턴 마틴, 벤틀리, 마세라티… 아무튼 슈퍼카부터 세단까지 골고루 다 있어요.” 컬렉션을 쭉 읊자 조대호 사장은 입을 떡 벌렸다. “대부분 직수입한 거라 돈 엄청 깨졌어요.” “왜 난 한 번도 못 봤지? 너 그걸 다 타고 다니니?” “아뇨. 전 수행원이 운전하는 BMW 세단만 타잖아요. 전 운전은 영 별로더군요.” “야! 그럼 그건 그냥 세워 뒀어? 타지도 않고?” “아뇨. 사서 처음에 하루 이틀 정도는 타봐요. 그래 봤자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죠 뭐. 밟을 곳도 없고, 잘 밟지도 못하고.” 조대호 사장은 기가 차는지 한숨만 자꾸 내쉬었다. “아 참, 그거 가져가서 다 뜯어보실래요?” “뭐?” “연구소에서 살펴보면 도움 되잖습니까? 아! 벌써 다 뜯어 봤나…?” “야! 슈퍼카를 왜 뜯어봐? 경쟁차종이나 뜯어보지. 그런데… 너 방금 말한 거 진심이냐?” “뭘요?” “네 차 연구소에 가져가서 뜯어봐도 돼?” “네. 어차피 주차장에서 잠만 자는데 다 가지고 가세요. 주행거리도 대부분 5천 미만이라 새 차나 다름없어요.” 조대호 사장은 길 가다 지갑 주운 사람처럼 표정이 변했다. “연구소 놈들, 완전히 땡잡았구먼. 수십억을 장난감처럼 주무르다니.” “공짜 아니니 너무 좋아라 할 필요는 없다고 전해주세요.” “뭐? 설마 그거 사란 말이야?” “아뇨. 대신 철저한 보고서 올리라고 하세요. 제대로 된 보고서 안 올라오면 찻값 월급에서 깐다고 전해주시고요.” 조 사장은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수화기부터 들었다. 마치 대단한 파티를 앞둔 사람처럼 들뜬 목소리로 한참 통화했고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쯤 흥분을 가라앉혔다. “착실한 재벌 3세가 곁에 있으니 여러모로 쓸모가 많어. 허허.” “그러니까 빨리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세요. 그래야 내 돈이 안 깨지니까요.” “아 참, 하던 이야기 마저 하자.” “네.” “완전한 인수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기술 이전을 약속하는 회사와 손잡을 거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거야. 지분 투자라든지, 로열티, 혹은 기술이전료를 줄 수도 있고.” “뭐든 괜찮습니다. 목적은 기술 확보니까요.” “그래. 여러 채널을 열어 두고 진행하마.” 가능하다면 100% 인수를 원했다. 이탈리아 메이커를 인수한 한국 기업. 앞으로 벌어질 자동차사의 이합집산에 대비해 덩치를 키워 놓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 * * 『재난대책본부에 무려 500억을 쾌척한 익명의 기부자가 다름 아닌 순양그룹의 진도준 씨로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진도준 씨는 일찌감치 한국의 조지 소로스라 불리며 투자 귀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이번 성금액으로 그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더욱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진도준 씨의 성금액은 사상 최대 금액이며 대기업이 쾌척한 금액의 열 배에 육박합니다. 시민단체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라는 평가를 내놓았습니다. 그는 많은 언론사의 인터뷰를 정중히 거절하며 ‘필요할 때 필요한 행동을 했을 뿐 떠벌릴 일은 아니다’라며 자신의 선행이 밝혀진 것에 대해 난처해한다고 순양그룹 측이 전했습니다.』 장도형 부사장이 일을 깔끔하게 처리했다. 신문, 인터넷은 물론이고 방송사까지 내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뭐가 어쩌고 어째? 알려진 게 난처해? 네 각본대로 진행된 거잖아. 가증스러운 놈.” “야! 너 내 아들한테 왜 그래? 좋은 일 했구만.” “속지 마라, 인마. 네 자랑스러운 아들내미가 어떤 놈인지 넌 잘 몰라.” 아버지와 오세현 대표는 술잔을 앞에 놓고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겸사겸사죠. 목적이 꼭 하나여야만 하나요? 일타쌍피도 있는 법이죠.” 오세현을 향해 웃으며 말하자 그는 진지하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봐. 진짜 목적이 뭐냐?” “포석이라고나 할까요? 중장기 계획 중 일부입니다.” “거 봐. 내 말 맞지? 이거 다 계획에 따라 착착 진행하는 거라니까!” 아버지는 오세현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내 곁에 앉았다. “목적이 뭐든 난 관심 없고, 도준아.” “네.” “우리 일 이야기 한번 할까?” “네? 무슨 일요?” 아버지가 이런 은근한 목소리를 내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게다가 표정마저 영업사원 같지 않은가? “회사에서 말이지 나한테 엄청난 미션을 던져주더라고.” “무슨 미션요?” 아버지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엥? 저요?” “응. 넌 재벌 3세답게 가끔 언론을 타지만, 내용은 완전히 정반대거든. 다른 애들은 전부 사고 쳐서 사회면을 장식하지만 넌 경제면이잖아. 사회면이라도 좋은 내용으로 가득 차고.” “혹시…?” “그래. 인터뷰 한번 따자. 우리 방송사에서 예능프로그램 하나 시작하는데….” 예능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뻔했다. “아이고, 저 그런 거 못 합니다. 예능이라뇨?” “그냥 예능이 아냐. 오락성에 정보성을 가미한 인포테인먼트라고. 너 보고 웃기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그냥 인터뷰로 생각하면 된다니까.” “이야…. 여기 아들 하나 잘 둬가지고 날로 먹는 놈이 있네. 공중파 인터뷰도 거절했는데 애국가 시청률 나오는 케이블 방송에서 독점 인터뷰를 다 따고.” 오세현의 딴지에 아버지는 눈을 부라렸다. “첫 방 첫 출연자라니까. 너 나오면 시청률 2%, 아니 5%는 확실하다고 제작국장이 난리 치더라. 무조건 섭외해 오라고 하면서 말이야. 부탁 좀 하자. 프로그램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아버지 한번 도와줘.” “첫 방송인데 저로 되겠어요? 아, 배용준, 최지우 섭외하세요. ‘겨울연가’ 때문에 지금 일본에서 난리 났잖습니까? 일본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는데…. 아버지의 파워면 손가락만 까닥해도 쪼르르 달려올 텐데, 뭐가 아쉬워서…?” “걔들은 일본 스케줄 때문에 안 돼. 당분간 안 들어와.”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아버지는 술잔 대신 내 손목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 [223] 들켜야 한다 3 “실장님. 지금 방송국 사람들이 떼거리로 몰려왔다는데, 이미 약속한 거라고… 맞습니까?” 휴대전화를 든 김윤석 대리는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오늘이었나?” “네?” “아, 맞습니다. 그 사람들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세요.” 출근하는 차 속의 세 사람은 말은 못했지만, 도대체 왜 방송사 사람들이 떼로 몰려왔는지 내가 말해주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특히 옆자리의 김윤석은 수행비서라는 자신의 직무도 있는데,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있으니 당황스러워 보였다. “별일 아닙니다. 아버지 부탁이라서 거절하지 못했어요. 간단한 인터뷰만 하고 끝낼 겁니다.” 하지만 순양 본관 24층 내 방에는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간단한 인터뷰 정도가 아닌 모양이다. 예능 프로그램이라 그런지 카메라만 네 대였다. 특히 어린 스텝들은 드라마에서나 본 게 전부인 대기업 사장급 집무실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느라 정신없었다. 물론 재벌 3세도 처음이니 나를 보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조금은 긴장한 듯 보이는 PD가 환히 웃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화면빨 잘 받으시겠어요. 그림 잘 나오겠는데요? 하하.” “아, 네. 이왕 하는 거, 잘 부탁합니다.” “염려 마십시오. 멋지게 뽑아낼 겁니다.” 조명과 카메라를 세팅하는 동안 분장이라는 것도 시작했다. 아버지 덕분에 얼굴에 분까지 발라보다니. 어디서 준비했는지 모르지만 나보다 두세 배 더 두꺼워 보이는 분화장을 한 예쁜 여성 리포터가 배시시 웃으며 머리를 꾸벅 숙였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누군지 모르겠다. 아직 힘이 약한 케이블 방송이라 그런지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은 연예인을 캐스팅한 것 같다. “자, 시작할까요?” PD의 큐 사인이 떨어지고 카메라가 돌아갔다. * * * 서너 시간은 걸릴 거라고 한 인터뷰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끝났다. 방송사 사람들은 모두 입이 댓 발이나 나온 채로 모두 짐을 싸서 돌아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버님 부탁으로 한 것이라면서요?” 김윤석 대리도 방송사 직원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한 표정은 아니었다. “김 대리가 보기에도 좀 그랬습니까?” “네. 방송을 잘 모르는 제가 봐도 순양그룹 홍보에 열을 올리시는 게 눈에 보였어요.” “이거, 아버지에게 한 소리 듣겠는데….” 아니나 다를까 방송사 사람들이 돌아간 지 두 시간쯤 지났을 때 휴대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 야! 너 오늘 인터뷰 뭐야? 대뜸 소리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 ― 네가 순양그룹 홍보실 직원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짐짓 영문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뗐다. ― 방금 촬영분 봤다. 말끝마다 우리 순양그룹은, 순양생명은, 순양증권은…. 기가 차서… 하다 하다 펀드 상품까지 소개해? 이 자식이 어디서 약을 팔아? “사실은 그게….” ― 시끄러! 어쩐지 사전 인터뷰 내용을 볼 필요가 없다고 할 때부터 수상하더라니. 이놈아, 방송이 광고판이냐? “그게 말입니다. 인터뷰가 너무 사생활 관련 질문으로 흘러가서요.” ― 됐고. 편집 끝내고 다시 이야기하자. 분량 안 나올 게 뻔하니까 너 각오해. 여차하면 다시 찍을 거야! 통화를 끝내자 김윤석 대리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화 많이 나신 모양인데,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아버지도 옆에서 우는소리 하는 PD 때문에 생색 한 번 내시는 겁니다. 아마도 오늘 왔던 그 PD는 잘릴 게 뻔해요.” 웃으며 말하는 나를 향해 김 대리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네?” “일하다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책임자는 그런 난관을 돌파할 지혜를 보여줘야죠. 내가 PD의 의도와 다른 말을 늘어놓으면 현장에서 대본을 수정했어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으니까 포기하고 돌아가 버린 거 아닙니까? 리더의 모습이 아니죠.” 십여 명의 스텝진이 움직였고 허탕 쳤다. 아버지의 방송사는 아직 공중파 수준의 인재가 모이지 않았다는 증거다. 아버지는 대한민국의 최고의 제작진을 거느리고 초일류 배우와 함께 영화를 제작한다. 더 살벌한 현장을 매일같이 겪은 아버지가 나와 PD 중 누구에게 더 화가 났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짐작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항상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는 영화 제작 현장에서 십 년 넘게 구른 아버지의 순발력이 바로 그것이다. 통화를 끝낸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다시 아버지의 전화가 왔다. ― 6분 건졌어, 인마. “그 정도면 티저 예고편으로는 쓸 수 있겠는데요?”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조금 전 불같이 화내던 아버지 대신 언제나 웃으며 말씀하시는 본래의 아버지로 돌아왔다. ― 예고편? 원래 20분은 건졌어야 해. 14분을 더 채워야 한다고! “설마 인터뷰를 또 하자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 미쳤냐? 네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 뻔히 아는데? 다른 사람 인터뷰로 그 분량 채워야지. 이미 섭외 끝났다. 제작진도 인터뷰 따러 출발했어, 흐흐. 능글능글한 웃음소리. 뭔가 수상했다. “누구 섭외하셨어요? 혹시 제가 아는 사람…?” ― 응. 아주 화제가 될 거다. 재학 중 사시 패스, 뛰어난 연수원 성적으로 사법부 요직인 서울중앙지법 발령 난 신임 판사. 응? 이건? 설마? “아, 아버지!” 화들짝 놀라 소리쳤지만, 아버지는 웃음을 참으며 계속 말씀하셨다. ― 누가 보더라도 인정할 만한 미모, 특히 재벌 3세를 남자친구로 둔 운 좋은 여인. 이 정도면 너보다 더 화제가 될걸? 아, 이름이 서민영이지, 아마? “버, 법원에서 허락하지 않을걸요? 현직 판사가 예능 프로에 어떻게 나갑니까?” ― 얘가 날 뭐로 보고? 인마, 너 나 무시하냐? 네가 재벌 3세면 난 2세야. 내가 그 정도 인맥도 없어 보여? 법원장도 잘 부탁한다고 말하더라. 시민의 곁에 있는 친근한 사법부로 홍보 좀 해달라면서 말이다. 아무튼, 그림 좋다고 제작진도 만세 불렀어. 커플은 언제나 시청자를 끌어당기거든, 하하. 설마 아버지에게 뒤통수 맞을 때가 올 줄은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 * * “방송 잘 봤어요. 이야! 우리 조카님은 방송용 얼굴이야. 연예인 후광이 아주 그냥…. 끝내주던데? 그리고 애인인가? 그 판사님? 우리 조카님 커플은 직업 잘못 선택했다고 다들 난리야.” “가뜩이나 요즘 놀림받아서 쪽팔려 죽겠는데, 숙부님까지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그냥 갈까요?” 웃으며 몸을 슬쩍 일으키자 대현그룹 주광식 회장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가긴 어딜 가? 나 살려주고 가야지.”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주광식 회장의 얼굴은 지금 속이 타들어 간다는 걸 보여줬다.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지 푸석푸석한 마른 낙엽을 보는 듯했다. “회생이 어려운가 보죠? 수혈 못 받았습니까?” “난 돈 많은 친조카가 없잖아. 금융권도 전부 제 살길 찾느라 대현이라는 이름도 안 통해.” “그게 아니라 형제분들이 차단한 거 아닙니까?” “그 영향도 커. 이 기회를 놓칠 우리 큰형님이 아니거든.” 대현자동차 주태식 회장이 동생들을 전부 몰아내려고 총력을 기울인다는 소문이 이미 재계에 퍼졌다. “그런데 조카님은 어떻게 예견한 거야?” “뭘 말입니까?” “카드 사태. 그때 조카님은 회사를 팔았고 난 인수했어. 누구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분명하잖아.” “예견은 아니고 취향의 문제였죠.” 짐짓 시치미를 뚝 뗐지만, 수상한 눈초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들리는 말로는 온갖 재미를 다 봤다던데 사실인가? 두 분 큰아버지가 된통 당했다던데?” “아닙니다. 전 채권 챙긴 게 전부예요. 재미는 미라클이 봤죠.” “그거 자네 작품 아냐? 그런 식으로 흘러간 거?” “아닙니다. 전 중재만 했을 뿐입니다.” 순간 주광식 회장의 눈이 반짝였다. “그 중재, 한 번 더 해줄 수 없겠나?” 이 사람 비명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난 잠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주 회장의 표정을 살폈다. 어디까지 몰린 것일까? 벼랑 끝에 더 가까이 밀려날수록 더 좋은 조건을 건질 수 있는데. “글쎄요. 미라클도 순양카드를 인수했으니 아쉬울 게 없을 겁니다. 그리고 카드 사업에 또 거금을 투자하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죠. 오세현 대표는 외형 확장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타입이라서요. 투자사의 전문경영인 아닙니까? 아무래도 투자자들의 이익이 우선인 게 그분 생각이거든요.” “투자자는 아웃풋만 좋으면 얼마든지 확장하는 사람이잖아. 우리 조카님도 그렇지? 주가가 오를 게 확실하면 끝없이 사들일 거 아닌가?” “그야 그렇죠. 하지만 대현카드는 모든 게 불확실합니다. 아니, 불안하기 그지없죠.” “대신 인풋이 적어서 좋은 조건이 될 거야. 부채만 해결해줘.” “부채만요?” 이건 좋은 조건이 맞다. 경기가 회복했을 때 가지게 될 대현카드의 가치, 그건 인수가격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 대현카드에 계열사 돈을 많이 쏟아부었어. 그것만 해결해주면 나도 숨통이 좀 틜 것 같아. “그 계열사 부채가 얼마나 됩니까?” “그건 자네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지? 오세현 대표에게 직접 전하고 싶어. 내 치부까지 우리 조카님에게 보여주는 건 자존심 상해서 말이지.” 아차차, 말조심해야 한다. 표면적으로 난 미라클의 주인이 아니다. 중재자의 역할만 해야 한다. “그래도 대략적인 금액은 알아야 말이라도 던질 거 아닙니까? 무조건 만나게 해달라? 솔직히 숙부님도 그게 어려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대현그룹의 주광식 회장님께서 차 한잔하자고 하면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 그런가? 그래도 아는 사람이 다리 놔주는 게 아무래도 편하지.” 갑자기 당황해하는 기색을 비쳤다. 이게 당황할 정도의 말이었던가? 난 다시 그의 표정과 눈빛을 유심히 살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숙부님의 뜻을 오 대표에게 전하죠. 하지만 제 예상은 부채 금액부터 확인하려고 할 겁니다. 적정 수준의 금액이 아니라면 오 대표는 만날 생각도 하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깨질 거래 때문에 직접 만나서 얼굴 붉힐 일은 왜 하겠습니까?” “그건 내가 약속하지. 오 대표 얼굴 붉힐 일은 없을 거야. 하하.” 다시 표정이 환해진다. 이 양반,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다. * * * “청와대와 관계 부처에 알아봤는데, 호의적입니다.” 장도형 부사장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서류를 펼쳤다. “강제 명령 내리는 것 같은 직접 개입은 없다는 뜻입니까?” “네. 대현카드는 자구책을 이미 제출했고 그 계획서대로 성실하게 이행 중이라고 합니다. 불량 회원 정리뿐만이 아니라 심사 강화를 통해 신규 회원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자금 상황은요?” “금융권 채무는 아직 정리 못 했습니다. 계열사 자금 지원 내용은 아는 놈이 없습니다. 최상층 임원들끼리 주고받은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런 사실이 없거나….” “네?” “아닙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조사는 계속해주세요. 대현카드의 모든 걸 알아야겠습니다.” “네. 그런데 실장님. 조건만 맞다면 대현카드까지 인수하실 생각이십니까?” “부사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왠지 부실 덩어리를 떠안는 것 같아 불안합니다만.” “네. 신중하게 결정합시다.” 뭔가 수상하다. 자존심 구겨가며 내게 매달릴 만한 상황이 아닌 건 틀림없다. 의구심이 해소되지 않는 만큼 주광식 회장의 부탁을 무시했다. 오세현과의 약속도 잡지 않았고 연락하지도 않았다. 내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는 만큼 주광식 회장도 초조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만날 때 서로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 [224] 자만은 금물 1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 “주광식 회장요.” “응? 주 회장? 그 사람이 뭐?” “삼촌!” 계속 딴청만 피우는 오세현에게 결국 소리를 빽 질렀다. “야야, 이 정도면 감 잡아야지. 눈치 빠른 놈이 왜 그래?” 이렇게 빠른 단절이라니?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불과 한 달 아니, 보름 전만 해도 서너 개의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매일같이 금융시장을 체크했고 HW 그룹에서 올라오는 수십 개의 보고서도 전부 체크하지 않았던가? 그런 분이 사내 전체 메일을 싹 돌리고 난 뒤, 제대를 보름 앞둔 말년 병장보다 더 늘어져 버렸다. 심신 쇠약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명분으로 장기간 휴직을 선언하고, 그 기간 동안 각 부서의 임원들이 투자 책임을 지되 일 일 보고는 내게 올리라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대표이사 대행, 이것이 내게 붙은 태그였다. “내가 네 입장 생각해서 정식 퇴임 안 하고 꼼수 써준 것만으로 고맙다고 생각해. 자꾸 귀찮게 하면 이사회 열어 신임 대표이사 선출 안건 올려버린다.” “현업에서의 마지막 미팅으로 주광식 회장 한번 만나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잖습니까?” “나빠. 내가 지금에 와서 인맥 넓혀봤자 뭐해? 이젠 휴양지 원주민들과 인맥 쌓을 거다. 네가 알아서 해.” 더는 조를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오늘 자로 은퇴가 맞다. “그럼 힌트만 주십시오. 주광식 회장이 왜 미라클 대표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대현카드 인수 때문에 논의하고 싶어 한다면서?” “그게 아니라면요?” “그럼 미라클을 이용하는 꼼수밖에 더 돼?” “어디에 이용한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나도 모르지.” 이건 말년 병장이 갓 자대배치 받은 신병 놀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다른 건 모르겠고 넘길 생각도 없는데 날 만나겠다고 우기는 건 그림이 필요한 거 아닐까?” “그림? 아! 삼촌과 만나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그림?” “아마도?” 문제는 왜 그런 그림이 필요하냐인데,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오세현은 웃으며 말했다. “좋아, 기분이다. 주광식 회장 전화 넣어.” “네?”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조금 불안했지만, 구력이 어마어마한 분인데 실수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잠깐만요.” 휴대전화를 꺼내 재빨리 연결했다. “회장님. 진도준입니다.”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 휴대전화를 넘겼다. “이거, 전화로 인사드리게 돼서 송구합니다. 회장님.” 오세현은 서글서글한 음성으로 통화를 시작했다. 그는 평범한 안부 인사 몇 마디를 건네고 본론을 꺼냈다. “회장님. 혹시 대현카드 인수 건에 관해 말씀하실 게 있다면 진도준 실장과 논의하시면 됩니다. 전 진 실장의 판단에 맡길 것이고 그가 내리는 결론에 따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진도준 실장과 이 건에 대해서 마무리하시죠. 그럼….” 오세현은 통화를 툭 끊어버리고 휴대폰을 내게 던졌다. “됐지? 이제 네가 알아서 해.” 그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나 괴롭히지 말고 나가. 메일 보낼 곳이 많다.” * * * “실장님. 아무리 봐도 엄살입니다. 대현카드가 필요한 긴급 자금은 2천억에도 못 미쳐요. 그런데 매각이라니…?” 장도형 부사장은 꽤 두꺼운 서류 파일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새까만 손때가 묻은 걸 보니 철저하게 분석한 것 같다. “계열사에서 빌린 돈은 어떻습니까?” “정확한 금액은 파악 못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계열사 역시 주광식 회장 아래에 있는 회사들입니다. 긴급히 상환해야 할 이유도 없고요.” 장도형 부사장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지난 보고에 말씀드렸다시피 정부 측도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외부의 압박도 없다는 말이죠.” 장도형은 내 눈치를 슬쩍 살피다 조심스레 말했다. “겉으로 볼 때 그리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은데도 매각에 적극적이라면 내부에 해결할 수 없는 시한폭탄이 있다는 뜻이고, 아니라면 다른 속셈이 있지 않겠습니까? 괜히 말려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주 회장의 다른 속셈 때문에 내가 미친년 칼춤을 출 이유는 없다. 이쯤에서 욕심을 버리고 다른 시선으로 회사를 바라봐야 한다. “부사장님.” “네.” “대현카드를 저격할 만한 전략을 수립하세요.” “네?” “대현카드의 주 고객층을 우리가 뺏어 와야겠습니다. 대현이 보기에 아주 노골적인 전략이 필요합니다.” “아…!” “그쪽 속살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군요. 큰 문제가 없는 상태라면 오래 버틸 것이고, 문제가 많다면 금방 본모습이 드러나겠죠. 인수 여부는 그때 결정합시다.” “대현카드와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신규카드를 런칭하거나, 기존 카드에 그 서비스를 추가해서 광고 한번 때리겠습니다.” 장도형 부사장도 싸움꾼 기질이 다분하다. 한 판 붙어보자는 말을 듣자 대번에 달아올랐다. “네. 하지만 광고 전에 소문부터 흘려야겠죠? 순양카드의 신규 서비스가 어떤 내용인지 주광식 회장 귀에 먼저 들어가도록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금융권과 이 내용으로 미팅부터 하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대현 귀에 들어갈 겁니다.” 몰아칠 비바람에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기다렸다. 남들이 비바람에 휩쓸려 떠내려갈 때 나 혼자 승승장구하니 자만을 넘어 오만함에 빠졌다. 주변의 모든 것이 다 내 전리품으로 보이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구태여 챙길 필요도 없고, 외형 확장에 눈이 멀어 옥석을 가려낼 냉정함을 잃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날 이용하려는 자가 나타나면 두 번 다시 그런 생각을 못 하도록 확실하게 눌러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 * * “아이고, 우리 조카님. 나한테 화나는 일이 있었나? 어찌 그리 매정하게 날 피하시나?” “그런 거 아닙니다. 요즘 처리할 게 많아서 정신없이 지내느라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사과할 필요까지 없어. 아쉬운 놈이 샘 파는 법이잖아. 엄살 한번 부려본 거야. 하하.” 호기롭게 웃는 주광식 회장이었지만, 흔들리는 눈빛마저 감추지는 못했다. “참, 나도 소문 들었어. 오세현 대표가 잠시 쉰다고?” “네. 안식년이라나? 너무 빡세게 달려 에너지 고갈이라고 하시더군요. 일 년 정도 푹 쉬고 재충전하신답니다.” “참 팔자 좋은 양반이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 일 년이나 휴가를? 대단해.” 팔자 좋기로는 재벌가에 태어난 당신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단지 창업주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 하나 때문에 별다른 노력 없이 나이만 차면 대표이사니, 회장이니 하는 타이틀을 손에 넣는 팔자 아닌가? 반면에 오세현 같은 사람들은 뼈를 깎고 살을 발라가며 그런 타이틀을 차지한다. 팔자 좋다는 말이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건 그런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다. 이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의사의 진단이 절대적이었어요. 이 상태로 가다가는 몸이 망가진다고 경고했거든요.” “이런, 쯧쯧. 의사 말을 백 퍼센트 다 믿으면 어떡하나? 그놈들이야 아프다고 말하는 게 직업인데. 괜찮다고 하면 누가 의사 찾겠어?” “어쨌든 결정하셨으니까 되돌리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럼 우리 조카님이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건가?” “전부 채우는 건 아닙니다. 투자 관련해서 제가 거를 건 거르고 판단하기 어려운 건 오 대표님께 다시 컨펌받아야죠.” “그렇구먼. 그런데 카드사 인수까지 자네에게 맡긴다고 했는데…. 그 판단이 호락호락한 건 아닐 텐데? 안 그래?” 끝까지 오세현 대표를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보인다. 그 기대를 산산조각 내야겠다. “숙부님도 이럴 때 보면 참 눈치 없으시네요.” “뭐? 내가?” “네. 그 정도 중대사를 제게 맡기겠습니까? 거절한다는 표현을 완곡하게 하신 거죠.” 주광식 회장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거절이라…. 그럼 지금 떠도는 소문도 사실이구먼.” “무슨 소문 말입니까?” “순양카드가 나와 전면전을 한번 벌이겠다고 준비한다는 소문. 몰라?” “그 정도 중대사를 제가 알 수는 없죠.” 주광식은 내 얼굴을 잠깐 노려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이거…. 두 사람의 콤비플레이를 당할 재간이 없네그려. 대단해. 하하.”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의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보자 평상시의 능글능글한 태도를 보였다. “이거 왜 이러나? 대현카드가 흔들흔들하니까 제대로 한번 자빠트려 보겠다는 속셈인 거 같은데… 그렇게 나오면 내가 무섭잖아. 여기서 멈추자고. 우린 서로 칼을 겨눌 필요가 없는 사이 아닌가?”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다시 한 번 시치미를 떼자 웃음기가 싹 빠진 목소리로 변했다. “그만해. 두 사람의 관계가 회사를 맡길 만큼 한 몸이나 다름없는데 모르기는 뭘 몰라? 떠보는 건 그만하자고.” 웃음기 사라진 그의 목소리만큼 나도 건조하게 말했다. “약한 모습을 보인 건 바로 숙부님이었습니다. 이건 사람이 아니라 회사 문제죠. 쇠약했던 경쟁사가 몸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나려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 있어요?” 본심을 드러내자 주 회장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멀쩡한 회사도 탐이 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빠트리는 게 이 바닥 생리 아닙니까? 하물며 자빠진 회사가 일어서는데 발목 잡고 다시 넘어트리지 않으면 그게 회사예요? 재활센터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래서 주겠다잖아. 적당히 값 치르고 가져가라고. 먼저 항복까지 한 회사의 발목을 왜 잡아?” 옳지. 원하는 말이 나왔다. “좋습니다. 그럼 미라클의 감사팀과 회계팀을 각각 한 트럭씩 보내겠습니다. 회사 속살 제대로 한번 보여주세요. 그래야 인수할지, 인수한다면 그 금액을 얼마로 할지 결정할 것 아닙니까? 이 제안을 받아들이시면 전면전은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만.” 역시나 대답을 못 한다. 물론 회계 장부를 다 보여주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회사를 넘겨야 할 만큼 위급한 상태라면 보여주지 못할 것도 없다. 다른 속셈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회사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나서 약한 곳을 치고 들어오겠다는 계산 같은데?” “물건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사달라는 건 팔지 않겠다는 계산 같은데요?” 더는 말씨름할 필요가 없었다. 주 회장이 어떤 꿍꿍이인지 알아낼 필요도 없어졌다. 비명을 지르고 두 손 두 발 다 들 때까지 공격하면 그만이다. 엄살이 아니라 진짜 위험에 빠트리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면 된다. “그럼 오 대표님의 의견은 전달했으니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자, 잠깐. 내 이야기 마저 듣고 가. 사실은….” “숙부님…. 아니, 주 회장님.” 다급하게 내미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어떤 사정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아요. 순양카드는 칼을 갈고 총알도 준비 중입니다. 지금에 와서 멈추는 건 이쪽 전투병의 충만한 사기가 꺾는 일입니다. 그런 짓은 못 하죠.” 이마에 땀까지 흘리며 나를 붙잡으려는 주광식 회장이었지만 모질게 마음먹었다. “미라클이, 그리고 제가 회장님 주머니에 든 도구라고 착각하셨습니까? 마음대로 꺼내 이리저리 써먹고 다시 제자리에 두면 된다고 생각하셨어요?” “천만에. 오해야. 약간의 도움만 주면 되는….” “제가 왜요? 도와주긴 누가 누굴 도와주겠습니까? 조카님, 숙부님…. 이렇게 부르는 건 단순한 호칭으로 끝내야죠. 서로 먹고 먹히는 게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 난 그런 본모습을 보여주고 뒤돌아섰다. ======================================== [225] 자만은 금물 2 주광식 회장이 사재 일천억을 대현카드에 수혈한다는 기사가 나오자마자 대현카드 채권단인 은행들도 일천억의 긴급 자금 지원이 결정되었다. 주광식 회장이 이로써 한숨 돌릴 것은 확실하다. 그는 주머닛돈 천억이 아까워 카드사를 팔아치울 정도의 좀팽이가 아니다. 이렇게 손쉬운 해결책이 있음에도 인수를 논했다는 것은 분명 다른 꼼수 때문이다. “은행 채권단과 극적 타결 했답니다.” 뉴스를 보자마자 확인하겠다며 달려 나간 장도형 부사장은 사실 확인이 어려운 소문까지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쉽게 해결한다고 큰소리 땅땅 쳤는데,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차일피일 미루다 채권단의 마지막 경고에 사재를 내놓기로 한 모양입니다.” “그 큰소리가 회사를 팔아버린다는 의미는 아니었겠죠?” “대현자동차에서 자금을 끌어온다고 큰소리쳤답니다.” 대현자동차의 주태식 회장이 동생을 도와줘? 놀부가 흥부를 도와줬다는 것보다 더 믿기 힘든 말이다. 주광식 회장이 왜 이런 큰소리를 쳤는지 곰곰이 생각하다 머리를 흔들었다. 그 집안 형제간의 일이나 왜 미라클을 끌어들이려 했는지 더는 생각 않기로 했다. 사세 확장은 지금이 적기다. 작년 국내 최초로 누적 고객 천만 명을 돌파하며 외적인 성장의 정점을 이룬 LG카드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신용 조회도 없이 사인 한 번으로 카드를 발급한 결과였다. 그 속에는 백수는 물론 고등학생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LG카드는 부실채권 누적으로 부도 위기까지 몰린 상태에서 정부의 공적 자금을 요청한 상태다. 경영권 포기, 워크아웃 신청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내밀며 정부와 채권단의 처분 결과만 기다리고 있고 정부와 채권단은 무려 2조 원의 공적 자금 투입 여부를 논의 중이다. 이렇듯 카드 시장은 붕괴와 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시기며 다행스럽게도 순양카드는 재건의 위치를 미리 선점했다. 대현카드를 욕심내지 않았듯이 LG카드 역시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할 것이다. 몇 년 뒤 신한은행이 무려 7조 원이나 쏟아부어 인수할 회사 아닌가? 지금 그런 거금을 동원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 돈의 백 분의 일만 투입해도 무너진 카드 시장에서 충분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 요즘 같은 혼란의 시기에는 오만을 버리고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앞으로 나가도 늦지 않다. * * * 가장 큰 혼란은 바로 정치권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국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며 개혁을 시도했고, 잔류파는 기존의 야당보다 더 지독한 야당이 되었다. 여당은 국회에서 제3당이라는 초미니 정당으로 출발했고 여소야대의 국면에서 야권은 내년 17대 총선의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누구나 약점이 될 수밖에 없는 대선 자금을 거론하며 대통령과 여당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의 목이 날아가는 것도 모른 채…. 불법 대선 자금은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나 역시 불법 대선 자금을 건넸다. 다른 재벌들이야 언제든 선거법 위반이라는 죄를 대신 뒤집어쓸 충신들이 가득하지만, 나는 그런 충신이 없다. 만약 언론이 내 이름을 거론하고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면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야 하는 건 바로 나다. 날 대신해서 내세울 사람도 없고 그런 짓은 하고 싶지도 않다. 노아의 방주는 비가 오기 전, 화창한 기간에 만들었고 Better safe than sorry라는 말도 있다. 나는 우병준 상무를 조용히 집으로 불렀다.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실장님.” “지난 대선에 말입니다. 제가 준비해서 건넨 선거자금을 추적해보십시오.” “갑자기 그건 왜…?” “지금 정치권에서 슬슬 흠집 내기 네거티브를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특히 야권에서 특검까지 거론하며 대선 자금을 조사하자고 군불을 피우는 모양인데, 저에 관한 그 어떤 흔적도 나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상무님께서 역추적해서 제 흔적이 나오면 지워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병준 상무는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되물었다. “지워버리라는 말씀 속에 사람도 포함됩니까?” 사람을 지워? 이 엄청난 말에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우병준은 슬쩍 미소 지었다. “오해하신 것 같군요. 영화를 너무 많이 보신 것 같습니다만….” “지, 지운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한국에서 지우는 겁니다. 터진 문제가 잠잠해질 때까지 외국으로 보낸다는 뜻입니다. 설마 죽여서 입을 다물게 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미안합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네요. 하하.” 웃음으로 어색함을 지우려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병준은 개의치 않았다. “그때 자금 추적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죠? 미국에서 몇 바퀴 돌린 돈이라고.” “네.” “그러니까 그 돈을 추적할 수 있는지 확인하면 되겠습니까?” “바로 그겁니다. 한번 훑어만 보십시오.” “불가능하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셨는데, 불안하십니까?” “혹시나 해서요.” “알겠습니다. 찾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우병준 상무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때 현찰을 본 사람은 누구죠? 특히 돈을 오피스텔까지 가져온 사람 말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쪽은 문제없어요.” “총선 앞둔 정당들의 싸움입니다. 그들은 목숨 걸고 덤벼들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리소스를 쏟아붓습니다. 그 속에는 검찰과 경찰도 들어 있어요. 실장님을 타깃으로 삼으면 주변부터 칩니다. 주변 사람을 탈탈 털어 협박하면 의리나 신뢰는 와인 잔보다 쉽게 깨집니다. 그게 사람이에요.” 이 사람도 숱한 배신자를 봐온 게 틀림없다. 모든 걸 먼저 부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자신의 말 속에 모순이 있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오피스텔에서 돈을 챙겨 전달한 사람은 바로 상무님입니다. 그럼 저도 상무님을 의심의 눈으로 봐야 합니까?” 의외였는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을 침묵하다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실장님과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조차 믿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저는 믿음을 보여드리지 못했네요.” “꼭 그런 뜻은 아닙니다. 상무님에 대한 믿음도 시간이 지나면 굳건해지겠죠. 서두르지는 않습니다.”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시간을 좀 단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실장님이 좋아졌거든요.” 잘 보이지 않던 미소까지 띠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전화기를 열고 만지작하더니 주소록을 보여줬다. “이건 이학재 실장님 번호입니다. 삭제하겠습니다.”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지워버렸다. “그리고 이건 진 회장님 번호입니다. 삭제하겠습니다.” “사, 상무님. 그… 그건….” 이미 늦었다. 두 사람의 번호를 지워버렸다. “전 제 전화기에 저장하지 않은 번호는 받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두 사람의 전화번호 정도야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다. 기억 못 한다면 회사로 가서 다시 확인하면 된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내 신뢰를 얻기 위해 상징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오로지 내 명령만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는가? 그의 말대로 신뢰를 쌓는 시간을 많이 줄였다. 이제 내가 화답할 차례인가? “돈을 마련한 사람은 미라클의 오세현 대표님입니다. 그리고 오피스텔까지 들고 온 사람은 직원이고요.” 우병준 상무는 다시 미소 지었다. “오 대표님과의 관계는 잘 압니다. 믿을 수 있는 분이죠. 하지만 직원들은….” “이번 주 내로 미국으로 보내겠습니다. 연수 명목으로 뉴욕 미라클 본사로 보내면 그들도 좋아할 겁니다. 내년 총선 끝나고 잠잠해지면 다시 불러들이죠.” “이렇게 빠르고 철저하시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혹시 모르니 지시하신 자금의 흔적을 되짚어보겠습니다.” 우병준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뭘 말입니까?” “아까 사람을 지운다는 거, 혹시 설마도 포함됩니까?” 죽여서 입막음하는 일, 정말 없었을까? “누구 죽여야 하는 사람 있습니까?”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재주는 보통이 아니다. 할 말 잃은 내가 헛웃음을 보이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자 우 상무도 웃으며 나가버렸다. * * * “그만 가봐. 이민 가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여기까지 나와?” “이 자식아. 짐만 보면 이민이야. 삼 개월 있다가 온다는 놈 가방이 도대체 몇 개야?” “집사람이 챙긴 거야. 집사람은 쭉 눌러살겠다잖아.” 오세현은 12월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짐을 챙겼다. 아버지도 그를 배웅하러 바쁜 시간을 쪼개 공항까지 나왔다. 당신을 대신해서 아들을 돌봐줬다고 생각하신다. 그것도 무려 10년이나. 그런 친구가 외국으로 떠나니 공항까지 나오는 건 당연했다. “아무튼, 너도 자리 잘 잡아. 내가 곧 갈 거다.” “네가 코타키나발루에? 놀러 올 시간 있냐? 휴가도 못 챙겨 먹는 놈이?” “거기서 프로그램 하나 찍을 거야. 리조트 홍보 좀 해달라고 이놈이 얼마나 조르는지. 제작비까지 대겠다고 해서 내년에 편성할 거다. 덕분에 나도 슬쩍 한 다리 걸치는 거야.” “그거 잘됐네. 유명한 애들 잔뜩 데리고 와라. 내가 거하게 한번 쏠게. 흐흐.” 두 분은 가벼운 농담만 계속 주고받았다. 조금이라도 이별을 떠올릴 단어는 쓰지 않았다. 이 순간이 지나고 몇 개월의 시간만 지나면 이별이 아니라는 걸 안다. 시집가는 딸을 보며 친정부모는 눈물을 떨구지만, 결혼식과 신혼여행이라는 짧은 시간이 지나고, 다시 왕래를 시작하면 이별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 두 분은 이 사실을 잘 아신다. 나도 잘 안다. 전생에서 군대 갔을 때 어머니가 펑펑 우셨지만, 잦은 휴가로 아들이 군인이라는 사실마저 잊으신 듯했었다. “코타키나발루 가시면 운동도 좀 하세요. 리조트 피트니스 센터 정말 잘 만들어 놨잖습니까?” “잔소리 그만해라. 공기 좋고 햇볕 좋은 곳에 가면 운동 안 해도 건강해진다.” 오세현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보다 네가 메일만 안 보내면 더 건강해질 거야. 괜한 일로 신경 쓰게만 하지 마. 알아들었지?” “매일 보고서 보내겠습니다. 흐흐.” “까분다.”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오세현을 향해 아버지가 말했다. “그만 들어가라. 제수씨 기다리잖아.” “인마, 너 호칭 조심 안 해? 형수지 어떻게 제수씨냐? 두 살이나 어린 놈이!” 아버지도 웃으며 오세현을 떠밀었다.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오세현은 계속 뒤돌아보며 손짓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면 펑펑 울었을 것이다. “가자. 참, 넌 회사로 가야 되냐?” “아닙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집에 가서 저녁 먹을게요. 상준 형도 부를게요. 간만에 우리 가족 다 모여 오붓한 시간 보내죠.” “이제 철드는 거야? 세현이 멀리 가는 거 보니 효도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흐흐.” 아버지가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올리려 할 때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었다. “응? 이 양반이 웬일이래?” “누군데요?” “의료원 원장. 또 VIP 한 명이 입원했나?”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원장님. 진윤기입니다.” 시끄러운 공항이라 잘 들리지 않는지 손으로 다른 귀를 막았다. “네? 누구요…? 뭐?!” 갑자기 하얗게 질린 표정의 아버지 손에서 휴대전화가 툭 떨어졌다. ======================================== [226] 끝내지 못한 일 1 휘청거리는 아버지를 부축하자 뒤따르던 김윤식 대리를 비롯한 수행원들이 달려왔다. 그들에게 아버지를 부탁하고 공항 바닥에 떨어진 전화기를 주웠다. “병원장님. 진도준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 아, 도준이구나. 아버님은? 떨리는 목소리. 무슨 일인지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하며 말했다. “지금 충격받으셔서 통화가 힘듭니다. 제게 말씀하십시오. 혹시 할아버지께서…?” - 그, 그게… 이거 참…. 병원장이 머뭇거리자 속이 탔다. 어떤 일인지 빨리 듣고 싶어 소리를 질렀다. “원장님!” - 아…. 회장님께서 쓰러지셨…. 눈이 질근 감기고 저절로 이가 앙다물어졌다. - 다행히 이학재 실장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급히 병원으로 모시고 왔어. 그런데 이 실장이 컨피덴셜을 지시했어. “함구령을 내렸다고요?” - 그래. 그렇지만 이사장님은 아셔야 할 것 같아 연락드린 거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이학재 실장이 함께 있었고 그는 내가 원하는 조치를 취했다. “할아버지 상태는요?” - 괜찮으시다. 지금 안정을 취하는 중이니…. 괜찮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노인은 한번 쓰러지기 시작하면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 두 번째가 곧 죽음이라 할지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알겠습니다, 원장님. 병원 직원들 입단속 단단히 시키시고…. 고맙습니다. 아버지께 연락 주셔서….” - 아니다, 당연한 일인걸. 통화를 끝내자마자 나만 바라보는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순양의료원으로 갑시다. 최대한 빨리요.” “네.” 김윤식 대리는 휴대전화를 꺼내 승용차부터 대기시켰다. “뭐래? 아버지는 괜찮으시다더냐?” 하얗게 질린 아버지가 가까스로 입을 뗐다. “네. 지금 안정을 취하신다고 하니 염려 마십시오.” “휴…. 다행이네. 빨리 가자.” 아버지는 뛰는 것 같은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 * * 병원 로비를 가로지를 때 병원장과 과장 서넛이 달려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버지는요? 특별 병동에 계십니까?” “네. 하지만 면회는 어렵습니다. 숙면 중이시니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로비 한 가운데 서서 질문을 퍼부어 대는 아버지와 난처한 표정의 병원장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는 과장들을 보자 함구령이 아무짝에 쓸모없어질 것 같았다. 지나다니는 병원 직원 중에 아버지와 날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우리 부자의 표정만 봐도 집안에 큰일이 생겼다는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조용한 곳으로 옮기시죠. 보는 눈이 많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병원장은 아버지를 모시고 특별 병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학재 실장님은 아직 병원에 계십니까?” “조금 전에 떠나셨습니다. 회사로 가신 것 같습니다만.” 아버지는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지만 참았다. 할아버지 모습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다. 병실의 할아버지는 산소 호흡기를 달고 주무시고 계셨다. 우리 모두는 아무 말 없이 몇 분간 그 모습을 보다 밖으로 나왔다. 병실 입구를 지키는 두 명의 건장한 사내들도 잔뜩 긴장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병원장실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고 나서야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깨어나시면 퇴원 가능합니까?” 아버지는 차마 생명에는 지장이 없냐는 말을 못하고 이렇게 에둘러 말씀하셨다. 하지만 병원장을 비롯한 의사들은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계속 입원해 계셔야 합니다. 당분간…. 아니, 퇴원은 어렵다고 보셔야 합니다.” “위독하시다는 뜻입니까?” 병원장은 곁에 앉아있는 의사에게 눈길을 보냈다. “음, 음. 뇌혈관 질환입니다. 혈류가 원활하지 않다는 말이지요.” “뇌졸중?” “그렇습니다. 심장이 많이 약해지셔서 그렇습니다. 회장님의 연세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입니다.” “퇴원이 어려운 이유는 뭡니까?” 조심스러운 내 질문에 병원장이 말했다.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시 쓰러지신다면 3시간 이내에 치료를 끝내야 합니다. 그다음부터 골든타임은 점점 더 줄어들고요. 앞으로 이런 일은 빈번히 반복될 것이고 주기도 점점 더 짧아질 겁니다.” “이런 말씀드리게 돼서 죄송하지만,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입니다.” 의사라고 해서 생로병사까지 거스를 수는 없는 일, 이제 질문은 단 하나만 남았다. 아버지는 천천히 입을 뗐다. “어…. 얼마나 더…?” 의사들도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인지 서로 눈치만 살폈다. 병원장은 다른 의사들의 눈길을 받았고 그가 대답해야 할 질문이었다. “확정 지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우리를 이해해 주십시오.” 할아버지의 죽음을 더는 미룰 수 없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참았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 * *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이학재 실장은 진윤기를 발견하자 조금 놀랐지만, 그가 이 병원의 수장인 이사장이라는 걸 떠올렸다. “형님.” “응. 언제 왔어?” “좀 됐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진 회장이 쓰러졌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며, 이 상황을 컨트롤하는 사람이 이학재다. 진윤기는 자신이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배제할 생각은 없었다. “나야 매일 몇 시간씩 말상대 해 드리지 않냐. 함께 정원을 산책하시다 쓰러지셨다. 참, 의사들 의견은 다 들었지?” “네.” “할 말은 아니지만 이제 준비해야 한다. 회장님께서 다시 건강하게, 정상으로 돌아오실 가능성은 없어.” “네.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님.” “응.” “왜 함구령을 내리셨습니까? 제가 형님들에게 연락하려다 잠깐 미뤘습니다만….” “회장님 지시였다. 당신은 한 번에 저세상으로 뜨지 않는다고 늘 말씀하셨어. 저승사자가 눈앞에 나타나도 한 번은 쫓아내고 정신 차리신다고 했어. 남은 일을 다 정리하시고 저승사자 만나러 직접 가신다고 신신당부하셨다.” 진윤기는 어이가 없었다. 팔순 넘은 노인은 눈길에 미끄러지는 사소한 사고에도 유명을 달리한다. 희박한 회복 가능성을 두고 도박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학재는 진윤기의 표정을 보고 그의 생각을 짐작한 듯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을 믿어. 너보다 내가 더 잘 안다. 아직 남은 일이 있다고 하셨으니 그거 마무리할 때까지는 돌아가시지 않아.” “그래도 형님들과 누나에게는 연락해야겠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는데 숨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학재는 세차게 손을 내저었다. “기다리자. 의사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어? 곧 깨어나실 거다. 그때 회장님 지시받고 연락해도 늦지 않다. 네 형제들의 원망은 내가 감수하마.” 진윤기는 아버지가 지금 주무시는 거라는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이대로 돌아가시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니 이학재 실장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모두 진 회장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 * * 새벽이 돼서야 할아버지가 깨어났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우리는 병실로 달려갔지만, 할아버지는 이학재 실장만 찾으셨다. 아버지와 나는 병실 밖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렸지만, 두 분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한참 뒤에 병실을 나온 이학재 실장은 우리를 막아섰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좀 더 주무시고 연락하시겠다고 하니 회장님 뜻에 따라.” “무슨 소리예요? 잠깐만 뵙고 돌아가겠습….” “그만해.” 내가 병실 문을 잡으려 하자 아버지가 내 손목을 잡았다. “네가 있다는 걸 아시잖아. 그런데도 돌아가라고 하신 걸 보면 혼자 계시고 싶은 거다. 조용히 하고 일단 돌아가자.” “그래, 도준아. 오늘내일 당장 돌아가시는 것도 아니다. 의사들 말로는 안정을 취할수록 더 좋다고 했어. 답답하겠지만 지금은 기다려야 한다.” 아버지와 이학재 실장의 눈을 보자 더는 고집 피울 수는 없었다. “국내 최고의 의료진이 24시간 대기 중이니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 나도 회장님 지시 몇 가지만 처리하고 돌아갈 거다.” “알겠습니다. 그럼 할아버지께서 찾으실 때까지 병원에서 기다릴게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회장님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어. 그리고 네가 병원에 죽치고 있으면 의사들도 신경이 쓰여 날카로워져.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라. 회장님이 찾으시면 곧바로 연락 갈 거다.” 이학재 실장의 엄중한 눈길을 받으니 더는 고집 피울 수 없었다. 이 실장은 병원 관계자를 만나겠다며 사라졌고 나도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서 나왔다. 집으로 가는 차 속에서야 아버지의 눈가가 젖은 것을 발견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을 리야 없겠지만 달리 위로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도준아.” “네.”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말이다. 난 내 기억에서 전부 지워졌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아니더라.” “어떤 기억 말입니까?” “내 젊은 시절의 10년. 아버지가 내게 실망했고 내가 아버지를 원망했던 그 세월 말이야. 최근 10년 동안 부자 관계를 회복하고 좋은 기억도 많이 있는데…. 왜 내가 미안했던 기억만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손만 꼭 잡았다. “도준아.” “네.” “너도 지금부터 딴 생각 하지 말고 귀여운 막내 손자 역할에만 충실해. 후계니, 지분이니 이런 복잡한 건 다 잊고 어린애처럼 굴어. 아버지가 부탁하마.” “네. 할아버지께서 즐거운 기억을 조금이라도 더 가지시도록 노력할게요.” 원하는 대답을 했으나 쉬운 일은 아니다. 내 머릿속이 복잡한 만큼 할아버지도 복잡하실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내 할아버지는 임종 직전까지 순양그룹 진양철 회장이라는 직책에 전념할 것이 틀림없다. * * * 언제 할아버지를 뵐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아침이 될 때까지 잠 한숨 자지 못했다. 병원에서 연락이 올지 몰라 출근도 하지 않고 만 하루를 꼬박 집에서 지냈다. 전화가 울린 건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이학재 실장의 전화였다. “네. 실장님.” - 회장님께서 찾으신다. 수행원 달지 말고 조용히 혼자 와. 참, 네 아버지에게도 알리지 말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 특별 병동 지하 주차장을 통해서 와라. 전용 통로 알지? “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차 키를 쥐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빠른 스포츠카를 전부 줘 버린 걸 처음으로 후회했다. 몇 번의 교통 신호 위반과 단속 카메라를 무시하고 병원으로 달렸다. 특별 병동의 지하 주차장에는 이미 이학재 실장의 부하직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키 주시고 올라가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마워요.” 차 키를 전해주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 속도는 왜 이리 굼뜬지…. 발만 동동 굴렸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전혀 의외의 광경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하, 할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정장에 코트를 걸쳤고 중절모까지 썼다. “뭔 호들갑이냐? 다녀올 데가 있으니 차려입은 게지.” 병실에는 병원장과 의사들도 함께 있었다. 혹시 퇴원하시겠다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괜찮다. 이분들도 허락했어.” “괜찮을 리가 있습니까? 아직 퇴원은 안 됩니다. 좀 더 누워 계세요.” “시끄럽다. 어디서 감히 죽을 병 걸린 환자 취급이냐.” “할아버지!” “이놈아. 시간이 없어. 빨리 따라나서지 못하겠느냐?” 할아버지의 흔들리는 눈빛, 그리고 할아버지 뒤에서 머리를 끄덕이는 이학재 실장. 나도 고집을 꺾었다. 특히 시간이 없다는 할아버지의 일갈이 내 속을 후벼 팠다. ======================================= [227] 끝내지 못한 일 2 할아버지의 간절한 표정을 보자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부족한 시간을 나 때문에 허비할 수 없는 일이다. 재빨리 다가가 할아버지의 몸을 부축했다. “좋은데 가는 거 아니면 차 돌릴 겁니다.” “미루고 미룬 곳이니 네 마음에 쏙 들 게다. 허허.” 부축한 내 손을 꼭 잡은 할아버지는 바짝 마른 입술 벌리며 환하게 웃었다. 주위를 완전히 차단한 경호원들을 지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이미 세 대의 자동차가 시동을 건 채 대기 중이었다. 가장 뒤에 대기 중인 앰뷸런스를 보자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이 차 어떠냐? 새 차가 나왔다길래 가져와 보라고 했다.” 선두 차와 앰뷸런스 사이에 떡하니 그 자태를 뽐내는 BMW 7시리즈가 낮은 배기음을 내며 우리를 반겼다. “오늘 내가 쓰고 나면 더 쓸 일은 없지 싶다. 네가 가져가서 써라.” “저도 좋은 차 많습니다. 이 차는 할아버지가 계속 쓰세요. 앞으로도 좋은 곳 많이 다니시며 바람 쐬셔야죠.” “쓸데없는 소리. 내 상태 뻔히 알면서 그러느냐? 위로랍시고 하는 말인 건 잘 알겠는데, 손자의 위로로 다시 젊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부질없다. 가져다 써라.” 할아버지가 이미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게 더 마음 아프다. 생명을 단 하루라도 더 연장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실 것 같다. 어쩌면 이 순간이 할아버지와 단둘만이 가지는 유일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정말 시간이 없다. 젠장…! 선두 차에 건장한 경호원들이 먼저 올랐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회장님.” 이학재 실장이 머리를 숙였다. 동행하지 않을 생각인 것 같다. 세 대의 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힘드실 텐데 눈 붙이고 계십시오. 도착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원히 쉴 날이 며칠이나 남았다고? 목숨 붙어 있는 동안 부지런히 우리 손자 얼굴 봐 둬야지.” 철면이라는 우리 할아버지, 별명을 바꿔야 하나?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가슴을 후벼 판다. “하긴 이 정도 잘난 손자는 어디 가서 보기 힘들죠. 하하.” 막내답게 재롱이라도 떨어 할아버지를 즐겁게 해 드리고 싶었지만, 기껏 할 수 있는 게 이따위 썰렁한 농담뿐이다. 하지만 이런 내 모습을 계속 웃으며 봐 주시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참, 이야기는 들었다. 대현카드 인수는 포기했다면서?” 참 말리기 힘든 분이다. 이 와중에 일 이야기라니? 딴 이야기나 하자고 말하려다 생각을 바꿨다.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은 바로 일을 하거나 일 이야기 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네.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LG카드가 워낙 대형 사고를 치는 바람에 대현이 순식간에 정신 차렸어요. 제게 미끼를 던지긴 했는데 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현카드는 완전히 포기한 거냐?” “아뇨. 노선을 바꿨습니다.” “어떻게?” “제대로 한판 붙어서 아예 피떡으로 만들어 버리려고요. 돈 되는 고객을 싹 끌어올 생각입니다.” 할아버지는 싸운다는 말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변했다. 역시, 생기를 불어넣는 건 손자의 재롱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오로지 일에서만 살아 있다는 걸 느끼시는 분이다. “돈 좀 깨지겠는걸?” “제 유일한 무기 아닙니까?” “깨지는 거에 비해 전리품이 부실할 수도 있어.” “아마도요. 하지만 이번에는 손익 따져가며 싸울 때가 아닙니다.” “어째서? 장사치는 이문 남는 장사가 아니면 시작하지 않는 게 순리다.” “그렇지만 본때를 보여줄 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계속 절 만만하게 보는지, 이리저리 도구로 쓰고 싶어 합니다.” “주광식 그놈이?” “네.” “얕보이면 끝이지, 암. 두 번 다시 쳐다보지도 못하게 밟아버려. 네 그림자만 봐도 오줌을 찔끔 싸게 말이다. 허허.” 달리는 차 안에서 시시콜콜한 회사 일까지 말씀드렸다. 내 이야기를 들으시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할아버지를 보니 점점 더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참, 오세현 대표는 회사 일 손 떼고 코타키나발루로 떠났습니다.” “뭐라? 아니…. 그놈 나이가 몇이길래 벌써 한량으로 지낸다는 말이냐?” “제 말이요. 이제 팔자 늘어졌죠, 뭐. 참, 할아버지도 거기 리조트 한번 구경하셨어야 하는데….” “리조트? 됐다. 내 집이 그 리조트보다 백 배는 더 좋고 편한데 뭐하러 더운 나라까지 비행기 타고 간다는 말이냐? 외국은 출장 갈 일이 있을 때만 가는 거다. 내가 거대한 집에 사는 이유가 뭔데? 편히 쉬려고 그 큰돈을 쓴 거 아니겠느냐?” 빈말이라도 손자가 지은 리조트 구경 못 해서 아쉽다는 소리는 하지 않으신다. 할아버지답다. 밤늦게 출발해서 도로는 한산했다. 어느새 서울을 벗어났고 차는 남쪽으로 달렸다. 계속 나타나는 표지판을 보니 목적지가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차 잠깐 세우지.” “네. 회장님.” 비상 깜빡이를 켜고 도로 한쪽에 서자 할아버지가 창문을 내렸다. “저기 기억나느냐?”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곳, 그곳에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신호등이 빨간 불빛을 내고 있었다. “네.” 바로 김윤석 대리가 우리를 대신해서 BMW로 돌진한 곳. 황천길을 건널 뻔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자네는 좀 내리게. 장시간 운전한다고 힘들었을 텐데 허리라도 좀 펴고, 담배도 한 대 펴.” 운전기사를 위한 배려가 아니다. 지금부터 할아버지가 하는 말을 모르게 하기 위함이다. 운전기사도 그 뜻을 모르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기사가 내리자 할아버지는 다시 창문을 올렸다. “우리 저기서 사고 나고 시간도 꽤 흘렀지?” “네. 오늘 여기 안 왔으면 기억도 못 했을 것에요. 김윤석 대리가 새삼 고맙네요.” “아차, 그놈 한번 데리고 와라. 내가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했어. 네게 착 달라붙을까 봐 윽박만 지른 것 같어. 허허.” “아닙니다. 할아버지께서 이학재 실장에게 보냈지 않습니까? 많이 배웠다고 늘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데리고 와. 생명의 은인이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할아버지는 한동안 사고 지점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도준아.” “네.” 할아버지가 다시 입을 떼셨을 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넌 그 사고에 대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뭐라고 말해야 하나?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고 어느 정도 짐작한다고 대답해야 하나? 하지만 평범한 대답이 나왔다. “사고니까요. 트럭 기사 과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진정 그렇게 믿는 게냐?” “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가족을 의심한다는 대답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이젠 거짓말을 해도 표정조차 변하지 않는구나. 사기꾼이 다 됐어. 허허.”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암레스트까지 탁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 “오냐.” “말씀하시기 곤란하신 건 그냥 묻어 두셔도 됩니다. 제가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여기 안 왔으면 기억도 못 했을 거라고요. 전 이미 다 잊었습니다.” 진심이었다. 누구 짓인지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가족 중의 한 명 아니겠는가? 이미 묻어버린 사건을 다시 들춰내서 감옥으로 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정말 끝난 일이다. “미안하구나.” 할아버지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다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내 책임이야.”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는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다. “내가 네 할미를 조금만 챙겼다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게다. 언제부턴가 남남처럼 지냈으니 그 할망구가 나 대신 아들에게 집착한 거야.” 할머니였다. 차라리 큰아버지 중 한 명…. 아니, 큰아버지 모두가 함께 벌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낫다. 손주를 해하려는 할머니는 너무 비정하지 않은가? “내가 순양그룹 전부를 아들이 아니라 네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눈이 뒤집혔을 거야. 네가 순양그룹을 차지한다면 모든 걸 다 잃는 셈이니까 말이다. 남편도, 유산도, 아들도. 그래서 일이 벌어지기 전에 막으려 했던 거다.” 더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말을 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았고 내가 들어야 할 말도 남았기 때문이다. “네 에미를 그리 싫어한 이유도 아들을 뺏겼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도 한때 그랬어. 하지만 이유는 달라. 난 내 기대를 저버린 네 아버지에게 실망했고, 그 분노를 죄 없는 네 에미에게 쏟아냈어.” “어제 아버지가 그러시더군요. 할아버지가 쓰러지시니 할아버지를 원망했던 젊은 시절의 10년이 너무 미안하고 후회스럽다고 말입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유, 윤기가 참으로 그리 말하더냐?” “네.” 할아버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고 눈빛에는 기쁨이 서렸다. 나도 아버지의 진심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어 한없이 기뻤다. 할아버지는 눈가에 맺힌 한 방울의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늙으면 눈물이 흔해진다더니, 내가 딱 그짝이로구나. 그놈 말 한마디가 내 가슴에 박힌 대못을 뽑아줬어.” “다행입니다. 그러니 할아버지, 더는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다. 아직 멀었다.” 할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를 다 잡았다. “네 할미는 살아 있는 동안 영원히 널 미워할지도 모른다. 죽고 나서야 그 미움이 풀릴 게다. 그 엄청난 증오는 나 때문이야. 그러니 넌 나를 봐서라도 네 할미를 너그러이 대하고 용서하거라.” 이것이 내가 들어야 할 말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할머니가 어려울 뿐이지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용서하고 말고도 없어요. 이미 까마득히 잊었습니다.” “아니다. 내가 단단히 일러두겠지만, 그 할망구가 또 네게 해코지할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그런 일이 있더라도 용서하라는 뜻이다.” 내게 향하는 증오는 바로 할아버지를 향한 것이다. 참 지독하다. 아무리 남편이 미워도 그 덕에 평생을 호의호식하지 않았는가? 아니, 어쩌면 증오가 아니라 욕망일 수도 있다. 남편이 일군 모든 것이 바로 자신의 것이라 여기고 단 하나도 뺏기지 않으려는 욕망. 이렇게 해야 이해할 수 있다. 손자를 해치려는 마음이 증오보다는 욕망이라고 해야 조금 더 받아들이기 쉽다. 욕망은 충분히 핏줄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할머니를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약속드릴 테니 이제 그만하십시오.” 할아버지는 나의 눈을 보며 내 진심을 읽으려 애썼다. “그래. 내가 널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냐?”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을 내렸다. “추운데 고생했다. 이만 가자.” 기사는 재빨리 신호를 보내고 차에 올랐다. 자동차는 다시 남쪽을 향해 달렸다. “할아버지. 서울로 가는 거 아니에요?” “아니다. 여긴 지나는 길에 들른 게다. 우린 군산으로 갈 게야.” 군산이라. 설마 그때 못했던 그것 때문에 아픈 몸을 이끌고 이렇게 무리하시는 건가? “할아버지. 전 이미 할아버지의 뜻을 잘 압니다. 굳이 군산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요? 편찮으신데 몸만 축납니다. 그냥 돌아가시죠.” “이놈이! 순양그룹 역사의 출발점이야. 그 중요한 곳을 그냥 지나친다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말어! 때로는 내용보다 그 형식이 더 중요할 때도 있는 법이야.” 이 고집을 내가 꺾을 방법은 없다. 마지막 그날까지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군말 없이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네가 인사드려야 할 분도 계시다.” 인사? 누굴까? 설마… 꼭꼭 숨겨두신 작은 할머니는 아니겠지? ======================================= [228] 끝내지 못한 일 3 “이게 원래는 목조창고였는데 보수 작업을 계속 거치면서 이렇게 변했어. 까마득한 옛일이지만 아직도 기억나. 때 묻은 나무가 내는 향기. 바짝 말라가는 쌀가마니의 냄새와 누렇게 변해버린 그 갈색 나락. 난 거기서부터 돈을 모았어.” 할아버지는 이미 콘크리트와 벽돌로 뒤덮인 건물을 매만지며 추억에 잠겼다. “바람이 찹니다. 회장님.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급히 연락받고 달려 나온 순양그룹 역사관의 책임자는 하얀 입김을 내뿜는 할아버지 곁에 서서 안절부절못했다. 감기라도 드는 날엔 본사에서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비록 많은 급여는 아니지만 겨우 건물 관리하는 정도만으로 월급 끊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땡 보직이다. 늙어 거동하기 힘들 때까지는 악착같이 붙어 있고 싶을 것이다. “거, 사람 참…. 조금만 기다리게. 자네가 일을 똑바로 하는지 안 하는지 점검하는 게야. 건물 벽에 금이라도 하나 발견하는 날엔 아주 혼쭐날 줄 알아.” “아이고 회장님. 제가 밥줄인 이곳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제 손주가 다쳐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는 접니다만, 여긴 거미줄만 발견해도 온갖 호들갑을 다 떱니다요.” 역사관 책임자는 건물 벽을 손으로 쓱 훔치고 할아버지 눈앞에 내밀었다. “보십시오. 먼지 좀 묻은 게 전부 아닙니까? 땟자국 하나 없어요.” “허허, 그러네. 관리 잘해줘서 고마우이.” 할아버지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자, 들어가자.” 아무도 없는 텅 빈 실내는 할아버지의 구두 소리가 낮게 울렸다. 우리는 구식 양복 차림의 중년 남자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담을 낡은 흑백 사진 앞에 멈춰 섰다. “…이건 순양섬유가 최초로 1억 불 수출을 달성했을 때야. 지금이야 너도나도 1억 불이지만, 저 때만 해도 정말 대단한 쾌거였지.” 불도저와 포크레인, 공사장 인부들의 곡괭이질 사진도 있었다. “너 이 사진 뭔지 알겠니?” “혹시 경부고속도로 아닙니까?” “맞다.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시작한 대역사 아니냐? 건설, 토목회사들이 난리 치던 때야. 누가 가장 먼저 공사를 끝내느냐로 마치 달리기 시합처럼 공사를 서둘렀지. 그래야 대통령 눈에 띄거든. 허허.” 과거 빛나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은 계속 이어졌다. “이건 리비아 대수로 공사 때 쓰던 송수관 사진이구나. 정말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사업이지.” 리비아 대수로는 남부 사하라 사막의 지하수를 끌어올려 북부 지중해 해안에 있는 도시들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로다. 총 길이가 4,000km가 넘는 거대한 송수관을 사막을 가로질러 지하에 매설해서 하루 650만t의 물을 북부 지중해 연안에 공급하는 이 초대형 프로젝트는 총 공사비가 무려 300억 달러에 이른다. 할아버지는 사진과 기념품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하나하나 설명을 이어갔다. 마치 현장에 계신 듯한 상기된 표정,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미소, 반작이는 눈. 꺼져가는 촛불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횃불 같은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미술관의 큐레이터처럼 사진 하나하나에 얽힌 일화와 그때의 감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한쪽 벽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어떠냐? 이렇게 보니 그럴싸하지?” “뭐가 말입니까?” “순양의 성장 말이다.” “그럴싸한 게 아니고 대단한 거죠.” “아니다.” “네?” “저거 전부 다 가짜야. 허허.” 가짜라니?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보자…. 어디였더라? 아, 아마 ‘한일상사’였을 거다. 지금이야 흔적도 찾기 힘든 회사지만, 아무튼 그놈들이 최초로 1억 불 수출 달성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소문이 돌더라고. 이거 큰일이다 싶었지. 최초는 내가 되고 싶었거든. 그래서 가짜 서류 만들어서 언론에 발표해버렸지.” 가짜라고 하길래 다른 의미가 있을 줄 알았다. 모든 게 허망하다든지, 부질없는 1등 싸움에 치중했다든지 하는…. 정말 거짓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기자들 떡값 돌리고 잘 부탁한다고 하니까 대서특필한 거야. 떠들썩하게 해 놨으니 다들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였어.” “그래도 수출 통관 서류가 남아 있을 텐데요? 그거 확인하면….” “아, 그거야 금방 들켰지. 정부도 난감해했지만 어쩌겠어? 1억 불 수출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국민도 자기 일처럼 뿌듯해하는데 아니라고 초를 칠 이유가 없잖아. 대통령도 수출, 수출하며 입에 달고 살았고…. 으허허.”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엄청난 돈을 여기저기 뿌려 무탈하게 넘어갔을 게 뻔하다. “경부고속도로 속도전은 부실 공사라 나중에 하자 보수 하며 메꿨고,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앞으로 남고 뒤로 아까지(あかじ,적자) 난 헛발질이었어.” 회한에 잠긴 음성이 아니라 재미있는 추억을 더듬는 밝은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지금 이 역사관은 어떠냐? 성공을 써 내려간 상징처럼 보이지?” “처럼이 아니라 상징 맞습니다.” “그래. 한국 경제의 역사와 맞물리는 성공의 상징이지. 과정이야 여기저기 너덜너덜했지만 말이다.”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았다. “어떠냐? 넌 이 역사관을 계속 넓힐 자신이 있겠지?” “아뇨. 이곳은 지금 이 상태로 멈춰야죠. 여긴 할아버지의 기념관입니다.” 의외의 대답에 할아버지가 눈을 치켜떴다. “왜? 더 크게 키울 자신 없어?” “어린애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무럭무럭 자라죠. 하지만 성인이 되면 키도 멈추고, 덩치도 더는 커지지 않습니다.” “순양그룹은 이제 다 큰 어른이다?” “한국 경제성장률을 보십시오. 클 만큼 컸습니다. 병들지 않고 시들지 않도록 건강 관리가 우선이죠.” “그래서? 지키는 것에만 힘쓰겠다? 에라이!” 할아버지의 손이 내 뒤통수를 갈겼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손길이었지만 꽤 맵다. 난 뒤통수를 만지며 말했다. “순양은 건강만 지키면 됩니다. 대신 또 다른 종자를 심어 새싹을 틔우고 거목으로 키워야죠. 제2의 순양이 될 겁니다.” “또 하나의 순양이라….” “네. 아, 물론 키우는 데 필요한 거름값은 순양이 좀 보태야겠죠.” 또다시 뒤통수에 손이 날아왔다. 이번은 그리 맵지 않았다. “순양 돈을 왜 빼먹어? 네 돈으로 거름 대고 물 뿌려. 돈도 많은 놈이!” 나란히 앉은 할아버지의 표정을 곁눈질로 보니 웃고 계셨다. 이 정도면 만족하시려나? “그만 일어나자. 출출한데 해장국이나 먹으러 갈까?” “피곤하시지는 않으세요? 좀 쉬시는 게….” “어제 하루를 꼬박 잤다. 피곤할 게 뭐가 있다고? 어여 가자. 여기 선지해장국 잘하는 데 있어. 먹을 만하다.” 밖으로 나오자 의료진이 우르르 몰려와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괜찮아. 내 몸 정도는 가눌 수 있어. 자네들도 출출할 테니 같이 가자. 해장국 한 그릇 정도는 내가 대접하마.” * * * 해장국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밖으로 나오자 희끗한 새벽빛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이제 올라가셔야죠? 또 장시간 차를 타야 하는데 어디 온천이라도 가서 좀 쉬시고 출발할까요?” “아직 멀었다. 들를 데가 있어.” “아차, 깜빡했습니다. 인사드릴 분이 계시다고 하셨죠?” “그래.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 바로 출발하자.” “방문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아닙니까?” “늙은이라 새벽잠이 없어. 동트기 전에 일어나서 밥 챙겨 먹을 영감이다. 괜찮아.” 영감이라고 하니 숨겨 둔 여인은 아니다. 누굴까? 한 시간 남짓 국도를 달렸다. 도착한 곳은 완전 깡촌도 아니었고 중소 도시도 아닌,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시골이었다. 논밭과 비닐하우스 그리고 과수원이 펼쳐져 있지만, 흙길이 아닌 포장도로가 집 앞까지 깔린 그런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집집마다 이미 불이 켜진 것으로 보아 새벽부터 농사일을 준비하는 듯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이런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꽤 멋들어진 한옥이었다. 낮은 담 너머로 보이는 넓은 마당은 관리가 잘된 잔디가 깔려 있었고, 본채와 별채로 이루어진 집은 누가 보더라도 고급 자재를 잔뜩 썼다는 걸 알아챌 만큼 화려했다. 이미 자동차 소리를 들어서인지 백발의 노인이 담 너머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놈아. 형님 오시는 걸 뻔히 보고도 문 안 열고 뭐 해?” “거참, 새벽부터 뭐 이리 요란하게 행차하십니꺼? 동네 사람들 다 깨것수.” 툴툴거리며 문을 열었지만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다. “아침은 자셨습니꺼? 밥 준비하라고 하까예?” 할아버지는 지독한 경상도 사투리로 반기는 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해장국 한 그릇 했어. 나중에 점심이나 챙겨주게.” “오믄 온다꼬 전화라도 하제. 그라고 밥때 됐는데 만다꼬 사 묵는교? 와서 자시면 되지.” 섭섭한 듯 말하는 노인을 따라 할머니도 나와 할아버지를 반겼다. “아이고, 회장님. 여까지 어인 일이라예? 참말로 오랜만이라예. 아이고 참, 우짜노? 쪼매만 기다리소. 내 얼른 밥 안치고 아침 준비하께예.” “고마 됐다. 자시고 오셨다니께 우리끼리 묵자. 차나 좀 내온나.” “그래도 밥 한술은 뜨고 가셔야지예. 저기 젊은 장정들이 몇인데? 얼른 준비하께예.” 할머니는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쪼르르 부엌으로 달려갔다. “제수씨는 여전하시네. 허허.” “말도 마이소. 인자 내 말이라믄 똥으로도 안 듣는다 아입니꺼? 그냥 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합니더. 그만 들어가입시더. 바람이 찹니다.” 노인은 같이 온 일행을 향해 말했다. “저짜 별채에 가서 손발 좀 녹이소. 보일러 틀어 놔서 따습을 거라.” 모두 할아버지의 눈치만 살피자 버럭 소리 질렀다. “집주인이 괜찮다고 안 하나? 얼릉 안 드가고 뭐 하노?” 할아버지가 머리를 끄덕이자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야는 누꼬? 손잔교?” “그래. 우리 집 막내야. 도준아, 인사드리거라.” 난 이 경상도 영감님 앞에서 대뜸 큰절을 올리고 일어나서 머리를 조금 숙였다. “진도준입니다. 작은할아버지.” 살얼음이 낀 잔디에 주저 없이 엎드렸으니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어흠…. 거 어린놈이 싸가지는 있네. 형님 핏줄 맞소?” “시끄럽고. 춥다. 빨리 들어가자.” 반가움을 저리 표현하는 걸 보니 두 분은 보통 사이가 아닌 듯했다. 누굴까? * * * 집 밖이 화려한 만큼 내부도 보통이 아니었다. 멋들어지게 쓴 붓글씨가 돋보이는 족자, 골동품처럼 보이는 도자기까지. 가짜가 아니라면 이 노인은 부자가 틀림없다. 노부부 둘이 사는 집이 이리 크고 깔끔하다는 건 분명 집안일 하는 사람도 있다는 증거다. 아니나 다를까, 다과상을 들고 온 사람은 조금 전 그 할머니가 아니라 삼십 대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었다. 머리만 꾸벅 숙이고 나가는 거로 봐서는 딸이나 며느리가 아님은 분명했다. 핏줄이라면 인사를 했을 테니까 말이다. “차 드이소. 형님이 지난번에 보내주신 중국차라예. 맛이 에법 납디다.” “내가?”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자 곧바로 이마를 찌푸렸다. “그럼 그렇지. 이런 거 챙겨 줄 만큼 살가븐 사람이 아이제. 보나 마나 밑에 것들 시킨 거구먼.” “누가 보냈든 내 돈으로 산 거다. 고맙다는 말도 안 하면서 불평은…!” 두 분이 찻잔을 들고 나서 나도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차를 마시니 몸이 녹는 것 같았다. 노인은 무릎 꿇고 공손히 앉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할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야도 델꼬 갔다 왔소? 군산에?” 할아버지는 머리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순양카드 하나로 지 큰아버지 둘을 데꼬 논 게 이놈이요? 똘똘해 보이긴 하구먼.” 은퇴해서 유유자적하는 시골 노인이 아니다. 누굴까? ======================================= [229] 끝내지 못한 일 4 “니도 너거 할아버지 자리 노리는 기가?” “글쎄요. 노린다기보다는 언젠가 제가 그 자리에 앉을 수 있기를 희망하는 정도입니다.” “언젠가? 그기 언젠데?”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아주 강력한 장점이 있으니까 느긋할 수 있습니다.” “장점? 나이 말하는 기가?” “네. 10년 뒤든, 20년 뒤든 천천히 준비하면 언젠가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능물 떠는 건 영판 형님이오. 으허허.” 노인은 피식 웃으며 할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10년은 무슨! 당장 내일이라도 순양그룹 회장실에 앉고 싶어 안달 난 면상이구만.” 마치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말투. 그렇다고 딱 들어맞는 소리를 하는 것도 아닌 걸 보면 점쟁이나 관상 보는 사람은 분명히 아니다. 할아버지는 왜 이 노인을 꼭 만나야 한다고 했을까? “도준아.” “네.” 할아버지는 눈을 한번 끔뻑했다. “내가 이 고약한 늙은이랑 할 이야기가 좀 있으니 밖에 나가 있겠니?” “네. 할아버지.” 꿇은 무릎도 저려 오는 데 잘 됐다. 조용히 일어나 머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 * * “형님. 손자 보여줄라꼬 오신 건 아니지예? 뭡니꺼?” “저놈 부탁하러 왔어.” 노인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어디 편찮으십니꺼?” “쓸 만큼 썼다는구먼. 이제 고쳐서도 쓸 수 없을 만큼 망가졌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이.” 진 회장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쿡 찔렀다. “형님!” “호들갑 떨지 말고.” 진 회장은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가는 길 늦출 생각은 없어. 충분히 살았고 미련도 없다.” 노인은 입술만 깨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네는 공기 좋고 물 맑은 이곳에서 좋은 것만 먹고 있으니 앞으로 십 년은 거뜬할 거 아닌가? 그동안 저놈 좀 보살펴주면 돼.” 두 노인은 찻잔을 다 비울 때까지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마침내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저놈이 그룹을 물려받습니꺼?” “알면서 뭘 물어봐? 잘난 놈이 차지하겠지.” “고약한 심술은 어디 안 갔네. 손주 놈에게는 달랑 10%만 줬으면서 우째 싸워요? 그것도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혹한 놈들 틈에서!” “10% 아냐. 더 많이 줬어. 아니… 더 많이 뺏어갔다고 말하는 게 맞겠구먼.” “뭘 뺏어요?” “내 주식. 으허허.” “뭔 소리 하는 겁니꺼, 지금? 알아묵기 쉽게 말 안 할 겁니꺼?” “순양자동차를 가져갔고, 이번엔 순양카드를 가져갔지. 들어는 봤겠지?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와 HW 그룹, 옛 아진그룹 말일세.” “네. 그게 뭔 상관인데예?” “그 두 회사가 바로 저놈 거네.” “예? 그기 무신…?” “과정은 나도 잘 모르네. 아무튼, 목초지 좀 떼 줬더니 그걸 장사밑천 삼아 이만큼 일궜네. 겉으로 보이는 규모만으로도 국내 20대 그룹이고 미국에 투자한 돈은 나도 헤아릴 수 없어. 물론 순양자동차 넘길 때 주식도 좀 얹어준 건 사실이야. 하지만 저놈이 가진 건 다 저놈 혼자 힘으로 세운 게 맞아.” 진 회장의 설명이 끝나자 노인의 입꼬리가 올랐다. “형님이 저놈을 엥가이 아끼누만요.” “사실이라니까!” “씰데없는 소리! 영기 놈이나 동기 놈이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까 회사 하나 따로 떡 하니 채려주고 뒷구멍으로 다 퍼줬구먼. 내리사랑이 도가 넘었수.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닙니꺼?” 진 회장은 노인의 반응에 피식 웃었다. “못 믿겠지? 나도 그랬어. 달러를 한 움큼 쥐고 와서 자동차 내놓으라고 한 게 저놈 스무 살 때야. 그때 내 표정을 자네가 봤어야 하는데….” 진 회장은 손자의 어린 시절부터 순양카드를 차지한 올해까지 벌어진 일을 차분하지만, 자세하게 늘어놓았다. 노인은 진 회장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온갖 표정을 다 보여주었다. 찌푸릴 때도, 감탄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멍하니 듣는 게 전부였다. 진 회장의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노인이 소리쳤다. “여기 차 좀 다시 내 온나. 한 주전자 가득!” 다시 가득 찬 차주전자가 들어오자 노인은 다시 입을 닫고 물 마시듯 차를 들이켰다. “그 정도로 똘똘한 놈이믄 내가 돌봐주고 살펴볼 필요가 없습니다. 솔직히 형님 아들내미 중에 동기는 좀 쓸 만하지만, 저놈만치는 아입니더. 가만히 내비두면 저놈이 다 묵겠구만….” “그 가만히 내버려두는 시간이 불안해서 하는 말일세. 저놈이 나이 서른만 되었다면 이런 걱정 안 해.” “와요? 형님 아들내미들이 저놈 더 크기 전에 확 잡아묵을 까바서요?” 진 회장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차를 마셨다. “그냥 도와줘. 딱 10년만.” 진 회장은 앞뒤 다 자르고 한참 만에 대답했고 노인은 그런 진 회장을 유심히 살폈다. 확연히 쇠약해 보이는,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의 모습과 손자를 걱정하는 할아버지의 모습만 보일 뿐,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재계의 거물다운 모습은 털끝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긴 한숨을 한번 쉰 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는 거 봐서 챙겨주리다. 되도 않는 재벌 흉내라도 내는 날이면 내 집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할낍니더.” 진 회장은 노인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굳었던 얼굴이 확 펴졌다. “제수씨가 밥 준다더니, 아직 상 차리나? 아침 먹은 거 소화 다 됐어. 상 내오게.” “오늘내일하며 황천길 건너는 연습한다면서 식성은 여전하네.” “제수씨가 소고기국밥 하나는 기막히게 끓여내지 않나? 그 생각하니 갑자기 시장기가 도는구먼.” “이거 우짭니까? 오늘 아침은 시락국인데. 흐흐.” * * * 연이은 아침 식사 때문인지 할아버지는 차에 오르자마자 잠에 빠졌다. 난 저 노인이 누군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잠에서 깰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거의 두 시간이 지나도록 단잠을 즐긴 할아버지가 눈을 떴을 때 그 노인의 정체를 슬며시 물었다. “주병해라고 순양그룹의 일등공신이었다.” 주병해? 기억에 없는 사람이다. 할아버지가 일등공신이라고 할 정도면 최소한 주력 계열사의 사장 정도는 역임했을 텐데 이름이 생소하다. “언제 순양그룹에 몸담으신 분이죠?” “몸담은 정도가 아니야. 전쟁 끝나고 대구에서 섬유공장 시작할 때 만났지. 우리가 기술이 있어? 기계가 있어? 일본에 가서 중고 기계 사 오고, 그 기계 만질 일본 기술자까지 데리고 온 사람이 바로 그 영감이야.” 그 정도면 일등공신이 아니라 거의 창업 공신 수준이다. “정말 대단한 친구였어. 내가 계획을 세우면 그 친구가 밀어붙였지. 내가 확신이 서질 않아 주저할 때조차 일단 시작하고 보자며 실행에 옮겼어. 머리도 비상했고. 계속 나와 함께 있었다면 진즉에 회장 자리 꿰찼을지도 몰라.” “그런 분이 왜 저렇게 지내십니까? 언제부터…?” 솔직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할아버지께서 쫓아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그룹이 성장할수록 주병해라는 분의 입지는 점점 더 커졌을 테고 성장의 과실을 함께 나누자고 요구했을 수도 있다. 그걸 받아들이실 할아버지가 아니다. 하지만 내 추측은 틀렸다. “이십 년이 넘었으니 오래됐지. 네가 아주 어릴 때 내게 침 뱉고 등진 사람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등을 돌리다니? 할아버지는 그 순간이 떠올랐는지 잠깐 얼굴을 찌푸렸다. 얼마나 아픈 기억이길래? “신군부가 정권을 잡고 총칼을 휘두를 때였어. 군부 정권은 늘 그렇지. 먼저 돈 있는 놈들부터 휘어잡으려고 하거든.” 그 정권에 줄을 잘 서서 승승장구한 기업이 바로 순양 아닌가? “다들 눈치 보며 돈 달라면 돈 줬고 특정 지역에 공장 지으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뚝부터 박았지.” “그럼 그분은 신군부에 저항하셨습니까?”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주병해 저 친구도 뼛속까지 장사치라고. 정권에 갖다 바친 돈 이상의 이익을 뽑아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어.” “그럼 그 시대 상황과 관계없이….” “아니. 맞아. 너 혹시 동명그룹이라고 아니?” 모를 리가 있나? 70년대 중반까지 압도적인 재계 서열 1위였던 기업 아닌가? 신군부가 들어서자마자 표면상 국가 헌납의 형태로 강탈당해 어이없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말이다. “네. 대충 주워들었습니다.” “주병해가 바로 그 동명그룹의 강 회장과 많이 친했어. 형님, 형님 하며 쫓아다녔고 도움도 많이 받았지. 덕분에 나도 도움 좀 받았고.” 원인이야 뭐가 됐든 경쟁 기업이 사라졌다. 그 때문에 두 분이 갈라서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재계는 모두 바짝 엎드렸어.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지. 괜히 강 회장 돕겠다고 나섰다가 제2의 헌납 기업이 될 건 뻔하니까 말이야.” 이십여 년 전만 해도 권력이 기업을 무너트릴 수 있었다. 그만큼 기업의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이제 대기업 집단의 규모는 정권이 어찌할 수도 없을 만큼 비대해졌다. “혹시 주병해 그분이 구명운동이라도 벌린 겁니까?” “아니. 아무리 친하다 해도 같이 망할 수는 없잖아? 병해 저 친구도 엎드린 채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자고 했어. 나중에 강 회장 노후나 책임져주면 욕 얻어먹지 않을 만큼 도리는 다한 거라고 했어.” “그런데 왜…?” 할아버지는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난 가만히 안 있었거든. 곧바로 신군부에 줄을 대기 시작했어. 기업 헌납이라고 해 봤자 현찰이 아니잖아? 정부가 기업을 손에 들고 있으면 어디에다 쓰겠어?” 무슨 말인지 대번에 알아들었다. 하긴, 그런 기회를 놓칠 할아버지가 아니다. “동명그룹 6개 자회사 중에 동명산업, 동명중공업, 동명개발, 동명식품… 내가 4개를 거저먹다시피 가져왔지. 그거 먹는 바람에 우리 순양의 중공업 부문이 엄청나게 커졌어.” 역시. 그렇게 된 것이다. 이제 흐릿하나마 그림이 그려졌다. “병해는 그 사실을 알자 노발대발해서 펄펄 뛰더라고. 상도의가 바닥에 떨어지더라도 인간의 도의는 지켜야 하지 않냐면서 말이야. 쓰러진 강 회장을 두 번 죽이는 짓을 어떻게 할 수 있냐며…. 정말 그렇게 화내는 모습은 처음 봤어. 내게 마지막으로 화낸 모습이기도 하고.” 주병해 그분이 불같이 화낸 건 이해한다. 내 집이 경매로 넘어갈 때 기다렸다는 듯이 친한 친구가 싸게 입찰해서 가져가 버리는 꼴이다.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그럼 그때부터 저렇게 사시는 겁니까?” “응.” “좋지 않게 헤어진 것치고는 두 분 사이가 친형제 못지않아 보이던데요?” “아이고, 말도 마라. 한 5년은 문전박대도 그런 문전박대가 없었어. 하지만 제 놈도 늙어가니 별수 있겠어? 과거가 그립고, 사람이 그리운지 물렁물렁해지더구나. 친구처럼, 형제처럼 지낸 지 오래되었다.” 그럼 이제 남은 의문은 하나다. 왜 저 노인에게 꼭 인사를 드려야 했을까? “앞으로 내가 없더라도 나를 대한다 생각하고 자주 찾아뵙거라.” “네. 작은할아버지처럼 모시겠습니다.” “그래, 어려운 일 있으면 도움도 청하고 조언도 구해.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네게 답을 줄 거다.” “현명하신 분인가 보군요.” “지혜롭기도 하다. 그러니 내가 그룹 일을 시시콜콜 다 이야기하며 저 늙은이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니겠냐?” 또 한 명의 이학재 실장이다. 하지만 이 실장에게 못 미치는 것도 있다. 난 그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룹에서 저분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할아버지는 눈을 빛내며 미소 지었다. “많아. 그룹에서 방귀깨나 뀌는 놈들은 다 저 친구 밑에서 일을 배웠으니까. 명절 때 빼놓지 않고 선물꾸러미를 들고 인사하러 갈 걸?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전화라도 하고.” 그렇단 말이지? 은퇴한 노인이라도 영향력이 있다면 친손자처럼 재롱떠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 [230] 끝내지 못한 일 5 병원 주차장에는 아버지와 이학재 실장이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할아버지는 의사들이 가져온 휠체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몇 발짝 된다고 그걸 가져와? 됐다. 그냥 올라가자.” 엘리베이터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간 할아버지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말 않겠다. 모두 돌아가. 오늘은 혼자 있고 싶다.” 우리는 빠르게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다른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말했다. “도준아. 넌 가서 좀 쉬도록 해. 난 병원장 만나보고 갈 테니까. 학재 형님도 가서 좀 쉬세요.” 아버지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이학재 실장은 마음이 놓였는지 긴 한숨을 쉬었다. “도준아. 피곤하니?” “아닙니다. 올라오면서 눈 좀 붙였어요.” “그럼 나랑 이야기 좀 할까?” 그와 난 병원 근처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군산은 어떻더냐?” “썰렁하던데요?” “뭐? 썰렁?” “네. 순양그룹의 역사관이라고 하기에는 좀 빈약하지 않습니까? 사진 몇 장과 기념품 몇 개가 전부던데….” “그런가? 그 현장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은 별다른 감흥을 못 느끼나 보군.” “차라리 할아버지의 사진첩이라고나 할까요?” “사진첩? 하하. 그래, 그편이 더 어울리겠다. 회장님의 추억을 담은 곳이니까 말이다.” 이학재는 웃으며 나를 살폈다. “별말씀 없으시더냐?” “그때 그 사고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그의 눈썹이 꿈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설마 할머니 짓이라는 걸 할아버지가 다 털어놓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게 틀림없다. “실장님도 알고 계셨죠?” “으흠…. 당연히. 내가 조사했으니까.”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뭐지?” “할머니도 손발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런 일을 실행에 옮기려면 보통의 직원들로는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돈만 주면 무슨 짓이든 저지르는 놈들이 득실거리는 세상 아니냐?” “순양그룹 회장 사모님이 그런 놈들과 어울려 지낸다고 생각하기 어려운데요? 그놈들에게 약점 잡히는 일인데…. 그리 단순하지는 않을 겁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왜 그렇게 자세히 알려고 하지?” “할아버지께서 그러시더군요. 또 해코지할지 모르지만, 당신을 봐서 용서하라고요. 그럴 때를 위해 저도 대비해야죠.” 이학재 실장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용서할 자신은 있고?” “할아버지 부탁인데 들어드려야죠.” “흠….”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고 난 그가 이야기하기를 기다렸다. “사모님이 미술관과 예술지원센터를 운영하는 건 알지?” “네. 최고의 후원단체라고 들었습니다.” “고가의 예술품이 움직이는 세계다. 가짜가 판을 치고 웬만한 전문가가 아니면 위작과 진품을 구별하기 어렵지. 그리고 음지에서 거래하는 경우가 다반사고.” “아…!” “떳떳하지 못한 거래를 했는데 위작이라고 판명 나면? 경찰에 신고할까?” 음지, 떳떳하지 못한 거래…. 바로 밀수를 말한다. 한때 떠도는 소문이 있었다. 북한의 골동품이 중국을 통해 한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그 골동품을 싹 거둬들여 지하 수장고에 고이 모셔둔 곳이 바로 순양갤러리라는 소문이었다. 이 역시 밀수를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힘으로 해결하는 손발 조직이 있군요.” 이학재 실장은 대답 대신 머리만 끄덕였다. “돈과 힘이라…. 할아버지 말씀 새겨 둬야겠네요.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두 번째는 별다른 죄책감도 못 느낄 테니까요.”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돈과 힘을 다 갖췄어. 우병준이는 네가 지시하면 눈 하나 깜빡 않고 사모님께 경고할걸? 널 건드리면 그대로 되갚아준다고 말이다.” “설마요?” “내 전화도 안 받던데? 너한테 충성 맹세 한 거 아냐?” 보여주기 쇼가 아니었다. 정말 순양의 이인자를 지워버렸다. 아니, 그래도 이 사람의 말을 다 믿으면 안 된다. 두 사람이 입을 맞추고 나를 속이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사람을 쉽게 믿고 따르다 어떤 꼴을 당했는지, 죽음으로 배우지 않았던가? “우병준이 정도면 초일류다. 잘 벼린 칼이니 신중하고 조심해서 써.” “네. 유념하겠습니다.” “뭐, 집안 문제는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닌 것 같고…. 회장님께서 그룹에 대한 말씀은 없으셨어?” 내가 이 사람에게 약속한 바가 있으니 할아버지와 내가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궁금해하는 건 당연하다. “순양을 더 크게 키울 자신이 있느냐만 물어보셨습니다. 그 외에는 특별한 건 없었고요.” “그래? 그게 전부야?” “네, 실장님. 아니 오히려 제가 여쭤보고 싶습니다. 할아버지는 제게 그룹 지배 지분을 더 주실 생각이십니까?” 이학재는 머리를 흔들었다. “다들 회장님이 비장의 카드 한두 장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잘못 생각한 거다. 회장님 손에 그룹 지배 지분은 없어. 남은 건 부동산과 예금이 전부다. 개인 재산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몰라. 그건 개인 변호사가 관리하니까.” “확실합니까?” “내 손으로 나눴다. 더는 없어.” 단언하는 그의 말을 듣자 힘이 좀 빠졌다. 최후의 일격을 가할 만큼의 비밀 무기 하나쯤은 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사라졌다. 참 냉정한 분이다. 끝까지 싸워 이긴 놈이 당신의 후계자라 이건가? “실망한 얼굴인데? 하하.” “네. 기대했거든요.” “네가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 회장님이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을 텐데.” 실수? 내가? 이건 또 무슨 말이지? 휘둥그레 뜬 내 눈을 보며 이 실장은 손을 살짝 저었다. “그런 실수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못 읽은 걸 말하는 거다.” “제가요?” “그래. 부모 마음을 약간만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넌 너무 잘난 모습만 보여줬어. 조금은 부족하고 약한 모습을 보여드렸어야 해. 그래서 측은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도록 했다면 조금 달랐을 거다. 우는 애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 그거 사실이다.” 정말일까? 나에 대한 신뢰가 컸기 때문에 딱 그 정도의 지분만 주신 걸까? “아,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마. 단지 내 생각일 뿐이니까. 이거…. 자꾸 이야기가 딴 데로 새는구나. 참, 올라오는 길에 어디 들렀다면서?” “네. 실장님은 아시는 분일 것 같습니다. 주병해 씨라고….” “응? 주 사장님을?” 이학재 실장은 의외인지 놀란 표정이었다. “네. 앞으로 어려운 일 있으면 도움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종종 찾아뵙고 인사도 하라고 하시면서요. 잘 아시는 분입니까?” “물론.”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맺히는 걸 보니 좋은 기억이 많은가 보다. “대단한 분이다. 조금만 참았다면 순양의 절반을 그분이 가질 수도 있었어. 그걸 다 팽개치고 미련 없이 돌아섰으니… 진짜 사내지.” “그래도 사는 모습 보니 궁색하지는 않던데요?” “버린 거에 비하면 궁색한 거 맞아. 회장님이 신경 쓰시니까 그 정도로 사는 거야. 참, 그분을 네게 보여드린 건 회장님 안 계시면 네가 그분 돌봐드리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거다.” “아, 그렇군요. 잊어먹지 않아야겠군요.” “현명하신 분이니까 종종 자문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나도 가끔 전화드린다.” 이학재 실장은 커피 잔을 싹 비우며 말했다. 나를 따로 보자고 했던 진짜 이유를 말할 것 같다. “이제 각오 단단히 해라. 회장님 저리되신 거 알면 모두 본색을 드러낼 거다. 특히 진영기 부회장이 가장 먼저 시작할 거야. 첫 먹이가 네가 될지 아니면 진동기 부회장이 될지 모르지만, 곧바로 축출 작업 들어간다.” “도와주실 겁니까?” “말했지? 회장님의 유지는 받들 거라고. 지분 이동은 막아주마. 하지만 그 이상은 없다. 날 앞세울 생각은 하지 마.” “알겠습니다. 준비 단단히 해야겠군요.” “특히 두 부회장이 단합해서 너부터 쫓아내려는 수작을 부릴지도 몰라. 그 고비 잘 넘겨.” “싸울 만한 뭔가를 제 손에 좀 쥐여주실 생각은 없으시고요?” 웃으며 슬쩍 찔러보니 이학재도 웃음을 보였다. “직접 찾아봐. 재벌 2세 공격할 만한 흠집이야 널리고 널린 거 아니겠어? 흐흐.” 이 양반도 뭔가 한껏 움켜쥐고 있는 게 틀림없다. * * * 2003년은 검찰이 2002년 대선 전반에 불법자금이 만연했다는 의혹을 조사하며 야당 대선 후보의 측근을 긴급 체포했고 이 뉴스가 2003년의 대미를 장식했다. 일명 차떼기 수법에 가담한 대기업을 전방위로 수사한다는 중수부의 발표가 터져 나오자 모두 비상이었다. 두 분 큰아버지는 선거자금 전달 과정에 자신들의 흔적을 지우고 누군가 대신 검찰 포토라인에 설 사람을 구하느라 정신없었다. “실장님.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관계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오세현 대표는 은퇴나 다름없고, 그때 돈을 전달한 직원 두 명도 일찌감치 미국으로 출국했습니다. 두 직원은 가족들과 함께 나갔으니 저쪽 흔적은 지웠다고 봐도 되겠죠?” 우병준 상무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됐습니다. 진동기 부회장 측에 실장님의 돈을 전달한 놈들도 검찰 수사가 끝날 때까지 동남아로 휴가 보냈습니다.” “제 돈의 흐름은 찾으셨나요?” “아뇨. 오세현 대표님이 깔끔하게 처리하셨더군요. 제힘으로 발견하는 건 불가능하고 검찰이 작정하고 덤벼들어도 힘들 겁니다. 미국 계좌까지 전부 확보해서 일일이 대조해야 하니까요.” “설사 그렇게 해도 못 찾습니다. 뉴욕과 여의도 양쪽으로 하루에 왔다 갔다 하는 돈만 수십억입니다.” 내가 자신감을 보이며 말하자 우병준 상무도 어깨를 으쓱하며 받아들였다. “두 분 다 보통 아니시군요.” “제 나이 이제 겨우 스물일곱입니다. 벌써부터 구정물에 손 담글 수는 없죠.” 우병준은 천천히 미소를 거두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계속 병원에 계신다는 소문이 돕니다. 아시고 계십니까?” “어디서 그런 소문이 시작됐죠?” “회장님 자택 경호원들입니다. 통 출입을 안 하시니 그놈들도 이상하게 생각하겠죠. 사실입니까?” 이 사람에 대한 내 믿음이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소문을 확인시켜줄 만큼은 된다고 생각했다. “네. 일주일쯤 전입니다.” 그는 놀라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비밀로 하신 이유는…?” “할아버지께서 원하셨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학재 실장님께 연락하셔서 회장님 자택 경호원들 교대하라고 요청하십시오. 경호실은 일정 기간 지나면 교대 근무하는 게 원칙이니 그놈들도 특별한 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가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시간문제일 뿐이다. 어쩌면 두 분 큰아버지도 눈치채지 않았을까? “알겠습니다. 이 실장님께 말씀드릴게요.” “이런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만, 회장님 건강이 많이 나빠졌습니까?” “네. 병원에서는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고 합니다.” 우병준은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직원들 전부 모이라고 해. 진도준 실장님 운전하는 애만 빼고 전부.” 그는 짧은 통화를 끝내고 바로 일어섰다. “오늘은 외부 일정 짧게 하시고 댁으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경호 수준을 좀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이 과잉인 것 같아 좀 거북했다. 그는 내 표정을 보고 더욱 음성이 굳어졌다. “물리력과 금력을 모두 쥔 사람이 초조해졌을 때, 상식을 벗어난 짓을 저지르는 걸 여러 번 봤습니다. 순양그룹의 차기 구도가 명확해질 때까지 온갖 사건 사고가 연이어 난다 해도 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장님도 긴장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할머니가 벌인 일을 생각하면 우병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새삼 할아버지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 [231]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 1 직접 노려보는 눈이 수십이요, 소문에 민감한 귀가 수백이다. 할아버지가 병원에서만 지낸다는 사실을 더는 감추기 힘들어질 때쯤, 다시 쓰러지셨다. 새해 첫 소식이 날벼락이었지만 병원으로 달려가지 못했다. “실장님. 병실에 모인 분들을 확인했는데 부회장님들과 사모님 그리고 이사장님만 계시다고 합니다. 실장님 사촌분들은 아무도 없다고 하니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다급한 내 발길을 붙잡는 김윤석 대리였다. 그는 내 눈치를 보며 계속 말했다. “이럴 때 실장님 혼자 병실에 나타나면 불필요한 눈총만 받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회장님께서 깨어나시면 실장님을 찾으실 겁니다. 그때 두 분만 만나시는 게 더 좋을 듯합니다.” 지금껏 지시만 따르다 처음으로 의견을 냈다. 그것도 내가 경황이 없을 때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심해야 할 것을 지적했다. 이학재 실장의 행동을 보며 배운 것일까? “병원과 긴밀하게 연락할 방법은?” “실장님은 병원장이나 이사장이신 아버님께 연락받으실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제가 손을 좀 써 뒀습니다.” “손을 쓰다니요?” “지금 병실 경호를 맡은 놈들은 전부 이학재 실장의 수족입니다. 제가 몇 년간 그분 밑에 있으면서 경호실 직원들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좀 쌓아 뒀거든요. 같이 삼겹살도 구워 먹었고 소주도 함께 마신 놈들입니다. 수시로 상황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으니 중요한 순간을 놓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미리 사람 관리까지 한다? 이 친구의 몰랐던 장점인가? “그래요. 지금은 기다려 보죠. 대신 한순간도 놓치면 안 됩니다. 병실에서 일어나는 일 중 내가 몰라서 낭패당하는 순간이 없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수시로 업데이트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김윤석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 * * 네 명의 아들과 네 명의 며느리 그리고 딸 한 명, 아홉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이자 특별 병동의 가장 넓은 병실마저 비좁아 보였다. “제발 목소리 좀 높이지 말고 나가서 이야기하자. 아버지 회복 중이잖아.” 호들갑 떠는 누이와 병원장을 붙잡고 닦달하는 큰형, 의사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퍼붓는 둘째 형까지…. 진윤기는 이들을 일 초라도 빨리 병실에서 내보내고 싶어 그들을 밀어내다시피 했다. “이 실장! 당신도 따라와. 이야기 좀 하자!” 진영기 부회장은 엉거주춤 서 있는 이학재 실장을 향해 소리치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이 실장의 볼이 실룩거렸다. 이젠 완전히 아랫사람 취급하는 진영기의 말투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의 손을 잡은 진윤기를 보며 표정을 풀었다. “흥분하면 위아래 없는 사람 아닙니까? 형님이 좀 참으세요.” “윗사람 맞지, 뭐. 저 사람이야 순양그룹 회장실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고 난 이제 쫓겨나는 일만 남았으니 말이야.” “형님! 그게 무슨 소립니까?” “됐다. 빨리 가자. 모두 내게 할 말이 많을 거 같아 보이는데? 흐흐.” 이학재는 근심 가득한 진윤기의 어깨를 툭 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병원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진 회장의 상태를 설명했다. 그의 입에서 앞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자, 자식들의 입에서는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남았어? 설마 두어 달이니, 반년이니 하는 소리는 아니지?” 진영기 부회장이 병원장을 향해 쏘아붙였다. “예측 가능한 질병이 아닙니다. 노화로 인한 것이니 남은 생명을 가늠하는 건 의사의 능력 밖입니다.” 셋째인 진상기도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뭐요? 그게 의사 입에서 나올 소리요? 이거 원, 기가 차서….” 마침내 진영기 부회장이 폭발해 버렸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것들이 미쳤나? 선생, 선생 하며 불러주니까 분수도 모르고…! 이 새끼들아. 사람 살리라고 그 어마어마한 연봉 줘 가며 채용한 거야! 회사 같았으면 그따위 하나 마나 한 소리나 해대는 놈은 진즉에 모가지야, 이 새끼들아.” “형님!” 진윤기가 험한 말을 쏟아내는 그의 입을 막으려 하자 진영기는 동생마저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너도 똑같은 놈이야! 이런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우리에게 알렸어야지. 그리고 이런 무능한 의사 새끼들 다 자르고 미국이든 일본이든 제대로 된 의사를 불렀어야지!” 병원장은 진영기의 손가락질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머리를 숙이고 나가버렸고 나머지 의사들도 그를 따랐다. 의사들이 사라지자 진동기 부회장이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 분명했다. “좀 솔직해지자. 살리지 못한 무능 때문이 아니잖아?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는 게 더 열 받은 거 아냐? 회장 자리에 앉으려면 준비할 게 많으니까 말이야.” “이 새끼가 진짜….”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혔을 때 진서윤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잘들 하는 짓이다. 환갑 바라보는 나이가 부끄럽지도 않아?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구만.” “뭐?” “야!” 그녀는 두 오빠를 무시하고 벗어 놓은 코트와 핸드백을 챙겼다. “잘들 해봐. 난 아버지 곁에서 팔이라도 주물러드릴 테니까.” 진서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녀는 이제 필드의 선수도 아니고, 벤치의 후보 선수도 아니다. 일개 스텝에 불과할 뿐이니 누구도 여동생을 붙잡지 않았다. 진서윤의 문 닫는 소리를 신호로 모두 입을 열지 않았고 어색한 침묵만 감돌았다. 침묵은 깬 사람은 이학재 실장이었다. “부회장님. 제가 따로 말씀드릴 일은 없습니다만,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시죠.” 다소 도발적인 어조 때문에 진영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도대체 왜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걸 숨긴 거야? 윤기와 단둘만 알고 쉬쉬한 이유가 뭐지?” “형님 그건 오햅니다.” “넌 입 닫고 있어. 이 실장에게 물었다. 네게 따질 것도 있으니까 기다려.” 진윤기가 나서자 진영기는 소리를 꽥 질렀다. “그것도 오햅니다. 진윤기 이사장은 병원 관계자가 보고할 수밖에 없는 위치죠. 초특급 VIP가 병원으로 실려 왔는데 병원 이사장이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저와 말을 맞추지도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좋아. 그럼 왜 장남인 내게 숨긴 거지? 내가 아버지 쓰러지신 걸 몰라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글쎄요. 회장님 지시 사항일 뿐입니다. 제가 회장님 마음까지 알지는 못합니다.” “뭐?” “건강에 적신호가 오더라도 입 닫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자식 얼굴 보는 건 싫다고 하시더군요. 자식들에게는 직접 말씀하신다고 하셨기에 그 뜻을 따랐을 뿐입니다.” 이학재 실장은 무표정한 얼굴과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회장님의 지시 사항이라고 하니 더는 따질 수도 없었다. 머쓱한 2세들의 표정을 봐도 이학재의 무표정한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다시 사무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 몰라서 스위스에 계신 사모님께 전화드렸습니다만 알았다는 대답만 하시고 끊으셨습니다. 한번 연락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학재는 진영기를 향해 말했다. 남편을 증오하는 사모님이지만 장남을 향한 애정은 누구 못지않은 사람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진 회장의 임종은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영기는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전화하지. 그리고… 이 실장은 나 좀 볼까? 조용히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그 순간 진동기도, 진상기도 눈을 빛냈다. 이 눈빛을 놓치지 않은 이학재는 슬쩍 웃었다. “진영기 부회장님. 불필요한 오해는 이제 사양입니다. 다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말씀 나누시죠.” 진영기는 날카로운 두 동생의 눈빛을 보자 짧게 한숨을 쉬었다. “제수씨들은 집으로 돌려보내지? 의사들도 고비는 넘겼다고 말했으니 아버지 깨어나시면 다시 와도 되잖아. 당신도 집으로 돌아가.” 며느리들이 남편의 눈치만 살피며 우물쭈물할 때 남편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며느리들이 다 빠져나가자 진윤기도 일어섰다. “난 형님들이 무슨 말 하려는지 궁금하지 않으니까 자리 피해줄게. 알아서들 하라고. 참, 병원에서 연락 가면 재빨리 뛰어오고. 연락은 똑같이 갈 테니까 이제 내게 뭐라 하지 마.” 진윤기까지 나가버리자 세 형제와 이학재만 남았다. 진영기가 떫은 표정으로 이학재를 노려볼 때 진동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님이 궁금한 거 내가 물어보지. 나도 엄청 궁금하거든.” 진동기의 눈길이 이학재 실장을 향했다. “실장님. 아버지 유언장에 특이한 사항 있습니까? 남은 지분 배분이라던가, 후계자로 생각하는 특정인이라든가….” 이학재는 웃으며 세 형제를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궁금하신 것 같으니 제가 아는 것만 말씀드리죠. 첫째, 전 회장님의 유언장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드릴 게 없어요. 둘째, 회장님 소유의 그룹 지배지분은 없습니다. 승계작업이 다 끝났습니다.” 더는 남은 지분이 없다는 말에 희비가 엇갈렸다. 진영기의 표정은 순식간에 밝아졌고 가장 흙빛이 된 건 진상기였다. 그는 명색이 순양의 셋째 아들이지만, 아무짝에도 힘쓰지 못하는 재단 몇 개 손에 쥔 게 전부다. 앞으로도 영원히. 진동기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이대로 간다면 진영기에게 회장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 “화, 확실해요? 더는 지분 없어요?” 진상기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졌다는 걸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룹 지배력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지분을 ‘유산’으로 남길 수는 없습니다. 상속세를 어떻게 감당하려고요? 계열사 자투리 주식은 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 역시 회장님 개인 변호사가 관리합니다.” 진상기는 저도 모르게 후― 하는 긴 한숨을 쉬며 애꿎은 의자를 걷어찼다. “그럼 남은 건 아버지 개인 재산뿐이다, 이 말인가?” “네. 하지만 큰 기대는 마십시오. 항상 입버릇처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평생 신세 진 사람이 많아 그분들께 나눠준다고요.” 이학재는 진영기의 욕심에 혀를 내둘렀다. 이미 핵심 계열사를 물려받았다. 계산하기도 불가능한 엄청난 유산을 받았음에도 새 발의 피에 불과한 개인 재산까지 노리는 듯한 저 욕심…. “더 물어볼 게 없으면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만.” 나가려는 이학재를 불러 세운 건 진동기였다. “실장님은 어쩌실 겁니까?” “네?” “아버님이 안 계신 순양그룹에서 어떡하실 생각인지 묻는 겁니다.” 이학재는 이런 질문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아직 진 회장의 죽음 이후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제격이겠죠. 두 부회장님께서 각자의 보좌진을 거느리고 있으니 전 조용히 사라지겠습니다. 다만….” 이학재는 두 사람을 향해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제가 데리고 있던 직원들은 잘 챙겨 주십시오. 그놈들은 구하기 어려운 인재들입니다. 다른 곳으로 옮긴다면 그룹의 손실입니다.” “이 실장님이야말로 다른 곳으로 옮기면 그룹 손실 아닙니까? 순양을 위해 계속 남는 게 어떨까요?” 진동기의 이런 제안 역시 예상 밖이었다. 과연 그의 속셈은 뭘까? 이학재는 ‘다른 곳’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순양을 속속들이 아는 자신이 다른 회사로 가서 검은 비밀을 떠벌릴 것이라고 생각하나? 만약 이런 뜻으로 한 말이라면 모욕이다. 평생을 몸 바친 회사, 그 회사에서 최상의 대우를 받으며 군림했다. 적어도 진 회장의 신뢰를 가벼이 여기지는 않는다. “둥지를 옮기는 것도 격이 맞아야죠. 순양의 회장 자리 정도라면 생각해보겠지만, 그 외 어떤 곳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전 조용히 현업에서 떠날 겁니다. 그럼….” 이학재는 머리를 조금 숙이고 나와버렸다. 저들이 조금은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 [232]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 2 진 회장은 거의 48시간 만에 다시 깨어났다. 병원의 연락에 부리나케 달려온 자식들은 환자복이 아니라 정장 바지와 셔츠 차림의 진 회장을 발견했다. “소란 피우지 말고 얌전히들 굴어. 나 아직 안 죽었다.” 문을 열고 쏟아져 들어오는 자식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내뱉은 첫말이다. “아버지!” “나 귀 안 먹었어, 언성 높이려면 나가. 채신머리 지켜.” 비록 쇠약한 몸이기는 하나 또렷한 음성이 병실을 채웠다.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의 당당한 태도가 오히려 마음 놓일 지경이었다. “영기야.” “네. 아버지.” “내가 정신 잃은 동안 막말을 일삼았다고 들었다. 우리 병원장이 돌팔이는 맞지만 너한테 막말 들을 정도의 사람은 아니다. 사과하거라.” “회, 회장님.” “아, 아버지.” 두 사람 모두 당황했지만, 진 회장의 따가운 눈빛을 피하지는 못했다. “원장님. 일전의 무례를 용서하세요. 제가 경황이 없어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했습니다.” 병원장은 자신에게 깍듯이 머리를 숙이는 진영기에게 손사래를 쳤다. “그, 그만하십시오. 그보다 더 험한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 일은 다반사로 일어나는 곳이 병원입니다. 부모님이 위독하신데 자식 된 처지에서 못할 말이 뭐 있겠습니까?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두 사람을 바라보던 진 회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괘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 넘쳐나더라도 그렇게 본심은 숨기고 서로 웃으며 대하는 게다. 그게 어른이야. 허허.” 진 회장이 의료진에게 눈짓하자 그들은 조용히 병실 밖으로 나갔다. “모두 들어서 알겠지? 내가 또 쓰러지면 그 길로 황천길을 건널지 한숨 푹 자고 다시 일어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한다.” “아버지. 그런 말씀 마시고….” “입 닫아라. 아비가 말할 때 불쑥 끼어드는 버르장머리는 어디서 배웠누?” 진 회장의 매서운 눈초리에 움찔한 진영기 부회장은 입을 닫았다. “상기야.” “네. 아버지.” 진상기는 굳은 얼굴로 진 회장 곁에 다가섰다. “네가 제일 섭섭해한다는 거 다 안다. 하지만 네 동생 서윤이를 봐. 줘도 지키지 못하면 저리 뺏긴다. 넌 서윤이보다 더 물러 터졌어.” “아, 아버지. 저도….” “말했지? 끼어드는 버르장머리는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한다고!” “아, 네….” “머리 들어. 일머리 없는 게 죄는 아니다.” 진 회장은 고개 숙인 아들의 손을 잡았다. “내가 꿍쳐 둔 돈이 좀 있다. 그걸 재단에 맡길 테니까 넌 그 돈을 쥐고 있다가 필요할 때 써라. 돈은 날려 먹어도 돼. 하지만 회사는 잃어버리면 안 된다.” 진상기는 입술만 깨물었다. 할 말은 태산같이 많았지만 쇠약한 아버지 앞에서 떼를 쓸 수는 없었다. “영기야.” “네.” “네가 장남이니 상기 데리고 가르쳐. 그러다 동생 심지가 좀 굳어졌다 싶으면 쓸 만한 계열사 두어 개 계열분리 해서 뚝 떼 주고.” 진 회장은 다시 셋째를 향해 말했다. “넌 내가 준 쌈짓돈 잘 보관하고 있다가 네 형이 계열사 떼 줄 때 후하게 값을 쳐줘. 공짜는 허투루 대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비싸게 값 쳐주고 사서 본전 찾을 때까지 잘 키우도록 하고.” 비록 다른 속셈이지만 두 형제는 머리를 끄덕였다. 형은 아버지가 말한 그 쌈짓돈이 얼마나 될까 생각했고, 동생은 욕심 많은 형님이 쓸 만한 계열사 두어 개를 떼어 줄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진 회장은 두 아들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머리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만 지었다. “그리고 윤기야.” “네.” “넌 아들 잘 둔 덕에 가질 만큼 가졌지? 필요한 게 더 있느냐?” “딱 하나 남았습니다.” “뭐라? 남았어? 이놈 보게. 잘난 아들에, 예쁜 마누라에…. 또 있지. 팔도에 예쁘다는 여자 다 모아 놓은 꽃밭이 바로 네놈 회사 아니냐? 그런데도 더 갖고 싶은 게 있어? 에라이, 도둑놈아.” 진윤기는 웃으며 농담하는 아버지가 보기 좋았다. 죽음을 앞둔 노인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눈앞의 아버지를 순양의 회장님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도준이가 관리하는 순양금융그룹 말입니다. 완전히 계열분리 해 주십시오. 지배지분이 얽히지 않은 독립 기업으로 말입니다.” 모두의 눈빛이 변했다. 당치도 않는 말이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는 모습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아들이 있었다면 그놈도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당사자인 도준이도 계열분리 하는 건 원하지 않는다는 걸 진윤기도 잘 안다. 순양그룹을 통째로 먹으려 하는 아들은 계열사 간의 연결 고리를 절대 끊고 싶어 할 리가 없다. 진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한 계열분리는 사랑하는 손자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흠…. 가만 보니까 네 녀석 욕심도 보통이 아니었구먼. 금융계열이 순양그룹에서 금고 역할을 한다는 걸 모르지 않는 놈이 그따위 소리를 해?” “아, 아버지. 그게 아니라….” “시끄럽다. 그룹을 조각내고 싶어? 쪼개지는 순간 순양이 아니야. 널리고 널린 일개 기업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 진 회장은 황급히 진윤기의 입을 막았다. 그도 아들이 왜 이런 요구를 하는지 모르지는 않았다. 아들인 도준이가 험난한 싸움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윤기 넌 더 욕심부리지 마. 네 몫은 네 아들놈에게 다 줬으니까 불만은 없을 거다.” 진 회장은 막내아들의 요청을 단칼에 자른 뒤, 두 부회장을 보며 말했다. “난 너희 둘에게 다 줬다. 서로 박 터지게 싸워서 한 놈이 다 가지든, 사이좋게 공동 경영하든 너희 선택이다. 하지만 하나는 명심해라.” 두 부회장은 진 회장의 마지막 말에 귀를 기울였다. “누가 이기든 내치지는 마.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 자리 마련해주고 평생 그 자리 보장해. 그게 이 애비의 마지막 부탁이다.” 진 회장의 유언 같은 말이지만 두 아들이 이 말을 지켜줄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차피 결과를 보기 전에 눈 감을 것 아닌가? 떠나는 자는 유언을 남기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다. 그 유언이 지켜질지 아닐지는 떠나는 자가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 “자, 이제 내가 해야 할 말은 다 끝났으니 다른 이야기나 해 볼까? 평범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아, 손주들 이야기나 좀 해봐. 요즘 그놈들 어떻게 지내고 있어?” 자식들은 굳은 표정을 풀고 진 회장처럼 웃음을 띠기 시작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자신들도 잘 모르는 자식들의 근황을 늘어놓아야 했다. * * * 교대로 병실을 지키겠다는 자식을 전부 쫓아낸 진 회장은 다시 잠에 빠졌다. 깊은 어둠이 깔린 한밤중에 깨어난 진 회장은 담당 의사를 불렀다. “내가 두어 시간 바깥바람 좀 쐬고 올 생각인데 괜찮겠는가?” “지난번처럼 장거리 행차가 아니시면 괜찮습니다만…. 혹시 어딜 다녀오시려는지요?” “딴 건 아니고 허기가 져서 그래.” “아, 곧바로 식사 준비하….” “아닐세. 병원 밥 먹으려면 나간다는 소리를 했겠는가? 갑자기 초밥이 먹고 싶어졌어. 참, 초밥 먹는 게 나쁜 건 아니겠지?” “혹시 약주라도 드실 생각이신지….” 담당의는 진 회장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술 생각은 안 나니 걱정 말게. 초밥만 몇 점 먹고 올 게야.” “차라리 사람을 보내시지요. 심부름할 사람은 많습니다.” 짧은 시간이라 해도 특급 VIP가 병실을 비우는 게 계속 마음에 걸리는지 담당의는 이런저런 군소리를 덧붙였다. “거 사람, 참. 아, 그리 불안하면 같이 가던가? 자네도 초밥 좋아하나?” 물론 좋아합니다라는 표정이었지만, 진 회장의 뜻이 명백하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아, 아닙니다. 다녀오십시오. 하지만 너무 오래 비우시면 곤란합니다. 회장님.” “알았네. 두어 시간이면 충분해.” 담당의가 머리 숙이고 나가자 진 회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이고, 김 행장. 자는데 깨운 거 아닌가 몰라?” 첫 번째 통화는 은행장이었다. “내가 어려운 부탁 하나 함세. 내 세이프티 박스 있지 않은가? 그거 좀 가져다주겠나? 업무 시간도 아닌데 미안허이. 아니, 자네가 직접 올 필요는 없고 아랫사람 시켜.” 두 번째 통화는 스시집 사장이었다. “마스타? 날세. 지금 자네가 만들어주는 스시가 갑자기 생각나서 말이야. 그래, 좋은 거 아니라도 돼. 남은 거로 몇 피스만 만들어주게나. 내, 한 시간 내로 감세.” 세 번째 통화는……. “도준이냐? 지금 이 할애비가 불러주는 곳으로 냉큼 오너라.” 통화를 모두 끝낸 진 회장은 병실 밖의 경호원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모두 잘 듣게. 내가 지금부터 자리 좀 비울 텐데, 자네들에게는 내가 병실 밖을 벗어난 적이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겠지?” “네. 회장님.” 비밀이며 입단속 하라는 뜻이다. “이학재 실장에게도 말하면 안 돼. 명심하라고.” “넵!” 모두 부동자세로 힘차게 대답했다. 이들도 누가 자신들의 고용주인지 잘 안다. * * * 한밤중에 초밥집이라니?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 병실에서 할아버지는 큰아버지들에게 몇 가지를 당부했다고 김윤석 대리가 알려주었다. 내게도 뭔가를 말씀하시기 위해 불러내는 것이 틀림없다. 단지 초밥 몇 점 먹고 싶어 밥 친구 해달라는 의미는 아닐 테니까. 초밥집으로 달려가니 누군가 준비에 한창이었다. “미안합니다. 영업 끝났어요.” 요리사의 무뚝뚝한 응대에 재빨리 대답했다. “진양철 회장님과 약속했습니다.” “아, 그러세요? 이거 죄송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룸도 없이 다찌에 의자 대여섯 개가 전부인 조그만 스시집이었다. 먼저 따뜻한 녹차로 몸을 녹일 때 문이 열리며 할아버지께서 들어오셨다. “벌써 왔어? 눈길에 살살 다녀야지, 이놈아.” “몸은 좀 어떠세요? 이리 나오셔도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니까 나왔지. 호들갑은 그만 떨고 앉자.” 의자에 앉자 요리사가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모시는데 재료가 영 시원치 않아 죄송합니다.” “괜찮아. 다음엔 미리 연락함세. 그때 잘 챙겨주게.” “특별히 드시고 싶은 거라도 있으십니까? 회장님.” “아냐. 사실은 내가 이 녀석이랑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자리 빌리는 게야. 서너 점이면 족해.” “아,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는 말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오늘 이 자리는 아마도 할아버지께서 내게 마지막 말을 남기는 장소일지도 모른다. 굉장히 소박한 장소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때 또다시 문이 열리며 낯선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허리부터 숙였다. “회장님. 행장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그래, 늦은 시간에 고생 많았어. 이리 가져오게.” 중년의 사내는 보자기에 싼 길쭉한 철제 상자를 꺼냈다. “가만있자, 열쇠가….”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열쇠 지갑을 꺼내 세이프티 박스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중년 사내는 그 모습을 유심히 보다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회장님. 작은 거, 그게 박스 열쇠 같습니다만.” “그래? 이거?” “네.” 할아버지는 열쇠 지갑을 중년 사내에게 건넸다. “눈이 침침해서 그러니 자네가 좀 열어보게.” “네.” 그는 재빨리 열쇠를 받아 들고 박스를 열었다. 그 속에는 서류 봉투 두 개가 들어 있었고 할아버지는 그걸 꺼내 옆자리에 놓았다. “됐네. 자네는 이만 가보게. 추운데 고생했어. 김 행장에게는 내가 한번 들른다고 전해주고.” “네, 회장님. 그럼.” 나는 문을 열고 나가는 중년 사내가 아니라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과연 저 속에는 뭐가 들었길래 은행 개인 금고에 맡겨 뒀을까? ======================================= [233]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 3 서류봉투에 쏠린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날 위해 준비한 것이니 봉투 속에 뭐가 들었는지는 알게 될 것이다. 이제 귀를 활짝 열어야 한다. 지금부터 할아버지께서 하는 말씀은 단 하나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겨 두고 지켜야 할 유언일지도 모른다. “이거, 급하게 준비하느라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요리사는 초밥 몇 개를 올려놓은 작은 도마를 우리 앞에 내밀었다. “자네 솜씨야 잘 아는데 무슨 소리? 잘 먹겠네.” 할아버지가 젓가락을 들자 요리사는 손을 닦으며 말했다.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필요하시면 부르시고요.” “바깥 날씨가 매섭던데 나 때문에 고생이구먼.” “별말씀을요. 겨울 찬 바람은 제가 싱싱한 횟감만큼 좋아하는 겁니다.” 그는 할아버지께 꾸벅 머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먹어봐. 저 친구 솜씨는 눈치만큼이나 좋아.” 할아버지가 초밥 하나를 입안에 넣는 걸 보고 나도 젓가락을 들었다. “어때? 괜찮으냐?” 날씨도 찬데 차가운 생선 쪼가리를 올린 밥 덩이가 그리 맛있지만은 않았다. 내 표정을 본 할아버지는 황급히 입안에 든 밥을 꿀꺽 삼킨 후 따뜻한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이고, 이 시려. 차라리 뜨듯한 국물 나오는 집으로 갈 걸 그랬나?” “오뎅 국물이라도 좀 만들어달라고 할까요?” “아니다. 장소가 필요했을 뿐, 혀끝 즐겁자고 너 부른 거 아니다.” 할아버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다시 따뜻한 차를 마셨다. “도준아.” “네.” “오늘 낮에 네 애비가 그러더라. 금융부문을 완전히 계열분리 해달라고 말이다.” “네? 아버지가요?” 금융사가 가진 지분으로 순양그룹에 10%의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계열분리 해버리면 그 10%의 영향력이 사라진다. 당황한 내 표정을 본 할아버지는 싱긋 웃었다. “그래. 허나 걱정하지 마. 어림도 없는 소리 말라고 단단히 혼을 내줬다.” 다시 안심하는 나를 보며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난 네가 내 뒤를 잇기를 원해.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구나. 자식이라는 천륜이란 거, 세대라는 거, 나이라는 거, 시간이라는 거…. 참 무서운 게 현실이야.” “잠시 비워 둘 뿐입니다. 그동안 빈자리에 스쳐 가는 사람이 있겠지만 결국 제자리입니다.” “큰소리는, 허허.” 할아버지는 꼭 잡았던 내 손등을 찰싹 때렸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난 우리 도준이가 커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순양그룹의 확장보다 더 즐겁고 기뻤다. 대기업이라는 것도, 큰 사업이라는 것도 다 따지고 보면 장사야. 그리고 장사는 돈을 버는 게 무조건 제일 중요한 일이고.” 난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것도 장사라고 볼 수 있을까? 사실은 이미 번호를 아는 복권을 사 모은 것에 불과하다. 그동안 경영을, 장사를 배우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지만 할아버지의 기대치에는 한참 모자란다. 이런 내 속도 모르고 할아버지는 대견한 눈빛을 보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넌 이미 우리나라 제일의 대기업 회장이다. 십여 년 만에 가늠하기도 힘들 만큼 돈을 벌었으니 말이다.” 얼마나 벌었는지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가뜩이나 약해진 할아버지의 심장이 견디지 못할 것 같아 겸손의 미소만 지었다. “사실 네게 순양그룹이 꼭 필요한지도 의문이다. 이대로만 간다면 십 년, 이십 년 뒤에는 분명 순양을 뛰어넘는 일가를 이룰 게 틀림없으니 말이다.” “돈만 있을 뿐입니다. 할아버지처럼 힘은 없어요. 돈과 힘을 다 가졌다는 상징이 바로 순양그룹 회장 아닙니까?” “네가 그런 욕심을 낸다는 것도 나를 흡족하게 했어. 사내라면 당연히 나라를 뒤흔들고 호령할 만한 힘을 가지겠다는 웅심이 있어야지, 암.” 기특하게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눈빛이 조금 변하며 의외의 질문을 하셨다. “많이 섭섭하냐?” “네?” “내가 아직 지분을 움켜쥐고 있을 줄 알았고… 그리고 그 마지막 지분을 네게 줄 것으로 기대했다지?” 이학재 실장이 말한 게 분명하니 시치미 떼기에는 늦었다. “솔직히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빈털터리라서 실망했어?” “실망은 했지만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충분히 주셨고 그걸 밑천으로 벌써 삼분지 일 이상을 확보했으니까요.” “그리 생각한다면 됐다.” 이것은 진심이다. 순양자동차를 가져올 때 기대 이상의 지분을 받지 않았던가? 할아버지는 다시 젓가락을 들어 초밥 한 점을 삼키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널 이리 은밀하게 불러낸 건 몇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게 있어서야.” “말씀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네가 순양의 회장 자리를 차지하는 방법은 나도 모른다. 단지 돈이 많다고 해서 순양그룹을 통째로 사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겠지? “네.” “하지만 난 네 말을 믿는다. 넌 언젠가 순양을 차지할 게다. 난 그 이후의 일을 말하고 싶다.” 회장 이후라…….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 목표는 단지 그 자리에 오르는 데에서 끝난다. 과연 난 할아버지 서재의 주인 돼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나를 모르는 할아버지는 회장 자리까지 오르는 과정은 가벼이 여기신다. 당연히 그 과정은 쉽게 헤쳐나가리라 보고 결승점 이후의 일을 알려주시려는 것이다. 갑자기 할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순양의 회장실은 참 지독한 자리다. 어느새 속을 터놓을 친구가 전부 사라진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놈들도 슬슬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지.” 그런데 할아버지도 친구가 있긴 하셨을까? 동등한 시선을 교환하는 사람이 바로 친구 아닌가? 할아버지를 같은 높이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지금껏 본 적이 없다. “네가 가장 먼저 견뎌야 하는 것은 바로 고독이다. 함부로 측근들에게 마음을 열고 친구를 자처하지 마라. 그런 호사는 회장의 몫이 아니야. 친구 하나 두지 못한 채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할아버지.” “…?” “전 지금껏 친구를 둔 적이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전부 거래였을 뿐입니다. 다만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뿐입니다. 전 제 어깨에 올려진 짐을 나눠서 질 사람이 필요치 않습니다.” “거래?” “네. 누구든 제 밑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들에게서 충성심 같은 건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걸 주고 그들에게서 필요한 것만 취하면 그만입니다.” “그게 신세대가 쓰는 방법이냐? 허허.” 속내를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할아버지는 잠시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씀하셨다. “네게 뭔가를 가르치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겠구나.” “아닙니다. 전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쓸데없는 겸손은 말어. 넌 부족한 게 하나뿐이다.” “하나라고요?” “그래. 자, 봐라. 세상에 입 달린 놈들은 전부 날 욕하고, 손가락 달린 놈 모두 내게 손가락질한다. 정경유착의 상징이니, 편법과 탈법을 일삼는 재벌이니, 하청업체 쥐어짜서 부를 쌓아 올린 악랄한 영감이니 하며 말이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그리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내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그놈들 중에 날 두려워하지 않는 놈이 있을 것 같어? 단 한 명도 내 앞에서는 그런 말을 입에 담지도 못한다. 심지어 정치인도 그렇다. 내가 국회 청문회장에 선 것만 세 번이다. 다른 그룹 총수에게는 온갖 비난을 퍼붓던 국회의원들도 내 앞에서는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내 눈치만 본다.” “그게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까?” “그래. 거래도 좋고, 존경도 좋다. 하지만 그들의 바닥에는 너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 두려움이야말로 네가 원하는 힘의 원천인 게야.” 눈치 보는 강아지들은 두려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때마다 챙겨주는 묵직한 무게의 돈, 그 무게도 무시할 수 없다. 채찍과 당근이 바로 할아버지 힘의 원천이다. 할아버지는 다시 내 손을 꼭 쥐었다. “네가 부리는 사람들에게 꼬박꼬박 말을 높이고 깍듯이 대한다는 말을 들었다.” “네. 다들 저보다 나이가 많아 조심하는 편입니다.” “그것도 적당히 해. 강아지 귀엽다고 자꾸 쓰다듬으면 밥상까지 차지하려 든다.” “알겠습니다. 가끔 따끔하게 대하겠습니다.” “그래. 더는 잔소리할 게 없다. 이제 부탁 하나 하자.” “뭐든 말씀하십시오.” “네가 순양의 주인이 되더라도 핏줄들을 너무 괄시하지 말고 적당한 자리 만들어서 나눠줘. 그놈들도 다 내 새끼들 아니냐?” “당연합니다. 식구 아닙니까?” 할아버지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드리기 위해서야 못할 말이 없다. 이보다 더한 거짓말이라도 할 수 있다. 조금 이상한 건 할아버지의 반응이었다. 단지 해야 할 말을 했을 뿐, 그리 신경 쓰는 모습은 아니었다. 할 말은 속 시원히 다 하셨는지 은행에 보관했던 서류 봉투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제 이건 네가 관리하거라.” “이게…?” “꺼내봐.” 봉투에 손을 넣으니 잡히는 건 두꺼운 노트였다. 가죽으로 만든 커버, 손때가 새카맣게 묻은 속지. 설마? 커버를 넘기자마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가 아니었다. 빼곡히 기록한 이름과 날짜, 장소 그리고 금액. 바로 순양그룹의 비자금 전달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한 장부다. “내가 그거 기록한 게 신군부가 정권을 잡았을 때부터였다. 대통령 말 한마디면 그룹이 통째로 자빠지니 당최 불안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여기저기 손써 두며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 뒀다. 여차하면 다 터트리려고 생각했지.” 순양 돈은 먹어도 뒤탈이 없기로 유명하다. 그룹 회장이 청문회장에 불려 나가도,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아도 뇌물 이야기는 일절 나오지 않았다. “터트릴 일이 없었군요.” “그래. 하지만 정권이 바뀌어도 빠짐없이 계속 기록해 뒀어. 내 돈 먹은 놈들도 다 알 거야. 그 장부가 존재한다는 걸. 그리고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야.”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이 장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무언의 위협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장부를 들이밀고 협박하지도 않았어. 차라리 돈을 더 안겨주고 내 뜻을 따르도록 했지.” 위협은 말로 하는 게 아니다. 폭탄을 쥐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위협이다. 한 손에는 폭탄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돈을 건넨다.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직접 기록하신 겁니까?” “잔챙이 관료들이나 정치 신인들에게 떡값 몇 푼 쥐여준 거는 나도 몰라. 그건 이학재나 계열사 사장들이 내게 보고하지 않고 알아서 처리했으니까.” 일선 판검사, 초선의원, 정부부처 실무진 정도가 잔챙이들이니 이 장부에 이름 오른 사람들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봉투도 꺼내봐. 그것도 쓸 만할 게다.” 두 번째 봉투에는 통장과 카드, 열쇠 꾸러미가 잔뜩 들어있었다. “내 명의로 된 것은 여기저기 재단에 쭉 뿌릴 거야. 언론이야 내 개인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나팔을 불어대겠지. 뻔한 꼼수라는 걸 아는 놈들은 욕할 테고.” “그럼 이건…. 차명입니까?” 할아버지는 머리를 끄덕였다. “국내외 계좌들이다. 페이퍼 컴퍼니도 있고 위조 여권으로 만든 계좌도 있어. 국내 은행은 다 차명이다.” “할아버지. 저 돈 많습니다. 쓸 만큼 있으니 이 돈은 딴 데….” 내가 통장을 다시 봉투에 주섬주섬 담으며 말하자 할아버지는 머리를 저으셨다. “네 녀석의 그 피 같은 돈을 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뇌물로 쓸래?” “네?” “여기저기 찔러줘야 할 데 생기면 그 돈을 써. 추적하기 힘든 돈이니 안전할 거야. 그리고 그 계좌, 네가 계속 이어서 써. 이리저리 빼돌린 명찰 없는 돈 만들면 그 계좌에 넣어. 안전하다.” 드러나지 않게 관리해야 할 사람, 관리를 위해 필요한 돈과 계좌. 난 지금 이 순간, 할아버지의 힘 반쪽을 얻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234]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 4 노트의 가죽 커버를 쓰다듬었다. 과연 몇 명의 사람들이 등장하며 그들의 현재 위치는 어디일까? 이십 년도 넘었으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자도 많을 것이고, 일선에서 물러나 모든 영향력을 잃어버린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 기록을 어떻게 다시 정리하고,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 머릿속이 복잡할 때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걸 네게 주는 내 마음을 알아주기 바래. 이것들은 바로 내가 누구에도 보여주지 않은 나의 어두운 기록이다. 내 회사의 주인이 되는 놈, 돈을 가져가는 놈, 땅을 차지하는 놈은 여럿이지만 내 치부를 고스란히 가져가는 건 바로 너다. 만에 하나, 네가 순양의 주인이 못 되더라도… 넌 이 진양철을 잇는 유일한 후계자라는 징표가 바로 그것이다.” 참 낯간지러운 말이었지만, 이보다 더한 진심은 두 번 다시 듣지 못할 것이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절대 지워지지 않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겠습니다.” 나도 낯간지러운 말이 나왔다. 진심을 표현하는 말은 왜 이리 유치한가? 좀 더 세련되고 중후한 어휘를 생각했지만 당장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할아버지와 난 잠깐 동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조금 붉어진 뺨이 세게 틀어 놓은 히터 때문은 아니다. “흠, 흠…. 아무튼 말이다…. 그 노트에 이름 오른 사람들은 잘 관리해라.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돈을 쓰는 건 네 큰아버지들이 할 것이다. 지난 대선 때라든지, 올봄에 치러질 총선 같은 거 말이다.” “아, 깜박했는데요. 저도 지난 대선에 20억을 둘째 큰아버지께 건넸습니다.” “알고 있다. 바로 그런 식으로 하면 된다. 그룹 차원에서 진행할 때만 그렇게 보태줘.” “그럼 이 명단의 사람들은 별도로…?” “그래. 특별한 일이 있건 없건 늘 전해 주도록 해. 보험금 낸다 생각하고. 그리고 너도 사람을 잘 보고 앞으로 큰 인물이 되겠다 싶은 놈들을 그 명단에 추가해. 항상 길게 보고 투자해야 한다.” “제가 가장 잘하는 게 장기 투자 아닙니까? 10년을 묻어놔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습니다.” “또, 또…. 그놈의 잘난 척은 끝이 없어! 허허.” 할아버지는 내 뒤통수를 툭 쳤다. “계좌는 내가 특별히 알려줄 건 없어. 해당 은행에 담당하는 놈들 이름과 연락처가 있으니 필요한 건 그놈들이 다 처리해줄 거다. 네가 조심해야 할 건 하나다. 돈을 은행에서 찾아올 믿음직한 놈 하나를 구해. 그놈이 돈을 찾아오면 전달하는 건 우병준이에게 맡겨. 몇 번 해봤으니 잘할 게다.” “돈을 찾을 때, 전달할 때 제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시죠?” “그래. 그 누구냐? 우리 대신 목숨 걸고 트럭 들이받은 놈?” “김윤석 대리 말입니까?” “맞다. 그놈. 이학재가 그러더라. 영민한 머리는 없지만 우직한 마음은 있다고 말이다. 돈 찾아오는 거, 그놈이 딱이지 싶다. 머리 쓰는 일은 아니나 우직하니 입이 무거워야 하니까 말이다.” “돈 욕심도 별로 없으니 적당하겠군요.” “뭐? 돈 욕심이 없어?” “네. 그때 우리 목숨 구해주고 큰돈을 주겠다고 해도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할아버지는 인상을 찌푸렸다. “세상에 돈 욕심 없는 놈이 어디 있어? 돈보다 더 큰 욕심이 있으니 그런 게지. 아무튼, 너무 믿지 말고 항상 경계하도록 해.” 다시 한 번 놀랐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마저 믿지 않는다. 사람을 믿다 죽음까지 맛본 나보다 더 사람을 불신하다니. 하지만 저런 모습이 바로 지금의 순양을 만든 것이니 명심해야 한다. “그럼 일어날까? 여기 주인장 밖에서 얼어 죽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밖으로 나가니 입술까지 새파래진 주인장이 벌벌 떨며 서 있었다. * * * 집으로 돌아와 장부를 펼쳤다. 80년대보다 가장 최근부터 역으로 짚어나갔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할아버지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틈만 나면 TV에 나와 입에 거품까지 물며 기업 친화적인 발언을 일삼던 경제학 교수들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국내 최대 노동자 조합이 유독 순양그룹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이유도 알았고 순양의 임원들이 고등법원에만 가면 무죄나 집행유예 판결이 나는 이유도 알았다. 순양그룹이 감추고 싶은 것은 절대 뉴스에 나오지 않는 이유와 사회 원로나 지식인 그룹이 순양이라는 이름 자체를 입에 담지 않는 이유도 알았다. 나는 이들에게 전해지는 돈의 액수와 주기를 면밀히 검토했고 할아버지가 주신 계좌도 확인했다. 놀라운 사실은 국내 계좌다. 외국 계좌야 우리나라의 손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쳐도 적게는 수억, 많게는 수백억이 들어 있는 차명계좌인데 어떻게 지금까지 발각되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하나뿐이다. 은행도 알고, 관련 정부 기관도 알지만 단지 모른척하며 조사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할아버지가 이 계좌를 계속 사용하라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이 계좌들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내 개인 비밀 금고인 셈이다. 장부와 계좌 확인을 다 끝내자 이미 밖은 훤했다. 난 전화를 들어 김윤석을 불렀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그는 부리나케 달려왔다. 난 통장 세 개를 내밀었다. “은행 문 열자마자 이 세 곳에 들러 각각 1억씩 인출해 오세요. 인감은 함께 들어 있고 담당자와 비번은 메모해 뒀습니다.” “네. 또 시키실 일은 없습니까?” “담당자 표정을 잘 살피세요. 돈을 찾을 때 은행원들의 행동도 유심히 관찰하고요.” “네. 돈 찾으면 어떻게 할까요?” “집으로 가져오세요. 난 눈 좀 붙이고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수상한 지시였고 의문을 가질 만한데도 김윤석은 질문 하나 없이 머리를 숙이고 나갔다. 초인종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정오가 가까웠다. “좀 쉬셨습니까?” “네. 꿀잠 잤습니다. 일은 다 처리했고요?” 김윤석 대리는 대답 대신, 가져온 보스턴 백 세 개를 가리켰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까?” “네. 말씀하신 담당자들은 전부 지점장들이었습니다. 전 지점장실에서 차 한잔 마시며 기다리니 다 알아서 처리해줬습니다.” “놀라지는 않던가요?” “두 곳은 아무 말 없었고 한 곳만 슬쩍 물어보더군요. 담당자가 바뀐 거냐면서요.”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혹시나 해서 아무 말 않고 그냥 노려보기만 했어요. 그랬더니 대번에 실례했다면서 머리 숙이더군요.” 많이 늘었다. 누가 갑인지 확실히 알려줘야 하고 불필요한 말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좋다. “잘했습니다.” 가방 지퍼를 열어 돈뭉치를 슬쩍 보며 김 대리의 표정을 살폈다. 견물생심에는 예외가 없다. 유혹에 흔들려봐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 그에게는 수백억이 들어 있는 통장만 줬다. 그도 알았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거금을 챙길 수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차분히 가라앉은 그 상태에서 변화가 없다.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할아버지 말씀처럼 돈보다 더 큰 걸 바라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에게 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가져가서 쓰세요.” “네?” 이제야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돈 때문이 아니다. 갑자기 거금을 선뜻 내미는 이유를 몰라서일 것이다. “필요한 곳에 쓰면 됩니다. 영수증 챙길 필요 없는 돈이니 현금으로 뿌리세요.”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김윤석은 곤란한 표정을 보였다. “실장님. 너무 많습니다.” “많아요?” “…네.” 내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챈 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백만 원씩 뿌리면 백 명입니다. 지금까지 깔아 둔 사람이 백 명도 안 됩니까? 모자란다고 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짐짓 굳은 목소리로 질책하듯 말하자 그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 단위가 달랐습니다. 전 십만 원씩 나눠준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룹 기획실, 비서실, 전략실 그리고 경호팀의 말단 직원들 월급을 생각하면 김 대리가 십만 원으로 생각할 만하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단위를 올립시다. 아니…. 그럴 필요 없이 판단은 김 대리에게 맡길게요. 알아서 뿌리세요.” “알겠습니다. 솔직히 백만 원은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난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맡긴다고 했습니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 네.” 김 대리는 가방을 챙겼다. “참,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실장님 사촌들이 진 회장님 병실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다 같이?” “아뇨. 따로따로 온다고 합니다.” “확인해보세요. 분명히 미리 연락하고 갈 겁니다.” “네. 확인 후 알려드리겠습니다.” 김 대리가 나가자 남은 두 개의 가방을 구석에 던져 두었다. 나중에 우병준 상무에게 전할 생각이다. 그가 여기저기 뿌린다면 이억 정도는 충분히 소화할 것 같았다. 이때 전화가 울렸다. “응. 형.” ― 도준아. 넌 할아버지 병원에 입원한 거 알고 있었지? 상준 형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도 놀랐나 보다. “아, 미안. 연락 못 했네.” ― 아냐. 내가 할아버지께 자주 연락 않으니까 그런 거지. 아버지께 여쭤보니까 면회가 된다고 하는데, 너 시간 되면 같이 가자. 솔직히 난 아직 할아버지가 좀 어려워. 혼자 갈 생각하니까 눈앞이 캄캄하다. 우리 집안에서 할아버지께 가장 미움받은 손자가 바로 상준 형이다. 성인이 되고 좀 나아졌지만 혼자 할아버지 앞에 서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 어차피 나도 오늘 들를 생각이었어. 같이 가.” 안도하는 한숨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 휴, 다행이다. 언제 갈 건데? “시간은 확인해야 돼. 형은?” ― 난 계속 녹음실에 있을 거니까 언제든 괜찮아. “그럼 내가 녹음실로 갈게. 형 일하는 곳 구경도 할 겸 해서. 괜찮지?” ― 나야 괜찮지. 그런데 너 번거로워서 어쩌냐? “아냐. 병원 가는 길에 잠시 들르는 건데 뭐. 신경 쓰지 마.” ―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통화를 끝내고 다시 눈을 좀 붙였다. * * * 김 대리의 전화에 눈을 떴다. 사촌들은 오후에 몰려들 것이며 저녁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알려줬다. 그래, 밤이 되면 놀아야지. 어차피 주식 한 주 떨어지지 않는 걸 다 아니 뒤늦은 효도도 필요 없는 놈들 아닌가? 병원으로 가는 길에 상준 형의 스튜디오에 들렀다. 이 회사에 투자한 이후로 보고 서류만 봤지 회사 방문은 처음이다. 서류가 말해주듯 아직 큰 성공은 못 했다. 그럭저럭 꾸려간다고 생각했는데 건물을 보니 내 생각과 많이 달랐다. 꽤 그럴듯한 빌딩에 입주해 있었고 빌딩 앞에는 극성팬들 수십 명이 진을 친 것도 보였다. 이 회사에 스타급 아이돌이 있었나? 숫자만 들여다볼 뿐,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 없으니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실장님. 제가 가서 모셔올까요?” 수행팀이 슬쩍 물어본다. 입구에 진을 친 사람들 때문에 신경이 쓰이나 보다. “괜찮아요. 우리 형이 일하는 모습도 한번 볼 겸 해서 온 거니, 주차장에서 기다리세요.” 이것이 실수였다. 최고급 외제차에서 내리는 내 모습을 발견한 여고생 몇 명이 쪼르르 달려왔다. “오빠! 오빠도 여기 소속이에요? 연습생?” “야! 차 안 봤어? 저런 차 타는 연습생이 어딨냐?” “밴보다 더 비싼 차 아냐? 아니, 잠깐! 그보다 이 오빠 어디서 본 거 같지 않아? 방송에서 본 것 같은데…?” 따갑게 떠들어대는 애들을 못 본 척하고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정장 차림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로비의 경비원들은 팬들만 막았을 뿐 나는 어렵지 않게 들어섰다. 로비에서 상준 형에게 전화했지만 곤란하게도 신호음만 들릴 뿐 전화를 받지 않는다. 몇 번 재통화했으나 여전하다. 어쩔 수 없이 문자를 보내려고 할 때 한 무더기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걸어 나오는 상준 형을 발견했다. ======================================= [235] 겨울이 끝나기 전 1 “어? 도준아. 일찍 왔네.”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상준 형은 당황한 듯 호주머니를 이리저리 만졌다. “아, 밑에 놔두고 왔어. 미안, 오래 기다린 건 아니지?” “방금 왔어.” “잠깐만, 나 얘들 배웅하러 올라왔거든.” 상준 형은 빌딩 밖을 흘깃 보더니 곁에 서 있는 여자애들에게 말했다. “로드 안 불렀어? 왜 안 보여?” “방금 문자 했어요. 곧 오겠죠, 뭐.” 한 무더기의 여자애들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보며 상준 형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예요, PD님. 소개는 해주셔야죠.” “응? 아, 이쪽은 내 동생이야. 친동생. 그리고 이쪽은 이제 막 데뷔한 애들. 당당하게 공중파 탔어.” 형이 걸그룹까지? 이제 아예 상업성으로 눈을 돌렸나? 공중파라고 하니 문뜩 생각난 게 있었다. “그래? 그럼 아버지한테 말해서 케이블 음악 방송….” 갑자기 당황한 상준 형이 머리를 조금 흔들며 내게 눈을 끔뻑했다. 아차차. 이 바닥에서 누구 아들이네, 누구 손자네 하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고 했지?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애들은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스무 살이 넘지 않아 보였다. 행동도 영락없는 애들이다. 순식간에 내 곁으로 우르르 몰려와 조잘대기 시작했다. “이야, 진짜 잘생기셨다. 난 우리 PD님이 아이돌 데뷔 않은 게 신기했는데 동생분 보니까 이해가 돼. 늘 비교하며 컸을 테니까 자신감이 없었던 거지. 맞죠?” “근데 이분 어디서 본 듯한데… 혹시 방송인 아니세요?” 혹시 가끔 했던 내 인터뷰를 봤나? 만약 기억해 내면 낭팬데? 하지만 자신 없게 말하는 걸 보니 대충 스쳐 가며 본 것 같기도 하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가! 방송은 무슨 얼어 죽을, 내 동생은 지금 대학원 다녀. 너네들은 잘생긴 놈만 보면 다 방송인이래.” 화들짝 놀란 상준 형이 큰소리 내며 어린 애들의 입을 막았다. “아닌데… 분명히 봤는데….” 그중 한 명이 여전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중얼거리자 상준 형은 양 떼 몰 듯 그 애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안 가? 그리고 헛다리 짚지 마. 내 동생 엄청 이쁘고 똑똑한 여친 있어. 너네들이랑 비교도 되지 않으니까 괜히 찔러보지 마.” “PD님. 차가 와야 나가죠. 근데 진짜 로드 오빠는 뭐 하는 거야?” 잠시도 한눈팔 수 없는 초딩들보다 더 하다. 밀어내고 떼 내도 끊임없이 다가온다. “저기 근데 이름이 뭐예요? 나이는요? 스물둘? 셋? 피디님 동생이니까 이십 대 중반?” “진짜 방송 탄 적 없어요?” 내가 이 생이 처음인 혈기 왕성한 이십 대였다면 이 상황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시끄럽고 귀찮기만 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을 감추지 않았지만, 이 애들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이 걸그룹의 로드 매니저가 구세주였다. 빌딩 입구에서 빵빵거리는 클락션 소리가 나자 상준 형이 이 애들을 내 곁에서 떼냈다. “자, 빨리 가. 딴짓하지 말고. 목 컨디션 조절해야 하니까 숙소에서 푹 자. 밤부터 녹음하는 거 잊어버리지 말고.” “피디님! 동생분에게 제 전번 알려줘도 돼요!” 쫓겨나듯 나가면서도 마지막까지 끈질긴 면을 보여준다. 신인 애들이 다 사라지자 우린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정신없지?” 상준 형이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뭐야? 재들은?” “가능성 있는 신인? 우리 회사 기대주? 그 정도…?” “도대체 쟤들 몇 살이야? 혹시 전부 고삐리야?” “반은 고삐리, 반은 스무 살. 프로필은 19세로 되어 있지만.” “형은 음악성 있는 신인 키운다고 하지 않았나?” “언제까지 나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나? 회사도 먹고살아야지. 인디 애들도 키우고 걸그룹, 아이돌도 키우고. 아, 쟤들은 마냥 맹탕은 아냐. 다들 기본기는 탄탄해. 트레이닝도 많이 시켰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구만, 왜 저리 애 같아?” “학교도 안 다니고 트레이닝만 해서 그래. 몸만 컸지 정신은 아직 어린애야.” 상준 형은 갑자기 어깨에 올린 손을 잽싸게 내렸다. “참, 이럴 때가 아니지. 나 옷 좀 갈아입고 올 테니까 넌 사장님 만나고 있어. 전화할게.” “내가 형 사장을 왜 만나?” “투자자가 대표이사 만나는 게 뭐가 이상해?” “뭐?” 형은 놀란 내 표정을 보며 싱긋 웃었다. “이야기 들은 지 오래됐다. 네 덕분에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컸다고 늘 고마워하시더라.” “뭐야 그럼? 다들 아는 거야?” “아니. 사장님만 알아. 괜찮아. 우리 사장님, 그것 때문에 내 눈치 보거나 그러지 않아. 공과 사를 잘 구분해. 나도 여기서는 그냥 PD야. 순양 회장님 손자도 아니고 투자자 친형도 아닌, 일개 프로듀서.” “다행이네. 아무튼, 됐어. 월별 보고자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차라리 형 작업실 구경하는 게 더 나아.” “그래? 그럼 같이 내려가자.” 계단으로 통해 지하로 내려가니 딴 세상이 펼쳐졌다. 로비의 그 깔끔함과 정반대인 새카맣게 때 묻은 벽, 쩍쩍 갈라진 가죽 소파와 의자가 뒹굴었고 테이블 위에는 빈 짜장면 그릇과 컵라면이 널브러져 있었다. 칸막이 친 녹음 부스 몇 개도 보였고 유리를 벽처럼 막은 널찍한 안무 연습실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애들 대여섯이 땀을 뻘뻘 흘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상준 형이 녹음 부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난 그들의 춤을 구경했다. “어? 누구?” “네?” 누군가 어깨를 툭 쳤고 뒤돌아보니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아래위로 날 훑어본다. “오디션 보러 왔어? 나이는 좀 있어 보이는데… 아이돌은 아닐 테고, 혹시 발라드야?” “아, 그게 아니라….” “얼굴 좋고, 비율 좋고… 괜찮은데? 누구 만나러 왔지?” 그런데 이 여자는 날 언제 봤다고 말을 툭툭 놓지? 한마디 톡 쏘려고 할 때 상준 형의 음성이 들렸다. “누나. 그 애는 아냐. 내 동생이야. 나 만나러 온 거야.” 추리닝 차림에서 정장 바지와 셔츠로 갈아입은 상준 형이 코트 단추를 채우며 다가왔다. “아, 그래? 이거 미안해요. 난 또…. 그런데 일반인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지망생?” “아놔, 아니라고! 내 동생 이 바닥 관심 없어. 서울대 법대 나와서…. 대, 대학원 다닌다고. 관심 끄고 가던 길이나 가.” 당황한 상준 형이 내 손을 잡고 끌었을 때 그 여자는 잽싸게 우리 앞을 막아섰다. “생각 있으면 연락해요. 요즘 고학력 연예인 많아. 스타성이 충분히 보여.” 명함 한 장을 내 주머니에 쏙 집어넣고는 눈을 찡긋하며 사라졌다. “이런…. 이제 시달리게 생겼네, 젠장.” 상준 형은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래? 누구야? 저 여자?” “여기 기획팀장인데 명함까지 주는 거 보면 너한테 꽂혔나 봐. 이제 널 데려오라고 들들 볶을 텐데….” “귀찮으면 말해. 내가 사장님에게 말해서 저 여자 자르라고 할 테니까. 흐흐.” “일은 잘한다. 사람 보는 안목이 좋아서 잘 찾아내고 컨셉 세팅도 잘해. 아무튼 빨리 나가자. 여기엔 저런 인간들 많아. 여차하면 너 연예인 되겠다. 흐흐.” 우린 농담을 주고받으며 건물을 벗어났다. * * * “할아버지는 좀 어떠셔?” 나와 나란히 뒷좌석에 앉아 차가 출발하니 상준 형이 조심스레 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정하셔. 하지만 쓰러지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어.” “할아버지의 죽음은 왠지 현실감이 없다. 영원히 군림하며 사실 것 같은데….” “그렇지? 벌써 두 번이나 쓰러지셨는데 나도 실감이 안 나. 여든 넘은 노인이라는 걸 자꾸 잊어먹게 돼.” 상준 형은 내 얼굴 보며 말했다. “괜찮냐?” “뭐가?” “넌 할아버지와 좀 특별했잖아. 우리 사촌 중에 유일하게 지분을 직접 물려받았고.” “아버지 대신 받은 거지 뭐.”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 네게 직접 주신 거야. 어찌 됐던 우리 중에는 네가 제일 힘들 것 같다.” “어쩌겠어? 마지막까지 자주 찾아뵙는 수밖에. 참, 형은 어때? 괜찮아?” 오늘 회사 꼬락서니를 보니 보통 고생이 아닐 것 같았다. “난 지금 만족해. 이 바닥의 좋은 점은 다들 지가 좋아서 발 담근 놈들이니까 돈이나 환경에는 그닥 민감하지 않아. 그놈들에게 비하면 난 호강에 겨운 거야. 적어도 밑바닥까지 떨어져서 빌빌대지는 않을 테니까.” “응? 나도 모르는 돈이라도 좀 꿍쳐 둔 거야? 믿는 구석이 있나 보네?” “야! 하나뿐인 형님이 밥 굶으면 보고만 있을 거냐?” 상준 형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었다. “마흔까지만 죽어라 해. 그렇게까지 했는데 성공 못 하면 운 탓으로 돌려야지 어쩌겠어? 할 만큼 한 거 아니겠어? 그때는 나랑 같이 손잡고 코타키나발루 리조트에 가서 정원 손질이나 하며 살자.” “네가 마흔 전에 은퇴한다고? 말 같은 소리를 해라.” 오랜만에 만나 이런 농담이라도 주고받으니 상준 형은 할아버지를 만난다는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차는 어느새 병원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 * * “상준이도 왔어?” 여전히 정장 차림의 할아버지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상준 형을 보자 환하게 웃으셨다. “네.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많이 늦었어요.” “아니다. 병원에 누운 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래 넌 잘 지내고?” “네. 염려해주신 덕분에 잘 지냅니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소파에 앉혔다. 직접 음료수 두 병을 가져와 우리 앞에 놓으며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듣자 하니 열 평짜리 오피스텔에서 혼자 산다고? 내, 집 한 채 주랴?” “괜찮습니다. 집이라고 해도 옷만 갈아입고 잠깐 들러 잠 좀 자는 게 전분데요, 뭐. 대부분 스튜디오에서 지내니까 열 평짜리 오피스텔도 충분합니다.” 기특한 대답인지 머리를 끄덕였고 오랜만에 만난 손자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래? 월급은 얼마나 받누?” “얼마 안 됩니다.” “이놈아, 내가 그걸 모르겠냐? 왜? 너무 적어서 부끄러운 게냐?” 오랜만에 듣는 할아버지의 고함에 상준 형은 재빨리 대답했다. “아닙니다. 월급 이백에 인센티브 받으면 삼천만 원은 넘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녹음실에서만 지내다 보니 오피스텔 관리비 외에는 돈 들어갈 일이 없어 고스란히 다 모읍니다.” “그래? 그깟 노래 만드는 놈에게 뭐 그리 후하게 줘? 네 녀석 회사 사장 좀 데리고 오너라. 내가 월급 적게 주고 부려먹는 법 좀 가르쳐줘야겠다.” 할아버지의 농담에 긴장이 풀린 듯 평소에 잘 보이지도 않던 능청을 떨었다. “할아버지. 저 일 잘해요. 우리 회사 사장님이 틈만 나면 월급 적게 줘서 미안하다고 그럴 정도라고요. 그래서 인센티브도 제가 제일 많이 받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로구나.” 할아버지는 갑자기 상준 형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내 손자가 몇이더냐? 열 명이 넘는 놈들 중에서 내 돈 빼먹지 않는 놈은 너희 형제뿐이구나. 제 손으로 밥벌이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처자식을 제힘으로 먹여 살리는 게 사내자식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이라는 걸 아는 놈이 어른인 게다. 손주 놈들 중에서 어른이 된 건 너희 둘이 전부다. 내가 자식 농사 잘못한 거야.” “그럴 리가요? 다들 제 갈 길이 다른 거겠죠.” “아니, 아니다.” 할아버지는 애틋한 눈으로 상준 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네 애비에게 실망한 걸 네게 화풀이했다. 어린 네가 무슨 죄가 있다고…. 원망이 깊지? 이 할애비를 용서하거라.” “아닙니다.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뭐. 그리고 끝이 좋으면 전부가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할아버지께서 제가 음악 하는 걸 인정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할아버지는 묵은 짐 하나를 내려놓은 듯, 편안한 모습이었다. ======================================= [236] 겨울이 끝나기 전 2 “한 핏줄인데도 우리 상준이는 동생과 많이 다르구나. 저놈은 속이 시커먼 욕심으로 가득 찬 놈인데 말이야. 허허.” 할아버지가 나를 가리키며 껄껄 웃으셨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두 사람의 시간이다. 할아버지는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침대 옆의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가져와 탁자 위에 슬쩍 놓았다. “이건 네 몫으로 준비해 놓은 거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당연히 상준 형은 나보다 훨씬 더 놀랐을 것이다. 눈만 똥그랗게 뜬 채 아무 말 못 하고 있었다. “그런 표정 하지 말아. 너만 주는 거 아니다.” 할아버지는 우리 둘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네 녀석들 사촌들에게도 다 뭔가 하나씩은 줄 생각이다. 이미 다녀간 애들도 봉투 하나씩은 다 챙겨 갔어. 도준이 넌 봉투 없다.” “아니, 그건 좀… 하다못해 상품권이라도 한 장 넣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상준 형을 향해 말했다. “봐라, 저놈이 저렇게 욕심 많은 놈이다.” 하지만 놀란 상준 형은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 여전히 봉투만 바라보고 있었다. “상준아.” “네? 아…. 네.” “네 사무실과 오피스텔이 강남이라지?” “네.” “집 한 채 준다는 거, 그냥 했던 말이 아니다. 그거 강남에 구한 집 매매 계약서다. 네 이름으로 했고 우리 손자 깨끗한 집에서 살라고 증여세까지 깔끔하게 정리했어. 집 안을 채울 가구는 저놈이 채워 줄 거다.” 할아버지가 나를 가리킬 때 입을 삐쭉 내밀었다. “거, 이왕 주시는 거 집 안도 꽉꽉 채워주시지….” “이놈아. 모르는 소리 말어. 선물은 조금 부족한 듯 보여야 하는 법이다. 아쉬움이 남아 있어야 더 얻기 위해 관계를 지속하는 거야.” “핑계도 참 그럴듯한….” “시끄럽다, 이놈아. 그래서? 넌 친형이 집 생겼는데 선물도 안 할 생각이냐? 돈도 많은 놈이?” 할아버지와 주고받는 농담도 상준 형에게는 들리지도 않은 것 같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할아버지께 머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아니다. 고맙기는 무슨….” 이쯤 해서 자리를 피해줘야겠다. 비록 조손간이지만 두 사람은 집안 모임 때 인사드리는 게 전부였을 뿐 지금껏 단 한 번도 정을 나눈 적이 없다. 이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라는 걸 두 사람도 안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상준 형은 당황했지만, 그의 손을 꼭 잡은 할아버지는 머리를 끄덕였다. * * * “이 실장. 다시 한 번 확인하는데, 아버지 소유의 주식은 단 하나도 없는 게 확실하나?” “실장님. 혹시 파악 못 한 지분이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아버지께서 손수 관리한 지분 말입니다.” 이학재 실장은 두 부회장의 타는 듯한 시선이 정말 부담스러웠다.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걱정하는 것일까? “명동 사채시장에 쫙 깔린 게 순양그룹 주식입니다. 전부 차명이죠. 그걸 전부 파악하지 않는 한 제가 아는 범위 내에는 없습니다. 또, 회장님께서 사적으로 관리하는 게 있다면 제가 알 방법이 없겠죠?” “실장님. 사실 확인이 아니고 그럴 가능성을 묻는 겁니다.” “없다고 봅니다.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회장님이 차명으로 관리할 이유가 없어요. 두 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학재 실장의 말에 두 사람은 뜨끔하는 눈치였다. 이들은 개인 소유나 다름없는 법인을 세워 자신들이 관리하는 계열사의 일감 몰아주기 수법을 자행한다. 이렇게 모인 돈으로 끊임없이 주식을 사들인다. 물론 차명으로. 믿을 만한 임원이나 그 가족들 혹은 주변 측근들이 차명의 주인이지만 늘 불안하다. 언제든 싹 팔아치우고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 진영기 부회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상기에게 준다는 아버지 사재, 구체적으로 아는가?” 이학재는 참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눈살이 찌푸려졌다. 도대체 저놈의 욕심은 그 끝이 어디일까?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회장님 개인 재산은 제가 모릅니다. 개인 변호사에게 맡기셨으니까요. 참, 개인 변호사가 여러 명인 거 아시죠? 그마저도 전부 분산해서 관리하셨습니다.” 그나마 눈치 빠른 진동기는 이학재 실장의 마음이 불편하다는 걸 알고 진영기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미 다 말한 거 아닙니까? 했던 말 계속 반복하지 말고 우리 생각을 말합시다. 그게 이 실장님 편하게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진동기는 앞에 둔 찻잔을 들며 이학재의 눈치를 슬쩍 살핀 후 조심스레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아버지께서 안 계시면 우리 그룹이 시끄러워질 테고 예상치 못한 일들도 생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죠. 시끄러워질 일이 뭐가 있습니까?” “지분 말입니다. 순양은 거미줄처럼 얽힌 지배 구조 아닙니까? 가느다란 거미줄 하나만 끊어져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요?” 이학재 실장의 표정과 말투에서 언짢은 기색이 확 드러나니 진영기 부회장이 발끈했다. “거. 사람 참! 도대체 뭐가 그리 못마땅한가? 우리가 지금 못 할 말 하나?” “형님!” 진동기의 고함에 진영기는 끙 하는 소리 한 번 내고 다시 입을 닫았다. “이 실장님. 우리 처지도 생각해주십사 하는 겁니다.” “진동기 부회장님. 요점부터 먼저 말씀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말을 빙빙 돌리는 걸 보니 어려운 이야기라는 건 알겠는데 결론부터 말씀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좋습니다. 지주 회사를 새롭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지주 회사요?” “네. 흩어져 있는 지분을 싹 모아서 거미줄이 아닌 튼튼한 동아줄로 묶어버리는 겁니다.”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잘못 건드렸다가는 약하디약한 거미줄이 끊어질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세금 문제까지 일어날 수 있어요. 도박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실장님께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 작업은 이 실장님 외에는 누구도 지휘할 사람이 없어요.” 두 형제가 부리는 사람들 중 머리 좋다고 소문난 놈들만 모아 이 작업을 지시했으나 지배 구조 파악도 제대로 못 하고 두 손 들었다. 반도체 회로보다 복잡하고 거미줄보다 더 촘촘한 그림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 구조를 만든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결론만 나온 게 전부였다. “꼭 그럴 필요 있습니까? 이 시스템 때문에 두 분께서 부회장을 하시는 겁니다. 굳이 리스크를 안고 바꿀 필요가…?” 이학재는 두 사람의 속셈을 훤히 들여다봤지만 그들의 입에서 어디까지 원하는 것인지 직접 듣고 싶었다. “몰라서 그래? 첫 번째로 미라클부터 들어내야지! 만약 미라클이 도준이 놈 손을 들어준다면…. 아니, 확실해. 그놈들은 도준이를 앞세워 우리 순양을 야금야금 차지할 속셈이라고.” 진영기가 소리쳤다.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23%의 주식을 지닌 투자사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게 바람직한 건 아니죠.” 진동기도 거들었다. “그렇기도 합니다만……. 좋습니다. 안전한 지주 회사를 별도로 만든다고 칩시다. 그럼 그 지주 회사의 지분구조는 어떻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두 사람은 잠깐 눈빛을 교환하더니 진영기 부회장이 헛기침했다. “으흠. 나와 동기가 55%, 상기 5% 임원들 10% 정도. 나머지는 계열사로 분산시키고. 일단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두 사람이 모든 권력을 쥐겠다는 의미다. 셋째인 진상기를 포함해서 55%가 아니다. 이 말은 셋째 동생마저 못 믿는다는 뜻이다. 혹시라도 진상기가 딴마음을 품더라도 그룹 지배권에는 흔들림이 없다. “임원들 보유 지분은 늘리는 대신 사람은 바꿀 생각입니다. 전부 아버지 세대의 사람 아닙니까? 새로운 임원으로 교체할 생각입니다.” 진동기는 세대교체까지 언급한다. “미라클은 그렇다 쳐도 도준이는요? 그 애도 10%의 지분이 있습니다. 아예 빼버릴 생각입니까?” 이학재가 이들이 거론하기 꺼리는 부분을 들쑤시자 두 부회장의 표정이 굳었다. “도준이에게는 금융 계열사 두어 개 떼 줄 생각입니다. 그놈 적성에도 맞고…. 부족하다면 계열사 주식 좀 얹어 줘도 되고. 어차피 어린애 아닙니까? 그룹 경영에 참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남들 보면 웃음거리야. 지금 대기업 중에 이십 대가 그룹 경영권을 위협한다는 게 말이 돼? 도준이는 착실하게 경영 수업 받을 나이지, 계열사를 책임질 나이는 아니야.” 차라리 이들은 자신들이 회사를 갖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더 낫다. 도준이는 이미 능력을 증명했다. 이들은 진 회장의 피를 물려받은 것 외에는 내세울 게 없지 않은가? 이학재가 좋지 않은 표정을 보이자 진동기가 다급하게 말했다. “실장님도 섭섭지 않을 자리 드리겠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죠.” “그래요? 어떤 자리라면 제가 만족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건조한 음성이었지만 적어도 관심을 보인다. 진동기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순양전자 총괄 대표이사 자리라도 드리겠습니다. 순양의 핵심 아닙니까?” 돈으로 이학재를 잡을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두 사람은 자리를 내민 것이다. 하지만 대표이사 따위야 하루아침에 물갈이할 수 있다. 시끄럽지 않게 교체한다고 해도 2년이면 충분하다. 이학재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들은 이학재 실장이 5년 정도 자리 보장을 요구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 정도는 받아들이기로 합의까지 한 상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회장님 모르게 진행할 생각이시죠?” “꼭 알릴 필요가 있나?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당신의 뜻대로 모든 게 이뤄졌다고 여기시는 게 마음 편한 것 아니겠어?” 사실 진 회장이 두 아들의 속셈을 안다고 해도 어찌할 수 없다. 다시 지분을 거둬들이기에는 남은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새로운 지주 회사는 순전히 이학재의 손에 달려 있다. 그가 거부한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들의 힘만으로 진행할 것이다. “생각을 좀 해봐야 할 문제 같군요. 아직 회장님께서 절 지켜보고 계십니다. 차마 그분의 얼굴을 보며 유지를 거역하는 일은 못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소리가 아닌가?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당연하지. 이 실장이 우리 뜻을 알아주니 이거…. 마음이 한결 가볍구먼. 하하.” 진동기도 벌떡 일어나 이학재의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실장님. 이게 다 순양을 더 안전하게 하려는 일입니다. 이 일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학재는 진동기의 손을 슬며시 뺐다. “두 분 뜻은 충분히 알았고, 제 마음도 말씀드렸으니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그럼.” 이학재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가 보이지 않자 미소를 머금었던 두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저 새끼, 지가 꼭 뭐라도 된 줄 알아. 성질 같아서는….” “그만해. 순양의 호위 무사 정도는 되잖아. 아버지의 충신이기도 하고.” “저놈, 진심일까?” 진영기는 여전히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반면에 진동기는 훨씬 여유 있었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자신도 물러난다고 했어. 그게 진정으로 원하는 건 아닐 거야. 아직 한창나이잖아. 순양전자의 우두머리 자리면 심장이 벌렁거릴걸? 그리고 저놈 도움이 필요해. 상기 재단이 받을 아버지 개인 재산을 생각해봐. 그것부터 챙겨야지. 적어도 수천억은 족히 될걸?” “난 더 된다고 봐. 현금뿐만이 아니고 부동산도 있어. 그게 훨씬 알짜 재산이야.”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기 시작했다. 영향력 없는 지분 좀 나눠 주고 챙길 어마어마한 돈. 그 돈을 생각하니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 [237] 겨울이 끝나기 전 3 진상기 이사장은 한껏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손님 셋을 맞이했다. 그들은 법무법인 소속이 아닌 개업 변호사들이었으며 모두 두꺼운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미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모두 재단에 기증한다는 서류입니다. 회장님은 이미 사인하셨으니 재단 인감만 찍으시면 기증 절차는 끝납니다.” “이 서류는 기증 자산 목록입니다. 한번 확인해보십시오.” 진상기는 뺏다시피 서류를 받아 들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빽빽한 목록을 꿈꾸던 그의 표정이 일그러진 건 순식간이었다. “이게 뭐요?” “네?” “달랑 이게 전부요?” “우리가 관리하는 회장님 재산은 그게 전부입니다.” “우리? 그럼 다른 변호사도 있다는 건가?” “거기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회장님께 한번 확인해보시죠.” 진상기는 다시 한 번 목록을 살폈다. 다섯 채의 건물 그리고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땅. 마지막으로 현금 삼백억가량…. 진상기가 목록으로 다시 눈을 돌리자 변호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현재 유지 보수와 빌딩 관리 직원 급여를 제외하면 매달 14억가량 수익이 발생합니다. 임대차 계약 만료일을 확인하시고 계약 연장 여부를 결정하셔야 합니다. 아 참, 계속 우리가 관리할지 아니면 재단에서 관리할지 결정하셔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토지는 용도 변경 가능한 곳과 불가능한 곳, 이렇게 구분해 뒀습니다. 토지의 가치는 주변 거래 금액을 참고로 산정한 겁니다.” “그 가치가 구백억. 맞습니까?” 진상기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용도 변경한다면 토지 가치는 확 뛸 겁니다.” 서류를 쥔 손이 부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서류를 구겨버렸다. “이 사람들이 지금 장난하나! 이봐요. 대한민국 최대 기업의 창업주가 우리 아버지요. 그런데 재산이 푼돈 조금하고 빌딩 몇 채 그리고 쪼가리 땅이 전부라고! 이게 말이 돼?” 흥분한 진상기와는 달리 변호사들은 차분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말씀드렸다시피 우리가 관리한 재산은 그게 전부입니다. 회장님께서 우리 외에 개인 변호사를 더 두셨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니 그게 재산의 전부인지, 일부인지는 회장님께 확인하시는 게 정확할 겁니다.” 그래, 이 정도일 리가 없어. 분명히 더 있을 거야. 꿍쳐 둔 돈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잖아. 아버지가 꿍쳐 뒀다고 할 정도면 수천억은 넘어야 해. 맞아. 돈 관리는 다른 변호사가 한 게 틀림없어. 보나 마나 차명계좌일 테니까 그쪽 전문 변호사를 별도로 두셨을 거야. 이것이 진상기의 생각이었고 틀림없다고 믿고 싶었다. 전화기를 든 그는 짧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법무팀 오라고 해. 재단 인감 들고.” 진상기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일어섰다. “법무팀 오면 설명해주고 처리해요. 난 약속이 있어서….” 진상기가 나가자 변호사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게 전부잖소? 돈은 회장님께서 싹 정리하셨으니 말이오.” “조금 전 저 친구 표정 못 봤소? 이게 전부라고 말했다가는 난리가 날 것 같더이다.” “다른 변호사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 우린 이것만 처리하면 돼요. 괜히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 필요 없어요.” 세 변호사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법부팀 직원들 때문에 입을 닫았다. * * * “회장님. 어서 쾌차하셔야죠.” “아직 정정해 보이십니다. 훌훌 털고 일어나십시오.” 순양그룹의 모든 임원이 오고 싶어 하지만 선택받은 자는 몇 안 된다. 병실에 발을 디딘 이들은 모두 진 회장이 건재할 때 주력 계열사의 대표이사나 핵심 보직에 앉았던 사람들이었다. 여전히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사람도 있었고 몇몇은 진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자마자 회사를 나온 퇴직자도 있었다. “요즘 회사가 한가한가 봐? 뒷방 늙은이 병문안 올 짬도 나는 걸 보니 말이야.” 진 회장은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고 한동안 병실에는 웃음이 만발했다. 그들의 웃음이 잦아들 무렵 진 회장이 말했다. “다들 주름이 는 걸 보면 요즘 봉급 생활이 힘든가 봐?” 단순한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진 회장이 지금의 그룹 상황을 확인하는 말이라는 걸 모두가 안다. “이제 우리도 정리해야 할 때라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들의 대표 격인 순양전자 손훈재 사장이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왜? 자식놈이 심하게 대하나?”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진영기 부회장이 속 편히 지휘하려면 아무래도 우리 같은 구세대는 불편하겠죠. 젊고 훌륭한 후배도 많으니까요.” “진동기 부회장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특히 우리같이 시멘트 만지고 쇳덩이 만지는 노가다 출신들은 상하관계가 더 거칠다 보니 불편해하는 모습이 훤히 보입니다.” 순양중공업 사장도 한마디 더 보탰다. “가만 보니 내 병문안 온 게 아니고 불만 털어놓으려고 온 것이구먼. 허허.” 진 회장은 웃음을 터트렸으나 사장들은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진 회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남자는 늙었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지위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욕심을 부린다. 이미 사내로서의 향취가 손톱 때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늙은이가 늙지 않았다는 걸 인정받는 방법은 자리와 명함뿐이기 때문이다. 이 병실에 모인 사람 전부는 아니겠지만, 진 회장에게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늙은이들이 생명력을 연장하고자 매달리는 모습처럼 보였다. “종이하고 볼펜 좀 듬뿍 가져와.” 대기 중이던 비서 하나가 재빨리 병실 밖으로 나갔다. 난데없는 진 회장의 행동에 모두들 눈만 동그랗게 떴다. “내가 가기 전에 자네들 마음 편하게 해줌세. 잠시 기다려 봐.” 비서가 종이와 볼펜을 한 움큼 들고 오자 진 회장은 대표이사들을 가리켰다. “전부 나눠줘.” 종이와 볼펜을 쥐고 눈만 끔뻑거리는 그들을 향해 진 회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모두 사표 써. 날짜만 비워놔. 물러나야 할 때는 내가 정하지.” 날벼락 같은 지시에 모두 눈치만 볼 때 다시 큰소리가 들렸다. “뭐 하나? 어서!” 손훈재 사장이 가장 먼저 볼펜을 쥐고 사표를 쓰기 시작하자 나머지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이미 물러난 사람들은 어색하고 불편한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빌었다. 모두 펜을 내려놓고 사표를 진 회장에게 내밀었다. 그들의 사표를 한쪽에 치워 놓은 진 회장이 입을 열었다. “어떤가? 마음 비우니?” 스스로 비우지 않은 마음이니 편할 리가 없다. 모두 머리를 숙인 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 친구들아. 그 정도면 오래 해먹었어. 자식들 결혼시킬 때 혼주가 순양의 임원이라는 걸 잘 써먹지 않았는가? 설마 손주 결혼 때도 써먹으려 뭉기적대고 있었던 게야?” “아, 아닙니다. 회장님.” “그럼 됐어. 내가 퇴직금은 섭섭지 않게 챙겨 주라고 해 놓을 테니 지금부터는 마음 비우고 일해. 그리고…. 다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삥땅 많이 쳤잖아. 그거 내가 다 눈감아줬고. 고맙지 않나? 으허허.” 진 회장의 웃음소리만 병실에 퍼졌다. 슬쩍 흘려 말하는 것 같지만 명백한 경고다. 새로운 공장 부지를 선정할 때 주변의 땅을 미리 사 두고 땅값이 뛰면 팔았다. 회사의 호재가 있으면 차명으로 주식을 사재기하고 엄청난 차익도 봤다. 심지어 신규 하청업체 선정 때 친척이나 지인의 회사를 골라 지분을 태우는 일도 있었다. 누구나 이 정도는 눈감아주는 일이지만, 문제 삼으려면 그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 회장의 웃음은 오늘 당장 사표를 수리하더라도 딴생각하지 말라는 경고나 다름없다. “참, 회사 그만두더라도 감사 자리와 사무실 하나씩은 준비해 두라고 할 테니까 심심하면 나와서 소일하도록 하고.” 두둑한 퇴직금, 감사라는 직책으로 현재의 급여 정도를 받으며 품위 유지를 할 수 있는 기간, 2년. 이것이 순양그룹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이다. 물론 99.9%는 이런 호사를 누리지도 못하고 쫓겨나지만…. “자, 다들 돌아가서 일 봐. 난 좀 쉬어야겠어.” 명백한 축객령이 떨어지자 모두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아, 손 사장. 자네는 잠깐 남게.” 진 회장 곁에서 수발들던 비서까지 내보내고 단둘만 남자 손훈재 사장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요즘 회사 돌아가는 꼴이 영 엉망인가 봐? 저놈들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었어.” “다들 오늘내일하니까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아무튼, 잘하셨어요. 두 부회장과 껄끄럽게 지내는 것보다 이처럼 마음 비우게 못 박아 두는 게 났습니다.” “나이 먹었어도 사내라는 걸 왜 잊어버리는지, 원. 물갈이할 때라는 왜 몰라?” “아쉬우니까 그렇겠죠. 회장님께서 이해해주십시오.” “내가 이해할 게 뭐 있나? 자네가 신경 쓰여 그런 게지.” “전 괜찮습니다. 사실 작년에 그만뒀어야 하는데 때를 놓쳤습니다. 참, 제 사직서에는 날짜를 적어뒀습니다. 이달 말까지 정리할 거 하고 물러나겠습니다.” “미안하고 고맙우이. 내 뜻을 알아줘서.” 그룹의 대표 격인 순양전자다. 그곳 사장인 손훈재까지 물러나는 마당에 버티고 있을 만큼 뻔뻔한 사람은 없다. “별말씀을요. 그보다 하실 말씀이라도…?” “자네와 다른 친구들이 쥐고 있는 지분 말일세.” “아, 네. 말씀만 하십시오. 옮기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진 회장은 빙긋 웃었다. 무려 5%나 되는 지분인데 흑심 품은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옮길 필요 없어. 계속 쥐고 있게. 그건 내가 주는 퇴직금이야. 다만….” “회, 회장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단순한 계열사 지분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화들짝 놀란 손훈재 사장이 손을 내저었지만 진 회장은 계속 웃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그 지분이 어떤 건지 몰라서 하는 말 같은가?” “아, 아닙니다.” “그럼 내 말대로 해. 대신 그 지분 의결권은 자네를 수탁자로 해둬. 내 지시라고 하면 문제없을 것 아닌가? 더는 토 달지 마.” “네. 회장님. 그럼 그 의결권에 대한 회장님 심중을 말씀해 주십시오.” “오로지 하나만 생각해서 자네가 결정해. 그룹에 이익이 되는가?” “명심하겠습니다.” 손훈재 사장은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저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래, 수고했어. 아 참. 혹시 말이야, 내가 저승길 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자식놈들이 알고 나서 혹시 달라지거나 이상한 기류 같은 게 없나 해서 말이야.” 진 회장은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손훈재 사장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다들 바쁘시죠. 허허.” “바쁘다니?” “임원들이야 누구 뒤에 줄을 서야 하나 눈치 보기 바쁘고 혹시라도 대대적인 구조조정이라도 있을까 봐 실적 나쁜 직원들은 전전긍긍하죠.” “그게 전분가? 내가 뭘 묻는지 알면서 딴소리는…!” 진 회장의 못마땅한 표정에 손훈재 사장은 잠시 기억을 더듬다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정확하게 확인한 건 아니나, 조금 이상한 이야기가 나돌았습니다. 하지만 곧 잠잠해져서 저도 흘려들었는데….” “이 친구가! 무슨 뜸을 그렇게 들여? 얼른 말해보게.” “현재의 그룹 체계를 새로운 지주회사로 변화하려고 검토했다는 소문입니다. 그리고 이 소문은 회장님께서 병원에 들어오시기 훨씬 전에 돌았던 거라 저도 잊었습니다.” 손훈재 사장 입장에서야 대수롭지 않게 꺼낸 말이지만, 곧바로 후회했다. 이미 굳을 대로 굳어버린 진 회장이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 [238] 겨울이 끝나기 전 4 “회, 회장님. 흥분하지 마십시오. 그냥 뜬소문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소문만으로 끝났습니다. 실제 그룹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예상 밖의 반응에 손훈재는 자신이 저지른 짓이 아님에도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진 회장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말했다. “됐어. 자네도 이만 가봐.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참, 회사 그만두면 종종 와서 말벗이나 되어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회장님. 또 찾아뵙겠습니다.” 손훈재 사장이 물러나자 진 회장은 대기하던 비서에게 소리쳤다. “이학재 빨리 들어오라고 해!” 곧 죽을 날짜 받아 뒀다는 회장이 불같이 노하자 병원이 발칵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큰소리에 몰려온 의사들은 진 회장을 침대에 눕히고 혈압을 재니, 링거를 꼽니 하며 야단법석이었다. 침대에 누워 화를 삭이던 진 회장은 급히 달려온 이학재를 보자마자 다시 소리쳤다. “넌 알고 있었어?” “회장님. 고정하시고….” “알고 있었냐고? 두 놈이서 지분 장난질 치려 했다는 거 말이다!” “아, 그거….” 이학재 실장이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이자 진 회장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아 그거…? 이 친구가 지금 제정신인 거야?” “회장님. 두 부회장의 장난질 정도로 지배구조가 흔들릴 순양이 아닙니다. 너무 노여워 마시고…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학재 실장이 차분히 말했지만 진 회장의 노기는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뭐야? 자네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소리야?” “두 사람은 계획을 제게 털어놓았고 도움까지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왜? 왜 내게 일언반구도 없었던 게야!” “실행 불가능한 무의미한 계획입니다. 전 도와줄 생각이 조금도 없고요. 그러니 굳이 보고할 필요조차 못 느꼈습니다.” 이학재 실장은 펄펄 뛰는 진 회장을 진정시켰다. “가뜩이나 심장도 좋지 않으신데 괜히 불편한 이야기 들으시고 더 나빠질 것이 염려되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진 회장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병실에서 새어 나오는 큰소리 때문에 또 한 번 의료진이 달려왔지만 매섭게 노려보는 진 회장의 눈길에 조용히 물러났다. 한동안 숨을 가다듬은 진 회장은 이학재 실장이 떠다 준 물 한 모금을 마시며 물었다. “그래, 그놈들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던가?” “현재의 복잡한 구조가 취약점이라고 생각해서 굳건한 지주회사 구조로 전환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속셈은 딴 데 있겠지?” “미라클과 도준이의 지분을 무력화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지주회사 지분 55% 정도를 두 놈이 가지고?” “네. 정확하십니다.” “정신 빠진 놈들. 그게 말처럼 쉽다면 진즉에 복잡한 구조 버리고 지주회사를 만들었지. 그리고 또?” “진상기 이사장도 참여시키겠다는 의사를 보였습니다.” “상기를?” “네.” 갑자기 진 회장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요노무 새끼들. 내가 상기 그놈에게 재산을 물려준다고 하니까 그것까지 눈독 들이는구먼.” 셋째를 끌어들이는 이유가 돈? 이것은 이학재 실장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의 추측이지만 두 아들의 욕심은 진 회장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지분을 미끼로 재단까지 꿀꺽하려는 건 순양 전부를 갖고 싶어 하는 장남의 생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자네는 뭐라고 했나?”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나왔습니다. 굳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줄 필요성을 못 느꼈으니까요.” “잘했네.” 이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을 깬 건 진 회장이었다. “그런데 자네의 진심은 뭔가?” “네?” “내가 가고 나면 정말 은퇴할 생각인가? 아직 한창인 자네가?” “그럼 회장님께서 책임지십시오. 하하.” 대수롭지 않게 웃는 이학재에게 진 회장은 눈을 부라렸다. “이 친구가…! 계열사 몇 개 이리저리 엮어서 자네가 맡으라고 했잖나? 필요하다면 계열분리까지 해서 온전히 자네 것으로 해주겠다고 했지만 단칼에 거절한 건 바로 자네야. 내가 더 이상 어떻게 책임지나?” “아, 그럼 어쩝니까? 회장님 밑에서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들만 해왔고 모두 제 앞에서 머리 숙이며 눈치 봅니다. 그런 일만 하다 평범한 경영자로 변하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자리지만, 회장님 안 계시면 그 자리도 사라집니다. 그러니 저도 물러나는 게 맞습니다.” “총리 하다가 장관은 못하겠다?” “그런 셈이죠. 하하.” 안타까운 표정의 진 회장 앞에서 이학재는 호탕한 웃음을 보였다. “회장님. 염려 마십시오. 제가 회장님이 바라시는 게 뭔지 모를 리 있겠습니까? 도준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내가 가고 나면 그놈들 구박이 심할 텐데?” “견제는 할지언정 대놓고 절 박대하지는 못할 겁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진 회장은 잘 안다. 온갖 잡다한 불법적인 일들을 지시하고 실행한 건 바로 이학재다. 하지만 이런 일도 그룹 승계 과정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다. 어마어마한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동원된 모든 편법과 불법, 이 세부 사항을 가장 정확히 아는 자는 이학재다. 자신이 이 일의 실행자이니 문제가 불거지면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그의 입은 다 같이 자멸하는 스위치가 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이학재는 두 부회장이 자신을 어찌할 수 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진 회장은 여전히 불편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문을 열고 들이닥친 진상기 때문이다. “아, 이 실장님도 계셨네요.” 이 실장은 그의 표정을 보자마자 단순한 문안 인사차 들른 것이 아닌 걸 알았다. 긴장과 흥분, 그리고 허탈함까지 배어 있는 얼굴이었다. 눈치 빠른 진 회장은 이미 못마땅한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실장님.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아버지와 단둘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좀 있습니다만.” “아, 그러시죠. 저도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이학재 실장이 돌아서려고 할 때 진 회장 그를 붙잡았다. “자네는 그냥 있게. 어차피 이놈 표정 보니 내 병세를 살피러 온 건 아닌 게 분명해. 부자간의 정을 나누는 게 아니라면 공무지. 이 실장 자네는 공적인 이야기를 들어도 되는 사람이야.” “아버지.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내 말이 틀렸어? 상속 문제 때문에 온 거 아니냐?” 속을 들킨 진상기는 대꾸를 못했다. “그래, 말해봐. 또 뭐가 불만이기에 이렇게 달려온 게냐?”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자식들이 불만을 터트리며 떼쓰는 모습, 이학재 실장이 수도 없이 봐왔던 모습이다. 하지만 생명의 불꽃이 언제 꺼질지 모르는 노쇠한 사람을 앞에 두고 조금도 변하지 않은 자식을 보니 기가 찰 지경이었다. 더 놀라운 건 진 회장의 태도였다. 그는 상속 문제까지 회사 일처럼 공무라고 말한다. 과연 이 사람에게 사적인 일은 무엇일까? “아, 아버지. 정말 죄송한데요. 상속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단지 확인 좀 하고 싶은 게 생겨서요.” “그러니까 말해 보라고.” 진상기는 이학재의 눈치를 슬쩍 살핀 후 말했다. “오늘 변호사들이 다녀갔는데…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건물과 땅, 현금 조금이 전부라고 했습니다. 혹시 개인 변호사를 몇 분이나 두셨습니까?” “오늘 찾아갔더냐?” “네.” “셋 아니었어?” “네. 맞습니다.” 셋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진상기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설마설마했는데 그게 전부라니……. “그놈들이 전부다. 왜 생각보다 적어서 그러는 게냐?” 열불 난 속에 기름을 붓는 말이었지만 진상기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는 절대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 분명히 더 있다. 지금은 분통을 터트릴 때가 아니라 더 받아내기 위해 노력을 할 때라는 걸 믿었기 때문이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다. 단지 아버지의 개인재산치고는 너무 초라해서 확인하고자 했던 것뿐입니다.” “머라? 초라해? 이놈아! 빌딩에, 땅에, 현찰 삼백억이 초라하다고? 남들은 평생 일해도 모으지 못하는 돈을 월세로 받게 해 줬더니…. 그 정도면 어딜 가더라도 갑부 소리 들어. 게다가 재단까지 더하면 재벌 소리까지 듣는다. 이놈이 말이면 단 줄 알아?!” 진 회장의 큰소리에 진상기는 두 손을 황급히 내저었다. “아이고, 아버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확인차….” “시끄럽다. 네 얼굴에 훤히 다 써 있는데 무슨…!” 이학재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 삼백억? 고작 삼백억만 줬다면 나머지 돈은? 조세 회피처인 해외 계좌와 국내 차명계좌를 관리하던 이학재였다. 그 자료 전부를 진 회장에게 전달했는데 행방이 묘연하다. 설마 아직까지 쥐고 있을 리는 없고…. 역시 진도준인가? 그 엄청난 돈을 진도준이 손에 쥐었다면 또 하나의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매년 정관계에 뿌리는 순양 장학금이 얼만가? 그 돈은 출처를 찾을 수 없는 돈이어야 하는데 두 부회장은 아직 충분한 비자금을 확보하지 못했다. 진도준이 먼저 장학금을 뿌린다면 그가 실질적인 후계자임을 알리는 셈이다. 이학재는 진도준이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할지 몹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 * “이 자식은 왜 감감무소식이야?” “아무래도 거절한 것 같은데? 우리 조건이 마음에 차지 않나?” 진영기, 진동기 두 형제는 가타부타 말이 없는 이학재를 생각하면 분통이 터졌다. “전자 사장 자리보다 더 나은 게 어디 있어? 아예 순양그룹 회장 자리 주랴?” 진영기의 말이 틀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제안을 던졌고 이학재가 거부했을 뿐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 손으로 하자. 이학재가 그랬잖아? 지 밑에 있는 놈들은 뛰어난 인재니까 거둬 달라고. 그놈들 데려오고 세무, 주식 쪽으로 빠삭한 로펌에서 난놈들 싹 쓸어 와서 시작하자고. 아예 맡겨도 되고.” “좀 위험하지 않을까? 이학재가 데리고 있던 놈들이 간첩질하면? 이학재 그놈이 대번에 알 텐데?” 진동기가 불안한 듯 말했지만, 진영기는 머리를 저었다. “알면 어쩔 건데? 아버지 돌아가시면 그놈은 백수야. 권력 떨어진 놈한테 충성 바칠 사람은 없다.” “그 양반 마음 상하면? 우리 그룹 비밀을 속속들이 알잖아. 고춧가루 뿌리려면 얼마든지 가능한 사람이 이학재잖아.”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나 보다. 하지만 진영기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어떻게 간뎅이가 벼룩만 하냐?” “흘려듣지 마. 그놈이 빈정 상해서 작정하고 덤비면 우리도 크게 다쳐.” “도대체 넌 아버지에게 뭘 배웠냐?” “무슨 소리야?”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밟아서 완전히 무너뜨리고 자포자기했을 때 슬쩍 손을 내미는 거…. 몰라?” “이학재를 밟자고?” “그래. 이 일이 아니더라도 가만히 놔두면 두고두고 화근이야. 아버지께 충성하던 놈들 정리해야지. 딴 영감들이야 퇴직금 두둑이 주면 감지덕지할 테지만 이학재는 아냐. 그놈은 밟아야 해.” “어떻게?” “그놈 손에 묻은 흙먼지가 태산이야. 확 털어버려야지.” 진동기가 놀라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우리까지 다쳐!” 하지만 진영기는 여전히 여유 만만했다. “너 나랑 내기할래? 아버지 안 계시면 내가 바로 순양이야. 장남이잖아. 칼질은 이학재까지만이다. 번뜩이는 칼날은 우리 앞에서 멈춰.” 진 회장과 순양그룹이라는 배경이 사라진 이학재는 단순한 민간인일 뿐이라고 굳게 믿는 진영기였다. ======================================= [239] 겨울이 끝나기 전 5 “듣기 거북해. 형님의 순양이라니? 우리의 순양이지.” 동생이 정색하자 진영기의 표정도 굳어졌다. “말꼬리 잡지 마. 아버지 돌아가시면 장례 기간 동안 누구 얼굴이 언론에 나오겠어? 맏상주인 나야. 그 방송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후계자로 생각할 거다. 난 그걸 말한 거야.” 진영기 부회장은 기회다 싶어 동생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 당분간 경계의 벽을 허물자. 순양에 들러붙은 놈들 다 쳐낼 때까지만 날 밀어줘. 네 몫은 내가 절대 손대지 않으마.” “밀어달라는 뜻은 아버지 돌아가시면 형이 회장실을 차지하겠다는 거지?” “그래야 하지 않겠냐? 언제까지 빈자리로 놔둘 거야? 아버지 돌아가시면 그룹이 요동친다. 그때 누군가가 중심을 잡아야지. 그리고….” 진영기는 서랍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이거 아버지가 주시더라. 계열사 사장들 사표야. 필요할 때 언제라도 물갈이할 수 있도록 말이야.” 사직서 뭉치를 본 진동기는 피식 웃었다. “그걸 형만 받았어? 나도 내가 관리하는 계열사 사장들 사표는 받았어. 그게 바로 아버지의 뜻이야. 함께 그룹을 경영하라는….” “그러니까 함께 진드기들 쳐 내자고. 창업 공신이네 뭐네 하며 방귀 뀌는 영감들 정리하고, 이학재 밟아 지주 회사 만들고, 도준이 놈이랑 미라클을 잘라낼 때까지만 내가 순양그룹 총괄 회장 할게.” “그다음은? 날 쳐내고?” 진영기는 동생의 곱지 않은 시선을 못 본 체하며 말을 이었다. “넌 부회장 맡아. 내가 네 몫은 손대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 계열사들은 말아먹든 비벼 먹든 네 마음대로 해. 그리고….” “아직 할 말이 남았어?” “어차피 우리도 나이 먹어간다. 애들도 크고. 우리 애들이 그룹을 맡을 때쯤 갈라서자. 완전히 계열분리 하면 되잖아. 싸움은 우리 대(代)에서 끝내고 자식들은 제 몫 챙기면 되잖아.” 진동기는 형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자식들도 자신들과 똑같이 싸울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싸울 것이다. 자신들처럼 형 동생의 관계는 경영 참여 전까지다. 회사에 발 담그는 순간 형 동생이 아니라 회사의 주인 자리를 놔두고 싸우는 경영자의 모습으로 변한다. 그 싸움을 사촌들까지 확대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두 사람이 핏대를 세우고 싸우는 이유에 자식들도 한몫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물려주기 위해 아니, 온전한 순양그룹을 통째로 넘겨주기 위해 눈치 보고 싸우는 것이다. “우리 주변의 날파리 전부를 없앨 때까지는 동의. 하지만 그 뒤에도 형님이 계속 회장 자리를 지키는 건 못 받아들여.” “야! 지주 회사 설립하고 우리가 55% 지분을 가지면 경영권은 안전해. 게다가 내가 많이 양보했잖아! 그래도 못 믿어?” 두 사람의 합의는 55%의 지분을 55:45로 나누는 것이었다. 현재 진동기의 그룹 지분이 26%에 불과하며, 형님의 지분이 36%인 것을 생각하면 진영기 부회장이 많이 양보했다는 말은 사실이다. “회장 자리에 오래 앉아 있을수록 지주 회사 지분을 늘리는 게 가능하잖아. 형님이 그 지분을 계속 늘리려는 속셈이라는 건 나도 알아. 왜냐하면, 나라도 그럴 테니까.” 진영기는 긴 한숨을 쉬고 입을 닫았다. 일단은 동생의 생각을 따른다. 그리고 이 정도라도 만족해야 한다. 최소한 아버지 사후에 회장 자리 앉는 건 확보했으니 일보전진이다. 다음 단계는 회장 자리에 앉아 세우면 된다. 지금은 보이지 않더라도 회장이 되고 나면 선명하게 보이는 그림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 * * 할아버지가 정신을 잃는 빈도는 점점 잦아졌고 주기도 짧아졌다. 절대 몸에 칼을 대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지만, 간단한 혈관 확장 치료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놈들아. 어차피 천수를 다 누리고 가는 게야. 칼 대고 수명 늘려 봤자 그게 얼마나 된다고? 기껏 한두 달 더 살자고 소란 피울 거 없다. 그리고 나도 힘들어. 그만해라.” 쓰러지실 때마다 몰려드는 자식들을 향해 할아버지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의사들의 권유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죄짓는 기분이 드는 자식들은 할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더라도 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난 언제든 달려갈 수 있도록 아예 병원 근처의 호텔로 옮겼다. 할아버지는 자식들이 없을 때 전화를 했고 그럴 때마다 병실에서 할아버지의 말벗이 되어 주었다. “동남아는 이제 생산지로서 수명은 다한 것 같다. 대신 훌륭한 시장으로 성장할 게야. 넌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그 나라 정치인들과 돈독한 관계를 쌓도록 해.” “그런 것보다 할아버지 과거의 기억 중에 다이내믹하고 스펙타클했던 거 들려주시면 안 됩니까? 옛날이야기 들려주는 보통의 할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시끄럽다. 딴소리 말고 새겨들어.”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당신이 평생 해왔던 일을 계속하실 것 같았다. “지난 정부에서 외교부 차관을 지낸 놈이 있어. 그놈이 퇴직을 앞두고 고민이 많다고 들었다. 그놈 꿈은 금배지 다는 거지만 인지도도 약하고, 딱히 내세울 게 없어 이번 총선 때 공천 물먹었다. 그놈 데려다 써.” “외교부 관료를요?” “그래. 그놈이 젊을 때부터 동남아만 돌았어. 그쪽으로는 인맥이 두텁다고 들었다. 국회의원들이 시찰 명목으로 동남아 가서 골프나 치고 와도 문제없는 건 다 그자 때문이다. 그자가 자료도 준비해 주고 그 나라 정치인들과 사진도 한 방 찍을 수 있게 주선하기도 한다.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거다.” “네. 그럼 대아건설 임원 자리 내주고 데려오겠습니다.” 이렇게 맞장구치며 지시사항을 조용히 따르는 게 손자의 재롱이다. “참, 그 차떼긴지 뭔지 하는 대선 비자금 문제는 어찌 돼가냐?” “우리도 조사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LG 그룹을 제물로 삼고 끝낼 심산인가 봐요. 연일 LG 그룹 이야기만 나오지 않습니까?” “그쪽에서 얼마나 냈다고 하더냐?” “150억으로 추산하더군요.” “그래?” “네. 하지만 방법이 너무 서툴러서 곳곳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LG 그룹은 본사 건물에 내화벽으로 만든 재무관리팀의 특수한 공간이 있었다. 통칭 ‘금고 방’이라고 불렀는데 특수관계인 주주들의 상속 및 증여에 대비해 마련해둔 현금 160억 원이 잠자고 있던 공간이었다. 이 자금의 총책인 강모 본부장은 직원들이 퇴근한 뒤에 재무관리팀 직원들을 시켜 현금 160억 중 150억 원이 든 상자를 비상 엘리베이터를 통해 금고 방에서 지하 2층 주차장에 대기시켜 놓은 탑차로 옮겨 실었다. 2억4000만 원씩 담은 상자 62개와 1억2000만 원을 담은 1개를 합친 돈 상자는 무려 63개였다. 탑차는 경부선 하행선 ‘만남의 광장’ 주차장에 도착했고 선거 캠프의 자금 관리자였던 변호사에게 차량 키와 화물칸 키가 달린 열쇠 고리를 전달했다. 하지만 탑차는 야당 당사의 좁은 지하주차장으로 진입이 불가능했다. 그들은 탑차를 한강 둔치로 이동시켰고 급히 렌트한 봉고차 2대에 돈 상자를 나눠 실은 뒤 다시 당사로 옮겨놓는 촌극까지 벌였다. 다른 대기업들도 적게는 수십억, 많게는 수백억을 전달했지만 대부분 잘게 나눠서 승합차나 승용차로 여러 번 전달했을 뿐 이런 무모한 방식은 쓰지 않았다. 불법 대선자금 ‘흑역사’에서 명실상부한 ‘차떼기’가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으허허.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 법이지.” 할아버지는 별일 아닌 듯 여기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크게 번질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 선거가 아닌가? 이 일을 담당한 본부장급 사람 하나가 법정에 설 것이며 세상의 관심이 멀어질 때쯤 슬며시 보석으로 풀려날 것이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도준아.” “네.” “회사에 빈자리 좀 있느냐?” “글쎄요. 전 큰아버지들처럼 임원 정리를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 많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순양금융 말고. 네놈 회사 말이다.” “아, HW 그룹 말이죠? 거기도 마찬가지긴 할 건데 확인은 해봐야겠습니다. 제가 인사 문제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아서요.” “임원급 말고. 내가 죽고 나면 옷 벗어야 할 사장이나 임원들 중에 모자라는 자식놈 때문에 걱정인 사람들이 꽤 있어. 네가 그 부족한 자식놈들 좀 챙겨주는 게 어떨까 해서 말이다.” “할아버지께서 그 정도로 신경 쓰셔야 할 사람이라면, 없는 자리라도 만들어야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대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과거를 되짚으며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정리하는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 쓰는 것처럼 보였다. “아예 빚진 사람 명단을 만들어볼까요? 제가 몇 배로 후하게 다 갚을 테니까 염려 마시고요.” 단번에 내 말뜻을 알아챈 할아버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내 새끼지만 눈치 하나는 징그러울 만큼 빠르구나, 허허.” 이것은 다시 생각해도 절묘한 것이었다. 그 이후로 할아버지는 순양그룹의 미래에 대한 생각은 버리셨다. 나와 보내는 단둘만의 시간에는 할아버지가 주신 비자금 장부에 적힌 이름과 순양그룹 과거 인사 기록을 보며 기억을 더듬으셨다. 그중에 신세 진 사람을 떠올리기도 하고, 아직 본전을 못 찾았다며 더 우려먹어야 할 사람들을 짚어내며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미래가 아닌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하니 할아버지의 표정도 한결 밝아졌고 추억에 잠기는 시간도 길어졌다. 걱정보다는 즐거운 시간이 계속되었다. 안타깝지만 갈수록 시간이 줄어든다는 걸 확연히 느낄 만큼 할아버지는 점점 더 약해지셨다. 주무시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졌고 깨어있는 시간은 점점 더 짧아졌다. 정신을 잃으면 다시 깨어나는 데 굉장히 긴 시간이 필요했고 의사들은 초긴장 상태로 24시간 병실을 지켜야 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깨어나 계실 때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소한 일까지 또렷이 기억했고, 늘 헷갈려하던 13명의 손주들 이름은 물론이요, 나이까지 정확히 말씀하셨다. 할아버지는 기억을 몽땅 끄집어냈고, 우리는 빽빽이 적은 명단을 완성했다. “네 녀석 어깨가 무겁겠다. 그 많은 사람을 다 돌봐주려면 말이다.” “전부 다 어떻게 챙깁니까? 이 중에 성의 표시로 돈다발을 쥐여 주고 정리할 사람이 태반 아닙니까?” “그래. 그 정도로 끝내도 될 사람은 그렇게 정리하려무나.” 할아버지는 만족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다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네 어미 좀 불러 주겠니? 조용하게 말이다.” “네? 어머니를요?” “그래. 내가 네 어미에게는 지은 죄가 많아. 그 죗값을 너한테 갚으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니냐? 내가 마지막으로 정리해야 할 사람은 바로 네 어미다. 그리고 그건 직접 해야 하고. 알아들었겠지?” 언제부터였을까? 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것은? 내가 할아버지 눈에 들면서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구박한 적도, 모멸감을 준 적도 없다. 그저 며느리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며 무뚝뚝한 시아버지 모습만 보였다. 지금은 어머니의 앙금도 다 사라졌을 텐데…. 굳이 용서의 시간을 가진다는 건 어머니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를 위한 것이다. “네. 제가 내일 모시고 오겠습니다.” ======================================= [240] 하늘이 무너지는 1 “어머니. 긴장 푸세요. 할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누지 못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지려고 노력하시는 겁니다. 그냥 즐겁게 대화 나누시면 됩니다.” “알아. 하지만 이 나이가 되었지만, 아버님 앞에서는 오금이 저려 오는 건 나도 어쩔 수 없구나. 이게 무슨 주책인지 원….” 어머니는 병실 앞에서 몇 번이나 크게 숨을 쉬면서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오십을 바라보는 어머니지만 지금 모습은 마치 처음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오는 예비 신부 같았다. 조용히 병실 문을 두드리며 어머니를 모시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할아버지는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우리 서현이… 왔어?” “아, 아버님…!” 내가 깜짝 놀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머니는 얼어붙은 듯 할아버지 곁에 다가서지도 못했다. 우리 서현이라니! 할아버지가 어머니뿐만 아니라 다른 며느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게다가 이렇게 부드러운 음성이라니? 놀라고 있을 수만 없었다. 할아버지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자 어머니는 발걸음을 뗐다. 내가 있어야 할 필요를 못 느꼈다. 두 분의 눈이 이미 붉게 변한 것을 봤다. 눈물은, 서로를 향해 흘리는 눈물은 지난 시간 쌓였던 모든 것을 씻어낼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건 두 분에게 불편할 것 같아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병원 카페에 앉아 어머니를 기다렸다. 다행히 특별 병동이라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아 마음 편히 기다릴 수 있었다. 거의 두 시간이 넘어서야 어머니가 병실에서 나오셨다. “말씀 많이 나누셨어요?” “그래. 잠드시는 거 보고 나왔다.” 더는 묻지 않았다. 환하게 웃으시는 얼굴을 본 것만으로 두 시간 동안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생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또 주무세요?” “그래. 이제는 앉아서 이야기하시는 것도 어려우신가 봐. 힘들어하시는 게 훤히 보여. 어떡하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요. 우리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눈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지만 이젠 고개를 돌리면 안 된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면 그동안 발톱을 숨기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본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의 나는 발톱을 드러내기보다는 그들의 발톱에 상처 입지 않도록 튼튼한 갑옷을 입어야 한다. “어머니.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집으로 가실 거죠?” “그래.” 어머니는 내 팔을 꼭 잡았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아버님이 그러시더라. 네가 참 어려운 일을… 아니, 힘든 길을 가야 하니까 내가 지켜보는 게 힘들지 모른다고 말이야. 하지만 절대 막지 말고 널 내버려 두라고 하셨어. 대신 몸 상하지 않게 잘 챙겨주고 나 대신 널 챙겨줄 수 있는 좋은 며느릿감 빨리 구하라는 말도….” “어머니가 보시기에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제겐 별로 힘든 길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길이라서 즐겁기만 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순양그룹을 네 것으로 만드는 건데 당연히 쉽지 않은 길이겠지. 하지만 네가 원해서 선택한 것이니까 그리 걱정하지도 않아.” 어머니는 또 한 번 나를 놀래켰다. 지금도 충분하니 만족하며 편히 지내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다. “그리고 미약하지만 내 힘이 필요할 때는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해라. 엄마잖니. 어떤 말이라도 해도 되는 사람이잖아. 그렇지?” 뜻밖의 말에 마땅히 할 말이 없어 팔짱 낀 어머니의 손만 꼭 잡았다. 병원을 나와 차에 오르기 전에 불현듯 잊었던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어머니.” “응. 왜?” “십여 년 전에 땅 사놓은 거 있죠? 일산이던가? 그거 지금쯤 금싸라기 땅으로 변했을걸요? 아니, 이미 파셨나?” 당황한 어머니의 표정은 귀엽기까지 했다. * * * ― 실장님.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밤중에 걸려온 김윤석 대리의 전화를 받자마자 옷부터 챙겨 입었다. ― 병실 경호원에게 연락 왔는데 병원이 초비상이랍니다. 이번에는 좀 심각한 것 같습니다. 이미 병원장이 실장님 아버님과 이학재 실장에게 연락했다고 들었습니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실에는 불안한 표정의 경호원 한 사람만 있을 뿐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수술실…?” “네. 방금 들어가셨습니다.” 수술실로 달려가니 병원장이 보였다. “원장님!” “어? 도준아. 너 어떻게 알고…?” “그보다 할아버지는요? 많이 심각합니까?” 병원장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수술 끝나는 대로 가족분들께 연락드려야 하지 싶다. 만약 깨어나신다고 해도 48시간? 길어야 삼사일일 거야.” “못 깨어나시면요?” 이미 각오했지만 직접 말을 들으니 몸이 떨렸다. “선택해야겠지. 삽관해서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느냐, 아니면 편히 보내드리느냐를 말이다.” 다리가 풀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는 뜻이 바로 이런 것이었나?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다시 정신을 차린 건 급히 달려온 아버지와 이학재 실장이 내 어깨를 두드렸을 때였다. “아, 아버지. 실장님.” “일찍 왔네. 좀만 있어. 원장님과 이야기 좀 하고 올 테니까.” 아버지는 병원장과 잠시 자리를 비웠지만, 이학재 실장은 내 곁에 앉았다. “이미 이야기 들었겠구나.” “네.” “회복은 힘들겠지?”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이자 이학재 실장은 긴 한숨을 쉬었다. “젠장, 아직 못다 한 말이 좀 남았는데….” “무슨 말이든 할아버지는 이미 아실 겁니다.” “살다 보니 네가 날 위로할 때도 있구나.” “저도 그렇게 믿고 싶으니까요.” 이 실장은 나를 슬쩍 보더니 등을 한 번 툭 쳤다. “그래. 회장님은 우리 마음 다 아실 거라고 믿자.” 한동안 우린 아무 말 없이 자리만 지켰다. 수술실에 들어갔지만 살리기 위한 수술을 하는 게 아니라 응급 처치 수준이 전부라는 걸 안다. 병원장이 말한 할아버지의 남은 시간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도준아.” “네.” “각오 단단히 해. 회장님 돌아가시면 진영기 부회장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알고 있습니다.” “아는 정도로 안 돼. 필요하다면 계열사 지분을 쓸어 담는다 생각하고 돈을 쏟아부어야 할지도 몰라.” “혹시 뭔가 들으신 게 있습니까?” “너부터 쫓아내고 두 사람이 회장 자리를 놓고 싸우려나 보더라. 회장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지주회사 체제로 변환하려고 머리 쓰고 있어. 그렇게 되면 네가 가진 지배지분은 일개 비상장 회사의 주식에 지나지 않아.” 지금 이런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할아버지는 죽음이 코앞까지 왔는데도 그룹만 생각하시지 않았나? 나도 그래야 한다. 할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미뤄서는 안 된다. “혹시 직접 들으신 겁니까?” “그래. 지주회사로의 전환 방법을 물어보… 아니 도와달라고 하더라.” “제게 전부 말씀하시는 걸 보면 거절하셨군요.” 이 실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넌 내게 순양그룹 회장 자리를 준다고 했는데 그 양반들은 고작 순양전자 사장 자리를 준다더구나. 그래서 흥미를 잃었어.” 피식 웃는 그의 얼굴에서 또 다른 감정이 있음을 알았다. 자존심 상하는 모멸감을 느꼈나 보다. 전자가 아무리 그룹의 주력 회사라 해도 일개 계열사 사장이다. 할아버지를 대신해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휘두른 사람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자리가 분명하다.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가 내 약속을 확답받고 싶어서는 아니다. 이 사람은 할아버지가 안 계신 순양그룹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아무런 결정을 못 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더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군요. 여차하면 총알을 퍼부을 준비도 하고요.” “나도 약속했다시피 이 상태를 고수하는 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마. 그게 회장님 유지를 받드는 거니까.” “그 정도만 해 주시는 것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며 이 사람의 마음을 엿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복도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며 두 사람이 다가왔다. 병원장과 함께 나타난 아버지는 참담한 표정이었다. “형님. 식구들을 다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을 때 이학재 실장은 머리를 저었다. “회장님 수술실에서 나오시면 결정하자. 그래도 늦지는 않을 거야. 안 그렇습니까?” 이학재 실장이 병원장에게 묻자 그도 머리를 끄덕였다. “차이 없습니다.” 변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48시간. 할아버지가 숨 쉬는 시간이다. 우리는 수술실 앞에서 시간을 잊고 기다리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몇 시간은 기다렸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수술실을 나오는 의사들은 굳은 표정만 보일 뿐 아무 말도 없었다. 병원장이 의사들과 몇 마디 나누더니 아버지께로 와서 머리를 슬쩍 저었다.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사장님.” “오늘… 밤?” “모릅니다. 말씀드렸듯이 길어도 48시간입니다.” 우리는 힘없이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소마스크를 쓴 할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가쁘게 숨만 쉴 뿐이다. 주무시는지, 정신을 잃으셨는지 아니면 정신은 멀쩡한데 몸을 가눌 수 없는 건지 우리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냥 곁에서 꺼져가는 생명을 바라만 볼 뿐이다. 아버지는 휴대전화를 들고 큰아버지들께 연락하기 시작했고 이학재 실장도 어디론가 끝없이 통화 중이었다. 두 사람은 통화가 길어지자 아예 병실 밖으로 나갔다. 의사와 간호사는 침대 옆의 의료 기기를 보며 계속 체크했다. “선생님. 아주 잠깐이라도 깨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의사는 난처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힘들지 싶습니다.” “그럼 이대로…?” “아마도요. 죄송합니다. 이런 말밖에 못 드려서….” “아닙니다. 선생님 잘못도 아닌데 괜히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차트를 든 의사는 가볍게 머리 숙이며 양해를 구했다.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마저 나가버리니 나 혼자 텅 빈 병실에 남았다. 산소마스크 사이를 뚫고 나오는 할아버지의 가쁜 숨소리는 지켜보는 내 마음을 찢어놓았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타고 계속 흘렀다. 깡마른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뺨을 닦으려 할 때 할아버지의 손이 꿈틀했다. 내 손을 마주 잡으려 하시는 것 같았다. “으… 으… 허….” 반쯤 눈을 뜬 할아버지를 보고 의사를 부르기 위해 일어나려 했지만 내 손을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고개를 자꾸 흔들며 한쪽 손으로 힘겹게 마스크를 툭툭 건드리는 걸 보니 답답하신가 보다. 산소마스크를 살짝 들어 올리자 마른 입술 사이로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 도준…아….” “네. 할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 꽉 잡은 두 손에 힘을 주며 할아버지 얼굴에 닿을 듯 가까이 갔다. “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안간힘을 쓰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더는 보기 힘들었다. “할아버지. 아무 말씀 마세요.” 손에 쥔 산소마스크를 다시 대려고 하자 할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주 조금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 또다시 말씀하셨다. 느릿했지만 아주 또렷하게 들렸다. 마치 유언처럼 말이다. “단 하나도 뺏기지 마.” 마주 잡은 할아버지의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악당으로 살아.” ======================================= [241] 하늘이 무너지는 2 할아버지는 다시 태어난 이번 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다. 내게 많은 기대를 했고 난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많은 것을 받았다. 생이 끝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도 나를 위한 것이다. 이 사실이 그룹의 지배지분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정신을 잃으신 할아버지를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 만났을 때 환히 웃으며 나를 안아 올렸던 그 모습. 전국 10위의 수능 성적을 온 동네 자랑하시던, 그냥 평범한 할아버지와 다를 바 없던 모습. 10억 달러를 내밀었을 때 감격하던 그 모습. 아진그룹을 내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시던 모습. 이런 과거의 기억이 죽음을 눈앞에 둔 지금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시야가 흐릿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병동을 울린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 같다. 난 그들이 들어서기 전 병실을 벗어나야 한다. 어차피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봐야 할 사람은 손자가 아니라 자식들이니까. 병실 복도에 서서 달려오는 큰아버지들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병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버지!” 자식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밖에서도 다 들렸다. 아직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차라리 놀라서 정신이 드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복도 끝의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병원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사나운 형제들에게 다시 한 번 진 회장의 상태를 설명했다.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 시간이 많은 건 아닙니다.” “회복 가능성이 없다?” “…네.” 병원장은 혹시나 또 소리 지르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진영기 부회장은 눈을 감으며 머리를 떨궜다. “다들 모이셨으니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이 상태라면 회장님은 48시간을 넘기기 힘듭니다. 원하신다면 좀 더 강제적인 의료 장치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만….” “삽관 같은 거 말이요?” 진동기 부회장이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네. 하지만 평소 회장님께서는 그런 물리적인 장비는….” “하지 마.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가시도록 해.” 진영기가 단호하게 말했다. 병원장의 권고가 아니더라도 가는 길을 억지로 늦추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당부를 모두 기억한다. “네. 알겠습니다.” 병원장은 조용히 병실을 떠났고 담당의는 병실 구석에서 조용히 대기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직 연락 안 돼?” 진서윤이 세 오빠를 향해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어머니가 연락 안 되면? 수행원이라도 있을 거 아냐?” “수행하는 놈들도 연락 두절이다. 아버지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전화 받으신 게 끝이야.” 진동기의 한숨 섞인 말에 진서윤은 진영기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큰 오빠. 비서실 애들이라도 보내서 찾아야지! 그리고 혜경이는? 그 기집애가 어머니 곁에 딱 붙어 있지 않아? 딸도 연락 안 돼?” “스위스 별장에서 나가신 것까지만 확인했다. 그 뒤로 그 애도 전화 안 받아. 어머니가 막은 것이겠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이러다 아버지 임종도 못 보시면 어떡해?” 진영기는 날카롭게 소리 지르는 진서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임종 안 보시려고 전화 피하는 거, 몰라서 그래? 그리고 넌? 도대체 엄마 전화번호도 모르는 딸년이 어딨어? 그 주제에 어디서 큰소리야? 큰소리는!” “목소리 좀 낮추자. 지금 그따위 소리가 나와?” 진동기는 두 사람을 향해 말하며 한숨만 쉬었다. 아버지를 극도로 증오하며 경멸하는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임종은 지키지 않아도 좋다. 제발 장례식 전에만 나타나기를 빌었다. 장례식 때는 가족만 있는 게 아니다. 카메라까지 동원되어 전 국민이 지켜볼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강지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또 무슨 억측이 돌지도 모르며, 엉뚱한 소문이 찌라시로 돈다면 그보다 더한 집안 망신도 없다. 제발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기를 빌 뿐이다. 그나마 크게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어머니도 체면이라는 걸 굉장히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장례식 때는 슬픔에 잠긴 아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저기, 의사 양반.” “아, 네?” 구석에 서 있던 담당의가 화들짝 놀라며 진동기 부회장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잠깐 자리 비울 시간 정도는 있겠지?” “네?” “한두 시간 안에 큰일이 생기겠느냐 묻는 거야. 괜찮겠지?” “네.” 무의미한 질문이라 담당의도 건조하게 대답했다. 정신을 잃은 이 상태에서 깨어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단지 숨을 쉴 뿐이다. 임종의 순간을 꼭 지켜봐야 할 이유가 없다. 진동기는 의사의 대답을 확인하자 형인 진영기에게 눈짓했다. 병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담배 하나씩 물었다. “어머니는 진짜 연락 안 돼?” “나도 미치겠다.” 진영기는 두어 번 연기를 들이켜더니 담배를 내팽개쳤다. “왜? 통화는 했어?” “넌?” “내 전화는 아예 안 받아. 그래도 어머니는 장남이라고 형님 말은 좀 듣잖수.” “몇 번 받으시긴 했어. 그런데 늘 같은 말이야. 그 영감탱이는 명이 질겨서 쉽게 안 죽는다고. 때 되면 갈 테니까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 “이번엔 오셔야 하는데….” 동생이 무슨 마음인지 아는 진영기는 한숨 쉬며 말했다. “아까 연락받았을 때 일단 문자는 넣었어. 하루를 넘기기 힘들 거라고 했으니까 비행기 타셨을 거야. 그 정도 눈치는 있으시잖아.” “꼭 오셔야 하는데…. 잘못하면 진짜 집안 망신인데….” “어쩌면 아버지 죽음은 유야무야 묻힐지도 몰라.” “응?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진동기는 뜬금없는 형님의 말에 눈이 커졌다. “요즘 시끌시끌하잖아. 대통령 때문에.” “그거랑 우리가 무슨 상관이야? 대선자금 문제는 거의 다 가라앉았는데.” “어쩌면 탄핵당할지도 몰라.” “뭐? 탄핵?” “그래. 저쪽에서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다. 기회만 노리고 있던 중에 꼬투리 하나 잡은 거지.” “설마? 그 정도로 탄핵을? 가능하겠어?” 어림없는 소리라는 듯 눈살을 찌푸린 진동기는 머리를 조금 흔들었다. “탄핵 상정안의 국회 통과는 자신하더라. 여당이 갈라지면서 지금 야당 의원 수가 압도적이니까 말이야.” 진동기는 점점 더 힘이 커져가는 진영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런 고급 정보를 자신에게 전해주는 놈이 없다. 여의도 국회에 꽂아놓은 의원이 한둘이 아니지만 정작 중요한 정보는 순양의 장남에게만 들어간다. 아닌 게 아니라 형의 말대로 장례식이 끝나면 외형적으로는 맏아들인 진영기의 위치가 더욱 공고해질 것만 같아 자꾸 불안해졌다. “그래 봤자 대통령 직무정지로 끝날 것 같은데? 정말 그대로 정권이 끝나지는 않을 거야.” 자신의 말에 싱긋 웃는 진영기를 보자 아차 싶었다. 형은 다른 생각이 있고 자신은 그 생각을 읽어내지 못했다. 또 잘난 척하며 자신을 깔보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설마 생각해둔 사람이라도 있어? 정권을 확 바꿔버리게?” 놀란 진동기의 질문에 진영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관심 없어. 알아보니까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헌법재판소에서 맥시멈 6개월을 끌 수 있다더라.” 그제야 진동기는 형의 속뜻을 알아챘다. “혼돈의 6개월이 되겠구먼.” “그래.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야. 곧 총선도 있잖아. 세상의 이목은 아버지의 죽음보다 청와대와 여의도로 쏠릴 게 분명해. 우린 이때를 놓치지 말고 우리 계획을 속전속결로 진행하는 거야.”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을 6개월이다?” “그렇지. 이 기회를 절대 놓치면 안 돼.” “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셈인가?” “장례식 때 우리가 필요한 사람 대부분이 조문 올 거야. 그때 이야기 끝내야 해.” 형제는 서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잠시 보였지만 곧바로 지웠다. 웃음은 감춰야 할 때 아닌가? “들어갑시다. 곁은 지켜야지.” * * * 속속들이 병원에 도착했다. 며느리들도 한껏 긴장한 얼굴을 한 채 병실로 들어갔고 곧이어 계열사 사장 몇몇이 도착했다. 그들은 병실에 들러 할아버지의 상태만 확인하고 밖으로 나와 이학재 실장을 찾았다. 임종은 가족의 몫이다. 손자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장손인 진영준이었다. “아, 형님.” “어? 도준아. 역시 일찍 왔네.” 난 그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꽤 오랫동안 못 본 사이 풍기는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서른 중반으로 넘어가는 나이와 회사에서의 직책 때문인지는 몰라도 철부지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할아버지는 좀 어떠셔?” 내가 고개를 살짝 젓자 그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흠…. 오늘…?” “아마도.” “가자.”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병실로 들어갔다. 넓은 특별실이 꽉 찼고 난 한쪽 구석에 자리 잡았다. 진영준은 사람들을 헤치며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사촌들이 계속 도착하면서 병실이 비좁아지자 자식들만 남고 나머지는 복도로 나왔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숨결을 함께하지 못하는 슬픔이 가슴을 짓눌렀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길어지기를 바랐지만 내 염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 흑흑.” 병실에서 울음과 탄식이 터지자 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의사가 산소마스크를 떼자 할아버지의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완벽하게 무표정한 얼굴. 차마 그 얼굴에 손을 댈 수 없었다. 고모가 할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으며 통곡하기 시작했고 난 반쯤 나간 정신을 꼭 붙잡고 할아버지 곁으로 발을 끌었다. 침대를 에워싼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는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고통스러운 죽음이 아니었기를. 단 한 순간도 회한의 시간이 없었기를. 팔십 넘게 살아온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시간은 단 일 초도 없었기를.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한동안 병실 안은 울음과 통곡 소리만 메아리쳤다. 그리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나왔고 그 소리를 신호로 통곡 소리도 잦아들었다. “하, 할머니.” 손주들 중 한 명이 병실 입구에 서 있는 할머니를 발견하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어, 어머니!” “엄마! 왜 이리 늦었어? 아버지 임종은 지켰어야 하는 거잖아!” “안 늦었다. 딱 맞춰 온 거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리치는 고모와는 달리 할머니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차가운 표정이었다. “어머니! 지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엄마! 지금 그게 할 말이야?” 큰아버지와 고모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할머니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말했다. “그 인간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지 않아. 그러니 제시간에 온 게지.” 난 내 귀를 의심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증오한다는 건 알지만, 이게 고인이 된 분 앞에서… 그것도 자식과 손주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할 말인가?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나를 발견한 할머니는 손을 들어 가리키며 말했다. “네놈이 왜 여기에 있어?” 할아버지의 죽음보다 나를 보는 것이 더 힘든지 손끝을 떨고 있었다. ======================================= [242] 하늘이 무너지는 3 할머니는 병실 안을 휙 둘러보더니 눈살을 확 찌푸렸다. “딱 맞춰 온 게 아니구먼. 내가 저런 것들을 또 봐야 하다니….” 할머니가 말한 저런 것들은 바로 나와 상준 형 그리고 내 어머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눈물로 얼룩진 아버지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지며 소리쳤다.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차마 큰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의 마지막 인내심 때문일 것이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전부 모자란 놈들만 득실대는구먼. 누구 핏줄 아니랄까 봐 어찌 이리 한심할꼬.” 할머니는 쯧쯧 하며 혀를 차며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차가운 눈길을 보냈다. “장례는 집에서 지내라. 조문객은 엄격히 가려 받고 번잡한 일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고.” 할머니는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병실을 나섰다. “참, 영기, 동기는 필요한 거 지시하고 집으로 와. 내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할머니는 진영기 부회장의 맏딸인 진혜경에게 눈짓하고 나가버렸다. 진혜경은 모두를 향해 머리를 꾸벅 숙이고 재빨리 따라가 버렸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났고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할머니의 뒤를 쫓으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의 팔을 붙잡았고 둘째 큰아버지도 아버지의 앞을 막아섰다. “윤기야. 오늘은 참아. 제발 오늘만은….”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던 아버지가 힘을 풀었다. “큰형!” 아버지는 진영기 부회장을 향해 소리쳤다. “아버지 입관하는 거 어머니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도록 해야 해. 안 본다면 끌고 와서라도 꼭! 형이 책임져.” 입관은 시신을 관 속에 넣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관 뚜껑을 닫기 전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의미다. 미우나 고우나 한평생을 함께했던 남편에 대한 예의는 저버리지 말라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첫째 큰아버지는 힘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처구니없는 할머니의 행동에 울화가 치밀었지만,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억눌렀다. 할머니를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직 귓가에 생생히 남아 있다. * * * 특별 병동 회의실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눈코 뜰 새 없는 5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지?” 진영기가 맏상제로서 회의를 주도해 나갔다. 형제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지만, 급히 달려온 주력 계열사 사장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부회장님. 전경련에서 경제인 장으로 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입니다. 물론 회장님 장례는 전적으로 자제분들의 의견에 따라야겠지만, 각계각층의 의견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맞습니다. 솔직히 사회장도 어렵지 않습니다. 회장님의 생애가 바로 한국 경제의 역사 아닙니까? 조금도 무리한 일이 아닙니다.” 진영기는 두 사장의 말을 들으며 진동기의 표정을 살폈다. 무표정하게 앉아 있지만, 이 의견을 내도록 조정한 것은 저놈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장남인 자신이 노출되는 것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한 꼼수, 바로 그것이다. 사회장은 국장, 국민장 다음으로 예우를 갖추어 거행하는 장례다. 비록 정부에서는 장례 절차와 방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지만, 고인의 업적을 감안하여 훈장을 추서하기도 한다. 또한, 사회장은 각계각층의 사회단체 중진들이 모여 부서를 정하고 위원을 선출하여 장의위원회를 구성하고 계획을 세워 장례를 집행한다. 이때 장의위원장은 고인의 장남이 아니라 가장 중량감 있는 원로가 맡기 마련이다. 순양그룹 회장이라면 적어도 전직 총리급이 물망에 오른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장남인 자신이 아니라 위원들을 향한다. 조용히 장례를 치르면서 일을 도모하자고 말했을 때 머리를 끄덕였던 동생의 모습은 가식이었다. 진영기는 별다른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 시도는 불발이다. 어머니도 가족장이라고 못 박았고 나머지 형제들도 가족장을 원한다. 무엇보다도 고인이신 진 회장의 뜻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막내인 윤기가 알아서 나서준다. “사장님들 뜻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원하시는 길이 아닙니다. 조용히 생을 정리하시겠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가족장으로 치르겠습니다.” 단호한 진윤기의 말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진동기도 볼이 조금 씰룩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진영기는 좌중을 쓱 둘러보고 결론을 내렸다. “그럼 가족장으로 하겠습니다. 언론 발표는 내일 할 테니까….” 진영기는 이학재 실장을 힐끗 본 다음 바로 자신 뒤에 서 있는 비서실장인 백준혁을 보며 말했다. “백 실장이 차질 없도록 준비해. 참, 집 앞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취재하는 것도 막아. 조문 오는 손님들 불편해하신다.” “네, 부회장님.” 이학재는 웃음이 나는 걸 참아야 했다. 노골적인 배제…. 이젠 자신은 그룹의 일에서 빠지라는 신호이며 그룹 비서실장이라는 이름을 반납하라는 명령이기도 했다. “그리고 전략실 직원 전부 차출해서 장례 기간 동안 조문객들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 “네.” 진영기는 자신의 지시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마치 그룹의 회장 같지 않은가? “아, 그룹 본관 로비와 계열사 사옥 그리고 지방 사업장에도 분향소를 준비하는 게 좋겠죠?” 가만히 있던 진동기가 계열사 사장들을 향해 말하자 모두 당연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장님들께서는 우리가 부고를 빠트려서는 안 될 분들 명단 좀 만들어 주십시오. 혹시 모르니 이중 체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동기는 갑자기 생각난 듯 막내를 향해 말했다. “윤기야. 네게 부탁 하나만 하자. 넌 유명 연예인들 많이 알 테고 그 사람들도 조문을 빠질 수는 없는 관계잖아.” 미디어 엔터테인먼트의 큰손인 진윤기라면 초상집이 영화제로 돌변하는 건 순식간이며 레드카펫만 없을 뿐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줄을 이어 등장할 것은 뻔하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 제작사나 기획사 사장들만 조문 오도록 할게. 배우들은 화환 정도만 받고.” “그래. 이해해 줘서 고맙다.” “아냐. 나도 생각하고 있었어. 아버지 장례를 언론 경제면과 사회면이 아니라 연예란에 실리게 할 수는 없지.” 그들이 장례식에 관한 이야기를 한창 나누었을 때 병원장이 들어와 조심스레 말했다. “회장님 시신… 자택으로 옮길 준비를 끝냈습니다.” 진영기가 먼저 일어섰다. “그럼 이만 끝내고 집에서 봅시다.” * * * 『순양그룹 진양철 회장이 지난밤 노환으로 사망했다고 오늘 아침 순양그룹 측이 공식 발표했습니다. 진양철 회장의 타계는 순양 임직원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CNN과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해외 언론들도 진양철 회장의 사망 소식을 긴급 뉴스로 보도했으며 해외 주요 언론들도 진 회장의 사망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었습니다. 경제단체들, 그리고 주한미국 상공회의소까지 국내외 재계는 진양철 회장의 타계를 깊이 애도하는 분위기입니다. 또한, 창업자를 잃은 순양 사옥 주변에는 오늘 검은색 정장의 물결이었습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국회는 오늘도 대통령 탄핵에 대한 찬반 논의로 뜨겁습니다….』 아침 첫 뉴스는 할아버지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예전 대현그룹 주영일 회장 때처럼 하루 종일 소식을 전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단순한 소식이지만 대통령 탄핵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말만 무성하던 대통령 탄핵이 실제 눈앞으로 다가오자 모든 언론의 카메라는 국회와 청와대로 향했을 뿐, 순양그룹으로 방향을 돌릴 카메라는 몇 개 남지 않았다. TV를 끄고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정신이 없었지만, 꼭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잠시 집으로 돌아왔고, 초인종 소리와 함께 검은 정장 차림의 김윤석 대리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실장님.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 와중에 일 이야기를 해야 하니 제가 면목이 서질 않는군요.” “아이고, 아닙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전략실 소속 직원들 전부 동원했죠?” “네. 회장님 가족분들 서포트하던 여직원들까지 전부 회장님 자택으로 달려갔습니다.” “김 대리는 그 직원들과 관계를 계속 유지했죠?” “물론입니다. 실장님 지시대로 그놈들에게 인심 잃지 않으려고 때마다 밥 사 주고 술 사 주고 차비도 쥐여줬죠.” 김윤석의 자신 있는 태도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그럼 그 직원들에게 장례 도중에 누가 누구를 만나는지 전부 확인하도록 하세요. 단순한 조문은 필요 없습니다. 분명히 밀담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특히 두 부회장과 독대하는 사람들 명단은 꼭 작성하도록 하세요.” “얼마나 오래 밀담을 나누었는지도 확인해야겠죠?” “그것까지 확인한다면 금상첨화죠.” 길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때 김윤석 대리가 내 눈치를 보며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저기, 실장님. 차라리 말입니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요. 괜찮으니까.” “차라리 방마다 도청장치를 달아 놓는 건 어떻습니까? 그게 더 확실하지 않을까요?” 언뜻 보기엔 아주 좋은 생각이지만 할아버지를 모르니까 이런 말을 한다. 그분의 꼼꼼함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정도다. “그건 안 됩니다. 매일 두 번씩 보안 요원들이 집 안을 싹 점검합니다. 도청은 불가능해요.” 수많은 사람들이 서재와 거실에서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 그 대화는 밖으로 새어 나가서도 안 되고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내용이 태반이다. 집안일 하는 사람에게 거금을 안겨주고 도청장치를 숨겨 놓으려는 시도는 아예 원천 봉쇄한 것이다. “아, 그렇군요. 제가 괜한 말을….” “아닙니다. 앞으로도 아이디어가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말해요. 지레 생각하지 말고.” “네. 그럼 전 나가서 연락 돌리겠습니다.” “그래요. 수고하세요.” 김 대리가 나가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잠깐 쉬었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우병준 상무도 검은 넥타이를 매고 집 안으로 발을 디뎠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본관 분향소를 다녀오셨습니까?” “네.” “굳이 그럴 필요 없었는데…. 저랑 같이 할아버지를 뵈어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장소가 중요하나요? 제 마음만 회장님께 전달하면 됩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항상 무표정하고 딱딱한 그였지만 오늘은 달라 보였다. 눈물을 흘렸는지 충혈된 눈을 깜박였다. “나중에 저랑 같이 묘소에 갑시다. 제가 매일 문안 인사 드린다고 약속했거든요.” “네. 그렇게 하죠.” 그제야 옅은 미소를 보였다. “참, 지시하실 일이라는 게 뭔지 말씀하십시오. 실장님도 빨리 빈소를 지키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 숨을 한 번 들이켜고 말했다. “할머니를 조사하세요. 특히 미술품 구매와 판매를 중심으로 샅샅이 뒤져봐요. 그 바닥 구린 건 널리 알려진 사실 아닙니까?” 할머니를 용서하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한다. 그 말씀에 따라 나를 죽이려 했던 일은 용서한다. 또한, 악당으로 살라는 유언도 기억한다. 나와 내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주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 모름지기 악당이라면 처절한 복수가 제격 아니겠는가? 비록 복수의 대상이 친할머니라고 해도 말이다. 핏줄마저 냉혹하게 대할 때 비로소 악당이 되는 법이다. ======================================= [243] 五日葬 1 할머니 뒷조사를 듣고 놀랄 법도 하건만, 우병준 상무는 변함없는 모습이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대뜸 부정적인 반응부터 보인 건 그가 나를 위해 일한 뒤로 처음이다. 그만큼 힘든 일인가? 아니면 할머니라서 부담되는 건가? “어려운 건 일입니까? 대상입니까?” “대상을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미술품 거래 파악이 어려운 일입니다.” 우병준도 사람이구나 싶어 이 와중에 슬쩍 웃음이 났다. “엄살 아닙니다.” 내 웃음을 오해했는지 표정이 더 굳어졌다. “고가의 예술품 거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료를 찾아내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은밀한 거래도 많고 오로지 캐시만 주고받는 거래도 부지기수입니다.” “혹시 사람을 조사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네. 거래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거래 내용을 파악해야 하니까 어렵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입을 열게 하는 건 돈과 폭력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죠.” 우병준이 조금 놀란 표정이다. 내 입에서 정답이 나올 줄 몰랐을 것이다. 난 정반대의 경우였다. 돈과 폭력으로 사람의 입을 닫게 만드는 것이 내 업무였다. 임신한 여자, 폭행당한 남자, 교통사고 뺑소니, 마약 등등. 당사자의 입에 자물쇠를 채웠고 담당 수사관의 입에 돈을 물렸다. 눈치를 챈 기자의 집으로 고가의 선물을 보내 소리가 멀리 퍼지는 스피커를 껐다. 입을 열게 하는 것과 닫게 하는 것은 똑같은 일이다. “잘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폭력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네. 대신 폭력을 사용하는 인간을 고용하죠. 그것도 쉽게 꼬리를 자를 수 있는 놈을 써야 합니다.” “그것 역시 돈으로 가능한 일인데…. 힘들다고 하신 건 폭력을 적절히 잘 쓰는 인간이면서 꼬리 쳐내기도 용이한 사람 구하기가 어렵다는 뜻이군요.” “머리도 잘 돌아가야 하니까요. 머리 나쁜 놈이면 엉뚱한 질문에 엉뚱한 답만 듣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저쪽에도 힘쓰는 애들 많습니다. 서로 각목질 오갈 테고 충돌 일어나면 무마하는 것까지….” 이상하리만치 사족이 많다. 평상시의 우병준이라면 어렵다 할지라도 ‘알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좀 걸릴 겁니다.’라는 짧은 대답으로 끝낼 사람 아닌가? 혹시? “이미 뭔가를 아시는군요. 맞습니까?”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우병준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이 사람은 당황하면 눈을 자주 깜빡거린다. “눈치 빠른 분이라는 걸 잠시 잊었습니다.” 당황한 그를 더 난처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세한 건 묻지 않겠습니다만 힘들어도 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 일입니다.” 우 상무의 깜박거리던 눈이 멈췄다. “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필요 자금은 충분히 지원하겠습니다. 일단 10억을 오늘 중으로 제 오피스텔에 놔두겠습니다. 가져가십시오.” “알겠습니다. 실장님.” 우 상무가 떠나고 나도 빈소가 차려진 할아버지 집으로 출발했다. * * * 진 회장의 세 아들이 이제 주인 없는 서재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의 체취가 사라지기도 전에 그들의 어머니가 떡하니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 하고 싶었으나 초상집에서는 큰 소리 내는 법이 아니니 모두 마음을 다잡았다. “연락도 없이 언제 들어오셨습니까?” “일주일쯤 됐다.” “전화라도 받으시지….” 진상기가 불만스럽게 말하자 그녀는 아들의 입을 막았다. “지난 얘기는 그만하고…. 넌 도대체 그동안 뭘 한 게야?” 그녀의 시선이 장남에게 꽂혔다. “무슨 말씀입니까?” 진영기는 어머니의 질책이 짜증 나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 맹랑한 놈이 아직 회사에 어른거리냐는 말이다.” 모두 그 맹랑한 놈이 바로 진도준이라는 걸 안다. “그룹에서 그놈 하나 들어내는 게 그리 힘들더냐? “어머니. 그룹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괜한 데 신경 쓰며 기력 잃으실 필요 없어요.” 팔순 넘은 노인치고는 기력이 넘치는 어머니지만, 환갑이 다 돼가는 자식들은 어머니의 간섭과 잔소리가 곱게 여겨질 리가 없다. “한심한 인사들 같으니라고…!” 자식들의 얼굴에 훤히 드러나는 불만과 짜증을 읽은 이필옥 여사는 눈꼬리를 치켜들었다. “그놈이 네 아비의 순양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데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한단 말이냐?” “어머니. 우리도 이미 대책을 세웠고 아버지 장례가 끝나는 대로 추진할 겁니다. 그럼 도준이는 그룹에 발도 못 디뎌요. 그러니 우리에게 맡겨두세요.” 진동기는 일 초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밖에서는 빈소를 차리느라 정신없는데 아버지 장례는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어머니가 못마땅할 뿐이었다. “형님. 그건 또 무슨 말이요? 대책이라니?” 조용하던 진상기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긁어 부스럼이라더니…. 어머니 때문에 괜한 말을 꺼내 아무것도 모르는 셋째까지 나서게 됐다. “너도 곧 알게 될 거다. 따돌릴 생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어. 아버지는 널 그룹에서 빼버렸지만 우린 다르다. 아무튼…. 큰일 치르고 자세히 알려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진영기가 타이르듯 셋째를 향해 말했을 때 이필옥 여사는 분통을 참지 못하고 책상을 탕 내리쳤다. “이런 한심한 놈들! 이렇게 천지 분간도 못 하는 놈들이니 저 영감이 그 어린 도준이 놈을 끼고 살았지!” “어머니. 진정하시고 언성 낮추세요. 밖에 아랫것들이 다 듣습니다.” 장남이 달래듯 말했으나 소용없었다. “상기 너! 말해봐. 네 애비가 개인 재산 전부를 네게 줬다지? 그게 얼마나 되든? 일조 원이 넘든? 부동산은? 빌딩 수십 채와 수백만 평의 땅이라도 받았어?” 느닷없는 어머니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눈을 피하는 진상기를 보자 두 형들이 재촉했다. “뭐야? 너 왜 그래?” “말해봐. 얼마야? 설마… 깡통인 거냐?” 이필옥은 이런 모습의 아들들을 보며 혀를 찼다. “밖에 누워 있는 저 인간이 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모았어. 설마 네놈들이 받은 주식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거냐? 멍청한 놈들.” “그럼 개인 재산 전부를 도준이에게 줬다는 말입니까?” 진상기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럼? 누가 가져갔겠어? 두 형들이? 아니면 내가? 서윤이가? 꼭 먹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알아채는 거냐?” 이필옥 여사는 놀라서 서로 눈만 끔뻑거리는 아들들을 한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천하에 근본도 모르는, 얼굴에 분칠이나 하며 살던 천한 년이 내 귀한 막내를 홀려서 낳은 자식 놈이다. 그런데 하필 그놈이 너희들 애비의 성정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어. 음흉하고, 욕심 많고 독하고….” 이필옥은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그러니 저기 누워 있는 인간이 그놈을 금이야 옥이야 챙겼던 게야. 자기랑 똑같은 놈이니까 말이다.” 세 아들은 어머니의 따끔한 질책에 아무 말 못 하고 머리만 숙였다. “천한 년이 내 아들을 가져가더니, 이젠 그 천한 년 피가 섞인 천한 놈이 우리 순양그룹까지 가져가게 생겼는데… 너희는 마음 풀고 앉아서 서로 회장 되겠다고 싸움질이나 하고 있어? 제정신이냐!” 이필옥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가슴을 탕탕 쳤다. “두말할 필요 없다. 장례 치르고 나면 영기 네가 회장 자리에 앉아. 동기는 군소리 말고 네 형을 따라. 너희 둘의 지분이면 아무 문제 없지 않으냐? 그다음, 도준이 놈이 차지한 금융 계열사를 장악해. 대표이사부터 임원들 전부 너희 사람들로 앉히면 끝나는 일이다. 이렇게 쉬운 일을 네놈들은 서로 견제하느라 놓친 것이야!” 진영기는 갑자기 어머니가 좋아졌고 고마웠다. 이렇게 든든한 아군이 생길 줄이야! 하지만 진동기는 더욱 표정이 굳어졌다. 일시적인 회장 직책을 오래도록 내놓지 않을 것이다. 이젠 어머니까지 등에 업었으니 말이다. “왜 대답이 없어?” 진동기는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새롭게 지분 조정을 끝낼 때까지 형님이 회장 자리에 앉도록 협의했습니다.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어머니.” “그래? 그거 잘했구나.” “아무튼, 그룹 일은 형님과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관심 끊으시고 장례 치를 동안만이라도 슬픈 표정 좀 지으세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진동기는 짧게 한숨 쉬고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이 그를 붙잡았다. “내가 지분이 좀 있다. 그리고 이리저리 모은 돈도 꽤 많아. 너희가 하는 거 봐서 내 마음에 쏙 드는 놈에게 몰아서 줄 생각이다. 동기 네가 그걸 다 쥐면 네 형도 널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다.” 지분? “어, 어머니….” 당황한 진영기가 더듬거렸을 때 이필옥은 자식들의 입을 막았다. “내가 팔십 넘게 네 아버지와 살면서 빈털터리라고 생각했어? 돈을 어떻게 빼돌리고, 확보한 지분 어떻게 숨기는지 훤히 다 봤다.” “지, 지분이 얼마나 됩니까?” 진영기가 다급하게 묻자 이필옥은 웃음만 보였다. “부모도 가진 재산이 있어야 대접받는 세상이라지? 이제야 너희들도 이 에미의 말을 귀담아듣겠구나.” 이필옥 여사는 진 회장의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가진 지분이 그리 많지는 않아도 지분과 돈을 합치면 저울을 움직일 수 있는 추 하나는 될 게다. 집안 곳곳에 묻은 천한 것들 흔적을 말끔히 지워. 그럼 내가 가진 전부를 줄 테니까. 알아들었으리라 믿는다.” 이필옥은 아들들의 간절한 눈빛을 못 본 체하며 서재를 나갔다. * * * 빈소에는 일하는 사람 몇 명이 화환을 정리할 뿐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방금 영빈관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봤는데, 나머지 상주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새로운 향 하나를 올리고 조용히 물러나 텅 빈 빈소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 혼자 빈소를 지키는 모습을 할머니가 보기라도 하는 날엔 경건해야 할 이 자리가 다시 소란스러워진다. 장례 끝날 때까지는 부딪히지 않도록 노력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서재 문이 열리며 할머니가 나왔다. 그녀는 빈소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이 층으로 올라가 버린다. 왜?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서재에 왜 들어갔을까? 저곳은 이미 말끔히 치웠다. 자료 대부분은 태워버렸고, 꼭 필요한 서류는 각 계열사로 옮겼다. 남은 건 서가를 장식하는 책과 할아버지가 받았던 상패와 트로피가 전부다. 서재를 보며 추억에 잠길 분은 아니다. 혹시나 해서 서재로 가까이 가자 아니나 다를까 세 분의 큰아버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또 무슨 모의를 꾸미는지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낮은 목소리였다. 할머니가 자식들을 앉혀놓고 잔소리를 퍼부었던 걸까? 이 의문은 곧 풀렸다. 서재를 나오는 큰아버지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잔소리를 들었다면 짜증 난 얼굴일 텐데….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궁금했지만, 생각을 떨쳐버려야 했다. 하나둘 조문객이 몰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 * 한국을 이끄는 힘 있는 자들이 빈소를 찾아올수록 진동기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들은 아예 진영기가 회장 후계자라고 확신하는 듯 자신보다 진영기를 찾기 바빴다. 심지어 건설업계를 관장하는 건설교통부 장관이 자신은 뒷전이고 진영기와 한참 동안 밀담을 나눌 때는 피가 거꾸로 쏟았다. 자신이 순양건설과 중공업의 책임자라는 건 이미 안중에도 없다는 뜻 아닌가? 모두가 자신을 이인자로 취급하자 조급해졌다. 어머니가 가진 지분과 돈, 이것이 더욱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꼭 가져야 한다고 아버지에게 배우지 않았던가? ======================================= [244] 五日葬 2 진동기가 이런 복잡한 생각에 잠겼을 때 똑같은 경험으로 마음이 불편한 사람도 있었다. ‘이거, 예상은 했지만 좀 심한데…. 안면 몰수라는 말이 이런 거구먼.’ 이학재 실장은 빈소를 방문하는 조문객 중에 예전처럼 자신을 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에 기가 찼다. 며칠 전만 해도 허리를 굽신대던 사람들이 자신보다 진영기 부회장의 수족인 백준혁 실장에게 눈도장 찍으려 발버둥이다. 마치 예전의 자신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백준혁은 그룹을 대표하여 진 회장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그의 모습이 일제히 언론을 타고 흘러나가자 순양을 아는 사람들은 이학재의 역할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룹 회장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최측근. 그 자리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장례 첫날부터 실감하는 중이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 맞는 마당이 빈다죠?” “정승 자리를 계승하는 아들이 있으니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대신 죽은 정승이 키웠던 개는 이제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군요.” “여전히 입이 맵군. 언제 왔나?” “지금 공항에서 곧바로 오는 길입니다.” “전투기 타고 온 게 아니면 너무 빠른데?” “며칠 전에 윤기가 전화했습니다. 회장님께서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으니까 들어오라고요.” “오 대표가 회장님과 그처럼 가까웠나? 임종을 지켜볼 만큼?” “가깝지는 않지만 조금은 존경하는 구석도 있습니다. 물론 임종을 지키려 온 건 아니고요.” “도준이?” “네. 회장님 안 계시니 부회장님들이 움직일 테고 순양그룹의 지배지분을 가진 우리 미라클도 상황을 예의 주시해야죠. 우리도 대주주 아닙니까? 개나 소나 회장 자리에 앉는 꼴은 못 봅니다.” 오세현은 이학재 실장과 마당 한편에 나란히 서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고급 승용차의 행렬을 지켜보며 말했다. “피곤할 텐데 한숨 자고 오지? 자네가 딱히 할 일은 없을 것 같네만.” “전세기는 아니더라도 퍼스트 클래스에서 편히 푹 잤습니다. 정신은 말똥말똥합니다. 윤기와 도준이 얼굴은 보고 가려고요. 조문도 하고요.” 오세현은 이학재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제가 등장하면 상주들 모두 허리 숙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대주주님 납시었는데….” “이 집안 아들들에게 자네는 도둑놈이고 사기꾼 취급일걸? 그 귀한 지분을 뺏어갔으니 말이야.” “그럼 이 실장님은 어떤 취급입니까?”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죽은 정승이 키우던 개라고. 아니, 더 심한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니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고 해야 맞는 것 같은데? 흐흐.” “그럼 신세타령 그만하시고 도준이 제안을 받아들이시죠.” “제안? 아, HW 그룹?” “네. 정승까지는 아니더라도 판서 정도는 되지 않겠습니까?” 실실 웃음을 흘리는 오세현을 보며 이학재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이런 능글능글한 놈이 어떻게 진중한 윤기와 친구가 되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가만 보자…. 정승이 정1품, 판서가 정2품이지 아마?” “아이고, 아는 것도 많으셔라.” “이 정도는 상식이지. 자네가 무식한 거야.” “저야 영국물 먹은 유학파다 보니… 한국사는 좀 어둡죠. 딴소리는 그만두고 생각해보시겠습니까? 진지하게.” “순양이 정1품이면 HW는 정2품은 턱도 없고… 이제 겨우 과거 급제한 수준이지. 비유가 맞지 않아.” “대신 자리가 다르죠. 이건 회장입니다. 용 꼬리가 아니라 뱀 대가리 아닙니까?” “적당할 때 끝내. 농담도 길어지면 지겨워서 짜증 나. 참, 아예 오 대표가 그 자리에 앉지그래? 대표 떼고 회장 달면 되겠네.” 오세현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제 때깔 한번 보십시오. 거의 동남아 원주민 같지 않습니까?” 원주민까지는 아니더라도 프로 스포츠 선수 이상으로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이었다. 두 달 남짓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 변한 건 그의 일상이 어떤지 알려주는 것이다. “팔자 늘어졌나 봐?”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서 호텔 조식 먹고, 골프 한 바퀴 돌고. 풀장에서 수영도 좀 하고, 바닷가에 앉아 비키니 미녀들 감상하다 푸짐한 저녁에 와인 곁들이는 게 하루 일상입니다. 이젠 일 못 하죠. 낙원에서 사는데. 흐흐.” “부인이랑 함께 가지 않았나? 비키니 미녀라니?” “그러니까 감상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조금 아쉽긴 하죠.” “오 대표는 참 희한해. 갬블러는 노름판을 떠나면 살 수 없는 법인데…. 내가 잘못 봤나?” “때를 알고 판을 접을 줄 아는 사람이 진짜 갬블러 아니겠습니까?” 이학재 실장은 오세현을 힐끗 보며 미소 지었다. “좀 쉬더니 감을 잃었군. 이번엔 패를 잘못 골랐어. 관심 없으니 빈소에 국화나 하나 올리고 가. 참, 낙원으로 돌아가기 전에 연락해. 저녁이나 한번 하자고.” 이학재는 오세현의 어깨에 손을 한번 올리고 휘적휘적 사라졌다. “이대로 은퇴할 사람은 아닌데….” 그의 뒷모습을 보던 오세현은 머리를 갸우뚱했다. 난 이학재 실장이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오세현에게 다가갔다. “뭐라고 해요?” “모르겠다. 말하는 걸로 봐서는 지금 처지가 마음에 안 드는 건 확실한데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아.” “속을 벅벅 긁어야 하는데 또 엉뚱한 소리만 하신 거 아닙니까?” 오세현은 내 머리를 툭 쳤다. “얌마! 정승 집 마당 개 취급까지 했는데 웃기만 하더라. 속내를 모르겠어.” “아쉽네요.” “자존심 긁어서는 답이 안 나온다. 작전 바꿔봐.” 오세현은 미덥지 못한 표정으로 나를 흘겨보기 시작했다. “아무튼, 난 향이나 하나 올리고 갈 거다.” “호텔에 계실 거죠?” “그래. 장례 잘 치르고. 천천히 보자.” “네. 오랜만에 오셨는데 사람들도 좀 만나고 그러세요.” “그래. 친구 몇 놈 보고 소주나 한잔하며 시간 때울 생각이다. 고생해.” 그는 내 등을 가볍게 쓰다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 오세현은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노려보는 눈길을 느꼈다. 가볍게 볼 수 없는 순양그룹의 대주주. 하지만 이학재 실장의 말처럼 저들의 눈길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따뜻한 눈길은 친구인 진윤기뿐이다. 오세현은 공손히 분향하고 큰절을 했다. “망극한 일을 당하셔서 어떻게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공손히 말하자 진영기는 표정을 풀었다. “위로의 말씀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세현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 잠깐 보고 가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인 오세현이 조용히 물러나자 진영기가 뒤따르며 그를 향해 눈짓했다. 진윤기는 이 모습을 보고 자신도 따라가려 했지만 진동기가 그의 손을 잡았다. “주주와 경영자가 이야기하는 거다. 네가 낄 자리가 아냐.” # # # “몸이 좀 안 좋다고 하더니 엄살이구먼. 얼굴 탄 거 보니까…. 골프…?” “엄살은 아니고 머리와 마음을 치료하는 중이죠. 안식년이라고나 할까요?” 두 사람이 이 층 거실에 마주 앉자 백준혁 실장이 달려왔다. “마실 것 준비할까요?” “아니. 금방 끝나. 아, 아무도 못 올라오도록 해줘.” “네. 부회장님.” 단둘만 남게 되자 오세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맏상제가 자리 비워도 됩니까?”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바쁘니까 용건만 말하지. 곧 주총이 열릴 거야.” “그렇겠죠. 빈자리를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 “지분 내놓으라 소리는 하지 않을 테니 의결권만 내놓고 이대로 돌아가. 동남아에서 골프나 치며 지내라고. 내가 좋은 골프채 한 세트 보내줄 테니까.” 오세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 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대주주가 주총에 빠지면 쓰나요? 성실하고 올바르게 주권을 행사해야죠.” “농담 아냐.” “저도 농담 아닙니다.” 서로를 노려보는 눈빛이 부딪혔다. 날카로운 눈빛을 먼저 거둔 이는 오세현이었다. “문상 온 대주주를 이리 겁박하는 건 좀 심한 거 아닙니까?” “보통의 대주주면 업고 다니지. 오 대표는 사실상 적대적 M&A의 기업 사냥꾼이나 다름없으니 내가 물 한잔도 안 주는 게야. 하하.”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는 진영기를 보며 오세현이 피식 웃었다. “착각하시는군요. 전 M&A 관심 없습니다. 순양그룹은 삼키려다 목에 걸려 죽죠. 전 최고의 경영자를 선정하는 데만 관심 있는 주주입니다. 그리고 경영 자질로만 본다면 진영기 부회장님보다는 진동기 부회장님이 더 낫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뭐야?” “소리치지 마시고 과거를 돌이켜보십시오. 사업 말아먹은 사례가 누가 많은지. 그리고 미라클과 진동기 부회장의 지분을 합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 아닙니까?” 오세현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총 날짜 잡으면 연락 주십시오. 그럼…. 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를 악물고 있는 진영기를 내버려 둔 채 오세현은 가볍게 머리 숙이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진동기 부회장과 눈이 마주친 오세현은 미소를 띠며 다가갔다. 그는 진동기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나중에 술 한잔 사쇼.” * * * “너 혹시 오세현이와 손발 맞추고 있냐?”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확실해? 만약 내 뒤통수칠 생각이면 그만둬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다.” “갑자기 왜 또 트집인데?”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이 층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첫 마디부터 시비조로 말하니 진동기는 짜증이 확 솟구쳐 올랐다. 진영기는 조금 전 오세현이 했던 말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전달했다. “후…. 형님. 그 자식에게 말려들지 말자. 그놈은 우리 형제가 갈라서야 힘을 발휘하잖아. 캐스팅 보트가 그놈의 유일한 무기야. 그런 얕은 수에 이리 흔들리면 어떡하려고?” 진영기는 동생의 얼굴을 노려보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 “좋아. 내가 지나쳤다. 미안해.” “괜찮아. 예민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동기야. 도저히 안 되겠다. 이런 식이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 지주회사 서두르자.” 찝찝하긴 하지만 진동기도 별다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오세현의 캐스팅 보트가 언제라도 진영기에게 도움 될 수도 있다. 이런 불안 요소를 없애려면 주변을 정리하고 형제만 남는 게 최선이다. “그래. 장례 끝나면 곧바로….” “아니. 오늘부터 바로!” “응?” 단호한 표정의 진영기를 보자 그냥 내뱉는 말은 아닌 듯싶었다. “이학재부터 조지고. 그놈이 우리를 돕게 해야 해. 그럼 지주회사 전환은 훨씬 더 빨라지잖아.” “아는데…. 오늘은 무슨 의미야?” “아까 연락 왔잖아. 법무부 인사들 조문 온다고. 그 사람들과 조용히 이야기 좀 해야겠다.” 무슨 뜻인지 알았다. 법무부 관료들이라면 검찰 출신이 태반이다. 특히 법무부의 주요 보직은 검사들 중 선두에 선 사람이 차지하고 검찰을 주무른다. 그들이 나서면 이학재를 압박하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진영기는 오늘 그들에게 부탁할 생각이다. “아주 작살을 내고 살려주면 고분고분해질 거야.” 진동기는 흥분한 형님을 보며 말했다. “다 좋은데 이젠 혼자 뛰지 마. 지주회사 설립하고 지분 확실하게 나눌 때까지는 이인삼각이라고.” “무슨 뜻이야?” “중요한 조문객을 왜 혼자 만나? 앞으로 그런 독대는 안 돼. 함께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그래야 조금 전 오세현이처럼 서로 오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지. 안 그래?” 진영기는 심각한 표정의 동생을 보며 살며시 웃었다. “산 사람을 화해시키고 하나로 만드는 건 죽은 사람이라더니 딱 그 짝이네. 아버지가 우리를 손잡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두 사람은 진심으로 손을 잡았다. ======================================= [245] 五日葬 3 “고검장님. 공무가 바쁘실 텐데 어려운 걸음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당연히 와야 할 자리 아닙니까?” “오실 때 불편함은 없었습니까?” “들어오다 보니 이 동네에 기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은 걸 보면 신경 많이 쓰셨더군요.” 서울고등법원의 김석휘 고검장은 한국 경제의 거목이 떠난 자리에 경찰 십여 명만 서성대며 주차나 돕는 것이 신기했고, 아마도 순양그룹에서 손을 쓰지 않았나 짐작했을 뿐이다. “우리가 신경 썼다기보다는 지금 요동치는 정국 때문입니다. 어깨에 카메라 걸친 기자 놈들은 전부 여의도에 진을 쳤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신경 쓸 언론사는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쪽도 터지기 일보 직전이니….” 빈소를 찾은 고검장은 자신을 조용히 불러낸 두 부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진 회장이 자기를 서재에 불러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고검장으로 승진했다. 한 번만 더 불러주신다면 검찰총장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며 기다렸는데 그 기회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기대를 접고 간 단순한 조문이었는데 진 회장의 후계자들이 불러주니 다시 들뜰 수밖에. “고검장님.” “네. 말씀하십시오.” 김석휘 고검장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룹의 기둥이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우리가 많이 어렵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 부회장님이 떡하니 버티고 계신 데…. 이젠 기둥이 둘씩이나 됐으니 더 굳건하지 않겠습니까?” “기둥은 둘인데 하나뿐인 주춧돌이 약합니다. 그래서 굳건한 주춧돌 두 개를 다시 심으려 하는데, 고검장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진동기의 공손한 태도에 고검장은 곧바로 눈치를 긁었다. 두 아들이 순양그룹을 장악하는 데 분명 문제가 생겼다. 법적인 문제라면 대형 법무법인을 찾거나 전관예우를 받는 데 충분한 고위 법조인을 찾는다. 고위급 법조인에게 거액을 안기고 공직에서 물러나게 한 다음, 전담 변호인으로 쓴다. 이게 재벌들이 법적 문제를 해결하는 ABC 아닌가?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현재 고검장이라는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어찌 됐든 둘 다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다.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고인이신 회장님께 신세 진 적이 한두 번입니까?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환하게 웃으며 말하던 고검장은 두 부회장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거두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두 사람이 잔뜩 찌푸린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고검장은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재빨리 되짚었다. 그리고 단어 하나를 잘못 썼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고, 이거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그려. 도와드린다니… 오해 마십시오. 당연히 해야죠.” 해야 한다는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풀렸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진영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동생이 이어받았다. “아버지가 쓰시던 주춧돌은 빼내고 우리 형제가 쓸 주춧돌을 박고 싶은데 방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옛 주춧돌에 떡하니 앉아 비키질 않아요.” “이런, 그런 일이 있습니까?” “네. 생각대로 한다면 그 사람을 휙 들어 치워내고 싶은데…. 아버지께서 중히 쓰던 사람이고, 우리도 어느 정도는 예의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보고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는 가만히 있기 힘듭니다.” 진영기도 한마디 더 보탰다. “예의도 중요하고 대우도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순양그룹의 기둥이 자리를 못 잡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순양이 흔들리면 한국 경제가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고검장은 기껏해야 사기업의 경영권을 공고히 하는 것에 불과한 일을 위해 나라 경제까지 거론하는 이들이 어처구니없었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맞장구쳐야 한다. 그것도 진심으로. “당연합니다. 리더가 흔들리면 나머지는 우왕좌왕하기 마련이죠. 순양의 경영권은 반석 위에 자리 잡아야죠.” 고검장은 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누굽니까? 제가 그 사람을 들어내는 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고검장의 말에 두 형제는 서로에게 눈짓하며 입을 열었다. “조금 부담이 있을 겁니다. 바로 이학재 실장이니까요.” “네? 이 실장…?” 김석휘 고검장은 눈을 크게 떴다. 과거의 꼰대 임원 정도가 아니다. 바로 며칠 전까지 진 회장을 대리하여 세상을 주무르던 사람이다. 이학재 실장의 영향력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누군가 자신의 뒤에서 칼을 간다는 걸 알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다. 순식간에 굳어진 고검장의 표정을 보며 두 형제가 말했다. “이거,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서울고검장님께서 이렇게 긴장하는 걸 보니 이학재 실장이 대단하긴 대단한가 봅니다.” “그래 봤자 끈 떨어진 연이지 뭐. 순양이 커버치지 않으면 회사에서 퇴출당한 중년 백수일 뿐이야.” 진영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고검장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자신이 이학재의 뒷조사를 지시하는 순간 이학재 실장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불같이 화내는 검찰총장의 전화를 받을 게 뻔한데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진동기는 이 쫄보의 마음을 편히 해줘야 했다. 이미 시작된 일인데 한 놈 한 놈 사정 봐줘 가며 일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고검장님.” “네.” “하이에나 아십니까?” “네? 하이에나요? 썩은 고기만 먹는다는….” “잘못 알고 계시는 겁니다. 하이에나는 썩은 고기도 먹을 수 있을 뿐, 실제로는 집단 사냥을 하는 놈들이죠.” “아, 그렇습니까?” 고검장은 혹시 자신을 하이에나에 빗대는가 싶어 조금 언짢아졌다. “늙은 사자를 사냥하는 하이에나 떼 보신 적 있습니까?” “네? 아, 아뇨.” “사실 다 늙어 젊은 숫사자에게 쫓겨난 늙은 사자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자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맹수들이 두려워하죠. 그런데 하이에나는 굉장히 머리가 좋습니다. 무리 중에 가장 용감한 놈이 다가가서 슬쩍 건드립니다.” 뭘까? 진동기는 자신을 용감한 하이에나로 빗대는 걸까? “하지만 늙은 사자는 크게 포효할 뿐 자신을 건드린 하이에나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놈 눈에는 수십 마리의 하이에나가 보이거든요. 그놈들이 동시에 공격해 오지 않도록 위협하는 게 전부입니다. 사실 일대일 싸움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겠죠.” 고검장은 이 이야기를 왜 하는지 알았다. 이건 하이에나 이야기가 아니라 늙은 사자 이야기다. “하이에나 떼는 알았습니다. 저 늙은 사자는 아무런 힘도 없고 위협이 되지 못하는구나…. 이제 하이에나 떼에게 무참히 뜯겨 나가는 사자의 마지막 운명만 남죠.” “제가 가장 용감한 하이에나가 돼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리가요. 우리 고검장님께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십니까? 법무부 형사기획과에서 그 일을 맡을 겁니다. 검사장님께서는 나머지 하이에나들이 동시에 덤비도록 신호만 내리시면 됩니다.” 검사장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적어도 맨 앞에서 돌진하는 보병 역할은 피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순양의 후계자들이 요구한다고 해도 상황은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이학재가 늙은 사자가 아니라 단지 늙어 보일 뿐, 여전히 강한 이빨과 발톱이 건재하다면 물러서 버리면 그만이다. 고검장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문제없습니다. 그럼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일어서겠습니다.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조문객들이 줄지어 기다릴 텐데 말입니다.” “다들 기다리라고 하죠, 뭐. 고검장님이 더 중요한 분이니까요. 하하.” 진동기가 입 발린 소리를 하자 진영기도 한마디 했다. “이번에 어머니께서 유럽에서 돌아오시면서 그림 몇 점 가지고 오셨습니다. 개중에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린다는 프랑스 화가 그림을 검사장님 차에 실어 뒀습니다. 집에 걸어 두시고 감상하셔도 좋고, 우리 순양 예술 재단에 되파셔도 괜찮습니다.” “아이고, 이런…. 이렇게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제가 미술에 문외한이지만 척 봐도 아주 고가의 그림처럼 보입디다.” 그림이 중요한 게 아니다. 되팔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그깟 물감 칠 한 걸 집에 두면 뭐 하나? 두둑한 지폐 뭉치가 훨씬 아름답지 않은가? 고검장은 여기가 초상집이라는 걸 잊은 듯 연신 웃으며 물러났다. “저놈, 잘할까?” “믿을 놈이 어디 있어? 동원할 수 있는 놈 전부 동원해야지.” 형제는 피곤한지 계속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내려가자. 또 만나야지.” “이번에 누구지?” “국책은행 지점장들. 우리 지분 들고 있는데 휴지 조각 될 거잖아. 미리 약 좀 쳐놔야지.” 두 사람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 * “오늘 명단입니다.” 김윤석 대리가 내 곁에 다가오더니 메모지 한 장을 슬쩍 건넸다. “특별한 건 없습니까?” “메모에 체크해 뒀습니다. 그런데 차 트렁크에 실은 게 그림 같습니다.” “그림?” “네. 큼지막한 액자가 분명하다고 하네요. 박스와 보자기로 잘 싸서 넣었답니다.” “돈은요?” “지금까지는 없습니다. 전부 그림입니다.” 새로운 돈세탁 방법이다. 그림을 주고 다시 산다. 출처 미상의 그림이니 누가 그림을 팔았는지 기록을 남길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림을 살 때 지불한 돈은 매입비용으로 경비처리가 가능하다. 뇌물을 경비로 떨어버리는 새로운 수법이다. “특이한 점은?” “가장 오랜 시간 밀담은 나눈 사람들은 전부 법무부를 포함한 검찰 쪽입니다.” “검찰?” “네.” 이상하다. 대통령 탄핵 때문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국이다. 당연히 정치인들과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검찰이라니? 검찰이 우리 그룹에 칼날을 겨누고 있다면 모르지만 그런 징후는 찾아볼 수 없다. 회사가 아니면 사람인데…. 설마 나? 노골적으로 나를 그룹에서 제거하려는 할머니의 독촉에 검찰을 움직이려 하는 게 아닐까? 그때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나눈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었나? 검찰이 나를 털어도 나올 건 없다. 하지만 검찰은 없는 죄를 만들고, 있는 죄를 없애는 일쯤은 쉽게 하지 않는가? 할아버지 장례 기간이라고 해서 안심하면 안 된다. 저들은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이용해서 모략을 꾸민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나도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 같았다. “김 대리.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차 준비해줘요. 지금 집으로 갑니다.” “네.” 김 대리는 이유를 묻지도 않고 곧바로 달려 나갔다. * * * 김 대리가 전해준 메모의 이름과 할아버지가 남겨준 노트를 대조하며 겹치는 명단을 작성했다. 지금 내가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할 일은 오늘 장례식장에 온 검찰이 큰아버지들에게 받은 표적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 표적지에 내 얼굴이 그려졌다면 반격은 힘들지 모르지만, 검찰 스스로가 표적지를 찢도록 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을 정리한 다음 거실에서 기다리는 김윤석 대리에게 돈을 준비시켰다. “최대한 빨리 20억을 찾아오세요.” “분산은 어떻게 할까요?” “1억씩 나눕시다.” “알겠습니다.” 김 대리는 급박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재빨리 달려 나갔다. 잠시 후에 오세현 대표가 투덜거리며 들어왔다. “야. 전화로 하면 될 걸, 뭐 하러 직접 만나? 너 안 바쁘냐?” “바쁜데 더 바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심각한 내 표정을 본 오세현은 정색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난 오늘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고 메모의 명단을 내밀었다. 오세현은 메모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 [246] 五日葬 4 “법무부, 검찰 소속 조문객에게만 뇌물을 건넸습니다. 두 명의 은행장과는 꽤 오랜 시간 밀담을 나눴고요.” “검찰과 은행이라…. 어울리는 조합이 아냐. 아마도 다른 이야기를 했을 것 같기도 해. 네가 염려하는 건 검찰이지?” “네. 할머니가 퍼부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날 쫓아내는 가장 빠른 방법은 제 약점을 잡는 것 아닙니까?” 오세현은 생각에 잠기더니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넌 일단 확인만 해. 검찰이 널 목표로 한다고 해도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나도 여기저기 알아볼 테니까.” “은퇴하신 분 괜히 끌어들여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한국에 오는 게 아니었어. 탁한 공기만 해도 가슴이 턱 막히는데 너희 집안 돌아가는 거 보니 더 숨 막힌다.” 집에서 나가려던 그가 조금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내가 알아본다고 한 건 너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혹시 윤기의 약점을 잡으려 할지도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버지를요?” “그래. 그쪽이야 워낙 불투명한 일이 많잖아. 꼬투리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어. 네가 부모님 끔찍이 여기는 거 아니까 윤기를 미끼로 널 협박할지도 모르잖아. 난 그게 더 걱정돼.”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불꽃이 튀었다. 화가 솟구친 게 아니다. 어쩌면 역전의 기회일 수도 있다. “삼촌. 지금은 아버지께 아무 말씀 마세요. 전부 확인하고….” “잔소리 그만해라. 아직 너한테 잔소리 들을 만큼 눈치 없는 꼰대 아니다.” 오세현이 나간 뒤, 김윤석 대리를 기다렸다. 금액이 크다 보니 시간이 꽤 걸렸다. 최소한 대여섯 곳은 도는가 보다. 그를 기다리다 전생에 봤던 ‘돈의 맛’인가 하는 영화가 떠올랐다. 재벌가의 저택에 돈을 쌓아 두는 비밀 공간이 있었고 그곳에는 컨테이너 서너 개는 채울 법한 어마어마한 돈더미가 쌓여 있었다. 뇌물을 건넬 때마다 그곳에서 돈을 챙겨 가는 장면을 보며 얼마나 낄낄대며 웃었던지…. 물론 감독이야 재벌의 모습을 판타지스럽게 그리려고 장치한 것이겠지만 내게는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금융실명제니 뭐니 해도 재벌은 비자금을 은행에 보관하지 집 안에 두는 사람은 없다. 금융권은 언제나 부자들 편이다. 법망이 아무리 촘촘해도 부자들을 위해 편법과 탈법을 동원해서 그들의 편의에 맞게 움직인다. 부자, 특히 재벌급 고객을 위한 금융서비스는 언제나 그렇듯이 일반인의 사고 범주를 벗어난다.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집 안에 수십억 정도는 쌓아 둘 만한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재의 책장이 열리며 드러나는 비밀 공간…. 재미는 있겠다. 이런 쓸데없는 상상은 김윤석 대리와 경호원 몇몇이 박스를 들고 들어올 때 사라졌다. “수고했습니다. 전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할아버지 집으로 먼저 가세요.” 사람들을 내보내고 진짜 일을 하기 위해 깨끗한 셔츠로 갈아입었다. “이렇게 빈소를 비워도 괜찮으십니까?” 급히 달려온 우병준 상무는 조금 걱정스럽게 말했다. “워낙 자손이 많으니 저 하나쯤 안 보인다고 해서 티가 나지 않습니다. 아직 저 찾는 전화가 없는 걸 보면 말이죠.” “빈소를 비울 만큼 급한 일이군요.” “네.” 우병준 상무는 거실 한쪽에 쌓인 상자를 보더니 살짝 미소 지었다. “사모님 조사하는 건 이제 시작 단계라 보고드릴 내용이 없는데…. 저것과 관계있습니까?” “네. 오늘 배달 좀 해야겠습니다.” 내 태도를 보고 우 상무는 놀란 듯했다. “혹시 직접 가시려고요?” “그래야 합니다. 직접 전해주며 확인할 게 좀 있습니다.” “누굽니까? 직접 만나야 할 정도의 사람이?” “김석휘 서울고검장입니다.” 우병준은 이름을 듣자마자 휴대전화를 꺼냈다. “서울고검장 김석휘. 핸드폰 번호랑 집 주소 확인해줘. 긴급이다.” 어디로 연락했는지 묻지 않았다. 각자의 영업 비밀 정도는 서로 캐묻지 않는 것이 예의 아닌가? 몇 분 지나지 않아 문자 알림음이 들렸다. “연락은 미리 하셔야겠죠?” “그래야죠. 검찰청에서 뇌물을 전해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잠시만요.” 우병준은 다시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기 하나 가지고 올라와. 새걸로.” 전화기? 대포폰인가? “깨끗하게 세탁한 휴대폰입니다. 앞으로 이런 사람들과 통화하실 때 쓰십시오. 지금 휴대폰은 실장님 명의죠?” “네.” “그건 공적인 업무에만 사용하십시오. 재벌 3세와 고검장의 통화는 누가 봐도 수상하니까요.” 참 디테일하다. 이런 걸 신경 쓰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해주니 새삼 이 사람의 능력이 대단해 보였다. 경호원이 휴대전화 하나를 내려놓자 우병준이 물었다. “몇 개 가져가실 겁니까?” “두 박스면 됩니다.” 우 상무의 눈짓에 경호원은 두 박스를 들고 내려갔다. “전 잠깐 나가 있겠습니다. 통화 끝내시고 알려주십시오.” 일어서려는 그를 앉혔다. “저런 일을 맡아서 하시는데 통화 내용 듣는 게 뭐 대수라고 자리 피하십니까? 그냥 앉아 계세요.” “아닙니다. 서로 아는 게 적을수록 실장님이 편하실 겁니다.” 철저한 건지 아니면 고지식한 건지, 참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가 자리를 비우고 난 크게 숨을 한 번 쉰 다음 고검장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고검장님. 진도준입니다.” ― 누구? 진도준? 혹시…? 의심 가득한 음성이다. “네. 돌아가신 진양철 회장님 손잡니다. 그리고 순양금융그룹을 맡고 있는 바로 그 진도준입니다.” 대번에 목소리가 변했다. ― 아, 그러시구나. 오늘 빈소를 들렀는데 인사를 못 드렸네요. 응?!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당황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오늘 표적으로 삼은 사람이 마치 다 안다는 듯 전화를 하면 아무리 차분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반가운 목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 아닌가?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표적이니 뭐니 그런 것 없이 단순한 대화였던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큰아버지들이 인사나 나누자고 고검장급 사람과 오랜 시간을 나눌,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아닙니다. 큰아버지를 뵈었다고 들었습니다. 고검장님께 먼저 인사드리지 못한 제가 죄송합니다.” ― 아이고, 별말씀을. 회장님 총애가 대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상심이 크실 텐데 굳이 조문 인사 때문에 전화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내가 표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더 굳어졌다. 이 사람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경계심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해십니다, 고검장님. 전 인사드리려고 전화한 게 아니고 회장님 유훈(遺訓) 때문에 전화드린 겁니다.” ― 유훈? “네. 직접 만나 뵙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혹시 시간 내실 수 있겠습니까?” 갑작스럽게 만나자고 하면 의구심이 드는 건 당연한 일, 대답이 없다. 좀 더 편하게 풀어줘야 한다. “아, 할아버지께서 제게 맡기신 게 금융그룹이 전부는 아닙니다. 금융그룹이 특별히 해야 할 일도 함께 맡기셨습니다.” ― 그 일이라는 게…? “시시콜콜한 개인적인 일 때문에 공무에 지장 주지 않도록 ‘분기마다’ 잘 챙겨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이 정도면 할아버지의 ‘유훈’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을 법도 한데…. 순식간에 반가움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변했다. ― 아, 그렇군요. 가만있자…. 그럼 한 시간 후 늘 하던 대로 그 장소에서 뵙겠습니다. 그 장소라니? 황급히 노트를 확인하니 주차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주차장에서 물어볼 수는 없는 일, 재빨리 장소를 바꿨다. “인사도 드려야 하니 좀 쾌적한 곳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장소를 알려드리죠.” ― 그럴까요? “참, 이 일은 제 ‘식구’들을 포함해서 아는 사람이 적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 물론이죠. 그에게 여의도 오피스텔을 알려주고 통화를 끝냈다. 이제 그가 큰아버지에게서 받은 표적지가 누군지 확인해야겠다. * * * “처음 뵙겠습니다. 진도준입니다.” 실내를 두리번거리며 들어오는 김석휘 고검장을 향해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아, TV를 통해 몇 번 봐서 그런지 처음 뵙는 분 같지 않게 낯이 익숙해요. 허허.”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확신했다. 난 표적이 아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스쳐 갔다. 큰아버지들이 쳐내고 싶은 사람은 과연 누굴까? 간단히 인사를 나누자 그가 물었다. 그도 어지간히 궁금했나 보다. “회장님의 유훈이라는 것이… 제 짐작이 맞습니까?” “아마도요. 할아버지께서는 몇몇 분들을 선택하셨고 그분들을 가족처럼 챙겨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부회장님이신 큰아버지 두 분은 꼼꼼함이 좀 부족하다고 하셨죠. 물론 그룹 일이 워낙 바쁘시기도 하고요.” “이거 참, 역시 회장님은 대단하신 분입니다. 솔직히 회장님 저리되시고 나니 생각을 접었는데 말입니다.” “바뀌는 건 없습니다. 늘 그렇듯, 집안일이 공무에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단지….” 슬쩍 그의 눈치를 보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편히 말씀하세요, 괜찮습니다.” “단지 이 일은 부회장님께도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할아버지께서 이 일을 제게 맡기신 건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다른 이유요?” “네. 두 분 부회장님은 효율을 굉장히 따지시는 분들입니다. 뭐…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경영수업을 하셨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필요한 일이나 도움을 청할 때만 적절한 보답으로 끝내실 분들입니다.” 김석휘 고검장의 표정이 좋지 않다. 일을 처리해줄 때만 돈을 준다는 말이다. 그리고 일을 처리해줄 검사들은 많다. 즉, 가끔씩 써먹는 도구로 전락하는 건 충분히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할 분담이라고 편히 생각하십시오. 지금 그룹 경영의 역할을 나눈 것처럼 말입니다.” 내 설명이 끝나자 고검장은 미소를 보였다. 누가 더 자신에게 꼭 필요한 사람인지 확실히 알았다는 의미다. 필요할 때만 돈을 건네는 사람. 언제나 빠짐없이 돈을 건네는 사람. 놓치지 말아야 할 끈이 누군지는 두말하면 입만 아픈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신경 써 주시니 고맙다는 말을 빠트릴 수 없군요.” “저야 뭐 할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요. 부담 느끼실 필요 없습니다.” 내 위치와 역할을 정확히 알렸고, 남은 것은 확인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고검장님.” “네.” “오늘 큰아버지께서 부탁하신 일은 잘 좀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룹의 중요한 일이니까요.” 단어 선택을 신중히 해야 한다. 마치 나도 그들과 한통속이며 이미 부탁의 내용이 뭔지 다 안다는 느낌을 줘야 한다. 초조하게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물론입니다. 세대교체라는 건 앞으로 30년을 결정지을 중대사니까요.” 세대교체? 할아버지가 지분을 나눴을 때 이미 세대교체는 끝났다. 남은 사람이 누가 있다고? 아직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언제든 바꿀 수 있지 않은가? “네. 특히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 이젠 더는 늦출 수 없죠.” 슬쩍 맞장구를 치자 대화는 한 발짝 더 깊이 들어갔다. “아무리 이인자였다고 해도 회장님이 작고하셨으니, 남은 분들 부담 주지 않게 스스로 물러났어야죠. 그게 사람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이인자! 딱 두 사람이 떠올랐다. 손훈재 전자 사장과 이학재 비서실장. 진영기 부회장의 처지에서는 그룹의 주축인 전자를 확실하게 장악하려면 손훈재 사장을 빨리 쳐내야 한다. 하지만 진정한 이인자는 바로 이학재 실장이다. 김석휘 고검장은 외부인이다. 외부에서 바라볼 때 이인자는 이학재 실장뿐이다. ======================================= [247] 五日葬 5 이미 전부 아는 내용인 것처럼 담담한 표정을 보이도록 안간힘을 썼다. 고검장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고 느껴버리면 큰일이다. “그분이 좀 그런 면이 있죠. 뭐든 쉽게 포기하지 못해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해도 됩니다. 아주 오랫동안 지켜온 자리니까 미련이 없을 수는 없겠죠.” 다행히 아무런 낌새를 채지 못한 것 같다. “그나저나 고검장님께는 좀 부담이겠습니다. 그분과의 전혀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니고….” 김석휘 고검장의 눈치를 살피니 그리 난감해하지는 않는 것 같다. “저야 뭐 마무리만 하는 정도니까요. 법무부가 칼잡이로 나섰으니 그쪽이 곤란할 겁니다.” 큰아버지들의 시나리오가 나왔다. 법무부가 목 조르고 고검장이 관 뚜껑을 닫는다. 물론 관 뚜껑에 못질하기 전, 원하는 것을 받아내면 다시 꺼내줄 테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미 안다. 바로 지분 재조정. 요것들 봐라! 꽤 머리를 썼다. 검찰을 써서 이학재를 잡고 이학재는 날 잡는 도구가 되고…. “혹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까?” 굳은 내 표정을 본 고검장의 눈빛이 변했다. 혹시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는지 염려하는 것 같다. “아뇨. 이학재 실장을 아꼈던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요.” 대화는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불필요한 것까지 나오기 마련이다. “자, 그럼 고검장님. 장례 끝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예전처럼 그 장소에서 진행할 겁니다.” “아이고, 바쁘신 분을 너무 오래 붙잡은 건 아닌지….”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참, 키는 주차장에서 우리 직원에게 맡기셨죠?” “네.” 고검장도 트렁크에 실린 돈을 빨리 확인하고 싶었는지 곧바로 일어섰다. “그럼 먼저 출발하십시오. 전 잠시 뒤에 나가겠습니다.” 김석휘 고검장이 떠나자 급히 휴대전화를 꺼냈다. 하지만 이학재 실장에게 알려주지는 못했다. 성급한 판단보다는 좀 더 생각하고 내게 유리하도록 국면을 전환해야 한다. 다시 할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당사자의 얼굴을 보며 대화하고,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 * * 밤낮없이 조문객들이 몰려오고 모든 조명을 밝힌 저택도 밤낮 구분이 힘들 만큼 환했다. 영빈관에는 중요한 분들이 식사를 하거나 술 한잔을 걸쳤고 마당에 차린 간이 식탁은 잠깐 밥 한술 뜨고 가는 사람들이 차지했다. 나를 발견한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대세의 흐름 같은 것이 느껴졌다. 분명 금융계열 임원이 분명한데도 예전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내 뒤를 든든히 받쳐주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내가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예상하는 게 틀림없다. “어딜 다녀왔어? 한동안 안 보이던데?” 간이 철렁했다. 하필 이학재 실장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 실장님. 잠깐 처리할 일이 생겨서 다녀왔습니다.” “미라클?” “…네.” “하긴 요즘 주식 시장이 요동치긴 하더라. 대통령 탄핵 때문이겠지?” “그렇죠. 일시적인 현상인데 팀장이나 매니저들이 흔들린다길래 중심 잡아주고 왔습니다.” “중심? 어떻게?”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든 부결되든 정상회복은 시간문제고 가결된다 해도 헌법재판소에서 기각할 거니까요.” “어떻게 확신하지? 정치는 생물이야. 어떻게 꿈틀댈지 아무도 몰라.” 자신의 목을 노리는 칼이 목전으로 다가왔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그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순양과 할아버지라는 든든한 성벽의 보호를 받으며 누군가의 목을 찔러대기만 했던 사람이 반대의 경우가 되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통찰력은 그런 걸 정확히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죠. 흐흐.” “이젠 겸손한 척하는 건 전부 벗어던졌구먼.” 이학재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네가 자리 비운 사이 회장님 장지(葬地)를 바꿔버렸다. 그건 통찰력으로 예측 못 했어?” “네? 그게 무슨…?” “군산 순양박물관으로 바꿨다. 사모님이 고집부렸고 자식들도 받아들이더라. 명분이 그럴듯하잖아. 순양의 출발지가 바로 군산이니까. 그곳에 편히 잠들다…. 물론 네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어쩌겠어? 미망인과 장, 차남이 밀어붙이는데.” “이런 씨팔!” 절로 욕이 터져 나왔다. 이건 숫제 멀리 보내놓고 신경 끄겠다는 소리 아닌가? 손끝이 덜덜 떨려 주먹을 쥐었다. 집 안으로 달려가려 할 때 이학재 실장이 내 팔을 잡았다. “아서라. 네가 어찌해볼 일이 아니다.” “이거 놓으시죠.” “장례는 미망인과 자식들의 일이야. 손자가 나서봤자 변하는 건 없다. 손자는 어른들 결정을 따르는 수밖에 없어. 시끄럽게 해봤자 너만 힘들다.” 그는 더 힘껏 내 팔을 움켜쥐었다. “참고 견뎌. 나중에 네가 회장님 묘를 이장할 만큼 힘이 있다면 이 정도는 별것 아니다. 순양그룹 본관에 회장님을 모신다 한들 그 누구도 입도 벙끗 못 해. 그때를 위해 지금은 힘을 아껴.” 주먹을 풀었다. 이 실장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매일 문안 인사 드린다고 약속했지만, 그것마저도 지키지 못하게 돼버렸다. * * * 닷새째 되는 날, 할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운구 행렬은 집을 떠나 순양 본관에 잠시 들렀고 다시 군산으로 향했다. 누구나 그렇듯, 하관식을 진행할 때는 눈물바다였다.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큰어머니마저 눈물을 글썽였지만, 난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곳은 내가 눈물을 흘릴 자리가 아니다. 이곳 군산이 아니라 용인의 순양미술관 앞뜰로 이장할 때 참았던 눈물을 흘려야 한다. 할아버지를 보내고 이틀을 집 안에만 있었다. “뭐야? 슬픔을 못 이겨 폐인처럼 지내는 줄 알았는데 멀쩡하네?” 커피를 사 들고 들어온 오세현은 노트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나를 보며 한시름 놓은 표정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느라 집에 있었습니다.” “뭔 생각?” “여러 가지죠. 참, 혹시 뭔가 알아내신 건…?” “없다. 검찰은 조용해. 서울과 경기도 지검 전부 확인했는데 순양 측 관련 수사는 없어. 사람도 마찬가지고.” “삼촌. 제가 알아낸 게 있습니다.” “뭐? 야!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하다. “말씀드릴 틈이 없었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싫어 동남아로 가버린 사람이 호기심을 보이니 우습기도 했지만, 지금 내 의견을 교환할 사람은 오세현뿐이다. “큰아버지들의 타깃은 이학재 실장입니다.” “뭐?” “재밌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은퇴하겠다는 사람을 조지려고 고검장과 법무부 요직을 움직였어요.” “그러니까 왜? 이 실장은 자기 세력 만들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순양 계열사에 욕심내는 것도 아니잖아.” “가만히 있는 게 싫은 거죠. 자기들 편이 되어달라는 요청입니다.” “죽을 때까지 순양에 충성해라? 미친 거 아냐?” 이학재 실장에게 동질의 느낌을 받아서일까? 자기 일처럼 분노를 터트린다. “순양이 아니라 두 아들이죠. 제 지분과 미라클이 가진 지분을 휴지로 만드는 일. 그걸 지시했는데 이 실장이 거부했으니까요.” 지주회사 전환, 순양전자 대표이사 자리 제안 등을 이야기해주니 오세현은 분노는 지우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 실장이 버틸 수 있을까? 그 양반 궂은일에 손 담근 적 많잖아.” “힘들걸요? 배임, 횡령이나 뇌물만 털어도 무기징역입니다. 특히 국회의원 하고 함께 엮을 수 있으니 노다지나 다름없어요. 탄핵 정국에, 곧 총선입니다. 이학재 실장은 화약고의 뇌관입니다. 이걸 검찰이 주무르기 시작하면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칩니다.” “야! 그런데 말이야. 만약 이학재가 혼자 죽지 않겠다고 하면? 순양 발목 잡고 함께 죽자고 하면 도리어 역풍이잖아.” “아니죠. 이 실장이 잡을 수 있는 발목은 순양이 아니라 할아버지뿐입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죠. 독박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 명예를 더럽힐, 간 큰 놈은 없습니다.” 담담한 내 말투가 이상한지 오세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 지금 무슨 생각 하냐? 이학재 실장에게 검찰이 노린다고 경고하긴 했어? “아뇨. 모른 척해야죠.” “뭐?” “가만히 두고 보시죠. 검찰이 어디까지 이 실장을 벼랑으로 몰아갈지. 아예 벼랑에서 확 밀어버리면 더 좋고.” 오세현의 눈이 반짝였다. “널 위해서는 그 양반을 지켜줘야 하니까 버릴 생각은 아닐 테고…. 극적인 순간에 짠! 하고 등장하시겠다?” “네. 검찰이 이학재 실장을 물어뜯을 수 있는 건 그의 배경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배경이 되어주는 거죠.” “HW 그룹?” “벼랑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떨어지기 일보 직전에 동아줄을 내려주면 붙잡아야지 별수 있겠어요? 완강히 거절하던 HW 그룹 회장 자리에 앉을 겁니다. 제게는 감사한 마음을, 두 분 큰아버지에게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말이죠.” 오세현이 입을 떡 벌렸다. “이야…. 이 자식, 몇 달 안 본 사이에 더 영악해졌네. 그런 생각을 다 하고.” “HW 그룹과 제 지분을 지키는 튼튼한 방패, 두 큰아버지를 공격하는 날카로운 창. 일인이역을 해낼 만한 그릇이지 않을까요?” “하고도 남지. 아무튼, 너도 참 독하다. 늪에 빠질 사람인 거 뻔히 알면서도 구경만 하다니. 흐흐.” “아직 멀었습니다. 더 독해지고 강해져야죠. 제가 힘이 없으니 할아버지께서 온갖 수모를 다 겪지 않습니까? 지하에서 눈이라도 제대로 감으시도록 빨리 힘을 키워야죠. 이 실장이 도와주면 더 빨라지겠죠.”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간 내 모습을 보며 오세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빨리 돌아가기는 틀린 것 같은데?” “큰아버지가 서두르니까 빨리 끝날 겁니다. 이학재 실장이 HW 그룹 회장에 취임하시는 건 보고 가세요.” * * * “장 부장. 어쩐 일이야?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먼저 연락을 다 해?”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회장님 장례 때 찾아뵙지도 못했습니다.” “괜찮아. 고위 공무원들 수두룩하게 조문 왔어. 부장검사 정도는 왔는지 안 왔는지 티도 안 나. 자네는 왔다 간 걸로 함세. 허허.” 이학재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짓다 곧바로 멈췄다. 장 부장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눈치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어려운 말을 하려고 만나자고 한 게 틀림없다. “자네, 무슨 일 있나? 안색이 안 좋아. 혹시 재정 문제….” “아, 아닙니다. 실장님. 제가 염치가 있지, 어떻게 돈 때문에 먼저 실장님께 연락드리겠습니까? 평검사 때부터 돌봐주신 것만 해도 평생 못 갚을 은혜를 입었는데요.” 장 부장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럼?” “이런 말씀드리기가 송구합니다만…. 중앙지검 법무부 라인 선수들이 움직입니다.” “법무부?” “네. 아시겠지만 법무부 파견 검사들은 출세가 보장된 선두주자들 아닙니까? 그래서 그들을 따르는 검사들이 지검 곳곳에 박혀 있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 빼고! 누구야? 칼잡이가?” “검찰국의 검찰과장, 형사기획과장이 중심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지검 라인을 동원해서 칼을 가는데…….” “핵심들이 움직이네.” “네.” “대상은? 누구를 제물로 삼는 거야? 설마 우리 순양이야?” “그게….” 머리를 조아리며 제대로 말을 못 하자 이학재 실장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 장 부장은 아주 미세하게 머리를 조금 끄덕였다. 이학재 실장의 손끝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 [248] 집으로 1 “죄송합니다. 이런 말씀 드리게 돼서….” “아, 아냐. 미리 알려주는 것만 해도 고맙지. 그런데 확실한가? 날 잡으려고 법무부가 움직이는 게?” “네. 남부지검에 제 연수원 동기가 있습니다. 법무부 대학 선배에게 연락받았는데 난감해하더군요. 남부지검 윗선에는 보고하지 말고 다이렉트로 보고하라는 밀명이었답니다.” 부장검사는 잘못 알지 않았다. 직접 지시받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사실이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탄핵 정국에 제물로 삼아야 할 놈이 자신과 연관됐을까? 검찰이 총선 흐름을 주도하기 위해 국회의원 길들이기 하는 걸까? 국회의원 길들이기의 도구로 자신을 고른 것이고?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왜가 아니라 누구를 먼저 찾아야 한다. “장 부장. 이 지시 내린 윗선이 누군지는 몰라?” “죄송합니다. 거기까지는 파악이 안 됩니다. 법무부 감찰국이 시작했으니 현재 알 수 있는 최고 윗선은 감찰국장이겠지요.” 감찰국장이 자신을 건드려? 절대 아니다.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장 정도는 돼야 순양의 이인자인 자신을 노릴 수 있다. “죄송하긴 뭘. 아무튼, 고마워. 내가 이 일은 절대 잊지 않겠네. 언제 소주 한잔하자고.” 이학재는 황급히 일어섰다. 자신을 겨누는 칼, 그리고 그 칼자루를 쥔 놈을 빨리 찾아야 한다. 장 부장과 헤어지자마자 휴대전화를 들었다. “지금 즉시 모여. 한 명도 예외 없다. 회의실…. 아, 아니다. 밖으로 나와. 광화문 일식집 알지? 삼십 분 뒤다.” 대기하던 승용차에 올라탄 이학재는 기사에게 소리쳤다. “광화문. 30분 안에 도착해야 해.” “넵.” 이학재의 세단은 서초동에서 광화문으로 달렸다. 일식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인장이 나와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실장님.” “애들 왔지?” “네. 이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별실에 들어섰을 때 눈앞이 캄캄했다. 마치 죄라도 지은 양, 사내 셋만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이학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올 때 ‘애들’이라는 복수형을 쓴 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달랑 셋이라니. “앉자. 그리고 내 눈 똑바로 봐. 죄졌어?” 그들이 슬그머니 의자에 앉았을 때 이학재는 차디찬 냉수부터 들이켰다. “다른 애들은? 몰라서 못 온 거야? 아니면 알지만 안 온 거야?” “일단 이야기는 했습니다만….” “모시는 윗전이 아니니 나오기 싫다?” “아, 아닙니다. 실장님. 눈치 봐서 빠져나온다고 했습니다.” “눈치 봐서라…….”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놈들에게 섭섭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이 그들을 보내주지 않았나? 훌륭한 인재들이니 데리고 가서 중하게 쓰라는 부탁까지 했다. 이학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해는 한다. 자기 밑에서 엄청난 힘을 휘두르며 선택받은 특권층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어차피 월급쟁이. 매달 고액 월급을 챙겨주는 사람의 명령을 따라야 하며 눈치도 봐야 한다. 그래야 연봉도 오르고 진급도 할 게 아닌가? 이제 눈치 봐야 할 사람이 바뀌었다. 진영기와 진동기가 그들의 주인이다. 자리를 옮긴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으니 눈칫밥이 심할 것이다. 전화 한 통에 달려온 사람이 겨우 셋에 불과하자 이학재는 자신이 흘러간 물결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실장님….” 참담한 표정의 이학재가 안쓰러웠는지 의리를 지킨 놈들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새끼들이! 미친 거 아냐? 지금 뭐 하는 거야? 설마 네놈들이 날 동정하는 거냐?” “아, 아닙니다.” 이학재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일어섰다. “이 자리에 없는 놈들을 욕할 마음은 없다. 그놈들이 현명한 선택을 한 거야. 예전처럼 불러낸 나도 멍청했지만, 네놈들이 멍청했어. 난 이제 너희들 상사가 아니니까 나올 필요 없었다.” 이학재는 지갑을 열고 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밥이나 챙겨 먹고 가.” 이학재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외면하며 밖으로 나왔다. 3월 초의 밤바람은 아직 매서웠다. “씨발…. 49재나 끝나고 시작하지.” * * * “형님. 이거 심상치 않습니다. 구속 영장 칠 만큼 증거를 확보했다는 소문도 돌아요.” “실장님. 죄송합니다만 제가 도와드릴 방법이 없어요. 지금 칼 뽑은 놈들은 검찰 핵심 라인입니다. 이놈들 지시라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 검사가 수두룩합니다.” “차라리 잠시 외국으로 나가 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총선용일 수도 있으니 선거 끝나고 잠잠해지면 들어오십시오. 길어봤자 3개월입니다.” 이학재 실장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발 물러서기에 바빴다. “실장님. 지금 청와대 꼴이 말이 아닙니다. 탄핵은 막아야죠. 이럴 때 법무부나 검찰에 전화 넣다가는 역풍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대한 청와대마저 외면했다. 하긴 자신보다 더 궁지에 몰려 고생하는 걸 생각하면 도와주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이학재는 지친 몸을 차에 실었다. “집으로 가지.” 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룸미러로 자꾸 힐끔거리는 기사가 거슬렸다. “이봐. 뭐 하는 거야? 왜 자꾸 힐끔거려?” “아, 그게 아니라 며칠 전부터 거슬리는 게 있어서요. 아무래도 미행하는 것 같습니다.” “미행?” 고개를 돌려 뒤를 봤지만, 도로를 꽉 메운 자동차 중에 어느 것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이것들이 정말!” 이학재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참고 참았지만 이젠 방법이 없다.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도 있지만, 저쪽 대가리를 쳐야 할 때가 왔다. 먼저 대가리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것이 분명한 법무부 장관부터 건드려야 한다. 조금 주저했지만 결국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거의 끝나갈 때쯤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아이고, 실장님. 그간 격조했습니다. “장관님. 인사는 건너뛰겠습니다. 제가 그럴 여유가 없어서요.” ― 네? 아, 그렇죠. 회장님 장례 치르시느라 마음고생, 몸 고생이 심하셨겠습니다그려. “다 아시면서 시치미 떼시는군요. 긴말 않겠습니다. 멈추세요.” ― 네?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진정 모르신다면 감찰국장과 업무 협조가 안 된다는 뜻이고, 시치미 떼신다면 제 말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감찰국장요? “조심하십시오. 제가 입만 벌리면 대통령 탄핵보다 제 이야기가 더 크게 번질 겁니다. 감당할 수 있으면 계속해보세요.”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 이학재는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 미끼를 던지면 칼날이 아니라 칼자루 쥔 놈이 얼굴을 빼꼼히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칼자루 쥔 놈보다 칼자루들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하필 장소가 이학재의 집 앞이었다. “이학재 씨. 밤늦게 죄송합니다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정장 차림 두 명과 점퍼 차림의 남자 한 명. 이학재는 기가 찼다. 법무부 장관의 빠른 행동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어디서 나왔나?” “중앙지검 금융조사부입니다.” “장관이 보냈나?” “장관님이야 TV에서만 얼굴 보죠. 우리 같은 평검사야 부장님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임의동행?” 두 명의 검사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잘 아시니 두말 않겠습니다. 잠깐 가시죠.” 순순히 끌려가지 않을 사람이고 그럴 수도 없다는 걸 법무부 장관이 모를 리 없다. 분명 후속 조치도 취했을 것이다. 이학재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 “싫다면?” “영장 전담 판사가 대기 중입니다. 이학재 씨가 그냥 지금 집으로 들어가신다면 수색영장이 나올 겁니다. 집안이 쑥대밭이 될 건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체포영장도 준비 중입니다. 검찰청에는 사진기자가 대기 중이고요.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법무부 장관의 확실한 경고가 평검사들의 입을 통해 나왔다.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준다. 두 평검사를 노려보던 이학재가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일 때려 치운 후 귀가 시간이 빨라졌거든. 자정 전에 끝낼 수 있으면 따라가고.” “용건만 간단히. 약속드립니다.” “그 약속 꼭 지켜야 할 거다. 아니면 검찰총장의 비자금 통장 계좌 번호가 내일 신문 톱에 실리는 걸 너희 눈으로 볼 테니까.” 검찰총장의 비자금. 이 단어가 주는 충격 때문에 두 검사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뭐 해? 빨리 길 잡아. 말했지? 자정 전에 끝내야 한다고.” 이학재 실장은 아랫것들 대하듯 검사들에게 소리쳤다. * * * 중앙지검 취조실에 앉아 물 한잔을 마시고 한동안 기다렸다. 뻔한 수법이지만 늘 통한다. 특히 끌려온 이유를 모를 때는 그 초조함을 견디기 힘들다. 법무부가 자신을 토끼몰이 한 이유를 들으려 순순히 왔으나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취조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낯이 익었다. “안녕하십니까? 실장님.” “안녕하지는 않아. 근데…. 누구더라? 만난 적이 있나?” “예전 총장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뵌 적 있습니다. 인사도 드렸지만, 실장님께서 기억하실 정도는 아니고요.” 그가 내민 명함에는 법무부 검찰국 형사기획과라고 찍혀 있었다. “검찰국? 감찰국에서 나섰다더니 이젠 검찰국까지 동원한 건가?” “특정부서라기보다는 이곳저곳 다 나섰죠. 일종의 TFT라고나 할까요?” “내 신세가 이 정도까지 추락했나? 국장도 아닌 일개 과장이 내 앞에 앉을 정도로?”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집 나오면? 단순히 순양의 끈이 떨어졌으니 힘을 잃었다는 표현일 수도 있으나 이상하리만치 집이라는 낱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회장님 아들내미들이 묵인하거나 동조한다는 것 하나는 명확하군.” “순양이 자선단체도 아닌데 퇴사자를 돌볼 이유는 없겠죠. 더는 묻지 마십시오. 전 순양의 내막은 모르니까요.” “그럼 아는 것만 말해.” 형사기획과장은 서류 몇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실장님 자녀 명의로 홍콩에 펜트하우스가 하나, 미국 시애틀에 15층짜리 빌딩이 하나 그리고 프랑스 외곽에 와이너리(winery)…. 이게 양조장을 말하는 것이더군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전 와이너리라고 해서 와인 보관 냉장고 같은 건 줄 알았거든요. 아무튼, 알려진 재산만 이 정도니까 더 파보면 해외계좌도 쏟아져 나오겠죠?” “그건 쏟아져 나온 다음 이야기해. 그리고 해외 부동산이야 상속세 내면 되고…. 다른 건 없어?” “상속세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죠. 순양의 해외 법인을 통해 돈을 빼돌린 건데, 외국환관리법과 횡령 문제도 함께 생각하셔야 합니다. 법망 피하는 법은 잘 아시는 분이니 이 정도 금액이면 중범죄에 해당한다는 것도 아시겠죠?” 저쪽의 패가 뭔지 알았으니 이쪽 패를 슬쩍 보여줘야 한다. “날 검찰청 포토라인에 세울 생각이라면 아서라. 포토라인 기자들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당신 상관들은 다 알아. 기자들은 해외 부동산보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에 더 관심 있을걸?” 기획과장은 과장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뻥카가 심하시네. 어차피 폭로전으로 몰고 가실 생각은 없으신 거 다 압니다. 본인 다치는 거야 감내하시겠지만, 순양그룹은 물론이고 작고하신 진 회장님 무덤까지 똥칠하는 셈인데, 설마 그러시겠습니까?” “뻥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되고…….” 상대를 협박하는 패는 서로 확인했다. 그럼 이쯤에서 판을 접는 방법도 확인해야 한다. 시작은 칼잡이들이었으니 그들의 요구를 들어야 한다. “이 정도까지 날 골탕 먹였으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말할 차례야. 그거 알려주려고 날 데리고 오지 않았나?” 기획과장이 머리를 긁으며 우물쭈물할 때 문이 열리며 중년의 사내가 들어왔다. “개고생 그만하시고 집으로 다시 들어가십시오. 실장님.” ======================================= [249] 집으로 2 이학재와 여러 차례 만났고, 술자리도 몇 번 했다. 물론 꼬박꼬박 떡값까지 받아 챙긴 놈이다. “드디어 칼잡이 두목 얼굴 보는구만.” “에이, 칼잡이라뇨? 그건 우리끼리 쓰는 말이지 민간인이 쓰면 기분 상합니다.” “민간인이라…. 이제 내가 자네한테는 별 볼 일 없는 놈이라 이건가? 내가 주는 돈은 넙죽넙죽 받아 챙겼으면서?” “사실관계는 정확히 합시다. 실장님이 돈 준 거 아니지 않습니까? 배달꾼이었지. 전 순양 돈을 받았습니다.” 감찰국장은 재벌의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말했다. 이중 거울을 통해 들여다보는 사람도 없고 녹음도 녹화도 없다는 뜻이다. 집으로 가라. 그리고 순양의 돈…. 이들 칼잡이를 누가 고용했는지 이제야 알았다. “돈 준 놈을 위해 배달꾼 정도는 얼마든지 찌를 수 있는 놈이라는 걸 깜빡했군.” 이학재는 감찰국장의 등장에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한 기획과장을 향해 말했다. “자네도 줄 잘 서. 지금 자네가 동아줄이라고 생각하는 이 사람, 내가 돈 줄 때는 내 앞에서 머리도 못 들었어. 아,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지.” “그만하시죠.” 감찰국장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이학재는 웃음까지 터트렸다. “술자리였나? 아무튼, 내가 저 친구 술잔에 담뱃재를 털었어. 실수였지. 그런데 갑자기 그 잔을 들어 단숨에 마시더라고. 뭐, 말릴 새도 없었어. 입을 쓱 닦고 나서 뭐라고 하는 줄 알아? 하하.” “실장님!” 감찰국장이 이학재의 입을 막으려 소리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실장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뭐든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러는 거야. 으하하.” 이를 꽉 깨문 감찰국장은 이학재를 노려보다 표정을 풀었다. “그러니까 다시 그런 대접을 받고 싶으면 집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지금 이게 무슨 꼴입니까?” 이학재는 참았던 말을 던졌다. “내가 이 꼴을 당하는 게 집 주인 때문인가?” “빨리 돌아오시랍니다.” “그게 전부야? 그들이 오해한 것 같은데… 난 은퇴야. 딴마음 먹은 게 아니라고.” “그래서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주인 말을 잘 듣는 개로 훈련시켜서 돌려보내라고요. 돌아가셔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그럼 제가 실장님이 담뱃재를 털어버린 술잔을 다시 받겠습니다.” 이학재는 손목시계를 흘낏 보더니 일어섰다. “지금 나가야 12시 전에는 집에 도착하겠어.” 감찰국장은 슬며시 문을 막아섰다. “확답은 받아야겠습니다. 저도 밥값은 해야 하는지라….” 이학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야. 착각이 지나쳐. 주제를 알아야지. 넌 메모 전달자일 뿐이야. 내가 비루먹은 강아지 같아 보여도 전화 한 통으로 너 정도는 시골 지청으로 쫓아버릴 수도 있어. 비켜!” 서슬 퍼런 일갈에 움찔한 감찰국장은 슬며시 물러났다. 이학재가 사라지자 취조실에 남은 두 사람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도 갈까? 할 일은 끝난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충분할까요?” 형사기획과장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확보한 자료 전부 서울고검장과 공유해. 남부지검 검사장에도 주고. 저 새끼가 말한 대로야. 우린 메모 전달자니까 이 정도면 충분해.” 감찰국장은 기획과장의 등을 툭 쳤다. “우리도 가자. 해장국이나 한 그릇 할까?” * * * “동기야.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가면 나도 회장님에 대한 의리는 버린다. 이게 내 대답이야.” 아침 일찍 진동기 부회장을 만난 이학재는 두꺼운 서류 봉투를 툭 던졌다. “오랜만에 들어보는군요. 실장님…. 아니, 형님이 내 이름 부르는 거 말입니다.” “이젠 실장도 뭣도 아니니까 이름쯤은 불러도 되잖아. 왜? 기분 나빠?” “아뇨. 정겨워서 그렇습니다.” 활짝 핀 진동기의 미소가 거짓말이 아님을 보여준다. “내가 네 형을 만나려다 네게 왔다. 적어도 넌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니까.” “잘하셨습니다. 우리 형님이야 윽박지르고 소리치는 게 전부 아닙니까?” 진동기는 이학재가 던져준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한참을 들여다본 진동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에 대한 의리는 예전에 버리셨군요. 이런 것까지 차곡차곡 모은 걸 보면 언제든 아버지 뒤통수를 칠, 만반의 준비를 한 것처럼 보이는데요?” “삼세번은 못 하겠더라. 애들이 커서 말이야. 알 거 다 아는 자식들에게 법정에 서는 건 더는 보여주기 싫었어.” 검찰청을 들락거린 건 부지기수다. 법정에 서서 무죄 선고를 들은 것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무려 두 번이나 실형 선고를 받았다. 비록 집행유예로 옥살이는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얼굴을 찌푸린 진동기는 머리를 저었다. “우리 아버지를 못 믿었군요. 세 번이나 총대 메라고 하신 적은 없어요. 전부 두 번으로 끝냈습니다.” “두 번으로 끝낸 건 총대 멜 놈들이 많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내가 총대 메는 건 나를 대신할 놈이 없어서 그런 거야. 대체할 놈이 없다면 회장님은 세 번, 네 번도 보낼 사람이다.” 진동기는 표정을 풀고 서류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착각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이깟 자료가 무서워서 형님을 놔뒀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요. 두 번이나 총대 멘 게 미안해서 더는 총알받이로 안 쓴 겁니다. 이런 자료 한 트럭을 가지고 있어도 눈도 깜빡하지 않을 분이 바로 아버지입니다.” “뭐?” “저를 보세요. 제가 겁먹은 것처럼 보입니까?” 진동기는 봉투를 다시 이학재에게 내밀었다. “경찰이든 검찰이든 가져다줘요. 언론사에 쫙 뿌려도 됩니다.” “내용을 제대로 봤다면 그런 말을 쉽게 못 할 텐데?” “봤습니다. 불법증여, 탈세, 내부거래…. 이 정도면 핵폭탄급이죠. 언론도 물 만난 고기처럼 펄떡펄떡 뛸 겁니다.” 이학재는 진동기가 이처럼 여유를 보이는 이유를 안다. 언론이 시끄럽게 떠들어도 길어봤자 한 달이다. 딱 한 달이면 시끄러운 세상을 잠잠하게 만들 힘을 가진 곳이 순양이다. 그렇지만 조용하게 만드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특히 이 자료처럼 확실한 불법의 증거가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최소한 몇천억의 세금과 추징금을 내야 하며 두 부회장 모두 대국민 사과 이벤트를 열어야 한다. 대신 자신은 실형으로 감옥살이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학재는 자신을 감방에 처넣기 위해 몇천억의 돈을 날리고 대국민 사과라는 망신을 견뎌낼 2세가 아님을 안다. “그럼 그 대가도 알겠지?” “알죠. 하지만 이번은 다를 겁니다.” “아니. 다르지 않아. 같은 패턴이고 결과는 변함없어.” “궁지에 몰리니 정신을 엉뚱한 데 놓고 다니시나 봐요?” 진동기는 이학재의 확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TV를 켰다. TV는 긴급 속보를 계속 내보내고 있었다. 3월 12일 11시 55분 현재. 재적 271명 중 193명 찬성, 헌법 제65조 제2항에 의거 탄핵소추안 가결! 국회 소추위원, 헌법재판소에 소추의결서 정본 제출! “바로 오늘이라는 걸 모르셨습니까?” “그래서?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짐작했던 거 아냐? 새삼스럽지도 않아.” 진동기는 의외인 듯 머리를 갸우뚱했다. “이런, 현업에서 물러나신 지 얼마나 됐다고 감을 다 잃으셨을까?” “뭐야?” “대통령 탄핵이 주는 의미를 모르십니까? 저건 면죄부를 주는 겁니다.” “면죄부라니?” “전 국민의 눈과 귀를 뺏은 게 바로 탄핵입니다. 앞으로 두세 달은 우리 형제와 실장님의 힘 싸움에 신경 쓰는 이가 없을 겁니다. 즉, 대통령 탄핵은 형님이 제출할 그 자료를 검찰과 언론이 완전히 무시해도 되는 면죄부라는 겁니다.” 이학재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두 달이면 종결이다. 순양그룹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언론사에 광고 물량을 밀어줄 것이고 기자들은 두둑한 술값으로 연일 흥청망청할 것이다. 이번 일을 덮은 검사들은 떡값과 승진이라는 보상, 혹은 사표를 던지고 순양그룹의 고액 연봉 변호사로 둔갑할 것이다. 자신은 어느새 온갖 혐의를 뒤집어쓴 채 구치소에서 재판을 준비할 테고. 이학재의 굳은 표정을 보자 진동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엔 패턴이 다르다는 걸 드디어 감 잡으셨나 보네. 193명의 국회의원 덕분에 우리는 별다른 데미지가 없이 실장님만 법정에 설 겁니다. 참, 그나마 다행입니다. 실장님이 법정에 서는 건 뉴스거리도 안 되니까 자식들도 못 볼 테니까요.” 이학재는 진동기가 말하는 시나리오가 그리 틀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게 원하는 건 지주회사 설립이겠지?” “그것 말고 있겠습니까? 완벽하게 끝내시고 깔끔하게 은퇴하세요. 퇴직금은 충분히 챙겨드리겠습니다.” 진동기는 다시 입을 다문 이학재에게 조금 더 진솔한 속내를 말했다. “솔직히 전 실장님께 많이 섭섭합니다. 아버지께서 분명히 형님께 후계구도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텐데 단 한 번도 제 손을 들어준 적이 없었죠? 우리 형제 중에 후계자감은 저 아닙니까?” 이번에는 이학재 실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직도 그런 착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어? 후계자감에 대한 평가는 회장님과 내가 일치했어. 넌 아니었다.” 진동기는 믿기지 않은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영기 형이 나보다 더 낫다고? 도대체 평가 기준이 뭡니까? 욕심?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추진력?” “여전히 착각하는구먼. 진영기는 장남으로 태어난 게 전부다. 하지만 회장님께 장남은 큰 의미였어. 그 덕을 본 것뿐이다.” 진동기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설마 윤기…?” 이학재는 머리를 끄덕였다. “회장님과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 지금의 윤기를 봐. 비록 도준이와 오세현이가 도와줬다 해도 터줏대감들이 득실거리는 미디어 판에서 우뚝 섰다. 너라면? 순양을 동원해서 전력을 다한다 쳐도 10년 만에 한 분야를 석권할 자신 있어?” 진동기는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장담하는데 윤기는 한국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장악할 거다. 그놈이 유학 가서 딴짓만 하지 않았다면, 문화예술 방면으로 관심이 없었다면 회장님은 일찌감치 윤기에게 그룹을 승계했을걸? 대신 너희는 골프장이나 재단 정도 물려받았겠지.” “그래서 아버지는 도준이에게 그토록 애정을 퍼부은 겁니까?” “그것도 그래. 도준이가 어리지만 않았다면 너희를 위협했을 거다. 아니, 이미 위협했나? 무려 10%나 가져갔으니 말이다.” “도준이는 나도 인정합니다. 그러니 위협이 되지 않도록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겁니다. 만약 나와 영기 형이 도준이가 두려울 정도로 성장한다면….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을 거니까요.” “그런 건 또 회장님을 닮았지. 흐흐.” 이학재는 ‘부모 양쪽 모두의 피를 물려받았지’라고 말할 뻔했다. 정당한 방법으로 이길 수 없을 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불법이거나 범죄라고 해서 망설이지도 않는다. 이학재는 가져온 서류를 진동기의 책상에 다시 던졌다. “천천히 다시 살펴봐.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검사를 동원해서 날 찔러. 서로 칼질 한번 해보자. 내가 많이 다치는 건 각오하마.” “형님!” “낯간지럽다. 형님은 무슨!” 무심한 듯 툭 던지는 한마디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이학재는 굳은 표정의 진동기를 뒤로하고 순양그룹 본관을 빠져나왔다. 아직 그를 순양의 이인자로 생각하는 많은 직원들이 그를 발견하고 머리를 숙였을 때 이학재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에게 머리를 숙였던 직원들은 곧 자신을 회장의 믿음을 배신하고 순양의 돈을 빼돌린 양아치로 손가락질할 것이다. 이학재는 자신이 늙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예전 같으면 타인의 시선과 인식은 신경 쓰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명예라는 단어의 의미가 묵직하게 온몸을 눌렀다. 그가 힘없이 집으로 돌아온 오후 5시 15분, 대통령의 권한행사는 정지되었고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기 시작했다. ======================================= [250] 집으로 3 “대화 내용은 못 들었는데 가끔씩 고성이 오갔다고 합니다.” “진영기 부회장은 그 자리에 없었고요?” “네. 진동기 회장과 독대했습니다.” 드디어 누가 노리는지 이학재 실장도 알아버렸다. 그가 어떻게 대처할지가 궁금했지만,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혹시라도 그가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밀려나는 건 막아야 한다. 다시 김윤석 대리에게 물었다. “예전 기획실 직원들 근황은 어떻습니까?” “두 부회장님이 적절한 자리에 앉혔습니다. 홀대한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아니, 자리 말고요. 사람들 말입니다. 만족합니까?” “만족하지는 못하겠죠. 돌아가신 회장님의 친위대나 다름없었는데 지금은 2진이니까요. 두 부회장님을 처음부터 모셨던 측근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봉급쟁이에게 중요한 두 가지는 월급과 직책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숫자나 명함에는 나오지 않지만, 당사자도 알고 주변 동료도 안다. 그것은 바로 하는 일의 중요도와 주변의 인정이다. 능력과 자존심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이학재 실장 밑에서 눈에 보이는 두 가지와 눈에 보이지 않는 두 가지 모두 만족하며 지내던 그들이 쉽게 적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단 그들에게 먼저 동아줄을 내려보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이학재 실장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건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그를 서포트하는 뛰어난 스텝진과 함께 움직였기 때문이다. “김 대리.” “네.” “믿을 만한 전략실 직원들에게 지시해서 이학재 실장의 사람들과 시간을 조율해서 한자리에 모아주세요.” “전부 다요?” “네. 하지만 지금 큰아버지 밑에서 만족하는 놈들을 빼야 합니다.”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김윤석 대리는 머리를 끄덕였다. “네. 말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시키겠습니다.” 은퇴한 노정객이라도 측근들의 살림살이가 궁핍하면 외면하기 힘들다. 세간의 욕을 얻어먹더라도 다시 등장해서 자신을 따르던 가신들이 기를 피게 하는 것이 우두머리의 의무다. 이학재 실장도 우두머리의 의무를 잊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 * * “몇 명이나 왔습니까? 아니, 부르지 않은 사람은 몇이나 됩니까?” “네 명입니다. 그들이 저쪽 편에 완전히 적응했는지 아닌지, 판단하기 힘든 사람만 뺐습니다.” “그럼 여기 참석한 자들은 다 부적응자라는 말이죠?” “표면적으로야 그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회장님 살아계실 때가 좋았다고 구시렁대던 사람들입니다.” 어차피 부딪혀보기 전에는 회색분자를 알기 어렵다. 눈으로 확인하고 색깔을 바꾸는 게 지금 해야 할 일이다. “들어갑시다. 참, 이 사람들에게 줄 선물은 준비해 뒀죠?” “네. 직급에 맞게 챙겨 뒀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십여 명의 사내들이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그냥 앉으세요. 제가 여러분께 인사받을 위치는 아닙니다.” 어정쩡하게 다시 앉는 그들의 얼굴에 불편함이 보였다. 왜 불러냈는지 궁금하겠지만 대놓고 물어보기도 힘든 창업주의 핏줄, 그다지 직접적인 관계도 없는 애매한 위치. 속 시원한 것 하나 없으니 저들의 저런 표정은 당연했다. “자리가 많이 불편하신 듯하니 밥 먹기 전에 용건부터 말하겠습니다. 제 이야기 다 들으시고 편히 식사하십시오.” 이들의 표정이 조금 펴지고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전 부탁을 받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제게 어려운 부탁을 했고 전 여러분께 어려운 말을 해야 합니다.” 십여 명을 모아놓으면 성질 급한 놈도 있기 마련이다. 그놈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누구 부탁인지 먼저 말씀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두 분입니다. 아마 잘 아실 텐데…. 조대호 사장님과 오세현 대표님입니다.” 실내가 잠깐 술렁였다. 순양자동차 대표였던 조대호와 순양자동차를 가져간 오세현. 이 두 사람은 공통분모가 있다. 바로 HW 그룹. “아시겠지만 HW 그룹의 수장이셨던 송현창 회장님이 물러나시고 그 자리는 공석입니다. 그룹의 주력 기업 대표와 대주주의 대표는 회장 그릇이 안 된다며 한사코 마다하셨고 대신 한마음으로 한 명을 원하시더군요.” 십여 명을 모아 놓으면 성질도 급하고 눈치도 빠른 놈도 있다. “그 한 명이 혹시 이학재 실장님입니까?” “네. 하지만 이미 의사를 여쭈어봤는데 단칼에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또다시 술렁이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각자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학재 실장의 격에 맞지 않는 자리라는 생각도 있을 테고 이인자에서 일인자로 승격하는 셈이니 최적의 제안이라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얘기를 우리에게 하시는 건지…?” “여러분들은 이학재 실장님과 한 몸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그룹 회장으로 일하시려면 오랜 시간 동안 손발 맞춰온 여러분들과 함께인 것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이들은 눈치 또한 빠르다. 이학재 실장이 HW 그룹의 회장이 되면 자신들 전부 패키지처럼 HW 그룹으로 옮길 수 있다는 걸 안다.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며 계산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금 이들은 단 한 명도 주류 라인에 올라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때 계열사 임원들마저 아래로 보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부회장 비서실의 끗발 없는 일개 직원일 뿐이다. 한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눈치를 보며 아부성 발언을 늘어놓았지만, 지금은 비서실 내부에서도 굴러온 돌 취급 받을 뿐, 아부는커녕 먼저 접근하는 사람도 없다. 규모가 좀 작으면 어떤가? 다시 메인 스트림에 올라타는 일인데. 또한, HW 그룹의 규모가 작다고 해도 순양에 비교하면 그렇지 국내 기업 규모로 보면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대기업이다. 이 제안은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지만, 자신들은 패키지의 핵심이 아니다. 메인 상품은 바로 이학재 실장인데 그가 이미 거절해버렸다고 하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저기…. 이 실장님께서 거절하셨다면 무의미한 이야기 같은데요.” “환경은 변하고 상황은 바뀌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이 실장님의 생각을 바꿔주시는 건 어떨까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 피식 웃음까지 보였다.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이 실장님은 결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은 있지만, 최종 결정을 번복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설득해서 마음을 돌리실 분이 아닙니다.” 모두 머리를 저으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다들 만족하시나 봅니다.” 가라앉은 내 목소리 때문인지 모두 입을 닫았다.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라도 하는 겁니까? 여러분은 구조조정에 앞서 대기발령 중인 퇴출 대상입니다. 두 부회장님이 여러분에게 중책을 맡길 거라고 생각하세요? 뛰어난 인재들이라고 들었는데 실망입니다.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 하는 듯싶군요.” 내 말이 심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들도 안다. 믿고 싶지 않을 뿐 불투명한 미래가 지금보다 더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뭐, 전 HW 그룹을 대신해서 뜻을 전달하는 것뿐이니까 선택은 여러분이 하세요. 모두 이학재 실장님께 몰려가 함께 보금자리를 옮기자고 매달리든지 아니면 순양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퇴출당하던지….” 한마디 더 했다. 좀 더 센 걸로. “제 할아버지의 죽음이 잊혀질 때쯤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을 겁니다. 2세 경영 체제가 굳건해질 때 여러분의 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 가족을 잘못 본 겁니다. 우린 그렇게 너그럽지 않아요.” 말을 끝내고 김윤석 대리를 향해 눈짓했다. 김윤석 대리는 서류를 그들에게 나눠 주기 시작했다. “그건 HW 그룹에서 준비한 계약서입니다. 그 계약서에 사인하고 싶으면 이학재 실장님을 설득하세요. 이사하자고 말입니다. HW 그룹이 여러분의 새 보금자리로 적당하지 않을까요?” 계약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들을 남겨 두고 일어섰다. “제 일은 끝났습니다. 여러분들끼리 식사도 하면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세요. 그럼….” * * * “꽤 머리를 썼더구나.” “아쉬우니까 온갖 잔꾀가 다 떠오르더군요.” “너 혹시 뭐 아는 거라도 있어?” 이학재 실장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비서실 직원들과 만난 후 딱 이틀이 지났을 때 이학재 실장의 전화를 받았다. 시간으로 추측건대 비서실 직원들은 나와 만났던 그날 밤 그들의 보스를 찾아갔고 그는 하루 동안 생각하고 내게 연락한 것이다. 이것은 청신호지 적신호는 아니다. “많습니다. 가장 정확히 아는 건 실장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실 수밖에 없다는 거죠.” “내가? 지금까지 내가 결정을 번복하는 걸 본 적이 없었을 텐데?” “그거야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깔아놓은 꽃길만 걸어서 그런 거죠. 흙탕길을 걷다 보면 후회도 하고 생각을 바꾸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깔아놓은 꽃길로 올라오세요.” “북한이냐? 대를 이어 충성하게?” “제게 충성할 생각도 없으시면서 그런 말씀 하십니까?” 이학재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네 큰아버지 두 사람이 날 벼랑 끝으로 밀어 넣는 걸 알고 얘들까지 동원한 거 맞지?” “네. 제가 생각해도 절묘한 한 수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쁘지 않아. 그런데 넌 갈수록 얼굴이 두꺼워지는구나. 능물스럽기까지 해.” “웃으며 말씀드리는 게 실장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그냥 귀엽게 봐주십시오.” 마침내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실장님. 지금 큰아버지들과 부딪히지 마십시오. 정치판 상황을 생각하면 그분들은 날개까지 달았습니다.” 이번 총선은 그야말로 목을 내놓고 치르는 진검승부다. 대통령 직무정지 상태에서 총선을 치르니 여당도 야당도 사활을 걸었다. 당연히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야 하니 돈줄인 순양그룹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니 순양이 찍어내라고 손가락질만 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해낼 것이다. “싸우지 마시고 임시로나마 HW 그룹을 방패로 쓰십시오. 총선 끝나면 곧바로 반격할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나도 구렁텅이에서 건져주고 내 새끼들 전부 밥그릇도 챙겨주고…. 넌 뭘 챙기지?” “제가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합니다. 할아버지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학재 실장은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의외의 말을 한다. “너도 참 잔인하다. 힘든 내 사정을 후벼 파고, 내 새끼들 못 챙겨준 죄책감을 들쑤시고, 회장님을 거론해서 미안한 마음까지 들게 해?” “실장님은 의외로 의리 있으시네요. 지금은 실장님만 생각하십시오. 의리는 제가 챙기겠습니다.” “한마디도 안 져요. 허허.” “그럼 입 다물고 있을까요?” “까불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해. 넌 뭘 챙기고 싶은 거냐?” “첫째는 지주회사 전환을 막아 제 지분을 유지하는 것. 두 번째는 HW 그룹을 최소 재계 3위까지 끌어올리는 것. 순양과 대현을 앞지르는 건 힘들 것 같아 목표를 좀 낮췄습니다.” 이학재는 다시 침묵에 빠졌다. 거의 다 왔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드리워진 동아줄을 거부할 만큼 머리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누구의 그림자가 아니라 당당하게 전면에 서서 기업을 이끌어 나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은 욕심도 있을 것이다. 이학재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하나 더 하자.” “더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날 순양의 회장 자리에 올리겠다는 약속, 아직 유효하지?” “물론입니다. 대신 순양을 차지하는 데 힘을 보태주셔야 합니다.” 이학재는 싱긋 웃었다. “회장님께 들었다. 넌 깔끔한 거래 관계를 선호한다지?” “네.” “계약서는 내가 만드마. 깔끔하게.” 난 이학재 실장이 내미는 손을 덥석 잡았다. “새집으로 이사 오시는 걸 축하합니다.” ======================================= [251] 불가능한 동맹 1 HW 자동차의 조대호 사장은 잔뜩 굳은 이학재 실장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뭘 그리 긴장해? 기자회견이 처음도 아니면서?” “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이번엔 제가 회견의 당사자 아닙니까?” “대신 좋은 내용이잖아. 회장 취임. 좀 생산적이지 않냐? 지금까지 자네 기자회견은 전부 사죄 아니면 변명…. 아, 딱 잡아떼는 것이 대부분이었지? 차명 계좌는 없다, 정치 비자금은 우리와 무관하다, 회사 차원의 개별적 행동이었으며 진 회장님은 모르는 사안이다. 으허허.” “사장님까지 왜 그러십니까? 가뜩이나 그런 이상한 질문 나올까 봐 신경 쓰여 죽겠는데….” 이학재는 조대호 사장에게 툴툴거리다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사장님.” “응. 왜?” “괜찮으십니까?” “뭐가?” “제가 그룹 회장이 되는 것 말입니다. 한참 아랫사람인데 사장님 윗자리로….” 조대호 사장은 손을 들어 이학재의 말을 막았다. “한참 아래는 무슨! 순양 시절에 자네가 내 아랫사람이었나? 무서운 시어미 노릇 했으면서?” “사장님. 제가 또 뭘 그리….” “진 회장님 등에 업고 계열사 사장 군기 잡은 게 자네 아닌가? 지주보다 마름이 더 무섭다고, 자네가 딱 그짝이었잖아. 나도 회장님과는 형님, 아우 하며 편히 지냈지만 자네 눈치는 봤다고.” 이학재가 어찌할 줄 모르자 조대호 사장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지나간 일인데 다 털어버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야. 공적으로는 난 자네를 높이 평가해. 순양그룹의 지저분한 일만 처리하기에는 아까운 사람이었어. 자네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야. 다 잘됐어.” 조 사장의 덕담에 이학재 실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데 아쉽지 않으십니까?” “뭐가? 난 처음부터 회장 자리는 관심 없었는데?” “아뇨. 그거 말고 순양그룹 말입니다.” “무슨 뜻이지?” “사실 진 회장님께서 어이없을 만큼 자동차를 쉽게 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일시적일 뿐, 곧 자동차를 다시 순양으로 가져올 줄 알았거든요. 아마 사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겁니다.” “아, 그거?” “회장님이 돌아가셨으니 이젠 순양그룹과의 인연은 끝났습니다. 아쉽지 않으세요?” “전혀.”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는 걸 보면 진심이다. “처음엔 언제 다시 돌아가나 노심초사했어. 그리고 순양자동차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 엄청 눈치 봤고. 진 회장님이신지, 미라클인지 아니면 도준이에게 물려주려는 회장님의 복심이 있는 거지….” “그래서 누구 겁니까?” 이학재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조대호 사장은 짧게 웃을 뿐이었다. “이젠 누가 주인인지는 상관없어. 회장님이 돌아가셨으니 미라클 아니면 도준이겠지. 그렇지만 누가 됐든 주주일 뿐이잖아. 경영성과가 좋지 않으면 물러나야겠지만 그것은 내 탓이지.” 이학재는 조 사장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순양그룹 사장 중에 경영성과 때문에 옷 벗은 놈이 몇이나 돼? 비자금 들킨 놈, 2세들과 사이 틀어진 놈, 회장님 지시 사항에 반발한 놈. 다 이런 이유였잖아. 하지만 여기는 일만 생각하면 되니까 그렇게 마음 편할 수 없더라고.” “이제 제가 회장이 되면 환경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조대호 사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자네가 변할 거야. 이미 HW 그룹의 체질은 자네 한 사람 때문에 변할 만큼 허약하지 않아.” 이학재는 조대호 사장의 눈에 가득 찬 확신을 읽었다. “이제 시작할 시간입니다. 나가시죠.”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가 회견 시간임을 알렸다. “가지. 긴장 풀고 자연스럽게 해.” 두 사람은 대기실을 벗어나 회견장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터져 나오는 플래시와 셔터 소리가 회견장을 가득 메웠다. “뭐야? 뭔 기자가 이리 많어?” 이학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조대호 사장이 웃으며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오늘, 내일 빵 터트려야지. HW 그룹 회장 취임 기사가 대통령 탄핵 기사를 눌러야 하니까.”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에 앉아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요식적인 발표가 끝나자 조대호 사장이 말했다. “……그럼 기자님들 질문받겠습니다.” 뻔한 질문이 쏟아졌고 쓰기 좋은 대답이 이어졌다. “순양의 이인자로 지내신 분인데 다른 기업의 총수로 옮긴다는 건 기업윤리에 대한 문제는 없습니까? 순양그룹의 많은 비밀을 알고 계신 분 아닙니까?” 약빨 덜 받은 기자가 있었는지 민감한 질문이 나왔다. 조 사장이 당황해서 마이크를 잡으려 할 때 이학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업윤리는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닙니다. 회사의 경쟁력인 테크놀로지나 노하우를 빼먹는 일은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전 순양그룹 회장 비서실장으로 지냈습니다.” 이학재는 머리를 슬쩍 긁었다. “솔직히 순양그룹의 기술은 눈으로 봐도 모릅니다. 제가 HW 그룹으로 가져가는 건 제 경험입니다. 회장도 회사의 월급을 받는 봉급쟁이, 경험을 평가받아 경력직으로 뽑힌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경험은 회사 기밀이 아니니까요.” 조대호 사장이 슬쩍 끼어들었다. “이학재 회장의 연봉이 아무리 높아도 HW 그룹의 주식 하나 없으니 월급쟁이 맞습니다. 하하.” * * * “이거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 “어떻긴! 보고도 몰라? 새 둥지 찾아 도망간 거잖아!” 진동기는 신경질적으로 TV를 껐고 진영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자식이!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그리고… 네가 말했지? 이학재 저놈은 항복한 거나 다름없다고? 이야기 잘 끝냈다고 했잖아!” 진영기 부회장이 소리를 지르자 진동기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동생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진영기는 수화기를 들었다. “조대호 사장 연결해.” 진동기는 갑작스러운 형의 행동에 화들짝 놀랐다. “뭐 해? 조 사장은 왜?” “넌 입 다물고 있어.” 진동기는 눈을 부라리는 형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저런 표정일 때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 제 성질을 다 풀 때까지 건드리면 불똥만 떨어진다는 걸 안다. “아, 조 사장. 오랜만입니다.” 인사를 건넸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다. 진영기는 전화기를 확인하고 다시 말했다. “여보세요? 조 사장?” ― 듣고 있네. 말하게. 순식간에 진영기의 얼굴이 붉어졌다. 감히 어디서 하대를? 하지만 지금 성질대로 해버리면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다. 진영기도 그 정도의 자제심은 있다. “방금 기자회견 봤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 봤으니 알 것 아닌가? 회견 그대로야. 이학재 실장을 우리 HW 그룹이 스카우트한 거지. 직장인들 회사 옮기는 거야 특별날 것도 없지 않은가? “조 사장! 이게 직장인들 이직이랑 비교할 수 있는 일이요? 망명 아니오?” ― 뭐? 망명? 허허. 이거야 원…. 순양그룹이 뭐 국가라도 되나? 망상이 지나쳐. “조 사장!” ― 소리 지르지 마. 나 귀 안 먹었어. 그리고 다짜고짜 전화해서 남의 회사 일에 감 뇌라 배 놔라 하는 버르장머리는 어디서 배워먹었나? “뭐야?” 수화기를 쥔 진영기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 이봐, 진영기. 내가 돌아가신 회장님과 사석에서는 호형호제했다는 거 몰라? 이젠 순양과의 인연도 다 떨어졌으니 자네한테 숙부님 소리를 듣지 못할망정 예의 없게 반말 들을 사람은 아냐. 이만 끊지. 진영기는 신호 끊긴 수화기를 집어 던졌다. “왜? 무슨 일이야?” 진동기가 씩씩대는 형을 향해 물었으나 그는 소리만 질렀다. “법무부, 검찰 독촉해. 이학재 이 새끼 당장 구속수사 하라고 압력 넣어.” 진영기는 수화기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손에 잡히는 것 전부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 * * “그러니까 이게 지분 싸움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진 회장님의 최측근이었던 이학재 회장을 그토록 핍박할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장관님.” 오세현 대표는 찻잔을 든 법무부 장관에게 공손히 말했다. “그랬군요.” 어색한 표정의 법무부 장관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거, 우리 애들이 오해했나 봅니다. 이학재 실장…. 아니 이젠 회장님이죠. 아무튼, 이 회장이 순양그룹의 약점을 쥐고 단단히 한몫 챙기려 오너 가족을 협박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럴 리가요. 이학재 회장은 고 진양철 회장님의 자식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회장님 돌아가시자 곧바로 은퇴를 결심했죠.” “그런데 오 대표님. 도대체 지분 구조가 어떻길래 진영기, 진동기 부회장이 이 난리를 치는 겁니까?” “혹,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IMF 때 우리 미라클이 순양그룹에 달러를 지원했습니다.” “네. 어렴풋이 들었습니다. 그때 미라클의 달러가 아니었다면 아진그룹, 대아건설이 망했겠죠. 순양그룹도 계열사 여러 개가 무너졌을 겁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위태위태했죠. 우리 때문에 버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 회장님이 그룹 지분까지 넘기는 과감한 선택을 하셨고요.” “아…. 미라클이 순양의 지분을…?” “네. 그것 때문에 지금 두 부회장이 지분 구조를 확 바꾸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 미라클이 가진 지분을 휴지로 만들 생각이죠.” “그렇군요. 이제야 그림이 선명하게 보입니다그려.” 머리를 끄덕이는 장관을 보며 오세현이 말했다. “장관님. 그룹 내부 문제에 정부 기관이 관여한다는 게 알려지면 시끄러워지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죠. 더 커지기 전에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법무부가 오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는데 오 대표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허허.” 장관은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이학재 실장을 그룹 회장으로 초빙한 이유를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워낙 큰 이슈다 보니 궁금해서 그럽니다.” “그분은 순양의 후반기를 함께한 분입니다. 그 기간에 순양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죠. HW 그룹은 그런 순양의 역사를 본받으려 합니다.” “미라클은 자금 동원력이 어마어마하니 엄청난 투자를 하시겠군요.” “네. 전력을 다해 HW를 키울 생각입니다. 장관님께서도 관심 가져주시고 지켜봐 주십시오.” “아이고, 저야 뭐 시한부 인생 아닙니까? 정치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이 자리에서 떠날 각오로 하루하루 버팁니다.” 엄살을 떠는 장관의 눈이 빛났다. 그 눈빛의 의미를 모를 리 없는 오세현이었다. “장관님이야 이 자리가 잠시 거쳐 가는 항구 아닙니까? 더 큰 항구로 들어가셔야죠.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이거 말씀만 들어도 힘이 납니다. 허허.” “잘 아시겠지만, 이학재 회장도 사람이 진국입니다. 은혜를 잊을 분이 아니죠.” 오세현이 약을 치자 장관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 * *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쫄지 말고 앉아. 안 잡아먹는다.” 법무부 감찰국장은 HW 그룹 회장실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소파에 엉덩이를 걸쳤다. 널찍한 회장실에 가득한 난초 중에 가장 앞에 놓인 두 개의 난초가 그를 불편하게 했다. 법무부 장관 그리고 검찰총장이 보낸 난초였다. “축하 인사 때문에 직접 올 필요는 없는데, 혹시 이번에도 메모 전하러 왔나?” 메모가 무슨 의미인지 아는 감찰국장은 안색이 시뻘겋게 변했다. “일전에는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말했잖아. 안 잡아먹는다고.” “감사합니다, 회장님.” “감사는 무슨. 자네도 검사니까 알겠네. 살인사건 발생하면 찌른 놈을 잡아 처넣지, 범행도구인 식칼을 깜빵 보내지는 않잖아? 내가 식칼 붙잡고 드잡이질할 이유는 없어.” 검사를 칼잡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들 같은 거물들에게는 칼일 뿐이다. 검사를 도구로 사용하는 거물 틈에 낀 감찰국장은 죽을 지경이었다. ======================================= [252] 불가능한 동맹 2 “수사 종결하라는 장관님과 총장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혹여 마음 상하셨다면 넓은 마음으로 잊어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으셨고요.” 이학재는 여유롭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래? 여기 HW 그룹도 꽤 하는군. 순양의 요청도 쌩깔 정도의 위상은 되나 보지?” “자칫하면 기업들의 정당한 경쟁에 정부가 개입한다는 오해를 사기 십상이니까요.” “단지 그게 다야?” “HW 그룹의 위상과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라서요.” 감찰국장이 조심스레 말했을 때 이학재는 이마를 찌푸렸다.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돼? 안 돼?” “되, 됩니다. 앞으로 회장님께 찝쩍댈 곳은 없을 겁니다.” “검찰도, 법무부도 여기 돈 많이 받아 처먹었구먼. 빨대 무지하게 꽂아 뒀어.” 이학재의 노골적이고 천박한 표현이 거슬리는지, 감찰국장은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 모습을 놓치지 않은 이학재 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담뱃재를 재떨이가 아닌 물 잔에 터는 실수까지 범했다. “메모는 잘 받았다고 전해. 그리고 내가 예전보다 더 신경 써서 챙겨줄 테니 자네도 그리 알고 가.” 불편한 자리에서 해방된다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돈을 더 챙겨준다는 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감찰국장의 표정이 다시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럼….” 그가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을 때 이학재 회장이 말했다. “그래도 한번 뱉은 말은 지켜야지?” “네?”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잔을 받겠다고 하지 않았나?” 이학재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담뱃재가 떨어진 물 잔이 놓여 있었다. “왜? 이 집은 마음에 안 들어? 꼭 순양이라야만 돼?” “아, 아닙니다.” 감찰국장은 재빨리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학재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래서 자네를 미워할 수 없다니까. 심부름하느라 수고했어. 자네 차에 박스 하나 실어 뒀으니까 애들 과자값이나 해.” 감찰국장은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나갔다. 혼자 남은 이학재는 이제 뒤를 쫓는 늑대가 없어졌다는 안도감을 즐길 여유도 없었다. “회장님. 진도준 실장님이 오셨습니다.” * * * 회장실에 가득 찬 축하 난을 보자 이학재 실장의 거미줄 같은 인맥을 엿보는 듯했다. “축하합니다. 이학재 회장님.” “됐다. 안전한 곳으로 숨은 꼴인데 축하는 무슨.” 이학재는 나의 축하 인사가 거북한 듯 손을 내저었다. “그 자리 싫으시면 사표 쓰시던가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쏘아붙이자 움찔했지만,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건 순식간이었다 “지방으로 좌천당한 공무원 심정인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자리로 보면 엄청난 승진 아닙니까? 누가 보더라도 영전입니다.” 마지못해 회장 자리를 수락한 건 아닐 테지만 두 번 다시 이런 말은 나오지 않아야 한다. 그가 이끌어야 할 사장과 임원들도 바보는 아니다. 도살장에 끌려온 소 같은 모습의 회장이라면 기존 경영진의 집단 반발은 뻔하다. “순양그룹 같은 대형차를 운전했으니 HW 정도야 한 손으로 핸들링할 것 같죠? 만만해 보이죠? 어림없습니다. HW 그룹이 순양보다는 작더라도 경차 수준도 아니고 동네 구멍가게도 아닙니다.” 이학재 회장은 다시 손을 내저었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였다. “핀잔은 그만해. 오늘 하루 축하한다는 소리를 워낙 많이 들어 쑥스러워서 그랬다. 만만하게 생각한 적 없고 좌천당했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 잘해낼 수 있을까 두렵고 무섭기까지 하다. 요즘 잠도 안 와.” “하다 하다 이젠 엄살이십니까?” “진심이다.” 간절한 눈빛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무심한 표정. 감정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니까 단언하는 그의 말투에서 진심을 읽어야 한다. “믿겠습니다.” “기회다 싶으면 사람 갈구는 건 딱 네 할아버지 판박이다.” 입가에 걸린 작은 미소를 보며 나도 슬쩍 웃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는 아주 잠시 보였던 미소를 지우고 말했다. “조금 전 법무부 친구 하나 다녀갔다. 더는 날 괴롭히지 않겠다고 하면서 사과하더라.” “오세현 대표가 좀 뛰어다녔습니다.”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 양반은 통 안 보이시네.” “주주가 전문경영인 자주 보면 부담이라고 하시면서… 지금쯤 짐 싸실 겁니다.” “짐? 또?” 오늘 나와 함께한 시간 중에 가장 놀란 표정이다. “네. 코타키나발루로 돌아가신답니다. 이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부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더군요.” “그래? 대리인은 가고 진짜 주주… 아니, 주인은 남아 있구먼.” 그는 슬쩍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전 오세현 대표와 다르거든요. 감시의 눈길을 절대 거두지 않습니다. 흐흐.” “이거 어째 소문과 다르다? 너 순양금융그룹에서는 주요 인사 문제 빼고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거긴 할아버지가 물려주셔서 공짜로 받은 거고, 여긴 내 피 같은 돈으로 하나하나 사들인 회사거든요. 차원이 다르죠.” “그래. 네 피 같은 돈 날리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마.” “그게 전부는 아니죠. 여기서 회장님의 경영능력을 검증하지 못하시면 약속했던 순양그룹 회장 자리는 못 드립니다.” “그 약속 지키려면 네가 순양을 차지하는 게 먼저다. 큰소리는 그 뒤에 해.”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는 신뢰보다 투지가 넘쳤다. “비서실 직원들은 다 데려오셨습니까?” “그래. 지금 짐 정리 중일 거다. 나중에 꼬투리 잡히는 일이 없어야 하니까 지울 건 지우고 챙길 건 챙기라고 해 뒀다.” “순양에 남겠다는 직원은 없었습니까?” “꽤 있었지. 하지만 설득했다. 남겠다는 놈들은 내가 연락했을 때 외면했던 전력이 있어. 그러니까 미안해서 그런 거거든. 하지만 다 떠난 자리에 남아 있어 봤자 눈칫밥만 먹을 게 뻔하잖아? 챙겨줘야지.” “그 사람들의 충성심이 더 깊어지겠네요. 사면받았으니.” “이놈아. 그런 계산 없다. 이건 의리야.” 이학재 회장은 흘깃 노려보더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참, 이번 총선은 어쩔 생각이냐?” “하나 마나 한 선거 아닙니까?” “왜?” 정세를 읽는 눈을 확인하려는 듯 알면서도 꼬치꼬치 캐묻는다. 이미 아는 거 말해주는 건 어렵지 않다. “대통령 탄핵의 후폭풍이 저리도 거센데 여당의 압승이겠죠.” “압승? 어느 정도?” “과반수 이상.” 이번엔 조금 놀란 듯하다. “너무 많이 잡은 거 아냐? 지금 여당은 미니 정당이야. 겨우 47석의 제3당인데 과반수 이상?” “거대 야당이 멀쩡한 당사를 버려 두고 여의도에 천막 치고 동정표 끌어모으는 중입니다. 그들은 피부로 위기를 느끼니까 그런 쇼를 하는 겁니다만, 이미 늦었죠. 대통령 탄핵이 미니 여당 최고의 선거 마케팅 수단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겁니다.” 총선을 코앞에 둔 야당은 ‘국민께 석고대죄하는 심정’이라며 허허벌판에 천막을 쳤다. 이른바 천막 당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차떼기당’이란 오명이 너무나 두터웠고 대통령을 탄핵한 후폭풍이 거셌다. 천막 당사는 총선에서 50석도 못 건질 것이란 예상이 일반적일 만큼 수세에 몰려 시도한 극약처방이었다. ‘당이 부패 정당, 기득권 정당이란 오명에서 완전히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로 중소기업종합전시장이 있던 여의도의 공터에 천막 당사가 마련됐고, 야당 의원들은 천막으로 출근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천막 당사를 차린 구 중소기업전시관 터의 자리를 50일 빌려 전체 임대료로 4,200만 원을 주었는데, 당시 여당의 당사 건물 임대료는 월 2,500만 원이었다. 국민에게 동정표를 구하느라 엉뚱한 곳에 세금을 쓴 것이다. 이학재는 과반수 이상이라는 내 예측은 여전히 믿지 못하는 눈빛이었지만 그도 하나는 인정한다. “정세 예측은 너 따라갈 사람 없으니 그 판단을 믿고 움직이는 수밖에. 그럼 여당에 몰빵해?” “아뇨. 성의를 안 보였다고 불이익을 받지 않을 만큼만 던지죠. 어차피 다 이긴 선거고, 지금 여당은 우리 같은 대기업에 큰 특혜를 줄 것 같지도 않으니까요.” “그래? 그럼 쓸데없는 돈은 안 나가겠군.” “아뇨. 대신 지금 천막 치고 길에 나앉은 야당 있지 않습니까? 컵라면이라도 몇 박스 보내죠.” “질 게 뻔한 놈에게 베팅하자고?” “알면서 왜 그러십니까? 지금 천막 치고 쇼하는 야당은 항상, 늘 친재벌 정당 아닙니다. 그들이야 우리가 준 만큼 꼭 보답하니까 나쁠 건 없어요.” 이학재 회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도 이미 잘 아는 걸 내게 확답받기 위해 물어본 것은 내가 이 회사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걸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적당히 뿌릴 테니까 그리 알아. 혹시 이런 것도 다 승인받아야 하나?” “그럴 리가요. 불법적인 일에는 발을 담그지 않고 모른 척하는 게 낫죠. 나중에 잡혀가더라도 오너는 쏙 빠져야 하니까 말입니다.” “뻔뻔한 놈. 미안한 기색이라도 좀 하고 말해. 흐흐.”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을 때 비서가 문을 두드렸다. “회장님. 사장단 회의 시간 다 됐습니다. 어떡할까요? 좀 연기할까요?” 조심스럽게 말하는 비서를 향해 가볍게 손을 저으며 일어섰다. “아닙니다. 제 볼일은 끝났습니다. 신임 회장님이 주재하는 첫 사장단 회의인데 늦으면 안 되죠. 사장님들 욕합니다. 회장이랍시고 폼 잡느라 늦게 나타난다고요.” 이학재 회장도 회의 참석을 위해 일어서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너무 자주 오지 마. 은근히 신경 쓰여.” 난 그이 손을 잡으며 말했다. “회장님.” “뭐냐? 아직 잔소리가 남았냐?” “자동차 프로젝트 중에 알파로메오 인수 건이 있을 겁니다. 막바지에 달했으니 면밀히 검토해주십사 부탁드립니다. 하하.” * * * 보고서를 검토하던 두 형제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졌다. 결국, 참을성이 부족한 진영기 부회장이 먼저 보고서를 휙 던져 버렸다. “이 새끼들이 깽판까지 치고 튀어?” 진영기의 고함에 진동기도 보고서에서 눈을 뗐다. “교묘하게 중간 고리를 지웠네. 이거 골치 아파지겠는데?” 지배지분의 계열사 간 연결 고리 일부를 파악할 수 없다는 내용과 지주 회사 설립은 내년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것이 보고서의 결론이었다. “이학재 그 새끼랑 밑에 일하던 비서실 새끼들 전부 고발해야겠어. 사표 쓰고 나가는 놈들이 감히 똥을 싸질러?” “진정해. 이건 우리가 해결해야 해. 그놈들 수사하려면 지배지분 이동부터 차근차근 밟아야 하는데, 편법 증여라는 걸 세상에 광고라도 할 참이야?” 차분한 동생의 말에 진영기는 더욱 얼굴을 구겼다. “그래서? 이대로 보고만 있자고?” “일단 총선 끝나고, 대통령 탄핵 여부 결정이 나면 그때 다시 대책을 세우자고.” “야! 그놈들이랑 우리가 뭔 상관인데?” “생각 좀 하자. 검찰은 손 털었어. 우리가 무기로 쓸 수 있는 건 결국 정치권이야. 그놈들 움직여서 HW 그룹을 흔들자고. 국세청도 있고 금융감독원, 공정거래위원회도 있잖아. 사람이 안 되면 회사를 쳐야지.” “젠장. 허구한 날 기다리고, 헛발질이나 계속하고.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말 한마디, 지시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착착 해결되던 모습을 봐온 진영기는 그때처럼 술술 풀리는 일이 없자 답답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만큼 우리 입지가 굳건하지 못하다는 뜻이겠지. 어쩔 수 없어. 다들 그랬잖아. 청일그룹, 화순그룹…. 모두 2세 체제에서 얼마나 고생했어? 대현그룹 봐봐. 아직 시끄럽잖아.” “빨리 회장 선출해서 확 휘어잡아야 해. 그래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진동기는 형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회장 선출이라니…? ======================================= [253] 불가능한 동맹 3 “회장 이야기는 그만하자. 내년이면 지주 회사 설립이 가능하다고 하잖아! 그때 회장실 차지해. 우리가 약속한 대로.” “동기야. 형식적이야. 대외적인 모양새만 갖추자고. 네가 관리하는 계열사는 절대 손대지 않으마.” “그래? 그럼 반대로 하자. 내가 회장 타이틀 가져가면? 전자를 비롯한 형님 계열사 쪽으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어때?” 진영기는 동생의 되바라진 말을 듣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놈은 장남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지를 모른다. “겉도는 이야기는 그만하자. 네 회사 손 안 대는 것은 당연하고 추가로 원하는 것을 말해. 단, 회장 자리 달라는 억지는 그만 부려. 장남이 회장이고 차남이 부회장이면 둘 다 살아. 하지만 차남이 회장 자리에 오르는 순간 장남은 사형선고 받은 거나 다름없다고. 세종이 세자가 되는 순간 양녕대군은 궁 밖으로 쫓겨났어. 그게 세상의 눈이다.” “장남이 왕위에 오른 후 죽임을 당한 왕자가 더 많아. 부회장? 과연 내가 그 부회장이라는 자리라도 보존할까? 회장 직책을 이용해서 날 쫓아낼 거야.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두 형제가 팽팽한 시선을 교환할 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잘들 하는 짓이다. 뭐가 어쩌고 어째? 양녕? 세종?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어디서 왕자놀이를 하는 게냐?!” “어, 어머니!” “갑자기 어쩐 일로….” 연락도 없이 나타난 어머니 때문에 두 아들은 깜짝 놀라 다툼을 멈췄다. 이필옥 여사는 진영기의 집무실을 휙 둘러보더니 소파에 털썩 앉았다. “멀쩡한 회장실을 비워놓고 이런 곳에 만족하는 너희를 보니 내 억장이 무너진다.” “어머니. 그 자리는 결국 우리 형제가 앉을 겁니다.” “시끄럽다!” 진동기가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의 모친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내가 네 아버지 장례식 때 말했지? 도준이 그놈부터 들어내라고! 그놈이 가진 금융계열사, 그것부터 빨리 찾아와! 이놈들아.” “그만하세요, 어머니.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 “이학재가 저쪽으로 갔다. 아직 모르겠어?” 이필옥 여사는 아들의 말을 자르며 탄식했다. “이학재가 회장으로 간 회사는 오세현인가 뭔가 하는 놈이 주인이다. 오세현이는 윤기와 친구고. 이학재, 오세현…. 이 두 놈이 도준이를 들쑤시면 어찌 되겠어? 우리 순양의 금융계열사부터 노릴 거다. 계열분리 작업을 시작하면?” 두 부회장은 머리를 탁 치고 싶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서로만 노려봤다. 어머니가 도준이를 싫어하는 건 노인네의 옹졸한 마음이라고 치부했을 뿐 그리 신경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앙심을 품었을 게 분명한 이학재가 도준이와 손을 잡는다면? 역시 사람은 자신의 시야만으로 모든 걸 본다. 어머니는 극렬히 미워하는 막내 손자에 몰두해 있으니 항상 최악의 경우만 상상했고, 이젠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왔다. “도준이 그놈은 네 애비와 똑같다고 내가 늘 말했지? 욕심도 많지만, 쇠(金)귀신도 붙은 놈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지분으로 위태위태하게 있느니 재빨리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할 거야. 그런데 이학재가 도와준다고 바람 넣으면? 네놈들이 노래 부르는 그 지주 회사 만들기도 전에 금융그룹이 먼저 떨어져 나갈 거다.” 두 아들은 노모를 바라보며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이런 재빠른 판단이 과연 집착 때문일까? “회장 자리 놓고 다툴 때가 아니라는 걸, 이래도 모른다면 네놈들은 회장 자격도 없다!” 어머니의 호통에 장성한 두 아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동기야.” “네. 어머님.” “지금 당장 네 형을 회장 자리에 올리라는 말이 아니다. 형과 뜻을 같이해서 순양의 금고나 다름없는 금융계열사부터 되찾아라.” 어머니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학재라는 인물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안다. 그자가 손을 쓰기 전에 빨리 조치를 해야 한다는 걸 진동기도 충분히 느꼈다. “그리고 영기야.” “네.” “금융그룹을 되찾더라도 네가 차지하겠다는 욕심은 가지지 마. 허수아비라도 좋으니 상기를 거기 앉혔으면 좋겠다. 너희 둘이 싸우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모양새 아니겠니?” 어머니의 타이르는 듯한 말도 두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젠 회장 자리는 한쪽으로 잠시 밀어놓고 금융계열사를 가지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 * * 양우찬 전 순양생명 사장은 진영기 부회장의 부름에 막연한 기대를 품고 달려갔다. 새파란 어린애 때문에 당한 모욕을 회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였다. 그가 살포시 진영기 부회장의 집무실 문을 열자 진동기 부회장이 먼저 반겼다. “어서 오세요, 양 사장님. 아버지 장례식 때는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죠?” “아이고, 아닙니다. 정신없으셨을 텐데 그럴 경황이 있었겠습니까? 아무튼 큰일 치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서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앉읍시다.” 진영기가 그의 등을 토닥이며 소파로 끌었다. 의례적인 인사말과 근황을 묻는 의미 없는 말이 오갔고 양우찬 사장이 자신을 불러낸 이유를 궁금해할 때쯤 진영기가 말했다. “순양금융그룹을 재정비하려고 하는데 사장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재정비라니요? 혹시 통폐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아직 구체적인 그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가만히 두고 보기가 힘들군요. 아무래도 도준이 같은 어린애가 만지다 보니 위기 대처 능력도 의심되고….” 양우찬 사장은 두 부회장의 본심을 알아야 했다. 본심도 모른 체 섣불리 지껄이다가는 도리어 기회를 놓쳐버릴 수도 있다. “진도준 실장은 새로운 경영진을 세팅한 후, 일절 관여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경영진의 문제일 텐데….” 양 사장은 두 사람의 눈치를 슬쩍 보며 말했다. “그게 문제라는 거요. 금융그룹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할 때 제각기 놀면 어쩌려고! 쯧쯧.”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한국 실정에 맞기나 해? 어디서 외국 기업 흉내나 내는 거지. 그런 게 쿨하다고 생각할 나이긴 하지만.” “그러니까 우리 양 사장님 같은 분을 박대한 거 아니겠어? 애가 뭘 알아?” 양우찬 사장의 눈이 빛났다. 금융그룹 재정비는 핑계일 뿐이고 진도준을 쫓아내려 하는 것이 분명하다. 역시…. 호랑이 같은 진 회장이 사라지니 늑대 새끼들이 이빨을 드러낸다. 물론 이것이 자신에게 기회라는 걸 모를 리 없는 양 사장이었다.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저같이 일선에서 물러난 구세대가 새롭게 재정비하는 데 도움이 될는지…?” “구세대라니? 그게 무슨 겸손의 말씀이십니까? 아직 정정하시고 한창입니다.” 양 사장의 얼굴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내세워 진도준을 치려는 것이 분명하다는 걸 확신했다. “아무튼 회사를 재정비하려면 가장 먼저 경영진을 정비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기업은 곧 사람이니 말이요.” 진영기 부회장은 양 사장의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수족처럼 움직일 인재들을 구석구석 배치해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죠. 그런데….” “편히 말씀하세요. 양 사장님.” “만약 경영진을 교체하실 생각이시라면 진도준 실장의 의견도 확인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진동기는 양우찬 사장의 생각을 읽어내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대표이사 및 임원 선임은 이사회 결정 사항인데 진도준 실장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이사회보다 더 상위에 있는 게 주총 아닙니까?” “그야 그렇죠.” “그룹 지분을 보면 저와 형님의 지분만 합치면 51%가 넘습니다. 이래도 도준이의 허락이 필요할까요?” 양 사장은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 부회장의 지분만으로 금융그룹을 휘어잡을 수 있으니 진도준이라는 어린놈은 손가락 빨며 바라볼 뿐 아무런 일도 못 한다. “아이고, 그렇다면야 뭐…. 당장 이사회 소집하고 부회장님들 사람으로 재정비하셔도 문제없겠습니다.” “그래서 양 사장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두 부회장은 서로를 향해 눈빛을 교환했다. “대표이사와 임원진, 요직 부서의 부장급까지 리스트를 만들어보십시오. 진도준에게 반발하는 자. 그리고 추종자.” “아, 살생부인 셈이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대신 하나는 명심하세요. 절대 사적인 감정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냉철하게 판단해서 만드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참, 순양생명의 대표이사 자리는 비워 두십시오. 그 자리는 바로 양 사장님을 위한 자리니까요.” 양우찬 사장은 죽은 진 회장이 살아 돌아온 듯 감격에 찬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진영기 부회장님, 진동기 부회장님. 제게 이런 기회를 다시 주시다니….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진영기는 머리를 배꼽까지 숙이는 양 사장의 등을 두드렸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처럼 손발 한번 맞춰봅시다. 기대하겠습니다. 하하.” 양 사장은 두 사람에게 연신 허리를 굽히며 나갔다. 떠난 그의 빈자리를 보며 진영기가 피식 웃었다. “어때? 잘할 것 같지?” “꼼꼼하게 하겠지. 자기가 데리고 쓸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테니.” “노친네, 벌 만큼 벌었으면 손주나 보며 쉬는 게 당연한데…. 나이 처먹고도 욕심을 버리지 못해요.” 진영기는 마치 벌레라도 본 듯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겠어? 뒷방 늙은이로 나앉으면 떵떵거리던 옛 생각밖에 더 나겠어? 그때가 그리운 거지.” “명단 작성이 마지막 임무라는 걸 알면 실망할 텐데….” “왜? 안쓰러워?” “안쓰럽기는 개뿔, 밥이나 한 그릇 사 주고 용돈 좀 쥐여주면 되겠지.” 두 사람이 사라진 양우찬 사장을 비웃을 때 다시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나타났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순양생명 신임 대표이사님.” 진영기는 허리까지 꾸벅 숙이며 과장된 인사를 했지만, 진동기는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순양생명의 새로운 대표이사는 아무래도 진영기 부회장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서 와라, 상기야. 차 한잔할래?” 정말 오랜만에 순양 본관을 찾은 진상기는 큰형의 말에 활짝 웃었다. “형님들!” * * * “양 사장이?” “네. 요즘 뻔질나게 진영기 부회장실을 들락거린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장도형 부사장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이게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상기 이사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싱글벙글하며 본관에 자주 나타납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회사에 나타나면 감출 수 없다. 특히 임원 이상의 전용층에는 출입하는 사람을 한 명도 빠짐없이 지켜보는 여직원이 있고, 여직원들은 새로운 소식은 빠르게 전달하기 마련이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죠?” 장도형 부사장은 조금은 힘들게 말했다. “진상기 이사장님이 공공연히 떠들고 다닙니다. 자신이 순양금융그룹의 새로운 책임자라고 말입니다.” 양우찬 사장이 등장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큰아버지 두 사람이 뭔가 꾸미고 있다는 걸 짐작했다. 그런데 진상기라니? 이건 뭔가 어색하다. 세 형제의 관계를 봤을 때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계획이다. “셋째 큰아버지는 입이 가볍죠. 그리고 과장된 허세도 곧잘 부리고요.” “허세라고 보기에는 위험한 것 아닙니까?” 장도형 부사장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분들이 뭘 꾸미든 간에 실패할 확률이 높아요. 한마음으로 움직일 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십니까?” “공통의 이익 아닙니까? 힘을 합쳐 이익을 볼 수만 있다면 철천지원수와도 손잡는 게 사람입니다.” “아뇨. 그 전에 꼭 필요한 게 있어요. 내가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거나 이익을 적게 가져가도 괜찮다는 마음이죠. 욕심의 일부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집안 사람들은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에요.” 하지만 내뱉는 말과 다르게 찜찜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 [254] 불가능한 동맹 4 “실장님. 너무 확신하는 건 위험합니다. 두 부회장님이 힘을 합치면 지분의 51%가 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이번에는 욕심이나 이익을 위한 게 아닙니다. 공동의 적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이럴 때는 욕심을 잠시 접어 둘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공동의 적이라……. 내가 그들 공동의 적일까? 아니면 두 사람의 무게 균형을 잡아주는 추일까? 물론 장도형 부사장의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의 생각에는 빠진 것 하나가 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두 분이 손잡으면 절 쫓아낼 수도 있죠. 하지만 전리품을 어떻게 나누느냐를 생각하면 다시 욕심이 머리를 듭니다. 산 넘어 산이죠.” “실장님.” 걱정하는 장도형 부사장의 마음이 보인다. 일단 그를 진정시켰다. “알겠습니다. 그분들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좀 더 확인해봐야겠어요.” “네. 저도 임원들을 만나보겠습니다. 혹시라도 새로운 사실이 나오면 곧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난 장도형 부사장과 헤어지고 곧바로 김윤석 대리를 불렀다. “그룹 내 전략실 직원들에게 확인하십시오. 두 부회장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진상기 이사장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떻게 알았어요?” “회장님께서 그룹 승계작업 끝내시고는 그룹 본관에 발도 디디지 않다가, 며칠 전부터 갑자기 뻔질나게 드나든다고 하더군요. 늘 두 부회장님과 만난다고 하니, 새로운 일이라면 그것뿐이거든요.” “왜 들락거리는지는 모르고?” “곧 그룹으로 복귀한다는 말이 떠돌긴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이 바로 진상기 이사장님 입에서 나온 말이니까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좀….” 워낙 과장이 심한 사람이라 흘려듣는 이가 많지만, 그룹을 떠났다가 오랜만에 돌아와서 허풍부터 일삼을 바보는 아니다. 양치기 소년의 말도 두 번은 거짓이었지만 한 번은 진실이다. 큰아버지들이 금융그룹을 차지하기 위해 모략을 꾸미는 건 거의 확실하지 싶었다. 아, 금융그룹을 차지하는 건 날 쫓아내면 얻게 되는 부수적인 효과다. 그 할망구가 부추겼나? * * * “회장님. 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네 표정 보니 딱히 심각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이학재 회장은 내 표정을 힐끔 보더니 다시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 “아닙니다. 이건 표정 관리한 겁니다.” 이학재 회장은 서류철을 덮으며 짧게 한숨 쉬었다. “그래, 너한테 바람 잘 날 있겠어? 또 무슨 일인데?” “우리 큰아버지들께서 목표물을 바꿨나 봅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절 노리는 게 틀림없습니다.” 이학재 회장은 농담처럼 받아들이다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내가 꿩이고 네가 닭인 건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말해.” 난 진상기 이사장이 회사를 들락거리고 공공연히 떠벌리는 말을 전했다. “물론 가능한 일이긴 한데 두 부회장이 손을 잡는다는 게 영 믿기지 않습니다.” 내 얘기를 끝까지 들은 이학재 회장의 표정은 나보다 더 심각했다. “도준아. 그룹을 지배한다는 건….” “인사권을 틀어쥐는 것 아닙니까?” 내 성급한 대답에 그는 손을 들었다. “하나 더 있어.” “그게 뭐죠?”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당연하다…?” 이학재 회장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순양금융계열사를 맡아 첫 번째 인사 조치를 단행했을 때…. 특히 네가 해임한 임원 중에 네 자격을 묻는 사람이 있었어? 네가 진짜 인사권을 휘둘러도 되는 법적 자격 말이야.” “아….” “순양에 몸담은 사람 그 누구도 네 자격을 의심하지 않아. 넌 진 회장님의 손자였고 그분이 네게 금융그룹을 맡긴다고 밝히셨으니까.” “순양의 모든 이는 큰아버지를 당연하다고 여기니까 조건은 충족했군요.” “지분도 문제없지. 그 두 사람이 금융 계열사 대표이사와 임원진 전부를 싹 교체하고 조직을 바꿔도 넌 보고만 있어야 해.” 이학재 대표는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거참, 으허허. 어지간히 똥줄 타나 보군. 두 사람이 손을 잡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인데 말이야.” “웃음이 나오십니까? 여차하면 할아버지께서 주신 걸 홀라당 뺏길지도 모르는데?” “네 인생에 영원한 승승장구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순양은 거대한 장기판이다. 밀릴 때도 있고 위기도 닥치겠지. 장기 말 몇 개가 죽는다고 해서 흔들릴 것 같으면 이 판에서 못 견뎌. 마지막 왕 하나만 남더라도 이기면 되는 거다.” 그의 말이 아리송하다. 난 재차 확인했다. “이번엔 물러나라? 그런 뜻입니까?” “그걸 왜 내게 물어보지? 스스로 판단할 능력도 충분하잖아.” 이학재 회장마저 불가능하게 보았던 큰아버지들의 동맹,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난 동맹을 깨버릴 한 수가 있다. “제가 큰아버지 두 분 중 한 분에게 미라클과 제 지분으로 밀어드릴 테니 저와 손잡자고 한다면 두 분의 오월동주는 끝이죠.” “과연 그럴까?” “그럴 겁니다.” “여유 있어 보이는데, 허세냐?” “아이고, 여유는요? 지금 속은 바짝 타들어 갑니다.” 한동안 물끄러미 나를 보던 이학재 회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와 손잡으면 더 강력한 라이벌인 형제를 쳐낼 수 있는데 왜 라이벌끼리 손잡았을까? 네가 그 두 사람의 오월동주를 끝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내 마음 한구석에 가장 걸리는 것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으니 불안이 점점 더 커졌다. 내 표정의 변화를 느꼈는지 이학재 회장은 슬쩍 웃었다. “내가 좀 도와주리?” “그럼 감사하죠.” “너 돈 많지?” “제가요?” “미라클이 보유한 돈 꽤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거기에다 진 회장님이 관리하시던 돈, 그거 네 손에 있지? 그 정도면 우리나라 현금 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걸?” “돈 많은 건 인정합니다.” “그럼 그 돈을 이용해서 금융그룹을 계열분리 해줄까? 순양 이름 떼고 HW 금융으로 바꿔버릴 수도 있어.” 순양의 지배구조를 훤히 안다는 것은 구조의 약점까지 훤히 안다는 뜻이다. “많은 시간과 엄청난 돈이 필요한 작업이겠죠?” “그렇지.” “그 전에 큰아버지들은 단숨에 절 축출할 것 같은데요?” “그것도 그래. 기업을 지배한다는 건 사람을 지배한다는 의미니까. 이사회 열어서 자기 사람을 다 심으면 끝. 회의 한 번으로 돼. 왜냐하면….” “반발이 없으니까요. 아까 말씀하신 대로 누구나 큰아버지들을 순양의 주인으로 생각하니까.” “부회장들이 사람을 지배하더라도 넌 주식을 끌어모을 수 있어. 지분을 확보하면 역전이지.” 그룹 전체를 사는 건 불가능해도 순양생명을 사는 건 가능할지도 모른다. 또한, 순양생명은 금융 계열사의 모회사나 다름없으니 역전의 기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난 머리를 저었다. “안 할랍니다. 잠시 맡겨 둔다고 생각하죠, 뭐. 귀중한 돈과 시간을 써 가면서 일부만 차지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어차피 다 가져올 텐데. 괜히 그들이 경계심만 잔뜩 가지게 됩니다. 그럼 큰 거 가져오는 게 더 힘들어지죠.” 이학재도 머리를 저었다. “발을 걸치고 있는 건 엄청나게 중요하다. 네가 순양그룹을 통째로 가져오는 게 일, 이 년 안에 가능한 일도 아니잖아? 한참 그룹을 떠나 있으면 넌 그룹과 전혀 관계없는 외부인이야.” 그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나 보라고. 회장님 돌아가시고 내가 은퇴한다고 하니까 그동안 내게 굽신대던 놈들도 순식간에 돌아섰어. 네가 그룹을 오랫동안 떠나 있으면 널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들도 마음이 변해. 네가 순양을 차지하더라도 널 주인이라기보다는 침략자로 여길걸?” 결론은 두 부회장의 음모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태로 유지해야 하는군요. 계열분리는 날 침략자로 만드는 것이니…. 그리고 할아버지의 유산인데 순양이라는 이름을 떼는 건 저도 싫습니다.” “결론 났네. 두 사람이 손잡는 거 막아.” “안 도와주실 겁니까?” “내가?” 그는 어림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계열분리는 도와줄 수 있어. 하지만 형제가 손잡는 건 내가 어찌할 방법이 없다. 네가 풀어야 해.” 이학재는 마지막 조언으로 그의 말을 끝냈다. “네가 가진 무기를 너무 숨기려 하지 마. 보여줄 때는 보여주고 풀 때는 풀어야 한다. 만고불변의 진리인 말도 있지? 잊지 마.” “무슨 말인데요?” “아끼면 똥 된다.” * * * “이 정도면 문제없지? 나중에 딴말하지 말고 첨가할 내용 있으면 지금 해.” “너도 참 독하다. 형제끼리 이런 것까지 해야 하냐?” 진영기 부회장은 동생이 내민 몇 장의 종이를 들여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생뚱맞게 사적인 관계를 들먹이실까? 이건 경영권에 관한 거야. 형제가 아니라 자식이라도 해야지. 새삼스럽게 왜 이래?” 진동기가 내민 서류는 순양금융그룹의 경영과 인사권에 대한 자세한 조건이 들어 있었다. 그로서는 장남인 큰형의 입김이 너무 커지는 걸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다. “솔직히 너무 공평해서 입 댈 게 없다.” 진영기는 계약서나 다름없는 서류를 흔들며 말했다. “넌 진짜 철저해. 이런 네가 날 위해 순양의 이인자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매일 생각한다.” “난 형님이 날 도와 순양의 이인자 역할 하는 건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 어쩌지? 섭섭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무시하는 동생의 모욕적인 말이었으나 발끈하지 않았다. 차남이라는 콤플렉스는 언제나 이렇게 날 선 말로 드러난다. 진영기 부회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진동기가 내민 서류에 사인했다. 이로써 순양금융계열사는 공동 관리다. 남은 건 계열사의 이사회뿐이다. 어린 조카를 쫓아내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계열사가 손에 들어오면 께름칙한 마음은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불만인 사람도 있다. 두 사람이 서류를 챙겨 넣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며 진상기가 씩씩대며 나타났다. “이거 너무하는 거 아냐? 내가 뭐 꿔다 놓은 보릿자루야? 도대체 이게 뭐냐고!” 그의 손에도 종이 몇 장이 팔랑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목소리 낮춰라. 여기 듣는 귀 많아.” 진상기는 형님들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보고 금융 계열사 맡으라면서? 그런데 임원급은 고사하고 부장급 인사까지 다 끝내? 그럼 난? 내 사람 하나 건사 못 하게 만들어 놓으면? 도대체 난 뭐야?”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그의 불만을 두 형은 조금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허수아비라서 싫다는 거냐?” 진동기는 싸늘한 눈빛으로 동생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무하잖아!” “허수아비도 역할이 있어. 참새 떼를 쫓잖아. 넌 그 정도 역할도 못 할걸? 어깨 힘주는 거 외에 할 줄 아는 게 뭐 있어? 그래서 힘 잔뜩 줘도 봐줄 만한 명함 주잖아. 주제 파악해.” “형님!” “시끄럽다. 목소리 낮추라고 했지?” 진영기마저 나서서 윽박지르니 진상기는 입을 닫았다. “전망 좋은 방 하나 주고, 월급도 주고, 차도 주고, 한도 없는 카드까지 준다. 그 자리 준다고 하면 너 아니래도 엎드려 절할 놈이 줄 서 있어. 어머니 부탁 때문에 널 앉히는 거다. 불평보다는 고맙다는 말이 먼저야.” 진영기는 시뻘건 얼굴의 동생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이건 시작이다. 네 사람이 아니더라도 다들 훌륭한 인재들이야. 그 사람들과 함께 차근차근 네 업적을 쌓아. 그럼 명실상부한 부회장 대접해주마. 조급해하지 마라.” 계약서 때문에 맞섰던 두 사람은 한심한 동생 때문에 한마음이 되었다. ======================================= [255] 불가능한 동맹 5 저들이 빨리 움직이는 만큼 나도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남기신 마지막 말도 내 결심을 굳히는 데 큰 몫을 했다. 맞다. 아무것도 뺏기면 안 된다. 뺏기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거침없이 해치워야 한다. 악당처럼 말이다. 악당이 가장 자주 만나야 할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법 만지는 놈들 아니겠는가? 진짜 악당은 법 위에서 놀아야 한다. 할아버지처럼. 좀 놀라기는 했지만, 환히 웃으며 날 반기는 걸 보니 돈 냄새는 확실하게 맡은 게 분명했다. “아이고, 그 유명한 재계의 총아 진도준 씨가 나 같은 공무원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실까? 하하.” 법무부 장관은 조금 과장된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오세현 대표님이 꼭 한번 찾아뵙고 인사드리라고 하시더군요. 지난번에는 신세 많이 졌다고 하시면서요.” “아, 그렇죠. 오 대표님의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에도 깊숙이 관여하시죠” “관여까지는 아니고 그곳에서 일을 좀 배웠습니다.” “겸손하기까지. 익히 들어서 알아요. 오 대표가 건강 챙기느라 진도준 씨에게 모든 걸 맡기고 휴양지로 떠났다는 거 말입니다. 순양그룹의 금융 파트를 책임지고, 국내 굴지의 투자사까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냥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순양이야 할아버지 덕분이고 미라클은 아버지 덕분이죠. 오 대표와 아버지께서 절친이시니까요. 한마디로 부모 잘 만난 운 좋은 놈일 뿐입니다.” 장관은 입꼬리가 올라가며 낮은 휘파람 소리까지 냈다. “이거 원, 대놓고 그리 말씀하시니… 재벌가의 막내답지 않게 소탈하신 것 같습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자, 이만하면 덕담은 충분했으니, 용건을 말씀하시죠.” 난 장관에게 반으로 접은 메모를 슬쩍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그가 메모를 집어 들어 내용을 보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주 잠깐 놀란 모습을 보였지만 당황한 건 아니다. 의외의 것을 봤을 때, 누구나 보이는 그런 평범함이었다.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단지 제 말의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준비한 겁니다.” 장관은 메모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깍지를 끼며 말했다. “역시…. 돌아가신 회장님은 꼼꼼하시군요. 회장님께는 푼돈이나 다름없는 숫자를 전부 기록해 놓으시다니.” “하지만 휠체어를 타고 검찰청에 출두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 기록을 이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보관’만 하셨죠.” “그런데 왜 이걸 진도준 씨가 가지고 있죠? 혹시 내 짐작이 맞습니까?” 장관의 눈이 반짝였다. “네. 앞으로 그 기록을 맡았습니다.” “기록을 맡았다…….” 이것의 의미가 뭔지 곧바로 눈치챈 장관이다. “궁금한 게 그룹을 맡은 아들이 있는데 왜 손자에게 기록을 넘겨줬을까…?” 솔직하게 말할 때가 아니니 적당히 둘러댔다. “이유를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첫째는 제가 돈 만지는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고 두 번째는 큰아버지들이 이 기록을 행여나 엉뚱한 데 쓰지나 않을까 걱정하신 듯합니다. 물론 제 생각일 뿐입니다.” 엉뚱한 데 쓴다는 의미를 정확히 알아들었기를 바랐다. 두 부회장은 필요할 때마다 협박용 무기로 꺼내 쓸 만큼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쯤은 알 것 아닌가? “그렇군요. 그럼 진도준 씨도 이 기록을 보관만 하실 테죠?” “당연합니다.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을 생각입니다.” 때마다 안전한 돈을 준다는 말이다. 장관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 진도준 씨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알았습니다. 그럼 진짜 용건을 말씀하시죠.” 할아버지가 기록을 공개하지 않아도 다들 받은 돈값은 한다. 할아버지는 전화 한 통으로 돈값을 받아내지만 난 아직 이렇게 일일이 찾아다니며 부탁해야 한다. 다들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똑같을 테지만. “제가 조만간 큰 사고를 칠 것 같습니다. 수습이 문젠데….” “사고 내용은 말할 것 같지 않고, 수습은 어떤 방향으로…?” “없었던 일로 만들어주시겠습니까?” “사이즈에 따라 다른데?” “그게… 사이즈가 좀 큽니다. 작은 사이즈라면 장관님을 찾아뵙지도 않았겠죠.” “이거, 머리 아프네. 순양 3세, 그것도 아주 잘나가는 3세 입에서 큰 사이즈라고 하면 나 같은 보통 사람은 상상이 안 되는데 어떻게 수습할지, 원….” 법무부 장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엄살은! “아, 제가 깜빡하고 순서를 바꿔서 말씀드렸네요. 오세현 대표님이 남기신 말도 있었고, 할아버지께서 초선 의원 시절부터 눈여겨봐 온 장관님 아닙니까?” “그게 뭐 자랑거리라도 되나, 허허.” “총선이 코앞입니다. 총선 끝나면 대통령 탄핵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론도 나올 테고 정국 쇄신을 위해 큰 인사이동이 있을 텐데….” “그럴 겁니다. 탄핵은 기각이 뻔하고 총선도 여당의 승리가 점쳐지는 상황이니까요.” “여권의 대대적인 승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참 이상하죠? 승리는 여의도에서 즐기고 내각은 피바람이 부니 말입니다. 참. 대한민국 역대 장관의 평균 임기가 14개월이었던가요?” “정확히는 13.8개월이죠. 내가 지금 딱 13개월째야. 이번 정권의 초대 장관이었으니까 말이요.” “다음 행보는 당연히 여의도로 가시겠군요.” “물론이지.” 이제 곧 옷 벗어야 하는 장관치고는 표정이 좋다. 다음 선거까지 남은 4년을 백수로 지내야 하는데도 말이다. “특별한 계획은 있으십니까?” “대통령께서 후미진 공공기관장 자리 하나는 주시겠지만, 장관까지 지냈는데 모양 빠지는 일은 못 하지요. 책이나 읽으며 소일해야지, 별수 있겠소?” 내 눈치를 살피는 걸 보면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어 한다. “그럼 2년 정도 유학 다녀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돌아오시면 지역위원장 하시며 선거 준비하시고.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젊은 사람치고는 정치를 잘 아시는군요. 빠삭해. 하하.” “준비는 제가 다 하겠습니다. 아, 이건 오세현 대표님을 대신해서 하는 일이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장관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진 회장님께서 기록을 맡기신 이유가 다 있구먼. 잘 알았소.” 잘 알았다……. 이보다 적절한 대답은 없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바쁘신 중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어서는 내게 그가 물었다. “사이즈 너무 키우지 말고 살살합시다. 임기 말년에 흙탕물 너무 튀면 위험하거든.” “흙탕물은 검찰총장과 나눠서 묻게 해드립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검찰총장이라는 말에 그의 눈이 커졌지만 모른 체하고 나와 버렸다. * * * “실장님.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다음 주에 순양생명의 이사회를 연다고 합니다.” “안건은 당연히 대표이사 및 이사진 물갈이겠죠?”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장도형 부사장은 타는 속을 달래느라 연신 물을 들이켰다. “그럼 울까요? 어쩌겠습니까? 지분 많은 대주주들이 경영진을 교체하는 건 그들의 권리 아닙니까?” “그럼 이대로 보고만 계실 겁니까?” “장도형 부사장님.” 웃음 거둔 내 표정에 장도형은 우는소리를 멈췄다. “제게 대책을 세우라고 말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앞으로는 그 어떤 일이라도 내게 대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시, 실장님. 하지만 이런 일은….” “주주들의 경영권 다툼이니 방법이 없다, 이런 뜻입니까?” “…….” “이사회를 무산시키는 방법은 생각해봤습니까? 이사진들의 집단 반발을 유도해본 적도 없죠?” 장도형 부사장은 입을 열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한 번씩, 지독한 실망을 질책으로 드러내야 한다. 상사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해서는 안 된다. 신임을 얻기 위해 뭐든지 해야 한다는 마음을 항상 유지하게 해야 한다. 상사는 괴팍하고, 고약하고, 무자비한 괴물이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하는 것이 신임받는 자의 마음이다. “이번 이사회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무능해서….” “아뇨. 전 장 부사장님을 구해주는 겁니다. 이사회가 열리면 지금의 경영진 중에 가장 먼저 해임될 사람이 누구 같습니까?” 다시 입을 닫았다. 내 덕분에 가장 고속 승진한 사람이니 해임 일 순위라는 걸 안다. 지금까지 내가 경영권을 잃을까 염려한 것이 사실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한 꼴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자, 상사의 잔소리는 이만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으세요.” “네. 실장님.” “평검사 한 명이 필요합니다. 힘없는 곳은 안 되고, 서울중앙지검이면 좋겠네요.” “평검사요?” “네. 제 손이 닿는 곳은 최소 부장검사라서요. 단, 깡다구 좀 있고 골통으로 소문난 놈일수록 좋습니다. 대신 이번에 옷을 벗게 될지도 모르니까, 뒤는 우리가 책임진다는 말을 꼭 하십시오.” “스나이퍼를 찾으시는군요.” “맞습니다.” 장도형 부사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구를 저격하실 생각이십니까?” “진동기 부회장님입니다.” * * * 크게 심호흡 한 번 하고 문을 두드렸고 이미 약속한 터라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 도준아. 어서 와라.” 반기는 말투였으나 숨기는 것이 있는 자의 불안함이 표정에 모두 드러났다. “많이 바쁘실 텐데 시간 뺏어서 어떡하죠?”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내게 아무리 바빠도 네게 시간을 못 내겠어?” 소파에 자리 잡자 비서가 차를 내왔다. 내가 찾아온 이유를 살피느라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도 그의 눈길은 내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어쩐 일이냐?”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서요. 다음 주에 순양생명의 이사회가 열린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아시는 것 있습니까?” “흠…….” “이사회야 이사라면 누구나 소집할 수 있지만 제 허락 없이 열리는 거라 좀 당혹스럽습니다. 연락도 없었고요.” “법적으로야 넌 주주일 뿐이고 이사가 아니니까 소집통지서를 못 받은 거지. 당혹스러울 게 뭐 있어?” 어울리지 않게 언제까지 발뺌하려나? “그런가요? 순양중공업이나 순양건설이 큰아버지의 허락 없이, 이사들끼리 모여 이사회를 열기도 하나 보군요.” 내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진동기 부회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미 다 알고 온 것 같은데, 뭘 그리 말을 빙빙 돌려?” “네. 그럼 몇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다음 주 이사회 안건이 내가 임명한 대표이사는 물론이고 이사들까지 전원 교체하는 겁니까?” “전원은 아닐 거다. 몇몇은 살아남겠지.” “살아남는 이사들은 당연히 큰아버지 사람이겠군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순양생명을 시작으로 다른 금융계열사의 이사회도 열릴 것이고 그때 모든 경영진을 교체하실 생각이시죠?” “아마도.” “이 모든 일은 제가 금융그룹에 그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게… 아니, 간단명료하게 말하자면 절 쫓아내기 위함입니까?” “미안하게도 정확해. 넌 경영에서 손 떼고 그룹 지배 지분 10%의 주주로 만족해야겠다.” “미안하긴 하신 겁니까?” 큰아버지는 어깨를 움찔했다. “진심이다. 고개도 들지 못할 만큼 미안한 건 아니고 아주 조금…?” 그는 손가락을 조금 내밀며 슬며시 웃었다. 저 웃음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당혹감과 초조함이 대신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절 쫓아내겠다는 아이디어는 두 분 큰아버지로부터 처음 나온 겁니까? 아니면 할머니의 요구입니까?” 그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요구는 아니고 바람 정도로 해 두자. 네 할머니가 널 끔찍이 싫어하시는 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잖니?” 당신 다음 차례는 당신 어머니야. 언제쯤이면 이런 말을 마음 놓고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을까? ======================================= [256] 동맹 파토 1 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말도 있다. “큰아버지께서 동조하지 않으신다면 다음 주 이사회는 열리지 않을 수도 있겠죠?” “동조? 넌 내가 이 일의 종범(從犯)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장남이 시키는 대로 끌려가는 동생,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그러길 바랍니다.” “이번에도 좀 미안하긴 한데, 내가 나서면 나섰지 다른 사람 뒤따르는 짓은 못 해.” “음…. 이사회는 무조건 열리겠군요.” “그래. 결과도 바뀌지 않을 거야. 이사회가 끝나면 넌 순양그룹에서 네 지시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확신에 찬 그의 말에 난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큰아버지께는 눈 밖으로 날 짓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군요.” “네가 손자면서 그룹 지분을 물려받았을 때, 모든 사람의 눈 밖에 난 거다. 다른 손자들처럼 통장이나 집문서 하나 받았다면 내가 널 그룹의 중요한 자리에 앉혔을 거야. 네 자질은 그냥 썩히기에는 참 아까우니까 말이다.” 진정성이 듬뿍 묻어나는 말이다. “똘똘한 조카까지만 허락한다, 경쟁은 안 된다. 이 말씀이군요.” “경쟁?” 진동기 부회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 단어는 30년 뒤의 너라면 인정하마. 지금의 넌 아무리 뛰어나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어린애다. 경영은 숫자가 아냐. 이 말의 진의를 알려면 한참 더 배워야 할 거다.” “얼마나 더 배워야 할까요?” “이미 말했다. 30년은 더 배워라.” 난 머리를 슬쩍 긁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곤란하군요. 전 배우는 건 앞으로 3년 정도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서른이면 배운 걸 써먹어야 할 나이 아니겠습니까?” “뭐,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고. 물어야 할 건 다 물었지? 그럼 이만 가봐라. 참, 네 사무실은 다음 주부터 다른 사람이 쓸 거다. 온 김에 짐 빼고 정리하는 게 좋겠지?” 진동기 부회장은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난 그에게 머리를 숙이고 인사하기 전 마지막 말을 남겼다. “오늘 저녁 뉴스를 놓치지 말고 꼭 보십시오. 제 대답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뉴스라는 말에도 그는 콧방귀를 꼈다. “조카 재산을 뺏는 큰아버지를 성토라도 하려고? 너라면 기자들이 벌 떼처럼 모여들겠지. 꽤 핫한 뉴스거리는 될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아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 정도라도 해서 네 화가 좀 풀리면 다행이고.” “제가 고작 화풀이 정도 하려고 뉴스에 나오겠습니까?” 웃으며 인사를 하자 그가 조금은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둘째 큰아버지는 아마도 오늘 저녁 식사를 건너뛰게 될 것이다. * * * “서울중앙지검 형사부 검사입니다. 원래 특수부 출신인데 물불 안 가리고 날뛰다가 형사부로 떨어졌습니다. 다음 정기인사 때 지방 발령이 확실한 놈이라 사직서를 만지작거리는 중입니다.” 장도형 부사장은 인사 파일을 건네며 설명했다. “누가 소개한 겁니까?” “지금은 변호사인 제 고등학교 선배가 특수부 시절에 이 친구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최근, 몇 번이나 찾아와 변호사 개업을 심각하게 생각 중이라며 고민을 털어놓았답니다.” “일단 들이받고 보는 스타일이군요.” 인사 파일의 주인공이 만진 사건을 보니, 이런 검사를 데리고 있었던 부서장도 머리 꽤나 아팠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단순한 정의감만으로 움직인 놈도 아니다. 건드린 사건들이 전부 굵직하다. 대어를 건드려야 실패하더라도 출세한다는 걸 읽은 놈이 분명하다. “하지만 성공한 케이스도 없어요. 전부 흐지부지 끝나버리니 오명만 자꾸 쌓인 겁니다.” “대충 언질은 줬죠?” “네. 옷 벗고 검찰청 떠나는 데 적절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자동차는 서울 강북의 좁은 길을 요리조리 달렸다. 지금 내 뒤에 붙은 큰아버지들의 눈과 귀를 떼어내려면 복잡한 시내를 몇 바퀴 도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꼬리를 따돌리고 다시 경기 북부의 한적한 고깃집으로 달렸다. 가든이라고 붙은 이름을 보니 아주 오래된 식당인 게 확실했고 탁 트인 정원까지 갖춘 곳이니 숨어서 사진 찍는 놈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저격수가 기다리는 별실의 문을 열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나이 많은 사내는 장도형 부사장의 친구라는 변호사일 게 뻔하고 긴장한 표정의 사내가 바로 내가 필요한 저격수일 것이다. “아이고, 이런 유명한 분을 뵙게 되다니 영광이올시다. 허허.” 너스레를 떨며 명함을 꺼내는 중년 사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장도형 부사장에게 말했다. “부사장님. 긴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딴 방에서 식사하십시오. 인사는 나중에 하죠.” “아, 네.” 명함을 꺼내던 변호사는 장도형의 눈짓에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이 기회에 재벌가와 엮였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던지 나가는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앉읍시다. 검사님.” “아, 네.” 삼십 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사내는 그리 초조해 보이지도 않았고 긴장한 것 같지도 않았다. 마음 비운 게 확연히 드러났다. “곧 검찰을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앞에 놓인 술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아, 네. 그렇게 됐습니다.” “그 조직이 튀는 사람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죠. 군대보다 더하다고 들었습니다.” “진도준 씨도… 아, 이거…. 뭐라 불러드려야 할지….” “괜찮습니다. 어차피 대학 후배 아닙니까? 편히 부르세요.” 그는 이마를 탁 쳤다. “아차차. 깜빡했어요. 우리 과 출신이죠? 재벌 3세가 법대 출신이라는 게 흔한 일이 아니어서 생각 못 했습니다.” “저도 익숙하지 않아요. 입학만 했지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어서…. 흐흐.” 역시 우리나라는 학연이, 그중에 대학이 최고다. 지연은 계층 간의 구분이 없어 흐릿하고 고등학교는 무작위 추첨이라 우월함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인연이 아니다. 하지만 대학은 비슷한 부류끼리 모이다 보니 다른 어떤 곳보다 끈끈함이 있다. 조금 전까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던 이 사람도 대학 후배라는 인연 하나만으로 갑자기 편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래도 우리 후배님은 참 대단해요. 그쪽 애들은 집안만 믿고 판판이 노는 애들이 대부분인데, 참! 성적도 어마어마했죠?” 재벌과는 맺힌 게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 곱지 않은 말부터 쏟아낸다. 기업 비리 파헤치다 윗선의 압력으로 수사 중단한 적이 많은 사람답다. “옛이야기만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소주 마시며 모교 이야기하는 건 이번 일 끝나고 나서 하는 걸로 미루죠.” 그는 손에 든 술잔을 내려놓았다. “서두르는 걸 보니 급하시군요.” “네. 오늘 저녁 뉴스에 때려야 하니까요.” “오늘?” “기자 동원은 전화 한 통이면 끝납니다. 대본도 나와 있는데 배우가 없어요.” “캐스팅은 끝난 거 아닙니까? 두둑한 개런티를 보장받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만.” 그가 찡그린 얼굴로 말했지만 난 미소를 지었다. “감독 입장에서 연기력은 확인해야 하니까요.” 난 서류 뭉치를 그에게 쓱 밀었다. “대본 먼저 보시죠. 오디션은 그 후에….” 주연 배우 후보인 검사는 후다닥 서류를 펼쳤다. 한 장 한 장 꼼꼼히 읽어 가던 그는 눈을 빛낼 때도 있었고 답답한지 물을 들이켤 때도 있었다. 고기 한 점 올리지 않은 숯불의 열기가 식을 때쯤 서류를 덮었다. “누군지 빠졌군요.” “그 누구가 누군지를 찾아내는 게 검사가 할 일이죠.” “찾아내야 합니까?” 이미 대본의 끝이 어디로 가는지 짐작한 걸 보니 머리 회전은 쓸 만했다. “아뇨. 범인이 누군지 모른 체 끝나는 이야기니까요.” 그는 손가락 사이의 담배를 슬쩍 흔들며 양해를 구했다. “얼마든지.” 머리를 끄덕이자 그는 담배 연기를 한껏 빨아들였다. “천억 원대의 해외 비자금도 문제지만,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외국 기업을 사들인다는 명목으로 돈을 빼돌렸으니…. 죄질이 악랄합니다.” 곧 옷 벗을 검사지만, 순순한 정의감에 불을 지를 만큼 깊은 분노를 느꼈나 보다. “횡령, 배임, 재산 국외 도피…. 50억 이상이면 최하 10년인데….” “최고 무기까지 가능하죠. 게다가 공소시효가 10년이니 아직 3년 남았습니다.” “법대에서 마냥 놀지는 않았군요. 잘 아시네요.” “그 자료 정리하면서 확인하느라 오랜만에 법전을 좀 뒤졌습니다. 다 까먹은 지 오래됐어요. 하하.” 검사는 함께 웃을 여유는 없어 보였다. 자신의 일이 이 범죄를 끝까지 파헤치는 게 아니라 군불만 피우고 끝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치 고기는 굽지 않고 열기가 식어버린 이 식탁 위의 숯불처럼. “후배님. 내가 이거 터트리면 수습하기 어려울 텐데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돈의 주인은 순양그룹 사람이 확실한 거 같은데…? 내부 자료가 아니면 이런 디테일은 못 구하거든.” 그의 눈에 비친 호기심을 읽었다. 많이 알면 다친다는 진리를 모를 리 없건만 호기심은 위험을 잊어버릴 정도의 강력한 감정이다. “마무리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 선배님은 도화선에 불만 붙이세요. 그리고 쓸데없는 넘겨짚기는 서로를 불편하게 합니다.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럽니까?” “그, 그런 게 아니라 타다가 꺼지면 불붙인 난 완전히 끝장이라서….” 후배님이라며 편한 모습을 보였던 그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각오하고 나오신 것 아닙니까? 뒤는 책임진다는 말 듣지 못했어요?” “아, 물론 들었지만….” “그럼 지금 결정하세요. 바쁜 사람 붙잡고 눈알 굴리지 말고!” 언성을 높이자 자세를 낮추는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힘을 쥐고 흔들어 본 자는 자신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자의 태도에 민감하다. 대번에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공무원 퇴직금이 얼만지 모르겠지만, 평생 돈 걱정 안 해도 될 만큼 책임지는 데 앞일을 걱정하는 겁니까?” “좋습니다. 후배님만 믿고 검사 신분증 제대로 한번 써보죠, 뭐.” 그는 큰소리치며 서류를 챙겨 들었다. “기자회견에서 꼭 강조해야 할 부분은….” “후배님. 주연 배우에게 믿고 맡겨봐요. 이런 일 한두 번도 아니고, 중요 포인트는 내가 더 잘 짚을 겁니다.” 자신감을 확 드러내는 그를 보며 웃으며 소주병을 들었다. “잘 좀 부탁합니다. 선배님.” 그도 웃으며 잔을 내밀었고 난 보통의 후배처럼 공손히 두 손으로 잔을 채웠다. * * * “저녁 뉴스에 나올 수 있도록 차질 없이 준비하세요.” “기자들은 이미 대기 중이고 보도국도 적극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최소 2분 이상 나올 것이며 가능하면 첫 꼭지로 배치하겠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차 속에서 장도형 부사장은 오늘 준비한 것을 차분히 보고했다. “검찰총장 미팅도 문제없겠죠?” “네. 처음엔 영문을 몰라 주저했지만, 돌아가신 회장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니 선뜻 응하더군요.” “수고했습니다.” 장도형은 내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뭡니까? 이건?” “실장님께서 이사회를 무산시키시려는 것 같아 미리 입수한 명단입니다.” 어떤 명단인지 알 것 같다. “이사회 때 부회장님의 수족으로 임명될 사람들이군요.” 순양금융그룹의 새로운 대표이사와 임원들의 조직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네. 좀 괘씸한 마음이 드는 놈들도 있더군요.” “이번 일이 잘된 면도 있네요. 흑백을 명확히 가릴 수 있으니 차제에 싹 정리합시다.” “네. 전부 해임….” “아뇨.” 난 머리를 짧게 흔들었다. “해임으로 끝내면 안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의 불명예를 안겨줘야 합니다. 모두 지방 지점이나 고객센터로 발령 내고 감사팀도 돌려서 좁쌀만 한 잘못이라도 무조건 찾아내도록 하세요. 사표를 내더라도 곱게 보내주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이를 악문 내 모습에 장도형은 세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 [257] 동맹 파토 2 『천억 원대의 거액을 비자금 저수라 일컬어지는 말레이시아 라부안(Labuan)의 국제 은행에 숨겨 둔 정황을 포착하여 수사하였습니다. 현재까지 조사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비자금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 오너, 다시 말씀드립니다. 자금의 실소유주가 법인이 아닌 개인 오너입니다.』 『……특히 자금 조성 경위는 기존의 횡령과 그 결을 달리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유령 해외 기업을 매입하는 명목으로 거액을 빼돌렸고, 이미 검찰은 관련 증빙 서류를 추적 중입니다. 이 비자금은 IMF 외환 위기 당시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며….』 『이 계좌의 소유자는 곧 소환할 예정이며 피의자로 전환될 확률이 높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TV를 끄고 술병을 들었다. “머리 아프시겠습니다. 총장님.” 입술을 살짝 깨문 검찰총장이 잔을 들어 술을 받았다. “오후에 저런 깜짝 쇼를 저질러놓고 잠수 탔답니다. 검찰청 기강이 이 정도까지 개판이니 원…. 평검사가 윗전 몰래 기자회견 할 정도면 방송 타서 얼굴 알리고 개업한다는 소리밖에 돼?” 술은 입도 대지 않고 잔을 내려놓은 검찰총장은 의심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무튼, 지검장이 알아서 처리해야겠지요. 그런데 말이오. 혹시…?” “왜요? 저 계좌의 주인이 순양그룹 같습니까?” “저 회견을 미리 감지했기 때문에 날 만나자고 한 것 아니요? 돌아가신 회장님까지 팔아서?” “방금 들으셨죠? IMF 때 빼돌린 돈입니다. 전 그때 대학 신입생이었고요. 제가 저 정도 큰돈을 만들 시간이 있었겠습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진영기 부회장을 대신해서 나온 거 아니냐는 뜻이지. 아니면 진동기 부회장?” 내가 대답을 않자 그는 이마를 탁 쳤다. “이런! 돌아가신 진 회장님 계좌였구먼. 그래서 회장님이 남기신 말을 전한다며….” “아닙니다. 총장님. 전 다른 일 때문에 총장님을 뵙자고 한 겁니다.” 그에게도 법무부 장관과 같은 종류의 메모를 내밀었다. “부장검사 시절부터 할아버지와 인연을 쌓아오셨더군요.” 검찰총장의 반응도 법무부 장관과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고 당황했으나 곧 의문을 품고 여러 가지를 물었고 난 법무부 장관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풀이했다. 총장은 지금껏 유지했던 비밀스러운 관계가 계속된다는 것에 안심하는 눈치였고 공격적인 큰아버지가 아닌 내가 그 일을 이어받은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이거, 좀 쑥스럽긴 하지만 이 말은 해야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앞으로 더 큰 일 하실 분인데 미약하나마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내게 큰일이 남아 있겠어요? 검사의 끝은 총장인데 그 끝을 봤으니 내려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럴 리가요. 일전에 법무부 장관님을 뵈었는데 내각 개편이 머지않았다고 합니다. 그 개편에 법무부 장관님도 당연히 들어가고요. 그러니 총장님께서 뜻이 있으시다면 내각에 합류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아이고, 언감생심 장관은 무슨….” 관심 없는 척해도 눈빛이 달라지는 걸 놓치지 않았다. “이미 국회 인사청문회까지 통과하신 분이니 검증까지 끝냈습니다. 청와대 측에서 보면 단연 1순위죠.” 이만하면 총장의 귀는 즐겁게 해줬다. 이제 요구할 타이밍이다. “그런데 총장님. 저 천억대 비자금 사건, 당분간 모른 체 내버려 두실 수 없겠습니까?” “그게 무슨…?” 아주 잠깐 눈을 깜빡거리더니 무릎을 탁 쳤다. “역시! 이거 순양이 관련된 건이구만!” “글쎄요? 아직은 모르는 일이죠. 아마도 총장님께 이 수사 덮으라는 부탁을 가장 먼저 하는 자. 그자가 비자금 계좌의 주인이겠죠. 전 덮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이니…. 좀 다르죠?” 한동안 인상을 찌푸린 채 아무 말 없던 총장이 서서히 표정을 풀었다. “몰라야 할 것을 많이 알게 되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갑자기 뜬금없는 말, 뭘 말하고 싶은 걸까? “방금 뉴스에 나온 저런 젊은 검사는 이렇게 생각하지. 자신이 점점 더 중요한 사람이 돼 간다고 말이지.” “사실은 점점 더 위험해지는 줄도 모르고 말이죠.” “역시 잘 아는군. 몰라도 되는 것에 호기심을 보이지 않는 게 오래가는 비결이라오.” 검찰총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모른 척하면 되나?” “그렇습니다. 담당 검사가 수사하는 걸 총장이라고 막을 수는 없다. 이 정도면 됩니다.” “그럼 덮어야 할 시점은?”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거 하나는 알아 두시오. 덮은 사건은 언젠가는 고개를 들고 다시 올라오는 법이요. 그때는 내가 검찰총장 자리에 없을 거요. 못 막을 수도 있어.” “공소시효가 3년 남았습니다. 푹 묵혔다가 잘 익었을 때 꺼내 쓰십시오. 그때쯤이면 총장님께서 법무부 장관님이 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전 지금 쓰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한입 베어 물고 내게 남겨주는 건가? 허허.” “천억이라는 거액입니다. 제가 아무리 뜯어 먹어도 줄어든 티는 나지 않을 겁니다.” “이거 오늘 선물을 잔뜩 받은 것 같은데…. 가만히만 있어도 된다니 미안한 마음마저 드는구려.” 권력을 쥔 자는 늘 돈을 쥔 자에게 미안한 마음만 가지면 된다. 많이 받고 적게 주는 게 그들의 특권이니까. “부담 드리지 말라는 게 할아버지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고받는 계산이 끝나고 우리는 잔을 들었다. 이 정도면 성공적인 거래 아닌가? * * * 진동기 부회장의 애타는 마음이 부재중 전화 숫자로 드러났다. 끊임없이 울리는 핸드폰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찾아오는 놈이 아래다. 큰아버지가 자존심을 꺾고 내 방으로 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똥개도 자기 집 마당일 때는 크게 짖는 법이니까. 느긋하게 회전의자 놀이나 하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며 진동기 부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 “아, 큰아버지. 어쩐 일이세요? 여기까지?” “왜 전화는 안 받는 게냐?” “전화하셨어요? 진동으로 해놨나? 못 들었습니다. 짐 싸느라고요.” “뭐? 짐?” “네. 다음 주면 쫓겨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짐 싸는 중이죠.” 진동기 부회장은 내 방을 쓱 둘러보더니 소리 질렀다. “지금 감히 날 놀리는 게냐? 짐 싼 흔적은 하나도 없잖아!” 난 내 책상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치약과 칫솔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제가 이 사무실을 자주 이용하지 않다 보니 아무리 뒤져도 저게 전부더군요.” 둘째 큰아버지는 우리 집안 사람 중에서 그나마 인격을 갈고닦았다. 새파란 어린 조카가 이 정도 약 올렸으면 뭔가 집어 던지거나 내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어도 그리 이상하지 않건만 꽉 쥔 주먹만 부르르 떠는 게 전부다. “아, 죄송합니다. 일단 앉으시죠. 하실 말씀이 많아 보이는데….” 둘째 큰아버지는 거친 숨이 잠잠해질 때까지 나를 노려보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뉴스 잘 봤다.” “보셨군요. 놓쳤으면 큰일 날 뻔한 뉴스 아닙니까?” “너 바보냐?” 큰아버지는 빙글빙글 웃는 나를 죽일 듯 노려봤지만 이미 목소리는 많이 차분해졌다. “그렇게 보입니까?” “이판사판이야? 라부안의 비자금 자료를 검찰에 던져주고 함께 죽을 셈이었어? 그게 날 협박하는 방법이야?” “정말 절 바보로 보십니까? 그 비자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검찰이 알고 있습니다. 정말 그들이 수사해서 찾아낸 것일까요?” “네가 준비했겠지. 서류는 아직 네 손에 있나? 아니면… 블러핑일 수도 있고.” “믿고 싶은 대로 추측하시면 단순한 위안으로 끝난다는 걸 잘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러십니까? 현실을 보세요.” “현실? 너야말로 큰 착각을 하는 거다. 설사 서류가 있다 해도 난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 돼. 게다가 비자금은 네 손에 있다. 검찰 조사의 첫 대상은 너야. 너부터 시작해서 나까지 올 것으로 생각했던 거라면 넌 아직 어린애다. 수사는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네 무덤을 스스로 판 꼴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불안함이 남아 있었다. 내가 그 정도로 멍청한 바보가 아니라는 걸 안다. “왜 제가 첫 번째 수사 대상이라고 생각하시죠? 전 천억 원의 비자금은 구경도 못 했는데? 아, 정정할게요. 구경은 했습니다.” 자신만만한 내 표정과 구경만이라는 말 때문인지 큰아버지의 얼굴에 불안함이 더욱 짙어졌다. “그 돈은 고스란히 그 은행에 잠자고 있습니다. 전 돈을 찾지도, 옮기지도 않았어요. 그 어디에도 제 흔적은 없습니다.” 마침내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물론 입도 떼지 못한다. “IMF 때 남미의 유령회사 매입 서류도 있고 그 일을 진행했던 두 직원은 외국에서 유유자적하며 살고 있습니다. 물론 언제든 증언할 수 있는 상태로 말이죠. 그리고 은행의 카드와 계좌 등도 다 내 손에 있으니 그 돈을 어떻게 지워버릴 수도 없습니다.” “너… 넌 처음부터…?” “설마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겠습니까? 딱히 필요한 돈도 아니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둔 겁니다. 그걸 이렇게 써먹을 줄 저도 몰랐어요.” 순진한 척 시치미를 뗐지만 믿는 것 같지 않다. 온갖 자료와 증인까지 미리 숨겨 둔 건 처음부터 작당했다는 증거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지나간 일이 아니라 닥쳐올 일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 때문에 오늘 뉴스에 나온 검사는 인생이 망가질 게다.” 한참 만에 입을 연 큰아버지는 내게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출세욕에 사로잡힌 검사의 섣부른 수사, 그 때문에 국내 유수 기업의 오너 명예를 더럽힌 놈으로 낙인찍혀 변호사 개업도 못 하게 될 테니까.” 이런 번한 수법이 내게도 통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이것 외에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나? “큰아버지. 일인시위 하는 공장 근로자 하나를 나쁜 놈으로 만들어 사안의 근본을 감추는 일, 이번에도 통할 것 같습니까? 상대가 다릅니다.” “검사나 공장 근로자나 내게는 별반 차이 없어!” “그 검사 뒤에 제가 있습니다. 전 그 검사를 스타로 만들 힘이 있어요. 잊으셨군요. 우리나라 미디어의 절반을 손에 쥐고 흔드는 권력자가 누군지!” 또다시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룹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은 내 아버지이며 자기 동생이라는 존재를 이제야 떠올린 것이다. “한국의 절대 권력이라는 순양그룹에 맞서는 용기 있는 검사.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기업 비리를 파헤친 정의로운 검사. 비자금 천억을 국고로 환수시킨 명예로운 검사. 딱 일주일 동안 예능프로에 나와 떠들면 국민 영웅이 될 겁니다. 아시겠지만 뉴스보다 예능프로그램의 시청률이 훨씬 높아요.” 큰아버지는 언론과 여론 전쟁에서 단 한 번이라도 밀리면 자신의 주장이 전부 비리 재벌의 변명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아직 시간은 있습니다, 다음 주 이사회 때까지 전 그 검사를 스타로 만들 테니까 큰아버지께서는 그자를 천하의 개잡놈으로 만들어보십시오. 누가 이기나 한번 볼까요? 아 참, 하나만 명심하십시오. 아직 이 나라 국민은 재벌의 입보다 검사의 입을 더 신뢰한다는 것을요.” 난 멍하니 앉아 있는 큰아버지를 두고 일어섰다. “이사회에서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책상 위의 치약과 칫솔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마지막 경고를 던졌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 [258] 동맹 파토 3 “스나이퍼는 어디 있습니까?” “기자회견 끝내고 호텔로 옮겼습니다.” “쓸데없는 짓 못 하게 잘 감시하십시오.” “네. 그 친구 핸드폰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검찰 내부에서는…?” “다 막아 뒀습니다. 다들 모른 척 할 겁니다.” 장도형 부사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검찰 윗선에서 움직이면 어떤 양상을 띨지 모르니 불안했던 것 같다. “기자들은요?” “회견장에서 기사 받아쓴 애들에게는 술값 넉넉히 쥐여줬습니다.” “방송사 보도국 간부들은 줄타기할겁니다. 딱 일주일만 참으라고 하십시오. 일주일이면 다 끝나니 줄타기 삐끗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경고도 확실히 하시고요.” “네. 오늘 저녁부터 한 명 한 명 만납니다. 단단히 못 박아 두겠습니다.” 장도형 부사장은 자신 있게 말하면서도 내 눈치를 살폈다. 총알 달라는 의미다. “아래층에 시큐리티 직원들이 대기중입니다. 오늘부터 함께 움직이십시오. 사과 상자 잔뜩 실은 봉고차로 따를 겁니다. 국장급은 10억씩 돌리고 그 이하 간부들은 5억씩 돌리세요. 깨끗하게 세탁한 돈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펑펑 쓰라고 하십시오.” 장도형의 입이 떡 벌어졌다. “시, 실장님. 너무 많습니다. 그놈들에게는 십 년 치 연봉이 넘는 돈인데….” “10억은 챙겨야 1억은 돌려보내지 않겠습니까?” “네?” “진동기 부회장은 분명 보도 자제를 위해 1억쯤 돌릴 겁니다. 언론인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10배 차이는 나야 고민을 안 합니다.” “아, 네.” “그리고 보나 마나 광고 물량 빠방하게 밀어주겠다고 전 언론사에 설레발을 칠 겁니다. 하지만 국장급도 월급쟁이죠. 회사가 돈 많이 버는 것도 분명히 신경 써야겠지만, 자기 주머니에 들어올 10억을 생각하면 그깟 회사 광고 물량 정도는 하찮게 보이겠죠.” “그러니까 아예 회사 사정은 싹 잊어버릴 만큼 지르는 거군요. 양심의 가책 따위는 떠올리지도 못할 만큼.” “바로 그겁니다. 사실 제 마음 같아서는 100억이라도 모자란 감이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방송이나 기사 추이를 지켜보다 삐딱선 타는 기자가 나오면 돈 걱정하지 말고 그놈들에게도 뿌리세요. 1억이든 2억이든 그놈들 입이 떡 벌어지게 줘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돈질할 때는 시세나 관행을 따르면 안 된다. 돈 받는 놈이 나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할 만큼 확 질러야 한다. 적당히 주면 그놈들이 내 편의를 봐준다고 생각하며 내 머리 위에서 놀려고 하지만 입이 떡 벌어지게 줘 버리면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해진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대한민국 모든 언론이 내가 시키는 대로 기사를 써야 하고 방송해야 한다. 내가 노래 가사로 기사를 대체하라고 해도 군말 없이 따를 만큼 돈으로 끌고 가야 한다. 어쩌면 삼국지를 초한지로 바꾸는 일인지도 모른다. 가진 돈을 다 퍼부어도 아깝지 않다. * * * “제대로 한판 붙었네? 으하하.” “아버지. 동네 나이트클럽 영업권 차지하는 양아치들 싸움 아닙니다. 순양그룹 1/3을 놓고 붙는 거예요. 웃음이 나오십니까?” “1/3은 무슨! 전자가 절반이야. 금융계열사 다 합쳐도 1/5 이상은 안 돼.” “매출액 확인해달라고 아버지께 달려온 거 아닙니다.” 가진 게 커지고 거느린 게 많아져서 그런 걸까? 날이 갈수록 여유롭고 배포가 커진 아버지다. 계열사를 놓고 싸우는데 구경꾼 같은 모습만 보이신다. “난 순양 주식 하나 없는데, 어쩌라고? 이사회에 들어갈 수도 없고 주총도 못 열어.” “대신 다른 쪽으로 힘을 보태실 수가 있습니다.” “어느 쪽인데?” “어쩌면 둘째 큰아버지와 언론전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웃음을 거둔 아버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알겠지만 난 드라마국, 예능국이면 몰라도 보도국과는 그리 연관이 없어. 내 입김이 그리 먹히지 않아.” “압니다. 그쪽은 이미 손을 썼습니다.” “벌써? 빠른데? 돈 줬어?” “네. 입이 떡 벌어질 만큼요.” 다시 아버지의 표정이 밝아졌다. “돈은 네가 줬으니까 난 돈 안 드는 것 정도는 도와줘야 아비로서의 체면이 서겠네. 흐흐.” “돈 안 드는 거는 또 뭡니까?” “방송국은 높은 놈이나 낮은 놈이나 다 사고 치며 다녀. 직장이 방송국일 뿐인데 마치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권력을 휘두르거든. 뭐… 방송인이라면 환장하는 애들이 있으니까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런, 약점 쥐고 협박하신다는 말씀이세요?” “협박은 무슨. 내 아들이 고군분투하니까 고춧가루는 뿌리지 말라고 정중히 부탁하는 거지. 그럼 그놈들은 다 알아들어.” 아버지는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그럼 다른 것도 좀 부탁드립니다.” “또 뭐?” “아버지는 마음만 먹으시면 단기간 반짝스타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잖습니까?” “스타? 설마 너를?” “전 이미 스타 아닙니까? 저 말고요.” “네가? 푸하! 뭐, 그렇다 치자. 너 말고 누군데?” “아직은 괜찮습니다만 둘째 큰아버지가 제가 내세운 그 검사를 걸레조각으로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때를 대비하는 거죠. 언론 공작이 시작될 것 같으면 토크쇼 같은 데 그 검사를 출연시켜주세요. 그리고 확 띄우면 됩니다.” 많이 달라진 아버지였지만 추진력 하나는 여전했다. 아버지는 곧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지금 작가들 데리고 내 방으로…. 아니, 전부.” 짧은 통화를 끝낸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담당자들 오면 직접 설명해. 지금은 네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는 게 중요하니까 한 다리 거치는 것보다 다이렉트가 나아.” 현재의 내 처지를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지만, 아버지도 속이 많이 타셨나 보다. 필요한 일이라고 하니 전광석화가 따로 없다. 우르르 몰려온 관계자들에게 자세한 내막은 말하지 않았다. 단지 정의감에 똘똘 뭉친 검사를 아름답게 포장해달라는 요구만 했다. 조직에 순응하기보다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칼날을 들이대며 외로운 싸움을 계속한 소신 있는 검사상을 만들어달라고 하니 단번에 이해했다. “대본은 내일까지 준비하겠습니다. 특별 편성으로 가야 하니까 되도록 아침에 연락주십시오. 그래야 저녁 프라임 시간대에 방송 나갈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피디와 작가들이 물러나자 아버지가 슬쩍 지나가듯 말했다. “내가 형님들 한번 만나봐?” “아뇨. 별반 소용없습니다. 지금은 핏줄의 호소가 통하는 가정사가 아니고 회사를 차지하느냐, 쫓겨나느냐 하는 공적인 경영권 다툼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아들에게 별반 도움 되지 않는다는 걸 자책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대신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그럼 난 네가 이 싸움에서 졌을 때를 대비해야겠구나.” 무너진 자식의 안식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에이. 설마 제가 질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지더라도 다시 반전의 기회를 노릴 겁니다.” “오해하지 마라. 난 그 반전의 기회가 왔을 때를 대비하겠다는 뜻이다. 이깟 첫 싸움에서 진 아들을 다독이며 위로나 할 생각은 없어.” 가장 기대했던 아들이었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일찌감치 발견하셨던 걸까? “사랑스러운 아들을 위해 준비하신 거라도 있습니까?” “내가 순양 의료원 VIP 환자들은 꼭 인사드린다. 꽤 쓸 만한 사람들이 많거든.” 우리 아버지, 참으로 꼼꼼하시다. * * * 진동기 부회장은 계속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렸다. 상황이 이쯤 되면 자신의 뜻을 물어보거나 확인하기 위한 전화가 빗발쳐야 하는데 단 한 명도 전화하지 않았다. 밖에서 바쁘게 뛰어다니는 비서실 직원들의 부정적인 소식만 간간이 들릴 뿐이다. “야! 뭐야? 소문이 사실이야?”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 소리 지를 사람은 뻔하다. “무슨 소문?” “라부안 비자금! 유령회사 매입으로 위장해서 돈 챙긴 게 너 맞아?” 얼굴을 찌푸린 채 아무 말 하지 않는 동생을 보며 진영기 부회장은 혀를 찼다. “해 먹었으면 들키지를 말아야지. 이 중요한 시기에 그런 뉴스가 나오면 어떡하자는 거야!” “뉴스의 주인공이 나라고 누가 그래?” “너 빼고 모두! 이 빌딩에서 왔다갔다 하는 놈들 전부 구시렁거려. IMF 때 해고한 숫자만 기천 명이야. 그런데 년 천억씩이나 빼먹었으니, 우리 보는 눈이 존경은 커녕 벌레 쳐다보는 것 같다고!” “그만하자. 파헤치면 형님도 수두룩하잖아. 순양전자 수출 대금 환차익을 개인 주머니에 넣은 거만 해도 수백억이지? 그거 뉴스에 나오게 해줘?” 신경 날카로운 동생의 한마디에 진영기는 한숨만 내뱉었다. “아무튼, 빨리 수습해. 아직 순양이라는 이름 안 나왔을 때 덮어. 이럴 때 대대적인 인사 발령 내면? 그룹 분위기 진짜 개판 된다.” “잔소리 그만하고 형님도 좀 나서봐. 이대로 가면 다음 주 이사회 때 난 빠질 수밖에 없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사회에 빠지다니?” “이거 도준이 그놈이 벌인 일이야. 내 약점 틀어쥐고 금융그룹 지키려는 수작이라고.” 진영기의 눈이 커졌다. “도준이? 그놈이 어떻게?” “설명하려면 길어. 아무튼, 그놈이 내 비자금 증거와 증인까지 확보해 놓고 협박하는 중이야. 게다가 그놈이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법무부장관도, 검찰총장도 뜨뜻미지근해.” “그놈들이?” “상황 파악할 시간을 조금만 달라고 하더라고. 내부 반발 없이 조용히 덮으려면 지금 당장은 어렵다나?” “씨발, 그런 거 신경 쓸 여유 없으니까 그냥 내버려 둬. 알아서 잠잠해지도록 하겠지. 지들이 어쩌겠어?” 이번엔 진동기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명백한 증거와 증인을 손에 쥐고 언론에 돈을 뿌려 대면? 도준이는 힘없고, 줄 없는 일반인이 아니야. 우리처럼 이곳저곳 인맥을 동원할 수 있는 놈이라고.” 진동기의 우는소리에 진영기 부회장은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너도 돈 있고, 줄 있고, 힘도 있잖아! 알아서 해. 난 다음 주 이사회 무산되는 꼴은 못 본다.” 진영기는 단단히 엄포를 놓고 동생 방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묘한 웃음이 감돌았다. “강력한 한 칼이 있다, 이거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진영기는 즉시 비서실장을 호출했다. “백 실장, 내 방으로. 즉시.” 진영기는 부리나케 달려온 백 실장에게 진동기 부회장의 일을 자세히 설명한 뒤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이사회는 무산될 것 같습니다. 해외 계좌의 천억 정도야 별일 아니지만, 하필 IMF 때라는 게 걸립니다. 여론의 뭇매를 맞을 게 뻔한데….” 진영기 부회장은 손을 저으며 백 실장의 입을 막았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이 기회에 동기를 잠시 물러나게 하면 어떨까 하는 거야. 그놈이 부회장직을 잠시 내려놓으면 누가 중공업 계열을 맡아야 할까? 나 말고 없잖아.” “아……!” 백 실장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이런 아이디어는 책사라는 자신이 냈어야 비서실장이라는 직책이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진도준이 쥐고 있는 증거를 부회장님께서 챙기셔야 하는데…. 순순히 내놓겠습니까? 금융계열사를 뺏기지 않으려고 큰아버지를 협박하는 놈인데요.” “그놈도 이젠 시커먼 욕심을 확 드러낸 거지?” “네. 뭐, 짐작은 했지만 이젠 노골적이기까지 하죠.” “그럼 그 욕심을 조금 채워주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까?” 백준혁이 비서실장까지 오르는 데는 진영기의 마음을 빨리 읽어내는 눈치도 한몫했다. “제가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정확히 뭘 쥐고 있는지, 그리고 원하는 게 어디까지인지 파악하는 게 우선 인 것 같습니다.” 진영기 부회장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서둘러.” ======================================= [259] 동맹 파토 4 뉴스와 신문을 보며 돈의 위력을 확인했다. 사돈댁의 치부라고 생각한 한성일보는 기사 한 줄 내지 않으며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언론은 노골적이지 않게 부정적인 기사를 실었다. 뉴스는 순양그룹이라는 이름은 언급하지 않고 검찰의 엄중한 수사를 요구하는 논조를 유지했다. 대신 인터넷 판에는 조심스레 순양의 이름을 흘리는 것으로 받은 돈값을 치렀다. 기사에 만족하며 신문을 접었을 때 띠링 하는 알림음이 울렸다. - 진영기 부회장님 비서실장 백준혁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잠시 시간 좀 내주십시오. 어라? 갑자기 진영기 부회장이 왜 접근하는 걸까? 위협이라도 하려는 걸까? 뭐, 만나보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겠지. 진영기 부회장은 에둘러 말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긴 이야기는 필요 없을 것이다. 난 백 실장이 말한 곳으로 갔다. 회사에서 좀 떨어진 카페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다리던 백준혁 실장이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백 실장님이 제게 연락을 다 주시고. 무슨 일입니까?” “차 한 잔하며 숨이라도 좀 돌리시죠.” 개는 주인 성격을 따라간다고 했던가? 흥분하면 본심을 숨기지 못하는 우리 큰아버지의 성격을 얼마나 닮았을까 궁금하다. 난 의자 등받이에 한껏 몸을 기대며 최대한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재벌 3세처럼. “어이, 우체부 아저씨. 편지만 전달하지? 편지 쓴 주인 흉내 내지 말고.” “말씀이 좀 심하시군요.” 자존심을 긁는 한마디에 벌써 얼굴이 붉어지며 발끈한다. “참 내, 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니 당황한 그도 따라서 일어섰다. “문자 한 통에 달려 나오니까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해? 큰아버지 대리라고 생각해서 나온 거야. 회사에서 거리가 떨어진 이곳으로 잡은 건 은밀히 할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겠지? 그것 때문에 나온 거지 당신이랑 차 마시며 시간 때울 생각은 없어.” 입술을 깨문 백 실장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일단 진정하시고 앉으시죠. 부회장님 말씀 바로 전하겠습니다.” 못 이기는 척하고 다시 앉았다. 이제 나를 떠보는 말 따위는 꺼내지도 못할 것이다. “혹시 진동기 부회장님 비자금에 관련된 자료를 가지고 계시는지요?” 아직 뭔가를 더 알아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인다. 기특하긴 하지만 장단 맞춰줄 생각은 없다. “편지만 전해. 질문은 내 몫이야.” 백 실장은 다시 옅은 신음을 내고, 천천히 말했다. “진동기 부회장님에 관련된 자료를 원하십니다.” “정확히 뭔지는 알고?” “비자금 증거라는 것은 아십니다.” “그 증거를 어디에 쓰실까?” “그것까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모를 리가 있나? 하지만 아는 걸 말할 것 같지도 않다. “설마 그냥 내달라는 건 아니겠지? 눈엣가시 같은 동생을 단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강력한 폭탄인데?” 진동기 부회장을 날려버릴 자료라는 말에 그의 눈이 반짝인다. 옳지. 날 쳐내는 것보다 라이벌을 제거하는 걸 더 원하는 게 틀림없다. 진동기 부회장이 날아가면 순양그룹 회장실은 저절로 손에 들어오는 셈이니까 말이다. “원하는 걸 말씀하시랍니다.” 정확하다. 이 제안의 목적은 진동기 부회장이다. “제안을 먼저 꺼낸 쪽에서 지갑을 보여줘야지.” “사는 사람이 가격을 제시하는 상거래는 없습니다만.” “장사 하루 이틀 하나…. 안 파는 물건 살 때는 돈다발부터 내미는 거 몰라?” 백 실장은 아무 말 못 했다. 자기 선에서는 단돈 십 원도 쓸 수 없는 처지 아닌가? “돌아가서 주인님한테 다시 확인해야겠지?” 진영기 부회장의 속마음을 알았으니 백 실장에게 볼일은 끝났다.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혹시나 해서 알려주는 건데, 내가 가진 자료로 진동기 부회장을 궁지에 몰아넣는 걸로 가치를 판단하지 마시라고 조언해. 진동기 부회장을 궁지로 몰아넣은 다음 얻을 수 있는 것의 가치를 생각해서 가격 정해야 할 거야.” 여전히 굳은 표정의 백 실장이 이를 악물었다. “이봐요, 진도준 씨. 아무리 아쉬운 게 내 쪽이라고 해도 이 말은 해야겠소.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 그룹 내에서 두 부회장님 외에 내게 함부로 반말하는 사람은 없다고. 부회장님 장남인 진영준 상무도 꼬박꼬박 존대한다는 걸 알아둬.” 마침내 폭발한 백 실장은 앉은 채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자를 브레인이라고 곁에 두는 큰아버지가 안쓰럽다. 필요한 걸 얻을 때까지는 철저히 웃는 낯을 해야 하는 기본도 모르다니. “아, 그러시군요. 그럼 정중하게 다시 말하죠. 큰아버지께 전하세요. 내가 가진 자료를 원하시면 백준혁 비서실장님의 해고는 필수라고.” 백 실장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필요한 걸 얻을 수만 있다면 월급쟁이 정도는 언제든 버릴 수 있어. 그래서 월급쟁이들은 우리 가족만 보면 굽신대는 거고. 월급쟁이는 살아남기 위해서 간 쓸개는 집 안에 널어놓고 출근해야 하는 걸 모르나 보지?” 단 한마디도 못 하는 백 실장을 남겨 둔 채 카페를 나왔다. 잘만 하면 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둘째 큰아버지를 끝장낼 수도 있겠다. 물론 계산기 두들기며 어떤 스탠스를 취하는 게 더 이익인지 생각해야겠지만. * * * “진영기다운 선택이네. 딱 일 년만 진동기를 그룹에서 쫓아내면 많은 일을 할 수가 있지.” 이학재 회장은 당연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가능할까요? 일 년이라면 실형 선고받고 옥살이해야 하는데, 최악의 경우라도 3심까지 가면 집행유예로 풀려날 게 뻔한데.” “네가 가진 그 자료의 파괴력 문제겠지? 옴짝달싹 못 할 정도라면 진동기가 이리저리 힘을 쓰면 1, 2년은 가능할 거다.” 고민하는 내 모습을 보며 이학재 회장은 넌지시 말했다. “그 자료를 넘겨주고 순양중공업을 포함한 계열사 몇 개를 넘겨받을 수만 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 “그러게요. 하지만 그렇게 할 사람은 아니니까 먼저 제안할 필요도 없어요.” “차라리 진동기와 협상해보지 그러냐?” “그게 낫겠죠? 궁지에 몰린 사람을 꺼내주며 주고받는 게 아무래도 이익이긴 한데….” 눈이 마주친 이학재는 빙긋 웃었다. “역시 빠르구나. 단박에 알아듣네.” “진영기 부회장이 이럴 때는 큰 도움을 주니까요. 흐흐.” 비자금 증거를 진영기 부회장에게 넘긴다고 말하면 진동기 부회장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건 그렇고 하나 물어보자.” “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진동기가 힘을 못 써? 이쯤 되면 사실무근이라든지, 기자회견 했던 검사의 사생활까지 파헤쳐서 출세욕에 눈이 뒤집힌 나쁜 놈으로 몰고 가는 게 정상인데….” “검찰 쪽과 언론의 일주일 치 시간을 샀습니다.” “시간을 사?” “네. 딱 일주일만 가만히 있어 달라고 했죠. 거의 백억 가량 썼어요.” “뭐?” “진동기 부회장의 스피커를 꺼버리는 데 백억이면 싸게 먹혔다고 생각합니다.” 이학재는 입을 떡 벌렸다. “하이고, 기가 차서 할 말이 없다. 진 회장님도 그 정도까지 무지막지하지는 않았어.” “현찰은 할아버지보다 제가 더 많지 않겠어요?” 황당한 표정의 이학재 회장을 보는 재미도 나쁘지 않았다. * * * “이야, 서슴지 않고 큰아버지를 협박하는 우리 조카가 어려운 발걸음을 다 하시고. 뭔가 또 새로운 협박거리라도 생겼나?” 마음이 무거울 텐데 억지로라도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다. “여전히 이사회에서 절 쫓아낼 생각이십니까?” “더 강하게!” 의외의 대답에 오히려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역시 녹록치 않은 분이다. “내가 차분하게 생각해봤어. 왜 너 같은 어린애가 이런 일까지 벌일 수 있는지를. 결론은 딱 하나만 나오더라고. 바로 순양그룹 창업주의 특별한 손자라는 세간의 인식, 그리고 순양금융계열사의 대표. 이게 네가 가진 힘이었어.” 이럴 때 보면 첫째 큰아버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판단력이 좋다. 하지만 머리 잘 돌아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건 지금 이 상황이 말해준다. “그래서 절 쫓아내겠다는 생각은 변함없다는 뜻이군요.” “네가 순양그룹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는 걸 세상이 아는 순간, 모두 등을 돌릴 거다. 그때는 지금 내가 당한 이 수모를 고스란히 돌려주마.” “전 비자금 따위는 만든 적도 없고, 가진 적도 없는데요?” “지금 내 돈이라고 떠들어 대는 저 라부안의 비자금이 네 것이라고 순식간에 바뀔 거다. 강한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진실이야. 언론이든 검찰이든 순양의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 서 있는 널 날카롭게 물어뜯을 걸?” 이미 승자의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내가 쫓겨나더라도 꼭 저 말처럼 되지는 않을 테지만 섬뜩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두 큰아버지가 호시탐탐 서로 노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난 항상 위기에서 벗어날 기회가 온다. “아이고, 그룹에서 쫓겨나고 해외로 돈이나 빼돌리는 재벌 3세로 손가락질 받을 생각하니 이거 엄청 살 떨리는데요? 지금 세상은 절 잘생기고, 똑똑하고, 돈도 많은 재계의 총아라며 극찬하는데…. 순식간에 쓰레기가 되는군요.” “그 칭찬이 질투의 다른 표현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거다. 질투가 본래의 얼굴을 드러내면 얼마나 험악한지 곧 깨닫게 되겠지.” 난 잠깐 큰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다 머리를 긁었다. “이거 혼자 죽을 수는 없으니 큰아버지의 발목을 꽉 잡아야겠습니다.” “그런 일 없을 거다. 날 끝까지 물고 있기에는 네 힘이 약해.” “그럼 힘을 빌려야죠.” “뭐?” 이제 조금은 당황한 눈치를 보인다. “제가 가진 비자금 자료를 아주 비싸게 사겠다는 분이 나타났거든요. 역시 옛말 틀린 게 없어요. 보물은 지킬 힘이 있는 사람 손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정확해요.” 내 얼굴에 미소가 번지자 큰아버지의 당혹감은 더욱 커졌다. “전 비싸게 팔아먹고 돈이라도 챙겨야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하신 말씀은 되돌려드리겠습니다. 강한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진실이니까 순양의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 서 있는 큰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이 물어뜯겠는데요?” 눈치가 바닥은 아니니까 내가 말한 강한 자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들었다. “너 형님 만났어?” “백 실장이 먼저 찾아왔더군요. 원하는 게 뭔지도 물어보고 자료의 파괴력이 얼마나 되는지도 확인하고 갔습니다.” 먼저라는 말이 먹혔다. 진동기 부회장의 얼굴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뒤통수 맞았다는 배신감, 그 다음 찾아온 분노. 그도 할머니 때문에 잠시 잊었던 사실이 머리를 쳤을 것이다. 순양그룹을 놓고 손잡은 동맹은 아주 사소한 것 하나만으로도 쉽게 깨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인터폰을 눌러 커피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한 잔 다 마실 때까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각하는 모습이다. 커피 한 잔의 마지막 향기가 사라질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네가 본색을 드러내니 왜 아버지가 널 그리도 끔찍이 생각하셨는지 알겠어. 경쟁자를 이간질하는 게 보통이 아니야.” “이간질인 걸 아시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독배라는 걸 알지만, 잔은 받아라?” “독배까지는 아니고 몸에 해로운 것 정도로 해 두죠.” “이사회 무산시키고 금융그룹을 그대로 놔두면 그 자료 전부 내게 넘길 거냐?” “이사회 무산, 제 자리는 그대로. 이건 첫째 큰아버지에게 자료를 팔지 않는 대가죠. 자료 파기를 원하신다면 두 번째 제안을 하셔야 할 겁니다.” “그 두 번째는 뭐지?” 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걸 한번 진지하게 논의하고 싶습니다. 큰아버지.” ======================================= [260] 짧게나마 함께 1 진동기 부회장은 살포시 웃는 내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제가 첫째 큰아버지의 욕심을 얕봤습니다. 언론이나 검찰보다 더 확실한 곳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또 써먹을 카드가 없으니 아쉽겠구나.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원하는 게 뭐냐?” “절 쫓아내기 위해 두 분께서 손을 잡았지만, 잡은 손의 힘은 약하고 다른 손에는 칼을 쥐고 있지 않습니까? 언제든 찌를 수 있는 그 칼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싶습니다. 언제, 어떤 식으로든 칼끝이 내게로 또 향할 수 있으니까요.” “잡설이 길다. 요점만.” “당분간…. 아니, 꽤 오랫동안 저와 함께 첫째 큰아버지의 칼을 막는 게 어떠십니까?” “네 손을 잡아라?” “네.” 진동기 부회장의 표정이 변했다. 어처구니없는 제안이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내가 네놈 손을 잡아서 어따 쓰게? 그 이야기는 내가 널 키워주는 것밖에 더 돼?” “큰아버지 지분 26%, 제 지분 10%. 합치면 36%입니다. 첫째 큰아버지의 지분과 같죠. 두 분을 바라보는 그룹 내의 시선이 똑같아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표정이 변했다, 이번엔 반가운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나쁘지 않군. 네가 지분을 넘길 리가 없으니 의결권을 위임하겠다는 게냐? 그렇게 한다면야 내가 널 지켜주마. 절대 그룹에서 쫓겨날 일은 없을 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절 쫓아내시려는 분이셨습니다. 지금 그 약속을 믿는다면 제가 바보라는 소리죠. 섣부른 오해십니다.” “그럼?” “36%의 공동의결권입니다.” “뭐?” 큰아버지의 안색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공동의결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같은 비율이라고 해도 어림없는 소린데, 고작 절반도 안 되는 지분을 들고? 가당키나 한 소리냐!” “평상시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걸 알지만 지금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 가족이 쥔 지분이라는 것이 어차피 경영권 방어용 아닙니까? 큰아버지의 경영에 대해서는 제가 관여하지도 않고 할 생각도 없습니다. 단지 두 분께서 다시 손잡고 절 쫓아내시려는 시도를 사전에 방지할 목적이 전부입니다.” “시끄럽다.” “진정하시고 냉철하게 생각하십시오. 이건 큰아버지의 26%를 뺏기는 게 아니라 제 지분 10%의 힘을 얻으시는 겁니다. 물론 저도 26%만큼 경영권 방어의 힘을 얻는 것이고요. 제가 더 많은 이익을 본다고 해서 큰아버지께서 손해 보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윈-윈이라고 해두죠.” 진동기 부회장은 지금 인간의 치졸한 본성을 이겨내야 한다. 나보다 남이 더 많은 것을 얻는다고 해서 내가 얻는 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함께 손잡고 달려가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나보다 더 가진 놈, 앞서가는 놈을 찍어 누르는 법만 익힌 사람은 뒤따라오는 놈을 끌어준다는 것 자체를 손해라고 여긴다. 진영기 부회장이라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지만 조금이라도 이성적 판단을 우선시하는 진동기 부회장이라면 치졸한 본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큰소리칠 처지가 아니라는 것도 계산에 넣을 것이다. “미라클이 가진 지분도 생각하십시오. 아무리 물타기를 해서 그쪽 지분이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아직 20%가 넘습니다. 그 20%는 언제든 제 편이 되어줄 수도 있고요. 그럼 전체 지분의 과반이 훌쩍 넘습니다. 첫째 큰아버지께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다고 해도 절대 그룹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진동기 부회장의 눈빛이 달라졌다. 지금 가장 약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외부의 지분은 방관자라고 생각해도 무방하지만, 미라클은 다르다. “오세현 대표와 아버지 그리고 제가 있는 한 미라클은 확실한 우리의 우호지분입니다. 제 지분 10%는 그런 의미도 있다는 걸 생각하십시오.” 구구절절한 말 대신 비자금으로 협박하는 게 빠를 수도 있지만, 협박으로 굴복시키면 오래가지 못할 약속만 받아낸다. 지금은 큰아버지의 지분도 오래가는 우호지분으로 바꿔야 한다. 한참을 생각하던 진동기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우리 셋의 지분이면 과반이다. 차라리 미라클 지분을 이용해서 날 회장으로 올려라. 그럼 널 유일한 부회장으로 만들어주마. 그럼 더는 불안에 떨 필요가 없겠지?” 달콤한 말이었지만 생각이 다르니 무의미한 속삭임이다. “큰아버지께서 회장에 오르시면 가장 먼저 무슨 일을 할지 오세현 대표도 압니다. 대대적인 계열사 구조조정으로 미라클의 지분을 희석하시겠죠. 물론 제 지분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오 대표도,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이미 다 알면서 슬쩍 던진 말이 분명하다. 더는 조르지도, 강요하지도 않았다. “네가 공동의결권으로 내 손과 발을 묶어버릴 수도 있어. 네가 의결권을 포기하면 나도 포기해야 하니까 말이다.” “저 역시 마찬가지로 묶여버릴 수도 있습니다. 전 그런 상황이 오면 제 지분을 부모님께 넘겨버릴 겁니다. 그럼 공동의결권은 파기 되니까요. 큰아버지께서도 그렇게 하십시오. 어차피 아들에게 물려주실 것 아닙니까?”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한다는 것은 반 이상 넘어왔다는 증거다. 마지막 미끼를 던져야 할 때다. “라부안에 있는 비자금 천억, 제가 인출하겠습니다. 그럼 비자금으로 큰아버지를 협박할 일은 없어지죠. 저도 엮인 것이니까요.” “내 먼지를 너도 뒤집어쓰겠다?” “그래야 ‘공동’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네 제안을 거부하면 비자금 자료를 형님께 넘길 거냐?” “저 그렇게 양아치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사회만 무산시키시면 자료는 넘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소시효 3년 남은 강력한 무기가 제 손에 있으니 늘 불안하실 겁니다.” 진동기 부회장은 인터폰을 눌렀다. “법무팀 전부 들어오라고 해.” 한결 부드러운 표정의 큰아버지가 말했다. “검토하고 오늘 중으로 연락하마. 아, 검토는 긍정적 검토다. 나가 봐.” 법무팀에게 위협적인 요소를 제거한 공동의결권 계약서 작성을 지시하기 위한 호출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간 제가 했던 불손한 언사는 용서해주십시오. 저도 살아남으려고 이러는 겁니다.” “이미 널 조카로 생각하지 않아. 넌 내게 조카가 아니라 순양의 경영권자일 뿐이다. 그러니 그따위 예의 바른 모습 보이려고 애쓸 필요 없다.” 그에게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나오려 할 때 그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네가 형님과 손잡았다면 날 쫓아내 버릴 수도 있었다. 그 대가로 계열사 몇 개쯤은 뚝 떼어 받았을 테고. 왜 거부했지?” “전 할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걸 지키는 게 목적입니다. 계열사 몇 개 더 받을 욕심은 없습니다. 그리고 첫째 큰아버지는 예전부터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통째로 삼킬 생각이니 부스러기는 성에 차지 않겠지. 됐다.” 큰아버지는 손을 휘휘 저으며 등을 돌렸다. * * * 진동기는 크게 숨을 한 번 쉬고 진영기 부회장실의 문을 열었다. “부회장님 계시지?” 데스크를 지키던 여직원이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아, 네. 부회장님. 이사회 준비 중이십….” “아무도 없지?” 진동기는 여직원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들어갔다. “어? 웬일이냐? 좀 있다 이사회에서 볼 텐데?” 진영기는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동생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사회 안건이 바뀔 테니까, 형님이나 나나 갈 필요 없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사들 인사 문제가 안건인 건 변함없지만, 결정은 도준이가 할 거야. 아버지께서 원하신 방향 그대로야.” “야!” “그렇게 됐어. 형님이 내 뒤통수칠 생각만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약속한 대로 임원들 물갈이했을 테지만, 언제나 날 쳐내려는 사람과 뜻을 함께한다는 건 아무래도 안 되겠더라고.” 진영기는 어떻게 흘러갔는지 짐작했다. “도준이가 그래? 내가 네 뒤통수 친다고?” “시치미 떼지 말고. 아, 원망한다든가 화난 건 아냐. 나였다고 해도 이런 호기를 놓치기는 아까웠을 테니까. 당연해. 약점을 드러낸 내가 멍청했던 거지.” 진영기는 손에 쥔 이사회 자료를 내팽개쳤다. “인마! 그렇다고 도준이를 들어낼 기회마저 날려? 제정신이야? 어머니 얼굴 어떻게 볼래?” “우리가 어머니를 극진하게 생각하는 효자도 아닌데 새삼스럽기는……. 아무튼 금융그룹은 손대지 마.” 진영기는 동생을 향해 소리쳤다. “야이, 멍청한 놈아! 아직 안 늦었다고! 지금이라도 마음 돌려. 내가 순양생명을 네게 줄 수도 있어.” “그만해. 도준이 지분과 내 지분. 그리고 미라클 지분까지 합치면 그룹 지배지분 절반이 넘어. 여차하면 형님을 쫓아내고 내가 회장 자리에 앉는 게 허황한 꿈이 아니라고. 더는 도준이 긁지 마.” 방금까지 버럭버럭 소리 지르던 진영기가 하얗게 질렸다. 그룹에서 밀려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단 일 초라도 해본 적 없었다. 그룹 외부에도 많은 지분이 있다. 공기업, 은행, 외국 자본 등. 하지만 그들은 그룹 내부 일에는 조금도 관여하지 않는다. 단지 안전한 투자처라고 생각해서 돈을 묻어 두거나 주식 매매 차익을 노릴 뿐이다. 혹은 담보로 쥐고 있던지. 미라클의 지분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섣부른 판단으로 빠져나갔고 그룹에 우호적인 지분이라고 여겨왔다. 그런 미라클이 동생과 조카의 실질적인 힘이 될 줄이야. 진동기는 형님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으며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진영기가 한참을 멍하니 있을 때 백준혁 비서실장이 문을 두드렸다. “부회장님. 이사회 시간이 다 돼 갑니다. 특별히 준비할 게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심상치 않은 부회장의 표정 때문에 아주 조심스레 말했지만 돌아온 건 손찌검이었다. 짝-! 따가운 뺨을 어루만지려고 했지만, 부동자세를 풀지 못했다. 진영기 부회장의 손이 연거푸 날아왔기 때문이다. “이 병신 새끼야! 넌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 * * “다 모여 있습니까?” “네. 실장님께서 들어가시면 모두 깜짝 놀랄 겁니다.” 장도형 부사장은 승자의 기분을 만끽하는지 환한 표정이었다. “아무 일도 못 하고 지켜만 봤던 제가 이런 말씀드리기 죄송스럽습니다만,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머리 숙인 그를 향해 말했다. “죄송하다는 말, 두 번 다시 듣지 않을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순양을 떠나야 한다는 의미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실장님.” “갑시다. 노친네들 많이 기다리겠습니다.” 우리는 대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노친네들 표정이 확 변했다. 눈칫밥 먹은 게 몇 년인데 상황이 변했다는 걸 모르겠는가? 회의실 상석에 비워 둔 자리까지 성큼성큼 걸어가 엉덩이를 걸쳤다. 바로 곁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은 이미 백지장이었다. “양우찬 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양 사장을 향해 슬쩍 웃음을 보이자 그는 눈을 감았다. 난 내 곁에 앉은 장도형 부사장을 향해 말했다. “장도형 부사장님. 임원 전용층까지 외부인을 들여놓은 경비실 직원 전원 문책하십시오. 순양그룹이 언제부터 개나 소나 들락거리는 시골 장터로 변했습니까?” “죄송합니다. 실장님. 곧바로 조처하겠습니다.” 다시 양 사장을 향해 말했다. “뭐 하세요? 경비에게 끌려 나가면 쪽팔리지 않을까요? 아직 충분히 걸어 다닐 기력은 있어 보이는데…?” 양우찬 사장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며 회의실을 나갔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 모두 다리를 덜덜 떠는 게 느껴졌다. ======================================= [261] 짧게나마 함께 2 “윤호일 순양생명 사장님.” “네. 실장님.” 내가 임명한 윤 사장의 표정은 다른 이들과 다르게 많이 밝았다. 양우찬 전 사장이 대회의실에 등장하는 순간, 자신의 해임을 직감했던 그였다. 하지만 이사회를 주도하리라고 생각했던 두 부회장 대신에 내가 나타났을 때 전세가 뒤바뀌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이사회 빨리 진행하시죠.” “네.” 윤호일 사장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편의상 순양그룹 금융계열사 통합 이사회를 개최하게 된 것에 대한 양해를 구하며, 임시 이사회 안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대표이사들을 한 번 쓱 둘러보고 말을 이어나갔다. “첫째. 순양생명, 순양카드, 순양화재 그리고 순양증권의 대표이사 해임 및 선임에 대한 건입니다. 의견 있으신 분 말씀해 주십시오.” 모두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다물고 눈치만 보기 시작했다. 내가 이 회의실에 나타났다는 것은 대주주가 변함없다는 의미다. 그런 대주주가 임명한 대표이사를 해임하자는 말은 사표 쓰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사표 쓰고 싶은 자는 아무도 없다. 조용한 실내를 쓱 둘러본 윤호일 사장은 재차 확인했다. “없습니까? 그럼 두 번째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동사(同社)들의 이사 해임에 관한 건입니다.” 내가 장도형 부사장에게 눈짓하자 그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잠시 회의 진행 발언하겠습니다.” 장 부사장이 윤호일 사장을 보며 말하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시간 절약을 위해 제안하겠습니다. 오늘 이사회 안건에 대해 특별한 의견이 없으시다면 이사회를 끝내는 게 어떻습니까?” 모두 입을 굳게 다문 채 서로 눈치만 보자 윤호일 사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이사회 안건은 의견이 없는 관계로 철회되었음을 알립니다. 이것으로 임시 이사회를 마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나둘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다시 장도형 부사장이 말했다. “각 계열사 사장님들은 잠시 남아주십시오.” 이 말을 신호로 임원들은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네 명의 사장들은 흥분과 긴장감 때문인지 모두 얼굴이 조금 붉었다. 오늘 쫓겨날 수모를 당할 것이라고 자포자기했지만, 자신을 대표이사 자리에 앉힌 내가 건재하다는 것은 자신들도 굳건하다는 의미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장도형 부사장이 그들에게 몇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새로 정리한 인사명단입니다. 이번 기회에 두 부회장님의 사람을 싹 청소합시다. 충성 맹세는 엉뚱한 곳에서 하고 월급은 우리 회사에서 받아 가는 철면피들을 더는 두고 볼 수 없군요.” “그럼 이 명단은…?” “다시 확인하려고 나눠 드린 겁니다. 혹시 그 안에 잘못 판단한 사람은 있는지부터 체크해보십시오.” 그들은 내 눈치를 슬쩍 살피며 이름을 확인해 나가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 눈치 보지 마시고 정확하게 판단해 주십시오.” 수포로 돌아간 이사회를 열었던 대회의실은 졸지에 인사위원회 자리로 변했다. 거의 십여 분간 꼼꼼히 들여다보던 그들이 명단을 다시 내밀었을 때는 몇몇 사람은 펜으로 마킹되어 있었다. “이 친구들은 저쪽 사람이긴 하지만 실력과 능력은 발군입니다. 이렇게 내치는 건 좀….” 윤호일 사장이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사장님이 생각하시는 그 능력, 순양 임원이라는 명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웬만하면 뜻하시는 대로 따르고 싶지만, 이번에는 안 되겠습니다. 능력은 보지 마시고 어느 쪽인지로만 판단하세요. 그리고 실력과 능력이 출중한 인재를 발굴해서 그 자리에 앉히세요. 그것도 대표이사가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명단을 다시 정리하자 장도형 부사장의 판단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난 명단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사람들은 전부 지방 영업소로 발령 내세요. 순양카드의 경우 채권추심 부서로 내보내도 됩니다. 또한, 부장급까지 싹 물갈이할 생각입니다. 그 임원들 라인은 단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일선 영업소로 다 쫓아버리세요.” “부장급까지 말입니까?” “네.” “부장급까지 정리하면 좀 시끄러워질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것까지 걱정해야 합니까? 시끄러워지지 않게 정리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아닙니까?” 사장들은 난처해하던 표정을 싹 지우고 머리를 숙였다. 난 장도형 부사장을 향해 말했다. “장 부사장님도 함께 하세요. 내일까지 인사발령 내고 결과 보고하세요.” “네. 실장님.” 자리에서 일어서자 사장들도 벌떡 일어났다. “두 부회장님이 또다시 금융그룹을 차지하기 위해 이사회를 요구할 엄두도 못 내게 하세요. 여러분들을 쳐내고 다른 사람을 앉히려 해도 사람이 없어 못 할 정도로 탄탄한 조직을 구축해야 합니다. 지금 하는 대량 해고는 저만을 위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머리 숙인 그들을 뒤로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큰 고비는 넘었고 방어벽을 더 굳건히 쌓아야 할 때다. * * * 『…제보와 증거를 제대로 검증하지 못한, 성급한 수사 때문에 혼란을 야기한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또한, 이 일로 불필요한 오해를 받게 된 분들에게도 사과의 말씀 전합니다. 전 제 개인의 실수 때문에 검찰의 명예를 실추시킨 책임을 지고 검찰을 떠나려 합니다…….』 “저 친구는 어쩌기로 했어?” “아버지 회사의 법무팀에 들어갈 겁니다. 검사 월급의 열 배를 주고 데려오니 저 양반도 손해는 아니죠.” “기자회견 한 번으로 팔자 고쳤구먼.” 나와 진동기 부회장은 최초로 방아쇠를 당겼던 검사의 두 번째 기자회견을 확인하고 TV를 껐다. “라부안 돈은?” “여기 일 마무리하고 직접 날아가 인출할 겁니다. 그리고 자료는 전부 파기하겠습니다.” “두 번 써먹을 생각하지 마. 넌 똑똑하니까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거로 믿는다.” “믿으십시오. 공동의결권까지 작성한 한편입니다.” 우린 각자 사인한 서류를 챙겨 들었다. “한편이라서 말하는데 이번에는 너무 심했어. 부장급까지 가지치기 한 건 그룹 전체의 분위기를 망치는 거다. 오너 가족의 지분 다툼이 일반 직원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 좋지 않아.”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넥타이 맨 샐러리맨은 일상이 줄타기라고요. 부장급 이상 다 날아갔으니 승진 기회 잡은 차장, 과장은 쾌재를 부를 겁니다. 살아남은 부장급은 임원 될 생각에 코를 벌렁거리고요. 아마도 지금은 축제 분위기일 테죠.” 큰아버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이야기를 슬쩍 흘렸다. “너도 아직 줄타기가 늦지 않았어. 미라클 잘 구슬려서 큰 그림 그려봐. 나나 너나 욕심만 좀 접으면 순양그룹 양분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제가 조금 더 나이 먹을 때까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젊다는 게 경영에서는 핸디캡이더군요.” “그리 오래는 못 기다려. 난 언제든 마음 바뀔 수 있다.” “명심하지요. 큰아버지. 흐흐.” 웃으며 나가려 할 때 문이 열리며 카랑카랑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기야! 넌 지금 저놈이랑 뭘 하는 거야?” “어, 어머니.” 갑자기 나타난 할머니 때문에 큰아버지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녀를 보는 순간 짜증이 솟구쳤지만 나 혼자 앉아 있을 수는 없어 천천히 일어나니, 할머니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넌 이제 이 할미에게 인사도 하지 않는 것이냐?” 난 입을 다문 채 가볍게 머리만 숙였다. “저, 저….” 공손하지 못한 내 모습에 할머니가 눈을 치켜뜨자 큰아버지는 내게 눈짓한 뒤 그녀를 막아섰다. “어머니. 일단 앉으세요. 화내실 일 없으니까 진정하시고요.” 머뭇거리며 눈치 볼 이유가 없었기에 큰아버지께 머리를 숙이고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는 나를 끝까지 노려보는 할머니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가슴에 담았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핸드폰을 꺼냈다. “군산 갑니다. 지금! 준비하세요.” * * * “갑자기 웬 군산입니까?” “상무님은 아직 직접 묘소에 가신 적 없죠? 언제 가실지 모르니 내가 자리 만들어드리려고요.” 우병준 상무는 슬쩍 미소 지었다. “단지 그것 때문일까요?” “지금 못 믿겠다는 뜻…?” “당연히. 흐흐.” 달리는 차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뭐…. 제가 용서를 구해야 할 일이 생길 것 같아 미리 사죄드리러 가는 것도 있지만, 주목적은 상무님 때문입니다.” 갑자기 우 상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필옥 여사님 때문입니까?” 이 사람 눈치 빠른 건 아무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지시한 일은 진척이 있습니까?” “네. 그렇지 않아도 보고 드리려 했습니다. 이사회 때문에 정신없으신 것 같아 기다렸습니다.” “깨끗하지는 않군요.” “네. 그렇지만 원하시는 수준의 증거는 없습니다. 그 바닥 놈들 입에서 대체적인 상황은 다 들었습니다만 그놈들이 증언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깔끔하게 일 처리 했다면 마도구찌가 있을 텐데요?” 우병준 상무는 조금 머뭇거렸다. 누군지 짐작할 수 있는 태도다. “상무님 같은 사람이군요.” “네. 아주 오랫동안 이 여사님 곁에서 일한 사람입니다. 일 잘하기로 소문났죠.” “그럼 그 사람 밑에서 일했던 사람을 찔러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요?” 우병준은 고개를 짧게 저으며 운전 보조석에 앉은 직원에게 말했다. “야. 누가 너에게 접근하면 어쩔 거야?” 보조석 직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누가 보낸 건지, 목적이 뭔지, 확인할 때까지 속아주는 척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선에서 감당하기 힘들 땐 상무님께 보고합니다.” “수십억 정도 돈으로 유혹하면?” “아이고, 상무님 왜 그러십니까? 저 오래 살고 싶습니다.” 우병준 상무는 나를 향해 말했다. “저쪽도 똑같습니다.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모든 걸 망칩니다.” 수십억이 아니라 수백억. 그리고 안전 보장이라는 단서까지 붙여 접근한다고 해도 저런 대답이 나올까? 아, 맞다. 날 죽인 놈이 그랬지. 『우리가 좀 멍청하긴 해. 하지만 삼키지 못할 떡을 넘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아.』 날 죽인 놈은 수천억을 거부한 놈이다. 이처럼 사람마다 다르다. 모두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뭐…. 방법을 찾아봅시다. 아무리 튼튼한 성벽이라도 개구멍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지 않겠습니까?” 자동차는 빠르게 군산을 향해 달렸다. 순양박물관이 보이자 우병준의 눈빛이 달라졌다. 설마 이 양반, 펑펑 우는 건 아닐 테지? 차에서 내려 박물관 뒤편의 햇볕 잘 드는 공원으로 걸어가다 발길을 멈췄다. “상무님 먼저 올라가십시오. 전 커피 한잔하고 천천히 뒤따라가겠습니다.” 우 상무는 주춤하더니 머리를 숙였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 상무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고 난 박물관 입구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얼추 삼십 분쯤 지났을 때 카페를 나왔다. 할아버지 묘소에 도착하니 우병준 상무는 봉분 주변의 잡초를 손으로 뽑고 있었다. 눈이 퉁퉁 불은 채로.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용서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과거가 아니라 제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겠습니다.” 우병준 상무가 천천히 내 곁으로 와서 말했다. “어떤 선택을 하실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할머니를 다시 스위스 별장으로 보내야겠습니다.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며 살도록 노후를 챙겨드릴 생각입니다.” 우병준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는 안락한 노후군요. 회장님께 용서를 빌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다시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 [262] 짧게나마 함께 3 “군산 다녀왔다고?” “네. 할아버지께 인사드리고 왔습니다.” “단지 인사만?” “보고드릴 일도 있었습니다. 뭐… 좋은 일은 아니지만.” 회장 의자에 앉아 결재 서류를 확인하던 이학재 회장은 벌떡 일어나 내 맞은편에 앉았다. “말해.” “네?” “그 안 좋은 일이 뭔지 말해보라고. 그거 확인차 온 거 아냐?” “꼭 일이 있어야 옵니까? 겸사겸사 안부 인사 드리려고 온 거죠.” “대주주가 월급쟁이 회장 감시하러 온 거 아니면 한가하게 안부 인사나 하고 돌아다닐 네가 아니다. 말해.” 군더더기가 없어 참 편한 사람이다. “순양금융그룹 이사회를 잘 막아낸 건 아시겠죠?”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할까? 듣고 싶다면 해주고.” “거, 어째 무슨 말도 못 꺼내게 하십니까?” 짐짓 볼멘소리를 하자 이학재 회장은 싱긋 웃었다. “잘했다. 됐지? 이제 말해. 뭐냐?” 꺼내기 힘겨운 말을 하자니 쓸데없는 말은 내가 더 많이 한다. 이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할머니 문제입니다.” “여사님?” “네. 절 순양그룹에서 쫓아내려고 큰아버지들에게 자꾸 떼를 씁니다.” “두 부회장이 어머니 말 잘 듣는 착한 아들은 아니잖아. 떼쓴다고 또 그런 짓 하겠어?”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지만, 이학재 부회장의 표정이 어둡다. 이 사람도 할머니에 대해서 뭔가 아는 게 틀림없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할머니는 큰아버지들을 움직일 만한 무기가 있어요. 그 무기를 휘둘렀는지, 아니면 아직 밝히지 않았는지는 모릅니다.” “무기?” “네.” “그 무기가 뭔데?” “돈입니다.” 이학재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던가? “돈이라…. 순양그룹 안주인인데 당연히 많은 돈을 가졌겠지. 그런데 무기로 쓸 만큼은 아니다. 굵직한 계열사를 손에 틀어쥔 아들 둘이 어머니의 재산 정도에 휘둘리지는 않아.” “상상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확실합니다.” 이젠 조금 놀라는 것 같다. 아는 게 없었구나. “네 입에서 상상 이상이라고 할 정도면 얼마나 큰 돈이냐?” “정확히 안다면 액수를 말씀드렸겠지요.” “그럼 불확실한 추측일 뿐이네?” “그래서 확인하는 겁니다. 할머니가 순양예술재단을 맡은 지가 얼마나 됐죠?” “가만 보자….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문화 정책이니 뭐니 하며 억지로 시작했으니까 이십 년이 넘었네. 그게 왜?” “이십 년 넘게 재단으로 흘러들어 간 돈은요?” 이학재 회장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난 또 뭐라고. 설마 몰라서 하는 소리냐? 물론 재단으로 들어간 돈은 어마어마하지. 탈세 목적으로 기부금을 쏟아부었으니까. 하지만 예술 재단은 영리 활동을 못 해. 뭐, 편법으로 장난을 좀 쳤을 수도 있지만 미미할걸? 돈은 굴리지 않으면 불어나지 않아.” “아니죠. 사실상 어마어마한 재테크를 했습니다. 국내 미술품과 골동품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예술품까지 쓸어 담았습니다. 오죽하면 할머니가 런던 소더비와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의 VIP 대접을 받겠습니까?” “예술품은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어. 팔아서 돈으로 바꿔야 무기가 돼.” “바로 그겁니다.” “그게 무슨….” 이제야 뭔가를 알아챈 듯 이학재 회장은 입을 떡 벌린 채 한동안 말을 못 했다. “확실해?” 한참 만에 다시 나온 첫말은 재확인이었다. “증거는 없습니다만, 증언은 있습니다. 물론, 법정에서 써먹을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자세히!” 이학재 회장의 굳은 얼굴은 다시 할아버지의 비서실장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일어났다. “순양 갤러리의 전시 그림과 순양 예술관의 골동품은 일 년에 서너 번 교체 전시됩니다. 물론 엄청난 가치를 지닌 건 절대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죠.” “대부분의 예술품은 재단 수장고(收藏庫)에 있지.” “제가 순양예술재단의 목록까지 확인했습니다. 20년 이상 모은 예술품입니다. 가격이 수십 배는 기본이고 수백, 수천 배까지 뛴 작품도 많아요.” “목록 확인했다면 아직 현금화를 못 했다는 뜻이잖아?” “목록만 확인했습니다. 현물은 못 봤죠.” “없다고? 다 팔아치웠다?” “아마도요.” “뭐?” 깜짝 놀란 이학재 회장을 보는 것도 참 드문 일이다. “지금 수장고에 들어있는 작품 대부분은 위작(僞作)일 가능성이 큽니다. 어차피 대작은 공개하지 않으니까 아예 없을 수도 있고요. 목록 중에 프랜시스 마이어의 프로이트 초상 삼부작이 가장 비싼 축에 들어갈 텐데 무려 9백억에 매입했어요. 보신 적 있습니까?” “난 예술 문외한이다.” “저도요. 하지만 지금 이 작품의 가치는 1천5백억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없거나 가짜로 바꿔치기했다? 진품은 다 팔아치우고?” “거의 확실합니다. 진품을 해외로 빼돌리는 데 가담한 밀수업자와 인사동 마법사라고 불리는 위작 전문가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직접 위작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순양예술재단이 진품을 매입했다는 기사가 뜨더랍니다.” 이미 이학재 회장은 파랗게 질린 얼굴이었다. “심한 경우에는 해외에서 진품을 구입하고 아예 가짜를 들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답니다. 진품은 현지에서 곧바로 처분하고요.” “여사님이 스위스에 오래 계셨던 이유도 혹시…?” “네. 거기서 여러 가지 일을 했겠죠.” “우병준이 조사한 거냐?” “네.” “그자라면 틀림없겠지.” 이학재 회장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길게 쉬며 다시 입을 닫았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뭘 했는지 파악 중입니다. 그렇지만 차명 계좌나 명동에 묻어 뒀다면 알아내기 힘들 겁니다.” 다시 몸을 바로 세운 그가 단정하듯 말했다. “차명 주식이다.” “주식?” “그래. 이 여사는 분명히 주식을 끌어모았을 거야. 돈은 아무리 펑펑 써도 모두 계열사에서 정리해 주니까 돈 필요한 분은 아니지.” “그럼 더욱 이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겠군요.” “어쩌려고?” “할아버지께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할머니는 스위스에서 노년을 보내도록 하겠다고요. 물론 그 전에 할머니를 빈털터리로 만들어야겠지요. 나중에 화근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이학재는 서늘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이 여사님은 너의 친할머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회장님의 조강지처야. 천륜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마라. 천벌 받는다.” 악당은 언젠가는 천벌을 받아 죽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난 천벌을 미리 받았다. 머리에 총알이 박혀 죽었다. 누가 보더라도 천벌이다. 천벌을 미리 받은 악당이니 천벌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경치 좋은 스위스 별장에서 편히 말년을 보내도록 해드린다고 했습니다. 이 정도면 자식보다 더 나은 효손이죠.” * * * 전세기가 코타키나발루 공항에 도착하자 금융계열사 사장들은 한껏 들뜬 표정이었다. 회사 분위기 쇄신을 위해 모두 3일의 휴가를 줬다. 골프도 실컷 즐기고 리조트에서 푹 쉴 수 있도록 전세기에 모두 태웠다. “이거, 우리끼리만 골프 쳐도 됩니까?” 장도형 부사장이 난처한 듯 말했으나 그의 입은 찢어질 듯 커져 있었다. “노친네들 노는 데는 별로 껴들고 싶지 않습니다. 하하.” 난 그들을 리조트에 몰아넣고 오세현을 만났다. “진동기 부회장이랑 공동의결권을?” “네. 당분간은 조용할 겁니다.” “돈은?” “삼촌이 찾아서 깨끗하게 빨아주세요. 흔적 안 남게.” “내가 쓴다?” “그러시던지요.” “농담 아냐. 리조트 적자라고. 대출 땡겨서 메꾸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러세요. 그리고 직항 노선 개설되면 좀 낫겠죠.” “하늘길 빨리 열리도록 힘 좀 써라. 여기저기 돈 찔러 준 데 많잖아. 이번에 좀 써먹어.” 심각한 오세현의 표정을 보니 우습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비즈니스의 본성이 드러난다. 적자 따위를 걱정할 이유가 없는 분 아닌가? 편히 쉬면서 적당히 관리만 하면 될 일인데 회계 장부의 빨간 숫자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힘써 볼게요. 아무튼, 라부안 돈부터 빨리 정리합시다.” “근데 왜 사람들을 우르르 끌고 왔어? 비자금 정리하는데 조용히 와야 하는 거 아냐?” “보험 든 겁니다.” “보험?” “네. 만약, 진짜 만약에 말입니다. 라부안 비자금 때문에 제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빠져나올 구멍은 있어야죠.” “이, 이런 나쁜 놈을 봤나?” 오세현은 혀를 내둘렀다. “저들 중에 한 명을 비자금 주인으로 만들려고 데리고 왔어?” “만드는 게 아니고 스스로 비자금 주인이라며 자처하고 나설 겁니다. 그때를 대비한 알리바이죠.” “이제는 재벌 회장 다 됐구나.”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오세현을 향해 우는소리를 뱉었다. “어쩝니까?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저도 방탄복 역할 하는 사람이 있어야죠.” 조금 화가 난 듯도 하고 동정심도 보인다. 아니, 애처롭게 바라본다는 게 맞을 듯하다. “아무튼, 빨리 돈 찾고 저와 함께 미국 가시죠.” “미국? 왜? 뉴욕 미라클에 볼일 있어?” “네.” 애처롭게 바라보던 눈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투자자의 눈빛으로 변했다. “촉이 왔어? 아니면 괜찮은 정보? 이번엔 어디에 투자하게?” “저도 대부호답게 아트 콜렉트라는 품위 있는 취미라도 키워보려고요. 이번엔 뉴욕의 작은 갤러리라도 인수할 생각입니다.” “뭐? 아트?” 오세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눈물까지 흘리며 한참을 웃고 난 뒤에야 가까스로 말을 할 수가 있었다. “재테크로 미술품 모으는 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진짜 안목이 있어야 해. 갤러리에 속아 가치도 없는 그림 사서 돈 날린 졸부 여럿 봤다.” “전 이미 유명한 예술품만 살 겁니다. 이미 목록까지 만들었어요. 웃돈 준다면 얼씨구나 하며 팔 겁니다.” “모르는 소리 그만해라. 유명한 그림을 소장한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그림 안 판다. 그놈들은 돈이 썩어나는 놈들이야. 남아도는 돈 때문에 그림 샀는데 웃돈 준다고 하면 비웃음만 돌아올걸?” “제 수집 목록의 주인은 다릅니다. 현금이 간절한 사람이에요. 그림 대신 순양그룹 주식을 더 좋아하는 분이거든요.” 순양의 주식이라는 말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뭐?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거야?” “제 할머니입니다.” 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 * “참 내, 그놈의 집구석은 왜 그 모양이야? 모두 주식에 환장한 사람들만 모였어.” “그러게나 말입니다. 욕을 얻어먹어도 싸죠. 저도 그중의 한 명이니까요.” “어이그. 장하다, 인마.”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다 듣자 오세현은 기가 차는지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윤기도 알아?” “아뇨. 말씀 안 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 더는 할머니와 나쁜 감정이 쌓이도록 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번 일은 조금만 삐끗해도 치명적이야. 집안 최고 어른의 허물을 들추는 건데…. 네 할머니 이름 석 자가 새어 나가면 집안 망신은 물론이고 순양의 이름에도 상처를 입는다.” “이미 순양이라는 이름은 모두가 손가락질할 만큼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졌어요. 흙탕물에 빠진 간판에 먼지 좀 더 묻는 게 두렵지는 않습니다.” “알았다. 그럼 라부안 비자금 처리하고 바로 미국으로 가자. 나도 간만에 그쪽 애들 얼굴이나 좀 봐야겠다.” 오세현은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고 아주 오랜만에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라부안의 돈은 은행과 장소만 다를 뿐 비자금이라는 이름을 유지한 채 세계 곳곳을 돌다 내 주머니로 들어올 것이다. ======================================= [263] 은밀한 갤러리 1 뉴욕 미라클은 큰 변화 없이 평범한 수익률을 내며 굴러가고 있었다. 책임자인 레이첼 아리에프의 하이리스크 하이리턴보다는 손실 제로를 지향하는 경영 철학 때문이기도 하다. “제임스, 하워드. 우린 되도록 파생상품은 손대지 않으려고 해.” “이유가 뭐죠? 지금 월가에 파생상품 외에는 딱히 투자할 곳도 없을 텐데요?” 내가 웃으며 물었지만, 그녀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고액 투자자들의 돈으로 움직이는 헤지펀드가 지금 몇 갠 줄 알아? 10년 전 500개 정도였는데 지금은 일만 개가 넘어. 이놈들이 전부 파생상품을 주물러.” 그녀는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사모펀드가 점잖아. 이쪽은 기업가치를 판단해서 저평가 기업을 사서 되파니까. 적어도 기업이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그래도 고수익은 파생상품이잖아. 리스크 회피 때문에 마냥 외면할 수는 없을걸?” 오세현은 조금 답답한 듯 말했으나 레이첼은 완강히 머리를 흔들었다. “파생상품은 두 번 정도 비틀어버리면 그 실체를 확실하게 그려낼 사람은 그 상품을 만든 놈밖에 없을걸? 나머지는 배당 하나 보고 덤벼드는 불나방이야.” “그럼 레이첼이 직접 파생상품을 만들어보는 건 어때요? 아주 정확히 그 실체를 아는 상품으로요.” 의외의 제안에 조금 당황한 듯 보였으니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우리 미라클은 안 돼. 직접 파생상품을 만들려면 ISDA (International Swaps and Derivatives Association, 국제 스왑 파생상품 협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거든.” 미라클의 규모라면 승인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핑계를 대면서까지 거부하는 걸 보면 아예 생각이 없는 것이다. “우린 건실한 기업, 우량주식, 확실한 채권에 투자해서 고객의 돈을 지키는 게 우선이야.” 오세현이 뭐라 입을 열려고 할 때 그의 손을 잡았다. 난 그녀가 올바른 판단을 한다고 믿었다. 어차피 온갖 리스크를 안고 갈 필요가 없다. 강력한 한 방이 또 오기 때문이다. “레이첼. 그럼 내 판단을 믿는다면 이건 어때요?” “말해봐, 하워드. 난 언제나 하워드의 판단은 믿으니까.” 그녀는 눈을 반짝였다. “통화, 금리, 주식의 파생상품은 손대지 말고 신용파생상품, 특히 부채담보부증권(CDO)만 매입하는 걸로 하죠.” 반짝이던 레이첼의 눈빛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안전을 최우선 하는 그녀에게 가장 위험한 상품을 제시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주택담보채권을 기반으로 하는 상품이 지금 핫하기는 해. 하지만 기초자산이 채권인 상품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제 판단으로는 앞으로 2년은 끄떡없어요. 2년 뒤는 자신 없으니까 딱 2년만 굴려보세요.” 내 판단을 믿는다는 말을 뒤집을 수는 없으니 순순히 받아들였다. “몇 퍼센트나?” “제 예상은 2년간 38% 정도의 수익이 날 겁니다. 미라클 전체 수익률을 생각해서 판단하세요.” 내키지는 않지만 구체적인 수익률을 알려주고 투자금액도 일임하니 레이첼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오케이. 또 한 번 미라클 보이의 판단을 믿어볼게. 그런데 이런 사소한 것 짚으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투자 내역이야 하루도 빠짐없이 메일로 체크하잖아?” “우리 미라클 보이가 이번엔 예술 한번 하겠다니까 레이첼이 좀 도와줘야겠어. 하하.” “뭐? 예술?” 파생상품에 투자하라고 할 때보다 백배는 더 놀란 표정의 레이첼이었다. * * * “아니, 뭘 그리 복잡하게 일을 해? 그냥 사면 되잖아. 하워드 너 정도면 슈퍼 컬렉터 자격이 충분해. 그냥 뉴욕에 저택 하나 구입하고 거길 그림으로 채워. 왜 번거롭게 갤러리를 인수해?” 레이첼은 그림 입수 프로세스를 듣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사고 싶은 그림을 보유한 곳은 절대 제게 그림을 팔지 않아요. 그래서 대리인을 내세워야 하는데…. 적당한 곳 알아봐 줘요. 레이첼은 부자들 많이 알죠? 그 부자들은 당연히 예술품을 수집할 테고. 그쪽 인맥으로 고만고만한 갤러리 하나 소개받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 “그야 그렇긴 한데….” 여전히 미심쩍은 눈빛을 풀지 않는다. “자자, 너무 호기심 보이지 말고 힘 좀 써주라고. 혹시 알아? 하워드가 구입한 그림이 폭등할지? 손만 대면 황금으로 변하는 게 하워드의 능력이잖아. 하하.” 오세현이 더는 캐묻지 못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오늘 저녁은 화끈하게 보내야지. 진탕 마셔보자고.” 우리는 오세현의 손에 이끌려 화려한 뉴욕의 밤거리로 나갔다. 저녁 만찬을 즐기며 그 비싼 클로 드 그리피어 코냑을 소주처럼 쉴 새 없이 들이켜던 오세현은 2차로 옮긴 바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자, 은퇴한 중년 아저씨는 주무시니 현역인 우리끼리 제대로 된 이야기 좀 할까?” “갤러리?” “아니. 그건 아무리 봐도 네 사적인 일 같으니까 더 이야기할 거 없어. 내가 최적의 갤러리를 알아봐 줄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CDO(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 “그래. 지금 월가는 미쳐 돌아가고 있어. 전부 서브프라임모기지론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CDO와 신용부도스왑 상품을 남발한다고. 네가 2년간은 끄떡없다고 했지만, 글쎄…?” “왜 그토록 위험하다고 생각하죠?” “서브프라임이야. 명백한 불량 대출이라는 뜻이라고. 그걸 한데 묶어서 상품으로 만들어놓고는 AAA 등급을 매겨. 이건 사기야.” “성공한 사기는 사기가 아니죠. 실패했을 때 사기라는 게 들통나는 겁니다.” “네 추측으로는 지금부터 2년이나 들통나지 않는다?” “네. 풍선은 바늘로 찌르지 않는 한 쉽게 터지지 않거든요. 공기를 넣어 터트리려면 미국은 2년간 쉬지 않고 풍선을 불어야 할 겁니다.” “문제는 그 풍선이 터지면 미국 경제는 엉망이 될 거야.” 난 걱정스럽게 말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요?” “뭐?” “레이첼. 당신은 미국 시민이기도 하지만 우리 회사의 대표예요. 미국 경제보다 회사의 수익률을 더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요? 미국 경제는 미 재무부에 맡겨 둬요.” “그들도 한통속이라고!” “그렇게 미국이 걱정되면 지금 당장 미라클의 CEO 자리에서 물러나서 정치계로 뛰어들어요. 선거자금은 제가 무한대로 밀어줄 테니까. 그럴 생각 없으면 오로지 회사 수익률만 생각하세요.” 차갑게 식은 내 목소리 때문인지 그녀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미, 미안. 내가 프로답지 못했어. 네 말이 옳아. 난 워싱턴이 아닌 뉴욕 시민이지.” “흐름을 꺾을 수 없다면 흐름에 올라타요. 돈과 정의는 결코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이니까.” “좋아. 그럼 2년이라는 것은 어떻게 확신하지?” 사실은 3년이지만 만약을 생각해서 2년이라고 했다. 어차피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니 질문은 숙제로 던져주는 게 가장 쉬운 일이다. “계산해 보세요. 2년 혹은 3년으로 나올 겁니다.” “계산이라…….” “그럼 내가 수정 구슬에 물어봤겠어요?” 난 얼음이 녹아내린 위스키 잔을 들었다. 좀 신비한 동양인처럼 보이려나? * * * “엘리자베스 포터(Elizabeth Porter)입니다. 친구들은 벳(Bette)이라고 부르죠. 만나서 반가워요. 미스터 진.” “편히 하워드라고 하세요.” “그럴까요?” 그녀는 까무잡잡한 피부와 심한 곱슬머리를 봐서는 흑인의 피가 조금 섞인 듯한 훤칠한 키의 미녀였다. “하워드. 벳은 예일에서 역사를, 뉴욕대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수재야. 지금 웬트워쓰(Wentworth) 아트 갤러리 관장이지.” 레이첼이 그녀를 슬쩍 치켜세웠다. “관장이지만 제 역할을 못 해 문 닫기 일보 직전이에요.” 씁쓸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빚이 얼마나 돼요?” “……?” “문 닫지 않으려면 얼마가 필요하냐는 말입니다.” “아, 120만 달러 정도면 숨통이 틔죠.” “일 년 예산은요?” “250만 달러입니다. 하지만 전시 프로그램을 통해 들어오는 수입도….” 난 손을 들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매년 300만 달러를 지원할 테니 좋은 갤러리로 거듭나세요. 됐죠?” “……!” 벳 포터는 입을 떡 벌린 채 눈만 깜빡거렸다. “내가 뭐랬어? 오늘 잭팟 터지는 날이라고 했지? 호호.” 레이첼이 크게 웃으며 멍한 표정의 벳 포터를 툭 쳤다. “자, 잠깐만. 지금 이게 무슨…?” 정신을 차린 그녀는 황급히 가져온 가방을 헤집으며 파일을 잔뜩 꺼냈다. “우리 갤러리의 현황이에요. 검토부터 하는 게 순서일 것 같은데요?” 난 그녀가 내민 파일을 받아 옆자리에 툭 던졌다. “꼭 봐야 합니까?” “혹시 우리 갤러리나 저에 대해서 잘 아시는지…?” “아뇨 전혀 모릅니다. 사실 예술은 문외한이나 다름없어요.” “그런데 갤러리에 대한 검토도 없이 매년 300만 달러를 지원한다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제가 이상한 걸까요?” “대가 없는 호의는 거절한다는 뜻입니까?”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니까요.” 예술에 푹 빠져 지내는 현실감 없는 여인이 아니다. 비즈니스의 기본을 안다. 이런 여인이 운영하는 갤러리가 적자에 허덕인다는 것은 규모의 문제가 분명하다. 하긴, 적자에 시달리지 않는 예술이 어디 있으랴? “누가 공짜라고 했습니까? 제가 원하는 걸 가져와야 제 약속은 유효합니다.” 난 작품 목록을 잔뜩 적은 종이를 내밀었다. “일단 한번 보시죠.” 벳 포터는 목록을 확 낚아챈 후 황급히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다 결국에는 탄성이 터져버렸다. “Holy Shit! WOW!” “그 정도로 대단한 겁니까?” “아니, 이걸 모른다는 거예요? 마크 로스코, 폴 세잔, 얀 반 에이크, 티치아노…. 게다가 데미안 허스트까지. 이건 전부 인류의 유산이라고요!” “그 작품의 공통점이 뭔지 압니까?” “말했잖아요. 엄청난 걸작이라고.”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목록을 적은 종이 아래에 선명하게 찍힌 순양갤러리라는 이름을 보지도 못할 만큼. “그걸 전부 매입해요. 물론 다 팔지 않을 테지만 최대한 많이 사 오도록 해요. 그게 내 조건입니다.” 그녀에게는 엄청난 충격인가 보다. 하긴 저 작품을 다 사려면 3, 4천억은 족히 들 테니까. “아, 그 작품 매입 비용은 내가 전액 댈 테니까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그것보다 이 작품을 누가…?” 그녀는 종이를 다시 들여다보다 눈을 반짝였다. “순양갤러리! 이 작품은 전부 순양갤러리에 있는 거군요.” “네.” 이름을 확인한 벳 포터의 얼굴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포기하세요. 그 갤러리에 들어간 작품은 두 번 다시 햇빛을 보지 못하는 거로 유명해요. 영원히 수장고에서 잠들죠.” 이젠 실망을 넘어 분노까지 보였다. “걸작은 절대 전시하지 않는 악명 높은 갤러리예요. 상시 전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전시해야죠. 작품을 감춰놓고 보관만 하는 건 갤러리의 의무를 저버리는 겁니다.” “전시는 하지 않아도 팔기는 할 겁니다. 물론 전부 팔지는 않겠지만.” “그게 무슨 뜻이죠? 순양갤러리는 매매상이 아니에요.” “제 말을 믿고 진행해봐요. 손해 보는 일 없잖아요?” 그녀는 나와 만난 이 짧은 시간 동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만 오고 갔으니 여전히 혼란스러운가 보다. 하지만 벳 포터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았다. 이처럼 기회는 예고하지 않고 단번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 기회를 잡을지 말지 고민하는 시간은 많지 않다. 기회는 아주 짧은 시간만 기다리는 매정한 놈이니까. ======================================= [264] 은밀한 갤러리 2 “아, 순양갤러리와 접촉할 때 그쪽 작품만 매입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다른 곳 작품 몇 개를 함께 사들여도 됩니다. 비용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잠깐만 실례해도 될까요?” 벳 포터는 황급히 레이첼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십여 분이나 이야기를 나눈 후에 다시 나타났다. “미안해요, 하워드. 제가 좀 무례했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내가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인 말을 했으니까요.” “하나만 묻겠습니다. 만약 내가 순양갤러리의 작품을 구매하지 못한다면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의 지원은 무산되는 것인가요?” “이미 말했을 텐데요? 난 예술에는 문외한이라고. 없었던 일이 될 겁니다.” 벳 포터는 입술을 깨물었다. 덥석 물기에는 뭔가 찝찝한 조건임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사적인 질문이 될 텐데, 괜찮을까요?” “말씀해보세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라면 노코멘트하죠.” “하워드는 순양그룹의 오너 가족이라고 들었어요. 순양갤러리 역시 그 그룹이 운영하는 재단이고요. 그런데 왜 이리 복잡하게 일을 하는 거죠?” “복잡한 집안 문제니 노코멘트. 흐흐.” 그녀는 내 웃음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오케이. 한번 해보죠.” “그 정도로는 안 돼요.” “네?” “한번 해본다? 그럼 마음으로 순양갤러리에 접근했다가는 변변한 답변조차 못 얻어요. 바늘구멍 하나 없는 완벽한 계획으로 접근해야 순양갤러리의 빗장이 풀릴 겁니다. 순양이라는 이름 뒤에 앉아 있는 것들은 전부 괴물입니다.” 난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날 봐요, 내가 상식적인 놈으로 보입니까?” * * * “밖에서 단둘이 무슨 이야기 했어요?” “네 정체가 뭔지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의문 갖지 말고 원하는 대로 맞춰주라고 했어. 그럼 인생이 바뀔 거라고 슬쩍 알려줬지.” “레이첼 말을 따를 것 같아요?” “아마도…. 아니, 거의.” “왜 그렇게 확신하죠?” “벳 포터, 그 바닥에서 실력도 있고 야심도 보통이 아니야. 단지 아직 운이 따르지 않았지. 예술 쪽이 아무래도 좀 보수적인데 그녀는 좀 급진적인 성향이거든.” “그 유별난 성향을 내가 돈으로 감싸주는 꼴이군요.” “어차피 크게 신경 쓰는 것도 아니잖아. 갤러리가 아무리 성공 가도를 달려도 네겐 용돈 수준의 이익을 남길걸?” “제 용돈, 얼마 안 됩니다. 돈 쓸 시간이 없거든요.” 레이첼의 말은 사실이었다. 벳 포터는 자신의 야심을 위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빈틈없는 계획을 세웠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첫 번째는 바로 소문이었다.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는 엄청난 후원자를 만났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는 한참 미치지 못할지라도 사설 갤러리 중에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힐 규모로 성장하는 것도 꿈은 아니라는 소문이었다. 소문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미국은 물론, 세계 곳곳의 갤러리가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의 메일을 받았다. 각 갤러리의 소장품 중 매입하고 싶은 작품 목록도 함께. 이런 짓을 장난삼아 할 수 없다. 그냥 한번 찔러보며 가격만 확인하는 정도라면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는 물론 벳 포터 역시 이 업계에서 매장된다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순양갤러리 역시 같은 메일을 받았다. * * * 순양갤러리 운영진들은 메일 때문에 그리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진위 여부는 순양그룹 뉴욕 법인에서 조사하고 확인해줬기 때문이다. “이건 뭐 새롭게 탈바꿈한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네요.” “그렇습니다. 이미 뉴욕 바닥에 소문이 쫙 깔렸다고 할 정도면 정식 제안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죠.” “그런데 이사장님이 그림을 팔까요? 예술에 대한 욕심은 아무도 못 말리지 않습니까?” “그래도 보고는 해야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림 사겠다는 제안은 꼭 보고하라고요. 그래야 작품의 실질적인 현재 가치를 알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럼 보고 올리죠. 엘리자베스 포터 관장은 뉴욕에서 평판이 좋다고 합니다. 이 기회에 우리 갤러리와 관계를 맺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그들은 뉴욕 법인의 조사 자료와 메일을 재단 이사장인 이필옥 여사에게 올렸다. 이필옥 여사는 갤러리 운영본부장이 올린 보고서를 유심히 살펴보다 입을 열었다. “확실해? 우리 그림 사고 싶다는 거? 살 능력은 있고?” “그렇게 보입니다. 뉴욕 법인이 확인한 사실이니까요.” “그래? 알았어 나가 봐.” “네. 이사장님.” 운영본부장이 머리를 숙이고 나가자마자 이필옥 여사는 인터폰을 눌렀다. “송 비서 들어오라고 해.”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사십 대로 보이는 사내 한 명이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찾으셨습니까?” “이거 한번 봐.” 그녀는 보고서를 쓱 내밀었다. 송 비서는 메일까지 꼼꼼히 확인한 뒤 머리를 들었다. “어때? 괜찮지 않아?” “이사장님. 이 목록 중에 이미 은밀하게 매각한 것도….” 송 비서는 목소리를 착 가라앉혔다. “알아.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것으로 다시 목록을 만들어봐. 값나가는 거로 골라서.” “네.” 송 비서가 나가려 했지만 이필옥 여사의 지시는 끝나지 않았다. “뉴욕 가야겠지? 거기 메일 보낸 포터인지 트럭인지 하는 애도 직접 만나봐. 우리 조건을 받아들일지 아닌지도 확인하고.” “네. 이사장님.” 송 비서가 나가자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낌없이 퍼부어야 할 때 딱 적당한 물주가 등장했으니 이 기회를 잘 살리고 싶었다. * *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스터 송. 비행은 어떠셨습니까?” “좋았습니다. 이렇게 환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벳 포터는 순양갤러리에서 이처럼 빠른 반응을 보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재빠른 메일의 회신, 그것도 직접 만나서 논의하고 싶을 만큼 서두르는 이유는 진도준이 말한 대로 복잡한 사정 때문일 것이라는 것만 짐작했을 뿐이다. “미술품 매입에 꽤 공격적이시던데, 갤러리의 정책입니까?” “정책이라기보다는 새롭게 태어난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 되겠군요. 전폭적인 후원자가 나타났거든요.” 그녀의 설명에 송 비서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 그 후원자가 누군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벳 포터는 처음 보자마자 대뜸 심문하듯 말하는 이 남자 때문에 눈꼬리가 올라갔다. “유감스럽게도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이상하군요. 그림을 매입하는 곳은 후원자가 아니라 우리 갤러리입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사실 우리 순양갤러리는 개인에게만 작품을 판매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갤러리의 주요 고객인 개인인 건 잘 알려진 사실 아닙니까? 혹시 우리를 통해 후원자와 거래하시려는 생각입니까?” “외람되지만 그렇습니다. 가능할까요?” 벳 포터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그림 매입 대금은 후원자를 통해 나온다. 후원자와 직접 거래하더라도 후원자가 갤러리에 그림을 기증하면 같은 결과 아닌가? 멀리 한국에서 날아온 이 남자는 지금 무의미한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갤러리와 개인 거래의 차이라면 단 하나, 공공장소에 그림을 걸어 두는가 아니면 사적인 공간에 걸어 두는가 하는 차이뿐이다. 벳 포터는 드디어 이 남자가 원하는 거래를 눈치챘다. “혹시… 그림의 대중 공개는 불가, 그리고 거래 사실도 비밀리에 진행하고자 하는 건가요?” 송 비서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확합니다. 그게 우리가 원하는 거래입니다.” “개인 간 거래에서는 흔한 조건이기도 하죠.” 수많은 예술품이 이런 식으로 사라진다. 그렇다면 우리 갤러리가 매입하더라도 그 조건만 지킨다면 문제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그렇습니다만, 갤러리가 대중 공개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사회에서 논의해야 하겠지만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순양갤러리가 보유한 작품은 걸작이니까요. 보존을 생각한다면 가능할지도….” 그녀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송 비서는 대화를 조금 더 진척시켰다. “이걸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는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철을 꺼냈다. “요청하신 작품 중에는 우리가 팔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판매 가능한 작품 목록입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벳 포터가 목록을 받자 송 비서는 가볍게 머리 숙였다. “그럼 결론 나는 대로 연락주십시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늦어도 모레까지는 알려드리죠.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럼.” 송 비서가 나가자 벳 포터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휴대전화로 유명한 한국의 회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참 궁금했다. * * * “역시 그런 조건이군요.” 벳 포터가 알려준 거래 조건은 우병준 상무의 보고가 사실임을 입증했다. 과연 순양갤러리의 수장고에는 몇 점의 작품이 보관되어 있을까? 특별 전시 때 잠시 걸리는 몇억 원대의 작품이 전부라는 걸 장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쪽에서 가져온 목록 좀 봅시다.” 난 우병준 상무가 조사한 순양갤러리의 작품 목록과 비교하며 빠진 것만 따로 정리해서 벳 포터에게 건넸다. “그건 순양갤러리가 팔지 않을 것 같은데, 어느 정도의 가치일까요?” 손가락을 까닥이며 목록을 살펴보던 그녀는 점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췄을 때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크리스티에서 경매에 부친다면 이 작품들의 낙찰가를 예측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만약 한날한시에 경매한다면 세계적인 부호들의 경쟁심이 불붙어서 천정부지로 뛸걸?” “정확한 가격을 물어본 게 아닙니다. 대략적인 추측가를 알려줘요.” 다시 생각에 잠기더니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숫자가 나왔다. “최소 20억 달러.” 오래전 이미 팔아치운 것도 많을 테니, 절반만 잡아도 할머니는 1조 원 이상의 돈을 주식에 묻어 뒀다. 이제 숨어 있는 할머니의 전 재산을 까발려 봐야겠다. “그럼 순양갤러리에서 가져온 작품을 전부 매입하려면 얼마면 될까요?” 20억 달러라는 말에 눈도 깜짝하지 않는 나를 희한하게 바라보던 그녀는 또 한 번 놀랐다. “전부?” “네. 물론 저쪽에서 가격을 제시하겠지만 무조건 받아들일 수는 없잖겠어요? 그러니까 거래가 깨지지 않을, 가장 최적의 금액을 생각해야죠.” “6억 달러.” 이미 계산을 끝냈는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전부 매입합시다.” 나도 망설이지 않았다. 벳 포터는 놀랍고 기쁜 표정이었지만 난 곧바로 제동을 걸었다. “잠깐만, 벳. 이건 기부가 아닙니다. 그림 매입자는 미라클이거나 내가 될 겁니다. 단지 무상으로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에 임대하는 형식입니다. 이건 정확히 해야 해요.” 그녀의 표정에 실망이 스쳤으나 이것 역시 기부의 흔한 방식이니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우리 갤러리가 그 작품들을 받아도 전시를 못 하니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녀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해졌다. 걸작을 꽁꽁 싸매 지하 깊숙이 보관만 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아닌가? 난 그녀를 향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길어봤자 1년입니다. 1년 뒤에는 그 작품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들어드리죠.” “정말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거래부터 성사시켜야죠?” “저쪽 조건을 들어준다면 거래는 이미 성사한 것과 다름없어요.” “거래 처음 하시나…. 저쪽 조건은 들었으니 이제 이쪽 조건도 제시해야죠.” 실실 웃는 내 표정에 그녀의 혼란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 [265] 은밀한 갤러리 3 “벳. 블랙마켓의 은밀한 거래는 보통 어떤 방식으로 하죠?” “작품 감정하고 진품이라는 게 확인되면 판매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지불하죠. 거액의 경우 계좌 송금, 아닐 경우에는 캐시.” “계약서는?” 내 질문이 어리석었는지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말 그대로 블랙마켓이에요. 계약서 따위가 있을 리 없죠.” 난 할머니의 거래 방식을 생각했다. 위작 전문가와 밀수 조직까지 굴리는 할머니다. 이번에도 위작을 만들어 보관할지는 미지수지만, 그림을 이곳 뉴욕에 가져오려면 밀수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벳 포터는 생각에 잠긴 날 보며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순양갤러리가 블랙마켓처럼 거래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네. 그러니 웬만한 조건을 내걸어도 다 들어줄 겁니다.” “설마! 순양갤러리 정도 되는 곳에서 왜 그런 짓을…? 일반 공개 불가와 계약 내용을 비밀에 부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거래 자체를 불법으로 할 이유가 없을 텐데요?” 복마전도 이런 복마전이 없는 우리 집안을 평생 예술만 생각하며 살던 여인이 어떻게 이해할까? “벳. 궁금하더라도 불필요한 곳에 호기심을 갖지 말아요. 이 거래로 얻는 것만 생각하면 돼요. 매년 삼백만 달러의 후원금.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전시할 수도 있는 걸작들. 호기심 때문에 이런 걸 놓치면 안 되겠죠?”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엄중한 경고라는 걸 알아챈 벳 포터는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자, 이제 우리가 제시할 조건입니다. 저쪽이 일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적당히 양보할 겁니다. 금액까지도 양보할 수는 있지만 절대 물러설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계약서예요.” “하지만 지금 예상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계약서가 없다면 거래도 없습니다. 또한, 그 계약서에 반드시 순양갤러리의 최고 책임자, 형식적인 갤러리 관장이 아닌 실질적인 주인의 친필 사인까지 받아야 합니다.” “실질적인 주인? 그게 누구죠?” “순양아트파운데이션의 이사장.” 그녀는 머리를 싸매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불법적인 거래에 재단 이사장의 친필 사인을 요구한다는 건 거래하지 말자는 의미니까. 난 그녀가 뭐라 말하기에 앞서 손을 들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합니다. 거래 한 번으로 6억 달러가 들어와요. 순양재단 이사장은 이런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에요.” “혹시 아는 사람? 아, 가족…?” “내가 말했죠. 불필요한 호기심은 금물이라고.” 조심스레 말하던 그녀가 다시 입을 닫았다. “한 가지 팁을 주자면 이런 말을 하세요. 아시안 기업, 특히 일본과 한국 기업은 담당자의 권한이 없다는 걸 잘 안다. 최고 책임자의 결정이라는 것을 직접 확인해야 믿을 수 있다. 물론 계약서는 철저히 비밀에 부칠 것이고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계약 내용의 비공개 조항을 계약서에 명시해도 좋다. 이 정도면 저쪽에서도 받아들일 겁니다.” “만약 거부하면?” “거래는 없다고 못 박으세요. 밀리지 말고. 그럼 계약서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나와 진동기 부회장이 공동의결권을 약속했다는 걸 모를 리 없는 할머니는 순양의 주식을 조금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가진 돈을 다 털어 넣을 것이다. 그런데 무려 6천억이라는 거금을 뿌리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내키지는 않겠지만, 펜을 들어 계약서에 이름 석 자를 분명히 적을 것이다. * * * “6억 3천.” “6억 달러. 이건 냉정한 평가입니다. 이 이상 받으려면 크리스티나 소더비에 맡기세요. 분명 6억 3천 이상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경매장이 가져갈 어마어마한 수수료를 생각하면 6억 달러가 더 실속 있을 텐데요?” 송 비서는 벳 포터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며 그녀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결정하기는 힘들고…. 승인을 받아야 할 사항 같군요.” “얼마든지.” 송 비서가 황급히 휴대전화를 꺼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본 벳 포터는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진도준의 말이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머나먼 미국까지 날아왔지만 아무런 결정권이 없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결정권 하나 없다면 굳이 출장까지 올 필요가 없지 않을까? 결정권자가 아니더라도 그 권한을 위임받고 모든 걸 책임졌을 때 미팅도 하고 협상도 하는 게 상식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할 때 밖으로 나갔던 송 비서가 웃으며 돌아왔다. “좋습니다. 6억 달러로 하죠.” 마치 자신의 결정인 양 선심 쓰듯 말하는 사내의 태도 때문에 벳 포터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힘든 결정, 감사합니다. 이제 한고비 넘겼나요?” “네? 무슨 뜻인지…?” “글쎄요. 거래를 끝내려면 굉장히 힘든 고비를 많이 넘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벳 포터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송 비서를 향해 말했다. “지난번 미스터 송께서 하신 말씀으로 추측하건대, 정상적인 거래는 아닌 것 같으니 제가 먼저 거래 조건을 말씀드리죠. 적어도 이쪽 바닥에서의 커리어는 제가 훨씬 긴 것 같아 보이니까요.” 그녀는 진도준의 생각과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작품 대금은 그쪽에서 원하는 계좌로 송금합니다. 선금 10%를 먼저 보내고, 작품은 이곳 갤러리 수장고에서 받고 싶군요. 물론 우리 쪽 전문가들의 감정을 거쳐야겠죠? 감정이 끝나고 진품이라는 것을 확인하면 잔금을 즉시 보내드리죠. 물론 비밀 거래입니다. 어떻습니까?” 송 비서의 얼굴이 환해졌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바로 우리가 원하는 방식입니다.” “그쪽이 원하는 대로 했으니 제가 원하는, 아주 사소한 조건은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말씀하세요.” “방금 제가 말한 내용 그대로 계약서를 만들어야겠죠? 대금 지급 방법, 작품 인도 시기….” “계, 계약서를…?” “아직 제 말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단호한 음성에 송 비서는 입을 닫았다. “마지막으로 계약서에 친필 사인을 해주세요. 이런 불확실한 비밀 거래는 작품 소유주의 확인이 있어야 하니까요.” “작품 소유주는 바로 순양갤러리의….” “아뇨. 진짜 소유주를 말하는 겁니다. 조금 전에 미스터 송이 통화하신 바로 그분 말입니다. 순양아트파운데이션의 이사장, Madam Lee.” 송 비서는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눈만 껌뻑거렸다. “물론 사인은 제가 직접 받을 겁니다. 마담 리가 뉴욕으로 오시기 번거롭다면 우리 측 사람이 한국으로 갈 겁니다.” “그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은, 아니 불가능합니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지만 벳 포터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추적 불가능한 계좌로 6억 달러를 송금하는 일입니다. 제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 같지 않은데요? 그리고 그쪽의 힘든 요구를 다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계약서 사인도 못 하겠다면 제가 뭘 믿고 거래하죠?” “아, 아니…. 그런 뜻이….” 벳 포터는 짧게 손을 저어 그의 말을 끊었다. “외람되지만 미스터 송은 결정권이 없지 않나요? 차라리 지금 또 전화해서 승인받는 게 어떨까요? 참, 이 말은 꼭 전해주세요. 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거래는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안색이 새까만 흙빛으로 변한 송 비서는 다시 휴대전화를 꺼내 들며 밖으로 나갔다. * * * “진짜? 너 미쳤냐? 아예 할머니를 잡으려고 작정했구나!” “뭘 또 그리 심하게 말씀하십니까?”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 밀반출, 차명계좌… 아니지. 6억 달러나 받을 정도면 분명 해외 계좌가 분명하니까 외환관리법 위반. 마지막으로 재단 재산을 빼돌렸으니 횡령이잖아. 이 정도 금액이면 집유는 불가능할걸? 아무리 좋은 변호사라도 5년이야.” 뉴욕에서 또 다른 휴가를 즐기던 오세현은 사정을 다 듣고 난 후 혀를 내둘렀다. “그 정도 되어야 강제 은퇴하시지 않겠습니까?” “강제 은퇴라….” 오세현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도준아.” “네.” “주식을 차명으로 갖고 있다면 찾아내기 힘들걸? 만약 네 할머니가 이 악물고 옥살이하겠다면? 감방에서도 차명주식 움직일 수 있어.” 웃음이 났다. 오세현은 아직 우리 가족을 잘 모른다. “삼촌.” “응.” “우리 할머니는요, 감방은커녕 검찰청 취조실도 못 견뎌요. 삼십 년 넘게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사신 분입니다. 수백만 원짜리 바르셀로나 체어가 아니면 엉덩이를 못 붙이는 분인데 취조실의 의자에 앉겠어요?” “그런데… 진짜 계약서에 사인하겠어? 너희 집 식구들, 책임 안 지려고 인사 문제 외에는 사인 안 하잖아.” “무려 6억 달러예요. 돈 필요한 사람에게 이 액수는 굉장한 유혹일 겁니다. 그 비싼 그림 30점을 한 번에 다 팔아치우는 겁니다. 안전하게 하나씩 팔려면 몇 년은 걸릴 텐데, 절대 거절 못 해요.” 내 추측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만약 직접 사인하지 않겠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플랜B는 세련되지 못한 거친 방법이지만, 뭐 어떠랴? 고상한 척하는 할머니에게 무식하게 막 나가는 손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 * * “일은 똑바로 잘하네.” “그쪽에선 유능한 여인으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뉴욕 아트센터에서 책임자로 스카우트하려 했지만,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는 게 싫어서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는 작은 갤러리를 맡았다고 합니다.” “내가 그 여자 잘난 이야기를 왜 들어야 하지?” “죄, 죄송합니다.” 이필옥 여사에게 보고하던 남자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잘난 척 해봤자 어차피 그림 장사하는 년이야. 그 갤러리는 단지 중계상에 불과해. 전시가 목적인 갤러리가 걸지도 못할 작품에 6억 달러씩이나 쏟아부어?” 이필옥 여사는 확신했다. 이건 미국의 부호가 콜렉팅하는 것이라고. “우리 그림 전부를 개인이 사는 거야. 그년은 이 거래로 두둑한 중계수수료 챙길 생각에 만전을 기하는 거지. 돈 많은 스폰서에게 신용 잃으면 돈벌이는 끝나니까. 뉴욕 아트센터 관장 자리는 이런 돈벌이를 못 하니까 걷어찬 거야.” 실력 있고 그 실력을 인정받는 사람이 명예로운 자리를 거절한 이유는 오로지 돈 때문이라고 믿는 이필옥 여사였다. 머리를 조아리던 사내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떡할까요? 인사동 마법사 불러서 작업 지시할까요?” “됐어. 30점이나 되는 걸 언제 작업해? 올해 안으로 끝내지도 못할 텐데. 영기에게 연락해서 전세기나 준비하라고 해. 오랜만에 뉴욕 바람이나 좀 쐴 테니까.” “네, 이사장님. 이번 건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그래. 아, 송 비서에게 말해서 뉴욕 총영사관과 식사 자리 준비하라고 해. 그 애들 도움이 필요하니까 아쉬운 소리 좀 해야겠어.” “알겠습니다. 뉴욕 아파트 깨끗이 정리하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이번엔 호텔에서 지내고 싶어.” “네. 이사장님.” 사내가 나가자 이필옥 여사는 돋보기안경을 쓰고 수첩을 펼쳤고 빼곡히 적힌 내용을 살피다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너머 공손한 목소리가 들리자 노인답지 않은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순양전자, 순양중공업, 순양생명…….” 한동안 순양계열사의 이름을 계속 말하더니 수첩을 덮고 안경을 벗었다. “주식 시세와 시장 물량 변동량 파악해. 대량 매집 가능한 기관도 알아보고.” 통화를 끝낸 이 여사는 6억 달러로 사들일 수 있는 주식을 생각하니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 [266] 은밀한 갤러리 4 벳 포터는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기 위해 연거푸 물을 마셨다. 미술계의 큰손인 순양예술재단 이사장은 대리인을 앞세워 경매장을 싹쓸이했기에 벳 포터가 실제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내려다보는 듯한 섬뜩한 태도는 백인 우월주의자가 까무잡잡한 자신의 피부를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계약 내용은 별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좀 더 강력한 조항을 추가했는데 확인해주시죠.” 이사장과 함께 온 변호사가 아니었다면 판을 엎어도 벌써 엎었을 것이다. 유창한 영어와 신사다운 정중함이 그녀의 인내를 지탱했다. “거래 내용의 공개와 불이행, 그리고 그 원인이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라는 게 확인된다면 세 배의 위약금을 지불해야 합니다.” 벳 포터는 진도준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계약서의 친필 사인! 그것만 얻을 수 있다면 모든 걸 다 양보해도 좋다는 다짐이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이 조항은 쌍방 간에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녀의 대답에 변호사는 눈을 반짝였다. “아, 그렇죠. 그런데… 이 작품을 원하는 분이 갤러리가 아니라 개인인가요?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는 단지 대리인…?” “그건 계약서에 없으니 대답하지 않아도 되죠?” 그녀는 새침하게 앉아 있던 늙은 여인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저 할망구, 영어를 알아듣는 게 틀림없다. “아, 실례했습니다.” 변호사는 가볍게 머리 숙인 뒤 다시 서류를 꺼냈다. “이건 보험증서입니다. 우리 측 문제로 계약 내용이 공개되었을 때, 그리고 계약 내용 중 하나라도 위반했을 때 거래 금액의 3배, 즉 18억 달러를 즉시 지급한다는 증서입니다. 계약 위반으로 법정에 서서 다투는 번거로운 일은 피하고 싶습니다만.” 이 정도까지 준비해 올 줄 예상하지 못했다. 변호사는 벳 포터가 보험증서를 멍하니 바라보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뉴욕의 작은 갤러리의 재정 상태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 안전장치는 당연한 것 아닐까요? 우린 당신이나 웬트워쓰 갤러리가 18억 달러나 되는 거금을 물어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확실한 안전장치가 필요하죠. 이해하시죠?” “아, 네.” “우리 재단의 신용도는 세계적이라 보험 가입에 큰돈은 들지 않았습니다. 540만 달러니까…. 싸게 먹혔죠.” 벳 포터는 자신의 갤러리를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했다. 한국 굴지의 대기업인 순양그룹의 백그라운드를 가지고도 540만 달러라면, 자신의 보험금은 천만 달러를 훌쩍 넘길 것이다. 그녀는 송 비서를 비웃었던 자신이 똑같이 부끄러웠다. 결정권 없는 대리인의 모습을 이들 앞에서 보여야 한다. “잠깐만 실례해도 될까요? 전화 좀….”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자 함께 앉아 있던 송 비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얼마든지.” 벳 포터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사라지자 이필옥 여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 저 애가 누구에게 전화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상대가 바로 물주야.” “그렇군요. 대단한 스폰서 하나 잡은 것 같습니다.” “결국 얼굴 반반한 년은 머리보다 몸이 무기인 셈이지. 천박한 것들.” 이미 육체를 이용해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고 확신한 이 여사는 혀를 차며 와인으로 입술을 축였고, 이때 벳 포터가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들어왔다. “지금 즉시 보험 가입할 겁니다. 늦어도 내일까지 전해드리겠습니다.” “그쪽 결정권자께서는 일 처리가 빠르시군요.” 송 비서의 이죽거림이 귀에 꽂히자 벳 포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전의 제 무례를 사과합니다. 미스터 송.” 송 비서가 정중한 사과에 당황했을 때, 그녀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내일 보험증서를 가지고 올 테니 그때 계약서에 사인하죠. 그럼.” 벳 포터가 계약서를 챙기려 할 때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한 영어로. “Wait a Second” 이필옥 여사는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를 자기 앞으로 가져가더니 거침없이 사인을 해 나갔다. 그녀는 사인을 끝마친 후,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내가 당신을 두 번이나 만날 필요는 없겠지?” 선명한 영어로 말을 끝낸 이필옥 여사는 송 비서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곧바로 사라졌다. “우리가 내일 계약서를 들고 갤러리로 가겠습니다. 그때 보험증서를 건네받죠.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벳 포터는 두 사내와 악수를 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 * * 6천억 원대의 사기. 그 사기의 확실한 증거가 지금 내 손에 들어 있다. 물론 그림을 받고 돈을 보낸 뒤에야 효력이 발생하겠지만. “그림은 언제 들어온답니까?” “보름 뒤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보름?” “네.” 보름이면 위작을 준비할 시간도 없다. 급하긴 급한가 보다. 게다가 배가 아닌 비행기로 들여온다는 뜻인데… 밀수라고 하면 보통 배가 떠오른다.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쓰기에 항공편을 이용할 수 있을까? “그림 감정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두 달은 걸릴 거예요. 물론 진품이라면 더 짧을 테지만.” “진품이면 더 짧다?” “그래요. 보통 블링크(Blink)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블링크라면 눈을 깜빡거리는 걸 의미한다. 이게 법칙이라니? “전문가들은 처음 딱 보자마자 느낌이 와요. 아무리 정교한 위작이라고 해도 뭔가 거부감이 생기죠. 대신 진품이라면 아무리 낡았어도 저절로 탄성이 나와요.” “그러니까 느낌이 이상할 때 정밀한 검사를 시작한다는 뜻입니까? 진품이라면 검사도 하지 않고?” 벳 포터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아뇨. 진품이라고 믿을 만해도 검사는 해야죠. 대신 위작 같은 느낌이 나는데 모든 검사를 동원해도 진품이라는 결과가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런 경우가 시간을 많이 잡아먹죠. 그림의 판매 경로까지 역추적해야 하니까요.” “검사 결과가 진품인데도 못 믿는다는 말입니까?” “아직은 인간의 심미안이 물리, 화학보다 더 정확할 때가 많답니다.” 내 손에 쥔 계약서가 확실한 무기가 되려면 석 달은 걸린다. “그렇군요. 그럼 일은 마무리됐군요. 고생하셨습니다. 후원금은 이번 달부터 지원할 테니 좋은 갤러리로 거듭나시기 바랍니다.” 비록 이상한 일에 엮였지만, 결과가 좋으니 그간의 일을 다 잊은 듯 벳 포터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밝았다. 그녀가 돌아간 뒤, 난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우 상무님. 낯선 곳에서도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의 똘똘한 친구들 데리고 뉴욕으로 오십시오. 휴가 며칠 즐기시고 보름 뒤부터 일 좀 합시다.” * * * “네? 이필옥 여사님이 직접요?” “네. 상무님이 조사해서 짐작만 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어요.” 우병준 상무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가 생각했던 규모를 훌쩍 뛰어넘는 일이며 금액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 이번엔 6천억 원대의 밀수입니까?” “네.” 금액을 확인한 우 상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실장님. 아무리 이 여사의 약점을 잡는 일이라고 해도 6천억은 너무합니다. 회장님이 남겨주신 비자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출혈이 너무 커요.” 할머니를 공격하는 일이라 께름칙하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 돈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상무님.” “네.” 내가 웃으며 말해도 그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다. “바늘에 찔려 피 몇 방울이 맺히면 그걸 출혈이라고 합니까?” “네? 그게 무슨…?” “6천억은 제게 그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이런 데 쓰라고 남겨주신 돈이 아니죠. 그 돈은 철저히 한국에서 내 위치를 굳건히 하는 데만 쓸 겁니다.” 그제서야 감을 잡은 우 상무는 입을 떡 벌렸다. “저 돈 많습니다. 돈 싸움으로 흘러갔다면 순양그룹 회장 자리는 이미 제 것이 됐을 겁니다. 돈으로도 못 사는 주식이 많으니 이 고생을 하는 거죠.” 여전히 입을 벌린 채 아무 말 못 하는 우 상무의 이런 표정을 잠시 즐겼다. “아무튼, 상무님.” “아, 네.” “며칠 뒤면 갤러리로 그림이 들어옵니다. 상무님께서는 직원들과 그림 배달꾼 뒤를 밟아주십시오.” “밀수 운반책?” “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게 바로 항공편입니다. 그림 밀수하는데 어떻게 비행기로 실어 올 수 있는지….” “항공편은 모르시죠?” “네. JFK 공항인지 NEWARK 공항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운반책을 추적하는 수밖에 없어요.” “알겠습니다. 애들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런데 해외 계좌는 어떻습니까?” “버진 아일랜드 계좌라는 것밖에 모릅니다. 이건 우리 힘으로는 찾지 못해요. 할머니를 통해서 파악하는 수밖에요.” “어찌 됐든 이 여사님은 실장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군요.” “욕심을 조금 더 내봅시다. 운반책을 캐다 보면 뭔가 더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할머니의 재산 목록을 싹 까봐야겠어요. 흐흐.” * * * 갤러리로 달려가 그림을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호텔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갤러리에서는 그림 감정을 시작한다. 당연히 할머니 측 사람들도 그 자리에 입회하여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킬 것이고, 혹시라도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일이 틀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초조하게 전화를 기다렸다. 가장 먼저 전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벳 포터였다. 그녀의 울먹거리기까지 하며 말했다. ― 하워드. 이런 걸작을 직접 볼 기회를 주셔서 어떻게 고마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진품입니까?” ― 네. 입회한 모든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확실한 진품이에요.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벳 포터의 전화를 끊고 곧바로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김 대리. 지금 순양예술재단의 공식적인 작품 목록을 구해서 메일로 보내줘요.” 또한, 순양갤러리의 홈페이지를 확인했다. 공지사항이나 알림 글을 다 뒤졌으나 그림 판매에 대한 글은 없다. 지금 당장 돈을 입금하고 불법 거래를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의심스러운 상황을 내가 만들 수는 없으니 두 달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이 상황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우병준 상무는 밤늦은 시간이 다 되어서야 호텔로 돌아왔다. 그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실장님. 외교부를 이용한 것 같습니다.” “외교부요?” “네. 운반책은 두 팀이었습니다. 순양 뉴욕 법인 직원들과 뉴욕 총영사관입니다. 그들의 집까지 확인하느라 좀 늦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리 할머니, 참 대단하다. “할머니 수족 중에 외교부까지 줄 닿는 사람이 있다는 건데, 그 사람이 누군지만 알면 이 싸움은 끝나겠군요.” “어쩌면요. 그 정도 되는 사람이면 최측근일 테고…. 여사님 쌈짓돈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알 테니까요.” 우 상무는 내 눈치를 슬쩍 보며 말했다. “영사관 직원들을 만나보겠습니다. 그놈들이 어디까지 아는지, 이곳 책임자가 어느 정도 선인지 파악하면 좀 쉬울 것 같지 않습니까?” 공무원은 참 쉽다. 민간인보다 더 엄격한 룰을 적용하니 조금만 위협하면 술술 불기 때문이다. 거기에 퇴직 연금에 해당하는 돈까지 얹어주면 언제든 배신을 선택한다. “당근은 제가 준비할 테니 채찍은 상무님이 쓰십시오.” “이런 놈들은 채찍이면 충분합니다. 모가지가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당근이 되거든요. 흐흐.” 참으로 든든한 사람이다. 일도 잘하고 돈까지 아낄 줄 안다. 이 사람의 퇴직금은 아주 넉넉하게 챙겨 줘야겠다. ======================================= [267] 은밀한 갤러리 5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진품 감정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오세현은 감정이 끝나는 대로 버진 아일랜드 계좌로 송금하기 위해 뉴욕에서 돈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을 것이다. 내심 정교한 위작이라도 하나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두 달이 다되어갈 때쯤 모두 진품이라는 결과를 연락받았다. 그리고 괜시리 툴툴거리는 오세현의 연락도 받았다. - 야! 6억 달러 송금했다. 그 돈 씻느라고 돈 많이 썼어. 손해 보는 짓 하지 말고 잘해. “고맙습니다. 삼촌.” - 내 일은 끝났지? 나 이제 돌아간다? “한국…은 아니죠?” - 당연하지. 깨끗한 바다 보며 좀 쉬어야겠다. “뉴욕에서도 푹 쉬시지 않았어요?” - 이놈아. 네가 시킨 일 하느라 놀지도 못했어! “아, 예. 돌아가셔서 푹 쉬십시오. 가실 때 면세점에서 숙모님 드릴 선물 듬뿍 사십시오. 오랫동안 집 비우셔서 화가 잔뜩 나셨을 텐데.” 전화기를 통해 한숨이 흘러나왔다. - 너도 어서 결혼해라. 삼십 년쯤 지나면 알게 될 거다. 오랫동안 집 비운 남편이 선물을 잔뜩 사야 하는 건 집을 비웠기 때문이 아냐.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사는 거다. 중년 남자의 신세 한탄을 다 들어주고 통화를 끝냈다. 이제 무대는 준비됐고 본 공연을 시작해야 한다. 가장 먼저 장도형 부사장을 불렀다. “순양증권을 비롯한 여의도와 명동 인맥을 총동원해서 알아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심각한 내 표정 때문인지 장 부사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마 다수의 명의로 순양그룹 주식, 특히 전자와 중공업, 건설, 물산, 상사의 주식을 집중 매입할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설마 누군가 적대적 M&A를 시도한다는 겁니까?” “아뇨. 단순한 주식 확보가 목적입니다. 6천억 이상의 자금이 움직일 테니까 분명히 눈에 띌 겁니다.” 다시 한 번 마른침을 삼켰다. “6천억이나요? 도대체 누가?” “그걸 찾아내라는 말입니다.” “아, 네.” “다수의 차명계좌가 움직일 겁니다. 그놈들을 추적해야 하는데 가능하시겠죠?” 불법적인 거래를 불법적인 방법으로 찾아내야 한다. 각 증권사의 인맥을 동원해서 순양그룹 주식을 대량으로 매집하는 계좌주인의 개인정보를 얻는 것, 명백한 불법이다. 하지만 장도형 부사장은 앓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위기를 한 번 겪고 나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바로 생존과 직결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마지막까지 살아남기만 하면 부의 왕국을 차지할 수 있다. 왕국을 얻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는 것쯤은 사소한 일일 뿐이다. “문제없습니다. 개미를 찾는 것도 아니고 6천억이 움직이는 거래 아닙니까? 백 명이라고 해도 60억, 그것도 전부 순양그룹 주식. 이 정도면 무조건 눈에 띄죠. 전체 명단을 입수하겠습니다.” “꼭 찾아내야 합니다. 그럼 그 주식을 전부 제 것으로 만들겠습니다.” 할머니가 6억을 위해 새로운 차명계좌를 만들지는 못한다. 분명 기존의 차명계좌를 활용할 것이고 그 계좌에는 6천억이 아니라 이미 은밀히 쓸어담았던 주식까지 들어있다. 우리 할머니, 주머니 탈탈 털면 얼마나 나올까? 다시 한 달이 지났을 때, 순양그룹 주력 계열사 주식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6억 달러 정도의 거금을 한 달 만에 한국으로 반입했다는 건 할머니 밑에 대단한 실력자가 있다는 의미다. 차명계좌를 두드리면 그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주가 상승이 눈에 띄지 않게 매집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대단한 실력자는 인내심도 대단했다. 순양그룹 주가 상승이 경제 뉴스에 나오지 않을 만큼 아주 천천히 쓸어담았다. “차명계좌 파악이 힘든 건 아닙니까?” 걱정하는 나와 다르게 장도형 전무는 여유를 보였다. “시간이 걸릴 뿐 파악하는 건 문제 없습니다. 백여 개의 차명계좌가 돌아가면 패턴이 보입니다. 게다가 순양그룹이라는 특정 종목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확실하죠?” 재차 물었지만, 장도형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자신 있습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바닥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니 그를 믿어야 한다. 이제 슬슬 움직여 볼까? * * * 대문 앞에 서니 감회가 새로웠다. 참 자주 들락거린 집이었지만, 할아버지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는 처음이다. 내게 이 집의 주인은 영원히 할아버지였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이필옥 여사의 집으로 변해버렸다.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보통은 현관까지 차로 달렸지만, 오늘은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눈여겨본 적 없었던 정원수와 꽃이 잘 가꿔져 있었고 석등의 은은한 불빛이 여름밤을 비추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산책했을 때는 이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신선하게 다가왔지만, 함께 걸었던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니 아름다운 정원이 슬프게 다가왔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서자 노기 가득한 할머니가 일하는 사람들을 꾸짖는 중이었다. “내 허락도 없이 아무나 들여보내? 제정신인 게야?!”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연신 머리만 조아렸다. 내 눈을 마주친 할머니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썩 되돌아가지 못하겠니?” 어차피 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할머니다. 물론 피는 이어받았으나 따뜻한 말은커녕, 늘 쌀쌀맞은 눈빛만 보냈을 뿐이다. 게다가 난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이 노파는 할머니라기보다는 할아버지의 부인일 뿐이며 날 죽이려 했던 완전한 타인이다. 난 슬쩍 웃으며 말했다.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서재로 옮기시지요.” “시끄럽다. 냉큼 나가지 못해?!” 저런 태도를 보이는 할머니에게 예의 있는 손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본론부터 꺼내게 만든다. “무려 6억 달러어치나 물건을 사준 고객인데 차 한 잔쯤은 괜찮지 않습니까? 그 까다로운 조건을 전부 들어주는 고객이 그리 흔치 않을 텐데요?” 새하얗게 질려버린 할머니의 얼굴을 보니 아차 싶었다. 나이도 많은데 이대로 쓰러지면 큰일이다. 차명계좌의 주식도 찾아야 하고 꿍쳐놓은 돈도 찾아야 하는데 말이다. 다행히 건강만큼은 자신하는 할머니답게 핏기 사라진 안색이 전부였다. “아랫사람들 다 듣는 앞에서 할머니와 손자 사이의 거래를 다 까발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너… 너….”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할머니를 못 본 체하며 주방 아주머니께 말했다. “저 커피 한 잔만 가져다주시겠어요? 서재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재로 들어갔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는 할머니는 분명히 따라 들어올 것이다. 할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장소였지만 처음 보는 물건이 곳곳에 놓여 있어 낯설다. 할머니의 손을 탄 만큼 할아버지의 체취가 사라진 것 같다. 자리를 잡고 기다리니 할머니가 들어왔다. 할아버지의 의자에 앉으려 할 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건데 웬만하면 마주 보고 앉으시죠? 지금 윗사람한테 보고하러 온 거 아닙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실 텐데요?” 입술을 깨문 할머니가 발걸음을 돌려 맞은편에 앉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이미 짐작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놈이! 어디서 감히 건방을 떠는 게야?” 꼿꼿한 저 자존심이 얼마나 갈지 두고 보는 것도 재미다. 오늘 완전히 무너뜨려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대 순양그룹 안주인이 그림을 팔아먹고 위작으로 갤러리를 채워놓았다는 것을요. 이건 진짜 엄청난 스캔들이 될 겁니다.” “흥!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하겠구나.” “아직도 감을 못 잡으셨습니까? 아니면 모른척하시는 겁니까? 뉴욕의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와의 거래는 제가 파놓은 함정이란 말입니다. 벳 포터는 제 장단에 놀아난 꼭두각시고요. 그림값 6억 달러도 제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고요.” “…….” “할머니. 이미 끝났습니다. 제 손엔 할머니가 직접 사인한 비밀 계약서가 있어요. 또한, 버진 아일랜드의 비밀계좌번호까지 기억합니다. 이럴 땐 시치미 떼고 모른척할 게 아니라 상대가 뭘 원하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입니다.” “시끄럽다.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와서 나를 협박하는 게야?” 담대한 척 나를 노려보고 있지만 가늘게 떨리는 손끝은 어찌할 수 없나 보다. 난 가져온 계약서 사본을 할머니 앞에 던졌다. “재단 소유의 수천억 원대 자산을 팔아먹었으니 횡령, 그림을 미국으로 밀반출했으니 밀수, 해외 유령회사를 세워놓고 돈을 빼돌렸으니 외국환관리법 위반. 제가 장담하는데 이 정도면 할머니는 더 이상 쇼핑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남은 여생을 수의(囚衣) 한 벌로 지내야 하니까요.” “네… 네놈이…!” “할머니는 이 손자를 잘 모르시죠? 아니다, 잘 아시려나? 제가 피도 눈물도 없는 할아버지와 똑같다는 것을? 전 제 손으로 할머니를 법정에 세우고 감방에 보내는데 눈곱만큼의 거리낌도 없어요. 웬 줄 아십니까?” 감방이라는 말이 나오자 할머니는 더욱 심하게 손을 떨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날 트럭으로 죽이려 한 것 때문이 아닙니다. 할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걸 자꾸 뺏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얗게 질린 할머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 입에서 트럭 사건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당신 잘못이라며 묻어두셨어요. 제게도 그러시더군요. 할머니를 용서하라고. 그래서 제 기억에서 지웠습니다. 하지만 순양그룹에서 절 밀어내려고 하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끝장을 봐야겠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과 말투에서 내 뜻을 읽었는지 할머니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어쩌면 제정신을 차리기 위한 시간일지도 몰랐다. 한참 만에 입을 연 할머니는 다시 본래의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네놈이 날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네가 가진 증거라는 걸 만천하에 까발리려고 해도 뜻대로 안 될 거다. 순양그룹의 힘은 네놈이 쥐고 있는 게 아니라 내 아들이 쥐고 있어. 신문, 방송에 기사 한 줄 나오지 않을 거다.” “대단한 아들을 두셨습니다.” 비꼬는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아들 힘자랑이 계속되었다. “오히려 네놈이 당해. 버진 아일랜드? 그 계좌를 네놈 것으로 만들어 널 구속시킬 거야. 6억 달러나 빼돌린 천하의 잡놈으로 만들어 주지.” 가능성 없는 것도 아니다. 큰아버지들이 모든 연줄을 동원하고, 언론에 돈을 뿌려 그들의 입을 틀어막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이 싸움을 나와 큰아버지의 싸움으로 만들어 서로 피 흘리는 동안, 그녀는 차명 주식을 정리하고 해외로 도망가 버리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할머니도 생각하지 못하는 게 하나 있다. 모든 일은 단순하지 않다. 여러 가지가 서로 얽혀 결과를 만들어 낸다. 사회 경험이 없으니 전체를 읽는 눈이 있을 리 없다. “순양그룹의 전 재산을 모두 때려 부어도 언론을 못 막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건 정치 싸움으로 변질되기 때문이죠.” 할머니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찡그리기만 했다. “전 이 일을 언론이 아니라 야당에 흘릴 겁니다. 총선에서 진 야당은 호시탐탐 정부 여당을 공격할 건수만 찾고 있어요. 그런데 할머니는 외교부를 이용했더군요. 밀수나 하는 외교부. 이걸 야당이 보고만 있을 것 같습니까? 특검과 청문회가 열릴 겁니다.” 또다시 할머니의 표정이 변했다. “야당 정치인이 순양의 돈을 아무리 많이 받아먹었어도 이건 안 덮어줘요. 자기들도 살아야 하니까요.” 당황한 할머니를 보며 웃었다. “재미있겠죠? 할머니 때문에 나라가 시끄러워질 테니까. 흐흐.” ======================================= [268] 뱀 머리 1 “어림없는 소리!” 큰소리는 치지만 할머니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내 말을 믿어서가 아니다. 옳은지 그른지 판단 자체를 못하기 때문이다. 사건을 가장 크게 확대하는 방법은 정치를 이용하는 것인데 할머니는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쪽으로는 뉴스나 신문을 제대로 본 적 없는 평범한 노파일 뿐이다. “하나 더 말씀드릴까요? 진짜 최악의 상황을?” 큰아버지였다면 이런 말은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척하면 척 아닌가? “야당이 국회에서 순양갤러리의 미술품 밀수에 외교부가 개입됐다고 터트리는 순간, 이건 한국과 미국의 외교 문제로 번집니다. 한국 정도의 국가가 밀수 같은 걸 하리라고는 미국도 생각 못 했겠죠? 할머니는 그걸 이용한 것일 테고요.” 할머니의 생각이겠는가? 누군가 알려준 것이겠지. “이제 미국은 우리나라에 대한 꼬투리 하나 잡은 겁니다. 미국은 이걸 덮어주지 않습니다.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부터 조사를 시작할 테고…. 전 그 그림이 전부 가짜라고 할 겁니다.” “그림은 진짜야!” “압니다. 하지만 밀수나 일삼는 순양갤러리의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특검에서 순양예술재단의 소장품 전수 검사를 시작하겠죠? 그럼 몰래 팔아먹은 그림 대신 가지고 있는 위작이 쏟아져 나올 테고,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의 주장은 진실이 됩니다.” 가짜 그림을 가지고 있는 순양갤러리. 이 일은 세계적인 뉴스가 될 테고 미술업계는 발칵 뒤집힌다. 그럼 지금까지 순양갤러리의 그림을 은밀히 사들은 고객들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이제 국제적인 소송이 줄을 잇는 건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다. “아 참, 계약서에 나와 있죠? 위약금은 거래액 6억 달러의 3배, 뭐…. 괜찮겠죠? 보험사가 처리해줄 테니까.” 우리 할머니, 이제야 이 일이 얼마나 커질지 감 잡았다. 꽉 쥔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네놈은 고작 위약금이나 받으려고 이런 짓을 한 게야?” “설마요? 돈 버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이런 협상 테이블에서는 상대가 뭘 원하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라고요.” “그, 그래서? 네놈이 원하는 게 뭐냐?” “하나 더 알려드리죠. 칼자루를 쥔 자는 원하는 게 뭔지 먼저 말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싶으시면 할머니가 뭘 줄 수 있는지부터 말씀하세요. 그게 순서입니다.” 더 말할 필요는 없다. 아직 알아내야 할 것이 남아있다. 진짜 알아내야 할 것이. “생각할 시간을 드리죠. 똘똘한 아랫사람을 불러 상의하든지, 자랑스러운 아들을 불러 상의하든지 하세요. 그래야…. 나라가 시끄러워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의자에서 일어나 서재를 먼저 나가는 놈이 쎈 놈이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나오기 전에 꼼짝도 못 하는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거, 손자가 왔는데 커피 한 잔도 내주지 않는 건 너무 야박한 거 아닙니까? 할머니 맞아요?” 다시 천천히 걸어왔던 정원을 둘러보며 집을 나왔다. 초조하게 기다렸던 김윤석 대리와 직원들이 내 모습을 보자 황급히 차에서 내려 달려왔다. “사람 더 충원하세요. 오늘부터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을 확인해야 합니다. 혹시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면 끝까지 뒤를 쫓아요.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정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아시겠죠?” “네. 실장님.” “그럼 수고 좀 해 주세요.” 누구든지 가장 빨리 오는 놈, 그놈이 이필옥 여사의 브레인이다. * * * 입술을 깨문 채 서재를 서성이던 이필옥 여사는 수화기를 들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려면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천 이사. 급해. 지금 당장 집으로 와줘야겠어.” 그녀가 연락한 지 삼십 분쯤 지났을 때, 중년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사장님.” “아, 천 이사. 어서 와.” 급히 달려온 천 이사는 물 한 잔 마실 틈도 없이 이필옥 이사장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진도준이? 이게 전부 그놈이 꾸민 함정이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그래. 이걸 봐.” 이필옥 여사는 계약서 사본을 내밀었다. “그걸 그놈이 쥐고 있더라고. 아무래도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아.” 천상필 순양예술재단 이사는 영문 계약서 사본을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이 수십 번이나 검토한 계약서니 힐끗 보기만 해도 가짜가 아님을 알았다. “이걸 야당에 뿌리겠다고 했습니까?” “그래. 특검이니, 청문회니, 외교 문제가 될 거라느니 하면서 협박까지 하더라고.” “언론이 아니라 야당? 거 참…. 허허.” 천상필 이사는 어이가 없는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똑똑한 놈이군요. 손에 쥔 무기를 어떻게 하면 가장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 아는군요.” 이필옥 여사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지금 내가 그놈 칭찬 들으려고 천 이사 부른 거야?” “죄송합니다. 진도준이가 핵심을 찔러서 그만….” 천 이사가 고개 숙이며 입을 다물자 서재는 침묵만 감돌았다. 한참의 침묵 끝을 참지 못한 이필옥 여사가 입을 열었다. “하나만 이야기해봐. 그놈이 이거 야당에 흘리면 정말 외교 문제가 커질까?” “외교보다 국내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총선에서 패배한 야당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겁니다. 없던 문제라도 더 키우려고 발악할 겁니다.” “내가, 이 순양의 안주인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내년에 재보궐 선거가 있습니다. 그때 야당이 이기면 여당의 과반의석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지금 여당은 간당간당하게 딱 2석 앞서있으니까 역전도 가능합니다.” “그놈 말이 사실이라 이거지?”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알았어. 나가 봐.” “네. 이사장님. 제가 진도준이를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해결하기 전까지는 내 얼굴 볼 생각하지 마.” 천상필 이사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이필옥 여사에게 머리를 숙이고 서재를 빠져나왔다. * * * “이야, 이 자식. 선수구먼. 할머니 잡으려고 6억 달러짜리 함정을 파?” 이학재 회장은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혀를 내둘렀다. “네 할머니 이제 큰일 났다. 이건 순양그룹의 힘으로 못 덮을 정도야. 휠체어 타고 검찰청 출두는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야당이 짹짹대면 실형이야. 빠져나오려면 집행유예 혹은 병보석뿐이네. 빼박이다. 흐흐.” “순양예술재단은 문 닫아야겠죠?” “그건 덤이고.” 이학재 회장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런데 재판 3심까지 가는 데 몇 년이나 걸릴지 몰라. 내년 보궐 선거 끝나면 네 할머니 사건은 흐지부지…. 그 안에 지분 싹 정리해버리면? 넌 얻는 거 하나 없다.” “재판 가기 전에 끝내야죠.”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할머니의 해결사가 있습니다. 이 사람 한번 보시죠.” 인화한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밤에 찍은 거라 선명하지는 않지만 얼굴을 알아볼 정도는 된다. “혹시 아십니까? 누군지?” 이학재 회장은 사진을 유심히 보더니 한참을 생각했다. “아! 이 친구. 천… 상필. 맞아 천상필 이사다.” “아시는 분입니까?” “그래. 이 친구 그만둔 지 꽤 오래됐는데? 예술재단 이사였지 아마?” “어디 출신입니까?” “그룹 법무팀이었는데 재단으로 차출됐지. 똘똘한 친구였는데 몇 년 근무하지도 않고 그만뒀어. 비주류로 밀려나서 그만둔 걸로 알고 있는데?” “법무팀이면 변호사겠군요.” “아마도 그렇겠지? 그런데 이 친구는 왜?” “제가 할머니에게 선전포고하자마자 그자가 가장 먼저 달려왔습니다.” “그래? 그럼 그 친구가 최측근인 건가?” “브레인이겠죠. 할아버지께서 곤경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찾은 분이 바로 회장님이듯이요.” 이학재 회장은 자신을 가리키는 내 손을 보며 피식 웃었다. “수족을 자르면 이필옥 여사는 꼼짝을 못하지. 여분으로 가지고 있는 수족이 없거든.” “머리도 하나겠죠? 천 이사는 브레인이니까요. 여분이 있으면 곤란합니다.” 이학재 회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독한 놈. 할머니 머리를 잘라 네 손에 철컥 붙이겠다는 거지?” “왜요? 설마 천상필 이사가 이 회장님처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죠?” “힘은 상대적인 거다. 꼭두각시 같은 할머니 대신 순양예술재단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힘은 내가 순양의 이인자였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아니 더 크지. 난 용 꼬리, 천 이사는 뱀 대가리니까.” 됐다. 얻을 정보는 다 얻었다. “용 꼬리를 자르려면 용을 잡기 위해 대규모 원정대가 필요하지만, 뱀 대가리 자르는 건 땅꾼 한 명이면 충분해요. 그게 뱀 대가리의 한계입니다.” “땅꾼은 있어?” “네. 무시무시한 땅꾼 하나가 있죠. 흐흐.” 이학재 회장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만 가라. 널 보고 있으면 내가 용 꼬리였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 * * - 진도준 씨? 갑자기 걸려온 낯선 전화, 순간 느낌이 왔다. 이놈, 뱀 대가리다. “그렇습니다만.” - 이필옥 여사님, 그러니까 진도준 씨 할머님 문제로 만나고 싶습니다만….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머리 아프고 귀찮은 일은 전부 아랫사람에게 미루는 할머니의 습성을 잠시 깜박했다. 이 정도 큰 사안이면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움직이는 게 당연하고, 그런 사람은 브레인이지 팔다리 역할은 아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최소한의 예의부터 구경합시다. 누굽니까? 당신?” 칼자루는 내 손에 있다는 걸 뱀 대가리가 똑똑히 알도록 해줘야 한다. - 아, 이런 죄송합니다. 전 순양예술재단의 이사, 천상필이라고 합니다. “천상필? 재단 이사들 중에 천상필이라는 이름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누구요? 당신?” - 아…. ‘과거에’라는 말을 빼먹었습니다그려. 하하. 뱀 중에 능구렁이 과에 속하는 놈이다. “좋습니다. 할머니의 대리인이라 치고, 얼마를 들고 와야 하는지 잘 생각하고, 할머니와 의견 조율한 뒤 다시 연락하세요. 끊습니다.” 전화는 끊었지만 뱀 대가리가 ‘어린놈이 싸가지는 어디에다 밥 말아 처먹었나’하는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제 우리 할머니와 뱀 대가리의 그릇이 얼마나 큰지 두고 볼 일이다. * * * 순양호텔의 방 하나를 빌렸다. 능구렁이가 마음 놓고 능청을 떨려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게 편할 것 같아서였다. 오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천상필은 능구렁이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은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도준 실장님. 천상필입니다.” “진도준입니다. 앉으시죠.” “뭐 좀 아시네. 이런 밀실도 준비하실 줄 알고 말입니다. 하하.” “재벌 나오는 드라마 흉내 좀 내봤습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자리에 앉아 테이블에 놓인 커피잔을 보자 그가 또다시 웃었다. “이럴 땐 커피보다 위스키 한잔이 더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가져온 숫자가 마음에 들면 발베니(Balvenie) 위스키를 박스째 가져다 드리죠.” “역시 뭐 좀 아시네. 오늘 허리띠 풀고 거하게 한잔하게 생겼습니다그려.” “김칫국은 그만 마시고, 가져온 숫자부터 들어봅시다.” 실실 웃던 천상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원하는 걸 들으러 왔습니다. 단지 숫자뿐이라면 이런 큰 함정을 팔 이유를 못 찾았으니까요. 함정 파는 비용으로 6억 달러나 퍼부은 분이 돈을 원한다? 농담은 그만하시죠.” 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를 향해 말했다. “갑작스러운 통화 때문에 제 생각을 정확히 전달 못 했군요.” “이제야 말이 통하겠습니다. 그래,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건 숫자가 맞습니다. 단지 내가 원하는 숫자가 아니었을 뿐입니다. 천상필 이사, 당신이 원하는 숫자를 들고 오라는 뜻이었습니다.” 순간 천상필은 능청스러운 말도 못하고 날카로운 눈빛도 보내지 못했다. 눈만 껌뻑거릴 뿐이었다. ======================================= [269] 뱀 머리 2 능구렁이 아저씨는 이제 능청스러운 표정은 싹 지우고 날카로운 인상과 어울리는 표정만 보일 뿐이다. “돈으로 날 사시겠다? 외람되지만 전 그리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순양예술재단에서의 인연으로 이 여사님의 법률 자문이 고작인 일개 변호사일 뿐입니다.” “얼마 받아요?” “네?” “우리 할머니 법률 자문으로 얼마 받느냐고요?” “몰라도 됩니다.” 노골적이며 다소 천박하기까지 한 질문에 마음이 상했는지 목소리가 조금 올라가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쿡쿡 찌르지 말고 원하는 걸 말씀하세요. 호텔 방에서 남자 둘이 밤샐 일 있습니까?” 일단 이 사람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 할머니의 지시를 잘 처리하려면 바짝 엎드려 빌어도 부족할 판이라는 걸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한다. “잠깐 실례할게요. 급히 전화 한 통만 하겠습니다.” 찌푸린 표정을 무시하고 전화 스피커를 켰다. 신호가 끝나자 낮고 굵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수석님. 순양의 진도준입니다.” 내 이름을 밝히자마자 반가움이 확 묻어나는 음성이 스피커를 울렸다. - 아이고, 이게 누구야! 그래, 진 실장.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수석님.” - 서러운 야당 생활이라 못 지낸다오. 구박이 심해. 허허. “그래도 총선 후 영전하셨지 않습니까? 원내수석부대표님. 하하.” 제1야당의 원내수석부대표. 통화 상대의 정체를 알자 천상필 이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수석님. 제가 선물을 하나 드리려고 하는데 말입니다. 영전 축하선물인 셈이죠.” - 아이고, 선물은 무슨…. 보내준 난(蘭)이면 충분해요. “이 선물은 좀 반가우실 겁니다.” - 그게 뭘까? 좀 색다른 느낌이 드는데? “제가 얼마 전 뉴욕 출장을 다녀왔는데 뉴욕총영사관의 수상한 행동을 발견했습니다.” - 총영사? “네. 아무래도 우리나라 국보급 문화재의 밀반출에 뉴욕총영사관 직원들이 관계된 것 같습니다.” - 뭐요? 밀반출? 그거 밀수를 말하는 거요? “네. 명백한 밀수죠. 아시다시피 외교 행낭은 세관의 검사를 받지 않으니까요. 그 점을 이용한 것 같습니다.” - 이런 미친놈들! 배를 갈라 간뎅이부터 확인해야겠구먼! 고성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이미 천상필은 사색이었다. “흥분 가라앉히시고요. 이 건을 긴히 말씀드리고 싶은데 내일 저녁 식사 같이하시죠.” - 물론. 하늘이 두 쪽 나도 시간 비워놓겠소. 자세한 이야기 좀 들려주시구려. “네. 그럼 이만….” 스피커를 끄자 천상필의 고함이 터졌다. “지, 지금 뭐하자는 거요? 국보급 문화재? 이건 또 무슨…!” “문화재 밀반출이 미술품 밀반출보다 좀 더 파괴력이 있으니까요. 결과는 이렇게 되겠죠. 총영사관의 국보급 문화재 밀반출은 사실무근이나 그와 버금가는 고가의 미술품을 밀반출했다. 뭐… 엎어치나 메치나 그게 그거죠.” “당장 그만둬요. 이런 식이면 당신이 원하는 건 단 하나도 가지지 못할 거요!” “이봐요. 천상필 씨. 그 머리로 우리 할머니 곁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거요?” “뭐? 보자 보자 하니까….” “아직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습니까?” 굳은 내 표정에 소리치던 그가 입을 닫았다. 한동안 나를 노려보던 그가 한숨을 쉬었다. “젠장……. 멈추지 않을 생각이구만.” 그의 한숨 소리에 난 인터폰을 눌렀다. “준비해둔 술 좀 가져와요.” 호텔직원은 발베니 위스키와 술잔, 얼음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대충 이야기 끝난 것 같으니까 한 잔 해요.” 천상필은 한 잔에 무려 35만 원이나 하는 술을 연거푸 두어 잔 들이켰다. 뜨끈한 술기운이 속을 달랜 듯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멈추지도 않을 거면 날 왜 만난 거요? 그냥 진행해버리면 될 텐데.” “멈추지 않는 건 원하는 걸 얻기 위한 행동이죠. 원하는 건 따로 있습니다.” “이제 말장난은 그만하죠?” “우리 할머니, 이필옥 여사의 모든 것.” 천상필은 다시 술을 따랐다. “가능한 걸 말해요. 이 여사님은 순양 부회장이라는 두 아들이 있어. 그분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일을 무마할 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가족에게 허용된 경계는 바로 검찰청이니까요. 검찰 출두는 해도 법정에 서는 일은 없어요. 법정엔 항상 최측근이라는 사람들이 서서 선고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야 밖에서 힘을 쓰니까. 집행유예든, 병보석으로….” 그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다. 앞으로 펼쳐질 일을 이미 다 그렸다. 비밀 계약서를 작성한 사람은 바로 천상필이며 영어는 전혀 못 한다고 우기는 할머니는 신뢰하는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사인했을 뿐이다. 그 계약서가 그림을 몰래 팔아먹는 게 아니고 뉴욕 갤러리 전시를 위한 임대로 알았다. 지금껏 그림을 전부 몰래 팔아먹은 놈은 바로 천상필이며 이필옥 여사는 이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마지막으로, 믿었던 측근의 배신에 의한 충격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대단히 정교한 그림 아닌가? “지금까지 재단의 작품을 빼돌린 걸 지휘한 분이 바로 당신이죠? 그럼 화살은 누구에게 향할까요? 가장 적절한 과녁은 바로 천 이사님, 당신입니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이 더욱 또렷해지는 건 비싼 고급술이라서가 아니다. 피하기 어려운 위험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하며 겁나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보며 물었다. “뭘까요?” “뭐가 말이요?” “스스로 최측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엄청난 희생정신. 아니, 대타 정신이라고 해야 하나? 고작 순양그룹에서 월급 받는 존재에 불과한 사람인데 인생을 조져가며 대신 덤터기를 쓰는 이유 말입니다.” “당신 같은 어린애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요. 살아온 세월이 그 이유를 알게 해줄 테니….” “푸핫…!” 죽었다 깨어나니 그 이유를 알게 된 내가 이런 말을 듣다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실례했습니다. 옛날 생각이 나서 그만….” 찌푸린 얼굴의 그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죽었다 깨어나면, 아니…. 죽기 전에 알 것이다. 그냥 병신 같은 노예근성이었다는 것을. “이제 쓸데없는 소리는 그 정도만 하고, 가능한 걸 말해요. 이 여사님의 모든 걸 가지는 건 불가능하오. 적절한 선에서 타협합시다.” “절충안은 없습니다. 할머니의 모든 걸 다 가질 것이고, 할머니가 콩밥을 먹지 않는다면 누군가 대신 먹겠죠. 그것도 아주 오랜 세월을 말입니다. 전 이 두 가지를 전부 원합니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 때, 남은 한마디를 더 던졌다. “특히 차명 주식은 제가 꼭 가져야겠습니다.” 천상필은 차명 주식이라는 말에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속 시원한 표정이었다. “그거였구먼! 주식!”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표정이 변했다. 마치 승기를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어떻게 차명 주식의 존재를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 주식은 두 부회장님의 수중으로 들어갈 거요. 당신도 알지? 당신 집안 사람들은 주식이라면 환장하고 달려든다는 거?” “물론이죠. 그러니 저도 할머니까지 압박하며 그거 가지려고 이러는 거 아닙니까?” “알면서 이딴 짓을 해? 주식만 쥐여주면 두 부회장이 모든 걸 해결할 거요. 물론 누군가는 감옥에 가겠지. 하지만 나는 아냐. 주식 실명 전환하려면 내가 꼭 필요하거든. 으하하.” 어이가 없다. 고작 이 정도로 만족하며 모든 게 다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어쩔 수 없는 저 노예근성. 생각을 한 걸음만 더 나가면 모든 게 달라진다는 걸 왜 모를까? “천 이사님, 당신을 제외하고 감옥에 갈 만큼 충성스러운 사람은 없습니다. 순양의 회장님이라면 몰라도 고작 늙은 여인을 위해 누가 갑니까? 계열사 사장 정도의 자리를 보장해 줄 리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당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돈도 아주 괜찮은 보상이니까.” 천상필 변호사는 아주 개운한 표정으로 술잔을 비웠다. 협상은 없다는 걸 확인했고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알았다. 남은 건 대책을 세우는 것뿐. 이 대책이라는 것도 간결해졌다. 내가 멈추지 않을 것이니 적당한 머슴 하나 구해서 그의 등에 모든 걸 올려놓으면 끝이다. 술잔을 깨끗이 비운 천상필은 입맛을 다시며 일어섰다. “좋은 술, 잘 마셨소. 병째 마시고 싶지만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지.” “그런데 아직 대답하지 않은 게 있는데 그건 알려주고 가시죠?” 내 계획은 이미 망쳤다고 생각하는 천상필이지만, 여전히 여유만만한 내 표정 때문인지 쉽게 방을 떠나지 못했다. “뭘 말하는 거요?” “당신도 잘 모르는 당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숫자.” “그만하지? 추해 보여.” “아니, 돈 이야기가 왜 추합니까? 돈 싫어하는 사람 있습니까?” “내 손에 차명 주식이 있어. 그 주식의 가치가 얼만 줄은 아나?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 주식을 내가 꿀꺽할 수도 있었어. 난 돈에 흔들리지 않으니까 포기해.” “주식은 돈이 아니죠. 그리고 감히 차명 주식을 꿀꺽해요? 불가능하니까 그대로 관리만 한 것이겠죠. 그거 꿀꺽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하니까요. 대단한 충신인척하지 마시죠. 역겨우니까.” 진실은 늘 속을 후벼 판다. 그 고통 때문인지 천상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일 야당에 자료를 건네면 더는 돌이킬 수 없어요. 그리고 이 일이 크게 번지면 어마어마한 공돈이 생깁니다.” “무슨 소리요?” “비밀 계약서를 만든 분이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보험금 말입니다.” “보, 보험…?” “비밀 거래가 세상에 드러나면 계약 위반이죠? 그럼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무려 18억 달러! 현재의 환율이면 2조 원이 넘어요.”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난 본전만 찾으면 됩니다. 6억 달러. 그럼 12억 달러가 남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 숫자라면 당신도 잘 모르는 당신의 깊은 진심에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1조3천억. 이 압도적인 숫자에 천상필은 호텔 방을 나가려던 발걸음도 잊고 멍하니 서 있었다. “당신은 주식을 지킬 힘이 없지만 난 있습니다. 차명 주식을 전부 내 앞으로 옮겨도 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일은 없어요. 그리고 당신의 안전도 보장하죠. 참, 12억 달러는 해외 계좌에 넣어두면 되겠죠? 그 방법은 당신도 잘 알 테니까 알아서 하시고요. 주식은 못 삼켜도 돈은 삼킬 수 있는 분 아닙니까?” 지금까지 커피만 마시던 나도 술 한 잔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짜릿한 향이 목을 타고 흐르자 순식간에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오늘은 이렇게 따로 축배를 들었습니다만, 다음에는 잔을 부딪치며 함께 축배를 들죠. 난 주식을, 당신은 1조3천억을 가진 순간을 위하여.”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천상필을 호텔 방에 남겨두고 먼저 빠져나왔다. 내가 쥔 칼자루를 함께 쥘 것인지 아닌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그가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1조3천억을 단칼에 거절할 사람은 애초에 할머니 밑에서 온갖 지저분한 짓을 거절했을 테고 이미 순양과의 인연을 끊었을 것이다. 지금은 온갖 생각이 뒤엉켜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간단명료한 하나의 숫자만 남을 것이다. 숫자는 절대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진실한 언어다. 그리고 1조3억이라는 숫자가 주는 달콤함은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만큼 진실하다. ======================================= [270 뱀 머리 3 혼자 남은 천상필은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잔뜩 남아 있는 술병을 들어 잔에 부었다. 많이 녹아버린 얼음 몇 개를 떨구고 잔을 흔들었다. “씨발…. 조 단위라니… 저 어린놈의 새끼는 진짜 미쳤어.” 그는 독한 위스키를 물 마시듯 들이켰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조라는 단위가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관리하는 차명주식도 자꾸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물론 차명주식 역시 조 단위다. 이필옥 여사는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듯 이십 년 가까이 야금야금 주식을 사 모았다. 천상필이 이필옥 여사의 차명주식 목록을 처음 봤을 때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순양그룹의 지배지분 구조의 단면을 엿봤을 때 주식 시장의 거래가로 이 여사의 주식 가치를 계산하는 건 중단했다. 초창기에 진 회장이 주식을 분산하기 위해 증여한 주식은 비상장 상태였지만, 이십 년이 지난 지금은 그룹 지배지분으로 둔갑했다. 거래는 없지만 가치는 어마어마한 주식, 그리고 꾸준히 사 모은 주요 계열사의 주식. 이 주식은 꾸준히 오른 우량주들이다. 천상필은 이것들을 관리하고 이필옥 여사가 돈을 주면 추가로 매집했다. 그리고 골고루 분산하는 일을 십 년 넘게 도맡아왔다. 물론 충분한 보수를 받았다. 주변의 잘나간다는 변호사 친구들과 골프치며 그들이 돈 자랑할 때 속으로만 웃었다. 친구들이 렉서스나 벤츠에서 골프백을 꺼낼 때 그는 그랜저 트렁크를 열었지만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벤츠나 렉서스보다는 십여 채의 강남 아파트를 가지는 게 더 현명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고, 십여 채의 강남 아파트 수십 배에 달하는 달러가 든 해외 계좌가 더 든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뿌듯해하던 십여 채의 강남 아파트와 달러 계좌가 너무나 하잘것없이 느껴졌다. 강남 아파트 대신 비벌리 힐즈의 대저택과 마이애미 빌라가 생각났고, 벤츠나 렉서스 대신 보잉사의 자가용 비행기가 손에 잡히는 듯했다. 지금껏 유지했던 가치관이 ‘조(兆)’라는 단 한 자 때문에 무너져버렸다. 兆는 점괘 또는 조짐이라는 뜻이다. 이 얼마나 적절한 뜻인가? 너무 커서 정확히는 알지 못하고 추측으로만 가늠할 수 있기에 이 단어를 단위로 쓰는 것이다. 천상필은 1조 원이라는 돈의 크기를 측량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돈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그는 위스키 한 병을 다 비울 동안 호텔 방을 떠나지 못했다. 어린놈의 미친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 * * 이필옥 여사의 장남과 차남은 망연자실한 채 계속 한숨만 쉬었다. 어머니가 아니고 아내였다면 머리카락을 죄다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썼습니까? 쇼핑이든 뭐든 전부 회사 돈으로 처리하지 않았습니까? 현찰은 어디에 쓰시려고 그런 짓까지 저지른 겁니까?” 진영기 부회장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누르며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말투조차 거슬린다고 소리칠 법도 한데 지금은 지은 죄가 있으니 고분고분했다. “너희를 위해 그런 거지 날 위해 그랬겠냐?”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요?” “주식이다.” 진영기는 또 한숨을 쉬었다. “그거, 별반 소용없다는 거 모르십니까? 시답잖은 계열사 주식 아무리 끌어모아 봤자 경영권 방어에 도움 안 됩니다. 몇 번이나 말했습니까?” “지배지분의 3% 이상, 5% 이하. 이게 내가 가진 주식이다. 이래도 도움이 안 돼?” 두 아들은 숫자를 듣자 숨이 멎을 듯했다. 뒷방 늙은이로 돈이나 써대며 돌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큰 문제를 일으켰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놀란 아들을 보자 이필옥 여사는 다시 순양의 안주인다운 표정으로 변했다. “동기 네가 도준이 그놈이랑 공동의결권을 맺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런 무리수는 두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서 그리된 게야.” 아들의 책망에서 벗어난 모친은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입 다물고 있던 진동기가 말했다. “도준이는 적당히 타협 보는 놈 아닙니다. 그놈은 항상 마음먹은 대로 끝까지 가는 놈입니다. 저도 그놈에게 당한 거라 잘 알아요. 빨리 대책부터 세워야 합니다.” “이놈이 딴소리는….” “딴소리가 아니라고요. 내게는 공동의결권을 요구했지만, 어머니에게 요구한 거 있습니까? 없죠? 그럼 이걸 크게 터트리겠다는 겁니다.” 진영기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놈 영악한 거 몰라? 곧 뭔가를 요구하겠지.” “답답한 소리 좀 그만해. 몰라서 그래? 이건 복수라고! 형도 눈치챘잖아. 교통사고…. 아버지와 도준이가 죽을 뻔한 그 사고!” 진동기가 소리 지르자 진영기도, 이필옥 여사도 얼굴이 굳어지며 입을 다물었다. “도준이 말대로 이 내용을 야당으로 흘리면 우리 순양의 힘으로도 못 막아. 그놈들도 지금 전쟁 중인데 우리 사정 봐줄 리 만무하잖아.” 동생과 같은 생각인지 진영기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 여의도는 지금 목숨과도 같은 과반 숫자 확보 싸움에 전력을 다하는 중이니까. “그, 그래서? 지금 이 에미가 밀수범으로 감옥에라도 가라는 게냐? 이, 이놈들이 진정…!” 두 아들은 기가 막혀 부르르 떠는 모친의 심정 따위를 배려할 여유가 없었다. “그 뒤로 도준이는 아무런 연락 없습니까?” 이필옥 여사는 냉정한 두 아들의 태도가 섭섭했으나 그만큼 위급한 상황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오늘 사람을 보냈다. 지금쯤 만나고 있을 게다.” “누굴 보냈습니까?”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다. 천상필 이사야.” 두 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확인했지만, 기억에 없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신뢰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그자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놈인지가 중요하다. 항상 간신을 신뢰하는 주인이 더 많았다. 진영기 진동기 형제는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는 것으로 대책은 하나뿐이라는 걸 확인했다. “그 천상필 이사가 어머니 대신 이 사태를 책임질 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믿을만한 사람인 건 틀림없다. 일 처리도 빠르고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게 뭔지 파악한다. 이필옥 여사도 잘 모르는 자신의 진심까지 읽어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아들이 말하는 믿음은 옥살이를 대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주저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두 아들은 얼굴을 찌푸렸다.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나와야 한다. 그렇더라도 몇 번이나 더 확인하고 대가를 약속하고 신신당부해야 가능한 게 대신 옥살이하는 것이다. 천상필은 대타로서 적임자가 아니다. “천상필 외에 미술품 팔아먹은 거 아는 놈은 몇이나 됩니까?” “서너 명 된다.” “그놈들은요? 천상필이보다 낫습니까?”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진도준과 담판 지으러 간 놈이 가장 믿을만하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두 아들은 머리를 젓는 어머니를 보자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주 다행인 것도 있다. 그들은 이런 일을 여러 번 처리해봤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고 동시에 휴대전화를 꺼냈다. “순양예술재단에서 일했던 천상필이라는 놈이 있다. 그놈 인적사항 파악해서 먼지 좀 털어. 치명적인 걸 찾아야 한다. 한칼에 무릎 꿇을 정도로 강력한 거 말이야. 그래. 시간 없다. 인력 전부 동원해.” 두 사람은 같은 내용의 통화를 끝내고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차명주식 관리도 천상필이가 했습니까?” “그래.” “그럼 지금 짐 챙겨서 출국하세요. 이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들어오실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고요. 입 무거운 놈들 붙여드릴 테니까 그놈들과 움직이세요.” 이필옥 여사는 입이 달싹거렸으나 차마 불만을 말하지 못했다. 두 아들의 표정을 보니 아끼던 천상필마저 날려야하는 아주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 * * “이거 정확한 겁니까?” 야당의 원내수석부대표는 내가 전한 서류를 흔들었다. “그 서류에 나온 날짜에 영사관에서 나온 트럭, 그걸 운전한 사람은 영사관 직원입니다. 외교부를 통해 영사관 업무일지를 확인하십시오. 그들은 적절한 대답을 못 할 겁니다.” “진 실장, 이거 확실하지 않으면 내가 곤란해져요.” “수석님. 제가 실수할 일을 하겠습니까? 믿으세요.” 원내부대표는 여전히 수상쩍은 눈빛이었다. “진 실장. 솔직히 털어놔요. 이거 마지막 과녁이 어딥니까?” “수석님. 그거 파기 시작하면… 제가 장담하는데 최소 외교부 장관과 청와대 외교 특별보좌관은 옷 벗습니다. 또한, 미국에서 엄청난 항의도 쏟아질 겁니다. 최종 과녁이 어디든 청와대 기둥 하나는 뽑을 걸요?” 파괴력은 놓치기 아까울 정도니 부대표의 눈빛이 달라졌다. “찝찝하시면 그냥 식사나 하고 돌아가십시오.” “그냥? 그럼 이거 묻어버리려고?” “아뇨. 다른 계파의 저격수에게 던져 주죠, 뭐. 머리 조아리며 받아갈 의원은 많습니다.” 머리 조아리며 라는 말에 부대표는 당황한 듯 보였다.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고,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오해하신듯한데, 미덥지 못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묵직한 한 방이니 확인 차 물어보는 겁니다. 허허.” “이해합니다. 아무튼, 그 날짜에 있었던 그 일, 그거 하나만 파시면 외교부가 발칵 뒤집힐 겁니다. 참, 트럭을 직접 운전한 직원 이름도 있으니까 여차하면 그 직원을 소환하셔서 국회에 세우십시오.” 이름까지 있다고 하니 수석부대표가 만족한 듯 보였다. 다시 수저를 들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진동기 부회장의 전화다. 아이고, 우리 할머니. 든든한 아들까지 불렀구나. “네. 큰아버지.” - 뭐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좀 보자. “죄송합니다. 지금 손님과 식사 중이라 움직일 수 없습니다만.” - 그럼 밥 먹고 와. 술 한 잔 하자. 삼청동 알지? 그리 와라. 통화를 끝내고 식사를 서둘러 끝냈다. 공동의결권을 가진 파트너 아닌가? 무시하면 안 된다. * * * 천상필 변호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신호가 가면 곧바로 전화를 받던 이필옥 여사의 전화기가 꺼져있다. 수행비서도 마찬가지였고 문자를 보내도 회신이 없다. 위기를 느끼자 해외도피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연락까지 끊어버린 건 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 이필옥 여사를 대신해서 나서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진영기 부회장의 비서실에서 온 전화는 조금 강압적인 느낌이었다. “아들한테 뒤처리를 맡기고 도망쳤다 이거지?” 천상필은 단단히 마음먹고 순양그룹 사옥으로 향했다. “우리 처음 보나? 낯이 익은데?” 대뜸 반말로 맞이하는 진영기 부회장의 태도가 불쾌했지만, 이 집안 사람 중에 예의 차리는 놈이 없다는 건 예전 그룹 법무팀 시절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예전 그룹 법무팀 소속이었습니다. 그때 몇 번 뵌 적 있습니다.” “어쩐지, 초면은 아닌 것 같았어. 하하.” 진영기는 호탕하게 웃으며 천상필의 손을 잡았다. “이거, 어머니 밑에서 애쓴다고 들었는데 내가 고맙다는 말도 못했어.” “아닙니다. 제 일이었을 뿐입니다.” “성격 한 번 깔끔하구만. 그럼 구질구질한 거 빼고 담백하게 가 보자고.” “그런데 여사님께서는…?” “아, 혹시나 해서 비행기 태워 보냈어. 어머니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역시 그렇군요.” “일단 천 변호사 당신이 관리하는 차명주식 있지?” “네.” “그거 목록부터 줘봐. 명동 애들에게 뿌렸지? 싹 거둬서 실명전환부터 해야겠어.” 이것 봐라? 마치 옆집에 빌려준 그릇 돌려받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천상필 변호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 [271] 뱀 머리 4 “왜? 어머니 몰래 하는 짓 같아서?” 진영기는 굳은 표정의 천상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 친구…. 내가 누군지 몰라? 당신이 모시던 분의 장남이야. 순양의 장남. 내가 어머니 재산이나 가로채는 후레자식으로 보여?” “아, 아닙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자네도 지금 상황 알잖아. 집안의 망나니 같은 놈 하나가 사고 치기 일보 직전이야. 그전에 정리해두려는 것뿐이야. 물론 어머님도 아셔. 전세기도 내가 띄웠어.” “하지만 이건 증여문제입니다. 부회장님 실명으로 전환하기 전 다른 자제분들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상속문제가 생기는….” “이런, 오해했구먼. 내 이름으로 전환하자는 게 아냐. 자네가 관리하는 차명에서 그룹이 관리하는 차명으로 전환하는 걸세. 증여니 상속이니 하는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천상필은 이 집안사람이 자신이 가진 유일한 힘을 뺏으려는 것을 알았다. 진도준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칼자루를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냥 물러나면 모르되 팽 당하는 건 피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차명 변경할 준비하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수고 좀 해주게.” 천상필이 일어서자 진영기 부회장은 손을 들어 그의 발길을 잡았다. “잠깐만 기다려보게.” 진영기 부회장은 인터폰을 눌렀다. “들어와.” 이미 대기하고 있었는지 두 명의 젊은 사내가 들어와 머리를 숙였다. “이 친구들과 함께 움직여. 비서실 직원인데 똘똘해. 데리고 다니면서 심부름도 시키고 궂은일도 시켜. 급한데 손 하나라도 더 있어야 하지 않겠나?” 너무 노골적이다. 24시간 붙어 감시하겠다는 것 아닌가? 마침내 천상필이 폭발했다. “부회장님.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뭐?” “제가 감시까지 받으며 이 여사님 뒤처리나 할 머저리로 보이십니까?” “무슨 소리야? 감시라니!” 이미 서로의 속셈을 다 읽었다. 시치미 떼고 구구절절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 “차명주식, 제가 관리합니다. 당신 집안 망나니가 일을 저지르면 해결하십시오. 깔끔하게 정리되고 이 여사님 귀국하시면 그때 차명 정리하겠습니다. 부회장님이든 누구든 원하는 대로 해드리죠. 그 전엔 어림없습니다.” 천상필의 단호한 말에 진영기 부회장은 턱을 쓰다듬었다. “이거, 주식 쥐고 있다고 큰 소리가 대단한데? 흐흐.” 진영기는 천상필을 세워둔 채 수화기를 들었다. “아, 지검장. 나요. 뭐 하나 물어봅시다.” 지검장이란 말에 천상필은 가슴이 철렁했다. 진도준이 했던 말, 그리고 자신이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가는 게 분명하다. “재단 직원이 몰래 재단 자산을 처분하면……. 응, 그래. 무려 몇 천 억이나 해먹었더라고. 간뎅이 부은 놈이지. 뭐? 무기? 그 정도까지는 필요 없고 15년 정도는 문제없겠지?” 본심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나? 어떻게 이놈의 집안 새끼들은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긴 그게 순양의 힘이기도 하다. 아무도 예상 못 하는 방법을 쓸 필요가 없다. 누구나 예측 가능한 방법을 쓰지만 대응할 방법이 없다. 압도적인 권력으로 밀어붙이니 누구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이대로 가면 자신이 고가의 미술품을 팔아먹은 도둑놈이 된다. 유일하게 예측 못 한 제안을 한 그놈이 떠올랐을 때 통화를 끝낸 진영기의 경고가 들렸다. “이봐! 천상필이. 잘 들어. 지금부터 내가 쓴 시나리오대로 해. 그럼 삼 년 안에 출소할 거야. 형기 마치고 나오면 찌그러져 조용히 살아. 먹고 사는 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게 마음대로 될까? 진도준이는 당신 어머니의 친필 사인한 비밀계약서가 있어. 그건 가장 확실한 증거야.” “아직 내 시나리오 안 봤지? 거기에는 엑스트라가 십여 명 등장해. 전부 재단 사람들이지. 그들이 증언할 거야. 세상 물정 모르는 여든 넘은 노파를 살살 꼬드겨서 그림 팔아먹은 게 바로 당신이라고, 재단 일은 전부 당신이 맡았다고 증언하면?” 눈도 침침한 할머니가 영어로 작성한 계약서를 꼼꼼히 읽었다고 우기는 꼴이 더 우습다. 게다가 자신은 최측근, 믿음직한 직원이 내미는 계약서니 순양의 안주인 정도 되면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사인했다는 주장이 어색하지도 않다. 진영기의 여유는 허세가 아니다. 그럴듯한, 아니 확실한 시나리오다. “이게 끝이 아냐. 무대장치도 좋아. 지금 당신의 과거를 샅샅이 뒤지고 있어. 먼지 한 톨 없이 살았다면 안심해도 돼. 아… 아니다. 없던 과거도 만들어볼까 생각 중이야. 당신은 검찰 소환장보다 언론 기사를 먼저 볼걸? 보통 추문, 스캔들이라고 하지. 혼외자식이라도 하나 만들어 줘?” 하얗게 질려버린 천상필을 보며 진영기는 승리의 미소를 보였다. “그 친구들 데리고 빨리 가서 시키는 일이나 해. 약속한다니까! 삼 년이야.” 진영기 부회장의 손짓에 젊은 두 사내는 어깨 늘어진 천상필을 데리고 나갔다. 진영기는 진도준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덕분에 어머니가 꿍쳐둔 귀한 지분을 챙기는 셈이었다. 그의 단 하나 문제는 동생과 나누지 않고 혼자 꿀꺽하는 것이다. * * * “다 들으셨습니까?” “그래. 각오하고 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넌 이제 우리 집안의 적이다.” 진동기 부회장은 이미 몇 잔 마신 듯 얼굴이 불그스름했다. “언제는 가족이었습니까? 아니, 어차피 우리 집안은 가족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죠. 누가, 얼마나 많은 지분을 가졌는가? 그걸로 어른 대접 받고 머슴 대접받는 집 아닙니까?” “그렇다고 다 늙은 할머니를 꼭 그렇게 해야겠어?” 둘째 큰아버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아무리 정이 없다고는 하나 친모가 옥살이하게 생겼는데 너무 침착하다. 이미 대책을 다 세웠다는 의민데…. “혹시 할머니…. 비행기 탔습니까?” “지금쯤 이륙했을 걸?” “그렇군요. 빠르시네요.” “네가 아무리 용을 써도 여기까지다. 할머니를 어찌할 수 없어.” “고맙습니다. 둘째 큰아버지.” 내가 머리를 꾸벅 숙이니 둘째 큰아버지는 손에든 술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뜻이야?” “할머니가 옥살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명색이 순양의 대왕 대비마마 아닙니까? 제 목적은 여기까지였습니다. 할머니가 영원히 한국 땅을 밟지 못하는 것. 아무 짓도 못 하고 숨만 쉬며 사는 것. 그걸 앞당겨 주셨으니…. 지금쯤 귀양 가는 심정으로 비행기 안에서 훌쩍거리실 겁니다.” 진동기는 내려놓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너도 참 독하다.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하고.” “주제를 아는 거죠.” “네가 원하는 대로 됐으니 순양그룹에 먹구름 끼는 짓은 그만해.” “이미 늦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멈추면 할머니는 곧바로 귀국하시겠죠?” “뭐? 늦었다니? 무슨 짓을 한 거냐?” “방금 함께 저녁 먹은 사람이 바로 저격수입니다. 실탄을 받았으니 쏠 겁니다.” “지독한 놈….” 다시 잔을 드는 그에게 말했다. “가만히 한 번 돌이켜 보십시오. 저와 우리 가족에게 누가 가장 지독한 짓을 했는지. 할머니가 제 어머니께 한 짓, 제게 한 짓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지독하다면 할머니는 악독했습니다.” “좋게 끝낼 수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기대를 한 내가 멍청했던 것 같다. 좋아. 한번 해 보자. 이번엔 우리 형제가 손잡고 네가 저지른 짓을 막을 거다. 네가 네 어머니를 생각하듯 우리도 어머니를 생각해야겠지? 올해가 가기 전에 네 할머니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시도록 할 거다.” 나도 내 앞에 놓인 잔을 비웠다. “잘 생각하세요. 단지 할아버지와 우리 가족이 싫어 온갖 진상만 부리는 할머니입니다. 차라리 외국에서 숨만 쉬며 여생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다. 그렇게는 못 하지.” 나를 향해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머리 숙였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이제 바쁠 것 같으니까요.” “같이 나가자. 나도 여유 부릴 시간 없다.” 둘째 큰아버지는 내 어깨 툭 치며 앞장서서 나갔다. * * * 야당이 내가 알려준 정보를 터트리는 건 최소한 이틀쯤 걸릴 것이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적어도 뉴욕 총영사관에 줄 닿는 사람을 이용하여 최소한의 사실 확인은 거칠 것이다. 그동안 큰아버지들이 여기저기 전화를 넣겠지만 어긋난 톱니다. 문화재 밀수와 미술품 판매의 차이 때문에 약간의 시간은 벌었다. 중요한 것은 그 이틀의 시간 안에 천상필의 결단이다. 그런데 오늘 큰아버지의 행동으로 봐서는 이미 천상필과 접촉한 것 같다. 할머니의 대타를 요구했을 테지만 진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건 바로 차명주식이다. 일이 벌어지기 전 재빨리 주식을 옮기고 싶을 것이다. 일을 빨리 처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막힘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 막힘없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 보통 모든 수단이라 함은 정상적이지 않다. 난 천상필이 큰아버지의 비정상적인 압력을 피해 내게 달려오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내건 조건은 단순한 도피처가 아니라 꿈의 엘도라도였으니까. 그리고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 진 실장님. 제게 말한 그 약속 믿을 수 있습니까? 한밤중에 전화를 건 그는 확답부터 원했다. “사람 말을 믿습니까? 일단 제가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차명주식은 당연히 보험금을 타낸 다음 제게 옮겨주시면 됩니다.”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 애쓰는 것이다. - 제가 보험금만 먹고 주식을 넘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죠. 절 믿으십니까? “잊으신 게 있군요. 저도 순양 가의 사람입니다. 제 돈 먹고 도망친 사람을 가만히 놔둘 것 같습니까? 목숨이 두 개라면 몰라도.” 또다시 침묵이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 이미 목숨을 저당 잡힌 것 같습니다. 저 좀 빼 주시죠. * * * “감시가 붙었다는 말이군요.” “네. 진영기 부회장이 두 명을 붙였답니다. 회사에서 만났을 때부터 감시를 시작했습니다. 천상필 변호사는 회사에서 나와 곧바로 집으로 가버렸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출입을 감시한답니다.” 우병준 상무는 그리 심각한 표정이 아니었다. 겨우 두 명이다. 이건 감금이 아니라 감시일 뿐이니 사람 빼내오는 건 손쉽다고 생각할 것이다. “천 변호사만 데리고 오면 됩니까?” “아뇨. 아예 가족 전부를 챙기는 게 낫겠습니다.” “그럼 일단 동남아 휴양지로 보내겠습니다.” “그러세요. 아, 천 변호사는 제 여의도 오피스텔로 데려오십시오. 아직 끝내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놀라지 않도록 미리 언질 주십시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우병준 상무가 출발하고 난 전화를 들었다. “천상필 변호사님.” - 네. 어떻게 됐습니까? “지금 우리 측 사람들이 출발했습니다. 신분증과 여권만 챙기십시오. 카드는 잘라버리고 휴대전화도 부숴버리세요. 몸만 이동합니다.” - 네? 어, 어디로 간다는…? “가족분들은 동남아 휴양지로 모실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는데 괜히 짐 싸고 귀금속 챙기는 짓 하지 마십시오. 그야말로 사라지는 겁니다. 몸만 나오세요.” - 그, 그래도… 돈이라도 좀 챙겨야…. “천상필 변호사님.” - 네. 더듬거리는 그의 입부터 막았다. “곧 1조 원의 거액을 차지할 분입니다. 변호사님 재산이 얼만지 모르겠지만, 그거 꼭 챙기고 싶습니까? 1조 원과 비교하면 만 원짜리 몇 장에 불과합니다. 필요경비는 제가 준비할 테니까 몸만 나오세요.” - 아, 네. 통화를 끝내고 여의도로 미리 달려갔다. ======================================= [272] 뱀 머리 5 “오늘 그 사람들 다 누굽니까?” 잔뜩 겁먹은 천상필이 오피스텔에 들어오자마자 던진 질문이었다. “궂은일 하는 직원입니다. 일 잘하는 분들이니 가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참, 우리 가족은 어디로 간 겁니까?” 그가 보여줬던 능청스러움은 전부 연기였던 것으로 생각될 만큼 잔뜩 겁먹은 표정이다. “인도네시아 발리로 갔습니다. 바닷가 리조트에서 며칠 쉬면서 지내도록 조처했으니 안심하세요. 제 부하직원이 함께 갔으니 현지에서 불편하지 않게 살필 겁니다.” “그, 그럼 전…?” “여기 일 끝나고 원하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곳으로 가족분들 보내드리겠습니다.” 순간 천상필의 표정이 확 변하며 소리쳤다. “설마 내 가족을 인질로 잡은 거요?!”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일까? 아니면 큰아버지의 위협이 그만큼 두려웠던 걸까? “제가 조폭 두목이라도 되는 줄 아십니까? 생뚱맞게 인질은 무슨…. 혹시 모를 위험 때문에 피신한 겁니다. 아직 공항 도착 전일 텐데, 차 돌려요?” “아, 아닙니다. 제가 말실수를 한 것 같군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온갖 생각이 다 들 테지만 진정하세요.” 그에게 위스키 한잔을 내밀자 숨도 안 쉬고 들이켰다. “혹시 부회장님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진영기 부회장…. 그 새끼는 대놓고 협박질부터 합디다.” 천상필은 분통을 터트리며 나눴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돈, 힘을 다 가진 사람이며 가진 걸 아껴둘 사람이 아니다. 이번엔 힘을 썼다. 그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입을 열었다. “자, 변호사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네?” “결정하십시오. 주식을 어떻게 할 건 지부터, 전부를 말입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끝났을 때 그는 내게 물었다. “차라리 실장님께서 제안해 보십시오. 판단은 제안을 듣고 난 후 하겠습니다.” 모함, 협박, 공포, 안전 그리고 욕심. 이런 것들이 뒤엉켜 있으니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올바른지 모르기 때문에 내게서 기준점을 찾으려 한다. “전 이미 야당에 정보를 흘렸습니다. 이 일이 드러나는 건 넉넉잡아도 이틀 뒤, 전 그 전에 모든 걸 정리하고 변호사님께서 이 나라를 뜨는 게 어떨까 생각합니다.” “정리라면… 주식 말입니까?” “네. 이틀 안에 실명전환 가능합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대답의 끝을 흐리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바로 돈. 아니, 이 경우는 꼭 돈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인생을 바친 충성의 대가, 할머니에 대한 조각난 믿음이 준 배신감, 큰아버지의 협박이 만든 공포. 이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을 받지 않는 한, 손에 쥔 것을 내놓으려니 당연히 주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죠. 제 손을 잡으시면 지금 당장 1억 달러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그 돈으로 원하는 곳에 정착하십시오. 설마 초기 정착 자금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아, 아닙니다.” “나머지는 보험금 타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이제 결심하셨습니까? 만약 제가 나중에 약속을 어기더라도 천억 원 이상의 자산가가 되는 겁니다. 더 고민하셔야 합니까?” 한쪽은 옥살이 3년과 생활비, 다른 한쪽은 최소 천억 원. 천상필은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지금 즉시 돈을 준다는 것도 그의 결심을 앞당기는 요인일 것이다. 그는 가져온 가방을 열어 두꺼운 서류철을 모두 쏟아냈고 노트북을 열었다. “주식 현황부터 먼저 보시죠. 전 해외 계좌 좀 봐야겠습니다.” 그가 던진 서류를 뒤적이며 전화를 들었다. “삼촌, 라부안 자금 지금 좀 써야겠습니다. 준비 좀 해 주세요.” 오세현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기 전, 재빨리 전화를 끊어버렸다. 통화 할 곳이 많다. “장 부사장님. 지금 제 여의도 오피스텔로 급히 좀 와 주셔야겠습니다.” 김윤석 대리에게도 지금부터 비상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통화를 끝내고 천상필에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주식 실명전환은 내일 아침부터 시작할 거죠?” “네. 실장님 명의로….” “아뇨. 그 주식의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제가 인적사항 알려드리고 필요서류 준비해서 아침에 드릴게요.” 할머니가 필사적으로 모은 주식이다. 난 그 주식을 가질 자격이 없다. * * * 짝-! 짝-! 연이은 따귀 소리 뒤에 진영기 부회장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 병신같은 새끼들. 뭐 하느라 놓쳐?” 따귀 정도로는 화가 풀리지 않는지 주먹질과 발길질도 이어졌다. 잔뜩 얼어붙은 백준혁 비서실장은 폭력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쭈? 인상을 써? 이게 지금 남 일 같아? 넌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진영기의 손이 백 실장을 향해 날아들었을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뺨을 툭 건드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잘하자. 응? 좀 잘하자고!”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백 실장이 머리를 꾸벅 숙이자 진영기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놈 빨리 잡아와. 혹시 모르니까 공항에 인력 배치하고.” 직원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연락받은 진동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튀었다고?” “그래. 훼방꾼이 등장하셨다네?” “도준이 쪽 애들?” “그렇겠지? 지금 그놈 챙길 필요 있는 건 도준이뿐이잖아. 어머니가 저지른 범죄의 가장 큰 조력자니까 말이다.” 중요한 인물을 놓쳤지만, 진영기 부회장은 여유가 넘쳤다. “뭐, 외국으로 튀더라도 상관없으니까. 범죄 혐의를 받으니 도망간 걸로 생각할 수도 있잖아.” “주식이 더 큰 문제지, 그놈 행방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 “명동에서 작업하는 놈들에게 이미 약 쳐놨어. 천상필이 나타나면 바로 연락 올 거야.” 진영기는 걱정만 하는 동생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천상필이도 단번에 도준이에게 붙지 않아. 그놈도 자기 목숨줄이 바로 주식에 걸려있다는 걸 아는데 단번에 안 넘겨. 뉴스 확인하면서 지 살길 찾을 때까지는 주식 꼭 쥐고 있을 거야. 아직 시간 여유 있다.” 이것저것 따져 묻기만 하는 동생을 보며 진영기가 말했다. “이제 네가 뭐했는지 숙제 검사해보자. 도준이 만난 건 어떻게 됐어?” “차명주식에 대해서 아는지 모르는지는 확실하지 않아. 다만 그놈은 우리 어머니에 대한 증오만 가득하더라고. 어머니가 제수씨 구박한 거, 트럭 사고…. 하지만 도화선이 된 건 자신을 그룹에서 쫓아내려는 노골적인 어머니의 행동 같아. 어찌 됐든 순양의 안주인인 어머니가 사방팔방 떠들어 대는 게 부담이었겠지.” 진동기는 진도준과 술을 마시며 나눴던 이야기를 자세하게 말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진영기의 눈빛이 반짝였다. “차명주식은 모른다?” “확실하지 않아. 그놈 음흉한 건 못 당하잖아.” “어쩌면 차명주식을 노리고 이 모든 일을 꾸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 “가능성은 열어둬야지.” 방안을 서성이던 진영기는 갑자기 미소 지었다. “야, 이거 잘하면 의외로 허무하리만치 쉽게 끝낼 수도 있겠는데?” “무슨 소리야?” “도준이 그놈 원하는 대로 해주고 이번 일 덮으면 되잖아. 그럼 천상필이 그놈을 몰아세울 일도 없어지고. 어때?” “뭐?” “그렇잖아. 도준이 그 자식이 원하는 건 우리 어머니의 유배생활 아니냐? 솔직히 유럽 별장 몇 군데 돌며 여생을 보내는 게 어머니에게 나쁠 것도 없잖아? 그리고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나이 들면 고향 땅 밟으며 살고 싶은 게 노인들 생각이야. 물 낯설고 음식 안 맞는 외국에서 여생을 보낸다는 게 말이 돼?” 진동기가 버럭 소리 질렀지만, 진영기는 오히려 비웃는 표정이었다. “안 맞긴? 어머니 프랑스 귀족 흉내 내는 거 몰라? 된장찌개, 김치찌개를 입에 안 댄 지 오래다. 유럽이 오히려 고향 같으실 걸? 아버지 살아계실 때 스위스에서만 지낸 게 7년이야. 별 걱정을 다한다.” 달리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이 땅을 지긋지긋하게 여기셨다. “그러니까 어머니만 외국에 계시면 모든 게 끝이나. 윈-윈이 바로 이런 거 아니겠어? 우린 주식 챙기고, 어머니는 편히 살고, 도준이는 복수했고, 천상필이도 평범한 생활 계속하고, 순양예술재단은 지금처럼 잘 돌아가고. 세상 시끄럽게 할 필요가 뭐 있어?” 진영기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동생이 답답하기만 했다. “야! 너도 착한 척 그만해. 솔직히 어머니가 옆에서 잔소리해대는 게 귀찮기만 하잖아. 안 그래?” “그래서? 도준이한테 가서 네 할머니 영원히 한국 땅 안 밟게 해줄 테니 입 닥치라고 해? 만약 그놈이 차명주식의 존재를 안다면? 그리고 진짜 목적이 바로 그 주식이라면 어쩌려고?” “그럼 작살내야지. 그러니까 확인해 보자고. 그놈 진심이 뭔지.” 진동기는 이런 형의 모습이 늘 마음에 걸렸다. 아니, 어쩌면 두렵다고 해야 하는 게 맞다. 원하는 걸 가지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냉혹해진다. 목표물에만 집중할 땐 머리 회전도 빠르다. 지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진동기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난 못해. 내가 도준이 그 자식에게 큰소리 떵떵 쳤는데 어떻게 말을 바꿔? 제대로 해 보자고 했는데 다시 살살거려야 해?” “아이고, 그놈의 자존심…. 알았어. 내가 하지. 서둘러야 야당의 폭로를 막을 수 있잖아.” 진영기는 거침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 * * 처음 전화가 울렸을 때는 받지 않았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지는 생각 못 했기에 당황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두 번째 울렸을 때는 지체 없이 전화를 받았다. 이미 둘째 큰아버지를 통해 적의를 드러낸 이상 더 나빠질 것도 없기 때문이다. “네. 큰아버지.” -오, 우리 도준이. 많이 바쁘지? 이건 또 뭔가? 버럭 고함부터 지를 줄 알았는데 마치 안부라도 묻는 양 부드럽기 그지없다. 화를 억누르는 것일까? 아니면 나를 구슬리려는 것일까? “아닙니다. 말씀하십시오.” - 네가 데리고 있는 그 천상필인가 뭔가 하는 놈, 내놓으라고 안 할 테니 좀 만나자. 천상필을 가로챈 것을 따지지 않겠다는 건 왜일까?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주저하자 큰아버지는 한결 더 부드러운 목소리가 되었다. - 어쩌면 우리가 지금 이 상황을 아주 깔끔하게 처리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말이지. 너무 겁먹지 말고 와. “알겠습니다, 큰아버지.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찾아뵙겠습니다.” 시간을 버는 방법이기도 하다. 내일 오전, 내 사람들이 움직일 때 그를 묶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 그래. 아침이나 같이하자. 집으로 와라. “아뇨. 집은 좀 불편합니다. 순양호텔에 자리 준비해 놓겠습니다. 괜찮으시죠?” - 그래. 8시까지 가마. “네. 내일 뵙겠습니다.” 통화를 끝내자 천상필, 장도형, 김윤석 그리고 우병준 상무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진영기 부회장님이신데,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천상필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진영기 부회장과 모종의 협의를 하고 자신을 다시 넘기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보였다. “천 변호사님. 내일 오전 최대한 빨리 실명전환하세요. 변하는 건 없습니다.” “좋습니다. 믿겠습니다. 어차피 믿을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그런데 실명은 누구로 해야 합니까?” “이서현. 관련 서류는 내가 준비하겠습니다.” 모두 눈만 깜빡거렸다. 누군지 짐작하지도 못하는 것 같다. “아, 제 어머니예요.” 할머니가 가장 증오하는 며느리였지만, 내일이면 할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며느리로 둔갑할 것이다. 전 재산을 물려준 며느리니까 말이다. ======================================= [273] 효자…들 1 모두 왜 어머니의 명의를 이용하는지 궁금해했지만, 우리 가족 일을 훤히 아는 우병준 상무만 이마를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거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여사님이 아시면 거품 물고 쓰러지실 지도…. 흐흐.” “그렇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죠.” 내 말 속의 진심을 읽은 우병준 상무는 급히 웃음을 거뒀다. “죄송합니다. 너무 절묘한 한 수라 제가 그만….” “사과까지 하실 일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는 사람들은 애써 서류를 들추며 못 본 척, 못 들은척했다. 실내의 무거운 공기를 걷어내기 위해 천상필을 향해 말했다. “약속한 돈은 지금 처리 중입니다. 완료 즉시 알려드릴 테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내일 일 처리나 잘 해주십시오.” 머리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주식 현황 파일을 펼쳤다. 내일 오전, 할머니는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 * * “네 고모가 쫓겨나지 않으려고 애쓰는구나.” 호텔 레스토랑을 둘러보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진영기 부회장은 의자에 앉으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호텔 말이야. 내가 이곳을 오랜만에 왔는데 예전과 많이 달라. 훨씬 세련됐고 모던해 보여. 직원들 표정도 좋고, 발전했어.” “백화점 매출도 계속 상승세라고 들었습니다. 고모님은 포텐셜이 대단하신 분인 것 같아요.” “네 역할은 없었고?” 어느 정도 심증도 있겠지만, 어차피 넘겨짚는 말이다. 진지하게 대답할 필요는 없다. “저야 미라클에 투자한 돈이 있지만, 한 다리 건너입니다. 제 역할이야 뭐… 자주 이용해서 매상 올려주는 것 정도…?” “능청도 자연스럽고…. 좋아. 흐흐.” 물 한 잔을 마시자 음식이 나왔다. 한식이라 반찬이 많이 깔렸지만, 큰아버지는 젓가락을 거의 대지 않았다. 짧은 식사를 끝내자 그가 물었다. “진짜 원하는 게 뭐냐?” “이미 둘째 큰아버지께 다 말씀드렸습니다. 혹시 못 들으셨습니까?” “할머니 꼴 보기 싫다는 거?” 사안을 단순화하는 건 발군이다. 한마디로 정리해 버릴 줄이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사실 우리 어머니가 좀 심하긴 했지. 우리 제수씨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는데 너한테까지 그렇게 이어질 줄이야…. 보는 내가 얼굴이 찌푸려질 때도 있었어.” 이렇게 너스레를 떠는 이유가 뭘까? 아직 내가 차명주식에 대해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럼 절 이해하시겠군요.” “물론이지. 그래서 내가 이 집안의 최고 어른으로서 깔끔하게 정리할 생각이다.” “말씀하십시오.” “네가 원하는 대로 어머니는 두 번 다시 한국 땅을 밟지 않게 해주마. 여생을 외국에서 유배생활 하듯 지내실 거다. 물론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쇠약해지시면 우리가 모셔야겠지. 어차피 병원에서만 지내실 것 아니냐?” “외국에도 좋은 병원 많습니다.” “뭐?” 부드럽게 웃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자식아! 그게 할 말이냐?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객사가 가당키나 해?” “큰아버지. 원하는 걸 물어보시니까 솔직한 마음을 말씀드린 겁니다. 손자를 트럭으로 밀어버린 할머니 아닙니까? 아무리 손자가 미워도 그렇지, 이건 가당한 일입니까?” 이 집안사람들은 트럭 이야기만 하면 입을 다문다. 그때 할아버지도 계셨기 때문이다. “큰아버지. 그냥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십시오. 지금 제 생각은 중요한 게 아닌 듯 보입니다만.” 날 노려보며 물 한 잔을 쭉 마신 그가 말했다. “어머니는 계속 외국에서 지내도록 하마. 그렇다고 진짜 유배생활 하시도록 놔둘 수는 없다. 지내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충분한 돈은 지원할 생각이다. 이건 네가 막을 수 없는 문제야.” 한국에서 가장 돈 많은 집안에서 아들이 효도한다는데 막을 생각은 없다. “이게 네가 원하는 거 맞지? 그러니까 네가 야당에 흘린 거 다시 주워 와라. 우리 순양 이름이 세상에 오르내리는 건 좋지 않다는 것쯤 알 거 아니냐?” “그게 전부입니까?” “천상필 그자를 네가 데리고 있지? 어머니가 실수한 거 그자가 많이 안다고 들었다. 괜히 그놈 이용할 생각 말고 입단속이나 잘 시켜. 예술재단은 뒤탈 없도록 내가 정리하마.” 차명주식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는 걸 보니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하던지, 아니면 차명주식은 내 관심 밖의 일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내가 아무 말 없자 자신의 생각이 모두에게 득이 되는 최상의 방법이라는 것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난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이렇게 떠들어 대며 시간이나 축내는 게 내게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른다. 단 하루 만에 속전속결로 끝내버리는 내 행동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한참을 신나게 떠들어대던 그가 말을 멈추고 상의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잠깐만.” 부르르 떠는 휴대폰의 폴더를 열었다. “무슨 일이야?” 알아듣기 힘든 다급한 상대편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 얼마나 놀랐는지 의자를 쓰러트리며 벌떡 일어서기까지 했다. 큰아버지는 전화를 귀에서 떼지 않은 채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명동에서 주식이 움직이는 걸 눈치 챈 건가? 눈과 귀가 될 사람을 이미 여기저기 뿌려놓은 게 틀림없다. “너, 이 자식…!” 끊지도 않은 전화를 잡은 손을 부르르 떤다. “지금 우리 순양의 주식이 대거 움직인다는데, 네놈 짓이냐?” 어른이 서 계시는데 앉아 있는 건 예의가 아니다.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큰아버지께서 천상필 변호사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게 도움을 청하더군요. 그래서 빼 왔는데…. 대뜸 주식을 팔겠다고 하잖습니까? 전 우량주라면 꼭 사두는 습관이 있어서… 시세보다 조금 더 쳐준다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노린 게 주식이냐?” “덤이죠. 제가 원하는 게 뭔지는 입이 닳도록 말씀드렸는데요?” “야!” “야당에도 정보는 계속 흘릴 생각입니다.” “주식도, 어머니도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거다. 네가 아무리 까불어 봤자 내 전화 몇 통이면 잠잠해져. 네놈이 내게 대서려면 백 년도 부족하다.” “그렇다고 해두죠. 하지만 지금까지의 일은 프롤로그에 불과합니다. 야당이 멈추면 검찰을 움직일 겁니다. 그것도 막으시면 미국에서 터질 겁니다. 한국 총영사관이 밀수에 관여했다면 외교 문제 아닙니까? 큰아버지께서 미국도 막으신다면…. 할머니는 귀국하시겠네요.” “아주 미쳤구나. 뭐? 미국?” “주식은 어떻게 가져가실지 사뭇 기대되는군요. 시나리오는 대충 그려지는데….” 쉬운 일이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영화가 어디 시나리오대로 개봉하나요? 제작사의 입김, 감독의 수정, 배우의 변덕. 시나리오와 전혀 다른 내용으로 상영관에 걸리는 일이 많습니다. 영화는 최종 편집이 끝나야 압니다.” 큰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다. “까불지 말고 내 제안, 받아. 아직 늦지 않았어.” “죄송합니다. 아침 드신 거 소화는커녕 체할지도 모르는 말씀을 드려서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쭉 가 볼랍니다.” 아차, 아직 큰아버지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누군지 모르지만, 우리 대화를 전부 들었을 것이고 똥줄이 탈것이다. 주식 감시 잘하라고 많은 돈을 받았을 텐데…. 실패로 돌아갔으니 다 게워내야 하니까 말이다. * * * “실명전환 끝냈습니다. 전부 실장님 어머니 명의로 돌렸습니다.” 장도형 부사장이 두툼한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난 개운한 표정의 천상필에게 말했다. “계좌, 확인하셨죠?” “네. 계약금은 잘 받았습니다.” 1억 달러로 만족하지 않는 모습, 이 양반도 평범하게 살기는 틀렸다. “잔금도 틀림없이 드릴 겁니다.”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가족도 만나시고 쉬면서 어디에 정착할지 결정하십시오. 마지막까지 살펴드리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진도준 실장님.” 천상필이 내게 머리 숙이자 우병준 상무가 말했다. “이제 출발할까요? 인천이나 김포 국제공항은 진영기 부회장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을 겁니다. 천상필 씨는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으로 건너가고 거기서 발리행 비행기 타게 될 겁니다.” “밀항하는 겁니까?” 천상필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리자 우병준 상무가 웃음을 터트렸다. “영화 많이 보셨군요. 일본으로 가는 여객선 많습니다. 후쿠오카까지 세 시간이면 가요. 여권이나 잘 챙기세요. 하하.” 천상필이 부산으로 출발하는 걸 확인하고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이 일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직 남아있다. 오랜만에 고향 집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어머니는 저녁 준비하시느라 분주했고 바쁜 아버지도 일찍 돌아오셨다. “부모 얼굴 보러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야?” “겸사겸사 온 겁니다. 안부 인사도 안 드리는 불효자식으로 생각하십니까?” “넌 우리 얼굴 보고 싶으면 식당부터 예약하잖아. 네 어머니 부엌에서 일하는 거 보기 싫다고.” 아버지는 부엌에서 부산떠는 어머니를 가리켰다. “그러니까요. 하지만 오늘은 집에서 밥 먹겠습니다. 밖에서 말씀드리면 식당이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또 뭐야? 무슨 사고를 쳤길래?” “저녁 먹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머니가 차려준 저녁 식사 뒤, 두 분과 거실에 앉았다. “그래 할 이야기가 뭐냐?” 일단 할머니의 미술품 거래부터 말씀드렸다. 순양예술재단이 완전히 망가진 것을 안 아버지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니까 그림 다 팔아서 그룹 주식을 샀다는 말이냐?” “네. 아주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사들였습니다. 그중에는 비상장 주식도 있고요. 할아버지께서 창업 공신들에게 쪼개준 주식도 몰래 사들여서 가치가 상당합니다.” 차마 내가 함정을 팠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 주식 전부 차명이겠지?” “네.” 아버지는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 채신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네가 그 주식을 차지했고?” “맞습니다. 어떻게 아신 겁이니까?” “그 주식이 네 큰아버지 수중으로 들어갔다면 굳이 우리에게 보고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버지는 별것 아닌 것처럼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형님들이 내게 소리 지를지도 모르니 대비하라는 뜻이냐?” “네. 이번엔 어머니도 마음 단단히 잡수셔야 합니다.” 어머니는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네. 이번 할머니의 차명주식을 전부 어머니 명의로 옮겼습니다. 정확한 지분은 이학재 회장님께 확인해야겠지만 그룹 지배지분의 3% 이상은 될 겁니다.” “어, 어머님 지분을 내… 내 앞으로 옮겼다고?” “네.” 숫자보다 그룹 지분을, 게다가 시어머니의 지분이라는 것이 훨씬 충격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비록 더듬었지만 말이라도 했다. 아버지는 너무 놀라 입만 떡 벌렸을 뿐이다. “가장 고생한 며느리가 물려받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머니는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빠르게 충격을 벗어버렸다. 아무리 봐도 주식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친척들의 공격을 걱정하는 것 같지 않다. “도준아.” “네.” 냉정함을 되찾은 어머니는 차분한 음성이었다. “내가 시집와서 겪었던 수모와 모멸감은 네 아버지 덕분에 견뎠어.” 아버지는 어머니 말씀이 마음 아픈지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오늘, 네 덕분에 그 기억을 싹 지웠다. 지금처럼 개운한 기분은 처음이야. 고맙다, 아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어머니의 말에 나와 아버지는 할 말을 잊었다. ======================================= [274] 효자…들 2 기뻐하는 어머니를 보니 평생 맺힌 응어리의 크기를 알 것 같다. 어머니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아버지의 눈치를 슬쩍 보며 일어섰다. “난 들어가서 조금 쉬다 나올게.” 어머니가 거실을 떠나자 아버지가 민감한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일부러 자리를 피해주신 것 같다. “할머니는 지금 어떠시냐?” “수사 확대를 걱정하셨는지 이미 외국으로 떠나셨어요.” “그 정도야? 네 큰아버지들이 못 덮을 것 같아?” 어차피 아시게 될 일,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제가 덮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왜지?” 아버지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화난 것 같지는 않다. “할머니께서 한국에 계시면 제가 힘듭니다.” “마주치는 게 힘들어서?” “아뇨. 절 그룹에서 쫓아내고 싶어 자꾸 사람들을 부추깁니다. 지금까지는 큰아버지들만 부추겼는데 범위를 넓힐 겁니다. 대표이사나 임원들까지요. 그들은 할머니의 말씀을 무시하기는 힘들 테니까, 이래저래 저에 대한 안 좋은 말이 나돌 겁니다.” “그래서? 할머니를 꼭 범죄자로 만들어야겠다?” “검찰출두도, 법정에 서는 일도, 더욱이… 옥살이할 일도 없습니다. 할아버지 생전에 늘 외국에 계셨지 않습니까? 그 생활의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원할 때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건 달라. 그건 유배생활이다.” “호화로운 유배생활이죠. 제가 원하는 겁니다.” 혹시나 화를 내실까 조마조마했지만, 아버지는 곤혹스러운 표정만 지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낀 아버지. 이런 난처한 상황에 밀어 넣은 꼴이 돼 버렸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됐다. 그만해라.” 아버지는 한동안 말씀이 없으셨다. 물끄러미 나만 바라보던 아버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팔순 넘은 할머니, 감옥 가는 일은 없도록 하자. 그것만 지켜 줘.” “네. 유럽에서 이 나라, 저 나라 도망 다닐 일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내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는 어머니가 계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가 아니라 아들인 내 편에 섰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는 법이다. * * * “이서현? 이서현이 누구냐?” “진윤기 사장님 부인입니다. 진도준 모친….” “뭐? 제수씨라고?” “네. 관련 거래세금까지 완납하고 실명전환 끝났습니다.” “이 개놈의 자식. 하필이면….” 진영기 부회장은 분노보다 어이가 없었다. 하필 막내 제수씨라니. 어머니가 아시면 졸도하실지도 모르는 일이다. “법무팀 전원 집합시켜. 차명주식은 어머니 소유였으니까 증여과정의 위법성을 찾아내서 실명전환 무효로 만들라고 해.” “네. 부회장님.” 백준혁 비서실장이 머리를 숙이고 나갔다. 진도준이 말한 목적은 거짓이 아니었다. 차명주식은 덤이었고, 할머니에게 그동안 당했던 수모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그놈이 원했던 것이 맞다. 가장 미워하는 며느리가 당신의 유산을 몽땅 가져가 버리는 것만큼 분통 터지는 일이 어디 있을까?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길래 사람 속을 이렇듯 잔인하게 후벼 팔 생각을 했는지, 진영기는 이놈의 머릿속을 열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 부회장님. 야당 대표님 전화입니다. 진영기는 인터폰을 통해 들리는 비서 목소리 때문에 진도준의 생각을 떨쳤다. “대표님. 바쁘실 텐데 결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렸습니다.” -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부회장님께 확인할 일이 하나 있어서 연락 해보려던 참이었습니다. “네.” - 순양그룹에서 소스가 하나 들어왔는데 이거 괜찮은 거요? “철없는 어린 조카 놈이 어디서 잘못된 이야기를 주워들었나 봅니다. 제 딴에는 야당에 도움이 될까 해서 전해드린 것 같은데, 죄송…. - 응? 아닌데? 아, 문화재 밀반출은 아니고 고가의 미술품이더군요. 우리가 뉴욕총영사관에 확인했어요. 관계자 몇 놈이 사실을 털어놓았고. 그런데 말입니다. 의외의 이름이 나와서 확인해야겠다 싶더군요. 부회장님 모친 존함이…. 진영기는 뱃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 급하다. “대표님. 전화로 이럴 게 아니라 식사라도 하면서 말씀 나누시죠. 잘못된 정보는 바로잡아야 하고 오해도 풀어야죠.” - 그럴까요, 그럼? 제가 스케줄 확인해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진영기를 수화기를 던져버렸다. “거머리 같은 새끼들!” 약점을, 그것도 아주 큰 약점을 손에 든 여의도 놈들이 이걸 빌미로 얼마나 뜯어갈지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 # # 통화를 끝낸 야당 대표의 표정을 살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니 만족한 듯 보인다. “뭐라고 합니까? 대표님?” 원내수석부대표도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우리 진 실장님 제보가 정확한 듯하네. 진영기 부회장이 당장 만나자는군.” 당 대표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진 실장은 이미 이 여사가 연루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아닙니까?” “아주 작은 가능성 정도만 짐작했을 뿐입니다.” “에이, 아닌 것 같은데?” 당 대표는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이거 아무래도 순양그룹 집안일에 말려든 것 같은데, 어떡하나?”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십시오. 지금 야당이 누구 사정 봐줘 가며 있을 때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가 웃음을 거뒀다. “원하는 게 없다?”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실 리는 없고, 어차피 서로의 방향이 같아야 앞으로 가는 법 아닙니까? 제 생각에는 야당의 유리한 쪽이 제가 원하는 것과 일치할 듯합니다.” “작고하신 진 회장님께서 가장 아끼던 핏줄이라더니, 보통이 아니군요. 허허.” “과찬이십니다.” “이거 원, 어려운 선택인데…. 존경하는 회장님의 장남이냐, 아니면 회장님이 가장 아끼신 막내 손자냐….” 이미 결정을 내려놓고 고민하는 척한다. 노회한 정치인의 뻔한 수법이지만 모른 척 넘어가 줘야 한다. “참, 일전에 자제분 수술하셨죠? 병원에서는 잘 됐다고 하던데, 어떻습니까?” “아, 부친이신 진윤기 이사장님 배려로 건강하게 회복 중입니다. 내가 선거 때문에 경황이 없어 인사도 못 드렸어요. 부친께 내가 고마워하더라는 말은 꼭 좀 전해주세요.” “당연히 병원에서 할 일 아닙니까? 아무튼, 아버지께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순양 의료원 VIP 병실 비워놓겠습니다.” 이만하면 생색도 냈고, 남은 건 저 영감이 원하는 말을 해 주는 것이다. “정치와 경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건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정치인과 기업인은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연인 같은 사이죠. 가끔씩 투정도 부리고 삐진 척도 하면서 밀고 당기는 맛이 있어야 상대가 방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진짜 헤어지면?” 당 대표는 진영기 부회장과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는 걸 염려했다. “매력 있는 사람은 언제나 새로운 인연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혹시 압니까? 더 젊고 능력 있는 상대가 나타날지.” 당 대표는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난 양다리도 좋아하네만….” 욕심 많은 영감탱이. 하나라도 포기하는 법을 모른다. “그건 능력의 문제죠.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능력이 있으면 둘 다 잡을 수 있는지 혹시 아오? 젊고 잘생겼으니 연애 잘할 것 같은데, 좀 알려주시오. 흐흐.” “너무 뻗대면 안 되겠죠. 그러다 보면 둘 다 놓치는 낭패를 당하니까요.” 난 물 한잔으로 마시고 티슈로 입을 훔쳤다. 식사는 끝났고 할 이야기도 다 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한 가지 정보를 더 드리겠습니다. 미국에서 움직일지도 모릅니다. 그럼 도저히 숨길 방법이 없어질 테고, 저나 진영기 부회장님도 손 쓸 수 없어집니다. 순양그룹의 힘은 ‘국내용’이니까요.” 어차피 터질 일, 잘 이용하라는 충고를 던졌다. “죽 쒀서 개 주는 일은 막아야지. 잘 먹었습니다. 진도준 실장님.” 야당 대표는 잘 알아들었다는 듯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 * * 주인 없는 집에 아들들이 모였으니 일하는 사람들만 분주했다. 그들은 아들 중 누군가는 이 집에서 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집을 팔아버리면 모두 쫓겨날 수도 있다. 그들은 회장님 살아계실 때보다 더 지극 정성으로 식탁을 차렸다. “야당 놈들이 내 전화를 안 받는다. 만나기로 한 당 대표는 지역구에 내려갔다는 구라까지 쳐.” “그놈들, 이 기회를 버리지 않겠다는 뜻이구먼.” 진윤기는 자신을 노려보는 두 형님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도준이 막아. 너도 어머니가 타향살이하는 걸 원하지는 않겠지?” “어머니 주식도 돌려놔. 그건 어머니 뜻대로 하시도록 해야지.” 두 형의 명령 같은 소리에 진윤기가 말했다. “도준이가 내 말 들을 놈이야? 그리고 애 엄마도 내 말 안 들어. 형수들이 형님들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과 똑같다고. 우리는 마누라 눈치 보며 사는 나이잖아.” “지금 네 농담 받아줄 생각 없다. 말 들어!” 진동기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진윤기를 향해 소리 질렀다. “농담 아냐. 그리고 어머니 휴대전화나 어떻게 좀 해봐. 연락은 할 수 있도록 해 놔야 할 거 아냐.” 진윤기의 불만에 진영기가 움찔했다. 주식을 차지하려고 어머니 주변을 완전히 차단한 것인데 혹시 눈치라도 챈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너나 제수씨, 이제 욕심 많아졌구나. 손에 들어온 주식 아까운가 보지?” “도준이 꺼 보관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함부로 못 하는 거지. 이런 이야기나 하려고 나 불렀어? 시간 낭비야. 주식은 도준이하고 쇼부 쳐.” 진윤기는 두 형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하나만 물어보자. 도준이가 어머니는 절대 귀국 못 하는 조건으로 주식 다 내놓는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 진윤기의 말에 진영기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게 도준이가 원하는 거 확실히 맞아?” 큰 형의 반응에 진윤기는 코웃음을 쳤다. “어머니보다 주식을 더 원하는 이상 형님들도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 없어. 안 그래? 차라리 가져간 주식 포기할 테니 어머니만이라도 집으로 돌아오시도록 하자고 했으면, 시끄러운 일 벌어지지 않도록 내가 도준이를 설득했을 거야.” 머쓱해진 진영기가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 끌어들이지 마. 어차피 유산 싸움 아냐? 승자가 전리품 챙기는 싸움. 내가 보기엔 도준이가 이긴 것 같은데?” 진윤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진동기가 말했다. “아직 끝난 거 아니다. 기나긴 법정 싸움이 기다리고 있어. 법적으로 누가 옳으냐의 싸움이 아닌 건 알지? 변호사 잘 쓰고 판사 잘 고르는 쪽이 이겨. 그 둘 다 도준이보다는 우리가 더 낫다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 “착각하지 마. 도준이 꺼 보관하는 사람이 내 마누라야. 내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것 같아? 법정으로 끌고 가면 이건 내 싸움이야.” 동생의 태도에 두 형님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아직 그들이 꺼내지 않은 카드 한 장이 있었다. 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했고 진동기가 카드를 꺼냈다. “이 집, 도준이에게 주마.” “뭐?” “도준이에게는 이 집의 의미가 특별하지 않아? 특히 이 서재는 그 애에게 시나이 산이나 다름없잖아. 아버지의 선택을 받은 곳이니까. 안 그래?” “이 집과 주식을 바꾸자고? 어이가 없네. 형님이 이 집 주인이야?” 진윤기의 목소리는 힘이 빠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 집은 어머니의 소유다. 주식을 준다면 어머니는 집을 내놓을 것이 틀림없다. “주식 달라고는 안 했다. 이 집 받으면 도준이도 뭔가를 내놓아야겠지? 그건 도준이가 결정할 테니까 말이나 전해.” 진윤기도 안다. 자기 아들이 이 집을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 진 회장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정성껏 차린 음식은 결국 그들이 먹었다. 주인집 아들들 모두 성난 표정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 [275] 효자…들 3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미술품 밀반출 사건은 총영사관 직원까지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움직인 정황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정권의 공직 기강이 얼마나 해이한지, 단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 야당은 외교부 장관의 즉각적인 해임을 요구하며 더불어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공식적 사과를 요구합니다. 또한,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기 위해 특검을 발의할 것입니다……」 아직 순양이나 할머니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야당 대변인은 결전의 의지라도 보여주려는 듯 주먹을 움켜쥐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회견을 진행했다. 저녁 뉴스 역시 미술품 밀반출 사건을 첫 꼭지로 다루며 야당을 도와 청와대를 공격했다. “지금쯤 형님들이 부들부들 떨겠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차라리 어머니와 외국에라도 잠시 나가 계시는 게 어떨까요?” “죄 졌냐? 왜 피해?”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그런데… 할아버지 집은 아깝지 않아?” “큰아버지들은 그 집이 무슨 상징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겠죠. 할아버지를 부모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룹 회장으로만 여겼을 테니까요. 그러니 그 집을 무슨 순양그룹 본관으로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제게는 하나의 장소에 불과합니다. 할아버지와 함께한 장소, 중요한 건 할아버지였지 장소는 아닙니다.” “가치로 계산한 건 아니고? 흐흐.” “차라리 할아버지 산소를 순양미술관으로 이장하고 미술관을 제게 준다면 진짜 고민했을 겁니다.” 갑자기 아버지가 헛기침했다. 당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 멀리 떨어진 무덤. 할아버지의 역사가 시작된 순양박물관이니 그 장소도 괜찮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자식보다 손자가 더 낫다. 이거, 갑자기 부끄러워지는데….”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장소라는 건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니까요. 세상도 군산이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주면 내가 덜 부끄럽고.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떡할 생각이냐? 야당이 저 정도로 소리 내고 외교부 직원의 자백까지 있다면 특검은 피하기 어렵겠는데?” “어떻게 막느냐는 큰아버지들이 해야 할 일이죠. 전 할머니가 이 사건의 주요 참고인이든, 피의자든 관계없습니다. 몇 년간은 귀국할 엄두가 안 날 정도면 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할머니가….” “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걱정하는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내가 아니더라도 일은 더 커질 것이다. 이 사태를 진정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지만, 항상 그러듯 소란을 더 키우는 건 편법을 쓰기 때문이다. 할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게 돈 많은 사람들의 습성 아닌가? * * * “이 명단의 사람들로 특검 구성하세요. 그리고 순양재단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안 됩니다.” “특히 우리 어머니 이름이 나오는 건 결단코 막아야 합니다.” 여야 원내대표 두 사람은 순양그룹의 두 아들이 내미는 명단을 받아들었다. “그동안 우리 순양그룹이 여야불문하고 얼마나 많은 협조를 했습니까? 이번엔 여야가 합심해서 우리 그룹을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진동기 부회장의 노골적인 생색내기에 야당 원내대표는 난처한 표정이 되었고 여당 원내대표는 화색이 돌았다. “우리 입장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당 원내대표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외교부 장관 경질, 뉴욕 총영사관 경질, 해당 직원은 사법 처리. 대통령님의 직접 사과는 불가. 이건 야당이 더는 청와대를 공격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순양예술재단의 책임 있는 사과문 발표. 이렇습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 불똥이 가장 두려운 곳은 순양그룹이라는 걸 안다. 여당은 순양을 걸고넘어져야 유리한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장난하나…! 미술품 밀수에 외교부 자원이 동원됐어요. 우리나라가 뭐, 아프리카 후진국이요? 콜롬비아 마약상이냐고?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질러 놓고 청와대는 쏙 빠진다? 말 같잖은 소리!” “말조심해요. 지금 외교부 장관, 당신네들이 추천한 인물이야. 당신네 추천인사 세 명을 내각에 포함하지 않으면 장관청문회 보이콧한다는 협박 때문에 장관 임명한 거 아니요!” “지금 와서 옛날이야기 들추면 뭐하나? 장관 관리는 엄연히 대통령이 할 일인데…!” 서로 으르렁대며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겁먹은 개는 짖기만 할 뿐 물지 않는다. 주인이 뛰어나와 말려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진영기, 진동기는 두 정치인의 말싸움을 한동안 지켜보기만 했다. 넓게 보자면 여당이나 야당이나 한 통속이다. 이 싸움은 적당히 흠집 좀 내고 전리품이나 잔뜩 챙기면 끝날 일이라는 걸 두 원내대표가 모를 리 없다. 저 둘에게 순양은 공통의 먹잇감이다. “적당히들 합시다. 속 보이는 말싸움 그만하고 빨리 합의해요.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우린 관심 없어. 그리고 순양재단의 책임 있는 사과? 꿈도 꾸지 마쇼. 도둑질한 직원 몇 놈 옥살이하는 걸로 마무리할 겁니다. 아시겠어요?” 진영기가 책상을 탕 치며 소리치자 두 원내대표는 입을 닫았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 이 정도로 끝내자는 겁니다. 야당이 이 일을 더 키우려는 생각이라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습니다. 물타기 할 것도 많고 정국을 단번에 뒤집을 건수도 많아요. 언론이 누구 편에 설지 다 아시지 않습니까?” 진동기가 슬쩍 덧붙였다. 이 집안의 막내인 진윤기가 물타기 할 소스는 엄청나게 쥐고 있다. 딱 일주일만 연예계 대형 스캔들을 터트리면 여의도는 뉴스에서 빠질 것이고 여야 할 것 없이 의원들 뒷덜미를 잡고 있는 손이 바로 순양 아닌가? “그리고 청와대도 놀고 있으면 안 됩니다. 미국에서 이 문제를 더 크게 키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쪽 언론이 떠드는 것쯤이야 우리 언론이 받아쓰기만 하지 않으면 국내는 알 도리가 없으니 괜찮고….” 진동기는 여당 원내대표를 노려보며 말했다. 청와대에 정확히 전달하라는 압박이 숨어있는 눈빛이었다. “정치적 부담이 크겠지만, 워싱턴에서 이 문제를 더는 거론하지 않도록 힘 좀 쓰십시오. 외교 문제가 아니라 범죄자 개인으로 초점 맞추면 될 일 아닙니까? 우리 힘이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적극 돕겠습니다.” 하지만 두 의원은 서로 눈치만 보며 즉답을 피하자 참고 있던 진영기가 폭발해 버렸다. “4년 남았다 이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총선 아직 4년 남았으니 자리보전은 문제없다 이거 아니요?” “부회장님, 오해십니다. 우리도 이 문제를 원만하게 풀려고….” 야당 원내대표가 달래듯 말했지만 터져버린 진영기를 막을 수 없었다. “좋아. 마음대로 하시오. 청와대도 불러내고 외교부도 불러내. 순양재단도 불러내고 원한다면 우리 어머니 이름도 까. 대신 다 같이 진흙탕에서 뒹굴 각오는 해야 할 거요.” 진영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4년 뒤가 아니라 의원직 박탈당할 인간들 명단부터 작성해서 내년 재보궐 선거 준비하는 게 우선일 게요. 그냥 하는 말 아니니까 명심해.” 미리 입 맞추지 않아도 역할은 분명하게 나뉜다. 배드캅 진영기가 씩씩대며 나가자 굿캅 진동기가 차분하게 말했다. “이거, 미안합니다. 우리 형님 급한 성격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뒤끝도 없어요. 저러다 맙니다.” 하지만 그의 태도도 형님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저기 알아보니까 이번 선거에서 불법을 저지른 의원님들 많더군요. 특히 야당 의원님들 숫자가 꽤 되던데…. 검찰이 기회만 노리고 있습디다. 괜히 검찰 자극하지 말고 조용하게 끝냅시다.” 순양에 줄 닿는 검사들을 움직이겠다는 명백한 협박이다. “올 하반기, 순양그룹 공채 인원 두 배로 늘리겠습니다. 그리고 의원님들 지역구에 공장도 올리죠. 미리 지역구 내려가셔서 자랑 좀 하십시오. 순양그룹 투자를 유치한 공적이면 지역민들이 좋아라 할 겁니다.” 두 원내대표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준비해 온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순양그룹으로 향하는 화실을 막으려면 특단의 조치도 필요합니다.” “특단?” “네. 순양예술재단을 해체하십시오.” “뭐요?” “우리도 감사원을 통해 보고받았습니다. 드러난 재단의 재산은 얼마 되지도 않더군요. 어차피 미술품과 부동산이 전부 아닙니까? 부동산은 순양그룹에서 헐값에 매입해서 그 돈은 사회에 환원하고 미술품은 국립미술관에 기증하십시오.” “이봐요!” 진동기가 소리쳤지만, 여당 원내대표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진품은 다 팔아버렸다는 거….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더군요. 그거 정리하시라는 말입니다. 감사원에서 미술품 하나하나 조사하면 재단 이사장님이신 이필옥 여사는 보호 못 합니다. 제 말, 무슨 뜻인지 모르시겠습니까?” 이번 사건이 아니라 이미 저지른 범죄를 덮어주겠다는 선의다. 정부도 이 일이 더 크게 번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진동기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부가 나서서 어머니의 범죄를 지워주겠다는데 그깟 부동산 수백억 정도야 미련 가질 필요가 없다. “좋습니다. 그룹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대신 정리할 시간은 충분히 주셔야 합니다.” 혹시 모를 알짜배기 재산을 빼돌릴 시간을 달라는 뜻이다. 여당 원내대표는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대신 더는 잡음 나지 않도록 말끔히 지워주세요.” “대신 확실히 해야 합니다. 순양의 이름은….” “재단 해체 발표 하나로 끝입니다. 약속드립니다.” 진동기는 확답을 받고 일어섰다. “두 분 차 트렁크에 약소하나마 선물 좀 넣어 뒀습니다. 특별 당비라 생각하시고 부담 없이 쓰십시오.” 특히 당비라는 단어에 힘주어 말하는 걸 보니 혼자 꿀꺽하지 말라는 뜻이다. 대신 다 같이 나눠 쓸 만큼 넉넉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두 원내대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먼저 빠져나가는 진동기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이것이 바로 진도준이 바라는 것 아닌가? 그놈은 친할머니의 모든 흔적을 한국에서 지워 버렸다. * * *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던 야당이 특검이 시작되자 입을 닫았다. 언론도 공정한 수사를 기대한다는 마지막 코멘트를 남기고 미술품이나 그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대신 행정수도 이전문제가 정가와 언론의 최대 쟁점이었고 순양예술재단 밀수 사건은 조용히 덮이는 듯했다. 재단의 해체와 사회 환원 발표도 언론에 반짝 등장하고 사라졌다. 물론 밖에서 볼 때만 그렇다. 그룹 내부는 발칵 뒤집힌 지 오래다. “신용 등급이 떨어지는 건 각오했잖아. 그런데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냐? 국제신용등급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무디스, 피치, S&P 등 빅3는 일제히 순양그룹 계열사 전체의 등급을 하향 조정해서 발표했다. 국내 기업 중 유일하게 A+ 등급인 순양전자가 A로 떨어졌고, 나머지 계열사는 전부 A-도 아닌 BBB 등급이었다. 해외 보험업계는 순양그룹 전체를 아예 BBB-이하로 취급하며 모든 보험요율을 높여버렸다. “도대체 원인이 뭐야? 이놈들이 갑자기 왜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고?” “그게….” “빨리 말 안 해?” “그 그림 사건 때문에 18억 달러를 지급한 사실이 업계에 퍼졌습니다. 금액이 크다 보니 세계적인 보험사 서너 군데가 리스크를 분산했다고 합니다. 그놈들이 우리 순양의 2차 보험요율을 올려버려서 어쩔 수 없다고….” 진영기 부회장은 머리를 싸맸다. 수출의 해상 보험은 새 발의 피다. 보험료의 몸통은 바로 해외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업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보험이다. 각국의 사정에 맞춰 크고 작은 필수 보험이 한둘이 아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진동기는 더하다. 해외 건설 수주 때 1달러라도 줄여서 견적을 넣어야 하는데 보험금이 껑충 뛰었으니 그만큼의 경쟁력을 잃었다. 진영기는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의 주식을 되찾기 위한 법적 절차도 미뤘다. 지금 정권은 아무래도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서민의 대통령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노골적으로 편드는 일을 일절 없었다. 정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건 전부 다음으로 미루고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도준이, 이 새끼….” 진영기는 그놈 때문에 손해 본 돈을 생각하니 갈아 마셔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 [276] 머리 숙이는 것쯤 1 앞에서는 머리 조아리며 예의 바른 조카 모습으로, 그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지만 속으로 칼을 품고 있는 큰아버지들과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갔다. 호주제가 폐지되고, 박지성 선수가 한국 선수 최초로 꿈의 무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 진출했다. 서울시장의 숙원 사업인 청계천 복원이 2년간의 공사 끝에 2005년에 완성됐다. 황우석 교수의 논문 파동으로 나라가 뒤숭숭했으며 2006년 12월 30일 이라크의 독재자인 사담 후세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내 나이 서른이 넘자 집안에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나와 상준 형만 남았다. “뭐…. 넘쳐나는 돈으로 이 여자, 저 여자 넘보며 방탕한 생활 하는 것도 아니고…. 연애할 시간 없이 자기 일 하느라 바빠서 못하는 결혼, 재촉할 생각 없다.”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은 말로 부담 주지 않았다. “근데 너 여자친구는 계속 기다려 준대냐? 여자 나이 서른이면 많이 초조할 거야.” “판사는 딴 생각할 겨를도 없을 만큼 일에 치여 사는 공무원입니다. 그다지 초조해 보이지 않습니다.” “과연 그럴까?” “자신감도 있으니까요. 나 아니더라도 손 내밀면 쪼르르 달려와 떠받들어 모실 남자들이 번호표 받고 기다립니다. 아쉬울 게 없는 애라니까요.” 아버지는 한심한 눈빛으로 변했다. “몰라서 하는 소리라면 연애결혼 포기하고 중매 결혼하는 게 답이고, 알고도 하는 소리라면 독신으로 살겠다는 뜻이구먼. 그런데 난 내 아들이 독거노인으로 늙어가는 꼴은 못 본다.” 결혼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카드다. 모든 일이 잘 풀려서 이 카드를 내가 원하는 곳에 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열심히 뛰어다니며 일해야 한다. 특히 올해는 황금 같은 시기다.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차근차근 밟아나가야 한다. 자꾸 성급한 욕심이 앞섰지만, 머리를 흔들며 욕심을 떨쳤다. 계획의 바탕이 욕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항상 그렇듯, 욕심은 계획에 구멍을 낸다. 구멍 난 부분을 채우는 게 바로 욕심이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 위의 배처럼 물살에 맡기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다 보면 기회가 온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준비를 철저히 해 두는 게 승리의 비결이다. 준비는 다가올 위험을 미리 아는 자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다. 다행히 난 HW 그룹의 중요 사업에 대한 보고서를 빠짐없이 확인했고 언제든 위험을 경고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회장님. 중동 진출은 보류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학재 회장은 어이가 없는지 짧은 탄식부터 내뱉었다. “후-. 새해 첫 출근이다, 이놈아. 아직 시무식도 안 했는데 초를 쳐?” “그러니까 미리 드리는 말씀입니다. 중동 두바이 진출에 총력을 다하자…. 이런 말씀 하셨다가 다시 취소하면 회장님으로서 면이 서질 않잖습니까?” 진중한 내 표정을 확인한 이학재 회장은 인터폰에 대고 말했다. “시무식은 각 계열사 사장들이 진행하라고 해. 사내 방송은 없을 테니까 기다리지 말라고 전하고. 참, 사장단 회의도 미뤄. 오후에 결정할 테니까.” 그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이제 말해봐. 지금 건설업계가 들썩이는 건 알고 있겠지? 제2의 중동 붐이라고까지 말해. 오일머니를 잔뜩 벌어들일 절호의 기회라고. 그런데 그걸 발로 차버려?” “차는 게 아니라 들어가지 않는 겁니다.” “그게 그거다. 이유가 뭐냐?” “지금 두바이 호재는 모래 위의… 아니 거품 위에 건설하는 모래성입니다. 바닥도, 기둥도 전부 위태롭기 짝이 없어요. 두바이는 모래 폭풍으로 변해서 우리를 덮칠 겁니다.” “거품과 모래라…. 근거는?” “미국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학재 회장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아주 진지하고 차분한 표정과 말투였다. “지구상에서 그 어떤 헛소리를 해도 내가 귀담아들어야 하는 유일한 사람이 너라는 걸 알아. 그렇지만 이건 좀 심하다. 미국이 무너지다니?” “사실입니다. 지금 미국은 수십조 달러에 달하는 부실 빚더미 위에서 돈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부실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면 무너지지 않습니까? 이제 곧 돈 잔치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침몰할 것입니다.” “계속해.” 그는 귀를 세우며 내 말에 집중했다. “미국 주택 가격이 작년부터…. 정확히는 2006년 9월부터 주춤하면서 하락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딱 10년 만에 두 배로 뛰었지만 더는 아닙니다.” “10년 동안 두 배 뛴 것이 그렇게 이상한 거냐? 2000년, 닷컴 버블이 끝나서 돈이 부동산으로 몰려서 그런 거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그건 부실이 아니라고. 실제 돈이 이동한 거니까 말이야.” “실리콘 밸리 투자자들의 돈이 아무리 많아도 닷컴에서 빠져나간 돈이 미국 집값을 두 배까지 끌어 올릴 정도로 많다고 보십니까? 이건 평균 인덱스에요. 미국 깡촌을 제외하고 괜찮은 주택가는 세배 이상 뛴 겁니다.” “그렇다 쳐도 그게 왜 부실이지?” “다들 빚내서 집을 샀으니까요.”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야.” “우리나라 은행이 백수에게 집 사라고 대출해주지는 않죠. 또한 건실한 직장인이라도 집 한 채를 담보로 은행 서너 곳이 너도나도 돈을 빌려주지는 않습니다.” 이학재 회장이 눈을 치켜세웠다. 미국 은행이 한국과 달라 공격적인 대출도 마다하지 않는 건 알지만, 이건 숫제 돈을 버리는 행위다. 한국에서 이런 식의 대출을 했다가는 부정 대출로 감옥행을 피하지 못한다. “그게 사실이야?” “네. 이런 짓이 수년째입니다. 이제 무게를 못 견딜 때가 왔습니다.” “도대체 넌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게냐?” “뉴욕 미라클은 투자회사입니다. 매일 제게 보고서를 보내옵니다. 전 그걸 분석하고요. 그리고 뉴욕 직원들은 꽤 유능합니다. 그들은 진작부터 위험 신호를 감지하고 있었어요.” 미국의 자금 경색이 가져올 파장, 그 파장이 중동에 미칠 영향. 이학재 회장은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회장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우린 그 위험을 피하고….” “딴 놈은 몽땅 빠트려야지.” 역시, 이 양반도 할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악당이다. “그런데 너만 위험하다고 주장하고 있어. 어디에서도 경고 보내는 놈이 없다. 우리 미국 지사도, 순양그룹 미주법인도 아무 말 안 해. 네 말이 틀려버리면 우리만 잔칫상에서 빠져 남들이 배터지게 먹는 모습을 손가락 빨면서 구경만 해야 한다.” “IMF 때를 생각하십시오. 단 한 놈도 위험하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그런데 전 그때 순양자동차를 챙겼고 아진그룹과 대아건설을 인수했습니다. 저 혼자 돈 잔치했죠. 잊으셨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금 헛소리나 다름없는 네 말을 귀담아듣는 거다. 믿기지는 않지만….” “믿기지는 않지만 믿으실 거잖습니까?” “일단은. 나도 좀 알아봐야 확신이 설 것 같다. 부실이 쌓여도 연착륙할 가능성을 버릴 수는 없어. 미국이 쌓아 올린 부는 우리나라와 비교가 안 돼. IMF 사태와 비교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다.” 보류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 뜻대로 할 것이다. 리스크가 클수록 신뢰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진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네 말이 옳다고 치면 순양건설은 타격이 클 거야. 회복하기 어려워.” “건설 하나로 되겠습니까? 건설, 중공업, 토목, 물산까지 휘청거리게 해야죠.” 이학재 회장은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다시 입을 열 때는 야릇한 미소마저 보였다. “당분간 건설 실적은 바닥을 치겠구먼.” “그 실적 부진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겠습니다. 대주주로서.” “내가 진동기 부회장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는 건?” 이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일, 바로 모시던 사람의 자식들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것. 대를 이은 머슴같이 느껴지는 일. 이건 대단한 보상을 받아야 마음이 풀릴 일이다. “진동기 부회장님 백수 되면 HW 건설 사장 자리 제안할 생각인데…. 그 제안 직접 하시면 어떨까요? 마음이 좀 풀리겠습니까?” 이학재 회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 하하.” * * * “누구?” “HW 이학재 회장님입니다.” “연결해.” 진동기 부회장은 크게 숨 한 번 쉬고 수화기를 들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 십니까? 이학재 실장… 아니 회장님. 죄송합니다. 아직 회장이라는 직책이 입에 익지 않아서 실수했습니다그려.” - 실장일 때가 더 좋았을지도…. 구멍가게 같은 회사 회장이 되니까 걸리는 일이 뭐가 이리 많은지 모르겠어요. 이거, 신세 한탄하려고 연락한 건 아닌데….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 저녁 식사나 한번 할까요? 내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진 부회장도 솔깃할 겁니다만. 솔깃한 이야기? 빈정 상해 멀어진 친구가 다시 연락하는 이유는 보험 들어달라고 부탁할 때 외에는 없다. 절대 솔깃하거나 도움되지 않는 이야기가 뻔한데도 진동기는 순순히 응했다. “솔깃한 이야기 없어도 회장님께서 식사하자는데 마다할 제가 아닙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간의 회포나 좀 풀죠.” - 그럼 오늘 저녁 어떨까 합니다만. “그러시죠.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데…. 하하.” 자기 형제들을 무시하던 이학재의 눈빛. 아버지의 신임을 등에 업고 늘 지시만 하던 그의 태도. 그런 그가 급히 만나자고 하는 걸 보면 분명히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아쉬운 소리를 하는 그를 만나 한껏 비웃어주고, 적선하듯 조금 도와주며 비굴한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 * * 진동기 부회장은 오늘 저녁 두 번 놀랐다. 오랜만에 만나 이학재의 변한 모습이 첫 번째다. 외모는 그리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 아버지를 모시던 때의 그 날카로움과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가 보이는 온화한 미소와 소탈한 웃음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이 사람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궁금할 지경이었다. 두 번째는 그가 만나자고 한 용건 때문이다. 아쉬운 말을 꺼내고 어려운 부탁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부탁인 건 분명한데 어떻게 보면 양보에 가깝다. 진동기는 마음가짐을 고쳐먹었다. 이학재 회장의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꼭 붙잡아야 한다. “그러니까 두바이 프로젝트에 손을 잡자는 말씀이십니까?” “결론은 그런 셈이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이학재는 진동기의 의심 가득한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실력문제죠,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실력? 설마 대아건설 실력이 미진하다는 뜻입니까?” 이학재는 한숨을 내쉬고 술 한 잔을 들이켰다. “큰 프로젝트는 상암동이 전부더라고. 그리고 경험 많은 대아건설 초기 멤버들은 전부 짐 싸서 나갔고. 알차고 내실은 탄탄한데 경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두바이에서 빌딩 한두 개쯤이야 문제없겠지만, 달랑 그거 먹으려고 나설 수는 없으니까.” 해외의 큰 프로젝트는 내수와 견줄 수 없는 리스크를 안는다. 리스크가 큰 만큼 크게 움직이고 크게 먹어야 하는 판인데 이건 경험이라는 자산 없이는 불가능하다. “경험 많은 대아의 초기 멤버들은 전부 돈 빼먹다가 걸린 놈들이니 회사 차원에서도 놔둘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허허, 그거 참.” 진동기는 기쁨을 감추기 위해 안타깝다는 듯 너털웃음으로 대신했다. “그럼 손잡는 형식은 생각해 두신 게 있습니까?” “HW와 순양의 컨소시엄은 어떨까 생각합니다만.” 협상의 시작이 컨소시엄이면 마지막은 하청으로 끝내면 된다. 진동기는 두 회사가 나눠야 할 파이를 재빨리 계산하기 시작했다. ======================================= [277] 머리 숙이는 것쯤 2 인근 중동 국가와 달리 석유자원이 거의 없는 두바이는 중동의 물류 허브로 일찍부터 발전해왔다. 2000년대 들어 외국자본의 대규모 차입과 거대 토목공사에 의존한 두바이의 발전은 초고속 성장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2006년 7월,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소속 자치정부인 두바이는 이 거대한 재건 프로젝트를 도맡을 기업의 필요성을 느껴 두바이월드를 설립했다. 두바이월드(DubaiWorld)는 국영기업으로서 이 엄청난 발전의 선두에서 지휘하고 이끄는 기업이며 두바이월드는 세계 최대 인공섬 ‘팜 주메이라’를 비롯하여 팜 제벨알리 교량 공사, 7성급 호텔로 알려진 ‘버즈 알 아랍’을 시작으로 두바이 월드 센트럴 계획을 발표했다. 두바이 월드 센트럴은 두바이 알 막툼 국제공항과 공항 주변에 여러 시설을 건설하여 문자 그대로 세계의 중심 도시를 만들 계획이며 공사가 끝나면 연 1억6천만 명의 승객과 1,200만 톤의 화물을 취급할 전망이다. 또한, 제벨알리 자유무역지역의 물류시설에 26억 달러를 투입하고, 거대한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뉴욕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마천루의 도시를 만든다고 발표했다. 확정된 금액만 300억 달러에 이르렀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자금이 흘러들어 갈지 모르는 황금… 아니, 오일의 땅이 전 세계 기업을 유혹하는 중이다. 그런 곳에 손을 잡고 함께 가자는 이학재의 제안이 반갑기까지 한 진동기였다. “순양건설, 토건 그리고 물산이 지금 ‘부르즈 두바이’ 공사에 많은 자원을 쏟아부은 걸로 아는데…?” 2004년 착공한 부르즈 두바이는 두바이 마천루의 상징이다. 첨탑을 포함하여 829.8m, 건물 높이로만 따지면 828m, 163층이며 완공되면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건물이 된다. 이학재의 말에 뜨끔한 진동기였으나 변함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노가다 인부만 대거 투입했지 핵심 인력은 여유 많습니다.” 부족한 인력, 자원, 돈을 HW 그룹에서 끌어올 수만 있다면 훨씬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면 교활한 이학재가 무슨 술수를 부릴지 모른다. 늘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 그것이 협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그럼 다행이고. 아무튼, 내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주기 바랍니다.” “회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요? 공항? 신도시? 아니면 물류?” “다다익선 아니겠습니까? 턴키로 전부 먹을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고.” 이학재의 입에서 뻔한 이야기가 나오자 진동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 아시는 분께서 그런 두리뭉실한 말씀을 하시다니요.” “자금이야 얼마든지 갖다 대리다. 우리 뒤에는 미라클이라는 든든한 물주가 떡하니 버티고 있고, HW 그룹의 사내 유보금도 만만치 않아요. 이미 말했듯이 우린 경험이 부족하고 기술력이 조금 못 미친다, 이 뜻입니다. 서로 부족한 걸 메워줘야 컨소시엄 아니겠습니까?” 이학재는 이쯤에서 옵션 하나를 내밀었다. “옛정을 생각해서 제안하는 건데, 내키지 않으면 지금 말씀하시죠.” 객관적인 사실만 본다면 당장 손잡아야 한다. 좋은 사업 계획이 있으니 돈 대달라는 놈은 피해야 하지만, 빵빵한 자금을 들고 동업하자는 사람을 거부하는 장사꾼은 없다. 그런데 옛정을 생각하면 제안하지 않는 게 정상이다. 순양그룹에는 좋은 기억이 있을지 몰라도 순양의 두 부회장에게는 나쁜 기억만 있을 것이다. 이자가 노리는 게 뭘까? 자신을 훑듯이 살피는 진동기를 보며 이학재 회장은 피식 쓴웃음을 흘렸다. “내키지 않으면 못 들은 걸로 하고.” “단번에 결정할 문제가 아닌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는데, 우리 부회장님 표정이 반기는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요.” “나눠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혼자서는 다 못 먹을 만큼 양이 많으니 나눠 먹지 않으면 구경만 해야 할지도 몰라요. 아무튼… 잘 생각해서 빨리 알려줘요.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제가 거절하면 당연히 다른 곳과 손잡으시겠지요?” “물론, 사실 이 제안은 대현에서 먼저 왔어요. 내가 성호 그룹과 남광 그룹 같은 순위 좀 떨어지는 회사들 모으려고 깃발 준비 중이었다는 걸 어디서 들었나 봅디다.” 진동기는 둘 다 뻥이라는 걸 안다. 단지 미래형을 과거형으로 바꾼 것이다. 순양이 거절하면 저런 식으로 움직이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긍정적인 검토, 빨리 끝내고 곧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회장님. 그래도 순양그룹이 이 회장님 친정 아닙니까? 우리가 함께하는 게 가장 보기 좋을 겁니다.” “보기만 좋아서야 되겠습니까? 서로 실속도 챙겨야죠. 그럼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식사나 마저 합시다.” 남은 식사를 하면서 분위기는 좋았다. 하지만 진동기는 이학재가 던진 제안이 왠지 덫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고소한 치즈가 놓인 쥐덫. 하지만 쥐덫의 모습은 그려지지 않고 치즈의 고소한 향기만 선명했다. * * * “무리한 부탁은 안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큰아버지.” “이게 왜 무리한 것이지? 합리적인 거 아냐?” “합리와 부당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나이 먹을수록 뻔뻔해지는 건 남자의 특징인가? 아니면 우리 집안 남자의 특징일까? 둘째 큰아버지는 두바이 특수를 위해 미라클이 HW 그룹에 투자할 자금을 아예 순양으로 돌리자고 말한다. 분명히 이학재 회장과 만난 사실을 나도 안다는 걸 모를 리 없건만 이렇게 새치기를 할 줄이야. “미라클도 손해 보는 게 아닐걸? HW 그룹에 괜히 쿠션 먹는 꼴밖에 더 돼? 프로젝트 메인은 우리 순양인데?” “저도 압니다, 큰아버지. 하지만 한국 미라클은 이제 이사회에서 결정을 내린 뒤 미국의 최종 승인 하에 움직입니다. 오세현 대표가 은퇴나 다름없이 지내자 미국 측에서 내린 결정이라고요. 전 한국 미라클의 이사회에도 참석 못 합니다. 심사역이 제 역할입니다.” “내 생각엔 그것보다는 더 결정권이 있지 싶다.” “네, 더 있어요. 발언권 강한 심사역. 그게 전부라고요.” 미심쩍어하는 그를 향해 못을 박았다. “그리고 HW의 대주주가 미라클입니다. 제 식구 밥벌이를 더 챙기지 우리 순양을 왜 챙겨줍니까?” “그래? 이거…. 괜한 기대를 잠시 했구먼.” 그의 표정이 변했지만 실망한 모습은 아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니?” 이거였다. 둘째 큰아버지가 나를 떠본 진짜 목적은 지금부터 나올 것이다. “너도 알겠지만, 두바이 신도시 건설은 엄청난 자금이 선 투입되어야 한다. 이학재 회장이 제안한 컨소시엄이라는 게 물주 하겠다는 거다. HW, 예전 대아건설은 이런 대규모 공사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돈 좀 대주고 우리 순양의 노하우를 빼가려는 술책이야.” 잘못짚어도 한참 잘못짚었지만 난 동의하듯 머리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 “돈은 어디서든 구할 수 있어. 하지만 외부 자금을 끌어 쓸 이유가 없다고 봐.” “그렇죠. 그룹 자금 쓰고 부족분만 끌어들이면 되죠.” “그런데 지금 중공업 부문은 이미 중동에 돈을 쏟아부었거든. 자금 여력이 없어. 남은 곳은 전자, 그리고 금융 부분이다.” 사실일까? 과연 주력인 건설과 중공업의 자금이 씨가 말랐을까? “전자의 자금을 끌어오는 건 좀 그렇고…. 금융 부분에서, 그러니까 네가 돈을 준비해 주면 어떻겠니? HW를 굳이 끌어들이지 않아도 되잖아.” 대답 잘해야 한다. 정말 그룹 내부자금으로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이학재 회장이 먼저 접근한 이유가 나 때문인지 확인하는 것인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이럴 때는 먼저 나와 무관한 일이라는 걸 알리는 게 우선이다. “저도 여유 자금이 없습니다.” 대답은 짧게. 긴 설명은 변명으로 혹은 거짓으로 들리는 법이다. 둘째 큰아버지는 믿지 못하는 표정이다. “금융 기업이 돈이 없다? 나와 함께 사업 진행하는 게 싫은 게냐?”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2년 전부터 여유 자금 전부를 미국 파생상품에 투자 중이거든요. 미심쩍으시면 직접 확인하셔도 됩니다.” “파생상품?” “4%대의 시중금리보다 두 배 이상의 수익을 꾸준히 내는 안정적인 투자처입니다.” “분산투자가 아니라 올인?” “네. 분산하는 게 정석이지만 선택지가 없어요. 투자 상품 중에 트리플 A 등급만 고르다 보니 그렇습니다. 회사 자금이니까 안전이 우선이죠.” “금리의 두 배, 트리플 A 등급이면 너무 좋은데?” 이건 또 뭐지? 하여간에 돈벌이라면 눈빛이 달라진다. “그러니까요. 제가 왜 회사 여유 자금을 전부 썼겠습니까?” 그룹의 자금을 쓸 수 없다면 우리 큰아버지는 이학재 회장을 선택할까? 아니면 욕심을 덜 부리고 할 수 있는 능력만큼만 진행할까? 쉬운 방법을 선택한다면 장사지 사업이 아니다. 누가 뭐래도 진동기 부회장은 사업가 아닌가? * * * “이거 한 번 봐라. 진동기가 던져준 합작 제안서다.” 이학재 회장은 조금 화가 난 듯 보였다. 제안서를 살펴보니 HW를 완전히 호구로 생각한다는 것이 읽혔다. “돈 대고 수익이나 좀 챙겨라, 이 말이군요.” “그것도 은행이자보다 조금 더 얹었어.” “뉘앙스가 싫으면 말고. 딱 이건데요?” “그러니까. 여유 부릴 처지가 아닐 건데…. 나랑 마주치기 싫다는 건지, 원.” “돌다리 두드리는 것 같습니다.” “확인? 날?” “네. 회장님께서 선의를 가지고 다가올 리가 없다는 걸 전제에 두고 생각하는 거죠. 뭔가 있는 게 분명한데 그걸 모르니 불안하기도 하겠죠.” 이학재 회장은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HW와 순양건설이 손잡는 건 틀렸다. 이놈, 안 물어.” 그럼 물게 만들어야지. “미끼가 약한가 보죠. 큼지막한 거 하나 던지죠.” “뭐? 돈도 싫다는데?” “하지만 남이 돈 버는 건 더 싫을 겁니다.” “뭔 말이야? 정확히 말해.” 내 얼굴에 걸린 웃음의 의미를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삼천억 정도면 덥석 물지 않겠어요?”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계속하니 그의 표정에 짜증이 보인다. 화내기 전에 얼른 말했다. “삼천억 날린다 생각하고 단독으로 들어가시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들어가는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들어갑니다. 어차피 공사 대금은 못 받습니다. 아니, 받을 수도 있겠지만 아주 오랫동안 악성 채권으로 남아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단독으로 들어간다면 이게 진심이라고 생각하겠죠.” 삼천억을 버린다고 해도 그리 놀라지 않는다. 가진 게 돈밖에 없다는 건 이럴 때 정말 편리하다. 판세를 언제든 바꿔버릴 수 있는 수단을 마음 놓고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기엔 미친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돈 가진 자의 특권이며 힘이다. “미끼 더 큰 걸로 하자.” 이학재 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미 던져놓은 구라가 있는데 그걸 사실로 만들면 판이 더 커져. 성호 그룹과 남광 그룹을 끌어들이마. 각각 삼천억씩 내서…. 아니, 딱 1조 원 맞추고 두바이로 들어가면 진동기 부회장도 앗! 뜨거라 할걸?” 고만고만한 놈들 셋이 모여 잔칫상에 덤벼들면 재빨리 달려와 대장 노릇 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학재 회장 혼자가 아니니 의심도 사라질 것이고…. 무릎이라도 탁 치고 싶었다. 우리 학재 회장님, 역시 선수다. ======================================= [278] 머리 숙이는 것쯤 3 <성호 토건, HW 건설, 남광 개발. 두바이 특수를 위한 컨소시엄 확정. 컨소시엄은 항시 열려 있으며 자격을 갖춘 건설사라면 언제든 함께할 계획이라고 발표. 업계, 최소 2조 원대 이상 수주 예상.> “하! 이것 봐라…. 이학재…. 진심이었나?” 진동기 부회장은 조간신문을 툭 던지고 인터폰을 눌렀다. “두바이팀, 전부 회의실로.” 순식간에 모인 십여 명의 사람들에게 신문을 던졌다. “모두 이거 봤지?” “넵.” “어때? 바람 들어간 회사 많아?” “모두 들썩이기는 하는데 이 컨소시엄에 합류할만한 규모의 회사는 몇 안 됩니다. 커트라인을 상당히 높게 잡았다고 모두 투덜거리더군요.” “그러니까 언론 플레이다?” “그렇게 예상합니다.” 진동기는 두 갈래 길을 생각 중이다. 먼저, 독야청청! “우리 자금 사정, 별로지?” 가장 취약한 곳을 물어보니 모두 눈치만 살폈다. “인천 신도시에 묶은 돈은 언제 풀릴 것 같아?” 장밋빛 미래가 확실하다며 그 지역을 선점하기 위해 온갖 로비를 벌였고, 그 결과 가장 넓은 구역을 확보했다. 하지만 장미꽃은 고사하고 가시밭길만 걷는 중이다. 정부 차원의 제반 인프라는 언제 깔릴지 모르고 회색 시멘트의 고층 건물만 즐비한 유령도시 같은 결과만 남았다. 미분양이 속출했고 꽁꽁 묶인 자금은 언제 풀릴지 기약도 없다. 정권이 바뀌면 정부에 책임을 떠넘길 속셈으로 근근이 버티는 중이다. “다음 정권에서 돌파구를 열지 않을까 예상합니다만.” “정권 안 바뀌면?” “그건 장담할 수 있습니다. 여당은 강력한 대선 후보 없이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도토리 키재기 중이고 야당은 강력한 두 후보가 경선에서 이기기만 하면 됩니다. 본선보다 예선이 더 어려운 형국입니다.” “손에 쥔 건 어음인데… 당장 현찰이 필요하니, 이거 미치겠구먼.”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이 모시는 상전이 진영기가 아니라 진동기라는 것에 감사했다. 인천 신도시 사업을 강력히 밀어붙인 사람은 진동기 부회장이었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시작된 어려움이니 아랫사람을 들들 볶지는 않는다. 진영기 부회장이었다면…? 자신이 밀어붙였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고 미분양 물량 털어내라고 매일같이 닦달했을 것이다. 물론 애먼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열댓 명은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부회장님. HW 이학재 회장이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시죠.” 두 번째, 동맹. 이건 아랫사람들도 생각하는 방법이다. “이제 와서?” “컨소시엄은 열려 있다. 이건 우리 순양을 향한 구애가 아니겠습니까?” 진동기는 회의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같은 의견이야? 얘들하고 손잡아?” 신문을 흔들며 묻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금융권에서 최대한 돈 땡겨. 부족분만큼만 얘들하고 나눌 거야.” “더는 무립니다, 부회장님. 금융 여신은 여유가 없어요. 이미 인천 신도시와 부르즈 두바이 공사에 전부 끌어다 썼습니다. 회사채마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곧바로 날아온 대답의 주인공은 회의실에서 가장 젊은 사내였다. 당돌한 대답이었으나 회의실은 얼어붙지 않았다. 더 시건방진 소리를 해도 진동기 부회장이 화를 내지 않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확실해? 그 발언, 책임질 수 있어?” “네. 남은 방법은 그룹 지분을 담보로 빌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그거 맡기고 빌려.” 진담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진동기의 표정을 보며 젊은 사내가 말했다. “예상 수주 규모를 줄이는 게 안전합니다. 묶인 돈이 풀릴 때까지는 소극적인 경영이 낫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지금 두바이 같은 기회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 안전하게 소극적으로 가는 건 어리석은 일 아닐까?” “9회 말 투아웃 만루 풀카운트 상황에서 안타나 만루홈런의 역전극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대부분 아웃으로 경기 끝나죠.”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답하는 사내를 보며 진동기 부회장은 슬쩍 미소 지었다. “제안서 다시 만들어서 이학재 회장에게 넣어. 컨소시엄은 우리 순양이 주도하는 그림으로 그리고. 모두 나가 봐.” 사람들이 일어서자 진동기는 조금 전의 젊은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 상무는 좀 남고.” 두 사람만 남자 진동기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웠다. “태준아, 자금 사정 정확하게 파악한 거 맞아?” “네, 아버지. 시중 은행 전부 접촉했고 그들의 공식적인 답변입니다.” 진동기의 장남 진태준은 경영지원본부장으로 건설, 중공업 계열의 자금을 총괄한다. 비록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지만 아버지와 본부장이라는 직책이 주는 후광으로 단기간에 그룹의 살림을 휘어잡았다. “태준아. 우리 컨디션 좋을 때만 공격적인 경영을 해서는 발전이 없어. 항상 공격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9회 말 투아웃 만루 풀카운트 상황에서 타자를 보지 말고 투수를 봐. 투수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쳤어. 100개가 넘는 공을 던졌는데 어깨가 멀쩡하겠어? 모두 다 지치고 힘든 거다. 우리만 그런 게 아냐.” 진동기는 타이르듯 말했다. 그나마 착실한 편에 속했고 성실하기도 한 아들이지만 겁이 많다. 늘 안전부터 확인하고 발걸음을 뗀다. 경영지원본부장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지만 최고 경영자가 되기에는 부족한 그릇이다. 10년 안에 그릇을 더 키우고 싶은 게 진동기의 마음이었다. “힘들 때 이가 상할 만큼 악물고 던져야 에이스다. 우리 상황이 좋지 않아도 장롱 속 돌 반지라도 팔아서 자금을 구해와야 하는 게 경영지원본부장이 할 일이야. 돈 구하기 어렵다 같은 우는 소리는 과장 입에서나 나올법한 소리다. 명심해.” 진태준 상무는 아들이 아니었다면 한 소리 들었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죄송합니다. 공식 회의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여 드려서….” “괜찮아. 다음부터 잘하면 돼. 같은 실수 두 번 하는 건 용서 못 한다. 알겠지?” “네.” “그래. 나가 봐. 자금 다시 한 번 챙겨보고.” 진동기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부족하긴 하지만 뒤처지지도 않는 아들이다. * * * “실장님. 진태준 상무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문을 빼꼼히 연 비서가 조금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찾아오는 사람은 단칼에 거절하지만 오너 가족이니 그녀도 어려웠을 것이다. “들어오라고 해요. 괜찮습니다.” 웬일로 왔을까? 아버지 심부름일까? “도준아. 내가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냐. 괜찮아.” 다들 서른이 넘어가니 슬슬 한 자리씩 꿰찬다. 이 집안 장손인 진영준은 이미 순양전자 부사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진태준이가 벌써 상무를 달았던가? 애들이 하도 많으니 어디서 임원 놀이하고 있는지 도무지 외우지 못하겠다. “태준 형은 본사 온 지 얼마나 됐어? 건설 현장 돌아다니며 업무 익혔잖아?” “일 년 다 돼간다. 같은 건물에 있는데 우린 너무 뜸하구나. 그치?” “그러네. 현장은 어땠어? 고생 많았지?” “내가 제대로 굴렀겠냐? 대충 수박 겉핥기만 했지. 호리가다, 우찌바나시, 시아게 같은 현장 용어 익숙해지니까 3년 지났더라. 흐흐.”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장 좀 구른 걸 저렇게 꼭 티를 낸다. “제대로 한 거 같은데?” 오랜만에 얼굴 봤지만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촌이니 인사는 이쯤에서 끝내야겠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거 보니 급한 일이 있는가 보지?” “아, 너도 알겠지? 두바이.” 하긴 이 건이 아니면 일부러 찾아올 놈이 아니다. 하지만 이놈 저놈 경영진 흉내 내는 걸 일일이 다 맞춰줄 수 없다. 일찌감치 선을 그어줘야겠다. “태준 형. 일 이야기 하기 전에 하나만 묻자.” “응. 말해.”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조금 긴장한 듯 보였다. “나와 일 이야기 하려면 책임 못 질 말은 하지 마. 그리고 권한을 가지고 말해야 해. 가부(可否) 결정을 못 하고 승인받아야 할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마. 이 방은 결정권자들이 모이는 방이거든. 아니면 누군가가 내게 보고하는 장소야.” 진태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과 나의 위치가 다르다는 걸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순양 본관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방은 네 개야. 이 방, 두 부회장님 방 그리고 비어있는 회장님 방. 태준 형이 결정권자라면 용건을 말하고 아니면 담당자와 이야기해. 그럼 그 담당자가 내게 보고하겠지. 그럼 난 결정을 내리고.” 단풍 든 것같이 붉어진 진태준의 안색을 보니 우습기도 했다. 그래, 그나마 둘째 큰아버지 자식들이 싸가지는 있었지. 첫째 큰아버지 자식들이었다면 자존심이 상해 소리부터 질렀을 것이다. “그런 표정 지으면 내가 미안하잖아. 아무튼, 오늘은 태준 형이 처음 내 방에 온 날이니까 이런저런 조건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 편하게 다 해도 돼.” 박차고 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점수를 주고 싶다. 참을성이 굉장하다. 나이를 먹어서일까? 아니면 그만큼 다급하다는 의미일까? “그래. 오늘만 좀 봐줘라. 다음부터는 결정권을 손에 들고 올 테니까. 하하.” 태준 형은 어색한 웃음으로 표정을 바꿨다. 다음은 없다. 결정권을 손에 넣는 건 십 년은 지나야 할 거다. “결론만 말할게. 건설이 걸쳐 놓은 프로젝트가 많아서 자금이 많이 부족해. 지금은 씨 뿌리는 계절이니까 수확하면 곧바로 돌려준다.” “구휼미(救恤米)는 아니고 환곡(還穀)이라는 거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아, 아냐. 농사라니까 생각난 거야. 그런데 이미 큰아버지께 말씀드렸어. 우리 금융계열사도 여유 자금이 없어. 힘들어.” “네 개인 돈도 좋아. 처음으로 하는 부탁인데 단칼에 거절하지 말고 생각이라도 한번 해봐. 이자 듬뿍 쳐줄게. 너 돈 많은 거 다 알잖아.” “그래. 생각은 해보겠지만, 너무 기대하지 마. 소문만큼은 아냐.” “불우이웃돕기에 수백억씩 쾌척하면서 돈이 없다? 기준을 낮춰. 꿔줄 돈은 충분히 있을 거야.” “아이고,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그때는 우연찮게 투자 이익이 좀 많이 나서 그랬던 거고, 이젠 푼돈 굴리는 수준이야.” 명백한 거절이라고 생각하는 진태준은 점점 더 얼굴이 굳어졌다. “태준 형. 정말 급하다면 꿍쳐놓은 쌈짓돈부터 먼저 꺼내서 써. 돈 빌려주는 사람이 제일 궁금한 게 뭔지 알아? 저 사람은 자기 돈은 안 쓰고 남의 돈을 빌리러 다니는 건 아닐까? 자기는 손해 보기 싫고 난 손해 봐도 된다는 생각 아닐까? 이런 거야.” “그런 거 아냐. 말했잖아! 생각이라도 한번 해보라고.” “알아. 하지만 두바이가 정말 기회라고 생각한다면 올인해. 그래야 나도 믿음이 가지.” “그러기에는 내가 아직 결정권이 없어.” 이 정도 바람을 집어넣었으면 충분하다. 이젠 저들의 결정만 남았다. 두바이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이 주는 유혹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전 세계 건설업계가 그 유혹을 못 이겨 불나방처럼 덤벼드는데, 저들만 예외일 리가 있나? “일단 내가 금융권을 한 번 만나볼게. 순양건설이나 중공업이라면 여신 한도를 더 늘릴 수 있을 거야.” “이미 확인했어. 그놈들 다 머리를 흔들더라.” 난 웃으며 태준 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순양그룹 금융계열사를 꽉 쥐고 있는 내가 말하면 무시하기 힘들 걸? 말의 무게가 다르거든. 흐흐.” 진태준의 눈빛에 감춰진 생각. 만약 내게서 듣고 싶은 말이 이것이었다면, 꽤 선방했다. 아직 제 무덤을 파고 있는지를 모르니까 말이다. ======================================= [279] 머리 숙이는 것쯤 4 “이거 진심입니까? 순양그룹의 공식적인 의견이오? 아니면 일 잘한다는 소리 들으려고 순양건설 직원들이 쥐어짠 생각이오?” “진동기 부회장님 결정 사항입니다.” “이게 컨소시엄이요? 하청이지! 어이가 없네, 정말…!” “진정하시고, 마저 들으세요.” 이미 컨소시엄을 결성한 세 회사의 담당자들은 순양그룹에서 제시한 조건을 듣자마자 너나 할 것 없이 소리를 질렀다. “뭘 더 들어요? 결론 났구만. 순양 이름값 하는 거잖아, 지금!” “조무래기들이랑 겸상은 못 하겠으니 주는 돈이나 먹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시키는 일이나 해라. 이거 아니오?” 세 회사가 불만을 터트리자 순양의 담당자는 그들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솔직히 언론에서 떠들어댄 2조 원, 그거 뻥튀기한 숫자라는 거 업계 사람들은 다 압니다. 잘해봤자 절반 정도 수주하겠죠.” “그래서요? 순양건설은 언론 발표 때 포장 안 합니까? 주가 띄우려고 누구나 다 하는 거잖소. 새삼스럽게….” “현실적으로 생각하시라는 뜻입니다. 세 회사가 두바이월드에 수주해도 어차피 하청 아니오? 유럽 기업들이 설계하고 기술 공법 전부 대고, 귀사들은 공사판 십장 역할 아닙니까?” 정확히 꼬집는 순양 담당자에게 다른 회사 사람들은 얼굴만 붉힐 뿐 대꾸도 못 했다. “노가다 일당을 유럽놈에게 받으나 우리 순양에서 받으나 뭐가 다릅니까? 우리가 후하게 쳐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자존심과 실속, 둘 중 하나밖에 고르지 못하는 것이 약한 놈들의 숙명이며 대부분의 경우 후자를 선택한다. 마지막 자존심을 슬쩍 내세우면서. “일단 윗선으로 토스는 하겠지만 기대는 마쇼. 순양 없이 우리끼리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먼저 일어서는 사람들을 향해 순양 담당자들은 머리를 숙였다. 이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치켜세워주는 게 강한 자의 아량이다. “아무쪼록 말씀 잘 드려 꼭 성사되게 해주십시오. 우리 모가지도 간당간당합니다.” 하지만 상대가 떠나자 그들의 얼굴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얼마나 더 준다고 했지?” “2% 더 쳐줬습니다.” “그 정도면 감지덕지하겠구먼.” “고심하는 척하는 기간은 넉넉잡고 삼 일, 그 뒤에 연락 오겠죠. 흐흐.” * * * 성호 토건과 남광 개발의 고심하는 척하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HW 그룹의 파격적인 제안 때문에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두바이 공사 다 끝나고 마지막 잔금 받을 때까지 순양은 계속 어음이나 던져줄 거 아닙니까? 2% 더 얹어주는 거, 솔직히 은행 금리도 안 나옵니다.” “우리가 밑에서 받쳐주면 순양의 수주 실적이 두 배는 뛸 겁니다. 그럼 순양 주가도 껑충 뛰겠지요. 재주는 우리가, 실속은 순양이 챙기는 꼴 아닙니까?” 불만을 터트릴 때는 유리한 건 기억나지 않는다. 이학재 회장은 두 그룹의 불만을 가만히 듣다 그들이 빠트린 걸 말했다. “대신 수주 금액은 우리끼리 할 때보다 두 배는 더 커지지 않을까요?” “그럼 뭐 합니까? 자금만 더 쪼들리는데….” 그들의 불만이 한 층 더 커지자 이학재 회장은 슬쩍 웃었다. 자신이 나서서 좀 더 유리한 조건으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두 그룹 회장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순양이 던져주는 어음 우리 HW가 다 안고 가겠습니다. 그럼 자금 문제는 없으시겠죠?” “이 회장님께서 어음할인을 해주시겠다는 뜻입니까?” “네. 순양 어음이야 현찰 아닙니까? 은행에 밀어 넣으면 즉각 할인해 주겠지만, 두 분이 원하는 건 최소한의 금리부담일 테니까 우리 HW가 은행보다 싸게 해 드리죠.” “얼마나 싸게…?” “절반이면 되겠지요?” 두 회장의 얼굴이 활짝 폈다. “우리가 순양의 하청으로 전락하지만, 결제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더럽고 아니꼬워도 어쩌겠습니까? 우리도 이번 기회에 덩치를 좀 키워야죠. 놓치기는 아깝지 않습니까?” “역시 이 회장님이십니다. 화끈하게 지르시는군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HW 그룹이 승승장구한다더니, 혹시 넘쳐나는 돈을 처치 못 하시는 거 아닙니까? 하하.” “돈 쌓아두고 경영하는 기업이 어디 있습니까? 단지 우리는 미라클이라는 투자사가 대주주 아닙니까? 외국 자본이 많으니 이 기회에 좀 쓰려고요. 외국 돈 끌어다 쓰는 게 바로 애국입니다. 애국자 흉내 내는 거죠.” 두 회장은 부러운 눈으로 이학재를 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마르지 않는 우물같이 단비를 내려주는 든든한 물주가 떡 버티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 편할까? 비록 이학재가 오너인 자신들과는 달리 전문경영자인 월급쟁이지만, 웬만한 그룹 회장보다는 훨씬 팔자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럼 이견이 없는 걸로 알고 제가 진행하겠습니다. 앞으로 함께 고생 좀 합시다.” 두 회장이 웃음을 터트리고 돌아가자 이학재의 표정은 단번에 굳어졌다. “도준이 이놈, 예측이 틀리기라도 해봐, 어디…. 가만두나 보자.” 두바이가 위기에 빠지지 않으면 순양도, 남광도, 성호도 꽃 노래를 부른다. HW는 큰 이득 없이 본전치기가 고작이다. 재계에서 자신을 호구 새끼라고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 * “분하냐?” “아닙니다.” “아니긴, 이마에 써 있는데. 흐흐.” 진동기는 아들을 보며 대견한 듯 웃었다. “도준이가 한 말… 틀린 거 하나 없다. 넌 도준이 아랫사람을 만나는 게 당연해. 장도형 부사장? 그래, 그 정도면 네가 쳐지지는 않겠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다만? 사촌이니까 동등하다?” “네. 쉽게 생각했습니다.” “순양의 임직원 중에 도준이를 쉽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도준이가 나이만 좀 많았다면 순양의 모든 걸 계승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 나도 그렇고.” “아, 아버지.” “자존심 상하겠지만, 보고 배워라. 머리를 숙이더라도 그놈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가.” 진동기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네가 도준이에게 우는소리를 해서 그런지 몰라도 HW 그룹 컨소시엄이 우리 조건을 다 받아들였어. 우리 밑으로 들어와서 두바이로 함께 간다. 덕분에 자금 부담이 많이 줄었다.” 진태준이 놀라서 물었다. “도준이가 이학재 회장에게 부탁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모르지. 아무튼, 타이밍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잖아. 우연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네 덕분으로 알 거다. 네가 도준이와 괜찮은 협상을 했다고 생각해. 이미 임원들이 네 칭찬 하더라. 자존심 버리고 회사를 위해 동생에게 머리 숙였다고 말이야.” 부자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진도준은 그 정도로 정이 많은 놈이 아니다. “너도 이제 본사 생활이 익숙해졌을 테니 여유를 가지고 도준이를 자주 만나. 그놈 지금 미국 금융상품에 올인했어. 나도 유심히 살펴봤는데 뭔 놈의 금융 파생 상품이 그렇게나 많은지 모르겠더라고.” “회사에 돈이 없는데 금융상품은 왜 보신 겁니까?” “회사 돈은 없어도 개인 돈은 있잖아. 그걸 알차게 불려놔야 급할 때는 긴급 수혈이라도 하지. 지나가는 말로 쓱 물어봐. 나는 큰아버지니까 자세히 묻기도 머쓱하지만 넌 다르잖아. 괜찮다 싶으면 네가 가진 돈 묻어둬. 네 총알이 많아야 나중에 지분 승계 작업할 때 편하다.” “알겠습니다.” 돈 잘 버는 놈 옆에서 무임승차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빨대라도 꽂아 놓는다면 더할 나위 없고. “자주 술자리 갖겠습니다. 도준이가 다른 사촌들은 싫어하지만, 우리 형제에게는 그런 감정이 없어요. 다 같이 모여 어울리다 보면 더 가까워지겠죠.” 진동기는 말귀를 잘 알아듣는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 * * “컨소시엄 조건, 좋은데요? 성호, 남광은 무조건 돈 벌고, 우린 양손에 순양 어음 잔뜩 쥐고. 순양은 회장님 앞에서 살려달라고 머리 숙이게 될 테고, 최상의 시나리오 아닙니까?” “그 전에 HW 건설이 먼저 부도날걸? 성호, 남광에 꼬박꼬박 돈 줘야 하고, 받아야 할 돈은 1조가 넘을 텐데, 부도 안 나고 버티겠어?” 밝은 표정의 나와는 달리 이학재 회장은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제가 열심히 벌어 구멍 난 자금 채워드리겠습니다.” “HW 구멍가게 아니다. 자금 계획 빡빡하게 돌아간다고. 삐끗하는 일 없도록 너도 준비 단단히 해야 해.” “네. 그래서 미국 좀 다녀오려고요. 돈 벌어야죠.” “뭐? 미국?” 이학재 회장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 질렀다. “야! 너 미국 망한다고 했잖아! 망조 든 곳에서 뭔 돈을 벌어? 이 자식 이거…. 대형 사고 치는 거 아냐?” “무너지는 진영에서 공을 세울 때 더 큰 훈장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위기에서 기회를 찾는 사람은 어마어마한 돈을 법니다. 10년 전 IMF를 생각해 보세요.” 여전히 미덥지 못한 표정의 이 회장에게 말했다. “아, 혹시 회장님 개인 재산 중에 미국 관련한 금융상품에 투자한 거 있으시면 얼른 정리하세요. 올해 하반기부터 폭락할 겁니다.” “그런 곳에 투자할 만큼 내가 돈이 많아 보이냐?” “회장님이 돈 없다고 하시면 누가 믿어요?” “봉급쟁이 인생이다. 월급 뻔한데 무슨….” 그가 당황해하는 표정을 보니 짐작할 수 있었다. “땅이나 건물이군요. 가장 안전한 투자처죠. 흐흐.”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서 일이나 잘해. 조금만 잘못되면 망신살 뻗쳐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한다.” “절대 그럴 일 없을 테니까 두바이 공사 최대한 크게 벌이세요. 이번이 순양의 건설, 중공업 부문을 차지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행여나 불안 때문에 소극적으로 변할지 몰라 다시 한 번 당부하고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 * * 진태준은 양손에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손수 들고 아침 일찍 내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태준 형, 요즘 부쩍 자주 오네.” “돈 빌려달라는 소리 하려고 오는 건 아니니까 염려 마. 커피나 한잔 하려고 왔어. 참, HW 그룹과 컨소시엄 맺었다. 네 덕분에 지금 문제가 많이 해결됐어. 고맙다는 말은 빼먹지 말아야지.” “아, 나도 들었어. 이학재 회장님이 결정한 거지 그거 내가 나선 거 아냐. 어쨌든 감사의 말은 내가 전할게.” 계속해서 내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니, 단지 이 말 하려고 온 것 같지는 않다. “미국 출장 간다면서?” “응. 월가의 투자사에 우리 금융그룹 자금을 좀 묻어 뒀는데 그거 좀 살펴보고 오려고.” “전 세계 돈이 미국 금융상품으로 몰린다고 들었는데 진짜 괜찮은가 봐?” “왜? 형도 거기에 투자하려고?” “글쎄, 이리저리 좀 알아봤는데 괜찮다는 말은 들었어.” “남의 말 믿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게 투자야. 조심해서 해.” 단순한 인사말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니다. 내가 미국 간다니까 부랴부랴 달려온 거다. 얼마 전에 둘째 큰아버지에게 흘린 말을 놓치지 않은 거다. “그렇긴 한데, 마음이 쏠리더라고. 그래서 네 의견을 좀 들어보고 싶어서. 말해줄 수 있어?” 저 집안사람들을 순양에서 쫓아내기 전에 마지막 선물이라도 하나 던져줄까? “지금 뜨겁게 달아오른 파생상품들은 대부분 미국 주택담보대출을 근간으로 만든 거야. 집을 담보로 대출받은 건 확실하게 갚잖아. 아니면 쫓겨나니까. 부실이라도 집이라는 확실한 담보가 있으니 안전하기도 하고.” “안전하다 이거지?” “남의 말 믿지 말라니까! 형이 판단해야 하는 거야. 혹시 알아? 대규모 부실 대출이 드러나서 박살날지?” 딱 여기까지만 말하면 된다. 박살이라는 말보다 안전이라는 말이 이미 꽂혔으니까. ======================================= [280] 복마전, 월스트리트 1 사실 은행의 업무는 굉장히 단순하다. 돈 맡기는 사람과 빌려 가는 사람 사이에서 예대마진(대출 금리와 예금 금리의 차)이라고 이름 붙인 수수료를 챙기는 게 전부다. 매뉴얼대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하는 단순한 업무, 안정적인 월급, 정년보장이라는 장점 때문에 예전의 은행원이라면 마치 공무원처럼 생각했다. 대신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분야에도 번쩍이는 재기를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이런 단순한 은행권에도 천재들이 숨어 있었고 그들의 천재성은 어떻게 하면 단번에,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지에 집중했다. 1980년대 초, 한국은 신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체육관 선거를 치르는 후진국의 생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자본주의의 대명사 미국에서는 세 명의 천재가 머리를 맞대고 기상천외한 돈벌이를 생각해 냈다. 투자은행 살로먼 브라더스(Salomon Brothers)의 채권 부서장인 루이스 라니에르, 자산 운용사 블랙록의 설립자 래리핑크, 미 연방주택저당공사의 CEO 데이빗 맥스웰은 MBS(Mortgage Backed Security) 즉, 주택저당증권이라는 기발한 상품을 만들었… 아니, 창조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주택담보 대출은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고 10년, 20년 동안 원금과 이자를 따박따박 받아내는 단순한 업무였다. 하지만 은행 입장에서는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큰돈을 빌려주고 장기간 푼돈으로 나눠 받는 하품 나오는 일일 뿐이다. 게다가 목돈이 묶여버리는 업무이기도 했다. 이 세 명의 천재는 은행의 시선이 아닌 상품의 시선으로 주택담보 대출을 들여다봤다. 주택담보 대출은 비록 적은 돈이기는 하지만 장기간 안정적인 수익을 낸다. 이것은 바로 은퇴한 노인, 금융소득자, 원금 손실을 가장 꺼리는 자산가들이 원하는 안정적인 투자상품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고 주택담보 대출을 MBS라는 상품으로 만들었다. 사실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원인은 바로 금리 때문이었다. 1979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금리를 올리면서 금융권은 ‘돈’맥경화에 걸렸고, 주택담보대출시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금리 시대에 대출해서 집 사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정치가는 늘 돈 많은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이 손해 보는 일은 절대 없도록 법으로 막아준다. 1981년 9월 30일, 미국 의회는 아끼는 금융권을 위해 재치 있는 법안을 통화시켰다. 금융권이 주택 대출을 정리하면 세금을 유예시켜 주며, 더욱이 이 과정에서 일어난 모든 손실을 국고에서 보상해주는 법안이 통과된 것이다. 대출 채권을 팔아버리기만 하면 돈이 굴러들어오는 시스템이 된 것이고, 이른바 채권의 증권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제 은행은 주택을 담보로 돈을 잔뜩 빌려주고는 수수료를 챙긴 다음 그 채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리기 시작했다. 원금 회수의 걱정도 사라졌고, 대출금이 장기간 묶이는 일도 없었다. 은행은 주택담보 대출을 메인으로 내걸고 사활을 건 영업에 전력을 다했다. 투자은행인 살로먼 브라더스는 이 채권을 리스크별로 나누고 재포장해서 판매하며 엄청난 중계 수수료를 챙겼다. 안전한 대출 하나에 위험한 대출 서너 개를 섞어도 신용 등급 AAA를 받는 마법까지 부리니 83년 한해만 2억 달러가 넘는 순이익을 거뒀다. 이제 금융가의 사람들은 주말을 골프와 함께 보내지 않는다. 호화 요트에서 선상파티를 즐겼고 맛있는 피자를 먹기 위해 자가용 비행기를 띄워 베네치아로 날아갔다. 그들의 흥청망청한 파티도 끝낼 때가 다가왔고, 난 그 파티가 끝날 때쯤 등장해 파티 비용을 청구할 생각이다. 물론 파티 비용은 은행가들이 지불하지 않는다. 미국 국민들이 그 비용을 낼 것이다. 뉴욕 미라클의 CEO 레이첼 아리에프는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은 잠시였고 곧바로 심각한 얼굴로 변했다. “그러니까 투자자들의 선택에 맡기자는 뜻이지?” “네. 제 판단이 늘 옳을 수는 없으니까요. 계속해서 MBS가 안정적이라고 믿는 투자자들은 놔두고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하는 투자자들의 돈만 빼면 되겠죠.” “투자금을 빼는 사람들은?” “그 역시 그들이 선택하라고 하세요. 안정적인 국채도 있고, 헐리우드 펀드도 있으니까요.” “넌 주택담보대출증권이 폭락한다는 쪽에 베팅하고?” “네. 만약 날 따라서 베팅하겠다는 투자자가 있다면 그 역시 그들의 선택이겠죠.” “널 따라갈 투자자는 없을 것 같은데?” “레이첼은요? 어디에 베팅할 거예요?” 레이첼 아리에프는 이마를 찡그렸다. “MBS가 고리스크라는 건 알아. 하지만 붕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연착륙하겠지.” “붕괴는 미국 금융의 몰락이니까?” “그래. 연방정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추락 못 하게 떠받칠 거야. 월가의 몰락은 미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경제를 침몰시킬 테니까.” 지금 이 순간, 미국 경제가 무너진다는 생각은 미국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단번에 변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만큼 황당한 의견이다. “그럼 레이첼은 서스테인(sustain)?” “아니, 웨이팅. 전부 빼서 일단 보관. 다음 투자는 좀 더 지켜본 다음에.” “그럼 고객들에게 메일 돌리죠. 리스크 등급 분류 확실하게 해서요.” “네 투자는 리스크 등급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미국 경제의 몰락에 올인하는 게 황당하기는 하지만, 하필 그 투자 장본인이 바로 단 한 번의 예측도 틀린 적 없는 나였기에 진심으로 궁금한가 보다. 확신, 확실 같은 단어는 쓰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반반이죠. 이게 진리 아닙니까?” “50%에 올인? 네 전 재산을?” “전 재산은 아니고 미국에 있는 재산이죠. 그리고 저 아직 젊어요. 다 날려도 다시 시작할 시간과 돈이 있으니까.” 레이첼은 여전히 한숨을 내쉰다. “네 돈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월가가 긴장할 텐데? 월가 역사상 단 한 번에 이만큼 큰돈이 이동한 적 있었을까 싶다.” “절반만요.” “응?” “제 자산의 절반만 월가에 뿌릴 겁니다.” 레이첼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확률 50%니까 절반만 건다? 너무 정석 아냐?” “무슨 말씀이세요? 조금 전 말했죠? 월가가 긴장할 거라고? 그러니까 긴장하지 않도록 절반만 푸는 겁니다. 나머지 절반은 런던에 풀어야죠. 설마 세계의 금융이 월가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The City?” 더 시티는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을 간단히 부르는 이름이다. 런던의 가장 작은 행정 구역으로, 런던 역사의 중심이며 금융가의 중심이기도 하다. 또한, 독자적인 자치권을 누리는 자치법권 지역이다. 잉글랜드 은행을 비롯해 JP 모건 체이서, 골드만 삭스, 모건 스탠리, 아메리카 은행, 시티 그룹, HSBC 등 5,000개가 넘는 금융기관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시티의 넓이는 정확히 여의도의 면적과 일치하지만, 움직이는 돈의 규모는 차원이 다르다. “네. 그쪽에서도 절반은 소화할 수 있을 겁니다. 웬 호구 하나 등장했다고 다들 좋아라 하겠죠.” 레이첼의 눈빛이 흔들렸다. 만약 월가의 폭락이 일어난다면 그 방아쇠는 내가 당기는 셈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수십억 달러의 폭탄을 한 번에 떨어트리는 꼴이니까 말이다. * * *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주택저당증권에 묻어둔 돈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한 번에 빼버리면 월가가 술렁인다. 아주 조금씩 상품을 갈아타며, 평상시의 거래와 다르지 않도록 주의하며 주택저당증권을 팔아치웠다. 인기 상품이라 매도물량을 소화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MBS는 다 처분했어. 이제 이 돈으로 뭘 할 거야?” “베팅이죠. 모기지 채권은 전부 휴지로 변한다는 것에 올인!” “언제 그 베팅의 결과를 알 수 있을까?” 레이첼은 여전히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내년요.” 너무 빨리 도래하는 것이라 더 믿지 못하는 표정이다. 만약 내가 10년이라고 했으면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10년이면 악성 채권이 발생하기 시작해도 수습할 시간을 벌지만, 내년이면 불가능하다. 불가능하다는 건 그만큼 희박한 확률의 다른 말일뿐이다.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물량이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2년간은 2%대의 고정금리지만 올해부터는 변동금리가 적용됩니다. 10% 이상의 이자를 내야 하는데 미국 시민들은 그럴 여력이 없어요.” “집을 보유할 만큼 안정적인 사람들이야. 위태롭기는 하겠지만 단번에 무너지기는 힘들 걸?” “누가 안정적이랍니까? 서브프라임, 말 그대로 프라임이 아닌 등급 이하, 후보 수준이라고요. 문제는 여력도 없는 사람들이 집을 서너 채씩이나 가지고 있어요. 세 채만 가지고 있어도 지불해야 할 이자가 30%로 뜁니다.” 안정적인 투자만 계속해온 레이첼은 월가의 탐욕스러운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망하든 말든, 리스크가 크든 작든, 눈앞의 돈만 챙기기에 급급한 그놈들은 번호표를 뽑고 창구에 나타난 사람이면 주택담보 대출을 승인할 정도다. “좋아, 그렇다 쳐. 그럼 베팅은 어떤 방식으로 할 거지?” “신용부도스왑(CDS. Credit Default Swap).” 신용부도스왑은 부도 날 때를 대비한 보험의 일종이다. 예를 들어 애플사의 채권 1억 원을 가지고 있는데 만약 애플사가 부도나면 그 채권 1억 원은 허공으로 날아간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보험을 드는 것이다. 보험 방식 역시 간단하다. 10년 내 부도가 나면 보험사가 1억 원 전액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매년 20만 원의 보험금을 낸다. 보험금이 싼 이유는 애플은 아주 건실한 기업이고 10년 안에 부도날 확률이 없기 때문이다. 위험이 없으니 보험금이 싸다. 신용도가 낮고 건실하지 못한 기업이라면 당연히 보험료는 올라간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바로 탐욕스러운 월가의 인간들이 보험을 도박으로 바꾼 것이다. 애플사의 채권을 10원짜리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도 보험가입이 가능하다. 누구라도 매년 20만 원씩 내고 10년 이내에 애플이 부도나면 1억 원을 받을 수 있다. 애플의 주식, 채권 하나 없어도 망한다 아니다를 놓고 베팅할 수 있는 것이다. 매년 내는 보험금이 바로 베팅 칩이며 이기면 1억을 번다. 레이첼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까지 금융상품에 대한 신용부도스왑은 발행한 적이 없어. 하워드 넌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 상품을 사겠다고 하는 거야.” 결론이 허망하자 레이첼은 한숨을 쉬었다. “만들면 되죠. 주택저당증권이 안전하다고 믿는 금융권 사람들은 내가 보험금을 낸다면 공돈이라고 생각하며 쌍수 들고 환영할 겁니다. 보험금 책정하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문제는 없다고 봐요.”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들어줄 그 금융권 사람들이 누굴까?” “골드만삭스, 도이체방크, 모건스탠리, 바클리스 캐피털, 메릴린치, 씨티그룹, 뱅크오브아메리카, 크레디트 스위스, J.P. 모간, UBS. 수없이 많습니다.” “베어스턴스와 리먼브라더스는 왜 빼? 이들도 최상위그룹인데?” 내 입에서 월가를 장악한 초거대 금융기업의 이름이 줄줄이 나오자 레이첼은 기가 차는지 비꼬는 듯 말했다. “아, 그 두 회사는 지급 불능에 빠질 겁니다. 신용부도스왑 계약을 체결해 봤자 돈이 없어서 못 받아내요.” 미국을 상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초거대 금융이 내년에 망한다고 단정 짓자 레이첼은 입만 떡 벌렸다. ======================================= [281] 복마전, 월스트리트 2 “왜 이따위 짓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잘 아니까 근본적인 질문은 사양합니다. 여러분은 숫자에 집중하고 금융사의 지불 능력만 정확히 산출하면 됩니다. 아시겠죠?” 회의실에는 각 금융사의 회계 자료와 PC, 노트북에 둘러싸인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들이 눈을 반짝이며 내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몇 년 전, 내게 펀드와 금융 파생상품에 대한 것을 가르쳐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가만히 경청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지만 주어진 미션을 해내야 하는 것, 이것만큼 답답한 일도 없다. 모두 의구심만 잔뜩 드러냈고, 참다못해 입을 여는 사람도 있었다. “하워드. 이 회사들은 월가의 메인스트림이예요. 우리 미라클보다 수십 배나 많은 돈을 굴리는 곳인데 지불 능력의 한계치를 산정한다는 게 조금 우습지 않습니까?” 이들은 전 세계의 돈을 주무르는 기업 리스트를 흔들며 정말 무의미한 일이 아닌지 확인했다. 이들이 전부 이해하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가능성은 설명해줘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우리 미라클의 모든 고객들이 일시에 돈을 빼버립니다. 여기까지는 문제없죠?” “그렇겠죠. 갑작스러운 인출로 고객이 손해 보는 걸 스스로 감수한다면요.” 아주 정상적인 대답이다. 우린 고객의 돈을 굴릴 뿐이지 도박은 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서 신용부도스왑 계약서를 내밀며 1억 달러를 청구합니다. 이 1억 달러는 고객의 돈이 아니라 우리 미라클의 돈으로 지급해야 해요. 가능합니까?” 전제가 잘못된 질문이다. 모든 고객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시에 돈을 빼가는 일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숫자만 생각해야 할 시간이다. 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건 꺼렸다. “우리 미라클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올해 보너스를 포기해야 하고 몇몇은 짐 싸서 이곳을 떠나야 하죠. 1억 달러의 손실은 누군가 책임져야 할 금액입니다.” 그들의 불편한 표정을 보며 말을 이었다. “똑같은 일을 골드만삭스, 도이체방크,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등이 당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단, 청구금액은 100억 달러입니다. 우리처럼 보너스 못 받고 인원 감축으로 버틸 수 있습니까?” 10조 원이 넘는 100억 달러라는 숫자는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는지 그들은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이게 내가 원하는 겁니다. 대형 금융사들이 고객의 돈이 아니라 회사가 보유한 돈으로 얼마까지 지급할 수 있는가? 지급할 여력은 있지만, 아예 디폴트 선언을 하고 파산이라는 극단적인 선택할 만큼 몰아붙일 금액은 얼마인가…?” 잠자코 듣기만 하던 그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유괴범이 몸값을 계산해야 하는 시간이군요.”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아, 학교에서 진행했던 연구였어요. 자녀를 유괴하고 부모에게 돈을 요구할 때, 부모가 경찰에 알리지 않고 건네줄 적정금액을 산출하는 연구였죠.” 눈길을 받은 그는 조금 당황했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했다. “부모의 자산에 비해 몸값을 너무 낮게 부르면 유괴범이 안고 가야 할 범죄의 리스크에 못 미치고, 지불 능력 이상으로 부르는 것도 멍청한 짓이죠. 또 하나, 부모의 캐릭터도 파악해야 합니다.” “부모의 캐릭터?” 난 그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네. 그래서 보통의 유괴는 면식범이죠. 불의를 못 참는 부모의 경우, 지불 능력은 있지만 조금만 과하다고 생각하면 경찰에 알리니까요.” “그럼 이 경우 부모는 해당 금융사의 CEO들인가?”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경영철학, 명예, 주주들, 사회적 인식 등도 고려해야죠.” “숫자만 봐서는 절대 최대치의 지급 능력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뜻?” “지불 적정치는 숫자만으로 가능하겠지만, 최대치까지 미치지 못할 겁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난 그를 가리켰다. “당신이 이 TFT의 팀장입니다. 기한은 2주. 적정치가 아닌 최대치의 숫자를 뽑아서 내게 보고하세요.” 내가 가리킨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내 결정을 변하지 않았다. * * * 한쪽에서 금융사들의 지불 능력을 파악할 때 난 또 다른 전문가들을 어시스턴트로 두고 스왑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주택저당증권은 단일 상품이 아니라 수많은 부채를 뒤죽박죽 섞어놓은 것들이기 때문에 각각의 증권에 대한 기준치 설정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값에 거래되는 상위 50개를 추려 AAA라는 자체 등급을 매겼다. 다른 이들에 AAA는 안전의 상징이지만 내게는 가장 큰 배당금을 제시할 수 있는 로또나 다름없었다. 증권 분석에 한창일 때 레이첼 아리에프는 조용히 나를 불러냈다. 아주 다급한 표정으로. “무슨 일인데 그래요? 표정이 영….” “월가를 돌며 정보를 입수했는데…. 하워드, 너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몇몇을 발견했어.” 당연히 존재한다. 난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었는지 이미 알고 그들과 똑같은 방식을 따르고 있으니까. 하지만 짐짓 놀란척하며 물었다. “벌써요? 누구죠?” “그렉 리프먼, 스티브 아이스먼. 존 폴스, 벤 호켓…. 개인도 있고 기관도 있는데….” “그들은 언제부터 시작했어요?” “빠른 사람은 이미 2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돈이 몰린 건 작년이야.” “그 사람들, 돈 많이 잃었겠네요. 흐흐.” 모기지 채권 상품의 가치가 오를수록 손해 보는 베팅이다. 2년이나 계속 베팅했으니 기관투자라면 고객의 항의가 빗발치거나 많은 투자금이 빠져나갔을 것이다. “골드만삭스가 주택담보부증권으로 운용하는 자금만 2천억 달러가 넘어. 반대에 베팅한 그들 중 가장 큰 금액은 7억 달러에 불과해. 단순 비교만으로도 그들은 지금 엄청난 손실을 보고 있을 거야. 어쩌면 반 토막 났을 수도 있고.” 2천억 달러라면 200조 원. 2007년 올해 우리나라 예산이 230조 원이니 역시 미국은 미국이다. 일개 금융회사가 한 국가 예산을 주무르다니. 난 레이첼을 향해 말했다. “반 토막 났으니 불안한 겁니까? 그래서 말리려고 알려주는 거예요?” “아니. 네 예측이 어쩌면 틀리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어.” “그럼 저와 함께 베팅?”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난 내 소신을 지키고 싶어. 베팅이 아니라 투자, 안정적이고 꾸준한 수익을 내는 투자만 할 거야. 이미 대부분 고객들은 내 방식을 지지했고 주택담보부증권 투자에서 철수하는 것도 찬성했어. 하지만 베팅은 원하지 않더라고. 고객 들의 요구대로 가는 게 내 방식이니까.” 레이첼은 공격수가 아니라 수비수를 원한다. “그러세요. 저도 레이첼의 경영방식을 지지합니다. 그러니 계속 미라클의 CEO로 남아 주세요.” 이 말은 진심이다. 뉴욕 미라클은 내 돈을 보관하는 금고 역할이 최우선 아닌가? 투자 수익보다는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불려 나가는 게 내가 원하는 것이다. 물론 이번 베팅 때문에 미라클이라는 이름이 월가에서 크게 오르내리겠지만, 그 공로는 고스란히 이곳 사람들이 차지하면 된다. 이들은 명성을, 난 돈을. 그리고 레이첼 아리에프의 불안한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도 안다. 위태위태한 미국 금융시장에 내가 거금을 투여하는 순간이 바로 폭락의 시작이라는 걸 그녀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 * * “명심하세요. 동시에 신용부도스왑 계약을 체결하는 겁니다. 순차적으로 하나씩 계약하면 분명 우리 계약서를 조사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정보가 새기 전 순식간에 해치워야 합니다.” 계약서를 든 사람들이 어이없는 듯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는 게 보였다. 이런 바보 같은 계약은 언제 어디서든 대환영이지, 의심하며 조사할 놈은 없다는 생각일 것이다. “뉴욕은 금요일 오전, 런던은 금요일 오후입니다. 런던팀은 거기서 주말을 즐겨도 됩니다.” 런던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소리 없는 웃음이 번졌다. 눈먼 돈 갖다 바치는 계약서 들고 가니 상대는 대환영일 테고, 손쉽게 계약을 체결한 뒤 주말 내내 즐기다 돌아오면 되는 휴가 같은 출장이다.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출발했다. 난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자그마한 바에서 레이첼과 함께 술을 마시며 금요일을 기다렸다. “전부 얼마지? 총 투자 금액이?” 레이첼이 칵테일로 입술을 축이며 물었다. “보험요율을 조금 높게 잡았어요. 지금쯤 이 위기를 조금은 감지한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그 불안이 눈멀 정도의 돈은 줘야죠.” “몇 %나?” “미니멈 4%에서 맥시멈 7%요.” “기간은?” “5년.” “뭐…. 네 생각대로라면 5년이나 10년이나 차이는 없겠지? 어차피 내년이니까.” 레이첼은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다. “그렇죠. 1년 치 보험금만 내면 되니까요.” “전체 금액은?” “평균 보험요율 5%로 잡는다면 35억 달러 정도….” “넌 이번 베팅으로 35억 달러의 20배를 버는구나. 700억 달러인가?” 술잔을 채우던 바텐더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돌아섰다. 중년 아줌마와 젊은 동양 남자가 헛소리처럼 말하는 숫자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나도 헛소리처럼 들렸다. 7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70조. 내게는 동그라미가 잔뜩 붙은 암호나 디지털 신호나 다름없는 현실감 없는 숫자. “700억 달러는 월가가 지급할 수 있다고 보는 거지?” “레이첼 생각은요? 너무 낮게 잡았나요?”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면 조금의 문제도 없을 만큼 낮아. 하지만 내년이라면 높게 잡은 금액 아닐까 하며 염려할 것 같은데?” “런던과 뉴욕으로 분산했으니 안전할 겁니다.” “내년이면 넌 워렌 버핏을 따라잡거나 누를 거야. 단숨에 세계 1위의 부호 자리에 앉을 걸?” “제가 드러나지 않았듯이 이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은 부자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내년 포브스지 부호 순위 1위는 여전히 워렌 버핏이고 2위는 빌 게이츠겠죠.” 한국 재벌 회장들도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에 속한다. 개인 재산이야 3조, 4조 정도로 발표하지만 수백조의 가치를 지닌 기업들을 금고처럼 사용하고 숨겨놓은 돈은 또 얼마나 많은가? “평생 숫자에만 파묻혀 살았는데 사고의 경계를 넘어가 버리는 숫자가 현실 앞에 나타나니까 혼란스럽기까지 해.” 레이첼은 또다시 술잔을 비웠다. “그 돈으로 뭐 할 건지 계획은 있어?” 물론 있다. 이 여인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존경하는 제 할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 있어요.” 술잔을 응시하던 레이첼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돈이라는 건 버는 게 목적이다. 그 돈을 어디에 쓸지는 생각하지 마라. 살다 보면 어차피 그 돈을 써야 할 때가 꼭 나타난다. 돈 쓸 고민은 그때 하면 된다.”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역시 거부들은 생각이 달라. 네 할아버지께서도 엄청난 부자셨지?” “네. 하지만 그분도 살아계셨다면 엄청나게 놀라셨을 겁니다. 1년 만에 700억 달러를 버신 적은 없거든요.” “자본주의 등장 이후로 네가 처음이지 싶은데?” 그런가? 분명 또 있었을 것 같은데?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 때 로스차일드 가문이 영국 전체를 살만큼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아요?” 레이첼은 머리를 저었다. “음모론에서 줄기로 뻗어 나온 이야기야. 그냥 국채 투자로 큰돈을 벌었고, 지금 시세로 따져도 10억 달러를 넘지 않았어.” 로스차일드 가문이 번 10억 달러도 결국 국민의 세금이고 내가 벌어들일 돈도 미국 시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그나마 한국 국민이 아니라서 마음은 한결 가볍다. ======================================= [282] 복마전, 월스트리트 3 미국의 투자은행이자 전 세계 금융시장의 최대기업인 골드만 삭스 그룹 주식회사(The Goldman Sachs Group, Inc.)는 독일계 유대인 마르쿠스 골드만이 세운 어음 거래 회사로 출발해서 21세기에는 금융시장을 장악했다. 23개국 50개 사무소에 총 3만 명이 넘는 임직원이 국경과 화폐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돈을 쓸어 담는다. 또한, 빌 클린턴과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에는 이곳 출신이 재무장관을 역임하며 미국 재무장관 사관학교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그들은 온갖 규제를 풀어버리며 골드만 삭스에 날개를 달아주기도 했다. 이들은 그리스가 유럽연합에 가입할 수 있도록 금융장부를 조작했고 그 결과, 그리스의 파산과 이어진 유럽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 회사는 그 과정에서 엄청난 수익을 남겼기에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의 폐해를 상징한다. 마침내 D-day인 금요일 아침, 골드만 삭스의 본사 앞에 서니 이 회사의 미래가 떠올랐다. 미국의 금융 몰락으로 천만 명에 가까운 미국 시민이 직장을 잃어도, 육백 만에 가까운 국민이 집을 잃어도, 이들은 수천억 원씩 배당금을 챙기고 보너스를 챙기며 샴페인을 터트린다. 무너져 가는 회사는 어차피 국민의 혈세로 다시 세워줄 것이고 또다시 사기나 다름없는 파생상품을 만들어내며 돈을 쓸어담을 것이다. 침이라도 한번 뱉어줄까 하다가 관뒀다. 나 역시 이들과 방식만 다를 뿐 똑같이 돈을 챙기는 놈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갑시다.” 나를 따라온 TFT 팀장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나를 따랐다. 10억 달러짜리 계약은 그를 긴장시켰다. “이런 미친 새끼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엉겁결에 한국 욕이 튀어나왔다. 골드만 삭스의 로비는 논현동 명품 가구점보다 더 비싼 것들로 가득했다. 바닥과 벽의 대리석은 참을 만했지만 안내 데스크까지 대리석으로 만들 생각은 누가 했을까? 아주 잠깐 로비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의자도 하나에 기백만 원이 넘는 명품이다. 그런 의자 수십 개가 지하철역처럼 쭉 놓여있다. 돈 지랄도 이런 돈 지랄은 처음이었다. 다시 한 번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려 할 때, 함께 온 팀장이 손을 번쩍 들며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가니 이미 세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의 임원, 두 명의 매니저. 이들은 눈을 번뜩이며 내 돈을 삼키려 혀를 날름거렸다. * * * “꼭 하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도의상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가장 젊어 보이지만 이미 임원 자리까지 올라간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이미 이와 비슷한 스왑이 있습니다. 2년 전에 계약한 건데….” 레이첼이 말한 뛰어난 안목을 가진 사람들 중 한 명일 것이다. “차이라고는 2년 전 계약한 건 매월 프리미엄 보험료를 냅니다. 처음엔 낮은 보험료였지만 주택저당증권의 가격이 오를수록 보험료가 올라갔죠. 지금은 9%대의 보험료를 낼 정도죠. 엄청난 손실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건도 년 단위가 아니라 월 단위로 하고 싶다는 겁니까?” “아뇨. 단지 알려드리는 겁니다. 모기지론이 부실 덩어리라는 루머를 믿으시면 큰 손해를 보실 겁니다.” “올해부터 주택담보대출에 변동 금리가 적용되는 건 아시죠? 이미 연체율이 증가하고 있는데 부실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참으로 안전하다고 믿는 것인지, 아니면 부실을 감추려는 건지 궁금하다. “미스터 진, 증권은 대출이 아닙니다. AAA 등급이 기본이며 부실한 대출도 조금 섞여 있어요. 그래서 좋은 상품이라는 겁니다. AAA 등급이 B등급의 손해를 충분히 메워주니까요. 완벽한 스테이크에 질긴 힘줄이 한 가닥 박혀 있다고 해서 스테이크를 버리지는 않겠죠?” “지금은 주택 가격이 너무 올라서 약간의 조정기를 거치는 중입니다. 폭락은 없어요.” 매니저 한 명도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골드만 삭스의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생각을 철회할 정도는 아닙니다. 아, 물론 정보를 주신 건 감사드립니다.” 젊은 임원은 어깨를 으쓱한 뒤 손바닥을 짝 쳤다. “그럼 미라클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한번 들여다볼까요?” 세 사람은 우리가 준비한 요약본을 펼쳐 순식간에 읽어내려갔다. “상품 분석이 아주 탁월합니다. 역시 미라클이군요.” “두 가지 사항만 원만히 합의한다면 계약은 문제없겠습니다.” 그들의 만족한 얼굴을 확인하고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험금은 매월 지급한다고 해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또한, 이미 프리미엄 조건을 체결한 전례도 있으니 그 방식을 따르겠습니다.” 함께 온 팀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프리미엄이라면 증권의 가치가 오를 때 지불해야 할 보험료가 급격히 올라간다. 보험료는 순식간에 감당하기 힘들어질지도 모르는 수준까지 치솟을 수도 있다. 난 그를 향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안심하라는 신호였지만 그의 얼굴에서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해야 할 말은 대신해 주시니 술술 풀리는 느낌인데요? 하하.” 젊은 임원의 웃음이 끝나기 전에 다른 조건을 말했다. “마찬가지로 전례가 있으니 보험은 4.8%로 하죠.” 웃음을 거둔 그가 난색을 드러냈다. “이런, 2년 전과 같은 조건을? 그건 좀 힘들겠는데요?” “왜 힘들죠? 주택보증증권의 가치가 떨어졌다면 리스크가 오른 것이니 보험금도 올라야겠지만 2년 전보다 증권의 가치는 꾸준히 상승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리스크가 줄었다는 의미 아닙니까? 같은 조건이라고 해도 문제없어 보입니다만…?” 혀를 날름거리던 세 사람은 양해를 구한 뒤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스왑 금액은 어느 정도 생각하십니까?” “금액에 따라 제 조건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그렇습니다. 1억 달러를 넘기신다면 4.8%로 체결하겠습니다.” 됐다! 5% 아니, 6%라고 해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골드만 삭스처럼 한 번에 큰 금액을 소화해 주는 곳은 드물다. “이런, 한 번에 남은 문제가 싹 해결되는군요.” 환하게 웃는 내 모습에 세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10억 달러니까 전체 금액도, 보험률도 단번에 정리한 거 아닐까요?” 이들의 표정은 참으로 볼만했다. 엄청난 금액에 놀라기도 했고, 10억 달러의 4.8%니 4천8백만 달러라는 거액의 공돈이 굴러들어온다는 기쁨도 보였다. 그리고 아주 조금, 마치 포커판에서 에이스 포카드를 쥐고서 뻥카에 흔들리는 약한 모습도 보였다. “아무 말씀 없으시다는 걸 좋게 해석해도 될까요?” “아, 실례했습니다. 물론 좋게 해석해도 됩니다. 아니, 우리가 부탁해야 하나요? 하하.” 나와 함께 온 팀장은 끊임없이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받기도 했다. 다른 금융사를 방문한 직원들의 상황을 실시간 점검하는 중이다. 난 두꺼운 계약서 공란에 숫자를 적었다. 4.8% 그리고 10억 달러. 계약서에 사인을 끝내는 순간 나도, 저들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양쪽 모두 이처럼 만족하는 계약이 어디 흔한가? 의자를 밀고 일어나 한 명씩 악수했다.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이때 함께 온 팀장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런던까지 포함해서 26곳 모두 계약 체결했답니다.” 한층 더 환해진 내 미소를 보며 골드만 삭스의 젊은 임원이 말했다. “좋은 소식이라도 온 것 같군요.” “네. 아주 괜찮은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입니다.” “아, 축하합니다. 혹시 어떤 내용인지 귀띔이라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어차피 이런 건 숨기기 힘드니까요. 월가는 비밀을 감추는 벽(Wall)이 없지 않습니까?” 금방 입소문 퍼지는 것은 두 가지다. 누군가 대박을 쳤거나, 아니면 쪽박 찼거나. “귀를 활짝 열어둬야겠군요. 미라클이라면 성공적인 투자로 소문났지 않습니까?” 자기가 한 말이 얼마나 큰 모순인지 깨닫지 못한다.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으니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그에게 약간의 힌트를 던졌다. “성공적인 투자로 유명한 우리 미라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체결한 이것도 성공적인 계약 아닐까요?” 난 두꺼운 계약서를 가볍게 흔들었다. 우리의 성공은 저들의 실패를 의미한다. 양측 모두 만족하는 성공적인 계약은… 아주 드물다. 그제야 저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인간은 나쁜 일에 대해서 생각하는 걸 꺼려한다. 그래서 가능성도 축소해버린다. 저들은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여기며 최소한으로 줄여버린 가능성, 즉 미국 주택시장이 붕괴된다는 최악의 악몽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걸 느끼고 있을 것이다. “뭐, 이 계약이 누구에게 성공적인지는 시간이 알려주겠죠. 그럼….” 얼어붙은 그들을 뒤로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화창한 뉴욕 하늘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다.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요? 맛있는 핫도그와 뜨거운 커피, 어떻습니까?” 여전히 불안한 표정의 팀장을 데리고 모퉁이에 보이는 푸드 트럭으로 걸어갔다. * * * 그날 오후, 미라클의 전 직원에게 두둑한 보너스를 안기고 일찍 퇴근시켰다. 나의 즐거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었고, 그 방법은 생각지도 못했던 돈과 그 돈을 쓸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이 최고라는 걸 안다. 혼자 자축이라도 하고 싶어 레이첼과 함께 갔던 바에 갔다. 맥주를 홀짝이며 실없이 웃고 있을 때, 바 곳곳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미라클이 오늘 하루 동안 미친 짓을 하고 돌아다녔다는 거… 들었어?” “물론이야. 그 소식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도대체 얼마를 뿌린 거야?” “정확한 금액은 모르지만 미라클 덕분에 전부 돈 잔치하게 됐을 걸? 우리 도이체 방크만 해도 1천2백만 달러라고 들었어.” “젠장, 임원들은 또 보너스 챙겼겠네.” “불안하지 않을까? 미라클의 미친 짓이 성공하면 2억4천만 달러를 줘야 해. 그 계약 체결한 부서는 전부 모가지야.” “미친 짓이 성공하는 거 봤어? 앞으로 어마어마한 보험금을 내야 하는데…. 미라클도 문 닫게 생겼어.” 하지만 그들은 나의 미친 짓에 웃지 못했다. 한 곳만 생각하면 미라클이 미친 짓 한 게 맞다. 그러나 월가에 뿌린 돈이 어마어마하다는 건 다들 짐작한다. 전화 몇 군데만 돌려도 몇 십 억이라는 걸 알게 될 테고 미친 짓도 정도를 넘으면 모두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바 곳곳에서 걱정스러운 속삭임은 있어도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런던에도 같은 짓 했다는 거 알아?” “런던? 더 시티?” “그래. 잉글랜드 뱅크에 6억 달러짜리 신용부도스왑을 계약서를 던졌다고 들었어. 진짜 수백억 달러 스왑을 진행한 거 아닐까?” “만약, 진짜 만에 말이야. 미라클의 베팅이 맞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 월가 전부 좆되는 거지.” 금요일 저녁이다. 지금부터 월요일까지 이틀. 경고등을 빨리 읽어낸 놈들은 정모를 모으고 긴급회의를 가지며 바쁘게 일할 것이고, 여전히 날 미친놈으로 생각하는 놈들은 큰 건 하나 걸렸다고 흥청망청할 것이다. “Hey, Son.” 흰머리가 성성한 중년의 바텐더가 내 앞에 맥주병을 놓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레이첼과 함께 여기서 7백억 달러니 뭐니 하지 않았나?” “그랬었죠. 레이첼을 아세요?” “물론. 그녀는 여기 단골이야. 좋아하는 칵테일 두어 잔 마시고 퇴근하는 게 일과라고.” “그렇군요.” “레이첼이 미라클의 보스인 것도 알아. 그러니까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미라클의 미친 짓이 그 7백억 달러와 관련 있는 거야?” 바텐더도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편히 한잔하고 싶었는데 흥이 깨져 버렸다. 난 지갑에서 백 달러짜리 한 장을 꺼내 올렸다. “혹시 대출받아 집 산 거 있어요?” “아니. 난 빚 없어.”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럼 더 늦기 전에 이 바 팔아버려요.” “뭐?” 화들짝 놀란 바텐더는 백 달러짜리를 챙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백수들만 득실거릴 월스트리트에서 술장사하다가는 망합니다.” 멍한 표정의 바텐더를 향해 살짝 웃어주고 뉴욕 밤거리를 나왔다. ======================================= [283] 복마전, 월스트리트 4 골드만 삭스의 리스크 매니지먼트 총괄 부사장 윌 에머슨(Will Emerson)은 지난주 금요일 체결한 계약서를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 서서 부사장이 입을 열기만 기다리던 붉은빛 머리의 사내는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에 먼저 연락을 해볼까요?” “잠깐 기다려. 전체 금액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먼저야.” 윌 에머슨 부사장은 턱을 괴고 여전히 계약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핸드폰이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불러 봐.” 펜을 든 그는 휴대전화를 통해 들리는 숫자를 빠르게 적어 나갔다. “이거 확실하지?” 그는 숫자가 나열된 종이를 펜으로 툭툭 치며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통화를 끝냈다. 이미 윌 에머슨은 사색이 되었다. 그는 곁에서 있던 붉은 머리의 사내에게 말했다. “전원 회의실로. 지금 당장!” 붉은 머리 사내는 부사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밖으로 달려 나갔다. 윌 에머슨은 다시 숫자를 확인했다. 펜으로 동그라미 친 700억이라는 숫자가 무섭게 가슴을 짓눌렀다. 에머슨 부사장이 회의실로 들어가자 십여 명의 눈길이 그를 향했다. 에머슨은 다른 말 없이 한 사내를 향해 질문부터 던졌다. “마이클, 현재의 채무 불이행 현황은?” “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변동금리 적용 뒤의 채무 상환 상태 말이야!” “3% 언저리일 겁니다.” 마이클의 자신 없는 대답에 에머슨 부사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언저리? 일 겁니다? 추측 말고 정확한 숫자 말해. 5분 준다.” 마이클은 노트북 자판을 미친 듯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난 금요일, 미라클이 모기지 저당증권이 휴지가 된다는 데 베팅한 돈이 28억 달러다. 저들의 계획은 35억 달러였는데 몇 군데에서 베팅 금액을 좀 낮췄다. 계약 내용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으니까 그들이 이기면… 거의 560억 달러를 가져가는 거야.” 회의실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라클의 행적이야 주말 내내 술자리의 화제였으니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전체 베팅 금액은 처음 들었다. F로 시작되는, 욕 같은 감탄사가 터질 법도 했지만, 부사장님의 굳은 표정 때문에 모두 가까스로 참았다. 그들은 미라클이 28억 달러나 쏟아부었는데 골드만 삭스는 겨우 4천8백만 달러밖에 챙기지 못했기에 부사장이 저렇게 화를 내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전에도 미라클과 같은 생각인 놈들도 있었어. 하지만 금액이 크지 않았지?” 부사장의 말에 누구는 머리를 끄덕였고 누구는 생소한 듯 눈치만 보기도 했다. “미라클은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곳이야. 원금 손실을 극도로 꺼리는 곳인데 28억 달러나 쏟아부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에머슨. 매년 모기지론 증권 상품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5천억 달러예요. 28억 달러가 거금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푼돈에 불과합니다.” 누군가 반론을 제기하자 용기를 얻는 또 다른 누군가는 낙관론을 펼쳤다. “라스베이거스 증권화 포럼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증권의 손실률은 5%에 불과하다고 발표했어요.” “누가?” “베어스턴스의 브루스 밀러 사장의 기조연설에서….” 에머슨 부사장은 그의 말을 끊고 물었다. “5%의 근거는? 확인했어?” 낙관론을 펼친 이가 대답 못 하고 꾸물거릴 때 채무 불이행 현황을 파악하던 마이클이 그를 살렸다. 하지만 그가 파악한 숫자는 회의실의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애머슨, 올해부터….” “얼마야? 숫자만 말해!” “8%…….” 위기감은 마이클이라는 자가 가장 확실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상환 불이행의 그래프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걸 봤기 때문이다. “이 추세라면 다음 달은 9% 이상 될 겁니다. 10% 선이 눈앞이에요.” 마이클은 숨겨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도 알렸다. “변동금리는 이미 고정금리의 4배가 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당 잡힌 주택은 전부 넘어갈 판인데….” 윌 에머슨 부사장의 눈썹이 떨렸다. 증권화 포럼의 기조연설에서 나온 숫자는 근거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포럼은 더 많은 파생상품을 팔기 위해 좌판을 까는 장사치들의 모임일 뿐이다. 장밋빛 미래, 안전한 투자, 돈 잔치…. 이런 미사여구만 늘어놓기 바쁜 놈들 아닌가? 윌 에머슨이 리스크 매니지먼트 업무만으로 부사장까지 오른 건 그의 세심한 통찰력 때문이다. 거대한 댐에서 아주 작은 개미구멍을 찾아 댐이 무너지는 걸 막을 정도의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 사직서를 써야 할 것 같았다. 개미구멍이 아니라 이미 커다란 균열이 일어났고 물이 줄줄 샌다. 댐이 곧 무너질 것 같았다. 화려한 돈 잔치에 눈이 멀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자신을 책망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는 지금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았다. 리스크를 사전에 감지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닥친 리스크를 최소로 해야 한다. 이제 짐을 싸서 댐이 무너지기 전 피난길에 오르는 것이다. 윌 에머슨 부사장은 회의실 테이블의 전화를 들었다. “경비원 5명을 즉각 올려보내.”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입을 열지는 못했다. 부사장의 굳은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비원이 도착하자 에머슨이 말했다. “내가 다녀올 동안 모두 여기서 꼼짝도 하지 말아. 휴대전화는 테이블에 올려놓고.” 서로 눈치만 보자 그가 소리를 질렀다. “빨리. 아니면 이 자리에서 해고야!” 사람들은 재빨리 휴대전화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부사장은 경비를 향해 말했다. “휴대전화 전부 끄고 사용 못 하게 해. 노트북도 마찬가지. 그리고 전화선을 뽑아버리고, 이 사람들이 회의실 밖으로 못 나가게 막아. 잠시면 끝나.” 경비가 휴대전화를 수거하기 시작하자 윌 에머슨은 골드만 삭스의 회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회의실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한 고립된 섬으로 변해버렸다. * * * “존. 긴급 상황입니다.” “일단 앉아. 물 한 잔 마시고.” 존 로저스(John Rogers) 골드만 삭스 회장은 급히 달려온 윌 에머슨 부사장을 진정시켰다. “미라클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그렇습니다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로저스 회장은 손을 들어 TV를 가리키며 에머슨의 입을 막았다. “저거부터 보라고.” TV에는 CNN 긴급 속보가 나오는 중이었다. 『서브프라임 업체 2위인 뉴센츄리 파이낸셜은 2일 델라웨어 윌링턴 소재 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을 냈습니다. 이날 회사는 직원의 54%인 3,200명을 감원하고, 계열회사를 매각하는 등의 구조조정 내용도 발표했습니다. 최근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이자율이 올라가고 주택 가격이 떨어지자 부실이 커지며 어려움을 겪어왔고, 작년 거의 600억 달러에 달하는 론을 제공했지만, 지난달부터 대출을 정지시켰습니다. 또한, CIT그룹 및 그리니치캐피털이 1억5천만 달러의 자금 지원에 합의했다고 설명했습니다만 이미 주가는 작년 대비 97%나 하락했습니다.』 윌 애머슨은 눈을 질근 감았다. 아뿔싸! 이미 터져 버렸다. “뉴센츄리의 최대 채권자가 누군지 알지?” 회장의 물음에 에머슨은 머리만 끄덕였다. 바로 골드만 삭스다. 그리고 세계 10위권 안의 모든 금융기관이 주요 채권자들이기도 하다. “미라클이 10억 달러 스왑을 계약했다고?” “그렇습니다.” “레이첼 그 여자는 직감이 뛰어난 건가? 아니면 치밀한 수학자야? 딱 하루 전에 치고 빠지는구먼.” “존, 미라클의 10억 달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CDO(부채담보부증권)부터 빨리 정리해야 합니다.” 다급한 부사장과는 달리 로저스 회장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우리가 CDO를 정리하기 시작하면? 다른 곳에서 보고만 있을까? 모기지론 베이스의 모든 증권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올걸?” “그렇다고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는 일 아닙니까?” “윌.” “네.” “미라클이 왜 10억 달러만 계약한 줄 아나?” 에머슨은 느긋하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 회장 때문에 속이 타올랐다. “10억 달러가 적은 금액은 아닙니다.” “아니지. 전체 금액이 600억 달러라면서?” “560억 달러입니다.” “560억이라고 해도 어차피 2%도 안 돼. 미라클은 우리의 지불 능력을 정확히 파악한 거야. 우린 이미 신용부도스왑 계약을 꽤 많이 체결했거든.” “도, 도대체 얼마나…?” “250억 달러.” 에머슨 부사장은 회장의 느긋함이 포기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았고, 리스크 매니지먼트 부사장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넋 나간 에머슨을 보며 로저스 회장은 껄껄대며 웃었다. “너무 그러지 마. 그중에 100억 달러는 우리 꺼니까.” “네? 그게 무슨…?” “혹시나 해서 우리도 보험을 들었지. 우리 회사로부터 분사한 게리 트러스트 알지?” “네. 독자적인 성격의 투자팀 아닙니까? 뛰어난 인재들로 구성한….” “그래, 그 회사와 우리 골드만 삭스가 신용부도스왑을 체결했어. 자회사가 100억 달러는 벌어들인 셈이니 숨통은 좀 틜 거야.”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본사는 주택 시장이 승승장구할 거라고 떠들어 대고, 자회사는 주택 시장이 망한다는 데 베팅했다. 골드만 삭스의 주주들이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분명 기업 윤리를 배반한 꼴이다. 만약 100억 달러 중 1천만 달러는 존 로저스 회장의 개인이 계약한 것이라는 것을 에머슨이 알았다면 그는 절망했을 것이다. 존 로저스는 소파를 툭 치며 일어났다. “늦었지만 우리가 선수 치는 게 맞겠지? 가지고 있는 휴지 쪼가리들, 최대한 빨리 처분하도록 지시하지. 자네는 이 사실이 퍼지는 걸 최대한 막아주게.” 회사 내부는 어찌해보겠지만, 외부는 이미 글렀다. 다른 기업들도 바보가 아니다. 미라클이 휩쓸고 지나간 이유를 분석할 것이고 그들도 자신과 같은 결론을 낼 것이다. 월가는 이미 폭탄이 터졌다. 단지 이 사실을 개인 투자자들이 최대한 늦게 알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 항상 그렇듯 최대 피해자는 일반 투자자들 아닌가? * * * “골드만 삭스가 가장 빨라. 물량을 쏟아내며 소화하려고 발버둥 치는데?” 온종일 걸려오는 전화에 시달린 레이첼은 커피를 마시며 숨을 돌렸다. “내일이면 모든 곳에서 던지겠죠. 또 그걸 사겠다고 덤비는 멍청한 곳도 나올 테고요.” “이제 미국 주택담보 대출은 채권 회수가 불가능하다는 걸 모두가 알 때까지의 시간만 남았어.” 레이첼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았다. “하워드. 내가 파악한 바로는 주택저당증권은 권총에 지나지 않아.” “파생상품 말씀하시는 거군요.” “응. 복합 CDO, 스퀘어 CDO, 더블 CDO 등 CDO를 묶은 합성 파생상품의 규모가 얼마인지 알아?” “네. 20배 이상이죠.” 레이첼은 담담하게 말하는 나를 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요? 세계 경제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니까 나도 호들갑을 떨어야 해요?” “아니. 세계 경제가 무너지는데 넌 엄청난 돈을 긁어모았어. 그런데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기쁨과 안타까움이 서로 부딪혀 상쇄해버렸어요. 560억 달러를 벌었지만 증발해버릴 미국의 부 때문에 수백만에 이르는 선량한 시민이 길거리를 전전할 겁니다. 언제까지나 즐거워할 수는 없죠.” 사실 돈을 번 것은 그리 기쁜 일이 아니다. 진짜 기쁜 일은 이 경제 위기가 진동기 부회장을 쓰러트릴 총알이라는 것이다. ======================================= [284] 복마전, 월스트리트 5 중동 두바이의 지불유예선언과 한국 금융권의 경색, 진동기 부회장은 이런 이중의 압박은 견디지 못한다. 한국 금융권은 채권 회수에 열을 올릴 것이고 기존 대출의 연장은 없을 것이다. 행여나 벗어날 길목이 있다면 내가 차단할 것이다. “하워드. 무슨 생각해?” “아, 별거 아닙니다. 이번 사태가 한국에는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지 잠시 생각해 봤어요.” “참, 넌 순양그룹의 경영자이기도 하지. 계속 깜빡해.” “일단은 그렇죠.” “무슨 걱정이야? 이번 사태로 순양그룹 전체가 피를 흘려도 넌 충분히 수혈할 수가 있는데? 아니, 한국 전체금융을 구제할 수도 있을 걸?” “전 그런 영웅 놀이는 사양입니다. 아 참, 말 나온 김에… 필요할 때 언제든 한국 미라클로 자금을 보낼 수 있게 준비해 두세요.” “560억 달러 전부?” “아뇨. 그 정도까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스왑 체결한 돈이 당장 들어오지는 않아. 알지?” “물론입니다. 계약한 금융사마다 다르겠지요. 내년 상반기가 끝나야 모든 돈이 다 들어온다는 게 제 예상입니다. 미국 금융계는 침몰하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만큼 거대하니까요.” 1912년 4월 14일 오후 11시 40분, 빙산과 충돌한 5만2천 톤의 타이타닉호는 뚫린 구멍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후 완전히 침몰하는 데는 세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버티는 회사도 있겠지만 560억 달러 대부분은 내년 봄 이전까지 거둬들일 것이다. “그럼 한국으로 보내고 남은 돈은? 어디에 투자하는 게 좋을까?” “늘 하시던 대로 하세요. 파생상품 쪽은 거들떠보지도 마시고 우량주를 사놓는 것이 좋겠어요. 특히 애플사를 유심히 살펴봐요.” “유심히 살펴보라는 건 꼭 사야 된다는 말로 들리는데?” 레이첼은 곧바로 시세부터 확인했다. “주당 15달러 수준을 유지하네.” “장기투자 종목으로는 나쁘지 않을 겁니다.” “혹시 올해 초,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맥 월드를 봤어?” “아뇨. 맥 월드에서 새로운 게 나왔어요?” “정전기 터치식 셀폰인데, iPhone이라고. 곧 정식 판매에 돌입할 거야.” 벌써 나왔나? 내년이 아니었던가? “그래요? 그럼 그거 하나 사서 가지고 돌아갈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최초의 아이폰인 1세대 iPhone OS는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두 번째 모델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순양전자는 휴대전화 시장에서 막강하지만, 스마트폰 시대에는 패스트 팔로워일 뿐이다. 이번에도 시장 우위를 지킬 수 있을까? 온갖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레이첼은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혹시 중국은 어떨까?” “중국?” “응. 사실 홍콩과 상해에 사무실을 내고 싶은데 네 의견이 궁금해.” 올바르게 판단하는 CEO의 의견은 따라야 한다. “뜻대로 하세요.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한다면 절대 손해 보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한 10년 묵혀뒀다가 열 배 이상의 수익을 거둔 후, 한국 연기금이 보유한 주식을 왕창 사버릴까? * * * 월가에서 펀드런(펀드 대량환매)이 시작되는 걸 확인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젠 그 누구도 이 사태를 막을 수 없다. 쏟아지는 펀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테고 가격은 폭락할 것이다. 주택담보 대출의 채무 불이행이 15%가 넘어가면 미국의 주택시장이 망했다는 걸 언론에서도 떠들어 댄다. 물론 금융사들은 악착같이 부인하겠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손에 든 펀드를 조금이라도 더 환매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뻔뻔한 거짓말을 일삼을 것이다. 한국에 도착해서 신문과 뉴스를 눈여겨봤다. 아직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 대한 기사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고 오로지 야당의 대선후보 경선에 관한 기사만 넘쳐났다. 본선에 나가기만 하면 대선 승리는 떼놓은 당상이다. 두 후보는 경선이 곧 대선인 양 사활을 걸고 상대를 물어뜯기 바빴다. 서로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세상에 드러났지만 극구 부인하며 약점을 지우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었다. 온갖 치부가 다 드러나더라도 당내 경선에서 이기기만 하면 내년 2월 대통령 취임식까지 직행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반면 여당은 도토리 키 재기 하듯 여러 명의 후보가 난립해서 공방을 주고받았지만, 누구 하나 관심 두는 이 없었다. 나 역시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환매 현황은 어떻습니까?” “시장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소량씩 정리했습니다. 아직 조금 남았고요.” 장도형 부사장은 순양금융그룹이 쥐고 있던 금융상품 리스트를 내밀었다. 퍼펙트한 결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손해 보는 부분이 있더라도 전체 수익이 플러스가 된다면 모른 척 내버려 둬야 할 때도 있다. “곧 주식 시장이 폭락할 겁니다. 순양그룹의 주식을 제외하고 정리하세요. 주가가 떨어지면 다시 사들이면 됩니다.” “남아있는 펀드는 어떡할까요?” “그냥 쥐고 있으세요.” “손해를 감수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장도형은 의외라는 듯 또다시 확인했다. “남들이 피 흘릴 때 우리는 땀이라도 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운 좋은 놈이 되어야지, 뭔가 이상한 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앞으로 국내 시장이 요동칠 겁니다. 직원들에게 절대 흔들리지 말고 섣부른 단기 투자에 빠져들지 않도록 철저히 주의하라고 하세요. 올 하반기 실적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성적을 내더라도 인사고과에 유리하지 않다는 걸 각인시키세요.” 기관투자가 개인 투자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개인은 아주 유리한 점이 있다. 시장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투자할 필요 없이 은행에 돈을 넣어두면 된다. 최소한 이자라도 챙길 테니까. 하지만 기관은 그럴 수 없다. 경제가 엉망이라도 돈을 굴려야 한다. 그래야 수수료를 챙기고 기업의 이익을 만든다. 은행에 돈을 넣어둔다는 건, 일하지 않고 논다는 뜻이다. 또한, 개인 투자자는 1년이고 2년이고 한 종목에 돈을 묶어 둘 수 있다. 떨어진 주식을 끝까지 쥐고 기다리다 올랐을 때 매도할 수 있다. 하지만 기관은 떨어지는 주식을 마냥 쥐고 있을 수 없다. 빨리 손 털고 다른 우량주를 찾아내야 한다. 쥐고 있어도 괜찮다는 걸 알지만, 연말 실적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개인 투자가 기관투자의 흉내를 내니 실패하는 것이다. “실장님. 관망도 좋지만 일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뇨. 놀아야 합니다. 폭락하는 장에서 압박을 받다 보면 온갖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입니다. 아, 전부 휴가 쓰라고 하십시오. 연월차 전부 소진하는 것도 좋겠군요.”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장도형 부사장은 직원이 놀아도 좋다는 말은 처음이다. 낯설기도 하지만, 반갑기도 할 것이다. “혼란스러울 때 실적이라는 놈이 어깨를 짓누르면 올바른 판단은 힘듭니다. 냉정을 되찾았을 때 일해도 늦지 않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결정은 순양금융그룹 직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야당의 대선 후보 경선 며칠 전, 코스닥지수가 10% 넘게 급락했다. 오전 한때 선물시장 급락으로 사이드카가 발동됐고, 오후에는 주식과 선물의 매매를 일시 정지하는 서킷브레이커가 사상 두 번째로 발동됐다. 무려 293개 종목이 하한가를 찍었고 코스피 역시 전 업종이 하락했다. 특히 대형 증권주는 무려 10% 넘게 급락했고 순양 증권도 피하지 못했다.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은 1조 원 넘게 팔아치웠는데, 기관투자가는 무려 1조5천억 어치를 사들였다. 펀드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한국은 미국 증시 폭락의 현상만 봤을 뿐 원인이 뭔지는 모르는 것이다. 아니, 알면서 쉬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폭탄을 일반인에게 떠넘기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 뻔뻔한 거짓말이 난무하는 것일 수도 있다. 미래에셋운용 측은 ‘자사 대형 주식형 펀드에는 큰 이상이 없다’고 말했고 UBS의 아시아 담당은 매력적인 밸류에이션 운운하며 한두 달이면 안정될 것이라는 달콤한 말도 속삭였다. UBS 미국 본사는 폭탄이 터져 정신을 못 차리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얼마나 됩니까?” 간단한 내 질문에도 장도형 부사장은 사색이 되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지, 지난주에만 35억 달러를 매입했습니다. 어쩌려고 이런 짓을 했는지….” “우리는 아니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또?” “국내 주식형 펀드만 11조 원 이상이 쏟아질 겁니다. 해외주식형 펀드는 15조 원이 넘고요.” “국내는 반 토막, 해외는 휴지가 될 테니까 20조 원이 증발하는군요. 미국 파생상품의 규모는 어떻습니까?” “한심하게도 한국 금융권에서는 정확히 파악하지도 못합니다. 워낙 복잡한 상품이다 보니 어떤 구성인지도 몰라요. 무디스나 S&P가 AAA라고 했으니 무작정 사들인 겁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흐흐.” “네? 그게 무슨…?” “아, 아닙니다.” 황당한 표정의 장도형을 못 본 채하며 웃음을 거뒀다. “장 부사장님. 지금부터 정확히 알아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실장님.” “진동기 부회장님 산하 계열사들의 거래은행을 철저히 조사하십시오. 각 은행마다 부채가 얼만지, 담보는 뭔지. 그리고 은행들이 이번 사태에서 받을 타격이 어느 정도인지 말입니다. 지점 단위까지!” “계열사가 아닌 은행을요?” “네.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장도형은 내 시선을 피하지 않더니 살짝 미소 지었다. “은행의 자금압박을 진동기 부회장으로 돌리려는 생각이시군요.” “빙고.” 돈이 말라버린 은행은 은행이 아니다. 이미 IMF를 거치며 은행도 망할 수 있고 공중분해 될 수도 있다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이번 외환위기는 그들에게 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되살려줄 것이다. “그럼 우리 금융그룹의 여유 자금을 지금이라도 그 은행에 넣어줘야 하겠군요.” 눈치 빨라서 좋다. 은행 금고가 비어갈 때 우리가 맡겨놓은 돈마저 빼버린다. 금고를 다시 채우기 위해서는 채무자를 쥐어짜는 수밖에 없다. 은행의 BIS 비율, 즉 자기자본비율을 맞추지 못한 은행은 악덕 사채업자보다 더 흉폭하다. 사채업자는 개인을 파멸시키지만, 은행은 기업을 파멸시킨다. 기업에 딸린 식구가 몇인지, 조금의 여유만 주면 충분히 되살릴 수 있다는 사실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 자기가 생존하기 위해 무자비한 회수 작업에 들어간다. “나도 한국 미라클의 자금을 그 은행에 예치할 겁니다. 가장 최적의 타이밍에 전량 빼버리면 정신을 못 차리겠죠.” 장도형 부사장은 잠시 생각하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동기 부회장님…. 이번에 고생 좀 하겠군요. 그런데 실장님. 이번 목표는 어디까지입니까? 예전엔 순양카드였는데…. 이번엔 어떤 계열사를 노리시는 겁니까?” “계열사가 아닙니다.” “네?” 장도형 부사장은 내 생각을 읽으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이번엔 제대로 대어를 낚을 생각입니다. 회사가 아니라 사람이죠.” 그의 눈이 확 커졌다. “혹시 진동기 부회장…?” “네. 우리 둘째 큰아버지, 참 열심히 일하셨는데 이젠 좀 쉬셔야죠. 완전히 은퇴하시던가, 아니면 제 밑에서 전문경영인으로 계속 부회장직을 맡으시던가 결정해야 할 겁니다.” 자존심 강한 그가 허울뿐인 부회장직을 계속 맡을 리 없다. 나도 일말의 정은 남겨둘 생각이다. 그의 두 아들은 순양의 일꾼으로 계속 일할 기회는 줄 것이다. ======================================= [285] 복마전, 순양가족 1 “미국은 잘 다녀 왔어?” “네.” “꽤 오래 있었지? 이번 미 증시 폭락과 관계있는 일이었어?” “그렇습니다. 아, 저 때문에 미 증시가 폭락한 건 아닙니다.” “네가 그 정도로 영향력 있는 놈은 아니지. 변방의 왕자 주제에. 흐흐.” 웃으며 말하는 이학재 회장의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한국 증시도 엉망인데 내가 꼭 알아둬야 할 게 있으면 말해. 나중에 내가 잘못했다고 책임 묻지 말고.” “유동성 자금 문제가 생길 텐데, 그건 제가 문제없도록 하겠습니다.” “기업 하는 사람이 돈 문제 해결해주는 든든한 물주 있으면 게임 끝이지. 그럼 신경 끊는다?” “네. 그런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어째 표정이 어둡습니다?” 이학재 회장은 집무용 책상에서 일어나 내 곁의 소파에 앉았다. “진영기 부회장이 대형 사고를 칠 것 같다. 아니, 확실해.” 대형 사고라니 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걸까? “또 지주회사니 뭐니 작당합니까? 저와 진동기 부회장님의 공동의결권이 손들어주지 않는 한 힘들 텐데요?” “아니. 이번엔 승계작업이다.” “네? 승계요?” 이학재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내미에게 지분 물려주는 작업에 착수했다는 정보를 들었어. 그쪽 그룹 기획실 놈들이 비밀리에 작업한다고.” “네? 영준이 형에게요?” “그래. 지분 물려주는 건 집 한 채 물려주는 것과 다르다는 건 너도 알잖아. 아주 오랜 시간 천천히 준비해야 하니 그리 이른 것도 아냐. 영준이 나이도 이미 마흔이다.” 안 본 지 오래됐으니 까맣게 잊었다. 그놈 나이가 벌써 마흔이라니. “퍼뜩 판단이 안 섭니다. 어차피 큰아버지의 지분이 이동하는 것이니 변수가 될 것 같지는 않은데, 맞습니까?” 이학재 회장도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만큼 복잡한 문제라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 한번 해보자. 네가 미라클을 이용하듯 진영준이 법인 하나를 설립하고, 진영기 부회장이 그 회사에 자신의 지분 일부분을 팔아버리면?” “팔아버리는 지분은 비상장 회사의 지분이겠죠?” “그렇지. 그런데 그 비상장 회사는 순양 그룹의 지분을 잔뜩 쥐고 있겠지?” “그럼 그 새로 설립한 법인의 가치는 폭등하겠네요.” “그래. 문제는 진영기는 그 지분의 51%만 가지고 있어도 그룹 지배력은 여전한 거야. 새로 설립한 그 법인으로 일감 잔뜩 몰아주거나 중간에서 쿠션만 먹어도 실적은 하늘을 찌를 테고….” “그 법인을 상장하면 다시 엄청난 돈을 챙기는군요. 49%만 주식 시장에 내놓으면 되니까.” 이런 식으로 단지 지분만 쥐고 있는 회사가 늘어나면서 돈을 챙긴다. 직접 돈을 벌어들이는 순양 그룹을 이용하여 단지 지분을 쥐고 있는 정체 불분명한 수많은 회사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게 번 돈으로 분명 2단계 전략을 시작할 거다. 내가 썼던 방법이니까.” 전환사채 발행, 신주인수권부사채 저가 배정 등이 2단계다. “그들의 지분이 늘어날 가능성은 없습니까?” “확답하기 어렵다. 아주 아래 등급의 계열사를 껍데기만 남기고 알맹이를 빼먹을 수는 있을 거야. 그런 계열사들은 지배지분의 영향력에서 꽤 벗어나 있으니까.” 자신 없는 말투였다.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은데요?” “사실 잘 모르겠다. 아주 똘똘한 놈 하나가 뭔가 허점을 발견했다면 새로운 방법을 쓸 수도 있겠지. 나도 그쪽에서 손 뗀 지 오래됐으니까 말이다. 법도 많이 바뀌었을 테고…. 이럴 때는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가 아주 큰 변수가 될 수 있어.”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지분을 진영준이 갖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진영준은 그의 아버지보다 더 수월한 상대다. 부잣집은 대를 내려갈수록 더 성격이 고약해지고 참을성도 부족하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랐으니까. 하지만 이학재 회장의 말대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도 낭패다. 막아야 하나? “회장님.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 없을 때, 가만히 두고 보며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보다는 초기에 막아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승계작업을 막겠다는 거냐? 어떻게?” 놀란 눈으로 날 보는 이학재 회장에게 웃음을 보냈다. “회장님. 검찰청 출두, 마지막으로 한 번 해주실 수 있습니까?” “뭐?” “이번엔 과거와 다른 이유로 말입니다. 피의자가 아니라 참고인이겠죠. 기억나지 않는다, 모른다로 일관하는 게 아니라 기억나는 대로 아주 소상히 말씀하시는 겁니다. 참고인으로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검찰청이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킬 것 같다. 재빨리 손을 저으며 진정시켰다. “밀린 세금 내는 셈 치죠, 뭐. 할아버지께서 주신 유산, 법대로 세금을 내야 한다면 진영기 부회장님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요?” “너 설마?” 이학재 회장은 이미 내 생각을 읽었다. “전 국세청과 적당히 합의 볼 생각 있습니다. 하지만 진영기 부회장님은 두 번의 승계작업을 거치니까 세금도 두 배겠죠? 물론 세금 안 내려고 발버둥치다 보면 구린 구석이 자꾸 드러날 테고….” “그러다 너도 수천억의 세금을 내야 할지도 모른다.” “항상 그래 왔지 않습니까? 문제 생기면 적당히 사과 기자회견하고, 추징금 대신 사회 환원이니 하며 몇 백억 던져주고. 대신 전 세금 내겠다고 하면 더 임팩트 있을 걸요? 오천억 정도 던져줄 생각도 있습니다.” 같은 돈이라도 세금으로 내는 것보다는 사회 환원이라는 명목으로 던지는 기부가 낫다. 세금은 전례를 남기며 앞으로 계속될 승계작업의 걸림돌이 된다. 또, 다른 재벌가의 승계작업과 비교되어 끊임없이 세금 문제로 시끄러워진다. 재벌은 증여세와 상속세를 내지 않는다는 게 전례로 남아야 한다. “그래서? 네가 얻는 건 뭔데?” “굉장히 많은 걸 얻습니다. 일단 대중의 환호.” “그런 걸 얻어서 뭐하려고? 최초의 재벌 3세 연예인 되려고?” “그럴 리가요. 대중의 환호는 정치를 압박하죠. 정치를 압박하면 공무원이 움직이고.” 이학재 회장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국세청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겠구먼. 흐흐.” “이것도 타이밍의 문제입니다. 가장 절묘할 때 기자회견을 하겠습니다. 자진 납세라는 국민의 의무를 보여줄 겁니다.” “그 타이밍은 순양 그룹의 자금줄이 말랐을 때를 말하는 거지?” “네. 얼마 남지 않았어요. 미국 금융이 무너지면 순양도 가뭄이 들거든요.” * * * 돈 만지는 놈들은 뻔뻔할 뿐만 아니라 지독한 악당이다. 이와 반대로 일반 대중들은 멍청하리만치 순진하다. 10년 전, IMF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속고 있다. 미국은 서브프라임 모지기론 사태로 5조 달러가 증발하는 중이었고 뉴욕 센트럴 파크에는 집 잃은 사람들의 텐트가 늘어났지만, 한국의 코스피 지수는 2천을 넘기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투자사와 금융사가 손에 쥔 폭탄을 일반인에게 떠넘길 때까지 한국 경제는 순항 중이라는 걸 과시하는 것이다. 언론도, 정치도 같은 목소리를 내며 순진한 사람들에게 불붙은 생명력이 끝난 증권을 팔아 치웠다. 게다가 한국은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으니 미국발 금융위기를 숨기는 데는 더할 나위 없었다. 단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던 서민 경제를 지금에 와서 살리겠다고 외치는 후보를 철석같이 믿는 이도 서민이었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입에 올리지도 않으며 7%의 경제성장과 300만 개의 일자리 창출을 약속한 후보가 이런 서민들의 압도적인 표를 받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 대통령이 취임식도 올리기 전인 2008년 1월, 뉴욕상업거래소에서 국제유가(WTI)가 사상 처음으로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하며 물가가 급등하기 시작했지만, 뉴스는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도배되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라는 대통령 취임선서가 끝나기도 전, 미국 달러화도 폭락했다. 한국이 미국발 금융위기를 체감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미국 5위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의 부도가 알려지기 시작한 때였다. 그나마 정보를 빨리 습득하는 측은 바로 부자들이었다. 내 방에 뛰어든 진태준은 손끝까지 떨고 있었지만 태연함을 가장했다. “요즘 많이 힘들지? 이럴 때 내가 도와줘야 하는데 그다지 해줄 게 없네?” “진짜 돌아버리겠어. 아무 일도 못 하고 손 놓은 지 오래야. 알잖아? 순양투자나 증권이 잔뜩 움츠린 거.” “소문 들었다. 직원들이 전부 휴가까지 다 썼다면서?” “응. 일하면 뭐해? 손대면 폭락인데.” “그래도 다른 그룹에 비해서는 성적이 나쁘지 않던데? 손실도 적고, 주가 방어도 잘했고.” “아이러니하지? 가만있으면 중간은 갈 거라고 생각해서 작년 3/4분기 때부터 놀았거든. 그런데 업계 1위야.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딴 놈들이 못해서. 하하.” 진태준은 내 웃음소리를 들으며 눈치만 계속 살핀다. “그런데 태준 형, 혹시 내게 할 말 있는 거 아냐? 표정이 별론데?”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투자한 게 좀 있는데 그게 말썽이야.” 장도형 부사장이 보고하기로는 작년 9월 펀드가 쏟아질 때 진태준이 꽤 많은 물량을 털어냈다고 했다. 물론 엄청나게 손해 본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무슨 투자? 설마 금융파생상품은 아니겠지? 아니…. 잠깐만.” 내가 수화기를 들자 진태준의 눈이 커졌다. “너 어디에 전화하는 거냐?” “순양투자 사장. 형의 거래 내역부터 좀 봐야….” “도, 도준아. 끊어. 거긴 아무것도 몰라.” 그럼 그렇지. 이제 진짜가 나온다. “응? 순양 말고 다른 회사를 이용했던 거야?” “그건 아니고…. 여러 곳에 분산했어. 순양에 맡긴 건 다 팔아치웠지. 그런데 작년 10월쯤 주가가 오르길래 또 투자했어. 순양은 부정적인 의견이라 다른 회사와 거래했지.” 손해 보고 팔아치우니 주가가 올랐다. 땅을 치고 후회할 만큼 본전 생각이 간절하니 또 지른다. 전형적이다. 착실했던 태준 형이 도박의 맛을 알아버렸다. 도박은 잃을 때 더 흥분된다고 했던가? “이젠 본전은 고사하고 똥값에 내놔도 산다는 사람이 없지?” 진태준이 힘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과연 잃은 돈은 얼마며 그 돈의 출처는 어디일까? 내가 믿을 놈은 못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찾아온 걸 보면 회사 자금에 손댄 게 틀림없다. 급히 메꿔야 하는데 돈 나올 구멍이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온 것이다. “태준 형. 급한 건 알겠는데 내가 어떻게 해줄 방법은 없어. 지금 모든 금융상품이나 펀드는 쓰레기야. 고철 판다 생각하고 빨리 처분해. 나중엔 고철값도 못 건져.” “알아. 나도 그걸 네게 떠넘길 생각은 없어.” “그럼?” “자금 좀 빌려줘. 회사가 아니라 개인 대 개인으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돈을 빌려주고 이놈에게서 받아낼 만한 게 있을까? 가만히 놔두면 회사 돈에 손댄 게 드러날 테고 또 한바탕 야단법석이 날 텐데…. “은행을 이용하지 그래? 얼만지 모르겠지만, 사적으로 돈거래 하는 건 좀 그렇다.” “은행이 지금 대출해주겠어? 전부 발등에 떨어진 불 끄느라 씨알도 안 먹혀.” 그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얼만데? 수십억 박았어?” 쉽게 말하지 못하는 걸 보니 몇 백억이다. “말해. 그래야 방법을 찾아보지.” “급한 건 6백억이야. 그거면 돼.” 급한 게 6백억? 요놈, 회사 돈만 6백억이구나. 당연히 빌려줘야겠다. 순양건설 무너트릴 때 6백억이면 수류탄 정도는 된다. 폭탄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 [286] 복마전, 순양가족 2 간절한 진태준을 보며 난 입을 떡 벌렸다. “6백억?! 우와…. 태준 형 돈 많구나!” “놀리냐? 진짜 알짜 부자는 너잖아. 뭘 놀라는 척해?” “난 6백억을 날릴 만큼 부자는 아니거든.” “야! 염장질 그만해!” 웃는 내 모습에 속이 타는지 소리를 버럭 지른다. “혹시 영준이 형에게는 부탁해 봤어? 순양전자라면 6백억 정도는 기밀비로 빼내 올 수 있을 텐데?” 진태준은 손부터 내저었다. “미쳤냐? 그 인간이 어떤지는 잘 알잖아? 절대 남 도와줄 인간이 아냐. 대신 빌려줄 듯 말 듯 사람 속이나 태우겠지.” “진짜 그 이유야? 영준이 형에게 말했다가는 6백억 날린 게 흘러 흘러 둘째 큰아버지 귀에 들어갈까 봐 말하지 않은 건 아니고?” “너도 영준이 형 닮아가냐? 줄 듯 말 듯 자존심 밟아가며…. 애태우는 내 모습이 그렇게 보고 싶어?” 여기까지가 진태준의 인내심이다. 6백억이라는 큰 사고를 쳤지만 수습하는 데는 잠깐의 부탁이 전부다. 자존심은 잠시 묻어두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보통 사람의 인내는 기대하기 어렵다. “형은 날 핏줄로 봐? 진짜 사촌 동생으로 생각하는 거야?” “무슨 말이야, 그게?” “몰라서 그래? 내가 둘째 큰아버지와 지분 놓고 티격태격하잖아. 진심으로 도와줄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않아?” 인내를 잃고 인상 쓰던 진태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만큼 급하다면 대답이 되겠냐?” 이달 안에 지급해야 할 돈이다. 거래처에 줘야 할 돈을 차일피일 미뤘거나 어음으로 돌려막기 했다. 그렇게 몇 달을 버티다 더는 미룰 수 없어진 거다. 더 미루다가는 6백억 날린 게 모두의 귀에 들어갈 지경까지 궁지에 몰린 것이다. “명동도 있잖아. 순양의 신용이면 문제없을 텐데?” “그 즉시 아버지 귀에 들어간다. 이것도 대답이 됐어?” 잠깐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다 웃으며 말했다. “6개월. 이자는 안 받지만, 기한은 지켜.” 진태준의 표정이 환해졌다. “도준아.” “됐어. 나중에 밥이나 한번 사.” 그에게 손을 내저으며 수화기를 들었다. “장 부사장님. 6백억 인출 준비해 주세요.” 진태준이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쉴 때 그를 향해 말했다. “형은 순양건설 어음 준비해줘.” “응? 아…. 그렇군. 차용증이 필요하다, 이거지?” “기한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 아냐? 그리고 태준 형도 어음이 좋지 않아? 공금 손댄 거 들킬 염려도 없고.” 그의 안색이 붉게 물들었다. “너 눈치 빠른 걸 깜빡했다.” “걱정 마. 비밀은 지켜줄 테니까. 적어도 우리가 고자질할 만큼 싫어하는 건 아니잖아.” 그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6백 억짜리 폭탄을 선물로 준 사촌 형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들 만큼 호감도 있다. * * * 고등학생을 중심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을 때, 18대 총선이 시행되었다. 작년까지 집권여당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맥없는 모습을 보여준 야당은 아니나 다를까 처참한 패배를 기록했다. 투표율이 46.1%밖에 안 되어 전국단위 선거 사상 최악이었지만 여당과 그 지지세력이 의회마저 장악했다. 금융위기의 진정한 쓰나미가 아직 한국을 덮치지 않았지만, 전국이 정치에 매몰되어 있는 동안 체력 약한 지방이 먼저 쓰러지기 시작했다. 약한 체력이다 보니 은행이 조금만 돈줄을 죄어도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쓰러진 빈자리는 대기업이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사람 욕심은 끝이 없어. 그렇지?” 신임 대통령과 첫 경제인 만찬을 끝내고 돌아온 이학재 회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진동기 부회장님 말씀이십니까?” “그 사람도 포함해서.” “청와대 반찬이 입에 맞지 않으셨습니까? 불만이 많아 보이십니다. 흐흐.” “지방 아파트 건설에 뛰어들고 싶어서 규제 좀 풀어달라고 다들 난리 치더라.” “새삼스럽게 왜요? 규제 때문에 못 들어간 것도 아니면서. 대기업 아파트가 지방마다 다 들어섰지 않습니까?” “경치 좋고, 입지 조건 좋은 곳은 전부 그린벨트니까. 그거 규제만 풀어주면 노다지 아니겠어? 개발 제한구역이니 땅값은 바닥이고 아파트만 세우면 수도권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이익이 많이 남잖아.” “그래서 청와대는 뭐라고 해요?” “적극 검토. 해준다는 말이지. 지방 경기가 안 좋으니 그걸로라도 부양책을 쓰겠다는 건데….” “잘됐네요. 지방은 아파트 브랜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순양과 대현, 두 이름이면 어딜 가더라도 밀리지 않으니까요.” 이학재 회장은 내 말의 진의를 알아채고 슬며시 웃었다. “넌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작정했구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니까요. 둘째 큰아버지와 이야기 나누셨죠?”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 완공한 버즈 두바이, 그거 때문에 순양건설의 위상이 대현을 누를 정도잖아. 세계 최대의 빌딩이니까. 주가도 상당히 뛰었고. 진동기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거지.” “원하는 건 우리 HW가 시공해 달라는 거겠죠?” “그래. 두바이에서 돈 들어오려면 아직이고, 있는 돈마저 두바이에 다 쓸어 박았잖아. 엄두도 못 낼 지경인데 청와대에서 가장 강력하게 요구하더라.” “어차피 순양건설은 제 손에 들어올 테니까 원하는 대로 들어주죠, 뭐.” “그게…. 재미있는 일이 생겨서 말이야. 선뜻 결정할 필요가 없어.” “재미있다니요?” “똑같은 제안을 대현에서도 했다.” “네?” 깜빡했다. 대현도 두바이에 올인했고 자금 사정은 순양과 마찬가지다. 대현 그룹도 아들 여럿이 그룹을 나눠 가진 채 서로 기회만 노리며 품 안의 칼을 꼭 쥐고 있다. 언제든 찌르고 뺏어오기 위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대현이다. 두바이 몰락이라는 네 예측이 맞다면 대현 건설은 부도야. 두바이에 물린 돈만 2조8천억인데 어떻게 버텨?” “순양이 아니고 왜 대현이죠?” “냉정한 기업 평가지. 순양건설이 대현과 나란히 서는 건 아직이야.” “그럼 둘 다 인수하면 어떻습니까? 초대형 건설사가 탄생하는 건데 경영이 버겁다면 안 되겠지만요.” 이학재 회장은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내 말처럼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에 돈을 잔뜩 들고 있으니 부도 날 회사를 인수하는 건 식은 죽 먹기 아닌가? “자신만만한 걸 보니 미국에서 돈 많이 벌었나 보네?” “좀 벌었습니다. 두 건설사 인수할 정도는 충분해요.” 이학재 회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검토 시작할게. 두 회사 인수해서 겹치는 부분은 팔아치우던지, 정리하면 괜찮을 게야.” “그런데 HW 건설이 이 모든 걸 감당하겠습니까? 인력이나 장비가 턱없이 부족하지 않아요?” “돈만 준다면 우리 밑에서 일할 회사 수두룩하다. 지금 건설경기로 보면 우리가 가뭄의 단비라고.” “날씨를 돈으로 조절할 수 있다면 단비 정도가 아니라 소낙비라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고 두 회사의 인수 뒤를 논의했다. 그리고 망하기 일보 직전인 미국의 거대 기업 두 곳은 뉴욕 미라클의 CEO 레이첼 아리에프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 * * “이제 그만 인정하시죠. 담보부채권은 가치가 없습니다. 부도율이 15% 넘으면 끝장이라는 게 이 바닥 통설 아닙니까? 지금 60%를 넘었고 끝도 없이 추락 중입니다.”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부탁입니다.” “마지막 남은 자산 다 처분하고 엄청난 퇴직금 챙길 시간을 달라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아닙니까?” 메릴린치와 AIG 보험의 대리인인 두 변호사는 레이첼의 따끔한 일침에 주춤했고, 함께 온 두 회사의 모기지 채권 수석 회계사는 먼 산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가 눈뜬장님으로 보여요? 메릴린치의 부실은 500억 달러가 넘는다는 걸 알아요. 우리 미라클의 스왑 체결은 23억 달러죠. 500억 달러를 감당하지 못할 게 뻔한데 침몰하는 광경을 구경만 할 만큼 내가 멍청해 보입니까?” “레이첼. 솔직히 말씀드리죠, 우리 메릴린치는 지금 뱅크오브아메리카와 협상 중입니다. 틀림없이 그쪽에서 인수할 겁니다. 실질 손실이 클수록 협상이 불리해요. 미라클의 23억 달러는 우리가 아니라 뱅크오브아메리카가 지불합니다.” 메릴린치의 변호사가 황급히 말하자 레이첼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 참, 뱅크오브아메리카에서 받을 돈도 19억 달러가 넘는데 서둘러야겠네. 500억 부실인 메릴린치를 인수하기 전에. 꼭!” 레이첼의 눈꼬리가 올라가자 사내들은 다시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내가 웬만하면 여러분의 사정을 감안해서 스왑 청구를 뒤로 미루려 했어요. 가능하면 충격파가 덜하기를 바라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요. 월가의 몰락은 미라클에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 다소 희망적인 그녀의 말에 사내들의 눈빛에는 한 줄기 기대가 서렸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더욱 날카로웠다. “스탠 오닐 회장, 어제 정식 퇴임했죠?” “네. 이제 임시 이사회 운영체제입니다.” 메릴린치의 대리인이 대답했다. “퇴직금은 얼마나 받았죠?” “네?” “500억 달러의 부실이라면 퇴직이 아니라 해임했어야 정상이죠!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명예로운 퇴직이니 퇴직금도 받았을 것 아니에요!” 대리인은 다시 꿀 먹은 벙어리로 변했다. “무려 1억6천만 달러를 퇴직금으로 챙겼죠? 500억 달러의 부실을 책임지고 재직 시절 받았던 연봉 4천5백만 달러를 전부 토해내도 용서가 될까 말까 한데 3년 치가 넘는 연봉을 별도로 챙겨요? 당신네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이런 비도덕적인 일을 자행하면서 내게 유예를 부탁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아요?” 무려 500억 원의 연봉을 받던 CEO가 50조 원에 달하는 부실을 만들었지만, 나 몰라라 하며 2천억 원에 육박하는 퇴직금을 챙겼다. “몇백의 가정이 집을 날리고, 직장을 잃고, 퇴직연금마저 사라져 버린 대가가 바로 퇴직금 1억6천만 달러라는 건 아세요?” 그녀의 분노가 AIG로 향했다. “당신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AIG는 2천억 달러에 육박하는 부실을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셉 카사노 사장은 해고는커녕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컨설턴트라는 해괴망측한 자리를 차지했죠?” “그. 그건…. 조셉 칸사노 회장이 이 사태를 책임지고 사임했고 마지막까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모습이다? 그런 사람이 바하마 별장으로 전용기기를 타고 떠나요? 매달 백만 달러 이상의 컨설턴트 비용을 받아가며?” AIG의 부실은 너무 거대해서 인수할 만한 기업이 없었다. 신용부도스왑은 일종의 보험이고 AIG는 세계 최대 보험사답게 엄청난 스왑 계약을 체결했다.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주는 위험을 AIG만큼 크게 받은 곳도 없다. 하지만 Too Big To Fail, 대마불사의 법칙이 어김없이 작동할 것이다. 1천8백억 달러의 부실이 터지면 그 영향은 돌이킬 수 없다. 결국, 긴급 구제금융을 투입하여 AIG를 되살리는 것이 부시 행정부의 마지막 일이 될 것이다. “더 말하기에는 내 입이 더러워지는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하겠어요. 모두 돌아가세요. 그리고 절대 잊으면 안 됩니다. 내일 오전 업무 시작과 동시에 우리 돈이 계좌에 들어오지 않으면 곧바로 소송을 진행할 겁니다.” 소송이라는 단어에 사내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소송에 걸린 회사를 인수할 만큼 뱅크오브아메리카는 멍청하지 않다. 그리고 AIG도 마찬가지다. 소송 중이라면 정부가 긴급 구제금융을 수혈하려 해도 의회가 막아버릴 게 뻔하다. 두 회사는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빨리 돈을 마련해서 저 지독한 레이첼의 다음 행동을 막아야 했다. ======================================= [287] 복마전, 순양가족 3 요즘은 아예 HW 그룹 회장실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두바이에 쏟아붓는 자금, 바로 폭탄이 되어 진동기 부회장 머리 위로 쏟아질 자금을 매일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도준아. 이거 괜찮은 거야? 미국발 금융위기가 생각보다 약한 거 아냐?” 이학재 회장은 조간신문을 휙 던졌다. “미국 금융위기 충격파가 약하면 우리가 진동기 어깨에 날개 달아주는 꼴이야. 자금 유동성에 문제없어지면 내년에 떼돈 벌어. 더욱 굳건하게 지금 위치를 지킬 거라고.” 그가 던진 신문을 펼치자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도대체 세상 돌아가는 걸 이렇게 모르다니? 한국 금융을 이끌어 간다는 놈들의 안목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되나? 『산업은행, 미국 거대 금융 그룹 리먼 브라더스 인수 타진. 이미 구체적인 인수 조건 제안. 주당 23달러, 18달러, 6.4달러, 세 차례에 걸쳐 지분인수를 제안.』 “미친놈들. 호흡기 달고 오늘내일하는 걸 인수해서 뭐하려고….” “확실하지?” “물론입니다. 리먼 브라더스는 미 정부의 구제금융 혜택도 못 봅니다. 여긴 정말 구제불능이라니까요. 곧 파산입니다.” 리먼 브라더스는 파산 후 세계적인 투자은행을 목표로 하는 노무라 증권이 리먼 브라더스의 아시아, 유럽 부문만 인수한다. 인수금액은 유럽 부문의 경우 전 직원 고용 승계 조건으로 단돈 2달러, 아시아 부문은 2억2,500만 달러다. 자기자본이 11조 원이나 되는 노무라 증권은 세계적인 투자은행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에 저 정도 인수금액은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돈 2달러에 인수할 수 있는 회사를 주당 23달러로 지분인수하겠다는 건, 바보이거나 뭔가 더러운 거래를 숨겼다는 뜻이다. 산업은행이 그만큼의 바보는 아니니 지금 어떤 거래가 오고 가는지 뻔하다. 산업은행은 국책은행이다. 파산할 리먼 브라더스를 인수하면 엄청난 손실이 발생할 것은 불 보듯 뻔하고, 그 손실은 결국 국민의 혈세로 부담해야 한다. 국민의 혈세를 엉뚱한 곳에 쓰는 거야 내 알 바 아니지만, 이건 아주 좋은 기회다. “기자회견 한번 해야겠어요.” “뭐? 산업은행 막으려고?” “그건 핑계고, 진짜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미국의 금융 사태가 쓰나미가 되어 한국을 덮칠 것이라는 예언이자 경고죠.” 이학재 회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경고가 아니라 폭탄을 미리 터트리려는 속셈이구나.” “며칠 남지도 않았어요. 리먼이 파산하는 그 순간이 세계 경제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내가 쏘아 올리나 CNN 뉴스가 쏘아 올리나 차이는 없지만, 이 기회에 제 신뢰도를 올려야겠습니다.” “정치할 거냐? 신뢰를 쌓아서 어디에 쓰게?” “그래야 나중에 순양그룹의 승계 과정의 비리를 폭로할 때 여론이 제 편을 들지 않겠습니까?” “하여튼, 잔대가리 하나는….” 내 계획에 놀란 모습을 감추려는 듯, 괜한 핀잔이다. “이틀 뒤에 기자회견해라. 지금 지방 아파트 단지 진행 중이다. 순양, 대현 둘 다 진흙탕에 발 담갔으니 내가 밀어 넣으마.” 짐작은 했지만 나와 이학재 회장, 손발이 꽤 잘 맞다. * * * “부시 행정부가 수천억 달러의 공적 자금을 투입할 지경입니다. 8백만 채가 넘는 집이 흉가로 변했고 베어스턴스는 회생불능, 모기지 주택담보 대출의 회수불능 판정으로 미국 전역이 얼어붙었습니다. 장담하건대 리먼 브라더스는 파산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진도준 실장님. 말씀하신 리먼 브라더스가 현재 산업은행이 인수협상을 진행 중인 바로 그 회사가 맞죠?” “그렇습니다. 리먼 브라더스는 하나뿐입니다.” “산업은행의 인수협상이 잘못된 거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됩니까?”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죠.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업이 파산하면 주식의 가치는 0입니다. 무가치한 자산을 주당 26달러나 주고 산다? 그 돈으로 차라리 길가에 버려진 돌멩이를 사는 게 낫습니다. 화날 때 힘껏 던질 수 있는 도구라도 되니까 더 가치 있습니다.” 기자회견을 진행할수록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목소리를 낮췄다. “10년 전의 일을 벌써 잊었습니까? 달러를 흥청망청 써댄 결과,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미국의 금융위기가 세계 경제에 먹구름을 끼게 했습니다. 대비해도 부족할 판에 망할 기업에 달러를 쏟아붓는 건 매국 행위나 다를 바 없습니다.” “혹시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를 IMF와 비교하시는 겁니까?”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단지 진원지가 아시아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죠.” IMF라는 말이 나오자 기자들이 후끈 달아올랐다. 강 건너 불구경할 만큼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이다. “진도준 씨, 지금 IMF와 같은 위기가 다시 시작된다는 뜻입니까?” IMF는 역시 강하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국가의 트라우마 같은 거다.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특히 각 기관의 엄격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절대 느슨한 여유를 보이면 안 됩니다.” 한국의 젊은 워런 버핏이 하는 말이다. 경제지는 1면 톱으로, 중앙지는 경제면에 내 얼굴을 실었고 연예지나 다름없는 스포츠 신문도 내 얼굴을 찍어냈다. 방송사도 다르지 않았다. 젊은 천재 투자자이며 순양 3세라는 타이틀은 시청률을 보장하는 확실한 카드라는 걸 그들도 안다. 첫 꼭지는 아니지만, 나의 회견을 비중 있게 다뤘다. 재벌이 지금껏 국가 기관에 경고를 보내는 일은 없었다. 대부분 대학이나 경제연구소에서 이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아주 보기 드문 일이니 국민의 관심을 끄는 데도 성공했고 여론도 내게 호의적이었다. 산업은행은 단 하루 만에 리먼 브라더스 인수를 포기하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 단지 검토 수준이었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고 한발 물러섰다. 내가 진짜 원했던 결과도 얻었다. 입 다물고 있던 대학의 경제학 교수들이 일제히 포문을 열었고 많은 경제연구소도 암울한 미래를 경고하는 연구논문을 쏟아냈다. 더욱이 2008년 9월 14일 리먼 브라더스가 700조 원이라는 천문학적 숫자로 파산 신청한 사실이 주요 외신을 통해 긴급 뉴스로 터져 나오니, 내 이름도 다시 오르내렸다. 덕분에 부가적인 이익도 얻었다. “실장님. 기자회견은 정말 신의 한 수였습니다. 하하.” 장도형 부사장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언론 기사 보셨습니까?” “예언자라는 거요?” “네. 투자천재, 예언자…. 지금 실장님께는 이런 별칭이 따라다닙니다. 그리고 사회 지도층은 늘 장밋빛 미래만 말하며 주식 사라, 집을 사라 등등 돈 빼먹기 좋은 소리만 일삼는데, 실장님께서는 위기를 말하고 지갑을 닫으라는 입바른 소리를 하신 유일한 분이라고요.” “칭찬은 쓸데가 없어요. 이득 본 게 있어야죠.” “가장 양심적인 경영인의 회사. 그게 우리 순양금융그룹이 득 본 겁니다. 주가도 오르고 고객들도 몰려듭니다. 웬만한 TV 광고 수백 번 때린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봤습니다. 하하.”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은 우리나라 금융 시장도 공황 상태에 빠트렸다. 코스피, 코스닥 시장을 합쳐 시가 총액은 하루만에 51조 원이 증발했고, 증권 업종의 주가가 12% 넘게 폭락했지만, 순양증권은 주가가 오르는 기적을 보여준 유일한 금융사였다. 장도형 부사장은 시원하게 웃으면서도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기자들이 후속 취재를 하고 싶어 하는데 어떠십니까? 인터뷰 스케줄 좀 잡을까요?” “아뇨. 더 말하면 밑천 들킵니다. 딱 그 정도가 적당해요. 대중의 호기심이 남아 있어야 계속 내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보다 산업은행은요? 지시한 건 처리했습니까?” “네. 행장과 임원들에게 식사 대접했고, 선물도 좀 안겨 줬습니다. 이 일로 꽁하지는 않을 만큼 충분히요.” “잘하셨습니다. 이제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세계 경제 몰락의 도미노가 시작됩니다. 모든 투자를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당장 미국의 실업률이 최소 10%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고 유럽도 예외일 수 없다. 미국 부동산 압류 주택이 이미 9백만 채를 넘었다는 기사도 나왔다. 미국 내수 경제는 완전히 얼어붙을 것이다. 세계 최대의 소비국인 미국이 얼어붙으면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는 중국도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는다. 이미 중국 제조업이 붕괴하는 조짐도 보였다. 실직자가 천만이 넘었다. 이 실직자들은 월급 7, 80달러가 고작인 노동자들이다. 이렇게 상류의 물길이 흔들리면 마지막에는 항상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큰 고통을 받는다. 기술자들은 컴퓨터를 만들고 우주선을 만들었다. 금융 기술자들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꿈을 만들었고 그 대가로 기술자보다 수십 배가 넘는 연봉을 받았다. 하지만 꿈이 악몽으로 바뀌면 꿈을 산 사람은 망한다. 꿈을 판 사람은 아무런 피해를 당하지 않고 말이다. 이 비극의 원인 제공자인 미국 월가의 금융 기술자들은 10월 4일, 조지 부시의 7천억 달러 정부지원금으로 또다시 흥청망청한 파티를 열었다. 미국 정부는 1천6백억 달러로 AIG 생명의 주식을 사들여 최대주주가 됐고 골드만 삭스에는 150억 달러를 수혈했다. 모건 스탠리는 정부의 지원금을 받자마자 임원들에게 140억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했고, 골드만 삭스는 정부 수혈금 전체를 보너스라는 명목으로 임원들이 나눠 가졌다. 마지막으로 뉴욕 미라클의 레이첼은 56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찍힌 계좌를 사진으로 찍어 메일을 보냈다. 딱 한 줄의 메시지와 함께. Congratulation! World’s Richest Person! * * * 대선을 앞둔 미국은 이번 금융위기를 진화하기 위해 이미 7조 달러를 넘게 투입했고 앞으로도 이 정도 금액을 더 투입할 계획이었다. 기축 통화로서의 자격이 흔들릴 정도였지만, 이 덕분에 위기의 쓰나미는 유럽에서 멈추는 듯했다. 아시아는 강력한 태풍 정도로 그치는 것이 확실해지자,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감춰둔 탐욕을 다시 드러냈다. 위기가 닥치면 항상 그렇듯이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진다. 신정부는 경기 둔화와 내수위축을 극복하고자 대대적인 감세정책을 폈고 재건축 규제를 완화했다. 이 덕분에 재벌 대기업은 다시 꽃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네 계획은 망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순양건설만 부자 만들어 주겠어.” 이학재 회장은 안절부절못하며 현황판을 살폈다. “빚내고 외상거래하는 겁니다. 외상값 못 받으면 끝납니다. 염려 마시고 순양건설이나 대현건설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아파트 올리라면 올리고, 쇼핑센터 짓자고 하면 지어주세요.” “두바이가 멀쩡하잖아! 미국 위기에 쓰러진다고 하지 않았어?” “곪아가는 중이죠. 썩어 문드러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두 회사에 물린 돈만 3조 원이 넘으려고 해. 내년이면 5조가 될지도 몰라.” “그 돈으로 순양그룹의 중공업 부문과 대현의 건설 계열을 다 먹을지 모릅니다. 싸게 사는 거죠.” 불안에 떠는 이학재 회장에게 난 여유를 보였다. 더 지르고 더 퍼주어야 한다. 돈은 넘쳐난다. 난 또다시 돈을 쓰러, 아니 맡겨두기 위해 시중 은행장들을 잇달아 만났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구세주를 만난 듯 머리를 조아렸다. ======================================= [288] 복마전, 순양가족 4 “그, 그러니까 원하는 금액만큼 채워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뭘 그리 놀라십니까? 이미 순양금융그룹의 예금이 적지 않은 걸로 아는데요?” “그러니까 놀라는 겁니다. 우리 은행이야 고마울 따름이지만….” 진한은행의 행장은 의심 한가득 품은 눈빛을 감추려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개인이야 이자라도 벌어볼 양으로 은행에 돈을 맡기지만, 기업은 다르다. 여러 군데 분산투자하는 게 정석인데 왜 또 돈을 넣겠다는 건지 의심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거절하기는 더 어렵다. 연말 실적과 자기자본 비율을 맞추려면 머리를 더 조아려야 한다. “형편 어려운 걸로 아는데 사실이 아니군요. 꺼리시는 걸 보니 말이죠.” “아, 아닙니다. 실장님. 형편이야 엉망인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전국 지점들이 죽을 것 같다고 아우성입니다. 순양 같은 대기업이야 기초가 탄탄하니 이 고비를 넘기지만, 중소기업은 줄도산이에요. 올해 손실로 떨어야 할 채권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습니다.” 은행장은 내 눈치를 살피며 한참 동안 우는 소리를 늘어놓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실장님. 우리 진한은행 측에 원하는 것이 있으시면 툭 터놓고 말씀하시지요. 그래야 제가 편히 원하는 숫자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필요할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행장님께도 간절히 원하는 숫자, 바로 지금 말씀하세요. 생각은 나중에 하시고요.” 예상하지 못한 대답인지 행장은 눈만 동그랗게 떴다. “기업과 은행입니다. 조건 없이 부탁을 들어줄 관계는 아니지요. 들어줄 만하고, 상응하는 대가가 있다면 언제든 부탁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오늘 제가 행장님의 힘든 점을 해결해드린다고 해서 다음에 행장직까지 걸고 절 도와주시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원하는 걸 미리 말씀드려봤자 소용없습니다.” 은행장은 조금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금방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제가 불필요한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그려. 허허.” 그는 어색한 웃음 뒤에 숫자를 말했다. “빠듯하게 말하면 6천억, 여유 있으시다면 8천억 정도 부탁드립니다.” “사람 보내겠습니다. 8천억 들고 갈 겁니다.” 은행장이 머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실장님. 그리고 지금이 아니라 다음인 것도 꼭 기억하겠습니다.” “다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다음에’라고…. 아무쪼록 제가 행장이라는 자리를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부탁하셨으면 합니다. 허허.” 은행장은 능글거리는 웃음을 뒤로하고 사라졌다. 눈치 빠른 영감. 돈 많은 사람 앞에서는 머리를 숙일 줄 아는, 뼛속까지 은행원인 사람이다. 그리고 난 4대 시중은행의 최고 은행원을 차례차례 만났다. * * * 미국 최초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자 하와이 출신으로 제44대 대통령에 당선된 버락 오바마는 선거 유세 내내 부패한 월가를 비난했다. “월스트리트와 워싱턴의 탐욕이, 그리고 책임을 방기하는 동안 미국인은 금융위기로 내몰렸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골드만 삭스 출신의 티모시 가이트너(Timothy Geithner)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고, 윌리엄 더들리(William Dudley)를 연방준비은행의 신임총재로 임명했다. 윌리엄 더들리는 골드만 삭스의 수석경제학자였다. 이 외에도 경제 관련 관료 대부분이 골드만 삭스 출신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월스트리트를 개혁하겠다는 그의 공약이 진심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지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하다. 워싱턴은 미국 금융계가 지배한다. 재벌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처럼. 너무 노골적으로 들리는 친재벌 정책보다 훨씬 순화된 용어인 ‘기업 프랜들리’라는 신정부의 기조는 재벌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다. 미국 재무부가 월가의 족쇄를 풀어준 것처럼 정부는 온갖 규제의 빗장을 풀어주며 전국을 토목 현장으로 만들었다. 실물 경제는 바닥을 기는데 건설업계는 더할 수 없는 호황을 누렸다. “순양건설 먹기 전에 우리 HW 건설이 더 커지겠다.” 이학재 회장은 어이가 없는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순양, 대현은 두바이에 올인하고 한국은 이름만 빌려주는 꼴이야. 이제 건설도 OEM 시대가 된 거라고.” “곧 옵니다. 유럽이 독일의 힘으로 버티는 거 안 보이십니까?” “이미 조짐이 보인다. 대현 건설이 아파트 분양대금에 손댄 게 분명해.” “네? 대현이요?” “그래. 자꾸 결제를 미뤄서 우리 쪽에서 심하게 따졌어. 시행사가 분양대금 받으면 시공사 결제가 최우선 아니냐? 그런데 분양광고, 설계, 떴다방까지 결제를 미뤘다는 거야. 두바이에 돈 때려 박느라고.” 드디어 썩은 내가 솔솔 풍긴다. “그 말씀은 두바이에서 들어와야 할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지. 두바이 현지 분위기는 정말 험악해. 유럽 기업들은 소송도 불사할 정도로 막바지에 몰린 것 같아. 자국 경제도 엉망인데 두바이에서 돈 떼이면 끝장이거든. 저쪽 놈들이 사활 걸고 덤비니까 순양이나 대현은 명함도 못 내밀고 구경만 하는 신세야.” 반가운 소식이다. 두바이의 모래폭풍이 얼마나 매서운지 모두 호되게 당할 때를 준비해야겠다. “회장님. 두 건설사에 받을 돈 확실하게 뽑아두십시오. 전 인수를 준비하겠습니다. 높은 분들께 약도 좀 쳐놔야겠어요.” “받을 수는 있는 거냐? 끝장난 두바이가 돈 챙겨 주겠어?” 금액이 상상을 초월하다 보니 배짱 좋은 이학재 회장도 불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시간은 걸리지만 다 받습니다. 국내 아파트는 손해 좀 보겠지만,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후…. 지금은 네 말을 믿는 수밖에. 우리 HW도 모래폭풍에 휩쓸려가지 않으려면 총알 든든해야 할 거다.” “마음 편히 가지시고 믿으세요. 저 돈 많아요.” 이 회장은 자신만만한 내 모습에 한숨을 거두고 표정을 폈다. “알았다. 아 참, 인테리어 직원 보낼 테니까 네 집 뜯어고쳐라.”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집을 왜 뜯어고쳐? “너 새로 나온 오만 원권 구경했냐?” “구경했죠. 보여 드려요?” 내가 지갑을 꺼내자 이 회장은 아주 깔보는 눈빛으로 웃었다. “지폐 말고 박스, 인마. 흐흐.” 아직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눈알만 굴리고 있으니 이 회장이 오만 원 한 묶음을 서랍에서 꺼내 내게 툭 던졌다. 올해 6월 말에 나온 빳빳한 신권이다. “그게 백 장이야. 비타오백 한 박스에 그거 11개 들어간다. 사과 상자는 12억까지 담을 수 있어. 끝내주지 않냐?” 정말 즐거워하는 표정이다. 하긴 만 원짜리를 가득 담은 박스를 얼마나 많이 배달했던 사람인가? 이젠 웬만한 떡값은 한 손으로 가볍게 들 수 있는 비타오백 한 박스… 아니, 한 통이면 끝이다. 겨우 2억을 채울 수 있는 사과 박스는 꽉 채워 넣으면 12억, 007 가방에는 3억 이상 넣을 수 있다. 나도 잘 안다. 얼마나 많이 들었다 놨다 했던가? 오만 원권이 가득한 상자를 자동차 트렁크에 실은 횟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나 같은 사람에게 오만 원권은 정부가 준 선물이었다. 고된 업무가 5분의 1로 확 줄었으니까. “그거랑 제 집을 뜯어고치는 건 무슨 관곕니까?” “이번에 처음 찍어낸 오만 원권이 1조 원가량 된다. 혹시 몰라서 좀 챙겨 뒀다. 집에 뒀다가 필요할 때 써. 약칠 곳 많다면서?”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비자금 통장에 든 돈을 모를 리 없는 분이다.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모르나? 내 생각을 읽은 그가 말했다. “올해 건설 일거리가 좀 많았어? 이런 기회 좀처럼 오기 힘들다. 현금은 많을수록 좋아. 챙겨둘 수 있을 때 챙겨 두는 거다.” “그래서 집을 뜯어고쳐 현금 쌓아둘 공간을 만들라는 겁니까?” “그럼? 창고 빌려서 쌓아둘래? 집도 넓잖아. 내 말 들어.” 대한민국에서 이런 쪽의 경험은 가장 많이 한 분의 말이니 따를 수밖에. “네. 그런데 얼마나 커야 합니까?” “일단 50개 확보해 뒀다. 앞으로 100개 정도는 쌓아둬야지.” 일단이라는 말이 무섭게 다가왔다. 시중에 오만 원권을 구경하기 힘든 이유도 알았다. “그럼 우리 집 인테리어 공사하는 동안 잘 곳도 없으니 호텔에서 지내야겠군요.” “하루면 끝나. 집 비워줄 일은 없을 거다.” “핑계 삼아 두바이 호텔에서 며칠 자는 거죠. 아, 회장님도 함께요.” “뭐?” “한방 쓰자는 말은 아닙니다. 특실로 준비해 둘 테니까 며칠 쉬다 오자고요.” 영문을 몰라 놀란 이 회장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 * * 순양 본관 대회의실은 한 달 넘게 순양건설과 두바이 TFT가 차지하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건 단지 쌓인 피로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회장님. 이 상태로 4/4분기가 넘어가면 올 스톱입니다.” “HW의 이학재 회장도 위기를 느꼈는지 더는 자금 동원이 어렵다고 합니다.” 이미 진동기 부회장도 잘 아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붉은 경고등이 끊임없이 울렸지만, 기회는 늘 위기 속에 있지 않은가? 살 떨리는 위험을 헤쳐 나가야 금덩이 가득한 동굴을 발견하는 법이다. 그러나 두바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유럽 업체들은 이미 위기의 조짐을 현실로 받아들인 것 같다. 동굴이 무너져 갇히기 전에 보물을 포기하고 탈출해야 하나? 그러기에는 지금까지 투입한 자원과 노력이 아깝다. 더 큰 문제는 그중에 얼마나 건질 수 있는지도 미지수다. 이 미지수를 정확히 알려면 발주처인 두바이 월드와 서로 칼날을 겨눈 채 담판을 지어야 한다. 두바이 월드는 순양건설이 공사를 중단했을 때 일어나는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 짓다가 만 건물은 콘크리트 더미의 흉물에 불과하다. 세계적인 도시를 계획했지만, 포탄 떨어진 전쟁터 같은 황량함만 남는다. 대신 순양건설은 지금까지 투입한 자원과 돈을 헛되이 날려버릴지도 모른다. 돈을 받고 건설을 재개하는데 걸릴 기간 동안 극심한 자금난에 허덕여야 한다. 하지만 이 상태라면 곧 자금난에 빠진다. 같은 결과를 마주하게 될 테니 담판 짓는다고 해서 더 나빠질 것은 없다. “지금부터 공사 중단할 경우를 시뮬레이션해 봐. 그리고 태준아.” “네.” 진태준은 화들짝 놀랐다. 회사에서는 직책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아버지다. 그런 아버지가 얼마나 속이 타들어 가길래 이런 실수를 하실까? “넌 캐시 플로우 확실하게 그려. 단돈 십 원이 라도 착오 나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진동기는 회의실의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말했다. “지금 건설 사장 두바이에 나가 있지?” “네.” “두바이 월드에 경고 날리라고 해. 빨리 돈 내놓지 않으면 언제든 철수할 수 있다고.” * * *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가진 자가 불가능한 상상을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두바이다. 두바이 국제공항에서 아랍의 타워라는 뜻인 ‘부르즈 알-아랍’ 호텔까지 가는 동안, 리무진 창밖으로 보이는 두바이 야경은 사막이라는 느낌은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여기는 미래의 낙원이다. 이학재 회장은 입을 떡 벌린 채 야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날 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숫자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사니까 촌놈 다됐구나. 지금 여기야말로 숫자에 불과한 돈이 현실로 바뀐 모습이다. 디지털로 쌓아두는 것보다는 훨씬 괜찮지 않아?” “그러네요. 제가 오일 달러만큼 돈이 없어서 이런 도시는 못 만들겠지만, 타워 하나쯤은 가능합니다. 여기 일 끝나면 타워 하나 올리죠. HW 타워.” 진지한 내 표정에 이 회장은 손을 휘휘 저었다. “무슨 말을 못해요. 그냥 해본 말이다. 그런 낭비를 왜 해?” “뭐, 어떻습니까? 돈 많을 때 쓰는 재미도 좀 있어야죠. 빌딩도 남으니까 낭비는 아닙니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HW 타워의 모습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 [289] 복마전, 순양가족 5 “그럼 순양 본관보다 딱 한 층만 더 높게 지어.” “거봐요. 회장님도 그런 욕심 생기시죠? 흐흐.” 경쟁자를 내려다보는 우월감. 그것 역시 숫자다. 한 층이라도 더 놈이, 1m라도 더 높이…. 단지 1이라는 숫자에 불과하지만, 이 숫자를 얻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다. “아무튼, 여기 일 잘 끝내면 시작해.” 속내를 들킨 이 회장은 얼굴을 돌렸다. 내일 저녁에 만날 사람 앞에서는 저런 표정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숨길 것도 없으니 들킬 것도 없다. “그럼 오늘은 또 다른 사치를 즐겨볼까요? 7성급 호텔에서?” “공식적으로는 5성급이다. 다른 5성급 호텔과 너무 차이 나서 그렇지.” “숙박비도 엄청나더군요. 1박에 3천만 원이 넘다니.” “그러니까 이런 리무진으로 우릴 모시러 온 거 아니겠어?” 이학재 회장이 리무진의 루프를 손으로 툭 쳤다. 호텔에 도착하니 우리가 묵을 동안 서비스를 담당할 십여 명의 직원이 입구에 늘어선 채 머리를 숙였다.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호텔 로비로 들어가니 온통 금으로, 진짜 금으로 도배한 인테리어 때문에 또다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침 흘리겠다. 쪽팔리게 하지 말고 입 좀 다물어.”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는 것 같았다. 두바이의 모라토리엄 선언은 당연하다. 먼 옛날부터 현재까지 사치의 끝은 파멸이라는 건 역사가 말해준다. 여긴 파멸의 역사가 재현된 곳이기도 했다. 하룻밤을 푹 쉬고 나서 아침이 밝았을 때, 이학재 회장은 빵 한 조각을 급히 삼키고 나서 나갔다. “현장 좀 둘러보고 올 테니까 쉬고 있어. 오후에 연락하마.” 함께 갈까 하다가 관뒀다. 권위가 나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니까 말이다. 이 회장이 올 때까지 또 다른 사치의 극치를 보여주는 1백7십만 평의 인공섬 ‘팜 주메이라’에서 뜨거운 열기와 푸른 바다를 만끽했다. 오후 늦게 돌아온 이 회장은 표정이 굳어있었다. “분위기 엉망이야. 이미 철수하는 유럽 업체까지 등장했어. 현장 직원들 사기도 엉망이라 다독이느라 좀 늦었다.” “이제 우리만 살아남는다는 걸 알면 사기도 올라가겠죠.” “그렇게 만들어야지. 가자. 비록 돈을 안 주는 업자지만 슈퍼 갑 아니냐. 기다리게 해서는 실례니까.” 우리는 화려한 불빛을 뿜어내며 바다에 떠 있는 호텔 소유의 요트로 이동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곳으로 이만한 데도 없다. ‘아메드 빈 사에드 알 막토움’이라는 긴 이름의 중년 사내는 중동 남성의 전통복장인 ‘깐두라’와 ‘케피야’라는 두건을 쓰고 나타날 줄 알았는데 깔끔한 서구식 정장 차림으로 등장했다. 두바이 월드의 재무이사에 불과했지만, 두바이 왕가의 핏줄이라 단순한 임원 이상의 힘을 가졌다. 막토움 가문의 사에드의 아들 아메드. 이것이 긴 이름의 뜻이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잠깐 고민했지만, 이미 만난 적이 있는 이학재 회장이 내 고민을 날려주었다. “다시 뵙습니다. 제임스.” “반갑습니다, 미스터 리. 오래 기다리신 건 아니죠?” 완벽한 미국식 영어 발음이 들렸다. 오호라, 이 아저씨도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유한한 것이 틀림없다. 이 회장이 날 소개했을 때 나도 영어 이름을 말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하워드 진입니다.” 조금 의아스럽게 바라보는 그를 향해 이학재 회장이 설명했다. “하워드는 우리 HW 건설의 최대 주주인 투자사 미라클의 책임자입니다.” 최대 주주 그리고 투자사. 그는 이 단어에 흥미를 느낀 듯 눈빛이 달라졌다. 서로 본심은 숨긴 채 의례적인 대화를 조금 나눈 후 아메드 이사가 물었다. “혹시 HW 건설도 철수하려는 겁니까?” “우리야 순양건설의 뜻에 따를 수밖에요. 그쪽에서 빠진다고 하면 함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럼 특별히 날 만날 이유도 없는데…. 그 말 전하려고 한국에서 오신 건 아니겠죠?” “제임스가 반가워할 이야기는 이 친구가 할 겁니다. 난 단지 오늘 두 사람이 나눌 대화의 끝이 궁금할 뿐이고요. 하하.” “그렇습니까? 그럼 어디 한번 들어볼까요?”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을 때 난 두 개의 숫자를 먼저 말했다. “800억 달러. 그리고 600억 달러. 맞습니까?” 두 사람은 동시에 놀랐지만, 이 숫자가 무얼 의미하는지는 알았다. 단지 이 회장은 숫자가 예상보다 커서 놀랐고, 아메드 이사는 거의 정확한 숫자라서 놀란 것이다. “이미 지불 능력을 잃었다는 게 우리 회사의 판단입니다. 지금 두바이 월드는 아마도 모라토리엄 선언을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논의가 뜨거울 걸로 예상합니다만.” 입술을 굳게 다문 아메드 이사는 말이 없었다. 기분이 상했는지 표정도 점점 딱딱해졌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미스터 리가 말한 것처럼 제안을 드리어 왔습니다. 그 제안을 미스터 아메드가 반가워하실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들어보죠, 그 제안. 모쪼록 반가운 이야기였으면 합니다.” “두바이 전체 부채가 800억 달러, 그 중 두바이 월드의 부채가 600억 달러….” “정확히는 590억 달러요. 물론 이 숫자는 올해 말 기준입니다. 추정치이기도 하고.” “네. 더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또한 우리 회사의 예상입니다.” 더 늘어날 리가 없다. 이 부채를 감당 못 해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니까. “다행히 우리 회사는 아직 자금 여력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쪽 회사… 미라클이라고 하셨죠? 미라클의 자금 여력이 우리와 무슨…. 가만… 혹시 뉴욕의 미라클 인베스트먼먼트와…?” “네. 같은 회사입니다.” 아메드 이사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그도 이미 들었다.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미라클만이 초토화된 월가에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몇백억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린 유일한 회사라는 걸. 그러니 방금 내가 말한 여력이 어느 정도라는 것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군요. 계속 말씀하시죠.” 이제 내 제안이 몹시도 궁금한지 바짝 다가앉았다. “만약 한국의 순양, 대현 두 기업이 철수를 결정했을 때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받아들여야죠. 방법이 없습니다.” 돈 많은 놈이 앞에 앉아 있으니 앓는 소리를 서슴지 않는다. “두 회사가 맡은 지역은 핵심인 알 막툼 국제공항과 두바이 월드 센트럴이죠. 기타 신도시 거주지역도 있고.” “하워드. 혹시 우리 두바이 월드에 자금을 융통해 줄 테니 두 한국 기업의 철수는 막으라는 뜻입니까? 그럼 HW 건설도 계속….” “아닙니다. 전 우리 회사 돈으로 순양과 대현을 먹여 살릴 만큼 너그럽지 못합니다. 다만 두 회사가 철수하면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HW 건설에 맡겨주실 생각은 있으신지 묻고 싶습니다.” “반대할 이유가 없어요. HW 건설의 역량은 우리가 이미 눈으로 확인했으니까요. 하지만….” 돈이 없다. 눈앞의 중동 왕족은 끝내 이 말은 꺼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준공식의 테이프 커팅까지 책임지겠습니다. 돈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신경 쓰지 말라는 걸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충분한 유예기간을 드리겠습니다. 두바이 월드는 국영기업 아닙니까? 게다가 중동의 보석…. 월가보다 훨씬 더 믿음 가는 AAA 등급의 채권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해결하리라 믿습니다.” 아메드는 갑자기 반가움 물씬 묻어나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큰 걱정 하나는 덜었습니다. 혹시 금액은 정확히 알고 계신 겁니까?” “네. 순양과 대현, 현재 미지급된 금액이 합쳐서 70억 달러가 조금 넘는 걸로 기억합니다.” “완공까지 100억 달러가 넘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겠지?” 지금껏 듣기만 하던 이학재 회장이 끼어들었다. 내게 경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동의 왕족 앞에서 생색을 내기 위한 목적이다. “물론입니다. 감당할 여력은 있습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는 덥석 받을 때는 항상 의심도 함께해야 정상이다. 아메드 이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넘칠 것 같은 관대한 제안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합니다. 하지만 모두 철수하려는 이때 이런 제안을 하시는 이유,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여기서는 둘러댈 필요가 없다. 내 저의를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순양과 대현, 두 회사는 HW보다 한참 앞서가는 경쟁사입니다. 그들을 제치고 우리가 신도시를 건설한다면 그들을 뛰어넘는 기회가 되겠죠. 우린 자금 여력이 있고 그들은 없습니다. 우리의 강점을 살려 경쟁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경쟁이라는 단순한 이유지만 이보다 더 강력한 것도 없다. “더불어 두바이와 우리 HW 그룹의 끈끈한 유대를 기대합니다.” 이학재 회장은 또 한 번 생색냈다. 이유야 어떻든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 아니겠는가? 긴 이름의 두바이 왕족은 아주 만족한 미소를 보였다. “식사도 잊다니, 제가 멀리서 온 친구에게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긴 식사가 이어졌다. * * * 서형균 순양건설 사장은 진동기 부회장의 발탁으로 대표이사가 되었다. 그리고 대표이사 취임 후 가장 큰 프로젝트인 두바이를 맡아 문제없이 진행했지만, 오늘 가장 큰 문제를 담판 지어야 했다. 하지만 첫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겠구나, 두바이 월드에서 돈 받는 건 물 건너 갔구나 하고. 비즈니스의 마지막은 수금이다. 아무리 매출이 높아도, 이문이 많이 남아도 돈을 받지 못하면 전부 헛수고한 꼴이 돼버린다. 두바이 월드를 대신한 아메드 이사는 단 한마디로 담판을 끝내버렸다. “곧 두바이 정부에서 공식 발표가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기다리세요.” “어떤 내용인지 말씀해 주시죠. 또다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정부를 대신해서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단호하지만 여유도 넘쳤다. 서형균 사장은 그의 여유로운 표정 때문에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서형균 사장이 듣지 못한 두바이 정부의 공식 발표는 대현 건설도 듣지 못했다. 체불액 지급을 약속하지 않으면 모든 공사를 중단하고 철수하겠다는 마지막 카드를 던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귀사의 선택을 존중합니다만, 지금 현시점에서는 그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순양과 달리 대현은 두바이 월드의 태도가 여유가 아니라 포기라는 것을 읽었다. 궁지에 몰린 자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 배 째라. 대현은 이 말을 똑똑히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바이 월드는 전 세계를 향해 ‘배 째’라고 외쳤다. 모라토리엄 선언이라는 그럴듯한 표현으로! <무너진 사막의 기적> 이 표제는 세계 언론이 공통으로 표현한 두바이 사태였다. 기적도 무너졌고 한국 증시도 무너졌다. 2009년은 참 많은 것이 사라진 한해다. 존경받던 추기경이 세상을 떴고, 두 명의 전직 대통령 국장을 치렀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든 세계적인 팝스타가 팬들의 눈물 속에 떠나갔다. 진동기 회장은 빽빽한 숫자가 적힌 종이를 들고 부르르 떨었다. 그 숫자는 마치 사망 선고처럼 느껴졌다. 책임질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금액. 그는 망연자실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와 똑같은 심정의 또 다른 사람도 있었다. 대현 건설의 회장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정신을 차렸고 자신을 구해줄 사람이 누군지 정확히 알았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다. “청와대에 전화 넣어. 꼭 뵙고 싶다고 전해. 조용히.” ======================================= [290] 사이 좋게 반띵? 1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실장님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깨졌는지 아십니까? 기껏 언론을 눌러놨는데 난데없이 순양의 젊은 스타가 떡 하니 등장해서 국가 경제가 흔들린다고 발표해 버리니… 손쓸 틈도 없었어요. 하하.” “그러셨군요.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로서는 워낙 다급했던 터라…. 경제 위기가 또 터지면 제가 맡은 금융사부터 위험해지니 말입니다.” “아닙니다. 지나간 일이라 웃자고 하는 소립니다.” 청와대 경제수석은 나의 정중한 사과에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 또 이런 일이 터져 버리니 돌아버리겠어요. 실장님께서 만나자고 연락 주셨을 때, 까무러치게 놀랐다니까요. 이제 더 큰 일이 터지는 건가….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미 큰일은 터지지 않았던가? 아직 심각성을 모르는 걸까? “사실 국내 굵직한 건설사 사장님들의 면담 요청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순양을 포함해서 말이죠. 하지만 전 실장님의 연락이 가장 반가웠습니다. 일단 사태 파악이 중요하니까요.” 경제수석은 내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굵직한 건설사라면 순양과 대현을 말씀하시는 거죠?” “네.” “두 회사가 물린 액수를 아십니까?” “아뇨. 아직 확인 못 했습니다.” “거의 100억 달러, 우리 돈 10조입니다.” 경제수석은 입으로 가져가던 찻잔을 든 채 눈만 껌뻑거렸다. 체감하기 힘든 숫자라 그럴 것이다. “시… 십조? 확실합니까?” “제가 순양의 일원입니다. 그리고 HW 건설에도 손가락 하나 정도는 담갔고요.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한 정보니까 정확합니다.” 경제수석은 찻잔을 내려놓고 급히 휴대전화를 꺼냈다. “수석님. 제 이야기 끝나고 통화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 네.” 그가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넣었다. “두바이가 끝이 아닙니다. 국내 지방에 벌여놓은 아파트 건설, 그곳으로 불똥이 튈 겁니다. 건설사 대표들이 수석님께 면담 요청을 하는 이유가 뭔지 아시겠죠?” 막연히 대출 알선 부탁 정도로 짐작했을 테지만 이건 그 범위가 넘었다. IMF 때처럼 기업 구제금융이 필요할 정도다. 그가 열심히 머리 굴리는 게 훤히 보였다. 곧 집권 3년 차로 넘어간다. 악재가 터지면 터질수록 레임덕은 빨리 온다. 내년 지방 선거에서 청와대의 입김이 작용하려면 최소한의 충격으로 이 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 “그들이 만나자고 한 이유보다는 실장님께서 만나자고 한 이유가 더 궁금해지는군요. 혹시 해결책을 들고 계십니까?” “좀 과격하지만 깔끔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과격한 이라는 표현 때문에 내 말이 그리 반갑지 않게 들렸나 보다. 해결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밝아지지 않았다. “시끄러워지면 곤란합니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시끄러울수록 좋은 겁니다.” “네?” “지난 2년간 야당의 공세가 주로 기업 프렌들리…. 즉, 친재벌 정책 아닙니까? 아, 조금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전 수혜자니까요.” 친재벌이라는 말에 그의 표정이 굳어졌을 때 난 손까지 내저으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정책이었지만 이번 사태는 특혜라고 할 겁니다. 그러니 아예 시장에 맡겨버리시면 어떻겠습니까?” “시장에 맡긴다…?” “네. 미국발 금융위기와 두바이 모라토리엄이라는 이중의 충격파를 견디지 못하면 망하는 거고 버티면 살아남는 거죠. 정부의 개입 없이 말입니다.” “잘 아실만한 분이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두 회사가 부도라도 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난 이 사람의 걱정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정부는 무너지는 지방 중소기업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그럼 야당도 머쓱해질 테고, 내년 지방 선거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겁니다.” “거 참, 좋은 의견이긴 한데 대형 건설사가 무너지면 그까짓 것들은 전부 무용지물이라는 걸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대현과 순양의 부실은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정부의 생색내기는 순식간에 묻혀버린다. “시장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겁니다. 두 회사를 고스란히 인수할 곳이 있으니까요.” “인수?” “네. 아주 좋은 조건일 겁니다. 부채 감면, 대출 연장 등의 특혜는 바라지 않고 그 기업의 힘으로만 인수할 겁니다.” 경제수석은 이제야 내가 만나자고 한 까닭을 눈치챘다. 도와달라거나 특혜를 달라는 다른 놈들과 달리 난 끼어들지만 말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그 기업이 어딥니까?” “HW 그룹입니다.” “아…!” “특히 두바이에 물린 돈은 대부분 HW 그룹이 떠안고 있어요.” “그렇습니까? 처음 듣는 소립니다만.” “HW 그룹이 쥐고 있는 어음을 던지는 순간이 바로 두 회사의 최종 부도일입니다. 연쇄부도는 불 보듯 뻔한 일이죠.” 청와대 경제수석이라는 자리를 차지한 자다. 이 정도면 큰 그림으로 그린 시나리오를 들여다본 것이나 다름없다. “HW가 두 기업의 인수 전략을 치밀하게 세운 것이었군요. 그러니 청와대는 다 된 밥에 재 뿌리지 말고 보고만 있으라, 이 뜻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사전 시나리오라면 HW 그룹이 두바이의 모라토리엄을 1년 전부터 알았다는 뜻인데…. 세계적인 기업도 예측 못 한 일입니다. HW가 그 정도로 뛰어나지 않죠.” 경제수석에게 내 반론은 중요하지 않다. 청와대가 개입하지 않는 것. 이것도 청와대의 아주 중요한 역할이다. 순양과 대현을 도우면 HW의 인수 전략은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에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은 바로 HW 그룹에 주는 특혜다. 경제수석의 표정과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이젠 내가 특혜를 구걸하는 다른 재벌과 다름없는 처지고, 자신은 청와대를 대표해서 민원을 접수하는 위치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제가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특히 한국을 대표하는 두 기업의 부도를 보고만 있기에는 부담이 크거든요.” 경제수석은 결정을 미루고 난 뒤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실장님. 순양의 간판 기업 중 하나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일인데…. 왜 앞장서시는지 궁금하군요.” 난 쑥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슬쩍 긁었다. “이거, 오늘 가정사까지 말씀드려야 하나요? 하하.” “아이고, 불편하시면 말씀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뇨. 온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인데요. 사실 제가 HW 그룹과 손잡았습니다. HW가 대현과 순양을 인수하면 제가 순양건설을 다시 가져오는 걸로 말입니다. 큰아버지 회사를 조카가 직접 인수하는 건 아무래도 좋은 모양새가 아니라서요.” 다시 그의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청와대는 현 상황에서 최선의 것만 챙기면 된다. 머리 굴리는 그에게 꼭 고려해야 할 사항을 말했다. “순양전자와 대현자동차가 흔들리지 않는 한 순양도, 대현도 건재합니다. 단지 HW 건설이라는 초대형 기업이 탄생하는 거죠. 이건 여러모로 이득 아니겠습니까?” 전자, 자동차 그리고 건설. 정치권이 기댈 곳이 또 하나 생기니까 잘 생각하라는 의미였다. 그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생각 중이었다. 내가 줄 수 있는 선물 보따리를 더 풀라는 행동이다. 이럴 때는 개인적인 작은 선물을 던져주는 게 효과적이다. 난 호텔 카드키 여러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요즘 보는 눈들이 많아 힘드신 거 압니다. 오늘처럼 은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할 때 쓰십시오. 수석님들 한 장씩 돌리십시오. 365일 비워놓을 테니까 언제든 사용 가능하실 겁니다.” “이건 호텔…?” “네. 전담 매니저도 하나 붙여뒀습니다. 출발하실 때 전화하시면 불편함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을 겁니다.” 청와대 수석들은 기자를 만나 어르기도 하고 청탁도 해야 한다. 여당 의원을 만나 청와대의 의중을 알려줘야 하고 야당 의원을 만나서 용돈도 건네야 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밀 장소다. 10년 전만 해도 관행이었지만,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불법을 자행하는 장소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간 많이 아쉬웠는지 경제수석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이거, 정말 가려운 데를 긁어주시는군요.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그리고 기자들 점심 사주는데 보태시라고 약소하나마 박스 하나씩 놔두겠습니다. 시간 나실 때 들러 가져가세요.” “아이고, 이거…. 먹고 탈 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그려.” “제가 돌아가신 할아버지께 경영수업을 받았습니다. 선물은 선물로 끝낸다는 거 잘 압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경제수석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기업인들은 전부 수석들을 통해 대통령 면담만 요청한다. 그리고 면담 주선비 명목으로 봉투 하나 휙 던지고 가는 게 전부다. 나처럼 가려운데 긁어주는 물주를 잡는 게 그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모쪼록 청와대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니 그도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시장의 흐름에 맡기는 게 우리 정부의 가장 큰 기조 아니겠습니까? 애써보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가장 쉬운 선택이다. 굳이 어려운 길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 * * “당신들 도대체 뭐하는 거야? 내가 돈을 가져오랬어? 아니면 어음 되찾아 오랬어? 청와대 미팅 주선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진동기 부회장이 소리쳤지만 모두 머리를 숙인 채 꿀 먹은 벙어리 흉내만 냈다. “그간 정치자금이네 뭐네 하며 가져간 돈이 얼마야? 작년 총선 때 가져간 돈만 해도 이번 사태 다 막았을 거다. 배달 사고라도 낸 거야? 전부 인 마이 포켓 했어!?” 괜한 화풀이라는 걸 진동기 부회장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청와대는 자신이 직접 전화해도 피하기만 하는데 하물며 임원들 전화는 오죽하겠는가? 아예 받지도 않을 것이다. “빨리 연결해! 여의도도 쑤시고 정부청사도 털어. 그동안 내 돈 먹은 놈들 총동원해서 청와대 문을 두드리라고.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은행이 먼저 움직인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대마를 죽여버리는 모험은 청와대도 부담이다. 진동기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형님을 찾았다. 하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 진영기 부회장은 손부터 내저었다. “말도 꺼내지 마. 나 돈 없다. 금융위기가 너만 때리는 거 아냐. 나도 지금 정신없다고. 미국과 유럽이 자빠졌어. 두 개의 가장 큰 시장이 박살났는데…. 버티기만 하는 것도 힘들다고.” “형님. 전자 돈을 달라는 게 아니라고요. 은행, 은행 금고 좀 열어달라고.” “발등에 불 떨어진 건 은행이 더 해. 순양전자 이름으로 대출 땡기는 건 포기해라.” “형님!” “소리 지르지 마. 지금 사태 모르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각자 제 앞길에 놓인 돌은 본인이 치우면서 가자고. 너만 힘들어? 나도 죽겠다고!” 진동기는 형님이 등을 돌렸다는 게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위기가 형님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순양의 건설, 중공업 계열을 형님이 차지할 수 있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걸 진동기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진영기의 음침한 눈빛이 은행보다 더 두려웠다. * * * 형제가 고성을 주고받을 때 이학재 회장은 부지런히 전화를 돌렸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순양건설이나 대현 쪽으로는 연락도 안 했어요. 받을 돈 줄 형편이 안 되는 걸 뻔히 아는데 전화해서 뭐합니까?” 이학재 회장은 시중 대형은행의 행장들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통화했다. 도준이가 다 차려놓은 밥상이다. 숟가락 젓가락을 들고 있는 건 자신뿐이고, 은행들이 그 밥상을 들고 자신 앞에 내려놓는 일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밥상 엎을 힘을 가진 청와대는 이쪽으로는 보지도 않는다. 맛있게 먹는 일만 남았다. ======================================= [291] 사이 좋게 반띵? 2 이학재 회장은 채권단 모임을 요청했다. 순양과 대현이라는 거대 기업의 눈치를 보던 은행들은 얼씨구나 하며 달려왔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다고 나서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모임에서 던진 이학재의 말에 그들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난 그리 너그럽지 못해요. 공짜로 실컷 부려먹은 사람의 사정을 왜 고려해야 합니까?” 가지고 있는 어음을 전부 던진다는 말에 은행장들은 이구동성으로 손을 내저었다. “이 회장님. 순양건설과 대현건설의 자금 사정은 우리가 잘 압니다. 그거 전부 던지면 못 막아요. 부도가 확실합니다.” “회장님. 부도나면 채권회수는 불가능합니다. 정상화하는 데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고요.” “채권회수 방법을 찾자고 모인 건 줄 알았습니다. 두 기업 문 닫게 하려고 모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학재 회장은 화들짝 놀란 은행장들에게 머리를 저었다. “망할 놈은 망해야죠. 부실 덩어리인 놈들, 덩치 크다고 사정 봐주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10여 년 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은행원들이다. 그때부터 철밥통이라고 생각했던 은행도 망하기 시작한 것 아닌가? “그리고 받을 돈 안 받아도, 아니 못 받아도 됩니다. 대신 두 회사 문 닫고 길거리에 나 앉는 꼴을 보며 실컷 비웃어주렵니다.” 못 받은 돈이 최소 조 단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걸 내던질 배포가 어디서 나오는지 모두 잘 안다. 든든한 물주가 있으니 저런 배짱을 부릴 수 있다. 하지만 은행은 다르다. 부도나는 순간 채권회수는 물 건너가며, 두 건설사 밑으로 줄줄이 딸린 자회사들의 연쇄부도는 기정사실 아닌가? 은행은 또다시 엄청난 손실을 입고 휘청거릴 테고 이 중에 몇몇은 은행장이라는 명함을 뺏긴다. 가장 무서운 일은 정부가 부실은행 퇴출 및 통폐합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거다. 살아남은 은행은 두 배로 덩치가 커진다. 그러나 살아남은 놈만 더 잘 먹고 잘사는 것보다 조금 덜 먹더라도 다 같이 먹고 사는 게 동종업계의 의리 아닌가? 모두 기를 쓰고 이학재 회장의 기분을 풀어주며 그를 만류했지만, 이 회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뜻을 같이하는 사람까지 불렀다.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했을 때, 아무도 이들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은행장들은 알아버렸다. * * * “여러분들은 이 친구에게 꽤 많은 채무가 있으실 겁니다.” 이학재 회장은 이런 말로 날 은행장들에게 소개했다. “채무라니요? 그게 무슨…?” 은행장 한 명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 양 발끈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다. “제 돈, 은행에 빌려준 거 맞지 않나요? 돈을 빌려줬으니 은행에서 꼬박꼬박 이자 준 거 아닐까요? 빌려준 게 아니면 투자라는 뜻인데, 투자자에게 이자 주는 경우도 있습니까?” 예금주는 모두 빚쟁이고 통장은 차용증이다. 돈을 은행에 맡긴다, 혹은 예금한다는 그럴듯한 말로 슬쩍 바꿔 놨지만, 빌렸다는 말이 정확하다. 그래서 갖가지 금융 상품을 만들어 빚쟁이들인 예금주를 유혹한다.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달콤한 말로 꼬드겨야 빌린 돈을 안 갚아도 되기 때문이다. 난 금융 상품에 투자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예금주이기 때문에 빚쟁이가 맞다. “제가 은행에 큰돈을 빌려줬습니다. 그런데 그 돈으로 부도날 게 뻔한 회사를 살리겠다면 어쩔 수 없죠.” 은행장들은 내 뒷말을 예상했는지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순양금융그룹이 빌려준 돈, 제 개인이 빌려준 돈, 전액 돌려받고 싶습니다. 내일 아침 영업 시작하면 인출하겠습니다.” 은행장들은 어음을 던지겠다는 이학재 회장과 예금을 전액 찾아버리겠다는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고, 진짜 원하는 목적이 뭔지 정확히 알아야 했다. 우리 두 사람이 막무가내 고집부릴 만큼 멍청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이 회장님 그리고 진 실장님. 혹시 우리가 제대로 된 토픽을 놓치고 있는 겁니까?” “이 회의는 순양과 대현의 부도 대책이 아니라 인수 방법을 논의하기 위한 것인지요?” 우린 저절로 드러나는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HW 그룹은 무려 십조 원에 육박하는 돈을 때려 박았습니다. 전 여러분의 은행에 수조 원대의 돈을 빌려드렸고요. 이걸 시간으로 환산하면 초당 수백억은 될 겁니다. 이제야 황금 같은 시간을 헛소리나 하며 때우지 않겠군요.” “그러니까 두 건설사를 가지기 위해서 그 많은 돈을 쓰신 겁니까?” “그건 투자라고 해 주십시오. 본전은 물론이고 두둑한 수익까지 챙길 생각이니까 모두들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은행장들이 뿜는 긴 한숨은 그들의 안도감이다. 부실 채권 때문에 구조조정 당하는 일은 없어졌고, 은행장이라는 보직에서 멀어질 일도 없어졌다. 단, 이 인수 건이 잘 마무리된다면 말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인수 절차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분들은 얼마를 안고 가실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다 알아들었으면서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영감들, 손해는 절대 안 보려는 은행원답다.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부도난 회사 되살릴 때 은행도 거들어야죠. 두 건설사의 채권감면, 어느 선까지 하시겠습니까?” 노골적인 물음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누가 봐도 적당하다고 할 만한 금액. 그 정도는 은행도 지고 가셔야죠. 단 한 푼의 채권감면도 못 하겠다, 이런 생각이신 분은 이 자리를 뜨셔도 됩니다. 튼튼한 은행이라는 뜻이니까 제 돈을 다 빼도 괜찮으시겠죠?” 또다시 이어지는 침묵. “아, 혹시라도 말입니다. 정부가 나서서 구제금융이라도 던져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접으세요. 청와대가 두 건설사의 전화는 일절 받지 않습니다. 여의도 국회의원 보좌관들조차 피하는 전화니까요.” 단 한 명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들을 향해 이학재 회장이 입을 열었다. “최대 채권자인 제가 키를 잡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제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열심히 노 젓기만 하세요. 이의 없으시겠죠?” * * * 대현자동차 그룹의 주태식 회장은 조간신문을 보며 끙 하는 앓는 소리를 냈다. 언론은 연일 두바이 사태를 다루며 폭락하는 주가를 앞세워 순양과 대현의 위기를 증폭했다. 대현그룹과 순양그룹의 힘으로 언론 기사를 못 막았다는 건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라는 뜻이다. 주태식 회장이 신문을 내려놓자 머리를 푹 숙인 채 소파에 앉아 있는 동생이 보였다. “두바이가 전부야?” “응?” “이거만 막으면 다 해결되는 거냐고?!” 건설 부문을 물려받은 고 주영일 회장의 삼남 주민식은 대답을 못 했다. 지방에 벌여놓은 아파트 공사, 재건축 쇼핑몰 등 전부 빚으로 진행 중이다. 쉬쉬하지만 누구나 아는 비밀도 있다. 분양대금으로 돌려막기 할 정도로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렸다. “정부가 외면한다는 거 금융권에서 다 알아. 이거 네가 막아야 해.” “큰형님. HW에서 어음 돌리면 부도 못 피합니다. 그룹 차원에서 해결하는 방법 밖에….” 주민식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건 큰형님의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그룹 차원? 대현 건설그룹이라고 떠들고 다닌 건 너 아냐? 난 자동차그룹이라면서? 우린 한 가족이 아니다. 그룹 차원이라면 건설그룹에서 해결하면 되겠네.” “형님.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닌 거 안다. 하지만 우리가 동네 슈퍼 주인이냐? 딸린 식구만 수만 명이다. 너 구하자고 우리까지 굶어 죽을 수는 없다. 우린 순양과 달라. 계열사 분할까지 끝냈어. 네가 망한다고 해서 대현자동차그룹이 피해 볼 일은 없을 거다.” “형님! 건설은 대현의 모태 아닙니까? 이걸 죽이는 건 돌아가신 아버지….” “지랄한다. 네가 언제부터 아버지 명예를 생각했어? 이 자식이 어디서 함부로 아버지를 끌어들여! 나가, 이 새끼야!” 주태식 회장은 동생을 쫓아내고 한참을 씩씩거렸다. 대현 건설의 위기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다. 저런 멍청한 놈에게 그룹의 모태였던 건설을 물려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분노였다. 흥분한 마음을 좀 가라앉혔을 때 비서가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회장님. 이학재 회장 약속 시각입니다. 출발하시겠습니까?” “가자.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될 양반이다.” * * * “아이고 형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이학재 회장은 환히 웃으며 주태식 회장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 회장. 엄청난 돈을 물린 사람치고는 신수가 훤하네. 아직 쟁여놓은 돈이 많나 봐. 허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죽겠습니다. 돌려받지도 못할 어음만 잔뜩 쥐고 골머리 썩히는 중입니다.” 굳게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환히 웃었다. 잠깐 동안 서로의 안부와 신변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오늘의 비밀 회동의 목적을 꺼냈다. “이 회장. 이 사태만 해결하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는 건 확실한가?” “물론입니다. 이미 미국 정부가 천문학적인 돈을 퍼부었어요. 두바이에 물린 돈은 넉넉잡고 2년이면 회수 가능합니다.” “HW 건설은 두바이에 눌러앉았더구먼.” “네. 회생을 믿지 않는다면 저도 철수했을 겁니다.” “두바이가 살아나면 HW 형편은 확 피겠구먼. 의리 지킨 기업을 나 몰라라 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일세.” “그놈들도 장사치입니다. 돈 안 되면 의리고 뭐고 없죠. 하하.” 찻잔을 든 주태식 회장은 부러운 눈길로 이학재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든든한 돈줄이 대주주인 그룹을 맡아 장기적인 안목으로 회사를 이끈다. 자신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눈앞에 닥친 자식 놈들의 승계 작업 때문에 여유가 없다. 이학재 같은 전문경영인이 대현을 위해 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깐 생각했다. “아무튼, 형님. 건설을 살릴 생각은 없으신 거 맞습니까?” “그렇다네. 그거 살리자고 천문학적인 돈을 때려 박는 멍청한 짓은 못해. 알다시피 자동차그룹도 대현 산업이라는 건설사를 쥐고 있어. 그 돈으로 내 회사 살찌우는 게 더 낫지.” “그럼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이 회장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거 아닌가?” 이제 이학재 회장이 주태식 회장의 요구를 들어야 할 차례다. “그럼 원하시는 회사 말씀하십시오.” 주태식 회장은 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게 우리 애들이 꼭 챙기라고 신신당부한 거야. 한번 보시게.” 그가 내민 종이를 펴니 회사 이름 몇 개와 그 회사의 가치를 평가한 숫자가 적혀있었다. 대현 토건, 대현 시멘트, 대현 개발 등 전부 삼남인 주민식의 계열사 명단이다. “너무하십니다. 건설만 가져가라는 말씀이십니까?” “오해는 마시게. 우리 대현 산업에 꼭 필요한 회사만 적은 거야. 돈 되는 회사만 뽑은 건 아니라고. 그리고 대현건설의 알짜배기 자회사는 고스란히 넘겨 줌세.” “대현건설의 자회사는 당연히 넘겨받아야죠. 돈은 우리가 다 썼고 청와대도 우리가 막았습니다. 은행도 우리 손에 있는데 이건 너무 야박한 거 아닙니까?” “이 사람아, 이 회장. 우리 부친께서 일군 거야. 내가 이 악물고 나서면 대현건설까지 지켜낼 수 있다고. 그거 양보하는 건데 야박하다니? 도대체 얼마나 가져가야 성에 차겠는가? 설마 절반은 챙겨야 만족하시는가?” “형님. 이럴 때는 눈 딱 감고 반으로 가르는 게 정석입니다. 코흘리개 어린애들도 아는 규칙 아닙니까?” 이 회장은 절반이나 가져올 생각은 없었다. 욕심 많은 주 씨 일가를 상대할 때는 훅 지른 다음 조금 양보하는 방법이 언제나 통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두어 개만 더 얻어내면 만족할만한 협상이다. ======================================= [292] 사이 좋게 반띵? 3 “참 내, 별소리 다 꺼내는구만. 좋아, 우리 이 회장께서 원하는 건 뭘까? 툭 터놓고 말씀하시게.” “시멘트.” 주태식 회장은 펄쩍 뛰며 난색을 보였다. “아이고, 이 친구야. 그건 안돼. 시멘트는 우리 동생 밥벌이라도 하게 놔둬야지. 그나마 돈 좀 버는 놈인데 그걸 홀라당 가져가면 쭉정이만 남잖아.” “동생이라면 주민식 회장…?” “그래. 못난 놈이라 해도 피붙이야. 백수로 살며 한량 노릇이나 하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종합설계와 로템을 더 얹어 주십시오. 더는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로템?” 갑자기 튀어나온 회사, 대현 로템. 대현 로템은 철도차량과 방위산업 분야의 기업이다. 건설 부문이 아니라 자동차 계열사, 주태식 회장이 생뚱맞은 표정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방산이야 알짜 사업이니 달라는 거 아닙니다. 철도차량 부문만 넘기십시오.” 주태식 회장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 돈 되는 사업도 아니고 규모도 크지 않기 때문에 욕심낼 만한 회사가 아니다. 굳이 그걸 원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가뜩이나 HW 자동차가 바짝 따라와서 쪼그라드는데 철도까지 가져가겠다고? 에라이, 날강도 같은 친구야.” “형님. 전 자동차는 조금도 관여하지 않습니다, 조대호 사장 혼자 하는 독립 기업이라고 봐도 무방해요. 그런 분이 슬쩍 부탁하더라고요. 철도차량 기술을 확보하고 싶다나? 명색이 제가 회장인데 체면 좀 세워 주십시오. 큰 돈벌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종합 자동차 회사의 구색을 갖추려면 뒷받침하는 중공업이 필수다. HW 자동차의 취약점이 바로 중공업의 부재…. 조대호 사장은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럼 로템만 가져가는 걸로 하지. 종합설계는 남겨두고. 어떤가?” 곁가지 몇 개를 올렸다 놨다 했지만 결국 원하는 것을 얻었다. 두 사람 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이학재 회장은 흔쾌히 머리를 끄덕이고는 웃음을 거뒀다. 이제 주 회장의 약속을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동생의 경영권은 어떻게 정리하실 생각입니까?” “그놈이 가진 지분 전량 내가 인수해야지. 이 사태를 해결하는 조건으로. 부도나서 공중분해 되는데 제 놈이 뾰족한 수 있겠어?” “차질 없으리라 믿겠습니다.” “염려 말게. 지분 인수하고 건설과 나머지 계열사 잘 포장해서 자네에게 넘김세. 참, 사람 너무 많이 쳐내지 않도록 부탁하네. 그래도 대현 밥 오래 먹은 놈들이니.”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으니까요.” 빈말이라도 모든 사람을 다 안고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하여튼…. 칼이라니까. 회장씩이나 됐으면 좀 무뎌질 만한데….” “형님 앞에서 제가 회장 흉내 내봤자 무슨 소용 있습니까? 하하.” 호탕하게 웃는 이학재를 보며 주태식 회장은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순양이 걱정되는구만. 진동기, 그 친구…. 설 자리를 잃겠는데?” “동생들 수난시대죠. 저도 회사 하나쯤은 남겨두겠습니다. 밥벌이는 해야죠.” 이학재가 남겨둔다는 회사가 뭔지 궁금해지는 주태식 회장이었다. * * * “다, 당신들이 감히….” 진동기 부회장은 차오르는 분노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에워싼 은행장들은 진동기 부회장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냉담한 태도로 압박했다. “이건 신중한 결정입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진 부회장님.” “순양건설 하나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급 보증 선 다른 계열사는 물론, 순양그룹 전체가 흔들리는 일입니다. 우리 금융권에서 그 충격파를 가벼이 여긴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10년 전 외환위기를 잊으셨습니까? 수백억이 없어 재계 10위권 그룹 몇 개가 공중분해 됐습니다. 겨우 10년 지났습니다. 무려 100배가 넘는 조 단위의 부도가 날 지경이라고요. 막을 자신 있습니까? 진동기 부회장님!” 진동기 부회장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순순히 굽힐 수는 없었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건 그룹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아버지 진 회장이야 문제가 터지면 심복들을 허수아비로 앉혀 놓고 수렴청정했지만, 지금 금융권이 요구하는 건 경영진 전체의 사퇴다. 심복 하나 심어놓지 못하고, 아니 심복들과 함께 회사를 나가고 그 자리에 채권단의 사람으로 꽉 채워진다면 복귀는 불가능하다. “자구책을 내놓을 시간이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요?” 진동기 부회장은 은행장들의 본심을 알고 싶었다. 단순한 경고 차원인지 아니면 회사를 조각내어 정리할 만큼 극단적인 상황인지 도무지 알기 어려웠다. 주 채권자인 진한은행장이 말했다. “우리도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요?” “순양만 야박하게 대하는 거 아닙니다. 이미 대현에도 최종 통보했어요. 두 그룹의 부도는 우리 은행 모두를 위협할 지경입니다.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우리 개인의 생존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은행 자체가 흔들리고 있어요. 또 외국 자본이 금융권을 잠식하는 지경까지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거 혹시 청와대 지시 사항이요?” 진동기가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청와대가 은행을 통해 자신에게 최후통첩했다면 일단은 순순히 따르는 수밖에 없다. “청와대는 절대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만 되풀이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혹시라도 정부 차원의 금융지원을 기대하신다면 포기하십시오.” 최후통첩이 맞았다. 더는 이들과 협상할 필요도 없다. 채권단이 회사를 점령하기 전, 이들의 발을 묶어버릴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다. “일주일만 기다려 주시오. 설마 그 정도 시간도 거절하지는 않겠죠?” 진동기는 은행장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리를 떴다. * * * “그놈들 말, 맞아. 정부는 손 뗐다. 자빠진 중소기업 일으켜 세우는데 들어가는 돈도 부족하다고 징징대. 우리나 대현은 그룹 차원에서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거야.” “막아 줄 거요?” “그게 청와대의 착각이지. 우리가 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거. 대현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걸? 주태식 회장이 주민식이를 쫓아내려고 작정하고 말려 죽인다는 소문이 자자해.” 진영기 부회장은 아주 재미있는 드라마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형님은? 내가 말라 죽기를 기다리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왜 널 살려줘야 하는데? 설마 동생 챙기는 우애 많은 형제라도 기대했던 거냐?” 실실 웃으며 속을 쿡쿡 찌르는 형님을 보며 진동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순양 종합화학, 순양 정밀기계. 두 개 챙겨줄게. 그리고 너와 네 가족 개인 재산은 고스란히 가져가. 대신 그룹 주식은 다 내놓고. 그럼 내가 이 사태 책임진다.” 큰소리는 땅땅 치지만 진영기 부회장도 조 단위의 부실을 막을 수 없다. 계열사 구조조정을 자구책이랍시고 생색내며 시간을 끌 것이고 열심히 로비해서 다시 은행 돈을 끌어다 쓸 것이 뻔하다. 부실은 더욱 커지겠지만. 진동기는 자신의 지분 강탈만이 목적인 형과 더는 이야기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는 최대 채권자를 찾아가 협상하는 게 더 낫다는 걸 알았다. 형제보다 빚쟁이가 더 너그럽기를 바랄 뿐이다. * * * “진 부회장님 개인 소유 주식은 손대지 못하겠지만… 순양 건설과 중공업이 가진 주식, 그건 우리 HW가 가질 겁니다. 그럼 두 회사 밑에 줄줄이 딸린 자회사, 그리고 계열사 몇 개는 우리 손에 들어오겠죠.” 형님은 진동기 자신이 가진 건설과 중공업 주식을, 빚쟁이는 건설과 중공업이 보유한 다른 계열사 주식을 원한다. 그래 봤자 부도나면 은행이 전면 재배치부터 하겠지만 말이다. “이 회장님. 그 생각 바뀔 리는 없겠죠?” 진동기는 구차하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매달리고 애원한다고 해서 부탁 들어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나마 냉철하고 이성적인 협상이 통하는 사람이다. 형님처럼 무조건 지분부터 내놓으라고 떼쓰는 말은 꺼내지 않을 것이다. “안 바뀝니다. 최소한 순양 계열사 25%는 먹을 수 있는데 인정에 끌린다면 전문경영인의 자격 미달이죠.” 진동기에게는 이 사람이 가장 두렵다. 순양그룹의 지배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 아닌가? 뭐부터 가져올 수 있는지 계열사에 번호 매겨놓고 계산 끝낸 게 분명하다. “그룹 지배지분은 절대 내놓을 리 없다는 것도 잘 알아요. 그러니 별수 있습니까? 하나하나 찢어서 가져오는 수밖에.” 진동기는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내가 전력을 다해서 막을 겁니다. 절대 쉽게 가져가지는 못할 거요. 긴 싸움이 될 거고 서로 많은 피를 흘릴 겁니다. 나 진동기, 아직 그 정도 힘은 있습니다.” “그 말은 여전히 정치권의 힘을 빌려 생명을 연장하겠다는 뜻인 거 같은데…. 과연 아직 힘이 남아있을까요? 저놈들 등 돌리는 거 한순간입니다. 잘 아실 텐데요?” “확인하고 싶으면 해보시던가. 난 서로가 흘릴 땀과 피를 아끼자고 하는 겁니다. 원하는 게 뭔지 말씀하세요. HW는 중공업 계열이 부족하니 채권 연장만 해 주신다면 관련 회사 몇 개는 그냥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학재 회장은 피식 웃었다. “순양의 영광은 진양철 회장님이 돌아가셨을 때 관 속에 함께 묻혔습니다. 그걸 아직도 모른다면 알게 해 드리죠.” 이학재 회장은 스마트 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스피커를 켰다. 액정 화면에는 총리라는 두 글자가 선명했다. “총리님. 이학잽니다.” - 아, 이 회장. 또 무슨 일인가? 설마 지난 주말 골프 설욕전이라도 하겠다는 건 아니지? 허허. “아이고, 총리님, 이제 골프는 접었습니다. 실력 차이가 너무 확연해서 설욕전은 엄두도 못 내겠어요.” 화기애애한 전화통화를 듣는 진동기의 표정이 굳어졌다. “총리님. 제가 대현 주태식 회장과는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건설 계열은 우리 HW가 전부 인수해서 살리기로 말입니다. 그러니 대현 그룹 때문에 불길이 번질 일은 없을 겁니다.” - 그거 다행이네그려. 고맙소이다. 또 한 번의 IMF 같은 사태가 벌어질까 노심초사했는데…. 혹시 순양도 정리 끝냈나? “아직입니다. 대현은 계열분리가 확실해서 큰 어려움이 없는데 순양은 지배지분이 얽혀 있어서 말이죠. 아무튼, 조기에 해결하도록 힘쓰겠습니다.” - 부탁하네. 그렇지 않아도 진동기 그 친구가 동네방네 쑤시고 다녀서 여간 난처한 게 아닐세. 그만하면 우리 정부 입장은 명확히 전달한 걸로 아는데…. 눈치가 없는 겐지, 욕심이 많은 건지…. 에잉, 물러날 때를 몰라요. “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총리님 심기,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 아, 아닐세. HW 그룹이 쫄딱 망한 건설업계를 떠받쳐주니 도리어 우리가 고맙지. 그리고 이 회장 말씀대로 미라클이 120억 달러를 국내로 들여온 거 확인했어. 덕분에 우리가 한숨 놓았는 걸? 고마우이.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환율 방어를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 그럼 수고 좀 해주게. 순양 일은 계속 알려주고. 혹시라도 진동기 그 친구가 말 안 들으면 연락해. 국세청이라도 동원해서 탈탈 털어버릴 테니까. 손바닥으로 한번 쓱 닦기만 해도 묵은 때가 시커멓게 나올 텐데…. 망신살 뻗치고 싶다면 그렇게 해 줘야지. 통화를 끝낸 이학재 회장은 웃으며 진동기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 부회장님의 힘으로 총리부터 설득해야 할 것 같은데? 물론 총리의 뜻이 청와대의 뜻이라는 것쯤은 알겠지만….” 하얗게 질린 진동기는 통화 끝난 스마트 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293] 사이 좋게 반띵? 4 “진동기 부회장님!” 이학재 회장이 테이블을 탕 치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 아니 경곤데, 계열사 간 순환 출자 구조 때문에 서로 쥐고 있는 주식, 함부로 이동하면 안 됩니다. 부도나기 전 회사 소유의 자산을 손대는 건 명백한 배임 횡령이라는 거 아시죠?” 건설의 부도로 순양건설의 소유 지분이 채권단으로 다 넘어가면 계열사 지배력이 무너진다. 진동기가 지배하는 모기업 역할은 건설과 중공업, 중공업으로 모든 지분을 이동하고 껍질뿐인 건설만 날려버리는 수작은 일찌감치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지금까지야 검찰이 눈감아 줘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지만 조금 전 총리가 말하지 않았던가? 여차하면 국세청까지 동원하겠다고. 국세청 동원까지 생각하는 정부가 검찰을 못 움직이겠는가? 정권이 등을 돌리면 재벌이라도 보통의 기업과 다르지 않다. “중공업이 건설의 지급 보증을 많이 섰죠? 우리 HW가 갖고 있는 중공업 어음도 상당해요. 건설이 무너지면 중공업도 휘청, 어차피 살아나지 못합니다.” 마침내 진동기가 입을 열었다. “그만하면 협박은 충분합니다. 원하는 걸 말씀하세요.” “내가 왜?” “네?” “당신이 원하는 걸 말해야지. 그걸 들어줄지 말지 결정하는 게 나야. 아직 멀쩡한 순양그룹 부회장이라고 착각하는 거야?” 이학재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선택은 딱 하나뿐이야. 당신 형 진영기에게 모든 걸 다 주고 휙 던져주는 뼈다귀를 챙기는 것. 아니면 HW가 원만한 인수를 할 수 있도록 조용히 돕는 것. 어느 쪽이야?” 듣고 싶지도, 믿고 싶지도 않은 현실이다. 딱 2년만, 아니 1년만 버티면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걸 진동기 부회장도 안다. 중동 법인에서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모은 정보를 종합했을 때 두바이는 예상보다 빨리 모라토리엄에서 벗어난다. 미국 금융위기는 꽤 오래가겠지만, 아시아는 그 충격이 덜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단지 1년이라는 시간 때문에 모든 걸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꼭 다 가져가야겠소? 조금의 시간만 주면 이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있소.” “보기에 없는 건 선택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시면서….” 이학재 회장은 조금은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호형호제하며 지낸 사이 아닌가? “시간, 바로 그 시간이 없어서 기업이 사라집니다. 진 회장님이 기업을 인수할 때 돈으로 인수한 줄 알아요? 인수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고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순양그룹을 만들어 낸 겁니다.” “그래서? 기어이 순양건설의 부도를 뉴스 탑으로 때리겠다는 뜻입니까?” “말하지 않았나? 원활한 인수를 돕겠다면 조용히 처리한다고?” 진동기는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요? HW 그룹의 주인도 아니면서. 월급쟁이 회장일 뿐이잖아. 차라리 실속 챙기는 게 더 나을 거 아니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말하라고 한 거고….” “월급쟁이니까.” “뭐요?” “내 주인이 진동기 부회장의 순양을 원하니까. 난 지금 밥값 하는 중이라니까. 하하.” 투자사가 기업을 삼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다. 아버지의 그림자였던 이학재가 순양을 넘보는 게 분명하다. 이인자가 숨긴 착각, 바로 자신이 순양을 키웠다고 생각하며 순양의 회장 자리는 자신이 받았어야 했다고 믿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진 부회장. 암 환자가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 5단계를 거친다고 해요. 부정, 분노, 희망, 우울, 수용. 부회장은 지금 어느 단계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좀 더 영리하게 행동하는 게 나을 거요. 다 건너뛰고 현실을 수용하고 하나라도 더 건지는 게 좋지 않겠소? 진영기 부회장보다야 내가 훨씬 더 많은 걸 남겨줄 거요.” 이학재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설득했으나 진동기의 얼굴에는 떫은 미소만 보였다. “아버지 시다바리나 하던 놈이 감히 훈계질을 해? 남들이 회장, 회장 하니까 모셨던 아버지 흉내라도 내고 싶은 거야? 어디서 건방을 떨어.” 낮은 목소리였지만 터질 것 같은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내가 쪽박을 차면 당신도 깨져. 뭐? 암 환자? 5단계? 어이가 없어서, 원….” 진동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알거지가 되더라도 내 형… 조카에게 던져줄지언정 당신은 순양의 벽돌 하나도 손에 넣지 못할 거요.” 진동기 부회장이 선언하듯 소리치고 밖으로 나가버리자 이학재 회장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분노라…. 아직 2단계구만.” 분노는 사람을 장님으로 만든다. 조카에게 던져주면 두고두고 땅을 칠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이다. 아닌가? 형이든 조카든 후회는 어쩔 수 없는 일인가? * * * “HW가 채권단을 지휘한다고요?” “그래. 이학재는 순양을 원해.” 잘못짚으셨습니다, 큰아버지.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한 건 처한 상황이 워낙 다급해서일까? 아니면 내가 이 정도까지 큰 그림을 그리고 실행할 만한 돈이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두바이에 물린 돈이 워낙 커서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은데요?” “하나 있다.” 빠져나갈 구멍이 아직 남았나? “너도 알다시피 우린 주요 계열사 지분과 지주회사 역할 하는 껍데기 회사의 지분만 쥐고 있잖아.” “그렇죠.” “계열사들은 순환출자로 서로의 지분을 잔뜩 쥐고 있고. 지금 이학재가 노리는 건 바로 계열사들이 잔뜩 쥐고 있는 지분이다. 그자가 그 지분을 다 확보해 버리면 우리가 쥔 지분은 지배력을 잃어.” “그렇죠.” “계열사들이 가진 주식을 뺏기면 큰일이야. 그러니까….” “그거 함부로 손댔다가는 채권단이 걸고넘어질 건데요?” “적정가격에 팔고 그 돈으로 채무를 일부 해결하면 돼. 그럼 걸고넘어질 것도 없는 자구책의 일환이야.” “적정가격에 그 주식을 다 살 곳이 있습니까?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갈 텐데요?” “그러니까 내가 네게 부탁하는 거다. 너와 난 지배지분의 공동의결권자 아니냐? 계열사 지분이 사라지면 네가 가진 지배지분의 힘도 약해져.” 같이 죽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협박처럼 들리기까지 하다. “순양금융그룹의 자금을 총동원해서 건설 계열의 회사가 소유한 지분을 확보해. 그래야 이학재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그 돈으로 건설 계열의 부채를 갚겠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일거양득이다.” 부채도 갚고, 지분도 지키고. 일거양득 맞다. 단, 내가 아니라 둘째 큰아버지에게. 난 어차피 내 것이 될 지분을 사느라 엄청난 추가 비용만 들 뿐이다. “싫습니다.” “뭐?” 진동기 부회장이 매섭게 쏘아보기 시작했다. “첫째 큰아버지께 똑같은 제안을 하셨습니까? 순양전자와 순양물산의 자금력이 금융그룹과 비교해서 뒤처지지 않습니다.” “그, 그건…….” “특히 순양물산은 건설과 함께 중동진출 했습니다. 첫째 큰아버지도 불구경하듯 나 몰라라 할 때가 아닙니다. 분명 논의하셨을 거 아닙니까?” 날 쏘아보던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왜요? 계열사 지분 매입은 싫고 아예 그룹 지배지분을 내놓으면 생각해보겠다고 하셨습니까? 대신 비주력 계열사 두어 개 적선하듯 던지셨고요?” 입을 굳게 다문 그의 아픈 곳을 찔렀다. “분명 책임져야 할 분도 거절했는데 제가 왜 해야 하죠?” “네가 가진 지분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그건 모두에게 적용되죠. 하지만 전 걱정 없습니다. 제 지분은 제가 지킬 수 있으니까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인지 그의 눈이 커졌다. “HW가 순양 계열사 주식을 가져간다면 금융그룹 지분만 다시 거둬올 겁니다. HW 그룹의 주인은 미라클입니다. 전 미라클에 상당히 많은 돈을 투자했고요. 아주 싼 가격에 넘겨줄 겁니다.” 이제 내 계획을 눈치챘나 보다.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묻는다. “너, 혹시 이번 기회에 그룹에서 완전히 분리할 생각이냐?” “당연하죠. 호시탐탐 제 회사를 뺏으려는 큰아버지들, 그리고 두 분의 사업이 흔들리면 저도 위험해진다는 걸 알았는데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도준아! 그건 안 된다. 계열 분리라니…. 순양을 이렇게 깨버릴 수는 없어!” 건설 계열의 주요 회사가 HW로 넘어가고 금융그룹은 분리 독립하면 순양은 더 이상 순양이 아니다. 난 둘째 큰아버지가 이런 걱정을 하는 게 우습기까지 했다. 이미 순양에서 떨어져 나가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사람이 아직까지 순양 운운하다니…. “큰아버지. 첫째 큰아버지는 이미 승계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영준이 형에게 그룹 지배지분을 넘겨준다는 것 자체가 계열 분리를 의미하지요. 가진 건 확실히 지키겠다는 의지 아니겠습니까? 순양이 찢어지는 건 피할 수 없어요.” 진동기 부회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도 승계절차를 진행하려 했고 이번 두바이 월드 프로젝트가 끝나면 벌어들인 돈을 아들에게 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다 틀어져 버린 일이지만. “죄송한 말씀이지만 큰아버지께서 선택하실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어요. 지분을 전부 넘기고 순양이 다른 이에게 뺏기는 일만큼은 없도록 하던지, 아니면 채권단에 협조해서 회사가 망하는 일은 피하든지….” 믿고 싶지 않은 냉혹한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한 그에게 마지막 옵션 하나를 슬쩍 던졌다.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그가 머리를 들어 내 입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첫째 큰아버지 대신 제게 모든 지분을 넘기십시오.” “뭐야?” “화내지 마시고 잘 생각하십시오. 전 첫째 큰아버지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태준이 형을 챙길 수 있거든요.” 아들 이름이 나오자 그의 눈이 커졌다. “첫째 큰아버지가 그룹을 장악하면 영준이 형과 그 가족 외에는 순양 본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전 달라요. 태준 형과 성준 형 모두 순양의 중책을 맡을 겁니다. 3세 공동 경영, 이것 하나는 약속드립니다.” “네 밑에서 말이지?” 비웃듯이 말하는 그에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미 아실 텐데요? 전 금융그룹 사장들에게 보고받지 않습니다. 이번 미국 금융위기 정도 되는 큰일이 생겼을 때만 함께 논의하는 정도죠. 두 형은 독립적인 전문경영인이 될 겁니다. 물론 성준 형은 능력을 검증해야 하지만, 태준 형은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회사보다 자식이 더 중요한가 보다. 진동기 부회장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대며 나가버렸다.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냉철한 이성을 가릴 정도라면 아직 멀었다. 더 처참하게 현실을 느껴야 한다. * * * “숨길 건 숨기고 가릴 건 가렸습니다만, 6천억 이상은 나올 것 같습니다.” 장도형 부사장은 머뭇거리며 서류를 내밀었다. “많이 숨겼네요. 매출액 2조 원도 안 되는 조그마한 식품회사 하나 승계하면서 1천5백억이나 세금 낸 기업도 있는데요, 뭐. 전 13억밖에 안 냈어요. 1조 원은 넘어야 정상이겠죠.” “이미 끝난 일입니다. 굳이 자진 납세라는 형식으로 6천억이나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사장님. 전 성실 납세자 아닙니다. 아깝긴 하지만 필요한 일입니다. 이건 상속세를 내는 게 아니라 상속을 막는 일입니다.” “후……. 그렇긴 하지만….” 장도형 부사장은 아무래도 아까운지 긴 한숨만 자꾸 내쉰다. 돈은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하긴, 돈 없는 사람에게는 액수도 중요한 법이지만. ======================================= [294] 사이 좋게 반띵? 5 “제 방법이 악수(惡手)로 보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꼼수를 상대할 때는 악수가 정공법이 될 때도 있죠. 돈 아까워하는 건 그만합시다. 준비는 차질 없죠?” “네. 순양건설 채권단의 공식 발표 후 기자회견을 준비 중입니다. 이틀 뒤쯤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죠. 기사 덮으려고 난리 칠 때 제가 불을 붙여버리면 방법이 없을 겁니다.” 장도형 부사장은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불붙이는 정도가 아니죠. 연말 연초의 TV 방송은 실장님 이름으로 도배할 겁니다. 기업 역사상 세금 덜 냈다고 스스로 자백하고 천문학적인 돈을 낸 기업인이 어디 있습니까?” “절세, 탈세 없이 성실하게 세금 내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정상으로 돌아가는 걸 뉴스가 떠들어대는 게 비정상이죠.” 장도형은 무릎을 탁 쳤다. “그거 좋은데요?” “네?” “방금 그 말씀 기자회견 때 꼭 하십시오. 하하.” 아, 깜빡하고 있었다. 통신사가 아이폰을 팔기 시작했고 이제 본격적인 스마트 폰 시대가 열린다. 스마트 폰은 SNS의 비약적인 성장 동력이다. 누군가는 SNS가 인생의 낭비라고 했지만, SNS는 스타를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창구다. 그리고 긍정적인 인식의 스타는 여론을 움직인다. 이번부터 시작해 볼까? 난 아버지께 전화했다. “아버지. PI 전문가 소개 좀 해 주세요.” - PI? 갑자기 왜? 설마 네가…? PI는 President Identity의 약자이며 시작은 단어 뜻대로 정치였다.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여러 요소 중 특징적인 것을 뽑아 국민에게 어필해서 대통령을 대중이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활동을 말한다. 국가 최고 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PI는 기업의 최고 경영자, 공공 기관의 장, 연예인 등으로 그 범위를 넓혀 왔다. 자신의 개성과 특징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소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만드는 일은 오피니언 리더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다. 이제 PI는 대통령이 아니라 개인을 말하는 Personal Identity, 즉 개인 정체성 활동으로 확대되었다. 우리나라 재계의 존경받는 스타 경영자 정도면 여론을 움직이는데 편리하지 않을까? 놀란 아버지에게 웃으며 말했다. “네. 왜요? 안됩니까? 흐흐.” - 도대체 뭔 생각이냐? 연예인 할 거냐? “연예인은 아니지만, 스타는 돼야겠어요. 괜찮은 사람 있을까요?” - 알아보마. 업계 최고라야겠지? “네. 최고인 만큼 대우도 최고로 해주겠습니다.” - 몇 명 보내줄 테니 직접 만나보고 결정해. “고맙습니다, 아버지.” 내 말 한마디로 누군가를 영웅으로 혹은 쓰레기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을 키워야 한다. 그 전에 친척부터 쓰레기로 만들고……. * * * 아버지의 소개로 온 두 명의 전문가는 내 설명을 듣고는 눈만 껌뻑거렸다. “왜들 그러십니까? 이미지 구축에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 “아, 아닙니다. 너무 의외라서요.” “그, 그렇습니다. 몇 년 전에 끝난 일인데…. 게다가 6천억이라는 돈을 쓰시다니….” “6천억을 쓰니까 화려하고 우아하게 등장해야겠죠? 누구라도 칭찬을 아낄 수 없도록 말입니다. 자신 없으십니까?” “그럴 리가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펄쩍 뛰었다. “상품 퀄리티…. 아, 죄송합니다. 업계 용어라 습관이 돼서….” “괜찮으니까 업계 용어로 편히 말씀하세요.” “아, 네. 아무튼, 진 실장님의 퀄리티가 보통의 사람과 비할 바도 아니고, 6천억이라는 숫자가 주는 위압감. 그리고 안 내도 될 세금을 스스로 내는 도덕성. 이 정도 재료면 굳이 저 같은 업계 사람이 필요 없을 정도예요.” “그렇습니다. 언론도 크게 떠들어 댈 수밖에 없는 기삿거리고. 팩트만 나열해도 드라마입니다. 덧붙일 일이 없을 정도니까요.” 이들의 칭찬이나 듣자고 부른 게 아니다. “전 이번 일 하나 때문에 여러분과 만나는 게 아닙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게 목적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미지를 원하시는지…?” “간단합니다. 제가 1조 원이 넘는 금액을 탈세했거나 회사 자금을 횡령해도 일반 대중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철석같이 믿는 무한하고 무조건적인 믿음, 신뢰…. 이것이 내 목표 점입니다.” 지금까지와는 상반된 내용이 흘러나오자 두 전문가는 종잡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내지 않아도 될 세금을 내면서 탈세와 횡령을 입에 담으니 그럴 만하다. “업계 탑이라고 하시던데, 어렵습니까?”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이 될 수도 있는데 천사 옷을 입혀야 하니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약 빨고, 술버릇 더럽고, 여자관계 복잡한 연예인도 엄친아로 비춰지는 게 여러분의 능력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두 사람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장기적인 이미지 구축에는 꼭 필요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어려워 말고.” “무조건적인 신뢰가 필요합니다.” “신뢰라…….” “네. 불필요해 보이고 괜한 짓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도 전문가의 디렉션에 정확히 따르는 것, 이건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성공한 사람의 경우에는 더 그렇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공했기에 주변의 조언이 그리 달갑지 않거든요.” 두 사람의 걱정이 무슨 뜻인지 안다. 스타 연예인보다 더한 재벌 3세의 안하무인. 이들이 가진 내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계약합시다.” “네?” “두 분 다 계약하겠습니다. 계약서는 두 분이 상의해서 보내주세요. 무조건 지시대로 따른다는 조항이 들어 있어도 됩니다. 대신, 계약 기간은 1년. 제 잣대로 평가해서 부족하다 싶으면 1년으로 끝내겠습니다.” 또다시 눈만 껌뻑거리는 그들에게 내 명함을 건넸다. “계약서 사인하는 즉시 기자회견 어떻게 할지 계획서 준비하세요.” * * * 2010년은 한국을 대표하는 두 거대기업이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증폭된 위기로 시작했다. 위기의 당사자인 진동기와 주민식이 아주 똘똘한 언론 플레이를 한 것이다. 두 건설사의 부도는 마치 제2의 IMF가 올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언론은 건설사를 위한 기사라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기사 말미에는 항상 정부의 구제금융이 절실하다는 논조가 빠지지 않았다. 부정적인 기사 때문인지 증시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쎄다. 녹록지 않아.” 이학재 회장은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뭡니까? 할아버지와 함께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이런 약한 모습 보여주십니까?” “회장님과 함께 보낸 시간이 있으니까 불안한 거다. 여론을 여기까지 끌어올렸다면 정권도, 은행도 흔들리거든.” “두 건설사의 부도를 마치 정부의 책임처럼 몰아간다, 이 말씀이시죠?” “그래. 한국 건설계의 얼굴이다. 정부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 “카운터 펀치 날릴 겁니다. 기대하십시오.” “카운터 펀치?” “네. 일전에 한 번 말씀드렸죠? 검찰청에 참고인으로 출두하시게 될 거라고요.” “야!” 소리 지르는 그를 향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주 당당하게 들어가시면서 검찰청으로 몰려든 기자들이 내미는 마이크에 대고 한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 “누구나 알지만 모른척하는 불편한 진실, 그 민낯을 보시게 될 겁니다…. 뭐, 이 정도? 그리고 지검장이랑 커피 한잔 하시고 나오세요.” “정말 다 드러낼 생각이냐?” “설마요. 필요한 만큼만 드러내야죠. 일반인이 보기에 우리 큰아버지들이 도둑놈으로 보일 만큼만.” “충격은 있겠지만 K.O. 시킬 만큼 강력한 카운터는 아닌 것 같은데?” “연타가 있어요. 그건 세상에 감춰야 할 거라서 검찰에게만 알려줄 겁니다.” “두 부회장의 비리는 별반 소용없어. 쓰레기 더미를 다시 뒤지지는 않아.” “아들이라면 달라지죠.” “뭐? 아들? 누구 말이냐?” “진태준, 진동기 부회장님의 장남. 순양건설의 재무담당 이사. 그가 사고 친 돈 6백억. 이 정도면 진동기 부회장이 항복할 겁니다.” “태준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오자 이학재 회장은 입을 떡 벌렸다. “지금 회장님이 놀란 것처럼 둘째 큰아버지도 충격받으실 겁니다. 더욱이 검찰의 칼끝이 향하니까 수습할 틈도 없다는 게 더 두렵겠죠.” “그 6백억, 네가 판 함정이냐?” “아뇨. 돈에 눈이 먼 거죠. 투자가 아닌 투기는 도박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흐흐.” * * * “분까지 발라야 합니까?” “지시대로 따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참으세요.” 얼핏 보기에는 수더분한 정장이었지만 떨어지는 실루엣은 감탄이 나올 만큼 잘 빠졌다. 머리를 한 시간이나 만졌고 화장까지 하니 카메라 마사지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틀이 좋으니까 수고가 아깝지 않습니다. 기자회견 영상이 뉴스만이 아니라 연예프로그램에도 나갈 겁니다. 시청률은 뉴스보다 그런 쪽이 훨씬 잘 나오니까요.” “내용이 부각되어야 합니다. 아주머니들도 화가 치밀어 오를 만큼요.” “그건 회사 홍보팀과 조율했습니다. 당분간 이 뉴스로 세상이 시끄러울 겁니다.” 김윤석 대리가 긴장한 표정으로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실장님, 나가실 시간입니다.” 회견장은 기자들로 꽉 차있었다. 이미 뿌려놓은 떡밥 때문에 언론은 오늘 회견이 엄청난 특종이 될 거라고 예상한 듯 끝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간단히 인사말을 끝내고 준비한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지금까지 애써 외면한 제가 부끄럽지만, 언제까지 부끄러움만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엄격하고 정밀한 객관적인 잣대로 평가한 결과, 약 6천억 원 정도의 증여세가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눈을 들어 기자들의 반응을 보니 원했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증여 당사자인 제가 납세 금액을 결정하는 건 모순입니다. 정확한 금액을 산정하기 위해 이미 모든 자료를 국세청에 넘겼고, 증여과정의 위법, 혹은 불법 사항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검찰 금융조사부에도 동일한 자료를 넘겼습니다. 또한, 이 회견이 끝나는 대로 참고인 자격으로 검찰청에 출두할 생각입니다.” 슬슬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다. “물론 증여과정에서 불법과 위법은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단지 법의 맹점을 이용한 편법은 있었습니다. 이러한 편법이 국민 정서에는 많이 어긋날 것입니다. 이점,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허리를 깊숙이 숙이자 기자들의 질문이 터져 나왔다. 뻔한 질문과 뻔한 답변만 오고 갔고, 기다렸던 질문은 거의 막바지가 돼서야 나왔다. “현재 순양그룹의 부회장이신 두 분도 진도준 씨와 같은 시기에 물려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도 편법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보다 세배 이상 그룹 지분을 받았다는 것만 말씀드리죠. 질문의 답은 부회장님들이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필요한 말은 했으니 회견도 끝이다. 기자들의 이어지는 질문을 무시하고 회견장을 빠져나왔고 곧바로 서울 중앙지검으로 향했다. 이미 검찰청 앞에도 기자들이 진을 치고 기다렸다. 기자들에게 할 말은 다 했으니 코앞에 들이미는 마이크는 무시하고 검찰청 안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 * 취조실에 앉아 물 한잔을 마셨을 때 문이 열리며 젊은 검사 한 명이 들어왔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책상 위에 툭 던지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졸업하고 처음이지?” “노안은 장점이 있구나. 하나도 안 변했어. 김지훈 검사님. 흐흐.” “야! 그 노안이라는 단어, 금기어라고 말했지? 검사 기분 나쁘게 해서 좋을 거 없다. 몰라?” 동창인 김지훈은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 [295] 사이좋게 반띵? 6 “근데 너, 내 이름 용케도 기억하네?” 김지훈은 조금 신기한 듯 말했다.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간 인연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꼬박꼬박 학교와 도서관을 오간 그를 시험 때 잠깐 얼굴 비친 내가 이름까지 기억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널 오늘 이 자리에 나오도록 한 게 나거든. 기억 못 하는 게 더 이상하지.” “뭐?” “중앙지검 금융조사부. 대한민국 누구라도 그 계좌를 뒤져볼 수 있는 막강한 자리. 누가 이 자리에 널 앉혔다고 생각해?” 공안부, 특수부 그리고 금융조사부. 중앙지검의 3대 보직이다. 물론 김지훈의 출신 학교와 성적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최소 2년 차 이상의 검사가 넘볼 수 있는 자리다. 성적 좋은 서울대 출신의 검사가 어디 한둘인가? 하지만 김지훈은 검사 인생 첫날부터 이 보직을 꿰찼다. 금융조사부에서는 김지훈의 뒷배가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시골 출신인 그의 뒤를 아무리 뒤져도 과수원 농부나 시골 학교 교감 선생이 전부였다. 당사자인 김지훈도 발령장을 들고 놀랐다. 중앙지검 형사부 정도가 최고의 보직이라 기대했었는데 느닷없이 요직에 발령 나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동기 중에 한국 최고의 재벌가 손자 놈이 그가 아는 유일한 권력자였으니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인연의 깊이가 너무 얕다. 아니, 없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다. 그런데 내가 그 앞에서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니 입도 벙긋 못 할 만큼 놀랐을 게 틀림없다. “내가 손쓴 게 기분 나쁘거나 자존심 상한다면 말해. 원하는 자리로 옮겨줄 테니까. 괜히 드라마 흉내 낸답시고 주먹 날리면 폭행으로 고소할 테니까 주먹에 힘 빼.” 여전히 말을 못 하던 그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너였어? 모두가 궁금해하던 내 백이…?” 김지훈 검사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이중 거울 너머로 높으신 분들이 지켜보고 있을 게 뻔하니 눈치를 보는 것이다. “괜찮아. 아무도 없어. 너랑 조용히 이야기하려고 미리 부탁했다.”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냐? 나랑 조용히 해야 할 이야기가?” “자식아, 그 전에 보직이 마음에 들면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냐?” “동기라고 마음 쓴 거 아니잖아. 필요할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날 이곳에 꽂은 거 아냐?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게 말보다 백번 낫잖아.”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겠다, 좋은데?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거야?” “들어보고. 재벌 편에 서는 검사는 모양 빠지거든. 흐흐.” 처음 그대로다. 처음 도서관 앞에서 만났을 때 김지훈은 서먹서먹함을 느끼지도 못할 만큼 친근한 말투와 태도를 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학교 다닐 때 몇 번 마주치지 않았지만 아주 친했던 동기를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보다 이런 짓을 벌인 이유부터 말해. 뭐냐? 돈이 썩어나서 버릴 데가 없어 세금 내는 거냐?” “먹고 죽으려 해도 없다. 세상에 버릴 돈이 어디 있어? 아까워서 피눈물이 나는데.” “그럼 왜 그랬어? 설마 노블리제 어쩌고는 아니지?” “그건 가정사다. 묻지 말고, 검토는 했어?” “자식아. 그 방대한 양을 삼 일 만에 어떻게 봐? 부장님도 그러시더라. 순양 진도준이가 쇼하는 거니까 국세청과 입이나 잘 맞추라고!” 김지훈은 내려놓은 서류 더미를 툭 쳤다. “그럼 더 할 거 없지?” “안 내도 될 세금을 6천억이나 내는 재벌에게 뭘 더해? 진도준 씨의 결단에 찬사를 보낸다는 내용으로 부장님이 발표할 거다.” 검찰청에서 더 할 일은 없다. 이제 여론에 떠밀려 두 큰아버지들의 증여 절차를 검토하는 건 국세청의 몫이다. “그럼 이제 내 볼일을 이야기할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세웠다. “회사 돈 6백억으로 외국 파생상품에 투자했어. 그리고 그걸 홀라당 날려 먹었지. 그거 메꾸느라 회사 어음 돌려서 겨우 돈을 융통했어. 이 정도면 서울중앙지검 검사님께서 덤벼들 만해?” “6백억 날려 먹었다는 걸 보니 넌 아니구나. 6백억을 벌었다면 너였겠지만.” “진태준. 진동기 부회장의 장남. 순양건설과 중공업 계열의 재무 파트 총괄 임원. 내 사촌 형이다. 다섯 살 많은.” 검사로서의 피가 돌기 시작하는지 김지훈은 조금 흥분한 듯 보였다. 수첩을 꺼내고 볼펜은 손에 쥐었다. “장남? 아들만 있어?” “아니, 위로 누나가 한 명 있긴 해. 진수경이라고, 2년 위야. 아래로는 남동생 진성준. 그들은 아직 그룹 일에 끼어들지 않았어.” “6백억은 단독이야? 아니면 진동기 부회장도 알아?” “단독. 아니라면 내게 돈을 꾸러 오지 않았겠지.” 부지런히 끄적이던 김지훈의 손이 멈췄다. “돈 융통해준 사람이 너야?” “응.” “그럼 어음도 네 손에 있겠네?” “그래. 어음이 단서야.” “단서는 무슨, 물증이지.” 그는 펜과 수첩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확실한 물증이 있으니 정황 파악은 필요가 없어졌다. “어떻게 해줄까?”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는데?” “네가 원하는 대로는 안 될 것 같고, 내 능력과 권한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선까지.” 참 희한한 놈이다. 재벌의 편에서 표적 수사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이 자식, 혹시 비리 검사였나? 금융조사부에서 온갖 검은돈을 파헤치며 뒷돈 받아먹고 덮어주는 그런 부류였을까? “너 표정이 왜 그러냐?” “아, 아냐.” 김지훈 검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내가 너무 순순히 하겠다고 대답해서 이상해?” “아니라고.” 내가 손을 내젓자 그는 웃음을 거뒀다. “딱 봐도 네 집안싸움에 검찰을 이용하는 게 뻔하니까 내가 못 하겠다고 하면? 넌 지검장 만나서 칼잽이를 또 구할 테고, 우리 금융조사부 검사들은 전부 출세 지향적이니까 서로 하겠다고 나서지 않겠어?” “어차피 누군가 할 일, 네가 직접 하겠다?” “그런 셈이지.” “그렇다면 너도 출세 지향적인 검사라는 거지? 원하는 게 뭐야? 검찰 총장? 법무부 장관?”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성공이야 하고 싶지. 하지만 그런 꿈은 없어.” “그건 또 무슨 뜻이냐?” “공무원은 말이야, 뚜렷한 꿈을 가지면 삽질하게 돼 있어.” “응?” “꿈을 좇는 게 아니라 꿈만 좇거든. 내가 총장이 목표라면 오로지 요직만 찾아다니게 된다고. 만약 형사부로 가면 일은 안 하고 보직 이동하려고 로비나 인사만 하고 다니게 되거든. 그럼 아웃이야.” “흐흐, 공무원은 성실해야 한다?” “그렇지. 그게 출세의 첫걸음이야.” “그럼 내게 원하는 건 없어?” 김지훈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없다. 나중에라도 생기면 말하지.” “그 말은 영원히 원하는 게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건 모르지. 아, 하나 있다.” “뭐지?” “네가 원하는 대로 내 보직을 마음대로 바꾸지 마. 윗선에 요구하기 전에 내게 먼저 확인해라. 영문도 모른 채 다른 자리로 가는 건 이제 사양이야. 흐흐.” “꼭두각시는 싫다?” “판단과 선택은 내가. 넌 내 힘이 부칠 때 도와주면 된다.” “좋아. 그렇게 하지.” 김지훈은 다시 서류를 챙기며 일어섰다. “이만하면 시간도 충분히 때웠고, 할 이야기는 대충 끝난 것 같지?” “그래. 부탁한 거나 잘 처리해줘.” “6백억?” “응.” “그거 어디까지 파는 거야? 딱 봐도 협박용인데?” “맞아. 멈춰야 할 때는 지검장이 말해줄 거다. 채권단이랑 협의 되면 종결이야.” 김지훈은 머리를 끄덕이며 서류를 들었다. 내가 취조실 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 그가 말했다. “야, 근데 너… 혹시 얼굴에 분칠했냐?” * * * “졸지에 국민 영웅이네. 꼼수 써서 빼먹은 세금 다시 내는 건데….” “그러게요. 탈세에 대한 분노가 먼저인데….” “그 분노는 네 큰아버지들에게 쏟아지는 중이다. 아무튼, 축하해. 넌 오늘부터 재벌들에게는 공공의 적이 된 거야. 재벌의 상속세와 증여세를 전면 재조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어. 흐흐.” 이학재 회장은 대기업 회장 중 세금과 상관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이번 일이 강 건너 불구경일 뿐이다. “넌 가봐. 순양 사옥은 지금 어떤 꼴인지 잘 보고 와서 이야기해줘. 나도 검찰 조사받으러 가야 한다.” “지검장 만나는 겁니까?” “그래. 국세청장도 온다고 했으니 만나서 머리라도 한 번 숙여줘야지.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이야.” “대신 제가 6천억의 세금을 냈으니 번거로운 보람은 있을 겁니다.” 모두 만족하는 일이었지만 불만을, 큰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진영기, 진영준 부자였다. * * * “그 새끼 때문에 다 망쳤어. 갑자기 이런 미친 짓을 벌이다니.” 아직 국세청에서 아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진영기 부회장은 자신이 그룹을 물려받을 때와 똑같은 방법을 지금 쓰고 있다. 언론을 통해 3세 승계 작업이 조금씩 거론되고 있으니 미친 진도준의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국세청은 자신들을 유심히 관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아버지. 이학재 그 양반도 검찰 조사받는다고 출두했습니다. 검찰에서 쓸데없는 이야기 하면 어쩌죠?” “총장과 통화했다. 자진 납세라 수사 확대는 없을 거야. 단지….” 진영기 부회장은 백준혁 실장을 향해 말했다. “지금 어떻게 돼가고 있어?” “일단 지분 이동은 홀딩했습니다. 국세청이 순양그룹 지분 변동 사항을 정밀조사 할지도 모르니까요. 이 바람이 멈추면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잘했어.” 진영기는 긴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함께 논의하는 사람들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동기 부회장은 살아나오기 힘들어. 검찰의 집중 수사 대상에 이미 올랐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부도 직전인데 국세청과 검찰의 공격을 받는다는 건 정권도 등 돌렸다고 봐야 해.” 진영기 부회장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남몰래 마음을 놓았다. 무너지는 진동기 부회장의 모든 것을 챙겨 오라는 요구가 아니다. 파편 맞지 말고 조심하라는 말이 나올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곰곰이 생각 좀 해봤는데 말이지…. 이참에 계열분리를 해버리면 어떨까 해.” “아, 아버지…!” 그나마 아들이라 말이라도 했다. 나머지는 터져 나오는 소리를 막으려 입술까지 깨물었다. 몸조심이 아니라 담벼락을 쌓고 도망을 치다니! “물산 봐라. 피해 금액만 2천억이 넘어. 내가 관리하는 것도 아닌데 리스크는 똑같잖아.” “하지만 아버지. 순양이 쪼개지면 재계 순위가 확 떨어집니다.” “기업은 등수놀이 하는 곳이 아니다.” “그만큼 영향력도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순양 돈 먹은 놈들은 그대로다. 그놈들이 살아 있는 한 우리 순양의 영향력은 변하지 않아. 그리고 백 실장.” “네. 부회장님.” “전자의 보유 자금으로 자체 확장 계획을 세워봐. 일단 동기 계열사 몇 개 먹고, 쓸 만한 다른 회사도 인수하자고. 그럼 계열사 지배도 더 쉽지 않겠어?” “순양전자가 다른 계열사의 지주 회사 노릇을 한다면 지배 구조가 좀 더 탄탄해질 겁니다. 또한, 중동과 미국발 금융위기 때문에 자금난에 허덕이는 회사 많습니다. 주가도 많이 떨어졌으니 지금이 기업 사냥의 최적기이기는 합니다.” 백준혁 실장의 긍정적인 답변에 진영기 부회장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대현을 보라고. 완전히 쪼개졌지만, 자동차 그룹이 덩치를 키우니까 결국 대부분 흡수하잖아. 우리도 주태식이의 방식을 배울 필요가 있어.” 진영기 부회장의 자신감과는 다르게 측근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생각만 떠올랐다. 진영기 부회장이 진도준을 무서워하는 건지도 모른다. ======================================= [296] 사이좋게 반띵? 7 “아무튼, 동기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잘 지켜봐. 저쪽이 시끄러울 때 우리는 계열사를 확실히 다져놔야 해.” “아버지. 그룹 쪼개면 절반 이하로 떨어집니다. 반 토막 내서 회장 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새로운 지시를 끝내고, 부자 두 사람만 남았을 때 진영준은 참았던 불만을 터트렸다. “한발 물러날 때도 있는 법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야.” 진영기 부회장은 아들의 볼멘소리에 화를 내지도 않았고 호통치지도 않았다. “HW는 미라클의 엄청난 자금을 업고 순양건설의 최대 채권자가 됐어. 내 생각에는 미라클, HW 그룹 그리고 도준이까지 합세해서 건설을 압박하는 거야. 건설은 못 지킨다.” 마흔 살 넘은 진영준도 건설을 지키지 못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 건설이 쥐고 있는 중공업의 지분이 넘어간다는 말이며 중공업이 쥐고 있는 정밀기계와 화학의 지분도 넘어간다. 그룹을 지배하기 좋은 구조인 계열사 간의 순환출자구조는 누구에게라도 마찬가지다. 건설과 중공업을 쥐면 고구마 넝쿨처럼 다른 계열사도 줄줄이 엮여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내가 확인한 사실인데, HW는 순양건설과 대현건설을 먹기 위해 무려 10조에 달하는 돈을 쏟아부었어.” “시, 십조나요?” “그것뿐만이 아니다. 은행을 제 편으로…. 아니, 말 잘 듣는 충견으로 만들려고 100억 달러를 긴급 외환으로 국내에 들여왔어. 그것 때문에 은행도 고개 숙였고 정권도 그놈들 편을 드는 거야.” 말하지 않아도 안다. HW 그룹의 돈이 아니라 바로 미라클의 돈이라는 걸. “또 있다. 도준이 그놈이 순양금융 계열사의 돈을 잔뜩 은행에 예치했어. 투자가 아니라 단지 예금만 한 거다.” “돈을 한꺼번에 인출해버리면…?” “그래. 은행이 난리 나겠지? 바로 미라클과 손잡은 거야.” 진영준은 아버지가 왜 진도준의 이름을 입에 올렸는지 알았다. 진도준은 순양의 얼굴마담이며 HW 그룹은 행동책이다. 그리고 미라클은 자금 담당. 세 곳의 완벽한 동맹으로 순양의 한 축을 차지하는 계획이었으며 미국과 중동의 금융위기를 이용해 성공했다. “내가 왜 계열분리를 서두르는지 알겠어? 일단 네게 물려줄 회사부터 확실하게 지키려는 이유다. 우리 계열사 중에 하나라도 휘청인다면 건설 꼬라지가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어.” 손에 쥔 계열사부터 자물쇠를 채우겠다는 아버지의 생각에 더는 반발하지 못하는 아들이었다. “전자와 물산은 지주회사나 다름없다. 이 두 곳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흠집 나면 안 돼. 이참에 확실히 해 둘 거다. 그리고 대현자동차 그룹처럼 다시 확장하면 된다. 딱 10년, 네 나이 쉰이 넘어갈 때쯤 지금의 그룹 규모로 만드는 건 네 몫이다.” 계열사의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주축이 되는 계열사 몇 개를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며 부자는 이미 그룹의 코어를 가졌다. 장기판에서 밀고 밀리는 싸움은 빈번한 법, 그들은 최종 승리를 위해 차, 포쯤은 희생할 각오를 다졌다. * * * “부회장님! 지금 검찰에서 압수수색 영장을 들고 들이닥쳤습니다.” “뭐?” “경영지원본부가 타깃인 것 같습니다. 곧장 그리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들과 회생 자구책을 논의하던 진동기 부회장은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고 진태준도 급히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경영지원본부 사무실은 이미 검찰청 직원들이 장악했고 서류와 컴퓨터를 쓸어 담고 있었다. “이놈들이! 모두 그만두지 못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진동기 부회장이 부들부들 떨며 소리 지르자 젊은 사내 하나가 앞으로 쓱 나섰다. “잘 아실 만한 분이 이러신다는 건 그만큼 초조하다는 뜻이겠죠?” “누구야? 넌?” “아, 죄송합니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 검사, 김지훈입니다.” “지검장이 시켰어? 내가 빨리 두 손 들게 하려고 먼지 터는 거냐?” “혹시 진동기 부회장님 아니십니까?” 김지훈 검사는 무슨 소린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갸우뚱했다. “뭐야? 이놈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진동기 부회장님은 수사 대상이 아닙니다. 검찰은 회사 말아먹은 사람은 관심 없으니까요. 우리 소관도 아니고요. 그러니 우리 지검장님께서 부회장님 두 손을 들게 하려는 건 아니겠죠?” “이, 이놈이…!” 실실 웃는 게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라고 생각한 진동기는 몸이 떨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 저기 계시네요.” 김지훈 검사는 진동기의 뒤에 서 있는 진태준을 가리켰다. “진태준 씨 맞죠?” “…네.” “조사할 게 좀 있는데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임의동행이니까 거절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다음엔 체포영장을 들고 올 겁니다. 그러니 피차 번거로운 일은 피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검사가 아들을 지목하자 진동기 부회장은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듯, 그리고 불안한 듯 떨리는 아들의 눈동자가 보였다. 이때 김지훈 검사의 협박 같은 말소리가 들렸다. “체포영장 들고 올 때는 기자들도 잔뜩 데리고 올 겁니다. 아시겠지만 체포할 때는 수갑도 찹니다. 굳이 그 모습을 신문이나 방송에서 보고 싶다면 지금 안 가셔도 되고요. 어떻습니까?” “이유가 뭐야? 내 아들이 왜?” 다시 돌아선 진동기가 소리쳤다. “회사 돈 6백억을 파생상품에 투자해서 홀라당 날려 먹었더군요. 아버지는 무리한 사업에 남의 돈 끌어다 꼬라박고, 아들은 제 주머니 채우겠다고 거금을 갖다 쓰니 회사가 멀쩡할 리가 없죠.” 6백억이라는 말이 나오자 진태준의 안색은 흙빛으로 변했다. 그 모습을 본 진동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검사의 말이 사실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바로 아들의 표정이다. “빨리 결정하시죠. 우리도 퇴근해야죠.” 웃음기가 쏙 빠진 검사의 말에 진동기 부회장은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변호사들 호출해.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네. 부회장님.” 직원들이 휴대전화를 꺼내자 진동기는 아들을 향해 말했다. “넌 입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마. 변호사 올 때까지 기다려.” “…네.” 진태준이 가까스로 대답하자 김지훈 검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묵비권 좋죠. 그런데 입 다물고 말하지 않는 건 통상 범죄 사실을 시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모르시나? 뭐, 아무튼….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지훈 검사는 박스를 챙겨 든 검찰 직원들에게 말했다. “얼른 갖다놓고 퇴근들 합시다.” 박스 든 검찰 직원들이 빠져나갈 때 진태준은 아버지인 진동기 부회장의 귀에 입을 대고 잠시 속삭였다. 진동기 부회장의 표정이 차츰차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 * “다 쓸어 갔어요?” “네, 실장님. 진태준 상무도 참고인으로 순순히 따라갔습니다.” 김윤석 대리는 왠지 신이 난 표정이었다. “순순히?” “네. 검사가 체포영장 들고 다시 오겠다면서 협박하니까 꼬랑지 내렸다고 하더군요.” 김지훈이가 일은 잘하는 것 같다. 안하무인인 재벌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 아니다. “수고했습니다. 저쪽 움직임 잘 감시하고 계속 보고해요.” “네. 실장님.” “참, 나가면서 차 두 잔 준비하라고 해요.” “두 잔요?” “손님 올 겁니다. 막지 말고 놔두라고 전해요.” 차를 준비할 시간도, 미리 손님 온다는 사실을 밖에 알릴 틈도 없었다. 이미 문을 박차고 들어온 손님이 씩씩대며 소리쳤다. “야이, 새끼야! 네가 감히 내 아들을 건드려?!” 둘째 큰아버지에게는 김윤석 대리가 보이지 않나 보다. 체통 따위는 집어던지고 쌍스러운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김 대리는 나가 봐요.” 그에게 고갯짓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앉으십시오. 차라도 드시면서….” 역시 가족은 건들면 안 된다. 늘 이성적이던 큰아버지가 내 멱살부터 움켜잡았다. “이 새끼야! 이런다고 해서 내가 순순히 포기할 것 같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난 그의 눈을 바라보며 진정하기만을 기다렸다. 아들의 횡령은 그가 체념하는 계기일 뿐이다. 이미 포기했고 무너졌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바로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구하지 못하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곳저곳 급히 전화를 돌렸겠지만 모두 피하거나 난색을 드러내니 내 방으로 달려와서 아들을 빼 오라고 난리 치는 것 아니겠는가?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흔들렸고 내 멱살 잡은 손에 힘이 빠져나갔다. “이제 앉으시죠. 차 드시면서 진정하시고요.” 진동기 부회장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목이 타는지 물부터 들이켰다. “먼저 오해는 풀어야겠습니다. 전 파생상품 투자, 말렸습니다. 거액을 벌 수도 있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요. 그리고 그 돈 메꾸느라 내 돈 6백억 가져갔습니다. 쓸데없는 짓 말렸고, 돈까지 빌려줬어요. 남 탓을 하고 싶으시겠지만… 큰아버지도, 태준 형도 욕심 때문에 빚어진 일입니다.” “네놈이 파놓은 함정이지. 순진한 태준이는 덥석 물었을 테고.” “맞습니다.” “뭐야?” 멍한 얼굴이었던 진동기 부회장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함정이라고 말했습니다. 빠지면 죽는다고 경고했고요. 그런데도 뛰어들었습니다. 이래도 제 탓입니까?” “순진한 게 아니라 멍청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아뇨.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욕심이 과했다고.” 둘째 큰아버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에서 내 힘으로 아들을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말이 나오면 지루한 버티기가 끝난 것이다. “순양을 남에게 넘기는 게 그리 좋으냐? 아니, 내가 그리 싫은 게냐? 건설이 지금 흔들린다고 해서 남에게 훌쩍 던져줄 만큼 가벼운 회사가 아니다.” 조금 망설였지만, 마음을 굳혔다. 완전히 체념하고 내게 머리를 숙이게 하려면 좀 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하다. “남에게 왜 줍니까?” “……?” “둘째 큰아버지께서 가진 모든 게 제 손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제가 할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순양을 남에게 단 하나라도 넘겨줄 것 같습니까?” “채권단이 건설을 차지하고 계열사 주식을 손에 넣으면 못 찾아온다. 네가 가진 돈으로 그 주식을 다시 사들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억만금을 준다 해도 팔지 않으니 지배지분인 거다. 이학재는 절대 그 지분을 내놓지 않아. 미라클은 바로 우리 순양을 노리는 거다.” 아직 눈치채지 못했나? 하긴, 지금처럼 심란한 상태에서 몇 마디 말만 듣고 모든 걸 꿰뚫어 볼 통찰력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게 아닙니다. HW 그룹의 최대주주는 바로 접니다. 아니, 미라클이군요. 바로 그 미라클의 최대주주가 바로 접니다. 방금 큰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전부 맞습니다. 지배지분은 절대 남에게 팔지 않을 것이며 순양그룹 전체를 노리는 것도 맞습니다.” 더할 수 없을 만큼 놀란 진동기 부회장은 입을 떡 벌린 채 말을 잊었다. 강력한 한 방이 되었나? “순양자동차도 뺏긴 게 아니라 바로 제 손으로 더 키운 겁니다. 아진그룹을 인수했고 대아건설도 먹었습니다. 그 회사 모두 순양이라는 이름을 달아도 됩니다. 우리 가족 중에 할아버지처럼 남의 것을 차지한 사람이 있었던가요? 모두 물려받고 보관하는 데만 급급할 때, 전 남의 것을 뺏었습니다.” “네…. 네가…?” “할아버지가 절 가장 예뻐하시고 아끼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순양의 회장 자리에 저만큼 적합한 핏줄이 없었기 때문이죠. 두 분 큰아버지께서 순양의 부회장이 되고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하신 일이라고는 할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것뿐입니다.” 여전히 멍한 그에게 중요한 교훈 하나를 말했다. “쉽게 얻은 건 쉽게 뺏기는 법입니다.” ======================================= [297] 사이좋게 반띵? 8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뭐… 그리 쉬운 건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워낙 탄탄하게 벽을 쌓았으니까요. 제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순양을 뺏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말하고 나니 너무 잘난 척한 것 같아 몇 마디 덧붙였다. “아, 전 강한 운이 따르니까 가능했다는 뜻입니다.” 몇 마디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진동기 부회장은 이미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은 간다. 그가 받은 충격이 가실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그, 그럼 미국 미라클 본사에 달러 지원을 요청한 것도 너였어? 은행을 바짝 죄려고?” 한참 만에 입을 연 그는 미국과 나를 연결하지 못했다. “요청이 아니라 지시였습니다.” “뭐?” “뉴욕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최대주주이며 운용자금 대부분이 제 돈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 돈 굴리려고 만든 회사라고요. 이제 이해하셨습니까? 한국은 별도 법인이지만 현지 사무소 정도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을 잃었다. 아들이 검찰에 출두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정도니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며 말했다. “지금 제가 가진 돈으로 사지 못하는 기업은 없을 겁니다. 스마트 폰으로 최고 기업의 자리에 다시 올라선 애플도 전체 주식 절반 이상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난 그가 듣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할 말을 할 뿐이다. “순양전자? 시가 총액 100조 조금 넘어요. 제 돈을 전부 끌어모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애플보다, 마이크로소프트보다 더 어려운 게 바로 순양그룹 주식 매입 아닙니까?” 100조라는 숫자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눈을 번쩍 뜨는 큰아버지를 보니 내 말을 듣기는 하는가 보다. “이해는 합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야 돈 많고 존경받는 기업가일 뿐이지만, 권력이 없죠. 하지만 우리 순양은 세계 경제 10위권인 우리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이 있으니까요. 순양은 기업이 아니라 권력이니 아무나 침범하지 못하도록 철옹성을 쌓아야죠.” “지. 진짜냐? 네가 진정 그 모든 걸 가졌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도대체 왜…?” “네?” “그 엄청난 자산을 가진 네가 뭐 때문에 순양에 집착하는 게야? 그 돈으로 HW 그룹을 더 키우면 될 일 아니냐? 권력? 순양의 권력이 어디서 나오는 줄 몰라서 그래? 바로 돈이다. 그 돈으로 권력을 사고 기업을 사. 그럼 순양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전생의 악연만 아니었다면 당신이 말한 대로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몇십 년 동안 할아버지가 구축한 거미줄처럼 촘촘한 인맥을 단기간에 구축하는 것이 어렵긴 하겠지만, 돈으로 가능하고, 순양 정도의 규모로 계열사를 늘리는 것은 더 쉬운 일이죠. 하지만 난 순양을 차지하고 당신들을 내 발아래 두는 게 목적인 걸 어떡하겠습니까? 이 말은 꺼낼 수 없다. 대신 다른 이유를 말했다. 이것 또한 진심이긴 하다. “전 할아버지가 남기신 유산을 원합니다. 저도 그분의 피를 이어받았으니까요. 순양이 아니라면 제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반쯤 넋이 나간 그에게 말했다. “이제 포기하십시오. 계열사가 보유한 주식이 HW 그룹으로 넘어가면, 큰아버지께서 가지신 지분은 곧 영향력이 확 줄어듭니다. 더는 순양그룹에 자리 하나 마련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이대로 퇴장하라는 말이냐?” “아닙니다. 고모를 보십시오. 여전히 백화점과 호텔을 호령하고 있지 않습니까?” “뭐?” “고모를 만나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백화점 경영에 관여한 적 있는지…. 전 경영은 관심 없습니다. 단지 가지고 싶을 뿐입니다.” “지, 지금 나더러 네놈 밑에서 머슴살이라도 하라는 거냐?”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한 제안일 뿐입니다. 싫으시면 물러나십시오.” 담담한 말투 때문인지 그도 조금은 진정하는 듯 보였다. “다 끝났습니다. 남은 건 큰아버지께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천천히 생각하시고 답을 주십시오.” 온몸에 힘이 빠진 그가 내 방에서 걸어 나가는 건 힘들 것이다. 내가 자리를 비켜주는 건 그를 위한 마지막 아량이다. * * * “대현은 정리했다. 주태식 회장이 동생 뒤통수에 꿀밤 좀 먹이고 지분 정리했어.” 이학재 회장은 서류를 내밀었다. “대현건설과 철도차량 그리고 대현기계 가져온다. 기계와 철도차량 부문은 HW 자동차에 붙일 거다. 건설은 합병할 거고.” “언론에 발표는 언제쯤 하실 겁니까?” “순양 정리하면 한 번에 해야지. 어때? 진동기는?” “체념, 그리고 순응. 결단만 남았습니다.” “결단? 뭘 결단해?” “전문경영인이 될 것인지, 아니면 은퇴할 것인지 생각 중일 겁니다.” 이학재는 인상을 찌푸렸다. “착한 척하지 마. 역사가 알려주는 교훈을 믿으라고.” 정변이 일어나면 귀양 후 사약이다. 지금은 사약은 불가능하니 귀양으로 끝내야 한다. “발도 못 붙이게 할까요?” “당연하지. 순양에 눌어붙어 있다 보면 언제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른다. 진동기는 회장님 핏줄이다. 힘 빠지고 돈 없어도 그 친구를 위해 나서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지분 하나 없는 사람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형이 있잖아. 진동기가 너보다야 친형인 진영기 편에 서지 않겠어? 그에게 힘을 실어주는 멍청한 짓을 절대 하지 마.” 우리 이 회장님도 할아버지께 단단히 배웠다. 인정 때문에 후환이 될 일은 애초에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난 인정 때문에 진동기 부회장을 그 자리에 두는 게 아니다. 내 눈치를 보며 내게 머리 숙이는 모습을 누리기 위함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지금은 이런 대답이 적당한 것 같다. 그리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검찰 조사는 어땠습니까?” “조사는 무슨, 승계 과정을 슬쩍 알려주고 진영기 부회장이 장남에게 승계하는 과정이나 잘 살펴보라고 말했지. 이번에도 편법을 방관했다가는 여론의 뭇매를 맞을 거라고 단단히 일러뒀어.”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일단 진영준으로의 승계 작업은 멈췄다. 하지만 좋은 일만 생기라는 법은 없다. 이학재 회장은 곤란한 표정으로 나쁜 소식도 전했다. “문제는 진영기 부회장이 바짝 겁먹었다는 거야.” “겁먹은 게 나쁜 소식입니까?” “승계 작업은 멈췄지만, 계열분리 작업에 박차를 가했어. 가진 거 들고 도망가려는 거다.” “저도 일단은 분리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분리보다 지분 계산을 다시 하고 이번에 좋은 포지션이라도 차지하는 게 낫지 않을까?” “가능할까요? 계열사 지분을 많이 확보했지만, 첫째 큰아버지의 전자 계열과 서비스 계열, 무역 계열 지분은 그리 많지 않을 텐데요?” “워낙 덩치가 커서 그런 게지. 대신 금융권과 공공기관이 소유한 지분을 네 편으로 만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룹 전체를 차지할 만큼 확실한 겁니까?” 이학재 회장은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절대 네 편을 들어주지 않을 곳과 기권이 분명한 놈들을 빼면 네가 순양전자를 늘 감시할 만큼의 지분은 확보할 수 있을 게다.” “그럼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리스트를 작성해 주십시오. 제가 만나야 할 사람을 피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래. 나도 만나볼 사람은 챙기도록 하마.” 우리가 다음 단계를 구상할 때 진동기 부회장은 시달림의 극을 향해 가라앉고 있었다. * * * 청와대와 금융기관의 수장들은 순양건설이 법정관리에 들어간다는 기사를 원하지 않았다. “대현건설을 보세요. 깔끔하게 물러나니까 언론이 띄워주지 않습니까? 주인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한 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모두 대기하고 있어요. 부회장님만 결단을 내리시면 됩니다.” “돌아가신 진양철 회장님을 생각해서 지금까지 기다려 드린 겁니다. 순양이라는 이름에 먹칠하기는 우리도 안타까우니까요.” “내가 뭘 하기를 바라는 거요?” 낙담하고 포기한 듯한 태도에 채권단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일단 보유한 건설 주식부터 소각하세요. 중공업의 주식은 자사주로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계열사 주식은 처분하시든 가지고 계시든 뜻대로 하십시오.” 자신의 지분을 없애버림으로써 그 가치를 다른 주주에게 분산하는 것이다. 경영 실패를 책임지는 경영자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당신네 채권단은 만장일치로 내 회사를 HW에 맡기겠구만.” “물러나는 사람이 신경 쓸 일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진동기 부회장은 한동안 채권단 대표들을 노려보다 긴 한숨을 쉬었다. “서류 준비해서 다시 와.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 채권단은 모두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부회장님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입 발린 소리를 끝내고 재빨리 빠져나갔다. 텅 빈 부회장실에 앉아 있으니 이 방도 곧 비워줘야 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진도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이 방을 차지했다.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아주 멍청한 짓만 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아들은 모두 순탄하게 꽃길 밟으며 부회장실로 직행할 수 있었다. 동생인 상기처럼 아무 생각이 없거나, 윤기처럼 깔아놓은 꽃길을 거부하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자신이 이 방을 비우면 이제 형님과 조카만 남는다. 도망치는 형님과 쫓는 조카…. 싸움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건 자식들뿐이다. 아주 작은 것이지만 그들의 기회는 남겨 두는 게 부모의 도리다. 3등이, 비록 까마득히 뒤처져버린 3등이지만 실낱같은 기회를 잡으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1등과 2등이 피 터지게 싸우도록 칼이라도 던져주는 것…. 그것뿐이다. 진동기는 남은 지분을 어떤 비율로 넘기면 1등과 2등이 더 격렬하게 싸울지 생각했다. 그는 생각을 끝내고 천천히 일어섰다. 부회장실을 나와 방향을 잡았다. 마지막 남은 협상 대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오셨습니까? 큰아버지. 방금 채권단 사람에게 연락받았습니다.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셨다고요?” “그래. 더 버티는 것도 추하기만 할 뿐, 얻는 게 없으니까.” “이 방으로 오셨다는 건 제게서 얻을 게 남았고, 제가 줄 수 있다고 생각하셨군요.” “그래. 내가 원하는 건 돈은 아니니까 너무 좋아하지 마라.” 돈이 아니다? 그럼 가진 지분을 넘기지 않겠다는 뜻인가? 여전히 녹록지 않은 분이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웬만한 건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둘째 큰아버지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중역들 물갈이부터 하겠지?” “네. 부실 경영의 책임은 중역들도 져야 하니까요.” “너도 알겠지만, 건설은 눈먼 돈이 많이 돌아다닌다. 사장부터 이사까지 털면 먼지 좀 나올 거다. 털지 말고 보내줘.” 중역들이 해먹은 돈 대부분은 둘째 큰아버지 주머니로 들어갔을 게 뻔하다. 중역들의 손에는 떡고물 조금 묻은 게 전부다. 자신이 해먹은 돈은 들추지 말라는 말이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음은요?” 진동기 부회장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닌지 얼굴을 찌푸렸다. “너 돈 많잖아. 그거 몇 푼이나 된다고 생각해 보겠다는 거냐?” 둘째 큰아버지가 해먹은 돈은 범죄다. 공짜로 덮어줄 수는 없는 노릇, 나도 얻을 건 얻고 나서 덮어줄 것이다.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따지지 마시고 두 번째를 말씀하세요.” 위압적인 내 태도가 그의 처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줬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 [298] 사이좋게 반띵? 9 “이름은 어떻게 할 거냐? 순양을 지킬 거냐? 아니면 HW에 합병할 생각이냐?” “대현그룹에서 인수하는 회사들은 HW와 합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만, 순양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요. 이 부분은 첫째 큰아버지와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학재 회장께서 담판 지을 겁니다.” “왜? 네가 미라클과 HW의 주인이라는 걸 숨기고 싶어서 이학재 회장을 내세우는 거냐?” 내 정체를 정확히 아는 그의 눈이 빛났다. 착각에 빠지는 거 같아 웃으며 말했다. “숨길 이유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건설을 인수하는 주체가 바로 HW 그룹이니까 이 회장이 나서는 것뿐입니다. 첫째 큰아버지께 제가 미라클의 주인이라는 걸 말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숨기는 게 나을 텐데? 네게 품은 경계심이….” “큰아버지. 원하는 걸 말씀하십시오. 충고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끙― 하는 짧은 신음 소리를 내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네 사촌들은 문제없도록 하고 싶다.” 결국, 마지막은 자식 걱정이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큰아버지께서 자회사라도 원하신다면 생각해보겠습니다.” “더는 날 모욕하지 마라!” 순양 창업주의 둘째 아들로 자식들 중 가장 낫다고 평가받았고, 부회장으로서 그룹의 한 축을 맡았다. 차라리 명예로운 은퇴가 낫지 구멍가게 주인장 처지는 죽음보다 더한 치욕일 것이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럼 그룹 일을 계속하는 걸 원하십니까?” “가능하겠어?” “태준이 형이야 평판이 좋으니 문제 될 거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준 형은 아직 그룹 일에 손댄 적 없지 않습니까?” “유럽 지사에서 일 년 일한 게 전부지만 떠돌이로 지낼 수는 없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상의해서 자리 만들겠습니다. 그런데 전 해당 계열사 대표에게 분명히 말할 겁니다. 맡은 자리를 감당한 능력이 없다면 언제든 정리해도 된다고 말입니다.” 냉정한 말이었지만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진동기 부회장의 힘만으로도 조그만 자회사 정도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자식들이 마지막 궁지에 몰렸을 때 밥벌이할 수단이다. 지금 당장은 몸통에 붙어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버지 뒷배가 없으니 당연하겠지. 그 정도면 족하다. 대신….” “염려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직책을 약속드립니다.” 널널한 한직에 앉아 세월이나 보내는 자리일까 걱정하는 그를 안심시켰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둘째 큰아버지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게 내가 가진 지분이다. 계열사가 쭉 빠져나가 버렸으니 가치 없는 지분이 대부분이지만, 아직 쓸 만한 게 좀 남아 있다.” 난 재빨리 지분 리스트를 훑었다. 쓸 만하다는 건 바로 전자와 물산 지분이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싸움에서는 한 주의 주식도 아쉬울 터, 반갑기도 했다. 이 지분을 내게 보여주는 건 거래하자는 뜻이다. 돈을 원할 사람이 아니다. 그 정도로 단순한 분은 아니니까. “내가 이 지분은 묻어 두마. 네 큰아버지에게도 넘기지 않을 거다. 잊지 마라.” “제가 가장 필요할 때…. 물론 첫째 큰아버지도 가장 필요할 때겠죠.” “역시 눈치 빠르구나. 그때 이 지분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궁금해지는데?” 그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지만 나도 마찬가지다. “잘 생각하십시오. 가치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 지분으로 대세가 바뀌지 않을 확률이 높아요.” “네가 확률만으로 투자하는 건 아니겠지? 나도 내 감을 믿어보마.”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자신이 늙어 간다는 사실은 잊은 듯하다. 세월이 지나면 마음도 바뀌는 법. 변하지 않는다면 자신만 괴로울 뿐이다. “그러세요. 큰아버지의 예측이 정확할지 궁금해지는군요.”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누구는 쓴웃음이겠지만. * * * “우리 이 회장을 보면 말이야, 참 부러워. 든든한 물주…. 아니지, 어마어마한 물주 하나 잡고 있으니 이럴 때 싹쓸이하잖아. 참! IMF 때도 그랬지? 아진, 대아 전부 돈 없어 쩔쩔맬 때 돈질해서 다 먹었잖아. 맞지?” 진영기 부회장은 이학재 회장 앞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눈에 이학재는 아버지의 영원한 따까리일 뿐이다. 그런 자가 지금 순양이라는 솥단지를 받치는 세 다리 중 하나를 가져가려 하니 진영기의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단지 돈만으로 그렇게 되겠습니까? 기회를 놓치지 않은 거겠죠. 기회를 살리는 게 경영의 기본 아닙니까? 하하.” 기회를 놓친 진영기를 비꼬자 그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지금은 옛 영화를 떠올리며 성질부릴 때가 아니니 순식간에 표정을 풀었다. “아깝지. 이런 찬스가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니까.” “지나간 건 잊고 파편 정리나 잘 끝냅시다. 괜히 얽힌 지분 때문에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생각도 바로 그래. 동기야 내 형제니까 그렇다 쳐도 HW나 이 회장은 완전히 남남 아닌가? 아니, 완전한 남은 아니구먼. 그래도 한때 이 회장이 우리 집 행랑채의 주인이었으니 말이야.” 이번엔 이학재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행랑채의 주인이라니…! 행랑채는 대문과 담벼락을 따라 만든 하인들이 기거하는 방 아닌가? 자신을 머슴이라고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그때가 참 좋았는데….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 순양은 화려한 자태를 뽐낸 시절 아닙니까?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겨우 반쪽짜리에 불과하니 내 마음도 편하지 않습니다.” 진영기는 제대로 된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두 사람은 서로 날 선 대화만 주고받을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약속이나 한 듯 두 사람은 찻잔을 들어 어색한 공기를 발려버렸다. “서로가 가진 주식 내역은 한 식구였으니 모를 리 없고, 어떻게 정리하면 좋겠나?” 어느새 찻잔을 내려놓은 진영기가 부드럽게 말했다. “부회장님이야 잘 아시겠지만 나는 모릅니다. 제가 순양…. 아니, 행랑채를 떠난 뒤에 지분 구조가 많이 변했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내용도 모르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야 서로의 주주 명부를 까면 될 일이고, 교환 비율을 말하는 걸세.” 이학재는 진영기 부회장을 노려보며 슬쩍 웃었다. “완전한 분리를 원하는군요. 그렇다면 이 자리에 꼭 함께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지 않을까요?” “또? 누구?” “진도준 말입니다. 순양건설과 중공업이 순양금융 계열사 주식을 조금 쥐고 있더군요. 순양과 HW가 확실하게 선을 그으려면 도준이도 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삼자가 서로 꼬리를 붙잡고 있는 형국이니 세 곳을 한 번에 자르지 않으면 결국 연결은 끊어지지 않는다. “그야 HW와 도준이 관계는 두 사람이 알아서 할 문제지. 난 이 회장과 정리하고 도준이와 따로 정리할 생각인데…?” “그건 안 됩니다. 도준이와 부회장님이 확실하게 선을 자르지 않으면 결국 완전한 분리는 없는 셈이니까요.” “그러니까 이 회장은 확실한 분리를 원한다는 말이구먼. 이건 순양을 셋으로 쪼개자는 뜻 같은데?” 이학재는 진영기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걸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싫으시다면 이런 어정쩡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수밖에요. 전 확실한 분리가 아니면 지분 정리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거 원…. 어쩔 수 없이 삼자대면해야겠구먼. 알았네. 다시 자리 한번 만드세나.” “그 전에, 하나만 알아 두십시오. 전 주식의 거래가로 정리하지 않습니다. 우리 HW에 도움될 만한 조건으로 거래할 겁니다. 말씀하셨다시피 든든한 물주가 있으니 돈은 그리 필요한 게 아닙니다.” 이학재 회장은 몹시 어려운 숙제 하나를 툭 던지고 일어섰다. * * * 두 사람이 계열분리를 협상할 때 난 하나로 뭉치는 가능성을 타진하며 돌아다녔다. “진 실장님. 우리가 순양전자나 순양물산의 주식을 쥐고 있는 건 꾸준하게 수익을 내고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고객의 돈을 굴리는 건데 수익과 안전을 버릴 수는 없어요.” “행장님. 돈 맡긴 고객은 그런 거 안 따집니다. 수익만 내면 돼요. 은행이 어떤 곳에 투자했는지 관심도 없다는 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시장에 팔아버리는 건 더 위험합니다. 그 많은 물량이 쏟아지면 주가가 떨어져요. 당장 손실 발생합니다.” 전자와 물산의 주식 5% 이상을 쥐고 있는 은행장은 난처한 표정만 지었다. 주가가 높다 보니 마치 적금 넣듯 주식을 확보한 곳이 많다. 이들은 쉽게 시장에 던지지 않으니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량은 전체의 20%도 안 된다. “그 주식을 사겠다는 투자사가 있습니다. 던지는 대로 족족 사들일 테니 오히려 주가가 올라갈 겁니다.” “혹시 그 투자사가 미라클입니까?” “그중 하나가 미라클입니다만….” 은행장은 나를 잠시 노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 실장님. 실장님이 우리 금융권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잘 압니다. 당장 저부터 실장님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순양전자는 우리의 오랜 파트너라고 생각하십시오. 아니, 시중 4대 은행은 전부 파트너입니다. 안방마님처럼 거래하는 겁니다. 우리가 주가를 받쳐주고 전자와 물산은 막대한 수수료와 이자로 우리를 받쳐줍니다.” 은행장은 다시 짧은 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미라클이 순양을 노린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 아닙니까? 실장님도 한몫 거들고 계시죠? 그런데 외국 자본이 한국의 상징을 차지하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배신의 보복이 두려운 것이다. 장남인 진영기 부회장이 바로 순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를 주군처럼 여긴다. 이학재 회장이 했던 말이 내 입에서도 나왔다. 세다! 정말 세다. 순양공화국이라고 하더니 순양왕국이다. 장자 계승의 원칙이 뿌리까지 박혀 있다. 이 정도까지 한국을 집어삼킨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정도다. 다른 곳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프리미엄을 얹어서 팔겠다고 하는 곳도 있었지만, 그런 곳의 지분은 저울에 모래 한 알 올리는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남김없이 긁어 와야 하지만. 생각을 바꿨다. 계열분리는 정말 신중해야 한다. * * * “진영기 부회장은 완전한 독립을 원해. 네게 잔뜩 겁먹은 게 틀림없다.” “우리가 놓친 게 하나 있어요.” “놓친 거?” “네. 겁먹고 도망치는 점도 있지만 절대 건너지 못하도록 다리를 불태우는 겁니다.” 이학재 회장은 눈을 크게 떴다. “그 정도야?” “네. 이번에 계열분리를 끝내면 완벽한 지배 구조를 짜놓은 게 틀림없어요. 절대 흔들리지 않을 철옹성입니다.” “어쩐지…. 분리하자는 말에 너무 티 나게 좋아하더라니.” “걸치고 계속 갑시다. 그래야 빈틈이 있을 테고 언젠가는 그 빈틈이 더 크게 벌어질 겁니다.” “빈틈 메우려다 실수도 하고?” “네. 초조하다는 건 판단마저 흐리게 하니까요.” 이학재 회장은 골똘히 생각하다 말했다. “기관들은 어때? 완고해?” “네. 제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그들을 내 뒤에 줄 세우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진영기 부회장이 약해 보일 때겠지?” “그렇습니다. 결국, 하나로 통합니다. 공격하고 또 공격해서 진영기 부회장이 쓰러질 수도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면 됩니다. 그럼 이 싸움은 단번에 끝납니다.” “벼락이 떨어지는 것처럼 한 번에 끝난다.” 많이 듣던 말이다. “할아버지께서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죠.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 보여도 모든 일은 허무하리만치 단번에 정리된다고 말입니다.” 의지를 담아 말했을 때 이학재 회장은 내 등을 툭 치며 웃었다. “일단은 절반의 성공부터 축하하자. 고생했잖아.” * * * ======================================= [299] 나도 몰랐던 내 마음 1 뭐가 그리 좋은지 진영기 부회장은 싱글벙글이었다. “자자, 얼른 해치우고 술이나 한잔하자고. 우리가 남도 아니고 조금씩 양보하면 될 일 아니냐? 아버지가 가장 신뢰했던 이 회장, 끔찍이 아꼈던 손자 그리고 맏아들인 나. 사실은 함께 일하면 좋았을 텐데….” 저 말은 진심이 분명하다. 단, 이학재 회장은 할아버지께 했던 것처럼 여전히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비서여야 하고, 똘똘한 조카는 자신의 개인 재산을 열심히 불려주는 개인 펀드 매니저였더라면 말이다. “미안하지만 전 함께 일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습니다.” 이학재 회장은 웃었지만, 큰아버지의 웃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꼭 그딴 식으로 말해야 하겠나?”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 회장이 큰아버지의 속을 긁으려 던진 말인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삐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만합시다. 빨리 조건이나 말하고 협의 끝내죠.” 이 회장은 큰아버지의 눈길을 무시했다. 흥분하면 자그마한 조건도 양보하기 싫어진다. “흠…. 뭐, 빨리 끝내지. 몇 배를 원하나?” 건설, 중공업 계열이 보유한 전자와 물산의 주식은 전자와 서비스 계열이 보유한 건설, 중공업의 주식보다 훨씬 높은 가격이다. 큰아버지는 일단 두 주식 가치의 차이를 물었다. 이 차이만 동의한다면 거래는 쉽게 이뤄진다. “지금 시장 거래가의 두 배부터 출발하시죠.” “뭐?” “순양전자의 주가는 계속 상승세…. 반면에 건설주는 계속 하락세입니다.” 주가 1만 원대의 순양건설과 중공업. 주가 1백만 원에 육박하는 순양전자. 이미 거래가는 100배의 차이다. 이것의 두 배라면 200배. 전자 주식 하나 주면 건설 200주를 내놓으라는 소리니 진영기 부회장은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1만 원이라는 것도 순양건설이 수습 상태라는 게 알려지면서 조금 오른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인 건설주 하락은 여전히 계속된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주식 교환으로 한몫 잡을 속셈인가? 우린 서로의 지분을 되찾는 게 목적 아닌가? 거래가의 두 배? 그걸 말이라고…!” “시장 경제의 간판인 우리 기업 대표들은 시장 가격에 기준을 두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부회장님이 원하는 비율을 말씀해보시죠.” “이 회장. 일단 주식 전량 교환하자고, 그리고 추가금을 주겠네. 그 금액만 말해. 2백 배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마.” “2백 배는 시작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뭐?” “건설주는 잠시 반짝했다가 다시 떨어지고 있습니다. 미라클의 예상은 당분간 5천 원대를 유지한다고 하더군요.” 이학재 회장은 아직 저의를 눈치 못 챈 진영기 부회장이 답답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주식 교환을 서두르지 않을수록 교환 비율은 제게 유리합니다. 그러니 시작인 거죠.” 서로가 가진 주식을 훤히 안다. 진영기 부회장은 추가로 부담해야 할 돈이 얼마인지 계산이 섰다. 그리고 감당하기에 힘든 금액이라 꽉 막힌 것이다.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가는 시대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 널려 있는 생산 공장을 스마트폰 시대에 맞추기 위해 천문학적인 투자 중이다. 그룹 유보 자금이 그리 많지 않다. 이학재 회장은 거래를 무산하기 위해서 가장 보편적이며 좋은 방법을 썼다. 돈이 안 맞다. 기타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돈이 맞지 않으면 거래는 성사되지 않는다. 협상은 돈을 맞추는 과정이고 계약은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금액일 때 이루어진다. “부회장님. 아무리 자기 회사 주식 가져가는 게 중요하다 할지라도 돈은 맞아야죠. 더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시세에 맞추자는 건데…. 난색을 보이면 거래하지 말자는 뜻 아닙니까?” 이학재 회장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내 의견을 말하라는 뜻이다. “솔직히 전 순양건설과 중공업 주식은 관심 없습니다.” 나마저 부정적인 의견을 내자 큰아버지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전 이미 순양건설과 순양중공업 주식을 잔뜩 사 놨거든요. 흐흐.” “뭐?”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봤다. “바닥 치는 주식을 왜 안 사겠어요? 전 1년 봅니다.” “1년이라니?” 큰아버지가 물었다. “1년 정도 지나면 정상화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예전 가격인 3만 원대는 훌쩍 넘을 테니까요. 일 년에 대여섯 배를 버는 투자는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순양증권도 꽤 많이 매입했습니다.” 기관투자의 문제점은 실적이다. 단기간이라도 항상 실적을 내야 하니 장기 투자는 엄두도 못 내지만, 사주인 내가 단기 실적에 목메지 말라고 하니 그들도 안정적인 장기 투자를 시작했다. “또 하나, 전 두 분이 보유한 순양금융계열의 주식이 그리 아쉽지 않습니다.” 이미 셋의 거래는 깨졌다는 걸 눈치챈 큰아버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순양금융계열의 주식을 단 한 주라도 쥐고 있는 개미들은 이미 절 지지합니다. 한국의 젊은 투자 귀재를 쫓아낼 정도로 그들은 멍청하지 않거든요. 제가 금융그룹을 맡고 주가가 세 배 이상 뛰었습니다. 개미들이 절 지지하는 이상 우호 지분은 경영권 방어에 문제없을 정도죠.” 난 두 사람을 쓱 둘러본 뒤 책임을 미뤘다. “두 분께서 합의하지 않는데 제가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두 분 합의하시고 다시 모이죠. 단, 시세대로 주식을 내놓지는 않을 겁니다. 전 장기적인 투자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포함한 프리미엄을 원합니다.” 판은 깨졌다. 아쉬운 사람은 한 명뿐이니 세 사람의 머리를 맞대도 결론은 나지 않는다. “두 분께서는 말씀 나누십시오.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한 것 같군요.” 큰아버지가 나를 붙잡고 장황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빠져나왔다. * * * 이학재 회장이 회의실로 들어오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다. 이 회장이 상석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자 사람들은 의자 끄는 소리도 내지 않으려 조심스레 다시 앉았다. 이 회장은 사람들을 쭉 둘러보며 감회가 새로운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한동안 자신에게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항상 자신의 뒤에 있는 진양철 회장을 향했다. 오늘은 다르다. 이들의 시선은 오로지 자신을 향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얼굴이 많군요.” ‘반가운’이라는 말이 참 애매했다. 기쁜 마음인지 이를 악문 반가움인지 사람들마다 그 뜻이 달랐다. “먼저 인수 과정에 적극 협조해주신 점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분간 순양이라는 이름은 버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름 외에는 아주 많은 것이 달라질 겁니다.” 회의실의 사람들은 이름을 지킨다는 건 반갑지만 달라진다는 말은 달갑지 않았다. 먼저 사람부터 달라진다는 뜻이니까. 이건 인력 교체를 말한다. “첫째, 모든 자회사를 원점에서 재검토합니다. 정확한 역할도 없이 돈만 빼먹던 자회사는 모두 정리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비리가 드러나면 모두 형사고발 진행합니다.” 이미 안색이 창백해진 사람도 보였다. “모회사도 마찬가지, 감사팀은 회사 부실에 한몫한 사람을 철저히 밝힐 것입니다. 또한, 능력도 없으면서 오너 가족에 충성한 대가로 과한 자리에 앉은 사람은 즉각 책상을 비우게 될 것입니다.” 진동기 부회장의 측근부터 정리한다는 말이니 많은 임원이 옷을 벗게 될 상황이다. “난 HW 그룹의 회장이지만 단 한 주의 HW 그룹 주식도 없습니다. 완전한 전문 경영인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그리될 것입니다. 그룹 인사가 마무리되면 매출, 이익, 주가 등 오로지 실적만으로 평가할 것이고 전 업무 지시를 위해 이 건물을 다시 찾는 일은 없을 겁니다.” 순양 사옥의 대회의실은 환희와 실망, 두려움과 설렘으로 가득했고. 쫓겨나는 사람과 그 자리를 차지할 사람들의 감정이 뒤섞였다. 이학재 회장이 대회의실에서 점령군 놀이를 할 때 내 방에는 쫓겨난 왕의 아들이 불안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고생했지? 구치소에서 며칠이나 있었지?” “얼마 안 있었어. 조사는 계속 받았지만.” “기소유예라면서?” “그래. 아버지가 채권단에 항복하니까 그리 결론 나더라.” 진태준은 이미 현실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내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분노를 보이지도 않는다. “큰아버지께 이야기는 다 들었겠네?” “응. 너의 진짜 모습도 알았어.” 알았으면 존경의 눈빛 정도는 보여야 하는데, 회사를 뺏긴 아버지 때문인지 영혼이 빠진 눈빛만 보인다. “그럼 큰아버지의 생각과 계획 말고 형의 생각을 말해.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 “네가 우리 아버지와 한 약속 진심이야?” “형의 자리를 계속 지키도록 한다는 거? 응. 진심이야.” “아무런 조건 없이?” “아니. 있어.” 진태준의 맥없던 눈빛이 달라졌다. “모든 업무보고는 나와 이학재 회장에게만 할 것.” “그 말은 우리 아버지에게는 회사에 관계된 건 입 다물라는 뜻이구나.” “당연한 거 아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일을 잘할 것. 아주 잘해야 할 거야. 난 눈이 높거든. 능력에 부친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 해임이야.” “또 있어?” “난 없어. 하지만 이학재 회장님은 있을지도 모르지.” 이제 재벌 3세가 아니다. 재벌의 사촌이 그가 가진 특혜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차지할 수 있는 자리를 손쉽게 얻었다. 하지만 지키는 방법은 똑같다. 자리에 어울리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특혜 없는 냉정한 평가. 진태준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지만 이젠 남에게 평가받는 일이 일상처럼 되어버릴 것이다. 굳은 그가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이학재 회장님부터 만나야겠군.” “면접 보고 알려줘.” “그래.” 밖으로 나가려는 그를 불렀다. “태준 형.”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앞으로 형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할 거야. 보통의 사람들처럼. 그 말을 생각해내지 못한다면 이 회장님 면접은 보나 마나야. 절대 통과하지 못해.”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랐는지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이 평생 잊었던 말을 기억하고는 씩 웃었다. “고마워. 도준아. 기회를 줘서….” 저 정도면 일 못한다는 평가는 듣지 않을 정도는 되겠다. * * * “어떻습니까? 태준 형은?” “차분하데? 사고 안 치고 평범하게 자란 놈이라 신경 쓴 적이 없었는데.” “일 맡겨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그 정도 사람은 수두룩하잖아. 핏줄이니 챙겨주는 거 말고 특별한 이유가 있겠어?” “둘째 큰아버지의 부탁이니 들어주긴 하겠지만, 회장님께서 내키지 않으시면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재무이사와 동급의 자리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아니다.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으니 약속은 지켜야지. 좀 더 지켜보자.” 이 회장도 진동기 부회장을 생각하며 너무 냉정하게 굴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도준아.” “네.”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내 표정을 살폈다. “순양물산 주식 2.8%를 쥐고 있는 곳이 있어. 내가 접촉했는데…. 어때?” “물어보실 필요가 있습니까? 무조건 매입해야죠. 어딥니까?” “한국토지신탁이야.” 한국토지신탁은 국토교통부 산하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종합부동산투자금융업 전문 자회사다. 그런데 이번 정권이 들어선 후, 주택공사가 가진 지분을 민간에게 넘기면서 민영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거긴 국내 아파트 건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이제 우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속셈이겠지.” 순양과 대현을 인수하며 건설업계 1위가 된 HW다. 한국토지신탁의 저런 반응은 당연하다. “그런데 저쪽에서 널 좀 만나고 싶어 하더라고.” 응? 나를 왜? 건설은 내 영역이 아닌데? ======================================= [300] 나도 몰랐던 내 마음 2 “저를 뭐 때문에…?” “우리나라 투자의 대명사가 너 아니냐?” “이상한데요? 회장님께서 절 띄워주는 말씀을 다 하시고….” “내가 아니라 저쪽에서 한 말이다. 물어볼 게 좀 많다고 하더라. 너도 알지? 주택공사가 지분 매각 계속하는 거?” “네. 민영화 아닙니까?” “그래. 여기저기서 한국토지신탁 먹으려고 접근하니까 궁금한 게 많은가 보더라.” 짐작할 수 있는 게 있다. “혹시 미라클도 인수 의향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걸까요?” “직접 묻지는 않았지만 아닌 것 같아. 미라클은 외국 자본이라고 생각하니까, 아무리 민영화라 하더라도 국영기업이나 다를 바 없는 걸 넘기겠어?” “그도 그렇군요.” 이 회장은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토지신탁 사장이다. 그 자리 마지막 공직 일 게야. 민영화되면 물러나야 하니까. 그리고 그 양반, 집안 좋다.” “금수접니까?” “돈은 아니고, 집안 전부가 여의도 아니면 청와대를 거쳤어.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을 거다. 정중하게 대해.” “뭐 말씀하지 않은 거 있으십니까? 오늘따라 걱정이 많으신 거 같은데요?” “그 양반 캐릭터가 좀… 그래, 네 첫째 큰아버지랑 비슷해.” 왜 이리 조심하는지 알았다. 안하무인이라는 의미니 나와 트러블이 생길 걸 염려하는 것이다. “아하, 알겠습니다. 그분 캐릭터가 할머니와 같다고 해도 꾹 참고 주식 받아 오겠습니다.” 자신 있게 큰소리치고 명함을 챙겼다. ***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순양의 진도준입니다.” - 오, 안녕하시오. 전화 기다렸습니다. 전화기를 통해 걸걸한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학재 회장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주택공사가 보유 중인 귀사의 주식 매각 때문에….” - 아이고, 복잡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차, 물론입니다. 스케줄 맞춰 제가 회사로 방문하겠습니다.” - 음…. 회사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식사나 하면서 편히 말씀 나누는 게 어떻겠소? 밥 한 그릇 사 달라는 건가? 지분만 챙겨 올 수 있다면 한 그릇이 아니라 백 그릇이라도 사 줄 수 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 오늘도 괜찮은지 모르겠소만…? 물론 괜찮지. 하지만 너무 안달 난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선약 때문에 오늘은 힘들고…. 잠시만요…. 모레 점심 어떨까요?” - 그러시죠. 내가 예약하고 알려드리겠습니다. 2.8%의 주식으로 무엇을 얻으려는 걸까? 이 양반은 지금 끝물이다. 민영화 전환 후 설 자리를 잃는 예정된 은퇴자. 원하는 게 뭔지 선하다. 정치인을 수두룩하게 배출한 집안이라면 돈 보다는 권력과 명예를 원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아주 잘 안다. 권력은 돈을 불러온다는 것을. 자기 것이 아닌 회사 소유의 주식을 대표의 권한으로 슬쩍 팔아치우면서 일신의 영달을 챙기는 것이 바로 권력의 장점 아닌가? 적당한 자리 몇 개를 생각했다. 만만한 게 외교관인데 저 정도 인물이면 동남아 정도가 적당하고, 공공기관장 자리는 중급 아래나 가능하다. 원하는 건 그 이상일 테니 힘 좀 써야 할 것 같다. 혹시나 해서 가족 현황도 살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아들의 취업 청탁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너무 약하다. 돈과 아들의 미래를 패키지로 묶어서 생각해 봤다. 이것도 쉬운 일이니 제안해볼 만하다. 몇 가지 옵션을 생각하고 그를 설득해야겠다. 이틀 뒤 그가 예약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중년이 훌쩍 넘은 아저씨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라니 조금 웃기기도 했다. 하지만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그리 나쁘지 않은 장소다. 적어도 그가 아는 사람이 이런 레스토랑을 들락거리지는 않을 테니까. 연장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약속 시각보다 10분 먼저 도착했지만 소용없었다. 레스토랑 매니저는 이미 예약한 분이 기다리고 계신다고 귀띔했다. 안내를 받으며 별실에 들어서자 쉰이 넘은 그가 벌떡 일어났다. “마침내 순양의 대들보를 뵙게 되는군요. 변도식입니다.” 그의 인사가 들리지 않았다. 변도식 사장과 함께 일어선 젊은 여인, 화장기 없는 단아한 모습이었으나 몸에 걸친 옷과 백만 봐도 중형차 한 대를 둘렀다. 이놈 봐라…. 씨는 속일 수 없다고, 젊은 여인의 얼굴에는 변도식의 흔적이 남아 있다. 딸을 데리고 나와? 이런 자리에? 완전히 굳은 나를 향해 젊은 여인이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고, 이거…. 결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딸이 진도준 실장님을 꼭 만나게 해달라고 어찌나 조르는지… 허허.” “아빠… 내가 언제….”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고, 변도식 사장은 조금도 결례라고 생각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젊은 사람이니 격식이니 뭐니 크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서로 인사만 하라고 데리고 나왔어요. 순양 가문에는 한참 못 미치겠지만, 우리 집안도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제 딸과 알고 지내도 괜찮을 겝니다.” “아, 네. 지인이야 많을수록 좋겠죠.” 일단 자리에 앉았지만,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불편하지만 참아야 한다. 할머니보다 더한 사람이라고 해도 꾹 참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거, 방송에서 몇 번 봤지만, 실물이 더 훤칠하구먼. 방에 들어오는데 난 연예인인 줄 알았소. 허허.” 맞장구치기도 한심한 말이라 슬쩍 웃기만 했다. “사장님. 회사가 보유한 순양그룹 주식은 물산이 전부입니까?” “아, 그렇지. 이거 내가 괜한 주책을 부렸구려. 바쁜 사람 앞에 두고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아닙니다.” “일단 식사 주문부터 할까요?” 부녀가 메뉴판을 집으려 할 때 그들을 막았다. “식사는 본론부터 끝내고 하는 게 어떨까요? 식사하면서 숫자 이야기가 나오면 따님도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럼 그럴까요?” 변도식 사장은 내 눈치를 보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순양물산 주식만 딱 집어서 매각하는 건 아무래도 모양새가 빠집디다. 그래서… 이거 한 번 보시겠습니까? 순양그룹 주식 리스트를 뽑은 겁니다.” 그가 내미는 종이를 받아 쭉 훑었다. 소소한 지분은 있으나 대세에 영향을 줄 만한 주식은 순양물산 2.8%가 전부였다. “순양그룹 주식은 제가 전량 매입하겠습니다. 모양새 빠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 깔끔하게 처리하려면 투자신탁이 보유한 다른 회사의 지분을 전부 매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아닙니다. 순양그룹만 매각해도 됩니다. 전부 몰아버리면 또 특혜라고 말들이 많으니까요.” 사고팔 물건은 정해졌고 가격만 남았다. “매각 가격은 어느 정도면 적당할까요? 이사진이나 감사원에서 트집 잡을 일 없도록 해드릴 생각입니다.” “아, 그리 어렵지 않아요. 전임 사장도 회사 보유 주식을 정리한 사례가 있으니까요. 우량주일 경우에는 15% 프리미엄을 붙였고, 비우량주일 경우에는 15% 인하해서 매각했습니다.” 이미 아는 내용일 뿐 새로운 건 없다. 남은 건 진짜 프리미엄이 얼만지를 들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변도식 사장이 속내를 끄집어내도록 옵션을 말했다. “무리한 조건은 아니군요. 합당한 조건을 제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뭘 더 해드리면 될까요?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아이고, 회사 방침이 민영화라 그 전에 자산을 처분하는 건데 뭘 더 바랍니까? 흔쾌히 회사 조건을 받아주시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허허.” 이자가 원하는 옵션은 돈도, 자리도 아닌 관계다. 맞은편에 앉아 나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딸, 나와 그럴듯한 관계를 시작하는 게 바로 옵션이다. “사장님.” “네. 말씀하세요.” “혹시 제가 오해해서 실수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서 말씀드리는데, 제게 따님을 정식으로 소개하실 생각이셨습니까?” “아이고, 소개는 무슨…. 두루두루 알고 지내라는….” “조금의 흑심도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흑심이라니! 무슨 그런 말을…!” 딸의 눈꼬리도 바짝 올라갔다. “집안도 내세울 만하고, 예쁘다는 소리도 들을 만하니 나와의 인연을 기대해볼 만하다…. 이런 생각 없었습니까?” “이봐요. 진 실장!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런 막말을…!” “오해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계약 협의는 끝났으니 이만 일어설까요?” 의자를 뒤로 밀자 변도식 사장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그의 딸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수백 번의 로또 당첨이나 다름없는 이 기회를 박차고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상하리만치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이 보다 더한 일도 내색하지 않고 견뎠는데…. 화를 참지 못해 일을 그르치는 실수는 말아야 한다. 지금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2.8%의 순양물산 주식은 절대 가져올 수 없다. 마음을 진정하고 협상을 다시 시작했다. “변도식 사장님. 사장님의 조건은 잘 알았습니다. 이제 제 조건을 말씀드릴 테니 잘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제안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뭐요?” 이미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따님을 조건으로 내세웠으니 제가 생각하는 따님의 가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적정하다 싶으면 고개를 끄덕이세요. 백 억!” “이 친구가 지금 뭐 하는 게야!” “이백억.” “이봐요! 진도준 씨! 지금 내 가격을 매기는 거예요? 돈으로?!” 참고 있던 그의 딸이 마침내 폭발했다. “이봐, 아가씨. 사람의 가치를 돈 말고 뭐로 환산하는데? 연봉으로 남자 가치를 판단하는 게 결혼정보회사가 하는 일이야. 교통사고로 사람 죽여도 합의금으로 털고, 몇천만 원 수술비가 없어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세상사를 모르는 철부지 젊은 애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내 말을 듣고 있다. “돈으로 목숨값도 매기는데 사람 가치는 당연히 돈이라는 숫자로 판단하지. 몇 살인지 모르겠지만, 철이 덜 들었구만. 삼백억.” 변도식 사장은 딸을 멸시하는 내 눈빛에 소리 질렀다. “이놈이! 어디서 감히 내 딸한테…! 야!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 “제가 생각하는 따님의 가치를 말씀드린다고 했습니다만 이 제안… 곧 끝날 것 같습니다. 오백억.” 재미있는 것은 숫자가 올라갈수록 내 마음이 더 차분해졌다. 지금 나는 변도식 사장 딸의 가치를 말하면서 누군가의 가치도 함께 생각하는 듯하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가씨는 자기애가 강하군. 난 이미 바가지 요금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데 말이야. 칠백억.” “이 새끼가! 당장 그만두지 못해!” 변도식 사장이 의자를 넘어트리며 벌떡 일어섰지만,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그의 사랑스러운 딸이 옷자락을 잡았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애다. “이쪽은 결정한 것 같고 변 사장님만 고개를 끄덕이면 되겠군요. 판단하기 쉽게 만들어드리죠. 천억.” 이번에는 내가 식탁을 짚으며 일어섰다. “이대로 나갈까요? 아니면 고개를 끄덕이시겠습니까?” 그의 눈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말하자 변 사장은 눈길을 피하며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끄덕이신 걸로 생각하겠습니다.” 난 웃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김대리. 잠깐 들어와 봐요.”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김윤석 대리가 달려왔다. “김 대리. 은행에 가서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 하나 만들어 와요.” “네, 실장님. 금액은 어떻게 할까요?” “천억. 그리고 그 예금증서는 이분께 드리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김 대리는 천억이라는 금액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그런 그를 보는 두 사람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럼 천천히 식사하세요. 식사 끝나기 전 천 억을 받으실 겁니다. 그리고 내일 회사로 사람 보내겠습니다. 순양그룹 주식 양도 계약은 문제 생기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변 사장을 남겨 두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대기하던 차에 올라타고 말했다. “서초동으로 갑시다.” 오늘 숫자를 부르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이름을 만나야겠다. ======================================= [301] 아니, 뭐가 아쉬워서 그런 걸 해? 1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렸다. “혹시 모르니 시동 끄지 말고 대기해요. 여차하면 총알처럼 도망쳐야 할지도 모르니까.”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깜빡거리는 수행원들을 남겨 두고 법원 계단을 뛰어올랐다. 서너 번 왔던 곳이지만 여전히 어색하다. 스쳐 가는 사람들이 날 힐끔거리는 것도 편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7층 판사실 중의 하나를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 오셨어요? 오랜만이네요.”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난 사내는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계장님, 서 판사 계십니까?” “이런, 약속 안 하셨어요? 지금 재판 중이신데….” “어디죠?” “425호입니다.” “단독이군요.” “네. 가만있자…. 곧 끝날 것 같긴 한데….”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425호 법정의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가자 판사석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싱긋 한 번 웃어주고 방청석의 뒷자리에 앉았다. 재판을 지켜볼 여유가 없었다. 손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몇 번 하자 그녀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때만큼 그녀가 판사인 게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의 425호 법정에서는 그녀가 회장이며 총수다. 가장 강력한 힘이 있다. 몇 분 후 그녀는 시계를 슬쩍 보더니 말했다. “한 시간 동안 휴정하겠습니다. 증언은 오후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리둥절한 검사와 변호사를 못 본 척하며 그녀는 재빨리 일어섰고 나도 방청석을 나왔다. “뭐야? 연락도 없이 갑자기?” 복도에서 만난 그녀는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배가 고프거나, 재판이 답답하게 진행된다는 뜻이다. 아니면 내가 짜증나거나. “점심 먹었어?” “아니.” “밥 먹자. 맛있는 거 사 줄게.” “못 들었어? 한 시간이 전부야. 대충 먹어.” “대충 뭐 먹어?” “몰라서 물어? 요 앞에 곰탕집 가는 거지.”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는 법복을 벗어 팔에 걸치고는 휘적휘적 앞장서서 걸었다. 젠장, 그냥 가버릴까? 내가 어떤 마음으로, 왜 갑자기 달려왔는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나? 하긴, 내가 입버릇처럼 말한 게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말을 해.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아? 마음은 벙어리라고.” 그녀가 섭섭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내가 했던 말이다. 식당에 들어서자 식사 중이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려니 하며 곰탕 두 그릇을 시켰다. “너 오늘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영….” “내 표정이 어때서?” 그녀가 뭐라 말하려 할 때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곰탕이 나왔다. 깍두기와 김치를 잘라 접시에 놓자 그녀는 밥 한 공기를 말기 시작했다. 밥때가 한참 지나서인지 그녀는 숟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천천히 말했다. “결혼하자.” “큭, 푸―!” 입안의 밥을 고스란히 뱉어낸 그녀에게 얼른 냅킨을 뽑아 건넸다. 서민영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입가를 몇 번 훔치고는 다시 숟가락을 들어 곰탕만 괜히 휘저었다. “싫어? 왜 대답이 없어?” “기다려봐. 지금 찾고 있잖아.” “뭘 찾아?” “반지. 이 곰탕 안에 반지 없으면 넌 죽을 줄 알아.” 아차차. 큰일 났다. 그제야 그녀가 머리를 들어 나를 빤히 노려보기 시작했다. “서로 죽이네, 살리네 싸우며 이혼 법정에 들어서는 막장 부부 중에 곰탕집에서, 반지도 없이 청혼 받은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단 한 명도 없어. 그 사람들도 처음은 샤방한 꽃길에서 출발했다고. 지금 이 상황이 말이 돼?” 앞으로 평생 울궈먹을 빌미를 줄 수는 없다. 무사히 넘겨야 한다. “방금 내게 엄청나게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밀며 유혹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거 내던지고 왔어. 하지만 후회 안 한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얼마짜린데 그래?” “천억.” 그녀의 눈빛에 일렁이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대충 둘러대느라 구라치면 법정 구속한다.” “증인 있다. 내 말이 진실이라고 증언할 사람이 있다고.” “누군데?” “김윤석 대리.” “그 사람은 네 수족이잖아. 증인의 신빙성이 떨어져.” “증거도 있는데 그건 차명 계좌 비자금이라 제출 못 해. 어쩌지?” “이 식당 손님들 전부 판검사야. 입 닫아.” 목소리를 확 낮춘 그녀는 내가 처음 보는 표정으로 변했다.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이다. “네게 결혼은 뭐지? 꼭 거쳐야 할 과정이야? 여러 가지 업무 중의 하나? 아니면…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과 같아?” 이건 전략을 잘 짜서 대답 잘해야 한다. 솔직한 내 생각도 좋은 대답일 수 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진솔한 대답이 아니라는 걸 그녀가 알아도 상관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로맨틱이다. “민영아.” “말해.” “연애는 3인칭의 여자를 2인칭의 그녀로 만드는 과정이고, 결혼은 당신에게 2인칭인 내가 ‘당신만의 2인칭’으로 존재하겠다는 약속이야. 이게 내가 생각하는 결혼이다.” 그녀의 얼굴에 번지는 환희를 발견했다. 이 정도면 상한가 친 대답이다. 서민영이 벌떡 일어났다. “나가자.” “어딜?” “지금부터 한 마디라도 토 달면 청혼은 거절이야.” 난 손을 들어 입술에 지퍼를 채웠다. 식당 밖으로 나온 그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기사님, 서초구청요.” 구청? 설마? 그녀의 팔을 툭 치고 눈을 깜빡거리자 입 여는 걸 허락받았다. “말해.” “이렇게 해치워도 돼?” “네가 늘 말했지? 눈앞에 어른거리는 걸 보고 망설이면 다 놓친다고. 빠른 판단. 과감한 결단, 신속한 행동. 이 세 가지는 한 덩어리라고 하지 않았어?” 그녀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구청에 도착할 때까지 난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구청에서 혼인신고서를 작성했다. 빈칸을 빼곡히 채웠지만 채우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증인 인적 사항을 적어야 하는데?” 서민영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고 난 스마트폰을 꺼냈다. 문자를 보내자마자 답신이 날아왔다. “이거 적어.” “누군데?” “법원에서 날 기다리는 수행원들이야.” “굿.” 재빨리 빈칸을 채우고 서류를 접수하자 나를 알아본 구청 직원이 입을 떡 벌렸다. “더 필요한 거 있어요?” 서민영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며 말하자 구청 직원이 더듬거렸다. “아, 아니에요. 접수됐고요. 처리하는 데 3일 정도 걸려요.” “네. 수고하세요. 절대 빠트리시면 안 돼요.” 그녀는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고, 우린 다시 법원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덜렁대는 서민영으로 변했다. 시간을 확인하더니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어머, 큰일 났네. 재판에 늦었어. 나 먼저 간다.” “야! 방금 결혼했는데 일하러 간다고?” 그녀의 눈꼬리가 확 올라갔다. “결혼? 우리가 언제 결혼했어? 혼인신고만 했지. 순서만 바뀌었을 뿐이라고! 얼렁뚱땅 넘어가면 죽는다.” 불끈 쥔 주먹을 한 번 보이더니 법원으로 달려갔다. 난 그녀의 등을 향해 외쳤다. “오늘은 빨리 일 끝내고 집으로 와! 알았지?”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들어 휙 흔드는 게 전부였다. 저런 여인과 방금 결혼한 것이다. 늘 곁에 있었고, 가족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뭔가를 요구한 적이 없는 유일한 타인이다. 결혼했음에도 변한 게 없다고 느껴질 만큼 자연스럽다. 절로 미소가 나왔다. 대기하던 승용차에 타자 두 명의 수행원이 룸미러를 통해 무슨 일인지 호기심이 잔뜩 드러난 눈빛을 보낸다. 결국, 참지 못한 그들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실장님. 우리 신상명세는 왜…?” “아, 증인 필요해서요. 심각한 일 아니니까 괜찮아요.” “증인요?” 그들의 눈동자가 확 커졌다. “네. 혼인신고 하는 데 증인 두 명이 필요하더라고요.” “호, 혼인신고…!” “그렇게 됐어요. 방금 결혼한 셈이군요. 하하.” 두 사람은 아무 말 못 할 정도로 놀란 것 같았다. 출발할 생각도 않은 채 서로 바라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자자, 그만하고 출발합시다.” “아, 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수행원은 대답은 했지만, 차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운전석의 그가 더는 참지 못하고 몸을 돌리며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 실장님. 실장님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걸 해요?” 이 친구는 유부남이다. 그의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가만있자, 처리하는 데 사흘 걸린다고 했던가? * * * 재판을 끝낸 서민영이 재판정을 나오자 기다리던 변호사가 앞을 막았다. “서 판,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선배님.” “멍하니 앉아서 딴생각했지? 우리 말은 하나도 안 듣는 것처럼 보이던데?” “다 들었어요. 서류 검토도 완벽했고요. 설마 날 못 믿는 거예요?” 아무리 친한 선후배 사이라도 판사와 변호사다. 판사가 빈정 상하는 순간 재판은 묘하게도 불리하게 돌아간다.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서 판사님 재판이야 공정하기 이를 데 없다는 평판이 자자한데. 변호사 나부랭이가 괜한 오버질을 했습니다. 흐흐.” 변호사가 너스레를 떨자 서민영은 생끗 웃었다. “사실 딴생각했어요. 선배님이 이해하세요. 혼인신고 처리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계속 찝찝해서요.” “혼인신고? 판사가 왜 그런 걸 신경 써?” “제 혼인신고니까 신경 쓰죠. 구청장에게 슬쩍 전화할까? 하루 만에 되려나?” 아직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는 변호사 선배는 이미 서민영 눈앞에 없는 사람이다. 멍하니 서 있는 변호사를 뒤로하고 부장 판사실로 걸어갔다. “부장님.” “아, 서 판.” 뼛속까지 성골인 서민영 같은 평판사는 부담이다. 그녀의 집안사람들만 모여도 법원 하나쯤은 구성하고도 남는다. 개중에는 자신의 인사권을 쥔 사람도 있다. 서민영 판사가 완전히 굳은 얼굴로 나타나자 부장 판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맡은 재판 중 외부의 압력이나, 힘 있는 피고인이 있는지 재빨리 되새겼지만 그런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부장님. 혹시 제가 구청장에게 전화해서 민원서류 하나 빨리 처리해달라고 부탁하면 이것도 공직자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이겠죠?” “민원? 어떤 민원?” “혼인신고요.” “혼인? 에이, 그 정도야 뭐…. 청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 아닐까? 빨리 법적 인정을 받고 싶은 부부의 애틋한 마음? 그 정도니까. 위법도 아니고, 뇌물 주고 빨리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부장 판사는 별것 아닌 내용이라 한시름 놨지만, 이런 것까지 확인하는 저 고지식함이 더욱 부담스럽긴 했다. “누군데? 친구야? 아니면 동기?” “아뇨. 제가 당사자라 더 꺼려지긴 해요.” 부장 판사는 손에 든 안경을 툭 떨어트렸다. “서, 서 판…. 뭐라고? 혼인? 언제 결혼한 거야?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아, 그렇게 됐어요. 오늘 갑자기 해치운 거라서요.” “지, 지금 비밀 결혼했다는 말이야?” “아뇨. 혼인신고부터 먼저 한 거예요. 당연히 결혼 휴가는 챙겨 먹을 거구요.” 서민영은 아직 얼떨떨한 부장 판사에게 머리를 꾸벅 숙였다. “아무래도 전화 한 통 정도는 해야겠어요. 계속 신경 쓰여서 일이 손에 안 잡혀요.” 그녀가 나가자 한동안 멍하니 있던 부장 판사는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고등법원장님 연결해, 빨리…! 야! 어디긴 어디야? 서울고등법원이지!” 부장 판사는 자신이 가장 먼저 신부의 친인척 중 현직에서 가장 높은 분께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 [302] 아니, 뭐가 아쉬워서 그런 걸 해? 2 “돈은 좀 썼지만, 순양물산 2.8% 확보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통화했다. 토지공사 사장, 말을 더듬더듬하던데 무슨 일 있었어?” 이학재 회장은 궁금함과 걱정이 섞인 눈빛이었다. “그 양반…. 뭐라고 해야 하나…. 자부심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착각이 심하다 해야 하나. 딸을 데리고 나왔더라고요.” “딸? 변 사장 딸?” “네.” “그 새끼 또라이 아냐? 일 이야기 하는 자리에 딸내미를 왜 데리고 나와?” “제게 슬쩍 밀어 넣으려는 속셈이더군요. 인사나 하라고 데리고 나왔다고 했지만….” “미친 새끼. 사위 욕심이 아무리 많아도 그렇지, 깜도 안 되는 놈이 언감생심 널?” “스스로 생각할 때는 그럴 만하죠. 성골 정치 집안이고 딸도 성형 티는 좀 났지만 예쁘장하더군요. 나야 2세도 아닌 3세, 욕심낼 만했을 겁니다.” “그래서 얼마 더 얹어 줬어?” “천억입니다.” “그래? 변 사장은 자신의 가치도 모르고, 딸의 가치도 모르고, 주식의 가치도 모르는구먼.” 대형 마트의 빵은 천 원의 가치뿐이지만 난파선이 도착한 무인도에서는 같은 부피의 금덩이보다 더 가치 있다. 지금은 전쟁이 시작됐고 놋그릇이 무기로 바뀌는 중이다. 순양 주력 계열사의 주식 가격은 회사의 가치 표현 수단이 아니라 전투부대의 화력이다. 이천억을 요구했더라도 줬을 것이다. “그걸 알 정도면 딸을 데리고 나오지도 않았겠죠.” 이학재 회장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그 여자애가 네 맘에 들지 않았구나. 그냥 사귀는 척하고 주식 공짜로 받으면 되잖아. 그다음 헤어지고. 흐흐.” 아, 이 중늙은이의 얍삽한 생각이라니. “회장님. 언론사가 저와 그 딸이 데이트하는 장면을 포착해서 언론에 나가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 어쩌면 변 사장이 언론 플레이할 수도 있겠죠. 자기 딸이랑 순양의 진도준이 진지한 만남을 한다. 아니면 좋은 감정으로 서로를 알아가고 있다….” 상상만 해도 무섭다. 서민영이 눈에 불을 켜고 날 잡으러 다녔을 것이다. “그건 좀 그렇다. 이왕 정략결혼 할 생각이라면 이 여자 저 여자 찝쩍댄다는 소문은 없는 게 좋지.” “정략결혼이라니요?” “응? 아냐? 넌 그 누구냐…. 판사 여친, 오래되지 않았어? 너랑 동기지?” “네.” “나이도 꽤 먹었는데 결혼 이야기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연애로 끝 아냐?”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정략결혼도 생각했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던 진심을 오늘 그 부녀가 일깨워 주지 않았다면, 순양그룹 주식을 잔뜩 쥐고 있는 공공기관이나 금융기관의 수장을 장인으로 모셨을지도 모른다. “저기…. 회장님.” “응.” “절대 놀라면 안 됩니다.” “뭐가?” “사실…. 아, 이거 참….” “뭐야, 인마! 말해.” “사실 저… 오늘 결혼… 아니 혼인신고 끝마쳤습니다.” 갑자기 결혼 날짜 잡았다고 해도 놀랄 일이고, 약혼하겠다고 해도 놀랄 일이다. 혼인신고부터 했다는 말은 듣고도 믿지 못할 일이다. “상대는 당연히 서민영입니다. 판사 여친 말입니다.” “너… 너….” 계속 버벅거리기만 하는 이 회장에게 머리를 슬쩍 숙이며 인사하고 곧바로 회장실을 나왔다. 생각해보니 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 * * PI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입만 벌린 채 아무 말 못 했다. “그러니까 이 일을 아주 폼 나게 포장해야 합니다. 잘나가는 재벌 3세, 구청에서 혼인신고부터 했다!” 이들이 내 말을 듣고 있기만 바랄 뿐이다. “영화 보면 나오죠? 서로 손잡고 구청으로 막 달려가서 혼인신고 하고 격렬히 키스하는 그런 거….” 달려가는 대신 택시를 탔고, 격렬한 키스 대신 사무실로 돌아갔지만. “시, 실장님. 저, 정말입니까?”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림이 중요합니다. 혼인신고 한 건 팩트니까 멋진 그림 나오게 잘하세요.” “혹시 결혼식도 건너뛸 생각이신지…?”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세요?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포기할 여자가 지구상에 존재하긴 하는 겁니까?” 이들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 안도의 한숨까지 내쉰다. “그렇죠. 그런 이벤트는 절대 놓치면 안 되죠. 신부의 웨딩드레스가 화룡점정인데.” “이 사실을 아는 외부인이 있습니까?” PI 전문가들은 수첩을 꺼냈다. 벌써 일을 시작한 것이다. “음…. 서초구청에서 신고했으니 그쪽은 소문이 쫙 퍼졌을 겁니다. 접수한 공무원이 절 알아보는 것 같았어요.” 그들은 동시에 낭패한 표정으로 변했고 한 명이 재빨리 곁에 있던 직원에게 말했다. “서초구청장에게 전화해. 진 실장님 혼인신고는 개인 정보니까 유출하면 법적 책임 묻겠다고 해. 담당 공무원 입막음 확실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네.” 직원이 달려 나가자 그들은 내게 몇 가지 사실을 더 확인했다. “결혼식은 외국에서 하는 게 어떻습니까? 화보 좀 만들어야겠는데…. 잡지사에서 난리 날 것입니다.” 이러다 끝이 없겠다. “그냥 전체적인 계획을 짜서 알려주세요. 언론사에 보도자료부터 잘 써주시고요. 가능한 한 계획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아, 그럼 일주일 안에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들이 물러났을 때, 진짜 힘든 일만 줄줄이 남았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 온다. 우리 부모님, 그리고 서민영의 부모님을 만나야 한다. 반대하실 리 없으니 별일이야 있겠느냐마는 결혼식 없이 혼인신고부터 한 게 마음에 걸린다. 일단 저녁에 집으로 간다고 알리려 휴대전화를 꺼냈을 때 드르륵 진동이 느껴졌다. 그새를 못 참고 전화하다니, 여자는 여자다. “응, 민영아.” ― 우리 혼인신고 한 거 처리됐어. 이건 또 어떤 시추에이션이지? “사흘 정도 걸린다고 하지 않았어?” ― 내가 서초구청장에게 민원 하나 넣었지. 곧바로 처리해주더라고. 우리 이젠 정식 부부야. 전광석화가 따로 없다. 엄청난 행동력 아닌가? ― 뭐지? 이 반응은? 좋아해야 하는 거 아냐? “네가 못 봐서 그렇지 지금 나 웃고 있다.” ― 오케이. 그럼 전화 끊는다. 저녁에 봐. 참, 좀 늦을 거야. 판사가 퇴근이 늦다고 하면 퇴근은 자정을 넘긴다는 뜻이니 부모님께 말씀드릴 시간은 충분하다. 학교에서 사고 친 청소년이 된 기분이다. * * * “뭐? 혼인신고?” “야! 도준아. 인마!” 어머니와 상준 형은 소리부터 질렀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푸하하―! 이야, 진도준, 대단한데?” 다행히 부모님은 단지 몰랐을 뿐 화를 내시는 건 아니었다. 어머니는 황당해했지만, 시댁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밀 결혼식까지 올리신 분 아닌가? 피는 못 속인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결국 어머니도 쑥스러우셨는지 미소 지었다. 이제 가장 바빠진 분이 어머니다. 자식의 결혼은 양가의 어머니들이 지휘하는 가장 큰 행사다. 길일도 잡아야 하고 사주 궁합도 봐야 한다. 예물에, 혼수에 준비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보니 어머니만 조급해하셨다. 혼인신고까지 마쳤으니 빨리 날 잡아야 한다고 부산을 떠셨다. 왜 이러시는지 안다. 혹시 속도위반이라는 소문이라도 돌면 집안의 쑥덕거림이 향하는 곳은 바로 어머니니까 말이다. 그런 어머니를 진정시켰다. “어머니. 양쪽 집안에서 준비할 건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회사에서 종합 계획을 짜서 보고할 테니까요. 그 계획에 맞춰야 합니다.” 아버지도, 상준 형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단박에 알아들었다. 톱스타의 결혼은 바로 최고의 마케팅 아니던가? 확실한 컨셉으로 마치 프로모션하듯 진행하는 게 스타의 결혼이다. 내 결혼도 그룹과 내 개인의 이미지 광고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엔터테인먼트 세계에 종사하는 두 사람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저쪽 집안에는 인사드렸냐?” “아뇨. 아직 정식 인사 전입니다.” “서둘러. 서로 인사드려야 상견례를 하지.” “네.” 희한한 점은 형보다 동생이 먼저 장가간다는 걸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나도 딱히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순서 따지는 일은 고루하다. 형과 단둘이 이 층에서 마주 앉았을 때 내가 먼저 말했다. “내가 먼저 결혼할 줄은 나도 몰랐어. 미안해.” 내 사과 따위는 상준 형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나 보다. “야! 넌 뭐 때문에 결혼을 서둘러? 너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는 연예인이 순양 사옥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꽃밭을 놔두고 감옥에 왜 기어들어 가?” 그러게나 말이다. 인연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 * * 줄줄이 법조인을 배출한 명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머리 좋다는 사람만 모인 대학의 법대에서, 그 어렵다는 재학 중 사시 합격에 성공한 재원. 사법연수원 성적이 상위권이 아니면 불가능한 판사 임용. 그중에 톱이 아니면 발도 디딜 수 없다는 서울중앙지방법원 입성. 스펙만 놓고 보면 흠잡을 때 없는 신붓감이다. 그리고……. 부모님 앞에 단정히 앉아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부모님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하는 모습은 흠잡을 때 없다. 가증스럽게도. 내가 그녀의 집으로 갔을 때는 똑같은 상황이었는데 부모님의 표정은 달랐다.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기뻐하는 게 느껴질 만큼 나를 반겼다. 처음에는 순양이라는 한국 제일의 재벌가이며 언론에도 자주 등장하는 젊은 경영자라는 간판 때문인지 알았다. 하지만 외동딸을 시집보내는 데 조금도 섭섭한 감정이 없는 듯 보였고 오히려 속 시원한 표정이었다. “이왕에 혼인신고까지 끝마쳤으니 날은 빨리 잡는 게 좋겠지?” “네. 최대한 빨리 서두르겠습니다.” “그럼 됐지, 뭐. 술이나 한잔할까?” 전직 헌법재판관이며, 현재 법대의 석좌교수이자 가까운 미래의 장인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술잔을 기울였다. 그는 취기가 상당히 올랐을 때 웃으며 말했다. “자네, 우리 딸 민영이를 감당할 자신은 있는 겐가?” “아빠!” 서민영이 눈을 흘기며 소리를 빽 질렀지만, 그의 웃음은 끊어지지 않았다. “하긴 뭐…. 혼인신고까지 끝마쳤으니 게임 끝난 거지. 으하하.” * * * “식은 순양호텔에서, 신혼여행은 코타키나발루로 정했습니다. 실장님의 결혼식장이며 신혼여행지라는 것만으로 두 곳의 매출은 껑충 뛸 겁니다.” “조금은 비밀스럽고 신기루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언론은 통제할 생각입니다. 대신 잡지사 한 곳과 웨딩 화보 촬영만 계약했습니다. 순수하고 수수한 컨셉으로 잡았으니 실장님께서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다만….” “말씀하세요. 괜찮습니다.” “신부가 마음에 들어 할지 모르겠어요. 일생에 한 번이니 럭셔리하고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원하는 게 당연하니까요.” 신부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결혼식에 대해서 상의하려 했을 때 그녀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PI 전문가가 계획 짠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하지만 누가 뭐래도 결혼식의 주인은 신부잖아. 네 의견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 “전문가를 왜 고용했어? 이럴 때 써먹으려고 고용한 거 아냐?” “그렇긴 하지.” “그럼 그 사람들 계획대로 움직여줘야지. 웨딩드레스 대신 거적때기 걸치라고 해도 따를 테니까 그분들 마음대로 하라고 해.” “진짜 괜찮겠어? 얼렁뚱땅 넘어가면 가만 안 둔다고 한 게 너야.” “전문가의 계획이 얼렁뚱땅은 아니잖아. 괜찮아.” 이 정도면 마누라는 잘 구한 것 같기도 하다. 이들에게 서민영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전하자 그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이거 다행이군요. 그런 마인드를 가진 분이라면 우리도 한결 일하기 수월하죠. 하하.” 수월하고 별일 없이 상견례도 끝났고 화보 촬영도 끝났다. 그리고 축하 화환과 축의금은 일절 받지 않은 결혼식도 문제없이 끝냈다. 우리 둘은 진이 다 빠졌지만. ======================================== [303] 아니, 뭐가 아쉬워서 그런 걸 해? 3 죽음과 탄생, 애도와 축하, 검은 상복과 새하얀 웨딩드레스. 장례와 결혼은 이처럼 상반된 의식이지만 공통점도 있다. 많은 사람이 모이고 한동안 연락조차 뜸했던 사람이 얼마나 많이 변했나 확인할 기회도 온다. 더 냉혹한 현실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어떤지 확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례식과 결혼식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달려가서 머리를 조아리는 대상은 상주도 아니고 혼주도 아니다. 그 장소에서 가장 성공한, 힘 있는 사람이다. 진도준의 결혼식은 재계와 법조계가 한자리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자리는 권력이 등급별로 모여있었다. 법조계야 당연히 대법원장, 헌법재판장, 검찰총장의 삼두마차와 대형 로펌의 대표로 나뉘어 있었지만. 재계는 조금 미묘했다. 제힘으로 세운 공장 하나 없이, 오로지 인수합병으로만 커온 HW 그룹이 대현자동차그룹의 주태식 회장과 순양의 진영기 부회장과 비교해도 결코 결코 뒤지지 않았다. 이학재 회장이 등장하자 정·재계의 대부분 인사들이 머리를 숙였고, 주태식 회장이 먼저 달려와 그를 같은 테이블로 안내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홀로 동떨어진 진영기 부회장은 가족석에 있어야 한다는 그럴듯한 핑계로 마음을 달랬다. “이 회장. 근데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그거 사실이요?” 대현의 주태식 회장은 귓속말하듯 목소리를 깔았다. “무슨 소문 말입니까?” “오늘의 주인공인 진도준이가 미라클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하던데?” “누가 그래요? 그리고 투자사의 주인은 실속 없습니다. 투자사가 아무리 크다 한들 굴리는 돈의 임자는 돈을 맡긴 투자자들 아닙니까?” “그 정도라면 내가 말을 꺼내지도 않았어. 금융회사 창업자야 펀드매니저와 다를 바 없으니까. 그런데···. 미라클의 운용 자금 대부분이 바로 진도준 그 친구 돈이라고 하더라고.” “도준이도 미라클에서 꽤 큰손이긴 할 겁니다. 하지만 형님 말씀처럼 그 정도야 되겠습니까? 초대 사장은 오세현 아닙니까? 미국 본사의 대표는 따로 있고.” 주태식 회장은 손을 들어 멀찍이 떨어져 있는 크고 둥근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기 앉아 있는 저 외국 여자, 미라클 대표라던데? 얼마나 돈이 많은지 대통령까지 만난다는구먼.” 청와대를 시작으로 굵직한 금융인들과의 미팅이 줄줄이 이어진다는 뉴스도 나왔다. “내일 청와대 오찬에 초대받았죠? 그럴 만합니다. 잊으셨습니까? 지난 금융위기 때 무려 100억 달러를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덕분에 우리나라 은행이 무사했고 환율도 지켰지 않습니까? 그 정도면 IMF 총재급이라고 봐야겠지요.” “그 덕에 이 회장도 재미 많이 봤잖은가?” 주태식 회장은 팔꿈치로 이 회장을 툭 쳤다. “그 모든 걸 조율한 인물이 도준이라고 하던데?” “그건 사실입니다. 중간에서 다리 노릇 한다고 고생 많이 했죠.” 이학재 회장은 시치미 뚝 떼고 대화를 이어갔지만, 진도준의 비밀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럴듯한 소문은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으므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그만큼 거짓 소문도 많이 돌아다닌다는 말이다. 하지만 도저히 믿기 어려운 소문도 있다. 믿기 어렵다는 건 그럴듯하지도 않고, 상상하기도 어렵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만들지 않는다. 누구도 믿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라클의 진짜 주인, 투자금 대부분의 주인, 이 말은 그의 재산이 말 그대로 천문학적이라는 뜻이다. 누구도 한 명이 그 돈의 주인이라고 믿기 어렵다. 믿기 어려운 소문일수록 사실일 확률이 높다는 건 정보를 많이 접해본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이 결혼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보다 정보를 빨리 접하고 그 정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2이들에게 진도준의 정체가 소문으로 돌고 있다는 건 더는 숨기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다음 청와대 오찬은 도준이가 가겠구만. 더는 숨기기 힘들겠어. 하긴···. 이제는 숨길 이유도 없어진 건가?’ 주 회장의 표정을 슬쩍 살피니 그는 미국 미라클의 CEO를 노려보고 있었다. “젠장, 세상이 변했어.” “늘 변하지 않습니까?” “아니, 우리같이 공장 돌리며 물건 만들어 팔아먹는 놈들의 시대는 끝난 거 같아. 이젠 돈놀이하는 놈들의 시대 같다고. 나도 단독으로 청와대에서 밥 먹은 적은 없거든.” “아이고, 형님. 그건 특혜 시비가 나올까 봐 그런 거죠.” “아니야. 미국 보라고. 월가가 경제를 좌지우지하잖아.” 전혀 다른 두 상황을 끌어와 비교한다. 이런 자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을 이끌다니. 이학재는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항상 돈을 쥔 자가 칼자루를 쥐는 것이다. 한국은 재벌이 돈을 쥐고 있으니 항상 칼자루를 쥐고 있다. 도준이도 아주 잘 벼린 칼의 칼자루를 쥐고 있다. 도준이는 재벌일까? 아니면 돈놀이를 하는 놈일까? 갑자기 드는 의문이었다. * * * “아고, 힘들어.” 서민영은 결혼식을 끝내고 호텔에 준비한 특실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녀의 곁에 눕자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그녀의 머릿결을 만지며 말했다. “한숨 자고 가자.” “비행기 시간은···. 아, 전용기라고 했지?” “그래. 우리가 탑승하기 전에는 안 뜨니까 쉴 만큼 쉬고 가도 돼.” 그녀는 안심한 듯 눈을 감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벌떡 일어났다. “가자.” “벌써? 더 쉬어도 돼.” “아니, 공항 말고.” “그럼 어디?” “군산. 할아버님께 인사드려야지.” 누워있을 수 없어 상체를 일으켰다. “신혼 여행 다녀와서 인사드리러 가도 돼. 어른들 뵙는 건 그때 해도 늦지 않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으론 기특하지? 가고 싶지 않아?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분이잖아. 오늘 할아버님이 이 자리에 계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 번이나 생각했어?” “지금 나 웃고 있냐? 어떻게 그리 잘 알아?” “그만 웃고 짐 챙겨. 후딱 다녀오자. 너무 늦으면 내일 출발해도 되고. 이 방, 오늘 밤 쓸 수 있지?” “전용기가 얼마나 쓸모 있는지 보여주지. 기대해. 흐흐.”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뜬 서민영을 두고, 결혼과 신혼 여행 전부를 관장하는 스텝을 불렀다. “지금 할아버지 뵈러 군산으로 갈 거니까 준비해요. 그리고 군산에서 바로 뜰 수 있도록 전용기 이동하라고 해요. 군산에도 공항 있죠?” “확인하고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군산까지는 차로 이동하실 거죠?” “그게 편하겠죠?” “준비되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스텝이 나가자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척 세웠다. “오호, 이제야 내가 진짜 재벌이랑 결혼했다는 게 실감 나네.” 다시 내 옆에 걸터앉은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며칠 전에 부모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걸 말씀해주셨어.” “뭔데?” “너랑 나 엮으려고 강남에서 유명한 마담 뚜가 붙은 거 모르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너 대학 가자마자 할아버님이 신붓감을 물색했다더라. 내가 일 순위로 뽑혔고.” “진짜?” 서민영은 힘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응. 요즘 중매인은 대놓고 선보게 하지 않는대. 자연스럽게 자리를 계속 만들어서 호감 가지게 한 뒤 선을 주선한다고 하더라고. 마담 뚜도 우리가 같은 학교 같은 과니까 아주 쉽게 생각했을 거야.” “으흐흐. 계산 착오구만.” “그렇지. 네가 학교에 안 온다는 걸 몰랐을 테니까.” 이제야 그녀가 군산부터 다녀오자고 말한 이유를 알았다. 할아버지 뜻대로 이뤄졌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은 거다. 이때 스텝이 조심스레 들어왔다. “준비 끝마쳤습니다. 그런데 군산 공항 이용은 어렵고, 근처의 무안국제공항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우린 기자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출발했다. * * * “어때? 기분이?” 괜히 비석을 쓰다듬는 나를 보며 그녀가 웃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 너랑 결혼할 걸 그랬어.”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어. 그러니 후회할 짓 안 하며 살아야지.” “어쭈, 벌써 훈계 질이야? 그거 혹시 바가지?” 그래, 후회할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가자. 이왕 여기 왔으니 인사드리고 가자.” “인사? 어디?” “할아버지의 의동생쯤 되는 분이야. 가끔 인사드리러 내려왔었는데 오늘 안 오셨거든. 청첩장도 보냈는데···. 할아버지도 자주 찾아뵈라고 신신당부하셨어.” 난 그녀의 손을 잡고 작은할아버지나 다름없는 주병해 할아버지의 집으로 향했다. * * * “그것참, 기특한 애로구나. 신혼 여행도 미루고 할아버지께 인사를 먼저 드리다니! 네 녀석, 장가 한번 잘 갔다.” 그는 연신 웃으며 무릎을 탁 쳤다. 한동안 덕담을 건네시더니 나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 “동기를 쫓아냈다면서? 그놈이 가진 것도 다 네 손에 넣고.” 멀리 지방에 있지만 듣는 귀는 서울에 많은가 보다. “부실경영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신 겁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겠지. 욕심만큼 능력이 따라가는 놈은 너밖에 없다고 형님이 늘 말씀하셨는데 틀리지 않았구나.” “할아버지께서 틀리신 적이 있었습니까?” “많았다, 이놈아.” 작은할아버지는 한바탕 웃고 난 뒤 말했다. “대신 틀린 걸 맞도록 확 뒤집었지. 당신이 맞고 당신 외에 모든 사람이 다 틀리도록 만든 게야. 너도 그 정도는 해야 순양을 차지할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작은할아버지.” 호칭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다. “참, 부탁 하나 하자.” “네. 말씀하십시오.” “네 할아버지 묘는 천천히 이장하도록 해라.” 이제 내가 그 정도 힘이 있다는 것까지 아신다. 할머니도 없고 반쪽이 된 순양을 거머쥔 큰아버지만 남았으니 내가 이장하겠다고만 하면 막을 사람은 없다. “내가 기운 빠져서 벌초도 힘들어지면 말하마. 그때 서울로 옮기거라.” “네. 그때 작은할아버지도 함께 모시겠습니다.” “듣기 좋은 말 하는 것도 배웠구나. 영악한 놈. 허허.” 그는 웃으며 일어섰다. “어여 가라. 결혼한 날 늙은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다.” “다시 찾아뵐게요. 작은할아버지.” 서민영이 공손히 머리 숙이자 그는 다시 환히 웃었다. * * * “이야, 새신랑! 결혼 축하한다.” 코타키나발루에서 기다리던 오세현은 날 덥석 껴안았다. “너의 화려한 상한가도 이렇게 마감치는 구나. 이젠 내리막만 남았다. 흐흐.” 조용히 귓가에 대고 속삭인 그는 우리를 리조트로 안내했다. 만약 서민영이 눈을 부라리고 그를 쫓아내지 않았다면 우리의 신혼 여행 첫날밤은 술로 지새웠을 것이다. 딱 일주일, 여한 없이 쉬었다. 일 생각, 지분 생각을 완전히 지우고 지낸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돌아왔다. 난 전쟁터로, 아내인 서민영은 일터로. * * * 출근 첫날 몇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이학재 회장과 마주 앉았다. 그는 사업자등록증 수십 장을 내 앞에 툭 던졌다. “이게 다 빨대 꽂고 꿀 빨던 놈들입니까?” “그래. 건설, 중공업, 기계, 화학 등등 무지하게 많다.” 그룹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던 이 회장이니 불필요한 자회사 또는 협력업체라는 이름으로 돈을 빼돌린 곳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건 이 빨대 꽂은 놈들과 관련 있는 회사 인물들이고.” 명단을 건네는 그가 내 눈치를 슬쩍 봤다. 왜 저런 눈짓인지 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이 회장의 뜻을 들어줄 수 없다. ======================================== [304] 나도 있다. 1 “인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안타까운 사람이 꽤 포함되어 있나 보군요.” 이 회장은 뜨끔한지 얼굴을 조금 붉혔다. “눈치 빠르니 말 꺼내기가 더 편하긴 하다. 개중에는 진동기의 사람도 있고 진 회장님의 사람도 있어. 하지만 오래됐으니 공로를 인정하자는 뜻은 아냐. 능력을 보면 정리하기에 아까운 인물도 꽤 있다.” “다들 임원 이상이죠?” “대부분. 부장급이야 임원 밑에 줄 서다 보니 동참한 거겠지.” 이학재 회장의 사심이 들어 있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정리한다면 회사가 안 돌아갈까요?” 단번에 무슨 뜻인지 파악한 이 회장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임원 목 좀 날린다고 해서 회사가 안 돌아간다면 그게 대기업이냐? 그냥 회사지. 알았다.” “혹시 신세 진 인물이 계시면 그 사람부터 날리십시오. 그래야 목 날아가는 사람들 입에서 딴소리가 안 나옵니다.” “독한 놈. 흐흐.” “아직 안 끝났습니다. 만약 이번에 옷 벗는 임원들이 경쟁 업체에 들어간다면 회사 돈 빼먹은 거 배임 횡령으로 고소한다고 엄포 놓고 취업 길 막아버릴 생각입니다.” “그 정도까지 할 필요 있나?” 이 회장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평생 몸담은 순양의 인연을 매정하게 자르기 힘들다는 것도 안다. 건설은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난 곳이다. 가장 먼저 그 구멍은 뚫은 사람은 주인이며 마름은 티 나지 않게 쥐구멍을 뚫었다. 대기업의 비자금 창구를 담당하는 건설사는 뒷주머니를 채워주는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하지만, 항상 터지기 전의 폭탄이다. 검찰이 재벌을 털겠다고 결심하면 가장 먼저 건설사부터 쑤셔 댄다. 난 비자금 따위는 만들 필요도 없다. 그러니 누군가 나를 칠 수 있는 아킬레스건은 애초에 도려내는 게 낫다. 지금이 적기다. 주인이 바뀌었다. 직원들은 새로운 바람이 불 거라며 기대 반 걱정 반이다. 기대는 부응하고 걱정은 덜어주면 된다. 사표 쓰고 회사 떠나면 또 다른 걱정이 생기겠지만, 그건 내 걱정은 아니다. 그리고 난 남의 걱정을 해줄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싹 도려내면 새살이 올라옵니다. 새살은 진급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오니까 살아남은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겠죠.” “축제라기보다는 살아남아 올라오는 새살들에 대한 경고겠지. HW라는 이름 아래에서 장난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아니냐?” “회장님도 앞으로 꽃길만 걸으셔야죠. 일부러 지뢰 심으며 길 닦을 필요 없잖습니까?” 이 회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알았다. 칼춤 한번 추지 뭐.” “회장님이 뭐 하러 그런 궂은일을 하십니까? 승진한 신임 사장 기분 좋을 때 덩실덩실 춤 한번 추라고 하십시오.” “당연하지. 내가 미쳤다고 피 묻히냐?” 이학재 회장은 인터폰을 눌렀다. “사장들 좀 오라고 해. 아니, HW 말고…. 순양.” * * * “화, 확실해?” “청와대 경제수석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진동기 부회장님이 완전히 포기한 이유도 이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두바이에 물린 돈 10조 원을 아무렇지도 않게 안고 간다고 하니 더는 손쓸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보고 올리는 백준혁 비서실장도, 보고받는 진영기 부회장도 목소리가 떨렸다. 함께 앉아 있던 진영준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만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잘못 안 거 아냐? 한국 미라클의 펀드가 그놈 돈이라던가…. 그래야 그럴듯하잖아. 미국 미라클의 자금이 얼만데 그놈 돈이라는 거야?” “기업 공개가 안 되어 있으니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이번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 때 챙긴 돈만 50조에 육박한다는 월가의 소문만으로 대충 가늠하는 것 같습니다.” “미, 미친 새끼. 그런 돈을 쥐고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정신 차린 진영준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이 돈. 진영기 부회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래서? 부러워? 산더미 같은 돈 쌓아 두고 펑펑 쓰니까?” “아, 아버지. 그게 아니라….” “이놈아. 그놈이 가진 돈이 아무리 많아도 숫자에 불과해. 그 돈을 총알로 바꾸려면 찬스를 잡아야 하는 거야! 서브프라임, 두바이 사태가 아니었다면 건설과 중공업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아직 동기가 부회장 자리를 꿰차고 있을 거다.” 아들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개운하지 않았다. 백 실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순양백화점도, 호텔도, 리조트도 도준이 놈의 소유가 됐다. 건설 중공업계열도 다 먹었고 금융계열은 이미 굳은자로 변한 지 오래다. 전자와 물산의 엄청난 매출과 영업이익이 아니라면 70% 이상 그놈 손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그나마 전자와 물산이라는 순양의 주력이 아직 자신의 손아귀에 있으니 40% 이상은 남은 것이다. 물론 진도준이 미라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쯤은 짐작했다. 한국 미라클의 2, 30% 정도는 진도준의 지분이라고 확신했다. 만약 백 실장의 보고가 사실이라면?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진영기 부회장은 진도준이 무서운 놈이라는 것도 알았고 두려움도 느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바닥에서 올라오는 감정은 바로 공포였다. 지금의 한국 경제는 어쩔 수 없이 세계 경제 속의 일부분이다. 유기적으로 엮인 세계 경제 속에서, 어디 붙어 있는지 정확히 알기 힘든 국가가 무너지면 그 여파가 어떤 형태로 한국을 덮칠지 모른다. 나비효과는 더 이상 기후 이야기가 아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런데 수십조에 달하는 돈이라면 나비의 날개짓 정도가 아니라 세찬 강풍을 만들어낼 만한 금액이고, 없는 기회도 만들어낼 만큼 무지막지한 숫자다. 이제 진도준이 가진 계열사를 어떻게 뺏어 올까 궁리할 때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계열사를 어떻게 지킬까 전전긍긍해야 한다. “백 실장.” “네.” “좀 더 알아봐.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어. 경제수석은 어디서 들었는지 출처까지 확인해.” “네. 부회장님.” 진영기 부회장은 조금 망설이다 아들에게 말했다. “영준아. 넌 도준이 찾아가서 신혼 재미 어떠냐고 물어봐라.” “네? 아…. 알겠습니다.” 진영준은 아버지의 의도가 뭔지 알았다. “너무 앞서지는 말고. 자연스럽게.” 나이 마흔 자신을 너무 어린애 취급한다. 진영준은 큰소리 땅땅 치며 일어섰다. “무리하지 않고 확인하겠습니다. 정확하게 말 안 해도 눈치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 * * “우리 새신랑, 생각보다 멀쩡하네? 볼이 푹 패이고 눈 밑에 그늘이 잔뜩 껴야 신혼이잖아. 하하.” 진영준이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순양전자 부사장이라는 간판을 내년쯤 떼고, 진영기 부회장을 대신에 그룹을 지휘한다는 소문이 돈다. 첫째 큰아버지가 칠순잔치를 해야 할 날이 몇 년 안 남았다. 일흔이 되면 상왕처럼 명예 회장으로 물러나고, 아들인 진영준이 이름뿐이라 하더라도 회장이나 부회장 명찰은 달 것이다. 이놈은 전경련 모임에 등장해서 큰소리치는 게 삶의 낙이니 명찰 욕심 때문이라도 내년엔 전자를 맡을 것이다. “형수처럼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 그럴 시간이 있겠지. 민영이는 판사야. 침대에서 뒹굴거릴 시간은 없어.” “야야. 그깟 판사 때려치우라고 해. 공무원 월급 몇 푼이나 된다고 그 고생을 하냐? 그냥 법복 벗고 변호사 하면 되잖아. 순양 법무팀 변호사 연봉이면 평생 공무원 월급 한 방에 번다.” 이 자식은 남의 말은 잘 듣지도 않으니 속 긁는 말을 해도 효과가 없다. “그 판사가 우리 집안 사람의 재판을 맡을 수도 있어. 형님도 잘 알잖수. 우리 집안 사람들은 법정에 서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말하는 게 연례행사라는 거.” 그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내 아내가 바로 강력한 무기라는 뜻을 이제야 알아들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다음에 나도 제수씨 덕 좀 보자.” “그 정도는 해야지. 분명 그런 날이 올 거야.” 초반 신경전은 이쯤에서 끝냈다. “참. 내년에는 전자 맡는 거지?” “그래야지. 이젠 스마트폰이 주력이야. 노친네들은 스마트폰 쓸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진두지휘하겠어? 내년엔 내가 전자 맡고 임원들 물갈이할 생각이다. 4, 50대로 싹 바꿔야지. 환갑 넘은 노친네들은 집에서 손주나 보는 게 맞아.”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니까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은 물러나는 게 맞다고 봐.” 그의 의견에 머리를 끄덕이자 기분 좋은 미소를 보였다. “그럼 다시 승계 작업 재가동하겠네? 전자를 맡아 인사권 쥐고 큰소리치려면 지분은 좀 있어야 체면이 서지.” “네가 방해만 안 한다면.” 진영준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방해했어? 법이 막았지. 증여세 다 내면 대통령도 승계 작업 못 막아.” “야! 너야 돈이 넘쳐나니까 세금 꼬박꼬박 다 내는 거지. 증여세 똑바로 내면 순양전자 주인은 국가야. 지금 주가를 감안하면 그 엄청난 세금을 어떻게 내냐?” 돈이 넘쳐나니까? 이런 말을 왜 할까?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 내 방을 찾은 이유가 나왔다. “참, 이상한 소문이 돌더라.” “소문?” “그래. 우리 막내가 바로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주인이라는 소문, 넌 못 들었어?” “아, 들었지. HW가 둘째 큰아버지 회사를 인수했을 때부터 그런 말이 솔솔 나돌던데? 형님도 알잖아. 그런 소문은 여의도 찌라시에서 시작한다는 걸.” 그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 입에서 소문의 진위를 듣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 소문…. 사실이냐?” 나는 살짝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찌라시 내용을 일일이 확인해주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야.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뭐 중요해? 난 그 소문을 어떻게 이용할지 그 생각만 하면 돼. 돈 많다고 소문나는 건 나쁜 게 아니거든.” 미소처럼 애매한 대답에 진영준은 답답한 속을 드러냈다. “말 돌리는 거 보니 맞구만. 이야, 이거 대단한데? 미라클은 기본이 조 단위로 움직이잖아. 그 엄청난 돈이 우리 도준이 것이라니….” “마음대로 생각해. 나라면 그걸 궁금해하느니 승계 작업할 때 미라클이 돈으로 방해나 하지 않을까 걱정부터 하겠다. 또 방해 공작을 어떻게 막을지 계획도 세우고.” 참을성 없는 이놈의 본성이 표정에서 드러난다. 인상을 팍 구기며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너 지금… 나 가르치냐?” “충고지. 조언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뭐? 이 자식이 오냐오냐 받아주니까 어디서 건방을 떨어?” 난 어깨를 으쓱했다. “거슬리면 걸러서 들어. 늘 듣기 좋은 소리만 듣고 싶다면 입 닫을게.” “걸러서 들으니 하나는 귀에 꽂히는데? 미라클이 내 승계 작업을 왜 방해하지? 네가 주인이라서?” “미라클은 순양그룹 계열사를 야금야금 먹어왔어. 미라클의 과녁은 순양그룹인데 주인 따져서 뭐 해? 부처님이 그랬어. 화살이 날아올 때는 몸을 숨기는 게 먼저라고. 화살을 누가 쐈는지, 왜 쐈는지 그런 거 따지다가는 화살에 맞아 죽는다고.” 한쪽은 웃으며 말하고, 한쪽은 씩씩대며 말한다. 이런 대화가 길게 이어질 리 없다. 진영준이 벌떡 일어났다. “잘 들어. 이 자식아! 넌 내가 어떤 놈인지 몰라. 내가 작은아버지처럼 호락호락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난 내 껄 지키고 네 껄 뺏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 작은아버지처럼 점잔 떨고 앉아만 있지는 않는다고.” 그는 내 방을 나가며 한 번 더 경고했다. “내 앞에서 까불지 마. 내가 악마로 변하는 걸 보게 될 거다.” 그가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그를 불렀다. “진영준.” “뭐야? 시뻘게진 얼굴로 돌아서는 그를 향해 말했다. “까불지 마. 내 속에 웅크린 악마가 네 속에 웅크린 악마를 이겨.” ======================================== [305] 나도 있다. 2 “말을 빙빙 돌리긴 했지만, 그놈이 돈 많은 건 확실합니다. 마라클의 자산 전부가 그놈 게 아닐 수는 있겠죠. 하지만 수조 원… 아니, 어쩌면 수십조 원을 동원할 힘이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놈 입으로 그렇게 말했어?” 진영기 부회장은 아들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뇨. 직접 말했다면 허풍으로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태도가 그랬어요.” “태도?” “네.” 진영준은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전부 다 말할 수는 없었다. 그놈이 노려보며 천천히 뱉어내던 말, 입가의 미소, 힘이 잔뜩 들어간 눈빛. 섬뜩한 그 모습과 태도 때문에 간이 쫄아버렸다는 것은 더더욱 말하기 어려웠다. “그렇지. 혀는 거짓말을 해도 몸은 못 해. 그래, 태도가 어땠는데?” “제 위에서 내려다봤습니다. 이미 전 그놈 안중에도 없더군요.” “여유라 이거지?” “그 이상입니다.” 진영기 부회장은 아들이 보고 느낀 것을 정확히 알았다. 주머니가 두둑할 때 뿜어져 나오는 태도, 상대보다 훨씬 강할 때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여유. 평생 이 두 개가 마치 팔다리처럼 몸에 배어 있었다. 한국 최고의 기업, 그 기업의 장남이니 모두 머리를 조아렸고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이가 없었다. 다른 재벌 그룹의 2세와 모임을 가졌을 때, 그들이 아무리 잘난 척해도 우습기만 했고 머리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그들을 아래로 보는 눈빛과 태도는 절대 숨기지 못했다. 대현그룹의 주태식마저 한 수 아래로 바라본 건 자연스럽게 그랬을 뿐 자존심 싸움도 아니었다. 이제 반 토막 난 그룹을 손에 쥐고 있으니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이 바로 그런 놈들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전경련 모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룹 회장들의 눈초리가 괜히 신경 쓰였고,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확실히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담긴 여유와 입꼬리에 맺힌 승리자의 미소를 말이다. “아버지. 만약 도준이 그놈이 수십조의 돈으로 우리 전자와 물산을 비롯한 계열사 주식을 깡그리 긁어 가면….” “쓸데없는 짓이지.” “네?” “깡그리 긁어 가는 짓이나, 네가 지금 걱정하는 것이나 다 쓸데없다는 뜻이다.” 진영준 역시 부질없는 걱정이라는 것을 안다. 단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주식 시장에서 순양전자와 순양물산의 주식을 쓸어 모은 놈이 회사를 차지한다면 우리나라에 재벌이라는 단어는 벌써 사라졌을 게다. 지금 회장입네 하고 거들먹거리는 2세들은 1% 정도의 지분을 가진 주주일 뿐이겠지. 매년 배당금 얼마나 주나 하고 침 흘리는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게야.” “저도 압니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허술하지 않다. 전자와 물산을 차지하려면 네 작은아버지처럼 부도가 날 정도로 망해야 해. 채권을 감당하지 못해 우리 스스로 물러나는 일만 아니면 뺏길 리 없다.” “주식 시장에 나오지는 않지만, 기관이 쥐고 있는 주식도 있잖습니까? 도준이 그놈이 서너 배의 웃돈을 주고 매입한다면….” “기관 주식은 정권이 결정한다고 보면 돼. 정권이 득 될 것도 없는데 왜 순양의 주인을 바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진영기 부회장도 일말의 불안은 남아 있었다. 이 불안을 없애는 길은 하나다. 무리를 해서라도 지분 구조를 아들에게 유리하도록 승계하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저기서 불만을 터트릴 것이고 반대를 외칠 것이다. 당장 핏줄부터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지 모르는 일이다. * * * “형님. 저 도준입니다.” ― 어? 아…. 도준아. 어쩐 일이야? “신혼여행도 잘 다녀왔고 새살림도 시작했는데 형님께 인사도 드리지 못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려서 전화했어.” ― 뭘 그런 거 가지고….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결혼식에도 못 갔으니까. 순양물산 호주 법인에서 순양전자의 1호 스마트폰을 알리느라 뛰어다니는 진경준. 열심히 일하는지, 자리만 지키는지 모르겠지만, 유학을 끝내고 해외 법인만 열심히 뺑뺑이 돌고 있다. “기념사진 한 장 찍으려고 그 먼 곳에서 어떻게 와요? 마음 쓰지 마.” 지금쯤 내가 왜 전화했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이다. 안부 전화 꼬박꼬박 할 만큼 살가운 사이도 아니고, 오히려 경영권 때문에 자기 아버지 진영기 부회장과 날을 세우는 관계라는 걸 모를 리 없으니까 말이다. ― 그래, 신혼 재미는 어때? “연애를 너무 오래 해서 그냥저냥 해. 여자 친구가 집에 늘 있는 것 같은 느낌? 하하.” 진경준은 내 웃음을 함께하지 않았다. 긴 통화가 오히려 불편할 것이다. ― 그렇구나. 아무튼 전화 고맙고, 또 통화하자. 내가 일이 좀 바빠서 말이야. “응. 바쁜 사람 붙잡고 너무 오래 통화했지? 곧 들어올 거지? 그때 내가 술 한잔 살게. 또 봐.” ― 곧? 당분간 한국에 들어갈 일 없는데? 걸렸다, 요놈. “그래? 큰아버지께서 그룹 승계 절차 다시 시작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잘못 알았나?” 진경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뒤에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너 지금 이간질하는 거냐? 아니면 분탕질이야? “사실을 전해주는 거니까…. 이간질은 아니고 분탕 정도로 해두자.” ― 너 이 자식…! “난 사실을 전해주는 것뿐이야. 그게 이간질이 될지, 분탕질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고…. 그것보다 더 나쁜 건 차남인 경준 형이 십 원 한 장 상속받지 못하는 것 아니겠어? 그룹에 영향력 하나 없는 핏줄로 해외 법인만 뺑뺑이 도는 게 적성에 맞으면 이 전화 끊든지.” 하나, 둘, 셋, 넷, 다섯…. 마음속으로 카운팅을 했지만,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 사실이냐? “물론.” ― 네가 또 미친 짓으로 막을 거잖아? “아이고, 이젠 못 해. 지난번에 승계 작업 막느라 날린 돈이 6천억이야. 참, 형은 내게 그거 막아줘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섭섭한데?” ― 미친 새끼! 수화기를 쾅 하고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진영기 부회장의 둘째 아들. 진영준와 다섯 살 차이가 나고 둘 사이에 딸이 하나 끼어 있다. 이 집안은 딸까지 신경 쓸 만큼 현대적이지는 않다. 사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진영기 부회장은 차남인 진경준에게도 적지 않을 만큼 계열사를 나눠 주려 했다. 그때는 순양그룹 전체를 다 먹었으니까. 하지만 욕심 많은 진영준이 가만히 있을 리가 있나?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검찰의 압수수색과 잇따른 재판이 있었고 그 틈을 노린 진영준이 동생의 몫까지 꿀꺽해버렸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진경준이 길길이 날뛰던 것이 기억난다. 회장실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다 때려 부쉈던가? 그것만 봐도 진경준 역시 보통 욕심은 넘는다는 걸 알 수 있다.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자신은 빼놓고 상속절차를 시작했다는 걸 알면 가만있을 리 없다. 즉시 날아와서 친형인 진영준이 밥상을 받기 전에 걷어차야 하는데…. 생각대로 잘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만약 진경준이 쪽박 깨는 데 힘이 부치면 적극적으로 도와줄 생각이다. 저쪽 집안이 깨지고 쪼개져야 내가 수월하니까 말이다. * * * “마지막 우리 대화는 욕으로 끝난 것 같은데…. 그 대화 계속할 거야?” “웃자고 하는 소리라면 관둬. 재미없으니까.” 며칠 뒤에 진경준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국제전화가 아니었다. 만나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니 그는 은밀한 장소를 원했다. 귀국한 사실을 비밀에 부쳐달라는 뜻일 테고, 보는 눈을 피하려면 집이 최고다. 더욱이 신혼집 아닌가? 집들이로 생각했다. “제수씨는?” 진경준은 집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법조계는 공무원 중에 쓰리디 업종이야. 자정 전에 퇴근한 적이 며칠 안 돼. 덕분에 나는 좀 편하고.” “집에 오면 쓰러져 잠자기 바쁘니까 바가지 긁을 시간이 없다?” “그런 셈이지. 참, 형은 좀 어때? 형수님이랑은 잘 지내?” “얼굴 두어 번 보고 결혼한 것치고는 그럭저럭.” 부부의 불화는 부족한 돈이 첫 번째 이유다. 돈 펑펑 쓰며 생활에 쪼들리지 않으면 그냥저냥 산다. 알콩달콩한 로맨스는 없어도 그 부분을 메워주는 풍요로운 생활이 있기 때문이다. “조용히 들어온 거 보면 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나 보지?” “그래. 공항에서 바로 이리 왔어.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몰라. 뉴질랜드 출장으로 말해 뒀다.” “많이 달라졌네?” “내가?” “그래. 욱해서 큰아버지께 달려갈 줄 알았는데 나부터 찾은 걸 보니 말이야.” “정확한 데이터는 좀 알고 싶어서. 외국에서 쭉 지내다 보니 정보가 없어.” 젊었을 때 신인 가수나 배우를 별장으로 불러 놀던 그 철부지가 아니다. 굴뚝 성질 죽일 줄도 알고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존심도 버릴 줄 안다. “이간질이나 하는 내가 전해주는 정보가 믿을 만하겠어?” “가려서 들을 거다. 그리고… 미끼 던지는 걸 알면서도 덥석 물어야 할 때도 있어. 미끼인 줄 모르고 무는 것보다는 낫잖아?” 슬쩍 웃는 걸 보니 진태준을 말하는 것이다. “태준 형 말하는 거야?” “너 때문에 천억 날렸다던데? 회사 돈 6백억은 네가 메꿔줬지만.” 오늘 알았다. 진태준이 파생상품으로 날린 개인 돈이 얼마인지….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경준 형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 “몰랐어? 그놈 돈 날린 거?” “돈 날린 건 알았지만 4백억이나 날린 줄은 몰랐어. 태준 형도 돈 많네.” “세금으로 6천억 던진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자, 이제 전화 통화로 이야기하던 거 마저 하자. 내가 아버지께 말하면 얻을 수 있는 계열사는 뭐 뭐야?” “순양그룹에 들어오지 못한 자회사. 순양이라는 이름을 못 쓰는 회사.” “뭐?” “큰아버지는 할아버지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실 거야.” 진경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할아버지의 그룹 승계 방식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시거든. 지분을 쪼개서 나눠 주니까 HW 그룹, 미라클 같은 외부 자본이 그룹을 야금야금 먹어치운다고 말이야. 만약 할아버지께서 장남인 큰아버지께 전부 물려줬다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실 거야.” “나도 듣는 귀는 있다. HW 그룹이나 미라클은 네 주머니라고 들었어. 결국 외부는 바로 너. 아냐?”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내 알 바 아니고. 그보다 대단한데? 본사에 형님 사람이 꽤 있나 봐? 이런저런 소문도 다 알려주고?”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내 알 바 아냐. 아무튼 아버지 생각이 그렇다는 건 정확한 거야?” 그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상속 문제를 단 한 번이라도 형에게 말한 적 있어? 큰아버지 나이 일흔이 내일모레야. 백준혁 실장은 차명 주식 정리하느라 명동 뛰어다닌 지 오래됐고.” 진경준은 입을 닫았다. 아버지의 생각이 그렇게 굳어졌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어린애처럼 아버지 앞에서 떼쓰는 정도가 전부, 쪽팔려서 그 짓을 어떻게 할까? 욕심을 채울 만큼 현실이 따라주지 않으니 답답해서 말이 없는 것이다.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방법 하나 알려줄까? 밥상 엎어버려.” “뭐?” “할아버지가 날 처음으로 마음에 들어 한 게 뭔지 알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여전히 찌푸린 얼굴이지만 눈빛에 숨어 있는 호기심이 보였다.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부숴버리겠다. 아마 내가 그런 말을 했을 거야.” “뭐? 언제 이야기야?”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 말을 들은 할아버지의 만족스러운 미소를. ======================================== [306] 나도 있다. 3 “아마 할아버지 생신 때였을 거야. 그때 장난감 말을 내게 주셨는데 강준이 형이 그걸 뺏어 타고 내게 줄 생각을 안 하는 거야.” “아…. 기억난다. 그때 강준이 다쳤지?” “응. 내가 강준이 형이 타고 있는 말을 밀어버렸거든. 다리 부러졌지.” “밀었다고?” “그래. 아무튼 그때 할아버지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물었을 때 내가 그랬어. 사실은 강준 형이 미워서 그랬는데 사실대로 말하면 더 혼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둘러댄 말이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부숴버리겠다?” “응. 좋아하시던데? 하하.” 어린 시절 추억 이야기가 아님을 진경준도 잘 안다. 나는 변명한 것이었지만, 그는 다르게 써먹어야 한다. “아버지께 협박이라…. 후레자식 다 됐군. 결혼 뒤에는 아버지 속을 썩인 적이 없었는데….” 내가 모르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의 눈치를 보며 슬쩍 물었다. “근데… 협박할 만한 거리는 있어?” “한 지붕 아래에서 산 가족이다. 서로 묻어주고 덮어주며 살았어.” “내게는 말해주지 않을 거지?” “강도한테 칼을 쥐여주랴? 누구 좋으라고?” 진경준은 피식 웃었다. 한층 여유 있어 보인다. “그리고 너, 착각하지 마. 난 네 편이 아냐. 앞으로 내가 우리 형이랑 대립각을 세우고 물어뜯을지는 몰라도 너한테 이로운 일은 안 해. 영준이 형이랑 손잡고 네 목을 조르면 몰라도….” “역시 한 다리가 무섭네. 한배에서 난 형제라 이거지?” “그만할까? 생산성 있는 대화는 끝난 것 같고, 더 이야기하다가는 지난번 전화 통화할 때처럼 험한 소리만 나오겠다.” 차남이 계산 빠르다고 했던가? 진영준보다는 훨씬 차분하고 냉정하다. “그런데 형님.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말해.” “꼭 형제 편을 들어야 할까? 더 이득 되는 쪽으로 붙는 게 낫지 않아?” “무슨 소리야? 그건?” “잘 생각해봐. 영준 형이 전자와 물산을 차지하면 형은 자회사 몇 개 받아서 하청 공장 사장되는 게 전부라고. 그룹에 손가락 하나 담그도록 해줄 것 같아? 그 욕심 많은 우리 집안 장남께서?” “욕심 많은 우리 집안 막내는 뭐가 다른데?” “태준 형을 봐. 여전히 건설, 중공업 계열의 재무총괄이사야. 바다 건너 호주에서 폰팔이 하는 형보다 낫지 않아?” “이 자식이 또…!” 그는 눈을 부라렸지만 비웃지는 못했다. 형제만 아니었다면 내 줄을 잡는 게 더 낫다는 건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피의 농도가 다르다. “적어도 난 내 손을 잡은 집안 식구는 계열사 사장 자리까지는 생각하고 있어.” “입에 발린 소리 그만해라.” “사실이야. 내가 영준 형과 다른 점이 뭔 줄 알아?” “…….” 그는 말없이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조금은 흔들렸으려나? “경준 형이든 태준 형이든 능력만 된다면 순양전자 회장 자리도 줄 수 있어. 내게는 사장이든 회장이든 수많은 그룹 자리 중의 하나일 뿐이야.” “이젠 아예 순양그룹 주인 행세냐? 기가 차서….” 혀를 차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방이 넓어도 주인이 앉는 의자는 하나야. 나머지는 모두 소파에 앉아야 해. 의자는 내 것이고 소파는 나눠 줄 거야. 난 영준 형처럼 방 밖으로 내쫓지는 않아.” “그건 인정이 많아서냐?” “아니. 자신감이지. 난 의자를 지킬 자신이 있으니까.” 진경준은 입술을 깨물며 일어섰다. “잘난 척하는 거 잘 들었어. 그 의자, 언제 차지하는지 두고 보지.” “이왕 잘난 척한 거, 하나만 더 해도 될까?” 진경준은 날 한 번 노려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싸울 때는 두 가지만 기억해. 상대의 욕망과 두려움, 이걸 파악하고 정확히 그곳에 당근과 칼을 찔러 넣어. 칼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니까.” 곰곰이 내 말을 곱씹던 진경준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충고는 고맙지만 그렇다고 네 편에 서지는 않아.” * * *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지만, 저녁 식사 자리는 어색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진영기 부회장은 두 아들을 바라보며 흐뭇해했지만, 진영준은 갑자기 나타난 동생의 속셈을 몰라 불편한 표정이었고 그의 아내 홍소영은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난 동서가 너무 부러운 거 있죠? 뉴욕, 파리, 런던… 이젠 시드니…. 답답한 서울을 벗어나 그림 같은 도시에서만 생활하니 얼마나 좋아요?” 웃으며 말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진경준은 그런 형수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렇게 부러우면 뭘 망설이세요? 원하는 곳으로 가면 되잖아요. 전 세계 어디든 현지 법인이 있고, 없다면 만들 수도 있어요. 하와이에 순양 지사 하나 만들까요? 형수님 원하신다면 형님도 가시겠죠, 뭐.” 진영준은 입으로 가져가던 젓가락을 식탁에 탁 놓았다. “야! 너 지금 형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내가 뭘? 외국 가서 살고 싶으시다잖아. 뭐 어려울 게 있다고?” “그 말이 아니잖아! 말투 말이야, 말투! 실실 웃으며 비꼬는 거 아냐?” “그만해라. 밥상머리에서 버르장머리 없이 뭐 하는 게냐?” 진영기 부회장이 버럭 하자 두 아들은 입을 닫았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귀국한 걸 보면 경준이도 할 말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오랜만에 식구가 모였으니 즐겁게 먹자. 네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진경준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런데 어머니는요? 전화도 안 받으시던데…?” 모두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진경준은 단박에 무슨 일인지 짐작했다. 또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오래됐구나. 사람을 붙여 놨으니, 어디서 뭘 하는지는 아버지만 아실 것이다. 진경준은 괜한 말을 꺼냈나 싶어 잠깐 후회했지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딱히 대화 나누고 싶지 않은 형님 내외도 입을 닫았고 아버지도 말없이 수저만 들었다 놨다 했다. 화목한 저녁 식탁을 원했던 아버지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자신에게는 불편했던 시간이 후다닥 지나가 버렸다. 저녁을 끝내고 진경준은 아버지와 서재에서 독대했다. 형인 진영준이 끼어들고 싶어 안달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단둘이 대화하고 싶다는 말이 힘을 얻었다. “그래, 무슨 바람이 분 게냐?”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저도 본사로 돌아오고 싶습니다.” 이미 아들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진영기 부회장은 별말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너도 외국에서만 5년 이상 지냈는데 들어올 때가 됐어. 내가 곧 자리 마련해서 불러올리마.” “아버지.” “그래.” “그 곧이 언제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원, 녀석도. 뭐가 그리 급해? 우리 순양전자의 스마트폰 사업이 이제 막 시작했잖니. 자리 잡을 때까지 딱 1년만 더 고생하거라. 아무리 늦어도 1년은 넘지 않을 게다.” 1년이라는 말에 진경준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룹 승계작업을 전부 끝내고 자신을 부르겠다는 뜻 아닌가? 아버지에게 배신감마저 들었다. “전 한 달 안에 귀국하고 싶은데요?” “경준아.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마라. 그게 그리 쉽게….” “아버지. 저도 이젠 어린애 아닙니다. 왜 1년이라고 하시는지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영준 형에게 모두 물려주는 데 1년 걸린다는 뜻 아닙니까?” “경준아!” “왜요? 겨우 두 개 남은 회사, 쪼개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아서 형에게 전부 주시는 겁니까?” “이놈아. 전부라니! 전자와 물산을 제외하고도 스무 개가 넘는 계열사가 있어. 뭘 전부 준다는 말이냐?” “그 스무 개가 넘는 계열사를 물산과 전자가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 진경준은 아버지의 말이 기가 차는지 한숨을 쉬었다. “두 주력이 80%를 차지합니다. 나머지 다 합쳐봤자 전자의 반도 안 돼요.” 그 나머지를 다 준다는 뜻도 아니다. 진도준의 말처럼 자신은 하청 공장 몇 개 받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순양전자는 단일 기업으로 재계 순위 10위 안에 든다. 고만고만한 재벌 그룹 몇 개를 합쳐도 순양전자 하나를 못 따라온다. 진짜 원하는 거야 순양전자지만,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바도 아니다. 그는 이미 스스로 타협하고 있었다. “영준 형이 전자, 제가 물산…. 이게 그리도 과한 욕심입니까?” 진영기 부회장은 예상했던 아들의 말을 직접 듣게 되자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 때문에 울화가 치밀었다. “네 할아버지가 이리 쪼개고 저리 나눠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다. 화살 한 다발은 부러트리지 못해도 하나씩 부러뜨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는 동화도 있어. 애들도 아는 그 간단한 교훈 하나 못 지킨 네 할아버지 때문에 순양그룹이 어떻게 됐지?” 진경준은 아버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순양의 모든 것이 당신 것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았는데 반 토막 난 그룹을 손에 들고 있으니 분통 터질 만하다. 하지만 그 책임을 할아버지로 돌리면 안 된다. 싸움에서 진 본인의 책임이다. 이젠 전쟁을 포기하고 도망치려는 나약한 마음 때문이다. “넌 네 형과 힘을 모아 지금의 순양을 지키고 키워야 해. 전자의 자본과 물산의 힘으로 지금보다 두 배 이상 키워. 그러면 네 몫도 커지는 게야.” 아버지의 구구절절한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진경준의 눈이 커졌다. 힘을 모아? 고만고만한 계열사 몇 개를 떼 주는 것도 아니다. 아예 형 밑에서 일하라는 소리로 들렸다. “아, 아버지. 설마…?” “또 뭐?” “모든 계열사를 전부 형에게 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죠?” 진영기 부회장은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본심이 나와 버렸고 아들은 자신의 본심을 읽어버렸다. “경준아. 이 애비의 말 잘 들어.” 듣고 싶지 않았다. 현실성 있는 말이든 논리적인 말이든 자신은 순양의 오너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만 각인될 뿐이었다. “난 대현자동차를 모델로 보고 있다. 우린 10년이면 재계 1위의 자리를 다시 차지할 수 있어. 그때면 물산 하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기업에 네 손에 들어갈 거다.” 진경준은 귀를 막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지.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할아버지께서 아버지께 순양 전부를 물려주셨다면 그걸 삼촌들과 나누셨겠습니까? 고모에게 백화점을 줬겠어요?” “경준아.” “그래서 할아버지가 나눈 겁니다. 자식들 다 잘 먹고 잘살라고요. 영준 형이 아버지보다 욕심이 적을 것 같습니까? 키운 다음에 나눠요?” 진경준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버지께서 형에게 다 준다면 전 평범한 부자 소리 들으며 인생 끝나게 될 겁니다. 제 자식들은 더 평범한 중산층으로 전락하겠죠.” “이놈아,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널 그렇게 되도록 놔 둘성싶으냐?” “아버지.” 진경준은 아버지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할아버지께 형님이 계셨죠? 그분의 후손들이 어떻게 사는지 아십니까?” 진영기는 아들의 질문을 피하고 싶었다. 아들은 자신의 미래를 가족사를 통해 점친 것이다. “전 그렇게 사라지고 싶지 않습니다.” 진경준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섰다. “경준아!” “오랜만에 제 방에서 자고 싶었는데 힘들겠습니다. 내일 회사로 가겠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하시고 대답해주세요.” 서재를 나가자 발걸음을 잡는 진영준이 서 있었다. 이미 큰소리가 오갔으니 다 들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바로 그 증거다. 아버지의 입에서 모든 걸 장남에게 준다는 말이 나왔으니 웃음을 참기 힘들 것이다. 진경준은 형의 미소를 보자 진도준의 말이 떠올랐다. 가지지 못할 것 같으면 부숴버려라. 그게 어떤 심정에서 나온 말인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 * * ======================================== [307] 나도 있다. 4 “그러니까, 큰아버지 입에서 직접 나온 말이라는 거죠?” “그렇다니까요. 집이 떠나가라 소리쳤다는데 못 듣는 게 이상하죠. 정확합니다.” 아침 출근길에 김윤석 대리는 나를 보자마자 폭포수처럼 떠들어 댔다. “진경준 이사와 진영기 부회장님이 서재에서 독대했는데 모든 걸 다 장남에게 준다고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계열사는커녕 자회사도 안 준다는 소리였다고 하더군요. 형님 곁에서 일이나 도와라…. 이런 뜻 아니겠습니까?” “서재 바깥에서 들은 사람은 일하는 분들일 테고….” “요즘 부회장님이 워낙 심부름을 많이 시켜서 머슴 놈들…. 아, 죄송합니다. 예전 말버릇이 나와 버렸네요.” 김윤석 대리는 머리를 슬쩍 긁었다. 전략팀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 심부름꾼에 불과한 직원들을 그들은 이렇게 불렀다. 머슴. 나도 한때 머슴이었다는 것을 잊어버릴 만하면 이렇게 상기시켜준다. “전략팀 직원들이 가정부에게 들었다는 말이죠?” “네. 아주머니들은 조금만 부추겨도 수다 떠니까요.” “그래서요? 경준 형은 어떻게 했답니까?” “서재를 나와서 집을 나가 버렸답니다.” “영준 형이 좋아 죽겠구만.” “부인이 더 좋아했다는데요? 전에 없이 아주머니들에 싹싹한 태도를 보였답니다. 흐흐.” 나한테 당한 것 때문에 그런가? 큰아버지가 너무했다. 뭐라도 손에 쥐여주고 달래도 시원찮을 판에 아예 형 밑에서 수발이나 들라고 했으니 집을 뛰쳐나갈 만하다. “혹시 어디로 갔는지 파악했습니까?” “네. 전략팀 한 명이 잽싸게 따라갔습니다.” 김 대리는 점점 더 꼼꼼해졌다. “어디서 잤습니까?” “강남 순양호텔입니다.” “그래요?” 하고많은 호텔 중에 순양이라니? 진경준이라는 이름을 호텔 직원들이 모를 리 없으니 자신이 어디 있는지 광고하는 꼴이다. 누구에게 광고하는 걸까? “그리로 갑시다.” “네? 아, 알겠습니다.” 차는 호텔로 달려갔다. 호텔에 도착하니 매니저 한 명이 대기 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실장님.” “아침부터 번거롭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미리 연락 주시고 오시니 번거로울 것도 없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준비했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아침밥 먹는 건데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할 게 뭐 있습니까?” 매니저의 안내를 받으며 최상층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다. 저녁에만 오픈하는 곳이라 아무도 없었지만 얼큰한 찌개 냄새가 풍겨 나왔다. 자리에 앉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어제 술 많이 마셨습니까?” “룸서비스 직원 말로는 와인 한 병과 요리를 가져갔을 때 이미 미니바의 술을 몽땅 마신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속 좀 쓰리겠군. 알겠습니다.” 매니저는 머리를 숙이고 물러났고 난 룸으로 전화를 걸었다. 술에 곯아떨어졌는지 한참 만에 전화를 받았다. “해장하러 올라와. 얼큰한 거 준비해 뒀어.” ― 너 어디야? 술이 확 깼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타고 꼭대기로 올라오라고. 아침이나 먹게.” ― 너,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순양그룹 전 직원이 알겠다. 소문 안 날 거라고 생각했어? 실컷 광고한 건데? 빨리 와.” 십여 분이 지나자 초췌한 몰골의 진경준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자석 붙였어?” “자석은 무슨…. 형님이 나 기다린 거 아니고?” “내가 널 왜 기다려?” “아니면 갈까? 아침 혼자 먹을래?” “넌 아침도 못 얻어먹냐? 왜 여기서 먹어?” 진경준이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우린 사람 안 쓰잖아. 시리얼이나 토스트로 대충 때워. 민영이는 아직 아침 차릴 내공이 안 돼.” “신혼이라 이거지? 괜히 기분 낼 생각하지 말고 사람 써. 밥 굶고 다니면 되겠냐?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대신 난 형님처럼 속상해서 술 퍼마실 일은 없어.” 진경준은 아주 잠깐 날 노려보더니 담배를 꺼냈다. “자석 붙인 거 맞군. 모르는 게 없어.” 말없이 담배 한 가치를 다 피웠을 때 음식이 나왔다. 해장국과 된장찌개를 보더니 진경준은 허겁지겁 국물부터 마시기 시작했다. 쓰린 속이 풀렸는지 그는 다시 담배를 물었다. “담판 지었나 보네? 결과는 별로 좋진 않았을 테고.” “그거 확인하러 아침부터 달려온 거냐?” “아니. 내 도움이 필요하면 주저하지 말라는 말 하고 싶어서.” “네가 뭘 도와줄 수 있는지부터 말해. 선택은 내가 할 테니.” “선택은 남은 게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거야. 형은 남은 게 없잖아. 큰아버지께서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영준 형에게 올인해도 형은 보고만 있어야 해.” 냉정한 말에 한동안 나를 노려보던 진경준이 말했다. “난 네게 줄 거 없다. 네 말대로 가진 게 없어. 아버지의 약점? 영준 형의 흠집? 엄청 쌓여 있지. 하지만 다 사적인 거야. 가십거리 정도로 위험에 빠지진 않아.” 아직 배가 부른 놈이다. 아니면 간절히 회사를 원하는 게 아니든지. 진영기 부회장의 핏줄이다. 금수저 한 세트는 손에 쥐고 태어난 셈이다. 그런 놈이 가진 게 없다니. 자신이 뭘 가졌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럼 이야기 끝났네. 난 형님께 공짜로 뭔가 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거든. 아, 이 아침은 든든히 먹어 둬. 내가 주는 마지막 공짜 밥이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야! 도준아. 진도준, 인마!” 그가 애타게 불렀지만 돌아서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의 처지를 절절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뭘 가졌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 * * 김윤석 대리는 진경준의 행보를 놓치지 않고 알려주었다. 며칠간은 호텔에서 술로 보냈고, 호텔로 찾아온 진영준과는 대판 싸웠으며 아버지인 진영기 부회장 앞에서는 대성통곡까지 했다고 한다. 이로써 하나는 명확해졌다. 진영기 부회장의 결심은 확고했고, 장남인 진영준이 모든 걸 가진다. 전자 계열과 물산 계열로 나눴다가는 내 공세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게 틀림없다. “그렇단 말이지?” “네. 승계 작업을 강행할 겁니다.” “갑자기 경준이가 불쌍해지는데?” 이학재 회장의 얼굴에서는 조금도 측은한 마음이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빈털터리라는 걸 알았으니 기댈 데라고는 나밖에 없을 겁니다.” “에이, 설마?” 아들이 아버지와 형을 배신한다.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다. 단…! 평범한 집안에서는 그럴 수 있다. 모든 걸 형에게 뺏기고 빈털터리가 된 동생은 이를 악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집안은 다르다. 모든 걸 형이 가져가도 최소한 수백억 정도는 남는다. 평범한 사람은 꿈도 꿀 수 없는 엄청난 돈. 그 정도는 기본으로 챙기고 시작한다. 굳이 아버지가, 형이 이를 가는 사람 곁에 설 필요는 없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설마 아닙니다. 경준 형이 한국에 오자마자 저부터 만났어요. 물론 제가 먼저 긁은 것도 있지만…. 아무튼 가장 먼저 승계 작업 시작했는지부터 확인하더군요.” “어이구. 이놈이나 저놈이나 욕심은….” “어디 우리 집안만 그렇겠습니까? 세상이 그렇게 변해버린 거죠.” 부모의 유일한 재산인 아파트 한 채 갖겠다는 민사 소송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평당 몇만 원도 되지 않는 시골 밭뙈기를 서로 갖겠다고 머리채 잡고 싸운다. 이런 사람들도 장남이네 하며 우선권을 주장하고 똑같은 자식이라며 공평하게 나누기를 희망한다. 우린 단위가 다를 뿐이다. 욕심의 크기는 서민이나 재벌이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넌 어쩔 생각이냐?” “경준 형이 가진 걸 제게 주면 월급쟁이 사장 정도는 시켜줄 생각입니다. 능력 부족이면 잘리겠지만 말이죠.” “그놈이 가진 게 뭐가 있어서? 영준이 놈이 다 차지하면 개털인데.” “꽤 쓸 만한 게 있어요. 바로 진영기 부회장님의 아들이라는 거.” “뭐?” 이학재 회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꼭 필요할 때가 올 겁니다.” “당최 무슨 꿍꿍이인지… 원.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말하는 걸 보니 진영기 부회장 승계 작업 이대로 놔둘 생각인가 본데….” “그걸 상의하고 싶습니다. 지금 지분 구조가 철옹성은 아니지 않습니까?” “판단하는 건 간단해. 지금 당장 전자와 물산 주주총회 열면 돼. 네 지분이면 충분히 임시주총 소집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주총 안건 올려봐. 전자 계열, 물산 계열 대표이사 해임. 통과할까?” “지금 당장은 안 되죠.” “그럼 철옹성이지.” “만약에 말입니다. 진영준이 회장이 되면 어떨까요?” “진영기 부회장의 우호지분이 조금은 흔들리겠지? 영준이는 아직 미덥지 못하니까.” “그러니까요. 철옹성이 좀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흠….”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승계 작업을 서두른다는 것이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계열사와 자회사의 숫자를 조금씩 늘려 가며 탄탄한 지분구조를 쌓아야 하는데 무너진 진동기를 보며 서두르고 있다. 계열분리와 승계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다. 분명히 더 허술해진다. “분명히 내년까지는 끝내려 할 테니까 유심히 지켜봐야겠구나.” 내년이면 대선이다. 정권이 바뀌면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친재벌이 아닌 정권이 들어서면 사사건건 승계 작업에 딴지를 걸 것이다. 어쩌면 무지막지한 세금을 때려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친재벌 성향이 강한 지금 정권 아래에서 재빨리 해치워야 한다는 걸 진영기 부회장은 잘 안다. “네. 지분구조 변화를 철저히 체크해야죠. 물론 지분 확보는 계속할 겁니다.” 이학재 회장은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이미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허둥대며 도망치는 쪽은 항상 잡히기 마련이다. 서두른다는 건 쫓긴다는 뜻이고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싸움은 늘 쫓는 자가 이긴다.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지분 확보에 힘쓴다는 말은 방심하지 않는다는 모습이다. * * *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틀림없이 기회는 준다는 것.” 마음고생을 심하게 겪은 진경준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중견 계열사 두어 개는 주지. 애들에게 회사 몇 개 물려주는 아버지 노릇은 할 수 있을 거야.” “그 기회가 공평하기는 한 거냐?” “불공평하지. 형님이 다른 사람의 절반 정도의 능력만 보여도 사장 자리를 내줄 테니까.” “그 자리, 전자나 물산… 아니, 최소한 주력 계열사인 건 확실하고?” “물론이야. 사촌인데 설마 생색내려고 구색이나 맞출까….” 긴 한숨으로 생각할 시간을 가진다. 그래 봤자 변하는 건 없을 테지만. “좋아. 대신 난 뭐 하면 되지?” “절대적인 복종.” “뭐?” 진경준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해. 하지만 내가 적당히 듣기 좋은 표현을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 내 생각을 가장 정확히 표현하는 말은 복종뿐이야.” “이, 이 자식이 진짜…!” 이미 늦었다. 나와 다시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는 건 형과 아버지를 저버리는 대신 실속을 챙기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친형의 수족 역할이나 하며 평생 눈칫밥을 먹느냐? 아니면 사촌 동생에게 머리를 숙이고 온전히 제 것을 챙기느냐의 선택이다. 한 5년 정도 순양전자의 대표이사를 지내고 계열사 두어 개를 챙겨 독립하는 것. 거절하기 힘든 유혹 아닌가? 자존심에 상처 입은 그를 위해 또 하나의 유혹을 던졌다. “가족을 배신한 놈이라는 소리는 안 듣도록 해줄게. 버림받은 차남이라는 동정만 잔뜩 얻을 거야. 그게 내 방식이거든.” 날 노려보던 진경준의 눈빛에서 독기가 점차 사라졌다. ========================================== [308] 가치 증명. 1 독기가 사라진 곳에 냉정이 깃드는지 진경준은 꼭 물었어야 할 질문을 이제야 던진다. “네가 순양그룹 전체를 차지한다면 시키지 않아도 복종해야겠지. 할아버지 말을 거역한 사람이 없었듯이 말이야.” “그렇게 돼.” 자신감 넘치는 내 태도를 확인한 그가 말했다. “소문이 사실이구나. 미라클이 네 것이고 HW 그룹 역시 네가 실질적인 지배자라는 거….” 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애매한 미소만 지었다. 어차피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게 인간의 본성…. 믿음이 바로 내 대답이다. “하지만 네 말만 믿고 결정할 수는 없어. 순양그룹 회장 자리가 돈만으로 차지할 수 없다는 건, 너도 인정하잖아.” 슬슬 현실감이 돌아오나 보다. “보험을 원하는 거야?” “보험?” “그래. 내가 순양을 차지하지 못했을 때 낙동강 오리알 되는 건 피하고 싶어서?” “그러네. 보험이라는 말이 적당하겠어. 가능해?” “건설이나 중공업 대표이사 해볼래? 아니면 HW 자동차? 근데 끌어갈 자신은 있어? 분명히 말했지만, 정량적인 숫자로 성적이 부실하면 해임이야. 물론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더 관대하겠지만.” “보험은 보험이고…. 그 전에 내게 확신을 줘야지.” “확신이라….” 내가 자기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그룹을 뺏어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뜻한다. “내가 왜 형을 내 곁에 두려는지 알아?” “그것도 묻고 싶었던 거야. 자신 있다면 굳이 날 원할 필요도 없잖아.” “첫째 이유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니까 다음에 말할게. 두 번째가 중요한데, 바로 거수기 역할을 해줬으면 해서야.” “거수기?” “응. 난 이 집안의 막내야. 역사를 보면 막내가 왕위에 오를 때는 어느 정도의 지지 세력이 필요해. 지분 문제가 아냐. 회장에 적합한 인물은 나밖에 없다는 모두의 인정을 받고 싶거든.” “모든 핏줄이 널 지지한다는 걸 원하는 거야?” “바로 그거야. 친형보다 사촌 동생을 지지한다는 건 꽤 그럴듯해 보이거든.” 충녕대군이 세자에 오를 때는 태종이라는 막강한 권력이 존재했다. 난 태종 대신 집안 모든 사람의 지지를 원한다. 그룹 내부뿐만이 아니라 외부 정치권에도 보여주고 싶은 그림이다. “그게 내가 확신할 근거는 아닌데?” “이미 내가 충분히 순양의 회장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믿고 있잖아. 아니라면 내게 찾아오지도 않았을걸? 원하는 것도 못 주는 놈에게 왜 찾아와? 안 그래?” 아버지와 형을 배신하는 데 필요한 명분 쌓기에 불과하다. 온갖 이유와 핑계를 대서 자신은 정당하다는 걸 스스로에게 세뇌시키는 과정이다. “날 지켜봐.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가족에게 돌아가면 되잖아.” “첫 단추를 끼워버리면 돌이킬 수 없어. 돌아가지 못해.” “그 첫 단추는 어려운 게 아니야. 가족들도 쌍수 들고 환영할걸?” 진경준의 표정이 또 달라졌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을 때 불빛이 반짝이는 등대를 발견한 눈빛이다. “큰아버지의 결심은 확고해. 형님이 아무리 애원해도 바뀌지 않아. 모든 그룹 지분은 영준 형이 갖게 될 거야.” “그래서? 포기하라고?” “그래야지. 방법 없잖아. 대신 나머지를 다 받아내.” “나머지?” “순양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나서 곧 일흔이야. 가진 게 지분이 전부겠어? 부동산, 증권, 예금, 금괴 등등…. 최대한 다 받아내. 지금이 적기야. 큰아버지가 형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얻어야 해. 좀 지나면 그 미안한 마음도 사라질 거야. 그 어떤 감정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소멸하거든.” “그룹에서 빠지겠다고 공식 선언해라?” “물러나는 걸 아쉬워 말고 얼마나 많이 받을 거냐만 생각해.” 진경준은 입을 닫고 생각에 잠겼다. 지분을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미래가 바뀐다. 이미 결심은 선 듯하고 다음 행동을 계획하는 건가? “짐 싸서 한국 들어와. 영준 형 옆에서 일 돕겠다고 해.” 그가 생각하는 시간을 줄여주기 위한 말이었다. “뭐? 야! 내가 형님 옆에서 시다바리 하라는 거냐? 아니면 네 간자 노릇이라도 해?” “오해하지 마. 전자 사장 하고 싶지? 최소한 물산 사장이라도 하고 싶은 거 아냐? 그런데 준비도 없이 그 자리를 노려? 내가 장담하는데 그런 식이면 설사 그 자리에 앉더라도 반년도 못 가. 말했지? 능력 없으면 곧바로 자르는 게 내 방침이라고.” 조금은 충격 받은 표정이다. 신세 한탄이나 징징대던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워야 한다. 욕심만 내세우고 능력은 키우지 않는 재벌 3세의 때를 벗길 수 있을지는 지금 결정될 것이다. 월급 받는 전문경영인이 자기 미래라는 걸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철부지 도련님으로 인생 종 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진경준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해줘. 아니면 언제든 우리 형의 곁에 설 거다.” “곧 보게 될 거야. 내가 어떤 놈인지.” 진경준은 내가 내민 손을 거절하지 않고 꽉 잡았다. * * * “내가…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고맙다, 우리 아들.” “아닙니다. 회사를 지킨다는 게 바로 아버지를 지키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마음 불편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진영기 부회장은 머리 숙인 차남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애비가 뭘 해주면 될까? 우리 아들 원하는 건 전부 다 들어줄 테니 말해. 허허.” 진경준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영준 형이 그룹에서 자리 잡을 때까지는 저도 돕겠습니다.” “오, 그래?” 진영기 부회장의 얼굴은 더욱 환해졌다. 형제가 나란히 힘을 뭉치는 모습은 모든 아버지가 흐뭇하게 바라보는 그림 아닌가? “하지만 영준 형이 반석에 오르면 전 그만둘 생각입니다.” “뭐?” “저도 아버지 아들 아닙니까? 아무래도 또 분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도 그룹에서 자리 잡으면 제가 원하지 않더라도 제 뒤에 줄 서는 임원들이 등장할 겁니다. 아버지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봉급쟁이들, 윗사람 골라서 동아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는 거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생각했더냐?” 속 깊은 차남의 말에 아버지는 감격스럽기까지 했고 이런 심지를 가진 아들을 눈여겨보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미 되돌리기는 어려운 지점을 지났다.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던 진경준은 자신의 전략이 먹혔다는 걸 알고 조금은 자신 있게 말했다. “제가 그룹을 떠나는 건 괜찮습니다만 애들 생각이 나더군요. 그래도 순양의 핏줄인데….” “이놈아. 내가 우리 손자들 기도 못 펴고 살도록 놔둘 거라고 생각했더냐? 걱정하지 마라. 옛날 부모들은 집은 장남에게 돈은 차남에게 물려줬다. 우리 가족에게 집은 순양그룹 아니냐? 그룹은 네 형이 갖더라도, 내가 가진 사재는 전부 네게 주마. 삼대가 아니라 몇 대가 지나더라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게다.” 가슴을 탕탕 치며 큰소리치는 아버지를 보며 진경준은 한시름 놨다. 더 달라고 떼쓰지 않고 아버지 스스로 모든 걸 주겠다는 말을 끌어냈다. 이 정도면 성공 아닌가? 진영기 부회장이 장남을 불러 동생의 결심을 전하자 진영준도 더할 나위 없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경준아. 정말 고맙다. 네가 큰 희생하는 거 알아. 내가 절대 잊지 않으마.” 차라리 생판 모르는 남이 낫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면 의인이라는 평가라도 받는다. 몽땅 차지하는 형의 입에서 희생이라는 말을 들으니 짜증이 전부였다. 잊지 않겠다는 말보다 하나라도 양보하겠다는 말이 더 진정성 있는 말이다. 빈말이나 일삼는 진영기를 보니 차라리 사촌 동생이 더 낫다 싶었다. 적어도 그 동생은 최소한 중견 계열사 두어 개를 약속하지 않았던가? “날 돕겠다고 했으니 내일이라도 들어와. 아버지. 그래야겠죠?” “물론이다. 그 자리 앉을 놈은 천천히 구하더라도 우리 경준이 자리는 내일 당장에라도 마련해야지. 내가 지시해놓을 테니 넌 가족들 빨리 데리고 들어와.” “아, 아닙니다. 저만 들어올 생각입니다.” “응? 왜?” “애들도 있으니까요. 호주에서 학교 졸업하면 영국으로 보낼 생각입니다. 굳이 애들까지 데리고 올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지. 네 가족이니 네가 알아서 해.” 무슨 말이든 좋게 받아들이는 아버지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진경준은 앞으로 벌어질 험한 싸움 때문에 아내와 자식이 상처 받는 건 피하고 싶었다. * * * 진경준이 보고 싶었던 내 능력은 아닐지 몰라도 내 이미지를 한층 더 포장할 수 있는 일이 터졌다. 아니 곧 터진다. 메일 한 통을 확인하고 곧바로 전화를 들었다. “레이첼. 방금 메일 확인했는데 이거 확실한 정보 맞아요?” ― 확실한 정보는 아냐. 홍콩 지사에서 들어온 건데…. 정확한 정보가 아니니까 공지 메일에 올리지 않고 내게 개인적으로 전달했어. 팩트 확인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어. 판단은 네 손에. OK? 통화를 끝내자마자 장도형 부사장과 증권사 임원 전부를 불렀다. 그들은 모두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모두 모이라고 할 때마다 아주 큰 일이 터졌기 때문이다. “도이체 방크가 보유한 우리나라 주식과 금융상품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세요. 그리고 선물투자 전체 금액도 알아내세요.” “도이체 방크 한국 지사 말입니까?” “아뇨. 본사부터 전 세계 지사들 보유 물량 전부 파악해야 합니다. 어떻게 알아보느냐 같은 질문은 하지 않으시겠죠?” 인상을 찌푸리거나 어려움을 토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국 금융위기 여진이 또 한 번 한국을 덮치는 건 아닌지 모두 두려운 기색만 보였다. 도이체 방크는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JP모건, 씨티그룹, UBS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벌지 브래킷(Bulge bracket)에 해당하는 세계적인 투자은행이다. 벌지 브래킷이란 전 세계에 고객을 두고 유가증권 인수, 자금 조달 주선, 인수합병(M&A) 자문 등 거의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는 초일류 투자은행을 말한다. 자라 보고 놀란 놈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벌지 브래킷의 이름만 나오면 모두 가슴이 철렁한다. 아직 금융위기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분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잘 압니다. 아직 정확한 건 아니니까 상황 파악이 먼저입니다. 신중하고, 정확하게 알아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순양금융 홍콩 지사도 조사하라고 하십시오. 아, 미라클 홍콩 지사에 말해 둘 테니 직접 만나서 정보 얻으라고 지시하세요.” “혹시 지금 미라클에서 뭔가 알려온 겁니까?” 장도형 부사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네. 홍콩 지사에서 뭔가 소문 들은 게 있나 봅니다. 소문이 소문만으로 끝난 적 없다는 걸 여러분도 잘 아시죠? 철저히 체크해야 합니다.” 회의를 끝내자 홀로 남은 장도형 부사장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혹시 도이체 방크가 파산한다는 소문이라도 난 겁니까?” “아뇨. 요놈들이 우리 한국 증시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요.” “네?” “미국에서 서브 프라임 때 빵꾸 난 돈을 채우려고 주식 시장을 뒤흔들 계획인가 봅니다. 어떤 방법을 쓸지 알아내야죠.” “그놈들 왜 하필….” 외국 자본이 한국 증시를 한 번 흔들 때마다 수십조의 돈이 증발한다. 더욱이 이 수십조의 돈은 대부분 개미들 돈이며 수많은 가정이 몰락한다. “한국이 아직 외부의 장난질에 흔들릴 만큼 금융 후진국이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분명 한국 금융시장을 만만하게 본 것이 맞다. 설마 내가 신용부도스왑으로 도이체 방크 돈을 쫌 빼먹었다고 해서 앙심 품은 것은 아닐 테니까. * * * ========================================== [309] 가치 증명. 2 며칠 동안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며 수집한 정보와 홍콩, 런던에서 떠도는 루머를 놓고 회의를 시작했다. “도이체 방크가 보유한 주식과 기타 증권이 총 2조 3천억입니다.” 현재 증시가 상승세라 이상하리만치 많은 건 아니다. 이 수준으로 보유한 다른 기관도 꽤 있다. 그들보다 조금 많은 정도라고 볼 수 있다. “홍콩지사는 도이체 방크를 수상하게 보고 있습니다. 뭔가를 기획하는 게 확실한데 더는 내용이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평범하다. 한국 주식 2조 3천억 원어치를 쥔 투자은행. 이것만으로는 어떤 도박을 벌일지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자,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도이체 방크라고 치면 지금 가진 걸로 어떻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까요?” 모두 입을 다문 채 서로 눈치만 보는 게 전부였다. 이들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주식을 잔뜩 사놨다면 주가가 오르는 게 가장 쉬운 돈벌이다. 그게 아니라면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엉뚱한 의견이라도 괜찮습니다. 공격적인 서양 애들의 투자 성향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엉뚱한 방법일 수도 있으니까요. 일기예보도 증권으로 만들어 도박의 수단으로 만드는 놈들 아닙니까?” 최대한 자유로운 의견이 나오도록 유도했지만, 이들은 순양맨들이다. 최소한의 리스크로 최대 이익을 뽑아내는 데는 일가견이 있지만 하이리스크 하이리턴과는 거리가 멀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은 주인만 가능한 것이지 직원은 해당되지 않는다. “높은 수익을 위해 리스크를 안고 간다면 선물투자나 파생상품이 제격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상황은 그런 것도 아닙니다.” 주식은 투자라는 탈을 쓴 투기다. 도박의 색깔이 짙지만, 파생상품이나 선물투자처럼 수십 수백 배의 수익을 내기에는 부족하다. 갑자기 전혀 엉뚱한 패를 놓고 고민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도이체 방크가 우리나라 주식 시장에서 한탕 하려는 건 확실하다. 이것만 놓고 추적해야 하는데, 그들이 보유한 주식을 놓고 더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뜩 든 것이다. “맞습니다.” “네?” 의견을 던진 임원이 오히려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방에 확 땡기려면 선물이나 파생상품이죠. 주식 시장에 주식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몇몇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는지 짧은 탄성을 냈다. “하지만 실장님. 우리나라 시장은 그렇게 덤벼들 만한 상품이 없습니다. 도이체 방크라면 최하 수백억 이상의 수익을 노리고 들어올 텐데…. IMF 사태, 911 테러, 미국 금융 붕괴 정도는 되어야 시장이 흔들리잖습니까?” 바로 그 임원이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정확한 말이다. “폭등이 아니라 폭락일 때 큰돈을 벌겠죠?” “네?” “대부분 도박에서 이기는 건 폭락에 베팅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 주식 시장이 폭락할 가능성은 있을까요?” 그리스가 위태위태하지만 우리나라는 그 영향력이 미미하다. 유럽의 위기가 곧 닥치겠지만, 그 역시 큰 태풍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국 증시는 계속 흔들리지 않고 조금씩 상승 중이다. 내년엔 다시 코스피 지수 2천 돌파를 기대할 정도니까 말이다. “그래!” 나도 모르게 책상을 탕 치며 소리 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것조차 개의치 않았다. “급합니다. 도이체 방크든 어디든 상관없어요. 선물이든 파생상품 베팅이든 관계없습니다. 주가 폭락에 베팅한 기관 찾아보세요. 말도 안 될 정도의 조건에 베팅한 것부터 우선입니다. 어서요!” 그들의 계획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그려졌다. 중요한 것은 언제 베팅하느냐다. 정확한 날짜를 모르면 계획을 알아도 막을 수 없다. 베팅은 찰나의 순간에 끝난다. * * * 11월 11일. 도대체 이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무슨 일이 터지길래 도이체 방크는 주가 폭락을 확신하고 선물에 투자한 것일까? 올라온 보고서를 보며 한참 생각에 빠졌다. 2010년 11월은 기억에 없다. 지금 신문에서 한창 떠드는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즉, ‘G20 회의’ 개최가 11일이다. 또 있다면 빼빼로 데이. 이게 전부다. 정부는 G20의 장밋빛 전망 홍보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2002년 월드컵의 4.3배에 달하는 효과’라며 급기야 수백조의 파급 효과 발생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소리까지 나왔다. 수백조는 아니더라도 호재는 맞다. 주요 국가의 정상들이 모여 여러 안건을 다루는데 막힌 문제 하나라도 해결할 것이 아닌가? 최소한 주가가 떨어질 리는 없다. 세계 정상이 모인 회의장에 폭탄테러라도 일어난다면 모를까…. 폭탄테러가 있었다면 내가 기억 못 할 리 없다.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모든 데이터를 이리저리 분석했다. 그러다 한순간 도이체 방크가 그리는 그림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이건 사기잖아!” 도이체 방크가 보유한 2조 원 이상의 주식을 장 마감 직전 동시호가 시간(단일가 매매시간)에 쏟아버리면 다른 증권사의 프로그램도 덩달아 매도 물량을 쏟아내고 코스피 지수는 급락한다. 몇 분의 시간 동안 이뤄지는 일이므로 누구도 대처할 수 없다. 기관투자 시세조작 사기의 전형적인 방법이며 도이체 방크가 보유한 주식은 사기의 수단일 뿐이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사기 치는지 알았으니 충분히 피할 수 있다. 혹은, 나도 슬쩍 다리 한쪽을 걸쳐 수백억의 돈을 챙길 수 있다. 아니면 아예 이놈들의 장난질을 막아버리는 방법도 있다. 셋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대형 금융사고가 터지는데 제삼자로 수수방관하는 건 기회를 놓치는 바보짓과 다를 바 없다. 사기에 편승해서 돈을 버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코스피 지수 급락으로 버는 돈은 푼돈에 불과하다. 자연스럽게 세 번째로 마음이 쏠렸다. 희대의 금융사기를 막아내는 건 정의감으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 좀 더 그럴듯한 대가가 있어야 한다. 괜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원하는 대가가 아무래도 좀 오글거리기 때문이다. * * * 다시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외국계 투자은행이 이런 대범한 사기 행각을 꾸미고 있다는 게 믿기 힘들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할 것이다. “도이체 방크 같은 대형 투자은행이 이런 고전적인 수법을 쓸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임원들의 허탈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말이었다. “가장 고전적이고 전형적이 사기가 가장 잘 통한다는 말도 되겠죠.”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우리가 이놈들 장난을 한번 막아볼까요? 우리나라 개인과 기관이 입을 손실도 막고, 도이체 방크가 한 방 먹고 망연자실한 모습도 구경하고요. 흐흐.” 내 웃음을 듣고 가장 창백해진 사람은 바로 순양증권 사장이었다. 사기 행각에 한 방 먹이는 역할은 당연히 순양증권이 맡아야 하는데 정말 찰나의 순간에 이 일을 해내야 한다. 장 마감 몇 분 전, 어쩌면 1분이 될 수도 있고 2분이 될 수도 있다. 자칫 타이밍을 놓쳐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고 도이체 방크의 웃는 모습만 구경하게 된다.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이 일은 제가 지휘하겠습니다. 폭락을 막으려면 우리도 최소 2조 이상의 자금을 투입해야 합니다. 사장님은 우리 가용자금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해주십시오. 부족한 돈은 미라클에서 가져오겠습니다. 내가 책임진다는 말에 순양증권 사장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몇몇 임원은 하나의 단어에 담긴 뜻을 알아채고는 놀란 모습을 보였다. 가져온다. ‘빌려 온다’가 아니라 ‘가져온다’고 표현했다. 떠도는 소문을 내 입으로 확인해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저들의 표정이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놀란 표정은 잠시 후 기쁨으로 변했다. 자신들이 잡은 줄이 가늠하기도 힘든 돈을 가진 엄청난 부호다. 회사가 위기에 부닥칠 때 언제든 구원투수로 등판할 것이니 큰 근심 하나가 사라졌다. 오죽 돈이 많으면 한국 증시가 흔들릴 것을 막기 위해 남의 일이나 다름없지만, 구원투수로 등판할 정도니까 말이다. “자, 회의 끝냅시다. 며칠 남지 않았으니 도이체 방크와 도이체 증권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하고요.” 보통 이런 회의를 끝내면 긴장해야 하는데 임원들은 왠지 들떠 보였다. 넘쳐나는 돈을 주체 못 하는 주인장의 재미있는 유희를 구경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모습이었다. 회의를 끝내고 내 방으로 돌아오니 몇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PI 전문가들과 홍보팀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신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공개하는 게 어떠냐고 계속 요구했지만 차마 그런 닭살 돋는 짓은 못하겠다고 거절하던 참이었다. 혹시나 내 마음이 변하지 않았나 살피는 것이었지만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는 없었다. “지금 언론에서 워낙 떠들어 대니 11일이 무슨 날인지 아시죠?” “네. G20 정상회의 개최일 아닙니까?” “맞아요. 그럼 12일은 모든 언론이 G20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겠죠?” “당연히 그렇겠죠. 혹시 실장님도 관련 있으십니까?” “G20은 관련 없는데 11월 11일은 관련 있습니다.” 난 이들에게 도이체 방크의 주가조작 사기 계획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이들은 외계어를 듣는 표정만 지었다. “그러니까 실장님…. 쉽게 말해서 도이체 방크? 그놈들이 주가조작을 할 텐데 그걸 실장님께서 막아낼 것이라는 뜻이죠?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들은 좀 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가조작을 막아버리면 조작이 성립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이미 이들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챘고 그 일을 하기 위한 자료를 확인하는 것이다. “거래 기록이 남아 있어요. 증명은 문제없습니다.” “좋군요. 하하.” 이들은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내 이야기가 나오는 게 어렵지 않을까요? 정부가 G20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중인데 그걸 뭉개고 내 기사를 실어야 합니다.” “실장님. 언론사는 광고주가 최우선입니다. 잘 아시잖습니까? 정권의 힘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광고주를 이길 수는 없죠.” 젠장, 또 돈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광고를 얼마나 나눠 줘야 할까? “그리고 내용이 좋습니다. 외국 자본의 사기 행각을 사전에 감지하고 막아낸 정의로운 사실 아닙니까?” 이들의 표정을 더 밝게 만들 만한 사실도 알려줘야겠다. “도이체 방크가 쏟아붓는 물량이 2조가 넘을 것이고 저 역시 그 정도 돈을 쏟아부어 막을 겁니다. 만약 이 일을 막지 못하면 시총 30조 원가량이 증발할 것이고, 피해 입을 개인 투자자 수만 명이 쪽박 찰 겁니다. 어떻습니까, 구체적인 숫자로 들으니까?” 더 밝아지라고 한 말인데 놀라기만 한다. 이제 익숙해질 만한 대도 말이다. “아직 조 단위의 숫자는 실감이 나지 않는가 보군요. 그냥 숫자일 뿐입니다. 만질 수도 없고 쓸 수도 없는 숫자예요. 대신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효과는 크죠. 바로 여러분들이 지금 놀라는 것처럼요.” “아, 죄송합니다. 말씀대로 신기루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뭐…. 그래서 더 관심이 쏠리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 정도 숫자라면 언론도 확 쏠리겠죠?” “물론입니다. 침 흘릴 만한 숫자인 건 확실합니다.” 그들의 만족한 표정을 확인하고 홍보팀을 향해 말했다. “우리 순양금융그룹과 HW 그룹 전체 광고 예산 두 배로 늘린다고 언론사에 슬쩍 흘리세요. 그 정도면 불나방처럼 달려들 겁니다.” 홍보팀의 표정도 밝아졌다. 간만에 언론사를 향해 큰소리칠 건수가 생겼기 때문이다. * * * ========================================== [310] 가치 증명. 3 1997년, 아시아를 강타한 금융위기로 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가 매우 불안정한 시기를 겪으며 금융과 외환 등에 관련된 국제적 위기에 대처하는 체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1999년, 국제통화기금 연차 총회에 참가한 G7 재무장관들은 전 세계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서는 선진국의 모임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다른 나라들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 그 결과 같은 해 12월, 독일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주요 신흥 경제국들이 참가하는 G20 회의가 창설됐지만, 각국 정상들이 아닌 회원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의 수장들만 참석하는 실무적인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위기는 끝이 없다. 2008년 11월에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정상급 회의로 격상됐고, SUMMIT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THE SEOUL SUMMIT 2010이 한국을 뒤덮었다. 공중파와 라디오는 물론이고 인터넷, 종이 신문까지 모든 기사의 시작은 바로 이 영어 단어들이다. 이런 들뜬 분위기 속에서 주가가 폭락하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테니 독일 놈들이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았다. 순양증권 직원들은 이슈에서 한발 물러나 실시간 주가 변동에 평상시와 다른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증권시장 마감 직전에 작전이 시작된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여차하면 수조 원의 돈이 물거품으로 변하니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오늘을 위해 매매 프로그램을 보강했고 도이체 방크의 매도 물량이 쏟아지더라도 충분히 방어할 준비를 끝냈기에 단지 지켜보는 것이 전부일 뿐이지만 말이다. 예상대로 장 마감 직전까지는 별다른 문제 없이 정상적으로 흘러갔다. 주가는 등락을 거듭하며 평이한 차트를 만들고 있었다. 장 마감 30분 전, 선물과 연계된 현물 프로그래밍 매도 물량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공시로 떴다. 그래프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다. 묵직한 한 방을 위해서는 서서히 추락하는 그래프를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섣불리 끌어 올렸다가는 방어 낌새를 눈치챈 도이체 방크에서 멈출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유를 가지고 마지막 3분에 집중하라고 전 직원에게 메시지를 돌렸다. 몇몇 눈치 빠르고 직관이 뛰어난 직원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국내 증권사 몇 곳이 프로그램 매도를 시작했다는 걸 알려왔다. 이런 상황을 짐작했기에 충분한 총알을 준비했다. 오늘 최소한 3조 원 이상을 매수해야 할 것이다. 장 마감이 3분 남았을 때 진짜가 시작됐다. 도이체 증권에서 풋옵션 대량매수와 콜옵션 대량청산으로 인해 프로그래밍 매도 물량이 급격히 쏟아져 나왔다. 우리의 매수 프로그램도 미친 듯이 돌아갔다 지금부터 깜깜이다. 결과는 동시호가가 끝나는 14시 59분 55초에 판명 날 것이다. 3분이 3시간 같았다. 14시 50분, 동시호가 직전까지 코스피 지수는 3포인트 하락이었다. 내가 쏟아부은 돈이라면 충분히 유지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오후 3시, 마감으로 종가가 떴을 때 모니터를 보지 않아도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양금융 사옥이 떠나갈 것 같은 환호성이 들렸다. 1,963포인트에서 오락가락하던 코스피 지수는 1,965포인트로, 코스피200지수는 254포인트를 굳건히 유지한 것이다. 오늘 단 3분 동안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 30조 원가량이 사라지는 걸 순양증권이 막은 것이다. 지금 현재 이 일을 아는 곳은 단 두 곳이다. 환호성을 지른 순양증권과 망연자실하게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을 도이체 방크와 도이체 증권뿐이다. 임원들이 환희에 찬 얼굴로 몰려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실장님.” “여러분도 수고하셨습니다.” 서로 노고를 치하하는 건 내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간단한 말로 끝내고 해야 할 일을 지시했다. “직원들에게 금일봉 돌리고, 회식이라도 하라고 하세요. 단, 오늘 일 빨리 정리해서 금감원에 보고하는 건 잊지 않아야 합니다. 독일 애들이 쏟아부은 금액, 만약 우리가 막지 않았다면 입었을 손실을 정확히 파악해서 전달하세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안 임원들은 얼굴을 조금 붉히고 물러났다. 혼자 남아 한숨 돌리려 했지만 내 팔자에 언감생심이었다. 또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 들어왔다. “실장님, 이야기 들었습니다. 훌륭히 잘 막아냈다고요? 하하.” PI 전문가와 홍보팀이 먼저 얼굴을 내밀었고 카메라를 든 기자 몇 명이 머리를 꾸벅 숙이며 그들의 뒤를 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퇴근은 글렀다. *** “오호! 우리 서방님이 한국 금융의 수호자라 굽쇼?” 뺨을 건드리는 것 때문에 눈을 뜨니 이미 출근 준비를 끝낸 아내가 신문을 흔들었다. “기사 떴어?” “아주 도배를 했어. 인터넷 실시간 검색 1위도 차지하셨고요. 대통령이 열 받겠어. G20으로 지지율 좀 살려보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썼는데 그걸 자기가 홀라당 받아 먹어버렸으니….” 그뿐만이 아니다.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20 개국 정상들이 모였다. 그들은 분명 오늘 뜬 기사를 확인할 것이고 통역들은 친절하게도 내 활약을 자세히 말해줄 것이다. 외신도 서울을 향해 촉각을 곤두세운 하루다. 그들도 내 이야기를 그냥 흘려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각국 정상들의 티타임에 내 이름이 오르내릴지도 모른다. 광고 예산을 두 배 늘린 것보다 훨씬 큰 이익을 봤다. “홀라당은 사실이지만 거저먹은 건 아냐. 어제는 폭풍 같은 하루였으니까. 그리고 기사는 사실이야. 그 정도면 엄청 좋은 일 한 거라고.” “기자들이 훌륭한 일 했다고 기사 써줘? 맨 입에? 설마?” “광고 예산 두 배로 올렸어. 하지만 나 때문에 증시 폭락을 막은 건 진실이라고.” “기사 내용은 믿어. 너무 노골적으로 쓴 게 낯간지러울 지경이라 도대체 떡값을 얼마나 받아먹었나 궁금했을 뿐이야.” 아내는 신문을 휙 던지고 입었던 정장을 벗기 시작했다. “뭐야? 신문 기사에 난 서방님이 섹시해 보여?” 기름기 흐르는 내 말에 서민영은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미안하지만 그럴 시간 없거든?” “근데 왜 갑자기 옷을 벗어? 무섭게?” 그녀는 신문을 가리켰다. “저렇게 떠들었는데 기자들이 가만있겠어? 분명히 법원 앞에서 진 치고 있을 텐데…. 사진이라도 찍혀봐. 영구 박제되는 거야. 이왕이면 예쁘게 나와야지.” 갈수록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쓴다. 뭐…. 내게 나쁜 일은 아니다. 공무원 아니랄까 봐 무채색의 옷만 있는 옷장을 뒤적거리다 그나마 최근에 쇼핑한 옷으로 갈아입는 그녀에게 말했다. “가다가 미용실이라도 들를래? 전화해 놓을 게.” “내가 뭐 연예인이야? 시간도 없어. 괜찮아.” 후다닥 달려 나가는 그녀를 배웅하고 신문을 쭉 펼쳤다. 경제지는 전부 내 이야기를 1면 톱으로 때렸다. 중앙일간지는 차마 정권을 외면할 수 없었는지 1면을 대통령으로 채웠고 경제면은 내 기사로 가득 채웠다. G20과 대등한 비중으로 다뤄줬으니 돈 쓴 보람은 충분했다. 신문을 덮었을 때 얼굴이 달아올랐다는 걸 알았다. 아내의 말이 맞았다. 낯간지러울 정도로 날 추켜세웠다. 함께 실린 사진도 잡지에나 실릴 법한 심한 보정을 거친 것이다. 오늘도 아주 바쁠 것 같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올 것이고 후속 보도와 2차 매체를 위한 인터뷰가 잔뜩 밀려 있다. 나도 아내처럼 옷차림에 신경이 쓰여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 회사에서 가장 먼저 나를 기다리던 사람은 다름 아닌 진경준이었다. “신문 보고 왔지? 앉자. 커피 할래?” “대단하더라, 너. 단번에 스타가 되셨어. 그것도 전 세계 정상들이 주목하는 스타.” “이 정도는 별일 아니야. 3조 원 정도로 막았고 투입한 자금은 전부 주식으로 쥐고 있으니까 손해 본 것도 아니지. 지금 프로그램 매수한 주식 확인 중이야. 쓸 만한 건 남겨 두고 나머지는 시장에 조금씩 풀려고.” “이정도는 쉬운 일이다?” “그래. 물론 이런 게 그룹을 차지하는 것과는 별개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하나는 알았겠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순양그룹 주가를 확 흔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걸?” 진경준은 짧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협박은 그 정도로 끝내. 용건은 다른 거니까.” 진경준은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오늘부터 순양전자 전략팀장이다. 인사 공고는 오후에 뜰 거야.” “전략팀장? 뭐지? 부장급인 것 같은데?” “아니, 이사야. 영준 형 곁에 딱 붙어서 브레인 역할 하라고 만든 자리야.” 표정이 어두운 이유를 알았다. 브레인이라고 하지만 자칫 하다가는 궂은일만 도맡아 할 수도 있다. 누군가의 브레인, 참모 역할을 제대로 하느냐 마느냐는 바로 그 누군가의 의지에 달려 있다. 잔심부름이나 시키고 귀찮은 일을 맡기면 심부름꾼으로 전락하고 중요한 안건이 있을 때마다 의견을 구하면 브레인이 되는 것이다. 진영준은… 글쎄. 아무래도 전자이지 싶다. 과거 그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장차 후환이 될지도 모르는 친동생을 키워주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놈이니까 말이다. 솔직히 진경준이 전자에서 인정을 받든 말든 상관없다. 내가 필요할 때 차남이라는 역할만 잘 수행하면 더는 기대하지 않는다. “형님. 이거 하나는 신경 쓰면서 일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 “뭘?” “백준혁 실장.” “응? 백실장님을 왜?” 갑자기 의외의 이름이 나오자 진경준은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학재 회장님을 봐. 지금 누구 편에 서 있지?” “아…!” 그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전자와 물산 계열의 돌아가는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큰아버지도 아닌 백 실장님일 거야. 대지주의 땅과 소작농을 속속들이 아는 건 지주가 아니라 마름이니까.” 진경준이 백준혁 실장에게 일을 배우는 것 역시 내 관심사가 아니다. 진영기 부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진영준이 전면에 나서면 그의 성격상 분명히 백 실장을 쫓아낸다. 바로 그때 나와 백준혁 실장을 연결해줄 고리 역할을 진경준이 맡아야 한다. “전자를 맡고 싶다면서? 누가 뭐래도 순양전자는 순양그룹의 간판이야. 거긴 닳고 닳은 영악한 임원들이 득실대잖아. 그 양반들 휘어잡으려면 백 실장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할걸?” 진경준이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HW 그룹이 순양 건설과 중공업을 인수했지만 잡음 하나 나지 않잖아. 바로 이학재 회장이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한 회사들이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어.”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손뼉을 살짝 치며 말했다. “자, 내 의견은 여기까지. 아무튼, 잘해봐. 확실한 목표가 멀리 있는 건 아니잖아.” 진경준도 머리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런 그에게 슬며시 웃으며 물었다. “참, 큰아버지께 확답은 받았어?” “뭘?” “상속. 그룹 지분 외에는 형님이 가져야지.” 진경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 주머니까지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마. 난 너랑 손잡은 게 다야. 내 모든 걸 다 보여준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차가운 목소리로 톡 쏘며 돌아서는 그를 향해 난 손을 들어 슬쩍 내저었다. 동생이 아버지의 전 재산을 가져가는 걸 보고만 있을 형님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할 텐데…. 진영준이 큰아버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동생은 빈털터리가 되는 게 나로서는 나쁠 게 없다. 자신이 빈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오로지 나만 바라볼 테니까 말이다. *** ========================================== [311] 게릴라전. 1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의 작은 소도시 광장에서 과일 노점상을 하던 청년이 분신했을 때, 그가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의 독재자와 시리아, 예멘, 바레인 정권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될 거라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청년의 분신 소식에 시민들의 시위는 들불처럼 번져 나갔고 정확히 28일 뒤, 튀니지의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하며 23년간의 독재정치는 막을 내렸다. 이제 시민의 저항 정신은 멕시코 사람들이 마약 카르텔의 공포에 맞서고, 그리스 사람들이 무책임한 지도자들에게 반대하는 행진을 하고, 미국인들이 소득 불평 등에 반대하며 월가에 모여듦으로 나타날 것이다. 2011년은 시위로 시작해서 시위로 끝날 것이며 타임스지도 올해의 인물로 시위자(Protester)를 선택하겠지만,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작년부터 삐걱거리던 한국 경제는 산업화 이후 처음으로 한국 경제 성장률이 세계 경제 성장률을 밑돌 거라는 암울한 전망이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다. 정부도 우려하고 국민도 걱정하지만 내 관심사는 딴 곳에 있었다. “이미지 관리에는 이보다 더 좋은 도구가 없어요. 언론보다 훨씬 더 파급력이 큼니다. 하루에 하나씩 메시지를 올리세요. 제 메시지를 사람들이 매일 기다리는 걸 목표로 합니다.” “연예인 수준으로요?” “정량적인 목표는 연예인 수준이지만 내용은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특히 일반인들은 내게 어떤 주식에 투자해야 하는지 엄청나게 물을 겁니다. 그런 건 철저히 무시해야 합니다.” 본격적인 SNS 시대가 열렸다. 지급까지 PI 전문가는 하는 일에 비해서 너무 많은 연봉을 받는다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지만 이제 그 돈값을 충분히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처음에 말했듯이 내가 경제사범이 되더라도 나를 지지하는 여론이 우세하도록 해야 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연예인과 정치인은 같은 카테고리의 직업이다. 이제 기업인도 그 범주에 들어가는 시대다. 카메라 기자들을 몰고 다니며,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 이젠 재벌 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너 연예인이야? 뭔 놈의 쇼맨십이 이리 거창해?” 새해 인사를 받던 이학재 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쇼할 만하죠. 30조 원을 세이브했잖습니까?” “그런 쇼 집안에서도 하냐?” “네?” “집안 어른들에게 새해 인사드렸을 거 아냐? 착실한 집안의 막내 흉내 내느라고 쇼 안 했어?” “착실한 막내가 아니고 무서운 막내로 변했죠. 모두 내 눈치만 슬슬 보니까요. 물론 첫째 큰아버지 식구들은 뵙지도 못했습니다만.” 환갑 넘은 고모는 은퇴당하기 싫어 아직 젊다는 걸 내 앞에서 과시한다. 고모의 세 아들은 호텔을 맡고 싶어 전에 없던 아양을 다 떨었다. 둘째 큰아버지 진동기는 초연한 척했지만, 여전히 그룹 내부 사정에 관심을 보였고 진태준은 민망할 정도로 날 직장 상사 대하듯 했다. 영원히 천대받던 셋째 큰아버지는 핸들을 틀어버린 게 확실했다. 유난히 아버지 곁에 맴돌며 자신의 동생을 떠받들었다. 어릴 때 내가 다리를 부러트렸던 그의 외동아들 진강준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힘세고 돈 많은 친척에게 알랑방귀 뀌는 건 재벌 집이나 일반 가정이나 다를 바 없구먼.” 이학재 회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부 묻는 건 이만하고 일 좀 할까?” 그는 서류철 하나를 휙 던졌다. “올해 사업 중에 네가 꼭 알아야 할 거 정리한 거다. 검토하고 네 의견 알려줘.” “회장님께서 승인하신 거라면 그냥 진행하시죠.” “내가 승인하기에 좀 모호한 거만 정리했으니까 확인해. 그리고 이건 진영기 부회장의 작년 연말 주식 보유 현황이랑 재산 목록이다. 개인 건 다 털었다고 보면 돼.” 사업보다 이게 더 관심 있다. 그가 내민 서류를 한동안 꼼꼼히 살폈다. 재산 이동 경로는 어느 정도 짐작했는데 의외의 내용이 보였다. “재단을 설립했네요?” “그래 작년 말에 기습하듯 만들었더라고. 진영기 부회장 개인 재산은 전부 그리로 들어갔다고 보면 돼. 재단 이사장은….” “차남인 경준 형에게 이런 식으로 물려주는군요.” “너무 노골적이야. 보통은 사회 환원이니 뭐니 하며 너처럼 쇼도 좀 하고 은근슬쩍 넘어가는데 이번에는 아예 숨어서 했어. 기사 한 줄 안 나왔거든.” “이건 뭐, 대놓고 증여세 안 내겠다는 말이잖습니까?” “더한 거도 있다. 재단으로 부동산은 대부분 흘러갔는데 현금은 칠백억이 전부야. 내가 아는 것만 해도 현금 삼천억 이상은 쥐고 있을 텐데….” 큰아버지가 바짝 쫄았다는 증거다. 혹시 모를 예비비로 남겨놓았든지 아니면 지분 확보를 위해 재단으로 넘기지 않은 것이다. 재단의 돈으로 주식을 매입하면 차남 소유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경준 형이 또 이를 갈겠는데요?” “그놈이 열 받을수록 네게 유리하잖아. 흐흐.” “내분은 언제나 환영이죠. 그럼 남은 건 계열사 주식 이동이로군요.” “그래. 머리 좀 아플 거다.” “완벽한 지배구조는 안 나오죠?” “그래. 소위 말하는 우호지분의 확실한 지지가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간이 철렁 내려앉을걸?” “예상하시는 대응 방안은 있습니까?” “전자와 물산은 덩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손쓰지 못할 테고 두 주력사의 지분을 가진 계열사에서 장난을 쳐야겠지.” “계열사의 지배구조를 더욱 공고히 해서 제가 각개 격파 들어가는 걸 방어한다는 거죠?” “그래. 획기적인 방법을 찾기 전에는 그게 전부일걸?” 진영기 부회장 주변에 모여 있는 인재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그들은 어떤 계획을 세워 성을 방어하고 주인을 지킬까? “회장님. 승계작업이 끝나기 전 슬쩍 한번 찔러볼까요? 새해 선물 겸해서 말이죠. 어떤 대응책을 내놓는지도 한번 보게…? 푹 찔러보면 피가 날 것이고 그 피를 외면하는 자와 닦아주는 자를 구분할 수 있다. 우호지분이라는 가면을 쓰고 외면하는 자부터 공략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자의 우호지분이며 친구다. “찔러?” “네. 흑기사를 등장시켜 저들의 전력을 한번 확인하는 겁니다.” “흑기사라…. 누구? 미라클?” “네. 순양그룹의 지분도 있으니 자격은 충분합니다. 대신 미국 미라클을 등장시켜 볼 생각입니다.” “본사를?” “네. 레이첼이 우리나라에서 인지도도 꽤 있고, 우호적이지 않습니까? 그녀도 슬슬 은퇴 생각하던데 짜릿한 일 한번 하고 보내드려야죠.” 이 회장은 손가락을 꼽아보더니 혀를 찼다. “아니, 몇 살이나 됐다고 벌써 은퇴 운운이야? 이게 쉰 넘었나?” “그 바닥이 은퇴가 빨라요. 그리고 레이첼은 공격적인 성향이 덜해서 이 정도면 오래 버틴 거죠. 이미 나파벨리의 와이너리까지 사놓고 차곡차곡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요.” 와이너리란 말에 이 회장은 부러운 듯 말했다. “젠장, 나도 시골 내려가서 막걸리나 만들며 살까?” “태생이 육식인데 초식 동물로 변하겠습니까? 원하시면 술도가 하나 차려 드릴 테니까 주말농장처럼 한 번씩 왔다 갔다 하십시오. 괜히 전원생활 꿈꾸지 마시고요. 지겨워서 하루도 못 견딜 분이…. 흐흐.” 초식 동물은 시골에서, 육식 동물은 도시에서. 이것이 현대판 정글이다. *** “내가 또 협박하는 거 좋아라 하지.” 갑자기 연락했음에도 크게 놀라지도 않고 한국으로 들어온 레이첼 아리에프는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지었다.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발견한 표정이다. “거참, 장난이 아니라니까요. 적절한 경계를 지켜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정부까지 개입할 수가 있어요. 그만큼 순양전자는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니까요.” “정부까지 개입할 정도로 중요한 기업인데 왜 네 가족이 지배하지? 한 줌도 안 되는 지분으로 말이야.” 경영인이 주주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정상적인 주식회사가 아니라 경영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주를 무시하는 한국의 주식회사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 하는 그녀와 기업 윤리에 대해 토론할 생각은 없었다. “덕분에 내가 순양그룹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거죠. 도덕적 잣대를 대는 건 미국에서 해도 충분하지 않아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더는 거론하지 않았다. “그럼 공격적 M&A를 공개적으로 발표할 거니?” “아뇨. 어차피 지금은 M&A가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비공식 라인을 타고 슬슬 흘리는 겁니다.” “비공식 라인이라면 언론?” “네. 레이첼이라면 우리나라 주요 언론사가 모두 인터뷰하려고 줄을 설 테니까요. 그리고 그 인터뷰에서 레이첼의 기업에 대한 생각을 말하면 됩니다.” 그녀는 대번에 실망한 표정이었다. “뭐야? 그게 협박이라고?” “알잖아요. 레이첼이 생각하는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기업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게 바로 한국의 재벌 대기업이니까.” “이건 단지 비난일 뿐이잖아.” “비난할 때 순양전자를 예로 들면 됩니다. 그럼 기자의 추측과 상상이 더해져서 비난은 어느새 협박으로 변할 겁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깨달은 레이첼이 웃으며 말했다. “넌 참 상대하기 힘들겠어. 은근히 괴롭히는 스타일이야.” “그만큼 우리 가족들이 힘든 상대라는 말입니다. 단번에 치고 들어가는 게 너무 어려워요.”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만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전해졌다. 남들이 부러워할 세계 최고의 부호 자리를 차지했지만, 원하는 걸 갖지 못해 안간힘을 쓰는 날 안타까워한다. 편안하게 사는 건 타고나야 한다는 걸 그녀도 잘 알 것이다. *** “이번 한국 방문의 목적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특별한 건 없습니다. 한국 미라클이 대주주인 HW 그룹의 경영 성과를 점검하는 통상적인 업무의 일환입니다.” 합동 기자회견장에 모인 기자들은 엄청난 자금을 움직이는 그녀에게서 특종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했다. “미라클은 한국에 특별한 애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외화 보유고가 부족할 때 100억 달러를 긴급 지원한 것부터, 한국 기업의 인수에 적극적인 걸 보면 말입니다.” 이 질문에 래이첼의 눈동자가 빛났다. “한국 기업의 기반은 아주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기업 가치가 저평가되어 있어요. 그래서 외부의 충격에 쉽게 무너지죠.” “어떤 뜻인지 정확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제 발언 그대로입니다. 좋은 기업을 싸게 인수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뜻이죠.” “저평가되었다는 평가의 근거는 뭡니까?” 레이첼은 자신에게 꼭 필요한 질문을 퍼붓는 기자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진도준이 심어놓은 기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순양전자, 며칠 전에 주가가 천 달러를 돌파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하지만 순양전자의 30% 정도 되는 규모의 미국 기업 십여 개는 이미 천 달러를 돌파한 지 오래됐어요. 순양전자의 주가는 최소한 지금의 두 배가 되어야 정상입니다. 물론 전제 조건이 필요하겠지만.” 순양전자 그리고 두 배. 이 단어는 기자들의 먹이가 되었다. “정상적인 기업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경영의 투명성과 주주의 권리를 보장해야 합니다. 지금의 한국 재벌 대기업은 기이할 정도로 변칙적인 지배구조라는 걸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기자들은 어떤 질문을 해야 더 충격적인 발언을 끄집어낼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혹시 순양전자를 인수할 의향이신가요?” 바로 그 기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레이첼은 아주 잠깐 숨을 가다듬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훌륭한 기업은 늘 M&A 리스트에 올라 있습니다. 순양전자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겠죠?” 레이첼은 이 정도면 진도준이 원하는 대답이 되었을까 생각하며 인터뷰를 끝내버렸다. ========================================== [312] 게릴라전. 2 진영기 부회장의 호출에 두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달려갔다. 급한 호출의 이유는 두 아들도 알고 있었다. 바로 미국의 한 투자사 대표의 인터뷰 방송 때문일 것이 분명하다. 초조하게 거실을 서성이던 진영기 부회장은 아들이 도착하자 불안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레이첼인가 하는 여자, 인터뷰 봤겠지?” “네. 지가 무슨 거물이라도 되는 양 시건방진 소리를 잔뜩 늘어놓더군요.” 진영준이 투덜거렸다. 진경준도 그녀의 인터뷰가 거슬렸지만, 아버지의 질문은 이런 답을 원하는 게 아니다. 잠깐 속 시원한 험담이 듣고 싶어 아들을 부를 아버지가 아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진경준은 아버지의 눈길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 인터뷰가 진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대기업의 지분구조가 단일 기업 하나만 M&A 하는 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어요. 순환출자구조를 잘 알면서 그런 말 했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겠죠.” “의도?” 진영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동생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의도가 뭔지 말해야지.” “형님. 미라클이 도준이 거라면서? 그럼 레이첼 아리에프라는 그 뉴욕 미라클의 CEO는 도준이가 시키는 대로 기자회견 한 것 아니겠어?” 진영기 부회장이 차남의 말에 무릎을 탁 쳤다. “내 생각이 바로 그거다. 레이첼 머시기가 그놈이 시키는 대로 말했다면 그건 기자회견이 아니라 우리를 겨냥한 소리 아니겠나?” “아버지. 도준이가 한국 미라클 자금의 주인이라는 건 틀림없어 보이지만 미국 자금까지 그놈 돈이라는 건 확신할 수 없습니다. 섣부른 추측은 위험합니다.” 진영기 부회장이 차남의 의견에 솔깃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진영준도 동생에게 질 수 없다는 듯 재빨리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관계 깊은 건 확실하니까 기자회견 내용은 도준이의 생각이 들어간 것으로 봐야지. 그게 아니라면 너무 생뚱맞잖아?” 두 아들의 대화를 듣던 진영기 부회장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그는 이미 진도준이 깊이 개입했다고 믿었다. “이놈이 선수 치려는 거다. 그룹 승계과정에서 빈틈이라도 나오면 바로 헤집고 들어올 생각인 게야.” 진경준은 지나치게 불안해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의아할 정도였다. 하지만 장남인 진영준은 짚이는 것이 있었다. 자신은 아버지가 말한 승계의 당사자다. 불안은 불완전에서 기인한다. “아버지. 너무 걱정 마십시오. 미라클 CEO의 인터뷰는 선전포고도 아니고, 도준이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무작정 덤벼들 정도로 무모하지 않습니다.” 진영준은 동생을 향해 말했다. “경준아. 네가 도준이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니?” “응? 내가?” “그래. 음흉한 그놈이 아무리 속을 감춘다 해도 표정에서, 태도에서 드러나는 게 있다. 그걸 한번 확인해봐.” 진경준은 형의 말이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진정시키려는 뜻임을 눈치채고 조금 놀랐다. 이래서 부모는 장남을 특별하게 생각하는가? 부모를 위해서라면 가장 적절할 때 필요한 말이 뭔지 안다. “그래. 내일 아침 일찍 만나볼게.” 진영기 부회장은 이런 두 아들의 태도 때문인지 굳었던 얼굴을 폈다. “나이 먹으니 괜한 걱정이 많아지는구나. 허나 너희가 이렇게 듬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유난히 늙어버린 것 같은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진경준은 할 말이 많았지만, 오늘은 참았다. *** “그게 그리 궁금했어? 아침 댓바람에 이렇게 달려올 만큼?” “이죽거리지 말고 말해. 왜 괜한 짓을 한 거야?” “지금 뭐 하는 거지?” 불만을 터트리는 진경준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 “하나만 해. 아버지와 형님의 심부름이나 하며 효자 소리 듣든지, 아니면 인간 말종 소리를 듣더라도 순양 계열사 몇 개를 먹든지. 이솝 우화 몰라? 박쥐 새끼 말로가 어떻게 됐더라?” “야! 그건….” “레이첼의 기자회견이 내 작업이었는지, 또는 내가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했는지 확인하는 건 효자 소리 듣겠다는 뜻이잖아. 내 편에 서겠다면 다른 말이 나왔어야지. 기자회견에 대한 큰아버지와 영준 형의 반응이나 대응. 안 그래?" 대답 못 하는 그를 향해 다시 쏘아붙였다. “노선 정했으면 중심 잡아. 지금 이 상황이 가볍게 보여? 단순한 집안 분란으로 보는 거야?” “도, 도준아.” “우리 집안싸움을 사적으로 본다면 지금 이 순간 빠져. 수조 원의 돈이 한순간에 날아갈 수도 있고, 한 나라의 주식 시장을 흔들 수도 있어. 누군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해도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교통사고가 어떤 의미인지 알아채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누군가의 목숨을 노릴 정도로 큰 판이라는 건 분명히 알아야 한다. “잘 들어. 형 때문에 내가 위태로워질 것 같으면 언제든 형을 매장할 거야. 영원히 재기 불가능하게…. 알아들었어?” 빈말이 아니란 것을 그도 잘 알 것이다. 그의 부친이 물려준 재단, 알맹이는 쏙 빠진 재단 정도는 언제든 폭삭 주저앉힐 수 있다. 으름장이 통했는지 아니면 생각을 고쳐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경준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네가 선전포고한 건 아닌지 아버지가 많이 두려워하시더라.” “엄청난 자금으로 주식을 끌어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거였어?” “아마도. 그만큼 지배 구조가 취약하니까 그러신 거겠지.” “그 취약한 곳이 어디지?” 진경준은 잠시 대답하기를 주저하더니 짧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정확한 건 아닌데… 내 생각엔 두 곳이야.” “어디?” “우성 MK와 은행 한 곳인데 어느 은행인지는 확신이 안 서.” “우성…?” 십여 년 전 IMF 때 망한 우성그룹이 비자금 수천억 원을 빼돌렸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심지어 1조 원이 넘을 거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비자금이 몇 년 동안 해외를 떠돌며 깨끗하게 세탁된 뒤 우성 MK라는 투자회사의 창업 자금으로 둔갑했다. 이곳에 순양물산과 주요 계열사의 지분이 꽤 있다는 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하지만 우성 MK의 대표는 예전부터 진영기 부회장과 각별한 사이였다는 건 금융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우성 MK의 자금이 우성그룹의 비자금이라고 확신한 검찰이 수사의 촉각을 곤두세웠을 때 검찰을 잠재운 이가 바로 진영기 부회장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이학재 회장도 우성 MK는 확실한 진영기 부회장의 우호세력이라고 일찌감치 포기하지 않았던가? “우성 MK가 등 돌린 이유, 그리고 어느 은행인지 빨리 파악해서 알려줘.” “야! 숨 좀 쉬자. 이런 우격다짐이 어딨어?” “한가한 소리는 그만하지? 응석 받아줄 생각 없으니까.” 심한 소리지만 그가 지금 상황을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 주저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핏줄 편에 서기 마련이다. 돌아갈 다리를 빨리 끊어야 한다. 진경준은 이를 악물었고 잠깐 동안 나를 노려봤지만, 별다른 소리 없이 일어섰다. “큰아버지께 레이첼의 기자회견은 뭐라고 할 거야?” “내가 알아서 한다. 그런 거 하나하나 다 보고하고 네 허락 맡아야 하나?” 그는 독한 한마디만 툭 내뱉고 나가 버렸다. 도련님은 저런 식으로 변해 가는 법이다. *** “도준이는 줄 세우기를 하려고 툭 던져본 말인 것 같습니다.” “줄 세우기?” 진영기 부회장은 차남의 입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귀를 기울였다. “그룹 지분을 가진 여러 곳이 있지 않습니까? 그중에 우리와 등 돌릴 가능성이 있는 곳은 없는지 확인하려는 속셈 같았어요. 돈 자루를 풀어 주식 매입하는 건 무식한 짓이라는 걸 아니까요.” “내 그럴 줄 알았다. 그 미국 년이 떠든 건 분명히 도준이 그놈과 관계있었던 게야.” 진경준은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지만 이럴 때마다 박쥐로 변하는 자신에게 짜증이 솟구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우리의 우호지분은 문제없겠죠? 설마 저런 도발에 흔들릴 만큼 약한 관계는 아니지 않습니까?” 진경준은 대수롭지 않은 듯 질문을 툭 던졌다. 그의 눈빛은 아버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아. 그들도 자신들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니까. 이 바닥에 인연의 끈적함과 의리가 사라진 건 오래전이다.” “설마 그 소문이 사실입니까?” “무슨 소문?” “은행 한 군데와 우성 MK가 우리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거 말입니다.” “넌 그 소문을 어디서 들었어?” 진영기 부회장은 아들의 말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굳건한 성이라도 잘못된 소문 하나 때문에 성안의 거주민들은 공포에 떤다. 이 경우는 공포 대신에 등을 돌릴 수도 있다. “제가 지금 전자 전략실에서 일하지 않습니까? 우호지분 확보하느라 직원들이 뛰어다니는데 그런 이야기가 잠깐 돌았습니다.” 아들의 말에 진영기는 한시름 놓았다. 내부 실무자들의 소리다. 아직 밖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넌 그놈들 입단속 단단히 시켜. 좋지 않은 이야기는 안에서만 돌게 해.” “네. 그런데 소문은 사실인가 보죠?” “그래. 아쉽지만 우리 손을 떠날 것 같다.” “이유가 뭡니까? 특히 우성 MK 대표는 아버지와 돈독한 사이 아닙니까?” “불안하단다.” 진영기는 이마 주름이 더 깊어졌다. “네 형이 미덥지 못하다는구나. 과연 그룹을 이끌어 갈 만한 깜냥이 되는지 좀 더 지켜보고 싶다고 하더라.” 진경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우호지분이 흔들릴 만큼 형의 능력을 의심한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진 건 아닐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아주 잠깐 품었던 희망을 버렸다. 아버지는 피식 웃고 있었다. “그놈들, 말은 그럴싸하지만…. 돈 냄새 맡은 거다.” “네?” “전쟁 중의 화살 한 대는 활보다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는 놈들이거든. 게다가 돈은 넘쳐나지만, 화살의 총량이 정해진 전쟁이니까 진한 돈 냄새를 놓칠 리 없어.” “그럼 우리가 우성 MK가 보유한 주식을 사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진경준은 아차 싶었다. 괜한 질문을 했다. 시간이 프리미엄이다. 진도준이 발톱을 다 드러내면 매일매일 가격이 뛴다. 진도준 돈 많은 거야 업계 상식 아닌가? 기다리면 판매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뛸 텐데 명색이 투자사인 우성 MK가 이 간단한 사실을 몰라 주식을 팔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 “표정 보니 대답할 필요는 없겠구나. 허허.” “은행은 어딥니까?” “진성은행.” “거기도 주식 가격 오르기만을 기다리는 겁니까?” “아니. 진성은행은 주식 안 팔아. 그들은 선택한 사람의 손만 들어줄 거야.” “선택…?” “돈 필요할 때마다 말만 하면 예금 잔고 팍팍 늘려 줄 쪽의 손을 들어주겠지.” 둘 다 진도준에게 유리하다. 돈 싸움에서 진도준을 이길 수는 없다. 진성은행과 우성 MK는 진도준의 손을 들 것이다. 난감한 표정의 아들을 보던 진영기가 슬쩍 미소 지었다. “실망했나? 우리가 너무 쉽게 무너질 것 같아서?” “역시 지분은 총알 싸움이군요. 이러다 맥없이 무너지는 거 아닙니까?” “그랬다면 도준이 그놈이 손잡은 이학재가 지금까지 기다렸겠냐? 벌써 전자를 먹었지.” 진영기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아들을 향해 말했다. “돈으로 사고파는 건 작은 거다. 우성 MK든 진성은행이든 그리 많지 않은 지분이야. 하나라도 아쉽긴 하지만 큰 걸 노리면 돼.” “큰 거라니요?” “그런 게 있다. 그건 돈이 아니라 거래를 하는 거야. 너도 곧 알게 될 거다.” 진경준은 돈으로 사고파는 것과 거래의 차이점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 [313] 게릴라전. 3 누구와 거래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거래일까가 궁금했지만, 아버지의 이어지는 말 때문에 호기심은 일단 접어야 했다. “그렇다고 잔잔바리 무시하면 안 돼. 긁어모을 수 있는 건 다 긁어 와야 한다. 큰 줄기, 작은 가지 전부 중요한 거다. 알겠지?” 머리는 끄덕였지만, 아버지가 말한 거래가 뭔지 도무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께서 여전히 안심하시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큰 거래도 쉬운 일은 아닌가 보죠?” “그래. 쉽다면 내가 이리 예민하겠냐?” 진경준이 좀 더 캐묻고 싶었을 때 진영기 부회장은 아주 민감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넌 섭섭하다는 말은 않는구나.” “네?” “재단 말이다. 네 몫으로 만든....” 할 말은 아주 많았지만 억누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속 빈 강정 같은 재단을 만들어 자신에게 넘겼지만, 화를 내지 않았다. 많은 것을 물려주겠다는 약속을 아버지가 먼저 어긴다면, 부모와 형제를 배신하고 사촌과 손잡은 것에 대한 면죄부를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아버지. 지금 중요한 건 제가 아닙니다. 우리 가족이 가진 걸 고스란히 지키는 일이 우선이죠. 제 몫은 천천히 남겨 주셔도 됩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진경준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에 서린 기특함을 읽었다. 달라고 때쓰지 않아도 부모의 지갑을 여는 방법을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 방법은 바로 부모에게 기대지 않고 내 몫은 내가 챙기는 것이다. 바로 그때 기대하지 않았던 이런 일이 생긴다. 굳게 닫혔던 지갑이 스르르 열리는 것이다. “그래. 조급해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리거라. 다 생각해 뒀고 준비하고 있다. 이 애비에게 섭섭한 마음은 절대 들지 않을 거야. 허허.” 진경준은 등을 쓰다듬는 아버지의 손길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자신이 가지게 될 것을 생각하며 미안함을 털어버렸다. *** “진영준이가 마누라는 잘 구한 거 같지?” “이런 거 필요할 때 써먹으려고 언론사와 사돈 맺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기획은 누가 한 걸까요? 편집국장? 아니면 주필?” “둘 다야. 환상의 콤비지. 나도 회장님 모실 때 그 양반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한성일보는 레이첼의 기자회견 요약으로 포문을 열고 사설로 독자들을 저격했다. 외국계 투자사의 국내 기업 인수를 국부 유출이 아니라 수탈로 규정짓고 프레임을 짰다. 미라클은 졸지에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변했으며 레이첼은 이 회사의 설립자인 이토 히로부미로 표현했다. 여의도의 한국 미라클은 국부 수탈의 앞잡이며 매국노로 변해버렸다. “그게 바로 모진 세월 속에서도 백 년 가까이 버틴 힘이다. 이제 잘 봐봐. 내일이면 외국 자본이 수탈 자본으로 변해서 매스컴을 시끄럽게 할걸?” “대통령도 나서서 외국 자본 유치하겠다고 광고하는 세상인데, 자기들 멋대로 잣대를 들이대는군요.” “한성일보도 며칠 전까지 외국 자본 끌어와야 우리 경제가 산다고 떠들어 댔어. 그런 뻔뻔함이 생존 비결이고 힘이지.” “그 뻔뻔한 아저씨들에게 인사 한번 해야겠습니다. 회장님께서 자리 한번 만들어주시죠.” 이학재 회장은 실소를 참지 못했다. “아서라. 이놈들은 안 돼. 사주의 사돈댁 편드는 걸 네가 어떻게 막아? 돈으로 샤워를 시켜줘도 흔들리지 않아.” 돈만으로 모든 게 해결된다면 난 벌써 순양그룹 회장이다. 돈은 욕망의 상징일 뿐 전부가 아니다. 중요한 건 욕망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네 편으로 돌린다고 해도 크게 바뀌는 건 없을 거다. 한성일보는 글쟁이가 많아. 대신할 놈은 금방 나온다.” “현재 한성 일보의 대들보가 그 두 사람인 건 확실하죠?” “그렇긴 해.” “그럼 해볼 만합니다. 대들보를 뽑아버리면 다음 대들보가 되는 놈들은 한성일보에 뿌리내리지 않을 겁니다. 선례가 있으면 그걸 따라가니까요.” “그게 뭔 말이냐?” “똘똘 뭉친 한성일보를 균열만 내면 됩니다. 일 마치면 아시게 될 테니까 자리만 잡아주십시오.” 이학재 회장은 긴 한숨을 쉬며 수화기를 들었다. 두 대들보를 만나기 전 몇 가지 사전 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뛰어다녔다. 물론 그 시간 동안 한성일보의 맹공은 끊어지지 않았고 다른 언론사도 외국 자본의 침투를 조금 다루기도 했다. 한성일보가 던진 쟁점을 TV토론 프로그램에서 다룰 정도가 되었을 때 그들을 만났다. “결례를 범하게 됐습니다만, 너그러이 양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두 사람은 이학재 회장 대신 내가 나타나자 놀랐으나, 곧 승리자의 미소를 보이는 여유를 부렸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렇게 직접 뵈니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 사실인가 봅니다.” “아, 그 소문요? 제가 미라클의 오너라는 거 말씀이시죠?” “그렇지 않다면 우리와 겸상할 일이 있겠습니까? 지금 미라클에 맹공을 퍼붓는 곳은 우리뿐이니까요.” 우쭐한 태도. 저들은 내가 자세를 낮추고 타협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문의 진위야 차차 밝혀질 테고.... 아무튼 한성일보가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힘을 잘 봤습니다. 역시 돈보다 펜 끝이 매섭더군요. HW, 순양금융, 순양중공업 계열이 그동안 갖다 바친 광고비만 해도 순양전자와 맞먹을 텐데 말입니다.” 순간 그들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비쳤지만, 곧바로 웃음을 되찾았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설마 광고 물량으로 우리 입을 막을 생각은 아니시겠죠?” “지면 광고 중에 한성일보만 한 데도 없지 않습니까? 광고 효과는 충분히 보셨을 텐데요?” 여전히 자신감 있는 태도다. 저들의 말이 틀리지는 않다. 아파트 광고 하나만 해도 한성일보에 때리면 문의 전화가 폭주한다. 이 나라의 돈 많은 부자 대부분은 한성일보 구독자기 때문이다. 구매력이 가장 큰 계층을 확실한 구독자로 쥐고 있는 한성일보의 힘을 광고 물량으로 협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고, 생색 한번 내본 겁니다. 광고와 기사는 별개의 문제죠. 저, 그 정도로 속 좁은 놈 아닙니다. 하하.” 이 정도로 초면 인사를 끝내자 편집국장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HW와 순양금융, 건설의 광고 물량을 마치 손에 쥔 것처럼 말씀하시는 걸 보니... 더는 감추실 생각이 없나 봅니다.” “형수님이 제게 붙여놓은 기자가 한둘입니까? 제가 만나는 사람만 확인해도 감추기 어렵죠.”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헛기침했다. “아, 보고받지 못하셨나 보군요. 이거... 제가 괜한 말을....” “우리가 보고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건 사적인 집안일이니까요.” “그 사적인 집안싸움에 한성일보라는 각목 하나 들고 우리 형수님 돕겠다고 뛰어든 분들 아니십니까? 국장님 그리고 주필님?” 잘 차려진 한정식 식탁에 냉기가 흘렀다. “밥 한 끼 먹는 게 이렇게 불편해서야 원....” 한성일보 주필이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수저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온 세상이 칭송하는 젊은이라 기대가 많았는데.... 이거, 실망입니다. 고작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빈정거리는 게 전부요? 그 빈정거림 들어주며 밥을 먹을 만큼 속 넓은 사람이 아니니 먼저 일어나겠소.” 편집국장도 주필의 눈치를 보며 엉덩이를 뗐다. “회사 이야기는 그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 시작하려는데.... 듣고 가시죠.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겁니다.” 그들의 눈을 외면하고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똑바로 쳐다보면 자존심을 굽히기 힘들다. 눈싸움이야말로 자존심 싸움 아니던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편집국장이 주필에게 눈짓하며 소매를 끌 것이다. 다시 자리한 두 사람은 채운 술잔을 들어 들이켰다. 먼저 입을 열기 껄끄러운 그들 대신 말했다. “제게 유리한 기사 써달라는 것도 아니고 순양전자 노리는 외국 자본 찬양해달라는 사설을 부탁드리려고 이 자리 만든 거 아닙니다.” “말 돌리지 말고 본론을 꺼내시죠. 개인적인 이야기가 뭐요?” 편집국장이 톡 쏘며 말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두 분은 이제 펜을 꺾으시면 어떨까요? 그만하면 펜대 잡은 손도, 원고지 노려보는 눈도 피로할 텐데 말입니다.” “뭐야? 보자 보자 하니까.... 말이면 단 줄 알아?” 이번에는 편집국장이 발끈했지만, 주필은 오히려 차분했다. “끝까지 들어봅시다.” 심지어 주필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까지 보이는 듯했다. 영감.... 눈치 하나는 빠르다. 저러니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겠지만. “펜대 놓고 원고지 멀리하면 우리는 뭘 해야 할 것 같소? 배운 거라고는 그게 전분데...?” “학업 끝내고 스펙 탄탄하게 쌓았으면 취직해야죠. 언제까지 공부만 하실 생각입니까?” 편집국장은 혐오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겨우 생각해낸 게 고액 연봉을 미끼로 던지는 임원 자리요? 그런 게 모두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아직 모르니 어린애인 게지.” 국장의 저 표정이 변할 때쯤 말투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방금 공부 마친 사람이 고액 연봉과 임원 자리 바라면 한참 모자란 사람이죠. 전 비정규직 자리를 제안할 생각입니다만.”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내 제안이 평범한 게 아니라는 건 안다. 최대 신문사의 국장과 논설위원이 갈 만한 비정규직 자리는 하나뿐이다. 두 사람은 침을 꿀꺽 삼키고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이젠 이들이 입을 열 때까지 웃으며 기다리면 된다. 먼저 입을 연 이는 편집국장이었다. “그 비정규직 자리,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 갈 수 있어요. 뭐 대단한 것인 양 착각하는 거 같아 말해주는 거요.” “언론사 등에 업고 여의도 취직한 분들.... 언론사 시다바리 아닙니까? 회사가 던져주는 각본대로 말하고, 거수기 노릇하고, 시키는 대로 줄 서야 하고.... 그러니 언론인 출신 중에 중진 의원 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죠.” “좀 더 조사해 보셔야겠소이다. 중진 의원 많아요.” 주필이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그 중진 의원들이야 개인기로 성공한 사람들이죠. 국회의원 배지 달기 전부터 스타였잖습니까? 여의도에서 러브콜 잔뜩 받을 만큼.... 두 분이 그 정도 스타였다면 광화문이 아니라 이미 여의도가 직장이었을 겁니다.” 이들은 얼굴이 붉어진 걸 감추기 위해 얼른 술 한 잔을 털어 넣었다. “회사에서 완전히 독립한 의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소신을 지키는 초선 의원. 이 정도는 돼야 언론인 출신답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국회의원 배지를 미끼로 본인에게 유리한 기사를 써달라? 광고로 기사를 사는 대신, 자리로 사겠다는 뜻입니까?” “제 말, 허투루 들으셨군요. 가사 써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펜대를 꺾으라고 했죠.” 두 사람은 아직 내 말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미간을 찡그렸다. “사표 쓰고 여의도 갈 준비나 하시라는 말입니다. 내년 총선 때 금배지 달게 해드리죠. 시시한 비례 대표가 아니라 당당한 지역구 의원으로 입성하게 해드리죠.” 국회의원 공천이라는 것은 오랜 기간 충성을 바쳐야 겨우 얻을 수 있는 대가다. 그마저도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언론사에서 피 터지게 싸워 살아남아야 하고 4년마다 돌아오는 선거 타이밍도 맞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빈자리가 나는 운도 따라줘야 한다. 이런 불확실한 약속이 아니라 일을 그만두는 조건으로 당장 내년에 여의도 입성이라니.... 편집국장이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때 주필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일 잘하는 세무 공무원을 더 좋은 자리로 승진시켜 제거해버렸던 옛 영국 부르주아 계급의 수법이군요. 역시 영민하십니다그려. 으허허.” “잘 아시네요. 그 당시 세무 공무원 중에 승진을 거절한 이는 없었습니다. 그들도 영민했던 거죠.” 저 웃음은 제안을 거절할 때 나오는 웃음이 아니다. 영민한 영감이다. ======================================= [314] 게릴라전. 4 괴롭히는 사람을 아주 멀리 보내버리는 일은 언제나 통했던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다. “한성일보에 우리를 대신할 사람은 많아요. 그게 바로 오랜 역사를 지켜온 회사의 저력입니다. 나 혼자 펜대를 꺾는다고 해서 칼날이 무뎌지지 않아요.” 주필은 벤치에서 대기하는 후보들도 만만하지 않다고 말한다. 한두 명 어떻게 처리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성일보의 저력은 바로 사람이라고 하셨으니 주필님이나 국장님을 대신하는 사람도 펜대를 꺾게 만들 겁니다. 수십 수백 명이라도 상관없어요.” “무모하시네. 여의도 의자 전부 손에 쥐었다고 착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듣고 있던 편집국장도 끼어들었다. “펜대 꺾는 방법이 당근만 있다고 생각하세요? 채찍도 있습니다.” 이놈들의 착각을 깨버려야 한다. 무릎은 은혜를 베푸는 사람에게 꿇지 않는다. 두려운 사람 앞에 무릎이 꺾인다. “전 그리 너그러운 놈 아닙니다. 처음이니까 당근 내밀며 협상하는 것뿐입니다. 두 번째부터는 채찍 들고 협박할 겁니다. 두 분은 운 좋게도 첫 번째 대상일 뿐이라 의원직 제안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가 그 제안을 거절하면…?” “당연히 채찍 들고 협박하죠.” 이제야 이들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 채찍이 뭔지 말해줄 수 있겠소? 명색이 언론인이라 호기심이 많아서….” “두 분의 솔직한 자서전을 생각해보십시오. 감추고 싶은 비밀 한두 개는 있을 것이고 세상에 드러나면 매장당할지도 모르는 비밀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협박이 힘을 받으려면 가슴 철렁할 비밀 하나쯤은 흘리는 게 효과적이다. “차인해, 박선미. 국장님은 이 이름이 낯설지 않겠죠?” 입사한 지 일 년도 안 돼서 신문사를 그만둔 여기자의 이름이 나오자 편집국장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미국으로 유학 간 자녀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살다가 격리 치료받은 것도 숨겨야 하지만, 그런 자녀 앞으로 증여세 한 푼 내지 않은 수만 평의 땅이 있다는 게 더 치명적이죠.” 이번엔 주필의 안색이 변했다. “내년에 여의도 입성하려면 이런 건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제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제가 지우개로 싹 지워드리죠.” 당근과 채찍 둘 다 통했는지 한동안 침묵만 흘렀다. 한참 만에 현실로 돌아온 편집국장이 입을 열었다. “만약 우리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공천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습니까?” 기다렸던 말이다. 협상의 끝이 보인다. “함께 식사하실 분을 초대했습니다. 익히 아시는 분일 테니 합석해도 어색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호출 벨을 누르자 직원이 달려왔다. “옆방에 식사 중이신 두 분 오시라고 해요. 식탁 세팅도 다시 하고.” 직원이 나가기 무섭게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국장님.” 두 언론인은 인사도 건네지 못할 만큼 놀란 것 같다. 여당의 원내 대표와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의 복심이라고 알려진 실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겨우 그들이 인사를 나누고 식탁에 웃음꽃이 필 무렵 공천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평택은 자동차 공장 지역이고, 거제도는 순양중공업의 본거지 아닙니까? 여당 번호 달고 두 회사가 움직이면 내년에 배지 다는 건 문제 없겠죠?” “속된 말로 작대기만 꽂아도 압승입니다. 공천이 곧 당선이죠.” 여당 원내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럼 이 두 분이 평택과 거제도 지역구 공천받는 데 어려움이 있을까요?”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히려 우리가 모시고 싶은 분들이지요.” 원내 대표의 말에 표정이 밝아지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더 필요합니까?” 그들의 대답이 필요해서 물은 게 아니다. “이제 회사를 위해 일할 것인지, 스스로를 위해 일할 건지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라는 말 속에는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나도 들어 있다. 날 위해 움직여야 그만한 대가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눈치 빠른 언론인들이라 잘 알 거라고 믿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앞으로 한 식구가 되실 분들끼리 좋은 말씀 많이 나누십시오.” 의자를 밀고 일어나자 한성일보의 펜대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영민하고 처세에 능한 놈들이다. *** “의원 자리 던져주고 입 막았다고?” “입도 막았고 제 손발 역할도 자처하던데요?” “의원 자리 몇 개나 된다고 남발하는 거냐? 현역 의원 관리가 더 중요한 거 몰라?” 이학재 회장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회사 지역구 의원은 매우 중요한 자리다. 자동차와 중공업 지역의 의원은 집중 관리 대상인데 그 자리 의원을 바꿔버리겠다고 하니 저런 표정이 나올 만하다. “이거 한번 보십시오.” 말 잘 듣는 애완견으로 변한 그들이 보낸 자료를 내밀었다. “한성일보는 흥신소나 다름없어요. 큰아버지와 영준 형을 밀착 감시했다니까요. 사돈댁 철저히 체크한 이유가 뭐겠어요?” 이 회장은 자료를 넘기며 피식 웃었다. “어디서 갑자기 혼외자라도 나올까 봐 살핀 거구먼. 자기들 딸내미가 낳은 자식이 순양 재산을 차지해야 하니까.” “이거 영준 형이나 큰아버지께 던져주면 그날로 이혼할 겁니다. 흐흐.” “그래서? 가정까지 박살 낼 생각이냐?” 이 회장은 못마땅한 눈빛이었다. “누구 좋으라고요? 영준 형은 자식도 있겠다, 이혼하는 순간 화려한 돌싱 생활 즐길 생각에 만세라도 부를 텐데 내가 왜요?” “어째…. 좀 짠하다. 너 화려한 싱글 생활이 그리운 거야? 벌써?” “회장님. 그다지 안 웃기니까 농담은 그만하시고요. 그리고 지역구 의원 너무 염려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정치는 살아 숨 쉬는 생물 아닙니까? 내년 총선 전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한 자리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건 그 두 사람뿐입니다.” “이놈 보게. 자리 만들어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구나.” “원래 자기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는 놈이 다루기 쉽습니다. 총선 전까지 교통정리 해놓을 테니 안심하세요.” 사실 그들이 준 자료는 꽤 쓸모 있다. 이런 자료를 계속 가져온다면 비례 대표 순번이라도 받아주고 싶을 정도다. “큰아버지가 최근에 자주 만나는 사람들 한번 보세요. 낌새가 보이지 않습니까?” 이 회장은 자료를 들춰 가며 명단을 확인했다. “이 정권에 마지막 선물을 안겨주려는 모양이다. 정부 요인 대부분을 만나고 다니는구만.” “기댈 곳이라고는 정권뿐이라는 말이기도 하죠. 민간에서는 우리 싸움이 더 격렬해지기만 기다릴 테니까요.” “돈 싸움으로는 밀린다는 걸 아니까 정권에 줄 서는 거다.” 그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승계작업을 끝내더라도 공공기관을 확실한 우호지분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자신 있는 건가? 민간 지분을 너무 무시하는데? 아예 접촉이 없어.” 명단을 보며 계속 중얼거리는 이 회장을 진정시켰다. “조금 더 기다려보죠. 경준 형이 뭔가 알아내면 제게 알려줄 겁니다.” “그래. 나도 여기저기 안테나 좀 세워보마.” 이 회장의 께름칙한 표정이 어딘가 찜찜하다. 큰아버지가 접촉한 명단을 보고 뭔가 이상한 낌새라도 알아챈 것일까? *** “조 국장.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이거 필터링 안 했어?” 한성일보 편집국장은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펄럭이며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주워야 했다. “제가 전부 승인한 기사입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뭐? 지금 몰라서 하는 소리야?” 조 국장은 큰소리 지르는 홍 회장보다 그의 곁에 앉아 있는 회장의 딸 홍소영이 더 신경 쓰였다. “며칠간 강경일변도라 잠깐 숨 고르기 하는 중입니다. 기획 기사니까 후속 보도 개념으로….” “조 국장. 당신 지금 누굴 가르치는 거야?” 성질 더러운 기자들의 불평불만도 참아낼 만큼 인내심이 강한 조 국장이었지만 이번에는 참기 힘들 정도였다. 아무리 사주의 딸이라고는 하지만 나이도 한참 아래인 어린 년이 어른들 말씀 중에 불쏙 끼어들다니, 그것도 반말로! 재벌 사모님이 되더니 아예 안하무인이다. 조 국장은 홍소영은 쳐다보지 않고 회장을 향해 말했다. “일본 자본이 동남아 산업을 장악한 걸 빗대어 후속 기사 나갈 겁니다. 미국 자본을 일본 자본의 그림자를 덧씌워 나가면 효과적일 테니까요.” 편집국장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홍소영이 탁자를 탕 치며 소리쳤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조 국장. 누구를 바보로 알아? 이건 숨 고르기가 아니라 아예 논조가 다르잖아! 오늘 기사는 미라클이 한국 경제에 도움 줬다는 식으로 해석 할 수도 있어. 도대체 이런 걸 끄적인 박 주필은 어디 있어? 출근도 안 한 거 아냐?” ‘이런, 씨발…. 아가리를 확!’ 비록 입 밖으로 내지 못했지만, 표정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 홍소영이 눈을 치켜떴을 때 홍 회장이 입을 열었다. “조 국장은 그만 나가서 박 주필 찾아서 멱살이라도 끌고 다시 와. 회사 방침 잘 따르던 자네들이 왜 이런 실수를 한 거야? 내일 조간 확실하게 꾸며. 숨 고르기니 뭐니 시답잖은 변명을 그만두고.” 조 국장은 머리를 숙이고 회장실을 나왔다. 홍 회장이 서둘러 자신을 쫓아낸 이유는 안다. 딸년의 심한 말 때문에 수습하기 힘든 일이 터지는 걸 막은 거다. 조 국장은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은 참으로 간사하다. 그동안 사주 집안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잔소리를 퍼붓거나 질타한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그럴 때마다 어떡하던지 실수를 바로잡으려 노력했지 화가 난 적이 없었다. 정확히 노비의 마음이었다. 잘못 보여서, 혹은 찍혀서 승진이 가로막히거나 요직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만이 머릿속에 꽉 찼던 감정이었다. 사주 집안의 딸이며 재벌가의 며느리인 홍소영이 회사로 쳐들어와 험한 소리 퍼부은 게 한두 번인가? 그럴 때마다 머리를 조아렸다. 엄청난 권력을 쥔 그녀의 마음이 상할까 늘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새로운 길이 보이고 그 길로 걸어갈 결심을 하자 우러러만 봤던 홍소영이 싸가지 없는 부잣집 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존경에 마지않던 홍 회장은 사돈댁 눈치나 보며 돈이나 빼먹으려는 욕심 많은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훤히 보였다. 마음이 있을 때는 밥 흘리는 것도 귀엽지만, 마음이 떠나면 숟가락질마저 짜증 난다. 조 국장은 불같이 일어나는 짜증을 누를 수가 없었다. 만약 저놈들의 지원을 받아 국회로 갔다면 영원히 종살이를 면하지 못했을 것 아닌가? 물론 진도준의 힘으로 국회에 입성한다면 그놈의 종살이는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왕 종살이하는 거…. 언론 사주보다는 순양가의 핏줄이며 재계 최고의 신성이라는 진도준이 낫지 싶었다. 편집국으로 돌아온 조 국장은 사회부 기자 중 베테랑 몇몇을 은밀히 불렀다. “너희들 지금 취재하는 거 애들에게 인계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만 판다.” 기자들의 눈이 번뜩였다. 엄청난 걸 물어 왔든지 아니면 홍 회장의 지시가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홍소영이 알지?” “당연히 알죠. 우리가 아는 홍소영이야 한 명뿐이지 않습니까?” “그래. 그년 털어. 경찰 라인 전부 동원하고 선후배 다 호출해. 솜씨 좋은 두더지 사서 그년 뒤에 붙이고.” 조 국장은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린 기자들 앞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 [315] 주고받는 통수. 1 “국장님.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한성 일보 그 홍소영 맞죠?” “그래. 재벌들…. 말이 부부지 남남으로 사는 거야 다 아는 사실이잖아. 남편에게 마누라라는 존재는 회사를 이어받을 사내자식 낳는 씨받이일 뿐이고, 여자에게 재벌 남편은 사모님 소리 듣게 만들어주는 후광이고.” 이를 바드득 가는 국장 앞에서 사회부 기자들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하극상 정도가 아니라 역모다.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다. “쫄지 마. 내가 책임진다.” “뭘 어떻게 책임진다는 말입니까? 국장님 설마…?” 월급쟁이가 윗사람을 들이받을 때는 마음의 준비가 끝났을 때다. “회사 관두십니까? 어디 스카웃 제의받으셨어요?” 기자 한 명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내년 4월에 취직한다. 너희들도 이제 내게 빨대 꽂아. 내가 옮기기 전에 정치부로 발령 낼 테니까.” 조 국장이 웃으며 말하자 기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 여의도?” “그래. 나랑 박 주필이 낙점 받았다. 여기도 길면 한 달이다. 흐흐.” “아이고, 감축드립니다. 국장님. 이런 경사가….” “그것 때문에 홍 회장님 뵙고 오신 겁니까? 가만, 아닌데? 그랬다면 홍소영이를 털 이유가 없잖아.” 기자들은 조 국장의 스폰서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조 국장은 밝히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차차 알게 될 거다. 아무튼, 방향 확실하게 잡아. 너희들이 홍소영이 머리채를 잡아도 피해는 없을 거다. 알아들었지?” *** “우리의 거래는 어제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못다 한 말이 남았습니까?” “나이를 먹으니 싸우는 것보다는 손잡는 게 더 편합디다.” 갑자기 나타난 한성일보 주필, 박만성은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넉넉한 웃음을 보였다. “우리, 손잡은 거 아닌가요? 저 혼자 착각한 겁니까?” “손은 두개라오.” 손은 두개라……. 빙그레 웃는 그가 던진 말의 진의가 뭔지 생각했다. 박 주필이 싸움을 피하고 싶은 사람, 내가 또 손을 내밀어야 할 사람. 이 양반 보통 아니다. “주필께서 바쁘시겠군요. 가능하겠습니까?” “가족보다 우선하는 게 가업 아니겠습니까? 고집부릴 일이 아니지요.” “일만 잘 성사된다면 저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승낙하신 걸로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급히 가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또 한 번 느꼈다. 영민한 늙은이다. *** “이 친구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한성일보 홍 회장은 하루 종일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난 박 주필이 엉뚱한 소리를 하자 어이가 없었다. “고정하시고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한성일보가 패자의 편에 선 적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진영기 부회장이 지는 싸움이라고?”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진양철 회장이 막내 손자를 앞세울 때, 어쩌면 승패는 정해졌는지 모릅니다. 다 뺏기고 겨우 남은 성 하나를 지키는 쪽과 그 성을 포위하고 연일 공세를 퍼붓는 쪽. 진도준이 유리한 상황입니다.” “이 친구야! 내 딸이라고! 사돈댁이란 말일세.” “그래서요?” “뭐야?” 박 주필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홍 회장은 기가 찼다. 아무리 남의 집안일이라고 하더라도 이토록 쉽게 말할 수는 없다. “다 망해버린 집안의 맏며느리 노릇을 소영이가 할 것 같습니까? 진도준이 순양을 차지하는 순간 이혼 서류를 내밀 애 아닙니까? 회장님은 따님 성정을 모르십니까?” 반박하기 힘들었다. 젊을 때의 진영준이 개차반인 걸 알면서도 결혼했다. 진 회장의 장손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순양그룹의 안주인이 목표인 딸이 망한 집안의 맏며느리 노릇을 순순히 자처할 리가 없다. “한성일보는 삼대째 내려온 가업입니다. 일제 때도, 전쟁에도, 군인들이 한강을 두 번이나 건넜지만 능숙한 처세로 살아남았어요. 그에 비하면 회장님의 가정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참을 입 다물고 서성이던 홍 회장이 박 주필을 향해 말했다. “자네는 이미 승패가 결정 났다고 생각하는구먼.” “역량이 다릅니다. 가장 많은 걸 물려받은 장남과 가장 적은 걸 물려받은 막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세요. 진도준이 가진 HW와 순양, 미라클의 진정한 규모는 아무도 모를 만큼 어마어마합니다. 화력에서 이미 끝났어요.” 홍 회장의 마음이 움직이는 걸 확인한 박 주필은 가장 현실적인 말을 꺼냈다. “진도준이 순양을 차지할 때를 생각하십시오. 우린 말라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이 정권이 진행하는 종합편성채널을 확보해도 광고 편성이 불가능할 정도일 겁니다.” 홍 회장은 종합편성채널을 떠올리자 한숨부터 나왔다. 언론사의 목줄은 독자도, 정권도 아닌 광고주가 쥐고 있다. 지금도 진도준이 뿌려 대는 그 엄청난 광고비를 구경만 하느라 속이 쓰릴 지경이다. 종편 채널에서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엄청난 적자는 불 보듯 뻔하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말 꺼내는 이유가 뭐야? 자네도 그렇고 조 국장도 좀 이상하고….” “진도준이 스카웃 제의를 했습니다.” “역시! 그랬구먼.” 역시 조 국장보다 박 주필이 한 수 위라고 생각했다. 양자택일의 순간에 둘 다를 취하려는 박 주필은 개인의 이익만 계산하는 조 국장이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만약 내가 자네 제안을 거부하면 자네는 어찌할 생각인가? 저쪽에 붙을 건가?” “거부하실 리 없잖습니까? 아닌가요?” 홍 회장은 웃으며 말하는 박 주필의 얼굴에 대고 고개를 가로젓는 건 힘들었다. *** “아이고, 사돈. 신수가 훤하구먼. 결혼식 때 얼굴 잠깐 본 게 마지막이지? 내가 너무 무심했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회장님. 아랫사람인 제가 자주 연락드려야 하는데….” “아닐세, 아니야. 한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인데 나 같은 늙은이까지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다고? 괜찮네.” 언론인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갑의 위치인 광고주를 만나서 그런 걸까? 어떤 사람이든 간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다. “참, 오늘 조간 톱 기사 봤는가? 내가 신경 단단히 쓰라고 지시했네만….” 한국 기업도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변해야 한다. 더 이상 기업 사주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주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설사 외국인이라 하더라도 능력만 된다면 최고 경영자 자리를 내주어야 마땅하다. 화해의 몸짓치고는 낯간지러울 정도였다. “아주 옳은 말씀 하셨더군요. 하하.” 나도 웃으며 낯간지러운 소리 정도는 할 수 있다. 한동안은 서로를 추어주며 낯간지러운 소리를 반주 삼아 식사만 했다. 기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미 서로 손 내밀고 맞잡은 상황이다.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단지 저 늙은이가 내게 확답을 듣고 싶어 굳이 이런 자리까지 만든 것일 뿐이다. “그런데 회장님. 오늘 기사 괜찮겠습니까? 큰아버지께서 많이 노여워하실 텐데요?” “어쩌겠나? 늘 사이좋은 사돈 관계를 유지하는 게 그만큼 힘들다네. 하지만 딸을 둔 죄인 노릇만 하며 지내기에는 내가 짊어진 짐이 너무 커. 한성일보를 지키는 것이 좋은 사돈 관계 지키는 것보다 우선이니 말이야.” “그렇죠. 가업이 우선이죠.” 홍 회장은 내 눈치를 보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어떤가? 이 늙은이가 물려받은 가업을 잘 키우도록 좀 도와주겠는가?” 들어야 할 말이 내 입에서 나오기를 기다린다. “제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언론의 사명을 다하다 보면 국민이 알아줄 것이고 독자가 보답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한성일보는 영원하겠지요. 아, 제가 정기 구독하겠습니다. 그리고 관계 계열사에도 지시하지요. 부서마다 한 부씩 구독 신청하라고 말입니다.” 순간 홍 회장의 안색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들어야 할 말이 아니라 속을 뒤집는 말이니, 아무리 가식적인 웃음으로 살아온 사람이라고 해도 감정을 숨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농담이나 할 때는 아닌 것 같은데…?” “농담 아닙니다. 이 이상 제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진심인가?” 노려보는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제가 할아버지께 배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적과 아군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입니다. 아군이라면 배곯지 않도록 삼시 세끼 잘 챙겨주고 적이라면 곳간에 불이라도 질러서 당장 땟거리 걱정에 잠도 못 자게 만들어 버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내가 적인가? 오늘 아침 신문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해?” 자존심 꺾어 가며 쓴 기사가 분명하다. 항복 선언이며 화해의 신호인데 그걸 무시해 버리니 꺾인 자존심에 소금 뿌린 셈이다. 얼마나 쓰라리겠는가? 노려보는 저 눈빛은 당연히 그럴 만하다. “기사는 감사합니다만, 회장님의 따님은 제 형수입니다. 제가 꺾으려 하는 사람의 아내죠. 우호적인 기사 한 줄로 바꿀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내가 가업을 지키려 딸까지 버린 걸세. 그걸 모르겠나?” “그게 아니라 망해 가는 사돈집에서 딸을 빼내 오시려는 거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할 저를 얻고 싶으신 거고요. 아닙니까?” 아직 주제를 모른다면 더 독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 아무 말도 못 하는 그에게 앞으로의 관계를 일러주었다. “한성일보와 순양이 더는 사돈이라는 인척 관계가 아니면 저와 회장님은 남남입니다. 비즈니스가 아니라면 이렇게 웃으며 겸상할 기회는 없겠죠. 아, 물론 지금도 비즈니스로 만난 건 맞지만 엮인 게 있으니 애매하긴 합니다.” 다물었던 입이 조금 벌어지며 옅은 탄식이 나왔다. 딸이 이혼하지 않는 한 백날 우군이라고 말해봤자 공허한 소리일 뿐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딸이 이혼하는 순간, 동맹이 아니라 주종관계다. 광고주와 언론사, 갑과 을, 나눠주는 자와 얻어먹는 자의 상하 관계만 존재한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한성일보의 힘을 너무 무시하는구먼.” 판을 깨자고 하는 협박이 아니라는 걸 안다. 조금이라도 더 동등한 위치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아직 제 힘을 모르셔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세우시는 겁니다. 언제든 무제한으로 동원할 수 있는 돈과 제가 가진 순양 계열사 그리고 HW 그룹. 이 힘으로 한성 일보를 제외한 대한민국 모든 언론을 움직여 볼까요? 한성일보 혼자 외톨이가 되는 건 한순간일 겁니다.” 다른 언론이 받아주지 않는 기사는 한낱 낱말의 조합일 뿐 힘이 없다. 비슷한 논조의 기사가 줄을 이어야 여론을 움직이고 민심을 움직인다. 한성일보 혼자 특종이라고 떠들어봐야 신뢰를 얻지 못한다. 독립 언론이 힘을 못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제한의 돈이라는 말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뉴욕의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가 누구 것인지 알려준 것이고 홍 회장은 알아들었다. “어차피 이혼은 피할 수 없을 걸세. 그럼 우리 한성일보와 순양은 인척 관계가 아니야. 이래도 더 필요한 게 있나?” “그렇게 된다면야 제가 필요한 건 없습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 꼭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자. 유치원생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수저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누가 알려줘서 될 일이 아닙니다. 깨달으시면 연락주십시오.” 식당을 나와 차에 올랐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홍 회장이다. 이 노친네도 영민한 것 같다. “네. 회장님.” 먼저 전화했지만 쉽사리 입을 열기 힘든가 보다. 나도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들고만 있었다. 꼭 해야 할 말은 그의 몫이다. - …아무쪼록 우리 한성일보… 잘 부탁합니다. *** ======================================= [316] 주고받는 통수. 2 아침 신문을 펼친 홍소영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벌써 삼 일째다. 순양전자를 언급한 미라클의 레이첼은 별다른 행동 없이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는데 한성일보는 삼 일째 특집 기사를 내는 중이다. 얼핏 보면 주식회사의 주인은 오너 가족이 아니라 주주라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지만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는 특정인을 겨냥한 것이다. 바로 그녀의 시댁이다. 시아버지와 남편은 아직 아무 말 없지만, 식탁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분명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홍소영은 아침 식사 대신 일반인들의 출근길에 합류했다. 누구보다도 일찍 출근하는 홍 회장은 아침부터 회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딸을 보자 걱정이 앞섰고 혹시나 시댁에서 혹독한 질책을 받았나 싶어 마음도 조금 아팠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홍 회장은 짐짓 모른 체하며 말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홍소영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아버지가 말씀해주셔야죠.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눈치 빠른 딸이니 시치미 뗄 필요도, 돌려 가며 말할 필요도 없었다. “회사 방침이다.” “그러니까 그 방침이 뭐냐고요?” “네 시댁보다 더 큰 광고주를 따르기로 한 게다. 회사를 위하는 일이니 네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야.” “아버지는 사위까지 버리고 새파란 막내를 선택하신 겁니까?” “새파란 애가 아니라 가장 큰 광고주다. 누가 보더라도 타당한 선택이야.” 타당하다는 아버지의 말에 홍소영의 억눌렀던 분노가 터져버렸다. “그 타당한 선택을 할 때, 딸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었나 보죠?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기대는 않는다마는 혹시나 해서 묻는다. 시댁에서 뭐라고 하더냐? 따져보라고 시키던?” “아빠!” 홍소영은 어릴 때 말버릇이 나올 정도로 흥분했다. “정말 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셨죠? 아니, 외손주 생각은 안 나시던가요?” “진정하고 그 정도로 끝내. 이건 일이다. 너도 시댁보다는 친정인 한성일보 걱정을 먼저 해야 하는 게 맞아.” 부녀는 한동안 서로 노려보기만 했다. 먼저 입은 연 사람은 딸이었다. 그녀는 침착을 되찾았고 아주 현실적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계속 이렇게 나가시면 전 그 집에서 못 살아요. 그건 생각해보셨어요?” “더 심한 생각도 했다.” “네?” “네 시댁이 그나마 남은 전자와 물산마저 뺏기면 과연 네가 그 집 맏며느리 노릇을 계속할까? 아니, 계속해야 하나…? 이런 생각 말이다.” 홍 회장은 흔들리는 딸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얼굴 한번 보고 결혼한 너다. 네가 십여 년을 진 서방과 살 맞대고 살면서 애를 둘이나 낳았지만, 너희 두 사람이 따뜻한 눈길 한 번 주고받는 걸 이 애비는 본 적이 없다. 내가 잘못 본 게냐?” 그녀가 원했고 지금도 원하는 건 순양그룹의 안주인 자리다. 진영준이 매일 밤 여자 분 냄새 풍기며 들어왔지만, 그것 때문에 화가 나지는 않았다. 분통 터지는 걸 참지 못할 때도 있었다. 고모가 백화점을 날려 먹었을 때, 건설과 중공업을 HW 그룹이 차지했을 때만큼은 참지 못하고 남편에게 시아버지의 무능을 퍼부었다. “이미 저울은 기울었어. 진도준 그놈은 돌아가신 진 회장이 낙점한 만큼 대단한 놈이다. 사돈은 진동기 부회장처럼 그룹에서 손을 뗄 게다. 네 남편도 마찬가지고.” 나지막이 말하는 홍 회장은 딸의 모습을 살폈다. 버럭 하며 소리 지르지 않는 걸 보니 그녀도 위기는 느끼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내가 의리를 지킨답시고 난파선 돛대를 붙들고 있다가는 넌 시댁과 친정이 한꺼번에 가라앉는 모습만 보게 되겠지. 그걸 바라는 게냐?” 연신 한숨만 내쉬며 앉아 있던 홍소영은 홍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가 틀렸다면 어쩌실 거예요?” “뭐?” “전자와 물산을 뺏기지 않고 잘 지켜내고, 대현자동차그룹처럼 두 회사를 바탕으로 계열사를 더욱 늘려서 예전의 기세를 되찾으면 어쩌실 거냐고요?”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홍소영은 백을 챙기며 일어섰다. “부디 아버지가 옳은 판단 했기를 바래요. 아니라면 아버지는 딸자식 인생까지 망쳐버리게 한 셈이니까요. 그런데 아버지….” 홍 회장은 딸의 굳어버린 표정에 심장이 덜컹했다. “난파선 선장인 시아버지, 기관장인 내 남편은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고 평안해요. 이건 왜일까? 한번 알아보세요.” 힘없이 돌아서서 나가는 딸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홍 회장은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사돈댁은 평안할 리가 없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 “도대체 넌 한성일보를 어떻게 구워삶았어? 거긴 영원한 적군 아니었나?” 이학재 회장은 신문을 툭 던지며 말했다. “세상에 영원한 적이 어디 있습니까? 주고받을 거 있으면 둘도 없는 친구인 척하는 거죠.” “넌 뭘 줬는데?” “언론사에 줄 거라고는 광고 말고 또 있습니까? 참, HW 그룹 광고, 이제는 적당히 나눠 줘도 됩니다.” “네가 받은 건 뭔데?’’ “뻔하죠, 뭐. 이제 용비어천가를 부를 겁니다. 주인공은 제가 될 거고요. 흐흐.” “그 집도 이제 회오리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겠구먼.” “아시면서 뭘 그러세요? 무늬만 부부였는데. 어? 그러고 보니 영준이 형 좋아하겠는데요? 이제 돌싱 되면 세상 여자 다 가지려고 방방 뛰어다닐 테니….” “영준이는 아직도 그러고 다니냐?” 이 회장은 한심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요즘은 걸그룹 애들에게 빠져서 정신 못 차린다고 하더군요. 상준 형이 그러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삼촌 팬이라고 기획사들이 극진히 대접한다더군요.” “설마 요즘 광고 모델로 얼굴 내미는 애들, 영준이 손을 거쳐 간 거야?” “아뇨. 요즘은 그렇게 노골적으로는 안 한다네요. 행사 뛰느라 몸 축나니까 보약값이나 하라고 기획사 사장에게 몇천만 원 툭 던져주고 싱글 음원 비용이나 뮤비 찍으라고 몇억 던져준답니다.” “사장에게? 여자애 아니고?” “네. 기획사 사장은 세금 한 푼 안 내는 캐시 들어오니까 좋아 죽는 거죠. 그러니까 신인 키우는 기획사는 영준 형에게 얼굴 비치려고 줄 선답니다. 물론 걸그룹 애들에게는 용돈 주고 차를 사 주기도 하고요.” 이 회장은 날 흘겨보기 시작했다. “너 설마 그런 자료 모으냐?” “아주 결정적인 거 두어 개는 쥐고 있습니 다. 필요할 때 한성일보가 터트리면 형수가 좋아하겠네. 이혼 사유로 이 보다 더 적당한 게 어디 있습니까?” “친형을 그런 뒷조사하는 데 써먹다니. 너도 참 못돼 처먹었어.” “그 업계에 있으니까 저절로 아는 거지 딱히 조사 같은 건 하지도 않았어요.” 절반만 사실이다. 보통은 소문만 듣게 되지만 상준 형은 꽤 치명적인 소문일 경우에는 꼭 사실 확인까지 했다. 내가 부탁한 건 아니었지만 내게 도움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리한 것이다. 우리 집안에서 형제끼리 돕고 사는 건 나와 상준 형이 전부다. “그보다도 논의드릴 게 좀 있습니다.” “말해.” “이번 저축은행 사태로 일곱 곳 정도가 문을 닫습니다.” 저축은행은 1972년에 탄생한 상호신용금고의 다른 이름이다. 대기업 중심의 시중은행을 대신해 ‘서민과 중소기업의 금융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탄생했지만, 돈이 서민과 중소 기업을 위해 움직일 리가 없다. 2000년 중반부터는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 로 떠오르며 저축은행은 전성기를 맞았다. 2010년 말 PF 대출은 17조 4000억 원에 달할 만큼 모든 돈은 부산에 집중됐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PF 대출은 부동산 경기가 위축되자 속절없이 무너졌다. 온갖 부실과 부정한 비리가 판을 치던 저축은행은 정부의 한참 늦어버린 조치로 최악의 상태를 맞이한 것이다. 가장 썩은 내가 나는 부분은 영업정지 하루 전, 거액을 예치한 큰손들은 예치한 돈을 전부 인출해서 유유히 사라졌고, 이자 좀 더 받으려 알토란 같은 돈을 예금한 일반 서민들만 그 돈을 몽땅 날린 점이었다. “우리와 상관없잖아. 혹시 순양금융이 거기 발 담갔어?” “아뇨. 제가 푼돈 먹자고 손대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순양생명과 증권에서 저축은행 부실 정리가 마무리될 때쯤 적당 한 거 하나 인수하는 게 어떠냐고 하더군요.” 이 회장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저축은행은 아무래도 급전 땡겨 쓰기 좋으니까 자동차나 건설, 중공업에서 필요할 것 같긴 합니다. 회장님께서 필요하다고 판단하시면 진행하려고요.” “너 이제 네 돈 안 쓰려고? 미라클이 우리 HW 그룹의 저축은행이잖아. 흐흐.” “기회 있을 때 하나라도 더 챙겨놓는 게 나쁘지는 않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면….” “진행하자. 언제까지 대주주 주머니만 믿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네. 그럼 인수 자금 절반은 HW 그룹에서 내는 걸로 하겠습니다.” “뭐?” 이 회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장 빈번하게 은행 돈 가져다 쓰실 분이 왜 그러세요? 투자도 좀 하세요.” “이야, 너도 이제 완전히 재벌 다 됐구나. 자기 돈 안 쓰고 회사 돈으로 불려 나가겠다, 이거지? 하하.” 우리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터트릴 때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一 실장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여의도 미라클에서 온 전화였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一 임시주주총회가 열린답니다. 여의도가 발칵 뒤집혔어요. “진정하고 자세히 말해봐요. 어디 말입니까?” 一 순양물산입니다. “뭐? 순양물산?”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순양물산이라는 말에 이 회장도 놀랐는지 눈을 깜박거렸다. 一 네. 안건은 합병이 분명하답니다. “합병이라니? 순양물산이 어디와 합병한다는 거요?” 一 그게…. 순양애드미디어와…. 순양애드미디어라면 광고 회사 아닌가? 번개를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진영준은 이 회사의 지분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 전화를 끊고 이 회장에게 말했다. “순양물산과 순양애드미디어를 합병한답니다. 곧 임시 주총이 열릴 거라고요.” “뭐? 애드미디어? 그게 말이 돼?” 말이 되는 방법은 딱 하나다. 순양물산 주식 한 주와 순양애드미디어 주식 천 주 정도의 비율로 합병하면 된다. 보통은 이런 복잡한 방법을 쓰지 않고 순양물산이 순양애드미디어의 주식 51% 이상을 매입해서 인수하는 게 정석이다. 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순양애드미디어 지분 구조 빨리 파악해서 알려줘요. 이 회장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 난데…. 무슨 일 있어? 소문 돌던데? 물산이 어디 조그만 회사와 합병한다고 말이야. 뭐? 몰라? 야! 네가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아! 이제 내 얼굴 안 볼 참이야?” 수화기에 대고 몇 번 소리를 지르더니 힘없이 끊었다. “사실이란다. 순양물산 기획실 임원인데…. 자기도 조금 전 주주총회 준비 공문 받았다고….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철저히 비밀로 진행한 거 같다고 하는구나.” “이 건으로 주총까지 여는 거 보면…….” “합병 비율로 장난치는 거다.” “설마 1:1 비율로…?” “그러기야 하겠어? 그랬다가는 주가 폭락인데 주주들이 가만있지는 않을 거야. 높게 잡아도 1:10이야.” 위안하는 말일 뿐이다. 이건 순양물산의 지배력을 확실하게 하는 방법이니 분명히 1:1 비율로 합병한다. 다시 전화가 울렸다. 一 78%가 진영준, 10%는 진영기 부회장 소유입니다. 나머지는 순양애드미디어의 임원들이고요. 이런 젠장, 예상한 대로 100% 진영준 회사다. ======================================= [317] 주고받는 통수 3 “진영기 부회장이 안 될 일을 저지를 만큼 멍청한 사람은 아니다. 또 괜한 일을 벌여 소란을 일으킬 시점도 아니고.” “순양애드미디어는 문제없겠죠. 그런데 순양물산이 제 살 깎아 먹기 하는데 대형 기관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공허한 말만 계속 나왔다. 가까스로 충격을 털어내고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다. 큰아버지가 어디까지 손을 썼는지 확인해야 한다. 밖으로 달려 나가는 날 보며 이 회장이 말했다. “이건 저쪽 승인 없이는 불가능한 계획이다. 알지?” “네. 제가 세종로를 맡을 테니 회장님은….” “여의도는 내가 맡지. 빨리 움직이자. 주총을 무너뜨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순양 본관으로 돌아오자마자 장도형 부사장을 불렀다. “금융감독원에 사람 풀어서 순양물산 합병에 대해 알아보세요.” “네? 물산 합병요?” “진영기 부회장이 손을 쓴 거 같습니다. 순양애드미디어를 끌어들여 물산 지배력을 키우려는 속셈이에요.” “이런…!”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마를 탁 쳤다. “뭡니까? 또 다른 게 있어요?” “순양애드미디어가 유상증자 한다고 했어요. 상장도 않은 회사고 개인 회사나 다름없는데 별 쓰잘데기 없는 짓 다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언제죠?” “이틀 전인가 그렇습니다.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주식 수를 왕창 늘리려는 거다. 그 주식의 양이 바로 순양물산 주식으로 변하는 거니까 말이다. “여의도 증권가에 떠도는 찌라시까지 전부 확인해서 종합 보고 하세요. 아시겠죠? 1차 목표는 합병 무산입니다.” “네. 실장님.” 장도형 부사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뛰어나갔고 난 호흡 한 번 가다듬고 수화기를 들었다. “수석님. 차 한잔합시다. 그 방에서. 지금 당장.” *** 청와대 수석들에게 하나씩 내준 호텔 방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렸고 십여 분이 지났을 때 경제 수석이 호들갑을 떨며 들어왔다. “아이고, 무서워라. 우리 실장님께서 왜 이리 화가 잔뜩 나셨을까나…….” “몰랐다거나 금시초문이라는 말은 마십시오. 청와대 몰래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아니, VIP는 모르실 수도 있지만, 최소한 수석님은 아셨을 겁니다.” “혹시 순양물산 때문에 이러시는 겁니까?” “역시…. 잘 아시네요.” 경제 수석은 난처한 듯 머리를 긁었다. “민간 기업이 합병한다는 걸 우리가 나서서 못 하도록 막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순양 물산이 동네 구멍가게예요? 시가총액 15조가 넘는 기업입니다. 그런 회사가 움직이는 건 이미 사적인 영역을 넘어선 거죠. 정부가 눈감아주겠다는… 아니, 적극 협조하겠다는 언질도 없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일 만큼 진영기 부회장이 바보는 아닙니다.” 따지듯 퍼붓는 내 태도 때문인지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거…. 슬슬 마음 상하려고 합니다. 아직 하지도 않은 합병 건으로 따지는데…. 내가 변명이라도 해야 합니까? 아니면? 주주총회 못 하게 막아요? 경찰 투입하고 살수차 보낼까요?” 이놈이 건방을 떤다. 교체 없이 청와대에 4년가량 출근했으니 장관도, 국회의원도 실세라고 부추기며 꼬리를 흔들었을 테고, 경제 수석이니 대기업 사장들과 겸상도 자주 했을 것이다. 이제 이놈에게는 재벌도 흔해 보이고 여기저기 널린 게 대기업이다. 더는 머리가 숙여지지 않는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수석님.” 나를 노려보는 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진영기 부회장과 저 사이에 끼어 곤란한 거 잘 압니다. 이럴 땐 어느 줄을 탈까 고민하지 마시고 그냥 양쪽이 원하는 거 다 들어주면 됩니다. 서로의 이해가 상충할 때는 발 빼시고요. 괜히 힘자랑한답시고 양쪽을 이리저리 찔러보다가는 더 곤란해져요.” “뭐요?” “아, 더 조심해야 할 것은 당신이 저울의 무게추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엉뚱하게 선물 자루 둘러멘 산타 흉내 내지 말고 핸들 꺾는 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그동안 예의를 잃지 않고 대했지만 그런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은 상투를 쥐고 흔들든 수염을 뽑아버리든 이놈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틀어야 했다. “내일 중앙 일간지 전면에 당신 얼굴 나오게 해드릴까요? 원한다면 방송사 저녁 뉴스도 괜찮고. 대통령 임기 말에 청와대 발목 잡은 경제 수석. 내년 총선 때 퇴임 앞둔 대통령 방어를 위해 국회의원 배지 달고 직업 바꾸는 게 꿈일 텐데…. 어쩌나? 물거품 되게 생겼네.” “되지도 않을 협박 할 생각이라면 접어. 지금까지 권력을 이긴 금력은 없어. 우리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면 국정원과 검찰이 움직인다고.” “과연 그럴까?” 내 입가의 비웃음을 확인한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국정원? 거기 원장님, 오늘 점심 뭐 먹었는지, 누구랑 먹었는지 알아맞혀 볼까?” “뭐?” “원장이야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실무진은 공무원이거든. 그들은 이 정권과 함께 퇴장할 원장보다는 그들의 노후를 책임져주는 0B 모임인 음지회의 눈치를 더 봐. 그 음지회는 누구 돈으로 굴러가는지 알아?” 경제 수석은 내가 국정원까지 손을 뻗쳤다는 걸 알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을 장악했다고 생각하지? 5년짜리 시한부 권력, 그마저도 1년 남은 권력 앞에 줄 설 놈이 있을 거 같아? 세상은 권력이 아니라 돈 앞에 머리 숙인 지 오래됐어. 청와대에 앉아 있으니 그걸 잠시 까먹은 거야.” 여전히 말을 못 하는 그를 불렀다. “이봐요, 수석님.” 그의 멍한 눈이 나를 향했다. “사춘기 때 놀고 싶은 거 꾹 참고 죽을 만큼 공부해서 서울대 가고…. 아, 나도 알아. 할아버지 눈에 들려고 피똥 싸며 공부해서 서울대 법대 갔거든. 그러고 보니 당신이 내 선배네. 아무튼, 그런 동문 팔겠다는 말은 아니고….” 물 한잔을 마시고 그에게도 물 잔을 건넸다. “서울대 나와 타잔처럼 이 줄 저 줄 잡아 가며 모시는 분 대통령 만들어서 청와대 들어가니까 신분이 바뀐 것 같아? 바닥에서 박박 기다가 이젠 바닥에서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벌레 같은 사람들 구경하고, 입만 열면 기자들이 우르르 따라붙으니까 이 나라의 진짜 권력자처럼 느껴져서 기분 째지지?” 경제 수석은 물 잔을 잡고만 있을 뿐 입으로 가져가는 걸 이미 잊은 듯하다. “그런데 신분 상승 그거? 그게 그렇게 쉽게 된다면 왜 신분이라는 말을 붙이겠어? 신분은 딱 두 종류야. 말 한마디로 상대를 시궁창에 처박을 수 있는 사람과 시궁창에 처박히지 않으려고 시키는 대로 다 하는 사람. 당신은 어디에 속해 있는 거 같아?” 이제 경제 수석에게 현실을 보여줄 시간이다. 스마트폰을 꺼내 스피커를 켜고 전화를 걸었다. “지검장님. 자료 받으셨죠?” 一 네. 실장님. 근데 이거 괜찮겠습니까? 조금은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습니다. 포문은 검찰이 아니라 언론이 열 테니까요. 검찰은 재빠른 수사 착수라는 모양새를 지킬 겁니다.” 언론이 먼저 기사화한다는 걸 알자 지검장의 목소리는 한결 가벼웠다. 一 알겠습니다. 그럼 방송 확인하고 수사 착수하겠습니다. “지검장님.” 一 네. “청와대 수석이라 부담되신다면 덮으셔도 됩니다.” 一 아닙니다. 이런 확실한 증거를 덮는 건 직무유기죠. 통화를 끝내자마자 그가 소리쳤다. “도, 도대체 무슨 자료야?!” “언론과 검찰이 아주 흥미로워할 자료지. 기억을 더듬어 봐. 뭘까? 아…! 한두 개가 아닐 테니 단번에 기억을 떠올리는 건 힘들겠지?” 자신이 마주한 현실이 어떤지 깨달은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뭐요? 이미 말했듯이 진영기 부회장이 진행하는 걸 내가 막기는 힘들어요.” 말투도 좀 더 공손해진 것 같다. “그럼? VIP까지 승인한 거요?” “모르겠어요. 어느 선까지 움직이는지….” “대기업 합병을 경제 수석이 모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사실이라니까! 난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언론 브리핑 준비하라는 지시받은 게 전부란 말이요. 나 모르게 움직이는 일에 괜히 호기심 보이면 안 되는 곳이라는 걸 잘 알잖소?” “좋아, 그렇다 치고. 그럼 아는 건 뭐요?” “난 그냥 인사 한 번 한 게 전부요. 경제부총리와 밥 먹는 자리에 나와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만 하고 다른 말은 없었어. 그 뒤에 합병 소식 통보받았고.” “진영기 부회장이 직접 인사드렸다고? 설마…?” 부탁 따위를 위해 직접 얼굴을 비칠 사람이 아니다. 그 정도는 백준혁 비서실장 정도면 충분하다. “아니, 진영준이 온 거요.” “진영준?” “그렇소. 이제 그룹 경영은 자신 책임진다며 큰소리 땅땅 치고 갑디다. 승계와 동시에 전면에 나서겠다는 뜻 아니겠소?” “그럼 이번 합병 건으로 진영기 부회장은 모습을 보인 적 없고 진영준이 일일이 돌아다닌 겁니까?” “아마도요. 그룹 지분 전부 물려줄 진영기 부회장은 이제 스스로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라고 광고까지 합니다. 아들 키워주려고요.” 부모 노릇 한다고 애쓰는 모습이 눈물겹다. “수석님.” “네.” “아무래도 소문이 틀린 것 같군요.” “무슨 소문 말입니까?” “수석님이 실세라는 소문. 실세치고는 이런 중요한 일에 관여하지 못했다는 건 전례가 없을 겁니다.” “이봐요! 진 실장!” 발끈한 그가 다시 소리 질렀을 때 난 손을 가볍게 저었다. “진정해요.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뭐요? 생각? 나 참, 기가 차서….” 혀를 차는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정권 말에 큰일 하나 벌였는데 거기서 빠진 겁니다. VIP는 아무래도 수석님과 같이 갈 생각은 없어 보이니 생각 잘해서 줄 갈아타세요.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시고.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릴 테니까요.”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스스로 이미 느끼고 있었다는 뜻이다. “험한 소리를 너무 많이 한 것 같아 미안합니다만 이해하세요. 나도 지금 다급하거든. 하하.” 웃으며 일어나자 그가 머리를 꾸벅 숙였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건방을 떨었습니다. 이 건은 제가 좀 더 알아보고 새로운 사실이 나오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참, 트렁크에 몇 상자 더 넣어 뒀습니다. 앞으로 돈 쓸 일 많을 텐데 부족하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다시 한 번 깊숙이 머리 숙이는 그를 두고 호텔을 나왔다. *** “진영기 부회장이 모든 걸 던지고 얻은 거다. 다들 그간의 인연을 무시하지 못해 눈 감아주는 거라고 하더라.” 이학재 회장이 여의도를 한바탕 휘젓고 얻은 소식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어떠냐고, 전자와 물산 계열은 장자가 차지하는 게 우리나라 정서에 맞지 않겠냐…. 뭐 이런 의미였어. 찢어진 순양에서 잡음 나는 건 지들도 불편하단다.” “그러니까… 하다 하다 동정 여론까지 끌어들였다는 겁니까?” “좋아하는 거보다 더 무서운 게 불쌍하게 생각하는 동정심이다. 이건 제 주머니까지 열어 도와주고 싶은 감정이거든.” 그놈의 장자, 거기다 늙은 부회장의 읍소. 세상을 제 것인 양 호령하던 큰아버지가 이런 유치한 방법까지 동원할 줄이야. “도대체 어디까지 손을 썼길래 합병을 자신하는 겁니까? 최소한 세 곳 이상의 기관은 무조건 손을 들어줘야 가능한 거 아닙니까?” 이 회장은 서류 몇 장을 내밀었다. “일단 지분 현황으로 분류해봤다. 여론을 끌어올려 개미 주주들은 합병 찬성표로 만들 테고….” “개미 주주 전부를요? 가능하겠습니까?” 이 회장은 날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네 실수다. 개미 주주들이 저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도록 명분을 준 게 너라고.” 내가? 내가 뭘 잘못했길래? ======================================= [318]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게 가능할까? 1 집안의 막내가 재산을 차지하는 게 그 정도까지 국민 정서에 어긋나는 걸까? 그런 잡음이 나지 않도록 PI 전문가까지 고용해서 이미지를 만들지 않았던가. 순양가의 가장 뛰어난 천재적인 경영자. 이 이미지가 얼마나 먹혔는지 여론 조사까지 수차례 했다. 순양그룹의 경영자로 가장 적합한 인물은 누구인가? 이 질문의 대답으로 내 이름이 압도적이었다. 고령층은 누가 누군지도 모르니 장남이라고 대답했지만 말이다. 영문을 몰라 눈만 휘둥그레진 나를 보며 이 회장은 짧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가 레이첼을 통해 툭 던진 그 말, 그걸 이용하는 거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 “설마 애국심이니 국부 유출이니 하는 것 말입니까? 그게 먹히겠어요?” “일부는 먹히겠지. 하지만 순양전자 주식은 예금의 성격이 강해.” 예금은 안전이 일 순위다. 순양물산의 합병은 순양전자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일이니 순양전자도 변함이 없다. “전횡을 일삼는 오너 가족보다는 전문 경영인이 전자를 맡으면 주가가 두 배는 뛸 텐데….” “일반인들이 그런 걸 알면 순양그룹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못했다. 각각 독립적인 회사만 존재했을 거야.” 누굴 탓하겠는가? 이런 국민 정서 때문에 순양가, 대현가 같은 말이 나오고 내가 순양그룹을 차지하더라도 모두 머리를 끄덕일 것 아닌가? “그럼 개인 주주는 다 날리고… 기관 세 곳은….” 서류를 보자 저절로 이마에 깊은 주름이 됐다. 은행 한 곳은 순양전자의 주거래 은행이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나머지 두 곳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산업은행, 그리고 국민연금공단이라….” “이제 알겠냐? 저들이 합병에 자신감을 내보이는 이유를?” “하나는 확실하게 알겠군요. 누가 승인했는지.” 이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승인이 아니라 묵인이다. 세종로나 여의도는 가타부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 뿐이야.” “책임질 일 만들지 않겠다는 거군요.” “그래. 국민연금공단이 소유한 순양물산 주식은 국민의 것인데 그 가치를 확 떨어트리는 일에 손을 들어주는 거야. 누군가 나서서 문제 삼고 따지고 들면 곤란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 다시 서류를 확인했다. 물산과 애드미디어의 합병을 전제로 한 지분구조를 꼼꼼히 들여다보니 한숨이 나왔다. 진영준은 물산을 확실하게 장악한다. 그 말은 물산과 연계된 계열사를 장악한다는 뜻이며 순양전자 역시 손아귀에 넣는다는 말이다. 물론 전자와 연계된 다른 계열사 전체도 그놈의 주머니에 들어간다. 두 주력 회사를 손에 넣고 그놈 지분 100%의 자회사를 잔뜩 늘려서 전자와 물산의 주식을 흩어버리면? 과연 되찾아 올 기회가 남아 있을까? 어두워진 내 표정을 본 이학재 회장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주주총회… 개판 쳐버릴까?” 전문 총회꾼 불러다가 주주총회를 무산시켜버리는 것쯤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간을 좀 더 끄는 수단일 뿐이다. “소용없다는 걸 잘 아시면서….” “시간도 벌고 합병을 묵인하는 놈들에게 압박을 주는 거지.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는 걸 가장 꺼리는 게 정치하는 놈들 아니냐? 합병이 그들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고….” 이 회장은 다시 한 번 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가 가진 걸 써서 원점으로 돌리게 만드는 거야.” “내가 가진 거…? 아…!’’ 할아버지가 남기신 그 장부를 말하는 것이다. 그 장부에 이름 올린 사람들을 협박한다면 합병은커녕 주총도 열리지 못 한다.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사실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바로 그 장부였다. 하지만 유혹을 뿌리쳤다. “그건 영원히 쓰면 안 됩니다. 그냥 기록으로 존재해야 하는 겁니다.” “이 정도 다급할 때라면 회장님도 쓰셨을 거다.” “아뇨. 할아버지도 저와 같은 생각이실 겁니다. 그 장부를 사용하는 순간 순양은 더 이상 순양이 아니게 됩니다.” “순양이 아니게 된다…?” “우리만큼 다른 재벌들도 돈 뿌립니다. 하지만 언론에, 검찰에 그리고 국회에서 그들의 이름은 늘 오르내리지만, 우리 순양의 이름은 꽤 오래전부터 자취를 감췄어요.” “그게 기록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이유냐? 절대 써먹지도 못하고?” “네. 다른 재벌의 돈을 챙긴 사람들은 받은 돈만큼만 도와줍니다. 하지만 순양은 다르죠. 절대 탈 나지 않는다는 믿음, 해준 것 이상으로 챙겨준다는 기대. 이것 때문에 자진해서 우리를 도와줍니다. 마치 미녀의 손길을 한 번이라도 더 받기 위해 꽃다발을 안기는 사내들처럼 말입니다.” 이 회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는 안다만 전자와 물산을 잃어버리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 장부에 이름 올린 놈들은 너와 진영준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남에게 뺏기는 게 아니라 회장님의 핏줄이 나눠 가지는 모양새니까 말이다.” “제가 그룹을 전부 차지하는 게 끝이라면 장부를 썼을 겁니다. 하지만 그 뒤도 생각해야죠. 이 나라에서 영원히 순양으로 남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계속 미모의 여인으로 존재해야죠.” 그제야 이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회장님이 네게 장부를 물려준 건 참으로 현명하신 선택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구나. 진영기 부회장이나 영준이 놈이었다면 그 장부를 흔들고 다니며 온갖 무리한 요구를 다 했을 거다.” 이 회장의 칭찬이 용기를 북돋웠지만, 여전히 답답했다. 이럴 때 먼저 해야 할 일은 부닥쳐보는 것이다. “그럼 한번 만나 볼까요?” “누굴? 진영기 부회장?” “아뇨. 영준이 형요. 두 주력사를 손에 넣고 뭘 하려는지 확인해야겠습니다. 도망치려는 건지 아니면 그걸 밑천으로 다시 판을 벌일지 말입니다.” “그거 확인해서 뭐하게?” “도망치지 않고 다시 판 깔도록 도발이라도 해야죠.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이 회장은 웃으며 일어서는 날 보며 말했다. “아예 숨어버리는 건 아닌지 그게 더 걱정이다. 살살해.” * * * “네가 직접 날 찾은 걸 보니 초조한가 보지?” 진영준은 날 보자마자 피식 웃었다. 팍 쪼그라들고 거기에 만족하는 주제에 승자 같은 표정이다. “그렇게 발 빠른지 몰랐어. 이럴 줄 알았다면 발부터 묶어 뒀어야 하는 건데.” “헛소리나 하려면 돌아가고. 용건만 말해.” “정말 물산과 전자만 있으면 돼? 이런 식으로 나오면 국경에 담쌓는 꼴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내 걱정은 접어 둬. 난 만족하니까. 특히 네가 직접 찾아와서 날 긁는 걸 보니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확실하다. 네가 다른 사람 열 받게 할 때는 늘 이유가 있었지. 흐흐.” 이번은 아니다. 얕은꾀를 부린 이놈을 그냥 열 받게 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밥값 좀 했다고 들었는데, 직접 관계된 사람들 다 만나서 설득했다면서?” “쉬운 일이지. 네가 금융 그룹, 백화점 그룹, 건설 중공업 그룹을 가졌고 내가 전자 물산 그룹을 갖겠다고 하니 모두 머리를 끄덕이더라. 누가 보더라도 내가 밀려난 장남으로 보이거든. 뭐…. 사실이기도 하고.” 많이 달라졌다. 한결 여유가 있어 보인다. “힘들게 뛰어다니며 뒤집으려 하지 마. 그 사람들, 이구동성으로 말할 거다. 그 정도면 네가 충분히 가졌으니 욕심 그만 부리라고 말이야.” “나야 그렇다 치고, 전자와 물산만으로 만족하는 걸 보니 형은 마음 비웠나 보네. 내가 가진 거 탐나지 않아?” “그다지. 흐흐.” 도발에 넘어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씁쓸한 웃음이 아니라 약간의 아쉬움만 감도는 표정이었다. “자동차는 조금 탐나지만, 나머지는 금방 채울 수 있거든. 건설, 중공업, 증권, 백화점, 호텔…. 고만고만한 거 널렸어. 인수해서 키우면 돼. 하지만 넌? 순양전자와 순양물산만 한 건 이 나라에 없어. 맨땅에 머리 박고 시작해야 하는데…. 가능하겠어? 진심으로 말리고 싶다. 돈만 날릴 거야.” 이젠 충고까지? 이놈과 난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 난 이놈이 가진 걸 다 뺏고 시궁창에 처박는 게 목적이지만 이놈은 자신이 가진 걸 지키고 더 키우는 게 전부다. 진영준은 나 혼자 남겨 두고 링을 내려갔고 체급과 종목을 바꿔 버렸다. 두 번 다시 판을 벌이지 않을 것이다. “충고는 고마운데 주총부터 잘 끝내야 하지 않겠어?” “왜? 막아보려고?” “이대로 구경만 하고 있기에는 내 손에 쥔 무기가 좀 많아서.” “자신 있으면 해보든지. 아버지와 내가 주주들에게 공들인 게 어느 정돈지 알면 그런 소리 못 할 텐데…. 말리지는 않으마. 뭐라도 해야 마음 편하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갑자기 진영준은 상대하기 어려운 놈으로 변해버렸다. 마음 비우고 싸울 마음 없는 놈의 멱살을 쥐고 흔들어봤자 기운만 빠진다. 싸워야 할 상대는 이놈이 아니다. * * *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아닙니다. 순양금융그룹의 실세이신 분이 뵙자고 하는데 냉큼 달려와야죠. 허허.” 현완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장도형 부사장의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공손한 듯 들리는 말투지만 표정과 태도는 정반대다. 돈이 벼슬인 세상이다. 세계 3대 연기금 중 하나이며 무려 600조 원에 가까운 국민연금을 굴리는 자리의 수장이다. 오죽하면 ‘자본시장의 대통령’ 이라고 부르겠는가? 국내 주식 보유 금액만 100조 원이 넘고 해외 주식도 마찬가지다. 채권이 300조, 기타 투자도 100조 원에 달한다. 현완주 본부장이 외국을 방문하면 최소한 장관급이 영접하며 원한다면 그 나라의 국가원수를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런 그가 아무리 순양이라 해도 부사장인 장도형에게 머리 숙일 이유는 없었다. 술 한잔 나누며 식사하면서 가볍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 장도형 부사장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증권가가 떠들썩합니다. 이유는 잘 아시겠죠?”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순양그룹 사람들에게는 큰일이겠지만 민간 기업이 합치고 찢어지는 일이야 다반사 아닙니까?” “너무 기이한 합병이니 그런 게지요. 항공모함과 나룻배 아니, 뗏목 하나와 합치는 꼴 아닙니까? 순양물산 15% 지분의 국민연금이 찬성한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요.” “찬성이라니? 누가 그럽니까?” “아닙니까?” “아직 결정한 바 없어요. 우리 의견은 주총에서 밝힐 겁니다.” 시치미 떼는 현완주 본부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선수끼리 왜 이러십니까? 국민연금이 반대하면 해보나 마나한 안건인데 진영기 부회장이 밀어붙이는 건 그만큼 자신 있다는 소리 아니겠어요?” 기금운용본부장은 기금의 투자를 책임지기에 금융권 출신이다. 두 사람은 이 바닥에서 함께 뒹굴었던 과거를 공유한다. “부사장님이야말로 왜 이러십니까? 뻔한 이야기 아니겠어요? 움직이는 사람이 있고 난 그 사람 장단에 맞춘다는 걸 모르시고 묻는 겁니까?” 본부장의 언성이 높아진 건 그도 이 말이 안 되는 합병을 찬성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하지만 까라면 까야 하는 공무원이라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 장단에 맞춰 주시는지 속 시원하게 말씀해주십시오.” 한동안 침묵만 흘렀다. 참다못한 장도형 부사장이 말했다. “청와대 지시입니까?” “VIP가 이런 걸 지시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복심(腹心)이 움직이는 거죠.” “복심?” VIP의 복심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딱 한 명이다. VP의 친형인 국회의원. “그분이 지휘하는 겁니다. 기획재정부, 보건복지부는 손발이 돼서 움직이고요.” 대통령의 복심과 주요 부처의 수장이 나섰다면 더 물어볼 것도 없다. 합병은 성공할 것이다. ======================================= [319]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게 가능할까? 2 이렇게 무리한 일을 뒤에서 밀어줄 때, 공짜는 없다. 진영준 측은 분명 어마어마한 대가를 약속했을 것이다. 장도형 부사장이 조심스레 물었을 때 현완주 본부장은 목소리를 확 낮췄다. “나도 흘려들은 이야기라 확실한 건 아니오. 진영준이 중견 건설사 하나를 인수할 텐데…. 그 건설사 지분을 나눈다고 들었어요. 더 자세한 건 나도 모르고.” 진영준이 뺏긴 순양건설 대신 새로운 건설사 하나를 만드는 건 정해진 수순이다. 그룹 계열사의 물량만 소화해도 운영에 무리가 없고 비자금 만드는 데 꼭 필요한 부분 아닌가? 자세한 건 모른다는 말로 한 발 뺐지만, 그리 망설이지 않고 뒤에서 오고 가는 거래를 털어놓는 현 본부장에게 장도형 부사장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본부장님. 아니, 현 선배. 혹시 때려치울 생각이십니까?” “주총에 참석하는 건 내 후임 본부장이 될 거요. 이 건을 께름칙하게 생각하는 날 그대로 뒀다가는 공든 탑이 무너질지도 모르니까.” 투자사 출신으로 수백조를 주무르는 자리에 앉았지만, 고작 2억 남짓한 연봉으로 일한다. 수백조 운용 책임의 무게를 생각한다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낮은 보수다. 공적인 책임감이 없다면 쉽게 앉기 힘든 자리다. 그래서 국민연금공단에서도 외부에서 운용본부장을 모셔 오는 게 항상 골칫거리라고 말한다. 그런 본부장이 사표를 던질 만큼 부당한 압력을 받고 있다. 혼란은 항상 반전의 기회를 깊숙한 곳에서 품고 있다. 장도형 부사장의 머리가 무섭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진도준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을 정리한 장도형은 진도준이라면 했을 말 하나를 던졌다. “현 선배, 우리… 거래 하나 할까요?” * * * “건설사? 고작 그거 하나로 수십, 수백조짜리 회사의 주인 자리를 내줬다고요? 그럴 리가?” 기금운용본부장을 만나고 온 장도형 부사장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현 본부장이 아는 게 그것뿐이겠죠. 더 많은 뒷거래가 있을 겁니다.” “젠장, 그 양반들 원하는 거 내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는데, 하필 큰아버지와 거래하다니.” 왜 그런지 알면서도 괜한 푸념 한 번 해봤다. 그들과 전혀 다른 세대인 나보다는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큰아버지가 추잡한 뒷거래를 하는 데 훨씬 더 믿음직스러웠을 것이다. “실장님. 그래서 제가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거래? 현완주 본부장 말입니까?” “네. 그 양반은 이번 합병 건으로 자신의 경력을 망칠 생각이 없어요. 주주총회 전에 물러날 생각입니다.” “현명한 사람이군요. 그래, 어떤 제안입니까?” “스스로 사직서를 던지지 말고 끝까지 반대 의견을 고수해서 쫓겨날 때까지 버티라고 했습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서 합병에 대한 일치된 찬성이 나오지 않는다면 위원을 교체하는 수밖에 없다. 본부장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요?” “쫓겨날 때까지의 과정을 전부 기록하라고 했어요.” “녹취 말입니까?” “녹취든 기록이든 유용한 증거가 될 수준으로 말입니다.” “끝장을 보자…?” “이거 막으려면 소송뿐입니다. 주총은 정당한 절차지만 두 회사의 합병 비율은 증권 공시 규정 위반입니다. 합병 가액 산정방법인 자산가치, 수익가치, 상대가치 전부 세칙에 어긋나니까 승산 있습니다.” “진짜 그렇게 믿습니까? 부사장님?” “그, 그건….” 대답하기 곤란한지 말을 더듬었다. 지금 합병이라는 탈을 빌려 쓴 싸움에 가담한 이들은 법 위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소송이든, 언론이든 세상을 아무리 시끄럽게 만들어 봤자 그들이 짠 시나리오대로 세상은 굴러간다. 법을 손아귀에 쥔 사람들의 싸움. 이 싸움의 승자는 항상 그랬듯이 정권이 손을 들어주는 쪽이다. 법 집행의 주체가 바로 정권이기 때문이다. “질책 아닙니다. 잘하셨어요. 그럼 현 본부장이 원하는 건 뭐였습니까?”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본부장 자리에서 쫓겨나면 좀 쉬고 싶다고 하더군요.” “충분히 쉬라고 하세요. 언제든 원하는 자리 내주겠다고 말씀하시고요. 그분의 기록이 누군가의 목을 조를 만큼은 되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누가 뒤에서 움직이는지 확인하자 맥이 탁 풀렸고 피곤이 몰려왔다. 눈을 감고 소파에 머리를 기대자 장도형 부사장은 슬그머니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변호사들을 불렀다. 과연 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알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실장님께서 경영참가를 목적으로 순양물산 주식 보유량을 공시해야 합니다.” “또한, 순양물산과 이사진들에 대한 주주총회결의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는 법적 절차에 착수해서 주총을 막아봐야죠.” “하나 더 있습니다. 순양애드미어와 물산의 자산가치가 너무 차이 나니까 순양물산이 자사주를 매각할 겁니다. 믿을 만한 곳에 넘겼다가 경영권 확보하면 다시 사들이겠죠. 다른 자회사나 계열사에서 말입니다.” 변호사들이 쏟아내는 의견을 듣고 되물었다. “승산이 있어요?” “우리 쪽 계산 결과는 이렇습니다. 불공정한 합병 비율로 인해 물산의 장부가치 7조 8000억 원을 진영준 개인에 게 넘기는 꼴입니다. 우린 이걸 강조해야 합니다.” “그럼 저쪽에서는 어떤 논리를 펼 것 같습니까?” “합병으로 인한 시너지 효과를 강조하겠죠. 순양애드미디어는 규모는 작지만, 순이익률이 엄청나니까요. 그리고 순양애드미디어가 보유한 다른 계열사 주식을 거론할 겁니다. 그 계열사와의 사업 연계가 원활해져서 얻는 가치 등등….” 변호사들의 말은 어차피 법정에서 울려 퍼질 공허한 숫자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도로는 법 집행자들을 이길 수 없다. 그들을 내보내고 다시 혼자 남았다. 뭘 해도 성에 차지 않았다. 설사 모든 힘을 동원하고 법원을 구워삶아 가처분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현상 유지가 전부다. 온갖 난리를 다 치고도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너무 비효율적이다. ‘소 뒷걸음질에 쥐를 잡는다.' 는 속담은 우연이나 요행을 말하는 거지만, 할아버지는 다르게 말씀하셨다. 무능한 사람에게 소만도 못한 놈이라고 하셨다. 「소도 한 걸음 움직일 때 쥐를 잡는다. 하물며 사람이라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뭐라도 건지든, 한 놈을 잡아 죽이든 해야 할 것 아니냐!」 막대한 비용과 인맥을 동원하고도 현 상태를 유지한다면 할아버지는 곧바로 멍청한 놈이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바로 그 음성이 귀를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을 때 일어났다. 한 놈을 죽이고 뺏어야겠다. * * * 내 계획 아니, 지금은 생각이다. 내 생각을 다 듣고 난 후 이학재 회장은 놀라기보다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한참 뒤에 나온 말은 아주 짧았다. “자신 있어?” “잘 모르겠어요. 자신 있어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꼭 해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상태가 계속 지속되면 그대로 굳어질 뿐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앞으로 서브프라임이나 두바이 사태 같은 기회가 내 기억에 없기 때문이며, 5년 만에 두 배로 커버릴 거대한 순양 전자를 등에 업은 진영준은 자신의 성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건 입 밖으로 내지 못하니 다른 말을 했다. “큰아버지와 영준이 형은 도망친 다음 돌아올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네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한 발짝이라도 비끗하는 날에는 네 손으로 저쪽 성을 쌓아주는 꼴이 된다. 알지?” “네. 그러니 자신 있다는 말을 못 하는 겁니다.” 이 회장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시기는 언제로 잡을 거냐?” “대선이 딱 1년 남았죠? 그러니까 내년 하반기부터 시작할 생각입니다. 정권 교체기 때에는 공무원도 눈치 보느라 바쁘거든요. 구멍 뚫린 곳이 많을 겁니다.” “주총을 최대한 연기시켜야 하겠구나.” “네. 소송전으로 가야겠죠. 저들이 원하는 주총은 5, 6월에나 가능할 겁니다.” “거참, 줄타기도 보통 줄타기가 아니네. 꼭 져야 할 소송을 질질 끌어야 한다니 말이다.” 만약 주주총회결의금지 가처분 소송에서 내가 이겨버리면 큰일이다. 시체가 나와야 살인죄가 성립하듯이 주총은 열려야 하며 합병은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사냥을 시작할 수 있다. “이 줄타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뭘 해도 질 소송이니까요. 문제는 그다음이죠.” “결정적인 한 방이라….” “큰아버지는 이번 합병 건으로 써먹을 수 있는 카드는 다 썼으니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입니다. 그분은 꼼작 못 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을 때까지 호랑이다.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 “공적인 부분에서는 미약하나마 전화라도 한 통 돌릴 수 있겠죠. 하지만 사적인 부분이 터져 나오면 미약한 힘마저도 쓰지 못할 겁니다.” “사적인? 그게 무슨 뜻이지?” 이 회장은 이해하기 어려운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룹 전략팀 직원들이 내 눈과 귀 역할을 한 지 오래됐습니다. 우리 집안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제가 훤히 알아요.” “뭐?” “아, 그 직원들은 자신들이 내 눈, 귀라는 걸 모릅니다. 그냥 밥 먹을 때, 술 마실 때 주절대는 내용이 고스란히 내게 들어오니까요.” 말을 잊고 눈만 깜박거리던 이 회장이 신음 같은 소리를 흘렸다. “아…… 김윤석이가 그쪽 출신이지?” “네. 하지만 진짜는 신석호 부장입니다. 절 위해 일한 지 십 년도 넘었어요.” “신석호? 그 친구는…?” “네. 가장 오래됐죠. 그 덕분에 큰아버지 가족 담당 부장 아닙니까? 세상에 숨기고 싶은 내용이 산더미입니다. 전 결정적인 거 몇 개만 확보할 생각입니다.” 이학재 회장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영준이는?’ “다행히 이번 합병 건에서는 영준이 형이 전면에 나섰다고 하더군요. 소송으로 질질 끌면 또 나설 겁니다. 기회는 분명히 있어요.” “바보 같은 자식.” 이 회장이 혀를 찼다. “백 실장은 꿔다놓은 보릿자루도 아니고…. 인사만 하고 빠져야 하는데 직접 청탁하다니.”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회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할아버지 돌아가시니까 두 큰아버지가 가장 경계한 분이 바로 회장님이십니다. 흐흐.” “그럼 또 한 번의 기회가 있겠네.” 이 회장이 빙긋이 웃었다. “네?” “백 실장 말이다. 토사구팽 신세 아니겠어? 내가 가려운 데 한번 긁어줘? 어떻게 나오는지 보게?” “그것도 좋겠네요. 하나는 확실합니다. 첫째 큰아버지나 영준 형이나, 사람 귀한 줄 몰라요. 백 실장…. 지금쯤 분명히 마음 많이 상했을 겁니다.” 백준혁 실장이 끝없이 충성하는 사람이라도 상관없다. 그는 아직 외부의 충격을 받은 적이 없어 관성의 법칙에 충실할 뿐이다. 유혹받은 적 없는 충성심이 얼마나 견고할지는 충격을 줘야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배신하면 무섭게 변합니다. 예전에 회장님 밑에서 일했으니 잘 아시겠네요?” “인간이 거기서 거기지 뭐. 욕심 채우고, 자존심 세우고, 쪽팔릴 일 없으면 마음 기울기 마련이다.” 하나 더 있다. 상처가 있다면 상처를 달래야 하고, 상처를 달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상처에 약 바르는 게 아니라 내게 상처 준 놈에게 똑같은 상처를 주는 것이다. 백준혁 실장은 누구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었을까? * * * ======================================== [320]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게 가능할까? 3 2012년은 선거의 해라고 할 만큼 지구촌 곳곳에서 선거가 치러질 예정이었다. 우리나라는 총선과 대선이, 미국, 러시아, 멕시코, 스페인, 프랑스 등은 대통령 선거가 기다린다. 하지만 한국의 새해는 소송 하나가 모든 이슈를 잡아먹고 세상을 시끄럽게 해버렸다. 언론은 주주총회결의금지 가처분 소송을 ‘막내의 반란’ 이라던지 ‘막내의 역습’ 이라는 자극적인 카피를 뽑아내며 클릭을 유도했고 엄청난 광고 수익을 벌어들였다. 법정에서는 한국 최고의 두 법무법인이 진검 승부를 겨뤘고, 법정 밖에서는 일방적인 싸움이 펼쳐졌다. 언론의 입장에서는 나나 영준 형이나 어차피 대형 광고주다. 양측의 비중을 비슷하게 다뤘지만, 내 사진만 실리면 클릭과 댓글이 폭주하니 여론전은 압도적인 승리였다. “기업이 왕조는 아니죠. 적장자 승계 원칙이라는 게 현대 사회에 가당키나 합니까? 게다가 편법까지 동원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진도준 씨 역시 한 핏줄 아닙니까? 외부에서 보기에는 왕조의 왕자들 싸움으로 보입니다. 진영준 씨와 진도준 씨 누구라도 차이가 없어요.” 보기에는 핵심을 찌른 질문 같지만, 인터뷰라는 게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한 적 없습니다. 전 편법을 넘어 불법에 가까운 합병을 반대하는 것일 뿐입니다. 순양물산의 주주로서 말이죠.” “순양물산 주주 중에 소송까지 불사한 건 진도준 씨가 유일합니다. 그 이유가 그룹 승계와 관련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으세요?” 준비한 답을 말하려다 멈칫했다. 좀 더 화끈하게 불을 지르는 게 나을 것 같다. “제가 왜 순양물산을 원한다고 생각하시죠?”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할지라도 패를 잘못 낼 때도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순발력이다. 다행히 인터뷰하는 기자는 순발력이 있었다. “그, 그야… 순양물산을 차지하면 순환 출자 구조 덕택에 순양전자까지 손에 들어오기 때문 아닐까요? 또한 전자가 가진 타 계열사 지분까지 덩달아 확보하니 말 그대로 호박이 넝쿨째….” “그러니까 제가 왜 순양전자를 원한다고 짐작하는 겁니까? 전 순양그룹을 욕심내지 않습니다.” 엉뚱한 답변에 오기가 발동했는지 기자의 질문에 날이 서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요? 원하지도 않는데 굳이 법정 소송까지 시작할 필요가 있을까요?” “기자님.” 난 웃으며 기자의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아주 궁금해하는 게 있죠. 저 진도준이라는 놈은 투자의 귀재라고 하는데 과연 재산이 얼마나 될까…?” 기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내가 내 재산을 밝힌다면 그야말로 초특급 특종을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포브스지에 이름 올리는 부호들이 타 기업을 차지하기 위해 소송 거는 거 보신 적 있습니까?” “아, 아뇨.” “기업을 차지한다는 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차피 장사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돈을 벌기 위해서죠. 세계적인 부호들은 투자를 위해 기업을 인수하지 덩치를 키우려고 인수하지는 않습니다.” “그 말씀은 진도준 씨는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에 버금가는 부호라는 뜻입니까?” “제가 여기저기 투자한 돈을 전부 회수하여 재산 목록을 만들면 포브스지에 이름 올린 부호들의 순위는 무조건 한 계단씩 내려갑니다. 단 한 명도 예외 없어요.” “호, 혹시… 제가 잘못 이해한 게 아닌가 해서 다시 질문합니다. 그러니까 세계 최고 부자라는 말씀이신가요?” 기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더듬거리며 말했다. 최고의 특종을 건졌으니 그럴 만하다. “물론입니다. 아마 지금 1위의 두 배 정도 될걸요?” 답답해하는 기자의 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현재 세계 최고 부자의 재산이 얼만지 모른다. “말이 엉뚱한 곳으로 흘렀는데…. 핵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순양전자나 물산을 탐낼 이유가 없어요. 단지 주주의 이익에 반하며,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기업을 편법으로 장악하는 후진적인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입니다. 비록 가족이라 할지라도….” * * * “저 자식은 돈 자랑을 해도 꼭 저렇게 공개적으로 해요.” 이학재 회장은 TV를 끄며 찻잔을 들었다. “설마 저 보라고 TV 켜신 겁니까?” “그럼? 난 이미 아는 건데 왜 보겠어?” 백준혁 실장은 피식 웃으며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래서요? 진도준이가 돈 많은 게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이 싸움의 결과가 뻔하다는 걸 알려주려고.” “뻔하죠. 우리가 이깁니다. 승산 없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어요.” “자네, 큰 착각을 하는 게 아닌가?” “착각이라뇨?” “늑대가 도망치는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는 거야. 운 좋으면 살아남고 한 번만이라도 삐끗하면 잡혀 먹히지. 사냥에 실패한다고 해서 늑대가 죽진 않아. 이런 게 싸움인가?” 백 실장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 실장님. 진 회장님 흉내는 그만 내시고 용건만 말씀하시죠.” “같은 따까리 출신이니까 말하는 건데 주인 바뀌면 따까리도 은퇴야. 알지?” “설마 저 꼬시는 겁니까? 토사구팽 피해서 밑으로 들어와라…. 이런 거냐고요?” 백 실장이 눈을 부라리자 이 회장은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말귀 잘 알아듣네.” “실장님!” “내 밑으로 오라는 거 아니니까 소리 지르지 마. 제안 하나 하려는 거니까.” “무슨 제안요?” “돌아가신 진 회장님께서 지분 다 나눠 주고 물러나셨을 때 진영기가 내게 처음 했던 말이 뭔지 아나?” “……?” “숨만 쉬고 죽은 듯 지내라고 하더구먼. 그룹 일은 물론이고 외부에서 그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고. 이건 은퇴가 아니라 순장하라는 명령이었어.” 모시던 주군이 죽으면 무덤에 함께 묻히는 노비. 그 명령을 주군의 아들이 했다. 백준혁 실장은 이미 은퇴한 주군인 진영기의 아들이 떠올랐다. 그놈은 어떤 명령을 내릴까? 멈추고 싶었지만 이런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자네는 나보다 훨씬 젊어. 한창 일할 나이 아닌가? 숨만 쉬고 살 수 있겠나?” “전 이 실장님처럼 진도준이 밑에서 살랑거리는 건 쪽팔려서 못 합니다만.” 분명 비웃는 말이었지만 이학재 회장은 여전히 온화한 표정만 지었다. “그래 보여? 자넨 도준이를 너무 몰라. 상전 놀음이나 하는 놈이 나이 서른에 혼자 힘으로 순양을 다 먹고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럼 아닙니까? 이 실장님은 진 회장님 대신 진도준이를 모시는 것뿐입니다. 부인하고 싶어도 그게 현실입니다.” “내가 HW 그룹 회장 자리에 앉은 뒤 단 한 번도 도준이에게 결재받은 적이 없는데? 아, 있긴 하다. 긴급 자금이 필요할 때 은행 대신 도준이에게 손을 벌렸지. 도준이는 다스리는 건 관심 없어. 정복만 할 뿐이지.” “그 말을 믿으라고요?” “믿고 안 믿고는 자네 몫이고. 아무튼, 도준이는 칭기즈칸 같은 놈이야. 정복하고 그 땅은 다른 사람에게 휙 던지고…. 말하고 보니 그놈 늑대 맞네. 흐흐.” 인상을 찌푸리며 바라보는 백 실장에게 이 회장이 말했다. “자네도 손 닿는 사람 많잖아? 물어봐. 내 말이 거짓말인지.” “관심 없습니다. 아무튼 난 진도준이를 위해 주총 막을 생각도, 합병 막을 생각도 없으니까 서로 시간 낭비 그만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해하지 마. 난 전자와 물산은 관심 없으니까. 그건 도준이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럼 도대체 왜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 이학재 회장은 웃음을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영준이가 자네를 순장하려고 할 걸세. 그때 잘 생각해 봐. 자네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그 일을 내가 도와줄 수 있겠다 싶으면 주저하지 말고 말해. 도와줌세.”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백준혁은 얼어붙었다. “따까리 마음은 따까리가 알지. 분명 자네도 하고 싶은 일이 생길 거야. 내가 회장질 해보니까 인생이 꼭 한 길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 흐흐.” 이학재 회장은 굳은 백준혁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 * * “내가 포브스지 확인했는데 세계 최고의 부자는 멕시코 사람이던데? 카를로스 슬림이라고 통신사 재벌이더라고. 75조 원.” “그래? 80조가 안 돼?” “응.” 마누라는 현실감 없는 숫자를 마치 시험 성적처럼 여기는 듯했다. 늘 시험과 등수에 얽매여 살던 공부 벌레다운 태도였다. “그런데 자기 재산이 1위의 두 배라고 했으니 150조라는 뜻이잖아.” “글쎄 개인 재산만 따져보면 100조는 넘을 테고, 순양그룹을 포함하면 또 달라지지.” “그런데도 순양그룹 전부를 가지고 싶어?” 묻고 싶은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나? 남편의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을까? “순양그룹을 돈으로 본 적 없으니까. 그냥 인생의 목적이라고나 할까?” 아내는 순양그룹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은 이유는 묻지 않았다. 부부라 하더라도 바깥일은 서로 바라보는 곳이 다른 것이다. 그녀도 그녀만의 목적이 있다. “집에 이야기할까? 합병 막아달라고?” 아내가 내 눈치를 보며 아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송이 시작된 이상 칼자루를 쥔 곳은 법원이다. 그다지 날카롭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칼이지만. 처가의 사법부 인맥이라면 큰 입김을 불어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냥 모른 척해.” “왜? 처가 도움은 싫다, 이거야?’’ “천만에. 필요할 때는 내가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릴 거야. 합병은 내가 원하는 거야. 우리 막강한 장인어른 힘은 그 뒤에 필요하거든. 별난 사위 받아들인 대가를 톡톡히 치르실 거야. 하하.” “그럼 주총 막겠다고 소송 시작한 건 뭐야?” 그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남편의 속내를 궁금해했다. “전 국민이 뭔가 찜찜한 시선으로 순양의 속을 들여다보게 하는 거. 그거면 족해.” 시작한 김에 아내에게 물었다. “혹시 사법부는 이 합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은 거 있어?” “소문만 무성해. 담당 판사 배정되면 소문이 사실로 변하겠지. 담당 판사 줄이 어느 줄인지 나오니까.” “소문은 어떻게 돌아?” “합병을 방해하는 요소는 일찌감치 제거하라. 위에서 이런 오더 내려왔다는 정도?” 사법부에 압력 넣을 힘이 있는 사람들 아닌가? 내 계획대로 된다면 판사 서넛은 옷 벗게 될 것이다. “자긴 절대 이 건 맡으면 안 돼. 절대!” “난 형사재판부 판사거든! 마누라가 무슨 일 하는지도 몰라? 법대 나왔으면서?!” * * * 6월 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부는 합병 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순양물산 자사주 매각금지’ 가처분 신청도 기각했다. 법원은 자사주 매각이 사회 통념상 현저히 불공정하거나 사회질서에 반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기가 차는 것은 다시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서울고법 민사부에서는 항고심도 끝내버렸다는 것이다. 당연히 주주총회 결의금지 및 자사주 매각금지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빠른 재판 진행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진영기 부회장과 진영준의 발걸음도 번개처럼 빨랐다. 7월이 되자마자 순양물산은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순양애드미디어의 합병안을 가결했다. 찬성표는 70% 가까이 됐으며 25분 만에 주주총회는 끝났다. 순양물산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운용본부장이 등장했지만, 현완주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교체된 본부장은 기금운용본부의 일개 기획실장에 불과했던 사람이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격 인사의 이유는 바로 시키는 대로 찬성표를 던질 허수아비로 제격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주총회가 끝났을 때 긴 한숨이 나왔다. 살을 내줬다. 이제 뼈를 취해야 한다. * * * ======================================= [321] 마지막 한 발까지, 남김없이 전부. 1 “축하해. 순양전자, 순양물산 총괄 CEO 겸 회장님.” “나오지 않는 웃음 짜내느라 힘들겠다. 뭐…. 축하 인사하러 온 손님을 박대할 수는 없지. 차라도 한 잔 줄까?” “물이나 한 잔 줘.” “그래, 그거 딱이다. 물 먹었으니까 속이 타는가 봐? 흐흐.” 진영준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중이다. 더욱이 패자라고 여기는 내가 직접 나타났으니 기쁨은 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잖아? 세계 제1의 부자. 개인 재산만 100조가 넘는 네가 이깟 회사 몇 개 더 먹으려고 용쓰는 게 어리석은 거지. 그런데…. 진짜야? 100조가 넘는다는 네 재산?” “부러워? 그럼 내가 100조 줄 테니까 세계 1위 부자 놀이하며 살아. 대신 순양그룹 주식은 하나도 빠짐없이 날 주고. 어때?” 당황하는 이놈의 표정을 보니 한심할 뿐이다. 순양은 할아버지가 평생을 걸쳐 이룩한 권력이다. 법을 초월한 권력은 돈으로 환산하는 게 불가능하다. 진영준은 그 가치를 모르니 잠시나마 흔들리는 것이다. 한심한 놈. “뭐, 난 언제든 바꿀 용의가 있으니까 생각 있으면 말해. 아무튼, 현실적인 이야기 할까?” “현실적인? 아직 나와 할 이야기가 남아 있어?” “많아. 일단 여기 순양 사옥에서 나가 줘야겠어. 이 사옥은 순양건설 재산이고 전자와 물산, 다른 계열사는 임대료도 거의 안 내고 사용했거든. 이사부터 해야겠지?” “뭐?” “또 있어. 계열사 간 외상 거래한 거, 돈 빌려준 거 다 정리해야겠지? 계산해보니까 4천억 정도 받아야 할 돈이 있더라고. 그거 정리해줘.” “야! 치사하게 그런 걸….”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던 그가 다시 비웃으며 말했다. “그래, 비워주지. 돈 정리도 깔끔하게 하고. 이런 식으로 분풀이라도 하고 싶겠지. 이해한다.” “분풀이? 무슨 분풀이?” “됐다. 이 정도 투정은 받아주마. 돈 많은 우리 막내, 내가 잘 보여야지. 그래야 필요할 때 돈도 좀 빌릴 수 있지 않겠어?” “착각하는 건 자유지만 좀 그러네. 난 형님이 전자를 먹기 위해 합병한 거… 오히려 반가운데?” “그만해. 그렇다고 쿨하게 보이는 건 아니니까.” “사실인데…. 믿고 안 믿고도 자유지만. 잘 생각해봐. 난 소송 외에는 아무것도 안 했어.” 진영준의 표정이 이제야 굳어지기 시작했다. “주주들에게 의결권을 위임해 달라고 요청도 안 했고 합병 반대의 타당성을 호소하지도 않았어. 형님은 소액주주들에게 합병 동참을 호소하는 성명서도 발표하고 광고까지 했지? 하지만 난 단 한 명의 주주도 만나지 않았다고.” 눈을 깜빡거리며 기억을 더듬는 모습이다. 상대가 뭘 하는지보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지를 의심해야 하는 기본도 모른다. “나도 합병 찬성파였으니까 가만히 있었던 거라고. 축하 인사도 진심이니까 내 진심을 고깝게 생각하지 마.” 이것이 선전포고라는 걸 알아채지 못한 그를 두고 일어섰다. “한 달 안에 방 빼고 계산도 다 해줘. 형님도 깔끔하게 새 출발 하는 게 개운하지 않겠어?” 여전히 기억을 되살리는 그에게 환한 웃음을 보였다. * * * 여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은 요식행위일 뿐이었다. 강력한 대권 후보에게는 경선이 바로 대선을 향한 선거 캠페인의 일부분일 정도로 결과는 정해져 있고 그 결과는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일찌감치 윤곽을 드러낸 여당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는 막강한 진용을 자랑했다. 하지만 난 그들과의 접촉은 피하고 지금껏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사람과 조촐한 저녁 자리를 준비했다. “어서 오십시오. 검사장님.” 조그마한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조심스레 들어오는 한 사내를 향해 인사를 건네자 그는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재안입니다.” 고개 숙인 그를 보며 생각했다. 이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그리고 이젠 일개 변호사일 뿐입니다. 회사 그만둔 지 1년이나 됐는데…. 검사장은 옛날 말이죠.” “더 큰 도약을 위해 잠시 웅크리고 계신 거 다 압니다. 하하.” 슬쩍 찔러보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조금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기색도 비쳤다. 벌써 이야기가 오고 갔구나. “이런, 제가 너무 앞서갔나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그냥 덕담으로 듣겠습니다.” 깜짝 인사를 위해 철저하게 물밑으로 움직이는 게 분명했다. 실세 비서실장이 추대한 초대 법무부 장관이 될 사람이 바로 이자다, 철저한 공안검사 출신이며 기획 수사의 달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엄청난 권력욕을 가졌다는 뜻인데 그가 검찰을 그만둔 것은 나도 이번에 알았다. “혹시 레스토랑을 빌리신 겁니까?” 손님 하나 없는 실내를 둘러보며 그가 말했다. “네.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리고 전 와인은 잘 모르지만, 이 집 와인이 좋다고 하더군요. 음식도 제법 맛 납니다.”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와인을 좋아하는 그로서는 와인 리스트가 궁금할 것이다. “한번 골라 보시죠.” 와인 리스트를 펼친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격이 적혀 있지 않았고 한 병에 수백만 원을 넘기는 와인만 적혀 있다. 그가 진정한 애호가라면 그 가치를 알 것이다. “이건 좀 과한 것 같군요.” 리스트만 보고 단번에 그 가치를 아는 것 보니 진짜 와인을 좋아하는 것 같다. “검사장… 아니 변호사님. 인터뷰 안 보셨습니까?” “네? 어떤…. 아, 하하하.” 그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와인 리스트를 내려놓았다. “괜한 생각을 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 앞에서 가격 걱정을 하다니. 허허.” 내 손짓에 매니저가 달려왔고 그는 꽤 긴 이름의 와인을 주문했다. “덕분에 오늘 혀가 호강하겠습니다그려.” 천천히 와인과 더불어 식사하며 선거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를 끝마칠 무렵 그에게 달콤한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전 확실한 승산이 점쳐지지 않으면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게 제 할아버지와 다른 점이죠.” “진 회장님께서도 확실한 투자만 하신 거 아닙니까?” “아뇨. 할아버지는 먼저 투자하고 승산을 만드셨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요.” “듣고 보니 차이가 크군요. 진 회장님이 가장 아끼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성향이 다르다니, 의외입니다.” “그래서 이번엔 할아버지 방법을 따르려고 합니다.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그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전 일개 변호사일 뿐입니다. 세계 제일의 부호도 하기 힘든 일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돈으로 사고 싶은 게 있는데 파는 사람이 망설일지도 몰라서 말입니다.” “그런 게 있습니까?” “네. 법을 사고 싶습니다.” “법? 아니, 그게 무슨…?” “이미 아시겠지만, 우리 집안싸움이 좀 떠들썩합니다.” “그 싸움 끝난 거 아닙니까? 장손이 순양의 전자와 물산 계열을, 그리고 진도준 씨가 나머지 전부를. 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끝낼 것 같았으면 전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진영기 부회장이 싸움을 피하려고 현 정권의 도움을 얻어 도망친 겁니다. 전 그들을 다시 싸움판으로 끌어내린 다음 변호사님의 도움으로 완전히 끝내버릴 생각입니다.” 황재안 변호사의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임기 반년 남은 대통령과 진영기 부회장은 오래전부터 잘 아는 관계 아닙니까? 퇴임 전에 선물 하나를 던져준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전 그걸 되돌릴 생각이고요.” “순양그룹의 60%를 차지하셨고 개인 재산도 세계 제일이신 분인데 아직 만족하지 못하신 겁니까?” “제가 그런 쪽으로는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습니다. 전부가 아니면 성에 차지 않아요.” 다시 생각에 잠긴 그를 향해 말했다. “재벌 그룹을 공평하게 나누는 건 정치권의 관심사가 아닐 겁니다. 정치권에서는 재벌을 금고로 바라봅니다. 그럼 차기 정권은 누구를 금고로 사용하는 게 좋을까요?” 너무 노골적인 말이라 당황한 표정이었다. “저기, 이왕 말씀하셨으니 하나 여쭙겠습니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기다리던 질문이다. “순양전자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한 진영준의 구속입니다.” “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재벌 회장이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법정 구속된 회장도 드물지 않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아니면 너무 황당한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대법원까지 가면 집행유예로 풀려날 겁니다. 그 정도 힘은 있으니까요. 단지 그 기간 동안 구속 상태로만 있으면 됩니다. 최소 6개월 이상.” “그, 그러니까 손발 묶어 두겠다는 목적이신 것 같은데 실세는 그의 부친인 진영기 부회장 아닙니까?” “우리 같은 사람의 실권은 주식인데 이미 다 물려줬죠. 남은 건 영향력인데…. 그건 제가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황 변호사는 한참을 노려보더니 조금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알았습니까?” 사실대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적당히 둘러대야겠다. “우리 정보팀에서 이번 대선과 초대 내각을 분석한 결과입니다. 여당 후보가 이미지만 좋을 뿐 행정부를 구성할 능력은 부족하죠. 부족한 부분은 비서실장이 채워야 할 테고 황 변호사님은 그 비서실장과 깊은 인연이 있는 분 아닙니까?” “순양이 왜 순양인지 알 것 같습니다. 대단하군요.” 이 정도까지 이야기하는 건 그도 내 제안에 흥미를 가졌다는 뜻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 돈이겠지만.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상의를 해야 할 사안입니다.” “물꼬는 제가 틔우겠습니다. 변호사님께서는 가장 잘하시는 걸 하면 됩니다.” “제가 잘하는 거라니요?” “기획 수사. 아닙니까?” 또 입을 다문다.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여기까지 올라왔겠지만. “물꼬를 틔운다고 하셨는데…. 그게 뭘까요?” “만사형통(萬事兄通), 상왕, 복심으로 불리는 현직 대통령의 형님입니다. 일단 그 사람 옷부터 갈아입히죠. 수의(囚衣)로 말입니다.”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의원님.” “아이고, 우리 진 실장…. 손 한번 만져 봅시다. 쇳복 많은 사람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어마어마할 줄이야! 정말 놀랐어요.” 호들갑을 떨며 내 손을 잡고 흔드는 국회의원. 행시 출신으로 경제통이다. “먼저 축하 인사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이제 봄날의 시작이군요.” 최석환 의원은 손을 내저었다. “봄날은 무슨, 가까스로 당선했는데…. 허허.” 현 대통령의 반대파 여당의원이다 보니 지난 총선 때 공천도 못 받았고 4년간 미국 위스콘신에서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건너가 골프나 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물론 그 비용은 전액 내 주머니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가 모시는 분이 여당의 강력한 대권후보가 되자 깃발만 꽂아도 당선이라는 지역구에 공천받았고 올해 4월, 다시 국회로 입성했다. 후보의 최측근이다 보니 국회 입성과 동시에 여당의원들이 손을 비비며 그의 뒤에 줄서기 시작했고 이미 최대 계파의 수장이 되어버렸다. “내가 진 실장 은혜는 잊지 않으리다. 백수 생활 4년을 진 실장 때문에 호의호식하며 버틴 거나 다름없으니까 말이요.”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보다 앞으로의 일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뭐든 말만 하시게. 있는 힘껏 발 벗고 나서겠네.” 반짝이는 최 의원을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대선,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필요한 자금 얼마든지 제공할 테니까 한계를 두지 마시고 마음껏 쓰십시오. 그리고 차기 정권에 대선 자금의 대가로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올해 그 대가를 미리 받고 싶습니다만.” 대선 자금을 무제한 제공한다고 하자 최 의원은 환히 웃었고 대가를 원치 않는다고 하자 웃음이 사라졌다. ======================================= [322] 마지막 한 발까지, 남김없이 전부. 2 “도, 도대체 진 실장이 원하는 건 뭐요?” 최 의원은 종잡을 수 없는 내 태도에 무척이나 당황한 것이 틀림없다. 말까지 더듬는다. “올해 연말까지 제 발걸음을 막지 마십시오. 차선 하나 다 비워주시고, 무단 횡단하면 신호등도 바꿔주시고, 흙길이면 아스팔트도 깔아주십시오. 폭주하더라도 못 본 척해주시고요.” “폭주라니? 그건 또…?” “검찰이 무리한 기소를 남발하고 언론이 원색적인 소재를 기사로 쓸 겁니다. 옐로페이퍼나 다름없겠죠. 대선 기사가 묻힐 수 있습니다. 일반인은 선거 이야기보다 자극적인 이야기를 더 좋아하니까요.” 최 의원은 난감한 표정을 보였다. 선거가 아닌 다른 이슈가 두드러지는 건 바람몰이에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대신 제가 큰 도움이 될 일 하나를 시작할 겁니다.” “큰 도움이라니요?” “현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입니다. 같은 당이지만 정권 교체, 여당 내의 야당이라는 전략을 이미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만.” 현 대통령의 지지율은 단순히 레임덕 현상으로 설명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낮다. 여론 조사에서 여당이 우세한 이유는 야당이 지리멸렬하기 때문이지 여권이 잘해서가 아니다. 게다가 현 대통령은 경쟁자였던 지금의 후보 측을 집권 기간 내내 탄압했기에 정권 교체라는 키워드를 선점해버릴 수 있었다. “제가 확실한 키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현 대통령의 친형을 공격할 겁니다. 구경만 하시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 하셔서 적절한 발표만 하시면 후보님은 현 정권과 확실히 다르다는 인식이 퍼질 겁니다.” “공격이라니…?” “실형을 면하지 못할 겁니다.” “진 실장. 도대체 그렇게까지 해서 뭘 얻으려는 게요?” “의원님이 모시는 후보가 대통령 취임식을 하기 전에 제가 순양그룹 회장으로 취임하는 겁니다. 물론 전자와 물산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최 의원은 놀라기보다 반가움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대통령과 순양그룹 회장이라는 최고의 동아줄 두 개를 한 번에 잡은 셈이기 때문이다. * * * “말년에는 몸조심해야 오래 사는데…. 실장님은 아예 날 벼랑으로 확 밀어버릴 생각이구만. 허허.” “그 벼랑 밑에는 안전망이 있습니다. 두려울 게 뭐 있습니까?” “번지 점프할 때 말이지, 발목에 줄을 매달아 놨다는 걸 알아도 발을 떼기 힘들다고 하더구먼.” 검찰 총장은 우는소리를 늘어놨지만, 생색내려는 수작일 뿐 거절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럴 때 다른 재벌처럼 강압적으로 누를 필요가 없다. 내게는 다른 재벌 놈들이 가지지 못한 강력한 무기가 있다. 바로 응석이다. “선배님. 한참 어린 후배가 먹고살려고 아등바등하는 게 안쓰럽지도 않습니까? 좀 확실하게 밀어주십쇼.” “그걸 말이라고…! 한 나라의 3년 예산을 현찰로 쥐고 있는 사람이 할 말인가?” “네? 제가요?” “내가 인터뷰 보다 하도 기가 차서 찾아봤어. 필리핀 예산의 세 배더구먼.” 총장은 한참 웃더니 수화기를 들었다. “저축은행 자료 좀 가지고 와.” 수화기를 내려놓은 검찰 총장은 다시 깍듯한 태도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습니까? 여기 관계된 걸?” “작년 저축은행 사태 때 괜찮은 거 하나 인수하려고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이름이 튀어나오더군요.” 젊은 직원 한 명이 조심스레 들어와 자료를 건네주고 나갔다. 총장은 그 자료를 보지도 않고 내게 전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걸세. 27억 좀 넘어요.” “묵혔습니까?” “나도 최소한의 의리는 지켜야지요. 날 임명한 사람의 친형이니까.” “그만하면 최소한의 의리는 지킨 것 같습니다. 이제 터트리시죠? 여당의 대선 후보 캠프에서 좋아라 할 겁니다.” “야당이 아니고?” “현 정권과 각을 세우는 게 이번 대선 전략이니까요. 유권자들이 여당 후보가 마치 야당 후보인 것처럼 착각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겁니다. 공약을 보세요. 경제민주화가 제일 앞에 있습니다.” “영리한데?” “총장님도 영리하잖습니까? 말을 갈아탈 때가 왔습니다.” “아이고, 진 실장. 너무 노골적이야. 으허허.” “편하시죠? 제가 점잔 떨지 않아서. 하하.” 한바탕 시원하게 웃은 총장은 슬그머니 서류를 가리켰다. “그런데 갑자기 그 양반을 왜 치려는 거요? 그다지 관계도 없어 보이는데?” “시궁창에 빠진 사람과 협상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으니까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의 총장에게 미소만 보냈다. * * * 시작은 다섯 개의 차명계좌였다. 작년 저축은행 사태 때 영업정지 하루 전날 빠져나간 돈을 수사하던 검찰은 특정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차명계좌를 발견했고 이 계좌의 실질 소유주는 여당의 중진 국회의원이라고 발표했다. 전 재산을 날린 수만의 사람들은 분노했고 실명을 공개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검찰은 당연히 실명을 언론에 홀렸고 언론은 대선을 앞두고 이보다 더 큰 폭탄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두 톱기사로 내보냈다. 「차명계좌의 실소유주는 여당 중진 의원이자 현직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일 의원으로 밝혀졌습니다. 다섯 개의 차명 계좌가 비자금인지 아니면 개인 재산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검찰은 계좌의 자금 흐름을 추적 중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상일 의원은 곧 참고인 자격으로 검찰로 출두할 예정이며 피의자 전환은 미지수입니다.」 검찰청 포토라인에 선 이상일 의원은 굳은 표정으로 기자들이 들이미는 카메라 앞에서 짧은 한마디만 남기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정치권의 더러운 술수에 검찰이 놀아나는 겁니다.” 하지만 이 말을 믿는 바보는 없었다. 그가 검찰청 조사실에 앉아 물 한 잔을 마셨을 때 젊은 검사 하나가 들어와 머리를 꾸벅 숙였다. 검사의 목에 걸린 신분증을 확인한 이상일 의원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어이, 김지훈 검사. 나가서 지검장에게 전해. 평검사 보내서 기죽이는 거 식상하니까 시나리오 들고 직접 오라고 말이야.” “저 지금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는 건데요? 시나리오상 오늘 등장인물은 저 혼자입니다.” “뭐야?”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 지르는 이 의원 앞에서 김지훈 검사는 보일 듯 말 듯 한 작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대한민국 검사 중에 청와대 전화 받은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게 별도의 지시 내린 사람은 총장 님뿐이었어요. 다른 사람은 입도 벙긋 안 했습니다. 참, 총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오늘 참고인을 피의자로 만들지 못하면 제주도로 발령 내버린다고요.” 이상일 의원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복잡한 기획이라는 걸 깨닫자 속이 타들어 갔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아 참, 참고로… 전 때려죽여도 제주도 안 갑니다.” 김지훈 검사는 이를 악물며 자료를 펼쳤다. “다섯 개의 차명계좌에 들어 있던 돈은 총 27억. 이 돈이 의원님 돈이라는 증거는 없어요. 분명히 뇌물이고, 엮인 사람 찾아보니 저축은행 행장 서넛과 대기업 이름 두 개가 나오더군요. 지금이라도 입증 가능하고 영장 바로 칠 수 있습니다.” 김지훈 검사가 증거를 들이밀고 하나하나 따져 물었지만, 이상일 의원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 없었다. 한참이 지난 뒤, 김지훈 검사가 말했다. “묵비권 쓰셨으니 저는 영장 치겠습니다. 혼자 떠든 게 억울해서 안 되겠어요.” 마침내 이상일 의원도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검찰이 쓸 자료는 충분할 테고, 카메라 끄고 이야기하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김 검사의 핸드폰이 울렸고 문자 하나가 찍혀 있었다. 一 시작해. 휴대전화를 확인한 김지훈은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옵션을 말씀드리죠. 뇌물 27억을 발표하고 저축은행을 다시 발칵 뒤집어 놓는 것.” “그리고?” “7억이 들어 있던 통장만 뇌물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의원님 재산이 맞다고 발표하는 것. 20억은 그냥 가지십시오. 대신 대국민 사과 같은 요식행위는 하셔야 합니다.” “그게 전분가?” “후자를 택하실 경우, 뇌물을 제공한 곳은 저축은행은 빼고 대기업으로 해야 합니다. 이미 다 끝난 저축은행 사태를 다시 뒤집는 건 차기 정권에 부담이거든요.” 이상일 의원은 반쯤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차기 정권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이거 지금 우리 후보가 기획한 건가?” “차기 대통령은 누가 될지 이미 아실 테고, 우리가 아무리 사냥개라도 그쪽 캠프의 양해도 없이 현 정권을 물겠습니까? 선수께서 왜 이러시나?” 이 의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떠오르는 태양이 지는 태양을 지워버리려 작업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첫 표적이 자신이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어지는 젊은 검사의 말에 다시 눈을 번쩍 떠야 했다. “7억 뇌물은 순양전자의 진영준이가 전해준 걸로 발표할 겁니다. 그렇게 아십시오.” “뭐? 순양? 갑자기 그 이름이 왜…?” “판 키우려면 순양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순양 돈도 꽤 받았잖습니까? 못해도 수십억은 챙겼으면서 새삼스럽게….” 이상일 의원은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순양이 갑자기 등장한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우리 사위 표정 보니 오늘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어.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 “네. 처갓집 덕 좀 보고 싶어 아버님만 모신 겁니다.” 항상 사람 좋은 미소만 보이던 장인은 오랜만에 냉철한 판사 시절의 표정으로 변했다. “청탁은 주로 검사에게 하는 거 아닌가?” “그쪽은 이미 손봤습니다. 사실 고민 좀 했습니다. 곧바로 판사들과 접촉하려다 아무래도 아버님의 전화 한 통이 더 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혹시 오늘 검찰 출두한 그 의원 때문인가?” “네. 하지만 이상일 의원은 시작일 뿐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시작은 누군지 알았고…. 중간 건너뛰고 마지막이 누군가?” “순양전자 회장인 진영준. 제 사촌 형님입니다.” “역시…. 자네의 모든 행위는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구먼.” 미소 짓는 장인의 표정에서 마음을 읽었다. 돈도 충분하고 순양의 60%를 차지했으니 싸움은 그만하고 편히 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도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살아본 경험이 있는 분 아닌가? “그래, 내가 전화 돌리면서 뭐라고 하면 되는가?” “검찰에서 구속 영장을 칠 겁니다. 진영준은 물론이고 관계된 모든 사람의 영장을 기각하지 말고 발부해 주십시오.” “꽤 중량감 있는 사람들도 많겠지?” “네. 현직 장관도 있을 겁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장인은 그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며 말했다. “오늘부터 인가?” “네.” 곧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건 장인은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아,유 판. 오랜만이야. 그래, 그래. 나야 잘 있지. 학교 왔다 갔다 하며 신선놀음 중이야. 그런데 부탁 하나 함세. 아니…. 어려운 일이니 부탁이라고 하는 거야. 청탁일 수도 있고. 자네에게는 부담이겠지만.” 장인은 나를 향해 눈을 한 번 찡긋하며 통화를 계속했다. “오늘 중앙지검에서 영장 하나 칠 거야. 따지지 말고 바로 발부해 주게. 누군지는 알겠지? 그래, 이상일 의원. 심사숙고하는 척하며 새벽쯤에 내주면 돼. 부탁함세.” 통화를 끝낸 장인에게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잠깐만, 인사는 좀 있다 하게.” 장인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네, 숙부님. 갑작스럽지만 오늘 밤 집안 모임을 해야겠습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했으면 합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큰일 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별난 제 사위를 위해 우리 집안 모두가 힘을 써야 할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하하.” 오늘 밤, 대한민국 사법계의 주요 보직이 모두 모이게 생겼다. 나 때문에. 통화를 끝낸 장인이 날 향해 말했다. “이제 인사해도 돼.” 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버님.” * * * ======================================= [323] 질곡의 시간은 벼락처럼 끝난다. 1 「지난 새벽, 법원은 이상일 의원의 구속 영장을 발부했습니다.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에 출두한 지 11시간 만에 피의자로 전환된 겁니다. 검찰의 이례적인 수사 속도에 정가의 촉각이 집중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됩니다.」 “저게 네가 한 일이라는 거냐?” 아버지는 TV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합병 과정의 불법을 이용해 영준 형을 몰아내고 제가 순양 전체를 장악할 겁니다.” “어쩐지…. 네가 합병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러려고 그랬구나.” “지분은 영준 형에게 모두 넘어갔고 합병을 주도한 것도 영준 형입니다. 리스크는 크지만 해볼 만합니다. 전 이 싸움을 올 해 안으로 끝낼 생각이고요.” “질곡의 시간은 벼락처럼 끝난다…….” 아버지는 낮게 읊조리더니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끝은 벼락처럼 순식간에 일어나지만, 준비는 아주 오래 했습니다.” “안다. 그러니 벼락처럼 끝낼 수 있을 게다. 그래, 이 애비는 뭘 해주면 되겠냐?” “저쪽이 시끄러울 때, 전 제 모든 걸 세상에 내보일 생각입니다.” “그 모습을 세상에 퍼트려 달라?” 아버지는 말 한마디에 담긴 본질을 순식간에 알아버리니 대화는 쉽다. 아버지가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았더라면 최대의 경쟁자는 다름 아닌 아버지였을 것이다. “네. 다른 언론도 다루겠지만 끽해야 뉴스 한 꼭지 분량일 겁니다. 긴 분량으로 살포할 곳은 아버지의 채널뿐입니다.” “편성부터 손봐야겠구먼.”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시는 아버지께 조심스레 말했다. “제 측근들이 지저분한 큰집 이야기를 가져올 겁니다. 그것도 흘려 주셔야 합니다.” “스캔들이구만. 알았다.” 아버지는 담배를 비벼 끄고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꼭 이겨. 하늘에서 재미있게 구경하고 계실 네 할아버지를 위해서라도.” * * *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상일 의원이 왜 우리를 물고 늘어져?” 진영기 부회장은 백준혁 실장의 보고를 믿을 수가 없었다. “백 실장. 이상일이는 저축은행 건으로 끌려간 거 아니오? 차명 계좌도 저축은행이라면서?” 진영준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이런 자질구레한 일까지 아버지와 함께 보고받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퇴한 아버지는 빼고 자신에게만 보고해도 되지 않는가? 아니, 아랫선에서 깔끔히 처리하고 이따위 보고는 애초에 없어야 당연한 거 아닌가? “검찰이 저축은행 뇌물 건은 덮고 7억으로 정리하는데…. 출처가 순양이라고 그림 그렸답니다.” “이상일이가 멍하니 당해? 청와대는 뭐 하고 있는데?” “총장이 나서서 온몸으로 막고 여당 개선 후보 캠프에서 이상일을 제물로 삼아 현 정권과 선 긋기를 한다는 시그널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검찰과 법원에서 마음 놓고 후드려 패는 거죠.” 듣고 있던 진영준이 백준혁 실장에게 짜증을 확 냈다. “이봐요, 백 실장. 도대체 그거랑 순양이 무슨 상관이라고…?” 백준혁 실장은 어이가 없었다. 아직도 전체 그림을 파악하지 못했단 말인가? “영준아.” 진영기는 조용히 아들 입을 막았다. “넌 회사로 돌아가라. 이건 이 애비가 알아서 하마.” 퉁퉁 부은 얼굴로 아들이 나가자 진영기가 급히 물었다. “이거 도준이 놈이 움직인 거 맞지?” “거의 확실합니다. 합병 진행 때. 국민연금 움직인 게 이상일 의원 아닙니까? 검찰에서 여론을 등에 업으려고 피해자 많이 나왔던 저축은행을 빌미로 이상일 의원을 엮은 겁니다.” “그럼 검찰 칼끝은….” “영준이를 향하고 있습니다. 부회장님.” 백준혁은 진영기 부회장의 눈빛에서 그의 생각을 읽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자주 써먹었고 구태의연하지만 늘 통하는 방법이 있다. 백준혁은 낮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만일을 대비해 대타 알아보겠습니다만, 전 아닙니다. 전… 영준이를 대신해 휠체어 탈 생각은 없습니다.” “이, 이 친구가…! 내가 자네를 왜….” “이 정도 압박이면 검찰이 계열사 사장 정도로 만족할 리가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속내를 들킨 진영기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부회장님. 이학재가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순장당할 거라고. 그러면서 제게 자리를 제안했습니다. 부회장님 곁을 떠나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뭐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부회장님.” 백준혁은 진영기 부회장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순장은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옥살이는 못 합니다.” 백준혁은 당황한 진영기에게 머리를 숙였다. “검찰 상황 계속 파악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이 일이 제 마지막 업무가 되겠군요. 그럼.” * * * “공직자 기강 확립, 부정부패 척결, 경제민주화를 위한 재벌과 거리 두기. 일타삼피 아닙니까?” “진도준이 그 친구, 어리지만 보통이 아냐. 투자의 귀재라고 하더니 제 할아버지를 쏙 빼닮았어. 기획도 잘해.” “정권이 바뀌니까 순양의 주인도 바꾸는 게 나쁘지 않죠. 그 친구, 국민들에게는 영웅 대접받으니까 순양그룹 주인 자리에 앉아도 모양새도 그럴듯하고.” 황재안 변호사와 최석환 의원은 구치소 접견실에서 이상일 의원은 없는 사람인 양 웃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지켜보던 이상일 의원이 기가 차서 한숨을 푹 내쉬자 황재안 변호사가 그를 향해 말했다. “의원님. 2년으로 끊겠습니다. 3심까지 1년 정도 끌면 실제 1년만 고생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은퇴하실 거 아닙니까? 마지막을 희생하신다 생각하고….” “넌 뭐야? 넌 뭔데 여기 있는 거야?” 이상일 의원이 소리를 버럭 지르자 최석환 의원이 나섰다. “아이고, 형님. 차기 정권 초대 법무부 장관이 될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친구 말은 믿으셔도 됩니다.” “버, 법무부 장관? 다들 김칫국부터 한 사발씩 하는구먼.” 이상일 의원은 비꼬듯 말했지만 대선 승리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씁쓸하기만 했다. “의원님. 동생이신 VIP도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쇼라도 하지 않으면 정권을 뺏길 수도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여당 집권이 낫지 않습니까? 야당이 정권을 가져가면 정말 여럿 다치게 됩니다.” 황 변호사가 공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거절했다가는 동생을 믿고 저지른 자신의 비리가 전부 까발려 질 것이다. “형님. 이대로 갑시다. 보건복지부 장관하고 연금공단 이사장, 기금운용본부장까지만 손보겠습니다. 다들 동의했으니 형님도 조용히 따르십시오. 소란 피워봤자 달라질 건 없습니다. 어차피 형님도 순양물산 합병 때 두둑이 챙겼지 않습니까?” “장관도…?” “네. 이번 일 끝나면 진도준이가 단단히 한몫 챙겨준다고 했습니다. 형님도 뉴스 봤죠? 100조가 넘는 현찰을 쥐고 흔드는 놈 아닙니까? 그놈이 말하는 ‘한몫’ 은 다른 재벌과는 단위가 다릅니다.” 대통령인 동생도 등 돌렸다. 이건 정치가 아니라 남의 집 재산 싸움에 휘말린 것이다. 문제는 그 남의 집이 한국 정치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다.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하던 이상일 의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떠들기 귀찮으니까 검찰이 서류 준비해서 오라고 해. 사인만 하고 끝내자고 해.” 이상일이 포기 선언을 하자마자 두 사람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그 모습을 본 이상일은 과연 저 두 놈이 진도준에게서 돈을 얼마나 받아 처먹었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 * * 「이상일 의원의 구속은 얼마 전 일어났던 순양물산과 순양애드미디어의 합병과 관련 있다는 소식입니다. 법정 소송까지 갔던 일인 만큼 많은 문제점이 있었고, 국민연금의 무리한 결정에 소액주주들의 피해가 7조 원에 달한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재벌가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국민의 돈을 썼다는 이야기인데요. 검찰은….」 진영준은 TV를 끄고 신경질적으로 리모콘을 던졌다. 뉴스는 연일 순양물산 합병 건을 떠들었고 심심치 않게 자신의 이름도 오르내렸다. 알아서 처리한다던 아버지는 감감무소식이었고, 답답한 마음에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도 모두 피하기 일쑤였다. 부아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도 힘들 때 아내인 홍소영이 들어왔다. 이미 집을 나가 한성일보가 운영하는 호텔에서 지내는 아내의 방문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왜 왔어?” “나도 오기 싫었지만, 변호사에게만 맡기기에는 좀 껄끄러워서 왔어.” 변호사라는 말에 아내가 회사까지 찾아온 이유를 짐작했다. “껄끄러울 게 뭐 있어? 이혼은 변호사가 맡아서 서류만 처리하면 되는데?” 홍소영은 퉁명스러운 남편에게 봉투 하나를 휙 던졌다. “애들은 내가 데리고 갈게. 순양은 물 건너갔지만 한성일보는 내가 가져야겠어. 이혼녀가 신문사 사장 되는 건 힘드니까 내 아들에게 그 자리 줄 거야. 어차피 당신은 순양에서 쫓겨날 테니까.” “뭐야?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흥분하지 말고 봉투나 확인해. 그리고 딴소리 말고 도장 찍어.” 봉투 속에는 이혼서류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십여 장의 사진도 튀어나왔다. 사진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여자의 허리를 감고 호텔로 들어가는 사진, 자동차 뒷자리에서 젊은 여자와 짙은 애무하는 사진이었다. “이젠 내 뒤도 캤어? 그래서? 어쩌라고? 별거 중인데 뭐?” “그건 일부래. 몇 년 동안 당신이 연예인들과 놀아난 증거가 수두룩하다네? 내가 그 사진 보고 알았어. 당신은 도준이 상대가 안 된다는 걸.” “누, 누가 이걸…? 설마 도준이 그놈이?” “내일 변호사 보낼 테니까 서류에 도장이나 찍어놔. 옆에서 부리는 놈이 누구에게 충성하는지도 모르고…. 쯧쯧.” 홍소영은 한심한 눈길로 혀를 차며 일어섰다. 진영준은 사진을 다시 확인하며 사라진 그녀가 한 말을 되새겼다. 자동차 실내 사진은 분명 블랙박스 영상을 캡처한 것이다. 아내가 말한 곁에서 부리는 놈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신석호…. 이 개새끼가….” 인터폰을 눌러 소리쳤다. “신석호 빨리 들어오라고 해.” 몇 분 지나지 않아 신석호 팀장이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진영준은 그의 얼굴에 사진을 확 뿌렸다. “이거 네가 한 거야? 엉?” 신석호 팀장은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주섬주섬 모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방금 인사과에 우리 팀 애들 전부 사직서 던졌습니다. 그동안 감사했고 지긋지긋했습니다.” “뭐? 지금 뭐라고 했어?” 진영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십 년 치 자료가 내 손에 있습니다. 분풀이한답시고 괜히 애들 풀어서 우리 팀원들 해코지할 생각은 마십시오. 한국에서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진영준은 신석호 팀장이 자신을 향해 피식 웃으며 뒤돌아서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어야 했다. 현실인 것 같지 않았다. * * *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냐?” 진영기 부회장은 밤늦은 동생의 방문이 의외였다. 이 싸움에서 멀찍이 떨어져 방관만 하던 막내 아니던가? “형님께 드릴 말씀이 좀 있어서 왔습니다.” “도준이 이야기라면 그냥 돌아가. 너랑은 할 말 없다.” “길게 이야기 않겠습니다.” 진영기는 동생에게 눈짓했고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았다. “그래, 할 이야기가 뭐냐?” “형님은 나서지 않았으면 합니다.” “뭐야?” “도준이가 제게 부탁한 게 있습니다. 형님과 형수 그리고 영준이 사생활을 까발려 달라는 것이었어요.” “뭐? 지, 지금 그게….” “형수가 젊은 남자들과 해외여행 다니는 거, 형님이 젊은 여자 집으로 불러들이는 거, 영준이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이것들이 진짜….” 부끄럽기보다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젠 아예 바닥 싸움도 마다치 않겠다는 뜻 아닌가? “제 손에 자료가 많습니다. 하지만 차마 이걸 방송으로 내보내는 것도, 기사 한 줄 쓰는 것도 못 하겠습디다.” “그래서? 네 아들에게 백기 들고 항복하라 이 말이냐?” “아닙니다. 형님도 최선을 다해서 지켜야죠. 그거까지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뭐냐? 밑바닥까지 들춰내서 협박하는 저의가 뭐냐 말이다!” “검찰은 가족 두 명을 동시에 구속하는 걸 피합니다. 부부, 형제, 부자….” 진영기는 동생의 생각을 알아챘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을 막으러 온 것이다. “영준이 대신 형님이 검찰에 출두할 생각은 마십시오. 그때는 형님 손자가 학교도 못 다니게 만들어 버릴 겁니다. 그 외에는 뭐든 하십시오.” 진영기는 할 말을 잃었다. 최후의 수단을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 * * ======================================= [324] 질곡의 시간은 벼락처럼 끝난다. 2 “전 언론사 사장들에게 한 장씩 돌리고 함께 미국으로 갈 기자 두 명씩 붙여 달라고 하세요. 기자 숫자 파악해서 항공사에 전세기 하나 신청하고요.” “전용기는…?” “기자들과 함께 이동할 겁니다. 거기 맞춰 준비하세요.” “네. 실장님.” “그리고 이번 미국행에는 신석호 팀장과 팀원들이 함께할 겁니다. 그렇게 준비하세요.” “네? 아…. 알겠습니다.” 김윤석 대리는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내 생각을 읽어냈나 보다. “그리고 나 없는 동안에 김 대리도 여유 좀 즐기고. 요즘 너무 고생만 시켰어요.” “아닙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여유를 부리다니요? 괜찮습니다. 실장님께서 회장실에 앉으시는 거 보고 휴가 내겠습니다. 흐흐.” 그때부터는 더욱 여유가 없을 텐데라는 말은 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회장이 되고 완벽한 철옹성을 쌓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HW 자동차의 조대호 사장과 전용기에 오르니 기자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대통령 순방길보다 더 많이 모인 거 아냐?” “제가 대통령보다 훨씬 더 많은 기삿거리를 제공하니까 당연하죠.” “떡고물이 아니라? 흐흐.” 우리 두 사람이 일등석으로 들어가자 대기하던 신석호 팀장과 팀원들이 허리를 숙였다. “이번 출장은 그간 고생한 여러분께 드리는 휴가의 성격이 짙습니다. 그리고 전 진영준 회장과 달리 의전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까 모두 긴장 풀어요.” “감사합니다, 실장님. 그런데 기자들에게 뭐라도 한 말씀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실장님만 기다리고 있는데….” 신석호 팀장이 조 사장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신 팀장이 대신 전해요. 보고 들은 것만 정확히 기사로 써 달라고. 과대 포장은 바라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신 팀장이 머리를 숙이고 나가자 팀원들도 모두 자리를 비웠다. 기자들은 절대 과대 포장 기사를 쓰지 못할 것이다. 정확한 사실로도 믿기 힘든 이야기가 시작될 테니까. * * * 당연히 뉴욕으로 갈 줄 알았던 기자들은 우리의 목적지가 캘리포니아인 걸 알고 궁금증이 폭발했지만, 호텔 연회장에서 함께 저녁 식사할 때 등장한 두 사람 때문에 궁금증은 사라지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하워드! 이게 얼마 만이지?” “기억 안 나면 구글에 물어보던지. 하하.” 구글의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은 나를 힘껏 끌어안았고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는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이들의 등장에 의문을 가질 틈이 없었다. 그들은 사진부터 본사로 전송하고 낚시성 제목을 단 인터넷 기사부터 올릴 것이다. 지금부터 실시간 전송 싸움이다. 누가 더 많은 클릭을 유도하느냐에 따라 수익이 달라진다. 우리가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놓치지 않으려 사진을 찍으려 할 때 신석호 팀장이 나섰다. “식사 후 정식 회견 시간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모두 카메라를 꺼주시죠. 아니면 귀국행 티켓을 받을 겁니다.” 신 팀장의 협박에 기자들은 카메라를 내리고 우리의 식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식사 후 연회장에 준비된 단상에 우리 세 사람이 자리를 잡았다. “자, 질문하시죠.” 규모가 작은 언론사 기자들은 왜 진즉 영어를 배우지 않았을까 땅을 치며 후회하는 순간이었다. 미국 특파원들이 영어로 질문하며 선수를 쳤다. “두 분과 진도준 씨의 관계를 말씀해 주십시오.” 세르게이 브린이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가 차고에서 창업을 준비할 때 날개를 달고 등장한 천사가 바로 스무 살의 하워드였어요. 알고리즘 논문 하나만 보고 무려 삼천만 달러를 파격적인 조건으로 투자했죠.” “하워드는 구글의 숨은 창업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래리 페이지가 내 역할을 정확히 말했지만, 기자들의 관심은 오로지 돈이었다. “그 파격적인 조건이란 게 뭐죠?” “의결권은 우리에게 넘기고 경영 불간섭, 그리고 우리의 평균 지분만 요구했어요. 그 당시 삼천만 달러라면 우리는 영혼이라도 팔았을 거예요. 하하.” “그, 그럼 지금 진도준 씨는 구글의 대주주라는 말씀입니까?”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가 6.8%의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라클의 대주주가 나라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보니 기자들은 구글의 주가를 검색하며 내 지분의 가치가 얼마 인지 계산하기에 바빴다. 지금이야 10조 원 남짓하지만, 앞으로 몇 배나 뛸지 모르는 최고 기업의 대주주. 누가 한국의 대통령이 되느냐보다 더한 특종이 이 자리에서 터져 나오자 기자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탄성만 쏟아냈다. 창업과 투자에 관한 질문이 이어지고 옛날 전설과 다름없는 이야기가 쉴 새 없이 나왔다. 그나마 예리한 눈길을 가진 기자가 HW 자동차의 조대호 사장에게 눈길을 돌렸다. “혹시 조 사장님이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 구글과 관계있습니까?” 조 사장도 먼 길 날아온 보람이 있다. 그가 마이크를 잡고 천천히 말했다. “구글의 비밀 프로젝트에 우리 HW 자동차가 작게나마 역할을 맡았습니다. 오늘 그 계약을 위해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자동차와 구글이라니, 쉽게 연결하기 어렵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말씀드린 대로 비밀 프로젝트입니다. 발표 시기는 구글에서 정할 겁니다.” 이 기사가 나가는 순간 HW 주가는 폭등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내가 구글 주식으로 돈 자랑을 하기 위해 이런 쇼를 벌인 게 아니니까. “향후 구글의 여러 하드웨어 개발 프로젝트에 순양전자의 부품 사용도 함께 논의할 예정입니다. 이것이 이번 미국 방문의 주목적입니다.” 내가 마이크를 들자마자 기자들의 플래시가 다시 터져 나왔다. “순양전자는 지금 진영준 회장이 맡고 있습니다. 혹시 두 분이 협의하신 겁니까?” “진영준 회장이 지금 사업에 신경 쓸 겨를이 있겠어요?” 기자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검찰 소환을 앞둔 걸 기자들도 잘 안다. “그럼 순양전자를 대신할 자격이라도…….” “자격이 중요합니까? 앞으로 얼마나 많은 수익을 창출할지 모르는 비즈니스입니다. 제가 좋은 결과를 가져가면 순양 전자도 환영할 겁니다. 그리고…. 제가 남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내 말뜻을 알아챈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혹시 진영준 회장의 빈자리를 노리시는 겁니까?” “제가 뭐가 아쉬워서 빈집털이를 하겠습니까? 하지만 주주들이 굳이 원한다면 마다하지도 않을 겁니다. 솔직히 저 말고 있습니까? 그 빈자리를 채울 사람이?” 내일 신문 1면을 채울 기사가 그려졌다. 「순양가의 막내 진도준, 순양전자그룹의 회장직 도전 선언!」 * * * 두 번째 무대에는 한국 기자들이 발붙일 곳이 없었다. 이미 미국 언론들이 인텔사의 컨벤션 센터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인텔사가 처음 들어보는 이스라엘의 작은 기업을 인수하는 순간을 목격했지만, 그들은 왜 이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지 몰랐다. 이들이 확인한 건 인텔사가 정체도 파악하기 힘든 이스라엘의 기업을 무려 150억 달러, 우리 돈으로 15조에 인수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를 따라다니는 기자들에게는 이미 조 단위의 숫자가 익숙해져 버렸는지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계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 기업 Mobileye의 창업자이자 CEO인 암논 샤슈아(Amnon Shashua) 박사가 등장해 나를 잃어버린 동생이라도 만난 듯 반가워하자 다시 셔터를 눌러 댔다. “…학교로 찾아와 대뜸 천오백만 달러를 투자하고 사라졌죠. 하워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너그럽고 미래를 정확히 예견하는 투자자일 겁니다. 저도 하워드가 구글의 첫 투자자였다는 어제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럼 진도준 씨의 모빌아이 지분은 어떻게 됩니까?” “60%. 10년 만에 100배의 수익을 올린 겁니다.” 샤슈아 박사의 설명에 기자들은 내게 질문을 쏟아냈다. “진도준 씨. 투자의 기준이 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전 세상을 변화시킬 기업에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투자합니다. 구글이야 이미 잘 아실 테고, 여기 모빌아이는 자동차의 미래를 바꿔놓을 기업입니다. 그래서 HW 자동차와 기술 계약을 할 겁니다. 이미 인텔의 인수 조건에 들어가 있습니다.” “HW 그룹의 지주회사가 미라클이니 HW 자동차도 진도준 씨 회사라고 봐도 무방합니까?” “구조상 그렇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전 전문 경영인 시스템을 좋아합니다. 순양도 금융 계열사에는 잔소리를 좀 많이 하지만 나머지 계열사는 성과 확인만 하는 정도입니다.” “혹시 HW 그룹과 순양그룹의 통합도 생각하시는지요?” “통합의 시너지 효과를 파악하는 중입니다. 조금이라도 효율이 올라간다면 당연히 해야죠.” 내일 신문의 헤드라인은 HW, 순양그룹 통합이다. 또한 진도준이 가장 신경 쓰는 회사는 전자와 자동차라는 기사도 뜰 것이다. “진도준 씨. 혹시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투자는 어떤 게 있는지 말씀해주시죠?” “투자가치가 아니라 단순한 금액만으로…?” “네. 흥미 위주의 질문이라 좀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흥미 위주의 질문이야말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할 뉴스 아닌가? “아, 하나 있습니다. 파생상품에 투자한 게 있는데…. 일주일 만에 천삼백 배 정도? 일본 증시에 투자했는데 지금은 얼만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요. 몇 년 전 결산서에는 칠조 몇천억 엔이라고 나와 있었는데…. 그리 신경 쓰지 않아서….” 받아쓰는 것도 잊어버린 기자들을 보며 이 정도면 쇼는 성공이라고 확신했다. 일본 돈을 수십조 벌었다면 축구 한일전 승리보다 더 기분 좋은 뉴스 아니겠는가? * * * 동행한 기자들보다 더 많은 기자들이 인천공항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언론은 마치 구글이 한국 기업인 양 기사를 써 갈겼고, 난 메이저리그를 제패한 박찬호나 추신수 대접을 받았다. 특히 한성일보는 나와 진영준을 나란히 놓고 비교한 기사를 연일 내보내는 중이었다. 기사는 프로와 아마추어, 성인과 어린애를 비교하는 것보다 더 신랄하게 진영준을 깎아내렸다. 이래서 갈라설 마누라가 무서운 것이다. 독기를 품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무대에 등장하기 위한 화장은 끝났으니 마지막 전투만 남았다. “야! 난 버거워서 피똥 싸는데 넌 금의환향 놀음이냐?” “평검사 주제에 어디서 건방을 떨어? 윗선에서 조율 다 끝냈는데. 널 스타 검사로 만들려고 내가 힘 많이 썼다.” 저녁때 집으로 찾아온 김지훈 검사는 괜한 엄살이었다. “스타고 뭐고, 살 떨려 죽겠다. 모르는 전화가 빗발치고 집 앞에는 늘 사람들이 날 기다려. 꼭 누가 날 미행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러다 테러라도 당하는 거 아닌지 몰라.” “허수아비를 테러하는 바보도 있냐? 담당 검사니까 회유하려고 그러는 거야. 언론이 지켜보며 생중계나 다름없으니까 법정에서 네가 구형을 낮게 해 버리면 빼도 박도 못하거든.” 겁먹은 동창 놈을 안심시켜야 했다. “그리고 널 미행하는 사람들은 내 사람이야. 혹시나 해서 내가 붙였다.” 김 검사는 한동안 눈을 깜빡거리더니 혀를 찼다. “야! 네 사람들 뭐가 그리 아마추어야? 나도 미행을 눈치챘는데?” “일부러 티 나게 따라다니는 거지. 그래야 함부로 접근 못 하니까. 좀 배워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긴장이 풀린 김지훈이 말했다. “내일 진영준이 출두해. 이상일 의원부터 보건복지부 장관, 연기금 위원장은 전부 구속했는데…. 진영준이 구속영장 떨어질까?” “너 내 처가를 무시하냐?” “아는데…. 저쪽도 보통이 아니잖아.” “내가 더 보통이 아니야. 영장 담당 판사도 사람이다. 내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을 것 같아?” “너 뇌물 멕였냐? 그 판사 꼿꼿하기로 소문났는데…?” 김지훈은 화들짝 놀랐다. “대나무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는 무게가 있어. 돈으로 그 무게를 만들었다. 영장은 틀림없이 나와.” * * * ======================================= [325] 질곡의 시간은 벼락처럼 끝난다. 3 저녁부터 새벽까지 진영준의 영장 실질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법원 앞에서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했다. 국민의 노후를 위해 모은 피 같은 돈 7조 원을 해먹은 놈을 꼭 구속하라는 요구였다. 물론 그들은 아버지가 준비한 엑스트라 배우들이었지만 꽤 그럴싸했다. 여론과 돈, 이미 구속된 사람들의 진술 등으로 구속을 피할 길이 없었다. 새벽에 진영준이 구속됐다는 속보가 떴고, 이제 시작이다. 아직 법원의 최종 판결은 나오지 않았지만, 전세를 완전히 뒤집으려면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물산의 합병 무효와 불법으로 취득한 진영준의 물산 주식에 대한 의결권 제한. 이 두 소송을 동시에 진행합니다. 한숨 돌릴 틈을 주면 안 됩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장도형 부사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긴요? 전자와 물산의 임원들이죠. 그들이 진영기 부회장이나 진영준을 배신한다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임시 이사회를 열어 절 대표이사로 추대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집니다.” “그럼 주주총회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자리를 함께한 변호사들은 이사회보다 주주총회를 더 걱정하는 것 같았다. 이사회에서 내가 대표이사로 선임된다 하더라도 주주총회에서 이 사회를 해산해 버리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절 끌어내리기 위한 이사회는 열리지 않도록 해야죠. 그래서 소송이 중요합니다. 아시겠어요?” “네. 실장님.” 변호사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번 일이 실패로 돌아가면 모두 순양에서 쫓겨난다는 걸 안다. 그리고 성공하기만 하면 지금보다 더 화려한 인생이 펼쳐진다는 것도 안다. 변호사들이 물러나고 우병준 상무가 들어왔다. “저쪽 상황은 어떻습니까?” “매일같이 사장들과 임원들을 부릅니다. 진영기 부회장이 단도리 치는 게 분명한데….” 우 상무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습니까?” “아직 부회장님이 죽지는 않았습니다. 정부 인사들도 줄줄이 들락거립니다.” “그래요? 그 사람들 명단은?” 우병준 상무는 리스트 한 장을 내밀었다. 이름을 쭉 훑었고 종이를 찢었다. 확신이 더 굳어졌다. “전부 떨거지들입니다. 큰아버지의 힘이 미치는 곳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면 더 볼 것도 없습니다.” 일단 한시름 놨다. 하긴, 눈치 하나로 먹고산 공무원들이 대세를 못 읽을 리 없다. 다시 장도형 부사장을 향해 말했다. “순양전자가 지금 세 파로 나뉘어 있죠?” “네. 진영준 회장이 구속되고 눈치 싸움이 한창입니다.” 진영기의 수족과 진영준이 임원으로 끌어올린 유학파 신흥 세력. 그리고 휴대폰 사업을 일으켜 전자의 선두에서 달리는 사람들. 이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항상 충돌했다. “자리 한번 만드세요. 서로 으르렁대는 사람들 한자리에 모이면 그것도 볼만하지 않겠습니까?” 물산은 지분으로 먹고 전자는 이사회의 만장일치로 차지하면 될 것이다. * * * “물산 합병 무효. 진영준의 주식 의결권은 재판이 끝날 때까지 제한될 겁니다. 임시 주총을 다시 열면 순양물산은 누구 손에 들어올 것 같습니까?” 찻잔을 앞에 둔 세 사람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임시 주총 없이 이사회 결의로 대표이사에 취임할 생각입니다. 제가 순양물산의 대표이사가 되는 걸 주주들이 싫어한다면 주총을 열어 절 해임하겠죠. 그런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런 주총이 열릴 것 같습니까?” 그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저도 진영준처럼 물산과 전자의 총괄 CEO가 될 것입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말이죠.” “말씀대로 될 것 같군요.” 셋 중 가장 늙은 진영기의 사람이 말했다. 이들도 안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언론은 진영준을 국민의 피와 땀인 국민연금 7조 원을 깎아 먹은 천하의 잡놈이며 복잡한 여자 문제로 이혼당한 파렴치한으로 만들었다. 반면에 나는 세계를 누비며 거물들과 어울리는 글로벌 리더의 모습이며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부호로 띄워줬다. 나를 반대할 주주는 없으니 순양그룹의 회장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이들도 생각한다. “그런데 지킬 수는 있습니까?” 아무리 힘이 빠져도 진영준은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그 순간 진영준은 의결권을 되찾고 다시 세력을 규합해서 아주 낮지만 물산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곧바로 배신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들이 걱정하는 점이다. “제가 물산과 전자의 총괄 CEO가 되면 가장 먼저 두 회사가 보유한 물산, 전자 주식을 전부 매각할 겁니다.” 세 사람은 깜짝 놀랐지만 굴러먹은 짬밥이 다르다. 어디로 팔아넘길지 눈치챘다. “미라클이야 충분히 소화할 자금력이 있으니 가능하겠군요. 그럼 미라클이 전자와 물산을 지배하고, 전자와 물산이 나머지 계열사를 지배하니 굳건한 지배구조를 갖추는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지금 건설, 중공업, 백화점을 지배하는 구조와 똑같습니다.” 순환출자구조를 수직구조로 바꾼다. 모든 재벌 총수들이 원하는 구조지만 돈이 없어 불가능한 방법이다. 이제 세 사람은 서로 눈치만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 먼저 말 꺼내도록 서로 미루는 것이다. 그 어려운 말은 내가 먼저 꺼냈다. “이사회 때 만장일치로 날 추대하도록 임원들을 설득하세요. 조건 없이.” “네?” “세 분에게 어떤 자리를 줄지, 아니면 아예 해임해버릴지는 제가 전자를 차지하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저와 거래할 생각이라면 포기하세요. 거래는 강자가 제안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런 자격이 없어요. 누가 더 강자인지는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내가 부려야 할 사람 중에 진정으로 나를 따르는 사람 외에는 힘으로 눌러야 한다. 거친 정글을 헤치며 높은 자리까지 올라온 이들 같은 능력자들은 타인을 존경하지도 않고 충성심도 없다. 이들에게 통하는 건 단 하나, 두려움이다. “내가 순양그룹 회장실, 바로 할아버지가 쓰시던 그 방에서 여러분을 다시 만나겠습니다. 그때 거래나 협상이 아닌 부탁을 하십시오. 여러분이 원하는 게 뭔지 들어는 보겠습니다.” 이들의 눈에 서린 불안이 보였다. 많이 봤던 눈빛이다. 바로 할아버지 앞에서 항상 보였던 그 눈빛이기 때문이다. * * * 진영준은 구속된 지 정확히 3일 만에 연락이 왔다. 그동안 변호사들과 상의하며 기울어진 흐름을 실감했나 보다. “지금 영준 형은 어디 있는데?” “네?” 진영준의 변호사는 화들짝 놀라며 더듬거렸다. “구치소에 없는 거 아니까 괜찮아요. 시멘트 바닥에 등 붙이고 잘 사람이 아냐. 어디요?” “구치소 근처…. 모텔입니다.” 변호사가 어렵게 털어놓았다. “사람들 눈이 있으니까 급히 샀겠네. 변호사님 명의요?” “네.” “갑시다. 길 잡아요.” 변호사의 차를 뒤따랐다. 김윤석 대리는 불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실장님, 괜찮겠습니까?” “왜요? 모텔에서 내게 칼질이라도 할 것 같아서요? 지금 진영준의 목줄은 내가 쥐고 있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자고 하는 게 전부니까 염려 말아요.” 김 대리와 수행원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모텔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맨 위층에 계십니다. 그럼.” 변호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주차장의 자동차로 돌아갔다. 모텔방 문을 열자 긴급히 공수한 침대와 소파가 눈에 띄었다. 이 지경이 됐는데도 편안한 잠자리만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잘해놓고 사네. 괜찮냐는 인사는 생략할게. 구치소 소장에게 얼마나 줬어?” “좀 집어 줬다. 앉아.” 이 사실이 들키면 구치소 소장은 파면이다. 하지만 평생 받을 월급과 연금의 수십, 수백 배는 챙겼을 테니 무슨 상관인가? “복잡하게 하지 말고 1심에서 끝내자.”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네 처갓집, 쎄더라. 판사 새끼 이름이 전부 서씨로 시작해. 담당 검사는 네 동문이고. 구형은 3년 때리고 난 초범이니까 판결은 1년 반, 집행유예면 끝나잖아.” “장인어른께 부탁하고 동기 놈에게 술 한잔 사줘서 그렇게 끝낸다 쳐. 난 뭘 얻지? 이 상황 만드느라 처바른 돈이 얼만 줄 알아? 본전 찾으려면 까마득해.” 진영준은 꽉 다문 이 사이로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천천히 말했다. “전자는 그룹의 얼굴이니 네가 갖고, 물산만 계열분리 해서 내가 들고 갈게. 물산 밑에 계열사 대여섯 개만 붙여줘.” 이 자식, 판세를 확실하게 읽었다. 드라마틱한 역전타 같은 건 없으니 큰 결심을 했다. 진영준이 이런 결정을 내리는 데까지 변호사들이 얼마나 고생하며 설득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게 사흘 동안 생각한 최종 결론이야?” “내가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해? 하나도 남김없이 네가 다 가져가야 속이 시원하겠어?” “아니,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뭐야?” “…….” “큰아버지가 꽁꽁 감춰 뒀던 비자금, 이번에 주식 매입하느라 거의 쓴 걸로 알고 있어. 아닌가?”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맞는 것 같다. “그럼 형이 쥐고 있는 주식이 전부라는 이야기겠지? 물론 전자와 물산을 차지하면 투자한 비자금 정도야 쉽게 복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고.” “그냥 말해. 네가 원하는 건 뭐야?” “형이 쥔 주식 전부 토해 내. 대국민 사과의 뜻으로 기증한다고 하면 법원도 정상참작 할 거야. 물론 기증은 내가 지정하는 재단으로 해야겠지? 그럼 1심 집행유예로 끝낸다. 이 모텔에서 이삼 주만 지내. 부를 여자 많으니까 시간은 금방 갈 거야.” “이, 이 새끼가 진짜…!” “형이 가진 순양그룹 주식으로 살 수 있는 건 물산도 아니고 계열사도 아니야. 형량이 전부고 시간은 덤이다. 명심해.” 난 쿠션 좋은 소파에서 일어서며 침대 위에 뒹구는 휴대전화를 가리켰다. “일주일 뒤에 물산과 전자의 임시 이사회가 열려. 내가 총괄 CEO로 취임할 거야. 내 제안은 딱 1주일 동안만 유효해. 이 사회 끝나면 더는 제안 없어. 그리고…. 이런 건 전화로 말해. 오라 가라 하지 말고.” 온몸을 부르르 떠는 진영준을 보며 모텔방을 빠져나왔다. * * * 결국 1주일이 지났지만, 진영준은 연락하지 않았다. 그놈도 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다는 걸. 어차피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물에 걸린 놈이다. 진영준은 구치소를 나올 때 다시 처리하면 되고 난 눈앞에 닥친 임시 주주 총회에 전력을 다해야 했다. 순양그룹 대회의실에는 물산과 전자의 등기이사 삼십여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양 사옥 로비와 빌딩 주변에는 백여 명이 넘는 기자들이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진을 쳤고 사원들도 초조하게 기다렸다. 로비 곳곳에 붙은 벽보는 이사들을 압박하는 데 한몫했다. 「우리는 진도준을 지지합니다. 一 순양물산 순양전자 직원 일동.」 이건 내가 시킨 일이 아니다. 직원들의 자발적 행동이었다. 사실 로비로 들어서며 이 벽보를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드디어 내가 여기까지 왔다. 입사해서 잔디나 깎던 과거가 떠올라서가 아니다. 내 손을 꼭 쥐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이놈아! 뭘 꾸물대는 거냐? 냉큼 올라가지 않고!”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내게 이놈 저놈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작은할아버지!” 주병해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나를 향해 환히 웃으며 서 있었다. “어찐 일이세요? 여기까지?” “어쩐 일이긴? 오늘 네놈이 우리 형님 뒤를 이어 회장실에 입성하는 날 아니더냐? 내가 그 순간을 놓칠 리 있느냐? 순양의 공식적인 2대 회장이 나오는 순간인데!” 그렇다. 할아버지 외에 순양그룹 회장을 거쳐 간 사람은 없다. 오늘은 바로 내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 회장이 되는 날이다. ======================================= [326회] 죽은 지와 산 자. [완결] 대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사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들의 놀란 표정은 분명 나와 함께 나타난 주병해 때문이다. 주병해는 인자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저쪽 구석에 앉아 구경만 할 테니까 나 신경 쓰지 마라. 불편하면 말하고. 자리 비켜줘?” “아, 아닙니다. 고문님.” 전자 사장이 황급히 손을 내젓자 주병해는 웃으며 자리 잡았다. 등기이사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 때문은 아닐 테고, 주병해 고문 때문이 분명한데…. 뭘까? 회의실 상석의 빈자리에 앉자 이사회가 시작되었다. “지금부터 순양물산, 순양전자의 임시 이사회를 개최합니다. 안건은 동사(同社) 총괄 CEO의 선임에 관한 건입니다. 이사들은 의견을 개진해주십시오.” 서로 눈치만 보며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전자와 물산의 사장과 파벌을 이끄는 몇몇 임원들이 먼저 찬성한다는 의견을 내야 하는데 그들도 입을 다물고 있다. 영감들, 튕기기는. 항복 선언 직전의 마지막 침묵이지만 그다지 쓸모없다는 걸 이들도 잘 안다. 난 전자와 물산 사장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두 분, 아직 계산 중입니까? 아니면 한 자락 남은 자존심을 제게 보여주시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두 사람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이를 신호로 삼십여 명의 등기이사들도 재빨리 일어나 손뼉을 쳤다. “본 안건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천천히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마지막 목표였던 두 회사마저 손에 넣었는데도 이상하리만치 덤덤했다. 허리를 펴자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주병해 고문이 등을 두드렸다. “고생했다.” 그의 짧은 한마디는 마치 할아버지가 내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 정말 긴 시간 동안 고생했다. * * * 주병해 고문은 순양그룹 회장실에 발을 디디는 순간 이미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인생의 가장 화려한 순간이 떠올랐을까? 아니면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걸까? 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집무용 의자에 앉았다. 손때 묻은 팔걸이의 가죽이 주는 촉감은 마치 할아버지의 손길 같았다. “어떠냐? 그 자리에 앉은 감상이?” “그냥 그렇습니다. 뛸 듯이 기뻐야 정상인데 덤덤하군요.” “충분히 자격을 갖췄기 때문에 그럴 게다. 과분한 자리였다면 뛸 듯이 기뻐했겠지.” 주병해 고문은 중절모를 고쳐 썼다. “네가 그 자리에 앉은 것도 봤으니 이제 내려갈란다. 남은 일 다 마무리하고 한번 내려오거라. 우리 형님 산소도 용인으로 이장하고. 이제 나도 늙어서 그런지 묘지기가 버겁구나.” “오신 김에 좀 쉬시다 가시지요?” 후다닥 일어나 그를 잡았다. “됐다. 보고 싶은 거 봤으니 더 볼일 없다.” “작은할아버지. 단지 그것뿐입니까?” “응? 무슨 말이냐?” “서울 오신 목적이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서요.” “고놈 참, 눈치 하나는…. 허허.” 주병해 고문은 지팡이를 들어 밖을 가리켰다. “이사회 때 혹시 삐딱한 놈 있으면 혼쭐을 내려고 왔어. 그리고 영기가 이사회에 난입하면 내가 그놈 입을 찢어버릴 생각도 했고.” 역시, 할아버지를 대신할 생각이셨다. “작은할아버지. 절 너무 허술하게 보시는 거 아닙니까?” “뭐야?” “제가 사람을 풀어 큰아버지 집 주변을 에워쌌어요. 집 밖으로 못 나오십니다. 그리고 전자 임원들은 이미 제게 무릎 꿇었습니다. 오늘 이사회는 요식행위였어요. 하하.” 깜짝 놀란 작은할아버지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독한 놈. 지 할애비 판박이구먼. 나 간다. 나올 거 없다.” 그는 배웅하려는 나를 밀치고 회장실을 횡하니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회장실을 천천히 걸으며 할아버지의 손때 묻은 흔적을 하나하나 돌아보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一 회장님. 계열사 사장들이 인사드리겠다며 기다립니다. 어떡할까요? 회장님…. 이제 익숙해져야 할 내 호칭이다. “전자와 물산 사장만 들어오라고 하시고 나머지는 다 돌려보내요. 취임식 끝나고 만나겠습니다.” 인터폰을 끄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장이 들어와 머리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인사는 나중에 하시고 빨리 처리해야 할 일부터 알려드립니다.” “아, 네. 회장님.” 두 사람은 긴장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았다. “전자 계열과 물산 계열이 보유한 사적 용도의 국내외 자산 전부를 처분합니다. 집, 별장, 전세기. 자동차, 각종 회원권 포함입니다. 집과 별장 내부의 모든 물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품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증빙하라고 하세요, 그 전에는 숟가락 하나, 슬리퍼 하나 밖으로 가져가지 못합니다. 기한은 삼 일 드립니다.” 큰아버지 식구 전부를 집에 쫓아내라는 지시를 이렇게 길게 말했다. 두 사람은 이 껄끄러운 지시에 당황했지만,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또 대대적인 계열사 감사를 시작할 겁니다. 그러니 임직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잘 다독이시고요.” 이들은 두 번째 지시에 새파랗게 질렸다. 계열사 임원들의 비리를 파헤치겠다는 뜻 아닌가? “놀라지 마세요. 저, 임원들까지 손댈 정도로 꽉 막힌 놈 아닙니다. 타깃은 딱 두 명, 진영기와 진영준입니다. 아시겠어요? 두 분의 협조 부탁합니다.” 그룹을 차지하는 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걸 이들도 짐작했다. 최종 목표는 진영기 부자의 파멸이다. 진양철 회장이 친형인 진순철의 흔적을 지웠듯이 말이다. “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이 둘을 잘 처리하면 두 분께 회사를 맡길 겁니다. 이미 잘 아시죠? 전 경영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걸? 실적만 잘 내시면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실 겁니다.” 역시 월급쟁이에게는 자리보전이 최고의 선물이다. 두 사장은 다시 환한 표정으로 돌아왔고 연신 머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그들이 나가자마자 웃음을 터트리며 이학재 회장이 들어왔다. “어쭈? 그 자리가 제법 어울리는데? 으하하.” “오셨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그가 손을 내저었다. “그냥 앉아 있어. 그 의자가 오랜만에 주인을 찾았는데 적응해야지.” “회장님도 이 방이 오랜만이시죠?” 그도 감회가 새로운 듯 천천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속보는 이미 떴더라. 축하 전화 많이 오지?” “전화 차단했고 핸드폰도 꺼 뒀어요.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인사는 천천히 받으려고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물산과 전자의 자사주부터 사들여야지?” “네. 정식 공시 뜨면 바로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 다 해뒀습니다. 이번 주 내로 그룹은 수직 계열화로 될 겁니다.” “빠르네, 역시. 참 언론도 난리 났던데? 순양그룹의 새로운 선장. 낯간지러울 정도로 칭송 기사가 쏟아져. 특히 한성일 보에서.” “참 잔인하죠? 애 아버지가 쫓겨났는데 그렇게 만든 나를 칭송해야 한다니.” “일이니까. 잔인한 수모도 견뎌 내야지.” “이제 더한 수모를 겪을 겁니다. 당분간 한성일보와의 거래는 없을 테니까요.” “당분간?” “네. 영준 형이 백기 들고 살려달라고 할 때까지요. 영준 형도 자식 생각하면 백기 들겠죠.” “독한 놈. 구족을 멸하는구만.” “할아버지 방식이거든요.” 이학재는 씁쓸히 웃었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이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계열사 정리는?” “큰아버지나 영준 형의 손을 탄 사람들은 싹 정리해야죠. 그들도 지금은 살아남으려 제게 머리를 조아리지만, 어쩌겠습니까? 왕이 바뀌었는데? 차라리 전부 사표 던졌다면 내 마음도 흔들렸을 겁니다.” “그냥 싹 정리해. 회장님이었다면 그렇게 하셨을 거다. 그리고… 하나 더 있어.” 이 회장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네?” “순양그룹과 HW 그룹의 합병. 그리고 그 꼭대기에 앉을 진도준 회장.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정리해야 한다. 흐흐.” 참으로 깔끔하고 철저한 사람이다. 그 오래된 거래를 잊지 않고 정확한 시점에 모든 걸 내려놓는다. “제 취임식 때 퇴임식을 함께할까요?” “냉정한 자식. 빈말이라도 붙잡아야 하는 거 아니냐?” “붙잡는다고 결심을 바꾸실 분이었다면 제가 그토록 어렵게 모셨겠습니까? 괜한 투정까지 다 하시고. 흐흐. 그래, 이제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이학재 회장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싱긋 웃었다. “오세현이가 놀러 오라더라. 너에게 모든 짐을 던지고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그 말이 맞는지 일단은 가볼 생각이다.” 사람마다 다르다. 이학재는 죽을 때까지 일에 매달리며 머리를 써야 할 사람이다. “리조트에서 지내시다 지겨우시면 다시 오십시오. 자리 하나 비워놓겠습니다. 제가 늘 말동무 해드릴게요.” 부회장 정도면 적당하려나? “봐서.” 이학재 회장은 벌떡 일어섰다. “실무진 꾸려서 빨리 보내. 합병 논의해야지. 간다.” 그는 조금의 미련도 보이지 않고 뒤돌아섰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한숨 돌렸다. 이렇게 쉬는 것도 잠시뿐이다. 가장 효과적인 때를 놓칠 수는 없다. 전화를 들어 김지훈 검사를 찾았다. 一 야! 연락도 안 되고 뭐 하는… 아니다. 먼저 축하부터 해야지. 감축드립니다. 순양그룹 회장님. 흐흐 “축하는 천천히 하고 지금 급히 일 하나 해줘야겠다.” 一 일? 무슨 일? “진영준이 만나서 협박 좀 하고 와라.” * * * “회장님. 담당 검사가 찾아왔습니다.” “뭐? 그놈이 여길 어떻게 알고?” “그게… 진도준의 말을 전하러 왔답니다.” 진영준은 잠시 고민하다 머리를 끄덕였다. 회장이 된 그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역시, 재벌이 구치소에 지낼 리가 없지. 이래서 구치소에 재벌만 들어오면 로또 맞았다는 소리가 나오는구만.” “설마 이런 걸로 트집 잡지는 않겠지?” “이 정도는 애교로 넘어가야지 별수 있겠어? 아무튼….” 김지훈 검사는 침대에 턱 걸터앉았다. “뉴스 봤겠지? 도준이가 순양 전부 꿀꺽한 거?” 한참 어린 놈이 말끝마다 반말이다. 진영준은 끓어오르는 속을 눌렀다. “용건만 말하고 가, 심부름꾼이 말이 많다?” “오케이. 당신이 차명으로 사들인 순양물산 주식 4천억, 그 자금 출처가 회사 돈 빼돌린 거 맞지? 도준이는 오늘부터 계열사 탈탈 털어 4천억 횡령한 증거 찾는다고 하더라고.” “이것들이 진짜….” “증거 찾으면 내가 그걸 100억씩 쪼개서 기소할 거야. 운 좋게 전부 집행유예가 된다 한들, 40번이나 기소할 수 있어. 그러니까 당신은 재판받으며 인생 다 보내는 거야. 물론 구치소가 당신 집이 되겠지. 아, 다음부터 모텔은 얄짤없어. 시멘트 바닥에서 지내야 할 거다.”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해?” 씩씩대는 진영준에게 김지훈은 소름 끼치는 웃음을 보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도준이가 이 말을 꼭 전하라고 하더라. 구치소 대신 네가 가진 그룹 주식으로 남은 인생을 사는 게 어떠냐고. 천천히 생각해. 흐흐.” 진도준의 칼질이 절대 멈추지 않는다는 생각에 진영준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어설 힘도 없었다. * * * 지시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걸 확인하자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내가 순양의 주인이 되었다는 걸 꼭 알려야 할 사람에게 찾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인터폰을 눌렀다. 一 네, 회장님. “전용기 준비해요. 지금 당장.” 一 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행선지는 어디라고 전할까요? “몰도바.” * * * 一 에필로그. “모두 여기서 대기해요. 혼자 다녀올 테니까.” “회장님. 그건 좀….” 당황한 수행원들을 못 본 척하며 검은 비닐 봉투를 들었다. “괜찮아요. 여긴 사람의 왕래가 없어. 안전해.” 김윤석이 앞으로 나섰다. “회장님. 안 되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간절한 그의 표정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그럼 내 뒤 10m 밖에서 따라오도록. 이 정도면 되겠지?” “네. 회장님.” 십여 명의 수행원이 뒤따르는 가운데 발걸음을 옮겼다. 20년도 훨씬 지난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호숫가로 가는 숲길마저 또렷이 기억났다. 그리고 펼쳐진 푸른 호수. 바로 그 장소에서 소주병을 따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기침이 났지만, 천천히 담배를 피웠다. 이런 내 모습을 보는 수행원들의 웅성거림도 어렴풋이 들린다. 그 소리마저도 숲의 소리 같다. 윤현우가 죽었고 진도준으로 태어난 곳. 윤현우는 어디서 잠들었을까? 호숫가 숲일까? 아니면 차디찬 호수 바닥일까? 돌이켜보면 복수를 위해 살았는지, 순양그룹을 차지하기 위해 살았는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머리에 총알이 박히는 악몽을 더는 꾸지 않았을 때가 그 경계선이 아니었을까? 담배를 비벼 끄고 소주를 부었다. 절반은 호숫가에, 절반은 호수에. “이제 편히 자라. 이 정도면 억울했던 죽음의 한풀이는 충분히 한 셈이니까.” 죽기 전에 했던 것처럼 한참 동안 푸른 호수를 바라보았다. 윤현우의 장례를 다 치른 것 같다. 이제 죽은 자는 잊고 산 자로 돌아가야겠다. 윤현우가 아닌 진도준으로……. 一 끝 一 一 작가 후기 一 하고 싶은 말은 참 많습니다만, 글쟁이는 글만 써야지 말이 많으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 말만은 꼭 해야겠습니다. 끝까지 따라오신 독자님들의 의리에 깊은 감사 드립니다. 좀 더 나은 글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산경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