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는 무림인이 되고 싶었다. 아홉 살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와 함께 TV로 <세계제일 비무대회>를 보다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와…….” 내게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광경이었다. 비무대 위에 선 무림인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마법처럼 느껴졌고,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 느껴본 동경이라는 감정. 내켜 하지 않는 엄마 몰래 아버지를 졸라 목검을 샀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검을 휘두르고,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달려와서 또 검을 휘둘렀다. 결국 엄마에게 들켜서 검을 빼앗겼지만, 내가 사흘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티자 엄마도 못 이기는 척 허락해주셨다. “무림인 되겠다고 괜히 헛바람 들면 어쩌려고…….” “이런 거 전부 한때야. 금방 재미없다고 팽개칠걸?” 그러나 부모님의 바람과 달리, 내 안의 두근거림은 사라지긴커녕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나는 무림인이 되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체육 시간엔 항상 1등이었고, 키도 크고 팔다리도 길었다.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너는 커서 무림인을 하라는 말도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자식 하나를 번듯한 무림인으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웬만한 서울 아파트 한 채 값은 든다고 했다. 중산층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우리 집 형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지출이었다. 부모님은 긴 상의 끝에 내 손을 잡고 입시학원을 찾아갔다. “무공을 익히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게 근골과 체질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아드님은 근골은 타고났습니다.” 영업용 멘트로 아버지의 입매를 씰룩거리게 한 원장이 슬쩍 덧붙였다. “다만 체질도 받쳐줘야 합니다. 열아홉 살은 되어야 정밀검사를 해서 체질평가를 받을 수 있는 건 아시죠? 이게 운이 많이 작용하는 부분이라…….” 무림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를 받아들이고 다룰 수 있는 체질을 타고나야 했다. 1급부터 10급으로 구분되고, 등급이 높을수록 기를 잘 모을 수 있었다. 원장은 평균적으로 7급 체질이 가장 많고, 그보다 낮으면 무림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한계가 명확하다고 설명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무림인들의 경우에는 최소 3급 이상의 체질을 타고났습니다. 천 명에 한 명 정도의 확률이지요. 십만 명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1급부터는 극음지체니 극양지체니 나뉘는데 아직 그 부분은 아실 필요 없고요. 아, 그리고…….” 극히 드문 확률이지만 아예 내공을 쌓을 수 없는 체질도 나온다고 했다. “정밀검사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부분은 저희가 미리 꼭 명시를 해드려야 하는 부분이라…….” 신체가 충분히 성장하기 전인 열아홉까지는 내공에 입문하는 것은 세계무림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자칫 기를 다루다가 사망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원장은 정밀검사 결과가 최악이어도 학원에서는 책임질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선생님. 저희도 충분히 알아보고 왔습니다. 리스크가 있다는 것도 알고요. 그런데 근골이 뛰어나면 체질도 뛰어날 확률이 높다던데 그 말이 맞나요?” “통계적으로 분명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아버지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엄마는 잡은 내 손에 가만히 힘을 주면서 말했다. “등록할게요.” 엄마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꼭 대단한 무림인이 아니어도, 무림맹에 무림인으로 등록만 할 수 있어도 진로가 무수히 많아진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괴이(怪異)를 사냥하는 사냥꾼. 흉악 범죄자들을 전담하는 특수경찰. 일반 장교보다 훨씬 좋은 대우를 받는 직업군인 등.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 대단한 고수는 못 되더라도, 먹고살 길은 얼마든지 열릴 거라고 판단하고 큰 결심을 내렸다. 그러나 내 아버지는 조금 더 낭만이 있는 팔불출이었다. “선생님. 저희 아들은 나중에 세계비무 대회에 나가서 우승할 겁니다. 무혁아. 그렇지?” “……응.” “기무혁!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림인이 될 녀석이 목소리가 왜 이렇게 작아?” “당신. 팔불출 짓 좀 그만해.” 두 분은 생각은 달랐지만 자식을 무림인으로 키워보겠다는 쉽지 않은 결정에는 동의하셨다. 학원비가 어마어마하게 비쌌지만, 부모님은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살던 집을 팔아서 전셋집으로 옮기고, 일 년에 한 번씩은 가던 해외여행도 가지 않았다. 그러고도 모자란 비용은 두 분이 주말에도 나가서 일을 하며 충당했다. “너는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수련만 해. 아버지가 알아보니까 근골이 받쳐줘야 단전에 내공이 쑥쑥 흡수된다더라. 홍삼도 빼먹지 말고 챙겨 먹고!” “부상이라도 당하면 전부 도루묵이야.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운동해. 알겠지?” “둘 다 잔소리 좀 그만해.”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분들의 잔소리가 얼마나 그립던지. 그때 나는 열두 살이었고, 부모님은 7년 동안 내 뒷바라지를 하셨다. 나 역시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죽어라 노력했다. 학교가 끝나면 가장 먼저 연무관으로 뛰어갔고,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서 검을 휘둘렀다. “또 기무혁이 실기평가 1등이야?” “콩쿨에서도 금상 탔다며?” “와, 재능충 때문에 할 맛 안 나네…….” 내가 이뤄낸 결과를 단순히 재능으로만 치부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런 말들 따위 신경쓰지 않았다. 손발이 매일 부르트고 근육통으로 몸살을 앓아도 검을 휘두르는 게 즐거웠으니까. ‘난 세계비무대회에 나갈 거야.’ 작은 동경으로 시작된 두근거림이 너무 커져, 이제는 하루라도 검을 휘두르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열아홉 살 생일이 지나, 드디어 병원에서 체질 정밀검사를 받았다. [무림인 부적합 체질 판정] 몸 안에 단전을 형성할 수 없는 체질이라고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무림인이 될 수 없다는 그 희귀한 확률의 주인공이 나였다. 몇 날 며칠을 울고불고 현실을 부정하며 난리를 쳐도 바뀌는 건 없었다. 실의에 빠져 학교에도 가지 않고 몇 달을 폐인처럼 보냈다. 그러다 그때까지 눈길조차 주지 않던 무림인 커뮤니티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한 가지 가능성을 발견했다. 바로 ‘인공단전 불법시술’이었다. 동아줄을 발견한 사람처럼 희망에 차올랐다. 시술 후 생존율이 50% 미만이니 하는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몇 달 만에 방문을 박차고 나가 부모님에게 매달렸다. “엄마! 아빠! 인공단전을 심는 시술이 있대! 가격이 조금 비싸긴 한데, 나 이번 한 번만 믿고 지원해주면…….”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따귀를 맞았다. -짜악! “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은 이유는 아버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너, 너 그거 얼마나 위험한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아버지가 안 알아본 줄 알아? 죽을 수도 있다며! 시술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엄마랑 아빠는 어떻게 살아가라고, 이 불효자 놈아!” “…….” 나를 붙잡고 엉엉 우는 아버지를 보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엄마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내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 “우리 아들. 몸 튼튼하고 건강하니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나쁜 생각은 하지 말자. 엄마 소원이야.” “……미안.” 정말로 중요한 것이 뭔지 깨달은 순간이었다. 나는 두 분을 안아드리며 맹세했다. 몇 년간 나 때문에 힘들었을 부모님을 꼭 행복하게 해드리겠다고. “다시는 나쁜 생각 안 할게. 무림인 같은 거 이제 안 해도 괜찮아. 엄마, 아빠. 정말 미안해…….” 부모님은 주말에 하던 부업을 그만두셨고, 나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지원하려던 무림맹 시험을 포기하고 체대입시를 준비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평범한 행복을 서서히 되찾아갔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부모님이 7년 만에 둘이서 오붓하게 다녀오겠다며 떠난 제주도 여행에서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 내게 남겨진 것은 전셋집과 부모님의 사망보험금 3억이 전부였다. 당시 내겐 마음을 털어놓을 만한 친구도 없었고, 친척들은 도무지 믿을 만한 사람들이 못 되었다. 두 번이나 삶의 목적을 잃은 나는 부모님이 남겨주신 돈을 까먹으며 일 년 넘게 허송세월을 보냈다. 대부분의 시간을 너튜브로 <세계제일 비무대회> 영상을 보거나 커뮤니티에서 시간을 축내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즈음, 만박자라는 유명한 무공 학자이자 술법사가 자신의 너튜브 채널에서 침을 튀기며 주장한 이론이 화제가 되었다. “저는 오랜 연구를 통해 인공단전을 이식한 사람도 단련을 통해 높은 경지에 이르면, 진짜 단전이 몸 안에서 형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문제는 현재 인공단전 시술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불법적인 경로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비위생적이고 전문가도 아닌 인력이 시술을 집도하니 성공 확률이 당연히 낮아지지 않겠습니까?” 만박자는 앞으로 인공단전 시술을 합법화하고 각국의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당연히 얼마 가지 못해 그 영상은 엄청난 욕을 먹으며 결국은 삭제되었지만, 내 뇌리에는 아주 강렬하게 남았다. ‘인공단전을 이식하면 나중에 진짜 단전이 생길 수도 있다고?’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하고 싶은 것도 없었잖아.” 만박자는 종적을 감추었지만, 돈만 있으면 불법 시술을 해주는 술법사들은 넘쳐났다. 나는 반쯤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전셋집 보증금을 빼서 나름 실력이 괜찮다는 술법사를 찾아 불법시술을 받았다. 그리고, 이번만은 운이 좋았는지 시술이 끝난 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그게 비록 반쪽짜리 세상이라도 말이다. 내가 의식을 차리자, 내게 시술을 해준 돌팔이가 히죽 웃으며 내 아랫배를 툭툭 건드렸다. “단전은 잘 정착했어. 하루 이틀이면 아랫배에 묵직한 기운이 느껴질 거야.” “한쪽 눈이 안 보이는데…….” “눈 하나만 안 보이면 다행이지. 관짝에 들어간 놈들보다야 형편이 낫잖아?” “…….” 당연한 말이지만, 불법시술을 한 몸뚱이로는 무림맹에 무림인으로 등록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둘 중 하나였다. ‘범죄 조직에 들어가거나 프리랜서 낭인이 되거나.’ 또 다른 문제는 돈이었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돈 대부분은 불법시술을 받는 데 사용했다. “너 돈 필요하지? 일자리 소개해줘?” 결국 먹고살기 위해 돌팔이가 소개해준 사설 보안 업체에 첫 일자리를 얻었다. 수당이 높은 대신, 법의 테두리를 슬쩍 벗어난 일도 종종 하는 업체였다. 일이 끝나고 남는 시간에는 대부분 무공을 수련했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여러 차례 크게 다치고, 몇 번은 진짜로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질기게도 살아남았다. “애꾸 동생. 그 소식 들었어? 만박자 그 새끼가 떠들던 연구 결과 그거 다 구라였다는데?” 무정한 시간은 참 잘도 흘렀다. 바쁘게 살다가 한 번씩 돌아보면 몇 년이라는 시간이 휙휙 지나가 있었다. “저한테 검 좀 가르쳐주세요! 스승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동안 때로는 누군가에게 곁을 주었고. “전부 당신 때문이야! 함께 살아서 돌아오겠다고 했으면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들에게 많은 원망을 듣기도 했다. “천마신교라고 들어봤지? 그쪽이랑 관련된 일은 최대한 피해. 요새 정말 심상치 않으니까.” 간혹 친해진 녀석들이 있었지만 전부 다 나보다 먼저 죽어버렸다. 어느새 돌아보니 가족도, 친구도, 동료라고 부를 만한 사람도 없었다. 위험한 일을 도맡다 보니 몸도 만신창이가 됐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검은 예리해졌다. 뒷세계에서는 인맥도 제법 넓어졌고, 그럴듯한 별호도 하나 얻었다. 독고귀(獨孤鬼). 어딜 가든 혼자서 살아 돌아오는 귀신이라는 의미가 썩 좋은 것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홀로 살아남는 데 익숙해졌다. 타인을 믿거나 챙기는 행동은 사치라고 믿게 될 만큼. 그렇게 내 배 속에 인공 단전을 박아 넣은 지 어느새 20년이 흘러, 세상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긴급 속보입니다! 무림인 종교단체인 천마신교가 세계 각국의 정부를 습격했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이번 테러로 현재 ○○○ 대통령을 비롯해 국회의원 다수의 사망이 확인되었으며, 현재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무림인들이 국회를 봉쇄한 채로……. 어느 날 천마신교라는 광인들의 집단이 세계를 장악했다. 폭력과 절도, 살인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순식간에 세상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이 망하든 말든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이십 년을 굴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내 육신은 이제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다만 흥미가 생긴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전 세계에 알린다. 내가 무림인의 꿈을 꾸게 한 <세계제일 비무대회>에서 이십 년간 연속으로 우승하고 은퇴한 절대고수. 베일에 싸여 있던 천마신교의 교주가 바로 그였다는 것이 밝혀지며, 놀랍게도 TV를 통해서 전 세계에 비무첩을 돌린 것이다. -내 통치에 불만이 있는 자들은 이곳을 찾아와라. 자격을 갖춘 자라면 누구든 비무를 받아주겠다. 바로 매년 <세계제일 비무대회>가 열렸던 결승전 비무대 위에서 말이다. “……세계제일 비무대회.” 그 순간, 내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정했다. 죽기 전에 한 번은 저 비무대 위에 서보기로 결심했다. 2화. 그야 당연히 곧장 미국으로 날아가 <세계제일 비무대회>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천마신교의 교주와 겨루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말한 ‘자격’을 갖춰야 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각 나라에 퍼져 있는 천마신교 지부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봐들.” 그래서 나는 천마신교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봉쇄된 국회의사당을 찾아갔다. 당장 천마신교도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었으니까. 잔뜩 경계하는 무림인들에게 나름대로 정중하게 물었다. “세계제일 비무대회에 참가하고 싶은데, 누구한테 검증을 받아야 하나?” “웬 미친놈이…….” “꺼져라!” 다짜고짜 욕하며 공격하는 천마신교의 교도를 스물쯤 베고 나서야 겨우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날 수 있었다. “뭐 하는 놈이냐?” 염화도(炎火刀) 신강헌. 한국제일도로 유명한 그가 천마신교 소속이었다는 사실에는 나도 꽤나 놀랐다. ‘이 녀석. 나랑 동년배였지.’ 체질검사를 받기 전, 한국의 전도유망한 십대 후기지수들을 언급할 때마다 항상 나와 함께 이름이 언급되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한 명은 불법시술을 받아 뒷세계를 전전하는 낭인이 되었고, 한 명은 전 세계를 상대로 한 테러의 주범이 되었다. 이건 누가 더 낫다고도 할 수 없을 만큼 둘 다 막장인생이 아닌가. “쯧. 이러니 나라 꼴이 개판이지…….” “갑자기 뭔 소리냐?” “세계제일 비무대회에 참가하고 싶어서 찾아왔다. 너한테 검증받으면 되나?”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놈이군.” 당연하지만 신강헌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무척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내 용무를 듣고는 ‘교주님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지.’라고 중얼거렸다. “비무로 할 텐가? 아니면 생사결로?” “난 생사결밖에 할 줄 모르는데.” “하하! 재미있군. 나도 그쪽이 더 편하니 생사결로 하지. 시간과 장소는?” “이왕이면 지금 바로.” “거, 시원시원한 친구네.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신강헌은 곁에 있는 부하에게 귓속말로 무언가 명령을 내렸다. 부하는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났다. “자, 시작하자.” 동시에 무기를 뽑아 든 우리는 처음부터 격렬하게 부딪쳤다. 검과 도가 부딪칠 때마다 죽어가던 온몸의 세포가 살아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왜 진작 이 녀석과 싸워보지 않았는지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하하하하……!” “미친놈인가? 곧 뒈질 것 같은 얼굴로 뭐가 좋아서 처웃고 지랄이지?” “그러는 너는 왜 히죽거리고 염병이냐?” 단언컨대, 그것은 내 생애 최고의 싸움이었다. 우리는 오백 합을 넘게 겨룬 끝에서야 결판을 낼 수 있었다. 나는 신강헌의 가슴에 구멍을 뚫었고, 그 대가로 내장이 흘러나올 정도로 옆구리를 깊게 베였다. “…….” “…….” 양패구상(兩敗俱傷). 솔직한 심정으로는 내 패배에 가까웠다. 신강헌은 나와 싸우기 전부터 굉장히 지쳐 보였고, 본래 실력의 절반도 제대로 내지 못한 것 같았으니까. 반면 나는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불사르듯이 싸웠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지만, 괜히 입맛이 써서 신강헌에게 물었다. “결과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나?” “전혀. 내 마지막에 어울리는 근사한 싸움이었다.” 다행히도 신강헌은 딱히 불만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씨익 웃은 신강헌이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물었다. “……근데 너 같은 무인이 왜 낭인으로 있었지?” “지, 지부장님을 치료해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천마신교도들이 달려오다가 신강헌의 사자후에 멈춰 섰다. “날 모욕할 셈이냐! 한쪽이 쓰러질 때까지 생사결은 끝나지 않는다!” 곧 죽을 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부하들이 꼼짝도 못 하도록 만든 그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소란스럽게 해서 미안하군. 조금 전 질문에 대답해 주겠나?”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도 신강헌은 꼿꼿하게 서 있었다. 무림인의 생명력이 질기다고는 해도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나는 상대를 존중하는 의미로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과거에 체질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미련이 남아서 단전 시술을 받았고, 보다시피 뒷세계를 전전하는 낭인이 됐지.” “하…….” 한숨을 쉬는 녀석의 표정에 담긴 의미는 조롱이 아닌 안타까움이었다. “아깝군. 본교에 일찍 투신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체질 부적합자도 무공을 익힐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거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10년 전에만 알았어도 천마신교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겠지만, 지금에서야 다 부질없는 정보였다. 나는 그러냐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진작에 선교 활동이라도 좀 열심히 하지 그랬어?” “푸흐흐……! 너 진짜 재밌는 놈이다. 어릴 때 알고 지냈으면 친구가 됐을 수도 있겠어. 이름이 뭐냐?” 자신을 꺾은 상대의 이름과 별호를 묻는 것. 무림인들의 오랜 관행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기무혁. 독고귀 기무혁이다.” “……기무혁? 설마 그 기무혁?” 기억하고 있었나. 신강헌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핏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입매를 끌어올리며 히죽히죽 웃었다. “너, 어릴 때 나보다 높게 평가받던 놈이었잖아! 갑자기 소문이 안 들려와서 궁금했는데…….” 털썩. 순간 몸에서 힘이 빠졌는지 신강헌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칼로 간신히 버텨서 완전히 넘어지는 꼴만은 피한 상태였다. 녀석이 점점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술이라도, 한잔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중에 저승에서 만나면 하자고.” 나 역시 몸 상태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손으로 틀어막은 옆구리에서 내장이 삐져나오려고 했다. 회복 불가의 상처. 남은 수명이 실시간으로 깎여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나도 질문 하나만 하자. 세계제일인은 얼마나 세냐?” 신강헌이 무릎을 꿇은 채로 하늘을 올려보며 웃었다. “나 따위와 비교하는 것이 우스울 만큼. 아마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교주한테는 못 이길걸?” “못난 자식. 그러니까 겨우 낭인인 나한테 진 거다.” “흐흐. 그럴지도…….” 그 말을 끝으로, 신강헌은 자신의 칼에 몸을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주변을 둘러싼 천마신교도들을 둘러봤다. “복수하고 싶은 놈 있으면 덤벼라. 땅 짚고 헤엄치기도 이거보다 쉬울걸?” 눈치만 볼 뿐 덤비는 놈은 없었다. 아무래도 놈들은 신강헌의 복수로 자연사라는, 무림인에게 가장 멋없는 최후를 내게 안겨줄 생각인 듯했다. ‘피곤하군.’ 슬슬 눈이 감겨왔다. 옆구리가 베일 때 인공단전도 함께 찢어졌고, 그 탓에 기가 덧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혈도에 흐르는 기운들 덕분에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 나 역시 이미 시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 이십 년이면 오래도 버텼다.’ 나는 자꾸만 옆으로 흘러나오려는 찢어진 고무공 같은 것을 손바닥으로 꾸욱 밀어 넣었다. 보통의 인공단전은 십 년도 못 가서 수명이 다해 갈아 끼워야 하는데, 이 녀석은 무려 이십 년이나 버텨주었다. ‘그 돌팔이가 실력은 좋았어.’ 지금은 뒈져버리긴 했지만, 대신 해달라던 복수도 몇 년 전에 해줬으니 저승에서 만나도 별 불만은 없을 것이다. 잠시 멍하니 서서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새길 때였다. “저리들 비켜라!”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한 노인이 인파를 헤치고 나를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나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누군지 알아봤다. “……만박자?” 한때는 저명한 무공 학자이자 술법사였던 인물. 인공단전을 오래 사용하면 진짜 단전을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해, 내가 불법시술을 받도록 만든 원흉. 그러다 갑자기 종적을 감춰서 희대의 사기꾼으로 판명된 인간이 아닌가. “대체, 어떻게…….” 만박자는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꼼짝할 힘도 없었던 나는 그저 가만히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인공단전으로 신강헌과 대등한 경지를 이뤘단 말인가?” “그 녀석은 만전이 아니었어. 봤다면 알 텐데?” “하지만 자네는 조잡한 뒷세계 무공을 익힌 낭인, 그것도 신체가 온전하지 않은 애꾸가 아닌가?” 이 늙은이가 사람 열받게 하는군. 마지막 남은 힘으로 검을 휘두를까 하다가 관뒀다. 그사이 만박자는 내 상처를 막아 지혈하고 응급처치를 했다. 물론 그런다고 내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시간을 벌어줄 뿐. “조금 아플 테니 참게.” 갑자기 만박자가 내 옆구리에서 손바닥을 치우더니 인공단전을 쑤욱- 빼버렸다. 장기가 뽑히는 듯한 격통에 검마저 놓쳐버릴 정도였다. “컥……! 이 미친, 늙은이가!” 나는 아파서 죽겠는데, 만박자는 찢어진 내 인공단전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 “하하하! 으하하하하하―!” 겨우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뜨린 검을 다시 쥐었다. 그사이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어젖힌 만박자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군.” “미친 늙은이. 내가 너는 죽이고……” “이 인공단전은 진작 수명이 다했네. 이건 그냥 술법이 다한 고무일 뿐이야.” “……뭐?” “자네는 몸 안에 진짜 단전을 형성했단 말일세!” 나는 끔찍한 고통마저 잊을 정도로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가, 부적합이 아니라고……?” “처음에는 부적합이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닌 게야. 자네는…… 체질을 극복하고 단전을 만들어낸 최초의 무림인이라네!” 만박자의 눈에서 기쁨인지 희열인지 모를 것이 줄줄 흘러내렸다. 진짜로 울고 싶은 건 나다, 이 망할 늙은이야……. 어릴 적 그토록 바라던 것이 이렇게 이루어졌는데, 심지어 그걸 알아차린 시점이 죽기 직전이라고? 그래도 죽기 전에 뭔가 하나는 이룩했다는 사실에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걸 증명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그래서 천마신교에까지 투신했는데……. 드디어 내 이론이 옳았다는 게 밝혀진 게야! 이제 여한이 없구나, 여한이 없어.” 만박자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서러움과 회한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지난 이십 년간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네. 천마신교에 투신한 뒤 교의 무공과 자금으로 온갖 실험을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지. 그래서 내가 직접 과거로 돌아가서 하려고까지 마음을 먹었는데. 어찌 이렇게 한순간에, 하하하하……!” 감격에 겨워서 혼자서 울고, 웃고, 떠들며 지랄을 하던 만박자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내 생명은 이제 바람 앞의 촛불처럼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자네.” 모든 감각이 둔해진 가운데, 유독 그 목소리만 선명하게 들렸다. “혹시라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뭘 가장 하고 싶나?” ……뭐? 이 세상에는 믿기 힘든 신비한 술법과 괴이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어느 날 종적을 감추기 전까지 만박자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무공 학자이자 손에 꼽히는 술법사였다. 나는 그의 말을 헛소리라고 치부하면서도, 가만히 상상을 해보았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야 당연히.” 나는 이 순간 떠오르는 가장 간절한 소원을 빌었다. “부모님과 함께 밥을 먹고 싶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만박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멋진 대답이로군. 그럼 하나만 더 묻겠네.” “그냥 좀 죽으면 안 될까.”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무공을 익힐 건가?” 그 순간 무수한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아버지를 졸라서 처음 목검을 잡았던 때의 설렘. 근육통에 제대로 잠을 못 잘 정도로 운동을 하면서도 즐거웠던 날들. 부모님을 잃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불법시술을 받던 순간. 낭인이 되어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던 감각. 동료라고 불렀던 녀석들의 주검을 마주한 순간과 무력한 스스로를 원망하며 검을 집어 던졌던 날들. ‘돌아보면 기뻤던 날보다 고통스러운 날들이 훨씬 더 많았지.’ 하지만 그럼에도. “……어. 익힐 거야.” 나는 또 무림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기회가 있다면 이번 생처럼 살지는 않으리라. 부모님의 앞에서 떳떳할 수 있도록 정도(正道)를 걷고. 더 이상 혼자가 아닌 동료들과 함께 살아서 돌아오겠다. 그리고 세상 그 누구보다 더 강해질 것이다. “자네가 내 일생의 소원을 이뤄주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자네의 소원을 들어주겠네.” 만박자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뭐라고? “내 평생을 쌓아온 술법, 간절한 염원, 천마신교의 보물, 그리고 생명을 바쳐 역천(逆天)의 술법으로 그대를 과거로 보낼 걸세.” 그 순간 불길처럼 뜨거운 기운이 내 몸을 휘감았다. 완전히 암전된 시야는 이내 우주로 변했다. 나는 수많은 별이 가득한 우주에 홀로 떠 있었다. “혹시라도 그곳에서 나를 만난다면.” 아스라이 아주 먼 곳에서 만박자의 목소리만이 웅웅- 울렸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족이나 잘 돌보라고 전해주게나.” 점점 흐릿해지는 의식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마 자네의 몸 속에는…….” 만박자가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희미해진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뜨자 거짓말처럼 주변의 풍경이 변해 있었다. “……아.” 너무나 낯선, 그러면서도 아주 낯익은 공간이 보였다. 지저분한 방,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과자봉지며 컵라면 따위의 쓰레기들. 급히 몸을 돌려 거울을 찾았다. 그 안에는 까슬까슬한 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가 아닌,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송이가 있었다. 몸에 흉터도 없고, 당연히 왼쪽 눈도 멀쩡했다. “……진짜네.” 나는 과거로 돌아왔다. 날짜를 확인해보니 열아홉 살, 정밀검사에서 부적합 체질 판정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인 것 같았다. 3화. 해야 할 일들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기도 잠시.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호흡이 가빠졌다. 방 안에 공기가 부족해서도, 회귀의 부작용도 아니었다. ‘그럼 지금 저 밖에…….’ 나는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방문의 손잡이를 바라봤다. 그 너머에서 너무나도 그리운 두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여보. 들어가 볼까? -그냥 둬. 마음을 추스르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야. -벌써 일주일이나 저러고 있잖아! -쉿! 안에서 듣겠다. 혁이가 얼마나 힘들지 당신도 알면서 그래? -난 혹시라도 나쁜 생각이라도 할까 봐 그래. 방금도 혼잣말 중얼거리는 거 들었잖아……. 문 바깥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이야기하는 부모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오래전에 말라붙은 줄 알았던 눈물샘에서 무언가가 뚝뚝 떨어졌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문으로 다가갔다. 지금 이 바깥에 부모님이 계신다. 멀쩡히 살아계신 모습으로,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 그대로. “…….” 손등으로 급하게 눈물을 훔치고, 제자리에 서서 심호흡을 몇 차례나 했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진정이 되지 않아 덜덜 떨렸다. 혹시라도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이 모든 것이 꿈일까 봐 두려웠다. 끼익……. 그래서 아주 천천히, 별일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게 문을 열었다. “……엄마, 아빠.” 두 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야 며칠 만에 본 아들이 퉁퉁 부은 얼굴로 나타나니 놀라기도 하셨겠지만. 하지만 저는…… 무려 이십 년 만이라고요. “어, 어어! 혁아! 왜 그래?” “필요한 거 있어? 엄마가 갖다 줄까?” 부모님이 혹시라도 내가 다시 방으로 숨을까 봐 조마조마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짧은 순간에 입가에 수많은 말이 맴돌았다. 보고 싶었어요. 사랑해요. 다시는 저 때문에 고생하시는 일 없도록 할게요. 제 앞에 다시 나타나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 모든 말을 안으로 삼키고,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말을 뱉었다. “나…… 배고파. 밥 먹자.” 어린애가 투정을 부리는 듯한 내 말투에 부모님은 잠시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어?” “뭐?” 처음에는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이내 서서히 안도의 한숨이, 마지막에는 내 계획대로 황당하다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우리도 마침 먹으려고 했는데 잘됐다. 잠깐만 기다려!” “방에 들어가지 말고 식탁에 앉아 있어! 엄마가 금방 차려줄게.” 나는 두 분이 앞다투어 부엌으로 향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티격태격하며 함께 식사를 준비하시는 모습에 괜히 피시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하…….” “쟤가 배고파서 실성을 했나?” “방울토마토 꺼내줄 테니까 먼저 좀 먹고 있어!” 그날, 나는 과거로 회귀하자마자 가장 큰 소원을 이뤘다. * * * 회귀 후 며칠 동안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부모님에게 마구 치댔다. “……얘가 왜 이래, 정말?” “너, 인생 망했다고 울고불고 난리 치던 내 아들내미가 맞냐?” 징그러워도 좀 봐줘요. 이쪽은 이십 년 만이라니까? 부모님은 처음에는 당황해하셨지만, 그래도 밝아진 내 모습에 안심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버지. 오랜만에 같이 게임 할까요? 너무 오랜만이라 다 까먹었지만…….” “지금 밑밥 까는 거냐?” 퇴근한 기 씨네 가장은 아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콘솔을 붙잡고 놀다가 마누라에게 등짝을 맞기 일쑤였고. “봐봐 엄마. 스트레칭을 이렇게 하라니까? 대충하니까 운동이 하나도 안 되잖아.” “귀찮아아…….” 유도부 출신이면서 결혼 후 심각한 운동량 부족이 된 엄마는 아들을 따라서 운동을 시작했다. 몇 번인가 진짜로 하기 싫다고 짜증을 냈지만, 가족의 건강이 걸린 이상 나도 순순히 물러서진 않았다. 부모님은 무뚝뚝하던 아들이 갑자기 살갑게 변한 모습에 ‘체질 검사의 충격이 크긴 했나 보다.’라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물론 당시에야 그랬지만, 지금은 그저 부모님이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랄 뿐이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야.’ 기적처럼 찾아온 두 번째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지켜나가자고, 가족과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마다 다짐했다. “그럼 엄마 아빠 출근할게.”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친구들도 좀 만나고.” “네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일을 하셔서 출근한 이후부터 퇴근 시간까지는 나 혼자 있었다. 그 시간에는 조용히 몸 안에 생긴 변화를 관조했다. 젊고 튼튼해진 육체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함부로 굴려서 망가질 대로 망가졌던 회귀 전 몸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 ‘아껴 써야지.’ 과거에는 그냥 무식하게, 무조건 많이 훈련해야 좋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젊을 때야 무리하게 훈련해도 버티지만, 그것이 누적돼 나중에는 결국 고장 나는 것이 사람 몸이다. 뒷세계에서 이십 년간 낭인으로 굴러먹으면서 뼈저리게 느낀 바였다. ‘이번에는 조급해하지 말고 제대로 된 몸을 만들자.’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훈련하고 몸을 만들어야 할지 이미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거실에서 가볍게 몸을 풀어준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자 아랫배에서 꿈틀대는 기운이 느껴졌다. 내 안에…… 단전이 있었다. 회귀한 날 밤부터 수십 번이나 확인한 것인데도, 아직도 그 사실을 실감할 때마다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확실하게 느껴져.’ 나는 더 이상 무림인 부적합 체질이 아니었다. 몸 안에서 원활하게 기가 흐르고 있으며, 그 중심에 단전이 있었다. 지금은 콩알보다도 작게 느껴지지만, 훨씬 더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정확한 등급은 체질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만약 7급 이하더라도 인공단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무공을 익힐 건가? 만박자의 질문에 나는 그렇게 할 거라고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무공을 익혀 무림인이 되고 싶었으니까. “……진짜 무림인이.” 뒷세계에서 하루하루 먹고살기 급급한 낭인이 아니라, 떳떳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제대로 된 정파무림인. 지금부터 미래를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바꿔야만 한다. 나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계획하고 정리했다. 중요한 사건 같은 것들은 기억이 날 때마다 적어뒀다. 다시 만나고 싶은 인연들. 고마웠던 사람들. 차라리 빨리 죽이는 편이 세상에 이로운 해충들. 하나하나 적어가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나갔다. 그 마지막쯤에 네 글자를 적고 잠시 바라봤다. “천마신교…….” 지금으로부터 약 이십 년 후, 천마신교가 전 세계를 상대로 테러를 일으킨다. 각국 정부를 습격해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일부 국가는 실제로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혼란과 공포,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번엔 그렇게 못 두지.” 회귀하기 전의 나는 세상이 망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곧 죽을 몸이었고, 지켜야 할 가족이나 친구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내겐 함께하는 가족이 있고, 건강한 몸과 앞날이 창창한 미래가 있다. ‘정신 나간 사이비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이 멀쩡할 리 없지.’ 천마신교는 강해지기 위해서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마도(魔道) 집단. 놈들이 득세하는 미래는 끔찍한 세상이었다. 강자존이란 법칙 아래에 상식과 치안이 모두 무너지고, 그 안에서 마교도들은 추악한 범죄를 일삼았다. 그런 놈들을 어느 누구도 응징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부모님을 잃고, 친구 하나 없이 죽어가던 내게는 그런 세상인들 아무 상관도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최대한 천마신교를 막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떠오르는 대로 적어놓은 노트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생각했다. 뭔가 계획은 많지만 결국 해야 할 일은 단순했다. “강해진다. 누구보다 더.” 나는 고개를 들어 거실 벽에 붙어 있는 우상의 포스터를 바라봤다. -내 통치에 불만이 있는 자들은 이곳을 찾아와라. 자격을 갖춘 자라면 누구든 비무를 받아주겠다. <세계제일 비무대회>가 개최된 이래 최다 우승자. 그리고 훗날 천마신교의 교주로 밝혀지는 남자. 리차드 한. 내가 가장 존경하는 무림인이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 말은, 내가 당신을 꺾으면 쓸데없는 짓을 관두겠다는 거지?” 훗날 <세계제일 비무대회>에서 내 결승전 상대가 될 남자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 * * 내 생일은 항상 여름 방학에 걸쳐 있었다. 열아홉 살이 된 올해는 생일이 되자마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전문병원에 가서 체질검사를 받았다. ……부적합 판정이 뜨고 나서는 울고불고 지랄 난리를 치고 한동안 방구석에 처박혔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빨리 제정신을 차린 덕분에 아직까지 방학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즉, 나는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이다. 누군가는 죽어라 공부하는 시기이지만, 진로를 무림인으로 잡은 내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여긴 똑같네.”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남대문시장을 찾았다. 익숙한 길을 따라가다가 잠시 추억에 잠겨 주변을 둘러봤다. 평일임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 빼곡한 상가들. 그러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지하상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인기척은 줄어들었고, 종종 어둠 속에서 음침한 시선이 느껴졌다. ‘약에 쩐 낭인 놈들.’ 희미한 약냄새와 썩은 내가 섞인 악취. 수십 년을 지낸 거리의 모습에 저절로 감정이 가라앉았다. 가볍게 혀를 찬 나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목적지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간판도 없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안쪽은 5평이나 될까? 녹슨 철문에 덕지덕지 붙은 부적들이 음산함을 더했다. 물론 거기에 익숙한 나는 거침없이 다가가 두꺼운 철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쾅쾅쾅쾅-! 가게 안에서 시끄러운 헤비메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정도로 두드리지 않으면 밖에 사람이 온 것도 모를 녀석이었다. 잠시 후, 음악이 멈추고 안쪽에서 경계심 어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끼이익. 손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로만 열리는 문. 안쪽에 쇠사슬 같은 안전고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 안으로 붉게 염색한 머리카락이 비쳤다. 시선을 더 아래로 내리자 짙은 화장에 라이더재킷 차림인 여자가 날 올려보고 있었다. 나는 웃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 “여기 기(氣) 시술하는 가게 맞지?” “……손님?” 제법 보고 싶었던 낯짝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일하는 시간 아니야. 뭔데 꼭두새벽부터 찾아오고 난리야?” 참고로 지금은 오후 3시가 넘었다. 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내 기억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여자를 바라봤다. -단전은 잘 정착했어. 하루 이틀이면 아랫배에 묵직한 기운이 느껴질 거야. 과거에 내게 인공단전 불법시술을 해준 바로 그 돌팔이. 시술의 부작용으로 애꾸가 된 내게 첫 일자리를 주기도 했고, 그 후로도 여러모로 도움을 받은 은인이었다. “……그쪽 솜씨가 좋다고 해서 멀리서 상담받으러 왔는데. 차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하면 어떨까?” 나름 부드럽게 웃으면서 정중하게 말했는데, 녀석은 징그러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정색하더니 문을 쾅 닫으려고 했다. “꺼져. 관심 없으니까!” 잠깐, 잠깐만. 나는 급하게 손을 뻗어서 닫히려는 문 안에 집어넣었다. “잠깐만 얘기 좀 하자니까?” “이거 당장 안 치워? 확 잘라줄까?”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듯, 돌팔이는 안에서 톱을 가져와 치켜들었다 ……뭔가 첫 만남부터 조금 어긋난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었다. 이 녀석의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김복자. 얘기 좀 하자고.” “너, 너, 너 누구얏-!”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자신의 본명을 부르자 김복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4화. 넌 내 옆에서 협박과 공갈, 고성과 욕설이 다수 포함된 실랑이 끝에 나는 김복자의 작업실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 “자, 이거라도 처마시든가.” 나는 김복자가 가져다준 의심스러운 검은 액체를 한번 바라보고는 옆으로 슬쩍 밀었다. 그러자 황당하다는 시선이 내게 꽂혔다. “차 한잔하면서 얘기하자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처음 보는 사이에 뭐가 들었을지 알고 주는 대로 받아 마셔?” “하? 그냥 커피거든?” 저 뻔뻔한 거 봐라? 아까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낼 때 손장난 치는 것을 눈치챘지만, 굳이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산공독이나 간단한 마비독 정도일 테니까.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사파 무림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살아남기 위한 저 녀석 나름의 생존전략. 물론 그 수작을 전부 알고 있는 내게는 통할 리 없었다.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도 없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다는 거야?” 내가 끝까지 음료를 마시지 않자 복자는 초조한 표정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탁자 아래에 감춰둔 오른손으로는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는데, 나는 그것이 권총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경계심 많은 건 여전하군.’ 화려하고 거침없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복자는 생각보다 훨씬 겁이 많았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 싶으면 그대로 방아쇠를 당길 성격이었다. ‘괴이를 부리는 게 더 나을 텐데. 아직 거기까지는 못 하나?’ 지금으로부터 불과 몇 년 후의 김복자는 중급 이상의 괴이(怪異)를 사역해 부리는 강력한 술법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실력도 경험도 풋내기 티를 벗지 못한 초짜처럼 보였다. ‘부탁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지만.’ 나는 두 손바닥을 들어서 보여주며 친절하게 웃어주었다. “신뢰는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거지. 보다시피 그래서 무기도 안 들고 왔거든.” “난 댁 같은 타입 딱 질색이야.” 아까부터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고개를 갸웃거리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봤지만, 복자는 아예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내게 질문했다. “그 이름은 어디서 들었어?” “김복자?”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이야기고 뭐고 없어. 당장 쫓아낼 줄 알아.” 본명으로 불리기 싫어하는 건 여전하네. 퍽 친해진 후에는 편하게 부르기도 했지만, 그때도 저렇게 정색했을 때는 조심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나는 순순히 사과했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네 본명은 우연히 어떤 사람한테 들었어. 몇 가지 시술을 부탁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마침 네 얘길 하더군. 자기가 아는 돌팔이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낫다고.” “그게 누군데?” 나는 대답해주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왜냐면 그 사람이 바로 나니까. “말하기 좀 그러네. 정식으로 소개받은 것도 아닌데 괜히 중간에서 욕만 먹게 할 수는 없잖아?” “제대로 소개받아서 온 것도 아닌데 내가 일을 받을 것 같아?” “어차피 먹고살려고 하는 일 아냐? 대가는 충분히 지불할 수 있는데.” “…….” 복자는 잠시 날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알려줬다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해보는 눈치. 물론 그런다고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짱구를 아무리 굴려봐라. 뭐가 나오나.’ 나는 이 녀석과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알고 지냈다. 성격이며 능력, 주변 인간관계까지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녀의 본명을 아는 사람이 극히 적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비밀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금 내게는 이 녀석의 능력이 꼭 필요해.’ 뒷세계에 연줄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 중에서 그나마 쓸 만한 인성과 양심을 가진 녀석. 게다가 그 실력은 양지에서 활동하는 어지간한 술법사보다 뛰어났다. 20년간 낭인으로 굴러먹으며 본 술법사들 중에서도 복자보다 뛰어난 이는 몇 보지 못했으니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충분한 지원을 받았다면…… 분명히 대단한 술법사가 되었을 것이다. “……뭐, 돈만 충분하면 손님으로 못 받을 것도 없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듯, 복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내게 물었다. “무슨 시술이 필요한데? 인공단전? 무구류 술식 부여? 인피면구? 아님 부적이나 저주?” 하여간에 우리 복자 재주도 많다니까.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본격적인 협상에 돌입했다. “미안한데, 나 돈은 없어.” “……장난하냐?” 복자의 눈빛이 당장에라도 날 내쫓을 것처럼 싸늘해졌다. 물론 그 정도로 위축될 거였으면 애초에 찾아오지도 않았다. “대신 다른 걸로 거래를 하자. 너한테도 절대 손해는 아닐걸.” 뒷세계에서는 수상쩍은 호의보다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거래로 안면을 트는 것이 친구를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다음을 기대할 수 있고, 두 번, 세 번 거래가 쌓이면서 서서히 신뢰가 쌓이는 법이니까. ‘그리고 첫 거래를 통해서 상대에게 호의를 살 수 있다면 베스트지.’ 비록 지금의 내게 돈은 없지만, 복자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해줄 능력 정도는 있었다. 저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아하니 그 사실을 납득시키려면 조금 더 설득이 필요해 보이지만 말이다. “난 돈 말고는 관심 없어.” “귀찮은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건 어때?” 내 말에 복자가 코웃음을 쳤다. “지금 나한테 제일 귀찮은 게 뭐라고 생각해? 바로 댁이거든?” 퉁명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탁자 아래에 있는 손은 긴장해서 권총을 더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진상으로 돌변해 깽판이라도 부릴까 봐 경계하는 것이다. ‘빽 없는 프리랜서들의 현실이지.’ 나는 이 시기의 김복자가 어떤 문제로 곤란에 처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설령 이 녀석이 내 제안을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만큼은 해결해줄 생각이었다. “최근에 여기저기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와서 골치 아프지?” “……!” 부릅뜬 눈에는 놀란 감정이 가득했다. 그리고 경계심이 더 강해진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는 뺨을 긁적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뒷조사한 거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알음알음 소문이 퍼질 정도로 실력 있는 프리랜서 술법사가 스카웃 제안을 받는 건 당연하잖아?” “……프리랜서인 건 어떻게 알았지?” “문밖에 이렇다 할 조직의 표식도 안 붙어 있고, 시끄럽게 떠들어도 와보는 놈 하나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앗?!” 나는 김복자가 방심한 틈에 테이블 밑으로 손을 뻗어 권총을 빼앗았다. 그리고 단숨에 부품 단위로 분해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테이블 밑으로 손님한테 권총을 겨누고 있을 정도면…… 뭐 뻔하지 않나?” 내 실력을 살짝만 보여주는 간단한 퍼포먼스였다. “…….” 눈 깜빡할 사이에 무기를 빼앗긴 복자는 흠칫한 얼굴로 뒤로 물러나더니, 이내 입술을 꽉 깨물고 나를 노려봤다. “계속 말해봐.” 나는 분해했던 권총을 순식간에 다시 조립해 탁자에 올려놓고 말했다. “내 짐작이지만 넌 여기저기서 스카웃 제의를 받고 있을 거야. 그중 일부는 도를 넘었겠지. 이 바닥에서 계속 일하고 싶으면 우리 조직에 들어와라, 거부하면 좋은 꼴 못 볼 거다……. 정작 그런 새끼들치고 오래가는 놈들 못 봤지만.” 내가 알기로 이때의 김복자는 뒷세계에서 시술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짜였다. 실력은 좋았지만 기댈 만한 빽도, 뒷세계에서 혼자 살아남을 만한 실력이나 수완도 아직은 부족했던 시기. 결국 그녀가 선택한 것은 스카웃 제의를 받은 조직 중 한 곳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버텼어야 했어. 그 새끼들 때문에 내가 십 년 동안 얼마나 엿 같았는지 알아? 특히 그 대머리 자식은 어떻게든 죽여 놨어야 했는데. 복자는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노라고 술에 취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했다. “너……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나이는 나랑 비슷해 보이는데, 말투나 하는 짓은 닳고 닳은 낭인 아저씨들 같고…….” 네 미래를 아주 많이 알고 있는 친구.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그저 진심을 담아서 그녀를 바라봤다.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해주지. 이게 내 거래조건이다.” 한동안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던 복자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네가 원하는 건 뭔데?” 드디어 거래를 할 마음이 드셨나 보군. 옛정을 생각해서 무료봉사라도 해줄 생각으로 찾아왔지만, 대가를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요구했다. “무림인 적합 체질검사. 그리고 등급을 속이는 술법. 두 가지면 돼.” 내 요구에 무언가를 눈치챈 듯, 복자가 내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면서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 설마…… 미성년자야?” “맞아. 얼마 전에 열아홉 살 생일이 지났지.” 내가 슬쩍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이자, 어째선지 복자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짜증을 냈다. “아오! 너 지금부터 나한테 존댓말 해!” “……그쪽도 나랑 몇 살 차이 안 나는 거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민짜랑은 다르지! 난 방금 전까지 늙다리가 인피면구를 쓴 줄 의심했다고!” “정신연령을 포함하면 내가 존댓말을 들어야 할 입장이긴 하지.” “너 또라이지?” 우리는 존댓말 여부를 두고 잠깐 실랑이를 벌였으나 결국은 서로 말을 편하게 하기로 합의했다. 질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김복자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래서 확인도 안 해본 체질을 숨기려는 이유는 뭔데?” “내 체질이 좀 특이한 것 같아서.” 만박자의 말에 의하면, 나는 무림인 부적응자 체질을 극복하고 스스로 단전을 만들어낸 최초의 사례였다. 마냥 기뻐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재검사를 하게 됐을 때 내 체질이 어떤 등급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아마 평범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특이체질로 판정되면 너무 많은 이목을 끌게 돼.’ 나는 충분한 실력과 명성을 쌓기 전까지는 천마신교의 눈에 띌 만한 행동은 자제할 생각이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경험상 괜히 여기저기 주목받아서 좋을 게 없으니까. 낭인 시절과 달리 내게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다. 변수가 될 만한 것들은 최대한 차단할 계획이었다. “하……. 내가 지금 자기 체질 등급도 모르는 민짜랑 뭐 하는 건지…….” 김복자는 내 이야기를 듣고 현타가 온 표정이었지만, 거래를 무르자고 하지는 않았다. “뭐, 좋아. 대신 내 문제를 먼저 해결해주면, 그다음에 네 조건을 들어줄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기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바로 해결하러 가자.” “……지금 당장? 걔들이 어디 있는 줄 알고?” “그런 양아치 새끼들이 있을 곳이야 뻔하지. 암루(暗樓)에서 술 아니면 약을 빨고 있을걸.” “솔직히 말해. 너 민짜 아니지?” 복자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가져온 복면을 꺼내어 썼다. 눈 밑으로 코와 입, 턱을 가리는 용도였다. 내가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설 모습을 보이자 복자도 긴장했는지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난 뭐 하면 되는데?” “아무 칼이나 한 자루 빌려줘. 그리고…….” 나는 복자의 작업실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정신 사나울 정도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갖가지 장비들. 그 사이로 빨간색 고글이 하나 보였다. 복자가 시술할 때 피가 튀는 게 싫어서 종종 쓰는 물건이었다. “이거면 되겠네.” 피식 웃은 나는 그것을 집어 들어서 착용했다. 자, 변신 완료. 나는 복면에 고글까지 착용한 모습으로 복자를 돌아봤다. “가자. 넌 내 옆에서 고개만 끄덕이면 돼.” “……미치겠네.” * * * 남대문시장 지하에 숨겨진 암루(暗樓). 평범한 사람들은 그 위치를 찾을 수 없는 술집으로, 사파 조직원들이나 낭인들이 뒷세계의 물건이나 정보를 거래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규모가 꽤 커서 충분히 백 명 이상도 들어갈 수 있으며, 사람이 적을 때도 수십 명은 늘 상주해 있는 곳이었다. 끼이익……. 누군가가 암루의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다들 습관적으로 그쪽을 힐긋거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금세 흥미를 잃고 다시 고개를 돌리기 마련인데, 지금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음?” “저거 레래 아니야?” 지금 막 암루에 들어선 붉은 머리의 여자와 고글과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 그중 여자 쪽을 알아본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근 알음알음 실력이 뛰어나다고 소문이 퍼지고 있는 프리랜서 술법 시술가. 즉, 누구든지 저 여자를 조직으로 데려가는 놈이 임자였다. “이게 누구야!”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그녀에게 접근하려던 자들이 움찔했다. 몸에 문신이 가득한 대머리 거한이 경쟁자들을 밀치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아이구! 우리 귀여운 토끼가 누추한 술집엔 어쩐 일이야? 아, 오빠랑 계약 마무리하고 싶어서 왔어?” 레드래빗(Red rabbit). 줄여서 레래. 김복자는 그런 가명으로 뒷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와 대화를 선점한 거한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주변을 쏘아봤다. 대부분은 그 시선을 피하거나 혀를 찬 후 자리에 앉았다. 경쟁자들을 물리친 거한이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김복자의 팔을 덥석 잡았다. “이쪽으로 와. 오빠가 한잔 살게. 근데 옆에는 누구야? 남자친구?” 거한이 경계의 시선으로 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나 역시 키가 2미터는 될 법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는 중이었다. ‘복자가 말했던 그 대머리가 이놈 같은데…….’ 나는 복자의 팔을 잡고 있는 거한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거 놓지?” “하! 객기 있는 친구네?” 남자는 같잖다는 듯 웃으면서 나를 내려다볼 뿐, 손을 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어진 내 말에는 딱딱하게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는 내가 먼저 스카웃 했거든. 그러니 둘이서 얘기 좀 하게 꺼져줬으면 좋겠는데.” “……뭐라고?” 내 말에 앞에 있는 거한은 물론이고, 상황을 구경하던 놈들, 심지어 복자까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 미쳤어?’ 복자가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내 조언을 잊지 않았는지 입은 가만히 있었다. “이봐. 이 개소리가 진짜야?” “……진짜면 어쩔 건데?” 거한은 그야말로 꿈에 나올까 무서운 얼굴로 복자를 홱 노려봤고, 복자도 지기 싫다는 듯 마주 쏘아보았다. “씨발. 너 우리가 우습게 보여? 이딴 듣보잡 새끼랑 계약해봤자 결국…….” 핏대를 세우며 복자를 협박하던 거한은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통스러워했다. “끄으으윽……!” “이 손부터 놓으라니까.” 놈이 복자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려고 하기에, 내가 먼저 놈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줬거든. “너, 너 이 새끼! 이, 이거 안 놔?” 팔이 뜯어질 듯한 고통에 녀석의 손에서 저절로 힘이 풀렸다. 놈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복자가 내 뒤로 이동하고 나서야, 나는 놈을 붙잡은 팔을 슬쩍 밀며 놓아주었다. 거한은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나더니, 뒤늦게 찾아온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아 들었다. “너…… 죽여버린다!” 뽑아 든 칼에는 언제 묻었는지 모를 검붉은 핏물이 굳어 있었다. 거, 썼으면 제대로 관리 좀 할 것이지. 상대가 먼저 칼을 뽑았기에 나도 정당방위로 칼을 뽑았다. “모두에게 말해두는데.” 나는 암루에 모여 있는 낭인들과 사파 조직원들을 스윽 둘러보며 경고했다. “오늘부로 레래는 우리 조직 소속이다.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잘 보고 가서 전해.” 5화. 역시 그렇지? 거한과 내가 칼을 뽑아 서로에게 겨누자 본격적인 판이 깔렸다. “생사비무다!” “빨리 자리부터 만들어라!” “잠깐만! 아직 싸우지 말고 기다려!” 암루의 손님 대부분은 사파의 말단 조직원들이나 프리랜서 낭인들. 싸움이라면 환장을 하고, 내기 도박에 인생을 걸며, 피를 보면 흥분하는 정신 나간 놈들이었다. ‘뒷세계 놈들이 다 그렇지 뭐.’ 싸움을 부추기다 못해 판을 깔아주는 손님들에 의해서 테이블이 순식간에 치워지고, 중앙에 싸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보통은 이러다 일이 커질까 봐 가게 주인이 나서서 말리겠지만, 여기는 주인장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암루에서만 볼 수 있는 생사비무! 과연 누가 이길지 승자예측이 빠지면 섭섭하지 않겠나? 우리 협객들의 안목을 시험해볼 기회가 왔는데 말이야!” 한 목청 좋은 중년인이 능숙한 호객꾼처럼 주변을 둘러보면서 외치자 주변에서 환호가 쏟아졌다. 바로 이곳 암루의 주인 황숙수였다. 내기비무에 중독된 인간말종으로, 종종 빚더미에 앉은 낭인들을 모아다 상금을 걸고 생사결 비무대회를 열기도 하는 작자였다. “다들 승자에게 돈을 걸게나! 대머리 거인이 이긴다는 왼쪽! 복면 쓴 놈이 이긴다는 오른쪽! 맞히면 수수료 떼고 두 배! 몇 합 만에 승부가 날지까지 정확하게 맞히면 다섯 배!” 얼마나 많이 해봤는지 관중들을 흥분시키는 솜씨가 대단했다. 금세 황숙수의 좌우로 수북하게 돈이 쌓였다. “X같네…….” 정작 당사자는 옆에서 싸움을 부추기면 멋쩍어지는 법이다. 거한은 자신이 내깃거리가 되자 불쾌한 듯 욕을 내뱉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싸움을 무를 수도 없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도로 칼을 집어넣는 순간 겁쟁이로 소문이 나 조롱거리가 될 테고, 그건 조직의 위신과도 연결되는 문제니까. ‘후회해도 늦었지. 흥분해서 칼을 뽑는 순간 여기까지 정해진 수순이었거든.’ 저 대머리가 내게 지는 순간, 놈의 조직은 섣불리 복자에게 다시 스카웃 제의를 할 수 없게 된다. 뒷세계에서 더 강한 조직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즉, 이 자리에서 실력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몰려들 수많은 날파리를 쫓아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확실히 이쪽이 단순해서 좋다니까.” “뭐래. 너 까딱하면 여기서 죽게 생겼거든?” 복자는 초조한지 손가락을 깨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봤자 딱히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아, 그 대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가서 내 돈도 걸어줘.” “……돈 없다면서? 구라였어?” “시술받을 만한 돈은 없지. 그래도 용돈 정도는 있어.” “뭐 이딴 게…….” 복자에게만 들리도록 말하며 지갑에 있는 현금을 전부 꺼냈다. 그 소소한 액수를 확인한 복자가 날 보더니 안쓰럽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너 진짜 급식이긴 하구나. 엄마 아빠한테 용돈 받는…….” “닥치고 가서 돈이나 걸어.” “야. 나도 너한테 건다?” 그 퉁명스러운 말이 복자 나름의 응원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몫 땡기고 싶으면 빨리 은행이라도 갔다 오든가.” “미친놈. 지기만 해봐.” 킥킥 웃은 복자는 황숙수에게 가서 내 돈과 자기 돈을 걸었다. 슬쩍 봤는데 상당한 액수였다. ‘승패 예상은 얼추 반반…… 아니, 내가 조금 밀리나.’ 황숙수의 좌측, 그러니까 대머리 거한의 승리에 조금 더 많은 돈이 쌓여 있었다. 아까 내가 거한의 팔을 비튼 것은 기습적인 한 수였다고 판단한 모양. 나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내 승리에 돈을 건 놈들은 역배를 노리거나, 눈썰미가 좋거나 둘 중 하나일 터. 그중에 후자로 보이는 황숙수가 나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선수들은 잠깐 몸이라도 풀고 있게. 몸이 굳어서 실력 발휘를 못 하면 안 되지 않겠나?” “다섯 합.” “응?” “맞히면 다섯 배라면서. 다섯 합에 내가 이긴다에 걸 테니까, 잘 기록해 둬.” “흐흐. 배짱이 두둑한 친구로군. 마음에 들어!” 황숙수가 히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취급하는 인간말종이긴 하지만, 뒷세계에서 그와 친분을 쌓아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저 씨벌 놈이……. 이봐! 내 돈도 전부 걸겠어! 다섯 합 안에 내가 저 새끼를 쳐 죽이는 걸로!” 내 이야기를 들은 거한이 눈이 시뻘게져서 자기도 전 재산을 걸자, 도박판의 열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잠시 후, 내기도박판이 얼추 정리되자 황숙수는 그때까지도 어정쩡하게 중앙에 대치하고 있던 우리에게 다가왔다. “미리 말해두는데 기물파손이 생기면 그 배상은 진 놈한테 받을 거야. 죽으면 시체에서 장기를 빼낼 거고, 운 좋게 살아남으면 접시를 닦게 해서라도 받아낼 거야. 둘 다 여기에 동의하지?”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하는데, 둘 다 질 생각이 없었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사결이지만 한쪽이 항복하면 자비를 베풀어 살려주라고. 시체가 너무 자주 나오면 가게 소문이 나빠지거든.” 들으나 마나 한 소리였다. 본인도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거한이 눈썹을 씰룩이며 말했다. “그럴 기회도 없을걸? 저 새끼 입에서 항복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죽여버릴 테니까.” 놈이 커다란 칼을 바닥에 쿵- 소리 나게 찍으며 말했다. 눈빛만 보면 호랑이도 찢어 죽일 기세였다. “흐흐. 젊은이들의 혈기가 부럽군. 그럼 두 사람의 무운을 빌지.” 황숙수가 구경꾼들이 우리를 둘러싼 위치까지 물러나고, 잔뜩 흥분한 관중들이 싸움을 시작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바닥에 박아둔 칼을 다시 뽑아 든 거한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다섯 합이라고 했지? 사지를 한 번에 하나씩 자르고, 마지막에 목을 자르면 딱 맞겠네.” “혹시 더 창의적인 방법은 없어? 데뷔전에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해서 아까부터 계속 고민 중이거든.” “……이 새끼가!” 놈이 다짜고짜 내 목을 노리고 칼을 휘둘렀다. ‘치사한 새끼. 처음부터 약속을 어기다니.’ 과거로 회귀한 후 첫 실전이었지만 긴장은 되지 않았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아도 뒷세계의 시정잡배 따위는 내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복면으로 입과 코를 막고, 고글로 시야가 제한됐어도 핸디캡조차 되지 못했다. 후우웅! 나는 내 목을 노리는 검을 고개만 슬쩍 젖혀서 피하며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진짜배기들은 저기 있군.’ 도박판의 열기에 취하지 않고, 구석에 앉아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자들. 제법 큰 조직에 소속된 놈들이었다. 그중에 몇은 기억에 있었고, 악연이 떠오르기도 했다. ‘오늘은 맛만 보여주는 걸로 할까.’ 상대를 어떻게 요리할지 결정한 나는 거한의 옆으로 스치듯 지나쳤다. “한 번.” 그리고 사과껍질을 잘라내듯 놈의 한쪽 귀를 잘라냈다. “끄악!” 놈의 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나를 돌아보는 거한의 눈에 어느새 실핏줄이 터져서 시뻘겋게 물들었다. “죽인다-!” 놈이 칼을 마구 휘두르며 멧돼지처럼 달려들었다. 칼에 실린 힘은 돌도 깨부술 것 같았지만, 맞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두 번.” 또 한 번 스치듯이 공격을 피하면서 이번에는 놈의 옆구리를 베었다. “허억!” 뒤늦게 벌어진 옆구리에서 통증을 느꼈는지 대머리가 주춤주춤 물러나며 상처를 손으로 짚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상처가 얕다는 것을 깨닫고는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깟 허약한 칼질에 외공을 익힌 이 몸이 베일 것 같으냐!” 자신만만한 말과 달리, 위기를 느낀 놈은 재빠르게 주머니에서 주사기를 꺼내더니 팔뚝에 꽂았다. ‘약이군.’ 뒷세계 사파 무림에서 약을 사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보통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두려움을 잊게 한다. 비싼 것은 일시적으로 신체능력을 상승시키거나 기를 더 빠르게 돌게 하는 것도 있었다. 당연히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지만, 절체절명의 순간 일발역전을 노릴 수 있는데 누가 그걸 안 쓸까? 물론 압도적인 상대 앞에서는 그것도 소용없는 짓이지만. “세 번.” 푸화아악! 칼을 든 팔을 손목째로 잘라버렸다. 약 기운 탓에 감각이 둔해진 놈은 자기 팔이 잘린 것도 모르고 마구 팔을 휘둘러 허공에 피를 뿌렸다. “나는 케첩 뿌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으, 으으……!” 뒤늦게 자신의 팔이 잘렸음을 알게 된 놈이 뒷걸음질 쳤다. 약을 투여했음에도 눈동자에 혼란과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지금쯤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눈앞에 있는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잠시 칼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뺨을 긁적였다. “어쩔래? 이쯤에서 그만할까?” “하, 항복…….”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자 구경꾼들에게서 야유가 쏟아졌다. 우우우우우! 죽여라! 죽여라! 그리고 내가 잠시 주변에 한눈을 판 사이, 대머리는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비도를 들고 내게 돌진했다. “……할 것 같냐-!” 역시 그렇지? ‘예상에서 하나도 벗어나질 않네.’ 나는 상대를 보지도 않고 피한 후,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그리고 넘어진 놈의 허벅지에 깊게 칼을 꽂았다. “네 번.” 푸욱- “끄아아아아악!!” 바닥까지 파고든 칼 때문에 놈은 압정에 꽂힌 곤충 같은 꼴이 되었다. 귀, 옆구리, 손, 허벅지까지 전신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놈의 모습은 의기양양하던 처음과는 꽤 달라졌다. “사, 살려줘…….” 나는 살고 싶어 하는 본능만이 남아서 꿈틀대는 놈에게 다가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거 알아?” 놈이 꺽꺽대며 몸을 뒤틀려고 했지만,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는 내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난 이미 너를 네 번이나 살려줬어.” 공포에 질려 부들대는 놈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암루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깊고 선명한 목소리로. “처음 귀를 잘랐을 땐 목을 자를 수 있었고, 옆구리를 벴을 땐 내장이 쏟아지게 할 수 있었어. 팔을 자를 땐 심장을 찌를까 고민했지. 하지만 살려줬잖아? 분명히 기회를 줬잖아?” 허벅지에 꽂아 넣은 검을 살짝 비틀었다. 놈은 입이 틀어막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통에 겨워서 꿈틀대기만 했다. “읍, 으읍……!” “네 번째는 허벅지가 아니라 가랑이 사이에 칼을 꽂을 수도 있었지만 또 봐줬지. 왜냐면 나는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 진심이었다. 20년 동안 낭인으로 칼밥을 먹으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죽일 만한 놈은 죽이고, 살릴 만한 놈은 살렸다. 정파의 협객처럼 살지는 못했지만 죄 없는 사람은 해치지 않으면서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형성된 내 기준에서, 이놈은 죽일 놈이었다. 꿀꺽……. 어디선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날 올려보며 죽어가고 있는 놈에게 담담하게 물었다. “한 번 더 해볼까? 다섯 번째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 녀석은 울면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천천히 입을 막은 손을 떼었다. “하, 항보……!” 그 단어가 완성되기 전에 놈의 목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늦었어.” 칼날을 뽑을 때 치솟은 핏물이 고글에 물감처럼 튀었다. 풀썩 옆으로 쓰러지는 시체를 뒤로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경꾼들을 돌아봤다. “다들 도박은 즐거웠나? 다시 한번 말하지. 레래는 앞으로 우리 조직 소속이다. 건드리지 마. 경고는 이번 한 번뿐이니까.” 침묵하던 구경꾼들 사이에서 황숙수가 갑자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짝짝! 그는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만약 고글을 쓰고 있지 않았다면 경멸하는 내 눈빛을 들켰을 것이다. “뭣들 하냐? 생사비무의 승자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야지-!” 뒤늦게 박수와 환호성이 잇따랐다. 휘파람을 불어대고 술을 뿌리는 놈들도 있었다. ‘하여간 여긴 제정신 아닌 놈들뿐이라니까.’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곤, 표정이 잔뜩 굳어 있는 복자에게 다가갔다. 6화. 스카웃 제안 싸움이 끝나자마자 황숙수가 거한의 시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 아까 말한 대로 장기라도 빼낼 생각인 듯했다. ‘바닥에 흠집만 좀 났지, 별로 부순 것도 없는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부수입은 딴 놈이 챙기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생사비무의 승자에게는 오늘 술과 음식이 전부 공짜라는 말에 내 불만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나는 암루에서 가장 좋아했던 메뉴인 동파육과 마시지도 않을 비싼 술을 여러 병 시켰다. “여긴 동파육이 최고란 말이지…….” 황숙수가 직접 만든 동파육은 내 입 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고 있었고. “이거 맛있네…….” 비싼 술은 지금 내 옆에서 복자가 홀짝거리며 벌써 두 병째 비우는 중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고기와 술을 즐기며 시끌벅적한 암루 내부를 구경했다. “이봐! 내 돈 빨리 줘!” “돈 딴 놈들 전부 뒈져버려라!” 한쪽에서는 점소이들과 손님들이 내기도박판에 걸린 돈을 정산하는 중이었다. 내기에 걸었던 돈을 부풀리며 더 달라고 구라 치는 놈, 소매치기하다가 걸려서 손모가지가 잘린 놈, 재미 본 놈들에게 들러붙어 개평을 요구하는 놈들까지. ‘뒷세계 하류잡배 인생들을 구경하고 싶으면 여기만 한 곳이 없지.’ 가끔씩 처음 보는 놈들이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 때도 있었다. “형씨! 아까 보니 실력이 대단하던데?” “고글은 끝까지 안 벗네? 수배라도 걸렸수?” “이 오빠. 하관만 보면 꽤 젊어 보이는데……. 나랑 한잔할래?” 나는 흥미로운 정보를 가져온 놈들에게는 선심 쓰듯 한 잔씩 따라주고, 쓰잘데기없는 말을 주워섬기는 놈들은 쫓아냈다. “꺼져. 지저분한 낯짝 보면 밥맛 떨어지니까.” 대부분은 공짜 술 한잔 얻어 마시러 왔다가 내게 욕만 처먹고 돌아갔다. ‘이러고 있으니 꼭 옛날 같군.’ 낭인으로 칼밥 먹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나도 암루에 자주 왔었다. 이런저런 소문을 얻어듣고, 일자리도 알아볼 겸 해서. 그리고 이 동파육이 정말 맛있었으니까. 황숙수가 길바닥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후로는 발길을 끊었지만……. 전부 오래된 이야기다. “그런데 넌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래?” 나는 바 테이블 옆자리에 앉아 있는 복자의 팔을 툭 쳤다. 나름대로 친근함의 표시였는데, 복자는 닿으면 안 될 것이라도 닿은 것처럼 흠칫했다. “내, 내가 뭐?” 정색하면서 말을 더듬는 모습이 더 수상했다. 혹시 이 녀석, 원래는 술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나? ……그럴 리가. 예전에 처음 봤을 때부터 술이라면 환장을 했었는데. ‘겨우 일 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얼마나 평지풍파를 겪은 거야?’ 전생에서 내가 복자와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1년 하고도 몇 개월쯤 뒤였다. 그러니까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삶에 의욕을 잃은 내가 엉망진창으로 살다가 만박자가 너튜브에서 하는 말을 듣고 인공단전을 시술받으러 갔을 때. -돈이 부족하다고? 그럼 시술할 때 콩팥 하나만 뗄까? 아니면 집에 귀한 술 있으면 가져와 봐. 그건 비싸게 쳐줄게. 내 기억 속 김복자는 그때부터 뒷세계에서 닳고 닳은 느낌이었던 터라, 지금 옆에 있는 풋내기 같은 모습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네 일은 잘 해결될 것 같은데. 또 무슨 문제라도 있냐?” “……문제가 있지,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지, 뭐 하나가 해결될 것 같으면 항상 새로운 문제가 튀어나오니까……. 하, 인생 X같네…….” “맛있는 술 처먹으면서 청승을 떨고 지랄이야? 알아듣게 말해 봐.” 날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복자가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야, 솔직히 좀 너무하지 않아?” “……?” “미리 말해줬어야 했을 거 아냐. 너네가 뭐 하는 조직인지, 조건은 어떤지, 구체적으로 이야기는 했어야 하는 거 아냐?” “……?” “딱히 싫다는 건 아냐. 네 실력을 보니까 믿을 만해 보이고, 이 바닥에서 빽 없으면 먹고살기 힘든 것도 알아. 그래도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무슨 개소리야? 복자는 앞으로의 조직 생활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했고,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듣다가 뒤늦게 생각이 미쳤다. ‘설마?’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복자가 날 대하는 태도가 조금 변했다. 민짜 어쩌고 하면서 무시하지도 않고, 술 마시는 내내 생각이 많아 보였다. ……아마도 내가 거한을 죽이고 온 다음부터였던 것 같은데. “뭐 꼭 지켜야 하는 규칙 같은 것도 있어? 솔직히 난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편이라서 지킬 자신이 없는데……” “김복자.” 내가 조용한 목소리로 본명을 부르자 복자가 움찔했다. 두 눈에 짜증이 가득했지만, 제 성깔대로 욕을 퍼붓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확신했다. ‘내가 진짜로 조직에 가입시킬 거라고 생각하고 있군.’ 나는 주변에 우리 이야기를 엿듣는 놈이 없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한 후,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직 같은 건 없어. 다른 놈들이 널 귀찮게 못 하게 만들 핑계가 필요해서 급조한 말이었을 뿐이야.” “……진짜야?” 복자는 ‘이 말을 믿어도 되는 건가?’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복자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빈 잔에 따라주었다. “그리고 열아홉 살이 무슨 조직이야?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을 일 있냐?” 내가 부모님을 걸고 나오자 복자는 이게 맞나 싶은 표정을 지었지만, 내 진지한 표정을 보더니 내 옆구리를 있는 힘껏 쥐어박았다. “왜 그걸 이제야 말해!” 참았던 성깔을 부리는 모습이 우스워서 나는 낄낄 웃었다. “하, 내가 이런 술도 제대로 못 마시는 민짜한테 쫄았다니…….” “안 마시는 거다. 무인한테 술담배만큼 나쁜 것도 없거든.” “점소이! 여기 콜라 하나 줘요! 아니면 우유라도 시켜줄까?” “지랄 말고. ……근데 여기 우유도 있나?” “아하하하! 미친 새끼!” 그렇게, 우리는 비로소 조금씩 즐겁게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앞으로도 조직 같은 것은 만들 생각이 없었다. 뒷세계의 사파 무림은 지긋지긋하니까. 돈 때문에 남의 목숨을 빼앗고, 언제 뒤통수 맞을지 걱정하며,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소모품과 같은 삶. 그렇다고 정파 무림인은 다 깨끗하냐면 당연히 아니지만, 지난 생과 달리 이번에는 밝은 곳에서 살아가고 싶었다. “……너도 적당히 벌고 손 털어라. 늦을수록 못 빠져나온다.” “까불지 마. 나보다 어린 자식이 애늙은이 같은 소릴 하고 있어.” 하여튼 내 설명에 완전히 안심이 되었는지 복자의 얼굴도 편안하게 풀렸다. 술에 퍽 취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만. “너 말이야. 아깐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고. 사람을 벌레처럼 잡아 죽이는 거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걸 보고 솔직히 좀 쫄렸는데…….” “그랬나?” 얼굴이 벌게져서 투덜거리는 복자의 말에, 나는 손가락으로 고글 위를 긁적였다. ‘앞으로 더 주의해야겠군. 이번 생에는 정파 무인이 될 거니까 말이야.’ 지난 며칠은 부모님과 함께 지내서 얌전했는데, 환경이 바뀌다 보니 낭인 시절 성격이 나온 모양이었다. 우리는 잠시 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충분히 먹기도 했고,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었다. “다 먹었으면 정산이나 받아서 돌아가자.” “벌써? 술이 남았는데…….” 남은 술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질척거리는 복자의 뒷덜미를 잡아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가려고?” “…….”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손은 본능적으로 칼자루에 닿아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낯선 사내가 잔을 들고 다가오며 웃고 있었다. “혹시 많이 놀라게 했나?” 나와 눈높이가 맞을 정도로 큰 키. 눈 밑이 퀭한 인상에 수척한 외모. 암루에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셔츠 차림에, 싸움이라곤 해본 적도 없을 것처럼 생긴 안경 낀 샌님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걷어 올린 소매 아래에 드러난 포효하는 붉은 호랑이를 본 순간, 내 경계심은 극도로 높아졌다. ‘혈호방(血虎幇)…….’ 총인원이 서른이 안 되는 조직으로, 머릿수가 곧 힘인 사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놈들이었다. 하지만 숫자가 적다고 혈호방을 무시할 수 있는 조직은 없었다. 왜냐면 그들 한 명 한 명이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힌 ‘진짜 무림인’이니까. 때문에 적은 인원으로도 서울에서 10대 흑도 방파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었다. ‘누추한 곳에 거물이 숨어 있었군.’ 암루에서 혈호방의 일원을 만날 거라고는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 경험상 조직이든 별호든 피(血)가 들어간 놈들은 전부 미친놈들이었다. 엮여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바로 눈치챈 거 보니 초짜는 아닌가 보네? 종종 이걸 보여줘도 무시당하는 경우가 있거든.” 남자가 내 앞을 자연스럽게 가로막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혈호방의 오호(五虎)라고 한다. 유치하지만 이렇게 소개하는 게 우리 조직 규칙이라서 말이야.” “나한테 용무라도?” 내가 알기로 호랑이(虎) 앞에 붙는 숫자는 조직 내에서의 서열이었다. 즉, 놈은 혈호방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였다. ‘이 녀석과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20년간 낭인으로 칼밥 먹은 경험이 있어도 지금은 어려울 것 같았다. 아직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구하기도 전이고, 신체도 완성되기 전이었으니까. 그만큼 상대는 어중이떠중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제대로 된 사파 무림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재밌겠는걸.’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나자 몸이 근질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고글에 가려 내 얼굴이 보일 리 없는데도, 오호는 내 사소한 반응만으로도 그 사실을 간파한 듯했다. “하하. 목덜미가 간지러운데?” 미소를 띤 오호가 흥미로워하는 시선으로 고글이 뚫어질 듯 나를 응시했다. “고글 안쪽이 점점 더 궁금해지는데.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 “그쪽이 먼저 바지라도 벗으면 생각해보지.” “……뭐?” 내 대답에 잠시 벙쪄 있던 오호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눈가에 눈물까지 맺힐 정도였다. “하하하하! 아무래도 그건 어렵겠네. 여긴 숙녀분들한테만 허락된 거라서 말이야.” 장난스레 허리의 벨트를 툭툭 두드린 오호가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래도 조직 이름 정도는 알려줄 수 있겠지? 우리도 눈여겨보고 있던 레드래빗을 데려간 녀석들이 누군지는 알아야 나도 보스한테 할 말이 생기거든.” 대답을 듣지 않고는 비켜주지 않겠다는 듯, 오호가 빙긋 웃었다. ‘어떡해?’ 내 뒤에서 복자가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나는 걱정 말라는 의미에서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었다. “우리 조직은…….” 주변은 여전히 왁자지껄 시끄러웠지만, 많은 이들이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여러 조직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프리랜서 술법사를 데려간 곳이 대체 어디일지 다들 궁금할 테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머릿속에서 번뜩 떠오르는 단어를 내뱉었다. “청낭이다.” “……청랑?” 나는 친절하게 다시 발음을 알려주는 대신, 선심 쓰듯 녀석이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알려주었다. “너희 혈호방처럼 소수정예로 이루어진 크루다. 아직은 신생이라 솔직히 몇 명 안 돼.” 적당히 진실과 거짓을 적당히 버무려서 이야기했다. 방금 만들었으니 신생이고, 인원은 나랑 복자 둘뿐이니까 소수정예가 맞다. “옛날 생각나네. 혈호방도 처음에는 다섯 명으로 시작했거든.” 의외로 순순히 믿는지 오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소수정예를 지향한다고 해서 그런지, 감성적으로 변한 녀석의 눈빛에서 약간의 호의마저 엿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일이 쉽게 풀릴 거라는 순진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마 복자를 데려가기 위해 날 협박하거나 조건을 제시하겠지. 최악의 경우에는…….’ 그때 오호가 품에서 명함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혈호방에 들어올 생각 없나?” “……뭐?” “말 그대로 스카웃 제안이야. 아까 싸우는 걸 봤는데 재능이 있어. 얼굴은 가리고 있지만 나이도 꽤 어릴 것 같고 말이지.” 빙글거리며 웃는 상대의 시선은 복자가 아닌 내게 못 박혀 있었다. 7화. 이런 건 처음 봐 혈호방의 공식 스카웃 제안. 지난 생의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회였다. ‘혈호방 정도면 무림맹에 가입된 중견문파 못잖은 무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텐데…….’ 뒷세계 사파 무림에도 급이 있다. 나야 이곳에서도 하류인생으로 취급받는 낭인으로 굴러먹었지만, 사파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세력이 크거나 역사가 깊은 암흑가의 방파들은 정재계와도 연관돼 있고, 양지로 드러나지 않을 뿐 고수들의 실력이나 무공도 정파 무림에 밀리지 않는다. 그들은 건설, 투자, 요식, 엔터 등 합법적인 사업체를 여럿 운영하고, 휘하에 새끼 문파들을 통해서 불법적인 사업체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내 앞에서 여유롭게 미소 짓는 사내가 명품 브랜드 셔츠를 입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방주님 앞에서 간단한 테스트를 봐야겠지만, 내가 봤을 때 너 정도면 무리 없이 통과할 거야. 그럼 내 직속 후배로 들어오도록 조치해줄게.” 지금 시점에서 혈호방은 암흑가의 신진 세력에 가깝지만, 나는 몇 년만 지나면 이들의 세력과 명성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점점 확장해가면서 앞으로 기회도 더 많아지겠지.’ 게다가 혈호방은 지금 내게 필요한 것 대부분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오호가 구체적인 스카웃 조건을 제시했다. “원하는 종류의 무공과 내공심법을 구해주고, 중급 이상의 영약도 매년 지원하지. 이거 어디 가서도 받기 힘든 특급 대우인 거 알지?” 중급 이상의 영약은 기본이 수천만 원을 호가하고, 무공과 심법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사파 무공 특유의 주화입마 리스크가 있다지만, 인공단전의 불안전성과 비교하면 그 정도는 별것도 아니었다. “잘 생각해봐. 살면서 두 번은 없을지도 모를 기회니까.” “…….” 만약 저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지난 생에 갖췄던 실력까지는 금방 도달할 자신이 있었다. “혈호방에서 스카웃이라고?” “저 자식 완전 로또 잡았군.” “젠장. 누구는 몇 년을 뺑이 쳐도 그 하청에도 못 들어가는데…….” 웅성이는 소리와 함께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사방에서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들이 쏟아졌다. ‘감개무량하군.’ 지난 생에, 나는 일 년 이상을 폐인처럼 살다가 인공단전 불법시술을 받았다. 굳을 대로 굳었던 몸에 시술의 부작용으로 한쪽 눈마저 잃었으니, 그 몸에 적응하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낭인이 되고 처음 제대로 된 스카웃 제안을 받은 것은…… 내 기억으로 업계에 발을 디디고 5년은 지난 후였다. ‘그런데 이번엔 암루에서 한 번 싸운 걸로 특급매물 취급이라니.’ 내가 한동안 말이 없자, 복자가 옆에서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힐긋거렸다. 내 대답에 따라 자신의 상황도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겠지. “이런, 내 정신 좀 봐.” 그 모습을 본 오호가 복자에게도 명함을 건네며 웃었다. “레드래빗.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당신에게도 같은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뛰어난 인재에 항상 목말라 있거든요.” 우리 둘을 한 번에 혈호방으로 데려가겠다는 뜻이었다. “음…….” 명함을 받아 든 복자도 생각이 복잡해 보였다. 내가 보기에도 혈호방이라면 결코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귀동냥으로 듣긴 했지만, 뒷세계 조직치고는 이런저런 대우가 꽤 좋다고 들었으니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그런 의미를 담아 복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분명 누구도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니까. 하지만 내 결정은 처음과 바뀌지 않았다. “난 관심 없어.”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 설마 단칼에 거절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처음으로 상대의 표정에서 당혹스러움이 엿보였다. “더 좋은 조건을 바라나? 아니면 더 큰 곳을 노리고 있나?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십 년 후엔 우리 혈호방이…….” 지금보다 더 커지는 거, 나도 알아. 그 과정에서 맡아야 할 피 냄새가 얼마나 짙고 역겨울지도 말이지. “난 적어도 내 의지로 칼질을 하고 싶거든. 시키는 대로 아무한테나 휘두르는 칼은 멋없잖아?” “……하.” 낭인으로 칼밥 먹고 산 지 10년이 넘어갔을 때, 나는 암흑가의 방파들 사이에서도 실력을 꽤 인정받았다. 독고귀 기무혁. 그때 나를 스카웃하려 했던 방파 중에는 지금의 혈호방보다 큰 곳도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끝까지 낭인으로 남았던 이유는 지금 말한 것과 같았다. “……부럽네. 그 신념을 꺾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야.” “지랄 마시고.” 잠시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오호가 이내 한 번 피식 웃고는 말했다.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연락해. 내 제안은 계속 유효하니까.” “이제 가봐도 되나?” 고개를 끄덕인 오호의 시선이 내 옆에 있는 복자를 향했다. “레드래빗은?” “나도 관심 없어.” 이번에는 내가 더 놀랐다. ‘너는 왜?’ 혈호방은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달랐다. 복자의 능력을 이용해 등골을 빼먹긴커녕 오히려 확실하게 지원해줄 수 있는 조직이었다. 녀석도 그걸 알 테니 당연히 승낙할 줄 알았는데, 단호하게 거절하는 얼굴에는 협상의 여지조차 없어 보였다. ‘너 제정신이야?’ 내가 그런 의미를 담아 바라보자 복자가 갑자기 까치발을 하더니 내게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했다. “나도 이 자식하고 생각이 비슷하거든. 그런 이유로 청랑이 더 마음에 들어.” 청랑이 아니고 청낭이라니까. 아까 오호가 청랑이냐고 되묻는 말에 내가 반박하지 않은 탓인 것 같았다. 어느새 우리 크루의 이름은 청랑(靑狼)이 돼 있었다. “설마 둘 다 놓칠 줄은 몰랐는데……. 아쉽군.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허탈한 표정으로 옆으로 비켜서는 오호를 지나쳐서 출구로 향했다. 그때 등 뒤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랑이라는 이름. 기억해 두지.” ……망할. 이렇게 된 거, 나는 누구도 우리를 얕보지 못하도록 모두에게 들으란 듯 말했다. “참고로 나는 청낭의 막내고, 소속된 무인들 중에서 가장 약하다. 뭐, 조만간 가장 강해질 거지만.” 내 배짱이 마음에 든다는 듯 몇몇이 휘파람을 불었다. 일부는 내 말이 허풍인지 진짜인지 가늠해보는 놈들도 있었지만, 그래봤자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칼밥만 20년을 먹었다.’ 여기 있는 놈들 중에서 나보다 뒷세계의 생리를 잘 아는 인간은…… 아마 저쪽에서 걸어오는 황숙수 정도뿐일 것이다. “이번엔 또 뭐야? 설마 오호랑도 한판 붙으려고?”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내기비무 중독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돈이나 정산해 줘. 다섯 합에 이긴다를 정확하게 맞췄으니까 다섯 배인 거 알지?” “아무렴! 자네 돈은 내가 주려고 직접 챙겨왔지!” 황숙수가 건네준 봉투를 열어본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많은데?” 봉투 안에는 내가 걸었던 돈의 다섯 배가 아니라 무려 열 배가 들어 있었다. 그래봤자 고등학생 용돈의 열 배여서 그리 큰돈은 아니었지만, 뒷세계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는 사실을 아는 나는 황숙수를 노려봤다. “하하! 작은 호감의 표시랄까? 혹시라도 또 싸울 일 있으면 그때도 우리 가게를 이용해 달라고. 아니면 일거리 필요할 때 찾아와도 좋고.” 배 나온 중년인이 손바닥을 살살 비비며 징그럽게 눈웃음을 치는데, 솔직히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내 실력이 괜찮아 보이니 미리 침을 발라두려는 모양이었다. 황숙수는 뒷세계에서 이런저런 일을 알선하는 브로커도 겸하고 있었고, 개인적인 감정과 별개로 그와 친분을 만들어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나는 돈을 받아서 챙겼다. “동파육 맛있었어. 생각날 때 다시 오지.” “이 친구, 맛을 아는 친구였군! 꼭 다시 오라고! 다음엔 더 맛있게 해서 대접할 테니까!” 황숙수의 기쁜 목소리를 뒤로하고, 우리는 암루를 나섰다. * * * “진짜 후회 안 해?” “안 해. 안 한다고.” “나중에라도 혈호방에 연락해 봐. 조건도 충분히 맞춰줄걸? 몇 년만 바짝 일하고 털고 나오면…….” “야!” 더 이상 잔소리 듣기 싫다는 듯, 복자는 내 얼굴에서 고글을 홱 벗겼다. 함께 작업실까지 돌아오는 내내 혈호방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내가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옷 벗고 눕기나 해!” 복자의 손가락이 병원의 검사용 침대처럼 생긴 것을 가리켰다. 그 옆에는 복잡하게 생긴 기계장비와 모니터가 있었는데, 체질검사용 도구였다. 나는 웃옷을 벗으려다가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갈아입을 옷은?” “넌 여기가 병원인 줄 아니? 네 몸뚱이 관심 없으니까 그냥 빤스만 입고 누워.” “……흠.” 시키는 대로 속옷만 입고 침대에 눕자, 복자가 장비를 작동시켰다. 우우우웅-! 장비가 작동하며 모니터 위로 복잡한 기호와 숫자가 떠올랐다. 모니터를 자기 쪽으로 돌린 복자가 어느새 진지해진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천천히 심호흡해. 억지로 기를 느끼거나 끌어올리거나 하지 말고.” 약속대로 복자의 귀찮은 일을 처리해 주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체질검사를 받을 차례였다. 복자가 내 몸 곳곳에 부항처럼 생긴 것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위험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졸리면 한숨 자든가.” “……잠이 오겠냐?” “너도 떨리긴 하나 봐?” 복자가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찰싹 때리며 웃었다. 침대에서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와 내 몸 안으로 스며들었고, 곧 몸에 붙인 장비들을 통해 확인된 반응이 모니터로 나타날 거라고 했다. 전문병원처럼 정밀한 장비는 아니지만, 술법장비는 애초에 술법사를 돕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즉, 술법사의 실력이 뛰어나면 장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더 집중해야 하고 기력소모가 심하긴 하겠지만. ‘문제는 뒷세계에 믿을 만한 술법사가 거의 없다는 거지.’ 다행히도 김복자는 내가 아는 뒷세계 최고의 실력자였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걸리지?” “대충 십 분? 서비스로 오행적성 검사도 같이 해줄게.”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 물(水).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기운으로, 사람마다 그중 더 강한 기운을 타고나거나 받아들이기 쉬운 체질이 있다. 무공을 익히는 입장에서는 그것을 ‘적성이 높다.’라고 표현한다. 가령 내가 화(火) 속성의 적성이 높다면, 양강 계열의 무공을 익히는 편이 성취도 빠르고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우우우우웅!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복자가 웅얼웅얼 알아들을 수 없는 진언을 외우기 시작하자 내 몸으로 들어오는 기운이 강해졌다. “……저항하지 마. 몸을 활짝 연다는 생각으로 기의 흐름에 순응해. 좋아. 어? 잠깐만. 이거 뭔가…….” 화아아아아악!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끄으윽…….” 얼마 후 겨우 다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자, 모니터를 올려보고 있는 복자가 보였다. “뭐야……?” “……검사 끝났어. 결과도 나왔고. 근데 이거…….” 나를 돌아보는 복자의 표정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시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결과가 어떻게 나왔길래 그래?” 나는 몸에 붙은 검사기구를 떼어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썩 좋은 반응이 아니었기에 절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높은 등급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5급 이상이기만 하면…….’ 설령 결과가 그 이하더라도 무림인이 되는 것을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이왕이면 이번 생에서는 행운이 따라주길 바라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비칠거리며 일어난 나는 복자 옆으로 가서 모니터를 확인했다. 二라는 한자가 모니터 한가운데에 타오르듯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2급……?” “거기만 보지 말고, 아래쪽도 봐.” 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시선을 내려 아래를 봤다. 그곳에는 체질등급 아래에 표시된 오행적성 검사 결과가 나와 있었다. (木), (火), (土), (金), (水) 오행의 모든 속성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나 이런 거 처음 봐.” “……나야말로.” 우리는 한동안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8화. 무림크루 청랑 몇 번을 다시 해봐도 체질검사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모니터에 뜬 二라는 선명한 한자는 그대로였고, 오행의 모든 속성에 들어온 불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진짜 2급인 거지?” “몇 번이나 더 해야 믿을래?” 의자에 털썩 기대앉은 복자가 더 이상은 못 하겠다며 손을 휘휘 저었다. 처음에는 결과가 잘못되었나 싶어 먼저 재검사를 하자고 하더니, 계속 같은 결과가 나오자 이제는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축하해. 2급이면 만 명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확률이니까, 이제 앞날에 창창한 꽃길만 펼쳐진 거나 다름없잖아?” “…….” 나는 말없이 모니터를 올려보는 중이었다. 전생에서 나는 저 모니터 화면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무림인 부적합 체질 판정] 검사실 밖에서 초조한 심정으로 결과를 기다리던 내가 받아 든 것은 그 문장이 적힌 종이 한 장이었다. 그 밑으로는 각 항목별로 상세한 수치가 적혀 있었고, 혹시 재검사를 원하느냐는 술법사의 말에 나는 병원을 뛰쳐나갔다. 거기 적힌 모든 수치가 0이었으니까. “솔직히 난 등급보다 오행적성 다섯 개가 전부 뜬 게 더 어이없어. 보통 하나에서 둘, 진짜 운 좋아서 세 개 뜨면 천연기념물 취급하면서 너도나도 모셔가려고 하는 거 알지? 근데 넌 들어본 적도 없는 다섯 개라고! 와씨 갑자기 배아프려고 하네.” “……좋네.” “좋네에에? 저 미친 결과를 보고도 반응이 겨우 그거야?” “아직은 실감이 잘 안 나서.” 현시점에서 불과 몇 주 전에 ‘무림인 부적합 판정’을 받았었거든. 지금의 내게는 오래된 전생의 일이긴 하지만, 동시에 평생의 열등감이기도 했다. ‘결과가 좋게 나오면 눈물이라도 날 줄 알았는데.’ 막상 눈으로 확인하자 이상할 정도로 담담한 기분이었다. 2급. 통계적으로 만 명에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한 뛰어난 체질. 그리고 (木), (火), (土), (金), (水) 오행을 모두 다룰 수 있는 적성. 어디든 원하는 문파를 골라서 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복자는 여전히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하여간 세상 참 불공평하다니까. 딱 봐도 근골도 최상급인데, 체질까지 이렇게 뜨는 건 반칙 아냐?” “맞아. 반칙 같은 일이지.” “……응?” 다만 이건 내가 회귀 전의 인생을 전부 바쳐서 만들어낸 반칙이거든. 전생의 나는 타고난 신체 능력을 갈고닦아 근골은 또래에서 최상위라는 평가를 들었지만, 체질검사에서 부적합 판정이 뜨면서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나와는 반대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둘 중 하나만 뛰어난 경우, 혹은 둘 다 애매한 경우, 온갖 경우의 수에서 근골과 체질이 모두 뛰어난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렇게 타고난 녀석들 중에서도 죽기 살기로 노력한 놈들만 세계비무대회에 나가지.’ 지금의 나는 최상위의 근골과 체질을 모두 갖췄다. 다르게 말하면, 이제야 제대로 된 출발선에 섰다고 할 수 있었다. ‘세계 최정상에 있는 무인들과 제대로 붙어볼 수 있어.’ 비로소 입가에 실실 웃음이 맺혔다. 지금 나온 결과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세계제일 비무대회>라는 훨씬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내 체질과 적성에 가장 잘 맞는 심법을 찾아야겠군.’ 머릿속에 떠오르는 유명한 심법들이 몇 개 있었지만, 정확히 이거다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당장 급한 것은 아니니 신중하게 찾아보고 결정할 생각이었다. 나는 벗어뒀던 옷을 입으며 복자에게 말했다. “내 체질검사 결과는 비밀로 해줘.” 내 부탁에 복자는 미간을 좁히고 콧방귀를 뀌었다. “설마 맨입으로? 검사만 몇 번을 다시 해줬는데?” 짓궂게 웃는 모습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분명했지만,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수는 다음에 와서 줄게.” “……야. 농담도 못 알아들어?” “충분히 알아들었어. 그래도 줄 거라고. 너한테는 고마운 게 꽤 많거든.” 오늘도 그렇지만, 전생에도 여러 번 말이야.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김복자는 이번 생에도 친구로 지내고 싶을 만큼 괜찮은 녀석이었다. ‘겸사겸사 술법이 필요할 때 도움도 받고 말이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종종 놀러 올게. 또 괴롭히는 놈 있으면 연락하고.” “뭐래. 진짜 조직이라도 만들게?” “조직은 무슨. 심심할 때 모여서 노는 친목 크루 정도면 모를까.” “아까 말한 청랑(靑狼) 말이지?” “청…… 그래. 네 마음대로 불러.” 나는 청랑이 아니라 청낭이라고 정정해주려다가 복자의 기대하는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 ‘청춘…… 낭만. 아무거나 대충 떠오르는 거 줄임말로 지은 거였는데. 알면 지랄하겠지?’ 김복자 성격에 분명 네이밍이 구리다고 지랄 난리를 칠 것 같아서, 청춘과 낭만은 앞으로도 내 마음속에만 묻어두기로 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만든 푸른 늑대라는 뜻의 무림 크루 ‘청랑’이 결성되었다. “잘 부탁해, 리더.” 복자는 킥킥 웃으며 나와 연락처를 교환했고, 아직은 두 명뿐인 단톡방도 하나 만들었다. “비밀 유지는 걱정하지 마. 나 레드래빗. 의리 빼면 시체니까.” “고맙다, 복자야.” “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성과가 많았던 하루였다. 이번 생에서 얻은 내 체질을 정확히 알 수 있었고, 원치도 않는 뒷세계 조직에 들어가야만 했던 복자의 미래도 바꾸었다. ‘늦는다고 부모님이 걱정하시겠는데.’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스마트폰에는 두 분이 보낸 메시지가 꽤 쌓여 있었다. “난 슬슬 가야겠다.” “응, 급식아. 통금시간 되기 전에 얼른 집으로 돌아가렴.” 한 번씩 주고받는 티키타카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야 조금 친해졌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럼 다음에 또…… 아! 가장 중요한 걸 깜빡할 뻔했네.” 나는 밖으로 나가려고 잡았던 문고리를 놓으며 돌아섰다. “체질검사를 속이는 술법. 지금 걸어줄 수 있어?” 처음 거래를 제안할 때, 나는 복자에게 귀찮은 일을 처리해주는 대가로 두 가지를 요구했다. 하나는 체질검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식 체질검사에서 내 등급을 숨겨줄 술법이었다. ‘2급 체질에 오행적성 적합자인 걸 들켰다간 난리가 나겠지.’ 둘 다 체질검사 결과에만 정신이 팔려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공식 병원에서 재검사를 받기 전에 미리 시술을 받지 않으면, 이 결과가 만천하에 공개될 것이다. 그 후의 후폭풍은…… 딱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거 별로 어렵진 않아. 근데 진짜 숨기게? 동네방네 자랑해도 모자라는 거 아냐?” “개인적인 사정.” 내 간결한 대답에 복자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쓰고 나갔던 고글을 쓰고 라텍스 장갑을 양손에 끼며 말했다. “그럼 옷 다시 벗고 누워. 빨리 시술 끝내고 나도 쉬게.” * * * 시술까지 받은 기무혁이 작업실에서 떠난 후, 혼자 남은 김복자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털썩 드러누웠다. “하아……. 피곤해 죽겠다.” 하루 종일 긴장해 있던 것이 풀리면서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녀의 삶에서 한 손에 꼽을 만큼 스릴 넘치는 하루였다. “무슨 귀신에 홀린 것 같네…….” 기무혁 앞에서는 별것 아닌 척했지만, 사실은 암루도 소문만 들어봤지 안에 들어가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인상 살벌한 사파 조직원들과 낭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옆에 있어준 기무혁 덕분이었다. “……솔직히 개쫄렸다고.” 기무혁은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능숙하고 자연스러웠으니까. 하지만 그 유명한 혈호방의 스카웃 제안을 받고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거절했을 땐, 티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미친놈. 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긴 하는 거야?’ 혈호방에서 거절에 앙심을 품고 싸움을 걸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다행히 오호가 다음을 기약하며 점잖게 물러난 덕분에 자신도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다. ‘아무리 대우가 좋아도…… 그런 본격적인 조직은 찝찝하단 말이야.’ [Kimoo : 아까 냉장고 보니까 술밖에 없더라] [Kimoo : 그렇게 먹다가 위장에 빵꾸난다.] 정작 하루에 사람을 몇 번이나 놀라게 한 당사자는 메신저로 아저씨 같은 소리나 하고 있었지만. [Rabbit : 남이사 무슨 상관?] 너무 차가운가 싶어서, 째려보는 토끼 이모티콘도 같이 보냈다. “……안 읽어?” 김복자는 단톡방을 잠시 노려보다가 방 이름을 <무림크루 청랑>이라고 변경하고 나왔다. 조직이 아닌 크루.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의 친목 모임이라고 했다. 딱히 부담도 없으니, 보험 삼아 들어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로고 정도는 내가 만들어도 되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김복자는 종이에 떠오르는 대로 이것저것 그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남대문시장 지하상가. 프리랜서 술법 시술가 레드래빗의 가게 정문에 고개를 치켜든 푸른 늑대의 로고가 큼직하게 새겨졌다. * * * 부모님을 설득하는 과정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저 체질검사 한 번만 더 받게 해주세요.” “혁아, 너…….” “미련이 남아서 그러니?” 가능하다면 혼자 조용히 가서 재검사를 받고 싶었지만, 미성년자는 법적 보호자의 동의 없이는 체질검사를 받을 수 없었다. “딱 한 번만요. 검사 비용이 많이 비싼 건 알지만…… 이번엔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일게요.” 내 담담한 말투에, 부모님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다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까짓거 한 번 더 받아보자.” “돈은 신경 쓰지 마. 엄마 아빠 그 정도 돈은 있어.” 체질검사를 한 번 받는 비용은 오백만 원이 넘었다. 때문에 어지간한 부잣집 아니고서는 검사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다시 받는 경우는 없었다. 우리 집 형편으로는 버거운 액수였음에도, 두 분은 아들을 위해 흔쾌히 검사를 예약해주셨다. ‘금방 백 배, 천 배로 갚을게요.’ 며칠 후. 병원에 도착해서 잠시 대기하다가 복자네 작업실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정밀한 장비에 몸을 집어넣고 한참을 있었다. 비싸고 오래 걸리는 만큼 정확도가 높고 상세한 수치까지 나오긴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내게는 아주 지루하고 부모님에게는 초조했을 검사가 끝났다. 어째선지 첫 검사보다 훨씬 더 길어졌다. “우선 죄송합니다. 지난번 결과를 다시 확인하고 대조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저희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내 검사를 담당한 의사이자 술법사는 결과지를 보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부모님은 그 표정을 부정적으로 해석하셨는지 덩달아 표정이 어두워졌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의사가 어렵사리 결과를 말해주었다. “……4급입니다.” “예?” “네?” “기무혁 군의 체질은 4급으로 정정되었습니다.” 체질검사 결과가 잘못 나올 확률은 0.1% 이하로 알려져 있었다. 과학장비뿐만 아니라 기를 다루는 술법을 함께 이용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0%는 아니지. 결과가 잘못 나왔던 선례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고.’ 즉, 내 경우에도 검사 실수로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잘못된 결과를 듣고 상심하셨을 기무혁 군과 부모님께 거듭 죄송하다는 말씀을…….” “우와아아아아아!” ……내가 지른 소리가 아니다. 얼빠진 얼굴로 가만히 듣고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괴성을 질렀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 무혁이가 4급! 선생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버지는 얼마나 기쁜지 의사를 덥석 끌어안았다. 반면 어머니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지, 진짜인 거죠, 선생님? 그럼 우리 무혁이 이제 무림인이 될 수 있는 거죠?” “물론입니다. 4급이면 어떤 분야에서든 충분히 활약할 수 있는 뛰어난 체질입니다.” 거듭 확인한 후에야 엄마의 눈에도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맺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처음부터 정확한 결과를 알려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기무혁 군. 축하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축하와 감사, 기쁨의 시간을 보낸 우리 가족은 결과지를 받아 들고 기분 좋게 병원을 나섰다. ‘역시 김복자. 실력이 기가 막히다니까.’ 4급 체질. 세간의 이목을 지나치게 끌지 않는 선에서, 충분히 높게 평가받는 체질이었다. ‘충분히 강해질 때까진 지나치게 이목을 끌지 않는 편이 좋아. 그리고 계획대로 하나씩…….’ 그러나 나도 예상하지 못한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찌르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아들아. 아까 검사받을 때 봤는데, 너 배에 그 문신은 뭐냐?” “네? 아니 그게…….” -술법을 시술한 흔적을 커버하는 데 문신만 한 게 없거든. 부모님은 내 배꼽 위에 생긴 조그만 문신을 보고는 기겁을 하셨다. 술법 시술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새긴 건데……. “너 인마! 무림인 될 건데 이제는 삐뚤어지면 안 돼!” “며칠 전에 밤늦게 들어오더니. 혹시 그때 한 거니?” “똑바로 말해라. 안 그래도 그날 술 냄새 나는 거 아버지가 모른 척해줬는데, 어디서 뭐 했어?” “……친구 만났다니까요.” “미성년자들이 술을 마셨단 소리야. 지금?”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치는 부모님의 잔소리 연환공격에 정신이 혼미해지려는 찰나. 찰칵찰칵찰칵! 창문 밖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지고 있었다. “뭐지?” “기자들이 알고 왔나? 그럴 리가…….” 나는 촉망받는 후기지수 중 한 명이었지만, 기자들은 이미 지난번 내 체질검사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내게서 관심을 껐다. 재검사 결과가 벌써 알려졌을 리도 없으니, 저 인파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때 플래시 세례를 받는 위치에서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선 검사 결과를 기다려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겠습니다!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3급의 매우 뛰어난 체질로 판정받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내 또래의 덩치 큰 녀석이 취재진 앞에 서 있었는데, 내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신강헌?’ 바로 훗날 한국제일도이자 천마신교의 테러범 신강헌이었다. 9화. 첫 비밀작전 취재진이 잔뜩 모여든 자리. 두 손을 허리에 올린 신강헌이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물론 많은 분들께서 기대해주신 만큼 3급이라는 수치가 조금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제 근골은 한국무림계에서 다시 나오기 힘들 정도로 뛰어나니까요!” 본인 스스로는 당당해 보였지만, 어째선지 지켜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저걸 지 입으로…….’ 신강헌의 근골이 뛰어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얼핏 봐도 190cm는 될 것 같은 큰 키에 긴 팔다리. 떡 벌어진 어깨에 다부진 근육으로 단련된 신체는 어떤 운동을 해도 국가대표가 되었을 거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으니까. 순수한 피지컬로만 따지면, 같은 세대였던 나보다 더 높게 평가받았던 재능. ‘종합적인 평가에서는 내가 좀 더 위였지만.’ 결과적으로 체질 부적격을 받은 나는 기억에서 잊혀 뒷세계 낭인이 되었지만, 신강헌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 한국제일도가 되었다. 비록 그 한국제일도는 훗날 국회를 습격한 천마신교의 테러 주범으로 등장해 세상을 경악시켰지만 말이다. “사실 의사 선생님이 3급이지만 상세 수치는 2급에 버금간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축기량과 축기속도만 조금 부족하지, 기혈의 튼튼함과 발경력은 동급의 체질보다 훨씬 뛰어나다고요.” 하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일. 지금의 신강헌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질문과 플래시 세례를 즐기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실제로 어릴 때는 개인 너튜브 활동은 물론이고, 매스컴과도 온갖 인터뷰를 하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를 포함해서 라이벌로 평가받는 녀석들 전부 실제로 붙으면 별것 아니라는 둥 도발 섞인 발언도 여러 차례 했었다. 나야 무시하고 수련에 전념했지만, 몇 명은 도발에 걸려서 실제로 가검비무까지 성사됐었는데…….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신강헌이 전부 이겼을 것이다. “결과가 아쉽지 않냐고요? 물론 1급이나 2급이 떴으면 더 좋았겠죠. 하지만 위로 올라가는 길이 너무 쉬우면 재미없잖아요?” 신강헌은 기자들의 질문에 질리지도 않는지 밝은 목소리로 하나하나 답변해 주었다. “아, 오행 중에서는 화(火) 적성이 굉장히 높게 나왔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무조건 적성에 맞는 무공을 익혀야 한다고 강조할 정도로요! 하하하!” 조금 재수 없기는 하지만, 어쨌든 녀석은 훗날 한국제일도로 인정받을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뒤에 이어진 말만큼은 내게 무척이나 거슬렸다. “목표는 한국제일! 그리고 언젠가 세계제일 비무대회도 제가 접수하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아버지가 내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진지한 목소리로 위로해주셨다. “아들아. 낙담할 것 없다.” “……네?” “지금은 신강헌이 너보다 주목을 받고 있지만, 사람 일 모르는 거다.” 나보다 더 무림인 관련 뉴스며 채널, 커뮤니티도 많이 찾아보는 아버지였다. 주먹을 불끈 쥔 아버지가 창밖으로 신강헌을 노려보며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겨우 한 등급 높다고 뻐기기는! 운이 좋았으면 겸손할 줄 알아야지, 어린놈의 자식이 벌써부터 거만해져서는 기자들 모아놓고 뭐 하는 거야? 1급이나 2급도 아니고 3급이 뭐 얼마나 대수라고 건방지게스리…….” “아버지, 진정 좀 해요.” 얼굴까지 빨개져서 분노하는 아버지를 어느새 내가 진정시키고 있었다. “무혁이는 가만히 있는데, 왜 당신이 급발진이야?” 반면에 엄마는 내게 현실적인 충고를 해주었다. “무혁아. 쟤는 쟤고 너는 너야. 남의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 네 진로만 고민하면 돼.” “저도 알아요. 별로 신경도 안 쓰이고요.” 당장 저기 있는 기자들에게 내 재검사 결과가 밝혀진다고 해도 큰 반향은 없을 것이다. 몇 명은 관심을 보일 수도 있지만 체질등급 자체가 높지 않으니 결국 금세 시들해질 것이다. 그리고 딱 그 정도의 관심이 내가 바라는 수준이었다. “근데…… 4급하고 3급은 크게 차이 나는 건 아니지?” “당연히 별 차이 아니지. 1급이나 2급이 특급이지, 3급부터는 다 비슷비슷해! 우리 아들이나 쟤나 오십보백보야!” “그렇지? 역시 그렇지?” “……엄마까지 왜 그래?” 이후에도 부모님은 쟤는 덩치가 너무 커서 둔하겠다느니, 얼굴은 우리 아들보다 못하다느니 하면서 나를 치켜세워주셨다. ‘아무래도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부모님의 오해와 달리, 나는 신강헌에게 열등감을 갖지도 질투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죄송해요. 사실은 제 체질이 훨씬 더 좋아요.’ 두 분을 믿지 못해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씩 말하다 보면 뒷세계에서 불법적인 시술을 받은 것, 그래야 했던 이유까지 전부 설명해야 하는데……. 나 스스로도 믿기 힘든 과거로의 회귀라는 사건을 말씀드려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저보다 약한 놈한테 뭐하러 신경 써요?” “하하! 이래야 우리 아들이지!” “으이구……. 시무룩해 있는 것보단 낫다.” 부모님에게 씨익 웃어드린 후 다시 신강헌을 바라봤다. 녀석에게 나쁜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전생에 마지막 생사결을 펼쳤던 상대라서 조금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단언컨대, 그건 내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싸움이었으니까. ‘언젠가 한 번은 만나 볼 생각이었지만, 이런 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젊다 못해 어린 얼굴을 보니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는 아는 체를 할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뒷문으로 갈까요? 누가 알아보면 귀찮아질 것 같은데.” 신강헌이 기자들 앞에서 어그로를 끄는 틈을 타, 우리는 조용히 뒷문으로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기분이다! 오늘은 밖에서 비싼 스테이크 먹고 들어가자!” 아버지 차를 타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뒷좌석에 앉아서 힐긋 뒤를 돌아봤다. 병원의 정문에는 여전히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계속해서 플래시가 터지는 것을 보니 신강헌은 아직까지도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세계제일 비무대회를 접수하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한 자식이…… 이십 년 후에는 왜 그러고 있었던 거냐?’ 나는 이십 년 후, 천마신교 소속이 되어 정부청사를 습격한 신강헌을 알고 있었다. 무척이나 지쳐 보였던 그는 저기 있는 소년과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다. * * * 집으로 돌아와서 신강헌과 관련된 정보를 검색했다. 이름이 알려진 녀석답게 현재 다니는 고등학교, 가족관계, 싸우는 스타일, 취미나 습관 등 자질구레한 정보들이 나와 있었다. 꽤 시간을 들여서 신강헌에 대한 정보를 찾아본 후,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이거 애새끼가 따로 없네.” 지금의 신강헌은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훗날 한국제일도로 명성을 떨치게 된 녀석이 꽤나 호쾌하면서도 진중한 성격의 무림인이었다면. 너튜브에서 상의를 탈의한 채 칼을 휘두르는 영상 속 저 애송이는 원숭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신 있는 놈은 언제든지 찾아와! 전부 으깨줄 테니까!] 190cm가 넘는 근육질의 육체로 무거운 칼을 풍차처럼 휘둘러대는데, 그 댓글에는 찬양보다 비꼬는 것이 더 많았다. ‘관종 짓 할 시간에 수련에 집중했으면 한국제일도가 아니라 한국제일인이 됐겠다.’ 나는 신강헌에게 개인적으로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녀석은 다짜고짜 찾아와 싸우자고 하는 나를 기꺼이 상대해 주었고, 생사결 도중에라도 부하들에게 명령해 나를 공격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누구도 자기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쉽게 그럴 수 없을 텐데. 신강헌은 무인으로서 인정할 만한 사내였다. -하하……. 술이라도, 한잔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중에 저승에서 만나면 하자고. 헌데 그런 녀석이 왜 천마신교 같은 단체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만약 어떠한 강압이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면, 가능하다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철부지 같은 호기심이나 쉽게 강해지려는 생각에 사파의 마공을 원해서였다면……. “처맞으면 정신을 좀 차리려나?” 뭐, 어쨌거나 접촉은 한번 해볼 생각이었다. 잘하면 천마신교에 대해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이런저런 검색 결과를 눌러보다가 흘러 들어간 커뮤니티에서 한 가지 글을 발견했다. “음?” [잡담] 서울창작검무콩쿨 올해 라인업 실화? ㅋㅋ 다들 참가자 명단 봤냐? 신강헌. 피승화. 김현승…… ㅅㅂ 이정도면 고등부 올타임 레전드 아님? 그 아래에 달린 댓글들도 읽었다. └ 생일 지나서 체질검사 받은 새끼들 총출동함. └ 올해가 최악의 세대임 ;; └ 기무혁은 왜 없음? └ 그 새끼 체질검사 망하고 잠수 탔다던데? └ ㄹㅇ? 존나 꼬숩다 ㅋㅋㅋㅋㅋ └ 뭘 알고 말하시죠? 기무혁 학생은 작년부터 콩쿨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대충 훑어본 후 스크롤을 내렸다. 예전 같았으면 나를 언급한 내용을 보고 상처받았겠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곧바로 사실확인을 위해 신강헌의 개인 SNS에 들어가 보니 며칠 전 올린 게시물에 접수증을 인증한 사진이 있었다. [형 검무콩쿨 참가한다. 방에 트로피 더 둘 데 없어서 이사 갈까 생각 중.] “미친놈인가?” 어쨌든 신강헌이 콩쿨에 참가한다는 사실은 확실해졌다. “창작검무콩쿨이라…….” 나도 예전에는 꽤 많은 콩쿨에 참가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 이후로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 전에 쌓아놓은 수상경력으로도 이미 충분했고, 당시에는 콩쿨 준비할 시간에 하루 루틴대로 단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서울시 창작검무콩쿨 안내> 나는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해 내용을 확인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더 확인했다. “접수 기간이…… 오늘까지네?” 조만간 자연스럽게 신강헌과 접촉할 기회가 생길 것 같았다. * * * <서울창작검무콩쿨> 당일이 되었다.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착용한 후, 콩쿨장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일찍부터 부모님과 함께 오거나 혹은 친구들과 함께 온 참가자들이 여럿 보였다. “나중에 아시면 섭섭해하시겠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이번 콩쿨 참가를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았다. 부모님과 함께 있으면 내가 원하는 대로 편하게 움직일 수 없을뿐더러, 혹시 모를 위험에 두 분이 노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혼자서 조사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나 역시 콩쿨 참가자이기 때문에, 대기하는 시간과 무대에 오르는 시간에는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었으니까. ‘신강헌의 주변 인물 중에 천마신교 관계자가 있거나 관객석에서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특별히, 이런 뒤가 구린 일에 적합한 조력자를 한 명 섭외했다. 나는 약속한 시간이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조력자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약속 시간에 조금씩 늦는 것도 여전하네.” 그러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저 멀리서 펑키한 차림의 빨간 머리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힐끔거리는 남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내가 손을 들어 보이자 빽 소리부터 지르는 김복자. “야!” 관심을 즐기는 신강헌과는 달리, 남이 자기를 어떻게 보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녀석이었다. “바쁜 사람을 불러내고 지랄이야?” 별로 안 바쁜 거 안다. 그래서 이렇게 가끔 밖으로 불러내면 은근히 좋아하는 것도 말이지. 나는 미리 메신저를 통해서 대략적으로 필요한 도움을 설명했다. “내가 왜 도와줘야 하는데?” 어차피 도와주려고 와놓고 괜히 투덜거리는 복자에게 일이 끝난 후의 보상을 약속했다. “끝나고 떡볶이 사줄게. 이 근처에 내가 보장하는 즉석떡볶이 맛집이 있다.” “하? 겨우 떡볶이? 내가 너 같은 급식인 줄 알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 방금 침을 꼴깍 삼켰다. ‘떡볶이 싫어하는 여자 못 봤거든.’ 특히 김복자는 자기 머리 색만큼이나 새빨간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매콤하고 달콤한 음식들, 떡볶이는 그중에서도 김복자의 소울푸드라고 할 수 있었다. “……뭐 어떻게 해주면 돼?” 나는 가방에 챙겨온 신강헌에 대한 자료와 하나 더 챙겨온 캡모자를 복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신강헌 주변인들 마크 좀 해줘. 함께 온 가족이나 친구, 녀석 차례에서 뭔가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체크 해주고. 가능하면 얼굴 나오게 촬영도.” “바라는 것도 졸라 많네. 떡볶이 맛없기만 해봐.” 투덜거리면서도 김복자는 머리를 묶고, 내가 준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것만으로도 화려한 외모가 확실히 덜 튀었다. 조명이 어두운 관람객석에 앉으면 거의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후후. 그러니까 이게 우리 크루의 첫 비밀작전이라 이거지?” “……그럼 난 들어간다. 이따 보자고.” 레드래빗의 스파이 데뷔 어쩌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복자를 뒤로하고, 나는 콩쿨장 안으로 들어갔다. 10화. 여기가 아니라 무공콩쿨도 종목과 연령별로 꽤 세분화돼 있다. 그중 내가 참가한 창작검무 부문은 ‘검이나 도를 이용해 본인이 창작한 초식들을 하나의 춤처럼 구성하는’ 방식이다. 신체능력, 기본기, 창의성, 응용력이 평가 기준이며 무림맹 관계자 및 여러 문파의 중진들이 심사위원을 맡는다. “기억도 잘 안 날 만큼 오랜만이네…….” 복도에는 무림인을 지망하는 학생들과 그 가족들로 가득했다. 다들 대기실로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천천히 심호흡 하고. 긴장 안 하고 잘할 수 있지?” “지금 청심환 먹자. 순서 다 기억하고 있어?” “너 이번에도 입상 못 하면 포기하는 거야. 아버지랑 약속한 거다!” 초등부부터 중등부, 고등부까지는 학년별로 그리고 각 종목별로 나뉘다 보니 콩쿨에 참가하는 인원이 상당했다. 그만큼 무림인을 꿈꾸는 학생들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중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남는 건 5%도 안 되겠지만.’ 나처럼 체질검사 결과가 나빠서, 혹은 자기보다 월등한 천재들을 보고 한계를 느껴서, 또는 부상을 당하거나 경제적인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무림인의 꿈을 포기하거나 뒷세계로 빠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과거에는 콩쿨장에 있는 모두가 경쟁자라고 느꼈지만, 20년이라는 세월을 살다가 돌아오니 꿈을 위해 노력하는 학생들 한 명 한 명이 기특해 보였다. ‘힘내라. 애송이들.’ 인파로 북적대는 복도를 지나쳐 대기실 앞에 도착했다. <창작검무/고등부 3학년 대기실> 대기실 앞을 지키는 보안요원이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막아섰다. “죄송하지만 콩쿨 참가자만 안으로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저도 콩쿨 참가자입니다. 여기 신분증과 접수증이요.” 잠시 후, 내 신분증과 접수증을 확인한 보안요원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홱 들었다. “기……!” 나는 슬쩍 마스크를 내려서 보안요원에게 얼굴을 보여주었다. “조용히 들어가고 싶어서요.” 이때는 나도 동년배들 중에서 꽤 유명했던 시기라 알아보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눈치가 빠른 보안요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인했습니다. 어? 그런데 참가 부문이 …….” 내 접수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보안요원에게 친근하게 웃으며 부탁했다. “안에 친구가 있어서요. 잠깐 응원만 좀 하고 나와도 될까요?” 잠시 고민하던 보안요원이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오래 계시면 안 됩니다.” “감사합니다.” 주변을 살핀 보안요원이 슬쩍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옆을 지나가는 내게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팬입니다. 이번 콩쿨도 기대할게요.” 나도 보안요원에게 마주 엄지를 치켜세워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콩쿨 참가자 대기실은 꽤 넓은 강당 같은 곳이었다. 먼저 온 참가자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가볍게 몸을 풀거나 준비해온 검무를 연습하고 있었다. 몇 명이 나를 쳐다봤지만 마스크와 모자를 쓴 탓에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서른 명 정도인가. 아직 다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주변을 훑으며 신강헌을 찾았다. 덩치만큼 존재감도 큰 녀석이라 금방 눈에 띄었다. “후우우…….” 한바탕 검무 연습을 마쳤는지, 상의를 벗어 던진 신강헌이 한쪽에서 호흡을 고르며 쉬고 있었다. ‘배고픈 호랑이를 보는 것 같네.’ 가까이에서 다시 본 신강헌은 기자들 앞에서 봤을 때와는 또 달랐다. 꽤 진지한 표정으로 집중하고 있는 얼굴을 보니, 뭐가 저 녀석의 진짜 모습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확실한 것은 압도적인 피지컬에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는 탓에, 녀석 주변으로는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 시작을 어떻게 하는 게 좋으려나.’ 내가 생각해둔 인삿말 몇 가지를 떠올리며 신강헌 쪽으로 걸어갈 때였다. “니들, 기무혁 체질검사 망했다는 이야기 들었어?” “…….”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리자, 몇 명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무리가 보였다. 눈매가 날카로운 꽁지머리의 소년이 내 이름을 언급하고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대기실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가 컸다. “우리 아빠 친구 중에 기자가 있거든. 그 새끼 검사 결과 받고 울면서 뛰쳐나갔대.” ……남의 불행을 이야깃거리 삼아서 뒷담화하는 거야 인간의 본능이고, 아직 어린 애들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긴 하지. 걔 작년부터 콩쿨도 참가 안 했잖아. 그때부터 뭔가 느낌이 왔던 거 아냐?” “근데 도대체 몇 급이 나왔길래 뛰쳐나갔을까?” “9급이나 10급 나온거면…….” “그럼 인생 조졌지. 근골이 아무리 잘나도 체질이 후지면 끝이잖아.” 그래서 웬만하면 그냥 지나가려고 했는데. “걔 그럼 앞으로 뭐 해서 먹고사냐?” “몰라. 나는 친척들도 다 6급 이상이라. 근골은 좋으니까 주먹으로 돈 벌면 되겠네. 깡패나 건달?” “와, 지금까지 돈 갖다 박은 부모님은 무슨 죄냐? 자식새끼 잘못 낳아서 인생 날렸네.” 한 사람을 향한 악의로 가득 찬 말에도 나서는 사람 한 명 없이, 다들 킥킥대며 웃거나 무시할 뿐이었다. “……이건 선을 넘는데.” 나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나를 열심히 씹어대는 꽁지머리와 그 친구들을 바라봤다. “얘들아.” 조용히 타이르듯 불렀는데, 왜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흠칫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기무혁이 체질검사 망하면 너희들 인생에 도움이라도 돼?” 내가 다가가면서 묻자 수군거리던 녀석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다른 콩쿨 참가자들의 시선도 내게로 하나둘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넌 뭔데 시비야?” “시비가 아니라, 그냥 듣고 있으려니까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나는 천천히 모자를 벗고, 이어서 마스크도 벗었다. 곧바로 내 얼굴을 알아본 녀석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기, 기무혁이다…….” 여기저기서 웅성대며 내 이름을 말하는 것이 들렸다. 조용히 집중하고 있던 신강헌의 시선도 내게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고, 그 밖에 몇몇 아는 얼굴들도 보였다. “당사자가 없는 자리라고 함부로 뒷담화하면 안 되지. 그거 나중에 업보로 다 돌아온다?” 나는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꽁지머리 소년과 그 패거리에게, 인생의 쓴맛 단맛을 모두 본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었다. “말 함부로 하다가 입 찢어진 사람들 이야기 들어봤어? 사파에서는 흔한 일인데, 특히 가족 관련된 모욕은 그쪽에서도 굉장히 거칠게 다루거든. 불로 지지면서 여러 번 찢고 아물면 다시 그걸 또 반복하는데…….” 내가 혈기 왕성한 평범한 십 대였다면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연령이 한참이나 차이 나는 어린애들을 상대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최대한 말로 잘 설득해 봐야지.’ 말이 안 통하면 그때는 좀 다른 방식을 고려해봐야겠지만……. “미, 미안해.” “우리는 그냥 그런 소문을 들어서…….” “진짜 미안! 다시는 안 그럴게!” 창백하게 질린 꽁지머리와 패거리가 내 눈을 피하면서 모두 사과했다. ‘음. 그렇게 나쁜 애들은 아닌가 보네.’ 좋게 말로 타일러서 못 알아들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한 번에 알아듣는 걸 보면 착한 학생들 같았다. 그런데 뒤에서 뭐라고 자꾸 수군대는 거야? “저, 저 자식 눈빛 봤어?” “방금 입 찢어버리겠다고 협박한 거지?” “기무혁.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더 무서운 놈이구나…….” 내가 오해라고 말해주려고 뒤를 돌아보자, 눈이 마주친 학생들 대부분이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그리고 시선을 피하지 않은 몇 명은 불쾌하단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기무혁.” 큰 키에 무용수처럼 탄탄하게 마른 체형의 소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대기실 너 혼자 써? 그만 좀 하지?” 내 오래된 기억에 조금은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워낙에 특이한 이름이기도 했고. “피승화…… 맞지?” 쾌검을 잘 다루던 동갑내기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문파 중 한 곳에서 스카웃을 받아서 나중에는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던가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그만하라니, 뭘?” 목에 헤드셋을 건 피승화가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조용히 하라고. 집중하는 데 방해되니까.” 예민한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는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와 정답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미안하다. 근데 신기하네. 내 목소리는 거슬리고, 남의 뒷담화나 하는 애들 목소리는 안 거슬렸어?” “무슨…….” “혹시 그 헤드셋 어디 거야? 노이즈캔슬링이 취사선택이 되는 것 같은데, 나도 한번 써보고 싶어서.” “…….” 입을 꾹 다문 피승화는 말없이 나를 노려보다가 홱 돌아서서 구석진 자리로 갔다. “푸흡…….”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신강헌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는 것이 보였다. ‘끼어들어서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콩쿨장이라 그런가 의외로 얌전하네.’ 그 대신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근데 있잖아.” 작지만 차돌 같은 몸에 쌍검을 등에 멘 소년으로, 역시 아는 얼굴이었다. 녀석이 작은 눈을 뱀처럼 빛내며 물었다. “너 체질검사 결과가 별로라는 거 사실이야? 그래서 몇 급인데?” “넌 이현승 맞지?” “……김현승이야.” 신강헌, 피승화와 마찬가지로 나랑 같은 나이에서 꽤 유명했던 이름이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기억나는 것이 없는 걸 보면, 일찍 은퇴하거나 빨리 뒈진 모양이지만. “미안하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헷갈렸네.” “……너 나랑 콩쿨에서 다섯 번도 넘게 만났어.” “아, 내가 전부 이긴 건 기억나.” 김현승이 나를 노려보며 “개새끼.”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똑같이 욕을 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어른다운 태도와 부드러운 미소로 친구를 바라봐 주었다. “……두고 봐.” 어째선지 김현승은 씩씩거리는 표정을 짓더니 구석자리에 가서 연습을 시작했다. 나는 대기실에 모여 있는 참가자들을 주욱 둘러보며 말했다. “얘들아. 중요한 콩쿨 앞두고 있는데 소란스럽게 했다면 미안하다. 모두 콩쿨 힘내고, 노력한 만큼 무대에서 좋은 성적 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응원할게.” 신강헌. 피승화. 김현승. 그 외에 콩쿨에 참가한 동갑내기 소년들이 나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하하-! 이거 완전 미친놈이잖아?” 드디어 신강헌이 나섰다. 나를 잔뜩 경계하는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신강헌은 한껏 신이 난 얼굴로 내게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나보다 더한 관종이네. 너 일부러 마스크 쓰고 있다가 누가 네 뒷담화할 때까지 기다린 거 아냐?” “……내가 왜?” “새끼, 내숭은…….” 신강헌은 내 말을 조금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녀석은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마치 맹수가 사냥에 나서기 전, 사냥감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해보려는 것 같았다. 파악이 얼추 끝났는지 신강헌이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콩쿨 참가자 명단에 기무혁 네 이름은 없던데, 여긴 뭐 하러 왔냐?” “지나가다가 인사나 할 겸 해서. 그리고 나도 콩쿨 참가자야. 여기가 아니라서 그렇지.” “……뭔 소리야?” 신강헌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묻는 순간. 똑똑- 노크와 함께 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보안요원이 다른 보안요원과 함께 들어왔다. “기무혁 참가자. 혹시 여기 계십니까?” “네. 접니다.” 손을 들어 보이자 보안요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가 시계를 가리키며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일반부 콩쿨이 곧 시작됩니다. 지금 대기실로 이동하지 않으시면 실격이에요.”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 나와 보안요원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학생들이 멍한 표정으로 우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일반부?” “뭐라고?” “쟤 설마…….” 그리고 나는 주머니에서 목걸이로 된 접수증을 꺼내 목에 걸었다. <창작검무/기무혁/일반부(25세이하)> 신강헌을 만나기 위해 콩쿨에 참가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같은 수준에서 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가 바라보는 곳은 이 녀석들보다 훨씬 더 높은 곳이니까. 이만하면 첫 만남에 눈도장도 확실히 찍은 것 같고. “그럼 다들 힘내고. 일반부 대회 끝나고 시간 나면 구경하러 갈 테니까, 최선을 다하는 모습 보여줘. 화이팅!” 나는 얼빠진 표정의 동갑내기들에게 마지막으로 응원을 전한 후, 고등부 콩쿨장을 나와 일반부로 향했다. 닫힌 문 뒤에서 온갖 욕설과 함께 폭소하는 신강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11화. 단언컨대 최고의 기무혁이 밖으로 나간 후. 한바탕 욕설과 고성으로 시끄러웠던 고등부 3학년 대기실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문 바깥을 노려보던 소년들이 하나둘 투덜거리듯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일반부가 말이 돼?” “……보나 마나 병풍 될걸.” “가서 개쪽이나 당하고 와라.” 기무혁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으면서도 어딘지 표정들이 복잡해 보였다. 자신들은 감히 생각도 못 했던 목표에 도전하는 모습.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무림인을 꿈꾸는 소년들이 기무혁의 행동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근데 기무혁 원래 저렇게 무모한 성격이었나?” “옛날부터 독종이긴 했잖아.” “눈빛이 졸라 무서워졌던데……. 체질검사 망하고 뭔가 각성이라도 했나?” “그래봤자 어림도 없지.” 고등부와 일반부의 수준은 말 그대로 차원이 달랐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무림인들이 참가하는 것이 일반부 콩쿨이니까. 제대로 내공심법에 입문도 하지 못한 고등학생이 일반부에서 수상하는 일은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기에, 누구도 기무혁이 수상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뭐라도 타면 간지 작살나겠다.” “고등부는 일단 평정하는 거지.”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을 기꺼이 선택한 기무혁에게 누군가는 부러움을, 자신과의 격차를 느낀 누군가는 분노를, 누군가는 동경의 감정을 품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만은 달랐다. “하! 들었던 것보다 더 개또라이네.” 신강헌만이 유일하게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는 다른 참가자들보다 무공에 입문이 늦은 편이라 기무혁을 직접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무공 콩쿨에 참가한 신강헌과 달리, 기무혁은 그때부터 콩쿨에 거의 나오지 않았으니까. “소문으로 들었을 땐 무공밖에 모르는 재미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본 기무혁은 동갑내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이질적인 존재였다. 대부분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남들보다 예민한 감각을 타고난 신강헌은 느낄 수 있었다. 기무혁이 극도로 절제한 살기를 은은하게 드러냈다는 것을. 그 살기로 은연중에 이 공간을 장악했던 것을 말이다. ‘오죽하면 무림인이 되겠다는 놈들이 겨우 말 몇 마디에 벌벌 떨면서 미안하다고 빌었을까.’ 신강헌의 시선이 맨 처음 기무혁의 뒷담화를 시작했던 꽁지머리와 그 패거리를 향했다. 아직도 안색이 하얗게 질린 것이, 콩쿨에서 제 실력을 보여주기는 글러 보였다. “뭐, 저 녀석들만 그런 것도 아니지.” 살면서 누군가에게 주눅 들어 본 적이 없었던 신강헌도 기무혁을 한동안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정도였으니까. 기무혁이 밖으로 나가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팔뚝에 돋은 소름은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흐. 간만에 불타오르네.” 강한 상대를 만난 신강헌의 두 눈에서 승부욕이 끓어올랐다. 쿵-! 가검으로 바닥을 찍은 신강헌이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두고 봐라! 오늘 콩쿨에서 금상 따고, 겨울 콩쿨에는 나도 일반부에 도전한다!”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돼?”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신강헌의 호쾌한 목소리에 맞섰다. 기무혁이 참가하지 않은 이번 콩쿨에서 가장 강력한 금상 후보 중 하나인 피승화였다. 신강헌이 히죽 웃으며 피승화를 도발했다. “넌 은상으로 만족해, 새끼야.”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놓고 수상 못 하면 봐줄 만하겠다.” “자기소개하냐?” 피승화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신강헌이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근데 이현승은 어디 갔냐? 걔도 한가락 하잖아.” “김현승 말하는 거지?” “아, 맞다. 기무혁이 이현승이라고 불러서 나도 헷갈리네. 그래서 어디 갔는데?” 피승화는 알 게 뭐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화장실이라도 갔나 보지.” 짧은 대화를 나눈 두 소년은 서로를 잠시 노려보더니, 이내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가 마지막 연습에 매진했다. 결과적으로 기무혁의 도발이 그들의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듯했다. ‘두고 봐. 금상은 내 거니까!’ ‘자존심 때문에라도 꼭 금상을 타야겠어.’ 그리고 그 시각, 콩쿨의 또 다른 강력한 수상 후보인 김현승은 대기실 옆에 딸린 화장실에 혼자 있었다. “후우……. 후우우…….” 김현승은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하고 있었다. 긴장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이상할 정도로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난 금상을 타야 해. 이번에는 반드시 타야 한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린 김현승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누런 괴황지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한자로 ‘마(魔)’라는 글자 수십 개가 검붉게 쓰여 있었는데, 그 자체로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이번에는 부디 좋은 결과 보여다오. 그래야 우리가 너를 중요하게 쓸지 말지 결정할 수 있지 않겠어? 콩쿨에 출전하기 전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김현승은 손에 든 괴황지를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이 부적을 사용하면 도핑 검사를 피할 수 있을 거야. 선택은 네 자유지만…… 우리를 더 이상 실망시키지는 마. 괴황지를 입 안에 넣고 으적으적 씹었다. 질긴 종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역겨운 느낌이 들었지만, 꾹 참고 삼켜 넘겼다. 두근! “커허억……!” 김현승이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기 위해 세면대를 붙잡았다. 거울에 비친 그의 이마에 순간적으로 ‘魔’가 검은 글씨로 떠올랐다. 눈동자는 시뻘겋게 핏발이 섰다. “야! 언제 나오는데! 나도 똥 마렵다고!” 쾅쾅쾅! 밖에서 누군가가 화장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김현승은 순간적으로 홱 돌아보며 소리쳤다. “닥쳐! 죽여버리기 전에-!” 문밖에서 목소리가 사라지고 잠시 후. 김현승의 충혈된 눈이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오고, 이마에 새겨진 글씨도 눈 녹듯이 흩어져 사라졌다. “…….” 화장실에서 나온 소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콩쿨 연습을 시작했다. * * * 나는 고등부 3학년 대기실에서 나와 곧바로 일반부 대기실로 이동했다. ‘고등부와는 공기부터가 다르군.’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조용한 대기실. 다들 가볍게 몸을 풀거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을 하는 등,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였다. ‘혹시라도 어리다고 무시하거나 텃세 부리진 않을까 했는데…….’ 각자 자신에게 집중할 뿐, 다른 참가자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참가자들을 조용히 관찰했다. 대부분이 소매나 어깨에 소속된 문파나 단체의 표식을 달고 있었다. 즉, 내공에 입문한 진짜 무림인이라는 의미였다. 손발 혹은 무기에 기를 담아서 발출할 수 있는 경지. 고등부까지는 신체를 갈고닦는 그릇을 만드는 과정이라면, 일반부는 본격적으로 초인(超人)이라고 불리는 영역에 들어선 이들이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무림인이라 이거지.’ 콧대 높은 대문파 소속은 보이지 않았지만, 제법 유명한 중견문파의 제자들은 간혹 보였다. 아마도 저들이 콩쿨의 유력한 수상 후보들일 터였다. “10분 후 콩쿨 시작합니다. 참가번호 1번부터 5번 참가자분들은 지금 백스테이지로 이동해서 대기하겠습니다!” “예.” 진행요원의 말에 다섯 명이 동시에 일어서는데, 작은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대기실을 나서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가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콩쿨은 처음이에요?” 별다른 의도가 느껴지지는 않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대답했다. “일반부는 처음입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소속 문파를 여쭤봐도 될까요?” “아직 고등학생입니다.” “……고등학생?” 고등학생이라는 말을 들은 참가자들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그중 몇몇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세상에! 고등학생이 일반부에 참가했다고?” “와, 천재구나.” “잠깐만. 기무혁? 커뮤니티에서 본 것 같은데. 십 대 유망주 아니야?” 갑자기 모여드는 관심들. 그들의 눈에 나를 향한 호기심과 흥미가 가득해 보였다. ‘이건 경계하는 게 아니라…….’ 일반부 25세 이하 참가자 형님들(어쨌거나 현재 나이로는)은 나를 막냇동생이나 조카라도 되는 것처럼 반겨주었다. “하하! 고딩이라니 귀엽네!” “일반부에서 고등학생이 수상한 적이 있었나?” “거의 이십 년은 됐을걸? 리차드 한이 귀화하기 전에 일반부 콩쿨 30세 이하까지 싹쓸이했었지 아마?” “와우! 그럼 오늘 그 전설이 재현될 수도 있겠네요!” 초중고 학생부 콩쿨이 좁은 문을 뚫고 무림인이 되기 위한 치열한 생존경쟁이라면, 일반부는 순수하게 자신의 역량을 뽐내고 싶어서 참가한 젊은 무인들이 선의로 경쟁하는 장에 가까웠다. ‘이런 분위기는 또 색다르네.’ 지난 생에는 고등부 애송이들과 무림인이라는 꿈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치렀고, 낭인이 된 후로는 뒷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살벌한 아귀다툼만을 겪어본 나였다. 이런 환대는 낯설어서 피부가 간질간질할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암루에서 혈호방의 제안을 거절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정파…….” 양지에서 살아가는 밝고 구김살 없는 무림인들의 모습이란 이런 거겠지.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처음 내게 말을 걸어준 참가자 오정민이 아하하 웃었다. “재밌는 애네. 처음 들어올 땐 누구 하나 족칠 것처럼 눈빛이 살벌하더니, 갑자기 혼자서 감격하고 그래?” “……제가 그랬나요?” “난 네가 원수라도 찾으러 온 줄 알았어. 안 보는 척해도 다들 서로를 의식하고 있거든. 무슨 말인지 알지?” “…….” 오정민의 조언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낭인 시절의 버릇이 남아 있는지, 다른 무인들과 만날 때는 경계심이 들어서 그런 것 같았다. ‘조심해야겠군.’ 다행히 내가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다들 긴장해서 그러나 보다, 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때 오정민이 조금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좋은 경험 한다고 생각해. 일반부 콩쿨은…… 생각했던 것하고는 좀 다를 거야.” 내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돌려서 말했지만, 나는 충분히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경쟁조차 안 될 테니 너무 실망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일반부 참가자들은 전부 내공심법에 입문한 무림인들이다. 콩쿨에서 내공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이긴 하지만, 기를 다루는 데 능숙해지는 것만으로도 몸을 다루는 능력도 발전한다. 조금 과장하면, 스포츠카를 몰아 본 사람과 막 운전면허를 딴 사람 정도의 차이랄까. “그러니까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 마.” 물론 내 경우는 입장이 조금 다르지만, 나를 걱정해서 해준 조언이었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나는 내 실력을 과신하지 않았다. 뒷세계에서 낭인으로 칼밥 먹은 20년의 세월이 있다고 한들, 그게 콩쿨 수상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일반부에 참가한 경쟁자들도 모두 재능 있는 이들이고, 몇 년씩 제대로 된 문파에서 수련한 무림인들이니까. 하지만……. ‘아예 경쟁 상대로 보지 않는 건 조금 그렇네.’ 나는 내 실력을 과신하지 않지만, 과소평가하지도 않았다. 이곳에서 경쟁조차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애초에 참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40번부터 45번 참가자! 대기실로 이동할게요!”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앞선 참가자들의 차례가 끝나고, 내 차례가 가까워졌다. “힘내라, 막내야!” “다들 눈치껏 적당히 해. 우리 막내 상금 타가게 말이야. 알았어?” “하하하! 상금 타서 효도하자!” 등 뒤에서 나를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는 참가자들의 응원을 받으며, 나는 백스테이지로 향했다. 피식. “모두 긴장하게 만들어줘야겠네.” 딱히 불쾌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호승심이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기무혁 참가자. 곧 차례니까 잠시 대기해 주세요.” “네.” 나는 백스테이지에서 내 앞 순서 참가자들의 검무를 구경했다. 주최 측에서 선정한 몇 가지 곡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준비해온 검무를 펼치는데, 다들 각자의 개성과 장점을 어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직까지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참가자는 없었다. “다음 42번 참가자. 올라가세요!” 진행요원의 말에 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 무대 위에 섰다. 생각보다 밝은 조명이 내리쬐고 있었고, 무심한 표정의 심사위원들이 보였다. 끼아아아아악- <귀신 춤사위> 내가 고른 검무곡의 섬뜩한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타이밍에 맞춰 허리춤의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스르릉. 칼자루를 손가락으로 말아쥔 순간, 나는 큰일이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느낌 제대로인데?’ 검 손잡이가 손에 감기는 맛이 지나치게 좋았다. 이대로 검을 타고 하늘이라도 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고양감. 단언컨대 최고의 컨디션이었다. 12화. 귀신 춤사위 검무(劍舞)란 말 그대로 칼로 풀어내는 춤이다. 3분가량의 짧은 음악에 어떠한 것을 보여줄지, 무엇을 담을지는 참가자 개인의 자유. 자신 있는 동작을 연결해서 개인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도 있고, 난도 높은 동작이나 독특한 구성으로 신체능력이나 창의성 점수를 노릴 수도 있었다. ‘나는 뭘 보여줄 수 있지?’ 지난 생에, 내 장점은 누구보다 많은 연습량에서 비롯된 정확한 기본기와 체력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중학교 콩쿨에서 여러 차례 입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검에 대한 열망만으로 가득하던 열아홉 소년이 아닌, 20년이란 삶을 살고 과거로 돌아온 기무혁은 칼로써 무엇을 풀어낼 수 있는가? 콩쿨 참가를 결정하면서 제법 깊게 고민했고, 결국 한 가지 답을 내렸다. ‘낭인의 삶을 담아보자.’ 그래서 주최 측에서 선정한 곡들 중 <귀신 춤사위>를 골랐다. 제목을 보자마자, 그리고 첫 소절을 듣자마자 지난 생의 나와 가장 어울리는 곡이라고 판단했으니까. 독고귀 기무혁. 전생의 나는 싸움에서 늘 혼자 살아남는 외로운 귀신이었다. -너, 칼솜씨가 귀신 같네? 전주가 시작되자 나는 그 시절의 내가 되어 검을 휘둘렀다. 퉁. 일부러 놓친 검을 발로 차서 다시 잡고, 곧바로 상체를 홱 눕혔다가 반동으로 일으켜 허공에 칼을 그었다. 끼아아아악- 끼아아아악-! 소름 돋는 귀신의 비명이 점점 고조되고, 그와 함께 북, 장구, 꽹과리, 그리고 방울 소리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나는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무대를 걸어가다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칼을 찌르고 휘둘렀다. 시선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계속 주변을 살폈다. 난전이 일상이었던 낭인의 움직임,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늘 주위를 경계했던 모습을 검무에 녹여냈다. 둥, 두두둥, 두웅-! 째재재재재재쟁! 정신없이 몰아치는 사극풍의 사운드에 걸쭉한 남자의 음성이 더해진다. 잡귀야 물럿거라! 마귀야 게 섯거라! 당장 귀천하지 못할까-! 귀신을 퇴마하러 온 무당의 외침이었다. 북소리가 더욱 커지고, 장단이 빨라진다. 나는 황급히 뒷걸음질 치며 언뜻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처럼 칼을 휘둘렀다. 필사적이고 처절한, 그러나 그만큼 날카로운 검이었다. 검로 하나하나가 최단 거리로 상대의 명줄을 끊기 위한 궤적을 그린다. 때로는 몸의 일부를 내어주면서도 기어이 상대의 숨통을 끊으려는 듯이. -……독한 새끼. 이렇게 피 칠갑을 하고도 살아남았어? 새벽에 뭐가 문을 두드리길래 난 또 귀신인 줄 알았네. 김복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나는 히죽 웃었다. 그래,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발악하는 귀신이었다. 인공단전을 쑤셔 넣은 몸에 한쪽 눈을 잃고서도 무림인이라는 꿈을 포기 못 한, 미련이 한이 되어 귀천하지 못하는 귀신이었다. -흐흐. 웬 애꾸병신이 나왔어? 낭인이 되고 처음으로 죽인 상대는 나와 같은 뒷세계의 낭인이었다. 늙고 지쳐 보였지만 끈질긴 남자였다. 찐득한 살기를 흘리며 한쪽 눈을 잃은 내 사각을 집요하게 노렸다. 덕분에 나는 첫 실전에서 비싼 수업료를 치렀다. 팔다리에 구멍이 다섯 개쯤 뚫리고, 온몸에 피를 흠뻑 적시고 나서야 상대의 멱을 딸 수 있었으니까. -씨이벌…… X같네……. 내 심상 속 낭인이 비틀거리다 쿵 하고 넘어졌다. 나는 허공을 찌른 검에서 핏물을 털어내듯 검을 옆으로 털며 앞으로 성큼 나아갔다. 흐으으윽. 흐으으윽. 귀신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진다. 쩌렁쩌렁하던 무당의 외침도 잠시 잦아들었다. 음악의 템포가 잠시 느려진 구간. 나는 저릿한 손을 쉬어줄 겸 칼을 반대 손으로 바꿔 쥐었다. -네가 우리 형님을 담근 새끼냐? 두 번째 살인은 동시에 세 명이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나를 골목길에 숨어서 기다리던 놈들. 첫 살인으로 죽인 놈의 동료들이라고 했다. 다행히 두 번째는 조금 더 수월했다. -사, 살려줘……. -다시는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 -칼 들어, 병신들아! 살려줄 눈깔이 아니잖아! 촤아아악! 일검에 셋의 목을 베었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과거의 환영들. 동시에 잠시 주춤했던 무당이 더 커진 목소리로 나를 겁박했다. 잡귀야 물럿거라! 마귀야 게 섯거라! 당장 귀천하지 못할까-! 내 상대는 계속해서 바뀌었다. 말로만 들었던 괴이(怪異)와 처음으로 조우했던 순간. 함정에 빠져 같이 갔던 동료들을 모두 잃고 혼자서 살아 돌아왔던 날. 은원(恩怨)을 잘못 샀다가 크게 손해를 보고, 그럼에도 작은 미소 하나에 기분 좋게 웃어넘겼던 기억. 지난 내 모든 삶이 검무에 녹아들었다. 둥, 두두둥, 두웅-! 째재재재재재쟁! 곡조가 빨라졌다가 느려지고, 멋대로 작아졌다가 커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내 지난 삶처럼. -……기무혁? 설마 그 기무혁? 한국제일도 신강헌도 내 앞에 나타났다. 녀석은 나와 수십 합을 맹렬하게 부딪치고는 호쾌하게 웃더니 사라졌다. 그리고 무대 너머 저 멀리,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리차드 한.’ 나의 우상이자 영웅. 평생을 선망해온 세계 최고의 무림인. 낭인이 된 후에도, 그를 쫓고 싶어 그의 무공을 분석한 너튜브를 하루에도 수십 개씩 돌려봤다. 내가 성큼 다가가자,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아직은 도전할 자격도 없다는 건가?’ 상상 속에서도 자신과 검을 맞댈 자격이 없다는 뜻일까? 과연 세계제일인다운 자신감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반대로 몸을 돌렸다. 무대의 중앙, 그곳에 내 마지막 상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마지막은 너로구나.’ 그는 과거의 나였다. 독고귀 기무혁이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웃었다. 상처로 가득한 몸과 덥수룩한 수염. 왼쪽 눈은 감긴 채, 어딘가 낡고 지친 느낌이 가득한 사내. 무대를 가로질러 단숨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채채채채챙! 나는 과거의 나와 어울려 신명 나게 검을 휘둘렀다. 핏물이 튀어 오르고, 뼈가 갈라지는 싸움이었다. 상상 속의 대결임에도 베인 곳이 은은하게 아려왔다. 그리고 그 끝에. 푸욱. 독고귀의 심장을 찌른 검을 천천히 빼내자,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마치 한번 봐줬다는 듯. ‘잘 가라.’ 우리는 서로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스스스스슷…… 겨울바람이 낙엽을 스치는 듯한 사운드와 함께, 마지막 춤사위를 끝낸 귀신은 스스로 귀천해 사라졌다. “후우우…….” 검무곡 <귀신 춤사위>가 끝났다. 콩쿨 안무를 끝낸 나는 자리에서 잠시 호흡을 정리했다. 조명 때문에 심사위원들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무림의 고수들이 쉽게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아니고. ‘너무 멋대로였나?’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털어버렸다. 스스로에게 만족스러웠으니 됐다. 심사 기준에 못 미쳐 수상하지 못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전한 후, 미련 없이 무대를 내려와 대기실로 돌아갔다. “…….” “…….” 분명 모니터로 내 검무를 지켜봤을 참가자들은 아무도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오정민도 굳은 표정으로 나를 힐긋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기분은 좋네.’ 그건 명백히 자신을 위협하는 경쟁자를 바라보는 표정이었으니까. * * * 창작검무 콩쿨의 심사위원석에는 세 명의 고수가 앉아 있었다. 송월문의 부문주 염명환. 대천문의 최연소 장로 구자승. 무림맹 원로 노구천. 한국무림의 내로라하는 중견, 원로고수들인 세 사람은 미래의 동량들을 살피기 위해 기꺼이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몇십 명이나 되는 인원의 검무를 심사하는 일은 다소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창작검무인데…… 비슷비슷하군요.” “흠. 요즘 아이들은 그저 화려한 기교만 보여줄 줄 알지, 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듯합니다.” 염명환과 구자승이 다소 지루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다. 콩쿨이라는 제도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높은 점수를 받는 고난이도 동작은 정해져 있고, 최대한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안정적으로 점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일반부는 조금 다를 줄 알았는데…….” “초중고에서 거쳐 온 습관이 무서운 것 같습니다. 다들 알면서도 한번 몸에 익힌 틀을 깨기가 쉽지 않은가 봅니다.” “차라리 미숙하더라도 파격적인 검무를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텐데요.” “그게 또 잘못하면 겉멋만 든 칼춤이 되지 않습니까?” “하긴…….” 방금도 막 끝난 검무를 관성적으로 채점하며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참가명단의 아래쪽을 확인한 염명환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기무혁?” “아시는 아이입니까?” “중등부 콩쿨을 심사할 때 자주 봤던 아이입니다. 정석적이고 빈틈없는 검으로 기억하지요.” 구자승 장로가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정석적이고 빈틈없다라……. 그 정도라면 고등부에서는 몰라도 일반부에서 통하긴 어려울 텐데.” “뭐, 좋은 경험이 되지 않겠습니까?” 기무혁을 알아본 염명환도 딱히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고등부와 일반부의 차이는 그만큼 큰 벽이었으니까. 잠시 후, 42번 참가자 기무혁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심사위원들은 앳된 참가자의 등장을 기대보다는 걱정을 담아 바라봤다. “귀신 춤사위를 선택했군요. 구성이 난해해서 거의 선택하지 않는 곡인데, 그걸 고등학생이…….” “긴장해서 실수를 연발하는 일만 없으면 좋으련만.” 그 순간 검무곡이 시작되었다. 퉁. 검을 놓친 듯했던 기무혁이 발로 차올려서 다시 쥐었을 땐, 심사위원들은 그 재치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곧 무대 이곳저곳으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발과 주변을 경계하는 시선, 고등학생의 것 같지 않은 예기가 실린 검을 보자 그들의 눈이 점점 부릅떠졌다. “……허!” “처음엔 무슨 장난인가 했는데…….” 세 명의 심사위원들 중에 기무혁의 움직임이 보여주는 의도를 읽지 못할 정도로 하수는 없었다. 난잡한 듯하지만 검로 하나하나가 정확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시선 끝에 닿는 칼끝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고, 검을 뻗고 회수함에 있어 망설임이 없었다. 지금 저 소년은 가상의 누군가를 상상하며 검무를 펼치고 있었다. 그 형상이 심사위원들에게도 흐릿하게 보이는 듯했다. “무슨 집중력이…….” “게다가 살기가…….” 심사위원들은 손등에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마치 상대의 목에 이빨을 박아넣을 순간을 기다리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늑대를 보는 것 같았기에. 구자승이 눈은 기무혁에게 그대로 못 박아둔 채 염명환에게 물었다. “정석적이고 빈틈없다는 게 저런 의미였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아는 기무혁 학생은 저런 검이 아니었는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놀라기는 염명환이 더 했다. 그가 아는 기무혁은 정직하고 올곧은 검무를 펼치던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뒷세계 낭인도 저러진 않겠는데…….’ 그리고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보던 무림맹 원로 노구천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 아이.” 어느새 검무곡이 끝나 있었다. 검을 납검한 기무혁이 천장을 바라보며 묘하게 웃는 순간, 노구천도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타고났군.” 다른 두 사람도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3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몰입해서 지켜본 무대였으니까. 꾸벅 고개를 숙인 기무혁이 무대에서 내려가고, 심사위원들이 잠시 갑론을박을 벌였다. “나머지 참가자는 볼 것도 없습니다. 기무혁. 저 아이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구 장로님. 지금껏 고등학생이 일반부에서 금상을 수상한 경우는…….” “선례가 하나 있지요. 이십여 년 전에.” “……지금 리차드 한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현시점 세계제일인이라 불리는 무림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하지만 노구천은 놀라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기무혁이 보여준 검무를 머릿속에서 조용히 복기할 뿐이었다. ‘저 아이의 검술…….’ 노구천은 생각했다. 리차드 한이 아닌, 자신이 아는 누군가의 검술과 닮았다고. 13화. 귀신 들렸다니까? 대기실로 돌아온 나는 모니터로 남은 참가자들의 검무를 지켜봤다. ‘이상하게 아까부터 실수가 많네?’ 내 순서 이후로 나온 콩쿨 참가자들이 실수를 연발하고 있었다. 무리한 동작을 펼치려다가 검로가 꼬이고, 괜히 애드립을 넣었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되는 등 각종 실수들이 무대에서 펼쳐졌다. 콰앙! “아이고…….” “저런…….” 심지어 마지막 참가자는 과한 동작으로 허공에서 몇 바퀴를 돌다가 크게 넘어졌는데, 벌떡 일어난 참가자의 입술이 찢어져 피가 뚝뚝 흐르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쯧. 무리하지 말고 준비한 대로만 했다면 좋았을 텐데.’ 뒤 순서일수록 부담이 되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반부에 참가한 무림인들이 저렇게 실수를 연발하는 것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는 앞 차례여서 망정이지…….” “갑자기 누가 말도 안 되는 걸 해버리니까 다들 지기 싫어서 저러잖아.” “쟤 진짜 고등학생 맞아?” 몇몇이 날 힐끗거리며 숙덕숙덕거리는데, 묘하게 내 뒷담화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뭐라는 거야?’ 슬쩍 바라보자 다들 내 시선을 피하거나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렇게 일반부 25세 이하 콩쿨에 참가한 모든 참가자들의 순서가 끝났다. 진행요원이 와서 결과는 이틀 뒤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되고, 개별 연락을 받은 수상자는 무림맹 본단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참가하면 된다고 공지했다. “그럼 이제 가봐도 되나요?” “네. 가셔도 됩니다.” 가방을 챙겨 든 내가 가장 먼저 대기실에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저기.” 일반부 대기실에 들어온 내게 처음 말을 걸어줬던 콩쿨 참가자, 오정민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거 내 명함인데, 괜찮으면 받아줄래?” 그가 건넨 명함에는 <송월문 일대제자>라고 적혀 있었다. 대문파는 아니어도 이십 대 초중반에 일대제자라면,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뛰어난 실력자라는 의미였다. 실제로 오정민은 콩쿨 무대에서도 충분히 입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훌륭한 검무를 보여주었다. “왜 저한테 이걸……?” 당연히 무슨 의미인지 눈치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질문했다. 오정민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전도유망한 십 대 후기지수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러지. 겸사겸사 우리 송월문으로 영업도 하고.” 붙임성이 좋은 오정민은 진지한 이야기도 농담처럼 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진로는 정했어?” “아직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마음이 기운 곳이 있지만, 굳이 지금 그걸 말해서 손해 볼 이유는 없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오정민이 반색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송월문은 내실이 튼튼한 중견문파야. 당장은 네 마음에 차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어. 특히 뛰어난 후기지수들에 대한 지원은 대문파 못지않다고 장담할 수 있지.” 송월문(松月門). 한국무림에서 견실한 중견 문파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문파로, 오정민의 말에는 크게 과장이 없었다. 확실하게 지원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문파 내 고위직까지 노려볼 수 있다는 점은 분명 큰 매력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안정적인 직장이 아니었다. “……진로에 대해서는 아직 고민 중이라서요. 부모님과도 이야기를 자세히 나눠봐야 하고요.”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부모님을 언급하자 오정민이 한발 물러섰다. “물론이지. 절대 강요는 아니야. 송월문에 대해서도 한번 고려해 보면 좋겠다는 의미지. 아,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체질검사 결과를 물어봐도 될까? 혹시 아직 안 받았다면 우리가 지원해줄 수도 있는데……” “4급이에요.” 내 대답에 오정민의 표정이 순간 미묘해졌다.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하달까. 하지만 금세 부드러운 웃음으로 표정을 숨긴 그가 말했다. “……근골만큼 체질도 뛰어나구나. 졸업만 하면 다들 데려가겠다고 난리겠는데?” 나는 잠깐의 침묵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읽었지만, 이번에도 모르는 척 해맑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저 그럼 이만 가봐도 될까요? 밖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아, 그래! 붙잡아서 미안하다. 다음 주 시상식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네.” 오정민의 덕담에 나도 덕담으로 인사했다. “형님은 충분히 수상하실 것 같아요. 저는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요.” “하하하하! 너, 농담도 잘하는구나?” “……?” 어쨌든 나는 오정민에게 명함을 받아서 주머니에 잘 챙겼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대기실에서 나가려고 했는데……. “잠깐만! 내 명함도 받아줄래?” “내 것도 줄게!” “혹시 번호 좀 알려줄 수 있어?”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다가온 일반부 참가자들이 나를 막아서면서 명함을 건네기 시작했다. 나는 명함은 주는 대로 전부 받고, 번호를 교환하자는 요청은 모두 거절했다. 열 장이 넘는 명함을 받아 들고 나서야 겨우 도망치듯이 대기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휴우…….” 혹시나 계속 쫓아올까 봐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러 고등부 콩쿨장으로 향하는 길. 날 바라보던 일반부 참가자들의 얼굴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 검무가 나쁘진 않았나 보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그것이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 * * 기무혁이 대기실에서 나간 후. 대기실에 남은 일반부 참가자들은 본격적으로 열아홉 살 소년이 보여준 검무에 대한 감상을 떠들기 시작했다. “걔 도대체 뭐야? 귀신 춤사위를 그렇게 해석한다고?” “사파식 검술로 해석한 거 맞지? 살기를 절제하면서 필요할 때만 드러내는데 꼭…….” “나 소름 돋은 거 아직도 그대로야.” “하하하! 나는 망했지만 콩쿨은 재밌었다!” 콩쿨이 시작되기 전까지 고요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을 정도로 다들 흥분한 모습이었다. 경쟁자이기에 앞서, 그들 모두가 검에 진심인 무림인들이기 때문이었다. 그중엔 기무혁의 체질을 언급하며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4급이랬지? 괜찮은 체질이지만 근골에 비하면 많이 아쉽네…….” “내 말이. 한 단계만 더 높았어도 대문파들이 전부 영입하겠다고 달려들었을 텐데.” “지금도 충분히 침 흘릴걸? 애초에 둘 다 최상급인 경우가 몇이나 된다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참가자들은 저들끼리 수상 결과를 미리 예측하기도 했다. 기무혁의 이름은 누구의 예측에서도 빠지지 않았는데, 상의 종류만 조금씩 바뀌었다. “특별상은 무조건 받을 것 같고…… 은상? 동상?” “내가 심사위원이면 특별상에 은상. 퀄리티는 높았지만 금상을 주기엔 너무 거칠었어.” “나는 금상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심사위원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참가자들은 재미 삼아 수상자를 예상하고 있을 뿐, 짐작도 하지 못했다. “기무혁에게 금상을 줘야 한다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금상은 과합니다!” “허, 답답하긴…….” “지금 저한테 하신 말씀입니까?” 지금 심사위원들이 기무혁 때문에 서로에게 침을 튀기며 격렬하게 토론을 벌이는 중이라는 것을 말이다. * * * 나는 고등부 콩쿨이 진행되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학부모들로 인해서 관객석은 일반부보다 훨씬 많이 차 있었는데, 용케도 앞줄에 자리 잡은 김복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별일 없고?” 복자가 미리 맡아 놓은 옆자리에 앉자, 무슨 비밀작전이라도 수행하듯 복자가 몸을 낮추며 나를 바라봤다. 대체 선글라스는 왜 쓰고 있는 거야? “너 일반부 콩쿨을 뒤집어 놓고 왔다며?” “……어떻게 알았어?” 복자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톡톡 두드렸다. 일반부 콩쿨이 끝난 지 십 분도 되지 않았는데, 커뮤니티에서 벌써 내 얘기로 떠들고 있다고 했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진짜 할 일 없는 놈들도 많다. 그 시간에 검이나 한 번 더 휘두를 것이지.” “또 아재 같은 소리 하네……. 근데 너, 이거 괜찮아?” “뭐가?” 주변을 슬쩍 둘러본 복자가 목소리를 더욱 낮게 깔며 말했다. “체질을 숨긴 이유가 있을 것 아냐? 그런데 지금 너무 어그로 끄는 거 아니냐고.” 무슨 뜻인지 이해한 내가 피식 웃었다. “어차피 금방 식을걸. 4급이라고 슬쩍 말해주고 왔거든.” 괜히 그 자리에서 오정민에게 4급이라고 알려준 것이 아니었다. 체질검사에서 1급이 등장하면, 그 자체만으로 한국 무림계가 들썩인다. 2급은 그 정도는 아니라도 한동안 너튜브를 비롯해 각종 매체에 오르내릴 정도로 큰 주목을 받는다. 3급까지도 근골에 따라 대문파에서도 탐을 내는 인재다. ‘4급부터는 좀 애매하지.’ 흔히 말하는 절정고수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 4급 이하 체질이었다. 기를 받아들이고 다루는 재능이 부족해 보다 위의 경지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 한계는 대문파의 정예무인. 혹은 중견문파를 이끄는 주역. 충분히 대단한 실력이지만, 그렇다고 대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 존재들. 내가 4급이라고 말했을 때, 오정민이나 몇몇 참가자들의 반응이 미묘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내 체질이 4급이라고 알려지면 호들갑도 금방 가라앉을걸.” “영악한 자식……. 숨길 만큼 숨기고 필요한 만큼은 누리겠다 이거지?” 괜히 친구가 아니다. 내 의도를 정확히 눈치챈 복자에게 씩 웃어주었다. “뭐, 내 얘긴 이제 됐고, 신강헌 주변에 뭐 없었어?” “딱히. 주변 인물이라고 해봤자 별것 없던데? 부모님은 어릴 때 돌아가셨고, 삼촌이랑 둘이 사는데, 저기 있어.” 복자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신강헌을 닮은 큰 키의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근데 신강헌 걔…… 아무래도 삼촌한테 빨대 꽂힌 거 같던데.” “무슨 소리야?” 신강헌이 삼촌과 둘이 사는 것은 나도 아는 정보였다. 내가 복자에게 건네준 자료에도 적혀 있었으니까. 그사이에 복자는 내가 건네준 자료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낸 것 같았다. “동병상련의 직감이랄까? 너튜브 영상 몇 개 보니까 딱 알겠더라.” 묘한 미소를 짓는 복자의 표정을 보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이 녀석도 가족과 사이가 나쁜 걸 넘어서, 증오할 정도였다는 것을 말이다. ‘혹시 신강헌이 천마신교에 빠진 건 가정사 때문인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으나 복자의 말만 믿고 섣불리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말고. 다른 수상한 건 없었어?” “없어. 수상한 인물도 없고. 고딩들 수준이라 별로 재미도 없고.” 복자는 지루한지 작게 하품을 했다. 나는 고생해준 녀석에게 추가 보상을 약속했다. “남은 무대만 보고 떡볶이 먹으러 가자. 오늘 디저트까지 내가 산다.” “치즈 추가. 납작만두 추가. 당면 추가. 사이드로 프렌치프라이 추가…….” “고등학생 용돈을 거덜을 내는구만.”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고등부 콩쿨을 관람했다. 고등부는 일반부보다는 수준이 떨어졌지만, 나름대로 필사적인 맛이 있었다. 특히 신강헌과 피승화의 차례에서는 눈이 꽤 즐거웠다. ‘제법인데?’ 신강헌은 압도적인 피지컬을 활용한 터프하고 강렬한 검무를 선보였고, 피승화는 예리하고 정확한 동작으로 관객들이 절로 감탄사를 내뱉게 만들었다. 둘 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뛰어나서 뒤 차례들이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마지막이네.” “이현승 차례인가? 얘도 실력이 괜찮지.” “……김현승 아니야? 저기 이름 나오는데.” “아, 그랬지.” 쌍검을 등에 멘 김현승이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신강헌이나 피승화에 비하면 조금 부족하지만, 고등부 콩쿨에서는 충분히 수상권에 들 만한 실력이었다. “하아압!” 기합을 내지르며 쌍검을 동시에 뽑아 든 김현승은 내 예상이 무색하게 신강헌과 피승화 못지않은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단숨에 무대의 끝까지 도달하는 운동능력과 힘이 살아 있는 검 끝. 그렇다고 정확함이나 예리함이 떨어지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차하아아앗!” 거기에 무대를 장악하는 존재감까지 더해서, 내가 알던 김현승보다 훨씬 더 강렬한 검무를 펼치고 있었다. “저 녀석 원래 저렇게 잘했나? 완전히 무아지경에 빠져서 신들린 듯 움직이네…….” 내 감상에 복자의 딱딱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신들린다는 말이 일부러 귀신을 씌운단 소리는 아니지?” “무슨 소리야?” 황당한 말에 옆을 돌아보니, 선글라스를 벗은 복자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귀화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 눈은 김현승을 꿰뚫어 보듯 노려보고 있었다. “쟤, 귀신 들렸어.” 그녀의 손가락이 김현승을 가리킨 순간, 고개를 기괴한 각도로 홱 꺾은 녀석과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14화. 왜 안 옴? 과하게 목이 꺾인 기괴한 자세로 멈춰 선 김현승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히죽 벌어진 입에서는 기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흐흐흐…….” 사람의 목소리라기에는 지나치게 음산한 웃음. 하지만 관중들은 그런 모습마저도 퍼포먼스로 생각하는 듯했다. 표정 연기, 강약 조절을 위해 잠시 제자리에 멈춰서는 참가자들은 흔했으니까. “흐하하핫-!” 폭소를 터트린 김현승이 다시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쌍검을 휘두르는 동작이 점점 빨라지고 과격해질수록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고등부 콩쿨에서 보기 힘든 화려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이었다. 문제는 지금 저 녀석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이 우리 둘뿐이라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일반부 콩쿨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심사위원들이 금세 알아챘겠지만, 그보다 무공과 경험이 부족한 고등부 심사위원들은 아직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복자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질문했다. “귀신이면 망령이야, 악령이야?” 괴이(怪異)에는 귀신(鬼神), 영물(靈物), 재해(災害)가 있고. 그중에 귀신은 망령(亡靈)과 악령(惡靈)으로 나뉜다. 망령은 죽은 자의 혼이 귀천하지 못한 것으로 무당이나 술법사를 통하면 어느 정도는 소통이 가능하지만, 악령은 자아를 잃고 원한만을 지닌 악귀라 퇴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복자는 내가 그런 개념을 아는 것이 신기하다는 얼굴이었지만, 내 다급한 표정을 보고 빠르게 설명해 주었다. “악령. 저절로 씐 게 아니라 누가 강제로 씌웠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태지?” 그 순간 복자의 두 눈에서 시퍼런 귀화가 일렁였다. 검무의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김현승에게 시선이 팔려 관객들 중 누구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김현승을 자세히 살핀 복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오래 못 가. 애초에 기가 약한데 귀신이 들러붙었네. 저러다 당장이라도 아무한테나 칼을 휘두를걸.” 복자는 악령이 김현승의 선천지기마저 끌어다가 쓰는 중이라고 했다. “……오케이.” 내가 움직이기 편하게 겉옷을 벗자 복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쩌려고?” “사고 치기 전에 떼어 놔야지.” 나는 지난 생에서도 저것과 비슷한 괴이를 몇 번이나 상대해 보았다. 숙주를 죽여도 봤고, 무당과 함께 봉인하는 임무를 맡은 적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겪은 지랄염병과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알게 된 건, 악령이란 오래두면 둘수록 더 큰 재앙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뭔가 수상하거든.” 과민반응일 수도 있지만, 악령에 씐 김현승을 본 순간 천마신교가 생각났다. 놈들이 전 세계를 상대로 테러를 일으켰을 때. 각국 정부청사 내부에서 악령에 씐 배신자들이 속출하면서 더욱 큰 혼란에 빠졌으니까. ‘확인해보면 알겠지.’ 물론 지금 나서면 콩쿨을 방해하는 미친놈이 될 뿐이었다. 나는 복자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악령을 자극할 수 있어?”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던 복자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진 않아. 저 귀신, 아까부터 날 불쾌하게 여기고 있거든.” 그것은 김복자가 평범한 술법사가 아닌, 무당의 피를 이어받은 술법사여서일 것이다. 내가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은 아직 비밀이지만 말이다. “그럼 부탁 좀 할게.” “……토핑 전부 추가할 거야.” 작게 투덜거린 복자의 눈에서 시퍼런 귀화가 다시 한번 피어올랐다. 그리고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악귀야, 악귀야. 무슨 원한이 남아 여태 이승에 남아있느냐? 네 꼴이 우습구나. 내 앞에서도 한번 재롱을 부려 보겠느냐?” 평소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간드러지는 목소리. 순간 킬킬거리며 검을 휘두르던 김현승의 움직임이 뚝 멈추더니, 이내 괴성을 지르며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아!” 지금껏 퍼포먼스라고 생각하던 관객들은 김현승이 무대에서 뛰어내리자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멈춰라!” “지금 뭐 하는 건가!” 심사위원들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지만, 이미 김현승은 맨 앞줄에 있는 관객의 어깨를 밟고 복자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양손에 나눠 든 쌍검을 사납게 휘두르면서. “꺄아아아악!”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리거나 도망칠 때, 나는 단숨에 솟구쳐 김현승을 덮쳤다. 쿠당탕탕! 우리는 뒤엉켜 바닥을 굴렀다. 나는 수도로 김현승의 손목을 때려 검 하나를 먼저 놓치게 만들고, 다른 하나는 무릎으로 찍어 눌러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끄아아악! 크아아아악!” 악령이 씐 김현승이 거칠게 저항하며 몸을 뒤틀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서 몸으로 김현승을 억누르며 소리쳤다. “김현승! 정신 차려!” “끄아아아아악!” 악령을 처리하는 방법 중 가장 손쉬운 것은 숙주를 죽이는 것이다. 과거 낭인이었을 때는 다른 방법을 몰라서, 혹은 고용주의 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방식.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배 속에 뭐가 있어. 토하게 해.” 뒤에서 들려온 복자의 조언에 따라 나는 김현승의 복부를 주먹으로 강하게 쳤다. “커허억!” 한 번으로는 되지 않아서 두 번 세 번 연달아 때렸다. 그러자 입에 게거품이 올라오며 무언가가 침에 섞여 나왔다. 잘게 찢어진 괴황지였다. 흐릿하지만 한자 ‘마(魔)’처럼 보였다. ‘찾았다!’ 내가 찢어진 종이 중 하나를 슬쩍 손 안에 쥐자마자, 경공을 펼친 고등부 심사위원들이 우리 주변에 내려섰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둘 다 멈추게!” 그때 괴황지를 토해내면서 힘이 빠진 김현승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순식간에 눈이 풀리며 멍한 표정이 되었다. “네가 왜……?” 거칠게 저항하던 김현승의 몸에서 힘이 스르륵 빠졌지만,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이렇게 제정신으로 돌아온 척하다가 뒤통수 친 귀신들을 여럿 만나 봤거든. “일단 나머지도 다 토해내고 시작하자.” “자, 잠깐만!” 나는 다시 두 주먹으로 있는 힘껏 녀석의 복부를 후려쳤다. “컥! 개새끼……!” 눈을 부릅뜬 김현승이 나를 원망 어린 눈으로 노려보더니, 이내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다. * * * “참가자가 악령에 씌다니…….” 김현승이 폭주해 날뛰면서 고등부 콩쿨은 개판이 되었다. 주최 측은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은 학생의 주화입마라고 발표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보다 더 심각한 상황임을 눈치챘다. 그래서 지금 모든 콩쿨 심사위원들이 한자리에 모인 상황. 가장 연배가 높은 무림맹의 원로 노구천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등부 심사위원에게 물었다. “김현승 학생은 어찌 되었나?” “주화입마 전문의가 있는 병원으로 곧바로 이송시켰습니다.” “……입에서 나온 물건의 출처는?” “가족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학생이 깨어나면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뒷세계에서 구한 것으로 일단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 노구천이 입을 다물자 좌중에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 역시 그곳에 끼어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불편해 죽겠군.’ 폭주하는 김현승을 막은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에, 직접 진술을 들어보겠다며 사람들 앞에 불려왔다. “현승이와는 예전부터 콩쿨장에서 자주 본 사이였습니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나빠 보여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오길래 일단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달려드는 바람에……. 저도 너무 당황해서 손속이 과해졌습니다. 그 점은 반성하고 있습니다.” 할 말은 이렇게 다 했고, 지금은 눈치껏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마침 노구천이 나를 불렀다. “기무혁 학생.” “……예.” 무림맹의 원로로 인정받는 노고수의 눈빛에는 고요한 와중에도 예리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마치 나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빛에, 살짝 긴장한 상태에서 상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신이 없어서 고맙다는 말도 못 했구나. 네가 아니었으면 관객 중에 크게 다치는 사람이 나왔을 게야. 내 무림맹에 이야기해서 소정의 보상이나마 받을 수 있도록 하마.” 노구천의 주름진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상황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닌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고요.” 정파 무인의 교과서 같은 답변에 노구천이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고, 다른 심사위원들도 기특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허어, 요즘 아이라고는 믿기 힘든 사고방식이 아닙니까?” “콩쿨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더니, 한국무림의 미래가 밝군요.” “혹시 진로는 생각해둔 바가 있나?” 일반부를 심사한 송월문의 부문주 염명환, 대천문의 구자승 장로도 내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귀신하고 푸닥거리 좀 한 걸로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으면 남는 장사지.’ 금창약도 하나 선물로 받았다. 바닥을 구르며 조금 긁힌 상처에 바르기에는 과분할 정도로 품질이 좋은 제품이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느냐?” “예.” 그때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인 노구천이 내가 방심한 틈을 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네 검술이 예사롭지 않던데, 어느 고인께 배웠느냐?” “……입시학원에서 기본기를 다졌습니다. 따로 스승님을 모신 적은 없고, 대부분 독학으로 익혔습니다.” 무림의 고수들은 상대의 호흡이나 혈색, 미세한 움직임만 보고도 거짓을 구별해 낼 수 있다. 눈앞의 노구천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고수였지만, 내 말에서 이상한 점은 찾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면 방금 내가 한 말은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독학이라니……. 대단하구나.”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노구천은 내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 눈치였다. ‘누구에게 배웠냐, 가 아니라 어느 고인께라고 물었어. 내 검에서 누군가의 흔적을 봤다는 말인데.’ 지난 생, 나는 리차드 한을 비롯해 여러 고수들의 검에서 영감을 받거나 참고하여 나만의 검술을 발전시켜 나갔다. 다만 그 토대가 되어준 하나의 검술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만약 노구천이 그 검술의 흔적을 알아본 거라면……. ‘조금 귀찮아질 수도 있겠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의혹만 있을 뿐, 확신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공통점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아주 희미할 테니 말이다. 이 자리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심사위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하지만 굉장히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그러는데, 저는 이만 가봐도 될까요?” 날 잠시 물끄러미 바라본 노구천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너무 오래 붙잡아 뒀구나. 이만 가봐도 된다. 단, 오늘 이 자리에서 듣게 된 이야기는 함구해다오.” “알겠습니다.” “그럼, 시상식에서 보도록 하자꾸나.” “예. 감사합니다.” 나는 다른 심사위원들에게도 포권을 취한 후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장소에서 나왔다. 서둘러 밖으로 나온 뒤에야 조금 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리고는 당황했다. ‘시상식에서 보자고?’ 그냥 인사말이었을 수도 있지만, 능구렁이 같은 노고수가 괜히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진 않았다.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털어낸 나는 스마트폰에 쌓여 있는 단톡방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Rabbit : 배고파 뒤지겠네. 언제 나옴?] [Rabbit : 왜 안 옴?] [Rabbit : x발 나 집에 간다? 간다고? 어?] [Rabbit : 그냥 내가 먼저 가서 떡볶이 시킬 테니까 튀어오도록] [Rabbit : 야! 떡볶이 시켜놨으니까 빨리 오라고!] [Rabbit : 아 쪽팔려. 너 안 와서 나 혼자 즉떡 3인분 먹는 사람 됨.] 김복자가 토핑이 산더미처럼 올라간 즉석떡볶이 사진과 함께, 토끼가 위협하는 이모티콘을 잔뜩 보내놓았다. [Kimoo : 금방 간다. 내꺼 남겨놔.] 나는 메시지를 남긴 후 즉석떡볶이 가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15화. 이거 만든 놈 누구냐? “아, 한 잔만 더 하고 간다니까아아.” 고주망태가 된 김복자가 내 어깨에 축 늘어져서 아저씨처럼 주정을 부렸다. 나는 짐덩이가 된 녀석을 어깨에 둘러메고 복자의 작업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진짜 상상도 못 했다. 떡볶이집에서 소맥을 그렇게 말아먹고 있을 줄이야.” “아, 네가 늦게 왔잖아! 다들 쳐다보니까 쪽팔려서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네 앞에 쌓여 있는 술병 때문에 쳐다본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냐?” “누가 너더러 마시래? 민짜는 꺼지렴! 누나 혼자서 더 마시고 갈 테니까!” “나머지는 집에 가서 쳐드세요.” 김복자가 고양이처럼 하악질을 하며 내 등을 할퀴었지만, 아무런 타격도 없어서 그냥 무시했다. 그때 갑자기 등골이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물어!” 김복자의 머리 위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던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내게 덤벼들어 팔뚝을 물었다. 캬아아아- 그 정체는 바로 김현승에게 씌었던 악령이었다. 김현승이 부적을 토해내면서 떨어져 나온 순간, 복자가 슬쩍 사역해 버린 것이다. 다들 의식을 잃은 김현승만을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는 틈에 벌어진 일이었다. ‘역시 할 줄 알았네. 하여간 얘도 정신 나간 재능이라니까.’ 만약 그 자리에 무당이나 술법사가 있었다면 들켰을 수도 있지만, 무림인들은 귀신의 존재를 느끼기는 해도 눈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런데 나는 왜 선명하게 보이는 거지?’ 지금 내 눈에는 부정형의 시커먼 악령이 선명하게 보였다. ……딱히 내공을 끌어올리거나 기감을 확장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과거로 회귀한 것과 관련이 있나 혼자 추측해 볼 따름이었다. “가려우니까 꺼져.” 악령이 물고 있는 팔뚝의 반대 손으로 벌레 쫓듯 쳐내자 악령이 깨갱 하며 떨어져 나갔다. ‘이게 되네?’ 그러자 복자가 자기의 첫 사역괴(使役怪)가 너무 약하다며 투덜거렸다. “아이씨. 얜 왜 이렇게 X밥이야?” “넌 괴이를 사역할 줄 알면서 지금까지 안 하고 뭐 했냐?” 내 질문에 복자가 조금 소심해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사역하려면 찾아서 제압부터 해야 되잖아? 나한테는 그게 더 빡세다고.” 들어보니 할 줄은 아는데 지금까지 괴이와 마주하기가 무서워서 못 했던 모양이었다. 이 자식 진짜 쫄보였네? 나는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어 강력한 괴이가 나타났던 장소와 시간대를 대략 떠올리며 말했다. “나중에 나랑 같이 몇 마리 잡으러 가자.” 복자가 얼마나 강력한 괴이까지 사역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강한 놈 주변에는 어중간한 놈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중 하나라도 잡아서 사역할 수 있다면 앞으로 어디 가서 쥐어터지고 다닐 일은 없겠지. “진짜? 진짜지이? 흐히히! 이 귀여운 자식! 일루 와봐!” “내 볼 자꾸 잡아당기지 마라. 죽여버린다.” “아하하? 왜? 누나가 귀여워해주는 게 부끄럽냐?” 그렇게 김복자와 옥신각신하는 동안 가게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몇몇이 우리를 힐끔거렸지만, 미리 마스크에 후드까지 써서 나를 알아보는 자들은 없었다. “야. 니네 가게 다 왔다.” 복자를 작업실에 대충 구겨 넣은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파에 널브러진 복자가 하품을 하며 재킷 주머니를 뒤졌다. “아까 택시비 얼마 나왔어? 누나가 줄게.” “됐으니까 문이나 제대로 잠가. 아, 그리고 이것 좀 빌려 간다?” “고글? 흐아암. 마음대로 해.” 밖으로 나온 나는 안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듣고 돌아섰다. “떡볶이 잘 먹었어! 다음에 또 놀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쓸데없이 명랑한 김복자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취했네, 취했어.” * * * 다음 날 오전. 나는 전날 복자의 작업실에서 챙겨 온 고글과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검은 트레이닝복을 챙겨 입은 뒤 남대문시장을 다시 찾았다. 허리춤에 검을 차고, 등에 멘 백팩에도 혹시 몰라서 연장을 몇 개 챙겼다. 오늘 볼일이 있는 장소는 뒷세계 인간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암루이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십셔……. 고글살인마?” 날 알아본 점소이가 흠칫하며 중얼거렸다. “어떤 새끼가 그따위 별명을 붙였어?” “죄송함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는 점소이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암루 내부는 한산했다. 내가 일부러 손님이 별로 없는 시간을 노려서 왔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암루의 주인 황숙수가 반가움과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얼굴로 나타났다. “어이쿠! 이게 누구야? 뒷세계에 한창 떠오르는 청랑의 행동대장 고글살인마잖아?” “……그 별명, 당신이 지었어?” “하하하! 내기비무 중독자의 몇 안 되는 취미이자 특권이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청랑이 대체 왜 뒷세계에 떠오르는 조직이 된 거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편이 일을 처리하기가 수월할 것 같아 굳이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쩐 일로?” 암루를 다시 찾아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황숙수에게 첫 번째 용무를 말했다. “이 가게 동파육이 자꾸 생각나더라고. 내가 먹어본 동파육 중에 최고였거든.” 자신의 요리를 칭찬하는 말에 황숙수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하하하! 자, 이쪽에 앉으라고. 금방 만들어서 갖다줄 테니까!” 나는 바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잠시 앉아서 기다리자 점소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동파육을 가져왔고, 정신없이 먹다 보니 어느새 황숙수가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흐뭇하게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어떤가? 지난번이랑 비교하면?” “더 부드러워졌어. 그냥 오래 삶아서가 아니라 고기가 바뀐 것 같은데?” “하하하! 맛있는 음식을 해주는 보람이 있는 친구라니까. 특별히 좋은 고기를 썼거든.” “근데 난 전에 먹었던 게 더 좋아.” “……음?” 낭인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나는 암루에서 파는 동파육을 꽤나 좋아해 자주 와서 먹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낭인에게 위로가 되는 맛이었달까. 몇 년 뒤 황숙수가 갑자기 죽어버려서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된 음식이었는데, 지난번에 와서 다시 맛보고 꽤 감격했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동파육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안에 넣고 말했다. “뭐, 이것도 맛있긴 하지만.” “……희한한 친구라니까. 뭐 동파육 얘기는 이쯤 하고.” 눈을 가늘게 뜬 황숙수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동파육만 먹으려 온 건 아니지?” “눈치 하나는 귀신이네.” “뒷세계 브로커 생활 10년이면 손님 젓가락질만 봐도 알지. 지난번처럼 비무도박을 하고 싶어서 찾아왔나? 아니면 의뢰?” 황숙수에겐 아쉽게도 둘 다 아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거 만드는 놈들이 누군지 알아?” 바로 전날 김현승이 토해낸 괴황지의 일부였다. 황숙수는 魔라는 한자의 일부가 흐릿하게 남아 있는 종이를 가져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흐음…….” 괴황지를 잠시 살펴본 그가 금세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음방에서 만든 부적이구만.” 귀음방? 내 기억에는 없는 이름이었다. 즉, 별거 아닌 놈들이라는 이야기였다. “질이 나쁜 종자들이지. 주로 귀신 들린 부적을 취급하고, 어린애들한테 일부러 악령을 씌운 다음에 용한 무당을 소개해 주겠다면서 부모를 등쳐먹기도 한다던데.” 거리낌 없이 족쳐도 되는 해충들이라는 말로 이해했다. 황숙수는 전문 정보상은 아니지만,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어지간한 정보상보다 믿을 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배 나온 중년 아저씨처럼 보이지만 한때는 잘나가던 프리랜서 낭인이었으니까.’ 여기저기 원한을 뿌리고 다녔을 낭인이 사지 멀쩡하게 은퇴해서 장사를 하는 것만 봐도, 황숙수의 수완과 실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근데 왜 귀음방에서 만든 부적을 가지고 왔나? 그것도 찢어져서 쓰지도 못하게 된 걸 말이야.” “……지인이 그 물건 덕에 신세를 졌거든.” “어이쿠! 하필이면 자네 지인을? 그놈들, 상대를 잘못 건드렸네.” 입을 벌리며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눈은 흥미롭게 반짝였다. 마치 앞으로 내가 벌일 일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그에게 말했다. “놈들 본거지 위치 좀 알려줘. 그리고 오늘 나눈 대화는 없었던 것으로 해줄 수 있나?” 지금까지 나눈 대화, 그리고 이후에 귀음방에서 벌어지게 될 일에 대해서도 함구해 달라는 의미였다. 물론 일이 벌어지면 어느 정도 소문은 나겠지만, 황숙수의 입에서 직접 퍼져나가는 것과는 다르니까. “하하하! 자네. 나한테 그 정도 의리까지 바라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다음에 내가 개최하는 비무대회라도 출전해 준다면 또 모르겠지만…….” 느물거리며 내게 딜을 거는 황숙수에게, 나는 다른 대가를 제안했다. “그건 안 되겠고, 대신에 내가 알고 있는 좋은 정보 하나 알려주지. 이건 돈 주고도 못 사는 거야.” 황숙수는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어디 한번 들어는 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의 손에서 괴황지를 회수해 주머니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 “알레르기 조심해. 심하면 그걸로 죽는 경우도 있다며?” “…….” 순간 황숙수의 표정이 묘해졌다. 몇 년 후 길거리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황숙수의 사인은 알레르기 과다반응이었다. 십 년 넘게 낭인으로 활동하고 멀쩡하게 은퇴할 만큼 조심성 많은 인간이, 고작 알레르기로 죽었다? 그를 잘 아는 주변 사람이 연관된 살인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눈치가 빠른 인간이니 알아듣겠지. 자기 주변에 배신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걸.’ 황숙수가 표정을 어색하게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하하……. 그게 무슨 뜻이야? 자세히 좀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차라리 내 밑천을 다 털라고 하지?”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어?” 정색하는 황숙수에게 입 모양만으로 하나의 단어를 말했다. ‘딸기.’ 지금 시점에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그의 딸기 알레르기를 내가 언급하자, 황숙수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당신이 만든 동파육을 좋아하는 놈. 이쯤 알려줬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할 수 있지?” “……주소는 적어주지.” 귀음방 본거지의 주소를 받아 든 나는 심각한 표정이 된 황숙수를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또 먹으러 올게. 그땐 옛날 맛으로 부탁해.”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다음에 암루에 왔을 때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 * * 나는 곧바로 귀음방을 찾아갔다.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여러 차례 지나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폐건물 앞에 도착했다. 창문은 전부 막혀 있고, 정문은 잔뜩 녹이 슬어 잠겨 있었다. “딱 봐도 귀신들이 좋아하게 생겼네.” 나는 검자루에 손을 얹고 단전에서 천천히 기를 끌어올렸다. ‘할 수 있을까?’ 본격적인 내공심법에는 아직 입문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를 다룰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모든 인간의 몸에는 많든 적든 기가 흐른다. 지난 생에 무림인 부적합 체질이었던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를 응축해서 단전을 형성할 수 없는 것뿐이지, 혈도가 막혔다거나 하는 절맥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인공단전을 20년이나 달고 살았던 몸. 나는 얼마 안 되는 기를 다루는 데 익숙했다. ‘될 것 같은데.’ 내공심법이란 몸 안에서 기가 순환하는 방식을 문파 혹은 개인의 지식과 경험을 통해 체계화한 것. 그 효율은 막무가내로 기를 끌어다 쓰는 것보다 몇 배에서 몇십 배까지도 차이가 나지만, 결국은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비효율적이더라도 기를 끌어온다면, 거기에 한 생애를 다해 갈고닦은 기교를 더한다면. “……벤다.” 까아아앙! 아직 철문까지는 단번에 베지 못해도, 녹슨 경첩 정도는 충분히 끊어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검을 집어넣고 경첩이 잘려 나간 문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겨 힘으로 뜯어냈다. 거칠게 뜯겨 나온 철문이 쿠웅!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리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자, 안에 모여 있던 무리가 경악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습격이다-!” 나는 그들 앞에서 괴황지 조각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흔들며 물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할게. 이거 만든 놈 누구냐?” 16화. 선수끼리 알면서 귀음방의 본거지인 폐건물 내부는 제법 넓었다. 스무 명 정도 되는 인원이 갑자기 쳐들어온 나를 경계하며 무기를 뽑아 드는 동안, 나는 빠르게 내부를 훑었다. ‘귀음방도는 여덟. 나머지는…….’ 경험상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하고 비쩍 마른 놈들이 귀음방 소속일 것이고, 나머지는 신체를 좀 단련한 깡패들로 무력이 필요할 때 내세우는 놈들일 터였다. “어디서 온 새끼냐!” “저 새끼 혼자 같은데요?” “일단 족쳐서 무릎 꿇려!” 깡패들이 앞으로 나서면서 위협적으로 무기를 들어 올렸다. 험상궂은 면상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살짝 혀를 찼다. “하여간 좋게 말로 하면 듣질 않는다니까.” 나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괴황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은 후, 가장 가까이 다가온 놈의 빠루를 금나수로 빼앗았다. “헉……!” 눈뜨고 무기를 빼앗긴 놈이 허둥지둥 손을 뻗었지만, 나는 이미 놈의 옆구리에 빠루를 휘두르고 있었다. 빠악! 가장 먼저 덤벼든 놈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자, 대장으로 보이는 깡패 놈이 뒤에서 소리쳤다. “사지를 끊어서 데려와!” 열 명이 넘는 깡패들이 온갖 쇠붙이를 휘두르며 내게 덤벼들었다. 나는 앞에서 덤벼드는 한 놈의 명치를 빠루의 뭉툭한 부분으로 찍었다. 그리고 쓰러지려는 놈의 멱살을 잡아서 방패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시간 끌어서 좋을 것 없지.’ 동료를 방패 삼아 밀고 들어오자 당황한 깡패들의 얼굴이 보였다. 기절한 놈을 그들에게 던져주자마자 몸을 숙이고 그 밑으로 빠져나가며 두 놈의 무릎뼈를 부쉈다. 빠악! 빠악! 우당탕 뒤엉켜 넘어지는 놈들을 뒤로하고 일어서자 시퍼런 회칼이 내 목을 노렸다. 고개를 옆으로 젖혀 피하자 눈에 띄게 아쉬워하는 얼굴이 보였다. ‘이 새끼가?’ 내가 무슨 살인귀도 아니고 덤벼드는 깡패들을 전부 다 죽일 생각은 아니었지만, 날 담그려고 한 놈까지 봐줄 생각은 없었다. 푸욱! “컥…!” 빠루의 뾰족한 부분으로 배에 구멍을 뚫어주자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회칼을 주워들었다. “고, 고수다!” 다섯이 아무것도 못 하고 쓰러지자 깡패들도 더 이상 내게 덤비지 못하고 눈치를 봤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대장 깡패에게 걸어가서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계속할까? 아니면 방주 불러올래?” “…….” 귀음방은 내가 전생에 20년간 칼밥을 먹으면서 들어보지 못한 조직이었다. 즉, 얼마 못 가 사라졌거나 밑바닥에서 근근이 먹고사는 놈들이라는 의미. 지금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다는 계산이 섰기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필요 이상의 은원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우, 우리는 그냥 계약된 입장이라…….” 대장 깡패가 항복의 의미로 칼을 아래로 내린 순간, 나는 급히 몸을 옆으로 틀었다. 탕! 타앙-! 두 발의 총성과 함께 깡패 대장의 몸이 풀썩 뒤로 쓰러졌다. 겁먹은 표정으로 이마에 총알구멍이 뚫린 채. 나는 그 시체를 일별하곤 총성이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야 그렇다 치고, 이쪽은 같은 식구 아니었나?” “식구는 무슨. 집 지키는 개가 꼬리를 내리면 죽어야지.” 봉두난발의 중늙은이가 한 손에 권총을 들고 나를 겨누고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저자가 귀음방주겠군.’ 귀음방주는 총을 들지 않은 왼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그 끝에 달린 방울에서 불길한 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딸랑딸랑딸랑…… “돈값도 못 하는 싸구려 낭인 새끼들 같으니! 제대로 일하지 못해?” 방울 소리와 함께 들리는 귀음방주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내게 당해서 쓰러져 있던 다섯 놈, 그리고 어정쩡하게 눈치를 보며 서 있던 깡패들의 눈깔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딸랑딸랑딸랑…… 비틀거리며 다시 내게 무기를 겨누는 놈들의 눈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흰자위만 드러낸 채로 맹견처럼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으으으…….” “끄르륵…….” 실혼인(失魂人). 평소에 약물을 먹여두거나 주문으로 조금씩 세뇌를 해두면, 심지(心志)가 약한 자들은 쉽게 의지를 잃고 술법에 조종당하게 된다. 뒷세계 사파들의 수법 중에서도 꽤 악질적인 짓거리. 나는 나를 포위하는 놈들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낭인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놈들이라지만…….” 내 기준에는 제대로 단련조차 하지 않은 깡패, 양아치들에 불과하지만, 사실 프리랜서 낭인들이 받는 대접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뒷세계에서 낭인들은 대부분 하류잡배 취급을 당했으니까. “간덩이가 부은 침입자 놈아. 어디 계속 지껄여 보겠느냐?” 귀음방주의 오만한 태도에 과거의 몇몇 불쾌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상대에 대한 경계심은 더욱 강해졌다. ‘귀음방주. 생각했던 것보다 강해 보이는군.’ 방주가 등장하자 오합지졸인 줄 알았던 귀음방도들도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거나 부적을 들고 일제히 던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아- 끼아아아악- 그들의 머리 위로 검은 악령들이 나타나 주위를 배회했다. 스물 가까이 되는 악령들로 인해 폐건물에 한겨울 같은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만만치 않겠는데.’ 실혼인 열에 악령만 스물. 권총을 든 귀음방주와 술법으로 귀신을 부리는 여덟의 문도들까지.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지면 몸 성히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딱히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투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대화를 거부한 건 그쪽이었는데? 나는 처음부터 가능한 평화롭게 해결할 생각이었다고.” 내 느긋한 반응에 귀음방주는 여전히 내게 총을 겨눈 채 실실 웃음을 흘렸다. “느닷없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대화라고? 너 혼자서 귀음방 전체를 상대할 자신이라도 있다는 거냐?” “왜 혼자 왔다고 생각하지?” “…….” 뒷세계의 밑바닥 인생일수록 사소한 판단 하나만 잘못해도 죽는다. 때문에 언제나 생존본능을 극도로 발달시켜야 하고, 상대의 말과 행동에서 참과 거짓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니까 전생의 나도 거짓말과 허세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눈동자 돌아가는 거 봐라.’ 귀음방주는 내 말에서 진위 여부를 가리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밑바닥에서 살아남아본 나를 상대로 가능할 리가 없었다. 고작해야 여유로운 척 코웃음을 치면서 내게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 전부였다. “너, 소속이 어디냐?” “청랑.” 생각이 복잡해지게 만들 생각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의외로 귀음방주의 표정이 즉각 변했다. “……들어본 이름이군. 혈호방에게 선전포고를 했다는 놈들이 너희냐?” 암루에서도 그러더니, 대체 소문이 얼마나 부풀려진 거야? 뒷세계가 원래 가짜 소문과 과장된 정보가 판치는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나친 감이 있었다. 설마 내가 콩쿨 준비하는 동안 김복자가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트렸나? 그러한 의문들을 집어넣은 채, 나는 킥킥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소문이 좀 과장됐는데? 오호라는 놈이 합병을 제안하길래 한 번만 더 지랄하면 죽여버린다고 한 게 전부야.” “…….” 자, 이쪽은 너희가 감당하기 힘든 거물이다. 그러니까 얌전히 협상에 임하는게 좋을걸? 잠시 나를 노려보며 말이 없던 귀음방주가 천천히 권총을 내렸다. “나를 찾아온 목적이 뭐냐?” 나는 품 안에 넣었던 괴황지 조각을 다시 꺼내서 콩알처럼 뭉쳐 귀음방주에게 던졌다. “일단 그거 만든 놈부터 불러와.” “…….” 귀음방주가 괴황지를 살펴보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귀음방도들의 눈동자가 전부 방주를 힐끔거리는 것을 봤다. “방주께서 직접 만드셨나 보군.” “……이건 왜?” “내 지인이 그 부적에 신세를 졌거든.” “…….” 순간 귀음방주가 잔뜩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권총의 총구가 다시금 나를 향해 올라오려고 했다. 나는 손을 뻗어서 그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이봐, 진정해. 우리도 일이 귀찮아지는 건 싫다고. 너희들도 어차피 하청받은 거잖아?” 내 말이 정답이었는지 귀음방주가 움찔하면서 동시에 안도하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대로군.’ 김현승은 촉망받는 한국무림의 후기지수 중 한 명이었다. 귀음방 따위가 미치지 않고서야 직접 건드릴 생각을 할 리 없으니, 분명 중간에 개입한 조직 혹은 제3자가 있을 터였다. 나는 그쪽이 천마신교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다. “누구한테 의뢰받았는지 말해라. 그럼 너희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 내가 은은히 살기를 담아 경고하듯 말하자 자존심이 상하는지 귀음방주의 눈썹이 꿈틀댔다. “시건방진 놈이……!” 그리고 귀음방주의 감정에 반응한 악령 하나가 나를 위협하듯 가까이 다가온 순간. 꺄아아악! 나는 벼락처럼 검을 뽑아 악령을 둘로 베어버렸다. 악령이 비명을 지르며 연기처럼 흩어지자 귀음방주와 방도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떻게……!” 전생에 나는 술법사나 무당의 도움이 있어야만 귀신을 퇴치할 수 있었다. 예민한 기감으로 귀신을 피하거나 견제할 수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정확하게 보고 베는 것은 불가능했다. 술법사나 무당이 귀신을 보이도록 실체화시키고, 검에 술법을 걸어줘야 가능했던 일. ‘하지만 이제는 달라.’ 전날 밤, 복자가 사역해 부리던 악령을 상대로 확인한 사실이었다. ‘나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괴이를 벨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귀음방과 정면충돌할 생각은 없었다. 별 이득도 없는 싸움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더 이런 무력시위가 필요했다. 나는 검을 들어 귀음방주를 겨누며 도발했다. “끝장을 보고 싶다면 그래도 되고.” “너 같은 고수가 왜…….” 귀음방주가 질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방도들도 최소 절정고수라느니 그 이상이라느니 하면서 웅성거렸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것 같은데.’ 굳이 저들의 착각을 바로잡아줄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았다. 내가 말없이 빤히 노려보자, 결국 귀음방주가 내 시선을 피하며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뢰주는 대천문이다.” “대천문? 잠깐만. 무림맹에 소속된 그 대천문?” 이번에는 내가 깜짝 놀랐다. 대답으로 바로 천마신교가 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휘하에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사파의 방파 중 하나가 언급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설마 정파의 중견문파 이름이 나올 줄이야. -혹시 진로는 생각해둔 바가 있나? 콩쿨장에서 김현승을 구한 나를 칭찬하며 진로에 대해 묻던 구자승이 대천문의 장로였는데…… 나는 목소리에 짙은 살기를 담아 말했다. “거짓말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정말이다. 놈들도 정체를 숨기려 했지만, 우리가 몰래 그 뒤를 캐서 알아낸 거니까 확실해.” 확인은 해봐야 하겠지만, 갑자기 몇 년은 늙은 것 같은 귀음방주의 얼굴을 보니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대천문이라……. 조사해 보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는데.’ 충격적인 대답이었지만 어쨌든 원하는 답을 얻었기에 나는 검을 집어넣었다. 휴우…… 내가 검을 치우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들려왔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조금 더 들어본 후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대천문이란 증거는 가지고 있겠지?” “증거는…….” 그 순간, 귀신의 울음과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도와주세요……. 기감을 확장하고 오감을 잔뜩 곤두세운 상황이 아니었다면 듣지 못했을 만큼 희미한 흐느낌이었다.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앳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이 건물의 지하였다. 청각에 더욱 집중하자 목소리가 하나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세 사람이었고, 하나같이 앳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새끼들이.” 밑바닥 인생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전생에 나는 협객은 아니었어도 그 선을 지키고자 노력하며 살았다. 그 선을 넘는 놈들은 이득이나 손해와 상관없이 죽였다. 그건 이번 생에도 달라지지 않을 내 신념이었다. -질이 나쁜 종자들이지. 주로 귀신 들린 부적을 취급하고, 어린애들한테 일부러 악령을 씌운 다음에 용한 무당을 소개해 주겠다면서 부모를 등쳐먹기도 한다던데. 황숙수가 귀음방에 대해 해준 말이 떠오르자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시야에 방해가 되는 고글을 벗고, 답답한 복면도 벗어버렸다. “갑자기 왜 얼굴을…….” “선수끼리 알면서 뭘 물어?” 낯빛이 창백해지는 귀음방주에게 씨익 웃어주었다. 내 얼굴을 보여줬다는 건, 여기 있는 놈들 중 단 한 놈도 살려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17화. 심신이 모두 사방에서 부적이 날아오고 폭주한 악령들이 정신을 갉아먹는 귀곡성을 쏟아내며 덤벼든다. 꺄아아아아아악-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실혼인들이 목숨을 도외시하며 달려들었고, 그 뒤에서 귀음방주가 총을 겨누며 방도들에게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죽엿-!” 난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 수십에 달하는 살기가 나 하나를 죽이고자 모여들고 있었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처음 귀음방을 찾아오면서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혼자 상대하기엔 버거운 전력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는 내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분노로 뜨거워지기 시작한 심장과는 별개였다. ‘내가 언제부터 안전한 싸움만 했다고.’ 암기처럼 날아오는 부적을 피하고, 회칼을 들고 덤벼드는 실혼인의 검을 위로 쳐올렸다. 쩌엉! 곧장 드러난 빈틈으로 일직선의 검로를 그렸다. 하나가 목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사이 다른 둘이 지척까지 와 있었다. 각각 도끼와 망치가 내 몸을 찍고 부수기 위해 순식간에 다가왔다. ‘왼쪽 먼저.’ 본능적인 판단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도끼날이 등줄기를 스쳤지만, 쓰라림을 느낄 새도 없이 그대로 망치 든 놈의 목을 날려버렸다. 푸화악! 핏물이 허공에 분수처럼 치솟았다. 곧바로 몸을 틀어 도끼질에 실패해 휘청거리는 나무꾼의 옆구리에 칼을 쑤셔 넣었다가 빼자, 그새 또 불어난 적들이 쇠붙이를 들이댔다. ‘왼쪽. 뒤쪽 아래. 오른쪽. 다시 뒤.’ 쩌저저정! 등줄기의 짜릿한 통증이 그간 평온했던 일상으로 둔해졌던 감각을 일깨우고 확장시켰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양감. 시야가 넓게 트이고 적들의 피 냄새가 선명해졌다. 그 사이로 쇠 냄새를 분간할 수 있었고, 적을 벨 때 느껴지는 촉감은 소름이 끼칠 만큼 예민했다. ‘보인다.’ 내게 다가오는 쇠붙이들의 움직이는 궤적이 점과 선으로 보였다. 어떻게 하면 그 사이로 드나들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타앙! 탕탕탕! 총알도 그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귀음방주가 총을 쏠 때마다 실혼인의 몸에만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놈이 방울 달린 지팡이를 맹렬히 흔들자 휘청이던 놈들이 다시 일어나 덤벼들었다. 목을 날리거나 심장에 구멍을 뚫지 않는 한, 실혼인은 웬만해서는 쓰러지지 않는다. ‘그럼 쓰러질 때까지 베면 돼.’ 돌이켜보면 나는 싸움에서 위험을 감수할 때마다 더 강해졌다. 칩 대신 목숨을 걸었던 베팅은 항상 결과가 만족스러웠다. “너희들도 나서!” 실혼인들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뒤에서 부적만 던져대던 귀음방도들이 뾰족한 협봉검을 들고 짓쳐 들었다. 창백한 안색에 비쩍 마른 놈들이라 술법만 익힌 줄 알았더니, 오히려 이쪽이 제대로 훈련된 살수들 같았다. ‘내공을 끌어올려 볼까.’ 단전에서 미약한 내공을 일으켰다. 전신 세맥으로 기운이 퍼지며 신체 능력이 한층 더 강화됐다. 쿵! 진각을 밟아 바닥을 흔들자 나를 찔러오던 협봉검의 궤적이 흔들렸다. 한 끗 차이로 피하며 적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촤아아악! 일검에 셋의 목을 베자 귀음방도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나 역시 못지않게 놀란 상태였다. ‘이게 맞아?’ 별다른 내공심법을 익히지 않았는데도 기의 순환이 인공단전을 사용할 때보다 배는 빠르고 강렬했다. 처음으로 전력을 다해 기를 끌어다 써 본 감상은…… 감격보다 황당함이었다. ‘본격적으로 내공심법을 익히면 얼마나 더 강해지는 거야?’ 제대로 된 단전을 가진 놈들은 대체 얼마나 꿀을 빨아왔단 말인가! “하하하……!” 내가 갑자기 미친놈처럼 웃음을 터트리자 귀음방도들이 희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그 뒤에서 귀음문주가 권총과 방울 달린 지팡이를 위협적으로 흔들며 고래고래 악을 써댔다. “뭣들 하느냐! 여기서 못 죽이면 어차피 다 죽어!” 하지만 총성이 울릴 때마다 쓰러지는 것은 실혼인과 귀음방도들이었다. 물론 나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공격에 피부가 긁히고, 부적이 몸에 들러붙었다. 캬아아아아-! 악령들은 자꾸만 시야를 가리고 내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그럴 때마다 입술을 깨물어 피를 삼켰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조금만 더.’ 회귀 후 처음으로 목숨이 걸린 실전을 겪으면서 내 육체의 한계를 거듭 깨부수고 있었다.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 한껏 고양된 정신이 새로운 영역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어느 순간 더 이상 벨 것이 없었다. 끼아아아아악- 귀음방주가 부리는 마지막 악령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 흩어졌을 때, 땅에 서 있는 존재는 나뿐이었다. “퉤.”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고, 몸에 들러붙은 부적들을 손으로 거칠게 뜯어냈다. 저주와 살(煞) 따위가 깃든 부적이지만, 단련된 무인에게는 몸을 조금 둔하게 만드는 효과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더 없어? 조금만 더 하면 뭔가 잡힐 것 같은데…….” 짙은 아쉬움을 담아서 돌아보자, 유일하게 살아 있는 귀음방주가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나고 있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목숨만…….” 봉두난발의 머리는 완전히 백발로 변해 있었다. 무리해서 귀신을 부리고 술법을 사용한 부작용이었다. “살려주시면 증거를 드리겠습니다! 저와 접촉한 인물이 대천문이란 증거! 그걸 드릴 테니 제발…….”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부들부들 떠는 귀음방주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다. 푸욱. “됐어. 그 정도로 급한 건 아니라서. 누군지 알았으니 충분해.” “이……!” 귀음방주가 나를 저주하려다 입에서 피를 게워내며 고꾸라졌다. 나는 가방에 귀음방주의 방울 달린 지팡이와 그의 품을 뒤져서 나온 스마트폰, 그리고 부적 몇 개를 챙겨 넣었다. 지팡이와 부적은 나중에 복자의 작업실에 들러서 갖다줄 생각이었다. “지하실은 저쪽인가.” 박멸한 해충들을 한 번 둘러본 후, 다시 고글과 복면을 쓰고 지하실로 향했다. * * * 차가운 지하실 안. 열 살 안팎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팔다리가 케이블타이로 묶인 채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도와주세요…….” “배고파요…….” “엄마…….” 간신히 목소리만 내고 있는 아이들은 모두 세 명이었다.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했는지 지저분한 옷차림에, 야윈 뺨에는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지하실로 내려온 나는 아이들이 놀라지 않게 발로 살짝 바닥을 두드렸다. 쿵쿵. “누, 누구세요?” 겁먹은 아이들이 고개를 들어서 나를 바라봤다. 붉은 고글에 복면 쓴 괴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터라,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쉿. 데리러 왔으니 얌전히 협조해라.” “살려, 살려주세요!” “무서워…….” “엄마, 엄마아…….” 예상과 달리 겁에 질려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들의 모습에 잠시 당황했지만, 나는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그들을 설득했다. “계속 울면 못 데리고 나간다. 너희들 부모님이 보고 싶지 않나?” 그러자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뚝 그치는 기특한 꼬마들. “지, 진짜 구해주러 온 거예요?” “그래. 한 명씩 이름과 나이를 말해봐라.” “기, 김수아……. 열 살이요.” “박지훈이요. 열한 살!” “최진우, 아홉 살……” 다행히도 귀음방 놈들이 애들에게 약을 먹이거나 악령을 씌운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손발을 묶은 케이블타이를 끊어내고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제대로 먹고 쉬지 못한 탓에 야위어 있었지만, 당장 치료가 필요할 만큼 다친 아이는 없었다. “혼자서 걸을 수 있는 사람?” 아이들은 모두 차가운 곳에 갇혀 있었던 탓에 몸이 굳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어쩔 수 없군. 자, 이리 와라.” “꺅……!” “놔 줘! 놔줘요!” 결국 한 명은 내가 등에 업고, 둘은 양 옆구리에 끼워서 안아 들었다. 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가며 겁에 질린 아이들에게 경고했다. “잠깐만 눈 감고 있어라. 아저씨가 떠도 된다고 할 때까지.” “네…….” “살려주세요…….” “순순히 협조하면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주마.” 눈을 꼭 감은 아이들을 데리고 귀음방을 빠져나왔다. 시체를 밟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서. “이제 눈 떠도 된다.” “바, 밖이다!” “흐에엥…….” 거리로 나온 후에는 미리 챙겨온 귀음방주의 스마트폰으로 집에 전화를 걸게 했다. “엄마 아빠 전화번호 아는 사람?” “저 알아요!” 셋 중 하나만 손을 들었다. 나는 똑똑한 꼬마에게 스마트폰을 건네준 후, 시무룩해 있는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경찰에 전화하면 부모님한테 금방 데려다줄 거다.” “엄마! 엄마! 나 수아야! 나 여기…….” “잠깐만 아저씨 바꿔줘 봐.” 목소리를 변조해 지우의 어머니와 통화해 인근의 주소를 불러준 후, 경찰에도 전화를 걸었다. 표정이 한결 밝아진 아이들이 내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아까는 나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저희 팔아버리는 줄 알고…….” ……역시 고글과 복면 때문인가? 나는 경찰이 올 때까지 잠시 아이들 옆에서 기다려주면서 아이들과 노닥거렸다. 그렇다고 딱히 애들과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어서 그냥 뻔한 잔소리만 늘어놓았다. “너희들 앞으로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고, 누가 맛있는 거 줘도 함부로 먹지 말고, 또 뭐냐……. 늦기 전에 효도해라. 알았지?” “네!” 꼰대 같은 잔소리에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꼬마들이 기특했다. 몇 번씩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서 경찰차가 요란한 소리와 빛을 밝히며 달려오고 있었다. “난 이만 간다. 여기 얌전히 있다가 경찰 아저씨들 따라가면 된다.” 휘익! 나는 힘껏 뛰어서 가까운 건물의 벽을 타고 지붕까지 올라섰다. 경찰차가 오기 전에 몸을 숨길 계획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협객 아저씨!” “나중에 꼭 은혜 갚을게요!” “고맙습니다아!” 피식. “내 마음 편하자고 한 건데, 협객은 무슨.” 꼬마들은 이제 내가 보이지 않을 텐데도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밝아진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마음이 편해지고, 비로소 긴장이 탁 풀렸다. “끄응. 삭신이 다 쑤시네.” 나는 아이들이 잘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옥상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콩쿨 심사위원들에게 선물로 받은 금창약을 온몸에 덕지덕지 바르면서, 아이들이 경찰차에 타고 떠나는 모습을 바라봤다. “다들 조심해서 가라. 앞으로는 부모님 걱정시키지 말고…….” 그러다 문득 옆 건물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꼴이 가관이었다. 멀쩡한 부분을 찾기 힘들 만큼 찢어진 옷에 핏물이 흠뻑 배어 있었다. “……어쩌지?” 이 모습으로 집에 들어갔다간 아버지는 기절하고, 엄마는 경찰에 신고부터 하려고 할 게 뻔했다. 이젠 저 꼬마들이 아니라 내 걱정부터 해야 할 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며, 나는 벌러덩 드러누워 달만 덩그러니 뜬 도시의 밤하늘을 바라봤다. 그러고 가만히 있으려니 괜히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피곤하지만…… 이런 게 정파인의 삶이란 거겠지.” 비록 몸은 만신창이였지만 상처보다 얻은 게 훨씬 많은, 심신이 모두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18화. 한번 보고 싶긴 하네요 귀음방에서의 일이 있고 며칠 후. 나는 콩쿨 시상식에 참여하기 위해 무림맹 본단으로 가는 중이었다. “아니, 대뜸 아침에 시상식이 있다고 말하는 법이 어딨어? 옷도 제대로 못 챙겨입고 나왔잖아.” “상 받는 건 무혁인데, 왜 당신이 옷을 고민해?” “우리 아들이 무림맹에서 처음 받는 상인데, 기념사진 찍을 때 엄마 아빠도 잘 나와야 할 것 아냐!” “으이구, 호들갑 좀 떨지 마.” 벌써부터 잔뜩 호들갑을 떠는 아버지, 그리고 태연한 척하지만 잔뜩 긴장한 얼굴의 어머니와 함께 말이다. 나는 차 뒷좌석에 앉아서 일부러 시큰둥한 투로 말했다.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시상식에 초대만 받았지, 수상은 못 할 수도 있다니까요?” 사실 결과는 이미 전화로 들었지만, 두 분에게는 얼마 전에 참가한 콩쿨의 시상식에 초대받았다고만 얘기했다. “……그래? 그럼 견학만 하고 돌아올 수도 있는 거야?” “엄마 아침 일찍 급하게 미용실 다녀왔는데…….” “여보. 대체 누가 더 호들갑이야?” “시끄럽고 앞이나 잘 봐.” 급격히 텐션이 떨어지는 부모님의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나중에 터질 두 분의 도파민을 위해 꾹 참으며 덤덤한 목소리를 연기했다. “현실적으로 25세 이하 일반부 콩쿨에서 고등학생이 상을 받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냥 놀러 오라는 거지.” 콩쿨 홈페이지에도 수상자 후보들의 이름만 나열돼 있을 뿐, 누가 어떤 상을 받는지는 오늘 시상식에서나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아빠는 구경만 하고 와도 좋다.” 갑자기 아버지가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콧노래를 부르며 말했다. “몇 주 전만 해도 폐인처럼 방에 콕 박혀 있던 아들하고 이렇게 같이 나들이 나올 수 있는데, 그깟 상이 대수야?” “엄마도 마찬가지야. 상 못 타면 어때? 가서 무림맹 구경이나 실컷 하다가 맛있는 거 먹고 오자.” “…….” 혹여나 실망했을 아들을 위해 따뜻한 말로 미리 위로해주는 부모님의 배려에 괜히 또 울컥해지려는 찰나. “근데 아들아. 그때 고등부 콩쿨에서 사고 났다고 했던 거 말이다. 아버지가 찾아보니 생각보다 큰 사고였다며? 거기 네 이름도 한 번씩 언급되던데.” “아, 그게…….” 내가 미리 생각해둔 변명을 늘어놓기 전에, 엄마가 눈을 흘기며 남편을 타박했다. “당신 또 무림인 커뮤니티 했어? 거기 자꾸 들어가지 말라니까.” “흠흠. 어쩌다 한 번씩 들어가서 훑어만 보는 거야.” “거기 있는 글 읽어봤자 기분 나쁘기밖에 더해?” “안 그래도 어제 어떤 자식들이 자꾸 우리 무혁이 체질검사 망했을 거라고 해서……!” “설마 댓글로 애들이랑 싸우고 그러진 않았지?” “…….” “그러다 무혁이 가족인 거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절대 안 들켜. 완전 요즘 애들 말투로 싸웠다니까?” “혹시 이거 아버지 댓글 아니에요? 완전 꼰대 납셨다고 우르르 몰려와서 놀리던데.” “기무혁! 너, 이 배신자……!” “으이구 화상아!” 금실이 좋다 못해 매일 티격태격하는 두 분의 모습을 뒷자리에서 직관하다 보니, 어느새 무림맹 본단 앞에 도착했다. 서울 한복판에 들어선 종합경기장 규모의 부지와 그 한가운데 고개를 한참 들어야 끝이 보이는 마천루. 세계무림맹 지부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큰 한국무림맹 본단이었다. ‘여기가 무림맹…….’ 콩쿨 시상식에 참가한 경험은 여러 번 있었지만, 무림맹 본단에 와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고등부 이하 시상식은 대부분 당일 주관하는 장소에서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현승이 일으킨 사고로 그날 고등부 시상식이 취소되는 바람에, 오늘은 이례적으로 고등부 시상까지 무림맹 본단에서 한다고 전해 들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정문 입구에서 검문을 하는 무인들도 하나같이 눈빛이 형형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전송받은 출입증을 열어서 제출했다. “콩쿨 시상식에 참가하러 왔습니다. 여기 출입증이요.”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확인해드리겠습니다.” 내 출입증을 확인한 무인은 금세 고개를 끄덕이곤 나와 부모님을 통과시켜 주었다. “통과하십시오.” 정문을 통과해 무림맹 안으로 들어오자 잔뜩 긴장해 있던 부모님이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휴우, 괜히 떨리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긴장하고 그래요?” 시상식 일정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우리 가족은 무림맹 이곳저곳을 둘러볼 계획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넓은 무림맹 본단을 구경하고 시상식장으로 가는 복도에서,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기무혁!” 송월문의 일대제자 오정민이었다. 콩쿨장에서 봤던 부드러운 인상 그대로 걸어오는 그에게 나도 인사했다. “형도 오셨네요. 역시 수상하실 것 같았어요.” “하하! 누가 할 말을. 안 그래도 네가 언제쯤 오나 기다리고 있었어.” “……저를요?” “당연하지.” 고개를 끄덕인 오정민이 내 옆에 계신 부모님께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송월문 일대제자 오정민이라고 합니다. 기무혁 군과는 콩쿨에서 만나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후기지수를 키워내신 부모님이 어떤 분들인지 궁금했는데, 무혁 군의 근골이 부모님을 빼닮아서 이토록 뛰어난 거였군요.” 지난번에도 느꼈던 거지만, 오정민은 무림인이라기보다는 사회생활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직장인 같았다. 저렇게 상대방이 부담스럽지 않게 아부하는 법을 잘 아는 무림인은 보기 드무니 말이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송월문 일대제자시라고요?” “저희 아들을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송월문은 저희도 알 정도로 유명한 문파인데…….” 바로 입이 귀에 걸린 아버지와 엄마를 보니 덩달아 내 기분도 함께 좋아졌다. 그때 오정민과의 대화를 엄마에게 맡기고 슬쩍 뒤로 물러난 아버지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무혁아. 근데 일대제자면 엄청 콧대 높은 사람 아니냐? 우리 같은 일반인은 쳐다도 안 볼 줄 알았는데…….” 낭인 시절에 종종 그런 놈들을 보긴 했지만, 여긴 무림맹 한복판이고 오정민은 그렇게 거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성격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아버지가 하는 귓속말 정도는 다 들릴걸요?” “……흡!” 아버지가 놀라서 흠칫하자 오정민이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저희 송월문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에게 더 예의를 갖추라는 내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오만한 무림인은 적어도 송월문 내에는 없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는데, 자신의 문파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두 분께선 무혁 군의 진로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무래도 영업을 하러 온 모양인데.’ 지난번에도 내게 송월문으로 스카웃 제안을 하더니, 오늘도 같은 목적으로 날 기다린 듯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이 하나둘 이쪽을 돌아보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기무혁이라고?” “일반부 콩쿨에 참가했다던 어린 친구?” “지난번에 명함도 줬는데…….” 콩쿨장에서 마주쳤던 이십 대의 젊은 무인들뿐만이 아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 지긋한 무림인들도 슬금슬금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기무혁 군.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콩쿨에서 보여준 무대 인상 깊게 봤습니다. 검무곡에 대한 해석과 표현력이 남다르더군요.” “혹 마음에 둔 문파가 있는지…….” 그중에 일부는 콩쿨에서 본 얼굴이었고, 모르는 얼굴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꽤 유명한 인물들도 섞여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그때 다친 곳은 괜찮더냐?” 대천문의 최연소 장로 구자승. 규모가 상당히 큰 중견문파의 장로까지 등장하자 몰려든 사람들이 잠시 술렁였다. -……의뢰주는 대천문이다. 귀음방주가 한 말을 떠올리자 지난 번과는 사뭇 다른 것들이 보였다. 나는 구 장로에게 포권을 취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동시에 그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날 장로님이 주신 금창약 덕분에 금방 다 나았습니다.” 덕분에 부모님에게 콩쿨에 참가했다가 사고가 나서 다쳤다는 식으로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혹 수련이 막히거나 조언이 필요하면 부담 없이 대천문을 찾아오너라. 내 이름을 대면 될 것이다.” 구자승은 인자한 얼굴로 내게 그렇게 말한 후, 고개를 돌려 부모님에게도 덕담을 건넸다. “저도 결과는 아직 모르지만, 아드님이 콩쿨에서 보여준 실력이라면 오늘 수상을 기대해봐도 좋을 듯합니다.” “세상에, 감사합니다!” “저희 아들이 장로님에게 신세를…….” “아닙니다. 신세는 저희가 졌지요. 그럼 좋은 결과가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구자승은 짧게 할 말만 마치고 바로 떠났다. 나는 구자승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방금 전의 대화만으로는 상대의 속내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구자승의 얼굴에서 초조함을 숨기려는 듯한 어색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귀음방이 어떻게 됐는지 소식을 전해 들었다면…… 지금 나 같은 후기지수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겠지.’ 겉모습만 봐서는 올곧은 정파인의 표본 같은 인물이었지만, 귀음방주에게 대천문이란 이름을 들은 이상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구자승 장로가 떠난 후에도 인파는 줄어들지 않았다. 다들 나보다는 부모님 쪽을 먼저 공략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인지, 어느새 두 분을 둘러싼 인파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우리 무혁이가 절 닮아 어려서부터 인물도 훤칠하고 인기도 많긴 했는데…….” “진로에 대해서는 저희 아들의 의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어서요.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려운데…….” 그 타이밍에 나는 슬쩍 옆으로 빠져나와서, 어느새 한참 뒤로 밀려난 오정민과 대화를 나눴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무림맹은 원래 이래요?” “당연히 이 정도는 아니지. 다 누구 때문이겠냐?” “……저 때문이라고요?” 오정민은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명해 주었다. “모든 무림문파가 인재 영입에 사활을 걸고 있어. 고수의 숫자가 곧 문파의 힘이고 영향력이니까. 그래서 좀 속물적으로 말하면…… 넌 곧 시장에 나올 매물 중에서도 특급이거든.” 그 정도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체질검사 4급인데. 이렇게까지 공들여서 모셔갈 수준은 아니지 않아요?” “오히려 그래서 더 좋지.” “……?” “1급이나 2급, 3급 체질까지도 거의 다 대문파에만 지원하려고 하니까. 그 이하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말을 듣고 다시 인파를 둘러보니 대부분이 중견문파에 소속된 무림인들이었다. 팔대문파라 불리는 대문파 소속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자기들은 수준이 다르다는 건가.’ 대문파는 굳이 홍보하지 않아도 매년 입문하길 바라는 지원자들이 구름처럼 몰린다. 지원이 다르고, 복지가 다르고, 수입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체질검사에서 1~3급이 나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문파에 지원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나는 비로소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중견 문파에서 데려갈 수 있는 후보들 중 최상급 매물. 제 평가가 딱 그 정도라는 뜻이군요.” 이유를 알게 되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 내 반응에 오정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내 말이 기분 나빴어?” “전혀요. 그럴 이유도 없고.” 처음부터 대문파로 진로를 잡을 생각이었다면, 내 체질을 솔직하게 공개하거나 적어도 3급으로 속였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내 계획에 대문파 입문은 없었다. ‘대문파는 규율이 빡빡하고 제약이 너무 많아.’ 뛰어난 무공과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만큼이나, 뭘 하든 내 계획대로 움직이기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딱히 대문파의 관심은 필요 없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참 이상했다. 막상 관심을 받지 못하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한번 보고 싶긴 하네요.” “……뭘?”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대문파에서 저한테 제발 입문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모습이요.” “하하하하!” 오정민은 내 말이 정말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한참을 웃었다. 19화. 진로에 대해서는 인파가 몰려 소란스러움이 커지자 결국 무림맹 관계자가 와서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곧 시상식이 시작되니 정숙해 주시길 바랍니다! 수상 후보들은 지금 안으로 입장하시면 됩니다!” 중견문파 관계자들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자기네 문파에 꼭 한 번 들러 달라고, 그리고 언제든 연락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그럼 나중에 또 보자.” 오정민도 송월문 사람들과 함께 시상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번 기회에 그와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 짧은 시간에 중견문파에서 수십 장이 넘는 명함을 받아 온 부모님은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래…….” “이거 꿈 아니지? 현실 맞지?” 두 분은 콧대 높은 무림인들이 나를 영입하려고 경쟁하려던 모습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전부터 주목받는 후기지수였지만, 체질검사를 받기 전까지는 검증되지 않은 원석에 불과했다. 많은 십 대들이 체질검사 결과에서 좌절하고 꿈을 포기하거나, 부상 등의 이유로 진로를 바꿨다. 나 역시 콩쿨에서 보여준 강렬한 모습, 그리고 4급이라는 꽤 괜찮은 체질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걸 감안해도 이례적이긴 하지만.’ 지난 콩쿨 때부터 오늘까지, 무림맹에 소속된 중견문파의 명함은 대부분 수집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나는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서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놀라면 어떡해요? 기무혁 영입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인데. 최고 조건 아니면 쳐다보지 마세요.” “너! 너무 많이 욕심부리면 안 돼.” 엄마는 내가 벌써부터 헛바람이 들까 봐 경계하는 것 같았다. 반면 아버지는 헤벌쭉 벌어진 입과 표정이 도저히 관리가 안 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어느새 내 아들이 무림인들의 세계에 입성하다니. 이제 세계제일비무대회에 나가서 우승하는 것만 보면…….” “바라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내 황당한 표정에도 아버지는 혼자서 미래에 대한 계획과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쳐나갔다. “여보. 이제 무혁이도 다 컸으니까 우리 일 관두고 모아둔 돈으로 작은 카페나 차릴까? 당신 예전부터 그러고 싶어 했잖아.” “아직 십 년은 일러. 당장 모아둔 돈도 없는데 무슨 카페야?” “나랑 당신 퇴직금이면…….” 나도 그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카페, 나중에 제가 차려드릴게요.” 그러자 부모님이 동시에 미덥지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으이구, 됐으니까 네 앞가림이나 잘해.” “벌써부터 아들 덕 볼 생각 없다. 엄마 아빠 아직 팔팔하거든?” 단호하게 거절하면서도 내 말이 기특한지, 부모님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두고 보세요. 근사한 카페도 차려드리고, 세계제일비무대회 우승 트로피도 가져다드릴 테니까.’ 우리는 기분 좋게 웃으며 시상식장 안으로 들어왔고, 또 여러 사람들에게서 축하 인사와 부러움 섞인 시선을 받았다. 덕분에 내 어깨도 한껏 올라갔다. ‘이게 효도 아니면 뭐야?’ 시상식장은 강당으로 써도 될 정도로 넓었는데, 고등부와 일반부 수상 후보들, 그리고 그 가족들까지 손님으로 온 터라 꽤나 북적거렸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왼쪽, 중견문파 무림인들은 오른쪽, 단상 앞쪽은…… 팔대문파 무림인들 자리인가.’ 팔대문파(八大門派) 한국을 대표하는 여덟의 무림문파로, 대기업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자본과 힘을 지닌 조직들. 그 아래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속가문파까지 더하면, 팔대문파의 영향력이 한국 무림계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림맹이 허울만 남은 조직이 된 것도 팔대문파의 영향력이 너무 커진 탓이었지.’ 미래를 알고 있는 나는, 팔대문파의 권력이 점점 커지는 반면 무림맹은 지금의 무림맹주가 경질되는 등 여러 수모를 겪으며 약해진다는 씁쓸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림맹의 협객을 꿈꿨던 시절이 있었는데…….”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놓고 차별하지는 않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문파 소속과 팔대문파 소속 무림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것 같았다. 부모님과 함께 자리에 앉아서 팔대문파 쪽을 가만히 관찰할 때였다. “야! 미친놈!” 남의 눈치 따위 보지 않는다는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여서 설마 하는 생각으로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의 덩치가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신강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신강헌이 한껏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하하하! 너 진짜로 일반부에서 상을 탄 거야?” “방금 나한테 미친놈이라고 불렀냐?” “당연하지! 내가 살면서 너만큼 미친놈은 본 적이 없거든!”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신이 난 거야? 느닷없이 미친놈이라고 불렸지만 딱히 기분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남자들 사이에서 미친놈, 미친 새끼는 대체로 칭찬이니까. 물론 욕은 욕이기에 내 입에서도 썩 고운 반응이 나오지는 않았다. “이거 또라이 아냐?” “나 원래 그런 말 자주 들어. 너한테 비빌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호쾌하게 웃는 모습이 내가 미래에서 본 신강헌을 떠오르게 했다. 툭툭 시비를 거는 모습도 불쾌하다기보다는 황당하기만 했다. 훗날 한국제일도라 불리게 될 녀석이, 지금 나한테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었으니까. “나중에 나랑 한판 붙어보자. 어때?”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신강헌의 미소에서 들끓는 호승심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조만간 다시 만나볼 생각이었기에, 나는 신강헌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시간 정하게 번호 찍어.” “대박! 미친놈이라고 저장해야지.” 신강헌은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내가 보는 앞에서 나를 <미친놈>이라고 저장했다. 그리고 나는 휴대폰에 신강헌을 <또라이>라고 저장했을 때였다. “신강헌! 너 빨리 이리 안 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세상 무서워하는 것 없어 보였던 신강헌이 움찔했다. 저편에서 신강헌과 닮은 남자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복자가 말한 삼촌인가.’ -신강헌 걔…… 아무래도 삼촌한테 빨대 꽂힌 거 같던데. 썩 좋지 않은 이야기라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시상식에도 함께 온 모양이었다. “쳇. 한창 재밌어지려는데……. 야.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꼭 받아라.” 불만스럽게 투덜거린 신강현이 몸을 돌려 떠나고,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누구보고 미친놈이래? 나처럼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리고 시상식이 시작될 때까지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리려 했지만……. “무혁이 너! 누가 멋대로 그런 약속 잡으래!” “당장 내년에 라이센스 시험 앞두고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시상식이 시작될 때까지, 나는 눈에 쌍심지를 켠 부모님에게 혼나야 했다. * * * 고등부 콩쿨 시상식이 먼저 시작되었다. “고등부 금상은…… 축하합니다! 신강헌 학생입니다!” “우와아아아아!” 포효하며 단상 위로 올라간 신강헌은 자신의 관종 끼를 마음껏 뽐냈다. 특히 기쁜 마음에 심사위원을 덥석 껴안으려다 심사위원이 반사적으로 반격해 마혈을 짚는 바람에, 우스꽝스럽게 굳어버린 모습이 카메라에 수십 장은 찍혔다. “멍청하긴…….” 그 한심스러운 작태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등부 콩쿨의 은상은 피승화, 동상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참가자가 수상했다. 김현승은 참석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고등부 시상식이 끝나고도 수상자들은 대부분 떠나지 않고 자리에 남았다. ‘다들 나만 쳐다보고 있네.’ 기무혁이 무슨 상을 탈지 자기들끼리 내기라도 한 모양인지, 소곤거리는 목소리들 사이로 내 이름이 자주 들렸다. “그럼 잠시 후 일반부 시상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몇 가지 뻔하고 지루한 식순을 거친 후. 일반부 콩쿨 심사위원을 담당했던 무림맹 원로 노구천이 단상 위로 걸어 올라왔다. 좌중을 둘러보던 그의 눈과 내 눈이 잠시 마주친 듯했다. 빙긋. 무림맹 원로가 짓는 묘한 미소에, 나는 살짝 긴장했다. ‘내 검법을 보고 누구한테 배웠냐고 했었지.’ 그 순간이 마치 착각인 듯, 노구천의 시선은 나를 지나쳐 다시 여러 좌중을 향했다. “한국 무림의 미래인 젊은 후기지수들을 만나고, 이렇게 상을 줄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고 바로 발표를 시작하도록 하지요.” 잠시 말을 멈춘 노구천이 들고 온 상장을 펼쳐 수상자를 호명했다. “그럼 특별상부터 발표하겠습니다. 기무혁 참가자! 축하합니다.” 내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박수가 쏟아졌다. 내 특별상 수상을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은 우리 부모님뿐인 듯, 두 손을 모으고 긴장해 있던 두 분의 표정이 한순간에 환해졌다. “……제, 제 아들입니다! 하하하하!” 아버지는 싱글벙글이었고, 엄마는 손바닥에 모터라도 단 것처럼 열심히 박수를 쳤다. 단상 위로 올라간 나는 특별상과 트로피를 건네받고 간단한 수상 소감을 밝혔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알고 정진하겠습니다. 그리고 부모님, 사랑합니다.” 내가 짧게 수상 소감을 끝내고 들어오자 휴대폰으로 동영상 녹화를 막 시작한 아버지가 크게 아쉬워했다. “왜 그렇게 빨리 들어와? 적어도 3분은 말하고 와야지!” “빨리빨리 진행하라고요. 특별상이 시상식 메인도 아닌데.” “이 녀석아! 네가 탄 상이 메인이지!” “그러니까 빨리 진행해야죠.” “뭐라고?” 나는 대답 대신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고 동상과 은상의 시상을 연달아 지켜봤다. “……이어서 은상을 발표하겠습니다. 송월문의 오정민 참가자 축하합니다!” 그리고 은상을 받은 오정민의 수상 소감이 끝나갈 때쯤, 아버지에게 속삭였다. “아버지. 아까 챙겨온 청심환 남아 있으면 지금 하나 더 드세요.” “……왜?” 수상 소감 영상이 짧아서 시무룩해진 아버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아쉬워하는 어머니에게 이 말을 해드리고 싶었다. ‘특별상은 다른 상하고 공동수상이 가능하거든요.’ 하지만 나는 말을 아끼며 씩 웃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금상을 발표하겠습니다!” 아직 상을 받지 못한 수상 후보들과 그 가족들이 숨을 죽인 가운데, 우연히 노구천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와 아버지의 대화를 들었는지,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일반부 25세 이하 콩쿨 금상은…… 축하합니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42번 참가자 기무혁 군이 수상했습니다!” 내공을 담은 목소리가 시상식장에 가득 울린 순간, 좌중의 놀란 감탄사와 웅성거림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허억……!” 눈을 부릅뜬 아버지는 거의 호흡 곤란이 온 것처럼 떨고 계셨다. “엄마. 아버지 호들갑 좀 막아주세요.” “세상에……. 엄마도 지금 비명 지르고 싶은 거 겨우 참고 있거든……?” 나는 부모님의 손을 한 번씩 꼭 잡아드린 후, 두 번째로 단상 위에 올라갔다. 특별상을 받았을 때와는 달라진 시선이 보였다. 아까는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반응이었다면 지금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들이 대부분이었다. “……고등학생이 금상이라고?” “몇십 년 만에 처음 아닌가?” “대단하네…….” 지루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팔대문파 소속 무림인들의 눈에도 비로소 호기심이 어렸다. 중견문파 소속 무림인들의 눈에는 한층 더 욕심이 가득해졌다. 나는 좌중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과분한 상을 받게 돼 영광입니다. 저보다 실력이 뛰어나신 분들이 정말 많은데, 그날 제 운과 컨디션이 조금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허겁지겁 녹화를 다시 시작한 아버지에게 한 번 웃어준 후,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수상 소감을 전했다. “감사하게도 오늘 제 진로에 관하여 물어봐 주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여러 대단한 문파에서 명함을 주셨고, 고마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 모두가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일반부 콩쿨에서 금상을 수상한 후기지수. 리차드 한 이후로 처음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잠시 말을 멈추고 부모님을 바라보자, 두 분은 내 결정은 뭐든지 응원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나는 저분들의 믿음에 반드시 보답할 생각이었다. “저는 당장 진로를 결정하기보다는, 졸업 후 내년에 있을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무림인 라이센스는 세계 어디에서나 무림인임을 증명하는 자격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세가 되면 무림맹에서 그 자격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된다. 시험에서는 체질과 근골, 그리고 몇 가지 실기평가를 기준으로 종합 평가해 자격증을 발급한다. 라이센스의 종류는 세 가지. 일류(一流). 이류(二流). 삼류(三流). 강호초출과 동시에 어떤 라이센스를 획득하느냐는 그 무림인의 향후 가능성과 잠재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세계비무대회를 목표로 하는 나의 첫 번째 목표이기도 했다.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에서 일류 라이센스를 획득하겠습니다. 진로에 대해서는 그때 다시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내 말에 지금껏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던 대문파의 몇몇 무림인들까지 황당하다는, 일부는 불쾌하다는 반응까지 보였다. “뭐라고……?” “저 친구 체질이 몇 등급인데?” “체질 1등급도 장담할 수 없는 말을…….” “자신감이 지나치군.” 지금까지 체질검사에서 1등급이 아니었던 시험자가 첫 라이센스 시험에서 일류를 획득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즉, 내 말은 이런 뜻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일류 무림인 자격증 따올 테니까, 조건은 그때 다시 이야기해 보자고.’ 20화. 닮았습니다 회전계단이 위로 길게 이어졌다. 무림맹 본단에서 가장 높은 층. 그곳에 가려면 빌딩의 중간부터 계단을 이용해 올라가야만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한국무림의 절대자인 무림맹주의 집무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모든 무림인은 그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이 길고 긴 계단을 하나하나 걸어서……. “전부 헛소리지.” 쯧, 하고 혀를 차며 세간에 알려진 이유를 일축하고 계단을 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림맹주의 집무실까지 걸어가야만 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팔대문파(八大門波). 그들은 맹주를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해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 꼭대기 층으로 집무실을 옮기도록 만들었다. 또한 맹주를 만나러 오가는 사람들에게 굴욕과 불편함을 선사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동안은 내공조차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정을 고쳤다. ‘그때 자중지란을 두려워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면…….’ 과거, 하나의 사건 이후로 팔대문파의 영향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당시의 무림맹주는 올곧기만 한 무인이었으며, 다른 이들 또한 생각하는 바가 다를 뿐 자신과 같다고 믿는 정의로운 인물이었으니. “후우-.” 결국 그 믿음 탓에 자신을 고립시키기 위한 계략을 제때 막지 못하였고, 팔대문파의 힘이 이제는 무림맹과 무림맹주를 넘어서는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팔대문파의 계속되는 견제에 지친 맹주가 자신의 업무를 소홀히 하고, 도망치듯 수련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무림맹 내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층계를 올라가는 노인의 표정에는 평소에 이 계단을 오를 때 보이던 체념 대신 묘한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맹주님. 안에 계십니까?” 집무실 앞에 멈춰 선 그가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저절로 문이 열렸다. “노 원로? 자네가 웬일인가?” 문 너머에서 땀에 흠뻑 젖은 무복을 걸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났다. 주름진 얼굴만 제외하면 탄탄한 근육은 젊은 무인에 못지않았고, 뒤로 모아서 질끈 묶은 머리는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 그가 한국무림맹의 맹주 여필극이었다. “언제는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왔습니까? 그냥 담소나 좀 나누러 왔지요.” 빙그레 웃는 노구천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본 여필극이 이내 껄껄 웃으며 손님을 안으로 들였다. “들어오게나. 미리 알았으면 술이라도 준비해둘 걸 그랬군.” “저는 이제 끊었습니다. 맹주님도 좀 줄이십시오. 늙어서 마시는 술은 독이나 다름이 없다니까요.” “잔소리는. 그럼 차라도 내줄 테니 잠시 기다리게.” 노구천은 손수 차를 타주는 맹주의 소탈한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무림맹주의 집무실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검소한 공간은 그의 성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노구천은 맹주가 내어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물었다. “또 수련 삼매경이셨습니까?” “나야 뭐,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잖나?” 여필극은 자조적인 이야기를 농담 삼아 하면서 껄껄 웃었다. 그래도 될 만큼 노구천과는 오래된 사이였다. 몇 남지 않은 친 맹주파. 맹주의 권위가 점점 추락함에도 계속 그를 따른 탓에 장로에서 원로로 지위가 변하며 맹 내 실질적인 영향력을 대부분 잃은 노구천이었다. 그럼에도 여태껏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참으로 고마운 친구였다. “헌데 오늘따라 자네 표정이 밝군. 뭐 재밌는 일이라도 있었나?” “콩쿨 시상을 하고 왔습니다. 거기서 아주 당돌한 아이를 만났지요.” “흐음?” 처음에는 이야기에 그리 흥미를 보이지 않은 맹주였으나, 고등학생이 일반부 콩쿨에서 금상을 탔다는 이야기에는 절로 감탄한 표정이 되었다. “허어! 놀랍군. 리차드 한 이후로 처음 아닌가?” “맞습니다. 더 이상 유일한 기록이 아니게 되었지요.” “그래서 자네가 보기엔 제2의 리차드 한이 될 만한 자질이던가?” 세계제일인과 비교하면 어떻냐고 묻는 말에 노구천은 잠시 신중하게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반응이었으나, 이어진 대답에 맹주는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근골은 제가 근래에 본 아이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뛰어난 편입니다만…… 체질이 4급이더군요.” “저런, 체질이 조금만 더 받쳐주었어도 대단한 고수가 되었을 텐데.” 맹주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노구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정작 본인은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수상 소감에서 첫 라이센스 시험에서 일류를 따겠다고 호언장담하더군요.” “뭐라?” “그것도 4급 체질이라 본인에게는 관심 없는 팔대문파 무림인들 앞에서 대놓고 말입니다.” 잠시 황당한 표정이 된 무림맹주에게서 이내 시원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하! 다들 표정이 가관이었겠구만!” 팔대문파의 고고한 자존심을 아는 맹주이기에 더욱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일류(一流) 라이센스. 문파에 소속된 후기지수들에게 첫 시험에서 그 명예를 쥐여주기 위해 그들이 어떤 노력과 지원을 하는지 알기에, 대놓고 그들을 도발한 소년의 행동이 유쾌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 내가 새장에 갇혀 있는 동안 혼자 재미란 재미는 다 보고 다녔군?” “맹주님. 가장 놀라운 소식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여필극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있다고? 나는 아직 그 아이 이름도 못 들었다네. 일단 이름이나 좀 알려주고…….” “검마를 닮았습니다.”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건가?” “그 아이의 검술. 검마와 닮았습니다.” 웃음기라곤 없는 노구천의 진지한 대답에, 시종일관 밝던 맹주의 표정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검마(劍魔). 그 별호를 듣는 순간 온화했던 노인의 표정이 온갖 감정으로 물들었다. 후회, 미련, 자책, 상실감, 분노……. 긴 한숨으로 감정을 수습한 무림맹주가 진지한 눈으로 노구천을 응시했다. “그 친구가 우리와 완전히 연락을 끊은 게 10년도 더 되었네. 그 성격에 더 이상 제자를 두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식은 더욱 말이 안 되지 않나?” 검마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노구천도 맹주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무혁의 검술에서 느껴지는 그의 희미한 흔적을 알아본 것이었으니까. “……어떤 관계인지는 짐작도 안 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그 아이는 분명 검마의 검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듣는 귀가 많아서 자세히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기무혁의 콩쿨 무대 영상을 수십 번도 넘게 돌려본 노구천은 확신했다. 저 아이는 종적을 감춘 검마와 인연이 닿아 있다고. 잠시 말이 없던 맹주가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알겠으니 이젠 좀 알려주게. 대체 그 아이 이름이 뭔가? “기무혁입니다.” 기무혁, 기무혁……. 무림맹주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기라도 하듯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차를 다 마신 노구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맹주님도 조만간 그 아이를 보시게 될 겁니다. 내년 초 라이센스 시험에 참가할 테니까요.” “검마의 검을 닮은 어린 후기지수의 등장이라니……. 이것 참, 기대보다 걱정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친우를 배웅하는 무림맹주의 입꼬리는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 * * 내가 일류 라이센스를 따겠다고 선언하고 며칠이 지났다. 시상식에 참가한 녀석들이 소문을 낸 건지, 무림인 커뮤니티 등에는 나를 조롱하는 글이 난무하는 중이었다. 콩쿨에서 금상을 받더니 주제 파악을 못 한다, 개나 소나 일류를 따는 줄 아냐, 이건 박제해놓고 평생 망신당하게 해야 한다 등등. “무혁아! 우리 이놈들 싹 다 고소해 버리자!” “괜히 열 내지 마시라니까요.” 정작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데, 아버지가 내 대신 열을 내다가 엄마에게 그만 좀 하라며 등짝을 맞길 수차례. ‘뭐, 그럴 수도 있지.’ 막말로 십 년을 노력해도 일류에 닿지 못하고, 이십 년을 수련해도 일류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무림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 선전포고가 얼마나 아니꼽게 느껴졌을까? 오히려 나는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몇 개 읽고 조금은 반성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포부를 밝힌다는 게…… 범재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나 봐요.” “…….” “…….” “왜요?” 두 분은 ‘할 말은 많은데 하지 않겠다.’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두 분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쨌든. 나는 시상식에서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계획이었다. “저 그럼 수련하고 올게요.” “그래. 무리하지 말고!” “도시락 잘 챙겼지?” 부모님이 싸준 도시락을 들고, 두 분의 응원과 염려를 받으며 주말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오늘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지난 며칠, 나는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을 앞둔 내게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 고민했다. 시험은 내년 1월에 있으니, 약 4개월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 상황. 그때까지 일류 라이센스를 획득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실전경험은 차고 넘쳐. 내공도 시험을 치르기엔 충분해. 체력도 충분히 더 끌어올릴 수 있어.’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한 가지로 정리되었다. ‘지금 내 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문제점을 잡아줄 고수의 지도.’ 나는 낭인 시절에 갈고닦은 검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만이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나 매번 무리하면서 든 나쁜 습관들은 내 몸을 점점 망가뜨렸다. 지금은 최대한 고쳐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더욱 객관적으로 봐줄 시선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봐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무리 생각해도 한 명뿐이란 말이지.’ 해서 내린 결론은, 모처에 은거하고 있을 검마를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정파 무림인으로 드물게 별호에 마(魔)가 들어간 인물. 하지만 그 별호를 붙인 것은 정파가 아닌 사파의 무림인들이었으니. 검마(劍魔)는 젊은 시절 숱하게 사파 무림인들을 족치고 다니며 극도로 실전적인 검술을 완성한 무인이었다. “문제는 찾아야 하는 범위가 너무 넓다는 건데…….” 약속 장소인 지하철역에 먼저 도착한 나는 조금은 막막한 심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으로부터 5년 후, 오랜 시간 잠적했던 검마가 너튜브에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진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자신이 평생 완성한 검술을 전부 무료로 공개하고, 정확히 사흘 후 시신으로 발견된다. 뉴스에 짤막하게 <서울시 ○○구에서 벌어진 무림인 고독사 사건>으로 보도된 소식이었다. “……이왕이면 따뜻할 때 갖다주고 싶은데.” 나는 어깨에 걸친 도시락 가방을 슬쩍 바라봤다. 그 안에는 부모님에게 부탁해서 넉넉히 3인분을 싸 온 도시락이 들어 있었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나는 검마를 스승 비슷한 존재로 생각했다. 그가 너튜브에 공개한 검술을 꽤 오랫동안 연구하며 실전에 적용했고, 덕분에 목숨도 몇 번이나 건질 수 있었으니까. ‘내게는 은인인 셈이지.’ 솔직히 나는 검마가 은거하게 된 이유도, 고독하게 죽어야 했던 이유도 잘 모른다. 다만 그가 이번에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랐다. 그가 꼭 내게 검술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역 앞에서 만나기로 한 녀석이 도착했다. “어이! 미친놈!” “……저 또라이.” 메뚜기처럼 한 걸음에 계단을 5개씩 뛰어서 올라오는 커다란 덩치. 단숨에 지하철역을 올라온 신강헌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빨리 한판 붙으러 가자. 근처 연무장 예약은 이 몸이 해놨으니까!” 바로 어제. 나는 혼자서 검마를 찾느라 발품 파는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신강헌이 앞장서서 예약해둔 연무장으로 향하며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떠들었다. “어제 톡으로 얘기한 거 기억하지? 내가 이기면 내 너튜브에 출연해서 ‘신강헌 형님은 저보다 뛰어난 무림인입니다. 패배를 인정합니다.’라고 말하기로 한 거. 약속 꼭 지켜라?” “네가 이기면 원하는 대로 해줄게.” “하? 그 자신만만한 얼굴이 언제까지 가나 보자고. 그래서 네가 이겼을 때 조건은 뭔데? 만나서 알려준다며?” 지난밤 우리는 비무에 내기를 걸었고, 승자가 원하는 것을 하나씩 들어주기로 했다. 나는 내 조건을 궁금해하는 신강헌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사흘 동안 나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심부름하기, 어때?” “……이 새끼가?” 이 정도면 너튜브 출연보다 훨씬 간단한 조건이잖아? 그래서 쉽게 수락할 줄 알았는데, 자존심이라도 긁혔는지 장난스럽게 웃던 신강헌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나는 슬쩍 웃으며 한 마디 도발을 더했다. “너무 길면 이틀로 줄여줘?” “……너 오늘 내가 반 죽여줄게.” 나는 말수가 확연히 줄어든 신강헌과 함께 예약해둔 연무장으로 향했다. 21화. 신입 입단 테스트 신강헌이 예약한 개인연무장은 다양한 무기류와 보호구, 샌드백, 스트레칭 도구와 비상의약품, 심지어 간단한 식사까지 가능한 최고급 시설이었다. ‘이 자식. 돈이 많은가 보네.’ 학원이랑 연계된 공용시설만 이용해본 내게는 신세계나 다름없는 공간이었다. 내가 촌놈처럼 시설을 두리번거리자 신강헌이 잘난 척 으스댔다. “비싼 연무장 처음 와보냐? 난 맨날 이런 데서 수련해.” “쓸데없는 데 돈 낭비하지 말고 다음부터 싼 데 알아봐.” “내가 왜? 거지새끼도 아니고.” 말하는 싸가지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하는 신강헌에게, 아무래도 예의범절과 인성부터 주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한쪽에 가방을 내려놓고 가검만 챙겨서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각자 몸 좀 풀고 시작할까? 아니면 바로?” 마찬가지로 가방을 내려놓은 신강헌이 도를 어깨에 걸치고 걸어왔다. “원래 몸은 싸우면서 푸는 거 아냐?” 처음으로 생각이 일치한 우리는 각자의 검과 도를 들고 마주 섰다. 나는 금세 진지해진 신강헌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제야 좀 봐줄 만하네.’ 콩쿨장에서도 느꼈다. 매사가 장난인 것처럼 시시껄렁한 태도를 취하는 녀석이, 도를 들었을 때만큼은 제대로 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을. “유일하게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든다.” “뭐래? 난 너 마음에…… 안 드는데!” 내 혼잣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신강헌이 갑자기 도를 찔러왔다. 예고도 없이 시작된 비무였다. 까앙! 가볍게 쳐내면서 거리를 벌렸다. 손아귀를 타고 오르는 묵직한 진동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확실히 재능은 진짜라니까.’ 미래의 한국제일도. 나는 지금도 종종 전생의 마지막 싸움이었던 신강헌과의 생사결을 복기해보곤 했다. ‘그때 서로가 만전이었다면…… 내 필패(必敗)였겠지.’ 나 역시 쉽게 지지는 않았겠지만, 결국에는 신강헌의 도에 쓰러졌을 것이다. 일말의 과장도 축소도 없는, 냉정한 자기 객관화에 의한 판단이었다. 그때 내 승리는 불꽃을 향해 달려든 부나방에게 천운이 따라준 결과였으니까. 까가가강! 칼날이 연달아 부딪치며 서로를 위협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투박하고 거친 칼질은 전부 내 검에 막히거나 허공을 갈랐다. “나쁘진 않은데…… 아직 한참 멀었네.” 일부러 들으라고 중얼거린 말에 신강헌의 목에 핏대가 섰다. 동시에 잔뜩 힘준 손등에 핏줄이 터질 듯이 도드라졌다. “언제까지 여유 부리나 보자고!” 그러나 성질 좀 낸다고 실력이 나아질 거라면 뭐하러 고된 수련을 하겠는가. 풍차처럼 마구 휘둘러 대는 칼질은 허점만 더 크게 노출할 뿐이었다. 큰 공격 안으로 파고든 나는 검면으로 신강헌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그 순간 녀석은 무릎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주르륵 뒤로 밀려나는 신강헌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반응 속도가 내 예상을 뛰어넘은 탓이었다. ‘역시 이런 재능이 방황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열이 뻗친단 말이지.’ 나는 지금의 신강헌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단순히 녀석의 미래가 천마신교와 연관돼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강해질 수 있는데, 왜?’ 나는 신강헌이 내가 기억하는 한국제일도보다 더욱 강해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렇게 강해진 녀석을 내 실력으로 뛰어넘고 싶었다. 이번에는 서로가 만전인 상태로 제대로 붙어서 꺾는 것.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지극히 내 개인적인 욕심이었다. “……새끼. 생각보다 세네.” 잠시 뒤로 물러난 신강헌이 호흡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비무가 자신의 생각대로 풀리지 않자 답답해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눈은 투쟁심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나도 적당히 하고 멈출 생각은 없었다. “고작 이게 전부냐?” 성큼 전진보법을 밟으며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쩌엉-! 힘 조절을 하지 않고 내리친 검격에 신강헌의 눈이 부릅떠졌다. 방금 공격으로 지금까지 내가 봐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터였다. “미친……!” “반 죽여준다며? 이깟 실력으로?” 입꼬리에 비웃음을 달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제때 반응하지 못한 신강헌의 어깨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혹시 제대로 안 하는 거냐? 아니면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 거냐?” “닥쳐!” “불만이면 실력으로 닥치게 해보든가.” 나는 신강헌을 계속해서 도발하고 일부러 자존심을 긁었다. 그리고 바보라도 격차를 알 수 있도록 힘과 기술로 찍어 눌렀다. 쩌저저정! 어느 순간부터 막기에만 급급해진 신강헌의 눈빛에 당혹감을 넘어 분노가 어렸다. 이대로 가면 더 이상 아무것도 못 해보고 내게 질 것이 뻔했으니까. “큭……. 젠자아앙!” 궁지에 몰린 맹수가 온 힘을 다해 몸부림치듯 신강헌이 방어는 포기하고 전력으로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칼이 만들어내는 풍압부터가 달라졌다. 압도적인 피지컬을 최대한 활용해 힘을 싣자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그래. 이거지.” 살을 내주더라도 뼈를 취하겠다는 각오가 느껴지는 모습에 나는 슬쩍 미소 지었다. 물론 그렇다고 살살 해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무식하게 돌진해오는 신강헌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쩌저저정! 비스듬하게 쳐내고 있음에도 손아귀가 저릿저릿했다. 조금만 타격점이 어긋났어도 내가 검을 놓쳤을지도 모를 힘.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이제 좀 쓸 만한데.” “닥치라고-!” 아무리 발악을 해도 지금의 신강헌은 내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실전 경험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검을 휘둘러 쌓아 올린 세월의 간격이 이십 년이었다. “그리고 원래 이 시기엔 내 평가가 더 높았거든.” “크아악! 뭐라는 거야? 재수 없는 새끼……!” “이만 끝내자.” 흥분해서 반쯤 눈이 돌아간 신강헌의 얼굴을 검면으로 후려쳤다. 쾅! “쿠헉…!”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가더니, 이내 눈이 풀린 신강헌이 뒤로 털썩 넘어졌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녀석의 가슴에 검을 툭 갖다 대며 말했다. “관종 짓 하고 다닐 시간에 수련에 집중했다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거다.” “…….” 자신보다 압도적인 동년배를 마주했을 때의 좌절감.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했을 녀석이라면 더욱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내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신강헌의 눈에는, 불합리한 재능의 차이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 최악의 경우, 충격을 받아 다시는 도를 들지 못하고 무림인의 꿈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뿐이겠지.’ 훗날 세상을 혼란에 빠뜨릴 천마신교의 테러리스트 하나가 사라지는 것도 나쁜 결말은 아니리라. 하지만 내가 아는 신강헌은 이 정도에 꺾일 놈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왜 이렇게 잔소리야?” 대자로 드러누운 그대로 신강헌이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보며 물었다. “응? 돌아가신 우리 엄마아빠도 이렇게 잔소리는 안 하겠다. 근데 네가 뭔데?” 짜증이라기보다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것 같은 얼굴이라서, 나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한심해서 그런다. 그 재능에 삽질이나 하고 있는 게 아까워서. 처맞으면서 잔소리 들으면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잖아?” “미친놈……. 크크크크.” 갑자기 신강헌이 몸을 들썩일 정도로 웃어댔다.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키득대던 녀석이 상체만 불쑥 일으키더니, 다시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이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젠장, 내가 졌다! 그래서 사흘간 심부름하라고? 아침마다 빵이라도 사다 줘?” “그딴 건 필요 없고.” 아무래도 내가 말한 심부름을 오해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나는 신강헌을 데리고 다니며 일진 놀이를 할 생각은 없었다. “사람을 한 명 찾아야 해.” “……누구?” 나는 신강헌에게 검마라는 오래전에 은거한 무림인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검마? 들어본 것 같기도……. 되게 옛날 무림인 아니냐?” 지금 우리 나이가 열아홉이니, 리차드 한보다도 훨씬 이전 세대에 활동한 검마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이 정상이었다. 나 역시 너튜브에서 검마를 보기 전까지는 그에 대해서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했으니까. 인터넷을 한참 뒤져서 찾은 검마의 은거하기 전 마지막 사진을 보여주자 신강헌이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사람 찾을 거면 돈 주고 찾아달라는 게 낫지 않냐? 아, 너 거지라서……?” 빠악! 나는 검면으로 신강헌의 머리통을 한 대 후려친 후 말했다. “안 돼. 직접 찾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개새끼…….” 흥신소 등에 의뢰하는 방법도 있지만, 상대는 은거 중인 무림인. 그것도 엄청난 고수였다. 만약 내가 검마라면 누가 사람을 풀어서 자신을 찾는다는 사실을 아는 게…… 결코 기분이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무공 지도를 부탁해야 하는 입장인데 가능하면 좋은 인상을 남겨야지.’ 결국 직접 검마를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신강헌을 조력자로 섭외한 것이다. 돈 많고 시간 많은 열아홉 한량. 어차피 이놈도 라이센스 준비로 학교를 열심히 다닐 리 없으니, 발품 파는 일에는 최적인 인재였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울 한복판에서 우리 둘이 사람 하나 찾는 게 말이 돼?” “다행인 점은 둘이 아니라 셋이서 찾을 거란 거지.” “……또 누가 있는데?” “있어.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연무장에 들어오기 전에 메신저로 주소를 찍어서 보냈으니, 지금쯤 거의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연무장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빨간 머리가 보였다. 주변을 휙휙 둘러본 김복자가 감탄하며 말했다. “와, 여기 졸라 좋다. 민짜 너 생각보다 부자…….” “쟨 누구야?” 멈칫한 김복자와 눈을 가늘게 뜬 신강헌이 서로를 위험한 생물이라도 본 것처럼 경계했다. 마치 본능적으로 상대도 자기만큼 더러운 성깔을 가졌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내가 보기엔 똑같은 놈들끼리…….’ 둘 중에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신강헌이었다. 나한테 쥐어터진 흔적이 온몸에 가득하다는 걸 뒤늦게 자각했는지, 귀가 조금 빨개진 녀석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난 옷 갈아입고 온다.” 신강헌이 가방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가자마자 복자가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쟤가 왜 여깄어? 나한테는 그냥 닭갈비 먹자며?” 빨간 음식이라면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오는 친구에게, 여기까지 부른 진짜 이유를 설명했다. 김복자 성격에 당연히 길길이 날뛰었다. “X팔! 또 먹을 걸로 유인하다니! 나 그냥 갈 거야!” “저번에 먹은 즉석떡볶이 맛있었지? 이번엔 70년 전통의 숯불양념닭갈비다. 검색에도 안 걸리는 숨겨진 맛집인데 그냥 가려고?” 전생에 20년간 낭인으로 굴러먹으며 서울 시내 여러 맛집을 알게 된 나였다. 김복자가 좋아할 만한 맛집이라면 적어도 스무 개는 더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중 대부분이 김복자가 알려준 곳이지.’ 미래의 김복자가 보장한 맛집인데, 당사자 입맛에 얼마나 잘 맞겠는가? 꿀꺽……. 아니나 다를까. 복자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나를 노려봤다. “맛없기만 해봐. 까귀한테 대가리를 물어뜯으라고 할 거야.” 그러자 복자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던 까만 솜사탕 같은 것이 위협적으로 포효했다. 까아앗! 내가 슬쩍 노려보자 움찔하며 바로 복자의 등 뒤로 숨어버리긴 했지만. “이름까지 지었어?” “첫 괴이잖아. 좁밥이긴 한데 나름 귀여워.” 망령을 무슨 반려동물처럼 취급하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 “아무튼 사람 한 명을 찾아야 한다 이거지? 그건 오케이. 근데 말이야.” 나와 신강헌이 벌인 비무의 흔적을 둘러본 복자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팔짱을 끼고 말했다. “이건 부(副)크루장인 내 의견도 미리 물어봤어야 하는 거 아냐?” “뭐가?” “신입 입단 테스트. 아무리 우리 크루가 인성은 별로 안 본다고 하지만…….” “갑자기 뭔 소리야?” “한 번만 봐주는 줄 알아.” 김복자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신강헌이 들어간 탈의실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근데 쟤는 뭐 시키지? 전투원? 무력 담당? 돈 많아 보이던데 회식 담당?” “…….” 뭔가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았지만, 신이 나 보여서 그냥 두었다. 22화. 누가 보낸 놈들이냐? 간단히 통성명을 나눈 후, 우리는 연무장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복자가 내가 찾아온 검마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훑으면서 물었다. “이 검마라는 할아버지. 이쪽 동네에 있는 건 확실해?” “……구까지는 맞을 거야.” 나는 검마가 5년 후에 유튜브에 출연하고, 며칠 후 고독사로 발견된 장소를 서울시 ○○구 정도까지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사를 다녔다면 전제부터가 틀린 것이 된다. ‘새삼 막막하긴 하군.’ 무려 이십 년 전에 은거한 무림고수를 찾는 일이었다. 최선을 다해서 찾아본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운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내 말에 신강헌이 영 비관적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찾을 건데? 집마다 문 두드려서 검마님 계세요- 하고 물어보기라도 하게?” “오, 좋은 의견인데. 그건 심부름꾼한테 시키면 되겠다.” “시발…….” 괜히 빈정거리다가 본전도 못 찾은 신강헌이 나를 노려봤지만, 한쪽 볼이 잔뜩 부은 얼굴로 그래봤자 우습기만 할 뿐이었다. “……범위를 좁힐 수 있을 것 같아.”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복자가 입을 열었다. 그 눈은 마치 탐정만화의 주인공처럼 빛나고 있었다. ……지난번에도 느꼈던 건데, 김복자는 이렇게 뭘 수사하거나 추적하는 상황을 꽤나 즐기는 것 같았다. 복자가 내가 프린트해온 자료를 테이블 위에 펼치며 말했다. “옷차림만 봐도 검소하게 살아온 사람이야. 그리고 자세히는 안 나와 있지만 거하게 사고 쳐서 어쩔 수 없이 은퇴한 느낌이잖아? 그런 상황에서 이십 년이나 지났으면 지금 어떤 상황일 것 같아?” 갑자기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신강헌이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심심한 상황?” “멍청아. 생각을 좀 하고 대답해.” “와, 언제 봤다고…….” 내가 황당해하는 신강헌의 말을 끊으며 복자에게 물었다. “형편이 어려울 거란 뜻이야?” “바로 그거지!” “…….” 신강헌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흘겨보더니, 이내 팔짱을 끼고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형편이 어려우니까 심심할 수도 있지.” “우길 걸 우겨라.” “얜 도움도 안 될 것 같은데 그냥 빼면 안 돼?” 검마가 은거한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았다. 무림맹의 검술 스승으로 유명했던 그가 어떤 큰 실수를 저질러 제명까지 당했고, 그 일에 팔대문파도 어느 정도 관련돼 있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 후로 종적을 감춘 검마에 대한 정보는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숨긴 것 같단 말이지.’ 지금과 같은 시대에 이 정도의 사건을 은폐한다는 게 쉬울리는 없지만, 그것이 무림만의 일이라면, 그리고 무림맹이나 팔대문파가 개입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복자가 자료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주도적으로 추리를 해나갔다. “검마의 과거 행적이나 성향을 봐선 돈을 많이 벌었을 것 같진 않아. 즉, 지금쯤 가난한 독거노인이 되었을 확률이 높다는 거지.” “편견 아냐? 벌어둔 돈이 많아서 편하게 먹고살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무림인이 마음만 먹으면 돈 벌기가 얼마나 쉬운데.” 복자의 의견, 그리고 신강헌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서로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마치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묻는 듯했다. “이건 복자 말이 맞을 거야.” 둘 중에 한 명의 편을 들어준 것은 아니었다. 내가 너튜브에서 본 검마는 비쩍 마른 미라 같은 모습에,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니까. -……내 평생 연구해온 검술을 공개한다. 필요한 이들은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무공증진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느릿한 목소리, 바짝 마른 입술은 누가 봐도 그가 영양결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지저분하고 낡은 방에서 자신의 검술을 하나하나 천천히 펼치면서 설명하던 모습. ‘내 것으로 만들려고 수백 번도 넘게 봤었지.’ 낭인으로서 칼밥 먹으며 살아남기 위해 뭐라도 붙잡을 동아줄이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복자의 말을 들으니 그 방 안의 풍경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듯했다. 검마가 카메라를 들고 위치를 조정할 때 작은 창밖으로 보였던 탁 트인 높은 하늘과 나무들까지도 말이다. “……창밖으로 하늘이 보이고 은행나무가 내려다보이는 낡고 오래된 집.” “묘하게 구체적인데?” “뭐,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복자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고, 신강헌은 더 이상 반대 의견을 내지 않고 어깨만 으쓱였다. “정보를 이만큼 취합했으니 꽤 좁힐 수 있겠어. 앞에 은행나무가 심어져있는 오래된 빌라나 원룸, 옥탑방을 위주로 찾아보자고. 아파트나 빌딩으로 하늘이 가려지지 않는 동네 위주로 말이야.” 신강헌은 이런 추리와 계산을 술술 해내는 복자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너 무슨 사설 탐정이야?” 그러자 복자가 명함을 꺼내 신강헌에게 건네며 찡긋 윙크했다. 한눈에 상대가 부잣집 자식이라는 걸 알아본 모양인지 영업용 멘트까지 살짝 곁들여서. “실력과 미모를 겸비한 프리랜서 술법사. 필요한 시술 있으면 연락해. 특별히 10% 할인가에 해줄 테니까.” 「술법시술전문가 RED RABBIT」이라고 적힌 명함을 본 신강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근데 이름이 복자야? 아까 기무혁이 그렇게 부르던데.” “……나랑 알고 지낸 지 5년 이상 된 사람들만 그 이름으로 부를 수 있어. 그리고 아까부터 거슬리는데, 내가 누나니까 존댓말 해라?” 김복자가 정색하자 신강헌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기무혁은 반말하잖아.”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너 나랑 친해?” “……맞는 말인데 X나 억울하네…….” 참고로 나도 복자 입장에서는 서로 알게 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걸 굳이 신강헌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가볍게 박수를 쳐서 두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말했다. “대충 정리됐네. 그럼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탕-!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친 김복자가 내 말을 끊으며 외쳤다. “닭갈비 먹으러 가야지! 머리를 많이 썼더니 배고프다고!” 당장 닭갈비를 먹지 않으면 그 대신 나라도 잡아먹을 듯한 기세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밥부터 먹으러 가자고 하려고 했어. 나 때문에 모인 거니까 오늘은 내가 산다.” “진짜지? 신강헌. 너 닭갈비 얼마나 먹을 수 있어?” “하! 배불러서 못 움직일 때까지 가능.” “오케이! 누나는 오늘 집에 굴러갈 각오로 먹는다.” ……이 새끼들이? 내 지갑을 털어먹겠다며 갑자기 의기투합한 김복자와 신강헌은 그날 닭갈비 12인분을 먹어 치웠다. * * * 그날 이후. 나는 매일같이 신강헌과 함께 빌라, 원룸, 옥탑방 등등 독거노인이 지낼 만한 장소는 전부 돌아다녔다. 직접 문을 두드려서 확인해보기도 하고, 부동산에 찾아가 집을 알아보는 척하며 이것저것 캐묻기도 했다. 우리와 달리 본업이 있는 복자는 함께 다니지는 못했지만, 전화나 메신저를 통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전해주었다. [rabbit : 오늘도 허탕? 서쪽이 점괘가 좋게 나왔는데 글로 가봐.] [God Kang-heon : 님 사이비 아님? 점괘 한 번도 안 맞던데] [rabbit : 신입 너 뒤질래?] [God Kang-heon : ㅈㄹㄴ]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딱히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하, 이게 뭔 개고생이냐…….”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르락내리락하자 체력에 어지간히 자신 있는 신강헌도 앓는 소리를 냈다. “유산소 한다고 생각해. 그 두꺼운 허벅지가 아깝지도 않냐?” “매일 빼먹지 않고 하거든? 그리고 이딴 건 운동이 아니라 노동이라고.” “억울하면 나한테 이기시든지.” “아오 진짜!” 신강헌은 지난 패배를 설욕하겠다며 다시 덤볐지만, 두 번째 비무에서도 내게 처참하게 깨졌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내 심부름꾼이 되는 기간도 연장되었다. “그래도 지난번보단 낫더라. 한…… 손톱만큼?” “내가 올해 가기 전에 너 박살 내고 만다!” 어림도 없는 소릴. 하여간에 나와 신강헌은 매일같이 쏘다니며 은거한 검마를 찾으러 다녔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었다. “거기 두 사람!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냥…….” 동네 주민들이 수상하다며 우리를 신고하는 바람에 경찰에 붙잡혀 한참을 해명하기도 했고. “으히히! 꺼지지 못하겠느냐! 비열한 마두 놈들아-!” 본인을 절세검객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알코올 중독자 노인이 휘두르는 술병을 피해 도망치기도 했으며. “대학생이에요? 우리랑 같이 놀래요?” “저희 고등학생인데요.” “아하하! 거짓말. 무슨 고등학생들이 이렇게 멋있어요?” 옥탑방에서 기타를 치며 청춘을 즐기던 대학생들과 삼겹살 파티를 한 적도 있었다. 이 지역에서 오래 살았다는 말에 정보나 들을 겸 어울렸다가, 자꾸만 치근덕대는 바람에 옥상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그렇게 일주일째. 검마 수색에 이골이 난 우리는 이제는 각자 맡은 지역을 돈 후, 밤이 되면 똥 씹은 표정으로 만나서 정보를 교환했다. “뭐 좀 건졌냐?” “혹시나 해서 서쪽도 가봤는데, 어떤 할머니가 이거 먹으라고 주더라.” “……떡이네.” 공원 벤치에 앉아 신강헌이 받아온 떡을 나눠 먹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수정해야 하나 고민했다.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아무런 소득도 없으니 시간이 아까운 것도 사실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개인적인 수련에 집중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차선책을 선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훠이, 훠이! 이것들은 사람이 쫓는데 보는 척도 안 하네.” 신강헌은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호시탐탐 우리의 간식을 노리는 비둘기와 기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둘이 지능이 비슷해서 그런지 그 모습이 퍽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저기, 학생들.” 낯선 목소리에 돌아보니 안경을 쓴 중년인이 기웃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저분한 수염에 자기주장이 강한 뱃살은 공원마다 몇 명씩은 있는 오지랖 넓은 아저씨를 떠올리게 했다. “혹시 무림인을 찾고 있어?” “……왜 그러시죠?” 내가 일어나서 정중하게 되묻자, 어째선지 중년인이 목을 잔뜩 움츠리며 뒷걸음질 쳤다. “아, 아니. 며칠이나 이 주변에서 돌아다니는 걸 봤으니까……. 두 사람 체격이 딱 봐도 어마어마하고. 누구 하나 족칠 것 같은 눈으로 돌아다니길래…….” 그 말에 나와 신강헌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네 덩치 때문이잖아.’ ‘눈깔에 힘 좀 빼라고.’ 그렇게 서로를 탓하기를 잠시. 신강헌은 어쩔 거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저씨에게 대답했다. “맞아요. 무림인을 한 사람 찾고 있습니다. 나쁜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요.” “역시 그렇지? 내가 눈썰미가 좋거든. 딱 알아봤지.” 자신의 예상이 맞자 기분이 좋은 듯, 지저분한 수염을 긁적거린 아저씨가 우리에게 귀가 솔깃할 만한 정보를 주었다. “저기 옆 동네 옥탑방에 사는 최 씨 할아버지가 한때 검을 좀 다뤘다고 들었거든. 혹시 모르니까 한번 찾아가 봐요.” 최 씨? 검마의 본명이 최건이었다. 신강헌도 그걸 떠올렸는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최 씨 할아버지라는 사람의 정확한 주소를 들은 후 벤치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조심해! 그 양반 성격이 좀 많이 고약하니까!” 오지랖 넓은 동네 아저씨의 경고를 뒤로하고, 우리는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뭔가 느낌이 좋지 않냐?” 밤이 늦은 시간인데도 의욕을 불태우는 신강헌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달리면서 스마트폰을 꺼내드는 녀석에게 말했다. “너 재밌나 보다?” 그러자 신강헌이 움찔하더니 표정을 굳히고 나를 노려봤다. “재밌긴 뭐가 재밌어. 빨리 심부름꾼 때려치우고 싶으니까 억지로 하는 거지.” 억지라고 하기엔 방금 전까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는데……. 나는 신강헌과 지난 며칠간 함께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을 슬쩍 찔러보았다. “너, 친구 없지?” 그러자 신강헌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너, 내 팔로워가 몇 명인지 알아?” “그게 친구냐?” “닥쳐. 지도 친구 없으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린 우리는 최 씨 할아버지라는 사람이 산다는 옥탑방에 도착했다. 인적 드문 골목길을 몇 번이나 헤매다 겨우 찾아낸 곳은, 연식이 굉장히 오래돼 보이는 빌라의 옥상이었다. 삐걱거리는 철제 계단을 올라가자 오래된 시멘트 벽으로 된 건물이 보였다.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스산한 풍경이었다. 침을 꼴깍 삼킨 신강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계세…….” 그 순간, 나는 좌장으로 신강헌을 옆으로 밀어냄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살기에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 돌아서자마자 목덜미 바로 옆에서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고. 까앙! 칼날이 부딪치며 몇 걸음 주르륵 밀려났다. 제때 막지 못했으면 목이 베이고도 남았을 공격이었다. “누가 보낸 놈들이냐?” 어둠 속에서 우리를 노려보는 한 쌍의 눈동자. 싸늘한 목소리에는 살기가 짙게 배어 있었다. 23화. 셋이면 얘기가 달라지지 헝클어진 백발의 노인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순간,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마가 아니야.’ 내가 수백 번도 넘게 본 영상 속 얼굴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검마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정체를 감추기 위해 인피면구를 쓰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나는 살기로 번들거리는 노인의 눈을 보고 확신했다. ‘저런 자가 검마일 리 없어.’ 검마 최건은 별호에만 마(魔)가 들어갈 뿐, 정파인의 표상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완고한 성격, 그리고 악인들에게는 자비가 없는 손속으로 과거 사파무림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검객. 하지만 결코 아무에게나 함부로 검을 휘두를 사람은 아니었다. “입이 들러붙었느냐? 칼로 찢어주면 대답을 할 테냐?” 반면 킬킬 웃어대는 저 노인은 방금 전 나와 신강헌을 정말로 죽일 작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자신의 집에 갑자기 찾아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잠깐만요! 우리는…….” 나는 앞으로 나서서 해명하려는 신강헌을 제지했다. “그만둬. 우리가 찾던 사람이 아니야.” “……아니라고?” “딱 봐도 사파 쪽이잖아. 재수 없게 똥 밟은 거지.” 나는 스스로가 안일했음을 인정했다. 정체를 감추고 은거한 무림인이 왜 검마뿐일 거라고 생각했을까.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어.’ 당연히 정파보다는 사파무림인이 숨어 지내는 경우가 많고, 그중에는 수배 중이거나 흉악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친 자들도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 내 앞에서 살기를 줄줄 흘리는 노인도 그런 자들 중 하나일 터였다. “서로 간에 오해가 생긴 것 같은데.” 굳이 충돌할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상대가 인내심을 잃기 전에 해명했다. “다른 사람을 찾으려다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우리는 댁이 누군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어.” “흥. 그걸 믿으라는 거냐?” “만약 우리가 정말로 당신을 노렸다면 멍청하게 인기척을 내고 찾아왔을까? 조용히 기습을 했겠지.” “…….”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를 살폈다. 검 끝은 여전히 내 미간을 겨눈 채였다. ‘지금 내 실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노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 검을 쥔 자세, 아까 검을 부딪칠 때 느낀 반발력으로 대략적인 경지를 가늠해 보았다. ‘적어도 일류……. 어쩌면 절정고수일지도.’ 지난 생에 낭인으로서 살아남으며 쌓인 생존감각이, 맹렬하게 위기경보를 보내고 있었다. 최대한 충돌을 피하고 넘어가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그쪽도 소란이 벌어지면 좋을 거 없잖아? 서로 없었던 일인 셈 치자고. 우리도 조용히 돌아갈 테니까.” “흐흐…….” 백발의 노인은 바람 빠진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처럼 상대도 우리의 실력을 가늠해 봤을 터. 자신이 우리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고 판단을 내렸는지, 그 웃음에는 오만이 녹아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누군지 몰랐다고 한들, 지금은 알아보지 않았더냐?” “……말했잖아. 우리는 댁이 누군지 전혀 모른다니까.” “거짓말하지 마라! 본좌의 검을 견식하고도 이 야차검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야차검이 도대체 누군데? 맹세코 나는 저딴 별호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집을 잘못 찾아왔다는 이유로 칼부터 휘두르는 개차반같은 성격을 보아하니, 내가 낭인으로 활동하기도 전에 비명횡사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사죄의 의미로 팔 하나씩 스스로 끊어놓고 가거라. 그리하면 본좌의 휴식을 방해한 것을 용서해주마.” “……도저히 말이 안 통하네.” “협상은 틀어진 거지?” 도를 뽑아 든 신강헌이 내 옆에 섰다. 슬쩍 돌아보니 잔뜩 긴장해 있는 얼굴이 보였다. “너, 사람 베어본 적 없지?” “미친놈. 그러는 너는…….” 순간 내 표정을 본 신강헌이 침을 꼴깍 삼켰다. 직감적으로 내게 ‘사람을 베어본 경험’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그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노인이 킬킬 웃으며 자연스럽게 한 걸음 거리를 좁혔다. “꿈도 야무지구나. 네깟 놈들이 본좌의 옷자락이나 벨 수 있을 것 같더냐?” 상대의 전진에 맞춰 동시에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는 나와 신강헌. 잔뜩 긴장한 우리의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듯, 노인이 느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보아하니 정파 쪽 애송이들인 듯한데……, 음, 하나는 아닌가?” 왜 나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지? 나는 상대를 노려보던 눈동자를 돌리지 않고 신강헌에게 말했다. “넌 도망쳐라.” “……뭐?” “어차피 방해만 돼. 내가 붙잡아두고 시간을 벌 테니까 튀라고. 나도 적당히 상황 봐서 빠져나갈 테니까.” “…….” 신강헌이 구겨진 표정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늙은이가 우습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본좌가 도망치게 둘 것 같으냐? 어디 한번 해보거라! 등을 보이는 순간 어떤 꼴이 될지…….” 우리를 한참 얕보고 있는 노인이 곧 저지를 살인에 흥분해 주절주절 떠드는 순간, 나는 바닥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지금!’ 겁먹은 척하며 방심을 유도하는 방법은 고전적이지만 잘 먹혔다. 거의 앞으로 넘어질 것처럼 무게중심을 앞으로 이동시키며 검을 휘둘렀다. 찰나에 내 팔과 검이 길게 늘어난 것처럼 잔상을 남기며 상대의 목을 노렸다. 까앙-! 회심의 일격이 아슬아슬하게 노인의 목 앞에서 막혔다. 내 검에 잘려 나간 흰 머리카락 몇 가닥이 허공에 나부꼈다. 그 너머에서 당혹과 분노가 뒤섞인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법이구나.” 꽉 악문 이빨 사이에서 섬뜩한 살기가 배어났다. 그리고 나는 회심의 기습에 실패한 대가로 명백히 한 수 위인 상대의 반격을 맞이해야 했다. “그 사나운 눈알부터 파내주마!” 노인이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매의 발톱처럼 오므리며 내 눈을 노렸다. 그러나 그 손은 도중에 경로를 틀어야만 했다. 어느새 내 뒤를 쫓아온 신강헌의 도가 노인의 머리를 두 쪽 낼 기세로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쩌어엉-! 노인은 신강헌의 도를 옆으로 쳐냈지만 그 무식한 힘에 뒤로 밀려났다. 그사이에 나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누구보고 도망치라느니 개소리야!” 호랑이 같은 눈으로 나를 한번 노려본 신강헌이 다시 기수식을 취하며 말했다. “쫄리면 너나 도망치든가. 미래의 세계제일도 신강헌! 오늘 사파의 마두를 처단하고 협객으로 데뷔한다!” 곧 죽어도 폼부터 잡는 등신 같은 멘트에 나는 킥킥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 처음부터 도망치라고 말하면 신강헌의 성격에 더욱 불타오를 것을 알고 있었다. 즉, 적은 모르게 합공하자는 신호를 보낸 것과 다름이 없었다. ‘불리한 싸움에선 어떻게든 변수를 만들어야지.’ 도망칠 줄 알았던 녀석이 갑자기 끼어들자 상대가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얕잡아봤던 우리가 생각보다 거칠게 덤벼들자 그 당황은 점차 분노로 뒤덮였다. “이런 잡것들이……!” 추악하게 일그러지는 얼굴은 더 이상 노인이 아닌 노괴(老怪)라고 불러야 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내 그의 검을 타고 반투명한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웅-! 검기(劍氣). 완벽하게 정제되지 않은 것을 보니 절정고수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검기 조심해라. 네 두꺼운 도라면 쉽게 잘리지는 않겠지만 가능한 한 부딪치지 마.” “너나 잘하라고.” 캉. 마치 서로 주먹을 부딪치듯 칼끝을 툭 맞댄 우리는 곧바로 좌우로 벌어졌다. 콰가가각-! 노괴가 뿌린 검기가 방금 전까지 우리가 서 있던 바닥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몸에 닿았다면 그대로 두 쪽이 났을 법한 위력이었다. “안 맞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지.” 많은 기력을 쏟아내는 공격에는 반드시 찰나의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빠르게 거리를 좁힌 나는 노괴와 검을 부딪쳤다. 까앙! 검기가 맺힌 칼날과 부딪치는 순간 부드럽게 손목을 비틀어 힘을 흘려냈다. 절대적인 내공이 늘 부족했던 낭인이 검기를 사용하는 무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익혔던 잡기였다. ‘차라리 두꺼운 가검이라 다행이군.’ 날카로운 진검은 어지간한 보검이 아니고서야 검기를 몇 번 견디지 못하지만, 두껍게 만든 연습용 가검은 오히려 더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검과 함께 수십 조각으로 토막 내 죽여주마!” 노호성과 함께 사납게 몰아치는 검은 확실히 야차(夜叉)라고 불릴 만큼 거칠었다. 혼자서 상대했다면 금방 수세에 몰려서 상처를 입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우라아앗!” 노괴의 우측에서 나타난 신강헌이 우렁찬 기함과 함께 풍차처럼 크게 도를 휘둘렀다. 그 무식한 힘을 겪어본 노괴가 후퇴보법을 밟으며 뒤로 물러났다. 짧은 순간 눈이 마주친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날카롭고 빠른 검으로 노괴의 급소를 노리면, 신강헌은 피지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힘으로 상대의 중심을 흔들었다. 까가가강! 단 두 번의 비무였지만, 우리는 서로의 스타일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손발을 맞춰본 적이 없는데도 미리 짜둔 것처럼 역할을 분배했다. “건방진 애송이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을 거센 저항에 노괴가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솜털이 곤두설 만큼 사나운 살기가 터져 나왔지만, 이런 상황에 익숙한 나는 아무렇지 않게 살기를 헤집으며 상대에게 더 달라붙었다. 신강헌도 움찔했던 처음과 달리 저돌적으로 노괴에게 덤벼들었다. ‘조금 부족해.’ 언뜻 우리가 몰아붙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상황을 그리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노괴 또한 우리들의 합공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으니까. 다행히 절정고수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경험과 연륜을 지닌 고수였다. 그 증거로 몸에 상처가 늘어나는 숫자는 우리가 훨씬 더 많았다. 쩌엉! 쩌저저정! 노괴의 검력을 감당하지 못해 신강헌이 몇 번이나 비틀거리고, 내 가검에는 거미줄 같은 실금이 점점 번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승부수를 던지거나 상황을 봐서 도주하는 게…….’ 내가 불리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고민할 때였다. “우라아앗!” 갑자기 신강헌이 기합을 내지르며 무작정 노괴에게 돌진했다. ‘왜?’ 머리론 녀석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몸은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신강헌의 뒤에 몸을 숨겨서 바짝 따라붙었다. “이, 이 멧돼지 같은 놈이!” 당황한 노괴는 뒷걸음질 치며 검을 휘둘렀다. 흐릿하게 맺힌 검기가 신강헌을 일도양단할 기세였으나, 녀석은 피하지 않고 도를 방패처럼 세워 급소만 확실하게 보호했다. 촤악! 노괴가 도중에 급격하게 경로를 튼 검로가 신강헌의 비어 있는 옆구리를 베었고. “끄윽!” 신강헌이 노괴의 검을 몸으로 맞으며 시간을 버는 동안, 나는 옆으로 스치듯 빠져나가면서 노괴의 얼굴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푸화아악! 노괴의 얼굴에서 핏물이 뿜어지며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끄아아악!” 그 즉시 나는 신강헌의 어깨를 뒤로 잡아끌어서 녀석의 상처부터 확인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걸 몸으로 때워, 등신아!” “……등에 난 상처는 무인의 수치니까.”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한 주제에도 준비한 개드립을 치는 걸 보니, 죽을 만한 상처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제야 자세히 보니, 깊게 베인 줄 알았던 옆구리에서 핏물이 조금씩 배어나고 있었지만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찢어진 얇은 검은색 조끼가 보였다. “실은 안에 방검조끼를 입었거든.” “……그렇다고 안 아프냐?” 칼침을 맞아놓고도 히죽 웃어대는 모습에 대가리를 한 대 세게 쳐주고 싶었지만, 그 대신 비틀거리는 녀석을 부축하며 낮게 속삭였다. “지금이다. 튀자.” “뭐?” 나는 대답을 듣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건물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 순간 뒤에서 노괴의 고성이 들려왔다. “놓칠 줄 아느냐-!” 힐긋 돌아보자 뺨이 깊게 베인 노괴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휘이익! 머리 위로 스치는 검기를 피하며 우리는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중간에 계단의 난간을 한 번 붙잡고 속도를 줄인 후, 그대로 미끄러지면서 동시에 아래로 뛰어내렸다. 쿠당탕탕! 바닥을 몇 바퀴를 굴러 충격을 해소하고 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뼈가 부러지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고통스러운지 옆구리를 붙잡고 있는 신강헌을 부축하며 말했다. “뛸 수 있겠냐?” “끅……! 하하하! 미친, 졸라 웃기네!” “이게 웃기냐?” “넌 안 웃기냐? 그리고 혼자 뛸 수 있으니까 놔봐.” 아픈 건지 실성한 건지 모를 신강헌의 웃음소리와 함께, 달밤에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사지를 찢어 죽일 놈들! 거기 서지 못하겠느냐!” 우리는 쫓아오는 노괴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전력으로 달렸다. 창문을 열고 힐끔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위험을 경고했다. “괜히 집 밖에 나오지 말고 무림맹에 신고나 해요!” “무림맹이 오기 전에 너희를 죽이지 못할 것 같으냐! 이참에 거슬리는 것들을 모조리 죽이고 떠날 것이다!” 분노로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듯, 노괴는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뒤쫓았다. 부족한 체력을 내공으로 대신하니 벌어졌던 거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젠장…….” “후우, 후우…….” 설상가상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잘못 들어서면서 앞뒤가 모두 막혀버리고 말았다. “흐흐흐. 네놈들을 죽여서 그 생살을 씹어 삼키고 그 피를 뒤집어써야 이 고통이 가라앉을 것 같구나…….” 완전히 마귀처럼 변한 노괴가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우리는 다시 무기를 들어 올려 마지막 싸움을 준비했다. 까아악! 그 때, 하늘에서 새카만 솜사탕 같은 것이 날아와 노괴에게 덤벼들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노괴가 허공에 마구 검을 휘둘렀다. “크아악! 뭐냐, 이건 또!” 내 눈에만 선명하게 보이는 익숙한 망령. 그리고 우웅- 하고 울리는 기의 파동과 함께 높은 곳에서 사뿐히 내려서는 반가운 빨간 머리.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프리랜서 술법가, 레드래빗. 이곳에 등장.” 나와 신강헌이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김복자를 바라봤다. “뭐야 너?”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점괘가 불길하길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이었으나, 천군만마가 등장한 것처럼 반가운 상황이란 건 분명했다. “크아아아악! 저리 꺼지지 못하겠느냐!” 나는 아직도 까귀를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노괴를 돌아보며 말했다. “셋이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목을 좌우로 꺾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런 내 좌우로 김복자와 신강헌이 나란히 섰다. “야차검이라고 했지? 걸린 현상금이 두둑했으면 좋겠는데.” 24화. 누구한테 배웠느냐? 늦은 밤. 오래된 빌라촌의 골목길에서 갑자기 무인들 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채채채챙! 쇠붙이끼리 부딪치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거친 기합성, 살기가 가득한 고함소리가 잠들어 있던 사람들을 깨웠다. “무, 무슨 소리야?” “무림인들끼리 싸우는 것 같은데…….”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었다. 급하게 경찰이나 무림맹에 신고하는 사람도 있었고, 몇몇 용기를 낸 이들은 창문을 열고 바깥 상황을 살피거나 스마트폰으로 촬영을 시도했다. “방금 들었어? 누가 무림맹에 신고해 달라고 소리 지르고 갔어…….” “가만히 있어! 나중에 보복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불 켜지 말고 조용히 있어!” 반면 귀를 막고 가만히 이불 속으로 숨어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시끄러운 소란이 빨리 잦아들기를 바라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들을 비겁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무림인은 마음만 먹으면 창문을 부수고 들어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무림맹의 협객들, 특수경찰들이 아무리 열심히 뛰어다녀도 그 많은 악인들을 전부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 그렇게 모두가 불안에 떠는 와중에 단 한 사람. 높은 곳에서 고요한 눈길로 싸움을 내려다보는 인물이 있었다. “묘한 조합이구나.” 그는 낡은 항공점퍼에 회색 트레이닝바지를 입고 있었다. 정갈하게 뒤로 모아서 묶은 흰머리, 완고해 보이는 눈가의 주름이 아니었다면 노인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만큼 자세가 곧고 눈빛이 형형했다. “하나는 낭인, 하나는 맹수, 하나는 괴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노인의 시선이 야차검과 싸우고 있는 기무혁, 신강헌, 김복자를 차례대로 훑었다. 내공을 일으켜 청각에 집중하자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상처 때문에 좌측 시야가 불편할 거야. 그쪽을 집중적으로 노려.” “우라아아압!” “물어!” 반쯤 우스갯소리로, 높은 경지에 도달한 무인은 상대의 발걸음만 봐도 그 본성을 짚어 낸다는 말이 있었다. 노인은 마치 세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처럼 혼잣말을 이어 나갔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거늘, 희한하게 조화를 만들어내니 기이한 일이로군.” 셋 모두 약관이나 넘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 보였는데, 그 재능들은 노인이 평생 보아온 무인들과 술법사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출중했다. “특히, 저 아이는…….” 노인은 다른 두 사람을 진두지휘하면서 동시에 선두에서 야차검과 검을 부딪치는 기무혁을 유심히 관찰했다. 까가가강!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무수한 실전경험을 쌓은 무인을 보는 듯했다.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질릴 정도로 약점만 붙들고 늘어지는데, 저보다 훨씬 큰 짐승의 목덜미를 물고서 끝까지 놓지 않는 늑대를 연상케 했다. “허어! 지독하구나, 지독해.”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말과 달리, 노인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도를 휘두르는 맹수 같은 소년은 태생이 겁이 없고 저돌적인 성격이었다. 뛰어난 근골로 큼지막한 도를 휘두르는데 그 위력이 감탄을 연발하게 했다. 괴이를 부리는 소녀는 눈에 두려움이 가득한데도 물러서지 않고, 적재적소에 술법을 사용해 재치 있게 동료들을 도왔다. 둘 다 칭찬에 인색한 노인에게 극찬을 받아도 모자라지 않은 실력을 갖췄다. 다만 기무혁이 그 둘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자꾸만 시선을 잡아끄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저 검술, 묘하게…….” 잠시 어떤 생각이 들었던 노인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작게 중얼거리면서. 그가 유심히 지켜보는 동안 기무혁은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망설이지 않는 저돌성, 과감한 판단력, 물러설 때를 아는 냉정함을 두루 보여주었다. 노인은 어느새 소년의 싸움에 몰입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지! 거기서 조금만 더…….” 그러다 스스로 흥이 오른 것을 깨닫고는 표정을 굳혔다. 문득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오명(汚名)을 뒤집어쓰고 무림맹에서 제명당한 후 20년을 은거하게 만들었던 사건. 심마에 시달려 한동안 운신조차 힘들었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던 일을 떠올리자, 지금도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잠시 심호흡을 한 노인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기무혁을 바라봤다. “……이대로라면 무난히 쓰러뜨리겠구나.” 혹시라도 야차검이 날뛰어 민간인들을 공격하는 등의 사고가 벌어진다면 직접 나설 생각이었다. 허나 상황을 보아하니 자신이 나설 일은 없을 듯했다. 갑작스러운 변수가 생긴 것은 그때였다. “끄아아아악!” 궁지에 몰린 야차검이 상처 입은 짐승처럼 괴성을 지르며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처음에는 자포자기한 것인가 싶었으나, 몰아붙이던 소년들이 잠시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리자 곧바로 품에서 주사기를 꺼내 팔뚝에 꽂았다. “흐으으……!”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야차검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고통을 잊게 만들고 기혈을 들끓게 해 잠시간 내공을 증폭시키는 종류의 약물. 그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거나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부지기수지만, 당장의 고비를 넘기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구나.” 눈매가 사납게 변한 노인이 한 걸음에 딛고 서 있던 건물 옥상을 뛰어넘었다. 휘이익! 단숨에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어 전장으로 접근하는 노인의 손에는 얇은 바늘 하나가 들려 있었다. “꺼져라! 다 죽고 싶지 않으면-!” 약에 취해도 생존본능은 남아있는 건지, 야차검은 내공을 폭주시켜 동귀어진을 노리는 대신 몸을 돌려서 도주를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앞을 가로막는 것은 닥치는 대로 부수고 넘어뜨렸다. “쫓아가자!” 기무혁을 필두로 세 사람이 야차검을 뒤쫓았다. 그리고 노인이 건물들의 지붕을 뛰어넘으며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내공으로 감각을 끌어올린 그의 귀에 세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냥 놔둬도 되지 않아? 내가 알기로 저런 약은 십 분도 못 버텨.” “제정신이 아니라서 마주치는 민간인을 해칠지도 몰라.” “……거기까진 생각 못 했네.” “저게 무슨 약인데? 너희들만 아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세 사람의 대화 내용을 엿들은 노인의 표정이 일순간 부드러워졌다. ‘무늬만 정파인 녀석들보다 훨씬 낫구나.’ 뒷세계의 낭인처럼 싸워대기에 성정 또한 거칠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또 다른 일면을 본 기분이었다. 기꺼운 마음이 든 노인은 저 아이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기로 결정했다. 야차검과의 거리를 충분히 좁힌 그의 손이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피잇! 그의 손을 떠난 바늘이 야차검의 종아리를 관통하여 바닥에 깊숙이 박혔다. 균형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한 수였다. “컥! 누가……!” “우라아아압!” 비틀거리며 주변을 돌아보는 야차검을 신강헌이 뒤에서 태클을 걸어 넘어뜨리고, 김복자가 술법을 펼쳐 몸을 속박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무혁이 실금이 잔뜩 간 가검으로 노괴의 얼굴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빠악-! 온몸을 뒤틀며 발악하던 야차검이 의식을 잃고 힘없이 축 늘어졌다. “하아, 하아……. 방금 그건 뭐였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쉰 기무혁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마지막에 노괴가 갑자기 비틀거린 것, 그리고 뭔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린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이미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호오. 감마저 좋단 말이지?” 때마침 신고를 받은 무림맹의 무인들이 경공을 펼쳐 달려오고 있었다. 노인은 며칠 전부터 자신의 흥미를 자극한 소년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한 가지는 확인해 봐야겠군.” 그리고 잠시 후, 종적을 감춘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 * 우리는 뒤늦게 신고를 받고 출동한 무림맹원들에게 기절한 야차검을 인계했다. “……정말 너희들 셋이서 이자를 생포했다고?” “진짜라니까요! 여기 옆구리에 상처 보여요? 하마터면 세계제일도가 되기 전에 골로 갈 뻔했다니까요!” 무림맹의 무인들에게는 신강헌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본인의 활약상이 어마어마하게 부풀려지고 있었지만, 입을 열기도 귀찮을 만큼 지친 나는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근데 현상금은 얼마예요? 보통 고수가 아니었는데 최소 삼천은 넘죠?” 김복자는 현상금 확인에 나섰다. 정확히 얼마를 받을 수 있느냐, 언제까지 주느냐, 세금은 떼고 주느냐 등등. 그러다 슬쩍 우리를 돌아보더니 계산은 미리 확실하게 해두자며 말했다. “나 없었으면 너희들 모두 죽을 뻔한 거 알지? 그러니까 현상금도 정확히 삼등분 해. 혹시 불만 있어?” 나는 그렇게 하라는 의미로 손을 휘휘 저었고, 신강헌은 현상금에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나 역시 현상금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마지막에 누군가가 개입했어.’ 비틀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모습이 신경 쓰여 야차검이 쓰러진 주변을 꼼꼼히 확인했고, 바닥에 뚫린 바늘구멍 하나를 찾아냈다. 얼마나 깊게 파고들었는지 바늘은 꽁무니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만약 그 바늘이 야차검이 아닌 우리 셋 중에 한 명을 노렸다면……. “조사는 끝났으니 이만 귀가해도 된다. 포상금 관련해서는 따로 연락이 갈 거야.” 나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을 머릿속에서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사를 마치고 경찰서를 나와서 셋이 마주 보는데, 전부 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고생들 했다. 잘 들어가고 나중에 보자.” “징글징글해서 한동안은 안 보고 싶은데.” “피곤해 죽겠어. 할 얘기 있으면 나중에 톡으로 해.” 그렇게 각자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학생! 괜찮아?” “……아저씨?” 최 씨 할아버지를 찾아가 보라며 공원에서 주소를 알려준 아저씨였다. 어떻게 보면 이 사달이 나게 만든 원흉이었지만, 원망스런 마음보다는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날 향해 다가오는 아저씨의 얼굴에 미안함이 가득했으니까. “최 씨 할아버지가 범죄자 무림인이었다며? 괜히 나 때문에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 어이쿠! 이거 상처가 한둘이 아닌데 병원부터 가야 하는 거 아냐?” 호들갑을 떨며 내 몸을 여기저기 더듬는 아저씨의 주책맞은 손길을 밀어내며 말했다. “죄송한데요. 제가 지금 좀 피곤해서…….” 그 순간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설명할 수 없는 찝찝함이랄까. 낭인 시절 뒤통수치는 놈들을 수없이 겪어보며 생긴 특유의 싸한 감각이, 피부를 간질거리며 신호를 보내왔다.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야차검은…… 최 씨가 아니었어.’ 무림맹에서 그의 신상명세를 확인했을 때 확인한 성씨는 이 씨였다. 차가워진 내 시선을 느낀 아저씨가 뒤로 물러나며 멋쩍게 웃었다. “확실히 감이 좋구나.” “당신…….” 동시에 평범하게 배 나온 중년 아저씨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엉거주춤하게 굽었던 허리가 펴지고, 어딜 가나 볼 수 있었던 평범한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축골공(縮骨功). 뼈와 관절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인상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무공으로 주로 살수들이 익히는 수법이었다. 순식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상대가 나를 꿰뚫을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눈치를 챘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마. 검술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내가 찾던 검마라는 것을. 25화. 두 사람뿐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마. 검술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그 질문을 하는 검마와 눈이 마주한 순간, 절대로 경솔하게 대답해선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라.’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은거하기 위해 살수무공이라고 멸시받는 축골공까지 익힌 인물이었다. 내 대답 여하에 따라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종적을 감출 수도 있었다. 잠시 대답을 망설인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런 곳에서 가볍게 나눌 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자리를 옮겨도 되겠습니까?”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검마의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스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너라.” 나는 검마의 뒤를 따라서 야차검과 싸웠던 오래된 빌라촌으로 다시 향했다. 놀랍게도 그의 은거처는 야차검이 숨어지내던 옥탑방에서 무척이나 가까운 곳에 있었다. 창문 밖으로 야차검과 싸웠던 옥탑방 건물이 보일 정도였으니까. “누추하지만 들어오너라.” 나는 현관에 서서 최소한의 물건만 갖추고 있는 삭막한 공간을 잠시 둘러봤다. ‘영상에서 봤던 곳이 맞아.’ 낡은 벽지와 곰팡이 핀 천장, 퀴퀴한 냄새가 나는 집. 영상을 수백 번 돌려보며 익숙해졌던 벽지 위의 얼룩을 찾았을 땐, 반가운 마음에 입가에 슬쩍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거기 아무 데나 앉거라.” “……네.” 잠시 후,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 온 검마가 거실에 소반을 펼쳐놓고 나와 마주 보며 앉았다. 집 안을 자꾸만 두리번거리는 내 모습에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추레한 집은 살면서 처음 본 모양이지. 신기하더냐?” “……그것 말고 다른 것 때문에요.” “다른 것?” “이곳에 사는 사람이 정을 붙이지 않고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집이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곡을 찔렸는지 검마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앳된 얼굴은 약관도 채 되지 않은 듯한데, 말투나 행동하는 것을 보면 못해도 마흔은 먹은 애늙은이 같구나.” 내가 회귀를 통해 검마의 미래를 알고 있다면, 그는 연륜과 안목으로 내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강렬한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좀 어른스러운 편입니다. 부모님도 종종 그런 말씀을 하시거든요.” “넉살도 좋구나. 헌데 나를 따라오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더냐?” 상대가 나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도, 막상 무림고수의 형형한 눈빛과 마주하면 마른침이 저절로 삼켜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꿀꺽……. 하지만 나는 애써 웃으면서 허세를 부렸다. “저를 해칠 거였으면 번거롭게 집까지 데려오지 않고 바늘을 사용하셨겠죠. 야차검한테 그러신 것처럼요.” 검마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며 눈매의 잔주름이 깊어졌다. 그의 누그러진 눈빛은 물컵을 쥐고 있는 내 두 손을 향하고 있었다. “떨리는 손이나 감추고 허세를 부려야 할 것이 아니냐?” “아, 그게 무섭지 않다는 말은 아니라서요.” “뭐라? 하하하!” 내 솔직한 대답 덕분인지 조금은 가벼워진 분위기.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저도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검마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반응을 일방적인 질문과 답변을 듣겠다는 것이 아닌, 나와 대화를 하겠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다. ‘지금부터가 중요해.’ 지난 일주일간 검마에게 검술 지도를 부탁하고자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녔다. 전생의 내 검술의 근간이 되어준 검법의 창시자이자, 전성기에는 한국무림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던 검의 달인. 그런 인물에게 지도를 받는다면 전생의 나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갈 길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전에 반드시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저희를 일부러 야차검에게 보내셨던 건가요?” “맞다.” “……이유를 여쭤봐도 됩니까?” “이독제독(以毒制毒).” “예?” 검마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야차검이 살던 옥탑방을 바라보는 것인가 했는데, 그 공허한 눈동자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닿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검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를 찾는 자들이 있다. 너희를 그놈들이 보낸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에서 나는 몇 가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이독제독이라는 말까지 나온 것을 봤을 때, 검마를 찾는다는 자들과 검마는 적이라고 봐도 무방한 관계일 거라는 것. 두 번째는 검마가 이십 년이나 은거하게 된 이유 또한 그들과 관계되어 있지 않을까라는 것. “만약 제가 그놈들이 보낸 인물이었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셨습니까?” “베었을 것이다.” 담백한 한마디의 대답이 돌아왔다. 검마는 살기를 드러내지도, 표정을 일그러뜨리거나 목소리를 낮게 깔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흉포한 기세를 드러내며 나를 죽이겠다고 소리치던 야차검보다 훨씬 더 두렵게 느껴졌다. “……진심이시군요.” “여기까지 데려와 거짓을 말하겠느냐. 그렇다고 겁먹을 것 없다. 네가 그자들의 끄나풀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니 이리 데려온 것이다.” 검마는 내 컵에 보리차를 더 채워주며 말을 이었다. “내 오해로 위험한 일을 겪게 만든 것은 사과하마. 돌아갈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영약을 챙겨줄 터이니, 가져가서 복용하면 내공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검마의 담백한 사과와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한 가지만 더 여쭙고 싶습니다. 일부러 야차검과 가까운 곳에 머물고 계셨던 겁니까? 놈이 사람들을 해치면 나서시려고요?” 검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느껴지는 기도로 보아 사파의 잡배이겠거니 했을 뿐이지. 지금까지는 잠잠했는데, 너희와 만나면서 억눌러왔던 본성이 폭발한 것 같구나.” 그만한 망종인 줄 알았다면 진즉 내 손으로 베었을 것이야-, 라고 뒷말을 작게 중얼거리며 검마는 차를 홀짝였다. 사마외도와 싸우는 데 있어 타협이 없고 손속이 잔혹해 마(魔)라는 불명예스러운 글자가 별호에 들어간 인물. 하지만 내 기준에서 검마는 협객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올곧은 정파의 무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검마는 조금 쓸쓸해 보이지만, 눈빛은 또렷했고 신체도 무척이나 강건해 보였다. 그가 불과 5년 후에 폐인이 되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당신은 그렇게 죽어야 할 인물이 아니야.’ 나는 여전히 검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미래를 다시 보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표정이 복잡해 보이는구나.” “생각이 많아져서요. 더 묻고 싶은 것도 많은데…….” 검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내가 묻겠다. 너는 누구에게 검을 배웠느냐? 아니, 질문을 바꾸지.” 조용한 시선이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인데, 몇 번이나 잘 벼려진 칼에 베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는 어떻게 내 검술을 익히고 있느냐?” “…….” 나는 문득 이 대화가 일종의 논검비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을 어떻게 휘두르고 발을 어디로 움직일지, 얼마큼의 힘과 내공을 실어 초식을 펼쳐낼 것인지. 가벼운 대화를 통해 서로를 탐색하고, 그렇게 파악한 정보를 바탕으로 상대의 속내를 알아내는 과정이 그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검마도 방금까지의 대화를 통해서, 그리고 내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확신을 가졌겠지.’ 내가 자신의 검술을 익히고 있다고. 그러한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질문이 바뀐 것일 터였다. 긴장감에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들었다. 지금 이 국면에서 나는 명백히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오래전에 책을 내신 적이 있었죠. 무림맹의 검술사범이실 때, 검술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다룬 책을 출간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검마가 보리차가 든 컵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조금은 놀란 눈으로 그가 중얼거렸다. “삼십 년도 더 된 책이거늘…….” “절판된 책을 어렵게 구해서 읽었습니다.” 검마가 남긴 영상을 보고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후, 나는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찾아봤다. 그러다 절판된 도서 한 권을 어렵게 구할 수 있었다. 『검으로 살다』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어린 시절 처음 검을 잡고 청년기를 거쳐 중년이 되기까지, 최건이라는 사람이 일생 동안 어떻게 검을 대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것을 닳도록 읽으며 최건이라는 검객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당시 막혀 있던 검술에 어느 정도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독한 삶을 버텨나가는 데 있어서도 많은 위안이 되었던 그 책은…… 과거로 돌아온 후에도 다시 구해서 책장에 꽂아두었다. “당신과 관련된 너튜브, 기사, 모든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갑자기 은퇴하시고 종적을 감춘 이유까지는 모르지만, 그 전까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 그래서 검마 최건은, 김복자와 마찬가지로 내게 큰 은인이었다. 나는 진심을 가득 담아서, 준비해 온 최강의 초식을 그에게 펼쳤다. “저는 검마 최건의 열렬한 팬입니다.” “……허.” 저토록 고절한 검객이 당황한 표정을 보니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곧바로 연환격을 펼쳤다. “그러니까 제게 검을 지도해 주십시오.” “이 무슨 뻔뻔한 놈이……. 거절이다, 이놈아!” 단칼에 거절하는 검마에게 나는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요?” “그야 네 말에 거짓과 진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고작 내 책을 읽고, 몇 개 안 되는 영상과 기사를 읽은 것으로 내 검술을 훔쳤다고? 그게 말이 되느냐!” 날카로운 반박이었지만, 내가 그에게 직접 검술을 배우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여기서는 조금 뻔뻔해질 필요가 있었다. “동경해서 닮은 모양이죠. 상성이 잘 맞든가요. 오히려 제자로 삼기에 더 좋은 거 아닙니까?” “허어! 뻔뻔하기가 짝이 없구나!” “정 궁금하시면 가르쳐보시면 알 거 아닙니까?” “진짜 뭐 이런 놈이…….” 검마는 나를 한 대 쥐어박을 것처럼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반대로 내가 물으마. 왜 내게 온 것이냐?” “예?” “네 재능이면 원하는 문파는 어디든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도 모르지 않을 테지. 근골뿐만 아니라 체질 또한 그토록 뛰어나니…… 팔대문파가 전부 군침을 흘리고 있을 게다.” 내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팔대문파를 언급하는 순간 검마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제 체질을 파악하셨습니까?” “아까 만져보고 알았다. 기계만큼 정확하지는 않아도 대충은 가늠할 수 있지. 뉴스에서 네 이름을 듣지 못한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 중년 아저씨로 변장해 다가와서 상처를 봐주는 척 호들갑을 떨 때, 내 근골과 체질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토록 뛰어난 근골과 체질을 가지고 있는 후기지수가 무엇이 아쉬워서, 은퇴한 지 20년이 지난 퇴물에게 가르침을 청하느냔 말이다. 너는…… 나보다 뛰어난 스승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야.” 씁쓸한 미소를 띤 검마의 자조적인 말을 나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검마 최건도 무척이나 고집스러운 사람이지만, 나 또한 고집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제 검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은 세상에 단 두 사람뿐입니다.” “……두 사람?” 순간 검마의 눈썹이 꿈틀댔다. 스스로를 퇴물이라고 했지만, 그 순간 자존심이라도 상한 걸까. 하지만 이 뒤에 나올 이름을 들으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은 검마 최건. 다른 한 사람은 세계제일인 리차드 한.” “……뭐라고?” “이 둘 말고는 딱히 제가 배울 만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풉, 푸하하하하하-!” 방 안이 흔들릴 정도로 통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26화. 전부 익힐 수 있는 “하하하하하하-!” 뭐가 그토록 웃긴 건지, 검마는 고개를 치켜들고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한참을 웃은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나를 바라봤다. “너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나와 리차드 한뿐이라고? 그리 오만방자한 말을 당당하게도 하는구나. 허나 마냥 밉지도 않으니…….” 검마는 뒷말을 삼켰지만, 나는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면 진심이니까요.” 한국에 수많은 검의 고수가 있지만, 내 검술의 방향성과 결이 같다고 느낀 것은 검마 최건의 검술뿐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부탁했다. “제게 검을 지도해 주십시오. 제가 한 말이 정말 오만방자하기만 한 건지, 아니면 그만한 자격이 있는지 직접 판단해 주십시오.” “불가(不可)하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띤 검마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손에서 검을 놓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니 너도 더 이상 나를 설득하려 들지 말거라.” “말도 안 돼…….” 나는 그제야 집 안 어디에도 검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막연히 어딘가에 감춰두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예 검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검마라는 인물이 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 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투명한 눈은 진심을 비추고 있었다. “말이 안 된다니? 내가 너를 속이려고 거짓이라도 말했다는 것이냐?”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검에 평생을 미쳐 살았던 사람이 어떤 심정으로 손에서 검을 놓았을지,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혹시 은거한 이유와 관련된 것일까? 검을 놓아야 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이토록 당황할 줄은 몰랐구나. 허나 사실이다. 야차검이라는 잡배를 쫓을 때도 검이 아닌 바늘을 사용한 이유 또한 그것이다.” 내 표정에 혼란스러운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는지, 검마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검이 지긋지긋해진 게다. 더 이상 만지고 싶지도, 쳐다보고 싶지도 않으니, 누굴 가르친다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지. 그러니 돌아가거라.” 저건 거짓말이다. ‘당신은 몇 년 후에 평생을 갈고닦은 검술을 아무런 조건 없이 세상에 전부 공개했어. 자신의 검술이 사라지는 것이 그만큼 아쉬웠던 거야.’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나는 검마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믿었다. 비록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검마에게 포권을 취했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늘은?” 처음부터 쉽게 설득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최고의 검술 스승을 모시는 일.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될 때까지 문을 두드리고 설득할 생각이었다.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모레도, 그다음 날도 계속 오겠습니다. 허락해 주실 때까지 매일 올 겁니다.” “……쓸데없는 짓이래도. 백번을 찾아와도 내 대답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도 오지 말라고는 안 하시네요?” “거참…….”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보던 검마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너는 검을 위해 무엇까지 버릴 수 있느냐?”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쓸쓸한 눈빛을 한 검마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눈에는 짙은 회한과 후회가 어려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버렸다. 젊음과 청춘을 바쳤고, 부와 명예를 버렸고, 친우를 외면했고, 가족마저 저버렸다. 오직 검 한 자루만을 바라보며 살았지.” “…….” “정신을 차려보니 혼자더구나. 그럼에도 내가 바라던 경지에는 닿지 못했다. 너도 그리할 각오가 돼 있느냐?” 내 각오를 묻는 질문이었지만, 나는 그의 말에서 나의 지난 삶을 떠올렸다. 전생의 나도 검마와 비슷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세계제일인이 되고 싶다는 꿈으로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그 목적을 잃고 하루하루를 살아남기에 바쁜 낭인이 돼 있었다.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보냈고, 한 자루의 검 말고는 마땅히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와 내가 다른 점은, 나는 운이 좋게도 두 번째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생의 각오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버리지 않을 겁니다.” “뭐라?” 미간을 좁히는 검마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어렸다. 하지만 내 대답은 농담도 객기도 아니었다. “가족도, 친구도 버릴 수 없습니다. 부와 명예에 큰 관심은 없지만 그것도 굳이 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것들이 내 가족과 친구를 보호해 줄 힘이 될 테니까요.” “어설프다! 그런 마음으로 높은 경지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만큼 더 절실하게 노력할 겁니다. 아무것도 버리지 않을 수 있도록 죽을힘을 다해서요.” 더 이상 혼자가 되는 것은 싫으니까. 쓸쓸하고, 고독하고, 텅 빈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저는 반드시 행복해질 겁니다. 제 주변 사람들과 다 같이요.” “…….” 잠시 말없이 나를 노려보던 검마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의 눈이 조금 충혈돼 있었다. “고얀 놈. 그딴 대답이나 듣자고 물은 줄 아느냐? 그런 나약한 태도로 검객으로서 대성을 이룰 성싶으냐!” 뒷말은 고함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묘하게도 두렵거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검마가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처럼 느껴져,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제가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세계제일인이 될 수 있게, 나중에 삶을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썩 꺼지거라.”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비록 거절당하긴 했지만, 그를 만나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해서 한결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네가 아무리 부탁해도 검술을 가르칠 생각은 없다. 다만…….”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등 뒤에서 혼잣말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고민이 가득한 표정의 검마가 나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내 검술을 어설프게 따라 하다가 망신당하는 꼴을 보긴 싫으니…… 한 번씩 찾아오면 자세 정도는 봐주도록 하마.” 그 순간 나는 환하게 웃으며 검마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스승님!” “……스승은 무슨. 밤이 늦었으니 썩 꺼지거라.”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검마는 홱 돌아서서 먼저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돌아서는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맺힌 미소를 보았다. * * * 다음 날.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검마의 집으로 달려갔다. 혹시라도 밤새 마음을 바꾸고 종적을 감추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현관문을 노크했다. “스승님. 저 왔습니다!” “……열려 있으니 그냥 들어오면 된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전날과 같은 항공점퍼에 트레이닝바지 차림인 검마가 보였다. 신문을 읽고 있었던 건지 바로 옆에 접어놓은 신문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효자손이 하나 보였다. ‘저거 설마…….’ 얇은 대나무로 만든 효자손이 날카로운 검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침을 꿀꺽 삼킨 나는 효자손에 두었던 시선을 검마에게로 옮기며 말했다. “기다리고 계실까 봐 학교가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왔습니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구나. 그리고 누가 네 스승이냐? 내 분명 검술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자세를 봐주시기로 하셨으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앞으로 제게 큰 도움이 될 테니 마땅히 스승님이라고 불러야죠.” “허? 자신감이 아주 하늘을 찌르는구나.” 작게 혀를 차는 그에게 실금이 간 것을 대신해 챙겨온 예비용 가검을 보여주며 말했다. “몸부터 풀까요?” “……네 멋대로 해라. 옥상이 비어 있으니 거기 올라가서 휘두르든지.” “알겠습니다.” 곧바로 옥상으로 올라간 나는 가볍게 몸부터 풀기 시작했다. 뒤늦게 옥상으로 따라 올라온 검마는 널찍한 나무 평상에 앉아 나를 구경했다. “…….” 무심한 표정만 보면 내가 펼치는 검술에 아무런 흥미도 없는 듯했다. 내 검술을 보다가 말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거나 들고 온 신문을 읽기도 하고, 효자손으로 날벌레들을 툭툭 때려잡기도 했다. ‘딱히 지적할 부분이 없다는 거겠지.’ 나는 상관하지 않고 평소처럼 검을 수련했다. 지난 생에 갈고닦으며 정립한 것들, 그리고 앞으로 발전시키고 싶은 부분을 중점적으로 훈련했다. 그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검마가 지나가듯 말했다. “검을 쥐는 습관이 거칠게 들었구나. 그렇게 쓰다간 손목이 금방 상한다.” 즉시 멈춰 선 나는 검마를 돌아보며 물었다. “제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하고 있는데…… 파지법을 바꾸는 것이 좋을까요?” “굳이 바꿀 정도는 아니다. 방금 전 동작을 할 때 어깨에 들어가는 힘을 조금만 풀어봐라.” 휘익-. “이렇게요?” “…….” “혹시 제 동작이 틀렸습니까?” 얄미울 정도로 잘 알아듣는군, 투덜거리듯 작게 중얼거린 검마가 다시 신문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칭찬에 기분 좋게 미소 지은 나는 다시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곧 새로운 지적이 들어왔다. “보폭이 크고 급하다. 머릿속에서 상대를 그리고 움직이는 중이더냐?” “맞습니다. 그걸 어떻게…….” “모든 훈련을 실전처럼 한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동작에 우선 집중하고, 끝난 뒤 잠시 멈췄다가 다시 해보거라.” 조언을 머릿속에 새기고 또 검을 휘둘렀다. 스스로도 조금 더 나아진다는 느낌이 들자 이번에는 다른 조언이 귀에 들어왔다. “빠르게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같은 동작을 열 배 느리게도 할 줄 알아야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법이다.” “네!” 툭툭 한마디씩 내뱉는 말마다 지금의 내게 꼭 필요했던 조언이었다. 그렇게 검마의 조언대로 방식을 조금 바꾼 것만으로, 평소보다 몇 배는 힘들고 숨이 빠르게 가빠졌다. “후우, 후우우…….”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던 나는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리자마자 멈춰 섰다. 팔짱을 낀 채 진지하게 나를 지켜보던 검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갑자기 멈추는 것이냐?” “저녁은 먹고 해야죠.” 씨익 웃은 나는 가방에서 부모님에게 부탁드려 3인분을 준비해 온 도시락을 꺼냈다. “저녁 도시락을 싸 왔거든요. 같이 드시죠.” “나는 됐으니 너 혼자 먹어라.” 평상에서 일어나 집으로 내려가려는 검마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말했다. “부모님이 스승님과 함께 먹으라고 아침부터 만들어주신 건데……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드셔주시면 안 될까요? 남겨서 가져가면 섭섭해하실 겁니다.” “…….” 결국 검마는 못 이기는 척 다시 평상에 앉았다. 우리는 평상에 마주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도시락은 조금 미지근했지만, 보온통에 담아온 미역국은 아직까지 따뜻한 온기를 담고 있었다. 별다른 말 없이 수저를 움직이던 검마가 문득 내게 물었다. “부모님께는 내가 누군지 말씀드렸느냐?” “자세히 말씀드리진 않았습니다. 스승님께서 아는 사람이 늘어나길 원치 않으실 것 같아서요.” 내 진지한 대답에 검마가 픽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말해도 상관없다.” “예? 하지만 스승님을 찾는 자들이 있다고…….” “놈들이 마지막으로 날 찾았던 것이 십 년 전이다. 내가 예민하게 반응해 너희를 의심했던 것이지, 실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야.” 무림에서 검마 최건은 오래전에 잊힌 이름이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개의치 않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저 그럼…… 어제 같이 스승님을 찾아다녔던 친구들에게도 말해도 될까요? 절 돕느라 고생했는데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요.” “마음대로 해라.”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하며 전날 나누지 못했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주로 내가 이야기를 했고, 검마는 간단히 대답하거나 간혹 질문을 던졌다. “네 근골과 체질은 대충 알겠고, 오행적성은 어떻게 되느냐?”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을 통과하면 본격적으로 내공심법을 익혀야 하는데, 적성에 따라 익힐 수 있는 심법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물론 근골이나 체질만큼은 아니지만, 무인에게 있어 오행 중 어떠한 속성에 적성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중요한 부분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오행에 전부 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보거라.”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오해가 없도록 뜻을 명확하게 해서 다시 말했다. “저는 오행의 무공을 전부 익힐 수 있는 체질입니다.” 그 순간 젓가락을 툭 하고 내려놓은 검마가 경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오행적성자(五行適性子)란 말이냐?” 누가 봐도 단순히 놀란 것 이상의 반응이었다. 27화. 네가 기무혁이구나 “그럼 내일 또 뵙겠습니다!” 땀범벅이 된 기무혁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간 후. 홀로 옥상에 남은 검마 최건은 멀어지는 소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구나.” 기무혁이 자신의 검술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땐 놀라기는 했어도, 불가능한 일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무림맹에 검술사범으로 있을 때 가르친 제자들만 수백이 넘었으니까. 그중 적어도 열 명은 직전제자라고 불러도 될 만큼 많은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어쩌면 제자의 제자일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작은 인연이나마 닿았으니, 선물이라도 들려서 보낼 생각으로 집으로 데려왔는데. “내가 직접 가르친 그 누구보다 내 검술을 깊게 이해하고 있었지. 심지어 그 녀석보다도 더……. 허억!” 불쑥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올라 호흡이 가빠졌다. 그와 같은 고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최건은 익숙한 듯 깊게 심호흡을 하며 어지러워지려는 마음을 다스렸다. “……그놈의 제자였다면 감히 나를 찾아올 생각도 못 했을 터.” 섬뜩한 눈빛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최건은 욱신거리는 어깨의 오래된 상처를 주물렀다.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질 겁니까! -당신의 무모한 계획으로 젊은 무인들이 수십 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습니까? -무림맹의 작전이 사전에 유출되었다고? 증거도 없으면서 그걸 변명이라고 대는 건가! -이 살인자! 위선자! ……20년이 넘게 지난 일이건만, 지금도 최건은 과거의 일로 악몽을 꾸곤 했다. 마약과 사술로 짧은 시간에 세력을 크게 떨친 사교의 무리를 토벌하기 위해 펼쳤던 무림맹의 비밀작전. 검마 최건은 사교의 간부들을 일거에 척살하기 위해 파견된 정예부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미리 기다리고 있던 적의 함정에 빠져 대부분의 부대원을 잃고 간신히 생환했다. -함정이 있었습니다! 내 책임을 부인하지는 않겠으나, 정보를 유출한 첩자를 밝혀낼 때까지는 이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구차한 변명이로군!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소! 팔대문파의 문주들을 필두로 많은 이들이 최건에게 책임을 물어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었다. 비난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허나 정보를 유출한 첩자를 색출할 때까지는 자리에서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을 손가락질하던 수많은 사람들 편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증언하겠습니다. 검마 최건의 무리한 작전 강행으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정보 유출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모두 검마 최건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어떻게 네가……! 십 년 가까이 친자식처럼 생각하며 가르친 제자였다. 지금은 팔대문파의 장로 중 한 명이 된 제자의 증언이 있던 날. 최건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기를 포기하고 무림맹을 떠났다. “그날 이후로 누구에게도 검을 가르치지 않겠다 맹세했거늘…….” 몸에 새겨진 상처는 흉터를 남기고 아물었지만, 마음에 새겨진 심마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최건의 정신을 갉아먹는 중이었다. 심마를 억지로 털어내기라도 하듯 고개를 저은 그는 멀어지고 있는 기무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웬 맹랑한 꼬마가 나타나 그 맹세를 깨버리게 할 줄이야.” 기무혁이란 아이는 자신이 누구에게도 가르치지 않은 것까지 이해하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젊은 검객들을 가르칠 땐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아 알려주지 못했던 것들. 심지어 몇몇 부분에서는 자신이 오래 고민했던 문제들에 대한 실마리가 얼핏 보일 정도였다. ‘정말로 혼자서 저만의 검술을 정립한 것일까?’ ‘그 오래된 책과 영상만을 보고?’ ‘사실이라면 천재라는 말조차 우스운 재능이 아닌가?’ 기무혁이 미래의 자신이 완성한 검술을 익혔다는 것을 모르는 최건은 그저 귀신에 홀린 기분일 수밖에 없었다. “내 살면서 숱하게 괴이를 마주하고 베어보기도 했지만…… 이보다 괴이한 일은 겪어보지 못했거늘.” 최건은 헛웃음을 흘렸다. 기무혁의 모습은 이제 어둠 속으로 사라져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몸을 돌린 그가 손에 쥔 효자손을 허공에 가볍게 그었다. 사악- 선선해진 밤공기에 얇은 균열이 생겼다가 흩어졌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도 고수의 손에 들리는 순간 날카로운 검이 되는 법. 이 순간 검마의 손에 든 효자손은 절세보검이 부럽지 않을 만큼 날카로웠다. 사악. 사아악- 최건은 기무혁이 수련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검을 뻗고 휘둘렀다. 기무혁이 보았다면 입을 벌리고 정신없이 빠져서 보았을 만큼 완벽에 가까운 검술. 단 한 번 보고 외워버린 검로를 그대로 따라 하면서, 검마는 어린 검객이 쌓아 올린 노력과 마음가짐을 가늠해 보았다. “과연…….” 검을 아래로 내린 최건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지만 소년을 지도하면서 느꼈던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가르칠 것이 많지 않다.’ 기무혁이란 아이는 큰 틀에서는 이미 손 볼 곳이 없을 만큼 완성된 무인이었다. 다만 몸을 혹사하는 몇 가지 나쁜 버릇과 거칠게 밴 습관, 지나친 승부욕만 덜어내주면 금방 자신의 길을 찾아낼 터였다. ‘과거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최건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과 비교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대평가였다. 기무혁은 젊은 시절의 최건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저 아이와 비교할 만한 인물은…… 어처구니없게도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한국은 너무 좁습니다. 저는 세계로 비무행을 떠날 겁니다. 자신에게 검술을 배운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인사를 하고 떠난 청년. 세계제일인. 리차드 한을 떠올리게 하는 재능이었다. “그토록 대단한 녀석이…….” -저는 검마 최건의 열렬한 팬입니다. “흠흠!” 불쑥 기무혁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 헛기침이 나왔다. 늙어서 주책도 아니고, 그 말을 듣고 당황해서 하마터면 얼굴이 붉어질 뻔하지 않았던가. “뻔뻔한 녀석. 그런다고 홀딱 넘어갈 줄 알고?” 눈을 가늘게 뜬 최건은 고개를 홱 돌려 기무혁이 떠난 방향을 노려보았다. 더 이상 기무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마치 소년이 보이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길을 헤매지 않게 옆에서 지켜봐 주기만 해도…….” 한국을 넘어 세계로 진출하는 또 한 명의 절세무인이 탄생하지 않을까. 최건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천성이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무림맹의 검술사범을 맡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재능 있는 후기지수가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의 큰 기쁨 중 하나였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 정도라면.” 자신은 이루지 못했던 것을 저 소년이 대신 이루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버리지 않을 겁니다. 소년이 그토록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던 것처럼, 아무것도 포기하거나 잃지 않고도 이룰 수 있도록 말이다. “게다가 오행적성자이기까지 하니…….” 누구나 오행의 기운을 조금씩은 품고 있지만, 무공에 익힐 만큼 적합도를 갖추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술법사나 도인들 중에는 몸 안에 오행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수십 년씩 수련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무림인의 경우, 체질 자체가 떨어지는 경우에는 오행적성자라고 해도 큰 의미는 없었다. 하지만 체질이 뛰어난 경우에는……. ‘오행신공에 대해서는 벌써 말해줄 필요는 없을 터.’ 바위를 깎아내듯 단련한 근골과 천운을 타고난 체질. 여기에 올바른 지도가 더해진다면 과연 어떠한 검객이 탄생할까? 주먹을 꽉 쥔 최건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허. 늦바람이라도 든 기분이로군.” 최건은 옥상에서 내려와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평소와 다름없이 삭막하기만 한 공간. 냉장고 위에 처음 보는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 있었다. -후식으로 챙겨온 샌드위치랑 수박 넣어놨으니 최대한 빨리 드세요! 냉장고를 열어보니 가게에서 파는 것처럼 잘 포장된 샌드위치와 반찬통에 먹기 좋게 잘라놓은 수박이 담겨 있었다. “이건 또 언제…….” 내려가는 길에 냉장고에 몰래 넣어둔 것일까? 최건은 한참 그 글씨를 바라보다가 수박을 꺼내 먹었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건지 모를 수박이었다. “영악한 녀석. 반찬통을 가지러 내 집에 들락날락하려는 수작을 모를 것 같으냐.” 그러나 퉁명스레 내뱉는 말과 달리, 검마 최건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수박이 달구나.” 지난 이십 년간 사람과 교류하지 않고 살아온 노인은 오랜만에 내일이 기다려졌다. * * * 다음 날. ‘오행적성자가 뭘까?’ 나는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생각했다. 아직은 무더위가 기승인 고등학교 3학년 초가을의 교실. 학업에는 별로 흥미가 없지만, 그래도 수업 시간에 가능한 한 딴짓은 안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쉬는 시간만 되면 저절로 며칠간 겪은 일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올랐다. ‘분명 크게 놀란 기색이었어. 오행을 다 익힐 수 있는 체질이 특이한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그렇지만 부정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생각이 복잡해진 표정이었는데……. ‘내 체질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정보가 있을지도.’ 그 외에도 전날 지도를 받았던 내용을 복기하거나, 검마와 팔대문파의 관계, 앞으로 어떻게 훈련할지를 고민하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내 주변으로 점점 사람이 몰리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은 이유였다. “저기, 무혁아.” “……응?”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고등학교 동창이 말을 걸어왔다. 꽤나 드문 일이었다. 무림인 지망이 아닌 친구들과는 대화할 주제가 마땅치 않아 늘 혼자 조용히 학교에 다녔으니까. ‘1학년 때는 몇 명 있었던 것 같은데…….’ 자기도 무림인을 지망한다며 친하게 지내자던 말투가 거친 친구들이 몇 있었다. 한 번씩 대련을 한 이후로는 전부 학업에 집중하겠다고 해서 멀어졌지만. 그 후로 웬만해서는 학교에서 대화를 나누는 일이 잘 없는 편이라, 나는 최대한 친절한 미소로 친구를 바라봐주었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미, 미안해! 방해해서…….” “괜찮아. 그래서 용건이 뭐지?” “이, 이거 때문에…….” 왜인지 내 눈을 못 마주치고 잔뜩 목을 움츠린 친구가 손에 든 스마트폰을 내게 보여주었다. “무혁아. 이거 너 맞아?” “……아.” 어쩐지 오늘따라 사방에서 나를 힐끔거린다 싶더라니. 너튜브에 올라온 동영상에 내가 야차검과 싸우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카메라가 움직임을 쫓느라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한 번씩 멈춰 설 때마다 보이는 내 얼굴은 충분히 누군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잠깐만 줘봐.” 댓글을 확인하자 이미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와 이름이 나와 있었다. 내 스마트폰을 확인하자 메신저톡이 꽤 쌓여 있었다. 대부분 아버지, 신강헌, 김복자가 보낸 것들이었다. “……그래. 나 맞아.” 부정해 봤자 믿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쳤다! 너 이렇게 셌어?” “이 정도면 팔대문파에서 스카웃 제안 들어오는 거 아냐?” “이거 올라온 지 몇 시간 안 됐는데 조회 수 벌써 십만 넘겼어. 오늘 안에 무조건 오십만도 넘길 듯.” “…….” 나도 친구들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고 싶었지만,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한 명씩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곧 썰물처럼 주변의 인파가 흩어졌다. ……나랑 친해지고 싶었던 거 아니었나? 조용해진 김에 다시 너튜브 영상을 보면서 댓글들을 확인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커서 조금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오늘은 집에 먼저 들렀다가 스승님을 만나러 가야겠다.’ 모든 수업이 끝난 후. 나는 종례를 마치자마자 3층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휘익! 귀찮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빨리 집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내 대응이 조금 늦었는지, 아니면 상대의 대응이 빨랐던 건지. 학교 정문 앞에 한 대의 리무진이 떡하니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저 로고, 창천검문 아니야?” “맞네. 창천검문이 왜?” “그 영상 때문인가? 우리 학교 선배님이랑 무림인이랑 싸우는 거.” 웅성거리며 지나가는 학생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나는 저 리무진에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창천(蒼天)이라는 한자 위에 눕혀져 있는 검 한 자루. 팔대문파 중 하나인 창천검문의 로고가 차 옆면에 붙어 있었으니까. “네가 기무혁이구나?” 리무진에서 내린 여자가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어깨까지 오는 단발에 팔다리가 긴 모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 포멀한 정장을 차려입고 있지만, 그녀가 평범한 회사원이 아니라는 것쯤은 걸음걸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잠깐 시간 좀 내줄래?” 내게 다가온 창천검문의 제자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28화. 비교해 볼수록 학교 인근의 프랜차이즈 카페. 나는 창천검문에서 찾아온 무인과 마주 보고 앉았다. “음료 마실래? 디저트도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시켜도 괜찮아.” “전 물이면 돼요.” 제법 넓은 카페 안에는 우리 둘뿐이었는데, 출입문에 [close]로 돌려둔 문패를 보고서야 카페를 통째로 빌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창천검문한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건가?’ 커피와 물을 갖다 준 카페 주인도 곧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둘만 남게 된 상황에서 내 앞에 앉은 상대가 자신의 명함을 건네줬다. “정식으로 다시 인사할게. 창천검문 스카우트팀장 부연하라고 해.” 나는 상대가 건넨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푸른색의 창천검문 로고와 함께 <창천검문 스카우트팀장 부연하>라고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휴대폰 번호가 음각되어 있었다. “스카우트팀이면…… 무력대 소속하고는 다른가요?” “재작년까지는 검대 소속이었어. 부상 때문에 이쪽으로 옮겼지.” “…….” “그렇게 안 봐도 돼. 지금 팀에서도 굉장히 만족하면서 지내고 있거든.” 부연하가 싱긋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겉모습만 보면 모델이나 연예인이라고 착각할 법한 분위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눈에 확 띄는 외모와 정확한 발성, 몸에 걸친 근사한 정장은 그녀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여기에 창천검문이라는 배경까지 더해지면 무림인을 지망하는 소년소녀들은 일단 기가 죽거나 선망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볼 터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녀의 외모나 다른 조건은 들어오지 않았다. ‘부상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그렇다기엔 실력이 너무 뛰어난 것 같은데…….’ 부연하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내가 겪어 본 무림인들 중에서도 상당히 정제된 편이었다. 느낌을 정확히 수치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야차검보다 더 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심지어 나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괜히 팔대문파가 아니라 이건가?’ 내가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 보는 동안 부연하도 나를 자세히 살펴봤는지,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영상으로 봤던 것보다 근골이 훨씬 더 좋아 보이는걸?” “감사합니다. 팀장님도 왜 스카우트팀에 계신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강하신 것 같아요.”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부연하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리고 부드럽기만 했던 눈매가 살짝 가늘어지며 입가에 묘한 미소가 맺혔다. “대단하네. 보통 내 실력에는 관심이 없던데, 그걸 신경 썼어?” “무림인과 마주 앉았는데 당연히 상대의 기도부터 살펴야죠.” “호오.” 짧은 감탄사에 제법이라는 듯한 감상이 담겨 있었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부연하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굳이 창천검문에 대해서 소개하는 것도 입 아프지만 이게 내 일이거든. 알겠지만 우린 검에 관해서는 국내 최고의 무림문파야.” 소속 문파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소개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에 동의하지 않을 문파가 국내에 둘 정도 있지만, 객관적인 평가와 대중적인 인식에서 창천검문이 최고의 검문(劍門)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른 팔대문파와 달리 창천검문은 검과 관련된 무공만 익혀. 왜냐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니까. 검객에게 필요한 최고의 무공, 최고의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고 내 이름을 걸고 단언할 수 있어.” 팔대문파(八大門派). 뒷세계를 전전하는 낭인이었던 시절에는 까마득히 올려봐야 했던 존재들이었다. 정파무림의 정점으로,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하늘 위의 무림인들. 몇 번인가 양지에서 처리하기 곤란한 의뢰 건으로 마주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뒷세계의 낭인들을 지저분한 벌레처럼 바라보곤 했었다. ‘창천검문도 제법 거들먹거리는 놈들이었던 것 같은데.’ 물론 내가 본 창천검문의 제자들은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어쨌든 내 안에서의 이미지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창천(蒼天)은 맑고 푸른 하늘을 뜻해. 정파무림인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하지. 사마외도와 절대 타협하지 않는…….” “그건 좀.” 무심코 튀어나온 내 말에 부연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응?” “아니에요. 계속 해주세요.” 부연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창천검문의 역사와 전통,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검마 스승님과 팔대문파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던 걸까?’ 팔대문파를 언급할 때 보였던 검마의 표정,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졌던 적개심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미래에는 팔대문파의 힘과 영향력이 지금보다 더욱 커진다. 나중에는 팔대문파의 정예무인만 돼도 무림맹의 간부들을 자신들 눈 아래로 본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검마는 과거 팔대문파의 견제에 의해 무림맹에서 축출된 게 아니었을까?’ 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추측일 뿐이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내게는 남들은 모르는 정보가 몇 가지 더 있었다. ‘팔대문파 중에도 천마신교에 붙은 배신자들이 있었어.’ 천마신교가 세상을 뒤집어엎었을 때, 팔대문파의 대응은 둘로 나뉘었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바뀐 세상에 순응하거나. 혹은 천마신교와 싸우겠다며 문도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서거나. 창천검문은 둘 중 어떤 선택을 내렸더라……. 곧 죽을 몸이어서 세상사에 영 관심이 없던 시기라 모든 것이 자세히 기억나진 않았다. ‘만약 창천검문이 천마신교와 연관돼 있다면, 그리고 검마 스승님의 죽음과도 무관하지 않다면…… 너희들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그것이 내가 부연하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미팅에 응한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녀에게서 딱히 수상한 낌새는 느끼지 못했다. “근데 원래 이렇게 말수가 없어? 아까부터 나 혼자서만 떠드는 것 같네.” “무인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주의라서요.” “좋은 습관이야. 나도 입은 무겁고 실력으로 보여주는 친구들을 더 좋아하거든.” 적당히 둘러댄 핑계였는데, 부연하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내 소개랑 창천검문 자랑은 충분히 했어. 시간 괜찮으면 저녁 먹으러 갈래? 더 자세한 이야기는 밥이라도 대접하면서 하고 싶거든.” 본격적으로 영입을 해보겠다는 말로 들려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수련 후에 먹으려고 저녁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녀요. 그리고 벌써 수련하러 갈 시간에 늦었고요.” 듣는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도 있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연하는 오히려 점점 더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훌륭한 태도네. 그럼 짧게 말할게. 너도 빙빙 돌리는 건 싫어하는 것 같으니 바로 본론부터 말하자면.” 부연하는 들고 온 서류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올려놓았다. “기무혁. 너를 우리 창천검문에서 키워보고 싶어. 이건 네 가능성을 보고 제안하는 후기지수 계약서야.” “…….” “지금은 눈에 잘 안 들어올 테니 집에 가져가서 부모님과 상담해도 돼.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해도 좋고.” “지금 바로 읽어볼게요.” 나는 계약서를 내 쪽으로 가져와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별로 기대하지 않고 후루룩 넘기던 내 손이 점점 느려졌다. “이거…….” 놀랍게도 암루에서 오호에게 제안받았던 혈호방의 것보다 조금 더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사파가 아니라 정파라는 걸 감안하면…….’ 이런저런 절차와 제약이 더 많은 정파는 계약서도 사파보다 훨씬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부분을 고려하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내게 좋은 조건이었다. 게다가 창천검문이라는 배경까지 생각하면 거절하는 것이 바보 같을 정도였다. 부연하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했지만 일반적인 후기지수 계약서는 아니야. 1급까진 아니어도 2급 체질에 준하는 후기지수에게 제안하는 계약 조건과 비슷한 수준이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 체질이 4급인 건 알고 계시죠? 이렇게까지 투자할 이유가 없을 텐데요.” “실전으로 증명했으니까.” 부연하는 그 이유를 딱 잘라 설명했다. “동영상으로 네가 싸우는 모습을 봤어. 너보다 강한 사파의 고수를 상대로 주눅 들지 않고 전력으로 부딪치더라. 그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재능인지 알아?” 날 바라보는 부연하의 눈이 흥미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단순히 영업을 위한 태도라기엔, 잔뜩 들뜬 모습이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위에서 그 영상을 보고 우리팀에 불호령이 떨어졌어. 대체 왜 저런 인재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냐고. 당장 계약서 들고 찾아가라고. 그래서 팀장인 내가 직접 온 거야.” 그게 오늘 새벽에 벌어진 일이라며, 부연하는 혹시라도 다른 팔대문파에서 먼저 교실로 찾아갈까 봐 몇 시간 전부터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고 말했다. “체질, 근골. 물론 중요해. 하지만 너보다 좋은 조건을 가지고도 실전에선 살기에 굳어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 못해 죽거나 재기불능이 되는 후기지수들도 많아.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지.” 부연하는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리고 첫 라이센스 시험에서 일류 자격을 획득하겠다고 선언했다며? 계약이 성사되면 시험에 필요한 것들을 창천검문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할 거야.” “…….” “아주 좋은 예시가 될걸. 체질 4급의 반란, 평범한 체질로 첫 시험에서 일류 라이센스를 획득한 최초의 후기지수. 창천검문의 새로운 마스코트이자 많은 후배들의 꿈과 희망이 될 수 있어.” “말을 너무 잘하시네요. 듣고 있으면 뭔가에 홀린 것처럼 사인하고 싶어지는데요?” “그런 것치곤 팔짱이 너무 단단하지 않니?” 부연하의 농담에 나는 피식 웃었다. 계약할 마음이 없었어도 이 정도 제안을 들으면 누구라도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영입을 위한 말이라고 하기엔, 그녀의 말과 행동에서 충분한 진심이 느껴졌으니까. -네 재능이면 원하는 문파는 어디든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내 근골과 체질을 한눈에 알아본 검마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보다 뛰어난 스승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도. “그리고 이건 아직 말하면 안 되는 건데…….” 부연하는 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거의 다 넘어왔다고 생각했는지, 쐐기를 박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로님 중 한 분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셔. 운이 좋다면 그분의 직전제자가 될 수도 있을 거야.” 팔대문파에서 장로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적어도 다음 대에서 최소한 문파의 중진, 간부가 된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 거절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멍청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달콤한 제안이었다. 덕분에 나도 확실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역시 거절해야겠어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고도 거절당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부연하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오해가 없도록 확실하게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비교해 볼수록 조건이 별로라서요.” “뭐……?” 상상도 못 한 대답이었는지, 부연하는 말문이 막힌 얼굴이었다. 그녀는 내 대답이 진심인지 가늠하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부릅뜬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대체 어떤 조건이 부족해서? 아니, 우리보다 먼저 접촉한 팔대문파가 있다고?” 내 기준에서는 저 모든 조건을 저울에 올려도 반대쪽에 있는 한 명보다 못했다. ‘겨우 장로? 창천검문의 장문인이 직접 검을 가르쳐주겠다고 해도 할까 말깐데.’ 검마의 가르침과 비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조건들일 뿐이었다. 게다가 내가 강해지면 자연스럽게 얻을 것들을 위해 굳이 지금 족쇄를 찰 이유가 없었다. “하실 이야기 다 끝났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수련 시간에 늦어서요.” 나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부연하가 그런 나를 굳은 표정으로 올려보며 말했다. “……앉아. 아직 할 이야기 남았어.” 지금까지와 달리 싸늘하고 강압적으로 변한 목소리였다. 29화. 누구를 “……앉아. 아직 할 이야기 남았어.” 어디선가 겨울바람이 불어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 날 바라보는 부연하의 눈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과 약간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대로 서서 부연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는 더 이상 할 이야기 없다고 말씀드렸는데요.” “…….” “…….” 침묵 속의 대치 상태. 둘 다 무기는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단련한 무림인의 신체는 그 자체로 흉기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서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간격이었다. ‘만약 실력행사로 나온다면…….’ 나는 몸을 가볍게 긴장시키며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부상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잘 단련된 무인이니까. “후우-.” 부연하가 먼저 침묵을 깨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미안해. 내가 잠깐 흥분했어.” 내가 어린애를 상대로 뭘 하는 건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부연하가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정식으로 사과할게. 결코 널 위협하려고 했던 건 아니야.” “사과 받아들일게요. 나중에 이 일로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고마워.”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한지,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부연하의 얼굴은 여유가 사라지고 무표정하게 굳어 있었다. ‘아마도 저게 평소의 얼굴이겠지.’ 개인적으로 무인으로서는 지금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연하가 내게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로 거절하는 거야?” “네.” “조건을 바꾸고 싶은 건 아니고? 원하는 게 있으면 알려줘. 우리도 무조건 이 조건으로 계약하자는 의미는 아니니까.” 부연하는 내 요구사항을 최대한 고려해서 계약을 조율해 보겠다고 말했다. 이쯤 되자 왜 이렇게까지 내게 관심을 보이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지만, 그래도 내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나는 부연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했다. “그리고 창천검문 외에 접촉한 팔대문파도 없고요. 이리저리 조건을 재보려는 게 아니라, 어떤 문파에도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이상하게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네.” 비로소 수긍했는지 부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류 가방을 챙겨들며 말했다. “수련할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서 미안한데, 집까지 데려다줄까?” “괜찮아요. 혼자서 갈게요.” 집으로 같이 가면 은근슬쩍 부모님까지 만나려고 할 게 뻔해서 거절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카페를 나섰다. 부연하는 리무진에 오르면서도 내게 태워주겠다고 제안했고, 나는 한 번 더 거절했다. “저기, 팀장님.”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아까 전 상황에서 무력충돌로 이어졌다면……. 일어나지 않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본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될까요?” “그래. 뭐든 편하게 물어봐.”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는 얼굴이었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계약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창천검문에서 팀장님 실력이면 얼마나 강한 편인가요?” “뭐……?” 그게 왜 궁금하지? 라는 표정을 짓던 그녀가 이내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나는 일류 후기(後期)야. 창천검문에 들어온 지는 오 년이 됐고, 내 자랑 같지만 동기들 중에서는 손에 꼽히는 기대주였어. 비록 지금은 부상 때문에 스카우트팀으로 옮겼지만……. 못해도 중간 이상은 갈걸?” 나는 그 말에 자신감과 겸손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이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최대한 내게 창천검문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기려는 의도 같았다. “부상이 완벽하게 나으면 검대로 복귀할 예정이야. 물론 그렇다고 지금 하는 일을 대충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고. 스카우트팀에서 하는 일도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거든.” “그런 것 같아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본 부연하는 자신의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임하는 사람 같았다. 그녀 때문에 창천검문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은 나아졌을 정도로 말이다. “이 정도면 답변이 됐어?” “네. 충분히요.” 어쩐지 무력대 소속이 아닌 것 치고는 지나치게 강해 보인다 싶더라니. 부연하는 창천검문에서도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재였다. 근골은 한눈에 봐도 최상, 체질은 적어도 2급 이상일 터였다. “너 설마…….” 만족스러워하는 내 표정에서 무언가를 눈치챈 부연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내가 스카우트팀 들어와서 매일 하는 게 사람 만나는 일이거든? 삼 년 가까이 무인들을 만나다 보니까 표정만 보면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단 말이지.” “그런데요?” “지금 나랑 비벼볼 만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맞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네. 물론 나는 시치미를 떼며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제 실력으로는 팀장님한테 상대도 안 될 것 같은데요.”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비무로는요.” “뭐?”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등 뒤에서 황당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비무로는 안 된다고? 야! 너 그게 무슨 의미야?” 나는 그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집을 향해 달렸다. * * *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혼자 남은 부연하는 차 안에서 기무혁과 나눈 대화를 되새기고 있었다. 지금까지 후기지수과 계약 협상을 할 때, 그녀는 한 번도 상대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적이 없었다. 콧대 높은 체질 1급의 후기지수들도 자신의 이름을 들으면 반응이 바뀌곤 했으니까. -부, 부연하요? 혹시 예전에 라이센스 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하시지 않았어요? -창천검문의 그……! 그때부터 협상은 자연스럽게 수월해지고는 했다. 그런데 기무혁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부연하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5년이면 시간이 꽤 지나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부연하 많이 죽었다?” 게다가 기무혁이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비무로는 못 비빈다고? 실전이라면 다를 거란 말이지?”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창천검문에서 가장 촉망받던 후기지수였다. 지금은 내상을 치료할 때까지 스카우트팀에서 일하고 있지만, 차기 장문인감으로 언급될 만큼 뛰어난 인재로 창천검문의 미래라고 불렸던 그녀였다. “검대로 복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괜찮은 후배 하나 영입해놓고 가려고 했는데…….” 부연하는 모든 일에 완벽주의적인 성격이었다. 머지않아 다시 검대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해서, 스카우트팀의 업무를 대충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스카우트팀으로 오자마자 냈던 엄청난 성과들 덕에 1년 만에 팀장 자리까지 달게 됐으니까. 그런 부연하가 이 팀에 온 후 유일하게 한 실패가 바로 방금 전 기무혁의 영입이었다. 물론, 당사자는 아직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이잉- 때마침 진동하는 스마트폰. 부연하는 액정에 떠오른 [할아버지]를 확인하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리고 전화를 받았다. “저 감시하시죠? 방금 미팅 끝난 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푸념하듯 투덜거리는 목소리. 기무혁이 본 빈틈없는 무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그러자 스마트폰 너머에서 푸근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 목소리가 좋지 않은데. 실제로 만나보니 생각보다 별로였느냐?] 부연하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솔직하게 말했다. “아뇨.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어요. 할아버지가 허락만 해주시면 제 사제로 들이고 싶다는 욕심이 들 정도로요.” [호오. 그럼 잘된 게 아니냐?] “잘 안 됐어요. 거절당했거든요.” [연하 네가 스카웃에 실패했다고?] ‘실패’라는 단어에 발끈한 부연하가 스마트폰을 흘겨보며 말했다. “실패는 아니고요. 첫 미팅이라서 의견 조율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장. 문. 인.” 할아버지에서 장문인으로 호칭을 바꾼 그녀가 기무혁과 나눈 대화를 축약해서 간단히 설명했다. [영상을 보고 짐작하긴 했다만,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내가 관심을 보인다는 말도 했느냐?] 기무혁에게는 창천검문의 장로 중 한 명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관심을 보인 것은 장로가 아니라 장문인이었다. 장로가 관심을 보이는 것과 장문인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만약 장문제자가 된다면 다음대의 장문인 후보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체질 4급으로는 창천검을 대성할 가능성이 극히 낮아. 괜한 희망고문이 될까 봐 그랬던 건데…….’ 부연하는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해야 했을까 잠시 후회가 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얘긴 하지 않았어요. 장로님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으니까요. 그리고…… 제 짐작이지만 장문인이라고 했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 같아요.” 기무혁의 흔들림 없는 표정을 떠올린 부연하는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더 마음에 드는구나. 한국무림에 그런 패기 넘치는 녀석도 있어야지!] 스마트폰 너머에서 웃음을 참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래서 네가 보기엔 계약 조건을 더 높여서라도 본문으로 데려올 만한 아이 같으냐?] “이건 제 감이긴 한데…….” 기무혁과의 만남을 다시금 떠올린 부연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쩌면 지금이 기무혁의 이름이 가장 저평가되는 시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겠군. 네 판단이 그렇다면 조건을 더 높이도록 해라.] “단순히 조건만으론 안 될 것 같아요. 시간을 들여서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래. 믿고 기다리마.] 장문인과 통화를 끝낸 후, 부연하는 리무진을 출발시켰다. 그리고 태블릿을 열어 기무혁에 대한 정보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어린애가 승부욕을 자극하네.” 조급하게 곧바로 다시 접촉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창천검문이 못하면 그 어떤 팔대문파도 기무혁을 설득하지 못할 테니까. “난 포기를 모르는 여자거든.” 부연하는 다음에 만날 때는 오늘과 다를 거라고 중얼거리며, 태블릿으로 기무혁의 영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 * * 늦은 밤. 최건은 옥상에 올라가 기무혁이 “내일 또 뵙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오려나 보군.” 최건이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역시 너튜브에 올라온 기무혁이 야차검과 싸우는 동영상을 보았다. ‘아직 라이센스도 없는 녀석이 그만한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니…….’ 팔대문파를 잘 아는 최건이기에, 그 후에 기무혁에게 벌어진 일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분명 팔대문파 중 여러 곳에서 소년에게 관심을 보였을 것이고, 빠르게 움직였다면 벌써 접촉까지 했을 터. ‘거절하기 힘든 조건을 내밀면서 자기네 문파로 데려가려 할 테지.’ 팔대문파의 위상과 그들이 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하면, 없던 마음조차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하면 퇴물이 된 노검객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몇 수 가르침뿐이었으니. 기무혁이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꿔 팔대문파의 문하로 들어갔다고 해도 소년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는 그게 맞는 일이지.’ 그러나 마음 한편이 쓸쓸해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날이 꽤 차군. 올해는 겨울이 빨리 오겠어.” 밤하늘을 올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최건은 옥상에서 내려와 자신의 거실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마음속에 벼려진 한 자루의 검이 오늘따라 이리저리 흔들렸으나, 정신을 집중해 차분하게 심신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그러던 중에 흠칫 놀라서 눈을 떴다. “무슨?” 멀지 않은 곳에서 기무혁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닌 낯선 인기척 둘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혹 팔대문파에 자신의 위치를 알린 것일까? “설마…….” 가부좌를 풀고 천천히 일어난 최건이 한쪽에 놓인 효자손을 손에 들었다. 순간 노검객의 눈이 섬뜩한 빛을 뿌렸다. 잠시 후, 빌라 앞까지 도착한 기무혁과 낯선 인기척 둘이 멈춰 섰다. 그리고 기무혁 혼자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 인사라도 하러 온 것이냐? 아니면 팔대문파에 나를 팔아넘기려고 하는 것이냐?’ 최건은 고개를 돌려 싱크대 위, 돌려주려고 깨끗이 설거지를 해둔 반찬통을 잠시 바라봤다. 똑똑- “스승님. 안에 계신가요?” “열려 있다.” 현관문이 열리고, 어제의 그 당당했던 소년이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너무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 최건은 자신에게 사과하는 기무혁의 모습을 애써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정식으로 사제의 인연을 맺지는 않았으나, 마지막으로 한 번 가르쳐보고 싶었던 재능이었다. 고작 하루 만에 이토록 큰 실망감을 느끼게 될 줄 알았다면…… 결코 마음에 들이지 않았을 터인데. 최건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뭔가 할 말이 있으면 해라.” 기무혁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원인은 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낯선 인기척들일 것이 분명했다. “그게…….” 과연 어느 문파에서 이 아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까? 재벌가의 돈으로 후기지수들을 사 모으는 것이 취미인 금영문? 검으로 스스로가 최고라는 오만에 빠져있는 창천검문? 혹은 맹 내 세력확장이 필요한 태극검문일지도……. 최건이 자신을 무림맹에서 축출하려고 목소리를 높이던 얼굴들을 하나하나 떠올릴 때였다. 머뭇거리던 기무혁이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밖에 저희 부모님이 와 계시거든요.” “……뭐라?” “두 분이서 스승님을 꼭 뵙고 싶다고 하셔서 따라오셨는데, 한 번만 만나봐 주실 수 있을까요?” “누구를?” “저희 부모님이요.” 눈을 휘둥그레 뜬 최건은 급히 지저분한 자신의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30화. 금상첨화 부모님과 함께 스승님을 찾아간 것은 내 생각이 아니었다. 창천검문의 제안을 거절한 후, 나는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서 마스크와 모자만 챙긴 후 늦게라도 스승님에게 지도를 받으러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날 기다리고 있던 부모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어라? 두 분 벌써 퇴근하셨어요?” “…….” “…….” 분위기가 평소와 달리 뭔가 이상했다. 두 분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는데,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식탁 위의 노트북에서 내가 야차검과 싸운 너튜브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으니까. “아니, 그게…….” 나도 모르게 변명을 하며 한 걸음 뒷걸음질 친 순간. 엄마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나를 불렀다. “기무혁. 이리 와서 앉아.” “……넵.” 팔대문파의 계약 제안은 단번에 거절할 수 있는 나였지만, 엄마의 한마디에는 순한 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아버지도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여셨다. “아들. 학교 끝나자마자 튀어오겠다고 하지 않았냐?” “그게 사실은…….” 낮에 학교에서 동영상의 존재를 알게 된 후, 나는 부모님께 톡으로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두 분이 저녁에 퇴근하고 오시면 그때 얼굴을 보고 자세히 설명하겠다고. 그러나 부연하에게 붙잡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귀가가 늦어졌고, 그사이 부모님은 내가 걱정돼 반차까지 쓰고 집에 와서 먼저 기다리셨던 것이다. “아빠가 이거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 칼이 네 코 앞에서 휘둘러지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언성을 높이는 아버지의 눈가가 붉게 충혈돼 있었다. 내가 사파의 노괴와 싸우는 영상을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며,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혔다고 했다. “최소한 우리한테는 말해줬어야지.” 엄마도 애써 화를 꾹 참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엄마는 네가 무림인이 되겠다고 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각오는 했어. 당연히 위험한 일이니까. 싸우다가 다칠 수도 있고, 부상이 많다는 것도 알아. 그래도…… 알려는 줬어야지. 엄마아빠가 남들처럼 동영상을 보고 아들이 다친 걸 알아야 하니?” 두 분이 날 걱정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내게는 야차검에게 입은 상처보다 훨씬 더 쓰라리고 아팠다. “……정말 죄송해요.” 내 생각만 하느라 부모님을 배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나를 먼저 생각하는 분들인데, 그래서 이번 생에는 부모님과 함께 반드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겠다고 다짐했는데도. 괜한 걱정을 끼치기 싫다는 핑계로 다친 것을 숨기고, 조용히 넘어가려 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앞으로는 꼭 말씀드릴게요.” 진심을 담아 두 분께 사과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굳게 약속했다. “……다친 데는 괜찮은 거지?” “병원에서 치료는 제대로 받았어?” 부모님이 나를 꼭 안아주셨다. 두 분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최근에 이런저런 일로 긴장하고 있었던 몸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따듯한 포옹은 내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함정이었다. “그래서 얼마나 다쳤는지 한번 확인해 보자.” “당신은 꽉 잡고 있어. 내가 벗길게!” 두 분이서 동시에 내 윗옷을 들쳐 상처를 확인하려고 들었다. 당황한 나는 옷을 사수하려고 발버둥 쳤다. “아 잠깐만, 잠깐만요! 저 곧 있으면 스무 살이라고요!” “부모가 아들이 다쳤는지 좀 보겠다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엄마아빠가 너 키우면서 못 볼 꼴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알아?” 당연히 마음만 먹으면 쉽게 떨쳐낼 수 있었지만, 나는 곤란한 척하며 두 분의 장난에 당해드렸다. 부모님에게 벗은 몸 좀 보이는 것이 대수일까. 그걸로 두 분이 안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보여드릴 수 있었다. “아니 근데, 너 그 사이에 몸이 더 좋아졌다?” “바지도 벗을까요?” “됐으니까 징그러운 소리 그만해!” 그렇게 한바탕 혼나고, 화해하고, 장난치고 난 후, 평소대로 돌아온 부모님에게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저 최근에 일이 좀 많았어요.” 나는 일주일 넘게 스승님을 찾으러 다녔던 이야기와, 그 과정에서 야차검을 만나서 싸우게 된 과정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세상에…… 그러니까 검술을 지도받고 싶어서 은거기인을 찾아다닌 거야?” “어쩐지 갑자기 도시락을 잔뜩 싸달라고 하더라니.” 회귀와 관련된 부분은 감출 수밖에 없었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숨기지 않고 전부 이야기했다. 창천검문의 스카우트 팀장을 만나서 나눈 대화까지 전부. “그래서 방금 창천검문의 제안을 거절하고 오는 길이에요.” “…….” “…….” 창천검문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한 후, 나는 가만히 부모님의 반응을 기다렸다. ‘팔대문파의 제안을 거절한 걸로 실망하셨을까?’ 누가 봐도 성공이 보장된 길을 걷어찬 셈이었다. 내가 무림인으로 잘되기를 누구보다 바라셨으니, 두 분이 내 결정을 아쉬워하거나 화를 내신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은 침착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후, 서로 마주 보곤 고개를 끄덕이셨다. “……화 안 내세요?” 오히려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자, 아버지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으셨다. “화를 낼 게 뭐가 있어? 네 인생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몸을 함부로 다루다가 다쳐도 된다는 소린 아니야.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젠 거 알지?” 엄마도 내가 팔대문파의 제안을 거절한 것에는 별 미련이 없는 듯했다. 마치 내가 그럴 거라 예상이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두 분은 창천검문과의 계약 이야기보다 오히려 다른 것에 더 관심을 보이셨다. “무혁이 네가 검술 스승님을 먼저 찾았다 이거지?” “학원 말고 개인적으로 지도받을 필요는 없다더니…….” 사실 예전부터 부모님은 내게 따로 검술지도 선생님을 붙여주려고 했었지만, 내가 전부 거절했었다. 개인 지도를 받는 데 드는 비용이 효과에 비해 지나치게 고액이었으니까. ‘누군가에게 배우지 않아도 혼자서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고.’ 그랬던 내가 먼저 나서서 검술 스승을 찾았다고 하니, 두 분이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럴 게 아니지. 말이 나온 김에 뵈러 가자.” “네? 지금이요?” 시간을 확인한 아버지가 외투를 챙기며 말했다. 내가 당황해서 말리려고 들었지만 이미 차 키까지 챙긴 뒤였다. “여보. 선생님 선물로 뭐 좀 챙겨갈까?” “내가 과일 좀 챙길게. 다른 건 가다가 보이면 사요.”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벌떡 일어나서 부엌으로 향하는데, 나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진짜로 가게요? 이렇게 갑자기?” “부족한 아들을 지도해 주시는 분인데 제대로 인사라도 드려야지.” “시간도 늦었는데…….” “그래서 안 가려고? 너 아직 그분 연락처도 모른다며? 말도 없이 안 가면 계속 기다리실 지도 모르잖아.” “그냥 저 혼자 가도 되는데.” “빨리 옷이나 갈아입어. 바로 나갈 거니까.” 대부분 내게 양보해 주시는 부모님이지만, 한 번씩 고집을 부리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 * * 스승님이 민망한 표정으로 보리차 세 잔을 우리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손님께 대접할 것이 변변치 않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이렇게 갑자기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과일 좀 가져왔는데, 깎아 올까요?” 엄마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가서 과일을 깎아 오라는 뜻이었다. 내가 부엌에서 사과와 배를 깎는 동안, 어른들끼리 마주 앉은 자리에서 형식적인 인사가 몇 번 더 오갔다. 그리고 찾아온 어색한 침묵. “…….” 스승님이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힐긋거렸고, 나는 그 시선을 피하면서 사과와 배가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보며 껍질을 깎아냈다. 다행히 아버지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트리고자 말문을 열었다. “무혁이에게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이야기 들었습니다. 검마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로 불렸지만, 자기가 아는 누구보다도 협객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무인이시라고요.” “크흠…….” 대놓고 하는 칭찬에 내성이 약한 모양인지, 귀가 조금 붉어진 스승님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저 오래전에 검을 좀 휘둘렀던 늙은이일 뿐입니다. 그리 대단한 사람이 못 됩니다.” 나는 저 말이 얼마나 겸손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작심한 표정으로 저런 말을 꺼내진 않았을 테니까. “……아드님의 재능이면 팔대문파 중 어느 곳이라도 두 팔을 벌려 환영할 겁니다. 아니, 제가 본 무혁 군의 진가를 알게 된다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매달리려 할 테지요.” 상상도 못 한 극찬에 부모님이 눈을 크게 떴다. 농담도 적당해야 맞장구도 치고 하하 호호 웃고 할 텐데, 지금 스승님의 표정은 누가 봐도 진심이란 걸 알 정도로 무척이나 진지했으니까. “저는 칭찬을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혁 군에게는 분명 그만한 재능과 열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부모님이 설득해 주십시오.” “설득이라니요?” “무혁 군은 저보다 훨씬 더 좋은 스승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스승님의 표정은 처음보다 부드러웠으나 동시에 단호했다.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 그가 고개를 돌려 희미한 미소로 나를 바라봤다. “단 하루 지도해 봤지만 네 재능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부디 너를 만개시켜 줄 수 있는 곳에 찾아가서 꽃을 피우거라.” 나는 열심히 깎은 과일을 접시에 담아 가져와 소반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건데요?” “이 녀석이…….” 스승님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일그러진 순간, 부모님이 동시에 웃으셨다. “하하하!” 두 분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게는 그 미소가 마치 ‘좋은 선생님을 만났구나.’라고 칭찬하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가 옆에 앉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입을 여셨다. “무혁이가 자기가 가장 원했던 검술 스승님을 만났다면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르시죠? 그렇게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봤어요.” “흠흠…….” 민망함에 내가 헛기침을 했고, 엄마는 확신에 찬 눈으로 나와 스승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는 무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합니다. 선생님이라면 바른길로 지도해주실 것 같아요. 저희 무혁이랑 결이 비슷하신 것 같거든요.” 아버지도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녀석을 설득하라고요? 아홉 살 이후로 한 번도 성공한 적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도 사람 많고 이것저것 복잡한 팔대문파보다는 선생님이 무혁이에게 맞는 방식으로 잘 가르쳐 주실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굴 닮았겠는가? 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배운 것이었다. “……이 녀석 고집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부모님 두 분을 쏙 빼닮았군요. 정말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검술지도 말고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거면 충분하다니까요.” “더 바라면 도둑놈 아닙니까?” “저희 부족한 아들, 잘 부탁드립니다.” 차례대로 나, 아버지, 엄마의 대답이었다. “허! 거참…….” 스승님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마 똑같이 고집스러운 표정을 하고 앉아있는 세 사람을 보니 어이가 없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상대의 마음에 걸려있던 마지막 빗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스승님의 입가에 본 적 없었던 장난스러운 미소가 맺혔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나는 환호성을 질렀고, 부모님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부모님은 당연히 검술지도 비용을 드리겠다고 했고, 스승님은 한사코 돈을 받는 것만은 거절했다. 두 번째 고집 대결은 스승님의 승리였다. “저는 검을 가르치면서 단 한 번도 개인적으로 돈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제 명예가 걸린 일이니 결코 양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신.” 미안해하는 부모님에게, 스승님은 웃으며 돈을 대신할 조건을 요구했다. “가끔 제 도시락도 함께 챙겨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젯밤에 먹은 따뜻한 음식이 하루 종일 생각나더군요.” “겨우 그걸로요?”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지만…….” 결국 저녁에 함께 먹을 도시락으로 검술지도 비용을 대신하기로 합의했다.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다 보니 밤이 꽤 깊어졌다. 부모님이 아쉬운 표정으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무혁아.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먼저 가세요. 스승님이랑 조금 더 이야기하고 갈게요.”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부모님이 떠난 후, 스승님은 나와 독대했다. “휴우…….” 기가 쭉 빨린 스승님이 남은 보리차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힘없이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훌륭하신 부모님을 두었구나.” “네.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내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자 스승님이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부드러웠던 표정이 순식간에 예리한 검처럼 변했다. “부모님과 약속까지 했으니, 내 앞으로 너를 대충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표정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스승님이 말했다. “우선은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에 맞춰 훈련 일정을 짤 것이다. 시험은 매년 조금씩 바뀌지만 큰 틀에서는 비슷하다.” 세상사에 해탈했던 노인이 한순간에 대치동 일타강사처럼 눈빛이 바뀌었다. 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지금 네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합을 맞출만한 상대다. 내가 네 수준에 맞춰줄 수는 있으나, 긴장감이 떨어지고 실전성도 떨어질 테니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삼십 합은 비슷하게 겨룰 만한 상대가 있다면 좋겠지.” “또한 실력 있는 술법사의 도움을 받는다면 라이센스 시험과 비슷하면서 다양한 환경을 구현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일 터. 다만 섭외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 문제인데…….” 그때 내가 손을 들고 말했다. “스승님. 둘 다 바로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너와 비슷한 상대, 그리고 괜찮은 술법사를 말이냐? 이런 조건은 팔대문파에서도 쉽지 않은…….” 그 순간, 스승님도 나와 같은 얼굴들을 떠올린 것 같았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이 기대감이 살짝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연락이라도 한번 해보거라.” * * * 그리고 며칠 후. 내가 스승님의 집 옥상에서 훈련 중이던 때. “맛집 가자며! 또 먹을 걸로 구라 쳤지, 기무혁 이 개X끼야!” “뭐? 격차가 더 벌어져서 이젠 손끝도 못 댈 거라고? 오늘에야말로 박살을 내주마!” 김복자와 신강헌이 옥상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쳤다. 31화. 꿈에서나 그릴 수 있었던 옥상에서 혼자 수련 중이던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함께 도착한 둘을 바라봤다. “어떻게 둘이 같이 왔어?” “아, 쫌 비켜 봐!” 김복자가 자기보다 덩치가 두 배는 큰 신강헌을 옆으로 밀어내며 투덜거렸다. “오다가 이 앞에서 만났어. 근데 여기 감자탕 맛집이라며! 너 진짜 오늘 누나한테 혼날…….” 소매를 걷어붙이며 내게 다가오던 복자를 다시 커다란 손이 밀어냈다. “너나 쫑알거리지 말고 저리 비켜.” “야!” 신강헌이 복자를 밀어내고 앞으로 나서며 목을 좌우로 꺾었다. 딱 붙는 컴프레션 티를 입고 왔는데, 한참을 뛰어왔는지 온몸에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등에 멘 도를 꺼내 든 신강헌이 사납게 웃으며 나를 노려봤다. “기무혁. 지난번의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철저하게 너를 분석했다. 넌 이제 나한테…….”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린 후, 신강헌을 향해 도발하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말로 떠들지만 말고 한번 덤벼보든가.” 콧김을 강하게 뿜은 신강헌이 곧장 꼬리에 불붙은 멧돼지처럼 덤벼들었다. 나도 피하지 않고 마주 가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정! 우리가 만나자마자 치고받고 싸워대자 복자가 뒤로 물러나며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머리에 무공밖에 없는 멍청이들.” 나는 며칠 만에 만난 신강헌과 실컷 검을 부딪쳤다. 그렇게 오십여 합 만에 빈틈을 발견해 파고든 후, 녀석의 복부를 검 손잡이로 강하게 찍었다. 퍼억! 명치에 제대로 적중한 일격으로 신강헌이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컥! 이 새끼, 진짜로 더 세졌네…….” “너도 놀고만 있진 않았나 보다?” “으아악! X발 약 올라!” 나는 태연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신강헌을 놀리고 있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이 자식. 괜히 천재가 아니네.’ 날 분석했다는 말이 단순한 허세는 아니었는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내 검을 따라오는 속도가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스승님에게 지도를 받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승기를 잡는 데 적어도 열 합은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히죽. “……변태냐? 왜 쓰러진 사람 보고 웃어?” “기분이 좋아서.” “진짜 미친놈인가 봐. 사람 때리는 거 좋아하는…….” 복자가 내 표정을 보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려고 해서 급히 미끼를 던졌다. “감자탕 맛집은 이따 저녁에 가자. 사실 오늘은 너희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어.” “부탁?” 복자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신강헌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명치를 문지르는 중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가 대신하마.”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신강헌과 김복자가 뒤를 돌아봤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타난 스승님이 어느새 등 뒤를 점하고 있었으니까. ‘지난번 축골공도 그렇고, 가끔 보면 전직 살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라니까.’ 나조차도 종종 스승님의 기척을 놓칠 때가 있었다. 전생에 은신술을 익힌 살수들을 적지 않게 경험해 보았음에도 말이다. 한 손에 효자손을 들고 옥상에 올라온 스승님이 싱겁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최건이라고 한다. 검을 좀 잡을 줄 아는 늙은이로 한때 검마라 불렸지.” 검마라는 별호에 둘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나와 스승님을 휙휙 번갈아 쳐다본 김복자가 비로소 경계심을 풀고 입을 열었다. “결국 찾았다더니……. 근데 여기 지난번에 싸웠던 곳 근처 아니야?” “할 얘기가 많지만 나중에 해줄게. 스승님. 이쪽은 제 친구인 김복…….” “레드래빗이에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프리랜서 술법가죠.” 복자가 내 말을 끊으며 스승님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가끔 생각하는 건데, 남들 앞에서 레드래빗이라고 소개하는 쪽이 김복자보다 더 부끄러운 것 아닐까? 적어도 복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인지 명함까지 꺼내서 스승님에게 건넸다. “줄여서 레래라고 부르는 것까진 오케이예요.” “허허. 알겠다. 레래라고 부르마.” 반면 내게 맞은 명치를 만지며 구시렁거리던 신강헌은 벌떡 일어나서 스승님에게 포권을 취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세계제일도를 꿈꾸는 신강헌이라고 합니다!” “……선배님?” “당연히 대선배님이시죠. 한때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던 검객이시니까요!” 저 자식, 처음엔 검마가 누군지도 잘 몰랐으면서 나한테 들은 얘기로 아부를 떨고 있다. 내가 그 뻔뻔한 얼굴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지만 신강헌은 모른 척 스승님 앞에서 간사하게 손바닥을 비볐다. “한번 꼭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여간에 넉살도 좋고, 은근히 눈치도 빠른 녀석이라니까. 나와 마찬가지로 황당하다는 듯 신강헌을 바라보던 스승님이 이내 피식 웃으셨다. “오냐. 나도 반갑다. 생긴 것만 봐서는 호랑이처럼 기가 셀 줄 알았더니, 여우 같은 면도 있구나?” “선배님, 속지 마세요. 기무혁 이 자식이 저보다 훨씬 더 여우 같은 놈이거든요.” “하하! 그래, 나도 그건 안다. 헌데…….” 내가 아는 누구와 닮은 듯한데……. 스승님이 혼잣말처럼 작게 뒷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바로 들어온 복자의 질문이 상념을 방해했다. “그래서 아까 그 부탁이라는 건 뭐예요?” 잠시 잊고 있었던 본론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스승님이 두 사람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내년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여 무혁이에게 맞춤 훈련을 시키고자 하는데, 너희가 도와준다면 좋을 것 같구나.” 스승님은 신강헌에게는 앞으로 몇 달간 내 대련 상대를, 복자에게는 술법으로 라이센스 시험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저는 좋습니다!”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신강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같은 도객은 아니지만, 스승님과 같은 고수에게 지도를 받는다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을 테니까. 신강헌이 나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첫 시험에서 일류 라이센스. 네가 따면 무조건 나도 딴다.” 경쟁의식을 불태우는 신강헌에게 코웃음을 한 번 날려주자, 예상대로 잔뜩 열 받아서 씩씩거렸다. 신강헌이야 승낙할 줄 알았고, 중요한 것은 복자의 도움이었다. “으음…….” 복자는 내 수련을 돕는다고 얻을 것이 딱히 없었다. 아무런 금전적인 이득도 되지 않는 일에 시간만 쏟아야 하는 상황. 내가 아는 김복자라면 단칼에 거절하는 게 당연했다. ‘오히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민하는 눈치인데.’ 하지만 아무래도 어렵겠는지 복자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죄송한데 저는 안 될 것 같아요. 가끔씩은 몰라도 몇 달이나 꾸준히? 그렇겐 힘들어요.” 복자는 뒷세계에서 술법 시술로 꽤 많은 돈을 벌고 있다. 그 시간을 빼면서까지 내 수련을 도와달라는 건 내가 생각해도 무리한 요구였다. 그래서 처음엔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스승님이 일단 자신에게 맡겨 보라고 했다. “보수를 돈 대신 다른 것으로 주면 어떻겠느냐?” “……어디서 들어봤던 말 같은데. 다른 거 뭐요?” 나를 한번 흘겨본 복자는 스승님이 품 안에서 오래돼 보이는 얇은 책자를 하나 꺼낼 때까지도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죽은 내 친구가 남긴 술법서다. 남겨줄 가족도 제자도 없어서 내게 맡겼지. 팔아먹든 누굴 주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한 물건인데…… 내게는 쓸모가 없어 여태 가지고 있었단다.” 복자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스승님이 내민 책자를 바라봤다. “이런 거 거의 다 싸구려……. 아, 죄송해요.” “괜찮다. 혹시 모르니 한번 내용이나 살펴보거라.” 억지로 스승님에게서 술법서를 건네받은 복자는 슥슥 종이를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설렁설렁 페이지를 넘기던 복자는 어느 순간 눈이 커지고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이, 이거…… 누가 줬다고요?” “죽은 내 친구의 물건이다. 예전에 무림맹에서 함께 지냈던 술법사였지.” 흡족하게 웃는 스승님을 보니, 복자의 저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하신 것 같았다. 김복자는 반쯤 얼이 나간 표정으로 술법서를 손에 꼭 쥐었다. “이 정도 술법서는 돈 주고도 못 구하는 건데……. 진짜로 이걸 저한테 주신다고요?” 술법서는 무인에게는 무공비급과 마찬가지였다. 요즘은 너튜브로도 기초적인 술법은 배울 수 있지만, 제대로 된 술법은 여전히 일인전승으로 자식이나 제자에게만 전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김복자는 스승의 도움 없이 너튜브와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는 서적으로 술법을 독학한 천재였다. ‘악착같이 돈을 버는 이유 중 하나가 수준에 맞는 술법서를 구하기 위해서였으니…….’ 저 술법서는 복자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일 터였다. 침을 꼴깍 삼키는 모습이 술법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대단한 물건 같았으니까. 완전히 주도권을 쥔 스승님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건 선수금이다. 나중에 하는 거 봐서 하나 더 줄 수도 있지.” “저 언제까지 오면 돼요?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서 출근할게요!” 그렇게 셋이서 함께하는 라이센스 시험 대비 훈련 겸 수련이 시작되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하루하루 훈련에 매진하다 보니 어느덧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겨울방학이 지나고 금방 새해를 맞이했다. “해피뉴이어-!”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는 부모님, 그리고 스승님과 함께 신년을 맞이했다. 종종 도시락이나 작은 선물을 들고 오가면서 친분이 쌓인 부모님이 연말과 신년 저녁 식사에 스승님을 집으로 초대했다. “흠흠. 늙은이가 눈치 없이 자주 오는 건 아닌지…….” “선생님! 마음에도 없는 말 마시고 한 잔 받으시죠.”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레래도 많이 먹어야 한다?” 몇 차례 옥상에서 마주하며 부모님과 안면이 생긴 복자도 불러서 우리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복자는 식탁에 빼곡하게 들어찬 음식들을 보며 혼란스러웠다. “차린 게 없다고요? 너무 많아서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무혁이가 무공 수련을 하다 보니 워낙 많이 먹잖니.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더 차렸는데. 소문으로는 레래도 잘 먹는다며?” “얘 정도는 아닌데……. 잘 먹겠습니다.” 복자는 살갑게 구는 우리 부모님을 조금은 어색해했지만,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내가 어울리지 않게 젓가락을 깨작거리는 복자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왜 이렇게 못 먹어? 음식이 입에 안 맞냐?” “……뭔 소리야. 방금 너네 집도 맛집 리스트에 추가했거든.” “어머. 그거 맛있단 소리지?” “자주 놀러 와라, 자주! 우리 아들이 여자애를 데려온 게 처음이라…….” “당신은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우리 무혁이 인기 많았거든?” 북적거리고 즐거운 새해의 시작이었다. 가볍게 취기가 오른 부모님이 내 어린 시절 흑역사를 생생하게 재현해서 나만 빼고 모두가 폭소하는 등의 부끄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한때는 꿈에서나 그릴 수 있었던 행복한 일상임이 틀림없었다. “신강헌은?” “못 온대.” 몇 달간 옥상에서 부딪치고 구르며 함께 훈련한 신강헌도 식사에 초대했지만, 녀석은 삼촌과 함께 새해를 보낸다면서 메신저로만 연락을 보냈다. [God Kang-heon : 해퓨니어. 새해엔 나한테 뒤지게 맞을 각오하셈] 이 자식은 맨날 똑같은 소리 하는 게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우웅- [Bu-YH : 무혁 군. 새해 복 많이 받아. 이번에 우리 문파에서 신년 맞이 이벤트를 하나 하고 있는데, 관심 있으면 참여해봐.] 창천검문의 부연하는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종종 내게 먼저 연락을 했다. [Kimoo : 선배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때마다 나는 예의상 짧게나마 답변을 보냈다. 다른 팔대문파 몇 곳에서도 만나자는 연락이 왔지만, 라이센스 시험 준비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로 전부 거절했다. “그런데 아들. 곧 라이센스 시험인데 떨리진 않아?” 라이센스 시험이 다가올수록 나보다 더 긴장하는 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전혀요. 오히려 빨리 시작하면 좋겠어요.” 두 번째로 찾아온 스무 살. 지난 생에는 도전조차 할 수 없었던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이 너무나도 기다려졌다. 32화. 말해줄 것이 있다 연무장 한가운데 두 청년이 각각 검과 도를 들고 마주 섰다. 둘 중 먼저 움직인 쪽은 덩치가 조금 더 큰 청년이었다. 후우우우- 신강헌이 호흡을 길게 뱉으며 칼을 중단으로 세웠다. 그가 천천히 좌측으로 돌기 시작하자 기무혁도 같은 방향으로 발을 뗐다. “…….” “…….” 두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검과 도를 조금씩 움직였다. 칼끝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머릿속으로 치열한 수 싸움이 벌어졌다. 가상으로 수많은 궤적을 그리며 상대의 의도를 읽고, 자신의 의도는 숨긴다. 발걸음 하나, 미세한 호흡조차 서로를 속이기 위함이었다. 약관에 불과한 후기지수들이 하기엔 지나치게 어렵고 난해한 수 싸움. 그러나 두 사람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해내고 있었다. 그때, 먼저 발을 멈춘 신강헌이 낮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내가 언제부터 가능성 같은 거 따졌다고.” 소년에서 청년이 된 그의 눈빛은 고작 몇 달 만에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거칠고 맹렬하기만 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발톱을 감추고 먹잇감에게 서서히 다가가는 맹수처럼 섬뜩한 빛을 품었다. 꾸욱……. 신강헌이 도파를 강하게 쥐었다. 몇 달 전보다 선명해진 전완근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순간. 쾅! 강하게 진각을 밟은 신강헌의 신형이 기무혁을 향해 폭발적으로 쏘아졌다. 그 기세가 사냥감을 노리고 달려드는 호랑이를 떠오르게 했다. 그러나 상대는 어수룩한 사냥감이 아니라 노련한 사냥꾼이었으니. “어디서 개수작이야? 머리 쓰는 게 빤히 보이는데.” 피식 웃은 기무혁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틀며 비스듬히 칼날을 쳐냈다. 머릿속에서 그렸던 수많은 궤적 중 가장 위험한 경로에서 검과 도가 부딪쳤다. 쩌엉-! 한 번의 충돌로 끝나지 않았다. 신강헌은 그야말로 신들린 듯 도를 휘둘렀고, 기무혁은 그에 대응해 침착하게 검을 부딪쳤다. 쩌엉! 쩌저정! 까앙-! 지난 몇 달 동안 기무혁과 신강헌은 질리도록 부딪쳤지만, 상대에게 익숙해질 새가 없었다. 서로의 재능을 자극하며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했으니까. 한 명이 성큼 나아가면 다른 하나가 맹렬하게 추격하고, 어느새 따라잡히면 다시 앞서기 위해 죽어라 노력했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면서 혼자 수련할 때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미친놈.’ ‘또라이.’ 처음에는 장난으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지만, 이제 그 호칭에는 서로에 대한 인정과 경의가 담겨 있었다. “우라앗!” 처음으로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호흡을 크게 터트린 신강헌이 높이 뛰어오르며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켰다. 휘리릭! 타고난 피지컬을 이용한 탄력적이고 경쾌한 움직임이었다.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휘두르는 칼날이 일순간 맹호의 발톱처럼 허공을 갈랐다. 사악- 몇 달 동안 기른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있던 기무혁의 머리끈이 잘려 나갔다. 시야를 방해하며 흩어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히죽 웃는 신강헌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부터 그걸 노렸거든!” “……치졸한 자식.” “전략이다! 우라아앗!” 바닥으로 내려선 신강헌이 폭발적인 허벅지 힘으로 바닥을 박차고 거리를 좁혔다. 아래에서 불쑥 솟구친 도가 기무혁의 턱을 노렸다. 칼끝이 스치며 허공에 흩날리는 핏방울. 날이 세워지지 않은 도였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기무혁을 노려보는 신강헌의 두 눈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반드시 이긴다!’ 죽어라 노력해서 격차를 많이 좁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도 기무혁과 열 번을 싸우면 일곱 번은 패배했다. 세 번조차 컨디션이 좋은 날에 운까지 따라줬을 때, 지켜보던 검마의 판정승으로 따낸 승리였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기무혁이 여전히 자신보다 훨씬 강했다. ‘목숨을 반 개쯤 걸면 어떨까?’ 오늘만큼은 꼭 이기고 싶었다. 애매한 판정승이 아니라, 확실하게 기무혁의 검을 꺾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당당하게 내일 라이센스 시험장에 들어가겠다! “오늘 신강헌은 컨디션 최고라고!” 콰콰콰콰-! 도풍이 사납게 몰아쳤다. 특수처리된 마룻바닥에 할퀸 자국들이 새겨졌다. 아직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익히지 않았는데도 타고난 힘과 기술만으로 만들어낸 광경이었다. 뒤편에서 지켜보던 검마가 헛웃음을 지을 정도였다. “허어, 작정을 했구나.” 기무혁을 몰아붙이는 신강헌의 모습은 흡사 생사결에 임한 무인을 보는 듯했다. 대체 누가 저걸 보고 라이센스 시험을 하루 앞둔 날에 벌이는 친선대련이라고 생각할까? ‘내일 시험을 위해서는 지금 말려야 할 것 같다만…….’ 잠시 고민하던 최건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호승심이 강한 것은 자신의 제자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내가 질 것 같냐?” 신강헌이 만들어낸 도풍 속에서 눈을 매섭게 치켜뜬 기무혁이 신중히 헤쳐나오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산발이 돼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집중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자 도의 궤적이 선명하게 보였다. 까앙! 까앙! 까앙! 불티가 튈 때마다 신강헌의 도가 튕겨 나갔다. 조급해진 신강헌의 손발이 조금씩 어지러워지고, 결국 한계까지 밀려나며 도풍이 산들바람처럼 사라졌을 때. “우라아앗!” 남은 기력을 전부 끌어모아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 신강헌과 눈이 착 가라앉은 기무혁의 신형이 교차했다. 촤아악! 그리고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상의가 갈기갈기 찢어진 신강헌이었다. “X팔……. 졌지만 잘 싸웠다…….” 털썩. 체력을 모두 소진한 신강헌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기무혁은 입가에 맺힌 핏물을 닦아내며 씩 웃었다. “목숨 건 싸움은 내가 훨씬 윗줄이거든.” 중얼거린 기무혁은 신강헌을 발로 툭 차서 연무장 구석으로 밀어버렸다. 인성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 수련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스스슷……. 연무장에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하면서 제한되는 시야. 기무혁이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투덜거렸다. “쉴 시간도 안 주고 이차전이야?” 그러자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사방에서 김복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까귀! 삽살이! 왕뱀! 물엇!” 동시에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덤벼드는 세 마리의 괴이. 전보다 덩치가 두 배는 커진 까만 솜사탕 같은 망령과 사람이 타고 다녀도 될 만큼 커다란 하얀 개, 혀를 날름거리는 누런 구렁이가 사방에서 기무혁을 공격했다. 기무혁과 신강헌이 무공의 천재라면, 김복자는 술법의 천재였다. 지난 몇 달 동안 최건이 준 술법서를 익힌 뒤, 그녀가 다룰 수 있는 괴이의 숫자가 셋으로 늘어났다. “괴이를 동시에 여럿 다루는 것은 이름난 술법사들이나 가능한 거라더니…….” 아무리 최건이 건네준 술법서가 괴이를 다루는 데 특화된 것이라지만, 그럼에도 황당할 정도의 재능이었다. 끼아아악! 컹컹! 사아아아- 기무혁은 정신없이 쏟아지는 괴이들의 공격을 피하고 막아내며 안개 속을 뛰어다녔다. ‘베어서는 끝이 안 나.’ 검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모를까, 지금은 복자가 다루는 괴이들을 움찔하게 만드는 것이 한계였다. ‘술사를 찾는다.’ 기무혁은 위기 속에서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어차피 술법으로 만들어진 안개 속이었다. 시각, 촉각, 청각……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으니 오감에 의존하지 않고 기감을 확장했다. 본격적인 내공심법은 아직 익히지 않았지만, 그동안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기를 섬세하게 다루는 방법을 익혀두었으니까. 휘익! 휙휙휙! 눈을 감은 기무혁이 마치 묘기 부리듯 날아드는 괴이들의 공격을 피했다. 바짝 약이 오른 괴이들이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가까이 접근해 온 순간. “……거기구나?” 눈을 반쯤 뜬 기무혁이 덤벼드는 괴이들의 틈새로 보법을 밟아 스르륵 빠져나갔다. 괴이들이 저들끼리 우당탕 부딪치며 튕겨 나갔다. “이 멍청이들아!” 미세하지만 기의 흐름이 어딘가 다른 부분이 있었다. 단숨에 그곳에 도달한 기무혁이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술법진의 축이 부서지며 안개가 산산이 흩어졌다. 그리고 검이 그어진 곳으로부터 불과 30cm 거리에, 눈을 동그랗게 뜬 김복자가 엉덩방아를 찧고 있었다. “와 씨……, 오줌 쌀 뻔했네.” 눈을 깜빡이는 김복자의 귀에 못 보던 귀걸이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역한 괴이(영물)들의 혼이 봉인된 술법도구였다. “후우. 마지막 훈련도 이걸로 끝…….” 지친 기무혁이 한숨을 내쉬고 납검을 하려 할 때였다. 술법이 풀리면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그의 감각에, 바늘처럼 얇은 살기가 걸려들었다. ‘기습!’ 흠칫한 기무혁이 홱 돌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지난 몇 달간 예민하게 단련된 감각, 불시에 쏟아지던 살수 대비 훈련이 아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만큼 미세한 살기. 몸을 돌린 기무혁은 자신의 심장을 찔러오는 검을 발견했다. 채앵! 간신히 기습을 막아낸 기무혁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최건이 효자손을 뻗어 기무혁과 검을 맞대고 있었다. 살기가 너무나 섬뜩해 그걸 검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제법이구나.” “……스승님. 저 진짜 놀랐습니다. 살기가 너무 리얼해서 죽는 줄 알았다고요!” “내가 항상 수련이 끝났다고 할 때까지는 방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럼 이제 끝인 거죠?” 검마 최건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다.” 그 말과 동시에 기무혁도 바닥에 쓰러지듯 대자로 누워버렸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연이은 훈련이 끝나면 늘 그렇듯 녹초가 되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기무혁이 겨우 고개만 들어서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이 정도면…… 일류 라이센스 받을 수 있겠죠?” 최건은 제자의 질문이 그토록 우스울 수가 없었다. ‘이 녀석아. 마지막 공격은 절정고수도 대처하기 쉽지 않은 공격이었다. 네 또래에서 한 손에 꼽힐 후기지수들과 연달아 싸운 후에 그걸 막아놓고…… 이 정도면 되겠냐고?’ 저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올 뻔했지만, 최건은 애써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녀석! 결과를 장담할 정도로 라이센스 시험이 만만해 보이더냐?” 제자가 기고만장해질까 봐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지만, 자꾸만 올라가려는 스승의 입꼬리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라이센스 시험을 앞둔 마지막 훈련이 끝났다. * * * 그날 밤. 신강헌과 김복자는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기무혁은 스승인 최건과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뭐라도 좀 마시겠느냐?” “마음 같아선 맥주라도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은데…… 오늘은 보리차로 참겠습니다.” “그럼 나 혼자 마셔야겠구나.” “…….” “하하하!” 제자를 골려준 최건은 캔맥주를 하나 따서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몇 달 전까지 마실 거라곤 보리차뿐이었던 그의 집에는 온갖 마실 것과 주전부리가 생겼다. 또한 예전에는 없었던 소파와 식탁, 의자 같은 가구들도 생겼다. 무엇보다 기무혁과 그의 부모님, 신강헌, 김복자가 오가며 남긴 사람의 온기가 곳곳에서 느껴졌다. “내일이 시험인데 떨리진 않느냐?” “조금 건방진 말일 수도 있지만…….” 기무혁이 스승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일류의 기준에는 충분히 도달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최건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가 말년에 얻은 제자는 똑똑한 아이였다.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네가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행여나 우쭐해서 시험을 그르치는 일은 없도록 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라이센스 시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조언해 줄 말이 없었다. 차라리 빨리 집에 보내서 쉬라고 하는 것이 나을 터였다. 그럼에도 최건이 제자에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며 붙잡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네 장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물어본 적이 없구나. 무인이 되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자 하느냐?” 꽤 어려운 질문이었으나, 기무혁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인. 리차드 한을 뛰어넘어 세계제일 비무대회에서 우승하고 싶습니다.” “그리 대답할 줄 알았다.” 최건은 기분 좋게 껄껄 웃었다. 지난 이십 년간 웃지 못한 것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최근 몇 달간 부쩍 웃음이 많아진 그였다. “헌데 그것이 전부더냐? 세계제일의 무인이라는 목표 외에, 네가 가진 능력으로 어떠한 일을 해보고 싶다는 계획은 없느냐?” “…….” 기무혁은 문득 천마신교를 떠올렸다.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고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했던 단체. 과거로 돌아온 순간부터, 기무혁은 천마신교가 똑같은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대로 말할 수는 없기에 조금 돌려서 표현했다. “……가능하다면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제 가족과 친구들, 스승님, 그리고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 보는 일이 없는 안전한 세상……이 온다면 좋을 것 같아서요.” 천마신교가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 세상을 돌려서 말한 것이었는데, 조금 오글거리는 것 같아 괜히 뺨을 긁적였다. 진지하게 그 말을 듣고 있던 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이상적인 이야기구나. 한 명의 무인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위대한 정치가나 사업가나 되어야 그러한 일이 가능하겠지.” “역시 그렇겠죠?” “하지만…….” 검마(劍魔) 최건. 그는 과거 사마외도의 무인들에게 검마라는 별호로 불릴 만큼 심장이 뜨거운 협객이었다. “나는 그러한 이상을 좋아한다. 무인들의 방식으로 말하면 협(俠)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세상에는 악인이 너무 많고, 협을 행하는 무인은 적다.” “…….” 그리고 최건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신분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무혁아. 내 너에게 말해줄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스승님.” 최건은 경청하겠다는 듯 자세를 바로 하는 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오행신공이라는 무공을 들어보았느냐?” 처음 들어보는 무공이었지만, 그 순간 기무혁은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33화. 그냥 지나가라 기무혁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되물었다. “오행…… 신공이요?”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공이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 의해 새로운 무공이 창안되고, 수백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기존의 무공들 또한 끊임없이 발전되고 개량되고 있었다. 그만큼 무공의 세계는 넓고 방대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신공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 신공절학으로 인정받게 될 것들도 알고 있지만…….’ 기무혁은 오행신공이라는 무공은 처음 들어보았다. 하지만 그 이름을 언급한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스승, 검마 최건이었다. 낭인들이 술자리에서 만취해 떠들어대는 전설의 무공 따위가 아닌 진짜 신공절학일 터였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우리나라에 그런 무공도 있나요?” “……아는 사람이 극히 적은 무공이니라. 정확히 말하면 오랫동안 익힐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잊히다시피 했지.” 최건의 표정은 고요했다. 기무혁은 경험상 저런 표정일 때의 스승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행신공은 한 가지 조건이 전제되지 않으면 익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바로 오행을 모두 다룰 수 있는 특이체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거기까지 들었을 때, 기무혁은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예전에 제가 오행을 모두 익힐 수 있는 체질이라고 했을 때, 놀라셨던 게 그것 때문이었습니까?” 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행신공의 이름을 꺼낸 이상 더는 숨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난 몇 달간 너를 지켜보며 고민했다. 천부적인 자질과 바른 성품을 지녔다고 믿었기에 검술을 가르쳤지만…… 한 가지 불안이 나를 오늘까지 망설이게 하더구나.” “제자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기무혁은 최건이 어떤 말을 해도 가볍게 듣지 않았다. 항상 배움에 목마른 사람처럼 진심으로 나서려 했고, 때론 엄한 질책에도 부끄러워하거나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고작 약관에 불과한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태도지.’ 하지만 최건에게는 간혹 그것이 지나쳐 보일 때가 있었다. “최고가 되고자 하는 네 열정이 지나쳐, 훗날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마외도의 길에 빠지지는 않을까?” “…….” 늙은이의 노파심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최건은 실제로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다. 재능 넘치던 후기지수들이 벽에 가로막혀 몇 년 동안 정체되는 사이,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좌절을 이기지 못해 사마외도의 길로 들어선 것을. 결국 악인이 되어 끔찍한 범죄를 일으킨 옛 동료들을 제 손으로 베었던 경험이, 그에게는 지나치게 많았다. “한때 나는 무림맹의 비밀조직에 있었다. 주로 심마(心魔)에 빠져 사마외도에 현혹된 정파의 무인들을 조용히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했지. 그중에는 내 동료였던 이들도 있었다.” “…….” 기무혁은 지금 자신이 듣는 이야기가 무림맹 내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비밀일 거라고 짐작했다. 무림맹에 그런 조직이 있다는 말은 소문으로조차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제자의 표정에 최건이 피식 웃었다. “놀랐느냐? 네 스승이 전직 살수였다는 사실에?” 기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반짝이는 눈은 최건의 예상과는 달리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종종 궁금했는데…… 암습을 왜 이렇게 잘하시는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역시 스승님을 찾아오길 잘한 것 같아요.” “……너, 살수라는 단어에 과하게 편견이 없는 것 아니냐?” “저한테는 더 좋은 거 같은데요? 덕분에 검술뿐만 아니라 살수 훈련까지 제대로 받았으니까요.” 오히려 최건이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정파의 후기지수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생각이 깨어 있는 제자를 좋아해야 할지, 나무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남은 맥주를 홀짝이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하여간 오행신공과 같은 신공절학은 심마에 빠질 위험도 크다. 네게 미리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떠 수련에 방해만 됐겠지.” 최건은 과거와 같은 경험을 또 하고 싶지 않았다. ……한때 동료였던, 혹은 제자였던 무인을 자신의 검으로 베는 것. 그가 은거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믿었던 제자에게 당한 배신 때문이었지만, 무림맹의 암검(暗劍)으로 활약하며 심신이 오랫동안 피폐해진 영향도 있었다. “그럼 지금은 절 믿으셔서 오행신공에 대해 알려주시는 겁니까?” 되레 당돌하게 되묻는 제자에게 최건은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네놈은 아직도 못 믿겠다만, 네 부모님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해주는 게다.” “……저희 부모님이요?” “둘 다 아들이 엇나가면 볼기짝을 때려서라도 막으려고 할 분들이 아니더냐?” 잠시 그 모습을 상상한 기무혁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다 커서 부모님에게 엉덩이를 맞을 순 없죠. 저는 절대로 심마에 빠지지 않을 겁니다.” “말은 잘하는구나. 그게 마음대로 되면 심마겠느냐?” 퉁명스레 하는 말과 달리, 스승과 제자는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지난 몇 달간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고, 그만큼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혹여나 네가 심마에 든다면 내가 막아주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최건은 그러한 각오로 꺼낸 말이었다. 기무혁도 장난스레 대답했지만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스승님. 저는 스승님 같은 협객이 되어 악인들을 징벌할 겁니다! 잠시 잊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최건은 가슴이 뻐근해져 왔지만, 애써 웃으며 눈앞의 제자에게 집중했다. “……오행신공을 익히는 과정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해서 너는 많은 적을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상관없습니다.” “이놈! 쉽게 대답하지 말고 심사숙고한 후에 대답하거라!” 기무혁은 스승이 시키는 대로 진지하게 고민했다. 팔짱을 끼고 눈까지 감았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눈을 감은 기무혁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허어? 이놈이?” “적이 많아진다라…….” 잠시 후, 눈을 뜬 기무혁은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스승을 바라봤다. “그 많은 적들과 싸우면 더 강해질 수 있는 거잖아요? 오히려 좋을 것 같은데요?” 검마는 자신의 마지막 제자가 새삼 어떤 녀석이었는지 떠올리곤 한탄하듯 한숨을 쉬었다. “미친놈. 강헌이 녀석이 하는 말이 딱 맞다. 내가 말년에 미친놈에게 걸려서 밑천이 다 털리게 생겼구나.” “칭찬하시는 거죠?” “그래! 최고의 칭찬이다, 이놈아!” 최건은 껄껄 웃었다. 그는 벌써부터 제자가 강호에서 어떤 별호를 갖게 될지 궁금해졌다. 모르긴 몰라도, 사마외도에게는 검마라고 불렸던 자신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별호로 불리게 되지 않을까. “네가 마음을 정한 것 같으니 지금부터 오행신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마.” “……스승님이 직접 전수해주시는 게 아닙니까?” “이놈아. 내가 오행적합자도 아닌데 어찌 오행신공을 익혔겠느냐? 어디에 있는지 위치만 알 뿐이다.” 오행신공은 무림맹의 비밀서고에 있다고 했다. 즉, 기무혁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림맹주와 독대하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맹주님을 만나려면 일류 라이센스를 따는 것은 물론이고, 전체 라이센스 시험에서 3등 안에 들어야 할 것이다.” 라이센스 시험에 대해서는 늘 자신만만하던 기무혁의 표정에 처음으로 당황이 어렸다. “전체 3등이요? 그거 설마…….” 첫 라이센스 시험에서 일류를 따는 것이야 또래 후기지수들과의 경쟁이지만, 전체 성적은 다른 의미였으니까. “그래. 운이 나쁘면 절정고수들과도 부딪쳐야 할 게다.” 최건이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하며 남은 맥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 * * 다음 날. 무림맹 정문이 열리지도 않은 이른 시간. 그 앞에는 이미 수많은 인파가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주관하고 팔대문파에서 후원하는 공식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에 응시한 인원은 삼천 명에 육박했다. “올해는 당당한 이류무인으로 인정받겠다!” “가서 청풍문의 이름을 빛내고 오겠습니다!” “난 이번에도 떨어지면 진짜 끝이야…….” 그중에는 올해 성인이 되어 처음 시험을 치르는 앳된 이들도 있었고,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감이 붙어 라이센스 등급을 갱신하기 위해 시험장을 찾은 노련한 무인들도 있었다. 제자 혹은 사형제를 응원하러 나온 무인들, 응시자의 가족들에 촬영 나온 기자들까지 더해져 무림맹 주변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세상에……. 사람이 진짜 많구나.” “시간 딱 맞춰서 오길 잘했죠? 빨리 가봤자 오래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니까요.” 기무혁은 일부러 느긋하게 시험장 앞에 도착했다. 빨리 도착한다고 시험을 빨리 치르는 것도 아닐뿐더러, 괜히 귀찮은 시선만 쏟아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저기, 기무혁 아냐?” “그게 누군데?” “작년 가을에 한동안 너튜브에서 난리였던 소년검객 있잖아!” “어? 맞네!” 기무혁은 여기저기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따끔거리는 시선을 느꼈지만 무시했다. “무, 무혁아. 쳐다본다고 신경 쓰지 마라. 다 네가 뛰어나서 저러는 거니까…….” “우리 아들은 가만히 있는데, 왜 당신이 더 떨어?” “떠, 떨긴 누가 떨어! 날이 추워서 그렇지.” 그러나 기찬호의 호들갑이 무색하게, 기무혁을 힐긋거리는 시선들은 잠시 머물다 스쳐 갈 뿐이었다. ‘역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내길 잘했어.’ 지난 몇 달 동안 기무혁은 외부활동을 하지 않고 수련에만 매진했다. 눈에서 보이지 않자 대중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고, 이제는 기무혁이 눈앞에 나타나도 몇 마디 떠들다가 다른 유명인이 나타나면 바로 흥미를 잃는 수준이 되었다. 와아아아아! 갑자기 큰 환호성과 함께, 팔대문파와 계약한 후기지수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언론을 통해 이미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앳된 무인들이 팔대문파의 로고가 새겨진 수퍼카에서 한 명 한 명 내릴 때마다 엄청난 관심이 쏟아졌다. “송준호다! 태극검문과 계약한 체질 1급의 후기지수!” “극음지체 양하윤도 왔어! 빙하신녀의 제자로 이미 낙점됐다며?” “피승화? 저 애는 금영문에서 엄청난 돈을 부어서 계약했다던데…….” 모인 인파의 절반은 팔대문파의 새로운 후기지수들을 구경하기 위해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당당히. “우라앗! 신강헌 더 골드! 이 몸 등장-!” 하루 만에 금발머리로 염색하고 나타난 신강헌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팔대문파 로고가 그려지진 않았지만 꽤 비싼 외제차에서 내린 신강헌이 열심히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에, 기무혁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 또라이. 또 지랄이네.” 기무혁과 달리 신강헌은 훈련을 하면서도 SNS 활동을 활발하게 했고, 훈련 영상만 올리지 않을 뿐 관종 같은 성격도 여전했다. 와하하하하! 팔대문파 소속 후기지수들과는 조금 다른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지만, 어쨌든 본인은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확실한 것은 신강헌이 나타나면서 대부분의 관심이 그에게 쏠렸다는 것이었다. “경박하기 짝이 없네.” “광대도 아니고…….” “무인으로서 자존심도 없나.” 팔대문파 소속 후기지수들 몇이 불쾌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제발 아는 척하지 마라. 그냥 지나가라.’ 기무혁은 신강헌의 시야에서 최대한 보이지 않게 몸을 숨기려고 했다. 그러나 몇 달간 지겨울 정도로 무기를 부딪치며 싸워댄 탓에, 서로의 기운에 너무나 익숙해진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야! 미친놈!” 신강헌이 활짝 웃으며 기무혁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팔대문파 후기지수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기무혁을 향했다. “아.”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것 같아 기무혁은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34화. 지금부터 가장 “내 머리색 어떠냐? 초사이언처럼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마음으로 골드로 뽑았는데.” 화려한 금발로 나타난 신강헌은 단숨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기무혁은 그 모습에 질색하며 뒷걸음질 쳤다. “제발 아는 척하지 말고 꺼지라고…….” “흐흐. 이 몸의 포스에 쫄기라도 했냐?” 물론 꺼지란다고 꺼질 신강헌이 아니었다. 되레 씩 웃으며 성큼성큼 기무혁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신강헌!” 그때, 차에서 급히 내려 신강헌의 어깨를 잡아채는 거친 손길이 있었다. 홱 돌아선 신강헌이 짜증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붙잡은 상대를 바라봤다. “……왜요?” “내가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랬지.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몰라?” 누가 봐도 신강헌과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닮은 남자, 바로 그의 삼촌인 신준현이었다. 데칼코마니처럼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삼촌은 뭐가 또 불만인데요?” “넌 항상 왜 그 모양이냐? 자꾸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까불어봤자 좋을 게 없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그들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도 신경 쓰지 않고 언성을 높여 다투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둘 사이의 감정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뒤늦게 주변을 의식한 신준현이 목소리를 낮췄다. “강헌아.” 두 손으로 조카의 어깨를 감싸 쥔 그가 애써 화를 참는 얼굴로 낮게 속삭였다. “부탁이다. 돌아가신 부모님 이름에 먹칠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응?” 그러나 역효과였다. 부모님이 언급된 순간, 신강헌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어깨를 잡은 삼촌의 손을 강하게 쳐냈다. “내가 엄마 아빠 얘기하지 말라고 했지! 한 번만 더 그러면 아무리 삼촌이라도……!” 목에 핏대가 선 신강헌이 신준현을 향해 분노를 폭발시키려는 순간. 빠악! 뒤통수를 강하게 때리는 충격에 신강헌의 몸이 휘청였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벌어진 기습이었다. ‘대체 언제 다가온 거지?’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 못했어…….’ 조용히 지켜보던 팔대문파 후기지수들이 속으로 놀라고 있는 가운데, 당사자인 신강헌이 얼얼한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이 미친놈이?” “시험 보러 온 자식이 노랑머리가 뭐냐?” 기무혁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발 가까이 오지 말라며 뒷걸음질 치더니, 어느새 다가와서 신강헌의 옆에 나란히 섰다. 기무혁이 특유의 서늘한 눈매로 신준현을 바라보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준현 삼촌.” “……무혁이구나. 오랜만이다.” 두 사람은 지난 몇 달 동안 간혹 마주치며 안면을 익혔다. 신준현은 처음에는 조카가 기무혁과 어울리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함께 수련한 이후로 무공이 일취월장하자 차로 직접 픽업해 주는 등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무공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했지만, 기무혁이 철저하게 중간에서 막은 탓에 최건과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준현 씨!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기찬호와 박지연도 살갑게 웃으며 신준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예. 두 분도 잘 지내셨습니까?” 그렇게 어른들끼리 인사를 나누는 동안. 화를 내려다 김이 팍 새버린 신강헌이 기무혁의 옆구리를 찌르며 작게 투덜거렸다. “X팔……. 머리 나빠지면 네가 책임질 거냐?” “거기서 더 나빠질 게 있냐? 외공 단련시켜줬으니 고맙다고 할 줄 알았지.” “개새끼가.” 기무혁을 사납게 째려본 신강헌은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라이센스 시험을 앞두고 자신이 선을 넘지 않게 막아준 기무혁이 고마운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딱히 말로 고맙다고 하진 않았지만. 금세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 신강헌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삼촌에게 말을 붙였다. “하여간 우리 삼촌은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부모님 이름에 먹칠하지 않게 알아서 잘할게요. 그러니까 걱정 좀 줄여요.” “……그래. 믿는다.” 신준현은 떨떠름한 표정이었으나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기무혁까지 나서며 주변의 시선이 더 많이 쏠린 탓에, 더 이상 조카랑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부담스러운 듯했다. 다만 그는 조카에게만 들리도록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스스로 몸값 낮추는 짓 하지 말고. 라이센스 시험 끝나면 팔대문파랑 계약 이야기도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 알겠지?” “…….” 신강헌은 대답하지 않고 히죽 웃기만 했다. 작게 혀를 찬 신준현은 차에 타고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저는 다른 일정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기무혁은 떠나가는 차의 뒷모습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신준현. 역시 당신이 가장 의심스러워.’ 훗날 천마신교의 일원이 되었던 신강헌을 기무혁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신강헌의 성격이나 행동을 지켜봤을 때, 천마신교에 투신할 만한 요소는 아무리 생각해도 삼촌뿐이었다. 비록 삼촌과 자주 다투고 충돌하긴 해도 유일한 가족에 대한 애착이 큰 녀석이니까. ‘능력 있는 조카 덕을 보려고 하는 것까진 불쾌하지만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신강헌의 매니저이기도 한 신준현은 지난 몇 달간 팔대문파 여러 곳과 협상을 하고 다녔다. 팔대문파 입장에서는 간만 보는 태도가 좋게 보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신강헌은 삼촌에게 계약과 관련된 것은 전부 맡겨둔 상태였다. 그래도 가족이 자신의 미래에 나쁜 선택을 할 리는 없다면서. ‘조금이라도 천마신교와 연결된 흔적이 보인다면 그냥 두고 보진 않을 거야.’ 만약 정말로 신준현이 천마신교와 관련돼 있다면……. 기무혁이 잠시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린다-!”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굳게 닫혀있던 무림맹의 정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무림맹 무복을 차려입은 무인들이 나타나 일렬로 도열했다. “라이센스 시험 응시자들은 질서를 지켜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족 및 친지는 입장하실 수 없으니 밖에서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침 일찍 와서 기다린 응시자들부터 입장이 시작된 가운데, 팔대문파의 후기지수들은 정문이 아닌 옆문으로 통과했다. 태극검문의 송준호. 일월문의 양하윤. 금영문의 피승화. 그들 외에도 팔대문파 소속 무인들은 무림맹의 중요한 손님들이 이용하는 통로를 사용해 편하게 입장할 수 있었다. “박탈감 장난 아니네…….” “부럽구만, 부러워.” “쳇. 더러워서 팔대문파 말단으로라도 들어가든가 해야지.” 불합리함에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부러움의 시선들이었다. 지금의 무림맹이 거의 팔대문파가 지원하는 돈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무림인 중에는 없었으니까. 오히려 합당한 특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기무혁과 신강헌은 줄의 뒤편에서 대기했다. “둘 다 무리하다 다치면 안 된다, 알겠지?” “특훈의 성과를 보여줘라! 전부 팍팍 쓰러뜨려 버려!” 시험장으로 들어가기 전, 기찬호와 박지연이 두 사람을 꼭 안아주며 인사를 나눴다. “걱정 말고 집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일류 라이센스 따서 나올 테니까.” “아저씨, 아줌마. 저 시험 끝나고 밥 먹으러 가도 되죠?” “당연히 되지! 맛있는 거 잔뜩 차려놓을 테니까 꼭 같이 와, 알았지?” “……네!” 그렇게 부모님의 응원을 뒤로하고, 두 사람도 나란히 무림맹 정문으로 들어갔다. “근데 김복자는 안 왔네? 응원하러 올 줄 알았더니.” “걘 어제 집에 가자마자 뻗어서 못 일어났을걸.” “하여간 은근히 약골이라니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때마침 단톡방에 알림이 울렸다. 김복자가 보낸 응원의 메시지였다. [rabbit : 나 지금 일어남…… 끝나고 축하파티나 하자. 일류 라이센스 취득 기념 만취파티☆] 김복자스러운 응원에 둘 다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든 기무혁은 주변의 높은 건물들을 둘러봤다. ‘스승님. 지켜보고 계시죠? 다녀오겠습니다.’ 무림맹과 팔대문파의 이목을 피해 은거 중인 최건은 오늘 오지 않았지만, 기무혁은 왠지 어디선가 스승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무림맹 대연무장. 종합경기장 수준의 규모인 이곳은 다양한 수련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구역이 나뉘어 있었는데, 그 시설의 수준은 세계에서도 손꼽혔다. 그리고 1년에 단 한 번, 라이센스 시험을 치르는 날에는 모든 구역이 수천 명의 응시자들을 위해 개방된다. “한국무림의 미래를 환영합니다!” 응시자들의 웅성거림은 대연무장 중앙의 강단에 한 노인이 올라서면서 자연스럽게 멎었다. 마이크의 도움 없이도 쩌렁쩌렁하게 대연무장에 울려퍼지는 목소리. 한국제일인을 논할 때마다 언급되는 다섯 명의 초고수 중 한 명. 당대의 권왕이라 불리는 무인의 등장이었다. ‘무림맹주 여필극.’ 기무혁은 단상 위에 선 노인을 올려보았다. 몇 년 후 팔대문파의 견제에 쫓겨나다시피 물러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지금 보이는 모습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닌 거대한 산악을 보는 듯했다. -명심해야 한다. 기무혁은 스승이 당부해준 말을 떠올렸다. -팔대문파 모르게 맹주님과 접촉하는 것은 나조차 쉽지 않다.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독대할 수 있는 명분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지. 대연무장에는 첫 라이센스 시험을 치르는 앳된 무인들뿐만 아니라 이미 여러 차례 경험이 있는 응시자들도 섞여 있었다. 즉, 나이와 성별, 출신과 배분을 불문하고 이곳에 있는 모두가 동등한 경쟁자였다. -동년배에서는 너와 겨룰 만한 아이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허나 너는 그들은 물론이고 경험과 연륜이 풍부한 선배들까지도 뛰어넘어야 한다. 성인이 되자마자 첫 시험에서 일류 라이센스를 취득하는 경우는 많아 봤자 둘이나 셋. 소위 천재라고 불리는 부류였다. 하지만 경력자들까지 포함하면 매해 열 명이 넘는 무인들이 일류 이상의 라이센스를 취득한다. 그들을 모두 포함해 최고의 성적을 낸 3명만 무림맹주에게 개인적인 배움을 청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지는 것이다. ‘일류 라이센스가 중요한 게 아냐. 여기 있는 모든 무인들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이었지만, 기무혁의 입가에는 걱정보다 설렘 가득한 미소가 걸렸다. “……이왕 할 거면 첫 번째를 노려야지.” “신강헌 더 골드를 이기겠다고? 꿈도 야무지시군.” 설레는 마음에 옆에 있는 신강헌의 헛소리도, 무림맹주의 연설도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곧 무림맹주의 당부도 끝이 났다. “지루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들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으니 바로 시험을 시작하지요. 한 가지만 귀띔을 하자면…… 올해는 처음부터 좀 다를 겁니다.” 빙긋 미소 지은 무림맹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대연무장 전체에 기관장치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스스스스스스슷……. 안개가 자욱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짙은 안개에 바로 옆에 있는 사람조차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갑자기?” “처음부터 술법이라니…….” 시험 도중에 술법이 작동하리라는 것은 다들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허둥지둥대는 사람은 없었다. 무인들은 몸을 긴장시키며 갑작스러운 공격이나 돌발 상황에 대비했다. [지금부터 발길 닿는 대로 걷도록 하십시오. 안개가 걷히고 주변이 제대로 보이면, 그곳이 그대들이 시험을 시작할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무림맹주의 마지막 말이었다. “야! 기무혁! 거기 있냐?” 바로 옆에 있던 신강헌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기무혁은 그 방향을 향해 소리쳤다. “소리랑 방향이 안 맞을 거다! 여기서부터 각자 움직이자.” “다음에 만날 때까지 떨어지지 마라! 너 때문에 어색한 분위기에서 밥 먹기 싫으니까!” “등신아. 너나 잘해.” 피식 웃은 기무혁은 발길이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대략 10분쯤 걸었을까. 차츰 안개가 걷히며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한 명 보였다. “정민이 형?” 검무 콩쿨에서 만나 인연이 생긴 송월문의 일대제자 오정민이었다. “기무혁?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형도 시험 보러 오셨어요?” “응. 올해는 일류 라이센스를 한번 노려보려고. 너는?” “저도요.” “하하! 맞다. 너 시상식 때 일류 라이센스 따겠다고 장담했었지! 수련은 많이 했어?”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자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기무혁과 오정민은 상황이 파악될 때까지 일단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뭐 짐작 가는 거 있으세요?” “글쎄. 난 벌써 세 번째인데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기초 테스트는 생략하는 건가?” 주위를 둘러보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주변에 무인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뭘 하려는 걸까요?” “뭔가 기준이 있을 거야. 무작위로 모였다고 생각하기엔 꺼림칙하거든.” 그렇게 무인들이 백여 명 정도 모였을 때, 그들의 중심에서 가면을 쓴 인물이 홀연히 솟구치듯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의 시험을 도와드릴 흑백(黑白)이라고 합니다.] 흑백은 이름처럼 가면의 왼쪽은 검은색, 오른쪽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가 긴장한 무인들 사이에서 위화감을 조성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무림인 라이센스 기초평가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종목은 무기 뺏기입니다.] 무기 뺏기라는 말에 무인들은 각자 무기를 움켜쥐며 흑백을 경계했다. 갑자기 나타난 저 흑백이라는 존재가 자신들을 공격해 무기를 빼앗아 갈 거라고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라이센스 시험에서는 시험관이 응시자들을 상대로 실력을 체크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무인들을 주욱 둘러본 흑백의 입에서는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지금 즉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무인과 겨루어 무기를 빼앗아 주시기 바랍니다.] “뭐라고?” “갑자기 무슨…….” “시험이 뭔 배틀로얄이야?” [5분 안에 승패를 가리지 못할 시에는 페널티를 부과하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흑백의 머리 위에 홀로그램처럼 나타난 [ 05 : 00 ] 표시가 [ 04 : 59 ]로 바뀌었다. 35화. 스스로 놓지 않으면 “무기 뺏기라니! 원래 기초능력은 측정기계로 평가하지 않았습니까?” 한 남자가 흑백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며 항의했다. 날카로운 인상이 까다로운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인물이었다. “갑자기 시험 내용을 이렇게 바꾸는 법이 어딨습니까? 팔대문파 장문인들께서 허락하신 건 확실합니까?” 마치 시험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듯 따지는 남자의 말에, 일부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좀 이상하긴 해.” “겨우 기초평가 단계에서 서로 싸우라니……. 다치면 어쩌려고?” 웅성거리던 여론은 이내 시험 내용에 대한 불만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이유였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아는 얼굴이거나 심지어 사형제인 경우도 많았다. 서로 싸우는 것이 꺼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나서서 항의하자 동조하는 목소리들이 더해졌다. [죄송합니다만.] 흑백은 가면 안의 눈동자만 굴려서 항의를 주도하는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를 바라봤다. [저는 위에서 전달받은 대로 기초평가 테스트를 진행할 뿐입니다. 말씀해 주신 내용은 내년 라이센스 시험에 반영될 수 있도록 전달하겠습니다.] 높낮이에 변화가 없는 기계적인 대답에,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눈썹을 꿈틀대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럼 당신 상관을 불러오십시오. 최소한 무림맹의 간부, 아니면 팔대문파의 장로님께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가(不可)합니다. 대신 한 가지 예외 조항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예외?” [저를 쓰러뜨리면 기초평가를 모두 생략하고 통과하실 수 있습니다. 도전하시겠습니까?] 잠시 흑백을 매섭게 노려보던 남자가 스르릉 검을 뽑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전하겠소. 동문 사형제와 검을 섞느니, 설령 이기지 못하더라도 시험관에게 도전하는 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으니까.” 남자의 용기 있는 행동에 박수를 치는 무인들도 있었다. 기무혁이 보기에는 만용에 불과해 보였지만 말이다. ‘자신감을 가질 실력 같긴 하지만……’ 흑백에게 도전한 남자는 적어도 이류무인 이상의 기도를 갖추고 있었다. 저 정도면 라이센스 시험을 치르는 무림인들 중에서 분명 상위권에 드는 실력자일 터. [좋습니다. 준비가 끝나면 언제든 덤비시면 됩니다.] “하앗!” 불쾌한 듯 눈썹을 꿈틀거린 남자는 힘찬 기합성과 함께 흑백에게 검을 휘둘렀다. 번뜩이는 검날에 맺힌 예기가 상당히 날카로웠지만. 까앙! “커헉!” 흑백의 단 일격에 남자는 검을 놓치며 날아갔고, 그의 검은 흑백의 손안에 들어갔다. [해당 응시자는 무기 뺏기 종목에서 패배한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 잠깐만!” 무기를 빼앗기고 쓰러진 남자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시험관이 약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설마 한 번의 공방도 교환하지 못할 줄이야. 설마 이대로 라이센스 시험에서 탈락인가? 수치심과 분노로 이성이 마비된 남자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대체 누가 시험을 이따위로 바꿨나! 태극검문의 속가제자인 내가……. 흡!” 어느새 흑백이 다가와 남자에게서 빼앗은 검을 그의 목젖에 대고 있었다. [경고합니다. 이 이상 시험을 방해하면 강력하게 제재하겠습니다.] “…….”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남자가 뒤로 물러나며 침묵했고, 그 침묵은 빠르게 주변으로 번져나갔다. ‘흑백이라는 자. 절정고수다.’ 처음부터 흑백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본 기무혁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여전히 흑백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시간을 확인했다. [03 : 48] 5분으로 시작된 시험 시간이 이제 4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럼 제한 시간 안에 승패를 가려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의 건승을 빕니다.] 흑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사람과 거리를 벌리며 무기를 들어 올리는 응시자들. “……어쩔 수 없지. 해보자.” “사, 사형! 진짜로 하시게요?” “미안하지만 난 이번에 꼭 삼류무인 자격을 따야 한다고!” 곳곳에서 무기가 부딪치는 쇳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무혁은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누가 짰는지 몰라도 시작부터 고약한 방식이네.’ 무림인들이란 보통 낯선 인물을 자신의 간격 안에 두려고 하지 않는 법인데, 그걸 노리고 일부러 가까운 사람과 싸우게 만들었다. 함께 시험에 참가해 든든하다고 생각했던 사형제 혹은 지인이 경쟁자로 돌변하도록 말이다. “……무혁아.” “네.” 마찬가지로 거리를 벌리며 검을 뽑아 든 오정민의 얼굴에 난감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너한테는 첫 라이센스 시험인데 좀 너무하다? 그치?” “그러게요. 처음부터 아는 얼굴하고는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하하! 너 자신만만하구나? 이거 망신당하지 않게 조심해야겠는걸.” 그러나 엄살 부리는 말과 달리, 기수식을 취하는 오정민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충분했다. “네가 대단한 녀석이라는 건 알지만, 나도 만만치 않을 거야. 얕보다가 큰코다칠지도 모른다?” “얕본 적 없어요. 형이 일류 라이센스에 도전할 만큼 강하다는 것도 알고요.” “……안다고?” “느껴지거든요.” 오정민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가볍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픽 웃었다. 검을 자신의 가슴께로 끌어당긴 오정민이 비무에 앞서 예를 취했다. “송월문의 일대제자 오정민. 기무혁 소협과 검을 겨룰 수 있게 되어 영광이오.” “무림초출 기무혁. 저야말로 송월문의 검을 견식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후회가 없도록 서로의 실력을 마음껏 펼치고, 겨룬 이후에도 앙금이 남지 않기를 바라겠소.” “저 역시 같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까앙-! 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가볍고 경쾌했다. 매일같이 부딪치던 신강헌의 도와 비교하면 위력은 절반 이하였다. 그렇다고 오정민의 검이 약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빠르다. 그리고 정교해.’ 신강헌의 도에서는 보기 힘든 속도로 옆으로 돌아 나오는 검의 궤적. 기무혁은 눈으로 좇기를 포기하고 감각으로만 몸을 틀었다. 사락- 얕게 베여서 펄럭이는 소맷자락. 몸을 튼 방향 그대로 몸을 회전시킨 기무혁은 자세를 낮추면서 오정민의 하단을 노렸다. 오정민이 후퇴보법을 밟으며 검을 막아냈다. 까가강! 송월문의 검은 화려하거나 강력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문파의 이름대로 소나무 같은 올곧음과 만월과 같은 부드러움을 지향했다. 특히 방어초식에 있어서는 대문파에서도 인정할 만큼 일가견이 있는 검술이었다. 게다가 오정민의 유연하고 온화한 성향과도 자기 옷처럼 잘 맞았다. ‘기본기가 탄탄해. 단단하게 뿌리 내린 나무를 보는 느낌이야.’ 기무혁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뛰어난 오정민의 실력에 감탄했다. 그가 얼마나 부단하게 신체를 단련하고 검을 수련했을지가 느껴졌다. 외공과 내공, 충분한 경험까지, 삼박자가 조화를 이루는 무인은 흔치 않으니까. 쩌엉! 그때 검을 강하게 쳐내며 잠시 거리를 벌린 오정민이 가빠진 호흡을 다스리며 물었다. “왜 웃는 거야? 날 무시하는 건가?” “반대인데요? 강한 사람이랑 싸우는 게 좋아서 웃는 건데.”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넌 눈빛도 그렇고 웃을 때도 오해받기 딱 좋은 인상이야. 불필요한 시비를 불러일으킨달까?” “칭찬으로 들을게요.” 히죽 웃은 기무혁이 이번에는 먼저 달려들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오정민도 한순간에 눈빛이 돌변하며 검을 휘둘렀다. 쩌엉! 쩌저저정! 기무혁은 지난 몇 달 동안 익힌 것들을 마음껏 풀어냈다. 스승에게 지도받으며 부드럽게 바꾼 동작은 관절에 부하를 줄였고, 이제는 거침없이 휘둘러도 무리가 되지 않았다. 그의 검은 낭인처럼 자유로웠으며, 때론 사파처럼 맹렬했고, 어떤 때는 명문정파의 검처럼 절도가 있었다. 한때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던 검객의 지도는, 몇 달 사이에 그를 한층 더 높은 경지로 이끌었다. “미친…….” “처음부터 일류 무인끼리 붙은 거야?” “둘 중 누가 떨어지는 게 말이 되나…….” 무기 뺏기가 끝난 응시자들은 눈을 크게 뜨고 두 검객의 대결을 구경했다. 흑백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계속 보고 싶은 대결이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놀라고 있는 사람은 기무혁과 직접 검을 맞대는 오정민이었다. ‘정말 몇 달 전의 그 기무혁이랑 같은 사람이 맞는 거야?’ 처음에는 대등하게 공방을 주고받던 싸움은 점점 승패가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오정민은 송월검법의 단단한 방어초식으로 상대의 공격을 막기 급급할 뿐, 좀처럼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반면 기무혁은 점점 기세가 올라 이제는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크윽……!” 오정민은 기무혁의 검을 막고 또 막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 역시 뼈를 깎는 노력을 해왔다. 일류무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몇 년간 쉼 없이 단련했다. 하지만 지금, 불과 작년까지 미성년자였던 소년에게 밀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재능의 차이. 오정민은 그 절망적인 격차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송월문의 오정민 무인.” 잠시 공격을 멈춘 기무혁이 처음과 별로 달라지지도 않은 호흡으로 입을 열었다. 그 말투가 무척이나 정중했다. “더 겨뤄보고 싶지만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만 포기하고 제게 당신의 검을 넘기세요.” “……뭐?” “이미 손바닥도 검을 휘두르기 힘들 만큼 찢어졌잖아요.” 뒤늦게 오정민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자, 검을 쥔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 [ 00 : 32 ] 남은 시간은 이제 1분도 되지 않았다. 기무혁은 가만히 있어도 서늘한 눈빛에 살기를 더하며 말했다. “더 이상은 다치지 않도록 신경 쓸 수 없습니다. 스스로 놓지 않으면 손가락을 부러뜨리거나 베서 가져갈 수밖에요.” “너…… 진짜 말도 안 되게 강해졌구나.” 진심이 느껴지는 경고였지만, 오정민은 두렵다기보다는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그 역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송월문의 일대제자였다. 비록 팔대문파가 아닌 중견문파지만 그에게도 사문에 대한 드높은 자부심과 자존심이 있었다. 무엇보다. “검을 놓으라는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거였다면…… 애초에 쥐지도 않았어.” 부우욱- 소매를 찢어 피가 흐르는 손바닥에서 검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었다. “난 포기 못 해.” [ 00 : 22 ] 제한 시간이 30초도 남지 않은 상황. 오정민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검을 들어 올려 기무혁을 겨눴다. “……이기고 싶으면 내 손을 베고 가져가라. 내 의지로 시험을 그만두고 돌아가느니 그편이 나으니까.” [ 00 : 17 ] 눈빛만 봐도 허세가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령 손이 잘리거나 베이더라도 검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 단순히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 때문이 아니라, 오정민이라는 무림인의 자존심이 포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무인이 무기를 빼앗기는 게 죽는 것과 뭐가 다르지?” “…….” “시간 없다며? 어서 들어와!” [ 00 : 09] 남은 시간을 확인한 기무혁이 바닥을 박차며 쇄도했다. 눈을 부릅뜬 오정민이 부들거리는 팔로 검을 휘둘렀고. 푸화악! 은빛 궤적이 두 사람 사이에 그어진 직후, 오정민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36화. 이왕이면 오정민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 귀신처럼 눈을 번뜩인 기무혁이 단숨에 거리를 좁혀오고, 자신의 손목을 노리고 검이 날아오던 모습. 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꽉 움켜쥐고 휘두른 것이 오정민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내 검은…….” “깨어나자마자 검부터 찾아요? 손목이 날아갈 뻔했는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오정민이 고개를 돌리자, 기무혁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어?” “금방 깨어났어요. 한 3분?” “내 검은…….” 빼앗겼겠구나- 라고 중얼거리며 우울한 표정을 짓는 오정민에게, 기무혁이 눈짓으로 그의 오른팔을 가리켰다. “지금 손에 쥐고 있잖아요.” “뭐?” 오정민의 오른손에는 여전히 검이 꽉 쥐어져 있었다. 소매를 찢어 동여맨 모습 그대로, 다만 안전을 위해 검집에 넣어 얌전히 놓인 채였다. “큭…….”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자 뒤늦게 통증이 올라왔다. 길게 베인 팔뚝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는데, 핏물이 옅게 배어 나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금창약 바르고 점혈해서 응급조치했어요. 깊게 베진 않았으니까 몇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고마워.” 기무혁의 도움을 받아 상체를 일으킨 오정민은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팔뚝의 상처는 살갗만 베인 정도였고, 따끔거리긴 해도 큰 후유증은 없을 듯했다. 그리고 검과 손을 동여맨 천에는 찢거나 베려고 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왜 안 가져갔어?” 오정민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기무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꽁꽁 묶어놔서 풀 수가 없더라고요. 게다가 시간제한도 끝나버렸고.” “…….” 오정민은 그 말이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기절한 사람에게서 검을 빼앗는 데, 기무혁이라면 1초도 걸리지 않았을 테니까. ‘적어도 5초는 시간이 있었어.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가져갈 수 있었겠지.’ 기무혁이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자신에 대한 존중이었는지, 혹은 동정이었는지 오정민은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 중이에요. 흑백이라는 시험관, 강압적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쉬는 시간은 주더라고요.” “그래?” 주변을 둘러보자 기무혁의 말대로 부상자들이 쉬면서 금창약을 바르거나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때 기무혁이 오정민 옆에 나란히 앉으며 물었다. “근데 형은 저한테 지면 라이센스 시험을 아예 포기할 생각이었어요?” “……무슨 소리야? 어차피 지면 끝이잖아.” 그 대답에 ‘역시 그랬네.’ 하고 중얼거린 기무혁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흑백은 무기 뺏기가 기초평가 테스트의 ‘첫 종목’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다음도 있다는 말 아닐까요?” “어?” “그리고 아까 자기한테 이기면 기초평가를 ‘모두’ 생략하고 통과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도 했고요.” “설마…….” 그 말은 즉, 무기 뺏기가 기초평가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지은 오정민이 고개를 돌려 흑백을 바라봤다. 마침 두 사람 쪽을 바라보고 있던 흑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무기 뺏기에서 패배했다고 라이센스 시험에서 완전히 탈락하지는 않습니다. 약간의 페널티가 생기긴 하지만 다음 기회가 남아 있지요.] 무기를 빼앗겨도 시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고? 흑백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응시자들이 하나같이 분노한 표정이 되었다. “그걸 왜 이제야 설명해 주는 겁니까!” 누군가의 항의에 흑백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그래야 여러분이 더욱 절실하게 싸워줄 테니까요?] “이익……!” [불만이면 덤비세요. 이기면 바로 시험을 통과시켜 드리겠습니다.] 앞선 사례가 있어서인지 항의하던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완전히 탈락이 아니라는 말에 안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오정민은 미안함 가득한 표정으로 기무혁을 돌아봤다. “미안하다.” “왜요?” “왜냐니…….” 물론 그 어떤 상황이 닥쳤다고 해도, 오정민은 쉽게 검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도 기무혁에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지금의 규칙을 알고 있었다면……. “이건 네가 이겼어야 맞아. 내가 부린 고집 때문에 너까지 손해를 보게 만들 순 없어.” “괜찮아요. 흑백 말대로 시험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고.” 기무혁은 정말로 괜찮았다. 대부분의 응시자들과 달리 그는 처음부터 흑백의 말에서 허점을 눈치챘지만, 일부러 오정민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야 전력을 다한 오정민과 검을 겨뤄볼 수 있을 테니까. ‘덕분에 충분히 만족했지.’ 때문에 결과에도 후회는 없었다. 굳이 기절한 사람의 검을 빼앗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하지만 오정민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다치지 않은 손을 번쩍 든 그가 흑백에게 물었다. “심사관님! 저희 대결의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야 어느 쪽도 무기를 빼앗지 못했으니 두 분 모두 패배한 것으로 처리됩니다.] “기무혁 응시자는 저보다 명백히 강했습니다. 마음만 먹었으면 제 팔을 몇 번이나 자르고 검을 빼앗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패배라는 결과가 정당한 겁니까?” [저도 무척 흥미롭게 두 분의 대결을 봤습니다만 규칙은 규칙입니다. 예외 사항을 둘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으니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지만……!” 흑백이 검지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가면에 갖다댔다. [쉿. 더 이상의 억지 주장은 강력하게 제재하겠습니다.] 입술을 꽉 깨문 오정민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일별한 흑백이 자신을 바라보는 무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부상자들도 얼추 치료가 된 것 같으니, 기초능력 시험에 대해 추가 설명을 하겠습니다.] 흑백은 자신을 적대적으로 노려보는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듯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올해 기초능력 평가는 무인들 간의 대결로 진행됩니다. 5판 3선승. 총 다섯 번의 대결 중 세 번을 승리하면 삼류무인 라이센스를 획득하며, 이류무인 라이센스에 도전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약지를 접어 검지와 중지 두 개만 남겼다. [즉, 무기 뺏기에서 이기신 분들은 앞으로 두 번만 더 이기면 삼류무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은 손가락을 모두 접어서 주먹을 쥔 흑백이 그것을 허공에 흔들며 말을 맺었다. [반대로 방금 무기를 빼앗긴 분들은 앞으로 두 번 더 패배하면 집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규칙이 참 쉽고 간단하죠?] 분명히 웃고 있는데, 고저가 없는 기계적인 목소리라 더욱 기괴하게 들렸다. 기무혁이 작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누군지 몰라도 진짜 악취미네…….” [거기 응시자분! 불만이면 저한테 덤비시면 됩니다. 절 쓰러뜨리면 숨겨진 규칙도 알려드리죠.] “…….” 잠시 흑백을 빤히 바라본 기무혁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앞으로 무슨 시험이 더 있을지 몰라. 괜히 무리할 필요는 없지.’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흑백이 입맛을 쩝- 다시곤 말을 이었다. [자, 그럼 패배자 그룹과 승리자 그룹으로 나누겠습니다. 승리자 그룹은 저를 따라 빨간 화살표를, 패배자 그룹은 파란 화살표를 따라가 이동해 주세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허공에 두 개의 화살표가 나타나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상대의 무기를 빼앗은 무인들은 붉은 화살표 쪽으로, 무기가 없는 무인들은 분한 표정으로 푸른 화살표 방향으로 나뉠 때였다. “잠깐만요!” 오정민이 갑자기 자신의 손과 검을 묶어둔 매듭을 스스로 풀더니, 검을 기무혁의 손에 쥐여주었다. “형?”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기무혁뿐만 아니라 흑백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정민을 바라봤다. “심사관님. 아까 예외를 둘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하셨죠? 그 말은 이유가 있다면 예외를 둘 수 있다는 뜻 맞습니까?”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럼 저를 두 번 패배한 것으로 해주십시오. 대신 기무혁에게 1승을 주고, 승리자 그룹으로 가게 해주세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기무혁은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오정민은 억지로 그의 손에 자신의 검을 쥐여주었다. “이게 맞아. 그러니까 잔말 말고 받아.” 단호한 눈빛은 거절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눈을 빤히 바라보던 기무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직접 돌려받으러 와요.” “당연하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흑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기무혁 응시자의 실력과 비무 내용을 보았을 때, 윗선에서도 수용 가능한 선인 것 같군요. 시험관의 재량으로 인정하겠습니다.] [오정민 무인은 2패를 적립합니다. 앞으로 한 번 더 패배하면 라이센스 시험에서 완전히 탈락합니다.] [기무혁 무인은 1승을 적립합니다. 앞으로 두 번 더 승리하면 삼류무인 라이센스를 획득하고, 이류무인 라이센스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흑백의 결정에 반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기무혁과 오정민의 대결을 직접 보았으니까. 몇몇이 오정민의 선택이 어리석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부상까지 당한 몸으로 어쩌려고…….” “저러고 탈락하면 그때 가서 후회할걸.” 하지만 당사자인 오정민은 마음이 편안해진 듯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다시 볼 때까지 내 검 잘 가지고 있어야 한다?” “…….” 기무혁은 마냥 성격 좋은 사람인 줄로만 알았던 오정민을 무인으로서 다시 보게 되었다. 승부욕 강한 무인, 고집스러운 검객. 송월문의 일대제자 오정민은 꽤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평소 신강헌에게 하듯 가볍게 주먹을 내밀었다. “급하면 보조무기로 써도 되죠?” “뭐, 그것까지 뭐라고 할 순 없지.” 피식 웃은 오정민이 왼손을 들어 기무혁과 마주 주먹을 부딪쳤다. [자자, 패배자들은 어서 푸른 화살표를 따라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오정민은 파란색 화살표를 따라 떠났다. 흑백이 무기를 두 개씩 가지게 된 승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승자분들은 지금부터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곧 다음 시험이 시작될 테니 바짝 긴장해 주시길!] 대부분 침을 꿀꺽 삼키거나 한숨을 푹 내쉬는 가운데, 기무혁만은 두 개의 검을 허리춤에 하나씩 걸치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두 번이라……. 이왕이면 강한 사람하고 싸우고 싶은데.” 앞서가던 흑백이 기무혁의 중얼거림을 듣고 쿡쿡 웃었다. * * * 콰앙! “맹주!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던 무림맹주 여필극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멀쩡한 문을 부술 듯이 거칠게 열고 들어온 이들의 행동에 순간 분노가 치밀었으나, 그는 애써 웃는 얼굴로 일어나 돌아섰다. “장문인들께서 여긴 어쩐 일이오?” 평소 엉덩이가 무거운 팔대문파의 장문인들 중 몇이 몰려와 고리눈을 뜬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몰라서 물으십니까! 우리에게 고지하지도 않고 라이센스 시험 방식을 멋대로 바꾸다니, 대체 이 무슨 폭거입니까!” 무림맹은 지난 십 년 이상 유지했던 라이센스 시험 과정을 올해 갑자기 바꾸었고, 팔대문파에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팔대문파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대비하고 있던 시험 내용이 바뀐 셈이었으니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림맹주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상하군. 라이센스 시험에 대한 모든 것은 무림맹의 고유권한이오. 어째서 팔대문파에게 사전에 고지해야만 하지?” “그야 당연히……!” “일월문주. 대답 잘하시오. 아무리 팔대문파라 해도 월권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성격이 급해서 가장 먼저 따지고 들던 일월문의 장문인은 서늘해진 여필극의 눈을 보고 말문이 턱 막혔다. ‘이 늙은이가 갑자기 왜 이러지?’ 오랜 시간을 팔대문파의 눈치를 보며 얌전히 숨죽이고 지낸 무림맹주였다. 이렇게 계속 고분고분하게 굴면 앞으로 몇 년은 더 맹주직을 유지하게 해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노망이라도 난 것처럼 자신의 권한을 내세우니, 뭔가 믿는 구석이 생겼나 싶어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허허. 맹주님. 저희는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라 자초지종을 듣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적절하게 끼어든 태극검문의 장문인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물었다. “갑자기 시험 내용을 바꾼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간단하오. 겉만 번지르르한 무인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지.” 무림맹주는 몸을 돌려서 눈 앞에 펼쳐진 수십 개의 모니터를 가리켰다. 시험을 치르고 있는 각양각색의 무인들이 모니터에 비치고 있었다. “한번 잘 보시오. 상대에게 검을 휘두르길 망설이는 자들, 패색이 보이자마자 무기를 던지고 물러서는 자들, 뒤에서 비겁하게 기습하는 자들까지……. 저런 행태를 기계가 가려낼 수 있겠소?”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림맹주의 눈빛이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아서였다. “기계에 대고 내공을 주입하고, 가만히 서 있는 쇳덩어리에 검을 휘둘러 점수를 매기는 방식은 많은 인원을 선발하기에는 편하지. 하지만 그래서는 제대로 된 무림인을 가려낼 수 없소이다.” 무림맹주는 방금 전에 보았던 기무혁과 오정민의 대결을 떠올렸다. 서로에게 예를 갖추고 전력을 다해 부딪치는 두 명의 검객. 그 과정과 결과, 그리고 두 사람이 보여준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 무(武)에 평생을 바친 여필극이 생각하는 무림인이란 저런 이들이었다. ‘이것이 맹주로서 내 마지막 업무가 된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오래 유지하지 못할 자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물러나기 전에, 무엇 하나라도 남기고자 팔대문파 모르게 라이센스 시험을 바꿔 준비했다. 몇 남지 않은 측근들과 오래된 인맥들을 총동원해 이뤄낸 결과였다. “무공을 익히고 내공 좀 쌓았다고 다 무인이 아니오. 따로 진행되는 절정고수 심사 대상자들을 제외한 인원은 전부 처음부터 자격을 증명해야 할 것이외다.” 시험의 내용을 몰래 유출해 공유하고 성적을 내기 위한 방식만을 가르치는 팔대문파와 그 휘하 문파들을 향한 경고의 의미이기도 했다. 맹주의 단호한 태도에 팔대문파 장문인들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 뭐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거, 무슨 말씀인지는 충분히 알겠습니다만…….” 화려한 금빛 장포를 두른 금영문의 장문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결과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겁니다. 팔대문파는 모든 상황에 대비해서 수련을 시켰습니다. 오히려 중소문파나 소속이 없는 무인들이 크게 당황하겠지요. 갑자기 바뀐 시험방식에 우수수 떨어져 나갈 테니 그것이 안타까울 뿐…….” 끄아아아악! 그때 모니터 한쪽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간 무림맹주와 팔대문파 장문인들의 시야에, 금영문주와 같은 금빛 무복을 입은 청년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보였다. “저, 저게 무슨…….”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인 덩치 큰 청년이 금영문도의 팔을 부러뜨리고 수투(手套)를 벗기는 중이었다. “금영문주. 왜 말을 하다가 마시오?” 무림맹주의 질문에, 금영문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37화. 여기서 제일 “끄아아아악!” 팔이 부러진 남자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금빛찬란한 무복은 먼지투성이였고, 포마드 크림을 발라 멋지게 세웠던 머리는 엉망으로 변했다. 그 앞에서 신강헌이 금발로 염색한 머리를 벅벅 긁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로 할 때 벗어줬으면 좋았잖아.” “너,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악에 받친 금영문의 무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팔이 부러지는 격통과 분노, 수치심이 한꺼번에 몰려와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그는 문파의 이름을 앞세워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금영문에 입문할 수 있게 조언을 해주려고 했더니, 감히 호의를 원수로 갚아! 너 같은 놈을 금영문에서 가만히 둘 줄 아느냐!” “…….” 처음에 상대가 선의를 가지고 신강헌에게 다가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은 금영문의 무인이고, 시험도 벌써 세 번째라 이것저것 알려줄 수 있으니 편하게 형이라고 부르라면서. 잠시 뒤 흑백이 나타나 서로의 무기를 빼앗으라고 하기 전까지, 두 사람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하하……. 갑자기 싸우라니 좀 난감하네. 동문 사형제가 될지도 모르는 사이인데 괜히 얼굴 붉힐 일 만들기도 좀 그렇고. -뭐, 어쩔 수 없죠. 규칙이라는데 한판 붙어야지. -……차라리 이러면 어때? 이번에 후배인 네가 먼저 양보하면, 다음에는 내가 양보해 줄게. 속내가 빤히 보이는 표정으로 그런 제안만 하지 않았다면, 신강헌은 상대를 무림의 선배로서 대접해 줄 생각이었다. 금영문도의 제안을 거절한 신강헌은 압도적인 무공으로 상대를 제압했고, 수투를 벗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상대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팔을 부러뜨리고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 “평생 후회하게 해주마! 금영문의 무인을 적으로 만들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알게 될……!” “야.” 신강헌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금영문의 무인을 향해 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상대가 흠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마주 서 있음에도 키 차이 탓에 상대를 깔보듯 내려보는 시선. “지금 협박하는 거야? 겨우 그 실력으로?” 체격이 좋은 무인들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압도적인 피지컬과 외모. 실력에서 오는 자신감과 거침없는 언행. 신강헌은 남들에게 오만하다고 손가락질 받을지언정, 무인으로서 자존심을 굽힐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상대가 팔대문파라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아까부터 참아줬는데, 언제 봤다고 초면에 반말이세요?” “너…….” “아직도 반말이네. 덜 맞아서 그런가?” 사납게 웃으며 빈정거리는 말투에 금영문의 무인은 화가 치밀었지만,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몸은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된 애송이가…….’ 부끄럽게도 금영문에 들어온 지 3년 차인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팔대문파 대부분이 주목하고 있는 후기지수라길래 어느 정도인가 했더니…… 직접 보니 상상 이상의 괴물이었다. “왜 갑자기 말이 없어? 계속 협박을 하든가 사과를 하든가 마저 하셔야지?” 신강헌이 웃으며 한 걸음 더 다가가자 금영문의 무인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다행히 그때 두 사람 사이에 손 하나가 끼어들었다. [승패가 결정된 이후의 싸움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승자는 붉은 화살표 방향으로, 패자는 푸른 화살표 방향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흑백이 개입해 다툼을 중재하자 금영문의 무인이 그 뒤로 숨더니, 황급히 파란색 화살표 쪽으로 이동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강헌이 작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금영문도 별것 없네. 삼촌한테 저기는 안 간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상대의 팔을 부러뜨리고 챙긴 수투를 만지작거렸다. 검이나 도처럼 허리춤에 걸거나 등에 메기는 애매해서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장갑이나 다름없으니 한번 착용해 보았다. “오, 나쁘지 않은데?” 비싼 재료를 썼는지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괜찮았다. 손바닥 부분이 얇아서 도를 쥐는 손에 이질감도 거의 없고, 은은한 광택이 도는 검은색 표면도 마음에 들었다. 신강헌은 몰랐지만, 그가 빼앗아 낀 수투는 천만 원을 호가하는 비싼 장비였다. “무기는 좋은 거 쓰는구만. 실력은 이류도 간당간당해 보이던데.” 당사자가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을 만한 발언이었지만, 금영문의 무인은 벌써 멀리 도망친 후였다. [승자들은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신강헌은 앞장서는 흑백을 따라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야. 피승화.” “……나한테 말 걸지 마라.” “너 금영문이지? 너네 사형 X밥이더라.” 작년에 검무 콩쿨에서 은상을 수상한 피승화는 고민 끝에 금영문에 입문했다. 즉, 신강헌에게 팔이 부러진 금영문의 무인은 피승화에게는 사형인 셈이었다. 물론 금영문의 기대주인 피승화와 달리 사형은 평범한 무인이었다. 딱히 친분이 있는 관계도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문파의 무인을 쓰러뜨린 신강헌이 딱히 반가울 이유도 없었다. “사문을 계속 모욕하면 나도 안 참아.” 피승화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지난여름보다 훨씬 더 다듬어진 기세에 신강헌의 솜털이 기분 좋게 곤두섰다. “누가 너네 문파가 별로래? 지금 네 기세를 보니까 생각보다 괜찮은 데 같기도 하고.” 히죽 웃은 신강헌은 피승화 옆에 찰싹 붙어서 말을 걸었다. “나 여기에 아는 놈은 너밖에 없어. 심심한데 얘기나 하면서 가자.” “심심하다고? 시험 중인데 긴장도 안 되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피승화에게, 신강헌은 되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넌 겨우 삼류무인이 되는 시험이 긴장되냐?” “…….” 딴에는 맞는 말이었다. 삼류라는 표현과 달리, 매년 응시자들 중에서 절반은 삼류 라이센스조차 획득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신강헌이나 피승화 같은 무인에게는 그저 거쳐 가는 단계와 다름없었다. “최대 다섯 번의 기회에서 세 번도 못 이긴다? 그 정도 수준이면 집에 가서 칼로 양파나 썰어야지.” “운이 나빠서 세 번 연속으로 일류고수 수준의 상대를 만난다면?”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되는데? 매년 일류고수 라이센스를 따는 사람이 겨우 열 명 안팎인데.” 신강헌은 시험이 파격적으로 바뀌기는 했어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지금과 같은 방식이 더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은 흑백을 따라 움직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신강헌이 흑백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피승화에게 물었다. “넌 우리 나이대에서 누가 1등 할 것 같냐?” 같은 또래의 후기지수들 중에 누가 가장 뛰어난가? 유치한 질문이지만, 항상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키는 화두이기도 했다. 피승화 역시 막 무림에 발을 디딘 후기지수였기 때문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극검문의 송준호 아니면 일월문의 양하윤이겠지.” “아, 그 체질 1급들?” 신강헌은 무림맹 입구에서 보았던 두 사람을 떠올렸다. 태극검문의 송준호는 앳된 외모에 눈썹이 송충이처럼 짙은 녀석. 일월문의 양하윤은 어딘가 좀 맹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둘 다 쬐그만했던 것 같은데.” “너를 기준으로 하면 다 그렇지.” 신강헌의 기준에서는 180대 후반인 기무혁도 ‘작지는 않네.’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평범한 기준으로 봐도 둘 다 작은 키인 건 사실이었다. “……혹시라도 만나면 키에 대해선 언급하지 마라. 작다느니, 짧다느니, 특히 송준호는 그런 말에 엄청 예민하니까.” 팔대문파 소속 후기지수라는 공통점 때문에, 피승화는 방금 말한 두 사람과 이미 만나본 적이 있었다. 올해 단 두 명뿐인 체질 1급의 후기지수. 그들을 직접 본 피승화는 그 두 사람이 동년배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흐흐. 그러니까 땅꼬마라고 부르면 싫어한다는 거지?” “괜히 알려줬네…….” 한숨을 내쉰 피승화가 이번에는 신강헌에게 질문했다. 대답이 뻔히 보인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넌 우리 중에 누가 제일 강할 거 같은데?” 그러자 엄지로 자신의 가슴을 쿡쿡 찌르는 신강헌. “나 아니면 기무혁. 둘 중 오늘 컨디션이 좋은 놈이 1등이다.” 피승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동시에 조금 의외라는 표정이 되었다. “기무혁? 걔 체질 4급 아니야?” “체질이 뭐가 중요하냐? 실력이 훨씬 더 중요하지.” “…….” 한때는 피승화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너무 큰 격차만 아니라면, 노력으로 충분히 체질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실제로 1급 체질의 후기지수들과 만나보고 나서 깨달았다. “넌 아직 몰라. 1급은 차원이 다른 녀석들이라는 걸.” 피승화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팔대문파의 후기지수들은 체질에 따라 입문 후에 받는 지원의 수준이 달라진다. 당장 금영문의 기대주인 피승화만 해도 2급이라는 뛰어난 체질이었고, 금영문은 그에게 온갖 영약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무공 지도를 위해 여러 고수들을 붙여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피승화는 몇 달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공이 발전해 있었다. “대문파에서 왜 그런 지원을 하겠어? 그만한 잠재력이 확실하게 있으니까 그러는 거지.” 누가 뭐래도 무림인에게 있어 가장 큰 재능은 타고난 체질이었다. 팔대문파는 확실하게 미래의 고수가 될 자질에게만 막대한 비용을 들여 투자를 하고 있었다. “……나만 해도 이 정도의 지원을 받았어. 1급이 받는 대우가 어떤지는 상상도 못 할걸?” 천문학적인 액수와 고수들의 이름이 열거되자 조용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던 응시자들이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그러나 정작 신강헌은 시큰둥하게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붙어보지도 않고 1급한테는 못 비빈다, 결론이 그거냐?” “지금 당장은 기무혁이 너나 나보다 뛰어날 수 있겠지. 하지만 3년 뒤, 늦어도 5년 뒤에는 분명 한계에 부딪혀.” 피승화는 확신을 담은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10년 뒤에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거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건 바꿀 수 없다. 문주님이 직접 내게 해주신 말씀이야.” “…….” 그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신강헌이 작게 혀를 찼다. “역시 금영문은 아닌 것 같다.” “……뭐?” 신강헌은 지난 몇 달간 기무혁과 함께한 특훈을 떠올렸다. 하루하루가 토할 정도로 힘들었고, 때때로 포기하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는 기무혁에게 이기고 싶다는 승부욕이 절반. 하루하루 조금씩 더 강해지는 스스로에 대한 즐거움이 절반이었다. 신강헌은 그 과정에서 한 번도 한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네 말대로면 3급인 나는 평생 1급을 못 이긴다는 거지?” “…….” 대답하지 않는 피승화를 보며 신강헌은 피식 웃었다. 무인이라는 길을 선택했다면, 설령 한계라는 벽에 부딪혀도 그걸 부수고 넘어설 생각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한계부터 가르치는 문파라면 다른 건 들어볼 것도 없지.” 신강헌은 피승화를 지나쳐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맞은편에서 다른 흑백이 무인들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정지.] [정지.] 두 무리가 멈춰 서서 서로를 경계하는 와중에, 흑백들끼리 중간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 진영으로 돌아왔다. [마침 저쪽과 저희의 인원이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잠시 후, 두 번째 종목을 시작할 테니 다들 준비해 주시…….] 흑백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신강헌이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상대편으로 걸어가며 외쳤다. “여기서 제일 센 놈 나와라-!” * * * 같은 시각. 기무혁도 두 번째 종목을 앞두고 상대와 마주 서 있었다. “팔다리 간합이 짧아서 불리할 텐데, 정말로 나랑 해도 괜찮겠어?” “너……!” 나름대로 상대를 배려해서 한 말이었는데, 의도와는 달리 잔뜩 화가 난 듯 보였다. 하지만 기무혁은 그 이유를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던 말을 마저 했다. “흑백한테 가서 상대를 바꿔 달라고 해도 괜찮아. 두 번째 종목은 아무래도 신장 차이가 많이 날수록 불공평하니까.” “이 자식-! 방금 한 말을 후회하게 해주마!” 태극검문 최고의 후기지수, 송준호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씩씩거렸다. 38화. 정말 못 하는 걸까? 송준호는 태극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후기지수였다. 11월생인 그는 늦게 체질검사를 받은 편이었는데, 1급 체질이 확정되자마자 온갖 매스컴에서 그 사실을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올해 두 번째 체질1급 후기지수 등장! 송준호 군 단독 인터뷰!> 뉴스 인터뷰는 물론이고 각종 프로그램과 대형너튜브 채널에서 섭외가 끊이지 않았다. 팔대문파 전부가 최고의 조건을 들고 송준호에게 접근했고, 창천검문과 태극검문 사이에서 고민하던 송준호는 장문인이 직접 검을 가르쳐주겠다며 찾아온 태극검문과 계약을 맺었다. 인생역전. 보장된 미래. 태극검문의 차기장문인 후보. 평범한 후기지수에서 하루아침에 온갖 수식어를 단 팔대문파의 기대주가 되었다. 곧 꺼질 거품이라느니 하는 비난도 있었지만, 송준호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패배자들의 질투에 신경 쓸 것 없어.’ ……하지만 딱 하나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언론에서도 송준호의 유일한 단점이라고 지적하는 163cm라는 키. 자신의 콤플렉스를 떠올린 송준호의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성장판이 닫혀도 10cm는 더 클 수 있다고 했어. 아버지도 군대에서 더 컸다고 했으니까 나도 분명히…….’ 송준호를 귀엽게 생겼다고 좋아하는 팬들도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말을 싫어했다. 그래서 오늘도 특수제작한 깔창을 운동화에 넣고 온 참이었다. 티 안 나게 5cm 이상 키를 높여줘서 자존감이 무척이나 올라가 있던 상황. “하, 한 수 배웠습니다.” “저야말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태극검문에서 알려준 내용과는 달랐지만, 무기 뺏기라는 첫 시험에서도 상대를 압도하며 실력을 증명했다. 송준호는 주변의 시선이 의혹에서 감탄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기분 좋게 승자조에 합류해 흑백을 따라나섰다. ‘앞으로 점점 더 놀라게 될걸?’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낯선 무리와 조우했을 때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두 번째 시험이 시작되길 바랄 정도였다. [두 번째 종목은 ‘번호표 떼기’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무작위로 여러분에 등에 번호표를 붙여드리겠습니다.] [맞은편에 보이는 무인들 중, 같은 번호표를 단 분과 대결해서 번호표를 빼앗아 가져오시면 됩니다.] ‘어떤 시험이든 상관없어.’ 송준호는 누구와 붙더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태극검문에 입문한 것은 고작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신은 장문인에게 직접 무공을 지도받았으니까. 게다가 영약을 흡수한 단전에는 넘칠 듯한 내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단, 이번 종목에서 무기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독이나 투척무기도 불가(不可). 오로지 신체만 사용해서 상대의 번호표를 빼앗아 주셔야 합니다.] 설명을 마친 흑백은 응시자들에게 번호표를 확인시켜 준 후 날개뼈 사이에 붙였다. “7번이라…….” 번호표를 부착한 송준호는 맞은편의 무인들을 바라봤다. 누구와 싸워도 자신이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꺼려지는 상대들은 있었다. 특히 기무혁을 본 순간 알게 모르게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저 자식하고는 진짜 붙기 싫은데.’ 기무혁의 눈빛이 무서워서라거나 강해 보여서는 아니었다. 무림맹 정문에서 봤을 때부터 거슬렸던 이유는 바로 저 훤칠한 키 때문이었다. ‘함께 서면 내가 너무 작아 보이잖아!’ 심지어 기무혁은 키만 큰 것이 아니라 비율도 사기적이었다. 머리는 작고 골격은 크고, 팔다리가 쭉쭉 뻗어 있었다. 신강헌만큼 덩치가 우람하진 않지만 팔다리 길이는 비슷한 것 같았다. 그 앞에 서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부러운 자식…….’ 속으로 중얼거린 송준호는 기무혁에게서 최대한 멀리 돌아서 자신의 상대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잠시 후 그들은 마주서게 되었다. “혹시 7번?” “아, 설마……?” 같은 번호표를 등에 붙이고 마주한 두 사람은 곤란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둘 중 기무혁이 먼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팔다리 간합이 짧아서 불리할 텐데, 정말로 나랑 해도 괜찮겠어?” “너……!” “흑백한테 가서 상대를 바꿔 달라고 해도 괜찮아. 두 번째 종목은 아무래도 신장 차이가 많이 날수록 불공평하니까.” 시작부터 이렇게 도발한다고? “이 자식-! 방금 한 말을 후회하게 해주마!” “나는 네 신체조건이 불리해 보여서 배려해준 건데…….” “필요 없다고!” 쿵! 강하게 발을 구른 송준호가 두꺼운 눈썹을 꿈틀대며 외쳤다. “장문인께서 나를 모욕한 것은 사문을 모욕한 것과 같다고 하셨다! 태극검문의 명예를 걸고 쓰러뜨려 주겠어!” “태극검문? 아……. 네가 송준호구나?” 마치 상대가 누구지 몰랐다는 듯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기무혁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 송준호를 잘 알고 있었다. ‘태극검왕 송준호. 이번 시험에서 만나게 되면 꼭 한번 붙어보고 싶었다.’ 훗날 태극검문의 최고수이자 싸가지로 이름을 날리는 녀석의 후기지수 시절과 마주하게 되었다. 태극검문에서 오냐오냐 키운 탓인지 미래의 송준호는 오만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자기보다 큰 상대를 참지 못했는데, 싸움이 벌어지면 일부러 상대의 다리를 부러뜨려 무릎을 꿇리곤 했다. 팔대문파 내에서야 함부로 그런 짓을 못 했지만, 중견문파나 낭인들 사이에서는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 피해자들 중에 내 지인도 있었거든.’ 한동안 절뚝거리며 임무를 수행하던 동료를 떠올린 기무혁의 눈에 송준호가 곱게 보일 수 없었다. 그래서 상대를 더 도발한 것이기도 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사과해도 늦었어!” 화아아아악-! 송준호가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리자 그를 중심으로 기파가 휘몰아치며 무복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체질1급. 별다른 내공심법을 익히지 않아도 기가 단전에 저절로 쌓이는 축복받은 체질. 축기량, 축기속도, 기혈, 발경력이라는 네 가지 항목에서 전부 최상급 수치를 넘어서야 받을 수 있는 재능의 총아(寵兒)였다. “날 무시한 걸 후회하게 될 거야!” “왜 이렇게 열이 났어?” 눈에 정광(晶光)이 깃든 송준호가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손바닥을 뻗었다. 기무혁은 급히 두 팔을 교차해 막았다. 터엉-! 북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기무혁의 몸이 붕 떠서 날아갔다. 공격을 막은 팔뚝이 얼얼해질 정도의 통증에 기무혁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새겨졌다. “……번호표 뺏기라고 하지 않았나?” “널 쓰러뜨리고 나서 떼어가 주마!” 송준호는 태극검문의 보법을 밟으며 기무혁의 좌측으로 돌아갔다.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옆구리를 노리는 손바닥에는 철판도 우그러뜨릴 만한 힘이 담겨 있었다. “팔괘장?” 태극검문은 검법과 함께 권장법으로도 유명한 문파였다. 그 대표적인 무공이 팔괘장과 면장이었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한다는 묘리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데, 지금 송준호가 펼치는 무공은 그런 명성이 무색하게 힘이 넘쳤다. 퍼버벙! 방금 전까지 기무혁이 있던 자리에서 공기 터지는 소리가 났다.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피하자 이번에는 얼굴을 노리고 발차기가 날아왔다. “하압!” 채찍처럼 휘둘러진 발끝이 기무혁의 코끝을 스쳤다. 그 순간 기무혁이 손을 뻗어 송준호의 발목을 낚아챘다. 그러자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송준호가 휘리릭 몸을 회전시키며 반대편 발로 기무혁의 옆구리를 걷어차 견제했다. 파바바박! 몇 차례 손발을 부딪치며 공수를 교환한 두 사람은 잠시 거리를 벌리고 물러섰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네?” “흥! 그쪽이야말로.” 기무혁의 입꼬리에 가느다란 미소가 맺히고, 송준호의 두꺼운 눈썹이 꿈틀댔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더 강해!’ 송준호는 기무혁에게 이길 자신이 있었다. 예전 같으면 상대의 큰 체격과 눈빛을 보고 위축됐겠지만, 자신이 가진 무기가 더 강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은 달랐다. 성인이 되고 무림인의 체질이 활성화되면 육체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엔진의 출력 자체가 달라진다는 비유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 전까지의 너는 잊어라. 태극검문의 독문심법을 익히면, 두 달 후에는 또래에서 너를 어찌할 수 있는 후기지수가 없을 것이다. 태극검문의 장문인인 스승님의 호언장담.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두 달 동안 집중적으로 지도를 받으며 송준호는 점점 확신을 가졌다. ‘나는 강해! 누구든 이길 수 있어!’ 반투명한 기운이 송준호의 몸 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넘쳐흐르는 내공이 몸 밖으로도 유형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파바바박!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는 송준호의 동작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손발이 부딪칠 때마다 상대보다 자신이 앞선다고 느꼈다. “…….” 반면 기무혁의 표정은 통증으로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송준호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봐봐! 내가 더 빠르고 강하다고!’ 그 모습을 보며 송준호는 점점 더 확신에 차올랐다. 다른 무인들도 어느새 싸움을 멈추고 수준 높은 두 사람의 근접박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태극검문의 후기지수인 송준호에 대한 감탄이 대부분이었다. “저게 1급 체질…….” “송월문의 오정민을 이긴 녀석이 꼼짝도 못 하잖아?” “저건 타고난 거지. 부럽다, 부러워.” 몸 안의 기를 내공으로 바꿔 쌓고, 그 내공을 움직여 몸 밖으로 발출하게 되는 순간부터 무인은 본격적인 초인의 영역에 들어선다. 그중에서도 자유자재로 기를 다루는 무인을 무림에서는 일류(一流)라고 칭한다. 체질1급은 누구보다 쉽게 일류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는 재능이라는 것을, 송준호가 지금 증명하고 있었다. [송준호 응시자는 벌써 기감영역을 깨우친 것 같군.] 두 명의 흑백도 나란히 팔짱을 끼고서 흥미로운 시선으로 두 후기지수의 대결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송준호와 함께 온 흑백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평범한 무인은 십 년 이상을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감각을 두 달 만에……. 역시 괜히 1급이 아닌가?] 기감영역(氣感領域). 주변에 기를 퍼트려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면, 무인은 그 안에서 절대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뒤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거나 검의 궤적을 예측하는 것도 기감영역이 확장된 무인이라면 어렵지 않은 이유였다. 송준호가 현격하게 차이 나는 피지컬에도 불구하고, 기무혁과의 공방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확실히 1급 후기지수치고도 빠른 편이긴 하군요. 상승심법을 익혀도 반년에서 일 년은 걸리는 것이 보통인데……. 기감이 특출나게 발달한 타입일까요?] 기무혁과 함께 온 흑백도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송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처음 입을 연 흑백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흑백13. 담당하는 후기지수가 신경 쓰이지 않습니까? 그쪽도 꽤 기대주 같던데요.] 같은 가면을 쓴 흑백들끼리는 번호로 서로를 불렀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표식을 그들끼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딱히요? 저는 흑백8처럼 쉽게 정을 주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 흑백8이 말이 없자 흑백13이 그를 슬쩍 돌아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입니다. 그보다 벌써 승부가 난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이쪽도 만만치 않답니다?] 흑백13은 기무혁이 첫 대결에서 보여준 모습을 떠올리고 쿡쿡 웃었다. 퍼버버벅! 분명 송준호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양상이었다. 태극검문의 심법과 무공을 익힌 체질1급의 후기지수는 날개를 단 사자처럼 맹공을 퍼부었고, 반면 기무혁은 오정민이 자신을 상대할 때 그랬던 것처럼 방어에 급급해 보였다. [볼수록 여우 같다니까…….] 하지만 자세히 보면, 기무혁의 표정은 오정민과는 전혀 달랐다. 한 번씩 미간을 찌푸리기만 할 뿐, 상대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곤란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압도적인 내공으로 상대를 밀어붙이던 송준호가 점점 지쳐가는 것이 보였다. [혹시…….] 흑백8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흑백13에게 질문했다. [기무혁 응시자도 기감영역을 깨우친 겁니까?]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흑백8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기무혁의 체질은 4급이었으니까. 나쁘지 않은 재능이지만, 기감영역을 깨치기에는 기에 대한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터. [그건 아닙니다.] 흑백13이 고개를 단호하게 가로저었다. [저건 몸으로 갈고닦은 감각입니다. 기감이 아니라 육체의 반응으로 대응하는 거죠.] [……그게 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저 나이대 후기지수가 기감영역에 준하는 예리한 감각을 지녔다고요?] [하하! 매일 살수에게 기습 훈련이라도 받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실없는 소리를…….] 그게 스무 살에 불과한 후기지수에게 할 말이냐면서 흑백8이 째려보자, 흑백13도 농담이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여간 기감영역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실제로 내공도 거의 안 쓰고 있잖습니까?] […….]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건…….] 기무혁을 유심히 지켜보던 흑백13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못 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왜…….] 분명 불가능해야 하는데, 흑백의 눈에는 송준호가 할 수 있는 것을 기무혁이 못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저 친구 입가에 언뜻언뜻 미소가 비치는 걸까요?] 39화. 써야 할 땐 써야지 기무혁은 자신보다 많은 내공을 가진 상대와 싸우는 것이 익숙했다. 송준호와의 대결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할 만한데?’ 낭인 시절 인공단전에서 끌어다 쓸 수 있는 내공은 한 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작았고, 그마저도 적재적소에 아껴 쓰지 않으면 금세 바닥을 보였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걸로 부족함을 보완할 수밖에 없었다. ‘신체를 극한까지 단련하고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린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은 다른 감각이 극도로 발달하는 것처럼, 내공이 빈약했던 기무혁은 외공과 감각 수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적은 내공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을 스스로 체득했다. ‘지금은 딱히 내공이 부족하진 않지만…….’ 오랜 버릇이 된 탓일까? 기무혁은 내공을 조금이라도 낭비하는 걸 싫어했다. “저러다 어디 하나 부러지겠는데…….” “내공 차이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기무혁이 송준호의 압도적인 내공을 감당하지 못해 수세에 몰리는 것처럼 보였다. 퍼버버벙! 송준호가 팔괘장의 초식을 펼쳐낼 때마다 공기가 거세게 터져 나갔다. 멀리서 장풍을 쏘는 것은 금지였지만, 팔다리에 공력을 두르는 것까지는 허용되었다. “하아압!” 송준호의 두 팔을 타고 흐르는 공력이 반투명하게 일렁였다. 넘쳐나는 내공을 주체하지 못해 벌어진 현상이었다.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부딪칠 때마다 쇠로 된 방망이에 맞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기무혁의 미간이 한 번씩 찌푸려지는 이유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버틸 만해.’ 전생에 기무혁이 무리하게 몸을 혹사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외공과 내공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니, 멀쩡한 쪽이 부족한 쪽을 메꿔야 했으니까. 물론 진짜 단전이 생긴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기무혁이 거의 외공만으로 상대와 부딪치는 이유는 하나였다. 파바바박! 바로 몸으로 직접 상대의 무공을 경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전생에서도 대문파의 무공과 직접 부딪쳐 볼 일은 흔치 않았다. 그 속가나 하청과는 여러 번 부딪쳐 봤지만, 대문파와는 은원이 생길 만한 일은 되도록 피했으니까. 기무혁은 최소한의 내공으로 신체를 보호하며 팔괘장에 깃든 묘리를 피부로 직접 느꼈다. ‘팔괘장이 이런 무공이었군.’ 만물의 변화와 현상을 여덟 가지의 상으로 담았다는 뜻의 팔괘(八卦)를 장법으로 승화한 팔괘장은 강맹한 초식들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두 팔로 펼쳐내는 무공이었다. 괜히 팔대문파의 상승무공이 아니었다. 직접 보고 겪는 것 자체로 큰 공부였다. ‘이만하면 충분히 본 것 같은데…….’ 송준호는 벌써 몇 번씩이나 같은 초식을 비슷한 투로로 펼쳐내고 있었다. 점점 더 뻔히 눈에 읽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정작 당사자는 자신의 무공에 도취된 듯 중얼거리며 맹공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기무혁이 보기에는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부자연스럽기만 했다. -시험장에 가면 대문파의 무공이랍시고 어설프게 익힌 녀석들과 만나게 될 게다. 영약으로 내공은 주체 못 할 만큼 많아진 데다, 갑자기 상승무공을 익혀서 하루아침에 뭐라도 된 줄 아는 햇병아리들……. 그런 녀석들을 단번에 정신 차리게 하는 방법이 뭔 줄 아느냐? -삼재검법으로 패주면 어떨까요? -옳거니! 바로 그거다! 문득 스승과 나눴던 문답을 떠올린 기무혁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송준호에게는 그 웃음이 자신을 비웃는 것으로 보였다. “날 내려다보면서 웃지 마!” “내려다보지 말라고? 그럼 나보고 무릎이라도 꿇고 싸우라는 거야?” “으아아아!” 기무혁의 순수한 의문에 괴성 같은 기합성을 터트린 송준호가 거칠게 돌진했다. 마치 작은 멧돼지처럼 달려드는데, 폭발적인 내공을 추진력으로 삼은 덕분에 속도가 굉장했다. 촤아아악! 송준호가 아슬아슬하게 기무혁의 곁을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허공에 찢어진 옷자락이 흩날렸다. “……이건 좀 위험했어.” 기무혁이 찢어진 오른팔의 소매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상완에 난 붉은 손자국. 조금만 반응이 늦었으면 송준호의 조법에 그대로 어깨가 뽑혔을지도 몰랐다. 두 사람의 대결을 유심히 지켜보던 두 흑백이 점점 우려의 시선으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저 정도로 밀리는데도 아직 내공을 제대로 끌어올리지 않고 있군요.] [혹시 내공 자체가 부족한 체질일까요? 4급이라고 해도 축기량은 떨어질 수 있으니…….] 송준호는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내공을 다루고 있었고, 기무혁은 정확히 그 반대처럼 보였다. 그 나이대라고는 믿기지 않는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내공을 다루는 모습은 어딘가 미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밖으로 뿜어내야 할 것을 억지로 붙잡아두는 느낌이랄까. 흑백13이 팔짱을 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돌이켜보면 송월문의 오정민과 싸울 때도 내공을 많이 쓰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기껏해야 어기충검으로 검을 단단하게 하는 정도였나?] [기무혁 참가자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체질의 격차가 드러나는 것 같군요.] 두 흑백은 저들끼리 그렇게 결론을 내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기무혁이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습관 때문에 내공을 아끼는 짠돌이 같은 버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팔대문파의 무공을 피부로 느껴보고 싶다는 이유로 내공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작 당사자는 위기는커녕 지금 다른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 이겨야 아슬아슬하게 역전승하는 것처럼 보일까?’ 정식 체질검사에서 기무혁은 4급으로 판정받았지만, 그의 진짜 체질은 2급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체질을 속이는 술법을 직접 시술해 준 김복자와 스승인 검마 최건뿐이었다. 만약 지금 당장이라도 전력으로 내공을 끌어올려 송준호와 싸운다면? ‘낙승이겠지.’ 하지만 그건 기무혁이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오정민과 싸울 때와는 달랐다. 팔대문파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후기지수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받게 될 테니까. 그중에는 분명 악의에 찬 것들도 있을 것이다. ‘겨우 운 좋게 이기는 정도면 충분해.’ 본의 아니게 눈에 띄는 행동을 여러 번 했지만, 기무혁은 가족과 자기 주변을 충분히 지킬 만큼 강해졌다는 판단이 될 때까지는 가능한 한 실력을 숨길 생각이었다. 문제는 상대가 지금처럼 내공을 잔뜩 아끼면서 이길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것. “하아압!” 송준호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무공의 숙련도도 아쉬웠지만, 1급 체질의 압도적인 내공과 그것을 다루는 능력만큼은 분명 대단했다. 특히 저 그물처럼 촘촘한 기감영역을 뚫어야 등의 번호표를 뗄 수 있는데, 기무혁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송준호의 맹공을 막으며 열심히 머리를 굴린 끝에, 기무혁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연기가 좀 필요하겠어.’ 낭인 시절에 곧잘 하던 것을 떠올린 기무혁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볼 쪽의 살을 씹어서 피를 냈다. 주르륵……. 입가를 타고 핏물이 흘러나오자 송준호가 흠칫하는 것이 보였다. 기무혁이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부족하더라도 써야 할 땐 써야지.” “뭐, 뭘 하려고?” 비장한 목소리와 함께 기무혁의 상의가 부풀어 올랐다. 화아아아악! 순간 그들을 지켜보던 두 흑백의 눈이 커졌고, 송준호가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타하앗!” 처음으로 기무혁이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그의 두 팔에 희미한 기운이 맺힌 채였다. “이게 내 전력이다!” 피를 토하며 달려드는 기무혁은 최후의 절초를 펼쳐내는 무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간힘을 다해 뻗어낸 쌍장이 마지막 한 수라는 것을 지켜보던 모두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승부에 응해주마!” 잠시 물러났던 송준호도 피하지 않고 마주 쌍장을 뻗었다. 기무혁보다 훨씬 더 강렬한 기운이 그의 두 팔을 휘감았다. -쩌엉! 두 사람의 손바닥이 충돌하고 반발력에 밀려나는 순간, 마치 멀미라도 난 것처럼 송준호의 감각이 흐트러졌다. “흐헉……!”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본인도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기감영역에 타인의 기가 간섭하거나 침범할 때 생기는 현상이었다. ‘사실은 나도 할 수 있거든.’ 기무혁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그는 쌍장이 충돌하는 아주 짧은 찰나에 송준호의 몸 안에 자신의 기를 침투시켜 기감영역에 혼란을 주었다. 당하는 사람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섬세하고 은밀한 기(氣)운용 능력.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송준호의 감각에서는 기무혁이 갑자기 눈앞에서 흐릿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휘익! 흐릿해지는 기무혁을 잡으려다 허공에 헛손질을 한 송준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이형환위?” “벌써 그렇게 고절한 무공을 펼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찌이익- 어느새 송준호의 등 뒤를 점한 기무혁이 상대의 번호표를 떼어냈다. 표식이 뜯기는 선명한 감촉에 송준호는 아연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내가…… 졌어?” 체질 1급인 내가, 태극검문의 팔괘장까지 썼는데도 졌다고? 그 순간 기무혁의 갈라진 기침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쿨럭! 쿨럭…….” 몇 차례의 기침에 핏물이 섞여 나왔다. 누가 봐도 억지로 내공을 끌어올리느라 무리한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괘, 괜찮아?” 송준호가 허탈함과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기무혁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는 조금 지친 것 말고는 부상도 없이 멀쩡했지만, 기무혁은 한눈에 봐도 내상이 심각해 보였으니까. “내 승리지?” 하지만 번호표떼기 대결에서 승리한 것은 기무혁이었다. 비틀거리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기무혁이 송준호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차라리 네가 오랫동안 익힌 익숙한 무공을 사용했다면 훨씬 더 나한테 불리했을지도 몰라. 태극검문의 무공은 대단하지만, 숙련도가 조금 아쉬웠어.” “…….” 부끄러움에 송준호의 귀가 빨개졌다. 기무혁의 말에서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서였다. 아무리 신공절학이라도 겨우 두 달 배운 팔괘장은 어설플 수밖에 없음을 내심 스스로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 부족한 부분을 압도적인 내공으로 채우려 했고, 지금까지는 항상 통했었다. ‘기무혁 말이 맞아. 기본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익숙하지 않은 초식을 연달아 펼치려다 보니 빈틈이 커졌고, 기무혁은 마지막 순간에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즉, 미숙한 무공으로 승부를 내려고 한 자신의 실책이었다. ‘나는 아직도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태극검문에 입문하고 처음으로 맛보는 패배감. 하지만 그보다 상대는 부족한 내공을 억지로 끌어다 쓸 정도로 모든 힘을 쏟았는데, 자만심에 차 그만큼 최선을 다하지 않은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만하면 명분이 되겠지?’ 기무혁은 자신의 역전승에 대한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말이다. 그때 겨우 고개를 든 송준호가 기무혁에게 포권을 취했다. “……피드백 고마워. 명심할게.” 기무혁도 표정 관리를 하며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조금 의외이기도 했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생각만큼 성격이 모나지는 않았군.’ 대문파 도련님답게 패배를 납득하지 못하겠다며 화를 내거나 다시 하자고 억지를 부리진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송준호는 겸허하게 패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거 받아.” 송준호가 품에서 고급스럽게 포장된 케이스를 꺼내 내밀었다. 태극검문에서 아끼는 후기지수를 위해 준비한 최상급의 내상약으로,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고맙다. 잘 쓸게.” 기무혁은 거절하지 않고 내상약을 받아서 품 안에 잘 챙겨 넣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뒤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흑백13은 조금 전 기무혁과 송준호의 쌍장이 부딪치던 순간을 되새기고 있었다. ‘역시 기무혁 참가자는 계속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군요.’ 흑백13이 가면 안에서 흡족한 웃음을 지을 때, 송준호가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기무혁! 너를 내 라이벌 중 하나로 인정하겠어!” “……음?” 신강헌에 이어서 두 번째로 듣는 라이벌 선언이었다. 40화. 한계가 뚜렷한 후기지수 번호표떼기 대결이 끝난 후. 기무혁과 송준호는 다른 응시자들의 대결이 끝나길 기다리며 잠시 사적인 대화를 나눴다. “아직도 문파를 안 정했다고? 왜?” “개인적인 목표가 있거든. 문파에 입문하는 건 그다음에나 생각해 보려고.” “너라면 엄청나게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텐데……. 나중에 내가 태극검문에 소개해 줄까?”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 기무혁은 팔대문파에 입문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순수한 호의가 담긴 송준호의 제안을 굳이 딱 잘라 거절하지 않고 웃으며 받아두었다. “알았어. 그럼 나랑 연락처 교환하자!” 기무혁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송준호의 살가운 태도가 꽤 의외였다. ‘문파에서 교육만 제대로 했어도 그런 싸가지가 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만약에 막내 남동생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똘망똘망한 눈에 앳된 외모, 두꺼운 눈썹은 시골에 있을법한 강아지를 떠올리게 했다. 어렸을 때 엄마아빠에게 동생 갖고 싶다고 조르면서 상상했던 이미지가 딱 저랬던 것 같기도 하고. ‘무인치고는 팔다리가 짧은 게 안타깝지만…….’ 하지만 기무혁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송준호도 기무혁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얘는 단전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송준호가 보기에는 기무혁은 타고난 단전이 작아서 얼마 안 되는 내공도 간신히 끌어다 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안쓰러운 녀석.’ ‘불쌍한 자식.’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딱하게 여기는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그 사실을 서로 모르는 채 대화가 이어졌다. 송준호가 갑자기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물었다. “근데…… 너는 혹시 뭐 따로 먹는 거 있어?” “먹다니? 영약 같은 거 말하는 거야?” 주변을 슬쩍 둘러본 송준호가 거의 입만 뻐끔거리는 수준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사실 기무혁에게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키 말이야. 특별히 챙겨 먹는 영양제가 있어? 아니면 병원?” “……아무것도 안 하는데? 키는 그냥 유전이라.” 다른 가능성은 없다는 것처럼 들리는 단호한 대답에, 송준호는 크게 상처 입은 표정이 되었다. “이 자식이……. 체질도 유전이거든!” 그러고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한껏 치켜들어 봤지만, 안타깝게도 정수리가 기무혁의 턱 높이까지밖에 닿지 못했다. “뭐, 그야 당연히 그렇지?” 송준호는 기무혁이 자신과 똑같이 충격을 받을 줄 알았겠지만, 실제로는 2급 체질을 지닌 기무혁에겐 아무런 타격도 없는 도발이었다. “이게 아닌데…….” 자꾸만 치미는 패배감에 송준호가 부르르 주먹을 떨고, 기무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모든 대결이 종료되었다. 흑백13이 과장된 동작으로 두 팔을 벌려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승패가 모두 가려졌군요! 승자는 저를 따라오시고, 패자는 저쪽에 계신 흑백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흑백13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는데, 기무혁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묘하게 거슬린단 말이지.’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기무혁은 흑백13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알 수 없는 찝찝한 기분을 느꼈다. 다만 상대가 라이센스 시험의 심사요원이니 얌전히 있을 뿐이었다. 그때 송준호가 팔을 뻗어 기무혁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난 가볼게. 기무혁! 곧 다시 보자!” “그래. 나중에 보자고.” 그렇게 송준호가 패자 그룹에 합류해 떠나고, 기무혁은 승자 그룹으로 합류했다. [자, 그럼 저희 승자 그룹은 삼연승을 향해 가볼까요?] 유쾌한 말투의 흑백13을 따라 응시자들은 어느새 다시 짙게 내려앉은 안개를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기무혁은 멀리 안개 너머를 응시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안 들켰겠지?’ * * * “……한계가 뚜렷한 후기지수로군요.” 무거운 침묵이 감돌던 장내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금영문의 장문인이었다. 방금 전까지 뚫어져라 보고 있던 모니터에서 눈을 뗀 그가 다른 장문인들을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지 않습니까? 체질 4급. 방금도 무리해서 내공을 운용한 탓에 내상을 입은 것이 보였지요. 요행으로 태극검문의 후기지수를 이기긴 했습니다만…….”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이 넋을 놓고 지켜보던 모니터는 기무혁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근골만 보면 최상급 자질이지만, 체질이 받쳐주질 못하면 결국 의미가 없지요.” 일월문의 장문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보탰다. 그가 힐긋 태극검문 장문인의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저 아이와 송준호가 반년 후에 다시 붙는다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겁니다.” “반년은 무슨! 3개월이면 충분할 겁니다!” 금영문주가 맞장구를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자가 패배하는 모습을 지켜본 태극검문 장문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였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어쨌든 패배는 패배이지요. 준호도 이번 일을 계기로 깨닫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조용히 있던 태극검문의 장문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자신이 직접 가르친 제자가 패배하는 모습을 다른 장문인들과 함께 지켜본 탓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그는 애써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준호의 팔괘장은 아직 많이 미숙합니다. 고작해야 두 달, 심지어 주력인 검법이 아니라서 제대로 익힐 시간도 부족했지요.” “겨우 두 달이요? 그렇다면 오히려 재능이 어마어마한 게 아닙니까!” “부럽습니다. 집까지 찾아가셔서 기어이 데려가시더니……. 그때 해외에 있지만 않았어도 저도 욕심을 냈을 겁니다.” “허허. 아닙니다. 두 분의 아래에는 뛰어난 직전제자들이 이미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세 장문인이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고 있자,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림맹주 여필극이 짧게 혀를 찼다. “쯧. 누가 보면 태극검문의 후기지수가 이긴 줄 알겠군.” “…….” 그 말에 세 장문인이 싸늘한 시선으로 여필극을 돌아봤다. 눈빛에 담긴 감정이 하나같이 곱지 않았는데, 상대가 무림맹주만 아니었다면 거친 말이 튀어나왔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맹주님.”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띤 태극검문의 장문인이 말을 이었다. “제가 후배로서 조심스럽게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말씀하시오. 언제는 나를 어렵게 대한 적이 있었소?” “하하…….” 맹주 또한 기싸움에서 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 팔대문파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숨죽이며 살아온 그였다. 하지만 더 이상 허수아비같은 맹주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여필극의 언행에는 거침이 없었다. “누가 들으면 저희가 맹주님을 홀대라도 한 줄 알겠습니다?” “섭섭하군요. 수십 년간 존중과 존경을 잊은 적이 없는데…….” 일월문과 금영문의 두 장문인이 태극검문 장문인의 좌우로 나란히 서며 말했다. 마치 자신들은 한마음 한뜻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만 같았다. 두 장문인의 지원을 받은 태극검문 장문인이 입가에 미소를 짙게 띠며 말을 이었다. “큰 조직을 이끌다 보면 서로 오해도 생기고 불만도 나오기 마련이지요. 그렇다고 무림의 어른들이 어린애들처럼 다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나를 어린애 취급하며 어르고 달래는 것인가?” “……그럴 리가요. 그저 비유를 한 것입니다.” 태극검문의 장문인은 여필극의 주먹이 슬며시 쥐어지는 것을 보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권왕 여필극. 지금은 비록 영락해 가는 무림맹의 맹주이지만, 그 개인은 혼자서 팔대문파를 긴장시킬 수 있는 초고수였다. 또한 맹 내에는 여전히 그를 존경하는 무인들이 많았다. 팔대문파의 견제에도 무림맹이 가까스로 그 위상을 지키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아닌 무림맹주 여필극에게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진정하시지요. 맹주님의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걸려 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잘 알고말고…….” 여필극이 낮게 침음하며 세 사람을 바라봤다. 태극검문, 일월문, 금영문. 이 자리에는 팔대문파의 장문인 중 셋만 와 있었지만, 여필극은 다른 장문인들도 저들과 뜻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팔대문파 여덟 중에 셋, 아니, 둘만 마음을 돌렸어도…….’ 저들의 연합은 지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끝에 굳건한 성벽과도 같아진 지 오래였다. 무림맹주로서 오랜 시간 인내하며 그들을 품어보려 여러 정책을 펼쳐왔으나, 오히려 그 시간 동안 팔대문파의 세력은 날로 거대해져 이제는 무림맹의 권위를 넘어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부 내 잘못이다.’ 돌이켜보면 이십여 년 전, 검마 최건이 사교 토벌 작전에서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강경하게 개입했다면 상황이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터였다. ……결국 최건이 모든 책임을 지고 무림맹을 떠난 후, 무림맹 내에서 팔대문파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게 되었고, 그 영향력은 점점 더 강해졌다. 시간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수천 번도 더 해봤지만, 그것은 천하의 무림맹주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맹주의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지자 세 장문인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미 시험이 시작되었으니, 더 이상은 이 부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혹시 모를 사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후기지수들이 크게 다치거나 혹 죽기라도 하면 아무리 맹주님이라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장문인들은 미리 맞춰놓기라도 한 것처럼 한 사람씩 돌아가며 말했고, 맹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것 없소. 그만한 각오도 없이 일을 벌였을까. 충분한 안전장치를 해뒀고, 책임을 피할 생각도 없으니 장문인들은 걱정하지 마시구려.” 확답을 들었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서로를 바라본 세 장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부디 시험의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멀리 배웅하지 않겠소.” 문밖으로 나가려던 태극검문의 장문인이 슬쩍 맹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맹주님. 한 가지 부탁드리건대,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무어라?” “저희는 맹주님을 ‘지금처럼’ 곁에서 오랫동안 보필하고 싶습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팔대문파 장문인들은 문을 나섰고, 맹주는 한동안 그들이 나간 곳을 노려보다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시원하게 치고받으면 좋겠군.” 여필극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과연 자신이 맹주직을 앞으로 얼마나 더 유지할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은퇴하고 야인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무림맹에는 아직 팔대문파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협객들이 있었다. ‘나마저 떠난다면 누가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준단 말인가?’ 자신을 믿는 맹원들이 눈에 밟혀서라도 여필극은 스스로 무림맹을 떠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차라리 팔대문파의 견제와 압박 끝에 초라하게 물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어떻게든 버텨 봐야겠지.” 씁쓸한 웃음을 지은 그가 고개를 돌려 시험장 곳곳을 비춰주는 모니터들을 살폈다. 그중 하나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쏠렸다. 그곳에는 기무혁이 세 번째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 아이가 한계가 뚜렷한 후기지수라고?” 금영문 장문인의 말을 떠올린 여필극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눈이 달려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인가?” 내내 심각하던 여필극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꽃이 피었다. “4급 체질의 내공으로 1급을 꺾었는데,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것처럼 여기다니…….” 그렇다면 오히려 더더욱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기무혁이라는 아이가 벌써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뜻인데 말이다. “나는 네가 정말 체질 4급이 맞는지 의심스럽긴 하다만.” 여필극이 눈을 가늘게 뜨고 기무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기무혁과 송준호의 쌍장이 부딪친 직후, 다소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벌어진 것을 눈치챘다. 아무리 모니터 너머로 봤어도 그와 같은 초고수를 속이기란 불가능했으니. 하지만 기무혁이 부정행위를 한 것은 아니었기에, 맹주는 그 부분을 되짚을 생각은 없었다. “경지를 숨기고 이기는 것 또한 실력이지.” 기무혁을 지켜보는 맹주의 시선에는 단순한 호감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는데, 단순히 그 대상이 뛰어난 후기지수여서는 아니었다. ‘정말 검마를 닮았구나.’ 노구천의 말을 들었을 땐 반신반의했지만, 직접 본 이상 확신할 수 있었다. 기무혁은 최건의 검술뿐만이 아니라 무인으로서 성향과 태도마저도 닮았다. 혹시라도 정말 저 아이가 검마의 후계자라면…… 너무나 반가울 것 같았다. 그 친구에게는 오래된 마음의 빚이 있으니 말이다. “어디까지 올라올지 모르겠지만…… 내 너를 응원하도록 하마.” 무림맹주는 흐뭇한 표정으로 옛 친우를 닮은 청년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41화. 찾았다 [이번 시험은 ‘외팔외눈외발겨루기’입니다!] 라이센스 시험의 세 번째 종목은 직경 4미터 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결이었다. 참가자들은 한쪽 눈을 가리고, 한쪽 발로만 바닥을 딛고, 한쪽 손으로만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 상대를 원 밖으로 밀어내거나 넘어뜨리면 승리. 두 발이 동시에 땅에 닿거나 대결 중에 두 팔을 사용하면 실격이었다. [변수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 신체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능력, 개개인의 상황판단 능력을 종합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험입니다.] 흑백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응시자들의 입에서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한 손으로 검이나 도를 쓰는 사람들이야 상관없겠지만, 중병기나 쌍병을 다루는 무인들은 일방적으로 불리하지 않습니까?” “저는 빠른 발이 가장 중요한 무공을 익혔습니다. 그런데 발 하나를 쓰지 말라니요.” “하, 올해는 형평성에 맞는 시험이 하나도 없군…….”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기무혁은 혼자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세 번째 시험이 제일 쉬운데?’ 전생의 기무혁은 인공단전 시술의 부작용으로 한쪽 눈을 잃고도 이십 년간 살아남은 낭인이었다. 한쪽 팔이나 다리를 못 쓸 정도로 다친 적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부러져 덜렁거리는 팔을 천으로 대충 고정해서 싸운 경험도 있고, 외발 깽깽이로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던 일화도 있으니……. 쉽게 말해서 기무혁에겐 핸디캡조차 못 되는 조건이었다. “준비됐으면 바로 시작할 수 있나요?” 시험에 아무런 불만도 없는 기무혁이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맞은편 그룹에서도 건장한 중년인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나왔다. “철검방의 김철우다. 소싯적에 낭인으로 활동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었지.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이런 싸움 해본 적 있어?” “낭인?” 낭인 출신이라는 말에 기무혁의 눈에 반가움이 스쳤다. 웬만해서는 낭인들은 뒷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마련인데, 라이센스 시험까지 보러 온 것을 보면 인생이 제법 잘 풀린 모양이었다. ‘기대가 좀 되는데?’ 약간의 설레는 마음을 감추며 기무혁이 상대에게 포권을 취했다. “기무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냐. 후회가 안 남게 처음부터 최선을 다해라.” 안대로 각자 한쪽 눈을 가린 두 사람이 무기를 들었고, 시작하라는 흑백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김철우가 기합성을 지르며 먼저 달려들었다. “타핫!” 한 발로 균형을 잡으면서 처음부터 저돌적으로 달려들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지, 지켜보던 무인들이 웅성거렸다. 기무혁은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힘껏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멍청하긴! 착지하는 것만 방해해도 내 승리다 꼬마야!” 상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검을 휘둘렀다. 그 눈에서 기무혁을 경험 부족한 애송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휘리릭!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아 공격을 피한 기무혁은 머리가 아래로 향한 상태에서 검을 뻗어 바닥을 찍었다. 그 반동으로 한 번 더 튀어 오르며 상대의 뒤로 넘어가서는 발로 등을 걷어찼다. “허엇!” 김철우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동안 기무혁은 사뿐히 한 발로 착지했다. 그리고 검면으로 오금을 툭 쳐서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흐어억!” 상대가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기무혁이 그 모습을 보면서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낭인 출신이라더니…….” 이것도 못 막아? 기무혁은 한 가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기준이 회귀하기 전, 그러니까 낭인들 중에서도 최상위급이었던 자신에게 맞춰져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제대로 된 낭인은 아니었나 보네.’ 실망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하며 기무혁이 상대에게 포권을 취했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끄응……. 나, 나야말로 많이 배웠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감탄을 넘어 아연실색한 표정이 되었다. 오직 한 발과 한 손으로만 해낸 서커스와 같은 기무혁의 움직임을 본 무인들은 눈만 깜빡이다가 하나둘 입을 열었다. “방금 5초도 안 걸리지 않았어?” “괴물이네 진짜…….” “저 친구는 그냥 일류시험으로 바로 보내면 안 됩니까?” 차라리 위로 먼저 올려 보내라는 항의까지 나오는 와중에, 흑백13이 기무혁에게 다가와 축하를 전했다. [축하드립니다. 제가 담당한 그룹에서 가장 먼저 삼연승을 이루셨군요?] 그가 (三)이라고 적힌 배지를 직접 기무혁의 가슴에 달아주었다. [제가 다 뿌듯합니다. 아마 전체 시험자들 중에서도 손에 꼽는 속도일 것 같군요.] “이젠 뭘 하면 됩니까?” 기무혁의 질문에 흑백13이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잠시 대기하면서 다른 분들의 대결이나 구경하시죠. 어차피 이류 라이센스 시험은 합격자들이 다 같이 모여서 시작해야 하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기무혁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서는 흑백13을 힐긋거리며 지나가듯 물었다. “……그런데 이 안개. 위험한 거 아닌가요?” [걱정되시는 부분이라도?] 기무혁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짙어졌다 옅어졌다를 반복하는 안개를 바라봤다. 라이센스 시험이 시작되고 꽤 시간이 지났지만, 같은 공간에 수천 명의 인원이 들어와 있다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안개 너머로 시야는 물론이고 소리, 냄새까지 차단되는 것 같은데. 이 안에서 사람 하나쯤 죽어도 모를 것 같아서요.” [네? 하하하-! 살벌한 농담이군요. 라이센스 시험은 무림맹에서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습니다.] 정말로 그럴까? 기무혁은 의문이 들었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괜히 자세히 알아보려고 시도했다가 나중에 사고라도 터지면, 누구보다 수상해 보일 테니 말이다. ‘지금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이류 시험 때까진 두고 봐야겠군.’ 기무혁은 가까운 미래에 벌어진 사건 하나를 떠올리면서 무인들의 대결을 지켜봤다. “흐아아압!” “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재대결을 요청합니다!” “아까 입은 부상만 아니었어도…….” 낯선 환경과 생소한 대결 방식으로 구성된 시험이 진행되면서 참가한 무인들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기존의 시험이었다면 쉽게 붙었어야 할 무인이 떨어지고, 모두가 떨어질 거라 생각했던 무인들이 이기는 이변이 벌어졌다. 하지만 내공이 조금 부족해도, 삼류 무공을 익혔어도, 어쨌든 싸워서 이기는 것이 무인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이게 맞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기무혁의 모습에, 흑백13이 실실 웃었다. [기무혁 참가자는 참 재밌는 분인 것 같습니다. 이런 장소만 아니었다면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고 싶을 정도인걸요?] “제가요?”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흑백이 웃음을 참으며 끅끅거렸다. [저와 동류라는 느낌이 든달까요. 본성을 감추고 얌전한 정파 후기지수처럼 보이려 노력하는 모습이 재밌달까……. 앗, 혹시 실례되는 발언이었나요?]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기무혁은 흑백13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면 너머에서 흥미진진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호감이라고 하기엔 사납고, 적의라고 하기에는 부드럽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로소 상대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찝찝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쪽이야말로 누구보다 낭인 같은 녀석이었군.’ 흑백이라는 가면 너머의 진짜 정체가 궁금해졌지만, 기무혁은 칭찬이 부담스러운 것처럼 목을 움츠리며 포권을 취했다.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하하하! 끝까지……. 아무튼 앞으로의 활약도 기대하겠습니다. 기무혁 참가자는 지켜보는 재미가 있으니까요.] 쿡쿡 웃은 흑백은 고개를 돌려 대결이 끝난 참가자들에게 말했다. [자, 어느새 대부분 승부가 났군요. 패자들은 저쪽에 계신 흑백을 따라가 주시고, 승자는 저를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흑백13은 승자 그룹만 계속해서 담당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세 번의 승리를 한 참가자들을 모아놓고 직접 배지를 달아준 후 말했다. [삼류 무인 라이센스 시험을 통과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생겼습니다.] 흑백이 양팔을 뻗어 좌우를 가리키자 그 위로 글자가 떠올랐다. 그의 왼손을 따라서 허공에 <귀가>라는 선명한 글자가. [첫 번째는 여기서 만족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부상이 심한 분들은 저희가 자체적으로 판단해 돌려보낼 수도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의 오른손 끝에는 허공에 <二>라는 선명한 한자가. [두 번째는 남아서 이류 라이센스 시험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당연히 지금까지보다 더 어렵고 부상당할 확률도 높아집니다.] 좌우를 번갈아 본 참가자들 대부분은 고민하지 않고 <二>를 향해 이동했다. “남아서 다음 시험에 참가하겠습니다.” “삼류 무인으로 만족하고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 “다음 시험을 보러 갑시다!” 라이센스 시험에 참가한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서 온 무인들. 어쩔 수 없는 부상자들을 제외하면, 중간에 만족하고 돌아가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하하! 그럼 여기 계신 분들은 이류 라이센스 시험을 치르는 데 동의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이동하시죠!] * * * 흑백을 따라 다시 안개 속을 걷다 보니, 어느새 대연무장처럼 보이는 넓은 공간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이류 무인 라이센스 시험을 주관하는 흑백1입니다.]] 이마에 뿔이 달린 흑백의 가면을 쓴 인물이 높은 단상 위에 뒷짐을 진 채 기다리고 있었다. [[삼류 라이센스 시험 합격자들이 모두 모일 때까지, 이곳에서 편하게 휴식을 취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기무혁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모인 인원이 아직 많지는 않았지만, 삼류 라이센스 시험을 빠르게 통과한 사람들답게 대부분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예리한 기도를 갖추고 있었다. “빨리 도착했을 텐데…….” 기무혁은 누군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원래는 시험이 시작되자마자 찾아보려고 했지만, 작년과 시험 내용이 완전히 달라진 탓에 접촉조차 하지 못했다. ‘벌써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전생의 기무혁은 이 시기엔 무공에 완전히 관심을 끊고 살았다. 무림인 부적합체질을 판정받고 꿈을 포기했던 때였으니까. 그래서 시험과 관련된 내용은 미리 알지 못했지만, 뉴스에 나올 만큼 큰 일 하나가 터졌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라이센스 시험 도중에 예상치 못한 사고가 터져서 인명피해가 발생.’ 그로 인해 촉망받는 팔대문파의 후기지수 한 명이 재기불능의 상처를 입었다는 것. 이후로 무림맹주의 권한이 더욱 축소돼, 결국 몇 년 후 불명예스럽게 퇴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까지가 기무혁이 아는 미래였다. ‘처음에는 굳이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검마에게 무림맹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맹주님은 불철주야 한국무림을 위해 노력하시는 분이다. 그분 덕분에 나 같은 망종도 정파에서 활동할 수 있었지. 내가 누명을 썼을 때도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셨지만……. 최건은 무림맹주 여필극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무림인들이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 조금이라도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 의로운 협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팔대문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바보 같은 사람. -나 혼자 도망친 것 같아서 늘 죄송한 마음뿐이구나. 그 이야기를 듣고 기무혁은 맹주가 적어도 천마신교와 관련된 인물은 아닐 거라고 판단했고, 가능하다면 이번 시험에서 사고를 막아 보기로 결심했다. 마침 새로운 그룹과 함께 기무혁이 찾던 인물이 대연무장에 도착했다. “……찾았다.” 그러나 기무혁이 목표를 향해 걸어가려는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뒤에서 그를 덮쳤다. 42화. 넌 감당 못 해 후웅-! 커다란 주먹이 간발의 차로 머리 위를 스쳤다. 허리를 뒤로 젖혀서 피한 기무혁은 곧바로 발을 차올려 상대의 얼굴을 노렸다. 파바바박! 손과 발이 연달아 부딪치며 온갖 궤적을 그렸다. 갑자기 벌어진 싸움에 무인들이 힐긋 그들을 바라봤다가 그대로 시선을 빼앗겼다.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수준이 높은 근접박투였던 탓이었다. “이야……!” “둘 다 권각이 주력도 아닌 것 같은데…….” “피곤하지도 않나?” 라이센스 시험으로 심신이 지친 무인들은 물론이고, 시험 외 다툼을 제지해야 할 흑백들도 잠시 두 사람을 지켜봤다. [원한 관계는 아닌 거 같군요.] [친구처럼 보이지 않나요?] [그렇다기엔 자칫하면 크게 다칠 것 같은데…….] [스무 살 된 애들이 다 그렇죠 뭐.] [둘 다 올해의 기대주들이니, 위험해질 것 같으면 개입하죠.] 다행히 흑백들이 나서서 싸움을 말릴 일은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몇 차례 호흡할 시간 동안 수십 번의 공방을 주고받은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반응속도 보니까 세 번 다 허접들하고만 붙었나 보다?” 신강헌이 은근히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말하자 기무혁도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너야말로 시험 날로 먹은 것 같은데? 긁힌 곳 하나가 없는 거 보니까.” “나야 상대가 누구든 실력으로 압도했지.” 신강헌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러다 자신과 달리 기무혁의 무복은 여기저기 찢기고 긁힌 것을 뒤늦게 확인하곤 슬쩍 미간을 좁혔다. 오정민, 송준호와 연달아 대결하면서 생긴 흔적이었다. “너 혹시 다쳤냐? 나중에 부상 때문에 나한테 졌다고 핑계 대면 안 되는데!” “공평하게 너도 부상 하나 만들어줄까?” 숨 쉬듯이 악담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가볍게 주먹을 부딪쳤다. 둘 나름의 반가움을 표현하는 방식. 그때 기무혁이 신강헌의 손에 낀 검은색 수투를 보고 물었다. “손에 낀 수투는 뭐야? 못 보던 건데.” “이거? 뺏은 건데 들고 다니기 귀찮아서 그냥 내가 쓰는 중임.” “……그냥 약탈한 거잖아, 이 또라이야.” “이기고 빼앗았으니까 전리품 아님? 다시 돌려달라고도 안 하던데.” 신강헌에게 수투를 빼앗긴 금영문의 무인도 시험을 통과했는지 저 멀리 모습을 드러냈지만, 신강헌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뒷걸음질 쳐 멀어졌다. 기무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알아서 해라. 난 잠깐 만나고 올 사람이 있어서…….” “기무혁!” 그때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에 기무혁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흐르며 신강헌 외에도 그가 아는 얼굴들이 하나둘 모이고 있었다. “내 검. 잘 가지고 있지?” 송월문의 오정민은 내상을 입었는지 안색이 창백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겨우 몇 시간 만에 다시 보는 것이지만, 기무혁은 그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뭔가 깨달음이 있었나 본데.’ 그렇다고 갑자기 무공이 일취월장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정민은 원래도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번 시험을 통해서 그 마음가짐이 한층 더 단단해졌다. 그건 작은 차이였지만, 실전에서는 생사를 가르는 차이가 될 수도 있었다. “정민이 형. 잠깐 사이에 분위기가 바뀌었는데요?” “정말?” “뭔가 더…… 어른스러워졌달까?” “뭐라고? 하하! 내가 너보다 몇 살이나 형이거든!” 오정민이 다가와서 기무혁의 머리를 친근하게 헝클어뜨렸다. 기무혁은 웃으며 오정민에게 검을 돌려주었다. 스스로 2패를 감수하고 떠났던 오정민을 다시 만나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어-이!” 태극검문의 송준호도 멀리서 기무혁을 알아보곤 다가오다가 멈칫했다. 기무혁 옆에 있는 신강헌은 물론이고, 오정민도 상당히 키가 큰 편에 속해서였다. 우뚝 제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선 송준호는 손만 열심히 흔들었다. 휙휙휙! 아마도 ‘다음 시험도 잘해보자.’라는 뜻인 것 같았다. “어? 저거 태극검문의 땅꼬마 아냐? 야, 미친놈. 너 쟤랑 알아?” “팔다리 간합이 짧아서 안타깝긴 한데, 실력은 뛰어나더라.” “쩝. 나도 붙어보고 싶은데…….” 신강헌이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송준호는 홱 돌아서더니 동문 사형제들과 함께 꽤나 먼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기무혁이 아는 얼굴들과 하나둘 인사를 나누는 동안, 대연무장에 삼류 라이센스 합격자가 전부 모였다. 쿵-! 묵직한 진각이 단숨에 모든 응시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주목.]] 서로 안부를 물으며 반갑게 이야기하던 무인들이 몸을 긴장시키고 단상을 바라봤다. ‘살기?’ 놀랍게도 흑백1이 자리에 모인 무인들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류 라이센스 시험을 시작하기에 앞서, 규칙과 주의사항을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적대적인 살기라기보다는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가 조용히 입맛을 다시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류 무인 라이센스에 도전할 응시자들이 저도 모르게 무기에 손을 갖다 대자, 비로소 흑백1이 살기를 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장 먼저 알려드릴 주의사항은 삼류 라이센스 시험보다 부상당할 확률이 현저하게 높다는 것입니다. 시험 내내 지금처럼 긴장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삼류 라이센스 시험도 결코 만만치 않았는데, 그보다 훨씬 더 어렵고 위험하다는 말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무림인들이었다. 시험을 통과하며 자신감을 얻었고, 더 높은 곳으로 향하겠다는 일념으로 스스로 다음 관문을 선택한 사람들. “빨리 시작합시다! 벌써 근질근질하니까!” “누구하고 붙어도 자신 있습니다.” “더 이상 겁먹을 사람 없으니 규칙이나 설명해 주십시오!” [[좋습니다. 그럼 이류 라이센스 시험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흑백1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 앞으로 수십 명의 흑백들이 도열했다. 그들 모두가 똑같은 옷과 가면을 쓰고 있어서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목소리도 변조해 성별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류 무인 라이센스 시험은 팀전으로 이루어집니다.]] 팀전이라는 말에 응시자들이 웅성웅성거렸다. [[개인의 능력을 위주로 판단한 삼류 라이센스 시험과 달리, 이류 라이센스 시험은 그보다 다양하고 엄격한 평가 기준이 적용됩니다.]] 딱! 흑백1이 손가락을 튕기자 시험장 전체를 뒤덮고 있던 안개가 흩어지며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악- 안개가 밀려난 자리에 수풀이 돋아나 우거진 숲으로 변했다. 밋밋했던 바닥에서 풀이 자라나고, 하늘과 땅에서는 동물과 새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허어…….” “가, 갑자기 환경이 이렇게 바뀐다고?” “냄새와 촉각까지 진짜처럼 생생해.” 무인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무림맹 규모의 조직이 아니면 구현이 불가능한 대규모 술법진. 온갖 기관진식과 술법사들의 도움으로 구현한 환경은, 눈에 보이는 건 물론이고 무인들이 느끼는 감각마저 완벽하게 속여냈다. 기무혁은 밀려난 안개의 일부가 자신의 몸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처음부터 안개에 계속 노출시킨 건 이걸 준비하기 위한 밑 작업이었나.’ 기무혁, 신강헌을 비롯해 무인들 중에서도 감각이 극히 예민한 이들은 잠시 멀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마저 금방 사라지고, 어느새 그들은 울창한 숲속 한가운데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최소 두 명 이상의 팀을 짜서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호위, 이송, 구출, 생존, 저지 등 다양한 임무를 통해 역량을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크허어어엉! 산을 쩌렁쩌렁하게 진동시키는 산군의 포효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뒤로 깔깔거리며 웃는 여인의 목소리와 칠판을 긁는 듯한 불쾌한 소음, 걸걸한 사내들의 노랫소리도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이곳에 장치된 기관진식과 술법으로 만들어진 괴이들이 여러분의 임무를 방해할 것입니다.]] 스르르륵…… 흑백1과 나머지 흑백들의 모습은 서서히 투명해지더니 어느새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허공에서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준비할 시간은 10분 드리겠습니다. 첫 임무의 인원수는 두 명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험을 함께할 파트너를 찾아 짝을 이뤄주시기 바랍니다. 준비가 되신 분들은 앞에 보이는 오솔길을 따라오시길…….]] 이후 흑백1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참가자들끼리 서로 눈치를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두 명이라고?” “나중에 바뀌겠지. 아까 최소 두 명이라고 했으니까. 중간에 팀원이 추가되거나 바뀌거나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처음에 손발을 맞출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건데…….” 공교롭게도 오정민과 신강헌이 동시에 기무혁을 바라봤다. 그 누구보다 믿음직한 파트너가 되어줄 수 있는 인물. 뛰어난 무공은 물론이고,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는 성격을 생각하면 등 뒤를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오정민이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신강헌이 먼저 선수를 쳤다. “난 너랑 안 해.” 신강헌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확실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기무혁을 바라보는 신강헌의 눈은 경쟁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난 센 놈들이랑 싸워서 이기려고 온 거지, 너랑 같은 편 먹고 꿀 빨면서 올라가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히죽 웃은 신강헌은 미련 없이 휙 몸을 돌렸다. 누군가 다른 파트너를 찾기 위해서였다. “누가 너랑 같이한대?” 기무혁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 뒤통수를 바라보는데, 옆에서 오정민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하려 했는데, 한발 늦었네.” “정민이 형?” 오정민도 부드럽게 웃으며 기무혁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무혁이 너한테 의지하면 시험이 너무 쉬울 것 같거든. 나는 이 시험에서…… 더욱 나를 갈고닦고 싶어.” 그렇게 오정민도 다른 파트너를 찾아 떠나갔다. “참나…….” 가만히 있다가 두 번이나 거절당한 기무혁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둘의 마음도 충분히 알 것 같아서, 그냥 한번 웃어버리고 말았다. “뭐, 애초에 같이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기무혁은 몸을 돌려 누군가를 향해 걸어갔다. 다행히도 그가 찾고 있던 상대도 아직 짝을 이루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시험에서 크게 다쳐서 재기하지 못한 후기지수. 그 이름도 문파도 기억나지 않지만…….’ 눈이 마주치자 멍하니 서 있던 상대가 천천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기무혁은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의 소녀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딱 하나. 극음지체였다는 건 기억하거든.’ 일월문의 양하윤. 체질 1급, 그중에서도 극음지체로 분류되는 특수체질의 소유자. “너, 나랑 같이하자.” 양하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보다 한참이나 큰 기무혁을 올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체질 몇 급?” “나? 4급인데?” 그 대답에 양하윤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3급 이하는 안 돼.” 생각지도 못했던 무시에 기무혁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수준이 안 맞는다, 그런 거냐?” “……그런 게 아니라…….” 양하윤은 대답도 그렇고, 행동도 전체적으로 느렸다. 시험장이 아닌 곳에서 봤으면 무림인이라는 생각조차 못 했을 수준이었다. “……넌 나를 감당 못 해.” “그게 무슨 말이야?” 말로 설명하기보다 직접 이유를 알려주겠다는 듯, 양하윤은 억누르고 있던 극음지기를 밖으로 풀어냈다. 싸아아아아아- 양하윤의 몸에서 매서운 한기가 서리서리 뻗어 나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나랑 함께 다니려면 계속 이런 추위를 견뎌야 할 거야.” 극음지기를 드러낸 양하윤이 한결 자연스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쩌저적- 바람에 흩날리던 바닥의 풀에 살얼음이 맺히고, 가까이에 서 있던 일월문의 무인들조차 슬금슬금 뒷걸음질 칠 정도의 기운. “으으으…….” “하윤 양! 이런 데서 함부로 극음지기를 드러내면……!” 기무혁은 양하윤이 무슨 의미로 감당 못 한다고 했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너, 조별 과제에 최악인 타입이구나?” “알았으면 가.” 시무룩한 표정이 된 양하윤이 극음지기의 기운을 갈무리하려고 했다. 괜히 주변에 더 민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 순간, 기무혁이 한 걸음 크게 그녀에게 다가오며 웃었다. “한번 해볼까? 감당이 되는지, 안 되는지.” 눈썹에 새하얗게 서리가 맺힌 채였다. 43화. 별건 아니고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조합이군요.] 두 사람이 오솔길에 도착하자 허공에서 스르륵 흑백1이 나타났다. 몸은 없이 가면만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이었다. [기무혁 무인, 양하윤 무인. 두 분이 팀을 이루신 겁니까?] 이류 무인 라이센스 시험부터는 흑백이 참가자들을 부르는 호칭이 ‘무인’으로 바뀌었다. 삼류 라이센스 시험을 통과한 무인들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었다. “네. 같은 팀입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두꺼운 점퍼에 모자, 가죽장갑까지 낀 기무혁이 입에서 하얀 입김을 뿜으며 말했다. 바로 옆에서 양하윤이 그 모습을 슬쩍 쳐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제한이 다 돼서요.” 흑백1은 팀을 짜는 데 10분이라는 제한 시간을 두었다. 그 시간 동안 기무혁 외에는 양하윤과 팀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리 체질 1급의 후기지수라도 다들 그 옆에서 극음지기를 견디며 시험을 치르는 것은 꺼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양하윤이 거절도 승낙도 못 하고 머뭇거리는 동안, 기무혁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월동준비라도 하듯 방한용품들을 빌려왔다. ‘차라리 혼자서 하고 싶었는데…….’ 인원이 모자라지 않는 이상 반드시 팀을 이뤄야만 한다는 규칙 탓에, 결국 양하윤은 기무혁과 같은 팀이 되었다. 출발하기 전, 양하윤은 두꺼운 옷으로 무장한 기무혁에게 소심하게 물어보았다. -……감당할 수 있다며? -그거랑 별개로 쓸데없는 데 내공을 쓸 필요는 없잖아. 난 효율적인 걸 좋아하는 편이거든. 근거도 없이 자신만만해 보이던 첫인상과 달리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양하윤은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괜히 얇은 옷차림으로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그걸론 안 돼. 내가 무공을 펼치면 한기가 더 많이 나와. -그땐 내가 알아서 하지. 신경 쓰지 말라는 듯한 대답에도 양하윤은 걱정이 됐지만…… 이미 이류 라이센스 시험은 시작되었다. 팀원을 배려하기 위해서 자신이 무공을 펼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양하윤은 기무혁을 조용히 쳐다보다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분명 넌 후회하게 될 거야. 그리고 날 싫어하게 될걸.’ 나중에 기무혁이 자신을 원망하면 지지 않고 쏘아붙여 주겠노라고 다짐했다. 흑백1이 묘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두 분이 마지막 출발조입니다. 바로 임무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순간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가면처럼 흑백의 손만 스윽 하고 나타났다. [첫 번째 임무는 표물 이송입니다. 지금 제가 드리는 물건을 길을 따라 목적지까지 온전하게 가져가시면 됩니다.] 오솔길의 끝에는 여러 개의 갈래길이 있었고, 그중 하나에 두 사람을 위한 화살표가 떠올랐다. 친절하게 방향까지 알려주니 어렵지 않은 임무처럼 들렸다. 하지만 흑백의 손바닥 위에 놓인 물건을 본 순간, 기무혁과 양하윤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계란?” [그냥 계란이 아닙니다. 깨지기 쉬운 날계란이죠.] 두 사람에게는 흑백이 웃음을 꾹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무혁의 손에 달걀을 건네준 흑백이 설명을 덧붙였다. [만약 표물 이송 중에 표물이 깨지거나 손상되면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새로운 계란을 받아 가셔야 합니다. 그러니 각별히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젠자아아앙! 아아악-! 장난하냐고! 때마침 저 멀리서 무인들의 고함과 욕설,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깨진 계란을 들고 출발지로 돌아오는 무인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계란을 받으실 분들은 이쪽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두 분은 출발하셔도 좋습니다.] “…….” “…….” 잠시 말없이 날계란을 바라본 기무혁과 양하윤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평소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경공을 사용해 달리기 시작했다. [두 분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등 뒤에서 흑백의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경공을 펼쳤다. 기무혁은 출발지에서 꽤 멀어진 후에야 처음으로 양하윤을 돌아봤다.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핀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하나만 물어보자.” “왜, 왜?” 기무혁의 진지한 눈빛에 양하윤은 흠칫 놀랐다. 경공을 펼치자 어쩔 수 없이 극음지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냉기가 닿지 않게 하려고 최대한 조절했는데, 혹시 벌써부터 견디기 힘든 걸까? 저도 모르게 입이 삐죽 튀어나온 양하윤이 억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말했잖아. 그러니까 난 잘못 없어…….” “뭔 소리야?” 기무혁이 양하윤의 옆으로 바짝 붙더니 품에서 날계란을 꺼냈다. 그리고 주변을 경계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거 말이야. 안 깨지게 단단하게 얼려놓을 수 있어?” “……!” 생각도 못 했던 방법에 양하윤이 깜짝 놀란 눈으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그리고 얼떨결에 건네받은 계란에 냉기를 흘려 넣으니……. 쩌저적-! 날계란이 단단한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걸 가볍게 두드려 본 기무혁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네 체질. 꽤 도움 되는 것 같은데?” “……흥.” 코웃음을 쳤지만, 그 순간 양하윤은 처음으로 기무혁과 팀이 된 것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 * 꺄아아아앗!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귀신 형태의 괴이가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 연기처럼 흩어졌다. “후우……. 표물은?” 기무혁이 뒤를 돌아보며 묻자, 계란을 품에 소중히 안고 있던 양하윤이 지친 얼굴로 대답했다. “……멀쩡해.” 그녀 주변은 설원의 한복판처럼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고, 바닥에는 얼어붙은 화살과 암기 따위가 떨어져 있었다. 계란을 얼린 뒤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속도를 높여 경공을 펼쳤다. 얼려놓은 계란을 믿고 목적지까지 강행 돌파할 계획이었다. 한동안은 순조로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온갖 방해가 시작되었다. 숲에서 짐승들이 튀어나와 두 사람을 공격하고, 괴이들이 하늘과 땅에서 솟구치고, 기관진식이 발동해 투척무기를 쏟아냈다. “이거 아무래도 눈치를 챘나 본데.” 기무혁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날계란을 그대로 들고 있었다면 몇 번이고 부서졌을 정도로 강한 방해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저쪽에서 자신들의 꼼수를 눈치채고 난이도를 높였다고 봐야 했다. “지금이라도 녹일까?” 계란을 만지작거리는 양하윤의 제안에 기무혁이 고개를 저었다. “바뀌는 건 없을 거야. 규칙을 어겼다면 그 순간 흑백이 나타나서 출발지로 되돌아가라고 했겠지. 괘씸죄가 추가된 느낌인데……. 그래도 이건 좀 심한데 말이야.”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기무혁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살벌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양하윤은 조금 무서웠다. “일단 쉴 곳을 찾자.” “……으, 응.”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숲속에 찾아온 밤은 순식간에 주변을 어둠으로 물들였다. 다행히 두 사람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작은 오두막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주인이 없는 곳에는 약간의 음식과 생존용품이 있었고, 내부는 제법 쌀쌀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어.’ 양하윤은 오두막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술법진 안에서는 모든 것이 현실과 괴리돼 있었다. 몇 시간이나 달린 것 같지만 사실은 30분도 지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감각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양하윤을 조금 두렵게 했다. 그래서 살짝 고개를 들어 기무혁을 찾았다. “……뭐 해?” 기무혁은 어느새 화로를 찾아내 오두막 가운데에 불을 피우고, 백팩에 이것저것 물건을 챙겨 넣는 중이었다. 그런 행동들 하나하나가 여러 번 해본 것처럼 능숙해 보였다. “챙겨두면 뭐라도 쓸모가 있을지 모르잖아.” “……도와줄까?” “됐으니까 가만히 있어. 계란 지키는 걸로 충분히 네 역할은 잘하고 있으니까.” 꽤 지쳐 있던 양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둥글게 말고 잠깐이라도 자두기 위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오늘 처음 본 사람과 한 공간에 있는데 쉽게 잠이 올 리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든 양하윤은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기무혁을 지켜봤다. ‘이상한 애야.’ 갑자기 찾아와서 같은 팀을 하자고 한 것부터, 자신은 생각도 못 했던 계란을 얼리는 방법, 게다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무공까지. 전부 다 이상했다. 마치 누가 몰래 자신에게 술법에라도 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혹시…… 나한테 반했나?’ 부끄럽지만 잠깐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 감정적인 이유라면 모두가 기피하는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고, 팀을 하자고 제안한 것도 납득이 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뭔가 좀……. “안 자냐? 그럼 이것 좀 얼려서 네가 매.” 작은 배낭 하나를 또 어디서 찾아냈는지, 기무혁은 그 안에 음식을 꽉 채워서 양하윤 앞으로 밀었다. 사람을 냉장고로 아나? 양하윤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시키는 대로 가방에 든 음식들을 얼려서 옆자리에 두었다. ‘불친절해.’ 눈빛도 매섭고, 말투도 쌀쌀맞고, 괴이와 싸우고 나서는 계란의 안부만 묻고 자신에겐 괜찮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양하윤은 저도 모르게 부루퉁한 표정으로 기무혁을 째려봤지만, 기무혁은 신경조차 안 쓰는 듯했다. ‘아니면…… 혼자 있던 내가 불쌍해서?’ 양하윤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모두의 기대를 받는 체질 1급의 후기지수였다. 일월문의 최고수인 빙하신녀의 하나뿐인 제자이기도 했다. 비록 스스로 원해서 무인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양하윤.” “왜, 왜?” “어차피 잠도 안 오는 거 같은데 얘기나 좀 하자.” “……무슨 얘기?” 타닥, 타닥. 마주 보는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화로에서 불티가 튀어 올랐다. 어쨌건 그들은 팀이었다.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합을 맞출 수 있었다. 기무혁이 꼬치에 낀 감자를 화로에 천천히 구우며 말했다. “그냥 뭐 이것저것. 무공은 언제부터 익혔지?” “……열다섯 살. 너는?” “난 열둘. 어릴 때부터 무림인이 되고 싶어서 부모님을 졸랐지. 넌 특이체질인 게 드러나서 익히기 시작한 케이스지?” “어떻게 알아?” “딱 보면 알지.” 피식 웃은 기무혁은 꼬치에 끼워서 구운 감자를 양하윤에게 건네고, 새로 하나 더 굽기 시작했다. “맛있어…….” 한입 먹은 양하윤이 감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동시에 꽁했던 마음이 사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자기도 배고플 텐데 먹을 걸 먼저 양보해 주다니, 생각보다 괜찮은 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반응을 살핀 기무혁이 지나가듯 툭 하고 물었다. “네 얘기 좀 해봐. 체질 1급은 어떤 식으로 무공을 배웠는지 궁금하거든.” “별것 없는데. 나는…….” 열다섯 살에 갑자기 체질이 발현하며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한 일. 팔대문파, 그중에서도 일월문의 대장로인 빙하신녀가 찾아와 자신의 무공을 익혀야 한다고 한 달 동안 설득한 일. 그렇게 빙하신녀와 사제간의 인연을 맺고, 못 말리는 팔불출인 스승님이 온갖 영약을 챙겨주는 바람에 그 부작용으로 충분한 성취를 이루기 전까지는 극음지기를 조절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술술 흘러나왔다. ‘너무 많이 얘기했나?’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양하윤은 괜히 모닥불을 노려보며 민망함을 감췄다. 타닥, 타닥…… 화로에서 튀어 오르는 불티를 보고 있으니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분위기가 편안해지면서 쌓인 피로가 몰려왔다. “……너는? 내 얘기는 많이 했으니까 너도 말해봐…….” 양하윤이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려 기무혁을 바라보자 그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이만 자라. 내 얘기는 내일 해줄게.” “……딱히 궁금한 건 아니거든.” 양하윤은 입을 꾹 다물고 모닥불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쿠울……. “……윤, 양하윤. 좀 일어나 봐.” 그리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흠칫하며 다시 눈을 뜬 순간. 싸아아아아아-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극음지기가 화로의 불을 단숨에 꺼버렸다. “미, 미안.” “됐어. 어차피 일어날 타이밍이었으니까.” 기무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목을 좌우로 꺾으며 몸을 풀었다. 그리고 옆에 풀어두었던 검을 잡으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너 어디서 원한 같은 거 산 적 있냐?” “……무슨 말이야?” 양하윤이 눈을 깜빡이며 되묻자 기무혁이 그렇군, 하고 중얼거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건 아니고, 불청객이 찾아온 것 같아서 말이야.” 기무혁은 살기가 느껴지는 방향을 바라보며 차갑게 눈을 빛냈다. 44화. 별로 안 좋아하거든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 컨트롤 본부. 수백 대의 크고 작은 모니터가 시험장 전역을 비추고 있었다. “현재 모든 기관진식 정상적으로 작동 중입니다.” “녹림십채 구현율 90% 이상입니다. 채주 역할을 맡은 흑백2부터 11까지 정해진 위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 외의 흑백들은 술법진 틈새에서 비상대기 중입니다.” “술법진 오차율 3%까지 상승! 신비전(神秘殿)의 술법사 분들께 안정화 작업 요청 드리겠습니다!” 수십 명이 넘는 인원이 목소리를 높이며 시시각각 바뀌는 현장 상황을 공유하고 보고했다. “이류 라이센스 시험의 선두 그룹은 두 번째 임무를 시작했습니다. 각 팀을 이끄는 무인들은 송준호, 피승화, 오정민, 그리고…….” “신강헌 무인이 돌발행동을 보입니다! 갑자기 팀원들을 이끌고 임무와 상관없는 녹림채로 쳐들어가는데요?” “절정고수 시험도 빠르게 진행되는 중입니다. 특히 창천검문의 부연하 무인은 예상치를 크게 뛰어넘는 무위로…….” 무림맹은 이번 라이센스 시험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다. 지난 몇 달간 여필극이 철두철미하게 보안을 지키며 준비해온 만큼, 컨트롤 본부에 모인 이들은 모두 친맹주파로 눈빛이 하나같이 비장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인원이 적다 보니 다들 무리할 수밖에 없었고, 본부 안에는 며칠 전부터 집에도 못 가고 밤을 새운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선배님, 커피라도 좀 드세요.” “……아, 고마워.” 모니터를 주시하던 남자가 후배가 내민 커피잔을 받아 들었다. 벌써 열 시간 넘게 모니터를 바라보느라 눈 밑이 퀭한 모습이었다. “벌써 몇 잔째 신세 지네. 오늘 이상하게 피곤해서…….” “겨우 커피 가지고요. 차라리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고 오시는 게 어때요? 선배 모니터는 제가 커버하고 있을게요.” “…….” 평소 같았으면 거절했겠지만, 커피를 아무리 마셔도 피곤이 가시지 않는 데다 오히려 더 머리가 멍해지는 것만 같았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다간 진짜 앉아서 잠들 것 같아서였다. “그럼 부탁 좀 하자. 나 딱 20분만 자고 올게.” “예. 푹 쉬고 오세요.” 선배가 자리를 비운 후, 커피를 건넸던 후배는 선배가 모니터링하고 있던 후기지수들을 자신의 모니터로 분할해 옮겨왔다. “…….” 무림맹주는 라이센스 시험을 철저하게 비밀로 준비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애당초 이만한 사이즈의 작전을 완벽하게 숨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팔대문파 중 일부는 그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 방관했고, 누군가는 이번 시험을 통해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취하고자 했다. “……여기 있었군.” 수십 개의 모니터를 빠르게 훑던 요원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양하윤과 기무혁이 화로를 가운데 두고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곧바로 품에서 꺼낸 USB를 기기에 꽂아 넣고 간단히 조작하자 치직- 하는 짧은 노이즈와 함께 같은 화면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화로의 불티가 튀어 오르고, 마주 앉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두 사람의 평화로운 모습. 누군가가 눈치채기 전까지 해당 모니터는 계속해서 저 모습만을 보여줄 터였다. 그리고 눈치를 챘을 땐 이미 상황이 종료된 후일 것이다. [극음지기 확보계획 시작합니다.] 요원은 술법진 안에서 대기 중인 인물에게 메시지를 전송한 후, 지금쯤 수면제 효과로 푹 잠들었을 선배를 기다리며 느긋하게 모니터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 * * “불청객?” 양하윤은 아직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기무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넓게 기감을 퍼트려 주변을 확인해 봐도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아무도 없는데, 너 꿈꾼 거 아냐?” 당연하게도 양하윤은 자신보다 기무혁의 기감이 뛰어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저 무서운 눈빛과 단호한 말투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지만. “가방부터 챙겨.” “…….” 양하윤은 기무혁이 말하는 대로 가방을 등에 메고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여전히 별다른 기척은 느끼지 못했다. ‘단순한 살기가 아냐.’ 기무혁은 오두막 밖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미세한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타고나길 예민했던 그의 감각은 전생의 경험에 전직 살수였던 스승의 지도까지 더해져 극한까지 갈고닦아진 상태였다. 즉, 살기에 한해서는 시험장에 있는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할 수 있는 무인이 기무혁이었다. ‘술법진에서 만들어낸 맹수나 귀신하고는 달라. 이건…….’ 훨씬 더 은밀하고 정제된 살기, 동시에 끈적한 악의가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그 특유의 느낌이 기무혁에게는 몹시 익숙했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살수다.’ 꾸욱. 검파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라이센스 시험장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 들어와 있었다. 기무혁은 못 미덥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양하윤을 힐긋 바라봤다. ‘이 녀석을 노리는 게 살수였다고?’ 그가 아는 미래의 지식은 단편적이었다. 극음지체의 후기지수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재기불능이 되고, 그 일을 계기로 무림맹주가 불명예스럽게 퇴임하게 된다는 것. 문제의 ‘사고’가 어떤 종류였는지는 알지 못해서 짐작만 했을 뿐이었다. 후기지수들 간의 비무가 과열돼 부상을 입었거나, 기관장치나 술법진에 의해 다쳤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지금부터 아무런 소리도 내지 마. 잠든 것처럼 천천히 호흡해.” “…….” 양하윤은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이곤 기무혁이 시키는 대로 호흡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던 살기가 잠시 멈춰 섰다. 동시에 양하윤의 눈동자가 커졌다. ‘밖에 뭔가가 있어!’ ‘드디어 알아챘냐?’ 두 사람이 눈으로 대화를 주고받을 때였다. 스스스슷……. 바람을 타고 무언가가 오두막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소리를 들은 즉시 기무혁이 속삭이듯 낮고 빠르게 말했다. “숨을 멈추고 기다려! 내가 천장을 부술 테니…….” “부수는 건 내가 할게.” 평소에 주변에서 맹하다는 소리를 듣긴 하지만, 양하윤은 팔대문파에서 모셔간 촉망받는 후기지수였다. 무림인으로서 자질은 누구보다 차고 넘쳤다. 살수의 기척을 느낌과 동시에 그녀는 극음지기를 끌어 올렸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나풀거렸다. 쩌저저저저적-! 양하윤이 극음지기를 전력으로 개방하자 오두막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바람에 흘러들어오던 수면가루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굳은 가루들이 알갱이가 되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괴물은 괴물이네.’ 기무혁은 속으로 감탄했다. 체질 1급. 그중에서도 특수체질의 소유자가 진심을 발휘하자 가공할 냉기가 일대에 휘몰아쳤다. 털모자와 장갑 표면에 순식간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했다. “……조심해.” 양하윤이 새하얀 기운으로 물든 양 손바닥을 지붕을 향해 겨누며 경고했다. 동시에 쌍장에서 쏟아진 장력이 지붕을 날려버렸다. 퍼어어엉-! 오두막 지붕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자마자 두 사람의 신형이 그 위로 솟구쳤다. 기무혁은 허공에서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하나둘셋…… 여덟인가.’ 흑의복면 차림의 살수들이 솟구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일순간 굳은 움직임만으로도 저들이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양하윤을 노리고 살수를 동원한 것이 확실해진 상황. ‘무림맹 시험장에 숨어들어 팔대문파의 촉망받는 후기지수를 노린다?’ 이런 미친 짓을 벌일 정도면 상상 이상으로 큰 조직이 배후로 있어야 가능할 터였다. 괜히 오지랖을 부렸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어쩌면 천마신교와 관련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일단은…….’ 여러 가지 가능성과 계산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판단은 빨랐다. 기무혁이 양하윤을 남쪽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쪽으로!” 두 사람은 처음 임무를 받고 출발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곳이라면 흑백1이든 누구든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시험관을 만난다면 살수들로부터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될 것이다. 휘이이익! 하지만 둘은 전력으로 경공을 펼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하윤이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아까 그 길 아니야?” “……술법사까지 데려왔나.” 주변의 공간이 왜곡되고 있었다. 길이 일그러지더니 어느새 두 사람의 눈앞에 도망쳐 나온 오두막이 나타났다. “혹시 몰라서 술사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일이 커질 뻔했군.” 두 사람을 포위한 살수들 중 하나가 중얼중얼 술법을 펼치고 있었고, 대장으로 보이는 살수가 앞으로 나서며 변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은 기무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면가루에 곤히 잠들어줬으면 서로가 편했을 텐데 말이야. 쓸데없이 동료가 감이 좋아서 일을 어렵게 만드네?” “…….” “…….” 살수들이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기무혁은 자연스럽게 검을 뽑아내려 언제든 휘두를 수 있도록 준비했고, 양하윤의 두 손은 새하얀 냉기로 휘감겼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냐. 진짜 살수들이다.’ 뒷골목에서 살수랍시고 대충 간판을 내걸고 영업하는 양아치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한 명 한 명이 예리한 살기를 품은 실력자. 기무혁이 괜히 처음부터 도주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나도 동시에 셋 이상은 감당하기 어려울 거야.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몇 걸음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살수들의 대장이었다. 놈은 다른 살수들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도 이 이상 일이 지저분해지면 곤란해서 말인데.” 그때 살수들의 대장이 기무혁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극음지체 하나다. 그쪽은 모른 척 빠져주지 않겠나? 그럼 무사히 나머지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해주지.” “……뭐?” 그 순간 양하윤의 눈동자가 불안감으로 흔들렸다. 기무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양하윤을 바라보자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호, 혹시 이것도 시험이 아닐까? 동료를 버리면 바로 탈락하는…….”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간절한 바람이 깃든 말이었지만, 기무혁은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일류 라이센스를 따고, 전체 3등 안에 들어 맹주에게 오행신공을 요구하는 것이 기무혁의 목적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양하윤은 도와도 그만이고, 돕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그리고 이건,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그때 살수들의 대장이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난감하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리고 다시 기무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다섯을 세지. 그때까지 비켜서지 않으면 동료는 죽이고 극음지체는 생포한다.” 살수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장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담담한 목소리로 숫자를 말할 때마다 살수들이 내뿜는 살기가 압박하듯 점점 짙어졌다. “셋.” 숨통을 조여오는 지독한 살기에 양하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고, 기무혁은 살수들을 바라보며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넷.” 그 순간 양하윤이 기무혁의 등을 뒤에서 떠밀었다. “너 가.” “…….” 기무혁이 옆을 돌아보자 양하윤이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너 가라고. 어차피 안 죽이고 생포한다잖아. 그러니까…… 너 혼자 가. 그리고 내 스승님한테 알려줘.” 양하윤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본 진짜 살수들의 살기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무서웠지만, 애써 눈에 힘을 주며 살수들을 노려봤다. “당신들. 후회하게 될 거야.” 살수들은 대답 대신 기무혁을 바라봤다.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기무혁이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알겠어. 난 빠지겠다. 그러니 포위망을 열어줘.” 살수들의 대장이 기무혁을 바라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현실적이군. 열어줘라.” 잠시 포위망 사이가 벌어지고, 기무혁은 그 틈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양하윤이 기무혁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이거 가져가.” “…….” 두 사람이 처음 임무를 시작할 때 받은 계란이었다. 아직 얼어 있는 계란을 품 안에 갈무리한 기무혁은 고개를 숙이고 걷기 시작했다. 한숨을 푹 내쉬는 모습이 전쟁에서 항복한 패잔병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술법을 익힌 살수의 옆으로 지나가던 기무혁이 벼락처럼 검을 뽑아 휘둘렀다. “흡!” 섬뜩함을 느낀 상대가 곧장 반응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빠른 발검과 살수도 속아 넘어갈 정도의 연기가 방심을 초래했다. 푸화아악! 살수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부릅뜬 눈은 기무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하나.’ 곧바로 바닥을 박차며 옆으로 달렸다. 다른 살수가 날린 비수가 허공을 가를 때, 기무혁은 두 번째 살수의 옆구리를 베고 있었다. 촤아악! ‘둘.’ 무력화된 살수가 피를 뿜으며 물러섰다. 그러나 순식간에 다시 포위망을 갖춘 살수들이 기무혁을 포위했다. 살수들의 대장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이러는 이유가 있나?” 끔찍하도록 짙어지는 살기에 기무혁이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외로움을 좀 많이 타는 편이라. 혼자 다니는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 잠시 독고귀 기무혁으로 돌아간 그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45화. 알면 안 되는 전생의 기무혁이 처음부터 독고귀라는 별호로 불렸던 것은 아니었다. -초짜라면서 제법이던데? -칼솜씨가 완전히 귀신이야, 귀신. 몇 년만 지나면 검귀라고 불리겠어. -그 몇 년을 버티는 놈이 이 바닥에 거의 없지만 말이다. -재수 없는 소리는……. 하여간 친하게 지내자고. 편하게 애꾸 동생이라고 불러도 되지? 거친 낭인들의 세계에도 나름의 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뒷세계에 흘러들어온 인간이라면 하나씩은 지독한 사연을 품고 있기 마련이고, 함께 일을 마치고 어쩌다 술 한잔하다 보면 호형호제하게 되는 일도 흔했다. 비록 며칠 후에 형제의 부고 소식을 듣는 것이 비일비재한 하루살이 인생들이더라도 말이다. -……너 혼자 가라. -하하, 어차피 살긴 글렀다. 너라도 가. -대장! 살아남으면 꼭 복수해 주십쇼! 기무혁은 지저분한 일은 가렸어도, 위험한 일은 가리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꿈꿨던 당당한 정파의 협객은 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무인으로서 살고자 했으니까. 되는대로 사는 것처럼 보였어도 마음속에 있는 불꽃이 사그라든 적은 없었다. ‘더 강해지고 싶다. 인공단전으로도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 그에겐 전장이 스승이었고, 몸에 난 상처가 깨달음이었다. 누군가의 말대로 몇 년을 버티는 사람이 극히 적은 낭인들의 세계에서 기무혁은 점점 전설이 되어갔다. 불가능할 거라던 임무에서 몇 번이나 혼자 살아 돌아오면서 자연스레 명성이 높아지고, 어느새 그는 독고귀(獨孤鬼)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반송장이 돼서 살아왔다더라. 지독하다 진짜, 지독해. -동료들을 방패로 삼고 혼자만 빠져나왔다는 소문이 있던데……. -보수 나눠 먹기 싫어서 다 죽이고 나오는 거라며? 어떠한 일을 맡건 혼자서라도 반드시 살아 돌아오는 귀신. 달리 말하면, 기무혁과 함께한 동료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딱 그 정도 수준이었으니까. 스스로의 몸만 간신히 지킬 수 있는 실력.’ 몇 없던 친구들은 기무혁에게 악운이 강하다고 놀리듯 말하곤 했지만, 그랬던 녀석들도 결국 다 죽어버렸다. 자연스레 기무혁은 혼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친구를 만들지 않았고, 실력에 비례해서 위험한 일은 점점 많아졌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서 돌아가자.’ 임무에 나설 때마다 독고귀 기무혁이 했던 다짐이었다. 처음에는 살아남고 싶어서였고, 나중에는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외로움을 좀 많이 타는 편이라. 혼자 다니는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 더 이상 혼자 돌아가지 않기 위해, 기무혁은 잠시 독고귀가 되어 싸우기로 결심했다. “눈물겨운 우정이군. 극음지체가 파트너를 아주 잘 골랐는데?” 살수들의 대장이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섰다. 바닥에 죽어 널브러진 살수들, 특히 하나뿐이었던 술법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곤란한 기색이 스쳤다. “……편히 죽을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잇새로 까드득 소리를 낸 그에게서 가공할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양하윤은 깜짝 놀라서 기무혁을 바라봤다. 어느새 자기 앞으로 돌아온 넓은 등이 보였다. 솔직히 자포자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무슨 수를 써도 혼자서는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자신이 납치된 사실이 알려지면 스승님이 구하러 와줄 거라고 믿었지만, 그 전에 쓸모가 다하면 살해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냥 내 스승님한테 알리라니까!”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괜히 기무혁한테 화를 냈다. 기무혁은 힐긋 그녀를 바라보더니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너, 죽을 각오로 싸워본 적 있어?” “지금부터 그렇게 할 거야!” 양하윤이 기무혁과 등을 맞대며 외쳤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기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포위망을 좁혀오는 살수들과 그 뒤의 대장을 도발했다. “안 덤비나?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한 건 그쪽일 텐데.” “……치워라.” 살수들의 대장이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살수들이 기무혁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비수와 암기가 날아들고 수면가루를 살포했다. 쩌저저저저적-! 양하윤이 전력으로 극음지기를 개방했다. 그러자 공기 중에 얼어붙은 수분이 비수와 암기의 궤적을 바꾸고, 수면가루가 얼어붙어 땅으로 떨어졌다. ‘이제 보니 방어에 최적화된 무공이군.’ 극음지기를 억제하고 있을 때 양하윤은 말투도 어눌하고 행동도 느리지만, 마음껏 무공을 펼칠 때의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두뇌회전이 빠르고 판단력도 뛰어났다. “날 방패처럼 이용해! 생포하겠다고 했으니까 함부로 살초는 쓰지 못할 거야!” 기무혁도 그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등을 맞댄 채로 그가 양하윤에게 말했다. “그럼 네 몸. 내가 좀 쓴다?” 순간 양하윤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당연히 이상한 뜻은 아니겠지만, 순간적으로 오해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대로 해! 멍청아!” “……?” 극음지기를 개방하면 성격도 더러워지나? 잠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생각은 한편에 밀어 넣으며 양하윤의 어깨를 잡아 왼쪽으로 돌았다. “왼쪽!” 두 사람이 위치를 바꾸자 칼을 들고 덤벼들던 살수가 급하게 궤적을 틀었다. 확연하게 느려진 공격을 기무혁이 위로 쳐냈다. 쩌엉! 검이 튕겨 나가며 살수의 중심이 흔들렸다. 기무혁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푹! 무리하지 않고 허벅지에 칼침을 놔준 후 곧바로 뒤로 물러났다. 그 즉시 다른 살수가 던진 비수가 기무혁이 있던 공간을 스쳤다. “오른쪽!” 외침과 동시에 등을 맞댄 두 사람이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회전했다. 순식간에 바뀐 상대의 높이에 기무혁에게 암기를 던지려던 살수들이 멈칫했고, 양하윤은 쌍장에 극음지기를 담아 내질렀다. 콰콰콰콰콰! 지금까지 마음껏 분출해 본 적 없었던 극음지기였다. 새하얀 와류가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며 일직선으로 쏟아졌다. 기무혁이 새하얗게 서리가 내린 눈썹을 꿈틀대며 말했다. “잠깐만 들자.” “뭐? 꺅!” 양하윤의 두 발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기무혁이 한 팔로 양하윤을 번쩍 들어 적들에게 돌진하자 양하윤이 쌍장을 마구 휘둘렀다. “죽어엇-!” 그 무모한 돌격에 살수들이 좌우로 흩어졌다. 감정을 절제하는 훈련을 받아 온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양하윤을 마치 인질처럼 휘두르는 기무혁이나 거기에 맞춰 싸우는 양하윤이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미친놈을 건드렸군.” 살수들의 대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극음지기를 품은 체질 1급의 양하윤. 그리고 라이센스 첫 시험부터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준 기무혁. 두 사람이 마음먹고 한 팀이 되어 싸우자 훈련된 살수 집단도 섣불리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극음지체야 까다로울 거라고 예상했지만…… 오히려 저쪽이 더 상대하기 어려울 줄이야.’ 극음지기를 지척에서 견뎌내는 기무혁의 몸에 새하얗게 서리가 맺혀 있었다. 분명 끔찍한 고통일 텐데도 그는 눈썹 하나 꿈틀대지 않았다. 아무리 두꺼운 옷과 내공으로 몸을 보호한다고 해도 참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닐 텐데 말이다. 그 순간 잔인한 웃음을 흘린 살수들의 대장이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동료 놈의 몸에 얕은 상처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라. 극음지기가 흘러 들어가 상처가 괴사할 수 있도록.” 그 말을 듣고 놀란 사람은 기무혁이 아니라 양하윤이었다. “이, 이 비겁한 자식들아!” “나 때문에 힘 아끼지 마. 그게 놈이 의도하는 거니까.” “……너 괜찮아?” “안 괜찮아.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해치우고 쉬어야지!” 사납게 눈을 치켜뜬 기무혁이 살수들을 향해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양하윤도 입술을 꽉 깨물고 극음지기를 쏟아냈다. 그러나 살수들은 방어적으로 대응하며 기무혁의 몸에 수많은 상처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상처로 극음지기가 스며들 때마다 기무혁은 뼈까지 얼어붙는 고통을 느꼈다. “큭…….” 운이 좋아 살수들의 손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극음지기가 뼛속과 내장까지 스며들어 폐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기무혁은 양하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등을 맞대고 한 몸처럼 움직이며 살수들의 공격을 막고, 때로는 서로를 방패 삼아 위기에서 벗어났다. 살수들의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었다. 일곱이던 적이 다섯이 되고, 셋이 되고, 이내 둘만 남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싸움에 나서지 않는 대장을 제외한 숫자였다. “후우우…….”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뼛속까지 파고든 극음지기가 호흡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등 뒤에서 양하윤이 망설이는 것이 느껴졌지만, 기무혁은 집중하라며 어깨를 툭툭 쳐줄 뿐이었다. ‘우리가 지치길 기다리는 건가?’ 기무혁은 여전히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는 살수들의 대장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부하들이 죽어 나가는데, 대장은 구경만 할 생각인가?” “유능한 살수는 단 한 번의 완벽한 기회를 노리는 법이지.” 느물거리는 대답이 자신감에서 나오는 여유인지, 아니면 허세인지 알 수 없었다. 기무혁이 입가에 얼어붙은 핏물을 손등으로 슥슥 닦으며 말했다. “시간을 끌수록 그쪽이 불리할 텐데?”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도 있으니 말이야. 더 이상은 곤란할 것 같긴 하지만…….” 하늘을 한 번 올려본 살수들의 대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 그것뿐이었는데도 느껴지는 압박감에 기무혁과 양하윤이 동시에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덜덜덜……. 극음지기에 계속해서 노출된 기무혁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하아, 하아아……. 양하윤도 이렇게까지 극음지기를 쉴 새 없이 쏟아내 본 적이 없었던 탓에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다. 둘 다 한계에 달한 모습이었다. “너.”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 것 같은 눈빛으로 다가오는 상대에게, 기무혁은 남겨두었던 비장의 수를 꺼냈다. “흑백이지?” 상대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지만, 기무혁은 그의 좌우에 있는 두 살수가 멈칫하는 것을 느꼈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자들답게 그 반응은 아주 미세한 수준이었다. 기무혁이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하지만 그 반응을 확인한 기무혁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흑백13. 삼류 라이센스 시험에서 나를 담당했던 시험관이 그 번호였어. 나를 꽤 마음에 들어 했잖아? 동류 어쩌고 친한 척까지 하면서 말이야.” “…….” “네 진짜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림맹의 누군가는 알겠지. 배신자인지 아니면 누굴 죽이고 몰래 그 가면을 뒤집어쓴 건지.” 기무혁이 히죽 웃자 상대가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기무혁은 흑백13이 자신의 입을 막기 위해 공격할 거라고 생각했다. 당황과 분노가 담긴 공격은 살수에게 어울리지 않는 빈틈을 만들 것이고, 그 정도면 아껴두었던 한 수로 승부를 걸어볼 만했다. “……어쩔 수 없이 죽여야겠군.” 자신의 검을 바라보며 담담히 내뱉는 상대의 말에 기무혁의 눈빛도 차갑게 가라앉은 순간이었다. 푸화아악! 흑백13의 좌우에 있던 살수들의 목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무, 무슨……. 자기편을!” 상상도 못 한 상황에 양하윤이 입을 딱 벌렸다. 허물어지는 부하들의 눈동자가 당혹감을 담은 채 자신들의 대장을 바라봤지만, 그는 이미 죽은 부하들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기무혁을 바라봤다. “하하. 제 정체는 부하들도 알면 안 되는 기밀이라서요.” 싱긋 웃으며 말하는 그의 말투는 기무혁이 삼류 라이센스 시험을 볼 때 함께했던 시험관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46화. 지금부터 보는 건 저벅. 저벅. 살수들의 피가 묻은 검을 늘어뜨린 흑백13이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 충격적인 모습에 양하윤은 벌레가 몸을 기어다니는 듯한 혐오감을 느꼈다. “어떻게 같은 편을…….” 잠시 멈춰 선 흑백13이 양하윤을 바라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옆을 한번 보시죠. 같은 편을 해친 건 하윤 양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 양하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보지 않아도 기무혁의 몸이 만신창이가 된 걸 알고 있었으니까. 타고난 체질이자 스스로에겐 저주나 다름없는 극음지체를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체질이 발현된 후로 가족들과도 거리를 둬야 했고, 친구들도 만날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극음지기를 일반인들은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까지…….’ 아파하고 불행해지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닫고, 혼자 있는 게 편한 것처럼 행동하며 지난 몇 년간 사람들을 피했다. -하윤아. 지금은 네가 익히는 무공이 극음지기를 더 강하게 만드는 것 같겠지만, 길게 보면 스스로의 기운을 다스릴 수 있게 만드는 길이란다. 일월문의 최고수이자 대장로인 그녀의 스승, 빙하신녀는 극음지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빙공을 익혀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당장은 강해지는 극음지기를 통제하기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항상 다독여주었다. ‘죄송해요, 스승님. 결국 또 주변에 민폐만 끼치고 말았어요.’ 스승님을 생각하자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양하윤의 정신과 육체는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육체가 두려움 때문에 오들오들 떨렸다. 흑백13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어 양하윤을 겨눴다. “저는 당신을 생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얌전히 따라왔다면 누가 죽거나 다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결국 당신의 이기심이 동료까지 죽게 만들겠군요.” “나, 나는…….” 처음으로 겪어본 살수들과의 목숨을 건 혈투, 여전히 건재한 적, 자신 때문에 상처를 입은 동료의 상태 등 모든 것이 비관적이었다. ‘결국 우리 둘 다 죽을 거야……. 나 때문에…….’ 한계까지 달한 양하윤의 체력과 정신이 서서히 무너지는 중이었다. 도저히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란 절망감, 공포심이 그녀를 잠식하려는 순간이었다. “죽긴 누가 죽어? 저런 개수작에 넘어가지 마. 난 아직 쌩쌩하니까.” 양하윤의 어깨를 짚으며 기무혁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침착한 목소리를 듣자 떨림이 잦아들었다. “……칫. 허세는.” 양하윤이 파르르 떨리던 입술을 꽉 깨물곤 상처투성이인 기무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흑백의 눈동자가 더 이상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얕은수를 쓰네. 실력에 자신이 없나 봐?” 앞으로 나선 기무혁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흑백13을 노려봤다. 마치 상대가 무엇을 했는지 다 안다는 표정이었다. “……살기에 정말 예민하군요. 보통 이렇게 한계까지 몰린 상황에서는 눈치채지 못하기 마련인데.” 흑백13이 눈에 이채를 띠고 말했다. 그는 일부러 두 사람에게 충격적인 광경을 보여준 후, 눈을 바라보며 미세하게 살기를 흘려보냈다. 궁지에 몰린 적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어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살수들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기무혁에겐 그것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즉, 살수들만큼이나 살기를 잘 다루고 그들의 방식을 잘 안다는 의미였다. “기무혁 무인. 당신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요?” 시간에 쫓기는 상황임에도 흑백13은 상대에게 짙은 호기심이 드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정파 후기지수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살수들의 생리를 잘 알면서,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을 만큼 냉정한 데다, 오늘 처음 본 상대를 동료랍시고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워줄 만큼 협의심이 넘친다?” 이런 특이 케이스는 정말 처음 보거든요. 흑백13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기무혁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게다가 제 정체는 또 어떻게 알았을까요? 혹시 그냥 한번 던져본 낚싯바늘에 제가 걸린 걸까요?” 그가 쓰고 있던 복면을 벗어버렸다. 그 안에서 절반은 하얗고 절반은 까만 흑백의 가면이 드러났다. [이렇게 계속해서 제 호기심을 자극하니, 당신이란 존재에 대해서 자꾸만 더 알고 싶어지잖아요?] 그것은 스스로 이 상황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고 믿는 강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기만이자 유희였다. 기무혁은 기꺼이 상대의 놀이에 어울려 주었다. “처음 시험관으로 나타났을 때부터, 언젠가 너와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때는 물론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지만.” [호오. 기무혁 무인도 저를 그때부터 유심히 지켜봤던 겁니까? 기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제 정체를 확신하지 못했을 텐데요?] “그야 네 입으로 직접 말했으니까.” [……제가 말인가요?] 기무혁이 극음지기에 자꾸만 굳는 몸을 천천히 풀면서 대답했다. “아까 내가 빠지겠다고 하니까 ‘역시’ 현실적이라고 했지. 여기서 날 처음 보는 사람이 그렇게 말할 리 없으니, 이 정도면 눈치채 달라고 한 건 줄 알았는데?” 잠시 멍하니 있던 흑백13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제 불찰이었군요.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그만큼 기무혁 무인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그는 감탄했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쳤다. 마치 친구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하지만 둘 사이의 넘실거리는 살기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더욱 길게 이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요.] 쿠르르릉-! 그때, 하늘에 먹구름이 끼면서 갑자기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마치 분노한 하늘이 누군가에게 경고를 주는 듯했다.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출렁이고 있었다. 술법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모습을 본 흑백13이 가볍게 혀를 찼다. [……결국 눈치를 챘군.] 신속하게 처리했어야 할 극음지기 확보 계획이, 기무혁이라는 변수 하나로 인해서 지나치게 지체되었다. 자기 몸 하나를 빼내는 건 언제든 자신 있었지만, 무림맹주가 뭔가 이상하단 걸 눈치챘다면 이 이상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괴물같은 초고수들은 술법진 자체를 부숴버리고 들어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만 말씀드릴까요?] 쨍그랑. 흑백13이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허리춤에서 두 자루의 날이 살짝 휘어 있는 비도를 꺼냈다. 그가 직접 살행에 나설 때 사용하는 독문병기였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무림맹의 모니터에 노출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여러분의 손가락 발가락을 모조리 자르고, 눈알을 뽑고, 혀를 지지고, 피부를 벗겨 그 위에 소금을 뿌려도 모를 겁니다.] 끔찍한 이야기에 양하윤이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두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두려움을 이겨내며 흑백13을 매섭게 노려봤다. “더는 하나도 안 무서워!”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의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비록 평생을 불구가 되어서 살아가야겠지만요. 그리고 저는 구조대가 여러분을 치료하는 동안 이 가면을 쓰고 유유히 빠져나갈 거랍니다.] 흑백13이 칼날로 자신의 가면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무혁은 재기불능이 된 양하윤이 어떤 모습으로 발견되었을지 알게 되었다. “……정말 무림맹 모니터에는 노출되지 않는 건가?” 눈빛이 착 가라앉은 기무혁이 흑백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화면을 덧씌웠다고 해도 원본이 있다면 녹화가 되어서 나중에 네 흔적을 쫓을 수도 있을 텐데.” 기무혁의 진지한 질문에 흑백13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저 자체가 술법진에 끼어든 일종의 바이러스라서요. 제가 사라질 때까지 이 일대는 촬영도 녹화도 되지 않기 때문에 기록이 전혀 남지 않습니다!] “그래? 그거 꽤 마음에 드는데.” 생각했던 것과 달리 흡족해하는 기무혁의 반응에 흑백13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마음에 든다는 겁니까?] “기록에 남질 않는다는 거 말이야.” 피식 웃은 기무혁은 이젠 넝마가 된 점퍼를 벗어 던졌다. 스스로 극음지기에 무작정 노출되는 모습에, 양하윤이 화들짝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 “너 지금 뭐 해?” “양하윤. 너 오늘 나한테 목숨 빚진 거 맞지?” “……그야 물론이지.” 양하윤이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곳에서 살아 나간다면,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혜를 반드시 갚을 생각이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기무혁이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럼 지금부터 보는 건 모른 척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았던 낭인의 방식. 기무혁은 극한의 추위를 견디면서도 가장 위험한 싸움에 대비해,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마지막 한 수는 남겨두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체질 4급 이상의 능력은 보여주지 않았다. 치이이이익- 몸에 들러붙었던 새하얀 서리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최상급 체질에게만 허락된, 기를 전신으로 빠르게 순환시키는 능력. 몸 안으로 스며들었던 극음지기가 밖으로 밀려나며 얼음처럼 창백했던 얼굴이 혈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무, 무, 무슨……!” 양하윤은 너무 놀라서 같은 말만 반복했고. [당신은 절 몇 번이나 놀라게 하는군요! 지금까지 일부러 극음지기가 주는 고통을 참고 있었던 겁니까?] 흑백13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더니 자신의 칼을 혀로 할짝였다. 역시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삼류 라이센스 시험을 치를 때도, 지금 보여주는 모습도. 기무혁은 어중이떠중이와 달랐다. 간혹 이렇게 튀어나오는 예상 밖의 상대를 죽일 때의 쾌감은 그에게 마약만큼이나 중독적이었다. [하하하하!] 결국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곧바로 기무혁에게 달려들어 비도를 휘둘렀다. 쩌엉-! 칼날끼리 부딪친 충격파에 양하윤이 뒷걸음질 쳤다. 먼지가 가신 자리에는 두 사람이 무기를 맞댄 채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전신에서 수증기를 뿜어내는 기무혁이 섬뜩하게 눈을 빛내며 흑백13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게 진작 부하들이랑 같이 덤볐어야지. 슬슬 후회가 되나?” [방심한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로 제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요?] “충분히 해볼 만할 것 같은데? 남은 동료들을 죽여서 없애버린 누구와 다르게, 이쪽은 든든한 백업이 있거든.” 어느새 흑백의 뒤로 돌아온 양하윤이 냉기를 휘감은 쌍장을 휘둘렀다. 후우웅! “이 나쁜 놈! 정체를 속이다니!” 흑백에게 하는 건지 기무혁에게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극음지기에 휩싸인 두 손바닥은 정확히 흑백13의 등을 노리고 있었다.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는데, 조금 짜증이 나는군요.]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함께 흑백13은 한 쌍의 비도를 거칠게 휘둘렀다. 기무혁의 검을 단숨에 쳐내고, 곧바로 몸을 돌려 양하윤의 팔을 벨 작정이었다. 까가가가강! 하지만 생각과 달리 좀처럼 기무혁의 검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교라도 붙인 것처럼 달라붙는 검은 도저히 빈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힘, 속도, 내공. 모든 것이 자신이 계속 지켜봤던 기무혁과는 다른 사람 같았다. [……실력을 많이도 감춰뒀군.] 흑백의 말투에서 점점 여유가 사라지고 눈빛에는 당혹스러움이 맺혔다. 전신에 상처가 계속 늘어나도 눈썹 한번 꿈틀대고 마는 기무혁의 모습은 살수인 그조차 혀를 내두르게 했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 기무혁의 몸에 상처를 내던 극음지기는 어느 순간부터 기무혁을 보호하듯이 새하얗게 몸을 휘감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의 의지에 따르는 것처럼. 그 모습을 본 흑백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설마, 네 체질…….] 기무혁이 송준호와 쌍장을 부딪히던 순간을 떠올린 흑백13의 눈동자가 뭔가를 깨달은 듯 부릅떠졌다. 상대와의 거리를 바짝 좁힌 기무혁이 몰래 비밀을 알려주듯 속삭였다. “체질 측정 기계도 가끔 고장이 나는 것 같더라고.” [……!] 자신의 판단이 처음부터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자, 그처럼 노련한 살수라도 순간적으로 판단력이 흐려졌다. 촤아악! 헛손질에 가까운 흑백의 공격이 허공을 갈랐고, 기무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까 손가락부터 자른다고 했던가?” 상대의 아래로 파고든 기무혁이 번뜩이는 눈빛으로 흑백을 바라보며 웃었다. 푸화아악! 핏물이 뿜어지고 잘려 나간 손가락 세 개가 후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뒤로 물러난 흑백13은 손가락이 잘려나간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다시 기무혁을 바라봤다. […….] 등줄기를 훑는 소름과 함께, 그는 자신이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것을 자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47화. 오랜만입니다 콰앙-! 콘크리트 벽에 처박힌 인물의 몸이 축 늘어졌다. 커다란 손바닥 안에서 저항하듯 꿈틀대던 머리의 힘이 빠져나가더니, 이내 완전히 움직임이 멎었다. 그렇게 벽에 사람을 구겨 넣은 장본인에게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침입자는 이게 마지막인가?” 무림맹주 여필극. 그가 진심으로 분노하는 모습을 본 이들은 누구라도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옆집 노인처럼 인자하게 웃어주던 평소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침입자를 벌레 잡듯 때려죽인 철혈의 무인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맹 내부에 있는 무인들의 신분을 전부 확인했습니다. 더 이상의 침입자는 없다고 판단되나…… 배신자를 색출 중에 있습니다.” 무림맹 원로이자 친맹주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노구천이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는 맹주와 함께 이번 라이센스 시험을 기획한 핵심 인물이었다. 술법진 내부에서 양하윤을 납치하는 계획이 예상보다 지체되면서, 외부에서는 살수들의 조력자들이 시간을 벌기 위해 움직였다. 다행히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여필극이 직접 나서서 침입자들을 제압했지만, 그로 인해 현재 무림맹 전체에 비상이 걸린 상황이었다. “놈들의 목적은 파악했나?” “모니터를 전부 확인한 결과 일월문의 양하윤을 노린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기무혁도 이 일에 휩쓸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노구천의 대답과 함께 컨트롤 본부의 중앙 모니터에 양하윤과 기무혁의 프로필이 떠올랐다. 팔대문파의 일좌인 일월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후기지수와 검마의 제자일지도 모르는 청년. 하지만 현재 술법진 내부를 보여주는 모니터 어디에서도 그 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안에 있는 누군가가 술법에 장난을 쳤다는 의미였다. 모니터를 빠르게 훑은 여필극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술법사들에게 전하게. 즉시 술법진을 해제하고…….” “맹주님! 큰일입니다!” 그때 문을 부수듯 열고 들어온 맹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시, 신비전의 술법사들이……!” 휘이이익-! 맹주는 끝까지 듣지도 않고 날 듯이 경공을 펼쳐 술법사들이 모여 있는 공간으로 향했다. 무림맹에서 설치한 대규모 술법진을 구축하는 중심축, 그곳에서 술법을 제어하고 있어야 할 술법사들 중 일부가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술법사들을 기습했다가 반격을 당해 숯덩이로 변한 살수들의 시체가 있었다. “기습이 있었습니다. 극독을 가진 살수들이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이곳을…….” 여필극은 맹원의 보고를 들으며 직접 술법사들의 시신을 살폈다. “……내 반드시 흉수를 잡아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니 편히들 눈을 감으시게.” “매, 맹주님! 아직 시신에 독이…….” “괜찮으니 자네들은 물러서게.” 화르륵! 주변에 남아 있던 독 기운을 공력으로 태워버린 후, 여필극이 극독에 절명한 술법사들의 눈을 하나하나 감겨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심각한 표정의 술법사들을 바라봤다. “만박자. 지금 당장 술법진을 해제할 수 있겠소?” 한국 최대의 술법조직 신비전(神秘殿)의 고위 술법사이자, 라이센스 시험장의 술법진을 구축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해준 만박자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불가합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해체한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불안정한 상태에서 단번에 시도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술법진 내부의 괴이들이 폭주하거나 지형지물이 변해서 재해가 일어날 수도 있고, 안에 있는 후기지수들의 감각기관에 치명적인 손상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맹주가 낮게 침음하며 물었다. “술법진을 안전하게 해제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오?” “최소로 잡아도 두 시간은 필요합니다. 실력 좋은 술법사가 한둘만 더 있어도 그 절반으로 줄일 수 있겠지만…….” 죽은 술법사들의 빈자리가 크다며, 만박자는 최대한 서둘러 보겠다고 말했다. “흑백들과의 통신은?” 뒤늦게 맹주를 뒤쫓아온 노구천이 대답했다. “적들이 손을 썼는지 전부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리고 제 짐작이지만 흑백 중의 일부는…….” “배신자일 확률이 높겠지.” 여필극이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대체 언제부터 무림맹에 살수들이 잠입해 있었는지, 그 배후가 누구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에 싸늘한 분노가 맺혔다. “그럼 나 혼자서라도 술법진 안으로 들어가겠소. 서둘러 양하윤과 기무혁을 찾아내고…….” “맹주님. 안 됩니다.” “그 역시 곤란합니다.” 노구천과 만박자가 동시에 반대하며 여필극을 가로막았다. “맹주님과 같은 고수가 강제로 진입하면 술법진의 일부가 붕괴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고수들이야 괜찮겠지만 후기지수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콰앙! 여필극의 주먹이 바로 옆의 벽을 부수고 들어갔다. 후기지수들이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가 터져 나왔다. “허면 이렇게 손 놓고 구경만 해야 한단 말인가!” 저 안에 있는 후기지수들은 한국 무림의 미래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중 누구 하나라도 잘못된다면, 여필극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터였다. 자신의 무력함에 여필극이 주먹을 꽉 쥐고 화면을 바라볼 때였다. “상황이 좋지 않은가 보군요.” 낯선 기척에 여필극이 경악하며 돌아섰다. 그곳에는 복면을 쓴 인물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살수! 그것도 나조차 기척을 잡기 힘든 자라니!’ 아무리 침입자들과 배신자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 해도, 무림맹의 심처인 이곳에 살수가 들어올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감히!” 이형환위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상대에게 접근한 여필극이 침입자를 단죄하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다. 쩌엉-! 놀랍게도 상대는 권왕이라고 불리는 무림맹주의 일권을 검으로 막아내고, 고작 두어 걸음 물러난 것으로 그 힘을 해소했다. 그것만으로도 믿기 힘든 일인데, 상대가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입을 열었다. “맹주님. 성격은 여전하십니다.” “……설마?”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에 다시 주먹을 휘두르려던 여필극이 그대로 멈춰 섰다. “이 목소리는…….” 함께 검을 뽑아 들었던 노구천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복면 쓴 상대를 바라봤다. 맹주와 노구천이 무언가에 홀린 듯 다가가자 상대가 두 사람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복면을 살짝 내렸다. “맹주님, 노 장로님. 오랜만입니다.” “자, 자네…….” “허허허…….” 검마(劍魔) 최건. 한때 여필극이 가장 믿을 수 있었던 동료이자 무림맹의 암검이었던 사내가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 대체 그동안 어디에서……!” “회포는 나중에 풀도록 하지요.” 최건이 진지한 표정으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밖에서 지켜보는데 맹이 어수선해 보여서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싶어 찾아왔습니다. 혹시라도 제자 녀석이 큰 사고를 쳤나 걱정되기도 하고…….” 잠시 멋쩍은 미소를 지은 그가 금세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상황은 오면서 대충 파악했습니다. 지금 술법진 안에 후기지수들이 갇혀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수 놈들이 수작을 부렸다지요?” “……저 안에 자네의 제자도 있네. 기무혁. 그 아이 맞지?” 노구천의 질문에 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제자를 걱정하는 것치고는 너무나 평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무혁이는 괜찮을 겁니다. 그러니 저희는 최대한 빠르게 이 상황부터 수습하지요.” 최건이 만박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까 들으니 술법사가 부족하다던데…… 혹 뛰어난 술법사가 필요하면 한 명 추천해도 되겠습니까? 전화만 주면 당장 달려올 거리에 있습니다만.” “……술법에 이해가 높고 괴이도 다룰 줄 아는 술사가 필요합니다. 애매한 실력으로는 방해만 될 테니.” “방금 하신 말씀에 딱 맞는 인재입니다.” 최건의 호언장담에 만박자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리지요.” 복면을 쓴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맹주의 표정을 봐서는 믿을 만한 인물처럼 보였으니까. 다시 맹주와 노구천을 바라본 최건이 말했다. “술법진 내부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최건은 과거 무림맹의 해결사였다. 검마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로 가장 널리 알려졌지만, 동시에 그는 빠른 판단력과 과감한 일 처리로 무림맹주의 검이라고도 불렸다. 비록 그 탓에 무림맹주를 견제하기 시작한 팔대문파의 집중적인 타깃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최건이 맹주에게 제안했다. “당장 바깥에서 술법진에 개입하기는 어려우니, 현장에 있는 무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방금 말하지 않았나. 흑백들과의 연락은 끊겼고, 그마저도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맹주님.” 그 시절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최건의 눈빛은 예전과 똑같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안에 재능 있는 무인들이 수백 명이나 있지 않습니까?” 최건의 손가락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같은 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라이센스 시험을 중지하고 한자리에 모여 대기 중인 후기지수들이 있었다. “……내가 잠시 잊고 있었군.” 여필극은 한 방 먹은 사람처럼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저기 있는 후기지수들이야말로 가장 큰 전력이라는 것을 말이야.” 좁아졌던 무림맹주의 시야가 최건의 조언으로 트이기 시작했다. 저기 있는 모두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 이들이었다. 무림맹에서 마냥 보호해야만 할 대상이 아닌, 자신의 무(武)로 정의를 관철할 수 있는 무림인들. “만박자. 저 안에 있는 후기지수들에게 내 말을 전달할 수 있겠소?” 평소의 무림맹주다운 모습으로 돌아온 여필극의 질문에 만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길지만 않으면 가능합니다.” “짧게 할 것이오. 연결해 주시구려.” 잠시 후, 술법진을 통해 후기지수들에게 맹주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 * * 술법진에 이상이 생겼다는 공지와 함께 모든 시험이 중지되었다. 팀을 이뤄서 임무를 수행 중이던 후기지수들은 안내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고 한자리에 모여서 대기 중이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술법진 문제면 큰일인 거 아닌가…….” “대체 흑백들은 다 어디 간 건데!” 광장에 모인 후기지수들은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쿠르르릉……! 출렁이는 술법진의 풍경은 한눈에 봐도 정상이 아니었고, 한 번씩 내리치는 천둥번개는 이대로 세상이 망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살벌했다. 물론 그 자리의 모두가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젠장. 겨우 재밌어지고 있었는데…….” 신강헌은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까부터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근데 기무혁 이 자식은 왜 안 보여?” 선두권을 두고 경쟁할 줄 알았던 기무혁은 시험을 시작한 이래로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 자식이 뒤처졌을 리가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 때였다. -비상사태가 벌어져 라이센스 시험을 정상적으로 치를 수 없게 된 점, 우선 모두에게 사과하겠네.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하늘에서 무림맹주 여필극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 맹주님 목소리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주세요!” 놀라는 후기지수들에게 계속해서 맹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내 명예를 걸고 진실임을 보장하지. 현재 술법진 내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수들이 잠입했네. 이어지는 맹주의 설명에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당황해서 숨을 들이켜는 이,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살수들의 목표는 라이센스 시험에 참가한 일월문의 양하윤 무인이네. 그리고 양하윤 양과 팀을 이룬 기무혁 무인도 휘말린 것으로 파악되고……. 하지만 그보다 많은 후기지수가 무림맹 본단에 감히 살수가 침입했다는 사실에 분노했으며, 함께 시험에 참여한 동료를 노린다는 말에 무기를 꽉 움켜쥐었다. -하여 자네들에게 부탁하고 싶네. 위험에 빠진 동료를 위해 힘을 보태줄 수 있겠나? -상대는 무림맹 한복판에 침입할 정도의 고수들이네.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야.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어떤 불이익도 없을 것이니 신중하게 결정해서……. “그래서!” 맹주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신강헌을 필두로 오정민, 송준호를 비롯한 많은 무인들이 앞으로 나섰다. “기무혁이 싸우고 있는 곳이 어딘데요!” 더 이상 가만히 듣고 있지 못하겠는지, 신강헌이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48화. 방금 그 말로 상대와 검을 부딪친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쿨럭…….” 핏물을 왈칵 토해낸 기무혁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팔다리가 베인 상처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고, 내상을 입었는지 안색도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 모습이 마치 상처 입고 지친 늑대를 연상케 했다. [……지독할 정도로 끈질기군요.] 그 맞은편에는 낭패한 몰골의 흑백13이 서 있었다. 오른 손가락을 몇 개나 잃고, 가면에는 날카롭게 파인 흔적들이 보였다. 옷 위로는 깊게 베인 상처들과 핏자국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의 모습 또한 기무혁과 별다를 바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인정하겠습니다. 기무혁 무인이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익혔다면…… 제가 이길 수 없었을 겁니다.] 흑백13은 살수이기 전에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었다. 아무리 기무혁이 마지막까지 실력을 감추고 있었고, 최상위 후기지수인 양하윤과 협공까지 했다지만 그를 이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이 될 뻔했다. “……또 입을 터는 걸 보니 슬슬 도망칠 마음이 생겼나 봐?” 기무혁이 입가에 핏물을 닦아내며 다시 검을 들어 흑백13을 겨눴다. 그의 뒤에는 양하윤이 한계를 넘어서 극음지기를 사용한 대가로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하하하하하!] 이 뒤로는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한 기무혁의 자세를 보며 흑백13은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 때문에 저희의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극음지체를 확보해 원정만 취하고 빠지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는데……. 고작 약관의 후기지수 하나가 망쳐버린 겁니다.] 쿠르릉! 쿠르르릉! 하늘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주변의 풍경 사이로 건물의 벽과 같은 형상이 잠시 보였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술법진이 해제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지금쯤 무림맹에 숨어 있어야 할 저희의 전력이 노출되었을 겁니다. 작전이 틀어져 시간을 벌어야 했을 테니까요. 아마 꽤 많은 수가 잡히거나 죽었겠지요.]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우스운지 모르겠다는 듯, 흑백13이 쿡쿡대며 웃었다. 퉷. 피가 섞인 침을 뱉은 기무혁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저희는 방해물을 그냥 두지 않거든요. 당신뿐만 아니라 가족, 주변 사람들까지 피로 값을 치르게 되겠지요.] “……방금 그 말로 네 운명이 결정됐다는 건 알아둬.” 가족을 협박하는 말에 기무혁이 차갑게 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당장에라도 상대의 목을 물어뜯을 기세였다. 그 순간, 흑백의 가면을 쓴 새로운 적들이 나타났다. [대체 뭘 하는 거냐!] [우리까지 나서게 만들다니…….] 하나는 거구의 사내였고, 하나는 호리호리한 체형에 창을 든 인물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이번 일에는 나서지 않을 예정이었던 조직의 인원까지 나선 듯했다. [보다시피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도움을 부탁드리죠.] 흑백13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두 흑백이 그를 사납게 노려본 후 움직였다. [이렇게까지 일을 망치다니, 너답지 않군.] [돌아가면 징계를 피하지 못할 거다.] 체격이 큰 흑백이 두 주먹을 부딪치며 다가오고, 호리호리한 흑백은 창을 꺼내 기무혁을 겨눴다. “…….” 둘 다 최소 절정의 무인. 양하윤은 기절했고, 흑백13도 끝장내지 못한 상황에서 그와 수준이 비슷해 보이는 무인이 둘이나 더 추가되었다. 흑백13은 동료들과 함께 기무혁을 압박하며, 이제는 한 손에만 든 비도를 까닥거렸다. [어떻습니까? 지금도 후회하지 않습니까? 이젠 생각을 바꿔도 늦었습니다만.] “……하, 하하하.” 난감한 듯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던 기무혁이 실성이라도 한 듯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검을 천천히 아래로 늘어뜨렸다. 체념한 듯한 그의 모습에 흑백13의 입가에 가학적인 미소가 떠오른 순간. “후회해도 늦은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 같은데?” [그 의지만큼은 존경합니다. 아직도 허세를 부리겠다면…….] “머저리 같은 새끼. 위를 한번 보라고.” 기무혁의 시선을 따라 하늘 위를 바라본 흑백들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저게 무슨……!] 허공에 떠오른 수십 개의 화살표가 그들이 있는 곳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술법진의 공간 일부가 크게 일그러졌고. 와아아아아아! 땅을 떨어 울리는 진동과 함께 수백 명에 달하는 후기지수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미친놈아-! 형님이 구하러 왔다-!” 그 선두에서 신강헌이 말 그대로 미친개처럼 뛰어오고 있었다. 반가움에 기무혁이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여기 가면 쓴 새끼들 다 배신자다! 전부 족쳐도 돼!” “신강헌 더 골드 강림! 우라앗-!” 멀리뛰기 하듯 힘차게 뛰어오른 신강헌이 그대로 덩치 큰 흑백에게 내리꽂히며 도를 휘둘렀다. 쩌어어엉! 신강헌의 도를 어렵지 않게 받아낸 덩치 큰 흑백이 가면 너머로 보이는 눈에서 진득한 살기를 흘렸다. [이 애송이들이……!] 호리호리한 흑백도 송준호와 오정민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낸 후 창을 크게 한 바퀴 돌렸다. 그에게서도 무시무시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전부 죽고 싶다면 말리지 않으마.] 무림에서 절정고수란 일반인들에겐 범접 불가능한 존재이며, 이삼류 무인이 떼로 덤벼도 상대할 수 없는 강자였다. “……!” 절정고수의 살기가 쏟아지자, 달려오던 후기지수들이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튕겨나간 신강헌에 이어 송준호와 오정민이 다시금 흑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쪽수는 우리가 더 많아! 밀어붙여!” “다들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거냐고!” “동료들을 구하자!” 세 사람이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자, 다른 후기지수들도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살수들을 죽여라!” 신강헌, 송준호, 오정민 등 일류에 준하는 실력자들이 앞에서 공격을 막고, 실력이 부족한 후기지수들은 포위망을 형성하며 차륜전을 펼쳤다.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에 참여했다. 적들이 뿌리는 검기에 상처 입고 물러서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른 후기지수들이 금세 그 자리를 채웠다. “양하윤은 구출했습니다!” “기무혁 무인도 무사합니다!” “누구 금창약 없어?” 기무혁은 잠시 뒤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촤아아악! 신강헌의 어깨가 베이며 핏물이 뿜어졌다. 제법 깊은 상처였지만 신강헌은 굶주린 맹수처럼 다시 달려들어 상대를 당황시켰다. [뭐, 뭐 이런 놈이!] 송준호는 타고난 세밀한 기감으로 공격을 빠르게 차단했고, 오정민은 단단한 검법으로 동료들을 지키며 차륜의 중심이 되어주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어떻게든 극음지체를 확보해서 빠져나간다.] 거구의 흑백과 창을 든 흑백의 손발이 점점 어지러워졌다. 흑백13과 달리 그들은 전문적인 살수 훈련을 받은 자들이 아니었다. 절정고수에 걸맞은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지만, 흑백13처럼 적진에 숨어들거나 혼란을 틈타 기척을 감추고 도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냥 도망치게 둘 것 같냐고-!” “저 가면부터 부숴버려! 면상이나 한번 보게!” 흑백들의 가면에 실금이 가고, 상처가 늘어나며 옷 위로 핏물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절정고수도 벌떼처럼 달려드는 후기지수들의 물량공세는 당해내지 못했다. “우라아아앗!” 거구의 흑백을 들이받은 신강헌이 그대로 상대를 넘어뜨렸고, 십여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 점혈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봤냐? 내가 한 놈 잡았다!” 벌떡 일어난 신강헌은 기무혁에게 자랑할 생각으로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그러나 이내 기무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자식은 또 어디 갔어?” 그리고 흑백13의 모습도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 * * 기무혁은 달리면서 송준호가 준 최상급 내상약을 씹어 삼켰다. 몸에서는 후기지수들이 덕지덕지 발라준 금창약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응급처치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감히 내 앞에서 부모님을 죽이겠다고 협박해?” 저 앞에 동료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치고 있는 흑백13의 등이 보였다. 기무혁은 혼란 중에 상대가 은신술을 펼쳐 도망치는 것을 눈치챘지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추격했다. “너만큼은 내가 직접 끝장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거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기무혁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체력도 내공도 바닥나 있었지만, 분노와 독기가 그를 움직이게 했다. 다행히 조금 전부터 한 가지 낯선 기운이 그에게 힘을 북돋아주고 있었다. ‘극음지기?’ 체질을 숨기고 있었던 동안 몸 안에 스며든 극음지기였다. 내공을 일으키며 몸 밖으로 밀어냈지만, 이미 그전에 뼛속까지 깊게 스며든 기운이 적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 극음지기의 일부가 몸 안에 정착한 듯했다. 사아아아아- 기무혁은 손바닥을 흐릿하게 감싸는 새하얀 기운을 바라봤다. 양하윤의 것에 비하면 굉장히 미약했지만, 그 기운이 옮겨왔다는 것만으로도 무림계가 충격에 빠질만한 일이었다. ‘혹시 내가 오행적성자라서 그런 걸까?’ 지금 당장 정확한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기무혁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앞에 가던 적과의 거리가 충분히 좁혀졌으니까. 휘익! 힘껏 던진 비수가 상대의 등에 박혔다. 흑백13이 비틀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가면의 아랫부분이 부서진 모습이었다. 도망치는 와중에 이미 몇 차례 기무혁과 부딪치며 생긴 흔적이었다. 애써 미소를 지은 흑백이 힘겹게 웃었다. [하하……. 질리지도 않습니까? 저는 슬슬 그쪽 얼굴이 지겨운데요.] “나는 아직 네 진짜 낯짝을 못 봐서 말이야.” 기무혁은 이런 자들을 대하는 것에 익숙했다. 항상 여유 있는 척, 모든 상황이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상대방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쾌감을 얻는 변태들. 주절주절 떠들기를 좋아하는 이유도 상대방이 자신의 말에 절망과 공포를 느끼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리라.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되겠습니까? 분명 솔깃할 만한 이야기일 겁니다.] 기무혁은 대답 대신 달려들어 흑백의 가면을 주먹으로 후려쳐 부숴버렸다. 콰지직! 조각나서 흘러내리는 가면 안에는 놀라울 정도로 평범한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길에서 지나가다 보면 눈길 한번 주지 않을 인상. 비틀거리며 물러난 흑백13이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가면을 통해 항상 변조돼 나오던 목소리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 실체는 가늘게 떨리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당신에겐 놀라운 재능이 있습니다. 그 재능을 이런 재미없는 정파무림에서 썩히기 아깝지 않습니까?” 기무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들어 그 얼굴을 그어버렸다. 촤아악! 핏물이 치솟으며 남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한쪽 눈을 잃은 상대가 뒷걸음질 쳤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입은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저와, 저와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재능을 활짝 꽃피울 수 있게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팔대문파에서도 구할 수 없는 흥미로운 무공을 익힐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이라면…….” 기무혁은 상대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검을 휘둘러 관절을 부수고, 힘줄을 베어버렸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진 상대가 식은땀을 흘리는 얼굴로 히죽거리며 웃었다. “이런다고 제가 살려달라고 빌 것 같습니까? 끝까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고작 후기지수 따위에게! 하하, 하하하하……!” 기무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무기물을 보는 것처럼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관찰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까 순서가 손가락 발가락을 자르고, 눈알을 뽑고, 혀를 지진다고 했던가? 취조할 때 필요하니까 혀는 남겨두고. 그다음이…… 피부였던 것 같은데.” “…….” 만신창이가 된 몸이 꿈틀거렸다. 상대의 눈동자에 공포가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지만, 기무혁은 신경 쓰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날을 휘둘렀다. “그러게, 패드립은 하지 말았어야지.” 49화. 무언가 이상했다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도 흑백13은 쉬지 않고 입을 움직였다. “……헛수고라고 말씀드리죠. 이런다고 제가 당신을 두려워할 것 같습니까?” 마치 기무혁이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을 굴복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 같았다. “저를 고통스럽게 해봤자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습니다. 취조? 고문? 얼마든지 해보시죠. 하하하하!” “딱히 뭘 얻을 생각은 없어.” 기무혁이 자신을 비웃는 상대를 무심하게 내려보며 말했다. 그도 고통을 주는 것만으로는 이런 종류의 인간을 두려움에 빠트리거나 분노하게 만들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부모님을 죽이겠다고 협박한 인간을 사지가 멀쩡한 상태로 무림맹에 넘기고 싶지는 않을 뿐이었다. “적어도 다시는 누군가를 해칠 수 없도록 만들어 주려고.” “그런 쓸데없는 행위에 힘 빼지 말고, 차라리 저와 건설적인 대화를 이어가는 편이…….” 콰직! 푸욱! 촤아악-! 기무혁은 마치 정육점에서 고기를 다루듯 검을 휘둘러 뼈를 부수고, 생살을 찢고, 피부를 베어냈다. 상대가 어떤 말을 지껄이든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예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았다. “끄흐흐흐……!”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고 고통에 내색하지 않도록 훈련된 살수라도 몸은 저절로 반응하기 마련이었다. 자존심 때문에 억지로 웃고 있지만, 흑백13의 얼굴에선 피와 땀이 섞여 줄줄 흘러내렸다. “몹시, 능숙, 하군요…….” 뒷세계의 방식이었다. 낭인으로 살아가며 여러 가지 위험한 일을 하다 보면,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능숙해지는 것들이 있었다. 때문에 기무혁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적을 철저하게 짓밟으면서 분노하지도, 즐거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귀찮은 일을 하는 것처럼 지긋지긋하단 표정이었다. “당신, 지금, 나를…….” 그런 기무혁의 무심한 태도가 오히려 흑백13을 자극한 듯했다. 육체의 고통에는 태연했지만, 마치 도살장에 끌려온 가축처럼 취급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나를 무시하지 마―!”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싶을 정도로 쩌렁쩌렁한 고함이었다. 기무혁은 비로소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상대와 시선을 맞췄다. “뭔가 숨겨진 한 수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기대가 너무 컸나?” “……뭐?” “구명절초 같은 거 말이야. 최후의 순간이 아니면 보기 힘든 특별한 무공 같은 걸 감추고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쉽게도 넌 그 정도는 아닌가 봐.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기무혁의 눈과 마주한 순간. “……!” 흑백13은 그에게 손가락이 잘려 나갔을 때 느꼈던 등줄기의 소름을 다시금 느꼈다. 고작 약관에 불과한 후기지수가 풍기던 묘한 꺼림칙함, 건드리지 말아야 할 존재를 건드린 것 같다는 불안감. 자신을 무기물을 대하듯 감정 없이 베어내는 서늘한 눈동자를 보면서, 비로소 그 실체를 명확히 깨달았다. “무공광(武功狂)……. 너는, 무공에 진정 미친 인간이구나…….” 단 한 명, 흑백은 자신이 소속된 조직에서 기무혁과 비슷한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광인들이라 일컬어지는 교(敎)의 수뇌부에서도 압도적이고 특출난 존재가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닮았어…….” 독기로 가득했던 살수의 동공이 풀리고 그 자리를 두려움이 가득 채웠다.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바들바들 떨렸다. ‘마스터 한!’ 지금 흑백13의 눈에는 한 사내와 기무혁의 얼굴이 겹쳐 보이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전신의 근육에서 힘이 풀리고, 하반신에서 오물이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정신이 결국 한계에 도달해 무너져 내렸다. “흐흐흐흐…….” “뭐지?” 기무혁은 갑자기 눈빛이 맛이 가버린 흑백13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로서는 상대가 자신에게서 누구를 보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이봐. 벌써 포기하는 거야? 지금 죽으면 내가 곤란해.” 기무혁은 혹시라도 상대가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옷을 찢어서 재갈처럼 물렸다. 그리고 뺨을 계속 때려 억지로 의식을 잡아 두었다. 짜악! 짜악! 차라리 죽는 게 세상에 이로운 해충 같은 놈이지만, 배후를 캐기 위해서는 살려두는 편이 나았다. ‘천마신교와 관련돼 있을 가능성도 있고.’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기무혁은 라이센스 시험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 후에 이어진 무림맹주의 퇴진이 천마신교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조금 더 다져놓으면 정신을 차리려나?” “흐흐흐흐……!” 기무혁이 전생에 살수들의 입조차 열게 만들었던 몇 가지 방법을 떠올리며 고민할 때였다. 화아아아아아악- 두 사람을 둘러싼 풍경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천둥번개가 내리치던 음산한 숲속의 풍경이 무림맹 대연무장으로 돌아왔다. 술법진이 완전히 해제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기무혁은 몇 개의 기척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아. 괜찮은 게냐?” 친숙한 목소리에 기무혁이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의 스승인 최건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이 왜 이곳에…….” 기무혁이 스승의 등장에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는데,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만신창이가 된 제자의 몸을 여기저기 만지며 살폈다. “쯧쯧. 많이도 상했구나. 대체 얼마나 험하게 몸을 굴린 게야!” 익숙한 잔소리. 기무혁은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사르르 풀리며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 곧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기무혁이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급소는 다 피했습니다. 크게 다친 곳도 없고요.” “거울이나 한번 보여주고 싶구나. 네가 지금 어떤 꼴인지…….” 괜히 퉁명스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최건은 피 칠갑을 한 제자의 모습을 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다. 기무혁의 발 아래에 도축된 짐승처럼 꿈틀거리며 축 늘어진 인간이 놓여 있었으니까. ‘아무리 화가 나도 이리 분별없이 검을 휘두를 녀석이 아니거늘…….’ 그때 최건의 뒤편에서 노구천, 그리고 무림맹주 여필극도 모습을 드러냈다. “허어…….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둘 다 상태가 많이 심각하군.” 두 사람도 무사한 기무혁을 보고 일단 안도했으나, 그 아래에 쓰러져 있는 흑백13을 보고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파무림의 후기지수라기엔 그 손속이 지나치게 잔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기무혁의 스승인 최건조차 충격을 받을 정도였으니, 두 사람이 느끼는 동요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분위기를 느낀 최건이 엄한 표정으로 제자에게 물었다. “죽여 마땅한 놈이긴 하다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느냐?” 질책하는 듯 보이지만 걱정이 담긴 스승의 눈빛에, 기무혁은 자세를 바르게 하며 대답했다. “손속이 과했던 점은 인정하겠습니다. 놈이 제 부모님을 찾아가서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순간 이성을 잃었습니다.” “으음.”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는 이유에 여필극과 노구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최건의 반응이었다. “누굴 죽여?” 최건이 눈을 사납게 치켜뜨더니 바닥에서 꿈틀대는 흑백13을 당장에라도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봤다. 그러더니 곧장 검집째로 검을 휘둘러 머리를 후려쳤다. 빠악! 완전히 의식을 잃은 흑백13의 몸이 축 늘어졌다. 최건이 한 발로 그 머리를 꾸욱 밟으며 말했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 내게 걸렸으면 뼈 마디마디에 바늘을 꽂아 넣고 한 점씩 포를 떠 주었을 것이다.” 최건에게 기찬호와 박지연은 이제 거의 가족과 다름이 없었다. 이십 년간 굳게 닫혀 있던 그의 마음을 열게 해준 사람들이었다.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도 종종 찾아와 밥이나 술을 권하고, 날이 좋은 날에는 함께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 단지 아들의 스승에게 보이는 호의라기에는 훨씬 컸던 두 사람의 따뜻함을 생각하자, 살수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최건이 여필극을 홱 돌아보며 말했다. “맹주님. 이놈은 제가 직접 취조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게나.” 그 살기 어린 눈빛과 박력에 무림맹주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다시금 제자를 돌아본 최건이 방금 전과 달리 잘했다며 어깨를 두드렸다. “용케 죽이지 않고 잘 참았구나. 네 참을성이 나보다 낫다.” “살려둬야 나중에 배후를 캘 수 있으니까요.” “아무렴! 쓰레기 같은 놈은 숨만 붙어 있고 입만 달려 있으면 된다. 뒷일은 내게 맡기고 너는 이제 푹 쉬거라.” 훈련이 헛되지 않았다며, 역시 내 제자라고 최건이 흡족하게 웃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기무혁은 스승님에게 잘 배운 덕분이라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검마의 제자가 확실하군.” “예. 사고방식이 정상이 아닌 것까지 똑같습니다.” 사제 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필극과 노구천이 눈빛을 교환하며 속삭이듯 대화를 나눴다. “두 분.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검마가 힐긋 돌아보자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닐세.” “자네 제자가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했어.” * * * 라이센스 시험 중 술법진 내부에서 큰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팔대문파 장문인들이 곧바로 달려왔다. “내 이럴 줄 알았소이다!” “사고에 대비하라고 그토록 신신당부했건만!” “다음 팔대문파 회의에서 맹주 교체에 대한 안건을 올릴 것이오!” 태극검문, 일월문, 금영문. 현재 장문인이 국내에 부재하거나 당장 올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라이센스 시험을 주시하고 있던 세 장문인이 다시 무림맹을 찾았다. 다른 팔대문파도 장문 대리인들이 무림맹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세 장문인 중에서도 일월문주의 표정이 가장 좋지 않았다. 나직이 욕설을 내뱉는 얼굴에는 분노와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바로 양하윤이 살수들의 표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일월문의 최고수이자 막강한 권한을 지닌 대장로 빙하신녀의 제자. 그녀에게 처음으로 생긴 애제자에게 변고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문파가 한바탕 뒤집힐 것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이깟 쉬운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일월문주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무림맹주에게 쏟아낼 생각으로 누구보다 먼저 경공을 펼쳐 달려왔다. 그 뒤를 태극검문과 금영문의 장문인이 뒤따르고 있었다. “……엉망진창이 된 시험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물을 것이외다.” “누구보다 몇 년간 시험을 준비해온 후기지수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소. 대체 그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각 문파에서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운 제자들이었다. 엉망진창이 된 시험에 의해 날아가 버린 몇 년의 세월 때문에 일제히 크게 분노하고 실망해하고 있을 터. 어찌 문파의 장이자 무림의 어른이 되어 그들의 분노를 풀어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결코 이 일을 좌시하지 않으리라!’ 날 듯이 경공을 펼친 세 장문인이 무림맹에 도착해, 곧바로 대연무장까지 내달려 도착한 순간이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무림맹! 무림맹! 무림맹! 몇백 명의 후기지수들이 하나가 되어 승리를 축하하며 서로 얼싸안고 있었다. 대부분 몸에 크고 작은 상처 하나씩은 달고 있었지만, 마치 그 상처가 영광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안에는 팔대문파의 후기지수들도 함께 어울리는 중이었다. “이게 무슨……?” “살수들은 어디 있는가!” “너희들, 지금 뭣 하는 게냐?” 장문인들은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50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술법진이 해제된 후, 라이센스 시험은 전면 중지되었다. 무림맹주와 팔대문파의 장문인들,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 회의를 열었다. 다친 후기지수들은 전부 무림맹 내에 있는 병동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끄아악! 아프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옆에 걸레짝도 얌전히 있는데 겨우 어깨 좀 긁혔다고 엄살이야?” “엄사아알? 눈이 잘못된 거 아냐? 까딱했으면 이 몸이 외팔도객이 될 뻔했거든!” “……사람한테 걸레짝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지 않아?” 신강헌과 기무혁도 옆자리에 나란히 누워서 치료를 받았는데, 응급처치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복자가 병문안을 온 참이었다. ……둘의 눈에는 병문안이라기보다는 괴롭히러 온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김복자가 손가락으로 둘의 상처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가만히들 좀 있어 봐. 누나가 애정을 담아서 추궁과혈을 해줄 테니까.” “간호사 누나! 여기 환자의 안정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필요 없어, 필요 없다고…….” 제발 하지 말라는 둘의 부탁과 애원, 욕설을 한 귀로 흘리고, 김복자는 꿰매고 봉합한 상처들을 손가락으로 살살 누르거나 만져보며 상태를 살폈다. “……뭐, 흉은 크게 안 지겠네.” 뒷세계에서 일하다 보니 그녀도 크고 작은 상처를 볼 일이 많았는데, 한눈에 봐도 응급처치가 훌륭했다. 자상을 비롯한 내외상 치료는 한국에서 무림맹 병원이 최고라는 말도 있으니 상처가 덧나거나 후유증으로 고생할 일은 없을 듯했다. 내심 안도한 김복자가 팔짱을 끼고 본격적으로 둘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나댔어야지. 라이센스 시험이 뭐라고 목숨까지 걸고 살수들이랑 싸우고 지랄이니? 그러다 뒈지면 누가 알아주기나 한대? 하여간 서로 일등 하겠다고 난리 칠 때부터 이럴 것 같긴 했어. 특히 기무혁 너어는 진짜…….” 신강헌은 다치지 않은 어깨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고, 기무혁은 김복자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자 김복자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귀화가 피어올랐다. “이 새끼들이 누나 말에 집중 안 하지?” 당장에라도 괴이를 불러낼 듯한 모습에 두 사람이 급하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 듣고 있었다고! 악! 이거 왜 나한테만 오는데!” 꺄앗! 신강헌이 자신의 정수리를 쪼아대는 괴이를 멀쩡한 손으로 홱홱 쳐냈다. 기무혁은 자신의 차례가 오기 전에 화제도 돌릴 겸, 김복자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넌 어떻게 여기에 들어온 거야?” “……빨리도 물어보네. 선생님이 갑자기 전화로 술법사가 급하게 필요하다고 부탁하잖아. 그래서 눈곱도 못 떼고 달려왔지.” “스승님이?” 최건은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이 무림맹에 들이닥치기 전에 다시 모습을 감췄다. 악연으로 엮인 자들과 마주해서 좋을 것이 없다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아직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신 거겠지.’ 최건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계속 복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정체를 파악한 사람은 무림맹주 여필극와 노구천뿐이었다. 김복자는 최건의 부름을 받아 무림맹에 도착한 후에 벌어진 일을 말해주었다. “너희가 갇혀 있던 술법진을 당장 해체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뛰어난 술법사가 필요하다는 거야. 하지만 유능한 술법사를 당장 구하는 게 어디 쉬워?” 이 레드래빗 님이 아니었으면 너희들 거기에 한 시간은 더 갇혀 있었을걸? 결국은 자기 자랑으로 귀결되는 이야기에 두 사람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뭐, 덕분에 나도 수준 높은 술법진을 잔뜩 구경해서 나쁘진 않았지만.” 김복자는 꽤나 만족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너네, 신비전이라고 알아? 거기 술법사들이 나한테 제대로 술법을 배워볼 생각 없냐고 묻더라?” 콧대가 높아진 김복자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신비전(神秘殿). 무림맹과 협력관계인 술법사들의 조직으로, 그 규모는 폐쇄적인 성향을 띠는 술법사들의 조직 중에서 가장 크고 공신력 있는 집단이었다. ‘만박자도 거기 출신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신비전이라는 이름을 듣자 문득 만박자가 떠올랐다. -혹시라도 그곳에서 나를 만난다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족이나 잘 돌보라고 전해주게나. 죽음을 눈앞에 둔 자신을 과거로 회귀시킨 인물. 기무혁은 그의 부탁을 잊지 않고, 만박자의 사무실 주소를 알아내어 편지를 보냈었다. 당신이 연구 중인 ‘인공단전 연구’는 이미 성공한 사례가 있으니, 괜히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가족에게나 잘하라는 내용을 적어서. ‘1년 뒤에나 세상에 풀릴 자신의 연구 내용을 적어서 보냈으니, 경거망동하진 않겠지.’ 한편 김복자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신강헌이 좋은 기회 아니냐며 한번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술법사들이 무림인들보다 훨씬 더 폐쇄적이지 않나? 그럼 완전 좋은 기회 아냐?” “딱히……. 난 지금도 충분한 것 같은데. 그냥 명함만 받아놨어.” 시큰둥한 말투와 달리 김복자도 제법 고민이 되는 표정이었다. 외부인을 잘 들이지 않는 술법사들의 사회에서 신비전에 들어갈 기회를 잡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기무혁도 진지한 표정으로 조언했다. “이참에 뒷세계 생활도 청산하고 나오는 건 어때? 언제까지 위험한 동네에서 일할 순 없잖아.” “네가 무슨 내 아빠야? 그리고 위험한 짓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누군데?” 김복자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까귀에게 물어뜯게 하고 싶었지만, 까귀는 만만한 신강헌과는 달리 기무혁을 무서워해서 근처를 배회만 할 뿐 건드리지 못했다. 꺄앗……. “까귀는 또 커진 것 같다? 근데 왜 이렇게 비실대?” 기무혁이 빤히 바라보자 쫄아서 움츠러들었던 괴이는 괜히 화풀이하듯 신강헌한테 달려들어 정수리를 물어댔다. 콕콕콕! “아오! 왜 또 나한테 시빈데! 너 나중에 손에 잡히면 풍선에 넣어서 하늘로 날려버린다!” “또라이 넌 아직도 괴이가 눈에 안 보이냐?” “이제 대충은 보이기 시작하거든? 네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다 할 수 있다고!” “평소에 수련 좀 열심히 해라. 요즘 슬슬 대련할 때 지루하니까.” “너, 너 이 새끼, 병원에서 나가면 바로 한판 붙어!” 신강헌을 도발하는 기무혁과 거기에 반응해서 파르륵 열을 내는 신강헌. 김복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둘의 모습에 안심이 되면서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머릿속에 무공밖에 없는 멍청이들…….” 똑똑- 그때 병실 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세 사람의 대화가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허허. 괜찮을까 걱정하면서 왔는데, 저 멀리서부터 시끌시끌해서 한숨 놓이더구나.” “노 원로님?” 바로 무림맹 원로 노구천이었다. 기무혁과 안면이 있는 그가 직접 소식을 전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노구천의 얼굴은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지만, 다행히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기무혁은 시험이 중지된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 “회의는 어떻게 됐나요?” “아마 밤새도록 이어질 게다. 붙잡은 첩자들을 조사 중이니 조만간 성과가 있을 터. 그때부터가 진짜 중요한 내용이 나올 텐데…….” 노구천은 목소리를 살짝 낮추고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내가 아는 무림맹 최고의 취조 전문가가 나섰으니, 배후를 알아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게다.” 노구천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가 말한 무림맹 최고의 전문가는 바로 검마 최건이었다. ‘스승님이라면 믿을 수 있지.’ 최건은 지금 취조실에서 축골공으로 얼굴을 바꾼 채 살수들을 취조하고 있었는데, 팔대문파는 최건의 존재를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둘 다 많이 다쳤구나.” 기무혁과 신강헌의 부상을 살펴본 노구천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절도 있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림맹이 젊은 후기지수들에게 큰 빚을 졌구려. 맹주님을 대신해 감사를 전하며, 맹은 결코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노 원로님?” “불편하게 왜 이러세요!” 무림맹의 원로인 노고수가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깜짝 놀란 기무혁과 신강헌이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노구천은 두 사람을 제지하고 김복자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젊은 술법사에게도 진심으로 고맙네. 그대가 술법진을 진정시켜 준 덕분에 빠르게 양하윤과 기무혁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오.” “……보수는 신비전에서 충분할 만큼 주기로 했어요.” 뒷세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정중한 인사에, 김복자도 낯간지럽다는 듯 뺨을 긁적였다. 노구천이 그런 세 사람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다시 원래의 말투로 돌아온 그가 말했다. “너희 셋만 보아도 정파무림의 미래가 밝음을 알겠구나.” 라이센스 시험에서 큰 사고가 발생했지만, 세 사람을 비롯해 많은 후기지수들이 나서준 덕분에 천만다행으로 죽은 사람은 없었다. 물론 팔대문파는 지금이 기회라는 듯 맹주를 물어뜯고 있지만, 어떻게든 잘 무마할 수 있을 터였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르지.’ 결과적으로 무림맹을 침입한 살수들을 막아냈으며, 숨어 있던 첩자들도 색출했다. 그 배후를 잡아 확실하게 응징하고 무림맹의 힘이 건재함을 보여준다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떠오른 노구천이 조심스레 기무혁에게 물었다. “정말 외부에는 네가 요청한 대로 발표해도 괜찮겠느냐?” 노구천은 누가 뭐래도 이번 일의 일등공신은 기무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젊은 후기지수는 양하윤을 노린 살수들과 맞서 싸웠고, 혼자 도망칠 수 있음에도 끝까지 동료를 지켰으며, 흑백으로 변장한 살수들의 대장마저 쓰러뜨렸다. 그러나 기무혁은 그 모든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예. 오히려 그렇게 해주시는 게 저도 더 편할 것 같습니다.” 기무혁은 자신이 세운 공을 전부 양하윤이 한 것으로 처리해달라고 맹주에게 직접 부탁했다. ‘양하윤이 대부분의 살수들을 쓰러뜨렸고, 저는 곁에서 조금 돕기만 했습니다.’ 기무혁은 자초지종을 묻기 위해 찾아왔던 팔대문파의 무인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자존심이 드높은 팔대문파 무인들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하기야 직접 눈으로 본 나도 믿기 어려운 일이니…….’ 노구천은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이었어도 4급 체질에 불과한 후기지수가 1급 특수체질보다 더 큰 활약을 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 무림맹에서 진실을 아는 것은 맹주와 노구천. 그리고 기무혁과 직접 겨뤄본 후기지수들 일부만이 미심쩍어하는 정도였다. ‘실로 놀랍구나. 약관의 나이에 이만한 실력과 훌륭한 인성, 그리고 공명심에 초연한 태도마저 갖추었으니…….’ 제자 복이 없던 검마가 말년에 그 복을 한 번에 몰아서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금 세간의 이목을 끌어봤자 수련에 방해만 되니까.’ 기무혁은 자신의 진짜 실력이 드러나 귀찮은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 싫어서 그런 것이었지만, 노구천의 눈에는 참된 젊은 협객의 모습으로 보였다. “너는 아무런 보상도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내가 마음이 쓰이는구나. 혹시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느냐?” “으음…….” 기무혁이 잠시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이자, 오히려 애가 닳은 노구천이 다시 물었다. “괜찮으니 편히 말해보거라. 보상금이나 영약,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 맹주님께 직접 말씀드려주마.” 마음에 빚을 크게 가지고 있던 터라 노구천은 기무혁이 바라는 것이 있다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런 노구천의 마음을 파악한 기무혁은 오히려 상대방이 조바심 나도록 충분히 뜸을 들인 후에 입을 열었다. “그럼…… 짧게라도 좋으니 맹주님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전까지 무엇이라도 퍼줄 듯 굴던 노구천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어렸다. “으음? 맹주님께 말이냐?” 본래는 라이센스 시험 전체에서 성적으로 3등 안에 들어야 받을 수 있는 특혜. 형평성을 위해 당연히 거절해야 맞지만, 마음에 빚이 있으니 부탁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반응을 본 기무혁이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제가 실언을 한 것 같습니다. 일개 후기지수가 건방지게 맹주님을 뵙길 청하는 것조차 어불성설이겠지요. 못 들은 것으로 해주십시오.” “허허, 그렇다기보다는……. 꼭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만…….” 기무혁은 라이센스 시험에 참가한 가장 큰 목적을 잊지 않았다. 바로 무림맹에서 오행신공을 얻는 것.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라이센스 시험이 중지돼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어떻게든 오행신공은 받아낼 생각이었다. 51화. 약속 지켰다, 너도 지켜 기무혁은 계속해서 노구천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죄송하다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치켜 올라간 눈꼬리는 최대한 내렸다. 갑자기 안 하던 기침을 하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콜록! 사실 이번 라이센스 시험에서 3등 안에 꼭 들고 싶었거든요. 맹주님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얻고 싶어서……. 하지만 이렇게 다치는 바람에 시험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으니 기회가 날아간 것 같고…… 콜록!” 안 그래도 기무혁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노구천의 가슴을 쿡쿡 찌르는 이야기였다. 라이센스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못한 건 시험장에 잠입한 살수들 때문이고, 결국은 그것을 사전에 막지 못한 무림맹의 잘못이었으니까. “제가 무공 말고는 관심이 없어서……. 콜록! 조급한 마음에 무리한 부탁을 드렸습니다. 부담을 드렸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허어, 이것 참…….” 노구천 역시 무림맹에서 닳고 닳은 노고수였다. 자신이 오기 전까지는 멀쩡하던 기무혁이 갑자기 병자처럼 기침을 하는 것이 뻔한 연기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괘씸하지 않고 오히려 기꺼웠다. ‘무인으로서 더 높은 경지를 향한 열망에서 나온 부탁일 테니…… 도무지 얄밉지가 않구나.’ 한동안 고민하던 노구천이 한숨을 짧게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내가 책임지고 어떻게든 맹주님과의 자리를 마련해보마.” 자신에게 묻지도 않고 그런 약속을 했냐고 여필극에게 분명 한 소리 듣겠지만, 노구천은 이래야 맹주님도 양심의 가책 없이 가르침을 베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곧바로 기무혁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환자처럼 기어들어 가던 목소리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자 노구천이 껄껄 웃었다. “고얀 녀석. 역시 연기였구나!”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부상이 호전된 게 아닐까요?” “뭐라고? 하하하하!” 자기보다 훨씬 더 연배가 높은 노고수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신강헌과 김복자가 가증스럽다는 눈빛으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와, 뻔뻔한 자식…….’ ‘선생님도 그렇고, 얘는 아재나 할배들이랑 왜 이렇게 죽이 잘 맞는 거야?’ 특히 신강헌은 무림맹주에게 가르침을 받게 될 기무혁이 부러운지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기무혁이 받게 될 보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라이센스 시험장에 침입한 살수들은 후기지수들이 떼로 달라붙어야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이 미친놈은 그런 살수들을 상대로 혼자서 버텼다는 거잖아…….’ 기무혁은 볼수록 놀라운 녀석이었다. 무공 실력도, 지독하게 성실한 성격도, 한 번씩 보여주는 섬뜩한 눈빛과 차갑게 느껴질 정도의 침착함도. 신강헌이 평생 느껴본 적 없는 열등감을 느끼게 만드는 존재.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신강헌은 상대를 이기고 싶다는 호승심이 끓어올랐다. 신강헌이 조용히 자신을 노려보자 기무혁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왜 그렇게 째려봐?” “두고 봐라. 라이센스 시험 성적은 내가 훨씬 더 높을 테니까.” 보란 듯 코웃음을 친 신강헌이 고개를 돌려 노구천에게 물었다. “저희 시험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라이센스 시험이 도중에 중지되었지만, 그 직전까지 신강헌은 팀별 임무에서 선두를 다투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내심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험 결과를 알려줄 생각이었다.” 노구천이 애매하게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시험 중에 녹화된 영상을 판독해서 점수를 매겼다. 합격과 실격이 확실한 후기지수들에게는 결과를 통보하고, 판단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후기지수들은 추후에 재시험을 치르게 될 게야.” 지금 무림맹 관계자들이 병동을 돌아다니며 후기지수들에게 시험 결과를 전달하는 중이었다. “너희는 이번 시험에서…….” 그 말에 신강헌이 침을 꼴깍 삼키며 집중했다. 반면에 기무혁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좋은 성적을 기대하긴 어렵겠지. 재시험을 치르거나……. 부상이 제대로 낫지 않으면 다음 시험을 노리는 편이 나을지도.’ 시험 내내 선두권을 유지한 신강헌과 달리, 기무혁과 양하윤은 흑백의 함정에 빠져 첫 번째 임무조차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맹주와의 독대를 약속받았으니 크게 불만은 없었다. ‘거기다 생각지도 못한 소득도 있었으니까.’ 기무혁의 단전 안에는 극음지기가 여전히 꿈틀대고 있었다. 혹시라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 않을까 했지만,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자리를 잡은 느낌이었다. ‘맹주 정도의 고수라면 극음지기가 몸에 스며든 이유도 알고 있을까?’ 스승인 최건에게는 미처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오행적성자에 대해서 알려줄 때 별다른 말을 듣지 못했으니, 아는 사람이 극히 적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짐작할 뿐. 다만 오행신공을 익히면 극음지기도 제대로 다룰 수 있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앞으로 더 강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으니 시험 결과는 중요하지 않아.’ 아쉽겠지만 결과가 나빠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노구천이 그런 기무혁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장난스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축하한다. 둘 다 라이센스 시험을 통과해 이류 무인 자격을 획득했다.” “아싸아아!” “……?” 신강헌은 멀쩡한 팔을 높게 치켜들며 환호했고, 예상치 못한 결과에 기무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저도요? 하지만 시험 성적은 분명 최하위권이었을 텐데…….” “네가 맡은 임무. 난이도 조정에 문제가 있었더구나.” 알고 보니, 흑백으로 변장한 살수들이 기무혁과 양하윤을 뒤처지게 만들기 위해 난이도를 대폭 올려서 시험을 진행했었다고 한다. 심사관들은 두 사람이 오두막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영상만으로 평가했음에도, 모두가 입을 모아 다른 참가자들보다 몇 배는 진행이 어려웠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 부분이 평가에 참작되었다. 팔대문파 장문인들도 영상을 보고 동의한 결과이니 바뀔 일은 없을 게다.” 기무혁이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빡세더라니…….” “잘됐네! 집에 돌아가도 마음 편하게 밥 먹을 수 있겠다.” “뭐, 너만 떨어지면 나도 찝찝할 것 같긴 했으니까.” 김복자와 신강헌도 자기 일처럼 기쁜지 키득키득 웃었다. 맥없이 웃은 기무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탈락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역시 탈락보다는 합격이 기분이 좋았다. “그럼 나는 다시 회의에 참석하러 가봐야겠구나.” 자리를 털고 일어난 노구천이 두 사람에게 몸조리 잘하라고 당부하며, 한 번 더 고마움을 전했다. “너희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악인들과 싸워 결국 동료들을 지켜냈다. 나는 그것이 정파무림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단다. 부디 오랫동안 오늘 일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거라.” “…….” 그 말을 들으며 기무혁은 가슴이 조금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과거 낭인으로 살던 시절에도 그는 악인들을 용서하지 않았고, 동료들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뒷세계의 낭인들에겐 언제나 돈을 받고 움직인다는 꼬리표가 따라붙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정파가 되길 잘했어.” “뭔 미친 소리야?” 가만히 듣고 있던 김복자가 기무혁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기무혁이 뒷세계에서 영입 제안을 받은 걸 알고 있었기에, 노구천 앞에서 입을 조심하라는 경고의 의미였다. “하하하! 괜찮다! 나도 무혁이 네가 정파를 택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다행히 노구천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검마의 제자가 아닌가? 사상이 남들보다 조금 더 자유롭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대략 한 달 후. 중지된 일류 라이센스 시험과 절정고수 시험이 함께 치러질 게다. 그리고 마지막엔 다 같이 경쟁해서 최종 성적이 가려질 텐데…… 내 너희를 주시하고 있으마.” 이 눈부신 재능들이 다음에 볼 때는 또 얼마나 성장해 있을까? 노구천은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지금도 벌써부터 기무혁과 신강헌이 이렇게 눈을 빛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절정고수들과 경쟁? 그거…… 너무 좋은데요?” “한 달이라고 하셨죠? 야, 미친놈! 퇴원하면 바로 특훈이다!” “멍청이들아, 다 나을 때까진 무기 쥘 생각도 하지 마!” 그리고 그때, 기무혁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물었다. “아, 혹시 양하윤은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 * * 양하윤은 쓰러진 지 사흘 만에 의식을 차렸다. “안 돼……!” 지독한 악몽이라도 꾼 듯 바르르 떤 그녀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온몸이 땀범벅이었고, 천근만근 몸이 무거웠으며, 가만히 있는데도 숨이 가빴다. “하윤아! 하윤아! 정신이 드느냐?” 잠시 후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양하윤은 천천히 초점이 잡히는 시야 사이로 새하얀 머리카락과 갸름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스승님?” “그래! 스승님 여기 있다. 아이고 내 새끼……. 이제 겨우 정신을 차렸구나.”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빙하신녀가 제자를 끌어안았다. 양하윤은 극음지기를 완전히 소진하고 하마터면 진원까지 손상당할 뻔했다. 다행히 무림맹의 응급처치와 늦지 않게 도착한 빙하신녀 덕분에, 큰 후유증은 남지 않을 수 있었다. 노심초사 제자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던 빙하신녀가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부모님께는 연락을 드렸으니 곧 오실 게다. 지금 어디 아픈 데는 없고?” “괜찮아요……. 헤헤. 스승님. 조금만 더 안아주세요.” “아무렴. 오늘은 어떤 응석이라도 받아주마.” 양하윤은 체질이 발현한 이후로 멀어진 부모님보다 빙하신녀를 더욱 부모처럼 따랐다. 마찬가지로 자식이 없는 빙하신녀도 양하윤을 딸처럼 아꼈다. 일월문의 대장로이자 최고수. 문파 내에서는 장문인과 비견되는 영향력을 가진 철혈의 무인이었으나, 제자 앞에서는 팔불출인 스승이었다. “제가 사흘이나 자고 있었다고요?” “그래. 내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느냐?” 두 사람은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퍼뜩 한 사람에게 생각이 미친 양하윤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무혁! 기무혁은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너랑 같이 살수들에게 공격당했던 아이 말이냐? 걱정하지 말거라. 부상을 잘 치료했는지 곧 퇴원할 거라고 하더구나.” 빙하신녀는 제자가 기특한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성정이 착한 아이였다. 본인이 이렇게 다쳐 누워 있는데도 함께했던 동료부터 떠올리지 않는가? 그러나 빙하신녀는 이어지는 제자와의 대화에서 조금씩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절 구하러 돌아온 탓에 많이 다쳤을 거예요……. 상처도 엄청 많이 입었고, 극음지기에도…….” 양하윤은 말하다가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기무혁이 흑백13과 싸우기 전에 극음지기를 체외로 밀어내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체질을 속였잖아!’ 은인이지만 괘씸했다. 하지만 자신을 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줘서 고마웠고, 얄미웠고, 너무나도 미안했다. 기무혁을 떠올리자 온갖 복잡한 마음과 감정이 뒤섞여 뭐가 뭔지 모르게 혼란스러웠다. “그 아이에게는 일월문에서 아주 크게 사례할 것이다. 원한다면 사문에 들여서 무공을 가르쳐 줄 의향도 있단다.” “네…….” 하지만 기무혁이 일월문에 들어오는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병문안을 왔었는데.” “네? 기무혁이 왔었어요? 그걸 왜 이제 말해주세요!” 제자의 반응에 빙하신녀가 움찔했다. 이게 늦게 말해줬다고 화를 낼 만한 일인가? “미, 미안하구나. 하여간 희한한 걸 하나 두고 갔는데…….” “뭔데요?” 빙하신녀는 방 한쪽에 있는 냉장고의 냉동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 정체를 확인한 양하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아…….” 흑백에게 첫 임무로 받았던 계란이 멀쩡한 모습으로 그곳에 있었다. 다만 한 가지가 달라져 있었다. 기무혁이 계란 위에 옛날사람들이나 쓰는 이모티콘을 그려놓고, 그 밑에 메시지를 적어 둔 것이다. (^-^)/ 약속 지켰다, 너도 지켜 양하윤은 저도 모르게 계란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약속? 무슨 약속?’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 급박한 상황에서 주고받았을 만한 말들은 분명 평범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뭐지? 무슨 약속을 한 거지?’ 이곳에서 탈출한 이후에 다시 보자는 약속이었나? 미래에 대한 약속이었을까? 혹시 그것도 아니면…….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 양하윤의 귀가 천천히 빨개지고 뺨에 홍조가 들었다. “바보 자식……. 말을 해줘야 알지…….” 양하윤은 한참이나 계란을 두 손에 소중하게 꼭 쥐고 있었다. ‘이걸 어쩌나…….’ 그리고 빙하신녀는 어린 제자를 바라보며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52화. 천금보다 귀한 기무혁의 몸 상태를 살핀 의사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다. “무림인의 회복력이 범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지만…… 기무혁 씨는 제가 본 사람들 중에서도 연구 대상감입니다.” 아무리 일월문에서 보내온 최상급 내외상약과 영약까지 치료에 사용했다지만, 처음 실려 왔을 때 모습을 생각하면 적어도 일주일은 누워만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무혁은 불과 사흘 만에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회복하더니, 집에서 통원할 수 있는 병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앞으로 하루이틀이면 다 나을 것 같은데.’ 전신의 거미줄 같았던 상처들이 눈에 띌 정도로 아물었고, 내상도 상당 부분 호전되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 괴물 같은 회복력에 놀라면서도 신신당부했다. “괜찮은 것 같다고 빼먹지 말고 꼭 병원에 다니세요. 그리고 훈련 및 운동, 특히 내공 수련은 한동안 절대로 금지입니다.” “다리 쪽 상처는 거의 다 나은 것 같은데, 하체 운동은 해도 되나요?” “절대 안 됩니다!” “간단한 러닝은…….” “보호자분께 전화해서 말씀드리는 편이 낫겠네요.” “…….” “그렇게 실망한 표정으로 쳐다보셔도 안 됩니다. 절대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환자님? 제 말 듣고 계시죠?” 그렇게 잔소리를 잔뜩 들으며 퇴원 수속을 밟았지만, 기무혁은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간단한 맨몸 운동 정도는 괜찮겠지.’ 푸시업이나 턱걸이, 상태를 봐서 머슬업이나 플란체 같은 가볍게 몸을 푸는 운동은 해도 되지 않을까? 기무혁은 집에 가서 오랜만에 운동을 할 생각에 한껏 설렜지만, 바로 그날 최건에게 걸려서 쥐어박히고 수련을 금지당했다. “네놈이 나이 먹고 골병들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그냥 재활 삼아서 가볍게만 하려고 한 건데…….” “어림도 없는 소릴. 무림인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하루라도 수련을 쉬면 좀이 쑤셔서 못 견뎌 하다가 몸이 작살 나는 걸 내가 모르겠느냐? 흰소리하지 말고 얌전히 누워나 있거라!” 최건은 경고를 말로만 끝내지 않았다. 기무혁의 연습용 가검을 전부 압수하고, 방에 몇 가지 있는 운동기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청테이프로 칭칭 감아버렸다. “……스승님.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이러다 몸이 굳으면 어떡해요? 엄마 아빠도 보고만 있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줘요!” 처음으로 스승에게 반항심이 든 기무혁이었다. 그러나 최건은 까불지 말라며 콧방귀를 뀌었고, 항상 자식을 믿어주던 부모님도 이럴 때는 아들 편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계시니 이런 게 좋네요. 이노무 자식 더 많이 혼내주십시오!” “순순히 선생님 말 들어. 그동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수련해서 좋았지? 전문가들이 하지 말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세 사람이 나란히 서서 팔짱을 끼고 째려보는데, 기무혁은 처음으로 집에서 혼자가 된 기분을 느꼈다. 입이 삐죽 튀어나온 기무혁이 툴툴거렸다. “대체 언제부터 세 분이 이렇게 합이 잘 맞으셨어요?” “몰랐냐? 이제 너 없어도 우리끼리 잘 놀거든!” 결국 기무혁은 스승님과 부모님의 서슬 퍼런 감시 아래에서 며칠간 더 요양을 했고, 병원에서 재활을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후에야 간단한 수련을 시작할 수 있었다. 기찬호는 아들이 완치 판정을 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축하 파티를 추진했다. “조금 늦었지만 라이센스 취득 축하 파티는 해야지!” “일류 라이센스 시험이 아직 남았는데요?” “그거야 다음에 또 하면 되지. 이번엔 정식 무림인이 된 기념으로, 다음에는 일류 무인 승급 축하 기념으로.” 평소에는 팔불출 남편을 말리는 편인 박지연도 라이센스 취득 기념 축하파티는 꼭 해야 한다고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기무혁이 어렸을 때부터 온 가족이 이날을 기다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들이 갑자기 다쳐서 무림맹에 입원한 탓에, 미리 사뒀던 축하 케이크를 집에서 둘이서 먹었었다. “강헌이랑 복자도 오라고 해야지?” “당신은 왜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해?” “이제 아들한테는 물어보지도 않네요?” 그리고 며칠 후, 기무혁의 집에서 무림인 라이센스 획득 기념 축하 파티가 열렸다. “아저씨, 아줌마! 선물로 비싼 위스키 사 왔어요!” “세상에! 우리 복자가 이름처럼 복덩이라니까!” “전 백화점 한우선물세트로 사 왔는데.” “으하하, 오늘 강헌이 덕분에 포식하겠구나!” 당연하다는 듯 김복자가 파티에 참여했고, 신강헌도 깁스를 푼 모습으로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무혁이와 강헌이의 이류 무인 라이센스 취득을 축하하며!” 짠-!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시간이었다. 처음 기무혁의 집에 왔을 땐 어색해하던 김복자는 이제는 거의 음식을 흡입하는 지경이었고, 신강헌은 라이센스 시험에서 자신의 활약상을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근데 기무혁이 너무 안 보여서 이렇게 생각했다니까요? 이 자식, 팀원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두들겨 패서 실격당한 거 아냐……?” “내가 너 같은 줄 아냐?” “아주마아…… 이거 진짜 마시써요…….” 둘은 쉴 새 없이 아웅다웅하며 다투고, 한쪽에선 그걸 신경도 쓰지 않고 볼에 음식을 가득 넣고 맛있다며 감동하는 모습이 마치 삼남매를 보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박지연이 신강헌에게 물었다. “근데 강헌이 넌 마음을 정했니? 들어가고 싶은 문파가 있어?” 신강헌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삼촌은 팔대문파 중에 조건이 좋은 곳으로 골라 가자는데,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직은 일류 라이센스 시험이 남아 있다지만, 진지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고민해야 할 시기였다. 그러나 신강헌은 별로 고민해보지 않았다며 씩 웃었다. “딱히 들어가고 싶은 데도 없어서요. 그냥 삼촌이 가자는 대로 갈까 봐요.” “…….” 부모님이 돌아가신 신강헌에겐 삼촌이 유일한 가족이라는 것을 다들 알기에, 다들 신준현을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네 스스로 결정할 일이니 가타부타 잔소리할 생각은 없다만…….” 그때 평소에는 이런 대화에 끼지 않는 최건도 웃으며 슬쩍 말을 보탰다. “하나는 알아두거라. 강헌이 네 부친은 훌륭한 도객이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신강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희 아버지를 아세요?” “신재현. 무림맹 백호단의 부단주를 지내지 않았더냐?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만, 오가며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나눴었지.” “그걸 왜 이제 알려줘요!” “이 녀석아. 언제 나한테 물어보기나 했느냐?” 최건이 껄껄 웃으며 되물었다. 그가 약간의 취기에 평소보다 부드러워진 눈으로 신강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재능은 아들이 더 나은 듯한데……. 그 건실했던 신재현의 아들이 이런 망아지 같은 녀석이라니. 처음에는 이름을 듣고도 긴가민가했었지.” 평소에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거의 꺼내지 않는 최건이었다. 처음으로 그가 사람들 앞에서 무림맹 시절에 있었던 일을 언급했다. 그만큼 여기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섞여들어, 한 식구가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선생님! 우리 아버지 얘기 조금만 더 해주시면 안 돼요?” “나도 별로 아는 것이 없다만……. 흐음. 백호단에 대해선 좀 아느냐?” “저 그런 거 하나도 몰라요.” 한동안 최건의 입에서 무림맹의 여러 조직들이 하는 일, 약자들을 위해 어떤 일을 했고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얼마나 희생을 치렀는지 등의 옛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 자식, 무림맹에 관심이 생겼나 본데?’ 그 시간 동안 신강헌의 눈은 기무혁이 전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백호단…….” 그렇게 중얼거리다 갈증이 났는지 슬쩍 손을 뻗어서 술병을 가져오려고 했지만. 짜악! 짜악! 기무혁과 김복자가 양쪽에서 신강헌의 등짝을 힘껏 때렸다. “악! 나도 성인이라고! 술 좀 마실 수도 있는 거 아냐?” “뭐래? 막내 주제에 음주를?” “기껏 만들어 놓은 몸, 술로 망치려고?” 눈물이 찔끔한 신강헌이 잔소리하는 둘을 째려보더니, 입을 삐죽 내밀고 손을 옆으로 뻗어서 탄산음료를 마셨다. “쳇. 아주 내가 동네북이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두 사람의 말을 듣는 모습에, 기찬호와 박지연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늦은 밤까지 많은 대화가 이어졌다.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 또 이야기 들려주세요!” 김복자와 신강헌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자 집 안이 급격히 조용해졌다. “두 사람이 갔다고 갑자기 집이 휑해 보이네.” “쟤들이 존재감이 워낙 커야지.” “반찬이나 조금 더 싸줄 걸 그랬나?” “됐어. 혼자 사는 애들이 얼마나 먹는다고. 조금씩 자주 주는 게 나아.” 기찬호와 박지연은 아들과 또래인 신강헌과 김복자를 자식처럼 아꼈다. 공교롭게도 둘 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기에 더 살갑게 대하려고 애썼다. 둘에게도 그 마음이 전해진 것인지, 요즘에는 신강헌과 김복자가 종종 먼저 찾아오기도 했다. 김복자의 경우에는 지난번에 왔을 때, 레래라는 별명이 아닌 복자라고 불러달라고 먼저 말하기도 했었다. 정작 이 집 아들은 자신보다 친구들을 더 챙기는 부모님의 모습에 황당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어쩌다 우리 집이 쟤들 아지트가 된 거예요?” “난 좋은데? 둘 다 심성이 착하고 요즘 애들 같지 않게 순수하잖니.” “나도 좋다. 우리 아들처럼 붙임성 없는 애랑 친구해 줄 애들이 흔해?” “붙임성 없는 아들이라 죄송하네요…….” 작게 투덜거리던 기무혁도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전생의 자신이 원하던 삶이 바로 이런 것이었으니까. 그때 최건이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나는 한잔 더 하고 싶은데. 늙은이가 계속 있으면 민폐려나?” “애들 갔으니까 술자리는 이제부터 시작이죠!” “인삼주 꺼내 올까요?” 기찬호와 박지연, 최건이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고, 기무혁은 콜라를 따라 마시며 느긋한 시간을 보낼 때였다. “음?” 세 사람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최건의 눈썹이 꿈틀대더니, 그가 고개를 돌려 기무혁을 바라봤다. “무혁아. 피곤할 테니 너는 이만 방에 들어가서 쉬거라.” “예? 저 별로 안 피곤한데요.” 기무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승을 바라봤다. 퇴원 후에 매일 먹고 자는 것이 일상인 데다 훈련도 하지 않아서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러자 최건이 억지로 제자의 등을 떠밀다시피 했다. “어허. 어른들끼리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눈치껏 빠지란 뜻이다.” “……?” 당황스럽긴 했지만 기무혁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선 순간, 아무런 기척도 없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존재를 보고 얼어붙었다. “쉿.” 기무혁이 반응하려 하자 순식간에 접근한 상대가 기무혁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반응이 좋구나.” 부드럽게 휜 눈매가 기무혁의 손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검결지가 그를 찌르려고 들었을 터였다. “……맹주님?” 비로소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기무혁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몸에서 힘을 풀었다. 권왕 여필극. 정파무림의 맹주가 자신의 방 안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조용히 빠져나오는 것이 쉽지 않아서 말이다. 혼란스러운 시기라 망정이지, 평소였다면 벌써 누군가에게 들켰겠지.” 장난꾸러기처럼 웃은 맹주가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문을 닫고 들어온 기무혁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저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오신 겁니까?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시면 제가 가면 될 텐데…….” “비밀을 지키기엔 이편이 나을 것 같았다. 허나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구나.” 여필극은 품에서 낡은 서책을 하나 꺼냈다. 책장에 오행신공(五行神功)이라는 글씨가 일필휘지로 적힌 것을 본 기무혁이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그건……!” “그 친구에게 네가 오행적성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더구나.” 지난 며칠, 최건은 무림맹에서 살수들을 심문해 배후를 캐내는 일을 맡았다. 그 과정에서 맹주에게 자신의 제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고, 여필극은 기무혁이 자신에게 독대를 요청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진본이니라. 어차피 익힐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사라져도 찾을 사람이 없으니, 네게 장기간 대여해 줄 수 있을 것 같구나.” 기무혁에겐 천금보다 귀한 선물을 건넨 무림맹주가 눈을 찡긋했다. 53화. 금생수(金生水)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기무혁은 손안에 들어온 오행신공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토록 쉽게 얻을 수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주를 직접 만나면 어떻게 설득할지, 자신이 가진 미래의 지식과 정보를 이용해 거래를 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과연 정파무림의 대선배는 다르구나.’ 아무런 조건도 없이 선뜻 오행신공을, 그것도 진본을 내어준 무림맹주의 큰 그릇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썩 기쁘지 않은 표정이구나? 소리라도 지를까 싶어 기막까지 미리 둘러쳤건만.” “굉장히 기쁩니다. 지금의 저에게 가장 필요하던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무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신공절학을 바라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기무혁이 지난 생에서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무공의 수준이 꼭 무인의 강함으로 연결되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낭인들이 더 강한 무공과 영약을 찾아 불나방처럼 몰려다닐 때, 기무혁은 자신이 가진 것을 끊임없이 갈고닦는 데 집중했다. 결국 살아남아서 강함을 증명한 것은 자신이었다. “……이 신공에 걸맞은 노력을 해야 그만한 강함을 얻을 수 있겠죠.” 허세로 보이지 않는 담담한 대답에 여필극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좋은 태도다. 신공절학을 익힌다고 누구나 고수가 될 순 없지. 다만 너처럼 자질과 노력을 갖춘 이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는 있단다.” 그렇게 말한 여필극이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말했다. “앉아보거라. 네 체질을 한번 직접 살펴봐야 뭐라도 조언을 해줄 수 있을 터이니.” “예?” 기무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필극을 바라봤다. 체질을 확인해 보겠다는 말보다, 바로 돌아갈 줄 알았던 여필극이 느긋한 태도로 눌러앉았기 때문이었다. “맹주님. 조금 전에 시간이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줄 것이 많으니 부족하다고 한 게다. 설마 내가 딸랑 비급만 넘겨주고 그냥 갈 줄 알았더냐?” “역시 은혜로운 정파…….” 감탄한 기무혁은 순순히 여필극과 마주 앉아 손목을 내밀었다.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동문 간에도 함부로 맥문을 맡기지 않는 법이지만, 상대는 무림맹주였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내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고수다. 괜히 뻗댈 이유가 없지.’ 잠시 후, 기무혁의 맥문을 잡아 신중하게 살펴보던 맹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요 녀석. 짐작은 했다만 체질을 속였구나.” “……죄송합니다. 특이체질인 것이 들키면 주변이 시끄러워져서 수련에도 방해되고, 가족들에게도 피해가 갈까 걱정이 돼 수치를 속이는 시술을 받았습니다.” 기무혁은 최대한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상대는 무림맹주였다. 어설픈 거짓말에 속을 만큼 어수룩한 인물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필극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한 짓은 아니다만, 너와 같은 아이들이 언론과 문파에 얼마나 시달리는지 알고 있으니…… 벌하지는 않으마. 다만 추후에 제대로 정정해야 할 것이다.” “혹시 절정고수가 된 다음에 정정해도 될까요?” “뭐라고? 하하하하!” 자신이 절정고수가 될 거라고 확신하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여필극은 웃음을 터트렸다. 무림맹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여필극은 기무혁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무림맹이 이 아이에게 큰 도움을 받았지.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도…….’ 기무혁이 아니었다면 무림맹은 살수의 침입에 대응조차 못 하고 이미 벌어진 일을 지켜봐야만 했을 터였다. 그리고 자신은 무능한 맹주로 기록되어 불명예스럽게 퇴진하게 되었으리라. 그러니 체질을 속인 정도의 잘못이야 충분히 눈감아 줄 수 있었다. “네 말인즉 절정고수가 되면 주변에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이렷다? 좋다. 그렇게 해라.” “감사합니다.” “자, 이제 비급을 한번 살펴보거라.” 여필극은 오행신공의 책장을 바로 넘기지 않고 제목부터 천천히 세심하게 살피는 기무혁의 모습에 작게 감탄하며 물었다. “오행신공의 사본을 만들어서 건네줄 수도 있었다만, 굳이 진본을 가져다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무공을 창안하신 분의 의도, 그리고 아주 사소한 버릇까지 파악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묻자마자 바로 나오는 정답에 여필극이 혀를 찼다. “가르치는 재미가 없는 제자라더니. 검마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구나.” 무공의 창안자가 무의식적으로 원본에 찍은 점 하나, 손때, 구절 사이에 남은 흐릿한 얼룩조차도 후학들에겐 중요한 깨달음의 단초가 될 수 있었다. 원본을 건넨 것은 그중에 하나라도 놓치지 말라는 의도이자 배려였다. ‘검마가 괜히 호언장담한 게 아니었군.’ 여필극은 기무혁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느꼈다. 라이센스 시험을 치를 때 보았던 과감한 손속과 훌륭한 근골. 그리고 오늘 자신이 직접 확인한 우수한 체질과 뛰어난 오성. ‘머지않아 자신을 능가하는 무인이 될 거라더니…….’ 최건이 제자 바보여서 괜한 주책을 떤 것이 아니었다. 여필극이 봐도 기무혁은 무인으로서 갖춰야 할 자질을 고루 갖춘 후기지수였다. 하지만 세계로 나가면 도처에 널린 것이 기무혁만큼 뛰어난 조건을 갖춘 무인들이었다. “네 목표가 세계제일 비무대회에 나가 리차드 한을 꺾는 것이라고 들었다. 진심이더냐?” 그렇게 묻는 맹주의 입가에 짓궂은, 동시에 조금은 씁쓸하게 보이는 미소가 떠올랐다. 오행신공에서 천천히 시선을 뗀 기무혁이 맹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제 꿈은 세계제일 비무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입니다.” 기무혁은 그 연배에 어울리지 않는, 스스로의 실력을 잘 파악하고 있는 냉정한 무인의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결코 그 말이 오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목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루어 낼 눈빛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멋진 꿈이구나.” 그 단단한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으려니, 여필극도 가슴이 뜨거웠던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게 될 정도로 말이다. “과거에 이 늙은이도 세계제일 비무대회에 참가했던 적이 있었다.” 무림맹주 여필극은 지금도 대단한 무인이지만, 세계제일 비무대회에 참가할 당시에는 한국제일고수를 언급할 때 항상 첫 손에 꼽히던 인물이었다. ‘지금이야 인상 좋은 노인처럼 보이지만, 과거에는 국제기구에서 고위험 무림인으로 분류돼 흑비환(黑臂環)을 착용했던 인물이기도 하지.’ 여필극은 사십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룬 육체와 내공의 조화, 그리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쌓은 경험으로 천하(天下)를 평정하겠다며 비무대회에 참가했었다. 기무혁은 그 결과도 알고 있었다. 리차드 한 이전, 한국계 무인이 낸 최고의 성적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세계비무대회에서 8강까지 올라가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허허. 그리고 유럽의 검왕이라 불리던 무인을 만나 탈락했지.” 여필극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비무대회의 벽은 그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높았다. 마지막 경기에서 당한 부상으로 몇 년간 회복과 재활에 매진해야 했을 정도로. 이후 국내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집중하며 무림맹주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돌아보면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부상을 회복하고 한 번 더 세계무대에 도전했었다면…….’ 결과와 상관없이, 무인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그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았을 터인데. 눈앞의 후기지수는 자신처럼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며, 여필극은 진심으로 기무혁을 응원했다. “세계비무대회 결승에서 너와 리차드 한이 맞붙는 날을 기대하고 있으마.” “맹주님께서 오행신공을 주셨으니 그날이 훨씬 빨라질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가능하면 이 늙은이가 맹주직에서 물러나기 전에 붙어다오!”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어젖히던 여필극이 금세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지난 백 년간 공식적으로 오행적성자가 나타난 적은 없었다. 그러니 누구도 함부로 이 무공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간 무공학자들이 오행신공의 비급에 대해서 연구하고 해석한 주석이 있었지만, 여필극은 그것을 가져오지 않았다. 자칫 잘못된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고, 기무혁이 스스로 고민해서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다만, 모두가 입을 모아 동의하는 부분이 한 가지 있다. 오행신공을 익히고자 하는 이에게는 오행의 모든 기운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내 너에게 마지막으로 선물을 주마.” “지금까지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스스스스스. 가부좌를 틀고 앉은 맹주의 몸에서 은은한 황금빛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기무혁은 말문이 막혔다. “돌아서 내게 등을 보이고 앉거라. 너에게 오행 중 순수한 금(金)의 기운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금오유성권(金猿流星拳). 무림맹주 여필극의 성명절기 이름이었다. 수십 년 넘게 여필극이 쌓아온 내공에는 정순한 금기(金氣)가 가득했다. 그중 일부를 기무혁에게 나눠줄 생각이었다. ‘검마 그 친구에게 빚진 것을 이렇게 갚게 될 줄은 몰랐군.’ 오행신공을 준 것이 무림맹주로서 이번 일에 대한 보답을 치른 것이라면, 내공을 나누어 주는 것은 과거 검마에게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자 함이었다. “……설마 맹주님의 내공을 제게 주시겠다는 겁니까?” “어차피 나이가 들면 쓸데없이 내공만 넘쳐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누가 다 퍼준다더냐? 맛보기나 하라고 조금만 줄 게야.”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하지만, 일평생 쌓아온 내공을 일부나마 타인에게 넘겨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기무혁은 잘 알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공손하게 포권을 취한 후 돌아앉았다. “천재일우의 기회이니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쓸데없이 실랑이 안 해서 좋구나.” 픽 웃은 여필극이 두 손을 뻗어 기무혁의 등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리고 자신의 내공 중 일부를 기무혁의 단전으로 인도했다. 수십 년간 쌓은 내공의 일 할에 가까운 양이었다. 그 일 할로 기무혁은 단숨에 후기지수들 중에서 상위권으로 뽑힐 만한 내공을 가지게 되었다. ‘이만하면 되겠지. 이제…….’ 그러나 금의 기운이 기무혁의 단전에 안착한 순간, 여필극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콰콰콰콰콰콰! 기무혁의 단전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극음지기가 새롭게 들어온 금기와 맞닿아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금생수(金生水). 오행의 상성 관계에 따라 금기(金氣)가 수기(水氣)를 북돋웠다. 몸속에 굳어 있던 극음지기가 부드러운 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하면서 몸 내부에서 기운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금기는 수기가 지나가는 방향을 잡아주면서 더욱 단단해지고, 그 사이로 물이 강하게 흐르면서 수의 기운 또한 점점 더 커져갔다. “……!” 기무혁은 몸 안에 차오르는 두 가지 기운에 말로 설명하지 못할 만큼 큰 충만감을 느꼈다. 몸이 격정으로 파르르 떨려왔다. “허허…….” 조금 초췌해진 얼굴의 여필극이 기무혁의 등에서 손을 떼고, 그 놀라운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기무혁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치솟았고, 황금빛 기운과 푸른 기운이 번갈아 나타나며 그의 몸을 휘감았다. “놀랍구나, 놀라워…….” 다만 아직은 물과 기름처럼 각자의 색을 주장하기만 할 뿐, 완벽하게 섞여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맹주님!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기막 밖으로 갑자기 강렬한 기가 새어나오는데…….] 그때 여필극의 귀에 당황한 목소리의 검마의 전음이 꽂혀 들었다. 여필극은 문밖에 있는 검마에게 전음을 보냈다. [나중에 직접 확인하게나. 자네, 말년에 말도 안 되는 녀석을 제자로 들였구만.] [자세히 좀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 [배 아파서 안 되겠네.] 두 가지 색상의 기운이 기무혁의 몸 안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모습을 확인한 여필극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무혁은 아직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 몸 안에서 날뛰는 기운을 다스리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터였다. “그럼 다음 시험 때 보자꾸나.” 부드럽게 미소 지은 여필극은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기무혁을 바라본 후, 찾아왔을 때처럼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다음에 볼 때는 기무혁이 또 얼마나 변해 있을지, 한동안은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것 같았다. 54화. 그래서 말인데 창밖으로 휘황찬란한 도시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주변에서 가장 높은 빌딩의 꼭대기 층. 이곳의 주인은 고요함 속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등 뒤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지기 전까지 그는 미동도 않고 도시를 바라봤다. “주군.” 창밖을 바라보던 인물이 몸을 돌려 자신 앞에 부복해 있는 흑의인을 바라봤다. “갔던 일은?” “뇌옥에 있던 위험요소는 전부 제거했습니다. 더 이상 정보가 새어 나갈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부복해 있는 흑의인의 몸에서 피 냄새가 풍겼다. 그 농도가 평소보다 훨씬 짙었기에, 방의 주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자네, 다쳤군.” “……위험요소들을 제거하던 중 예상치 못한 고수와 조우했습니다만, 떨쳐내고 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죽인 것이 아니라 떨쳐냈다?” “제 실력으로 죽일 수 없는 고수였습니다.” “…….” 흑의인은 덤덤하게 사실을 인정했으나, 그의 주인은 무척이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림맹 뇌옥에 갇힌 살수들을 정리하라고 보낸 인물은 수하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자였기 때문이었다. 웬만한 절정고수조차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일 수 있는 암살자. 헌데 무림맹의 뇌옥에 그가 감당하지 못할 고수가 대기하고 있었다? “맹주 그 늙은이……. 숨겨진 수가 한둘이 아니었군.” 무림맹주를 경계하면서도 깔보는 언행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그때 그의 앞에 부복한 흑의인이 고개를 들어 주인에게 말했다. “주군. 감히 속하가 의견을 전해 올려도 되겠습니까?” 주인이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흑의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팔대문파 중 일부가 맹주에게 붙은 것은 아닐지요.” “……근거가 있는 의심이더냐?” “없습니다. 하지만 밖에서 볼 때는 성벽처럼 견고해 보이는 팔대문파의 동맹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내부에서는 다들 느끼고 있습니다.” 입을 함부로 놀린 것에 처벌을 각오했다는 듯, 할 말을 마친 흑의인은 고개를 더욱 깊게 숙였다. 그러나 그의 주군은 수하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성벽에 금이 갈 만도 하지. 모두가 최고가 되기를 원하는데, 비좁은 자리에 여덟이 함께 앉아있으니 말이야.” “그중 누군가가 무림맹주와 손을 잡았다면 저희의 계획이 유출된 것도 설명됩니다. 아시다시피 무림맹의 정보망은 저희의 눈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까드득 이를 간 주인이 흑의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맹주의 주변을 감시하며 다른 팔대문파가 개입한 흔적을 찾아내도록.” 만약 확실한 증거가 발견된다면, 앞으로 팔대문파는 지금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내 계획을 눈치채고 맹주에게 알린 자가 있다면…….’ 그게 누군들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주군의 눈에서 일렁이는 살기를 본 흑의인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존명.” 팔대문파가 오랜 시간 견고하게 유지해온 동맹에 균열이 가는 순간이었다. 그간 조금씩 쌓여온 서로에 대한 불만과 의심이, 이번 라이센스 시험에서 벌어진 사건을 통해 점화되었다. “더 보고할 내용은?” “저희의 계획을 망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후기지수에 대해 조사를 마쳤습니다.” “……시험장에서 양하윤과 한 팀이었던 놈 말인가? 기무혁이라는 이름이었지.” “맞습니다.” 흑의인의 입에서 기무혁에 대한 여러 정보들과 세간의 평가, 팔대문파 중 창천검문이 기무혁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흘러나왔다. 보고를 마친 흑의인이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제거할까요?” 잠시 말이 없던 주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같은 시기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일단 주시하다가 천천히 접촉해 보고…….” 잠시 말을 끈 그가 차갑게 웃으며 수하에게 지시를 내렸다. “재능은 제법 뛰어난 것 같으니, 추후에 기회를 봐서 영입을 하든 죽이든 하지.” “본문으로 영입입니까?” 흑의인의 질문에 그의 주군이 고개를 저었다. “교(敎) 쪽으로 보내. 내 눈에 띄면 자꾸만 죽이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점점 치미는 살기를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그가 손바닥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소름 끼치도록 사악한 기운이 불길처럼 피어올랐다. “……알겠습니다.” 흑의인은 그 불길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 * * 기무혁이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고, 여필극으로부터 내공을 건네받은 지도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후우우…….” 단전에서 내공을 갈무리한 기무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반개한 시야 사이로 황금빛 아지랑이와 푸른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운기조식으로 인해 금기(金氣)와 수기(水氣)가 몸 밖으로 새어 나왔다가 다시 안으로 흡수되는 과정이었다. 처음 여필극에게 금기를 건네받았을 때와 비교하면 두 기운을 다루는 것이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흐음. 이제야 좀 성과가 보이는 것 같구나.” “……언제 오셨어요?” 기무혁이 뒤를 돌아보자 최건이 뒷짐을 진 채 흐뭇한 표정으로 제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안 됐다. 막바지 같아서 호법이나 잠깐 서고 있었지. 두 기운을 다루는데 제법 익숙해진 것 같구나?”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기무혁이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이 녀석들, 꽤나 애를 먹이네요.” 처음에는 갑자기 늘어난 내공이 마냥 기뻤다. 하지만 전생에서 한 번도 누려본 적 없었던 풍족한 내공에 몸이 쉽게 적응하지 못했고, 가검을 몇 개나 부숴 먹기도 했다. 게다가 오행신공에 적응할 겸 했던 대련에서 신강헌에게 무참하게 패배하기까지 했으니……. -우하하하하! 내가 이겼다! 미친놈한테 이겼다고! -……다시 해. -내가 미쳤냐? 오늘 하루 종일 자랑하고 다닐 건데! -……다시 하자고. -패배자 주제에 공손하게 요청하지 못하냐? 그리고 일단 그 요상한 내공이나 어떻게 하고 덤비시지?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허우적대지 말고 말이야. 까드득! 지금도 그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서, 혹시라도 주화입마에 들리지 않게 심호흡을 해야 했다. 후우- “빨리 오행신공에 익숙해져서 또라이한테 설욕해야죠.” 평소보다 더 매서워진 제자의 눈빛을 본 최건이 껄껄 웃었다. “조급해할 것 없다. 상승심법에 입문하면 대부분 겪는 일이야. 하물며 네가 익힌 것은 신공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더냐?” 내공이란 것이 쉽게 얻었다고 해서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기운이었다면 신공이라는 이름이 붙지도 않았을 터. “지금은 네 생각과 달리 검로도 어긋나고 보법의 간격도 달라졌을 게다. 그걸 신경 쓰면 검 끝이 무뎌질 수밖에 없지. 다 적응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는 스승의 말에 기무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욕심이 화를 부르는 법이니까요. 하나씩 차근차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만 그렇게 하지, 요즘 밥 먹는 시간 빼고는 운기조식만 한다던데?” “…….” “흐음. 이 녀석 봐라?” 최건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기무혁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쯧쯧. 안 되겠다. 너 나랑 밖에 좀 나갔다 오자.” “이 시간에 어딜요?” 시간이 꽤 늦은 밤이었다. 그러나 제자의 질문에 스승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머리도 식힐 겸 가볍게 마실이라도 다녀오자는 게다.” 두 사람은 간단히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와 나란히 걸으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은 무공에 대한 담론이었다. “많은 양의 내공보다 중요한 것이 내공과 외공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오행신공에 익숙해지면 다시 외공 수련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부터는 다시 검술수련 비중을 늘리려고요.” “억지로 기운의 균형을 맞추려고도 애쓰지 말거라. 구결에도 자연스럽게 기운이 조화를 이루게 하라고 하였으니.” “부족한 화, 목, 토의 기운은 언제쯤 얻는 것이 좋을까요? “물도 급하게 먹으면 체하기 마련이다. 네 그릇이 더 단단해졌다고 생각될 때 시도해 보는 것이 좋겠다.” 최건은 제자가 오행신공의 비급을 읽고 스스로 해석하게 두었지만, 필요할 때마다 함께 비급의 구절을 읽으며 최소한의 조언을 해주었다. ‘내가 보기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거늘.’ 본인이야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고작 며칠 만에 오행신공의 기운을 이만큼이나 다루게 된 것도 보통 노력과 끈기, 재능으로는 불가능했다. 말 그대로 엉덩이에 종기가 생길 정도로 앉아서 운기조식만 했기에 가능했을 일. “오행의 기운이 하나로 모여 조화를 이루면 새로운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 구절이 신경이 쓰이는 게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긴 합니다.” 기무혁이 설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하윤의 극음지기(極陰肢氣). 그리고 무림맹주의 금기(金氣). 두 가지 모두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정순한 기운이었다. 이 둘을 얻은 것만으로도 기무혁은 단숨에 후기지수 중에서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만한 내공을 얻었다. ‘다른 기운들까지 전부 다 모으면 어떻게 될까?’ 물론 두 기운과 비슷한 수준의 화(火), 목(木), 토(土)의 기운을 얻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그릇을 더 크게 키우는 일이었다. 두 가지 기운만으로도 현시점에서는 한계에 달했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스승님 말씀대로 지금은 그릇을 더욱 크고 단단하게 만들어야 하는 시기인데. 제가 욕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며칠간 집에만 있다가 밖에 나오니 확실히 머리가 맑아진 듯, 기무혁이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요 녀석. 드디어 순순히 인정을 하는구나!” 최건은 기분이 좋은지 손을 뻗어 제자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때, 기무혁은 최건의 손바닥에서 희미하게 베인 흔적을 발견하고 놀라서 물었다. “상처를 입으셨어요?” “별것 아니다. 무림맹 뇌옥에 침입자가 있어서 검을 나누다가 조금 베였지.” “예?” 충격적인 사실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면서, 최건이 슬쩍 웃어 보였다. “나도 늙기는 한 모양이다. 옛날 같았으면 단칼에 베어버렸을 놈에게 상처나 입고 말이다.” “대체 누가…….” “클클. 나도 그 낯짝을 한번 보고 싶구나.” 기무혁이 몸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는 동안, 최건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무림맹에서 첩자들을 취조했다. 흑백으로 변장한 첩자들은 지독할 정도로 세뇌가 잘된 자들이었다. 게다가 적들은 혹시나 모를 정보유출을 막기 위해 암살자까지 보냈다. “여간내기가 아니더구나. 하마터면 완전히 놓칠 뻔했으니…….” “스승님. 그래서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뭔가 눈치챈 듯한 기무혁의 말에, 최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바로 저기다.” 제자리에 멈춰 선 최건이 고갯짓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멀리 대천문(大天門)이라는 현판이 크게 붙어 있는 빌딩이 보였다. “도망친 암살자의 흔적이 도중에 끊겨서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예전에 네가 대천문에 관련해 알려준 것이 기억나더구나.” 기무혁은 검무 콩쿨에서 김현승에게 괴이를 들리게 했던 귀음방과 그 배후에 있는 대천문에 대해서 최건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최건은 그 이야기를 떠올렸고, 흔적이 끊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천문이 있음을 알고 혹시나 해서 조사해 보았다. 그리고 결국 이곳에서 놓친 줄 알았던 암살자의 흔적을 다시 발견했다. “대천문이 제법 역사가 깊은 중견문파이긴 하지만, 무림맹을 건드릴 만큼 간덩이가 크지는 않다. 그만한 능력도 없고.” 빌딩을 올려보는 최건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뒤에 팔대문파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단다.” 팔대문파와 지독한 악연으로 얽힌 검마 최건의 입꼬리가 사나운 호선을 그렸다. 그 미소 그대로 제자를 돌아본 최건이 가볍게 권유하듯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제자야.” 최근 내공과 외공의 조화에 애를 먹고 있는 제자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새롭게 얻은 내공에 적응도 할 겸 함께 갔다 오겠느냐? 역시 실전만큼 좋은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는 누구보다도 실전에 강한 타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무혁의 입가에도 스승과 꼭 닮은 미소가 맺혔다. “좋죠. 백 번 보는 것보다 직접 한 번 해보는 게 낫다는 말도 있잖아요?” 스승의 말이 끝나기도 전부터 기무혁은 이미 몸을 풀고 있었다. 55화. 어쩔 수 없잖아? 갑자기 몸 안에 내공이 불어난 상황에서 외공과의 조화를 이루는 방법. 그 가장 빠른 길이 실전이라는 스승의 말에 기무혁도 적극 동의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봐도 그보다 좋은 방법은 찾기 힘들었다. ‘집중력이 극도로 높아지면 말을 안 듣던 몸도 빠릿하게 움직이기 마련이지.’ 낭인 시절에도 그랬다. 이론보다는 실전에서 검을 휘두르며 강해졌던 기무혁은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 즐겁고 설렜다. 물론 그만큼 위험도 따르겠지만. “이 녀석아. 왜 갑자기 음흉하게 실실 웃는 거냐?” “스승님하고 이런 부분이 잘 맞아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쯧쯧. 어린놈이 나중에 뭐가 되려고 이러는지…….” 그러나 제자에게 잔소리를 하는 최건의 눈꼬리도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그 역시 결이 잘 맞는 제자와 합을 맞출 수 있어 기대됐으니까. “옷부터 갈아입거라.” 최건은 미리 챙겨온 장비들을 제자에게 건넸다. 특수소재로 만들어 적외선 감지 센서를 속일 수 있는 야행복. 그리고 초저주파를 발생시키는 호루라기가 지급되었다. ‘이것도 오랜만에 보네.’ 평범한 사람은 초저주파를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지만, 감각이 극도로 발달한 무인들은 귀 안에서 느껴지는 압력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물론 무인이라고 누구나 가능한 것은 아니라 집중적인 훈련을 받거나, 타고난 감각이 예민한 이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기무혁은 둘 모두에 해당했다. “거참…….” 최건은 장비들을 익숙하게 챙기는 기무혁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말년에 생긴 제자는 태도도 바르고, 재능도 출중했지만 비밀도 많았다. 평범한 후기지수가 이런 물건을 접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누구나 말 못 할 사연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 다만 제자의 심성이 올곧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최건은 굳이 물을 생각은 없었다. “도중에 흩어져야 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호루라기로 몇 가지 신호를 미리 만들어 놓고 비상시에 사용할 게다.” 몇 가지 약속된 신호를 만들어 서로 확인한 후, 검마가 미리 구해온 대천문 빌딩의 내부 설계도를 꺼내 들었다. “작전을 간단히 설명하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작전을 브리핑하는 모습이 무척 익숙했다. “최우선 목표는 대천문에 잠입, 라이센스 시험 중에 벌어진 사건과 관련된 증거를 찾는 것이다.” “팔대문파와 엮인 증거를 찾는다면 금상첨화겠네요.” 기무혁도 스승 못지않게 전생에 낭인으로서 온갖 작전에 참가해 본 경험이 있었다. 척하면 척, 알아듣는 제자의 모습에 최건이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정색하고 말했다. “결코 무리해선 안 된다. 적당히 실전 경험을 쌓으려 온 거지, 마주치는 놈마다 잡아 족치려고 온 것이 아니니 말이다.” 여긴 정파무림의 한복판임을 명심해야 한다, 제자야. 스승이 그런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자 기무혁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저도 그 정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압니다.” “흐음…….” 제자를 의심스럽게 한 번 흘겨본 최건이 미덥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자신이 근처에 있는 한, 지나치게 위험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대천문주와 주요 고수들이 자리에 없는 것은 이미 확인했다. 기껏해야 당직 장로 하나 있을 테니 그것만 신경 쓰면 될 게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에 대비는 해야겠죠?” “물론.” 가벼운 마음으로 왔지만, 언제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최건은 만약의 상황을 가정하며 말했다. “잠입한 사실이 발각되면 모든 출입구가 닫히고 통로에 산공독이 살포될 게다. 혹시 모르니 해약을 미리 지급해주마.” 기무혁이 스승에게 산공독의 해약을 건네받으며 물었다. “발각이 된다면 타임리미트는 얼마나 될까요?” “10분이면 대천문의 주요 전력이 도착하겠지. 그 안에 탈출해야 한다.” 최건이 생각했을 때는 그리 위험도가 높은 작전은 아니었다. 대천문의 경비 수준, 자신과 제자의 실력을 고려하면 충분히 목적을 완수하고 조용히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정말 팔대문파까지 엮인 사건이라면…….’ 어쩌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위험이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최건이 뒤늦게 걱정 어린 표정으로 제자에게 말했다. “너는 그냥 밖에서 기다리겠느냐? 다시 생각해보니, 팔대문파까지 엮여있다면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른다. 지금 네 실력으로는 조금 무리이지 않을까 싶구나.”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기무혁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하하…….” 하지만 기무혁은 오히려 웃었다. 변수야말로 실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경험이자 묘미이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저 혼자 다녀올 테니 스승님이 여기서 기다리시는 건 어떨까요?” “으음?” “손에 부상도 입으셨는데, 젊고 쌩쌩한 제자가 다녀오는 것이 맞죠.” 물론 이것도 기무혁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존심이 긁힌 최건이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제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알겠으니 내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너라. 내 오늘 잠입과 침투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쳐 주마.” “힘드실 것 같으면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스승과 제자는 잠시 서로를 빤히 바라보더니, 동시에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누가 먼저 중요한 정보를 찾는지 내기라도 할 테냐?”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는 것으로 할까요?” “…….” “…….” 자존심 강한 것까지 똑 닮은 스승과 제자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대천문의 빌딩을 바라봤다. “잘 따라오너라. 제대로 못 쫓아오면 놓고 갈 테니.” “요새 잘 먹고 쉬었더니 힘이 넘쳐서, 스승님을 업고도 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잠시 후,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두 사람이 경쟁하듯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 * * “흐아암-.” 대천문의 무인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 앞에는 CCTV를 통해 빌딩의 주요 통로들을 감시하는 모니터가 여러 개 놓여있었다. 늦은 밤. 정지 화면과 다를 바 없는 심심한 모니터를 지켜보던 무인이 몸을 돌려 뒤를 바라봤다. “언제까지 할 거야? 한 시간 지났으니까 교대하자고.” 그 말에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 중이던 동료가 슬쩍 눈을 떴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났어?” “어디서 모른 척이야? 나도 운기조식하게 나와 봐.” 두 사람이 교대해서 한 명은 의자에 앉고, 한 명은 바닥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차가운 바닥에 앉은 무인이 괜히 투덜거렸다. “나 참, 요즘 같은 시대에 무인이 직접 경비를 설 일이 뭐가 있다고…….” “위에서 까라니까 까는 거지.” 두 사람은 대천문의 하급 무인들로, 자신들과 같은 고급 인력이 고작 경비나 서게 된 것에 불만이 많았다. 칼을 찬 무림고수들이 매일같이 드나드는 이 빌딩에는 최신식 보안장치까지 설치돼 있었다. 일류 살수도 잠입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경계가 삼엄한데 감히 어떤 도둑이 대천문에 숨어들겠는가? 그런 이유로 두 사람은 경계 임무에 집중하지 않았다. 집중했다고 해도 뭔가를 발견하진 못했겠지만 말이다. “지하 연무장에 내려가서 가볍게 대련이나 하고 올까?” “구 장로한테 걸리면 어쩌려고?” “당직실에서 잠이나 자겠지. 장로들이 제대로 순찰하는 거 본 적 있어?” “하긴…….” 그렇게 신나게 직장 상사의 뒷담화를 하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 주변이 조금씩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아아아아- “뭐지? 묘하게 싸늘한데…….” “에어컨이라도 켜진 거 아냐?” “이 겨울에?” 불안감을 느낀 무인들이 검에 손을 얹으려 했으나 벌써 몸이 꽤나 둔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의 등 뒤를 점한 그림자가 있었다. 툭. 툭. 수혈을 짚자 기절한 두 무인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그 뒤에서 복면을 쓴 기무혁이 쓰러진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조금만 늦었으면 들킬 뻔했어.” 하얗게 입김을 뿜어내는 기무혁의 전신에 새하얀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방금 전 두 무인의 몸을 둔하게 만든 것은 그가 가진 수기(水氣)로 빙공을 흉내내 본 것이었다. ‘스승님이 보셨으면 아직 기의 수발이 미숙하다고 하셨겠지.’ 기감이 예민한 상대였다면 추위를 느끼는 즉시 이상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다행히 하급 무인들이었기에 쉽게 넘어갔지만, 기운을 내 것처럼 다루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경험이 필요했다. 지금처럼 실전을 통해 오행신공의 기운을 다루는 방법을 조금씩 찾아갈 생각이었다. “계속 써보면서 감을 잡아가는 수밖에.” 기무혁은 기절한 무인의 검을 하나 챙긴 후 CCTV를 확인했다. “스승님은…… 역시 안 보이는군.” CCTV 모니터 어디에도 최건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작게 혀를 내두른 기무혁은 모니터 화면을 정지시킨 후,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나는 꼭대기 층부터 훑으면서 내려갈 테니, 너는 보안실을 점거한 후에 지하로 가거라. 두 사람은 빌딩에 잠입한 후에 위아래로 흩어졌다. 최건은 보안이 가장 삼엄한 맨 위층의 장문인실로. 기무혁은 뒤가 구린 물건을 숨겨놓기 좋은 지하의 창고로. ‘저도 쉽게는 안 집니다.’ 반쯤 장난으로 한 내기였지만, 기무혁은 상대가 스승님이라도 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누구……?” 퍼억! “치, 침입자……!” 빠악!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기무혁은 지하로 향하면서 간혹 보이는 대천문의 무인들을 빠르게 제압했다. ‘적응하려면 다양한 상황에서 기운을 써 봐야 해.’ 수의 기운으로는 빙공을 흉내 내 상대의 몸을 굳게 만들고, 금의 기운으로는 주먹을 단단하게 만들어 자물쇠를 부수거나 상대의 무기를 단번에 깨뜨렸다. ‘더 없나? 열 명도 못 채운 것 같은데.’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기무혁이 지하 창고에 잠입했을 때였다. 지잉, 지이잉- 지잉! 귓가를 진동하는 불규칙한 음파에 기무혁이 멈춰 섰다. 초저주파 호루라기를 불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미리 약속된 신호에 의하면 이건. ‘문제가 생겼으니 먼저 빠져나가라.’ 그와 거의 동시에 위쪽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퍼어어어엉-! 빌딩이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진동이었다. 유리창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건물 전체에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위이이이이이잉-! “……뭘 잘못 건드리신 것 같은데.” 무언가 일이 틀어진 것 같았지만, 기무혁은 최건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대천문의 장문인과 장로들이 떼로 몰려와도 혼자서 몸을 빼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한 분이니까. ‘나만 잘 빠져나가면 돼.’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겨우 오행신공의 기운을 다루면서 몸을 움직이는 데 슬슬 익숙해지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지.” 기무혁이 몸을 돌려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뭐 하는 놈이냐!” 내공이 담긴 일갈과 함께 빠르게 가까워지는 기척. 지금까지 만난 대천문의 무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감이었다. ‘하필이면…….’ 순식간에 상대의 얼굴이 보일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놀랍게도 기무혁이 아는 얼굴이었다. 대천문의 최연소 장로 구자승. 검무 콩쿨에서 기무혁을 심사한 인물이기도 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구자승이 검을 겨누며 말했다.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그리하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기무혁은 몸을 돌려 도망치려다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어차피 쉽게 떨쳐내기 어려운 상대야. 등을 보이는 순간 베일 수도 있어. 그리고…….’ 실전 경험을 쌓기에 너무나도 좋은 상대가 아닌가? 기무혁은 잠입하기 전에 스승님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10분이면 대천문의 주요 고수들이 도착하겠지. 그 안에 탈출해야 한다. “10분.” “……지금 뭐라고 했느냐?” “타임어택 시작.” 마음속에 타이머를 켠 기무혁이 구자승에게 달려들었다. 56화. 착각하지 마라 터엉! 바닥을 부술 듯이 박찬 기무혁의 신형이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전신을 휘감은 금(金)기가 질주에 폭발력을 더했다. “명을 재촉하는군.” 싸늘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본 구자승이 검을 크게 휘둘렀다. 침입자를 단숨에 베어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그의 검은 기무혁에게 닿지 못했다. 끼이익! 급브레이크를 건 듯 멈춰 선 기무혁이 상체를 뒤로 젖혀 상대의 검을 피했다.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눈앞을 스쳤다. ‘전환.’ 금의 기운이 쇠처럼 몸을 단단하고 강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면, 수(水)의 기운은 전체적으로 몸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푸른 아지랑이를 몸에 두르자 급격한 방향 전환에도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았다. 기무혁이 구자승의 좌측으로 돌아가며 검을 내쳤다. 까앙! “큭!” 구자승의 눈에는 강맹한 기세로 돌진하던 상대가 정지화면처럼 멈춰 서더니, 순식간에 다시 가속해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초식이라고 할 수도 없는, 단순히 템포 조절로 만들어낸 공격. ‘보통내기가 아니다.’ 침입자를 얕잡아보던 구자승의 눈에 경계심이 어렸다. 이 정도로 능숙하게 강약과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굉장히 뛰어난 감각과 경험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좀도둑은 아닌 듯한데.” 본격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린 구자승의 무복이 마구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는 대천문의 최연소 장로이자 미래의 장문인 자리를 노리는 절정고수였다. 존재감이 한층 커진 구자승이 성큼 전진보법을 밟으며 거리를 좁혔다. “입을 꾹 다문 것을 보니, 팔다리 중 하나는 끊어놓아야 대화가 될 것 같구나.” 피식. 복면을 쓰고 있는데도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구자승의 두 눈에 은은한 살기가 어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검에 반투명한 검기가 맺혔다. “시건방진 놈이!” 구자승의 검에서 대천문을 대표하는 무공이자 문파를 지금의 위치에 있게 만든 대천검법이 펼쳐졌다. 절도와 힘이 넘치는 중검(重劍)이 전방위를 압박하며 기무혁을 검권에 가두려고 들었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모습이었지만, 기무혁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의 검로를 유심히 보았다. ‘다시 전환.’ 푸른 기운이 흐릿해진 자리를 다시 금빛 기운이 채웠다. 단단해진 전신에서 응축된 힘을 단숨에 폭발시켰다. 기무혁의 검이 정확히 상대 검로의 맥을 끊는 곳을 찾아 강하게 내리쳤다. 보다 적은 힘으로 큰 효과를 내기 위해서였다. 쩌어엉-! 두 검이 충돌하며 구자승과 기무혁이 주르륵 밀려났다. 발이 끌리며 바닥에 새겨진 두 줄기 고랑의 길이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 구자승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비록 팔대문파는 아니지만, 그는 재능과 실력을 인정받아 대천문의 최연소 장로가 된 몸이었다.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를 원했기에 대천문을 선택했을 뿐, 마음만 먹었다면 팔대문파의 정예무인이 될 수도 있었다. ‘고작 침입자가 그런 내게 필적한다고?’ 구자승이 경악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순간에도 기무혁은 멈추지 않았다. 금기와 수기의 내공이 필요할 때마다 자유롭게 전환하며 검을 휘둘렀다. 까가가강! 두 고수의 검로가 난마처럼 얽혔다. 검이 너무 빠른 탓에 흐릿하게 보이는 궤적들 사이로 끊임없이 불티가 튀었다.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어.’ 기무혁은 그 과정에서 오행신공의 내공을 다루는 것에 빠르게 능숙해지고 있었다. 옷을 스치는 칼날,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 여러 번 이어졌다. 극한의 집중력이 발휘될 수밖에 없는 실전이었다. 머리로 익혔던 오행신공의 구절과 새롭게 받아들인 내공, 기무혁의 검술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대천문의 구자승은 빈말로라도 쉽다고 말할 수 없는 상대였다. 묵직한 검과 맞댈 때마다 뼈가 저릿저릿했고,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어.’ 기무혁은 외줄에서 칼춤을 추는 것이 오히려 편한 사람이었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며 감각이 더 예리하게 벼려졌다. 상대에 비해 부족한 내공은 타고난 센스와 숱하게 사선을 넘나든 경험, 심리전과 수 싸움으로 메웠다. 그에겐 무척 익숙한 일이었다. “무슨……!” 반면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점점 더 맹렬해지고 정교해지는 침입자의 공격에 당혹스러움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구자승은 대천문에 숨어든 침입자의 실력이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러자 오히려 분노가 차갑게 식으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이지?’ 경계심이 더욱 커진 구자승은 방어적으로 검술을 펼쳤고, 그것은 공교롭게도 기무혁이 더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 수 있게 도왔다. 쩌어어엉! 강하게 검을 부딪친 두 사람이 거리를 벌리고 섰다. 기무혁은 거칠어진 호흡을 잠시 정리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5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자잘한 상처들이 생겼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복면도 찢어지지 않았고, 구자승이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낌새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것만 시도해 보고 떠나야겠군.’ 사아아아악- 기무혁을 둘러싼 주변의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금생수(金生水). ‘금의 기운이 수의 기운을 북돋아준다.’는 말은 차가운 쇠에 물방울이 맺히는 이치와도 같았다. 하물며 기무혁이 지닌 수의 기운은 극음지기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빠르게 차가워진 수기가 금기를 식히고, 서늘해진 금기가 수기를 더욱 북돋웠다. 쩌저저저적-! 그렇게 합일된 두 기운이 새하얗게 물들며 빙공을 발현했다. 기무혁의 몸 주변으로 휘도는 하얀 바람을 본 구자승의 눈이 부릅떠졌다. “빙공……?” 짓눌린 신음성이었다. 구자승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처음으로 그가 뒷걸음질 쳤다. ‘뭐야? 잘 싸우다가 왜 물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구자승이 물러날 이유가 없는 싸움이었다. 기무혁의 실력이 일취월장했다지만 대천문의 장로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구자승은 시간만 끌어도 점점 더 유리해지는 입장이었다. “잠시, 잠시만!” 그런데 구자승이 지금까지와는 어딘가 달라진 초조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가 괴이한 내공을 쓰는 걸 보고 처음에는 사파의 인물이라고 생각했소. 본문의 무공이나 보물을 훔치러 온 도둑일 거라고. 헌데 이 빙공은…….” ‘게다가 존대까지 한다고? 뭔가 있군.’ 기무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싸늘한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구자승이 멋대로 착각하도록 내버려두면 스스로 떠들 거라고 판단해서였다. 그리고 그런 반응이 상대에게는 어떠한 확신을 준 듯했다. “역시…….” 주변에 듣는 이가 아무도 없음에도, 구자승은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말을 이었다. “그대는 일월문에서 온 것인가?” 일월문? 기무혁은 예상치 못한 상대의 말에 놀랐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다. ‘자기네 본거지에 불법 침입한 자에게 일월문에서 왔냐고 묻는다라…….’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며 지금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스승님이 추측한 대천문의 윗선이 일월문일 확률이 높겠군.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둘이 밀접한 관계라는 소리겠지.’ 생각을 정리한 기무혁이 검을 천천히 내리며 삐딱하게 섰다. “그나마 눈치가 있는 자였군.” 걸걸하게 변조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여유롭게 한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것은 휴대폰을 찾아서 녹음 기능을 켜기 위해서였다. 구자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일월문이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이오?” “정말 몰라서 묻나?” “……가르침을 주시면 경청하겠소.” 먼저 자존심을 굽히고 묻는 말에, 기무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슬쩍 찔러보았다. “귀음방.” 구자승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반응을 놓치지 않은 기무혁이 조금 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무림맹.” “지금 무슨 말을…….” 귀음방을 언급할 때는 확실한 반응이 있었지만, 무림맹에 대한 반응은 미묘했다.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대천문이 관련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무혁은 살기를 일으키며 기세로 몰아붙였다. “뻔뻔하게 되묻는가? 개가 주인이 내린 임무에 실패했으면 응당 처벌을 받아야지.” “헛소리를!” 사문을 개에 비유해 모욕하는 말에 구자승이 참지 못하고 분노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기무혁은 반응하지 않았다. 격장지계에 넘어온 상대가 스스로 정보를 발설하도록 기다렸다. “우리가 실패했다고? 황당하군. 당신들이야말로 라이센스 시험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전부 실패하지 않았나!” “……이번 일이 본문의 책임이다?” “오히려 화를 내야 할 것은 우리요. 무림맹에 남겨진 흔적을 지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는가? 염치가 있다면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 할 터!” 얼굴까지 붉어져서 열변을 토하는 구자승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무혁은 녹음 기능이 부디 잘 켜졌길 바랐다. 잠시 말이 없던 그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진득한 살기를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부터 대천문 따위가 본문 앞에서 그리 빳빳하게 목을 세울 수 있었지?” “……!” 치미는 분노와 수치심에 구자승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팔대문파만큼은 아니지만, 명성 높은 중견문파의 장로. 지금의 발언은 아무리 일월문과 대천문이 밀접한 관계일지라도 터무니없는 모욕일 터였다. ‘지금이라면 제대로 된 생사결을 할 수 있겠는데?’ 기무혁은 잠시 전력을 다한 구자승과 싸우는 상상을 해보았지만, 이내 입맛을 다시며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해.’ 더 이상 지체하기엔 시간도 촉박할뿐더러 구자승과 싸우는 것보다 좋은 계획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일월문과 대천문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면 뒤를 캐기가 더 쉽겠지.’ 그러려면 구자승이 오해를 증폭시켜 주는 것이 좋았다. 대천문의 차기 장문인으로 유력한 만큼 문파에 끼치는 영향력도 클 테니까. “착각하지 마라. 너희 따위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하니까.” “……아무리 일월문의 사람이라 해도 더 이상의 모욕은 참지 않을 것이다.” 구자승이 내렸던 검을 들어 올리며 살기 띤 눈빛으로 기무혁을 노려보았다. 기무혁은 큭큭 소리 내 웃더니 오히려 검을 집어넣었다. “오늘은 가볍게 경고를 전하러 왔을 뿐이다. 이만하면 잘 알아들었으리라고 믿지.” 돌아선 그가 보란 듯이 천천히 걸어서 복도를 빠져나가는데, 등 뒤에서 구자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너는 알 자격이 없다.” 구자승은 상대의 뒷모습을 사납게 노려보기만 할 뿐, 함부로 쫓지는 않았다. ‘됐다.’ 등 뒤에서 구자승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후, 기무혁은 전력으로 경공을 펼쳐 빌딩에서 탈출했다. 위이이이이이잉! 침입자다! 침입자를 찾아라! 저기 수상한 자가 있다! 쫓아! 솟구치는 불길을 보고 출동한 소방차와 경찰차, 경공을 펼쳐서 달려오는 무인들이 보였다. 기무혁은 아슬아슬하게 그들을 피해서 안전한 장소까지 빠져나온 후에야 한숨을 돌렸다. “휴우…….” 조금만 늦었어도 포위망이 촘촘하게 구축돼 빠져나오지 못할 뻔했다. 그러나 기무혁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절정고수를 상대로 실전 경험을 풍부하게 쌓을 수 있었던 것도 만족스러웠고. “스승님이랑 한 내기도 이긴 것 같으니까.” [오히려 화를 내야 할 것은 우리요. 무림맹에 남겨진 흔적을 지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는가? 염치가 있다면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 할 터!] 휴대폰에 잘 녹음된 목소리를 확인한 기무혁은 스승님을 만나면 무슨 소원을 들어달라고 할지 고민하며, 탈출한 후에 만나기로 한 장소로 이동했다. 57화. 만들면 되지 않나? 최건은 빌딩에 잠입한 후, 곧바로 최상층에 있는 장문인 집무실로 향했다. ‘증거가 될 수 있는 위험한 물건이나 서류는 대부분 우두머리가 직접 관리하기 마련이지.’ 과거 무림맹의 숨겨진 암검으로서 정파의 비리와 악행을 찾아내 처단하는 일을 맡았던 최건이었다. 누구보다 정파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정파의 이중성과 추악한 모습 또한 숱하게 보았다. ‘권력과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놈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정의 최건이 팔대문파를 싫어하고, 그런 최건을 팔대문파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과거에 그가 해결했던 사건들 대부분이 깊게 파고들면 팔대문파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 있었으니까. 결국 팔대문파에 미운털이 박혀 축출되다시피 했지만, 최건은 자신의 지난 행동에 조금의 후회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도 네놈들에게서 나는 시궁창 냄새는 여전하구나. 건물이 높고 화려해질수록 더 짙어지기만 해.”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최건이 장문인실 앞에 섰다. 그리고 기감을 넓혀 그 너머의 보안 수준을 가늠했다. ‘적외선 센서, 술법감지장치, 기계식 기관진식까지. 켕기는 게 얼마나 많은지 가지가지도 깔아놨구나.’ 하지만 온갖 최신식 보안장치로도 최건의 잠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스르륵. 초일류 살수를 능가하는 잠입 능력은 현역에서 은퇴한 지 이십 년이 지났음에도 녹슬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장문인실에 숨어든 최건은 능숙하게 보안장치들을 해제하고, 기밀정보를 숨겨뒀을 만한 장소를 뒤지기 시작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성과가 있었다. 딸깍. 예리한 감각으로 장문인 책상에 숨겨진 버튼을 찾아 누르자, 한쪽 벽면이 옆으로 밀려나며 비밀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너머로 이어지는 통로를 확인한 최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제자야. 내기는 이 스승이 이긴 것 같구나.’ 기무혁에게 자랑할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 최건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제자와 내기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이 잘 맞는 어린 제자와 만난 후, 최건은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종종 유치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약관에 불과한 놈이 벌써부터 스승을 이겨 먹으려 드는 것이 문제지. 돌아가면 부모님 앞에서 귀엽게 재롱을 부려보라고 시켜야겠다.’ 귀염성 없는 제자가 억지로 귀여운 짓을 하는 모습을 구경할 생각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러나 최건의 미소는 비밀통로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그놈이군.” 무림맹에서 자신을 떨쳐내고 도망친 암살자의 흔적이었다. 바닥에 남겨진 희미한 발자국, 익숙한 혈향, 무엇보다 자신과 싸우면서 찢어진 옷이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떠났다? 그 말인즉슨…….’ 이곳은 외부로 빠져나가는 통로라는 뜻일 것이다. 그 순간 최건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에게서 도망친 암살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였다. 헌데 비밀통로에 이렇게 어설프게 흔적을 남겼다면……. “일부러 남긴 것인가?” 최건은 암살자가 대천문 소속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자신의 사문이었다면 위험한 증거를 애초에 남기지 않았을 테니까. 오히려 대천문까지 와서 옷을 버려두고 간 이유가 무엇인지 점점 확실해졌다. ‘추격을 당하면 대천문에 뒤집어씌우고 꼬리를 잘라내겠다는 속셈이렷다.’ 즉, 대천문은 저들에게 버려도 되는 패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만한 중견문파를 버리는 패로 쓸 수 있는 자들은 오직 팔대문파의 족속들뿐이었다. 최건이 조용히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네놈들이구나.” 하지만 주어진 정황으로 여러 정보를 추측해낸 최건도 한 가지 놓친 것이 있었다. 버리는 패로 결정된 이상, 언제든지 패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그그극……. “……!” 통로에서 기관진식이 작동하는 것을 느낀 순간, 불안한 예감이 든 최건은 뒤돌아서 전력으로 경공을 펼쳤다. 휘이이익! 아슬아슬하게 비밀통로를 빠져나온 그는 제자에게 알리기 위해 있는 힘껏 호루라기를 불었다. 등 뒤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은 그 직후였다. 퍼어어어어엉-! 폭발과 함께 치솟은 불길이 최건을 집어삼켰다. 비밀통로가 터져나가면서 그 폭발의 영향으로 강화유리가 와장창 깨져나갔다. 그 하나하나가 암기에 못지않았다. 그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장문인의 집무실을 통째로 날려버릴 만한 폭약이 바로 그 옆에 설치돼 있었으리라고. 잠시 후 검은 연기가 걷히고, 옷이 절반 이상 불에 탄 모습으로 최건이 나타났다. “……퉷.” 핏물을 뱉어낸 그가 검을 휘젓자 깨진 창문 밖으로 새까만 연기가 흘러나갔다. 폭발의 위력은 상당했다. 집무실의 가구는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 났고, 벽이 박살 나 골조가 보일 지경이었다. 최건은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지만, 그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것은 부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찌 이런 자들이 정파임을 자처한단 말이냐!” 단지 추격자를 제거하기 위해 다른 문파의 본거지에 저렇게 많은 폭탄을 설치한다? 늦은 밤이어서 망정이었지, 만약 그 폭발에 대천문의 무인들이나 빌딩에서 일하는 민간인들이 휘말렸다면? 많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을 장기말로밖에 보지 않는 팔대문파의 악랄함에 치가 떨렸다. ‘배후가 누군지 모르지만, 반드시 찾아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그때 폭발음을 들은 대천문의 경비무인들이 아래층에서 올라와 최건을 포위했다. “치, 침입자다!” “장문인께 당장 연락해!” “테러다! 저자가 범인이야!” 곧바로 탈출할 수도 있었지만, 최건은 일부러 무인들이 몰려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경보음이 울리면 위험해지는 것은 자신 혼자만이 아니었으니까. ‘무혁이 녀석이야 어련히 잘 탈출하겠지만…….’ 최건은 제자가 탈출할 시간을 약간이나마 벌어주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일으켰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정체를 밝혀라!” 까가가각. 검 끝으로 엉망이 된 바닥을 긁는 소리에 포위망을 좁혀오던 무인들이 흠칫했다. 한때 검마라 불리며 악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무인의 몸에서 살기가 진득하게 배어나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려주랴? 썩은 정파 놈들을 잡아먹으러 온 마귀이니라.” 대천문의 무인들을 둘러보며 킬킬댄 검마가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었다. 검마는 그날 아무도 죽이지 않았지만, 그곳에 있던 모두에게 악몽 같은 시간을 선사했다. “……이만하면 되겠지.” 수십 명의 무인을 쓰러뜨린 최건은 대천문의 정예가 도착하기 전에 미련 없이 몸을 돌려 탈출했다.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내심 아쉬웠다. 배후에 팔대문파가 있다는 확신은 더욱 강해졌지만, 정확히 그중 어디인지는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만난 제자에게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스승님?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너야말로 꼴이 그게 뭐냐?” 꽤나 낭패한 꼴로 다시 만난 스승과 제자는 서로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각자 얻어낸 정보를 공유했다. [일월문이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이오?] [우리가 실패했다고? 황당하군. 당신들이야말로 라이센스 시험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전부 실패하지 않았나!] 최건은 휴대폰에 저장된 구자승의 목소리를 듣고 감탄한 표정으로 제자를 바라봤다. “허! 네가 나보다 낫다. 그 상황에서 유도신문을 한 게냐?” “저쪽에서 제 발 저려서 말한 것에 가깝지만……. 어쨌든 내기는 제가 이겼죠?” “하하하! 물론이다! 내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마!” 기쁜 얼굴로 벌떡 일어난 최건이 제자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부상은 심하지 않다고 했지?” “찰과상이 대부분이라 금창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것 같은데요.” “그럼 나랑 어디 좀 가자.” “또 어디를요?” “내 친우에게 갈 것이다. 그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을 직접 말해다오.” * * * “……둘 다 새벽에 이게 무슨 꼴인가?” 노구천이 갑자기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최건과 기무혁을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는 대천문에서 테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 전에 일어난 상태였다. 곧바로 무림맹으로 가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난데없이 두 사람이 담을 넘어서 들어온 것이다. 최건이 오랜 친우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네. 하지만 중요한 일이니 잠시 시간을 내어주게나.” “거참……. 급히 가봐야 하니 최대한 빨리 끝내게.” 하지만 투덜거린 것도 잠시, 두 사람에게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노구천이 입을 떡 벌렸다. “내가 대천문에서 테러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듣고 얼마나 놀란 줄 아는가! 헌데 그게 두 사람이 한 짓이라고? 최소한 언질 정도는 미리 해줬어야 할 것이 아닌가!” 노구천은 화를 내다가 이내 한숨을 쉬고 말았다. 오랜 친우인 최건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었다. “자네에게 물어보고 맹주님께 결재까지 받으라고? 증거가 모두 사라진 다음에 움직였다간 아무것도 못 건졌을 게야.” “……말을 말아야지. 하여간 고생했네. 무혁이 너도 고생했다.” 과정이야 어쨌건, 라이센스 시험에서 일어난 사건의 배후가 일월문이라는 녹음 증거를 확보했다. 하지만 이 증거를 섣불리 폭로했다가는 역풍이 불 수도 있었다. 노구천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일월문의 후기지수가 피해자가 될 뻔했는데, 그 범인이 일월문이라……. 녹음을 듣지 못했다면 결코 믿지 않았을 게야. 오히려 조작으로 몰아갈 수도 있네.” “왜 믿지 않겠나? 문주가 양강무공 파벌이고, 희생자가 될 뻔한 아이는 음한무공 파벌인데. 권력에 미친 팔대문파 놈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아무리 그래도…….”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기무혁이 질문했다. “제가 그런 쪽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러는데, 일월문의 파벌이 정확히 뭔가요?”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팔대문파 중에서도 일월문은 그 구조가 조금 복잡하단다.” 노구천이 일월문에 대해서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일월(日月). 해와 달을 함께 일컫는 말로, 시작은 음양을 아우르는 무공을 익히려는 무인들의 단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각각 양강계열과 음한계열 중 하나를 선택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익히는 문파로 변했다. 자연스럽게 문파 내 세력도 둘로 나뉘었다. “결국 두 파벌에서 번갈아 가며 장문인을 역임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지.” 일월문의 현 장문인은 장진명이었다. 별호는 화염군(火焰君). 열양무공의 초고수로 불꽃을 살아 있는 것처럼 부린다는 인물이었다. 최건이 픽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문제는 일월문의 현 최고수가 장문인이 아니라 대장로인 빙하신녀라는 게다. 실력으로나 인망으로나 장진명이 그녀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단지 이번이 양강계열 파벌 차례여서 운 좋게 장문인이 된 게지.” 기무혁은 그 말을 들으며 무림맹 병동에서 본 빙하신녀를 떠올렸다. ‘양하윤의 스승님이었지.’ 잠깐 본 것뿐이지만, 무림맹주를 만났을 때와 비견될 정도로 큰 존재감을 느꼈었다. “일월문주가 빙하신녀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 그래서 그 제자를 죽이려고 한 게 아니겠나? 다음 대 음한계열의 세력이 약해지게 만들려고 말일세.” 최건의 과격한 발언에 노구천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허! 아무리 그래도…….” “자네는 아직도 모르나? 팔대문파의 수뇌부는 정파라 부를 놈들이 아닐세.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짐승만도 못한 짓도 할 자들이야.” “그렇다고 확실한 증거도 없이 그렇게 주장하자는 건가? 자칫하면 우리가 범인으로 몰릴 수도 있어!” “그럼 또 예전처럼 모른 척 넘어가자는 건가!” 심각해지는 대화 속에서 기무혁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대천문과 일월문의 관계. 일월문을 지탱하는 두 파벌.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끼리 서로 치고받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들도 바보가 아니니 쉽게 충돌하지는 않겠지.’ 정말 내부에서 큰 갈등을 일으킬 만한 큰 사건이 없는 한, 어지간해서는 직접적인 충돌은 피할 터였다. ‘……잠깐만. 없으면 만들면 되지 않나?’ 문득 자신의 빙공을 보고 대번에 일월문이라고 오해한 구자승의 모습이 떠올랐다. -역시…… 그대는 일월문에서 온 것인가? 중견문파의 장로가 오해할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사아아아아- 갑자기 새하얀 바람이 기무혁의 몸을 휘감자, 아직도 다투고 있던 최건과 노구천이 동시에 그를 돌아봤다. “잘하면…… 판을 깔아줄 수 있을 거 같은데요?” 58화. 혼자보다 팀이 낫지 “판을 깐다고?” “그게 무슨 말이냐?” 기무혁은 궁금해하는 두 사람에게 머릿속에 떠오른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지금 대천문의 장로인 구자승은 저를 빙공의 고수로 착각하고 있어요. 자기네 문주에게도 그렇게 보고하겠죠. 그런데 일월문의 장문인은 양강 계열이라고 하셨잖아요?” 정보를 재차 확인하는 질문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무혁이 말을 이었다. “즉, 일월문의 장문인 입장에선 반대 파벌이 개입한 걸로 보일 수 있겠죠. 저희는 그 오해를 이용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말을 하면서 점점 머릿속에서 구체화되는 모양인지, 예시를 하나하나 드는 기무혁의 눈에서 생기가 돌고 입가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맺혔다. 대천문과 일월문, 그리고 일월문의 두 파벌 사이에 균열을 일으킬 계획이 술술 흘러나왔다. “……이렇게 하면 제대로 싸움을 붙여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사이에 저희는 어부지리를 취하고 배후에서 수월하게 필요한 정보를 얻는 거죠.” “허어!” “…….” 가만히 듣고 있던 최건과 노구천의 표정이 각각 감탄과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최건은 제자를 향해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제자야. 너는 실로 미친놈이다. 대단히 미친놈이야!” “그거 칭찬이시죠?” “아무렴! 최고의 칭찬이지!” 껄껄 웃음을 터트린 최건이 노구천을 돌아봤다. 네 생각은 어떻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나?” 무림맹의 원로이자 까마득한 후기지수를 대하는 선배 무인으로서, 노구천은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이 계획은 기무혁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움직여야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무혁은 오히려 그걸 바라는 얼굴이었다. “저는 좋은데요? 이렇게 실전에서 경험을 실컷 쌓을 수 있는 기회가 흔할 것 같지도 않고요.” “…….” 팔짱을 끼고 말없이 고민하는 노구천의 옆구리를 최건이 쿡쿡 찔렀다. 그리고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제자. 훌륭한 협객이 될 소질이 보이지 않나?” “……협객이라고?” 모략가나 협잡꾼이 아니라? 노구천이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자 최건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협객이 따로 있나? 나쁜 놈들 때려잡고 정의를 구현하면 그게 협객이지. 저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우리가 고상하게 상대해 줄 필요가 있냐 이 말이야.” “거참…….” 노구천은 똑 닮은 스승과 제자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기무혁에게 물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이렇게까지 하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너도 잘 알고 있을 터, 실전 경험을 쌓고 싶다는 것만으로는 납득할 수 없구나.” 잠시 말을 멈춘 노구천이 진지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혹 팔대문파와 악연이 있는 네 스승의 복수를 하고자 함이냐?”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최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노구천은 하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네 의기(意氣)는 높이 산다만, 팔대문파는 어설픈 마음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자칫하면 너와 네 주변인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음이야.” “내가 그렇게 둘 것 같나?” “자네는 가만히 있게. 나는 지금 기무혁이라는 무인에게 각오를 묻는 것이야!” “…….” 무림맹의 원로 노구천.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노라 말했던 무림맹의 협객들이 절망하고, 도망치고, 혹은 변절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다. ‘젊은 날의 치기라면 말려야 한다. 앞날이 찬란한 후기지수에게 굳이 고행의 길을 걷게 할 필요는 없으니…….’ 팔대문파에 균열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가 생긴 것과 별개로, 노구천은 한 후기지수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기무혁은 훗날 세계비무대회에 나갈 수 있을 만한 원석이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기무혁도 노구천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진지한 물음이었기에 그의 대답도 진지했다. “저나 스승님이나 정파무림 기준에서 별종이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행동이나 말투가 정파를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천마신교가 세상을 지배했을 때. 혼란스러워진 나라에 온갖 범죄가 성행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비명과 눈물로 세상이 얼룩졌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팔대문파 무인들의 도움을 기다렸다. “팔대문파는 정파의 상징이죠. 물론 무림맹이 있지만, 후기지수들은 그보다 팔대문파의 무인들을 동경하면서 멋진 정파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런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팔대문파 대부분은 천마신교의 압도적인 힘 앞에 굴복했으며, 심지어 고개를 숙이고 앞잡이가 된 자들도 있었다. “저는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지금의 기준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래서 바꿔보려고요.” 망가진 몸으로 천천히 죽어가던 낭인은 정파라는 가면을 쓴 위선자들을 조소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의 기무혁은 아니었다. “기준이 잘못돼 있다면 깨부수고, 새로운 기준을 만들 겁니다. 정파임을 자처하려면 언행이 아닌 가슴에 품은 것이 정도(正道)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줘야죠.” “…….” “…….” 잠시 말이 없던 두 노고수의 입가에 동시에 미소가 맺혔다. “내 제자지만 참으로 대견하지 않은가?” “알겠으니 자랑 좀 그만하게. 부러워 죽겠으니까.” 툴툴거린 노구천이 최건에게 눈을 흘기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정말로 자네가 세뇌한 거 아니지?” “대체 날 뭘로 보는 게야!” “……농담일세. 발끈하는 걸 보니 조금 의심되긴 하네만.” “이놈이 정녕?” 친우의 심술에 고리눈을 떴던 최건이 이내 픽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찌할 생각인가? 몇십 년 만에 팔대문파에 균열을 만들 기회가 왔는데. 이대로 날릴 겐가?” 최건은 급진적이고 불같은 성격이지만 도의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노구천을 찾아와 이야기했다는 것은 무림맹에 협조를 구하겠다는 뜻이고, 만약 무림맹에서 반대한다면 모든 계획을 일단 보류할 생각이었다. 팔대문파를 건드린다는 건, 그만큼 무림맹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속이 시원하긴 하겠군.” 잠시 기무혁의 계획대로 진행이 된 상황을 상상해 본 노구천이 자신도 모르게 입가를 씰룩였다. 팔대문파의 한 축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무림맹에 가자마자 맹주님께는 바로 전해드리도록 하지.” 결국 노구천도 지금까지 팔대문파의 월권을 참고 살아오며 쌓인 게 많은 무림맹의 일원이었다.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보나 마나 맹주님께선 적극적으로 판을 키워보자고 하실 게야. 우리 쪽에서도 방안을 더 강구해 보도록 하겠네.” 최건과 기무혁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노구천이 기무혁에게 물었다. “혹 지원이 필요하더냐? 드러내놓고 인원을 보내는 것은 어렵겠으나, 장비나 자금 지원은 어느 정도 가능할 게다.” “지금은 딱히…….” 기무혁은 거절하려다가 뭔가에 생각이 미쳤는지 말을 바꿨다. “혹시 지원금 범위가 얼마나 되나요? 그리고 서류 하나만 써주실 수 있을까요?” 웬만한 무림맹의 도움보다 더 든든한 지원군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 * 일류 라이센스 시험까지 아직 열흘가량의 여유가 있었다. 기무혁은 그전에 대천문을 최대한 여기저기 들쑤셔볼 계획이었다. ‘이런 일에는 혼자보다 팀이 낫지.’ 그래서 다음 날 곧바로 찾아간 곳은 김복자의 작업실이었다. 기무혁이 계획을 설명하자 예상했던 반응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는 중견문파랑 팔대문파까지 엿 먹이는 일을 도와달라고? 너 진짜 미친 새끼니?” 뉴스 특보로 본 대천문 빌딩 테러 사건의 범인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김복자가 의자에 바짝 등을 붙이며 말했다. “지금 너한테 걸린 현상금이 얼만지 알아? 박복한 내 팔자를 살짝이나마 고칠 수 있을 정도거든?” “친구 팔아서 팔자 고치시게? 며칠 전에도 우리 엄마아빠가 해준 밥 얻어먹고 그게 할 소리냐?” “아오 씨……!” 괜히 농담을 했다가 본전도 못 건진 김복자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이즈가 너무 커. 아무리 네 부탁이라도 이건 안 된다고. 미안하지만…….” 미안함에 고개를 숙인 김복자의 시야에 두툼한 봉투 하나가 들어왔다. 테이블에 봉투를 올린 기무혁이 스윽 그녀 쪽으로 밀며 말했다. “이건 착수금. 지원금을 충분히 받아 왔거든. 그것도 전액 현금으로.” “……봐도 돼?” 봉투를 열어 안에 있는 액수를 확인한 후, 사납게 치떠 있던 김복자의 눈매가 무척이나 상냥하게 변했다. “그래서 뭐부터 하면 될까?” 술법사는 구했으니 그다음은 현장에서 구를 요원을 구할 차례였다. 기무혁은 김복자와 함께 신강헌이 훈련하고 있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미친놈. 오랜만이다? 그 요상한 내공은 이제 좀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됐냐?” 마침 신강헌의 수련을 봐주러 온 최건도 그곳에 있었다. 스승과 제자가 찰나에 눈빛을 교환했지만, 신강헌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기무혁은 평소처럼 몸을 풀거나 곧바로 한판 붙자고 하는 대신,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신강헌. 너 정파무림의 후기지수로서 의미 있는 일 해보고 싶지 않냐?” “또 무슨 미친 소리를 하려고 이러지?” 신강헌이 기무혁을 잔뜩 경계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기무혁이 이렇게 밑밥을 깔 때에는 보통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무혁은 상대의 성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돈 봉투 대신 무림맹주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를 꺼내 보여주었다. “……무림맹 1급 기밀명령?” “쉿. 조용히 읽기만 해.” 침을 꼴깍 삼킨 신강헌이 문서를 읽는 동안, 기무혁이 옆에서 설명을 덧붙였다. “너도 알다시피 맹주님은 적이 많아. 팔대문파의 견제에 최근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이 시험까지 엉망으로 만들어놨잖아. 그 범인을 찾았어.” “뭐? 그게 누군데!”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절대 그 누구한테도 발설하지 않는다고 맹세할 수 있냐?” 끄덕끄덕! 기무혁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신강헌에게 차근차근 현 상황과 계획을 설명하면서 분위기를 잡았다. “그래서 맹주님에겐 팔대문파 모르게 움직일 수 있는 손이 필요한 거야. 그게 너와 나인 거지.” “맹주께서 너희들의 실력을 눈여겨보신 모양이구나.”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검마가 슬쩍 한마디를 보탰다. “맹주님이…… 저를요?” 다른 사람도 아닌 무림맹주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에 신강헌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무림맹주가 직접 요청한 비밀 작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악인들과 벌이게 될 사투. 스무 살이 되어도 사춘기가 끝나지 않은 청년에게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상상이었다. 그리고. “옛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손에 숱하게 악적의 피를 묻혔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 다만 세상을 조금이나마 평화롭게 만든 것으로 이 늙은이는 충분한 보람을 느낀단다.” 뒷짐을 진 검마가 쓸쓸한 목소리로 결정타를 먹였다. “뭐야……. 존나 멋있잖아…….” 뭔가에 홀린 듯 혼잣말을 중얼거린 신강헌이 자신의 가슴을 퍽퍽 치며 말했다. “저도 할게요! 누가 보느냐가 뭐가 중요해? 이 한 몸 무림의 정의를 위해 불살라주마!” 당찬 선언에 최건이 흐뭇하게 웃으며 신강헌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기무혁은 방금 신강헌의 말을 재차 확인했다. “너 진짜 불사를 각오가 된 거지?” “당연하지!” 신강헌은 그 질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되면…… ‘청랑’의 첫 공식 임무가 되는 건가?” 그 뒤에서 김복자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59화. 보다시피 과묵하고 “둘 다 합류하기로 했으니 지금부터 작전을 설명할게.” 기무혁의 말에 김복자와 신강헌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건은 슬쩍 뒤로 빠졌다. 그 역시 제자의 계획에 동참할 계획이었지만, 일단은 셋이서 주도적으로 이야기하도록 둘 생각이었다. ‘옛 생각이 나는군.’ 혈기 왕성한 젊은 협객이었던 시절. 최건도 무림맹의 동료들과 함께 여러 임무에 나섰고, 정의를 실현할 방법을 찾기 위해 밤새 머리를 맞대 고민하고 토론했었다. ‘이 모든 과정이 너희를 더욱 성장시킬 게다.’ 그러니 지금은 가만히 지켜보아야 할 때였다. 젊은 혈기에 잘못된 결정을 내리거나 일을 그르칠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경험도 젊은 후기지수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니까. ‘혹 실수를 하더라도 내가 옆에서 조언을 해줄 터이니…….’ 그렇게 흐뭇한 미소로 세 사람을 지켜보던 최건은 문득, 얼마 전 기무혁과의 내기에서 진 기억이 떠올라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보다 더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적인 정보까지 얻어낸 제자가 아닌가? “……쯧. 하여간 귀여운 구석이라곤 없는 놈이라니까.” 제자 녀석이 실수하는 모습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아서 못마땅해진 스승이 미간을 살짝 구기며 중얼거렸다. “스승님. 뭐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됐다. 하려던 말이나 마저 해라.”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젓는 스승의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했던 기무혁은 금세 다시 친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일월문의 고수로 위장해 대천문의 사업장을 들쑤실 거야.” 정파무림의 중견문파쯤 되면 다양한 사업을 벌이기 마련이었다. 그중에는 합법적인 사업장이 있는 반면, 법의 테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거나 외부에 드러내지 못하는 불법적인 사업장도 있었다. 기무혁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진짜 큰돈은 불법적인 사업장을 통해 벌어들이기 마련이지. 우린 거길 노릴 거야.” 듣고 있던 신강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천문은 중견문파 중에서도 큰 곳이잖아. 그런데 불법적인 사업을 한다고?” “우리 막내가 세상 물정을 모르네. 원래 가진 놈들이 더 지독한 법이란다.” 김복자가 이 순진한 어린애를 어쩌냐면서 등을 툭툭 두드리자, 신강헌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째려봤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니들은 이런 걸 왜 이렇게 잘 알아?” “감당할 수 있겠니?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도련님한테 말해주기엔 너무 위험한 비밀인데…….” “아오 씨!” 낄낄대는 복자와 약올라 미치겠다는 신강헌을 바라본 기무혁이 피식 웃고는 조금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믿을 만한 정보통이 있어. 누군지는 말해줄 수 없지만, 그쪽에서 확인해 준 정보야.” 최건이 관심을 보이는 것이 느껴졌지만 기무혁은 그 이상은 말해주지 않았다. 정보의 출처가 바로 자신의 전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천문이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손을 뻗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위험한 사업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것 정도는 낭인 시절 들은 풍문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만 알면 나머지는 충분히 알아낼 자신이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둔 인맥이 있으니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기무혁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일월문의 무인으로 위장하고 대천문을 건드리면 일월문 쪽에서도 가만히 있진 않겠지. 사건을 조사하려 할 거고, 시선이 우리에게 쏠릴 거야.” 기무혁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최건을 바라봤다. “어수선해진 틈에 스승님이 일월문에 잠입해서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해 주세요. 계획의 큰 틀은 이렇고, 세부적인 건 진행하면서 채워나가죠.” 고개를 끄덕인 최건이 세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몹시 위험한 임무다. 정체를 들키거나 붙잡히면 큰 고초를 겪을 게야. 아니,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못 들은 것으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 “됐어요. 착수금도 벌써 받았으니까.” 김복자는 뭘 자꾸 묻냐는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대답했고, 신강헌은 두꺼운 대흉근을 퍽퍽 두드리며 자신했다. “무섭다고 피하면 협객이 아니죠. 칼에 피를 묻힐 각오는 얼마든지 됐다고요!” “녀석들…….” 최건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특히 신강헌을 바라보다가 제자와 눈이 마주쳤다.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인 기무혁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분위기를 잡았다. “중요한 문제가 한 가지 있어. 일월문이 빙공 계열과 양강무공 계열 두 파벌로 나뉜 건 알지? 빙공은 내가 흉내 낼 수 있어. 하지만 한쪽만 있으면 밸런스가 안 맞잖아?” 빙공뿐만 아니라 양강계열의 고수까지 나타나서 대천문을 공격한다면 대천문의 의심은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월문은 상대 파벌의 음모라며 서로를 비난하고 충돌하게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이보다 혼란을 크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즉, 양강무공의 고수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요해.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너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기무혁이 신강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 어둠의 협객으로서 활약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신강헌은 피부가 뚫어질 듯한 기무혁의 시선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는데, 다가오는 기무혁의 걸음이 더 빨랐다. “아까 정의를 위해 한 몸을 불사를 각오가 돼 있다고 했지? 설마 그거 진심이 아니었냐?” 순간 움찔한 신강헌은 한번 내뱉은 말을 어길 수 없다는 자존심, 그리고 기무혁에게 지기 싫다는 마음에 멈춰 서서 외쳤다. “당연히 진심이지! 네가 눈깔을 그렇게 뜨고 쳐다본다고 내가 쫄 것 같냐? 까짓거 뭐든지 해줄게!” “분명히 네가 한다고 했다.” 턱. 신강헌의 어깨에 손을 올린 기무혁의 미소가 짙어졌다. ‘화염도 신강헌. 화염 적성이 압도적으로 높은 체질이었지.’ 그렇다고 당장 양강계열의 도법을 익혀서 펼칠 수는 없지만, 흉내 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뛰어난 술법사의 도움이 있다면 말이다. “복자야. 술법으로 신강헌한테 불 좀 붙여 줘.” “……뭐?” “말 그대로. 몸에 불을 붙여보자고. 얼마나 잘 버티나 보게.”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뜬 김복자였지만, 눈치로 먹고사는 프리랜서답게 곧바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화르륵! 김복자의 손 위로 귀기 어린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멍청하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신강헌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저항하려고 했다. “잠깐만. 지금 뭔 소리야? 내 몸에 불을 왜 붙여?” “너, 화(火) 적성이 높게 나왔다고 취재진 앞에서 의기양양했었잖아. 이참에 어디까지 가능한지 테스트해보자고.” 파바바박! 전광석화 같은 점혈에 신강헌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그의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비쳤다. “아니, 미치이인! 사람 몸에다 불을 붙이겠다니! 니들이 제정신이냐고!” 기무혁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신강헌의 웃옷을 벗기며 차분하게 말했다. “무림의 정의를 위해서 한 몸 불사를 수 있다며?” “그거랑 이거랑 같냐고, 이 미친놈아-! 선생님도 구경만 하지 말고 말려줘요!” “무릇 정의엔 고난이 따르는 법이다.” 최건은 신강헌의 바지를 종아리까지 내렸다. 옷이 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복자야. 흉물스러운 꼴은 보기 싫으니 복부 아래로는 불이 붙지 않게 주의하거라.” “위쪽만 바싹 구우라는 거죠?” 요구 사항을 확인한 김복자가 신강헌의 몸에 귀화를 붙였다. 화르르르륵! “아악! 당신들 전부 고소할 거야-!” 한동안 고성과 욕설, 비명이 가득한 시간이 지나고 신강헌의 화염 적성 테스트가 끝났다. ‘예상대로네.’ 놀랍게도 신강헌은 김복자가 술법으로 만들어낸 화염에도 수월하게 견뎌내는 모습을 보였다. 피부가 조금 그을리고, 머리카락이 조금 타는 정도로 끝난 것이다. 시술자인 김복자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걸 견디네? 피부가 무슨 방염(防焰) 물질이라도 돼?” “견딘다기보다는 기운을 흡수한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구나.” 최건도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신강헌의 체질에 놀란 표정이었다. 기무혁만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강계열의 도법으로 한국제일도라고 불리게 된 녀석이니까.’ 신강헌은 오행 중 화(火) 속성에 한해서는 기무혁보다 훨씬 뛰어난 적성을 지니고 있었다. 일월문에서도 탐을 낼 만큼 굉장한 재능이었으나, 정작 본인도 이 정도였는지는 몰랐는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나 좀…… 개쩌는 듯?” 그새 좋다고 히죽거리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기무혁이 스승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이만하면 충분히 양강계열 고수로 위장할 수 있겠죠?” “괜찮을 것 같구나. 설마 술법으로 몸에 불을 붙이고 다닌다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테니.” “고수들의 눈도 속일 수 있을까요?” “나 정도 되는 고수면 금세 알아보겠지만…… 대천문에 그런 고수는 없으니 너무 오래 노출되지만 않으면 될 게다.” 그때 신강헌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며 물었다. “근데 있잖아. 내가 불에 못 견디면 어쩌려고 했는데?” “하하하…….” “허허허…….”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리지 말고!” 이후 세부적인 변장 계획까지 세운 후, 최건이 기무혁에게 물었다. “곧바로 대천문의 불법 사업장을 칠 게냐?” 기무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대천문이 불법 사업장을 운영한다는 단편적인 정보만 알 뿐, 정확한 위치는 몰랐으니까. 하지만 장소를 알 만한 인물을 한 명 알고 있었다. “그쪽으로 발이 넓은 지인이 있어서요. 찾아가서 협조를 구하려고요.” “……계획을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 건 좋지 않은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한테 목숨을 한 번 빚진 사람이니까.” 기무혁이 자신 있게 웃으며 말했다. * * * “이게 누구야? 한동안 찾아오지 않아서 어디서 죽은 줄 알았다고!” 황숙수가 호들갑을 떨며 기무혁을 반겼다. 그 뒤로 따라오는 김복자에게도 알은체를 하며 웃어주었다. “레래도 오랜만이네. 요즘 가게에 붙어있질 않는다면서?” “그런 것도 알아요?” “술장사하면 듣기 싫어도 들리는 게 이 바닥 소문이지.” 황숙수는 넉살 좋게 웃으며 두 사람을 직접 안내했다. 그리고 둘의 뒤를 따라오는 낯선 인물을 잠시 힐끔거렸다. “…….” 암루는 여전했다. 사람이 많지 않은 시간대였음에도, 곳곳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저 녀석. 청랑의 고글살인마 아냐?’ ‘레드래빗도 같이 왔네. 어쩐 일이지?’ ‘뒤에 따라오는 놈은 누구야?’ 전보다 감각이 예민해지고 경지가 깊어진 덕분에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선명하게 들렸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고글을 쓰고 복면까지 하고 왔음에도 이제는 그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시끄럽지? 자자, 안으로 들어가자고.” 황숙수는 곧바로 암루에 몇 없는 룸으로 세 사람을 안내했다. 완벽한 방음과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룸. 따로 예약하거나 돈을 지불하지 않았음에도 이곳에 데려온 걸 보니 지난번과 확실하게 태도가 바뀐 게 보였다. 쿵. 룸의 문을 닫자마자 황숙수가 기무혁에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덕분에 뱀 새끼를 찾아냈어. 십 년을 넘게 알고 지낸 놈이었는데, 내 전 재산을 털어먹을 궁리를 하고 있더라고.” “딸기 수확을 제대로 했나봐?” “하하하! 제철이 아니라서 맛은 별로였지만 말이야!” 몇 년 후, 황숙수는 알레르기 과다 반응으로 길에서 변사체로 발견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번에 암루를 찾아온 기무혁이 슬쩍 준 힌트로 배신자를 찾아냈고, 무사히 후환을 제거한 참이었다. 황숙수가 무척 기분이 좋은 얼굴로 말했다. “다시 찾아오면 아주 제대로 대접하려고 기다렸지. 동파육을 좀 만들어 올까? 마침 술도 좋은 게 들어왔는데.” 좋은 술이 들어왔다는 말에 김복자가 침을 꼴깍 삼켰지만,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기무혁을 바라봤다. 기무혁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됐어. 오늘은 정보를 얻으려고 온 거라서 말이지. 볼일만 보고 바로 갈 거야.” 황숙수는 계산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받은 만큼 돌려주고, 보수만큼 일하는 것이 철칙이었다. 낭인으로 오래 살아남은 인물들이 가진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즉, 목숨을 빚지게 한 값은 꽤나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그럼 아쉽지만 대접은 다음에 해야겠네. 은인께서 뭐가 궁금해서 나를 찾아오셨으려나? 아, 그전에…….” 하지만 그만큼 경계심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황숙수가 기무혁의 뒤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낯선 인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명은 못 보던 얼굴이네? 이 안에 있어도 될 만한 사람인가?” “…….” 상대는 키가 훌쩍 크고 등에는 커다란 도를 메고 있었는데,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심지어 얼굴도 눈만 빼고는 붕대로 둘둘 감싸고 있어서 인상착의를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킁킁. ‘몸에서 탄 냄새도 조금 나는 것 같은데.’ 궁금증이 일었지만 황숙수는 섣불리 그것을 묻지는 않았다. 다만 경계의 시선으로 붕대 도객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때 기무혁이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청랑의 막내야. 보다시피 과묵하고 진중한 성격이지.” “…….” 붕대로 입까지 막아버려서 말을 하려고 해도 못 할 것 같은데. 그리고 묘하게 개폼을 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황숙수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60화. 처음 뵙는 얼굴인데 그때 붕대 도객이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등에 멘 도를 꺼내 바닥에 힘껏 찍었다. 콰직! 바닥이 깨져나가며 칼날이 깊게 파고들었다. 마치 자신이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한 무력시위. 하지만 다들 뜬금없는 기물파손에 황당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갑자기 왜……?” “너……!” “…….” 황숙수는 물론이고 김복자와 기무혁도 예상치 못했던 돌발 행동이었다. 다행히 임기응변에 능한 기무혁이 급하게 변명을 만들어냈다. “이 녀석, 자존심 상하는 일을 못 참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앞으로는 언행에 주의해주면 좋겠군.” 내 탓이라고? 황숙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상대가 생명의 은인만 아니었어도 한마디 쏘아붙였겠지만, 그는 겨우 인내심을 발휘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하. 미안하네. 무시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청랑은 하나같이 특이한 사람들만 크루로 받나 봐?” 황숙수는 말하면서 기무혁과 김복자를 차례대로 바라보더니, 이내 스스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또라이와 하나로 묶이는 것이 다소 불쾌했지만, 기무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붕대 도객을 힐긋 바라봤다. ‘멍청아.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 황숙수가 신강헌의 지독한 컨셉질을 적당히 넘어가 줘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일을 망칠 뻔했다. 끄덕! 하지만 신강헌은 기무혁의 눈빛을 다른 의미로 이해했는지, 당당한 눈빛으로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좀 쩔었지?’ 말로 하지 않아도 멍청한 소리가 들리는 것은 왜일까? 붕대로 칭칭 감아서 정체를 감추고, 입까지 막아버리는 예방 조치를 했어도 신강헌은 과연 신강헌이었다. ‘제발 좀 과묵하고 진중한 도객이라는 역할에 충실해라.’ 눈빛으로 신강헌에게 주의를 준 기무혁은 고개를 돌려 황숙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그런 면이 없잖아 있지. 소수 정예를 추구하다 보니까 다들 좀 특이해.” 끄덕끄덕! 소수정예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는 듯, 붕대를 뒤집어쓴 신강헌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다못한 김복자가 지그시 신강헌의 발을 밟았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지.” 기무혁이 다시 분위기를 잡으며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우리가 알고 싶은 정보는 대천문의 ‘뒤쪽’ 사업장이다. 위치, 규모, 이왕이면 고수들이 얼마나 있는지도 알려주면 좋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숙수의 표정이 불편하게 굳었다. ‘뒤쪽’은 불법 사업장의 은어였다. 그 자체야 별로 놀랄 만한 게 아니지만, 앞에 붙은 문파의 이름은 어지간해서는 언급하기 힘든 사이즈였으니까. “……방금 내가 문파 이름을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대천문. 이만한 사이즈면 알 만한 정보통이 당신밖에 없을 것 같더라고.” 잘못 들었겠거니 하는 황숙수의 희망 사항을 산산조각 내는 대답이었다. 방음이 완벽한 룸이었음에도 황숙수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내가 어지간하면 이유도 묻지 않고, 당연히 정보료도 안 받고 그냥 알려주려고 했거든? 근데 이거 건수가 너무 크지 않아? 다른 곳도 아니고 최근에 사건이 터져서 한창 예민할 대천문을……. 아니, 잠깐만.” 정보가 조합되며 어떤 사실을 깨달은 듯, 황숙수가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 사람을 바라보는 그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서, 설마 얼마 전의 대천문 테러. 그거 너희와 관계된 건 아니지?” “…….” “미쳤군! 나 지금 굉장히 곤란해. 어중간한 중견도 아니고 대천문이랑 엮이라고?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그냥 가. 목숨을 구해준 보답은 다른 걸로 하지. 응?”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황숙수다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기무혁은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천문에 대한 정보가 내가 구해준 당신 목숨값보다도 비싼가?” “오늘 구해주고 내일 죽이면 그게 무슨 의미야? 내가 호구로 보여?” 호락호락하지 않은 황숙수의 반박에 기무혁은 준비해 온 수를 던졌다. “당신의 안전은 보장해 줄 수 있어. 왜냐면…….” 기무혁이 중요한 정보란 듯 손짓하며 몸을 숙이자, 황숙수는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귀를 기울였다. “대천문은 조만간 해체될 거거든. 그 전에 최대한 털어먹어도 뒤탈이 날 일은 없다는 뜻이지.” “……!” 대천문은 라이센스 시험에서 벌어진 사건에 연루돼 있었고, 천마신교를 배후에 두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일월문과도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대천문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과 다름이 없었다. ‘일월문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에, 대천문 따위는 이 사실이 까발려진 순간 풍비박산이 날 수밖에 없지.’ 물론 황숙수에게 아직 거기까지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 건을 함께하면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을 거라는 뉘앙스만 풍겼다. 완벽하게 한패가 되어야 뒤통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하, 미치겠군. 헛소리라고 하기에는 내 눈으로 본 게 있으니…….” 황숙수는 미지의 생물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으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그래봤자 얼굴을 가린 고글과 복면밖에 볼 수 없었지만. 잠시 고민하던 그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이내 마음을 굳힌 듯 히죽 웃었다. “혹시 이 판에 나도 끼워줄 수 있나?” 내기도박 중독자. 황숙수는 자기보신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이지만, 확신이 섰을 때는 크게 베팅할 수 있는 배짱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하는 거 봐서. 별 볼 일 없는 정보로 생색만 내진 않겠지?” “하하하! 걱정하지 말라고! 하루만 주면 바닥까지 싹싹 긁어올 테니까!” 기무혁이 암루의 주인이자 뒷세계에서 손에 꼽는 정보통을 같은 편으로 만든 순간이었다. “이제 뭐라도 간단히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 대천문이 숨기고 있는 뒤쪽 사업장 몇 개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중에서도 주요 수입원은…….” 이후, 세 사람은 황숙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 * * 다음 날.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강남의 한 클럽이었다. 화려하게 점멸하는 네온사인 간판을 올려본 신강헌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나 이런 데 처음인데.” “생긴 건 매일 클럽에 출근하게 생겨가지고, 이거 은근히 숙맥이라니까?” 김복자가 코웃음을 치며 신강헌을 놀렸지만, 사실은 그녀도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자꾸만 주위를 힐긋거리고 있었다. ‘이래서 어린애들은…….’ 기무혁은 혼자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앞장섰다. 전생에 돈이 궁할 때 몇 차례 가드로 일한 적도 있었으니까. 그 뒤를 두 사람이 주눅 든 모습으로 쫄래쫄래 뒤따랐다. 무공을 익힌 가드가 입구에서 세 사람을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세요.” 세 사람은 계단을 따라서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반짝거리는 조명과 그 아래에서 정신없이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와…….” “으으.” 새로운 세상을 접한 신강헌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고, 김복자는 불쾌한 듯 미간을 구겼다. 그들이 클럽 안으로 들어서자 은근히 추파의 시선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일단 뭐라도 좀 마시자.” 일행을 카운터로 데려간 기무혁이 적당히 마실 것을 시킨 후,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무공을 익힌 가드는…… 다섯이군.’ 신경이 쓰일 만한 고수는 없었고, 대부분 삼류 무인 수준이었다. 그중 유일하게 이류로 짐작되는 한 명이 어딘가로 향하는 통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저쪽이네.” 기무혁이 잔을 카운터에 내려놓자 신강헌과 김복자의 표정도 변했다.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두 사람의 얼굴에 냉기가 어렸다. “계획대로 난 따로 움직일게.” 김복자가 술법을 펼쳐 자신의 존재감을 지웠다. 그러자 그녀를 힐긋거리던 남자들이 눈을 깜빡이더니,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툭툭. 김복자가 자신의 귀에 낀 이어폰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무슨 일 생기면 알지?” 기무혁과 신강헌이 클럽 내부에 깊게 잠입해 일을 벌이는 동안, 그녀는 따로 움직이며 정보를 수집할 예정이었다. 신강헌이 목을 가볍게 좌우로 꺾으며 김복자에게 물었다. “불씨는?” “붙여 놓을 테니까 아껴서 써.” 화르륵-.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푸른 귀화가 신강헌의 심장 어림에 자리를 잡았다. 따뜻해진 가슴을 가볍게 툭툭 친 신강헌이 씨익 웃었다. 기무혁은 준비가 끝난 동료들을 확인한 후 말했다. “시작하자.” 김복자가 클럽의 인파 사이로 스며들고, 기무혁과 신강헌은 통로를 막고 있는 가드에게 다가갔다. “저기, 우리가 여기 처음인데요.” “……?” “소화제 좀 구할 수 있어요?” 그 말을 들은 가드가 피식 웃더니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두 사람에게 나름의 조언을 건넸다. “너무 많이 먹으면 오늘 집에 못 간다. 재활용되기 싫으면 적당히 먹어라.” 의미심장한 가드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두 사람은 구불구불한 통로를 걸어서 클럽의 깊은 장소에 도착했다. 후우우우욱- 자욱한 연기가 퍼져 있었고, 그 안에서는 낄낄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파와 테이블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늘어져 동태처럼 흐릿한 눈을 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명품으로 보이는 옷과 장신구, 비싼 위스키 병들이 어질러진 채였다. “등신들.” 신강헌이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욕설을 내뱉었다. 대천문의 불법 사업장을 실제로 보자 역겨움이 치미는지, 그의 주먹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있는 집 자식들 대상으로 하는 약이야 뭐 기본이지. 근데 메인은 더 안쪽에 있어. 기무혁은 황숙수가 해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개를 헤치고 나아가자 정신이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음험한 눈빛을 하고, 허리춤이나 품에 무기를 숨기고 있었다. -무림인들이 쓰는 도핑 약도 팔아. 싸구려 말고 진짜 위험한 거. 뭔지 알지? 그런데 그것도 메인이 아니야. 진짜는……. “멈추십시오.” 건장한 체구에 싸늘한 인상의 가드가 두 사람을 막아섰다. 이류에서 일류 사이로 느껴지는 기도를 풍기는 상당히 강한 무인이었다. 걸음걸이에서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힌 절도가 묻어났다. “처음 뵙는 얼굴인데, 초대장을 가지고 계십니까?” 말투는 정중하지만 태도는 고압적이었다. 그의 등 뒤로,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피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정육점이야. 무림인들의 장기를 비싸게 밀매하는 장소. 거기야말로 VIP들만 입장할 수 있지. 난 진짜 궁금한 게…… 그걸 다 어디서 조달했을까? 기무혁이 가드의 뒤편으로 보이는 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초대장은 없는데. 초대해 주신 분의 이름을 밝히면 들어갈 수 있나요?” “……닉네임으로 충분합니다. 명함을 가지고 계시면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기무혁은 품 안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찾는 척했다. 그사이 신강헌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노크하듯 주먹으로 톡톡 두드렸다. 귀화가 일렁이더니 전신으로 서서히 번졌다. “이런, 안 가지고 왔네요. 직접 가서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기무혁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주먹감자를 꺼내 가드에게 내밀었다. “약에 취했나 보군.” 눈썹을 꿈틀댄 가드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가 손을 휘둘러 기무혁의 뺨을 후려치기 직전. “정파라는 새끼가 부끄럽지도 않냐?” 빠악! 먼저 기습적으로 휘둘러진 신강헌의 주먹이 가드의 얼굴에 꽂히고, 동시에 신강헌이 전신에서 불꽃을 점화했다. 화르르르륵! 푸른 화염이 단숨에 전신을 휘감고, 쓰고 있던 인피면구가 타올랐다. 그 안에서 입 주변만 빼고 붕대로 꽁꽁 싸맨 얼굴이 드러났다. “더러운 새끼들. 다 뒈졌어.” 동시에 기무혁도 오행신공을 끌어올려 새하얀 기류를 일으켰다. 기무혁이 문 너머를 바라보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이것들 하는 꼬라지를 보니까, 죄책감 없이 족쳐도 되겠다.” 사아아아아아- 얼음과 불꽃이 지하 클럽을 뒤덮기 시작했다. 61화. 문주에게 전해 클럽 지하의 VIP룸. 재력뿐만 아니라, 신분이 철저하게 확인된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 장소. 그렇기에 그 내부에서 무엇이 거래되는지는 소문만 무성할 뿐, 제대로 된 정보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번에 들어온 상품들입니다.” 정장 차림의 건장한 무인들이 VIP룸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냉장 쇼케이스의 좌우로 시립해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물건을 구매하러 온 바이어들이 유심히 제품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콧수염을 길러 멋을 낸 장년인이 쇼케이스에서 시선을 떼더니 혀를 찼다. “신선도가 전보다 떨어지는데. 등급도 그리 높지 않아 보이고…….” “양 사장. 물건들 상태가 왜 이래?” “단골이라고 아무거나 다 사주는 줄 알아?” 다른 바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다 똑같은 장기처럼 보이겠지만, 깐깐한 바이어들의 눈은 예리하게 차이를 구분해냈다. 양 사장이라 불린 사내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바이어들을 달랬다. 짙은 와인색 정장에 수천만 원짜리 명품시계를 찬 남자였다. “사장님들. 아시다시피 최근에 물건 수급이 조금 어렵습니다. 이게 회 뜨듯이 막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도 어렵게 가져온 겁니다.” 무림인의 장기는 일반인의 장기보다 훨씬 튼튼하고 건강하다는 믿음이 수요를 불러일으켰다. 때문에 보통 장기의 몇 배에서 수십 배까지도 비싸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주문이 많았다. 하지만 그만큼 물건을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어지간한 연줄과 금력, 무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시도조차 불가능한 사업이었으니까. “사정이야 이해하지만, 우리는 뭐 흙 파먹고 살아? 괜찮은 물건이 있어야 사지.” “양 사장. 우리가 거래를 오래해 왔다고, 여기에서만 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최근에 혈호방 쪽에서 나온 물건들 상태가 괜찮다던데…….” 그러나 뒷세계에서 벌어먹고 사는 부류 대부분이 그렇듯 장기밀매를 하는 바이어들도 만만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온갖 이유를 들어 가격을 후려칠 작정으로 제품의 상태를 따지고 들고, 언제든 다른 거래처로 옮길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양 사장 또한 이쪽 업계에서 닳고 닳은 인간이었다. “혈호방…… 걔들이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양 사장이 조용히 미소를 짓자 바이어들이 움찔했다. 뒷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답게 다들 한 가락씩 무공을 익혔다지만, 정제된 고수의 살기에는 뱀 앞의 개구리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길어봐야 몇 달입니다. 아시잖아요? 그런 애들 잠깐 뜨는 듯하다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 정확히는 어떻게 없애버렸는지. 감히 대천문의 사업에 슬쩍 숟가락을 얹으려 했던 자들 중, 대다수는 VIP룸에서 재활용되었다. 바이어들 중에는 그 과정을 직접 본 이들도 있었다. “사장님들.” 양 사장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안색이 나빠진 바이어들을 설득했다. 친근하게 다가가 웃으며 엄살을 부렸다. “제가 다음번에는 품질 좋은 물건들로만 따로 빼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조금 양해해 주시고…….” 그렇게 어르고 달래며 어렵사리 거래를 성사시키려고 할 때였다. 퍼엉! 와장창창! VIP룸 바깥에서 들려온 소란스러운 소리에 양 사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뒤에 있는 수하에게 물었다. “밖에 무슨 일이야?” “싸움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바로 정리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그러나 수하가 VIP룸 바깥으로 무전을 시도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바깥의 소란은 점점 더 커졌다. 꺄아아악! 도망쳐! VIP룸 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에 바이어들의 표정도 불안하게 변했다. 양 사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수하에게 지시했다. “나가서 자세히 알아보고 와.” “예!” 그리고 잠시 후, 상황을 살피고 온 수하의 안색이 변해 있었다. 그가 양 사장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대주님. 습격입니다. 상당한 고수로 보이는 두 놈이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 클럽의 VIP룸, 일명 ‘정육점’을 담당하는 양 사장은 대천문의 비밀 무력대의 대주로 장문인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다. 뒤쪽 사업을 담당하는 인물답게 겉으로는 유들유들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손속이 잔혹하고, 성격이 교활하기로 유명했다. 그가 조용히 생각에 잠기자 눈치를 보던 바이어들이 말했다. “그, 일단 우리는 자리를 피해야 할 것 같은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오는 걸로 하고…….” “아이고, 사장님들! 별일 아닙니다.” 불안해하는 바이어들에게 양 사장이 환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잠깐만 여기 계세요. 제가 나가서 직접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양 사장이 직접 나선다고 하자 바이어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양 사장의 뒤에 대천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놓고 밝힌 적이야 없지만, 이래저래 다 알게 되는 방법이 있었으니까. “뭐, 양 사장이 나서준다면야…….” “우리도 안심하고 있을 수 있지만.” “예예. 가만~히 계시면 금방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비즈니스는 그때 다시 하지요.” 바이어들에게 환히 웃어주고 돌아선 양 사장의 표정이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마침 잘됐네. 우리 고객님들에게 드릴 신선한 물건을 현지에서 수급할 방법이 생겼으니 말이야.” 잔인한 미소를 지은 양 사장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으로 손을 뻗었다. “음?” 그 순간, 이상함을 느낀 양 사장이 문에서 뒤로 훌쩍 물러남과 동시에 커다란 충격이 연달아 문을 때렸다. 콰앙! 콰아앙! 콰아아앙! 몇 차례의 공격에 찌그러진 철문이 삐걱거리더니 쿵-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넘어지고, 그 너머에서 두 인영이 걸어 들어왔다. “후우. 더럽게 단단하네.” 치이이이익- 몸에서 불꽃을 뿜어내는 붕대 괴인이 바닥에 도를 끌며 안으로 들어왔고. 사아아아악- 새하얀 바람으로 몸을 뒤덮은 청년은 무심한 눈으로 VIP룸을 둘러봤다. 냉동 쇼케이스를 발견한 기무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육점이라더니…….” “우읍! 야, 저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지?” “뭘 생각해도 그 이상일걸.” 기무혁이야 낭인 시절에 이보다 더한 꼴을 수없이 보았지만, 신강헌은 냉동 쇼케이스 안의 광경을 보고 토할 것처럼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말로만 들었던 것을 직접 목격하자 더욱 분노가 치미는 듯했다. 칼자루를 꽉 움켜쥔 신강헌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쓰레기들. 다시는 이딴 짓 못 하게 만들어주겠어.” “…….” 양 사장은 조용히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수하에게 손짓했다. 그가 평소에 사용하는 손도끼가 아닌 제대로 된 검을 건네 달라는 표시였다. ‘둘 다 고수다.’ 양 사장은 절정의 초입에 도달한 고수였다. 사업에 재미를 붙인 이후로는 수련보다는 고객 관리에 집중했지만, 본인 스스로 실력이 녹슬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적들도 고수로 보였지만, 직접 나서면 충분히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보아하니 어중이떠중이는 아닌 것 같고, 누구신데 우리 사업장에 이렇게 거친 방법으로 방문하셨을까?” “왜? 누군지 알면 엄마한테 가서 일러바치려고?” “하하하……!” 기무혁은 저런 자들의 성질을 긁는 법을 잘 알았다. 뒷세계에 숨어 왕인 척 행세하는 정파의 바퀴벌레들. 자신의 진짜 정체와 힘을 드러내는 순간, 모두가 벌벌 떨며 무릎을 꿇을 거라고 착각하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등신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너희, 여기가 어딘지 알고 까부는 거…… 흡!” 휘익! 기습적으로 달려든 기무혁의 검이 양 사장의 목을 노렸다. 황급히 뒤로 물러난 양 사장의 넥타이가 반쯤 잘려나갔다. 하마터면 낭패를 당할 뻔한 그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소리쳤다. “대화 중에 기습이라니! 무인이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느냐!” 스르릉.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오며 서슬 퍼런 예기를 뿌렸다. 절정고수가 뿌리는 끈적한 살기가 전신을 옭아맬 듯 다가왔다. 그러나 기무혁은 상대의 살기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 “장기밀매나 하는 주제에 무인? 예의? 혹시 악명이 자자한 사파의 고인을 우리가 몰라뵀나?” “……너, 내가 누군지 다 알고 있구나.” 살기로 번들거리는 양 사장의 눈은 도저히 정파의 무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바로 죽이지는 않으마. 살아 있을 때 해체해야 가장 신선하니까.” 혀로 검을 할짝인 양 사장이 쏜살같은 속도로 기무혁에게 달려들었다. 기무혁도 피하지 않고 검을 맞댔다. 까가가강! 검과 검이 부딪치며 사방으로 불티가 튀었다. 충돌의 여파가 광풍이 되어 사방으로 매섭게 휘몰아쳤다. ‘빙공?’ 양 사장은 몸이 조금씩 굳는 것을 느꼈다. 기무혁의 검에 맺힌 새하얀 기류가 자신의 검을 타고 오를 때마다 뼛속까지 찬 기운이 스미는 느낌이었다. 결코 어설픈 빙공이 아니었다. ‘게다가 같이 온 붕대 도객은 살갗이 뜨거울 정도의 불꽃을 내뿜고…….’ 자연스럽게 양 사장의 머릿속에 빙공과 양강계열의 무공으로 유명한 대문파의 이름이 떠올랐다. ‘설마 일월문이?’ 그는 대천문에서 믿고 위험한 사업을 맡길 만큼 상당한 실력자였다. 눈치도 빠른 편이고, 처세술도 있었다. 양 사장의 표정이 바뀐 것을 확인한 기무혁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네?” “대, 대체 무슨 생각이냐! 이런 일을 벌이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가만히 안 있으면? 대천문 따위가 뭘 할 수 있지?” “……!” 대천문을 발아래에 둔 듯한 오만한 발언에 양사장의 의심은 확신에 가까워졌다. 설상가상으로 분한 듯 이를 악무는 양 사장의 뒤편에서, 낮게 변조한 신강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다 정리했다.” 기무혁이 양 사장과 싸우는 동안, 신강헌은 도망치려고 한 바이어들과 수하들을 전부 제압하고 싸움에 합류했다. 화르륵! 불길에 휩싸인 도가 양 사장의 허리를 노렸다. 몸이 두 쪽 날 상황에 양 사장이 간신히 검을 돌려서 공격을 막았다. 쩌어엉! “큭! 무슨 힘이……!” 주르륵 뒤로 밀려나는 그에게 기무혁이 따라붙었다. 양 사장이 비장의 수로 숨겨뒀던 비수를 꺼내 던졌지만, 기무혁은 고개만 까딱여서 간단히 피했다. “으아아아아!”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한 양 사장은 어금니 사이에 넣어두었던 약을 씹었다. 단시간에 내공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켜주는 약이었다. 양 사장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자 신강헌이 흠칫해서 물었다. “조심해야 하는 거 아냐?” “약 기운 제대로 돌기 전에 빨리 패면 돼.” “간단하네!” 신강헌까지 합류하자 이후의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사방이 그을리고 얼어붙었다가 녹아내리길 반복했다. 양 사장은 약의 도움으로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한참을 흠씬 두들겨 맞았다. 퍼억! 결국 검을 놓친 양 사장이 초주검 된 몰골로 쓰러졌다. 주름 하나 없었던 명품 브랜드 정장은 다 찢어지고, 얼굴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피멍이 들었다. 그 앞에 쪼그려 앉은 기무혁이 말했다. “문주에게 전해. 이쪽에 뻗어둔 사업 다 접으라고.”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너희들도 불만은 없었을 텐데!” 양 사장은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애초에 이 사업은 일월문의 협조를 받아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대천문 혼자서는 꾸준히 그 많은 무인들의 장기를 구하기란 불가능했으니까. 당연히 사업장에서 나오는 수익의 상당부분을 일월문에게 넘겨주었는데……. “뭐, 나쁘지는 않았지.” “그런데 왜!” “그래서 유통을 거치는 것보다는 직접 하는 게 낫겠더라고.” “……!” 씨익 웃어준 기무혁은 내공을 실은 발차기를 양 사장의 단전에 깊게 꽂았다. 퍼어억! 기가 실린 일격이 체내로 파고들며 단전을 부숴버렸다. 눈이 뒤집힐 정도의 격통이 뒤따랐다. “꺼흐윽……! 일월문, 네놈들……!” 양 사장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의식을 잃으며,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일월문을 저주했다. 62화. 팔대문파가 아니고서야 기무혁과 신강헌이 아래로 내려가 깽판을 치던 그 시각, 김복자는 술법으로 존재감을 지운 후 클럽 곳곳을 조사 중이었다. “사장실은 저쪽인 것 같고, 술 창고는 저기 뒤편, 그럼 도대체 현금다발은 어디에 쌓아두고 있으려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다니는데도 누구도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클럽의 구조와 주요 인사들의 위치 파악을 거의 끝냈을 때, 귀에 낀 이어폰에서 기무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작한다.] 톡톡. “오케이. 이쪽도 시작함.” 이어폰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대답한 김복자는 미리 점찍어둔 타깃을 향해 걸어갔다. 동시에 클럽 내 가드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실장님. 아래 쪽에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데?” “밑에서 어떤 미친놈들이 소란을…….” 가드들 중에서도 무공을 익힌 듯 보이는 몇몇이 저들끼리 수군대더니 전부 황급히 아래로 내려갔다. 정신없이 몸을 흔드는 사람들 대부분은 술에 취해 그런 사실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덕분에 훨씬 편해지겠어.’ 김복자는 가드들이 사라지면서 보안이 헐거워진 클럽을 살피며 씨익 웃었다. 잠시 후, 타깃 앞에 멈춰 선 그녀가 술법을 해제했다. 상대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자, 깜짝 놀란 타깃이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와우, 이런 미인이 왜 혼자 다니신대?” 눈여겨본 클럽 MD 중에서도 수완이 좋은 남자였다. 멀끔한 외모와 상대방을 정신없게 만드는 말빨로 손님들을 구워삶는 것이 능숙해 보였다. ‘게다가 약 기운도 진동하고 말이지.’ 클럽에서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 남자는 흐릿하게 풀린 눈으로도 자연스럽게 영업을 시도했다. “진짜 미쳤다. 빨간 머리 왜 이렇게 잘 어울려? 혹시 인플루언서야?” “나 가고 싶은 테이블이 있는데, 안내 좀 해줄래?” “오우! 얼마든지!”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김복자가 싱긋 웃어 주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귀화가 피어올랐다. “까귀. 물어.” 그러자 허공에서 까만 솜사탕 같은 망령이 나타나 MD의 얼굴을 덥석 물었다. 마치 까귀가 MD의 얼굴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실제로는 정신을 장악하는 중이었다. 잠시 후, 이미 약으로 흐물흐물해진 MD의 정신에 쉽게 침투한 까귀가 상대의 몸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캬캬캬!” 입꼬리가 올라간 그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더니,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봤지만 클럽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김복자가 신이 난 까귀의 등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가자. 사장이 있는 테이블로.” 클럽의 MD가 앞에서 안내하자 가드들도 길을 비켜주었다. 뒤따르는 여자가 특별한 손님이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벌컥! 노크도 하지 않고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중년의 남자가 초조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움찔하며 돌아봤다. “……뭐야?” 중년의 남자는 대천문이 세워놓은 바지사장이었다. 지하 정육점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잔뜩 긴장해 있던 그는 익숙한 MD의 얼굴을 보자마자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이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그러나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질 줄 알았던 MD는 휙 손을 뻗어서 재떨이를 낚아챘다. 무공고수를 연상케 하는 손놀림이었다. “캬캬캬!” 완전히 맛이 간 얼굴로 다가오는 MD를 보며 바지사장이 침을 꼴깍 삼켰다. “너, 너 왜 이래? 지금 뭐 하는…….” 그 뒤에서 쿵- 소리와 함께 문을 닫아버린 김복자가 섬뜩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괴이들을 소환했다. “삽살이, 왕뱀이.” 그러자 사람이 타고 다녀도 될 만큼 커다란 하얀 개와 혀를 날름거리는 누런 구렁이가 스르륵 나타나 김복자의 양옆에 섰다. 원래 평범한 사람들은 눈이 트이지 못해서 괴이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술법사가 괴이에 술법을 걸면 보통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도록 구체화할 수 있었다. “가서 잡아 와.” 김복자는 지금부터 해야 할 일들을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 기꺼이 괴이들에게 술법을 걸었다. “히이익! 주, 죽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괴이들을 보고 비명을 지른 바지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김복자와 괴이들을 향해 발사했다. 탕탕탕탕! 그러나 총알은 괴이들의 거죽조차 뚫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삽살이가 거대한 몸으로 김복자를 완벽하게 가려주었고, 그사이 왕뱀이는 바지사장을 제압해 쓰러뜨렸다. 김복자가 저벅저벅 걸어와 바지사장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 방음 되게 잘 되네? 아니면 바지사장이라 아무도 관심이 없는 건가?” “끄으윽……!” 거대한 구렁이에게 전신이 휘감긴 바지사장이 공포심에 바들바들 떨었다. 방금 전 총성이 울려 퍼졌지만, 클럽의 시끄러운 음악 탓에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대천문에서 세워놓은 바지사장 따위, 상대의 말대로 죽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고개를 치켜든 바지사장이 한 줄기 희망을 가지고 상대를 협박했다. “저, 저 아래에 쳐들어온 놈들이랑 한패냐? 이 클럽이 누구 소유인지나 알고…….” “대천문이잖아. 그래서 털어먹으려고 왔는데?” “알면서 왔다고……?” 멍청한 표정을 짓는 바지사장 앞에 쪼그려 앉은 김복자가 싱긋 웃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화만 잘 통하면 나도 해칠 생각은 없어요. 얘들이 사람 고기는 맛없어서 잘 안 먹거든?” 그러면서 소만 한 삽살개와 구렁이를 쓰다듬는데, 녀석들이 흉악한 이빨을 드러내며 군침을 뚝뚝 흘렸다. 크르르……. 바지사장은 오줌을 지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울먹이며 빌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누가 죽인대? 차근차근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마시고. 근데 여기 은근히 현금 결제 하라고 유도하던데, 현금은 어디다 보관해요?” 그렇게 김복자는 바지사장으로부터 현금을 보관하는 장소와 약 보관처, 거래처와 VIP 명단 등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근데 있잖아. 들어볼수록 아저씨 못된 인간이네. 그냥 세워 놓은 허수아비가 아닌데?” 바지사장은 지하 클럽에서 벌어지는 일을 생각보다 상세히 알고 있었고, 장기밀매 사업에도 엮여 있는 인간말종이었다. “왜, 왜 이래? 분명히 아까 살려준다고 약속했잖아-!”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바지사장이 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그니까…… 누가 죽인대?” 김복자의 눈에서 새파란 귀화가 피어오르고, 잠시 후 바지사장은 눈이 게게 풀린 채로 입에서 침을 줄줄 흘렸다. “히히힛……. 흐히히힛…….” 바지사장은 지금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자신의 이름이 뭐였는지조차 떠올리지 못할 테니까. 할 일을 모두 마친 김복자가 스마트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했다. “숙수 아저씨. 바깥은 어때요?” 세 사람이 클럽으로 들어와 있는 동안, 황숙수는 클럽 밖에서 정보 차단과 뒤처리를 맡았다. [노 프라블럼! 앞으로 한 시간은 대천문에서 아무것도 눈치 못 챌 거야. CCTV도 전부 막아놨고, 내 인맥으로 약도 좀 쳐놨지. 흐흐흐.] 낭인 출신인 황숙수는 오랜만에 현장에 나온 것이 즐거운 듯했다. 비록 직접 나서지는 않고 청랑 크루를 백업하는 역할이라도 말이다. “명단이랑 현금은 우리가 올라가면서 챙겨갈게요. 정육점에 있는 물건들은 나중에 아저씨가 옮겨줘요. 대신 약은 전부 폐기하기로 한 거 기억하죠?” [그 비싼 걸 그냥 버리려니 아쉽긴 하지만…… 나야 작전에 얹혀가는 입장이니 그러려니 해야지.] 황숙수는 약을 폐기한다는 결정에 못내 아쉬워했지만, 청랑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작전을 세울 때부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무림인의 장기는 정말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챙겨간 뒤 병원에 넘기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약은 전부 폐기할 거라고. [크으! 뒷세계 무림인들에게도 낭만이 있다 이거지? 역시 젊구나, 젊어.] 청랑의 진짜 정체를 모르는 황숙수는 장난 반 감탄 반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때마침 기무혁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정리 끝났어. 그쪽은?] “여기도 끝. 올라와. 전리품 좀 챙겨서 같이 가게.” 잠시 후,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고도 시큰둥한 표정인 기무혁과 기세등등한 신강헌이 클럽으로 올라왔다. “별일 없었고?” “오늘도 난 개쩔었지.” “생각보다 약하더라.” 세 사람은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며 클럽을 나섰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클럽에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시끄러운 음악과 함께 사람들이 몸을 흔들고 있었다. * * * “지랄하지 마! 내가 병신이라니! 단전을 못 고친다니-!” 지하 클럽에서 양 사장이라 불린 남자, 양준석은 눈을 뜨자마자 평생의 내공이 쌓인 단전이 깨져 회복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현대의 의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망가진 단전만큼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으아아아아-!” 무인으로서 사망 선고를 받고 반쯤 미쳐가던 그에게 대천문의 문주가 찾아왔다. “……몸은 좀 괜찮으냐?” 양준석은 문파의 문주이자 사적으로는 친척 형제이기도 한 그에게 분노와 억울함을 토해냈다. “문주님! 저를 이 꼴로 만든 놈들, 하나는 빙공을 쓰고 하나는 양강무공을 사용했습니다. 일월문 놈들입니다!” 악귀처럼 시뻘겋게 일그러진 얼굴로 양준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형님! 제 복수를 해 주십시오!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 주십시오!” “…….” 대천문의 문주 양준표는 하루아침에 병신이 된 사촌 동생을 딱하다는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고, 그 옆에는 구자승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양준표는 사촌 동생이 악을 쓰다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놈들이 자기 입으로 일월문이라고 했느냐?” “일월문이라고 말만 안 했을 뿐이지 대놓고 티를 냈습니다!” “왜?” “……예?” “일월문이 그럴 이유가 없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와 척을 져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정한 물음에, 잠시 대답을 못 하던 양준석은 다시금 분노가 끓어오르는지 이를 빠드득 갈았다. “형님은 그럼 제가 어중이떠중이가 익힌 빙공에 당했다는 말씀입니까?”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일월문이 아니면 내가 별것 아닌 놈들에게 당한 거고, 거기 있었던 대천문의 무인들도 전부 병신이라서 뒈졌다는 말 아닙니까?” 흥분한 양준석은 상대가 자신이 속한 문파의 문주임에도 거친 말을 함부로 쏟아냈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구자승이 나서서 만류할 정도였다. “대주. 문주님 앞에서 언행에 주의해 주십시오.” “닥쳐라! 어린놈이 장로랍시고 기고만장해서 까불지…….” 폭언을 쏟아내던 양준석의 몸이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점혈로 사촌 동생을 기절시킨 문주가 낮게 혀를 차며 말했다. “돌아가지.” “예.” 두 사람은 기절한 양준석을 뒤로하고 병실을 나섰다. 구자승이 문주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룻밤 만에 세 곳이 공격당했습니다.” “전부 같은 놈들 소행인가?” “정황상 그렇게 보입니다. 빙공을 쓰는 검객과 양강무공을 쓰는 도객, 그리고 술법사 한 명을 파악했습니다.” “이해가 안 돼. 지난번 테러도 그렇고……. 적들이 정말 일월문일까?” 대천문의 문주 양준표는 냉정하고 합리적인 성격이었다. 때문에 오랜 동맹이었던 일월문의 배신, 혹은 토사구팽으로 보이는 최근의 습격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엔 대천문과 일월문은 아직 서로에게 유용한 관계였으므로. “문주님. 모든 정황이 일월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문주가 가장 신뢰하는 장로이자, 지난번 테러에서 직접 빙공을 쓰는 검객과 검을 맞댔던 구자승마저 상대를 일월문의 고수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저와 싸웠던 검객은 귀음방을 언급했습니다. 본문과 일월문밖에 모르는 비밀을 말입니다.” “으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양준표가 낮게 침음했다. “게다가 적들은 사업장에 배치한 본문의 무인들을 농락할 정도로 뛰어난 고수들입니다. 국내에서 그만한 빙공과 양강무공을 익힐 수 있는 문파는 일월문이 유일합니다.” “…….” 정육점은 대천문의 뒤쪽 사업장 중에서도 매출이 가장 높은 곳 중 하나였다. 그래서 절정고수인 양준석을 비롯해 충분한 인력과 고수들을 배치했고, 보안시설에도 신경을 썼다. 그런데 하룻밤 새에 전부 뚫렸다. 정육점을 비롯해 공격당한 세 곳 모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말이다. 더 황당한 것은 사업장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 것도 습격 후 몇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는 것이다. 명백히 프로의 솜씨였다. “하나같이 전문가들이고 정예입니다. 저희의 알토란같은 사업장만 골라서 건드렸고요. 저희가 관리하는 사업장 위치를 이미 알고 있는 놈들의 소행인데, 팔대문파가 아니고서야 이런 수준의 작전이 가능한 세력이 있겠습니까?” “본문의 최정예를 동원해도 쉽지 않겠지…….” 무인들이 배치된 사업장을 농락할 수 있는 고수들과 술법사. 그리고 정보를 교란하는 배후 공작원. 팔대문파 정도의 세력이 아니라면, 그만한 수준의 스페셜리스트들을 하나하나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만약 일월문이 정말로 우리를 쳐내려는 것이라면…….” 비로소 대천문주의 마음에도 의심과 분노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절대 혼자서는 안 죽는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양준표가 독기 어린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63화. 너는 아니지? 창밖으로 휘황찬란한 도시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장소. 한국무림을 대표하는 팔대문파인 일월문의 장문인이 기거하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일월문주 장진명은 창밖을 바라보며 대천문주와 통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문주께서 심려가 깊으시겠습니다. 빌딩의 피해도 수습하기 쉽지 않으실 텐데, 별 잡스러운 놈들이 사업장을 습격하다니요.” [저보다는 제자들이 걱정입니다. 흉수들의 습격에 많이 상하고 다쳤습니다. 특히…… 화상과 동상이 고통스러운 모양입니다.] 은근슬쩍 자신을 떠보는 상대의 말에 장진명은 잠시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저도 들었습니다. 흉수들이 감히 본문의 무공을 흉내 냈다지요? 그렇지 않아도 문주께서 오해를 하실까 봐 염려가 크던 참입니다.”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빙공과 양강무공의 고수가 어디 일월문에만 있겠습니까? 다만 다친 제자들은 감정이 격해졌는지 자꾸만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서…… 겨우 달래는 중입니다.]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뻔히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 느껴졌다. 창문에 비치는 장진명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으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이럴 게 아니라 조만간 한번 만나 뵙고 이야기 나누도록 하지요. 대천문을 습격한 자들을 잡는 데 저희도 최선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예. 조만간 뵙도록 하지요. 저 또한 두 문파의 동맹과 우정이 굳건함을 제자들에게 알릴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별말씀을. 곧 화상과 동상에 좋은 약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장문인의 배려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통화를 끝내자마자 장진명의 표정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졌다.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파르르 떨려 나왔다. “시건방진 놈. 감히 누구보고 걱정하지 말라느니…….” 장진명의 날숨에서 불티가 튀어 올랐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몸 주변으로 검붉은 불길이 잠시 일렁였다가 가라앉았다. 최근에 익히기 시작한 무공의 부작용으로 감정이 격해지면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잠시 심호흡으로 평정을 찾은 장진명이 돌아서며 말했다. “흑연(黑燕).” 잠시 후, 허공에서 스르륵 모습을 드러낸 흑의인이 장진명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예. 주군.” 흑연은 일월문주 장진명의 오래된 심복이었다. 장진명의 명령으로 무림맹 뇌옥에 사로잡힌 살수들을 제거해 입을 막고, 검마의 추격을 피해 도망친 후 대천문에 폭탄을 설치하고 사라진 장본인이기도 했다. “본문의 무공을 흉내 내 대천문을 습격한 놈들이 있다. 짐작 가는 바가 있느냐?” “…….” 흑연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말을 아꼈다. 일월문주도 바로 답이 나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은 듯, 혼자서 추측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장 의심되는 쪽은 무림맹이다. 네가 뇌옥에 침투하기 전에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면 맹에서 우리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수도 있을 터, 현시점에서 대천문과 우리를 이간질해서 가장 이득을 볼 세력 또한 무림맹이니…….” 장진명의 추리는 직관적이었고 진실에도 상당히 가깝게 닿아 있었다. 하지만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흑연이 조심스럽게 반대 의견을 내며 고개를 들었다. “제 짧은 소견으로 무림맹의 소행은 아닐 듯합니다.” “이유는?” 흑연은 범인이 무림맹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조목조목 설명했다. “첫째, 그 짧은 시간 내에 대천문의 뒤쪽 사업장을 파악하기엔 무림맹의 정보력이 떨어집니다.” “둘째, 무림맹에 사로잡혔던 살수들 대부분 누가 본인들을 사주했는지 알지 못하며, 흑백들은 교에서 훈련받은 자들입니다. 저희가 노출되었을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셋째, 대천문을 습격한 흉수들의 수법이 잔인하고 치밀했습니다. 이는 결코 무림맹의 방식이 아닙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장진명이 마지막 말에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여필극 그 늙은이는 자신이 정의로운 협객이라고 생각하지. 그 주변에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고…….” 반면 대천문을 습격한 자들의 행보는 파격적이고 거칠었다. 무림맹의 꽉 막힌 무인들이 저지른 짓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그럼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흑연과 대화를 나눌수록 일월문주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적이 될 수 있는 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설마 본문에 배신자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팔대문파 중 하나가 이 일에 개입한 것이라면?’ ‘혹시 빙하신녀 그 눈엣가시가 눈치를 채고…….’ 누군가가 자신의 계획을 눈치채고 훼방 놓는다는 생각에 살심이 들끓었다. 마음이 어지러워지자 머리에 피가 잔뜩 쏠리는 기분이었다. “설령 그게 누구든…….” 눈앞에 있으면 산 채로 갈아 마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숨이 붙어있는 채로 사지를 뽑고 잔인하게 도륙해 피를 폭포처럼 쏟아내게 만들 것이다. “흐흐흐…….” 장진명이 괴소를 흘리며 진득한 살기를 흘릴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큰 소란이 벌어졌다. “대, 대장로님!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비켜라. 나도 참을 만큼 참았으니까!” 장문인실 바깥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소란을 일으킨 자는 곧 힘으로 밀어붙이고 들어올 기세였다. 황급히 제정신을 차린 장진명이 흑연에게 명령했다. “너는 가서 누가 범인인지 알아내 보고해라. 지금 당장!” “존명.” 흑연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직후, 장문인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한 여인이 성큼성큼 들어섰다. 눈처럼 새하얀 백발을 허공에 흩날리는 중년의 여인. 바로 일월문의 최고수이자 장문인조차 무시할 수 없는 대장로 빙하신녀였다. “대장로가 연락도 없이 갑자기 여긴 어쩐 일이오?” 장진명이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묻자, 빙하신녀 또한 매서운 눈길로 그를 쏘아보며 답했다. “몇 번이나 약속을 잡으려고 연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장문인께서 저를 만나주질 않으시니 무례를 범할 수밖에요. 놀라게 해드린 점은 사과드리지요.” 그러나 사과한다는 말과 달리 빙하신녀의 고개는 뻣뻣했다. 오히려 무언가를 찾듯 방 내부를 둘러보는 눈길이 불경할 정도로 무례했다. “선객이 있는 줄 알았는데, 벌레라도 들어왔다 나갔나 보군요?” 방금 전까지 있었던 흑연의 기척을 느끼고 비꼬는 것이었다. 또한 무얼 숨기고 있냐는 추궁이기도 했다. 장진명이 정색하며 되물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대장로에게 보고라도 해야 하나?”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습니까? 장문인이 켕기는 일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 “…….” 장문인과 대장로. 빙공과 양강무공으로 나뉘는 두 파벌의 수장이기도 한 두 사람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잠시간의 눈싸움 끝에 장진명이 퉁명스레 물었다. “그래. 이렇게 무례한 방식으로 찾아올 정도로 급한 일이 뭔지 들어나 봅시다.” 빙하신녀가 가져온 서류를 장문인의 책상에 올리며 말했다. “하윤이를 납치하려 한 자들의 배후를 본격적으로 수색할 겁니다. 무림맹과 다른 팔대문파에도 협조를 요청할 계획이고요. 장문인의 결재가 필요합니다.” 빙하신녀는 하나뿐인 제자가 살수들에게 납치될 뻔한 것을 잊지 않았으며,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배후를 찾아내 응징할 계획이었다. “…….” 서류를 대충 살핀 장진명이 그것을 다시 자리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대장로의 마음은 이해하겠소. 하지만 지금은 이것보다 급한 일이 여럿…….” 콰앙-! 빙하신녀가 장문인의 책상을 내리쳤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치고, 사나운 기파가 눈보라처럼 휘몰아쳤다. “하윤이는 단순히 내 제자가 아니라 다음 대 장문인 후보입니다. 문파의 미래가 꺾일 뻔했는데, 이보다 급한 문제가 있으시다고?”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장진명의 몸에서도 불꽃같은 기파가 피어올라 그의 몸을 휘감았다. 당장에라도 출수할 것처럼 기세를 끌어올린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장진명.” “현은하.” 두 사람이 서로의 본명을 불렀으나 그것은 친근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후기지수 시절부터 앙숙이었던 그들이었다. 그리고 장진명은 아주 오래전부터 빙하신녀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네 행동은 명백한 월권이다. 문파 내 최고수라고 떠받들어주니 장문인도 눈 아래로 보이나?” “왜 항상 결론이 그런 식이지? 예전부터 넌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무시한다고 생각했었지.” “실제로 그랬으니까.” “네 열등감이 그렇게 들리게 했겠지.”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일월문에 입문해 경쟁했지만, 문파 내 최고의 후기지수는 언제나 빙하신녀였다. 때문에 장진명은 ‘시기가 좋아서 장문인이 되었다.’라는 수군거림을 들어야만 했다. 그들이 처음 만난 수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현은하. 더 이상 선을 넘지 마라.” “…….” 장문인을 한참 노려보던 빙하신녀가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먼저 몸을 돌렸다. “좋아. 오늘은 그냥 가지. 보아하니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도 아닌 것 같으니까. 다음 수뇌부 회의 때 정식으로 이 안건을 올리겠어.” 그대로 장문인실을 나가려던 빙하신녀가 멈춰 서더니 장진명을 돌아봤다. 장문인을 바라보는 대장로의 눈에 일말의 불안감이 비쳤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어렵게 입술을 뗐다. “진명아. 너는 아니지?” “……또 선을 넘으려고 하는군.” “아닐 거라고 믿는다. 아니어야 해. 만약 내 제자와 관련된 일에 네 이름이 나온다면…….” 화아아아아악-! 방 안에 무시무시한 한기가 몰아쳤다. 단숨에 주변 일대를 전부 얼려버릴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문파가 두 쪽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니까.” 짧은 경고를 남긴 빙하신녀는 문을 닫고 나갔다. 장진명은 그녀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같은 곳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저 괴물 같은 것이…….” 일월문. 한국무림을 대표하는 팔대문파. 견고해 보였던 그들의 성벽에 생긴 균열이 점점 크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 * “흐하하하! 풍작이구나, 풍작이야!” 황숙수는 지난 며칠 동안 몰라보게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암루의 창고에 가득 쌓여 있는 물건들 때문이었다. 전부 대천문의 사업장에서 챙겨온 것으로 현금다발과 가치 있는 현물까지. 암루 매출의 몇 년 치에 달하는 양이 쌓여 있었다. “그냥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네!” 일부는 장물로 처리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이 남아 있었지만, 그깟 수고야 벌어들인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저씨. 수수료 떼고 계산 정확하게 해요. 몰래 뒷주머니 챙기면 까귀한테 밥으로 줄 거니까.” 김복자가 옆에서 눈을 희번득하게 뜨고 협박을 해도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붕대 도객이 개폼을 잡으며 노려봐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후후후! 나 황숙수 신용 빼면 시체인 인간이야. 믿고 맡기라니까!” 그 유들유들한 미소가 어딘가 찜찜했지만, 김복자는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옆에 있는 기무혁을 바라보며 정말 이 인간을 믿어도 괜찮겠냐는 표정을 지었다. 기무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장물은 이쪽이 전문가니까 믿고 맡겨야지.” “하하! 이래서 어떤 분야든 전문가가 필요한 법이지. 내가 책임지고 전부 제값을 받아올 테니까…….” 황숙수의 머릿속에서 장물을 전부 팔아치운 후 얼마의 ‘추가 수수료’를 뗄까 하는 생각이 가득할 때였다. “만약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그땐 우리 쪽 전문가가 나서면 되고.” “응?” 그 의미심장한 말에 황숙수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목덜미에 닿은 서늘한 검의 감촉을 느꼈다. “그 썩어빠진 놈들에게서 많이도 챙겨왔구나.” “……!” 황숙수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까랑까랑한 상대의 목소리에서 칼날 같은 예리함이 느껴졌다. ‘대체 언제? 아니, 어떻게?’ 그들이 있는 창고는 암루에서 보안이 가장 삼엄한 장소였다. 애초에 찾기도 힘들뿐더러, 몰래 들어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황숙수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검은 야차 가면을 쓴 상대가 그의 목덜미에 손가락 하나를 올려두고 있었다. 분명 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손가락이었던 것이다! “누, 누구신지?” 꿀꺽……. 낭인 시절 살수라면 숱하게 만나고 상대해 보기도 한 황숙수였다. 하지만 아예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상대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 정도면 특급 살수잖아? 대체 청랑이라는 곳은…….’ 크루 청랑에 대한 황숙수의 평가는 계속해서 고점을 갱신하고 있었다. “여긴 우리 크루의 전문 살수.” 기무혁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소개하자, 가면을 쓴 검마가 피식 웃었다. “이놈이 네가 말한 정보통이더냐?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것이 믿을 만한 놈으로 보이진 않는데…….” “능력만큼은 확실해요. 나름 신용도 있고요.” “뭐,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하여간 전해줄 소식이 있어서 급히 들렀다.” “저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눈알만 좌우로 굴리던 황숙수가 슬쩍 자리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황숙수는 자신의 그릇을 알았다. 딱 여기까지. 여기서 더 깊게 엮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두 분 편하게 이야기 나누시죠? 저는 나가서 가게를 좀 봐야 해서…….” 기무혁은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돌려 검마를 바라봤고, 그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검마는 하려던 말을 마저 했다. “곧 무림맹에서도 본격적으로 움직일 게다.” “……!”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이름이 나오자 황숙수는 차라리 기절해버리고 싶었다. 64화. 우리 크루에 들어와 대천문의 사업장을 털어먹은 것도 결과가 좋아서 망정이지,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간덩이에 부담이 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무림맹이 튀어나온다고? “나,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걸로…….” 황숙수는 뒷세계에서 알아주는 정보상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여기서 더 깊게 엮이면 발을 빼기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래서 뒷걸음질로 빠져나가려는데, 기무혁이 어느새 다가와 그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나한테 대체 왜 이래?’ 황숙수가 억울한 표정으로 째려보는 것을 못 본 척하며, 기무혁이 최건에게 물었다. “무림맹이요? 조금 더 지켜보다 나설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놈들이 더 크게 흔들리는 모양이다. 맹주도 이 기회를 놓치기 싫은 게지.” 평소였다면 ‘맹주님’이라고 존칭을 붙이며 말했겠지만, 최건도 황숙수를 의식해서인지 애매한 호칭을 사용했다. 정보를 주되 모호하게 흘려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함이었다. 예상대로 황숙수는 큰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맹주? 지금 무림맹주 말하는 거야? 이거 대체 어디까지 얽혀 있는 거야?’ 슬쩍 옆을 돌아보니 레드래빗은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이었고, 붕대 도객은 심심한지 창고 바닥을 거대한 도로 긁고 있었다. 끼이이익…….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마치 망나니가 칼 가는 소리처럼 섬뜩하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 꿀꺽. 황숙수는 자신에게 어깨동무를 한 기무혁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꼼짝도 못 하고 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여기서 나를 토사구팽하려는 건 아니겠지…….’ 안절부절못하고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이는 황숙수의 모습에, 기무혁이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친근하게 말했다.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래? 몰래 장물 빼돌려서 삥땅치려다가 생각보다 큰일에 휘말렸다는 걸 깨닫고 X됐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 사람처럼?” 움찔. 움찔. 기무혁의 한마디 한마디에 황숙수가 몸을 떠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 그 반응에 황숙수를 바라보는 세 사람의 눈이 가늘어지자 그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하하! 이 친구 농담도 참 잘한다니까! 유머 감각이 아주 그냥 코미디언…….” “…….” 어림도 없다는 듯 싸늘한 기무혁의 반응에 황숙수는 눈치 빠르게 이실직고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 약간의 수수료만 챙길 생각이었어. 장물을 처리하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래서 수고비 느낌으로 진짜 조금만…….” 황숙수가 본 크루 청랑은 아직까지 극소수인 데다 소속된 인물들은 하나같이 젊었다. ‘고글 안에 있는 얼굴은 못 봤지만, 목소리나 말투만 봐도 알지.’ 실력이야 어디서 이런 괴물들만 모아놨나 싶을 정도로 뛰어나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조금 얕잡아 본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이 없으면 장물을 처리해 줄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것은 기무혁을 너무나 만만하게 본 판단이었다. “내가 장물아비 하나 못 찾아서 당신에게 맡긴 줄 알았어? 나름 신뢰가 쌓여서 믿고 맡겨보려 했는데……. 대놓고 등쳐먹을 생각을 하는 모습을 보니 실망이 크네.” “아니…….” 애초에 낭인으로 황숙수 이상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기무혁을 등쳐먹는 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하! 내가 이 아저씨 그럴 줄 알았다니까!” “쯧쯧. 놀랍지도 않구나. 뒷세계에 발 담근 종자들 중 뒤통수치지 않는 놈을 찾아보기가 힘드니…….” 쿵쿵쿵-! 차례대로 김복자, 최건, 그리고 컨셉 때문에 말은 못 하고 칼로 바닥만 내리치는 신강헌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황숙수도 할 말이 있는지 다소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뒤통수라니? 이 정도는 그냥 업계의 암묵적인 관행이라고 봐야지. 애초에 구린 일 알아봐달라고 찾아왔으면서 너무 나만 나쁜 놈으로 만드는 거 아냐?!” “생명의 은인에게도 업계의 관행이 적용되나 봐?” “……흠흠. 그건 미안하게 됐어.” 아무리 뻔뻔해도 그 말에는 뭐라고 반박하지 못하겠는지 황숙수가 헛기침을 하며 사과했다. 그러자 기무혁은 기다렸다는 어깨동무를 한 황숙수의 몸을 잡아당겼다. “말로만 미안하면 다야? 행동으로 보여줘야지.” “……?” 황숙수가 생각한 최고의 그림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것이었다. 대천문의 사업장을 충분히 털어먹고 재미를 보았으니, 장물만 처리하고 나면 이번 일에서 발을 뺄 생각이었다. 그러나 기무혁은 황숙수를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수완이 좋아.’ 황숙수가 뒷세계에 확실한 연줄과 정보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 정도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대천문의 사업장을 털면서 같이 일을 해보니, 그는 상대를 교란하면서 이동 경로를 짜고 주변을 통제하는 능력이 발군이었다. 그 덕에 세 사람은 불필요한 싸움을 줄이고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눈치가 빠르고 임기응변이 뛰어나. 밖에서 팀을 서포트 해주는 데 특화된 능력이야.’ 사실 기무혁은 황숙수가 장물을 좀 떼먹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저 상대의 양심에 난 털에 아주 조금의 미안함이라도 심어주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으니, 처음부터 계산을 다시 하자고.”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 “우리 크루에 들어와.” 표정이 가라앉았던 황숙수의 눈이 순간 왕방울만 해졌다. 김복자와 신강헌도 예상치 못한 말에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고, 최건은 제자를 믿기에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기무혁은 어깨동무를 풀고 황숙수를 마주 봤다. 여전히 농담 같은 어조였지만 그 태도는 진지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하는 얘기 다 들었잖아? 이미 같은 배를 탄 거지. 그러니까 끝까지 같이 가자고.” “뭐 이런…….” 황숙수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처음에는 기무혁이 장물을 삥땅치려 한 것을 빌미로 협박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으니, 협박이 아니라 스카웃 제안이었다. “끄응…….” 황숙수는 걸려도 된통 걸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늙고 쓸모없어져 은퇴한 자신을 누군가가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려고도 했다. “영악한 자식. 처음부터 이러려고 나를 이 일에 끌어들였지?” “처음부터는 아니고, 같이 일해 보니까 욕심이 나서. 예전에 낭인으로 한가락 했다더니, 실력 안 죽었던데?” “뭐? 푸흐흐……!” 그 솔직한 대답에 황숙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말에 기분이 나쁠 사람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덥석 제안을 받아들일 만큼 그는 어설프지 않았다. 황숙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씨익 웃었다. “같은 배를 탈 거면 서로에게 솔직해야지. 최소한 그 고글 안에 누가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대화에 진전이 있을 것 같은데?” “못 보여줄 것도 없지.” “……정말로?” 기무혁은 고민도 하지 않고 곧바로 고글을 벗었다. 앳된 청년의 얼굴이 드러나자 황숙수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뭘 놀라는 척해?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을 거면서.” “아니, 그래도 실제로 본 거랑은 다르지.” 황숙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수많은 정보를 얻는 사람이었고, 갑자기 나타난 청랑이라는 크루에 대해서도 당연히 조사했으니까. 레드래빗의 본명이 김복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몇 달 전 너튜브를 통해 그녀가 두 소년과 함께 사파의 노괴와 싸우는 영상도 확인한 후였다. “야, 이렇게 된 거 나도 벗는다?” 답답했는지 신강헌도 얼굴의 붕대를 풀어버렸다. 기무혁은 딱히 말리지 않았다. 기무혁. 김복자. 신강헌.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청랑의 크루원들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황숙수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면면이 대단하구만. 라이센스 시험에서도 활약이 굉장했다고 들었는데……. 아, 그래서 무림맹이 이번 일에 엮여 있는 건가?” 정보통답게 벌써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조합하며 눈을 빛내는 모습. 황숙수의 시선이 홀로 가면을 벗지 않은 최건을 슬쩍 향하자, 최건은 팔짱을 낀 채 싸늘하게 말했다. “내 정체는 무림맹에서도 극소수밖에 알지 못한다. 하물며 네놈 같은 정보통에게 드러낼 수는 없지. 만약…….”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황숙수의 평생에서 손에 꼽을 만큼 살이 떨리는 협박이 이어졌다. “딴마음을 먹거나 어디 가서 저 아이들에 대해 떠들고 다니면, 내가 따로 너를 찾아갈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간에.” 스윽. 최건이 다가와 손으로 황숙수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리자, 마치 면도기로 밀어낸 것처럼 지저분한 수염이 사각- 하고 깎여나갔다. “명심하도록.” 꿀꺽……. 황숙수가 베일까 봐 고개도 함부로 끄덕이지 못하고 침만 삼키는 와중에, 기무혁이 너무 긴장하지 말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긴장할 필요 없어. 비밀만 지켜주면 아무 문제도 없을 테니까.”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사람 하나를 어르고 달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강헌과 김복자도 어느새 다가와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반갑슴다, 숙수 아저씨. 미래의 천하제일도이자 암흑협객왕 신강헌임다. 이제 아저씨가 막내예요.” “막내……?” 막내에서 벗어난 신강헌은 반갑게 웃으며 황숙수의 손을 잡고는 위아래로 열심히 흔들었고. “난 부크루장이에요. 크루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있으니, 앞으로 나한테 잘 보이는 게 좋을걸요?” 김복자는 부크루장으로서 기강을 잡으려는지 매서운 눈빛을 해 보였다. “아니아니, 잠깐만…….” 황숙수는 그들 사이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역정을 냈다. “나 아직 청랑에 들어간다고 안 했어! 마음대로 가입시키지 말라고!” 그러나 신강헌과 김복자는 이미 늦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기무혁은 뻔뻔하게도 앞으로 황숙수가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한 현장에 나설 일은 없을 거야. 지금처럼 정보 수집, 교란, 주변 통제 같은 서포트 역할을 맡아주면 돼.” “나 가입한다고 안 했다니까!” “물론 강제성은 없어. 비밀만 지켜주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불이익은 없을 거야. 하지만 우리와 함께하면…….” 기무혁은 잠시 쉬었다가 씨익 웃으며 상대가 거절할 수 없는 미끼를 던졌다. “지금처럼 나쁜 놈들을 털어먹을 일이 앞으로도 상당히 많을 거야. 그건 분명히 약속하지.” “…….” 황숙수는 창고에 쌓인 장물을 곁눈질로 힐긋 보고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하필 나야? 찾아보면 괜찮은 정보통이 나 말고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질문에, 기무혁은 아주 솔직하게 대답했다. “내가 아는 정보통 중에 그나마 당신이 가장 덜 악질이라서.” 비록 내기비무도박 중독에 남의 등을 쳐먹는 데 거리낌 없는 인간이지만, 황숙수는 기무혁의 기준에서 최소한의 선은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흐흐……. 그게 또 뭐라고 기분은 좋네.” 황숙수가 비로소 긴장이 풀린 듯 피식피식 웃었다. 꼬마라고 불러도 될 만큼 어린 녀석에게 휘둘리는 기분이지만, 이상하게 불쾌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대화를 나눌수록 묘하게 낭인 시절의 향수가 느껴졌다. ‘희한한 놈이야. 닳아빠진 낭인을 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 괜히 자신까지 낭인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청춘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짧은 고민 끝에, 결국 황숙수는 기무혁이 내민 손을 잡았다. “좋아. 같이 한번 여럿 털어먹어 보자고.” 65화.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볼까?” 황숙수가 크루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후, 본격적으로 향후 계획을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저기, 크루장. 그 전에 건의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그때 슬쩍 손을 든 황숙수가 최건을 제외한 세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 나이가 여러분보다 두 배는 많은 것 같은데 말야. 지금처럼 반말은 좀 그렇지 않아? 정체를 숨기고 있었을 때야 그렇다고 쳐도…….” 은근히 연장자로서 대우를 바라는 모습. 특히 세 사람이 야차 가면을 쓴 최건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마땅히 어른 대접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황숙수의 미간에 슬쩍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크루장이라도 어린 놈이 어른한테 반말을 찍찍하는 건 좀 그렇지!’ 반말을 듣는 것이 죽을 만큼 기분 나쁘냐고 묻는다면 또 딱히 그렇진 않았지만…… 어쨌든 중년으로서 체면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기무혁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쪽 업계에선 센 놈이 어른이지. 무슨 예의범절을 따지고 있어? 알 거 다 아는 사람이.” 이번 생에선 반듯한 정파의 무림인을 추구하는 기무혁은 평소 어른들에게 깍듯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건 뒷세계의 인간들에게는 해당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난 존경할 만한 어른한테만 어른 대우를 해드리거든.” 그 순간 최건의 어깨가 으쓱 올라가고, 황숙수의 표정은 구겨졌다. 장물을 팔아서 삥땅 치려고 한 것도 그렇고, 평소 행실을 보면 능력과는 별개로 황숙수는 나잇값을 못 하는 인물이었으니까. “내가 뭐가 어때서? 이 근방에서 나보다 양심 있게 장사하는 놈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당연히 황숙수는 반발했지만, 바로 그다음에 나온 기무혁의 제안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럼 당신이 좋아하는 내기비무로 결정할까? 나한테 이기면 꼬박꼬박 존댓말을 해드리지.” 스르릉. 검집에서 반쯤 빠져나온 검날에 서슬 퍼런 예기가 흘렀다. 암루에서 기무혁이 대머리 거한을 어떻게 죽였는지 기억하는 황숙수는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하하하, 그깟 나이가 뭐 중요해? 조직이라면 당연히 위계질서가 있어야지. 신입 막내가 크루 선배님들 재밌으시라고 농담 한번 해봤습니다!” 물론 속으로는 기무혁에게 욕을 한 바가지 쏟아내는 중이었다. ‘저 새끼 출신성분이 의심스러워. 아무리 봐도 우리 쪽 출신 같은데…….’ 그러자 양옆에서 신강헌과 김복자가 위로랍시고 황숙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숙수 아저씨. 아무리 막내여도 우리는 존댓말 해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기무혁 저게 워낙 싸가지가 없어요. 나도 한 살 누난데 초면부터 반말이었다니까?” “……고맙다. 근데 니들도 딱히…….” 말만 존댓말이지, 대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 같은데……. 뒷세계에 발을 담근 지 어언 수십 년 만에, 다시 조직에서 막내 생활을 시작하게 된 황숙수였다. “그럼 앞으로 들어오는 녀석들은 다 내 밑이야. 그건 확실하지? 힘센 놈이 들어와서 나 무시하면 선배들이 혼내줄 거지?” 청랑은 소수 정예를 추구해서 한동안 신입을 받을 계획이 없지만……. “물론이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황숙수를 안심시킨 기무혁이 최건을 돌아봤다. “그래서 무림맹이 움직이는 동안 우리는 뭘 하면 되죠?” 초장부터 경력직 신입을 제대로 단도리하는 제자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최건이 입을 열었다. “뜸을 잘 들여야 쌀도 맛있게 익는 법이다. 충분히 들쑤셔 놓았으니 잠시 반응을 지켜보자꾸나.” 청랑의 크루원들이 대천문의 사업장을 습격한 이후, 대천문은 물론이고 누명을 쓴 일월문까지 내부가 크게 혼란스러워진 상황. 최건은 무림맹이 이미 물밑 작업을 시작했다고 전해주었다. “맹주가 빙하신녀와 따로 접촉했다.” “……우리가 가진 정보를 흘린 건가요?” 기무혁이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최건이 클클 웃었다. “맹주 그 양반이 곰처럼 보이지만 사실 늙은 여우다. 우리가 쥔 패를 함부로 내보일 리가 없지.” 빙하신녀는 자신의 제자를 건드린 놈들의 배후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상황. 그 타이밍에 무림맹주가 빙하신녀를 찾아가‘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정파무림이 힘을 모아야 한다’라고 설득했다. “오늘 빙하신녀가 무림맹과 팔대문파 전체에 공문을 보냈다. 자기 제자를 납치하려 한 배후를 찾게 협조해달라는 내용을 말이지.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지 않으냐?” 직접 맹주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최건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무혁의 입가에도 스승과 닮은 미소가 맺혔다. “지금쯤 일월문주는 똥줄이 바짝바짝 타고 있겠네요.” 라이센스 시험에서 사건을 일으킨 배후가 일월문-정확히는 일월문주를 필두로 한 양강계열 파벌임을 아는 사람은 현재 청랑과 무림맹주, 노구천 정도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빙하신녀는 팔대문파에 범인을 잡기 위해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고, 팔대문파도 모른 척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청을 무시하면 자기들이 배후로 의심받을 수도 있으니…….’ 팔대문파가 공동으로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하면, 제아무리 일월문주가 흔적을 잘 숨겼다고 해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예전 같으면 팔대문파가 똘똘 뭉쳐서 조용히 문제를 덮으려 했겠지만, 이번 사건은 언론에 퍼질 만큼 퍼져서 그것도 불가능할 게다.” “결국 일월문을 시작으로 팔대문파가 서로 의심하고 견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겠죠. 그들 관계에 금이 가면…… 무림맹은 움직이기 한결 편해지겠고요.” “클클. 심계가 깊은 것이 과연 내 제자답구나!” “후후. 다 스승님께서 잘 가르쳐주신 덕분입니다.” “내가 가르쳤다고? 너는 애초에 타고난 녀석이야!” 사제가 서로를 마주 보며 악당처럼 웃었다. 그 모습이 익숙한 신강헌과 김복자는 그러려니 했지만, 황숙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무림의 꼭대기에 있는 팔대문파를 상대로 이간질을 벌이는 중이란 거지?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지?” 이 정도면 간이 붓다가 못해 배 밖으로 튀어나와서 나 좀 잘라줍쇼, 하고 있는 미친 짓이 아닌가! 그러자 기무혁과 최건이 동시에 황숙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왜? 후회돼?” “설마 이제 와서 발을 빼고 싶은 것이냐?” 황숙수는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에 아찔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누가 그렇대?” 낭인 세계에서 은퇴한 후, 막장 인생들의 내기비무 도박이나 즐겨온 황숙수에게 기무혁의 이야기는 어마어마한 자극이었다. ‘그야말로 한국무림계 전체를 판으로 하는 위험한 도박이잖아?’ 그렇게 생각하자 도박중독자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동시에, 마약 같은 도파민이 머리끝까지 퍼지며 짜릿함이 밀려왔다. “흐흐흐……. 역시 사나이는 큰 판에서 놀아야지. 이만하면 판돈으로 목숨도 걸어볼 만하겠는데?” 저 아저씨도 제정신은 아니구만. 기무혁은 눈이 살짝 돌아간 황숙수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째선지 크루에 비정상적인 사람들만 모이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하여간에 이 계획이 성공하면…….” 최건이 제자와 그 동료들을 둘러보며 낮게 웃었다.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다름이 아닌 너희다. 어떤 방식으로든 무림맹은 결코 그 보답을 잊지 않을 것이야.” 청랑이 대천문의 사업장에서 찾아낸 고객명단과 정보들은 이미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일월문이 무인들의 장기를 공급하고 그 수수료를 받은 게 분명한 상황에서, 고객 명단을 털어 대천문과 일월문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 그다음은 라이센스 시험에서 벌어진 사건의 배후가 일월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아낼 차례였다. “그럼 우리는 그때까지 그냥 대기하면 되는 거예요?” 신강헌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냥 대기라니? 너희 둘은 당장 준비해야 할 것이 있지 않더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최건이 기무혁과 신강헌을 번갈아 쳐다봤다. 설마 잊었냐는 그의 눈빛에 두 사람은 번뜩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라이센스 시험?” “맞다!” “이 녀석들이…….” 시험장에 난입한 살수들 때문에 중지된 라이센스 시험. 그날 기무혁과 신강헌 둘 모두 이류무인 라이센스를 획득했지만, 시험은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재시험을 비롯해서 일류고수 라이센스, 절정고수 라이센스 시험이 미뤄졌기 때문이었다. “뭐 일류야 따놓은 당상이지만…….” “누구 성적이 더 높게 나올지는 승부를 봐야지?” 어느새 승부욕을 활활 불태우며 서로를 노려보는 기무혁과 신강헌의 모습에, 최건이 껄껄 웃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거라. 이십여 년 전 리차드 한이 등장한 이래로 가장 많은 이목이 집중된 시험이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무림맹은 미뤄진 라이센스 시험을 보란 듯이 거창하게 치를 예정이었다. 살수들에게 습격받았음에도 정파무림의 기둥이 건재하며, 힘든 시련을 이겨낸 후기지수들의 용기를 널리 알리겠다는 의도였다. “그날, 수많은 언론과 정치인들, 해외의 무림인들까지 초청한 자리에서 무림맹주가 중대 발표를 할 것이다.” “설마……?” 눈치가 빠른 기무혁이 눈을 크게 뜨자, 최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음흉하게 웃었다. “기대해도 좋을 게다. 그날 세상이 발칵 뒤집힐 테니 말이다.” 일월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릴 날이 정해졌다. * * * “컥, 크허억…….” 목이 붙잡힌 사내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컥컥댔다. 평소의 냉정한 표정은 볼썽사납게 일그러져 있었고, 뇌로 가는 혈류가 차단된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사, 살려줘, 살려…….”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사내가 목숨을 구걸했다. 저항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위도 부수는 주먹을 휘둘러도, 상대는 마치 모기가 물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 “문주님. 그러게 계속 조용히 계셨으면 좋았을 것 아닙니까?”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상대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옥의 겁화처럼 뜨거운 숨결에 살이 익을 것만 같았다. “하,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목을 붙잡힌 사내는 잘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간신히 끄덕이며 빌었다. 그러나 상대의 입가에는 조롱기 어린 비웃음이 맺힐 뿐이었다. “이제 와서요? 진정성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방금 전까지 혼자서는 안 죽을 거라며 저를 협박하던 사람을 믿으라고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달리, 상대의 눈에는 진득한 살기가 가득했다. 목을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고, 숨결에서 새어 나오는 열기가 피부를 벌겋게 익혔다. “끄흐으윽……!” 시간도 장소도 비밀로 한 채 최대한 은밀하게 장문인들끼리만 접촉한 회동이었다. 그는 이 거래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할 생각이었고, 일월문주가 자신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문파를 버리고 잠적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잃을 것이 많은 상대는 충분히 그렇게 할 의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 확답을 듣기 위해 만난 것인데……. “대체 얼마나 저를 머저리로 보신 겁니까? 두 문파가 연관되었다는 증거가 세상에 공개되는 것이 싫으면 일월문의 무공과 비전을 내놓으라고요? 제가 정말 그딴 제안을 받아들일 줄 알았습니까?” 하지만 설마, 자신을 죽여서 살인멸구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왜냐면 상대는 오래된 동맹이자 정파 팔대문파의 장문인이었으니까! “장, 진, 명-!” 대천문주는 잔뜩 충혈된 눈으로 상대를 노려봤다. 저주라도 할 것처럼 그 이름을 한 글자씩 짓씹어 발음했다. 그러나 이곳에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진명이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문주께선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입을 막아야 제가 사니 별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화르르르륵! 장진명의 손에서 치솟은 불길이 삽시간에 대천문주의 전신으로 옮겨 붙었다. “끄아아아아악-!” 양준표가 산 채로 불태워지며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일월문주가 피운 거친 불길은 삽시간에 양준표를 집어삼켰다. 곧 비명소리가 잦아들고, 남은 것은 검은 재뿐이었다. 손을 툭툭 턴 장진명이 잿더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날 너무 원망하지 마십시오. 무인이란 본질적으로 약육강식의 세계를 살아가는 자들이니까.” 다음 날, 대천문의 장문인 양준표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66화. 생각을 많이 해봤어 대천문주의 실종은 또다시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최근 업무가 과중해진 탓에 심마가 생겨 폐관에 들었다는 소문부터 시작해, 며칠이 지나도 행방을 알 수 없자 해외 잠적설이 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설까지 돌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 특히 무림인이거나 관련 업계에 발을 걸친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비슷한 화제를 입에 올렸다. “지금 대천문 완전 초상집 분위기라던데요? 빌딩 테러범들의 정체도 못 밝혔는데, 하루아침에 문주까지 사라졌잖아요.” “그 와중에 어떤 정신 나간 놈 하나가 일월문에서 자기네 문주를 죽였다고 빨가벗고 거리에서 소리치고 다녔다며?” “아, 그거 주화입마 병원에서 도망친 대천문 출신 무인이었다던데. 무림맹에서 빠르게 체포했답니다.” “요즘 무림맹 일 잘하네. 라이센스 시험 때 잠입한 살수들도 전부 잡아내고 말이야.” “저기, 혹시 그 소문 들으셨어요? 최근에 벌어진 일이 전부 대천문이 팔대문파에 밉보인 결과라고…….” “쉿! 그런 얘기는 함부로 하지 마세요!” 그러나 온갖 흉흉한 소문과 추측만 무성할 뿐, 대천문주의 실종과 관련된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은 상황. 무림맹에서도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대천문주의 실종 사건을 조사 중이었다. “폐관에 든 것은 아니야. 한 달 전까지의 행적을 조사해 봐도 그런 기미는 없어. 작은 깨달음 하나 붙잡겠다고 문파를 내팽개칠 만큼 무공에 미친 인물도 아니고…….” 최근 들어 혈색이 무척 좋아진 무림맹 원로, 노구천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손에 든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그가 옆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맞은편에 앉은 상대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십 년이 넘게 연락 하나 없이 종적을 감추고 지내더니, 요즘에는 무림맹을 자기 안방처럼 드나드는 최건이었다. 최건도 차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둘 중 하나겠지. 일월문의 토사구팽이 무서워 가족까지 버리고 해외로 내뺐거나…… 이미 어딘가에 묻혀 있거나.” 후자의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는지, 최건의 입매가 싸늘했다. 노구천이 다 읽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같네. 아무래도 일월문주 장진명이 손을 쓴 것 같아.” “옛날부터 음흉한 놈이었어. 사람 하나 죽이는 게 뭐가 어려울까.” 일월문이 대천문의 배후라는 사실을 몰랐으면 남들처럼 헤맸겠지만,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방향을 잡고 시작하니 조사는 순조로웠다. 무림맹은 소수의 인원으로도 가장 빠르게 진상을 파악했고, 거짓 정보를 퍼트려 팔대문파가 혼란에 빠지도록 교란하는 데도 성공했다. 여전히 팔대문파의 견제를 받는 무림맹의 힘만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숨겨진 조력자의 도움이 있었다. “대체 이 황숙수라는 자가 누군가? 정보를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팔대문파 정보원들을 바보로 만들다니…….” 노구천이 혀를 내두르는 모습에 최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제자의 부하라네. 경박한 성격만 빼면 제법 실력이 괜찮더군.” “부하……?”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된 기무혁에게 부하가 있다는 말이 이상했지만, 노구천은 이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검마 최건의 젊은 시절과 똑 닮은 제자가 아닌가? 자신처럼 평범한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세간의 관심이 어마어마해. 무림의 일에 일반인들까지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전화위복인 셈이지. 시험장에서 날뛴 살수들을 막아낸 덕에…… 여론도 우리 쪽에 꽤 우호적이지?” “상황이 무척 좋아. 무림맹과 맹주님에 대한 평판도 올라가고 말이지.” “후후후…….” 마주 보며 웃는 두 사람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팔대문파의 오래된 부정부패와 갑질에 맺힌 것이 많은 그들이었다. 그로부터 무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내일이군. 팔대문파의 추악한 만행이 밝혀지는 날이.” “이번에는 일월문 하나뿐이지만, 이로 인해 다른 팔대문파들도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될 걸세.” “시작이 중요한 법이야. 앞으로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이 모두 끝나면, 무림맹주가 모두의 앞에서 일월문주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그 증거를 밝히고 체포할 계획이었다. 한국무림을 지배해 온 팔대문파는 명성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며, 견고했던 동맹이 흔들리고 영향력이 줄어들면 무림맹에서 그들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철없는 시절에 바랐던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까지는 아니어도,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겠나?” “모든 것이 계획대로만 된다면 말이지…….” “변수는 최대한 차단할 걸세.” 그렇게 말하면서도 노구천의 얼굴에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팔대문파의 힘은 단순히 명성과 권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들이 지닌 무력, 정재계와 깊은 관계를 맺어오며 쌓은 인맥, 또한 긴 세월 그들의 의무였던 대괴이(大怪異) 억제력까지. “……힘의 균형에 공백이 발생하면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지. 허나 이대로 두면 이 나라 무림이 곪다 못해서 썩어버릴 게야.”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까. 맹주님은 그것까지 감수하고 마음을 먹으신 게야. 나는 따를 걸세.” “……나 역시 마찬가지야.” 두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인 듯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할 겸 노구천이 물었다. “아, 자네 제자는 시험 준비 잘 하고 있나?” 두 사람에게는 우선순위가 뒤이긴 하지만, 세간에선 미뤄진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에도 많은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정체를 숨기고 무림맹에 잠입한 살수들을 스스로 물리친 후기지수들. 리차드 한의 등장 이후, 지난 이십 년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세대가 등장했다고 설레발을 치는 언론들이 있을 정도였다. “클클. 말해서 뭐하나. 최고가 될 준비를 하고 있지.” 양하윤. 송준호. 신강헌. 매스컴에서는 이렇게 세 사람을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무림에 발을 담근 이들은 기무혁이란 이름을 주시하고 있었다. 당사자의 부탁으로 활약상을 의도적으로 축소해 발표했음에도, 당시 시험장에 있었던 후기지수들의 입을 통해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나갔으니까. 최건의 입꼬리가 저절로 흐뭇하게 올라갔다. “낭중지추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두고 보게. 무혁이 녀석이 세계를 들썩이게 할 테니까.” “어련하겠나, 어련하겠어.” 오랜 친구의 팔불출 같은 모습에 노구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 역시 그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 * * 거듭된 사건사고와 대천문주의 실종으로 최근 한국무림계에는 묘하게 불안한 기류가 흘렀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 중지되었던 일류 라이센스 시험 날이 되었다. “……느낌 좋은데?” 그날 아침, 기무혁은 자는 동안 몸 한 번 뒤척이지 않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눈을 떴다. 느긋하게 몸을 푼 후, 부모님과 함께 아침을 먹으며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고, 운동화를 고쳐 신고 어깨 한쪽에 더플백을 멨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놈의 회사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아들 인생이 걸린 시험 날에 출근이라니…….” “호들갑 좀 떨지 마. 무혁이 인생 이미 탄탄대로거든? 근데…… 진짜 같이 안 가도 괜찮겠어?” 기찬호와 박지연은 아들이 지금이라도 같이 가자고 하면 무단결근이라도 할 태세였지만,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기무혁이 며칠 전부터 극구 사양했다. “앞으로 무슨 일 있을 때마다 따라오실 거예요? 잘하고 올 테니까 저녁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우리 아들 다 컸네, 다 컸어.” “아빠는 쪼금 서운하다……?” 아쉬워하며 출근을 준비하는 부모님을 한 번씩 안아드린 후, 기무혁은 이른 시간에 먼저 집을 나섰다. 무림맹 근처에 도착하자 예전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지난 시험에 떨어진 응시자들은 오지 않아서 시험 인원은 훨씬 적었지만, 매스컴의 관심이 폭증한 탓에 구경하러 온 일반인들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기무혁이다!” “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찰칵찰칵찰칵! 처음 느껴보는 플래시 세례에 기무혁은 후드를 눌러쓰고 빠르게 지나갔다. 다행히 무림맹에서 무인들을 파견해서 어렵지 않게 시험장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이, 미친놈!” 꽤 빨리 왔는데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참가자들은 대부분 도착했는지, 익숙한 얼굴들이 여럿 보였다. “늦잠이라도 잤냐? 기다리다가 지루해 죽는 줄 알았네. 흐암-.” 신강헌은 잠도 제대로 안 자고 온 모양인지, 하품을 쩍쩍 하며 걸어왔다. 그 모습에 기무혁이 혀를 차며 잔소리를 했다. “잠은 제때 좀 자라. 아직 젊으니까 괜찮은 거지, 나이 들면 체력이 못 버텨.” “이 새낀 가끔씩 아저씨 같은 소리를 한다니까?” 신강헌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리는데,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하하. 시험 전날은 설레서 잠 못 자는 게 보통 아니야?” 지난 시험에서 친해진 송월문의 오정민이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그 옆에는 태극검문의 송준호도 함께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나도 떨려서 한숨도 못 잤는데. 역시 키가 크려면 질 좋은 수면이 중요한가…….” “야, 땅꼬마.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신강헌이 자신보다 한참 작은 송준호를 놀리자 송준호가 발끈해서 덤벼들었다. “땅꼬마라고 부르지 말랬지! 키만 크면 단 줄 아냐? 체질도 나보다 두 단계나 떨어지는 자식이!” “뭐라고? 멀어서 잘 안 들리는데-!” “저기, 너희들 시험 시작하기 전에 괜히 힘 빼지 말고…….” 세 사람은 지난 라이센스 시험 이후로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신강헌이 타격감이 좋은 송준호를 놀리면서 낄낄거리며 시간을 때우고, 오정민은 난감한 표정으로 둘을 말렸다. 기무혁이 주변을 둘러보며 또 누가 와 있나 구경할 때였다. “일월문 차량이다!” “양하윤이 온 건가?” “빙하신녀도 함께 왔어!” 새하얀 리무진 한 대가 들어오자 기자들과 방송국 카메라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지난 라이센스 시험에서 가장 큰 피해자가 될 뻔했던 양하윤의 등장. “하윤 양! 이번 시험에 어떤 각오로 임하실 것인지…….” “한마디만 부탁드립니다!” 매스컴의 어마어마한 관심과 인터뷰 요구가 쏟아졌지만, 리무진은 그들을 무시하고 무림맹 내부로 진입했다. 잠시 후, 빙하신녀와 함께 차에서 내린 양하윤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기무혁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왜 저러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기무혁 앞에 멈춰 섰다. “생각을 많이 해봤어.” “……?” “그치만 지금은 안 돼. 아직 우린 너무 어리고, 또 무공에 정진해야 할 시기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내가 좀 더 강해지면…….” 말을 할수록 양하윤의 볼이 새빨개졌고 목소리는 모기처럼 작아졌다. “약속…… 지킬게.”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도 않았는데, 양하윤은 그대로 홱 돌아서더니 스승인 빙하신녀에게로 뛰어갔다. “대체 뭔 소리야?” 황당해하는 기무혁만 제외하고, 모두가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67화. 누가 먼저 오겠나? “이요올~ 기무혁. 대체 언제 양하윤이랑 그런 사이가 됐냐?” 신강헌이 기무혁을 놀릴 드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커다란 덩치로 두 팔을 모으고 수줍게 몸을 비비꼬는 모습은 보는 사람에게 살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약소쿠…… 지킬게!” 양하윤이 그 흉내를 봤다면 당장 쌍장에 냉기를 휘감고 달려들었겠지만, 다행히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진 그녀는 스승님과 함께 리무진으로 들어간 후였다. 대신 송준호와 오정민이 정색했다. “와, 진짜 죽이고 싶다.” “시험 보기 전에 토하면 컨디션 나빠지는데…….” 둘이서 그러거나 말거나 신강헌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기무혁을 놀리기에 바빴다. “맨날 수련만 하는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야? 이 새끼 이거, 얍삽한 고양이가 솥뚜껑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기무혁은 귀찮게 구는 신강헌을 파리 쫓아내듯 손으로 밀어냈다. “얍삽한이 아니고 얌전한, 그리고 솥뚜껑 아니고 부뚜막이다 이 멍청아. 그리고 난 쟤 전화번호도 몰라.” “구라 치지 말고~ 복자한테는 비밀로 해줄 테니까 나한테만 말해봐. 응?” “…….” 기무혁은 대꾸도 하지 않고 양하윤 쪽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을 뿐이지 눈치까지 없지는 않았다. 양하윤이 자신에게 호감을 품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지난번에 내가 도와줘서 그런가?’ 납치될 뻔한 위기에서 동료가 되어 끝까지 함께 싸웠으니, 특별한 감정이 생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낭인이었던 시절에도 동료들끼리 생과 사를 오가는 임무를 마친 후, 눈이 맞아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경우를 종종 봤으니까. ‘그 녀석들 대부분은 끝이 좋지 않았지만…….’ 잠시 씁쓸한 과거를 떠올린 기무혁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양하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의 그는 무공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상처를 줄 생각도 없었다. ‘저 나이 때 애들이야 하루에도 열두 번씩 감정이 바뀌니까. 내버려두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겠지.’ 지금이야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도, 더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면 금세 바뀌는 것이 어린애들 마음이 아니겠는가? 기무혁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될 문제라고 말이다. “쳇. 재미없는 놈.” 놀려도 반응이 없자 흥미가 떨어진 신강헌이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때 라이센스 시험 관계자가 나타나 그들을 안내했다. “신분 확인을 마친 라이센스 시험 참가자들은 저를 따라 실내연무장 안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삼삼오오 모여 있던 참가자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기무혁 일행도 함께 움직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한 백 명 정도 되나?” “처음에는 지원자가 삼천 명 가까이 됐으니까…… 진짜 얼마 안 남았네.” 일류무인 라이센스 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온 무인은 대략 백여 명. 지난 시험에서 이류무인 라이센스를 획득한 이들 중,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했거나 스스로 역량이 부족하다 생각하고 시험을 포기한 이들을 제외한 숫자였다. “결국 끝까지 남아서 일류고수가 되는 사람은 일 년에 평균 열 명 정도야. 그중에 첫 시험에서 일류 라이센스를 따는 건 겨우 한 명이 될까 말까인데…….” 오정민이 자기보다 몇 살씩은 어린 동생들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올해는 첫 시험 합격자가 최소한 셋은 넘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단 말이지.” 기무혁. 신강헌. 송준호. 이 자리에 있는 셋과 양하윤은 누가 봐도 일류고수 시험에 무난히 합격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금영문의 피승화나 몇몇 다크호스들도 무시할 수 없었다. 오정민은 이들과 함께 시험을 치르게 된 자신이 운이 없는 건가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최고의 세대와 함께 경쟁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두고 봐라. 중견문파 출신으로서 이변을 보여줄 테니!” “전 아직 소속문파도 없는데요?” “몇 살이나 많으면서 왜 똑같이 경쟁하는 것처럼 그래요?” “오늘 일류시험 떨어지는 사람은 단톡방 강퇴임.” “아오……. 이 자식들이……!” 네 사람은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 실내연무장에 도착했다. 천 명 이상도 너끈히 수용이 가능한 내부. 그 중앙에 널찍한 비무대가 마련돼 있었고,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그리고 비무대 뒤쪽, 참가자들이 입장한 맞은편으로는 초대를 받은 각계의 명사들이 자리를 채우고 앉아있었다. “스케일 미쳤네…….” “너, 너무 사람이 많은 거 아냐?” “저기 봐봐. 팔대문파 장문인들도 왔어.” 가장 상석에는 팔대문파의 장문인들과 그 대리인들이 무거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험 참가자들은 동경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기 바빴지만, 기무혁은 차가운 시선으로 한 명을 응시했다. ‘일월문주. 뻔뻔하게도 그 자리에 앉아 있군.’ 일월문주 장진명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기무혁이 직접 대천문의 사업장을 가보지 않았다면, 그들과 일월문의 관계를 몰랐다면. 그리고 대천문주가 실종된 진짜 이유를 황숙수에게 듣지 못했다면. ‘나도 깜빡 속았겠지.’ 정파무림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무인으로 여기며 동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실제로 전생의 어린 기무혁은 그랬으니까. ‘당신이 무인이라고 불리는 것조차 부끄러울 만큼 역겨운 인간이라는 걸…….’ 기무혁은 할 수만 있다면 묻고 싶었다. 팔대문파의 장문인이라는 위치까지 올라갔음에도 대체 뭐가 부족해, 그토록 악랄한 범죄들을 저지른 것인지 말이다. “곧 알게 되겠지.” 작게 중얼거린 기무혁의 시선은 장진명을 지나 그 옆에 나란히 앉아있는 태극검문과 금영문의 장문인에게 향했다. ‘당신들은 얼마나 다를까?’ 기무혁은 팔대문파 전부가 한통속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필요에 의해 오랫동안 동맹에 가까운 관계로 지내왔지만 각각의 신념이 다르며, 문파로서 추구하는 바 또한 다를 테니까. 실제로 팔대문파 중 일부는 천마신교가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을 때, 그들과 맞서 싸우다가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예를 들면……. “어? 창천검문도 장문인이 직접 왔네!” “한국제일검-!” “이런 행사에 거의 참여 안 하기로 유명한 분이 왜……?” 뒤늦게 도착한 창천검문의 장문인을 발견한 참가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창천검문의 장문인은 지긋한 연배의 백발노인이었다. 흐릿한 눈빛에 굼뜬 움직임은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처럼 보일 정도였는데, 그가 걸어오자 엉덩이가 무거운 팔대문파 장문인들이 벌떡 일어나 깍듯이 인사했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미리 말씀해주셨으면 저희가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흘흘. 이 늙은이가 뭐라고. 편하게들 앉게, 앉아.” 창천검노 나일천. 창천검문의 장문인으로, 다른 팔대문파 장문인들과 비교해도 연배가 많게는 두 배분은 높은 인물이었다. “나이를 먹으니 소일거리도 없고 심심해서 구경이나 하러 왔네.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들 있으시게나.” 일월문, 태극검문, 금영문. 팔대문파 중 일류 라이센스 획득이 유력한 후기지수의 문파 장문인들만 시험장에 오는 것이 암묵적인 그들의 전통이었다. 해당 문파가 주인공으로서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랄까. 때문에 이번에도 다른 팔대문파는 무림맹주의 강력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대리인을 보낼 뿐 해외 일정이나 수련 등을 핑계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창천검문의 장문인이 등장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기무혁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왜지? 지난번에는 대리인을 보냈을 텐데…….” “리차드 한의 등장 이후로 가장 뛰어난 세대라고 불리기 시작한 후기지수들을 보러 오셨다면 어때?”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에 기무혁이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웃으며 다가왔다. “……부연하 팀장님?” “오랜만이야. 그새 또 엄청나게 유명해졌더라?” 기무혁의 재능을 알아보고 몇 번이나 스카웃하려고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한 창천검문 스카웃팀의 팀장. 그러나 오늘 부연하는 정장이 아닌, 화장기 없는 얼굴에 창천검문의 로고가 하얗게 새겨진 감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기무혁의 눈에는 그 모습이 훨씬 더 잘 어울려 보였다. “그리고 나 얼마 전에 스카우트 팀에서 나왔어. 지금은 창천검문 제2검대 소속 검객이야.” 부연하가 자신의 검파를 툭툭 두드리며 자부심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기무혁도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물었다. “팀장님도 시험 보러 오신 거예요?” “이제 딱딱하게 팀장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선배라고 하는 건 어때? 근데 너 아직 어떤 문파에도 안 들어간 거 맞지?” 스카우트 팀에서 나왔다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기무혁이 탐나는 듯했다. 알음알음 그에 대해 들려오는 소문들이 하나같이 믿기 힘든 것들이었으니까. 부연하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네가 양하윤을 납치하려는 살수를 혼자 막았다며? 그거 진짜야?” 기무혁은 슬쩍 웃기만 했다. 그러자 역시 내 눈이 맞았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부연하가 아쉬워했다. “선배님은 절정고수 라이센스 따려고 오신 거죠?” “응. 우리도 지난 번 시험 도중에 중지됐으니까.” 절정고수는 팔대문파에서도 최정예로 분류되는 전력이었다. 그만큼 시험의 난도 또한 높고 자격도 까다로운데, 하필이면 시험 막바지에 난리가 나는 바람에 중지되었다고 했다. 결국 지난 시험에서 상위권으로 평가 받은 몇 명만 재시험 자격을 얻었다고. ‘확실히…….’ 기무혁은 전보다 훨씬 예리해진 부연하의 기도를 가늠했다. 그러자 손등의 솜털이 살짝 곤두섰는데, 그 낌새를 눈치챈 부연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얘 봐라? 또 나를 재보네? 차라리 대놓고 비무를 하자고 하지 그러니?” “저야 기회만 된다면 오늘이라도…….” 그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했다. “무림맹주께서 오십니다! 모두 일어나 주십시오!” 잠시 후, 무림맹주 여필극이 장포를 펄럭이며 날듯이 경공을 펼쳐 비무대 위에 내리꽂혔다. 쿵-! 의도적으로 낸 묵직한 소리에 참가자들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좌중을 둘러보는 무림맹주의 형형한 눈빛에 다들 숨을 죽였고,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을 능가하는 기도에는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작정하고 분위기를 잡으시는군.’ 맹주가 거침없이 초고수의 기도를 드러내자 창천검노를 제외한 팔대문파 문주들이 얼굴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맹주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주변을 한번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나 반갑네. 정파무림의 미래를 밝힐 후배들.” 씨익. 그가 미소를 지으며 기세를 풀자 숨죽이던 참가자들이 겨우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본인은 지난 몇 주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소이다. 온갖 사건으로 정신이 없었지. 무림에 좋지 않은 일들이 많아 맹주로서 마음이 무척 무겁고 책임을 통감하고 있소.” 잠시 말을 멈춘 맹주가 참가자들을 주욱 둘러보고 목소리에 힘을 더했다. “허나 오늘만큼은 축제라고 생각하고 즐겼으면 좋겠소! 위기 속에서 이처럼 뛰어난 후기지수들이 대거 등장한 것은 한국무림의 복이라 할 수 있으니!” 무림맹주 여필극. 한국무림에서 권왕이라 불리는 사내가 목을 좌우로 풀기 시작했다. 두둑. 두두둑. “일류 라이센스 시험과 절정고수 라이센스시험은 최대한 간단한 방식으로 치르기로 결정했소. 빠르면 한 시간 안에 전부 끝날 수도 있을 것이오.” “예?” “한 시간이요?” 예상치 못한 말에 다들 당황하는 가운데, 여필극이 자신의 장포를 벗어서 비무대 밖으로 던졌다. 백색의 무복 위로 강철처럼 단련된 육체의 윤곽이 드러나자 눈치가 빠른 몇몇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서, 설마…….” “에이,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그 순간, 비무대 중앙에 선 여필극이 발로 바닥을 강하게 굴렀다. 콰아아앙-! 지진과도 같은 진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진각 한 번에 건물마저 흔들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시험 내용은 본 맹주와의 대련이다. 일류는 삼 초식, 절정고수는 십 초식을 받아내면 합격을 주마.” “……!” “……!” 모두가 경악 속에 침묵하는 가운데, 여필극이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며 참가자들에게 선언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본 맹주도 전력으로 하진 않을 테니까.” 그랬다가 누구 하나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진담 같은 농담을 중얼거리며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무림맹주였다. “자, 누가 먼저 나서겠나?” 평소였다면 무림맹주와 대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유독 커 보이는 저 주먹을 본 후기지수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맨 처음은 조금…….’ ‘그래도 힘이 조금 빠진 다음에 나서는 게 낫지 않을까?’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하며 쉽사리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는 가운데. “저요, 무조건 저요-!” “제가 첫 번째로 하고 싶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앞다투어 손을 드는 두 사람이 있었다. 68화. 다음! “저요, 무조건 저요-!” “제가 첫 번째로 하고 싶습니다.” 동시에 손을 든 기무혁과 신강헌이 서로를 홱 노려보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비무대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할 거다!” “웃기지 마. 내가 먼저다.” 서로의 생각을 뻔히 아는 두 사람이었다. 행여나 상대가 자신보다 앞서 나가지 못하게 금나수를 펼쳐 서로의 옷을 잡아당기고, 발을 걸어서 넘어뜨리려고 하며 앞으로 나섰다. 만전의 무림맹주와 겨뤄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둘로서는 조금도 지치지 않은 최고의 컨디션인 맹주와 싸우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너네 진짜……. 나도 질 수 없지. 제가 첫 번째로 도전하겠습니다!” “하여간 생각이 남다른 녀석들이라니까. 송월문의 오정민이 맹주님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은 송준호도 손을 들고 비무대로 향했고, 오정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비무대를 향해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더 강해진 다음에 약속을 지키기로 했으니까…….” 양하윤은 앞으로 나아가는 기무혁의 뒷모습을 보더니 뭔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꽉 깨문 채 앞으로 나아갔다. “……망할 자식들. 이러면 눈치가 보여서 안 나설 수가 없잖아.” 금영문의 피승화도 한숨을 쉬더니 눈치껏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얘들 뭐야? 올해는 진짜 왜 이래?” “새파란 꼬마들이…….” 첫 시험을 치르는 후기지수들 중에서만 다섯 명이 나서자 부연하를 비롯한 절정고수 시험을 치르는 무인들도 자존심 때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비무대 위에는 서로 맹주와 먼저 대련을 하겠다고 나선 무인들이 열 명 이상 올라왔다. “……하하하하! 젊은 무인들의 혈기에 나까지 젊어지는 것 같구나!” 그 예상치 못한 상황에 여필극도 순간 당황한 듯 보였으나, 이내 기꺼운 듯 웃음을 터트렸다. “헌데 말이지……. 미안하지만, 흥을 돋우기 위해서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다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여필극이 자신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실은 지난 시험 성적에 따라서 다 정해진 차례가 있거든. 그러니 모두 자리로 돌아가서 호명 순서를 기다리게나.” “그런…….” “엄청 기대했는데…….” 서로의 옷을 반쯤 벗긴 기무혁과 신강헌이 잔뜩 실망해서 비무대에서 내려갔고, 다른 후기지수들도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중 몇몇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갔다. “허허, 요즘 젊은 애들한텐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하겠군.” 여필극은 사실 정반대의 상황을 예상했다. 누구도 선뜻 먼저 나서려고 하지 않고 눈치만 보는 상황 말이다. 헌데 생각지도 못하게 후기지수들이 우르르 비무대 위로 올라오면서 체면을 조금 구기고 말았다. ‘거참……. 맹주의 위엄은 실력으로 보여줘야겠구만.’ 기다렸다는 듯 나서는 후기지수들의 배짱에 당황하고 말았지만, 여필극은 도리어 그 기백이 마음에 들어 흐뭇하게 웃었다. “이 늙은이가 맹주께 질문을 좀 해도 되겠소?” 그때 몹시 느릿한 노인의 목소리가 절묘하게 끼어들었다. 각계의 명사들을 초대한 자리 중에서도 상석. 창천검문의 장문인 나일천이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선배님. 편히 말씀하십시오.” 무림맹주 여필극이 상대에게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창천검노 나일천은 맹주조차 선배라고 부를 만큼 연배가 높은 무림의 어른이며, 팔대문파의 장문인들 사이에서도 노야라고 불릴 만큼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공식적인 석상에는 거의 나서지 않음에도 그 영향력은 이 자리의 누구보다 지대했다. “내 나이가 들어 진부한 소리를 한다고 해도 부디 이해해 주시오……. 맹주께서 대련으로 시험을 갈음하겠다 하셨는데…… 단순히 무공의 고하만으로 자격을 주어도 되는지 의문이구려.” 답답할 정도로 느리고 힘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어느새 모두가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무림맹에서는 참가자의 인성과 소양 또한 반영해서 시험을 치르고 자격을 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내가 혹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오?”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이 그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씩 보탰다. “저 또한 노야와 같은 생각입니다.” “정파무림인이라면 무공만큼이나 인성과 소양의 함양 역시 중요하지요.” “그저 무공의 강함만으로 합격여부를 가린다면 사파와 무엇이 다른지…….” 그들로서는 나일천이 나서서 맹주와 대립하는데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비록 인성과 소양을 반영한다는 취지는 진즉 유명무실해졌고, 단지 딴지를 걸기 위한 질문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가 팔대문파의 권위와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맹주. 마땅히 반박할 말이 있겠나?’ ‘창천검노 같은 낡은 무림인이나 주장할 정론이지만…… 때론 이것만큼 까다로운 것이 없지.’ ‘화라도 냈으면 좋겠군.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정파를 운운하냐면서 말이야.’ 그러나 장문인들의 예상과 달리 맹주는 순순히 인정했다. “옳은 지적이십니다. 장문인들께서 걱정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저 또한 잘 알고 있지요. 우리는 정. 파. 무림인이지 않습니까?” ‘정파’라는 단어를 유독 강조한 여필극이 시험에 참가한 일백여 무인들을 돌아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헌데 이곳에 있는 후배들은 전원이 지난 시험에서 심성과 소양을 증명하였습니다.” “……이미 증명하였다?” 나일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여필극이 확신을 담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에 침입한 살수들을 상대로 용기 있게 맞섰고, 불의를 외면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동료를 지켜냈지요. 제가 그 모습을 직접 본 증인입니다. 거기 계신 세 장문인도 아시지 않습니까?” 무림맹주의 말에 시험 참가자들의 표정에 자부심이 가득 어렸다. 동시에 시험의 적절성에 의문을 표했던 장문인들은 질문을 받자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크흠…….” “저희도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 눈을 천천히 깜빡이는 창천검노만 제외하고 말이다. “늙은이가 귀가 어두워서 그런 자세한 사정은 몰랐구려. 아닌가,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고…….” “하여 이 자리에 있는 무인들에게 필요한 시험은 순수하게 자신의 무공을 증명하는 것뿐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장문인들께 충분한 설명이 되었을지요?” 다른 장문인들이 못마땅한 속내를 감추며 침묵하는 가운데, 창천검노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만! 충분히 납득이 되었소이다.” “……장문인?” “노야…….”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손해만 보고 끝난 대화였다. 팔대문파의 위엄을 보여주고 무림맹주를 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맹주에게 힘을 실어준 꼴이었으니까. “……응? 내가 뭘 잘못했나?” 그러나 창천검노 나일천은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그가 다른 장문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그저 궁금했던 것을 물어본 것인데…… 이 늙은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겐가?” “……아닙니다.” “허허, 그럴 리가요…….” “곧 시작될 시험에 기대가 큽니다. 하하!”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나일천의 모습은 영락없이 눈치 없는 노인네였다. 그 답답한 행동에 장문인들은 분노가 치밀었지만,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중이었다. 함부로 불만 어린 눈빛조차 보일 수 없었다. ‘도움이 안 되는 늙은이 같으니. 대체 누구 편이야?’ ‘진작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뒷방으로 물러날 것이지…….’ ‘설마 맹주와 무슨 거래라도 한 것은 아닐 테지?’ 장문인들이 그런 의심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흘흘. 기대가 되는구만. 올해 후기지수들이 아주 볼 만하다던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일천은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에게 씩 웃어준 여필극이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외쳤다. “그럼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하겠소이다! 참가자들은 호명하는 순서대로 올라오시게!” 첫번째 참가자가 비무대로 올라가자, 곧 시작될 무림맹주와 후기지수들의 대결에 모두가 숨을 죽이기 시작했다. * * * 퍼어어엉!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비무대 밖으로 날아간 참가자가 허공에서 중심을 잡고 두 발로 바닥에 착지했다. “아직 더 할 수……. 우웨엑!” 안색이 하얗게 질린 참가자는 허리를 숙이고 오늘 아침과 전날 밤에 먹은 것을 모조리 게워냈다. 그리고 그대로 탈진해 쓰러졌다. 의료팀에서 기절한 참가자를 데리고 나가자 여필극이 무심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까닥였다. “다음.” “맹주님께 한 수 배우겠습니다!” 비장한 표정으로 올라온 다음 참가자의 결과 역시 앞선 참가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에엑-!” 털썩. “다음.” 여필극의 주먹에는 자비가 없었다. 참가자 모두를 자랑스럽게 바라보던 인자한 눈의 맹주는 더 이상 없었다. 무쇠로 이루어진 인간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비무대 위로 올라오는 무인들을 족족 날려버렸다. 콰앙! 첫 번째 주먹에 열에 아홉은 무기를 놓쳤고. 퍼억! 두 번째 주먹에 골까지 흔들리는 충격을 받았으며. 퍼어엉! 세 번째 주먹에 허공을 날아 비무대 밖으로 떨어졌다. 비무대에 오른 이들 중 대다수가 삼초식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의식을 잃었다. 팔대문파 출신 참가자들도 예외 없이 박살이 났다. 제자들이 비무대 밖으로 나가떨어질 때마다 장문인들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렇게 스무 명을 연달아 비무대 밖으로 날려버린 여필극이 두 주먹을 부딪치며 말했다. “혹시 일류고수가 되기 쉬운 줄 알았나?” “…….” 자신감에 차 있던 후기지수들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저것도 많이 봐주는 거겠지.’ 기무혁은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맹주의 움직임과 초식을 최대한 분석하려고 했지만, 그 주먹에 날아간 인원이 스무 명이 넘어가면서 관두기로 했다. “의미가 없겠어.” 스무 명이 전부 똑같은 방식으로 당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 한 번 바꾸지 않고 삼 초식을 순서까지 똑같이 펼치고 있는데 막아낸 이가 없다는 뜻이었다. 맹주는 그 와중에 상대하는 무인들에게 필요한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공격하기 전에 어깨를 움찔하는 버릇이 있군. 고치거나 차라리 허초로 삼게.” “……예!” 퍼어엉! “생각이 지나치게 많구나. 맞수나 하수를 상대한다면 모를까, 한참 윗줄의 고수를 상대로는 본연의 움직임에만 집중하는 것이 옳다.” “아, 알겠습니다!” 꽈아앙! “호흡부터 신경 쓰게. 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해보는 거야.” “후우, 후우, 후우우…….” “그래. 잘했다.” 쩌어어엉! 그야말로 압도적인 신위. 신체적인 노쇠로 전성기에서 내려왔다고 알려졌지만, 그런 평가가 무색하게 지금 여필극의 모습은 그야말로 무신에 가까웠다. “맹주가 아직도 저 정도였나?” “권왕이라는 별호만 남은 줄 알았더니…….” “허어. 무림맹이 팔대문파의 등쌀에도 당당한 이유가 여기 있었군.” 점잖은 각계각층의 명사들마저 무림맹주의 무위를 보고 웅성이기 시작했다. 직접 시험을 치르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흥미롭다고 생각한 정도였지만, 직접 그 위용을 보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 이 자리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무림맹주 여필극이었다. “다음.” “다음.” “다음.” 그렇게 철벽같은 시험관이 되어 모두를 떨어뜨릴 기세를 보여주던 무림맹주가 처음으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다음!” 비무대 위로 새롭게 올라오는 청년을 보자마자, 무심하기만 했던 무림맹주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69화. 제정신이 아니구나? 무림맹주가 비무대 위에서 무용을 뽐낼수록 팔대문파 장문인들의 표정은 굳어가고 있었다. “애들을 상대로 무슨 장난인지…….” “쯧쯧. 체면도 모르고 말이야.” “뭘 믿고 자꾸만 선을 넘는지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들은 얼굴에 억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기막을 둘러쳐 소리를 차단한 채 입술을 움직이지 않는 복화술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각계의 명사들이 앉아있는 자리였다. 카메라를 통해서 방송으로도 송출되는 상황. 못마땅한 표정이나 언행이 노출되기라도 하면 온 국민의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시험을 왜 이리 떠들썩하게 만들었나 했더니…….” “우리를 물 먹이려고 작정한 것이었나 봅니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지 궁금하군요.” 때문에 세 장문인은 맹주의 도발이나 다름없는 언행에도 애써 분노를 삼키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홀로 재미나게 구경을 하는 창천검노 나일천만 제외하면 말이다. “흘흘. 맹주의 각오가 보이는구만. 아주 작정하고 날을 잡았어!” 뭐가 그리 즐거운지 혼자서만 싱글벙글이었다. 가식적인 미소를 띤 태극검문의 장문인이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맹주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저희를 모욕했습니다. 저희가 보는 앞에서 팔대문파의 후기지수들을 비무대 밖으로 날려버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거야 자네 제자들의 실력이 그뿐이니 어쩔 수 없지 않누?” “노야!” “나 귀 안 먹었어.” 창천검노 나일천이 귀를 후비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는 다른 장문인들처럼 복화술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모욕이라는 말 쉽게 하지 말게. 지금 자네들이 느끼는 것이 모욕이면, 그동안 우리가 맹주를 못살게 군 것은 무엇인가? 여필극이가 진즉 생사결을 신청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지, 쯧쯧.” “…….” 나일천의 충격적인 발언에 세 장문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창천검노 나일천은 팔대문파가 함께 해온 동맹의 역사를 가장 앞장서서 써내려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였다. 동맹의 구심점 중 하나이자 갈등이 생길 때에 중재자로 나서서 문파간의 협력을 이끌어내던 인물. 그랬던 그가 지금 무림맹주를 두둔하고 있었다. “……앞으로 맹주에게 힘을 실어주시겠다는 걸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노야. 지금 하신 말씀은 동맹을 깨는 발언입니다.” “창천검문 전체의 뜻입니까?” 주변을 의식하는 것도 잊고 심각해진 세 장문인을 본 나일천이 느물거리며 한발 물러섰다. “흘흘. 노망난 늙은이의 말을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게. 난 그냥 외손녀를 보러 왔을 뿐이야.” 세 장문인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언뜻 눈치 없는 노인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백년 묵은 구렁이가 들어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디 보자. 우리 연하는 뭘하고 있나…….” 장문인들이 흘겨보거나 말거나 나일천의 시선은 부연하를 향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외손녀. 핏줄이어서가 아니라, 그 능력이 창천검문을 팔대문파가 아닌 다음 세대의 천하제일문파로 우뚝 서게 하리라 기대를 품게 만드는 아이. 나일천이 다음대 장문인으로 콕 점찍어놓은 후계자이기도 했다. ‘저 아이가 호들갑을 떨 정도로 대단한 후기지수가 있다고 해서 겸사겸사 구경하러 왔건만…….’ 나일천은 마침 외손녀의 옆에 있는 기무혁을 유심히 살폈다. 부연하가 자꾸만 말을 거는데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것이 조금은 괘씸했다. 저 아이가 연하의 스카웃을 거절한 아이라면…… 일부러 저러는 걸까? 몸값을 올리려고? 산전수전 다 겪은 노강호의 노회한 눈에도 기무혁의 표정은 도통 읽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잠시 둘에게서 시선을 떼 주변을 둘러보던 나일천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거……. 욕심나는 인재가 한둘이 아니구만?” 올해가 역대급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후기지수들이 몰린 해라더니, 문파로 데려오고 싶을 만한 인재들이 곳곳에 보였다. 특히 지금 막 비무대 위로 올라오는 후기지수도 그 중에 하나였다. “두둥! 신강헌 더 오리진! 드디어 무대 위에 등장!” 금발에서 다시 흑발로 돌아온 신강헌이 자체적으로 등장 효과음을 내며 맹주와 마주섰다. 보는 사람이 조금 부끄러울 정도이긴 해도, 실력 하나만큼은 기대가 되는 후기지수의 등장이었다. * * * -쾅! 시험 중에 번잡스러운 예를 생략하기로 했다지만, 다짜고짜 비무대에 도를 내리찍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참가자는 신강헌이 유일했다. “맹주님! 한 수 제대로 부탁드립니다!” 히죽 웃은 신강헌이 마치 상대를 도발하듯 칼끝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여필극은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하하! 파이팅이 넘치는 녀석이구나. 실력도 그만한지 볼까?” “바로 시작해도 되나요?” “왜? 긴장해서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려고? 그럼 올 때까지 기다려…….” 그 순간 신강헌이 몸을 낮추더니 폭발적인 스프린트로 맹주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며 두 사람의 신형이 겹쳤다. “이놈 보게?” 촤아아아악! 맹렬하고 사나운 도초가 여필극의 몸을 일도양단할 기세로 들이쳤다. 그간 실전에서 갈고 닦은 도법에는 정제된 살기가 담겨 있었다. 여필극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동시에 눈은 차갑게 빛났다. “화려한 겉모습 속에 예리한 칼을 숨겼구나. 훌륭한 기습이다. 허나 상대가 나쁘군.” 콰아앙! 무림맹주의 첫 번째 주먹이 신강헌의 도를 튕겨냈다. 그러나 무기를 놓친 앞선 참가자들과 달리, 신강헌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억지로 버티지 않고 훌쩍 물러서며 충격을 상쇄했다. “호. 잘 막았구나?” 저릿저릿한 손아귀를 가볍게 풀어주며 신강헌이 씩 웃었다. “앞에서 어떻게 당했는지 다 봤는데, 똑같이 당하면 등신이죠.” “하하하! 방금 네가 몇 명을 등신 취급했는지 아느냐?” 껄껄 웃은 여필극이 곧장 두 번째 주먹을 뻗었다. 또 막을 수 있을지 보겠다는 기대감이 어린 얼굴이었다. 쩌어엉! 여필극의 주먹이 신강헌의 도 옆면을 후려쳤다. 어지간해서는 힘으로 밀리지 않는 신강헌이 비틀거렸다. 그러나 끝내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버티더니, 이내 벼락처럼 횡으로 도를 휘둘러 반격했다. 눈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가는 칼날을 보며 여필극이 흐뭇하게 웃었다. “좋구나! 이대로 세 번째도 받아봐라!” 흥이 오른 여필극이 바닥을 박차고 몸을 높게 띄웠다. 휘리릭! 허공에서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키며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발차기. 그가 각법을 펼친 것은 시험을 시작한 이후 처음이었다. “흐읍!” 눈을 부릅뜬 신강헌은 무릎을 굽혀 다가올 충격에 대비하면서, 동시에 도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피하지 않는다?’ 찰나의 순간 여필극의 눈에 의아함이 어렸다. 도를 휘둘러 반격하거나 최소한 막으려고 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무기를 내리고 뭘로 막으려는 것이지? 어깨나 팔을 내주려는 겐가? 아무리 강골이어도 반드시 부러질 텐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십 가지 생각이 들었으나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일류고수를 가리는 시험이었다. 그에 합당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앞선 스무 명과 똑같은 결과를 받을 수밖에! 그리고 잠시 후, 여필극은 신강헌이 내놓은 답에 눈을 부릅떴다. 쩌어억! 무림맹주의 퇴법을 이마로 받아낸 신강헌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였다. “이리 무식한……. 제정신이 아니구나?” “제 차례입니다!” 천하의 무림맹주를 당황하게 만든 한 수. 어깨나 팔보다 훨씬 튼튼한 두개골로 발차기를 받아낸 직후, 신강헌은 늘어뜨려 놓았던 도를 섬전처럼 휘둘러 여필극의 심장을 찔렀다. ‘이겼다!’ 승부욕이 활활 불타오르는 눈은 잠시 후, 바로 앞에서 펼쳐진 일이 믿기 힘들다는 듯 일그러졌다. “합격.” 바닥에 내려선 여필극이 두 손가락만으로 칼날을 잡아낸 모습으로 흡족하게 웃었다. “다소 과격하긴 하다만 일류고수에 걸맞은 실력과 판단이었다.” “…….” 무림맹주의 입에서 나온 최초의 합격자 선언. 둘 사이에서 수많은 움직임이 오갔지만, 지켜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숨을 몇 번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안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몰입해서 지켜보던 후기지수들이 참았던 숨을 겨우 내쉬었다. “후아…….”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마, 마지막에 어떻게 된 겁니까?” “방금 합격이라고 한 거 맞죠?” 넋을 잃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웅성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합격자를 향한 함성과 환호가 되어 울려퍼졌다. “와아아아아아-!” “신강헌! 신강헌!” 무림맹주를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고 거침없이 도를 휘두르던 패기 넘치는 모습은 지켜보던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신강헌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한국무림에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저 또라이. 해도 꼭 지 같은 전략을 써요.” 기무혁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신강헌을 향해 수많은 플래시 세례와 환호가 한참동안 쏟아졌다. 생각이 많아 보이던 팔대문파의 장문인들마저도 지금은 그저 감탄한 얼굴로 비무대 위의 주인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저런 재능을 어째서 안 데려온 거지?” “삼촌이라는 자가 지독하게 협상 중이라더군요. 요구한 계약금이 너무 높다는 말은 들었는데…….” “오늘 이후로 그 금액이 천정부지로 치솟겠군.” “흘흘. 웬만한 일류고수는 벌써 뛰어넘은 수준인데?” 팔대문파 장문인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극찬이 쏟아졌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차분한 표정으로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아낼 뿐이었다. “…….”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기뻐서 방방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어깨를 들썩이는 기색이 화가 난 듯 보이기까지 했다. 그 이유를 짐작한 여필극이 웃으며 물었다. “내게 한 방 먹이지 못해서 아쉽더냐?” “……이길 생각이었거든요.” 뒤늦게 머리에 충격이 오는지, 신강헌은 갑자기 비틀거렸다. 그러나 넘어질 듯 하면서도 간신히 균형을 잡더니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젠장. 꼭 이겨서 그 자식을 놀려줄 생각이었는데…….” “맹랑한 녀석. 삼 초식 안에 승부를 보려고 일부러 들이댔지?” 정석적으로 대련에 임했다면, 충분히 몇 초식은 더 버틸 수 있을 만큼 신강헌의 실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그는 안전하게 싸우는 대신 과감하게 승부를 걸었고, 무림맹주가 낭패할 뻔한 기회를 만들었다. “천운이 다섯 번쯤 따라줬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실력으로 이기려면…….” “최소 이십 년은 이르다, 요 녀석아.” 흐뭇한 표정으로 웃던 여필극이 기막을 펼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백호단 부단주를 지냈던 신재현의 아들이라고 들었다.” “저는 잘 모르지만, 훌륭한 도객이셨다고…….” 그 순간, 신강헌은 무림맹주의 얼굴에서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그리움, 더해서 미안함이라는 감정이었다. “……그렇다마다. 지금 펼치는 것은 네 아버지가 남긴 가전도법이지?” “네. 삼촌한테 배웠어요.” “무공은 언제부터 익혔느냐?” “중3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요…….” 점점 말이 느려지고 의식이 흐릿해졌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신강헌은 억지로 눈을 부릅뜨며 끝까지 무림맹주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지만.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해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쉬거라.” “꼭…… 해주셔야 돼요…….” 다음을 약속한 신강헌은 히죽 웃더니 도를 놓고 그대로 뒤로 누워버렸다. 쿵. 대자로 드러누운 소년은 천천히 의식을 잃었다.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였다. “눈빛이 좋다. 훗날 멋진 협객이 되겠어.” “멋진, 협객…… 흐흐…….” 바닥에 쓰러진 신강헌을 바라보며 여필극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70화. 현실적으로 충분히 “진작 좀 이렇게 하지.” 기무혁은 무림맹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판을 지켜보며 피식 웃었다. 지난 수십 년간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의 주인공은 팔대문파였다. 유일한 예외는 리차드 한이 등장했을 때뿐이었다. 그동안 무림맹은 언제나 들러리에 불과했다. 시험의 주최자이면서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팔대문파 후기지수들을 빛내주기 위한 역할이 전부였다. ‘지금은 그 반대가 돼 버렸지만.’ 비무대 위에서 직접 후기지수들을 시험하고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하는 여필극의 모습에서, 어느 때보다 정파무림의 맹주다운 권위가 느껴졌다. “다음!” “다음-!” 신강헌이 의료팀에 의해 실려 간 후에도 여필극은 지치지도 않는지 다음을 외쳤다. 그 누구도 무림맹주가 판정한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만을 드러내지 못했다.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왔어.’ 지금 이 자리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무림맹과 무림맹주였다. 라이센스 시험이 끝나고 난 후에도 그 영향은 크게 남을 터였다. 반면 들러리 역할에 낯선 팔대문파 장문인들에게선 어쩔 수 없이 불편함이 드러나고 있었다. “확실히…… 내가 알던 모습과는 다르게 변하고 있네.” 이러한 변화에 자신도 한 손 거들었다는 생각에 기무혁이 뿌듯함을 느낄 때였다. “준비는 잘 했느냐?” 노구천이 옆에 와 있었다. 무림맹주의 심복이자 지금의 라이센스 시험을 기획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무림맹의 원로. 최근에는 무림맹의 군사(軍師)라고도 불리기 시작한 그였다. “갑자기 준비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요. 평소에 열심히 수련했으니 딱 그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요?” 기무혁은 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침 창천검문으로 들어올 생각 없냐며 몇 번을 더 권유하던 부연하가 다음을 기약하고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비무대 위에 시선을 빼앗기거나 자기 차례를 준비하며 스스로에게 집중한 상태. 덕분에 두 사람은 조금은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허허. 너는 성격이 겸손한 건지 오만한 건지 도무지 모르겠구나.” “음. 저는 자기 객관화를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었기에, 노구천은 역시 그 스승에 그 제자려니 하고 넘어갔다. “하여간 이 이야기를 해주러 왔다. 네 스승이 지난밤에 빙하신녀를 만나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구나.” “그럼?” 기막을 둘러친 노구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곧 체포조가 움직일 게다.” 양하윤을 직접 시험장까지 데려다준 빙하신녀의 모습이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았는데, 다들 맹주에게 시선을 빼앗겨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없는 듯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기무혁이 말했다. “타이밍이 중요하겠네요.” “그래서 네가 저 위로 올라갈 때쯤 자기에게 알려달라고 하더구나.” “……왜 하필 그때죠?” “보나마나 사람들의 정신이 가장 많이 팔려 있을 거라던데?” 노구천이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기무혁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네 스승의 전언이다. 올라가서 네 마음껏 날뛰어 보거라.” 기무혁은 부담된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도 무림맹주의 주먹이 무인 한 명을 하늘로 날려버리고 있었다. “뭘 기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신강헌 그 또라이처럼 날뛰는 스타일은 아닌데요.” 당연히 노구천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네가 더하면 더했지…… 뭐 그런 표정이었는데, 기무혁은 신강헌 같은 또라이랑 같이 묶여서 억울한 심정이었다. “하여간 응원하고 있으마.” 눈을 찡긋한 노구천이 마지막으로 기무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후 자리를 떠났다. “참나…….” 콰아아앙!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그 잠깐 동안에도 몇 명이 허공을 날았다. “다으으음-!” 그래도 팔대문파의 후기지수들은 저력을 보여주었다. 태극검문의 송준호는 무려 여섯 초식을 버텨내며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일월문의 양하윤도 칠 초식에서 무릎을 꿇으며 명사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금영문의 피승화도 오 초식을,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중견문파 송월문의 오정민도 삼 초식을 막아내고 쓰러져 박수를 받았다. 앞서 신강헌이 그들의 호승심을 자극했기 때문인지 다들 평소 이상의 실력을 끌어냈다. 와아아아아아아! 실력이 출중한 참가자들이 자신을 증명할 때마다 환호가 쏟아졌고, 후기지수들이 사문의 체면을 살리자 팔대문파 문주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방송사 시청률과 너튜브의 시청자수가 시간이 갈수록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일류 라이센스 시험의 마지막 참가자가 등장할 순서가 되었다. “이제 몸이 좀 풀렸는데, 벌써 마지막 차례로군.” 백여 명을 비무대 밖으로 날려버리고도 지치기는커녕 혈색이 더 좋아진 여필극이 기무혁을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일류 라이센스 도전자는 비무대로 올라오시게!” 기무혁이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자신감 있게 경공을 펼쳐서 훌쩍 뛰어오르지도, 기합을 넣으며 일부러 시선을 끌어모으지도 않았다. 이미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저벅저벅. 천천히 계단을 올라와 비무대로 향하는 아직 앳된 얼굴의 청년. 그를 향해 호기심과 기대감이 어린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이거 꽤 부담되는데…….” 그러나 입꼬리는 자꾸만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자리. 지난 생에 낭인으로서 온갖 경험을 해본 기무혁에게도 낯선 일이었다. 가슴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세계제일비무대회는 여기보다 훨씬 더 크고 부담되는 곳이겠지.’ 기무혁은 애써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 방송으로 이 장면을 보고 있는 사람들 중, 기무혁이 어느 정도의 무인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이 지나면……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 “올라오는 데 늑장을 부리는 녀석은 또 처음이구나.” 비무대 중앙에서 여필극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의 장난기 섞인 투덜거림에 기무혁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저도 한참을 기다렸으니 맹주님도 조금 기다려주시면 안 될까요?” “……뭐라고?” 후기지수가 무림맹주에게 말대꾸를 하는 모습에 지켜보던 명사들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방송으로 보던 사람들도 황당해했고, 너튜브 채팅창은 터져 나갈 것처럼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 친구 미친 거 아냐?” “도발할 사람이 없어서 맹주님을…….” “객기 부리다가 큰코다치지.” 그러나 그건 기무혁이 의도한 말대꾸였다. 체포조가 움직이기 쉽도록 시선을 끌라고 노구천이 당부했으니까. 그 방식을 굳이 무공으로만 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이러면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겠지.’ 여필극도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기무혁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싸늘하게 웃으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래? 아예 부모님께 영상편지라도 보내지 그러느냐? 앞으로 며칠 뵙기 힘들지도 모르니…….” 농담처럼 웃으면서 말하는데 그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지켜보던 후기지수들이 자기도 모르게 파르르 몸을 떨었다.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창천검노 나일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흘흘. 맹주가 마지막 순서에 배치한 걸 보니…… 어지간히 기대를 하게 만드는 녀석이구만.” 다른 팔대문파 장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세히 보기 위해 저도 모르게 몸을 앞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이 대련을 기대하는 사람은 바로 여필극이었다. ‘그간 부단히 수행을 해온 것이 느껴지는구나.’ 공식적인 자리이기에 기무혁을 아는 척하지 않았지만, 그가 직접 오행신공을 가져다 주기까지 한 후기지수가 아니던가. 고작 몇 주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 지났지만, 기무혁의 성취가 얼마나 늘었을지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 일류 라이센스 참가자이니만큼 각오를 물으마.” 두 주먹을 가슴 앞에서 부딪친 여필극이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너도 날 이길 생각으로 나왔느냐?” 앞서 가장 강렬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신강헌을 빗대어 묻는 질문이었다. 비록 삼 초식 만에 끝나기는 했지만, 그 대련을 지켜본 무림인들은 신강헌이 빠르게 승부수를 던지지 않았다면 몇 초식은 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과연 기무혁이란 후기지수가 그보다 더 강렬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러나 당사자인 기무혁은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렇게 무모한 성격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편이라서요. 감히 맹주님을 이기겠다는 건방진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자신감이 떨어지는 듯한 대답에 지켜보던 사람들의 표정에 조금은 실망감이 어렸다. 무림의 후기지수라면 허세에 가깝더라도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길 원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여필극은 실망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기무혁에 대해서 조금은 더 알기 때문이었다. “호오. 그럼 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고 나왔겠구나?” 기무혁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능할 것 같은 목표를 정하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데…….” “묻거라.” “일류고수 시험이 아닌 절정고수 자격에 도전해도 될까요?” 여필극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오를 때였다. 기무혁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며 웃었다. “맹주님한테 십 초식 버티는 거. 보니까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서요.” 마침 의무실에서 정신을 차린 신강헌이 TV로 그 모습을 보고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역시 네가 제일 미친놈이다.” 생중계로 지켜보던 사람들과 너튜브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커뮤니티가 기무혁이란 이름으로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여필극만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최건의 제자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몇 마디 말로 기무혁은 어마어마한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지금 한국무림에서 저 녀석을 지켜보고 있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렇게까지 잘 해주었으니, 자신도 기꺼이 장단을 맞춰줘야 할 터였다. “오냐! 지금부터 절정고수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도록 하마!” 콰콰콰콰콰콰-! 여필극의 무복이 미친 듯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두 눈에서는 형형한 안광이 쏟아지고, 전신에서 소름 끼치는 기세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건 절정고수 시험이 아니라 절정고수도 패 죽일 수준인데…….’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에 기무혁이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물러서거나 봐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그에 맞춰서 자신도 전력을 끌어올릴 뿐. ‘오행신공.’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내공이 사지백해로 뻗어나가며 전신을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금(金)과 수(水) 두 가지 기운이 주도적으로 몸 안을 질주한다. 다른 세 기운도 아직은 미약하지만 뒤따르며 힘을 보탰다. 콰콰콰콰-! 기무혁의 머리카락이 나풀거리고, 황금빛 기운과 푸른 기운이 은은하게 몸 위로 흐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실력을 숨기지 않을 생각이더냐?” 잔잔한 미소를 짓는 여필극의 질문에 기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대로 보여줄 생각입니다. 세계를 향해서요.” 기분 좋게 웃은 기무혁이 여필극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 * * 라이센스 시험에 한국무림의 이목이 대부분 집중된 그 시각. 일월문의 본단이 위치한 빌딩에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쩌저저저적-! 맹렬한 불꽃과 날카로운 냉기가 부딪치며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수증기를 피워냈다. 그러나 불꽃과 냉기가 팽팽하게 맞서기도 잠시. 쩌저저저저저적-! 무시무시한 한기가 앞을 가로막는 화염을 밀어내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밀려나는 불꽃 너머에서 분함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로! 이게 대체 무슨 미친 짓이오!” “빙하신녀! 문파를 배신할 셈인가!” “어서 장문인께 빨리 연락해라!” “토, 통신이 안 됩니다! 지금 전부 다 먹통…….” 고함과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누구도 빙하신녀의 전진을 막아낼 수 없었다. 장문인이 온갖 비밀을 숨겨놓은 지하의 장소로 향하는 복도였다. 힘으로 수많은 보안 장치와 무인들을 돌파한 빙하신녀가 저항하는 양강 계파의 무인들에게 경고했다. “누가 배신자인지는 오늘 밝혀지겠지. 그러니 비켜라. 내가 지금 화가 많이 나서…… 실수로 몇 명쯤 죽일지도 모르거든.” “……!” 그녀의 서슬 퍼런 경고에 장진명의 심복들인 양강 계파의 무인들이 뒷걸음질 치기 바빴다. . . . 잠시 후, 반대 계파를 완전히 제압한 빙하신녀가 지친 표정으로 뒤를 바라봤다. “……뒤는 맡기지요.” 그곳에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최건과 김복자, 황숙수가 있었다. 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녀는 물러나 있게. 지저분한 조사는 우리가 전문이니.” “……올라가서 제자들을 살피고 있겠습니다.” 빙하신녀가 문파를 수습하고 있겠다며 돌아가고, 지하실 앞에 세 사람이 나란히 섰다. 황숙수가 잔뜩 흥분해 충혈된 눈으로 지하실 문의 복잡한 잠금장치를 해제하며 중얼거렸다. “흐흐흐. 내 평생 팔대문파를 털어먹을 날이 올 줄이야……!” “경박한 놈. 필요한 정보가 담긴 자료가 우선이다. 애먼 데 손을 대면 손모가지를 잘라버릴 것이야.” “마, 말이 그렇다는 거죠.” “빨리 풀어요, 아저씨. 이 작전은 시간이 생명이거든요?” “자꾸 나한테만 그래…….” 기무혁이 맹주와 부딪치고 있는 그 시각, 세 사람은 일월문의 비밀을 캐내고 있었다. 71화. 절정고수라 함은 무림맹주와 기무혁이 비무대 위에 마주 선 순간, 가파르게 올라가던 방송사 시청률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무림인 관련 모든 커뮤니티는 기무혁에 대한 내용으로 도배되는 중이었다. [쟤 뭐 있음? 왜 이렇게 나댐?] [한때 유명했던 후기지수임. 근데 체질검사에서 망했다고 들음.] [한 방에 날아간다에 내 치킨쿠폰 건다.] [그래도 좀 치는 거 같은데? 삼 초식은 간신히 버틸지도?] [흑역사 제대로 박제될 듯.] 자신감을 넘어서 건방지게 느껴지는 기무혁의 태도에, 여론은 썩 좋지 않았다. 자리에 초대를 받은 명사들도 고까운 눈으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절정고수에 도전하겠다니…….” “용기와 만용은 구분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맹주께서 따끔하게 가르침을 주시겠지요.” 그만큼 첫 시험에서 절정고수 라이센스를 획득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세계제일인 리차드 한도 첫 라이센스 시험에서 일류 라이센스를 획득하는 데 그쳤으니까. 물론 미국으로 귀화한 후에 거의 바로 절정고수 자격을 획득했지만……. 자신을 향한 따가운 눈초리와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기무혁이 비무대를 박차며 선공을 취했다. “자신감만큼 실력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달려드는 기무혁을 향해 소리친 여필극이 일격을 휘둘렀다. 그 순간 모두가 무림맹주의 주먹이 몇 배로 커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지간한 후기지수는 한 방에 날아가 버릴만한 일격에 지켜보던 명사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 쩌엉-! 무림맹주의 첫 일격을 검으로 비껴 막아낸 후, 기무혁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 표정이 침착하다 못해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어?] [저렇게 쉽게?] [고작 한 걸음…….] 얼마나 잘하는지 보겠다며 탐탁잖은 눈으로 쳐다보던 사람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껏 누구도 맹주의 첫 일격을 기무혁처럼 평범하게 막아내지 못했으니까. 대단하다는 생각 이전에 뭔가 잘못된 것을 본 것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하하! 말뿐만은 아닌 것 같구나!” 여필극만이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재차 주먹을 말아 쥐었다. 보다 무거워진 두 번째 주먹이 포탄처럼 쏘아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기무혁의 대처는 간결했다. 몸을 낮춤과 동시에 검을 올려쳐 주먹의 궤적을 옆으로 틀었다. 까앙! 타이밍이 조금이라도 빠르거나 늦었으면 그대로 검이 부러질 수도 있는 위력이었지만, 기무혁은 정확한 순간을 포착해 충격을 최소화했다. 퍼버버벙! 뒤늦게 비껴 나간 주먹에서 풍압이 터져 나왔다. 아래에서 지켜보던 후기지수들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그 모습을 방송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은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기분이었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막아?] [맹주님이 봐주는 거 아냐?] 반면 무공을 조금이라도 익혔거나 안목이 있는 이들은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벌렸다. 단순히 기무혁의 무공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앞선 후기지수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 기교. 그 기교를 드러내지 않는 간결함. 무엇보다 찰나에 이루어진 판단력과 그걸 실행하는 과감성까지. 쩌어엉-! 무림맹주의 세 번째 초식까지 연달아 막아낸 기무혁이 도리어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무혁이 신강헌처럼 승부수를 던질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기무혁의 방식은 신강헌뿐 아니라 누구와도 달랐다. 반격을 하려고 기다리던 맹주의 눈썹이 꿈틀댔다. ‘속임수?’ 파고들 것처럼 보였던 움직임은 페이크였다. 여필극이 반격을 하려고 기다린 간격 바로 앞에서, 기무혁은 반보 뒤로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다. 사악! 서늘한 감각이 여필극의 허벅지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록 살갗에는 닿지 못했지만, 날카로운 예기에 무복 자락이 잘려 나갔다. 라이센스 시험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 벌어진 사건. 여필극은 여유롭게 뒤로 물러서는 기무혁을 쫓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급소가 아니라 다리를 노렸지?” “자기보다 강한 상대와 싸울 때는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게. 가능하다면 기동성부터 무너뜨리라고 배웠습니다.” 지난 생의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이번 생에는 검마 최건에게. -신공절학을 얻었다고 네가 싸우는 방식을 바꿀 필요는 없다. 오행신공이라는 신공을 익히게 된 것은 분명 천고의 기연이었다. 하지만 최건은 제자에게 신공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너는 이미 완성된 검을 지니고 있다. 신공이든 뭐든 거기에 너를 맞추지 마라. 너에게 그것을 맞춰서 사용해라. 최건 또한 억지로 기무혁의 검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거칠고 사나웠던 낭인의 검을 더욱 예리하고 단단하게 벼려냈을 뿐. 앳된 청년의 얼굴 위로 누군가를 본 여필극이 씨익 웃었다. “좋은 스승을 두었나 보구나.” “최고의 스승님이시죠.” 두 사람의 입가에 똑같이 짓궂은 미소가 맺히기도 잠시. 쿵! 여필극이 다시 성큼 전진보법을 밟으며 기무혁에게 쇄도했다. 주먹에 맺힌 무색의 기파가 공기를 사방으로 찢어발겼다. 쐐애애액! 그러나 무림맹주가 뻗은 네 번째 주먹도, 다섯 번째 공격도 기무혁은 차분하게 대처해 전부 막아냈다. “진짜 미쳤군…….” “순식간에 다섯 초식을 막은 거 맞지?” 기무혁이 자신을 향하던 의심의 눈초리를 감탄과 경악으로 바꿔놓기까진 몇 분이면 충분했다. 방송으로 보고 있던 시청자들도, 커뮤니티에서 기무혁을 조롱하며 떠들던 이들도, 어느새 하던 것을 모두 멈추고 뚫어져라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첫 라이센스 시험을 치르는 후기지수가 저렇게 노련할 수 있는 겁니까?” “전쟁터에서 백전을 치른 무인에게서나 느껴지는 분위기가…….” “허허, 내공을 많이 쓰지도 않은 것 같은데요.” 웅성웅성. 각계각층의 명사들마저 소란스러워진 와중에, 그 자리의 최고수들이라 할 수 있는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은 침묵했다. “…….” “…….” 그러나 사실 그들은 누구보다 대련을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창천검노 나일천이 문득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흘흘. 연하가 왜 그렇게 안달을 냈는지 이제야 알겠구만…….” 기무혁은 다른 후기지수들과 달리 무공의 강함을 증명하는 게 아닌 싸우는 방법 자체를 보여주고 있었다. 철저하게 필요할 때만 검을 뻗고, 그 외에는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것이 낭인이나 살수의 방식과도 닮았다. 하지만 전반적인 방식이 그러할 뿐, 언뜻언뜻 드러나는 검의 기교는 명문검파의 검객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즉,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화려한 검격을 펼쳐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필요 이상의 힘은 쓰지 않으면서 기회를 노리는구나. 언제라도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는 늑대 같은 기질이야. 헌데 극도로 정교하기까지 하니…….” 나일천의 복잡한 감상을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한마디로 압축했다. “천재로군.” 일월문주 장진명의 희미한 중얼거림에, 다른 장문인들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또한 한평생 천재 소리를 듣고 살아온 무인이었다. 팔대문파의 장문인 중 그렇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럼에도 기무혁이 보여주는 모습은 장문인들조차 충격에 빠뜨릴 수준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본문으로 데려와야겠군.” “섣불리 장담하지 마시지요. 금영문이 먼저 나설 테니까.” “흘흘. 자네들 지금 뭐 하나?” 태극검문, 금영문, 창천검문의 장문인들이 후기지수 한 명을 두고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까드득. 일월문주 장진명만이 유일하게 그 기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이를 갈았다. ‘양하윤을 구했다던 그 주제도 모르는 애송이가 저놈이었군…….’ 사실 그는 들끓는 살의를 간신히 가라앉히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근에 벌어진 사건들도, 눈앞에서 알량한 재주를 자랑하는 건방진 천재도. 대천문주에게 그랬듯, 이 자리에서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내는 중이었다. “진명이 자네, 어디 불편한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일천의 물음에 장진명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쩌엉! 콰아아앙-! 어느덧 기무혁은 여필극과 칠 초식을 겨루고 있었다. 그전까지 최고기록이었던 일월문의 양하윤이 세운 기록을 넘어선 순간. 잠시 주먹을 거둔 여필극이 입을 열었다. “훌륭하다. 확실히 일류고수의 기준으로 너를 평가하기에는 부족할 듯싶구나.” 무림맹주의 인정. 기무혁은 그를 지켜본 누구라도 납득할 만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당연한 결과였기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허나 절정고수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보여준 것만으로는 안 된다.” 단호하게 말한 무림맹주는 자세를 낮추고, 오른 주먹을 장전하듯이 당겨 옆구리에 붙였다. 쿠르르릉……. 권격이 일발 장전된 주먹에서 천둥소리가 들리고, 그 주변으로 대기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무식한 힘을 느낀 기무혁이 대련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맹주님. 그거 절정고수 시험용 맞습니까?” 여필극이 후후 웃었다. “절정고수라 함은 무(武)로써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뜻이다. 그걸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여필극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한계를 뛰어넘는 고난과 역경! 예를 들면 자신보다 격이 높은 상대로부터 살아남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무인만이 절정(絕頂)이라고 불릴 자격을 갖추었다고 믿는다!” 그 순간 기무혁은 망해가던 무림맹을 돕기로 결정한 것을 조금이지만 후회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검기만 보여주면 거의 통과였다고 들었습니다만…….” “갈!” 사자후로 기무혁의 불평을 잠재운 여필극이 고개를 돌려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절정고수 시험 참가자들에게 경고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후배 무인들이여! 스스로 완성한 무공을 믿어라. 그리하면 능히 다가올 역경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참가자들 중 일부가 진지하게 기권을 고민하게 만든 여필극이 다시 기무혁을 바라봤다. “금원유성권(金猿流星拳) 오의(奧義). 제 일식 섬광유희(閃光遊戱).” “이런 미친……!” 친절하게 초식명을 읊은 여필극이 호쾌하게 주먹을 뻗었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속도의 금빛 주먹이었다. 권격에서 터져 나온 권풍에 기무혁의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뒤로 휘날렸다. ‘정신 나간 늙은이가 진짜 죽이려고 작정했나!’ 턱까지 올라온 욕설을 간신히 참으며, 기무혁은 전력을 다해 방어초를 펼쳤다. 콰아아아아앙! 비무대 한쪽이 무너져 내리고, 먼지가 잔뜩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잠시 후, 가라앉은 먼지 너머에서 낭패한 몰골로 기무혁이 서 있었다. 깨끗했던 무복은 엉망이 되고,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에는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기무혁은 쓰러지지 않았고, 멀쩡히 검을 들고 있었으며 눈빛 또한 형형한 상태였다. “과연 버텨냈구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젊은 무인의 모습이 몹시 보기 좋다.” 여필극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다시 자세를 잡았다. “자, 이제 두 초식 남았다.” “……퉷. 진짜 이러실 겁니까?” 바닥에 피를 뱉어낸 기무혁이 저도 모르게 사나워진 눈으로 여필극을 노려봤다. 72화. 독고생사검(獨孤生死劍) “후우…….” 겉으로는 크게 다친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기무혁의 몸 안은 내상으로 엉망이었다. ‘성질 나오게 만드시네.’ 권왕이라 불리는 무림맹주의 성명절기를 받아냈다. 물론 전력을 다해 펼친 것은 아니겠지만, 기무혁은 그 일격에 몸이 바스러질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오행신공으로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의식을 잃고 비무대 밖으로 튕겨나갔을 것이다. 카가각……. 지팡이 대신 비무대 바닥을 짚은 검이 질질 끌리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맹주님.” 잠시 회복할 시간을 벌 겸, 기무혁은 시험의 공정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아무리 맹주님이라도 기분에 따라 시험 난이도를 바꾸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울컥한 마음에 조금쯤은 빈정거리는 말투가 섞여나왔다. 기무혁의 항의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지켜보던 명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방금 전 공격은…….” “맹주께서 지나치셨습니다.”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을 텐데요.” 방송으로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몇 배나 강력해진 무림맹주의 공격에 마치 자기가 당한 것처럼 불만을 터트렸다. [일부러 떨어뜨리려고 저러는 거 아님??] [팔대문파 후기지수가 아니라서 차별하는 거 같다……] [십 초식 얼마 안 남으니까 갑자기 살아남아야 통과 ㅇㅈㄹ ㅋㅋㅋㅋ] 기무혁을 욕하던 사람들이 어느새 그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필극은 주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기무혁만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눈빛이 매서워졌구나. 이제야 제대로 할 마음이 든 것이더냐?” “…….” 마치 자신을 완벽히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기무혁이 움찔했다. 수많은 카메라와 지켜보는 사람들 앞에서 실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감히 무림맹주를 상대로 여유를 부린 적은 없었다. “제대로라니……. 전 처음부터 최선을 다했습니다.” “딱 시험에 필요한 만큼만 효율적으로 치고 빠지던데. 그게 네 최선이더냐?” “…….” 검의 움직임과 내공의 소모를 최소화하는 효율적인 검법. 낭인 시절부터 갈고닦으며 발전시켜 온 실전적인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여필극은 지금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방식을 부정당하는 것 같아 불쾌해진 기무혁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럼 목숨을 걸고 맹주님을 베기라도 해야 한다는 겁니까?” 늑대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사나운 낭인의 기질이 묻어나는 대답. 꿀꺽…….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던 후기지수들이 더욱 긴장하는 가운데, 여필극이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혹은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선문답 같은 말을 하는 여필극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그 눈빛에는 까마득한 후배 무인을 향한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아홉 번째 초식을 준비하는 권왕의 주먹에는 자비가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아무래도 기무혁의 의문에 대답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쿠르르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맹주의 주먹이 다시금 들어 올려졌다. 전신을 억누르는 초고수의 기백에 기무혁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이건 못 피한다.’ 기무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여필극이 자신의 수준을 파악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즉,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하에 저 주먹을 내지를 거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막지? 막는 게 답이 아닌가? 차라리 반격을 하는 편이…….’ 해답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 마치 거대한 벽 앞에 선 것처럼 막막한 기분만이 들었다. 그리고 무림맹주의 아홉 번째 초식이 펼쳐졌다. “금원유성권(金猿流星拳) 오의(奧義). 제 이식 유성낙진(流星落塵).” 그 순간, 기무혁은 눈앞에서 금빛의 유성우가 쏟아지는 듯한 환영을 보았다. 순간 오기가 치밀었다. ‘어떻게든 뚫어주지!’ 기무혁은 이를 악물고 쏟아지는 유성우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유성낙진은 단숨에 수십 개의 권격이 몰아치는 초식이었다.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러야만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유성의 소나기 속에서 기무혁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막아내진 못했다. 촤악!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간 권격이 기무혁의 근육을 가르고 뼈를 흔들었다. 반탄력을 감당한 손아귀에서는 피가 뚝뚝 흘렀고, 보법을 딛는 다리가 천근처럼 무거웠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팔이 비명을 질렀다. “허, 완전히 무아지경이군.” 창천검노 나일천이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며 박자를 탔다. 신들린 듯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기무혁의 모습은 한국무림 최고 배분의 노강호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지켜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맹주의 맹공을 막아내고 있음에도, 기무혁의 눈은 이전보다 선명해지고 있었다. ‘맹주님의 말…… 어렴풋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쏟아지는 권격 속에서 기무혁은 여필극이 했던 말을 다시금 되새겼다. -절정고수라 함은 무(武)로써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뜻이다. 회춘한 듯 비무대 위에서 날뛰고 싶어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흘려들을 수 없는 조언이었다. 절정고수(絕頂高手). 소설이나 영화속에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묘사되곤 하지만, 무림에서 절정고수란 스스로의 무(武)를 정립하고 완성한 이들을 뜻했다. 지난 생의 낭인 기무혁도 그 경지를 넘어서 자신만의 무공을 완성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만만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충분한 시간과 내공이 주어졌으니, 가볍게 딛고 넘어갈 계단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과거에 완성한 계단을 쉽게 넘어간다면……. ‘더 높은 곳이 아니라 똑같은 길로 가겠지.’ 기무혁은 기어코 마지막 유성우를 검으로 베어내었다. 촤아아아악! 그리고 탈력감에 빠져 비틀거리다가 결국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아, 하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권격에 스친 무복은 넝마처럼 찢어져 있었다. “이제야 한계에 달한 것처럼 보이는구나.” 고개를 푹 숙이고 숨을 몰아쉬는 기무혁 앞에, 여필극이 걸어와 오연히 서서 물었다. “마지막 한 초식이 남았다. 끝까지 받아보겠느냐?” 무림맹주의 차가운 말투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방송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분노했다. 기무혁은 끝까지 검을 놓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누가 봐도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 마지막 초식을 받아보라는 것은 상대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하…….” 그러나 그 순간, 기무혁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들었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그는 너무나 즐거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당연하죠.” 기무혁은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숨이 차서가 아니라 하나의 깨달음에서 오는 설렘 때문이었다. ‘무인으로서 내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라는 의미였어.’ 독고귀 기무혁의 검. 누군가에게 말해줄 생각도, 제자 따위를 들일 마음도 없었기에 검법에 따로 이름을 붙여 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지어놓은 이름은 있었다. ‘독고생사검(獨孤生死劍).’ 홀로 생과 사를 넘나들며 익힌 낭인의 검. 오직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며 얻은 깨달음이 바탕이 되었다. 그것이 지난 생에 독고귀 기무혁이란 존재가 정립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이야.’ 지금 이 순간, 기무혁은 지난 생에 정립한 무(武)의 세계를 벗어나야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게 더 잘 맞는 옷이 있다면, 바꿔 입어야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기무혁이 부들거리는 팔을 들어 올려 여필극에게 검을 겨눴다. 지난 생에 쌓아 올린 계단 위에 새로운 벽돌 하나를 더 쌓을 것이다. 그리하여 더욱 높이 올라갈 수 있도록. “……뭔가 얻은 것 같구나. 좋다. 마지막이니만큼 나 또한 진심으로 갈 것이다.”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여필극이 천천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기무혁은 비틀비틀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쿠르르르르르릉……! 무림맹주의 마지막 십 초식에는 지금까지와도 수준이 다른 힘이 실렸다. 앞선 팔 초식과 구 초식을 합친 것보다 더 강맹한 위력이 느껴지자 팔대문파 장문인들조차 당황했다. “맹주! 아무리 흥이 올랐어도 그 이상은 지나친 것 같구려!”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창천검노 나일천이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다른 팔대문파 장문인들도 멈추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여필극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금원유성권(金猿流星拳) 오의(奧義).” 여필극의 무심한 눈동자가 기무혁을 향했다. 눈앞의 후기지수는 툭 치기만 해도 쓰러질 것처럼 힘겨운 상태였지만, 그 눈빛은 비무대에 올라온 이후로 가장 선명했다. 자연스럽게 여필극의 입꼬리도 올라갔다. “제삼식 금룡승천(金龍昇天)-!” 무지막지한 기파를 두른 주먹이 황금빛 용처럼 휘몰아치며 쏟아졌다. 눈앞의 것에만 온전히 집중한 기무혁의 시야에는 주변이 온통 뿌옇게 보였다. ‘벤다.’ 오행신공으로 마지막 한 톨 남은 내공까지 모조리 끌어왔다. 어차피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기무혁의 집중력이 한계까지 벼려졌다. “……!” 검에 오행의 힘이 서리기 시작한다. 금(金). 그리고 수(水). 두 개의 힘이 기무혁의 검을 타고 흘렀다. 다른 세 기운도 전신에 힘을 북돋웠다. ‘일검에 싣는다.’ 기무혁은 황금빛 용이 지근거리에 온 순간,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지금!’ 황금빛 용과 검이 충돌했다. 그와 동시에 기무혁의 몸에 어마어마한 압력이 쏟아졌다. 끔찍한 압력에 기무혁의 눈에 핏발이 서렸다. ‘아직…!’ 아직은 견딜 수 있었다. 단전을 한계까지 쥐어짜내고, 끊어질 것만 같은 손목을 감당하며 기무혁은 버텨냈다. 그 순간 귓가에 무림 맹주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는 무공으로 무엇을 완성하고자 하느냐?] 무림맹주와 열 번의 초식을 교환하는 것은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기무혁은 자신이 찾아낸 정답을 읊조리며 한 걸음 전진했다. “독보(獨步)…….” 무인으로서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앞서 나아가고자 하는 욕심. 하지만 지난 생처럼 외롭게 걷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할 테니까. 부모님과 스승님, 그리고 친구들. 가장 앞에서 걸으면서도 아무도 잃지 않고, 끝내 세계제일인이 될 것이다. 기무혁은 그러한 소망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천하(天下).” 황금빛 용을 간신히 버텨내던 독고생사검이 변화한다. 오로지 자신의 생에만 집착하는 고독하고 날카로운 검이, 모두와 함께하길 소망하는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검으로 바뀌었다. 변화한 검의 인도에 따라 황금빛 용이 급격히 궤적을 틀더니 그대로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콰콰콰콰콰콰! 무림맹주의 십 초식이 용오름처럼 치솟더니 허공에서 흩어져 사라졌다. 기무혁은 제자리에 선 채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여필극이 함께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독보천하라……. 멋진 대답이구나.” “혹시 봐주신 겁니까?” “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여필극이 능청을 떨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지막에 용오름을 위로 비틀어낼 때, 기무혁은 황금빛 용이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는 것을 느꼈다. 십 초식을 막고 나면 며칠쯤 못 일어날 각오를 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휘청. 기무혁은 휘청거리는 몸의 균형을 간신히 잡으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깜빡 속았네요. 원래 잘 안 속는데…….” “도중에 검이 변화할 줄은 나도 예상치 못했다. 아주 기특하구나.” 껄껄껄 웃은 맹주가 기무혁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다시금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띤 그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절정고수가 된 것을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기무혁은 다소 멍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아직은 현실감이 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 순간, 무림맹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후기지수들, 초대받은 명사들, 그리고 방송으로 지켜본 사람들이 멀리서 외치는 환호성이 무림맹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지켜보던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과였으니까. “아니, 뭐 이렇게까지…….” 정작 당사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 얼굴이 방송사를 향해 생중계되었다. 기무혁이 비무대에서 내려간 후에도, 그를 향한 환호와 박수는 오랫동안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73화. 심마가 자라났겠지 기무혁을 마지막으로 일류고수 라이센스 시험이 종료되고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비무대를 정비한 후 예정된 절정고수 라이센스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내빈 여러분께서는 잠시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석하는 것으로 무림맹주의 체면을 충분히 세워주었으니, 중간에 떠나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한시가 바쁜 각계각층의 명사들 중 자리를 비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던 이들조차 그대로 눌러앉아서 옆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이거…… 아무래도 한국무림계가 요동치려는 모양입니다.” “첫 시험에서 일류 라이센스에 합격한 후기지수만 다섯 명이지요?” “시험 자체는 작년보다 훨씬 더 어려워진 것 같은데요.” “마지막에 나온 기무혁이란 후기지수는 아직 소속 문파가 없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시험을 마친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의무실에 실려 갔던 이들도 응급처치만 받고 모두 다시 돌아왔다. 잠시 후 있을 절정고수 라이센스 시험을 구경하기 위해서라는 이유였지만……. ‘나랑 동갑인데 절정고수라니…….’ ‘마지막에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 ‘아직도 소름이 가라앉질 않아.’ 그건 핑계일 뿐, 모두의 시선이 지금까지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존재를 힐끔거렸다. “후우…….” 기무혁은 눈을 감고 조용히 맹주와의 싸움을 복기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누구도 섣불리 말을 걸지 못할 때였다. “야- 이 치사한 새끼야!” 이마에 붕대를 둘둘 감은 신강헌이 등장해서는 대뜸 기무혁에게 다가가 시비를 걸었다. “넌 진짜 나한테 고마운 줄 알아라.” “뭔데 또?” 눈을 뜬 기무혁이 귀찮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신강헌이 허리춤에 두 손을 올리고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몰라서 묻냐? 내가 먼저 나가서 맹주님을 지치게 해놨잖아!” “……이거 진짜 또라이 아냐?” 황당하다는 표정이 된 기무혁은 이내 씨익 웃으며 신강헌을 약올렸다. “하긴, 인정하기 싫겠지. 나는 십 초식을 버텼는데, 누구는 삼 초식 만에 바닥에 뻗었으니…….” “웃기시네. 네가 첫 번째였고 내가 마지막 순서였으면 반대로 됐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냐?” 신강헌은 지지 않겠다는 듯 코웃음 치며 반박해 보았지만, 애초에 이런 말싸움은 기무혁이 몇 수는 위였다. “잠깐만. 어디서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냐? 일류고수 따리가 절정고수한테 깝치는 소리가…….” “아오오오! 개빡치게 하네 진짜!” 약이 올라서 길길이 날뛰는 신강헌 덕분에 다소 굳어 있던 주변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도 유치하게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에, 주변의 후기지수들이 웃음을 터트린 덕분이었다. 잠시 후, 치료를 받다 말고 뛰쳐나온 신강헌과 달리 정상적으로 치료를 끝내고 돌아온 오정민과 송준호도 와서 축하 인사를 건넸다. “무혁이 너 진짜 말이 안 나오더라. 좀 천천히 강해지면 안 되겠어?” “두고 봐. 나도 내년에 절정고수 라이센스 딸 테니까!” “근데 마지막에 뭐가 어떻게 된 거냐?” 기무혁의 싸움에서 자극을 받았는지 신강헌까지 셋이 상기된 얼굴로 한참 동안 기무혁의 비무에 대해 떠들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뭐지?” 기무혁이 으슬으슬 오한이 들어서 뒤를 돌아보자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양하윤이 고개를 홱 돌렸다. 스치듯 본 그녀의 눈에는 어째선지 눈물이 찔끔 맺혀 있었다. “차라리 말을 걸지…….” 괜스레 찜찜한 가운데, 기무혁은 시험이 끝나고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저기서 ‘기무혁’이라는 이름이 쉬지 않고 들려왔다. 귀가 가렵고 얼굴이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끄응…….” 평생 받아본 적 없는 대중의 관심에 기무혁이 뺨을 긁적였다. 이렇게 많은 관심이 싫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인정받은 것 같아 당연히 기쁘고 뿌듯한 마음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었던 것도 맹주와의 대련을 복기할 겸, 벅차오르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였으니까. ‘이런 기분이었구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비무대 위에 선다는 건…….’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목표에 한 걸음 더 내디딘 기분. 세계제일 비무대회를 향한 첫 관문을 통과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비록 오늘의 대련은 비무대회가 아닌 시험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무공을 증명한다는 것은 같았으니까. 기무혁은 자신을 향한 시선들을 마주하며 멋쩍게 웃었다. “앞으로 조용히 지내긴 글렀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는 실력을 숨기고 체질을 감출 계획이었으니까. 지나친 주목을 받아 수련에 방해받는 일이 생기는 것이 싫었고, 혹시 모를 천마신교의 접촉에 대응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지금의 나는 충분히 준비가 되었나?’ 절정고수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기무혁은 자만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회귀자인 그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벌써 많은 부분이 바뀌었으니, 앞으로 자신이 아는 미래가 계속 이어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별로 불안하지는 않았다. 기무혁은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예전처럼 혼자가 아니니까.’ 전생과 달리 지금 그의 곁에는 가족이 있고, 스승님과 친구들이 있었다. 과거와 다르게 건재한 무림맹의 조력도 받을 수 있었다. 혼자서는 무리겠지만 그들과 함께라면 충분히 암울한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생겼다. 천마신교의 지배를 받는 약육강식의 세상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도 웃을 수 있는 당연한 미래를 말이다. 기무혁이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후기지수가 됐지만…… 이제부터 시작이지. 세계엔 어마어마한 녀석들이 더 많으니까.” “뭐래? 이 재수 없는 새끼가.” “너 지금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얼굴인 거 모르지?” “카메라가 여기 찍고 있는데…….” 세 사람이 기무혁을 둘러싸고 비난을 퍼붓는 와중에,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이거 주인공이 완전히 바뀌었구나?” “맹주님.” 흐뭇한 미소를 띤 여필극이 기무혁을 비롯해 일류 라이센스 시험을 치른 후기지수들을 둘러보며 덕담을 건넸다. “모두 고생했다. 결과와 상관없이 무언가를 얻어가는 시간이었길 바라마. 더욱 정진하여 내년에는 세상을 한층 더 깜짝 놀라게 해 다오.” “예!” 젊은 후기지수들의 힘찬 대답에 여필극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나. 아직 볼거리가 많이 남았으니 기대하거라.” 몸을 돌린 여필극은 절정고수 시험을 기다리고 있는 무인들에게 걸어갔다. “다음은 자네들 차례로군. 각자가 쌓아올린 무공으로 자격을 증명하길 기대하겠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맹주님.” 절정고수 라이센스 시험에 참가하는 여덟 명의 일류무인이 절도 있게 포권을 취하며 대답했다. 그러나 잠시 후, 절정고수 라이센스 시험이 시작되자 예상치 못한 일이 연달아 발생했다. “저는 기권하겠습니다.” “기권하도록 하겠습니다.” “스스로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절정고수 시험에 참가한 여덟 명 중에 세 명이 비무대에 오르지 않고 기권했다. 그들 모두 안색이 좋지 않았는데, 맹주는 이유를 묻거나 나무라지 않고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알겠네.” 남은 다섯 명의 참가자 중에 넷은 용기를 내어 무림맹주에게 도전했지만, 그의 십 초식을 받아내지 못했다. “다음!” “다음!” “다으음-!” 네 명 모두 예년 같았으면 충분히 시험을 통과할만한 실력자들이었지만, 여필극의 후반 삼 초식에서 의지가 꺾였다. “거, 절정고수 기준이 너무 높지 않소이까? 맹주의 기준에 맞추려면 본문에 있는 절정고수들 중에서 절반은 라이센스를 반납해야겠구만.” 창천검노 나일천이 뼈 있는 농담을 하며 웃었다. 다른 팔대문파의 장문인들 역시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맹주가 판정하는 결과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앞에서 그렇게 버텨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결국 이것도 저 아이 때문에 벌어진 일이로군요.” 팔대문파 장문인들이 복잡한 눈빛으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자연스럽게 절정고수 라이센스 시험의 통과기준이 된 존재. 그에 부담감을 느낀 일류고수 셋이 결국 시험을 포기했고, 넷은 용기를 냈으나 역량이 부족했다. “……이미 저들의 마음에 작은 심마(心魔)가 자라났겠지.” 장진명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장문인들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다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첫 라이센스 시험에서 절정고수가 된 것부터 비정상이거늘.’ ‘리차드 한의 재림이 아닌가.’ ‘나 같아도 마음이 꺾였을 것 같으니…….’ 그들은 리차드 한의 젊은 모습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동년배에서 천재라 불렸던 수많은 무인들을 좌절하게 만든 괴물. 그가 등장한 해는 라이센스 시험이 치러진 이래로 시험을 포기한 무인들이 가장 많은 해였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반복될까? “창천검문의 일대제자 부연하가 무림맹주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그때, 비무대 위로 훌쩍 뛰어오른 부연하가 차분하게 검을 들어 기수식을 취했다. 절망하고 포기한 이들과 달리, 여필극과 기무혁의 대화에서 깨닫는 바가 있었는지 그녀는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여유롭게 웃기까지 했다. “자꾸 한 후배한테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데, 제가 전부 빼앗아 오려고 합니다.” “하하하하! 당찬 포부가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곧바로 시작하지!” 이내 창천검문의 장중한 검과 권왕의 주먹이 연달아 부딪쳤다. 푸른 하늘에 천둥이 연달아 내리치고 벼락같은 검기가 사방으로 회오리쳤다. 콰콰콰콰콰콰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듯 보였지만, 끝내 십초식 금룡승천까지 버텨낸 부연하는 대련이 끝난 후에도 두 발로 당당히 서 있었다. 여필극이 흡족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정고수가 된 것을 축하하네.” “예. 감사합니다.” 부연하는 기어이 두 발로 비무대를 내려간 후에야 바닥에 주저앉았고, 명사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기무혁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절정고수 시험 합격자였다. “흘흘. 저 아이가 내 외손녀라네! 우리 창천검문의 미래이지!” “아, 예…….” 나일천은 주책인 줄도 모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저기 손녀 자랑을 했고, 팔대문파 장문인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팔대문파 중에서는 결국 부연하를 제외하고 절정고수가 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 모든 시험이 끝났소이다!” 부연하를 끝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 라이센스 시험이 종료되었다. 여필극의 말대로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여필극은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명사들,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서 말했다. “잠시 휴식 후에 라이센스 자격 수여식이 있을 것이오. 또한-!” 무림맹주의 형형한 눈빛이 카메라를 그대로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한국무림계를 옳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중대 발표가 있을 것이오!” 무림맹주가 폭탄 발언을 예고했다. 예상치 못한 맹주의 발언에 팔대문파 장문인들이 당혹스럽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자네들 미리 언질 받은 거라도 있나?” “……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 역시도…….” 그들은 맹주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 할 수 없었다. 라이센스 시험을 일방적으로 바꾼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열기. 과하게 집중된 수많은 이목. 그렇기에 그들은 함부로 앞으로 나설 수가 없었고, 이 상황 또한 맹주가 의도한 바임을 깨달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그들은 맹주가 준비한 무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 * * “후우…… 후우…….” 일월문주 장진명은 자신의 대기실에서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부쩍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어진 최근이었다. 자꾸만 살의가 샘솟고, 모든 것을 불태우고 싶었다. 스스로 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미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마공(魔空)에 깊이 심취했기 때문이었다. “주군.” 그때 방 안에 흑의무복의 사내가 연기처럼 나타나 부복했다. 눈을 뜬 장진명이 잔뜩 충혈된 눈으로 자신의 심복을 노려봤다. “흑연!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온 것이냐. 자칫했다가 네 존재가 발각되면…….” “본문이 공격받았습니다.” “……뭐라 했느냐?” 그대로 굳어버린 장진명에게 흑연이 빠르게 말했다. “빙하신녀가 배신했습니다. 음한계열 무인들을 이끌고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저희의 안가(安家)도 발각당했습니다. 통신부터 차단당한 것이 미리 계획된 작전이 분명합니다. 급히 주군께 소식을 알리기 위해 저만 간신히 빠져나왔습니다.” 다시 보니 흑연의 옷에 핏물이 튀어 있었다. “빙하신녀…… 현은하가 배신을?” “주군. 지금 당장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장진명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더니 괴소를 흘리기 시작했다. “흐흐흐……. 흐흐흐하하하하하!” 고개를 치켜들고 앙천대소를 터트리는 얼굴은 어느새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74화. 무림맹의 협객들은 같은 시각. 청랑의 크루원들은 일월문의 빌딩 지하에 숨겨진 비밀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추악하기 짝이 없구나.” 최건이 분노를 삼키며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는 장진명이 대천문의 불법 사업장에 무림인의 장기를 지원했다는 자료와, 라이센스 시험장에 살수들을 잠입시켜 양하윤을 납치하려고 계획했던 기록이 들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뒷세계를 장악한 사파의 거두들과 거래한 정황도 다수 발견했다. “히야, 지저분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해 먹었을 줄 몰랐네. 이거 터지면 일월문은 그냥 줄초상 나겠는데요?” 황숙수가 감탄하며 확보한 자료들을 살폈다. 지하실에는 종이로 된 서류뿐 아니라 암호화된 자료들도 적지 않았는데, 은밀한 정보를 다루고 관리하는 황숙수에게는 대부분 간단히 해독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르신. 이건 폭발 장치가 달려 있는데, 어쩔까요?” 철궤를 하나 발견한 황숙수가 최건에게 물었다. 무인도 쉽게 들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철궤의 겉면엔 ‘敎’라는 글자 하나만 새겨져 있었는데, 가져온 센서로 확인하니 내부에 폭발 장치가 설치돼 있었다. 섣불리 건드리면 폭발할 수 있는 위험한 장치를 해놓았다는 것은, 일월문주 장진명에게 치명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 물건이라는 의미였다. “교(敎)? 설마…….” 과거의 한 사건이 떠오른 최건이 부릅뜬 눈으로 철궤를 바라봤다. 20여 년 전, 짧은 기간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세력을 확장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든 사교가 있었다. 최건은 그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조직된 정예무인들을 이끌고 본단을 공격했지만, 적의 함정에 빠져 대부분의 동료를 잃었다. 누군가가 정보를 유출한 것이 틀림없었으나 결국 그가 모든 책임을 떠안고 무림맹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게 네놈이 연관된 일이라면…….” 무시무시한 살기에 황숙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단칼에 철궤를 베어버릴 듯이 노려보던 최건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지시했다. “가져간다. 들어라.” “예? 제가요?” “그럼 내가 들까?” 황숙수는 얌전히 철궤를 들어서 어깨 위에 올렸다. 생각보다 훨씬 육중한 무게에 절로 욕설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삼켰다. ‘씨벌, 내 밑으로 딱 한 놈만 들어와라.’ 지하실에는 장진명이 벌인 악행과 관련된 것들 외에도, 일월문의 존속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약점들도 있었다. 하지만 최건은 그러한 것들에는 손대지 않았다. 빙하신녀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일월문주 장진명이 죗값을 치르고, 일월문이 한동안 봉문하게 만들 정도면 충분하다.’ 그런 협상이 없었다면 빙하신녀는 결코 설득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 정말 그냥 두고 가시려고요? 평생 협박해서 두고두고 뜯어먹을 수 있을 텐데…….” “내가 네놈 같은 줄 아느냐.” 황숙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최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검마가 그러한 고집이 있는 무인이라는 것을 알기에 빙하신녀도 최건에게 이곳을 맡기고 떠난 것이었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쯤에서 만족하고 멈춰야 한다.’ 무림맹이 팔대문파 중 하나를 파멸시킨다면 감당하기 힘든 후폭풍이 생길 터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다른 팔대문파들과 전면전을 해야 할지도 모를 일. 지금도 명분과 여론을 등에 업은 시기이기에 이렇게 과감한 행동이 가능한 것이지, 일정한 선을 넘으면 저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이만 돌아가지.” 지하실에서 발견한 자료들은 전부 무림맹에 실시간으로 보고했으니, 지금쯤 핵폭탄을 터트릴 준비도 끝났을 터였다. 그러나 최건의 말에 황숙수가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 어르신.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뽀찌정도는 조금 챙겨도 되지 않겠습니까?” 황숙수는 최건을 두려워했지만, 그렇다고 할 말을 아예 못 할 정도로 간이 작은 사내는 아니었다. 그가 여기까지 와서 수고한 바가 적지 않았기에 최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욕심 부리지 말고 주머니에 들어갈 만큼만 챙겨라.” “히히히. 그럼요!” 황숙수가 신이 나서 눈여겨본 것들을 주머니에 꽉꽉 눌러 담았다. 지하실 한쪽에는 귀한 영약과 값비싼 물건들도 적지 않았다. 그때 술법으로 뭔가 놓친 것이 없나 주변을 살펴보던 김복자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기감으로는 최건에 비할 수 없지만, 술법이나 영적인 것을 느끼는 감각은 초고수보다도 예민한 그녀였다. “선생님. 잠깐만요.” 김복자는 한쪽 벽으로 걸어가더니, 최건을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 좀 잘라주세요. 너머에 뭐가 있는 것 같아요.” “이봐, 레래! 두꺼운 철문을 베는 게 무 썰듯이 간단한 일인 줄 알아? 아무리 어르신이라도 힘드시게 괜히…….” 최건은 앞으로 걸어가며 두말할 것 없이 검을 휘둘렀다. 서거어억! 두꺼운 철문이 종이처럼 갈라졌다. 발로 밀자 뒤로 쿵- 소리를 내고 넘어간 철문 너머로 새로운 공간이 드러났다. 황숙수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철궤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물개박수를 쳤다. “여, 역시 우리 청랑의 최고수! 존경합니다 어르신!” “철궤나 제대로 들거라. 네놈을 이렇게 만들기 전에.” “옙! 맡겨만 주십쇼!” 두 사람을 뒤로하고 김복자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우리에 갇힌 작은 동물을 발견했다. 끼잉……. 힘겹고 가느다란 울음소리. 고작해야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새였다. 부적이 붙어 있는 새끼줄에 칭칭 감겨 있었는데,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는지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끼잉, 끼이잉. 원래는 붉은빛이었으리라 짐작되는 주홍빛 털은 새끼줄이 닿은 곳만 검게 변색돼 있었다. 힘겹게 고개를 든 작은 새가 김복자를 올려보았다. 김복자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불쌍한 새를 우리 안에서 꺼내주려다 미묘한 기운을 느끼고 멈칫했다. “어?” 뒤늦게 무언가 알아차린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설마? 아니지……?” 그때 최건이 김복자의 옆으로 와서 물었다. “느껴지는 기운이 평범한 짐승은 아닌 것 같은데, 혹 영물이더냐?” 조심스럽게 작은 새를 살피던 김복자가 스스로도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영물과 괴이는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어렵지만, 눈앞의 존재는 그 위험성 때문에 따로 분류된 대상이었다. “아뇨, 이건 괴이예요. 그것도 평범한 괴이가 아니라 대괴이(大怪異) 같아요. 이런 건 오래된 책에서나 본 건데…….” “뭐라고?” 최건은 혹 농담을 하는 것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김복자를 바라봤다. 농담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표정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최건이 만나본 수많은 술법사들 중에서도 그 재능이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난 김복자. 그녀가 괴이의 기운을 잘못 느꼈을 리는 없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 같지만, 분명해요. 얘…… 금시조(金翅鳥)예요.” “장진명, 이 미친 작자가!” 최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괴이는 하룻밤에 도시 하나를 지워버릴 수도 있는 천재지변과도 같은 존재였다. 물론 새끼에 불과한 작은 녀석에게 그만한 힘은 없겠지만……. “정녕 정신이 나갔구나. 대괴이의 새끼를 숨겨두었다니. 설마 어미에게서 빼앗아 온 것은 아니겠지?” 끼이잉, 끼잉. 금시조는 풀어달라는 듯 낑낑대며 몸을 움직였다. 왜 저 작은 몸에 봉인 술법을 건 부적을 덕지덕지 붙여 새끼줄로 묶어놓았는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물러나거라. 함부로 건드릴 것이 아니다. 자칫하면…….” 대괴이는 길들이기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상상하기 힘든 전력과 상징을 가지게 될 테니까. 비록 그것에 실패해서 끔찍한 대가를 치른 사례가 대부분이라고 해도 말이다. “선생님.” 그러나 그 순간, 최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금시조를 바라보는 김복자의 눈에서 평소의 시퍼런 귀화와 다른 따뜻한 불길이 피어올랐고. 화르륵! 동시에 금시조의 몸에서도 불길이 피어오르더니, 몸을 묶어둔 새끼줄과 부적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으허억! 풀려났다! 어르신! 저, 저거 어떡합니까!” 긴장한 채 지켜보던 황숙수가 호들갑을 떨며 엉덩방아를 찧었고, 최건도 당황해서 검파에 손을 올린 순간. 뺘아악! 작은 날개를 펼치며 힘껏 포효한 금시조 새끼가 아장아장 걸어오더니, 김복자의 손바닥에 올라탔다. 김복자가 그 작은 괴이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려 두 사람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얘, 우리가 데리고 가면 안 돼요?” “쿨럭…….” 천하의 검마 최건이 사레가 들릴 만큼 천연덕스러운 질문이었다. * * * 라이센스 수여식은 간결하게 이루어졌다. 합격한 인원이 많지 않았기에, 무림맹주가 직접 그 이름을 한 명씩 호명했다. “송월문의 오정민!” “태극검문의 송준호!” “금영문의 피승화!” “일월문의 양하윤!” 무인들은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시상대로 변한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정장으로 갈아입은 무림맹주가 직접 라이센스 자격증을 건네주고 덕담을 나눴다. “신강헌 무인. 급한 성질을 조금만 죽이면 능히 대성할 걸세. 십 년쯤 지나면 세계로 나가도 경쟁해 볼 만하겠어.” “그럼 5년 안에 한국제일도로 인정받고 세계로 나가겠습니다!” “하하하하! 방금 성미가 급하다는 말을 못 들은 게냐!”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축하와 환호, 박수가 이어졌다. 먼저 라이센스 자격을 받은 무인들은 맹주의 뒤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하나씩 빈자리가 채워졌다. “창천검문의 부연하 무인. 오랜만에 훌륭한 검을 견식할 수 있었네. 검노께서 왜 지금까지 장문인직에서 물러나지 않고 기다리셨는지 알겠더군.” “과찬이십니다. 맹주님의 가르침 덕분에 부족한 면을 많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창천검문의 부연하까지 자리에 앉자 이제 남은 의자는 하나였다. 여필극이 주위를 크게 둘러보며 웃었다. “벌써 마지막이군. 모두가 예상하고 있을 테니 뜸 들이지 않고 발표하겠소이다.” 올해는 이례적으로 합격자들의 순위를 따로 발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첫 번째 라이센스 시험에서 일류무인을 넘어 절정고수 라이센스를 획득한 스무 살의 후기지수. “절정고수 기무혁 무인은 올라오시게!” 당연하게도 가장 큰 환호와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비무대 위에 오른 기무혁은 덤덤한 표정으로 짧게 소감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자만하지 않고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더 하고 싶은 말은 없고? 다들 자네를 비무대회 우승자라도 되는 것처럼 지켜보고 있는데?” “앞으로 많이 하게 될 것 같아서 오늘은 자제하겠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리신 분들도 지루하실 테고요.” 자신감과 센스가 넘치는 대답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기무혁이 씩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보다 정의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무혁의 의미심장한 소감으로 정파무림의 축제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무림맹주가 예고한 폭탄 발언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최근 무림에 안타까운 사고가 연달아 있었습니다.” 라이센스 자격을 획득한 정파무림의 신성들을 뒤로한 채, 여필극은 씁쓸한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무림맹에 정체불명의 살수들이 잠입했고, 정파무림의 한 축인 대천문이 끔찍한 테러를 당했습니다. 대천문의 장문인은 행방불명되어 현재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입니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좌중이 침묵했다. 무림맹주의 목소리가 고저 없이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부끄럽게도 무림맹은 사건들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무림맹에 등록된 문파나 무인들은 맹에 사건사고를 보고할 의무가 있지만, 항상 다른 곳을 먼저 거쳐서 오기 때문입니다.” 분위기가 뭔가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눈치챈 이들은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이었다. ‘설마…….’ ‘저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우리를 불러놓고 저런 말을 한다?’ 조용히 듣고 있던 팔대문파 장문인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무림맹주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항상 당당해야 할 무림맹의 무인들이 누군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정의를 실천하고 협을 행해야 할 후기지수들이 어느샌가 입신양명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싶지요. 허나 그 방법이 옳지 못하다면 우리가 힘만 센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점점 힘이 실리는 무림맹주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고조됐다. 눈치가 빠른 이들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았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뭔가 큰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맹주.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멈추십시오. 저희와 전쟁이라도 하려는 게 아니라면…….] [감당할 수 있겠소?]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이 전음을 보냈으나 여필극은 못 들은 것처럼 준비해 온 말을 이어나갔다. 대문파에 하청처럼 종속된 중견, 중소문파들의 현 상황. 십 대가 되기 전부터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과 계약을 선점한 후, 성장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파기하거나 하청으로 떠넘기는 일들. 그럼에도 무림맹이 제재를 가하지 못하고 도리어 눈치를 봐야 했던 이유. 이러한 고질적인 병폐가 어떻게 한국무림에 어떤 악영향을 주고 있는지. 수십 년간 쌓여온 한을 풀어내듯 쏟아낸 후, 마지막으로 준비해 온 폭탄을 터트렸다. “하여 무림맹은 대문파의 부정부패 감시를 강화하는 법안을 제안할 것입니다. 본 맹이 직접 감시기관 역할을 맡을 것이며, 지나치게 집중된 힘과 권력을 분산하고 평등하게 무(武)를 수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습니다!” 결국 참다못한 팔대문파의 태극검문과 금영문의 장문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맹주. 당신의 무능을 우리 탓으로 돌리는 것이오!” “가당치도 않은 모함을 하는가! 무림맹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수작임을 세상이 알 것이다!” 맹주는 대문파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누가 봐도 팔대문파를 저격하는 법안이기 때문이었다. 팔대문파 장문인들의 분노와 반발은 당연했다. “흐흐흐…….” 일월문주 장진명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까지 들썩이며 실소를 흘렸다. “맹주.”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는 창천검노는 다른 이들처럼 성토를 하진 않았지만, 그 역시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지금 맹주의 말은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오. 그러한 법안을 제안하려면 보다 타당한 이유와 증거가 있어야 할 것이오.” 시종일관 미소를 띠던 입가에서 웃음을 감추자 날카롭게 벼린 칼날 같은 기세가 치솟았다. 그러나 무림맹주 여필극도 그에 밀리지 않는 산악 같은 기세를 일으키며 말했다. “감히 무림맹에 살수들을 잠입시켜 후기지수들을 해치려고 사주한 진짜 범인. 나머지는 그자에게 물어보도록 하지요.” “……갑자기 무슨. 지금 그게 이 일과 상관이 있소?” “물론입니다. 범인이 바로 이 자리에 있으니까요.” “뭐라……?” 분노한 팔대문파 장문인들의 눈동자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들은 설마? 라는 생각으로 눈동자만 굴려 서로를 힐긋거렸다. ‘아니겠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실이라고 해도 증거를 남겼을 리가 없을 텐데.’ ‘대체 어떤 멍청한 자가!’ 서로에 대한 불신과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두려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무림맹의 협객들은 일월문주 장진명을 체포하라!” 무림맹주의 쩌렁쩌렁한 외침과 동시에 곳곳에서 무림맹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죄목은 다수의 살인 및 살인교사! 불법약물 유통과 장기매매, 또한 금지된 마공을 연성한 것으로 짐작되는바!” 여필극이 죄인을 단죄하는 판관의 눈빛으로 장진명을 쏘아보았다. “장진명을 무림공적으로 선포한다!” 75화. 언젠가 해보고 싶었던 무림공적(武林公敵). 한국무림맹이 창설된 후,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악인들과 사파의 대마두들이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팔대문파의 장문인쯤 되는 정파의 거물이 무림공적이 된 것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화면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거야?” “무림공적이라고? 팔대문파 장문인이?” “이런 미친! 나 일월문 주식 가지고 있다고!” 무림맹주가 폭탄 발언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였다. 팔대문파와 무림맹과의 오래된 갈등. 한국 무림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무림맹주가 그 갈등에 대해 언급한 것이 놀라웠을 뿐, 세상을 발칵 뒤집을 정도의 이야깃거리는 아니었다. ‘무림맹주가 무리수를 뒀어.’ ‘여론을 등에 업으려고 한 것 같은데, 결국 또 금방 잊혀지겠지.’ ‘뒷감당을 어쩌려고 저런 말을…….’ 속으로 무림맹주를 응원하는 사람들도 솔직히 그의 제안이 허황되다고 생각했다. 팔대문파가 한국 사회의 정경과 유착된 지 이미 수십 년. 그들의 막강함은 무력뿐만이 아니라 사방으로 뻗어 있는 인맥과 자본력으로 완성되었다. 종종 팔대문파의 갑질 문제가 보도되어도 잠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지나갈 뿐이었다. ‘저렇게 공론화하려고 해봤자…….’ ‘결국 법안을 발의하는 건 정치인들인데, 누가 팔대문파와 척을 지려고 하겠어?’ 감정적인 호소로는 대국민적 공감대를 이끌어내더라도, 나아가 정치인들이 정말로 법안을 발의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다들 생각했다. [다수의 살인 및 살인교사! 불법 약물 유통과 장기매매, 또한 금지된 마공을 연성한 것으로 짐작되는바!] 화면을 통해서 그 충격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기 전까지는. 일월문주 장진명이 입에 담기 힘든 끔찍한 범죄의 용의자로 지목된 순간, 사람들은 잘못 들었나 하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장진명을 무림공적으로 선포한다!] TV와 너튜브를 통해서 그 장면이 생중계되었다. 영상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도 송출되는 중이었다. 올해 재능 있는 후기지수들이 많이 참가한 탓에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던 무림부 기자들은 갑자기 터진 사건에 사회부와 정치부에 급히 연락했다. “특종! 나라가 들썩일 만한 특종이야!” 기자들은 팔대문파에 전화를 걸어 입장을 물었고, 앞다투어 정치인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성격 급한 이들은 곧장 무림맹으로 달려갔다.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지고 있었다. 팔대문파가 지닌 힘을 총동원해도 절대로 덮을 수 없는 수준으로. “뭐? 한국에서?” “거기 리차드 한이 자란 나라잖아.” “지루한 나라라고 들었는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무인들 중 일부도 한국에서 벌어진 이 사건에 관심을 기울였다. 오래전에 그곳을 떠나온 한 남자도 고국에서 벌어진 사건을 지인에게 전해 들었다. “내 고향에서 재밌는 일이 생겼다고?” 손에 묻은 피를 바지에 슥슥 닦아낸 남자는 스마트폰을 켰다. 인간과 괴이가 뒤섞인 시체로 이루어진 언덕. 그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채, 그는 스마트폰에 나타난 여필극을 보고 웃었다. “맹주님, 오랜만이네.” 자신이 만든 선혈빛 풍경을 뒤로하고, 남자는 느긋하게 고향에서 벌어진 사건을 지켜보기로 했다. * * * “나더러 무림공적이라…….” 당사자인 일월문주 장진명은 그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신을 서서히 포위해오는 무림맹의 무인들을 바라보면서였다. “장진명! 저항할 생각은 마라. 순순히 협조해야 그나마 참작이 가능할 것이다!” 그 선두에는 무림맹의 원로 노구천이 있었다. 팔대문파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온 무림맹주의 심복. 하지만 장진명은 노구천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무림맹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맹주. 지금 이거 쇼맨십이 아니라 진심이오?” 장진명이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은 황당한 누명을 써서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했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네 설마…….] [맹주의 말이 사실입니까?] [정확하게 말하십시오. 그래야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이 장진명에게 다급히 전음을 보냈다. 그들은 무림맹주의 말을 쉽사리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장진명의 편을 들지도 않았다. 수십 년을 함께 해온 만큼 서로의 본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월문주 장진명은 때로는 위험할 정도로 급진적이고 거침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맹주가 방금 열거한 범죄들은…… 도무지 믿기 힘든 것이었다. “혐의를 부인하는 것인가? 증거라면 차고 넘칠 만큼 있다.” “…….” 장진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맹주를 똑바로 바라봤다. “지금 팔대문파와 전쟁을 하자는 것이오?” 그 곁에 선 팔대문파 장문인들의 미간이 좁혀지는 가운데, 맹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왜 다른 문파를 걸고넘어지나? 나는 네놈을 체포하려는 것인데……. 설마 다른 문파의 누군가와 공모했다는 의미인가?” “헛소리!” “맹주는 억측을 그만두시오!” 금영문과 태극검문의 장문인이 곧바로 부정하고 나섰다. 지금 상황에서 한편으로 엮이면 자신들의 문파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게 될 테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장문인들은 물러나 주시구려.” “……!” 두 장문인은 뒤늦게 맹주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팔대문파 장문인들이 장진명을 편들고 무력시위를 한다면 제압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맹주는 장진명 개인의 죄목을 열거하며 체포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만약 지금 장진명을 돕는다면 여론의 분노가 자신들의 사문에까지 미칠 수 있는 상황. ‘빌어먹을…….’ ‘맹주가 확실한 증거 하나 없이 저리 나서진 않았겠지.’ ‘대체 뭘 얼마나 준비한 것인가!’ 모두가 비슷한 생각인 듯, 장문인들은 짧게 눈빛을 주고받더니 뒤로 물러나며 장진명과 거리를 벌렸다. 견고했던 팔대문파의 동맹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순간이었다. “하하……. 우리의 관계가 이토록 얄팍한 것이었구나.” 홀로 남은 장진명은 씁쓸하게 웃더니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다가오는 무림맹의 무인들, 그 뒤에서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는 무림맹주 여필극. 분명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한 가지만 묻지. 다른 것들이야 얼마든지 증거를 조작할 수 있겠지. 헌데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럼에도 장진명은 당당하게 웃어 보였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헷갈릴 정도로 여유로운 태도였다. “내가 마공을 익혔다는 혐의는 대체 뭐요? 확실한 증거라도 있나?” 그러나 무림맹주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빙하신녀의 증언이 있었다. 최근 너의 언행과 불안해 보이는 심리상태, 그리고 급격히 증가한 열양공의 수위가 의심스럽다더군. 그 부분은 체포 후에 명백하게 조사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하하하하하하하-! 막대한 내공이 담긴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명사들이 귀를 틀어막으며 고통스러워하고, 내상을 입은 후기지수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갈! 당장 저자를 붙잡아 내공을 금제하라!” 맹주의 일갈에 노구천과 무림맹원들이 빠르게 포위망을 좁혔다.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은 더욱 뒤로 물러났다. “저거…….” 뒤에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기무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마공을 익혔군. 부작용으로 광증이 퍼진 주화입마 상태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마공을 많이 접해본 사람이 그일 것이다. 낭인들이 익히는 싸구려 마공부터 상당히 위험한 것들까지, 전생에 험한 일을 많이 한 탓에 다양한 마공을 겪어볼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마공을 익힌 무인들의 최후도 여럿 지켜봤다. ‘아무리 대비를 철저하게 하고 싸워도 지저분하게 끝나는 일이 많았지.’ 기무혁이 신강헌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준비해둬.” “뭘?” “저 쓰레기. 순순히 체포당할 것 같지 않거든.” “우리까지 나설 일이 있을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부연하가 돌아보며 묻자, 기무혁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혹시 모르잖아요.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해뒀을지도.” 그리고 그때, 거짓말처럼 웃음을 뚝 멈춘 장진명이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빙하신녀 현은하! 기어이 나를 쫓아내고 장문인 자리에 앉고 싶어서 이 모든 계략을 꾸몄구나!” “멋대로 음해하지 마라. 그런다고 네놈의 범죄가…….” 여필극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장진명을 바라봤다. 순식간에 장진명의 눈동자가 벌게지고 얼굴에서는 핏줄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오한이라도 든 사람처럼 몸을 덜덜 떨었다. 그리고. “어떻게알았지?하여간어릴때부터눈치만빨라가지고후기지수때부터사사건건나를못잡아먹어서안달이었어진작없애버렸어야했는데내가조금만더강했어도이런수모를겪지않았을텐데아니야늦지않았어지금이라도흐히히히” 히-죽 장진명이 기괴하게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순간. “맹원들은 뒤로 물러나라! 손님들과 후기지수들을 최우선으로 보호해라!” 위험을 직감한 여필극이 비무대 바닥을 부술 듯 박차며 장진명에게 쇄도했다. 콰앙! 후기지수들과 백전을 넘게 치렀음에도 그의 움직임은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장진명은 그 움직임을 빤히 바라보며 웃었다. “늙은이가체력도좋아아주활활잘타겠어금시조의불꽃을시험해보기좋겠는데어디한번얼마나잘타나볼까?” 천천히 타오르던 금시조의 불꽃이 그의 폐부를 태우듯 스며들자, 장진명의 피부 밑 혈관이 검붉게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팔대문파의 다른 장문인들이 경악을 토해냈다. “일월문주 자네……!” “대체 몸에 무슨 짓을 한 것이오!” “저, 저 기운은 분명 괴이인데.” 그 순간 장진명의 전신에서 수십 줄기의 화염이 솟구치더니 사방으로 뻗어나가 폭발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무공과는 궤를 달리하는 기이한 불꽃이 맹렬하게 날뛰었다. 쇠약해진 어미 금시조를 죽이고, 그 힘을 몸 안에 품은 힘이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을 몸 안에 가두고 다스리려 하니 그것이 곧 마공이었다. “흐히하하하하하하하하다불태워라전부불타버려라!” 비록 금시조의 기운을 십분지 일도 제대로 다룰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장진명은 개세(開歲)적인 힘을 얻었다. 콰콰콰콰콰콰! 화염의 폭풍이 몰아쳤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무림맹원들이 손님들과 후기지수들을 보호하느라 화상을 입었고,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은 경악한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꽈아앙! 맹주의 주먹이 불꽃에 휘감긴 장진명을 후려쳤다. 그러나 꺼질 듯 휘청이던 불꽃이 다시 하나로 모이더니 활활 타올라 수 미터가 넘는 거인의 형상으로 크기를 키웠다. “카하하하하하하질긴늙은이야너는나중에필히태워주마!”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장진명이 사방으로 막대한 불꽃을 쏟아내 여필극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그리고 그 틈에 몸을 빼내 도주했다. 이 자리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촤아아악! 그러나 사나운 검풍과 도풍이 화염을 가르고 화염거인을 가로막았다. “거봐. 내가 이럴 거랬지.” “네가 떠들어서 이렇게 된 거 아냐?” “어쩌다가 나까지…….” 장진명이 도주하는 맞은편에 기무혁과 신강헌, 부연하가 각자 무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장진명의 타오르는 눈동자가 기무혁을 정확히 노려봤다. “흐히히히히너처음부터눈에거슬렸다진작없애버렸어야했는데그러지못한게실수였어현은하를죽이기전에너부터불태워야겠다!” 기무혁은 조용히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려 상대를 도발했다. “지랄하네.” 언젠가 팔대문파 장문인에게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였다. 76화. 지금은 위험하니까 자신 있게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도발한 것과 달리, 기무혁은 마음속으로 냉정하게 현 상황을 판단했다. ‘기껏해야 시간을 버는 게 최선이다.’ 상대는 마공을 익힌 팔대문파의 장문인이었다. 암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삼류마공만 익혀도 부작용을 감수하면 순간적으로 몇 배는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정파의 초고수가 평생 쌓아온 명예를 버릴 위험을 감수하고 익힌 마공이라면? “최소 맹주님이 작정하고 우릴 죽이려 든다고 가정하고 싸워야 할 거야.” 기무혁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는 화염거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좌우에서 신강헌과 부연하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르르르르륵! 화염에 휩싸인 거대한 주먹이 공간을 불태우며 날아왔다. 벌써부터 얼굴이 익을 것만 같은 가공할 열기가 느껴졌다. “온다.” “잠깐만 버티자고!” “맹주님이 도착할 때까지!” 화염거인의 뒤에서 엄청난 속도로 쫓아오는 여필극이 보였다. 세 후기지수를 발견한 그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맞서지 마라!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아니야-!” 그러나 세 후기지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각자의 무기를 단단히 움켜쥐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휘둘렀다. 꽈아아아앙! 셋이서 충격을 나누어 분산했음에도 한 초식 만에 튕겨 나간 세 사람은 핏물을 왈칵 쏟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쿨럭!” 무림맹주와의 대련에서 이미 적잖은 내상을 입은 그들이었다. 만전의 상황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공격을 피해 없이 막아낸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크크크크건방이하늘을찌르는애송이녀석들모조리불에태워주마끔찍한고통속에서후회하며죽어라.” 화염거인이 다시 주먹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두 번째는 정말로 위험할 터였다. 피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직감이 맹렬하게 위기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셋 중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달리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지금 놓치면 또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것 아냐?’ ‘일류고수의 자존심이 있지!’ ‘한 번만 더 막아내면 맹주님이 오실 거야.’ 정파 무림인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워 온 정신이었고, 타고난 성향이었으며, 누군가를 보면서 본받은 마음가짐이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후기지수 셋의 생각이 일치했다. “우라아앗! 신강헌 더 파이어맨-!” 의미 모를 기합성과 함께 신강헌이 둘보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기무혁이 부연하의 어깨를 붙잡아 신강헌의 뒤로 숨으라고 눈짓했다. ‘혼자서 막겠다고?’ 의문이 들었지만 부연하는 두 사람의 판단에 맞췄다. 찰나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그녀는 제 눈으로 직접 본 두 사람의 실력을 믿기로 했다. 치이이이이익……! 화염거인이 내려치는 주먹에서 끔찍한 열기가 전해졌다. 타이밍에 맞춰 도의 옆면을 세워 몸을 방어한 신강헌이 주먹을 향해 돌진했다. “으아아아아악! 지금!” 신강헌이 보낸 신호에 그 뒤를 따르던 기무혁과 부연하가 동시에 좌우로 흩어졌다. 촤아악! 촤아악! 두 자루의 검이 동시에 화염거인의 손목을 베었다. 그 순간 불꽃이 흐릿해지며 맹렬하게 타오르던 기운이 잠시 흐트러졌다. 그러나 화염거인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장진명의 목소리는 조롱을 머금고 있었다. “가소롭구나고작이따위실력으로내게덤빈것인가?알량한재능을믿고날뛰는너희가얼마나벌레같은존재인지알려주마업화같은불길에불타버려라!” 스으으으으읍! 가슴을 한껏 부풀린 화염거인의 입에서 거대한 숨결이 세 사람에게 쏟아지기 직전. “쫑알쫑알 시끄럽구나-!” 퍼어어어엉! 금빛으로 물든 무림맹주의 주먹이 화염거인의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그대로 화염거인을 옆으로 밀어낸 여필극이 초주검이 된 후기지수들에게 소리쳤다. “이 미련한 놈들! 피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동시에 휘청이던 화염거인의 허리가 둘로 갈라지며 불꽃이 크게 약해졌다. 사아아아아악! 맹주의 옆으로 창천검노 나일천이 검을 들고 내려섰다. 서슬 퍼런 예기를 뿜어내는 노검객의 기세까지 더해지자 화염거인이 주춤했다. “할아버지!” “뒤로 물러나 있거라.” 나일천은 얼굴에 그을음이 잔뜩 생긴 손녀를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장진명을 바라봤다. “진명이. 부탁이니 이러지 말게.” 화염거인의 기세가 다소 약해졌지만, 그 안에 있는 장진명에게는 별다른 타격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가공할 마공이구나. 예사롭지 않은 괴이의 힘을 몸 안에 억지로 집어넣은 듯한데, 그 기운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데도 이 정도라니.’ 금영문과 태극검문의 장문인도 장진명의 뒤에서 무기를 겨누었다. “장문인! 일단 진정하시구려.” “오해가 있으면 대화로 풀어야지, 이런 방식으로는 입장만 더 불리해질 뿐이오!” 화르르르르륵! 대화는 통하지 않았다. 더더욱 크기를 키운 화염거인은 그 높이가 이제 십여 미터에 육박할 정도였다. 두 눈으로 짐작되는 부분에서 검붉은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늙은이들이합심해서나를핍박하는구나항상이런식이었지팔대문파의동맹?개나주라고해라결국무림인은서로가서로를잡아먹으며강해지는존재다교가옳았어약육강식강자존결국살아남는것은나다금시조의불꽃을온전히내것으로만들기만하면너희는잿더미가될테니까-!” “대체 뭐라고 지껄이는지 알아듣질 못하겠구나.” “마공이 골수까지 퍼진 모양입니다.”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우선 제압하지요.” 무림맹주와 팔대문파의 장문인 셋. 제아무리 마공을 익힌 장진명이라도 도주가 불가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포위망이었다. 그러나 분노를 품고 마공을 익힌 장진명은 세상을 전부 불태워버릴 것처럼 거세게 타올랐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화염거인이 하늘을 향해 포효하자 그 입에서 용암이 폭발하듯 막대한 숨결이 쏟아졌다. 무림맹 연무장 지붕을 뚫고 하늘로 치솟은 숨결은 하늘에서 흩어지더니 불비가 되어 도시 전역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감히 초고수들의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고 지켜만 보던 무인들이 그 광경을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미친…….” “도시에 불을 지를 셈이야?” 금시조의 불꽃으로 만들어낸 재앙과도 같은 현상에, 여필극이 가장 먼저 하늘로 솟구치며 사자후를 터트렸다. “내 목소리를 듣는 모든 무림인들에게 명한다! 불길을 진압하고 민간인을 최우선으로 보호하라!” 황금빛으로 물든 그의 주먹이 폭풍처럼 휘둘러져 불비를 꺼뜨렸다. 그러나 불비가 떨어지는 반경은 여필극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드넓었다. 휘이익! 창천검노 나일천도 허공으로 솟구치며 검을 크게 떨쳤다. 그의 검기에 들어온 불비가 일거에 소거됐다. “불이 지상에 떨어지기 전에 없애라!” “검기를 사용할 수 없는 무인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민간인들을 보호하라!” 팔대문파의 장문인들, 무림맹의 맹원들, 내상을 입은 후기지수들까지 흩어져서 불비를 끄고 민간인들을 구하기 위해 흩어졌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기무혁은 피부가 익다 못해 타버린 신강헌을 부축해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야 또라이, 너 괜찮냐?” “괜찮아……. 몸이 불타는 것쯤은 익숙하니까…….” “개드립 치는 거 보니까 멀쩡하네.” 불비를 피할 수 있는 건물 아래에 넝마가 된 신강헌을 휙 내던진 기무혁이 고개를 돌렸다. “크하하하하하하!활활잘타오르는구나전부잿더미로변해버려라모조리불타올라라-!” 앙천대소를 터트린 장진명이 무림맹의 한쪽 외벽을 부수며 멀어지고 있었다. 무림맹주와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은 쏟아지는 불비를 막느라 도망치는 장진명을 쫓지 못했다. 기무혁도 감히 혼자서 장진명을 쫓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아까 분명 금시조라고 했지?’ 지난 생의 다양한 경험 덕분에, 그는 광인이 아무렇게나 떠드는 것 같은 말도 흘려듣지 않았다. * * * 일월문주 장진명에게 대대적인 수배령이 떨어졌다. 팔대문파 장문인이었던 인물이 도심 한복판에 화재를 일으킨 충격적인 사건. 국가적인 규모의 체포 작전이 펼쳐진 가운데, 가장 마음이 급한 것은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이었다. “당장 추격조를 편성하라!” “문파의 최정예를 전부 동원해!” “누구보다 먼저 장진명을 잡아야 한다!” 팔대문파의 정문에서는 과거라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항상 당당했던 팔대문파의 문도들은 따가운 시선 탓에 무복을 입고 함부로 밖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시민들이 언제까지 무림인들의 눈치를 봐야 하나! 무서워서 못 살겠다!” 못 살겠다! 못 살겠다! “팔대문파는 책임지고 살인마 장진명을 잡아 와라!” 잡아와라! 잡아와라! “정부는 대문파 감시 특별법을 통과시켜라!” 통과시켜라! 통과시켜라! 하루가 다르게 팔대문파에 대한 민심이 흉흉해지는 가운데, 무림맹주 여필극이 제안한 법안을 국회에서 최단시간에 통과시킬 거라는 이야기마저 나왔다. 팔대문파 입장에서는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시간. 일반인들 사이에선 팔대문파가 다 한통속이라 일부러 안 잡는 것 아니냐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무림인 범죄 전문가들을 부르자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장진명은 며칠이 지나도록 수사망을 피해 도주 중이었다. “뜨거워, 너무 뜨거워…….” 장진명은 어딘지 모를 산속을 정처 없이 헤매고 있었다. 옷은 불타고 찢겨 있었고, 전신에 난 상처에는 피딱지가 가득했다. 추격을 뿌리치며 몇 명을 불태웠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몸이 점점 뜨거워지고 의식이 흐릿해졌다. 억지로 가둔 금시조의 힘에 자아가 잡아먹히고 있었다. “……그래도 무공만 완성하면, 금시조의 불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만 하면…….” 하지만 장진명은 웃었다. 괴이를 받아들이고 적을 불태울수록 강해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몸이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은 사소한 부작용이리라. “곧 완성된다. 조금만 더 있으면 금시조의 불꽃이 내 것이 된다고! 평생 추구해온 궁극의 불꽃……!” 그러기 위해서 일단은 한국을 떠날 생각이었다. 다행히 세계는 넓고 고강한 무림인이 필요한 나라는 많았다. 특히 전쟁 중인 나라로 가면 자신의 힘을 값비싸게 팔 수 있었다. 힘만 있다면 평생 왕처럼 살거나 실제로 왕이 될 수도 있었다. “흐흐. 그것도 나쁘지 않겠어. 곧 완성될 무공으로 전쟁을 종식시키고, 그 나라의 무신으로 군림하는 거야……. 흐흐……. 끄윽…….” 참을 수 없는 뜨거움에 장진명은 넝마가 된 상의를 부욱 찢어버렸다. 그럼에도 열이 식지 않아서 고통스럽게 신음을 참았다. 싸아아아아- 그때, 갑자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장진명의 표정이 굳었다. 뒤를 돌아보자 익숙하고도 증오스러운 얼굴이 본 적 없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럴 기회는 영원히 없을 거야.” 빙하신녀 현은하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한겨울의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중이었다. 우뚝 멈춰 선 장진명의 표정이 이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옛정을 생각해서 도와주려고 왔나?” “아니. 내 손으로 일월문의 수치를 없애려고 혼자 왔어.” “죽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말이군.”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전신에 불꽃을 휘감은 장진명이 화염거인으로 화해 달려들고, 새하얀 바람을 갑옷처럼 두른 빙하신녀가 쌍장을 휘두르며 맞섰다. 화르르르르르륵! 쩌저저저저저적! 열양공과 빙공의 최고수들이 생사를 걸고 충돌했다. * * * “으으, 살벌하구만.” 황숙수는 오한이 드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망원경으로 두 초고수의 싸움을 멀리서 지켜보면서였다. “쯧. 한발 늦었군. 일월문의 업보를 직접 매듭지으려는 겐가……. 헌데 과연 홀로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최건은 망원경 없이 팔짱을 낀 채 싸움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야차 가면을 쓴 탓에 표정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목소리에서 못마땅함이 느껴졌다. “그럼 우리는 안 싸워? 저 불꽃을 막아낼 필살기를 준비해 왔는데!” 며칠 전에 새카맣게 탄 얼굴 그대로 신강헌이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뺘아악! 김복자의 품에 안긴 새끼 금시조가 불안한 듯 울었다. 죽은 어미의 기운을 느끼고 이곳으로 사람들을 인도한 일등 공신이었다. 그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김복자가 옆을 바라봤다. “어쩔 건데? 그냥 이대로 구경만 할 거야?” 김복자뿐만 아니라 모두가 한 사람의 대답을 기다렸다. 크루원들의 시선을 받은 기무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은 위험해 보이니까 지켜보다가 힘이 좀 빠졌다 싶으면 그때 기습하죠.” 크루장의 말에 모두들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77화. 잿더미 치이이익-! 빙하신녀는 자신의 무복 소매를 태우는 불꽃을 냉기로 진압하며 화염거인으로 화한 장진명을 노려봤다. “하하하하! 아직도 뜨겁다! 네 현음공이 오죽 형편없으면 내 몸의 열기조차 식히지 못하는구나-!” 저것은 더 이상 무인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본능만 남아 짐승처럼 날뛰는 장진명을 따라, 그를 휘감은 불꽃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며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들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일월문은 수백 년 전 음과 양을 하나로 다루는 무공을 연구하며 시작된 문파였지만, 무인들이 점점 음한계열과 양강계열 중 하나에 집중하는 경향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두 개의 파벌로 나뉘었다. 음한계열의 현음공(玄陰功). 양강계열의 적양공(赤陽功). 일월문을 대표하는 두 무공은 각각 신공에 비견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 두 계파의 무인들은 자존심이 대단했고, 언제부턴가 서로가 자신들이 최고라고 여기며 사사건건 대립하기 시작했다. 장진명과 현은하는 그 대립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일월문에 함께 입문한 동기였다. “으하하하하! 뜨거워! 뜨거워서 미쳐버릴 것 같단 말이다-!” 화염거인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채찍처럼 움직이는 수십 줄기의 불꽃이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화르르르륵! 금시조의 힘을 삼킨 장진명의 불꽃은 분명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힘으로 맞붙는다면 빙하신녀도 당해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수십 년간 갈고닦은 초식의 현묘함과 일월문 역사상 최고라 불린 재능은 상대와 대등한 싸움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크하하하하! 천하의 빙하신녀가 내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군!” “감당 못 할 불장난에 뇌까지 익어버렸어?” 현은하는 늘 장진명보다 한수 이상 위로 평가 받았다. 그녀의 별호가 빙하신녀이기 전부터 그랬다. 일월문 최고의 후기지수. 일월문의 역사상 최연소 장로. 최연소 대장로이자 한국십대고수. 그 모든 타이틀을 현은하가 차지했다. 장진명이 가진 것은 단 하나, 자신의 대에서 예정된 일월문의 장문인 자리에 앉은 것뿐이었다. 두 파벌이 번갈아 장문인을 하는 일월문의 전통이 아니었다면 그마저도 빼앗겼을 터였다. -너만,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취급 받지 않았어! 언젠가 고주망태가 된 장진명이 자신을 찾아와 그렇게 화를 낸 적이 있었다. 후기지수 시절부터 어딜 가든 항상 비교를 당했으니 자기 딴에는 비참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 심정이 이해 간다고 해서 용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등신 같은 놈. 고작 알량한 열등감 때문에 마공같은 걸 익혔어?” “닥쳐어어어어-!” 정곡을 찔렸는지 장진명이 악을 쓰며 전신에서 불꽃을 내뿜었다. 화르르르르르륵! 그러나 용암이 폭발하듯 치솟은 화염에도 빙하신녀의 표정은 더욱 차가워졌다.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군. 이런 구제 불능의 멍청이를 장문인으로 두었으니 문파에 망조가 들 수밖에.”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은 빙하신녀가 강하게 쌍장을 쳐냈다. 날카롭게 벼려진 냉기가 날뛰는 불꽃을 갈랐다. 촤아아악- 쩌저저저적! 집중된 냉기에 불꽃이 출렁이며 일순간 좌우로 갈라졌다. 빙하신녀는 열린 길을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최대한 빠르게 끝낸다.’ 그녀의 몸 주위로 무시무시한 냉기가 휘몰아쳤다. 처음부터 싸움을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팔대문파의 정예가 눈치채고 몰려오기 전에 승부를 볼 작정이었다. 순간의 화력은 장진명의 불꽃이 훨씬 더 거셌지만, 빙하신녀에게는 장진명이 잃어버린 날카로움, 또한 상대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유리함이 있었다. 치이이이이익……! 물론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화염거인이 쏟아내는 화염을 쳐낼 때마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고, 감히 불꽃이 침범하지 못했던 몸 곳곳에 화상자국이 새겨졌다. 마치 용암 속을 헤쳐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 그럼에도 빙하신녀는 신음 한번 내지 않고 화염거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최소한의 여력만으로 몸을 보호하고, 나머지는 전부 앞을 가로막는 화염을 해체하는 데 사용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네 최후를 맡기지는 않겠다.’ 사문의 장문인이자 한때는 친구였던 녀석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그리고 일월문의 대장로로서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이었다. 잠시 후, 빙하신녀는 끝내 화염거인을 둘로 갈라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장진명과 마주했다. “뜨거워, 너무 뜨거워,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겁다고-!” 그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팔대문파 정예의 추격을 뿌리치며 입은 상처들과 정신을 잠식해가는 금시조의 기운이 얽혀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게다가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듯한 모습은 이대로 내버려두기만 해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금시조의 불꽃에 삼켜질 것처럼 보였다. “누가, 누가 제발 불을 좀 꺼줘……. 현은하? 은하야!” 머리를 붙잡고 고통스러워하던 장진명이 빙하신녀를 향해 반갑게 웃으며 한 걸음씩 걸어오기 시작했다. 주화입마의 광증이 극에 달한 장문인의 모습에 빙하신녀는 분노를 겨우 참으며 물었다. “누구야?” “내 몸에 붙은 불 좀 꺼줄래? 응? 제발, 은하야…….” “말해. 너한테 마공을 익히라고 건넨 놈이 누구냐고!” 까마득한 후기지수 시절부터 자의로, 또 타의로 서로 치고받으며 평생을 옆에서 봐왔다. 빙하신녀는 일월문주 장진명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처음으로 그가 마공을 익혔으리라고 눈치챈 것도 그녀였고, 어느 순간부터 뭔가 수상쩍은 짓들을 벌이는 것도 조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빙하신녀가 아는 장진명은 분수에 맞지 않게 욕심은 많아도, 마공에 손을 댈 만큼 간덩이가 부은 인간은 아니었다. “누가 네 소심한 허파에 바람을 넣었지? 다른 팔대문파의 장문인? 사파오문 중 하나인가? 빨리 말해. 그래야 복수든 뭐든 해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장진명은 뜨거운 불길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넋이 나간 듯 실실 웃기 시작했다. “현은하. 어릴 때는 우리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 제법 친하게 잘 지냈잖아. 그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사귀는 거 아니냐고 놀리기도 하고…….” “그래서? 이제 와서 옛정을 생각해서 살려달라고?” 그 순간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웃던 장진명의 표정이 다시 악귀처럼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사실 난 그때부터 널 죽이고 싶었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사람들은 모두 너만 추켜세웠지. 하지만 일부러 친한 척 굴었어. 언젠가 너를 밟고 올라가 네가 배신감에 사무치게 만들고 싶었으니까. 흐흐.” 빙하신녀의 표정은 더더욱 싸늘해졌다. 쩌저저저적-! 그녀가 옆으로 손을 뻗자 허공에 얼음이 고드름처럼 길게 자라나 한 자루의 창이 되었다. “그래, 어차피 제대로 된 대답은 못 들을 거라고 생각했어. 이만 끝내자.” 그러자 크히히히- 징그럽게 웃던 장진명이 돌연 빙하신녀 앞에 털썩 두 무릎을 꿇었다. “근데 있잖아. 나 죽고 싶지 않아.” “…….” “은하야. 우리 함께 일월문을 천하제일문파로 만들기로 약속했잖아. 내가 장문인이 되고, 네가 대장로가 되면 무서울 게 없을 거라고. 그러니 힘을 합쳐서 잘해보자고 약속했잖아. 두 계파의 갈등도 우리 세대가 되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장진명, 먼저 약속을 어긴 건 너였다.” 입술을 꽉 깨문 빙하신녀는 얼음창을 심장에 겨눴다. 그대로 찌르기만 하면, 일월문 역사상 최악의 장문인이자 끔찍한 범죄자를 처단할 수 있었다. 오욕을 뒤집어쓴 사문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리라. 그러니 망설일 이유 따위는 없는데. “나는…… 그냥 강해지고 싶었어. 너와 대등해질 만큼 강해지고 싶었다고. 천하제일문파에 어울리는 장문인이 되고 싶었을 뿐이야…….” 장진명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끔찍한 열기에 수분이 바로 말라붙고, 다시 흐르기를 반복하면서. “그래서 흑연이 죽어가는 금시조를 구해왔을 때, 그 열양지기를 보니 욕심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 여기저기 넝마가 된 다 큰 사내가 엉엉 울면서 비는 꼴은 무척이나 비참하고 초라해 보였다. 하지만 빙하신녀가 손을 멈춘 것은 그 몰골 때문이 아니라 방금 들은 한 이름 때문이었다. “……흑연이 누구지?” “내 심복이잖아. 항상 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수하. 어릴 때부터 함께 무공을 익힌 형제 같은 녀석…….”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얼음창을 옆으로 치운 빙하신녀가 장진명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려서 자신과 눈높이를 맞췄다. “내가 아는 한 일월문에 흑연이라는 별호를 가진 무인은 없어. 어릴 때 같이 무공을 익혔다고? 널 그림자처럼 따라다녀? 그럼 지금 그 새끼는 어디에 있는데!” 빙하신녀의 고함에 장진명이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흑연이…… 일월문 사람이 아니라고?” 그 흔들리는 눈빛을 본 순간, 빙하신녀는 이 일의 배후에 흑연이라는 존재가 관련돼 있음을 확신했다. “이 멍청한 놈. 대체 누구한테 무슨 짓을 당한 거야!” 만년빙처럼 단단했던 마음에 연민이 깃들면서 생긴 아주 찰나의 흐트러짐. 하지만 초고수들 간에는 생사를 가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늦었어.’ 소리조차 없었다. 빙하신녀는 눈앞에 들이닥친 손가락에 맺힌 응축된 화염을 보았고, 그 너머 희열에 들뜬 사악한 얼굴과 마주했다. ‘이 쓰레기와 함께 죽겠구나.’ 빙하신녀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면서 얼음창을 뻗었다. 최소한 동귀어진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사문에 끔찍한 해악을 끼친 이 쓰레기가 도망치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치이이익-. 손가락이 스쳐 간 뺨에 깊은 화상이 새겨졌다. 아마 평생 지워지지 못할 흉터로 남을 터였다. 허나. “쿨럭.” 승리감에 취해 웃어야 할 장진명의 입에서 핏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그는 자신의 가슴으로 삐져나온 칼끝을 내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복부를 찌른 빙하신녀의 얼음창은 거죽만을 뚫은 채로 힘을 잃고 녹아내렸다. 그뿐이었다면 그는 빙하신녀를 죽이고 달아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구……?” 등 뒤에서 심장을 뚫고 들어온 검 한 자루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쯧. 웬만하면 지켜보려 했다만 끝까지 추잡하기 짝이 없구나.” 장진명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눈동자를 돌려 바라보자 야차 가면을 쓴 사내가 혀를 차고 있었다. “뒤늦게 반성이라도 하는 줄 알고 혹시나 했다만…… 그래, 짐승은 끝까지 짐승이지.” “댁은 누구지?” 최건이 보란 듯이 가면을 벗으며 얼굴을 보여주었다. “검마 최건. 너를 명부로 보낼 사람의 이름이니라.” “……기억나는군. 골치 아픈 늙은이였지. 내게 복수하려고 기다렸나?” “복수는 무슨. 도축이라면 모를까.” 스르륵. 최건이 검을 빼내자 장진명이 힘없이 비틀거렸다. 그러나 이미 장진명의 몸을 장악한 금시조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생명이 빠져나간 육신을 잡아먹듯 더욱 맹렬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온몸이 불꽃에 휩싸인 장진명이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교(敎)……. 그래, 흑연은 교에서 보낸 사람이었어.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 회광반조일까. 내내 흐리멍덩하던 장진명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교? 방금 교라고 했느냐!” “너……!” 교라는 말에 눈을 부릅뜬 최건과 자신을 경멸하는 눈빛의 빙하신녀를 바라보며, 장진명이 저주를 내뱉었다. “너희라고 나와 다를 것 같나? 누구도 감당하지 못해. 결국 그놈들의 손에 다 죽거나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빌게 될 거다!” 화르르르르르륵! 화마에 휩싸인 장진명이 남은 힘을 다해서 사자후를 터트렸다. “파멸이 다가오기 전까지 다들 실컷 즐겨두라고! 흐하하하하하하-!” 잠시 후,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한 줌의 잿더미뿐이었다. 78화. 내단은 저희가 검은 잿더미만 남은 자리. 우두커니 그곳을 바라보던 빙하신녀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최건에게 말했다. “……굳이 심장을 찌를 필요가 있었나요. 팔을 잘라 제압해 데려갔다면 더 많은 것을 캐낼 수 있었을 겁니다.” “내 손속이 과했다고 생각하는가?” 최건 역시 같은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물었다. 팔대문파의 장문인을 베었다. 상대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었기에 한 점의 거리낌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묘할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악연으로 엮인 팔대문파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였다. “초고수 간의 생사결이었네. 어설프게 베었다면 놈의 손이 자네의 뺨이 아니라 눈이나 머리를 찔렀을지도 몰라.” 최건은 빙하신녀를 돌아보았다. 몹시 지쳐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만큼 심한 화상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내 딴에는 최선이었으니 탓하지 말게나.”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랬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 게지요.” 빙하신녀는 그새 몇 년은 늙은 얼굴이었다. 단순히 생사결로 인한 부상이나 피로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문의 장문인이자 한때는 친구였던 인물을 죽였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하지만, 그녀는 죽은 일월문주보다 훨씬 더 단단한 마음을 가진 무인이었다. “구명지은을 입었습니다. 훗날 기회가 생긴다면 필히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잿더미에서 시선을 돌린 빙하신녀가 정식으로 최건에게 포권을 취했다. “자네가 은혜를 갚을 기회가 없길 바라야겠군. 이 늙은이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라는 소리 아닌가?” 다시 야차 가면을 쓴 최건이 실없는 농담을 던지자 빙하신녀가 힘없이 웃었다. 곧 일대를 불태우던 금시조의 불꽃이 점차 사그라지면서, 그 너머에서 다가오는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그 면면을 확인한 빙하신녀의 눈이 커졌다. “저들은…….” “나랑 같이 온 이들이네.” 라이센스 시험에서 눈여겨본 기무혁과 신강헌, 처음 보는 젊은 술법사, 그리고 그들과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후덕한 중년인이었다. “후기지수들과 인연이 있으셨습니까?” “저기 눈매가 사나운 녀석이 내 제자일세. 물론 아직은 비밀이니 모른 척해주게나.” 라이센스 시험에서 최대의 이변을 일으킨 후기지수가 검마의 제자였다니. 검마와 악연이 있는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이 알게 되면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만한 이야기였지만, 빙하신녀는 잠시 놀랐을 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실력이 굉장하더군요.” “내 마지막 걸작이지.” 최건의 자부심 넘치는 말투에 빙하신녀는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러다 문득, 검마와 그의 제자에게 자신과 자신의 제자 양하윤이 둘 다 목숨을 빚졌다는 것을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언젠가 저 아이에게 보답하려 했습니다만, 그 스승인 선배님께 저까지 목숨을 빚져버렸군요.” “갚을 생각 하지 말래도.” 다가오던 기무혁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팔대문파의 시선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려놨습니다. 아마 5분 정도는 자리를 정리할 여유가 있을 겁니다.” 빙하신녀가 놀란 표정으로 기무혁과 뒤따라온 청랑의 크루원들을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팔대문파의 정예들이 곧 도착하리라 짐작하고 있던 차였다. 헌데 그들이 예상보다 늦어지는 이유가 이들 넷 때문이었다니. “……놀랍구나.” 빙하신녀는 기무혁이 일신의 무공만 뛰어난 후기지수가 아님을 깨닫고 진심으로 감탄해 중얼거렸다. 하지만 놀랄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빙하신녀님. 외람되지만 금시조의 내단은 저희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정중한 말투와 달리 예상치 못한 내용에 빙하신녀가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되물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내단이 어디…….” 상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빙하신녀가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뺘아악! 김복자의 품에서 바둥거리다 뛰쳐나온 새끼 금시조가 잿더미로 달려가 조그마한 부리로 그곳을 파헤쳤다. 그리고 잠시 후, 잿더미 속에서 붉게 빛나는 구슬 하나를 찾아낸 새끼 금시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뺘아악……. 마치 자신이 찾던 어미가 아니라서 실망한 것만 같은 울음소리. 빙하신녀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자, 기무혁이 옆에서 덤덤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장진명이 해친 금시조의 새끼입니다. 어미가 남긴 기운으로 돌봐주지 않으면 천천히 쇠약해져서 결국 죽을 거라고 하더군요.” 콕콕콕! 새끼 금시조는 어미의 기운이 담긴 구슬을 부리로 쪼아보고 뺨을 부볐다. 마치 놀아달라고 보채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빙하신녀가 입을 열었다. “설마…… 대괴이를 데려가서 기를 생각이더냐?” 대괴이를 길들인다는 것은 성공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껏 수많은 대문파와 술법사들이 시도했지만 막대한 피해만 보고 실패로 끝난 실험. 물론 기무혁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적당한 시기에 놓아주겠습니다. 지금은 너무 약해서 다른 괴이들의 먹이가 될 뿐이니까요.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까지만 돌봐주고 풀어줘야겠죠.” 하지만 어린 새끼일 때라면 어느 정도는 사람과 같이 지낼 수 있었다. 대괴이로서 완전히 각성하면 제어할 수 없는 존재가 될 테지만, 그전까지는 사람과 함께 지냈던 사례가 드물게 있었으니까. “풀어준 이후에도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기연이 따르지 않으면 평생을 찾아다녀도 만날 수 없는 존재가 대괴이니까요.” 빙하신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까지 하려 하느냐? 네가 새끼 금시조를 데려가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차라리 새끼인 지금 죽이는 편이 후환이 없을 것인데.” 결국 빙하신녀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금시조의 내단은 가져갈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일월문에서 새끼 금시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었다. 방식이야 어찌 되었든, 청랑은 일월문의 지하에서 녀석을 데리고 나왔으니까. “그건…….” 하지만 기무혁에게는 금시조의 어미가 남긴 내단과 새끼가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오행신공에 큰 도움이 될 거야.’ 금시조는 순수하고 강렬한 화기(火氣)를 품고 있었다. 내단을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오행신공의 화기를 연마하는 데 장기적으로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물론 빙하신녀에게는 그렇게 대답할 수 없었다. 오행신공을 익힌 것은 아직까지 비밀이었으니까. 기무혁이 그럴듯한 이유를 대기 위해 머리를 굴릴 때였다. “불쌍하지도 않아요?” 김복자가 앞으로 나서며 새끼 금시조를 들어 품에 안았다. 금시조의 부리에는 어미의 내단이 단단히 물려 있었는데, 녀석을 꼭 끌어안은 김복자는 평소에 보기 힘든 화난 표정으로 빙하신녀를 노려봤다. “얘는 엄마도 없이 지하에 묶인 채 갇혀 있었다고요. 근데 이득이 없으니 죽이니 마니 후환이 어쩌느니…… 방금 한 말이 죽은 일월문주랑 뭐가 다른데요?” 고작 스무 살쯤 되었을까 싶은 젊은 술법사. 빙하신녀 자신과 비교하면 까마득하게 어린 연배였다. 하지만 그녀는 무림의 거물을 상대로 전혀 겁먹지 않고 쏘아붙였다. “지, 진정하거라.” “……너 미쳤니?” “하하하. 얘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요.” 최건과 황숙수가 당황해서 양쪽에서 팔을 잡아끌고, 신강헌이 어색하게 웃으며 김복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행여라도 빙하신녀의 분노가 김복자를 향할까 봐서였다. “죄송합니다. 제 친구가 실언을 했습니다.” 기무혁도 앞으로 나서며 빙하신녀의 정면에 섰다. 제아무리 초고수라 해도 방금 전에 생사결을 치르고, 악연일지라도 오랜 인연을 잃은 상황이었다. 즉, 심신이 불안정한 빙하신녀가 김복자를 해치려고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던 듯했다. “……똑같다라. 과연 그 말이 틀리지 않구나.” 모두의 걱정과 달리, 빙하신녀는 후련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뺘아악? 김복자의 품에 안긴 새끼 금시조를 잠시 바라본 그녀는 이내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가거라. 나는 아무것도 못 본 것으로 할 테니.” “……정말이죠? 나중에 말 바꾸시면 안 돼요!” “휴우. 간 떨어질 뻔했네.” 뛸 듯이 기뻐하는 김복자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빙하신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분명 일월문 입장에서는 막대한 손해를 보는 결정이었다. 길들이지 못한다고 해도 금시조가 지닌 가치는 무궁무진하니까. 하지만 빙하신녀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얼굴이었다. 손익을 따지며 판단하려고 한 자신이 장진명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 그녀에게 어떠한 깨달음이라도 준 것처럼. 여전히 몹시 지친 모습이었으나 한결 밝아진 얼굴로 빙하신녀가 기무혁을 바라봤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따뜻한 마음을 지녔구나.” “예?” “진작 진짜 이유를 말해주었다면 내가 덜 부끄러웠을 것이다. 아니지, 섣불리 네 말을 믿지 않고 다른 의도가 있는지 의심했을지도 모르지.” “……칭찬 감사합니다.” 빙하신녀가 뭔가 오해를 한 듯했지만, 기무혁은 굳이 정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때 잠시 뒤로 물러나 있던 최건이 다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일월문은 앞으로 어찌 되는 겐가?” “봉문을 해야겠지요.” “…….” 일월문은 너무 큰 사건에 휘말렸다. 빙하신녀가 직접 장진명을 처단하였으므로 어느 정도는 면죄부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최소 일 년 이상은 대외적인 활동을 멈추고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 할 터였다. ‘양하윤은 한동안 보기 어렵겠군.’ 문득 라이센스 시험 동기에게 생각이 미친 기무혁이 빙하신녀에게 말했다. “양하윤한테 힘내라고 안부 전해 주십시오.” “걱정하지 마라. 어린 후기지수들까지 문파에 가둬 놓을 생각은 없으니, 앞으로는 편할 때 연락해서 만나도 좋다.” “……?” 빙월신녀의 공식적인 허락이 떨어졌지만 당사자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다행히 최건이 적절하게 화제를 전환해 주었다. “자네. 혹시 장진명이 말한 교라는 단체에 대해서 들어본 바가 있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허나…… 반드시 놈들을 찾아낼 겁니다.” 싸늘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은 빙하신녀가 말을 이었다. “일월문의 장문인을 타락시키고, 본문을 욕보이고 가늠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혔습니다. 마땅히 당한 것의 몇 배로 갚아줘야 하겠지요.” 그녀의 얼음장같은 눈동자 속에서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최건 역시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생각이 잘 맞을 것 같군. 무언가 단서를 찾으면 공유하는 것이 어떤가?” “그리하지요. 놈들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자연스럽게 동맹이 결성되었다. 그에 관해 두 사람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최건이 뒤쪽을 돌아보더니 작게 혀를 찼다. “곧 하이에나들이 우르르 들이닥치겠군. 우린 이만 가보겠네.” 금시조의 내단을 확보한 청랑은 팔대문파의 정예들을 피해 암루로 귀환할 계획이었다. “예. 나중에 다시 뵙…… 잠시만.” 빙하신녀의 시선이 최건과 기무혁을 지나 그 뒤로 향했다. 일이 잘 풀려서 안심했는지, 신강헌이 뒤편에 쭈그려 앉아 금시조가 남긴 잔불을 구경하고 있었다. “오, 이거 신기한데?” 신강헌의 손짓에 따라 불길이 이리저리 춤추듯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얼굴. 그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누군가를 본 빙하신녀가 신강헌에게 걸어갔다. “……제안 하나만 해도 되겠느냐?” 79화. 적양공(赤陽功) 뒤늦게 도착한 팔대문파의 정예들은 초토화된 현장을 확인했다. “마공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장진명을 찾아라! 분명 근처에 있을 것이다!” 새카맣게 탄 숲과 일대가 얼어붙었다가 녹아내린 흔적들. 대체 얼마나 처절한 싸움을 벌였는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추격대 중 하나를 직접 이끈 태극검문의 장문인이 낮게 탄식했다. “또 한발 늦었단 말인가…….” 장진명을 추격하는 도중에 갑자기 치솟은 불길을 보고 장진명인 줄 알고 달려갔지만,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몸에 화염을 붙이고 달리고 있던 술법인형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방해에 한참 돌아온 것이다. 그 탓에 또 시간이 지체되어 버렸고 결국……. “장문인! 빙하신녀를 발견했습니다. 현재 부상을 치료하고 계십니다.” 수하의 보고에 태극검문의 장문인은 날 듯이 경공을 펼쳐 빙하신녀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장진명은 어찌 되었소! 놈이 또 도망친 것은…….” “처단했습니다, 제 손으로 직접.” 그 짧고 간결한 대답에 모두가 잠시 침묵했다. 뺨에 생긴 끔찍한 화상을 냉기로 임시조치한 빙하신녀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문의 반역자이자 무림공적인 놈을 추포해서 끌고 가고 싶었으나…… 제 능력으로 그것까지는 불가능했습니다.” “마공을 익힌 장진명을 그대 혼자서 감당했다는 뜻이오?” 빙하신녀를 바라보는 무인들의 표정에 놀라움과 경외심이 어렸다. 다들 장진명이 무림맹에서 보여준 마공의 가공할 위력을 보았으니까. 무림맹주 여필극도 혼자서는 장진명을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마공의 부작용으로 이미 죽어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장문인께서 먼저 찾으셨어도 충분히 처단할 수 있었을 겁니다.” 빙하신녀는 과장도 축소도 없다는 듯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비로소 다들 어느 정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럼에도 빙하신녀의 무위가 그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저…… 혹시 금시조의 사체나 내단을 보셨습니까?” 그때 추격대를 따라온 팔대문파의 술법사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진명이 대괴이로 분류되는 금시조의 힘으로 마공을 연성했다는 것은 지난 며칠 동안 샅샅이 조사하면서 알려진 사실이었다. 만약 그 사체나 내단을 장진명이 가지고 있었다면, 그 가치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빙하신녀께서 확보하셨다면 저희와 거래를 하시는 것은 어떨지…….” 특히 괴이를 연구하는 술법사들에게는 눈이 돌아갈 만한 보물인지라 다들 눈이 탐욕으로 빛나고 있었다.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빙하신녀는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설령 있었다고 해도 불타서 사라졌을 겁니다. 장진명은 숨이 끊어지자마자 뼛조각도 남기지 않고 스스로 불타버렸으니까요.” “예? 아무리 그래도 금시조가 불에 탄다는 말은…….” “제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뜻입니까?” 빙하신녀의 차가운 목소리에, 움찔한 술법사들이 목을 움츠리며 사과했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캐물었다가는 그녀의 분노를 감당키 어려울 것만 같았다. 그때 한숨을 내쉰 빙하신녀가 손가락으로 불과 수십 미터 떨어진 곳의 잿더미를 가리켰다. “저거라도 가져가서 DNA 검사를 해보시든지요.” “설마 저게…….” “무림공적의 최후입니다.” 술법사들은 머뭇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잿더미를 조금 챙겼고, 빙하신녀는 그 모습을 싸늘한 눈으로 지켜보았으나 더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뼛가루라도 가져가서 사망을 확인하는 절차는 어차피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정말 장진명을 죽였나 보군.’ ‘상처만 봐도 얼마나 지독하게 싸웠는지 알 것 같으니…….’ 며칠간 밤낮으로 장진명을 추격한 무인들은 비로소 장진명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장진명을 추격하던 팔대문파의 정예가 한자리에 모였다. 상황을 전해 들은 창천검노 나일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겨우 일단락되었군.” 그의 말에 팔대문파의 장문인들, 정예 무인들이 몹시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체포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이걸로 여론이 좀 잠잠해지겠군요.” “며칠이나 씻지도 못하고 아주 지긋지긋합니다.” “다 끝났으니 이제 돌아들 가시죠!” 각자의 사문으로 귀환하는 팔대문파 무인들의 얼굴이 한층 밝아진 가운데, 빙하신녀만은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 끝났다라……. 나는 이제부터가 시작일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잿더미가 있었던 자리에 한 번 더 눈길을 준 그녀는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 * * <무림공적 장진명, 일월문 대장로 빙하신녀에 의해 격살!> 그러나 팔대문파의 예상과 달리, 장진명의 사망이 발표된 후에도 그들을 향한 대중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쌓여온 기득권 무림세력에 대한 불신이 일제히 폭발했다. 도화선에 누가 불이라도 붙인 것처럼 온갖 폭로가 잇따랐다. -팔대문파 고위 관계자, 자녀 대입 특혜 의혹…… -‘녹음파일 긴급입수’…… 금영문 장로, 성추문 의혹에 휩싸여 -팔대문파 장문인 ㅁ씨, ‘초호화 골프 접대’ 논란 기자들은 키보드 위 손가락을 신병이기처럼 휘둘렀다. 팔대문파가 쌓아온 업보가 회피 불가능의 절초가 되어 돌아왔다. 두려울 것이 없었던 팔대문파는 들불처럼 거센 여론의 비난과 반발에 가만히 웅크렸다. 그들은 이 소나기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 일월문의 봉문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일월문은 이번 장진명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한동안 봉문하고 자숙하는 시간을 갖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찰칵찰칵찰칵! 일월문은 대장로이자 최고수인 빙하신녀가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여 사죄하고 봉문을 선언했다. [빙하신녀!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당장 봉문을 철회하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난리인 중에…….]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이 직접 연락해 봉문을 철회하라고 설득했지만, 빙하신녀는 장문의 문자 한 통만을 남기고 두문불출했다. [일월문은 더 이상 대문파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하여 앞으로 팔대문파 정기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장문인들께서는 부디 문파 내부를 잘 단속하시어 저희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야흐로 팔대문파 동맹의 종말이었다. 일월문의 봉문으로 팔대문파 내부가 어수선해진 사이, 무림맹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장진명과 연관된 자들을 체포하라! 상대가 그 누구든 혐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무림맹주가 제안한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국회와 접촉함과 동시에, 장진명과 관련된 혐의를 지닌 무림인들을 잡아다가 취조하기 시작했다. “나,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과정에서 대천문의 최연소 장로인 구자승이 구속되었다. 죽은 대천문주의 심복이었던 그는 대천문주와 장진명이 함께 벌인 불법사업장에 대해서 실토했고, 그 추악함이 밝혀지면서 세상은 한 번 더 충격에 빠졌다. “하! 대체 어디까지 뻗어있는 거야?” “더러운 놈들…….” “설마 팔대문파는 다 이런 거야?” 덕분에 신난 것은 무림맹주 여필극이었다. “평소 행실이 떳떳한 무림인들은 당당히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뒤가 켕기는 자들은 하루하루 피가 마르게 될 것이야!” 사자후 같은 선언에 무림맹의 협객들이 호응했으며, 팔대문파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 * * 팔대문파와 관련된 스캔들로 한국무림은 하루하루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 상황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당들은 휴가라도 얻은 것처럼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뺘아악! 거의 아지트가 되어버린 암루에 모인 청랑의 크루원들은 쪼그려 앉아서 새끼 금시조가 밥 먹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뺙! 뺙뺙! 짧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가져온 고기를 먹는 모습은 대괴이라기보다는 주홍색 병아리에 가까웠다. “귀엽다…….” “짜식, 잘 먹네.” 다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황숙수만 어쩐지 죽상이었다. “저기, 언제부터 암루의 VIP실이 병아리 집이 된 거야?” “며칠만 여기서 키울게. 지금 여기만큼 안전한 곳이 없잖아.” 기무혁의 태연한 대꾸에 황숙수가 발끈해서 쏘아붙였다. “며칠째 말이 똑같잖아! 저 쬐그만 병아리가 하루에 생고기를 한 근씩 먹어 치운다니까! 이러다 나 아주 거덜 나겠어!” “엄살은. 일월문에서 잔뜩 챙겨 나온 거 다 아는데.” 기무혁이 피식 웃으며 바라보자 대꾸할 말이 없는지 황숙수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때 김복자가 새끼 금시조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근데 얘 이름은 뭐로 하지?” 신강헌이 번쩍 손을 들고 가장 먼저 의견을 냈다. “자꾸 빡빡거리니까 빡돌이로 하자!” 뺙!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금시조가 파다닥 날아올라서 신강헌의 정수리를 쪼았다. “악! 이게 진짜 빡돌게 하네!” 뺙뺙뺙! “어휴, 저 노답.” 금시조의 반응이 아니더라도, 일고의 가치도 없이 모두에게 기각이었다. “흠흠.” 최건이 헛기침을 하더니 젊은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의견을 냈다. “자고로 이름에는 좋은 의미와 진중한 멋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그런 의미에서 무적불사조(無敵不死鳥)가 어떠하더냐?” 놀라울 정도로 유치한 작명에 다들 탄식하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좀…….” “스승님…….” “오? 저는 좋습니다, 어르신!” 최건은 젊은것들은 낭만을 모른다면서 혀를 찼다. 유일하게 찬성한 황숙수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살구.” 그때 새끼 금시조를 두 손으로 안아 든 김복자가 부드러운 털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살구라고 부를래. 색깔이 잘 익은 살구색 같지 않아?” 김복자는 새끼 금시조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모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쁘지 않네.” “네가 데려온 거나 마찬가지니까 네가 정하는 게 좋겠지.” “무적불사조보다는 못하다만…… 허허, 귀엽긴 하구나.” 그렇게 살구가 된 새끼 금시조는 김복자를 가장 잘 따랐고, 꼬박꼬박 밥을 챙겨주는 황숙수도 쫄래쫄래 잘 따라다녔다. 처음에는 귀찮아하던 황숙수도 며칠이 지나자 입꼬리가 올라가서는 특식을 챙겨줄 정도였다. ‘근데 왜 나만 무서워하지?’ 덩치가 큰 신강헌이나 기도가 가장 날카로운 최건과도 잘 지냈는데, 유독 기무혁만 가까이 가면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살구야.” 움찔. 기무혁이 나직이 부르는 목소리에 살구가 흠칫하며 돌아보더니, 호다닥 도망가서 방석 위에 놓여 있는 어미의 내단 옆에 자리 잡고 힘껏 울었다. 뺘악-! “……설마 내가 내단을 뺏을 거라고 생각하나?” 당연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장진명도 감당 못 한 대괴이의 내단을 욕심냈다간 어떤 꼴이 될지 뻔했으니까. “와, 대괴이도 미친놈은 피하나 보다.” “지랄하지 말고.” 살구가 뽈뽈거리며 기무혁에게서 도망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신강헌이 낄낄대며 놀려댔다. “딱 보면 모르냐? 네 눈깔이 무서워서 그렇잖아.” “내 눈이 어때서?” “솔직히 그게 사람 눈깔이냐? 나도 꿈에서 볼 때마다 소름 돋는데.” “……네 꿈에 내가 왜 나오는데? 기분 더럽게.” “나도 싫어, 새끼야. 꿈에서까지 나와서 대련하자고 미친놈처럼 검 휘두르지 말라고.” 상상만 해도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떤 신강헌이 살구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뒤에 있는 기무혁에게 들으란 듯이 말했다. “빡돌아. 이리 와봐.” 뺙뺙뺙! 살구는 기무혁과 달리 신강헌과는 잘 어울렸다. 곧바로 손을 타고 올라와서는 순식간에 머리까지 달려가 부리로 콕콕콕 정수리를 쪼아댔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에 신강헌이 비명을 질렀다. “악! 아악! 적당히 좀 하라고! 이 자식아!” 둘이서 노는 모습을 지켜본 기무혁이 팔짱을 끼며 혀를 찼다. “너처럼 만만하게 보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서워하는 게 낫겠다.” “으아악! 이 쬐끄만 게 진짜! 오늘 제대로 서열정리를 해주마!” “신강헌! 너 살구한테 뭐 하는 짓이야?” 김복자가 나타나서 말리건 말건 신강헌은 살구와 푸닥거리를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손끝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르르륵! 뺘아아악! 기무혁이 보기엔 아무래도 저 불꽃의 영향으로 살구와 급격히 친해진 것 같았다. 불꽃이 피어오르자 살구도 더 신이 나서 파닥거리기 시작했으니까. ‘예상은 했지만…… 역시 잘 맞네.’ 빙하신녀가 신강헌에게 제안한 것. 바로 일월문을 대표하는 양강계열의 무공인 적양공(赤陽功)이었다. 80화. 이게 청춘이지 며칠 전. “……제안 하나만 해도 되겠느냐?” “네?” 금시조가 남긴 잔불을 구경하고 있던 신강헌은 갑자기 다가와 자신에게 말을 건 빙하신녀를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네 스스로 양강무공에 재능을 타고난 것을 알고 있느냐?” “오행적성 검사에서 화(火) 적성이 제일 높게 나오긴 했는데…….”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하는 신강헌에게, 빙하신녀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단언컨대 내가 일월문에 입문하고 본 사람들 중에 가장 뛰어나다. ……젊은 시절의 장진명보다도 더 나은 듯싶으니.” “진짜요?” 신강헌이 믿기 힘들다는 듯 눈이 동그래져서 되물었고, 다른 사람들도 놀란 표정이 되었다. 기무혁만 조용히 속으로 수긍했다. ‘괜히 염화도(炎火刀)라고 불렸던 녀석이 아니지.’ 기무혁의 전생에서, 신강헌은 염화도라는 별호로 불리며 한국제일도로 군림했다. 오행적성 중 화(火) 적성만큼은 한국을 넘어서 세계에서도 통하던 재능. 심지어 평범한 수준의 양강계열의 심법을 익히고도 그만한 경지에 오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만약 신강헌이 제대로 된 양강심법으로 수련했다면…….’ 방금 전에도 금시조가 남긴 잔불이 신강헌의 손길에 따라 춤추듯이 움직였다. 화염을 다루는 별다른 요결이나 기술도 없이, 본능과 감각만으로 불을 다룬 것이다. ‘설마?’ 그 순간 기무혁은 빙하신녀가 신강헌에게 무슨 제안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직 양강계열의 심법을 익히지는 않은 것 같구나. 일월문의 적양공을 전수받지 않겠느냐?” 장진명이 살아 있었다면 열등감을 느꼈을 만한 신강헌의 재능은, 빙하신녀가 문파의 불문율을 깨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어……. 그러니까 지금 일월문으로 절 스카웃 하시는 거예요?” 신강헌이 다소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느 문파에 입문할지는 아직까지 삼촌과 함께 고민 중인 문제였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무림맹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의 반응에 빙하신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본문이 처한 상황에서 염치없이 그럴 수는 없지. 네가 원한다면 적양공만 전수해주겠다는 뜻이다.” “……예? 왜요?” 당연한 의문이었다. 제자도 아닌 사람에게 문파의 무공을 가르치는 법은 없으니까. 하다못해 두 사람이 사제의 연을 맺는다거나 속가문파에라도 적을 둔다면 모를까. 하지만 빙하신녀는 둘 다 필요 없다고 했다. “네 재능이 아까워서 제안하는 것이다. 다른 목적은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 “…….” 평소와 같았으면 애초에 불가능했을 제안이었다. 보나마나 일월문 양강계파 무인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을 테니까. 하지만 장진명과 그 심복들을 힘과 명분으로 찍어 누른 지금, 빙하신녀에게는 문파의 누구도 범접지 못할 권력이 생겼다. 때문에 그녀는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양강무공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적양공도 직접 가르치지는 못하고 구결만 전해줄 수 있을 뿐이지. 그것도 내공심법만을…….” 빙하신녀는 신강헌이 무림맹주의 삼 초식을 버텨내 일류고수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너에겐 그것이면 충분할 것 같다만.” 만약 제대로 된 양강계열 내공심법이 신강헌의 도법을 받쳐주었다면, 절정고수 시험의 통과자는 둘이 아닌 셋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 “강헌아. 너에게 큰 기연이 찾아온 것 같구나.”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최건이 신강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역시 신강헌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있었다. 다만 타고난 신체 능력과 감각에 의존하는 성향이 강하고, 상대적으로 내공심법이 빈약함을 늘 아쉬워했다. 외공을 받쳐줄 뛰어난 내공심법을 찾는다면 분명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될 터였다. “……정말로 그냥 전수해주시는 거예요? 아무런 대가나 거래 없이요?” 신강헌도 이것이 얼마나 큰 기회인지 알고 있었다. 때문에 믿기지가 않아서 몇 번이나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빙하신녀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 적양공을 너 말고 다른 사람에게 전수해선 안 된다. 그리고 한 가지만 부탁하자면…….” ‘부탁’이라는 단어에 신강헌이 침을 꼴깍 삼켰다. 분명 빙하신녀가 무언가 쉽지 않은 것을 요구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빙하신녀의 지친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훗날 억울하게 핍박받는 일월문의 문도들을 보게 된다면, 모른 척하지 말고 도와다오. 그것이면 충분할 것 같구나.” 그것이 빙하신녀의 유일한 부탁이었다. 신강헌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으며 가슴을 탕탕 두드리고는 말했다. “전 협객이라고요. 누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데 보고도 못 본 척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신강헌은 한국무림에서 첫 손에 꼽히는 양강무공인 적양공을 전수받게 되었다. “후후후! 기다려라, 미친놈! 빨리 익혀서 너부터 때려 눕혀줄 테니까!” “그러시든가.” 기무혁이 생각하기에 빙하신녀는 신강헌의 미래에 투자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훗날 초고수가 될 가능성이 높은 후기지수에게 은혜를 베풀고 좋은 관계를 맺어두는 것. 그건 분명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든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물론 그처럼 복잡한 계산 없이 순수한 호의일 수도 있었다. “혹 너도 원한다면 현음공을…….” 하지만 마냥 순진하게 생각하기엔 빙하신녀가 자신에게도 침을 발라두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저는 괜찮습니다. 지금 익힌 무공에 집중할 시간도 부족해서요.” 기무혁은 정중하게 빙하신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미 자신에게는 오행신공이라는 절세신공이 있었으니까. “음, 그래. 너는 필요 없겠지.” 빙하신녀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리고 지금. “신강헌 더 파이어맨 업그레이드! 타올라라 지옥의 겁화여!” 화륵! 신강헌의 손가락 끝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거창한 외침과 달리 겨우 촛불만 한 크기의 불꽃이었지만, 손바닥만 한 금시조와 자웅을 겨루기에는 충분했다. 뺘아아! 살구도 입에서 불꽃을 토해내며 용맹하게 신강헌에게 덤벼들었다. 대괴이답게 그 화력은 신강헌의 촛불에 못지 않게 라이터를 켠 수준은 되었다. “쬐그만 게 제법인데? 화력으로 이 신강헌과 대등하게 겨루다니! 하지만 불꽃남자 신강헌은 아무리 뜨거워도 물러서지 않는다!” 뺘아악! 뺙뺙! 불꽃과 불꽃이 허공에서 어우러졌고, 곧이어 신강헌의 손가락과 살구의 부리가 콕콕콕 부딪쳤다. 둘의 격렬한 전투를 지켜보던 황숙수와 김복자가 그 싸움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어휴, 놀고 자빠졌네.” “정신연령이 둘이 딱 맞나 봐요.” 한편 기무혁은 살구가 신강헌과 푸닥거리며 노는 상황을 틈타, 어미 금시조의 내단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후우우…….” 금시조의 내단에서 흘러나오는 순수한 화(火)기를 몸에 쬐는 것만으로도 오행신공의 성취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화기는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쌓아나가야겠어.’ 지금 기무혁의 단전에는 수(水)와 금(金)을 중심으로 한 내공이 가득 쌓여 있었다. 오행의 다른 세 가지 기운인 화(火), 목(木), 토(土)의 기운은 아직까지 미미한 수준. 기무혁은 그중 화기부터 끌어올릴 계획이었다. ‘당장 욕심을 내기보다는 내외공의 밸런스를 잃지 않는 선에서, 단전과 혈도가 넓어지고 튼튼해질 시간을 줘야 해.’ 기무혁은 장진명의 최후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무공의 성취에만 눈이 멀면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세상 그 어떤 무인보다 강해지고자 하는 욕심, 그로 인해서 자연히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다잡는 계기였다. ‘더는 혼자서 걷지 않기로 했으니까.’ 때마침 신강헌과 살구의 푸닥거리 같은 싸움도 끝나가는 중이었다. “우라아앗!” 뺘아아앗! 오행신공을 익힌 이후로, 기무혁의 눈에는 만물을 순환하는 오행의 기운이 보이기 시작했다. 화르륵……! 신강헌이 금시조인 살구와 놀면서 그 불꽃에 닿을 때마다, 살구의 기운이 신강헌의 몸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그럴수록 신강헌이 가진 화기가 강해지고 활성화되는 것도 보였다. ‘적양공이 원래 저렇게 성취가 빠른 무공인가?’ 처음에는 그런 오해를 했지만, 알고 보니 촛불만 한 불꽃을 피워내는 데도 몇 달씩 걸리는 것이 보통이라고 했다. 즉, 신강헌의 타고난 적성과 금시조의 불꽃이 만나면서 상식을 벗어난 성장 속도를 내는 중이었다. 덕분에 그 모습을 지켜보는 기무혁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최소한 내가 알던 염화도는 뛰어넘겠네.’ 신강헌도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느끼고 매일 살구와 아웅다웅하면서 기운을 다루는 연습을 하는 것일 터였다. 기무혁과 방식은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빠르고 안전하게 적양공의 성취를 높여나가는 중이었다. “살구가 아주 복덩이지, 살아 있는 영약이 따로 없다니까.” 뺘악? 기무혁의 흐뭇한 중얼거림에 살구가 흠칫하며 털을 바짝 세웠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신강헌이 손을 휙 뻗어서 살구를 낚아챘다. “으하하하! 오늘 서열전도 나의 승리다! 이제 인정하고 부리를 조아려라, 밤톨만 한 병아리야!” 뺘아아앗! 분하다는 듯 살구가 저항했지만, 신강헌은 승자의 권리로 패자의 부드러운 털을 마구 쓰다듬기 시작했다. “야, 또라이.” 그때 금시조 내단의 기운을 충분히 쬔 기무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목을 좌우로 풀었다. “어? 뭔데?” 완전히 지쳐서 드러누운 살구의 배를 복복복 긁어주던 신강헌이 히죽거리며 그를 돌아봤다. “쬐그만 녀석 괴롭히지 말고, 나랑도 서열전 한판 할까?” 물론 신강헌은 마다하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며 도를 뽑아 들었다. “흐흐. 너 후회할걸? 오늘의 신강헌은 컨디션 150퍼센트라고.” “겨우? 200퍼센트는 돼야 나랑 간신히 비벼볼 텐데.” “넌 오늘 진짜 뒤졌다!” 두 사람은 곧바로 검과 도를 들고 부딪쳤다. 실내이니만큼 내공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외공만으로도 사나운 검풍과 도풍이 사방으로 몰아쳤다. 채채채챙! 기무혁은 지금의 신강헌이 염화도 신강헌보다 훨씬 더 강해지길 바랐다. 호적수가 있어야 자신도 계속 자극을 받아 긴장을 놓지 않고 계속 발전할 수 있을 테니까. 같은 의미로 태극검문의 송준호도, 양하윤도 더 강해졌으면 싶었다. ‘그래야 전부 다 이겨 먹고 최고가 되는 재미가 있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는 한국무림의 고수들과도 모조리 싸워서 이기고 싶었다. 국내의 고수들을 모두 꺾고 최고가 되어야 당당히 세계무대로 진출할 수 있을 테니까. “……이게 청춘이지.” 흥이 오른 기무혁이 저도 모르게 씩 웃으며 중얼거린 혼잣말. 밖에서 일하고 있다가 급히 달려온 황숙수가 그 말을 듣고는 괴성을 질렀다. “청춘 같은 소리하네! 너희들 남의 가게에서 싸움박질하지 말라고! 딴 데 구해서 빨리 나가 이것들아-!” 김복자는 살구를 꼭 껴안고 뒤로 물러난 지 오래였다. “쟤들은 또 지랄이네. 살구야, 저런 애들한테 물들면 안 된다?” 뺘아아악! 그렇지 않아도 기무혁은 조만간 제대로 된 크루 아지트를 구할 생각이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81화. 그런 표정은 처음 한국무림이 안팎으로 어수선한 시기. 연일 터지는 스캔들과 폭로로 팔대문파가 몸살을 앓고, 무림맹은 여론을 등에 업고 전에 없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중이었지만. “무혁아- 아침 먹자.” “네.” 기무혁은 전부 남의 일이라는 듯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아침을 먹고, 그 후에는 집에서 개인 수련을 진행했다. 주로 무림맹주와의 십초비무를 복기하며 얻은 깨달음을 가다듬거나, 오행신공을 운기하면서 몸 내부를 관조했다. ‘절정을 넘어 초고수가 되려면…… 오행의 기를 전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일깨워야 해.’ 오행신공을 수련하면서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현재는 수(水)와 금(金)이 압도적으로 많고, 화(火)를 비롯해 목(木)과 토(土)가 뒤따르는 상황. 다섯 가지 기운의 균형을 맞추고, 그 기운을 동시에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뭔가 큰 변화가 생길 것 같은데.’ 그 후에는 한국십대고수라 불리는 초고수들과도 자웅을 겨뤄볼 만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꺾으면 한국제일인이 된다. “……벌써부터 심장이 간질거리네.” 물론 아직 이른 생각이기는 했지만, 기무혁에게는 언젠가 닿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후우우우- 운기조식을 마친 후에는 외국 고수들의 비무대회 영상이나 인터뷰 등을 보면서 간단히 외국어 공부를 했다. 그리고 가벼운 점심 식사. 충분히 소화를 시키고 예약해둔 대련장에 가서 몸을 풀며 최건을 기다렸다. “흐암- 제자야. 오늘도 일찍 왔구나.” “스승님. 또 밤새고 오셨어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라니까요.” “클클. 뒤가 구린 놈들을 마음껏 족치러 다니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최건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팔대문파와 수십 년 넘게 이어진 악연을 지닌 그였다. 저들의 잘못과 악행이 밝혀지고 여론의 뭇매를 맞을 때마다 어찌나 속이 시원한지, 요즘에는 두 시간만 자고 일어나도 가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공식적으로 복귀하실 생각은 없으신 거죠?” 그러나 기무혁이 무림맹으로 복귀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볼 때마다 최건은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지금처럼 지내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해.” 최건은 스스로 무림맹의 암검(暗劍)이 되기로 결심했다. 여전히 그는 역골공으로 얼굴을 바꾸거나 가면을 쓰고 다니며 암중에서 무림맹의 일을 도왔다. 검마 최건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아는 인물은 무림맹 내에서도 여필극과 노구천뿐이었고, 빙하신녀 또한 비밀을 지켜주기로 약속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 점심은 든든히 챙겨 먹고 왔느냐?” 최건이 대련장 한쪽에 놓인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무림맹의 일로 바쁜 와중에도 그는 어떻게든 짬을 내서 제자에게 검을 가르쳤다. 그 질문에 기무혁도 자신의 검을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전부 게워낼 각오도 하고 왔습니다.” “클클. 그렇다면 실망시키지 않아야겠구나.” 부드러웠던 두 사람의 눈매가 동시에 날카롭게 변하면서 닿으면 베일 듯한 기운이 흘렀다. 검파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곧바로 실전과 다름없는 비무가 시작되었다. 까가가강! 칼바람이 사방팔방으로 휘몰아쳤다. 서로의 검격이 번뜩일 때마다 옷자락이 거칠게 나부끼고, 대련장 바닥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섞여들었다. “깨달음을 통해 네 길이 바뀌었다고 한들, 예리함을 잃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최건은 기무혁을 몰아붙이며 훈수를 두었다. 그의 검이 호랑이의 발톱처럼 빠르고도 무겁게 연달아 기무혁의 급소를 노렸다. “큭! 저도 알고…… 있습니다.” 힘겹게 방어하며 대답하는 제자에게, 최건은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안다는 놈이 움직임에 왜 이리 겉멋이 들었어?” “그건…….” 쩌엉! 스승이 휘두른 강검에 기무혁이 크게 밀려났다. 최건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아래에서 휘익 솟구친 검이 최건의 소맷자락을 베었다. ‘요놈 봐라?’ 스승에게조차 지는 것이 싫다는 듯 이를 악물고 덤벼드는 제자. 그 태도가 대견해서 미소를 지을 뻔했지만, 최건은 애써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다. 쩌저저정! 두 사람의 검이 맹렬하게 수십 합을 부딪쳤다. 하지만 결코 대등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최건이 일방적으로 기무혁을 압도하는 싸움이었다. “절정고수가 되었다고 네가 천하제일인이라도 된 줄 알았더냐?” “결코 아닙니다……!” 비록 내공은 사용하지 않은 대련이었지만, 두 사람의 격차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최건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그게 아니면, 맹주님의 무공이라도 따라 하는 게냐? 검로가 정직하고 장중한 것이 꼭 맹주님의 주먹을 상대하는 것 같구나.” “그건…….” 당황한 기무혁이 허를 찔린 사람처럼 입을 여는 순간. 퍼억! 최건의 기습적인 발차기에 걷어차인 기무혁이 벽까지 날아가 부딪쳤다. “컥, 커헉!” 숨이 막히는지 호흡을 힘들어하는 제자에게 다가간 최건이 등을 두드리며 짓궂게 웃었다. “하기야 나라도 그랬을 게다. 맹주님이 워낙에 대단한 양반이어야지. 스승에게 배운 검법도 잊을 만큼 말이야. 안 그러냐?” “그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영향을 받았나 봐요.” 진심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자의 볼을 가볍게 꼬집은 최건이 껄껄 웃었다. 그러곤 어느새 따뜻해진 표정으로 조언을 해주었다. “무혁아. 너는 누군가를 따라 할 필요가 없는 재능이다. 때문에 굳이 내 검법을 익히라고 하지 않았다. 아까워서가 아니라 네가 가야 할 길을 돌아가게 할까 봐 염려가 되어서다.” “…….” 기무혁은 잠시 잊고 있었다. 검마 최건 또한 여필극에게 견줄 만한 초고수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 그에게서 몇 달이나 가르침을 받았으면서. 잠시 권왕이라는 거인의 무공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 사실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누군가를 롤모델로 삼고 추구하는 것.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도 정도가 지나치면 심마(心魔)가 될 수 있었다. 상대의 그림자에 갇혀서 평생 자신의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니까. “마음으로는 아는데, 저도 모르게 한동안 영향을 받았나 봅니다. 제자가 아직도 이렇게 많이 부족하네요.” 기무혁이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이자 최건도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님처럼 한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대가들은 그걸 지켜보는 후배들에게 영향을 아주 크게 미치지.” “제가 스승님의 검술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요?” “뭐? 하하하! 요놈이 은근히 아부를 잘한다니까!” 두 사람은 대련이 끝난 후에는 카메라로 촬영해둔 영상을 함께 보면서 복기했다. “여기서 네 판단이 늦었다. 내 검이 평소보다 1.5cm가 길어진 것을 바로 눈치챘어야지.” “처음엔 집 안에 검 한 자루 안 두셨던 분이 어디서 자꾸 검이 늘어나는 거예요?” “클클. 마침 정보통 그자가 비슷한 검을 몇 개 가지고 있기에 빌렸지. 이 스승이 소싯적에 모양은 똑같고 길이만 다른 검을 다섯 개씩 가지고 다녔다.” “제자한테 그런 수법까지 쓰는 건 조금 비겁한 게 아닌지…….”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데, 비겁한 게 어딨느냐?” 기무혁은 최건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바랐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웠다. 그의 검술뿐만 아니라 검을 다루는 태도, 무인으로서의 마음가짐, 다양한 경험에서 나오는 조언까지. 무림맹주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 기반에 스승인 최건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만의 무공을 완성하려면 아직도 멀었지만…….’ 무림맹주와의 십초비무에서 독보천하(獨步天下)라는 목표를 세웠다. 자신의 독문무공인 독고생사검(獨孤生死劍)은 앞으로 그 목표를 향해 거듭해 발전하고 변화해 나갈 터였다. 그 과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려서 밤잠을 설칠 것 같았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최건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두 사람이 대련장에서 두 시간을 함께 보낸 후였다. “……벌써요?” 최건이 아쉬워하는 제자의 어깨를 장난스레 때리며 말했다. “살살 좀 하자. 늙은 스승님 뼈 삭겠다.” 그는 성장세가 무섭도록 빠른 제자를 언제까지 가르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빨리 자신을 넘어서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그날이 온다면 세상 그 누구보다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기무혁이 짐을 정리하며 물었다. “스승님. 암루에는 요즘 거의 안 들르시죠?” “한동안은 가기 힘들 듯하구나. 강헌이 녀석도 좀 봐주고 싶은데……. 네가 한 번씩 데려오너라.” “또라이도 요즘 바쁜가 보더라고요. 그래도 조만간 끌고 올게요.” 대련장을 나선 두 사람이 잠시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최건이 괜히 하늘을 올려보며 물었다. “흠흠.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더냐? 너도 슬슬 소속을 정해야 할 텐데. 최근에는 팔대문파에 대한 반발로 무림맹 지원자도 늘었다고 하고…….” 그는 제자가 과거의 자신처럼 무림맹 소속이 되어 힘을 보태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은근히 드러냈다. ‘죄송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아요.’ 기무혁은 스승이 원하는 대답은 해줄 수 없었다. 어딘가 한 곳에 소속되면, 이후에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기에 불편한 점이 너무 많았으니까. 하지만 완전히 다른 길로 갈 생각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결정이 될 것 같아요. 곧 중요한 미팅을 하기로 했거든요.” “……미팅을?”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확정되면 말씀드리려고 했던 거라.” “아니다. 네 미래는 네가 결정하는 것이지. 헌데 어디와 미팅을 하려고…….” 지이이잉- 주머니 속 스마트폰의 진동에 두 사람이 동시에 멈칫했다. 기무혁이 폰을 꺼내서 확인하자 한 통의 문자가 와 있었다. [허가가 떨어질 것 같구나. 조만간 직접 만날 수 있겠느냐?] “마침 연락이 왔네요. 제가 기다리던 곳에서.” 기분 좋게 웃는 제자의 얼굴을 본 최건은 아무래도 좋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며칠 후. “아침부터 대체 어딜 가는 건데?” “좀 알려주면 안 되니?” 기찬호와 박지연은 영문도 모르고 아들을 따라나서는 중이었다. 두 사람 모두 전날 급하게 연차를 냈다. 평생 떼를 안 쓰던 아들이 정말 중요한 일이라며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뭘 하러 가는지는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지금까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사고 쳐서 벌 받으러 가는 건 아니에요. 좋은 일이에요, 좋은 일.” “……좋은 일? 정말?” “요즘에는 무림인만 관련되면 전부 흉흉한 소식이니까…….” “내 말이! 내 아들이 라이센스 시험 수석인데 자랑도 마음껏 못 한다니까!” 아내의 한숨에 기찬호가 분통이 터진다는 듯 인상을 팍팍 썼다. 잠시 후,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연남동의 한 4층짜리 빌딩의 주차장이었다. “내비에 찍힌 곳은 여기가 맞는데…….” 차에서 내린 기찬호가 방치된 듯한 건물을 올려보며 말했다. “아니, 여기는 자리도 이렇게 좋은데 왜 공실이지?” “최소한 몇십억은 하겠다.” 박지연도 빌딩과 그 주변을 살피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기무혁이 뒤에서 그들의 등을 밀며 말했다. “자자, 여기로 들어가면 돼요.” “……여길?” “빈 건물 아니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도착한 사람이 앉아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림맹의 원로 노구천이 몸을 일으키며 포권을 취했다. “무림맹에서 일하고 있는 노구천이라 합니다. 예전에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기억하실지요?” “어어? 기억하고 말고요! 세상에, 요즘 굉장히 바쁘실 텐데…….” “혹시 무혁이가 무슨 사고라도 쳤나요?” “나 참, 사고 친 거 아니라니까요.” 네 사람이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잠시 스몰토크를 주고받은 후, 노구천이 진지해진 얼굴로 본론을 꺼냈다. “두 분께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찬호와 박지연이 침을 삼키며 긴장하는 가운데, 노구천은 두 사람이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무림맹에서 기무혁 군에게 이 건물을 무상으로 임대해 주려고 합니다.” “예에?” “네?” “기간은 십 년. 원하시면 더 길게도 가능합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돌아보는 부모님에게, 기무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엄마 아빠 전부터 카페 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어?” “뭐?” “여기서 시작하면 어때요?” 기무혁은 부모님의 그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82화. 첫 일정은 당황으로 물들었던 두 사람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건물을 무상으로 임대해준다고? 무림맹이 너한테 왜?”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부모님의 차가운 반응에 기무혁은 당황했다.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특히나 평소 사람 좋은 인상의 기찬호가 표정을 차갑게 굳히자 아들과 비슷할 만큼 눈빛이 매서워졌다. 기찬호가 고개를 돌려 노구천을 바라봤다. “노구천 원로님. 방금 이야기, 자세히 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헌데 기뻐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요. 갑자기 이렇게 좋은 빌딩을 무상으로 임대해 주신다고 하니 부모로서 걱정이 될 수밖에 없죠.” 박지연이 단호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녀는 평소에도 강단이 있는 어머니였지만, 지금은 무림고수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저희는 아들 팔아서 호강할 생각 추호도 없습니다. 혹시라도 무혁이가 저희 때문에 무림맹에 빚을 지게 되는 거라면…… 차라리 없던 일로 하고 싶습니다.” 세 사람의 대화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자 당황한 기무혁이 끼어들었다. “엄마 아빠. 그게 아니라…….” “넌 조용히 있어.” 동시에 하나처럼 울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기무혁이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눈앞을 스치는 칼날도 무서워하지 않는 절정고수도, 부모님 앞에서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허허…….” 노구천은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작게 미소 지었다. 기찬호와 박지연, 두 사람은 무림의 고수를 앞에 두고도 기세에서 밀리지 않았다. 아무리 노구천이 기운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지만, 단련된 무인을 상대로 눈을 똑바로 마주치는 것조차 일반인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괜히 기무혁의 부모가 아니구나. 둘 다 무공을 익혔어도 충분히 제 몫을 하는 무인이 되었겠다.’ 기무혁은 훌륭한 체격뿐만이 아니라 올곧은 성정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노구천이 속으로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무혁 군이 무림맹에 빚을 지다니요? 오히려 저희가 해야 할 말입니다. 무림맹이 무혁 군에게 큰 신세를 졌습니다.” “예?” “아드님이 자세히 이야기를 하지 않은 모양이지요? 라이센스 시험에서 벌어진 사고의 배후가 장진명임을 밝혀내는 데 무혁 군이 아주 큰 역할을 했습니다.” 노구천은 무림맹이 지금처럼 팔대문파의 비리를 파헤치고 압박할 수 있도록 한 기무혁의 공로를 십분지 일 정도로 축소해서 말했다. 그럼에도 기찬호와 박지연의 표정이 놀라 뒤집어질 것처럼 변했음은 물론이었다. “무혁이 너…….” “왜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했어!” 기무혁은 민망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괜히 걱정하실까 봐 그랬죠.” “이 녀석이 진짜…….” “나중에 따로 얘기 좀 하자.” 부모님의 매서운 눈빛에 기무혁의 얼굴이 뚫리기 전에, 노구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즉, 이것은 무림맹에서 기무혁 군에게 주는 약소한 선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양도가 아닌 임대를 해드리게 되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 “…….” 전말을 알게 되고 생각이 많아졌는지 기찬호와 박지연 두 사람이 침묵했다. 노구천은 약소하다고 했지만, 평생 서민으로 살아온 두 사람에겐 선뜻 받아들일 만한 선물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노구천이 목소리를 낮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일종의 투자이기도 합니다.” “……투자요?” 두 사람의 표정이 다시 의심스럽게 변했지만, 노구천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드님은 장래에 대단한 고수가 될 겁니다. 충분히 한국제일을 노려볼 수 있을 만한 재능이고, 어쩌면 그 이상도 가능할지 모르지요.” 아들 칭찬에 약한 기찬호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체면을 차리며 말했다. “흠흠. 저희 아들을 높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왜 저희가 십 년만 임대를 제안했는지 아십니까? 십 년 후면 이런 빌딩은 아드님에겐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요.” “흐흐, 흐하하하……!”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기찬호가 헤벌쭉 웃음을 터트렸다. 박지연이 주책맞은 남편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이 눈매가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한층 편안해진 분위기 속에서 노구천이 쐐기를 박았다. “무림맹은 기무혁 군과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헌앙한 청년이 앞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무인으로 성장해 세계를 놀라게 해주었으면 합니다. 지금처럼 올곧은 마음을 지킨다면 소속은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진심이 담긴 노구천의 말에 설득이 되었는지, 두 사람의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다. 빙긋 웃은 노구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포권을 취했다. “정 부담스러우시다면 거절하셔도 되지만, 서류를 한번 읽어라도 보셨으면 합니다. 무상임대로 발생하는 세금 등의 문제도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그 밖에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그리고 가방에서 무상임대와 관련된 계약서류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저는 맹에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노구천이 떠난 후, 텅 빈 건물에는 세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 “후우- 갑자기 이게 대체…….” 비로소 긴장이 풀리는지 기찬호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이게 현실이 맞긴 한 거지?” 박지연도 건물을 둘러보며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조용히 있던 기무혁이 부모님을 향해 슬쩍 서류를 밀며 말했다. “밑져야 본전인데, 계약서라도 한번 읽어 볼까요?” “기무혁 너-!” “일단 혼부터 좀 나자!” 한바탕 애정 어린 잔소리가 쏟아진 후. 세 사람은 노구천이 남기고 간 계약서를 살펴보며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통장에 남은 돈이랑 퇴직금까지 합치면 충분할 것 같은데. 가장 큰 임대료가 안 들잖아.” “인테리어 비용도 많이 안 들겠어. 지금도 깔끔해서…….” “여보. 우리 정말 카페 차리는 거지?”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겠어?” 작은 카페를 차리는 것은 예전부터 기찬호와 박지연 두 사람의 꿈이었다. 커피와 사람을 좋아하는 남편과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내. 무림인을 꿈꾸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다 끝낸 후엔, 두 사람이 함께 작은 카페를 운영해 보자고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데 십 년 후에나 겨우 가능할까 상상했던 일이 성큼 현실로 다가왔다. “지하랑 2층부터는 어떡하지? 전부 카페로 만들면 우리가 감당을 못 할 것 같은데.” “재임대라도 주면 되지 않을까?” 부모님이 어린아이들처럼 들뜬 표정으로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모습. 팔짱을 끼고 잠시 흐뭇하게 지켜보던 기무혁이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다른 층은 제가 써야 할 것 같아요. 앞으로 필요한 일이 많을 것 같아서요.” “네가?”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들이 공짜로 얻어온 건물이었다. 당연히 하자는 대로 할 생각이었다. 다만 어떻게 사용할지는 궁금했다. 두 사람의 눈빛에서 그것을 읽었는지 기무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크루 아지트로 쓰려고요. 지하는 훈련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2층은 복자한테 임대를 내줄 생각이에요. 3층은 크루 사무실. 4층은 생각 안 해봤는데…… 오락실로 만들까요?” 스케일이 남다른 아들의 계획에 기찬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좋다! 1층은 엄마 아빠의 아지트, 4층은 우리 아들 아지트네!” “두 분한테는 특별히 평생 공짜로 이용하실 수 있게 해드릴게요.” “아들아. 그럼 탁구대도 하나만 설치하면 안 될까?” “좋은데요?” “하여간 남자들은…….” 가족들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번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이 건물을 활용해서 무엇을 할지 얘기하던 중, 기무혁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카페 이름은 생각해 보셨어요?” 아들의 질문에 기찬호와 박지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씨익 미소 지었다. “옛날부터 지어놨지. 카페 이름은 ‘나루’라고 할 거야.” “나루? 나루터의 그 나루요?” “응. 바쁜 삶에 지친 사람들이 오가다가 잠시 머무는 쉼터 같은 공간이면 좋겠다는 의미거든.” < cafe 나루 > 무림크루 청랑의 아지트 1층에 들어서게 될 카페의 이름이었다. * * * 아지트 건물을 구한 기무혁은 크루원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최건이었다. “요 괘씸한 녀석!” 미간을 찌푸린 모습으로 건물에 들어선 그는 제자를 보자마자 잔소리를 쏟아냈다. “나 몰래 무림맹이랑 미팅을 했었단 말이지? 그것도 모르고 괜히 걱정을 했으니…….” “노 원로님이 스승님한테는 꼭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깜짝 놀라는 얼굴을 보고 싶다면서요.” “이 망할 늙은이가…… 흥. 괜히 무림맹에 정 붙였다가 나처럼 코 꿰이지나 마라.” 말은 괜히 퉁명스럽게 했지만, 제자가 앞으로도 무림맹과 깊은 인연을 이어갈 거란 사실에 최건은 내심 기쁜 표정이었다. 두 번째로 아지트에 방문한 것은 살구과 황숙수였다. 뺘아악! 켄넬에서 뛰쳐나온 살구가 뽈뽈거리며 열심히 돌아다녔다. 지하의 암루와 달리 햇볕이 잘 드는 창문 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야, 우리 크루장 젊은 나이에 성공했네. 여기 목이 엄청나게 좋던데?” 황숙수는 건물을 둘러보며 연신 감탄했다. 적어도 몇십억은 하겠다느니, 앞으로 잘 부탁한다느니 아부를 덧붙이면서 손바닥을 간신배처럼 비볐다. 김복자도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여기가 진짜 우리 아지트라고? 너 구라 치는 거 아니지? 앗, 살구야아아-!” 뺘악! 뺙뺙뺙! 귀찮아하는 살구를 부둥부둥 껴안고 귀여워하던 김복자는 한 층을 공짜로 임대해 주겠다는 기무혁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진심이야? 여기다가 내 작업실을 차리라고?” “대신 불법시술은 더 이상 하지 않는 조건으로. 우리 부모님이 계신 곳에 위험한 인간들이 드나들게 할 수는 없으니까.” “…….” 기무혁은 김복자를 양지로 데리고 나오고 싶었다. 뒷세계에서 온갖 불법시술을 하며 돈을 버는 것이 아닌, 보다 안전하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갔으면 하고 바랐다. 잠시 말이 없던 김복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고민 좀 해볼게.” 그리고 신강헌이 가장 늦게 도착했다. “미친놈이…… 건물주?” 이 새끼가 돈까지 많아지면 어쩌라고…… 라고 중얼거리는 신강헌에게, 기무혁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기무혁은 아지트에 전부 모인 크루원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다들 앞으로 편하게 이곳을 이용했으면 좋겠어. 각자의 일을 하다가 쉬고 싶을 때 와도 좋고, 그냥 수다를 떨고 싶을 때 놀러 와도 좋아.” 잠시 말을 멈춘 기무혁은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춘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청랑은 무슨 대단한 뜻을 가지고 만든 조직은 아니야. 방금 말한 대로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다가…… 누구 하나가 어디서 얻어맞고 오면 다 같이 우르르 몰려가서 패주는? 그 정도 의리는 다들 있지?” 크루원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기무혁이 바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청랑을 팔대문파처럼 크게 키워볼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여기 있는 사람들과 함께, 가능하다면 조금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크루장! 그럼 우리 공식적인 일정은 따로 없어?” “음, 공식적인 첫 일정은…….” 황숙수의 질문에 기무혁이 눈을 빛내며 모두에게 물었다. “제주도로 단합대회 가실 분?” 왜 하필 제주도냐는 질문이 나왔지만, 기무혁은 적당히 둘러댔다. 그곳에 부모님을 죽게 만든 원흉이자 조만간 큰 사고를 일으킬 물건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83화. 불편하긴 해도 기무혁에게 전생의 삶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을 딱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그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답할 것이다. ‘부모님의 제주도 여행을 따라가지 않은 것.’ 무림인이 되고 싶다는 아들을 뒷바라지하느라 몇 년 동안 여행 한번 가지 못했던 부모님이었다. 그러나 ‘무림인 부적합 체질’로 판정받고 절망한 아들은 폐인이 되어 몇 달이나 방에 틀어박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온 기무혁의 눈치를 보며, 부모님이 조심스럽게 꺼냈던 제안. -기분전환도 할 겸 오랜만에 가족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하지만 당시 기무혁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도 힘겨웠으니까. -……죄송해요. 전 집에서 쉬고 있을 테니까 두 분이서 다녀오세요. -네가 안 가면 우리도 딱히……. -저 때문에 안 가면 죄책감만 들어요. 그러니까 두 분이서만 다녀오세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애써 돌려서 한 것이었다. 부모님이 그걸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그래. 이번에는 우리 둘이서 오붓하게 다녀올게. 하하, 신혼 때 생각나고 좋네! -엄마아빠 없어도 밥은 잘 챙겨 먹어야 한다. 알겠지?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까지도 아들만 걱정하시던 부모님의 얼굴. 그게 전생의 기무혁이 기억하는 그분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라이센스 시험도 끝났으니까 가서 며칠 머리 좀 식히고 오려고요.” 기무혁은 부모님에게 친구들과 함께 제주도에 숙소를 잡아 낮에는 수련을 하고, 저녁에는 바비큐 파티를 하며 지친 몸과 마음을 쉬고 올 거라고 둘러댔다. 그 말을 들은 기찬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요새 제주도 여행 생각이 났는데. 카페 오픈 좀 미루고 엄마아빠도 같이 갈까?” “에이, 두 분은 퇴사하기 전에 인수인계도 해야 하고 카페 준비하기에도 바쁘잖아요.” 기무혁은 잠시 불효자가 되기로 했다. 부모님에겐 죄송하지만, 전생에 부모님을 잃은 곳에 다시 데려갈 수는 없었으니까. “바쁘긴 한데…… 그래도 밤바다 보면서 소주 한잔하면 딱인데, 그치 여보?” 기찬호가 아쉬움을 담아 얘기하자 한참 카페 인테리어를 찾아보던 박지연은 쿨하게 대꾸했다. “어쩔 수 없지 뭐. 대신 올 때 꼭 오메기떡 사가지고 와. 알았지?” “당신은 제주도 안 가고 싶어?” “애들끼리 놀러 가겠다는데, 눈치가 왜 이렇게 없으실까?” “……그래. 젊은 애들끼리 재밌게 다녀와라.” 결국 삐친 아버지와 카페 오픈에나 신경 쓰라고 아버지를 타박하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기무혁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부모님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 기무혁은 전생의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만든 원흉을 떠올렸다. 요검 환몽(幻夢). 자신을 쥔 사람에게 환각을 보이게 해서 끊임없이 피를 부르는 기물. 환몽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제주도에 나타나, 무인들을 홀려 미쳐버리게 만들었다. 이백 명이 넘는 사망자와 그 몇 배의 부상자가 발생한 끔찍한 혈사로, 무고하게 휘말린 희생자들 중에는 기무혁의 부모님도 있었다. ‘놈의 이동 경로는 알고 있으니 찾는 건 어렵지 않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기무혁은 환몽과 관련된 자료를 수없이 찾아서 읽었다. 곧 나타날 환몽의 위치를 예상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문제는 그 요검이 지닌 기운이 무인, 특히 검객들을 끌어들인다는 것. ‘당시 제주도에 있던 검객들 대부분이 본능적으로 환몽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지.’ 환몽에 홀렸던 이들 대부분이 이류 이하의 무인이었으나, 그중에는 높은 명성을 지닌 고수들도 있었다. 기무혁은 그중 떠오르는 한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탈백검 구현우.” 혈사를 막으려고 나섰다가 환몽에 홀려서 수많은 사람들을 해치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후 자결한 비운의 검객. 기무혁의 부모님을 비롯해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해서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인물이기도 했다. 어쩌면 제주도에서 그와 싸워야 할지도 몰랐다. ‘나라면…… 환몽을 다룰 수 있을까?’ 절정고수조차 이지를 상실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환몽은 괴이(怪異)-재해(災害)-신병이기(神兵利器)로 분류되었다. 기무혁도 검객인 이상 신병이기에 욕심이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환몽은 애초에 주인이 없었던 검이니, 그가 조기에 발견한다면 충분히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물론 섣부른 자신감만 가지고 도전할 생각은 없었다. “준비는 확실하게 하고 가야지.” 기무혁은 구현우에 대한 검색을 잠시 멈추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선배님. 지금 바쁘세요?] 그리고 다시 이것저것 검색해 보려는데,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답장이 왔다. [나 안 바빠. 무슨 일인데?] [전에 도와주신 것도 있고 해서, 제가 밥이라도 한번 사고 싶어서요. 오늘이나 내일 시간 어떠세요?] 제주도에 가기 전에, 기무혁은 요검을 다루는 방법을 알 만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 볼 생각이었다. [난 오늘도 가능해.] 이번에는 5초 만에 답장이 왔다. 짧고 간결한 대답이었지만, 기무혁은 메시지 너머의 상대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눈을 빛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직도 포기를 안 했나 보네.” 피식 웃은 기무혁은 천천히 문자를 적어나갔다. [그럼 오늘 저녁 드실래요? 사실 뭐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것도 있는ㄷ ] 지이이잉- 문장을 다 완성하기도 전에 상대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기무혁은 일부러 몇 번의 진동이 지나간 다음 전화를 받았다. “예. 선배님.” -후배한테 밥 얻어먹기는 좀 그렇고, 차라리 우리 문파로 올래? 간단하게 구경도 시켜줄게. “……저야 좋죠. 그럼 오늘 저녁 6시까지 찾아가면 될까요?” -더 빨리 와도 돼. 난 벌써부터 배고파지려고 하니까. 그녀의 넉살에 기무혁이 피식 웃었다. 괜히 대문파 스카웃팀에서 팀장까지 달았던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금방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그럼 이따가 뵐게요, 선배님.” 통화를 끝낸 기무혁의 스마트폰에는 <창천검문 부연하 선배님>이라고 표시돼 있었다. 기무혁은 그 이름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요검에 대해서는 여기만큼 잘 아는 곳도 없지.” 창천검문(蒼天劍門). 그의 전생에서 환몽 혈사를 종결시킨 문파였다. * * * 오래전, 사람들은 괴이(怪異)들로부터 생명을 위협받았다. 귀신(鬼神). 영물(靈物). 재해(災害). 원념에서 탄생한 귀신과 사나운 영물은 사람을 해치기 일쑤였으며, 재해(災害)에는 저항조차 못 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러자 무고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러 나선 여덟 명의 협객이 있었다. 그들은 수련을 통해 기(氣)를 자유자재로 다루니 무시무시한 괴이들과도 능히 맞설 수 있었다. 여덟 협객은 수많은 인명을 구해 사람들의 존경과 숭앙을 받았으니, 바로 팔대문파의 개파조사들이었다. 그 이후로 대괴이(對怪異) 억제력은 지금까지 팔대문파의 의무이자 전통으로 이어져오고 있었다. “비록 시간이 많이 흘러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했지만, 창천검문은 검으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를 지금도 가장 먼저 가르쳐.” 창천빌딩 정문 앞에서 만난 부연하가 개파조사의 동상을 올려보며 말했다. “어때? 우리 개파조사님 멋지지?” 한 자루 검을 허리에 찬 남자의 동상이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선이 뚜렷한 미남의 이목구비에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띤 모습. 창천검문의 개파조사이자 초대 장문인 남천. 기무혁은 역사에 협객으로 이름을 남긴 무인의 동상을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멋지네요. 비록 그 후인들은 지금 온갖 욕을 먹고 있지만…….” “야, 우리 개파조사님 앞에서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 기무혁의 농담에 부연하가 눈을 흘겼다. 하지만 기분 나빠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민망한 얼굴로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괜찮은 사람이라니까.’ 팔대문파 중에서도 창천검문은 초극문과 함께 스캔들이 가장 적게 터진 문파였다. 검에 관해서는 항상 태극검문과 최고의 자리를 다투고, 최근 몇십 년 동안은 자타공인 한국제일검문으로 인정받은 문파. 최근까지 팔대문파라는 하나의 거대한 울타리 안에 있었지만, 일월문의 봉문으로 인해 동맹 자체가 헐거워진 상황이었다. ‘이번 기회로 몇몇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자정작용을 하길.’ 기무혁이 생각하기에 창천검문은 그러한 일말의 기대를 품어도 될만한 곳이었다. “그래서, 네가 먼저 연락을 주고 어쩐 일이야?” 창천검문의 빌딩은 한 자루의 검처럼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빌딩의 출입문을 통과해 잠시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말씀드렸잖아요. 지난번에 도와주신 것에 대한 감사 인사 겸해서 밥 한번 사고 싶었다고요.” 라이센스 시험장에서 부연하가 함께 장진명을 막아 세우지 않았다면, 기무혁과 신강헌은 크게 다쳤을 터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감사 인사로 밥을 먹자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내가 그걸 믿을 것 같아?” 당연히 부연하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는 기무혁을 창천검문으로 영입하기 위해서 몇 달이나 공을 들였다. 때문에 나름대로 기무혁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부했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고? 나한테 부탁할 거라든가, 궁금한 거라든가 말이야.” “이래서 눈치 빠른 사람들은…….” 기무혁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곤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궁금한 게 있어서 연락드린 것도 맞아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일단 만났으니까 밥부터 먹고 얘기하자.” 부연하는 용건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고도 생글생글 웃었다. 기무혁이 그런 부연하의 옆모습을 조금 의아하다는 듯 바라봤다. ‘문파 곳곳을 보여주면서 자랑거리를 잔뜩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날 영입하는 걸 포기했나?’ 차라리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조금 부담감을 던 기무혁이 안심할 때였다. 부연하가 깜빡했다며 기무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런데 혹시 식사에 한 명 더 불러도 될까? 우리 문파에 너를 꼭 만나고 싶어하는 팬이 한 명 있거든.” 팬? 기무혁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별로 상관없는데…….” 그렇지 않아도 창천검문에 들어서자마자 온갖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호기심, 경계심, 호승심을 애써 억누르는 무인들의 시선. ‘하나같이 날카롭군. 괜히 한국제일검문이 아니야.’ 적당한 긴장감에 기무혁의 입꼬리도 슬쩍 올라갔다. 잠시 후 만날 팬이라는 사람도 이왕이면 강한 검객이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허허.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구나.” 식당에 도착하자 직원이 나와 두 사람을 룸으로 안내했다. 그 안에는 창천검문의 장문인, 창천검노 나일천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 팬이라던 사람이…….” “응. 우리 외할아버지야.” 뒤늦게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무혁은 부연하를 슬쩍 째려봤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못 느낀 것처럼 웃고만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대단한 결의가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 포기할 줄 알았어? 넌 오늘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될 거야!’ 부연하의 뜨거운 시선을 피한 기무혁이 나일천에게 포권을 취했다. “무림말학 기무혁이 창천검문의 장문인께 인사드립니다.” “딱딱하게 그럴 것 없다. 거기 편히 앉거라. 연하 너도 앉고.” “…….” 순식간에 불편해진 자리.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던 기무혁은 나일천이 옆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놓은 검을 보았다. 우우웅- 스스로 묘한 기의 파동을 퍼트리는 검을 보면서 퍼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요검?’ 불편하긴 해도 장소는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84화. 뒤에 누가…… 창천검노(蒼天劍老) 나일천. 팔대문파 장문인들 중 최연장자로 한국무림의 살아있는 역사나 마찬가지인 인물. 겉으로는 머리가 희끗한 칠십 대 정도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흔에 가까운 고령이었다. ‘그리고 전성기에는 한국제일검의 칭호를 달았던 검의 달인.’ 지금이야 정정하게 나이 든 유순한 인상의 노인처럼 보이지만, 기무혁은 상대의 겉모습에 속지 않았다. 한 자루 검을 쥐고 여필극과 함께 장진명을 상대하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장문인께서는 공사가 다망하신 걸로 아는데…….” 기무혁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팔대문파 장문인은 몇 달 전에 약속을 잡아도 볼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바쁜 존재였다. 당일 즉흥적으로 약속을 잡은 부연하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 그가 있는 것이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나일천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요즘에는 밖에 나가봤자 욕만 먹지 않으냐? 그래서 일정을 다 취소하고 할 일 없이 문파에서 밥이나 축내는 중이다.” “…….” 나일천을 밥이나 축내게 만드는 데 일조한 기무혁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혹시 내가 불편하더냐?” “아니요. 괜찮습니다.” 기무혁이 고개를 저었다. 나일천은 부연하보다 훨씬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창천검문을 찾아온 목적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기도 했다. ‘요검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창천검노보다 잘 아는 사람도 드물 테니까.’ 지금도 나일천이 테이블에 비스듬히 기대어 놓은 검에서 반투명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우웅- ‘창천(蒼天)’이 음각으로 새겨진 묵빛 검집은 고풍스러우면서도 기품이 흘렀고, 검파에 달린 금색 수실은 바람도 없는데 저절로 살랑살랑 흔들렸다. ‘저런 게 바로 신병이기인가?’ 전생에는 보검과 인연이 없었던 기무혁의 눈에도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검이었다. 그 시선을 느낀 나일천이 애병의 검집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흘흘. 누가 검객 아니랄까 봐 이 요물에 시선을 빼앗기는구나. 창천검문의 장문인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남천검이다. 개파조사께서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으셨지.” “그럼 수백 년도 더 되었단 말인가요?” “대단하지? 검집과 손잡이는 여러 번 바꾸었지만, 검날은 여전히 요즘의 보검들과 비교해도 예기와 단단함이 뒤지지 않는단다.” “아…….” 감탄사와 함께 기무혁이 남천검을 바라보자, 나일천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욕심이 나느냐? 이 녀석은 본문의 장문인이 되어야 가질 수 있는데?” “…….” “농이다. 뭘 그리 표정을 굳힐 것까지야.” 기무혁의 난감한 얼굴을 본 나일천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도 탈이다. 그냥 밥이나 맛있게 먹자꾸나.” “……알겠습니다.”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본 듯한 말에 기무혁이 멋쩍게 미소 지었다. 잠시 후, 식당의 서버들이 음식을 차례차례 내오기 시작했다. 나일천이 빙긋 웃으며 음식을 권했다. “많이 먹거라. 본문이 검술만큼이나 자신 있어 하는 것이 바로 밥이니라.” “그냥 하시는 말씀이 아냐. 나도 팔대문파에 있는 식당은 다 가봤지만, 본문만큼 맛과 영양까지 신경 쓰는 곳은 없거든.” 부연하가 자부심을 가지고 설명을 덧붙였다. 세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로 부연하가 대화를 주도하며 창천검문의 역사와 이념, 향후 목표에 대해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지는 않았다. “부모님이 카페를 여신다고? 주소 알려주면 종종 마시러 갈게.” “네가 맹주님 초식 받아내던 영상을 다시 봤는데…….” “그때 화상 입은 친구는 괜찮아? 이름이 신강헌이었나?” 그녀는 기무혁의 최근 관심사와 무공, 인간관계 등을 궁금해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영입을 위해서라고 해도 인간적인 호감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역시 좋은 사람이야.’ 반면 나일천은 정말 밥만 먹으러 나온 사람처럼 식사에 집중했다. “음. 오늘도 맛이 좋구나.” 그 모습만 보고 있으면 소탈한 노인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기무혁은 나일천의 눈빛이 한 번씩 자신에게 스칠 때마다 솜털이 슬그머니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조용히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압박이군.’ 식사가 끝날 때까지 대부분 부연하와만 대화를 나누었지만, 기무혁의 신경은 오히려 나일천에게 쏠리고 있었다. 동시에 고민이 깊어졌다. 창천검문에 입문할 것처럼 굴면서 이들에게 원하는 것을 얻어낼 것인가? ‘입문을 고민하는 것처럼만 보여도 요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기무혁은 스스로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았다. 첫 라이센스 시험에서 압도적인 모습으로 절정고수로 인정받은 스무 살의 후기지수. 지금이라면 팔대문파 중 어디를 가더라도 두 팔 벌려서 환영할 것이다. 그 가치를 가지고 협상을 하면 원하는 것은 대부분 얻어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러지 말자.’ 하지만 기무혁은 이내 그런 생각을 털어버렸다. 상대가 사파나 뒷세계의 인간이었다면 속이고 등쳐먹는 것에 거리낌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줄곧 자신을 호의로 대하며 진심으로 영입을 제안해 준 부연하를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요검에 대해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고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부연하 선배님, 그리고 장문인. 오늘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디저트까지 다 먹은 후, 기무혁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창천검문은 정말 좋은 문파인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이 여러 번 흔들릴 정도로요. 하지만…….” 아무래도 창천검문에 입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정중하게 거절을 말하려고 할 때였다. “연하야. 포기하자꾸나.” “네?” 냅킨으로 입을 닦은 나일천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늘 보니 확실히 알겠다. 창천검문에 들어올 녀석이 아니다. 아니, 팔대문파 중 어디도 감당을 못 할 게야.” “…….” 할아버지의 단호한 말에도 아쉬움이 크게 남아 보이는 외손녀에게, 나일천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창천검문 체면이 있지. 퇴짜 맞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물러나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 않겠느냐?” 부연하는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이었으나,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표정을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욕심이 과했던 모양이에요. 무혁아, 내가 지금까지 너무 부담 줬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실하게 정리가 되니 오히려 분위기가 더욱 편해졌다. “자자, 식사하는 동안 우리가 실컷 이야기 했으니, 이제 네 용건도 들어보자꾸나.” 잠시 후 나온 차를 마시며, 나일천이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기무혁에게 물었다. “창천검문에 입문할 생각도 없고, 보아하니 연하를 꼬시려는 마음도 없는 것 같은데. 본문에는 왜 찾아온 게냐?” “……할아버지. 이제 겨우 스무 살짜리 애한테 무슨 이상한 농담을 하시는 거예요?” “아차차, 우리 연하가 연하는 안 좋아하지!” 미리 생각해 둔 회심의 유머였는지 나일천이 껄껄껄 소리 내 웃었다. “진짜 못 말려…….” 부연하는 자기가 다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가렸고, 기무혁은 황당해서 피식피식 웃었다. 어쨌거나 나일천의 아재 개그를 넘어선 할배 개그 덕분에 화제를 꺼내기 편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은 요검을 다루는 방법이 궁금해서요.” 요검이라는 단어에 두 사람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부연하가 걱정스럽다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갑자기 요검을?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저도 이제 제대로 된 검을 구하고 싶은데…… 운이 좋으면 요검을 구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미리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제주도에 희대의 요검이 나타날 거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기에, 기무혁은 최근에 흥미가 생겼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완전히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검객들 대부분은 검에 술법을 거는 등 다양하게 커스텀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일부러 괴이가 깃든 요검을 찾아다니는 자들도 있었다. ‘복자도 무기에 술법 부여를 할 수 있지만…….’ 무기에 기(氣)를 불어넣어 특별한 무기로 만드는 것. 그것만큼은 현대기술로도 어쩌지 못하는 분야였다. 때문에 술법사를 비롯해 기를 다룰 줄 아는 장인은 여전히 무인들에게 수요가 많았다. 하지만 요검은 그런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위험한 물건이었다. “요검을 다루는 방법이라……. 잘 찾아오긴 했구나. 팔대문파 중에서도 그 분야는 우리 창천검문이 제일이지.” 나일천이 손을 뻗어서 남천검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우웅- 기분이 좋은 듯 파동을 퍼트리는 남천검. 나일천은 남천검을 무릎 위에 반듯하게 놓고 그 위에 두 손을 올렸다.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겠지. 단, 그 전에 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느냐?” 검이 손에 닿은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소탈한 노인처럼 보였던 나일천은 어느새 초고수다운 기백을 뿜어내고 있었다.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을 직감한 기무혁이 자세를 바르게 하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너는 팔대문파가 한국무림의 악이라고 생각하느냐?” “…….” 똑바로 마주 본 노인의 눈빛에는 깊은 현기가 어려 있었다. 감언이설로 속여 넘기거나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기무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의 팔대문파는 필요악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긴장한 채 듣고 있던 부연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반면 나일천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허면 무림맹은 절대적인 선이더냐?” “…….” 많은 의미를 내포한 질문이었다. 때문에 기무혁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나일천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현 맹주인 여필극은 분명 협객이다. 하지만 그 전대 맹주는 어땠을 것 같으냐? 그리고 여필극 다음의 맹주는? 장진명은 처음부터 악인이었을까?” 지금의 기무혁은 스무 살이지만, 전생에는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닳고 닳은 낭인이었다. 때문에 나일천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선악이란 어디에 기준을 두고 선을 긋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 편협한 시선으로 섣불리 세상을 판단하지 마라. 언젠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해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르는 순간이 올 테니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신 건가요?” 자신의 속마음을 읽은 듯한 말에 나일천이 놀란 눈으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허어. 그저 고집 센 어린아이라고 생각했건만…….” “고집은 셉니다. 하지만 사고가 유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무혁은 나일천의 말에 충분히 공감하고 그 뜻을 이해했다. 갓 무림에 나온 후배를 위한 까마득한 선배 검객의 조언이라고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생각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그래도 지금 사태에 이르기까지 팔대문파가 잘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장문인께서도 그걸 아시니까 찔려서 물어보신 거 아닐까요?” “뭐……. 허허허허허!” 맹랑한 대꾸에 나일천이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눈가에 눈물이 찔끔 맺힐 정도로 한참이나 웃어젖히던 그가 간신히 진정하며 말했다. “흐흐, 그래 맞다. 찔려서 물어본 것이지. 그래,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음……. 지금부터 잘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하하하-! 또 한 번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한국무림에서 배분으로는 누구도 따질 자가 없는 노검객은 눈앞에 있는 젊은 검객이 퍽 마음에 들었다. “네 대답이 나를 즐겁게 했으니 요검을 다루는 기본적인 방법을 알려주마.” 나일천이 남천검을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살짝 검을 뽑았다. 스르릉. 일부만 모습을 드러낸 검신이 서슬 퍼런 예기를 뿜어냈다. 수백 년이나 되었다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매끄러운 검신에 기무혁이 감탄했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요검은 아무나 제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괴이를 보는 영안이 트이지 않으면 어렵지.” 무공의 재능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창천검문에도 나일천을 포함해 영안이 트인 무인은 열 명도 되지 않았다. 훈련을 통해 강제로 트이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외부인에게 그 비법을 알려줄 수는 없는 데다가 최소 오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네가 영안이 얼마나 트여 있는지 시험해 본 후에…… 음?” 나일천은 설명을 하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기무혁이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등 뒤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이 한눈을 팔아?’ 미간을 살짝 구긴 나일천이 기무혁을 야단쳤다. “어른이 말하는데 집중을 안 하고 딴 데를 보는 게냐?” “……뒤에 누가 있는데요.” “있기는 누가 있어? 근처에 아무도 못 오게 했는데.” 하지만 기무혁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은은하게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반투명한 남자가 팔짱을 끼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말이다. “뭐……?” 나일천에게 그 모습을 설명하자 노인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지금…… 개파조사님이 보인다는 게냐?” 창천검문 장문인의 당황한 중얼거림에, 그 뒤에 있는 귀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85화. 나도 너 못지않거든 “할아버지!” 부연하의 낮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에 나일천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 그는 곧 크게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방금 내뱉은 말은 창천검문의 중요한 비밀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나도 늙으니 노망이 드나 보군.’ 그만큼 놀랄 일이었다. 자신도 전대 장문인에게 남천검을 물려받고 십 년이 지나서야 개파조사님의 형상을 제대로 볼 수 있었으니까. 뒤를 돌아보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개파조사님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것은 비밀로 해주겠느냐?” 나일천의 진지한 목소리에 기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기무혁이 생각해도 이건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될 일이었다. 나일천이 검을 뽑자 나타난 푸르스름한 저 귀신이 창천검문의 개파조사라니. 대체 무슨 한이 남아서 성불하지 못하고 자신의 검에 들러붙었단 말인가? “……역시 오해를 하는 것 같구나. 네 눈에 보이는 개파조사님의 모습은 실제 그분의 영혼이 아니다.” “아니라고요? 하지만 방금…….” “검에 서린 영(靈)이 생전의 개파조사님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부를 뿐이란다. 오랫동안 그렇게 부르다 보니 나도 버릇이 되었구나.” 허탈하게 웃은 나일천이 손가락으로 검신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개파조사님의 기운이 오랫동안 스며들면서 검에 영성이 맺혔고, 그 후로도 같은 무공을 익힌 후인들이 신물로 애지중지 여겼지. 마치 개파조사님을 대하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형태를 갖춘 남천검의 영이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은 불과 백 년도 되지 않았느니라.” 나일천이 내 말이 틀렸느냐는 듯 돌아보자 남천검의 영이 흥- 하고 콧방귀를 끼었다. 확실히 그 모습은 고고한 무인의 영혼이라기보다는 사춘기의 소년 같았다. “사람들이 알면 너처럼 오해할까 싶어 비밀로 하고 있었다. 개파조사의 명예에 누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나일천의 설명을 들으며 기무혁은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주인의 기를 통해서 요검의 영성은 점점 강해진다는 것. ‘환몽도 주인을 바꿔가면서 점점 영성이 강해졌을 수도 있겠군.’ 물론 그 방식은 남천검처럼 정순한 기를 오랫동안 흡수한 것이 아니라, 검을 쥔 무인들을 미치게 만들어 광기와 피를 흡수하는 방식이었겠지만 말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기무혁에게, 나일천이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쩔 수 없구나. 본문의 중대한 비밀을 알아버렸으니 입문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수밖에.” “……농담이시죠?” “절반쯤 진심인데, 어떻게 안 되겠느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부연하가 끼어들었다. “그만하세요, 할아버지. 아까는 저보고 퇴짜 맞기 전에 포기하라면서요?” 기무혁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나일천이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포기했던 마음도 바뀌려고 할 만큼 아쉬워서 그런다. 고작 스무 살에 영안까지 깨운 절정고수가 아니냐.” 어쨌든 약속했으니 요검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나일천이 조금은 심통이 난 표정으로 기무혁에게 말했다. “첫 번째는 영안으로 요검의 영을 보는 것이다. 지금 네 눈에 남천검의 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이느냐?” 기무혁은 나일천의 뒤에 서 있는 남천검의 영을 눈에 보이는 대로 설명했다. “동상에서 본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아, 옷차림이 다르네요. 동상에서 본 것은 장포였는데, 영은 가벼운 무복 차림이에요. 동상보다는 코가 조금 낮은 것 같고요. 오른쪽 눈 아래에 저건 점인가? 흐릿해서 확실하진 않지만요.” “이 무슨…….” 나일천이 괴물을 보는 듯한 얼굴로 기무혁을 바라보았고, 부연하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게까지 자세히 보인다고?” “선배는 안 보이세요?” “……푸르스름한 안개의 형태가 사람과 비슷하다 정도?” “아, 방금 선배를 보고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는데요.” “제가 아니라 얘가 이상한 거거든요?” 부연하는 푸르스름하게만 보이는 남천의 영에게 항의하듯 투덜거렸다. 창천검문 내에서 손에 꼽히는 재능을 지닌 그녀였다. 다음 대 장문인으로 확실시될 만큼 기대를 받는 몸이었지만, 문파의 신물에게 모자란 취급을 받으니 울컥한 듯했다. “발끈해 봤자 너만 손해다. 이 할애비도 처음에는 고생 좀 했지.” 손녀를 향해 웃어준 나일천이 다시 기무혁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네 영안은 기이할 정도로 크게 트여 있구나. 뛰어난 술법사나 무당들도 너처럼 자세히 보지는 못했거늘…….” 뒷말을 아끼는 나일천의 말에 놀라움과 염려가 섞여 있었기에, 기무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안 좋은 건가요?” “무엇이든 과하면 독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혹 네 영안에 대해서 짐작 가는 바가 있느냐? 조상 중에 대단한 술법사나 무당이 있다든지…….” 기무혁은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을 떠올리며 침묵했다. ‘내가 회귀한 것과 연관이 있을까?’ 전생의 기무혁은 죽음이 임박한 순간, 만박자의 술법에 의해서 과거로 회귀했다. 어쩌면 그때 알 수 없는 영향을 받아 영안이 트이게 된 것은 아닐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만일 그렇다고 해도 회귀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딱히 짐작 가는 바는 없습니다. 저도 이유를 모르겠네요.” “흐음. 그렇구나.” 애초에 뚜렷한 대답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는지, 고개를 끄덕인 나일천이 말을 이었다. “요검을 다루는 두 번째 방법은 검을 제대로 쥐는 것이다.” “네?” “무슨 소리인가 싶지? 일단 해 보거라.” 묘한 미소를 지은 나일천이 검을 납검한 후 기무혁에게 밀어주었다. 조심스럽게 검을 받아든 기무혁이 손잡이를 가볍게 말아쥔 순간. “……!” 손에서 검을 놓아버린 기무혁이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남천검을 바라봤다. 나일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놀랐지? 처음 쥐면 다들 비슷한 반응이다. 헌데 보기보다 엄살이 심하구나. 검을 놓칠 정도는 아닌데….” “더 쥐고 있다간 손바닥에 화상을 입을 것 같아서 놓았는데, 끝까지 쥐고 있어야 했던 건가요?” 장난스럽게 웃던 나일천의 얼굴이 기무혁의 질문에 굳어버렸다. “……화상이라니? 정전기가 찌릿한 정도가 아니고?” 기무혁은 대답 대신 자신의 손바닥을 뒤집어 보여주었다. 그 짧은 순간만 검을 쥐었음에도 불에라도 덴 것처럼 벌겋게 익어 있었다. 깜짝 놀란 부연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화상 약을 가져올게.” “어, 어찌 이런……. 미안하구나.” 당황한 표정으로 기무혁의 손바닥을 살피던 나일천이 심각해진 목소리로 권유했다. “너는 요검을 쥐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나일천은 그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해 주었다. 요검에는 괴이가 깃들어 있지만, 괴이 스스로는 자신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 즉, 요검이 가진 힘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통로가 필요하다. “바로 우리와 같은 무인이 그 통로 역할을 한다. 허나 처음에는 요검의 지닌 힘의 일 할도 끌어내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지.” 요검을 오래 곁에 두고, 부단한 연습을 통해서 조금씩 그 한계를 늘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칠 할 정도를 끌어내는 것이 한계였다. 그조차도 최소 신검합일의 경지를 이룬 초고수들의 기준이었다. “헌데 너는 시작부터 남천검의 힘을 절반 가까이 끌어냈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겠느냐?” 제대로 단련되지 않은 통로가 활짝 열려 있다는 의미. 요검의 힘이 언제 폭주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남천검과 같은 정파의 신병이기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허나 사악한 요검이라도 쥐게 된다면 정신이 그대로 잡아먹힐 수도 있다.” “…….” 환몽 혈사를 떠오르게 하는 섬뜩한 경고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고수들은 주인만큼이나 유명한 신병이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기무혁의 우상인 리차드 한도 마찬가지였다. ‘리차드 한도 신검을 길들이려다가 몇 번이나 심마에 빠질 뻔했다지.’ 기무혁은 언젠가 그와 대등해지고 싶었고, 그를 뛰어넘고 싶었다. “……다르게 말하면.” 잠시 말이 없던 기무혁은 부연하가 화상 연고를 발라준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말했다. “훈련을 하면 요검의 힘을 100% 완벽하게 끌어낼 수 있다는 말도 되지 않을까요?” 결코 포기하지 않을 무인의 눈빛. 나일천은 후기지수들의 그런 모습을 좋아했지만, 이번만큼은 냉정할 정도로 차갑게 대꾸했다. “내 경고를 듣지 못한 게냐? 아니면 주변에서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주니 금세 오만해져서 그런 것이냐?” “장문인이 해주신 조언을 무시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내가 요검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겠다고 하면?” 나일천의 싸늘한 물음에 기무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이만큼 알려주신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더 이상 창천검문에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포기하겠다는 뜻이더냐?” 기무혁은 대답 대신 씨익 웃어 보였다. 그 표정에서 결코 꺾이지 않을 고집을 느낀 나일천이 탄식했다. “정녕 검에 미친 종자로구나.”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사실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기무혁이 정말로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태연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노려보던 나일천이 속이 답답한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후우…….” 젊고 찬란한 재능이 훗날 요검 때문에 화를 입게 된다면 꿈자리가 무척이나 뒤숭숭할 것 같았으니까. 결국, 까마득한 후배에게 자신이 가진 밑천을 털어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매일 이 시간에 찾아오너라.” “……그 말씀은?” “하루에 한 시간씩 남천검을 쥘 수 있도록 훈련시켜 주마. 이 고집불통 같은 녀석아!” 나일천의 호통에, 내심 그 말을 기대했던 기무혁이 활짝 웃었다. * * * 그날 이후, 기무혁은 매일 창천검문을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문도들의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장문인께 가르침을 받는다던데?’ ‘부연하 대주와도 매일 만난다고…….’ ‘조만간 입문하는 거 아냐?’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고 온갖 수군거림이 들려왔지만, 기무혁은 굳이 해명할 생각은 없었다. ‘가르침을 받는 게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니까.’ 다만 검술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었을 뿐이다. 매일 같은 시간, 기무혁은 나일천이 보는 앞에서 남천검을 쥐었다. 치이이익……! 검을 쥐면 손바닥이 익을 것 같은 열기가 전해졌다. 열기에 익숙해지려고 하면 동상에 걸릴 것 같은 냉기가 전해졌고, 손바닥을 예리한 칼로 저미는 듯한 통증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온갖 통증에도 기무혁은 조용히 이를 악물 뿐,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나일천이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독종이구나, 독종이야.” “……오히려 좋은데요? 이 훈련이 끝나면 어떤 상황에서도 검을 놓진 않을 것 같습니다…… 끄윽.” “정신이나 집중해라. 괜히 영을 도발해서 더 아프게 만들지 말고.” 기무혁은 검을 쥠과 동시에 눈앞에 나타난 푸르스름한 남천검의 영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제 좀 허락해주면 안 될까?’ 그는 마음속으로 남천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녀석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일천은 이미 통로가 이어져 있으니 속마음도 전해질 것이라고 했다. “첫 번째로 익숙해지는 것, 두 번째는 영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만 되어도 제대로 검을 쥘 수 있을 것이다.” 나일천은 요검을 힘으로 억누르려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선택 중 하나라고 경고했다. “신병이기를 힘으로 제압하려면 적어도 초고수는 되어야 한다. 그마저도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억누르는 것에 불과하지. 그렇게 다루는 요검은 철검만도 못하다. 그러니 힘을 쓰지 말고 이해하거라.” 남천검의 현 주인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장담컨대 남천검을 제대로 쥘 수 있다면, 너는 그 어떤 요검에게도 잡아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조언을 얻으며 기무혁은 매일같이 남천검을 쥐고, 말을 걸고, 녀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한 가지 확실하게 이해한 것이 있었다. ‘너, 진짜 고집이 세구나. 자존심도 장난 아니게 강하고.’ 그 말에 남천검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이제야 알았냐는 듯 팔짱을 끼고 우쭐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치기어린 소년 같은 그 모습에 기무혁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나도 너 못지않거든.’ 기무혁은 스스로를 과신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가 요검을 다루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곧 제주도로 떠나야 하거든. 그러니까 이제 슬슬 결판을 내자고.’ 주머니에서 미리 가져온 붕대를 꺼낸 기무혁이 검을 쥔 손에 둘둘 감기 시작했다. “너…… 지금 뭐하는 게냐!” 나일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무혁은 붕대로 손과 검파를 단단히 묶어서 조였다. 치이이이이익-! 끔찍한 열기, 얼어붙을 듯한 냉기, 베일 듯한 통증이 동시에 느껴졌지만 기무혁은 오히려 웃었다. 86화. 나랑 같이 갈래? 기무혁의 무모한 행동에 나일천이 일갈을 터트렸다. “당장 멈추지 못하겠느냐!” 대체 무슨 생각으로 검에 손을 묶었단 말인가! 나일천은 강제로라도 둘을 떼어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성큼 기무혁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곧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우우웅-! 남천검의 영이 손을 들어 그를 가로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치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 조금 싸늘한 표정으로 기무혁을 바라보면서. ‘저 아이의 도전을 받아주겠다고?’ 나일천과는 거의 반백 년을 함께 해온 애병이었다. 하는 행동과 표정만 봐도 남천검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다치게 하지는 않을게.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며, 남천검은 나일천에게 뒤로 물러나라는 의미로 손을 휘휘 저었다. “음? 갑자기 통증이…….” 검을 쥔 손의 통증이 순간 약해진 듯, 기무혁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나일천이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좋아할 것 없다. 남천검이 너를 시험해 볼 작정으로 잠시 봐주는 것일 뿐이니.” 허공으로 둥실 떠오른 남천검의 영이 기무혁을 오만하게 내려보면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시험보다는 도발하는 것 같은데요?” 나일천도 그 모습을 보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전대 장문인으로부터 처음 남천검을 넘겨받았을 때, 자신에게 했던 행동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검술을 한번 펼쳐보라는 뜻이다. 네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은 모양이구나.” 기무혁이 미간을 슬쩍 좁히자 나일천이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는 듯 클클 웃었다. 오십 년 전, 젊었던 자신도 처음에는 저런 반응이었으니까. “자존심 상할 것 없다. 남천검은 대대로 본문의 장문인들에게만 허락된 신병이기다. 눈이 얼마나 높겠느냐?” “……확실히 마냥 자존심이 상할 만한 일은 아니네요.” 기무혁도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나일천만 해도 한국제일검의 칭호를 받았던 초고수였으며, 역대 창천검문의 장문인들 역시 모두 시대를 풍미한 검의 달인들이었다. ‘오히려 좋지.’ 눈높이가 최고 수준의 검객들에게 맞춰져 있는 관객 앞에서, 기무혁은 자신의 독문검법인 독고생사검을 펼칠 기회를 얻었다. 스윽……. 자세를 낮추고 검을 내려쥐었다. 맹수가 먹잇감을 덮치기 직전의 자세처럼 전신의 근육을 적당히 긴장시켰다. 한번 지켜보겠다는 듯, 남천검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마치 검무 콩쿨의 심사위원과도 같은 태도에, 기무혁도 능청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다. “참가번호 1번 기무혁. 독문무공은 독고생사검입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곧장 바닥을 밟고 뛰어오른 기무혁이 남천검의 영 앞에서 칼을 휘둘렀다. 사아아악! 검 끝이 눈썹을 스칠 정도로 가까운데도 남천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했다. 기무혁의 손에 들린 검이 바로 자신의 본체였으니까. 흥. 오히려 코웃음을 치는 모습이 겨우 이 정도냐고 무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바닥에 내려선 기무혁은 그런 반응에도 개의치 않았다. “계속하겠습니다.” 애초에 상대를 도발할 생각으로 휘두른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검술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으니까. 갈지(之)자로 보법을 밟으며 상대의 눈을 어지럽게 현혹하다가 전갈이 독침을 쏘듯 순식간에 검을 찔러넣었다. 슈욱-! 날카로운 검 끝이 허공의 일점을 꿰뚫었다. 그 후 곧바로 검을 회수하며 몸을 세차게 회전시켰다. 촤라라락! 팔방으로 뻗어나가는 검기.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치명적인 공격이 날아올 법한 위치를 선점하는 방어초식이었다. ……흥! 남천검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기무혁의 검술을 지켜봤다. 하지만 흥에 겨운 듯 허공에서 까닥까딱 움직이는 발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여 기무혁의 검로를 살피고,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기도 했다. ‘매일 창천검문의 검법만 펼치다 다른 검술을 경험하니까 재밌지?’ 기무혁이 마음 속으로 말을 걸자 남천검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마치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하지만 이내 다시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웃기지 말라는 듯, 창천검법이야말로 최고의 검법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네 고고한 자존심도 이해가 돼.’ 창천검문의 개파조사 남천은 절세고수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무인이었다. 그 절세검객이 자신의 이름을 붙일 정도로 아낀 애병. 주인의 영성이 스며들어 신병이기가 된 존재인 만큼 자존심도 드높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립지 않아?’ 때문에 주인과 같은 검법을 익힌 후인들 외에는 자신을 허락하지 않은 검. 창천검문의 신물로서 오랫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온 존재. 그것이 남천검의 정체성이었다. 허나 기무혁이 지난 며칠간 남천검을 쥐어보고 관찰하면서 느낀 것은 달랐다. ‘주인과 함께 괴이에 맞서 싸우던 날들, 너와 대등하게 맞서던 요검들,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쉴 새 없이 싸워야만 했던 시절 말이야.’ 기무혁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남천검의 영이 움찔했다. 마음 속으로 건네는 말이었지만, 기무혁의 들뜬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으니까. 남천검은 신병이기이자 창천검문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팔대문파의 장문인쯤 되면 실제로 적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일은 오히려 적었다. 나일천에게 장진명을 상대할 때가 십여 년 만에 전력으로 힘을 쓴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무혁은 깨달았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강하게 적과 부딪치고, 몸에서 불티를 튀며 주인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때가 그리운 거지?’ 검(劍)으로서 남천은 꽤 오랫동안 지루하고 고독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벌거숭이 같은 어린 검객이 나타나 요검을 다루고 싶다고 무작정 덤벼드니, 오래된 추억이 떠오른 건 아니었을까? 요검을 이해해 보라는 나일천의 조언에, 기무혁이 고민 끝에 내놓은 결론이었다. 그리고 불쑥 덧붙여진 한마디. “나랑 같이 갈래?”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고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말에 모두가 놀랐다. “……뭬야?” 기무혁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나일천의 매서운 시선을 애써 모른 척했다. ……애송이. 그 순간 기무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으로 남천검이 먼저 자신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남천의 눈빛을 닮은 애송이. 네 검은 어설퍼. 실력도 한참 부족해.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들리는 말투였다. 하지만 기무혁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맞아. 지금은 그렇지. 내 검법은 아직 미완성이니까.’ 독고생사검은 두 명의 검객에게 영향을 받아 기무혁이 스스로 창안한 무공이었다. 세계제일인 리차드 한. 그리고 검마 최건. 그들에 비하면 기무혁은 스스로 아직 한참 부족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앞으로의 가능성이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때문에 남천검에게 호언장담할 수 있었다. ‘훗날 세계제일인이 될 검객의 풋풋한 모습이니까 지금 잘 봐둬. 나중엔 보고 싶어도 못 보게 될 테니까.’ 잘난 척하는 애송이! 퉁명스러운 말투에 피식 웃은 기무혁은 그때부터 남천검의 존재마저 잊고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응?’ 그러나 신들린 듯 검을 휘두르던 기무혁은 어느 순간, 남천검의 영이 몹시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느꼈다. 잘 봐, 애송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기무혁의 눈에는 전보다 영의 형태가 훨씬 선명해진 듯했다. 마치 실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검?’ 남천검의 오른손에 한 자루의 검이 들려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마치 창천검문의 개파조사가 현현한 것만 같았다. 한 수, 보여줄게 남천검의 영이 창천검법의 초식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아악- 한 자루의 검이 고아하게 허공을 갈랐다. 드넓은 하늘을 유영하듯 자유롭게 노니는 몸짓이었다. 그러나 부드럽던 움직임에 갑자기 뇌전이 실리기 시작했다. 쿠르릉……! 창천검문의 검객들이 보았다면 경악했을 만한 일이었다. “개파조사님의 검법!” 눈을 부릅뜬 나일천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수백 년도 더 이전, 창천검문의 개파조사 남천이 괴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창안한 검법이었다. “창천항마검(蒼天降魔劍). 조사께서 사악한 괴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창안하신 검법이거늘…….” 훗날 대괴이의 숫자가 줄어들고 위협적인 놈들이 점차 사라지면서, 괴이보다는 사람을 상대하기에 적합하게 다듬어지고 변화한 것이 지금의 창천검법이었다. 그 과정에서 검법에 서려있던 항마(降魔)의 기운 또한 대부분 잃어버렸다. 기무혁이 시선은 남천검에게 뚫어질 듯 고정한 채로 나일천에게 물었다. “그럼 저게 수백 년 전의 검법이라는 건가요?” “천운이 따른 줄 알거라. 나조차 여러 번 부탁했지만 한 번밖에 본 적 없는 것이니.”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 듯, 남천검의 영은 무심한 표정으로 옛 주인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창공을 가르는 일검은 거대한 괴조를 가르는 듯한 환영을 일으켰고, 검날을 옆으로 힘껏 쳐내는 동작은 거인의 주먹을 막아내는 것처럼 보였다. 고대의 괴이들,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적들과 대적하던 무인의 뒷모습이 뇌리에 새겨지는 듯했다. “절세고수의 검법…….” 기무혁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홀린 듯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머릿속에서 벼락이 내리치며 검법을 발전시킬 영감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 그러다 더 이상 근질거림을 참지 못하고 남천검에게 덤벼들었다. 타닷!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수백 년 전 절세고수의 검을 받아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자신에게 달려오는 기무혁을 돌아본 남천검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역시 너 건방져! 그리고 그 손에 들린 검이 기무혁을 향해 휘둘러졌다. 단 한 번의 휘두름. 그저 내려쳐지는 궤적임에도 불구하고, 기무혁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두 검이 교차한 직후, 남천검의 영이 푸스스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때? 한껏 자신만만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남천검의 질문. 기무혁은 자신의 가슴에 꽂힌 검의 환영을 바라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굉장한 검법이야. 제대로 느낄 수도 없었어.” 압도적인 패배였다. 하지만 기무혁은 희열에 들뜬 표정으로 답했다. 또다시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얻었으니까. 킥킥킥- 즐거워하는 웃음소리를 남기고 남천검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무혁은 손에 쥔 남천검의 손잡이가 편안하게 착 감기는 것을 느꼈다. “이 무슨, 남천검의 인정을 받다니…….”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나일천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창천검문의 신물이자 장문인의 상징이 바로 남천검이었다. ‘그저 요검을 다루는 방법이나 조금 가르쳐 주려 했거늘.’ 그런 남천검이 방금 전 외인인 기무혁에게 개파조사의 검법을 보여주고, 직접 검을 겨루기까지 했다. 개파조사께서 무공을 한 수 지도해준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 녀석을 대체 어째야 한단 말인가?’ 창천검문의 장문인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사문의 밑천을 몽땅 털어가려는 도둑을 바라봤다. 87화. 확실히 그게 더 좋네요 남천검과 일검을 교환한 후. “…….” 기무혁은 배부른 고양이 같은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일천이 그 모습을 복잡한 심정으로 지켜봤다. ‘남천검의 인정은 본래 창천검문의 후계자에게만 허락된 것이거늘.’ 그가 아흔의 나이까지 창천검문의 장문인 직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 사람들이 욕심 많고 음흉한 늙은이라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말 못 할 진짜 사정이 있어서였다. ‘저 까탈스러운 검이 후계자를 좀처럼 인정 해주질 않아 이 늙은이가 아직도 고생 중인 줄도 모르고…….’ 나일천은 여전히 기무혁의 손에 쥐어져 있는 애병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본래 그는 일흔을 넘기기 전에 장문인 직을 다음 대에 넘겨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남천검은 그가 후계자로 점찍은 무인들을 전부 인정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손에 쥐는 것만 허락해 주었을 뿐, 검의 영조차 제대로 본 녀석이 없었다. 하나같이 무공에 대한 재능은 출중했는데도 말이다. 결국 몇 년 전에 부연하가 창천검문에 입문할 때까지, 누구도 남천검에게 인정받지 못하면서 나일천은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다. ‘내가 또 그것 때문에 얼마나 억울했는데!’ 나일천이 혈연에게 장문직을 넘겨주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고 수군대던 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부연하가 다음대 장문인으로 확실시되는 것은 나일천의 외손녀여서가 아니라, 출중한 재능과 더불어 남천검의 영을 볼 수 있는 영안이 트여있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저 아이는…….’ 기무혁은 남천검의 영을 자신만큼이나 선명하게 보는 것은 물론이고, 남천검이 스스로 개파조사님의 검술까지 보여주게 만들었다.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기무혁을 창천검문으로 데려와 후계자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 나일천이 심각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연하에게는 미안하지만…….” 창천검문의 미래와 영광을 위해서라면, 후계자를 바꾸는 것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 눈을 뜬 기무혁이 씨익 웃으며 남천검을 내려보았다. “남천검이 저한테 한번 증명해 보라고 하네요.” “즈, 증명?” 설마 검의 주인이 될 자격을 증명하라는 말인가! 몇십 년 전부터 애타게 기다렸던 순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나일천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기무혁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다른 검법으로는 절대로 첫 번째 주인보다 강해지진 못할 테니까, 창천검법을 익히라고 권유하더라고요.” “흠흠! 우리 개파조사님이 참으로 대단한 분이시지.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느냐?” 나일천이 기대감을 숨기지 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일천을 마주 본 기무혁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언젠가 그분을 넘어설 거라고 하니까, 증명해 보라던데요?” “뭐라? 누굴 넘어서?” 나일천이 가늘어진 눈으로 이 당돌한 어린 검객을 째려봤다. * * * 창천항마검을 보고 얻은 깨달음을 갈무리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있는 동안, 기무혁은 남천검과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눴다. ……애송이, 창천검법을 익혀. 그럼 널 다음 주인으로 삼아줄게. 자존심이 강한 창천검문의 신물이 기무혁에게 먼저 제안했다. 은근히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듯한 말투. 하지만 기무혁은 창천검법을 익힐 생각도, 한 문파에 매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어.’ 남천검의 주인이 될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쉽지 않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처음부터 기무혁은 제주도에 가서 환몽을 얻을 계획이었다. 남천검은 굉장한 신병이기지만, 기무혁에게는 자신의 검술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환몽이 더 필요했다. ……같이 가자며? 남천검의 고독과 지루함을 이해하게 되면서 불쑥 내뱉었던 말. 하지만 기무혁도 남천검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문파의 신물이 전장에서 험하게 휘둘러질 수는 없는 법이니까. 설령 기무혁이 창천검문에 입문한다고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음에 또 보러 올게. 지금보다 더 강해져서 말이야. 그리고 언젠가는 네 첫 번째 주인도 넘어설 거야.’ 기무혁의 에두른 거절에 남천검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칫……. 너, 분명 나중에 후회한다. 어쩐지 시무룩한 표정이 떠오르는 말투. 남천검은 더 이상 기무혁에게 입문을 권하지 않았다. 창천검법을 익히지 않은 무인은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남천검의 자존심이자 개파조사 남천의 의지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자신을 즐겁게 해준 보답으로 상 정도는 줄 수 있었다. ……남천을 닮은 바보 애송이. 그럼 증명해 봐. 네가 얼마나 높게 올라갈 수 있는지 지켜볼 테니까. 우웅- 오래전 수많은 괴이들을 베었던 항마의 기운이, 손잡이를 통해 기무혁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건……?’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거야. 가지고 있다 필요할 때 꺼내 써. 남천검은 나일천에게는 비밀로 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고마워. 잊지 않을게.’ 기무혁은 손바닥을 통해서 은은하게 스며드는 항마의 기운을 소중히 갈무리하며, 비밀을 굳게 지키기로 다짐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창천검문의 밑천을 너무 많이 털어먹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지금. 기무혁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남천검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장문인. 검은 돌려드리겠습니다.” “누가 보면 내가 네 검을 빼앗는 줄 알겠다. 얼른 내놓거라.” “…….” “이놈이? 어서 안 놔?” 기무혁이 손바닥에 아교라도 바른 것처럼 남천검을 붙들고 있자, 나일천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휙휙 잡아당겼다. “오냐. 당장 계약서를 가져오마. 이건 명백히 창천검문에 입문하고 싶다는 뜻이렷다?” “……놓을게요, 놓겠습니다.” 검을 붙잡고 실랑이하던 기무혁이 손에서 겨우 남천검을 놓는 순간. [너라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남천검의 영과는 다른 존재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누구지?’ 기무혁은 장문인의 손으로 돌아간 남천검을 한참이나 바라봤지만, 목소리는 두 번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 * * 나일천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기무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문인께 감사드립니다. 지난 며칠간 귀중한 시간을 내어주신 덕분에,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기무혁이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며 포권을 취하자, 나일천은 질린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더는 빼먹을 것도 없으니 다시는 찾아오지 말거라.” 물론 농담이었다. 나일천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열정으로 가득한 후기지수와의 대화는 그와 같은 노고수에게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이 아이가 본문에 입문했다면…… 연하와 함께 창천검문을 팔대문파 중 으뜸으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여전히 아쉬움이 남지만, 나일천은 더 이상은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깨끗이 단념하기로 했다. 그러자 기무혁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종종 들르겠습니다.” “흘흘. 하여간 말을 안 듣는 녀석이구나. 평소보다 늦었으니 이만 가 보거라.” “……마지막으로 남천검 한 번만 만져 봐도 될까요?” “왜? 그대로 들고 튀려고?” 겨우 허락을 받아서 남천검을 쥐어봤지만, 더 이상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영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에 또 올게.’ 마음속으로 검에게 인사를 남긴 기무혁이 장문인의 거처를 나섰다. 요검을 다루는 훈련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부연하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 들었어.” “뭘요?” 그녀는 기무혁을 보자마자 미간을 과장되게 구기며 추궁했다. “남천검을 들고 도망치려고 했다며?” “세상에.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났어요?” “이미 천라지망 쫙 깔아놨으니까 꿈도 꾸지 마.” 기무혁이 아쉽다는 듯 농담을 건네자 부연하가 맞장구를 치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는 창천검문의 정문 밖까지 직접 기무혁을 배웅했다. 한동안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부연하는 기무혁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은 다른 일로 바빠서 못 봤지만…… 지난 며칠간 너 때문에 나도 엄청나게 자극을 받았어.” “저 때문에요?” “응. 좋은 의미로.” 부연하는 차기 장문인 자리가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고 내심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신보다 영안이 트여 있었던 기무혁이 남천검을 쥐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기무혁이 마음을 바꿔 창천검문에 입문한다면…… 하는 가정도 해보았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 뭐야. 나도 내일부터 남천검에게 정식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할 거야. 다음에 볼 땐 내 손에 들려있을지도 모른다?” 눈빛이 달라진 부연하의 자신만만한 말에 기무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한테 남천검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 까다로운 남천검도 부연하라면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무혁은 지난 며칠간 매일 드나들었던 창천검문을 나서며 생각했다. ‘이제야 확실하게 기억이 나.’ 이십여 년 후 천마신교가 발호해 세상을 뒤집어 놓았을 때, 창천검문의 무인들은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서 검을 들고 맞섰다. 그리고 천마신교는 그들을 본보기로 삼기 위해 한 명도 살려두지 않고 멸문시켰다. 나일천과 부연하도 분명 그 자리에 있었을 터였다. ‘이번에는 막는다.’ 며칠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무혁은 창천검문에서 많은 배움을 얻었다. 요검을 다루는 연습은 환몽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고, 절세고수의 검법을 견식한 것은 기연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창천검문은 도울 만한 가치가 있는 문파였다. “부연하 선배님.” 정문 앞에 잠시 멈춰선 기무혁이 창천검문의 개파조사 남천의 동상을 올려보며 말했다. “응?” “저는 창천검문에 입문할 생각은 없어요. 그 대신 동맹은 어때요?” “……동맹? 뭐, 동맹?” 눈을 몇 번 깜빡인 부연하는 뒤늦게 그 말뜻을 이해하고 입을 벌렸다. “너 설마 문파를 만들 생각이야?” 기무혁은 여전히 남천의 동상을 바라보면서 뺨을 긁적였다. “거창하게 문파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조직을 만들었거든요.” 청랑은 제대로 된 무림조직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어설펐다. 하지만 그 구성원들의 능력만큼은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었다. 기무혁이 부연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저희랑 동맹은 창천검문 입장에서도 손해는 아닐걸요?” “뭐라고? 참나…….” 부연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최근에 팔대문파로 한데 묶여서 욕을 먹고 있다지만, 창천검문은 한국에서 검문으로 첫 손에 꼽히는 대문파였다. 그런데 우리와 동맹을 해도 손해가 아닐 거라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정말 손해가 아닐지도 모르지.’ 기무혁의 재능과 발전 속도라면 10년 후에는 한국제일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계산과는 상관없었다. 저 당당한 얼굴에서 다른 목적이 아니라, 창천검문에 대한 호의가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딱딱하게 동맹은 무슨 동맹이야.” 부연하가 기무혁이 내민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그냥 친구로 하자. 동맹은 목적이 같고 서로가 필요해서 하는 거잖아. 하지만 친구는 그냥 돕는 거니까.” “친구……. 확실히 그게 더 좋네요.” 기무혁도 씨익 웃으며 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 * * 그리고 며칠 후, 기무혁은 청랑의 크루원들과 함께 제주도에 도착했다. 88화. 보람이 있네 3월의 선선한 초봄 날씨.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야자수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관광객들을 반겼다. 많은 인파가 제주도에 도착했지만, 그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일행이 있었다. “신강헌 더 오렌지! 제주 아일랜드를 접수하기 위해 지금 강림-!” 머리를 주황색으로 물들인 신강헌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요란한 색상의 하와이안 셔츠는 우람한 근육을 감추지 못했고, 청바지는 두꺼운 허벅지 때문에 터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거기에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으니 제주도에 처음 온 외국인처럼 보였다. “어휴, 어딜 내놔도 창피한 저 관종.” 김복자가 신강헌과 거리를 두면서 공항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블랙 원피스에 챙이 넓은 검은색 플로피 햇을 쓰고 있었다. 신강헌과 마찬가지로 선글라스를 꼈는데, 모델처럼 늘씬한 몸과 등 뒤로 늘어진 붉은 머리카락 때문에 연예인처럼 보였다. “……저 사람은 무슨 아이돌인가?” “남자는 운동선수 같은데?” “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무림인 아니야?” 두 사람의 등장은 자연스럽게 이목을 집중시켰다. 김복자는 아닌 척해도 사람들의 관심을 은근히 즐기는 듯,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뺙! 그때 김복자의 숄더백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살구가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보이자 이내 겁이 났는지, 다시 몸을 쏙 집어넣었다. “지금은 사람들 눈에 안 보이게 해놨으니까 괜찮아.” 뺙……. 복자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속삭이자 그제야 다시 고개를 내밀고 햇볕을 쬐는 살구였다. 마지막으로 기무혁이 일행의 캐리어를 전부 실은 수하물 카트를 밀면서 나왔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탓이었다. 한껏 들뜬 둘의 모습을 본 기무혁이 피식피식 웃었다. “애들도 아니고 왜 이렇게 흥분했어?” 작정하고 여행객처럼 입고 온 둘과 달리, 기무혁은 선글라스만 꼈을 뿐 심플한 푸른색 후드티에 흰 반바지 차림이었다. 하지만 옷걸이가 워낙 좋아서 모델처럼 보였다. 기무혁은 카트 위에 실린 검 케이스를 힐긋 바라봤다. ‘라이센스를 따두니까 이럴 때 좋네.’ 낭인이었던 전생에는 번거로운 절차를 걸쳐 위탁수하물로 부치거나 그때그때 현지에서 무기를 조달해야 했다. 하지만 절정고수 라이센스를 획득한 지금, 기무혁과 신강헌은 무림인 전용 게이트를 통과해 쉽게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으하하하! 기다려라, 제주 아일랜드의 무인들이여! 전부 이 신강헌 님 앞에 무릎 꿇게 해주마!” 텐션이 지나치게 높아진 신강헌이 감당 안 된다는 듯, 슬금슬금 뒷걸음질 친 김복자가 기무혁에게 속삭였다. “쟨 그냥 여기에 버려두고 우리끼리 먼저 갈까?” “또라이 저거, 친구들이랑 여행 온 게 처음이라서 그럴걸?” “뭐? 에이…….” 기무혁이 설마 그렇겠냐는 표정의 김복자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너도 처음 아니야?” “뭐, 뭐, 뭐라고? 아니거든! 내가 뭐, 너네 아니면 친구 하나 없는 줄 알아?” 예상했던 것보다 더 당황해하는 반응에 기무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면 말고. 난 처음이라 너네도 처음인 줄 알았지.” “…….” “하여간 이왕 온 김에 실컷 즐기고 가자.” 잠시 말문이 막힌 김복자의 어깨를 툭툭 친 기무혁이 신강헌에게 다가가서 뒤통수를 후려쳤다. “크악! 왜 또 지랄인데?” “적당히 해라. 고릴라 같은 덩치가 이러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란 거 모르냐?” “뭔 개소리야. 나처럼 무해하게 생긴 사람이 어딨다고. 저기요, 혹시 사진 한 장만……. 왜 도망가세요?” 자신의 반경 십 미터 안에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신강헌이 당황했고, 그 모습을 본 김복자가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둘 다 신났네, 신났어.’ 또래들과의 첫 여행에 신난 둘만큼은 아니지만, 기무혁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랜만의 여행이었으니까. 전생에는 무공에만 미쳐서 제대로 놀러 다녀 본 게 손에 꼽힐 정도였고, 해외에도 일로만 다녀왔을 뿐이었다. ‘회귀한 후에는 항상 바빴지.’ 이번 제주도 여행은 환몽을 찾는 것이 주된 목적이지만, 겸사겸사 관광도 즐길 생각이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하늘을 올려보며 기무혁이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날씨 좋~네.” 제주도가 안전해진 후에는 부모님이랑 스승님과도 꼭 함께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김복자가 두 사람을 불렀다. “잠깐 이쪽으로 와봐!” 또래 친구들과의 첫 여행이라는 사실을 들켜서 부끄러워했던 것도 잠시,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김복자는 하고 싶었던 것들을 다 하기로 마음먹었다. “자, 여기 거울 봐봐. 기념사진 찍게.” 야자수를 배경으로 세 사람은 전신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흐으읍!” 신강헌이 우람한 이두근을 힘껏 쥐어짜는 포즈를 취했고, 기무혁은 바지에 두 손을 넣은 채 한쪽 입꼬리만 슬며시 올렸다. “자, 찍는다?” 김복자는 두 사람 사이에 서서 다리를 X자로 꼬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투명화 술법을 잠시 푼 살구가 그녀의 어깨로 냉큼 올라왔다. 뺙! 조금씩 자세를 바꿔가면서 수십 장의 사진을 찍은 뒤에야 김복자가 만족할 만한 사진이 나왔다. 꽤나 잘 나온 기념사진을 본 기무혁이 말했다. “이건 나중에 인쇄해서 크루 사무실에 액자로 걸어놓자.” “황숙수 아저씨랑 선생님이 섭섭해하는 거 아냐?” “더 찍으면 되지. 다 같이도 찍고, 둘이나 셋씩 모여서도 찍고, 그렇게 크루원들 사진으로 사무실 벽을 가득 채울 거야.” 기무혁의 향후 계획을 알게 된 신강헌과 김복자는 왠지 실실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평범한 가족과 친구를 가져보지 못한 두 사람에게, 기무혁의 저런 이야기는 가슴을 간질거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후, 오글거려……. 뭘 그렇게까지 해?” “콩쿨 나가서 받은 상들 가져다가 거기 장식해도 되냐?” “상 받은 건 또라이 너보다 내가 훨씬 많을걸?” “아오! 새끼가 꼭 초를 쳐요!”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은 여행의 시작. 세 사람은 공항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렌트카 업체로 향했다. 선루프가 달린 중형 SUV차량에 캐리어를 모두 싣고, 셋 중에 유일하게 면허가 있는 김복자가 운전석에 앉았다. “……운전 할 줄 아는 거 맞지?” 두 남자는 잔뜩 긴장해 운전대를 두 손으로 꽉 붙잡는 김복자를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분명 지난밤까지만 해도 운전은 자기한테 맡기라고 큰소리를 탕탕 쳤으니까. 안타깝게도 신강헌은 면허가 없었고, 기무혁은 운전에 자신이 있었지만 회귀 후에 바빠서 면허를 따지 못했다. “할 줄 안다니까. 작년에 면허 따서 다 기억한다고. 그, 근데 이거 의자 어떻게 움직여? 아 됐다!” 그러나 시트를 너무 바짝 당겨서 핸들에 거의 몸이 닿을 것 같은 김복자의 모습에, 두 남자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너 솔직히 말해봐. 면허 따고 나서 운전 얼마나 해봤어?” 옆자리에 탄 기무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하자, 김복자가 당당하게 손가락 하나를 폈다. 그러자 뒷자리에 탄 신강헌이 더욱 불안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하, 한 달은 했다는 뜻이지? 일주일은 아니지? 양심이 있으면 한 번은 아닐 거야…….” 조수석에 앉은 기무혁의 도움을 받아 겨우 시트위치를 제대로 조절한 김복자가 자신 있게 시동을 켜면서 말했다. “뭔 소리야? 지금이 면허 따고 처음이라고.” “……야, 그건 좀.” “난 내린다! 한 명은 살아야 김복자가 범인이라고 말할 거 아냐!” 그러나 신강헌이 오두방정을 떨며 차문을 열고 내리기 전에, 김복자가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며 동시에 엑셀을 밟았다. 부아아앙! “으어어어어!” “살살! 살살 밟으라고!” 두 남자의 비명과 함께 제주에서의 첫 드라이브가 시작됐다. 다행히도 김복자는 운전에 대한 감이 좋은 편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기무혁의 필사적인 속성 과외로 어찌어찌 조금씩 도로에 적응해 나갔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쉬고 시트에 등을 기댄 기무혁이 이내 피식피식 웃었다. 사실 무림의 고수쯤 되면 차 사고가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신강헌과 함께 유난을 떤 것은 김복자를 놀려주기 위한 장난에 가까웠다. “운전 개쉬운데? 이대로 고속도로도 가볼까?” “……제주도에는 고속도로 없다.” “제발 진정해, 미친 것아…….” “너네 방금 쫄았지? 말이 그렇다는 거지!” 킥킥 웃은 김복자가 한결 편하게 핸들을 잡았다. 선루프를 열고 창문도 내린 세 사람은 초봄의 시원한 제주도 바람을 만끽했다. 잠시 눈을 감고 그 감각을 즐기던 기무혁은 바람에 실려 오는 익숙한 냄새에 슬쩍 눈을 떴다. “……벌써부터 냄새가 날 줄은 몰랐는데.” “냄새? 무슨 냄새?” “신강헌 암내 아님?” “아, 지랄하지 말라고!” 공항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은은하게 퍼져있는 불쾌한 냄새. 기무혁에겐 전생의 몇몇 기억들이 떠오르는 익숙한 혈향이었다. * * * 제주도에 일찌감치 도착한 세 사람은 일단 실컷 관광을 즐겼다. 신강헌은 너튜브 먹방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흑돼지 꼬치며 핫바, 한라봉 등 간식을 보이는 대로 먹어 치웠다. “돼지냐? 점심 먹은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그게 들어가?” “우물우물. 너도 하나 줄까?” 김복자는 기념품 숍을 탈탈 털었다. 감귤 초콜릿, 한라봉 잼, 손수건은 물론이고 귤 모양의 모자를 3개나 사서 기무혁과 신강헌에게 억지로 씌웠다. “아, 이딴 거 쓰면 모양 빠진다고!” “쓰읍! 가만 있어봐. 사진으로 남겨야 되거든?” 이것저것 먹고 쇼핑하는 것에 열중한 둘과 달리, 기무혁은 뒷짐을 지고 제주도의 자연관광지를 느긋하게 걸으며 풍경을 감상했다. “경치 좋-다.” “와, 아재다 완전…….” “우리 삼촌도 안 저러는데?” 뺘악! 살구도 바깥 공기에 신이 났는지 셋 중에 가장 높은 신강헌의 머리에 자리를 잡고 일광욕을 즐겼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거의 하루 종일 관광지를 돌아다녔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종종 기무혁과 신강헌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혹시 기무혁 무인 아니세요?” “시, 신강헌이다…….” “라이센스 시험 영상 봤어요! 실제로 보니까 둘 다 진짜 크시다!” 한편 김복자에게 말이라도 걸어보려고 다가왔던 남자들은 좌우에 있는 두 남자를 보고는 얌전히 뒷걸음질 쳤다. “혹시 번호 좀…… 아, 아닙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제주도 곳곳을 돌아다닌 후. 늦은 밤이 되어서야 세 사람은 예약해 둔 펜션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후아- 되게 피곤하네.” “넌 운전하느라 고생했으니까 먼저 들어가. 짐은 우리가 내릴게.” 먼저 쉬라는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김복자가 냉큼 방으로 들어가고, 기무혁과 신강헌은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일부러 넓은 마당이 있고 주변이 한적해 보이는 프라이빗한 독채 펜션을 빌렸다. 저녁에 바비큐 파티를 하기도 좋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무공을 수련하기도 제격인 곳이었다. 가장 좋은 점은 주변에 인적이 드물어서 어지간한 소음이 나거나 칼부림이 벌어지더라도 조용히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돌아다닌 보람이 있네. 뭐가 좀 낚이긴 한 걸 보니까.” 피식 웃은 기무혁이 트렁크에서 검 케이스를 꺼냈다. 그리고 슬쩍 차에 시동을 다시 걸었다. “흐아암. 어떤 머저리들인지는 몰라도…… 빨리 끝내고 쉬자.” 신강헌도 기타 가방만큼 큼직한 도 케이스를 열면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긴장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아까부터 펜션 바깥에서 피부를 간질이던 살기가 짙어졌다. 89화. 우리는 무인이니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기 전, 기무혁은 크루원들에게 미리 설명했다. “제주 무인들은 외지 무인들에 대한 경계가 심해. 내륙에서 왔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는 경향이 있거든.” 관광객으로 방문했을 때 제주도는 치안이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 방문 대상이 무인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역사가 오래된 토착세력들이 제주도 전체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밖에서 들어오는 무인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견제했다. 신강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다며 맞장구를 쳤다. “제주도에서는 무림맹은 가입 안 해도 탐라련에는 가입해야 한다면서?” 탐라련(耽羅連). 제주도 최대의 무림조직 연합. 역사가 깊은 토착세력의 수장들이 돌아가면서 련주를 맡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조직이었다. 탐라련의 거미줄 같은 영향력은 양지는 물론이고 음지마저 가리지 않았다. 제주도에서는 그 권위가 무림맹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게 환몽이 등장했을 때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지.’ 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 외부에 알리지 않고 제주도 안에서 은밀하게 해결하려다가 피해가 커졌고, 결국 이백 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희생되며 혈사로 이어졌다. 기무혁은 이번에는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여간 최근에는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더 심해졌을 거야. 믿을 만한 정보통에 의하면, 제주도의 사파 무인들이 하나둘 실종되고 있다더라. 그걸 좀 캐보려고.” 환몽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조금 더 이후지만, 훨씬 전부터 징조가 있었다. 바로 제주도 뒷세계에 속한 사파무인들의 연속된 실종과 의문의 살인사건들. 이 시점에서는 아직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음알음 음지에서는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을 터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제주도에 그냥 놀러 가는 건 아니라는 거지?” 김복자는 역시 뭔가 꿍꿍이가 있을 줄 알았다는 듯 팔짱을 끼더니,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디를 털 건데?” 대천문과 일월문을 털면서 짭짤한 부수입을 올린 경험을 떠올리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김복자였다. “실종사건? 이거 정의로운 협객이 등장해야 할 것만 같잖아?” 몰래 마공을 익힌 정파 위선자의 짓일까? 아니면 사마외도의 피비린내 나는 세력다툼? 신강헌은 흥미를 자극하는 사건에 벌써부터 두근거리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편안하게 즐기는 여행도 좋지만, 뚜렷한 목적이 있다는 말에 눈빛이 달라진 두 사람. 오히려 기무혁이 지나치게 의욕을 불태우는 둘을 진정시켜야 할 정도였다. “일단은 가서 느긋하게 관광이나 하면서 동태를 살피자. 어차피…….” 저쪽에서 먼저 자신들에게 접근해 올 게 분명했다. 환몽을 찾기 위해서는 제주도 사파 무림인들의 시선을 끌어 그들과 접촉하는 것이 필수였다. 하지만 기무혁은 그 방법에 대해서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이 일행이라면, 제주도에 도착하기만 해도 금방 이목을 집중시킬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 * * 기무혁의 예상은 적중했다. 아니, 생각보다 더 빨랐다. 제주도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일행에게 감시의 눈길이 붙었고, 하룻밤도 지나기 전에 찾아온 자들이 있었다. 콰앙! 대문이 거칠게 밀어젖혀지고 눈빛이 사나운 무인들이 마당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이미 들켰다고 판단하자 거침없이 쳐들어온 것이다. “머저리라고?” 선두에 선 인상이 거친 사내가 신강헌의 말을 들었는지 인상을 잔뜩 쓰면서 다가왔다. “덩치 큰 꼬마야. 너 방금 우리보고 머저리라고 했냐?” 상대는 하나같이 단련된 몸에 살벌한 무기를 지닌 무인들이었다. 그러나 신강헌은 하품을 멈추지 않으며 그들을 대충 훑어볼 뿐이었다. “흐아암- 누가 아저씨들보고 머저리랬어요? 괜히 찔리나 보네.” “하! 이 쥐방울만 한 새끼가…….” “쥐방울보다 작은 건 뭐라고 부르지? 콩방울? 개미방울?” 신강헌이 자기보다 작은 사내를 가소롭단 눈길로 내려다보며 히죽 웃자, 모욕감에 얼굴이 붉어진 사내가 욕설을 쏟아내며 칼끝을 신강헌에게 겨눈 순간이었다. “어른한테 뭐하는 짓이야? 공손하게 굴어야지.” “……공손?”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신강헌을 옆으로 밀치고 기무혁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사내에게 사과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이 늦은 밤에 방문해주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기무혁이 정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아직 표정이 누그러지지 않은 사내가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너희가 기무혁, 신강헌. 맞냐?” “맞습니다.” “제주도에 기어들어 온 목적은?” 다짜고짜 취조하듯 묻는 말에 신강헌이 짜증 난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기무혁이 앞으로 나선 이상 끼어들지는 않았다. “친구들끼리 여행을 왔습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너희가 무림인이란 게 문제지. 관광 온 놈들이 칼은 왜 가지고 와?” 사내가 턱짓으로 기무혁의 검과 신강헌의 도를 가리켰다. 터무니없는 시비였다. 정식 라이센스를 딴 무인은 공항에서도 별다른 검문 없이 무기를 지니고 통과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 데서나 뽑아서 휘두르지만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무혁은 고개까지 숙여가며 상대에게 사과했다. “저희가 위화감을 조성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무기는 다른 의도는 없이 호신용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으음…….” 대놓고 시비를 걸었는데 상대가 정중하게 나오자 오히려 남자의 얼굴에 ‘이게 아닌데?’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기무혁이 또박또박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도 숙소 바깥에서 살기가 느껴져서 무장했을 뿐입니다. 무림의 선배님들께서 넓은 아량으로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반응에, 사내의 표정에 고민이 어렸다. 기무혁과 신강헌. 저 둘이 올해 라이센스 시험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펼친 후기지수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실력이 뛰어난 만큼 기고만장할 거라고 예상하며 특별히 준비까지 했다. ‘혹시 몰라서 독까지 가져왔는데.’ 절정고수도 독에 당하면 죽는 건 똑같았다. 물론 죽일 생각까지는 아니었고, 싸움이 벌어지면 독으로 제압해서 끌고 갈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 것 같다는 생각에 사내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요즘 보기 드문 예의 바른 후배구만. 그럼 제주도에 있는 동안 너희 검과 도는 우리가 맡아두마. 캐리어랑 가방도 싹 다 가져오고…….” 많이 봐줬다는 듯 사내가 한 손을 들어 기무혁의 어깨를 툭툭 칠 때였다. 기무혁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뭐?” 갑자기 싸늘하게 바뀐 눈빛에 사내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기무혁이 거의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당신들이 무단 침입한 장면과 우릴 위협한 모습이 블랙박스에 고스란히 찍혔거든. 나중에 정당방위였다는 증거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 비로소 사내는 기무혁 일행의 차량에 시동이 계속 켜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펜션에 침입한 순간부터 블랙박스에 전부 녹화된 것이다. 기무혁에게 속았다는 생각에 사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이런 시건방진 새끼들이 어른을 놀려! 당장 가서 블랙박스 통째로 떼와! 아니, 그냥 부숴버려!” 사내의 명령에 뒤에 있던 무인들이 일행의 SUV차량을 때려 부술 것 같은 얼굴로 다가왔다.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선 신강헌이 어깨에 커다란 도를 걸친 채 기무혁에게 물었다. “이제 싸워도 되지?” “나중에 치우기 귀찮으니까 죽이지는 말고, 웬만하면 팔다리도 붙여 놓고.” “미친놈아. 네가 말하면 진담인지 농담인지 헷갈리거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은 신강헌은 살벌한 기세로 다가오는 무인들을 보며 히죽 웃었다. “기다리다가 잘 뻔했네. 이러쿵저러쿵 떠들기만 하고……. 아저씨들도 지루했죠?” 쾅! 바닥을 박찬 신강헌이 침입자들을 향해 달려들며 즐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자, 우리는 무인이니 무력으로 해결합시다!” 맹수와도 같은 움직임에 적들이 무기를 뽑아 들었지만, 반응이 늦어도 한참 늦었다. 빠악! 도집에 얼굴을 얻어맞은 선두의 무인이 의식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바로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동료들이 무기를 뽑아 휘둘렀다. 그러나 신강헌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단숨에 적들을 뛰어넘은 후, 긴 다리를 풍차처럼 휘둘렀다. 쇳덩이 같은 발차기에 맞은 이들은 모조리 뼈가 부러졌다. 신강헌이 양 떼에 뛰어든 사자처럼 날뛰는 동안, 기무혁은 적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퇴로를 막았다. “죽어!” 혼자서 몰래 도망치려다가 기무혁과 마주한 무인 하나가 검을 찔러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심장을 찔러오는 공격에, 기무혁은 검집으로 상대의 단전을 박살 내는 것으로 돌려주었다. “꺼헉……!” 끔찍한 고통에 게거품을 문 남자가 얼굴을 땅에 박으며 쓰러졌다. “미, 미친…….” “방주님한테 빨리 연락해!” 몇몇은 스마트폰을 꺼내 어딘가로 연락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기무혁이 검기를 날려서 반으로 잘라버렸다. “독! 독을 써!” 준비해 온 독도 통하지 않았다. 난전 속에서도 기무혁은 정확히 독을 살포하려는 자들을 찾아내 쓰러뜨렸다. “이, 이렇게 강하다고?” 부하들을 데려온 사내는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제아무리 절정고수와 일류고수라고 해도 실전은 다른 법이었다. 충분한 머릿수와 암기, 독만 있으면 실전경험이 부족한 후기지수 둘쯤 쓰러뜨리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반대로 자신의 부하들이 아무것도 못 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잘못 걸렸구나.” 결국 혼자 남은 남자는 칼을 내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눈치가 빨라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뒷세계의 무인다웠다. 블랙박스를 끈 기무혁이 그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이름. 소속. 목적.” “……김동철. 흑오방 소속이고, 방주님이 너희들을 끌고 오라고 시켰다.” “시켰다?” “시, 시켰습니다!” 어차피 자신을 제외하고는 전부 기절한 후였기에, 김동철은 살아남기 위해 솔직하고 비굴해졌다. 기무혁이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하면 살려준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면 사고사로 위장해서 죽일 거야.” 아까 자신에게 존댓말을 할 때와 같은 차분한 표정과 말투에 몸서리치도록 짙은 살기가 배어 있었다. ‘이놈, 정파 후기지수 아니었어?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구나…….’ 묻고 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김동철의 입에서 묻지도 않은 정보들이 술술 흘러나오고, 기무혁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인상을 쓰기를 몇 차례. “합격.”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기무혁이 수도로 김동철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빠악! 의식을 잃으며 옆으로 쓰러지는 김동철은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신강헌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도대체 누가 더 나쁜 새낀지 모르겠네.” “다 끝났어?” 싸움이 다 끝나고 나서야 김복자가 펜션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새 씻고 나왔는지 편한 옷에 머리를 수건으로 감고 있었는데, 밖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여유롭게 머리까지 감은 듯했다. 기무혁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머리는 가면서 말려야겠는데.” “잉? 갑자기 어딜 가는데?” “흑오방 본거지.” 기무혁이 그 말만 남겨놓고 밖으로 나가자, 신강헌이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잠시 후, 기무혁이 밖에 주차되어 있던 흑오방의 승합차를 직접 운전해서 몰고 왔다. 능숙하게 핸들을 잡은 기무혁이 마당 한가운데 차를 대고서 차창을 내렸다. 그리고 턱짓으로 쓰러져 있는 무인들을 가리켰다. “기절한 것들부터 싣자. 펜션에 그대로 뒀다가 나중에 괜히 꼬투리 잡힐 수도 있어.” “…….” “왜?” “너 졸라 인신매매범 같아서…….” 세 사람은 기절한 흑오방 무인들의 혈도를 제압해서 승합차에 짐을 쌓듯이 차곡차곡 쌓았다. 마지막으로 김동철을 들어서 맨 위에 얹은 신강헌이 손을 털며 물었다. “근데 흑오방인가 호구방인가 어디에 있는지 아까 물어봤냐?” “안 물어봤는데.” 기무혁은 의아해하는 표정의 두 사람에게 내비게이션을 조작해서 보여주었다. “어차피 내비에 찍혀 있을 테니까.” “……솔직히 말해. 너 이거 한두 번 해본 거 아니지?” “혹시 선생님한테 이런 것도 배우냐?” 기무혁은 친구들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외면하며 차를 몰기 시작했다. “내가 운전할까?” 하루 만에 운전에 재미가 붙은 김복자가 큰 승합차도 몰아보고 싶은지 눈을 빛냈다. 물론 기무혁은 운전석을 양보하지 않았다. 야간에 초보운전자가 모는 차에 타는 것도 나름 스릴이 있겠지만, 이번에는 관광하러 가는 게 아니니까. “됐어. 이번에는 내가 할게.” “너 면허 없다며?” “운전 못 한다고는 안 했어.” 그로부터 몇 분 후. “으아아! 이 미친놈아, 몇으로 밟는 거야!” “브레이크! 브레이크 좀 밟으라고! 끼야아악……!” 도로를 거칠게 질주하는 차 안에서 신강헌과 김복자가 안전벨트를 꼭 쥐고 비명을 질렀다. 90화. 그러고 보니 흑오방주는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이 새끼는 왜 연락이 안 돼?” 흑오방의 행동대장 김동철이 몇 시간째 연락이 안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이 간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문제 생긴 건 아니겠지?” 흑오방주가 초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김동철에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긴 했지만, 상대의 저항이 생각보다 강했다면 사고가 터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기무혁과 신강헌. 전 세계로 생중계된 라이센스 시험에서 돌풍을 일으킨 후기지수들. 비록 그 이후에 폭로된 일월문주의 만행으로 대중들의 주목도가 떨어지긴 했지만, 무인들에게는 아니었다. 리차드 한 이후, 한국무림의 역사가 다시 한번 바뀔 수도 있다! 한국무림계에서 난다긴다하는 무인들 대다수의 평가였다. 하지만 흑오방주는 그 찬란한 재능에 배알이 꼴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부하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끌고 오라고 시켰다. 더 강해져서 손도 대지 못하는 거물이 되기 전에 인생의 쓴맛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지금이라면 몸값을 톡톡히 받아낼 수 있겠지.’ 이미 천정부지로 몸값이 치솟은 후기지수들이었다. 그 값을 지불해 줄 곳은 무림맹을 비롯해서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특히 팔대문파는 녀석들에게 은혜를 입혀서라도 입문시키려 할 테고, 그걸 위해선 천금도 마다하지 않을 테니 그야말로 둘 다 굴러다니는 로또나 마찬가지였다. ‘미친 짓이지만…….’ 다른 곳이라면 불가능해도 제주도의 무림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다. 하루 종일 외지 무림인이 설치고 다니니 사파와 정파를 가리지 않고 심기가 불편해졌을 것이고, 내일부터 놈들이 보이지 않아도 누군가 손을 써서 얌전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탐라련의 고수와 연줄이 있었다. ‘뜯어낸 몸값에서 절반을 바치면 조용히 숨겨줄 거다. 몇 년만 죽은 듯이 지내면…….’ 곧 평생 먹고살 돈이 떨어질 거란 행복한 상상에 즐거웠던 것도 잠시, 흑오방주는 여전히 울리지 않는 스마트폰을 보며 미간을 와락 구겼다. “동철이 이 새끼, 혹시 딴마음 먹은 거 아냐? 지가 혼자 해처먹고 섬을 뜨려고……!” 흑오방주의 초조함은 김동철에 대한 의심으로 번졌다. 그는 뒷세계 사파방파의 방주답게 부하의 충성심 따위는 믿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은 이유도 혹시 모를 변수가 생기면 꼬리를 자르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은혜도 모르는 새끼! 어디 한번 튀어 봐. 끝까지 찾아내 물고기 밥으로 던져줄 테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흑오방주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살기를 흘릴 때였다. 꽈아앙! 밖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굉음이 들려왔다. 흑오방주는 즉시 칼을 움켜쥐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무슨 일이냐!” 건물에 남아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도 뒤따라서 우르르 뛰쳐나오는 중이었다. 흑오방의 본거지는 외진 산길에 가건물로 위장하고 있었다. 철망으로 된 울타리를 세워 놔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 곳이었다. 바로 그 울타리를 부수며 달려오는 차량이 보였다. 모두에게 익숙한 승합차였다. “저, 저거 우리 애들 차 아냐?” “동철 형님이 타고 간…….” “어어? 이쪽으로 온다!” 끼이이익! 울타리를 부수고 들이닥친 승합차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급회전한 뒤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바닥에 새카맣게 남은 타이어 자국에서 탄내가 올라오고 있었다. 잠시 후, 차 문이 열리고 신강헌과 김복자가 차에서 탈출하듯이 뛰어나왔다. “으아아아! 저 미친놈이 운전하는 차에 다시 타면 내가 사람 새끼가 아니다!” “나, 나 아직 살아있는 거 맞지?” 뺘아악……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김복자의 품 안에서 살구가 바르르 떨었다. 마지막으로 기무혁이 차에서 내렸다. 그가 흑오방의 무인들을 둘러보며 지나가다 길을 묻듯 태연하게 물었다. “여기가 호구방 맞나요?” “……흑오방이다!” “너, 너희들 뭐 하는 새끼들이야!” 흑오방의 무인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며 소리쳤다. 그러나 유일하게 기무혁의 얼굴을 바로 알아본 흑오방주만은 굳은 표정이었다. 기무혁이 차 뒷문에서 기절한 김동철을 끌어내 정확히 흑오방주 앞에 던졌다. 행동과 달리 말투는 무척 정중했다. “택배를 잘못 보내셨길래 반품하려고 가져왔습니다. 겸사겸사 물어볼 것도 있고요.” “하…….” 흑오방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기무혁을 노려봤다. 김동철을 비롯해 자신의 부하들이 전부 당한 듯했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무공 실력으로 치면 부하들 대부분이 삼류나 이류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기무혁의 몸에 긁힌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은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등신들이 독이랑 수면제까지 잔뜩 들고 가서 아무것도 못 하고 당했어? 게다가 우리 방의 위치까지 노출해?’ 분노한 흑오방주의 몸에서 서서히 짙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기무혁을 노려보는 눈이 희번덕거렸다. “건방진 꼬마들아. 여기까지 와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평생 피를 묻히며 살기를 쌓아온 사파 무인의 눈은 웬만한 사람은 마주 보지도 못할 만큼 섬뜩했다. 흑오방은 제주도 사파무림의 흔한 중소방파 중 하나였지만, 방주만큼은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힌 고수였다. 기습이긴 했지만 내륙에서 온 일류고수를 단칼에 처리해 물고기 밥으로 만든 적도 있었다. 스르릉. 칼을 빼든 흑오방주가 성큼성큼 기무혁을 향해 걸어왔다. “주변에서 치켜세워주니 벌써부터 절세고수라도 된 것 같지? 저놈들 전부 아직 숨이 붙어있는 것 같은데……. 흐흐. 아직 사람은 못 죽여 봤나 봐?” 진득한 살기에 정면으로 노출되자 기무혁은 두려움에 꼼짝도 못 하는 것처럼 가늘게 몸을 떨었다. “으으…….” 그 모습이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보였는지 긴장했던 흑오방의 무인들이 금세 의기양양해졌다. “흐흐. 왜? 막상 여기까지 오니까 입도 뻥긋 못하겠어?” “비행기 타고 바로 내빼도 모자랄 판에 우리를 찾아왔다 이거지?” “동철 형님이랑 애들 몇 명 제꼈다고 방주님까지 만만히 보였냐!” 흑오방주와 부하들의 눈에는 기무혁 일행이 섣부른 정의감에 자신들을 찾아온 햇병아리 무인들처럼 보였다. 하기야 그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피를 묻혀본 경험이라면 기무혁이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 많고, 신강헌은 살기충천한 일월문주의 공격에도 피하지 않고 들이대는 강심장이며, 김복자는 어린 시절부터 사파 무인들을 상대하며 돈을 벌어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파르르 떨면서 몇 번 입술만 달싹이던 기무혁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과연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진 흑오방주가 귀를 기울였다. “뻥긋.” “……뭐?” 그 순간 겁먹은 표정 연기를 하던 기무혁이 벼락처럼 달려들어 흑오방주의 얼굴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절묘한 기습이었다. “커억!” 기무혁의 손가락 사이로 경악한 눈동자가 보였다. 일류고수가 있었어도 눈 뜨고 당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사람 많이 죽여 본 게 자랑인가? 난 시간이 지날수록 부끄러워지던데.” 흑오방주를 단 한 수에 제압한 기무혁이 태연한 목소리로 뒤에 있는 신강헌과 김복자에게 말했다. “여기는 우리가 안 치워도 되니까…….” “뒷말은 안 듣는 게 낫겠어.” “저 새끼가 악당이 아니면 대체 누가 악당이야?” 뺙! 투덜거리는 셋의 반응에 기무혁이 피식 웃고는 흑오방주를 그대로 뒤에 있는 건물에 처박았다. 콰앙-! 가벽이 부서졌지만 기무혁은 개의치 않았다. 방주가 잡혀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무인들을 뒤로하고 흑오방 내부로 향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신강헌의 “우라아앗!” 기합성에서 멀어지며, 고통스러워하는 흑오방주를 질질 끌고 점점 안으로 들어갔다. 으아악! 끄아악! 사, 살려줘! 바깥에서는 고성과 비명소리, 스산한 귀곡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흑오방주는 그 소리를 들으며 점점 공포에 질려갔다. 잠시 후, 방주의 집무실로 들어온 기무혁은 문을 닫고 내부를 둘러봤다. 허름한 바깥과 달리 내부는 꽤 값나가 보이는 물건들로 장식돼 있었다. “부하한테 시켜서 우리를 끌고 오라고 했다며? 납치해서 몸값이라도 비싸게 받아내려고 했나?” “그, 그걸 어떻게…….”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말에 흑오방주는 완전히 기가 죽었다. 기무혁은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받아낸 몸값으로 한몫 단단히 챙겨서 평생 놀고먹고 싶었을 거야. 그런데…….” 기무혁은 흑오방주가 평소에 앉았을 법한 의자에 그를 앉혔다. 제압했을 때 마혈을 짚어둔 탓에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탁상에 두 손을 올린 기무혁이 흑오방주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상대를 언제 망가뜨려도 괜찮은 물건으로 보듯 무심함이 깃든 눈이었다. “당신 때문에 우리 휴가가 엉망이 될 뻔했는데, 어떡할 거야?” 꿀꺽……. 죽이겠다, 고문하겠다 등의 뻔한 협박은 한마디도 없었다. 대놓고 살기를 드러내거나 위협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흑오방주는 차라리 고문당하는 것이 낫겠다 싶을 만큼 큰 압박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내, 내가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사파무림에서 오래 굴러먹은 생존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생각지도 못했던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거라고. 상대는 정의감으로 가득한 정파 애송이가 아니라, 자신 같은 부류의 인간을 수없이 죽여본 자였다.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자신도 그렇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보, 보상하겠다. 그리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 주겠다…….” “뭘 어떻게 보상할 건지 구체적으로 들어보고 싶은데?” 흑오방주는 마지막 자존심인지 자기보다 훨씬 어린 기무혁에게 끝까지 반말만큼은 고수하면서도, 기무혁이 묻지도 않은 숨겨둔 비밀금고의 위치까지 술술 불었다. 기무혁은 굳이 상대의 호의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내 목적을 뻔하게 알려줄 필요는 없지.’ 오히려 상대가 오해하면 오해하는 대로 자신에게는 더 유리했다. 한참을 듣고 있던 기무혁이 혼란을 주기 위해 일부러 다른 미끼를 던졌다. “한 가지 궁금한데, 외지 세력이 제주도에 자리 잡는 게 많이 어렵나?” “……!” 예상대로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지금 흑오방주는 기무혁이 제주도 뒷세계에 자리 잡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두려움에 사리분별이 안 되겠지.’ 정파무림의 촉망받는 후기지수가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지만, 흑오방주는 거기까지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아마 머릿속에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 “대답이 없네?” “마, 말하겠다! 일단 자리를 잡으려면 탐라련에 허가부터 받아야 하는데…….” 흑오방주의 입에서 제주도 사파무림의 구조와 최근 정세, 탐라련과 어떤 식으로 연결돼 있는지 등 꽤나 유용한 정보들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던 중에 기무혁은 지나가듯 툭- 본론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이쪽 검객들이 실종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뭐 아는 거 있어?” 91화. 만들길 잘했어 흑오방을 정리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흐히히히…….” “놀자! 나랑 놀자!” 수십 명의 남자들이 앞마당에 풀어둔 개처럼 신나게 뛰어다녔다. 그 중에는 기무혁에게 가진 것을 전부 털린 흑오방주도 있었다. 팔다리가 부러진 자들은 아무 데나 누워서 흐느적거리며 웃고 있었다. 단체로 약에라도 취한 듯한 광경이었지만, 진실은 김복자의 술법에 당한 것이었다. “쟤들은 언제까지 저러고 있는 거야?” “누가 안 깨워주면 한 사흘?” 며칠 동안은 뇌가 백지처럼 순수해진 상태로 지내게 될 거라는 설명에 기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진상을 파악하고 환몽을 회수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선 흑오방주가 사과의 의미로 준 선물부터 챙기자.” “그러니까 이게 다 정당한 합의금인 거지?” 짭짤한 부수입을 바라보는 김복자의 눈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세 사람은 몰고 온 승합차 트렁크와 뒷좌석에 흑오방에서 챙긴 현금과 장물을 꽉꽉 채워 넣었다. 그때 문득 떠올랐다는 듯 신강헌이 질문했다. “근데 비행기에 이런 거 갖고 탈 수 있냐?” “당연히 세탁해 주는 곳에 맡겨야지. 거기서 처분한 후에 계좌로 쏴줄 거야.” “중간에서 떼먹는 수수료가 좀 비싸긴 하겠지만, 창고를 하나 빌려서 맡겨두고 천천히 처리하는 방법도 있지.” 김복자와 기무혁은 장물을 처리하는 방법을 두고 전문가처럼 대화를 나눴다. 신강헌이 이래도 되나 싶은 표정으로 그런 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이런 새끼들이랑 같이 다녀도 되는 건가…….” 두 사람과 같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정파인지 사파인지 정체성에 종종 혼란이 올 때가 있었지만, 매번 내리는 결론은 같았다. 나쁜 새끼들 족치면 그게 정파고 협객이지! 짐을 다 실은 후,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타려는 기무혁을 김복자가 급하게 막아 세웠다. “기무혁 너, 핸들 잡지 마! 돌아갈 때는 내가 할 거야!” “야간 운전은 위험할 텐데?” “너보다 위험하겠냐고!” 기무혁은 그러라고 하며 김복자에게 운전대를 양보했다. 처음 해보는 밤길 운전이었지만, 김복자는 놀라운 집중력과 생존본능을 발휘해서 안전하게 펜션으로 돌아왔다. “후우. 그래도 어떻게 무사히 돌아왔다…….” “솔직히 흑오방에서 싸울 때보다 너네가 운전할 때가 백배는 더 쫄렸음.” 숙소로 돌아오자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셋 다 피곤하거나 졸린 기색은 없었다. 흑오방에서는 싸움이랄 만한 것이 없었고, 오히려 적당히 몸을 풀고 온 수준이었으니까. 말똥말똥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세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배고프지 않냐?” “고기 좀 구울까?” “첫날인데 술도 까야지.” 겨우 이십 대 초반에 불과한 그들이었다. 체력은 넘쳐났고 여행지에서의 밤은 짧았다. 치이이익- 불판에서 고기가 익어가고, 한쪽에서는 밀키트로 사 온 부대찌개가 참기 힘든 냄새를 풍기며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먹성 좋기로는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셋답게 금세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이 차려졌다. “잘 먹겠습니다-!” 배가 고팠던 그들은 전투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신강헌이 종류별로 사온 술을 꺼내 식탁에 일렬로 펼치며 김복자를 도발했다. “한잔 하실?” “삼겹살엔 당연히 쏘주로 시작해야지.” 김복자와 신강헌이 부어라 마셔라 술을 들이켜기 시작하고, 점점 온갖 종류의 술이 다양한 방식으로 섞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거의 마시지 않는 기무혁도 가볍게 몇 잔 마시며 어울렸다. 환몽에 대한 것은 잠시 잊기로 했다. ‘가끔은 이런 것도 좋지.’ 직전에 사파의 방파 하나를 털고 온 무림인들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 차라리 대학생들이 놀러 온 모습에 가까웠다. 셋 모두 또래들과 이렇게 평범하게 놀아본 경험이 거의 없어서, 더욱 특별하고 잊지 못할 저녁이었다. 자연스레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또라이 넌 무림맹에 들어갈 거냐?” “쩝. 나는 그러고 싶은데, 삼촌이 무조건 반대할 거라서.” “웃겨 진짜! 네 미래를 왜 삼촌이 결정하는데?” “입맹 지원일이 다음 주까지던데. 고민만 하다가 늦어버리면 후회할걸.” “……사실 지원은 해놨어.” “오? 삼촌 몰래? 엉클보이가 웬일이래? 삼촌한테 혼나는 거 아냐?” “아, 몰라……. 오늘은 일단 마시고 죽어!”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신강헌의 고민으로 가득한 얼굴을 보기도 했고. “근데 나는 어릴 때 두 분 다 돌아가신 건데, 김복자도 부모님 안 계심?” “난 어릴 때 버려졌는데.” “……어우 씨, 그런 건 깜빡이 켜고 말하라고!” “면허도 없으면서 무슨 깜빡이 타령이냐?” 부모에 대해 언급조차 싫어하던 김복자가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가정사를 말하기도 했다. “아빠는 낭인, 엄마는 무당. 책임 없는 쾌락에서 탄생한 자식이 바로 나, 레드래빗이라 이거야!” “……이건 나도 못 받아주겠다. 미친놈아, 네가 뭐라고 좀 해봐.” “뭐가 문젠데? 그 부모님 덕분에 지금 맛있게 술 마시고 있잖아.” 사고방식이 남다른 기무혁의 말에 김복자가 깔깔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얼마나 웃긴지 눈가에 눈물마저 맺힐 정도였다. 신강헌은 역시라면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하여간 우리 둘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는데, 기무혁만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거네?” “근데 행복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것치고 성격이 왜 저러냐?” 이번에는 자신이 타깃이 되자 기무혁이 보란 듯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부럽냐?” 이럴 때는 미안해하거나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짓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자랑해야 한다는 것을 기무혁은 알고 있었다. “아오 그래! 부러워서 그런다, 새끼야!” “복 받은 줄 알아, 꼬박꼬박 효도하라고. 알았어?”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을 함께 겪으며 쌓인 시간에 더해, 여행지에서 처음으로 같이 마시는 술의 마법이 더해졌다. 방어기제가 강한 세 사람이 조금씩 서로의 벽을 허물고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크루를 만들길 잘했어.’ 기무혁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아직은 가장 깊은 곳까지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그것도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자신부터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테니까. “우리 엄마아빠가 너희 되게 좋아해. 니들이 둘째랑 셋째였으면 집안이 활기차고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얘기하시더라. 그러니까 자주 놀러 와. 요새는 너희가 올까 봐 밥도 많이 하니까.” “…….” “…….” 잠시 말이 없던 김복자와 신강헌이 괜히 투덜거렸다. “근데 왜 우리가 둘째랑 셋째냐? 내가 너네보다 한 살 많으니까 첫째지.” “동갑이지만 키는 내가 더 크니까 내가 둘째다!” “또라이냐. 생일은 내가 더 빠르거든?” “그럼 비무로 결정하든가!” 세 사람은 쉴 새 없이 떠들고 싸우고 티격태격했다. 피곤해질 만도 한데 즐거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 또 언제 이런 시간을 가지게 될지 모르기에, 실컷 놀 생각이었다. 물론 술자리가 마지막까지 아름답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감히 술로 이 레드래빗에게 덤비겠다고-? 꿈 깨 애송아!” “뭐래 쬐끄만 게. 너나 이따가 토하고 난리 치지 말고 패배를 인정하시지-?” “까귀! 왕뱀! 삽살이! 저 새끼 물엇!” “아, 술맛 떨어지게 괴이들 불러내지 말라고!” ……성격들이 저 모양이라서 친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기무혁은 술 대결로 시작해 결국 서로 붙들고 추하기 짝이 없는 주사를 부리기 시작하는 둘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싸움도 말릴 겸 흑오방주에게서 알아낸 정보를 공유했다. “최근에 실종된 검객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어.” 그대로 생사비무라도 벌일 기세였던 둘이 멈칫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무혁이 언제 그 이야기를 해줄까 궁금했으니까. 기무혁은 흑오방주가 해준 이야기를 짧게 정리해서 말했다. “실종된 검객들, 전부 지하투기장 출신이라고 하더라.” 지하투기장은 불법 비무도박이 성행하는 도박장이었다. 참가자들 대부분이 삼류무공을 익힌 무인들로, 막대한 빚을 지거나 막장까지 몰린 인생들이 목숨을 담보로 일확천금을 노리고 뛰어드는 곳이었다. 물론 그 결과는 대부분 싸구려 죽음이었다. “우연 아냐? 그런 데서는 하루에 몇 명씩 죽어 나가잖아. 실종이 뭐 대수라고…….” 김복자가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도시무림의 음지에서 술법사로 살아가는 그녀다운 생각이었다. 기무혁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죽는 건 차라리 흔해. 그런데 실종이니까 이상한 거야. 누가? 왜? 빚만 잔뜩 진 막장 인생들을 납치할 이유가 없잖아.” “대천문에서 하던 것처럼 장기매매일 가능성은?” “빚 받아낼 채권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고 있을걸. 장기매매업자들도 너무 지저분한 물건은 안 건드려.” “하긴…….” 기무혁이 생각하기에 이 일은 환몽과 연관돼 있을 것 같았다. ‘환몽이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했다고 알려진 건 며칠 뒤다. 검의 첫 주인이 휴양림 안에서 민간인 수십 명을 해치고 도망쳤지.’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바로 그 휴양림에 가서 기다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넓은 숲속에서 놈이 정확히 어디서 등장할지 모르는 데다, 자칫 인질극을 벌일 위험도 있었다. ‘제일 좋은 건 환몽이 외부에 등장하기 전에 찾아서 확보하는 거야.’ 기무혁은 현재 환몽이 있는 장소가 흑오방주가 말한 지하투기장일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검을 쥔 사람을 환각에 빠뜨려 피를 갈구하는 환몽과 지하투기장의 광기는 최고의 궁합일 테니까.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신강헌이 호기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투기장이 어딘데? 안 그래도 몸풀기도 안 돼서 근질거렸는데 바로 쳐들어가자!” 당장이라도 내공으로 주기를 몰아내고 뛰쳐나갈 기세였다. 하지만 기무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가장 문제야. 흑오방주가 말한 지하투기장은 제주도에서 가장 큰 카지노 지하에 있거든.” 즉, 지하투기장에 들어가려면 카지노에 입장할 수 있는 허가증이 있어야만 했다. “외국인 관광객이나 허가증을 지닌 내국인만 입장할 수 있는데…… 우린 둘 다 해당이 안 되니까. 조용히 잠입할 방법을 찾아야 해.” 기무혁의 말에 신강헌과 김복자도 팔짱을 끼고 함께 고민했다. 셋이서 머리를 맞대자 생각보다 빠르게 방법을 찾았다. 짝! 갑자기 손뼉을 친 김복자가 말했다. “우리끼리 뭐 하러 이런 걸 고민해? 크루에 이쪽 분야 전문가가 있는데!” “전문가?” 김복자는 대답 대신 누군가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잠시 후, 디스플레이 위로 황숙수의 뚱한 얼굴이 나타났다. [뭔데? 셋이서 제주도 놀러 간 거 자랑하려고 전화했어?] 물론 기무혁은 황숙수에게도 제주도 여행을 제안했지만, 장사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한 그였다. 기무혁은 김복자가 그에게 전화를 건 이유를 깨달았다. ‘황숙수는 내기비무 중독자였지. 그것도 자기 가게에서 대회를 열 정도였으니…….’ 김복자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숙수 아저씨. 혹시 제주도에 있는 지하투기장에 가본 적 있어요?” 황숙수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단숨에 눈빛이 달라졌다. [당연히 가봤지. 전국의 비무도박장 중에서 내가 안 가본 곳이 있겠어?] 최근에는 청랑의 일을 처리하기에도 바빠서 비무도박을 여는 것도 줄었지만, 여전히 관련된 인맥은 살아 있었다. 기무혁이 스마트폰을 돌려서 자신에게 향하며 말했다. “우리가 거기 가야 할 일이 생겼는데, 허가증을 구할 수 있을까?” [너희가 비무도박장을? 내 건 양도가 안 돼서 줘 봤자 못 쓰고…….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봐!] 기무혁의 질문에서 뭔가 건수가 생겼다는 것을 짐작한 듯, 황숙수는 통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그로부터 십 분 정도 지나서였다.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크루장이 조금 불편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내가 불편할 일?” [허가증을 받으려면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데, 그게 크루장도 아는 녀석이거든.] 기무혁이 조용히 이어질 말을 기다리자 황숙수의 입에서 생각도 못 했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카지노. 최근에 혈호방에서 인수했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기무혁의 머릿속에는 어쩌면 혈호방과 환몽 혈사가 관련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피어났다. 92화. 역대급으로 다음 날.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눈을 뜬 기무혁은 마당으로 나가 간단히 몸을 풀었다. “후우우-.” 장소와 시간이 바뀌었어도 루틴은 달라지지 않았다.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독고생사검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차례 펼쳤다. 시원한 봄바람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식혀주었다. 기무혁은 한결 개운해진 표정으로 펜션으로 돌아왔다. 드르렁- 피유우우- 신강헌의 코골이가 방을 넘어서 거실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뺙! 밤새 달린 세 사람과 달리 일찍 잠들었던 살구가 거실 식탁 위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뭔가를 바라는 듯한 눈빛에 기무혁이 냉장고를 열면서 말했다. “배고프지?” 끄덕끄덕! 기무혁은 냉장고에서 생고기와 과일을 꺼냈다. 살구는 여전히 기무혁을 경계하면서도 맛있게 받아먹었다. 살구의 아침을 챙겨준 기무혁은 개운하게 씻고 나온 후, 부엌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아침을 차리기 시작했다. 탁탁탁탁! 냄비에 물을 끓이고 대파와 고추를 어슷 썰었다. 전날 마트에서 사온 수육은 반찬으로 먹을 겸 데워서 가지런히 담았다. 끓는 물에 스프와 면을 넣자 참기 힘든 냄새가 퍼져 나갔다. 여기에 콩나물과 순두부를 추가하면 기무혁표 해장라면의 완성이었다. 킁킁. 그 냄새에 김복자가 눈을 거의 감은 채로 방에서 기어 나왔다. 하여간 음식 냄새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맡았다. “라면이네……. 계란도 넣었어?” “조금 있다가 넣으려고. 반숙? 완숙?” “당연히 완숙이지! 반숙으로 하면 죽는다아…….” 잠에서 덜 깬 김복자가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기무혁은 거실에서 종종거리는 살구에게 작은 수육 조각을 하나 던져주며 말했다. “살구야. 가서 또라이 좀 깨워라.” 제자리에서 휙 뛰어올라 부리로 수육을 낚아챈 살구가 꿀떡 고기를 삼키고는 신강헌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으아아악! 빡돌이 너 미쳤어? 누가 보낸 자객이냐-!”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머리에 까치집을 한 신강헌이 하품을 쩍쩍하면서 걸어 나왔다. “흐아암- 벌써 아침 먹을 시간이야?” “아침은 진작 지났고 점심이다.” 화장실에서 눈곱만 겨우 떼고 나온 김복자도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눈이 동그래졌다. “이걸 다 네가 차렸어?” 식탁 위에는 기무혁이 끓인 해장라면과 따뜻한 수육, 뚝딱 만들어낸 계란말이가 김치와 함께 올라와 있었다. 기무혁이 자리에 앉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먹어 봐. 오랜만에 한 거라 맛이 어떨지 모르겠네.” 해장라면의 국물부터 맛본 두 사람이 감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개맛있잖아…….” “미쳤다. 계란말이도 완전 내 스타일인데?” 두 사람의 놀란 반응에 기무혁도 흡족한 표정으로 라면을 한입 먹었다. 낭인시절 동료들에게도 인정받았던 해장라면이었다. 그때보다 재료도 좋으니 맛이 없을 수 없었다. 후루룩 먹고 마시며 연신 감탄하는 두 사람에게 기무혁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많이들 먹어둬. 오늘 저녁은 못 먹을 수도 있으니까.” 농담인 듯 아닌 듯한 말에, 젓가락질을 멈춘 두 사람이 고개를 들어 기무혁을 째려봤다. “어쩐지 진수성찬을 차려준다 했어. 이게 최후의 만찬이라는 거지?” “잘 먹이고 졸라 부려먹으려는 거였냐!” 몇 시간 후, 세 사람은 혈호방이라는 거대사파의 소굴에 제 발로 찾아갈 계획이었다. 그러니 긴장하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 ‘검객들의 실종사건과 환몽이 혈호방과 관련돼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자기 전에 대략적인 계획을 세웠고, 두 사람에게도 위험성을 경고했다. 당장 혈호방과 싸우려고 가는 것은 아니었다. 황숙수가 자기 인맥을 동원해 마련해 준 자리이니 별문제 일으키지 않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는 해 둬야 했다. 기무혁의 기억 속에서 혈호방은 훗날 사파오패, 즉 사파에서 가장 큰 다섯 문파 중 한자리를 차지한 자들이었으니까. 식사를 마친 후, 기무혁은 두 사람에게 설거지를 맡기고 방으로 가서 캐리어를 열었다. 그리고 그 한쪽 구석에 들어있는 물건을 확인하고 슬쩍 웃었다. “혹시 몰라서 챙겨오길 잘했네.” 오늘은 정파무림의 후기지수가 아닌, 무림크루 청랑의 일원으로 혈호방을 찾아갈 계획이었다. * * * 카지노 극락(極樂). 제주에서 가장 큰 카지노로 외국인과 내국인 전용, 그리고 무림인 전용 입구가 따로 있었다. 무기를 패용한 무림인들에게 일반인들이 불안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이자, 위험요소를 따로 관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때문에 카지노를 이용하는 일반인들은 무림인 전용 입구 쪽은 신경 쓰지 않는 편이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무슨 코스프레 같은 건가?”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쉿. 듣겠다!” 카지노의 입구를 오가던 사람들이 웅성이며 특이한 행색의 일행을 힐끗거렸다. 빨간 고글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키 큰 남자. 토끼 귀가 달린 하얀 헬멧을 쓴 여자. 그리고 아예 붕대로 얼굴을 칭칭 감은 거구의 남자까지. 등에 푸른 늑대 로고를 새긴 후드티를 입은 세 사람은 기무혁과 김복자, 신강헌이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숙덕거리건 말건, 입구를 향해 나아가는 걸음걸이는 위풍당당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저희들끼리만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어쩔 수 없잖아. 우리 정체를 숨기고 접촉해야 하니까.’ ‘난 이거 좋음. 정체를 감춘 신강헌 더 암흑협객!’ ‘쪽팔려 진짜. 쌍으로 미친놈들이랑 다니려니까…….’ ‘너, 그래 놓고 헬멧에 토끼 귀는 잘만 붙이더라.’ ‘이건 내 아이덴티티거든!’ ‘그만 인정하시지. 우리 셋이 같이 다니는 건 이유가 있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슬금슬금 옆으로 비켜서 자연스럽게 길이 열렸다. 그중에는 인상이 사나운 무인들도 있었지만, 카지노에 놀러 와서까지 수상해 보이는 자들과 엮이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카지노 입구에 도착하자 토끼 헬멧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흠흠! 우리는…….” 보안요원으로 보이는 근육질의 무인이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누군지 듣지도 않고 들여보내줘도 돼요?” “대표님께서 미리 언질을 주셨습니다. 누가 봐도 행색이 독특한 무인들이 찾아오면 안으로 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대답에서 기무혁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남자도 혈호방 소속이군.’ 보안요원에게서 싸구려가 아닌, 단련된 사파무인 특유의 거친 기도가 느껴졌다. 말로는 그냥 들여보내 주겠다고 했지만, 꼼꼼한 눈길로 멀리서부터 자신들을 줄곧 체크한 것이 틀림없었다. “따라오십시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세 사람은 혈호방 무인을 따라 카지노로 들어갔다. 관계자들만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최상층으로 이동했다. 띠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기무혁이 아는 얼굴이 창가에 서서 그들을 맞이했다. “이렇게 밝은 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걸?” 오호(五虎). 혈호방의 다섯 번째 호랑이. 그는 지난번에 암루에서 만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깔끔한 셔츠에 지적인 안경을 쓴 수척한 인상의 남자. 하얀 피부와 창백한 인상까지 더해져 싸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혈호방에서 다섯 손가락에 안에 드는 강자였다. 괴이 중에서도 오래전에 멸종했다고 알려진 흡혈귀가 저러한 모습이지 않을까, 기무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날 기억하나?” “물론. 최근에 그쪽만큼 강렬한 기억을 남긴 사람이 몇 없었거든.”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오호가 다른 두 사람에게도 눈짓으로 인사를 하더니 자리를 권했다. “다들 앉으시죠. 술이나 차 중에…… 이런, 아쉽게도 드실 수가 없겠군.” 오호는 세 사람에게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고글과 헬멧, 붕대로 얼굴을 감추고 온 그들에 대한 비웃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 새끼가?’ ‘여전히 재수 없어.’ 신강헌과 김복자는 속으로 발끈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반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기무혁이 이미 상대가 도발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오호가 기무혁에게 물었다. “지난번엔 청랑의 막내라고 하지 않았었나?” “거짓말이었어. 사실 내가 청랑의 대장이야.” 작년 여름. 암루에서 기무혁이 싸우는 모습을 본 오호는 그를 혈호방으로 스카웃하려고 했고, 기무혁은 거절했다. 그때 기무혁은 모두에게 들으란 듯 자신이 청랑의 막내이며, 크루원들 중에서도 가장 약하다고 말했었다. 오호는 그것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그땐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 혈호방은 일 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제주도까지 세력을 뻗칠 만큼 조직의 규모를 빠르게 키웠다. 오호는 그 안에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황숙수에게 듣기로는 굵직한 사업에는 오호가 대부분 관여돼 있다고 했다. 그가 기무혁을 빤히 바라보며 웃었다. “왠지 그럴 것 같았어. 누구 밑에 있을 성격처럼 안 보였거든.” 고글을 꿰뚫을 듯한 시선이었으나, 기무혁은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잖아?” “맞는 말이야. 그걸 모르고 가끔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이 있거든.” “일부러 상대를 무례하게 만들어서 잡아먹는 건 아니고?” “…….” “…….” 기무혁은 대답 없이 웃고만 있는 오호를 빤히 바라봤다. 그는 이렇게 묻고 싶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 너희랑 관련이 있나?’ 전생의 기무혁은 환몽 혈사로 부모님을 잃었다. 그로 인해서 삶이 송두리째 망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혈호방이 환몽과 관련돼 있다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섣불리 혈호방을 건드릴 때가 아니었다. 기무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피차 바쁘니 용건만 말하지. 카지노 아래에 있는 지하투기장을 이용하고 싶다.” 그는 어설프게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봤자 상대에게 금세 들통 날 테니까.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숙수가 연락해서 자기 지인들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기에 왠지 그럴 것 같더군. 설마 그 지인들이 청랑일 줄은 몰랐지만…….” 거짓말이었다.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면 입구에서 혈호방의 무인이 자신들을 이렇게 쉽게 통과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이자는 황숙수와 우리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다. 어쩌면 내 정체도…….’ 하지만 기무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오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충고하자면 비무도박은 권할 만한 취미는 아니야. 피에 무감각해지는 것만큼 무인에게 위험한 것도 없거든.” “방파에 혈(血)이 들어가는 사파조직 간부의 충고라서 그런가,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하하하하-!” 처음으로 크게 소리내 웃은 오호가 몸을 바짝 당겨서 기무혁과 거리를 좁혔다. 그래봤자 고글에 비치는 것은 자신의 짜증이 치민 표정뿐이겠지만. “지난번에도 느꼈던 건데, 그쪽 언행이 상당히 불량해.” “댁이 날 얕잡아보는 건 아니고?” “호랑이가 늑대를 무서워해야 할까? 보통은 그 반대일 것 같은데.” “이쪽은 호랑이도 물어뜯는 늑대라서.” “하하! 그 이빨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고 싶은데?” 화아아악! 순간적으로 기파가 터져 나왔다. 오호는 눈을 사납게 뜨며 더더욱 기무혁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 “…….” 상대의 숨결마저 느껴질 거리.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신강헌이 아주 천천히 몸을 풀었고, 김복자도 언제든 술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먼저 표정을 풀고 물러난 쪽은 오호였다. 몸을 뒤로 기댄 그는 언제 분노했냐는 듯 다시 싱글거리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나는 볼수록 그쪽이 흥미로운데, 여전히 혈호방에 관심 없나?” “조금씩 관심이 생기긴 하는데……. 그쪽에서 반길지는 모르겠네.” 너희들이 환몽과 관계돼 있다면 그 관심의 방향이 바뀔 테니까. 기무혁은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오호는 이 대화가 즐겁다는 듯 생글생글 웃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겠다는 말로 이해하지. 오랜만에 즐거운 대화였지만…… 일 얘기로 돌아가서, 지하투기장을 이용하게 해주면 그 대가로 뭘 줄 거지?” 처음부터 오호가 순순히 출입증을 내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때문에 기무혁은 처음부터 그가 거절할 수 없는 패를 가져왔다. “날 지하투기장 선수로 등록시켜줘.” “……뭐?” 처음으로 오호의 표정에 놀랐다는 감정이 스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으니까. 자존심 강한 무인들이 지하투기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기에, 저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진심인가?” 그러자 기무혁이 보란 듯 자신의 검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역대급으로 흥행시켜 주지.”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오호가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93화. 어째서? “하하하하-!” 오호는 이렇게 진심으로 웃어본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자신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구는 무인들이야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려움을 숨기면서 허세를 부리거나, 겉모습만 보고 얕잡아보는 멍청이들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앞에 앉아있는 고글을 쓴 늑대는 달랐다. 털을 바짝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면서 자신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방심하면 정말 물어뜯기라도 할 듯이. 오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흥행은 하겠어. 그만한 실력에 스타성까지 갖췄으니 관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도 이상하지 않지.” 그가 소매를 걷자 팔뚝에 포효하는 붉은 호랑이 문신이 드러났다. 혈호(血虎)를 드러냈다는 것은 지금 하는 이야기에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나 비즈니스적인 계산과는 별개로 의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자존심 강한 검객들은 자신의 검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을 싫어했으니까.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나?’ 오호의 눈빛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기무혁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내가 새로운 경험을 워낙 좋아해서.” 지하투기장의 관객보다 선수로 참가하는 편이 환몽을 찾는 데 훨씬 더 유리할 테니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치기어린 무인의 호승심으로 포장했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기무혁을 바라보던 오호가 떠보듯 말했다. “투기장을 만만히 보지 않는 게 좋아. 재미로 참가했다가 팔다리가 잘려나가도 보상해주지 않거든.” “그럼 내가 자른 팔다리도 보상해 줄 필요 없겠네?” 그 자신감 넘치는 반문에 오호는 또 다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못 말리겠군. 좋아. 내 권한으로 바로 투기장 선수로 등록시키도록 하지.” “조건이 하나 있어.” “왜 조건을 그쪽에서 걸지? 부탁하려고 온 입장이 아니었나?” 황당해하며 투덜거리는 오호였지만, 기무혁은 개의치 않고 조건을 말했다. “투기장에 있는 검객들이랑 싸우게 해줘. 이상한 서커스에는 흥미 없으니까.” 기무혁은 환몽이 자신을 직접 찾아오게 할 생각이었다. 이곳에 있는 검객들 중 하나가 환몽을 들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으니까. 하지만 오호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싸늘해진 표정이 되었다. “원하는 싸움만 하겠다? 비무대회라도 나가는 줄 아는 건가?” 지하투기장에는 다양한 룰이 존재했다. 일 대 다수, 산공독을 먹고 싸우는 개싸움, 철창 안에 맹수를 풀어놓거나, 더 나아가 괴이와 싸움을 붙이기까지. 독과 암기 사용에 제한이 없으며, 관객들을 흥분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벌였다. 그러니 검객들과만 싸우겠다는 기무혁의 조건은 그가 장담한 것과 다르게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 말을 오해했나 본데.” 물론 기무혁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원하는 것은 일대일의 정당한 대결이 아니었다. 시간만 오래 걸릴 뿐더러, 환몽의 주인이 겁먹고 나서지 않으면 곤란해지니까. “상대가 백 명이든 천 명이든 좋으니까 이곳에 있는 검객 전부와 한 번에 싸우게 해달라고. 다른 룰은 너희가 정해도 상관없어.” “……!” 말문이 막힌 오호의 입꼬리가 이내 씰룩이며 올라갔다. 외지에서 온 검객과 지하투기장의 검객들 전원이 붙는 싸움이라? 머릿속에서 다양한 그림이 그려졌다. 수십 명을 철창에 몰아넣고 싸우게 할 수도 있고, 승자전으로 이긴 자가 계속해서 싸우게 만드는 방식도 좋으리라. “암기와 독, 약이 허용되고 기관이 설치된 룰도 상관없나?” “공중전이나 수중전도 오케이.” 기무혁의 대답에 오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는 확실히 흥행할 수 있는 카드라고 판단되자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호가 기무혁에게 악수를 청하며 씩 웃었다. “늑대를 위한 특별한 만찬을 준비하지.” 기무혁이 그의 손바닥을 옆으로 툭 쳐내며 도발했다. “기대한 것만 못하면 그쪽을 대신 물어뜯을 수도 있어.” “하하! 이거 정말 제대로 준비해야겠는데!” 협상이 타결되었다. 오호는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어 세 장의 허가증을 발급해 가져오도록 했다. 잠시 후, 카지노 입구에서 보았던 무인이 허가증을 가져왔다. 검은 바탕에 붉은 호랑이가 그려진 카드는 카지노의 모든 시설, 호텔, 지하투기장까지 이용할 수 있는 VIP이용권이었다. “경기 일정이 잡히면 연락이 갈 거다. 그 전까지 마음껏 극락을 즐기도록 해.” 용무를 마친 기무혁이 카드를 받아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잔뜩 긴장해 있던 신강헌과 김복자도 따라 일어났다. 그대로 뒤돌아서 나가려는데, 등 뒤에서 오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늑대. 고글 안의 얼굴 말이야. 경기 중에 드러나도 괜찮겠어?” 웃음기어린 목소리엔 어떤 의도가 깔려 있었다. 네 얼굴이 사람들 앞에 까발려지면 감당할 수 있겠냐는 질문. ‘역시 내 정체를 짐작하고 있군.’ 엘리베이터 앞에서 돌아선 기무혁이 오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의 고글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투기장에 직접 나서기라도 하시게? 그 정도는 해야 이걸 벗길 가능성이 생길 텐데.” “…….” 오호는 말없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마치 그 안을 보는 즐거움은 나중으로 미루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음에 식사나 한번 같이 하지.” 기무혁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들어서며 기무혁은 유리에 비치는 오호를 바라봤다. ‘나랑 다시 안 보는 편이 좋을 거야.’ 만약 혈호방과 환몽이 관계된 것이 밝혀진다면, 오호는 자신의 가장 분노한 얼굴과 마주하게 될 테니까. * * * 오호를 만나고 내려온 일행은 혈호방 무인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지하투기장으로 향했다. 그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신강헌이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미친……. 이렇게 커?” 음산하고 어두컴컴한 공간을 예상했던 것과 달리, 대천문에서 운영하던 클럽의 수십 배쯤 되는 규모의 화려하고 시끄러운 공간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혈향이 역겨울 정도로 진하게 난다는 것과, 멀리서 비명과 환호가 섞여서 들려온다는 것,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 중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였다. 김복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신강헌을 놀렸다. “녹슨 지하실이라도 나올 줄 알았어? 이런 투기장에서 쓸어 담는 돈이 얼마나 많은데 허름하게 관리하겠냐?” “……얼마나 많은데?” “못해도 여기 위에 있는 카지노보다 적진 않을걸.” 그 말에 신강헌이 거짓말이지? 라는 얼굴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기무혁은 출입증 카드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이렇게 큰 투기장은 웬만한 돈 가지고는 입장도 못 해. 카지노에서도 VIP들에게만 공개하는 곳이니까. 그만큼 하루에 쓰는 돈도 어마어마하지.” “왜 이렇게 잘 아냐고 물어보면 또 대답 안할 거지?” 씨익 웃어준 기무혁은 대답 대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혈호방 무인은 입구까지만 안내해주고 돌아가고, 세 사람은 투기장 안으로 향했다. 투기장에서는 외국인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괴력을 자랑하는 거구의 백인, 섬뜩한 눈빛을 가진 흑인 격투가, 각 나라 고유의 무공을 익힌 고수들. 그들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도 다양한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옛날 생각나네.’ 전생에 기무혁도 몇 달 정도 투기장을 전전하던 적이 있었다. 돈이 몹시 궁할 때였고, 자신의 실력을 사람들 앞에서 증명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불법 인공단전 시술을 한 몸으로는 공식 비무대회에 나갈 수 없었기에, 올라갈 수 있는 비무대는 이런 지하투기장뿐이었으니까. ‘다시 떠올려 봐도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지만…….’ 죽이고, 죽을 뻔하고,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거나 먼저 뒤통수를 치고, 광기로 가득한 관중들의 함성에 떠밀려 숨을 헐떡이는 적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던……. “기무혁. 너 왜 그래?” “야! 미친놈아!” 옆을 돌아보니 김복자와 신강헌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기무혁이 뒤늦게 되묻자 김복자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너 방금 표정이 사람 하나 담글 것처럼 살벌했거든?” “살기도 장난 아니었다고. 원수라도 본 줄 알았네.” “……잠깐 딴생각 좀 했어.” 기무혁은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냈다. 이틀간 사파조직 하나를 부수고, 암흑가의 거물을 만나고, 지하투기장까지 오니 스스로도 모르게 옛날 모습이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별거 아냐.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 “뭐, 그럼 다행이고…….” “나중에 지랄하지 말고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해.” 평소처럼 가볍게 넘어갔지만, 알게 모르게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을 때였다. “고글살인마 님? 고글살인마 님 맞으십니까?” 지하투기장에 어울리지 않는 소심한 인상의 남자가 세 사람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허리춤에 찬 검이 아무렇게나 덜렁거리는 모습을 보니 제대로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돈이 많아 보이지도 않았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기무혁이 암루에서 얻은 ‘고글살인마’라는 별명을 알고 있었다. 기무혁이 자신의 고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날 부른 건가?” “안녕하십니까! 투기장 선수 매니저인 박광태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고글살인마 님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 박광태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상대에게 대답이 없자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혹시 아니신가요? 고글살인마 선수님이랑 인상착의가 똑같은데, 대표님이 직접 계약하신 흥행 보증 선수라고…….” ‘오호, 이 새끼가?’ 기무혁은 치미는 욕을 참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별명이었지만, 눈앞의 남자가 잘못한 것은 없었으니까. “……내가 맞는 것 같네. 고글살인마.” 옆에서 신강헌과 김복자가 웃음을 꾹 참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고, 다행입니다. 첫날이시니 제가 이곳저곳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세 사람은 박광태를 따라서 지하투기장 내부를 구경했다. 지하투기장은 여러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고, 총 지하 5층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박광태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큰 경기가 열린다고 설명했다. “지금 계신 곳은 지하 1층입니다. 저희 투기장에서 가장 소프트한 경기가 열리는 구역이죠.” 와아아아아아! 관중들의 함성을 따라 세 사람의 시선도 움직였다. 철창에서 피투성이가 된 두 남자가 짐승처럼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한 명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음에도 경기는 멈추지 않았다. 무자비한 주먹질과 발길질이 쏟아졌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살기로 가득한 함성 사이로 박광태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맨몸 무투장입니다. 경기 중에서 가장 덜 잔인한 곳으로 사망률도 낮은 편입니다. 저렇게 죽이라고 난리지만, 실제로 사망률은 절반도 안 됩니다.” 그 설명을 들은 김복자가 시니컬한 표정으로 관중들을 둘러봤다. “돈 많은 살인사주범들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네.” 반면 신강헌은 침묵했다. 다른 사람이 옆에 있으니 과묵한 도객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눈은 인간을 싸움닭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행태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 분노를 조금이라도 해소해주지 않으면 사고를 칠 것 같아, 기무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박광태에게 질문했다. “여기 강제로 끌려와서 싸우는 사람은 거의 없다던데. 빚을 감당 못 해서 투기장에 뛰어들거나 현상수배를 피해 신분을 바꾼 범죄자들도 많다지?” 그 말에 박광태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잘 아시는군요. 혹시 전에 와보신 적 있습니까?” 기무혁은 대답하지 않고 박광태를 지나쳐서 걸어나갔다. 와아아아아아!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폭력이 주는 원초적이고 말초적인 쾌감에 절여진 관객들이 함성을 지르고 욕설을 퍼부었다. 돈을 잃거나 딴 자들의 광기. 그 광기에 떠밀려 사람을 죽이는 무인들의 광기. 혹은 살인 자체에 중독된 악인들이 내뿜는 희열에 찬 살기.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투기장을 둘러보던 기무혁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못 박힌 듯 멈췄다. “……어째서?” 오호의 살기어린 눈빛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눈동자가 태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가면으로 얼굴의 절반을 넘게 가리고 있었지만 확실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그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상상을 수천 번도 넘게 했었으니까. ‘탈백검 구현우!’ 저기 있는 남자는 환몽으로 그의 부모님을 살해한 검객이었다. 94화. 결과로 보여주겠소 기무혁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구현우를 바라봤다. 그는 얼굴의 반만 가리는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 아래로 드러난 입매는 무뚝뚝한 성격을 대변하듯 일자로 꾹 다물어져 있었고, 정리하지 않은 턱수염은 지저분했다. ‘저자가 왜 여기 있지?’ 탈백검 구현우. 중소문파의 문주이기도 한 그는 삼십 대 중반의 나이로 제주도를 대표하는 절정고수 중 한 명이었다. 기무혁은 어딘가로 걸어가는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생각했다. ‘당신은…… 혈사를 막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나?’ 혈사를 막으려고 나섰지만 오히려 환몽에 홀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해치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후 자결한 비운의 검객. 기무혁은 이렇게 구현우에 대해 줄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상대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투기장에서 가면을 쓴 그를 본 순간, 자신이 알고 있었던 정보가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어, 고글살인마 님?” 박광태가 기무혁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더니 뭔가 발견하고는 눈치껏 설명을 시작했다. “혹시 저기 가보고 싶으십니까? 투기장 선수들이 이용하는 라운지입니다.” 선수용 라운지 입구에는 두 마귀가 서로의 심장을 칼로 찌르는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구현우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기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가 봐도 되나?” “물론이죠! 그런데 죄송하지만 투기장 선수분들과 매니저 외에는 입장할 수가 없어서요. 여기 두 분은 대기해주셔야 하는데…….” 박광태가 김복자와 신강헌을 돌아보며 곤란한 표정을 짓자, 기무혁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너희는 매니저랑 주변 구경이라도 하고 있어. 난 잠깐 저기에 다녀올 테니까.” “예? 처음 가시는 건데 제가 안내를 해드려야…….” 기무혁이 박광태를 돌아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나 혼자서 천천히 구경해보고 싶은데.”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거부해선 안 될 것만 같은 압박감이 느껴져 박광태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벌한 무인들을 매일 상대하다 보니 눈치 하나는 빠른 듯했다. “아이 그럼요! 천천히 둘러보고 오시죠! 두 분께는 제가 투기장을 어떻게 즐기셔야 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기무혁은 박광태를 따라서 가는 두 사람에게 전음을 보냈다. [혹시 모르니까 탈출할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해 줘.] [너 설마 바로 사고 치려고?] [그냥 만약의 사태까지 대비해 두자는 거지.]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두 사람이 떠나고, 기무혁은 라운지로 향했다. ‘만약 구현우가 환몽을 가지고 있다면…….’ 기무혁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쟁탈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 * * 선수용 라운지 내부는 공항의 VIP라운지와 비슷했다. 편하게 쉴 수 있는 소파와 안마의자가 있고, 수면실과 씻을 수 있는 공간도 보였다. 라운지 한쪽에는 언제든지 먹을 수 있도록 음식과 주류가 제공되고 있었다. ‘내가 아는 투기장보단 고급이지만…… 분위기는 어딜 가나 비슷하군.’ 라운지는 술 냄새와 살기가 진동하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꽤 조용했다. 마주 앉은 사람을 당장 몇 시간 후에 죽여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은, 정답게 수다를 떨기에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었으니까. “뭐야, 신입이냐?” “요즘엔 면상을 가리는 게 유행이야?” 얼굴에 거친 흉터를 지닌 사내들이 기무혁이 들어오자마자 시비를 걸었다. 초장에 기를 죽여 놓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기무혁은 남자들이 무안해할 정도로 깔끔히 무시하고 옆을 지나쳤다. 그의 시선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구현우에게 고정돼 있었다. “이 새끼가 귓구멍이 막혔나!” 기무혁이 구현우의 뒷모습을 쫓아서 걸음을 옮기는데, 남자들 중 하나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아니, 잡아채려고 했다. 짜악! 남자는 자신이 어떻게 당한지도 모른 채 바닥에 쓰러졌다. 뒤늦게 얼얼한 뺨의 통증이 느껴졌다. “으으……!” 화가 났지만 감히 소리치지는 못했다. 방금 전 기무혁이 휘두른 게 손이 아니라 칼이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긴 어렵지 않았으니까. “…….” “…….” “…….”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들이 늘어나는 것이 느껴졌지만, 기무혁은 그저 천천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구현우. 너는 어떤 인간이지?’ 기무혁은 치미는 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처음 혈사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기무혁은 부모님의 원수가 사람들을 구하려고 한 협객이었다는 사실에, 그리고 이미 죽었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분노했다. 그럼에도 복수하는 상상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수백 번, 수천 번 구현우를 죽이는 꿈을 꿨다. ‘하지만 나중에는 당신을 이해하려고 했어.’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르면서 동료 낭인들 중에서도 괴이에 홀린 이들이 여럿 생겼고, 간혹 자신이 직접 그 명줄을 끊어준 적도 있었다. 독고귀 기무혁은 괴이에 홀린 사람들이 어떻게 망가지고,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숱하게 목격했다. 괴이에 잡아먹힌 뒤에는 인간의 의지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될 때마다 구현우에 대한 살의도 조금씩 옅어졌다. 그리고 회귀를 한 뒤로는 부모님 두 분 모두 건강하게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오래된 분노를 잠재웠다. 하지만 탈백검 구현우가 사실은 악인이었다면? 그가 부모님을 살해한 것이 검에 홀린 게 아닌 스스로의 의지였다면? “……그 숱한 밤에 했던 상상이 현실이 될지도 모르지.” 기무혁의 살기 어린 중얼거림에 몇몇이 그를 힐긋거렸다. 잠시 후, 기무혁은 구현우와 먼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그는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몇 번을 말해! 네 경기는 재미가 없어서 관객들이 돈을 안 건다고!” 키가 작고 뚱뚱한 매니저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보다 훨씬 체격이 큰 구현우의 뒷모습이 무척 초라해 보였다. “……이번엔 재미있을 거요.” 구현우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나 뚱뚱한 매니저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또 속을 줄 알고? 너 때문에 위에서 얼마나 날 쪼아대는지 알아? 그냥 방출하라고 난리야!” “이번에는…….” “그놈의 이번에는! 이번에는! 이번에는! 사람 하나 죽이지도 못하면서 투기장에는 뭐 하러 기어들어왔냐고!” “…….” 구현우는 고개를 숙인 채 상대의 분노를 묵묵히 받아내고만 있었다. 그때 스피커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지옥견과 백면검객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관람객분들께서는 늦기 전에 베팅을 마쳐 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흰색 가면을 손으로 쓸어내린 구현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결과로 보여주겠소.” 그는 라운지 내부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투기장으로 내려갔다. “하! 지랄하고 있네. 목소리만 깔면 단 줄 알아? 막장 인생에 사연 없는 놈이 어디 있다고……. 너는 또 뭔데?” 뚱뚱한 매니저와 눈이 마주친 기무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TV가 잘 보이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화면이 곧 싸움이 시작될 장소를 비추고 있었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반경 20미터 정도의 철창이었다. “선수들이 입장합니다! 먼저 14승 0패 14킬의 지옥견입니다! 화끈하기로는 투기장에서 한 손에 꼽는 미친놈이죠!” 지옥견이라고 불린 사내가 등장하자 관중들의 함성이 쏟아졌다. 얼굴 가득 문신을 새긴 지옥견이 관중들을 향해 포효했다. “반대편에서 백면검객이 입장합니다! 투기장의 신사! 15승 0패 무킬의 신기록을 써나가고 있는데, 과연 지옥견을 상대로도 그가 대기록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은근히 빈정거리는 듯한 소갯말이 끝나기도 전에,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두 선수 준비해 주십시오! 베팅이 끝나면 경기가 시작되는 것 아시죠? 이제 10초 남았습니다!” 투기장 가운데에서 두 무인이 마주 서고, 천장에 붙어있는 전광판에는 금액이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단순히 승패를 맞추는 것부터 몇 분 안에 승부가 날지, 생사여부, 어느 쪽 팔다리가 날아갈지 따위의 조건부 베팅까지. 두 사람만 볼 수 없는 전광판 위로 선수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숫자가 빠르게 쌓여갔다. “자! 이제 베팅을 마무리합니다! 5, 4, 3, 2, 1, 경기 시작!” “으아아아악!”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지옥견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일류고수도 방심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 순식간에 접근한 지옥견이 칼을 휘둘렀다. “지옥견이 저렇게 빨랐나?” “대체 약을 얼마나 꽂아댄 거야?” 라운지의 무인들이 지옥견의 움직임을 보며 놀랄 때 기무혁은 다른 것을 보았다. 바로 구현우의 검이었다. ‘요검이 아니야.’ 채앵! 구현우가 상대의 공격을 막아낸 검은 평범한 철검이었다. 영안이 트인 기무혁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환몽은 구현우에게 없었다. 하지만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다.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구현우가 일부러 봐주는군.’ 지옥견을 몇 번이나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구현우는 방어적으로 싸우며 공격을 막고 쳐내기만 했다. 우우우우우! 곧바로 야유가 쏟아졌다. 치고받으며 피를 쏟아내는 걸 원하는 관중들에게 구현우의 완성도 높은 검술은 하품만 나올 뿐이었다. “이번에는 다르기는! 저 씨부럴 놈이!” 뚱뚱한 매니저의 걸쭉한 욕설이 터져 나온 순간, 공격이 계속 막히던 지옥견이 무리하게 돌진했다. “으아아아아!” 그 순간 기무혁이 눈이 커졌다. 놀랍게도 지옥견의 공격이 통했기 때문이었다. 촤아아아악! 핏물이 허공으로 튀었다. 경기가 지루해지던 찰나에 처음으로 관중들에게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아! 그러나 기무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쪽은 구현우가 아니라 지옥견이어야 했으니까. ‘분명히 막을 수 있었는데…… 왜?’ 잠시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회자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백면검객 절체절명의 위기! 지금부터 딱 10초간 추가 베팅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집니다! 과연 그는 이대로 쓰러질 것인가, 아니면 역전을 이뤄낼 것인가-!”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광판에 적힌 숫자가 미친 듯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 중에서 수수료를 제외하고 5퍼센트를 승자가 받아간다. 살아남기만 하면 패자도 1퍼센트를 받을 수 있었다. 지극히 비합리적인 수치이지만, 그 액수만으로도 투기장에서 상대를 죽일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죽여 버려! 백가면 저 새끼, 평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고!” “역배 10배 가즈아아!” 라운지에서 지켜보던 무인들도 순식간에 광기에 휩싸였다. 그들 또한 다른 선수들의 경기에는 돈을 거는 도박중독자들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구현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채채채챙! 지금까지는 흘려보내던 공격을 모두 막아냄과 동시에 지옥견의 사방으로 검을 찔러넣었다. 가슴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빠른 움직임이었다. 다 이겼다고 생각했던 지옥견은 당황하며 주춤하다가 몸 곳곳에 상처를 입었다. 팔다리가 베이고 비틀거리다가 결국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다. 피를 잔뜩 본 관중들은 한마음이 되어 소리쳤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어마어마한 광기의 외침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상대의 숨통을 끊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구현우는 쓰러진 지옥견 앞에 검을 들고 섰다. 피로 물든 가슴을 왼손으로 틀어막고, 오른손에는 철검을 들어 상대를 겨눴다. “사, 살려줘…….” 지옥견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공포에 질린 상대가 바들바들 떨었다. 관중들의 죽이라는 함성은 더욱 거세졌다. 사회자도 흥분한 목소리로 백면검객에게 살인을 부추겼다. “백면검객이 치른 경기 중 최고 베팅액을 경신했습니다! 킬을 달성할 경우에는 2퍼센트 추가 보너스가 지급됩니다! 이래도 안 죽일 건가요?” 그 순간 지옥견을 물끄러미 내려보던 백면검객이 철검을 휘둘렀다. 푸욱! 지옥견의 얼굴 옆에 검을 꽂아 넣은 구현우는 전부 끝났다는 듯 관객들을 향해 돌아서며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인사보다는 조롱처럼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우우우우우우우!! 살의가 해소되지 않은 관중들이 온갖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지만, 구현우는 그들을 남겨두고 비틀거리며 퇴장했다. “저런 병신 같은 새끼!” “그 보너스 나한테 줘! 내가 지금 가서 목을 따줄게!” 흥분한 라운지의 무인들이 구현우를 욕하고 비난하는 와중에, 기무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라운지를 떠났다. “……당장 죽여야 할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 밖으로 나온 기무혁은 직접 구현우를 찾아 나섰다. 95화. 이게 내 신념이거든 기무혁은 구현우가 곧바로 의무실로 갔을 거라고 예상했다. 지옥견을 상대하며 입은 상처가 결코 얕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피가 많이 튀도록 일부러 깊게 베였어. 그 와중에 내장은 상하지 않도록 미세하게 조절까지 하면서…….’ 구현우는 관중들이 베팅액을 늘리도록 일부러 자신의 몸에 상처를 만들었다.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해야 많은 돈이 걸릴 것이고, 자신이 가져가는 몫도 많아질 테니까. 자기 실력에 엄청난 확신이 없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고, 만약 그렇다고 해도 정신 나간 짓인 건 마찬가지였다. “아오! 백면검객 그 새끼 포권하는 거 봤어?” “진짜 할 수만 있으면 내 손으로 죽여 버리고 싶다…….” “돈 줄 테니까 누구든 저 가면 벗기고 죽여 줄 놈 없냐고!” 돈을 잃은 관객들의 불만과 원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기무혁은 상대를 죽이라고 소리치는 관중들을 향해 엿 먹으라는 듯 포권을 취하던 구현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건 뭐랄까……. 기무혁은 익숙한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 평소에는 남에게 듣기만 하던 단어를 중얼거리며, 기무혁은 의무실로 들어갔다. “끄으으…….” “내 팔! 내 팔 어디 있어-!” 의무실 내부에는 팔다리가 잘리거나 중태에 빠진 무인들이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 대부분이 비무도박에서 이긴 승자들이었다. 패배자들은 대부분 죽어서 이곳까지 올 일이 없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부상자는 아닌 것 같은데?” “병문안 왔습니다.” “네?” 황당해하는 간호사를 그대로 지나친 기무혁은 한쪽에서 상처를 스스로 치료하고 있는 구현우를 발견했다. 그는 피가 튄 흰색 가면을 그대로 쓰고 있었는데, 상의를 탈의한 채로 거울을 보며 가슴에 금창약을 치덕치덕 바르고 있었다. “음?” 응급처치를 대충 마치고 붕대를 감던 구현우는 낯선 시선을 느끼고 옆을 돌아봤다. 붉은 고글에 복면을 쓴 남자가 자신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 “신입인데. 방금 전 당신 경기를 보고 감동 받았거든.”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구현우가 말없이 상대를 바라봤다. 기무혁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 고글과 마스크를 쓴 무인들이 아무 말도 안하고 서로 마주 보고 있자 의사와 간호사들이 슬금슬금 거리를 뒀다. 의무실에서도 종종 살인이 벌어지는 곳이 지하투기장이었으니까. 그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구현우였다. “사인이라도 해주길 바라나?”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썰렁한 농담이었다. 덕분에 팽팽했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조마조마하게 그들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기무혁은 그것이 주변을 신경 쓰는 구현우의 배려임을 느꼈다. “사인은 됐고. 궁금한 거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자신에게 구태여 질문을 하는 상대가 신선하다는 듯, 구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봐.” “왜 상대를 안 죽였지?” “너도 나 때문에 돈을 잃었나?” 퉁명스레 되묻는 말에 기무혁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차가웠다. “지옥견. 죽어도 싼 놈이던데.” “…….” 기무혁은 의무실까지 오면서 구현우의 상대였던 지옥견에 대해서 사람들이 떠드는 것을 들었다. 지난번 경기에서는 항복하려는 상대의 혀를 잘라 말을 못하게 한 뒤 잔인하게 죽였고, 그 전에는 상대의 목을 매달아 철창에 걸어두고 일부러 천천히 죽인 적도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살인에 쾌감을 느끼는 인간말종의 전형이었다. “양심에 가책을 느낄 만한 상대가 아니었어. 게다가 큰 돈까지 벌 기회였잖아. 그런데 왜?” 백면검객이 살인을 무서워하는 겁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무혁은 안다. 탈백검(奪魄劍)이라는 별호는 겁쟁이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님을 말이다. “시비 걸러 온 것은 아닌 것 같고. 진짜 궁금한가 보군.” 구현우가 가면 아래 꺼끌꺼끌한 수염을 쓸어내렸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 혹은 단순히 내 이득을 위해서는 살인하지 않는다. 그게 무인으로서 내 신념이다.” 신념(信念). 지하투기장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 중 하나이리라. 구현우는 상대가 비웃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기무혁은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진지해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상대가 인간 취급을 해줄 필요도 없는 쓰레기라 해도?” “기준에 예외를 두는 순간 신념은 의미를 잃지.” “그렇군.” 기무혁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대답을 위선이라고 매도하기엔, 백면검객이 지하투기장에서 16승을 거둘 동안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말의 무게를 뒷받침하고 있었으니까. “당신. 협객이군.”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구현우가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재밌는 신입이 들어왔구나. 이런 곳이랑은 안 어울리는데.” 구현우가 벗어두었던 상의를 입었다. 그 역시 상대가 평범한 무인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절정고수쯤 되면 상대가 기도를 대놓고 드러내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읽어내기 마련이니까. “하긴, 여기까지 온 놈들 중에 사연 없는 놈 있을까마는.” 응원이라도 하듯 기무혁의 어깨를 툭 친 그가 지나쳐 걸어갔다. “나랑은 되도록 만나지 않기를 바라지.” 기무혁은 그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작게 투덜거렸다. “누가 할 소리를.” 상대는 고집스러운 정파의 무인이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빴다. 자신이 좋아하는 종류의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신념을 말할 때 구현우의 눈빛은 이미 아슬아슬해 보였다. * * * 기무혁이 돌아오자 김복자와 신강헌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추궁했다. “생각보다 너무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분명 누구 하나 담그고 올 줄 알았는데……. 아, 조용히 처리했구나?” “얌전히 구경만 하고 왔거든.” 그럼에도 피가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느니, 역시 프로는 다르다느니 하면서 둘이 수군대자 기무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하! 정말 재밌는 친구분들을 두셨군요.” 그들의 대화를 농담으로 생각한 박광태가 웃으면서 슬쩍 끼어들었다. “고글살인마 님. 연락처 하나만 남겨주시겠습니까? 경기가 잡히면 일정을 알려드려야 해서요.” 기무혁은 황숙수를 통해서 미리 구해온 버너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때마침 그때 박광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박광태가 굽실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예! 대표님! 아, 지금 옆에 계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무혁이 전화를 건네받자 오호의 웃음기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투기장은 재밌게 즐기고 있나?] “용건이 뭐지?” 기무혁이 하늘 같은 대표님이자 사파의 거물인 오호에게 퉁명스레 대꾸하는 모습에, 박광태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전화통화를 하는 두 사람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황숙수를 통해서 계약서를 보냈으니 확인해 보라고.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이 추가된 것도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추가 조건?” 기무혁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되묻자 오호가 설명을 덧붙였다. [네 스타성이 어느 정도 되는지 확인해봐야 우리도 얼마나 판을 키울지 결정할 것 아니겠어? 그런 의미에서 데뷔전을 한 경기 치렀으면 하는데…….] 오호는 자존심이 상한 기무혁이 혹시라도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합당한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하지만 오히려 기무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곧바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 데뷔전 상대. 내가 지목해도 되나?” * * * “다음 경기는 오늘 처음으로 투기장에 등장한 신예의 데뷔전입니다! 정보가 없을 때 가장 높은 배당을 노려볼 수 있는 것, 다들 아시죠? 고글살인마를 소개합니다-!”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기무혁이 통로를 통과해 밖으로 나오자 관중들의 야유와 환호성이 뒤섞여 들려왔다. 와아아아아! 우우우우우! 반경 20미터의 원형 케이지. 그 바깥에는 관중들이 흥미를 띤 얼굴로 자신을 구경하고 있었다. 기무혁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주변만 둘러보자 사회자가 흥을 돋웠다. “고글살인마는 첫 시합인 만큼 긴장한 듯 보이네요. 왜냐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 알려드릴까요? 이 신예가 자신의 데뷔전 상대를 직접 지목했습니다! 그는 바로-!” 그 순간 반대편 통로가 열리며 짐승 같은 포효가 들려왔다. “으아아아아아!” 얼굴이 험악한 문신으로 가득한 거구의 남자가 칼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러자 기무혁이 등장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큰 함성이 쏟아지면서 순식간에 열기가 더해졌다. “전 경기의 패배로 스트레스가 잔뜩 쌓인 투기장의 미친개! 지옥견입니다!” 지옥견이 다시 경기에 나오자 일부 관중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너 때문에 전부 잃었다, 똥개새끼야!” “이번에도 지면 내 손에 죽어!” 동시에 전광판의 액수가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지옥견의 승리에 걸리는 돈이 훨씬 더 많았다. 백면검객에게 패배하기는 했지만, 지옥견은 투기장에서 유명한 실력자인 데다 전 경기에서 입은 부상도 치명상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후우, 후우우-.” 눈이 벌겋게 물든 지옥견이 기무혁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그의 얼굴에 새겨진 문신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백면검객에게 패배한 후, 대기실로 돌아간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 때려 부쉈다. 진정하라고 말리던 매니저는 반죽음이 되어서 의무실로 실려 갔다. 잔뜩 독이 오른 지옥견이 살기 띤 미소를 지으며 기무혁에게 말을 걸었다. “어떤 새끼가 날 지명했나 했더니, 첫 경기인 애송이라고? 내가 누군지 모르고 골랐나?” “그냥 아까 경기하는 거 보니까 만만해 보여서 골랐는데.” “이런 개……!” 기무혁은 대충 대답한 후 다시 관중석을 둘러봤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하지만 지옥견은 상대가 막상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자 겁을 집어먹고 피한다고 생각했다. “흐흐흐. 마침 잘됐어. 안 그래도 누구 하나는 죽이고 돌아갈 계획이었거든.” 지옥견은 살인의 쾌감을 즐기는 자였다. 무공을 익히면서 그 충동은 더 강해졌다. 상대가 무공을 익혔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일반인들을 살해하여 수배를 당해, 얼굴에 잔뜩 문신을 새기고 지하투기장으로 숨어든 인생이었다. “그 고글은 천천히 벗겨줄게. 난 누가 우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는 사람이거든.” 지옥견이 킬킬대며 이죽거리는 동안에도 기무혁은 관중석에서 누군가를 찾기만 했다. “자, 그럼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옥견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백면검객을 상대할 때보다 더 빠르다고 자부할 수 있는 속도였다. 살기에 취한 그가 관중들을 향해 외쳤다. “인간을 산 채로 몇 조각 낼 수 있는지 오늘 신기록을 세워주마!” 잠시 후 벌어질 지옥견의 퍼포먼스를 상상한 일부 관중들이 더욱 크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 그리고 그 순간, 드디어 찾던 사람을 발견한 기무혁이 손을 들어서 흔들었다. 정면에서 상대가 자신을 죽이러 달려오는데도 불구하고, 신경쓰지 않고 두 손을 모아서 외쳤다. “죽어 마땅한 놈들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박멸한다! 그게 내게 이득이 되면 좋고, 돈까지 벌 수 있으면 금상첨화지.” 저 멀리서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 하얀 가면이 보였다. 고글과 복면에 가려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에게 씨익 웃어준 기무혁은 눈앞에 들이닥친 지옥견을 돌아봤다. “이게 내 신념이거든.” 96화. 개싸움을 훨씬 더 좋아하지 지옥견은 일부러 칼을 뽑지 않았다. 매의 발톱처럼 구부린 손가락이 기무혁의 복면을 노렸다. “그 주둥이부터 먼저 찢어주마!” 내공이 실린 손톱이 바람을 찢는 소리가 무시무시했다. 쐐애애액! 지옥견은 지난 경기에서 백면검객에게 패배한 것도 모자라 살려달라고 구차하게 빌었다. 상대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을 지목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만큼 얕보였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날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이딴 애송이가!’ 지옥견은 지금껏 백면검객을 제외하고 만났던 모든 상대를 잔인하게 죽여서 투기장의 공포로 군림해 왔다. 철창 안을 피로 흠뻑 적셔서 다시금 그 악명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네가 그 첫 번째 제물이다!” 지옥견의 손가락 끝이 복면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기무혁이 뒤로 눕듯이 허리를 꺾으며 피했지만 곧바로 후속 공격이 따라왔다. 결국 중심이 무너진 기무혁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제기랄!” 다급하게 피하느라 검마저 놓친 기무혁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가 구르는 방향을 따라 지옥견이 휘두른 칼이 연달아 내리 찍혔다. 쾅쾅쾅쾅쾅!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기무혁이 있던 자리를 찍을 때마다 흥분한 관중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잘난 척하더니 시작부터 나려타곤이냐!” 지옥견이 비웃음을 담아 킬킬대며 칼을 휘둘렀다. 나려타곤은 무인들이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동작이었다. 살기 위해서 바닥을 뒹구는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공격을 허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체면보다 실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무혁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슬슬 시작해볼까.’ 한동안 계속 구르기만 하던 기무혁이 허리를 튕겨서 벌떡 일어나며 지옥견에게 덤벼들었다. “이판사판이다!” 그 순간 지옥견이 휘두른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기무혁의 얼굴 옆을 스쳐 지나자 관중들에게는 천운이 그를 돕는 것처럼 보였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다가 운 좋게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고, 냅다 이마로 지옥견의 얼굴을 들이받는 장면까지도 말이다. 빠악! 박치기에 당한 지옥견이 크게 휘청였다. 코가 깨졌는지 쌍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새끼가-!” 그러나 칼을 휘두르기엔 간격이 너무 좁았다. 결국 지옥견도 칼을 내던지고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퍼억! 퍽퍽퍽퍽! 두 무인이 무기를 버리고 달라붙어 맨손박투를 벌이기 시작하자 흥분한 관중들이 소리쳤다. “오오오오! 둘이 박빙이잖아!” “죽여라! 죽여버려!” “하하하하! 역시 족밥들 싸움이 제일 재미있다니까!” 기무혁은 투기장의 관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수준 높은 대결보다 피 터지는 개싸움을 훨씬 더 좋아하지.’ 그래서 딱 그들이 원하는 수준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일검에 지옥견을 베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은 이유였다. 또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줬다가 환몽의 소유자가 겁먹고 숨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지옥개라며? 너네 집으로 꺼져, 이 똥개새끼야!” 기무혁이 두 손으로 지옥견의 머리채를 잡고 연달아 박치기를 해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대를 그대로 철창까지 밀어붙였다. 바닥과 철창에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끄아아악! 이 새끼가!” 지옥견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주먹으로 기무혁의 복부와 옆구리를 연달아 가격했다. 기무혁이 고통스러워하면서 물러났다. “죽인다-!” 바닥에 떨어진 도를 주워든 지옥견이 기무혁에게 돌진했다. 기무혁도 검을 주워들면서 지옥견에게 달려들었다. 우와아아아아아!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흥분한 관중들의 함성이 그들의 살의를 부추겼다. 동시에 휘둘러진 검과 도가 강하게 부딪쳤다. 째앵! 공교롭게도 이번에도 둘 다 손에서 무기를 놓쳤다. 결국 다시 맨손박투가 벌어졌다. “푸하하하하하!” “등신들아! 그럴 거면 뭐 하러 칼 들고 나왔냐!” 관중들은 이 박진감 넘치는 개싸움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들의 눈에는 둘이 고만고만해 보이는 실력에,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은 경기여서 더욱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일부 눈썰미가 좋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극히 소수는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다. “저 미친놈. 뭐하는 거야?” “배당 높아지는 거 봐라…….” 신강헌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고, 김복자는 감탄한 얼굴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기무혁이 일부러 봐주는 것이 뻔히 보였다. 둘 다 옷이 피투성이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저 중에 기무혁의 피는 단 한 방울도 없었으니까. 촤아악! 기무혁의 손톱이 지옥견의 얼굴을 스쳤다. 얼굴에 가득하던 문신이 찢어지고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으아아아아! 이 개새끼가-!” “사람 무는 개새끼는 너지. 나는 똥개 때려죽이러 온 사냥꾼이고.” 피식 웃으며 도발한 기무혁이 다시 덤벼들어 주먹으로 지옥견의 턱을 후려쳤다. 사실 쉽게 이기는 것보다 어렵게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게 훨씬 더 힘들었다. 하지만 상대와의 압도적인 실력 차이, 낭인 시절의 경험, 거기에 더해 그리고 사파의 생리까지 잘 아는 그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크아아아아!” 지옥견이 괴성과 함께 미친 듯이 팔다리를 뻗으며 덤벼들었다. 내공을 담은 조법으로 얼굴을 할퀴고, 장법으로 어깨를 찍었다. 촤아아악! 그러나 손가락은 기무혁의 어깨를 스치고, 장법은 어깨를 벗어나 옆구리를 건드렸다. 옷이 찢어지고 맨살이 조금씩 드러났지만 허공을 친 것 같았다. 그 순간 기무혁이 달려들어 지옥견을 붙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핏물이 점점 둘의 옷과 몸에 배어들었다. 하지만 전부 지옥견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놀랍습니다! 첫 경기인 신예가 지옥견과 밀리지 않고 싸우고 있습니다! 투기장의 공포였던 지옥견은 끗발이 다 떨어진 걸까요? 오늘에야말로 개장수를 만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퍽퍽퍽퍽퍽! 두 사람은 바닥을 구르면서 계속 주먹을 휘둘렀고, 서로를 때릴 때마다 몸이 들썩였다. 하지만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건 한 명뿐이었다. “허억, 허어억…….” 시간이 지날수록 지옥견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주먹을 휘둘러도 타격감이 제대로 없었다. 결정타는 모조리 스쳐지나갔고, 상대는 맞지도 않았는데 아픈 제스처를 취했다. 고글살인마는 자신을 진작에 죽일 수 있었음에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서서히 공포감이 죄어왔다. 지금까지 숱하게 사람을 죽여 왔지만, 막상 자신에게 그런 순간이 닥치자 살고 싶다는 욕구가 간절했다. “커어억! 사, 살려줘…….” 바닥에 깔린 지옥견이 간절한 목소리로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는 오늘만 벌써 두 번째로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기무혁의 살점을 산 채로 발라내겠다고 장담했던 것이 무색할 만치 초라한 모습. 하지만 기무혁은 그 위에 올라타 쉬지 않고 주먹을 내리꽂을 뿐이었다. “나, 날 살려만 주면 지금까지 투기장에서 벌어둔 돈 다 줄게!” 그 순간 기무혁이 피로 범벅된 주먹을 멈췄다. 투기장의 패배자가 건넬 수 있는 최후의 제안. 이곳에는 돈에 환장한 놈들이 대부분이라 거의 다 받아들이기 마련이었다. 과연 고글 너머에서 흥미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모아뒀는데?” “그, 그게…….” 고개를 기울여 지옥견이 말하는 액수를 들은 기무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닥에서 지옥견의 도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지옥견이 소리쳤다. “더, 더 줄게! 모아둔 거 더 있어! 전부 다 준다니까!” 콰직! 칼날이 지옥견의 목 바로 옆에 틀어박혔다. 눈이 부릅떠졌던 지옥견이 이내 실성한 듯 웃음을 흘렸다. 순식간에 지옥에서 천국까지 다녀온 기분이었다. “흐, 흐흐흐. 돈은 나가서 바로 입금할게. 멀쩡한 계좌가 아니라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끼기긱. 그 순간 기무혁이 칼을 뽑아서 옆으로 틀었다. 시퍼런 날이 자신의 목으로 다가오자 지옥견의 안색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잠깐만! 안 돼, 그만! 그마아안! 돈 준다고! 내가 돈 준다고 했잖아! 근데 왜……!”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푼돈이라서.” 기무혁은 죽어가는 악인 앞에서 어설프게 정의를 들먹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쓰레기들은 반성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을 조롱할 테니까. 차라리 돈이 모자랐다는 말이 놈에게는 더욱 비참하게 와닿을 것이다. “야 이 개새끼야아아아아!” 상대의 공포와 분노가 절정에 달한 순간, 기무혁이 검을 옆으로 홱 그었다. 푸화아아악! 핏물이 높게 치솟아 올랐다. 죽기 직전 공포에 질린 지옥견의 표정이 대형 스크린에 생생하게 비쳤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기무혁이 보여준 화끈한 경기력에 관중들이 휘파람을 불고 현금다발을 케이지 안으로 던졌다. 투기장 최고의 찬사였다. “승자는 고글살인마입니다-! 놀라운 경기를 보여준 선수에게 박수와 함성 부탁드립니다!” 고글에 묻은 피를 닦아낸 기무혁이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자 투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더 커졌다. * * * 투기장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처음 경기에 출전한 신인이 지옥견을 죽이는 이변을 일으키며 배당도 대박을 터트렸다. 고글살인마! 고글살인마! 고글살인마! 고글살인마! 단 한 경기 만에 자신의 스타성을 증명한 신예를 연호하는 소리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살인마 님-!” 기무혁이 케이지에서 나와 라운지로 들어서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 박광태가 가장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제가 본 데뷔전 중에 최고였습니다!” 박광태가 양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우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죽어 마땅한 놈을 박멸한다는 말 너무 멋있었습니다! 신념이라는 것도 좋았고요. 터프한 싸움 방식에 완전히 반해버렸습니다!” “뭐, 운이 좋았지.” “운이 아니라 실력이지요!” 박광태는 제대로 무공을 익힌 사람이 아니었지만, 마치 자기가 싸워서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허리춤의 검을 툭툭 두드렸다. “장담하는데 살인마 님은 최고가 될 겁니다! 저와 평생 함께 가시죠!” “그럼 최고의 살인마가 되는 건가?” “하하하! 그게 그렇게 되네요!” 자신의 인생을 바꿔줄 사람을 발견했다고 생각한 걸까. 박광태는 기무혁에게 간이라도 빼줄 기세였다. 기무혁은 그가 가져다 준 물을 마시며 물었다. “내 친구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시다시피 외부인은 라운지 입장이 불가능해서……. 제가 한번 살짝 모시고 와 볼까요? 규정이라는 게 항상 예외가 생기는 법이니까요!” 기무혁이 그럴 필요까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보다 몇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조사 좀 해줄 수 있어?” “벌써부터 다음 상대가 궁금하신 거죠? 제가 싹 조사해 오겠습니다.” 박광태가 손바닥을 비비며 기무혁의 비위를 맞추려고 할 때였다. “끔찍한 쇼였다.” 싸늘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구현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화가 난 듯 눈빛이 매서웠다. “배, 백면검객이 왜…….” 곤란해하는 박광태를 뒤로하고 기무혁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 나보고 한 소리야?” 기무혁과 다섯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구현우가 멈춰 섰다. 그에게서 상대에 대한 실망이 느껴졌다.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고 지저분한 싸움이었다. 상대를 가지고 노는 부류로는 안 보였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그저 의무실에서 짧게 대화를 나눴을 뿐이지만, 그때 본 기무혁은 묘하게 자신과 비슷한 느낌이 났기에 더욱 화가 났는지도 몰랐다. 기무혁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까 못 들었어? 이게 내 신념이라니까.” “네 행동은 그저 살인일 뿐이야.” “저기, 답답한 협객 아저씨.” 기무혁은 화를 꾹 참고 있는 듯한 구현우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꼬우면 한판 붙어보시든가.” 97화. 100억짜리 경기라면 구현우는 눈앞에 있는 자의 실력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지옥견 정도는 쉽게 죽일 수 있는 수준. 허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를 조롱하면서 죽여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놈에게 했던 광대놀음이 내게도 통할 것 같나?” 구현우가 자신의 기세를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스스스슷. 날카로운 검이 목을 겨누는 듯한 감각에 기무혁은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역시 강하다.’ 하지만 기무혁은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다섯 걸음이었던 간격을 네 걸음으로 좁히며 물었다. “그쪽이 왜 화가 났는지, 내가 진짜 이유를 맞춰볼까?” “말했을 텐데.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고 지저분한…….” “당신은 이런 방식을 생각조차 못 했을 테니까.” 고글과 복면 탓에 보이지 않았지만, 구현우는 상대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고 느꼈다. “압도적인 실력을 가지고도 상대에게 베이는 연기밖에 할 수 없었으니까. 고작 배당 조금 올리려고 그딴 쓰레기한테 상처를 입는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겠지.” “닥쳐라.” “그렇다고 나에게 화풀이를 하러 오는 건 좀 우습지 않나?” 구현우는 이를 꽉 악물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분하지만 상대의 말이 맞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기무혁이 지옥견을 상대로 보여준 쇼는 자신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구현우는 그러지 못했다. 대신 피를 보는 걸 좋아하는 관중들의 니즈에 맞추기 위해, 상대가 아닌 자기 몸을 다치게 하는 미련한 방법을 선택했다. ‘지금 이 모습만 봐도 당신은 투기장과 어울리지 않아.’ 기무혁이 네 걸음의 간격을 세 걸음으로 좁히며 말을 이었다. 본심과 달리 상대를 계속 도발하는 말투였다. “당신은 내가 아니라 스스로한테 화가 난 거야. 그 잘난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멍청하게 굴었는지, 그게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날 보고 깨달았을 테니까.” “……닥치라고 말했지.” 구현우는 답답할 정도로 우직한 정파의 무인이었다. 때문에 기무혁은 궁금했다. 그가 지하투기장에 흘러들어오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어쩌다가 환몽 같은 요검을 쥐게 되었는지. 상대를 알기 위해서는 자꾸 건드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같잖은 그 신념을 바꿔 보는 건 어때?” “너……!” 그 말이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구현우의 기세가 사납게 출렁였다. 구현우가 성큼 다가서자 간격이 두 걸음 차이로 좁혀졌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서로를 공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잠깐만! 잠깐 기다려봐!” “지금 여기서 싸우시면 안 됩니다!” 그 순간 구현우의 뚱뚱한 매니저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구현우를 붙잡았다. 박광태도 기무혁을 가로막았다. 무인들의 기 싸움 한가운데에 끼어드는 것만 봐도 매니저들 또한 보통 강심장이 아니었다. “돈도 안 되는데 이런 데서 싸우지 말고, 차라리 경기를 잡는 게 어때?” “제 말이요!” 구현우의 뚱뚱한 매니저가 제안했다. 박광태도 동의하고 나섰다. 둘의 눈이 욕심으로 반짝였다. 백면검객은 실력에 비해서 인기가 지나치게 없었다. 상대를 죽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크게 상처를 입히지도 않으면서 항상 무난하게 이기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경기에 흥미도 떨어지고 결과가 뻔해서 걸리는 판돈도 가장 적었다. 재미없는 경기를 한다고 관중들에게도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이런 상황에서 주가가 단숨에 오른 고글살인마와 싸움이 붙는다면? “나야 얼마든지. 사실 가장 궁금한 상대가 그쪽이었거든.” 기무혁이 호승심을 숨기지 않으며 구현우를 바라봤다. ‘제대로 붙어보고 싶다.’ 상대는 자신보다 먼저 절정의 경지에 오른 검객이었다. 전생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감정, 환몽과 관련된 이유를 제쳐놓더라도 한 번쯤 검을 맞대보고 싶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더 있었다. ‘구현우가 환몽을 쥘 가능성 자체를 사전에 차단할 수도 있겠지.’ 탈백검 구현우는 기무혁이라도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희대의 요검까지 쥐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무섭고 강한 괴물로 변할 것이다. “붙어보자고. 난 오늘이라도 좋으니까.” 패기 넘치는 고글살인마의 도발에 두 매니저의 입가에 숨기지 못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백면검객의 건조한 한마디가 두 사람의 미소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거절하지.” 기무혁보다 더 실망한 것은 매니저들이었다. “뭐? 왜 또 지랄인데 도대체! 돈 많이 벌어야 한다면서!” “다시 한번만 생각해보시죠? 이건 무조건 대박 날 경기인데요…….” 특히 뚱뚱한 매니저는 구현우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 기세였다. 구현우는 미안하다는 듯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이어진 대답에서는 꺾이지 않을 고집이 느껴졌다. “……지금 저 녀석과 싸웠다간 내 신념을 깰 것 같아서 안 되겠소.”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빚 안 갚을 거야? 언제까지 푼돈만 벌 거냐고!” 구현우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은 사람은 기무혁뿐이었다. ‘날 죽일 수도 있다?’ 찰나였지만 구현우의 눈에 진득한 살기가 맺혔다가 사라진 것을 기무혁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휘휘 저은 구현우는 기무혁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에서…… 나와 투기장에서 만나지 않길 바라지.” “그 얘기만 벌써 두 번짼데. 자꾸 하니까 무슨 복선처럼 느껴지지 않아?” 구현우는 대꾸조차 하기 싫다는 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기무혁이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외쳤다. “조만간 다시 보자고!” 그 조만간이 생각보다 더 가까울 거라고 기무혁은 예감했다. * * * 카지노 입구 앞까지 배웅을 나온 박광태가 일행에게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 경기가 잡히면 제가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박광태는 기무혁의 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앞으로 큰돈을 벌어다줄 고객에게 깍듯한 모습이었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 김복자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기무혁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근데 저 사람은 너한테 왜 저렇게 잘해줘?” “매니저가 받는 수수료가 내 승리수당의 10퍼센트거든.” “미친! 그거 나 시켜줘!” 완전히 꽁돈 버는 일 아니냐면서 부러워하는 김복자의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주차장에서 차를 발견한 기무혁이 자연스럽게 운전석으로 향했다. 그러자 기겁한 김복자와 신강헌이 양쪽에서 어깨를 잡아당겼다. “너, 운전은 꿈도 꾸지 마!” “차라리 검을 휘둘러, 미친놈아!” “……왜?” 둘이서 합심하자 기무혁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뒷좌석으로 밀려났다. 덕분에 세 사람은 조금 느리지만 안전하게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일행이 펜션으로 돌아오자 마당에서 돌아다니고 있던 살구가 짧은 다리로 도다다다 달려와 그들을 맞이했다. 뺙뺙뺙뺙! 안전을 위해서 혼자 기다리게 했는데, 살구는 그게 섭섭했는지 불만이 담긴 날갯짓으로 일행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오구구, 우리 살구. 혼자서 심심했어?” 김복자가 살구를 번쩍 들어서 부드러운 털에 뺨을 비볐다. 신강헌은 그 옆에서 살구의 등을 긁어주며 괜히 심술을 부렸다. “팔자 좋게 낮잠이나 실컷 잤겠지. 너, 냉장고에 있던 고기 다 먹은 거 아니지?” 그 순간 신강헌의 머리 위로 뛰어오른 살구가 정수리를 콕콕콕 찍어댔다. “아악! 왜 맨날 나한테만 시빈데!” “새둥지가 함부로 돌아다니니까 그렇지.” “누가 새둥지냐고!” 살구는 기무혁의 말이 맞다는 듯 신강헌의 오렌지색 머리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결 만족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뺙-! 잠시 후. 피곤하지도 않은지 다들 오늘도 맥주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신나게 떠들고 놀았던 전날과 달리, 오늘은 둘러앉은 세 사람의 분위기가 사뭇 진지했다. “투기장 내부를 좀 조사해 봤는데, 딱히 이상한 건 없었어.” “솔직히 난 전부 다 이상해서 뭐가 진짜 문제인지 모르겠던데.” 김복자가 먼저 말을 꺼내자 신강헌이 뺨을 긁적이며 말을 보탰다. 기무혁이 투기장에 참가해 싸우는 동안, 두 사람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검객들이 실종된 사건에 대해서 조사했다. “누가 언제 실종됐는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네 말대로 돈 꿔준 빚쟁이들만 혈안이 돼 있었어.” “다들 돈 갚기 싫어서 몰래 튀었다고 생각하던데. 진짜 그런 거 아냐?” 두 사람이 조사해온 내용을 듣고 있던 기무혁이 고개를 저었다. “튀었다면 누군가 한 명쯤은 잡혔겠지. 실종자들은 아마 다 죽었을 거야.” “…….” “…….” 오늘 투기장의 분위기를 보면서 기무혁은 확신했다. 지하투기장은 선수들에게 매니저까지 붙이면서 관리하고 있었다. 얼핏 친절하고 비굴해 보여도 연쇄살인범이나 다름없는 인간들을 다루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눈을 피해서 사라지기란 결코 쉽지 않을 터였다. ‘현시점에서 환몽을 소유한 자가 그만큼 조심스럽고 치밀하다는 거겠지.’ 잠깐 생각을 정리한 기무혁이 김복자에게 물었다. “혹시 강력한 괴이의 흔적은 못 느꼈어?” “괴이? 부리는 술법사들이 몇 명 있긴 했는데, 전부 수준 이하던데?” 기무혁이 자신의 영안으로도 찾지 못했고, 김복자도 느끼지 못했다면 환몽은 오늘 투기장에 없었다는 의미였다. ……아니면 강력한 봉인도구를 통해서 외부에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도록 막아놨거나. ‘최소한 오늘은 검을 뽑지 않은 건 확실해.’ 생각을 정리하며 기무혁은 동료들에게도 환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줄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이건 출처는 밝힐 수 없는 정보야. 며칠 안에 제주도 뒷세계에…… 괴이가 깃든 요검이 나타날 거야.” “괴이?” “요검?” 서로 다른 포인트에 반응하는 김복자와 신강헌이었다. 하지만 둘 다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기무혁의 이어진 말을 듣기 전까지는. “신병이기 등급을 받을 만한 검이야. 검객들을 홀려서 피를 부르는 마병(魔兵)이기도 하고.” “신병이기라고?” 깜짝 놀란 신강헌이 마시던 맥주를 내려놓았다. 무인이라면 신병이기가 어떤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전 세계를 통틀어도 백여 개 정도의 무기만이 그 호칭을 받을 수 있었다. 국가에 따라서는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아예 소유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거 확실히 검이야? 도는 아니고?” “실종된 무인들이 괜히 다 검객이었겠냐?” “혹시 모르지! 너도 직접 본 거 아니니까 도일 수도!” 신강헌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환몽은 너무나 분명한 검이었다. 하지만 기무혁은 신강헌의 희망을 굳이 꺾지 않았다. “만약에 그게 도면 너 줄게. 대신 검이면 내가 가진다?” “날을 한쪽만 쓰면 그때부터 그건 도다!” “헛소리하지 말고.” 환몽의 생김새를 반드시 확인해보겠다는 의지로 신강헌의 두 눈이 불타올랐다. “그럼 나는? 나한테는 뭐 줄 건데?” 괴이와 관련된 일에는 뛰어난 술법사가 꼭 필요했다. 기무혁은 김복자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약속했다. “투기장에서 버는 돈 전부 줄게.” 김복자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거 수수료 다 떼면 얼마 남지도 않잖아? 됐으니까 너 용돈이나 해.” “……진짜로?” “고마우면 누나한테 잘해라!” 김복자가 호기롭게 웃으며 맥주캔을 들어 기무혁의 맥주캔에 부딪쳤다. 구체적인 목표를 알게 된 세 사람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환몽을 어떤 방식으로 찾을 것인지, 찾으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등등. 하지만 밤새도록 계속될 것 같았던 회의는 한 통의 전화가 오면서 멈췄다. 새벽에 박광태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살인마 님! 경기 일정이 잡혔습니다! 대표님께서 경기를 인상 깊게 보셨는지 초대형 이벤트를 직접 기획하셨어요!] 박광태는 고글살인마를 줄여서 그냥 살인마라고 부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잔뜩 흥분해 있었는데,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총상금 100억! 백 명의 검객이 참가하는 투기장 역대 최대 규모의 살육전이 열릴 거라고 합니다!] 투기장에 조용히 숨어 지내던 검객들까지 빠짐없이 불러내기에 차고 넘치는 돈이었다. “배, 백억…….” 호기롭게 보수를 거절했던 누군가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릴 만한 액수이기도 했다. 김복자가 기무혁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저기, 반이라도 주지 않을래?” “…….” “반의 반?” “…….” “아, 쪼금만 달라고!” 98화. 혹시 모르잖아? 방으로 온 기무혁은 박광태가 전화를 끊기 전 했던 얘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 그리고 그때 살인마님께서 조사하라고 하셨던 것 말인데요! 백면검객의 뒤를 캐봤는데……. 투기장에서는 환몽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구현우가 자신의 집에 숨겨뒀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기무혁은 박광태에게 구현우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부탁했다. 오늘 봤던 구현우는 환몽에 홀린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좋지.” * * * 늦은 밤. 구현우는 지하투기장의 매니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항상 그렇듯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큰 이벤트가 잡혔어. 검객들만 참가 신청을 받는다는데, 관심 있어?] “상금이 큰 경기요?” 잠시 후, 무려 총상금이 100억이라는 말에 구현우의 입이 벌어졌다. 투기장이 아닌 외부에서 진행하는 최대 규모의 이벤트. 심지어 투기장의 악명 높기로 유명한 수수료도 떼지 않는 순수한 상금이라고 했다. “그럼 진짜 100억을…….” [솔직히 감이 별로 안 좋아.] 누구라도 혹할 만한 내용이었지만, 그 내용을 전하는 매니저의 목소리에서 찝찝함이 느껴졌다. [투기장 출신이 아닌 고수들도 참가할 거라는 소문도 있고……. 일단 말은 해줬지만, 이번엔 참가하지 마.] “하하. 날 걱정해주는 건 당신뿐이군.” [걱정 같은 소리 하네! 어차피 한 놈도 못 죽이고 칼빵이나 맞을 게 뻔하면서! 돈줄 하나 끊어지면 나도 손해니까 말리는 거야!] 구현우가 퉁명스러운 자신의 매니저를 싫어할 수 없는 이유였다. 경기마다 들어가서 사람을 죽이지 않고 나오는 자신에게 늘 쌍욕을 퍼붓지만, 그 이면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막대한 빚을 조금씩이나마 갚을 수 있도록 계속 경기를 잡아주는 것도 매니저였다. [내 경험상 이렇게 큰 경기는 실력이랑 상관없어. 운 나쁘면 뒈지기 십상이야.] “…….” 평소와 같았으면 고민하지 않고 매니저의 의견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같잖은 그 신념을 바꿔 보는 건 어때? 그 순간 전날 만났던 고글살인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과 같은 정파의 검객으로 짐작되지만, 투기장에서 몇 년은 굴러본 것처럼 익숙하게 관중들을 열광시키던 인물.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매일같이 지하투기장에 출근해도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 빚이야말로 가장 큰 이유였다. “……참가하겠소.” [뭐? 내 말 못 알아들었어? 나가면 위험하다니까! 너 뒈지면 애는 어쩌려고!] “걱정하지 마시오. 내 딸을 고아로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상금으로 빚을 전부 갚고, 당신에게도 크게 사례하겠소.” 사례하겠다는 말에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매니저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봐. 자네 실력은 나도 알지만…….] “이따가 봅시다.” 통화를 끊은 후 구현우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거울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초췌한 안색에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 한때 절정의 검객으로 명성을 떨쳤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깟 신념이 뭐라고…….” 스르릉. 검을 반쯤 빼든 구현우가 거울 속 자신을 보며 피식피식 웃을 때였다. “아빠…….”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구현우는 황급히 검을 집어넣었다. 억지로 입가에 밝은 미소를 띠며 그가 문을 열었다. “지우야. 잠이 안 오니?” 창백한 얼굴의 조그마한 소녀는 구현우에게 남은 유일한 삶의 의미였다. “졸린데…… 아빠 출근하기 전에 인사하려구요.” “방으로 가자. 아빠가 재워줄게.” 구현우는 졸린 눈을 비비는 딸아이를 번쩍 안아서 방으로 데려갔다. 아내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구현우는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나뿐인 딸아이에게 절맥증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 후로는 슬픔을 가눌 새도 없이 치료를 위해 하루하루 살아온 삶이었다. 조부 때부터 지켜온 구도검문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수십 명이 넘던 제자들이 하나둘 발길을 끊고, 빚쟁이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아빠가 동화책 읽어줄까?” “아빠 출근해야 하잖아요…….” “조금 늦게 가도 괜찮아.” 침대에 누워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딸의 모습에, 아버지의 눈에 비애가 어렸다. 절맥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치료를 성공만 한다면 무인으로서 대성할 수 있는 체질로 바뀌는 절맥. 그리고 치료를 받으면 간신히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절맥. 전자의 경우는 대문파들이 몰려와서 서로 거액의 치료비를 지원하고 영약마저 대주려고 한다. 훗날 자신들의 문파에 입문하는 조건으로. 하지만 그의 딸 구지우는 후자였다. 심지어 아직 치료법이 없는 난치성 절맥이었다. 병원에서도 딱히 방법이 없으니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라고 할 정도였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구현우는 딸이 새근새근 잠이 들 때까지 동화를 읽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새 잠든 아이에게 약속하듯 속삭였다. “아빠가 꼭 낫게 해줄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흔들리던 눈동자에 각오가 새겨졌다. 지난 몇 년간 몸에 좋다는 영약이 있으면 어떻게든 찾아서 먹이고, 뛰어난 의원, 술법사, 무당까지 찾아다녔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빚만 끝없이 늘어났지만, 구현우는 포기할 수 없었다. “아빠는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자리에서 일어난 구현우의 충혈된 두 눈에 고요한 살기가 어렸다. 이번 경기로 큰돈을 벌면 지금까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영약을 살 수도, 새로운 방법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를 살리기 위해서 백 명을 죽여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거야.” 중얼거림과 함께 구현우는 돈을 벌기 위해 지하투기장으로 떠났다. 구도검문에 불이 완전히 꺼지고, 잠든 구지우의 고른 숨소리만 들렸다. 스르륵. 그리고 기무혁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구현우의 집을 몰래 수색하러 왔다가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보게 된 그가 중얼거렸다. “……자식이 있었나.” 탈백검 구현우는 절정의 검객이었지만, 정신적으로 크게 흔들리고 주의력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검마에게 직접 은신과 잠입기술을 전수받은 기무혁의 기척을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요검의 기운은 안 느껴져.’ 영안으로 살펴봐도 구도검문 내에서 별다른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기무혁은 쉽게 단정하지 않고 직접 구도검문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기운을 봉인해서 어딘가에 숨겨 두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한 시간쯤 구도검문을 이 잡듯이 뒤진 기무혁은 마지막으로 구지우가 잠들어 있는 방 앞에 섰다. 쿠울……. 기무혁은 발소리를 남기지 않고 구지우의 방으로 잠입했다. 곤히 잠든 어린 소녀의 얼굴 위로, 부모님을 잃고 절망했던 자신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 묘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가족을 해친 원수에게도 가족이 있을 거란 상상을 해보진 않았으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구현우가 죽은 후에 이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누구세요?” 어느새 눈을 뜬 구지우가 기무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글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낯선 사람이 무서울 법한데도, 꽤나 의연한 표정이었다. 기무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너희 아빠 친구.” “……우리 아빠는 친구 없는데요.” 소녀의 표정 위로 경계심이 잔뜩 드러나자 기무혁이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너무한 거 아냐? 아빠한테 네가 모르는 친구가 있을 수도 있지.” “아빠는 친구 만날 시간 없어요. 일할 때 빼고는 맨날 제 옆에서 간호만 하니까.” 구현우가 어떤 사람인지 세상에서 이 아이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무혁은 구현우가 환몽을 숨겨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의심마저 지워버렸다. 기무혁이 구지우 앞에 쪼그려 앉으며 눈높이를 맞췄다. “너 절맥증이지? 증상을 한번 얘기해봐.” “……왜요?” “아저씨가 고치는 방법을 알지도 모르거든.” 순간 눈이 커졌던 구지우가 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병원에서도 못 고친다고 했어요. 근데 아저씨가 고칠 수 있어요? 아저씨 의사예요?” 기무혁은 의사도 아니고, 절맥증에 대해서 아주 잘 아는 전문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절맥증 치료에 아주 좋은 영약의 조합은 알고 있었다. 지금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20년쯤 지나면 너무 흔해진 나머지 누구나 알게 되는, 구음절맥처럼 특수한 절맥증이 아니면 대부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혹시 모르잖아? 아저씨가 너한테 찾아온 산타클로스일지도?” “피이, 거짓말…….” 구지우는 복면과 고글을 쓴 남자를 여전히 경계하면서도, 우물쭈물 자신의 증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 며칠 후. 지하투기장 최대 이벤트가 열리는 당일이 되었다. “살인마 님! 여기 타시면 됩니다!” 기무혁은 박광태가 준비해둔 승합차를 타고 이동했다. 완전히 암막을 쳐둔 차량 내부에는 경기에 참가하는 검객들이 몇 명 앉아 있었다. 박광태가 관리하는 투기장 소속 무인들이었다. ‘벌써부터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기무혁은 편안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휴대폰과 전자기기는 사전에 전부 반납한 상태였다. ‘복자랑 신강헌은 알아서 잘 움직여주겠지.’ 외부에서 해야 할 일을 미리 다 전달해두었으니 두 사람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는 도로 위에서 보낸 후. 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것은 어딘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동굴의 내부, 백 명 정도는 너끈히 수용할 수 있어 보이는 상당히 넓은 공동이었다. [이벤트에 참가한 백인의 검객들을 환영합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동굴 천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오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러분에게는 한 사람당 1억의 상금이 걸려있습니다. 매니저에게 전달받은 목걸이에 참가번호가 새겨진 인식표가 있을 겁니다.] 참가자들은 차에 탈 때 지급받은 군번줄과 같은 형태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눈치가 빠른 자들은 번호가 새겨진 인식표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다. [경기가 끝나면 번호표 1개당 1억의 현금으로 환급해드릴 예정이니 분실에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즉, 다른 참가자를 죽여서 인식표를 빼앗으라는 의미였다. 손에 인식표를 움켜쥔 참가자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이들을 노려보는 눈에 탐욕이 어렸다. “이거 1개당 1억이란 소리지?” “흐흐흐. 돈 벌기 쉽네?” “곱게 내놓으면 목은 붙여줄게.” 벌써부터 기 싸움을 벌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시작하라는 말만 떨어지면 곧바로 살육전이 벌어질 기세였다. 기무혁도 자신의 번호를 확인했다. <100> 누가 의도한 것인지, 우연인지 모르지만 마지막 숫자였다. “빨리 시작합시다!” “몇 시간이나 차 타고 와서 근질근질하다고!” 성격 급한 자들은 벌써부터 검을 뽑아 들고 흉흉한 살기를 드러냈다.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기회를 엿보는 이들도 있었고, 벌써부터 패거리를 만들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오호는 그 모든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럼 규칙을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앞에 보이는 다섯 개의 통로 중 하나를 선택해 들어가야 합니다. 경기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공동의 앞쪽에는 동시에 여러 명이 통과할 수 있을 넓이의 통로가 다섯 개 있었고, 그 안쪽은 시커먼 어둠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통로는 중간에 나눠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합니다. 함정과 독, 기습에 항상 대비하시길 바랍니다. 경쟁자들을 처치하고 출구를 찾아 나오는 단 한 명, 최후의 승자는 가져온 인식표의 수만큼 상금을…….] 오호는 순간 말을 멈췄다. 다들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와중에, 한 사람이 다섯 개의 통로 중 가운데로 뛰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휘이익! 그는 바로 기무혁이었다. [……100번 참가자는 성격이 급하군요. 좋습니다. 지금부터 백인검객의 살육게임을 시작하도록 하죠.] 검객들이 살기를 터트리며 다섯 개의 통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곧장 기무혁을 쫓는 일단의 무리도 있었다. 그러나 기무혁은 뒤에서 누가 쫓아오건 말건 앞쪽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환몽이 저 안에 있다.’ 기무혁은 동굴 안쪽에서 느껴지는 요검의 기운을 따라서 달렸다. 99화. 그쪽에서 먼저 시작했으니까 오호는 가장 먼저 동굴로 뛰어 들어가는 고글살인마의 모습을 화면으로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무모한 놈.’ 그 뒤를 살기를 드러낸 검객 셋이 뒤쫓고 있었다. 서로 아는 사이인 듯 눈빛을 교환한 검객들은 앞서 간 그를 노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빨리 출발해야 유리하다고 생각한 건가? 그렇게 단순한 성격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아니면 자신감이 지나친 건가.’ 동굴의 출구까지 가는 길에는 무수한 함정과 독, 방해물이 깔려 있었다. 선두에 선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가장 먼저 상대해야 한다는 의미. 그리고 그 바로 뒤에서는 자신의 목에 걸린 상금을 노리는 검객들이 쫓아오는 상황이었다. 제아무리 일신의 무공이 뛰어나도 그것만으로는 저 안에서 살아남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온갖 종류의 싸움을 겪어 본 백전의 고수라면 모를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오호는 고글살인마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고개를 저었다. 고작해야 스무 살 언저리의 정파 애송이에게 수많은 실전 경험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때 오호의 뒤편에서 흥미로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패기 넘치는 검객이군. 얼마 전에 지옥견을 죽인 놈이 저 녀석이지?” 카지노 극락의 VVIP들이 한자리에 모여 화면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와인을 들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느긋하게 경기를 지켜보는 노인들. 오호가 그들을 돌아보며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련주님께서 투기장 선수에게 관심이 많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종종 직접 가서 보기도 하네. 젊고 가진 것 없는 무인들의 절박한 모습이 참 아름답지 않나?” 중앙에 있는 노인이 그렇게 묻자 오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그는 늙고 역겨운 관음증 환자에게 불쾌감이 치밀었지만, 능숙하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곳까지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싶었네. 혹시 불편한가? 돈을 좀 투자했다는 이유로 자네가 만든 판에 멋대로 끼어들어서?” “그럴 리가요. 오히려 세 분을 직접 모시게 돼 영광입니다.” 오호는 허리를 숙이며 세 노인에게 예를 취했다. 혈호방의 간부가 예의를 차려야 하는 인물들. 그는 바로 제주도에서 가장 강대한 무림세력인 탐라련(耽羅連)의 련주와 좌우호법이었다. 팔대문파와 비교하기엔 그 강함이나 세력이 부족하지만, 제주도에서만큼은 왕처럼 군림하는 자들. ‘교활한 늙은이들.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냐?’ 제주도 무림에는 정파와 사파의 구분이 큰 의미가 없다는 말이 있다. 탐라련이 그 둘을 전부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혈호방이 카지노 극락을 무사히 인수할 수 있었던 것도 탐라련의 협조 덕분이었다. 때문에 오호조차 그들을 쉽게 대할 수 없었다. “혈호방의 방주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게나.” “알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오호가 뒤로 물러나자 세 노인은 저희들끼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참가자들의 수준이 뛰어나. 돈 냄새를 맡고 온 놈들치고는 말이야.” “몇 놈은 진짜배기인데? 본가에서 태어났으면 대성했을 것을…….” “저기 탈백검 구현우 같은 녀석 말이지? “혈루방과 흑적회도 참가했어. 꽤나 봐줄 만한 놈들이야.” 그들은 백억이 상금으로 걸린 살육전에 참가한 검객들을 지켜보며 상품을 품평하듯 평가했다. 그 중간중간 오호가 이해할 수 없는 대화도 섞여 있었다. “……통제된 환경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겠어.” “마침 좋은 기회지. 신병이 개화할 때에 이런 이벤트가 생겼으니…….” “면밀히 지켜보다가 때가 되면 회수조를 투입하도록 하세.” 오호는 동굴 안에서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백인의 검객이 살육전을 벌일 장소로 이 동굴을 섭외한 것도 탐라련이었다. 그들은 이 장소와 검객들을 이용해 무언가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호는 항의하거나 경기를 멈출 수 없었다. ‘방주.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혈호방주가 탐라련과 직접 협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협상의 자세한 내용은 자신에게도 내려오지 않았다. 다만, 이번 일을 준비하며 오호가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이 동굴은…… 탈출이 불가능하게 설계돼 있다.’ 동굴에 들어온 백 명의 검객은 전부 이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저들이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서. 그 사실이 오호는 무척이나 불쾌했다. 자신의 계획에 갑자기 끼어들어 멋대로 판을 바꿔버린 상황에 짜증이 치밀었다. ‘차라리…… 누군가가 판을 엎어버렸으면 좋겠군.’ 오호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기무혁을 향했다. 마침 통로에 설치된 기관진식을 돌파 중이던 그는 뒤에서 다가온 검객들에게 기습을 받고 있었다. * * * 푸욱! 등을 파고든 검이 가슴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검날을 타고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본 사내가 쌍욕과 함께 피를 게워냈다. “씨이발…….” 기관진식이 발동하는 순간을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가 뒤에서 기습했다. 절대 피할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순간, 가장 자신 있는 쾌검으로. 하지만 상대는 어느새 등 뒤에 서 있었다. 기관에서 쏟아진 화살은 자신의 몸에 박혔고, 등 뒤에서는 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습을 할 거면 살기라도 제대로 감추든가.” 기무혁이 상대의 몸에서 검을 빼내며 앞으로 밀었다. 축 늘어진 시신이 쓰러진 순간, 죽은 사내와 함께 기무혁을 기습했던 두 검객이 다시 덤벼들었다. “이 개새끼가!” “죽어어!” 그러나 셋이서 한 기습도 통하지 않았는데, 둘이서 정면승부로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기무혁은 자신을 기습한 검객들을 차례대로 베었다. 촤악! 푸화악! 적들을 베는 기무혁의 손속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전부 죽일 놈들뿐이네.” 박광태를 통해서 참가하는 검객들의 신상명세를 대부분 확인한 후였다. 죽여 마땅한 놈들과 굳이 죽일 필요는 없는 자들로 분류했다. 기준을 세워야 머뭇거림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후두둑……. 검에서 핏물을 털어낸 기무혁은 죽은 검객들의 인식표를 뜯어내 자신의 목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환몽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다시 이동했다. 잠시 걸어가다가 멈춰선 그가 힐긋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개죽음당하기 싫으면 거기 조용히 숨어서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 “……!” 숨어서 떨고 있던 어린 검객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부모의 빚을 대신 갚기 위해 참가한, 기무혁이 확인한 몇 안 되는 죽이지 않아도 될 검객이었다. 기무혁은 두 번 다시 그쪽에 시선을 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쿠구구궁……. 동굴의 지형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존재하지 않았던 입구가 생기고, 통로가 막히거나 암기가 쏟아지는 건 물론이고 갑자기 땅이 치솟기도 했다. 그러나 기무혁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쳐내거나 피하고, 갈림길이 나와도 고민하지 않고 방향을 정했다. [전부 죽여!] [번호표만 내놓으면 살려준다!] [살려, 살려주세요…….] 동굴의 벽면에는 중간중간 모니터와 스피커가 달려 있었는데, 서로 싸우거나 함정을 돌파 중인 검객들의 모습을 비췄다. 화면 아래에는 대략적인 장소 표시가 되어 있어 상대의 위치도 알려주고 있었다. ‘찾아가서 죽이라고 안내까지 해주는군.’ 기무혁은 이벤트를 기획한 자의 의도를 느꼈다. 백 명의 검객을 한 곳에 몰아넣고, 서로 죽이도록 판을 깔아놓고 부추기고 있었다. 그 투명하도록 끔찍한 악의에 기무혁이 천장을 올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상금을 줄 생각 따윈 없었던 거지?” 혈호방의 오호. 나름 사파의 거물이라서 이렇게까지 치졸한 짓은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뭐,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만.” 거부하기 힘든 돈을 미끼로 던져놓고 뒤에서 수작을 부리는 것. 전생의 기무혁이 낭인 시절에 수없이 당해본 일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통로의 끝에 혈호방의 고수가 기다리고 있다가 지친 우승자를 죽이고 상금을 회수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서도 기무혁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쪽에서 먼저 시작했으니까, 나중에 따지지 말라고.” 많이 당해본 만큼, 기무혁은 자신을 등쳐먹으려는 놈들을 엿 먹이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낭인 시절에도 풋내기일 때 외에는 결코 보수를 떼먹힌 적이 없는 그였다. 쉬이익! 천장에서 뚝 떨어지는 적의 검을 피하자 동시에 어둠 속에서 비검이 날아왔다. 채앵! 비검을 쳐낸 후 몸을 돌리며 천장에서 떨어진 적의 목을 벴다. 쓰러진 상대의 검을 주워 도망치는 상대에게 던지자 푹- 소리와 함께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혼자 다니는 놈들은 거의 없나 보네.” 두 개의 인식표를 목걸이에 추가한 후, 기무혁은 환몽의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기무혁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기운이 점점 강해지면서 계속 이동하고 있어.’ 환몽의 기운을 쫓는 과정에서 먼저 덤벼드는 검객들을 만나면 베었다. 딱히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기무혁의 목에 건 인식표가 늘어났다. 그럴수록 동굴 곳곳의 벽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기무혁의 모습이 비쳐지는 빈도가 늘어나고 위치가 노출되었다. “저 새끼를 죽이면 10억이다!” “죽여서 인원 수대로 나눠 갖자고!” 목걸이에 인식표를 많이 걸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강자라는 뜻이었지만, 동시에 많은 이들의 타깃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촤악, 촤아아악! 점점 몰려오는 적들을 향해 기무혁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무혁의 몸에도 상처가 조금씩 늘어났다. 치명적인 상처는 허용하지 않았지만, 꽤나 아슬아슬한 장면도 몇 번이나 연출했다. “후우…….” 숨이 점점 가빠지고 있었다.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목에 건 인식표도 어느새 스무 개를 넘어갔다. 꽤 넓은 공동. 지금 그의 앞에는 열이 넘는 시체가 쌓여 있었다. 큰 싸움을 끝내고 잠시 호흡을 정리하는 그의 앞에 새로운 적들이 나타났다. “상당한 검객이구나. 이것저것 실험해 보기 좋겠어.” 탁한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흑의복면인들이 그를 포위하며 다가왔다. “후우, 후우우…….” 거칠게 호흡하던 기무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살폈다. “너희는 참가자가 아닌 것 같은데?” 흑의복면인들은 복장이 통일돼 있었고, 내뿜는 기도가 비슷했다. 같은 무공을 익힌 무인들의 특징이었다. 게다가 검이 아니라 창이나 도를 든 자들도 섞여 있었다. 탁한 목소리의 흑의인은 신병이기의 실험체가 될 자와 굳이 말을 섞지 않았다. “잡아와라.” 동시에 달려든 흑의인 다섯이 기무혁을 공격했다. 나머지는 퇴로를 차단하고 기다렸다. 그들은 기무혁을 금방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모니터를 통해서 기무혁의 실력을 충분히 보았고, 제대로 운신하기 힘들 정도로 지친 것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채채채챙! 때문에 기무혁이 생각보다 분전할 때에도 싸움이 금방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숨이 넘어갈 듯 가빠 보였던 호흡이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눈치챘을 땐,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저놈, 설마……?” “이런 식으로 꼬리를 잡을 줄은 또 몰랐네.” 기무혁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그 순간, 흑의인들이 예상치 못한 또 다른 변수가 발생했다. “커헉!”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퇴로를 막고 있던 흑의인 중 하나가 쓰러졌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탈백검 구현우가 걸어 나왔다. “주변에 있는 카메라와 모니터를 전부 부수고 오느라 늦었다.” 그러자 기무혁이 고글을 슬쩍 위로 올리며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는데요, 선배님.” 100화. 동의할 수밖에 없는 며칠 전. 아침이 되어서야 지하투기장을 나선 구현우는 지친 얼굴로 집으로 돌아왔다. 투기장의 악명 높은 수수료를 떼고 남은 몇백만 원의 목숨값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행여나 딸아이에게 피 냄새를 들키지 않도록 상처를 붕대로 꽉 조여맨 채로. 흠칫. 구도검문의 정문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구현우는 그 안에 있어서는 안 될 다른 사람의 인기척을 느꼈다. “……지우야!” 그 순간 구현우는 전력으로 경공을 펼쳤다. 온갖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휘이이익! 순식간에 담을 넘어 마당에 내려서자 투기장에서 만났던 고글살인마가 마루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 나란히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허공에 발장난을 하고 있는 딸아이와 함께. “아빠다!” 구지우가 집으로 돌아온 아빠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구현우는 그 미소를 볼 겨를이 없었다. “당장 내 딸에게서 떨어지지 못해-!” 살기충천한 구현우가 기무혁에게 곧바로 달려들지 않은 것은 오로지 딸아이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저자가 아이를 인질로 삼거나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처음 보는 아빠의 모습에 깜짝 놀란 구지우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빠! 이 아저씨는 나쁜 사람 아니에요!” “지우야! 가만히 있어! 아빠가 금방 구해줄게!” 구현우에게 딸은 유일하게 남은 삶의 의미였다. 아내에 이어 딸마저 잃는다면 간신히 버티고 있던 정신이 무너져 내리고 말 터였다. “……내 딸을 건드리면, 넌 죽는다.” 반쯤 이성을 잃은 구현우의 충혈된 눈에서 지독한 살기가 꿈틀거렸다. 바로 그때, 기무혁이 고글과 복면을 벗어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구현우는 상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무림 말학 기무혁이 탈백검 선배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기무혁?” “혹시 올해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 보셨습니까?” 구현우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관심이 없었지만, 그런 그의 귀에도 들려올 정도로 떠들썩했던 사건이 최근에 있었다.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에서 일월문주의 악행이 드러나고, 그로 인해 팔대문파의 권위가 추락한 일. 투기장 라운지에서도 지겹게 틀어놓던 그 뉴스들 속에서, 구현우는 기무혁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향후 한국 무림계를 뒤집어놓을 거라는 평가의 후기지수……. “그게 너라고? 아니, 그보다 왜 지우랑 함께 있는 것이냐!” 흥분한 구현우 앞에서 기무혁은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선배님. 저는 지우의 절맥을 고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당장 꺼져라.” 구현우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딸의 절맥을 고칠 방법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안 가본 곳이 없었고, 안 해본 짓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이 무용했고, 절맥증을 고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던 자들은 전부 사기꾼이었다. 게다가 저 녀석은 돈을 위해 사람을 조롱하듯 죽인 인간이었다. 쉽게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제가 선배님한테 뭐 얻을 게 있다고 사기를 치겠습니까? 빚 갚느라 빈털터리 신세인 거 뻔히 아는데.” 구현우는 기무혁의 태연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하투기장에서 지옥견을 죽이던 고글살인마와는 분명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당신은 내가 아니라 스스로한테 화가 난 거야. 그 잘난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멍청하게 굴었는지, 그게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날 보고 깨달았을 테니까. 딸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하겠다고 다짐했던 것 또한 떠올랐다. 그깟 신념보다 중요한 건 딸아이를 살리는 일이었으니까. “……정말 절맥증을 고칠 수 있다고? 어떻게?” “몇 가지 영약이 필요합니다. 실력 좋은 의원과 술법사도 필요하고요. 일단은 이 정도만 알려드리죠.” 여전히 허황되게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잠시 기무혁을 노려보던 구현우가 자신의 딸을 돌아봤다. “지우야. 잠깐만 방에 들어가 있으렴.” “……네.” 눈치를 보던 구지우가 방으로 들어간 후, 구현우가 차가운 표정으로 기무혁에게 물었다. “그냥 절맥을 고쳐주겠다는 말은 아닐 테지. 원하는 게 뭐냐?” “며칠 후에 있을 백인검객 살육전. 그곳에서 저와 같은 편이 되어 주십시오.” “……결국 돈이 목적인 건가?” 기무혁은 고개를 저었다. “찾아야 할 물건이 있습니다. 물론 상금도 챙길 거지만요. 대신 지우에게 필요한 영약과 치료비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딸의 절맥증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그깟 상금은 필요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구현우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왜 하필 나지? 다른 선택지도 많았을 텐데.” 이유라면 많았다. 탈백검 구현우는 지하투기장에서 손에 꼽을 만한 검의 달인이었고. 환몽 혈사에서 검의 마지막 선택을 받은 인물이기도 했으니까. 이번에도 그의 운명과 환몽이 엮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한 딸의 목숨이 걸린 이상 결코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기무혁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협객을 좋아하거든요.” 그 말에 구현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잠시였을 뿐, 그는 다시 사나운 눈빛으로 기무혁을 노려봤다. “약속은 꼭 지켜라.” 그렇게, 기무혁은 전생에 원수였던 탈백검 구현우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 * * 탁한 목소리의 흑의인은 분노로 당혹스러움을 애써 감췄다. “감히, 감히……!” 믿었던 부하들이 전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탐라련의 정예무인들이 고작 두 명의 검객에게 당한 것이다. 고글살인마와 백면검객이라고 불리는 자들에게. “고작해야 노름판의 구경거리에 불과한 잡배들이……!” 참가자들이 이런 괴물 같은 무공을 갖췄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살아남은 것은 이제 그 혼자였다. 두려움에 떠는 흑의인을 향해 기무혁과 구현우가 앞뒤에서 거리를 좁혔다. “머, 멈춰라! 너희가 지금 누구를 건드렸는지 아느냐!” 검을 뽑아든 흑의인이 사납게 소리쳤다. 그러나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때 구현우가 홀로 앞으로 나섰다. 지쳐 보이는 기무혁을 위한 배려였다. “너는 쉬어라. 내가 상대하지.” 적지 않은 적을 베었는지 구현우의 검에도 핏물이 배어 있었다. 채채채챙!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구현우는 흑의인들의 수장을 압도했다. 뒷걸음질 치며 막기 급급한 흑의인을 무심한 표정으로 몰아치는 검격. 흑의인은 결코 약한 무인이 아니었다. 라이센스 시험이었다면 충분히 절정고수를 노려볼 만한 실력자. 하지만 실력을 온전히 드러낸 탈백검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날카로우면서도 올곧은 검. 검로의 단단함은 나보다 위다.’ 기무혁은 편하게 구현우의 검술을 구경했다. 송월문의 오정민이 오 년 정도 죽어라 수련에 정진한다면 저런 검을 보여줄 수 있을까. 까앙! 흑의인이 검을 놓치고 뒤돌아 도망치는 순간, 기무혁은 자신의 판단을 정정했다. “……십 년은 걸리겠는데.” 도망치던 흑의인이 구현우가 날린 검기에 다리를 베이고 쓰러졌다. 다리를 질질 끌며 도망치던 그는 이내 자포자기한 듯 돌아서면서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댔다. “흐흐흐. 너희 모두 여기서 죽게 될 것이다. 동굴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결국 괴물에게 잡아먹혀서 죽을 거야!” 저주를 내뱉은 흑의인이 품 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누르려고 한 순간. 푹! 기무혁이 던진 단검이 흑의인의 손바닥을 꿰뚫었다. “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흑의인의 수혈을 짚은 것은 구현우였다. 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기무혁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를 못 믿는 거냐?” “혹시나 모르니까요. 품 안에 위험한 물건이 있을 겁니다.” 기무혁의 말대로 흑의인의 품 안에는 암기형 폭탄이 있었다. 폭발과 동시에 사방으로 쇠침을 뿌리는 물건이었다. “……많이 해본 솜씨군.” 구현우는 기무혁이 자기 물건인 양 폭탄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 흑의인의 입에 재갈을 물린 뒤 팔다리를 묶어 구석진 곳에 숨겨놓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 “깨워서 정보를 캐내야 하는 거 아닌가?” “처음엔 그러려고 했는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목표물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거든요.” 동굴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는 기무혁을 따라서 구현우가 시선을 옮긴 순간. 고오오오오오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존재감에 구현우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소름이 끼치는군. 저게 네가 찾는 물건과 관련이 있나?” 심각한 표정으로 어둠 속을 응시하던 기무혁이 구현우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제 와서 발 빼시게요?” 시답잖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구현우가 코웃음을 치고 앞으로 나섰다. “내가 앞장설 테니 따라와라. 빨리 끝내고 지우를 보러 갈 거다.” 두 사람은 불길한 기운의 흔적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족족 카메라와 모니터를 부수고, 앞을 가로막는 검객들과 정체 모를 흑의인들을 베었다. “인식표를 내놓으면 목숨은…… 커헉!” “놈들을 막아라!” 기무혁 혼자였으면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었을 것이다. 탈백검이라는 별호를 허명으로 얻은 게 아니라는 듯, 구현우는 투기장에서 쓸 일이 없었던 검술을 펼치며 길을 만들었다. 덕분에 여유가 생긴 기무혁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누군가가 환몽을 의도적으로 이곳에 가져다놨다.’ 처음에는 환몽에 홀린 누군가가 검객들을 하나씩 죽이고 실종으로 처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하투기장을 아무리 뒤져도 환몽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그러다 며칠 전, 백인검객 살육전을 기획한 오호와 혈호방이 배후가 아닐까 의심했다. 허나 그것도 아니었다. 흑의인들의 시체 어디에도 혈호방 특유의 문신이 없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탐라련이 배후였어.’ 제주도 최대의 무림조직. 이만한 일을 뒤에서 꾸밀 수 있는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고, 신병이기에 달하는 요검을 제어할 수 있는 세력. 그렇다면 전생에는 왜 환몽혈사라는 사고가 발생했던 것일까? ‘결국 제어에 실패한 거야.’ 기무혁은 창천검문에서 남천검을 직접 만나본 경험으로 추측했다. 신병이기는 인간들이 쉽게 다룰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무기의 인정을 받거나 차라리 그 힘을 봉인하거나. 선택지는 둘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환몽은 폭주하고 있다.’ 흑의인들의 당황한 모습에서 그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끄아아아악! 젠장! 어떻게든 회수해! 바깥에 있는 술법사들을 불러!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가까이 갈수록 비명과 고함소리가 늘어나고, 혈향이 역할 정도로 짙어졌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수십 명의 검객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난전을 벌이는 현장에 도착했다. “검! 그 검을 내놔아아!” “흐흐흐하하하하하!” “죽어! 다 죽으라고!” 전부 제정신이 아니었다. 검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찌르고, 베고, 심지어 이빨로 물어뜯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 거야! 이 검은 내 거라고!” 운 좋게 검을 쥔 자가 주변을 떨치려는 듯 마구잡이로 휘둘렀지만, 다들 팔다리가 잘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덤벼들었다. 몇 초 만에 주인이 바뀌고, 검을 든 자가 죽어나가고, 다시 또 주인이 바뀌는 모습이 반복됐다. 그 광란의 현장에는 환몽을 회수하기 위해 투입된 흑의인들도 섞여 있었다. “이런 미친…….” “잠깐만.” 기무혁은 달려나가려는 구현우를 제지했다. 더 가까이 가면 그들도 저 광기에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내공을 끌어올려 마음을 다스리세요. 지금 저 안에 끼어들었다간 우리도 무사하기 힘들 테니까.” “……알았다.” 구현우는 이를 꽉 악물었지만, 기무혁이 말한 대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두 사람이 요검의 기운에 저항하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수십 명이 뒤섞인 난전이 끝났다. 그 최후의 승자가 언덕처럼 쌓인 시체들의 위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크르르르……. 두 눈에서는 붉은 안광을 쏟아내는 봉두난발의 검객. 전신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지만, 검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상처를 금세 지혈했다. 상대를 확인한 구현우가 침음했다. “흑적회의 회주다. 나보다 십 년은 먼저 명성을 떨친 사파의 검객이지. 저자가 왜 여기에…….” 상황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원숙한 절정의 검객이 신병이기를 손에 쥐고, 살기 띤 미소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기무혁도 구현우도 물러서지 않았다. 기무혁이 힐끗 옆을 보며 물었다. “……두렵지 않습니까?” “진짜 두려운 건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감이지.”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네요.” 피식 웃은 두 사람은 동시에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101화. 심장이 아니라 흑적회주는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괴소를 흘렸다. “흐흐……. 사형들. 두 사람이 귀신이 되어서 나를 잡으러 왔구려!” 그의 눈은 달려오는 기무혁과 구현우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현실과는 다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언젠가 찾아올 줄 알았소. 독에 당한 것은 좀 괜찮아졌소?” 흑적회주는 과거에 같은 스승에게서 수학한 사형들을 독살하고 회주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당시 같은 사파의 무인들에게도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을 욕한 자들을 찾아가 하나하나 잔인하게 죽임으로써 비난을 잠재웠다. 실실 웃고 있던 그가 순간 표정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리며 고함쳤다. “뒈졌으면 얌전히 지옥으로 꺼질 것이지, 왜 자꾸 찾아온단 말이냐!” 끔찍한 악인이라고 해서 모든 죄악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검을 배운 사형들.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적을 앞에 둔 채 등을 맞대고 싸웠던 추억들. 두 사형을 독살해 죽인 일은 흑적회주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트라우마였다. “빌어먹을 놈들! 백번이고 천번이고 또 죽여주마-!” 흑적회주가 두 눈에서 혈광을 폭발시키며 검을 휘둘렀다. 콰콰콰콰! 시뻘건 검기가 파도처럼 몰아쳤다. 그 위력에 대경실색한 기무혁과 구현우가 급히 좌우로 피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갔군.” 표정을 굳힌 구현우가 중얼거리자, 기무혁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자가 들고 있는 검이 환각을 보게 만드는 겁니다. 가장 끔찍한 트라우마를 자극해서 미쳐버리게 만들죠.” “굉장히 잘 아는구나?” 누구 덕분에. 기무혁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구현우를 똑바로 노려보며 경고했다. “그러니까 절대로 저 검을 쥐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뿐인 딸을 고아로 만들기 싫다면 말입니다.” “내가 저깟 요검의 유혹에 넘어갈 것 같은가. 차라리 팔을 자르고 말겠다.” 콧방귀를 낀 구현우가 흑적회주의 좌측으로 돌아서 움직였다. 그의 검에 반투명하게 지글거리는 검기가 맺혔다. 백면검객이 아닌 탈백검 구현우의 독문무공. 구도검(求道劍)의 초식이었다. 쩌엉! 충돌 후 구현우가 자신의 검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검기를 둘렀음에도 검날이 눈에 띄게 상했기 때문이었다. 조부 때부터 내려오는 명검이었으나 환몽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힘으로 부딪치지 마라! 검이 버티지 못한다!” 구현우의 외침에 기무혁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은밀히 움직여 흑적회주의 뒤에서 기습했다. 동시에 오행신공 중 수(水)의 기운을 끌어올려 주변의 공기를 차갑게 만들었다. 쩌저저적- 검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에 흑적회주의 동작이 순간적으로 느려졌다. 기무혁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등을 찔렀다. 찰나의 순간 흑적회주의 팔이 불가능해 보이는 각도로 꺾이며 공격을 쳐냈다. 검이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인 것처럼 기괴한 광경이었다. “부끄럽지도 않소, 사형? 비열하게 뒤에서 암습이라니!” 흑적회주가 고개를 돌려 기무혁을 바라봤다. 사람이 검을 쥔 것이 아니라 검이 사람을 휘두르는 모습에 가까웠지만, 그래서 더 예측하기 어려웠다. ‘강하다.’ 환몽에게 정신을 잠식당했지만, 상대는 원숙한 절정고수였다. 본신의 무위만으로도 기무혁을 능가하는 강자. 그가 사납게 웃으며 연환검식을 펼쳤다. 까가가강! 기무혁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내공을 금(金)기로 전환해 검에 불어넣었다. 금빛 기운을 두른 검이 환몽과 연달아 부딪쳤다. 금기 덕분에 검이 두 동강 나는 것은 피했지만, 속절없이 뒤로 밀려나며 수세에 몰렸을 때였다. “숙여라!” 뒤에서 들려온 외침에 기무혁이 고개를 숙이자 구현우가 뿌린 검기가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촤아악! 위력적인 일검에 흑적회주도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훌쩍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구현우가 기무혁의 옆에 와서 나란히 섰다. “지금처럼 따로 덤벼서는 힘들 것 같다.” “같은 생각입니다. 합공하시죠.”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 듯,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내게 보조를 맞춰라.” “선배님이 저한테 맞춰 주십시오.”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은 두 사람 사이로 붉은 검기가 날아왔다. 양쪽으로 급히 흩어진 두 사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후기지수 주제에 건방지기는! 살고 싶으면 내 지시에 따라!” “무공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내 지시대로 움직이는 편이 나은데…….” 버럭 화를 내는 구현우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기무혁. 그 사이에서 흑적회주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이제는 둘이 합공을 해도 나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는구려!” 흑적회주가 단전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기운을 검에 불어넣으며 일갈했다. “다시 지옥으로 꺼져라, 망령들아! 나는 이 힘으로 천하를 지배할 것이다!” 흑적회주를 감싼 붉은 기운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요검 환몽이 피를 머금으면서 축적한 힘. 그 힘을 사용하는 대가로 흑적회주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있었다. 상대에게 시간을 줄수록 불리해질 거라고 판단한 기무혁과 구현우가 나란히 달려나갔다. “내 옆에서 보조를 맞춰라!” “선배님이 맞추십시오!” 고집 센 두 검객은 양보를 몰랐고, 거울에 비친 것처럼 똑같은 검로를 그렸다. 채채챙! 그러나 합의가 되지 않은 어설픈 합공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서로의 손발을 어지럽게 만드는 지경이었다. “내가 정면을 막는다! 넌 뒤로 돌아가서 공격해!” “그 검으론 얼마 못 버팁니다! 제가 빈틈을 만들 테니 그때를 노려요!” “어린놈이 고집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양반이 왜 말귀를 못 알아들으실까?” 둘 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헤쳐 온 검객인 까닭이었다. 또한 그들은 아직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눈앞의 강적을 믿을 수 없는 녀석에게 맡기느니, 차라리 자기가 싸우는 것이 편한 이들이었다. ‘내가 해야 해.’ ‘내가 한다!’ 타협하지 않고 살아온 고지식한 정파인의 검. 그리고 어떤 전장에서도 살아서 돌아온 낭인의 검. 전혀 다른 듯하면서도, 두 사람의 검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두 사람도 함께 싸우면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빌어먹을…….” 합공을 시작할 때만 해도 못마땅한 듯 찌푸려져 있던 기무혁의 표정이 점점 묘하게 변했다. 그것은 짜증이나 분노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의 감정이었다. 기무혁이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재밌잖아?” 그 말을 들은 구현우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봤다. “단단히 미친 놈이구나.”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구현우의 입가에도 희미한 웃음이 맺혀 있었다. 그 역시 연배가 십 년 이상 나는 후기지수와의 합공에서, 오랜만에 순수하게 검객으로서 즐거움을 느꼈다. 두 사람의 검술이 하나로 어우러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네가 가라.’ 양보가 없던 구현우가 처음으로 옆으로 물러섰다. 그가 만들어준 공간으로 파고든 기무혁이 검을 쳐올렸다. 쩌어엉-! 갑자기 치고 들어온 일검에 흑적회주의 몸이 휘청였다. 환몽이 손에 아교처럼 달라붙어있지 않았다면 검을 놓칠 뻔한 위력이었다. 계속 공격을 이어갈 수도 있었지만, 기무혁은 욕심내지 않았다. 뒤에서 준비 중인 강맹한 기운이 완성되길 기다리며 허초로 상대의 시선을 흔들었다. ‘당신 차례야.’ 흑적회주의 검이 덧없이 허공을 베고, 기무혁이 몸을 높게 띄웠다. 흑적회주의 시선이 그를 따라갔을 때, 구현우의 검이 나타났다. 구도검의 절초를 준비했는지 지글거리는 검기가 우윳빛처럼 선명했다. 콰아아앙! 폭격에라도 맞은 듯 흑적회주가 피를 토하며 튕겨나갔다. “크흐흐……. 징글징글한 사형들! 오늘 끝장을 봅시다!” 피투성이가 된 채 분노하며 달려드는 흑적회주와 달리, 기무혁과 구현우는 많이 다치고 지쳤음에도 표정만큼은 편안했다. 절정고수들에게는 마음가짐의 작은 변화조차 깨달음이 된다. 그리고 뛰어난 재능은 불현듯 다가온 깨달음도 곧바로 발아시킨다. 우우우웅! 독고생사검(獨孤生死劍)이 구도검(求道劍)의 기세를 포용했다. 그러자 구도검의 기세도 더욱 살아나기 시작했다. 쩌엉! 콰앙! 푸화악! 두 줄기의 검로가 난마처럼 얽히면서도 서로를 간섭하지 않았다. 한 명의 검객이 두 자루의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듯한 연격이 쏟아졌다. 쿵! 쩌억! 까가각! 올려치고 회전하고 내려찍고 깎아내는 온갖 검술 기예의 향연. 절정의 두 검객이 신들린 듯 요검을 비껴 쳤다. 수십, 수백 번이나 망치질을 당한 환몽의 분노가 숙주에게 전해졌다. “바퀴벌레처럼 질기기는! 이만 죽으란 말이다-!” 흑적회주는 이제 완전히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검을 쥔 손등이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가득했다. 촤촤촤촤촤!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검에서 검기가 비처럼 쏟아지는 순간, 기무혁과 구현우가 짧게 시선을 마주쳤다. ‘슬슬 끝을 내자.’ ‘동시에 갑시다.’ 눈짓으로 생각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함께 쏟아지는 검기를 피하며 거리를 좁혔다. 온몸에 자잘한 상처가 늘어났지만 둘 다 개의치 않았다. 우우우웅! 기무혁은 오행신공을 끌어올렸다. 수기와 금기를 바탕으로 화, 목, 토의 기운까지 모조리 끌어왔다. 구현우도 전력으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검 위로 검기가 도도하게 흘렀다. “흐하하하! 사형들이 정녕 나를 죽일 셈이오? 오시오! 다 함께 사이 좋게 지옥으로 갑시다-!”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는지, 흑적회주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끝까지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무혁과 구현우를 자신이 과거에 죽인 사형들이라고 믿었다. “지금이다!” 구현우가 흑적회주의 공격을 정면에서 막으며 외쳤다. 찰나의 순간, 자신이 기회를 만들고 기무혁에게 마무리를 맡기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판단은 정확했다. 푸우욱! 동료가 만든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기무혁이 흑적회주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 “쿨럭……!” 당장 절명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치명적인 상처. 실제로 흑적회주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왼팔이 움직여 기무혁의 검을 붙들었다. 사아아아- 동시에 사악한 기운과 함께 흑적회주의 입에서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심장이 아니라 팔을 베었어야지. 입가에 불길한 미소를 띤 흑적회주의 얼굴에 핏줄이 터질 것처럼 불거지더니, 이내 폭죽처럼 폭발했다. 퍼어어엉! 섬뜩함을 느낀 기무혁이 두 팔로 몸을 보호하며 뒤로 물러난 순간, 스스로 허공으로 떠오른 환몽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조심해라!” 뒤에서 구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기무혁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직후 환몽이 아슬아슬하게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기무혁은 오히려 의아했다. ‘빗나갈 리가 없는데?’ 팔 하나를 내줄 각오까지 했는데, 그냥 스쳐지나간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문득 불길함을 느낀 기무혁이 급하게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구현우! 피해!” 그러나 이미 기무혁을 스쳐지나간 환몽이 무언가를 꿰뚫은 뒤였다. “…….” 구현우가 자신의 몸에 꽂힌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102화. 이제부터 너희도 현우 씨……. 복부를 꿰뚫은 검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구현우가 흠칫 놀라서 앞을 바라봤다. 사무치게 그리운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몇 년 전 사별한 아내가 두 손으로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나 보고 싶었어요? “……당신, 당신이야? 정말 당신이야?” 바보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남편을 아내가 꼭 안아주었다. 구현우는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진짜 아내였다. 이렇게 선명한 감촉이 느껴지는데 가짜일 리가 없었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늦게 왔죠? “아냐, 하나도 안 늦었어. 함께 집에 가자. 하하! 지우가 당신을 보면 얼마나 좋아할지 상상도 안 돼…….” 지우가 태어나고, 세 가족이 함께 꾸려갈 미래에 가슴이 벅차고 행복하던 시절. 가끔은 현실의 무게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결국 다 잘 될 거라며 아내와 함께 웃던 날들. 다시 그때로 돌아가기를 구현우는 간절히 원했다. 그 순간. ……당신이 우리를 지켜줘야 해요. 아내가 불안한 표정으로 몸을 떨자 구현우가 그녀를 위로하며 장담했다. “걱정 마. 내가 있는데 누가 감히 우리 가족을 건드리겠어?” ……지키지 못했잖아요. 그리고 이번에도 지키지 못할 거잖아요. “여보? 그게 무슨 소리야? 이번에도, 라니?”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구현우의 눈이 서서히 붉게 물들고 있었다. 아내를 잃고, 하나뿐인 딸조차 절맥증이라는 얘기를 들은 뒤 그에게는 심마가 찾아왔다. 그럼에도 딸아이를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마음을 다스려왔다. 하지만 환몽이 보여주는 아내의 모습에, 한동안 잠잠해졌던 심마(心魔)가 다시금 내면에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를 지키지 못했잖아! 저 인간이 나를 죽일 때 당신은 내 곁에 없었잖아! 아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 순간 구현우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음주운전으로 아내를 친 남자가 그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현우! 정신 차려! 수천 번도 더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끝내 검을 들지 못하고 법의 판결에 처분을 맡겨야만 했던 살인자. 고개를 돌려 다시 옆을 돌아보자 피투성이로 변한 아내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저 살인마를 죽여줘요! 저 남자가 우리 지우마저 죽일 거야-! 트라우마가 된 아내의 마지막 모습을 본 순간, 구현우의 이성이 마비되었다. “으아아아아아아-!” 구현우는 자신의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복부에 꽂힌 환몽을 두 손으로 뽑았다. 스으윽……. 검이 뽑혀 나오며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환몽의 기운이 상처를 두르며 출혈을 막았다. 비칠거리며 검을 뽑아낸 구현우가 자신의 피로 붉게 물든 환몽을 기무혁에게 겨눴다. “죽여버리겠어……. 내 아내를 죽여 놓고 딸까지 해치려는 살인자!” 구현우를 휘감은 환몽의 기운이 불꽃처럼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가 기무혁을 향해 덤벼들었다. “이 세상에서 흔적조차 못 찾게 찢어발겨 주마!”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는 구현우.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기무혁이 입안에 고인 피를 바닥에 뱉었다. “퉤.” 과거에 수없이 상상해 보았던 상황이기 때문일까. 기무혁은 크게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한편으로는 이렇게 되길 조금쯤은 바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솔직히 한 번쯤은 당신과 제대로 붙어보고 싶었어.” 탈백검 구현우. 기무혁의 지난 생에서 부모님을 해친 불구대천의 원수. 때문에 그가 이성을 잃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모습은 기무혁에게도 오래된 분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불과 며칠 전이었다면, 기무혁은 망설이지 않고 구현우를 베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보니 이런 식으로 끝내는 건 별로인 것 같아.” 지하투기장에서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신념을 지키던 모습. 절맥에 걸린 딸을 지키기 위해 그 신념조차 버리려고 각오하던 눈빛. 그 전까지 상대에 대해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면서, 기무혁은 응어리졌던 분노가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남은 감정은 검객으로서 겨뤄보고 싶다는 호승심뿐이었다. 기무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나중에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고.” “죽어어어어!” 이성을 잃은 구현우의 검과 기무혁의 검이 정면에서 부딪쳤다. 쩌어엉-! 환몽의 힘을 몇 번이나 겪어보았음에도 기무혁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캬캬캬캬캬!” 요검에게 조종당하는 구현우의 입에서 사악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너 따위는 가소롭다고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금세 사라졌고, 그 자리를 푸들푸들 떨리는 뺨이 대신했다. “뭔가 좀 이상하지?” 기무혁은 더 이상 구현우가 아닌, 그의 손에 들린 채 휘둘러지는 환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트라우마를 건드려 자기 뜻대로 조종하는 괘씸한 요검. 사실 기무혁의 진짜 원수는 환몽 그 자체였다. “널 꼭 길들여서 다시는 나쁜 짓을 못 하게 만들어야겠다.” 기무혁이 단전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항마(降魔)의 기운을 끌어올려 자신의 검에 휘감았다. 쩌어엉-! 뒤로 크게 밀려난 구현우가 고통스러운 듯 표정을 잔뜩 찌푸렸다. 거세게 타오르던 환몽의 기운이 불규칙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거야. 가지고 있다 필요할 때 꺼내 써. 기무혁은 남천검이 말한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검에 은은한 백색의 기운이 맺혔다. “끄아아아악!” 고통스러운 괴성과 함께 환몽이 내뿜는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붉은 기운이 마치 안개처럼 주변으로 펼쳐졌다. 그러나 기무혁은 개의치 않고 붉은 안개를 헤치며 나아갔다. 그는 구현우가 아닌 환몽만을 노려서 검을 휘둘렀다. 쩌어엉! 쩌엉! 쩌저저정-! 검끼리 부딪칠 때마다 환몽이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부르르 검신을 떨었다. 오랜 시간 사람의 피를 마셔오며 쌓여온 원한과 마기. 그것으로 이루어진 환몽에게 항마의 기운은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기무혁의 몸에도 상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지만, 그는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그만! 그만해! 그마아안-!” 죄인에게 벌을 내리듯, 기무혁은 환몽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하지만 환몽 또한 신병이기였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사악한 기운을 연신 내뿜었고, 기무혁의 몸에도 무수한 혈선이 그어졌다. 하지만 그 대가로 기무혁이 의도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으으으…….” 남천검이 남겨준 항마의 기운은 환몽에게만 충격을 준 것이 아니었다. 끔찍한 환상에 갇혀 있던 구현우의 눈빛이 조금씩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 여기는…….” 그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기무혁이 구현우의 등 뒤를 점했다. “정신 차려, 구현우!” 구현우의 등에 손바닥을 붙인 그가 남아있는 항마의 기운을 모조리 구현우에게 불어넣었다. “지우 얼굴, 다시는 안 볼 거야? 집에서 아빠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 딸의 이름을 들은 구현우의 눈빛이 점점 정상으로 돌아왔다. 환몽이 그에게 무수한 환영과 거짓된 삶을 보여주었지만, 기무혁과 항마의 기운에 도움을 받아 구현우는 가까스로 심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목숨을 빚졌군.” 검을 늘어뜨린 구현우가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손 안에서 부르르 진동하는 환몽을 노려봤다. 녀석은 아교를 붙인 것처럼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다시 구현우의 몸을 빼앗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쯧. 끝까지 진상을 부리는군. 억지로 떼어낼 수도 없고…….” 기무혁이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구현우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구현우는 여전히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환몽에게 잡아먹힐 터였다. “……어려울 것 없다. 간단한 방법이 있으니까.” 그리고 구현우는 기무혁이 말리기도 전에,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서 자신의 오른팔을 잘라버렸다. 서걱! 환몽과 함께 바닥에 떨어지는 구현우의 오른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에 기무혁이 눈을 부릅떴다. 검객이 검을 쥐는 팔을 잃는다는 것은 무공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당신 미쳤어?” 기무혁이 진심으로 화를 냈지만, 구현우는 오히려 덤덤한 미소를 지었다. “……말하지 않았나. 요물에게 조종당하느니 차라리 팔을 자르겠다고. 검객이 자존심이 있지.” 후련한 표정을 지은 구현우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너무 많은 피를 흘린 탓이었다. 스스로 지혈을 한 그가 바닥에 힘겹게 주저앉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조금 쉬어야 할 것 같군.” 동굴 벽에 기댄 구현우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희미한 숨소리를 확인한 기무혁이 그를 내려보며 한숨을 쉬었다. “뭐 이런 인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기무혁은 바닥에 떨어진 구현우의 오른팔을 챙겼다. 쩌저저적-! 수기(水氣)를 내뿜어 오른팔을 차갑게 만들어 괴사를 최대한 늦췄다. 빠르게 병원으로 데려간다면 접합수술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수술을 잘 받으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회복할 가능성도 있었다. 응급처치부터 끝낸 기무혁이 환몽을 회수하기 위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아해야, 거기까지 하려무나.” “…….” 기무혁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두 노인이 뒷짐을 진 채 걸어오고 있었다. “감동적인 싸움이었다. 둘 다 여간내기가 아니구나.” “흑적회주를 쓰러뜨린 것도 놀라웠거늘. 둘 다 본련의 무인이 아닌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정도의 실력이더구나.” 키가 크고 작은 두 노인. 심후한 내공이 깃든 그들의 목소리가 동굴 전체에 울려 퍼졌다. “……타이밍 한번 끝내주는군. 다 끝나니까 이제야 주워 먹으러 왔나?” 기무혁의 빈정거림에도 두 노인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저희들끼리 대화를 나눴다. “저 아이는 신묘한 기운을 사용하던데. 데려가서 면밀히 살펴봐야겠소. 필요하면 단전을 뜯어내서라도…….” “저기 외팔이도 환각 저항력이 높은 것 같으니 함께 데려가서 이것저것 실험해 보십시다.” 두 노인의 정체는 탐라련의 좌우호법이었다. 그들은 기무혁을 다 잡은 물고기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무혁은 흑적회주, 구현우와 연달아 싸우느라 몹시 지쳤으니까. 체력은 한계에 가까웠고 남은 내공도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각각이 흑적회주와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보이는 두 노인을 상대하기란 불가능했다. “너희들.”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말이다. “지금까지 요검한테 먹잇감 던져주고 뒤에서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지?” 기무혁이 입가에 맺힌 피를 손등으로 훔쳐내며 그들을 바라봤다. 그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너희도 한번 당해봐.” 쿵! 기무혁이 강하게 발을 구르자, 환몽이 기다렸다는 듯 스스로 구현우의 팔에서 빠져나와 허공으로 치솟았다. “무슨 짓을 하려고……!” “설마 저 미친놈이!”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좌우호법이 기무혁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기무혁이 그들보다 한발 빨랐다. 꽈악! 망설이지 않고 환몽의 검파를 강하게 움켜쥔 순간. 세계가 붉게 물들며 악몽 같은 기억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103화. 왜 화를 내? 환몽의 검신은 핏물로 담금질한 것처럼 은은한 붉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내 검이다.’ 기무혁이 환몽을 손에 쥔 순간 든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검이었던 것처럼 부드럽게 손에 감겼다. 균형감과 무게도 완벽했다. 제대로 길들이기만 한다면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 녀석이었다. “……어디 한번 해볼까.” 작게 중얼거린 기무혁이 눈을 감았고, 직후 그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사방으로 발출됐다. 콰콰콰콰콰콰-! 폭주하는 기운에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고, 발은 허공에 한 치쯤 떠올랐다가 천천히 다시 내려섰다. 눈을 뜬 기무혁이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길게 내쉬었다. “하아아아아아-.” 만찬을 음미하는 듯한 감탄사와 함께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꼬리. 그가 내뱉는 숨결에선 붉은 기운이 흘러나왔고, 두 눈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악의가 가득했다. 환몽을 회수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탐라련의 좌우호법이 곤란해 보이는 표정으로 멈춰 섰다. “쯧. 기어이 악수를…….” “미련하기는. 다른 자들이 어떻게 됐는지 보고도 검을 쥐었단 말인가?” 두 노인의 얼굴에 짜증과 분노가 어렸다. 기무혁을 데려간 뒤 그가 사용하던 항마의 기운을 연구할 작정이었는데, 요검에게 홀리면서 계획이 무산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저 녀석도 요검이 보여주는 환상에 빠져서 미쳐 날뛰다가 죽게 될 것이 뻔했……. “어? 나한테 밥 주던 늙은이들이구나?” 그 순간 두 노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기무혁의 상태는 지금까지 그들이 봤던 검객들과는 전혀 달랐다. 환각을 보고 미쳐서 날뛰지도 않았고,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울부짖지도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걸어오며 자신들을 아는 척 말을 걸어왔다. 마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몸에 씐 것처럼. “저 모습은 설마…….” “우호법도 같은 생각이시오?” 서로를 마주본 두 노인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요검을 신병이기로 벼려내기 위해 수많은 검객을 제물로 바쳤지만, 지금껏 누구도 환몽의 힘을 저만큼이나 끌어낸 인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무혁이 내뿜는 가공스러운 기파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비로소 검신합일(劍身合一)에 성공했구나!” “하하하! 련주께서 그토록 바라왔던 순간이 왔구려!” 환몽이 숙주의 몸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사례가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앞으로 저 존재는 탐라련의 비밀병기로서 한국무림의 판도를 바꿀 것이다! 희열에 찬 탐라련의 좌우호법이 기무혁을 향해 다가갔다. “요검이여! 비로소 신병이기로 각성했구나. 우리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고대해왔다!” “네 주인께서 기다리신다. 어서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자꾸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두 호법을 바라보며 환몽이 환히 웃음을 보였다. “하하하! 환영해줘서 고마워. 근데…… 난 주인 같은 거 없는데?” 섬뜩한 살기가 느껴진 순간, 탐라련의 두 호법이 황급히 물러섰다. 촤아아아악! 허공에 핏물이 튀고, 낭패한 표정의 두 호법이 물러났다. 날카롭게 베인 몸의 상처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하마터면 치명상을 입을 뻔한 그들이 노호성을 터트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 “배은망덕한 놈! 우리는 너를 태어나게 해준 부모나 마찬가지거늘…….” 기무혁, 아니 기무혁의 육체를 장악한 환몽은 검날에 맺힌 핏방울을 혀로 핥으며 웃었다. “왜 화를 내? 날 이렇게 만든 건 너희들이잖아?” 콰앙-! 바닥을 박찬 환몽이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로는 기무혁이 직접 펼치는 것만큼이나 예리했다. 아니, 환몽은 기무혁의 검술을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었다. 까가가강! 사납게 쏟아지는 검기에 두 호법이 기함하며 마주 검을 휘둘렀다. 그들은 련주 다음 가는 탐라련의 최고수였다. 개개인의 실력이 죽은 흑적회주와 비견될 정도였으며, 노련함은 한 수 위라고 자부했다. “쯧. 일단 제압부터 해야겠소이다.” “건방진 것. 한낱 병기 따위가 인간의 몸을 차지했다고 신이라도 된 줄 아느냐?” 때문에 그들은 기무혁을 죽이지 않고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한 자신감이 착오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불과 수십 합을 나눈 뒤였다. “크헉…!”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강해지는 붉은 기운이 두 호법을 압도했다. 아무리 신병이기를 들었다고 해도 고작해야 절정 초입의 무인이 뿜어내는 무위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하하하! 이 몸, 정말 최고야!” 환몽은 흑적회주나 구현우가 자신을 쥐었을 때보다 월등히 더 강한 힘을 발휘했다. 기무혁은 무인으로서 그들보다 훨씬 큰 잠재력을 품고 있었으며. -……너는 시작부터 남천검의 힘을 절반 가까이 끌어냈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겠느냐? 창천검문의 문주가 인정할 만큼 신병이기의 힘을 강하게 이끌어내는 재능마저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환몽은 자신의 힘을 이전까지 해본 적 없었던 수준으로 완전히 개방했다. 콰콰콰콰콰콰! 환몽의 공격이 점점 빨라지고 강해졌다. 그만큼 그를 상대하는 호법들의 몸에 상처가 점점 늘어났다. “어찌 이만한 힘을…….” “그 몸이 무사할 줄 아느냐! 기운이 고갈돼 죽게 될 것이야!” 피를 게워 내며 검을 휘두르는 기무혁의 얼굴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폭주하는 신병이기의 기운이 몸을 점점 망가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을 장악한 환몽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광기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너희를 죽여서 그 피를 마시면 돼!” 두 호법의 눈에 서서히 공포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려, 련주께 연락을…….” “일단 후퇴합시다! 놈을 제어하려면 봉인도구와 술법사가 필요하오!” 신병이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많은 검객들의 피를 바친 자들에게, 그 대가를 치를 순간이 닥쳤다. 탐라련의 두 호법이 급히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환몽은 그조차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어딜 가려고? 나랑 계속 놀아야지.” 콰콰콰콰쾅! 환몽이 쏟아 내는 공격에 동굴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처음 느껴보는 해방감에 취한 환몽이 마음껏 자신의 힘을 드러냈다. 하지만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숙주를 얻은 신병이기는 정작 자신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스슷……. 자신의 본체인 검신의 붉은빛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 * * 캄캄한 밤, 해안가의 절벽. 바람이 칼날처럼 얼굴을 스치고, 파도가 절벽에 부딪쳤다. 파도 소리가 흩어질 때마다 창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공백을 채웠다. 절벽 위에서 무인들 간에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화르르륵! 불꽃에 휩싸인 도가 흑의인들을 베고 쓰러뜨렸다. 살이 익을 것 같은 적양공의 열기에 흑의인들이 고통스러워하며 물러섰다.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하는 놈들이냐! 정체를 밝혀라!” “……암흑협객 더 파이어.” 붕대로 얼굴을 가린 신강헌이 자신을 막아서는 적들을 둘러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인들을 응징하기 위해, 이 몸 등장!” “그 부끄러운 자기소개는 대체 언제까지 할 건데?” 신강헌의 뒤에서 김복자가 두 눈에 새파란 귀화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 떠오른 그녀의 눈동자는 담이 큰 무인들조차 마주보기 두려울 정도로 섬뜩했다. “까귀. 삽살이. 왕뱀……. 전부 물어뜯어!” 소환된 괴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흑의인들을 공격했다. 김복자는 술법을 펼쳐서 흑의인들과 맞서는 신강헌을 보조하고,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차단했다. 뺘악! 살구도 작은 불꽃을 토해 냈다. 아직 어린 새끼이기는 해도 대괴이는 대괴이였다. 그 작은 불꽃을 무시했던 흑의인들은 꺼지지 않는 불길에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을 굴렀다. “어, 어디서 이런 고수들이…….” “상부에 알려라! 습격자들이 나타났…… 커헉!” 자신들로는 감당이 안 되겠다고 판단한 흑의인들 중 일부가 도망치려 했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퍼억! 도의 옆면을 휘둘러 마지막 한 명까지 기절시킨 신강헌이 주변을 둘러봤다. 점혈로 제압한 대장을 제외하고 십여 명이 전부 쓰러져 있었다. “너희들,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누굴 건드렸는지도 모르고…….” “안 그래도 지금부터 그걸 알아볼 건데?” 목이 뻣뻣했던 흑의인은 김복자의 술법에 걸려 눈동자가 게게 풀렸다. “소속과 이름, 이곳에 온 이유를 말해주실까?” “탐라련 무력대 제12조 조장…….” 기무혁이 백인검객 살육전에 참가해 있는 동안, 김복자와 신강헌은 그 배후를 조사했다. 승합차에 탄 기무혁을 멀리서 뒤쫓은 그들은 차가 웬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고, 무인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통제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동굴 뒤편에 경비를 서는 흑의인들을 기습해서 정체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탐라련. 제주도 최대의 무림세력이 이 끔찍한 살육게임의 배후에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흑의인을 취조한 후 신강헌이 눈썹을 꿈틀대며 말했다. “지금까지 검객들이 실종된 것도 전부 이 자식들 짓이라는 거네?” “정황상 그런 것 같은데……. 확실한 증거는 더 안쪽에 있을 거야.” “빨리 가서 확인해보자고!” 거침없이 절벽 안쪽으로 향하려는 신강헌의 팔을 김복자가 잡아챘다. “잠깐만. 이 이상은 우리 둘만으로는 무리야.” 김복자는 현실적으로 상황을 판단했다. 그들이 방금 전까지 상대한 무인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뭘 지키는지도 잘 모르는 탐라련의 하급 무인들이었다. 절벽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탐라련의 정예무인들이 지키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 삼엄한 경계를 뚫고 그들이 원하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리고 만약 우리 정체를 들키기라도 하면…… 오히려 누명을 뒤집어쓰게 될 수도 있어.” 조심스러운 김복자의 태도에 신강헌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반박했다. “그럼 여기서 기무혁이 나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자고?” “누가 그러재? 준비를 더 확실하게 하고 들어가자 이거지.” 김복자는 휴대폰을 꺼냈다. 백인검객 살육전에 참가하기 전, 기무혁이 그녀에게 미리 맡기고 간 휴대폰이었다. -너희 둘이서 감당하기 어렵겠다 싶으면 이 번호로 전화해. 친구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면 될 거야. -최건 선생님이나 무림맹에 먼저 연락하는 게 아니라? -스승님은 바빠서 연락해도 바로는 못 오실 테고, 무림맹이 오면 일이 너무 커져. 그 친구는 요즘 백수거든. 백수라는 말이 사실인지, 신호가 가자마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기무혁? 네가 이 시간엔 웬일이야?] “……안녕하세요. 저는 기무혁 친구인데요.” 김복자가 상황을 설명하자 휴대폰 너머의 상대가 처음에는 황당해하더니, 이내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이 서 있는 절벽이 갑자기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쿠르르르릉! 동시에 김복자는 몸서리치도록 끔찍한 괴이의 기운이 깨어남을 느꼈다. “미친……. 도대체 뭘 건드린 거야?” 살면서 수많은 괴이와 그들이 내뿜는 악의를 겪어 본 김복자조차 경악할 정도의 기운. 기무혁이 말한 신병이기급의 요검이 내뿜는 힘이 틀림없었다. “갑자기 뭔데? 이거 괴이야?” 신강헌도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에 침을 꿀꺽 삼켰다. 기무혁이나 김복자처럼 괴이를 느끼는 재능은 떨어지지만, 타고난 감각으로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절벽 안쪽에서 굉음과 비명이 잇달아 들려오기 시작했다. 막아! 어떻게든 포획해야 한다! 전 병력 집결하라! 통제가 안 됩니다! 봉인도구가 전부 안 먹힙니다! 잠시 서로를 마주본 신강헌과 김복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봐야겠지?” “하여간 걘 뭐 하나 조용히 지나가는 게 없다니까.” 스마트폰 너머에서도 굉음을 들었는지 통화 상대가 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얘기를 하다가 말면 어떡해!] “자세한 건 기무혁밖에 몰라요. 하여간 급한 상황이니까 올 수 있는 대로 빨리 와줘요!” 대략적인 위치만 알려주고 전화를 끊은 후, 두 사람은 탐라련의 무인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안으로 잠입했다. 104화. 또 헛짓거리하면 기무혁은 환몽에게 완전히 육체의 지배권을 빼앗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스스로 내어준 것에 가까웠다. ‘환몽이 내 몸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믿게 만들어야 해. 그래야 들키지 않고 놈의 내면에 최대한 깊게 들어갈 수 있어.’ 어떻게 해야 환몽을 자신의 검으로 만들 수 있을까? 여기까지 오는 동안 기무혁은 수없이 생각했다. 남천검에게 얻은 항마의 기운을 이용한다면 수월하게 녀석을 제압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항마의 기운은 구현우를 구하기 위해서 전부 사용한 상황. 물론 기무혁은 구현우를 구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닌 능력으로 제압한다 해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테니까.’ 항마의 기운으로 환몽을 제압하는 것은 안전하기는 해도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다. 평생 봉인만 해둘 거라면 모를까, 기무혁이 원하는 것은 환몽이 자신을 주인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기무혁은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더 확실한 방법을 선택했다. “여기가…… 환몽의 내면인가.” 기무혁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걸으며 중얼거렸다. 하하하하하하! 이 몸, 정말 최고야-! 저 멀리 하늘에서 환몽이 외치는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반면 기무혁이 서 있는 곳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은 심연이었다. 이 앞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기무혁은 본능에 따라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환몽에게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숙주다. 어느 쪽이 이기더라도 쉽게 죽게 내버려두진 않겠지.’ 바깥의 상황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체력과 내공이 거의 바닥난 상황. 제아무리 환몽을 쥐었다고 하더라도 탐라련의 두 호법을 상대할 수 있을진 확신할 수 없었다. ‘구현우는 어떻게 됐을까? 복자랑 신강헌은 괜찮겠지? 상대가 탐라련 같은 큰 조직이라면 바깥이 더 위험할 수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심연을 혼자서 헤쳐 나가려니, 오만가지 생각과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기무혁은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묵묵히 걸었다. ‘당장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바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이 안에서 환몽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기무혁은 창천검문에서 신병이기를 쥐는 방법에 대해서 배울 때, 나일천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첫 번째로 익숙해지는 것, 두 번째는 영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만 되어도 제대로 검을 쥘 수 있을 것이다. 남천검이 아닌 환몽이라고 해도 그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기무혁이 이렇게 심연을 걷는 것도 환몽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얼마나 걷고 또 걸었을까? 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화난 듯한 환몽의 목소리에 기무혁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심연의 하늘 위. 붉은 달과 같은 눈동자 하나가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기무혁이 눈동자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이제 눈치챘냐? 화내는 걸 보니까 꽤 깊은 데까지 오긴 했나 보네.” ……감히 여기에 온 걸 후회하게 해주겠어! 스스스슷. 그 순간 붉은 안개가 스멀스멀 움직이더니 사람들의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전부 다 기무혁이 아는 얼굴이었다. “너희들…….” 독고귀로 살았던 지난 생, 그가 견뎌야 했던 후회들이 그곳에 있었다. “전부 당신 때문이야! 함께 살아서 돌아오겠다고 했으면서……!” “대장, 왜 날 버렸어? 왜 항상 너만 살아남는 거야?” “복수해 준다고 했잖아! 전부 다 죽여주겠다고 했잖아!” 전장에서 잃은 동료들.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그러나 결국에는 자신의 곁을 떠난 사람들. 환몽은 기무혁의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상처를 찾아내 다시 헤집었다. “당신이 그때 실수하지만 않았어도 난 살았을 거야!” 잘못된 선택으로 동료가 죽은 적이 있었다. “나도 내 가족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 그랬을 뿐인데…….” 악인이라고 생각하고 베었던 자들 중 일부는 또 다른 피해자에 불과했다. “이번 달은 쪼금 빠듯하네……. 부업이라도 하나 더 할까?” “됐어요. 쓸데없이 사는 거 줄이면 되지.” 부모님의 웃음 뒤에, 얼마나 큰 희생과 양보가 있었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 밖에도 전생의 기무혁은 무수히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다가온 사람들이 손을 뻗어 기무혁을 붙잡았다. 팔다리를 잡고 늘어지고, 걸음을 멈춰 세웠다. 곧 기무혁의 얼굴 아래는 그 손들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왜 너만! 왜 너만! 왜 항상 너만 살아있는 건데!” 원망과 증오가 담긴 목소리가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죄책감에 짓눌려 미쳐버리거나 눈을 감아 외면해 버렸을 것이다. 캬캬캬캬캬! 내가 후회할 거랬지! 환몽은 기무혁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본 어떤 인간보다 후회와 상처가 깊은 인간이었기에, 더 빨리 무릎을 꿇으리라고 확신했다. 넌 이제 완전히 내…… 뭐, 뭐야? 뭔가 이상했다. 그 많은 손에 붙들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무혁의 표정은 놀랍도록 차분했다. 죄책감에 질끈 눈을 감지도,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행동들을 부정하며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다. “다들…….” 오히려 자신에게 달라붙는 과거의 인연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다.” 마치 그들이 그리웠다는 듯, 한 명 한 명을 응시하면서. “한 번쯤은 선명하게 다시 보고 싶었어.” 누군가는 피투성이였고, 누군가는 신체의 결손이 심각했다. 대부분 기무혁이 기억하는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기무혁은 그들 중 누구도 잊지 않았다. 자신의 실수와 후회를 똑바로 마주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푸스스스……. 환몽이 불러왔던 기억들이 연기로 변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자 환몽이 당황해 소리쳤다. 너 뭐야? 이상해! 보통은 저런 걸 보면 미쳐버리는데! 기무혁은 다시 걸음을 옮기며 하늘 위에 뜬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잡아먹을 듯 사나웠다. “왜냐면 이미 몇 번이나 미쳐버렸던 적이 있거든.” 한때 매일 밤 악몽을 꾸면서 봤던 모습들. 기무혁은 환몽이 자신에게 뭘 보여줄지 예상하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만큼 쉽게 당하지 않았다. “……하나하나 다시 기억나게 해줘서 고맙다. 이 은혜는 지금 바로 갚도록 하지!” 화가 난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기무혁은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환몽은 다시 한번 기무혁의 기억을 들춰내서 환영을 보여주었다. 사방에서 나타나 손을 뻗어오는 과거의 망령들. 기무혁은 이를 악물며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 달렸다. “한 번 봤으면 됐지.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들 마라!” 낭인 시절처럼 거칠게 내뱉는 말과 달리, 기무혁의 눈은 붉게 충혈 돼 있었다. 그 역시 슬픔을 모르는 철인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기무혁에겐 환몽에 홀린 다른 사람들에겐 없는 것이 있었다. 우우우웅-! 오행신공이 저절로 움직여 환몽의 요기로부터 주인의 정신을 보호했고. 김복자가 심마를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옷 안에 붙여준 부적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주었으며. -저희 아들은 나중에 세계비무 대회에 나가서 우승할 겁니다! 무혁아. 그렇지? -부상이라도 당하면 전부 도루묵이야.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운동해. 기적처럼 다시 만난 부모님의 목소리가 그를 과거가 아닌 현실로 이끌었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고.” 기무혁이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멀지 않은 곳, 시체로 이루어진 언덕 위에 검을 들고 서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관자놀이 양쪽에 뿔이 달리고 눈동자가 새빨간 소년이 고함을 질렀다. 죽여버린다-! 콰콰콰콰콰! 붉은 안개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모습을 보며 기무혁은 확신했다. 저 녀석이 바로 환몽의 본질이자 영혼이라고. 터엉! 바닥을 박차며 전력으로 질주했다. 동시에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이 심연은 환몽의 내면이자 기무혁의 심상세계이기도 한 장소. 누군가를 상상해서 불러낼 수 있는 것은 환몽만이 아니었다. 스르릉……. 어느새 기무혁의 손에는 창천검문의 신병이기인 남천검이 쥐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남의 기억을 들춰서 상처를 헤집는 게 재미있었지?” 단숨에 언덕을 타고 오르는 기무혁의 두 눈에, 소년이 두려움에 부르르 떠는 모습이 보였다. 악인들의 욕심 때문에 피를 마시는 신병이기로 벼려진 요검. 만약 처음부터 제대로 된 주인의 손에 들렸다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평생 데리고 다니며 교육시켜 주마.” 크아악! 저리 가! 저리 꺼지라고! 기무혁이 달려들어 검을 휘두른 순간, 소년도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하듯 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엉-! 그 순간 세계가 뒤흔들릴 정도의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소년이 고통스러운 듯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불안에 떠는 눈동자, 흔들리는 검극을 간신히 기무혁에게 겨누며 중얼거렸다. 넌 왜 두려워하지 않아? 어째서 무서워하지 않아? 다른 놈들처럼 미쳐버렸어야 하는데……! 아쉬운 일이지만, 지금의 환몽은 남천검에 비하면 격이 한참은 낮았다. 검으로서 살아온 세월도, 주인과 함께 강적들을 상대한 경험도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아직은 신병이기보다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요검에 가까운 존재. ‘하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된 주인이 없었던 만큼 발전할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아직 후기지수에 불과한 자신과 함께 성장한다면, 언젠가는 저 남천검이나 리차드 한의 신검마저 뛰어넘는 신병이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쩌엉! 쩌엉 쩌어엉! 기무혁은 잘못을 저지른 자식에게 회초리로 훈계하듯 검을 휘둘렀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환몽이 비명을 질렀다. 그만! 그만! 그만해! 비틀거리며 물러나던 소년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소리쳤다. 알았다! 너, 나랑 같은 존재구나! 인간이 아니었어! 환몽은 기무혁을 괴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기무혁은 회귀자였으니까. 이미 한 번의 생을 살았고, 죽음을 겪으며 과거로 회귀한 인간이 평범한 인간과 같을 리 없었다. “맞아. 난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신강헌 식으로 표현하면…….” 휘이익! 다시 달려든 기무혁이 눈을 사납게 치켜뜨며 소년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검에 미친 놈이지.” 쩌엉! 쩌엉! 쩌저저저정! 기무혁은 환몽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기세로 검을 휘둘러 부딪치고 또 부딪쳤다. 힘으로 누르는 것이 신병이기를 취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 전에, 최대한 기를 꺾어 놓을 필요는 있었다. 물론 전생에 있었던 일에 대한 분풀이는 보너스였다. 아아아아악! 항복! 항복할게! 끝내 항복을 선언한 소년의 모습이 연기처럼 흩어지고, 검만 남아서 바닥에 푹 박혔다. 기무혁이 걸어가서 환몽의 손잡이를 꽉 쥐며 말했다. “또 나한테 헛짓거리하면…… 그땐 진짜 부러뜨린다.” 나지막한 협박에 환몽의 검신이 부르르 떨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그다음 순간, 기무혁은 미몽(迷夢)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105화. 꼭 왔을 것 같거든. 기무혁이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구의 시체였다. “…….” 탐라련의 좌우호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죽어 있었다. 전신에 생긴 수백 개가 넘는 상처들과, 걸레처럼 비틀어져 찢긴 사지는 그들이 죽기 전까지 끔찍한 고통을 느꼈음을 짐작케 했다. 기무혁은 피로 얼룩진 고글과 답답한 복면을 벗어던졌다. 더 이상 정체를 감추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야, 환몽.” 저들이 여태껏 저지른 악행을 생각하면 인과응보였지만, 자신의 몸을 조종해 인간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 죽였다는 사실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환몽은 기무혁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안 하지? 부러지고 싶냐?” 기무혁이 검을 들어서 빤히 바라보자 그제야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환몽? 나? 잔뜩 기가 죽은 목소리로 되묻는 환몽. 그 대답에 기무혁은 잠시 깜빡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환몽은 혈사가 정리된 후에 붙여진 이름이었지.’ 환몽(幻夢). 허황된 꿈. 기무혁은 그 이름을 굳이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편이 회귀 전의 기억들을 잊지 않게 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좋건 나쁘건 자신의 과거를 잊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래. 환몽(幻夢)이 지금부터 네 이름이다.” 환몽은 잠시 생각하는 듯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기무혁의 머릿속에서는 환몽의 내면에서 보았던 소년이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흠.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그 건방진 태도에 기무혁이 바로 검을 휘둘러 바닥에 내리쳤다. 까앙! 아악! 왜 또! “지금부터 함부로 사람을 해치는 것 금지, 피를 탐하는 것도 금지. 또 그런 짓을 하면 용광로에 처넣어버릴 줄 알아라.” 두려운 듯 검신이 바르르 떨더니 환몽이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계속 굶으라고? 내면세계에서 그가 얼마나 미친놈인지 보았기에, 환몽은 기무혁의 말을 단순한 협박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이 인간이라면 정말로 자신을 용광로에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그 대신.” 다행히 기무혁은 요검의 능력을 아예 봉인할 생각은 아니었다. “앞으로 내가 벨 악인들의 피, 사악한 괴이들의 힘을 흡수하는 건 허락해 주지. 영양가는 그쪽이 훨씬 높을 거야.” 쩝, 맛있겠다……. 그 순간 소년이 입맛을 다시는 듯한 모습이 상상되었다. 환몽은 자신이 벤 상대의 피를 흡수해서 힘을 쌓고 격을 높일 수 있었다. 그 능력은 신병이기들 중에서도 특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주인을 잡아먹을 만큼 위험하기도 했다. ……너랑 다니면 맛있는 걸 먹게 해주겠다는 거지? 그럼 좋아. 앞으로 아무거나 안 먹을게. 환몽은 고민 끝에 수긍한 듯 보였지만, 기무혁은 섣불리 믿지 않았다. ‘지금은 얌전해 보여도 힘을 회복하면 다시 내 몸을 빼앗으려고 할지도 몰라.’ 진짜 신뢰관계가 쌓이고, 서로를 인정하고, 믿을 수 있는 관계가 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기무혁은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좋은 검일수록 오랜 시간을 두드려서 만들어지는 법이니까. 생각을 정리한 기무혁이 환몽에게 물었다. “구현우는 어디 있어?” 그게 누군데? “……나 바로 전에 너를 휘둘렀던 인간.” 그러자 검 끝이 스르르 움직여 한 방향을 가리켰다. 기무혁은 그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 상태를 제대로 깨닫기까지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만신창이로군.” 물에 빠진 것처럼 몸이 무겁고, 몇 걸음만 걸으려고 해도 비틀거렸다. 체력이 이렇게까지 바닥 난 것도 오랜만이었다. 거울이 없어서 몸의 상처는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쓰라리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 단전의 내공도 텅 비어 있었다. “조금만 늦게 깨어났으면 아주 선천지기까지 다 빨아먹었겠다?” ……. 환몽이 눈치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기무혁은 더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 상황에서는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고, 결과적으로 살아남았으니까. 대신 환몽을 지팡이 삼아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푹. 푹푹. 검집이 없어서 날로 바닥을 찍으며 걸어가는데, 잠시 말이 없던 환몽이 흐릿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힘을 너무 많이 써서 피곤해. 나는 조금 자야겠어. “뭐?” 그리고 검에서 느껴지던 녀석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닥에 깡깡 내리쳐 보았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팔자도 좋은 녀석이군.” 작게 투덜거린 기무혁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구현우가 기절해 있었다. 희미하지만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용케 살아는 있네.” 온몸이 쑤시는 와중에도 반가운 마음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기무혁이 구현우를 일으켜 등에 업었다. “읏차.” 구현우의 잘린 오른팔은 주워서 천으로 대충 감싸 허리춤에 둘렀다. 눈앞이 잠시 노래졌지만, 잠시 서 있자 그럭저럭 견딜 만해졌다. “출구는…… 호법들이 도망치던 방향이겠지.” 구현우를 업은 채 기무혁은 출구를 찾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온몸이 지금 당장 쓰러져서 쉬고 싶다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밤새도록 검을 휘두른 탓에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관절은 삐걱댔다. 그러나 기무혁은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움직였다. 이럴 때야말로 낭인 시절에 겪은,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들이 도움이 되었다. ‘흘러나오려는 내장을 손으로 막으면서 싸운 적도 있는데, 이 정도도 못 버틸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더 이상 덤벼드는 적은 없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온 검객들은 다 죽은 듯했고, 벽면에 있던 카메라와 모니터는 모두 꺼져서 작동하지 않았다. ‘밖에서도 무슨 일이 터졌거나, 아니면 출구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는 중이거나…….’ 이왕이면 전자이길 바라지만 후자이더라도 일단은 출구로 나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동굴에 들어온 지 한참이나 되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으윽…….” 구현우가 끙끙대며 떨고 있었다. 등으로 느껴지는 몸의 열이 심상치 않았다. “조금만 더 버텨 봐. 지우한테 아빠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긴 싫으니까.” 동료의 죽음. 기무혁에겐 지겹도록 겪어본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익숙해져도 괜찮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겨우 팔 하나 잘렸다고 안 죽어. 그러니까 죽지 마라.” 기무혁은 이를 악물고 조금씩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의식을 차린 구현우가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힘드니까 꿈틀대지 말고 가만 있어. 되도록 말도 아끼고.” 잠시 상황을 파악한 구현우가 이내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 두고 혼자서라도 가라. 대신 약속은 꼭 지켜줘. 우리 지우의 절맥을…….” “지랄 좀 하지 마.” 기무혁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혼자 가라느니, 너라도 살라느니. 세상에서 그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그딴 말에 내가 감격이라도 할 줄 알았어? 마음 편하게 버리고 갈 거였다면 애초에 왜 업고 왔겠어? 사람 힘 빠지게 하지 말고 닥치고 있어.” “나는…….” “말 걸지 마. 걷기도 피곤하니까.” 잠시 말이 없던 구현우가 아주 작게 투덜거렸다. “어린놈이 싸가지 없게 반말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낭인 시절처럼 반말이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기무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 조금만 더 참아보세요. 지우랑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셔야죠.” “……비꼬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니 그냥 반말해라. 그게 더 어울린다.” “그래, 현우야.” “형이라고는 불러야지. 이 새끼야.” 두 사람은 실없는 대화를 주워 넘기며 큭큭거렸다. 이렇게라도 해야 버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잠시 자신의 몸 상태를 살핀 구현우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려줘라. 나 혼자서 걸을 수 있을 정도는 된다.” “됐으니까 가만히……. 고집은.” 반쯤 억지로 바닥에 내려선 구현우가 기무혁을 바라봤다. 식은땀으로 창백한 얼굴.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나은 몸 상태가 아니었다. 구현우가 비틀거리는 기무혁을 부축하며 말했다. “난 너 쓰러지면 버리고 혼자 갈 거다. 남길 유언은?” “지우랑 아이스크림 또 같이 먹기로 했는데…… 못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줘.” “나쁜 새끼. 절대 못 버리게 만드는구나.”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며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중간에 의식을 잃으려고 할 때마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비틀거리는 몸을 붙잡았다. 혼자였다면 출구까지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빛이 보이는데.” “저기가 바깥인 것 같다.” 출구에 가까워졌는지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남은 체력을 쥐어짜내 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후 동굴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작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하…….” “감동스럽군.”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절벽 위였다. 주변으로는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펼쳐져 있었고, 그 너머로 지평선이 보였다. 지평선 아래에서 이제 막 해가 떠오르는 중이었다. “……나오자마자 일출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난 모양이다.” 그때 낯선 기척들이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 황급히 경계하며 돌아보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휘파람을 부르고 환호를 보내며 다가왔다. “대단한 싸움이었어!” “우승자는 직접 맞이해 줘야지!” “둘이 함께 나왔으니 상금은 절반으로 나누는 건가?” “덕분에 세 배나 땄다고!” 구현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자들을 응시했다. “……관중들인가.” 지하투기장의 규칙에 익숙한 그였기에, 자신의 목숨값으로 내기를 하는 관중들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때. “살인마 님? 살인마 님 맞죠-!” 기무혁을 알아본 박광태가 인파를 헤치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헤벌쭉 올라갔다. “우리가 우승입니다! 100억이라고요! 아니, 둘이서 나눠도 최소 50억입니다!” 호들갑을 떨면서 달려오는 박광태를 향해, 기무혁도 기분 좋게 웃어주었다. “돈 벌 생각에 기분 좋지?” “하하하! 당연하죠! 이게 다 살인마 님 덕분입니다-!” 감격에 겨운지 박광태가 두 팔을 벌리고 기무혁을 안으려고 했다. 그 순간, 기무혁은 지팡이처럼 바닥을 짚고 있던 환몽을 자연스럽게 들어올렸다. 푸욱-. 자신의 가슴을 찌른 검을 내려보며 박광태가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왜……?” 입술을 타고 핏물이 흘러나왔다. 억울함과 분노로 가득한 얼굴이 푸들거리고 있었다. 기무혁이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되물었다. “얼마나 받기로 했어?” 그리고 그 순간, 박광태의 소매 안쪽에 감춰져 있던 단검이 흘러나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기무혁이 방심한 순간 기습하려던 계획을 들킨 박광태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어떻게, 알았지?” 기무혁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구현우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는 조금 전까지 누군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저 양반 매니저가 안 왔으니까. 그 푸짐한 아저씨라면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에는 꼭 왔을 것 같거든.” “씨팔……!” 기무혁이 검을 빼내자 박광태가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털썩. 박광태의 시신을 그대로 지나친 기무혁은 어느새 무기를 빼든 채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관중들을 향해 검을 겨눴다. ……이건 먹어도 돼? 피에 반응했는지 환몽이 잠에서 깨어났다. 기무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만찬이니까 얼마든지 즐겨.” 그 순간, 일출을 배경으로 선 기무혁의 모습이 붉게 타오르는 듯했다. 106화. 요즘 한가하거든 방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들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굳더니, 일제히 무기를 겨누며 두 사람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둘러본 구현우가 작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 뚱땡이가 안 보이더라니. 내가 큰돈을 벌었다는 얘길 들었으면 누구보다 빨리 달려왔을 인간인데…….” 기무혁이 점점 안색이 창백해져가는 구현우를 힐긋 바라보며 물었다. “싸울 수 있겠어? 힘들면 그냥 누워 있어도 되는데.” “까불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평소만큼의 실력은 못 내겠군.” 구현우가 천천히 몸을 숙여 박광태가 떨어뜨린 단검을 왼손으로 들었다. “그래도 최소한 짐은 되지 않을 거다.” 당장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 같았던 그가, 검을 쥔 순간 거짓말처럼 예리한 기세를 품은 검객으로 변모했다. “…….” 그렇게 양측의 긴장감이 고조된 순간, 한 중년인이 살기를 풍기는 자들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눈치가 빠른 놈이군. 하기야 비범한 구석이 있으니 그 요검을 쥐고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겠지.” 큰 키에 근육질의 중년인은 강렬한 기도를 갖추고 있었다. 상대가 범상치 않은 고수임을 느낀 기무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네가 탐라련주냐?” 기무혁이 탐라련주를 동네 양아치 부르듯 함부로 입에 담자 상대가 눈에서 진득한 살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어린놈이 재주 좀 지녔다고 건방지구나. 부모에게 예의를 배우지 못했느냐?” “날 죽이려는 놈들한테까지 예의를 차리는 건 호구라고 가르치셨지.” “죽일 생각은 없었다. 저항하지 못하게 제압만 해놓으라고 했지.” 바닥에 쓰러진 박광태의 시체를 잠시 일별한 사내가 짧게 혀를 찼다. “돈 욕심만 많은 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군.” “어차피 죽여서 입막음할 생각이었잖아?” 기무혁의 말에 중년인이 피식 웃으며 등에 맨 대검을 빼들었다. “자꾸 말을 거는 것이 시간을 끄려는 수작임이 뻔히 보이는군. 혹시 지원군을 기다리나?” “…….” 기무혁이 대답하지 않자 중년인이 잔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널 도우려고 침입한 쥐새끼들은 전부 죽었다. 내가 직접 처리했지.” 구현우가 움찔하며 기무혁을 바라봤다. 함께 동굴을 탈출하면서 바깥에 동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기무혁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기무혁이 차가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들을 죽였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더군. 자비를 베풀어서 단칼에 죽여줬지.” 도발하듯이 씩 웃는 중년인의 모습에, 기무혁도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못 만났나 본데? 봤다면 형님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텐데 말이야.” “…….” 순간 말문이 막힌 중년인이 이내 코웃음을 치며 대검을 들어 기무혁을 겨눴다. “곧 잡아서 죽일 테니 결국 시간문제다. 네놈들이 먼저 죽나 그놈들이 먼저 죽나 정도의 차이일 뿐!” “이런 일을 벌이고도 후환이 두렵지 않나? 보다시피 난 타지에서 온 무림인이야. 지금이라도 무림맹 지부로 가서 죄에 대해 이실직고하면 참작의 여지가 있을 거다.” 협상을 제안하는 말과 달리, 기무혁이 투기를 내뿜으며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어차피 댁은 탐라련주도 아니잖아? 심복쯤 되겠지.” 기무혁은 자신을 포위한 자들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끝까지 어딘가에 숨어서 부하들만 사지로 모는 련주에게 충성하는 이유가 뭐지? 나중에 입막음 당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나?” 기무혁은 중년인이 자신에게 하려던 행동을 훨씬 더 능숙하게 해냈다. 바로 말로 상대의 멘탈을 흔드는 것. 포위망을 구축한 무인들의 눈동자가 미세하지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닥쳐라! 그 교활한 혓바닥에 우리가 놀아날 것 같으냐!”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려 하자 표정을 일그러뜨린 중년인이 부하들에게 빠르게 명령했다. “숙주는 팔을 잘라 제압하고, 요검은 회수해라! 저항하면 사지를 전부 잘라도 된다. 숨만 붙여서 데려가면 그만이니까.” 명령이 떨어지자 포위망이 더 빠르게 좁혀지기 시작했다. 상대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한 눈에 보아도 기도가 정제된 무인들. 기무혁은 환몽의 검신을 왼손으로 가볍게 쓸어내린 후 기수식을 취했다. “좀 쉽게 갈까 했더니…… 결국 이렇게 되는군.” 내가 대신 해줄까? 직접 싸우고 싶은지 환몽의 기운이 손아귀에서 꿈틀댔다. 기무혁은 검파를 꽉 쥐며 경고했다. “어림도 없어. 기운만 보태.” 스스스슷……. 환몽에게서 시작된 붉은 기운이 기무혁의 손바닥을 타고 전신으로 흘렀다. 내공이 바닥난 단전에 희미하지만 불씨가 지펴졌다. ‘우두머리부터 최대한 빨리 처리한다.’ 기무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이 한 순간의 기회를 위해 조금씩 거리를 좁혀온 것이었으니까. 콰앙-! 바닥을 부술 듯 박차며 앞으로 단숨에 치고 나갔다. 깜짝 놀란 적들이 무기를 세우며 그를 막아섰지만, 기무혁의 움직임은 그들의 반응속도를 한참이나 벗어났다. 촤아아악-! 두 명의 목에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졌다. 경악한 표정의 머리들이 허공으로 떠오를 때, 기무혁의 신형은 그들을 이미 지나치고 있었다. “아직도 힘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던 기무혁에게 이만한 여력이 남아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지, 적들의 눈에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기무혁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중년인에게 달려들었다. “내 검을 빼앗으려면 누구든 목숨을 걸어야 할 거야.” “건방진 놈이-!” 환몽과 중년인의 대검이 강하게 충돌했다. 쩌어어엉-!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두 사람을 반대 방향으로 밀어냈다. 기무혁이 울컥 피를 토한 반면, 중년인은 잠시 표정을 굳힐 뿐 흐트러짐이 없었다. 명백하게 드러난 우위. 그러나 중년인은 상처 입은 맹수를 혼자 상대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안전하게 사냥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모두 쳐라!” “퉷. 겁쟁이 새끼. 부랄부터 떼고 덤벼라.” 바닥에 피를 뱉어낸 기무혁의 원색적인 도발도 소용이 없었다. 중년인이 물러난 빈 공간을 부하들이 채우며 좌우에서 덤벼들었다. 까가가강! 기무혁은 자신이 가진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적들의 무기는 환몽과 닿는 족족 실금이 가거나 부러졌다. 어기충검(御氣衝劍)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들은 환몽과 부딪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장비빨이 좋긴 좋네.’ 부러진 칼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적의 가슴에 구멍을 뚫은 후, 쉴 시간도 없이 돌아서며 뺨을 스치는 공격을 피했다. 그대로 검을 휘둘러 상대의 무기와 함께 가슴을 갈라버렸다. 푸화아악! 분수처럼 치솟는 핏물을 뒤집어 쓴 기무혁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처럼 보였다. “미친……. 힘만 빼라! 무리해서 상대하지 마!” 실금이 간 자신의 대검을 바라본 중년인은 결코 정면에서 기무혁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기무혁의 공격을 흘리면서 부하들이 공격할 틈을 만들었다. “요검의 기운으로 잠깐 미쳐서 날뛸 뿐! 시간은 우리 편이다!” 중년인은 교활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기무혁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정답에 가까웠다. “후욱, 후욱…….” 이미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몸에 상처가 조금씩 더 늘어나고 있었다. 기무혁이 힐긋 뒤쪽을 돌아보자 구현우도 왼손으로 단검을 들고 적과 싸우고 있었다. 마침 눈이 마주치자 구현우가 외쳤다.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으니 신경 끄고 싸워라!” “……살아남아. 인질로 잡혀도 안 구해줄 거니까.” 퉁명스러운 말과 달리, 기무혁은 적들이 구현우에게 신경 쓰지 못하도록 더욱 거칠게 날뛰었다. 채채채챙! 환몽이 지닌 붉은 기운을 품은 채로, 그리고 핏물을 뒤집어쓴 채로 정신없이 싸우고 또 싸웠다. 마치 먹이를 물어뜯기 전 이빨을 잔뜩 세운 늑대처럼, 상대가 누구든 찢어발기겠다는 기세로 광인처럼 검을 휘둘러댔다. “흐흐…….”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기무혁은 웃음을 흘렸다. 적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다. 이 순간 기무혁은 실제로 짜릿한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점점 더 알 것 같아.’ 환몽의 기운을 육체의 한계까지 받아들인 상태. 신병이기와 호흡을 맞춰가는 짜릿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처절한 싸움에 잔뜩 흥분한 것은 환몽도 마찬가지였다. 끝내준다! 더 싸우자! 더더! 다 죽여버려! ‘너도 태생이 싸움꾼이구나.’ 환몽에게도 누군가와 함께 싸우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지금껏 일방적으로 자신을 휘두르거나 잡아먹히기만 했던 인간이, 자신의 기운을 제대로 활용해서 그 이상을 끌어내는 모습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검이 느끼는 기쁨이 기무혁에게도 온전히 전해졌다. ‘처음 검을 쥐었던 때만큼이나…….’ 기무혁은 벅차오르는 이 순간의 감정을 입 밖으로 뱉어냈다. “즐겁다!” 이토록 순수하게 검을 휘두르는 것이 즐거운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 즐거움에 몸을 맡기고 미친 듯 검을 휘둘렀다. 통증과 피로조차 잊었다. 하지만 그렇게 베고 찌르길 반복하는 동안, 서서히 육체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었다. “……뭐야? 왜 안 덤벼?” 중년인이 대검을 아래로 내리며 기무혁을 바라봤다.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미친놈. 거울이 있다면 보여주고 싶구나. 네가 지금 산 사람의 꼴인 줄 아느냐?” “……?” 중년인에게 달려가 검을 휘두르려던 기무혁이 휘청이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털썩. 한계를 넘어도 한참이나 넘어버린 육신. 겨우 넘어지는 것은 면했지만, 더 이상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직, 안 끝났어…….” 어떻게든 검을 짚고 다시 일어나서 싸우려는 기무혁을 향해,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이죽거렸다. “네 무위에 경의를 표하마. 비록 여기 있는 몇몇을 제외하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 검을 들어 올린 중년인이 그대로 기무혁의 팔을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던 기무혁이 갑자기 실성한 것처럼 웃어댔다. “하하하하하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모든 것을 포기했거나 좌절해서 나오는 허망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반가운 마음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이었다. 콰콰콰콰콰콰! 굉음을 일으키며 하늘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무언가. 모두의 시선이 같은 곳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그 형체를 보며 누군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헬기?” 그리고 그 헬기의 굉음을 뚫을 만큼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이 미친놈아-!” 십 미터가 훌쩍 넘는 높이에서 겁도 없이 맨몸으로 뛰어내리는 인간이 있었다. 콰아아앙-! 땅에 떨어진 포탄처럼 먼지구름이 피어 오른 자리에서, 신강헌이 무릎을 만지작거리며 낑낑거렸다. “아오! 무릎 아프네…….” “등신아. 그러고도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거든?” 반면 괴이를 타고 사뿐히 지상에 내려선 김복자는 기무혁의 몰골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이럴 줄 알았다니까. 돌아가면 아저씨 아줌마한테 다 이를 거야.” “야. 그것만은 좀…….” 곤란해하는 기무혁의 모습에 김복자가 코웃음을 쳤다. 두 사람으로 끝이 아니었다. 휘익! 가벼운 몸놀림으로 지상에 내려선 여인이 기무혁을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새벽부터 비행에, 제주에 오자마자 헬기까지……. 국내라서 전용기가 바로 떠서 망정이지, 빨리 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와줘서 고마워요, 선배.” “알면 됐어. 그래도 너무 늦게 온 것 같지는 않네.” 기분 좋게 씨익 웃는 그녀는 바로 창천검문의 부연하였다. 예상치 못한 기무혁의 동료들이 등장하자 중년인이 당황했지만, 그는 이내 기무혁의 목에 대검을 갖다 대며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마! 다가오면 이놈을 죽여버릴…….” “흘흘. 여기 한 명 더 있네.” “……!” 중년인은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때까지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위험한 물건은 잠시 내려놓게나.” 손가락 하나로 가볍게 대검을 밀어서 치우는 가공할 내공. 천천히 고개를 돌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중년인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상대는 한국의 무림인이라면 결코 모를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차, 창천검노……. 당신이 왜 여기에?” 전용기를 타고 제주도까지 날아온 팔대문파의 장문인, 창천검노 나일천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손녀와 제주도에 여행이나 할 겸 왔지. 요즘 자숙 중이라 무척 한가하거든.” 모두의 전의를 상실시키는 실없는 농담이었다. 107화. 운명이었는지도 콰콰콰콰콰콰콰! 부상자들을 실은 헬기가 다시 공중으로 떠올랐다. 점혈에 당해 몸이 빳빳하게 굳은 탐라련의 무인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헬기를 바라봤다. “꼴 좋다. 쓰레기 같은 새끼들.” 헬기 안에 탄 신강헌이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보았다. 멀리서 경찰차들이 사이렌을 요란하게 울리며 달려오는 모습도 보였다. 창천검문의 이름으로 경찰과 무림맹 제주지부에 협조를 요청했으니 수사와 체포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될 터였다. “쟤들 적어도 십 년은 감옥에서 썩을걸. 아무리 뒷세계 무림에서 벌어진 일이라도,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으니까.” 김복자가 시니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품에 쏙 들어간 살구는 높은 곳이 무서운지 창밖을 바라보며 오들오들 떨었다. 뺘악……. “넌 조류 주제에 높은 곳이 무섭냐? 나중에 크면 날 태우고 다녀야 할 텐데 어쩌려고?” 뺙뺙뺙! “악! 아프다고!” 괜히 장난을 치다가 손등을 호되게 쪼인 신강헌이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하여간 이번에도 빡셌어. 까딱했으면 진짜 죽을 뻔…….” 탐라련의 무인들과 유격전을 벌이며 아슬아슬했던 순간을 떠올리던 신강헌은 이내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맞은편 좌석에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기무혁의 처참한 몰골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나도 나름 죽을 뻔했는데, 이 미친놈은 진짜 죽었다가 살아난 몰골을 하고 있네. 괜찮냐?” 신강헌이 발을 뻗어 정강이를 툭 건드리자 움찔한 기무혁이 실눈을 뜨고 노려봤다. “끙……. 죽여버린다, 또라이…….” 살벌하게 노려보는 기무혁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불거졌다. 싸움이 끝나고 긴장이 풀리자 쌓였던 통증이 한꺼번에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환몽의 기운까지 끌어다가 썼으니, 몸 내부가 전부 엉망진창이었다. 병원으로 가면 최소한 일주일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할 상태였다. “쩝……. 그래도 부럽다.” 신강헌이 기무혁이 품에 안고 있는 환몽을 부럽다는 듯 바라봤다. 조금이라도 도처럼 생겼으면 좋았을 텐데, 저건 동네 코흘리개가 봐도 검이라고 말할 것 같았다. “야. 혹시 모르니까 잠깐만 줘봐. 주인에 맞게 형상 변환되고 그런 기능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멍청이랑은 말도 섞기 싫으니까 꺼져.” 그때 김복자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기무혁과 환몽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기무혁 넌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환각으로 사람을 홀려서 조종하는 환몽의 능력에 대해서 어느 정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무혁은 괜찮다는 듯 환몽의 검신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지금은 괜찮아. 이 녀석도 피곤하다고 다시 잠들었거든. 나중엔 또 까불지도 모르지만…… 아마 괜찮을 거야.” “찜찜하니까 돌아가면 바로 봉인용 검집부터 만들어야겠어.” 환몽을 경계하듯 한 번 째려본 김복자가 기무혁의 옆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아저씨가 구현우지?” 기무혁의 옆에는 구현우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최소한의 응급처치를 했지만, 창백한 안색은 기무혁보다도 상태가 나빠 보였다. 그 앞에는 잘린 오른팔을 넣어둔 아이스박스가 놓여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기무혁이 흐린 표정으로 말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팔이 잘린 채로 계속 움직이고 싸우느라…….” 그때 헬기 앞좌석에서 조종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부연하가 돌아보며 말했다. “무림맹 제주도 지부 옥상에 헬리포트가 있어. 일단 그곳으로 가서 수혈하고 접합수술도 진행할 거야.” 부연하의 눈길이 구현우의 몸 상태, 그리고 오른쪽 어깨 아래의 절단면을 꼼꼼히 살폈다. “수술을 해봐야 알겠지만…… 지금 몸 상태로 버틸 체력이 될지 걱정이네.” “버틸 수 있을 거예요. 집에서 하나뿐인 딸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기무혁은 병원에 도착하면 구현우의 뚱뚱한 매니저에게 연락해 구지우를 데려오라고 할 생각이었다. 딸의 목소리를 들으면 지옥에서도 돌아올 사람이 구현우였으니까. “너무 걱정치 말거라.” 그때까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나일천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최고의 의사에게 연락해 두었다. 바로 비행기를 타고 온다고 했으니 곧 도착할 게야. 접합수술이라면 이골이 난 사람이니 멀쩡하게 살려낼 게다.” 기무혁이 나일천에게 포권을 취했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장문인.” “……음.” 고개를 끄덕이는 나일천의 표정이 어쩐지 심란해 보였다. 정확히는 기무혁이 품에 안다시피 들고 있는 환몽을 본 이후부터였다. 잠시 말이 없던 나일천이 결국 검에 대해서 언급했다. “나쁘게 듣지 말거라. 네 손에 들린 검 말이다. 소름 돋게 불길한 기운을 지녔구나.” 우웅-!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나일천의 허리춤에서 남천검이 진동했다. 항마의 기운을 품은 신병이기였기 때문일까.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기무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 녀석은 사람의 피를 마시면서 힘을 키워온 요검입니다. 아마도 탐라련주의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만 더 물으마.” 그 말을 듣고 더욱 침중한 표정이 된 나일천이 추궁하듯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 처음부터 그 검을 얻으려고 내게 요검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던 것이더냐?” 기무혁은 이번에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제주도에 여행을 왔다가 우연히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검객들이 하나둘 실종되고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전용기까지 타고 도와주러 온 나일천과 부연하에게는 미안했지만, 여기서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 사실대로 말하려면 내가 회귀했다는 이야기까지 해야 하니까.’ 천천히 설명을 마친 기무혁이 환몽의 검신을 쓸어내리며 말을 맺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검과 만나게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나일천은 크게 의심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또한 ‘운명’이라는 말도 어느 정도는 통한 듯 보였다. 무인들 사이에서는 흔히 ‘신병이기를 얻으려면 전생의 인연이 닿아야 한다.’라는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운명이라……. 남천검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녀석이 사이한 기운을 품은 요검을 들고 나타나다니. 내 입장에서는 참으로 고약한 운명이로다.” 나일천이 다소 풀어진 표정으로 농담을 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 검에 이름은 붙였느냐?” “환몽(幻夢)이라고 지었습니다.” “……한번 만져 봐도 되겠느냐?” 기무혁은 두 손으로 검을 들어 조심스럽게 건넸다. 나일천이 환몽의 능력에 당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제 아무리 환몽이라고 해도 나일천과 같은 초고수의 정신에 침범할 수는 없을 테니까. “허어…….” 나일천은 환몽을 건네받아 유심히 살폈다. 핏물에 담갔다 뺀 듯 붉은빛을 띤 검신은 절로 감탄사가 나왔고, 섬뜩한 예기를 품은 날은 남천검과 전력으로 부딪쳐도 상할 것 같지 않았다. 스스스슷……. 그 와중에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사악한 기운이 나일천의 눈살을 찌푸려지게 했다. 한눈에 보아도 극도로 위험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언제든 날뛸지 모르는 맹수와도 같구나.’ 창천검문의 장문인이자 남천검의 주인으로서, 차라리 이 검을 봉인해서 세상으로부터 격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나일천은 고심한 끝에 그러지 않기로 했다. “……조심해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환몽을 돌려받은 기무혁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나일천이 봉인하겠다고 결정했다면 지금의 그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나일천은 검을 품에 안고 조용히 기뻐하는 기무혁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흘흘. 그리도 좋으냐?” “고생해서 얻은 검이라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벌써부터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이는 무인과 검을 보며 나일천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는 기무혁의 기도가 전과는 또 달라졌음을 느꼈다. ‘허어. 그새 또 발전했단 말인가.’ 문득 괴물이라는 단어는 저 검보다 그 주인에게 더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기무혁은 지켜보는 즐거움이 있는 무인이었다. ‘왠지 너라면…… 그 위험해 보이는 요검도 네가 가고자 하는 길에 함께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래서 별말 없이 환몽을 돌려주었다. 앞으로 기무혁이 가려는 길을 계속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어차피 지금 빼앗아봤자 언젠가 다시 빼앗길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우우웅! 그런 주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남천검이 검신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검이 주인의 마음을 읽듯, 주인도 검의 마음을 읽었다. “……음? 너 설마 질투하는 게냐?” 남천검의 영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걸 보니, 꽤나 꽁해 있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기무혁이 다른 검을 애지중지하는 모습 때문일 터. 나일천이 웃음을 터트리자 남천검이 짜증을 부리듯 한동안 계속 파르르 떨었다. “할아버지. 탐라련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부연하의 질문에 나일천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제주의 풍경을 보며 말했다. “련주를 조사해봐야 할 게다. 증거가 많으니 아무리 그라도 쉽게 빠져나가긴 힘들겠지.” 제주도 최대 무림세력인 탐라련은 토착 문파들의 연합체였다. 즉, 세력은 크지만 팔대문파 각각처럼 하나의 견고한 조직은 아니었다. “탐라련주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지. 이 정도로 무모한 짓을 벌일 줄은 몰랐다만…….” “장문인께선 이 일을 탐라련주가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저질렀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무혁의 질문에 나일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조직이건 탐욕스런 소수의 권력자들이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지.” 일월문 때도 그랬다. 장진명이 벌인 끔찍한 사건들의 진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본인과 그의 수족들뿐이었다. 나머지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그저 명령에 따라 싸운 무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금방 수배가 내려질 테니 곧 소식이 있을 게다. 만약 바다 건너 도망이라도 쳤다면 일이 복잡해지겠다만…….” 지금은 그것까지 생각하고 행동할 여력은 없었다. 잠시 후, 헬리포트에 도착한 이들은 곧바로 병원으로 이동했다. * * * “꺼허어억…….” 두 눈과 코, 입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수염을 붉게 물들였다. 전신에 퍼진 독 때문이었다. 악귀처럼 얼굴이 일그러진 노인이 비틀거리며 자신을 중독시킨 상대를 노려봤다. “이, 찢어죽일 놈이……!” 탐라련주 이천홍. 전에 없던 신병이기를 만들어 한국무림의 판도를 뒤바꾸겠다는 헛된 꿈을 꾼 노인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죄송합니다. 련주께서 죽어주셔야 저희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 것 같아서요.” 오호가 손톱에 묻은 살점을 후두둑 털어내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의 주변으로 탐라련주의 호위무인들이었던 것들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감히, 나를, 배신해……!” “저희가 주최한 투기장 이벤트에서 벌어진 일이니까요. 련주께서 도주하면 무림맹과 경찰이 여기저기 들쑤시지 않겠습니까?” 오호가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탐라련주에게 다가갔다. 주저앉아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무력한 노인네를 내려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다 저희 혈호방까지 엮이면 곤란해져서요. 련주님이 벌인 일이시니 결자해지의 마음으로 깔끔히 마무리하시지요.” “이익! 애초에 너희 놈들이 먼저…… 커허어억!” 피를 왈칵 토해낸 탐라련주가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눈을 뒤집으며 절명했다. “끝까지 지저분한 늙은이군.” 오호는 피가 튄 재킷을 벗어 쓰레기통에 던지고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탐라련주는 자신의 계획이 어긋난 것에 비관하여 독을 먹고 자결한 것으로 꾸며질 것이다. 그의 필체로 적힌 유언장에는 모든 혐의를 인정한다는 내용이 있을 것이고, 최근 돈에 쪼들렸던 탐라련의 간부들 몇이 그에 대한 증언을 할 것이다. 수사 과정에서 혈호방과 이번 일이 연관된 증거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뒤처리를 했으니까. “…….” 그러나 오호의 표정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떠올랐다. 혈호방이 입은 금전적 손실이나 위험요소 때문은 아니었다.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진동. 오호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상대를 확인한 후 받았다. “예. 방주님.” [탐라련주는?] “방금 처리했습니다. 잘 포장해서 밖에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했다. 돌아와서 보도록 하지.] 평소와 같았으면 오호는 군말 없이 “네.”라고 대답하고 통화를 종료했을 것이다. 혈호방주는 질문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설령 사석에서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비즈니스와 관련된 일에는 조금의 감정도 들어가지 않길 원하는 인물이었다. “방주님. 아니, 대형.” 그러나 오호도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그 빌어먹을 검은 도대체 뭡니까?” 오호의 성난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에서 긴 침묵이 이어졌다. 108화. 이제부터 전부 오래된 폐가 주변으로 폴리스라인이 둘러쳐져 있었다. [금일 오전 6시 35분. 제주도 무림 조직 탐라련주 이천홍 씨의 시신이 숲속의 폐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현재 경찰과 무림맹 합동 수사대가 도착해 자세한 경위를 조사 중에 있습니다.] 그 앞에 몰려든 기자들이 쉴 새 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고, 경찰과 무림맹 소속 조사관들이 굳은 표정으로 오가는 모습도 보였다. 현장에 있는 기자가 보도를 계속했다. [최초 신고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천홍 씨는 독극물을 이용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난밤 ○○동굴 내부에서 발견된 수십 구의 시신들과 탐라련이 연관돼 있음이 밝혀진 가운데, 일각에서는 탐라련주가 전 일월문주 장진명처럼 마공 실험을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게 아니라 ‘당한’ 거겠지. 너무 뻔한 꼬리 자르기 아냐?” 한라봉을 까먹으며 병원에서 TV를 보던 김복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뺘악! 병원 침대의 간이 테이블 위에 올라선 살구가 접시 위에 잘라놓은 한라봉을 콕콕콕 찍어 먹었다. 그 사이로 조각 하나를 집으려다가 부리에 손가락이 찍힌 신강헌이 살구를 째려봤다. “아, 나도 좀 먹자고!” 뺙뺙뺙! 변함없이 옥신각신하는 신강헌과 살구의 입에 김복자가 한라봉 조각을 하나씩 물려주었다. “조용히 좀 해라. 환자 있는 데서까지 그러고 싶냐?” “야, 나도 환자…….” 불만스레 투덜거리던 신강헌은 침대에 누워 있는 기무혁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창백한 얼굴로 잠든 기무혁의 뺨은 안쓰러울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입술은 다 부르텄고, 얼굴을 제외하고 전신에 붕대를 감지 않은 부분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병원에 도착해 구현우를 수술실로 들여보내고 그의 매니저에게 연락한 후, 기무혁은 퓨즈가 나간 것처럼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새끼가 사람 놀래키고 있어. 갑자기 쓰러져서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신강헌이 짜증난다는 듯 기무혁을 노려보자 김복자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 역시 곱지 않았다. “하여간 기무혁, 맨날 지 혼자서 무리하고 지랄이야.” 천만 다행히도 기무혁을 진찰한 의사는 치명적인 상처나 감염은 없다고 했다. 다만 체력과 기력을 지나치게 소진해서 곯아떨어진 상태라고 했다. -이런 몸으로 방금 전까지 멀쩡히 서 있었다니……. 본인이 얼마나 몸을 혹사했는지 자각이 없나 보네요. 한동안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신신당부하고 떠난 의사의 말을 떠올리며, 두 사람은 기무혁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깨어나도 꼼짝도 못 하게 아예 침대에다 묶어 놓을까?” “저 검도 눈에 안 보이게 치워버리자. 눈에 보이면 분명 몸이 근질거려서 휘둘러 보려고 할 거야.” 뺙! 기무혁이 누워있는 침대 옆에는 두꺼운 천으로 감싼 환몽이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두 사람은 환몽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사실 정말로 화가 나는 이유는 스스로에게 있었다. “……이 자식. 제일 위험한 일은 맨날 혼자서 하려고 해. 그게 가장 열 받는다고.” “자기만 어른인 척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지가 무슨 우리 보호자야?” 기무혁이 동굴 안에서 싸우고 있을 때, 두 사람도 밖에서 탐라련의 무인들과 위험천만한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기무혁이 겪은 싸움에 비하면 자신들이 겪은 일은 별것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병원에서 쓰러진 기무혁의 옷을 벗기고 상태를 살필 때 보았던 상처들, 사선을 넘나든 흔적들에 두 사람은 큰 충격을 받았으니까. ‘내가 더 강했다면 창천검문에서 지원이 오기 전에 도우러 갔을 텐데…….’ ‘망할 자식. 그렇게 위험할 거라는 말은 안 했잖아!’ 두 사람은 친구가 가장 위험한 싸움을 하던 순간에 같이 있지 못했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들이 기무혁에게 충분히 믿음을 줄 만큼 강하지 않다는 생각에 분했다. ‘젠장! 돌아가면 슈퍼 특훈이다!’ ‘싸움이 벌어졌을 때 쓸 수 있는 술법을 더 찾아서 익혀야겠어.’ 둘 다 표현에 서툴러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주고받는 눈빛에서 비슷한 마음임을 느끼고 있었다. “넌 뒤졌다, 기무혁.” “두고 봐. 다시는 혼자 이 꼴로 돌아오게 안 만들 테니까.” 은은한 분노가 느껴지는 두 사람의 다짐에 기무혁의 손가락 하나가 움찔했지만, 마침 TV에서 중요한 내용이 나오고 있어 둘 다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동굴 내부에서는 시신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탐라련 혈사’로 명명된 이번 사건은, 소수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제주도 음지의 불법투기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 은밀히 운영돼 온 불법투기장은…….] 뉴스에선 아침부터 사건의 파장에 대해 연이어 보도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무림인들의 일이라고 해도 백 명이 넘는 사망자가 생긴 충격적인 사건인 이상, 한동안은 떠들썩할 터였다.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카지노 극락(極樂) 측에서는 연관성을 극구 부인하고 있는 와중에, 관계 당국에서는 이번 기회에 불법지하투기장을 근절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잘도 투기장이 없어지겠다. 결국 또 어디선가 만들어지겠지.” “그럼 상금 100억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극락에서 자기들이 한 거 아니라고 하면…….” 신강헌이 이 개고생을 해놓고 한 푼도 못 받는 거 아니냐고 중얼거리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대답이 들렸다. “……받아내야지.”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홱 돌리자, 기무혁이 눈을 반쯤 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계약서까지 썼겠어? 채무자가 누군지 적혀 있으니 못 받아낼 이유가 없어.” “이…… 미친놈아!” “기무혁! 너 깨어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돈 얘기야?” 황당해하는 두 사람을 향해 기무혁이 씨익 웃어주었다. 사실 아까 전부터 의식이 돌아왔지만, 분위기가 어색해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 몇 시간이나 잔 거야?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진 않은데.” “어어? 너 꼼짝도 할 생각하지 마. 술법으로 다시 재워버릴 거야.” “지금이라도 일단 묶어 놓고 간호사 샘 부르자!” “……쪽팔리니까 그렇게 호들갑 떨지 말라고. 근데 여기 개인실이야?” “창천검문에서 여기로 배정해줬어. 치료비도 걱정하지 말래.” “돈 많은 친구 좋네…….” 기무혁이 깨어나자 세 사람은 평소처럼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 신강헌이 한라봉 하나의 껍질을 까서 통째로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다 TV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오, 창천검문 할아버지 나온다!” 실내로 전환된 화면에서 나일천이 진중한 표정으로 앵커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본문은 개파조사께서 창천검문을 설립하신 이후로 괴이와 마공을 익힌 악인들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고 사고를 예방하는 데 전력을 다해왔습니다.] [장문인께서는 이번 혈사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아셨다는 말씀이신가요?] [안타깝게도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익명의 한 시민께서 창천검문에 제보를 해주셨고, 사건의 심각성을 보고받은 저희는 곧바로 제주도로 출발했습니다. 더욱 빨리 도착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은 무척이나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당당하게 인터뷰에 임하는 나일천의 표정에는 정파무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드러나 있었다. “장문인 할아버지, 되게 기뻐 보인다?” “욕을 그렇게 먹고 있다가 협객 소리를 들으면 누구라도 좋지.” 기무혁이 피식 웃으며 TV에 나오는 나일천을 바라봤다. 그는 자신의 공을 전부 나일천과 창천검문에게 넘겼다. 창천검문의 영향력이라면 자잘한 문제는 충분히 무마할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자신이 직접 경찰이나 무림맹에 가서 증언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환몽을 얻는 것으로 충분해.’ 기무혁은 여전히 언론의 지나친 관심과 주목을 경계했다. 게다가 새벽부터 전용기를 타고 도와주러 온 창천검문에 빚을 갚을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였다. “전부 다 잘 해결됐…….” 흐뭇하게 웃으며 중얼거리던 기무혁이 병실 바깥을 바라보더니 표정을 굳혔다. “……큰일 났다.” 탐라련의 무인들과 싸울 때도 짓지 않았던 다급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기무혁이 다시 눈을 감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순간. “무혁아-!” 병실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우당탕탕 하며 문이 열리고 기찬호와 박지연이 들어왔다. 기무혁이 어색하게 손을 들어 부모님에게 웃어 보였다. “하하……. 오셨어요?” “너, 너, 너-!” 온몸에 붕대를 두르고 침대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자마자 말문이 막힌 기찬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갑자기 다쳐서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전화도 안 받고…….” 박지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가와 아들의 몸을 이곳저곳 살폈다. 기무혁이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며 뺨을 긁적였다. “……엄마아빠도 제주도에 왔으니까 이참에 가족 여행이나 할까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이 불효자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효도하려고…… 읍읍!” “잘했다, 복자야. 차라리 입을 막아버리는 게 낫지.” 기무혁은 그로부터 한참 동안 부모님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의사가 와서 충분히 쉬면 괜찮을 거라는 말을 해주자 겨우 안심한 두 사람이 말했다. “선생님은 다음 비행기로 오실 거야. 단단히 혼내 달라고 부탁드렸으니까 각오해라, 너.”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기무혁. 네가 엄마아빠한테 애가 아니면 뭔데?” 박지연이 아들의 볼을 잡아서 쭉 당기자 김복자와 신강헌이 꼴 좋다는 듯 킥킥 웃었다. 그 와중에 기무혁은 문득 신강헌의 옆얼굴이 묘하게 쓸쓸해 보인다는 것을 느꼈다. ‘신강헌 삼촌한테도 연락이 갔을 텐데.’ 신준현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인지, 끝내 오지 않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무혁은 신강헌의 삼촌이 이곳에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생에 자신이 행복해진 만큼 친구들도 이전과는 달리 행복해지길 바랐으니까. 그때 신강헌이 씨익 웃으며 기찬호와 박지연에게 장난을 쳤다. “아저씨, 아줌마! 저희 고생했으니까 서울로 돌아가면 맛있는 거 잔뜩 해주세요!” “넌 인마. 아저씨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맛있는 거 해달라는 거야?” 몇 달간 신강헌과 친해진 기찬호가 아들에게 하듯이 장난으로 헤드락을 걸었다. 그러자 신강헌의 얼굴에도 평소처럼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이 피어났다. 기무혁이 그 기회를 노려 한 번 더 말했다. “엄마아빠. 제주도에 온 김에 복자랑 강헌이랑 다 같이 여행하고 돌아가요, 네?” 아들의 거듭된 성화에 두 사람도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참나, 그래. 알았다. 어차피 너 퇴원할 때까지 며칠은 있어야 할 테니까.” “그럼 내일은 맛있는 거 먹고 카페에 놓을 예쁜 소품들 좀 사러 가야겠네. 복자도 같이 갈래?” “너무 좋아요! 못 가본 곳이 잔뜩 있거든요!” “강헌이는 나랑 낚시하러 가자. 낚시해본 적 있냐?” “오, 낚시 완전 해보고 싶었는데! 어어엄청 큰 거 낚아야지!” 자신만 빼고 착착 이루어지는 여행계획에, 기무혁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부모님을 바라봤다. “그럼 저는요?” “넌 당연히 여기에 있어야지.” “의사 선생님이 퇴원해도 된다고 할 때까진 꼼짝도 하지 마.” “가족 여행인데 아들만 빼놓고 여행을 즐기겠다고요……?” 한껏 억울해하는 기무혁의 표정에 네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온 가족이 다 함께 제주도에 있게 되었다. 전생에 있었던 제주도에 대한 나쁜 기억을 이제부터 전부 좋은 기억으로만 덮어버릴 생각에, 기무혁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맺혔다. 109화. 높은 곳에 올라섰다고 생각될 땐 구현우는 자신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든 딸아이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쿠울…… 쿠울……. 눈물자국이 남아 있는 퉁퉁 부은 눈과 울다가 지쳐서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니, 비로소 살아남았다는 실감이 들었다. “누구 딸인지 참 예뻐, 안 그래?” “이 새끼는 지 딸 데려온 사람은 눈에 보이지도 않나 보네.” 지하투기장에서 인연을 맺은 뚱뚱한 매니저, 임정식이 두툼한 볼살을 실룩이며 투덜거렸다. 기무혁에게 연락을 받자마자 구지우를 데리고 한달음에 달려온 그였다. 구현우의 수술한 팔을 노려본 그가 인상을 잔뜩 구기며 말했다. “어휴. 원래도 인기 없는 거 팔 병신까지 됐으니……. 너 앞으로 투기장에 얼씬거릴 생각도 하지 마!” 평소와 다름없이 쏟아내는 욕설과 폭언. 구현우는 딸아이를 바라보던 따스한 시선 그대로 임정식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여전히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정식이 형. 그동안 고마웠어.” “고, 고맙기는 지랄. 맨날 욕만 처먹어놓고, 넌 배알도 없냐?” 좀처럼 보기 힘든 임정식의 당황하는 모습에 구현우가 큭큭 웃었다. 그는 임정식이 일부러 자신에게 먼저 험한 욕을 해서, 투기장의 관리자들로부터 커버를 쳐준 것을 알고 있었다. 지하투기장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이상한 신념을 지닌 무인이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임정식의 보이지 않는 배려 덕분이었다. “등신이냐? 팔 한 짝 잘려놓고 뭐가 좋다고 낄낄거려?” “팔이 대수야? 죽을 뻔하다가 살아서 다시 우리 딸을 만났잖아. 그리고 지우 절맥, 고칠 방법이 생겼거든.” “……그건 참 다행이네.” 변치 않는 팔불출 아빠 같은 구현우의 모습에 임정식이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네 팔 수술은 잘됐다더라. 몇 달 회복하면 무공도 다시 쓸 수 있을 거랜다.” “……창천검문에 여러모로 빚을 졌네.” “안 그래도 나 아까 창천검문 장문인 보고 기절할 뻔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구현우가 고개를 저었다. 동굴을 탈출하면서 기무혁과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창천검문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으니까. “나도 잘 몰라. 그리고 평소에 깨끗하게 살았으면 쫄릴 일이 뭐가 있어?” “뭐, 이 새끼야? 투기장 관둘 거라고 이제 아주 맞먹는구나.” 두 사람은 한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문파의 간판마저 내린 이후, 구현우에게 임정식은 유일하게 남은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언제 서울로 가려고?” 눈치가 빠른 임정식의 물음에 구현우가 멋쩍게 웃었다. 구현우는 더 이상 제주도에서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탐라련주는 죽었지만, 그 커다란 조직에 밉보인 이상 어떤 방식으로든 제재가 들어올 테니까. 하지만 구현우는 큰 미련은 없었다. 차라리 나쁜 기억을 모두 털어버리고 다른 곳에서 새출발을 하고 싶었다. “문파 살림만 정리하고 바로 이사 가려고. 지우한테도 그게 좋을 것 같아.” “서울로 가면 먹고살 방법은 있고?” “다행히 창천검문에서 날 좋게 봐줘서…….” 구현우는 창천검문의 지원금을 받아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기초검술학원을 차리기로 했다. 기초부터 단단하게 가르쳐서 창천검문이 원하는 방향의 후기지수들을 우선적으로 양성하는 학원이 될 터였다. 절정의 검객인 구현우와 창천검문 모두에게 윈윈인 계약이었다. “수술한 팔이 멀쩡해진 후에나 누굴 제대로 가르칠 수 있겠지만, 감사하게도 창천검문에서 그때까지 이것저것 지원해주기로 했어.” 임정식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네 실력이면 서울 가서도 어떻게든 먹고 살겠지. 솔직히 진작 갔어야지. 아버지가 물려준 문파가 뭐라고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붙어있었냐?” “그러게. 그깟 빚이 있다고 이사를 못 가는 것도 아닌데. 다 핑계였지 뭐.” 후련해진 표정으로 창밖을 한 번 바라본 구현우가 다시 고개를 돌려 임정식에게 말했다. “나 학원 차리면 한번 놀러와. 학원이 커지면 홍보실장 같은 거 시켜줄 테니까 와서 눌러앉아도 되고.” “지랄. 몇 년 안에 망할 줄 알고 내가 거길 가?” 코웃음을 친 임정식이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아까 본 기무혁이라는 녀석……. 걔가 고글살인마 맞지?” 그는 병원에 도착해서 팔이 잘린 구현우를 보고 놀랐지만, 그보다 더 처참한 몰골이었던 기무혁의 얼굴을 보고는 기겁했었다. 그러다 구현우가 고글살인마와 동굴에 함께 들어갈 거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렸고, 자연스럽게 정체를 추측한 것이다. 마침 그때 창천검노가 조용히 옆으로 와서 언질을 주었는데,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오늘 본 것은 모른 척해 주시게나. 그편이 자네도 마음이 편할 게야. 팔대문파의 장문인이 직접 입단속을 했으니,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어디 가서 입도 뻥긋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첫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에서 절정고수라는 초유의 기록을 낸 후기지수가 지하투기장에서 봤던 고글살인마였다니……. “글쎄. 무슨 말인지 난 잘 모르겠는데.” 구현우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기무혁이라는 녀석을 만날 일 있으면 최대한 잘 보여놔. 곧 전 세계가 그 녀석 이름을 알게 될 테니까.” 누가 내기를 하자고 하면 구현우는 거기에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동굴을 탈출하면서 보여준 무공, 기무혁이 환몽을 들고 적들을 베던 모습은 그야말로……. “검귀(劍鬼).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것 말곤 떠오르는 말이 없더라고.” “그러니까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난 모른다니까.” 어깨를 한 번 으쓱인 구현우는 딸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의뭉을 떨었다. * * * 기무혁은 며칠간 상처를 치료하고, 가족과 함께한 짧은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만 제주도 여행의 막바지는 마냥 순탄치는 않았다. “무혁이 네 이놈! 돌아가면 그때부턴 단단히 각오하거라!” 제주도에 늦게 합류한 최건은 병실에 누워 있는 제자를 보자마자 잔소리를 쏟아냈다. 며칠 동안 함께 다닌 여행지에서도, 밥 먹는 자리에서도, 심지어 돌아가는 비행기에서까지 기무혁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스승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잘하십니다, 선생님! 더 혼내주십시오!” “성인 됐다고 애가 막 나가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전에는 저희 눈치라도 봤는데…….” “저 자식 정신 차리려면 아직도 멀었다니까요!” “꼴좋다. 우리끼리만 있을 때처럼 네 마음대로 못하겠지?” 뺙뺙뺙! 부모님부터 시작해 신강헌과 김복자, 살구까지도 잔소리 대열에 합류했다. “끄응…….” 어디에도 자기편은 없다는 사실이 다소 억울했지만, 잘못한 것이 있는 만큼 기무혁은 여행 기간 내내 순순히 동네북이 되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가면 두고 보자는 최건에 경고에, 기무혁은 겁나기보다는 솔직히 기대가 더 컸다. ‘돌아가면 지옥 같은 수련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건 오히려 좋아.’ 환몽을 휘두르면서 얻은 경험과 깨달음을 스승과의 실전 같은 대련으로 더욱 발전시켜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막상 집으로 돌아와도 기무혁이 기대했던 지옥훈련은 시작되지 않았다. “스승님. 전 이미 각오가 돼 있습니다. 언제든 말씀하셨던 지옥훈련을…….” “제자야. 대체 내가 언제 지옥훈련을 한다고 했느냐?” “예?” 잔뜩 벼르고 있는 줄 알았던 최건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기무혁에게서 환몽을 압수했다. “네 생각이 뻔히 보이는구나. 열흘 넘게 검을 못 휘둘렀더니 좀이 쑤셔서 죽겠지? 신병이기를 마음껏 휘둘러도 되는 상대가 나뿐이니 대련할 수 있단 생각에 기대하고 있었을 게야.” “……이건 제 예상하고 너무 다른 전개인데요?” 환몽을 빼앗긴 기무혁이 나라라도 잃은 표정으로 스승을 바라봤다. “흥. 누가 너 좋은 거 해줄 줄 아느냐? 어림도 없지.” 최건은 준비해온 검 케이스에 환몽을 담은 후, 제자가 보는 앞에서 두꺼운 자물쇠를 몇 개나 채워버렸다. “그렇다고 기껏 얻은 검을 가져가시면 저보고 다시 가검으로 수련하라는 건가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제자에게, 최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주었다. “꿈도 크구나. 한동안 네게 검을 쥐게 하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요!” 평소의 애늙은이와 같은 모습과 달리 떼를 쓰는 제자의 모습에, 최건은 보란 듯 얄밉게 웃어주었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너한테는 수련을 금지하는 것이 최고의 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냐?” “진짜 치사하십니다!” 휘익! 기무혁이 기습적으로 손을 뻗어 검 케이스를 빼앗으려 했으나, 아직은 어림도 없는 반항이었다. 따악! 제자의 정수리를 쥐어박은 최건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제자야. 더 치사한 방법을 쓰기 전에 얌전히 앉아라.” “…….” 기무혁은 감히 더 이상 반항하지 못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와 마주 앉은 최건이 어느새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차분하게 함께 명상이나 하자꾸나. 시간이 남으면 논검도 하고.” “명상은…….” 기무혁이 생각하기에 이십 대 초반의 팔팔한 몸 상태로 하는 명상과 논검은 시간 낭비에 가까웠다. 하지만 스승으로 모신 검마의 말이었기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불만을 다시 꾹 눌러 담았다. 그때 마치 제자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최건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누구보다 실전파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무공이 무서운 속도로 늘고 있으니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허나 너무 빠르게 길을 지나치다 보면 못 보고 가는 것들도 많아지는 법이지.” 노고수의 현기 어린 깨달음이 깃든 조언이었다. 기무혁은 그걸 듣자마자 자세를 바로 하며 경청했다. “제자야. 높은 곳에 올라섰다고 생각될 때면 잠시 주변을 살펴볼 시간을 가지거라. 지금 당장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조급함이 생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지금까지 어떠한 무도(武道)를 걸어왔는지 정도는 돌아봐야 할 것이 아니냐? 그래야 다음으로 찾아갈 길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다.” 무도(武道)와 이정표라는 두 단어가 기무혁의 가슴 깊숙이 들어와 박혔다. 낭인 시절 기무혁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만 급급했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 따윈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후회와 아쉬움을 남겼던가. 제자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는 것을 본 최건이 잔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엇이 그리 조급하단 말이냐. 너는 또래에 견줄 상대를 찾기 힘들 만큼 뛰어나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오만해질 성격이 아니다. 만약 그리되면 내가 가만히 두겠느냐?” 스승의 농담에 기무혁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제가 스승님 말만 믿고 게을러지면 어쩌시려고요?” “그땐 볼기짝이 빨개질 때까지 때려주마. 그러니 지금은 마음 편히 검을 놓아도 된다.” 자리에서 일어난 기무혁이 감사의 의미로 스승에게 절을 올렸다. “스승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쥐어도 된다고 허락하실 때까지 검을 쥐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환몽이 자신은 당장 피를 마시고 싶다는 듯 케이스가 흔들릴 정도로 몸을 떨었다. 우우웅! 최건이 붉은 기운에 휩싸여 요동치는 검 케이스를 흘겨보며 혀를 찼다. “저 요망한 물건은 어떻게 할 필요가 있겠다. 아무 데서나 저런 기운을 흘리면 같은 일이 또 되풀이될 게야.” “복자가 기운이 새어나오지 않는 전용 검집을 만들어주기로 했습니다.” “허면 한 동안은 내가 맡아두고 있으마. 자, 그럼 명상 수련을 시작해볼까?” “네!” 기무혁은 스승의 조언에 따라 명상과 심법 수련, 논검 등의 마음을 수양하는 정적인 수련에 한동안 집중했다. 그러한 과정은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지난 싸움을 돌이켜보고,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면서 기무혁은 많은 것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구나. 조급한 마음에 낭인 시절에 했던 실수를 또 저지를 뻔했어.’ 그 사실을 깨닫자 초조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기무혁은 단순히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걸 실천으로 옮겨 보기로 마음먹었다. 전생과는 다른 방향의 무도(武道)를 걷기 위해, 더 나은 이정표를 세우기 위해 노력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려면…… 뭘 해야 하지?’ 하지만 기무혁의 그 결심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최건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110화. 우리 아들이…… 한동안 검을 내려놓고 내면의 수양에 힘쓰기로 결심한 후. -네가 지금까지 어떠한 무도(武道)를 걸어왔는지 정도는 돌아봐야 할 것이 아니냐? 그래야 다음으로 찾아갈 길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다. 기무혁은 스승의 ‘주변을 둘러보라’는 조언을 마음 깊이 새겼다. 명상과 논검, 심법 수련에 집중하면서 그 방법에 대해 점점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먼저 회귀한 후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돌이켜보자. 내가 어떤 싸움을 해왔고, 무엇을 경험했는지…….’ 무인으로서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꼭 거쳐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 필요한 깨달음이 여기에 있을 것 같아.’ 전생의 기무혁에게 깨달음이란 가부좌만 오래 틀고 앉아 있는다고 찾아오는 막연한 것이 아닌, 검을 휘두르며 생기는 굳은살처럼 조금씩 몸에 새겨지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부단한 훈련과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어떤 대단한 깨달음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믿음 때문에 나도 모르게 내면의 수양을 등한시하게 됐는지도 몰라.’ 기무혁은 전생의 경지를 뛰어넘어서 한국을 대표하는 초고수, 세계에서 인정받는 절세고수가 되고자 했다. 전생에 부족했던 내면의 수양은 그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후우…….” 명상을 마치고 눈을 뜬 기무혁의 몸에서 뿌연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고도로 집중한 상태에서 오행신공이 스스로 움직여 주인의 몸을 보호했던 것이다. “아직은 뭔가 알 듯 말 듯하지만…….” 최건의 조언 덕분에 조급해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기에, 기무혁은 개운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똑똑! “아들. 지금 바쁘냐?” 지하 훈련장 밖에서 노크소리와 함께 기찬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작 그 기척을 느끼고 있었던 기무혁이 문을 열고 나갔다. “별로 안 바빠요. 뭐 옮겨드려요?”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얼굴에 구슬땀이 맺힌 기찬호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이랑 가구 옮기는 것 좀 도와줘라. 어휴. 네 엄마가 위치를 몇 번이나 바꾸자고 해서 힘들어 죽겠다.” “그러게 평소에 운동 좀 하셨어야죠.” “내가 무림인이냐? 직장인은 회사 다니면서 헬스장만 가도 대단한 거야.” “이제 직장인도 아니고, 헬스장도 며칠 가다 안 가면서…….” 기무혁은 아버지와 티격태격하며 카페 개업 준비가 한창인 1층으로 올라갔다. 최근에는 온 가족이 무림맹이 무상으로 임대해준 건물에서 살다시피 했다. 회사를 그만둔 기찬호와 박지연은 본격적으로 카페 개업 준비에 속도를 냈고, 기무혁은 지하에 훈련장을 만들어놓고 몸을 단련했다. 검을 쥐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외공 수련이나 보법, 근접박투술을 집중적으로 수련했다. 덕분에 그간 소홀했던 부분을 채울 수 있었다. “아버지도 가끔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세요. 꽤 좋더라고요.” “그러냐? 나는 무림인 되겠다는 아들 뒷바라지하느라 바빠서 평생 쉬질 못했는데.” “와, 치사하게 죄책감 자극하지 마시고…….” “하하하! 그래도 아들 덕분에 꿈이었던 카페를 차리게 됐으니 앞으로 즐기면서 살아보마!” 기무혁은 수련하는 시간 외에는 부모님의 카페 개업에 필요한 일을 도와드렸다. 인테리어가 한창인 1층으로 올라가자 기찬호와 마찬가지로 트레이닝복 차림인 박지연이 팔짱을 낀 채 카페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아들 왔어?” “뭐부터 옮기면 돼요?” “테이블이랑 디저트 진열장을 저쪽에 놓아보려고. 손님들 동선을 생각해서…….” 박지연의 진두지휘 하에 기무혁이 가구를 번쩍 들어서 옮겼다. 무림맹 덕분에 무상으로 좋은 위치에 카페를 차릴 수 있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인테리어부터 시작해서 시장조사, 가구‧소품 구입, 메뉴 개발 등등 할 일이 끝도 없었다. ‘그래도 재밌어하시는 것 같네.’ 바쁜 와중에도 기찬호와 박지연 두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은퇴 후 꿈이었던 카페를 손수 꾸며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운 듯했다. 기무혁이 테이블과 가구를 이리저리 몇 번이나 옮겨놓는 동안, 박지연이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디저트를 가져왔다. “와서 이것 좀 먹어봐.” “……뭐가 이렇게 많아요?” “시그니처 메뉴를 개발 중이거든. 맛보고 솔직하게 말해줘.” 실험정신이 투철한 부모님 덕분에 기무혁은 온갖 커피와 디저트, 샌드위치를 매일 맛봐야 했다. 부모님의 요구대로 아들은 냉정한 심사위원이 되었다. “우와, 엄청 단데요? 이거 하나면 일일 당분 일일권장량도 바로 넘을 것 같은데.” “샌드위치치고는 단백질 함량이 너무 부족한 것 같아요.” “으, 초콜릿이 왜 이렇게 많아요?” 카페에는 크게 도움되지 않는 평가가 대부분이었지만, 박지연은 오히려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하지만 우리 주 고객은 너처럼 단백질 식단만 찾는 남자들이 아니란다.” “……그럼 왜 먹어보라고 한 거예요?” “평소 같았으면 식단 챙긴다고 입에도 안 댈 음식이잖니? 이참에 아들한테 달고 맛있는 거 잔뜩 먹여보려고 했지.” 박지연이 회심의 계획이었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했다. 생각지도 못한 어머니의 말에 기무혁은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순순히 인정했다. “솔직히 보는 재미도 있고…… 다 맛있긴 했어요.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네요.” 그리고 그때, 힘찬 목소리와 함께 거구의 덩치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저 왔어요-!” 제주도에 다녀와서도 여전히 파이팅이 넘치는 신강헌이었다. 바뀐 점이라면 휘황찬란했던 머리색이 단정한 검은색으로 변한 것뿐. 신강헌은 오자마자 기무혁 맞은편에 앉으며 기무혁이 먹던 디저트를 손으로 가리켰다. “맛있겠다. 저도 이거 먹어도 돼요?” “방금 무혁이가 너무 달다고 했는데 괜찮겠어?” “하여간 이 자식은 배가 불러가지고……. 한 일주일은 굶겨야 정신을 차리지.” “또라이, 넌 오자마자 시비냐?” 잠시 후, 디저트와 샌드위치 다섯 개를 순식간에 해치우고도 아쉬운지 입맛을 다신 신강헌이 기무혁을 도발했다. “푹 쉬니까 근질근질거리지 않냐? 내려가서 한판 붙을래?” “전에 말한 거 벌써 까먹었냐? 한동안은 아예 검을 안 쥘 거라니까.” “진짜로 안 해? 진짜?” “안 해.” 단칼에 거절한 기무혁이 아버지가 내준 커피를 마시며 미간을 찌푸렸다. 카페 나루의 시그니처 후보 33번 커피에서 뭔가 있어선 안 될 맛이 났기 때문이었다. “……마늘?” “어떠냐? 너처럼 몸 챙기는 무인들이 먹을 만한 음료를 개발하려고 한번 넣어봤는데.” 칭찬을 바라는 듯한 아버지에게 기무혁은 아들로서 솔직한 감상을 말해주었다. “우리 카페 망하면 전부 아버지 때문인 줄 아세요.” “그, 그렇게 별로였냐……?”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아버지의 얼굴을 외면하며, 기무혁은 마늘 커피를 신강헌에게도 맛보라고 주었다. “아저씨. 저도 이건 좀…….” “강헌이 너까지!” 한동안 기씨네 부자와 웃고 떠들며 큭큭거리던 신강헌이 지나가듯 말했다. “아, 그거 말했나? 나 무림맹 공채 서류 통과했다. 조만간 면접이랑 실기시험 보러 갈 거야.” “너네 삼촌한테는 말 했냐?” 신강헌은 못 들은 척 괜히 딴청을 피웠다. 기무혁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말 안 했구만?” “아 몰라! 내 인생인데 삼촌이 반대하면 어쩔 건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삼촌의 반대가 걱정이 되긴 하는 모양인지 신강헌은 남은 마늘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기무혁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무림맹이랑 의외로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끝까지 한번 잘 해봐.” 생각지도 못한 응원에 신강헌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씩 웃었다. “흐흐. 다음엔 무림맹 정복을 입고 올 테니까 기대하라고! 아저씨아줌마, 저 갈게요!” 카페를 나서는 신강헌의 뒷모습을 보며 기무혁은 생각했다. ‘또라이도 결국 자기 길을 찾았네.’ 무림맹이 최선의 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생과는 확실히 다른 길을 택한 것만은 분명했다. 천마신교의 테러리스트였던 신강헌의 인생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서게 될 테니 말이다. [rabbit : 뭐함?] 새롭게 자신의 길을 찾은 것은 신강헌만이 아닌 듯했다. 제주도에서 돌아온 후, 일이 바쁜지 며칠 연락이 뜸하던 김복자가 뜬금없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kimoo : 카페 인테리어 돕는 중. 왜?] [rabbit : 나 이따가 거기로 이사 가니까 대기하고 있으라고. 임대인님아.] 황당한 이야기에 기무혁은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뭔 소리야?” 무슨 소리였는지는 몇 시간 후에 바로 알게 되었다. 김복자가 직접 트럭을 운전해 이삿짐을 싣고 카페 앞에 도착한 것이다. “나 어때? 좀 쩔지?” 뺘앗! 운전석 밖으로 고개를 내민 김복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그녀의 어깨 위에서 살구가 날개를 파닥거렸다. “……이게 다 뭔데?” “여기 건물 한 층은 나보고 쓰라며? 아예 여기서 먹고 자려고. 아저씨랑 아줌마한테는 미리 허락받아 놨어.”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지금 네 띨빵한 표정 보려고 비밀로 했지. 짜잔, 서프라이즈-!” 그 뻔뻔한 말투에 기무혁은 저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무혁은 전생에서부터 친구였던 김복자의 결정을 크게 반겼다. 그가 김복자를 도와 이삿짐을 내려주며 조용히 물었다. “뒷세계에서는 완전히 나오기로 결정한 거야?” “뭐, 일단은 양지에서 햇빛 좀 쬐보게. 수입이 별로면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다?” 김복자는 무림맹에게 임대받은 건물의 2층을 사용하기로 했다. 바로 그날 오후에 간판까지 카페 앞으로 배송되었다. <☆럭키래빗 술법뷰티샵☆> 뒷세계에서 사용하던 레드래빗이라는 별명은 바꾸기로 한 모양이었다. “근데 술법뷰티가 뭐야?” “네일이나 타투 같은 거 빠르고 쉽게 술법으로 새겨주는 거야. 영구적인 건 아니지만 엄청 화려하고 이렇게 커스텀도 가능하거든.” 김복자가 자신의 손톱을 보여주자 파란 손톱 안에서 토끼가 깡총깡총 뛰어놀고 있었다. 미용과 관련된 술법 시술 외에도 일상용품이나 호신용품에 술법을 걸어주는 등의 사업을 계획 중이라고 했다. 친구의 여러 가지 사업계획을 들은 기무혁이 턱을 긁적였다. “요즘 애들은 별걸 다 술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네.” “또 아저씨 같은 소리 한다. 초치지 말고 짐이나 빨리 옮겨.” 김복자의 술법 실력을 아는 기무혁은 재능 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본인이 만족하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뒷세계에서 사람 장기를 만지면서 불법시술을 하는 것보다야 백배는 낫지.’ 김복자는 cafe 나루의 오픈에 맞춰 자신도 샵을 개업하겠다며 가게를 꾸미기 시작했다. 덕분에 기무혁은 1층과 2층을 오가며 일을 도와야 했다. “자, 그리고 이건 네 선물.” 이사가 끝날 때쯤 김복자가 검붉은 빛이 도는 검집을 내밀었다. 환몽의 전용 검집이었다. 웬만한 검보다 단단한 강도에, 기운이 흘러나오지 않게 봉인하는 술법, 그 밖에 온갖 보조술법이 걸린 술법무구였다. 기무혁이 감탄한 표정으로 검집의 자태를 감상했다. 한눈에 봐도 최상급 술법재료가 사용되었단 걸 알 수 있었다. “……이건 무기로 써도 되겠는데?” 전생에도 이만한 수준의 술법무구는 거의 보지 못했다. 그야말로 돈으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이었다. 감탄을 금치 못하는 기무혁의 반응에 기분이 좋은지 김복자가 씩 웃었다. “누나가 솜씨 발휘 좀 했지. 가게 월세는 이걸로 퉁친다?” “퉁치고도 남지.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지 말해.” “오늘은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가봐. 난 지금부터 바로 개업 준비해야 하거든!” 친구들이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모습은 기무혁에게도 자극이 되었다. 여기에 주변을 둘러보라는 스승의 조언까지 더해져, 기무혁은 자신도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세계제일인이 되는 것과 천마신교를 막는 일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인생의 목표였다. 물론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시간을 오직 무공 수련에만 미쳐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돈?’ 굳이 전생의 기억을 이용하지 않아도 지금의 실력이라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고글을 쓰고 뒤가 구린 사파의 문파를 털어도 되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무공 과외를 할 수도 있었다. 벌써부터 어떻게 알았는지 기무혁에게 연락해오는 무림인 지망생의 부모들이 적지 않았다. 제시한 액수를 볼 때마다 금전감각이 이상해질 정도였다. ‘돈이야 많을수록 좋지만.’ 기무혁이 지금 하고 싶은 일은 당장은 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돈이 급했다면 혈호방을 찾아가서 채무를 정산하는 방법도 있었으니까. “이왕이면 무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면 좋겠는데. 예를 들면…….” 오랜 고민 끝에 기무혁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비어있는 건물의 3층 내부를 둘러본 기무혁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공간을 그냥 두는 것도 아까우니까.” 고민은 길었지만 실행은 누구보다 빨랐다. 바로 다음 날, 기무혁이 주문한 현수막이 도착했다. 기무혁은 3층으로 올라가 창밖으로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의 결심처럼 진지한 궁서체로 적힌 문구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당당하게 펄럭였다. 3 “저게, 그러니까…….” 카페 밖으로 나온 기찬호와 박지연은 몹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람에 펄럭이는 현수막을 올려다봤다. “우리 아들이 카페 위에 흥신소 같은 걸 차린 거야?” 두 사람의 망연자실한 중얼거림은 현수막이 펄럭이는 바람소리에 묻혔다. 111화. 상담이나 한번 받아봐 기무혁은 창밖으로 펄럭이는 자신의 현수막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무림맹 공식 협력기관 청랑 사무소> 당신의 정의를 찾아드립니다! (*상시문의. 분쟁해결. 보수 협의 가능) 스스로 생각해도 문구를 꽤나 잘 썼다고 자화자찬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야! 기무혁-!” 문을 부술 듯이 열고 쳐들어온 아래층 세입자, 김복자의 눈에서 새파란 귀화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살기충천한 모습에 흠칫 놀란 기무혁이 표정을 굳히며 주변을 경계했다. 뭔가 큰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무슨 일이야? 밖에 위험요소라도 있어?” “내 인생에서 네가 제일 큰 위험요소다, 이 새끼야-!” 냅다 달려든 김복자가 기무혁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으나, 무의식적으로 반응한 기무혁이 먼저 손바닥으로 그녀의 이마를 밀어냈다. “……갑자기 왜 이래?” “아오! 놔! 이거 안 놔?” 김복자가 허공에다 팔을 마구 휘두르면서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다. “이건 임대인의 갑질이자 횡포야! 목 좋은 곳을 공짜로 쓰게 해준대서 왔더니 위층에 흥신소를 차려? 너 같으면 촌스러운 저 현수막 보고 여기 들어오고 싶겠냐! 오려던 손님들도 다 도망가겠…… 읍읍!” “잠깐만. 알았으니까 내 말 좀 들어봐.” 김복자의 입을 막은 기무혁이 아래층 세입자의 오해를 정정해 주었다. “일단 내가 차린 건 흥신소가 아냐. 그보다는 상담소라고 봐야지. 뭐…….” 상황에 따라서는 해결사 사무소의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기무혁은 뒷말은 조용히 속으로 삼켰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설득력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기무혁이 손을 치우자 김복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저 현수막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뭔지 알아? 돈 받고 뒷조사하거나 사람 하나 족치는 장면이라고. 내가 저런 사무실 한두 번 본 줄 알아?” “……흠흠.” 괜히 뜨끔한 기무혁이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낭인 시절에 드나들었던 몇몇 사무소들을 떠올리며 문구를 제작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에이, 그 정도는…….” 만약 현수막에 반대하는 사람이 김복자뿐이었다면 기무혁도 한 번은 더 고집을 부려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를 따라서 올라온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기무혁은 각성하라! 각성하라!” 노동자 투쟁이라도 하려는 듯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온 기찬호가 김복자 옆에 서서 시위에 동참했다. “영세 자영업자 부부는 임대인 기무혁의 갑질에 항의한다! 연남동 목 좋은 건물에 흥신소가 웬 말이냐! 이러다가 카페까지 다 망한다! 기무혁은 각성하라! 각성하라!” 작정하고 온 듯 격렬한 항의였지만, 솔직히 기무혁은 아버지의 저런 모습이야 별로 무섭지 않았다. 문제는 그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서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박지연의 눈빛이었다. “임대인님? 우리 따로 얘기 좀 할까?” 등줄기에 식은땀이 절로 맺히는 말에, 기무혁은 비로소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저 현수막이 그렇게 이상해요?” 결국 1, 2층 세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에 의해 기무혁이 제작한 현수막은 몇 시간 만에 철거되었다. 때마침 제자를 만나러 온 최건이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배를 잡으며 파안대소했다. “흐하하하하! 네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어있는 거냐? 분쟁 해결? 보수 협의 가능?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구나!” 현수막에 적힌 문구 하나하나가 웃긴지 조목조목 짚어가는 최건의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힐 지경이었다. 유일하게 편을 들어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스승마저 놀리는 데 동참하자 기무혁이 자포자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마음껏 놀리세요. 제자가 돈에 눈이 멀어서 흥신소를 차렸습니다.” “클클클! 더 놀렸다간 단단히 삐칠 것 같으니 그만하마. 아무렴 내 제자가 진짜로 흥신소를 차렸을까?” 최건은 현수막에 적힌 ‘당신의 정의를 찾아드립니다!’라는 문구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시선은 과거 젊었던 시절의 어디쯤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정의(正義). 글로 쓰기는 쉽지만 실현하기는 몹시 어려운 단어지. 이것이 네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인 것이냐?” “네.” 기무혁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함께 듣고 있던 세 사람도 다시금 그를 바라봤다. 모두와 한 번씩 눈을 맞춘 기무혁이 사무소를 차리려는 이유를 설명했다. “무림과 관련해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도와주고 싶어요. 그럴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물론 법과 제도가 있고, 무림맹의 맹원들이나 국가소속 무림인들이 약자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은 기무혁도 잘 알았다. 하지만 어디든 규범을 교묘하게 벗어나서 활동하는 비열한 악인들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저는 그런 놈들이 발 뻗고 편하게 자는 게 싫더라구요. 그러니 의뢰를 받아 문제를 해결해주고, 겸사겸사 다양한 경험도 쌓고, 보수까지 받으면 일석삼조잖아요?” 기무혁이 장난스럽게 씨익 웃으며 말하자 다들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허, 녀석…….” 최건이 흐뭇한 얼굴로 웃으며 제자를 바라봤다. 기무혁은 최근 있었던 팔대문파의 악행과 비리를 세상에 고발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이미 큰 정의 하나를 바로잡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하나의 큰 정의보다 작은 정의들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어린 나이에 거기까지 생각한 제자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나 기특했다. “비록 결과물은 엉망이지만 뜻이 훌륭하니, 내 틈날 때마다 너를 돕도록 하마!” 최건이 기꺼이 제자의 일을 돕겠다고 나섰다. 기찬호와 박지연도 ‘어쩔 수 없지.’라는 표정으로 마주 본 후 다시 아들을 바라봤다. “진작 그렇게 말하지.” “난 또 정말 이상한 사무소를 차리려는 줄 알았잖아.” “근데 저 현수막은 다시 만들자.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겠어.” “차라리 간판이 낫지 않을까?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소리도 안 나고.” 조용히 듣고 있던 김복자도 퉁명스러웠던 표정을 풀고 조언했다. “의도는 좋지만 저렇게 해두면 다들 지저분한 일 처리하는 곳이라고 생각할걸. 무림인하고 바람난 마누라 뒷조사해달라는 문의나 잔뜩 오지 않을까?” 꽤 설득력이 있는 가정이었는지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기무혁도 궁서체로 나부끼는 현수막을 다시 걸겠다고 고집부리지는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기무혁이 아무리 회귀자라고 해도 모든 것에 완벽할 수는 없었다. 그도 얼마든지 실수를 하고, 미숙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괜찮아.’ 고독했던 전생과 달리, 이번 생에는 곁에서 조언을 해줄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졌으니까. 기무혁이 모두를 둘러보며 묻자 기다렸다는 듯 여러 가지 의견이 쏟아졌다. “요즘엔 간판이라고 해서 크게 달 필요도 없어. 누나가 깔끔하게 디자인을 뽑아줄게. 이참에 명함도 같이 만들까?” “정말 필요한 사람이 검색해서 찾아올 수 있게 홍보를 해야지. 그건 나한테 맡겨라!” “인테리어는 엄마가 도와줄게. 내부가 삭막하면 의뢰인이 무서워서 할 말도 못 할 테니까.” “클클. 무림맹에는 내가 한번 이야기를 해보마.” 기무혁은 주변의 도움과 조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사무실 간판은 김복자가 직접 디자인해 제작하고, 기찬호가 준비 중이던 카페 나루 SNS와 더불어 청랑 사무소 SNS를 개설했다. 박지연은 사무실이 될 3층 내부를 둘러보며 인테리어 아이디어를 냈고, 최건은 무림맹을 통해 사무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법률적인 자문을 구했다. 정작 기무혁은 할 일이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다 해주시면 저는 뭐해요?” “너는 평소처럼 수련이나 하거라. 무인이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결국 일신의 무공이니라.” 기무혁은 스승의 조언에 따르기로 했다. 검만 다루지 않을 뿐, 하루하루 성실하게 루틴에 따라 수련을 거듭했다. 1층 카페 나루 2층 럭키래빗 술법뷰티샵 3층 청랑 사무소 4층 크루원 아지트 건물의 층마다 조금씩 각자의 색깔을 찾아가고 있었다. 카페와 술법뷰티샵은 개업까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고, 청랑은 간판만 달면 바로 영업을 시작해도 상관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파란색 바탕에 하얀 글씨로 쓰인 깔끔하고 작은 간판이 도착했다. < 청랑(靑狼) > [무림 관련 피해상담소] 청랑이라는 글자 옆에는 김복자가 직접 그린 늑대 로고를 넣었다.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에 모두가 만족했다. 마음에 쏙 드는 간판을 올려다보며 기무혁은 상념에 잠겼다. ‘내가 걷는 길이 바뀌어야 내 무도(武道)도 변화하겠지.’ 전생과는 다른 경험을 해보기 위해 시작한 일.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깨달음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기무혁은 회귀 후 새롭게 인연을 맺은 지인들에게 청랑 사무소 개업소식을 알렸다. “세상에. 우리 아지트라더니 이게 다 뭐야?” “한번 취미 삼아서 해보려고. 여기 명함이니까 좀 챙겨가.” 선물로 술을 들고 찾아온 황숙수는 돌아갈 때 명함을 잔뜩 받아 갔고, 부연하는 창천검문 로고가 새겨진 냉장고를 선물해줬다. “감사해요. 그런데 냉장고에 굳이 문파 로고를……?” “창천검문과의 친분을 최대한 과시하라는 의미야. 그럼 진상이 확 줄어들걸.” 하루는 서울로 이사 온 구현우와 구지우가 사무소에 와서 살구와 실컷 놀다 가기도 했다. “저 나중에 또 놀러 와도 돼요?” “언제든지 오고 싶을 때 와. 몸은 좀 어때?” “저 이제 하나도 안 아픈 것 같아요!” 그렇게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기무혁은 첫 번째 의뢰인이 찾아오길 느긋하게 기다렸다. * * * 황숙수가 운영하는 암루.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가게로 들어온 남자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 남자를 힐긋거리는 시선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별 볼 일 없다고 판단했는지 더 이상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남자는 말없이 술만 퍼마셨다. 음울한 인상과 몸에 새겨진 흉터들이 거친 인생을 살아왔음을 추측케 했다. “낭인인가 봐?” 남자는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의 눈에 차가운 살기가 맺혔다. “신경 끄고 꺼지쇼.” 암루에서 이런 상황에 먼저 말을 거는 일은 흔치 않았다. 주로 시비를 걸거나 만만해 보이는 호구라고 판단했을 때뿐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왜냐면 말을 건 사람은 암루의 주인인 황숙수였으니까. “젊은 놈이 안주도 없이 술만 처먹으니까 취해서 난동이라도 부릴까 봐 그래. 그리고…….” 황숙수가 남자의 붉게 충혈된 눈을 빤히 보고는 혀를 찼다. “사내 새끼가 질질 짜고 있으니까 안쓰럽기도 하고.” “질질 짜긴 누가……!” 남자는 황숙수에게 화를 내려다가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조용히 술만 먹고 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사고 치고 싶어도 지금은 그럴 힘도 없어.” “어디서 억울한 일이라도 당했나 보네.” “…….” “낭인이면 뻔하지 뭐. 받기로 한 돈을 뜯겼거나, 믿었던 놈한테 뒤통수를 맞았거나 아니면…….” “빌어먹을! 저리 꺼지라니까!” 울컥한 남자가 술병으로 황숙수를 후려치려다가 흠칫했다. 어느새 뻗어진 황숙수의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아 내리고 있었으니까. ‘고수?’ 황숙수가 과거에 낭인이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지금도 이 정도 실력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남자가 식은땀을 흘렸다. “자자, 흥분하지 말고.” 화난 남자를 진정시킨 황숙수가 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나 아는 가겐데. 억울한 일 있으면 여기에 한번 가보든가.” <청랑 사무소> [무림 관련 피해 상담] 그 아래에는 전화번호와 이메일, 사무실 주소가 적혀 있었다. 잠시 손에 들린 명함을 바라보던 남자가 이내 표정을 구기더니 다시 황숙수를 바라봤다. “난 여기 술값만 내면 이제 빈털터린데. 술값 외상으로 해줄 거요?” “지랄. 장기를 하나 빼놓더라도 술값은 내고 간다, 그게 여기 규칙인 거 몰라?” 황숙수의 단호한 말에 낭인이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맥 빠진 웃음소리를 흘렸다. 역시 돈이 없으면 안 된다. 그놈의 돈 때문에 다리도 절게 되고, 사람도 죽이고, 친구도 배신하게 만든다. “흐흐흐…….”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남자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황숙수가 말했다. “난 안 되지만, 거기 사무소는 말만 잘하면 공짜로도 해줄걸?”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돈 필요없다는 놈들이 제일 돈에 환장한 놈들이야!” 발작적으로 소리친 남자가 술병을 들어 병나발을 불었다. “거참…….” 황숙수가 수염을 긁적이며 웃었다. 괜히 오지랖을 부렸나 싶었지만, 이왕 홍보해준 김에 제대로 해주기로 했다. “나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말이야. 속는 셈 치고 상담이나 한번 받아봐. 왜냐면…….” 거기 대표 놈이 협객이거든. 뒷말은 술에 너무 취해서 제대로 들은 것인지 잘못 들은 것인지 헷갈렸다. 황숙수는 술을 많이 시켰으니 서비스라며 동파육 한 접시를 놓고 떠났다. “협객은 옘병…….” 남자는 명함을 노려보다가 이내 구겨서 바닥에 던졌다. 그러나 잠시 후. 술에 취해 비틀비틀 암루를 빠져나가는 남자의 손에는 반쯤 구겨진 명함이 들려있었다. 112화. 꼭 도와주고 싶습니다 부모님의 카페와 김복자의 술법뷰티샵이 막바지 개업 준비로 바쁜 와중. 기무혁은 굳이 적극적으로 청랑 사무소를 홍보하거나 알리지는 않았다. 애초에 돈을 벌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간절한 사람이라면 먼저 찾아오겠지.’ 아무나가 아닌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개업 후 처음으로 청랑 사무소의 문을 두드린 사람은 기무혁도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기찬호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아버지? 걔는 누구예요?” “요 앞에서 울고 있길래 데려왔다. 강아지를 잃어버렸다더라.”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초등학생 아이가 말했다. “저희 나나 좀 찾아주시면 안 돼요?” 초등학생이 내민 스마트폰 액정에는 잔디밭에서 주인을 올려보는 하얀 말티즈 한 마리가 있었다. “산책하다가 잠깐만 인형 뽑기 구경하고 나왔는데 나나가 사라졌어요…….” 울먹이면서 제발 강아지를 찾아달라고 말하는 초등학생에게, 기무혁은 차마 여긴 반려동물 찾아주는 곳이 아니니 돌아가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때 기찬호가 아들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차피 사무소에 파리만 날리는데 좀 도와줘라.” “……알았어요.” 결국 기무혁은 반려견 수색에 나섰다. 다행히 강아지가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절정고수에게 반려견 한 마리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건물 위로 훌쩍 뛰어오른 기무혁이 내공으로 안력을 돋워 주변을 살피자, 멀지 않은 골목길에서 가만히 엎드려 주인을 기다리는 말티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으앙! 나나야! 나나야아-!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기무혁이 데려온 강아지를 품에 꼭 껴안은 초등학생은 감사 인사와 함께 주머니에 있던 초콜릿을 주고 돌아갔다. “이것도 나름 보람이 있긴 한데…….” 청랑 사무소의 첫 의뢰로 치기에는 조금 아쉬웠다. 그 이야기를 들은 김복자가 괜찮은 사업아이템이 떠올랐다며 눈을 반짝였다. “차라리 전문적으로 실종된 반려동물을 찾아주는 사무소로 업종 전환하는 건 어때?” “그건 또 무슨 창의적인 헛소리야?” “잘 생각해봐. 시내에서는 차보다 훨씬 빠르고 높은 곳도 휙휙 올라가는 무림고수가 잃어버린 반려동물을 찾아준다? 이거 무조건 되는 사업이라고!” 초등학생이 보수로 주고 간 초콜릿을 기무혁 대신 까먹으며 김복자가 열변을 토했다. “반려동물 가구 천만 시대에 이건 가족을 찾아주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 아냐? 이보다 정의롭고 보람찬 일이 어딨니?” 김복자의 거듭된 설득에도 기무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기무혁의 기감에 꽤 익숙한 종류의 기운이 걸려들었다. ‘살기?’ 누군가에게 살의를 품고 내뿜는 종류의 살기가 아닌, 울분이 쌓이고 쌓여 자연스럽게 몸에 밴 살기. 기무혁은 이런 종류의 살기를 품은 자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드르륵. 창문을 열고 바깥을 확인하자 이쪽으로 걸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후줄근한 회색 후드집업에 청바지, 적당히 큰 키에 말총머리를 한 남자는 한쪽 다리가 불편한지 절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기무혁은 남자를 유심히 관찰하며 김복자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이 사업을 점진적으로 확장해서 프랜차이즈화하면……. 내 말 듣고 있어?” “첫 손님이 곧 도착할 것 같은데. 복자야, 자리 좀 비켜줘.” “쳇. 하필 이럴 때…….” 김복자가 구시렁거리며 돌아가고 잠시 후, 문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기무혁이 창문 밖으로 보았던 남자였다. 평범한 옷을 입고 무기도 가져오지 않았지만, 기무혁은 한눈에 상대의 정체를 짐작했다. ‘낭인이군.’ 뒷세계 무림의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인간 특유의 경계심어린 눈빛. 물론 그것만으로 낭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동류였던 인간만이 맡을 수 있는 어떤 냄새가 기무혁에게 상대의 정체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여기가 청랑 사무소…… 맞나?” 기무혁이 자기보다 한참 어리다고 생각했는지 남자의 말이 짧았다. 눈앞의 청년을 사무소 직원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맞습니다. 여기 앉으시죠.” 기무혁은 손으로 손님용 테이블을 가리켰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얕은 한숨을 쉬고는 의자에 앉았다. ‘확실히 낯이 익단 말이지. 분명…….’ 기무혁이 남자의 얼굴을 살피며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회귀 전 인생의 절반을 낭인으로 살았던 그였다. 친구나 동료가 아니어도 오가며 스친 얼굴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니, 그중 하나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황숙수 소개로 왔는데, 사장은 어딨지?” “제가 청랑 사무소의 대표 기무혁입니다.” 기무혁이 명함을 건네자 남자에게서 대놓고 실망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가 짜증 어린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씨발. 시간만 버렸네.” “욕까지 하실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한재찬 씨.” “……!” 흠칫 놀란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기무혁을 노려봤다. 기무혁은 눈앞의 남자와 오래된 기억 속 인물을 정확히 오버랩시켰다. ‘절름발이 한 씨.’ 낭인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에 몇 번인가 함께 일을 한 인물이었다. 한재찬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황숙수가 얘기했나? 아니, 그 인간도 내 이름은 모르는 것 같았는데…….” 특별한 친분은 없었다. 풋내기 낭인이었던 시절, 몇 차례 함께 일을 한 것이 전부인 사이. 그럼에도 기무혁이 한재찬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함께 있으면 애꾸와 절름발이 콤비라고 불렸지.’ 인공단전 불법시술을 받은 뒤 한쪽 눈을 잃은 기무혁과 마찬가지 이유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된 한재찬. 같은 조로 움직인다는 이유만으로 두 사람은 조롱과 놀림의 대상이 되었었다. 낭인들 세계에서 그 정도는 일상이었지만, 애송이 시절의 기무혁은 그런 놀림에도 발끈해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었다. -꼬마야. 그런 말에 일일이 발끈하면 낭인 짓 오래 못 한다. 적당히 웃어넘길 줄 알아야지. -닥쳐. 쫄아서 한 마디도 못 하는 겁쟁이 주제에. -…….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 기무혁은 한창 날카로웠던 시절 자신이 했던 행동을 반성하며, 한재찬에게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저희가 정보력이 좋은 편이라서요. 한재찬 씨가 낭인으로 뛰어난 활약을 하시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 거짓말이었다. 기무혁이 기억하는 한재찬은 만년 하급 낭인이었다. 귀신 같은 검술로 금세 두각을 드러낸 기무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수가 높은 일을 맡게 되었지만, 한재찬은 그렇지 못했다. 실력이 떨어지는 그는 보수는 적고 지저분한, 다른 낭인들이 꺼려하는 의뢰를 주로 맡았다. 그렇다고 위험하지 않냐면 그것도 아닌 험하고 거친 일들. 때문에 그는 경계심도 많고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다. “……정말로 네가 여기 사장이라고?” “혹시 티비나 유튜브에서 저 보신 적 없으세요?” “몰라. 그딴 거 관심 없어.” 한재찬은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는 것 외에는 세상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기무혁이 누군지도 몰랐고, 상대의 실력을 단숨에 알아볼 만한 안목도 없었다. 하지만 기무혁은 이미 한재찬의 의뢰를 맡기로 결심했다. “뭐, 모르면 차차 알아 가면 되죠.” 혼자 상대에게 내적 친밀감을 느낀 기무혁이 한껏 친절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개업 첫 손님이시니 특별히 비용도 아주 저렴하게 책정해드리죠. 어떤 문제로 저희 사무소를 찾아오셨나요?” 그런데 어째선지 한재찬이 표정을 굳히며 뒷걸음질 쳤다. “필요 없어.” “네?” 기무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한재찬이 물러서는 만큼 다가갔다. “믿고 맡기셔도 됩니다. 특히 낭인 관련 피해 상담이라면 업계 최고 경력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거든요.” 머리에 피도 안 말라 보이는 꼬마가 업계 최고 경력은 무슨……. 게다가 무슨 일인지 들어보지도 않고 덥석 의뢰를 맡겠다는 모습에서 신뢰도가 팍 떨어졌다. ‘완전 사기꾼이구만.’ 한재찬은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곤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됐다고. 그냥 가지.” 그대로 돌아서서 나가려는 순간, 기무혁이 문 앞을 가로막았다. “한재찬 씨. 저는 당신을 꼭 도와주고 싶습니다. 정의를 찾아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이유를 모르면 도와줄 수 없습니다.” 기무혁이 진지한 표정으로 한재찬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조금만 더 용기를 내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말도 꺼내보지 않고 이대로 돌아갈 겁니까?” 기무혁의 말 중에 어떤 것이 한재찬의 역린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이 애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버럭 화를 내며 휘두른 주먹이 기무혁의 얼굴을 노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코뼈가 주저앉을 만한 위력이었다. “……하, 말 더럽게 안 통하네.” 한숨을 내쉰 기무혁이 상대의 주먹을 가볍게 낚아챘다. 그대로 팔을 꺾은 후, 고통스러워하는 한재찬의 뒤통수를 잡아서 테이블에 얼굴을 찍어 눌렀다. 콰앙-! 단단함을 최우선 사항으로 두고 구매한 세라믹 테이블에 한재찬의 옆얼굴이 처박혔다. “커헉!” “한재찬 씨.” 기무혁이 버둥대는 그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여전히 정중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말투는 늑대의 으르렁거림 같았다. “경고하는데 주머니에서 칼 꺼내지 마세요. 손모가지 잘려서 돌아가기 싫으면.” “……!” 상대가 자신보다 월등한 고수라는 것을 깨달은 한재찬은 주머니로 향하던 손을 축 늘어뜨렸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미친놈한테 걸렸구나!’ 이런 인간을 소개해준 황숙수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등신같이 그 말을 믿고 여기까지 찾아온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죄, 죄송합니다. 미천한 실력으로 고수를 몰라 뵙고…….” 구차해 보였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엎드려서 싹싹 빌 수도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무혁이 조용히 그를 일으켜서 자리에 앉게 했다. “차분하게 다시 대화를 나눠 보죠. 10분만 더 제 얘기를 들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돌아가도 좋으니까.” “……예.” 한재찬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명이 조금 부족했던 것 같은데. 하나씩 다시 말씀드리죠.” 기무혁은 상대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천천히 설명했다. “한재찬 씨는 저희 사무소의 첫 번째 의뢰인입니다. 그리고 저는 빠르게 실적과 경험을 쌓고 싶어요. 의뢰가 잘 해결되면 주변에 소문 좀 내달라는 의미에서 보수도 저렴하게 받을 생각입니다.” 본심은 전생에 스친 인연이라서 도와주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보아하니 상대를 납득시키기 위해선 차라리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아…….” 비로소 한재찬의 표정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방금 전 기무혁이 보여준 실력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이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할 만큼 빠른 움직임. 무공이 형편없는 하급 낭인이라고 해서 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진짜 고수다. 이런 고수가 정말로 날 도와준다면…….’ 한동안 갈등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떼인 보수를 받고 싶은데…… 도,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기무혁이 한재찬의 손을 맞잡으며 씨익 미소 지었다. “잘 찾아오셨네. 그쪽 분야가 제 전문이거든요.” 비로소 제대로 된 의뢰를 맡게 되었단 생각에 기무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누구한테 돈을 떼이셨는데요?” “……비밀은 지켜주시는 겁니까?” 기무혁은 대답 대신 비밀유지 서약서를 가져왔다. 혹시 몰라서 미리 준비해둔 서류였다. “필요하다면 서약서를 쓰시죠. 민간인 살해나 그에 준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면 안 되겠지만, 그런 거라면 애초에 절 찾아오지도 않았겠죠?” “……서약서까진 안 써도 될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재찬이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게, 외국에서만 나는 영초를 밀수하는 일을 하다가…….” “밀수?” 밀수라는 말을 듣는 순간, 기무혁의 머릿속에서 이 시기쯤 뒷세계 무림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113화. ……맞겠지? 한재찬은 기무혁에게 보수를 떼이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인천에 사는 친구가 짭짤한 건수가 있다고 해서 갔습니다. 거기서 일을 주선받았는데…… 바다에서 밀수품을 건져서 가져오는 일이었습니다.” 인천항에서 수십 킬로 떨어진 바다에서 밀수품을 건져,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어둠 속에서 항구까지 헤엄쳐 가져오는 임무. 극한까지 신체를 단련한 무림인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제대로 된 내공조차 익히지 못한 하급 낭인이라면 목숨까지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했을 터. 기무혁은 한재찬의 안색이 기억하던 것보다 좋지 않았던 이유를 깨닫고 말했다. “죄송한 말이지만 한재찬 씨 실력으로는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 게 기적이네요.” 낭인으로 온갖 일을 다해본 기무혁이었다. 듣기만 해도 얼마나 위험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냉정하게 말해서, 한재찬의 실력으로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저도 제 주제는 압니다. 그런데 보수가 평소 하던 일의 열 배였거든요.” 한재찬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기무혁이 자신보다 압도적인 고수임을 깨달았기 때문인지, 그는 더 이상 허세를 부리지 않았고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일을 마치고 거의 일주일을 앓아 누었습니다. 처음 사흘은 온몸이 아파서 아예 꼼짝도 못 했죠.” “인공단전에는 별 문제 안 생겼어요?” “그걸 어떻게……?” 한재찬이 깜짝 놀란 얼굴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그가 인공단전 시술을 했다는 사실이 비밀은 아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 거기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기무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말했잖아요. 제가 정보력이 좀 좋은 편이라고.” 기무혁이 한재찬과 깊은 인연이 없음에도 그걸 기억하는 이유는. ‘나와 같은 인공단전 사용자였으니까.’ 한재찬은 이때까지만 해도 흔치 않은 인공단전 사용자였다. 인공단전 시술로 따지면 기무혁보다 훨씬 더 먼저 수술을 받은 선배였다. 즉, 더 불완전하고 출력은 부족하면서 위험하기까지 한 몸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인공단전이라는 거, 무리해서 내공을 운용하면 찢어지거나 터질 수도 있다면서요?” “……며칠 쉬고 나니 괜찮아졌습니다.” 괜찮다는 말과 달리, 한재찬의 안색은 누가 봐도 나빠 보였다. 그러나 한재찬의 핏기 없는 얼굴을 살피던 기무혁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주제 넘는 짓이었으니까. “그래서 보수는 밀수업자들이 떼먹은 겁니까?” 한재찬은 고개를 저었다. 보수를 주기로 한 사람은 중개인인 지인이었다고 했다. “친구라고 믿었던 놈이 잠수를 탔습니다. 그 자식이 소속된 문파를 찾아가도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잡아떼더군요. 놈들한테 따지다가 오히려 두들겨 맞기만 했습니다.” 체념한 듯 큭큭 웃는 한재찬의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저보고 등신호구라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인간이라 무작정 믿었으니까요. 씨발…….” 낭인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제대로 된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진짜 실력자가 아니면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받고 대부분 일이 끝나야 돈을 받았다. ‘하급 낭인들은 착수금이나 선금조차 못 받고 시작하는 경우가 흔하지. 정산도 제대로 못 받고, 뼈 빠지게 일하다가 골병들어서 관두는 경우도 많고.’ 낭인들 사이에서는 정말로 흔하게 벌어지는 현실. 하지만 흔하다는 것이 별것 아니라는 뜻은 아니었다. “한재찬 씨.” 기무혁은 어설프게 한재찬을 위로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성실하게 자신이 맡은 의뢰를 해결해 줄 생각이었다. “아까 밀수품이 외국에서만 나는 영초라고 했죠?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보통은 물건이 뭔지 안 알려줄 텐데.” “……같이 일하던 낭인들 중 하나가 물건을 빼돌리려다가 걸렸습니다. 그때 봤습니다.” 기무혁은 대충 어떻게 된 것인지 알겠다는 듯 혀를 찼다. “크게 한몫 땡기려고 거기에 가담한 건 아니고?” “맹세코 아닙니다! 그랬으면 사지 멀쩡하게 여기까지 걸어오지도 못했겠죠.” “삥땅치려다 걸린 놈은요?” “밀수업자들한테 끌려가고 다시는 못 봤습니다. 아마…….” “물고기 밥이 됐겠죠.” 한재찬은 멍한 표정으로 기무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데…….’ 지금 자신과 대화하는 상대가 젊은 청년이 아니라 마치 닳고 닳은 낭인처럼 느껴졌다. 반면 기무혁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아는 그 일이 맞는 것 같네.’ 세계 각국에선 자국에서 나는 영초나 영약의 재료들을 외부에 유출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도 뛰어드는 종자들이었다. 때문에 영초나 영물의 밀수는 생각보다 꽤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재찬 같은 하급 낭인까지 필요할 정도로 손이 모자란 상황이라면…….’ 곧 시장에 풀리게 될 물량이 어마어마하다는 의미였다. 기무혁이 아는 한 가까운 시일 내에 대량으로 풀린 영초 때문에 문제가 되는 사건은 하나뿐이었다. “혹시 그 영초. 붉은 생강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예. 맞습니다.” 더 이상 놀랄 힘도 없다는 듯 한재찬이 힘없이 대답했다. 기무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맞군. 동남아에서 대량으로 들여온 레드갈랑갈이야.’ 레드갈랑갈은 그 자체로 독성이나 부작용이 있는 영초는 아니었다. 오히려 가격 대비 효능이 뛰어나고 한국의 약초와 배합하면 보급용 영약을 만들기 좋아, 뒷세계 무림인부터 팔대문파의 하급 무인들까지 두루 찾는 물건이었다. 다만 한 번에 많은 양을 복용하면 단전에 크게 무리를 주는 부작용이 있는데, 이 시점에서 그걸 아는 사람은 기무혁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던 것보다 레드갈랑갈이 풀리는 속도가 1년은 빨라. 어째서지?’ 미래에 벌어질 일이긴 했지만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었다. 그 이유를 추측하던 기무혁은 문득 깨달았다. “설마…… 나비 효과인가?” “예?”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라서 묻는 한재찬에게, 기무혁이 질문으로 답했다. “인천이면 금영문 영역인데, 일하기 전에 그쪽이랑 얘기됐다거나 조심하라는 말 들은 거 없어요?” 한재찬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얘긴 못 들어봤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무혁은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팔대문파가 여론의 눈치를 보면서 활동을 줄이자 밀수업자들이 활개 치기 시작한 거야.’ 팔대문파는 정부와 무림맹에서 다 감당하기 힘든 무림의 일을 각자의 지역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지역의 치안이 유지되는 것 또한 사실. 즉, 팔대문파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치안의 공백이 생기며 밀수의 규모가 커진 것일 터였다. ‘어쩌면 생각보다 큰 건수랑 엮일 수도 있겠는데?’ 잠시 생각을 정리한 기무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돈 떼먹은 놈이 소속된 문파로 먼저 가보죠.” “……지금 바로 말입니까?” 기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밀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건이라면 꽤 크겠지만, 한재찬과 관련된 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몇 놈 족치고 받아내야 할 보수를 받아오면 되는 거니까. “보나마나 또 비슷한 짓 하면서 누구 등쳐먹고 있을 텐데, 최대한 빨리 잡아야죠.” “저,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그놈들 숫자가 꽤 많아서…….” 기무혁이 사무실 구석에서 고글을 꺼내 챙기며 씩 웃었다. “잘됐네요. 그중에 하나는 돈 떼어먹은 놈이 어딨는지 알 테니까.” * * * 삼악회. 삼류에서 이류 수준의 무공을 익힌 뒷세계 무인들이 모여서 만든 조직이었다. 그중에는 낭인 출신도 있고, 제법 규모가 큰 사파와 연줄이 닿은 이들도 있었다. 특히 회주는 수완이 좋은 인물이었다. 최근에는 동남아에서 영초를 밀수하는 일에 한 다리 걸쳐, 짭짤한 수익을 올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마셔라! 삼악회의 부흥을 위해서!” “건배-!” 회주는 미래에 대한 큰 꿈을 꾸었다. 지금은 고작 20명밖에 안 되는 조직이지만, 밀수로 번 돈을 바탕으로 힘을 키워 훗날 사파의 거물이 될 자신을 상상했다. 난데없이 고글을 쓴 괴한이 등장해서 부하들을 맨주먹으로 두들겨 패기 전까지, 그는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다. 쿵!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개과천선하고 살겠습니다!” 바닥에 머리를 박은 삼악회주가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외쳤다. 그 앞뒤좌우로 스무 명에 가까운 조직원들이 모조리 대가리 박아를 시전하고 있었다. 괴한이 침입하고 불과 10분 만에 벌어진 광경이었다. “살려주시면 다시는 나쁜 짓 안 하고 살겠습니다!” “한 번만 선처해 주십시오, 형님!”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 기무혁이 발로 회주를 툭 하고 밀자 도미노처럼 조직원들이 우당탕탕 넘어졌다. “일어나서 다시 대가리 박는다, 실시.” “시, 실시-!” 얼굴이 멍으로 퉁퉁 부은 조직원들이 허겁지겁 일어나 바닥에 머리를 박는 모습은 촌극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극심한 공포에 질려 있었다. ‘저거 완전히 미친놈이야…….’ ‘다짜고짜 나타나서 두들겨 패고 대가리 박으라니…….’ ‘왜 패는지 이유나 말해주고 패라고!’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저 주먹 하나에, 처음 덤벼든 몇 명은 피떡이 된 채로 여전히 미동도 않고 있었으니까.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한재찬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도 정체를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도와준다는 거였어?’ 돈 떼어먹은 놈을 찾는 걸 도와준다기에 흥신소 같은 방식을 생각했지, 설마 삼악회에 쳐들어가 전부 작살을 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동안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형성하던 기무혁이 비로소 그들을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내 돈 떼먹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재익. 그놈이 내 돈을 떼먹고 튀었다고. 지금 어딨어?” 안색이 창백해진 삼악회주가 부하들에게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지금 당장 이재익 그 새끼한테 연락해!” 잠시 후. 한재찬의 오랜 친구이자 목숨 걸고 일한 보수를 떼먹고 잠수를 탔던 이재익이 보스의 호출에 헐레벌떡 뛰어왔다. “예? 돈을 떼먹다니요? 대체 누구신데…….” “기억 안 나지? 금방 생각나게 해줄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글 쓴 남자를 바라보기도 잠시. 쿵! “맞습니다! 제가 돈을 떼먹었습니다! 제가 나쁜 새낍니다!” 이재익도 사이좋게 동료들과 함께 바닥에 대가리를 박고 무작정 빌었다. “흑흑흑…….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쇼!” 그 앞에 쪼그려앉은 기무혁이 이재익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말이 앞뒤가 안 맞네.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왜 살려줘?” “흐끄으으으으! 죄송합니다! 당장 입금해드리겠습니다! 아니, 바로 현찰로 드리겠습니다!”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는 한때 친구였던 인간을 지켜보며 한재찬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하, 이게 이렇게 쉽게…….” 자신을 두들겨 팼던 삼악회가 단 한 사람에게 박살이 났다. 오만하게 사람을 깔보던 회주는 바닥에 머리를 박았고, 조직원들은 전부 어딘가가 부러진 채로 쓰러졌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생겼다. 저런 힘을 가진 사람이 어째서 날 돕는 걸까? 고작해야 하급 낭인의 구질구질한 사연에 왜 끼어든 것일까? -한재찬 씨. 저는 당신을 꼭 도와주고 싶습니다. 정의를 찾아드리고 싶어요. 세상물정 모르고 순진하게까지 들렸던 그 정의라는 말이 진심이었던 걸까? 어쨌거나 자신이 기무혁에게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저 따위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은혜를 갚겠습니다. 한재찬은 그 말을 하기 위해 기무혁에게 다가갔다. 충분하니 복수는 그만해주셔도 된다고, 응어리진 감정도 다 녹아내렸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기무혁이 삼악회주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밀수한 물건은 어디에 숨겼어?” 입맛을 살짝 다시는 그 모습이 지금껏 본 누구보다 악당 같아서, 한재찬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정의…… 맞겠지?’ 114화. 쉬운 일이니까 기무혁은 삼악회 조직원 전원의 혈도를 짚어 기절시킨 후에야 고글을 벗었다. 그리고 놈들을 족쳐서 받아낸 돈을 한재찬에게 건네며 말했다. “액수 맞는지 한번 확인해 보세요.” 한재찬은 건네받은 현금을 세보지 않았다. 그럴 필요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제가 받기로 한 돈보다 두 배는 많은데…….” 애초에 기무혁이 삼악회에 내놓으라고 한 돈이 원래 보수의 몇 배였으니까. 한재찬의 손에 쥐어진 두툼한 오만 원짜리 다발. 그건 그가 낭인 일을 하면서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거액이었다. 당황해하는 한재찬의 반응에 기무혁이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돈 못 받은 기간이 있는데, 당연히 이자까지 계산해야죠.” “나중에…… 제가 보복이라도 당할까 봐 신경 써 준 겁니까?” 기무혁이 한재찬이 받아야 할 액수를 정확하게 요구했다면, 상대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예 훨씬 더 많은 돈을 뜯어내면, 오늘 일과 한재찬을 연관 지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냥 재수 없게 웬 사파의 정신 나간 고수한테 털렸다고 생각하겠지.’ 기무혁은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처음부터 유도했다. “뒤탈이 안 나도록 깔끔하게 일하는 게 프로잖아요?” “하…….” 과격하기만 한 줄 알았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철두철미한 기무혁의 계획에 한재찬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정말로 저보다 젊은 거 맞습니까? 무슨 반로환동한 고수라든가 그런 거 아니고요?”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이쪽 분야가 제 전문이니까 잘 찾아오셨다고.” “도대체 정파 후기지수가 떼먹힌 돈 받아내야 할 일이 뭐가 있다고요?” 이제야 기무혁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한재찬이었다. 자신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절정고수이자, 한국 무림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후기지수. 그야말로 탄탄대로의 앞날이 보장된 정파 무림인인데, 동종업계에서 십 년은 구른 베테랑처럼 보이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저도 가끔 있어요. 지금도 받아내야 할 채무가 100억 정도 있거든요.” “누군지 몰라도 상대가 너무 불쌍하네요.” 기무혁의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한 한재찬은 한 번 피식 웃고는 현금다발을 품에 챙겨넣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의뢰비용은…….” 한재찬은 기무혁이 보수로 자신이 받은 돈의 절반을 달라고 해도 기꺼이 지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무혁은 돈 대신에 다른 것을 요구했다. “운전할 줄 아시죠?” “예? 그야 할 줄 압니다만…….” “제가 아직 무면허라서요. 아, 그리고 짐 싣는 것도 좀 도와주세요.” “……혹시?” 잠시 후. 두 사람은 삼악회가 밀수품을 숨겨 놓은 지하창고로 향했다. 그 안에는 동남아에서 들여온 레드갈랑갈로 가득 찬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기무혁이 창고 내부를 둘러보며 작게 감탄했다. “새끼들. 많이도 꿍쳐놨네.” 삼악회를 족쳐서 픽업트럭의 차 키를 챙겨온 기무혁은 한재찬과 함께 상자를 트럭에 실었다. 무인 두 사람이 몇 번 왔다갔다하자 지하창고는 금방 텅텅 비었다. ‘밀수품이야 황숙수한테 갖다 주면 알아서 처분해주겠지.’ 기무혁은 삼악회에서 챙긴 레드갈랑갈을 본인이 챙기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삼악회가 들여온 양은 전체의 일부에 불과했고, 심신을 망가뜨리는 위험한 약도 아니었으니까. 운전석에 탄 한재찬이 삼악회를 엿먹여서 즐거운지 웃는 얼굴로 농담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 이것도 정의로운 일입니까?” 조수석에 탄 기무혁이 느긋하게 시트를 뒤로 젖히며 대답했다. “나쁜 놈들 쫄딱 망하게 만드는 일인데, 이게 정의구현이 아니면 뭐겠어요?” “뭐라고요? 하하하하-!” 한재찬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곤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그는 운전을 상당히 잘했다. 김복자처럼 아슬아슬한 코너링을 즐기지도 않았고, 기무혁처럼 거칠게 엑셀을 밟지도 않았다. 기무혁을 대하는 것도 한결 편해졌는지 그가 웃으면서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일단 서울로 가죠.”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가는 동안, 기무혁은 황숙수에게 연락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황숙수가 경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이런 시간에 연락하면 뭔가 사고가 터졌거나…….] “괜찮은 건수가 생겼거나 둘 중 하나지. 장물이 좀 생겼는데 처리해 줄 수 있지?” [먹으면 탈 나는 물건은 아니고?] 기무혁이 밀수품을 입수한 경로와 내용물을 알려주자 황숙수가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없겠네. 주소 보낼 테니까 그 앞으로 갖다 놔. 처리하고 다시 연락할 테니까.] “오케이. 가져가는 트럭도 함께 처리 부탁할게.” 그 능숙한 일처리에 옆에서 통화를 듣던 한재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황숙수가 알려준 주소 앞에 트럭을 갖다 놓은 후. 차에서 내린 한재찬이 기무혁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재찬은 떼먹힌 보수를 몇 배로 받아냈고. 기무혁은 청랑 사무소의 첫 번째 의뢰를 완벽하게 성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짭짤한 부수입까지 챙겼다. 깔끔하고 훈훈한 마무리. 이제 두 사람이 헤어질 시간이었다. “제가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제 명함입니다. 나중에 운전기사라도 필요하면 연락 주십시오.” 한재찬이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말과 행동이었다. 기무혁은 그걸 받아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한마디 했다. “……돈 적당히 벌면 낭인 일 때려치세요. 아무리 봐도 안 어울리니까.” 기무혁이 본 한재찬은 낭인으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공 실력이나 한쪽 다리를 저는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독기가 부족했다. 자기를 배신한 인간에게 칼침 한번 놓지 않고 돈만 받고 그냥 돌아온 인간이었으니까. ‘그런 호구 같은 성격으론 몇 년 못가서 골병들어 은퇴하거나 객사할 거야.’ 기무혁이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지만, 낭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재찬은 기분 나빠하지 않고 흐리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 더 벌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한재찬을 잠시 바라보던 기무혁도 이내 몸을 돌렸다. ‘돌아가면 무림맹이랑 밀수 건으로 얘기를 좀 해봐야겠네.’ 마음만 먹는다면 기무혁 혼자서 앞으로 들어올 훨씬 더 많은 밀수품을 꿀꺽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부수입이라 챙겼을 뿐, 그 이상의 욕심은 없었다. 기무혁이 머릿속으로 항구를 통해서 들어 올 대량의 밀수품과 그 배후 조직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할 때였다. “……저, 혹시 괜찮으시면.” 등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기무혁이 천천히 돌아섰다. 한재찬이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어떤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감사의 의미로…… 제가 술 한잔 사도 되겠습니까?” 회귀한 후에 기무혁은 가급적이면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좋죠. 안 그래도 쏘주 생각이 좀 났는데.” 단지 상대의 눈빛이 간절해서만은 아니었다. 낭인으로 활동하던 시절. 일이 끝나면 항상 동료들과 함께 기울이던 술잔이 문득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 * * 술이 몇 잔 들어가자 한재찬은 믿기 힘들 정도로 수다쟁이가 되었다. “저요, 어릴 땐 공부머리가 좋았습니다. 학원 한 번 가본 적 없었는데 중학교 때 반에서 3등을 했어요. 홀어머니에 쥐뿔도 없는 가난한 집이었는데…… 죽어라 공부하니 성적이 점점 오르더라고요.” 술에 취해 얼굴이 붉어진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열심히 공부해서 최상위권 성적이 나왔던 것. 억울한 사람들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 그리고 인생이 꼬여서 하급 낭인이 되기까지. “……그러다 딱 한 번 실수했습니다. 학창시절 내내 저를 괴롭히던 놈이 있었거든요. 도저히 못 참겠어서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근데 넘어지면서 하필 척추뼈가 골절되고…… 흐흐흐. 그때부터 제 인생이 X같이 꼬이기 시작한 겁니다.” 술자리에서 낭인들의 온갖 사연을 수없이 들어본 기무혁이었다. 때문에 그는 어설프게 위로하거나 공감하는 대신 농담으로 받아쳤다. “저한테 휘두를 때 보니까 주먹이 매섭긴 하더라고요.” “푸흐흐……. 하여간 덕분에 대학도 못 갔는데 어머니까지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겠더라고요.” 한재찬은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었고, 결국 뒷세계 무림에까지 몸을 담게 되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무공 한 자락 익히지 못한 그였다. 튼튼한 몸과 어설픈 싸움실력만 믿고 버티기엔 결코 만만치 않은 세계였다. “그러다 일하면서 알게 된 낭인 형님이 알려주더라고요. 몸에 인공단전을 달아서 내공만 쓸 수 있게 되면, 너도 제대로 된 무인 취급을 받을 거라고요.” “그 새끼, 브로커였죠?” 킥킥킥 웃은 한재찬이 절뚝이게 된 다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 결과가 이겁니다. 병신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쥐콩만 한 내공이라도 생겼으니까 다행이죠. 덕분에 몇 번 죽다가 살아나기도 했고.” 자신의 이야기를 실컷 쏟아낸 한재찬은 한결 후련해진 표정이었다. 그러나 눈에 담긴 알 수 없는 간절함은 여전했다. 어느 순간, 기무혁은 어쩐지 그 간절함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바로 삶을 바꾸고 싶은 사람의 간절함이었다. 물끄러미 한재찬의 얼굴을 바라보던 기무혁이 물었다. “한재찬 씨.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있죠?” 정곡을 찔린 것처럼 움찔한 한재찬이 시선을 피하며 술잔을 비웠다. 기무혁이 빈 잔을 채워주자 그가 술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넋두리나 좀 하고 싶었나 봅니다. 염치없게 뭘 바라고 술 마시자고 한 건 아닙니다. 그냥 저보다 훨씬 어린데…….” “참나,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대충 묶은 말총머리에 거뭇거뭇한 수염 때문에 그렇지, 한재찬도 이십 대 중반밖에 되지 않은 나이였다. 고개를 든 그가 부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어쨌든 저랑은 전혀 다르잖습니까. 무공이 그렇게 강한데, 그 무공으로 정의 같은 걸 실현한다는 게 대단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돈밖에 모르는 비겁한 인간으로 살았거든요.” “대단할 것 없어요. 지금의 저한테는 쉬운 일이니까.” “……예?” 멍한 얼굴로 묻는 한재찬에게, 기무혁은 정말로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저는 무공도 강하고 돈도 많아요. 그러니까 비겁해질 이유가 없고, 남을 도울 만큼 여유도 있는 거죠. 돈 많은 부자의 자선활동 같은 거라고 할까.” 겸손도 오만도 아니었다. 기무혁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차분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반대로 약하고 가난하면 그 쉬운 일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죠. 그러니 함부로 저 따라 하지 마세요.” “……하지 말라고요?” 묘하게 분해 보이는 듯한 한재찬에게 기무혁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 같은 어설픈 낭인에게 차갑게 경고했다. “괜히 어쭙잖게 정의 찾지 말아요. 불의를 봐도 꾹 참고, 위험할 것 같으면 쳐다도 보지 마세요. 인생 X같이 꼬이게 한 실수를 반복하기 싫으면.” 그것이 하류 낭인이 뒷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니까. 한재찬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저 같은 건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까?” “그게 싫으면 강해지든가.” “말이 쉽지! 누군 강해지기 싫어서 이 꼴인 줄 알아?” 술기운에 격앙된 한재찬이 자기도 모르게 반말을 쓰자, 기무혁이 차갑게 웃으며 소주잔을 비웠다. “강해지려고 노력은 해봤고?” “무공 한 자락 배우겠다고 돈 들고 찾아갔던 게 몇 번인데! 하지만 다 사기꾼 새끼들이었어. 약이나 팔아먹으려는…….” “그럼 제대로 된 기회를 주면 잡을 의지는 있다는 뜻인가?” “당연히…… 뭐?” 상대의 질문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한재찬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갑게 자신을 바라보던 기무혁이 씨익 웃고 있었다. “왜? 이제 와서 자신 없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로…… 요?” “한 형. 그냥 서로 반말하자. 나도 그게 더 편해.” 기무혁이라도 삼류 무인을 고수로 만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낭인’으로 한정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쓸 만하게 만들어 줄 자신이 있었다. ‘삶을 바꾸고 싶다는데 기회 정도는 줘야지.’ 자신이 가진 경험과 노하우만 해도 책 한권 분량은 나올 것이다. “내일부터 우리 사무실로 나와. 심심풀이 삼아 몇 수 가르쳐 줄게.” “어? 어……. 어어어?” 한재찬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가 믿기지 않는 듯 바보같은 소리를 내며 눈만 깜빡였다. 115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음 날. 한재찬은 잠을 거의 못 자고 밤새 뒤척이다 꼭두새벽에 눈을 떴다. -내일부터 우리 사무실로 나와. 심심풀이 삼아 몇 수 가르쳐 줄게. 기무혁의 그 말이, 술자리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후에도 귓가에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꿈…… 아니었지? 아니었겠지?” 자기가 밤새 같은 말을 수백 번이나 중얼거렸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잔뜩 취해서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도 기억이 흐릿했으니, 어쩌면 전부 다 자신의 망상일지도 몰랐다. “잘 들어갔냐고 연락해볼까? 아니야, 지금 새벽 5시인데…….” 초조한 얼굴로 휴대폰을 바라보던 한재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릴 겸 몽롱한 상태로 화장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가능한 한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나가기 전에 억지로 빵이라도 씹어 볼까 했지만, 입맛이 없어서 내려놓았다. “……일단 가보자.” 한재찬이 청랑 사무소가 있는 건물 앞에 도착한 것은 아침 7시였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건물의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한재찬은 3층의 간판을 올려다보며 심호흡을 했다. ‘너무 기대하지 말자. 술자리에서 한 말을 전부 믿는 멍청이가 어딨어?’ 기무혁도 술에 취해서 한 말이었을 테니, 기억이 안 나거나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눈치 없게 굴어서 은인을 귀찮게 하는 것은 아닐까. 역시 지금이라도 없었던 셈치고 돌아가는 편이……. “어? 어제 무혁이 찾아오셨던 분 아닌가?” 기무혁을 닮은 중년의 남자가 장바구니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 옆에서 함께 걸어오는 중년 여성도 보였다. 딱 봐도 기무혁의 부모님이었기에 한재찬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한재찬이라고 합니다. 어제 아드님에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 인사라도 드리려고…….” 기무혁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다고 오전 7시부터 찾아온 것은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무인들이야 다 희한한 사람들이니 그러려니 했다. 박지연이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쩌죠? 무혁이는 아침 수련하고 이따가 9시는 넘어야 올 텐데…….” “아, 괜찮습니다. 제가 너무 일찍 온 건데요. 근처 공원에서 기다리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들어오세요. 여기 1층이 우리가 하는 카페에요.” “네? 괜히 폐를 끼치는 게 아닌지…….” “괜찮아요, 괜찮아.” 친화력 만렙인 기찬호가 한재찬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한재찬은 카페 나루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테이블에 앉힌 기찬호가 물었다. “재찬 씨. 아침은 먹었어요?” “예? 아니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요.” “저 진짜 괜찮습니다!” 그러나 앞치마를 두른 박지연이 이미 샌드위치를 만들기 시작했고, 기찬호도 커피머신으로 향했다. 잠시 후, 한재찬은 그날 카페 나루에서 만든 첫 번째 샌드위치와 커피를 맛볼 수 있었다. “맛있……네요.” 얼떨결에 받아서 맛 본 샌드위치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커피는 좀 신기한 맛이었지만, 한재찬은 그걸 맛없다고 할 만큼 눈치가 없지 않았다. 다만 기찬호의 눈치가 기가 막히게 빠를 뿐이었다. “별로예요? 커피는 무인들을 위해서 단백질 파우더랑 강황 가루를 좀 넣어봤는데.” “음……. 개성 있네요.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저는 좋은 것 같습니다.” “한 잔만 더 마셔 볼래요? 이거 배합을 조금만 바꾸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끄악!” “내가 손님한테 새로운 메뉴 실험하지 말랬지?” 남편의 등짝에 스매싱을 날린 박지연이 평범한 아메리카노를 한재찬에게 갖다 주었다. ‘남자 사장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이게 훨씬 맛있네.’ 게다가 금슬이 좋은 부부를 지켜보고 있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커피를 다 마신 한재찬은 직접 그릇을 정리해 주방으로 가져갔다. “바쁘신 것 같은데 좀 도와드릴까요?” “아 괜찮아요. 무혁이 오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편하게 계세요.” “저도 가만히 기다리기엔 지루해서요. 설거지랑 짐 정리만 좀 해드릴게요.” 그러곤 설거지를 하고 척척 짐을 정리하는데, 그 능숙한 솜씨에 기찬호와 박지연의 눈이 커졌다. 둘 다 회사생활만 오래 해봤지 자영업은 처음이라 서투른 점이 있었는데, 한재찬이 스윽 보고는 그런 부분을 지적해주었다. “컵이랑 접시는 이쪽으로 두는 게 동선이 좀 더 편하실걸요? 테이블 냉장고도 계속 이렇게 사용하면 불편할 거예요. 재료 박스는 배치를 살짝 바꾸면 좋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잘 알아요?” “고등학생 때 카페 알바를 했거든요. 그것 말고도 지금까지 안 해 본 알바가 없습니다.” 한재찬은 기무혁을 기다리며 두 사람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카페 나루는 현재 가오픈 상태라고 했다. 일주일 정도 더 준비를 하고 정식으로 오픈할 계획이고, 처음에는 둘이서 시작해보고 필요하면 아르바이트생을 채용할 거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 재찬 씨 몇 살이에요?” “올해 스물여섯입니다.” “난 처음부터 어릴 줄 알았어. 수염이랑 머리만 정리하면 무혁이랑 친구라고 해도 믿겠는데?” “하하, 그 정도는 아니고요…….” 한재찬이 민망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 이런 모습이 낭인이 아닌 인간 한재찬에 가까웠다. 기무혁을 기다리는 동안 한재찬은 카페 나루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 특이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저씨 아줌마! 좋은 아침이에요~!” 아침 8시쯤 되자 징 박힌 가죽재킷을 입은 김복자가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카페로 들어섰다. 그 화려한 옷차림에 한재찬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는데, 기찬호와 박지연은 익숙하다는 듯 맞아주었다. “복자 왔니? 아침 차려줄 테니까 거기 앉아있어.” “오늘 메뉴는 뭐예요?” “너 좋아하는 블루베리잼 샌드위치랑 달달한 바닐라 라떼.” “아싸아!” 2층으로 출근하기 전 카페에 들른 김복자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 뒤늦게 한재찬을 발견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옆에 아저씨는 누구에요? 설마 알바생?” “한재찬 씨라고. 어제 무혁이네 사무실에 왔던 분이야. 일이 잘 해결돼서 인사하러 오셨대.” 그 순간 김복자와 눈이 마주친 한재찬이 흠칫했다. ‘바, 방금 눈동자가…….’ 잠깐 새파랗게 빛났던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한재찬이 잘못 본 거겠거니 하고 있는데, 김복자가 조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낭인인가 봐요? 인공단전 달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특유의 불량식품 같은 기운이 느껴져서. 기무혁 손님이라고요?” 김복자는 기본적으로 뒷세계의 낭인들을 믿지 않았다.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질 나쁜 인간들은 돈만 주면 살인청부업자가 되는 경우도 흔했으니까. 카페 나루에 낭인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기무혁의 손님이라는 말에 꾹 참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만으로 한재찬을 주눅 들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고수다…….’ 빤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시야가 어지러워지는 느낌이었다. 한재찬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저기요.” “네, 네?” 기찬호와 박지연이 잠깐 안 보는 사이, 김복자가 검지와 중지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리켰다가 한재찬을 가리켰다. 대충 ‘내가 당신 지켜보고 있어’ 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은 제스처였다. 꿀꺽. 애초에 나쁜 짓할 생각도 없었지만, 한재찬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안심했는지 김복자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출근할게요. 2층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제가 드린 부적 쓰는 법 알죠?” “하여간 우리 복자는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연남동 한복판에서 일 생길 게 뭐가 있어?” 마지막으로 한 번 스윽 자신을 보고 가는 시선에, 한재찬이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휴우…….” 그리고 김복자 때문에 흐른 식은땀이 겨우 말라갈 때, 최건이 카페에 찾아왔다. “선생님 오셨어요?” “맹에 가기 전에 잠깐 들렀네. 음? 못 보던 친구가 하나 있군.” 최건은 별다른 말도 위협도 하지 않았지만, 그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김복자보다 몇 배는 무서웠다. ‘이 사람한테는 잘못 걸리면 죽는다!’ 낭인의 생존본능이 발동한 한재찬이 필사적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한재찬이라고 합니다. 기무혁 무인에게 큰 도움을 받아 감사 인사를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카페 일을 조금 도와드리고 있었습니다.” “호오. 무혁이 친구였나?” 최건의 칼날 같은 눈매가 그 순간 부드럽게 휘었다. 그는 한재찬의 몸에 난 상처와 절룩이는 다리를 살폈다. 그리고 대화를 조금 나눈 후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유한 성정을 거친 외모로 감추고 있구나. 칼날 위의 삶이 고달프면 종종 차 한잔하러 오너라.” “……예, 감사합니다.” 그 역시 한재찬이 낭인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눈치챈 듯했다. 최건은 세 사람과 한동안 담소를 나눈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혁이 오면 안부나 전해주게. 그리고 이건 두 사람이 달여서 먹고.” 최건은 몸에 좋은 약재라면서 보자기로 포장한 상자를 놓고 갔다. 특이한 사람들의 방문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송월문에서 인삼생강 커피를 스무 잔이나?” “저희 장로님들이 아저씨가 타주신 인삼생강 커피를 엄청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선배님들 것까지 사가려고요.” “정말로? 서비스로 생강가루 팍팍 추가해 줄게!” “아, 제건 평범한 아메리카노로…….” 송월문의 오정민이 출근길에 들렀다며 커피를 스무 잔이나 포장해갔고. “연하 씨. 부담스럽게 뭘 자꾸 이런 걸 갖다 줘요?” “저번에 보니까 냅킨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어차피 저희 거 주문하는 김에 같이 주문했어요.” 창천검문의 부연하가 냅킨 박스를 몇 박스나 놓고 갔다. 짐을 옮기면서 다시 보니 카페 냉장고 옆면에 창천검문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야?’ 아직 정식으로 오픈도 하지 않은 카페에 찾아오는 사람들. 그들은 한재찬도 알 정도로 유명한 중견문파와 팔대문파, 무림맹과 관련된 이들이었다. 정파의 인사들이 비밀모임이라도 하는 장소인 걸까? 어느 순간부터 한재찬은 앞치마를 벗지 않았다. 기무혁이 오기 전까지 가게 일이나 도울 겸 머리도 단정하게 다시 묶고, 지저분한 수염도 화장실에 가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왔다. 그러고 나니 누가 봐도 카페의 알바생처럼 보였다. 게다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척척 알아서 필요한 일을 했다. 기찬호와 박지연이 그를 바라보는 얼굴은 점점 감탄을 넘어 감동으로 물들었다. “저기, 재찬 씨…….” “혹시 아르바이트 해볼 생각은 없어요?” “예? 하하, 저처럼 험악한 사람이 일하면 카페 망합니다.” 한재찬은 두 사람의 제안을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웃어 넘겼다. 그리고 아침 10시가 넘은 시각. 전날 마신 술을 땀으로 빼고 온 기무혁은 평소보다 늦게 도착했다. 자기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도 못 한 그가 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선 순간. “저 왔어요…… 어?” “어서 오세요!” 기무혁은 앞치마를 두르고 행주로 식탁을 닦고 있는 한재찬과 눈이 마주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형 맞지? 여기서 뭐해?” “아, 그게…….” 한재찬이 대답하기도 전에 기찬호와 박지연이 매서운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 형? 무혁이 너 여섯 살이나 많은 형님한테 말투가 그게 뭐야?” “예? 저희 어제 편하게 말 놓기로 했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평소 같으면 아들이 하는 말부터 들어봤을 박지연도 팔짱을 끼고 기무혁을 째려봤다. “재찬이 형도 아니고 한 형? 아무리 편한 사이여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는 거야.” “내 말이 그 말이다. 너 무공 좀 세다고 그러면 돼? 안 돼? 아빠가 평소에 그렇게 가르쳤어?” 한재찬의 양옆에 선 부모님이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기무혁은 억울하고 황당한 심정이 되었다. “우리 부모님한테 뇌물이라도 줬어?” 한재찬은 앞치마를 두른 채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116화. 이왕 될 거면 기찬호와 박지연이 최근 들어 형님들과 맞먹고 다니는 아들에게 장유유서에 대해 한바탕 예절교육을 시킨 후. “도대체 뭘 했길래 우리 부모님이 한 형을 저렇게 끼고도는 거야?” 폭풍같은 잔소리에 귀가 얼얼해진 기무혁이 한재찬에게 투덜거렸다. 두 사람은 잠시 바깥으로 나와서 대화를 나눴다. “그냥 일을 좀 도와드렸을 뿐인데……” 절정고수가 부모님에게 혼나는 진귀한 구경거리를 실시간으로 지켜본 한재찬이 웃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 “가족끼리 사이가 좋아 보여서 부럽더라.” “형 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 했고, 형제도 없다고 했지? 결혼은?” “갑자기 웬 호구조사? 그리고 어떤 눈 삔 여자가 나 같은 놈이랑 살려고 하겠어.” 한재찬이 자조적으로 말했지만, 기무혁은 수염을 정리하고 머리도 깔끔하게 묶은 그를 처음에는 못 알아볼 뻔했다. ‘지금처럼 하고 다니면 눈 삘 여자가 꽤 많을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거친 분위기를 풍기는 장발의 미남이 카페 안을 돌아다닐 때마다, 가오픈 기간에 커피를 마시러 온 손님들이 수군거렸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의 바뀐 모습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수염은 낭인들 사이에서 센 척해 보이려고 길렀던 거야?” “……처음엔 그런 의도였는데, 나중엔 정리하기 귀찮기도 해서.” 멋쩍은 듯 깨끗해진 턱을 긁적이는 한재찬의 대답에, 기무혁이 작게 혀를 차고 말했다. “앞으로는 지금처럼 정리하고 다녀. 옷도 가능한 한 깔끔하게 입고. 앞으로 여기 자주 오게 될 텐데, 지저분한 행색이면 부모님 카페에도 민폐잖아?” “그, 그 말은…….” 기무혁의 말에 한재찬의 눈이 커졌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찾아와서 몇 시간을 기다렸던 이유. 전날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던 기무혁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을 가르쳐 주기로 했는데, 한두 번 오는 걸로 되겠어? 틈날 때마다 와야 실력이 늘지.” 한재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가 기무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고맙다! 이 은혜 잊지 않을게! 필요한 일 있으면 뭐라도 시켜줘. 아니, 내가 매일 와서 부모님 카페 일 도와드릴게!” “됐어. 뭘 그렇게까지…….” 기무혁은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저 멀리서 느껴지는 익숙하고 따가운 시선에 흠칫했다. 눈동자만 슬쩍 돌려서 곁눈질로 바라보자 기찬호와 박지연이 두 손을 입에 대고 입모양만으로 외치는 것이 보였다. ‘사람의 호의를 거절하지 마, 이 녀석아!’ ‘일단 알겠다고 해! 고맙다고 말해!’ 도대체 한재찬이 일을 얼마나 잘 했던 건지, 두 사람의 모습이 사뭇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그 탓에 기무혁은 옆으로 저으려던 고개의 방향을 급하게 바꿔서 위아래로 끄덕여야 했다. “……도와주면 나야 고맙지. 그럼 부탁 좀 해도 돼?” “당연하지! 계속 받기만 해서 미안했는데, 앞으로 카페 일은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한재찬은 자연스럽게 카페 나루의 직원이 되었다. 월급을 두고 잠시 실랑이가 있었지만-사장님 부부는 어떻게든 더 주려고 했고, 직원은 어떻게든 안 받으려 했다-원만한 협의 끝에 모두가 만족할 수 있었다. “이제 훈련장으로 갈까?” “드디어……!” 기무혁은 한재찬과 함께 건물 지하에 있는 자신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자, 여기가 내 개인 훈련장이야.” “와…….” 수련장 내부 시설을 둘러본 한재찬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통적인 훈련 도구들과 샌드백, 목인장부터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최신식 트레이닝 기구들까지. 벽과 천장은 완벽하게 방음과 방검설계가 돼 있었고, 한쪽에는 전용회복시설과 신체의 다양한 수치를 측정할 수 있는 촬영장비, 모니터링 장비도 갖춰져 있었다. 대문파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종합훈련시설에 한재찬의 눈이 크게 떠졌다. “훈련장에 대체 얼마나 돈을 들인 거야?” “돈을 벌어도 딱히 쓸 곳이 없거든. 가장 많이 투자한 데가 바로 여기야.” 기무혁이 흐뭇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전생의 그는 한재찬보다 더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낭인으로 활동했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 운이 더해진 덕분에 계속 살아남으며 강해졌지만, 부상에 대한 완전한 치료나 회복 없이 함부로 몸을 굴린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결국 마흔이 넘으니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 더 이상 회복되질 않았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무혁은 돈을 벌자마자 자신의 훈련장을 최고의 시설로 갖춰놓았다. 신강헌도 한번 와서 보고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이런 시설을 처음 본 한재찬은 기대감에 부풀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에서 훈련하면 나도…….” “금방 고수가 될 것 같지? 꿈 깨. 하수는 죽어라 검부터 휘두르는 게 먼저야.” 기무혁이 훈련장 중앙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가검을 하나 뽑아서 한재찬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한번 덤벼 봐. 실력부터 보게.” “후우…….” 검을 든 한재찬은 심호흡을 깊게 한 후, 곧바로 기무혁에게 달려들었다. 절룩이는 왼쪽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줘 바닥을 박찼다. “하압!” 그는 주제넘게 경고 따위는 하지 않았다. 상대는 자신보다 아득한 경지의 고수. 최단거리를 계산해 가장 빠르게 심장을 노렸다. “처음부터 전력인 건 좋네.” 몸을 살짝 틀어서 첫 공격을 피한 기무혁의 눈이 예리하게 상대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휘익! 후웅-! 촤아악! 한재찬은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두르고, 찌르고, 벴다. 펼칠 줄 아는 공격은 모조리 쏟아냈다. 알고 보니 사기꾼이었던 강사에게 몇백만 원이나 주고 배운 초식, 스스로 터득한 공격법, 너튜브를 보고 혼자서 연습한 허초까지. ‘후회하지 않게 최선을 다하자!’ 한재찬은 이것이 평생에 다시없을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이를 악물고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렇게 심장이 터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을 때. “여기까지.” 제자리에서 상체만 틀어 그 모든 공격을 피하던 기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후우우…….” 한재찬은 호흡을 힘겹게 몰아쉬며 기무혁의 평가를 기다렸다.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제대로 한 걸까? 기무혁 눈에는 답도 없는 수준일지도 모른다. 다리만 절지 않았어도 조금 더 나았을 텐데……. “괜찮네.” 그러나 기무혁의 평가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나아. 검을 꾸준히 수련한 것 같고, 몸 관리도 나쁘지 않게 했네.” “……그럼 합격이야?” “뭔 합격? 불합격도 있을 줄 알았어?” 혼자서 조마조마했던 한재찬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직 기무혁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딱 하류 낭인 평균. 무인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고 일반인보다는 강하지. 라이센스로 치면 삼류 이하.” “…….” 밝아지려던 한재찬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기무혁은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 현실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왼쪽 다리. 실전에서도 그렇게 검을 휘두르다간 몇 년 못 가서 다리를 아예 못 쓰게 돼. 절름발이가 아니라 앉은뱅이가 될 수도 있다고.” 기무혁은 전생에 몇 번인가 그와 함께 임무를 수행해본 적이 있었으니 실력이야 대충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보다 1년쯤 뒤에는 그가 다리를 더 심하게 절게 된다는 것도 말이다. “……이건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야.” 다리는 인공단전 시술의 부작용이었다. 병원에도 여러 곳 가봤지만,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물론 기무혁도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억지로 균형을 맞추려고 하지 마.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균형을 가지고 있어. 한 형은 그게 훨씬 심하다고 보면 돼. 그러니 거기 맞춰서 움직이는 법을 알아야 해.” “그게 말은 쉽지만…….” “보여줄 테니까 잘 봐.” 기무혁은 설명으로만 끝내지 않고 자신의 왼쪽 다리에 점혈을 했다. 푹. 푹. 푹. 푹. 혈도를 눌러 다리를 불편하게 만들어, 한재찬과 비슷한 상태로 만들었다. 낭인들 중에는 애꾸, 절름발이, 외팔이가 흔했다. 기무혁은 그중에서도 오랫동안 살아남았던 이들이 싸우던 방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귀중한 노하우였다. 절름발이가 된 기무혁이 한재찬에게 손을 까닥였다. “공격해 봐. 그리고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보라고.” 한재찬은 잠시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무혁에게 달려들었다. “하아압-!”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 흠뻑 땀을 흘린 후. 완전히 탈진한 한재찬이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하아, 하아, 꼼짝도 못 하겠네…….”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할 정도로 힘든데도, 자꾸만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의 머릿속에는 기무혁이 자신처럼 움직이던 방식이, 그걸 따라해 보니 훨씬 편안했던 감각들이 생생했다. “갑자기 눈을 뜬 장님이 이런 기분일까……?” 혼잣말을 중얼거린 한재찬이 고개만 들어 기무혁을 바라봤다. “내일 또 와도 돼?” 기무혁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번호 알려줄 테니까, 나 없으면 혼자 와서 수련해. 녹화해 둔 영상도 가져가서 보고. 갈 때 깨끗하게 청소하고 가는 거 잊지 마.”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청소는 끝내주게 잘하거든!” 한재찬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 * 한재찬은 한동안은 아예 다른 일을 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기무혁의 훈련장에서 가까운 곳에 월세를 구해 이사했다. 돈은 지난번 밀수 건으로 몇 달은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벌었고, 새로운 직장도 생겼으니까. 무엇보다 기무혁에게 무공을 배우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재찬 씨. 너무 일찍 오지 말라니까…….” “몸이 근질근질거려서요.” 한재찬은 사장님 부부보다 일찍 출근해서 카페 문을 열었다. 가볍게 청소부터 하고, 재료들을 정리한 후, 필요한 일을 미리미리 찾아서 했다. 그의 노력과 깔끔해진 외형, 밝아진 인상 덕분인지 가오픈 기간인데도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이 제법 늘었다. “봤어? 여기 장발 알바생…….” “미쳤다. 방금 어색하게 웃는 거 봤지?” “난 예전에 거친 모습이 더 좋았는데.” 카페 일이 여유로운 시간에는 지하로 내려가서 검을 휘둘렀다. ‘더 강해지고 싶다.’ 기무혁이 자세를 교정해주고, 몇 가지 지적해주는 걸 고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느낄 정도로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하루는 너무 감탄해서 기무혁에게 말했다. “무혁이 너, 나중에 학원 열어라. 일타강사라고 불리는 사람들보다 훨씬 잘 가르쳐.” “내가? 난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게 훨씬 재밌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무혁도 한재찬을 가르치며 느끼는 즐거움이 쏠쏠했다. ‘생각보다 재능이 나쁘지 않아.’ 무림인 부적합 체질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뿐 신체적인 조건이나 센스는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같은 처지였던 기무혁으로선 전자도 충분히 극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한 형. 낭인 일은 계속할 거야?” 한재찬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인으로 살고 싶어.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고등학생 때 저지른 실수, 그리고 낭인으로 일하다가 생긴 자잘한 범죄 이력 몇 가지가 발목을 잡았다. 때문에 한재찬은 어릴 적 꿈이었던 변호사가 되는 것은 포기했다. 인공단전 불법시술자이기 때문에 정식 무림인 라이센스를 취득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새로운 꿈이 생겼다. 무인으로서 강해지는 것. 그리고……. ‘난 너처럼 되고 싶거든.’ 그는 기무혁을 빤히 바라볼 뿐 속마음을 말하지는 않았다. 기무혁이 한재찬에게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한 것은 그때였다. “이왕 낭인이 될 거면 업계 최고를 목표로 하는 건 어때?” “……최고?” “낭걸 말이야.” 낭걸(浪傑). 프리랜서 낭인들 중에서도 극소수의 낭인들만이 받을 수 있는 칭호. 단순히 강하다고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독고귀 기무혁이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수십 차례 해결하고 살아 돌아왔을 때, 뒷세계의 낭인들은 그를 낭걸로 인정했다. ‘지난 수십 년, 앞으로 최소 이십 년간 낭왕은 존재하지 않으니 낭걸만 되어도 충분해.’ 낭왕(浪王). 낭걸들을 포함해 뒷세계의 낭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영향력과 힘을 가진 유일무이한 존재. 전생의 몇몇 동료들이 한때 기무혁을 낭왕으로 만들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정작 그는 감투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낭걸만 돼도 업계에 제법 영향을 끼칠 수 있어.’ 만약 기무혁이 가진 노하우와 미래의 지식을 활용한다면……. 한재찬을 낭걸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훗날 천마신교를 견제하고 막는 데에도 분명 도움이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다른 아르바이트생을 구해야겠지만.’ 부모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업계 최고 수준의 낭인을 카페 직원으로 두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한재찬이 여기서 계속 일할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한재찬의 숨은 각오까지는 알지 못하는 기무혁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낭걸이라……. 멋지네. 좋아. 둘 다 목표로 삼아볼게.” “둘 다?” “그런 게 있어.” 한재찬은 말 대신 결과로 보여주겠다며 씨익 웃었다. 낭걸이 되든 뭐가 됐든, 그는 평생 기무혁의 곁에서 은혜를 갚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117화. 자잘한 것들보다는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된 한재찬은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보냈다. 변호사를 목표로 공부했던 어린 시절 이후 무언가에 이렇게 열심이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낭걸을 목표로 더 열심히 수련하자. 그리고…… 카페 나루를 연남동 최고의 핫플로 만든다!’ 후자는 그 누구도 부탁하지 않았지만, 혼자만의 목표로 삼았다. 사장님 부부보다 야망이 큰 직원의 탄생이었다. 유능하고 성실한 경력직 직원 덕분에 카페 나루는 제대로 된 카페의 모습을 갖춰갔다. 모든 동선이 최적화되었고, 시그니처 메뉴도 결정했다. 남은 것은 2층 <럭키래빗 술법뷰티샵>과 맞춰서 정식 오픈일을 잡는 것 정도. “저어, 사장님.” 카페 영업이 거의 끝난 시간, 한재찬이 기찬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일은 조금만 늦게 출근해도 될까요? 전에 살던 집에서 가져올 물건들이 좀 남아 있어서요.” “재찬 씨. 내일은 휴가 줄 테니까 그냥 출근하지 마요.” “네, 그럼 열 시까지 출근하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도 하루 문 닫고 좀 쉬려고 그래!” 한재찬은 그럼 다음 날 혼자서라도 가게를 열겠다는 말을 꺼냈다가, 모레 아침까지 카페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라며 쫓겨났다. “하루라도 쉬면 손님 떨어지는데…….” 아쉬웠지만 사장님이 싫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한재찬은 이참에 남은 이삿짐을 가져오기 위해 전에 살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 앞에서 기웃거리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재찬아! 잘 지냈어?” “너…….” 반색하며 돌아보는 얼굴에 시퍼런 멍자국이 가득했다. 바로 한재찬의 돈을 떼먹었던 친구, 삼악회의 이재익이었다. 한재찬이 이재익에게 다가가 멱살을 움켜쥐었다. “꺼져. 너랑 할 말 없으니까.” “내, 내가 전부 다 설명할게! 이 얼굴 좀 봐봐. 웬 미친 새끼한테 걸려서 나 진짜 죽을 뻔했다니까?” 실제로 이재익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그중 절반은 기무혁에게 얻어맞은 흔적이었고, 나머지는 삼악회주에게 맞아서 생긴 것이었다. “우선 이것부터 받아, 재찬아. 정산이 너무 늦었지? 내가 진짜 미안하다…….” 두툼한 봉투를 내밀며 이재익이 사정사정했다. 그 안에는 한재찬이 원래 보수로 받았어야 할 돈이 들어 있었다. 봉투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한재찬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멱살을 풀어주었다. “돈 주려고 찾아왔을 리는 없고, 무슨 일인데?”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 좀 하자. 이번엔 진짜 큰 건수야.” 두 사람이 한재찬의 집으로 들어갔고, 이재익은 곧바로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지난번에 했던 일 있지? 그거보다 훨씬 더 큰 건이야. 이번 한탕만 제대로 하면 너 앞으로 1년은 돈 걱정 안 해도 돼. 선금만 해도 지난번의 두 배야!” 이재익이 아는 한재찬은 돈만 주면 얼굴에 침을 뱉어도 참고 일하는 호구였다. ‘돈 많이 준다는데 네가 눈깔이 안 돌아가고 배겨?’ 분명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받아들일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한재찬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게 큰 건수가 왜 나한테까지 와? 돈이 썩어나나?” “아, 그게…….” 당황한 이재익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현재 삼악회는 기무혁 때문에 조직원들 대부분이 뼈가 한 군데 이상 부러져 제대로 일할 사람이 부족했다. 급하게 쓸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한 상황. 한재찬은 성실한 호구라서 일 맡기기도 편했고, 겁쟁이라서 밀수에 대한 정보를 함부로 흘릴 놈도 아니었다. ‘천애고아 새끼니 일이 다 끝나고 슥삭해도 상관없고…….’ 물론 그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이재익은 오히려 섭섭하다며 역정을 냈다. “왜기는! 내가 네 사정 몰라? 좋은 기회가 있으니까 친구한테 도움이 될까 해서 가장 먼저 달려왔더니!” “내가 보수 달라고 연락했을 땐 씹더니 이제 와서?” “흠흠. 일단 이것부터 받아. 선금 넉넉히 챙겨왔으니까.” “…….” 이재익이 찔러준 돈을 확인한 한재찬의 눈동자가 고민하는 것처럼 흔들렸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자식은 날 여전히 호구로 아는구나.’ 불과 며칠이지만, 기무혁을 만나면서 한재찬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새로운 삶의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돈만 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인간처럼은 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한재찬이 고민하는 척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무혁이가 밀수품 관련해서 조사 중이라고 했지. 정보를 캐내면 도움이 될지도 몰라.’ 최근 기무혁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조만간 무림맹과 함께 인천으로 들어오는 밀수조직을 일망타진할 계획이라고. 한재찬은 그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가 뜸을 들이자 애가 닳은 이재익이 한재찬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친구야. 도와줄 거지? 나 이번 한 번만 살려주라.” “이러면 곤란한데…….” 결국 한재찬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번에 들어오는 물건은 뭔데? 지난번이랑 같은 거야?” 일이 잘 풀렸다는 생각에 이재익이 술술 정보를 불었다. “저번이랑 같은 것도 있고, 진짜 돈 되는 것도 있어. 이번에 큰 물주가 판을 잡았거든.” “……누구?” “이건 꼭 너만 알고 있어.” 한재찬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재익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흑천회(黑天會)가 진행하는 건이야.” “……사파오패?” “흐흐. 내가 왜 대박이라고 했는지 알겠지?” 흑천회는 사파무림에서 가장 큰 다섯 개의 조직 중 하나였다. 정파의 팔대문파에 비견되는 세력으로, 팔대문파가 위축된 시기에 대규모 밀수를 진행하려는 것이었다. “혹시 알아? 흑천회 높은 분한테 잘 보이면 우리 팔자도 좀 필지?” “오오…….” 이재익이 헛바람을 불어넣었고, 한재찬은 알면서도 맞장구를 쳤다. ‘호구 새끼.’ ‘등신 같은 놈.’ 서로의 속내를 숨긴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마주 보며 웃었다. 볼일을 마친 이재익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고맙다, 친구야! 우리 이번에 한탕 크게 벌어서 나오자.” “그래. 조심해서 가라.” 이재익이 돌아간 후, 한재찬의 얼굴에서 거짓말처럼 미소가 사라졌다. 곧바로 휴대폰을 꺼낸 그가 기무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혁아. 이재익 그 새끼가 날 찾아왔는데……. 지금 내가 갈 테니까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 한재찬은 기무혁을 만나 이재익에게서 캐낸 정보를 전달했고. 예상대로 기무혁은 눈을 빛냈다. “흑천회가 끼어들었다고? 안 그래도 규모 때문에 사파오패 중 하나가 관련된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는데…….” 흑천회는 정사를 막론하고 무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팔대문파도 뒤엎은 전적이 있는 기무혁에게는 때려잡아야 할 세력 중 하나에 불과했다. 기무혁은 그 정보를 무림맹과 공유했고, 빠르게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한 형 덕분에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것 같아, 고마워.”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다. 혹시 내가 더 도울 건 없고?” “…….” 기무혁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한재찬을 바라봤다. 지금껏 한재찬이 낭인에 어울리지 않는 유순한 성격이라고만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낭인으로 만들려면 시간이 제법 걸리겠다고 여겼는데……. 그 짧은 순간의 판단으로 상대한테서 오히려 정보를 캐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쩌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지.’ 지금까지는 깊은 무기력과 절망이 그의 능력을 억누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기무혁은 한재찬에게 조금 더 중요한 역할을 맡겨보기로 결심했다. “한 형. 혹시 의뢰 받을 생각 있어?” “……의뢰?” 기무혁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적들 내부에 우리 쪽 사람을 심어두고 작전을 진행할 계획이었거든. 원래 나 혼자 하려고 했는데…… 마침 형한테 기회가 생겼네?” 흑천회의 하청인 삼악회. 그들은 항구에서 배를 타고 나가 바다에서 공급책과 접선한 뒤 밀수품을 건져올 계획이었다. 즉, 배에 탄 채 흑천회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의미였다. “이재익이랑 계약서를 쓴 건 아니지?” “계약서는 무슨. 그 자식이 지한테 불리한 걸 남길 리가 없지. 통화도 녹음될까 봐 직접 찾아와서 부탁한 거야.” “잘됐네. 그럼 이중 계약은 아니니까.” 하류 낭인들의 일이라는 게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기무혁이 나선 이상, 한재찬은 더 이상 하류 낭인으로 취급받지 않을 것이다. 기무혁은 무림맹에 연락해 서류 하나를 메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낭인은 자잘한 것들보다는 굵직한 건수 하나를 맡았을 때 명성이 오르는 법이거든. 특히 의뢰인이 누군지가 중요해.” 잠시 후, 기무혁은 프린트한 서류를 한재찬에게 내밀었다. 낭인과 의뢰인이 계약할 때 사용하는 정식 계약서였다. “이건…….” 계약서 자체도 처음이지만, 한재찬은 그보다 의뢰인 부분에 적힌 <무림맹>을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기무혁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무림맹도 필요할 때는 프리랜서 낭인들을 고용하거든.” 물론 무림맹과 계약할 수 있는 낭인은 실력과 명성을 갖춘 극소수였지만, 기무혁의 추천으로 그 부분은 생략했다. “대신 여기에 사인하면 그만한 능력을 보여줘야 해. 무슨 뜻인지 알지?” “내가……?” 물론 처음에는 기무혁이 도와줄 생각이었다. 애초에 혼자 임무에 보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무조건 강요할 생각도 아니었다. “작전은 최대한 조용히 진행하겠지만, 나중에 흑천회와 척을 지게 될 수도 있어. 부담스러우면 안 해도 돼.”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한재찬이 계약서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두려움으로 펜을 잡은 손이 떨려왔다. 불과 며칠 전의 자신이었다면, 겁에 질려 도망쳤을지도 몰랐다. 지금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래도 하고 싶어.” 낭인으로서 명성을 날린다는 건, 당연히 그만큼의 은원(恩怨)도 생긴다는 것이니까.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한재찬의 눈이 전에 없이 빛나고 있었다. * * * 밀수품이 들어오는 당일. 삼악회주는 인맥을 총동원해 끌어 모은 인원을 바라봤다. ‘이번에 제대로 못하면 끝이다.’ 웬 미친놈에게 창고까지 털린 이후, 삼악회는 그대로 망할 뻔했다. 흑천회 중견간부와의 인맥을 쌓아놓지 않았다면, 그래서 이번 건수에 한 다리 걸치지 못했다면 그는 빚쟁이들에게 끌려가 물고기 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그만큼 보안이 철저해야 하는데……. “……한재찬? 옆에 있는 건 누구야?” “제 친구인데 데려왔습니다. 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녀석입니다.” “시켜만 주시면 뭐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뻔뻔한 얼굴로 대답하는 한재찬과 그 옆에 서 있는 처음 보는 놈 때문에, 삼악회주는 열불이 치솟았다. 그는 한재찬을 불러온 이재익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쳤다. “이런 씨발……. 내가 보안 철저히 하라고 했잖아!” “죄, 죄송합니다!” 요즘 삼악회주의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이 된 이재익이 한재찬을 노려봤다. 하류 낭인들은 이래서 문제다. 상의도 없이 친구랍시고 무작정 사람을 데려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분명히 조심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일 끝나면 둘 다 정리하겠습니다.’ ‘제대로 처리해. 아니면 네가 뒤진다.’ 삼악회주와 이재익은 일이 끝나고 나서 두 낭인을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내쫓았다가 억하심정을 품고 여기저기 떠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삼악회주가 한 번만 봐준다는 투로 두 사람에게 경고했다. “특별히 이번만이다. 그리고 예정에 없던 놈이니까 네 보수는 절반이야.”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재찬 옆의 새로 온 낭인이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인피면구를 쓴 기무혁이었다. ‘예상대로군.’ 뒷세계의 생리를 잘 아는 그는 삼악회주가 일 시작도 전에 괜한 잡음을 일으키길 원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대놓고 한재찬과 함께 왔고, 예상대로 삼악회주는 못마땅해하면서도 그를 일에 투입했다. “배에 타라! 곧 출발한다!” 그렇게 기무혁과 한재찬은 배에 올라탔다. 배가 새카만 바다의 물살을 가르며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톡톡. 출발과 동시에 기무혁은 귓속의 초소형 이어폰을 두드렸다. [작전 시작합니다.] 잠시 후, 어딘가에서 대기하고 있는 무림맹의 병력에서 답신이 왔다. [클클. 밤바람이 좋구나. 칼춤 추기 딱 좋은 날이다.] 기무혁에게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118화. 버리지 않으면 달도 뜨지 않은 심야의 바닷길. 쏴아아아아- 낭인들을 태운 소형 어선이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금세 몇 미터 앞도 분간하기도 힘들 정도로 주변이 캄캄해졌다. “지난번보다 더 멀리 가는 것 같은데?” “오늘은 안개까지 꼈네…….” 어선은 흐릿한 불빛에 의지한 채 이동하고 있었고, 낭인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웬만한 강심장도 불안감에 침을 꼴깍꼴깍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 물론 거기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한 형. 많이 긴장돼?” 배에 탄 다른 낭인들을 구경하듯 지켜보던 기무혁이 옆에 있는 한재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긴장으로 잔뜩 굳은 한재찬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긴장되지. 넌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지야 않지.” 기무혁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오랜만에 낭인으로 활동하던 시절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기 때문인지……. “왠지 조금 설레네.” “미친놈…….” 기무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한재찬을 바라봤다. “한 형까지 나를 그렇게 부른다고? 다들 왜 나한테 미친놈이라고 그러는 거야?” “그걸 모르니까 네가 미친놈인 게 아닐까?” “한 형. 요즘 무공 수련이 할 만해졌지?” “야, 치사하게…….” 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지루한 시간을 때웠고, 덕분에 한재찬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렇게 배를 타고 얼마나 멀리까지 나왔을까. 배가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톡톡- 톡톡톡. 멀리 바다를 바라보던 기무혁이 귓속의 이어폰을 미리 약속한 신호대로 두드렸다. 저 멀리 무언가가 시야에 포착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공으로 안력을 돋우자 해무 너머로 흐릿하고 거대한 배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화물선이군.’ 배라기보다는 거대한 구조물처럼 보일 만큼 압도적인 크기.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아하니 이미 물건을 떨어뜨리고 떠난 듯했다. “슬슬 몸들 풀어라!” 선장실 밖으로 나온 삼악회주의 고함에 낭인들이 겁먹은 얼굴로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 “…….” 기무혁과 한재찬도 서로 마주 본 후 천천히 몸을 풀었다. 그로부터 잠시 후, 수십 척의 어선이 희미한 불빛을 내뿜으며 한자리에 모였다. ‘딱 봐도 저게 흑천회 배로군.’ 소형 어선들 사이에 눈에 띄는 배 한 척이 있었다. 선체를 전부 검게 칠한 고속정. 다른 어선들보다 몇 배는 크고 갑판이 높았으며, 상갑판에는 기관총까지 거치돼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 큰 배에다 술법까지 걸어놨네.’ 기무혁은 흑천회의 배에서 느껴지는 술법의 기운에 작게 혀를 찼다. 그야말로 사파오패 정도의 세력이 아니면 꿈도 못 꾸는 돈지랄. 그 순간. “불 꺼.”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강력한 내공이 깃들어 있었다. 소형 어선들이 동시에 불을 껐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배들이 좌우로 천천히 출렁였다. “여기서 잠시 대기한다.”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지시한 삼악회주가 구명보트를 타고 흑천회의 배로 옮겨탔다. 다른 어선들에서도 옮겨타는 자들이 보였다. 기무혁은 고속정 한가운데 서 있는 남자의 실루엣을 확인하며 한재찬과 귓속말을 나눴다. ‘방금 불 끄라고 말한 놈, 흑천회에서 나온 총책일 거야. 고수니까 저놈은 무조건 피해서 움직여.’ ‘삼악회주는 왜 불려간 걸까? 지난번엔 바로 잠수해서 물건을 가져왔는데…….’ ‘규모가 다르니까. 하청들을 불러 모아서 단속부터 시키는 거지.’ 이 자리에는 삼악회뿐만 아니라 인근에서 활동하는 소규모 사파조직 다수가 모여 있었다. 하지만 저 중 일부가 해양경찰이나 무림맹에 잡혀가도 흑천회는 쉽게 꼬리를 잘라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흑천회와 밀수가 관계된 증거를 최대한 확보해야 해. 총책을 잡는 게 최고긴 한데…….’ 우선은 상황을 봐서 판단할 생각이었다. 기막을 쳤는지 고속정 위에서 나누는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그물이 거의 완성됐다. 대기하며 신호를 기다리마.] 이어폰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기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배의 누구라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졸라 웃기네. 무슨 우르르 고기 뜯어먹으러 몰려든 피라냐 떼 같지 않아?” “어이 거기! 조용히 안 해? 한재찬 너, 데려온 애새끼 관리 똑바로 해!” 이재익이 기무혁과 한재찬을 노려보며 으름장을 놨지만, 둘 다 그에게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한재찬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물었다. ‘시작하는 거지?’ ‘슬슬 밑밥부터 깔고.’ 기무혁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투덜거렸다. “씨발.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건데? 그냥 냅다 뛰어들어서 물건 건져오면 되는 거 아냐?” “닥치라고 좀 이 새끼야! 공구리 쳐서 바다에 담가줘?” 이재익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나직이 협박했지만, 기무혁은 오히려 어쩔 거냐며 노려봤다. “넌 그냥 따까리 아냐? 여기서 한판 뜰까?” “이 개새……!” 낭인들, 특히 초짜들 중에는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인생을 막사는 놈들이 있다. 이재익은 한재찬이 데려온 놈이 하필이면 그런 놈이라고 생각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흑천회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러 소란을 일으킬 리 없으니까. ‘그냥 여기서 죽여?’ 하지만 괜히 한 놈 죽였다가 다른 낭인들까지 동요하면 일을 망칠 수도 있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때, 고속정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용.” 처음에 불을 끄라고 한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 고속정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얼굴에 흉터가 길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가 기무혁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금방 일을 시작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면 좋겠군.” “…….”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기무혁도 그 앞에서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물론 정말로 겁을 먹어서는 아니었다. 일부러 소란을 피워서 밀수 총책의 얼굴을 확인한 기무혁이 한재찬을 슬쩍 바라봤다. ‘제대로 찍었지?’ 품 안에 초소형 카메라를 숨긴 한재찬이 조용히 따봉을 치켜들었다. * * * 배로 돌아온 삼악회주가 기무혁을 한 번 노려본 후 낭인들에게 지시했다. “잠수 준비! 장비 착용하고 바로 들어가!” 배에 실어온 산소통과 잠수 장비를 착용한 낭인들이 바다로 풍덩풍덩 뛰어들었다. “가자.” 기무혁과 한재찬도 마지막으로 시선을 교환한 후 함께 바다로 잠수했다. 풍덩- 머리에 착용한 헤드램프 불빛 하나에 의지한 채, 두 사람은 새카만 물속을 헤치며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기무혁의 손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바닥에 가라앉은 방수 컨테이너가 보였다. 눈에 띄기 쉽게 형광 염료를 발라 둔 모습이었다. 그런 컨테이너가 최소 다섯 개가 넘었다. 각 컨테이너 앞에는 흑천회의 무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한 명씩 대기하고 있었다. 잠수부들을 확인한 흑천회의 무인이 컨테이너 문을 열어주었다. ‘이류 정도 수준인가.’ 기무혁은 상대의 움직임에서 대략적인 경지를 파악했다. 이류 고수라고 하면 약한 것 같지만, 하류 낭인들에게는 이류 고수나 십대고수나 별 차이가 없었다. 손쉽게 자신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서걱- 흑천회의 무인이 물속에서 검을 휘둘러 바위를 베자 낭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감히 허튼짓을 못 하도록 하기 위한 무력시위. 잔뜩 위축된 다른 낭인들과 함께 기무혁은 컨테이너 중 하나로 들어갔다. 한재찬은 중간에 흩어져 다른 컨테이너로 향했다. ‘많이도 챙겨왔네.’ 컨테이너 안에는 방수포로 밀봉한 박스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전부 금지된 밀수품들이었다. 흑천회의 무인이 눈을 부라리며 물건을 가지고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잠수부들은 박스를 하나씩 챙겨 올라가 자신들이 타고 온 배에 실었다. 띡. 띡. 띡. 기무혁은 아무도 안 보는 틈에 박스 몇 개의 밑면에 손톱만 한 위치추적기를 붙였다. 그리고 가장 작은 박스를 들었다. 경험상 사이즈는 작지만 포장이 단단하게 된 박스에 비싼 물건이 들었을 확률이 높았다.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올라가!’ 기무혁은 눈을 부라리는 흑천회 무인의 옆을 지나쳤다. 통로가 좁아서 어깨가 살짝 맞닿을 정도였다. 그 순간, 기무혁은 그대로 상대의 머리에 박스를 휘둘렀다. 살짝 느리게, 가까스로 상대가 눈치채고 반응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퍼억! 관자놀이를 살짝 비껴 맞은 흑천회의 무인이 크게 휘청였고, 기무혁은 그대로 밀수품 박스를 품에 안고 헤엄쳤다. ……! 등 뒤에서 맹렬한 살기가 느껴졌다. 힐끗 돌아보니 머리를 얻어맞은 흑천회의 무인이 검을 휘두르면서 헤엄쳐 오고 있었다. ‘낚였군.’ 쫓고 쫓기는 수중 추격전이 벌어졌다. 기무혁은 아슬아슬하게 상대와의 거리를 조절하며 물 위로 올라갔고. 한낱 잠수부 낭인에게 얻어맞아서 눈이 돌아간 흑천회 무인은 죽어라 기무혁의 뒤를 쫓았다. 후웅-! 후웅! 검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놈의 등을 스쳤다. 그대로 달아나는 놈을 죽이기 위해 헤엄치다 보니 어느새 물 위였다. “푸하! 죽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흑천회 무인이 물 위로 올라오며 소리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저 새끼가 절 공격한 후 물건을 들고 도망쳤습니다! 죽여야 합니다!” 흑천회 무인이 헤엄쳐 도망가는 기무혁을 가리키며 소리친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삼악회주와 이재익이 비명을 질렀다. “저, 저 미친 새끼가!” “당장 그거 들고 이리 와, 이 새끼야!” 감히 흑천회의 물건에 손을 댔으니, 자기들까지 한패로 엮여서 죽을 수도 있었다. 반면 고속정 위에 서 있는 흑천회의 총책은 오히려 차분해 보였다. “간혹 저렇게 날뛰는 놈들이 있지. 자기가 대범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는…….” 그러나 어선들을 둘러보는 그의 눈에 살기가 맺힌 순간, 모두가 총책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아챘다. “잡아와. 연대 책임으로 다 뒈지기 싫으면.” 그 한마디에 소형 어선들이 일제히 시동을 걸었다. “저 새끼 잡아!” “도망 못 치게 막아!” 배 위에 탄 이들은 고함을 지르며 기무혁을 향해 그물과 작살을 던졌고, 물에 들어갔던 낭인들도 밀수품 건지는 것을 멈추고 기무혁의 뒤를 쫓았다. 휘이익! 휘익! 기무혁은 무거운 산소통을 아예 벗어던지고 물속에서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말 그대로 분탕질을 쳤다. ‘조금 더 시선을 끌면…….’ 그 순간. 머리가 쭈뼛 서는 감각에 기무혁이 전력으로 몸을 비틀었다. 촤아아아악! 날카로운 검기가 수면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운 나쁘게 거기에 걸린 어선 하나가 반파되었다. 기무혁은 피가 흐르는 어깨를 지혈한 후 고속정 위에 서 있는 총책을 바라봤다. “꽤 세 보이더라니, 절정고수였어?” 그리고 그 순간, 총책의 얼굴을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가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피했다고?” 분노가 아니라 당황이 느껴지는 중얼거림이었다. 잠수부로 따라온 하류 낭인 따위가 자신의 공격을 피했다. 그것도 몇 배는 움직이기 힘든 물속에서 말이다. 결코 운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 비로소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낀 총책이 부하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함정이다! 당장 여기서…….” 쿵! “늦었어. 여기서 한 놈도 못 빠져나가.” 고속정 위로 뛰어오른 기무혁이 흑천회의 총책과 마주 선 순간. 위이이이이이이잉-!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술법이 풀리며, 모습을 감추고 있던 해경의 고속정들이 들이닥쳤다. “해경이다-!” 소형 어선들이 우왕좌왕하며 사방으로 흩어지려고 했지만, 빠르게 들이친 해경 고속정들이 그들을 포위하며 총구를 겨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푸화아아아악! 잠수정 한 대가 검푸른 수면을 뚫고 쇳빛 몸체를 드러냈다. 적은 인원만 탈 수 있는 소규모 잠수정이었다. 하지만 무림에서는 숫자보다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느냐가 중요한 법이었다. “다섯을 세마.” 잠수정의 문을 열고 나온 항공점퍼 차림의 노인이 서슬 퍼런 시선으로 전장을 오시하며 말했다. “그 안에 무기를 버리는 자는 목숨을 부지할 것이요.” 최근 무림맹의 암검으로 다시 활약하기 시작한 최건이 섬뜩하게 미소 지으며 검을 뽑았다. 스르릉. “버리지 않으면 목 아래 몸뚱이는 바다에 두고 가게 될 것이다.” 119화. 나이스 최건의 목소리가 바다 위에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하나.” 거칠어진 파도와 혼란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숫자를 세는 그의 목소리만큼은 놀랍도록 선명하게 모두의 귀에 박혔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왔습니다!” 무기를 버린 낭인들이 어선에 납작 엎드렸다. 주변을 둘러싼 해경의 고속정들이 그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갑판 위에는 무림맹의 고수들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둘.” 반면 낭인들을 데려온 흑천회의 하청 사파 조직원들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무림맹에 포위가 되었다고 해도, 그들은 흑천회의 보복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최건은 그들의 결정이 쉬워지도록 기꺼이 도와주었다. 즉, 검을 휘둘렀다는 의미다. 촤아아아악― 콰콰콰쾅! 혼란을 틈타 도망치려던 어선 하나가 검기에 두 쪽으로 쪼개지며 침몰했다. 배에 타고 있던 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셋.” 최건이 섬뜩하게 미소 지으며 남은 숫자를 마저 셌다. 과거 사파의 무인들에게 검마라 불렸던 인물. 그 손속은 사파오패조차 몸서리칠 만큼 자비가 없었다. ‘끔찍할 정도로 강하다…….’ 흑천회의 밀수 총책, 이태현은 최건의 일검을 목격한 순간 무림맹과 싸운다는 선택지를 포기했다. 저 괴물 같은 늙은이를 감당하려면 흑천회의 최정예가 몰려와야 할 것 같았으니까. “이봐. 목 위에 그거 간수하고 싶으면 항복하지?” 흑천회의 고속정 위에 올라탄 기무혁도 그에게 항복을 제안했다. 비무장인 채 어깨에 상처까지 입었음에도 당당한 그 모습에, 이태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그렇다 치고, 넌 여기서 살아서 돌아갈 자신이 있나 보구나?” 이태현의 얼굴에 난 흉터가 일그러지며 두 눈에서 섬뜩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눈앞에 있는 놈 때문에 일을 망친 것이나 다름없으니,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무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뒤편을 가리켰다. “넷.” 최건이 이쪽을 향해 검을 겨누며 숫자를 세고 있었다. 마지막 숫자 하나만 남은 상황. “다서…….” 쨍그랑. 이태현이 검을 떨어뜨리고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를 따라서 흑천회의 무인들도 모두 무기를 버렸다. “항복하지. 그러니 그 살벌한 칼 좀 내려놓으면 안 되겠소?” “쯧. 요즘 사파 놈들은 간덩이가 작구나.” 최건이 아쉬움에 혀를 차며 검을 내린 그 찰나의 순간, 이태현이 숨겨둔 비장의 수단을 사용했다. 그가 옷 안에 숨겨두었던 목걸이를 잡아 뜯으며 외쳤다. “폭(爆)!” 그 순간 고속정의 선체에 새겨진 술법이 보랏빛 형태로 빛을 뿜어냈고, 선체로부터 강력한 충격파가 터져 나갔다. 퍼버버버벙-! 거대한 파도가 일어 배들이 뒤집힐 듯 크게 휘청이며 서로 부딪쳐댔다. 그 틈에 흑천회의 고속정이 포위망을 돌파했다. “갈!” 최건이 일갈을 터트리며 크게 검을 휘둘렀다. 초승달처럼 휘며 날아간 검기가 흑천회의 배를 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반투명한 보호막이 생성돼 선체를 보호했다. 까가가가가각-! 그러나 술법이 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강한 검기였다. 배를 보호하는 방어 술법진이 찢겨나간 것도 모자라, 선체 일부에도 검흔이 새겨졌다. 수억을 들여서 설치한 방어 술법진이 단 일검에 박살 난 것이다. “저, 저 늙은인 대체 누구야…….” 그 가공할 위력에 이태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지만, 방어 술법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포위망을 가까스로 돌파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놓칠 줄 아느냐!” 허공으로 몸을 띄운 최건은 수상비를 펼쳐 도망치는 배를 쫓으려 했다. 적들을 노려보는 노인의 두 눈에서 새하얀 안광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해수면을 박찬 최건이 도망치는 고속정을 쫓아가려고 마음먹은 순간. [스승님,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최건은 제자가 보낸 전음에 멈칫했다. 지금 당장 고속정을 쫓아가면 흑천회를 잡을 수 있을 테지만, 현장을 지휘할 사람이 없어진다. 그런 상황을 아는 기무혁은 자신이 흑천회를 맡겠다고 했다. 마침 자신이 흑천회의 고속정에 타고 있었으니까. [우선 그곳부터 정리해 주세요. 저 믿으시죠?] “아무렴, 믿고말고.” 최건이 픽 웃더니 멈춰 섰다. 그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제자를 믿었다. “마침 가져오길 잘했구나. 아무리 너라도 맨주먹으로는 쉽지 않을 테니…….” 최건은 도망치는 흑천회를 쫓지 않는 대신, 등에 메고 있던 물건을 풀어서 멀어지는 고속정을 향해 던졌다. “받거라-!” 쐐애애애액! 공기를 찢으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는 무언가. 마치 붉은 유성이 꼬리를 문 것만 같은 모습에, 기무혁은 반가운 미소를 짓더니 손을 뻗어 그것을 허공에서 낚아챘다. “오랜만이다?” 검파를 손에 쥔 순간, 기무혁은 망설임 없이 환몽을 검집에서 뽑아 내렸다. 스르릉. 핏물에 담갔다 뺀 듯한 붉은 검신이 제주도에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토라진 목소리와 함께였다. 저 고약한 늙은이가 날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아? 바깥 구경도 못 하게 하고! 대머리들을 데려와서 요상한 주문이나 듣게 했어! 환몽은 그간 최건이 자신을 다뤄 온 방식에 불만이 많았는지 쫑알쫑알 투덜거렸다. 기무혁이 그런 환몽의 검신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토닥였다. “간만에 포식하게 해줄 테니까 기분 풀어.” 정말로? 나 배고파서 죽는 줄 알았어! 저기 있는 것들은 먹어도 돼? 기무혁은 어느새 무기를 들고 자신을 포위한 흑천회의 무인들을 바라보며 사납게 웃었다. 사파오패의 주력. 특히 밀무역에 동원되는 놈들은 사람을 바다에 빠뜨려 증거를 인멸하는 악질들이다. “전에 약속했잖아. 악인들의 피는 얼마든지 마시게 해주겠다고.” 스스스스슷……. 안개처럼 흘러나온 환몽의 붉은 기운이 밤공기에 섞여들었다. 그 모습을 본 이태현이 표정을 굳히며 부하들에게 경고했다. “술법무기를 든 놈이다. 가능한 무기를 부딪치지 말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판을 부술 듯 박찬 기무혁이 적진으로 파고들었다. 쾅! 일직선으로 쏘아진 신형이 가장 가까이 있던 적을 덮쳤다. 상대가 검을 반쯤 뽑아 들었을 때, 핏빛 궤적이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촤아아아악! 검객의 몸이 사선으로 갈라지며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기무혁의 머릿속에서 짜릿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피! 오랜만에 마시는 피다! 핏물을 머금은 환몽이 더욱 요사스러운 기운을 뿜어냈다. 제주도를 혈사로 물들였던 요검의 기운에 일부 검객들의 표정이 몽롱하게 변했다. “정신 차려라!” 내공이 담긴 이태현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리는 흑천회의 무인들. 사파오패라는 이름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는 듯, 대부분 제주도에서 싸웠던 적들보다 수준이 높고 정신력도 강했다. “거리를 두고 협공해! 저 붉은 검만 조심하면 별것 아닌…….” 콰직! 선두에서 부하들을 지휘하던 무인의 얼굴이 함몰됐다. 주먹을 회수한 기무혁은 절명한 상대의 시체를 방패삼아 옆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고 돌아섰다. “검이 아니라 검을 든 인간을 조심해야지.” “큭……!” 눈앞에서 마주한 섬뜩한 눈빛에 상대의 반응이 잠시 늦었다. 환몽이 그 목에 붉은 선을 그으며 지나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푸화악-! 등 뒤로 높이 치솟는 핏물. 기무혁은 곧바로 다음 상대를 찾아 나섰다. 그는 신병이기의 힘에 의존해서만 싸우지 않았다. 환몽을 쥔 오른손으로 적을 베고, 검을 경계하는 적들은 허초로 시선을 빼앗은 후 권장으로 직접 뼈를 부쉈다. ‘검을 꽤 오래 쥐지 않아서 어색하지 않을까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충분한 휴식으로 몸이 훨씬 더 가벼워진 것이 느껴졌다. 움직임은 경쾌했고, 검을 손에서 놓은 시간 동안 심상 속에서만 그려보던 검로가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푸욱! 콰직! 촤아아악! 갑판 위로 핏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기무혁이 만들어내는 혈로를 따라 흑천회 무인들의 시신이 쌓였다. 배 위의 좁은 공간도 난전에 능한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더더더! 더 강한 놈과 싸우고 싶어! 오랜만의 싸움에 흥분한 환몽의 검면을 손가락으로 튕겨주자 지이잉- 하고 기분 좋은 울림이 돌아왔다. “급하게 먹으면 체해. 천천히 음미하자고.” 중얼중얼 검과 대화를 나누는 기무혁의 모습에 적들이 흠칫했다. 입가에 은은한 미소까지 띠고 있으니 여기저기서 미친놈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무혁은 부하들의 등을 떠밀고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는 이태현을 바라봤다. “부하들 다 죽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 이태현은 대답 대신 손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동시에 배 위쪽 상갑판에 거치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투투투투투투투! 부하들 따위는 총에 맞아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기무혁과 붙어 있던 무인 몇이 총알에 맞아 고꾸라졌다. “하여간 사파새끼들 아니랄까 봐.” 눈썹을 찌푸린 기무혁이 전력으로 경공을 펼쳤다. 아직 총알만큼 빠르지는 못해도, 총구보다는 훨씬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피해! 이쪽으로 온다!” “어디다가 쏘는 거야!” 기무혁은 자신을 노리는 총구를 끌고 다니며 적진을 휘저었다. 총알 몇 개가 허벅지와 옆구리를 스쳤지만, 그 대가로 적들을 벌집으로 만들 수 있었다. 고속정에 탄 흑천회 무인들 대부분이 쓰러지거나 전투불능이 된 상황. 하지만 기무혁은 방심하지 않고 환몽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 ‘슬슬 대장이 나서겠지.’ 먹잇감이 지칠 때까지 기다린 맹수가 이빨을 곧 드러낼 테니까. “강하군.” “……!” 불현듯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은 기무혁의 등 뒤였다. 즉시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면서 돌아선 순간. 기무혁은 자신의 감각에 혼란을 주는 이질감을 느꼈다. 극한까지 단련한 감각이 아니었다면 놓쳤을 미세한 무언가. 고된 전투로 판단력이 흐려졌을 때라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찜찜함. 기무혁은 그런 작고 사소한 것 하나가 생사를 가른다는 것을 알았다. ‘술법이다. 뒤가 아니라 앞!’ 판단은 찰나에 이루어졌다. 기무혁은 회전하던 몸을 강제로 비틀며 검을 쳐올렸다. 까앙! 기무혁의 얼굴을 스친 검이 위로 튕겨나갔다. 회심의 기습에 실패한 상대에게서 놀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대단하군.” “그런 말 자주 들어.” 검날이 스친 뺨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기무혁은 너덜너덜해진 인피면구를 아예 뜯어내 버렸다. 그러자 이태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은 얼굴이 드러났다. “하, 세상 불공평하네. 이런 애새끼가…….” 살기를 풀풀 풍기며 다가오는 이태현과 달리, 기무혁은 한 걸음 물러나며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공격을 쏟아낼 것 같은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말이야. 아까부터 나한테만 너무 신경이 쏠린 거 아냐?” “시간 벌려고 해도 소용없다. 지금 당장 죽여주…….” 살기충천한 모습으로 다가오던 이태현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커헉!” 위쪽에서 들려온 비명과 함께 고속정이 바다 한가운데 갑자기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설마…….” “왜 나 혼자라고 생각한 건데?” 씨익 웃은 기무혁은 고개를 들어 배 위쪽을 바라봤다. 기무혁이 적들의 시선을 끄는 동안 함교를 장악한 한재찬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 형. 나이스.” 기무혁도 그를 향해 따봉을 치켜들었다. 120화. 집중하는 편이 나을 텐데 “저 새끼 잡아-!” “도망 못 치게 막아!” 기무혁이 물속에서 활개치며 소란을 일으키는 동안. 한재찬은 은밀하게 흑천회의 고속정에 접근했다. 빨판과 비슷한 흡착 장비를 선체에 붙이고, 배에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어 때를 기다렸다. “해경이다-!” 그 후 해경과 무림맹이 나타나고, 흑천회의 고속정이 포위망에서 탈출하기 위해 술법을 펼쳐 전속력으로 기동했을 때도. 콰콰콰콰쾅-! 최건이 무시무시한 검기를 날려 고속정의 선체가 넘어갈 듯 크게 흔들렸을 때도. “큽……!” 한재찬은 이를 악물고 배에 매달린 채 버티며 기다렸다. ‘아직 아니야.’ 고속정 위에는 흑천회의 무인들이 여럿 타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는 그중에 한 명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재찬은 기다렸다. 기무혁과 나눴던 대화를 되새기면서. -한 형은 이제 겨우 삼류라고 부를 수 있는 정도야. 흑천회 놈들하고 정면으로 싸울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반박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재찬은 자신이 기무혁에게 방해가 될까 봐 걱정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긴 할까? 그러자 기무혁은 무공이 약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은 아니라며 씩 웃었다. 낭인도 무인이지만, 그들의 세계는 일반적인 무림과는 달랐으니까. -낭걸 중에서 약한 놈은 없지만, 그렇다고 특출난 고수는 몇 없어. 대신 각자 확실한 특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지. -넌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아? 낭걸들을 직접 만나보기라도 한 것처럼……. -……뭐, 나도 다 소문으로 들은 거지. 대충 얼버무리던 기무혁의 얼굴은 묘하게 쓸쓸해 보였다. -아무튼 작전 설명할 테니 잘 들어. 낭인이 되기 전부터 돈을 벌기 위해 다양한 일을 경험한 한재찬은 눈치가 빠르고 임기응변이 뛰어났다. 또한 암기력과 기억력이 좋고, 인내심도 강했다. 기무혁은 그런 한재찬에게 잘 맞는 역할을 맡겼다. -한 형 임무는 고속정에 잠입해 밀수와 관련된 증거를 찾는 거야. 기회는 내가 만들 테니 배에 붙어 있다가 이때다 싶으면 들어가. -신호는 따로 없어? -알아서 눈치껏 잘 해야지. 현장에서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는데. 알아서 눈치껏 잘. 심플하고 화려하면서도 무난하게 고급스러운 결과물을 요구하는 직장상사와 기무혁이 잠시 겹쳐 보였지만, 한재찬은 해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아악!” “저 검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조심해!” 그리고 갑판 위에서 난전이 벌어지면서 모두의 이목이 기무혁에게 집중됐을 때. 한재찬은 자신이 움직여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그는 비명과 고함이 들려오는 반대 방향으로 기어올랐다. 다행히 행운이 뒤따랐다. 환몽에게서 흘러나온 붉은 안개 같은 기운이 그의 모습을 일차적으로 숨겨주었고, 무공이 약해 기도가 희미한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고속정 내부에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선원들도 있었는데, 혼란스러운 난전 중에 흑천회 무인들은 한재찬을 선원들과 구분하지 못했다. ‘곧장 내부로 간다.’ 피칠갑이 된 모습으로 싸우고 있는 기무혁의 모습이 힐긋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함께 싸우고 싶었지만, 오히려 방해만 될 것이 뻔했다. 한재찬은 자신이 맡은 임무를 되뇌며 배 안으로 향했다. “누구……?”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선원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빠악! 고등학교 때 한재찬의 신세를 망치게 만든 쇳덩이 같은 주먹이 상대의 관자놀이에 적중했다. 흑천회의 무인들은 전부 갑판 위로 싸우러 나간 상황. 내부에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선원들만 남아있었다. “지금 소리 지르면 어떻게 될지 말 안 해도 알지?” 쓰러지려는 선원의 멱살을 움켜쥔 한재찬이 낮은 목소리로 을러댔다. “사, 살려주십쇼…….”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선원에게 한재찬은 필요한 정보를 얻어냈다. “흑천회 놈들이 쓰는 방이 어디야?” “바, 방은 따로 없고, 저기 기관실 뒤쪽 침대에…….” 몇 가지 정보를 캐낸 한재찬은 선원을 기절시킨 후 기관실과 그 주변을 뒤졌다. 동시에 그의 몸에 부착한 초소형 액션캠이 배 내부를 샅샅이 촬영했다. 고속정이 흑천회 소유라는 것을 증명할 영상자료였다. “……찾았다.” 침대 밑에서 밀수품 장부를 발견한 한재찬은 그것을 품 안에 소중히 넣었다. 거래처와 품목, 연락처 등이 적힌 빼도 박도 못할 증거였다. ‘이만하면 충분해.’ 한재찬은 곧바로 함교로 빠르게 이동했다. 기무혁이 시킨 것은 증거를 수집하라는 것까지였지만, 이후의 일은 스스로 판단했다. “뭐야, 넌!” 함교로 난입한 한재찬은 인상이 험악한 함장과 격전을 벌였다. 다른 선원들과 다르게 무공을 약간 익힌 상대였지만, 기습의 묘를 살린 한재찬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주먹다짐 끝에 한재찬은 함장을 쓰러뜨리고 함교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단검을 던져 기관총수마저 제압했다. “커헉!” 한재찬은 배의 시동을 끄고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배 위에서 십수 명을 베어 넘기며 적의 피를 뒤집어쓴 기무혁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해냈다, 내가.” 혼잣말을 중얼거린 한재찬은 이쪽을 바라보는 기무혁에게 힘껏 손을 흔들었다. 기무혁도 씨익 웃으며 마주 엄지를 치켜들어 주었다. 그 순간, 한재찬의 등줄기에 짜릿한 소름이 돋았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나도 이제……!’ 비로소 제대로 된 낭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 오늘처럼 계속 임무에 성공해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한재찬의 마음속에서 훨씬 더 커졌다. * * * 엔진이 멈춘 고속정이 캄캄한 바다를 표류했다. 흑천회의 무인들은 자신만 빼고 전부 쓰러졌으며, 일검에 배를 반으로 쪼갠 늙은이가 언제 쫓아올지 모르는 상황. “흐흐흐…….” 이태현은 이 모든 것이 어이가 없었다. 실성이라도 한 듯 웃음이 흘러나오는 이유였다. “고작해야 쥐새끼 하나, 아니 둘이 일을 이 지경까지 망치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기무혁과 한재찬을 번갈아 바라보는 눈에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났다. 흑천회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의 실패면 아무리 간부라고 해도 팔 하나는 내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당연히 간부 지위도 박탈될 것이다. 파라라라락-! 이태현의 양손 소맷자락이 미친 듯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손목에 찬 팔찌들이 스스로 파동을 일으켰다. 전부 다 술법도구였다. “네놈들 머리라도 들고 가야 회주님에게 기회를 달라고 빌어볼 수 있겠지.” 절정고수가 작정하고 일으킨 기세에 한재찬의 몸이 넘어질 듯 휘청였다.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이 턱 막혀왔다. “끄읍……!” 가득 차올랐던 자신감이 한순간에 꺾이고, 전신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당장 어딘가로 숨거나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한재찬은 억지로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기무혁도 예상 못 한 입담으로 상대를 도발했다. “우리가 쥐새끼면 넌 바퀴벌레다! 세상에 해악만 끼치는 쓰레기 주제에, 누구 보고 쥐새끼래? 확 주둥이를 찢어버릴라!” “……뭐?” “우린 정의로운 일을 한 협객이라고, 오물 냄새 풍기는 사파종자 새끼야-!” 갑자기 어떤 스위치가 켜지기라도 한 건지, 한재찬의 입에서 거침없는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왔다. “하, 그래. 너부터 치워주마.” 이태현의 표정은 더욱 싸늘해졌다. 그가 검을 휘둘러 한재찬에게 검기를 쏘아내려던 순간. 까앙! 환몽이 이태현의 검을 멈춰 세웠다. 그와 검을 맞댄 기무혁이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왜 열을 내고 그래? 들어보니까 틀린 말 이 하나도 없는데.” “건방진……!” 한재찬이 시간을 끄는 동안, 기무혁은 약간이나마 체력을 회복했다. ‘수고했어.’ 한재찬에게 씩 웃어준 기무혁이 검으로 이태현을 강하게 밀어내며 말했다. “바람도 시원하겠다, 이제 방해하는 사람도 없겠다, 둘이서 느긋하게 밤바다를 즐겨볼까?” “……죽여주마!” 고함과 동시에 이태현이 착용한 술법도구인 팔찌들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짤랑짤랑짤랑. 흑천회의 중간 간부 이태현은 절정의 고수이자 술법사이기도 했다. 무공에 비교하면 뒤늦게 알게 된 술법사로서의 재능은 상당히 떨어졌지만, 약간의 재능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흑천회에서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값비싼 술법도구와 충분한 재료만 있으면 절정의 고수가 술법까지 펼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귀신울음!” 팔찌 중 하나에 사역된 귀신이 튀어나와 찢어질 듯한 귀곡성을 터트렸다. 꺄아아아악-! 그 소름 돋는 소리에 한재찬이 귀를 막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피아를 식별하지 않기 때문에 부하들이 있을 땐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던 비장의 술법. 청각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무너뜨리는 종류의 공격이기에, 제아무리 고수라도 빈틈을 보이게 돼 있었다. ‘사납게 생긴 그 눈알부터 파내주마!’ 이태현은 히죽 미소를 지으며 곧 실현될 미래를 상상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기무혁은 술법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한 번 찌푸린 것이 전부였다. ‘어째서?’ 당황할 겨를도 없었다. 순식간에 눈앞까지 들이닥친 기무혁의 검이 이태현의 목을 노렸다. 쩌저저정! 검끼리 부딪치며 사방으로 불티가 튀었다. 어지럽게 뒤섞이는 궤적들이 서로를 스칠 때마다 밤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두 사람의 몸에서 튀어 오른 핏물 때문이었다. “큭……!”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살갗이 베이는 통증에, 이태현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반면 이미 훨씬 더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음에도 기무혁의 눈동자는 생기 있게 빛났다. 제대로 싸워볼 만한 상대를 만나서 흥이 오른 모습이었다. “크윽! 환(幻)! 변(變)! 암(暗)!” 첫 술법이 통하지 않았지만, 이태현은 연달아서 술법을 펼쳤다. 검에 환영이 뒤섞이게 하는 술법과 자신의 위치를 한 보 이동시키는 술법. 그리고 상대의 시야를 어둡게 하는 술법 등. 그렇게 변수를 만들고, 당황한 상대에게 검을 찔러 넣어 쉽게 마무리한다. 그를 흑천회의 간부로 만들어준 필승법이었다. ‘통하지 않을 리가 없다. 저 애송이는 운이 몇 번 좋았을 뿐이야. 이번에야말로……!’ 그 순간, 잠시 공격을 멈춘 기무혁이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왜 자꾸 잔재주를 피우지? 그 시간에 검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 텐데.” “닥쳐-!” 짤랑짤랑짤랑! 손목에 찬 팔찌들이 쉴 새 없이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흔들렸다. 지금껏 이태현이 한 수 위의 고수조차 격살할 수 있도록 도와준 술법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기무혁에게는 그 무엇도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쉽게 막아냈다. 촤아아악! 날아오는 화염구를 반으로 가른 기무혁이 흥미가 식은 표정으로 이태현을 바라봤다. “절정고수라서 기대했는데…… 정작 검술은 일류만도 못하네. 아니, 술법에 의존하다 보니 퇴보한 건가?” “건방진 애새끼가-!” 점점 이성을 잃고 술법을 남용하는 상대의 모습에 김이 새버렸다. ‘술법이라도 제대로면 모를까, 둘 다 어중간해.’ 김복자와 셀 수 없이 대련을 해본 기무혁에겐 상대의 수법이 처음부터 뻔히 보였다. 게다가 괴이를 보는 영안마저 트여 있으니, 어쭙잖은 술법사들에게 기무혁은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짤랑짤랑짤랑짤랑! 쫑알쫑알 시끄러워……. 이태현이 가진 술법도구를 전부 더해도, 신병이기인 환몽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으니. 전부 조용히 해-! 환몽의 짜증 어린 외침에 이태현의 술법도구들이 전부 깨져나가고, 그 반동이 술사에게까지 미쳤다. “커헉!” 핏물을 토한 이태현이 휘청이며 뒷걸음질 쳤다. 기무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끝까지 검으로 승부를 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애초에 술법을 먼저 쓰기 시작한 쪽은 상대였으니까. “차라리 검으로만 승부했다면 당신한테도 승산이 있었을 텐데.” 기무혁은 비틀거리는 상대의 손에 들린 검을 날려버렸다. 그러곤 무표정한 얼굴로 이태현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지루한 싸움이었어.” “너…… 이, 개……!” 푸욱! 사파오패 중 하나인 흑천회의 밀수 총책이자 간부급의 절정고수가 허무하게 무릎을 꿇는 순간이었다. 121화. 누가 뭐래도 갑판으로 내려온 한재찬이 바닥에 쓰러진 이태현을 보더니 기무혁에게 물었다. “……죽인 거야?” 창백한 얼굴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그 모습이, 시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죽이진 않았어. 귀한 증인인데 살려서 무림맹에 데려가야지.” 기무혁이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대답했다. 이겼지만 그 역시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흑천회의 정예무인 십수 명과 난전을 벌이면서 묻은 피였지만, 자신의 몸에 난 상처도 적지 않았다. “뭐, 죽은 것보다 낫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하지만 기무혁은 본인의 상처를 살피는 대신 품에서 수갑과 재갈을 꺼냈다. 이태현이 의식을 차리더라도 헛짓거리를 못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한재찬이 다가와 기무혁의 포박도구를 빼앗듯 가져갔다. “넌 빨리 약이나 발라.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역시 조수가 있으니 편하네.” 픽 웃은 기무혁은 비로소 갑판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서 금창약을 꺼내 몸에 발랐다. 그동안 한재찬은 기절한 이태현의 팔을 등 뒤로 해서 수갑을 채우고, 입안의 이물질을 꼼꼼히 확인한 후 재갈도 물렸다. 기무혁이 보고 감탄할 정도로 깔끔한 솜씨였다. “잘하는데? 따로 어디서 배웠어?” “점혈을 제대로 할 줄 모르니까 이런 거라도 잘해야지. 이따가 네가 한 번 더 확인해.” “굳이 할 필요도 없어. 이제 내공이 없는 일반인이나 다름없으니까.” 환몽으로 단전을 꿰뚫었다. 내공은 산산이 흩어졌을 것이고, 저런 몸 상태로는 수갑을 부수는 것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녀석이 사용한 술법도구들에서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아무래도…….’ 우우우웅! 옆에 놓인 환몽이 붉은 검신을 부르르 떨었다. 검날이 상대의 복부를 파고들었을 때, 환몽이 상대의 피를 빨아들이며 다른 종류의 기운도 흡수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환몽의 검신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속삭이듯 물었다. “네가 먹은 거지?” 맛있어! 더더더더더 줘! 환몽이 아직도 배고프다며 투정을 부렸다. 술법사와 술법도구라는 별미를 먹고도 모자라다는 듯, 입가에서 군침을 줄줄 흘리는 소년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기무혁은 진정하라며 환몽을 토닥였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해. 나중에 더 맛있는 거 줄 테니까.” 진짜지? 약속한 거다! 기무혁이 검과 중얼중얼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한재찬이 움찔했다. 그는 오늘 처음 본 환몽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흠흠. 그럼 난 이것 좀 치우고 기관실에 한 번 더 다녀올게.” 고개를 끄덕인 기무혁은 한재찬에게 짐짝처럼 들려서 한쪽으로 옮겨지는 이태현을 바라봤다. ‘무인으로서도 술법사로서도 끝났군.’ 기무혁은 힘을 잃은 악인들의 말로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설령 이태현이 기적적으로 풀려난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쌓인 원한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터였다. ‘차라리 감옥에 계속 가둬달라고 비는 편이 나을 거다.’ 물론 상대를 그렇게 만든 것에 대해선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사파오패에 속한 자들이 얼마나 끔찍한 놈들인지 아니까. 팔대문파 중 일부가 뒤에서 구린 짓을 하는 위선자들이라면, 사파오패는 대놓고 범죄를 저지르는 악인들의 소굴이었다. ‘게다가 천마신교에 가장 먼저 굴복해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주범들이기도 했지.’ 언젠가 다 치워버려야 할 쓰레기들. 팔대문파와 달리 사파오패는 갱생의 여지조차 없었다. 흑천회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박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기무혁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한재찬이 어디서 구했는지 배낭을 하나 짊어지고 돌아왔다. “그건 다 뭐야?” “전리품 좀 챙겼어. 이런 것까지 몽땅 해경에 넘겨줄 필요는 없잖아?” 한재찬이 슬쩍 열어 보인 배낭 안에는 방수포장된 현금다발과 귀금속이 반짝이고 있었다. 게다가 전리품만 챙겨온 것이 아니었다. “배에 있는 CCTV는 전부 찾아서 부쉈고, 기관실에 숨어있던 선원들도 기절시켜놨어. 여러 번 확인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이건 뭐, 내가 할 일이 없네.” 조수의 깔끔한 일 처리에 기무혁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재찬은 무인으로서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낭인으로서는 확실히 소질이 있었다. 대부분의 문제를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파소속 무인들과 달리, 프리랜서 낭인들에겐 조심성과 생활력이 필수였으니까. “배 안에 눈뜨고 있는 사람이 우리 둘뿐이라 이거지? 그럼 이제 벗어도 되겠네.” 갑판 위에 대자로 드러누운 기무혁이 답답했다는 듯 피부를 뜯어냈다. 찌이이익-. 처음부터 두 개의 인피면구를 착용했던 것. 만약 원한에 사무친 이태현이 기무혁의 얼굴을 기억했다가 흑천회 상부에 알리더라도, 생뚱맞은 몽타주를 그리게 될 터였다. “……너에 비하면 한참 멀었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한재찬이 기무혁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함께 삼악회를 털 때도 느꼈지만, 기무혁은 종종 막무가내처럼 보여도 알고 보면 치밀하게 계획하고 움직이는 타입이었다. 한재찬이 뒤처리를 비롯해 전리품을 챙기고 CCTV를 부순 것도, 기무혁이 지나가듯 해준 이야기를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가르치다 잠시 쉬는 시간이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면, 기무혁은 슬쩍슬쩍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주었다. 어떤 낭인은 위기상황에서 이렇게 임기응변을 발휘했다더라. 전리품을 챙기고 흔적을 지울 땐 이런 방법이 좋다더라. 누구는 포위망을 돌파할 때 저런 방법을 썼다더라. ‘다 어디서 소문으로 들었다는 식으로 돌려서 이야기했지만……. 직접 경험한 것처럼 생생했거든?’ 게다가 오늘 보여준 작전수행 능력까지. 마치 노련한 낭인이란 이렇게 행동한다를 직접 보여주는 교과서 같았다. ‘기무혁. 너 대체 정체가 뭐냐?’ 한재찬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말해주지 않을 테니까. 중요한 건, 기무혁을 보고 배우는 것만으로도 업계 최고의 낭인이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었다. 그때 바닥에 드러누운 기무혁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후우- 이러고 있으니까 담배 생각나네.” 기무혁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적 없지만, 한재찬은 그러려니 했다. 뒷세계와 관련되기만 하면 말투부터 표정까지 사람이 바뀌는 듯한 모습을 본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으니까. “배 안에 뒤져보면 있을 것 같은데. 하나 갖다 줘?” “……됐어. 몸에 나쁘기만 한 거. 한 형도 피우지 마.” “난 원래 비흡연자라고.” 기무혁은 담배 한 대가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지만, 이내 금방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수고했어, 한 형. 내가 기대했던 것 그 이상이야.” “뭘……. 보니까 너 혼자서도 충분했겠던데.” 물론 기무혁 혼자서도 작전은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재찬이 함교를 장악하고 기관총수를 제압해주지 않았다면, 훨씬 더 어려운 싸움을 치렀을 것이다. 몸을 일으킨 기무혁이 총알이 스친 상처를 보여주며 말했다. “덕분에 쉬웠지. 형 아니었으면 바람구멍 몇 개는 더 났을걸?” 낭인 스승의 칭찬에 한재찬은 헤벌쭉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그래? 내 덕분에 사장님들한테 덜 혼나긴 하겠다.” “돌아가면 맛있는 거 살게.” 두 사람은 마주보며 씩 웃었다. 그러곤 주먹을 가볍게 툭 부딪쳤다. 그렇게 현장정리가 끝난 후, 기무혁은 하늘을 향해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퍼엉-! 곧 밀수 관련자들을 체포한 해경과 무림맹 병력들이 찾아올 터였다. “우린 슬슬 빠지자.” 두 사람은 고속정에서 고무보트를 찾아서 바다에 내린 후 올라탔다. 무림맹의 의뢰를 받아 진행한 작전이었지만, 굳이 해경에까지 신분을 노출할 필요는 없었다. 전리품을 챙기는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기에, 배 안에 밀수와 관련된 증거만 두고 조용히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아, 이거 놓고 오는 거 깜빡했다.” 한재찬이 품 안에 넣어두었던 장부를 꺼내며 말했다. 기무혁이 궁금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설명했다. “기관실에서 찾은 장부인데, 거래처 같은 게 적혀 있더라고.” “줘. 내가 갖다놓고 올게.” 기무혁은 한재찬에게 장부를 건네받아 배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함교로 향하면서 밀수품 장부를 휘리릭 넘겼다. 낭인 시절에 생긴, 뭐든 꼼꼼히 확인하는 습관이었다. “아는 이름도 몇 있네. 이번 기회에 싹 잡아 처넣으면 좋을 텐데…….” 장부에는 판매책들의 이름과 연락처, 그 옆으로 물품들이 적혀 있었다. 추측하기로는 밀수품과 관련된 큰손들의 명부였다. 그렇게 장부를 슥슥 넘기던 기무혁의 시선이 한 이름에서 멈췄다. 제자리에 못 박힌 듯 발걸음도 멈춰 섰다. “신……준현?” 그곳에는 신강헌의 삼촌이자 유일한 가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 * “이것으로 신입맹원 수습교육을 마친다. 오늘부터 주말까지 휴식 후, 각자 소속으로 돌아가 자랑스러운 무림맹의 일원으로 세상의 정의를 밝히는 데 힘쓰도록!” 교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입맹원들이 한목소리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예-!” 그 선두, 건장한 무림인들 사이에서도 머리 반개는 큰 신강헌이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옆의 맹원들이 귀가 먹먹할 정도의 목청이었다. 호랑이 같은 무림맹 교관도 그 모습에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모두가 가장 듣고 싶었을 말을 해주었다. “그럼 이만 해산!” “해산-!” 지옥 같았던 며칠간의 합숙교육에서 해방된 신입맹원들이 빛의 속도로 흩어지는 와중에, 신강헌이 교관에게 다가왔다. 교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강헌 맹원. 뭐 궁금한 거라도 있나?” “네! 오늘부터 바로 출근해도 되는지 궁금해서요!” “……상관이야 없지. 그런데 자네는 피곤하지도 않나?” 일주일간 진행되는 무림맹 신입맹원 합숙교육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과거 검마 최건이 커리큘럼을 만들어 놓은 후로, 경험한 모두가 하나같이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며 진저리를 쳤다. 무림맹에 신입맹원 백 명이 입맹하면, 그중에 두셋은 입맹을 포기하고 나갔을 정도. 그만큼 체력과 정신력을 극한까지 소모하는 교육인데……. “몸이 근질근질거려서요. 백호단 선배님들한테도 빨리 인사하러 가고 싶고…….” 신강헌이 굵은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 괴물 같은 체력에 호랑이라 불리는 무림맹의 교관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 내가 무림맹 교관 10년차에 너 같은 녀석은 처음이다.” 신강헌은 그 지옥 같다는 신입맹원 교육기간 동안 한 번도 힘들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항상 제일 먼저 나서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고, 자연스레 모든 평가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받았다. 뒤처지는 조원들을 종종 힘으로 설득해서 끌고 가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교관은 그 점도 나쁘게만은 보지 않았다. “백호단으로 간다고 했지? 아버지가 계셨던 곳이기 때문인가?” “예.”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신강헌에게, 교관은 처음으로 미소를 보여주며 덕담을 건넸다. “자네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어. 리더십이 좀……. 과격한 것만 빼면 말이지. 건승을 빌겠네.”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에, 신강헌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피어났다. “감사합니다!” 교관에게 인사를 마친 신강헌은 설레는 마음으로 백호단 건물로 향했다. ‘아버지가 계셨던 곳.’ 신강헌의 부친 신재현은 무림맹 백호단의 부단주를 지낸 인물이었다. 최건은 그가 타의 모범이 되는 훌륭한 무림인이었다고 했고, 무림맹주 여필극은 그가 협객이었다고 말했다. 삼촌에게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부모님 얘기만 나오면 삼촌은 늘 표정을 굳히며 화제를 돌렸으니까. ‘더 알고 싶어.’ 신강헌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했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무림맹에 입맹했으니 분명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분을 아는 사람들이 무림맹에 남아있을 테니까. 하지만 부모님 때문이 아니었어도, 신강헌은 자신이 무림맹에 지원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안녕하십니까! 백호단 신입맹원 신강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백호단 건물 앞에 도착하자마자 포권을 취하며 우렁차게 인사하자 지나가던 무인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신강헌은 그들에게 씩 웃어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에 백호단 정복을 입고 찾아가면 다들 놀라겠지?’ 퇴근 후에는 곧바로 카페 나루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무림맹원이 되어 나타난 자신을 보고 놀랄 기무혁과 김복자, 아저씨아줌마를 생각하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분명히 다들 자기 일처럼 축하해줄 것이다. ‘……삼촌은 별로 안 좋아하겠지만.’ 곧 해외 출장에서 돌아올 삼촌을 생각하면 가슴이 조금 답답해졌지만, 신강헌은 결국 삼촌도 자신의 선택을 이해하고 응원해 줄 거라고 믿었다. 122화. 전부 다 널 위해서야 신강헌은 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원장님! 신강헌이 저희를 때렸어요! -……강헌아. 또 너냐? 소년에게 보육원은 따분하고 짜증 나는 곳이었다. 어릴 때부터 또래 중에서 가장 덩치가 컸고, 힘은 몇 살 위의 형들보다도 셌다. 열 살이 넘은 후로는 싸움에서 져본 적이 없었다. -저 자식들이 먼저……. 하, 됐어요. -신강헌! 너 어디 가! 거기 안 서! 신강헌은 변명하는 대신, 약한 아이들을 몰래 괴롭히던 패거리들을 선생님들이 없는 곳에서 더 흠씬 두들겨 팼다. -강헌아, 고마워……. -알았으니까 꺼져. -……. 괴롭힘당하는 녀석들도 신강헌이 보기엔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주먹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훌쩍이는 모습이 짜증 나 몇 번 대신 싸워줬을 뿐, 친하게 지낼 생각 따위는 없었다. 신강헌은 늘 혼자였다. 보육원의 문제아이자 골칫거리. 나이가 들고 덩치가 커질수록 또래 아이들은 신강헌을 무서워하고 멀리했다. 자신들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이었다. -무공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혼자서 열두 명을 쓰러뜨렸다고요? -제대로 무공도 익히지 않은 녀석이 대체 어떻게……. -무림맹에서 봉사활동 나오는 무인들이 알려주는 기초동작 있잖아요. 그걸로 싸웠답니다. -그건 그냥 체조잖아요! 잘난 척하던 무공 학원 양아치들이 거슬려서 때려눕힌 이후로, 보육원 선생님들조차 슬금슬금 신강헌의 눈치를 살폈다. -강헌아. 원장님은 네 재능이면 훌륭한 무림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원 프로그램에 한번 신청해 보지 않겠니? 그중에는 소년의 압도적인 재능을 알아본 원장님의 제안도 있었지만. -관심 없어요. -잘 생각해 보렴. 무림인이 되면 다양한 직업을 얻을 수 있고, 사회에 좋은 일도 많이 할 수 있어. 또……. -싫다고요! 그러니까 짜증 나게 하지 마세요. 아니면 저보고 여기서 나가라는 거예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그 시절 신강헌에겐 아무런 꿈도 목적도 없었다. 무공이 싫다기보다는 단순히 누가 시키는 걸 하기가 싫었다. 힘들고 귀찮은 것도 질색이었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네가 강헌이냐? -……누구신데요? 신강헌은 그 질문을 하면서도 상대가 자신과 혈연관계가 아니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이목구비가 닮은 두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형을 많이 닮았네. 내가 네 삼촌이다. 다소 신경질적인 말투였지만, 신강헌은 상대가 하는 말의 내용에 놀라서 그런 부분까지는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늦게 데리러 와서 미안하다. 앞으로는 나랑 같이 살자. -어……. 진짜요? 신강헌은 멍청한 표정으로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갖게 된 가족.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던 사춘기 소년이라고 해도, 아니 그래서 더 가족이란 존재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여기가 네 방이다. -와, 졸라 크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 금방 준비해 주마. -……저 진짜 여기서 살아요?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묻는 신강헌의 어깨에, 신준현이 친근하게 팔을 두르며 속삭였다. -강헌아. 너랑 나는 서로 하나뿐인 혈육이야. 그러니 삼촌은 너한테 뭐든지 해줄 수 있어. 해외를 오가면서 사업을 하는 삼촌의 얼굴을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 -대신 하나만 부탁하자. 진지한 얼굴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유일한 가족. 신강헌은 그 부탁이 무엇이든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공을 익혀라. 넌 분명 나중에 대단한 무인이 될 거고, 형과 형수님도 그걸 원할 거야. -……삼촌. 부모님 얘기 좀 해주세요. 세상 그 무엇보다 궁금한 것이었지만, 삼촌은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때가 되면 말해줄게. 네가 어른이 되면……. 그러니 지금은 무공에 집중하자. 응? 왜 지금 알려주지 않는지 불만도 생기고 짜증도 났지만, 신강헌은 삼촌의 거듭된 설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신 괜히 투정을 부렸다. -무공 같은 건 귀찮은데……. 그냥 안 익히면 안 돼요? 진심이 아닌 뚱한 마음에 한번 해본 말이었다. 하지만 그날 삼촌은 처음으로 신강헌에게 정색을 했다. -강헌아. 삼촌을 실망시키지 마라. 내가 유일한 부탁이라고 했지? 이것마저 싫다고 하면…… 난 어떻게 해야 너랑 계속 잘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순간, 다시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난 소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열심히 할게요. 삼촌은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밝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래, 전부 다 널 위해서야. 그러니 열심히 하자.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삼촌과의 관계에 묘한 선 같은 것이 생긴 것은. 약속대로 무공만 꾸준히 익히면 삼촌은 만족해했다. 조카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SNS에 눈살 찌푸려지는 게시물을 올려도, 고등학교에 진학해 싸움을 벌이고 다녀도, 어떤 사고를 쳐도 화내지 않았다. * * * “……부끄러운 과거는 오늘부로 청산이다.” 새삼스레 흑역사를 떠올린 신강헌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때리며 중얼거렸다. 천방지축 망나니처럼 살았던 신강헌은 더 이상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어엿한 성인이자 무림맹 소속의 일류무인이었다. ‘부모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무인이 된다. 그리고…….’ 신강헌은 백호단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당차게 포부를 밝혔다. “미래의 한국제일인 신강헌! 그 전설의 시작이자 첫걸음을 백호단에서 디뎌보겠습니다!” 신강헌은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무림맹원들에게 히죽 웃어주었다. 이 정도는 해야 기에서 눌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제일인이 되겠다는 말은 진심이기도 했다. ‘기다려라, 미친놈. 금방 뛰어넘어 줄 테니까!’ 한국제일인을 목표로 삼으며, 신강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기무혁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후로 항상 천재 소리만 들어온 자신이 한 번도 제대로 이겨보지 못한 괴물. 처음으로 신강헌에게 벽을 느끼게 한 존재였다. 하지만 신강헌은 벽을 만나면 더욱 불타오르는 성격이었다. “두고 봐라. 올해 안에는 제대로 박살내 줄 테니까!” “저기요, 조용히 좀 해주세요.” “넵. 죄송함다!” 백호단의 행정 직원에게 주의를 받은 신강헌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그대로였다. 무인으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도 생겼고, 반드시 뛰어넘고 싶은 라이벌도 있었다. 백호단 건물을 가로지르는 신강헌의 걸음은 당당했고 가슴은 활짝 펴졌다. 이 괴상한 신입을 맞이한 백호단 소속 단원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네가 재현 형님 아들이라는 그 녀석이지?” “이렇게 보니 닮았네! 하하하!” “성격은 완전 딴판인데…….” 그중에는 신재현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나이가 지긋한 맹원들이었다. “맞습니다! 제가 백호단 부단주를 지내신 신재현의 아들 신강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들!” “선배는 무슨. 삼촌이라고 불러 인마.” “하, 영상으로 봤을 때도 느꼈는데, 근골이 어마어마하구나.” 신강헌은 1층부터 시작해서 문만 보이면 열고 들어가서 인사를 돌렸다. 패기 넘치는 신입의 모습에 대부분 재밌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하! 이거 골때리는 자식이네!” “하는 짓 보니까 앞으로 우리가 잘 보여야겠는데?” 백호단을 구석구석 쏘다닌 신강헌은 마지막으로 맨 위층에 있는 단주실로 향했다. ‘이 정도면 눈도장은 제대로 찍었겠지?’ 자신을 반겨주는 맹원들의 반응에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벌써부터 자기 집인 것처럼 백호단이 편했다. 오늘 신강헌의 기분은 최고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때마침 단주실의 문이 열리며 생각도 못 했던 사람과 마주하기 전까지는. “……어?” 벌컥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백호단주가 아니라 신준현이었다. 그 뒤로 백호단주가 낭패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강헌아.” “삼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흔들리는 신강헌의 눈동자에,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표정이 담겼다.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닮은 모습이었다.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잘됐다.” 저벅저벅 걸어온 신준현이 조카에게 말했다. “백호단주님에게는 내가 잘 이야기했다. 이제 돌아가자.” “……어딜 돌아가요?” “집에 가야지. 넌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 없으니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그의 말에, 신강헌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표정을 굳혔다. “삼촌 혼자서 돌아가요. 난 단주님께 인사드리고 갈 거니까.” “신강헌!” “나 무림맹 시험 봐서 합격했고, 수습교육도 끝났어. 삼촌한테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하긴 한데…….” 마른침을 삼킨 신강헌은 애써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백호단 소속 무인이 되기로 결정했으니까 잘하라고 응원이나 해줘요.” 신강헌은 삼촌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팔대문파 중 가장 좋은 조건을 제안하는 곳과 계약하는 것. 얼마 전까지는 신강헌도 거기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지난 몇 년간 자신이 무림인이 되도록 지원해 준 삼촌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가 백호단 부단주를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팔대문파가 자신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리 삼촌이 반대하더라도 결심을 바꾸지는 않을……. “무림맹이 네 부모님을 죽게 한 곳인데, 이곳 소속이 되겠다고?” 그 순간 신강헌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겨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신준현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백호단주를 바라봤다. “단주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백호단주는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신준현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걸렸다. “부끄러운 건 아는지 변명도 못 하는군. 그래, 내가 말해주마.” 조카가 어른이 되면 알려주겠다고 한 이야기가 신준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네 아버지는 무림맹이 무모하게 펼친 사파 토벌작전 중에 돌아가셨다.” “그건…….” 백호단주가 무언가 말하려고 했으나, 신준현이 차가운 표정으로 쏘아보며 말을 끊었다. “백번 양보해서 무림인이 싸우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는요?” 백호단주가 그 시선을 피하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 신준현이 하는 이야기는 같은 백호단 동료였던 이들 중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비화였다.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백호단주를 바라보던 신준현이 조카를 돌아보며 말했다. “포위망에서 탈출한 놈들 중 하나가 보복을 했다. 형님의 집 주소를 수소문해서 네 어머니를 찾아갔지. 형수님이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았다면…… 강헌이 너도 그때 죽었을 거다.” 진실을 알게 된 신강헌은 잠시 굳은 것처럼 서 있었다. 그러다 겨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삼촌이 하는 말이 전부 사실인가요?” 백호단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충분했다. 신준현이 백호단주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때 무림맹은 뭘 하고 있었습니까? 강헌이는 보육원으로 보내졌고, 당시 해외에 있던 유일한 혈육인 제겐 연락조차 하지 않았죠.” “저희도 몇 번이나 연락드리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됐습니다. 변명을 듣자고 한 말이 아니니까.” 신준현이 다시 조카를 돌아보았다. 어깨를 움켜쥐는 손에 힘을 주면서였다. “강헌아. 난 너마저 형님처럼 잃고 싶지 않다.” “…….” 신강헌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무림맹 정복을 벗어 던진 채 집에 와 있었다. * * * 신강헌은 삼촌이 내민 서류를 말없이 바라봤다. “태도문에서 보내준 계약서다. 우리가 받아본 계약서 중에 가장 좋은 조건이고, 네 영상을 본 장문인이 한번 무공을 가르쳐보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어. 또…….” 태도문(太刀門)은 팔대문파 중 도법만을 익히는 문파로, 이름과 달리 도(刀)이기만 하면 크고 작은 것부터 비도와 쌍도까지 전부 다뤘다. 또한 태도문주는 초극문주와 함께 팔대문파의 장문인들 중에서도 유별난 무공광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덕분에 최근의 사태에서도 크게 비난받지 않은 인물이었다. 도법을 익힌 신강헌과 궁합도 잘 맞으니, 최고의 선택지 중 하나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신강헌의 귀에는 그런 이야기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신강헌. 듣고 있냐?” “……네.” 들으나 마나 한 대답에 한숨을 길게 내쉰 신준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내가 지금까지 돈 때문에 계약을 질질 끈 줄 알았지? 맞다. 왜인 줄 아냐? 돈을 많이 준다는 건 그만큼 가치를 높게 쳐준다는 뜻이기 때문이야.” “삼촌. 저는…….” 입가에 싸늘한 조소를 띤 신준현이 조카의 말을 끊었다. “세상 일이 돌아가는 게 그래. 몸값이 네 가치다. 호구처럼 싼값에 팔리면 여기저기 이용만 당하다 버려지는 거야. 나는 두 번 다시는 그런 꼴 보고 싶지 않다.” “……아버지가 호구였다는 거예요?” “그럼 아니냐?” 신강헌이 사나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신준현이 한발 물러나며 작게 혀를 찼다. “일단 좀 쉬고, 계약서는 천천히 읽어봐.” “…….” 조카의 어깨를 두드려준 신준현은 해외에서 진행하는 사업에 조금 문제가 생겼다며, 급한 일이라 며칠 나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전부 다 널 위해서야. 삼촌은 네가 현명한 결정을 할 거라고 믿는다.” “다녀오세요.” 신강헌은 집을 나서는 삼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삼촌이 주고 간 계약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유, 자신이 고아가 된 과정을 알게 되었다. 무림맹의 무모한 작전,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않아 결국 어머니까지 죽게 만든 것, 고아원에 있는 자신을 방치한 것까지. 삼촌이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 ‘아버지가 무림맹에 평생 충성한 결과가 이거야?’ 화가 났다. 자신의 시선을 피하던 백호단주에게. 자신을 보고 친근하게 웃어주던 백호단의 단원들에게도 이유 모를 증오가 끓어올랐다. “……그딴 게 뭐가 정의야.” 이를 악문 신강헌은 반쯤 구겨진 태도문의 계약서를 다시 펼쳤다. 내용이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하지만 뭐가 됐든 무림맹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신강헌이 펜을 찾아 계약서에 사인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지이잉-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바라보자, 좀처럼 먼저 연락하지 않는 이름이 떠 있었다. “……기무혁?” 액정 위에 뜬 [미친놈]을 본 신강헌은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야. 내가 지금 좀 기분이 그렇거든. 뭔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문 좀 열어봐.] “……뭐?” [지금 너네 집 앞이라고.] 거실로 나가서 인터폰을 확인하자 정말로 기무혁이 서 있었다. 평소와 같은 눈매로 카메라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는데, 겁먹은 가사도우미가 신강헌에게 물었다. “겨, 경찰에 신고할까요?” 간신히 뜯어말린 신강헌이 직접 밖으로 나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네가 갑자기 여긴 왜 왔는데?” “친구네 집에 놀러 오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되냐? 아, 그리고 이건 빈손으로 오긴 좀 뭐해서.” 기무혁이 손에 들고 온 쌍화탕 한 박스를 내밀었다. “……아재냐?” 선물을 받아 든 신강헌이 황당하게 바라봤지만, 기무혁은 신경 쓰지 않고 처음 와보는 신강헌의 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집 좋네. 넓어서 이것저것 숨기기에도 좋겠어.” “뭐라는 거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기무혁이 신강헌에게 물었다. “나 오늘 자고 갈 건데, 남는 잠옷 있냐?” 그 뻔뻔한 말에 신강헌은 짜증이 나는 와중에도 헛웃음을 흘렸다. 123화. 대답 잘해라 기무혁은 신강헌이 가져다준 잠옷을 보고 인상을 잔뜩 구겼다. “……다른 건 없냐?”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입장이기에 뭘 주더라도 군말 없이 입으려고 했다. 구멍이 숭숭 뚫린 거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귀와 꼬리가 달린 호랑이 동물 잠옷만큼은…… 아무리 기무혁이라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남는 잠옷 달라며? 싫으면 빤스만 입고 자든가.” 이미 곰 잠옷으로 갈아입은 신강헌이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기무혁은 혐오스러운 무언가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잠옷 차림의 신강헌을 바라보다 불현듯 생각났는지 말했다. “제주도에서 입던 거 있잖아. 그거라도 내놔.” “그거 내 취향 아니라서 버렸음.” “뒤져서 나오면…….” “남의 집에 갑자기 쳐들어온 새끼가 말이 많아? 아 싫으면 가라고!” “……하.” 오늘따라 금쪽이처럼 구는 신강헌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기무혁은 이곳에 찾아온 목적을 되새기며 인내심을 발휘했다. 잠시 후, 결국 호랑이 잠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온 기무혁을 본 신강헌이 낄낄거리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마구 찍었다. “푸하하하! 준다고 그걸 진짜 입냐?” “……넌 일단 맞고 시작하자.” 주먹을 말아쥔 기무혁이 신강헌에게 달려들었고, 곧 호랑이와 곰의 난투가 벌어졌다. 파바바박! 주방에 있던 가사도우미가 깜짝 놀랄 정도로 요란한 싸움박질이었다. “역시 경찰에 신고를……!” “우리끼리 그냥 노는 거예요, 노는 거!” “죄송합니다. 저희끼리는 만나면 하는 인사 같은 거라서요.” 경찰을 부르려는 가사도우미를 간신히 설득해 퇴근시킨 후. 주먹다짐으로 오랜만에 회포를 푼 두 사람이 식탁에 마주 앉았다. 신강헌이 아무리 봐도 수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래서 왜 왔는데?” ‘너네 삼촌 뒤 좀 캐보려고.’ 그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기무혁은 적당한 핑계를 둘러댔다. “너 본 지도 좀 됐고, 뭐 하고 지내나 궁금해서…….” “지랄하네.” “엄마아빠가 강헌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오라고 해서 왔다. 됐냐?” 투덜거린 기무혁이 메고 온 백팩에서 부모님이 싸준 간식을 꺼내자 신강헌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그렇지. 잘 먹겠습니다!” 곧바로 샌드위치부터 꺼내서 우물거리는 신강헌을 잠시 바라보던 기무혁이 말했다. “마실 것 좀 없냐? 간만에 술도 괜찮고.” 케이크를 포크로 반 토막 내려던 신강헌이 심히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너 오늘따라 이상하다? 내가 아는 미친놈은 먼저 술 마시자고 할 놈이 아닌데?” 신강헌이 아는 기무혁은 ‘어릴 때부터 몸 관리를 해야 나이 먹고 골병들지 않는다.’는 꼰대 같은 소리를 하는 녀석이었다. 마셔도 한두 잔으로 기분만 내고 마는 자식이, 갑자기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한다? 다른 때 같았으면 무슨 꿍꿍이냐고 의심부터 했겠지만……. “싫으면 말고.” “누가 싫대?” 지금의 신강헌은 차라리 잔뜩 취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신강헌이 히죽 웃었다. “잠깐 기다려 봐. 삼촌이 아껴둔 위스키 전부 꺼내 올 테니까.” 잠시 후. 신강헌이 크고 작은 위스키병을 잔뜩 끌어안고 오자 기무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술을 잘 모르는 그가 봐도 수백만 원어치는 넘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너 이러다 삼촌한테 쫓겨나는 거 아니냐?” “그럼 너네 집에 가서 재워달라고 하지 뭐. 네가 먼저 마시자고 했으니까 먼저 뻗어서 쓰러지지 마라?” “하여간 또라이 새끼…….” 곧 본격적으로 술판이 벌어졌다. 신강헌은 비싼 위스키를 맥주 마시듯 따라서 들이켜기 시작했다. 취하려고 작정한 듯한 그 모습에 기무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자식 왜 이래?’ 이유가 있어서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하긴 했지만,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심상치 않은 신강헌의 표정에 결국 기무혁이 물었다. “무슨 일 있었냐?” “내가 고아가 된 X같은 이유를 알아버렸거든.” “……?” 신강헌은 연거푸 몇 잔을 더 마셨고, 술기운에 얼굴이 붉어지고 난 후에야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눈이 충혈된 신강헌이 억지로 입매를 비틀어 웃으며 말했다. “보육원에 있는 동안 날 찾아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거든? 그때 난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유도 모르고 원망만 했다고. 그냥 무책임하게 갖다버린 줄 알고…….” 무림맹의 무리한 지시를 따르다 돌아가신 아버지. 갓난아기인 자신을 혼자 지키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무림맹의 행동까지. 모든 것을 알게 된 신강헌의 마음에 남은 것은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과 무림맹에 대한 분노였다. “이딴 게 정의를 추구한다는 무림맹이야? 삼촌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난 아무것도 모르고 그 인간들한테 실실거리고 있었을 거 아냐……!” 기무혁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섣불리 상대를 위로하거나 조언하는 것보단 때론 조용히 들어주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무림맹 X까라고 해! 난 태도문이랑 계약할 거니까. 그리고 나중에 우리 부모님 돌아가신 거랑 연관된 새끼들 전부 다 찾아내서…….” 하지만 친구가 사리분별을 못하고 순간의 충동으로 중요한 판단을 내리려 한다면 나설 수밖에. “야.” 기무혁은 신강헌이 병째로 들이켜던 위스키를 빼앗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울분에 찬 신강헌과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들은 건 결국 삼촌이 해준 말뿐이잖아. 그것만 가지고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결정을 하겠다고?” 쾅! 식탁을 내려친 신강헌이 감정이 격해진 얼굴로 기무혁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지금 우리 삼촌이 거짓말을 했다는 거냐?” 평소처럼 장난이 섞인 것이 아닌, 진심 어린 분노가 깃든 눈빛. 여기서 조금만 더 선을 넘으면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기무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등신아, 내가 언제 거짓말이라고 했냐? 같은 사실을 두고도 입장에 따라 말이 달라지는 거라고. 그리고…….” 기무혁은 안주로 꺼내 온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난 너희 삼촌 싫어해.” “그거 봐! 네가 평소에 우리 삼촌을 싫어하니까……!” 쾅! 똑같이 식탁을 내리쳐 말을 끊은 기무혁이 사납게 신강헌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조카 꼬라지가 이런데 자기 일 바쁘다고 계약서만 달랑 놓고 가버리는 사람을 좋아할 수가 있냐?” “……!” 신강헌은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삼촌과 자신의 관계가 보통의 가족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흔히 말하는 따뜻한 가족의 정 같은 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는 것을.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기무혁의 화목한 가족을 보고 나서 더욱 느끼게 되었다. “……모든 가족이 다 너희 부모님 같은 건 아냐.” “그렇다고 다 너희 삼촌 같지도 않지. 제주도에서 너 다쳐서 병원에 누워 있을 때도 얼굴도 한 번 안 비치던데.” “씨발 너 나랑 삼촌 사이 갈라놓으려고 작정했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기무혁은 말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네 미래를 아는데 당연히 갈라놔야지.’ 훗날 신강헌을 천마신교의 주구이자 테러리스트로 만든 것이 신준현이라는 사실이 이제는 거의 확실했으니까. “아오, 씨……!” 위스키 한 병을 병나발로 단숨에 비워버린 신강헌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아. 어쩌라고 진짜…….” “나라면 직접 알아볼 거야.” “뭘 어떻게?” 기무혁이 미개봉한 위스키를 까서 신강헌의 잔에 따라주며 말했다. “백호단주든 무림맹주든 찾아가서 물어보는 거지. 부모님에 대해서 알려달라고. 왜 내가 고아가 되게 내버려뒀냐고. 증명할 자료가 있으면 내놓으라고 소리라도 질러야지.” 신강헌은 기무혁이 주는 대로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며 물었다. “그래도 안 알려주면?” “뒤집어엎어. 너 그런 거 잘하잖아.”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는 기무혁의 표정에, 신강헌이 피식피식 웃었다. “흐흐흐. 미친놈. 말은 쉽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주량을 한참 넘겨서 눈이 풀린 신강헌이 비틀거리다 그대로 식탁에 고개를 처박았다. 쿵……. 기무혁은 식탁에 머리를 박고 잠든 신강헌을 부축했다. 큰 덩치를 질질 끌어다 방 침대에 대충 던져놓고 밖으로 나왔다. “후우. 술 더럽게 세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기무혁은 내공으로 몸 안에 쌓인 주기를 전부 몰아냈다. 신강헌을 취하게 만들기 위해 마셨을 뿐, 그에겐 처음부터 다른 목적이 있었다. ‘미안하지만 너희 집 좀 뒤져야겠다.’ 신강헌의 집은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고, 신준현의 방은 위층에 있었다. 거실과 계단에 CCTV가 설치돼 있었지만 이미 사각을 파악해 둔 후였다. 카메라에 걸리지 않게 신준현의 방 앞에 도착한 기무혁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둘만 사는 집인데 자기 방에 도어락을 설치해 놨다? 보여주기 싫은 게 많으신가 보네.” 기무혁은 디지털도어락을 해제하는 방법은 몰랐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콰직! 도어락을 가볍게 박살 내 뜯어낸 후, 안으로 들어가 능숙한 솜씨로 방을 뒤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준현이 숨겨둔 밀수품 장부와 밀수품 일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지금까지 나온 증거만 가지고도 신준현을 감옥에 보내는 건 충분했다. 그러나 기무혁은 뭔가 아쉬운 듯 미간을 좁히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게 전부라고? 그렇다기엔 너무 쉬운데.’ 기무혁이 가장 찾고 싶었던 것은 천마신교와 관련된 증거였다. 만약 신준현이 흑천회 그 이상과도 연줄이 닿아 있다면, 단숨에 천마신교와 관련된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라도 놓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무혁은 시간을 들여서 처음부터 다시 뒤졌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방에 걸려 있는 액자였다. “혹시…….” 액자에는 신준현이 앳된 얼굴의 신강헌과 보육원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들어있었다. 기무혁이 조심스럽게 액자에서 사진을 꺼냈다. 그리고 사진을 뒤집자 몸을 만 지네처럼 생긴 붉은 벌레 형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레드웜.” 웬만한 일에는 잘 놀라지 않는 기무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마신교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은 아니지만, 거기로 통하게 해줄 열쇠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이걸 여기서 볼 줄이야…….” 중얼거리던 기무혁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취해서 잠든 줄 알았던 신강헌이 문 앞에서 굳은 표정으로 기무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레드웜이 뭔데?” 이내 그의 시선은 기무혁의 손에 들린 사진을 향했다. “응? 대답 잘해라, 기무혁.” 그 눈빛은 기무혁이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싸늘했다. 124화. 빚쟁이라고 하면 기무혁은 신강헌이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몸을 숨기거나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큰 의미는 없었을 테니까.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몰라.’ 설득보다는 증거를 직접 보여주는 편이 신강헌도 납득하기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기무혁은 여전히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강헌에게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깨어 있었냐? 분명히 잠든 걸 확인하고 움직였는데.” “……무림맹에서 귀식대법이랑 이것저것 좋은 걸 배웠거든.” “처음부터 날 의심했다는 소리네. 친구로서 조금 섭섭한데?” “뻗게 만들려고 일부러 술 먹인 새끼가 할 말이냐?” 성큼성큼 다가온 신강헌이 기무혁이 들고 있던 사진을 빼앗았다. 보육원에서 나오던 날 삼촌과 함께 찍은 사진.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기도 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강헌이 사진 뒷면에 찍힌 붉은 인장을 발견했다. “……이게 레드웜이라는 거지? 뭔지 설명해 봐.” “세계적으로 유명한 용병 조직.” “난 처음 듣는데?” “국내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레드웜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것은 몇 년은 더 지나서였다. 기무혁은 놈들에 대해서 아는 정보를 가감 없이 설명했다. “주로 전쟁, 암살, 민간인 학살과 납치 같은 짓을 저지르는 놈들이야. 스스로 벌레라고 자처할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한 범죄자 집단이지.” “…….” 신강헌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일그러졌다. 그런 끔찍한 조직의 인장이, 삼촌과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의 뒤에 찍혀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불길하게 느껴졌으니까. 기무혁은 그런 반응을 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거기에 찍힌 인장은 레드웜이 타겟에게 찍는 거라고 알려져 있어.”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 레드웜에 납치되었다가 간신히 탈출한 사람들이 언론에서 증언한 내용이었다. 물론 기무혁이 아는 미래에 신강헌이 레드웜에게 납치되거나 살해당하는 일은 없었다. ‘납치가 아니라 영입이 목적이었겠지. 레드웜은 단순한 용병 조직이 아니라…….’ 천마신교가 수족처럼 부리던 조직이었으니까. 전 세계를 향해 천마신교가 지배를 선포한 날 이후, 레드웜이 온갖 공작과 테러를 자행하면서 밝혀진 사실이었다. 기무혁의 머릿속에서 퍼즐조각이 조금씩 맞춰졌다. ‘신준현은 레드웜 소속 용병이거나 최소한 협력관계에 있는 인물이었어. 어쩌면 천마신교까지 닿아있을 수도 있고.’ 신준현이 해외에서 보낸 십몇 년의 기록을 자세히 추적해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터였다. 이야기를 듣던 신강헌이 눈을 사납게 부라리며 반박했다. “네 말도 전부 추측뿐인 거 아냐? 도장이야 얼마든지 비슷한 게 있을 수 있고, 이딴 게 확실한 증거도 아니잖아.” “증거가 있다면?” 기무혁은 신강헌의 손에 들린 사진을 다시 빼앗았다. 평소보다 반응이 느린 신강헌은 눈뜨고 사진을 빼앗겼다. “야! 그거 당장 돌려……!” 기무혁이 사진에 가볍게 내공을 불어넣자 레드웜의 인장이 붉게 달아오르며 혈향을 풍기기 시작했다. “레드웜의 인장은 술법적인 처리를 해서 기를 불어넣으면 피냄새가 나도록 만들어졌어.” “……!” 코를 가까이 대고 맡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기무혁이 내공을 불어넣은 순간부터 피냄새가 방 안에 진동하기 시작했으니까. 확실한 증거까지 확보한 이상, 기무혁은 신강헌에게 잔혹하리만치 명확하게 진실을 일깨워 주었다. “흑천회가 가지고 있던 밀수품 장부에서 신준현이라는 이름이 나왔어. 동명이인일 수도 있어서 확인해봤지만 너네 삼촌이 맞았고.” 기무혁은 흑천회의 밀수품 검거 작전 중에 있었던 일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처음엔 흑천회와 관련됐는지 조사할 계획이었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의 거물이었던 거지. 네 삼촌, 아니 이제는 신준현이 진짜 네 삼촌이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 신강헌은 아무런 말도 없이 삼촌과 찍은 사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기무혁은 알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녀석의 감정이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가족에 대한 건 논리로 설득되는 게 아니니까.’ 하얗게 변할 정도로 꽉 쥔 주먹을 당장 자신에게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스스스슷…… 신강헌의 몸에서 은은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전신의 솜털이 곤두설 만큼 맹렬한 살기에, 기무혁은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했다. 만약 신강헌이 삼촌의 범죄를 덮어주기로 결심했다면, 비록 자신을 이용만 하려고 한 인간일지라도 하나뿐인 가족을 지키기로 마음먹는다면. ‘더 이상은 너랑 친구로 지낼 수 없겠지.’ 기무혁은 부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서로 죽고 죽여야 했던 전생과 달리, 이번 생의 신강헌과는 계속 친구이고 싶었으니까. 꾸욱……. 그러나 동시에 언제든 싸울 준비를 했다. 진심으로 덤벼드는 신강헌을 쓰러뜨리는 것은 기무혁에게도 전력을 다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때였다. 으득! 이를 악문 신강헌이 갑자기 돌발 행동을 했다. 몸을 돌려서 벽에다 이마를 들이받은 것이다. 콰아앙-! 벽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실제로 신강헌이 들이받은 부분이 움푹 파였다. “……무슨 짓이야?” “후우우우우…….” 숨을 길게 내쉬는 신강헌의 이마가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꽤나 아픈지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으며 신강헌이 투덜거렸다. “술이 덜 깨서. 정신 좀 제대로 차리려면 이게 직빵이거든.” “미친 새낀가…….” “와 씨, 너한테 그 소리 들으니까 정신이 번쩍 드는데?” 평소와 같은 실실 웃는 얼굴로 돌아온 신강헌이었다. 기무혁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래서 결론은?” 신강헌은 삼촌과 찍은 사진을 액자에 다시 넣어서 원래 자리에 걸어두었다. 물끄러미 사진을 바라보는 눈에 여러 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지만, 망설임만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직접 알아보라며? 이제부터 그렇게 하려고.” 머리가 맑아진 덕분인지, 그동안 가족이라는 이유로 모른 척해왔던 삼촌의 수상한 행동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그걸 인지한 이상 그냥 넘어가는 것은 신강헌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어쨌든 하나뿐인 가족이잖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거야. 정말 나쁜 짓에 연루돼 있다면…….” 신강헌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부서진 도어락을 지그시 밟았다. 콰지직, 소리와 함께 도어락이 산산조각 났다. “두들겨 패더라도 내가 패.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야.” 기무혁의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이었다. * * * 날이 밝자마자 신강헌은 무림맹 정복으로 갈아입었다. 삼촌에 대해 알아보기 전, 백호단주를 찾아가서 부모님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아침을 먹고 함께 집을 나섰다. 기무혁이 다소 긴장한 표정을 한 신강헌의 어깨를 두드리며 농담 삼아 말했다. “무서우면 같이 가줘?” “꺼져 이 미친놈아!” 부웅-! 돌도 깨부수는 주먹이 대상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갈랐다. 기무혁이 미리 예상하고 피했기 때문이었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신강헌이 이내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나 또라이 신강헌이야! 무림맹에서 진상으로 찍혀서 쫓겨나더라도 궁금한 건 다 듣고 온다.” “끝나면 나루로 와. 본격적인 계획을 짜보자고.” “오랜만에 크루로 활동하는 것 같네. 김복자도 오냐?” “빼먹으면 걔가 제일 섭섭해할걸?” 킥킥 웃은 신강헌이 기무혁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기무혁도 피식 웃으며 마주 주먹을 내밀었다. 툭. 두 사람은 주먹을 가볍게 부딪치고 헤어졌다. 잠시 신강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기무혁도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내 방식대로 정보를 더 모아야겠어.’ 신준현에 대한 조사는 신강헌 때문이기도 했지만, 천마신교와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현시점에서 레드웜에 대한 정보는 국내에는 거의 없어. 아까 전화했을 때 황숙수도 잘 모르는 눈치였고.’ 황숙수는 뛰어난 정보통이지만, 암루를 통해서 수집하는 그의 정보력은 국내로 한정돼 있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용병조직은 애초에 관심사가 아니었다. 차라리 해외에서도 사업을 벌이는 기업형 문파에서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팔대문파보다는 사파오패라든가……. “……그 자식이라면 알겠군.” 생각에 꼬리를 물다 보니 마침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레드웜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알만한 사파의 인물이 말이다. “마침 받아야 할 것도 있으니까.” 기무혁은 곧바로 택시를 불렀다. * * * 출근 시간이 살짝 지난 시간. 강남에 있는 한 고층빌딩 앞에서 내린 기무혁은 곧바로 인포데스크 직원을 찾아가서 물었다. “도주원 본부장님을 만나려고 왔는데요.” “미리 약속은 잡으셨는지…….” “안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왔다고 하면 만나줄 거예요.” “저어, 죄송하지만 사전에 약속을 하지 않으셨으면 본부장님은 만나 뵙기 힘드실 겁니다.” 진상을 보는 듯 경계하는 표정을 짓는 인포 직원에게, 기무혁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제주도에서 받은 카지노 극락의 VIP 이용권이었다. “이걸로도 안 될까요?” 그냥 세워둔 직원은 아니었는지, VIP 이용권을 본 직원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누가 왔다고 전해 드릴까요?” “빚쟁이라고 하면 알아들을걸요.” “……잠시 기다려 주시면 금방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5분도 지나지 않아서 기무혁은 고층에 있는 접객실로 안내받았다. 소파에 앉아 내부를 둘러보며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절 보자고 하셨다고요?” 깔끔한 셔츠에 포마드로 머리를 뒤로 넘긴 지적인 외모의 남자였다. 하얀 피부와 창백한 안색은 햇볕을 거의 못 쬐고 실내에서 일하는 전문직 같은 느낌을 주었고, 여유로운 동작에는 품위가 느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도주원입니다.” 제주도에서 봤을 때와는 꽤 다른 모습이었지만…… 흡혈귀를 보는 듯 어딘가 퇴폐적인 분위기는 여전했다. 기무혁이 픽 웃으며 상대를 바라봤다. “난 벌써 세 번째 보는 것 같은데. 지난번에 식사나 하자고 한 건 빈말이었나?” “저를요? 하하. 다른 사람과 착각하신 건 아닐까요.” 기무혁은 뻔히 다 알면서 내숭을 떠는 상대의 행동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댁이나 나나 서로의 정체는 이미 알고 있었잖아?” “글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지금 당장 내 돈 100억 내놔. 혈호방 본거지가 여기라고 동네방네 소문내기 전에.” 도주원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서는 은은한 살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미소가 한쪽으로 비틀리며 비로소 기무혁이 아는 모습이 드러났다. “터무니없는 협박을 하는군. 누구 덕분에 이쪽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넘실거리는 살기에 기무혁이 한발 물러서며 상대를 진정시켰다. 오늘은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돈이 없으면 내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든가. 그걸로 빚을 조금 차감해줄 의향도 있거든.” “……제정신이 아니군.” 황당해하는 상대의 반응에 기무혁은 다리를 꼬며 말했다. “자주 듣는 말이야. 근데 혈호방 간부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잠시 기무혁을 노려보던 도주원이 연기를 그만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치며 물었다. “너무 황당해서 들어는 보고 싶군. 날 찾아온 목적이 뭐지?” “레드웜에 아는 놈 있지? 관련된 정보 전부와 그놈 연락처. 그리고…… 댁을 한 번 빌려 쓰고 싶은데.” “뭐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요구에 도주원, 혈호방의 오호가 미간을 좁혔다. 125화. 동상이몽 도주원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미지의 생물과 마주한 기분으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대체 이건 뭐 하는 물건이지?’ 그는 자신이 기무혁의 약점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암루에서 만났을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고, 라이센스 시험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다시 만났을 때 도주원은 확신했다. ‘기무혁. 리차드 한 이후로 등장한 최고의 재능이라 평가받는 정파 후기지수가…… 뒷세계 조직인 청랑의 리더였다니.’ 기무혁은 아직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알 만큼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팔대문파의 스캔들과 일월문의 봉문 등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던 탓이기도 했고, 스스로가 미디어에 노출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무림계에서는 이미 가장 주목받는 신성 중 하나였다. ‘동시에 고글을 쓰고 피를 뒤집어쓰던 뒷세계의 검귀이기도 하지.’ 기무혁은 정파의 후지지수가 발을 들여선 안 될 곳에 너무 깊게 연루돼 있었다. 그 사실은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 있는 리스크였다. ‘언젠가 그 약점을 이용해서 써먹을 계획이었는데…….’ 오히려 당당하게 상대 앞에 얼굴을 드러내고 협박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닌 기무혁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설마 돈도 없고 정보도 없진 않을 것 아냐. 혈호방이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저렇게 껄렁한 말투와 사나운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녀석이 정말 정파의 후기지수가 맞긴 한 걸까? 도주원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기며 상대를 떠볼 생각으로 물었다. “……이봐, 고글살인마. 지금 네 입장을 알긴 하나?” 일부러 이름이 아닌, 뒷세계에서 부르던 별명으로 불렀다. 고글살인마는 제주도의 동굴 안에서 무려 백여 명의 검객을 죽이고 걸어 나온 살인귀였으니까. 혈호방은 그중 CCTV가 깨지기 전의 영상을 일부 가지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유출된다면 정파무인으로서 기무혁의 인생은 끝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을 찾아와 100억을 달라는 건 지능이 의심되는……. “그래서? 돈도 정보도 못 주시겠다?” 작게 혀를 찬 기무혁이 품 안에서 수첩을 하나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왜 불안하게 웃는 거지?’ 도주원은 기무혁이 탁자 위에 올려둔 수첩을 폭발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계 어린 시선으로 쳐다봤다. “내가 혈호방의 본거지를 어떻게 찾아왔을 것 같아? 청화그룹 본부장이 혈호방의 오호와 동일 인물인 건 또 어떻게 알았고?” “그 정도야 네 정체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비밀은 아니지.” 기무혁이 언급한 것들은 분명 아무나 알 수 있는 정보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숙수 정도 되는 뒷세계의 정보통을 부하로 두고 부리는 인물이라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정보이기도 했다. “겨우 그걸로 내게 협박을 하러 왔나? 우습기 짝이 없군.” 비웃음을 짓는 도주원의 얼굴에는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기무혁은 저 표정이 잠시 후 어떻게 바뀔지 맞히는 데 내기라도 할 수 있었다. “협박이 아니라 빚을 받으러 왔다니까 그러네.” 그는 탁자 위에 올려둔 수첩을 상대 쪽으로 밀며 말을 이었다. “한번 읽어 봐. 보고 나면 우리 관계에서 누가 갑이고 을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반신반의하며 수첩을 가져와 넘기던 도주원의 표정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굳기까지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걸 어디서 구했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띤 도주원의 눈빛이 상대를 잡아먹을 것처럼 매서웠다. 기무혁이 준 수첩에는 의형제들밖에 모르는 혈호방주의 진짜 이름, 혈호방의 조직도, 그리고 최고 단계의 보안을 걸어둔 사업 계획과 같은 핵심정보들이 아무렇게나 휘갈겨져 있었다. “이제야 좀 진지한 표정이 나오네.” 상대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지고,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에 기무혁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가 상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무림맹에 여기 적힌 정보를 뿌리면 어떻게 될까? 아니지, 가치를 생각하면 사파오패 쪽에 넘기는 게 낫겠어. 그럼 100억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 기무혁은 지난 생에 프리랜서 낭인으로 뒷세계에서 20년간 몸을 담았다. 거친 일을 주로 하는 낭인의 특성상 정파보다는 사파조직들에 대해서 더 잘 알 수밖에 없었고, 굵직굵직한 사건과 정보들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혈호방에 대한 정보가 지금에나 별로 없는 편이지, 십 년만 지나도 다 알려질 것들이니까.’ 처음에는 소수 정예를 지향했지만, 기무혁이 아는 미래의 혈호방은 현 사파오패 중 일부를 잡아먹으며 성장한 거대조직이었다. 게다가 그 과정은 핏물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난폭하고 잔인했다. 지금의 사파오패가 신사처럼 느껴질 정도로. ‘내가 아는 것과 똑같은 미래는 만들지 않을 생각이거든.’ 물론 그런 사실을 상상도 못 하는 혈호방 간부, 도주원의 입장에서는 극비 정보를 유출한 배신자를 잡아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군. 커피라도 한잔하겠나?” 이 와중에 침착함을 유지하는 도주원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무혁은 주도권을 쥔 이상 이야기를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빚 한번 받기 힘드네. 됐어. 갈 곳이 여기밖에 없는 것도 아니니까.” 기무혁이 미련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주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일순간 그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내 허락 없이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까드득, 이를 간 그가 섬뜩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혈호방의 최고 간부 중 한 명인 그는 오래전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일 수도 있다.’ 도주원은 그러한 의지가 담긴 살기를 기무혁에게 쏟아냈다. 사아아아악- 절정고수라고 해도 긴장할 수밖에 없을 만큼 날카로운 살기. 하지만 도주원을 빤히 바라보는 기무혁의 반응은 영 시큰둥했다. 그가 허리춤의 검파에 손을 툭 올리며 건조하게 물었다. “진짜 해보자고? 더 큰 뒷감당을 해야 할 사람이 과연 누굴까?” “…….” 단순히 무공 수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살기가 마치 지겹다는 듯한 눈동자. 스무 살을 겨우 넘긴 애송이가 아니라 전장에서 닳고 닳은 무인을 보는 듯했다. ‘게다가 저 요검…….’ 환몽이 피가 고프다는 듯 지이잉- 하고 스스로 검명을 퍼트렸다. 동굴 속에서 벌어진 난투극의 원인이 바로 저 검이었다. 탐라련에서 벌인 일 때문에 모두가 홀린 듯 뛰어들었던……. 꿀꺽. 도주원은 정말 오랜만에 긴장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암루에서 기무혁을 처음 보았을 때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스카웃해서 한번 키워보고 싶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제주도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꽤 놀랐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꺾어버릴 수 있는 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싸워서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결코 쉬울 것 같지도 않았다. 혈호방의 간부이자 다섯 번째 호랑이인 자신이 말이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 미치겠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도주원이 결국 먼저 살기를 거둬들였다. 지금 싸워봤자 자신만 손해일 것 같았으니까. 한숨을 내쉰 그가 소매를 걷어 올리자 팔뚝에 붉은 호랑이 문신이 드러났다. “좋아. 원하는 정보를 주지.” 사실상 백기를 든 것과 다름없는 말. 기무혁도 괜한 기싸움을 더 이상 이어가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도주원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단, 그냥 알려줄 순 없어. 레드웜에 대해서 알아보는 이유와 정확한 목적을 먼저 말해라. 만약 혈호방에 피해가 갈 가능성이 있다면…… 차라리 100억을 주는 편이 나을 테니까.” 납득할 만한 이유였기에 기무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혈호방에 이득이 될만한 이유라면 충분히 협력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기무혁은 이곳에 오기 전에 상대의 구미가 당길 만한 말을 준비해 두었다. “레드웜을 끌어들여서 흑천회를 칠 거야.” “흑천회?” 사파오패 중 하나의 이름이 나오자 도주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흑천회는 사파에서 가장 큰 다섯 세력 중 하나로 규모 면에서 혈호방을 압도했다. 최근 기무혁이 밀수선을 습격해 큰 피해를 입혔지만, 흑천회가 관리하는 사업 전체에 비하면 그 정도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흥미로운 이야기군. 그런데 설마 너 혼자서 꾸미는 일은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지. 무림맹이 나서고 팔대문파 중 일부가 도울 거다.” 기무혁은 가장 중요한 뒷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아직 그쪽과는 이야기를 안 해 봤지만.’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의 계획에 도주원의 눈이 커졌다. 그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이 돌아갔다. 무림맹과 팔대문파가 직접 나서서 흑천회를 친다라……. “확실히 그 정도 규모라면…….” 혈호방은 충분한 저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아직 사파오패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무림맹과 팔대문파가 연합해 흑천회를 무너뜨린다면, 그 빈 자리는 높은 확률로 자신들의 차지가 될 터였다. ‘이 정도면 안 받아들이곤 못 배기지.’ 혈호방의 야망을 누구보다 잘 아는 기무혁이기에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내 정보에 의하면 레드웜과 흑천회에 발을 걸친 인간이 하나 있어. 그래서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해. 확실하게 놈을 엮어낼 수 있게 말이야.” 사실 아직까지는 뚜렷하게 구체화된 것이 하나도 없는 이야기였다. 택시를 타고 오면서 급하게 떠오른 계획이었으니까. 하지만 기무혁은 그것을 꽤나 그럴듯하게 포장했고, 그의 정보력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게 된 도주원에겐 무척이나 가능성이 높게 들렸다. “꽤 솔깃한 계획이야. 정말 네 생각대로 진행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물론 모든 말을 다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기무혁도 상대에게 대단한 믿음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실패해도 너희가 손해 볼 건 없잖아? 한 손 거들어 준다고 해도 리스크가 큰 것도 아니고.” “혹시 아까 나를 빌려 쓰겠다고 한 말이…….” 역시 눈치가 빨라서 좋았다. 기무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 “대어를 낚으려면 제대로 된 미끼가 필요하니까. 아까 보니까 연기가 못 봐줄 정도는 아니더라고.” “하하하! 혈호방 간부를 미끼로 쓰겠다?” 도주원이 처음으로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긴밀한 이야기가 오간 이후. 혈호방은 기무혁의 계획에 일시적으로 협력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이 만족스레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어쩌면 우린 괜찮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될 수도 있겠어.”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해서 다행이야. 그럼 또 연락하지.” 하지만 웃고 있는 두 사람의 속내는 각각 달랐다. ‘위험한 놈이야. 더 크기 전에 기회를 봐서 싹을 잘라내야겠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이는군. 하지만 그 전에 네 목이 먼저 날아갈 거다.’ 그렇게 서로의 속내를 감춘 두 사람이 일시적으로 손을 잡기로 했다. 126화. 일이 너무 커졌나? 혈호방과 일시적 동맹을 맺고 나온 후, 기무혁은 곧바로 무림맹으로 향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으니까.’ 내친김에 무림맹의 협조까지 얻어낼 생각이었다. 일월문주 사건과 팔대문파 스캔들 이후 기무혁에게 좋은 점이 하나 있다면, 별다른 절차 없이도 무림맹 고위 관계자를 바로 만날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특혜였다. “맹주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또래 후기지수들 중에서 이렇게 무림맹주와 독대를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은 기무혁뿐이었으니까. “어서 오거라.” 무림맹주 여필극은 바쁜 와중에도 환한 미소로 기무혁을 맞아주었다. 그의 책상에는 결재서류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최근에 강도 높은 업무에 시달렸는지 언제나 강철 같던 무인이 수척해 보였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기무혁이 절도 있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혈호방 본거지에 갔을 때와는 딴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너무 바쁘신데 제가 괜히 뵙겠다고 한 것은 아닌가요?” “괜찮다. 마침 한숨 돌리면서 쉬려던 참이었으니. 거기 앉거라.” 여필극은 탁자를 두고 마주 앉은 기무혁의 기도를 잠시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혁이 너는 볼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그새 더 발전했단 말이냐? 게다가…….” 여필극의 시선이 기무혁의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환몽에 잠시 머물렀다. 지잉-. 환몽은 소심하게 울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검마에게 단단히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노인 고수만 보면 얌전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검마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제주도에서 신병이기를 얻었다고? 다루는 게 어렵지는 않더냐?” “스승님께서 허락해 주셔서 이제야 겨우 들고 다니는 수준입니다.” 정파 후기지수의 모범과 같은 겸손한 대답에, 여필극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이 아이를 보니 한국 정파무림의 미래가 실로 밝구나.’ 그는 올곧은 마음을 가진 후학의 가파른 성취, 그리고 천금으로도 구할 수 없는 신병이기를 얻은 것에 진심으로 기뻤다. “명성을 떨친 절세고수들에겐 신병이기와 함께한 일화가 따르는 법이지. 허나 병기는 결국 도구일 뿐, 명검의 날카로움에 취해 스스로의 단련을 등한시하진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허허. 내 노파심에 뻔한 잔소리를 했다.”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인 여필극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그래. 담소나 나누려고 찾아온 것 같지는 않고,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더냐?” 혹 무공 수련 중 막히는 부분에 조언이라도 구하려고 온 것일까? 최근 부쩍 많아진 맹의 업무로 정신없이 바빴지만, 여필극은 기무혁에게라면 기꺼이 시간을 할애할 의향이 있었다. ‘작은 도움만 주어도 금방 스스로 깨칠 만큼 똑똑한 아이가 아닌가. 검에 관해서라면 검마만큼 뛰어난 선생이 없지만, 심법이나 보법에 관해서라면 내 얼마든지…….’ 탐나는 재능을 가르쳐 볼 생각에 여필극이 혼자 김칫국을 마셨지만, 아쉽게도 기무혁의 용건은 그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맹주님. 흑천회를 쓸어버리고 싶은데 도와주시겠습니까?” 풉-. 무림맹주와 같은 초고수의 입에서 찻물이 뿜어져 나오는 광경은 평생에 한 번 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 힘든 일을 해낸 기무혁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고개만 살짝 틀어 찻물을 피했다. “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진심입니다.” 기무혁의 단호한 표정을 본 여필극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의 의기는 높이 산다만 쉽게 말할 일이 아니다. 흑천회는 팔대문파와 견줄만한 세력을 갖춘 자들로 섣불리 도모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진작에 흑천회를 비롯해 모든 사파오패를 박멸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사파오패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결심과 준비가 필요했다. ‘적어도 흑천회와 사파오패의 동향을 시시각각 보고해 줄 정보원이 필요할 테지. 적들의 내부 상황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 순간, 마치 여필극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기무혁이 말했다. “사파 쪽에서도 도와줄 겁니다. 혈호방과 일시적 동맹을 맺었거든요.” “……누구와?” 무림맹주인 여필극이 혈호방에 대해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최근 기세를 올리고 있는 신흥 사파조직으로 그 성장세가 위험할 정도로 빠른 조직. 근시일 내에 사파오패만큼이나 골칫거리가 될 확률이 높다고 무림맹에서 평가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게야?” “혈호방 간부 중 하나가 저한테 약점을 잡혔거든요.” “……?” 여필극이 여러 가지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기무혁이 잠시 화제를 돌렸다. “맹주님. 레드웜이라는 용병 조직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해외에서 활동하는 마도(魔道)의 무리가 아니더냐?” 정도(定道)가 올곧은 길을 추구하며 무공으로 심신을 수양하는 방법이고. 사도(邪道)가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과 권력을 좇는 것이라면. 마도(魔道)는 뒤틀린 신념을 위해 수단과 방법조차 파괴하는 광인들을 일컬었다. 그리고 훗날 등장할 천마신교가 바로 그 마도의 정점이었다. “레드웜과 흑천회의 연결고리를 찾았습니다. 이대로 두면 레드웜이 국내에 뿌리를 내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레드웜의 배후에 천마신교가 있다는 거였다. 기무혁의 목표는 한국에서 천마신교의 교두보가 될 것이 확실한 사파오패를 하나씩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자세히 말해보거라.” 진지한 눈빛이 된 여필극은 오후 일정을 취소하고 기무혁과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기무혁은 전생의 기억과 지난밤에 신준현의 방을 조사해서 알게 된 정보들을 조합해서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신준현?” “무림맹 백호단 부단주를 지냈던 신재현의 동생입니다. 신강헌의 삼촌이기도 하고요.” “……누군지 알 것 같구나.” 신강헌에게는 미리 무림맹주에게 알리겠다는 사실을 말해두었다. 최대한 은밀하게 일을 진행하겠다는 것도. 천마신교에 대한 부분만 아직 시기상조라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 외에는 모두 여필극에게 공유했다. 처음에는 갸웃거리며 듣던 여필극도 점점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흑천회, 혈호방, 레드웜이라. 사파의 무리가 많으니 이독제독의 수법을 쓰는 것이 좋겠구나. 서로 물어뜯게 만들어야 한 번에 덮쳤을 때 최대한 많이 쓸어버릴 수 있을 게야!” 지금이야 점잖은 무림맹주지만, 소싯적에는 최건 못지않게 사파의 무리들을 족치고 다녔던 여필극이었다. “얼마 전에 흑천회에서 잡아 온 간부급 하나가 무림맹 뇌옥에 갇혀 있을 텐데, 한번 재활용해 볼까요?” “옳거니! 이간계로 쓰기에 딱 좋겠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오십 살이 넘게 났지만, 사파의 무리를 박살 내자는 계획 앞에서는 나이를 뛰어넘은 죽마고우처럼 죽이 잘 맞았다. “맹주님. 이럴 게 아니라 노 원로님이랑 스승님도 함께 얘기하게 부르죠?” “하필이면 둘 다 지금 지방으로 출장을 갔지 무어냐.” “원로님이야 그렇다 치고, 저희 스승님이 멀리 출장 갈 일이 있나요?” “현상수배범 잡으러 갔다. 최건 그 친구, 노후에 여기저기 놀러 다니면서 마두도 잡고 아주 살맛이 났다. 쯧. 얘기하면 나만 배 아프니 회의나 하자.” 두 사람은 계속해서 아이디어 회의를 이어갔고, 점점 계획이 구체화되고 살이 붙기 시작했다. 시간이 금세 흘러, 어느새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기무혁과 함께 계획을 검토한 여필극이 어느 정도 확신이 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 다듬어야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한 계획인 것 같구나. 문제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탁 두드리며 고민하는 표정이, 무언가 망설이게 되는 이유가 있는 듯했다. “무림맹의 피해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맹원들이 흘릴 피가 많을까봐 걱정이구나.” “그럼 다른 사람들이랑 좀 나눠서 흘리죠.” “……무슨 말이냐?” 기무혁이 이미 생각해 두었다는 듯 말했다. “지금 명예회복을 간절히 바라는 팔대문파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함께 싸울 기회를 주면 어떨까요?” 여필극의 표정이 서서히 밝아지더니 무릎을 탁하고 내리쳤다. “호오라……. 그것참 좋은 방법이구나!” 팔대문파에 휘둘리던 예전 같았으면 꿈도 못 꿀 방법이었다. 함께 사파오패와 싸우자고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빠져나갔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누가 뭐래도 정파무림의 중심은 무림맹이고, 팔대문파는 맹주의 뜻에 따르는 시늉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여필극도 기무혁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 조만간 장문인들과 식사 자리를 한번 마련해야겠구나.” 반드시 이미지 회복을 해야 하는 팔대문파 입장에서도 결코 손해만은 아닐 것이다. 의욕을 불태우는 무림맹주를 바라보던 기무혁이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맹주님.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빠른 시일 안에 또 이야기하자꾸나.”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백호단에 있는 신강헌에 대해서는…….” 여필극이 다소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거라. 내 그 사건에 대해서 다시 조사해 볼 것이다.” “감사합니다.” 포권을 취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기무혁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일이 너무 커졌나?’ 처음에는 신준현의 뒤를 캐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레드웜이 엮였고, 혈호방에서 오호를 만나면서 흑천회도 끼워 넣게 되었다. 즉흥적으로 떠오른 계획은 무림맹주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체화되고, 실행이 충분히 가능한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옛날 같았으면 전부 나 혼자서 하려고 들었을 텐데.’ 과거와는 달라진 스스로가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고, 약간의 불안감도 들었다. 함께하는 인원이 많을수록 변수도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바꾸거나 무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굳이 옛날 방식을 고수할 필요는 없지.’ 오히려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게 된 자신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정파의 무인으로서 잘 녹아들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기무혁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맹주실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무혁이 네가 검마의 제자라서 영향을 받은 줄 알았는데…….” “네?” 기무혁이 뒤를 돌아보자 여필극이 어째선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제 보니 네가 최건 그 친구보다 더한 것 같구나. 네가 사파가 아니라 정파에 적을 두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기무혁이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활짝 웃었다. “하하. 맹주님은 유머 감각도 정말 뛰어나신 것 같습니다!” “…….” “맹주님?” 여필극은 기무혁의 시선을 피하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127화. 대체 어떻게 기무혁이 사파와 정파를 넘나들며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을 때. 아침 일찍 무림맹에 도착한 신강헌은 곧바로 백호단으로 향했다. “…….” “…….” 그가 건물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전날 신준현이 와서 했던 이야기가 하루 만에 다 퍼진 듯했다. 신강헌은 개의치 않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하지만 전날 반갑게 인사를 나눴던 사람들이 지금은 어색하게 미소를 짓거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진지한 얼굴을 보니 더 닮았네.’ ‘사고 나고 삼촌이 바로 데려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지?’ ‘그때 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래도 딱하지. 어린애가 영문도 모르고……’ ‘다들 조용. 단주님과 이야기 끝내고 나오기 전까지는 입방정 떨지 마.’ 간혹 멀리서 중얼거리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강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저 사람들에겐 백호단주를 먼저 만나고 난 이후에 물어봐도 될 일이었으니까. 잠시 후. 단주실 앞에 도착한 신강헌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 노크를 했다. 똑똑- 기무혁에게는 당장 무림맹을 뒤집어엎을 것처럼 말했지만, 지금 신강헌의 마음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차분한 상태였다. “신입맹원 신강헌입니다. 단주님께 여쭤볼 것이 있어서 찾아 뵈었…….” “들어와.” 짧고 간결한 대답, 그러나 어딘가 지친 듯한 목소리였다. 신강헌은 문을 한번 조용히 노려본 후 열고 들어갔다. 하루 만에 다시 만난 백호단주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눈 밑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모습으로 그가 신강헌을 맞이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군.”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 드리고 갔습니다. 백호단 신입 신강헌입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포권을 취하는 신강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호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라. 커피 한잔 줄까?” “괜찮습니다. 지금은 정신이 아주 맑아서요.” “……젊구만.”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신강헌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백호단주를 자세히 살폈다. 선이 굵은 인상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듯한 중년의 무인. 그 사실을 증명하듯 옷 밖으로 드러난 몸에 무수한 상처가 새겨져 있었는데, 특히 손등 위로 지렁이가 꿈틀대며 지나간 듯한 긴 흉터가 인상적이었다. “이거 말이냐?” 신강헌의 시선을 느낀 백호단주가 소매를 걷자, 손등부터 어깨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가 드러났다. 소매 위로 드러나 보였던 것보다 더 끔찍한 흉터였다. “……운이 나빴으면 팔 하나를 못 쓰게 되셨겠네요.” “그래. 재현 형님이 아니었다면 평생 외팔이가 될 뻔했지.” “아버지가요?” 신강헌이 눈을 크게 뜨고 묻자 백호단주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 오는 날, 적들에게 기습을 당한 적이 있었다. 간신히 어떻게 물리치긴 했는데…… 칼이 여길 깊게 훑고 지나갔지. 팔에 아무런 감각이 없길래 난 그냥 포기하려고 했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백호단주의 입가에 그리움으로 가득한 미소가 희미하게 맺혔다. “재현 형님이 날 업고 병원으로 미친 사람처럼 뛰어갔다. 정작 본인이 나보다 피를 더 철철 흘리면서 말이야.” 처음 듣는 부친의 이야기에 신강헌은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은 더욱 커졌다. “그런데 왜……?” “네가 궁금해하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 백호단주는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신강헌 앞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어제저녁에 집에 가서 챙겨왔다. 며칠 지나도 오지 않으면 내가 직접 찾아가서 주려고 했는데…….” 그것은 빛바랜 몇 장의 사진이었다. 무림맹 정문 앞에서 백호단의 무인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찍은 기념사진. 해변가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장난치며 뛰어다니는 사람들. 회식 자리에서 얼큰하게 취해 소주병에 숟가락을 넣고 열창하는 신재현의 모습. 마지막으로 결혼식장에서 하객들에 둘러싸인 채 활짝 웃고 있는 한 쌍의 남녀. 신강헌의 부모님이 그곳에 있었다. “…….” 넋을 놓은 사람처럼 신강헌이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자 백호단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부모님 사진을 본 게 처음인 거냐?” “……본 적은 있어요. 전부 이 사진보다 훨씬 어린 아버지 모습뿐이었지만요.” 삼촌이 보여준 사진은 전부 형제가 어릴 적에 함께 찍은 사진들뿐이었다. 아쉬움에 어른이 된 후에 찍은 사진은 없냐고 물어봤지만, 자신이 성인이 되자마자 해외에 나가서 일하느라 함께 찍은 사진이 없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마저도 아버지 사진뿐이어서, 어머니의 얼굴은 여기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 신강헌은 저도 모르게 부모님이 나온 사진을 만져보려고 손을 뻗었다가 흠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백호단주를 바라봤다. 백호단주가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가거라. 처음부터 너한테 주려고 챙겨 온 거니까.” “……감사합니다.” 몇 장 안 되는 사진을 소중하게 품 안에 챙기는 신강헌의 모습을 바라보던 백호단주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형님에게 도움을 받았지. 백호단 부단주 신재현은…… 우리에게 없어선 안 될 사람이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백호단주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강헌아. 내게 변명을 할 기회를 주겠느냐?” 평생 변명이라는 것을 해보지 않았을 것처럼 단단해 보이는 무인의 입에서 나온 말. 진실을 캐묻기 위해 준비해 온 날카로운 질문들이 많았지만, 신강헌은 그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저 오늘 시간이 많거든요.” 나이답지 않은 여유로운 대답에 백호단주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방금 넉살 떠는 얼굴이 형님을 쏙 닮았는데.” “엄마는 안 닮았나요?” “그랬으면 더 미남이 되었을 텐데. 그 점은 조금 아쉽게 됐다.” 백호단주의 실없는 농담에 두 사람이 피식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조차 잠시일 뿐, 백호단주는 곧 진지한 얼굴로 오래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형님이 임무 중에 사망하고, 네가 실종되었던 시기는…….” 소중한 은인의 아들이기에 더욱 꺼내기가 쉽지 않은 이야기. 하지만 백호단주는 최대한 담백한 어조로 서두를 열었다. “쉽게 말해 무림맹의 암흑기였다. 당시 나는 2년 차에 풋내기 티를 겨우 벗은 애송이였는데, 그런 나까지 매일 현장에 나가야 할 정도였지.” 검마 최건이 대규모 사교 토벌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은거한-사실상 축출이었다-이후, 무림맹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내부에서는 맹주를 지지하던 사람들도 한 명씩 등을 돌리거나 불명예스럽게 은퇴했고, 외부에서는 사파세력들이 일으키는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작전에 한번 참여하면 그다음 날에는 장례식에 참여해야 했다. 선배, 동료, 오가며 인사하던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지.” 나중에는 무림맹주인 여필극마저 현장에 나가서 직접 전투를 진두지휘하며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무림맹에 들어오던 기업과 정부의 지원금마저 줄어들었다. 무림맹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탓이었어.” 정파무림의 후기지수들이 무림맹이 아닌 팔대문파로 점점 발길을 돌리게 된 계기였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하고 무림맹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처럼 악재만 계속 쌓였다. 그 와중에도 남은 사람들끼리는 어떻게든 해보려 했다만…….” 그토록 힘겹게 지켜온 정의였지만, 무림맹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결국 무언가를 포기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백호단주가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강 건너 불구경만 하던 팔대문파가 그제서야 손을 내밀더구나.” 사교 토벌 작전에서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이유로 무림맹을 비난만 하던 팔대문파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단, 그들은 무림맹의 운영에 간섭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무림맹은 그것이 자신들의 목을 죌 목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유일한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는 너도 알 거다. 최근의 일이 있기 전까지 팔대문파가 무림맹을 자기네 마음대로 휘둘러댔으니까.” 신강헌은 백호단주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물었다. “……아버지도 그 시기에 돌아가셨다는 거죠?” “형님이 돌아가셨을 땐 백호단을 해체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오던 상황이었다. 부단주와 주력이 대부분 죽고, 나 같은 애송이들만 남았으니까.” 백호단주는 피곤한지 충혈된 눈을 손으로 비비고 말을 이었다. “또 한 번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와서 집에서 쉬고 있던 와중에…… 형수님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엄마가…….” “그래, 그날이었다.”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지, 백호단주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꽉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내가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땐 형수님만 쓰러져 계셨다. 너는 그곳에 없었지만, 그땐 나도 분노에 눈이 멀어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어.” 그 순간, 무림맹을 대표하는 무력단의 수장이 스무 살 신입 맹원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범인을 쫓아야 한다는 생각에 눈이 뒤집혀서 정신이 없었다. 나중에야 네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정말 미안하구나. 바로 너부터 찾았어야 했는데…….” “단주님.” 신강헌은 백호단주의 사과에 진심이 깃들어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고개를 숙일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니까.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궁금했던 사실을 알게 되자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신강헌이 이야기를 들으며 위화감을 느낀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요.” 생각해 보면 지금보다 훨씬 더 빨리했어야 하는 질문. 여태껏 삼촌의 말만 믿고, 이렇게 혼자서 백호단주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면 떠올리지 못했을 의문이었다. “……그럼 절 보육원에 맡긴 건 대체 누구죠?” 다시 고개를 든 백호단주가 몹시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신강헌과 마주했다. “나도 그게 가장 의문이었다.” 백호단주의 눈이 하루 만에 붉게 충혈된 이유. 밤을 새워서 지난 19년간 실종된 아동과 서울에 있는 보육원에 대한 정보를 요청해 전부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네가 사라졌다는 걸 안 이후로 몇 달간 너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신고된 미아들 중에 강헌이 넌 없었어. 마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신강헌은 그 말을 들으며 심장이 차가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열어선 안 될 판도라의 상자가 눈앞에서 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가 너를 찾는 걸 완전히 포기하고 난 뒤에, 한 보육원에 무연고 고아로 등록된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어제 알게 됐다. 바로 신강헌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 “강헌아. 넌 대체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된 것이냐?” 그 순간, 신강헌은 자신을 찾아오던 날 보았던 삼촌의 얼굴을 떠올렸다. 128화. 변화의 계기 길었던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 백호단주가 신강헌에게 제안했다. “괜찮으면 이따가 저녁이라도 함께 먹었으면 하는데.” “저는 좋은…… 아.” 그러겠다고 대답하려던 신강헌은 퍼뜩 기무혁과 아침에 한 약속을 떠올리곤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다음으로 미뤄도 될까요?” “그래. 생각이 복잡할 테지.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신강헌이 포권을 취하고 돌아선 순간이었다. “강헌아.” “네?” 부담감을 조금은 내려놓은 듯, 백호단주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안 되겠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편하게 삼촌이라고 불러도 된다.” “……하하.” 하필이면 ‘삼촌’이라는 호칭에 신강헌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다른 누군가를 그렇게 부르자니 순간 망설여진 탓이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백호단주에게 밝게 인사를 하고 나온 신강헌의 표정은 무림맹을 나서자마자 딱딱하게 굳었다. “…….” 세상에 하나뿐인 가족이었지만,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먼 존재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한 사람 때문이었다. ‘삼촌은 대체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거예요?’ -전부 다 널 위해서야. 삼촌은 네가 현명한 결정을 할 거라고 믿는다. 그 말이 정말 나를 위해서 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삼촌은 왜 백호단주가 해준 이야기를 지금까지 한 번도 해주지 않았던 걸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조카를 컨트롤하기 위해서?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더 끔찍한 이유가 있다든가…….” 평소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과 달리, 신강헌은 단순한 바보가 아니었다. 그저 가족이기에 바보처럼 믿었을 뿐이다. ‘남들이 뭐라 하더라도 가족은 서로 무조건 믿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뿌옇게 가려져 있던 부모님의 죽음과 자신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된 이상, 더는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다. [난 볼일 다 끝남. 먼저 아지트로 가서 기다리겠음] [ㅇㅋ] 기무혁에게 메시지를 보낸 신강헌은 복잡해진 머리를 식힐 겸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하나뿐인 혈육이 구제불능의 악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황. “…….” 배신감에 몸서리치거나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하게 될 줄 알았는데, 막상 현실이 되자 놀라기보다는 묘하게 수긍이 되었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누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아는 법이니까. ‘처음부터 날 이용하려고 한 걸까? ‘아냐, 이 모든 게 오해일지도 몰라.’ ‘만약 부모님을 죽인 범인과 관련돼 있다면…….’ ‘어떡해야 하지?’ ‘그땐 삼촌이고 뭐고 죽여버린다.’ 겉으로 보기엔 무표정하게 걷는 것처럼 보였지만, 신강헌의 머릿속은 터질 것 같았고 감정은 활화산처럼 끓어올랐다. 다만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갑작스러운 불행과 비극, 감정을 양극단으로 치닫게 만드는 이러한 일들이. 화르륵! 때론 무인에게 있어 변화나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끄윽……!” 갑자기 뱃속이 뜨거워졌다. 단전 안에 쌓인 내공이 느닷없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래?’ 신강헌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몸 안에서 적양공의 열양지기가 제멋대로 움직이며 날뛰고 있었다. 빙하신녀에게 일월문의 적양공을 받아서 익히고 난 후 처음 겪는 일. ‘설마 주화입마?’ 불길한 상상이 떠오르는 동안에도 열양지기는 멋대로 몸 안을 휘저었다. 마치 불꽃이 살아서 안을 질주하는 것 같았다. 기혈이 달궈지는 듯한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후우, 후우우우……” 신강헌은 가까운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급한 대로 적양공의 구결을 떠올리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품 안에 넣어둔 부모님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더듬자 뜨거움이 조금은 가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화르르르륵……. 다행히도 언제 그랬냐는 듯 열양지기는 제자리로 돌아갔고, 신강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신강헌의 눈동자에서 불꽃 모양의 상이 맺혔다가 사라졌지만, 당사자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아직은 깨닫지 못했다. * * * 신강헌은 지친 걸음으로 카페 나루로 향했다. 갑자기 날뛰는 열양지기를 가라앉히느라 심력을 크게 소모한 탓이었다. “후우…….” 한숨을 내쉬고 카페로 다가가자, 창문 안으로 익숙한 모습들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선 신강헌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아줌마. 저 왔어요.” “강헌이 왔구나!” 반가운 얼굴로 돌아본 기찬호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신강헌을 덥석 안았다. “너 요즘 왜 이렇게 뜸했어?” “많이 바빴어요. 무림맹에 취업도 하고, 이런저런 일이 많아가지고요.” “취업했다는 소식이야 벌써 들었지. 무림맹은 다닐 만하고?” “그게…….” 신강헌을 제자리에 세워놓고 수다를 떨기 시작하려는 기찬호의 등에서 찰싹 소리가 났다. 남편을 흘겨본 박지연이 신강헌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일단 좀 앉히고 얘기해. 강헌이 배고프지? 간단하게 먹을 거 챙겨서 금방 갖다줄게.” 신강헌이 자리에 앉자, 한쪽에서 테이블을 닦고 있던 남자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재찬이라고 합니다. 사장님들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누구세요?” “직원입니다.” 무슨 카페 직원이 무공을 이렇게까지 익히는데? 한재찬에게서 느껴지는 정제되지 않은 거친 기운에 신강헌이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카페 나루에 마지막으로 왔던 게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 사이에 무공을 익힌 낯선 남자가 [naru]가 적힌 커피색 앞치마를 두르고 일하고 있었으니까. “근데 왜 여기서 일하세요?” 경계심이 깃든 신강헌의 질문을 한재찬은 간단히 해소해 주었다. “무혁이한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그리고 사장님 두 분이 월급도 많이 주시고요.” “……음.” 기무혁이 데려왔다면 그럴 수도 있지. 납득한 신강헌이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풍기는 분위기가 묘하게 거칠어서 걱정했는데, 기무혁 지인이라고 하니 바로 이해가 됐다. “전 기무혁이랑 동갑이에요. 말 편하게 놓으실래요?” “하하. 그래도 될까?” “초면이라 좀 불편하긴 한데.” “……아, 죄송합니다.” “농담이에요.”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기찬호와 박지연이 커피와 음식을 가져왔다. 평소 신강헌이 먹는 양을 고려해서 트레이에 가득 채워온 간식들. 그러나 신강헌은 몇 입 먹는 듯하더니 그대로 내려놓았다. 처음 보는 모습에 기찬호와 박지연이 심각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너 어디 아프니?” “평소에는 앉은자리에서 샌드위치만 다섯 개씩 해치우던 애가…….” 멋쩍어진 신강헌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입맛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조금 피곤해서요.” 다른 사람들 같으면 피곤하다는 말에 그러냐며 넘어갔을 터였다. 하지만 기찬호와 박지연은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신강헌의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억지로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이었다. “……저 그럼 위에 올라가 볼게요.” 두 사람이 슬쩍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이건 가지고 올라가서 이따 먹어라.” “피곤하면 소파에 누워서 좀 쉬어.” 간식을 챙긴 신강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크루 아지트인 4층으로 올라갔다. “후우…….” 지치고 피곤한 탓에 빨리 어디든 누워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띵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신강헌이 4층에 도착한 순간. 술법으로 은밀하게 기척을 감추고 있던 살구와 김복자가 신강헌을 덮쳤다. 뺘악! 살구는 신강헌의 얼굴에 들러붙어서 파닥거렸고, 동시에 김복자가 야무지게 말아쥔 주먹으로 복부를 때렸다. “문무겸비 미녀술법가 펀치!” 예전부터 종종 하던 식의 장난이었다. 맞는 입장에서는 전혀 타격감이 없어서 안마해 주는 거냐고 놀려댔던 솜주먹이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신강헌이 얼굴에 달라붙은 살구를 낚아채서 떼어냈다. 뺙뺙뺙!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냐고 말하는 것처럼 살구가 조그만 날개를 파닥거리며 손바닥을 부리로 콕콕콕 찍어댔다. 김복자는 여전히 주먹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신강헌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그만해라. 별로 장난칠 기분 아니니까.” 평소와 다르게 퉁명스러운 반응. 장난을 친 사람이 멋쩍어질 정도로 날 선 목소리였다. 순간 신강헌도 정색하듯이 말한 자신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내가 좀 심했나?’ 다행히 조금 정색한다고 기가 죽을 김복자가 아니었다. “왜 안 어울리게 개폼 잡고 난리야?” 허리에 두 손을 척 올린 김복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기무혁한테 상황은 대충 들었어. 너네 엄빠 문제로 삼촌이랑 사생결단 내기로 했다며?” “……기무혁 그 새끼 요약 더럽게 못 하네.” “근데 뭐 어쩌라고. 너만 엄빠 없냐? 나도 엄빠 없거든!” “와, 넌 씨…….” 대꾸도 못 할 만큼 막무가내 같은 드립에 신강헌의 말문이 막힌 순간. 뺘아악! 살구가 입에서 쏟아낸 작은 불덩어리가 신강헌의 얼굴에서 폭발했다. 퍼어엉! 얼굴을 검게 그을린 신강헌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친……. 돌았냐고 진짜!” “잘했어, 우리 살구!” 뺘뺘뺙! “둘 다 뒈졌다!” 신강헌과 김복자, 살구가 뒤엉켜서 마구 드잡이질을 벌였다. 친구들끼리 장난이라기엔 꽤나 거친 광경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셋 다 눈은 웃고 있었다. 청랑 크루의 아지트. 어느샌가 신강헌에겐 이곳이 집보다 더 편한 공간이 되었다. “으아아아아-!” “왜 갑자기 소리 지르고 지랄임?” “……그냥 이러면 속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아서.” 한참 치고받고 하다 보니 비로소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하루 종일 붙잡고 있던 긴장이 탁 풀린 신강헌이 소파에 대자로 드러누우며 물었다. “그래서 기무혁은 언제 오는데?” “몰라. 좀 있으면 오겠지 뭐.” 그러나 기무혁은 바쁜 일이 있는지 저녁이 다 되어서야 아지트로 돌아왔다. 엉망진창이 된 아지트 내부를 둘러본 기무혁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예상대로 개판을 쳐놨네.” “왔냐?” 복잡하던 머리가 좀 식었는지 어느새 카페에서 챙겨온 간식을 모조리 해치운 신강헌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래에서 먹을 거나 좀 더 챙겨오지.” “넌 양심이 있으면 돈 내고 처먹어라 좀.” “기무혁! 모이자고 한 사람이 제일 늦게 오면 어떡하는데? 뺙뺙-! 오랜만에 만난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밀린 수다부터 떨었다. 흑천회와 레드웜, 신준현이 엮인 중요한 본론이 있었지만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다들 잡담을 나누며 낄낄댔다. 그러다 기무혁이 지나가듯 툭 말했다. “아, 근데 너네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갑자기?” “왜?” 기무혁이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턱을 긁적였다. “우리 부모님이 너희 맛있는 거 해주고 싶다고 물어보라고 하셔서. 싫으면 거절해도 되는데…….” “난 자고 갈래!” 그렇지 않아도 혼자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신강헌이 반색하며 손을 들었다. 129화. 가족이 별거냐? 잠옷 차림의 세 사람이 기무혁의 방에 둘러앉았다. 기무혁의 부모님이 차려준 저녁을 푸짐하게 먹고, 과일과 쿠키를 챙겨와서 한참 수다를 떨다가……. “너희 부모님 사진이라고?” “오올- 엄마가 엄청 미인이신데?” 지금은 신강헌이 백호단주에게 받아온 부모님 사진을 함께 구경하는 중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변색된 사진을 본 김복자가 신강헌에게 말했다. “내가 아는 업체에 가져가면 원래 색깔대로 복구해 줄 수 있는데, 알려줘?” 그러나 신강헌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난 그냥 이대로가 좋아.” 신강헌이 사진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만지작거렸다. 오래된 사진에는 그 나름의 분위기가 있었다. 마치 자신은 모르는 부모님의 옛 시절을 지켜보는 것 같아서, 굳이 그것을 새것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김복자가 불안하지 않겠냐며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여러 장 복사해 두고 디지털 복원도 해놔.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맨날 가지고 다닐 건데 왜 잃어버림?” “그러면 더 해야지, 멍청아! 기무혁이랑 대련 한 번만 해도 찢어지겠다!” 평소 같으면 귓등으로도 안 들을 잔소리였지만, 평소에 자신이 싸우는 방식을 떠올린 신강헌은 사뭇 심각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그 사진 업체, 어딘데?”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기무혁이 뭔가 떠오른 듯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다. 너희한테 보여줄 거 있었는데 깜빡했네.” “현금?” “무공?” 김복자와 신강헌의 기대감 어린 시선이 기무혁을 향했고, 기무혁은 책상 서랍을 열고 그 안에서 영화 포스터만 한 사이즈의 액자를 꺼냈다. “오오오!” “야 이런 건 진작 보여줬어야지!” 비록 두 사람이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둘 모두 환해진 얼굴로 액자에 담긴 사진을 구경했다. 바로 제주도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석양이 지는 바다를 배경으로 세 사람과 살구가 함께 찍은 사진. 제주도에서 찍은 것 중에서 가장 잘 나왔다며, 나중에 액자로 만들어서 아지트에 걸어두자고 셋이서 지나가듯 이야기했던 사진이었다. “기무혁 이 짜식……. 누나 감동해서 눈물 날지도 모른다?” 김복자가 괜히 소매로 눈가를 스윽 닦았다. 장난치듯 말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사진에서 도무지 떨어질 줄 몰랐다. 또래 친구들과 이렇게 함께 찍은 사진은 그녀에게도 처음이었으니까. “빡돌아, 이거 봐봐. 너 되게 잘 나왔다.” 신강헌은 손을 뻗어서 살구를 톡톡 건드렸다. 어미의 내단과 함께 방석에 앉아서 작게 잘라준 과일을 콕콕 집어 먹고 있던 살구가 고개를 들었다. 뺘악? 뺙! 커다란 사진을 본 살구가 놀라서 방석에서 폴짝 뛰어오르더니 날개를 파닥파닥거렸다. 그러곤 사진에 나온 세 사람과 방 안에 있는 세 사람을 비교라도 해보려는 듯 고개를 홱홱 돌려가며 번갈아 바라봤다. 뺘아악! 살구의 그런 반응에 세 사람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기무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드나 보네. 그런데 아직 하나 더 있어.” “또 뭐가 있어?” “기무혁 너 오늘 뭐 잘못 먹었냐?” 친구들의 기대감 속에 기무혁은 서랍에서 두 개의 앨범을 꺼냈다. [제주도 여행 기념] 심플하게 그렇게만 적힌 앨범을 받아서 펼쳐본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저씨랑 아줌마도 있어!” “선생님이랑 창천문주 할아버지, 부연하 선배도…….” 기무혁이 만든 앨범에는 세 사람의 사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환몽을 수습한 뒤에 제주도에 온 기무혁의 부모님과 최건, 도와주러 왔다가 잠깐 놀고 간 창천검노와 부연하의 모습도 찍혀 있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멀쩡한 한쪽 팔로 카메라를 향해 V를 보여주는 구현우와 그 옆에서 살구를 꼭 껴안고 있는 구지우도 한 컷에 담겨 있었다. 기무혁이 떠들면서 앨범을 구경하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사진 고르느라 고생 좀 했는데, 일부러 다 채우진 않았어. 나머지는 너희가 좋아하는 걸로 채우라고.” 앨범을 채운 수십 장의 사진들. 제주도에서 보낸 추억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누군가는 어차피 휴대폰에 전부 있는 사진을 귀찮게 뭐 하러 앨범으로 만드냐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과거의 기무혁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해보니까 다르더라.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고 시간에 따라서 세월이 묻어나는 사진은 더 특별하더라고.’ 예전의 기무혁이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 이것 역시 회귀 후에 생긴 변화였고, 기무혁은 변한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다행히 친구들도 선물이 마음에 쏙 든 같았다. “우리 크루장! 깜짝 이벤트도 준비하고 좀 많이 기특하네?” 김복자가 기무혁에게 달려들어 장난스레 헤드락을 걸었다. 반면 신강헌은 앨범을 한 장씩 넘기며 사진들을 구경했다. “풉……. 개웃기네 진짜.” 제주도에서 찍힌 사진 속의 그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기무혁의 아버지와 함께 낚시하러 가서 처음으로 낚은 참돔을 들고 찍은 사진. 다이빙을 하겠다며 절벽 위에서 폼을 잡고 있는 자신과, 뒤에서 발로 걷어차려고 기척을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온 기무혁을 절묘한 타이밍에 잡아낸 사진. 자는 사이에 술법으로 잘 지워지지도 않는 낙서를 온몸에 해놓은 김복자를 쫓아가는 사진까지. 그 밖에도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이 앨범에 잔뜩 있었다. ……탁. 앨범을 마지막까지 넘긴 신강헌의 얼굴 위로,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단호한 표정이 보였다. -몸은 괜찮다고? 그래, 알았다. 난 일이 바빠서 보러 가진 못할 것 같은데. -아, 괜찮아요. 집에 가서 봐요, 삼촌. 만약, 이 앨범에 단 한 장이라도 삼촌이 담긴 사진이 있었다면 지금 이 결심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신강헌은 어느새 자신만 빤히 바라보고 있는 기무혁과 김복자에게 말했다. “가족이 별거야? 같이 밥 먹고, 수다 떨고, 힘들 때 옆에서 장난도 쳐주고, 언제나 똑같이 대해주는 사람들이 가족이지. 그러니까…….” 낯부끄러웠는지 신강헌은 말을 멈추고 뺨을 긁적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충분히 신강헌이 하고 싶은 말을 알아들었다. 너희들이 바로 내 가족이라고. “흠흠. 말 안 해도 알지?” “뭘?” “어쩌라고?” 신강헌은 ‘개새끼들’ 하고 투덜거리더니 다시 앨범을 펼쳤다. 그리고 거기에 부모님의 옛날 사진을 끼워 넣었다. 앨범을 탁- 소리 나게 덮은 신강헌이 히죽 웃더니 기무혁에게 물었다. “내가 뭘 하면 되냐?”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던 기무혁은 무림맹주와 이야기한 계획을 비로소 두 사람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든 계획이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신강헌의 적극적인 협력이 중요했고, 그런 마음을 강요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신준현에 대한 정보가 더 많이 필요해.” 그리고 이어지는 기무혁의 설명에 신강헌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무림맹 뇌옥. 흑천회의 간부이자 밀수를 총괄했던 이태현은 초췌한 모습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렇게 나를 버린다고?’ 누군지 모를 젊은 검객에게 패배해 무림맹 뇌옥에 끌려와 갇혀 지내기를 며칠째. 평생을 충성한 흑천회에서는 그에게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무림맹에 쳐들어와서 구해주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래도 변호사를 보내거나 편지를 보내는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을 텐데, 그런 최소한의 움직임조차 없었다. “씨발…….” 조직에 대한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럼에도 이태현은 지난 며칠간 무림맹의 어떠한 추궁에도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무림맹이 확인하기 힘든 흑천회에 대한 가짜 정보를 흘려서 저들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 혼자 죽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비록 사회에서는 손가락질 받는 사파의 악인이지만, 이태현에게도 가족은 있었다. 그리고 가족들은 흑천회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다. 흑천회는 배신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만약 무림맹에 조금이라도 정보를 넘긴다면, 그들은 자신의 가족을 전부 잔인하게 살해할 것이다. 몇 번이나 배신자의 말로를 보아왔고, 직접 처리해 본 경험도 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난 그런 쓰레기들이랑은 달라!” 어쩌면 기회를 봐서 구해줄지도 모른다. 비록 무공과 술법은 잃었지만, 밀수에 대해 자신보다 경험이 많은 간부는 없으니……. 이태현은 작은 희망이라도 붙들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쓰레기라고 부르던 놈들처럼 버려졌다는 사실에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흐흐흐…….” 어두운 골방의 벽에 기대어 힘없이 실성한 듯한 웃음을 흘릴 때였다. 쿵. 처음에는 환청인가 싶었다. 쿵쿵. 천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태현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가 천장을 향해 말을 걸었다. “누, 누구……?” 잠시 후, 천장에 희미한 금이 가더니 틈새로 가스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독인가? 대체 누가? 무림맹이 날 죽이려는 건가? 아니면 설마…….’ 거기까지가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이태현은 휘청이더니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소파에 묶여 있었다. “끄응…….” “깨어나셨군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서서히 정신이 들면서 이태현은 무림맹에서 장난질을 하는 게 아닐까 가장 먼저 의심했다. 뻔했으니까. 자신을 몰래 꺼내주는 척하면서 정보를 캐내려고 할 것이다. ‘개새끼들. 내가 속을 줄 알고?’ 하지만 그가 눈을 뜬 곳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어두운 창고나 건물이 아니었다. “여긴…….” 창밖으로 바깥이 환히 보이는 고층빌딩. 그리고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리 봐도 정파의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동류끼리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피 냄새를 은은한 향수처럼 풍기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청화그룹 본부장 도주원이라고 합니다.” 깔끔한 셔츠 차림이었지만 묘하게 퇴폐적인 인상을 주는 키 큰 남자. 그를 올려보며 이태현은 멍하니 입을 열었다. “……너 누구야?” “아, 이렇게 소개하는 편이 이해하시기 쉽겠군요.” 남자가 소매를 걷어붙이자 단단해 보이는 팔뚝 위로 핏빛 문신이 드러났다. 팔뚝에 저런 문신을 새긴 사파의 방파는 그가 알기로 하나뿐이었다. “혀, 혈호방?” “알아보시니 다행입니다. 제가 설명이 길어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요. 혈호방의 오호라고 합니다.” 혈호방의 다섯 번째 호랑이. 정체를 철저하게 감추고 있는 혈호방주의 의형제 중 하나이자 상당한 권력을 지닌 실권자라는 것을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혈호방이 왜 나를……?” “궁금한 게 많으실 테니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호는 이태현의 무릎 위에 서류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가 지금까지 파악해 온 흑천회의 밀수사업에 관한 서류였다. “이태현 씨. 저는 당신이 가진 밀수에 대한 폭넓은 경험과 인맥, 지식을 원합니다. 저희가 이번에 그쪽으로 사업을 확장하려고 하는데, 꼭 필요한 인재시라서요.” “…….” 이태현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당장 어떤 상황인지 파악도 잘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혈호방에 붙었다간 흑천회에서 가족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아, 중요한 걸 말씀 안 드렸군요.”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오호가 빙긋 웃었다. 그 미소에 이태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족분들이라면 저희가 미리 확보해서 안전한 곳으로 모셨습니다. 서류 맨 뒷장에 사진이 끼워져 있으니 확인해 보시길.” “너 이……!” 가족들이 찍힌 사진을 확인한 이태현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얼굴로 오호를 노려봤다. 그러나 이어지는 상대의 행동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태현 씨. 딱 한 번만 묻겠습니다.” 한 걸음 다가온 오호가 무릎 위에 놓여있는 흐트러진 서류를 들어, 깔끔하게 다시 각을 잡아서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이태현과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에서 핏물이 일렁거리는 듯했다. “저와 함께 혈호방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 무척 정중한 말투의 제안이었지만, 이태현은 마치 호랑이 아가리 안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130화. 일단은…… 가래가 잔뜩 낀 노인의 쉰 목소리가 넓은 회의장 안에 울려 퍼졌다. “혈호방에서 이태현이를 데려갔다며?” 수십 명이 넘는 무인이 노인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나같이 강렬한 기도를 풍기는 사파의 고수들임에도. “왜 대답이 없어? 가족들까지 작업해서 싹 빼돌렸다던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다시 묻는 노인의 질문에 한 무인이 벌떡 일어나서 대답했다. “지금 사실관계를 확인 중에 있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정리해서…….” 촤악! 노인이 날린 볼펜이 무인의 귓불을 뚫고 지나갔다. 살점이 떨어지고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당사자는 이 정도에 그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흑천회의 주인에게 자신 따위는 개미처럼 밟아서 죽일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머저리 같은 놈들. 다른 조직에서 간부 가족을 빼가는데 눈 뜨고 당해?” “죄송합니다, 회주님!” 콰앙! 테이블에 이마를 찍는 간부를 바라보던 흑천회주가 혀를 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쯧. 이러니 내가 은퇴를 못하지. 다들 잘 들어라.” 러시아계 혼혈인 흑천회주는 키가 190에 달하는 거구였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당당한 풍채에서 패도적인 기세가 흘러나왔다. “너희는 모두 내 형제이며 자식이나 다름없다. 너희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야. 헌데 감히 가족을 빼앗아 가? 이런 짓을 용서할 수 있겠느냐!” 흑천회주가 간부들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인간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지만, 이곳에서 그것을 티 낼 만큼 멍청한 자는 없었다.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한목소리가 된 간부들의 대답에 흑천회주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혈호방에 연락해라.” 사파오패와 견주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지만, 혈호방의 가파른 성장세는 분명 흑천회도 신경 쓰일 만한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기어오르게 할 수는 없지. 이참에 밟아놓는 것도 좋겠어.’ 잠시 후, 비서가 통화가 연결된 전화기를 흑천회주의 귀에 조심스레 가져다 댔다. [네. 전화받았습니다.] “흑천회주다. 전화받은 놈은 혈호방주냐?” [……오호라고 합니다. 저희 방주님께서는 현재 폐관 중이시니 용무가 있으시면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너 방금 내가 누군지 듣지 못했느냐?” [들었습니다. 흑천회주님.] 자신이 누구인지 밝혔음에도 전혀 겁먹지 않는 상대의 태도에, 심지어 그 상대가 혈호방주조차 아니라는 사실에 흑천회주의 눈썹이 꿈틀댔다. 칼로 칠판을 긁는 듯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흑천회주가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부터 나와 대화를 나눈 이후에 벌어질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간이란 뜻이지?” 명백한 경고였으나, 그 순간 전화기 너머에서 피식- 하고 웃는 숨소리가 들렸다. [저를 방주님 대리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거두절미하고 물으마. 너희가 내 새끼를 데려갔다며?” [이태현 말씀이십니까?] 오호는 혈호방에서 이태현을 데려간 사실에 대해 잡아떼지 않았다. 애초에 흑천회에 소문을 흘린 것이 자신이었으니까. [흑천회에서 버린 물건이라고 판단하고 저희가 주웠는데, 그 부분이 무슨 문제가 될까요?]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야!” 흑천회주가 이태현을 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물건이었으니까. 무공과 술법을 잃고, 밀수품까지 전부 빼앗긴 쓰레기를 뭐 하러 구한단 말인가? 그를 대체할 간부가 흑천회에 수십 명이 넘게 있는데 말이다. “이태현이는 내가 아끼는 녀석이야. 그러니 멀쩡하게 돌려보내.” 하지만 아무리 버린 물건이라도 다른 놈이 가져가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차라리 죽이면 죽였지, 흑천회주는 자기 것을 남에게 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회주님.] 그런데 전화기 너머의 오호라는 놈은 여전히 건방진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가 흑천회주가 된 이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습니다. 저희도 이태현 씨를 데려오는데 비용과 인력이 제법 들었거든요.]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모습에 흑천회주의 인내심이 조금씩 한계를 드러냈다. 스스스슷……. 수십 년을 사파의 종주로 군림하며 쌓아온 살기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흑천회주는 오호가 눈앞에 있으면 씹어먹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너와 농담하는 것 같으냐?” [선배님은 제 말이 농담 같으십니까?] 수십 년 만에 겪어보는 생경한 경험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이내 흑천회주는 웃음을 터트렸다. “클클클……!” 통화를 듣고 있던 흑천회의 간부들은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웃고 있었지만 흑천회주의 눈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네가 하는 말. 정말 감당할 수 있겠느냐?”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제게 그 정도 능력은 있습니다.] 이쯤 되자 흑천회주는 혈호방의 오호라는 녀석이 궁금해졌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담한 놈이군. 마음에 든다. 조만간 자리를 마련해서 식사나 한번 하는 것이 어떠냐?” 물론 그 자리에서 오호의 사지 중 하나는 찢어낼 생각이었다. [비즈니스 미팅을 원하신다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 조만간 다시 연락하지.” 먼저 통화를 끊은 흑천회주가 방 안의 간부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물러가라.” “예!” 잠시 후. 조용해진 회의실에 혼자 남은 흑천회주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어찌 생각하시오. 혈호방에게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소?”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반투명하게 출렁이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흑의무복 차림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혈호방주의 오른편에 서서 말했다. “혈호방은 워낙 숨기는 것이 많은 조직입니다. 저희도 혈호방주의 정체는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했지요.” “흐음…….” “고민이 많아 보이시는군요. 뭔가 조급해 보이시는 것도 같고.” 흑의복면인의 말에 흑천회주가 클클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세상이라도 온 것처럼 날뛰는 여필극도 골치인데, 동종의 후배 애송이까지 기어오르려고 하니 짜증이 치미는 게 사실이라오.” 놀랍게도 흑천회주는 상대를 자신과 동등한 위치의 사람을 대하듯 했다. 같은 사파오패의 수장들에게도 막말을 일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본다면 경악할 일. “이보시오, 흑연.” 하지만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는 흑천회주의 눈길에는 존중과 동시에 극도의 경계심이 엿보였다. “나를 도와주겠소?” “무엇을 원하십니까?” 흑연의 질문에, 흑천회주는 가슴에 오랫동안 품어온 네 글자를 이야기했다. “사파일통(邪派一統).” 평생 염원해 온 목표. 흑천회주는 밑바닥부터 시작해 사파오패 중 하나의 주인이 되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사파무림의 지존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흔을 넘은 지금, 더 늦으면 기회가 없을 거라는 조바심이 자꾸만 들었다. 흑연이 흑천회주에게 처음 접촉해 온 것은 그러한 고민이 깊어지던 시기였다. 그리고 오늘, 혈호방의 도발이 확실한 결정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본인은 사파오패를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고 싶소. 레드웜의 지원이 필요하오.” 레드웜. 최근 흑천회와 동맹을 맺고 교류하기 시작한 해외의 용병조직. ‘너희의 정체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흑천회주는 레드웜의 뒤에 있는 교의 존재까지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이 최근에 누구에게 작업을 쳤는지도 말이다. ‘멍청한 장진명은 저자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려졌지.’ 흑연은 일월문의 장진명에게 마공을 익히게 만들고, 꼭두각시로 만드는 데 거의 성공할 뻔했다. 만약 도중에 무림맹주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저들은 팔대문파 중 하나를 그대로 삼켜버렸을 터. 그만큼 위험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흑천회주는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나는 장진명과 다르다. 너희를 이용해 필요한 것만 취할 것이야.’ 평생 남의 것을 빼앗으며 살아온 사파의 거두는 이번에도 자신이 빼앗는 입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열흘만 기다려 주십시오. 레드웜의 정예를 부르겠습니다.” 레드웜의 정예가 도움만 주고 돌아갈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흑천회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이 끝난 뒤에도 동맹의 도움을 결코 잊지 않도록 하겠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저희는 흑천회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시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흑연의 모습은 다시 허공으로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상대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흑천회주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파일통이 끝나면 그땐 너희 차례다.” 그것은 평생 실패를 모르고 살아온 늙은 무인의 자신감, 혹은 오만이었다. * * * 여필극은 한자리에 모인 팔대문파 장문인들이 자신에게 화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맹주님! 지금 온전한 정신으로 하는 소리십니까?” “밑도 끝도 없이 흑천회를 공격하자니요?” “절대 안 됩니다. 정파의 젊은이들이 흘릴 피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무것도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팔대문파의 장문인들 중 다수가 참여한 자리였다. 여필극은 그들에게 함께 흑천회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했고, 예상대로 그 후는 혼란과 반발의 연속이었다. 장문인들의 성토를 잠시 들어준 여필극이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겠소. 빠질 문파는 빠지시구려.” “……!” 화를 내려던 장문인들의 말문이 막혔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는데 거기서 더 뭐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허나 대의를 함께한 무인들에게는 사파오패를 무너뜨렸다는 명예가 돌아갈 것이외다.” ……고작해야 명예.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그 말에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무림의 상징은 팔대문파였고, 명예는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로 문파의 명성이 바닥에 처박힌 지금, 팔대문파는 명예회복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흑천회와의 전투에서 본문이 큰 공을 세운다면…….’ ‘다른 팔대문파보다 더 빨리 명예를 회복할 기회인가?’ ‘참여해야 하나? 하지만 사문이 입을 피해는?’ 기무혁이 해준 조언대로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을 고민에 빠지게 만든 여필극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노파심에 드리는 말이지만, 돌아가실 분들은 필히 입조심을 해주셔야 하오. 만약 정보가 외부로 흘러 나가 작전을 망친다면…….” 한순간 무림맹주의 서늘해진 눈빛이 장문인들을 훑었다. “무림맹은 목숨 건 전투에 함께하지 않는 문파가 과연 정파무림의 동료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말씀이 심하십니다, 맹주!” “우리 중에서 사파와 내통하는 배신자가 있을 거란 말입니까?” 화를 내려는 장문인들에게 여필극은 반박 불가의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럼 장진명은?” “…….” 입을 꾹 다문 장문인들은 고민에 빠졌다. 흑천회와의 싸움에 참가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의 손익을 계산하는 사람도 있었고, 눈치를 보며 결정을 미루는 이들도 있었다. 그때 누구보다 먼저 손을 든 인물이 있었다. “창천검문은 무림맹을 도와서 싸우겠네.” 창천검문의 장문인이자 최연장자인 나일천이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장문인들에게 빙긋 웃어주며 말했다. “내 남은 생에 사파의 초고수와 싸울 기회가 앞으로 몇 번이나 있겠나?” 동시에 그의 허리춤에서 신물인 남천검이 우웅- 하고 울었다. 마치 잘했다고 말하는 듯했다. “……일월문도 잠시 봉문을 풀고 참전하겠습니다.” 일월문의 새로운 장문인이 된 빙하신녀도 참전 의사를 밝혔다. 여필극은 두 장문인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전했다. ‘고맙소. 두 분.’ 자리에 없는 기무혁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창천검문과 일월문 모두 기무혁과 인연이 있었고, 그래서 기무혁이 미리 찾아가 설득한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무혁이 그 녀석이 좀 징해야 말이지.’ ‘도움을 받았으니 은혜는 갚아야지요.’ 두 장문인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팔대문파 중 두 문파가 참전하기로 하자 나머지는 쉬웠다. “대한문도 함께하겠습니다.” “……금영문도 함께하겠소.” “태극검문도 당연히…….” 결국 자리에 참석한 장문인들에게 전원 동의를 얻어낸 여필극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본격적인 계획을 설명하겠소. 이번 작전은 속도가 생명이니, 순식간에 몰아쳐서 끝낼 것이오!” “기밀 유지를 위해 모든 계획은 극비로 취급하며 본진을 치는 인원은 문파당 최정예 서른으로 제한하겠소.” “사파 놈들이 사용하는 독, 암기, 총화기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오. 그 방법에 대해서는 함께 공유를…….” 회의를 주도하는 무림맹주 여필극의 눈이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이 기회에 반드시 흑천회를 쓸어버립시다!” 근래 들어서 가장 신이 난 무림맹주의 모습이었다. * * * “작전 실행 날짜가 잡혔다. 열흘 후, 무림맹과 팔대문파의 정예가 흑천회의 본거지를 기습할 게야.” 늦은 시간 집으로 찾아온 최건의 설명에 기무혁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예상보다 더 빠르네요. 팔대문파의 반발은 없었나요?” “클클. 맹주님이 네 덕분에 장문인들을 잘 구슬렸다고 하시더구나.” 최건은 말하면서 흐뭇한 눈으로 제자를 바라봤다. 흑천회를 친다는 최초의 계획이 제자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너라면 언젠가 한국무림을 변화시킬 거라고 생각했다만…….’ 자신의 제자는 벌써 한국무림에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종종 스승인 자신이 제자를 쫓아가는 것이 벅차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스승으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보람이기도 했다. “헌데 제자야. 너는 이번 계획에서 어찌할 것이냐? 따로 움직일 것이냐?” “일단은…….” 이후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기무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씩 웃으며 대답했다. “크루원들을 전부 소집하려고요.” 131화. 찐한 대화를 나눠보자고 신준현은 최근 들어 자신을 대하는 신강헌의 태도가 뭔가 달라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정확히는 흑천회의 밀수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며칠간 밖에 다녀오고 나서부터였다. 술김에 삼촌의 방문을 부숴먹었다며 잘못했다고 빌더니, 그 이후로는 순한 양이 따로 없었다. “삼촌!” 오늘 아침도 살갑게 웃으며 말을 걸어오는 신강헌의 모습에 신준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출근해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지난 며칠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이유가 궁금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 너도 나가려고?” “연무장에 수련하러 가려고요. 저 차 좀 태워주세요.” “……알았다.” 두 사람은 함께 차를 타고 집을 나섰다. 신강헌은 조수석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다. “나루에 얼마 전에 직원이 생겼거든요? 근데 무공을 제대로 익혔더라고요. 무공을 익힌 카페 직원이라니 신기하지 않아요?” “별 볼 일 없는 실력인가 보네. 삼류문파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수준이면 그런 곳에서라도 일해야지.” “그렇게 약해 보이진 않던데…….” 신준현은 한 귀로 대충 흘리면서 운전을 했다. 그는 신강헌과의 대화에서 재미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늘 시답잖은 이야기만 떠들어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화의 끝은 항상 주의를 주는 것으로 끝났다. “내일 태도문이랑 만나기로 한 거 기억하지? 장문인도 뵙기로 했으니 신경 쓰고, 옷도 제대로 갖춰 입어.” 예전 같았으면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퉁명스레 대꾸했을 텐데, 신강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요. 잘 준비했으니까.” 지나칠 정도로 순종적인 대답에 신준현이 미심쩍은 시선으로 신강헌을 돌아봤다. “확실한 거지? 너 혹시 아직 무림맹에…….” “백호단주한테 쌍욕 박고 나온 거, 내가 얘기 안 했어요?” 신준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신강헌이 백호단에 쳐들어가서 난장을 피우고 돌아왔다는 정보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난 태도문의 도법을 익혀서 최고가 될 거예요. 그리고 우리 부모님을 이용한 개새끼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고요.” 자신이 원했던 대답에 신준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잘 생각했다. 강헌이 네가 드디어 삼촌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신준현은 돌아보지 않아서 몰랐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몇 초간 말이 없던 신강헌이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삼촌.” “뭐가?” “절 이렇게 반듯하게 키워줬잖아요. 삼촌한테 도법도 배우고, 좋은 집에서 걱정 없이 살고……. 부모님도 분명 삼촌한테 고마워할 거예요.” 신준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늘 하던 말을 무신경하게 내뱉었다. “하나뿐인 가족이니까. 삼촌은 너를 믿는다. 너도 삼촌만 믿으면 돼.” “당연하죠.” 잠시 후, 신강헌이 다니는 연무장 앞에서 차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신강헌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따가 봐요, 삼촌!”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조카를 뒤로하고, 신준현은 다시 시동을 걸었다. 사이드미러를 통해 연무장 안으로 들어가는 신강헌을 바라보던 그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 애비를 닮아서 순진하긴.” 신재현과 신준현. 형제는 어릴 적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보육원에 맡겨졌다. 다행히 두 사람에겐 무공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고, 이를 눈여겨본 원장의 지원하에 도법을 익힐 수 있었다. 형제가 함께 연구하면서 만든 도법이 지금 신강헌이 익힌 가전도법이었다. 잠시 신재현을 떠올린 신준현이 피식 웃었다. “돈이나 더 벌어놓고 뒈질 것이지.” 형제는 둘 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지만, 가치관은 판이하게 달랐다. 성인이 된 신재현은 무림맹에 입맹했고, 신준현은 돈을 벌기 위해서 해외의 용병조직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신준현은 전장에서 사망했다. 품 안에 가전도법의 비급과, 형에게 조만간 조카를 보러 한국으로 가겠다는 내용의 편지 한 장을 남긴 채. 그 시신을 수습한 것이 현장에 있었던 레드웜의 한 한국계 용병이었다. 마침 현장직에서 은퇴를 고려하던 용병은 적당한 신분을 찾았음에 기뻐했고, 성형을 마치고 한국에 입국했다. ‘내 정체를 눈치챌 수 있는 인간은 신준현의 형뿐이겠군.’ 마침 무림맹은 안팎으로 사건사고가 많아 휘청이던 때였고, 레드웜의 용병에게 사고 하나쯤 위장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혹시 모를 후환까지 처리하고 난 뒤, 용병은 한 가지 흥미로운 전리품을 발견했다. ‘갓난아기라…….’ 잠시 고민한 용병은 갓난아기를 아는 곳에 한동안 맡겨두었다가 보육원으로 보냈다. 훗날 쓸 만한 재능이 발견된다면 키워서 팔아넘길 수도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써먹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용병은 이후 자신이 모은 돈과 신재현이 남긴 유산으로 해외와 국내를 오가며 사업을 해서 돈을 벌었다. 그리고 다시 신강헌을 찾아갔을 때, 얼마나 경악했는지 모른다. “내가 평생 본 것 중 최고의 근골이었지.” 자신의 인생을 바꿔줄 보물을 발견했던 순간을 회상하며 신준현이 비열하게 웃었다. 그 정도의 근골이라면 체질이 5급만 되어도 성공이라고 판단했기에, 그는 신강헌을 보육원에서 데려온 후 곧바로 가전도법을 가르쳤다. 고아였던 주제에 순종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무공에 대한 재능 때문에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 -아 씨, 한 번만 더! -삼촌! 나랑 또 대련해 줘요! -아까 그거 이렇게 하는 거예요? 오기를 부리면서 덤벼들 때마다, 그리고 한번 가르치면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순식간에 익혀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솔직히 망가뜨리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압도적인 재능에 질투가 났으니까. 하지만 미래에 돌아올 보상을 생각하며 지난 몇 년을 인내했고, 예상대로 팔대문파 대부분이 신강헌에게 호감을 보였다. 최근에는 레드웜의 상부 조직인 교(敎)에서도 관심을 드러냈다. ‘곧 교에서 직접 보겠다고 부를 수도 있겠어. 어쩌면 오늘 호출한 것도…….’ 기무혁이라는 동갑내기를 만난 후로 신강헌의 재능은 이전보다 더 활짝 꽃피기 시작했다. 덕분에 몇 년에 걸친 계획이 예상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태도문의 도법까지 익히면 신강헌은 누구보다 빠르게 한국 최고의 무인 중 하나로 성장할 것이다. 교는 신강헌을 발판으로 팔대문파 하나를 집어삼킬 것이고……. ‘그 역할에 지대한 공헌을 한 내게도 교에서 자리를 만들어 주기로 했지.’ 모든 것이 이보다 완벽할 수 없었다. 신준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불안할 정도로 일이 술술 잘 풀리는군.” 그가 앞으로 펼쳐질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는 동안, 어느새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낡은 [임대문의] 현수막을 걸어둔 한적한 교외의 오래된 건물. 신준현은 여러 번 와본 듯 자연스럽게 자물쇠를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도착한 상대방이 창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일찍 오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흑연.” 신준현은 흑의무복 차림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상대는 교에서 파견된 책임자로, 레드웜의 용병 출신인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흑연이 가져온 서류를 신준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몇 시간 후에 레드웜에서 병력이 도착합니다. 몇몇은 당신과도 안면이 있을 테니 그들을 인계해서 흑천회로 이동하십시오. 나머지는 그쪽에서 알아서 할 겁니다.” 갑작스러운 지시였지만 교의 지시에 질문이나 거부는 용납되지 않았다. 상대가 존대를 한다고 해서 자신과 대등한 위치인 건 아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조카는 요즘 어떻습니까?” 기대했던 질문이 나오자 신준현의 입매가 휘었다. “순조롭습니다. 태도문에 보내서 무공을 익히게 하면, 몇 년 안에 장문제자가 되어 두각을 드러낼 거라 확신합니다.” “확실히 성장세가 놀랍더군요. 조카분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조만간 자리를 마련…….” 문득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서 고개를 드니, 흑연은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 신준현은 잠시 기다린 후에 폐건물을 나섰다. ‘재수 없는 놈.’ 그리고 곧바로 차에 타서 내비에 공항을 찍었다. 레드웜의 용병들을 맞이하려면 바로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교외를 벗어나 도심으로 진입했을 때, 상상도 못 했던 소식을 마주하게 됐다. 고층빌딩의 모든 전광판에서 뉴스 속보가 전해지고 있었다. [속보입니다! 무림맹주 여필극이 거대 사파조직인 흑천회와의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현재 무림맹과 팔대문파의 소수정예가 흑천회의 본거지에 돌입한 것으로 전해지며, 외부에서도 팔대문파 무인들의 움직임이 곳곳에서 포착되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대규모 문파간의 전면전은 수십 년 만에 벌어진 이례적인 일로, 인근 지역과 주민들의 피해가 예상됩니다. 해당 지역 인근에 사시는 주민분들께서는 신속한 대피를 부탁드리며…….] “뭐?” 신준현은 불안감을 느끼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갑자기 무림맹과 팔대문파가 흑천회를 쳤다고? 하필이면 레드웜의 정예가 한국으로 들어오는 날에?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낀 그는 차를 돌려 흑연을 만났던 장소로 향했다. 그곳에 가야 흑연과 접선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30분을 넘게 기다려도 흑연은 나타나지 않았고, 어떠한 연락조차 없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서 연락할 여유조차 없거나 이미 몸을 숨겼다는 의미였다. ‘나도 숨어야 하나?’ 낭패감을 느낀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할 때. “삼촌.” 여기서 들려선 안 될 목소리에 신준현이 경악한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신강헌이 차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삼촌이랑 진지하게 대화 좀 하려고요.” 저게 무슨 소리지? 신준현은 신강헌이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흑천회가 공격당하고 있었고, 자신의 사업들이 대부분 거기 엮여 있었으며, 연락이 되지 않는 흑연 때문에 짜증이 치미는 상황이었다. 그 짜증은 이내 살기가 되어 밖으로 표출되었다. “지금 너랑 대화할 시간 같은 거 없다.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 살갗을 저밀 듯이 사나운 살기. 지난 몇 년간 그가 화내는 모습은 몇 번 봤어도 저토록 살기를 내뿜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건 당신 사정이고.” “……당신?” 그러나 신강헌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등허리에서 도를 뽑아 들었다. 스르릉. “아, 죄송. 아직 심증만 있지 확실한 건 아닌데. DNA 검사 결과 나올 때까지는 삼촌이라고 불러줄게요.” “너……!” 차갑게 웃는 신강헌의 눈동자에서 불꽃의 상이 맺힌 순간. 화르르르륵! 신강헌의 도에 화염이 휘감겼다. 신준현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강렬한 위력의 불길이었다. “오랜만에 남자 대 남자로 찐한 대화를 나눠보자고요, 삼촌.” 순식간에 주변을 불바다로 만든 신강헌이 자신과 닮은 얼굴에게 덤벼들었다. 132화. 작전 개시 작전 당일 아침. 기무혁은 청랑의 아지트에서 화이트보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형 화이트보드에는 흑천회의 전력, 레드웜과의 관계, 그 밖에 무림맹과 혈호방을 통해서 얻은 자료들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었다. “가장 변수가 될 만한 요소는 역시…….” 기찬호와 박지연은 아직 카페에 출근하지 않은 이른 시각. 기무혁의 중얼거림만이 아지트 안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 몇 번이고 검토한 작전이었지만, 기무혁은 자신이 계산하지 못한 변수가 없는지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계속 체크했다. ‘내 잘못된 판단으로 주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칠 수도 있어.’ 전생의 기무혁은 전장에 나설 때마다 동료를 잃어야 했다. 그 끔찍했던 경험이 그를 조금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게 만들었다. 자신이 아무리 회귀자라고 해도, 아군 중 누구도 죽거나 다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기무혁은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고 싶었다. ‘다행히 모든 상황이 전생보다는 형편이 훨씬 나아.’ 동원할 수 있는 아군의 전력도, 다룰 수 있는 패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기무혁이 이만하면 충분히 해볼 만하겠다는 결론을 몇 번이나 거듭해 내렸을 때였다. 부아앙-! 요란한 소리에 창밖을 바라보자 도로를 질주해 오는 바이크 한 대가 보였다. 잠시 후, 카페 나루 앞에 바이크가 멈춰 섰다. 개폼을 잡으며 헬멧을 벗은 신강헌이 4층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기무혁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신강헌 더 스파이! 임무를 마치고 복귀!” “저 또라이는 아침부터 지랄이네.” “낭만도 모르는 새끼…….” 투덜거리며 아지트로 올라온 신강헌은 화이트보드와 탁자 위에 어지럽게 놓인 종이들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모니터 큰 거 가져다가 하면 안 되냐? 무슨 드라마에 나오는 형사도 아니고…….” “난 화면보다 직접 뽑아서 보는 게 훨씬 집중이 잘돼. 신준현은?” 기무혁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신강헌도 금세 진지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차랑 옷에 위치추적기 붙여놨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도 확인했고.” 신강헌이 품에서 태블릿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자, 화면 위 지도에서 점 하나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기무혁이 그 모습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널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고?” 그 말에 신강헌이 차갑게 웃었다. “신준현 씨는 날 등신 머저리로 알거든. 나한테 뒤통수 맞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하고 있을걸?” 지난 며칠. 신강헌은 신준현의 방과 차량에 초소형 위치추적기와 도청기를 붙이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리고 신준현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덕분에 몇 년간 전혀 몰랐던 신준현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가 지금까지 해온 사업들은 전부 다 불법적인 것들이었다. 사채. 밀수. 마약 등. 부지런히 출장을 나섰던 게 하나같이 모두 누군가를 착취하고 상처 입히는 것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오만 정이 다 떨어졌지만, 신강헌은 결정적인 증거를 하나 더 발견했다. “내가 맡겨질 때 원장님이셨던 분을 찾아가서 확인했는데, 나를 보육원에 맡긴 남자의 인상착의가 신준현이랑 똑같아. 하지만 나를 데리러 왔을 때는 처음 보는 것처럼 얘기했지. 그리고…….” 조금 더 진지해진 표정으로 신강헌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었어. 그런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땐 얼굴도 비치지 않았지. 해외에 있느라 사고를 늦게 알았다는 말부터 전부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신준현이 자신의 진짜 삼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수상하다고 생각한 신강헌은 신준현의 머리카락을 확보해 DNA 검사를 의뢰했고, 곧 결과가 나올 터였다. “내 생각엔 아무리 봐도 가짜야. 아니, 가짜였으면 좋겠어. 진짜 삼촌이면 더 죽이고 싶을 것 같거든.” 신준현을 언급하는 신강헌의 표정에는 더 이상 일말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단호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기무혁이 물었다. “싸워서 이길 자신은 있냐?” 기무혁이 파악하고 있는 신준현의 무위는 일류고수였다. 냉정하게 말해서, 일류고수 라이센스를 획득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신강헌은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신강헌은 자기를 믿어보라며 가슴을 퍽퍽 쳤다. “걱정 말라고. 오늘의 신강헌은 컨디션 300퍼센트니까.” “…….” 얼핏 장난스럽게 느껴졌지만, 신강헌의 두 눈에서 자기가 직접 해결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느껴졌다. 잠시 고민하던 기무혁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 뭔가 무공에 변화가 생긴 것도 느껴지고…….’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넘어서야만 해결되는 문제도 있는 법이니까. 이럴 때 친구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짧은 응원 정도였다. “……조심해라.” 평소의 기무혁에게서 보기 힘든 진지한 걱정에 신강헌이 활짝 웃더니 주먹을 내밀었다. “갔다 와서 무용담 잔뜩 풀어줄 테니까 기대해. 복자랑 선생님이랑 숙수 아저씨한테 모두 안부 전해줘. 그리고…….” “재수 없는 복선 깔지 말고 얼른 꺼져.” 기무혁은 신강헌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 * * 그렇게 마지막까지 요란을 떤 신강헌이 신준현을 추적하기 위해서 떠난 후. 청랑의 다른 크루원들이 아지트로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시끄러워 죽겠네. 신강헌 쟤는 아지트 왔다 간다고 소문내고 다녀?” 징 박힌 가죽 재킷과 가죽바지 차림에, 손목과 손가락에는 술법용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달고 온 김복자가 가장 먼저 아래층에서 올라왔다. “또라이 가기 전에 올라와서 한마디 해주지 그랬어?” 기무혁의 말에 김복자가 생각도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까지 플래그 꽂기 싫거든.” 뺘악! 맞는 말이라는 듯 그녀의 숄더백에서 살구도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두 번째로 도착한 사람은 황숙수였다. “크루장! 나 오늘 가게까지 닫고 온 거야. 전리품 섭섭하지 않게 챙겨줘야 해. 알지?” 황숙수는 말로는 기무혁이 불러서 억지로 온 것처럼 투덜거리면서도, 오랜만에 현장에 나설 생각에 신이 난 얼굴이었다. “사파오패 토벌이라니……. 낭걸이 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거지?” 얼떨결에 크루원이 된 한재찬은 무언가 각오한 표정으로 백팩에 물건을 바리바리 챙겨 들고 왔다. 전쟁 나가기 전의 군인 같은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모인 인원들을 둘러본 김복자가 기무혁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안 오시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 안 구석의 그늘진 곳에서 무언가가 스르륵 솟아났다. “방금 도착했느니라.” 최건이 인기척도 없이 귀신처럼 등장하자 기무혁을 제외한 모두가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으헉! 깜짝이야 씨발!” “선생님 인기척 좀 내고 다녀요!” “흐어어억!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혁이한테 신세지고 있는 한재찬입니다!” 정작 최건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기무혁을 바라봤다. 제자를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먼저 눈치를 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다소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은신술을 조금 더 연마해야겠군…….” “더 이상 연마하셨다간 크루원들 심장마비로 쓰러져요.” 피식 웃은 기무혁은 한자리에 모인 크루원들을 둘러봤다. 따로 임무를 맡은 신강헌을 제외하면 전원이 자리에 모였다. ‘이렇게 보니 세상 든든하네.’ 무림맹과 팔대문파, 흑천회가 이번 싸움에 동원할 인원에 비하면 청랑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 명 한 명이 이번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줄 최정예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다 모였으니까 마지막으로 간단히 브리핑할게요. 작전 개시는 오전 11시. 무림맹과 팔대문파 정예가 흑천회 본진을 칠 겁니다.” “근데 왜 11시야? 새벽이나 밤에 습격하는 편이 유리하지 않나?” 김복자의 일리 있는 질문에 황숙수와 한재찬도 궁금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문파는 오히려 늦은 밤과 새벽에 경계가 더 강화돼. 그 시간은 차라리 피하는 게 나아. 그리고…….” 기무혁은 자신이 무림맹주를 설득해 작전 시작을 애매한 시간으로 결정한 이유를 모두에게 알려주었다. “무인들은 보통 10시에서 11시 사이에 두 번째 끼니를 먹어. 즉, 그때 공격하면 적이 소화가 제대로 안 됐을 때 불편함을 안고 싸우게 만들 수 있단 뜻이지.” 무척이나 비겁하지만 설득력 있는 이유에 세 사람이 입을 떡 벌렸다. “기무혁 너어는 진짜…….” “우리 크루장은 똥개도 밥 먹을 땐 안 건드린다는 말 모르지?” “이게 바로 피도 눈물도 없는 낭인의 세계…….” “내가 아는 어떤 낭인도 안 저래!” 사실 여필극도 처음에는 세 사람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다. “제자야.” 작전시간이 정해진 이유를 처음 알게 된 최건마저도 나지막이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이건 내가 봐도 치사한 방법이구나.” “좀 그런가요?” 기무혁이 민망한 듯 뺨을 긁적이자 최건이 그런 뜻이 아니라며 활짝 웃었다. “아주 마음에 든다는 말이다! 상대는 사마외도다. 응당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족쳐야 마땅하지!”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쿵짝이 잘 맞는 사제의 모습에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무혁이 이어서 작전을 설명했다. “이번 작전에는 팔대문파 중 다섯이 무림맹과 함께 흑천회를 칠 거야.” 창천검문. 일월문. 태극검문. 금영문. 대한문. 흑천회 공격에 직접 가담하는 팔대문파의 면면이었다. “나머지 세 문파는 다른 사파오패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견제할 거고.” 태도문. 파천문. 초극문. 세 문파는 다른 세력이 끼어들지 못하게 각각 사파오패 중 하나씩 전담해서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어? 그럼 숫자가 안 맞지 않나? 사파오패 하나가 남을 텐데…….” 황숙수의 걱정이 담긴 말에 기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따로 생각해 둔 방법이 있어. 그쪽은 문제없을 거야.” 얘기하려면 길어지는 이야기를 생략한 기무혁은 이어서 크루원들에게 각자가 해야 할 역할을 설명했다. “복자와 살구는 우선 신비전에 합류해. 기관진식과 술법진 해제하는 걸 도와주면서 나한테 계속 상황을 전해주면 돼.” “오케이. 전에 한번 해봤던 거네.” 뺙-! 김복자가 고개를 끄덕였고, 살구도 한쪽 날개를 경례하듯 번쩍 치켜들었다. 기무혁은 고개를 돌려 황숙수와 한재찬을 바라봤다. “황숙수랑 한 형은 스승님 따라가서 무림맹 특작조를 지원하고.” “나……?”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최건과 함께 흑천회의 분파들을 타격하는 일을 맡았다. ‘무력이야 스승님 혼자서도 충분하지만, 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으니까.’ 압도적인 무력과 잠입능력을 갖춘 최건, 온갖 잡기를 익힌 정보통 황숙수, 준비성이 철저한 낭인 한재찬은 기무혁이 생각하기에 꽤 훌륭한 조합이었다.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영광으로 알거라. 너희는 이 시간부로 무림맹 산하 특작조에 편입된 것이니.” 최건은 죽상이 된 황숙수를 벌써부터 갈구기 시작했다. “특히 황숙수 네놈은 임무 중에 재물에 욕심내는 모습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손모가지를 잘라버릴 줄 알거라.” “왜 맨날 나만…….” “쓰읍!” 기무혁은 황숙수의 원망 어린 눈빛을 모른 척 외면했다. “크루장은 어쩌게?” “난 따로 할 일이 있어. 일이 끝나면 상황 봐서 필요한 곳에 합류할게.” 최종 브리핑이 끝나자 김복자가 들고 온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크루원들에게 나눠주었다. “자, 그럼 다들 이거 하나씩 써요!” 푸른 늑대의 얼굴을 한 가면이었는데, 얼굴 위에 쓰자 술법의 효과로 두 눈에서 형형한 빛이 흘러나왔다. [웬만한 투구보다 단단하고, 내공을 주입하면 목소리 변조 기능도 켤 수 있어요. 끝내주죠?] 다들 김복자가 준 가면을 쓰고 손으로 만져보며 감탄했다. [호오. 아무것도 안 쓴 것 같구나.] [하하하! 거울로 보니까 나 제법 멋진데?] [오늘 같은 비밀작전에 찰떡이네!] 얼굴을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작전이라 김복자에게 간단히 부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좋은 물건을 만들어왔다. [청랑.] 기무혁이 마지막으로 가면을 쓰고 모두를 바라봤다. 푸른 늑대 가면을 쓴 크루원들을 보자 정말로 하나의 무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각자 흩어져서 작전을 개시하고, 나중에 이곳에서 다 같이 모이는 걸로.] 화이트보드 위에 있는 지도 위. 기무혁이 손가락을 짚은 지점을 확인한 크루원들이 각자 흩어졌다. 무림크루 청랑의 작전 개시였다. 133화. 비상시에는 크루원들이 먼저 떠난 후, 기무혁이 마지막으로 아지트를 나섰다. <저 다녀올게요. 별 일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1층의 카페로 내려온 그는 포스트잇에 부모님에게 전할 짧은 글을 적었다. 전날 밤에 계획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해두었지만, 분명 걱정을 잔뜩 하실 테니까. 기무혁이 다 쓴 포스트잇을 카페 냉장고에 붙여놓으려는데, 부모님이 먼저 써둔 쪽지를 발견했다. <맛있는 거 해 놓을게. 저녁은 크루 사람들 불러서 집에서 다 같이 먹자.> 오늘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함께 저녁을 먹는 하루가 되길 바라는 두 사람의 마음이 느껴졌다. 항상 싸움에 나서면 크게 다쳐서 돌아오는 아들에 대한 걱정을 애써 숨기고 말이다. “……이번엔 최대한 부상은 피해야겠네.” 조용히 다짐한 기무혁은 냉장고에서 쪽지를 떼 행운의 부적처럼 옷 안쪽에 붙이고 카페를 나섰다. 휘이익! 몸을 띄운 기무혁은 건물 지붕을 밟으며 경공을 펼쳤다.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휙휙 바뀌었다. 평소에는 대낮에 무림인이 경공으로 시내를 활보하면 문제가 되지만, 지금은 비상시였다. [금일 무림문파 간의 대규모 충돌로 인한 큰 피해가 예상됩니다. 시민 여러분은 외출을 최대한 삼가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금일 무림문파 간의 충돌로…….] 재난 방송 덕분에 거리는 한산했다. 기무혁은 김복자가 만들어준 청랑 가면을 얼굴에 쓰고, 검파를 가볍게 그러쥐어 살짝만 당겼다. 스르릉. 검집으로부터 영롱한 붉은 자태를 드러내는 환몽의 검신. 기무혁이 손가락으로 녀석을 툭툭 두드렸다. “야, 환몽.” 그러자 검신에서 스르륵 붉은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허공에서 반투명한 소년의 형상을 이루었다. 관자놀이 양쪽에 뿔이 달린 붉은 눈동자의 소년. 심상세계에서 만났던 환몽의 혼이었다. 다만 그때와 달라진 점이라면, 크기가 고작해야 손바닥만 하다는 것이었다. 녀석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후후후……. 드디어 맛있는 거 먹으러 가는 거지? 입에서 군침을 흘린 환몽이 신이 난 모습으로 기무혁 주변을 빙글빙글 날아다녔다. 빨리 가자! 빨리빨리-! 흑천회 간부였던 이태현을 쓰러뜨린 후. 술법사와 술법도구들의 기운을 흡수하면서 생겨난 변화였다. 우우웅-! 변화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환몽이 내뿜는 기운 자체도 더 강해져, 검집에서 뽑으면 순식간에 핏빛 안개가 흘러나와 일대를 덮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검날의 예기도 전보다 강해졌어.’ 지난 며칠 기무혁은 환몽을 상대로 이것저것 실험을 했고, 활용방법도 연구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냈다. 환몽은 인간의 피를 흡수해 힘을 키워왔지만, 괴이나 술법의 기운도 흡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추측이지만, 낯설고 강한 기운을 품은 존재를 벨수록 환몽의 영체도 성장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뭐 먹을 거야? 인간? 괴이? 술법? 물론 아직까지 환몽은 이 소년의 모습처럼 미숙하고 위험한 신병이기였다. 그 모습이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 얼마나 더 강해질지는 결국 기무혁이 다루기 나름이었다. ‘여기까진 다 좋은데…….’ 환몽이 영체를 구현하게 된 후, 검집에서 나오기만 하면 정신 사납게 구는 행동은 교정이 꼭 필요했다. 따악! 기무혁이 딱밤을 때리자 환몽이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끄악! 보통의 인간은 영체를 건드리기는커녕 눈으로 볼 수도 없지만, 기무혁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까불지 말고 얌전히 있으랬지.” 움츠러든 환몽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이상하다. 내 본체는 검인데 왜 아프지……? “궁금하면 몇 대 더 맞아볼까?” 아, 아니야! 그만해도 돼! 헤헤헤! 기무혁은 틈이 날 때마다 환몽에게 서열관계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지금은 단순히 욕망만을 추구하는 요검이지만, 언젠가는 자신과 같은 정파무림인에게 어울리는 신병이기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베어야 할 적이 누구라고?” 죽어 마땅한 악인들! 사악한 괴이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네 기운을 어떻게 한다?” 넓게 퍼트리지 않고 검날에 닿는 적에게만 집중한다! “반대로 안개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은?” 적을 기습할 때! 주인이 모습을 감추려고 할 때! 그리고 난전이 벌어졌을 때……?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인 기무혁이 환몽의 검신을 톡톡 두드렸다. “잘했어. 상으로 오늘은 악인들의 피를 잔뜩 마시게 해주지.” 하하하! 약속한 거다! 마치 강아지 보상 훈련을 연상시키는 듯한 방법이었지만, 환몽은 기쁜 표정으로 기무혁의 주변을 뱅글뱅글 돌다가 다시 주의를 받았다. ……그래서 지금 어디 가는데? 환몽의 소심한 물음에 기무혁이 픽 웃더니 검신을 검집에 찰칵 소리 나게 넣었다. “일단 가장 큰 변수부터 막으려고.” 기무혁은 이번 작전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변수를 직접 통제할 계획이었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기무혁이 바닥에 사뿐히 내려섰다. 청화그룹 빌딩의 정문 앞.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더 내려가자 이미 모여있던 무인들이 기무혁을 바라봤다. ‘만만해 보이는 놈이 하나도 없군.’ 하나같이 정제된 기도를 내뿜는 이십여 명의 무인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평소와 달리 검은색 수트차림에 장갑을 낀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가면을 새로 맞췄군? 청랑이란 이름에 훨씬 잘 어울리네.”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는 청화그룹의 본부장 도주원, 즉 혈호방의 오호였다. 그리고 그 주변의 무인들은 혈호방의 최정예인 혈호(血虎)들이었다. 기무혁이 그들을 한번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 내가 늦었나? 왜 이렇게들 노려보는 거야?” “다행히 딱 맞춰서 왔어. 굳이 안 와도 우리가 알아서 했겠지만 말이야.” 도주원의 대답에 기무혁이 코웃음을 쳤다. “그쪽을 어떻게 믿고? 흑야방과 손잡고 우리 뒤통수를 치면 이쪽도 꽤 곤란하거든.” 흑야방(黑夜幇). 사파오패 중 하나로 무림맹과 팔대문파가 전부 동원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견제할 상대가 없는 세력이었다. 또한 흑천회의 오랜 동맹이기도 했다. 그래서 기무혁은 흑야방을 견제하는 일을 혈호방에게 맡겼다. 물론 그들을 완전히 신뢰해서는 아니었다. 오호가 살짝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뭐, 그것도 재밌는 시나리오긴 한데…… 지금은 흑천회가 더 맛있어 보이거든.” 흑천회가 완벽하게 무너져야 그 자리를 혈호방이 차지할 수 있기에, 오호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른 혈호들과 달리 기무혁이 감시 겸 따라가기로 한 것에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기는 눈치였다. “나야 도와준다고 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비상시에는 큰 전력이 되어줄 테니 말이야.” “비상시?” 거슬리는 단어였지만, 오호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은 후 혈호들을 둘러봤다. “그럼 출발하지.” 기무혁은 혈호방의 정예와 함께 흑야방으로 향했다. 그 모습이 마치 다른 맹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늑대 같았다. * * * [이어서 속보 전해드립니다. 무림맹과 팔대문파의 병력이 현재 흑천회의 본진으로 돌입했다는 소식입니다. 기관진식과 술법진이 파괴되며 발생한 폭음으로 현장은 전쟁터를 방불케하고 있습니다.] 화면에 비치는 흑천회의 건물은 곳곳이 파괴돼 있었다. 바닥이 패이고 벽이 무너지고, 충돌의 흔적이 사방에 보였다. [기파가 연달아 충돌하는 탓에 드론으로도 내부를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무림맹은 가능한 한 신속하게 흑천회주 및 간부들을 체포해 작전을 마무리하고, 추가적인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입장을…….] 콰아아앙-! 그 순간 찬란한 금빛 권격이 터져 나왔다. 무림맹주 여필극의 독문무공인 금원유성권의 여파였다. “여필극 저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수십 년간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야…….” 화면을 지켜보고 있던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여인이 헛웃음을 흘리더니,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흑천회 쪽 상황은?” “정문은 이미 뚫렸고, 현재 독을 풀어둔 절진에서 교전 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적들도 최상급 피독주를 준비해서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답니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보고하는 부하에게 흑야방주가 물었다. “그리고?” “무엇이든 달라는 대로 줄 테니, 지금 당장 지원을 와달라는 흑천회주의 전언입니다.” “…….” “방주님. 어떻게 할까요?” 흑야방주는 잠시 눈을 감았다. 제아무리 무림맹과 팔대문파의 전력이 강해도 흑천회의 본진에는 무수히 많은 기관진식과 술법진, 방어시설이 설치 돼 있었다. 결코 쉽게 뚫리지는 않는다. 팔대문파 중 셋이 총력전을 펼치면 흑천회 본진을 뚫고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넷이면 흑천회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을 터였다. ‘헌데 저기에는 무림맹과 팔대문파 다섯이 나섰지.’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아쳐서 단숨에 끝장을 보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하지만 흑천회를 멸문시킨 후에는 무림맹주가 전쟁을 멈출까? 흑야방주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결론을 내리고 눈을 떴다. “……이참에 제대로 빚을 지워두는 것도 좋겠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부복한 채 대기하고 있던 무인들이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흑천회를 지원해 무림맹의 뒤를 친다!” “존명!” 흑야방주는 체구가 작은 여인이었지만, 이 순간 그녀의 존재감은 흑야방의 일백 정예무인들을 압도했다. 그러나 직접 지원병력을 이끈 흑야방주가 본진을 나섰을 때, 정문 앞을 가로막는 수십 명의 무리가 있었다. “……하. 누군지 몰라도 치밀하게 계획을 꾸몄구나.”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도를 풍기는 자들. 그중 몇몇의 손목에서 호랑이 문신을 발견한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혈호방?” 그들은 최근 혈호방이 급격히 세력을 불리는 와중에 흡수한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었다. 사파무림에 파란을 일으키며 등장했던 소수정예의 진짜 혈호들. 그리고 그 선두에 흑야방주가 아는 얼굴이 있었다. “흑야방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앞으로 나선 오호가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혈호방의 오호. 베일에 싸인 혈호방주를 대신해 혈호방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인물. 방주 아래에 그보다 서열이 높은 혈호가 셋이나 있지만, 문파에 끼치는 영향력만큼은 오호가 이인자나 다름이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거냐?”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저희 혈호방이 사파오패의 새로운 일원이 된 기념으로 말입니다.” “……뭐?” 잠시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던 흑야방주가 이내 앙천대소를 터트렸다. “아하하하하하하!” 흑천회가 무림맹과 팔대문파에 공격을 당하는 상황에서, 혈호방이 자신들을 막는 이유를 깨달았으니까. “재밌구나! 그러니까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흑천회의 자리를 차지하겠다? 아니지, 이렇게 빨리 움직인 걸 보면 그 정도가 아니라…….” 사파무림에서 수십 년을 살아남아 정상에 선 노괴답게, 흑야방주의 눈치는 보통이 아니었다. 눈을 번뜩인 그녀가 섬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희 놈들이 무림맹과 편을 먹은 게로구나? 그렇지?” 순식간에 정확한 추리를 해낸 흑야방주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맺힌 직후. 화아아아악! 그녀의 장포가 미친 듯이 펄럭였다. 동시에 흰자위까지 검게 물들고, 희끗희끗했던 머리카락은 새하얗게 물들었다. 사파의 초고수가 내뿜는 진득한 살기에 혈호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동종업계에 대한 예의라고는 없는 꼬마야. 일단 사지를 찢어놓은 후에 더 자세히 추궁하도록 하마.” 예상을 벗어난 흑야방주의 거친 반응에 오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기무혁을 힐긋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음. 비상시로군.” 기무혁은 그런 오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런 개새끼가?’ 134화.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흑야방주는 보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겉으로는 고운 외모를 유지한 오십 대 정도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칠십 대의 노인으로 흑천회주와 동년배였다. “사파무림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 법이거늘. 정파 놈들과 손을 잡은 것도 모자라…….” 그녀의 눈에 무림맹의 손을 빌려 흑천회를 처리하려는 혈호방은 마도의 정신병자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감히 본녀를 겁박하느냐!” 콰콰콰콰콰! 흑야방주와 같은 초고수가 내공을 끌어올리자 일대의 공기가 거칠게 들끓어 오르는 듯했다. “겁박이라니요?” 하지만 오호는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한번 치켜떴을 뿐, 당황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흑야방의 주인께 어찌 그런 마음을 먹겠습니까. 부디 오해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오해라?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이 물러나라는 겁박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분노한 흑야방주가 소매를 크게 휘두르자 강풍이 몰아쳤다. 그 속에서 한 줄기 암기처럼 숨어 있던 기운이 오호를 노렸다. 스악! 오호는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 기운이 가느다란 혈선을 만들었다. “…….” 뺨을 따라 주르륵 핏물이 흘러내렸다. 오호의 미소가 잠시 멎었고, 동시에 혈호방의 무인들이 일제히 기세를 끌어올렸다. 크르르르르……. 혈호들이 동시에 기운을 끌어올리자 수십 마리의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동시에 흑야방의 일백 정예무인들도 마주 기세를 끌어올렸다. 자칫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충돌이 벌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을 텐데. 왜 저렇게 대가리가 뻣뻣해?’ 기무혁은 오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면서 그 역시 검파에 손을 올리고 몸을 긴장시켰다. 최악의 경우 싸움이 벌어진다면 최대한 시간이라도 끌어 볼 생각이었다. 저쪽에는 초고수인 흑야방주가 있으니 혈호방이 아무리 최정예를 끌고 왔어도 승산은 적겠지만……. 그 순간. “제 언행에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오호가 고개를 깊게 숙이며 흑야방주에게 사과했다. 상대의 예상치 못한 저자세에 흑야방주의 얼굴에도 이채가 어렸다. “……그래도 목숨은 아까운가 보구나. 지금이라도 내 눈앞에서 꺼진다면 굳이 쫓아가 죽이지는 않으마.” 흑야방주 역시 혈호방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었기에, 선심 쓰는 척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나 오호 또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흑야방주님을 위해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사죄의 의미로 부디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 오호의 눈짓에 혈호 중 하나가 상자를 가져다 바쳤다. 혈호방에서 준비한 선물이라는 말에 흑야방주의 미간이 좁혀졌다. 상대의 진의를 가늠하는 듯했다. 그러나 상자가 열린 순간,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예의라곤 없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성의를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지는구나. 무척 귀한 물건을 구했어.” 천하의 흑야방주조차 감탄할 만한 선물이 무엇인지, 기무혁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녀의 태도가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호가 처음부터 이 상황을 의도했다는 것 또한. “방주님. 저희 혈호방은 흑야방과 긴밀한 우정을 쌓고 싶습니다.” “……우정이라 함은?”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두 방파 간의 굳건한 동맹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 대답은 없었지만, 흥미를 보이는 흑야방주의 반응에 기무혁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오호를 슬쩍 노려봤다. ‘그럼 그렇지. 이 능구렁이 같은 자식은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어.’ 오호는 흑천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혈호방이 사파오패의 일원이 된 이후를 이미 생각하고, 미리 동맹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본 방과 혈호방의 동맹이라…….” 한편 흑야방주의 머릿속에서도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는 분노하고 있었지만, 상대의 제안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자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확실히 지금 흑천회를 도우러 가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 흑야방주는 흑천회와의 오랜 관계를 버리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움직인다. 그것이야말로 사파무림인에게 가장 중요한 행동 원리였으니까. ‘차라리 그 자리를 혈호방이 차지하게 돕는다면…… 본 방의 위치는 변함이 없을 터.’ 흑야방주는 흑천회주처럼 커다란 야망이 있지는 않았다. 큰 변화보다는 현재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를 바랐다. 오호는 그 성향을 미리 파악하고 동맹을 제안한 것이었다. “흥미롭구나. 이야기를 한번 나눠볼 만해. 다만…….” 흑야방주는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 두 방파의 무인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멀리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시선들도 의식하곤 미간을 찌푸렸다. “모양새가 영 좋지 않구나.” 이 자리에서 자신이 순순히 물러나면. 흑야방이 흑천회를 도우려고 나섰다가 혈호방이 막아서자 지레 겁먹고 포기했다는 소문이 돌 수도 있었다. “혈호방에서 내 체면을 조금 더 세워주었으면 하는데.” “공식적인 동맹을 맺으면, 흑야방의 이름이 저희 혈호방보다 항상 앞서 적힐 것입니다.” 오호는 이만하면 충분히 상대의 자존심을 세워준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존심 강한 사파의 종주를 너무 얕본 판단이었다. 쯧쯧, 하고 혀를 찬 흑야방주가 말했다. “그야 당연한 것이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체면을 세워달라는 말이네.” “……바라시는 것이 있으면 편히 말씀해 주시길.” 그 순간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그린 흑야방주가 모두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모인 것도 기념할 겸, 혈호방과 본 방에서 한 명씩 나와서 친선 비무를 벌이도록 하지.” “…….” “무인들끼리 겨루어 보는 것만큼 문파 간에 친목을 다지는 일이 없지 않겠나?” 처음으로 오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입에서 이어서 나올 말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규칙은 생사결. 양측의 대표인 나와 자네는 제외하지. 그 외에는 이 자리에 있는 누가 나서도 상관없는 것으로.” 대놓고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흑야방주는 이 자리에서 혈호방의 무인 한 명을 죽이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것으로 자신들의 우위를 증명하려고 말이다. 오호가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방주님. 좋은 자리에서 굳이 피를 보셔야겠습니까?” “서로 피를 나누어야 단순한 동맹을 넘어 진정한 혈맹(血盟)이 될 수 있지 않겠나?” 궤변이었으나 동시에 지극히 사파다운 방식이었다. 힘을 과시하기 위해 상대를 짓밟고, 그를 통해 서열을 확실하게 하는 것. “…….” 오호는 말없이 흑야방주를 노려봤다. 이 자리에 함께 온 혈호들은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동료들이었다. 그들을 사지로 내몬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그건 어렵겠군요. 차라리…….” 입가에 싸늘한 조소를 띤 오호의 세계가 핏빛으로 물들려는 찰나. “혈호방에서는 제가 나서겠습니다.” 혈호방 진영에서 앞으로 걸어 나오는 푸른 늑대 가면. 기무혁이 오호의 옆에 섰다. ‘쉽게 넘어갈 리가 없지.’ 다행히 오호의 눈깔이 돌아가기 전에 나선 기무혁이 흑야방주를 똑바로 바라봤다. 상대는 사파오패의 주인 중 한 명이었다. 제아무리 대화가 통하는 정상인처럼 보여도, 이 나라에서 한 손에 꼽을 만큼 지독한 악인이라는 뜻이었다. “호오. 목소리를 들어보니 꽤나 어린데, 패기가 넘치는 아이로구나.” 흑야방주는 기무혁이 스스로 희생하기로 결정하고 나섰다고 생각했는지, 제법 기특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헌데 너는 호랑이 무리 사이에서 늑대 가면을 썼구나? 사연이 있더냐?” 기무혁이 고갯짓으로 굳어 있는 오호와 혈호들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호랑이보다는 늑대를 더 좋아해서요. 그래서인지 저기 있는 선배들이 절 별로 안 좋아합니다.”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흑야방주가 깔깔 소리 내 웃었다. “어린 것의 자신감이 마음에 든다! 그럼 나는 내 양아들을 내보내지. 주극아.” “예, 어머니.” 흑야방주의 부름에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 걸어 나왔다. ‘강하다.’ 기무혁은 한눈에 상대의 강함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오호도 마찬가지였다. [……네 상대로는 벅차 보이는군. 최대한 시간을 길게 끄는 작전으로 가라. 무림맹 쪽 상황이 바뀌면 내가 다시 개입하지.] [됐으니까 구경이나 해.] 이어지는 오호의 전음에서 짜증과 분노가 느껴졌다. [괜히 설치다가 죽지 마라. 일이 끝나고 무림맹과 척을 지긴 싫으니까.] 두 사람이 전음을 주고받는 것을 눈치챈 흑야방주가 말했다. “다시 말하마. 규칙은 생사결.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것이다. 만약 도중에 제3자가 개입하는 일이 벌어지면…….” 츠츠츠츳. 다시 한번 그녀의 장포가 사납게 펄럭였다. “나를 무시하는 것이라 간주하겠다.” 동의의 의미로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양측의 무인들이 뒤로 물러나며 싸울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주극이라 불린 무인이 검을 혀로 핥고는 느릿하게 자세를 잡았다. “장래가 창창한 어린애 같은데, 미안하게 됐다.” 그러나 입가에는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 비열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절정고수. 그것도 원숙한 경지.’ 느껴지는 기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전력을 다하더라도 승리를 점치기 힘든 상대라는 것을. 초고수인 흑야방주의 안목으로 살폈을 때, 충분히 상대를 꺾을 수 있다고 판단한 강자이리라. 하지만 그건 무인 대 무인으로 대결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최대한 부상은 피하는 방식으로.’ 기무혁은 오늘 아침 스스로에게 한 다짐을 지킬 생각이었다. 툭툭. 환몽을 쥐지 않은 손으로 검집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환몽이 조용히 진동했다. 그사이 흑야방주는 부하들이 가져온 의자에 앉았다. “시작하거라.” 그녀가 느긋하게 싸움을 구경할 생각으로 등을 기대며 입을 연 순간. 콰앙! 기무혁은 바닥을 강하게 밟으며 전력으로 쇄도했다. 여유를 부리는 적을 상대로 선공의 이점을 취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삽시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가소로운 표정으로 기무혁을 바라보던 적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생각보다 제법…….” 그 순간 기무혁이 빛살처럼 발검했다. 김복자가 만든 검붉은 봉인에서 해방된 환몽이 자신의 기운을 마음껏 드러냈다. 화아아아아악-! 환각을 보여주는 요검의 기운이 사방팔방으로 휘몰아쳤다. 끈적이는 기운과 진득한 혈향이 일대에 풍기는 듯했다. “으……!” 상대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정신을 현혹하는 요검의 기운에 호흡이 거칠어지고, 검을 쥔 손이 떨려왔다. 찰나에 가까운 짧은 망설임이었지만 그 정도면 생사를 가르기에 충분했다 ‘이건 무인과 무인의 대결이 아니야.’ 반면 기무혁의 시간은 찰나를 유영했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가 불러온 사고의 가속. 느린 화면처럼 서서히 겁에 질려가는 적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무혁은 생각했다. ‘사파오패라는 이름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지.’ 자신을 향해 다가온 사신을 바라보는 눈에 극심한 공포가 어렸다. 그 눈동자에 비친 기무혁은 지극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빠르게 처리할 뿐.’ 가진 실력의 일 할도 발휘하지 못하고 생사결에서 패할 것을 직감한 상대의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졌다. “이, 개새……!” 무언가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은 듯했으나, 이미 붉은 궤적이 목을 스치고 지나간 후였다. 스걱! 뎅겅 날아간 머리가 바닥을 구르고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후두둑 쏟아지는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쿵! 환몽이 뿜어낸 안개가 그 핏물을 흡수하며 흩어지고, 머리가 사라진 흑야방주의 양아들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 “…….” 단 일 합만에 결정된 승부. 양측이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어느새 자리로 돌아온 기무혁이 오호 옆에 나란히 서서 어깨를 으쓱했다.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좀 빨리 끝냈습니다.” “……그렇군.” 오호는 한 걸음 옆으로 움직여 기무혁과 거리를 벌렸다. 135화. 머지않아서 짧은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흑야방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에게서 분노에 찬 고함과 욕설이 터져 나왔다. “비겁한 놈! 술법무구를 쓰다니!” “감히 방주님의 양자를 죽이고도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방주님! 명령만 내려 주시면 놈들을 모조리 찢어 죽이겠습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맹렬한 살기. 무기를 뽑아 든 흑야방의 무인들은 당장이라도 기무혁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 기세였다. 그러나 혈호방도 물러서지 않고 무기를 뽑아 들었다. 두둑두둑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푼 오호가 싸늘하게 말했다.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군. 생사결이 규칙 아니었나?” 먼저 생사결을 규칙으로 삼은 것은 흑야방주였다. 물론 그녀의 의도와 달리 목이 날아간 것은 자신의 양아들이었지만, 그럼 이쪽이 순순히 목을 내놓고 죽었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 이상으로 양보하는 것은 혈호방으로서도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흑야방주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만.” 흑야방주의 한마디가 소란을 잠재웠다. 입을 꾹 다문 흑야방의 무인들이 살기를 겨우 가라앉히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내 양아들 주극의 패배다. 상대를 얕보고 여유를 부렸으니, 검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죽어도 할 말이 없지.” 분노한 방도들과 달리, 정작 양아들을 잃은 흑야방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대신 그녀는 푸른 늑대 가면을 쓴 기무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또한 술법무구를 다루는 것도 무인의 역량이다. 우리가 정파도 아닌데 그런 걸로 비겁하다고 할 수는 없는 법이야.” 흑야방주가 패배를 인정하자 오호도 입가에 다시 가식적인 미소를 띠었다. “흑야방주님의 넓은 이해심에 감사드립니다. 생사결 중 발생한 아드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저 역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괜찮다. 난 양아들이 많아. 그보다…….” 흑야방주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다시 기무혁을 향했다. 정확히는 허리춤에 걸린 환몽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그 검. 나에게 주지 않겠느냐?” 흑야방주의 말에 뒷세계에서 온갖 인간군상을 경험해 본 기무혁조차 혀를 내둘렀다. ‘사파오패의 주인들 중에 제정신인 인간이 없다더니.’ 눈앞에서 양아들이 목 잘린 시체가 되었는데, 그 목을 벤 검을 탐낼 줄이야. 과연 수십 년간 사파오패의 종주로 살아온 인간다웠다. “흑야방주님은 검을 쓰시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오히려 방주님처럼 고강한 무인께는 이런 병기가 거치적거리기만 할 테고요.” 당연히 환몽을 넘겨줄 생각은 없었기에, 기무혁은 에둘러 거절했다. 그러나 흑야방주 역시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색이 고우니 녹여서 장신구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구나. 검신을 타고 흐르는 요기도 마음에 들고……. 그래, 그 검을 준다면 내 너를 새로운 양자로 삼으마.” 녹여서 장신구로 만든다는 말에 환몽이 부르르 떠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농담이겠지만, 기무혁은 안심하라는 의미로 검집을 툭툭 두드렸다. ‘걱정 마. 누구한테도 널 뺏길 생각은 없으니까.’ 다행히 바로 옆에서 기무혁의 짜증을 느낀 오호가 대신 나서주었다. “방주님.” 그가 기무혁의 앞을 가로막고 서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검은 혈호방의 재산이기도 합니다. 추후에 제가 방주님께 말씀드려 선물로 드릴 수 있도록 힘써보겠습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지만, 흑야방주가 그것을 알 수는 없었다. 오히려 저러한 신병이기가 고작 절정고수의 손에 들린 것을 비로소 납득한 눈치였다. “……흐음. 알겠네.” 끝까지 탐욕스러운 눈으로 환몽을 바라던 흑야방주가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겨우 떼고 말했다. “그럼 동맹에 관해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잡도록 하지.” “저희는 오늘이라도 깊은 이야기를 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흑야방주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말고, 내일 점심에 다시 만나도록 하지. 그때쯤이면…… 저쪽도 얼추 정리가 될 테니 말이야.” 흑야방주는 멀리 보이는 빌딩의 전광판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흑천회가 공격당하는 상황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좋습니다. 흑야방의 결정에 후회가 없도록 준비해 오겠습니다.” 두 사람은 다음 날 실무자들끼리 다시 모여서 동맹에 관해 논의하기로 했다. 혈호방으로서는 최상의 결과였고, 기무혁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로써 흑야방이 변수로서 개입할 일은 사라졌다.’ 팔대문파가 예상 못 한 삽질만 하지 않는다면, 혹은 외부에서의 큰 변수만 생기지 않는다면 흑천회는 오늘 사라질 것이다. 두 방파의 대표자들 간에 조율이 끝나자 혈호방과 흑야방의 무인들이 비로소 무기를 집어넣었다. 오호가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멀리 나가지 않겠네.” 흑야방주는 멀어지는 오호와 기무혁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혈호방주에 저 오호라는 녀석만 해도 감당하기 힘든 놈들인데…….” 당사자는 몰랐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호보다 기무혁에게서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나조차 처음 보는 신병이기를 제 몸처럼 다루는 어린 검객이라니. 쯧. 혈호방에 괴물이 하나 더 늘었구나.” 흑야방주는 자신의 양아들을 일검에 베어버리던 기무혁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초고수인 그녀조차 요검이 내뿜은 안개를 완전히 꿰뚫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찰나에 번뜩인 검의 궤적만큼은 확실히 보았다. 수십 년간 무림에 몸담은 자신도 몇 번 보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깔끔한 일검이었다. 당장 지금의 경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흑야방주는 그 궤적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재능을 발견했다. “……다들 그 늑대를 잘 기억해 두거라.” 오랜 시간 버티고 살아남은 사파무림의 대모(代母)가 하는 말이었다. 흑야방의 간부들이 진지하게 경청했다. “머지않아서 사파무림의 거물이 될 놈이다. 가능한 한 적으로 만들지 말되, 적으로 만나면 반드시 죽여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흑야방의 간부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머릿속에 푸른 늑대 가면을 쓴 기무혁이 확실히 각인된 순간이었다. [현재 흑천회 본거지에서는 대규모 강풍과 뇌성벽력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기관진식과 술법진이 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무림맹은 신비전 소속의 술법사들과 협력해 대응에 나선 것으로……] TV에서는 폭격에 가까운 공격을 당하는 흑천회가 비춰지고 있었다. 불벼락이 계속해서 건물 위로 떨어지고 폭풍이 일대에 휘몰아쳤다. 흑천회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듯 보였지만, 흑야방주는 싸움이 그렇게 쉽게는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흑천회주 그 늙은이가 혼자 곱게 죽을 위인은 아니지.” 최후의 발악을 시작한다면 적어도 무림맹주나 팔대문파의 장문인 한둘은 데리고 가줄 수 있지 않을까? 사파오패의 종주 중 한명으로서 이 기회에 흑천회주가 균형을 맞춰주길 바랐다. “쯧. 도대체 이해를 못 하겠구나. 수십 년간 잠잠하던 무림에 왜 이리 갑자기 태풍이 불어대는 것인지…….” 흑야방주는 자신이 조금 전에 그 이유와 만났다는 사실만큼은 꿈에도 알 수 없었다. * * * 김복자는 신비전의 술법사들과 함께 무림맹의 후방을 지원했다. 그녀의 역할은 흑천회에서 설치한 술법진과 기관진식을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콰콰콰콰콰! 쿠르르르릉! 눈앞에서 폭풍과 벼락, 온갖 자연재해가 펼쳐지고 있었지만 술법사들의 표정은 다급해 보이진 않았다. 김복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녀는 조금 따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쉽네.’ 기의 흐름을 무인보다도 세밀하게 살필 수 있는 술법사의 눈에는 기관진식과 술법진이 얽혀있는 구조가 마치 퍼즐 문제처럼 보였으니까. 김복자는 몇 명의 술법사들과 함께 일정 구역을 맡아, 무인들의 경호를 받으며 술법진을 해제해 나갔다. 퍼즐 하나가 풀릴 때마다 술법진이 해제되고, 선두의 무인들은 더욱 안전하게 전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간단한 작업을 반복해 가던 중, 함께하는 술법사 중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술법사가 피곤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술법진 해제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있는거냐?” “아뇨? 무림맹 라이센스 시험장에서 한 번 해본 게 전부인데요.” “딱, 딱 한 번이라고?” 당황하는 술법사들의 반응에 김복자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했던 거랑 별 차이 없는데?’ ‘근데 다른 구역을 맡은 사람들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나만 이렇게 꿀 빨아도 되나…….’ 몇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김복자는 누구들처럼 사서 고생하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얌전히 시키는 일만 했다. 대신 여유가 생기자 청랑의 단톡방을 확인했다. 다들 바쁘게 임무 수행 중인지 새롭게 올라온 내용은 없었다. [Jiwoo : 언니! 이거 봐봐!] 대신 새로 온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제주도에서부터 친해진 구지우가 보낸 동영상이었다. 소녀의 자그마한 손바닥 위에서 술법용 부적 몇 개가 춤을 추고 있었다. [rabbit : 미쳤다! 바람 술법을 익힌 거야?][Jiwoo : 웅! 언니가 가르쳐 준대로 연습하니까 됐어!] 전에 구지우의 절맥을 고쳐주면서 심심풀이 삼아 조금 가르쳐 본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꽤 재능이 있었다. 물론 김복자는 본인 기준에서 ‘꽤 재능이 있다.’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몰랐다. 천재에게는 모든 것이 쉬워 보이는 법이니까. [rabbit : 조금만 더 연습하면 나중에 언니 가게에서 일해도 되겠다.][Jiwoo : 또또 가르쳐줘! 술법 재밌어!] 낑낑대며 용을 쓰는 다른 술법사들과 속도를 맞추면서, 김복자는 손가락으로 툭툭 메신저를 적었다. [rabbit : 다음에 만나면 알려줄게. 지우 어디 아픈 데는 없지?[Jiwoo : 웅! 근데 무혁 오빠한테도 동영상 보냈는데 답장이 없다……(시무룩)] 시무룩하게 축 처진 강아지 이모티콘이 귀여워서 킥킥 웃었다. [rabbit : 지금 바빠서 그래. 나중에 보면 엄청 잘했다고 칭찬해줄걸?][Jiwoo : 진짜?!?] 당연하지, 라고 답장한 김복자는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술법진 너머의 한 지점을 가만히 응시했다. 뺘앗! 가방 안에 있던 살구도 바깥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김복자는 그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어주다가 주변에 있는 술법사들에게 경고했다. “아저씨들. 잠깐만 뒤로 물러나 있어요.” “응. 왜 그러느냐?”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좀 도와주기나…….” 투덜거리는 술법사들을 무시하고 김복자가 선두로 나섰다. 그녀가 가방에서 푸른 늑대 가면을 꺼내 얼굴에 쓴 순간. 지이이잉. 술법진의 한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흑천회의 살수들이 그 안에서 튀어나왔다. “적이다!” “으허어억!” “술법사들을 지켜!” 지척에서 나타난 적들에게 혼비백산한 술법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하고, 앞쪽에서 경계 중이던 무인들이 황급히 달려왔다. 그러나 상대는 술법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투입된 전문적인 살수들. 무림맹의 무인들이 오기 전에 술법사들을 베고 도주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 순간 김복자의 눈에서 새파란 귀화가 피어오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까귀. 왕뱀. 삽살이.] 그녀의 화려한 악세사리들이 진동하며 모습을 드러낸 괴이들이 살수들을 막아 세웠다. 제주도 이후 수행한 특훈으로 몸집이 두 배씩은 커진 모습이었다. 김복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살구의 등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살구야.] 몇 달간 함께 지내며 서로의 기운에 익숙해진 둘이었다. 김복자가 자신의 술법으로 금시조의 기운을 일시적으로 증폭시켰다. 화르르륵! 살구에게서 피어오른 불꽃이 몸을 휘감더니, 이내 타조만 한 크기로 부풀어오른 살구가 포효했다. [태워버려.] 뺘아아아아-! 대괴이의 불꽃이 흑천회의 살수들에게 쏟아졌다. 136화. 다시 소개하지 화르르르륵! 화염이 휩쓸고 간 자리에 불에 탄 시체들이 쓰러져 있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기습에 동원된 살수들의 절반이 줄어들었다. 뺘앗……다시 원래의 아담한 크기로 돌아온 살구가 지친 모습으로 날개를 축 늘어뜨렸다. [우리 살구. 잘했어.] 김복자는 살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 가방 안에 넣었다. 그러나 싸움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저것부터 죽여!” 동료들을 방패 삼아서 불길을 뚫고 나온 살수들이 김복자에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눈에서 살기가 번들거렸다. 김복자는 달려드는 살수들을 바라보며 최건이 해준 조언을 떠올렸다. 예전에 기무혁과 신강헌의 라이센스 시험 준비를 도와주기로 했을 때였다. -네게도 무림인과 싸우는 법을 가르쳐주마. 배워두면 언젠가 큰 도움이 될 게다. -……굳이요?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다. 그녀가 두 사람의 무림인 라이센스 시험을 도와주기로 한 것은 최건이 보상으로 주기로 한 술법서 때문이었으니까. ‘괴이를 다루는 술법을 익혀서 대신 싸우게 하면 되지, 내가 무림인하고 직접 싸울 일이 뭐가 있어?’ 김복자는 그렇게 생각해서 배우지 않으려고 했지만, 기무혁이 그녀를 살살 꼬드겼다. -복자야. 같이 배우자. 끝나면 맛있는 거 사줄게. -야 기무혁! 넌 먹을 거면 다 되는 줄 알아? -끝나고 마라탕 콜? -……쓰읍. 그 꼬드김이 어느정도 마음을 바꾸게 한 건 사실이었다. 기무혁은 자신이 좋아할 만한 맛집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매일 치고받으면서 즐거워하는 두 바보를 보며 뭐가 저렇게 좋을까 궁금했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괴이 전부 불러봐! 이 신강헌 님이 전부 두들겨 패주지! -술법이랑 괴이들이랑 같이 연계해야 효과가 배가 될걸? -하, 이 바보들하고 같이 땀 흘려야 하다니……. 김복자는 술법사가 무림인과 싸우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문제는 그녀의 상대는 평범한 무인들이 아닌 무공의 천재들, 심지어 둘 다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의 인간들이라는 것이었다. -흐아아아앙! 난 못 해! 싫어! 무섭다고, 이 개새끼들아! 너네는 초보자한테 봐주는 것도 없냐! 하루 만에 김복자는 눈물 콧물을 쏟았다. 눈앞에서 칼날이 오가고, 가볍게 닿기만 했는데도 몸에 퍼런 멍이 들었으니까. 두 사람이 흘리는 살기에 다리가 후들거려서 넘어지기를 수십 번. 다 집어치우고 집에 가고 싶었던 건 셀 수도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모를 오기가 생겼다. -씨이……. 조금만 살살 해봐! 다시 해볼 테니까! 결국 그녀는 기무혁, 신강헌과 함께 훈련하면서 괴이들을 부려 무인과 싸우는 법에 익숙해졌다. 제주도에서는 탐라련 무인들을 상대로 실전경험도 꽤 쌓았다. 그리하여 지금. [흑천회 별거 없네? 정예는 다 저쪽에서 싸우고 있어서 그런가?] 눈앞에서 달려오는 살수들 정도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김복자가 고개만 까딱여 괴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삽살이, 왕뱀. 막아.] 소형차만큼 커진 삽살개와 전봇대만큼 두꺼워진 구렁이가 주인을 보호하자 거대한 벽이 생겨난 듯했다. 그 순간 살수들 중 하나가 빈틈을 발견하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죽어!” 무방비해 보이는 술법사의 지척까지 접근한 살수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맺혔다. 그가 휘두른 소검이 김복자의 심장을 노렸다. 하지만 살수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김복자가 의도적으로 딱 한 명만 자신에게 접근할 수 있게 빈틈을 조절했다는 것을 말이다. 까앙! 순간적으로 길어진 김복자의 손톱이 소검을 튕겨냈다. 술법으로 강철처럼 변한 네일 팁이 오색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이거 공들여서 한 네일인데, 어떻게 책임질 거야?] 비록 힘이 달려서 주르륵 밀려났지만 김복자는 웃었다. 그 순간 가방 안에서 날아오른 부적들이 살수의 몸에 달라붙었다. “……!” 당황한 살수가 뒤늦게 부적들을 떼어내려 했지만. 김복자가 엄지와 검지로 손가락 총을 만들어 살수를 겨눴다. 그리고 부적에 미리 새겨둔 주문을 외웠다. [펑-!] 괴황지에 새겨진 붉은 글자들이 꿈틀거렸고, 곧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켰다. 퍼버버벙!“커헉!”피를 토한 살수가 휘청이며 물러섰다. 비로소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도주를 시도했다. 하지만 몸을 돌린 살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검은 먹구름이었다. [까귀- 물어!] 먹구름처럼 넓게 펼쳐진 까귀가 살수를 집어삼켰다. 으적으적으적으적! 육편이 으깨지는 섬뜩한 파열음이 들리고 잠시 후. 캬캬캬캬-! 너덜너덜해진 살수를 뱉어낸 까귀가 포효했다. 다른 괴이들에게 막혀 동료가 당하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던 살수들이 두려움에 질려 중얼거렸다. “마, 마녀…….” “일단 후퇴해!” 애초에 그들은 제대로 된 살수조차 아니었다. 흑천회에서 신비전의 술법사들을 제거해 시간을 끌려는 목적으로 보낸 하급무인들. 적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려 했지만, 김복자는 그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명심하거라. 도망치는 악인에게 자비를 베풀면, 훗날 네 심장을 찌를 칼을 들고 돌아올 게다. [누가 도망치게 둔대?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 건데?] 괴이들이 적들을 물어뜯고, 붙잡아 으스러뜨리고, 짓이겼다. “사, 살려줘!” “으아아아……!” 기무혁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십 년 후에 뒷세계에서 명성을 떨친 전투술법사 레드래빗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김복자는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이었다. ‘전부 이삼류 수준이야. 두 바보들하고는 실력이 비교조차 안 돼.’ 기무혁과 신강헌에 익숙해진 눈에 이삼류 무인들이 찰 리 없었다. 이기는 것이야 당연했다. 오히려 그녀는 흠집이 난 자신의 손톱을 바라봤다. 진짜 손톱이 아니라 술법을 걸어둔 네일 팁이 손상된 것뿐이었지만,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지 못한 것이 못마땅했다. ‘만약 상대가 절정고수였다면 손가락까지 잘려 나갔을 거야.’ 경각심이 들었다. 아직 자신은 부족했고, 더 강해져야 했다. 보다 전투에 적합한 술법들을 배우고 싶었다. ‘나한테도 술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독학으로 술법을 익히며 한 번도 부족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지만, 기무혁과 최건의 모습을 보게 된 이후로 종종 하는 생각이었다. 그 괴물 같은 기무혁도 선생님을 만나고 더 강해졌으니까. 자신에게도 더 강한 술법을 가르쳐줄 스승이 있다면 어떨까? “부크루장 위신이 있지. 나만 뒤처지는 건 싫다고…….” 팔짱을 낀 김복자가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릴 때였다. 화아아아아!몰아치는 강풍과 함께 등 뒤에서 어마어마한 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 흠칫한 김복자가 경계태세를 취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기기묘묘한 문자들을 전신에 두른 노인이 허공에 떠서 술법으로 싸운 흔적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이걸…… 다 네가 했느냐?” 놀랍다는 표정으로 김복자를 바라보는 노인. 그는 김복자도 일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 * * 만박자는 신비전의 원로 중 한 명으로, 뛰어난 술법사이며 저명한 학자이기도 했다. 또한 무림맹에 우호적인 술법사 중 대표적인 인물로 이번 작전에도 무림맹주의 요청에 기꺼이 나서주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최근 큰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내 평생의 연구가…….’ 인공단전연구. 술법사의 길에 들어섰을 때부터 무인의 단전에 관심이 많았던 그였다. 왜 누구는 단전을 생성할 수 있고, 누군가는 생성할 수 없는가? 무림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까이에서 다양한 무림인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으니까. ‘만약 인공단전을 통해서라도 꾸준히 기를 순환하고 단련해 높은 경지에 이르면, 진짜 단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만박자는 수십 년간 그 방법을 연구하고 가능성까지 발견했으나, 인공단전의 표본이 워낙 적다 보니 결국 연구는 벽에 막혔다. 도움이 필요했다. 인공단전의 가치를 더 널리 알리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된다면 표본도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에는 아예 너튜브에 자신의 이론을 발표하는 것이 어떨까라는 마음까지 먹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이론을 알아준다면……!’ 그러던 차에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익명의 편지에는 놀랍게도 어디에도 발표하지 않은 자신이 이론이 언급돼 있었으며, 이미 자연적으로 성공한 사례가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한 명이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가 있었는지, 인공단전시술의 다양한 부작용 사례들이 덤덤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소홀했던 가족에게 조금 더 신경을 쓰라는 당부가 남겨져 있었다. 만박자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학자로서의 욕심에 누군가가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구나.’ 고작 편지 한 장이었다. 하지만 그 편지를 읽고 난 후, 만박자는 마치 강력한 술법에서 풀려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될 정도로, 평생 해온 연구에 대한 애정이 급속도로 식었다. 뒤늦게 찾아온 것은 허탈감이었다. ‘이 연구에 매진하기 위해서 평생 제자도 한 명 들이지 않았는데…….’ 만박자는 큰 무력감에 빠졌다. 그 와중에 무림맹주의 지원요청을 받았고,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응낙했다. 그렇게 신비전의 술법사들을 중앙에서 지휘하며 적의 술법진을 해체하던 때……. “만박자 님! A-13구역 술법사들이 습격당했다고 합니다!” “……내가 바로 가겠네.” 살수들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비행술법을 펼쳐 날아갔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걸…… 다 네가 했느냐?” 푸른 늑대 가면을 쓴 술법사와 그 주변에 쓰러져 있는 흑천회의 무인들. 그리고 그녀가 사역한 것으로 짐작되는 괴이들이 자신을 올려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때, 푸른 가면을 쓴 여인이 손가락으로 만박자를 가리켰다. “어, 그때……!” “나를 본 적이 있느냐?” ‘어느 계파인지 몰라도 예절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나 보군.’ 만박자가 김복자의 손가락을 보며 그렇게 생각할 때, 그녀가 푸른 늑대 가면을 벗었다. “라이센스 시험장에서 봤어요. 그때 술법진 해제하는 거 도와주러 갔었는데!” “아…….” 비로소 기억이 났다. 만박자는 그녀를 기관진식에 대한 이해력이 무척 높은 젊은 술법사로 기억하고 있었다. 만박자가 빙긋 미소 지으며 그녀를 칭찬했다. “그때는 기관진식과 술법진 해체에 조예가 깊은 후배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괴이들을 다루는 솜씨 또한 대단하구나.” 김복자는 요즘 세대의 젊은 술법사답게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제가 좀 쩔죠. 근데 살수 잡았는데 포상금 같은 건 없어요?” 조금 부담스러운 질문에 만박자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내 돌아가서 건의해 보마. 헌데 자네 스승은 누구인가?” 술법사들은 무림인들보다 훨씬 더 폐쇄적이고, 그만큼 사제관계가 중요했다. 때문에 스승이 누구인지 알면 어떤 술법을 주로 익혔는지, 어느 계파의 후배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없어요.” “음?” 김복자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방금 전까지 고민이었으니까. “그냥 혼자서 독학했거든요.” “……뭐라고?” 잠시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는 만박자. 그 앞에서 김복자가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최근에 좀 막혔어요. 전투에 쓸 더 강한 술법이 필요하거든요. 뭐, 시간은 좀 걸려도 어떻게든 될 것 같긴 한데…… 암시장에서 쓸 만한 술법서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라서요.” 만박자는 말없이 김복자가 사역한 괴이들, 그리고 김복자의 가방에도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선 그가 다시 자신을 소개했다. “다시 소개하지. 나는 만박자라고 한다. 신비전의 원로이며, 한국에 다섯 명밖에 없는 대술법사이자, 지금은 일인전승이 된 전투술법계파인 필천류의 유일한 계승자이니라.” “아, 네…….” 좀 특이한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며 김복자가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만박자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혹시…….” 삶의 가장 큰 목적을 잃고 한동안 무기력함에 빠졌던 대술법가. 평생 제자조차 들이지 않았던 그의 눈앞에, 갑자기 진흙 속에 숨겨져 있던 진주가 나타났다. “스승을 만들어 볼 생각은 없느냐?” 만박자가 평생 처음으로 학문적 성취 대신 스승으로서의 성취에 욕심을 낸 순간이었다. 137화. 비대칭전력 만박자는 앞에 있는 젊은 술법사와 대화를 나눌수록 점점 더 빠져들었다. “처음 술법을 익힌 것은 언제였느냐?” “일곱 살쯤? 너튜브에 있는 기초술법강좌를 보고 따라 했어요.” 그런 영상은 대부분 조회수 올리려고 합성해서 만든 가짜일 텐데? “그, 그럼 영안은 어떤 계기로 트였느냐? 너처럼 괴이 여럿을 동시에 부리려면 상당한 트라우마를 겪었을 터인데…….” “귀신은 그냥 어릴 때부터 보였는데요?” 조상들 중에 대단한 무당이 있는 건가? “괴이를 다루는 술법서 하나만 보고 저것들을 사역했다고?” “책에 친절하게 설명이랑 주석이 달려 있어서 별로 어렵지는 않았어요.” “……?” 고작해야 스무 살이 조금 넘은, 그의 기준에서는 어린 소녀나 다름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 김복자가 보여주는 술법사로서의 재능은 만박자의 상식을 파괴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뺙!체력이 조금 돌아왔는지 가방 밖으로 고개를 내민 살구를 본 순간. ‘대괴이?’ 만박자는 살구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았고,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손을 쓸 뻔했다. 그만큼 대괴이란 위험한 존재였으니까. 금시조의 새끼라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몸 안에 품고 있는 강렬한 기운 탓에 피부가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살구야. 들어가 있어.” 뺙! 김복자가 만박자의 눈치를 살피곤 가방을 돌려서 보이지 않게 뒤로 멨다. 살구가 답답한지 뒤에서 김복자의 등을 콕콕콕 찔러댔다. “흐음. 그 괴이 말이다. 혹시…….” 만박자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김복자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대술법사를 속이는 건 불가능했기에, 그녀는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그래도 얘 덕분에 술법사들이 아무도 안 다쳤는데, 비밀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만박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본래 대괴이는 발견하자마자 신고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평생을 학자로 살아온 대술법사의 가치관은 정상인과는 꽤 거리가 멀었다. ‘대괴이와 인간의 공존 또한 학문적으로 탐구해 볼 만한 주제지. 지켜볼 만한 가치가 충분한 일이야.’ 다행히 자신과 같은 대술법가가 아니면 대괴이를 한눈에 알아보지는 못할 터였다. “혹시 모르니 기운을 감추는 술법을 알려주마. 주기적으로 걸어주면 앞으로 누가 또 알아보는 일은 없을 게다.” “진짜요? 안 그래도 걱정했는데 감사합니다! 다행이다, 살구야아!” 뺘아악!안심했는지 김복자가 가방에서 살구를 꺼내서 볼에 마구 비볐다. 만박자는 그런 둘의 모습을 흐뭇하면서도 놀라운 심정으로 바라봤다. ‘대괴이를 곁에 품고 있는데도 영향이 없구나. 오히려 저 강한 기운과 자연스레 어울리고 있는 것인가?’ 이 아이. 대술법사인 자신보다도 아득하게 넓은 그릇을 지니고 있었다. 만박자의 입꼬리가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흠흠. 그래서 말인데, 내게 술법을 제대로 배워볼 생각은 없느냐?” “음. 그게요…….” 벌써 두 번째 제안인데도 김복자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만박자는 애가 닳았다. 무공도 마찬가지지만, 술법은 독학으로 높은 경지에 오르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분야였다. 특히 필천류(筆遷流)는 과거부터 익히기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자신의 대에서는 일인전승이 되어버렸을까. ‘지금까지 제자를 들이지 않은 것도 눈에 차는 녀석이 없어서였지. 조금 쓸 만해 보인다 싶으면 다른 대술법사 놈들이 바로 채가고…….’ 만박자는 이 아이만큼은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때 김복자가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자로 들어가는 조건이 어떻게 돼요?” “……조건?” 김복자가 술법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망설였던 이유. 술법계에서 벌어지는 사제관계의 관행이 하나같이 최악이라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제자는 스승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서 일하는 무급노예 신세가 기본이고, 매달 수강료라면서 큰돈을 갖다 바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들었다. ‘그런 호구 같은 계약은 못 해.’ 다행히 상대가 자신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 김복자는 최대한 조건을 잘 협상해 볼 생각이었다. “일단 저는 일주일에 적어도 5일은 가게에 있어야 하고요.” “……가게?” “최근에 연남동에서 술법뷰티샵을 시작했거든요. 아직 본격적으로 수익이 나는 단계는 아니라서, 솔직히 수강료가 좀 부담되긴 해요.” “……수강료?” 만박자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지자 복자가 자기도 공짜로 해달라는 것은 아니라며 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안 내겠다는 건 아니고요. 혹시 할부도 받으세요?” 만박자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세상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나 했구나!” 그 역시 일부 술법사들이 제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있었다. 한 번은 동료 술법가의 연구실에 놀러 갔다가, 제자들이 노예처럼 부려지는 모습을 보고는 상대와 인연을 끊은 적도 있었다. 만박자가 씁쓸하게 웃더니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돈은 필요 없다.” “네?” “술법 수련에 필요한 재료도 전부 내 사비로 사주도록 하마. 필천류의 계승자가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 하면 안 되지. 그리고 수업은 일주일에 한두 번이면 충분할 터.” 만박자는 정말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큰 재능은 기본만 잘 가르쳐 두면, 그 이후부터는 가끔씩 돌봐주기만 해도 알아서 쑥쑥 자랄 것이었다. “내 조건은 이런데, 마음에 드느냐?” 너무나 파격적인 조건이라 이번에는 김복자가 당황할 차례였다. “……그게 전부라고요?” 그녀는 섣불리 좋아하기보다 의심부터 했다. 여전히 양지보다 뒷세계의 규칙에 익숙한 술법사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에는 분명 의도가 숨어있기 마련이니까. “아, 가장 중요한 걸 빼먹었구나.” 그럼 그렇지. 비로소 상대가 진짜 속셈을 드러낼 거란 생각에 김복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수업이 끝날 때마다 숙제를 내줄 텐데, 다음 수업 때까지는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 그것만큼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면서 만박자가 팔짱을 낀 채 단호하게 말했다. 김복자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쉬운 조건이었다.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물어보기로 했다. “너무 저한테만 좋은 조건 아니에요? 사기꾼도 이렇게는 안 해요.” “큰 오해가 있구나. 네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제안이란다.” “……?” 만박자는 지금까지 제자를 들여본 적도 없었고, 남들이 어떻게 가르치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한번 무언가에 꽂히면 그에 대한 성취욕은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나는 딱히 좋은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욕심이 많은 늙은이지. 평생 처음으로 한국에서 나보다 뛰어난 재능을 발견했는데, 이 정도 투자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만박자의 눈동자가 순수하리만치 맑게 빛나고 있어서, 김복자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한국에 다섯 명뿐인 대술법사라더니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큼 상대에게서 분명한 진심이 느껴진 것도 사실이었다. “……저 그럼 지금 절하면 돼요?” “하하! 지금은 전시이니 나중에 하거라.” 김복자가 절을 하려고 하자 만박자가 말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비록 일반적인 술법사들이 맺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와는 너무나 많이 달랐지만, 양쪽 모두가 만족한 결과였다. ‘근데 이 할아버지. 그냥 사람 좋은 호구 아냐?’ 김복자는 만박자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그 눈빛이 문득 최건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쪼금 부러웠는데.’ 제자에게 무엇이든 가르쳐 주고 싶어 하는 스승의 눈빛. 어쩌면 자신에게도 비슷한 행운이 찾아온 것은 아닐까? 물론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벌써부터 신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주 조금쯤은 마음의 문을 열어 두었다. “……뭐, 스승님이 된 기념으로 제 진짜 이름을 알려드릴게요. 복자예요, 김복자.” “예쁜 이름이구나.” 그렇게 말해준 사람은 기무혁의 부모님 이후로 처음이었다. 김복자는 괜히 청랑 가면을 다시 얼굴에 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만박자가 말했다. “따라오너라. 네 능력을 외곽에서 쓰기엔 아깝구나.” 두 사람은 술사들이 대열을 이룬 중심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가장 단단히 짜여 있는 흑천회의 기관진식을 해체하며 전진했다. 우우우우웅! 제자를 얻어 의욕이 충만해진 만박자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입에서는 복잡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만박자의 몸 주변을 떠다니는 문자들이 흑천회의 기관진식이나 술법의 틈새로 스며들면, 잠시 후 쿠궁-! 소리를 내며 무력화되었다. 그렇게 술법진이 하나씩 해제될 때마다 만박자가 김복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복자야. 방금 내가 기관진식을 해제할 때 사용한 술법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쬐끔은 따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뭐라고? 하하하하!” 흥이 오른 만박자에 김복자가 더해진 것만으로도 흑천회의 기관진식을 해체하는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어느덧 그들은 흑천회 본진에 설치된 주요 기관진식과 술법진 대부분을 해제하는 데 성공했다. 쿠르르르릉……! 땅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흑천회 전체를 아우르던 거대한 술법의 기운이 서서히 흩어져갔다. 무인들의 전진을 가로막던 환영, 안개, 미로 같은 현상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먼 곳에서. 콰콰콰콰콰쾅!커다란 폭음과 함께 휘몰아치는 기파의 파편들이 보였다. 하나하나가 콘크리트 벽을 부술만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술법사들은 이곳에서 대기하라!” 가늘게 눈을 뜬 만박자의 시야에는 자연재해와 같은 저 먼 곳의 상황이 보이는 듯했다.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맹주와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이 흑천회주와 충돌했구나. 더 접근하면 그 영향권 안에 들어갈 수도 있겠다.” “우리가 쉽게 이기겠죠?” 제자의 질문에 만박자는 미간을 좁혔다. “단순히 전력으로만 보면 분명 수월하게 이길 테지만…….” 만박자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전혀 안심한 표정이 아니었다. “사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에 사파인 것이지. 놈들이 무엇을 숨겨두었느냐가 중요할 것 같구나.” 흑천회 같은 사파 조직의 전력은 무인들의 숫자만으로 가늠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정파와 달리 독, 괴이, 총화기, 마공과 금지된 혈법을 가리지 않으며, 필요하다면 민간인들을 납치해 인질극을 벌일 수도 있었다. 그런 것들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도 예상할 수 없었다. 술법사들이 후방에서 대기하는 것도 그러한 변수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정파에는 없는 비대칭 전력이지. 그러한 변수를 최대한 차단하기 위해 기습작전을 벌인 것으로 안다만…….” 가만히 듣고 있던 김복자가 팔짱을 끼며 씨익 웃었다. “그런 걱정이라면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음?” 김복자는 스승이 된 기념으로 만박자에게 비밀 한 가지를 알려주었다. “이쪽에도 비대칭 전력이 한 명 있거든요. 방금 스승님이 말한 것들을 처리하는 전문가가 말이에요.” * * * 데구르르……. 바닥에 떨어진 머리가 복도를 굴렀다. 잔뜩 일그러진 수급의 얼굴에는 죽기 직전에 느낀 공포가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괴, 괴물……!” “마인들을 더 데려와! 적은 겨우 한 명이잖아!” “씨팔! 총을 이렇게 갈겼는데 어떻게 한 발도 안 맞냐고!” 그러나 총화기도 독도, 심지어 마공을 익힌 무인들도 통하지 않았다. 늑대 가면을 쓴 침입자에게 달려든 인원만 수십 명이 넘었다. 그러나 그들 전부 남자의 발아래에 핏빛 카펫을 만드는 데 일조했을 뿐이었다. “클클. 손맛이 나쁘구나. 하여간 마공을 익힌 놈들은 육질이 질기단 말이지.” 누구보다 마인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인물. 그가 걸친 항공점퍼가 군데군데 붉게 물들어 있었다. 푸른 늑대 가면 너머의 눈동자에서, 악(惡)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사나운 살기가 일렁였다. “전부 도륙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군.” 최건이 복도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자 끝내 공포에 굴복한 적들이 등을 돌리고 도망쳤다. “히이이익!” “도망쳐-!” 흑천회의 분파 중 가장 큰 곳, 마공을 익힌 마인들이 본진을 지원하기 위해 나서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저분…… 진짜 우리 편 맞죠?” “아니었으면 지금 우리가 살아있겠냐?” 황숙수와 한재찬이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최건을 따라가고 있었다. 138화. 뭔가 예감이 최건이 이번 작전에서 맡은 역할은 흑천회의 분파들을 타격하는 것이었다. -맹주님. 저는 흑천회의 분파들이 본진을 지원하지 못하게 막겠습니다. 최건이 직접 여필극을 찾아가서 자청한 임무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여필극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늘 보이지 않는 일만 맡으려 하는군. 난 자네와 함께 흑천회주를 처단하러 가고 싶다네. -저도 맹주님과 함께 싸우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허나 꿩 대신 닭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팔대문파 늙은이들이 그 정도는 될 겝니다. -여전히 장문인들이 불편한가? 일월문, 창천검문을 제외한 팔대문파 장문인들은 아직까지 검마 최건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최건이 이번 작전에서 전면에 나서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무림맹에 정식으로 복귀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긋지긋한 정치질에 다시는 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필극의 생각은 달랐다. -자네가 원하면 억지로라도 자리를 만들 수 있네. 공을 세운다면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무림맹 원로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야. 이번 기회에 팔대문파 장문인들이 흑천회주를 처단하는 데 성공하면, 그들의 명성은 다시 높아질 것이다. 반면 최건의 활약을 알아주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터였다.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지도 않을 테니까. 그러나 최건은 고개를 저었다. -맹주님. 죄송합니다만 복귀해서 그 늙은이들과 다시 마주해봤자 열불만 날 겁니다. 다 아시는 양반이 왜 그러십니까? -그건…… 부정은 못 하겠군. 최건은 진심이 담긴 미소를 보이며 여필극에게 말했다. -저는 지금이 너무 좋습니다. 무림맹의 암검(暗劍)으로만 활동하는 것이 적성에 맞습니다. 무림맹의 숨겨진 비밀병기. 과거 검마 최건은 그렇게 불렸고,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에 가장 어울렸다. 바라지도 않는 감투는 더 이상 필요없었다. 그리고 지금. “쓸데없는 공명심을 내려놓으니 이토록 삶이 자유롭지 않은가.” 최건은 살려둘 가치가 없는 악인들을 처단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 촤아아아악! 사나운 검기의 궤적을 따라 콘크리트 벽이 붉게 칠해졌다. 작은 언덕을 이룬 시체들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질퍽한 피웅덩이를 만들었다. 저벅. 저벅. 그 안에서 걸어 나오는 검을 든 마귀를 누구도 멈춰 세우지 못했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뒷걸음질 치는 자는 흑천회의 분파주 중 하나였다. 그는 절정에 근접한 무공을 지닌 고수로 이 일대에서는 공포로 군림했지만, 최건에게 부하들이 모조리 도륙되는 모습을 본 지금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한번 묻고 싶구나. 네놈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면서 망설인 적이 있느냐?” “으으…….” 흑천회와 같은 사파오패는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수많은 하청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큰 조직들은 분파라고 불리며, 하는 짓은 본진보다 더 악독했다. 본진에 보내는 상납금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강도, 살인, 인신매매 등 대부분의 범죄를 분파에서 저질렀다. 최건의 검에 일말의 자비가 없는 이유였다. “대, 대체 어디서 온 고수요? 적월문? 무릉궁? 흑야방은 아닐 테고…….” 분파주는 최건을 사파오패에서 보낸 고수라고 생각했다. 끔찍하리만치 잔인한 손속 때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상상도 못 한 대답이었다. “무림맹에서 온 정의의 사도이니라.” “하, 지랄하지 말고 제대로 말하라고! 원하는 게 있으면 협상을……!” 짜악! 검 옆면에 뺨을 맞고 날아간 분파주가 벽에 처박혔다. 그에게 다가간 최건이 분파주의 어깨 위에 검을 올렸다. 푸른 늑대 가면 너머에서 서슬 퍼런 안광이 쏟아졌다. “태도가 글러 먹었구나. 당장 네 혀를 뽑아내고, 손가락을 잘라서 피로 필담을 나누어도 나는 상관이 없다만?” “사, 살려 주십시오.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혼자 살아남은 분파주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진득한 살기에 몸이 덜덜 떨려왔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됐군.’ 상대의 기가 확실하게 꺾였음을 확인한 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지껄여 보거라. 쓸 만한 정보가 있으면 목 위의 물건을 남겨두고 떠나마.” 분파주의 입에서 흑천회의 기밀로 취급되는 정보가 술술 흘러나왔다. 흑천회주가 알게 된다면 자신을 죽이겠지만, 지금 흑천회 본진은 무림맹과 팔대문파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평소 같았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하지 않았을 정보를 쉽게 불었다. “흐음…….” 그러나 한동안 분파주의 이야기를 듣던 최건이 미간을 좁혔다. “네놈이 지금까지 저지른 악행에서 너를 구해줄 정도는 아니구나.” “이런 씨팔 새……!” 죽음을 직감한 분파주가 시원하게 욕이라도 한마디 내뱉으려 했으나. 서걱!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분파주의 목을 벤 최건이 뒤를 돌아보며 혀를 찼다. “너희는 아까부터 뭘 그리 꿍얼거리는 게냐?” 방 안에 있는 금고를 따고 있던 전현직 낭인 콤비가 움찔하더니 돌아봤다. “하하.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희들끼리 얘기 좀 하고 있었습니다.” 황숙수의 넉살 좋은 대답에 최건이 작게 코웃음을 치더니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잠깐 쉴 테니, 이제부터는 너희가 해야 할 일을 하거라.” “저희가 곁에서 호법을 설까요?”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베어버릴지도 모르니 괜히 가까이 오지 마라.” “……넵!” 눈을 감은 최건이 짧은 운기조식으로 소모된 내공을 보충하는 동안. 황숙수는 능숙한 솜씨로 흑천회 분파의 곳간을 털기 시작했다. 동시에 한재찬에게 낭인으로서 익혀야 할 기술들을 속성과외로 알려주었다. “낭인은 첫째로 눈치, 둘째가 주제 파악, 셋째는 잡기가 많아야 오래 살아남는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눈치, 주제파악, 잡기……. 가르쳐 주시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자신이 하는 말을 받아 적으면서까지 배우려는 한재찬의 태도에, 황숙수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젊은 친구가 태도가 괜찮네. 잘 봐. 분파주 저 새끼가 준 열쇠로 금고를 땄잖아. 근데 내용물이 좀 시원찮지?” “예? 제 눈에는 어마어마한데…….” 금고에서 발견된 대량의 현금 다발은 한재찬에게는 충분히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액수였다. 하지만 전문가인 황숙수의 눈에는 가당찮은 속임수에 불과했다. “잘 봐. 사파새끼들 꼼수가 보통 이런 식이라고.” 황숙수가 챙겨온 짧은 마체테를 이용해서 벽 한 곳을 몇 번 툭툭 찍고 건드리자, 이내 벽이 쩌억- 하고 열리면서 금괴가 가득 나타났다. 감탄한 한재찬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와아…….” “흐흐흐! 이럴 줄 알았지. 꼬불쳐논 거 찾는 데는 나만한 선수가 없거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황숙수는 흑천회 분파 컴퓨터에 접속해 시스템을 해킹하고 마비시켰다. 한재찬은 이제 완전히 업계의 전설적인 대선배를 보는 눈빛이었다. “선배님……. 해킹도 하실 줄 아십니까?” “거창하게 해킹까지는 아니고. 요샌 장비가 좋아서, 이런 거 하나만 꽂아 넣으면 알아서 해줘.” 그러나 겸손과 달리 황숙수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한재찬은 알아보지도 못할 언어가 장뜩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내가 왕년에는 훨씬 빨랐는데 말이야, 나이가 드니까 손이 굳었네, 굳었어.” 존경의 시선을 듬뿍 즐긴 황숙수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정 형! 나야 나, 황숙수. 다름이 아니라 뻐꾸기 좀 날리려는데 말야. 흑천회에 아는 사람 있지? 뭐, 무림맹 눈치가 보여서 안 돼?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다 작업 쳐놓고 시작하는 거라니까!” 한재찬이 존경심이 가득한 눈으로 황숙수를 바라볼 때였다. “쯧쯧. 아주 꼴값을 떠는구나.” 어느새 운기조식을 마친 최건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헛기침을 한 황숙수가 시스템을 해킹해서 찾아낸 비밀금고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흠흠. 어르신. 저쪽 벽 너머에 있는 금고 하나만 열면 끝납니다. 안에 비싼 영약이 들어있는 것 같거든요.” 그러자 검마가 벽으로 다가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냥 베어버리면 될 것을…….” “아 그거 힘으로 부수면 안에서 폭발한단 말입니다! 기다려 봐요 좀!” 황숙수는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아차 싶었다. 저 무시무시한 검마에게 대들다니 자신이 잠깐 미쳤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눈치를 살살 보는데……. “흐음.” 화를 낼 줄 알았던 최건이 검을 거두고 순순히 물러났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느냐?” “그, 3분이면 됩니다. 연초라도 한 대 피우고 계실래요?” 고개를 끄덕인 최건은 곰방대를 꺼내 연초를 눌러 담았고,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딱 3분이다.” “넵!” 검마는 황숙수를 만날 때마다 갈구기는 하지만, 그것은 뒷세계의 인물을 대할 때 나오는 오랜 버릇일 뿐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황숙수를 유능한 동료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동료라…….’ 자신이 뒷세계의 인간을 동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에 최건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게 다 기특한 제자 녀석 덕분이지.’ 기무혁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현역으로 복귀할 일도, 뒷세계의 정보통과 함께 임무를 맡게 될 일도 없었을 터였다. ‘예전 같았으면 혼자서 다 처리하겠다고 했을 텐데…….’ 최건이 나이가 들면서 자신도 많이 물러졌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을 때였다. “어르신! 끝냈습니다!” 쿠구궁! 잠금이 풀린 벽이 아래로 내려가고, 그 뒤에 숨겨져 있던 금고 안에는 과연 분파주가 죽기 직전까지 말하지 않은 귀한 영약이 들어 있었다. 투명하고 작은 병 안에 들어있는 우윳빛 액체형태의 영약이었다. “꿀꺽. 이거 합성 공청석유 같은데……. 돈 주고도 못 구하는 겁니다.” 침을 삼키는 황숙수의 눈에서 무언가 간절한 욕망을 본 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정의를 위해서 싸운다고 해도, 가끔은 적절한 보상이 필요한 법이었다. “나중에 다 같이 나눠 먹으면 되겠군. 잘 챙겨라.” “옙! 다음 곳으로 가시죠!” 세 사람은 흑천회의 분파들을 빠르게 파괴해 나갔다. 최건과 황숙수는 오래 손발을 맞춰본 것처럼 호흡이 잘 맞았고, 한재찬도 옆에서 보조를 잘 맞췄다. “너, 보기보다 꼼꼼하다?” “일머리가 좋다는 얘긴 자주 듣습니다.” “하, 짜식이 금방 우쭐해져서는…….” 황숙수는 무림맹 특작조가 흑천회 분파를 공격한다는 소문을 일부러 퍼트렸다. 그 덕분에 다른 분파들도 함부로 본진을 도우러 가지 못하고 꽁꽁 틀어박혔다. 소식을 전해 들은 최건은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사파 놈들의 본성이지. 자기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동료를 구하러 갈 의리가 있겠느냐? 흑천회는 오늘 이 땅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렇게 세 사람은 흑천회의 분파 셋을 파괴했고, 무림맹의 다른 특작조들도 발이 묶인 분파들을 타격하는 데 성공했다. ‘너무 쉽군.’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너무 잘 풀려서 불안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 불안함의 이유가 잠시 후 드러났다. [속보입니다. 무림맹주와 팔대문파 장문인들이 전투를 벌이던 중 주변 지반이 대규모로 붕괴됐다는 소식입니다. 이번 붕괴로 무림맹주와 흑천회주,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이 함께 무너진 지반 안으로 떨어졌으며…….] 도시의 모든 스크린에서 같은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하늘에서 찍은 거대한 크레이터. 그리고 그 안에서 치솟는 검은 불기둥. 콰콰콰콰콰콰콰! [붕괴된 지반의 경계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금영문과 대한문의 장문인 두 명의 부상이 심각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추가 소식은 들어오는 대로 이어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옥의 입구처럼 시커먼 불길을 토해내는 구멍을 바라보며, 최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혔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구나.” 139화. 이 자리에서 “최후의 발악인가…….” 기무혁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흑천회 본진에서 치솟은 검은 불기둥은 끝을 모르고 하늘로 치솟아, 이제는 다른 도시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콰콰콰콰콰콰콰! 스크린을 통해서도 그 모습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는데, 맹렬하게 타오르는 검은 불꽃 바깥으로 신비전의 술법사들이 친 진법이 발동하고 있었다. 다급한 표정의 만박자와 그 뒤로 김복자의 모습도 얼핏 보였다. [지금 이곳은 신비전의 술법사들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부터 무너진 지하에서 검은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는데요, 불길이 확산되지 않도록 전력을 다해 제어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다행히 검은 불길은 하늘로만 치솟을 뿐 아직 주변으로 번질 조짐은 보이지 않습니다.] 현장에 나선 기자가 급박한 상황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 흑천회 토벌에 참가한 무림맹과 팔대문파의 무인들 일부가 불길 근처로 다가갔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상황이 몇 차례 목격되었습니다. 현장에서는 검은 불길의 정체를 두고…….] 그 순간 생중계 화면이 검게 변하더니, 뉴스데스크로 급하게 바뀌었다. 앵커가 당황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알 수 없는 통신오류로 화면이 끊긴 점 시청자 여러분께 사과드리겠습니다. 현장 연결이 복구되는 대로 최대한 빠르게 다시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사파무림 연구 전문가이신 김 박사님을 모시고 관련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정부에서 차단했군. 뭔지는 몰라도 상황이 심상치 않은 모양이야.” 오호의 말이었다. 그는 조금 전부터 표정이 심각해진 기무혁을 보며 피식 웃었다. “사파오패를 없애는 것이 마냥 쉬울 줄 알았나? 그랬다면 내가 네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었을 거다.” 하늘을 뚫을 듯 치솟는 검은 불기둥을 노려보던 기무혁이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돌려 오호를 바라봤다. “나도 알아. 너희들을 박멸하는 게 바퀴벌레를 박멸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거.” “……너희들?” 순간 오호의 눈썹이 꿈틀댔지만, 기무혁은 모른 척 화제를 돌렸다. “서로 볼일 끝났으니까 이쯤에서 헤어지자고.” “여전히 건방진 녀석이군.” 기무혁을 노려보던 오호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꽤나 진지한 목소리였다. “……이번엔 내가 신세를 졌다.” 흑야방주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기무혁이 나서지 않았다면, 혈호 중 하나를 생사결에 내보내야 했을 것이다. 아니면 방주가 포함된 흑야방의 정예들과 한바탕 큰 싸움을 치렀을 터. 둘 중 어느 쪽이었어도 큰 희생이 있었을 테니, 기무혁 덕분에 혈호방이 피 흘리지 않고 협상을 끝낸 것은 명백했다. “나중에 갚도록 하지. 어떤 방식으로든.” 오호는 은원에 대해서만큼은 정확하게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름 어렵게 꺼낸 이야기였는데, 기무혁은 관심 없다는 듯 휴대폰을 보면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흑야방이나 잘 지켜봐. 저 난장판을 보고 언감생심 딴마음을 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도록 하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오호는 혈호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떠나기 전, 하나같이 진득한 살기를 품은 혈호들이 기무혁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네 검. 인상 깊었다.” “다음에 또 보자고. 늑대.” “나는 널 친구라고 기억하겠다.” 하지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혈호들을 보며 기무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 나쁘게 왜 친한 척하고 지랄이야?’ 피 냄새나는 사파 놈들과는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때 기무혁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최건의 전화였다. [무혁아. 하늘을 보고 있느냐?] “네. 지금 보고 있습니다.” [흑천회주가 마공을 익힌 듯하다. 장진명 때와 비슷하지만 더 지독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혹 아는 바가 있느냐?] “제 생각엔 아마…….” 기무혁은 저 불기둥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특정한 마공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암염마공(暗炎魔功)인 것 같아요.” [……십대마공이란 말이냐?]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스승의 목소리에, 기무혁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진본은 아닐 확률이 높지만, 암염마공의 사본 중 하나는 확실할 거예요.” 세계 10대 마공으로 분류된 암염마공(暗炎魔功)은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세계무림맹에서 추살령이 내려질 수 있는 위험한 마공이었다. 기무혁은 전생의 기억 속에서 저것과 닮은 검은 불기둥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 미국의 한 도시 절반을 불태워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무림재해(武林災害)와 비슷한 모습이었으니까. “불기둥에 가까이 접근한 무림인들이 쓰러진 거, 내공이 갑자기 증발해서 탈진한 걸 거예요.” 콰콰콰콰콰콰콰! 저 검은 불길은 상대의 내공을 불태운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암염마공을 익히면 무인들 간의 싸움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갖게 된다. [……들어본 적 있구나. 헌데 흑천회주가 십대마공을 익혔다면 왜 지금까지 얌전히 있었단 말이냐?] “부작용이 심각할 테니까요. 지금도 정상적으로 펼친 건 아닐 거예요. 그리고…….” 문제는 그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펼친 암염마공의 불길조차 저토록 강렬하다는 것이었다. ‘괜히 십대마공이라 불리는 게 아니니까.’ 보통 마공이라 불리는 것들은 누구나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십대마공이라 불리는 것들은 무학의 천재들만이 시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렵다고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진본이 아닌 쉽게 익힐 수 있게 고친 사본들이 여랫 존재하고, 그로 인한 부작용은 셀 수조차 없었다. 흑천회주가 익힌 사본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막대한 부작용을 감당하고 있을 터였다. ‘동귀어진까지 작정하고 펼친 거라면…….’ 무림맹주나 창천검노의 목숨도 위험할 수 있었다. “스승님. 저희 약속장소에서 지금 바로 모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다. 당장 움직이도록 하마.] 최건과 통화를 종료한 기무혁은 곧바로 김복자에게 연락했다. 김복자도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지금 난리도 아니야. 저 불기둥 때문에 스승님이랑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이런 건 처음이라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고…….] 스승님? 대체 누굴 말하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자세히 물어볼 여유가 없었다. 기무혁은 김복자에게 똑같이 상황을 설명하고, 약속장소로 오라고 했다. [오케이! 지금 바로 갈게!] 전화를 끊은 기무혁은 전력으로 경공을 펼쳤다. 휙휙 스쳐 지나가는 빌딩들을 뒤로하고 머릿속으로는 생각을 정리했다. ‘암염마공에 대비하려면 양강계열무공을 익힌 무인이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크루원들 중에서 양강계열 무공을 익힌 사람은 신강헌뿐이었다. 신강헌의 부재가 크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아쉬운 대로 복자한테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달라고 해야지. 그것 말고도 필요한 것들이…….’ 기무혁이 몇 가지 대비책을 떠올리면서 약속 장소로 향할 때였다. 띠링! 청랑 크루 단톡방에 떠오르는 새로운 메시지. [God Kang-heon : 중요한 순간에 나만 빼먹지 말라고!] 바로 신강헌이었다. 곧바로 또 올라온 메시지에는 신강헌이 체포해서 묶어둔 신준현과 함께 찍은 셀카가 담겨 있었다. [God Kang-heon : 신강헌 더 히어로! 지금 전장으로 출발!] “하, 또라이 자식…….” 기무혁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 입가에는 분명 반가움 가득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 * * 끝도 없이 하늘로 치솟는 암염의 근원지. 불길이 들끓는 지옥의 한복판처럼 보이는 깊은 지하에서, 초고수들 간의 생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폭발과 함께 여필극과 나일천이 수십 미터를 튕겨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폭발이 일어난 장소에서 흑천회주가 괴소를 흘리며 걸어 나왔다. “빌어먹을 늙은이들. 지치지도 않고 죽을 자리를 찾아 덤벼드는구나. 흐흐흐…….” 190cm에 달하는 풍채를 자랑하던 흑천회주는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쭈글쭈글한 피부는 뼈에 거의 달라붙어 미라와 다름없었고, 암염에 휘감긴 몸은 스스로를 연료로 삼아 불태우는 듯했다. 그렇게 기이한 몰골을 한 채 암염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화르르르르륵! “네놈들은 나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내가 얼마나 무서운 독을 품고 있는지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흑천회주는 적들이 본진의 가장 깊은 곳까지 쳐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사파일통이라는 평생의 꿈이 허무하게 날아갔음을 알게 된 순간, 그는 비참하게 살아 도망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부하들의 등을 떠밀어 맹주와 장문인들의 체력을 소진시키고, 그동안 자신의 몸에 온갖 각성제와 영약을 주사했다. 그것도 모자라 심장에는 금지된 혈법(血法)을 새겼다. “한국무림의 역사에 내 이름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무림맹주와 팔대문파 장문인 다섯을 함께 저승으로 데려간다? 이만하면 호상이지! 흐하하하하하!” 그리고 저들이 합공해 온 순간 지반을 무너뜨려 함께 100미터 깊이의 지하로 떨어졌다. 비록 둘은 도망쳤지만, 곧 기어 올라가서 나머지도 죽일 작정이었다. “이 늙은이의 남은 수명을 모두 줄 테니 적들을 불태울 힘을 다오!” 우우우우우웅! 막대한 돈을 들여서 설치한 지하의 술법진에서 지독한 절독이 뿜어지고, 동시에 흑천회주에게는 끊임없이 새로운 내공을 불어넣었다. 수십 년 전부터 오늘 같은 날에 대비해 준비한 최후의 한 수. 흑천회주는 이곳이 무림맹주와 팔대문파 장문인들의 묫자리가 되리라 확신했다. “……졸렬한 마두답게 함정도 꼭 저같이 음침한 곳에 파놓았구나.” 여필극은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그 옆에서 창천검노 나일천이 흘흘 웃음을 흘리며 기수식을 취했다. 엉망이 된 옷에 수염이 붉게 물든 모습이었다. “맹주. 내공을 아끼시게. 내가 빈틈을 만들 테니 자네가 한 번에 골통을 부숴. 그래야 끝이 나겠어.” “검노께서는 버틸 만하십니까?” “흘흘. 그래 보이나?” 빙하신녀가 냉기를 흩뿌려 암염으로부터 모두를 보호하고, 태극검문의 장문인은 예리한 검으로 흑천회주의 몸에 몇 번이나 구멍을 뚫었다. “……제 힘으로는 불길을 억누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허, 칼에 찔려도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저건 더 이상 인간조차 아닙니다.”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한국무림을 대표하는 초고수들. 평소에는 누군가를 합공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 모두가 힘을 합쳐 싸우고 있음에도 무척이나 힘겨워 보였다. 콰아앙! 쩌어엉! 화르륵! 절진에서 흘러나오는 독 때문에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수십 년간 쌓아온 내공이 암염에 의해 소모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흑천회주의 몸에 몇 번이나 구멍을 뚫고 뼈를 부수었건만 상대는 쓰러지지 않았다. “흐흐흐. 내가 너희를 죽인 후에는 뭘 할지 알려주랴?” 흑천회주는 자신의 생명을 불살라 마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위로 올라가서 최대한 많은 인간을 죽일 것이다. 내 마지막 불꽃이 다하는 순간까지 죽이고 죽여서 역사상 최악의 대마두로 남을 것이야!” 흑천회주는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악인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너희는 역사상 가장 무능한 맹주와 장문인으로 남을 것이다! 공연히 나를 건드려서 재앙을 자초한 원흉으로 남겠지. 킬킬킬킬킬킬!”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흑천회주의 광기도 점점 더 짙어졌다. 콰아아앙-! 그 순간 여필극의 주먹이 흑천회주를 강하게 밀어냈다. 비틀거리는 상대를 향해 권왕이 연달아 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콰앙! 쾅쾅쾅쾅쾅! 금빛 충격파가 물결처럼 번졌다. 여필극은 튕겨 나가는 흑천회주를 쫓으며 매섭게 눈을 빛냈다. “역사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관심없다. 당장 눈앞의 사마외도를 척결해 세상을 보다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뿐인 것을!” 여필극의 외침과 함께 그의 전신이 찬란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멋진 말이외다. 맹주께선 역시 협객이구려.” 그 옆을 내달리는 창천검노의 남천검에서도 새파란 기운이 맺혔다. “……저도 한 손 거들지요.” “돌아가면 이 일에 대한 보상은 단단히 받아낼 겁니다.” 빙하신녀와 태극검문의 장문인도 표정을 굳히며 공격에 합세해 흑천회주와 격돌했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듯했다. 140화.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까가가각! 칼날이 서로 긁히며 불티가 거칠게 튀어 올랐다. 수십 차례 도를 부딪친 두 도객이 동시에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기수식을 취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신준현은 멀쩡한 반면, 신강헌은 어깨를 스친 상처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계속할 거냐? 그럼 다음은 얼굴이다.” 신준현이 신강헌의 얼굴을 겨누며 살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칼 내려놔라. 설마 진심으로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신준현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맺혔다. 그는 신강헌을 데려온 뒤 직접 도법을 가르쳤다. 신강헌 개인에게는 관심이 없었지만, 무인으로서 잠재력과 상품성을 지닌 신강헌에게는 아주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난 네가 도를 쥐는 습관을 잘 안다. 시선이 돌아갈 때 움직임이 어떤지, 어느 쪽 반응이 느린지도 파악하고 있지. 그런 나를 상대로 이기겠다고?” “조카 생일은 알아요?” “……이 와중에 헛소리를.” 빙하신녀에게 적양공을 받아서 익힌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성취도 꾸준히 체크하고 있었다. 기무혁과 어울려 다닌 후로 실력이 크게 늘었다는 건 알았지만, 고작해야 일 년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스무 살 애송이가 레드웜의 노련한 용병이었던 자신을 꺾을 만큼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은 결코 아니었다. “마지막 기회다.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빌어!” 신준현은 조급한 마음에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흑천회가 공격당하고 있었고, 흑연은 연락이 두절되었다. 당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신강헌은 껄렁한 태도로 도를 어깨에 걸치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자신 있으면 실력으로 꿇려 봐요. 유치하게 말로만 협박하지 말고.” “……이 새끼가!” 바닥을 박찬 신준현이 맹렬하게 도를 휘두르며 신강헌을 몰아붙였다. 쩌저저정!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반쯤 죽여주마!’ 어차피 사지만 멀쩡히 다 붙어 있으면 상품가치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 기회에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몸에 새겨주리라. “그거 알아요?” 신준현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수십 합을 더 부딪친 후였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강헌의 눈. 아슬아슬하게 칼날이 자신의 얼굴 옆을 스칠 때에도, 신강헌의 눈빛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삼촌이 알고 있던 내 나쁜 습관들. 진작에 다 고쳤다는 거.” “무슨…….” “기무혁 그 새끼가 약점만 보면 물고 늘어지니까 저절로 고쳐지더라고요.” 씨익 웃는 신강헌의 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적양공을 최대로 끌어올리면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치이이익-! 허공에 털어낸 핏방울은 강렬한 열기에 순식간에 말라붙었다. 끔찍하도록 뜨거운 기운에 신준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익었다. 그리고 신강헌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쩌엉-! 지금까지와는 수준이 다른 속도. 예측하기 힘든 도의 궤적을 간신히 막아냈다. “큭……!” “잘 봐요. 이제부터가 진짜니까.”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신강헌이 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도풍이 사납게 휘몰아칠 때마다 불꽃이 너울거렸다. 쩌저저저정! 신준현은 신들린 듯 휘몰아치는 공격에 반격은커녕 막기도 급급했다. 부릅뜬 눈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말도 안 되는……!” 자신이 발견한 경이로운 재능. 그것은 이미 자신의 예상치를 아득히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착각이었다. 적양공의 성취까지 얻은 신강헌은 살아있는 화마나 다름이 없었다. 화르르르르륵! “……이건 아주 잘 막아야 할 거야.” 도를 휘감은 불꽃이 형태를 유지하며 더욱 거대해졌다. 신강헌은 3미터에 이르는 화염의 태도(太刀)를 가차 없이 휘둘렀다. 콰아아앙! 폭발과 함께 신준현이 튕겨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신강헌은 천천히 호흡을 정리하며 자신이 만들어낸 주변의 광경을 바라봤다. 새카맣게 불탄 벽과 녹아내린 바닥. 그리고 열기에 휘어진 철골 구조물들. “후우우……. 빌어먹게 끝내주네.” 그 순간 신강헌은 느꼈다. 자신이 비로소 절정고수의 경지에 닿았음을. * * * 의식을 차린 신준현은 자신의 손발이 묶여 있음을 깨달았다. “이…… 배은망덕한 놈…….” 신준현은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숨을 헐떡였다. 깔끔했던 정장은 여기저기 불에 그을려 넝마가 됐다. 그러나 신강헌을 노려보는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크루 단톡방을 확인하던 신강헌이 그를 돌아봤다. “깼어요?” “짐승만도 못한 새끼!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날 배신해? 내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뒷골목을 전전하는 낭인이나 됐을 놈이……!”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녹슬었다고 해도 레드웜의 용병이었던 자신이, 스무 살 애송이와의 싸움에서 패했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신준현이 가장 화가 나는 이유는 어느새 역전된 무공 때문이 아니었다. “네가 누구 덕분에 그렇게 강해졌는데! 그 재능을 누가 발굴했는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신준현을 향해 신강헌이 다가왔다. 한쪽 무릎을 꿇고 상대와 시선을 맞춘 신강헌이 입을 열었다. “삼촌.” 신강헌의 모습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곳곳에 베인 상처가 보였다. 몇몇은 조금만 더 깊었으면 치명상이 될 만한 것들이었다. 지난 몇 년간 자신이 삼촌이라고 불렀던 사람은 조카에게 살초를 펼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날 돌봐줘서 고마웠어요.” 그럼에도 신강헌은 고개를 꾸벅 숙여 지난 시간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지금…… 날 놀리는 거냐?” “진심으로요.” 신준현을 응시하는 신강헌의 표정은 무척 복잡해 보였다. 굳은 얼굴 위로 미처 숨기지 못한 슬픔이 드러났다. 얼핏 눈가가 촉촉해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을 마지막 기회라고 여긴 신준현의 눈이 교활하게 빛났다. “가, 강헌아. 이것부터 풀고 이야기하자. 네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야. 누가 삼촌을 음해했지?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지금 가족끼리 이럴 때가 아니라…….” 레드웜의 정예가 한국으로 오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들과 합류만 할 수 있다면 위기에서 벗어날 자신이 있었다. “삼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별로 안 중요해요. 지금까지 내 유일한 가족이었던 건 사실이니까.” “그래! 나는 네 유일한 가족이야! 그러니까…….” 고개를 저은 신강헌은 슬픔을 참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채, 밀수, 마약……. 모두 삼촌이 출장 가서 저지른 범죄들이라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 순간 말문이 막힌 신준현의 모습을 바라보던 신강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보고 부모님 이름에 먹칠하지 말라고 했죠? 그렇게 하려고요. 삼촌은 무림맹으로 가서 정당한 심판을 받게 될 거예요.” 복잡한 감정을 털어낸 눈동자에 무심함이 담겼다. 그 순간 신준현은 깨달았다. 더 이상 어떤 설득이나 협박, 눈물도 신강헌에게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더 이상 ‘가족’이라는 마법의 단어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흐흐흐…… 히히히…….” 실성한 것처럼 웃어대던 신준현이 일순간 뱀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한순간에 돌변한 그가 키득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내가 놀라운 걸 알려줄까? 나는 네 삼촌이 아니야. 신준현은 전쟁터에서 죽었거든. 바로 내 손에 말이야.” “……뭐라고?” 신준현이란 가면을 벗어 던진 레드웜의 용병은 그에게 끔찍한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도 인간을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물론 네 부모도 내가 죽였어. 네 애비는 날 동생인 줄 착각하고 반갑게 달려오다가 칼에 찔렸지. 사파 토벌 작전? 그건 내가 위장해 놓은 네 애비의 사인(死因)이다. 실상은 개죽음이라는 거지. 네 애미도 마찬가지였어. 제발 아들만은 살려달라고 빌 땐 얼마나 추하던지……. 흐하하하하!” 신준현의 얼굴을 한 레드웜의 용병은 자신이 무림맹으로 끌려가면 다시는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신재현을 죽인 것이 밝혀지면 평생 감옥에서 썩을 것이고, 레드웜과 관계된 것이 알려지면 그보다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하지만 이대로 얌전히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공을 들여온 신강헌이 자신을 배신했으니, 상대도 그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신강헌의 얼굴을 보며 그가 킬킬댔다. “어떠냐? 하나뿐인 가족이라고 믿었던 삼촌의 정체가. 멍청한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원수랑 몇 년이나 살았던 거라고! 삼촌, 삼촌 하고 따르면서 말이야! 흐하하하하!” 레드웜의 용병은 애초에 심성이 뒤틀린 인간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신강헌에게 끔찍한 트라우마를 남기고, 그 정신을 망가뜨릴 생각이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마지막까지 누군가를 파멸시켜야 했다. ‘자, 이제 날 죽여라. 그리고 평생 끔찍한 기억 속에서 살아가라!’ 용병은 곧 분노한 신강헌의 도가 자신의 목을 내리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예상했던 반응은 없었다. “역시 그랬네.” 피식. 오히려 신강헌의 입가에는 차가운 조소가 번졌다. “뭐, 예상은 했지만 말이야. 직접 들으니 이제야 이야기가 다 맞춰지네.” “……뭐?”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용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뒤늦게 그는 애송이의 유도신문에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너, 이 새끼……!” “당신 입에서 직접 진실을 듣고 싶었거든. 내가 알려달라고 했으면 절대로 말 안 했을 거잖아?” 몇 년을 같이 살아도 용병은 신강헌에게 무관심했지만. 신강헌은 유일한 가족이었던 상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연기라도 해야 솔직하게 말해줄 것 같았어.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말야.” “이 개새……!” 신강헌은 용병의 단전을 강하게 발로 걷어찼다. “커헉……!” 단전이 으깨지는 고통에 용병의 눈이 뒤집혔다. 신강헌은 바닥에서 벌레처럼 꿈틀대는 그를 발로 툭툭 걷어차며 똑바로 눕혔다. “덕분에 남은 미안함 한 톨까지 털어낼 수 있었다. 이 씨발새끼야.” 혹시라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팔다리 관절을 부수고, 혀를 깨물어 자살하지 못하게 재갈을 물렸다. 기무혁과 최건이 하는 것을 몇 번이나 본 터라, 처음이지만 꽤 능숙하게 따라 할 수 있었다. “어이, 삼촌.” 용병 앞에 쭈그려 앉은 신강헌이 그의 뺨을 툭툭 두드리며 친근하게 말했다. “곧 다시 보자고. 무림맹 지하 감옥으로 자주 면회 갈게. 둘이서 오붓하게 할 이야기가 많이 있을 테니까. 알았지?” “읍읍……!” “아, 그리고 이젠 삼촌 아니어도 가족이 많이 생겼거든. 그러니까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으으으으읍!” 빠악! 신강헌은 용병의 관자놀이를 때려 기절시킨 후, 용병이 타고 온 차의 트렁크에 구겨넣었다. 그리고 차에 타서 바로 시동을 걸었다. 제주도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딴 면허가 도움이 되었다. “후우…….” 신강헌은 시트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방금 전까지는 냉정한 모습을 유지했지만, 당연히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감정들은 잠시만 옆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일단 가볼까?” 크루원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었으니까. 신강헌을 기다리는 진짜 가족이 말이다. [Kimoo : 또라이 언제 와?] [God Kang-heon : 30분이면 감.] 메시지를 보낸 신강헌은 강하게 액셀을 밟았다. 141화. 여기 있는 친구들은 약속장소에 가장 먼저 도착한 기무혁은 현장을 통제 중인 노구천과 접촉했다. “……왔구나.” 노구천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기무혁을 맞이했다. 그는 갑자기 지반이 무너지면서 지하로 떨어진 무림맹주를 걱정하고 있었다. 기무혁도 먼저 그것부터 물었다. “맹주님하고 연락은요?” “지반이 무너진 직후 두절되었다. 저 안이 생각보다 깊거나…… 여유가 없는 상황에 처하신 것이겠지.” 노구천이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치솟고 있는 암염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여필극을 도우러 가고 싶었지만, 자신마저 없으면 남아서 현장을 지휘할 사람이 없었다. 그가 기무혁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는 저 안으로 들어갈 생각인 게지?” “스승님하고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저희 크루원들 몇 명도 함께요.” “…….” 노구천은 젊은 후기지수의 무모해 보이는 계획을 말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기무혁은 절정고수였다. 충분히 제 몫을 할 수 있는 무인이자, 이미 몇 번이나 위험한 임무를 해결해 낸 실력자였다. 당장 다른 누군가에게 맡긴다고 해도 기무혁보다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주변 통제는 확실히 해두었다. 적어도 몇 시간은 언론이 여길 눈치채지는 못할 게야.” 기무혁이 크루원들과 집결하기로 한 장소. 바로 흑천회 간부들의 가족 대다수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이었다. 혈호방을 통해서 알아낸 정보로, 이곳에 흑천회 본진에서 도망칠 수 있는 긴 비밀통로가 숨겨져 있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침입할 수도 있다는 뜻이지.’ 기무혁의 원래 계획은 각자 임무를 끝내고 크루원들과 이곳에 모인 후, 비밀통로를 통해서 흑천회에 잠입하는 것이었다. ‘그다음에 레드웜과 교(敎)에 관련된 정보를 입수해서 조용히 빠져나올 계획이었지만…….’ 상황이 바뀌면서 계획도 수정되었다. 최우선 목표는 무림맹주와 팔대문파 장문인들의 생사 확인. 두 번째는 암염마공이 번지지 않도록 흑천회주를 막는 것이었다. “오면서 계획은 대략 짜뒀습니다. 나머지는 크루원들이 도착하면…….” “지금 세 명 도착했다.” 최건이 양 옆구리에 짐짝처럼 끼고 온 황숙수와 한재찬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자 하얗게 질린 두 사람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하, 하늘을 날았어. 내가 방금 전까지 하늘을 날았다니까?” “들고 뛰기 무겁다고 옥상에서 옥상으로 막 집어 던지시면……. 저 지금 심장이…….” “쯧쯧. 무인이란 놈들이 간이 이리 작아서야.” 그다음으로 도착한 것은 김복자와 살구였다. “내가 제일 늦은 건 아니지?” 뺘앗! 김복자는 한쪽 어깨에 못 보던 화구통을 숄더백처럼 메고 있었다. 처음 보는 화구통에서 강력한 술법의 기운을 느낀 기무혁이 물었다. “그건 뭐야?” “아, 이건 스승님이 준 거. 급한 일이라고 설명하니까 일단 가져가라던데?” “갑자기 스승? 아침까지만 해도 없던 스승님이 어디서 생겼어?” 황당한 표정으로 묻는 황숙수의 질문에 김복자가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다들 만박자라고 아세요? 한국에 다섯 명밖에 없는 대술법사인데, 제 재능에 홀딱 빠져서 제발 스승으로 받아달라지 뭐예요?” “……만박자라고?” 기무혁은 놀란 표정으로 김복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을 과거로 회귀시킨 장본인이 이번 생에는 김복자의 술법 스승님이 되다니. 인연이라는 것이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신강헌이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며 크루에 합류했다. 쿵! 화르륵……! 쿵! 화르륵……! 발자국이 남는 자리마다 잔불이 남아서 이글거렸다. 마치 불덩이가 걸어오는 듯한 광경이었다. “아니, 이게 아직 조절이 잘 안 돼가지고. 운전하다 차도 태워 먹을 뻔했다니까?”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걸어오는 신강헌의 몸 곳곳에서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너…….” 기무혁이 놀란 표정으로 신강헌을 바라보는 동안, 최건이 신강헌에게 먼저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 녀석! 큰 성취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축하한다!” “하하하하! 별거 아니에요. 위기의 순간 주인공에게 찾아오는 각성이랄까?” 최건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자 신강헌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기무혁도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염화도 신강헌. 순간 그 모습을 보는 줄 알았잖아.’ 물론 염화도 신강헌과 비교하면 아직은 한참 미숙하지만, 지금의 신강헌에게선 그때보다 훨씬 더 큰 가능성이 느껴졌다. 기무혁이 만들어 낸 이번 생의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였다. “신준현은?” “오는 길에 무림맹 사람들 보이길래 맡겨놨어. 그리고…… 예상대로 가짜였어.” “……괜찮냐?” “그럭저럭.” 시원섭섭해 보이는 신강헌의 표정을 본 기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급한 일이 전부 끝난 뒤, 밤새도록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현 상황부터 빠르게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저 불길의 정체는 암염마공으로 추정되고, 맹주님과 장문인들이 빠진 지하에는 강력한 술법진이 깔려 있을 것으로 예상되며…….” 기무혁은 한자리에 모인 크루원들에게 암염마공에 대해 알려준 후, 각자 해야 할 일을 맡겼다. “미안한데 황숙수랑 한 형은 이곳에서 대기해 줘. 노 원로님이 필요한 일을 말씀해 주실 거야.” 두 사람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가기엔 자신들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살구도 여기에 있어. 네가 갔다간 마공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어서 위험해.” 금시조의 불꽃은 싸움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암염마공의 기운은 아직 새끼인 살구가 견디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뺘악……. 살구는 시무룩해진 모습이었지만, 상황이 급하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폴짝 뛰어서 한재찬의 어깨로 옮겨탔다. “이번 작전에는 저, 스승님, 김복자, 신강헌만 들어갑니다. 전투가 발생했을 때 포메이션은 스승님이 먼저…….” 간단한 설명이 끝난 후, 네 사람이 흑천회로 향하는 비밀통로 앞에 섰다. “잠깐만! 혹시 모르니까 이거 챙겨가!” 황숙수가 급하게 품에서 꺼낸 것은 흑천회 분파를 털면서 챙겨온 합성 공청석유였다. 그가 기무혁의 주머니에 공청석유를 넣으며 말했다. “거기 들어가면 내공이 타버린다며? 아껴봤자 똥 되니까 필요하면 바로바로 마셔. 너희들도 알았지?” 상상도 못 했던 황숙수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본 세 사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구천도 최건에게 다가가 말했다. “가서 맹주님을 좀 도와주게. 분명 또 무리하고 계실 게야.” “걱정하지 말게나.” 최건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신의 제자와 크루원들을 둘러봤다. “여기 있는 친구들은 내가 여태껏 함께한 특작조 중에서 가장 든든한 이들이니까.” “그럼 가시죠.” 기무혁의 말과 함께 네 사람이 비밀통로로 들어섰다. * * * “쿨럭……!” 태극검문의 장문인이 핏물을 토하며 비틀비틀 물러섰다. 평소 그의 자랑이던 긴 수염은 불에 타 그을렸고, 마르지 않을 줄 알았던 심후한 내공도 대부분 소진됐다. 힘겹게 버티던 그가 결국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 죽여도 죽지 않는 괴물 같은 놈…….” 그 말을 끝으로 태극검문의 장문인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흑천회주는 가슴과 목에 구멍이 뚫린 모습으로 앙천대소를 터트렸다. 쩍 벌어진 가슴 안쪽, 금지된 혈법이 새겨진 심장이 구멍 뚫린 채 펄떡이고 있었다. “……이미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이거늘.” “십대마공이 왜 악명이 높은지 이제야 확실히 알겠구려.” “이대로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남은 세 사람의 상황도 최악이었다. 거듭된 전투로 체력이 다했고, 암염 때문에 내공은 바닥을 보인 지 오래였다. 술법진에서 흘러나오는 극독은 최상급 피독주로도 감당이 되지 않았다. 반면 흑천회주는 전신이 뭉개지고 부서졌음에도 처음과 달라지지 않은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카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는 더 이상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지를 상실하고 반복해서 파괴만을 일삼는 괴물. 암염마공에 휩싸인 육신을 계속해서 움직이게 하는 것은 지하에 새겨진 끔찍한 술법진이었다. 우우우우웅-! 수십 년간 막대한 돈을 들여서 모은 귀한 영약과 술법 도구들을 쏟아부어 만든 불사의 진법. 그 안에 있는 기운이 모두 소모되기 전까지 흑천회주는 멈추지 않을 터였다. “이 빌어먹을 술법진만 파괴할 수 있었어도…….” “포기합시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힘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았소.” 여필극의 말에 창천검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에 단 한 명이라도 술법의 전문가가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세. 전부 여기서 죽을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 말을 먼저 꺼낸 것은 창천검노였다. 지금까지는 누구도 먼저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들은 한 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 구덩이에서 탈출하면 살 수 있겠지.’ ‘하다못해 저 괴물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만 해도…….’ 술법진의 영향이 미치는 곳은 이곳, 지하의 구덩이로 한정돼 있었다. 밖으로 나간다면 흑천회주는 더 이상 술법진의 지원을 받지 못할 테고,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자멸할 것이다. 단, 그 몇 분이면 저 위에 있는 민간인들까지 암염에 휩쓸려 죽게 될 것이다. 흑천회주는 분명 그것까지 계산하고 자신들을 이곳에 빠뜨린 것이리라. “…….” “…….” “…….” 그 사실을 알기에 지금까지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창천검노가 말을 꺼낸 순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 생겼다. “내가 남아서 시간을 벌겠소. 두 분은 올라가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최정예를 소집해 놈을 죽이시오!” 쾅! 여필극이 바닥에 단단히 발을 박아 넣으며 말했다. 자신이 희생하기로 결심한 무인의 눈빛이었다. 그러나 창천검노 역시 남천검의 검신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을 잘못 알아들었군. 내가 시간을 벌겠다는 말이었네. 그러니 두 사람이 올라가게나.” 일월문의 빙하신녀도 양보하지 않았다. “……일월문은 더 이상 마공을 익힌 자들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의 눈에는 흑천회주의 모습 위로 장진명이 겹쳐 보이고 있었다.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이 상황에서 가위바위보라도 하자 이거요?” “흘흘. 그것도 나쁘지 않구만.” “차라리 태극검문 장문인을 깨워서 저 위로 던져버리지요.” 결국 옥쇄(玉碎)를 각오한 세 사람이 동시에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릴 때였다. 촤아아아악! 지하의 한쪽 면이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푸른 늑대 가면을 쓴 최건이 걸어 나왔다. [거, 눈물 없이는 못 들어주겠군. 미안한데 신파 드라마는 나중으로 미룹시다.] “……자네?” 여필극을 휘익 스쳐 지나간 최건이 흑천회주에게 검을 휘둘렀다. 촤하아악! 피 대신 암염을 뿌리며 흑천회주가 사납게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악!” 그가 휘둔 팔에서 채찍처럼 불길이 쏟아지고, 술법진 전체가 검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르륵! 호신강기를 전신에 두를 수 있는 고수가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수준의 불길이 일대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신강헌은 그 안으로 거침없이 발을 내디디며 기합을 터트렸다. 마찬가지로 푸른 늑대 가면을 쓴 채였다. [이건 저한테 맡겨요!] 끔찍한 열기에 피부가 달아오르다 못해 불타기 시작했지만, 신강헌은 개의치 않고 암염을 받아들였다. 치이이익- 그의 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그를 태우려고 하던 암염의 화(火)기가 오히려 피부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저 아이는…….”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신강헌의 정체를 알아본 빙하신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장진명 이상의 재능을 지녔다고 판단하고 적양공을 익히게 해주었던 젊은 도객. 분명 고작 몇 달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그동안 몰라보게 성장한 무인이 그곳에 있었다. [우라아아아앗!] 기합을 넣은 신강헌이 두 손으로 도를 잡고 하늘로 치켜들자 술법진 안의 암염이 그의 도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적양공을…… 벌써 개화했구나.” 신강헌이 암염을 제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빙하신녀는 확신했다. 화염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지난 몇십 년을 통틀어 한국에서 태어난 최고의 재능이라고. [이거…… 오래는 못 붙들어! 빨리!] 신강헌이 암염을 제어해 불길을 약화시킨 다음은 김복자의 차례였다. 술법진 안으로 들어온 그녀가 눈을 감고 본격적으로 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촤라라라락! 화구통에서 튀어나온 족자가 그녀의 등 뒤에서 길게 펼쳐지더니, 그 위로 온갖 복합한 글자와 도형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제법인데……. 대술법사에게 인정받은 천재한테는 안 되거든?] 김복자가 감았던 눈을 뜨자 새파란 귀화가 피어올랐다. “깨져라-!” 쿠구궁……! 지하에 새겨진 술법진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뿜어지던 절독이 멎고, 흑천회주의 몸에 끊임없이 내공을 불어넣던 술법진의 기운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분은 저희가 들어온 통로로 빠져나가세요.] 푸른 늑대 가면을 쓴 기무혁이 여필극과 장문인들을 지나쳐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암염만큼이나 불길한 기운을 흘리는 요검이 들려 있었다. [이제부터 여긴 저희가 맡겠습니다.] 무림맹주와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142화. 우리의 시대는 흑천회주의 상태를 확인한 기무혁은 곧바로 판단했다. ‘해볼 만하다.’ 비밀통로를 통과하면서 크루원들과 함께 짠 작전이 먹혀들고 있었다. ‘스승님이 흑천회주를 막는 동안 신강헌이 암염의 열기를 최대한 제어한다. 그 틈에 복자가 술법진 자체를 약화시킨다. 거기까지만 성공해도 충분히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어.’ 그 예상은 적중했다. 술법진의 도움으로 끝없이 암염을 쏟아내던 흑천회주의 기세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콰콰콰콰……! 지상으로 치솟는 검붉은 불길도 눈에 띌 만큼 옅어지기 시작했다. 지원군의 개입으로 한숨 돌린 여필극이 자신을 지나쳐 가는 기무혁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네가 왜 여기…….” 늑대 가면을 썼지만 여필극은 기무혁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잠시만 시간을 벌어다오. 술법진이 약해졌어도 검마와 너희들만으로는 무리다.” 여필극은 기무혁이 지금 실력으로 흑천회주와 맞서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생각했다. 분명 언젠가 세상을 놀라게 할 재목(材木)이지만, 아직은 더 다듬어야 할 원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잠깐이면 된다. 검마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자신이 조금이라도 내공을 회복해서……. [죄송하지만 맹주님은 더 이상 싸우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무혁은 단호한 어투로 여필극의 참전을 거부했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환몽으로 흑천회주를 겨누며 말을 이었다. [뒤로 물러나 계시는 편이 저희를 도와주는 일입니다.] “뭣……?”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여필극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빙하신녀도 언짢은 표정을 지을 때였다. “자자, 일단 술법진 바깥으로 물러나십니다. 저 아이도 우리가 걱정돼 하는 말이 아니겠소?” 창천검노가 의식을 잃은 태극검문의 장문인을 챙겨서 먼저 뒤로 물러났다. 그가 옷깃을 잡아당기자 맹주와 빙하신녀도 마지못해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부디 용기와 만용을 구분하거라.” 자신을 향한 걱정이 담긴 맹주의 말에, 기무혁은 여전히 흑천회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객기를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맹주님과 세 분이 아니었다면 싸울 시도조차 못 했을 테니까요.] 기무혁의 말은 진심이었다. 상대는 온갖 약물과 술법진, 혈법과 마공으로 스스로 괴물이 된 사파오패의 수장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범접할 수도 없는 괴물이었겠지.’ 무림맹주와 세 장문인이 대부분의 힘을 빼놓지 않았다면, 지금쯤 크루원들과 함께 도주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네 분 덕분에…… 저희에게도 승산이 생겼습니다.] 착각인지 모르지만, 그 순간 맹주와 두 장문인의 눈에는 기무혁이 쓴 가면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피 흘리는 먹잇감을 발견하고 몸을 웅크린 한 마리 늑대처럼. 기무혁은 흑천회주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스승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했다. “카하하하하하하하!” 술법진이 약해졌음에도 흑천회주는 맹렬히 위세를 떨쳤다. 암염의 채찍이 다섯 줄기로 나뉘어 주변을 휩쓸었다. 콰과과과강! 그때마다 지반이 터져나가고, 일대가 무너질 듯 흔들렸다 하지만 그에 맞서는 최건도 물 만난 고기처럼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으로 채찍을 튕겨내고 벌어진 빈틈으로 파고들었다. 쩌저저저정! 벼락이 내리친 듯한 굉음이 퍼져 나갔다. 허공에 새겨진 검격이 흑천회주의 전신을 난도질했으나, 상대는 얕은 상처만 남긴 채 뒤로 물러난 뒤였다. [클클. 목내이처럼 삐쩍 마른 몸뚱이가 질기기는 쇠심줄보다 더하구나. 베는 보람이 있겠다.] 그야말로 악(惡)을 처단하기 위해 태어난 마(魔)와 같은 존재. 최건의 가면 너머 눈동자에서 지독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팔대문파의 장문인들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는 검의 초고수. 그는 자신에게 집중된 암염의 채찍 세례를 몇 번이고 베고, 튕겨내고, 밀어냈다. 검을 쥔 팔이 부들거리면 다른 팔로 바꿔 쥐고 휘둘렀다. 치이익……! 그 과정에서 암염에 스친 어깨엔 인두에 지진 듯 상처가 생기고, 옆구리에선 핏물이 배어났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욱 사납게 웃으며 날뛰었다. [좋구나! 사파오패의 우두머리를 베는 것이 내 평생의 목표 중 하나였는데, 오늘 그 소원을 이뤄야겠다!] 기무혁은 함부로 끼어들기 힘든 초고수들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냉정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스승님에게 기회를 만들어드려야 해.’ 흑천회주의 손끝에서부터 휘둘러지는 다섯 줄기의 채찍, 그리고 전신에 두른 암염. 강기를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 기무혁이 그것을 뚫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내 힘만으로는 어렵겠지만.’ 우우웅-! 기무혁에게는 환몽이 있었다. 술법과 괴이의 힘을 흡수하는 특징을 지닌 신병이기. 스스스슷……. 검신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퍼져나가며 암염을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암염이 위험을 느낀 맹수처럼 기무혁으로부터 슬금슬금 밀려나기 시작했다. ‘환몽만 가지고는 아직 부족해.’ 자신이 저 싸움에 끼어들 수 있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할 터였다. 기무혁은 그 안에 전력을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오행신공.’ 기무혁은 오행신공의 모든 기운을 최대로 끌어올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금생수(金生水).] 사아아아악……. 금기가 수기를 북돋자 검날에 새하얀 서리가 맺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수극화(水剋火).] 금기로 인해 북돋워진 수기가 암염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환몽 위로 금기와 수기가 휘감기며 치이이익-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기무혁은 그 상태로 신강헌에게 다가갔다. [야. 또라이.] [……말 걸지 마. 지금 이거 제어하느라 죽겠거든?] 신강헌은 두 손으로 치켜든 도를 노려보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암염이 휘감긴 도는 언제라도 사방으로 뻗어나갈 것처럼 거칠게 날뛰고 있었다. 만약 신강헌이 제어를 놓친다면, 흑천회주가 휘두르는 암염이 다섯 줄기가 아니라 그 배로 불어날 터였다. 그때 기무혁이 신강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금 도와줄게.] 오행신공의 세 번째 기운, 지금까지 부단히 수련한 화(火)기를 일깨웠다. 그리고 신강헌이 제어 중인 암염을 자신의 몸 안으로 인도했다. 화르르르르륵! 몸을 불태우는 듯한 고통에 기무혁은 신음을 삼켰다. 오장육부를 지지는 듯한 느낌에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강헌을 통해 한 번 걸러진 기운이었음에도 이 정도였다. “……!” 기무혁은 입술을 꽉 깨물어 핏물을 삼켰다. 간신히 고통을 참아내며 세 기운을 하나로 모았다. 金. 水. 火. 오행의 세 가지 기운이 조화를 이루며 기무혁의 몸 안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황숙수가 챙겨준 합성 공청석유를 꺼내 절반을 마셨다. 꿀꺽꿀꺽. 일시적인 도핑을 마친 기무혁의 눈에서 핏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지금은 뒷일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너, 너 괜찮냐?] 신강헌의 걱정 어린 물음에 기무혁이 피식 웃었다. [최고야.] -쾅! 기무혁은 곧바로 한 발을 내디뎠다. 땅바닥이 진각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나감과 동시에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기무혁이 흑천회주의 뒤를 점했다. 최건의 공격을 피해서 물러나는 타이밍을 절묘하게 노렸다. 스스스슷……! 전신을 일주한 오행신공의 기운이 환몽으로 모여들었다. 붉은 기운 위로 섞여든 세 가지 색이 일순간 칠흑처럼 검은빛을 뿜어냈다. ‘통한다.’ 일시적이지만 검강에 준하는 위력이 환몽에 실렸다. 지금의 기무혁에게는 단 한 번의 휘두름조차도 버거운 힘. 촤아아악-! 흑천회주의 등을 보호하던 암염이 갈라지고, 척추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가 벌어졌다. 그러나 기무혁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조금 얕았나.’ 절체절명의 순간, 흑천회주의 이성이 잠시 돌아왔다. 그가 눈동자만 돌려서 기무혁을 바라봤다. “……늑대 무리구나. 내 목을 물어뜯으러 온 게냐?” 흑천회주가 킬킬거렸다. 그는 득달같이 달려든 검마의 검을 한 팔로 막아내고, 남은 팔을 기무혁에게 향했다. “나는 흑천회주다. 사파일통을 이루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이 몸이 고작 늑대새끼에게 물려 죽을 것 같은가-!” 천둥소리 같은 포효와 함께 두 줄기의 암염이 기무혁을 덮쳤다. [무혁아! 피해라!] 다급한 외침과 함께 검마가 기무혁을 밀어내며 하나의 불길을 베어냈다. 그러나 남은 하나의 불길이 살아있는 것처럼 기무혁을 뒤쫓았다. 기무혁은 오로지 감각에 의존해서 쳐내고, 막고, 튕겨냈다. 쩌저저정-! 극한의 몰입이 암염이 날아오는 궤적을 모조리 읽어들였다. 몸 곳곳에 핏물이 번졌지만, 치명상만큼은 허락하지 않았다. “쿨럭-!” 벽에 등을 부딪힌 기무혁이 한쪽 무릎을 꿇고 한동안 피를 게워 냈다. 잠깐이었지만 자신의 경지를 뛰어넘는 힘을 끌어다 쓴 반동 때문이었다. 늑대 가면도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다시 몸을 일으키는 기무혁은 웃고 있었다. “하하하…….” 참을 수 없을 만큼 즐거웠다. 세상에는 이렇게 강자들이 많았다. 언젠가 자신도 저런 경지에, 아니 더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한 번 더.” 기무혁의 눈이 빛났다. 다시 한번 오행신공으로 세 가지 기운을 하나로 모으고, 환몽의 힘을 끌어냈다. 여유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잘못 판단하거나 반응이 한 치라도 늦으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런 순간에서도, 기무혁은 단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싸움이 끝나면 자신은 더 강해져 있을 것이라고. * * * 창천검노는 물러서서 검마와 기무혁이 흑천회주와 벌이는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허허…….” 기무혁의 말이 맞았다. 지금의 자신은 저 싸움에 끼어봤자 방해만 될 터였다. “맹주. 우리의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 같구려.” 창천검노가 여필극을 돌아보며 말했다.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신강헌을 지켜보는 빙하신녀를 힐긋거린 후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맞는 말 같습니다.” 여필극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본 창천검노는 다시 전장을 바라봤다. 검마의 실력이야 익히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후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동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검의 달인. ‘유명세로 인해 내가 한국제일검이라 불렸으나, 싸워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검객 중 하나였지.’ 그래서 한때는 검마가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제자와 호흡을 맞추며 마음껏 날뛰는 검마가 너무나 부럽게 느껴졌다. 콰가가가가각! 스승이 만들어낸 빈틈으로 기무혁이 달려들었다. 환몽의 예리한 검날이 흑천회주의 상처를 파고들어 더 깊게 헤집었다. 푸확! 촤아아악! 쩌엉-! 기무혁이 물러나면 그 자리를 여지없이 최건이 채웠다. 절반가량 부서진 가면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얼굴에 붙어 있었다. 전신이 피투성이였으나 마귀 같은 기세는 변함이 없었다. ‘정말 이길 수도 있겠군. 몇 번만 더 결정적인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다면…….’ 우우웅웅! 그 순간, 창천검노는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아래를 바라봤다. “더 싸우고 싶으냐?” 수백 년간 척마멸사에 앞장섰던 신병이기는 더 이상 싸우지 못함에 분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창천검노는 남천검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저 아이는 네 힘을 전부 끌어낼 수 있었지. 나와는 달리 말이다.” 우우우웅! 수십 년간 자신 곁에 있었던 친우가 그걸 바란다는 것이 섭섭했지만, 창천검노는 그만큼 친우의 의지를 존중했다. 뒤로 튕겨나온 기무혁을 창천검노가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무혁아.” 기무혁이 힐긋 이쪽을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그 눈빛은 왜 아직까지 도망가지 않고 거기 있냐고 질책하는 것 같았다. “잠시 빌려줄 터이니.” 힘없이 웃어 보인 창천검노는 남은 힘을 다해서 남천검을 던졌다. “……반드시 베거라!” 눈을 크게 뜬 기무혁이 자신을 향해 날아온 남천검의 검파를 본능적으로 잡아챈 순간. 화아아아아악! 촤르르르르륵! 남천검이 항마의 기운을 눈부신 백광(白光)으로 뿜어냈고, 반대편에서는 그에 반발하듯 검은 기운이 환몽의 검신을 휘감았다. 143화. 누가 물으면 오른손에 환몽을 쥐고 있었던 기무혁은 창천검노가 던진 남천검을 왼손으로 잡아챘다. “남천검?” 기무혁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린 순간, 양손에 쥔 두 신병이기가 동시에 격렬하게 반응했다. 화아아아아악! 촤르르르르륵! 남천검이 지닌 항마(降魔)의 기운과 환몽이 지닌 흡정(吸精)의 기운이 서로 강하게 반발했다. “큭……!” 기무혁은 하마터면 두 검을 전부 놓칠 뻔했다. 몸 안에서 폭탄이 연달아 터지는 것 같은 충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신병이기의 기운이 그의 몸 안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넌 뭐야앗! 건방진 꼬마구나. 소년의 모습을 한 환몽의 영과 어른의 모습인 남천검의 영이 기무혁의 좌우에 나타났다. 저리 떨어져! 저건 내가 먹을 거야! 괴력난신을 베는 건 나다. 네가 떨어져. 자존심 강한 두 신병이기의 영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각자의 기운을 뿜어냈다. 그럴수록 두 검에서 뿜어지는 백광이 환해지고, 칠흑이 짙어졌다. 우우우우웅-! 마치 기무혁에게 상대방을 놓고 자신을 휘두르라고 강요하듯 양쪽에서 검명을 울리며 기운을 내뿜었다. 하지만 기무혁은 둘 중 하나만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둘 다…… 얌전히 있어라.” 콰앙! 두 신병이기의 검날을 부딪친 기무혁이 오행신공을 끌어올렸다. 입가에서는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 기운이 충돌하면서 생긴 내상 때문이었다. …… ……. 기무혁의 기세에 두 신병이기가 침묵했다. 남천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기무혁을 바라봤고, 환몽은 두려운 표정으로 목을 움츠렸다.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지? 남천검의 경고였다. 신병이기 하나를 제대로 다루는 것만으로도 숙련되기까지 몇 년은 필요한 것이 보통이었다. 하물며 상극에 가까운 기운을 동시에 다룬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 그렇기 때문에 저 요검을 놓고 자신을 쥐길 바란 것이었는데……. “괜찮아. 다 방법이 있거든.” 기무혁은 피식 웃더니 오행신공의 흐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서로 다른 기운을 다루는 것은 그에겐 낯선 일이 아니었다. 그가 익힌 오행신공은 서로 다른 다섯 가지의 기운을 조화롭게 다루는 무공. 기무혁은 거기서 두 신병이기를 동시에 다룰 방법을 찾았다. ‘물과 기름을 섞으려면 유화제가 필요해. 오행신공을 유화제로 삼아 환몽과 남천의 기운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게 양쪽으로 나눈다. 당장은 완전히 섞이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은 따로 다루는 것이 더 나으니까.’ 주인의 의념에 따라 단전에서 흘러나온 오행의 기가 전신혈도를 따라 흐르고, 신병이기의 기운과 만나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다.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그 순간, 기무혁은 오행신공에 대한 이해가 크게 발전했음을 느꼈다. 우우우우웅……. 몸 안에서 거칠게 부딪치던 항마와 흡정의 기운이 빠르게 안정되었다. 더 이상 충돌하지 않고 양손에서 각자 선명한 색을 되찾았다. “후우우우…….” 길게 숨을 몰아쉰 기무혁이 고개를 들어 흑천회주와 사투 중인 최건을 바라봤다. “스승님.” 쩌저저정! 콰앙! 퍼억! 흑천회주를 홀로 감당하고 있는 최건은 대답할 겨를조차 없어 보였다. 그의 항공점퍼는 핏물로 젖어든 지 오래였다. 하지만 기무혁은 스승이 듣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며 말을 이었다. “……기회를 만들어 주세요.” 최건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완전히 무아지경에 빠진 것일까? 하지만 기무혁은 스승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목숨을 건 사투 중에도 제자의 변화를 살피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제가 베겠습니다.” [하하하하하-!] 제자의 자신만만한 선언에 최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절반만 남은 늑대 가면 너머의 눈동자에서 적을 향한 살기와 제자의 성취에 대한 기쁨이 함께 일렁였다. [어서 이리 오거라! 함께 저 괴물을 물어뜯자꾸나!] 쩌어어엉! 최건이 강하게 내친 검격이 흑천회주를 밀어낸 순간, 기무혁이 힘껏 도약했다. 타다닷! 기무혁이 지하의 벽면을 타고 내달렸다. 그동안 최건은 흑천회주의 주의를 끌었다. 허나 그것이 허초나 변초로 무의미하게 시간을 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늦으면 네 차례는 없을 줄 알거라!” 검마의 검은 모든 악을 증오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결코 멈추지 않으며, 악을 멸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불구덩이에 뛰어들 수 있었다. 최건은 기무혁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 광인처럼 싸웠다. 푸확! 촤악! 화르륵! 어깨에서 핏물이 터지고, 화상을 입은 피부에서 진물이 흘러내렸지만, 최건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피 흘리는 황소의 등에 매달린 늑대처럼 집요하게 흑천회주를 물고 늘어졌다. 기무혁의 목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려올 때까지. “제 차례입니다.” 벽을 타고 한참을 올라갔던 기무혁이 허공에서 뚝 떨어지며 검을 내리쳤다. 환몽과 남천검을 X자로 교차해 흑천회주의 가슴을 깊게 베었다. 촤아아아악-! 암염에 휘감긴 근육이 갈라지고 뼈가 끊어졌다. 비틀거린 흑천회주가 괴성을 지르며 하나 남은 팔을 휘둘렀다. “크아아아악! 저리 꺼지지 못하겠느냐!” 암염의 채찍이 기무혁의 뺨을 스쳤다. 고개를 젖힌 기무혁이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림과 동시에 두 검을 힘껏 던졌다. 콰앙! 콰앙! 두 신병이기에 담긴 힘을 경시하지 못한 흑천회주가 암염을 휘둘러 검을 쳐낼 때, 그의 눈앞에 다시 마귀가 나타났다. [제자야. 아주 날카로운 송곳니를 얻었구나!] 흡족한 듯 웃음을 터트린 최건이 흑천회주의 목을 노렸다. 쩌어억-! 질긴 피부를 뚫어낸 검이 기어이 삼분의 일쯤 목을 잘라냈다. “흐흐흐흐흐. 고작 이 정도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러나 목을 덜렁거리면서도 흑천회주는 멀쩡했다. 화르륵! 암염이 스스로 움직여 상처를 막고, 불사신처럼 다시 몸을 일으켰다. 무림맹주와 장문인들을 몇 번이나 당황하게 만들었던 모습. 하지만 기무혁과 최건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클클! 너 같은 악인은 쉽게 죽어선 안 되지. 한참은 더 물어뜯어야 나도 직성이 풀릴 것 아니냐?] “쉽게 안 죽어서 다행이네. 실전에서 해보고 싶은 게 아직 많이 남았거든.” 늑대가면을 썼다고 자기들이 정말 늑대라도 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최건과 기무혁이 자세를 낮추고 다가오는 모습이, 흑천회주에게는 흡사 사냥감을 노리는 두 마리의 늑대를 떠올리게 했다. “하하하하! 지독하다 싶더니 나 못지않게 미친 종자들이었구나!” 흑천회주의 앙천대소와 함께 세 사람이 다시 충돌했다. 콰앙! 쩌저정! 화르륵! 폭발과 굉음이 연달아 터지고 불꽃이 폭발했다. 그들이 충돌할 때마다 지반이 뒤집히고, 검격의 여파가 발톱 자국 같은 고랑을 벽에 새겼다. 지상에서 벌어졌다면 일대를 전부 황폐화시켰을 격렬한 싸움.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승기는 한쪽으로 기울었다. “이, 지독한 것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두 늑대가 돌아가면서 상처 입은 먹잇감을 물어뜯었다. 피를 과하게 흘린 맹수가 결국 휘청이기 시작했다. “특히, 너 어린놈……!” 흑천회주가 기무혁을 노려봤다. 그가 휘두르는 두 신병이기도 원수마냥 노려보았다. 항마의 기운이 암염을 헤집고, 흡정의 기운이 약해진 불꽃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그때마다 암염이 크게 소모되었다. 저 둘뿐만이 아니었다. 한 명은 점점 더 많은 암염의 통제력을 빼앗아 갔고, 다른 한 명은 대부분의 술법진을 장악했다. “온통 늑대로구나. 이 흑천회주가 고작 늑대 무리에게 사냥을 당했어. 흐흐흐흐흐……!” 청랑 가면을 쓰고 있는 이들을 둘러본 흑천회주는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화르르……륵. 몸을 휘감은 암염이 옅어질수록 흑천회주의 모습은 점점 미라처럼 말라갔다. 곧 있을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듯 그가 기무혁에게 물었다. “너, 젊은 늑대야, 내 목에 이빨 두 개를 박아 넣은 무인아……. 이름이 무엇이냐?” 기무혁은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남천검의 백광이 번뜩이면 암염이 꺼질 듯 흔들렸고, 환몽이 스칠 때마다 뿌려지는 검은 기운은 암염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끝내. 촤자자자작! 전신이 난자된 흑천회주의 몸이 우뚝 멈춰 서더니, 느릿하게 바닥으로 넘어갔다. 쿵……! 바닥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치열했던 혈투가 끝을 맞이했다. “나는, 나는…… 흑천회주다, 사파를 일통할……!” 힘겹게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흑천회주를 바라보던 최건이 제자를 돌아봤다. “마무리하거라. 마땅히 너의 몫이다.” 검마가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고, 기무혁이 흑천회주 앞에 섰다.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로 전신이 만신창이였지만, 기무혁의 눈은 여전히 굶주린 늑대 같았다. “흐흐흐. 자세히 보니 더 젊구나. 내가 고작, 이런 핏덩이에게 패했는가…….” 암염이 완전히 흩어지고도 흑천회주의 질긴 목숨은 아직 붙어있었다. 마지막 회광반조(廻光返照)였다. “……이름,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생사결에 임한 예로서 마땅히 대답해야 할 터……!” 흑천회주는 자신을 죽일 무인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훗날 절세고수가 될 것이 분명한 찬란한 재능. 자신의 사파일통을 막은 것은 한낱 애송이가 아닌, 한국제일이 될 무인이어야 했다. 그 이름을 듣지 못하면 지옥에 가서도 온전히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다. “너는, 분명 한국제일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적인 무인이, 되겠지. 나를 막았으니, 응당…… 그리될 터.” 기무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흑천회주가 멋대로 망상을 하도록 잠시 내버려두었다. “훗날 절세고수가 된다면 이렇게 말해다오. 흑천회주를 죽이고 큰 깨달음을 얻었노라고…….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적수가 이 흑천회주 주철관이었노라고……!” 흑천회주의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그 장면을 상상이라도 한 듯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였다. “그럴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무혁은 흑천회주의 가슴을 꾸욱 밟았다. 짐승을 도축하듯 환몽을 들어 올렸다. 이런 일에는 환몽이 더 어울렸다. “누가 당신에 대해서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거야.” “……?” 간절한 바람을 담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흑천회주에게, 기무혁은 솔직한 감상을 말해 주었다. “내 손에 죽은 사파인 중에서 가장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었다고. 그래서 목을 벨 때조차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고.” 옆에서 듣고 있던 최건이 그 대답이 마음에 쏙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헛소리! 나는 흑천회주다! 이렇게 취급해도 될 인물이 아니란 말이다……!” “나한테는 조금 큰 쓰레기에 불과해.” 발작적으로 외치는 흑천회주의 눈이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 찬 순간, 기무혁은 환몽을 휘둘렀다. 서걱. 데구르르……. “아, 그리고 내 이름은 기무혁이다.” 사파오패의 거마(巨魔)로 군림했던 흑천회주는 눈을 부릅뜬 모습 그대로 절명했다. 자신의 목을 벤 무인의 이름은 끝내 듣지 못한 채였다. 144화. 안 되는데…… 가면을 벗은 신강헌은 흑천회주의 목을 베어내는 기무혁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최건과 합을 맞춰 흑천회주와 싸우던 기무혁의 움직임이 머릿속에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신강헌은 그 자리에 자신을 대입해 보았다. ‘몇 번은 죽었을 거야.’ 자신은 결코 저렇게 싸울 수 없었다. 최건에게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누군가는 기무혁이 신병이기를 둘이나 들고 싸웠으니 흑천회주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강헌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날카로운 무기를 들어도 그걸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면 의미가 없으니까. ‘나였다면…….’ 신병이기만 믿고 무모하게 돌진했다가 결국 위기를 자초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무혁은 달랐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고,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빠져야 할 때를 정확하게 구분했다. 보면서 전신의 솜털이 곤두설 정도였다. 그 싸움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신강헌은 많은 것을 배웠다. 그와 동시에 아직 자신이 갈 길이 멀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절정고수가 되니 기무혁이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더 피부에 느껴졌다. “젠장. 저 자식은 대체 얼마나 빨리 달려가는 거냐고…….” 한편으로는 분한 마음에 신강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화르르르르르륵! 그의 감정이 끓어오름에 따라 신강헌의 머리 위에 있는 거대한 화염구 또한 거세게 타올랐다. 흑천회주로부터 제어권을 빼앗아 온 암염은 더 이상 검붉은 빛이 아닌 선명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화염에서 도를 빼냈는데도 여전히 그 자리에 떠서 태양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좌절할 것 없단다.” “네?” 신강헌이 옆을 돌아보니 빙하신녀가 와 있었다. 그녀는 신강헌이 만든 거대한 화염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불을 다루는 네 재능은 내가 여태껏 본 무인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뛰어나다. 체질을 뛰어넘을 만큼 불에 대한 적성을 타고난 것이지. 아니……. 애초에 보통의 기계로는 네 체질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한 것 같구나.” 갑자기 옆에 와서 극찬을 해주자 신강헌이 멋쩍은 듯 한 손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저, 죄송하지만 그래도 일월문에는 안 갈 거예요.” “……음?” 빙하신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신강헌이 농담이라며 씩 웃었다. “전 무림맹에서 최고가 되기로 결심했거든요. 그리고 저 자식 보고 좌절 같은 거 안 해요. 더 뜨거워졌다면 모를까.” 빙하신녀가 그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걱정했던 것처럼 기무혁의 압도적인 재능에 절망한 모습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승부욕을 활활 불태우는 눈동자. 과거 그녀의 재능에 좌절해 잘못된 길을 선택했던 장진명의 전철을 밟을까 걱정한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래. 사내라면 응당 그만한 자신감은 있어야지.” 빙긋 웃은 빙하신녀는 잠시 양하윤과 신강헌이 함께하는 일월문을 상상해 보았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지금은 봉문 중인 일월문을 이십 년 후에는 팔대문파 중 최고로 만들 수도 있을 텐데……. 신강헌의 표정을 보아하니, 문파의 곳간을 다 털어도 못 데려올 듯싶었다. “아쉽지만 무림맹주가 된 모습도 퍽 잘 어울릴 것 같구나.” “매, 맹주요? 제가요?”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거라.” 빙하신녀는 호의로 가득한 미소를 보여준 후 돌아섰다. “무림맹주 신강헌……!” 먼 미래를 상상하며 헤벌쭉 웃는 신강헌의 등을 짝- 소리 나게 때리는 손길이 있었다. “징그럽게 왜 변태처럼 웃고 있냐?” 김복자였다. 술법진을 깨느라 기력을 대부분 소진한 탓에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촤르르르륵. 그리고 김복자의 등 뒤로, 넓게 펼쳐진 족자가 김복자를 호위하듯 둥실둥실 떠 있었다. 신강헌이 부럽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치사하게 너네 둘만 좋은 거 가지고 있냐고…….” 신병이기를 두 개씩 들고 휘두르면서 싸우는 기무혁도 그렇고, 김복자도 어디서 받아왔는지 대단한 술법도구가 새로 생긴 모양이었다. 무인이 도구 탓을 하고 싶진 않지만,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부럽냐?” 김복자가 씨익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봤자 신강헌의 가슴께에 불과했지만. “억울하면 너도 스승님 만들어서 하나 달라고 하셈.” “쳇. 어디 끝내주게 강한 절세도객 스승님 없나?” “뜨거워 죽겠으니까 저거나 어떻게 해봐.” 김복자가 아직도 신강헌 머리 위에서 회전하고 있는 거대한 화염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화르르르르르륵! 그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 해도 보호술법을 걸어야 하는 수준이었는데, 신강헌은 맨몸으로 그 아래 서 있으면서도 평온해 보였다. “잠깐만 기다려 봐.” 신강헌은 도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화염을 노려봤다. 암염마공의 마기가 빠져나간 순수한 불꽃은 더 이상 그에게 해를 끼치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 자체만으로도 다루기 쉽지 않은 거대한 힘이었다. “후으으읍…….” 호흡을 가득 들이마시는 신강헌의 팔뚝 위로 핏줄이 잔뜩 도드라졌다. 힘을 잔뜩 끌어모은 그가 벼락처럼 도를 휘둘렀다. “우라아아앗!” 신강헌이 허리를 틀어서 도를 아래에서 위로 힘껏 후려치자, 화염구가 용오름처럼 소용돌이치며 지상으로 솟구쳤다. 콰콰콰콰콰콰! 하늘 높은 곳까지 올라간 화염은 도시의 상공에서 폭발해 수백 개의 작은 불꽃으로 나뉘었다. 퍼버벙! 퍼버버버버버벙! 마치 싸움이 끝났음을 알리는 화려한 불꽃놀이 같았다. * * * 흑천회주의 목을 벤 후.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기무혁이 크게 휘청이더니 왈칵 피를 토해냈다. “쿨럭-!” 전신의 긴장이 풀리자마자 무리해서 싸운 반동이 한 번에 찾아왔다. 오행신공을 경지 이상으로 무리하게 끌어올렸고, 그것도 모자라 합성 공청석유를 들이켜 강제로 몸 안에 기운을 북돋웠다. 뿐만 아니라 하나도 벅찬 두 신병이기의 기운을 동시에 다뤘다. 만신창이인 전신의 상처보다 내상이 더 심각한 이유였다. ‘단전이 찢어지지 않고 버틴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기무혁은 곧바로 환몽부터 내던졌다. 요검의 사악한 기운이 내상을 당한 몸에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너무햇……! 서운해하는 환몽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기무혁은 남천검을 지팡이 삼아서 넘어지려는 몸을 지탱했다. 화아아아악- 항마의 기운이 부드럽게 몸 안에 쌓인 마기를 몰아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과연 심신의 안정에는 정파의 신물이 훨씬 더 뛰어난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훗. 주인한테 도움도 안 되는 꼬마구나. 우쭐한 표정을 한 남천검의 영이 팔짱을 끼고 바닥에 내팽개쳐진 환몽을 내려다볼 때였다. “가부좌를 틀고 앉거라.” 최건이 비틀거리는 기무혁을 부축해 똑바로 앉히고 그의 등에 장심을 갖다 댔다. 응급조치로 기를 불어넣어 일주천을 도왔다. “쿨럭! 쿨럭……!” 죽은 피를 두어 번 더 토해낸 기무혁이 스승을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후우……. 이제야 좀 살 것 같은데요.”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나. 내가 보기엔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꼴이다.” “네?” “일단 좀 자고 있거라.” 화가 난 듯 엄하게 말한 최건이 제자의 혼혈을 가볍게 짚었다. 털썩. 까무룩 의식을 잃은 기무혁이 옆으로 쓰러졌다. 심각한 표정의 최건이 제자를 받쳐서 똑바로 바닥에 눕혔다. “둘 다 괜찮은 건가?” “어서 부상부터 치료하게!” 그 모습을 본 여필극과 창천검노가 급히 다가왔다. 시체처럼 안색이 창백한 제자를 살피던 최건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괜찮은데, 무혁이 상태가 생각보다 안 좋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돼 먹은 정신력이란 말인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서 있었던 것이 이해가 안 될 만큼 기무혁의 상태는 심각했다. 이마에 손을 갖다 대자 열이 펄펄 끓었고, 간신히 호흡은 하고 있지만 미약하고 불안정했다. 입가에서는 핏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여필극과 창천검노도 최건과 함께 기무혁의 상태를 살피더니 탄식을 터트렸다. “지독한 마공에 너무 오래 노출되었군. 상처에 마기가 독처럼 스며들었어.” “신병이기 둘을 동시에 다뤘는데도 전신의 혈도가 버텨준 것이 천운일세. 우선 이것부터 먹이게!” 창천검노가 문파의 비전 내상약을 꺼내 기무혁에게 먹이고, 무림맹주가 직접 몸을 주물러 추궁과혈을 시작했다. “몸 안에 남은 잔열을 빼내야겠습니다.” 빙하신녀도 달려와서 기무혁의 몸 안에 남아있는 암염마공의 열기를 몰아냈다. “기무혁 많이 다쳤어요?” “야! 정신 차려, 미친놈아!” 신강헌과 김복자도 심각한 표정으로 달려와 양쪽에서 기무혁의 팔을 주물렀다. 십 분이 넘게 다섯 사람이 달라붙어서 응급처치를 한 후에야. 후우우우……. 창백했던 기무혁의 혈색이 서서히 돌아오고 호흡도 안정되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최건이 겨우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 “다행일세. 참으로 다행이야…….” “얘 이제 괜찮은 거죠?”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면 큰 문제는 없을 게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기무혁이 잠꼬대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으으, 안 되는데…….” 혹시 어디가 아파서 그러나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기무혁이 얼굴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다 같이, 저녁 먹기로 했는데…….” 여필극과 창천검노, 빙하신녀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미친놈아…….” “얘 진짜 제정신 아니지?” 기무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챈 신강헌과 김복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하하하하하!” 최건이 돌연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세 사람은 기무혁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오늘 오전에 청랑 사무실에서 작전회의를 마치고 나올 때, 다들 1층 카페에 붙어있던 포스트잇을 한 번씩 보았기 때문이었다. <맛있는 거 해 놓을게. 저녁은 크루 사람들 불러서 집에서 다 같이 먹자.> 기무혁의 부모님이 적어둔 애정이 가득한 문구를 떠올린 최건이 제자의 창백한 뺨을 쓰다듬었다. “이 와중에도 실로 너답구나. 너다워.” 고작 약관의 나이에 사파의 초고수를 격살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세계가 발칵 뒤집힐 것이다. 신병이기 둘을 동시에 다루는 것은 물론이고, 그 기운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재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기무혁은 한반도 무림의 역사를 뒤져도 찾아볼 수 없는 행보를 걷고 있었다. 하지만 이 녀석에게 그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최건이 기무혁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보다는 집에 가서 부모님,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인 녀석. “가서 다 같이 따뜻한 저녁을 먹자꾸나.” 자신의 제자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 최건은 다른 무엇보다 자랑스러웠다. 145화. 맞잖아? 한국무림을 넘어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힌 사건이 벌어지고 일주일이 흘렀다. [흑천회주 주철관의 시신에서 십대 마공 중 하나인 암염마공을 익힌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에 세계무림맹은 깊은 우려를 표하며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로써 지난 수십 년간 악명을 떨쳐온 흑천회는 멸문의 수순을 밟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하늘로 솟구치던 암염이 흩어진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지만, 모든 방송과 매체는 여전히 관련된 내용을 보도하는 중이었다. [함께 흑천회주를 척살한 것으로 알려진 무림맹주 여필극과 창천검문, 태극검문의 장문인 역시 공식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봉문 중인 일월문의 빙하신녀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사문으로 돌아간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채널을 바꾸자 단상 위에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의 여필극와 창천검노, 태극검문 장문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향해 쉴 새 없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먼저 마이크를 건네받은 여필극이 고개를 숙인 후 입을 열었다. [우선 갑작스러운 토벌작전에 놀라셨을 시민분들에게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번 작전이 극비리에 진행된 이유는…….] 창천검노와 태극검문 장문인도 각각 입장을 밝혔다. [정파 무림인의 한 명으로서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파무리가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허나 문도들이 피를 흘리는 것이 두려워 나서지 못 했던 것도 사실이지요. 창천검문은 그간 자숙하며 많은 반성과 고민을 했고…… 그 시간은 결코 무용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창천검노가 여필극을 바라보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덕분에 맹주께서 함께 흑천회를 소탕하자는 제안을 해주셨을 때,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후 창천검노는 팔대문파의 장문인으로서 자숙 기간에 대한 소회와 심정을 밝혔고, 앞으로 진정한 정파무림인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태극검문은 앞으로도 멸마척사의 길에 앞장 설 것입니다! 문도들은 사마외도와 싸우다 입은 상처를 자랑스러워할 것이며…….] 태극검문 장문인은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고 일장연설을 했다. 장포의 태극문양이 잘 보이도록 가슴을 내민 채, 무복 사이로 흑천회주과 싸우며 입은 상처들을 은근히 드러낸 모습이었다. “……근데 태극검문 장문인 아저씨는 그때 기절해 있지 않았어?” 식탁 위에서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던 신강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TV를 바라봤다. “클클. 자랑스러워하게 내버려두거라. 맹주님한테 들었는데, 저놈도 나름대로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고 하니 말이다.” 누구보다 팔대문파를 싫어하던 검마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최건은 TV를 보면서 느긋한 표정으로 위스키를 즐겼다. “하여간 정치가 무서운 거라니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체포하네 마네 날을 세우던 인간들이 지금은 정파대통합의 장을 열었잖습니까?” 황숙수는 자신이 가져온 동파육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기무혁의 부모님이 만든 음식을 집어 먹으며 감탄을 연발했다. “히야! 이거 전골요리 끝내주네. 어머님이 직접 만드신 거라고요?” “입맛에 좀 맞으세요?” “저희 가게에서 팔아도 대박 날 것 같습니다!” 끝까지 안 오겠다고 하던 사람이 가장 적극적으로 어울리면서 실컷 수다를 떨고 있었다. “진짜 맛있네요……. 이렇게 다 같이 먹으니까 어머니가 해주시던 밥 생각도 나고…….” “형 울어요?” 감수성이 풍부한 한재찬은 이렇게 여럿이서 함께하는 식사 자리가 정말 오랜만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뺘앗! 살구는 넓은 식탁을 도도도 뛰어다녔다. 신강헌의 머리에서 한재찬의 어깨로, 내려와서 검마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가 다시 김복자의 어깨에 올라갔다. “빡돌이 너 얌전히 안 있으면 확 쌈 싸서 먹어버린다?” 장난기가 돈 신강헌이 상추로 살구를 쌈 싸버리려는 순간, 김복자가 술법으로 상추를 날려 신강헌의 얼굴에 찰싹 붙여버렸다. “아오! 돌았냐고 김복자!” “그러게 왜 우리 살구를 괴롭히냐?” 허우적거리며 손을 뻗는 신강헌과 그걸 휙휙 피하는 김복자와 살구. 셋이서 그러는 모습이 익숙한 듯 아무도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았다. 흐뭇한 얼굴로 집에 온 손님들을 둘러보던 기찬호가 아들의 옆구리를 찔렀다. “오랜만에 집에 오니까 어떠냐?” 순간 모두의 시선이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일주일 만에 퇴원해서 집에 온 기무혁이 말도 없이 음식을 와구와구 집어먹고 있었다. “우음……. 맛있는데요?” 볼 안에 정신없이 음식을 집어넣고 있던 기무혁의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병원에서 간이 싱거운 음식만 먹다가 집에 오자마자 식욕이 터진 모습이, 영락없이 그 또래 남자애였으니까. 민망해진 기무혁이 뺨을 긁적이며 투덜거렸다. “밥 먹는 거 처음 봐요? 다들 왜 그렇게 좋아해?” 흑천회주와의 싸움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하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다행히 첫 응급조치가 워낙에 잘 된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퇴원할 수 있었다. 물론 계속 병원을 오가면서 한동안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도 내상이 꽤 깊게 남아 있었으니까. “왜긴! 죽다 살아난 우린 크루장이 밥을 잘 먹으니까 기특해서 그렇지!” “하여간 기무혁. 사람 걱정시키는 건 최고라니까.” “이 정도로 끝난 게 천만다행인 줄 알거라.” “엄마아빠 걱정시켜 놓고 넌 밥이 잘도 넘어간다?” 틈만 나면 잔소리를 퍼붓는 크루원들의 모습에 기무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잔소리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질 줄은 몰랐는데…….” “다 네 업보야. 네가 여기 있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모았잖아?” 키득거리며 말하는 김복자의 말에 기무혁은 반박하지 못하고 어깨만 으쓱했다. 말로는 투덜거리지만,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배어 있었다. 흑천회 토벌작전이 끝나고 다 함께 먹기로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미뤄야만 했던 저녁식사. 자신의 퇴원하는 날에 맞춰 다시 모여준 크루원들이 고마웠으니까. “자자, 기무혁의 퇴원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건배 한번 하시죠!” “또 해?” “축하를 많이 받아야 아픈 것도 빨리 낫는다고. 다들 빨리 잔 채우세요!” 백호단 회식자리에서 배워온 듯 신강헌이 능숙하게 술자리를 주도했다. 그 억지에 다들 황당해하면서도 잔을 채웠다. “이 집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청랑의 크루장인 기무혁의 퇴원을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잔을 부딪친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마음껏 떠들었다. 기무혁도 자신의 퇴원 축하 파티를 제대로 즐겼다. “아줌마! 이거 진짜 맛있어요!” “저도 한 그릇 더 주세요!” “어르신. 괜찮은 술을 가져왔는데 한 병 깔까요?” “호오? 네놈이 웬일로 기특한 짓을 했구나?” 뺘앗! 처음으로 가족과 크루원들이 다 함께 왁자지껄 떠들며 늦은 시간까지 함께했다. 거실에 틀어놓은 TV에서는 앵커가 이번 사건이 한국무림에 미칠 여파에 대해 전문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팔대문파에 대한 여론에 최근 긍정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박사님께서도 이 점에 동의하시나요?] [맞습니다. 특히 장문인들이 흑천회주 척결에 직접 참여한 창천검문, 태극검문, 일월문에 대한 호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비로소 정파가 정파다운 일을 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른 팔대문파들도 함께 사파오패의 움직임을 견제한 것으로 아는데요. 금영문과 대한문의 장문인도 흑천회주와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고요. 그런데 지나치게 세 문파의 활약상만 부각되는 것은 아닐까요?]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운 사람들과 도중에 밖으로 빠져나온 사람들이 같을 수는 없지요. 대중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흑천회 토벌에 참가한 문파와 소속 무인들에게 환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한국무림 전문가라는 인물이 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이번 일을 계기로 팔대문파가 본격적으로 경쟁하게 될 거라 보고 있습니다. 누가 더 좋은 이미지를 쌓느냐,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하고 먼저 대중의 지지를 얻느냐, 그들의 행동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겠지요.] 흑천회의 멸문과 흑천회주의 죽음은 벌써부터 한국무림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기무혁은 뉴스를 보면서 향후 무림 세력들의 동향을 예측해 보았다. ‘팔대문파는 대중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더 정파답게 행동하겠지. 위축된 사파오패와 사파세력은 한동안 몸을 사릴 테고.’ 물론 혈호방처럼 흑천회의 빈자리를 노리고 세력을 키우는 놈들도 있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함부로 사고를 치지는 못하고 물밑에서만 움직일 터였다. ‘그리고 천마신교는…….’ 흑천회를 없애 한국에 진출하게 될 교두보를 하나 치웠으니, 천마신교의 움직임도 어느 정도는 늦췄다고 볼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생각이 천마신교에서 레드웜으로 이어졌다. ‘용병들은 어떻게 됐지?’ 신준현이 무림맹 지하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 레드웜의 용병들이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종적을 감췄다는 소식도 문병을 왔던 노구천에게 전해 들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소식은 알지 못했다. ‘레드웜은 악명 높은 용병조직이야. 빨리 찾아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텐데…….’ 기무혁의 미간이 걱정으로 가볍게 찌푸려졌을 때였다. “이 녀석. 또 무슨 걱정을 하고 있구나?” 귀신처럼 눈치가 빠른 최건이 손을 뻗어서 제자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게 아니라…….] 기무혁이 레드웜의 용병들이 걱정된다고 전음으로 이야기하자, 최건이 걱정하지 말라며 클클 웃었다. [그 일은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맹주님이 믿을 만한 인물에게 맡겨놨으니 말이다.] 믿을 만한 인물? 최건은 그게 누군지 알려주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 * * 경기도 외곽에 설치된 한 대형 컨테이너. 공항에서 흩어졌던 레드웜의 용병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각자 알아 온 정보를 다른 용병들과 공유했다. “흑천회주가 익힌 암염마공은 술법진이 없으면 발동도 못 하는 반쪽짜리 사본이었다.” “흑야방과 접촉했어. 그쪽 방주는 동맹에 별 관심이 없더군.” “금영문 장로 중에 교와 끈이 닿은 놈이 하나 있던데, 상황을 봐서 접촉해 볼까?” “지금 상황에선 팔대문파는 건드리지 않는 게 나아.” “혈호방이라는 놈들은 꽤 실력이 있어 보였다. 하마터면 꼬리를 밟힐 뻔했어.” “푸른 늑대 가면을 쓴 자들이 흑천회 분파를 공격했다는데, 아는 놈 있어?”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 레드웜의 용병들은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상부의 지시로 합류하기로 했던 흑천회는 공격당하는 중이었고, 자신들을 픽업하기로 한 전직 용병은 오지 않았다. 결국 자체적인 판단으로 흩어진 용병들은 정보부터 모았고, 다시 모이기로 한 게 오늘이었다. 용병 중 하나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헤드는?”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노련한 살수이자 테러에 익숙한 용병이었다. 그런 레드웜의 용병들을 지휘하는 인물은 헤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실력이 가장 뛰어나고 잔혹한 용병. 업계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강한 무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을 소집한 헤드는 정작 이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컨테이너 밖으로 향했다. “다들 모였지?” 등에 검과 도를 각각 사선으로 멘 여자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검은색 민소매 티에 루즈핏의 청바지. 머리는 뒤로 모아서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평범한 체구의 여자였다. 그러나 거인이 걸어오는 것 같은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저벅저벅. 그녀가 걷는 길을 따라서 핏줄기가 길게 이어졌다. 한 손으로 질질 끌고 온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 레드웜의 용병들에게 헤드라고 불렸던 남자가 창백한 얼굴로 죽어 있었다. 스르릉. 무기를 뽑아 든 수십 명의 용병이 조용히 여자를 에워쌌다. 침묵 속에서 짙은 살기가 들끓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그녀의 오른쪽에 서 있던 한 용병의 중얼거림이었다. “Fxxx. 손목에 저거…….” 헤드의 시체를 보고도 평온했던 용병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목에서 은은한 기운을 흘리는 두꺼운 검은 팔찌 때문이었다. “……흑비환?” 국제기구에서 고위험도 무림인으로 분류한 이들에게 착용시킨 팔찌. 위치추적 기능, 일정 이상의 내공을 사용하면 발동하는 경보장치가 달려 있었다. 해당 무림인은 정해진 것 이상의 힘을 사용할 때마다 사유서를 제출해 보고해야 하며……. 위이이이잉-! 팔찌가 경고음을 내며 맹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표정을 굳힌 용병들은 비로소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다. 현재 한국에서 흑비환을 소지하고 있는 건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비공식 한국제일인. “초극문주 선우제하…….” 레드웜의 용병들은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상황을 봐서 도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선우제하는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심지어 그녀의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맹주가 한 놈은 꼭 살려두라고 했는데, 누굴 살리지?” 까가가각……. 그녀는 등에서 도검을 꺼내 바닥을 긁었다. 낙서하듯 바닥에 칼집을 새기며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선착순으로 항복하는 놈을 살려둘까? 아니면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놈을 살려둘까?” 그러더니 혼자서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역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놈으로 해야겠다. 보통은 그게 가장 센 놈이니까. 센 놈이 살아남는 게 맞지.”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 레드웜의 용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는 중이었지만. “맞잖아?” 선우제하가 휘두르는 검과 도의 궤적에서 벗어난 용병은 없었다. 직후 사방팔방으로 사나운 궤적이 난무하고, 수십 조각으로 갈라진 컨테이너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